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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무정 상권

검궁인 저

서문
폭력은 질서를 파괴한다.
아무리 작은 폭력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생애 전반에 걸친 치명적인 상처(傷處)가 될 수 있다. 연못에 무심코
던진 돌멩이 하나가 개구리에게는 죽음을 불러올 수 있듯이.
<강호무정>은 소재와 구성 면에서 일반적인 무협소설의 패턴을 벗어나 있다. 영웅주의, 패권장악을 전제로 하여
전 무림(武林)이 움직이는 방대한 스케일을 다루고 있는 여타의 작품에 비한다면 아주 단순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 소녀(少女)가 있다.
꿈많은 아름다운 소녀는 어느 날 납치되어 순결을 빼앗기고 노예가 되어 팔려간다. 이 불행한 사건은 소녀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오직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참혹한 지옥으로 떨어져 버린다.
네 소년(少年)이 있다.
그들은 저물어 가는 대원제국(大元帝國)이 암살자로 키워낸 천
명의 아이들 가운데 살아남은 아이들이다. 그들은 암살, 추적,
변장, 전법을 배웠으나 대원의 패퇴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들은 보통 사람은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시련,
각종 특수훈련을 받았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평범한 집사(執事)가 되어, 또는 찻집의 주인이 되어 과거를 잊고
살아가려 했다.
이야기는 우연치 않은 폭력이 한 소녀를 앗아감으로써 전개된다. 하찮은 존재일지도 모를 소녀의 죽음이 전
무림을 피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주 사소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무림인도 아닌 일개 소녀의 복수를 위해 전 무림을 상대로 싸우는 네 사나이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기둥이 된다. 그들이 검을 뽑은 것은 세상을 향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한풀이를 위해서라는
해석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생명존중에 대한 의미를 짚어 보기 위해서는 일독(一讀)할 가치가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신년(新年)의 새벽 자오정(子午亭)에서
검궁인 배상

비극의 서막


대명(大明) 홍무(洪武) 5 년 5 월 21 일.
하루의 일과를 마친 태양이 황하(黃河)의 나루터 위로 어스름히 기울 무렵. 아름답게 타오르는 석양(夕陽)에
취한 듯 한 소년이 나루터에 앉아 있다.
소년의 나이는 일곱 살 가량 되어 보였는데 석양을 받은 얼굴은 붉게 채색되어 있었고 두 눈은 꿈꾸는 듯 몽롱해
보였다.
아는 사람은 소년의 자세와 눈빛 만을 보고도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다. 소년은 고기잡이 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소년의 집안 내력은 보잘 것이 없었다.
장강십팔채(長江十八寨) 중 비교적 세력이 약한 진산채(進山寨)에 속한 하급 녹림가의 집안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포구에서 선부(船父)로 일하며 어머니는 수채(水寨)에서 주방일을 보고 있었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어부(漁夫)였다. 지금 소년은 어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석양은 핏빛으로 타오르다가 차츰 보랏빛으로 변하며 서녘으로 기울어가고, 석양에 물든 황하도 같은 색으로 점차
물들어가고 있었다.
문득 황하 저편으로 고기잡이배들이 나타났다.
"오셨어!"
소년은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배를 향해 냅다 두 손을 흔들었다.
과연 멀리 보이는 깃발은 장강십팔채의 표식을 달고 있었으며 그 배들 중 한 척에는 소년이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고기잡이 배는 모두 다섯 척이었다. 배는 금방 나루터에 도착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종종걸음으로 내리는 어부들 가운데 한 명의 백발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할아버지!"
소년은 크게 외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노인은 팔을 활짝 벌려 달려오는 소년을 마주 안았다.
"헤헤! 할아버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세요?"
"오냐, 오냐. 허허헛......!"
노인은 손자의 재롱이 몹시 귀여운 듯 연신 웃음을 흘리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소년은 노인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소년은 할아버지에게서 나는 비릿한 고기 비늘 냄새가 몹시 좋았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냄새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행복(幸福)의 냄새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소년을 업고 걸었다. 다른 어부들은 조손(組孫)의 그 같은 모습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부 생활은 늘 단조로운 것이고 이런 사소한 행복은 어쩌면 그들의 인생의 전부인지도 몰랐다.
어느덧 석양은 떨어지고 나룻터에는 어둠이 잦아들고 있었다.
진산채(進山寨).
장강십팔채 중 서열 16 위에 해당하는 수채였다.
지금 진산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일단의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도열한 채 저녁 짓는 연기가 평화롭게
피어오르고 있는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백색무복(白色武服)을 걸쳤으며 가슴에는 승천하는 용(龍) 형상의 수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눈빛이 부리부리하고 양 쪽 태양혈이 불룩 솟아 있는 인물들이었다. 문득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모두 준비되었나?"
나직하게 깔리는 음성에는 진기가 충만하게 담겨 있었다.
"옛!"
일제히 대답하는 자들의 두 눈에는 열기, 흥분, 살기(殺氣)와 같은 기운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럼 쳐라!"
시작(始作)이었다.
이것이 훗날 무림사가(武林史家)들이 정사대전(正邪大戰), 또는 사십일백화대전(四十日白華大戰)이라고
기록한 정도연합맹(正道聯合盟)과 녹림무림(綠林武林)과의 전쟁이었다.
죽음(死)의 광란무(狂亂舞).......
승부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었다. 오래도록 준비해온 정도연합맹은 전력으로 보나 인원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월등히 앞섰던 것이다.
백화(白華)란 무림을 정화(淨化)하겠다는 백도인의 일방적인 선언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싸움은 불과 40 일 동안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막(幕)이 내린 후의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무비한 것이었다.
충천하는 화광(化光)!
"허억...... 콜록......꼭 잡아라 강아(江兒)야......."
노인은 연신 기침을 하면서 불길 속을 달리고 있었다. 노인의 목을 꽈악 끌어안고 등 뒤에 업힌 소년은 겁에 질린
채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소년은 보았다.
아버지의 수급이 하늘로 치솟는 것을.......
어머니의 치마가 뜯겨 허연 허벅지가 보인 채 쫓기다가 헛간에 쓰러지고.......
그 위로 여러 명의 백색무복을 입은 사나이들이 번갈아 능욕을 한 뒤 죽이는 광경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으아아악!"
비명과 비명!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충천하는 불길 속으로 노인은 필사적으로 손자 하나를 구하기 위해 달아나고
있었다. 노인은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오직 손자를 살려야겠다는 일념 만으로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하며 달아나고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문득 노인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노인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그림자들은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노인은 두 자루의 검을 맞고 허공을 휘저으며
쓰러졌다. 그러나 쓰러지면서도 행여나 다칠세라 손자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나 쓰러진 노인의 등으로 다시 한 자루의 장창(長槍)이 사정없이 박혔다.
마치 노인이 안고 있던 손자까지 일부러 겨냥한 듯 백색무복의 무사는 장창을 땅에까지 박히도록 깊숙히 꽂았다.
노인은 불에 덴 듯한 고통을 느꼈으나 창이 파고든 순간 손자를 안은 채 필사적으로 몸을 구부렸다.
그는 창 끝이 소년의 얼굴을 온통 피로 물들이는 것을 보면서도 소년의 귀에 대고 필사적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강아...... 절대 움직이지 말아라...... 절대로...... 울지 말아라...... 넌 살아야 해......
반드시...... 끄르륵!"
노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노인의 혀도 더이상 움직여지지 않았다. 노인의 손에 더이상 힘이 주어지지도
않았다.
노인은 눈을 부릅뜬 채 미처 감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할아버지......!'
소년의 얼굴은 할아버지의 등을 뚫고 나온 창에 길게 찢긴 채 온통 피투성이었다. 흘러내린 피가 소년의 눈과 입
속으로 흘러들어와 잠시 후에는 그만 숨이 막혀 기절을 하고 말았다.
긴 어둠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어둠이 가고 거짓말처럼 광명(光明)이 대지에 밀려들었을 때 소년은 할아버지의 시신 밑에서 간신히 기어
일어서고 있었다.
"......!"
소년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너무나도 공포스런 것이었다.
온통 시신과 불에 탄 잔해(殘骸)뿐,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살아있는 것은 단 하나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한결같이 시신 뿐이요, 폐허 만이 그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울지 않았다. 죽기 전에 한 할아버지의 말이 소년을 다시는 울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소년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리고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내심 피를 토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만 울테야......'
"으허어엉......! 할아버지이......!"
소년의 간장을 끊어내듯 애처러운 울음이 폐허가 된 진산채를 울렸다. 소년의 울음은 길게 이어졌고 영원히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소년의 이름은 백리진강(白里眞强)이었다.

대명(大明) 홍무(洪武) 8 년 10 월 4 일 아침.
백제성(白帝城).
이곳은 사천(四川)의 명소였다. 이곳 백제성에서 세인의 존경을 받는 집안이 있었다. 일명 금문장(金文莊)이라
불리는 곳으로 장주(莊主) 백난천(白蘭天)은 유림(儒林)의 선비로 인품이 출중하고 명리에 담백하며 가난한
자를 돌보아 주기로 유명했다.
이 금문장이 때아닌 비보(悲報)로 온통 발칵 뒤집혀지고 있었다.
백난천의 금지옥엽이자 하나뿐인 외동딸 백가소(白茄韶)가 돌연 행방불명된 것이었다.
백가소는 아름답기로 사천일미(四川一美)이며, 학예(學藝)에 뛰어나고 심성 곱기로도 인근에 널리 알려져
명문가의 청혼이 줄을 잇는 소녀였다.
그런데 어제 오후 시녀 국향(菊香)을 대동하고 산책을 나간 뒤로 귀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로 인해 금문장은
발칵 뒤집혀 식솔 전원이 동원되어 수색을 나갔다.
결국 다음날 새벽 식솔들은 백가소의 몸종인 국향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국향은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그녀는 전라(全裸)로 능욕을 당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잔혹하게도 그녀의 유두가
도려내어져 있었고 심하게 유린당한 흔적이 나신의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국향의 나이 17 세.
백가소보다 겨우 한 살이 많은 나이였다. 그로 인해 금문장은 경악과 충격에서 휩싸이고 말았다.
식솔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며 장주인 백난천은 경황이 없는 채 안색이 백지장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책이
없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백가소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국향이 시신으로 발견된 후 금문장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온통 어수선한 분위기에 잠겨있을 때였다.
한 명의 청년이 금문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타나자 금문장의 식솔들은 모두 반가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장주인 백난천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맨발로 뛰어나와 맞이하고 있었다.
백난천은 급히 그를 서재로 불러들였다.
"여보게! 마침 잘 왔네. 큰일이 났네."
백난천은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청년에게 얘기했다. 얘기를 듣는 청년의 얼굴은 점차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청년은 금문장의 젊은 집사(執事)였다.
그는 삼 일 전 장주의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이 청년은 금문장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해왔으며
차분하고 정확한 일처리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신임을 사고 있었다.
그는 약관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나이였으나 그가 하는 일은 언제나 실수가 없고 완벽했던 것이다.
따라서 백난천조차 그를 태산같이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얘기를 다 듣고난 청년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국향의 시신은 어디 있습니까?"
"별원에 안치해 놓았네."
"일단 시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 그러세."
청년은 별원으로 가 국향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관을 보았다. 그는 서슴없이 관뚜껑을 열어 젖혔다.
"......."
관 속에는 국향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발견 당시의 모습이 하도 처참하여 그녀의 몸에는 흰 천을 덮어놓고
있었다. 청년은 천을 걷어 제쳤다.
그러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 나타났다. 아무리 죽은 시신이라 하지만 한창 무렵의 처녀였으므로 백난천은
민망함을 금치 못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고 국향의 나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향의 육체 곳곳을
면밀히 조사하고 있었다.
"......."
그러는 동안 청년의 안색은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는 시신의 형태를 자세히 관찰한 후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 낸 듯했다.
먼저 흉수(凶手)는 한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셋, 또는 넷은 된다. 그것은 국향을 능욕한 자의 숫자였다. 또한 변태적이며 야비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그녀의 육체를 가지고 희롱했다는 것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손자국, 이빨 자국, 국향의 국부에 남아 있는 상흔들.......
그러나 청년 집사의 마음이 무거워진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내심 놀란 것은 바로 국향의 사인(死因) 때문이었다. 국향의 직접적인 사인은 능욕 때문이 아니라 어떤
무공(武功)으로 인한 내부적인 공상(功傷)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치밀하고 교활한 짓이었다.
그녀를 죽인 자는 무림인이되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고의로 강호상에서 가장 흔한 내력지기(內力之氣)를
이용하여 그녀의 장부를 파열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어느 파(派), 어느 자의 소행인지 짐작할 수도 없게 만든 것이었다.
"무슨...... 단서라도 발견했나?"
백난천은 청년이 오랫동안 말이 없자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잠시 생각 좀 해봐야겠습니다."
"제발...... 범인을 잡아 주게. 관부(官府)에서도 다녀가긴 했네만 아무래도 이 일은 자네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네."
과연 그렇다.
관부에서는 국향의 시신을 슬쩍 살펴보고 갔을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도 못했다.
청년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그 후 반나절을 그는 방 안에 틀어박혀 명상에 잠겨 있었다. 백난천은 청년이
다시 나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으나 저녁이 될 때까지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저녁 무렵,
청년은 비로소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방 안에서 나왔을 때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녹슨 철검(鐵劍)이 들려 있었다.
금문장의 식솔들은 그가 검을 갖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평소에 말이 없는 그였기에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청년 집사는 아무도 모르게 장원을 빠져 나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있었다.
국향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금문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야산이었다.
그곳에 당도한 청년은 면밀히 주위의 흔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밤새도록 반경을 넓혀가면서 흔적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별 무소득이었다.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
청년은 바위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어느덧 어둠이 가고 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그동안 청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새벽 여명이 사위를 비출
무렵 그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청년의 눈은 어떤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추적(追跡).
바야흐로 추적이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청년의 눈은 야수안(野獸眼)이 되어 있었고, 길바닥을 훑어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매서운 광채가 점차 강하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청년 집사, 그의 이름은 장천림(長天林)이었다.
제 1 장 과거(過去)와 현재(現在)

홍무(洪武) 8 년 10 월 7 일. 오 시(午時).
사천(四川)의 중심에 위치한 백림(白林).
백림의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주루(酒樓)에 흑의를 입은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장천림(長天林).
이것이 그의 이름이었으나 그 이름을 아는 자는 하늘 아래 몇 되지 않았다.
장천림은 소면 한 그릇을 시켜 놓았으나 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
벌써 사흘째 그는 백난천의 금지옥엽 백가소를 찾아 헤맸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사실 그는 백가소를 찾는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한 심정이었다. 더구나 그는 수 년 만에 세상에
나온 것이었다.
그동안 장천림은 오직 금문장에만 틀어박혀 있다시피 했다. 그는 지난 과거는 기억 저편에 아득히 묻어두고 아주
단순한 삶에 파묻혀 있었다.
하기야 과거는 기억하기도 싫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므로.
"......."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백가소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입맛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그는 소면에는 젓가락도 대지 않은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뿌연 이슬이 어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창가에서 내려다보이는 가도에 어떤 행렬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그의 뿌연 시야에 들어왔다.
일단의 병사들이 죄인을 호송하는 듯 오라에 묶인 자들을 수레에 싣고 다가오고 있었다. 사오십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삼엄하게 경비하는 것으로 미루어 무척 중요한 죄인이거나 흉악범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덜컹덜컹.......
수레는 주루 앞을 멈추지 않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때 장천림의 옆자리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저게 뭐지?"
장천림은 그들이 아까부터 술잔을 기울이던 중년 상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것도 모르나? 이런....... 소식이 깡통이구먼?"
"아니...... 뭘?"
"저들이 누군지 아나? 빌어먹을, 아주 나쁜 놈들이라구. 저 놈들은 부녀자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먹는 악질
노예 사냥꾼들이라구. 이번에 관에서 벼르고 벼르다가 일당을 체포하여 압송해 가는 중이라네."
"노예 사냥꾼?"
약간은 멍청해 보이는 상인이 의아한 듯 반문한다.
"그런 직업도 있었나?"
"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저 놈들은 패를 이루어 예쁘게 생긴 아녀자라면 처녀건 부인이건 가리지
않고 납치해 실컷 농락한 후 팔아먹는 놈들일세. 쯧....... 저 놈들에게 희생된 부녀자들이 수백...... 아니
수천이 넘었네."
"허허....... 그런 작자들이 있다니."
"하지만 이번에 관에서 잡아 들였으니 곧 일망타진될 거야."
"에이! 저런 놈들은 그저 광장에서 오마분시(五馬分屍)를 시켜버려야 해!"
상인은 흥분한 듯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고 있었다.
"아암! 사지를 갈가리 찢어죽여야 하고 말고!"
한편 사라져가는 행렬을 바라보던 장천림의 눈이 일순 번쩍 빛나고 있었다. 불현듯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고
있었다.
탁!
그가 탁자에 내려놓은 것은 두어 푼 가량 되는 은자였다.
문득 바람소리가 난다고 했을 때, 두 상인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창 밖을 바라보며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흑의청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땅땅땅땅땅.....
신경을 온통 뒤집어 버리는 날카로운 철판(鐵板) 두드리는 소리다.
어느새 아침이다. 또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덜커덩!
밖으로부터 굳게 잠겼던 창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눈까풀 위로 뿌연 빛이 자극적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713
호는 눈을 떴다.
석실이었다. 고작해야 이십여 평(坪)밖에 되지 않는 비좁은 석실 안에서 삽십여 명 정도의 아이들이 부시시 눈을
비비며 일어나고 있었다.
딱딱한 돌바닥에 침구와 침낭이 제대로 있을 리가 없었다. 적당히 자리잡고 쭈그려 누우면 그 자리가 곧 침대요,
침실인 셈이었다.
하루 종일을 시달리고 지쳐버린 심신은 불면증 따위의 사치를 불러 들일 리가 없었다. 등이 땅에 닿기만 해도
촌각(寸刻) 안에 깊이 잠들어 버리는 아이들이었다.
713 호가 일어나 새벽 추위에 잔뜩 굳어있는 육체의 신경세포를 되살리기 위하여 관절을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뚜둑...... 뚝......!
손가락 마디와 허리, 무릎의 관절에서 둔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무심하게 들으며 작은 운동을 하는데 옆에서 한
아이의 절망적인 중얼거림이 들렸다.
"또 죽었군."
713 호는 시선을 돌렸다.
한 쪽 구석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소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 시간에 여전히 누워있다는 것은 곧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하나 둘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있어 동료들의 죽음이란 이미 관심권 밖에 있었다. 워낙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었으므로.
713 호도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일과(日課)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쯤이면 시체는 흔적도 없이 치워져 있으리라.
사방이 병풍같은 절벽으로 쌓여 있는 공지,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계곡 한가운데 있는 분지였다.
대략 천여 평 남짓한 공지에는 200 여 명 가량의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년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소년들이
바라보는 정면에는 나무로 높이 축조된 단(檀)이 있었다.
단 위에는 거대한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 대원(大元)
금색 글씨로 그같은 글이 수놓아져 있었다. 단 위에는 팔인의 금색무복을 입은 중년교두(中年敎頭)들이
위풍당당한 자세로 우뚝 서 있었다.
713 호가 소속되어 있는 청룡단(靑龍檀) 스물일곱 명, 아니 이제는 스물여섯 명으로 줄어든 소년들도 대열의
가운데에 섰다.
둥........
어디선가 묵직한 징소리가 울렸다.
이어, 조회(朝會)가 시작되었다. 조회는 늘상 있어온 형식을 따랐다. 간단히 훈시가 있은 다음 대원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게 한다.
"대원제국 만세(大元帝國萬歲)!"
"황제폐하 천세(皇帝陛下千歲)!"
삼창의 발호가 있고서 조회는 끝났다. 조회는 불과 뜨거운 차 석 잔을 마실 시간에 끝난 것이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200 여 명의 소년들은 구분이 되어 있었다.
선두에 깃발이 있고, 그 깃발에는 각각 다른 표식이 있었다.
- 청룡단(靑龍檀).
- 주작단(朱雀檀).
- 현무단(玄武檀).
- 백호단(白虎檀).
등이 그것이었다.
삐이이익!
팔인의 교두들이 동시에 호각을 불었다. 그러자 소년들은 각기 소속대로 분산되어 흩어졌다. 그들은 하루의
훈련을 시작하기 위해 대열을 나누는 것이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713 호의 눈빛은 암울하기만 했다.
'오늘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것이 그의 중얼거림이었다.
때는 대원 말기(大元末期), 절강성(浙江省) 최남단의 절곡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홍무 8 년 10 월 8 일 새벽.
백림(白林)에서 사십여 리 떨어진 숲길을 두 사람이 달리고 있었다.
"헉...... 하아...... 하......!"
정병(鄭兵).
그는 가슴까지 치밀어 오르는 벅찬 호흡을 가다듬지 못하고 괴로워 하고 있었다. 죽어라 뛰고는 있으나 그의
마음은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다시 잡힌다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숲길을 달리면서도 못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옆에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함께
달리고 있는 청년에 대해서였다.
정병은 이른바 노예 사냥꾼으로 불리는 조직의 소두목이었다.
오늘 새벽 그는 관청(官廳)의 뇌옥에 갇혀 있다가 한 청년으로부터 극적인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도주(逃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근 두 시진 이상을 쉬지 않고 달리면서도 그를 뇌옥에서 구해준 청년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왜?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중죄인인 자신을 구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만일 이 사실이 알려지면 청년은 무서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청년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규칙적인 보폭으로 뛰고 있을 뿐이었다.
"헉...... 허헉!"
마침내 정병은 더이상 뛸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마침내 그는 발을 멈추었다.
"자...... 잠깐만......."
그러자 청년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바로 금문장의 젊은 집사 장천림이었다.
정병은 거친 숨을 돌리며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들이 멈춘 곳은 숲 속으로 꽤나 들어와 있어 어지간해서는
남들의 눈에 띄기가 힘든 곳이었다. 그는 안심하고 장천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정병은 내심 흑!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의 시선이 마치 뱀처럼 차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때 장천림은 그의 숨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나이 십육 세. 이름 백가소(白茄韶). 붉은 장미가 수놓아진 백의를 입고 있으며 맑은 눈동자에 목덜미에는
손톱 반 만한 점(點)이 있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느냐?"
".......?"
너무나 뜻밖이었다. 정병은 미처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입을 벌린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나이 십육 세. 이름 백가소......."

챙챙챙......!
"반란(叛亂)이다! 쫓아라......!"
713 호는 잠결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
한 방에 있던 다른 소년들도 이미 깨어 있었다. 그들의 눈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고, 가슴은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탈출이다.
소년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그런 말을 내뱉는 듯 했다. 이때였다.
쾅!
단단히 밖으로부터 잠겨 있던 창문이 박살났다. 동시에 화광이 방 안을 밝게 비쳤다. 소년들은 희망과 불안으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이때 벌떡 일어서서 외치는 소년이 있었다.
"백호, 주작, 현무단의 동료들이 드디어 일어섰다! 자! 우리들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언제까지나
노예로 벌레처럼 살아갈 것이냐? 동료들이여! 검을 들어라! 자유(自由)를 찾자!"
이렇게 외친 소년은 744 호였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먼저 부서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자!"
"나가자! 싸우자!"
744 호의 행동에 고무된 듯 몇 명의 소년들이 소리치며 뛰어 나갔다. 713 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얼마 전부터 이런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각 단에 있던 소년들이 은밀히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것은 이곳을 탈출하자는 모의였다. 조회 때마다 연락이 오고가는 것을 713 호는 몇 번인가 보았다. 그런데
드디어 오늘을 거사일(擧事日)로 잡은 모양이었다.
실상 이 방에서도 744 호는 몇 차례 선동적인 발언을 하였으며 그에 따라 소년들도 불만을 토로하고 그에게
동조하는 기운을 보이고 있었다.
드디어 일은 기어코 터진 것이다.
"......!"
713 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석실 안에는 어느새 자신밖에 없었다. 모두가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남아 있을 아이는 없었다. 죽으면 죽었지 이왕이면 폭풍 속에 자신을 던져 버리고
싶은 것이 이곳의 아이들이었다.
713 호는 조용히 일어섰다.
그는 한 쪽 벽에 덩그라니 세워져 있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철검(鐵劍)을 집어 들었다.
그는 침착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고 다른 아이들과 달리 흥분하지도 않았다.

"으아아아아!"
정병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어찌된 셈인지 목젖이 굳어 아무런 비명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무섭게 사지를 비틀어대고 있었다.
"모른다."
그 말이 자신의 입 밖에 나온 순간부터 시작된 고문이었다. 아혈조차 제압당한 채 받는 고문은 한도 끝도 없었다.
영겁의 지옥에 떨어진 양 고통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더욱 다양해지고 더욱 배증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도 괴로워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손으로 땅을 긁었다. 손톱이 빠지고 모래알이 손톱 속으로 들어가
박혔다. 뿐만 아니라 무릎이 온통 까지고 뼈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도 고문은 조금도 멈추어지지 않았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마침내 그는 애원했다.
"흐으...... 차라리...... 죽여 주시오!"
구슬픈 눈으로 장천림을 바라보며 빌고 또 빌었다. 벌써 수백 번도 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할 수 없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무엇이든 아는 대로 대답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그것을 묵살한 채 더욱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더 다양하고 극랄한
고문을 가할 뿐이었다.
정병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이렇게 극악스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고통이 사라지며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귓전으로 흘러 둘어왔다.
"내가 어릴 적에 수천 가지의 고문술(拷問術)을 배웠었지. 그때는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지금와서는
무척 요긴하게 쓰게 되었다."
"......."
"너무 고통스러워 말라.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이것은 내가 아는 고문 수법 중 초보적인 것에 불과하다."
"......!"
말을 할 수는 없었으나 정병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머리를 땅에 부딪쳐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육이 제멋대로 뒤틀리고, 심장을 천만 마리의 개미가 갉아 먹는 듯 하고, 오장육부가 비비 꼬인다.
어디 그뿐이랴?
눈알을 천 개의 침으로 찌르는 듯하고, 심줄이 뽑혀 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는 오줌과 똥을 내갈겼으며
체중이 순식간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야말로 얼마나 격심한 고통이었는지 알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시작이라니?
으흐흐...... 차라리 죽여...... 죽이라구......!
"자, 시간을 줄이기 위하여 한 번만 더 묻겠다. 그녀의 행방은?"
순간 아혈이 거짓말처럼 풀리며 정병은 입이 자유로와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비명을 지르듯이 입을 열었다.
"예! 예! 어디 있는 지 알 것 같습니다요! 알고 말고요...... 하지만......"
"하지만은 없다. 어디 있느냐?"
장천림의 음성은 비정하기만 했다.
"우...... 우리의 짓이 아니고...... 해...... 해룡파(海龍派)의 짓일 겁니다. 정말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소녀는......"
벌벌 떠는 정병을 차갑게 내려보면서 장천림은 물었다.
"해룡파?"
"으흐흐...... 예...... 저희 말고도 가끔씩 이 지역에 들어와 부녀자를 납치해 가는 놈들입니다. 요 며칠
전에도 그들이 이곳을 지나갔습니다. 아마 그때 어른께서 찾으시는 분을 납치했을지도......"
"확실한가?"
"화...... 화...... 확실합니다!"
"그들은 어디로 갔느냐?"
정병의 온 몸은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예예...... 그들은 주로 양자강 줄기를 따라 활동합니다. 사천과 호북의 접경지역인 무협(巫峽)에 산채가
있다고 들었는데......"
정병은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청년의 눈에서 파란 불빛이 흘러나오는 듯 했기 때문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나...... 나리...... 제발 목숨만......"
장천림은 몇 가지를 더 물었다.
그는 아주 냉혹했다. 마침내 그는 알고 싶은 것을 알아낸 뒤 떠나갔다.
그가 떠나버린 숲 속에는 심장을 철검으로 관통당한 정병의 시체 만이 눈을 부릅뜬 채 누워 있었다.
제 2 장 반란(叛亂)

자욱한 연기와 사방을 울리는 함성소리!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713 호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체들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문득 그의 등 뒤에서 살기가 다가왔다.
".......!"
빙글 돌아선 그의 눈에는 한 명의 금색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보였다. 중년인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금검(金劍)이 들려 있었다.
"칠백십삼 호....... 너마저......?"
중년인의 고통스런 음성에는 실망이 담겨 있었다.
"......."
713 호의 눈빛은 더욱 암울해졌다. 금의중년인은 자신을 가르치던 교두 중의 한 명이었다. 하나같이 음악하고
잔인한 교두들 중에서도 비교적 그는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교두는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달려 들었다. 그의 금검은 패천마혼세(覇天魔魂勢)라는 초식이었다.
713 호는 간신히 피했다. 그러나 교두는 또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밖으로 통하는
요로로 누가 죽던 양보를 해야할 위치였다.
이리 저리 다섯 차례나 몸을 피하던 713 호는 문득 검세가 사나와지는 것을 느꼈다.
파츠웃!
"......!"
그의 왼쪽 어깨가 불에 덴 듯이 화끈해지며 피보라가 일어났다. 순간 713 호는 반사적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틀며
수중의 철검을 그었다.
슈욱!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流星)과도 같다.......
언젠가 그는 이 검법을 배우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눈 앞의 교두가 가르쳐준 검법이었다.
유성잔월(流星殘月)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검초식이었다.
"크아악!"
713 호의 검이 교두의 목을 날렸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제자에게, 그것도 그가 직접 전수한 유성잔월(流星殘
月)이라는 검법 아래 고혼이 되었다.
"......."
713 호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철검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과 자신의 왼쪽 어깨에서
뿜어지는 피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똑같은 피. 똑같은 색이었다.
그의 표정이 점차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지난 십여 년간 당해왔던 모든 고통과 수모들이 서서히
소용돌이치며 어떤 응어리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눈길을 돌려 함성이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동공 깊이 가라앉아 있던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마침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신형은 함성이 들리는 곳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차차차창......!
본부 앞 공지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난전(亂戰)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싸움은 거의 일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절곡 외곽을 경비하던 수백 명의
흑의인들에게 소년들이 몰리고 있으며, 이미 중과부적으로 당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수세에 몰린 소년들은 이제 수십 명밖에 남지 않았으며 그나마 태반이 중상을 입고 몸을 운신하기도 힘든
입장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밥 한 끼 지을 시간 쯤이면 반란이 평정될 것이다.
광장에 쌓여 있는 시체들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 그야말로 혈하를 이루고 있었다.
"크흐흐......! 어서 무기를 버려라! 너희들의 탈출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투항하는 자는 살고, 끝까지 반항한다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다."
흑의인들은 기세등등하게 소년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때였다.
휘...... 익!
문득 한 가닥 인영이 흑의인들 사이로 파고 들었다. 이어 검광이 눈부시게 일어나더니 상황이 돌변했다.
"크아악!"
여기저기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리며 흑의인들의 진용이 흐트러지는 것이 아닌가?
놀라운 일이었다. 713 호가 뛰어든 순간 상황은 일시에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713 호는 흑의인들의 진세
중앙으로 파고 들어 가차없는 살수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의 검법은 악랄하고 쾌속했다. 흑의인들은 미처 자세를 잡기도 전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정확!
신속!
713 호의 검이 한 번씩 호선을 그릴 때마다 정확하게 한 명씩의 목이 날아갔다. 잠시 후 장내의 판도는 달라졌다.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쓰러지자 진세에 구멍이 뚫렸으며, 용기를 얻은 소년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니 그
상황에 소년들은 용기백배하여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한편 713 호는 전세가 소년들에게 유리해지자 다시 다른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이름모를 산동(山洞).
어두침침한 산동 안으로 새벽 여명이 막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 여명에 동굴 안의 풍경이 어스름히 드러나고
있었다. 동굴 벽에 죽은 듯이 기대어 앉아 있는 네 명의 소년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713 호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피로 목욕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아수라(阿修羅).
그렇다. 새벽까지 계속된 혈전은 지옥의 아수라들이 싸운 것이나 다름없는 악전이었다. 그 속에서 그들은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백여 명에 가까운 소년들이 다 죽고 이곳 산동에 웅크리고 죽은 듯이 늘어져 있는 소년들이 생존자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나마 713 호의 눈부신 활약이 없었다면 그들도 모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절곡을 벗어나 이곳까지 달아났다는 것을 의미할 뿐, 저들의
추적은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체 대원 천하에서 그들이 숨어 있을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
죽음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런 가운데도 동굴 속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점점 안으로 비쳐들고
있었다. 문득 네 명의 소년들 중에서 몸집이 다소 뚱뚱한 소년이 입을 열었다.
"모두 죽었겠지......?"
소년의 오른쪽 어깨 부분에 76 이라는 번호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은 소년들의 고유번호를 의미했다. 나머지
소년들도 같은 부분에 번호가 수놓아져 있었다.
76 번이라면 현무단 소속이다.
1 번부터 200 번까지는 현무단, 201 번부터 400 번까지는 주작단, 401 번부터 600 번까지는 백호단, 601 번부터
1000 번까지는 청룡단 등, 도합 1000 명의 소년들이 조직을 나누어 훈련을 받았다.
물론 조직에 따라 받는 훈련의 종류도 틀렸다.
현무단은 변장술과 잠입, 추적을 전문으로 하며 주작단은 독극물 및 폭약, 암기술을 전문으로 한다. 백호단은
전술 및 전략, 기관장치 등을, 청룡단은 암살 및 실질적인 살수훈련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되어있었다.
76 번 현무단 소속의 소년이 한 말은 아무런 메아리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공허하게 끝났다. 소년들은 아무도
대꾸하지 않고 땅바닥 만을 내려다 볼 뿐이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무렵에 303 번 소년이 툴툴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후후....... 잘 된 일이야. 이제 모두 진짜 편해질 테니까 말야."
303 호는 아무도 대꾸하는 자가 없는 가운데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훈련 도중에 죽는 아이들을 부러워 한 적이 있었어. 그들에겐 더이상의 고통이 없을 테니까.......
후후...... 이제 나도 곧 그렇게 되겠지. 안 그래?"
소년들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잠시 후 76 번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젠장! 나는 당장 죽어도 좋지만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어."
".......?"
그 말에 소년들은 일제히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궁금한 것이 있다니.......?
76 은 문득 실성한 듯이 웃었다.
"내 이름이 뭔지 말이야........ 히히히........ 그것마저 안 된다면 하다 못해 우리가 무엇때문에 이런
지옥의 훈련을 받아야 했는지 말이야........ 히히........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죽기는 정말 억울하단
말이야."
그렇다.
그것은 소년 모두의 공통된 의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을 몰랐으며, 또는 왜 절곡에서 그런 지독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죽음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소년들은 동감하고 있었다. 76 번의 심정은 모두의 심정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서 걷기 전부터 이곳에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따라서 소년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훈련의 연속뿐,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부분이 막 젖을 뗄 무렵부터 이곳에서 생활해왔으므로.
소년들이 76 번의 말에 한결같이 공감한 채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있을 때 문득 한 쪽 구석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들은 원(元)에 대항하여 반원운동을 벌이는 열사(烈士)들을 척살하기 위해 훈련받는 살수 집단이야."
".......?"
소년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원은 너희들도 아다시피 몽고족들이 이 땅에 세운 제국이다. 그들의 학정은 한족을 말살시키고 있다. 따라서
한족을 부활시키려는 열사들은 반원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쳐 노력하고 있다. 비록 처음에는 조그맣게 시작된
혁명이었으나 시간이 흐를 수록 그 운동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침내 대원의 힘을 약화시키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원에서는 그들을 척살하기 위한 힘이 필요해진 것이다."
소년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야말로 처음 듣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더욱이 그 반원 조직은 은밀할 뿐더러 무림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 보통의 군사로는 제압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같은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훈련시켜 전문적으로 지사들을 척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혈랑대(血狼隊)........ 일명 혈명대(血命隊)라고도 불리우는 우리들이지."
".......!"
아이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이제까지 그토록 무서운 훈련을 받아 오면서도 교두들은 아무도 그 목적에 대하여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구석에 앉아 있던 소년의 설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들의 훈련은 앞으로 이 년이면 끝나게 되어 있었지. 그때가 되면 우리는 원의 앞잡이가 되어 수많은 한족의
열사들을 죽이게 되었을 거야."
이때였다. 76 호가 그의 말을 막으며 물었다.
"잠깐, 육백 호! 너는 어떻게 그토록 자세히 알 수 있었지?"
600 호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흘렀다.
"나는 육백 호가 아니야. 내 이름은 장하영(長河英)이야."
"장....... 하....... 영?"
소년들은 놀라 마지 않았다. 600 호의 이름이 장하영이라는 것에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의 이름이 장하영이라서가 아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이곳에 와 있었으므로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600 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소년들의 시선은 일제히 장하영에게
쏠리고 있었다.
경이(驚異)!
아니 차라리 경악에 가까운 시선들이었다. 장하영은 늠름하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반원 세력의 중추(中樞) 역을 하고 계시는 하북방면 백련대(白蓮隊) 대장군 장무혁(長武赫)의 아들이다.
내 나이 여섯 살 때 목적을 가지고 이곳으로 침투했다."
".......!"
동굴 안에 있던 나머지 삼인의 소년들은 마치 쇠뭉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한참 후에야
76 호가 불현듯 뭔가를 깨달은 듯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장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의 반란은 내가 주도해서 일어났다. 자그마치 십 년 동안에 걸쳐 면밀하게 계획한 끝에........"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돌연 76 호가 소리를 지르며 장하영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두 눈은 잔뜩
부릅떠져 있었으며 얼굴에는 온통 증오가 어려 있었다.
"으와아아악!"
그는 괴성을 내지르며 장하영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그의 면상을 마구 갈기는 것이 아닌가? 그의 갑작스러운
발작에 다른 소년들은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두 명의 소년이 달려들어 간신히 그를 떼어냈다.
"놔! 놓으란 말이야! 저 놈 때문에 수많은 동료들이 무참하게 죽었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76 호는 울부짖으며 몸부림을 쳤다. 동굴 안은 삽시에 그의 고함과 욕설로 뒤덮였으며
소년들은 그를 말리느라고 애를 썼다.
이때였다. 이제까지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었던 713 호가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들 해. 오히려 잘 된 일이야. 언제까지나 그들의 개가 되는 훈련을 받으며 이유도 없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
".......!"
그의 말은 결정적이었다. 한데 엉겨붙어 뒹굴던 소년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
713 호의 말은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소년들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더니 힘없이 동굴 벽에 기댄 채 다시
애초의 침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긴 침묵이었을까?
문득 303 호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칠십육 호, 이름을 알고 싶다고 했지?"
".......?"
"후훗........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죽기 전에 이름이나 알고 싶어. 아니....... 하다못해 아무 이름이나
하나 갖고 싶어."
말을 잠시 중단한 303 호는 고개를 돌려 장하영을 돌아보았다.
"이봐! 육백 호, 아니 장하영. 보아하니 네 놈은 우리보다 배운 것이 많은 것 같은데 우리들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겠나?"
장하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뜻밖의 제의였다. 303 호는 장난스런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내 성(姓)은 석(石)이었던 것 같아.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 그리고 어렸을 적에 어떤 숲 속에서 살았던 것
같아. 어때? 내 이름을 하나 만들어 주는 것이?"
장하영은 씨익 웃었다. 그는 알맞은 체격이었으나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소년이었다. 어쩐지 나이보다 더 성숙한
느낌이 든다고 할까.
"좋아, 친구. 자네의 성은 석씨이고 이름은 돌아갈 회(廻), 수풀 림(林)이라고 하자. 그런즉 석회림(石廻林)
이 네 이름이다."
순간 303 호는 박수를 쳤다.
"그래 좋군! 고마워 장하영. 친구들! 지금부터 나는 석회림이다. 그렇게 불러줘!"
"나도 하나 지어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침 하늘이다. 가장 맑고 신선하거든!"
76 호의 말에 장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성은 조씨(朝氏)야. 그리고 이름은 천백(天白)으로 하지. 어떤가? 아침 조(朝)에 하늘 천(天), 흰 백
(白). 아침의 맑은 하늘을 의미하지."
"이야아! 멋있군! 그래! 앞으로 내 이름은 조천백이다. 조천백........ 으하하하하!"
303 호나 76 호는 미칠 듯이 좋아하고 있었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들은 눈물까지 질금질금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웃음은 길게 가지 않았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게 되자 그들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어떤 한 사람만이 그들의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었다.
마침내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713 호에게 향했다. 그는 이제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713 호야 말로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살아서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 아닌가?
713 호는 소년들 중에서 유일한 청룡단 소속이었다.
청룡단은 전문적인 자객으로 키워지는 조직이었으므로 그들 중에서 가장 무공이 강한 편이었다. 다만 그 한 가지
사실 만 가지고도 713 호는 존경을 받을 만 했다.
그런데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무혼(武魂)과 투지, 죽음을 불사했던 놀라운 정신력은 어떠한 것이었던가?
그가 아니었더라면 아무도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들은 일제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713 호도 이젠 이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713 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다. 또한 좋아하는 것 따위도 없어."
그 한 마디뿐이었다. 그는 다시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소년들은 713 호를 위해 머리를 짜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를 위해 좋은 이름을 지어주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들었던 것이다.
마침내 장하영이 좋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칠백십삼 호는 우리의 은인이다. 그러니 그에게 우리들의 이름 중 한 자씩을 선사하는
것이다."
".......?"
뜻밖의 제의였다. 소년들이 미처 뭐라 답하기도 전에 장하영은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나의 성인 장(長)자를 주겠다. 그리고 너는 천(天)자, 넌 림(林)자를 주는 것이 어떠냐? 장천림(長天
林), 그 이름이 어떠냐?"
".......!"
그 순간 말없이 기대앉아 있던 713 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도 비로소 감정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의 이름이 장천림이라고........?"
"하하하! 멋있다. 장천림! 그 이름이야말로 제일 멋지다."
"아암, 정말 훌륭한 이름이야."
소년들은 박수를 치며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했다. 바로 그때였다. 밖으로부터 인기척이 들려온 것은.
".......!"
소년들은 아연 긴장했다. 어느새 추적자들이 쫓아온 것이다. 이제까지의 화기애애했던 소년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고 두 눈은 긴장으로 인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잠깐!"
막 철검을 들고 뛰쳐 나가려던 소년들을 막은 것은 장천림이었다.
그는 의아해하는 세 소년, 즉 장하영, 석회림, 조천백에게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한꺼번에 밖으로 나가면 모두 죽는다. 내가 놈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할 테니 너희들은 그 사이에
흩어져서 달아나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천림........"
소년들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들은 강한 아이들이었다. 이제껏 그들은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장천림의 말에는 한결같이 눈시울이 젖고 있었다.
"하지만 넌......."
장하영의 말에 장천림은 담담히 말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 능력이 있는 자가 있느냐? 그건 오직 나밖에 할 놈이 없어."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철검을 안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야아아아!"
멀어져가는 장천림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
동굴 안의 소년들은 벽에 기대여 숨을 죽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장천림....... 과연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들은 한결같이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장하영이 주먹으로 눈을 문지르며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도 나가자.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이대로 개죽음을 하기에는 너무나 억울하지 않느냐? 어떻게든
살아서 복수를 해야 해! 우리들을 위해 놈들에게 달려간 장천림을 위해서도 말이야."
그 말에 소년들은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너의 말이 맞다........
우리는 살아야 해........

"놈은 지쳤다!"
휘익! 휙휙휙!
살기에 찬 호통과 함께 인영들이 어지럽게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들은 먹이를 쫓는 사냥개처럼 일제히 하나의
목표를 향해 사정권을 좁혀가고 있었다.
장천림은 막다른 길로 쫓기고 있었다. 그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해도 중과부적이었다. 그는 벌써 이삼십여 명을
해치웠으나 이제는 탈진상태였다.
더욱이 그는 지금 달아나고 있는 길이 막다른 절벽으로 향해져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가는 데까지는 가야 했다. 자신 하나의 희생으로 세 명의 소년들이 살아날 수 있으면 그것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
너희들은 살아남아라.
보란 듯이 살아나 행복하게 사는 거다.
그것만이 나를 위한 길이요, 복수를 하는 길이다.......
장천림은 문득 물소리를 들었다.
쏴아아...... 우르릉...... 쿵쿵......!
급류(急流)였다.
급류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장천림은 막다른 절벽 끝에 몰리고
말았다.
"흐흐흐.......! 칠백십삼 호! 이제 네가 달아날 곳은 없다. 순순히 검을 버려라!"
흑의인 오십여 명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장천림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으핫핫핫.......!"
".......?"
흑의인들은 어리둥절했다.
그가 이 상황에서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쳤군!"
어떤 자가 그렇게 내뱉었다. 그는 수중의 강궁(强穹)에 독을 바른 살을 메긴 후 쏘았다.
"앗! 저 놈.......!"
"저......."
흑의인들이 경악성을 발하는 사이였다. 장천림은 느닷없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신형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그 아래는 천길의 낭떠러지였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돌출한 기암괴석들이 솟아 있어 떨어져 살아난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천림.
그는 그렇게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그가 살아날 희망은 전무했다. 적어도 흑의인들이 보기에는 그랬다.
흑의인들은 절벽 위에서 장천림의 몸뚱이가 하나의 바위에 떨어져 부딪친 후 퉁겨오르는 것을 보았고 이내 급류에
떨어져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급류의 물이 빨갛게 물드는 것은 그가 치유할 수 없는 중상을 입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사람의 운명이란 오직 하늘 만이 아는 법이다.
마침 절강성(浙江省)의 풍광수려한 절경을 유람하던 선비가 있었다. 그는 이민족 원(元)에게 짖밟힌 산하가
미워 몸을 숨기고 평생을 쌓은 학문조차 가슴 깊이 묻어버린 청렴한 학자였다.
그의 집은 사천의 백제성(百帝城)이었다.
그러나 집을 떠난 그는 지난 이 년여 간 여기저기를 떠돌며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마침 절강성의 한
계곡을 지날 때였다.
그는 급류에 떠내려 오는 한 구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그는 어렵게 그 시신을 건져냈다. 비록 시신일망정
물고기밥이 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최소한 매장이라도 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급류에서 건져낸 시신은 놀랍게도 아직 미약한 숨결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불과 십수 세에 불과한 어린 소년이라는 것이 선비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다.
마침 선비는 가산이 넉넉한 편이었다. 그는 그 길로 여행을 취소하고 마차를 세내어 백제성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떻게든 소년을 살려 보기로 한 것이었다.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할 소년의 명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선비의 이름은 백난천(白蘭天), 금문장(金文莊)의 장주였다.
소년은 금문장에서 마침내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그를 살리기 위해 백난천은 재산의 반을 써야 했다. 수많은
영약과 이름난 의원들을 동원하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소년이 살아난 것을 보고 그는 크게 기뻐했다. 마침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살아난 소년의
용모가 영준하고 믿음직스럽게 보여 자신의 양자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소년은 그 제의를 한사코 사양했다. 그리고 금문장의 하인으로 삼아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장천림, 바로 713 호였다.
이후 그는 금문장에서 없어서는 아니될 존재가 되었다. 그는 집사(執事)를 맡아 금문장의 재산을 크게 늘렸을
뿐더러, 여러 가지 일들을 비상한 능력으로 처리해 나갔다.
장천림은 과묵한 성품으로 말이 없었다. 말보다는 언제나 행동을 앞세웠다. 또한 자신의 공을 자랑하는 법도
없었다.
그런 그를 백난천은 장차 자신의 금지옥엽인 백가소의 부군감으로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하나밖에 없는 딸 백가소도 그를 무척 따르는 편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금문장의 식솔들도 모두 그를
아끼고 존경했다.
다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년집사 장천림은 오만해지는 법도 없이 묵묵히 집사의 일을 충실하게 이행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백난천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금지옥엽 백가소가 납치되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었다.
제 3 장 추적(追跡)

홍무(洪武) 8 년 11 월 2 일.
기루(妓樓) 춘강루(春江樓)는 초저녁부터 큰 손님을 맞았다.
그들은 불과 삼인이었다. 그러나 보통 손님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곳 무협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노예 사냥꾼
집단인 것이다.
이들과 기루와의 사이에는 특별히 깊은 관련이 맺어져 있었다. 이른바 수요자와 공급자라는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노예 사냥꾼들은 통상 기루에서 씀씀이가 컸다. 기루 또한 이들을 귀빈으로 접대하는 것이 상례였다.
"으하하하하......!"
"호호호......"
기루의 내실은 춘경(春景)이 아니라 온통 도화경(桃花景)이었다.
세 명의 중년 사나이들은 화려한 기루의 내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다섯 명의 기녀들을 데리고 놀고 있었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음담패설을 주고 받으며 손으로는 완전히
발가벗긴 계집들의 은밀한 곳을 거침없이 더듬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 술상 위에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색다른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 명의 기녀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누워 있었다. 안주감인가? 아니면 이름하여 여곡주(女谷
酒)라고 이르던가?
계집의 두 다리는 세워진 채 맞물려 있었고, 그 삼각 비역에 호박빛의 술이 담겨 있었다. 커다란 유방의 계곡
사이에는 싱싱한 생선회가 드문드문 놓여져 사내들의 젓가락질을 받고 있었다.
실로 이같은 황음한 광경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사나이들은 유방 위에 얹혀진 안주를 먹고, 여인의 꼭
다물려진 은밀한 부위에 고인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키들거리거나 지껄여지는 것은 전부가 음담패설이었고, 음탕한 그들의 손은 쉴 사이없이 자신들의
무릎에 앉아 있는 계집들의 비곡을 드나들고 있었다.
밖은 제법 카랑카랑한 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실내는 한 여름처럼 뜨거웠다.
그런데.......
그들이 광오한 환락에 젖어있는 사이 창문 틈으로부터 희미한 연기가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연기는 은밀하게 실내의 바닥에 깔리며 은은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잠시 후 사나이들은 물론이려니와 기녀들도 눈꺼풀이 천 근처럼 무거워짐을 느끼며 스르르 모로 쓰러지고 있었다.
삐......익.
창문이 열리며 한 명의 흑의청년이 들어섰다. 그는 바로 장천림이었다.

질문의 횟수는 가능한 한 적을 수록 좋고 위협은 확실히 해야 한다. 더불어 머리를 쓸 여지를 남겨주면 안 되고
무조건 공포에 질려 묻는 말에만 대답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끄아아아악......!"
한 사내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그의 사지는 통째로 뜯겨 나갔다.
"커어억...... 컥!"
또 한 명, 그는 두 눈이 닭다리에 찔려 있고 종내에는 입 속에 구운 오리 한 마리가 통째로 처박혀 숨이 막혀
죽었다.
"으으...... 으아아......!"
혼자 남게 된 자는 공포에 질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동료 둘이 무참하게
죽은 것을 보았다.
머리에 털난 이후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 그도 잔인한 짓이라면 취미삼아 해오던 위인이었으되, 이런
일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가해자 쪽이 아니라 피해자 쪽이 될 줄이야.
장천림은 무표정했다.
그는 구석에 몰려 와들와들 떨고 있는 기녀들을 손짓해 불렀다.
"젓가락."
기녀들은 처음에는 멍한 표정이었으나 곧 후다닥 상 위에 널려 있던 젓가락을 가져왔다. 장천림은 모두 세 벌의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저쪽으로 가라."
"으흐흐......."
사나이는 눈물 콧물까지 흘리면서 정신없이 장천림이 시키는 대로 했다. 이윽고 그가 벽에 기대어 서자,
슉!
한 개의 젓가락이 날아갔다. 빛살같은 속도였다.
"큭!"
사나이는 비명을 질렀다. 젓가락은 그의 팔목을 관통하여 벽에 박혔다.
"내게는 아직도 다섯 개의 젓가락이 있다. 모두 던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슉!
장천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다른 쪽 팔목에 젓가락이 박혔다.
"크윽! 제발...... 왜 그러는지 말해 주오....... 제발......"
사나이는 해룡파의 소두목이었다. 그는 도대체 장천림이 왜 이런 모진 고문을 가하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무엇인가 알아야 대답을 할 것이 아닌가?
"나이는 십육 세. 이름은 백가소, 백의를 입었으며 가슴에는 붉은 장미가 수놓아져 있다."
"으아악!"
또 하나의 젓가락이 이번에는 발목에 꽂혔다.
"어디 있느냐? 너희들이 납치했다. 장소는 백제성 부근의 야산......."
슉!
"아아악!"
왼쪽 발목에도 또 하나의 젓가락이 박혔다. 그는 이제 사지를 벌린 채 벽에 붙어 있는 꼴이었다. 장천림은
수중에 두 개의 젓가락을 들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노려보는 곳은 사나이로써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만일 그곳을 향해 날아간다면 사나이는 평생
다시는 계집을 안을 수 없게 되리라.
"으으으...... 봐, 봤소! 그...... 말씀하신 인상의 소녀는...... 수왕단(水王團)으로 넘어갔습니다요!"
"수왕단?"
"예...... 예! 황하(黃河)를 무대로 활동하는 작자들입죠....... 예....... 분명히 그런 소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우...... 우리가 납치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다만...... 야산에 버려져
있는 소녀를 발견한 것밖에는...... 미, 믿어 주십시오......."
슉!
"카아악......!"
다섯 번째의 젓가락은 사나이의 소중한 그곳에 꽂혔다. 이로써 그는 다시는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생명이란 소중한 것이 아닌가? 그는 애원의 눈빛으로 제발 목숨 만은 살려 달라고
빌었다.
슉!
마지막 젓가락은 애원하는 사나이의 목구멍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대황하(大黃河).
수만 년을 쉬임없이 흘러온 황하의 물은 언제나 탁하다.
도도히 흘러내리는 그 흐름 속에 한족의 영욕이 있으며, 중원의 역사가 숨쉬고 있다.
밤(夜). 흐르는 강물 위에 범선(帆船)이 떠있다.
범선 안에서는 축제라도 벌어진 양 쉴새없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횃불과 불빛이 강상까지 환하게
물들이고 있다.
이 범선은 황하 유역에서는 모양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유명한 범선이다. 황하 일대를 오르내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떤 조직의 범선인 것이다.
자시(子時)쯤 되었을까?
쏴아아.......!
문득 물결이 갈라지며 사람의 머리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범선의 후미진 쪽이었다.
"......."
사나이는 날카로운 눈으로 범선을 살폈다. 장천림이었다.
잠시 후 그는 경비경이 선미를 지나간 틈을 타 범선 위로 가볍게 뛰어 올랐다. 그의 동작은 민첩하기 그지
없었으며, 일 점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
뱃전에 소리없이 오른 그는 갑판의 잡동사니를 쌓아둔 뒤에 몸을 숨겼다. 바로 그때,
"헉........ 허헉.......!"
야릇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장천림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갑판 위의 풍경을 보라.
네 명의 험상궂게 생긴 장한들과 네 명의 여인들이 뒤섞여 혼음(混淫)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황하 가운데 떠있는 배 위라고는 하지만 지붕도 벽도 없는 갑판 위에서 혼음을 하다니 실로 낯뜨거운
일이었다. 그로 미루어 범선에 타고 있는 인물들이 어떤 부류인지 능히 짐작이 갈 일이었다.
장천림은 뱃전을 소리없이 이동하여 한 바퀴 돌았다. 정세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실로 뱃전에는 온통 광기(狂氣)에 가까운 난잡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십 명의 장한들이 술을 마시며
여인들과 난교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배 위의 전망대 위에 보초가 있었다. 단지 그 보초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엉망으로 취해 있었다. 따라서
보초의 눈 만 피한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활동할 수가 있었다.
장천림은 갑판 위를 모두 살폈으나 목적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곳에는 없다. 하긴 갑판 위에 나와 있는 자들은 모두 수왕단의 졸개들 뿐이다.'
수왕단(水王團).
그렇다. 그는 황하 일대를 주름 잡는다는 수왕단의 범선으로 잠입한 것이었다.
잠시 후 장천림은 선실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범선은 꽤 규모가 컸으므로 여러 개의 선실이 있었다.
그는 선실 하나 하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선실은 갑판 위에 있는 작자들보다는 비교적 신분이 높은 두목급들의
방인 듯 했다.
그러나 대충 선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은 갑판 쪽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 역시 선실 안에서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계집들을 희롱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장천림의 가슴 속에는
살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인신매매를 하는 작자들.......! 아무 여인이나 잡아 욕심을 채우며 환락에 취해 있군. 세상에 살아있어야
아무런 가치 없는 놈들........'
그러나 무작정 살인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목적은 백가소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가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가장 크고 호화로운 선실에 당도했다. 선실 안에는 수왕단의 단주로 보이는 사십대의 중년거한이 커다란
호피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는 네 명의 여인들을 희롱하고 있었다.
그 네 명의 여인들은 밖에 있는 어떤 여인들보다도 더 아름답고 젊은 미녀들이었다. 한결같이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선실 안의 풍경은 그야말로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중년거한은 제왕이 부럽지 않은 환락을 만끽하고 있었다.
여인들 중 몇은 거한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몇은 거한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있었다. 거한은 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털투성이의 팔을 뻗어 한꺼번에 두 여인들을 안고 여기저기를 주무르고 있었다.
실로 음탕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장천림은 서슴없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누....... 누구냐?"
호피의자에 앉아 있던 거한은 갑자기 예고도 없이 들어선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장천림은 태연했다. 그는 대꾸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 발로 진수성찬으로 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져 있는
주안상을 밟았다.
우지끈!
주안상은 대뜸 한가운데가 부러져 주저 앉았다.
"무...... 무슨 짓이냐?"
거한은 퉁방울같은 눈을 부릅뜨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으....... 헉!"
그는 헛바람을 들이켜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장천림의 발이 그의 콧등을 밟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천림의 발은 언제 어떻게 날아갔는지 그의 콧등을 정확히 짓밟았다.
거한은 과연 수왕단주였다. 그는 황하 유역을 제왕처럼 군림하는 작자였고 평생을 엽색질과 방화, 살인으로 보낸
작자였다. 그런데 이 갑작스런 사태에 완전히 주눅이 들어 버렸다.
장천림은 한 번 보고 그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겁이 많은 작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철검을 뽑지도
않은 채 검집째 그의 목을 눌렀다.
"으....... 캐액!"
목젖이 눌려지자 수왕단주는 호흡이 막혀 캑캑거리며 사색이 되고 말았다.
"나이는 십육 세, 이름은 백가소, 입은 옷은......."
그러나 장천림은 그만 입을 다물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가 끝까지 다 묻기도 전에 수왕단주는 그만
기절을 해 버린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하반신이 푹 젖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알고 보니 수왕단은 덩치만 컸을 뿐,
그야말로 겁장이였던 것이다.
"사내 값을 못하는 놈이군........"
장천림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겉보기와는 다른 위인이 있었다. 수왕단주같은 자가 바로 그런 위인이었다.
장천림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런 작자가 인신매매를 하는 집단의 영수일 줄은 정녕 뜻밖이었다.
이때였다.
"저어........ 나리."
".......?"
장천림은 흠칫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 음성은 구석으로 물러나 쪼그린 자세로 숨어있던 여인들 중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그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있었다.
"저어........ 혹시 목에 작은 점이 나 있는 그 소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
장천림은 전신을 떨었다.
"맞소. 보았소?"
여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열여덟 살 가량 되어 보였는데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풍만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가슴이 유난히 크고 허리는 대조적으로 가늘었으며 얼굴도 갸름하고 요염한 여인이었다.
피부가 투명한 것으로 미루어 과거에는 분명 신분이 높은 집안의 규수인 듯했다.
"백소저를 말씀하시는군요. 아,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곳에 없답니다."
장천림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찾았는가?
그런데 이제서야 비로소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다급히 물었다.
"그럼 어디에 있소?"
"백소저는........"
여인의 말은 이러했다.
백가소.
그녀는 잡혀온 여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래서 수왕단주인 위한림(韋韓林)의 눈에 들어 그의
수청을 들어야 했다.
위한림은 본래 계집에게 싫증을 잘 내는 위인이었다. 처음에 그는 백가소에게 반해 한동안 다른 여인들은 일체
접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은 백가소가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고집이 세어 그의 말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위한림같은 위인은
계집질을 밥먹듯 해왔으므로 도리어 뜻대로 응해주지 않는 여인에게 더 관심이 끌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결국 백가소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한동안 협박하고 달래고 해도 육체의 문을 열지 않던 그녀도 마침내
굴복을 하고만 것이었다.
위한림이 그녀에게 미약(媚藥)을 강제로 복용시킨 것이었다. 미약은 한 번 복용하게 되면 신지를 잃으므로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미약은 중독성이 있다. 처음에는 소량을 먹이고, 차츰 그 양을 늘려가게 되면 종내에는 미약을 하루라도 복용하지
않으면 미쳐버리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백가소는 한 달 이상 미약을 복용하게 되자 마침내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녀는 고고하던 자존심도, 순결한 여인으로서의 수치감도 다 사라져 버렸다. 누우라면 눕고 기라면 기었다.
핥으라면 핥았고 춤을 추라면 추는 애욕의 노리개가 되고 만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매료되었던 위한림도 마침내 서서히 싫증을 내게 되었다. 그녀에게 더이상 흥미가 없어진
것이었다.
중독이 심해진 그녀는 더이상 예전의 청순하고 아름다운 백가소가 아니었다. 위한림은 그런 그녀를 자신의
수하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의 수하들은 백가소를 실컷 농락한 뒤 점점 중독증세가 심해진 그녀를 또다시 하북(河北) 연변에 있는 한
사창가에 팔아 넘겼다는 것이다.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으아아아아!"
장천림은 격분하여 울부짖는 듯한 비명을 발하면서 철검을 내리쳤다.
퍼어어억!
검집째 떨어진 철검 아래 혼절해 있던 수왕단주 위한림은 그 유난히 커다란 골통이 두부가 으깨어지듯 박살나
황천으로 가고 말았다.
"뭐, 뭐냐?"
"단주님의 음성인데......?"
잠시 후 비명을 듣고 선실로 우르르 뛰어드는 작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선실 안에 벌어진 풍경에 그만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죽음의 범선(帆船).
겉으로는 한가롭고 평화롭게 황하 한가운데 떠 있는 범선이었으나........ 밤이 이슥해지고 새벽 여명이 터올
때까지도 범선에서는 죽음의 비명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슉! 슈욱!
장천림은 철검을 휘둘렀다. 그의 철검이 한 번 번뜩일 때마다 정확히 한 놈의 목이 끊어져 잘린 채 갑판 위에
뒹굴곤 했다.
그의 마음 속에 자비심은 한 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 범선 안에 살아 숨쉴 자격이 있는 놈은 한 명도
없다고 단정지었다.
그는 쉬지 않고 철검을 휘둘렀다.
피........ 피........ 피........
여인들은 한 선실 안에 뭉쳐 벌벌 떨고 있었고........
이백여 명에 가까운 수왕단의 졸개들이 모두 죽은 것은 새벽 여명이 온통 시체로 뒤덮인 갑판을 비칠 때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엇인가 물 속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을때, 겁에 질린 채 선실 안에서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 보던 담이 큰 한
여인은 볼 수 있었다.
밤새 지옥도를 연출했던 흑의청년이 입에 한 자루의 철검을 문 채 유유히 황하를 헤엄쳐 건너가는 것을.

며칠째 내린 눈으로 대지는 온통 건곤일색(乾坤一色)이다.
눈........ 눈........ 눈.
눈은 천지를 오직 하나의 색(色)으로 뒤덮었다.
황혼(黃昏)이 진다. 황혼은 눈부신 설지를 점차 핏빛으로 채색해가고 있었다.
이곳은 황하 연변. 하북(河北)의 평원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장천림은 묵묵히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고 있었다.
그에게는 고독한 여행자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눈길을 들어 멀리 바라다보이는 나룻터에 밀집되어
있는 군락을 보고 있었다.
그곳은 나룻터의 조악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선창이었다.
빈민들이 우글거리는 곳. 그곳은 더럽고 누추하며 온갖 추악한 군상들이 범벅을 이루어 사는 곳이다. 과연 그런
곳에 백가소가.......?
장천림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벌써 여러 곳을 전전했다. 수왕단의 범선에서 한 여인이 일러준 대로 그는 백가소가 팔려 갔음직한 사창가는
빠짐없이 뒤졌다.
없었다.
아니, 어떤 곳에서는 그녀를 알고 있는 자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들의 말은 그녀가 이미 다른 곳으로 팔려 갔다는
것이었다. 다시 백가소가 팔려갔다는 사창가를 전전하기를 그 몇 번이던가?
그때마다 그는 번번히 한 발자국 늦고 있었다.
인생이 무상이라더니........
그는 그토록 아름답고 청순하며 예지 발랄하던 백가소가 더러운 창녀(娼女)가 되어 사창가를 전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열여섯 번째........
간신히 잡은 실낱같은 단서를 잡고 있다가 끊어질 듯 말 듯 할때 장천림은 참을 수 없는 절망과 분노를 느끼곤
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대은인(一大恩人) 백난천의 금지옥엽.
어쩌면 그의 인생에 마지막 희망이 되어 줄 지도 몰랐을 백가소의 행방을 찾는 일을 어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번번히 무너지는 가슴을 달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마침내 그는 나룻터의 창기촌까지 왔다.
".......!"
절로 눈살이 찌푸러진다.
얼기설기 지은 움막들........
한 움막마다 열 명도 넘는 식구들이 이와 빈대가 드글거리는 더러운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집요했다.
움막을 하나하나 들추며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 어떤 움막에서는 온통 피고름으로 전신이 짓물러 가는
창녀가 두 명의 거지들을 상대로 매춘(賣春)을 하고 있었다.
어떤 움막에서는 열세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가 환갑이 넘은 영감을 상대로 그짓을 하고 있었다.
어떤 움막에서는 다섯 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한 명의 창녀를 상대로 일을 치르고 있었다.
어떤 움막에서는........
"우웩........ 웩........ 웩........"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몇 번이나 토(吐)했던가?
장천림은 먹은 것을 모두 토하고도 또 토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풍경들이었다. 그는 토악질을 하면서도
끝까지 움막들을 뒤졌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 아니던가?
백가소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건 간에 그는 놀라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그녀가 병신이면 어떠랴.
창녀이면 어떠랴.
본래부터 더러운 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찾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이 흐를 수록 장천림은 자신의 운명이 비극적인 종말을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 사창가에 있는 여인들은 대부분이 동전 몇 문(文)이면 스스럼없이 옷을 벗어던지는 최하급의 창녀들이었다.
그녀들은 텅빈 움막 속에 뒹굴고 있다가 장천림이 거적을 들추자 반색을 하고는 일어서곤 했다.
"흐응........ 어서 들어와요. 끝내주게 해줄께!"
"으응........ 들어오라니까?"
장천림은 눈물이 솟았다. 그는 거적을 내리고 돌아서면서 수없이 이를 갈고 있었다. 얼마나 뒤졌을까? 그가
움막촌을 이잡듯이 뒤지는 것을 본 포주 한 명이 다가왔다.
"헤헤........ 손님은 취미가 각별하신 모양이구려. 대체 어떤 계집을 찾으시오? 이곳에는 없는 계집이
없소이다. 그 방면의 기술이 기막힌 계집을 원하오? 아니면 변태적인......."
그 작자는 움막 하나 갖지 못한 포주였다. 따라서 이곳에서도 가장 싸구려 계집 몇을 데리고 있었다.
"나이는 십육 세, 이름은 백가소. 목에 작은 점이 있고........"
장천림은 그동안 수없이 뇌까린 말을 또 끄집어 내었다.
그러나 애꾸눈을 한 포주는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헤헤헤! 어떤 계집인지 모르나 내가 기막힌 계집을 하나 알고 있소. 나이도 비슷할 뿐더러 더구나 그
기술은........ 헷헷! 따라 오시겠소?"
장천림은 문득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그것은 실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야릇한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애꾸를 따라 나서고 있었다.
'어쩌면........'
눈과 진흙이 엉겨 엉망이 된 골목길.
이곳은 아무리 긴 장화를 신는다 해도 잠시 후면 옷이 엉망이 되고마는 그런 곳이었다.
이곳에는 움막의 형태도 최악이었다. 움막이라야 진흙땅에 얕으막한 웅덩이를 파고 그 위를 간신히 더러운 천으로
덮어 간신히 지붕 형태를 만든 것이 고작이었다.
이렇게 눈이라도 내린 날이면 일대는 더러운 흙탕물이 넘쳐 움막 안으로 밀려들어가기도 했다.
"헤헤........ 좀 지저분하긴 해도 안에는 천하절색이 있소."
애꾸눈 포주는 손을 내밀었다.
장천림은 그에게 동전 열 닢을 던져주고 움막집, 아니 혈거(穴居) 안으로 들어갔다.
웬일인가........?
그 순간 그의 가슴은 격하게 뛰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운명의 예감이 가슴을 무섭게 치고 있었다.
있었다.
혈거 안 쪽, 아무렇게나 뭉쳐져 있는 넝마쪽 속에 비스듬히 누운 한 여인이 눈에 쏘듯이 들어왔다.
그녀는 아예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달아날까봐 염려한 포주의 조처인지도 몰랐다. 이렇게 추운 날 아무것도
입지 않고 겨우 짚단 만 깔려 있는 맨바닥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여인, 그녀였다.
"으아아아아아!"
장천림은 울부짖었다.
백가소였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여인 백가소였다. 어쩌면 그의 운명을 평화와 안락으로 뒤바꿔놓았을지도
모를 아름답고 청순했던 여인 백가소였다.
장천림은 비명을 지르며 벌거벗은 백가소를 안아들었다. 미칠 듯한 분노가 그의 가슴을 마구 때리고 있었다.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혈관은 무섭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소아(韶兒)! 소아.......!"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다.
"어딜 가시오? 그곳에서 재미를 보아야지........ 커억!"
애꾸눈 포주는 비명을 질렀다. 아니 비명보다 먼저 그의 두개골은 완전히 무너졌다.
장천림의 주먹이 천령개를 으스러뜨린 것이었다.
장천림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달려갔다. 그러나 계속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있었다.
이곳에는 악질 포주들이 있었다. 그들은 여인들을 짐승처럼 가두어 놓은 채 돈을 벌고 있었다. 그들은 패거리가
되어 폭력으로 이 일대의 질서(?)를 유지한다.
그것은 종종 이곳을 빠져 달아나려는 여인들 때문이었다. 여인들은 그들의 밥줄이었던 것이다.
장천림이 백가소를 안고 달리자 여기저기에서 그런 불한당들이 뛰쳐나와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서라!"
"흐흐! 여기가 어디라구 감히!"
그들의 손에는 도끼나 낫, 또는 커다란 식칼, 또는 쇠스랑같은 것들이 쥐어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백주에 살인이
일어나도 관인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관인과 포주들
사이에는 일종의 묵계가 이루어져 있는 탓이기도 했다.
"크아악!"
어찌 알았으랴? 이곳의 법(法)은 황제조차 인정해야 하거늘 백주에 그들의 밥줄 하나를 납치해 달아나려는 자를
가로막던 무리들은 그저 눈 앞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장천림이 손을 내저을 때마다 그들은 추풍낙엽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장천림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는 앞을 가로막는 포주들을 닥치는 대로 도살했다. 잠시 후에는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수십 명의 시신들이 눈과 진흙탕 속에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하북에 연한 시진 제양성(帝陽城).
제양성 외곽 지역에서 장원 한 채를 빌리는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장원은 낡은데다 주인은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장천림은 이곳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백가소 때문이었다.
백가소는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여자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백치(白痴)나 다름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로는 금문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그녀를 치료하여 회복시킨 후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것이 은인 백난천을 위하는 길이자 본인인
백가소에게도 필요한 조치였다.
그는 낡은 장원 한 채를 빌리기 위하여 기름진 배를 가진 고급관리 한 사람의 창고를 털어야 했다.
물론 그런 일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적당히 필요한 만큼의 보물을 빼내왔다. 그것으로 여러 가지 물품을
구입하고 백가소와 함께 보낼 각종 집기들을 장만했다.
그날부터 백가소를 회복시키기 위한 피나는 치료가 시작됐다.
그것은 많은 의약품이나 생필품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인내가 더욱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설사 그 일에 반 평생이 소모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고 해낼 작정이었다.
백가소는 말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전혀 알아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밥을 먹을
생각도,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만일 장천림의 안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변해버린 그녀를 결코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백가소는 완전히 딴 사람처럼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몸은 비쩍 여위었으며 그 긴 머리칼도 군데군데 뽑혀져 있었다. 빙결같이 고왔던 피부는 탄력을 잃고
말았고 신체의 어느 곳이나 온통 거무죽죽한 멍 투성이였다.
어디 그뿐인가?
황음하고 타락된 창녀생활로 화류장독(花柳粧毒)이 옮아 여기저기 피부에 부스럼이 생기기까지 했다.
그녀를 지난 날의 아름답고 청순한 모습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대라신선이 환생한다해도 도저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해낼 것이다.
그는 장원을 떠나지 않고 성심(誠心)을 다해 치료를 시작한 것이다.
그의 눈은 집념으로 불타고 있었으며 어떤 일이라도 감내할 결의가 되어 있었다.
"아아아아악.......! 날....... 날 내보내줘.......!"
"이 더러운 놈! 어서 날 풀어줘.......!"
"으아악...... 악마! 이 더러운 놈아.......!"
꽈당! 탕탕탕......!
괴성에 가까운 비명소리와 함께 밖에서 빗장을 질러 잠겨진 나무문이 부서질 듯 요동쳤다.
뿐만 아니라 안에서 무엇을 집어 던지는지 물건 깨어지는 소리가 쉴 사이없이 들렸다.
백가소는 미친 듯이 고함을 치고 욕을 했다.
"으으으......!"
장천림은 밖에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무릎 사이에 처박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문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드디어 그녀의 금단증상(禁斷症狀)이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많은 양의 미약을 오랫동안 복용했으므로 골수 깊이
중독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약을 끊는다는 것은 죽음 이상의 고통을 주는 일이었다.
백가소는 식음을 전폐하면서 미친 듯이 오직 미약 만을 찾았다.
고비를 넘겨야 한다.
'제발, 소야! 고비 만 넘겨다오!'
장천림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방 안에 가두었다.
쿵쿵쿵......!
방 안의 벽에 머리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백가소의 이마는 깨어져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을 것이다. 장천림은 보지 않아도 훤히 눈에 그릴 수
있는 상황 때문에 미쳐버릴 것 만 같은 심정이었다.
그는 마침내 귀를 막고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술(酒).
제양성의 한 주점에 틀어 박힌 장천림은 벌써 다섯 동이의 독한 모태주를 퍼마시고 있었다.
괴로웠다.
꼭 이렇게 해서까지 백가소를 치료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 그녀가 당하고 있는 고통이야말로 정녕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설혹 그녀가 금단증상의 무서운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옛날의 순수무구한 소녀로 되돌아 올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옳으냐?
장천림은 충혈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벌써 사흘째였다.
쉴새없이 문을 두드리고 애원을 하고, 또는 벽에 머리를 찧어대는 백가소였다.
그러나 그는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고, 그녀가 원하는 미약을 넣어주지도 않았다. 다만 먹을 것 만 가끔씩 넣어
주었다.
그러나 백가소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음식물은 넣는 즉시 내던지곤 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미약이었다.
마침내 장천림은 인내의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장천림은 계산을 하지도 않고 적당히 은자를 던져준 채 달려갔다.
잠시 후 그는 굳게 잠긴 나무 문을 열었다.
"......."
조용했다.
안에 의당 있어야 할 백가소의 인기척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어두컴컴한 실내를 살펴보았다.
"헉!"
그는 찬바람을 들이켰다.
눈(眼).
아니 눈이라기보다는 시퍼런 귀화(鬼火)였다. 한 쪽 구석에서 파랗게 타오르는 두 개의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주춤하고 한 발자국 물러서는 사이,
"죽엇!"
느닷없이 인영이 그를 향해 덮쳐들었다.
"음!"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 인영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백가소는 그가 피하지 않고 서 있자 대뜸 목에 매달리더니 갈고리같은 앙상한 손으로 그의 목을 졸라대기 시작했다.
"나쁜 놈! 내놔! 약을...... 어서!"
장천림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실로 무서운 힘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일개 여인의 손 힘이 이렇게
세다니.
그의 목은 손톱자국이 움푹 패이고 핏방울이 맺히고 있었으나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장천림의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도 반항하지 않은 채 그는 목을 졸리고 있었다.
문득 마음 한 구석에 체념이 배였다. 차라리 이대로 그녀의 손에 목을 졸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떠돌고 있었다.
"악!"
돌연 백가소가 악을 썼다. 그의 목을 조르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탈진하여 기절해버린 것이었다.
"......."
바닥에 쓰러진 백가소의 모습은 비참했다.
그녀의 머리칼은 온통 산발이 되어 있었으며, 그나마 거의 뽑혀져 있었다. 게다가 전신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가 가장 비싼 고급 비단옷을 입혀주었으나 그녀 스스로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이었다.
문득 백가소가 눈을 떴다. 그녀는 천장을 향해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눈에 이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앙상한 손으로 자신의 유방을 쓸어잡고 가랑이를 벌리며 애원하고 있었다.
"흐으응........ 날 가져. 응? 그 대신 약을 줘........ 널 즐겁게 해줄게....... 응?"
장천림은 그만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의 전신에서 악취가 풍기는 것은 화류병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먼저 미약의 금단증세를 고쳐야만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장천림은 구역질을 참으며 잠시 후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처절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제 4 장 운명(運命)의 만남

치료에 들어간 지 백 일(百日)이 조금 넘었다.
백가소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백 일 전과는 천양지차였다. 더이상의 금단증상은
일어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미약을 달라고 하지 않았고, 식사도 비교적 규칙적으로 하는 편이었다.
장천림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백가소가 원하는 것이라면 설사 하늘의 달을 따다 달라고 하여도 해줄 참이었다.
희망이 생기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조금만 더 치료를 한다면........'
그는 본래 화류병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화류병을 치료하기 위해 성내는 물론 인근의 명의
(名醫)란 명의는 다 찾았고, 약이란 약은 안 써본 것이 없는 그는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화류병도 거의 완쾌 상태였다.
뽑혔던 머리칼도 새로 자라나 칠흑같이 검고 탐스러운 미발(美髮)이 자라나고 있었다.
윤기를 잃고 거칠었던 피부도 은은히 윤기가 돌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피부는 부스럼 자리가 조금 남아 있을 뿐
말짱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이따금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곤 했다.
그런 모습은 장천림을 행복하게 했다. 다만 그녀는 벙어리라도 된 양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실어증(失語症)도 머지 않아 치유되리라고 믿었다.
대체로 그녀가 하는 일은 단조로왔다.
그녀는 하루 종일 침상에 쪼그리고 앉아 멍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소야. 바람이 좋아. 산책이나 갈까?"
이따금 장천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화원으로 나갔다.
마침 사월(四月)이라 낡은 정원의 화원에는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화향이 그윽하게 풍기는 화원은 비록 잘 다듬어지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아취가 있었다.
백가소는 억지로 장천림에게 끌려나와 화원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움직이지 않고 오직
화원의 꽃들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럴 때면 장천림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던가.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것이 끝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한 뒤로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장천림은 뛸 듯이 기뻤다.
본래 그림 그리는 것이 취미인 그녀였다. 금문장에서도 틈만 나면 그림을 그리곤 하지 않았던가?
이제 제 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장천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밤 장천림은 시내로 나가 화구상에서 가장 값비싼 화구(畵具) 일습을 구입해
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화구를 받은 백가소는 멍하니 바라만 볼 뿐 그림을 그릴 생각도 않는 것이 아닌가?
"소야. 네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 보렴."
그러나 백가소는 말없이 고개를 젓기만 하는 것이었다. 장천림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런 가운데 며칠이 지나갔다.
"까르르........"
"소야?"
장천림은 깜짝 놀랐다. 며칠 간이나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백가소가 화원을 산책하던 중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호호호........ 림 오빠. 이리와 보세요, 여기 이게 뭐죠?"
"뭔데?"
장천림은 눈물이 나도록 반가왔다. 그는 얼른 그녀에게 달려갔다. 백가소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것은 부드러운 흙을 기어다니고 있는 땅강아지였던 것이다.
"깔깔........ 이리와서 머리 좀 빗겨 주세요."
이제 그녀는 완전히 변했다. 백가소는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치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장천림은 그녀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녀 앞에서 춤이라도 출 생각이었다.
이제 백가소는 완전히 옛날로 돌아간 듯 했다.
장천림은 비로소 그녀를 데리고 금문장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실로 거짓말같은 일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참아 왔던가?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드디어 이제는
금문장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장천림은 장원을 나섰다. 그녀의 치유를 기념하기 위하여 축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하하.......! 잔을 들어라. 소아."
"........"
백가소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것은 모두가 장천림이 손수 장만한
것이었다.
그는 백가소를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사람을 사지 않고 혼자서 모든 음식을 장만한 것이었다.
남자가 요리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장천림의 요리 솜씨는 일류였다. 그동안 많은 실전
(?)을 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마와요. 오빠........"
백가소의 눈에서 진주알같은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장천림은 껄껄 웃으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하하하! 이렇게 좋은 날 눈물은. 이것 좀 먹어 보아라. 네가 좋아하는 볶은 완두콩이다."
장천림은 완두콩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백가소는 눈물을 흘리며 완두콩을 삼켰다.
그녀의 눈에는 가슴이 터질 듯한 감격, 신뢰, 애정의 빛이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장천림은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그는 사가지고 온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실로 오랫만에 마음 놓고 마신
술이라서인지 다소 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자야지."
"림오빠........"
문득 백가소가 애절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왜 그러느냐?"
"날....... 더럽다고 생각하시나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소아?"
"난....... 그동안 너무나 타락해 있었어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전 더러운 계집이죠,
그렇지 않은가요?"
"그....... 그렇지 않다. 그건 너의 정신이 아니고......."
"후후........ 거짓말이에요. 그렇게 말을 하는 오빠도 속으로는 날 더럽다고 여기고 있죠? 그렇죠? 아무도
날....... 날 옛날의 백가소로 보아주지 않을 거예요."
"소아!"
장천림은 크게 부르짖었다.
"후후........ 그래요. 전 더러운 계집이에요. 화류병까지 옮았던 제가 감히 오빠와 맺어질 법이나 한
얘긴가요? 난 그때 죽어야 했을 계집이에요."
"소아!"
장천림은 와락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그는 세차게 그녀의 가냘픈 몸을 흔들며 격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내가 널 이전이나 다름없이 아름답고 순결한 소아로 본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증명할 수 있겠느냐? 응?"
백가소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더니 급기야 결심한 듯 입술을 열었다.
"그럼 날 안아줘요."
".......!"
장천림은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설마 이런 요구를 할 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사실 이제까지 백가소를 여자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 미래의 일이었다. 더욱이 은인인 백난천의 허락이 있고서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백가소의 갑작스런 요구에 그는 몸이 굳어지는 듯 했다.
"피이! 거봐요, 오빠는 속으로 날 더럽다고 여기고 계시는 거예요. 후후훗........ 난 실제 아주 추악한
계집이에요."
백가소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고 있었다.
"소아........"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장천림은 뜨거운 입술을 그녀의 꽃잎같은 입술에 갖다 대었다.
".......!"
백가소는 바르르 가는 몸을 떨고 있었다. 마치 화살을 맞은 작은 참새인 양 떨고 있었다.
장천림의 입술은 뜨거웠다. 그것은 술기운 탓만은 아니었다. 그는 백가소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영혼을 다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장천림과 같은 부류의 인간은 일반인의 경우와 확연히 틀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했다.
삶과 죽음. 그것은 일반인과 근본적으로 틀린 것으로 그에게 인식되어왔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백가소의 과거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백가소는 여전히 백가소였다.
아무리 심한 고초를 겪었다해도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백가소는 여전히 순결무구한 여인으로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더듬으며 전신이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그의 혀가 백가소의 고운 치열을 살며시 밀고
들어갔을때........
'......!'
의외로 그는 백가소의 혀가 굳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그뿐 아니라 백가소는 전신이 싸늘하게 얼어
있었다.
'가엾은 소아........'
장천림은 그녀의 마음을 환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거절을 할까봐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장천림은
입술을 옮겼다.
그의 입술은 백가소의 귓볼로 다가가 뜨겁고 은밀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의 애무는 직관적이면서 성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은 가능한 자제하면서 서서히 백가소의 육체와 영혼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아아........"
마침내 그는 백가소의 굳었던 몸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입술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동그란 턱을 지나 가녀린 목줄기로 끈질기게 애무해 나갔다.
"아아!"
백가소는 입술을 벌리며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장천림은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침실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그녀의 옷을 반쯤 벗겨내고 있었다. 박속같이 하아얀 젓무덤이 드러나자 그의 손은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침상에 반듯이 눕혀진 백가소는 행복에 찬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장천림은 그녀의 옷을 모두 벗긴 후 스스로도 옷을 벗고 침상에 올랐다. 이윽고 두 남녀의 몸은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쳐졌다.
뜨거운 밤이었다.
사월(四月)의 밤은 화단의 꽃뿌리까지도 달아오르게 할 만큼 뜨거웠다. 그것은 방 안의 남녀의 영과 육이
혼연일치가 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장천림은 장원을 나서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밝았다. 어젯밤 한 바탕의 춘풍(春風)으로 그는 기분이 몹시 상쾌했다. 하룻밤 사이에 백가소는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백가소는 이제 그의 아내가 된 것이다.
오늘 이후로 모든 과거는 망각 저편으로 물러가게 될 것이다. 마치 그 자신의 어둡고 암울했던 지난 날처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백가소는 그에게 작은 부탁을 하나 했었다.
"책을 좀 구해다 줘요, 책을 읽고 싶어요."
"하하........ 물론이다. 소아. 내 금방 다녀오마."
그는 그렇게 흔쾌히 말하고 막 장원을 나서는 길이었다. 장원 문 앞까지 배웅하며 손을 흔들어주는 백가소의
표정도 달콤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그녀는 저 멀리 장천림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편 장천림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돌아선 순간 그의 등을 바라보는 백가소의 눈동자에 깊은 체념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장천림은 모처럼 화창한 날씨에 기분이 좋아졌다.
책을 한 보따리 사고도 백가소에게 줄 것이 없나 하고 저자거라를 한 바퀴 돌고 있었다. 그러던 차 그의 눈길이
한 만두가게에 멎었다.
그곳에서 한 명의 거지소년이 만두가게 주인에게 매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이 빌어먹을 거지놈! 여기가 어디라고 도적질이냐! 이런 사지를 찢어 죽일 놈!"
퍽! 퍽퍽퍽!
만두가게 주인의 솥뚜껑 만한 주먹이 소년의 뺨과 면상을 사정없이 갈기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매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비명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놀랍게도 소년는 땅바닥을 뒹굴면서도
집요하게 훔친 만두조각을 우적거리며 입 속에 틀어넣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었다.
".......!"
그 광경을 본 장천림은 가슴이 진동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소년의 그런 행동은 오직 살아야 한다는 집념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소년의 그런 의지는 살아야 한다는 의지 이전에 무엇인가 꼭 해야만 할 일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장천림은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소년에게 어떤 한(恨)이 있길래.......
아니면 어떤 기가 막힌 사연이 있단 말인가. 장천림은 자신도 모르게 만두가게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마침 소년은 발길에 채여 그의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 왔다. 장천림은 소년의 옷을 잡아 일으켰다. 소년은 그에게
잡혀 일으켜지면서 고개를 번쩍 들고 있었다. 순간 장천림은 가슴이 써늘해지는 것을 금치 못했다.
소년의 눈! 그 눈이 그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넌? 너도 날 때릴 거야? 때릴 테면 때려봐!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성난 눈빛이었다. 추호의 겁먹은 표정이나 기죽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호전적인
눈이었다.
"......!"
장천림은 소년을 자세히 바라 보았다. 소년의 얼굴은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에 입고
있는 옷도 걸레조각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똑똑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만일 머리를 단정히 빗기고 목욕을 시킨다면 소년의 얼굴은 매우
맑고 영준할 것이라고.
다만 옥(玉)에 티랄까? 소년의 왼쪽 뺨에는 한 줄기의 상흔(傷痕)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더구나 그 상흔은
섬뜩하도록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검이나 창 따위에 스친 상처자국같이 보였다.
"빌어먹을 놈! 아까부터 얼쩡거리더니 내 그럴 줄 알았다구! 가만히 보고 있는데 만두를 덥썩 훔치다니!"
만두가게의 주인은 욕설을 해대며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또 다시 주먹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이것이면 되겠소?"
".......?"
장천림은 은자를 내밀었다. 만두가게 주인의 눈이 둥그레졌다.
소년이 만두 한 접시를 더러운 손으로 만졌기 때문에 한 접시의 만두가 몽땅 못쓰게 됐었다. 그런데 장천림이
내민 은자는 만두 한 접시가 아니라 한 솥을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무, 물론입죠. 헤헤!"
만두가게 주인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그는 얼른 은자를 낚아채듯 받고는 홱 돌아섰다.
"이 빌어먹을 꼬마놈! 오늘 은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네 다리가 성치 않았을 거다!"
만두가게 주인은 소년을 향해 침을 퇘! 뱉고는 얼른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행여나 장천림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장천림은 소년의 손을 잡고 걸었다. 소년은 만두 조각을 꿀꺽 삼키더니 말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걸었다.
얼마쯤 가자 장천림은 소년의 손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은자 한 덩이를 꺼내 소년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뭘 사먹거라."
그런데 소년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소년은 차갑게 그를 노려 보더니 야멸차게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난 거지가 아니오!"
장천림은 의아했다. 그러나 곧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거지라서 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돈으로 더이상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
그 말에 소년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소년은 약 십이삼 세 가량 되어 보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덥썩 은자를 받았다. 그러나 한 마디하기를 잊지 않는 것이었다.
"내 지금은 받지만 언젠가는 꼭 갚겠소, 왜냐하면 나는 이유없는 동정은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나도 네가 그러기를 바란다."
장천림은 돌아섰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같은 아이는 언제고 일어서기 마련이지. 잘 되기를 빈다. 꼬마야.'
이때였다.
"내 이름은 백리진강(白里眞强)이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소년이 등 뒤에서 묻는 말이었다. 장천림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백리진강이라? 좋은 이름이다. 내 이름은 장천림이다."
"장천림...... 장천림......."
소년은 몇 번이나 장천림이란 이름을 되뇌었다. 마치 그 이름을 영원히 잊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장천림은 다시 걸었다.
그런데 소년 백리진강이 다시 그를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면서 물었다.
"또 무슨 볼 일이 있느냐? 돈이 부족하냐?"
백리진강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당신이라면 알 것같아서........"
"무엇을 말이냐?"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공(武功)을 익히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장천림은 안색이 변했다. 너무나 뜻밖의 질문이었다. 아니 왠지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소년의 눈이 타고 있었다. 그 눈은 야수(野獸)의 눈빛을 닮아 있었다.
장천림은 생각했다.
'아마도 이 놈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
백리진강, 그는 벌써 수백 번도 더 그런 질문을 했다. 특히 무사들을 만날 때마다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각오하고 때로는 호되게 매를 맞으면서까지도 수없이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제대로 된 대답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인상이 좋지 못할 뿐더러 두 눈에 야수와 같은 빛을 담고 있는 그에게 그 누가 대답을
제대로 해주겠는가.
장천림은 잠시 생각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공.......?'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잠시 동안 장천림의 뇌리에는 수많은 문파와 무공들이 떠올랐으나 좀체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를 생각이 떠올렸다.
"그렇다면 소림사로 가라. 소림사의 승려들은 아주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백리진강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는 것이 아닌가?
"안 돼요. 그곳은. 흐흐....... 그 중놈들은 턱없이 오만하고 되먹지 않은 놈들이에요. 그들에게 무공을
익히느니 차라리 개에게 익히겠어요."
".......!"
장천림은 다시 가슴이 섬뜩했다.
'소림사와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아니면....... 벌써 가보았다가 고초를 겪었던가?'
그는 다시 생각했다. 잠시 후 또 한 곳이 생각났다.
"확실히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 황궁(皇宮)에 비밀무고(秘密武庫)가 있고 그 무고의 무학을 익히면
천하제일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황궁에 간다고 다 무학을 익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황실의 근위병이나
된다면 몰라도........"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백리진강의 눈이 일순 번쩍 빛나는 듯 했다.
그는 갑자기 땅에 무릎을 꿇었다.
"고마웠소! 내 평생 당신을 은인으로 생각하겠소. 만일 내가 황궁의 무학을 익힐 수 있다면 그때는 언제고
당신을 위해 한 가지 일을 하겠소!"
백리진강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더니 쏜살같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
장천림은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몸을 떨었다. 그는 가슴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소년은 떠났으나 왠지 알 수
없는 여운이 남아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장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던 장천림은 화석처럼 굳어졌다.
'믿을 수 없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린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는 물건이 있었다. 아니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백가소.
그녀가 목을 맨 것이다. 장천림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그는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고개를 흔들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하기를 수십여 차례, 그는 눈을 부릅뜨고 백가소를 바라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백가소는 백가소였다. 그녀는 목을 매단 채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백가소는 자살한 것이었다.
"왜? 왜지......?"
장천림은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이때 그녀의 발치 아래 네 장의
그림(畵)이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멍하니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그림에는 각각 한 명씩의 인물화(人物畵)가 그려져 있었다. 인물화 속에는 하나같이 준수하고 영기발랄한 이십대
청년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 좋은 자양(滋養)의 음식물을 먹고 언제나 큰소리를 치면서 대로(大路)를 활보할 듯한 그런
류의 청년들이었다.
"이건....... 뭔가?"
장천림은 한참 후에야 중얼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집어들어 살피던 그는 그림 후면에 갈겨 쓴 듯한 백가소의 글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이들이 소아를 망친 흉수(凶手)들이에요. 소아는 처음 이들에게 납치되어 수모를 당한 뒤 버려졌어요. 림오빠.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소아의 원한을 갚아주세요. 소녀는 더럽혀진 몸으로는 더이상 살 수가 없답니다.
간단한 글이었다. 그러나 이 몇 줄의 글귀로 그녀가 자살한 이유는 충분히 설명되고 있었다. 백가소는 결국 한
(恨)을 잊을 수가 없었다.
처음 화구를 달라고 했을 때부터 그녀에게는 죽음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원수들의 얼굴을 그려놓고
유부의 길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으흐흐...... 소아!"
비가 내린다.
처음에는 가랑비였다가 나중에는 점차 굵어지는 빗줄기 속에 무덤을 만들고 있는 자가 있었다.
생명이란 덧없는 것이다.
어젯밤만 해도 뜨겁게 타오르며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속삭이던 아름다운 여인이 지금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비에
젖은 황토 속에 묻혔다.
떨리는 손으로 흙을 메우는 장천림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한참 후에야 완성된 봉분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돌아가는 줄 알았었다. 이제는 옛날로 돌아가 금문장으로 나란히 돌아가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장천림은 품 속에서 네 장의 인물화를 꺼냈다.
그림 속의 네 인물은 누가 보더라도 귀공자로 보일 만한 기품과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 놈들이........
이 놈들이 소아를 죽인 것이다!
제 5 장 원점(原點)으로

강호사공자(江湖四公子).
당금 무림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촌놈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하늘 아래 귀공자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강호사공자 만큼이나 그에 합당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찾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강호사공자는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장차의 중원무림을 이끌고 나갈 후기지수 중에서도 발군의 신성(神星)
들이었다.
우선 그들의 내력은 쟁쟁했다.
당금 무림은 한 마디로 백도무림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수년 전 이른바 백화대전(白華大戰), 또는 사십일전쟁이라고 불리웠던 정사대전으로 인해 흑도녹림이
전멸을 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녹림은 물론 흑도무림인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었다. 그로 인해 백도무림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무림연합맹(武林聯合盟).
당시 구파일방과 무림세가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던 연맹체는 지금도 존속하고 있었다. 연합맹은 공동의 행동과
의결방식을 정하고 각 파가 번갈아 맹주(盟主)와 집행기관이 되어 무림을 장악하고 있었다.
강호사공자는 무림맹 중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사대명문(四大名門)의 후예들이었다.
천인검객(天忍劍客) 북리웅풍(北里雄風)은 대화산검파(大華山劍派)의 직계 제자로 화산파의 후기지수로
불리우고 있으며, 권왕(拳王) 상관중(上官重)은 종남파(終南派)의 차기 장문인감으로 내정된 인물이었다.
천수관음(千手觀音) 당수문(唐秀紋)으로 말할 것같으면 사천당가(四川唐門)의 서열 이위에 있는 인물이며
백도제일검(白道第一劍) 백유성(白流星)은 대무당파(大武黨派)의 속가제자로 속가인물로는 제일인자로
불리우고 있었다.
그들이 이른바 강호사공자로 불리는 기재들이었다. 따라서 천하에서 그들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강호사공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세인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첫째는 그들의 출신이 비범하다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출신 못지 않게 무공이 출중하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그들의 출신이나 무공보다도 각자가 지닌 인품과 덕망이 범인들을 뛰어 넘는다는 것이었다.
넷째는 강호사공자가 필히 미래 무림의 주역이 되리라는 점이다.
다섯째는 그들이 단단히 결속되어 있어 그 의리(義理)가 골육 같다는 점이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점은 강호사공자를 무림의 대선배들도 한 수 양보하게 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토록 무림의 선망과 기대를 한 몸에 모으고 있는 강호사공자가 범인이었다는 사실은 실로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장천림은 백가소가 남긴 그림 속의 인물들을 알아내는데 그다지 많은 노력이 필요치 않았다.
그는 어떤 주루에서 강호를 잘 아는 표객 한 명에게 그림을 보인 바, 그림 속의 청년들이 바로 강호사공자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 강호사공자는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영재(英才)들을 가리키는 말일세!
- 강호사공자들이야말로 앞날의 무림을 떠받들 동량들일세!
- 허허! 자네도 한 번 만나보게 되면 그들을 존경하게 될 걸세!
- 강호사공자는........
장천림은 더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표객의 면상을 주먹으로 한 대 갈긴 후 주루를 뛰쳐나와 버렸다.
복수다! 강호사공자가 아니라 상대가 당금 무림의 맹주라 해도 복수를 하고야 말 것이다.
기다려라! 이 장천림이 간다.

홍무(洪武) 9 년 6 월 16 일
사천(四川)의 험지를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전신은 피를 뒤집어 쓴 듯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장천림이었다.
전신에 성한 곳이라고는 한군데도 없었다. 여기저기 옷이 찢어졌음은 물론이려니와 곳곳에 암기와 자상(刺傷)이
나 있었다. 그런 상태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어젯밤 사천 지방을 군림하고 있는 무림명가인 당가보(唐家堡)에 단신으로 뛰어 들었다.
목적은 무림에 혁혁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천수관음 당수문을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수문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그를 찾기도 전에 수많은 당가고수들의 합공을 받았으며, 또한
당가를 무림일절로 만든 암기술(暗器術)에 만신창이가 되고만 것이었다.
그는 목표를 이루지도 못하고 탈출했다. 그나마 생명을 부지한 것 만도 다행이었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간단했다.
당가보의 경비가 상상보다 삼엄한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결정적인 원인은 그 자신이 지닌 무공이
너무나도 녹슬어 있다는 것이었다.
장천림은 출중한 무예를 익혔다. 그것은 대원제국이 반원지사들을 살해하기 위해 교육시킨 무공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익힌 무공은 빼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대원의 황실에서 전래로 내려오는 무예의 일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나 몸을 쓰지 않았다. 그가 검을 잡은 것 만 해도 근 십 년 만이었던 것이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생각과 동작이 쉽게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역부족이었다. 그가 익힌 무학은 고도의 살인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첩한 동작과 감각이
최우선해야 했다. 그래야 한층 빛을 낼 수 있는 무학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몸은 녹슬었으며, 감각도 예전에 비한다면 십배 이상 퇴보되어 있었다.
안돼........
이 정도로는.......!
장천림은 사천 분지를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의 발 밑으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렇게 숨이 차서야........
이 상태로는 복수가 불가능해.
그에게는 어떤 변화가 필요했다. 어느덧 장천림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늪지로 찾아들고 있었다. 예전에 그가
배운 특별한 요상법을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그는 황하로 흘러드는 지류의 하나인 작은 샛강을 발견했다. 늪지는 밀집된 갈대숲 속에 있었다. 그곳에
질척한 진흙의 수렁이 있었다.
장천림은 망설임없이 그 수렁 속에 옷을 벗고 몸을 담그었다. 진흙으로 된 수렁 속이라 몸을 담그는 순간 목까지
잠겼다.
그는 알몸이었으므로 독암기나 자상에 인한 상처가 즉시 불에 덴 듯한 고통을 호소해 왔다.
그러나 꾹 참았다. 그에게는 금창약이나 별다른 치료법이 없었다.
수렁 속에서 흙의 자연정화작용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독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류의 요상법은 동영(東瀛)의 인자(忍者)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루, 이틀, 열흘........
십여 일이 꿈같이 흘렀다. 그동안 장천림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화기를 접하거나 음식물을 복용하게 되면
요상법은 효과를 잃기 때문이었다.
열흘째 되는 날 그는 수렁에서 걸어나왔다.
그의 전신에는 놀랍게도 수백 마리의 거머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거머리들이 달라붙어 그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거머리가 빨아먹고 있는 피는 바로 독혈(毒血)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손을 피부에 대고 문지르자 거머리가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거머리들은 독혈을 먹고 거의 기운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장천림은 찢어진 옷을 대충 걸치고 그곳을 떠났다.
지난 열흘 간 그는 많은 가능성을 생각했다.
복수를 위한 깊은 상념이었다. 그의 현재 실력으로 강호사공자를 죽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자칫하면 중원무림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했다. 물론 자신에게는 그럴 만한 세력도 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복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설사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파는 한이 있더라도 백가소를 망치고
그녀를 자살로 몰고간 강호사공자는 죽여야만 했다.
그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남하(南下)하기 시작했다.

절강성(浙江省) 최남단.
세인들이 한 번도 발을 디뎌본 적이 없는 오지(奧地)가 있다.
이름하여 불귀곡(不歸谷).
언제, 누가 붙였는지 몰라도 그런 이름이 붙어 있는 절곡이었다. 불귀곡이란 돌아오지 않는 계곡을 뜻한다. 문자
그대로 한 번 불귀곡에 발을 들이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적어도 아득한 옛날에는 그랬다.
이 불귀곡에서 천여 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고된 훈련을 받으며 하나 둘 쓰러져 갔고, 나중에는 탈출을 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낙화처럼 쓰러져 갔던 것이다.
바로 대원제국이 기울어 갈 무렵의 일이었다.
그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이곳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들을 모아놓고 반원지사들을 암살하기 위한 살인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돌아왔다.
"......."
장천림은 물경 십 년 만에 불귀곡으로 돌아온 것이다.
과거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는 감회에 젖어 잡초와 밀림이 우거져 있는 불귀곡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그 얼마나 많은 고통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시달려 왔던가.......?
장천림은 돌아온 것이다.
현무, 주작, 백호, 청룡단의 천여 명 아이들이 잠을 자던 석실들 하며........
그들이 훈련을 받기 위해 지어져 있던 모든 시설물들을 둘러보았다. 장천림은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그는 단단히 각오를 한 것이다. 복수를 위해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자신의 녹슨 몸을 부활시키고........ 잃어버린 살수의 감각을 되찾기 위하여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일은 이곳의 시설물들을 과거와 똑같이 복원시키는 것이었다. 혼자의 힘으로 불귀곡을 복원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해내야만 했다.
이날부터 장천림은 웃통을 벗고 등짐으로 바위를 나르며 공사에 착수했다.
기억을 되살려 가면서 옛날의 지옥훈련을 받던 시설들을 하나하나 복원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불귀곡에
도착한 날은 홍무 9 년 9 월 10 일이었다.


황궁(皇宮).
천하에서 가장 화려한 곳. 아니 이런 설명보다는 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곳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대명황조(大明皇朝)가 철혈의 권력을 행사하는 곳이며, 권문세가들이 처마를 맞대고 운집해 있는 곳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리라.
금릉(金陵:당금의 남경)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황궁은 지상최대의 건축물이며 신이 내린 인간최대의 권좌다.
황궁에서 동쪽으로 삼 리(三里)쯤 떨어진 곳에 대저택이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명황가의 권력자가 사는 저택이라면 세인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추가하여 저택의 주인이 환관(宦官) 등소(登素)라면 세인들은 안색이 변할 것이다.
환관이라면 대명부의 내전을 관장하는 남성을 거세한 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런 인간이라고 말 할 수는 결코 없다.
왜냐하면 이들 환관이야말로 당금의 조정을 흔들고 황제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력자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모든 환관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태태감(太太監) 등소.
그는 환관들의 우두머리급 위인으로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두텁게 입고 있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뿐으로 그것은 남성을 행사할 물건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온갖 부(富)와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었다.
그가 사는 저택만 하여도 넓이가 황궁을 빼놓고는 이곳 금릉에서 가장 클 정도였다.
가을이다.
스스스........
추풍(秋風)에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저택의 후원에는 낙엽이 지고 있었다. 온갖 희귀식물의 전시장인 듯한
후원이었다.
낙엽이 떨어져 역시 거대한 인공연못 위에 떨어진다. 낙엽은 연못 위에 수북히 쌓여 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정자(亭子).
날아갈 듯한 처마 끝에는 황금으로 주조된 풍경(風磬)이 걸려 있었다.
디잉........
이따금 맑은 음향이 들린다.
딱.
또 다른 소리가 있었다. 역시 청아한 음향이었다.
청옥(靑玉)으로 된 바둑판 위에 묘안옥(猫眼玉)으로 된 바둑돌이 떨어지는 소리다.
등소는 지금 느긋하게 정자에 앉아 집사와 함께 바둑을 두는 중이었다. 그의 바둑 실력은 국수급이라고 한다.
틈만 나면 이렇게 바둑을 두는 것이 그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는 것이다.
지금 그가 돌은 둔 곳은 대마(大馬)의 급소를 노리는 위치였다. 그 바람에 집사는 낭패한 표정으로 잔뜩 눈살을
찌푸린 채 어쩔줄을 모르는 모습이었다.
이제 그가 대응수를 찾으려면 족히 뜨거운 차 석 잔은 마실 시간이 경과해야 하리라.
등소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 보았다. 느긋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연못가에서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나이는 십사 세쯤 되어 보인다. 일신에는 검박한 백의를 입었는데 복장으로 보아 그의 저택 일을 보는
하인임이 분명했다.
'못 보던 아이인데.......?'
그는 눈을 가늘게 하여 소년의 모습을 관찰했다.
등소의 나이 오십칠 세.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환관이기에 자식이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 대부분의 환관들은 노후의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양자를 들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등소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핏줄이 다른 아이에게 정을 주는 것은 마음에 차지는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차츰 마음이 달라지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올해 들어 공연히 허전한 것이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참한 아이라도
있다면 남들처럼 양자를 들일까 생각하는 중이다.
그러나 마땅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환관의 양자로 들어오는 자들은 뻔한 것이다.
그들은 환관의 권력이나 재산을 노리고 양자로 들어오는 것이다.
"저 아이는 누군가?"
집사 황신(黃信)은 고개를 돌렸다. 문득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얼마 전 들어온 아이입니다. 똑똑하고 여간 착한 것이 아닙니다. 머리도 영리한 것 같아 요즘 글(文)을
가르치고 있읍죠."
"그래.......?"
등소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부드러운 웃음이 흘러 나왔다.
"허허........ 오늘 밤 저 아이를 내 방으로 불러 들이게. 이야기라도 하고 싶군."
황신은 눈치가 빠르다. 그는 대뜸 주인의 심정을 눈치챘다.
"예. 알겠습니다. 저 아이는 고아인데다가 아직 이곳 권문가의 때가 묻지 않았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초겨울이다.
아직은 추위가 오기 이른 계절이었다. 불귀곡의 풍경은 변해가고 있었다.
잡초 무성하던 분지는 깨끗이 다듬어져 있었으며, 건물들은 제 모양을 찾고 있었다. 장천림이 불귀곡으로
들어온지 꼭 오십여 일 만의 일이었다.
그는 등가죽이 벗겨지고 손발에 못이 박혔다. 그동안 그는 전념으로 불귀곡을 복원시키고 있었다.
특히 그가 주력한 것은 지난 날 불귀곡에서 악명이 높았던 지옥십이관(地獄十二關)의 시설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지옥십이관은 소년들의 체력과 정신력, 투혼을 증진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의 시설들을 말한다. 지옥십이관을
통과하지 못하고 죽어간 소년들이 그 몇이던가?
장천림은 비지땀을 흘리며 지옥십이관을 복원시키고 있었다.

"이름은?"
"등진강(登眞强)입니다."
"부친의 이름은?"
"등소입니다."
"너는 언제 거세(去勢)했느냐?"
"한 달 전입니다."
"거세 방법은?"
"절단(切斷)입니다."
환관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남성의 거세였다. 환관의 자식은 다시 환관이 되는 것이 관례다. 태태감 등소의
양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등소의 양자가 된 소년은 몇 개월 후 환관으로 임용되었다.
처음에는 소감(少監)이라 하여 동자환관이 되는 것이다. 동자들은 주로 후궁들의 시중을 든다.
환관으로 입문하는 데는 심사가 엄격하기 그지 없었다. 등진강은 바지를 벗기고 검사를 당했다. 과연 그의 남성은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
그는 합격되었다.
그런데 그의 사타구니 안쪽이 유난히 부어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오직
등진강과 그의 양부인 태태감 등소 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양부인 등소가 태태감인 관계로 등진강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태감(少太監)이라는 동자환관으로서는 파격적인
진급을 하게 된다. 이후로 그는 황궁의 여러 곳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몸이 되었다.
등진강의 본래 이름은 백리진강(白里眞强)이었다.
자시(子時)가 넘었다.
등진강은 양부인 등소의 부름을 받았다. 등소는 백호피를 씌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등진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부드럽기 그지 없었다.
"어서 오너라. 그래 황실의 생활은 할만 하더냐?"
"예. 아버님."
등진강은 조용히 대답하고는 뒤로 돌아가 양부 등소의 어깨를 주무른다. 등소는 흐뭇한 표정이었다.
백 번을 생각해 보아도 잘한 일이었다. 그는 양아들을 둔 일을 스스로 잘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꺼려지는 것은 등진강의 사내를 제거하지 않은 일이었다. 문득 등소는 음성을 낮추어 물었다.
"그곳은 어떠냐?"
등진강은 얼굴을 붉혔다.
"이제는 밖으로 끄집어 냈습니다."
"어디 보자."
등진강은 스스럼없이 바지를 벗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분명 등진강은 환관이었거늘 그의 사타구니에는 의당 없어야 할 물건이 그것도 늠름하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흐음.......! 탐스럽군."
등소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는 손을 뻗어 등진강의 늠름한 사내를 잡았다.
손 안에 뿌듯하게 차오르는 부피감이 있었다. 그는 지난 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어릴 적에는 그런
물건이 있었다.
소년 적에는 그 물건을 가지고 아이들끼리 장난을 한 적도 있었다. 누구의 물건이 가장 크게 일어서는가를
자랑하기 위해 신나게 쥐고 흔들어대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그의 사타구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명예도 좋고 부귀도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남자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실이 항상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양자에게도 같은 불운의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백리진강을 양자로 들였을 때 그는 결심했다.
'내 이 아이 만은 내시로 만들지 않으리라!'
만일 그 사실이 발각된다면 자신은 물론 구족(九族)이 멸하게 되는 중형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등진강의 사내를 거세하지 않은 것은 한이 맺혔기 때문이었다.
환관 심사의 눈을 피하는 방법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일을 위해서 그는 특별한 방법을 동원했다.
등진강의 가랑이 사이를 ㅉ고 그 속으로 물건을 밀어넣은 뒤 봉합 수술을 해 버린 것이었다. 그 시술은 자신이
직접했다. 기밀이 밖으로 누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감쪽같다.
그러나 다시 물건을 꺼내니 등진강은 완벽한 사내 구실을 할 수 있는 몸이 된 것이다.
"조심하도록 해라. 발각나면 어떻게 되는 지 알지?"
등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등소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지 알고 있었다.
그는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들어왔다.
그동안 등소의 눈에 들기 위하여 얼마나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였던가? 결국 모든 일은 그의 뜻대로 된 것이다.
그는 등소의 양자가 되었고, 황실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신분으로까지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아무리 마음이 동한다 해도 내전(內殿)의 후궁이나 시녀들을 건드리는 일은 삼가해야 한다. 설혹 참을 수
없다면 이 애비가 적당한 계집을 구해 주마. 그 일은 꼭 집에서만 해야 한다. 알겠느냐?"
"물론입니다. 아버님."
등진강, 아니 백리진강은 진중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등소는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이렇게 바지를 벗기고 그의 물건을 만진다.
그것은 잃어버린 등소 자신의 물건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등소는 그에게 있어 은인이었다.
제 6 장 소수마경(素手魔經 )

홍무(洪武) 11 년 정월(正月).
날짜의 의미를 잊은 지 오래다.
장천림은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 계산하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지옥십이관을 모두
넘었다.
과거 그는 지옥십이관 중에서 간신히 팔관까지는 통과했었다. 나머지 사관을 통과하는데 그는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겨야만 했다.
진저리 쳐지는 일이었다. 더욱이 교두(敎頭)도 없이 혼자서 지옥십이관을 넘는다는 것은 초인적인 의지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마음이 약해진다면 중도에서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뒤로 물러날 수 없도록 퇴로(退路)마저 기관을
봉쇄해 놓았다.
화관(火關)....... 빙관(氷關)....... 독관(毒關)....... 도관(刀關).......
그 관문들은 그의 몸에 무수한 상처를 만들었다. 그는 불에 온 몸을 데어 한 달 가량을 꼼짝도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빙관에서는 온 몸이 얼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무서운 것은 독관이었다.
독관에서 전신을 칠백여 종의 독극물에 담근 채 온 몸이 두 배나 되도록 부은 상태로 그 독이 체내에서 섞여
일으키는 고통을 참는 것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극기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독관마저도 통과하였다. 그로 인해 그는 백독불침의 몸이 되었다.
도관(刀關)은 아수라지옥이었다.
도관에 들면 사방으로부터 무수한 창과 검, 칼들이 날아든다. 그 날카로운 칼날은 그의 몸을 수없이 난도질한다.
결국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곤 했다.
만일 그의 뇌리에 백가소의 환영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벌써 포기했을 것이다.
어느새 세월은 물같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대충 불귀곡에 들어온 지 일 년 반이 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
이대로 출곡한다 해도 과연 강호사공자를 죽일 수 있을까?
그 점에서 그는 자신이 없었다. 과거의 감각과 민첩함은 찾았으나 과연 중원 정통문파의 일류 고수인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지옥십이관을 모두 통과한 이상 더이상 불귀곡에 머문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그는
불귀곡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출곡하기로 한 날 아침이었다.
그는 지옥십이관의 마지막 관문인 도관의 가로막힌 석벽 안쪽이 비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우연히 석벽을
두드리다가 발견한 사실이었다.
속이 비어있는 소리가 공명으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 안에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그는 철검으로 석벽을 후려쳤다. 과연 불꽃을 내면서도 울리는 소리는 허전한 것이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석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반나절이나 되었을까?
마침내 와르르! 석벽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또 다른 석부였다.
반듯하게 다듬어진 석부는 한 눈에 보아도 인공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석부를 둘러 보았다.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으나 무척이나 중요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섯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석실에는 여러 가지 문서(文書)들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 중 한 개의 방에는 영약(靈藥)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공을 증진시키는 영약들이었다.
나머지 세 개의 방에는 중원무림 각 대문파(各大門派)에 대한 상세한 내막을 적은 문서들이 서가에 정리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들을 척살할 때 참조하기 위해 작성한 것인 듯 했다.
놀라운 것은 마지막 방에 있었다.
비급(秘級). 서가의 책상에는 온통 무공비급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서가에는 대원제국 황가독문(皇家獨門)의 무공에서부터 중원제파의 각종 무공비급들이 꽂혀 있었다. 그것은 원이
중원무림을 격파하기 위해 수집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청룡단에 속한 자객들에게 익히게 할 목적이기도 했으며, 각 파의 무공들의 단점을 파악하기
위해 모아 놓은 것이기도 했다.
이것이다! 이것들을 익히자!
장천림은 하늘이 자신을 도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날부터 석실에 틀어박혀 새로운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약실(藥室)에 있는 영단비약들은 그의 무공증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영약들을 복용하면서 잠을 자는
것도 잊고 피나는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수염과 머리칼이 뒤엉켜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입고 있는 옷도 거의 걸레쪽이 되다시피 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나날이 새로운 무공을 익히는데 빠져들고 있었다.
세월은 바람처럼 흐른다. 그리고 흐르는 세월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
인간도 변하고 산하(山河)도 변한다. 더욱이 목적을 가지고 한을 품은 인간의 마음은 더욱더 모질어지는 법인가
보다.
복수를 한다는 집념은 세월이 흐를 수록 쇠퇴해 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극명해지고 있었다. 장천림은 시간도
정지된 듯한 불귀곡의 석부에서 혼자의 몸으로 무공을 익히는데 몰입되어 있었다.
만일 그에게 복수의 일념이 없었다면 도저히 그 많은 시간들을 견디어낼 수 없었으리라.

홍무(洪武) 13 년 10 월.
인간에게는 빈부(貧富)와 계급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속옷 나부랭이와 식사 후에 마시는 한 잔의 차에 이르기까지 등급에 의하여 격이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에도 예외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계절이다. 땅을 가는 농부의 험한 손에 내리던 가을(秋)은 지금
이곳 황궁이 있는 금릉에도 똑같이 내리고 있다.
사나이.
비상하는 독수리 문양이 수놓아진 백색무복을 입고 황궁의 청석(靑石)이 반듯하게 깔려 있는 대도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어가는 품위있는 걸음걸이는 그가 곧 이 황궁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나이는 약관이 조금 넘어 보였을 뿐이나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잘 다듬어진 용모와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영준한
용모도 용모려니와 그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기상과 날카로운 면이 느껴지는 것이다.
규칙적인 걸음걸이로 걸어가던 사나이는 문득 걸음을 멈춘다.
그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고 있었다. 사나이의 시선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나이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육순이 넘어보이는 한 명의 환관 복장의 노인이 포박된 채 개처럼 의금부 관원들에게
끌려가고 있는 광경이 비친 것이다.
"으음.......? 등태감(登太監)이.......?"
이렇게 중얼거린 사나이는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쓸데없는 일이겠지."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간다.
그가 향하는 곳은 황궁에서는 약간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커다란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날따라 황궁 내의 공기가 다소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본래 황궁은 언제나 경비가 삼엄한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살벌한 기운이 퍼져 있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황궁이라면 그에게는 집안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따라서 그가 모르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사나이가 황궁 내에서 요직을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보통 요직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열 평 가량 되어 보이는 밀실이었다.
사방 벽에는 중원전도(中原全圖)가 벽지처럼 도배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살풍경한 분위기였다.
이 밀실이 바로 대명황실의 최고 첩보기관인 동창(東廠)의 본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불과
몇몇의 요인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금의 황제 홍무제(洪武帝)는 동창을 자신의 오른팔로 여기고 그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동창의 힘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들은 황가의 인물에서 고관대작에 이르기까지 마음대로 체포, 구금의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역모의 가담자나 그밖의 불순분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한다.
그러므로 금릉의 권문세가에서는 동창 알기를 귀신 보듯 하는 것이다.
검은 태사의에 앉아 있는 역시 검은 옷의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
그는 언뜻 서당 훈장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창의 최고권좌에 앉아 있는 영반이었다. 수백 명의 생살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대명부를 흔들고 있는 인물이었다.
대영반 장영걸(蔣英傑).
권문가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는 황제의 직속이며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하룻밤에 권문가를 온통
피비린내로 진동케 할 수도 있었다.
전 금군대도독(禁軍大都督)이었던 장무혁(蔣武赫) 대장군의 친 아우이자 대명제국을 일으킨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지금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언제나 그가 신뢰하고 있는 인물의 낮고 침착한 음성이 들리고 있었다.
"부영반 장하영(莊河英),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장영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린다.
"들어와라, 하영."
그의 말투는 인자하게 들렸다. 들어선 청년은 백색무복을 입고 있었다. 바로 방금 전 청석대로를 가로질러온
사나이였다.
장하영은 앞으로 다가와 한 쪽 무릎을 반쯤 꺾어 예를 표했다. 그리고 일어서더니 곧바로 부동의 자세를 취했다.
그를 바라보는 장영걸의 시선은 부드럽기만 했다.
'기특한 놈. 볼수록 커지는구나.'
장하영. 그는 석년에 병사한 금군대도독 장무혁의 독자(獨子)이자 바로 장영걸 본인의 조카이기도 하며, 또한
동창의 부영반이기도 하다.
장래가 촉망되는, 아니 전도가 양양한 청년이었다.
"그래 그동안 별고 없었느냐?"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이었다. 동창 소속의 사람이라면 꿈속에서라도 듣고 싶어하는 말소리지만 장하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순간 장영걸은 내심 쓸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엇다.
'ㅉ. 여전하군. 녀석, 모처럼 삼촌을 보면 미소라도 지을 것이지........'
그는 섭섭하다. 그러나 그것이 조카 장하영의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영걸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이곳은 동창밀실이고, 그가 조카를 부른 것은 공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대환관인 등소가 체포되었다."
".......!"
"예전에 등소는 자신의 양자인 등진강이라는 소년을 소태감으로 들여보낸 적이 있었다. 아마 너도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
장하영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웬만한 일에 안색이 변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소태감 등진강을 알고 있었다. 워낙 인상이 강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소년이 며칠 전 이유없이 행방을 감추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조사하던 중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
"소년이 행방을 감춤과 동시에 황궁의 비밀무고(秘密武庫)가 털렸다는 것이다."
".......!"
"그래서 등소가 그 책임을 지고 체포당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비밀무고에서 없어진
물건이 문제인 것이다."
".......?"
장하영은 이제까지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그러나 점차 그의 얼굴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천년하수오(千年荷首烏), 만년설삼(萬年雪蔘), 소림대환단(少林大還丹) 여섯 알, 구지자엽초(九枝紫葉草),
공청석유(孔淸石乳) 한 병........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종류의 영약류와 함께....... 아니다. 그런 것은
그다지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한 권의 중요한 문서(文書)가 없어진 사실이다. 그래서
너를 부른 것이다."
순간 장하영의 동공에서는 강한 의문이 떠올랐다.
'겨우 그런 일로 나를........'
아무리 중요한 물건이 없어졌다고 해도 그까짓 좀도적에 대한 일에 자신이 직접 나서야 되겠느냐는 강한 반발인
것이었다.
딴은 그렇다. 장하영은 동창이란 막강한 권력부의 부영반이다. 그런 그가 도적을 잡는 일에 직접 나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아무리 없어진 물건들이 중요하다고 해도 고작 약 나부랭이일진데........ 그 정도로 동창이 나선다는 것만
해도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자신을 장영걸이 친히 부르다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때 그의 마음을 읽은 듯이 장영걸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없어진 문서........ 아니다. 그것은 문서가 아니라 한 권의 무경
(武經)이다. 그 무경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름을 들으면 너도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소수마경(素手魔經)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겠지?"
"소수마경!"
마침내 장하영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흘러 나왔다.
- 소수마경(素手魔經).
그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전설은 말한다.
.......소수혈옥광(素手血玉光)이 나타나면 천하가 피에 잠기게 되노라!
소수마경은 칠백 년 전 천축(天竺) 소뢰음사(少雷音寺)에서 파생한 악마의 무경이었다. 이 무공을 익히게 되면
손바닥이 투명한 흰색을 띄게 되며 공력의 정도에 따라 손바닥 한가운데(掌中) 혈옥색의 반점이 생긴다.
일단 이 무공에 적중하게 되면 생물은 결코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 만일 십이 성에 달하게 되면 심성(心性)이
변하여 악마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서운 마공이었다.
칠백 년 전 천축의 마승 파가랍(破伽拉)이 이 마공을 익혀 천축을 피로 혈세하고 중원으로 건너 왔을 때 중원은
도합 칠십오 개의 문파가 무너졌었다.
만일 당시 소림의 신승(神僧) 무한선사(無限禪師)가 소림의 백팔나한대진과 무당의 대칠성검진, 그리고 중원
무림의 일백팔인의 고수들이 연합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를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원에서 소수혈옥이라는 말은 곧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였다. 그로 인해 소수마경은 금단의 마경으로
불리워졌으며 어떤 인물을 막론하고 그 마경을 익히게 되면 전 무림의 공적으로 선포된다는 철칙이 생겼다.
그후 칠백 년이 흐르는 사이 소수마경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그 마경이 황궁무고에서 잠자고 있었을 줄이야.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마경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실로 전율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이 마경이 세상에 나간다면 머지 않아 천하는 피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이 일이 더 번지기 전에
마경을 회수하여야 한다."
장하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녕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그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느꼈다.
숙부 장영걸이 자신을 부른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그가 생각하기로도 소수마경이 강호에 나간다면 이후로 벌어질
일은 상상하기도 무서운 결과가 파생할 것이다.
"너에게 환영팔신(幻影八神)을 주겠다. 적절히 부릴 줄로 믿는다."
환영팔신.
그들은 본래 사도 출신의 고수들이다. 후에 황궁에 투신하였으나 그들의 능력은 가히 신비경이었다. 그들이라면
무슨 일을 도모하든 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장하영은 본래 혼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위인이었으나 이번만큼은 환영팔신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이번에는 그도 거절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 만의 방식을 고집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허허........ 너의 무운을 빈다. 즉시 떠나도록."
장하영은 절을 한 뒤 밀실을 물러났다.

준비는 간단했다.
장하영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뒤 간단한 여장을 꾸렸다. 그는 방 안을 둘러 보았다. 쓸쓸한 방 안이었다.
특히나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로 그의 집안은 쓸쓸하기만 했다.
그는 금릉의 권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전의 그의 과거가 자꾸만 떠오르고 있었다. 명예도 권력도 그에게는
뜬구름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그것은 그가 남다른 과거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그는 한 소년을 떠올린다.
등진강. 그런 이름을 가진 소년이었다. 예전에 한 두 번인가 그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얼굴이 예쁘장하고 피부가 흰 소년이었다. 그는 소태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왠지 남성을 거세한 환관이라는
느낌이 와 닿지 않았다.
특히나 왼쪽 뺨에 미세흔(微細痕)으로 그려져 있는 한 줄기의 상흔(傷痕)이 왠지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섬뜩하다고 느낀 것은 그 상흔 때문 만이 아니었다.
눈빛. 바로 등진강의 눈빛 때문이었다.
그는 등진강의 눈빛이 누군가를 닮아 있으며, 그 눈빛이 자신이 무척 싫어하는 눈빛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눈빛이 누구를 닮은 눈빛이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언젠가 우연히 동경(銅鏡)을 보고서야 그 눈빛이 자신의 눈빛을 닮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그는 등진강이 더욱 싫어졌다. 그런데 놈이 기어이 일을 낸 것이다.
대체 놈의 정체는 무엇인가.......?
애당초 소수마경을 탈취할 목적으로 등소의 양자가 된 것인가? 그렇다면 놈은 무섭도록 집념어린 놈일 것이다.
놈이 양자가 된 것은 벌서 몇 년 전이었다. 그렇다면 놈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많은 세월을 인내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 종류의 인간은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한 성품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장하영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회랑에 나서자 가을 하늘이 보였다. 그는 다시 허파를 최대한으로 늘리며 그 가을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는 요대의 단추를 눌렀다.
찰칵!
경쾌한 소리가 나며 요대는 한 자루의 검(劍)으로 바뀌었다.
신선한 검날(劍刃).
그것은 황제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어검(御劍)이었다. 그는 이 검에 이름을 붙였다.
- 무루(無淚).
눈물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 검을 사랑했다. 그는 검날을 손가락으로 퉁겼다.
찡........
심금을 울리는 맑은 울음소리가 나고 있었다.
철컥!
그는 다시 검을 요대로 집어넣으며 걸었다. 걷다보니 생각나는 얼굴들이 있었다.
잊혀진 과거 속에서도 언제나 뚜렷이 떠오르는 이름들과 함께 그들의 얼굴은 아직도 붓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기만 하다.
'석회림........ 조천백........ 그리고.......? 맞아. 장천림이랬지.'
순간 장하영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이 지겨운 생활을 얼마나 싫어했는가? 이번 기회에 그들을 만나 밤새워 술이나 마셔보자.'
장하영은 회랑이 끝나자 문득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팔신!"
순간 그림자가 이리저리 이동하는 듯 하더니 회랑 아래 팔인의 인물이 소리없이 떨어졌다. 그들은 똑같이 검은
옷을 입은 중년인들이었다.
장하영은 기분좋은 음성으로 명령했다.
"준비하라. 강호로 나간다."

홍무(洪武) 14 년 5 월 21 일.
콰콰콰....... 꽝!
석부를 온통 진동하는 굉음이 울림과 동시에 돌가루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장천림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앞 석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는 다소 놀랐다.
그는 시험 삼아 천마쇄강인(天魔碎剛印)이라는 장법을 전개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께가 한 자가 넘는
두터운 석벽이 단번에 무너지며 구멍이 뚫린 것이 아닌가?
그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후흐흐....... 후하하하핫핫핫.......!"
그의 웃음소리에 석실이 무너질 듯 진동하며 자욱한 돌가루가 회오리쳤다. 장천림은 신형을 날렸다.
휘익!
그의 신형은 육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빛살처럼 날아갔다. 그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이제 나가자.
더이상 기다릴 수는 없지.
강호사공자.......!
개봉부(開封府).
와글와글........
시끌벅쩍........
대도에서는 흔히 수많은 인파를 보게 된다. 이곳 개봉부도 예외는 아니다. 개봉부는 하남의 성도이자 황하를
건너는 요지이므로 수륙양로의 중심지로 오래 전부터 많은 인파들이 들끓는 곳이다.
노상 연변에 위치한 주루는 이층이었다.
이층에서 내려다보면 저자의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잇점이 있었다.
"......."
주루의 이층 창가에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허리에는 한 자루의 철검(鐵劍), 입고 있는 옷은 낡은 흑의였다. 그의 얼굴은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무척이나 피로에 지치고 일면은 권태로와 보이기도 하는 얼굴이었다.
만일 그의 나이가 많지 않다는 점 만을 제외한다면 인생에 지친 중년의 나그네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눈썹 모양이나 우뚝 선 콧날, 한 일 자로 다문 입술은 준수함을 느끼게 했다.
그는 아까부터 맞은 편 다점(茶店)을 보고 있었다.
찻집은 어디를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저자에 있는 맞은 편의 찻집은 손님들이 붐비고 있었다.
뜻밖인 것은 찻집의 주인이 직접 차를 팔고 있다는 점이었다.
주인은 이십 대였으나 다소 뚱뚱한 몸매로 인해 좀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 역시 흰 얼굴에 준수한
편이었다.
그는 여유롭고 느긋한 모습이었으며 차를 끓이는 모습에서는 생활에 대한 만족과 흥미가 나타나 있었다. 흑의인은
아까부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몇 시진 째인가.
이윽고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찻집은 문을 닫고 있었다.
다점의 주인은 깨끗한 화복으로 갈아 입고 거리를 횡단하고 있었다. 그가 걸어가자 흑의사나이는 일어섰다.
그리고 주루를 내려와 멀찍이서 그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멀리서 보았을 때와는 달리 화복인은 키가 장신이었다. 그에게서는 왠지 강인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일개
다점의 주인이라고 보기에는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해가 뉘엿뉘엿해지고 시장도 파시를 맞은 탓인지 사람들이 드문드문 사라지고 있었다. 다점 주인은 골목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역시 흑의사나이도 그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다점 주인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흑의인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따라가고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다점 주인은 다시 걸었다. 그러다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다점 주인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선생, 혹시 나를........"
그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흑의인에게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겁을 먹은 표정은 아니었다.
이때 흑의사나이는 음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랫만이군 칠십육 호. 아니....... 천백, 조천백(朝天白)."
순간 다점 주인은 불에 덴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초라해 보이는 흑의 사나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참 후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묻고 있었다.
"당신........ 혹시........ 혹시........"
그는 갑자기 와락 다가서더니 흑의 사나이를 가까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연후 격동에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천림(天林)! 천림........ 맞지?"
그는 아득한 기억을 더듬어 무엇인가를 찾아냈는지 잔뜩 흥분한 음성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초라한 흑의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으아악! 살아 있었구만!"
덥썩!
거구의 사나이가 반가움과 희열에 젖어 굳세게 끌어안는 그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흑의사나이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잠자코 선 채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나다. 장천림!"
다점 주인 조천백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으하하하.......! 그래! 반드시 살아있을 줄 알았어. 왜.......? 이제야 나타났냐? 으하하하......!"
개봉부에서 가장 화려한 기루(妓樓).
천화루(天華樓)라면 웬만한 부호가 아니라면 감히 오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기루에서
기녀조차 부르지 않고 사나이 둘이서 연신 껄껄거리며 담소하고 있었다.
기녀를 부르지 않을 양이면 무엇 때문에 이런 비싼 기루에 왔는지 모르나........ 그들은 감회에 젖어 있었다.
다점의 주인 조천백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시켜놓은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는 그저
연신 장천림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죽은 귀신이 살아온 듯 온통 신기한 표정이었다.
"대체 자네........ 그동안 무엇을 했길래 이제야 나타났는가?"
"......."
"난 반드시 자네가 살아올 줄 알았어. 암, 자네가 누군데 쉽게 죽겠나?"
"......."
"그래 지금껏 무엇하고 지냈나? 엉! 허허........ 말 좀 하게."
장천림은 비로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부탁이 있어 왔네."
한 마디였다. 그러나 조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응? 무슨 부탁인가? 허허........ 내가 개봉부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나?"
장천림은 담담히 말했다.
"언젠가 자네가 개봉부에 가보고 싶다고 한 말을 떠올렸을 뿐이네."
"응. 응, 그랬었군. 하하........ 그래, 잘 왔어. 잘 왔다구!"
조천백은 눈물까지 질금질금 흘리며 기뻐한다. 그들이 어떤 사이인가?
불귀곡에서 생사를 함께 하던 혈명단의 옛 동지가 아닌가?
사실 조천백은 자신이 살아난 것이 바로 장천림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참, 부탁이 있다고 그랬지. 하하........ 무엇이든 말하게. 설사 하늘의 별이라도 따 달라면 따오겠네."
그렇다. 그는 새로운 삶의 은인인 장천림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장천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결코 그런 쉬운 부탁이 아닐세."
맙소사!
하늘의 별을 따는 것이 쉬운 부탁이란 말인가? 조천백은 비로소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며 정색을 했다.
그는 잠시 장천림을 노려보더니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이보게 천림, 나는 이미 자네에게 목숨을 빚졌네. 그리고 지금 남은 나의 삶은 이미 자네의 것이네. 그러니
무슨 부탁이든 부담없이 하게."
잠시 말없이 조천백을 바라보던 장천림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강호사공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장천림을 보고 조천백은 그만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맙소사! 강호사공자라니........ 왜........ 왜 하필 그 자들과 원한을 맺었나?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는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장천림의 눈을 한동안 응시하던 조천백은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굳이 그 이유를 알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상대는 강호사공자일세. 보통 문제가 아닐세. 실로 우리 두
사람의 힘으로는 벅찬 상대란 말이야."
장천림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렇네. 사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네를 찾은 걸세."
"......."
장천림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다시 놈들을 찾았을 때는 이미 놈들은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있었네.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곳으로........"
그의 짙은 검미가 잔뜩 찌푸러지고 있다.
그렇다. 그는 수 년간 혼자서 고독하게 불귀곡에서 무공수련을 쌓았다. 그 목적은 오직 강호사공자를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공을 완성했다고 자신하고 강호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그 세월 동안 강호사공자 역시 놀고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지난 날보다 더욱 강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
강호사공자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조천백을 찾은 것이다.
조천백은 입술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좋아. 상대가 누구든 간에 어쨌든 자네의 원수는 곧 나의 원수이니 반드시 복수를 해야겠지. 그런데 계획은
세워두었나?"
장천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조천백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으음. 어쨌든 좋아. 일단 동료들을 모으세. 참, 자네 회림을 알고 있지?"
"삼백삼 호?"
그래 그의 이름이 석회림(石回林)이지. 마침 그 놈이 이곳에서 의원 노릇을 하고 있다네. 기껏 훈련을 받을 때
배운 독술을 가지고 의원 노릇을 하며 생사람을 잡고 있지."
"잘됐군........"
장천림은 중얼거렸다. 그의 뇌리에는 석회림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불귀곡에서 간신히 살아 남은 소년들은 불과 네 명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잊을 리가 없었다.
장천림. 그는 이제 강호사공자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그 동료들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안돼!"
장천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째서?"
조천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석회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느닷없이 장천림이 반대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장천림은 완강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게 이미 부양할 아내가 있다면 곤란해. 그건 두 사람 모두를 죽이는 결과일 뿐이야."
그는 말을 마치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어쨌든 안돼. 나 하나의 원한 때문에 행복한 가정을 파괴한다는 건 안 될 일이야. 만약 자네가 결혼을 했다면
나는 자네를 절대 찾지 않았을 거야."
"......."
"회림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세."
장천림의 단호한 말에 조천백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장천림이었다.
"자네 육백 호의 소식을 아나?"
그 말에 조천백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육백 호? 아, 장하영을 말하는군. 알고 있지. 그 놈은 아주 잘 되었어. 하하........ 놈은 동창의
부영반이란 높은 직위를 갖고 황궁에서 근무한다고 하더군. 허허........ 우리들 가운데 가장 잘된 셈이지."
"음. 그렇다면 그도 곤란하겠군."
장천림의 말에 조천백은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장천림이 비록 겉으로는 무정한 듯이 보이나 실은 무척이나
다감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리는 것이 많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새삼 장천림이란 사나이에 대한 매력이
더해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었다.
장천림은 담담히 말했다.
"자, 이런 말은 그만하고 우리 술이나 마시세."
"술. 그것 좋지. 하하하! 자, 오늘 내가 옛 친구를 만난 기념으로 사겠네. 핫핫.......! 사실 그동안 돈을
좀 모았거든."
그는 손뼉을 딱딱 쳤다. 그러자 즉각 집사가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나리."
"핫핫핫! 오늘은 아주 기분 좋은 날이야. 이봐, 이 집에서 가장 예쁜 계집과 최고급의 술을 가져와라."
"예예! 알겠습니다요."
집사는 싱글벙글하면서 돌아갔다. 잠시 후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많은 안주와 술이 들어왔다.
디디디...... 딩!
은은한 주악소리가 들리더니 일단의 미희(美姬)들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그녀들은 이 기루에서 가장 비싼
기녀들이었다.
기예를 다루는 기녀, 가무를 하는 기녀, 또는 수청을 드는 기녀까지 몽땅 동원된 것이다.
"하하하! 자, 우리 오늘밤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봄세."
"물론이지."
두 사람은 잔을 부딪히며 폭음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술에 원한이라도 진 사람들인 양.......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다.
어젯밤 늦도록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았다. 장천림은 갈증을 느끼며 손을 저었다. 어디 물이라도 없는가
해서였다.
뭉클........
그런데 손에 잡히는 것은 뜻밖에도 뭉클한 감각의 피부였다.
'.......!'
그는 흠칫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피부의 질감으로 보아 여자임이 분명했다.
여자라니? 그는 여자라고는 거의 접하지 않고 살아왔다. 단 한 번 여자를 안은 것은 바로 백가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이, 벌써 일어나시나요? 흐응. 좀더 자요."
애교있는 코먹은 음성이 귓전에 들린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있는 곳은 하나의 화려한 방 안이었다.
그런데 푹신한 침상 위에 자신은 이미 홀랑 벗고 있을 뿐더러 바로 옆에 역시 알몸의 여인이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어리둥절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젯밤 여러 명의 기녀들과 함께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시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는 피식 웃었다.
그랬었군.
조천백 네가........
그는 몸을 일으켰다.
"아이........ 나리."
그의 목을 부드럽게 휘감는 손이 있었다. 장천림은 잠시 부르르 전율했다. 수 년 동안 여자라고는 구경도 하지
못했었다.
그도 남자였다. 더욱이 누구보다도 건장한 사나이다. 알몸으로 한 이불 속에 누워있는 여체를 접하고도 욕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깨끗한 척 할 것은 없지!'
그는 여인의 허리를 와락 안았다.
"어머머.......?"
기녀는 코먹은 소리를 내면서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 바람에 투실투실한 유방이 흔들렸다. 뿐만 아니라 희디흰
장딴지가 허공에서 한 바퀴 춤추듯 휘저어졌다. 그 위에 장천림의 육중한 몸이 짖눌러 갔다.
여인의 유방은 풍만했다.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을 정도였으며 탄력이 있었다. 게다가 여인의 피부는 눈처럼 희고
비단결처럼 부드러웠다.
이만하면 일개 기녀치고는 일급이었다. 그 정도 기녀를 하룻밤 사려면 다점 주인인 조천백이 적어도 한 달 이상을
벌어야 할만한 돈을 지불해야 했다.
더욱이 기술 또한 일품이었다. 장천림의 손길이 닿는 순간 여인의 몸은 펄펄 끓었다. 아니 손길이 스칠 때마다
툭툭 튀곤 했다. 그의 손이 유방을 움켜쥐자 허리가 들썩여 지는가 하면 둔부가 경련을 일으켰다.
"흐응!"
콧소리 또한 색정적이었다. 일반적으로 돈을 받고 몸을 파는 기녀들이란 형식적으로 정사에 응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녀는 삼급에 속했다. 실제로 일급 기녀들은 그녀들 스스로 정사에 도취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쾌락을 상대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장천림은 오랜만에 처음으로 쾌락의 궁극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남성이 여인의 비궁으로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것이 뇌리에서 잊혀졌다. 복수의 집념도, 앞날에 대한 걱정도.......
그는 성난 사자가 된 듯 미친 듯이 여체 위에서 용트림하고 있었다. 그가 거칠게 나오자 여인은 기성을 질렀다.
"아아........"
다섯 번째의 사정이 끝났을 때 여인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여인이 나른한 표정으로 떨어지자 장천림은
비로소 그녀를 놓아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장천림은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벌써 아침이었다. 아니 햇살이 벌써 한 뼘 이상 올라가 있었다. 그가 눈부신 듯 가늘게 눈을 좁히자 문득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천림. 잘 쉬었나? 기다리고 있었네."
반갑게 껄껄 웃으며 다가오는 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조천백이었다.
그의 뒤에는 또 한 명의 사나이가 따르고 있었다. 장천림은 처음에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날렵한 몸매에 황의를 입은 인물이었다. 그는 허리에 약상자를 끼고 있었는데 두 눈은 약간 갸르스름했다.
어딘가 어눌해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그것은 그가 보여 주는 겉모습에 불과했다. 그를 보는 순간 장천림은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넌........ 삼백삼 호!"
장천림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하하하! 천림, 정말 오랫만이다."
303 호, 아니 석회림은 달려오더니 그의 가슴을 세게 끌어안고 있었다.
장천림도 마주 포옹한 채 한참 동안을 감회에 젖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으로 번뜩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포옹을 풀고 난 후 그는 사나운 눈초리로 조천백을 노려보았다.
"천백, 왜.......?"
조천백은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아. 우리는 생사를 같이 한 사이가 아닌가? 그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네."
"........"
장천림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애당초 석회림이 가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자신의 일에 끌어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천백이 석회림을 부른 것이다. 석회림은 그의 가슴을 쳤다.
"섭섭하네. 자네가 날 부르지 않는다면 친구를 모독하는 것일세."
"......."
장천림은 눈시울이 젖었다. 그는 친구가 이렇게 좋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닌 것이다. 비록 마음 한편으로는 꺼림직한 구석이 있었으나 역시 한편으로는 든든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제 7 장 친구들

홍무(洪武) 14 년 10 월 21 일.
쏴아아아아........
낙양(洛陽) 거리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가을비로 인해 온통 젖어가고 있었다.
가을비치고는 폭우였다. 거리는 온통 흙탕물이었고, 저 편의 산자락은 자욱한 우막에 가리고 있다.
천하객점(天下客店).
낙양 중심가에 자리잡은 객점은 한산했다. 객점의 이층에 있는 한 객방.
열려진 객실의 창문 안 쪽에 서서 묵묵히 가을비를 바라보는 사나이가 있었다. 장천림이었다.
"......."
그는 처마에 방울방울 맺히는 빗방울을 바라보다가 아름다운 얼굴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백가소였다.
빗방울 하나마다 백가소의 얼굴로 보이고 있었다.
'가소........ 불쌍한........'
그는 오열이 이는 것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어깨를 들먹이고 말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철혈의 의지를 지닌
장천림이 한낱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오열을 참지 못하다니.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백가소에 대하여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찌 그녀를 위한
복수를 이토록 집요하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날이 갈수록 백가소의 죽음은 그의 가슴에 상처를 깊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는 지난 날을 생각할 때마다
백가소에 대한 온갖 추억들이 더욱 무거운 무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불귀곡에서 외롭게 무공을 연마할 때마다 그에게 친구가 되어준 것은 바로 그녀에 대한 추억이었다.
문득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섰다. 다소 뚱뚱해 보이는 체격의 화복청년으로 조천백이었다.
"알아 보았나?"
장천림은 눈을 문지르며 물었다. 그러나 조천백은 이미 그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는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장천림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낙양장(洛陽莊)에 와 있는 것이 확실해. 놈의 얼굴은 못 보았지만 수 차례에 걸쳐 정보를 검토한 바에 의하면
놈이 왔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네."
"음. 다행이군."
조천백은 과거 현무단 소속이었다. 현무단은 주로 잠입, 추적술에 관한 것을 훈련 받았다. 따라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데는 전문가였다.
조천백의 분석이라면 거의 정확할 것이다. 장천림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석회림은 왜 아직.......?"
"곧 오겠지."
조천백은 간단히 대답하고는 슬쩍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천림. 이제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
"뭘?"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강호사공자와 원한을 맺게 되었는지 말일세."
장천림은 그 말에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을 해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네."
"으음."
조천백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는 이제까지 그 사실이 가장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말을 하지 않으니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장천림은 문득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
"그놈들과는 절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네."
"......."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흐른다. 조천백은 감히 더 물을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다만 마음 속으로 강호사공자와 장천림이 풀 수 없는 원한을 맺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기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서로가 중재하고 양보하여 원한을 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사공자가 누구인가?
그들은 당금 무림의 떠오르는 신성일 뿐더러 이제는 무림연맹의 중추적인 직책을 담당하고 있는 유수한 명가의
제자들이 아닌가?
아무리 장천림의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그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방같은 짓이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이 어색한 표정으로 창 밖에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갔던 석회림이
들어온 것이다.
석회림은 들어서자마자 옷깃에 묻은 빗방울을 털 생각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일단 조사를 끝냈어. 하지만 충분하지가 않을 거야."
그는 품 속에서 비에 젖지 않게 양피지로 감싼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 두루마리에는 강호사공자의 일인인 종남파의 제이인자 권왕(拳王) 상관중(上官重)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
장천림은 그 모든 것을 끝까지 읽었다. 그런 연후 두루마리를 접으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별로 약점이 없군."
그 말에 조천백이 나섰다.
"맞아. 그리고 우리의 무공과 상관중의 무공을 비교 검토해 본 결과 역시 쉽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지. 우리
모두가 합공한다 해도 삽십 초 이상은 소모될 거야. 또한 자네 혼자 상대한다면 적어도 이백 초 이상은
소요되어야 할 거야."
장천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천백의 말을 믿었다. 그의 분석이라면 정확하니까.
석회림은 신음을 발했다.
"으음. 그건 너무 시간이 길어."
조천백이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단 둘이 있을 때 얘기야. 그러나 현재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혼자 떨어져 있게 하기는
불가능해. 또 지난 사흘 간 그가 낙양장을 벗어난 횟수는 겨우 일회에 불과해. 그것도 호위무사들을 대동한 채
말이야. 그러니 그를 척살하려면 좀더 색다른 방법을 써야 할 것 같아."
석회림은 걱정이 되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지.......?"
"......."
장내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서로 입을 다물고 묘안이 없을까를 구상하고 있었다.
장천림은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려 떨어지는 가을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조천백이었다.
"한 가지 가능성이 있어."
".......?"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상관중은 조금 묘한 습성을 지니고 있지. 그는 지나치게 외곬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가령 자신의 옷도
반드시 하남성의 비단으로 만든 백의 만을 고집한다는 것과, 신발도 천축의 흑색혁화, 그리고 마시는 차(茶)
까지도 반드시 남해의 설빙로(雪氷露) 만 고집한다는 거야.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여자에 대한 것이야."
"여자?"
석회림이 반문한다.
"그래 여자지. 그 녀석의 성생활은 다소 변태적이야.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놈은 자신이 좋아하는 형이
아니면 절대 근처에 접근조차 하지도 못하게 하며 성교조차 반드시 한 가지 체위 만을 고집한다는 거야."
장천림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실을 어떻게.......?"
"하하하! 날 얕보는 건가? 이래뵈도 현무단 출신일세."
"그렇군."
장천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명단의 아이들은 불가능이란 없도록 훈련받았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다만 그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대원제국의 운이 다했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혈명단이 완성되었을 경우 대명제국은 지상에서 세워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천백의 말이 이어졌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지."
그는 군뜸을 들이려는 듯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놈이 좋아하는 형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청순가련형이고 눈매가 맑은 여자여만 해. 또 성교는 반드시
대낮에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만 해. 그것도 여성의 손을 뒤로 묶고 나무에 엎드리게 한 채 하의만을 벗기고는
뒤로........ 어때? 조금 미친 놈같지?"
이때였다.
조천백의 말이 계속될 수록 장천림의 안색은 창백해지고 있었다. 그는 안색이 하얗게 탈색된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석회림은 침을 타악 창 밖으로 뱉고 있었다.
"정말 변태적인 놈이군. 그런 놈이 무림맹의 총순찰(總巡察)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니 무림맹도
썩었군........"
이때였다.
장천림은 갑자기 엉뚱한 얘기를 꺼내놓고 있었다.
"낙양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畵家)가 누구지?"
"화가?"
조천백과 석회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느닷없이 화가라니?
그들은 장천림이 무엇 때문에 화가를 찾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이미
계획이 서 있는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화가를 찾으러 갔다 오겠네."
".......?"
두 사람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장천림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랬다. 그는 소년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말이 없는 아이로 통했다. 따라서 장하영이 선동하여 반란을
획책하였을 적에도 그에게만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실 당시만 하여도 어쩌면 장천림이 원의 첩자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도리어 그가 아니었다면 그들 삼인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예상이란 왕왕 엉뚱하게 빗나가는 법이다.
"화가는 왜.......?"
"이것은?"
"아니오."
"그럼 이런 눈(眼)은.......?"
"그것도 아니오. 좀더 크고 끝이 둥그렇게 위로 말려 올라간 눈이오."
"허허........ 그럼 이것은?"
"조금 비슷하기는 하나 그것도 아니오. 왼쪽을 약간 크게 그리시오."
화가. 그는 낙양성에서 그림을 그리며 밥을 먹는 자다. 그는 평생에 걸쳐 이렇게 까다로운 손님은 처음 만났다.
흑의를 입은 청년은 그에게 여인의 인물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초상화는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달라, 눈은 어쩌구........ 코는
어쩌구........
그는 벌써 사오십 장째를 버리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평생 많은 그림을 그려 왔지만
이런 생고생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청년은 그림 한 장을 그리는데 물경 오백 냥을 제시했던 것이다. 화가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한나절이 다 지나서야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완성해 놓고 보니 자신이 보아도 반할 정도의 기막힌
미소녀였다.
그 미소녀는 그림 속에서 웃고 있었다.
목에는 손톱 반 만한 크기의 작은 점이 나 있었는데 그 점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고 있었다.
"휴우........ 아무튼 내 평생 이런 고생은 처음이요."
방 안에는 수백 장의 파지(破紙)가 흩어져 있었다.
"수고했소."
장천림은 그에게 약속한 대로 은자 오백 냥을 주고 초상화를 든 채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곧장 객점으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조천백이 그가 한 장의 초상화를 내밀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게 뭔가?"
"똑같은 인피면구를 만들어 주게."
"면구.......?"
조천백은 눈치가 빠르다. 그는 비로소 장천림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하하하하.......! 그랬었군! 기막혀! 정말 멋진 계획이야."
장천림은 고개를 돌려 석회림에게 부탁했다.
"자네는 이 그림을 잘 보고 몸매가 비슷한 여자를 구할 수 있겠지?"
석회림의 눈이 빛났다.
"후후! 날 보고 탐화랑이 되라 이건가?"
장천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중을 잡는 미끼지."
"정말 기가 막히는군. 장가야. 넌 생각보다 치밀하군. 하긴........ 그렇지 않았으면 그때 우리를 구해내지도
못했을 테지만."

상관중은 아침부터 기분이 몹시 나빠 있었다.
낙양장의 시녀가 영 자신의 취향에 어긋나게 구는 것이다. 어제 저녁 목욕물만 해도 너무 뜨거웠다. 그뿐이
아니다.
침상의 이불도 본견(本絹:비단을 말함)이 아니었고, 오늘 아침 마신 차 역시 남해산 설빙로가 아니었다.
물론 모든 것이 객지에 나와 있는 상태에서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나마 시녀의 머리가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가 아니었다면 그는 벌써 호통을 치거나 뺨을 후려 갈기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는 지금 공무수행 중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거처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본래 자신의 거처를 떠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것은
성격이 까다롭고 자신의 비위를 맞출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직책상 순찰을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그에게 있어서 외지생활이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때로는 색다른 재미를 볼 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맹을 떠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으나 상관중은 특이한 위인이었다. 그는 복고조에 빠져 있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한 번
좋아한 것이나 즐겨하는 것이라면 여하한 경우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다소 병적이기까지 했다. 여자만 하여도 그렇다.
상관중은 본래 전신에 교태가 흐르고 색기(色氣)가 흐르는 여자를 좋아했다. 그런데 몇 년 전 한 명의 여자를
겪은 이후로는 이상스럽게도 여자에 대한 취향이 바뀌어 버렸다.
믿을 수 없게도 그 이후로는 여자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변한 것이다. 그 이후에는........
상관중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아랫도리가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후후! 그러고 보니 그 계집종이........'
그는 모든 것을 마음에 들지 않게 하는 이곳 낙양장의 계집종이 떠올랐다. 계집종의 인상은 그가 새롭게 좋아하게
된 상이었다.
'후후, 그 계집을 불러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계집종은 그가 이곳에 온 사흘 간 이미 실컷 주물렀다.
그러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생각보다는 신통치가 않았던 것이다.
낙양장의 장주는 무림맹 산하의 낙양지부장이다.
그는 순찰인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낌없이 바치는 위인이었다. 아마도 그가
자신의 딸을 원한다면 딸 역시 바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사흘 간 부용(芙容)이란 이름을 가진 계집종을 계속 품었다. 아마도 낙양장주인 심전도(心傳刀)
추관명이란 위인은 정보를 듣고 일부러 긴머리를 가진 계집을 하녀로 배속해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상관중이 실망한 것은 부용이 이미 처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니 처녀가 아닌 것은
물론이려니와 남자 경험이 무척이나 많다는 것이었다.
상관중은 그 방면에 있어서 이미 전문가였다.
따라서 그는 첫날 밤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불과 행위의 절반도 진행되지 않았을때 이미 온 몸을 흔들며 난리를
피웠던 것이다.
그런 류의 여인은 그가 딱 싫어하는 형이다. 물론 과거에는 그와 정반대였지만........
상관중은 권태감이 일었다.
더이상 낙양장에 처박혀 있기에는 갑갑증이 났다. 그렇다고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사대전 이후로는 무림맹에서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순찰이라는 것도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에이! 밖으로 나가 바람이나 쐬자. 뭐 특별한 일이 있을 지도 모르니.'
그는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영(四影). 바람쐬러 가자!"
그가 그렇게 말하자, 어디선가 사인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등에 검을 멘 장년인들로 하나같이 눈빛이 부리부리하고 기도가 심상치 않은 위인들이었다.
종남사영(終南四影)이란 별호를 지니고 있는 자들로 언제나 상관중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위인들이었다.
"어디가 좋을까?"
한 명이 대답했다.
"일단 저자로 나가 보지요."
"그럴까?"
오인의 사나이는 거들먹거리며 걸어나갔다.
낙양에서 그들이 두려워하거나 꺼릴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황제나 다름없는 것이다.
강호제일루(江湖第一樓).
이곳은 낙양 제일의 주루였다. 밤이 되자 낙양은 불야성을 이루었고, 주루에는 많은 주객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분위기는 한껏 흥청거리고 있었고 시끌벅적한 소음은 오늘따라 유난히 들뜬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창가에 한 명의 백의청년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일견하기에 평범한 복장이었으나 준수한 용모와 약간은 길게 찢어진 듯한 눈매가 은연중 범인들을 압도하는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홀로 앉아 술을 자작하고 있었다.
얼마 후 두 명의 흑의 사나이가 그에게 다가오더니 공손히 인사했다.
그러나 청년은 가볍게 목례를 할 뿐 그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흑의사나이들은 중년이었는데 그들의 인상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눈빛이 안으로 갈무리되어 있어 강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숨은 내가고수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흑의인들은 청년의 맞은 편에 착석했다.
"어찌 되었나?"
백의청년은 하댓말을 쓰고 있었다. 보아하니 주종관계이거나 신분이 높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흑의인이 공손히 대답했다.
"아직 종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놈은 아마도 깊이 숨어버린 것 같습니다."
백의청년의 얼굴에 슬며시 짜증이 어렸다.
"아마도 놈은 은밀한 곳에 숨어 그 무경을 연마하는 것 같습니다."
흑의인의 말에 청년은 역시 눈살을 펴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으음. 이제 나타날 때가 되었을 텐데........"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동창에서 파견된 장하영과 그를 수행하는 환영팔신 중의 두 명이었다.
장하영. 그는 소수마경을 가지고 사라진 등진강, 아니 백리진강을 잡으러 강호에 나온 지 어언 일 년이 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는 백리진강의 그림자조차도 보지 못했다. 그는 황궁을 떠날 당시 장영걸에게 단단히 부탁받고
나왔다.
그러므로 그를 잡아 무경을 회수하지 않고는 금릉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입장이었다.
사실 장하영은 애당초 이 일을 맡을 때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사실 그의 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
그는 오랫만에 강호에 나와 세상 나들이도 할겸 또 한편으로는 옛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승낙을 한
것이다.
그래서 다소 짜증이 나더라도 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헛탕을 쳤다. 그는 두 명의 친구들이 개봉부에 있다는 말을 들어 그곳으로 가면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을 쉽게 찾을 줄 알았고 또 반드시 그들을 만나 회포를 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개봉부에서 허탕을 친 것이었다. 그들이 생활터전을 정리하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소식 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 이후 두 사람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았으나 도무지 오리무중이었다.
그는 그때문에 더욱 심기가 좋지 못했다. 그가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였다.
문득 계단쪽이 시끄러워지더니 오인의 인물이 올라왔다. 그는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앞장 선 자는 현의 비단을 입은, 얼굴이 뿌연 청년이었다. 나이는 대략 이십오륙 세 가량 되어 보였다.
그는 평소 안하무인격인 성품인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중인들을 무시하는 표정이 배어 있었다.
그를 수행하는 듯한 네 명의 사나이들은 그를 마치 황태자라도 되는 양 모시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마침 주루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현의청년이 앉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시선을 한바탕 장내로 굴리더니 한 곳에 멈추었다. 그곳은 주루에서 가장 좋은 장소였다.
마침 그곳에는 삼인의 중년상인이 앉아 담소하고 있었다.
"자리를 내라."
청년은 나직하게 말했다.
자리를 내라니?
그러나 그의 뒤를 따르던 네 명의 중년인들은 예! 하고 대답하더니 성큼성큼 상인들에게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상인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향해 오자 겁에 질렸다.
일견하기에도 그들 중년인들은 무사로 보였다. 상인으로서는 강호의 무사들을 겁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일어서라. 공자께서 이 자리를 쓰시겠단다."
한 명의 중년무사가 차갑게 말하자 상인들은 울상을 지었다. 아무리 무사라고는 하지만 이런 모욕이 어디 있는가?
한 명의 상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는 우리가 먼저....... 으악!"
그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뺨을 세차게 한 대 얻어맞고 저만치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의
이빨은 네 개나 부러졌다. 뿐만 아니라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 바람에 장내는 금세 싸늘해졌다.
그러나 중년무사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고집을 부리겠다면 목숨이 열 개인 것으로 간주하고 널 다루어주마."
그 말에 대항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아, 알겠습니다. 나리........"
상인들은 저만치 날아가 혼절해 있는 동료를 이끌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자리는 간단히 비워졌다.
비단옷을 입은 청년은 의기양양하게 그 빈자리에 가 앉았다. 그는 장내의 소란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지극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아니, 이런 현상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편 장하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런 일을 보고 더욱 짜증이 나고 있었다.
그가 누군가?
대명 최고의 권력집행기관인 동창의 부영반인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권력의 제이인자인 것이다.
그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저들은 누구인가?"
환영이신이 대답했다.
그는 강호사정에 정통한 위인답게 즉각 그들을 알아보았다.
"예. 비단옷을 입은 청년은 종남파 출신의 무림맹 총순찰인 권왕 상관중이라는 자이고 그 옆에는 그 자의
심복들로 종남사영이라고 합니다."
"흥! 철없는 것들........"
장하영이 코웃음을 치자 삼인은 즉시 묻는다.
"훈계할까요?"
사실 황궁과 무림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건드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굳이 분란이 일어난다면 무림 쪽에서 다소 양보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더욱이 동창 부영반인 장하영 쪽이
유리한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지금 이 순간 장하영은 모든 것이 귀찮은 심정이었다.
"놔둬라. 공연히 시끄럽게 할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다."
장하영은 눈길을 창 밖으로 돌렸다. 밤거리에는 불빛이 명멸하고 있었다.
낙양의 번화가에는 청등홍등이 걸리고 있었다. 가까운 환락가로부터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아득히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밤 경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지금 다른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 옛날 불귀곡에서 헤어진 친구들을 하나 둘 떠올리고 있었다.
조천백........ 석회림........ 장천림........
너희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가신 이 그리워 눈을 감으면
뒷산에서 들려오는 소쩍새 소리
행여나 님이신가 귀 기울이면
들창에 문풍지만 혼자 울어요.
손 내밀면 쥐일 듯한 님의 숨결은
숨어든 한풍에 흩어져 가고
홀로 되어 눈물 짓는 이 내 슬픔만
새벽녘 서리 되어 흘러 내려요........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절로 코 끝이 찡해지는 슬픈 노래였다. 그 노랫소리는 강호제일루를 은은한 분위기로
만들고 있었다.
소녀는 십칠팔 세 가량 되어 보이는 가냘픈 체구로 머리는 길게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얼굴도 청순하기 이를 데 없다. 그녀는 주루에 올라와 비파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장내를 한 바퀴
돌았을 때 손님들의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
"잘 한다!"
사실 주객들은 노래보다도 소녀의 미모에 더욱 취해 있었다.
강호에는 이렇게 노래를 파는 소녀들이 있었다. 소녀도 그런 부류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 옆에는 칠순이 넘어 보이는 늙은이가 모자를 거꾸로 들고 따라다니며 손님들에게 구걸을 요청하고 있었다.
늙은이와 너무나 대조적인 탓인지 소녀의 미모는 더욱 돋보이고 있었다. 술을 마시던 주객들의 시선은 소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
특히 그중에서도 상관중의 시선은 소녀에게서 떠나갈 줄 몰랐다. 그는 발견한 것이다. 마침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을 만난 것이다. 실로 생각지도 않았던 행운이었다.
그는 설마 오늘밤의 산책이 이런 좋은 결과를 낳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지며
웃음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흐음........ 정말 나오기를 잘 했군.'
그의 가슴은 점차 뜨거워지고 있었다.
시종일관 소녀의 몸매를 훑어보던 그는 더욱더 몸이 달아 올랐다. 한 줌에 쥐일 것 같은 잘록한 허리, 동그랗고
팽팽해 보이는 둔부, 게다가 가슴은 벗겨 놓으면 알토란같을 것이다.
그의 눈가가 가늘게 춤추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마음에 들어하는 물건을 볼 때마다 즐겨 취하는 표정이었다.
'후후! 어디서 저런 아이가 다 나왔지? 안아보면 기가 막힐 몸매로군!'
한편 창가에 앉아있던 장하영도 소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한 가닥 의혹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소녀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노인의 얼굴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서서히 경악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들은.......!'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그는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때 소녀는 노래를 한 곡(曲) 더 부른 후 사뿐사뿐 걸어 마침내 상관중의 앞까지 갔다.
"나리. 소녀에게 온정을 베풀어 주세요."
소녀가 나긋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자 상관중의 입술이 춤추듯 벌어졌다.
"후후! 노래 솜씨가 좋군.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소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떨구며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한다.
"소녀의 천명은....... 탁완상(卓婉霜)이옵니다."
"탁완상이라. 흐음, 얼굴 만큼 이름도 예쁘군."
그는 턱짓을 했다. 그러자 종남사영 중 한 명이 눈치를 채고 재빨리 품 속에서 은표를 꺼냈다.
"얼마를.......?"
"오백 냥을 주어라."
"옛?"
그는 깜짝 놀랐다. 기껏 노래 따위나 부르는 계집에게 오백 냥이라니?
그러나 그는 상관중의 성격을 안다. 두말 하지도 않고 즉시 은표 한 장을 찢어 소녀에게 주었다.
"넌 오늘 운이 트였다."
소녀는 기쁜 듯 입을 벌리며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나리."
상관중은 내심 중얼거렸다.
'고마와 할 것 없다. 너는 그 값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소녀와 노인은 곧 밖으로 걸어내려 갔다. 그들이 나가자 즉시 상관중은 몸을 일으켰다.
한편 창가에 앉아있던 장하영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우리도 간다."
".......?"
환영이신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묻지 않고 그들도 따라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낙양 외곽.
한적한 밤길에는 행인이 드물다. 그 길을 일노일소(一老一少)가 걷고 있었다.
얼마 전 강호제일루에서 노래를 부르던 소녀와 노인이었다. 그들은 하루의 일당을 흡족하게 채웠음인지 걸음도
가벼이 걷고 있었다.
낙양성을 빠져 나온 한적한 길이었다. 약간 이상한 점이 있다면 이들이 낙양성내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면으로는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밤을 틈타 벌이를 할 장소를 이동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얼마쯤 갔을까?
".......?"
노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맞은 편에서 사인의 그림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노인은 소녀의 손을 잡고 다시 걸었다. 설마하니 무슨 일이 있을려고........
노인은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들이 바로 강호제일루에서 은표를 주었던 네 명의 중년무사라는 것을 알고 어? 하고
신음을 발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슉! 슉슉!
문득 사인이 거의 동시에 손을 떨쳤다. 어둠이 짙어 그들의 손에서 무엇이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
문득 노인과 소녀는 가벼운 신음을 발하며 풀썩 쓰러지고 있었다. 인적도 없는 밤길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암습을
당하여 쓰러진다한들 달려와 볼 사람도 없었다.
네 명의 사나이는 쓰러진 소녀와 노인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신형을 날리더니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공연히 사람들을 암습해 놓고는 달아나 버리다니........
그러나 그 의문은 곧 풀렸다. 뒤이어 한 인영이 날아온 것이었다.
그는 즉시 땅에 떨어져 있는 소녀 만을 취해 어깨에 둘러멘 뒤 신속하게 숲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노인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둔 채였다.
인영이 소녀를 데리고 사라진 직후, 죽은 듯 누워있던 노인이 꿈틀거리더니 툭툭 먼지를 털며 일어나고 있었다.
노인은 혀를 차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쯧! 지독한 놈들이군.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독수(毒手)를 쓰다니........ 미리 방비하지 않았다면 깨끗이 저
세상으로 갈 뻔했군. 벼락을 맞을 놈들........"
문득 그는 숲 속을 바라보더니 히죽 웃는다.
"히히........ 그나저나 너도 이젠 끝이다. 이 놈아."
무슨 뜻인가?
노인은 뜻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걸어가는 동안 노인의 굽어져 있던 허리는 어느덧 곧게 펴져 있었고, 걸음걸이조차 힘차게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노인, 그는 바로 조천백이었다.
"악! 나리........"
노래를 파는 소녀, 탁완상은 기겁을 하며 부르짖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어찌된 셈인지 꼼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이 등 뒤로 묶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숲 속이다.
하늘에는 달이 떠있어 그다지 어둡지는 않았다. 따라서 주위의 풍물이 그런대로 보이고 있었다.
"후후! 화대(花代) 값을 치뤄야 하지 않느냐? 물론 너에게도 좋은 일이고."
등 뒤에서 한 가닥 들뜬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상관중이었다.
그의 눈은 어떤 기대감으로 열기가 올라 있었다. 지금 그는 오랫만에 취향에 맞는 계집을 목전에 두고 잔뜩
달아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화, 화대요......?"
탁완상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맑은 눈을 굴렸다. 유난히 또랑또랑해 보이는 눈이었다. 그 눈 또한 상관중의
구미에 맞는 조건 중의 하나였다.
상관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마침 좋은 것이 들어왔다. 그것은 벼락을 맞아 쓰러진
하나의 나무둥치였다.
상관중은 탁완상을 나무둥치에 엎드리게 했다.
"무....... 무엇하려는 거예요?"
탁완상은 더욱 더 기겁했다. 나무둥치에 엎드려진 자세는 그야말로 묘한 것이었다. 그녀는 손이 뒤로 묶여 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으므로 더욱 당혹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녀가 별로 놀라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달빛이 그녀의 아래로 숙여져 있는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녀가 겁을 먹기는커녕 도리어 즐기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상관중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뒤쪽에 서 있었으므로 탁완상의 그런 표정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흐흐! 이제 너도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음소를 흘리며 그녀의 치마를 활짝 걷어 올렸다. 그러자 탁완상의 치마 속에 있는 속곳이 드러났다. 속곳
아래로는 눈부시게 뽀얀 종아리가 보였다.
다만 종아리뿐이었는데도 상관중은 아랫도리가 불끈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야릇한 흥분을 느끼며 손을
움직여 속곳을 휙 벗겨냈다. 그러자 달빛 아래 희멀건 엉덩이가 드러났다.
마침내 탁완상의 하체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 하늘을 향해 치켜 올려진 엉덩이는 달빛보다도
희었다. 상의는 그대로인 채 하체 만 발가벗겨진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아찔한 유혹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헉!"
상관중은 뜨거운 숨을 삼켰다.
이런 모습은 그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다. 더욱이 한적한 숲 속에서 나무둥치에 엎어놓은 여자의
엉덩이라니........
마침내 상관중은 자신도 바지 만을 벗은 채 탁완상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아........"
탁완상은 사나이의 거친 동작에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상관중은 애무의 절차 따위는 완전히 무시해 버린
채 막바로 파고든 것이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탁완상은 얼굴이 나무둥치에 밀려 짓이겨지고 있었으나 조금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뒤쪽에서 강한 힘이 가해질 때마다 피부가 쓸리는 고통보다도 훨씬 더 큰 쾌감이 그녀의 전신을 경련하게
했다.
상관중은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여자의 긴 머리칼을 마치 고삐인 양 휘어잡고 있었고, 한
손으로는 여자의 엉덩이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얼마나 뜨겁게 운동하였을까? 그는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기분을 느끼며 화려하게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때였다.
스슷!
미세한 인기척과 함께 그의 등 뒤로 삼인의 인영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그들은 한 명의 노인과 두 명의
청년이었다.
바로 조천백과 장천림, 그리고 석회림이었다.
"히히히! 풍경 좋군. 달밤에 숲 속에서 계집의 엉덩짝을 안고 땀을 흘리다니 정말 취미치고는 아주 괴상한
취미야. 그렇지 않은가? 천림?"
조천백의 말에 장천림은 뚫어져라 상관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무섭게 불타고 있었다.
나무둥치에 엎어져 있는 여인은 인피면구를 쓰고 있는 화류계의 싸구려 창녀였다. 그녀가 쓰고 있는 인피면구
속의 얼굴은 얽고 각이 진 투박한 추녀일 뿐이었다.
그러나 인피면구상의 얼굴은 그가 그토록 잊지 못하는 백가소의 얼굴이었다.
백가소........
이런 모습으로 당했더냐.......?
나무둥치에 엎어져 있는 창녀를 바라보는 장천림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헉! 누, 누구냐!"
조천백의 비웃음 소리를 들은 상관중은 기겁을 하고 여인에게서 떨어졌다. 그야말로 꼴불견이었다.
그의 아랫도리는 발목 아래까지 흘러 내려져 있었고, 막 분출을 끝낸 그의 양물은 초라한 모양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강호사공자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상관중은 낭패감을 느끼며 후다닥 바지를 치켜올렸다. 그와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웬놈들이냐?"
장천림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더러운 놈. 널 죽이러 왔다."
".......!"
상관중은 안색이 싹 변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자신을 정말 죽이러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쉽게 당할 상관중이 아니었다. 그의 별호가 권왕이니만큼 그의 권공(拳功)은 가히 후기지수 중의
무적이었다.
"가소로운 놈들........ 감히........"
막 주먹을 쥐고 내력을 일으키려던 그는 문득 안색이 새파래졌다. 운기한 순간 단전(丹田)이 텅 비어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때 석회림에 의해 손을 묶인 끈을 풀어낸 탁완상이 일어섰다.
그녀는 갑갑하다는 듯이 얼굴을 쓱 문질렀다.
".......!"
인피면구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딴판이었다.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아니 그 얼굴은 상관중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얼굴이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밑바닥 창녀의 흉한 얼굴이 아닌가!
"하....... 함정!"
상관중은 휘청거리며 부르짖었다. 그렇다. 그는 함정에 걸린 것이다. 눈 앞의 상대방들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치밀한 함정을 파두었던 것이다.
그는 산공독(散功毒)에 당했다.
그것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기발한 방법으로 당한 것이다. 바로 여인의 음문에 산공독을 발라놓았기에 정사를
하는 도중 그는 공력이 무산되어 버린 것이다.
"으으.......! 대체 네 놈들은 누구길래.......?"
그는 뒷걸음치고 있었다.
ㅆ....... 팟!
칙칙한 검광(劍光)이 일어났다.
"으아아악!"
상관중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놀랍게도 바지 앞자락과 함께 그의 양물이 깨끗이 잘려버린 것이다.
그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뒹구는 순간 장천림의 철검은 다시 호선을 그렸다.
고개를 떨구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그것은 목을 쳐달라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캑........"
상관중의 수급이 저만치 굴러갔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에서 분리되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통
한가운데 박혀 있는 상관중의 동공은 크게 열려 있었다.
아직도 자신의 목은 어깨 위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듯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무림맹의 총순찰이라는 막강한 직위를 가진 강호사공자의 일인.
권왕 상관중은 이렇게 가장 저열한 모습으로 죽은 것이다.

"원상대로 해놓아라."
장하영의 음성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환영이신은 즉각 명대로 시행했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상관중의 토막난 시신을 묻었다. 그리고 침을 퉤 뱉는
것이었다.
"지저분한 놈은 죽을 때도 지저분하게 죽는군."
그들은 장천림 일행이 사라진 뒤에 이곳에 나타났다. 그리고 장천림 일행이 땅에 매장한 상관중의 시신을
파헤쳤던 것이다.
장하영은 그 시신의 상태를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본래 혈맥단에서 백호단 출신이었다. 백호단은 전술, 전략 및 기관 등의 전문가로 키워졌다.
그의 추리능력이나 분석력은 본래부터 뛰어난 편이었다. 고로 동창에서도 그의 명성은 크게 떨쳐지고 있었다.
그가 나서는 사건은 언제나 명백하게 밝혀지는 것이다.
"......."
달빛이 기울고 있었다.
장하영은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수시로 변하는 그의 얼굴은 어느 때는 심각하다가 어느 때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기까지 하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환영이신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비록 나이는 어려도 그들은 장하영이란 존재를 언제나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날 대명제국 창건의
일등공신인 대장군 장무혁의 독자로 어린 나이에 대명을 위해 원의 첩자로 들어갔던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나이를 따질 수 없는 상관이자 무서운 능력의 위인인 것이다. 환영이신은 기다렸다. 그의 입에서 다음
명령이 나오기를.
이윽고 장하영은 입을 열었다.
"팔신을 소집해라. 장소는 하원객점 매화실. 내일 새벽까지다."
그 말이 끝이었다. 장하영은 명을 내리고 즉각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하원객점 매화실.
"......."
환영팔신은 부복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장하영이 뒷짐을 진 채 등을 돌리고 있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무겁게 깔리고 있었다.
팔신은 그가 무슨 명을 내릴 지는 몰라도 필시 아주 중요한 것일 거라는 예감에 젖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까지 뜨거운 차 석 잔을 마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지금 등을 돌린 장하영의 시선은 지금 창 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쉴새없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렇듯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고 있다니.......
그는 무엇인가 즐거운 추억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인(大人)......."
이윽고 환영일신이 침묵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오!"
그제서야 장하영은 생각난 듯이 빙글 돌아섰다. 그의 안색은 아주 밝았다.
환영팔신은 어리둥절했다. 일찍이 그들의 상전 장하영이 이렇게 밝은 표정을 보인 적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황궁으로 돌아가라."
장하영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어검(御劍)을 풀었다.
그것은 황제가 친히 그의 무공을 포상하기 위해 하사한 것이었다.
"......!"
환영팔신은 깜짝 놀랐다. 뿐만 아니다. 장하영은 옷을 벗고 있었다. 그의 옷 안 쪽에는 날아가는 독수리 문양이
수놓아진 백색무복이 있었다.
그는 그것마저 벗고 미리 준비한 한 벌의 평범한 백삼을 걸쳐 입었다. 그는 백색무복을 탁자에 개어 놓았다.
"이 옷도 가지고 가라."
"대야!"
환영팔신은 떨리는 음성으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또 있었다. 장하영은 소매 속에서 금패(金牌)마저
꺼냈다.
"이것도 필요없다. 가지고 가라."
"대야!"
이제는 심각해졌다.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지금 장하영은 황궁을 떠날 생각을 굳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야기 할 것 없다.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까. 너희들은 이 물건을 가지고 동창으로 돌아가 대영반께
이렇게 전해라. 장하영은 강호인으로 돌아간다고."
"......!"
"황궁은 나에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 너희들은...... 새로운 부영반을 만나 그의 명을 받들어라."
"대, 대야!"
환영팔신은 놀라 부르짖었다.
"하하하하! 나는 꿈에도 그리던 옛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살겠다."
장하영은 감회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황궁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에게는 감옥으로 느껴질 뿐이다. 훗훗......! 옛날부터 그랬었지. 내가 황궁을
떠나지 못한 것은 아버님 때문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내가 장씨 무가를 이어주기를 바라고 계셨지."
환영팔신은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길이 아님을 벌써부터 느끼고 있었다. 사람에게는 각자 길이 따로 있는 법이다. 나
장하영은 자유인(自由人)이다. 구속받고 계급이 있는 곳에서는 숨이 막혀 지내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건
너희들도 알고 있지 않느냐?"
"......."
장하영은 문득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장하영은 한참 후에야 웃음을 그쳤다.
"너무 많은 말을 했다. 말을 많이 하면 즐거움이 감소되는 법이지. 할 말은 끝났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이
장하영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일 가능하다면 등진강에 대한 건(件)은 강호에서 처리해 보겠다."
"대야!"
그러나 환영팔신이 재차 그를 불렀을 때 이미 그 자리에 장하영은 머물러 있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열린 창문을
통하여 밖으로 신형을 날린 것이었다.
환영팔신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은 장하영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한 번 마음먹은 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환영팔신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천림은 혼자 있고 싶었다.
그는 상관중을 죽인 후 이상한 허탈감에 서로잡혀 있었다. 그는 조천백과 석회림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이른 후
혼자 나왔다.
저자에서 그는 향 한 줌과 술 한 병을 샀다. 그리고 그가 간 곳은 낙양 교외의 한적한 야산이었다.
"......."
야산의 언덕.
하늘은 맑다. 끝없이 푸른 창천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장천림은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소.......
한 명을 죽였어.
네가 부탁한 복수는 지금부터 시작이란다. 놈을 죽인 순간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지. 그런 놈들에게 티없이
청순한 너의 인생이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파괴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고 이빨이 악다물려졌지.
가소.
너는 너무 일찍 죽었다. 살아서...... 이 천림이 너의 원수들을 하나 둘 처치하는 것을 꼭 너의 눈으로 직접
보았어야 하는 건데.
가소.......
장천림은 대지에 얼굴을 묻는다.
흙의 향기. 가을의 땅은 쓸쓸한 냄새를 지니고 있다. 그 향기는 지난 날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장천림은 사가지고 온 향을 끌렀다. 그는 흙을 모아 향로를 대신하여 향을 꽂았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향연 위로 백가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가소의 얼굴은 그를 향하여 미소를 짓고 있었다.
림오빠.......
고마와요.......
장천림은 다시 얼굴을 땅에 묻었다. 오열이 어울리지 않게도 육 척의 건장한 사나이를 흔들리게 했다. 그는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긴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후...... 하하하하......!"
술병을 땄다.
독한 주향이 풍겼다. 그가 막 술병을 입에 대려는 찰나 어디선가 꾸중이 들렸다.
"나쁜 녀석! 친구를 두고 혼자서만 맛있는 술을 몰래 마실 참이냐?"
"......!"
이 음성은?
그는 고개를 돌렸다. 사나이. 백의를 입은 준수한 사내 한 명이 우뚝 서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 한데.......
문득 그는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넌...... 육백 호?"
장하영은 껄껄 웃으며 다가왔다. 그는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있었는데 장천림의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보따리를
끌렀다.
"......?"
보따리 속에는 술과 안주 등이 푸짐하게 들어 있었다.
"이봐. 천림. 너희들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니? 이 의리없는 놈들 같으니라구! 후후.......
하지만 결국은 찾아내고 말았지."
그는 안주를 벌려 놓더니 잔을 늘어놓는다. 그 잔은 한 개가 아니라 네 개였다.
"......?"
"천백과 회림도 곧 이곳으로 오게 될 거야."
장천림은 희미하게 웃었다.
"하영. 언제......?"
"훗! 낙양에서 너희들이 그 더러운 상관중이란 놈을 죽일 때 모두 보고 있었지."
장천림은 흠칫했다.
"내가 알기로 너는 황궁의......."
그는 말을 다 할 수 없었다.
"시끄러! 그 지긋지긋한 감옥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지금 이 장하영은 강호인이고 야인일 뿐이야. 그리고
자네들의 친구일 뿐일세."
"......!"
장천림은 부르르 떨었다.
"후후....... 설마 너의 일에 날 끼워주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그럴 권리도 없어. 너희들이 날
거부한다면 나는 끝없이 훼방을 놓으며 다닐테니 말이야. 강호사공자가 어디 그렇게 만만한 놈들인가? 상관중이란
놈은 그 중 제일 보잘 것 없는 놈이지."
"하영......."
장천림의 눈에 이슬이 어린다. 그는 강한 사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기실 장천림은
누구보다 다정다감한 인물이었다.
다만 자라온 환경이 그를 고독하고 과묵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지 않을 뿐 실제로는
무엇에나 심약한 정서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백가소의 죽음이 그의 인생을 이렇게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 놓지 못했을 것이다.
장하영은 술을 따르다 말고 장천림을 바라보았다.
"천림. 정말 보고 싶었다."
"......!"
장천림은 그를 마주 보았다. 두 사나이. 그들은 마주보는 시선 속에 뜨거운 감정을 보내고 있었다.
"하영!"
"천림!"
포옹. 사나이들끼리의 뜨거운 포옹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며 굳세게 끌어안고
있었다.
이때였다.
"히히히! 정말 보기 좋은데?"
"껄껄! 글쎄 말이야. 이런 곳에서 사내놈들끼리 끌어안고 대체 무엇하는 짓이지?"
낯익은 음성들이다. 장하영은 벌떡 일어서더니 달려갔다.
덥썩!
세 사나이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조천백, 석회림, 장하영, 세 사나이는 한데 어울려 언제까지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
그 광경을 바라보는 장천림의 시선은 젖어들고 있었다.
나는 외롭지 않다.......
저들이 있는 한.......
가을 하늘에 한 마리의 독수리가 비상하고 있었다. 독수리는 아득한 동쪽으로 사라졌는데 잠시 후에는 또 한
마리의 독수리가 그쪽으로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제 8 장 백색마인(白色魔人)

홍무(洪武) 14 년 11 월 8 일
태산(泰山) 성인봉(聖人峯).
이곳은 당금 무림을 관장하는 곳이다. 무림연합총맹(武林聯合總盟)이 있는 곳으로 구파일방을 위시하여 전
중원의 무림세가, 백도무림의 제파들이 공동으로 성지로 여기고 있는 곳이었다.
무림맹이 이곳 태산에 그 총본영을 둔 이유는 공정성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무림의 대파는 대부분 하남 일대에 모여 있으므로 중원에서 다소 떨어진 태산에 영지를 정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잠룡신도(潛龍神刀) 공손일도(公孫一到).
그는 무림맹 서열 육위의 인물이었다.
직위는 총순감(總巡監)으로 직책상 순찰당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에 들어온 보고를 받고 무척 화가 나
있었다.
그것은 낙양지부에서 올라온 것으로 낙양 일대에 순찰로 보냈던 상관중이 실종되었다는 보고였다.
실상 공손일도는 평소 상관중에게 불만이 많았다.
상관중은 명문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평소 오만했을 뿐더러 특히 강호사공자와 은연중 파벌을 형성하여 무림맹
내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강호사공자는 소장파에 속했으며 그에 비한다면 공손일도는 노장파에 속했다.
정사대전 이후 소장파의 득세는 피할 수 없는 현상으로 강세를 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류(時流)를 타는
것이 인정이라고 하지만 그는 노장파가 피땀흘려 세운 무림의 평화를 소장파들이 아무런 공도 없이 혜택 만을
누리려 하는 것에는 질색이었다.
사람이 미우면 모든 것이 비뚤어지게 생각되는 법이다.
그는 상관중의 실종이 별다른 일이 아니라 그가 어떤 재미를 보기 위해 마음대로 공무를 이탈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그러나 강호사공자 중의 또다른 일인인 무당 출신의 백유성(白流星)이 그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았다.
일명 백도제일검(白道第一劍)으로 불리울 만큼 백유성의 무학은 출중했다. 이제 그를 빼어난 후기지수로 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무당의 검법을 통달했을 뿐더러 성격도 침착하고 매사에 빈틈이 없었다.
그는 강호사공자 가운데 은연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찾아온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백유성은 반론을 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백유성은 완강하게 말했다. 공손일도는 화가 났다.
이 놈이 건방지게.......
그러나 백유성은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상관형의 성격을 모르고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평소 그의 성격으로 보아 절대로 알리지 않고 행적을 감출
인물이 아닙니다."
"......?"
"상관형은 성격이 까다로울 뿐더러 매사에 가리는 것이 많으므로 수발들 수하들조차 대동하지 않고 사라질 리가
만무입니다. 음식이나 옷, 심지어는 목욕물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찌 임의로 홀로
잠적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분명 사고가 생긴 것입니다. 철저히 조사를 해보야 합니다."
"......."
공손일도는 침묵했다. 그러나 그도 산전수전 다 겪은 무림의 원로였다. 그 역시 설명을 듣고 백유성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의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럼 자네가 나서서 이 일을 조사해 주겠나?"
백유성은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바라던 바입니다."
백유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그는 이번 사건이 어쩐지 불길한 예감으로 받아 들여졌다.
상관중은 그와 친했다. 강호사공자는 언제나 함께 붙어다녔으며 서로를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상관중이
실종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직감적으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별 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기련산(祈蓮山).
무림맹 기련분타의 타주인 방무력(方戊歷)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는 기련산 중에 괴인이 출몰한다는 소문을 듣고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수하들과 함께 왔다.
직책상 관할구역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수하 삼십 명과 함께
이곳에 왔다.
기련산은 방대했다. 그래서 수하들을 나누어 기련산을 조사하던 중이었다.
반나절쯤 지났을까? 그는 동쪽으로부터 향전(響箭)의 신호를 받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향전은 수하들이 웬만한 위기에 처하지 않는 이상에는 함부로 발사하지 못하도록 당부한 것이었다.
그는 경공술을 발휘하여 향전이 쏘아 올려진 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향전이 발사된 곳에 도착한 지금 그의 눈 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십여 명의 수하들이
땅바닥에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한 명의 장발괴인이 한 수하의 품을 뒤지고 있지 않은가?
"멈춰라! 넌...... 누구냐?"
그의 입에서는 절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섬칫한 예감이 든 것이었다.
그의 수하들은 기련분타 내의 최고 정예고수들이었다. 그 딴에는 이번에 예감이 좋지 않아 정예고수 만을
대동하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한 명도 아니고 열 명이 전부 시체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괴인의 무공이야 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내심 두려움이 치밀어 음성이 떨린 것이다.
괴인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꾀죄죄한 몰골에 머리카락이 온통 얼굴을 뒤덮고 있어 용모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괴인의 한 쌍의 눈을 보는 순간 방무력은 심장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괴인의 눈은 마치 비수를 보는 것 같았던 것이다.
"헉!"
방무력은 그 눈빛을 접한 순간 마치 칼날이 자신의 심장에 날아와 꽂히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이때였다.
괴인은 그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서, 서라. 나는 무림맹 사람이다. 그대는...... 정체를 밝혀라!"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아니 방무력은 순간적으로 괴인의 얼굴에 흰 선이 그어지는 것을 보았다. 괴인이 웃고 있는
것이다.
그는 괴인이 손을 쳐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그저 보이는 것이라고는 괴인의 손바닥이 얼음처림 투명하게 하얗다는 것과,
괴인의 손바닥 중앙에서 혈옥의 반점이 그를 향해 전광처럼 날아왔다는 것뿐이었다.
"으아아아악!"
그는 자신의 비명을 꿈결 속인 듯 들었다. 자신의 비명을 자신이 듣게 될 줄이야.......
아득히 멀어져가는 의식 저편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먼저 가거라....... 그리고 곧 뒤따라 갈 놈들에게 내 이름이나 가르쳐 주거라. 내 이름은 백리진강(百里眞
强)......."
피.
피바람이 분다. 그 피바람은 기련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기련산으로부터 시작된 혈풍의 향방은 곧장 남하(南下)
하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괴인이 일으킨 피바람이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면 그를 본 자는 전부 죽었기 때문이었다. 사신(死神)인가? 그는
죽음을 몰고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왜?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죽이는지 모른다.
아니, 죽인다기보다는 도살을 한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다만 기이한 것은 그가 꼭 무림맹의 인물들 만 골라서
죽인다는 사실이었다.
기련분타는 다만 첫 희생양일 뿐이었다.
이후 남하하면서 드는 불과 보름 사이에 무림맹 여덟 개 지단이 그의 손에 의해 혈해(血海)로 화하고 말았다.
- 크크ㅋㅋ! 무림맹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그는 이렇게 광소를 터뜨렸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었다. 무림맹은 하늘 아래 무림의 성역이었다. 누가 감히 무림맹 전체를 상대로 이런 광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정사대전 이래로 무림맹은 무림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흑도무림은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괴인은 공공연히 무림맹을 타파하면서 가공할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괴인의 무공은 실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무려 팔십구인의 고수들을 상대한 적도 있었다.
황하변의 십리평(十里坪)이란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무림맹 산하의 정예고수 팔십구인이 치밀한 계획 끝에 그를 포위하고 합격했다. 그러나 싸움의 결과는 그야말로
비참한 것이었다.
아비규환...... 생지옥...... 목불인견......!
결과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팔십구인의 고수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싸움의 결과를 알게 된 것도 싸움이 끝난 한참 이후였다. 어떤 형태의 싸움이 벌어졌는지는 아는 자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괴인이 검이나 도 따위의 병장기는 사용하지 않고 일종의 마공(魔功)을 사용했다는 것을 시신의
상태를 보고 짐작할 뿐이었다.
죽은 자들의 시신에는 선명한 장인(掌印)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장인은 기이하게도 흰색이었다.
백색장인(白色掌印)의 공포!
이후로 무림에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 백색마인(白色魔人)을 만나지 말라! 그를 만나느니 차라리 염라대왕을 만나는 것이 낫다.
그 노래 아닌 노래는 바로 정체불명의 인간도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름도, 내력도 알 수 없는 괴인. 그는 이제 백색마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 것이다.
중원천하는 혹한의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겨울의 추위보다 더욱 추운 것은 인간의 마음이었다. 특히 강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더욱 추운
겨울이었다.
더더욱 무림맹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올 겨울은 말할 수 없이 추웠다. 바로 백색마인 때문이었다.

홍무(洪武) 14 년 12 월 7 일.
예년에 비해 일찍 찾아온 한파는 성도 장안(長安)을 온통 쓸쓸한 풍경으로 만들고 있었다.
한파가 닥치면 사람들은 움츠러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장안 시내는 갑자기 인파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장안 전체가 흥청거리는 것이었다.
장안 북쪽에는 한 채의 보(堡)가 있다.
- 당가보(唐家堡).
강호인치고 그 이름을 모른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당가보는 수백 년의 전통을 지닌 무가였다.
사천당가는 독자적으로 명문의 서열에 든 지 오래였으며 당금의 무림맹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바로 그 당가보로 향하는 길이 온통 메워지고 있다시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가보에 혼례식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혼례를 치르는 사람은 당가보의 차기 가주가 될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설명보다는 강호사공자(江湖四公子)의 일원이 혼례를 치른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했다.
천수관음(千手觀音) 당수문.
바로 그가 혼례를 치르게 된 것이다. 그의 혼인 상대자 또한 쟁쟁한 명문의 규수였다.
역시 무림맹의 일원인 화산파(華山派)의 여제자 비선옥봉(飛仙玉鳳) 여옥환(呂玉環)이 그의 신부감이었다.
양가의 가문이 쟁쟁한 터라 혼례식에 참여하려는 하객들이 많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더구나 강호에 적을 두고
있는 자라면 이번 기회에 무림고인들의 얼굴을 구경이라도 하기 위해 사천으로 오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이같이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리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당가보가 아무리 전통있는 명가라고는 하지만 이 많은 하객들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당가보에서는 장안 시내의 객점을 거의 전세내어 하객들을 이곳에 묵게 하는 조처를 취했다.
와글와글.......
가는 곳마다 화제는 이번 혼례였으며,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두 사람의 혼인이 천생연분이니, 미래 무림의
주역이 될 사람들의 가화니 하며 축배를 들었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가운데는 화산 여제자 비선옥봉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여옥환.
그녀는 명가의 여고수였다. 무공 또한 쟁쟁할 뿐더러 미모의 수려함이 강호삼미(江湖三美)에 속한다고 했다.
그녀와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당수문이 결합하게 되면 그들의 후세는 더욱 뛰어난 아이가 태어나리라는 말들을
나누며.......
등용객점(騰龍客店).
두 평 남짓한 방 안에는 사인이 마주 앉아 있다. 바로 장천림 일행이었다.
그들은 간신히 이 방을 빌었다. 시내의 객점은 거의가 초만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비좁은 방도 평소의 다섯 배나 되는 많은 은자를 주고서야 간신히 빌릴 수 있었다. 조천백이 입을
열었다.
"혼례를 올리는 곳치고는 지나치게 경계가 심해. 아무래도 다른 사정이 있는 것 같아. 요즘같은 태평성대에
사천당가쯤 되는 곳에서 이렇게 초긴장이라니......."
그렇다.
비록 외부적으로는 들뜬 분위기였으나 실제 당가보는 초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당가보의 식솔들은 물론 많은
고수들이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하객들은 대부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객점에 흩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석회림이 심각하게 반문했다.
"혹시 상관중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 아닐까?"
조천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쉽게 발견되지 않을 거야."
그 말에는 장하영도 동감이었다.
"내가 당시 잘 마무리 해놓았기 때문에 그럴 염려는 없다."
이때 장천림이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아보기는 했나?"
조천백은 싱긋 웃었다. 그는 소매 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탁자에 펼치고 보니 그것은 지도였다.
"간신히 지도를 그렸지. 하지만 곳곳에 매복이 심해서 자세하지는 못해."
석회림은 못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말을 장하영이 받았다.
"어쨌든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거사일은 삼일 안에 잡아야 한다."
장하영. 그는 전술과 병술의 전문가였다.
그는 옛 친구들과 합류한 후 적극적으로 강호사공자를 척살하는 일에 동조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을 척살하는
계획은 그가 맡아 수립하는 입장이 되었다.
장천림이 물었다.
"당수문에 대한 사항은?"
"여기 있다."
조천백이 또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
"......?"
"당수문의 특기인 천수신전(千手神箭)에 대한 것을 조사해 내지 못했어. 그것은 워낙 그의
극비절기인지라...... 무엇보다도 그의 천수신전에 당한 사람 중 살아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 더욱 난점이야.
그러니 그에게 당한 시신의 상태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지."
조천백의 말은 계속되었다.
"짐작컨데 천수신전은 어떤 자세, 어떤 각도에서도 발사할 수 있는 것으로 회선전(廻旋箭)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천수신전.
그것은 천수관음이라는 별호가 있게 한 당수문의 최고 성명절학이었다.
사실 당가의 무공은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당가가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무공보다는 그 가문 전래의
암기술에 있었다.
암기라면 석회림이 전문가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하건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신체 다섯 부위에 장착되어 있는 일종의 소전(小箭)일 것이라고 생각해.
즉 팔꿈치, 무릎에 각각 두 개씩, 나머지 하나는 입 속에 있을 거야."
"입 속?"
장천림을 위시하여 모두 놀랐다. 입 속에도 활을 장착할 수 있단 말인가?
석회림은 담담히 말했다.
"너희들은 잘 모를 거야. 하지만 암기란 항상 상상을 벗어난 곳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지. 더욱이 당가 정도
되면 그 정밀성은 가히 최고에 달할 거야."
"으음."
장하영은 신음을 발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장천림을 바라보았다.
"천림, 자신 있나?"
그의 질문은 장천림이 염려가 된다는 뜻이었다. 장천림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에게 접근하기만 하면 자신이 있네."
"접근이라......."
이때 다시 석회림이 말했다.
"또 하나 유의할 것은 그의 신전이 전문적으로 호신기공을 파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래서 맞으면
혈맥을 상할 뿐 아니라 독(毒)까지 발라져 있다고 생각해야 돼."
장천림은 싱긋 웃는다.
"그 정도는 두렵지 않네."
그는 불귀곡에서 많은 무공을 익혔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영약을 복용하여 웬만한 기독은 영향을 받지 않는
몸이었다.
장하영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촉박해. 만일 열흘 정도의 여유만 있어도......."
그 말에 장천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그럴 시간이 없어. 놈이 혼례를 올리기 전에 해치워야 해. 놈같은 철면피가 정상적인 혼인을 하게 할
수는 없다."
장천림의 어조는 굳어 있었다.
"......."
"놈에게 제대로 복수를 하자면 놈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을 모두 느끼게 해야 돼. 생각같아서는 놈의
정혼녀를......."
장천림은 말 끝을 흐렸다. 그러나 방 안의 삼인은 더이상 듣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유독 장하영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문득 그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었다.
"천림.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장천림은 말이 없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저 허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소.......
두 번째야.
네 원수의 곁에 와 있다.

7 월 10 일.
혼례식은 삼일 후인 7 월 13 일에 치루어질 예정이었다.
신부(新婦)는 그 이전에 당가보에 갈 수 없었다. 본래 혼례는 신부의 집에서 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이번만은
특이한 경우에 속했다.
그것은 여옥환이 화산파 출신이라는데 사정이 있었다. 화산파는 도가(道家)의 수도장이었으므로 그곳에서 혼례를
올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혼례는 당가보에서 치르기로 합의된 것이었다.
여옥환은 혼례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당가보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혼례 당일이 되어야 당가보에 들어가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 그녀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장안에서 가장 큰 객점인 영원루(永遠樓)라는 곳이었다.
이 영원루는 화산파에서 온 하객들이 통째로 전세내어 쓰고 있었다.
하루하루 날짜가 흐를 수록 축제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물론 당사자인 여옥환이야말로
안절부절이었다. 가슴이 설레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매일매일 화장과 목욕을 하며 치장에 온 신경을 다 쏟고
있었다.
비록 강호의 여인이라고 하지만 이런 일에는 당연히 여자로 돌아가는 것이다. 혼야가 되기 전까지 신랑을 볼 수
없는 것이 중원의 풍습이었다.
그녀는 혼례 때까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되자 더욱 상대방인 당수문이 그리워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녀는 홀로 거울을 들여다 보며 당수문과 처음 만난 그날을 상기하면서
이따금 미소를 짓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였던가......?
당수문은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화산파의 천인검객을 만나기 위해 화산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이었다.
그때 그녀의 마음은 동문 사형인 북리웅풍에게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복리웅풍은 문을 닫아 걸고 이 년
전부터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그 일로 심리적인 타격을 심하게 받은 양 완전히 도사(道士)처럼 변해 버린 것이었다.
심지어는 그녀가 방문해도 만나주지 않았다.
당수문이 화산을 방문한 것도 그를 설득하여 무림맹으로 입맹하라는 권유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복리웅풍은 그를 만나는 것마저도 거절했다. 여옥환은 그 문제를 두고 당수문과 몇 차례 상의하다가
그만.......
'아아! 그날 밤 달은 무척 밝았어.......'
동경 속에 비친 여옥환의 얼굴에는 은은한 도화빛이 어리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곤 했다. 두 사람은 한창 청춘이었다. 중천에 뜬 그날 밤의
달빛이 그들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화산 후면의 폭포수 아래 바위가 있다. 그 바위 그늘에서 그들은 첫 입맞춤을 나누었을 뿐더러.......
그날 그만 넘어서는 아니되는 선(線)까지 넘고야 만 것이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결혼을 굳게 언약했다.
물론 그 둘의 혼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화산과 당가의 사돈 관계는 양파로 볼 때도 크게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사문의 존장들도 환영이었으며, 당가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왔다. 그래서 혼인은 급진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아가씨."
문득 밖에서 시비의 음성이 들렸다.
"응? 무슨 일이야?"
그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밖에 당공자께서 와 계셔요."
"당공자님이......!"
그녀는 펄쩍 뛸 듯이 일어났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혼례 당일까지는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곳까지
찾아 오다니......?
여옥환은 곧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후훗,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그녀는 얼른 거울을 보고 머리를 가다듬었다. 조금이라도 어여삐 보이려는 것이 여인의 심정인가.
그녀는 머리를 다 매만지고도 다시 거울을 몇 번이고 본 뒤 말했다.
"어서 모셔라."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황삼을 입은 청년이 들어섰다.
그는 바로 당가보의 차기 보주가 될 위인, 천수관음 당수문이었다.
"수문. 어떻게 여길......?"
짐짓 놀라워 하면서도 여옥환은 만면에 가득 웃음이었다. 그녀는 달려가 당수문의 목을 끌어 안았다. 당수문도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 안으며 말했다.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왔소."
"호호호호....... 이제 사흘 후면 당신의 아내가 될 터인데 그 사이를 못 참는단 말이에요?"
"후후! 그때는 그때고......."
당수문은 그녀의 엉덩이를 손으로 덥썩 움켜쥐었다.
"아이."
여옥환은 허리를 비틀었으나 싫지는 않은 듯 코먹은 소리를 내며 더욱 그에게 매달렸다.
그것은 이미 갈 데까지 가본 남녀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한편 문 밖. 그곳은 객점의 별원 후원이었다.
두 명의 청년이 서 있었다. 그들은 당가 특유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바로 당수문을 수행하고 온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 받으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시비 두 명이 각각 소반을 받쳐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나누더니 시비들에게
다가갔다.
"하하! 화산의 아가씨들은 전부가 아름답구려."
"후후! 아가씨들도 결국 곧 당가의 사람이 될 것이 아니오? 그 전에 우리 친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지
않소?"
시비들은 두 손으로 주안상을 받쳐들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도 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청춘은 통하는 데가 있는 법인지.......
시비들도 두 청년이 싫지 않았다. 당가라면 무림의 명문인데다가 청년들의 얼굴도 준수하였던 것이었다. 그녀들은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두 청년은 다가가더니 슬쩍 시비들의 뒤로 돌아가 손을 뻗어 엉덩이를 만졌다.
"어멋......."
"무슨 짓을......."
그러나 청년들은 대담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시비들이 손에 소반을 들고 있어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이용한
듯 서슴없이 손을 움직였다.
각자 시비들의 뒤쪽에 바짝 붙어 엉덩이를 더듬고, 한 손으로는 앞가슴을 주무르는 것이 아닌가?
"아, 아니......!"
"어머멋!"
시비들은 한창 물이 오를 나이였다. 그녀들은 가뜩이나 혼례다 뭐다 하여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준수한 청년들이 접근하자 애당초부터 거절할 마음이 없었다. 더욱이 그들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자 그만 마음이 풀려 버리고 말았다.
공범의식이랄까?
두 시비는 똑같은 처지를 당하자 은연중 그 현실을 즐기려는 마음이 들고 있었다. 더구나 시비들은 소반을 든
핑계로 청년들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도 변명이 되고 있었다.
마침내 두 시비는 청년들에 의해 으슥한 회랑 벽 쪽으로 밀려갔다.
"하하....... 우리끼리 재미를 보는 것도 좋지 않소?"
"후후! 어차피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사람들이 아니오?"
두 청년은 이렇게 지껄이면서 시비들을 회랑 구석으로 밀고 들어갔다. 마침 이곳은 객점에서도 가장 후미진
별원이었으므로 외인이 출입하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외부로 새어나갈 염려는 없었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 한은 말이다.
청년들은 기술은 훌륭(?)했다.
그들에게 있어 순진한 시비들을 녹이는 일이야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던 것이다. 회랑 구석으로 시비들을 몰아
붙인 그들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녀들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은 시비들의 옷을 풀어 헤치고 아직 한 번도 남에게 보인 적이 없는 처녀의 가슴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거기까지 가면 이미 쌀은 익어 밥이 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시비들은 그만 온 몸이 녹아 내리는 듯한
쾌감을 느끼며 청년들의 손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주안상을 들이는 일조차 까맣게 잊은 채.......
"수문......?"
여옥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수문이 옷을 벗는 것을 보며 그녀는 깜짝 놀란 것이다.
"얼마 후면 혼인인데......."
그러나 그녀는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수문이 옷자락을 내던진 후 곧장 그녀의 몸을 짓눌러 왔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심리란 묘한 것이다.
아무리 정숙한 척하여도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는 데야 어쩔 수 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겉으로는 나무라는 척 했으나 그가 몰래 당가를 빠져나와 이렇게 자신을 찾아준 것을 지극히 기뻐하고 있었다.
당수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로 침상에 쓰러진 여옥환의 옷을 벗겼다. 이윽고 그녀의 옷이 떨어져 나가고 백옥같은 나신이
드러났다.
알맞게 발달된 육체였다. 이미 남자를 겪은 여체였기에 여자로서의 성징은 뚜렷이 발달해 있었다. 두 개의 유방은
만지면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으며, 피부는 묻어날 듯이 부드러웠다.
게다가 기름진 아랫배에 은밀히 형성된 삼림은 짙게 우거져 있었다.
당수문은 왠지 서두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전희도 생략하고 막바로 입성했다.
"흑......."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바람에 여옥환은 활을 맞은 사슴인 양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동공이 크게
떠졌다.
그 눈에는 한 가닥 무서운 의혹이 맺혔다.
"당신은......?"
그러나 곧 이어진 당수문의 격렬한 율동에 그녀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녀의 육체가 침상에 반쯤
밖으로 걸쳐진 채 무섭게 흔들렸다.
그녀는 손을 쳐들어 당수문의 머리를 내려치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수문의 공략은 철저히 그녀의 육체를 뒤집어 엎어 버린 것이었다. 여옥환은 입을 딱 벌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했으나 그것은 입 밖에 나오지 못한 채 그만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아흑......."
당수문은 한 손으로는 유방을 쥐어짜듯 비틀고 있었으며, 한 손으로는 그녀의 긴 머리칼을 움켜쥐듯 잡고 있었다.
그의 허리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마치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 속도는 여옥환이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무섭도록 강한 쾌락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아악악......!"
여옥환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그녀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같은 느낌은 처음이었다. 처음 폭포수 아래에서
당수문과 정사를 벌일 때도 이런 충격은 없었다.
그때는 처녀였으므로 달콤한 느낌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마치 죽음같은 절망적인 쾌락이 온 몸을
휩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당수문의 무서운 힘에 의해 반쯤 침상 밖으로 삐어져 나갔던 상체가 쳐들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반월처럼
휘며 당수문의 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행여나 그가 움직임을 중지할까 두려운 듯 그녀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허리를 아래
위로 꺾으며 당수문의 움직임에 맞추어 전신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당수문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문득 그는 자세를 바꾸더니 그녀의 두 다리를 잡았다. 그는 다리를 잡아
벌린 후 그녀의 머리를 바닥에 닿게 했다. 그로 인해 여옥환은 거꾸로 된 기이한 자세가 되었다.
그런 상태로 당수문은 또 다시 입성했다.
"악!"
머리가 바닥에 밀려 부딪쳤으나 여옥환은 조금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고통보다는 악마적인 희열이 온
몸을 휘감는 바람에 그녀의 몸은 세찬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그러나 육체적인 욕망과 이성은 별개의 논리를 가지고 그녀를 어두운 타락과 함정의 구렁텅이를 향해 몰아 넣고
있었다. 한 순간 그녀의 눈은 크게 부릅떠졌다.
소반은 땅에 뒹굴어져 있다.
두 명의 시비는 머리칼이 온통 헝클어지고 치마는 물론 옷차림도 엉망이었다. 그녀들은 난생 처음으로 이같은
경우를 당했다.
회랑 구석에서 이루어진 급작스러운 정사는 시비들의 인생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한 것이다.
일이 끝난 후 그녀들은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명의 당가 청년들이 그녀들을 한 순간에 탕부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옷을 추스릴 때였다.
"부탁이 있소. 아가씨들."
"흐흐흑! 당신은 누구죠?"
여옥환은 오열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바탕 격렬한 정사가 끝난 후 아직도 전라의 모습이었다. 침상 위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그녀는 당수문을 보며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당수문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 그토록 불꽃을 내며 이글거리던 열기는 이미 싸늘히 식어 버리고 없었다. 그저 무심안(無心眼)일
뿐이었다. 하나의 물건을 보듯 그는 여옥환의 벗은 몸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여옥환은 그의 눈길을 받자 비스듬히 벌려진 다리를 약간 오므리며 입술을 떨었다.
"난 알아요...... 당신이 그가 아니라는 것을...... 흑! 그런데 왜?"
당수문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럼 알면서도 날 받아들인 이유는?"
여옥환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건...... 그건...... 아아!"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의 신비한 곳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뚜렷이 손자국이 남아
있는 유방이 노출되었다.
당수문은 차갑게 말했다.
"그 자와 나를 비교하면 어떻소?"
그 말에 여옥환의 몸이 굳어졌다. 너무나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아무리 여옥환의 얼굴이 두껍다고 해도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못되었다.
"당신...... 어쩌면 그런 질문을......!"
여옥환은 전신을 가늘게 떨며 원망스럽게 뇌까렸다. 당수문은 옷을 다 입은 후 돌아서며 말하고 있었다.
"오늘 일은 그대의 입으로 누구에게든 말하지 않을 것으로 믿소. 그것이 본인을 위하는 일일 테니까."
"......!"
그렇다. 여옥환은 그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에 이미 그가 당수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거부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도 마력적인 쾌감이 그녀의 이성을 초월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또한 그
누구에게 이런 사실을 털어 놓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스스로를 모욕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이때 당수문은 옷을 다 입고 미련없이 밖으로 걸어나갔다. 여옥환은 갑자기 그를 불렀다.
"자...... 잠깐! 이름 만이라도......."
당수문, 아니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돌아서지도 않은 채 물었다.
"무엇 때문에?"
여옥환은 입술을 악물었다. 너무도 수치스런 일이었으나 지금 그녀의 마음은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라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잖아!
마침내 그녀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말했다.
"당신을 다시 만날 수는...... 없을까요?"
사나이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 나왔다.
"훗! 가끔 외도라도 하겠다는 건가?"
일이 이쯤되면 뻔뻔해지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여옥환은 몸을 일으켰다. 사지를 움직이자
전신 곳곳에 아직도 노곤하게 남아있는 쾌락의 여운이 그녀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게 했다.
그녀는 침상 아래로 내려갔다. 여전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으나 몇 걸음 걷는 동안 둔부를 묘하게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녀는 뒤에서 사나이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이미 그녀는 변해 있었다.
"호호......! 당신은 나를 타락한 여인으로 만들었잖아요. 모든 게 당신 책임이에요. 흐응, 설마 날 이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요?"
여옥환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그녀는 사나이의 듬직한 등에 자신의 유방을 밀착시킨 채 뺨을
비벼댔다. 그러자 다시 전신이 뒤틀리는 듯한 쾌감이 되살아 났다.
'이런 느낌 처음이었어! 절대 이 사람을...... 놓지 않을 테야.'
한편 사나이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당수문. 들었느냐? 네가 혼인하려는 여인이 지금 한 말을? 네가 이 자리에서 듣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그는 서서히 돌아섰다. 그러자 여옥환이 그의 목을 휘어감으며 입술을 부딪쳐 왔다. 두 사람의 입술이 합쳐졌다.
여옥환은 사나이의 입술을 무섭게 핥으며 적극적으로 혀를 움직였다.
정녕 무서운 것이 여인의 변심(變心)이련가? 이제 화산의 명문 여제자 여옥환은 희대의 요녀로 화해버린
것이었다.
사나이의 손이 여인의 둔부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여옥환은 콧소리를 내며 한 쪽 다리를 들어 사나이의 허리를
뱀처럼 휘어 감았다. 사나이의 손이 둔부를 강하게 움켜 잡자 그녀는 아! 하고 신음을 토하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사나이의 눈 아래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유방이 흔들렸다. 뒤로 젖혀진 여옥환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또다시 열풍을 기대하는 듯이 그녀의 눈이 가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사나이이의 손이 둔부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앞으로 미끌어 지더니 유방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유방이 사나이의 손 안에서 뭉개졌다. 그러자 여옥환은 마력적인 쾌감에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사나이의 손은
더욱 강하게 유방을 움켜쥐었다. 여인은 눈꼬리를 떨고 있었다. 그 순간 사나이의 손이 떨어지더니 손가락 하나가
빳빳이 뻗으며 유방 한가운데의 옥당혈(玉堂穴)을 찔렀다.
"악!"
여옥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어 그녀의 몸은 뼈가 없는 듯 스르르 아래로 무너졌다.
"......?"
여옥환은 바닥에 널브러지며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사나이의 매정한 음성이 떨어졌다.
"내 이름은 장천림이다."
제 9 장 두 번째 복수(復讐)

12 월 12 일.
혼례식을 하루 앞 둔 날이었다.
당가보의 경비는 더욱 삼엄해지고 있었다. 이번 혼례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상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근래 들어 무림맹을 표적으로 무자비한 살상을 일삼고 있는 백색마인(百色魔人) 때문이었다.
백색마인은 무림맹의 수십 개 지부를 피로 평정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무림맹은 초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번 당가의 혼인식에 많은 하객들이 몰려 올 것이라는 예상은 벌써부터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색마인이
이곳에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 또한 없는 것이다.
신성하고 경사스러운 혼인일에 행여나 참변이 일어나지 않을까 저어하여 경비를 크게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당수문은 강호사공자의 일원이었고, 강호사공자는 무림맹의 소장파 핵심세력이었으므로 더욱 만전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별각(別閣).
당수문은 방 안을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도무지 안정되지 않고 있었다. 혼례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혼례라고 해야 이미 여옥환과는 육체를 나눈 사이였으므로 그다지 설렐 것까지는 없었다. 또한 그는 명문
출신이라는 잇점과 영준한 외모 때문에 강호상에서 이미 많은 여인들과 교제를 갖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여자라면 단순한 성욕의 대상일 뿐이었다. 다만 그가 여옥환과 혼인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그녀가 화산파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가와 화산의 결합은 앞날을 위한 큰 투자인 것이다.
지금 그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이유는 바로 백색마인 때문이었다. 그는 얼마 전 무림맹에서 날아든 전서구를
읽었다.
그것은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백유성이 보낸 것이었다. 전서구에는 여러 가지 소식이 적혀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상관중의 실종 건이었다. 백유성은 그 건을 전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 혼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백유성이 보낸 전서구에서 특히 마음에 걸리는 사항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상관중의 실종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강호사공자 전체와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상관중이 공연히 실종될 리가 없다. 어쩌면 백형의 말이 맞는 지도 모른다. 누군가 우리 사공자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상관중의 죽음은 이제 시작일지도.......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어쩌면.......'
여기까지 생각한 당수문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이곳은 용담호혈이나 다름없는 곳, 아무리 강한 자라 해도 감히 본가에 와서까지 사공자의
일원일 날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당수문은 그렇게 단정짓고 있었다. 실상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설사 상관중을 죽인 흉수가 눈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그와 일대 일로 겨루어 이길 자신이 있었다.
더구나 이곳은 그의 본가인 사천 당가보가 아닌가.
어쨌든 혼례를 하루 앞둔 지금 그는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잠자리에
들 시간이 넘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억지로 잠을 청해 보아야 기분만 더욱 찜찜해질 뿐이다. 그는 방 안을 서성거리다 책상으로 걸어갔다.
서책이라도 읽다 보면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가 막 책 한 권을 펼쳤을 때였다.
"공자님......."
문득 문밖에서 한 가닥 그윽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당수문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크게
울렁거렸다.
"산해(珊海)......?"
그러자 밖에서 약간 떨리는 음성이 들렸다.
"네......."
당수문의 눈빛이 빛났다.
"들어오시오. 산해."
그의 음성은 어떤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약간 망설이는 모습으로
들어서는 여인이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나이는 이십삼 세쯤 되어 보였으며 전체적으로 성숙한 미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의외로 소복(素服)을 입고 있지 않은가? 경사를 하루 앞둔 밤에 소복을 입은 여인이 신랑될
사람의 침소를 방문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수문은 소복을 입은 여인을 보는 순간 온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내일이면 그는 혼례식을 치루게 된다. 그러나 지금 그는 소복을 입은 여인 지산해(址珊海)를 본 순간 그만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낀 것이었다.
지산해.
그녀는 그가 형수(兄嫂)라고 불러야 할 여인이었다. 비록 직계는 아니라도 그의 육촌 형의 아내였기 때문이었다.
지산해는 육촌 형 당율빈(唐律彬)이 이 년 전 급병으로 죽은 이후 미망인이 된 여인이었다.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당가에 남아 당수문의 노모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런 미망인 지산해와 눈이 맞은 것은 반 년 전이었다.
삼 년 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소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 중원의 법도였으며 당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우기
당가는 무림 명가였으므로 그 법도는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지산해는 아름다왔다. 스물세 살의 여인이라면 여자로써의 완숙미가 한창 절정에 달해 있을 나이 아닌가. 더구나
미망인이라는 신분이 더욱 미묘한 매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당수문이 그녀와 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 뜻밖의 일이었다.
당수문이 아무리 여색을 좋아한다고 해도 차마 집안의 여인, 그것도 육촌 형의 아내까지 건드릴 정도는 아니었다.
만일 그런 일이 발각이라도 난다면 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 가문에 먹칠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이 벌어진 것은 지난 해 어느 날이었다.
지산해는 망부(亡夫)의 기일(忌日)에 제(祭)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복을 입고 한밤중에 젯상을 차리고
있었다.
지산해의 망부는 본래 당가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표국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급병으로 죽은 후
지산해는 당가로 오게 되었다.
따라서 지산해는 당가에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녀가 기일의 제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당가에서는
형식적으로 제기를 마련해 주었을 뿐 그녀를 거드는 사람조차 없었다.
마침 당수문은 정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별당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 텅빈 빈소에서 흐느껴 울고 있는
지산해를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위로나 해줄 양으로 빈소로 들어갔다. 그는 서럽게 오열하고 있는 지산해의 어깨를 다독이다가
그만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는 메마른 삭풍과 함께 비가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왠지 을씨년스러운 밤이었으며 사위는 적막하기만 하여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는 밤이었다.
그 쓸쓸한 밤의 빈소에서 미망인 지산해는 그가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하자 그만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으로
안겨든 것이었다.
꽈다당! 하는 뇌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뇌전이 빈소 안을 잠깐 밝혔다. 빈소의 위패와 신위가
흔들렸다.
문득 당수문은 소복을 입은 채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지산해의 희디흰 목덜미에 시선이 가는 순간 그만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와락 그녀를 껴안고 말았다.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기이하게도 지산해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긴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위패와 신위가 내려다 보고 있는 빈소에서 껴안고 뒹굴고 말았다. 새하얀 소복이 금침인 양
마룻바닥에 펼쳐졌다. 소복 위에 고스란히 드러난 여체는 소복보다 더 희었으며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의 불륜(不倫)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억제할 수 없는 욕망 앞에서 인륜이나 규범은 힘없이 무너지고
오랫동안 남성을 접하지 못했던 지산해의 육체는 뜨겁게 타올랐다. 반면 금기를 범하는 당수문의 욕망은 한 번
문을 넘은 이상 걷잡을 수 없이 비등해 버렸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러 차례 만나 불륜을 지속했다. 그것은 벌써 일 년 가까이 된
일이었다.
당수문은 활짝 손을 벌렸다.
"어서 오시오. 산해."
"흐흑......."
산해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망설이던 끝에 용기를 내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내일이면
당수문은 여옥환과 혼인을 하게 된다.
이제까지는 당수문이 혼자의 몸이었기에 사람들의 눈을 피한 둘만의 시간을 간간이 나눌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런 절박한 기분이 그녀로 하여금 모험을 불사하고 이곳까지 오도록 만든 것이었다.
이십대 미망인의 육체는 난숙했다. 당수문의 품에 안긴 순간 이미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당수문은 그녀의
둔부를 안으며 중얼거렸다.
"잘 왔소. 그렇지 않아도...... 당신 생각이 났었소."
지산해의 한 쪽 다리가 그의 손에 의해 들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당수문의 목을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난...... 난...... 정말 나쁜 계집이에요."
"무슨 소리, 내게 있어서는...... 최고의 여자요. 흐흠......."
당수문은 그녀의 허리를 힘껏 조이며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가 벽 쪽으로 밀어붙인 지산해의 몸은 이미
해파리처럼 휘감기고 있었으며 힘이 가해질 때마다 더욱 부드럽고 끈기있게 그의 욕망을 흡착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껏 많은 여인들을 상대해 보았으나 지산해 만큼 그를 만족시키고 흥분시키는 여인은 없었다. 두 사람은
선 채로 서둘러 서로를 탐닉했다. 산해는 고개를 마구 도리질치면서 달뜬 신음을 발하고 있었다.
"아아 ......전 나쁜 계집이에요."
무서운 욕망이었다. 미망인으로서의 위치나 금기 따위는 이제 그녀의 뇌리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의
소복이 바닥으로 허물벗듯 흘러내려 뽀얀 나신을 절반 이상 노출시키고 있었다.
터질 듯 무르익은 육체였다. 수밀도 같은 유방에 당수문의 얼굴이 달라 붙었다. 그가 힘차게 그녀의 가슴을
애무할 때마다 그녀의 몸은 격렬하게 진동했다.
두 사람의 정사는 숨가쁘게 이어지고 있었다.
내일이면......
내일이면 끝이야.......
그런 생각이 더욱 절박한 의식을 주어 지산해의 몸을 뜨겁게 태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수문이 그녀를 밀어
붙일 때마다 풀어헤쳐진 머리칼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당수문의 입술과 손은 그녀의 몸을 할퀴듯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지산해는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발했다.
이를 아무리 악물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신음은 억제할 수 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아!"
한참 후에야 두 사람은 땀에 젖은 몸을 떨구었다. 지산해는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육체는
도화꽃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
당수문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은 여체였다. 생각 같아서는 영원히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그도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내일부터는 그녀를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른한 기분을 느끼며 침상에 걸터 앉았다.
지산해는 반라의 몸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서슴없이 당수문의 무릎에 앉았다. 당수문은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 입을 맞추었다.
"사랑했었오. 산해."
지산해는 온 몸을 떨면서 그의 품에 안겼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 것이다. 당수문의 그 말 한 마디로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정말 끝인가요?'
절박함이 여인으로 하여금 더욱 타오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당수문의 입술이
그녀의 젖가슴을 훑고 지났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뒤로 활처럼 젖혔다. 기나긴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뒤로 쏟아져 내렸다.
"싫어요, 그런 말......"
당수문의 입술은 젖가슴을 지나 뽀오얀 그녀의 기름진 아랫배로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다. 지산해는 도리질을 하며
다시 뇌까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오늘 만은......"
그때였다.
문득 지산해는 이마에 무엇인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의아하여 눈을 떴다.
"악!"
문득 그녀의 입에서 공포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부드럽고 뜨거웠던 육체가 한 순간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당수문은 느낄 수가 있었다.
"왜 그래?"
그는 입술을 아쉬운 듯 그녀의 아랫배에서 떼며 산해를 보았다.
지산해의 눈은 공포에 질린 채 크게 떠져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천장에 박혀 있었다.
"......?"
그녀의 시선을 따라 천장을 바라보던 당수문은 부르르 떨었다.
천장! 그곳이 갈라지고 있었다. 한 자루의 검날이 삐어져 나와 천장을 일직선으로 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객(刺客)!'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그는 무림의 절정고수였다. 뇌리에 판단이 서는 순간 그의 육체는 즉각 반응했다. 다만
무릎에 올라앉아 있는 지산해가 큰 방해물이었다.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위급한 순간이 목전에 있었다.
결국 그는 한 순간에 차가운 이성으로 돌아왔다. 본래 냉혹한 것이 그의 이성이 아니던가?
그의 손이 섬광처럼 작렬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산해의 풍요로운 둔부를 애무하고 있던 손이 벼락처럼
움직인 것이다.
펑! 하는 폭음과 함께 처절한 여인의 비명이 울렸다.
"아아악!"
지산해의 몸은 그에 의해 허공으로 던져진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정수리에 검이 박혔다. 그녀는 머리에
검이 꽂힌 채 방바닥으로 추락했다.
"죽일 놈!"
곧이어 당수문의 입에서는 차가운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자유로운 몸이 되자 천장을 손바닥을 뻗었다.
파파파파팟......!
놀라운 일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손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천장에는 수십 자루의 철환표(鐵幻慓)
가 빽빽하게 박힌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그의 엄청난 판단착오였다. 자객은 천정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을 느낀 순간 당수문은 등골이 섬뜩해졌다. 그가 막 신형을 팽이처럼 돌리는 순간이었다. 무엇인가 광선이
번쩍하고 시야를 스쳐갔다.
"큭!"
위기를 직감하고 전력으로 신형을 반대 방향으로 틀었으나 그의 오른쪽 어깨가 깨끗이 절단되어 날아갔다. 선렬한
피보라가 어깨죽지로부터 분수처럼 뿜어져 올랐다.
"으으!"
그러나 당수문은 신음을 흘릴 뿐 자세를 가다듬으며 맞은 편 벽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는 벽에 걸린 원통형의
물체를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잡았다.
순간 흐릿한 인영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죽어랏!"
그는 원통 물체를 잡고 인영을 향해 뻗은 후 단추를 눌렀다.
철컥!
쏴아아아!
무수한 독암기가 빗발치듯 날아갔다. 거리는 지척이었고 암기는 섬광같은 속도로 쏘아 나갔다. 과연 인영은
그에게 날아오다가 무수히 암기를 맞고 떨어졌다.
"흐흐흐! 감히 당가의 암기를 당할 자가 어디......."
그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한 벌의 의삼이었다. 바로 그가 벗어놓은
황삼이었던 것이다.
그가 경악하는 순간 한 가닥 싸늘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기억하느냐? 그녀의 나이는 십육 세....... 이름은 백가소......."
번쩍!
섬광이 작렬했다. 그것은 비스듬히 그의 마지막 남은 어깨죽지로 떨어졌다.
"으아악!"
왼팔이 어깨죽지서부터 절단나 떨어졌다. 당수문은 온통 혈인(血人)이 되어 비틀거렸다. 이제 두 팔을 잃은 이상
저항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독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발을 들어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걷어찼다.
슈파악!
한 자루의 강전이 어디서 어떻게 쏘아졌는지 날아갔다. 그러나 상대방은 이미 예상한 듯 장소를 이동한 후였다.
불꽃이 튕기며 벽에 강전이 박혔다. 그것은 남빛이 도는 손가락 길이의 강전이었다.
"목에 손톱 만한 크기의 반점이 있는 아주 예쁜 소녀였지......."
예의 음성과 함께 다시 한 차례 섬광이 그의 눈 앞에서 아래쪽으로 작렬했다.
"크아악"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가 절단되었다. 독각(獨脚)으로는 신형의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당수문은 바닥에 뒹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쪽 다리뿐이었다.
"너희 강호사공자가 실컷 농락하다 버린 소녀는 그 이후...... 사창가에 팔려가 떠돌다가 폐인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살을 하고 말았지......."
"으아악!"
다시 섬광이 번뜩하는 순간 남은 다리마저 사정없이 잘려졌다.
비로소 당수문은 볼 수 있었다. 방 안에는 한 명의 사나이가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철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너, 넌...... 누구냐?"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그로서는 사나이를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사나이가 냉막하게 말했다.
"장천림.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모를 거다. 백가소의 복수를 하러 왔다면 알겠느냐?"
"헉! 그럼...... 네가 바로 상관중도......?"
"그렇다. 그는 첫 번째로 죽었다. 네가 두 번째다."
과연 사나이는 장천림이었다. 그는 화산파 인물의 고유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너희들에게는 한때의 장난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한 소녀의 인생이 망가졌다. 이제 그 대가를 돌려
줄 뿐이다."
그는 철검을 밀었다.
푹.......
섬뜩한 소리와 함께 당수문의 눈알이 부릅떠졌다. 그의 목에 구멍이 뚫려 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당수문의
화려한 일생도 마감되었다.
"......."
장천림은 검을 거두었다. 철검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자 그는 검신을 당수문의 몸에 닦았다. 당수문은 미처
옷을 입지 못했다. 그의 몸 위로 철검이 움직였다.
장천림의 철검이 축 늘어져 있는 당수문의 양물에 닿자 미련없이 그었다.
당수문.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은 것이었다.
이때였다. 밖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렸다.
"천림. 시간이 없다. 빨리 나가자."
그것은 조천백의 음성이었다.
"알았네."
장천림의 신형이 바람처럼 창문을 뚫고 날아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둘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화산파
인물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조천백과 장하영이었다. 두 사람은 장천림의 옷에 튕겨있는 핏방울을 보고 방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장하영이 긴박하게 말했다.
"비명이 들렸으니 곧 벌떼같이 몰려올 걸세. 석회림이 곧 시작할 테니 우리는 그 틈에 빠져 나가야 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콰콰콰...... 쾅! 펑...... 펑펑......!
문득 사방으로부터 폭음이 울리더니 당가보의 여기저기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하핫......! 드디어 시작이군! 저 화약은 앞으로 일향각 내내 터질거야! 나가세!"
장하영의 말에 삼인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날아갔다.
당가보가 사방에서 치솟는 불길을 잡고 간신히 사태를 수습하였을 때는 이미 장천림 일행은 당가보의 이십 리 밖을
달아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화산파의 전령(傳令) 복장을 하고 당가보에 침투했다.
화산파 인물의 옷과 화산파 고유 표식의 청강장검을 빌은 것은 바로 영원루에서 여옥환의 시비들을 녹여버린
조천백과 장하영의 솜씨였다.
그들은 시비들에게 그 물건들을 얻어내 변장을 한 후 급한 소식이 있다는 명분으로 삼엄한 당가의 경비를 뚫고
당수문의 별관까지 침투한 것이었다.
마침 당수문이 지산해와 불륜을 맺고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있어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로 인해 장천림은 생각보다 쉽게 당수문을 죽일 수 있게 된 것이다.

태산 성인봉.
무림총연맹에서는 연일 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흉흉한 무림정세로 인해 무림맹주의 긴급 소집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각 대문파에서는 원로들을 파견하여 총맹에 보냈다. 그들은 연일 대책을 숙의하느라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무우진인(無優眞人).
그는 대무당파(大武當派)의 삼십삼 대 장교진인이다. 또한 현 무림총맹의 맹주이기도 했다. 무림맹의 맹주는 삼
년을 주기로 각 파에서 돌아가며 맡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 권위는 상상 이상으로 일단 명령이 전달되면 각 파는 물론 천하무림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무우진인은 무림령을 발동하여 대책을 숙의했다.
무림은 혼란했다. 그것은 사천당가의 차기 가주였던 당수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어 실종되었다던 상관중이
암장된 시신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려되는 사태는 바로 백색마인에 대한 일이었다. 백색마인은 계속 무림맹의 분타를 무너뜨리며
무림맹의 권위에 명백한 도전을 해오고 있는 것이었다.
백색마인의 무자비한 살수(殺手)는 무림을 온통 공포에 떨게 하고 있었다. 무림총맹에서는 연일 회의를 계속한
끝에 결국 몇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첫째, 흉수는 무림제패의 음모를 꾸미는 자이거나 그 집단이며, 과거 무림맹에 원한을 가진 자일 것이다.
둘째, 현재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한 개 아니면 두 개의 집단이 무림맹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셋째, 흉수의 무공은 극강할 뿐더러 치밀한 두뇌를 지녔을 것이다.
그들이 내린 이 세 가지 결론은 은연중 당수문, 상관중을 살해한 흉수와 무림맹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백색마인이
별개의 조직일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매우 타당한 결론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두 부류의 행적이 전혀 연관성이 없을 뿐더러 시간이나
장소도 크게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무림맹은 그 두 흉수를 잡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한 조직은 소림의 후기지수인 오현상인(吾玄上人)을 필두로 한 것으로,
백색마인에 대한 추적과 척살이 주목적이었다.
오현상인.
그는 나이 불과 삼십 대의 나이였으나 무공은 이미 소림달마비예(少林達磨秘藝)를 통달하여 소림의 태양이라고
불리우는 인물이었다. 그의 배분 또한 높아 소림의 장문인과 동배였다.
한편 상관중, 당수문을 살해한 흉수를 잡기 위한 조직은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무당출신의 백유성이 우두머리가
되어 이끌게 되었다.
백유성 자신이 직접 나서겠노라고 자청하는 등 강한 집념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백유성은 사실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죽은 상관중이나 당수문은 무림맹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해가던 소장파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 두 명이 죽음으로써 소장파의 입김이 점차 흐려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흉수를 빨리 제거하지 못한다면 어렵게 장악한 무림맹에서의 세력기반이 무너질 우려가 있었다.
그는 맹주인 무우진인의 협력을 얻어 흉수를 잡기 위한 정예고수들을 선발했다. 그리고 이번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그의 각오는 사뭇 비장한 것이었다.
바야흐로 무림맹의 분위기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홍무(洪武) 15 년 1 월 1 일.
원단(元旦)을 맞이한 중원 전체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뜬 가운데 하남평원을 혼자 걸어가고 있는 사나이가
있었다.
일신에는 갈색의 무복(武服).
머리에는 어깨까지 덮이는 죽립을 쓰고 있었다. 병기는 휴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죽음을 느끼게 하는
사이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설원(雪原)은 끝이 없었다.
가도가도 끝없는 설원에는 놀랍게도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고 있었다.
분명 사나이는 눈을 밟고 지나갔건만 흔적조차 남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미 전설의 답설무흔(踏雪無
痕)의 경지에 올라있단 말인가?
사나이. 그의 이름은 백리진강이었다.
그는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의 눈 앞 설원의 끝에서는 황혼이 밀려들고 있었다.
서녘을 곱게 물들이며 설원까지도 점차 주황색으로 곱게 채색해 가는 석양빛에 백리진강은 묘한 비련을 맛보고
있었다.
벌겋게 타는 황혼.......
연인(戀人)들이 본다면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말 듯한 색조였으나 그에게는 세상 천지가 온통 피를 뚝뚝
흘리며 젖어들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
문득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전신을 엄습하는 피로감과 고독감 때문이었다.
그는 그만 설원에 드러눕고 만다.
차디찬 눈을 깔고 누우니 혼란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정신이 도리어 상쾌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에 죽립 안의 눈꺼풀은 다시 천 근처럼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깊은
잠이라도 들었으면 싶었다.
처음부터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황궁에 입궁했다.
그가 태태감 등소의 양자로 들어간 것은 애당초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소태감이 되어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은 언젠가 한 사나이로부터 들은 말 때문이었다.
-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히려면 황궁으로 가게.
그는 그 말을 믿었다. 왠지 강한 신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나이의 분위기가 독특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지 않다 해도 당시 그에게는 그 말 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복수를 하기에는 그에게 너무나 모자란 점이 많았다. 중원무림 전체나 다름없는 무림맹을 향한 복수는 그의
능력으로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설사 중도에서 피를 뿌리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는 복수의 칼을 뽑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공을, 그것도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공을 익혀야만 했다. 그래서 택한 황궁이었다.
그는 황궁의 비밀무고에 가공할 무공이 있다고 믿으며 소태감이 된 후로 오직 황궁 비밀무고를 찾는데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무고 속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곳에서 빼내온 영약과 한 권의 마경으로 그는 무공을
완성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무공이면 쉽사리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석 달 여가 지난 지금
그는 수없는 살상을 했다.
그러나 수 없이 많은 문제점들이 현실로 부딪치고 있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모두 죽이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의 원수는 무림맹이었다. 그러나 무림맹에 속한 인물 모두를 죽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백리진강 그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장강십팔채.
진산채.
어부였던 할아버지와 잡부인 아버지....... 그리고 주방 일을 보던 어머니....... 그들 사이의 단란하고
평화로웠던 하루 하루의 일상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작스럽게 들어닥친 무림연합맹의 공격!
할아버지는 그를 안고 등에 창을 맞고 쓰러졌다. 그 싸움은 훗날 백화무림대전이란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무림사에 표기되었으나 어린 소년 백리진강에게는 생애의 처절한 순간일 뿐이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났을 때는 왼뺨에서 피가 쉴 사이 없이 흐르고 있었고 진산채는 불에 탄 잿더미 만이 남아
있었다.
백리진강은 홀로 강호를 주유하면서 세상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왔다. 그리고 이제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런데.......
"후후후....... 후후......."
백리진강의 입에서 지친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은 어느덧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중원은 너무나 넓어....... 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내가 죽이는 자들은 하급의 인물에 불과해....... 후후!
모두 죽이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백리진강은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외롭다는 느낌이 뼈저리게 밀려들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던 그는 흠칫했다.
저 멀리 모닥불로 보이는 불빛이 눈에 띄였던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 불빛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화산(華山).
중원무림의 오대무문의 하나인 화산파는 화산의 주봉(主峯)에 있다. 화산파는 도가(道家)의 문파로 도제(道弟)
와 속제(俗弟)를 두고 있었다.
화산은 고래로 검도(劍道)에 치중하여 무당과 더불어 검법의 쌍벽을 이루는 문파였다.
한 명의 도복을 입은 동자(童子)가 합창 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도관에서 두 마장 가량 떨어져 있는 언덕 너머의 고목나무 아래 초라하게 지어져 있는 한 채의 초막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겉으로 보기에도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두 평 남짓이나 될까? 초막 안에는 한 명의 장발괴인이 벽을 보고 앉아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앉아 있었는지 그의 어깨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으며, 입고 있는 옷도 낡고 헤어져 있었다.
장발 사이로 언뜻 보이는 얼굴은 수염이 온통 덮여 있었으나 그다지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
그는 벽을 보고 있었다.
무심(無心).
허무(虛無).
그의 눈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심지어는 한 점의 생기마저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눈이 얼마나 크나큰 후회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 눈인지를 알 것이다.
그러나 장발괴인은 스스로 그 모든 인고를 감내하고 있었다.
"소사숙님. 정양(鄭陽)입니다."
동자는 문 앞에서 무릎을 끊었다. 그제서야 장발괴인의 무심한 눈이 흔들렸다.
"아직 수련이 끝나지 않았다 일러라."
그는 동자가 온 목적도 묻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는 자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그 말 만을 벌써 삼 년 가까이 하고 돌려 보냈던 것이다.
동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소사숙님. 장문인께서 신부(神符)를 내리셨습니다."
순간 장발괴인의 눈에 한 가닥 갈등이 어렸다. 그는 생각한다.
장문신부를 내리다니.......
그것은 화산의 제자라면 어떠한 경우라도 거역할 수 없는 것이거늘.......
내 아무리 모든 것을 버렸다고는 해도 아직 화산인인 이상에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다. 잠시 후에 가겠다."
동자는 돌아섰다. 돌아서며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화산파제이의 고수. 아니, 지금은 세상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가 화산 제일의 인물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실제 방 안의 인물은 화산의 검법정화를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타고난
자질과 집념으로 그가 보이는 성취는 그야말로 화산이 개파한 이래로 가장 무서운 경지를 쌓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강호사공자의 일원이었다.
무림맹에서도 강호사공자는 미래 무림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화산 제일의 기재이자 강호사공자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었던 소사숙이 아닌가?
그런데 삼 년여 전부터 소사숙은 갑자기 이 초옥에 틀어박혀 폐관에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동자는 왜 소사숙이
이런 고행을 선택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못내 아쉽기만 하였다. 화산의 명예를 빛내줄 인물이 이렇게 썩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한 것이다.
동자가 기껏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그가 비장의 검법을 연구할 지도 모른다는 상상뿐이었다.
장문인실.
화산의 이십삼대 장문인 유운자(儒雲子)는 방금 들어온 사제 천인검객 북리웅풍을 맞이했다.
사제이긴 했으나 그는 북리웅풍을 어떤 면에서는 늘상 어렵게 여기고 있었다. 북리웅풍은 그의 사부이자 전대
장문인이 속계로 입문시키면서 장차 화산을 빛낼 위인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 무공으로만 논한다면 유운자는 북리웅풍을 당할 수 없었다.
유운자는 이 사제를 무척 사랑했다. 그만큼 인격이 출중하다는 뜻도 되었다.
만일 그의 흉금이 이렇듯 넓지 않았다면 그가 화산의 법통을 이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제인 북리웅풍이
사문을 빛내 주었으면 하고 늘 바라고 있었다.
북리웅풍은 깨끗이 목욕을 하고 온 듯 정갈한 모습이었다. 다만 수염을 깎지 않아 얼굴이 온통 수염 투성이였다.
옷은 새로 갈아 입은 듯 검박한 마의였다.
"오서 오게. 사제."
말없이 자리에 앉는 북리웅풍을 보며 유운자는 가슴이 차는 것을 느꼈다.
'사제는 언제 보아도 믿음직스럽군.'
"어떤가? 사제가 얻고자 하는 깨달음은?"
정감있는 질문이었다. 북리웅풍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얻고자 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러니 얻고 말고가 없지요."
"......?"
유운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제까지 사제가 삼 년 가까이 면벽을 한 것이 나름대로 어떤 도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궁금한 것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제. 사실 이 사형은 오래 전부터 사제의 면벽에 관하여 궁금해 했네. 이제는 말해 줄 수 없겠나?"
그러나 북리웅풍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그의 입은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유운자는 사제의 입을 열게 할 자신이 없었다.
"무량수불....... 말하기 싫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네. 하지만 사제, 깨달음이란 인연이 닿아야 하는
법일세. 또 면벽을 통해 얻지 못한다면 무위자연에서 찾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일세. 허허.......
태상노군께서 무의 도를 얻은 것도 바로 자연세계에서 얻으신 것이네."
북리웅풍은 그저 씁씁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무량수불....... 대체 무슨 심사가 있길래......."
유운자는 사제가 몹시 안쓰러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원치 않는 것을 굳이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화제를
돌렸다.
"사실 자네를 부른 것은 세상이 시끄럽기 때문일세."
"......?"
유운자는 품 속에서 어제 저녁 날아온 전서(傳書)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얼마 전 종남의 상관중과 당가의 당수문 소협이 의문의 피살을 당했다네. 그들은 자네와 함께 강호사공자의
서열에 있는 인재들이니 자네가 더 잘 알 것일세."
"......!"
북리웅풍의 안색이 변했다. 유운자는 그의 안색을 살피며 계속 이야기했다.
"게다가 최근 전설의 마공 소수혈옥공(笑手血玉功)을 사용하는 자가 나타나 무림맹의 인물들을 무차별 도살하고
있다네. 그래서 무림맹에서는 맹주의 명이 떨어졌네. 물론 우리 화산에서도 고수들을 파견해 달라는 첩지가
왔네."
유운자는 북리웅풍의 눈빛이 처음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자네가 알다시피 우리쪽에서는 마땅히 파견할 만한 인물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자넬 청한 것일세."
북리웅풍의 입술이 움직였다.
"상관중과 당수문이 피살되었다고......?"
그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그렇네. 실로 애석한 일이지. 자네와 함께 명성을 날리던 기재들인데...... 더욱이 당수문 소협은 본파의
여옥환 사매와 혼인을 올리기 직전에 피살당했다네."
"......!"
북리웅풍은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그는 사매 여옥환이 오래전부터 그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는 여옥환을 맞아들일 자격이 상실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당수문에게
시집가게 된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수문이 피살당했다니.......
유운자는 사제의 반응이 큰 것을 보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사제. 말하기 민망하기는 하나 당수문 소협이 피살당한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네. 특히 그가 죽은
모습은 더욱 더 의혹스런 모습이었다네."
"어떻게...... 죽었습니까?"
처음으로 북리웅풍이 질문을 던졌다. 유운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당소협은 사지가 절단 당한 채 죽었네. 뿐만 아니라 국부가 절단되어 있었네. 혹시...... 짚이는 것이 없나?"
"......!"
북리웅풍은 말이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유운자는 그가 큰 충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묘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유운자는 눈살을 찌푸린 채 계속 이야기했다.
"그 일은 강호를 온통 뒤흔들고 있네. 당소협이 당한 형태로 보아 필시 원한이 있는 자의 소행일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네. 더구나 곤란한 점은...... 강호에서 나쁜 소문이 번지기 시작한 것일세.
"......."
"허허....... 글쎄 강호사공자가 여색을 탐닉하다 모종의 일을 벌렸으며 그때 당한 여인이 복수를 한다는
소문일세. 그래서 당소협의 국부가 응징의 의미로 잘렸다는 것일세. 이런 터무니없는 소문이 어디 있나?"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 사형의 생각으로는 자네가 직접 나서서 그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어떤가 하네."
"......."
"이번 기회에 강호출도를 하는 것이 어떤가?"
유운자의 음성에는 기대가 담겨져 있었다. 그러자 북리웅풍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실망의 빛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유운자에게 애써 가다듬은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준비하겠습니다."
북리웅풍은 그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
유운자는 깜짝 놀랐다. 그가 일어설 때는 거절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승낙을 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유운자는 몹시 기뻤다.
"허허허! 천인검객이 출도하게 되면 무림의 판도가 바뀔 거야. 암, 사제는 우리 화산 제일의 기재가 아닌가?"
유운자는 흐뭇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제 10 장 만남...... 또 하나의 운명(運命)

모닥불을 지피던 사람은 조천백이었다.
그는 갑자기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죽립 갈의인을 보고 놀랐다.
"......!"
설마 눈밖에 없는 이런 허허벌판 한가운데서, 그것도 가족들끼리 다 모여 환담을 나누고 있을 원단의 밤에 사람이
불쑥 나타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조천백이 누구인가?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위인이었다.
그는 한 눈에 상대방, 즉 백리진강이 풍기는 기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곧 사람좋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그렇지 않아도 적적하던 차에 잘 오셨소. 밤 바람이 차니 어서 불가에 앉으시오."
"......."
그러나 백리진강은 선 채 묵묵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특히나 이런 설원 한복판에
불을 지피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죽립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의 눈빛은 섬뜩하리만치 차갑고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조천백 또한 인내가 대단한 위인이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조천백은 사천에서 장천림을 도와 당수문을 척살한 뒤 일행과 헤어졌다. 무림맹의 경계가 너무나 삼엄하여 각자
흩어져 경계망을 벗어나기로 하자는데 합의했던 것이다.
그들은 잠시 경비가 완화되기까지 기다렸다가 화산에서 합류하기로 약정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백리진강을 만나게 되었다.
조천백은 처음 백리진강을 대하는 순간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싸늘한 기운이 피어 오르는 것을 금치 못했다. 다만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 그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중이었다. 여차하면 선공(先功)을 하거나
달아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만큼 백리진강이 풍기는 살기는 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잠시 살기를 띄운 채 그를 쏘아보던 백리진강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
조천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척이나 살기가 짙은 놈이군. 나이는 어린 것 같은데.......'
그러나 그는 더이상 상관 않기로 했다. 지나치게 경계를 하는 것도,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것도 다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타다닥...... 탁!
모닥불 만이 기세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조천백은 갑자기 생각난 듯 품 속에서 건량 꾸러미를 꺼냈다. 그리고 불
위에 올려 굽기 시작했다.
이런 추운 설원의 한복판에서 고기를 굽는 냄새가 나면 아무리 의지가 굳은 사람이라도 허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백리진강은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상대에게 손을 내밀 생각은 죽어도 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러나 코 끝으로 전해지는 고기의 향기는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이 자를 죽이고 먹을까? 하지만 고기 한 점 때문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살인을 밥먹듯이 했다해도 고작 한 점의 고기 때문에 살인을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였다.
"허허허....... 자, 자네도 들게."
조천백은 고기덩어리를 집어 그에게 건넸다. 그는 이미 상대가 몹시 허기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허허허....... 그럼 할 수 없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혼자서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모닥불 사이로 가끔씩 비쳐 보이는 상대방의 죽립 속의 눈빛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 하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 천림, 회림, 하영....... 그들의 눈빛과 같다.'
그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천백도 한 가지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눈빛도
동류의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천백은 품 속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는 술병을 내밀며 말했다.
"독한 죽엽청이오. 한 잔 하면 몸이 풀릴 거요. 허허...... 이것도 사양하겠소?"
그의 음성에는 다분히 비아냥거림이 깃들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리진강의 눈빛이 사나와졌다. 그는 죽립
사이로 그를 노려보았다.
"헛헛! 이 속에 독이라도 들어 있을까봐 그러는 모양이...... 헉!"
조천백은 찬바람을 들이켰다. 어느새 술병이 손에서 떠나 있었다.
술병은 눈 깜깍할 사이에 손을 벗어나 상대방의 손으로 가 있었다. 백리진강은 허공섭물로 술병을 낚아챈 후 병째
입에 대고 단숨에 대여섯 모금을 마셨다.
입에서 병을 떼면서 그는 차갑게 말했다.
"설사 독을 넣었다 해도 겁낼 내가 아니오!"
조천백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느닷없이 대소를 터뜨였다.
"으하하하핫......!"
"......."
갑작스러운 대소에 백리진강은 의혹의 눈을 떴다. 조천백은 대소를 뚝 그치며 술병을 빼앗더니 역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손으로 입가를 쓱 문지르더니 호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보아하니 자네도 쫓기는 몸인 것 같군!"
순간 백리진강의 눈에 살기가 일어났다.
"아아......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네. 나 역시 같은 입장이니까."
"......."
백리진강은 그말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같은 입장.......
그럼 이 작자도 도망자란 말인가?
"그런데 어린 친구, 자네는 강호경험이 너무 미숙하군."
조천백은 술기가 오른 탓인지 말을 놓고 있었다.
"......."
백리진강은 왠지 그가 그다지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쫓기는 사람일수록 더욱 여유를 가져야 하는 법일세. 옷도 깨끗이 하고 동작도 자연스럽게 하여야 한다네.
그래야 주위의 시선을 덜 받거든."
그 말에 백리진강은 자신의 옷을 무심코 내려보았다. 그리고 흠칫했다.
군데군데 검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는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 그가 고개를 들자 코
앞에 불쑥 내밀어지는 것이 있었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고기덩어리였다.
"하하! 배가 고프면 눈빛이 사나워진다네. 이걸 먹고 마음을 느긋하게 하게."
백리진강은 손을 내밀어 고기를 받았다. 왠지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고기를 입에
베어 물었다. 한 점을 뜯어 먹자 얼었던 위장이 녹는 기분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기를 먹는 일에만 몰두했고 조천백 또한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묵묵히
모닥불만 살폈다.
말 없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 간에 친근감이 짙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휘이이이...... 휘이잉......!
설원을 스치는 바람은 점차 살벌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설원 한가운데 모닥불을 마주한 두 사람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시간이 흐를 수록 두 사람 사이의 냉랭했던 기운은 훈훈하게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도동(道童) 정양은 화산을 등지고 떠나가는 소사숙 북리웅풍의 모습을 보고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소사숙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언젠가는 그런 모습이 되리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북리웅풍의
모습은 그가 보기에 당당하고 멋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는 북리웅풍이 항상 애지중지하던 애검(愛劍)을 지니지 않은 것을 보고 급히 달려갔다.
잠시 후 그는 헐레벌떡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소사숙! 소사숙......!"
그가 가슴을 들먹이며 뒤쫓아 오자 북리웅풍은 의아했다. 그리고 곧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정양이 무엇 때문에
쫓아왔는지 알아 차렸기 때문이었다. 정양은 숨을 가다듬지도 못하며 두 손으로 한 자루의 고동색 보검을 받쳐
올렸다.
"이걸...... 하아! 가져가지 않았어요"
그러나 북리웅풍은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다. 정양."
"네? 사숙께서는 강호로 나서는 것이 아닌가요?"
"왜 아니겠느냐?"
"그럼...... 검을 가지고 가시지 않고 어찌......?"
정양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소사숙의 별호는 천인검객이다. 검객이 검을 가지지 않고 강호에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북리웅풍은 담담히 말했다.
"검이 있으나 없으나 검객은 마찬가지다. 손 안에 풀잎 하나만 있어도 검이요, 설사 아무것도 없어도 심검(心
劍)이 있으면 된다."
"......?"
북리웅풍의 말을 정양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멍하니 사숙을 바라볼 뿐이었다.
북리웅풍은 문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검을 도로 내밀며 말했다.
"이걸 너에게 주마. 네가 가져라."
"넷?"
정양은 크게 놀랐다. 그러나 북리웅풍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이어 정양이 보는 앞에서 그는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
정양은 어리둥절한 채 손에 쥐어져 있는 검을 어루만졌다. 그의 가슴은 마구 뛰고 있었다.
그는 벌써부터 사숙의 애검을 얼마나 가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실 그 검이 보검이라서가 아니라 은연중에 검에
어려 있는 사숙의 체취 때문이었다.
정양의 눈동자가 갑자기 빛났다.
'아아! 사숙님께서 나에게 이 검을 하사하신 것은 장차...... 훌륭한 검사(劍士)가 되라는 뜻일 거야!'
정양의 작은 느낌으로 인해 훗날 화산에 일대의 검수가 탄생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검을 선사한
북리웅풍마저 짐작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북리웅풍은 애검을 미련없이 정양에게 넘긴 채 화산을 등지고 강호로 떠났다. 그가 무슨 뜻을 가지고 강호로
들어섰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오직 그 혼자 만의 가슴 속에 깊이 묻어진 비밀이었다.

홍무(洪武) 15 년 1 월 15 일.
황성(皇城) 금릉.
동창 본부에서 심기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인물이 있었다.
당금 동창의 대영반이라는 막중한 권력을 지닌 장영걸이었다. 그는 지금 방 안을 오락가락하며 노화를 삭이느라
애쓰고 있었다.
실상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좀체로 화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하영에 대한 소식은 없는가?"
"예. 아직......."
그의 발 아래 부복하고 있는 자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닥쳐라! 이 밥버러지같은 놈들!"
"죄, 죄송합니다."
"그럼 소수혈옥공을 쓰는 그 꼬마놈의 일은......?"
"그, 그것도 아직......."
순간 장영걸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참을 수 없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차마 수하를 내리치지는
못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수하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는 한숨을 쉬었다.
"휴우....... 왜 이렇게 일이 꼬이나."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가서 금위대장 추성결(秋星潔)을 불러와라."
금위대장(錦衛隊長) 추성결.
그는 어릴 적부터 금의위(錦衣衛)의 무사로 키워진 인물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무장의 기질을 타고난 자로써 그야말로 선천적인 군인이었다. 그는 타협이 없고 강직할
뿐더러 상부의 명을 따를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은 위인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천자를 제외하고는 동창 대영반 장영걸을 가장 존경했다. 사실 장영걸은 그의 후견인이었다.
그가 삼십대에 불과한 나이에 벌써 금위대장이라는 높은 직책에 오른 것도 따지고 보면 장영걸의 배경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오늘밤 장영걸이 그에게 내린 명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속명과 같은 것이었다.
- 전 병력을 동원하여서라도 반드시 그 등진강이란 꼬마놈을 잡아라. 반드시 생포할 필요는 없다. 발견 즉시
척살해도 좋다.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 그리고 장하영을 만나게 되면 이렇게 전해라. 즉시 황궁으로 귀환하라고.
이것은 나의 친명이라고 전해라.
추성결은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머리가 나쁜 위인은 아니었다.
그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것은 결코 용맹 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매사에 빈틈이 없고 신중한
위인이었다.
그는 장영걸의 명을 받고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강호(江湖).
그는 강호세계를 잘 알고 있었다. 강호 무림계의 인물들은 관가의 인물들과는 그 부류가 틀렸다. 그들은 천자의
명령조차 우습게 여기는 자들이었다.
또한 강호에 나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강호인과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추성결은 강호에 하나의 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소림(少林)이었다.
그에게는 단 한 명의 인척이 있었다. 그는 전란(戰亂)으로 일가붙이를 모두 잃고 혈혈단신으로 살아 남았다가
소림사에 입문한 사촌 형이었다.
그 사촌 형은 소림사에 입문한 뒤 뛰어난 능력으로 소림의 제일고수가 되었다.
당금 소림의 후기제일인으로 불리우는 오현대사(吾玄大師)가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추성결은 금릉을 떠나기 전 미리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머지 않아 소림사로 전달될 것이다.
그는 행장을 꾸린 후 신임할 만한 측근 수하 단 두 명 만을 대동한 채 눈보라치는 황성을 떠났다.
과연 평생 황성에서만 뿌리를 내렸던 그가 강호에 나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른지....... 그것은 누구도
예측못할 일이리라.
제 11 장 참회객(懺悔客)이라 불러다오

홍무(洪武) 15 년 1 월 19 일.
휘이이이잉!
강상(江上)에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강물은 군데군데 결빙되어 있기도 했으나 그래도 얼음을 깨며 도강하는 선박이 있었다.
"............."
두 사람은 동행이 되었다. 서로가 마음 속으로 비슷한 사람이라 여기는 까닭인지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조천백과 백리진강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걷다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룻터가 가까워진 것이다.
강을 건너려면 배를 이용하는 편이 편리할 것이다. 뜻이 통한 것일까?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란히 나룻터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막 나룻터에 당도한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일곱 명의
무사들이 검을 휘두르며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이름과 출신을 밝혀라! 우리는 당가보의 무사들이다!"
사나운 안광을 번쩍이며 오래 전부터 도강하는 사람들을 심문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당수문이 살해된 이후 부근
수백 리 일대에 쫙 깔린 당가보의 무사들이었다.
"......."
백리진강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죽립 사이로 칼날보다 매서운 살광이 번뜩였다. 여차직하면 살수를 뻗을
자세였다.
그러나 조천백의 반응은 그보다 빨랐다.
"헤헤헤! 나리들. 저희들은 장삿꾼들로 이번에 가는 목적은......."
조천백은 강호 사정에 훤했기에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기고자 했다. 그러나 백리진강이 산통을 깼다.
그는 조천백이 은연중 옷자락을 잡아 당기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잔뜩 굳은 자세로 호전적인 눈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무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수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조천백은 몰라도 죽립을 쓴 백리진강 만은 도저히 상인으로 볼 수 없는 분위기를 노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후후......! 거짓말 마라! 어서 병기를 버리고...... 으아악!"
말을 하던 작자는 가슴에 손자국이 찍힘과 동시에 피를 뿌리며 강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나머지 육인의 무사들은 상황이 급박함을 느끼고 재빨리 검을 휘두르며 공격했다. 그러나 백리진강은 신형을
야차처럼 날렸다.
우우웅!
그의 손바닥이 한 차례 호선을 그리는 순간 손바닥 한가운데서 투명한 빛이 뻗었다. 그 투명함 속에는 언뜻
혈광이 뻗치고 있었다.
조천백은 보았다. 그는 백리진강의 장심 한가운데 혈옥의 반점이 맺힌 것을 보았다. 그는 놀라 내심 부르짖었다.
'저것은...... 전설의 소수혈옥공!'
그가 아찔하여 신형을 흔드는 가운데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으아아악!"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살아있는 자는 없었다. 칠인의 무사들이 모두 시신이 되어 강물에 처박힌 것이었다.
"......!"
조천백은 몸을 으스스 떨었다. 가슴이 마구 진동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 백리진강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죽립 사이로 푸릇푸릇한 살광을 흘린 채 서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나오고 있었다.
조천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이 상황을 본 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그는 재빨리 백리진강의 소매를
잡고 신형을 날렸다.
"가세!"
백리진강은 흠칫했으나 묻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관제묘(關帝廟).
다 낡아빠진 지붕 사이로 드문드문 별빛이 보이고 있었다.
사당 안에는 두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바로 조천백과 백리진강이었다.
조천백은 몇 번이나 뛰쳐나가려는 백리진강을 달래어 간신히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잘못하면 인근에 깔린
무림맹의 고수들에게 협공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는 이미 일대는 물론이려니와 전 중원에 삼엄한 경계망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아무리
백리진강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한 손으로 수 만의 손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
백리진강은 말없이 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천백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가 혹시 근간에 이름을 떨치는 백색마인(百色魔人)이 아닌가......?"
백리진강은 그를 바라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억양없는 음성으로 덧붙였다.
"나는 그런 이름을 가지려 한 적이 없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오."
순간 조천백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맙소사....... 설마 했더니......!"
"왜......? 두렵소?"
백리진강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조천백은 툴툴 웃으며 말했다.
"두렵냐고? 큭큭! 그건 날 모르는 소리야.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귀신이지 자네와 같은 산 사람이 아닐세.
그러나 약간 떨리는 것은 사실이야. 왜냐면 자네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네가 몰고 다니는 혈풍이 두려운
게야."
"......."
조천백. 그의 음성에는 왠지 애잔함이 배어 있었다. 그것을 백리진강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림맹과는 무슨 원한이 있길래 그토록 무차별 살상을 하는 건가?"
"......."
백리진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천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네. 하긴 내가 알아야 무슨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어쩌면 두 놈이 하나같이 같을까."
"......?"
백리진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천백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 인물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신과 같은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 점이 궁금했다. 왠지 마음을 강하게 잡아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의문의 눈으로 조천백을 바라보자 조천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닐세. 내가 아는 어떤 인물이 자네와 비슷해서 하는 말이야. 그 놈도 자네처럼 무서운 적을
두었으면서도 정작 그 이유를 밝히려 들지 않거든......."
백리진강은 눈길을 허공으로 돌렸다. 그는 내심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말이오.......
설마하니 나보다 더하겠소?
그는 문득 몸을 일으켰다. 조천백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어디로 가는가?"
백리진강은 담담히 말했다.
"나 때문에 당신까지 위험할 필요는 없소. 그 동안은 고마웠소. 그럼......."
막 나가려는 백리진강을 조천백이 가로 막았다. 그는 나직히 꾸짖었다.
"왜 이렇게 날뛰나? 지금 자네 혼자 밖으로 나가면 당장 지옥행이야!"
그 말에 백리진강은 코웃음을 쳤다.
"흥! 누가 지옥으로 갈 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오."
"쯧쯧....... 철이 없기는......!"
조천백은 억지로 그를 끌어다 앉혔다.
"무림맹을 얕보는 것은 좋지 않네. 아무리 자네의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목이 열 개가 아닌 이상 신중해야
하네."
기이한 일이었다. 백색마인이 누구인가?
그는 무림의 살인마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조천백에게 살인마로 행세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찌보면 다정한 사형제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천백은 엄숙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복수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네. 물론 자네의 실력이라면 누구와 싸워도 밀리지는
않겠지만 언제까지나 졸개들을 죽이다가 힘을 허비할 수없지 않은가? 한 번 물어봄세. 지금까지 진정한 원수들을
만나보기나 했는가?"
"......."
그 말에 백리진강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이제까지 숱한 무림맹의 졸개들 만을 죽였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아무리 죽여봐도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차라리 무림맹의 요인 하나를 죽이는 것만 같지 않은 것이다.
조천백은 그를 자리에 앉힌 후 차분한 어조로 설득했다.
"이보게. 움직이려면 효과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복수의 대상을 정했다면 차근차근 행동해야 하네.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부터 연구하세."
"......."
"나룻터에서 쓸데없이 살인을 하는 바람에 이 일대는 천라지망이 되어 있을 걸세.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간 뒤
다음 일을 생각해야 하네."
백리진강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네의 무공이나 능력은 나보다 뛰어난 지는 몰라도 강호의 경험에 있어서는 내가 자네의 조상뻘일세. 당분간은
나와 동행하면서 내 말을 듣는 것이 나을 걸세. 허허....... 지금부터 내가 자네의 형(兄)이 되는 걸세.
어떤가?"
"......."
백리진강은 역시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조천백에게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이제까지 혼자서만 해왔던 일들이 그를 만나자 비로소 체계가 잡혀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자, 이제부터는 철저히 나의 명을 따라야 하네. 그런 다음에는 자네 마음대로 하게. 어쨌든 나도 당분간은
자네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게 되었네."
백리진강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고맙소......."
한 마디였으나 그 말 속에는 깊은 감동이 들어 있다는 것을 조천백은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백리진강같은
인간의 심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대협의 살해범으로 보이는 자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백유성은 하마터면 찻잔을 떨굴 뻔 했다.
"어디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그가 있는 곳은 당가보였다. 강호제일검 백유성은 당수문의 살해범을 잡기
위해 임시로 이곳에 추적대의 본부를 설치한 것이다.
사실 그는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강호사공자 가운데 벌써 이인이 죽은 것이다.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당수문의 시신과 상관중의 암장됐던 시신을 관찰한 결과 마음 속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다만 그는 설마설마하고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떠오르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두려움은 더해만 가고 있었다. 그는 내심의 갈등에 휩싸여 그동안 괴로움을 겪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수없이 부인하고 또 부인했지만 마음 속으로 떠오르는 예감은 점점 더 현실감으로 닥쳐오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당수문과 상관중의 살해범을 잡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는 추적대를 구성했으며 전 심력(心
力)을 쏟고 있었다. 당가보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벽에 당가보를 중심으로 한 지도를 걸어놓은 일이었다.
그의 수하들은 당가보 주변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매 시진마다 그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으며 시시각각
그의 지시가 하달되고 있었다.
백유성은 무강의 속가 출신으로 무공은 물론 지략에 있어서 타인의 추종을 불허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볼 때
그는 무공보다 지략으로 더욱 알려져 있었다.
그에게 새제갈(賽諸葛)이란 또 하나의 별호가 있다는 것이 그 사실을 은연중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가 나선 이상 무림맹에서는 조만간에 흉수가 잡힐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백유성은 무림맹의 여망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흉수를 잡아야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오직 그
자신 만이 알고 있었다.
만일 흉수가 그의 짐작대로이며 다른 자의 손에 잡히게 된다면....... 그는 물론 강호사공자의 영명은 완전히
땅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하는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보고했다.
"놈은 무협(巫峽) 부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심문하는 우리측 인원을 일곱 명이나 살해하고 서릉협
부근으로 달아났습니다. 현재 추적중입니다."
백유성의 준미한 눈썹이 꿈틀 일어섰다.
"알았다. 전 병력을 출동시켜라. 그리고 수시로 보고하라."
백유성은 수하가 물러간 뒤 벽으로 다가가 지도에 표시했다. 지도에는 무협과 서릉협을 연결했으며 그 주변 삼백
리 일대에 동그란 원을 그렸다.
그는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일에 자신의 앞날이 걸려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지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두려워한 자는 현 무림에서 북리웅풍 뿐이다. 그런데 그도 출동을 했다고 하는데...... 어째서 소식이
없을까?"
그는 식어빠진 찻잔을 들었다. 문득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후회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 그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을......."
그의 미간은 깊은 골로 패이고 있었다.

장하영은 이미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당수문을 죽인 직후 그들은 각자 헤어졌다. 당가보의 경비가 너무나 삼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작 서릉협까지밖에 오지 못했다.
"벌써 이레째다. 아직도 추적을 떨구지 못했으니......."
그는 잠시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만일 환영팔신이 곁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고전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황궁의 인물이니 이 일에 끌어들일 수는 없지."
그는 잠깐 후회했다.
"그때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곤경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을......."
쓸데없는 일이란 이레 전 산길에서 한 여인을 구한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추적한다는 명분으로 사방으로 퍼져있던 무림맹 산하의 몇몇 하급무사들은 곳곳에서 양민을 괴롭히고 있었다.
개중 몇 놈이 양가집의 아낙을 겁탈하려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뛰어들어 그들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흔적을 남기게 되어 그만 쫓김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비록 그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중얼거렸으나 협의를 생명처럼 여기던 그로서는 차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 해도 역시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행적이 노출되자 불행히도 추적은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더욱이 그는 조천백이나 석회림처럼
변장술이나 은둔술을 익힌 적이 없었다. 따라서 꼬리를 밟히게 되자 여간해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하영은 일부러 길을 우회하고 있었다.
장천림이나 석회림, 조천백 등을 보호하기 위해 무림맹의 추적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가 향하는 곳은 서릉협 쪽이었다. 사실 그 방향은 더욱 위험한 길이었다. 서릉협은 막다른 길이었다.
그러나 그가 믿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는 손을 품 속에 넣어 한 알의 단약을 만졌다.
그것은 독단(毒丹)으로 만일의 경우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즉시 삼킬 작정이었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동료들이
생로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도 가치있는 일이 아닌가?
그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저 놈이다!"
"쳐라!"
슈슈슉---!
돌연 숲 속으로부터 빗발치듯 암기가 쏟아져 나왔다. 장하영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무림맹의 고수들 십여 명이 매복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그의 앞길을 예상하고 포진한 것이었다.
'좋다! 오늘은 살계를 크게 열어볼까?'
장하영은 찬 바람을 한 모금 들이 마신 후 서슴없이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검이 춤을
추었다.
츠파아아아앗!
"으아아악!"
그의 검술은 혈명단에서 바탕이 되어 있는데다 황궁의 비전무학까지 익혀 절륜하기 그지 없었다. 단숨에 십인의
무사들을 해치운 후 다시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몇 마장 가기도 전에 사방으로부터 향전(響箭)이 쏘아지는 것을 느끼며 이미 출로가 막혔음을 느꼈다.
"빌어먹을...... 이곳이 끝인가?"
이젠 더이상 달아날 곳이 없었다. 장하영은 향전이 점차 가깝게 울리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완전히 포위되었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수많은 인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당가보의 인물들은 물론 백색무복을 입은
무림맹 고유의 복장을 한 무사들로 언뜻 보기에도 수백 명 이상이었다.
어느 쪽을 둘러보아도 물 샐 틈없는 포위망이 그물처럼 펼쳐져 있었다.
"빌어먹을......! 많이도 동원되었군!"
그는 수중의 검을 내려다 보았다. 이미 여러 차례의 전투로 인해 이가 빠지고 피가 얼룩져 있었다. 장하영은
쿡쿡 웃음을 흘렸다.
"쿡! 혈명단에서 탈출할 때를 빼고는 처음으로 네가 고생하는구나."
그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 보았다. 수백 명의 무림맹 산하 무사들이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차아아아앗!"
그는 신형을 떠올렸고, 곧이어 검과 몸이 하나가 된 채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천잔구검(天殘九劍)!"
"유성난월(流星亂月)!"
"팔방풍노(八方風努)!"
"지옥파천(地獄破天)!"
번쩍......! 쐐애애애액!
그의 손에서 가공할 검학들이 펼쳐졌다.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수급이 떠오르고 피보라가 일어났다. 장하영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검을 떨치고 있었다.
전신이 피로 젖는 것도, 상대에게서 뿜어져 나온 피보라에 얼굴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는 꿈결같이 몽롱한
기분을 느끼며 싸우고 또 싸웠다.
아니...... 베고...... 또 베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상대방의 인원은 더욱 많아질 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진기가 고갈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점점 검의 위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 각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장하영은 마음 속으로 비장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후! 나 장하영의 생도 여기서 마감을 하는가 보군.'
그런데 이때였다.
퍼엉!
돌연 폭음이 울림과 동시에 사방이 갑자기 자욱한 연막으로 덮이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시야가 자욱한
연막으로 가려져 버렸다.
그것은 장하영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는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으악!"
"아악! 기습이다!"
연막으로 사방의 시야가 차단된 가운데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장하영은 몹시 뜻밖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자신을 도울 원군이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원군이 올 리가 없었다. 어쨌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는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장하영은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을 들으며 옛날 생각에 젖었다. 그것은 혈명단에서 탈출할 때 들었던 함성과
비슷한 것이었다.
동굴 안이었다.
동굴의 입구를 커다란 바위로 막아 놓았으므로 여간해서는 밖에서는 안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
그는 동굴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연이은 전투로 손가락 하나 들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벽에는 화섭자가 희뿌연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 아래 맞은 편에는 자신을 구해준 복면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옷도 피에 젖어 있었다. 그 못지않게 복면인도 악전고투를 치룬 것이었다.
"후후후훗......."
장하영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있었다.
"......?"
복면 사이로 뚫린 정체불명인의 두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궁금한 듯 물었다.
"왜 웃는 것이오?"
그의 질문에 장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후훗!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면 믿겠소? 그런데 대체 당신은 누구요?"
복면인은 고개를 저었다. 기이하게도 그의 눈에는 한 가닥 고통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장하영은 더욱 의문을 느꼈다. 그는 복면인의 무공이 무척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정체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이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혈명단 이후 줄곧
황궁에서만 기거했다. 따라서 강호초출이나 다름없는 몸이었다.
그러므로 강호에서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그를 이유없이, 그것도 생명을 내걸며
도와줄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였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지금 그는 눈 앞에 있는 복면인이 아니었다면
무림맹 산하 고수들에 의해 천참만륙되어 뒹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 이상하군. 날 구한 이유라도 있어야 될 것이 아닌가?'
장하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튼 세상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이런 일도 있을
줄이야.......'
이때 침묵에 잠겨 있던 복면인이 물었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소?"
"물어 보시구료. 후후....... 어쨌든 당신은 이 장하영의 구명은인이니 내가 아는 것은 모두 대답하겠소."
복면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당신이 상관중과 당수문을 죽였소?"
장하영은 흠칫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소."
"이유는?"
복면인의 음성이 나직하게 떨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하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오."
"모른다니........?"
복면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장하영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훗! 왜냐면 내 친구의 일이기 때문이오. 나는 그 친구에게 빚진 것이 있어 그를 도왔을 뿐이오."
그 말에 복면인은 몸을 떨었다.
"친구? 그럼 그가 무엇 때문에 당수문과 상관중을 죽였는지도 모른단 말이오?"
장하영은 복면인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그건 나도 궁금한 점이오. 하지만 그는 얘기하지 않았소. 그가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길래 나 역시 묻지
않았소."
복면인의 눈빛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유도 모르면서 생명을 내건 도박에 뛰어 들었단 말이오?"
"하하하하핫!"
문득 장하영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가 갑자기 웃는 바람에 복면인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장하영은 웃음을 뚝
그치며 말했다.
"이해하지 못하겠소? 그는 나의 친구요."
간단한 말.
장하영의 그 말은 묘한 감동을 주었다. 복면인은 넋을 잃은 듯 잠시 말이 없다가 중얼거렸다.
"친구라......."
침묵.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복면인이었다.
"하긴 나에게도 친구가 있었지. 하지만 그들은......."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장하영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복면인에게 어떤 사연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내겐 구명지은을 베풀었소. 언젠가 은혜를 갚게 될 날이 오기를 바라겠소."
"당신의 친구는...... 진실하오?"
엉뚱한 질문이었다. 장하영은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곧 빙그레 웃었다.
"한 마디만 하겠소. 과거 그는 자신의 생명을 버려가면서 내 퇴로를 열어 주었소.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이 장하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오."
복면인은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면 그는...... 진정한 친구겠군."
"물론이오. 만일 그가 내 목을 원하다면 언제라도 목을 내놓을 용의가 있소."
"당신들은 행복하군."
복면인의 음성에는 회한이 묻어 있었다. 장하영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 자는 친구에게 배신이라도 당했단 말인가? 하긴 그렇다면 최소한 이 자보다 이 장하영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그는 복면인을 바라보다 부언했다.
"내 친구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소. 그러나 한 가지 짐작가는 것은 있었소. 그가 상관중과 당수문을 포함하여
강호사공자를 꼭 죽여야 할 이유는......"
"......!"
복면인은 충격을 받은 듯 진동했다. 그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물었다.
"그의 목표는 강호사공자 전원이오?"
"그렇소."
"왜? 무엇 때문이오?"
"그건...... 확실치는 않지만 한 여인 때문인 것 같았소."
"여인......!"
복면인의 눈이 커다란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혹시...... 그 여자란 백제성 부근에 살던 한 소녀를 말하는 것이 아니오.......?"
장하영은 의아했다. 그는 복면인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글쎄....... 거기까지는 모르겠소."
"......."
복면인은 눈을 감았다. 그의 가슴이 크게 기복을 그리는 것을 장하영은 볼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복면인은 품 속에서 한 장의 인피면구를 꺼내더니 내밀었다.
"이것을 얼굴에 쓰시오."
"......?"
복면인은 자신의 옷을 벗었다. 그는 겉옷 안에 또 한 벌의 옷을 받쳐입고 있었다.
"이 옷으로 갈아 입고 가시오. 그리고 만일 다시 쫓기게 된다면......"
복면인은 소매 속에서 영패 하나를 꺼냈다.
"이것을 보이시오. 그러면 위기를 몇 번은 넘길 수 있을 것이오."
"......?"
장하영은 더욱 의혹을 금치 못했다. 복면인이 준 영패를 본 순간 그는 더욱 놀랐다. 그것은 무림맹 내에서
중요한 신분을 가진 자 만이 소지할 수 있는 영패였던 것이다. 이런 것을 그가 어떻게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지
장하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쨌든 살고 볼 일이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고맙소. 친구.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겠소? 나 장하영은 빚을 지고는 살지 못하는 사람이오."
그러나 복면인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굳이 알고 싶다면...... 참회객(懺悔客)이라고 불러 주시오."
"참회객?"
장하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복면인, 즉 참회객은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장하영이 벗어놓은 옷을
걸쳤다.
"아니 뭐하는 것이오?"
장하영이 놀라 물었으나 참회객은 그를 향해 포권했다.
"그럼......."
그는 바위를 밀치고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
장하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참회객의 행동은 뻔한 것이었다. 그는 장하영의 옷을 입고 무림맹 고수들을
유인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생명을 내건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생면부지의 그를 위해 그런 모험을 하려는 참회객의 행동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왜?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하려고 하는지 그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때 그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고함과 비명이 들리는 것을 느꼈다.
장하영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휴우.......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군."

개봉(開封)을 빠져 나가는 관도(官道).
무사 복장의 인물들이 관도를 오가는 인물들을 일일이 조사하고 있었다.
한결같이 백색무복을 걸친 그들의 복장은 무림맹에 속한 무사들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십인 일조가 되어 날카로운 눈빛을 잠시도 쉬지 않고 행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중원 전역에 이같은 천라지망(天羅之網)이 펼쳐져 있었다. 관도상에는 거미줄같은
감시망이 펼쳐져 있어 무림인으로 보이는 자들은 너나없이 까다로운 조사를 받아야만 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무림은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강호사공자를 살해한 흉수와 백색마인을 척살하기 위한 무림령이 발동한 이후로
모든 것은 변했다.
강호도상에는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고 있었다. 혼자서 길을 가는 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개봉에서 뻗어나온 관도는 이 일대의 유일한 대도였다. 따라서 이곳에는 특히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었다.
문득 한 필의 말이 개봉부 쪽으로부터 달려오더니 멈추었다.
"아무 일도 없었느냐?"
마상의 인물은 사십대의 장한으로 무림맹 개봉지부의 지부장인 철혈객(鐵血客) 종리철(鍾里鐵)이란 자였다.
그는 마상에서 내리지 않은 채 경비하는 무사들에게 물었다.
"네! 별일 없습니다."
무사들은 바짝 긴장하여 대답했다.
"으음.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가 나타나면 놓쳐서는 안 된다."
"예! 염려 마십시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지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다만 조금 전 지나간 송장 한
구를 제외하고는......."
"응? 송장?"
종리철의 눈썹이 솟구쳤다. 그는 눈빛을 빛냈다. 그의 반응에 삼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무사는 급히 말했다.
"예, 염병에 걸려 죽은 시신이었습니다."
종리철은 눈을 번뜩이며 다그쳤다.
"확인해 봤느냐? 관을 열고 말이다."
무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관을 열 것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냥 수레에 거적으로 덮은 것이었으니까요. 거적을 들춰 보았는데 냄새가
어찌나 심하던지....... 전신에 고름투성이었습니다."
그 말에 종리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재차 물었다.
"흠! 운구하는 자는 조사해 보았나?"
종리철은 한 점의 이상이라도 발견하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묻고 있었다.
"네. 칠순도 훨씬 넘어 보이는 할망구였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이 장가도 못가고 죽었다면서 어찌나 구슬피
우는지......."
무사는 동정어린 표정을 지었다.
"음......."
종리철은 신음을 발했다. 그는 무사의 말에 조금도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으나 왠지 알 수 없는 느낌이 뒷머리를
짖누르는 기분이었다.
문득 그는 말채찍을 날리며 호통을 쳤다.
"알았다! 감시의 눈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두두두두---!
그는 이른 아침의 관도를 가로질러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렸다.
"......."
무사는 멍하니 그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리철이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그도 영 기분이 찜찜했던
것이다.
아침 바람이 제법 매섭게 분다.
관도는 텅 비어 있었다. 관도 위를 찌그러진 바퀴를 굴리며 천천히 움직이는 수레가 있었다. 수레 위에는 낡은
거적이 덮여져 있었다.
수레는 한 마리의 소가 끌고 있었는데 소를 모는 것은 칠순이 휠씬 넘어 보이는 노파였다. 눈자위가 짓무를
정도로 늙고 추한 노파로 허리도 잔뜩 구부러져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손도 갈고리처럼 굽고 주름이 져 있었다. 노파는 힘에 겨운 듯 이따금 기침을 하며 소를 몰았다.
기어이 노파는 견디지 못하겠는지 수레를 관도 한 옆으로 세우고 있었다.
"아이고! 이 불쌍한 놈아! 그렇게 가고 싶었던 장가도 못가고 죽다니...... 예끼! 이 괘씸한 놈, 이
불효막심한 놈같으니라구....... 늙은 에미보다 먼저 가는 놈이 어디 있느냐?"
노파의 통성이 관도를 비감하게 울렸다. 그런데 이때 노파의 귓전에 가느다란 전음이 들리고 있었다.
(아니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되오?)
노파는 움찔하더니 입술 안으로 우물거렸다.
(아직 멀었다. 오늘 저녁은 넘겨야 안심할 수 있단 말이야.......)
노파의 음성은 외부로 흘러 나오지 않았다. 전음입밀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거적 안의 인물은 시신이 아니었단
말인가?
거적 안에서 다시 전음이 전해왔다.
(왜 하필이면 염병걸려 죽은 시체 노릇을 시킨단 말이오? 죽어도 곱게 죽은 시신으로 할 것이지.......)
잔뜩 불만스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노파는 주먹으로 거적 위를 때렸다.
(시끄러워! 나는 뭐 좋아서 하는 일인줄 아느냐? 자네야 수레에 누워 편안히 잠이나 자도 되지만 난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냄새나는 할망구 노릇을 하고 있다구.)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두두두두----!
문득 뒤 쪽에서 급촉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왔다. 노파는 흠칫하더니 갑자기 어허엉하고 통곡을 터뜨렸다.
"아이고오오! 이 나쁜 자식아! 늙은이를 두고 먼저 가다니...... 이 나쁜 놈아!"
노파는 두 손으로 거적 위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거적 안에서 비명이 들렸다.
"아얏! 아니, 미쳤소?"
비명은 전음이 아니었다. 그러자 노파는 급히 전음으로 주의를 주었다.
(쉬잇! 또 누가 온다구!)
그제서야 거적은 조용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히히히힝!
힘찬 말울음 소리가 울리더니 먼지가 일어났다. 그러나 노파는 듣지 못한 듯 여전히 통곡을 하고 있었다.
마상 위에는 한 명의 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종리철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미심쩍어 급히 이곳까지 추적해 온 것이었다. 그는 마상에 앉은 채 노파를 뚫어져라 노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변장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사는 안전이 제일이었다. 별안간 그는 말 옆구리에 꽂아두었던 장창(長槍)을 뽑아 들더니 휘익
휘둘렀다.
"아이쿠우우!"
노파는 불시의 기습을 받고 창대에 맞아 저만큼 나가 뒹굴었다. 어찌나 충격이 세었던지 노파는 눈알을
까뒤집으며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
종리철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눈빛이 사나워지는 듯 싶더니 기척도 없이 다시 창을 날렸다.
그는 철저한 위인이었다. 설혹 실수로 양민을 죽이는 한은 있어도 천추의 한을 남길 일은 하지 않는 위인이었다.
'흐흐! 만일 위장했다면 후회할 것이다.'
그는 거적을 향해 창을 내리 꽂았다. 설사 시신을 꿰뚫는 한이 있어도 결코 후회할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푹---!
섬뜩한 소리가 났다. 긴 장창이 거침없이 거적 위를 찌른 것이었다.
"......!"
종리철은 손 끝에 전해지는 둔탁한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 사람을 찌른 감촉이었다. 거적 위로 시커먼
핏물이 번져 올랐다.
그러나 거적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비명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마침내 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신경과민이었나?'
그는 창을 뽑았다. 창 끝에는 역한 냄새와 함께 피가 묻어나왔다. 그는 창날을 거적에 문질러 닦은 후 미련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두두두두---!
그는 쏜살같이 오던 길로 달아났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길가에 쓰러져 있던 노파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이고오! 어떤 놈이 늙은이를...... 아이구 허리야!"
노파는 다시 수레를 기어 올라가 소를 몰기 시작했다. 수레는 덜컹거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얼마쯤 갔을까?
문득 거적 안 쪽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만일 당신의 말대로 죽은 개 한 마리를 안고 있지 않았더라면 탄로날 뻔 했소. 후후! 당신은 정말 놀라운
사람이오."
"히히! 그래서 다 강호의 경험이 무섭다는 것이야. 그러니 앞으로는 이 형님의 말을 무시하지 말라구."
이 두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관도 위에는 메마른 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덜컹거리며 천천히 굴러가는 마차 외에는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노파와 그가 이끄는 마차는 차츰 개봉성을 뒤로 하고 멀어져가고 있었다.
- 다음 권에 계속 -
강호무정 하권
검궁인 저

제 12 장 파소림초(破少林招)

무림맹 개봉 지단은 한 채의 전장(錢莊)이었다.
외부적으로는 전장이었으나 기실은 무림맹의 지단이었다. 이곳에 삼인이 찾아왔다.
가운데 인물은 삼십대 인물로 자의를 입었으며 허리에는 금도(金刀)를 차고 있었다. 그는 눈빛이 부리부리하고
얼굴은 각이 져 있었으며 눈썹이 짙었다. 양 옆의 두 사람은 그와 비슷한 또래로 수행원인 듯 했다.
그들은 아침 일찍 개봉성에 입성해서 곧장 이곳 전장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삼인이 전장의 문으로 다가가자
누군가 앞을 가로 막았다.
"무슨 일이오?"
앞을 막은 자는 눈빛이 범상치 않은 무사 차림의 사나이였다.
그는 무림맹 산하의 무사로 백색마인을 잡기 위한 특수 조직에 속한 인물이었다.
"안에 소림의 오현대사(吾玄大師)께서 계시다는 말을 들었소만?"
자의인의 음성은 낮았으나 어딘가 위엄이 있었다. 무사는 흠칫하더니 반문했다.
"실례지만 귀하는 어떤 분이신지?"
자의인은 담담히 말했다.
"계시다면 전해 주시오. 추성결(秋星潔)이란 사람이 찾아왔다고 말이오."
"추성결......?"
처음 듣는 이름이었으나 어딘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형님. 오랜만이오."
"아미타불......!"
방 안에 대좌하고 있는 사람은 한 명의 젊은 중과 추성결이었다. 추성결은 방 안에 단정히 앉아 있는 노란 승복을
입은 중을 보는 순간 이미 눈시울이 젖고 있었다.
중은 바로 소림의 후기제일인이라는 오현대사였다.
그의 나이 삼십이 세. 그 나이에 후기제일인이란 소리를 듣는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현대사는 청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눈빛이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우. 정말 오랫만이군. 자네가 황궁의 금위대장이 되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어인 일인가?"
오현과 추성결은 사촌형제였다.
속가 때의 오현대사의 이름은 추성웅(秋星雄)이었다. 그들은 전란(戰亂)중에 원나라 병사들에 의해 가문이
멸화된 이후로 헤어졌었다.
그들 중 하나는 주원장이 이끄는 군대에 가담하여 대명제국 건국의 초석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추성결이었다.
각자 행적도 모른 채 헤어졌던 사촌형제,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깊은 감회에 잠겨 있었다.
추성결은 오현의 손을 덥썩 잡았다.
"형님! 이렇게 훌륭한 모습을 뵈오니 아우의 가슴이 터질 듯 합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오현은 비록 속세 사람은 아니었으나 역시 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맑은 눈에도 눈물이 넘치고 있었다.
이제 그는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무림맹의 막중한 사명을 받고 백색마인을 잡기 위한 특별조직의 영수가 되어
강호에 나온 것이었다. 그의 휘하에는 명령 하나면 움직이는 무림인이 수천이 넘었다.
그래도 혈육지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오현도 추성결의 손을 마주 잡은 채 지난 날의 감회에 젖어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추성결은 황궁에서 나온 이후 곧장 소림사로 찾아 갔다. 그러나 이미 오현은 무림을 어지럽히는 백색마인을 잡기
위한 특별 조직의 영수가 되어 떠난 뒤였다. 그리하여 수소문 끝에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오현에게 자신이 황궁의 특별 명령을 받고 나오게 된 경위를 이야기했다.
오현대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등진강이라고? 그 아이가 그토록 교활하다면 문제가 달라지겠는 걸."
그는 그동안 궁금했던 백색마인의 정체를 추성결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무도 몰랐던 비밀이었다.
그러나 등진강이 황궁에 환관으로 잠입하여 수년 간을 기다린 끝에 영약과 소수마경을 훔쳐 달아난 내막을 듣고는
가슴이 섬뜩함을 금치 못했다.
오현은 소림사를 떠날 당시 백색마인을 제거하는 일에 그다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비록 무림을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는 일대마인이라 해도 그 역시 소림의 제일고수였던 것이다.
마공(魔功)이 아무리 강하다해도 소림의 불문무학에는 전문적으로 마공을 격파하는 선공(禪功)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추성결의 말을 듣고 오현은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백색마인이 단순히 무공만 강하다면 얼마든지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황궁에서의 일을 듣고 보니 내심 두려운 마음까지 일게 되었다.
추성결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서 아우도 대영반의 특명을 받고 나온 것입니다. 놈을 죽이고 마경을 회수해야 하는 것이 이 아우의
임무입니다."
추성결은 검미를 치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아우는 황궁에만 있었기 때문에 강호정세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따라서 이번 일에 형님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아미타불. 잘 왔네. 나 역시 혼자의 힘보다는 아우의 힘이 필요할 것 같네. 우리 손을 잡고 함께 뛰어봄세."
"하하하하! 우리 형제가 손을 잡은 이상 놈은 결코 빠져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아미타불, 나도 그렇게 되길 빌겠네. 어쨌든 놈은 살생을 밥먹듯 하는 악마이니 시간을 끌면 끌수록 무림이
피폐해질 걸세."

개봉에서 낙양(洛陽)을 향해 뻗은 관도를 가로지르던 수레는 방향을 바꾸었다.
북(北)으로 돌린 것이다.
그러나 노파와 거적 속의 가짜 시신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빈 수레만이 덜그럭거리며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노파는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름아닌 조천백이었다. 시신으로 위장하고 있던 자는 백리진강이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고 있었다.
"정말 냄새 때문에 죽을 뻔 했소이다."
조천백은 껄껄 웃었다.
"그러나 한 가지 얻은 것이 있지 않은가?"
"얻은 것이라니?"
백리진강이 의아해 하자 조천백은 실망한 듯이 말했다.
"아니 그러고도 깨달은 것이 없단 말인가? 생각보다 자네는 아둔한 편이군."
그제서야 백리진강은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하긴 그렇소. 강호에서는 무공보다도 당신같은 늙은 너구리가 더욱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하하하하핫핫핫---!"
조천백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네. 역대 무림을 둘러보아도 무공의 일인자가 천하를 지배하지는
못했네. 무공보다는 지략이 우선이네."
"......."
그는 마음이 흐뭇해졌다. 이 며칠 간 그는 백리진강과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느꼈던
살벌함이 많이 둔화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백리진강의 마음은 여전히 북천의 빙동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그것은 백리진강의 마음 속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한(恨)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그 내력을 알 리
없었다.
백리진강에게는 어린 시절 진산채에서 일어났던 일이 너무도 강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동안 고마왔소."
백리진강이 안색을 바꾸며 말하자 조천백은 흠칫했다.
"떠날 생각인가?"
"길이 다르니 헤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하긴 그렇군.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으니 말이야."
조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화산(華山)으로 가 장천림 일행을 만나야 했다. 그는 잠시 백리진강을
바라보더니 손을 잡았다.
"그동안은 즐거웠네. 마치 오래 전에 헤어졌던 아우를 만난 기분이었지.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치든 현명하게
헤쳐나가기를 빌겠네."
"......."
백리진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연다면 자신조차도 어떤 말이 나올지 몰랐다.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돼.......
그는 내심 그렇게 말하며 냉정하게 돌아섰다.
"명심하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되도록이면 힘보다는 머리를 쓰게. 그것이 강호에서 살아가는 요령이니
말이야......."
등 뒤로 호의에 찬 조천백의 말이 들렸다. 백리진강은 그저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떠났다.
조천백.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헤어지는 지금 그는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런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홍무(洪武) 15 년 2 월 25 일.
눈덮인 와호령(臥虎嶺)을 넘는 사나이가 있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산길이었다.
행색으로 보아 그는 사냥꾼 차림이었다. 이미 목적지가 정해진 듯 그는 일직선으로 남하(南下)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장천림이었다. 그는 당가보를 떠난 이후 곧바로 남하하지 않고 섬서(陝西) 쪽으로 우회했다가 다시
장강을 건너 남하했다.
그것은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함이기도 했으나 목적지가 화산(華山)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장강을 건넌 그는 방향을 바꾸어 화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는 무수한 검문을 받았다.
이미 중원 전역에는 무림맹의 인물들이 무수히 퍼져 있었다. 도중에 몇 번의 위기를 만났으나 그때마다 그는
무사히 넘겼다.
그럴 때마다 마음 속으로 장하영이나 석회림, 조천백이 염려되었다. 한편으로 그들도 무사할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들의 능력을 어느 정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
문득 지평선 저쪽에서 한 가닥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연기는 눈덮인 언덕 저편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였다.
연기를 보는 순간 허기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만 하루 반나절 동안 입에 음식물을 댄 적이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잠시 후 그는 연기가 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위험이 수시로 다가오고 있는 싯점에서 배가 고프다는 것은 체력 안배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묵묵히 걸었다.
지금 그는 사냥꾼의 복장을 하고 있으므로 여하한 일이 있어도 위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덕을 넘자 아담한 모옥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사냥꾼이 사는 모옥이었다.
모옥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으니 저곳에 가면 허기를 면할 수 있으리라.
모옥 둘레에는 눈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장천림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모옥으로 다가갔다.
"......!"
문득 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문 앞에 당도한 순간 직감적으로 잘못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모옥에는 예상외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인영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모옥으로부터
풍기는 무형의 기운 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인기척을 느낀 것이었다.
'잘못 왔다.'
그는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나도 늦어 있었다. 그가 주춤하는 순간 모옥의 문이 열린 것이었다.
모옥으로부터 걸어나온 사람은 뜻밖에도 삼십 대의 젊은 중이었다.
파랗게 깎은 청년 중의 머리 위에는 여섯 개의 계인(戒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소림(少林)?'
장천림의 뇌리에 직감적으로 떠오른 것은 이곳이 소림사가 있는 숭산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이때
중은 그를 바라보고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장천림의 반응은 빨랐다. 그는 합장을 하고 먼저 선수를 쳤다.
"아니 이런 산중에 스님께서 웬일로?"
어쩔 수없이 젊은 중은 함께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어인 일로 이곳에 오셨소?"
장천림은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으므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예. 저는 사냥을 하다가 워낙 눈이 많이 쌓여서...... 험, 또 배도 고프고 해서 들른 것입니다요."
그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중은 여전히 의심쩍은 눈으로 그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장천림의
복장은 사냥꾼으로부터 얻어입은 것이었으므로 복장만으로는 아무 것도 알아낼 길이 없었다.
이때였다. 모옥 안으로부터 한 가닥 늙은 음성이 들려왔다.
"정심(鄭深) 사질....... 그 분을 안으로 모시게."
청년 중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옆으로 비켜 장천림에게 길을 터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눈에는
미심쩍은 빛이 가득 남아 있었다.
장천림은 내친 걸음이라 어쩔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모옥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대로 모옥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천장에 매달려 있는 무쇠솥에서는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방 안의 인물들은 도합 일곱 명으로 하나같이 승복을 걸친 중들이었다. 그들 중 한가운데 앉아 있는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승이 일어서며 장천림을 맞이했다.
"아미타불. 어서 오시오, 시주. 노승은 소림의 각현(覺玄)이라고 합니다. 개봉부로 가던 중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는 중이지요."
"아....... 그렇습니까?"
장천림은 황급히 마주 절을 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시주께서는 웬일로 이런 산길을 지나시오?"
한편 장천림은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각현이라면...... 소림 사대금강(四大金剛) 중 복호금강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자는 소림의 장문인과
동배로써 좀체로 강호에 나서지 않는 자인데 어인 일로......?'
장천림은 절로 긴장감을 느꼈다.
그의 짐작은 맞았다. 그들은 백색마인을 잡기 위해 파견된 소림의 후기지수 오현대사를 지원하기 위해 뒤늦게
소림을 출발한 일행이었다. 각현대사는 소림십팔나한 중 여섯 명의 나한승을 대동하고 가는 길이었다.
장천림은 그야말로 호랑이굴 한가운데로 스스로 걸어 들어온 셈이었다. 그는 어이가 없었다.
'하필이며 호굴에 들어오다니.......'
그러나 그럴 수록 침착해야 했다. 장천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야 뭐...... 사냥으로 밥을 먹는 놈이니 그렇다 치고 스님들이야말로 어인 일로 이 험한 곳에 오셨습니까?
이곳은 호환(虎患)이 잦은 곳인데......?"
그의 어리석고 멍청해 보이는 태도에 각현대사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때였다.
"시주! 묻는 말에나 대답하시오!"
옆에 있던 사십대의 중이 소리를 질렀다.
그가 보기에 장천림이 어물쩡 넘어가려는 것이 눈에 거슬린 것이었다. 더욱이 각현대사야말로 소림의 원로가
아닌가?
장천림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무척 위축된 듯이 보였다. 이때 각현대사는 손을 저어 중년의 중을 만류했다. 이어 인자스러운 말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시주. 양해하시오. 사실 우리는 한 악귀나한을 쫓아 이곳을 지나는 길이오. 그래서 전부 신경이
날카로와졌소이다. 그러던중 시주 혼자서 이곳을 지나니 의심스러워 그러는 것이오. 그러니 시주께서는 바른 말을
해주어야 하오."
장천림은 그 말에 더욱 겁을 집어 먹은 표정을 지었다.
"예? 악귀나한이오? 어이쿠! 그럼 악마가 나타났단 말입니까?"
그는 벌벌 떠는 시늉을 했다. 중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연극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겁을 먹고 있는 건지 쉽사리 판단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장천림은
안색이 변하여 항의하듯 말했다.
"아니, 이것 보시오. 스님들! 그럼 내가 악귀라도 된단 말이오? 이런 억울할 데가......."
그는 씨근거리며 돌아섰다.
"이렇게 애매한 의심을 받느니 차라리 밖으로 나가겠소. 원, 허기라도 떼울려고 들어왔더니 별 의심을 다
받는군!"
정말이지 그는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공연히 소림의 승려들과 다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될 수는 없었다.
슉!
일순 파공성과 함께 그는 날카로운 경풍이 등쪽으로 쇄도해 오는 것을 느꼈다.
"억!"
그는 비명을 질렀다. 옆구리가 뜨끔하면서 동시에 손목의 완맥이 갈고리같은 손에 붙잡히고 만 것이었다.
그의 완맥을 움켜쥔 것은 바로 각현대사였다.
언제 신형을 날렸는지, 어떤 금나수를 사용했는지 모를 정도로 빠른 솜씨였다. 그러나 장천림은 일부러 대항하지
않았다.
일순 그는 완맥을 통해 뜨거운 기운이 무섭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이쿠! 뜨거......! 와앗!"
그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비명을 질렀다. 실상 각현대사의 무상금강력(無上金剛力)이
그의 혈맥을 조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천림은 일부러 내공을 운기하지 않고 받아 들였다.
"......."
각현대사는 아무 반응도 느끼지 못하자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놓아 주었다.
"미안하오. 시주. 잠시 시험을 해본 것 뿐이오."
만일 장천림의 내공이 그보다 반 단계만 낮았어도 본신의 기운을 속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천림은
자유자재로 진기를 혈도의 일정한 부위에 몰아넣을 수 있었으므로 감쪽같이 위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천림은 털썩 주저앉으며 진땀을 훔쳤다.
"아이쿠! 무슨 늙은 중의 손힘이 그렇게 세오?"
그 말에 승려들은 모두 분노의 표정을 드러 내었다. 각현대사를 늙은 중이라니......? 그들이 화를 내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각현대사는 손짓으로 제자들을 진정시켰다. 그는 소림의 노승답게 매사에 침착한 편이었다.
"그나저나 시주는 이곳에 자주 오시오?"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슬쩍 물었다. 순간 장천림은 머리를 굴려야 했다. 이곳을 터로 잡은 사냥꾼이 이곳을
다니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이곳은 사냥꾼들의 임시 거처였다. 설사 이곳 사정을 아무렇게나 꾸며 말한다고 해도 잠시 지나던 길인 소림사의
중들이 그 진위를 알 리가 없었다.
"그러문입죠. 이곳은 소인과 동료들이 자주 들리는 곳이오. 허허! 뿐만 아니라 이 집도 직접 만든 것인데
당신들이 차지하고 주인을 박대하니 정말 적반하장도 유분수가 아니오?"
장천림은 자신의 임기응변이 적절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중들의 안색에 난처함이 떠오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세상사에는 왕왕 뜻밖의 변수가 있는 법이다. 그야말로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마침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장년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사냥꾼의 복장을 한 자였다.
그 자는 들어서며 입을 열고 있었다.
"허허......! 오래 기다리셨겠구려. 스님들. 칡뿌리를 좀 구해왔으니 요기거리는 될 것입니다요. 어? 저
사람은 누구요?"
사냥꾼 사내는 장천림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불행히도 그 자야말로 이 임시 모옥의 주인인 토박이 사냥꾼이었다.
'아차!'
장천림은 일이 어그러졌음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었다.
잘못을 느꼈다면 튀는 것이 제일이다.
펑!
그는 창문을 발로 걷어 차면서 밖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잡아라!"
"아미타불......!"
호통과 불호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인영이 어지럽게 밖으로 쏘아 나갔다.
장천림은 전력을 다해 신형을 날렸다. 소림사의 중들과 싸우는 것은 피해야 했다. 중과부적일뿐더러 그들과
싸우다보면 무림맹의 포위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는 산으로 달아났다. 평야보다는 훨씬 몸을 숨기기가 쉬우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틀렸다.
애당초부터 지리를 모르는 것이 탈이었다. 게다가 소림 승려들에게는 안내자가 있었다. 바로 토박이 사냥꾼을
앞세워 마침내 장천림의 퇴로를 차단해버린 것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소림의 나한승들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더이상의 변명은 소용이 없었다. 결국 전투가
벌어졌다.
차차차창------!
퍼엉! 펑!
싸움은 격렬했다. 처음에는 승려들 중 두 명이 나와 장천림을 상대했다. 그들은 장천림을 얕보았던 것이다.
장천림은 시간을 끌면 끌 수록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독한 마음을 먹고 두 명의
젊은 승려를 거꾸러뜨렸다.
"으악!"
두 승려는 그의 장력을 맞고 삼 장이나 날아가 피를 토했다. 그러자 승려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아미타불......! 저 자의 무공은 뛰어나다. 어서 포진하라!"
각현의 말에 네 명의 나한승들이 일제히 달려 들었다. 소림사에는 그 유명한 백팔나한대진(百八羅漢大陣)이 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소나한진(小羅漢陣)을 펼치기도 한다.
소림의 나한진은 무림개사 이래 단 한 번도 격파된 적이 없는 무적의 진법이었다. 무림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소림의 나한진은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왔던 것이다.
우우우웅!
나한진이 펼쳐졌다. 비록 네 명의 나한승과 각현을 포함하여 오인이 펼치는 것이었으나 그 위력은 가공했다.
장천림은 나한진이 펼쳐지자 주변이 동장철담으로 화한 듯 꼼짝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장력을 날렸으나
그때마다 바다에 돌멩이를 던진 듯 흔적도 없이 소멸되는 것 같았다.
"아미타불! 무릎을 꿇어라!"
각현대사가 웅후한 불호를 외우며 선장을 휘둘렀다.
위이이잉!
선장이 막강한 경풍을 동반하며 장천림을 몰아쳤다. 장천림은 젊은 중에게서 빼앗은 계도를 휘둘렀다.
카카캉!
불꽃이 요란하게 튕겼다. 순간 장천림은 손목이 시큰하여 하마터면 계도를 떨굴 뻔했다.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늙은 중의 내력이 어째서 갑자기 두 배 이상 강해진 것일까?'
그는 나한대진의 묘용(妙用)을 알지 못했다. 소림의 나한진이 무적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나한진을
펼칠 때 여러 명의 내공력이 하나로 합쳐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각현대사가 떨친 선장의 힘은 다른 네 명의 중년 승려들의 내공이 합일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장천림은 가슴이 섬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혹감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진기가 고갈되어 당한다.'
그는 본래 소림사와는 원한이 없었다. 따라서 되도록 소림의 중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일이 이쯤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살수를 쓰지 않는 한 나한진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는 찬바람을 한 숨 삼키고는 신형을 팽이처럼
회전시켰다.
도세가 일변했다. 그것은 불귀곡에서 익힌 탈혼도법(奪魂刀法)이었다. 일단 탈혼도법이 전개되자 주변이 온통
가공할 도기(刀氣)로 가득찼다.
쐐애애애액---!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두 명의 승려들이 어깻죽지가 잘려 쓰러졌다. 그렇게 되자 진세가 흐트러졌다. 그는 눈부신
신법으로 좌충우돌하면서 나머지 이인의 혈도를 발로 걷어찼다.
"크윽!"
두 명의 중년 승려들이 거꾸러졌다. 바로 그때였다.
"아미타불......!"
웅후한 불호성이 들리며 각현대사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선장을 갈라쳤다.
위이이이잉!
천지를 진동하는 파공성과 함께 선장이 태산처럼 그를 휘몰아쳤다.
각현대사의 무공은 중년 승려들의 무공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장천림은 계도를 휘둘렀으나 선장의 웅후한 기세에 밀려 뒤로 세 걸음이나 밀려 나갔다. 그 순간 바닥에 쓰러졌던
승려들이 다시 뛰어 일어나며 합세했다.
싸움은 다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장천림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간신히 각현과 두 승려와의 싸움에서 평수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소림의 무학이 왜 무림에서 태산북두로 군림하는지 이번 싸움을 통해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소림이다!'
그는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가혹한 살수를 펼 수도 있었다. 그는 초수가
거듭할수록 소림 무학에서도 헛점이 드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뇌리에는 불귀곡의 비밀무고에 있었던 파소림초(破少林招)라는 무경(武經)에 수록되어 있는 무학이 속속
떠오르고 있었다.
당시 원(元)은 중원의 무림제파를 제압하기 위해 각 파 무학의 장단점을 연구하여 그 파해초식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싸움이 백여 초가 흐르자 마침내 장천림은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위이이잉---!
경력과 회오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그는 유유히 옷자락을 날리며 각현과 나한승의 공격권에서도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외쳤다.
"본의 아니게 여러분께 상처를 입히게 되어 유감이오!"
문득 그는 쌍장을 저었다.
퍼퍼퍼펑---!
연이은 폭음이 울렸다.
"헉......!"
여기저기서 신음과 비명이 울렸다.
소림이 자랑하는 나한진이 마침내 와해되었다.
비록 인원이 완전히 갖추어지지는 않았다해도 단 일인을 상대하면서 나한진이 격파되었다는 사실은 강호를
경동시키고도 남을 사건이었다.
두 명의 중년 승려들은 피를 토하며 날아갔고 각현대사도 가슴에 일 장을 얻어맞고 연달아 뒤로 일곱 걸음이나
밀려나갔다.
장천림은 그 틈을 타 홀연히 신형을 날렸다.
"손에 인정을 두었으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오. 한 마디 한다면 난 당신들이 찾는 악마가 아니오! 물론
믿지 않겠지만......"
장천림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각현대사 일행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
각현대사는 멍하니 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그는 놀라움으로 가슴이 마구 뛰고 있었다.
그의 나이 육십팔 세.
그는 소림에서도 서열이 십위 이내의 고수였으며 평생동안 한 번도 패배해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수십 년만에 강호에 나온 직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무명의 청년에게 패한 것이다.
그 충격은 실로 큰 것이었다. 게다가 소림이 자랑하는 나한진을 펼치고도 참패한 것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는 연신 불호를 외우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자위로 한 가닥 눈물이 흘러 내렸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아아! 노납도 이젠 늙었단 말인가......?'
제 13 장 수중혈전(水中血戰)

홍무(洪武) 15 년 3 월 1 일.
서안(西安).
상관중과 당수문을 살해한 흉수를 찾기 위한 특별조직의 본부는 서안부로 이전해 와 있었다.
서안부의 무림맹 지단.
집무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백유성이었다. 그는 점차 초조해지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직까지도
흉수는 잡히지 않았다.
서릉협에서 한 번 흉수의 꼬리를 잡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자를 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뜻밖의 방해자가
나타나 놓치고 말았다.
완벽하게 포위한 상황에서 정체불명의 복면인이 뛰어들어 그를 구출해간 것이었다.
그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복면인의 정체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봐도 누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자가 벌인 유인작전에 휘말려 엉뚱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종국에는 흉수의 종적을 완전히
놓치고 만 것이었다.
그가 펼쳤던 치밀한 천라지망이 복면괴인에 의해 원점으로 되돌아 가고만 것이었다. 결국 백유성의 자존심은 크게
상했다.
처음 그가 특별조직의 영수를 맡았을 때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이번 사건을 맡음으로써 더욱 명성을 날리게
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일이 갈수록 꼬이는 것이었다. 흉수는 오리무중에 빠져 버렸으며, 얽혀버린 실마리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새제갈이란 별호를 얻을 만큼 두뇌가 뛰어난 그였지만 상대방은 그를 비웃고 있는 듯 했다.
"......."
백유성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의문이 짙어지고 있었다.
대체 누가......?
어떤 자가 상관중과 당수문을 죽인 것일까?
그는 그 점을 알 수가 없었다.
백유성의 앞날은 창창했다. 앞으로 십여 년만 흐른다면 어쩌면 무림맹의 맹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도 않은 먹구름이 그의 신변에 몰려든 것이다.
만일.......
흉수가 노리는 것이 그를 포함한 강호사공자 전체라면......?
그는 그런 가정을 세워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전율과 함께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아니 그 근처까지 가기도 싫은 일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니...... 절대로 그럴 리는 없다!'
그의 상념이 깊어져 갈 때 문득 밖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갈이 오고 있었다.
"낙양 연도에서 흉수로 짐작되는 자를 발견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백유성은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쫓기고 있는 자는 백리진강이었다.
그는 조천백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그와 헤어진 직후 무림맹의 인물들과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비록
마음으로는 조천백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일단 무림맹의 인물들을 보는 순간 눈이 뒤집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되지 않았다. 그는 무림맹의 고수들과 충돌했으며 그들에게 무차별 살수를 펼쳤다. 그의
무공은 강했다. 따라서 수많은 무림맹도들을 살해할 수 있었다.
그러자니 자연 행적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마침내 그는 쫓기게 되었다.
죽이고 또 죽이고......
아무리 죽여도 추적하는 자들의 숫자는 오히려 불어날 뿐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신이 아닌 이상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실상 그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아무리 소수혈옥공이 희대의 마공이라고 해도 혼자의 힘으로 무림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적지 않은
중상을 입었고 공력도 크게 소진되어 있었다.
"와아아......!"
"저쪽이다......!"
사방으로부터 그를 쫓는 함성이 마치 산짐승을 모는 몰이꾼들의 함성처럼 들렸다. 백리진강은 이를 갈고 있었다.
'죽일 놈들......!'
생각 같아서는 되돌아가 닥치는 대로 쳐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조천백의 말이 떠올라 억지로 참고
있었다.
......살아 있어야만 복수도 할 수 있는 법이라네.
강(江)이 보였다.
그 강은 이수(伊水)였다. 낙양 근역(近域)을 흐르는 이수의 강물은 아직 이른 봄이라서인지 군데군데 얼어
있었다.
백리진강은 강변에 우뚝 선 채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를 향해 날아오는 인영들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는 조직적인 추적을 당하고 있었다.
그를 쫓는 무리들은 바로 백색마인을 척살하기 위해 소림의 후기지수 오현대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정예고수들이었다.
오현대사는 치밀한 조직을 만들어 그를 차츰차츰 조여오고 있었다. 오현대사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무공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병법에도 능했다. 그가 소림의 차기 장문인감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서서히 백리진강의 숨통을 조르는 작전으로 나왔다. 더구나 오현대사가 동원할 수 있는 무림인들은 수천
명이 넘었다.
따라서 그는 굳이 정면대결을 하지 않아도 백색마인을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더구나 오현대사의 작전 뒤에는 또 한 명의 병법 전문가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추성결(秋星潔).
바로 황궁의 금위대장인 그가 병법을 보완해 주고 있었다. 따라서 오현대사가 펼치는 추적방법은 상처입은 늑대와
같은 백리진강을 괴롭히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
이수의 강물을 내려다 보는 백리진강의 눈빛에서는 핏기가 스쳤다. 그는 굴욕감을 느낌고 있었다.
추적대를 피해 강물에 뛰어들면 최소한 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행해온 그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비겁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는 갈등했다.
여기서 몸을 돌려 무림맹의 더러운 작자들을 쳐죽이고 함께 죽느냐, 아니면 강물에 뛰어들어 훗날을
기약하느냐......?
이때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응?'
이수의 얼어붙은 박빙(薄氷)을 깨뜨리며 한 척의 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 배를 본 순간 백리진강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돛에 새겨진 표식은 바로 무림맹의 문양이 아닌가..
양면합공(兩面合攻)!
그는 절벽에 몰린 것이다. 강물로 뛰어들던 아니면 돌아서던 간에 관계없이 그는 양쪽에 적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이제 그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짧은 순간에 결정을 내렸다. 일단 결정을 내리자 이제까지와는 달리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적이 숫적으로 많은 육지보다는 수중전이 나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풍덩!
이수에 뛰어드는 순간 차가운 강물이 전신에 느껴졌다. 그러자 혼미하던 정신이 소스라치게 깨어났다.
'좋다! 어느 쪽이든 죽을 때까지 싸워보자!'
그는 박빙을 부수며 전면을 향해 헤엄쳐 나갔다.
한편, 이수의 강상(江上)에 나타난 선박은 바로 백유성이 지휘하는 조직이었다.
그는 수하들의 보고를 들었을 때 생각했다.
낙양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그리고 개봉부에는 백색마인을 상대하기 위한 소림 오현대사의 조직이
포진하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공(功)을 오현에게 빼앗길 우려가 있었다. 그는 무림맹에서 가장 큰 경쟁 상대가 오현대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현이 흉수를 제압하게 되면 자신의 장래에 큰 지장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낙양으로 달려가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바로 수로(水路)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의 선택은 옳았다. 비록 오현이 줄기차게 추적하여 이수까지 몰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나서기 직전 현장에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크게 실망했다. 처음 수하들의 보고에는 자신이 쫓는 흉수일지 모른다고 했으나 막상 와보니 상대는
백색마인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좋다. 놈을 내 손으로 잡으면 무림맹 내에서 내 지위는 더욱 확고해질 테니까.'
백유성은 출세욕이 강한 위인이었다. 그는 선박의 뱃머리에 우뚝 서서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백리진강이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입가에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예측대로군. 후후! 백색마인, 오늘 뜻밖의 수확이 될 것이다.'
그는 차갑게 명령했다.
"장강십이신(長江十二神)! 그대들에게 대어(大魚)를 낚을 기회가 왔다."
순간 그의 뒤쪽에서 우렁찬 대답이 들리더니 물 속으로 열두 명의 인영이 뛰어들었다.
장강십이신. 그들은 물 속이라면 두려울 게 없다는 수공의 제일인자들이었다. 지난 날 장강을 장악했던 세력은
녹림도(綠林道)의 장강십팔채(長江十八寨)였다.
그러나 사십일백화대전 이후 녹림의 몰락과 함께 장강십팔채도 사라졌다. 그 이후 장강의 이권은 장강십이신에게
넘어갔다.
실상 장강십이신의 무공은 평범했다. 그러나 그것은 땅에서의 일이었다. 일단 그들이 물 속에 있는 한은 천하에
적수가 없다는 것을 모든 무림인들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만큼 수공(水功)에 관한한 그들은 천하무적이었던
것이다.
애당초 백유성은 이수로 행로를 정하면서 장강십이신을 대동했다. 일찌감치 이런 일을 에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보기좋게 적중했다.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 같았다.
'후후! 예감이 좋다. 오늘 이후 이 백유성의 이름은 무림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백색마인(白色魔人).
그가 얼마나 강한 지 모르나 이미 오랜 전투와 추적으로 인해 진력이 고갈되었다는 보고가 들려오고 있었다.
더구나 물로 뛰어 들었다면 장강십이신의 공격을 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백유성은 행운은 자신에게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수의 강물은 얼음처럼 찼다.
이미 많은 상처를 입은 백리진강은 그 점이 차라리 낫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물에 뛰어드는 순간 혼미했던 정신이
번쩍 든 것이었다.
그는 뼈를 에이는 물 속으로 깊이 잠수해 들어갔다. 수면 가까이 헤엄쳐 가면 외부에서 육안으로 발견하게 되고,
자칫하면 궁노수들의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강상에 떠 있는 괴선박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깊이 잠수해 들어갔다. 다행히도 그는 장강십팔채 출신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물에서 살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므로 헤엄에는 자신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숨이 차올라 막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쏴아아!
그는 문득 머리 위로 무겁게 눌러오는 기류를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한 예감에 고개를 돌린 순간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머리 위로 커다란 그물이 덮어 씌어져 오는 것이 아닌가?
'억!'
그는 바짝 긴장하고 손을 저었다.
콰류류류류류......!
손바닥에서 경력이 발출되자 무서운 물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물은 위쪽으로 뒤집혀 날아가고
있었다. 간신히 불의의 기습을 피한 그는 시선을 돌렸다.
이수의 물은 맑았다. 그러나 심저(深低) 쪽에는 탁류가 고여 있었다.
이때 그는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았으나 자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들을 느낄 수 있었다.
'수공에 능한 자들이다.'
그는 위기를 느꼈다. 그는 헤엄을 잘 치는 편이었으나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수공을 익히지는 않았다.
그는 숨이 차올랐다. 위로 부상하여 새로운 공기를 마시지 않는 한은 진기를 이어갈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위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 일이다.
강력한 소용돌이가 다가오더니 우측과 좌측에서 온통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검은 가죽옷을 껴입은 괴인들이
무엇인가를 휘둘러 오는 것이 아닌가?
촤아악!
괴상하게 생긴 병기였다. 그것은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물 속에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쾌속하게 날아왔다.
'분수아미자(分水蛾眉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중공부의 전문가들이다. 으으! 놈들이 수공을 익힌 놈까지 동원할 줄이야!'
그러나 쉽게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쌍장을 좌우로 벌리며 두 발을 움직였다. 그러자 신형이 위로 떠오르며 두
괴인의 분수아미자가 튕겨나갔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다리 아래쪽의 물이 갈라지며 허벅지가 화끈해졌다.
'당했다.'
순식간에 핏물이 안개처럼 자욱히 번지고 있었다. 물 속에서 자상은 치명적이다. 그것은 몸 속의 피가 물 속으로
쾌속하게 빨려나가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리를 통해 체내의 피가 빠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이때 다시 왼쪽으로 두 괴인이 쏘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제 한 모금의 진기 밖에 없었으나 살기를 뿜으며 그들을 향해 부딪쳐 갔다.
양쪽에서 아미자가 날아왔다. 백리진강은 상관하지 않고 쌍장을 뻗었다.
퍽! 퍽!
둔탁한 느낌이 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옆구리와 어깨에 화끈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팔다리를 휘저으며 위로 부상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제히 사방으로부터 공격이 가해져 왔다. 백리진강은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가슴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고 있어 더이상 공격을 받지 않아도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다시 여섯 군데의 상처를 입었다. 그의 몸 주위로는 붉은 안개가 뭉클뭉클 일어나고 있었다. 모두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었다.
실로 가공할 악전(惡戰)이었다.
백리진강이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는 이미 주변의 강물은 온통 핏물로 화해 있는 상태였다.
그가 막 한 모금의 공기를 들이마셨을 때였다.
"후후후! 꽤나 끈질긴 놈이군!"
문득 머리 위쪽에서 차갑고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백리진강은 그를 보았다.
선박 위에 우뚝 서 있는 자는 백색의 무복을 입은 영준한 청년이었다. 그가 막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청년은
검(劍)을 날렸다.
번쩍......!
아찔하고 현란한 느낌이었다. 백리진강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검비도술(馭劍飛刀術)이라는
절정의 검법이었다.
검을 날린 자는 바로 백유성이었다.
그는 수면에 막 떠오른 백리진강을 향해 절정검학을 펼친 것이었다. 백리진강은 급히 수중으로 잠수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크윽!"
그는 등줄기에 화끈한 느낌을 받고 중심을 잃었다. 한 자루의 장검이 등에 깊숙이 박혀 버린 것이었다.
안돼.......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백리진강은 이를 악물고 가물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한편 장강십이신은 그의 손에 모두 죽고 단 두 명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동료들을 잃자 반쯤 미쳐 있었다.
그들이 아귀처럼 백리진강을 향해 달려 들었다. 좌와 우로 다가든 장강십이신은 동귀어진한다는 각오로 아미자와
몸이 하나가 되어 그에게 부딪쳐 왔다.
'헉!'
백리진강은 그들의 아미자를 각각 옆구리와 오른쪽 아랫배에 맞았다.
그러나 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양손을 뻗어 두 사람의 목을 움켜쥔 것이었다.
손 안에서 두 사람의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이 전달되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백리진강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강물은 말없이 흐른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시뻘겋게 변한 수면을 바라보면서 오현대사는 합장했다.
"아미타불....... 이로써 백색악마도 끝이로군......."
그러나 이때 그의 옆에서 날카로운 눈을 번쩍이고 있던 추성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형님. 아직 끝나지 않았소."
"......?"
"놈의 시신을 찾을 때까지는 추적을 중지할 수 없소."
오현대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우, 그 자는 중상을 입었고 장강십이신의 공격을 받았네. 그 아이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해도 신
(神)이 아닌 이상에야 도저히......."
추성결은 단호히 말했다.
"그렇지 않소. 형님."
그는 자신을 따르던 두 명의 수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류로 가자!"
"......."
오현대사는 신형을 날리는 삼인을 바라보며 더욱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제 14 장 백유성(白流星)의 의도(意圖)

홍무(洪武) 15 년 4 월 14 일.
안가점(安家店).
화산에서 십 리쯤 떨어진 작은 시진이었다. 이곳에 네 명의 사나이가 하나둘 모여 들었다.
그들은 하루나 이틀 간격으로 안가점에 당도하였으며, 하나같이 안가점에서 유일한 객점인 십리향(十理香)이란
객점에 투숙했다.
십리향은 한적한 마을의 객점답게 손님이 드물었다. 이들 사인 외에는 고작해야 장사치 몇 명이 손님의 전부였다.
처음에는 사인이 각기 방에 들었으므로 객점 주인은 그들이 한 일행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네 사람은 한 방에 모여 있었다. 네 사람은 서로를 감회깊은 눈으로 마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냥꾼
차림의 사나이였다.
"다행이군.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어서......."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이들이 이토록 생명을 내건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을 꺼내자 삼인의 청년은 한결같이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천림! 이제와서 새삼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리를 진정한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인가?"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다면 네 놈을 친구로 여기지도 않았을 거야!"
"......."
사냥꾼 차림의 청년은 장천림이었다. 그는 머리를 긁었다.
"미안하다. 난 단지......."
"또 그 소리!"
석회림이 그의 어깨를 치며 정색을 했다.
"과거에 네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이제와서 간신히 그 빚을 탕감할 희망에 젖어 있는데
그따위 소리를 하다니 정말 형편없는 친구로군!"
"회림......."
장천림은 특히 석회림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석회림이 어떤 각오로 자신을 돕기 위해
나섰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아파오는 것이었다. 이때 장하영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우리는 무사히 이곳으로 합류했다. 그동안 각자가 겪은 일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 거야. 후후후.......
대단한 소용돌이를 건너왔지."
"......."
그 말에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사실 당가보에서 당수문을 죽인 후 그들은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 각자 길을 따로 잡았다. 그동안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어디 한 두 번이랴.
혈명단 이후로 그들은 또다시 백척간두의 위기 속에 처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도 지긋지긋한 위기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하영의 그 말 한 마디에 삼인은 모두 기분이 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우정과 의리로 뭉친
사나이들인 것이다.
설사 그보다 더한 고생을 한다해도 그들은 한 잔의 술로 모든 것을 껄껄 웃어넘길 그런 위인들이었다.
"자, 이제 모두 무사히 모였으니 세 번째 작전을 진행해야지."
장하영. 그는 매번 작전을 담당했다. 그것은 그의 전문분야였던 것이다.
장천림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화산의 천인검객 북리웅풍은 사실 강호사공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네. 이번 일은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이 될 걸세."
장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는 나름대로 그 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지. 그 결과 역시 사공자
가운데 그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 자가 근 사 년 가깝도록 폐관했다는 것이네."
장천림도 그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백가소를 납치한 사공자 모두 똑같은 위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천인검객이 폐관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궁금한 것은......."
장하영의 시선이 장천림에게로 향해졌다
"과연 그도 꼭 죽여야 할 인간이냐 하는 것이다. 천림. 이젠 우리에게 사공자와 원한을 맺게 된 원인을 이야기해
줄 수 없을까?"
"......!"
장천림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석회림과 조천백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동감이라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모두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장천림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군....... 영원히 말하지 않으려 했었는데......."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스런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 일은 한 명의 천진하고 아름다운 소녀로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당시 나이는 열여섯 살....... 이름은
백가소....... 즐겨 입는 옷은 붉은 장미가 수놓아진 백의였네. 그녀는 세상의 험난함을 모른 채 금문장이란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
장천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장하영을 비롯한 삼인은 침을 삼키며 장천림의 입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결국 장천림은 백가소의 죽음에 관한
일들을 모두 털어 놓았다.
백가소가 실종되었던 일.......
그녀를 찾아 헤매고 다녔던 일들.......
노예상인들을 찾아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일들과.......
천신만고 끝에 그녀를 찾기는 찾았으나 그녀가 마약에 중독되어 폐인이 되어 있었던 일하며.......
그녀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가 행했던 모든 일들........
그러나 결국 그녀가 네 장의 그림을 남기고 목을 매었다는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의 긴 이야기가 끝났다.
"......!"
삼인은 모두 멍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세상에 이렇게 기막힌 일이 있을 수 있다는데 경악하고 있었다. 장천림의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참동안 가슴 한 구석을 칼로 후벼낸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특히 백가소가 네 장의 그림을 남기고 목을 매었다는 말을 했을 때 그들은 주먹을 움켜쥐며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군......."
석회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참......."
조천백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장하영만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미심쩍은 일이 생각나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천림.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있는데......."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말해 보게."
"상관중이나 당수문, 백유성이라면 그런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그들은 위선의 탈을 쓰고 있는
자들이니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북리웅풍이 그들과 함께 일을 저질렀다는 건 어딘가
좀......."
그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이었다.
"내가 알기로 북리웅풍은 사공자 가운데 가장 수양이 깊은 인물이네. 그는 화산파의 속계이면서도 사문의 도계
인물들이 오히려 더 존경을 하고 있네. 평소 그의 언행이나 태도도 정인군자의 자세에서 한 치도 어긋난 적이
없었네.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명예에 먹칠할 그런 조잡하고 더러운 짓을 저질렀을까?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드네."
"......."
좌중의 인물들은 침묵했다. 석회림이나 조천백도 동감이었다. 그들은 북리웅풍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색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위인이었다. 북리웅풍에게 천인검객이라는 별호가 붙은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수양이 깊은 위인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장천림의 얼굴에는 분노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가소가 내게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그녀가 죽기 전에 남긴 그림에는 분명 그 작자의 얼굴도 들어
있었네!"
"......."
삼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죽어버린 소녀. 아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녀가 거짓을 남길 리는 만무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장천림은 차갑게 말했다.
"어쨌든 나는 가소의 죽음을 잊을 수가 없네. 따라서 강호사공자와는 한 하늘을 대할 수 없네!"
"......."
장내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화산파(華山派)는 무당과 더불어 중원 이대검파로 일컬어지는 명문이었으나 그 규모에 있어서는 무당보다 빈약한
감이 있었다.
그것은 화산의 문규가 엄하게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화산문도는 장문인의 윤허를 얻지 않고는 강호로 나갈 수 없었다. 따라서 강호상에서 화산의 영향력은 무당에
비해 위세를 떨칠 수가 없었다.
밤이다.
정양은 내심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소사숙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매일 공양을 해야 하다니.......'
그는 지금 소사숙, 그러니까 천인검객 북리웅풍이 면벽하고 있는 초옥으로 음식을 날라가고 있었다.
이 일은 불과 두어 달 전부터 시작되었으나 그에게는 귀찮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소사숙이 강호로 떠난 후, 무림맹으로부터 한 명의 손님이 찾아 왔었다. 그 자는 은밀히 화산의 장문인을 만나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듯 했다. 그 이후 그 자는 소사숙이 거처하는 초옥에 기거하게 되었다.
그 자가 소사숙의 초옥에 기거하게 된 날 정양은 장문인에게 불려가 이런 말을 들었다.
"...... 잘 들어라, 정양. 네 소사숙이 강호에 나갔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매일
소사숙이 초옥에 머무르는 것처럼 공양을 바치거라."
정양은 장문인이 무엇 때문에 그런 명을 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사실 정양의 머리로 알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일에는 무림맹의 소장파 핵심 인물인 백유성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림맹에서 온 인물은 바로 백유성이 특파한 인물이었다.
백유성은 북리웅풍이 강호로 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북리웅풍은 무림맹에 오지 않았다.
백유성은 마음 속으로 한 가지 의심나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상관중과 당수문을 죽인 흉수가 과연 강호사공자
모두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화산의 북리웅풍을 이용하자는 계책을 떠올린 것이었다.
마침 북리웅풍은 화산을 떠난 상태였다. 그는 수하를 보내 대신 북리웅풍으로 위장케 했다. 그것은 북리웅풍이
아직도 화산에 있는 것으로 위장함으로써 흉수가 화산에 찾아오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정양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소사숙의 거처까지 왔다.
초옥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문은 안으로 잠겨져 있었다. 정양은 다시 내심 투덜거렸다.
'이런 바보같은 일이 어디 있담? 가짜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매일 공양을 바치다니.......'
그러나 지엄한 장문인의 명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사숙. 저녁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의 말투는 자연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초옥 안에서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거기 두고 가거라."
항상 똑같은 말이었다. 정양은 음식을 담은 소반을 마루에 내려 놓고 물러났다. 그리고 종종걸음을 쳤다.
사실 그는 한 시가 아까왔다. 소사숙이 강호로 떠나면서 그의 애검을 선사한 것은 그를 크게 고무시켰다. 아니,
그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된 것이다.
그는 이후로 소사숙을 능가하는 천하제일의 검객이 되리라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 일과를 마친
후에도 열심히 검법을 연마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종종걸음을 치는 것도 검법 연마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초옥을 뒤로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때 어디에선가 낮은 음성이 들렸다.
"음. 이상한 일이군. 저 도동은 북리웅풍을 조금도 존경하지 않는것 같군."
어둠 속.
사인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장천림 일행이었다.
그들은 화산의 경비가 의외로 허술하여 함께 행동을 하게 된 것이었다.
방금 말을 한 것은 장하영이었다. 그의 관찰력은 범인을 초월했다. 그래서 도동 정양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장천림의 마음은 격동으로 온통 들끓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한 마장 밖에 보이는 초옥의 방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손 하나가 뻗어나와 식사를 방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북리웅풍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만일 장하영이 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게 뭐 중요한 일인가? 어쨌든 그 자가 저기 있는 것이 확실한 이상......."
장하영이 그의 입을 막았다.
"아니, 뭔가 수상해. 이미 강호에 소문이 파다한데 어째서 저 자의 주위에는 경비가 없단 말인가? 설마하니
죽음을 앉아서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매사에 치밀한 장하영다운 말이었다. 석회림이나 조천백도 동감이었다.
조천백이 말했다.
"어쩌면 함정이 있는 지도 몰라."
장천림은 차갑게 말했다.
"그런 것을 두려워했다면 나는 이 일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는 앞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잠깐!"
장하영이 그를 만류했으나 장천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초옥으로 걸어갔다. 그의 행동에 장하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우리는 각자 방향을 나누어 경계하세."
그의 말이 떨어지자 석회림과 조천백은 미리 약속한 듯 신형을 날렸다. 그들은 각각 초옥의 사방으로 나누어
매복했다.
한편, 장천림은 초옥 앞에 다달았다. 그의 마음 속은 이미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방문에 비치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이때 그림자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듯 움직임을
정지하고 있었다.
장천림은 방문을 노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북리웅풍. 왜 나서지 않는 거냐? 지옥사자가 너를 방문한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느냐?"
"......."
방 안의 그림자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장천림은 다소 흥분해 있었다.
그는 장하영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장하영은 북리웅풍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기분이 몹시
나빴다. 아울러 명문 출신인 북리웅풍에 대한 반감이 일고 있었다.
"후후! 복리웅풍, 설마 벌써 잊지는 않았겠지? 백가소란 어린 소녀에 대한 일을 말이다. 네가 진정한
사나이라면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장천림은 방문을 노려 보았다.
그러나 기이한 일이었다. 방 안의 그림자는 마치 목각인형이라도 되는 양 처음부터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장천림도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었다.
장하영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미 상관중과 당수문의 죽음으로 인해 강호사공자는 위기를 느끼고 있어야 옳다.
그렇다면 모종의 대비를 할 것이 아닌가?
장천림은 긴장을 느끼며 허리춤의 철검을 손으로 잡았다.
"......."
그의 눈에서 강렬한 광채가 솟는 순간,
번뜩!
그는 전광석화같은 신법으로 쏘아나갔다.
와장창!
방문이 부서지며 검과 몸이 하나가 된 그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편, 멀리서 장하영 등은 그가 방 안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여차하면 구원의 손길을
뻗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 아니......!"
방 안으로부터 장천림의 당혹성이 울렸다. 장하영 등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
방 안에 뛰어든 사인은 어리둥절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방문에 비쳤던 그림자는 놀랍게도 하나의 짚으로 만든 인형(人形)일 뿐이었다. 인형이 불빛에 비쳐 사람의
형태로 보인 것이다.
사인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분명 방 안에서 사람의 음성을 들었고, 또한 식사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목도하지
않았던가?
사인은 한결같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때였다.
"이곳으로 달아났다!"
조천백이 놀라 부르짖었다. 그가 가리킨 곳을 본 삼인은 안색이 변했다.
한 쪽 벽면, 그곳에는 한 장의 족자가 걸려 있던 곳이었다. 조천백이 그곳을 들추자 벽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구멍은 밖을 향해 뚫려 있었다. 방 안에 있던 자는 바로 그 구멍으로 달아난 것이었다.
"......!"
사인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장하영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가 이런 일을 할 리가......"
장천림의 안색이 굳어졌다.
"무슨 뜻인가?"
"이곳에 있던 자는 북리웅풍이 아니야."
장하영이 단정적으로 말하자 그는 의혹의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어째서?"
"그는 아무리 위기에 처했다해도 결코 달아날 위인이 아니다. 더욱이 이렇게 미리 구멍을 파두고 있을 비겁한
위인은 더욱 아니다."
"......."
장천림은 이번에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도 장하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기는 중이었다.
문득 장천림은 신형을 날렸다. 그가 느닷없이 신형을 날리는 바람에 삼인은 흠칫했다.
그러나 곧 서로 눈짓을 주고 받으며 함께 장천림이 날아간 곳으로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장천림은 달빛 아래 검술을 연마하고 있는 한 명의 도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동은 바로 정양이었다.
정양은 검을 곧추 세운 채 서서히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으되 자세는 진중하고 신색이
엄숙하였다.
"야압!"
번쩍!
검광이 달무리를 베어내려는 듯 허공에 줄기줄기 은하의 물결을 이루며 검막을 형성했다.
그 광경을 보고 곁에 있던 장하영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저 아이의 검을 잘 보게. 저 검은 한백(寒白)이라고 하는 명검(名劍)이야. 비록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나 실은
화산의 삼대명검의 하나일세."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저 검이 바로 천인검객 북리웅풍의 애검이라는 사실이야."
"......!"
조천백, 석회림도 이미 근처에 와 있었다. 장하영의 낮은 음성이 이어졌다.
"저 검이 어떻게 저 동자의 손에 있는 지는 몰라도 저것만으로도 이미 이곳에 북리웅풍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
"......."
"가만. 저기 누가 오고 있다."
장하영의 말에 삼인은 숨을 죽였다. 과연 희디흰 도복자락을 날리며 한 명의 노도인이 나타났다.
그러나 정양은 그것도 모르고 한창 검법 연마에 몰두하고 있었다.
도인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입가에 이따금씩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윽고 정양이 땀방울을 훔치고 검법 하나를 다 마치자 도인은 헛기침을 했다.
"험! 정양아. 너의 검도가 많이 늘었구나."
정양은 깜짝 놀라다가 도인을 보고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
"자...... 장문인......! 언제 오셨나요?"
"허허허....... 방금 전에 왔다. 그래, 초옥에 공양은 하고 왔느냐?"
"헹....... 그 가짜 소사숙 말인가요?"
그 말에 도인, 즉 화산 장문인은 정색을 지었다.
"그런 말을 하면 못쓴다."
정양은 불만인 듯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대체 알 수가 없어요. 소사숙께선 화산을 떠나신 지 오래되었는데 무림맹에선 어쩌자고 소사숙의 흉내를 내게
하는 거죠?"
도인은 탄식했다.
"그것은 네 사숙과 함께 이름을 날리고 있는 무당의 백유성 소협의 부탁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알아볼 것이 있어
그런 연극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너는 다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흥......."
정양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자신의 소사숙 외에는 누구도 존경하지 않았다. 도인은 그에게 다가가더니 뭐라고 이야기했다.
정양은 눈을 빛내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말을 들으며 손을 잠시도 쉬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화산 장문인으로부터 어떤 검법의 요결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장천림 일행은 화산을 떠나고 있었다.
달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화산을 뒤로 하고 떠나는 그들의 가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들은 화산 장문인과 정양의 대화를 듣고 여러 가지 의혹에 젖어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로 미루어 볼 때
북리웅풍이 이미 오래전에 화산을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그가 무엇때문에 화산을 떠났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강호에 북리웅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또 한 가지 의문은 가짜 북리웅풍 행세를 한 자는 백유성이 보낸 자였는데 백유성이 무엇때문에 수하로 하여금
그런 연극을 하게 했느냐는 점이었다.
"......."
일행은 어쨌든 화산을 떠나기로 했다.
북리웅풍이 없는 이상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문득 장하영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렇군! 바로 그 때문이었어! 왜 그걸 바로 생각하지 못했을까?"
"......?"
나머지 삼인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장하영은 눈썹을 움직이며 설명했다.
"백유성이란 자는 도대체 상관중과 당수문을 죽인 우리들이 누구일까 궁금했을 거야. 그리고 우리의 목적이
강호사공자 모두를 겨냥한 것인지도 확실히 알고 싶었겠지. 그래서 그는 북리웅풍에게도 우리의 손이 뻗는가를
시험하기로 한 것이다. 만일 이곳에도 손이 뻗치면 목적이 강호사공자에게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고, 더불어 그
이유마저 알게 될 테지. 그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어!"
"......!"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아주 교활한 놈이야. 이번에 그의 수하가 달아났으니 그는 확실히 우리의 목적과 원한의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석회림이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의미가 있고 말고! 병법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한다고 했다. 그 자는 우리의 정체를 알고 싶어했어.
이제 대상을 알고 이유를 안 이상 그는 좀더 유리하게 대처할 자신을 얻을 것이다. 그로 미루어 그 자는 아주
교활하고 치밀한 자임에 틀림없다."
장하영의 말에 세 사람은 침묵했다.
장하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앞으로 부딪치게 될 백유성은 상대하기가 극히 어려운 난적일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들의 가슴은 이내 무거워졌다.
달빛은 숨이 막힐 정도로 밝았다. 그러나 달빛 아래를 걸어가고 있는 사인의 가슴은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했다.

홍무(洪武) 15 년 4 월 16 일
쏴아아.......
물소리가 들린다. 귓전에 찰랑이는 물소리는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오랫동안 그의 귓전에 부딪치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 그는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도 힘에 겨웠으나 초인적인 의지력이
그로 하여금 물가를 향해 기어가도록 만들고 있었다.
장강(長江).
수만 년을 도도하게 흘러내린 장강의 물은 탁하다. 그 탁류가 그의 몸을 흠뻑 적셔 놓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꼬박 이틀 간을 물에 떠밀려 내려온 것이다. 그러고도 죽지 않았다면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전신은 온통 상처 투성이였다. 등에는 부러진 장검이 아직도 박혀 있었으며, 옆구리에는 기이한
모양의 날카로운 병기가 꽂혀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전신에 최소한 열여섯 군데 이상의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그 상처는 물에 불어 흉하게 벌어져 있기까지 했다.
게다가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 이제는 흘러내릴 피가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
"으음......."
신음을 흘리고 있는 소년, 그는 백리진강이었다.
그가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것은 과거 황궁의 비밀창고에서 훔쳐먹은 각종의 영약 덕분이었다. 만일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백리진강은 강가에 드러누운 채 눈을 떴다.
태양(太陽).......
하늘에는 태양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흐려진 망막에 비친 태양은 그저 뿌연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쨌든 태양이 떠 있어 춥지 않아 좋다. 그는 전신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혼미함 속으로 잠겨 들었다.
.......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밤중이었다. 밤이 되자 극심한 추위가 그를 괴롭혔다.
피를 많이 흘린 데다 체력이 극도로 떨어져 추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손가락조차도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미루어 그는 회복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눈을 뜨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암천에는 드문드문 별이 떠 있었다. 그는 생각한다.
별 하나에 한 인간의 운명이 달려 있다면.......
나의 별은 저 중 어느 별일까.
그는 아무리 찾아도 자신의 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득한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별을 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몇 번이나 울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자신이 정했던 별은 어김없이 유성(流星)이 되어
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래.......
애당초 나의 별은 없었던 거야.
훗훗....... 나같은 놈은 애당초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백리진강의 눈은 이슬에 젖었다. 그는 아직 인생을 안다고 할 수 없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고초를 겪었다.
세상은 그에게 있어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고, 인간이란 믿음이 아니고 증오의 대상이며, 미래는 희망이
아니고 파국(破局)일 뿐이었다.
백리진강은 인생을 다분히 염세적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철이 들 때부터 이미
인생의 목적을 복수라는 명제로 정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몽사몽간에 밤하늘의 별이 모두 와르르! 허물어져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허억......!"
그 순간 다시 정신을 잃어 버렸다.
여인의 운명은 기구한 것이었다.
그녀는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죽었고 아홉 살 때는 부친마저 타계했다. 다행한 것은 그나마 집안이
부유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별 고생은 하지 않았다.
그녀를 열한 살 때까지 키운 것은 외조모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외조모는 그녀를 끔찍히도 귀여워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외조모도 곧 돌아가시고 말았다. 고아가 된 그녀는 결국 어머니의 인척인 어떤 집안에 의탁되었다. 그녀의
유산이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접을 받고 자랄 수 있었다.
그런데 불행은 쉬지 않고 그녀를 따라왔다. 그녀의 나이 십삼 세가 되었을 때였다.
한밤중에 그녀의 침실로 들어온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그녀가 이모라고 부르는 여인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고.......
그 바람에 온 집안이 난리가 나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일이 있은 직후 그 집안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술에 취한 사나이가 이모를 구타하고 허구한 날 도박에 미쳐 집을 나가기 일쑤였다.
그나마 그가 집어 가지고 나가는 패물이나 은자는 결국 소녀의 유산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 열네 살이 되었을
때.......
마침내 가산은 완전히 기울어 빚더미에 앉고 말았다. 결국 그로인해 이모는 자살을 하고 말았다.
이모가 죽은 후 여전히 이모부는 그녀를 탐내고 있었다. 아니 노골적으로 소녀를 겁탈하려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어느 날 밤 도망을 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상은 넓었으나 그녀 한 몸이 의지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는 낙양 근교에서 한 불한당을 만나 그때까지 고이 간직해 왔던 순결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그 불한당에게 반 년쯤 잡혀 있다가 마침내 기루(妓樓)로 팔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기녀가 된 그녀는 무척 아름다왔다. 어머니를 닮은 선천적인 미모와 비단결같은 피부가 수많은 사내들을 끓게
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항상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기루에서도 그녀는 얼마 있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칼부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몰래 기루를 도망쳐 나오게
되었다.
하늘도 무심치 않았음인가?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던 그녀는 한 마음씨 착한 젊은 어부(漁夫)를 만나게 되었다.
어부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다.
그녀는 어부와 함께 하면서 비로소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어부의 평범한 아내가 되어
하루하루를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심이었을까? 그녀의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고기잡이를 나갔던 남편이 그만 풍랑에
휩쓸려 실종되어버린 것이었다.
여인의 나이 열여덟 살의 일이었다. 비록 한창의 나이였으나 그녀의 마음은 이미 황혼이었다. 너무나 많은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마음이 늙어 버린 것이다.
그녀의 이름 환사금(幻思琴)이었다.
그녀는 어부를 잃고는 더이상 살아갈 자신을 잃었다. 결국 그녀는 한밤중에 강가로 나왔다.
그래.......
죽자.
이 한 몸 죽고 나면 더이상 괴로운 일은 없을 게 아니냐.
그녀는 별빛이 곱게 부스러지는 밤중에 장강의 언덕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신발을 나란히 강가에 벗어두고
강물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강물에 반쯤 들어갔을 때 그녀는 무엇인가 둥둥 떠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나무토막이려니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죽어가고 있는 한 사내였다.
제 15 장 새 출발(出發)

장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지류 소상천(蘇上川)은 매화림(梅花林)이 있는 작은 동산을 굽이 돌아 흐른다.
매화림 깊숙한 곳에 한 채의 오두막집이 있다. 오두막집의 원래 주인은 ㅈ은 어부와 아름다운 그의 아내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부는 죽고 혼자 몸이 된 그의 아내만 살고 있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이상한 동물이다.
스스로 삶에 회의를 느껴 죽기를 결심한 사람도 타인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는 그의 죽음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발버둥을 치게 되는 것이다.
환사금은 꼬박 칠 주야 간을 한잠도 자지 못했다. 그녀는 물에 빠져 죽으려고 장강에 나갔다가 죽기는커녕 도리어
사경(死境)에 처한 한 명의 소년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년은 너무나 극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환사금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렇게 비참한 인간의 몸을 본 적이
없었다.
천하의 명의라 할지라도 살릴 수 없을 정도로 소년은 중상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환사금은 생애의 마지막 희망을 이 소년에게 걸기로 했다.
그녀는 의술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약을 써야 할 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늘도
감동시킬 정도의 정성뿐이었다.
그녀는 칠 주야 간을 한잠도 자지 않고 소년의 곁에서 간병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팔 일째 되는 날 소년은 눈을 떴다.
"당신은...... 누구요......?"
그 말을 하고 소년은 다시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환사금은 너무나 기뻤다. 어쨌든 정신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죽은 어부 남편이 살아 돌아온 것 만큼이나 그녀를 기쁘게 했다.
환사금은 묘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수없이 망가지고 부서지고 더럽혀졌으되 여전히 미태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녀의 영혼은 여전히 순결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의 미모는 선천적인 것으로 누가 보아도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아름다왔다. 성숙미가 물씬 풍기는 몸매는
남자라면 누구나 침을 살킬 정도로 난숙해 보였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 평밖에 되지 않는 주방에서 향기로운 어죽(漁粥)이 끓고 있었다. 그것은 의식을 되찾은 소년을 위한 것이었다.
매실(梅實)을 넣고 삼(參)도 넣었으며, 연못에 기르던 잉어도 잡아 넣었다.
'이 죽을 마시면 금세 기운을 차릴 거야.'
그녀는 죽을 저으며 내심 기도하듯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
백리진강은 멍하니 여인을 보고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전신에 나있던 상처도 거의 아물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내상(內傷)이 완치되지 않아 진기를 자유롭게 유통시키지 못할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난 것은 모두가
여인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새로 거듭난 인생이었다. 그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삶.......
만일 장강에서 죽었다면 복수든 원한이든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그에게 새롭게 주어진 삶은 완전히
여분의 것이었다.
저 여인은.......
무엇이 저리도 즐거운지 언제나 콧노래를 부르고 있어.
방 안으로 들어서는 여인을 바라보는 백리진강의 눈은 부신듯이 좁혀지고 있었다.
과연 여인은 눈부실 만큼 아름다왔다. 비록 입고 있는 옷은 검박한 마의에 불과하였으나 눈처럼 흰 피부와 새하얀
얼굴은 볼 때마다 눈이 부셨다.
여인은 성숙해 보였으나 나이는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또한 몸매는 난숙하기 그지없었다. 한줌밖에 안 되는
가는 허리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선은 요염한 느낌마저 주었다.
투박한 마의를 뚫고 나올 듯이 육감을 느끼게 하는 가슴이나 날렵한 허리, 둔부의 풍만한 느낌이 이따금
백리진강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곤 했다.
"진강, 이걸 들어보세요. 전에 담그었던 매화주에요."
환사금은 자연스럽게 침상에 걸터 앉으며 술병을 내밀었다.
그녀의 팔뚝은 희었다. 얼음처럼 투명하게 느껴지는 팔뚝은 만지면 묻어날 듯 보드라와 보였다.
"......."
백리진강은 멍청하게 그녀의 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느다란 목의 선은 학의 목처럼 우아했다.
그러나 그 아래로 솟아나 있는 젖가슴의 느낌은 자꾸만 그의 가슴을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매화림의 오두막집에서 자연스럽게 한 달여를 보내게 되었다. 그 사이에 두 사람은 쉽게 친숙해졌다.
환사금은 언제 죽기를 결심했던 여인이었나 싶게 명랑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슬픔을 빨리 잊는 여인이었다.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된데 대해 그녀는 도리어 백리진강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백리진강이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했다. 또 묻지도 않았다. 백리진강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곱고
다정하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순수함이 백리진강에게는 지극히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더럽고 복잡한 세상사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밤이면 환사금은 옥소를 분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그녀가 외로울 때마다 불던 것이다.
삘리리릴...... 삘리리......
그윽한 옥소음이 울릴 때마다 백리진강은 더욱 더 세상사를 잊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서서히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백리진강은 갈등하고 있었다. 그는 몸이 완전히 회복된 후의 일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또다시 강호에 나가 피의 행각을 벌여야 할 지, 아니면 이대로 조용히 묻혀 살아야 될 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갈등은 강호에 대한 염증과 더불어 그에게 새 생명을 준 환사금이란 여인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한
여인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는 환사금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욕망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순수한 마음 때문이었다.
환사금은 참으로 신비한 면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에게서는 따스한 모성애(母性愛)가 느껴졌다. 상처입은
늑대같은 백리진강은 그녀의 곁에 있는 동안 아늑한 휴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곁에있기만 하면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원한도 복수도...... 환사금과 함께 있을 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백리진강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낱낱이 이야기했다. 환사금은 그의 과거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고백했다.
실로 한 여인의 일생치고는 너무나도 불우한 인생이었다. 만일 보통 남자였다면 그녀의 파란만장한 과거사를 듣고
결코 그녀를 아름답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리진강은 달랐다.
그는 환사금이 그보다 더한 인생유전(人生流轉)을 겪었다 할지라도 결코 그녀를 추하거나 더럽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환사금은 영원히 순결한 여인으로 느껴지기만 했다.
사금, 당신은 천사요.
당신은 아무리 시궁창에 버려져 있어도 변함없이 빛을 발하는 진주(眞珠)같은 여인이오.
백리진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환사금을 껴안은 채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달빛이 부서지는 밤이다.
창문을 통해 흘러드는 달빛은 은가루가 되어 오두막집의 방을 화려한 궁전으로 만들고 있었다.
"사금......."
백리진강은 환사금의 이름을 불렀다.
"네?"
환사금은 백리진강의 아물어가는 상처를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내다가 고개를 살풋 들었다. 백리진강은 그녀의
맑은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
"......."
환사금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는 약간 놀란 듯한 눈으로 백리진강을 바라 보았다. 아주 순수한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빛만 본다면 그녀가 많은 남자들을 겪었다는 것을 결코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금."
백리진강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는 손목이었다. 정맥이 비칠 정도의 가냘픈 손목을 잡으며 백리진강은 가슴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만일 당신만 거부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영원히 함께 하고 싶소."
"진강......."
환사금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붉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은 순결한 처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사금."
백리진강은 그녀를 끌어 안았다. 그러자 환사금의 몸이 그의 가슴으로 안겨 들었다. 백리진강은 강하게 그녀를
껴안았다. 그의 벗은 가슴팍에 환사금은 뺨을 대었다.
달빛이 두 남녀를 비추었다.
마침내 그들의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백리진강은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더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그들은 하늘의 은총이 만들어준 달빛만으로도 족했던 것이다.
마침내 환사금의 희디 흰 나신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백리진강도 태초의 나신이 되었다.
그들의 나신이 침상 위에서 하나로 겹쳐지고 있었다.
"아아......."
환사금은 백리진강이 뜨겁게 밀어붙일 때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백리진강이 자신을 취하는 순간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사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착할 곳을 발견하고 있었다.
백리진강은 환사금의 풍요로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처음으로 평온을 느끼며 온 몸이 타오르고 있었다.
환사금의 두 다리가 그의 허리를 감고 작으나 질긴 힘을 보냈을 때...... 그는 화려하게 폭발하고 있었다.
"진강, 너무 욕심 부릴 필요는 없어요. 우리 두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건 오직 사랑뿐이니까요."
백리진강은 떠나기 전 환사금의 가는 허리를 안고 뜨겁게 입을 맞춰 주었다.
그는 고기잡이를 시작한 것이다. 환사금의 전 남편도 어부였듯이, 그도 어부로 나선 것이다. 그물을 들고 집을
나서는 그에게 환사금은 굳이 많은 고기를 잡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리진강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 당신을 먹여살리려면 유능한 어부가 되어야 한다구."
그는 그물을 어깨에 걸치고 집을 나섰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어부가 되다니.......
이 백색마인이 말이야.
그러나 그는 행복했다. 슬며시 고개를 돌리니 환사금이 언덕에 서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불현듯 한 가닥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만일 이 행복이.......
또다시 파괴된다면 나는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백리진강은 언뜻 눈시울이 젖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랑스러운 아내와...... 장차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는 힘껏 손을 번쩍 들어 흔들며 외쳤다.
"사금! 빨리 돌아올께!"

장강 하류를 따라 샅샅이 수색을 하던 추성결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점차 회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당시 놈의 상태로 보아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공연한 헛수고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놈은 교활하고 끈질긴 놈이다. 시신을 발견하기 전에는 결코 죽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는 수하들에게 말했다.
'이 일대를 수소문한다! 최근에 낯선 작자가 살고 있거나 머물렀는지 알아 보아라! 발견 즉시 나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홍무(洪武) 15 년 7 월 2 일.
대륙(大陸)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한 여름의 열기는 대륙 곳곳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사람들은 더위에 지쳐 시원한 그늘을 찾거나 물가에
발을 담그며 땀을 식히는 계절이다.
무림은 이례적으로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림맹을 공포에 떨게 하였던 백색마인이 장강 어귀에서
무림맹의 추적을 받고 장강십이신과 함께 동귀어진했다고 전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그 이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백색마인을 죽인 공(功)은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무당파의 후기지수 백유성에게 돌아갔다. 그로 인해 백유성의
이름은 더욱 크게 떨쳐졌다.
어쨌든 백색마인이 죽은 이후 무림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다만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사람들을 짜증나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혈풍영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한 여름이 깊어가는 지금 더욱 무서운 피비린내를
뿜어낼 징조를 보이고 있는 지도 몰랐다.
내향(內鄕).
하남(河南)과 호북(湖北)의 접경에 위치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시진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철주부(鐵柱府)다. 철주부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곳이 철주산(鐵柱山)기슭에 있기
때문이었다.
철주부의 젊은 주인은 무림인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백도제일검 백유성.
그가 바로 철주부의 젊은 주인인 것이다. 그런데 철주부는 한 달 전부터 요새화되고 있었다. 철주부의 주인은 한
달 전부터 이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사방으로부터 날아드는 전서구를 받고 있었다.
백유성은 아직 무림맹의 특별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아직까지 상관중과 당수문을 살해한 흉수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서안(西安)에 설치했던 조직의 총본부를 자신의 본가(本家)인 철주부로 옮겼다.
요즘 매일같이 날아드는 전서구의 내용은 그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 흉수(凶手)로 보이는 자는 도합 사인입니다. 그들은 무당산(武當山)에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 흉수들은 다시 북상(北上)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시로 변장을 하여 종적을 감추고 있지만 여전히 감시망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계속 그들을 추적 중입니다.
- 흉수의 소재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하남성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 흉수들의 이름이 밝혀졌습니다. 객점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바, 그들의 이름은 장천림(蔣天林), 장하영
(蔣河英), 조천백(朝天白), 석회림(石回林)입니다.
백유성은 차곡차곡 쌓이는 전서구를 모아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그동안 날아든 전서구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 동안의 보고를 종합해 본다면 사인은 자신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화산에서 북리웅풍을 찾지 못하자
일단 무당산으로 갔다.
그렇다면 그들이 노리는 대상은 너무나 분명했다. 바로 백유성 자신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백유성은 확실히 단정할 수 있었다. 사인이 노리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강호사공자 전원인 것이다. 그것은
화산에서 가짜 북리웅풍 행세를 한 부하의 보고로 미루어 볼 때도 분명한 것이었다.
백유성은 자신만만했다. 그는 자신을 노리는 자들의 정체를 파악한 이상 모든 계획을 세울 수가 있었다.
후후......! 이제 너희들을 죽이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
백유성의 입가에는 차디찬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그는 결코 서두들 생각은 없었다. 모든 것을 완벽하고 철두철미하게 마감할 생각이었다. 만에 하나, 실수한다면
도리어 그가 이제까지 쌓은 명예가 땅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두고 봐라. 완벽하게.......
이 백유성이 너희들의 숨통을 조여주마!
난정루(蘭庭樓).
그곳은 내향에서 하나밖에 없는 주루였다.
이곳에서 한 명의 사나이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마의를 입었으며 두 눈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나이는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그는 병기도 휴대하지 않고 있었으나 무림고수라면 그가 절정의 무학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으리라.
천인검객(天忍劍客).
그것은 과거 그의 명호였다. 그는 한 때 강호사공자 중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득히 먼 옛일처럼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이름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의 커다란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하여 수년 간 폐관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를
괴롭히는 죄의식으로부터는 완전히 해방될 수 없었다.
그는 화산 장문인으로부터 상관중과 당수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강호사공자에게 뻗치는 운명의 굴레를 눈치챈 것이었다.
그는 더이상 화산에 머물러 있지 못했다. 운명적인 느낌이 그로 하여금 강호로 내몬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하리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강호로 나온 것이었다.
강호에 나온 그는 마침 쫓기고 있던 장하영을 구했다. 그가 강호사공자 중 두 명을 죽인 흉수의 한 명이라는
사실이 잠시 그로 하여금 번민에 잠기게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장하영을 구했다. 그것이 자신이 저지를 죄의 만분지 일이라도 갚는 길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이후 그는 강호를 떠돌면서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화산을 떠난 그가 곧바로 무림맹으로
가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죄의식은 하나의 굴레처럼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
지금 그는 술잔을 놓고 술잔 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술잔 속에 떠오르는 아득히 먼 과거의 일.......
공포에 질린 한 아름다운 소녀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술잔 속에 떠올라 있었다.
'아아......!'
천인검객 북리웅풍은 내심 비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 번을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그는 술에 만취해 있었다. 강호사공자의 다른 삼공자와 함께 만나 담론을 즐기다 지나치게 과음을 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잃어버릴 지경으로 취했다.
그가 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저질러진 후였다.
시녀로 보이는 한 소녀가 싸늘한 시신이 된 채 방 안에 뒹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또 한 명의 청순한 소녀가
전라의 모습으로 기절해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사공자로부터 번갈아가며 능욕을 당한 것이었다.
술에서 깨어난 사공자는 그같은 사실에 크게 놀랐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져 있었다. 만일 그 사실이 무림에
흘러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두 말할 것도 없이 명문 출신인 강호사공자는 씻을 수 없는 오명(汚名)을 쓴 채 사문은 물론 정파무림에서 영원히
제명(除名)될 것이다.
너무도 큰 일을 저지른 사공자가 한동안 멍해져 있을 때 당수문이 나섰다. 그는 독한 마음으로 살아남은 소녀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녀의 입을 막음으로써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북리웅풍은 당수문을 막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나선 이유는 죄없는 소녀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양심의 소리 때문이었다. 그는 소녀를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이 치밀었다. 소녀는 자신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강호사공자가 이런
추행을 했다는 사실이 강호에 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파멸은 물론 화산파의 명예에도 먹칠을 하는 결과가 빚어질 것이
아닌가? 그는 망설였다. 잠시 그녀를 죽일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천인검객의 양심은 도저히 그녀를 죽일 수 없게 만들었다. 소녀를 안고 달리던 그는 마침 장강의 도선장을
출발하려던 한 척의 선박을 발견했다.
그는 결심을 굳히고 그 선박에 소녀를 태워 버렸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 선박은 일종의 노예선(奴隸船)
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그 배가 노예선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멀리 떠나는 선박을 통해 소녀가 어딘가로 가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했을 뿐이었다.
천인검객 북리웅풍의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화산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날의 악몽을 도통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생애 처음으로 저지른 엄청난 실수였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였다.
마침내 그는 자책에 휩싸여 모든 것을 버리고 폐관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수년 간 흘렀지만....... 그래도 고통과 죄의식은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 한 번의 실수로 그는 인생에서 활기와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물론 천인검객이라는 미명도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대제일의 후기지수라는 칭호조차 싫어졌다.
"......."
북리웅풍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술잔 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술을 시켜놓고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채 술잔을
바라보는 그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가 워낙 뛰어나 아무도 감히 그를 건드리지 않을 뿐이었다. 주루의 자리에 혼자 앉은 채
북리웅풍은 회한에 젖어 있었다.
'아아! 단 한 번의 실수....... 그 일은 날 지옥에 빠지게 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한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문득 계단으로부터 발자국 소리가 울려왔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였다.
북리웅풍은 비로소 생각을 중단하고 고개를 들다가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중이었다.
그러나 그가 놀란 것은 중년의 승려들을 대동한 채 올라오고 있는 한 명의 노승 때문이었다.
'소림의 각현대사와 나한승들이......?'
북리웅풍은 급히 고개를 숙여 버렸다. 소림의 중들이 자신을 알아 볼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그들이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근처에 있는 철주부에 들른 것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음식을 장만하고 있던 환사금은 새로운 인생에 대해 너무도 큰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틀 후면 두 번째 어부 남편인 백리진강이 고기잡이에서 돌아오게 된다. 그동안 그녀는 남편을 위해 부지런히
맛있는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지금 이 순간 또다른 엄청난 불행(不幸)의 먹구름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 시각 오두막집으로 향하는 매화림 사이로 다섯 명의 사나이들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 명은 금의를 입은 청년이었으며 다른 네 명은 험악하게 생긴 장년인들이었다. 그들은 매화림 주위를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허리에 금도(金刀)를 찬 청년은 전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놈은 아직 살아 있었다. 만일 쉽게 포기했더라면 백색마인의 피바람은 또다시 중원을
어지럽혔을 것이다. 후후후! 하지만 이젠 끝이다."
그는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수하들에게 차갑게 말했다.
"놈이 고기잡이 나갔다는 것은 확인했겠지?"
"물론입니다. 마을의 아낙네들에게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이마에 섬뜩한 칼자국이 나 있는 자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좋아. 너희들은 그 계집에게 놈의 상세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확실히 일을 추진해야 한다. 무슨 수를
쓰던 그건 상관않겠다."
그 말에 네 명의 장한은 입가에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을 상상하는지 그들의 눈동자에는 광기에
가까운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흐흐흐....... 염려마십시오. 대인(大人).......
그런 일은 우리들이 전문가니 말이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환사금은 솥뚜껑을 여느라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자니 자연 탐스러운 그녀의 둔부가 쳐들리게 되었다.
그때였다.
"흐흐흐! 제법 쓸만한 엉덩이군!"
"......!"
환사금은 느닷없이 들려온 음침한 웃음소리에 놀라 그만 솥뚜껑을 놓쳤다.
땅!
쇳소리가 울렸으나 그녀는 솥뚜껑을 집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돌아서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누...... 누구세요?"
"누구긴 누구야 ? 네 낭군님들이지."
음침하고 징그러운 음성은 환사금의 전신에 소름이 돋게 했다. 그녀는 주방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네 명의
험상궂은 사나이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칼자국이 얽혀 있고 눈에는 온통 탐욕과 잔혹성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환사금은 심금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어...... 어떻게 오셨나요?"
그녀가 부르르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네 명 중 한 사나이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어떻게 왔느냐고? 몰라서 묻느냐?"
짜악!
흰 빛이 번뜩하는 순간 환사금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부엌에 넘어졌다. 사나이가 다짜고짜로 그녀의 뺨을 친
것이었다.
그녀가 엎어진 곳은 부뚜막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의 상체가 그곳에 엎어지자 사나이는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뒤로 다가왔다.
부욱! 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는 환사금의 치마를 잡아 당겼다. 그러자 치마는 여지없이 뜯겨져 나가고 눈부시게 흰
종아리가 드러나고 말았다.
"아악! 무, 무슨 짓이에요!"
"크크! 무슨 짓이냐고? 두고 보면 안다."
사나이는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다시 손을 놀렸다.
부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속곳마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그러자 달덩이처럼 하얀 환사금의 엉덩이가 환하게 노출되고
말았다. 부뚜막에 엎드린 채 둔부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다.
그 광경은 네 사나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셈이었다. 천성적으로 미인이며 타고난 비단결같은 피부를 지닌
환사금의 속살이 드러나자 네 사나이는 한결같이 음심(淫心)이 치솟은 것이었다.
"흐흐흐! 뜻밖에 괜찮은 계집이군!"
"흐흐......! 이거 횡재했는 걸?"
사나이들은 서로 마주 보며 침을 삼켰다. 그들의 눈은 욕정으로 이글거리며 환사금의 엉덩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악! 제발...... 이러지 마세요!"
환사금은 처절하게 애원하며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사나이가 그녀의 등을 누르고 있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흐흐! 가만히 있어라, 너도 곧 극락에 오르는 맛을 보게 될 테니 말이다."
사나이는 음침하게 말하며 손으로 환사금의 둔부를 슬슬 쓰다듬었다. 환사금은 사나이의 손이 닿자 전신을 부르르
경련했다. 마치 차가운 뱀이 닿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제발...... 아악! 안 돼요!"
환사금은 비명을 질렀다. 사나이가 갑자기 그녀의 엉덩이를 들어 올렸던 것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게 되었다.
제발.......
제발 이러지들 마세요. 어떻게 얻은 행복인데.......
아아! 하늘이시여! 왜 또다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환사금의 눈에는 절망의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그녀는 사나이들이 어떤 짓을 저지르려는지, 그 일이 그녀의 생에
어떤 잔혹한 종말을 가져올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흐흐! 내가 먼저야. 자네들은 좀 기다리라구."
사나이의 음침한 소리가 들렸다. 이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나이가 자신의 하의를 끌러 내리는
소리였다.
"흐으윽! 제발......."
환사금은 오열했다. 갑자기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무엇인가 딱딱한 것이 그녀의 깊숙한 곳으로 무지막지하게 파고 들어왔다. 전혀 준비가 안 된 그녀의 체내를 향해
사내가 우악스럽게 들어온 것이었다.
환사금은 전혀 무방비상태로 그의 모든 것을 받아 들여야 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고통이었다. 이제껏 수없는
남자들을 겪었으면서도....... 그녀는 이토록 무자비한 경우는 당해본 적이 없었다.
"아악...... 악!"
그녀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사나이는 그녀의 머리채를 말고삐인 양 잡아당기면서 계속
밀어 붙이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지옥의 겁화를 능가하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다리가 사나이의 손에 의해 억지로 벌려지고
상반신은 부뚜막에 짓눌린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자세로 당하고 있는지조차 느낄 겨를이 없었다. 너무나 큰 고통이 그녀를 지옥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흐흐흐......! 제법 쓸만한 물건이군 그래."
사나이는 만족을 채운 듯 한참 후에야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나머지 세 명의
사나이들이 차례로 그녀에게 달려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행위는 그때마다 더욱 무자비했다. 환사금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토록 굴욕적으로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요......?
그녀는 하늘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늘을 향해 피를 토하며 항의하고 싶었다.
그녀는 이제 눈물마저 말라 버렸다. 그녀의 손톱은 다 빠지고 있었다. 바닥을 수없이 긁었기 때문이었다.
머리칼도 사나이들의 손길에 반 이상 뽑혀져 나가고 말았다.
마침내 그녀는 혼절을 하고 말았다.

"놈의 상세는 거의 나았답니다."
사나이들은 매화림 한가운데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금의청년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금의청년은 추성결이었다. 그는 보고를 받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보고가 이어졌다.
"외상은 완쾌되었으나 아직 내상은 가라앉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칼자국이 흉하게 나있는 사나이의 얼굴에 흉물스러운 웃음이 어렸다.
"그 계집은 임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임신?"
추성결은 움찔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놈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칼자국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놈은 계집에게 푹 빠져 강호에 나설 생각을 포기하고 이곳에서 영원히 살 생각인
것 같습니다."
"뭣이?"
"흐흐! 하긴 그 정도 계집이라면 놈이 푹 빠질 만도 했습니다. 아무튼 흐흐! 기가 막힌 계집이었습니다.
대장님께서도 한 번 보시면 아마......"
"시끄럽다!"
추성결이 추상같이 호통치는 바람에 칼자국 사나이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수하들이 백리진강의 여인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능히 알 수 있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심문하라고 지시한 것이 자신이었으므로 그는 수하들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만일 여인이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런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놈이 강호계에 나설 생각을 버린 것 같다고......?'
추성결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는 임무 수행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불사하는 사나이였으나 그 말을 듣고는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추성결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그는 독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놈은 너무나 많은 살행을 저질렀다. 지금은 비록 강호에 나갈 뜻이 없다해도 언젠가 다시 나설 지도
모르지 않는가? 더욱이 놈은 소수마공을 익혔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놈을 척살하는 것이다. 결코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된다.'
그는 낮게 깔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언제 돌아온다고 하더냐?"
수하 중 한 명이 공손히 대답했다.
"이틀 후입니다."
추성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럼 계획대로 추진하도록."
그러자 사나이들의 얼굴에 징그러운 웃음이 어렸다. 그들은 적어도 앞으로 이틀 동안에는 즐거운 일을 더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제 16 장 그것은 음모(陰謀)!

각현대사의 방문을 받은 백유성은 짜증이 일고 있었다.
각현대사는 소림의 사대금강승 중 일인이었다. 그의 신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유성은
도무지 그가 달갑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무림맹에서 한 장의 전문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 전문은 바로 무림맹의 총순감인
공손일도가 보낸 것으로 전문의 내용이 그를 몹시 화나게 만든 것이었다.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백색마인을 척살하는 일은 일단락되었으나 상관중, 당수문 소협을 죽인 흉수에 관한 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소. 그 일에 동원된 무림맹의 각 파 고수들을 언제까지나 파견할 수는 없으므로 맹주께서는 조속히
매듭짓기를 바라고 계시오. 그로 인해 맹주께서는 각 파의 의견을 수렴하여 철주부의 인원을 보강하여 빠른 시일
내에 사건을 해결하라고 지시하셨소. 따라서 소림(少林)의 원군을 일차로 보내고 뒤이어 총맹에서 장로급
고수를 파견할 예정이니 차후로는 장로들의 지시를 받기 바라오.>
전문의 내용은 명확한 것이었다.
총순감 공손일도는 백유성으로 하여금 장차 이 일에서 손을 떼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것이었다.
백유성은 무림맹 내에서 소장파의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백색마인을 척살한 공로로 무림에서 더욱 부각되고
있었다. 무림맹에서는 그것을 저어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만일 그가 이번 사건마저 해결한다면 더욱 위치가 공고해질 것이 아닌가. 무림맹에서는 그것을 시기하는 자들이
이 사건에서 그가 손을 떼도록 압력을 넣고 있었다.
따라서 총맹에서 장로급 위인을 파견하려는 것은 지휘권을 백유성에게서 빼앗으려는 의도였다.
따라서 백유성으로서는 각현대사 등이 일차 지원군으로 온다는 사실 자체가 반가울 리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각현대사 일행과 무림맹의 장로가 파견되기 전에 자신이 손으로 사건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사실 그가 더욱 불안한 것은 사인의 흉수가 강호사공자를 노리는 이유였다. 만일 그 사실이 백일하에
밝혀진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이제까지 공들여 쌓았던 탑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었다. 백유성은 내심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으음....... 이렇게 되면 그들이 오기 전에 일을 매듭지어야 한다. 절대로 그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일이 알려지는 것만은.......'
마침내 백유성의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장천림 일행이 철주부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두르지는 않겠다. 놈들은 빠른 시일 내에 나를 찾아올 것이다. 굳이 내가 찾지 않아도 말이다. 나는
그저 앉아서 놈들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물론 이미 만반의 준비는 마쳐 두었다. 그저 놈들이 무모하게
달려들기만 하면 내겐 더욱 좋은 일이고.......'

백유성의 예상은 맞았다.
장천림 일행은 무당산을 떠나 철주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화산에서 허탕을 친 이후 북리웅풍의 행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세 번째 척살 대상을 백유성으로 잡은 것이었다.
그들은 무당산에서도 백유성을 만나지 못한 후 그가 철주부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강호의 소문을 들어 알게
되었다. 그래서 행선지를 철주부로 돌린 것이었다.
그런데 무당산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조천백의 변장술로 그들은 몇 번이나 얼굴을 바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적을 따돌릴 수가 없었다. 그 사실에
장천림 일행은 곤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은 크게 의아했다.
왜 그들은 암암리에 추적을 하면서도 정면으로 나서지 않는단 말인가?
일행 중에서 장하영이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후후....... 그것은 백가란 놈의 쓸데없는 명예심 때문이다."
"그게 무슨 뜻이야? 좀 쉽게 말하라구."
조천백의 질문에 장하영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놈은 이만저만 비상한 놈이 아니야. 놈은 철저한 계산으로 이미 우리의 능력을 헤아리고 있어. 따라서 놈의
수하들이 우리를 공격해 보았자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그래서?"
"놈은 완벽한 승기(勝機)를 잡을 때까지는 감시만 하도록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후후....... 또한 놈은
우리를 잘 알고 있으므로 서두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서두르지 않으면?"
이번에는 석회림이 반문했다.
"놈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어도 우리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지."
그 말에 장천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놈은 화산에서 수하에게 우리가 놈들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서두를
필요가 없겠지. 놈이 지옥에 간다해도 우리가 쫓아 갈 테니 말이다."
장천림은 이를 갈고 있었다. 사실 그는 마음이 조급해져 있었다.
화산과 무당산에서 연이어 두 번이나 허탕을 쳤기 때문이었다.
이때 석회림이 불안한 듯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장천림이 차갑게 말했다.
"어떡하긴? 놈이 있는 곳까지 가는 거다."
장하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천림의 말이 맞다. 아무리 변장해 보아야 소용없는 짓이다. 우리의 신분이 노출되었으므로 놈들은 천라지망을
펼쳐놓고 우리의 움직임을 환히 파악하고 있다."
장하영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말했다.
"우선은 철주부까지 가자. 그곳에서 머리를 써서 놈의 시선을 벗어나도 늦지는 않아."
사인의 의견은 통일되었다.
사실 그동안 사인은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것이다. 공연히 길을 우회하기도
하면서 심력을 꽤 낭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행적을 감추는데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철주부까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당도하기로 한 것이었다.
어느덧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장천림은 철주부로 향하는 연도의 산에 단풍이 물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아, 이 가을(秋)이 가기 전에 반드시 너의 복수를 해주마.'

백유성은 전문을 받아 읽고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도통 수하들이 하는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같이 모든 것이 허점 투성이에다가 능력부족인 것이다.
전문에는 수하들이 장천림 일행을 완전히 노쳤다는 보고가 들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놈들은 보란 듯이
행적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함정이었다. 그 바람에 수하들이 감시의 눈을 느슨하게 한 것이다. 그 틈을 타 놈들은 교활하게도
감시망을 벗어나 버린 것이었다.
백유성은 도무지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다 잡은 고기를 놓치다니.......'
그는 장천림 일행을 그물에 걸린 고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당한 시기에 그물을 던지기만 하면 잡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힘겹게 지은 밥에 재가 뿌려진 것이다.
"밥통같은 놈들!"
그는 집무실을 떠나 회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아내가 있는 안채로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무림인이 아닌 양가의 규수 출신이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오랫동안 능멸해 왔다. 그것은 어쩌면 현숙하고 품위있는 아내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과 반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로 인해 그는 아내를 옆에 두고도 늘 다른 여인과 잠자리를 해 왔다.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이 아내의 귀에
들어가도록 조치해 왔다. 그럼으로써 아내에게 복수(?)를 하는 셈이었다.
그의 아내는 도무지 그를 존경하지 않았다. 그 점이 그는 못견디게 화가 났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의 아내는 그에게 조금도 화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무관심(無關心).
그것은 그에 대한 완벽한 무관심이었다.
그는 언젠가 아내가 보는 앞에서 기녀(妓女)들을 불러 방탕한 행동을 보인 적이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최소한의
질투심이라도 보여주기를 바란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아내는 어떠했던가?
그녀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을 뿐더러 옆방으로 가 조용히 비파(琵琶)를 고르지 않았던가?
그 일이 있은 이후로 그는 아내에 대해 더욱 이를 갈게 되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더욱 다른 여인들과의 엽색질에
몰두해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었다.
그는 아무리 다른 여인들을 품어 보아도 결코 만족을 느낄 수가 없었다. 더욱 자존심이 상하는 일은 다른
여인들과 정사를 하는 중에도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아내를 떠올리지 않으면 정사를 완벽하게 치를 수조차 없었다. 그런 사실이 강호사공자의 으뜸이라고
자부하는 그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별채로 향하고 있었다. 별채에는 최근 기방(妓房)에서 은자 삼천 냥을 주고 사들여 들여앉힌 첩
만향(萬香)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쾌락(快樂).
완벽한 쾌락이란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백유성도 그런 종류의 인간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지금 침상에 누워 있었다.
"호호......."
만향의 웃음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요염하게 흔들었다. 그녀는 악기(樂器)와 같은 여인이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지 알고 스스로 울리는 악기.
과연 만금을 주고도 아깝지 않은 악기였다. 백유성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었다. 만향의 화려한 기술
(?)이 그를 쾌락의 세계 속으로 알아서 이끌어 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하는 것이 남자를 즐겁게 하는 것이며 무한한 쾌락 속으로 이끄는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혀(舌)의 마술사였다. 그녀는 혀의 기술에 관한 한 세상에서 자신을 따를 여인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으음."
발 끝에서부터 시작한 끈끈하고 녹아내릴 듯한 혀 끝의 애무는 백유성을 아득한 쾌락의 나락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는 침상에 누운 채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쾌락을 완벽하게 즐기는 방법은.......
만향의 혀에 전신을 맡긴 채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데 있었다. 그와 같은 부류의 인간은 남을 믿지 않기에
언제나 많은 생각을 해야만 했다.
그는 남들을 꺾기 위해 수많은 술책을 부려야만 했다. 그런 생활은 언제나 긴장이 팽팽한 생활이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순간 만큼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즐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누운 채 만향의 장기인 혀의 마술에 온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되었다.
만향의 혀는 아주 쉽게 백유성을 달아오르게 했다.
만향은 사나이의 뿌리를 존경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바로 그것이기에. 그러나 그녀에게는 또한 가장
약하고 부드럽고 순하며 말을 잘 듣는 어린아이가 또한 그것이기도 했다.
"호호....... 귀여운 것."
만향은 고양이가 쥐를 놀리듯이 그것을 가지고 놀았다. 그녀가 발휘하는 마술에 백유성은 어린아이처럼
고분고분하게 길들여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곳에 폭발의 감각이 왔다. 그때야말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만향은 그를 끝없이 받아들였다.
사나이의 힘이 화려하고 힘차게 그녀에게 분사하는 것을 즐기며.......
"......."
백유성은 쾌락이 휩쓸고 지나간 뒤의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는 시선을 월창(月窓)으로 돌리다가 흠칫 놀랐다.
그림자(影)!
월창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가슴이 섬뜩했다.
"누구냐!"
아무리 급해도 옷은 입어야 했다. 그는 기습을 방비하기 위해 몸을 침상 아래로 굴리며 급히 옷을 찾아 걸쳤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월창에 비친 그림자는 미동도 않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옷을 다 걸치자 밖에서 한 가닥 탄식이 들렸다.
"유성(流星), 여전하군......."
"......!"
백유성은 부르르 떨었다.
"너......너는!"
"정자에서 기다리겠네."
그 한 마디를 남기고 그림자는 사라졌다. 백유성은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결국 나타났군. 후후....... 하긴 언젠가 나타나리라고 생각은 했다.'
그는 입가에 쓰디쓴 기소를 지었다.
'그런데 나타난 시기치고는 별로 좋지 않은 시기로군.'
연못에 달이 떠 있다.
바람이 불자 달이 이지러졌다. 연못 위에 아름답게 축조되어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 안에는 일세의 영명을
지니고 있는 두 청년이 서로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듯 오랫동안 말이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명은 백유성이었다. 그의 앞에는 마의를 입은 기도가 범상치 않은 청년이 마주 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강호사공자의 일원이었던 천인검객 북리웅풍이었다. 마침내 그가 나타난 것이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북리웅풍이었다. 그는 탄식하더니 백유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성, 상관중과 당수문을 죽인 자는 아무래도......."
백유성은 짐짓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라니?"
"과거 우리가 사천의 백제성을 지날 때 일어났던 일과 밀접한 관련이......."
문득 백유성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
북리웅풍은 흠칫 놀랐다. 그는 백유성이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 그러나 곧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일은 전적으로 우리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네. 나는 두 사람을 죽인 자들이 그 일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백유성은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내게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온 것인가?"
"......."
북리웅풍은 침묵했다. 백유성은 흥! 하고 코웃음쳤다.
"그 일에 설마 자네가 빠져 있다는 뜻은 아니겠지? 그때 자네도 분명 개입했었네."
북리웅풍의 두 눈에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후후후....... 어떤가? 기왕 그 사실을 안다면 이곳에 남아 날 돕는 것이? 설마 참회라도 하는 마음으로
앉아서 놈들에게 목을 내 주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 말에 북리웅풍은 장탄식을 했다.
"아아! 유성, 나도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네."
"후후후....... 웅풍. 그건 위선일세. 자네가 할 일을 말해 줄까? 그건 간단해. 이곳에 남아 나와 함께
놈들을 죽이는 것일세. 그 놈들을 죽여야만 그 일을 영원히 땅 속으로 묻어버릴 수 있네."
백유성은 두 눈에 음침한 빛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후후후! 설마 그 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
"자네나 나나 모두 똑같이 저지른 일이니 똑같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그러나 북리웅풍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고 싶지는 않네."
백유성의 눈에서 성난 빛이 흘러 나왔다. 그는 다소 거친 음성으로 반박했다.
"뭐라고? 그럼 나만이 또 잘못을 저질러야 한단 말인가? 흐흐흐......! 그렇다면 자네는 고고하고 나는
속물이다, 이건가?"
북리웅풍은 더욱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백유성의 반응에 자신이 공연히 이곳에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이곳에 온 본래의 목적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실상 근본적으로 그는 백유성과는 다른 인품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돌아섰다.
"난 가겠네."
"간다고?"
백유성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오래 전부터 그가 달갑지 않았다. 매사에 그보다 앞서 가고 또한 무림의 평판에 있어서도 그를 훨씬
능가하고 있는 북리웅풍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북리웅풍을 대할 때마다 위축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못견디게 싫었다. 그는 북리웅풍의
수양과 기품을 따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틈만 나면 그의 약점을 잡고 싶었다. 그런데 도무지 북리웅풍에게는 약점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매사에 신중하고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위인이었던 것이다.
백유성은 끈질기게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한 번 마음 먹으면 무서울 정도로 집념이 강한 위인이었다.
마침내 그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강호사공자가 모임을 갖게 된 자리였다.
백유성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두었다. 그는 미리 준비한 술에 강력한 최음제(催淫劑)를 탔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북리웅풍을 비롯한 삼인은 술을 마신 것이었다.
백제성에서 두 명의 소녀를 겁탈하도록 일을 꾸민 것은 처음부터 그의 완벽한 계획이 빚은 결과였다. 세 사람이
취기가 오르자 강렬한 욕정을 느끼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마침 걸려든 것이 금문장의 금지옥엽인 백가소였다.
백유성은 최음제가 혼합된 술을 마시고 정욕에 눈이 먼 삼인에게 백가소와 그녀의 시비를 던져 주었다. 마치
굶주린 사자우리에 토끼를 넣은 것이나 같은 격이었다.
애당초 목표는 바로 북리웅풍이었다. 그는 평소에 고고한 척 하는 북리웅풍이 욕정에 눈이 멀어 선량한 소녀를
겁탈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는 무서운 희열을 느꼈다.
백유성은 정신없이 소녀를 겁탈하는 북리웅풍을 바라보며 마음껏 비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 보아라.......
너도 개나 다름없는 속물(俗物)이 아니더냐?
후후후! 북리웅풍! 너라고 별 수 있느냐!
그런데 그가 느낀 희열은 결코 오래 가지 못했다. 상관중이나 당수문은 당시의 일을 곧 웃어 넘기며 잊어 버렸다.
그들은 본래부터 여색을 밝히는 작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리웅풍만은 달랐다. 그는 그 사건이 있은 직후 화산으로 돌아가 폐관해 버린 것이었다.
'빌어먹을 놈! 네가 고고하다면 얼마나 고고하다고!'
북리웅풍의 폐관 소식을 듣고 백유성은 내심 이를 갈고 있었다. 어쩐지 그를 꺾었다는 기분보다는 도리어
무시당한 기분이 더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력한 경쟁자 하나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로 그는 강호사공자의
우두머리로 행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오직 그만의 비밀이었다. 실로 무서운 음모가 아닐 수 없었다.
'흐흐......! 북리웅풍, 넌 죽을 때가지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백유성은 입가에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북리웅풍의 돌아선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기울고 있었다.
북리웅풍은 이곳이 더이상 머물러 있을 곳이 못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돌아선 채 말했다.
"애당초 잘못은 우리에게 있었고...... 그들은 옳은 일을 하는 것 뿐이네. 그런데도 죄를 범한 우리들은 정의의
편에 있고 응징을 하려는 그들이 무림의 적도(敵徒)가 되다니......."
북리웅풍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세상 일이 이렇게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인 줄 알았다면 난 애당초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걸세."
그 말이 끝이었다.
휘익!
북리웅풍은 신형을 날려 달빛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백유성은 멍하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의 입가가 일그러지고 있었다.
군자(君子)인 척 하는 놈!
언제까지 네 놈의 군자연이 계속되는지 두고 보마!
그는 이를 부드득 갈고 있었다.
제 17 장 마지막 목적(目的)

백리진강은 몹시 기분이 좋았다.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만선(滿船)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장강에 사는 어부들은 인심이 좋았다. 그가
타지인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고기잡이에 참여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백리진강은 며칠 동안 장강을 오르내리며 고기잡이를 하면서도 줄곧 환사금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간혹 그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아....... 나도 머지 않아 아버지가 된다!'
그 얼마나 가슴벅찬 일인가?
그는 자신의 앞날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비록 구사일생으로 건진 목숨이었으나 환사금과 함께 영원히 이곳에서
정착할 자신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도 피맺힌 원한이 뇌리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내상만 완치된다면 언제고 다시 뛰쳐나가
무림맹의 인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살인귀로 화할 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환사금이 임신을 한 사실을 알았을 때 그의 마음은 미묘하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혈육(血肉).
그는 한 번도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도 혈육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 사실은 백리진강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기뻐해야 할 지, 아니면 난감해야 할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환사금의
배가 조금씩 변화를 보일 때마다 그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희열이 싹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밤이면 그녀의 동그란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귀를 대고 고동소리를 듣기도 했다. 아직은 임신 초기였으므로
이렇다할 징후는 없었으나 느낌만으로도 그는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었다.
그것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벅찬 감격이었다.
그래!
내게도 아들이 태어난다면.......
그 아들은 결코 나와 같은 삶을 걷게 하지는 않으리라!
내 아들은 이곳 장강 어귀에서 평생 고기나 잡으며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평화롭게 살게 하리라!
백리진강은 그렇게 상상하며 남몰래 눈물짓곤 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결정할 수 있었다. 지난 날의 피보라로 점철됐던 인생을 깨긋히 청산하고 이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
나룻터에 배가 도착했다.
백리진강은 언제나처럼 환사금이 마중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약간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곧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몸이 불편한 모양이군. 하긴....... 아이를 가졌으니 함부로 나다니지 말아야지.'
백리진강은 어구를 챙겨 곧장 매화림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걷는 동안에도 그는 조급한 마음이 들어
발걸음을 종종걸음치고 있었다.
한 시라도 빨리 오두막집으로 가 사랑스러운 환사금을 껴안아 주고 싶었던 것이다.
'후후, 깜짝 놀랄 걸? 이번 고기잡이에서 꽤 많은 돈을 벌었거든. 그 돈이면 당신의 새옷 한 벌과 아기가 입을
옷 몇 벌은 충분히 살 수 있다구.'
백리진강은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며 매화림 사이의 길로 접어 들었다.
매화림 사이의 길은 아득한 꿈길처럼 굽어져 있었다. 그 길 끝에 자리잡은 아담한 오두막집에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오두막집은 비록 작았으나 그와 환사금, 그리고 장차 태어날 아기가 함께 살기에는 너무나 좋은 곳이었다. 매화가
만발하면 꽃잎을 따서 매화주를 담으리라. 매실(梅實)이 열리면 열매로는 매실주를 담고...... 눈 내리면
매화숲을 거닐며 눈과 어울린 매화 속에서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리라........
백리진강의 걸음은 더 바빠졌다. 마침내 구비진 길을 돌자 그의 눈에 오두막집이 들어왔다.
언제나 처럼 오두막집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곳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었다. 하루 종일을 가야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새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바람에 실려오는 달콤한 매화향기뿐인 곳이었다.
예전에는 적막한 곳이었는지 몰라도 이제는 꿈같이 달콤한 곳이었다. 환사금과 부부의 의식을 치른 이후로는
매화가 더욱 만개하고 향기도 더욱 짙어진 것 같았다.
'사금! 내가 왔소. 후후....... 당신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바느질? 아니면 나를 위해 요리를 하고
있는 거요?'
이때였다. 백리진강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전 같으면 매화림으로 들어서는 순간 수많은 새떼가 날아오르는 것이 예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매화림을 거의
지나왔는데도 한 마리의 새도 보이지 않질 않는가?
오늘따라 숲은 너무 조용했다.
백리진강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는 내심 자신을 나무라고 있었다.
'내가 무슨 방정맞은 생각을?'
그는 자신의 생각을 부인하며 오두막집으로 들어섰다. 마당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환사금이 주방에
있을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주방의 문이 열렸다. 아니나 다를까, 환사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분명 그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환사금은 반가운 표정을 짓기는커녕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사금! 내가 왔소."
그는 손을 들며 외쳤다.
그 순간 환사금의 안색이 크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눈동자는 풀려 있었다. 애당초 그녀는
그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비로소 발견하고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는 것이었다.
"사금, 왜 그러오? 어디 아프오?"
백리진강은 부드럽게 말하며 주방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환사금이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찢어질
듯한 음성으로 외치는 것이 아닌가?
"달아나요! 진강!"
"......!"
백리진강은 충격을 받았다.
달아나라니? 왜? 무엇 때문에?
생각은 짧았다. 그러나 그 생각을 이어갈 시간도 그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며 네 명의
사나이가 벼락같이 뛰쳐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의해 환사금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저만치 나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환사금은 그를
향해 애처롭게 부르짖고 있었다.
"달아나요! 진강......."
환사금은 저만치 바닥에 뒹굴면서도 그를 향해 애절하게 외쳐댔다.
"어서 달아나요! 어서......!"
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 달아나야 한다!
백리진강은 사태를 직감했다. 그에게 무서운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바로 그 순간
우박같은 암기가 사방에서 그를 향해 쏘아져 왔다.
슈슈슈슈슛---! 쏴아아아아!
동시에 방금 전 그가 지나왔던 매화림 속으로부터 수십 명의 인영이 쏘아 나왔다. 땅에서, 바위 뒤에서, 나무
뒤에서....... 겉으로는 아무 것도 없는 듯이 보이던 주변으로부터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에 달하는 인영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으와아아아앗!"
백리진강은 피를 토하듯이 부르짖었다. 이미 그의 전신에는 십여 개의 암기가 고슴도치처럼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그나마 빨리 피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뛰었다.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다면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 자의
골통을 바수고 뛰어넘었다.
내상은 아직도 완쾌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혼력을 다한 그의 공격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는 상대방의
병기를 빼앗아 처절하게 휘둘렀다.
파츠츠츠츠츳!
"크아악---!"
눈 앞에 걸리는 자는 상대가 누구든 확인하지도 않고 베어 버렸다. 아니, 그는 사람을 베는 것이 아니라 잡초를
베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뜨겁고 역한 선혈이 온 몸에 튀는 것도, 자신의 몸에 무수한 상처가 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베고, 죽이며
달아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그가 달아난 뒤쪽으로부터 한 가닥 처절한 비명이 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귀에 익은 환사금의
음성이었다.
'사금......!'
백리진강은 피를 토하듯이 부르짖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언제부터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 하였던가? 백리진강이 환사금의 경고를 들었을 때 떠오른 것이라고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살아야 한다!
오직 그 사실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오직 일념으로 살기 위해 손발을 움직였고,
앞만 바라보며 달아났다.
환사금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 지, 그녀의 뱃속에 자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것도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내상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아 그는 불과 삼 성 정도의 공력밖에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그런 상태로 적과
싸운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달아난 것이었다.
"......."
술.
술이란 참으로 이상한 물건이다.
때로는 한 잔 술에 얼큰한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지금은 아무리 마셔도 취기를 느낄 수 없었다.
백리진강은 계속 술을 마셔댔다. 그는 잊고 싶었다. 모든 것이 악몽(惡夢)이었다. 그는 모옥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이후 환사금이 염려되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수백 명의 매복을 뚫고 그녀를 구해낼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탈출하다가 새로 입은 상처는 다시 그의
상세를 악화시켰다.
그는 환사금이 있는 오두막집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다만 먼 발치에서 매화림이 있는 곳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기를 보름여나 하였을까?
매화림 일대를 철통같이 지키던 무사들이 철수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보란 듯이 환사금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
백리진강은 멀리 떨어진 언덕 위에서 그녀가 철창이 달린 수레에 탄 채 끌려가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실로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그녀를 구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가 몸을 나타내기만 하면
수백 명의 무사들에게 둘러싸여 협공을 당할 것이다.
그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눈 앞에서 환사금이 멀어져가는 것을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사라진 후.......
늘어나는 것은 술뿐이었다. 그는 하루종일 술에 파묻혀 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짙은 패배감에 휩싸여 있었다.
복수......?
후훗! 다 쓸데없는 일이야. 자신의 계집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복수는 무슨 복수......?
ㅋㅋ! 너는 비겁한 놈이야. 천하에 비겁한 놈이라구!
백리진강은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환사금을 사랑했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제 도저히
그녀없이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느꼈다.
그는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가고 있었다. 중상을 입은 데다 그 이후로도 몸을 돌보지 않았으며 거기다 연일
마셔댄 술로 인해 그의 내상은 거의 치유불능의 상태까지 치닫고 있었다.
백리진강은 시간이 흘러갈 수록 점점 더 절벽으로 치닫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침내 그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래.......
내가 세상에 태어나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면.......
바로 그녀를 구하는 일이야!
마침내 백리진강은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또다른 피의 예고였는지도 몰랐다.

장천림 일행은 내향(內鄕)에서 십 리쯤 떨어진 지역에 와 있었다.
철주부는 내향의 철주산에 있었다. 결국 그들은 긴 여행을 한 셈이었다. 그들이 이곳까지 오는 동안 걸린 시간은
실로 중원의 반을 돌 만큼 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점점 가까워져 이제는 코 앞에 다다르고 있었다.
장천림을 비롯한 사인은 점차 마음이 비장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철주부에 가까이 올 수록 일대가 천라지망(天羅之網)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유성은
그들을 척살하기 위해 완벽에 가깝도록 포진해 놓은 것이었다.
석회림과 주천백은 면밀히 적정(敵情)을 살폈다.
그들은 철주부 일대에 적어도 칠백인 이상의 무림맹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로 가공할
숫자였다. 아니, 숫자만 가공한 것이 아니라 그들 무사의 무예 또한 정예고수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일단 그들 사인의 행적이 노출되기만 하면 순식간에 절망적인 상황으로 떨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행동에 만전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백유성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함께 행동한다면 눈에 띄기
십상이었다.결국 그들은 변장을 한 상태로 절대로 이인 이상 모이지 않기로 했다.
장천림과 장하영, 석회림과 조천백이 한 조를 이루어 따로따로 행동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암기(暗
器)를 나누어 적당한 장소에서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그들이 내향 부근에 당도한 것은 구월 초하루였다.
이때부터 그들은 백유성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만일 실패한다면 그것은 모두의 죽음을 의미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인은 결국 한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시일이 흐를 수록 복수할 확률이 적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무림총맹에서 자꾸만 정예고수들이
모여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이후부터였다.
결국 그들은 다시 한 자리에 모이기로 했다. 그들은 장하영의 의견을 쫓아 내향, 그것도 철주부에서 가장 가까운
객점에 상인으로 변장을 하고 모였다.
이른바 등하불명(燈下不明)의 헛점을 노린 것이었다.
"뭐? 정면돌파?"
장하영의 말에 모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뜻밖의 말이 쉽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정면돌파라니 말이나 되는 이야긴가?
기라성같은 무림맹의 고수들이 운집해 있는 철주부를 정면돌파하겠다니, 미치지 않고서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장하영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술 한 잔을 비운 후 담담히 말했다.
"그래. 사실 우리에겐 달리 선택의 길이 없어. 오직 그 방법만이 최선의 길이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그건 옳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하영. 다른 방법이 없을까?"
조천백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나 장하영은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일행의 지낭(智囊) 역할을 해왔다. 삼인은 그가 세우는 전략에 따라 움직였고 그의 정보 분석에
따라 행동해 왔다. 그가 결정한 방법은 모두가 옳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장하영이 내린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것 같지가 않았다.
그것은 최선의 길이 아니라 최악의 길인 것 같았다. 조천백과 석회림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장하영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가 보여준
여러 가지 일들을 미루어 그가 결코 허튼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마침내 장천림은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 길이 최선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장하영은 그를 바라 보았다. 문득 그는 장천림이 그를 의심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깊은 신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빛을 통해 알았다.
장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백유성은 상관중이나 당수문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를 평범하게 보면 곤란해. 그 자의 지략은
무림맹에서도 소장파의 세력 중 중심이 될 정도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돼."
"그래서?"
"게다가 우리는 이미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백유성은 우리의 공격을 예측하고 있는 상태다. 그런 상대를 놓고
잡다한 술수를 써 보아야 도리어 사전에 그가 쳐놓은 거미줄에 스스로 날아들어 걸리는 부나방 꼴이 되기
십상이다."
"음."
장천림은 신음을 흘렸다. 거기까지는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조천백, 석회림도 이젠 조용히 장하영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병법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허허실실(虛虛實實)이다. 허 속에 실이 있고 실 속에 허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예측했다면 우리는 결코 그가 바라는 대로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천백은 궁금한 듯이 반문했다. 그도 차츰 장하영의 말에 빨려들고 있었다.
장하영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가 무엇을 원하겠느냐? 우리가 온갖 머리를 짜내 철주부를 습격하기를 바라지 않겠느냐?"
"그, 그야 그렇겠지."
"우린 고작 네 명에 불과하고 그들은 천 명에 가까운 숫자다. 그러니 우리가 설마 정면으로 돌파하리라고는 그도
전혀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그게 바로 허허실실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 그렇긴 하지만......."
조천백은 말 끝을 흐렸다. 이론적으로는 장하영의 말이 틀린 데라곤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용담호혈인
철주부에 정면으로 뛰어든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
방 안의 삼인은 침묵했다. 실상 병법이라면 장하영이 전문가였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미 많은 생각 끝에
나온 결론일 것이다.
마침내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조천백이 확인해
둘 것이 있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경비가 삼엄한데 어떻게 뚫고 들어가지?"
장하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홍수는 흙으로 막고 군사는 장수로 막는다고 했다. 문제가 있으면 답이 있는 법이다."
"......?"
"철저한 계획을 세우면 된다. 남은 것은 시간이다. 시간 싸움에 승부를 걸면 된다."
"시간 싸움?"
일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잘 들어라. 그것은 바로......."
이윽고 장하영은 자신이 세운 계획안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삼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홍무(洪武) 15 년 9 월 11 일.
두두두두두!
긴장감이 감도는 철주부(鐵柱府)의 정문에 한 필의 오추마가 당도했다.
그 말은 한 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천리준마(千里駿馬)로 보통 사람은 평생 가야 구경조차 해보지 못할 것
같았다.
마상에는 금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타고 있었다. 그는 말에서 뛰어 내리더니 뚜벅뚜벅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철주부의 정문은 만인을 압도하듯 컸다. 대문 양옆으로는 석사자가 버티고 선 채 굽어보고 있었다. 또한 좌우로
열두 명의 경비무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당금 무림에서 철주부는 이미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은 대부분
무림인이거나 신분이 확실한 인물들이었다.
"......."
금포 중년인은 천리준마에서 내린 후 철주부의 높이 솟은 돌계단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처음부터 그는 추호도
망설이거나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뚜벅뚜벅!
돌계단은 높았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대문이 있는 대리석 바닥에 오를 수 있었다.
마침내 계단을 다 오르고 정문 앞에 당도했을 때 중년인의 좌우로 열두 명의 경비무사들이 둘러쌌다.
중년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뇌리에는 누군가의 당부가 다시 한 번 떠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우연히 얻게 된 무림총맹의 영패(令牌)네. 이것이 어느 정도의 위력을 나타낼지는 나도 모르네.
하지만 천운이 따른다면 자네는 무사히 철주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일세.
"멈추시오! 어디서 오신 분이오?"
경비 무사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중년인은 그를 바라 보았다. 몹시 오만한
눈빛이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신지 신분을......."
무사는 흠칫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의 눈 앞에 하나의 금빛 찬란한 물고기 모양의 영패가 내밀어졌던 것이다.
"금어령(金魚令)!"
무사는 경악하며 부르짖었다. 이어 그는 급히 한 쪽 무릎을 꺾으며 예를 표하는 것이었다. 그가 예를 표하자
나머지 십일인의 무사들도 일제히 똑같은 예를 표했다.
중년인은 거만하게 무사들을 쓸어보며 물었다.
"백대협은 안에 계신가?"
우두머리 무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금어령은 무림총맹의 요직에 있는 자만이 지니고 다니는 영패였다. 그는
평생 동안 금어령을 오직 단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금어령은 존귀한 신분을 지닌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관례에 따르면 상대방은 아무리 신분이 높다해도 일단 자신의 신분을
밝혀야 했다.
그런데 금어령을 소지한 이 중년인은 자신이 누구인지는 일체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로 백유성이 있느냐고만 묻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 어디서 오신 분이신지......?"
그는 간신히 더듬거리며 물었다.
"총맹에서 왔네."
간단한 대답이었다.
"총맹의 어떤......"
그러나 무사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중년인이 무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 보았기 때문이었다.
"수, 순찰 중이십니다."
"언제 쯤 돌아오나?"
"어, 얼마 후면......"
무사는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무림총맹에서 온 인물이라면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고무상한 신분일
것이다. 그는 완전히 기가 죽어 버렸다.
"일단...... 안으로 들어 가십시오."
무사는 얼른 길을 열었다. 중년인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그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높이 솟은 대문을 넘어 서면서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백유성이 순찰을 도는 시간에 자네는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운이 좋다면 그의 집무실까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제 18 장 세 번째 복수(復讐)

그는 운이 좋았다.
철주부 안으로 들어온 그는 곧바로 백유성이 사용하는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철주부는 본래 백유성의 본가(本家)로써 그가 무당의 속가로 입문한 뒤로 무림의 명문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무림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전형적인 문(文)의 가문이었다. 백유성의 부친은 은퇴한 고관(高官)이었던
것이다.
백유성은 무림의 일이 끝나면 언제나 철주부로 돌아와 쉬곤 했다. 이곳만은 무(武)의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무실에는 많은 도구들이 있었다. 그것은 백유성의 다양한 취미를 말해주고 있었다.
각종 악기(樂器)에서 바둑판, 화분, 서예 도구들이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
중년인은 집무실을 세심히 둘러보았다. 집기 하나 흐트러져 있는 것이 없었으며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다.
그것은 백유성의 완벽주의 정신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찻잔을 받쳐든 시녀와 한 명의 정숙하고 아름다운 젊은 부인이 나타났다.
부인은 그에게 정중히 절하며 말했다.
"천첩은 백가의 여인입니다. 대인께서는 총맹에서 오셨다고요......."
중년인은 약간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첫 눈에 여인이 무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여인의 동작이나 언행에서는 무림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차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렇소이다. 부인."
"그 분은 순찰 나가셨습니다. 연락을 취했으니 머지 않아 귀가 하실 테지요. 그간 차를 드시기 바랍니다."
여인은 그윽한 눈으로 중년인을 바라 보았다. 중년인은 여인의 눈빛을 받자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뇌리에 깊이 남아있는 한 소녀의 눈빛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백유성의 아내와 그녀의 눈빛이 닮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중년인은 바로 장천림이었다.
그는 변장을 하고 철주부에 잠입한 것이었다. 장하영이 계획한 정면돌파의 계획에 직접 나선 것이었다. 다행히
운이 좋았고 지금 그는 목표물인 백유성의 집무실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백유성의 아내를 통해서 그는 백가소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왠지 눈빛이 몹시 닮아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그는 내심 탄식했다.
백유성의 아내는 얌전히 마주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양가집 규수 출신이었다. 따라서 주인이 자리를 비운 동안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는 듯 했다.
장천림은 그녀가 따라주는 차를 마시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백유성은 정오쯤 돌아올 것이네. 그의 성격으로 볼 때 일 각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시간에 돌아올 것일세.
문제는 그동안 자네가 무림총맹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철주부의 사람들이 믿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걸세.
"부인."
"네......?"
조용히 얼굴을 내려뜨린 채 화분에 물을 주고 있던 여인은 고개를 들었다.
"총맹에서 귀가 따갑도록 백소협의 칭찬을 들었소. 그는 지혜로울 뿐 아니라 뛰어난 능력과 인품을 지닌
후기제일인이라는 것이오. 하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이다. 물어 봐도 될런지요?"
장천림의 말에 여인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우아한 얼굴에 한 가닥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분부만 하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천림은 여인을 주시하며 물었다.
"무림에서의 평판은 그렇다치고 가정에서의 그의 모습은 어떤 가요?"
"......!"
여인의 안색이 흔들렸다. 뜻밖의 질문이었던 것이다. 장천림은 짧은 순간 여인의 눈빛이 당황으로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아,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총맹에서는 백대협을 차기의 영웅으로 보고 여러 면에서 관심을 두고 있소이다.
그래서 그의 모든 것을 조사하려는 것이오."
장천림은 자신이 총맹에서 나왔다는 것을 강조했다. 여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건......."
여인은 귓볼까지 붉어진 채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다.
"허허허.......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가지고 있으니 그는 아마도 가정에서도 충실할 것이오. 그렇지 않소?
부인?"
"물론......."
여인은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보았다. 여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장천림은 가슴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백유성의 아내에게서 뼈저린 고독(孤獨)을 훔쳐 본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랬었군.......'
그는 새삼 여인을 살펴 보았다. 그녀는 스물서넛 쯤 되어 보였다. 한창 부부의 금실이 좋아야할 나이였다.
그런데 어쩐지 여인은 쓸쓸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한란(寒蘭)과 같은 향기가 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장천림은 문득 분노를 느꼈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내를 두고도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다니.......'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에는 백가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진무구하기만 하던 소녀....... 그녀가 강호사공자에게
무참히 유린당하는 광경이 장천림의 뇌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팍......!
장천림은 자신도 모르게 찻잔에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찻잔은 손아귀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어머......!"
여인은 놀라 그를 바라 보았다.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장천림이었다.
"아, 이런 실수를 하다니....... 미안하오, 부인."
그는 황급히 사과했다. 찻물이 튀어 그의 옷이 흠뻑 젖고 말았다. 여인은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그의 옷을 닦아
주었다.
"괜찮소......."
장천림은 그녀의 손길을 막으려다가 그만 희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을 잡고 말았다.
"......!"
여인은 손을 잡히자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의 반응에 장천림은 더욱 당황했다. 당황한 나머지 그는 손을
놓아줄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찰나지간이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힌 것은.......
잠시 후 여인은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고개를 푹 떨구었다.
"미안하오......."
장천림은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 여인을 살며시 손을 빼더니 몸을 일으켰다.
"새옷을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괜찮소. 부인."
그러나 여인은 도망치듯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여인의 뒷모습이 애련하게 장천림의 가슴에 남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새옷을 가지고 온 시녀로부터 옷시중을 받고 있었다. 시녀는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종알거렸다.
"이 옷은 마님께서 나리를 위해 지은 옷인데 한 번도 나리께서 입지 않은 옷이랍니다. 그런데 이걸
갖다드리라니......."
시녀의 말에 장천림은 뜨끔하는 기분이었다. 왠지 가슴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왜......?
그녀는 나를 처음 보았을 뿐인데.......
장천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시녀에게 물었다.
"백소협과 부인의 사이가 어떠냐?"
시녀는 별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이었으나 곧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님께서 불쌍하셔요. 나리께서는 매일 밖으로만 돌아다니시느라 마님을 도통 돌보지 않으신답니다. 그래서
마님은 허구한 날 독수공방이시지 뭐예요. 어멋, 내가 무슨 쓸데없는 말을......."
시녀는 실책을 느낀 듯 급히 입을 막았다. 그리고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정오가 되려면 꽤 시간이 남아 있었다.
장천림은 철주부의 책임자를 불렀다. 그는 백유성의 직속으로 무림맹의 팔기단(八旗團)에 속한 향주급
위인이었다.
"그래 아직 아무런 성과도 없단 말인가? 쯧쯧......! 어째서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단 말이냐?"
그는 짐짓 짜증스런 표정으로 향주의 보고를 받았다. 향주는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쩔쩔 매고 있었다.
기실 이것은 자신이 총맹에서 온 특사로 보이기 위한 위장술일 따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향주란 자는 그저
윗사람이라면 쩔쩔매는 그런 작자였다.
"죄...... 죄송합니다. 대인. 그러나......."
장천림은 손을 휘휘 저었다.
"듣기 싫다. 그나 저나 백소협은 언제 오시는가?"
"예, 예. 잠시 후면......."
"그럼 이만 물러가게. 그가 돌아오면 즉시 이곳으로 오도록 이르고."
"아...... 알겠습니다."
향주란 작자는 살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 장천림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 땀을
훔치고 있었다.
실상 이곳 철주부는 동장철담이요, 와룡복호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철주부에는 기라성같은 무림맹의 고수들이
물샐 틈 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자신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식은 땀 나는 일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해도 일단 정체가 발각나기만 하면 빠져 나간다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그는 마음을 가다듬은 채 운기조식만 하면 되었다.
백유성, 그가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스스스---!
추풍(秋風)에 지는 낙엽이 가슴을 허전하게 한다. 땅에 떨어지는 낙엽이 허전한 느낌을 주는 것인지 아니면 잎을
잃고 헐벗고 서 있는 나목이 허전한 느낌을 주는 것인지는 몰라도 여름을 넘긴 계절은 사람들에게 쓸쓸한 감상을
불러 일으킨다.
백유성은 정확한 시간에 철주부로 돌아오고 있었다. 평소의 그 답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시각이었다. 그는 이
일대의 경비망을 순찰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러나 여러 곳의 초소들을 빠짐없이 순찰했지만 오늘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 바람에 그의 자존심은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백도제일의 명문대파인 무당파에 입문한 지 어언 십칠 년.
그는 속가 제자이면서도 무당에서 비전지비로 내려오는 태극광혜검법(太極光慧劍法)을 전수받았다. 그것은
무당의 전통을 깨뜨린 일대 사건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자질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양의현천진기(兩意玄天眞氣)를 이어받기도 했다.
그것은 오직 장문인 직전(直傳)만이 허용되는 무공이었다.
그로 인해 그의 무공은 일찍이 발군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농락을 당한 것이다. 강호사공자를 노리는 흉수를 잡기는커녕 계속 놈들에게 보이지 않는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많은 시일이 흐르고 있었다. 해결해도 벌써 해결되었어야 했을 사건임에도 아직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변명해 보기도 했다.
'이건 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놈들이 워낙 교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이 닿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놈들을 잡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일 뿐이다. 후후...... 두고 보자! 지금은 끌려 다니는 듯
싶어도 최후의 승자는 결국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기 위안도 최근 무림에 나돌고 있는 소문 때문에 부질없는 것이 되고 있었다.
사건이 공전하는 바람에 무림의 일 각에서는 차츰 무성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 소문은 어쩌면 그의 전도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소문의 일차적 원인은 바로 상관중과 당수문의 시신의 형태 때문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시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모두 전라 상태로 양물(陽物)이 절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세인들에게 묘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왜 하필이면 발가 벗기운 채 그것도 양물을
거세했을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것처럼 누군가 혹시...? 하는 상상적인 말을 한 것이 삽시에
천하무림으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마침내 일부 무림인들은 강호사공자가 어떤 극랄한 일을 저질렀으며 그에 대한 응분의 복수를 당한 것이라는
결론까지 유추해 내고 있었다.
사실 강호사공자는 무림의 떠오르는 태양이었으나 그들이 크면 클수록 모함도 많은 편이었다. 이 사건은 그들을
시기하는 자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 바람에 백유성은 짜증이 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설사 잘못을 했다쳐도 이미 오래 전 일이다. 그 일로 인해 내 앞날이 먹구름에 가려질 수는 없다.
제길! 그깟 계집 하나가 뭐 대수라고 천하의 백유성이 전전긍긍해야 된단 말인가?'
그는 침을 퉤! 뱉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일은 아주 작은 유희에 불과했다. 그 유희에 의해 희생된
소녀는 어디서도 볼 수 있는 평범한 계집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줄이야.
'빌어먹을.'
그는 고개를 홰홰 돌리며 철주부의 거대한 대문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그가 계단 위로 오르자 양옆에 도열하고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그 중 우두머리 무사가 달려와 보고했다.
"손님이 와 계십니다. 얼마 전에 안으로 모셨습니다."
"손님?"
백유성은 흠칫했다.
"어떤 손님이냐?"
"총맹에서 나온 분이십니다. 그런데......"
무사는 말끝을 흐렸다. 백유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총맹? 누구냐고 묻지를 않느냐?"
"저어...... 그, 그게......"
무사는 안색이 굳어진 채 어물거렸다.
"누군지도 모른단 말이냐? 아니 신분도 모른 채 들여 보냈단 말이냐?"
백유성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흘러 나왔다. 무사는 그만 고개를 푹 떨군 채 더듬거렸다.
"그, 그것이...... 금어령을 보이길래 감히......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금어령을 가진 자라고?"
백유성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금어령이 얼마나 대단한 신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디에 있느냐!"
"저어...... 집무실로 모셨습니다."
백유성의 눈살이 잔뜩 찌푸러졌다. 그는 무사를 지나쳐 대문으로 들어섰다. 그의 마음 속은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금어령을 지닌 인물이 왔다고? 그렇다면 이번 사건에 대해 추궁이라도 하러 왔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제기랄! 대체 어떤 자가 왔단 말인가?'
그는 곧바로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찜찜한 기분을 금치 못하면서.

......우리는 백유성이 정문으로 들어선 뒤 정확히 일 각 후 일을 시작할 것이다. 자네에게 주어진 시각은 반
각(半刻)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게. 만일 그가 집무실에 도착하기 전에 폭음이 울린다면 자네는 즉시
포기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탈출하게. 그것은 곧 이번 작전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네.
장천림은 화분(花盆)을 보고 있었다.
백유성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마음은 차츰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지금 그는 한 여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화분에 물을 주던 여인. 그로서는 처음 보는 현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일신에 유백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던 모습이 눈에 잡힐 듯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내가 무슨 생각을? 그녀는 백유성의 아내인데?'
장천림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화분의 꽃을 만지고 있었다. 여인이 화분에
물을 주는 모습은 그의 가슴에 이상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지금 그의 처지로 볼 때 그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만일 백유성의 아내가 무림계의 여인이었다면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는
무림과 관계없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백유성같은 후기지수이자 명문 출신의 부군을 지녔으면서도 쓸쓸함이 짙게 배어 있는 여인의 모습이
이상하게 그의 가슴을 친 것이었다.
'그런 현숙한 여인이 백유성의 아내라니......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구나.'
장천림은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한편, 집무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백유성은 초조한 심정이었다.
사실 무림총맹에서 누군가 파견되었다면 껄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번 사건을 장담하면서 맡은 그가 아닌가.
그런데 벌써 기일이 한참 지나도록 그는 해결하지 못했다.
그동안 흉수의 그림자조차 잡지 못한 것이다. 이제 총맹에서 보낸 자에게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 지 감이 서지
않았다.
'누가 왔을까? 혹시 무당의 장교진인 가운데서? 아니야. 무당에서는 이런 일로 사람을 보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총맹의 어느 당주(堂主)가?'
회랑으로 걸어가는 백유성의 가슴은 답답해지고 있었다. 몇 가지 변명거리를 마련하고 있었으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신통치 않은 것들이었다.
같은 시각, 철주부의 장원 문 앞으로 세 대의 마차(馬車)가 돌진해 오고 있었다. 마차는 하나같이 검은
색이었으며 창문에는 두터운 휘장이 처져 있었다.
네 마리의 마차가 이끄는 마차. 그런데 마부석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마부도 없이 마구 달려오는
사두마차 네 대!
두두두두......!
마차가 돌진해 오는 기세는 무섭기 그지 없었다. 장원을 지키던 무사들은 마차가 달려오는 기세에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마차 네 대가 결코 좋은 뜻을 품고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일제히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철주부의 대문은 높은 계단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차가 계단을 오르지 않고서는 대문을 돌파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계단 위에서 신형을 멈춘 채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앗!"
"아니 저럴 수가!"
무사들은 대경실색했다. 마차는 계단 위를 마치 평지인 양 미친 듯이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네 대의 사두마차는
달려오는 기세 그대로 계단 위를 요란한 굉음을 내며 거슬러 오르는 것이었다.
"막아라!"
"멈춰라!"
뒤늦게 비상이 걸렸다. 무사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가운데 사두마차는 마침내 계단을 다 올라왔다. 무사들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마차는 여전히 무서운 기세로 대문을 향해 돌진했다.
무사들이 말고삐를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무사들은 픽픽 쓰러졌다. 굳게 처져 있는 마차의 휘장 안에서 무수한 암기들이 쏘아져 나왔던
것이다.
백유성은 마침내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는 들어서는 순간 의아한 느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의 시선은 곧장 집무실 안의 한 중년인에게 꽂히고 있었다. 그를 본 순간 그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총맹의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집무실의 의자에 앉아 화분을 들여다 보고 있는
중년인은 난생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이때 중년인은 그를 발견하고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기이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
백유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중년인이 그를 향해 포권하자 그도 얼떨결에 마주 공수할
수밖에 없었다.
"귀하는 누구신지......"
백유성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물었다. 중년인은 지그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과연 강호사공자다운 풍모로군."
"......?"
"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중년인은 고의인 듯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그와 백유성의 거리는 이 장쯤 되었다. 중년인, 즉 장천림은
눈어림으로 거리를 계산하고 있었다.
'아직 멀다. 좀더 가까이 접근해야 한다.'
그는 백유성에게 다가갔다. 그가 걸어가자 백유성의 얼굴에 언뜻 경계심이 떠올랐다.
"난 총맹에서 귀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누구시오?"
"허허! 그럴 만도 하지. 백대협은 날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것이네. 왜냐면......"
"......?"
백유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장천림은 그와의 거리를 일 장으로 좁히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계산했다.
'아직 멀다. 조금만 더 줄이면 된다.'
"왜냐면 말이오......."
그는 일부러 말을 늦추면서 다가갔다. 그러나 이때 백유성이 움찔하는 반응을 보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상한 예감을 느낀 듯 했다.
"허허! 난 총맹에서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기 때문이네."
장천림은 다시 그에게 걸어갔다. 백유성은 안색이 변했다.
"그럼 총맹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글쎄 어쩌면 그건......"
장천림의 얼굴에 기묘한 빛이 떠올랐다.
'일 보(步)만 더......'
그는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동시에 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그가 손을 올리자 백유성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이걸 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 것이네."
장천림은 품 속에서 손을 빼냈다. 바로 그때였다.
꽈꽈꽈쾅---!
경천동지(驚天動地)의 굉음이 울렸다. 어찌나 큰 폭음인지 집무실은 물론 철주부 전체가 온통 뒤흔들렸다. 이
느닷없는 폭음에 백유성은 깜짝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니?"
폭음은 철주부의 대문 쪽에서 울린 것이었다. 백유성은 대경하여 몸을 반쯤 돌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장천림은 품 속에서 손을 뺐다. 그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은 한 자루의 둥근 환(環)이었다. 오리알 굵기의
금속으로 된 환이 그의 손에 쥐어진 순간 으스스한 음성이 그의 입술 사이를 뚫고 흘러 나왔다.
"난 바로 널 지옥으로 데려갈 안내인이지!"
"......!"
몸을 돌려 대문 쪽으로 향해 있던 백유성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후기제일인 다왔다.
전광석화처럼 그의 신형이 회전했다.
그순간 장천림의 손아귀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났다.
번쩍! 하는 섬광이 그의 손으로부터 뻗었다. 놀랍게도 환은 둥글게 말려져 있던 연검(軟劍)이었다. 연검은
뱀처럼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그러나 일단 공력을 주입하면 빳빳해지는 것이었다.
"헉!"
백유성은 다급한 신음을 발했다. 몸을 돌린 순간 섬광같은 검세가 뻗어온 것이었다. 그는 짧은 순간 수많은
대응방법을 생각했다. 그의 부릅떠진 눈에 회의지심이 떠올랐다.
상대방의 일 초는 필살지초(泌殺之招)였다. 처음부터 일정한 검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수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동귀어진의 검법이었다. 그것을 간파한 순간 백유성은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아뿔사!'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가 대처 방법을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옆구리가 화끈했다. 상대의 연검이 물고기 배를
가르는 회칼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박혀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위인은 아니었다. 일 검을 맞는 순간 두 눈에 가공할 살기가 뻗었다.
"태극현현(太極玄玄)......"
슈파앗!
손바닥 하나가 꽃잎처럼 떠올랐다. 신형을 반쯤 튼 자세로 그의 장력이 뻗고 있었다.
강호제일검이라는 별호는 백유성의 무공 가운데 검법이 가장 뛰어나다기에 붙여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장기인 검법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아니 검을 뽑을 겨를조차도 없었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검법 못지 않은 절학이 있었다.
그것은 태극잠형공(太極潛形功)이란 무당비전의 절학이었다.
한편 장천림은 연검이 상대의 옆구리를 아무 저항없이 갈라버린 순간 공격이 성공했음을 알았다.
'됐다.'
손바닥을 통해 연검이 백유성의 옆구리를 꿰뚫고 갈빗대와 내장을 분리해 버리는 느낌이 전달되자 그의 뇌리에는
한 청순가련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소....... 세 번째 원수다. 이제 한 놈 남았다.'
그때였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그의 눈 앞에 하얀 손바닥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숨을 들이키지 못했다.
전광석화같은 순간에, 그러니까 백유성의 옆구리에 박힌 연검을 뽑지도 못한 그 순간에 그의 심장에 손바닥이
붙었다 떨어진 것이었다.
'역시 놈은......'
장천림은 탄식했다. 일순간 숨이 막혔다. 심장이 터질 듯 압박되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면서 그는 붕
떠올랐다.
꽝!
그는 뒤편 벽에 부딪쳤다. 놀라운 충격으로 벽이 부서지며 그의 몸은 벽을 뚫고 정원 쪽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는 화원 한가운데 떨어졌다. 그의 입과 코로는 붉은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전신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땅을 짚었다.
'일어나야 해.......'
그는 안간힘을 다하며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탈출이야. 자네가 정문으로 들어온 이상 반드시 정문으로 나가야 하네.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일 테니까.
그러나 장하영의 그런 신신당부도 지금 이 순간의 장천림에게는 아득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일어서기 위해
바닥을 짚었으나 어찌된 셈인지 손은 허공을 짚은 듯 허전했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과 바닥이 맞닿았다.
의지와 관계없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그는 코 끝으로 한 가닥 꽃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가 쓰러진
곳은 잘 가꾸어진 화원이었다.
화원의 꽃이 그의 몸에 눌려 쓰러져 있었다. 화사하게 핀 가을꽃이 바로 그의 코 앞에서 피어 있었다.
'향기가 좋군.......'
그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나마 꽃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백유성은 당대 제일의 후기제일고수였다. 장천림이 비록 혈명단에서 일급살수의 바탕을 닦고 다시 기연을 얻어
절학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백유성을 죽이기에 골몰한 나머지 필살검을 펼쳐낼 때 수비식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다.
무당의 태극잠형공은 도가의 상승기공이었다. 백유성이 최후의 힘을 짜내어 펼친 위력은 가공한 것이었다.
그것도 정확히 심장 부위에 적중되었다. 그의 손바닥이 닿은 순간 즉사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것은 장천림이 많은 영약을 복용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화원에 쓰러져 있었다.
콰콰콰......쾅! 펑! 펑!
정문 쪽에서 폭음이 연이어 울리고 있었다. 그 폭음은 각각 다른 곳에서 불규칙한 간격을 두고 울리고 있었다.
'일단 정문을 돌파하는데는 성공했구나.......'
장천림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석회림이 사방으로 폭약을 던지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그는 장하영과 석회림, 조천백이 자신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얼마나 초조해 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도무지 운신이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저 코 끝에 풍겨오는 꽃향기만을 맡을 수 있을 뿐이었다.
눈을 떠본다.
바로 얼굴 위에 국화(菊花) 한 송이가 늘어져 있었다. 화단에 처박힌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온통 가을의 향기를
뿜어내는 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는 향기를 깊숙히 들이마셔 보았다.
'흠....... 향기가 좋군.......'
국화향을 맡는 순간 그의 뇌리에 금문장에서의 즐거운 추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백가소가 꽃송이
하나는 머리에 꽂고 하나는 손에 쥔 채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소.......'
장천림은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귓전에 들려오고 있었다.
'일어나야 한다. 잡히면 끝이다.'
그는 간신히 몸을 반쯤 일으켰으나 곧 쓰러지고 말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문득 한 가닥 탄식이
귓전을 간지럽혔다.
"누군가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이었다. 장천림은 그 음성이 누구의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왠지 귀에
익숙한 음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식이 가물거리는 바람에 끝내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문득 향긋한 여인의
손이 그의 얼굴을 만지는 듯 했다.
그뿐이었다.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제 19 장 전족(纏足)한 여인

- 왜? 어째서 날 구했소......?
- 저도 몰라요. 왜 그랬는지....... 저도 제 마음을 알 수가 없답니다.......
두 사람의 눈이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여인은 사슴처럼 슬픈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여인의 옷이 바뀌어져 있었다. 눈처럼 하얀 소복(素服)이었다.
그는 여인이 소복을 입은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이 소복을 입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도리어 안 입는다면 더욱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소복 입은 여인이 어째서 남편이 아닌 다른 사나이를 돌보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장천림은 의혹의 눈을 떴다.
여인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는......?"
"몹쓸 계집의 방입니다. 이곳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장천림은 죄의식을 느꼈다. 여인은 미망인이었다. 그것도 그가 죽인 백유성의 아내였다. 그런데 그 미망인이
남편을 죽인 원수를, 그것도 자신의 침실 깊숙한 곳에 모셔오다니.
장천림은 눈을 감았다. 마음 속으로 회한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복수를 할 때마다 또 하나의 불행이 잉태되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건만.......
그는 눈을 떴다. 그는 부드럽고 향기로운 침상에 누워 있었고 여인은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느껴졌다.
소복을 입은 모습이 더욱 신비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길게 풀어헤친 머리칼과 눈처럼 흰 소복, 슬픔에 젖은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았다.
"당신의 이름은......?"
여인은 손수건으로 눈가에 고인 눈물을 찍는다.
"천첩의 이름은 망아(忘我)....... 망아랍니다."
"망아?"
몹시 이상한 이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릴 적에 어떤 스님이 붙여주신 이름이에요. 이 이름은 당신에게 처음으로 알려드린 것이랍니다."
장천림은 다시 눈을 감았다. 마음에 돌을 얹어놓은 듯이 무거웠다.
왜 이렇게 되었나.
그는 차라리 백유성을 죽이고 그 자리에서 자신도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악연은 악연을 낳는 것....... 그는 새삼 얽힐 지도 모를 또 하나의 운명의 굴레를 어찌해야 할 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차라리 당수문의 여인이었던 여옥환을 능멸할 때는 결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당수문에 대한
복수심으로 여옥환을 능욕하는 순간에는 도리어 일말의 쾌감마저 느꼈었다.
게다가 여옥환이 명문의 여인답지 않게 그에게 달라붙었을 때는 더욱 잔인하게 짖밟아 주고 싶은 마음까지도
들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백유성의 아내, 스스로를 망아(忘我)라고 밝힌 여인에게서 그는 도리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장천림은 운기를 해보았다. 그러나 한 줌의 진기도 모아지지 않았다. 도리어 운기를 하자 가슴이 쪼개질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그가 고통으로 눈살을 찌푸리자 여인 망아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힘쓰지 마세요. 백가 비전의 영약을 복용시켰으니 아직 움직이면 아니 됩니다."
망아의 말에 장천림은 멍해졌다.
"백가 비전의 영약을......?"
망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아니 당신의 눈을 대한 순간 왠지 저처럼 고독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화원에 쓰러져 있던 당신을 무사들에게 넘겼을 거예요. 어쨌든 당신은 부군을
죽인 원수니까요......."
"......."
장천림은 할 말을 잃었다.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과 망아의 관계가 너무도 기구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망아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너무나도 창백하여 마치 흰색 꽃을 보는 듯 했다. 그녀는 가늘게 탄식했다.
"아아! 유성은 저에게 있어 먼 분이셨어요. 그 분이 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었기에 순종했을 뿐이에요. 아....... 어쩌면 그 분과 저는 전생에서 악연이었을지도
모르죠."
"......."
"유성은 저를 곁에 두고도 다른 여인을 집 안에 끌어들이곤 했어요. 그 이유는...... 제가 너무나 차갑다는
것이었어요. 전 왠지 그 분에게는 가까이 갈 수가 없었어요."
장천림은 침상에 누운 채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 창백한 여인. 고결한 여인. 그리고 고독한
여인. 이 여인에게 붙는 수식어는 너무나도 많았다.
여인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듯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이해하시겠어요? 부부이면서도 이미 수년 간이나 잠자리를 따로 하였던 것을......? 그 분은 종종 제
앞에서 다른 여인의 이야기를 하곤 하였죠. 그리고...... 보란 듯이 그 여인을 끌고 와 술을 드시는 거예요."
장천림은 곤혹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째서 백유성이 이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러다가 문득 깨달아 지는 것이 있었다.
그래....... 이 여인에게는 이상한 향기가 있어. 그것을 백유성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야.
백유성이란 자는 근본적으로 망아를 모르고 있었다. 망아는 특이한 분위기를 지닌 여인이었다.
그녀는 정적(靜的)이었다. 백유성은 야망에 눈이 가려져 그녀 앞에서 자신이 속물(俗物)이라는 것을 느낀 순간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아내에게 복수라도 하듯 다른 여인과 바람을
피움으로써 자존심을 보상했는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한 장천림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어째서 처음 본 망아란 여인의 모든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부인 백유성도
모르는 망아의 내면과 성품, 분위기까지 어째서 타인에 불과한 그가 환히 알 수 있게 되었을까.
사람이란 참으로 묘한 동물인지도 몰랐다. 때로는 아주 간단한 사실조차 모를 때가 있고 또는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도 한 순간에 이해되는 경우가 있었다.
장천림과 망아.
그들은 천지간에서 가장 고독한 남과 여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그들은 처음 본 순간 눈빛만 보고 서로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장천림은 다시 생각했다.
'이 여인은 왜 날 구한 것일까? 부군의 원수인 날 구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일텐데.......'
그는 자신이 중상을 입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상세로 보아 최소한 한 달 정도는 누워 있어야 어느 정도 회복될 것이다.
그는 방 안을 둘러 보았다.
그가 누워 있는 침상은 망아의 것이었다. 금침에 향긋한 여인의 체향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방
안은 규모는 작았지만 은은한 느낌이 들었다. 망아의 성품과 같은 분위기를 주는 규방이었다.
그는 상세를 치유하는 동안에는 이 방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밖으로 한 걸음만이라도
나간다면 바로 적지(敵地)의 한가운데 들어서는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미 자신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는 여인의 지아비를 죽인 원수였다. 언제라도 마음이 변하면 여인의 손에 의해 비명횡사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
문득 그는 친구들 생각이 났다. 장하영과 석회림, 조천백은 얼마나 초조해 할 것인가?
그들은 지금쯤 자신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태로는 그들에게 소식을 전할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장천림은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어. 회복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는.......'

상세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장천림은 이따금씩 혼수상태에 빠지곤 했다. 전신에 신열이 들며 정신이 가물가물해져 의식이 아득히 멀어지곤
했다.
그런데 그가 깨어났을 때는 언제나 망아가 옆에 있곤 했다. 그녀는 한 번도 그의 곁을 뜨지 않고 침상 옆에 앉아
그를 그윽한 눈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제 장천림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소복을 입고 곁을 지키는 그녀의 모습이 몹시
거북했으나 차츰 습관화된 것이었다.
어떤 때는 그녀가 입은 소복이 소복으로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순결한 백의를 입고 있는 듯 했다.
가끔 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망아의 모습에서 말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곤 했다. 청초한 백합이랄까?
그녀의 가녀린 흰 목줄기 선을 올려다 보며 그는 자신을 나무라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저 여인은 네가 죽인 백유성의 아내다!'
기이한 일이었다.
꽤 많은 날짜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그는 시시때때로 운기해 보았으나
단전은 텅 비어 있었고 한 줌의 진기조차 끌어모을 수가 없었다.
백가 비전의 영약을 복용했고, 매일같이 망아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고 있었음에도 체력이 회복되기는커녕 나날이
기력이 쇠잔해갈 뿐이었다.
장천림은 자신이 침상에 누워 있은지 족히 열흘은 지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두렵지 않았다. 설사 이곳에서
머물다 죽거나 철주부의 인물들에게 발각된다해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장하영 일행이 걱정스러웠다. 그들이 누구인가?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며 우정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들이었다.
그들은 장천림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하는 한 철주부를 떠나 않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찾기
위해 모험을 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그것을 생각하자 장천림은 눈을 감고 말았다.
'어서 일어나야 할 텐데.......'

북리웅풍은 의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백유성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허탈한 심정이었다.
'결국 응보를 받았군. 허허......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나인가?'
왠지 아무런 분노나 감정이 일지 않았다. 올 것이 당연히 왔을 뿐이라는 느낌이었다.
북리웅풍은 내향 부근에 와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장하영을 발견했다. 장하영은 백유성이 살해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내향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비록 변장을 했지만 북리웅풍은 한 눈에 그를 알아 보았다. 그리고 의문을 느꼈다.
사실 철주부 일대는 가히 천라지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백유성이 살해된 직후 무림총맹의 고수들이 대거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철주부가 있는 내향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어째서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북리웅풍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암중으로 장하영의 뒤를 미행해 보기로 했다. 미행하는 동안 그는 몇
차례나 장하영의 종적을 놓칠 뻔 했다.
장하영이 여러 차례 변장을 했을 뿐더러 계속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북리웅풍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치밀하구나.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결코 뒤를 밟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미행한 지 반나절 만에 그는 장하영이 동료들을 만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동료를 만나는
장소나 방법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장하영은 농군으로 변장하고 막 작물(作物)을 수확하는 농부들 틈에 끼어들고 있었다. 처음 북리웅풍은 그의
그런 행동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도 곧 농사꾼으로 변장하고 농부들 사이에 끼어 들었다.
그는 장하영의 기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무림맹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 온 지혜를 짜고
있었다. 설마하니 추수를 걷는 농사꾼들 사이에 그들이 섞여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할 일이었다.
북리웅풍은 농사꾼들 틈에 섞인 채 삼인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그리고......경악을 금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그들이 왜 내향을 떠나지 않는 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장하영 일행은 장천림 때문에 내향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백유성을 척살한 장천림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장하영은 벼를 묶으며 옆에 있는 석회림에게 말하고 있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야. 천림의 행방을 그 작자들도 모르는 모양인데......?"
석회림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천림이 그들에게 잡히지 않았다면 어째서 나타나지 않는 거지?"
"어쨌든 무림맹의 동태로 미루어 천림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해."
그때 옆에서 벼를 베고 있던 조천백이 입을 열었다.
"정말 알 수가 없군. 천림은 분명 철주부를 나오지 못했어. 그렇다면 그가 어디 있는 걸까?"
장하영은 어두운 안색을 지었다.
"어쨌거나 그의 생사를 확인하기 전에는 우리도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물론이지!"
나머지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은 시시각각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천림을 버려두고 자신들만 살기 위해 이곳을 뜬다는 것은 세 사람 모두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한편, 북리웅풍은 그들이 하는 대화를 듣고 마찬가지로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저들의 말을 들어보면 장천림이란 자는 아직도 철주부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는 추수하는 척 하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장하영 일행은 동료를 찾기 전에는 철주부를 떠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시간이 흐를 수록 그들의 위험은 커질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치밀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해도
결국은 꼬리가 잡히게 마련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철주부로 뛰어들기라도 한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결국 모두 산화할 것이다.
'이들을 모두 죽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천인검객 북리웅풍은 장하영 일행을 바라보았다. 삼인은 대화를 끝낸 듯 서로 멀리 떨어져 일하고 있었다.
남들에게 의심받지 않기 위함인 듯 했다.
북리웅풍은 장하영, 조천백, 석회림을 하나씩 둘러 보았다. 그는 장하영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당시
장하영으로부터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그들이 얼마나 강한 의리를 지니고 있는 지 알고 있었다.
반면 정도를 자처하는 자신의 친구들은 어떠했던가? 장하영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는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안 돼, 저들을 죽게 해서는 안 된다.'
북리웅풍은 결심을 굳혔다. 가을 햇볕 아래 추수걷이를 하는 농부들의 손은 바빠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 끼어
서툰 낫질을 하는 그를 눈여겨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들판은 넓었다.
한편 장하영은 머리가 복잡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장천림이 실종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무림맹
인물들에게 죽음을 당하거나 생포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철주부의 동정을 볼 때 거의 확실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천림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철주부로 잠입해 들어가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하영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할 수 없지. 늑대굴로 뛰어들 수밖에......."
이때였다. 문득 그의 옆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안 되오.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같소."
"......!"
장하영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 한 명의 사나이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채 벼를 베고 있었다.
방금 전의 말은 그가 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고 있어 얼굴을 알 수 없었다. 그가 막 사나이에게 다가가려하자 다시 예의 음성이 들려왔다.
"부탁이오. 굳이 날 알려 하지 마시오. 당신들을 해칠 사람은 결코 아니오."
장하영은 흠칫했다. 사나이의 음성은 언젠가 들은 적이 있던 것 같았다. 마침내 기억이 났다.
바로 무협에서 위기에 처했던 자신을 구해 주었던 복면인의 음성이었다. 그는 놀라움을 가라앉히며 반문했다.
"당신은 바로......"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소. 내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믿어 주겠소?"
장하영은 생각했다.
'그렇다. 당시 이 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일로 볼 때 악의를 품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곧 음성을 부드럽게 하며 말했다.
"믿을 수 있소."
사나이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다행히 주변에 농부들이 없었으므로 전음으로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 내 말을 들으시오. 지금 당신들은 완전히 사면초가나 다름없는 상태요. 이 일대는 무림맹의 수천에 달하는
고수들이 천라지망을 펼쳐 놓았소. 함부로 움직이다가는 덫에 걸리기 십상이오. 더구나 이런 상태로 철주부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힘든 일이오."
장하영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걸 모르는 우리가 아니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해야만 하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친구이기 때문이오."
북리웅풍은 탄식했다.
"알고 있소. 당신들이 생사를 함께 하는 사이라는 것을...... 그러나 결과가 불을 보듯 뻔한 일을 할 필요는
없지 않소?"
그 말에 장하영은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이 일을 벌이는 동안 우리들 중 끝까지 살아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소."
"......!"
북리웅풍은 움찔했다. 장하영의 말은 몹시 비장한 것이었다. 아니, 어리석기까지 한 것이었다.
"후후후....... 하지만 죽으면 모두 죽고, 살려면 같이 살겠다고 생각했고, 우리는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중이오."
북리웅풍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백도의 청년고수들에게도 과연 이런 의리가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간단했다. 없었다. 결코 이런 의리를 주고받는 청년들이 그의 주변에는 없었다.
강호사공자만 해도 그렇다. 겉으로는 그들의 우의가 혈족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어떤가?
오래 전부터 강호사공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반목과 질시가 팽배해 있지 않았던가? 그는 고개를 돌려 장하영을
바라 보았다. 장하영은 묵묵히 고개 숙인 채 벼를 베고 있었다.
그는 장하영이 부러웠다. 친구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마침내 북리웅풍은 입을
열었다.
"철주부에는 내가 들어가겠소. 당신들의 친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보겠소."
장하영은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째서 당신이 그런 모험을 한단 말이오?"
사나이는 담담히 말했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요."
장하영은 더욱 의혹이 차올랐다. 그는 내심 염두를 굴렸다.
'이 자는 우리에게 악의를 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호의가 아닌가? 대체 이 자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자신의 생명까지 도외시한 채 이런 호의를 베푼단 말인가?'
이때 그는 북리웅풍이 저만치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전음으로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명심하시오. 며칠 내로 당신을 다시 찾겠소. 그의 생사를 확인한 후에 말이오. 그 안에 절대로 움직여서는 안
되오.)
북리웅풍은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더니 곧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
장하영은 커다란 의문에 부딪친 느낌이었다. 그는 사나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철주부 중의 집무실이었다.
"아미타불......."
청수한 인상의 한 젊은 중이 집무실을 둘러 보며 불호를 외우고 있었다.
그는 오현대사(五玄大師)였다. 그의 나이는 삼십육 세, 적지 않은 나이였으나 그렇다고 많지도 않은
청년중이었다.
그러나 나이에 비해 그의 비중은 커다란 것이었다. 그는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의 차기 장문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백유성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이곳으로 달려왔다. 철주부에 모여든 무림맹의 고수들을 지휘할
인물이 필요했다.
그는 임시로 이곳의 영수가 되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백유성의 시신을 살펴본 후 집무실부터 찾았다. 사건의
현장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집무실에 들어선 순간 그는 한 눈에 모든 것을 파악했다. 집무실의 도구들은 그다지 어지러져 있지 않았다. 다만
한 쪽 벽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매우 정갈한 분위기였다.
오현은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판단해 보았다.
'싸움은 한 순간에 끝나 버린 것 같다. 흉수는 백시주를 단 일초에 죽였다. 시신의 몸에 나 있는 검상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백유성의 옆구리에 난 상흔의 방향을 검사했다. 그 결과 분명한 사실 하나를 짚어낼 수 있었다.
'백시주는 마주 보고 있는 상태에서 몸을 반쯤 뒤로 돌렸다가 다시 자세를 잡는 순간 상대방의 갑작스런 급검(急
劍)을 맞았다. 그 이유는.......'
오현은 당시의 정황에 대하여 이미 자세히 보고 받은 바 있다. 백유성이 철주부로 돌아온 후 대략 일 다경 후
정문 쪽에서 화약을 실은 마차 세 대가 달려와 대문에서 터졌다고 했다.
'그 폭음 소리는 이곳까지 들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시주는 흉수와 얘기하다가 놀라 몸을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 보았을 것이다.'
오현은 백유성이 죽었으리라 짐작되는 위치로 가 섰다. 다리는 그대로 둔 채 상반신만 틀어 뒤를 돌아 보았다.
그 방향은 바로 정문 쪽이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오른쪽 옆구리가 비게 되었다. 오현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흉수의 공격은 필살검일 것이다. 그 자는 수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절초를 펼쳐 백시주의 옆구리 급소를 단 일
초에 베어 버렸다. 그렇다면 저 구멍은.......'
그는 전면에 보이는 벽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바라 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서서히 우장(右掌)을 뻗어
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백시주는 비록 치명적인 검상을 입었으나 최후의 반격(反擊)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시주의 일장을 맞은
흉수는 뒤로 날아가 벽을 뚫고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충격이 컸던 이유는 그 자가 미처 수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현대사는 차분하게 상황을 추리하고 있었다. 그는 매우 침착한 위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소림에서 자라 불문의
무상심법(無上心法)을 익혔으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심과 얼음같은 판단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흉수가 대단히 침착하고 치밀한 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몇 명의 방수와 함께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잠입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무림총맹에서 온 인물의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정문을 수비하던 무사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흉수는 총맹의 금어령(金魚令)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금어령이란 무림맹의 금은동목(金銀銅木) 네 가지의
신물 가운데 가장 서열이 높은 신물이다. 대체 그가 금어령을 어떻게 얻었을까?'
금어령. 그것은 순금으로 만들어진 물고기(魚) 모양의 신물로써, 무림맹에 속한 요인들만이 지닐 수 있었다.
오현대사도 물론 금어령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무림맹의 결맹문파에 단 한 개씩밖에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오현은 그 말을 듣고 무사에게 자신의 금어령을 보여 준 결과 똑같이 생겼다는 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금 무림에서 금어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도합 십육인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흉수는 십육인 가운데 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들 중 어느 한 사람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되면 흉수의 윤곽은 다소 좁혀지는 것이다.
물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열여섯 개의 금어령을 모두 조사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해당되는 각 문파나 무가들을 모두 소집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오현대사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 철주부 일대에 포진하고 있는 무림맹의 무사들을 점검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백유성이 배치한 무사들이었다. 당시 오현은 백유성이 친 그물과도 같은 포진이 거의 완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상 백유성은 이곳에서 강호사공자를 노리는 흉수들을 일망타진할 작전을 세워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천라지망을 펼쳐 놓았고 각 요로로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보고와 전서구를 받고 있었다.
백유성이 죽은 후에도 전서는 계속 날아들고 있었다. 오현은 그 전서들을 읽은 바 있었다.
그 결과를 토대로 할 때 흉수는 네 명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각종 보고와 전서구의
내용을 취합해 볼 때 그들이 아직도 철주부 일대를 떠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현은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백시주를 살해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했다. 그런데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오현대사는 다시 시선을 맞은 편 벽에 나 있는 구멍으로 향했다.
구멍의 크기는 사람만 했다. 그는 몸을 움직여 구멍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가보았다.
"......!"
오현대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밖은 잘 가꾸어진 화원이었다. 곧 그는 화원 중간 쯤 되는
곳에서 꽃들이 누워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소리도 없이 꽃밭 한가운데로 날아간 그는 무엇엔가 짓이겨진 듯한 꽃들을
살펴보았다. 문득 그의 눈이 빛났다.
'흉수는 중상을 입었다. 그가 이곳에 쓰러진 채 금방 일어나지 못했기에 며칠이 지난 지금도 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것이다.'
오현은 문득 영감이 떠 올랐다.
'흉수가 백시주를 만나는 시각에 대문 쪽으로 달려들었던 세 대의 마차에는 화약이 실려 있었고, 마차가 폭발한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처 폭약이 터지며 일대 소란이 일어 났다. 그것은 백시주를 죽인 흉수가 달아날 기회를
얻게 하려는 양동작전(兩動作戰)이다. 그러나 만일 흉수가 중상을 입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꽃밭의 부드러운 흙을 일일이 검사했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 누워 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오현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꽃밭의 부드러운 흙에 아주 작은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여인......?'
그가 여인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발자국의 크기가 아주 작았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작아 전족을 한 여인의
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현대사의 머리는 다시 회전하고 있었다.
'이 여인이 목격자였다면? 그렇다면......'
오현의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흉수는 쉽게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자력으로는 절대 밖으로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발자국의 주인일 가능성이 크다.'
마침내 그의 눈길은 여인의 작은 발자국을 쫓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간 앞으로 나가자 발자국이 갑자기
깊게 패여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 여인의 발자국이 깊어진 것은 흉수를 부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흉수를 부축한 채 어디로 갔을까?
물론 그런 상태로는 경계망이 삼엄한 밖으로 나갈 엄두는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오현대사의 추리는 막힘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의 맑은 얼굴과 빛나는 눈동자에는 혜광이 감돌고 있었다.
'경황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인은 흉수를 이곳 철주부 어딘가에 숨겨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발자국은 꽃밭에서 나와 청석에 이르러서는 끊겼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청석판에 발자국이 찍힐 리는 없는
것이었다.
더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수확은 컸다. 오현은 짧은 동안에 많은 단서를 얻어낸 것이다.
첫째, 흉수는 철주부를 빠져 나가지 못했다.
둘째, 흉수 일행이 철주부 일대를 떠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동료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 흉수의 행방은 여인과 관련이 있다.
네 번째는 더더욱 확실한 것이다. 흉수를 구해 숨겨두고 있는 여인은 바로 철주부 내의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오현대사는 다시 집무실로 돌아간 후 사람을 불렀다.
"철주부의 총관이나 집사(執事)를 불러주시오."

황양우(黃陽羽)라는 이름의 집사는 사순이 넘었다. 그는 무림인이 아니었으며 꼬박 이십 년 이상을 철주부의
집사로 일하고 있었다.
철주부의 원래 주인은 백유성의 부모였다. 그러나 그들은 수 년 전 타계했으므로 부중의 모든 일은 그가
관리해오고 있었다. 특히 백유성이 무림의 일에 바빠 철주부를 거의 비우다시피한 이후 황양우가 실질적인 관리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족을 한 여인이오?"
황양우는 문득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미타불....... 그렇소이다. 철주부에 혹시 전족을 한 여인이 있소?"
황양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양가(良家)의 여인이라면 대부분 전족을 하는 것이 풍습입니다. 그러나 부중에서 전족을 한 여인은 오직 한
분밖에 없는데......"
오현대사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어떤 여인이오?"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황집사는 신중한 위인이었다.
"아미타불....... 사실대로 말씀해 주셔야 하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오. 백부주의 사인을 규명하는데
없어서는 아니될 물증이기 때문이오."
그 말에 황양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어쩐지 꺼리는
점이 있는 듯 쉽게 입을 열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현대사는 부드럽게 말했다.
"전족을 한 여인이 꼭 흉수라는 뜻은 아니오. 다만 그녀를 통해 흉수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물어보는 말이오."
그 말에야 황양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잠시 주저하다 결심한 듯 말했다.
"그 분은...... 마나님입니다."
"......!"
오현대사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백시주의 부인이라고? 어찌 그럴 수가......?'
그것은 실로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설마하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꿈에도 예측하지 못했다.
한편 집사 황양우는 불안한 표정으로 오현대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철주부의 안주인인 마님을 몹시 존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자신의 말로 인해 가뜩이나 슬픔에 잠겨 있는 그녀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저어하는
것이다.
오현대사는 곧 안색을 회복하며 담담히 말했다.
"아미타불....... 말해주셔서 고맙소이다. 아무쪼록 큰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다만 당분간은 이 일을
비밀로 해주시면 고맙겠소."
"......?"
황양우는 의아했으나 더 묻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그는 정중히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후 집무실에서 물러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그가 집무실을 나와 회랑을 걸어가고 있는데 한 가닥 회영이 처마로부터 연기처럼 떨어져 내렸다.
회영의 신법은 괴이했다. 바닥에 떨어진 그는 다시 연기처럼 흐려지며 사라졌다. 그가 붙어있던 처마는 바로
집무실의 동정을 한 눈에 지켜볼 수 있는 위치였다.
제 20 장 이상한 남녀(男女)

"죽을 드실 시간이에요."
장천림은 꿈결처럼 그 음성을 들었다.
그는 줄곧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시일이 갈 수록 그의 체력은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분명 상세는 더이상
악화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전될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는 무기력할 뿐이었다. 딱히 아프지도 않았다. 다만 진기를 한 모금도 모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한 시라도 빨리 철주부를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이곳을 벗어날 만한
체력이 없었던 것이다.
여러 날이 흐르는 동안 그는 줄곧 망아의 침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망아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만일 그녀가 아니었다면 결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망아. 더이상 견딜 수가 없소. 날 차라리 밖으로 보내 주시오."
그는 망아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망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이대로 나가셨다가는 몇 걸음도 가시지 못하고 붙잡히고 말아요."
"하지만 이러다 들키면 망아에게도 위험이 닥치오. 그런 일은 절대로......"
그는 더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망아가 하얀 손을 뻗어 손가락 하나로 그의 입술을 살짝 눌렀기 때문이었다.
손가락이 입술에 닿자 말할 수 없이 그윽한 향기가 느껴졌다.
'망아.......'
장천림은 그만 스르르 눈을 감고 말았다. 가슴을 저미는 듯한 이상한 감동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만일 계속
망아를 바라본다면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지 자신할 수 없어 눈을 감고만 것이다.
망아의 손이 그의 어깨를 부축했다. 그녀는 장천림을 부축해 일으켜 앉힌 후 손수 죽을 떠 먹여 주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마치 남편에게 봉양을 하듯, 아니면 어린아이를 거두어주듯 다정하고 섬세하기만 했다.
장천림은 그녀의 남편을 죽인 원수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이 두 사람은 행동했다. 벌써
며칠인가? 두 사람은 한 방에서 생활해온 것이다.
그동안 장천림은 그녀가 떠먹여 주는 죽으로 연명해 왔다. 다른 음식은 소화를 시킬 수가 없었다.
죽을 먹으면 그는 곧바로 잠이 들었다. 그가 잠들면 망아는 그의 곁에 지켜 앉아 언제까지고 그를 바라보곤 했다.
어떨 때는 잠든 장천림의 곁에 살며시 눕기도 했다. 그녀는 부드럽게 장천림의 이마를 쓰다듬기도 하고 머리칼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지금 그녀는 꿈꾸듯 몽롱한 눈빛으로 장천림을 보고 있었다.
내 사람이야....... 당신은 날 벗어날 수 없을 거야. 당신의 모든 것은 이 망아의 것이에요.......
그녀는 그릇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전 그녀는 머리를 숙이더니 장천림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내 곁을 떠나지 말아요. 귀여운 사람.'
망아가 밖으로 나간 직후, 방 안에 한 가닥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북리웅풍이었다.
북리웅풍은 침상에 누워 있는 장천림을 보고 눈썹을 경련하고 있었다.
"으음......! 역시 그랬었군."
북리웅풍은 황집사의 말을 엿듣고 이곳에 잠입한 것이다. 전족을 한 여인은 철주부에 오직 한 여인밖에 없었다.
그녀가 바로 망아였던 것이다.
망아는 죽은 백유성의 아내다. 북리웅풍은 얼핏 짐작되는 점이 있었다. 그는 평소 백유성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여인들과 어울려 즐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망아가 남편의 원수를 감싸는 것도 어쩌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장천림의 현재 상태였다.
그는 장천림의 이불을 들추었다. 장천림은 상체를 벗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그의 가슴 한복판에 찍혀 있는 장인(掌
印)을 볼 수 있었다.
장인은 희미하게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북리웅풍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장인의 흔적으로 보아 상처는 이미 거의 치유된 듯 한데......?'
그는 장천림의 맥을 짚어 보았다. 북리웅풍은 약간의 의술을 알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의
얼굴에는 서서히 경악의 빛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는 전율을 금치 못했다.
'만성독약(萬性毒藥)을 복용했다! 그렇다면......?'
그는 가슴이 섬뜩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 자를 구해놓고 독을 먹인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장천림이 회복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가 정기적으로 만성독약을 복용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매일
마시는 죽 속에는 일정량의 만성독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망아라는 여인이 죽 속에 풀어넣은 독이었다. 북리웅풍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결정했다.
'어쨌든 이 상태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급히 장천림을 안아 들었다. 조만간에 오현대사가 들이 닥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막 장천림을 안고 신형을 날리려 할 때였다.
"움직이지 말아요!"
문득 한 가닥 싸늘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
북리웅풍은 몸을 돌렸다. 방문 입구에 망아가 만면에 살기어린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물론 여인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가 섬뜩한 느낌을 받은 것은 망아의 두 눈에 서려
있는 기괴한 빛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분명 정상인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는 몽롱한 안개가 끼어 있는 듯 했고, 으스스한 독기마저 뿜어지고 있었다.
"부인......."
북리웅풍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망아는 섬뜩한 음성으로 외쳤다.
"닥쳐요! 어서 그 분을 내려놓아요. 그 분은...... 아무도 나에게서 떼어놓지 못해요. 그는 나의
사람이에요."
"......!"
북리웅풍은 전율을 느꼈다.
'미...... 미쳤다. 이 여인은 정상이 아니다. 남편의 무관심과 갑작스런 정신적 타격으로 미쳐버린 것이다.'
북리웅풍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의 능력으로는 여인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설이는 것은 그녀가 소란을 피워 철주부의 무사들이 몰려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렇게 되면 장천림을 데리고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북리웅풍은 결국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할 수 없다. 신속히 제압하고 나갈 수밖에......'
그가 막 손을 쓰려 하는 순간이었다.
"아미타불....... 부인,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느닷없이 들려온 불호! 북리웅풍은 그만 아찔한 기분이었다.
'오현대사!'
그렇다. 그 음성의 주인은 바로 오현대사의 것이었다. 그가 우려하던 일이 드디어 터진 것이다.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염두를 굴렸다. 상황은 그야말로 진퇴유곡이었다. 만일 오현에게 자신의 정체를
발각당한다면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아무리 둘러댄다 해도 통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런데 이때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죠?"
망아가 지극히 태연한 어조로 방문을 향해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녀의 다음 행동이었다. 그녀는 몸에 걸치고 있던 소복을 하나씩 벗어 내리는 것이 아닌가?
'......!'
북리웅풍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무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미타불....... 잠시 안으로 들어가 여쭐 말씀이 있소이다. 부인을 해칠 일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오현대사의 주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는 듯 웅성거리는 인기척이 들리고 있었다.
북리웅풍은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간담이 크다 한들 이 상황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망아가 옷을 벗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마침내 망아는 거의 알몸이 되었다. 그녀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젖가슴을 간신히 가린 한 장의
천과 아랫배를 살짝 가린 비단천뿐이었다.
북리웅풍은 그녀를 바라보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아찔할 정도로 현기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백설보다 흰 피부였다. 두 장의 비단천 외에 나신으로 드러난 망아의 육체는 너무나도 아름다왔다. 만지면 묻어날
듯 부드럽고도 육감적인 육체였다.
"호호호호......! 이곳은 천첩 혼자만이 살고 있는 방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이 방에 들어오겠다는 건가요?
들어 오려면 들어 오시죠."
망아는 교소를 터뜨리며 문을 열었다. 북리웅풍은 급히 휘장 뒤로 몸을 감추었다.
약간 열려진 휘장 사이로 그는 방문 앞에 서 있는 오현대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 아미타불......!"
오현대사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불쑥 그의 코 앞으로 향기로운 여인의 나신이 나타난
것이었다. 평생 여인이라고는 접한 적이 없는 오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여체가 바로 코 앞에 나타나자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아니, 그는 합장하며 황망히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망아의 분노섞인 음성이 들렸다.
"옷을 갈아 입는 중이에요. 그래도 들어오겠다면 어서 들어오세요. 그러나 미망인을 희롱한다는 말을 들어야 할
거예요."
망아의 음성에는 차가운 한이 깃들어 있었다.
"호호홋......! 당신들은 천첩의 주인께서 타계하셨다고 미망인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건가요?"
"아미타불....... 아미타불......! 결코 그런 뜻은 아니외다. 부인."
오현은 눈을 감은 채 당황한 음성으로 불호를 연신 외우고 있었다. 그의 반듯한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호호호......! 아니라면 무언가요? 꼭 들어오겠다면 어서 들어오세요."
망아는 길을 비켜 주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가는 허리가 흔들리며 여체가 미묘한 율동을 그렸다.
"아미...... 타불!"
오현은 비록 눈을 감고 있었으나 망아가 움직이자 향긋한 여인의 체향이 코로 풍겨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심금이
떨림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의심이 간다고 해도 일이 이 지경이 된다면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그는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아미타불....... 그럼 다음에 다시 오겠소이다."
그는 자신의 뒤를 따라온 인물들에게 손을 저은 후 밖으로 나가 버렸다.
"......."
망아는 가만히 서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몸을 돌렸다.

북리웅풍은 휘장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부인. 이제 옷을 입으시오."
그러나 망아는 듣지 못한 듯 여전히 반라의 몸으로 서 있었다.
"......!"
북리웅풍은 흠칫했다. 망아의 창백한 뺨에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감히 그녀의 벗은 몸을
보지 못하다가 어쩔 수 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망아는 실로 찬탄할 만한 육체를 지닌 여인이었다. 솟을 곳은 알맞게 솟았으며 꺼질 곳은 역시 기묘하게 꺼진
요철형의 굴곡이 완벽한 여인이었다.
북리웅풍은 문득 의문을 느꼈다.
'어째서 백유성은 이런 아내를 두고 마음을 딴 데로 돌렸을까?'
부부간의 일은 타인이 알 수 없는 법이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부인......."
그가 다시 입을 열자 망아는 문득 중얼거렸다.
"아아. 그 사람을 살릴 수는 없나요? 저는......그 분이 죽으면 살 수가 없어요."
"......!"
북리웅풍은 경악했다. 그러고 보니 망아의 눈동자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줄곧 안정되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번뜩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 여인은 정신적인 타격을 받아 신지를 잃었다. 이 상황에서는 어쩌면 더 나은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설득해서......'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부인. 당신의 남편은 아직 죽지 않았소."
그는 침상에 눕혀 놓은 장천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여인은 고개를 돌려 장천림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정말인가요? 아아! 하지만 틀렸어요. 그 분은 너무나 심한 상처를 입었어요."
"아니오. 살릴 수 있소. 해약만 있다면......."
"해약이라니요?"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고 죽 속에 독약을 넣었소. 혹시 해약에 대해 알고 있소?"
"죽 속에 독을 넣었다고요? 죽......?"
망아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그렇소. 죽 속에 독이 타 있었던 것이오. 그 해약을 아마도 부인은 알고 있을 것이오. 잘 기억해 보시오."
망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죽이라면 내가 직접 만들었는데...... 독을...... 독을......?"
문득 그녀의 눈에 이상한 빛이 어렸다.
"그렇군요. 그 독은 내가 탔어요. 그리고 해약도 나에게 있어요."
"그렇소! 어서 해약을 내놓으시오. 밖에는 적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해약을 복용시켜야 하오."
그는 서둘렀다.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어쩔 수 없이 그는 눈부시게 흰 망아의 팔뚝을 잡고 흔들었다.
망아는 그의 재촉을 받자 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해약은......"
그녀의 눈동자가 한 쪽 벽으로 가고 있었다.
'저곳이다.'
북리웅풍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신형을 날려 벽장을 열었다. 벽장 속에는 서랍이 있었다. 그리고 서랍
속에 세 개의 옥병이 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북리웅풍은 옥병 세 개를 몽땅 꺼낸 뒤 물었다.
"이 중 어느 것이 해약이오?"
"그런데 당신은 누구죠?"
망아의 안색이 기이하게 변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 남편의 친구요."
북리웅풍은 당황했다. 문득 그녀의 눈에 증오가 어리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호호호......! 유성은 아주 나쁜 사람이에요. 당신이 그의 친구라니 당신 역시도 나쁜 사람이겠군요?"
"아니오. 나는 그렇지 않소. 부인은 오해하고 있소. 유성은......"
이때였다. 어디선가 가벼운 탄식이 들렸다.
"귀하. 너무 그렇게 애쓸 것 없소. 그녀는 불쌍한 여인이오."
"......!"
북리웅풍이 돌아다 보니 침상 앞에 장천림이 서 있었다. 장천림의 안색은 잿빛에 가까왔으나 정신은 말짱한 듯
했다.
그는 걸음을 옮기더니 망아의 손을 잡았다.
"망아. 당신은 참으로 좋은 여인이오."
망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시울이 빨갛게 충혈 되었다.
"당신은......."
장천림은 아직도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처음 이곳에 잠입할 때 쓰고 있던 중년인의 면구였다.
"당신은 눈을 떠야 하오. 백유성은 내가 죽였소. 나는 당신의 원수요."
장천림의 말을 듣고 있던 북리웅풍은 가슴이 철렁했다.
"귀하!"
그러나 장천림은 개의치 않고 담담히 말했다.
"나는 위선을 싫어하오. 불쌍한 여인을 더이상 속인다는 것은 남자의 도리가 되지 못하오."
그 말에 북리웅풍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아....... 저 자는 백도인이 아니면서도 자신의 생명이 달린 일에도 저렇게 당당하다. 그에 비하면 우리
백도인들은... 아! 부끄러운 일이다.'
이때 망아는 긴 미몽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이 미묘해지고 있었다.
"그렇군요....... 당신은 나의 원수예요. 나의 유성을 죽인 사람......."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그 자는 나의 원수였기 때문에 죽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오."
망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나는......."
"부인의 처분에 맡기겠소. 지금 이 자리에서 부인이 날 죽인다 해도 난 저항하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장천림의 진심이었다. 그는 망아와 함께 보내는 동안 그녀가 얼마나 불행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그녀가 자신에게 독을 먹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해 조금도 분노심이 일지 않았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망아의 태도였다.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군요. 아아! 유성이 당신의 반만 따라왔어도......."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검은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편 북리웅풍은 초조한 기분이었다. 비록 오현대사가 잠시 물러갔다고 하지만 언제 또다시 올 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망아의 음성이 들렸다.
"빨간 색의 옥병이 해약이에요".
북리웅풍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급히 붉은 옥병을 장천림에게 내밀었다.
"어서 복용하시오. 당신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소."
장천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누군데 날 돕는 것이오?"
북리웅풍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정상 밝히지 못함을 용서하시오. 다만...... 참회객이라고만 불러 주시오."
"참회객?"
"시간이 없소."
장천림은 옥병의 뚜껑을 열었다. 향긋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옥병을 기울였다.
"안 돼요! 그건 독이에요!"
"......!"
망아의 다급한 외침에 장천림은 물론 북리웅풍도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도무지 그녀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말에 대한 진위 여부도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장천림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부인. 날 죽이고 싶다면 굳이 독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오. 부인께서 직접 손을 쓰신다 해도 결코 저항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설사 이것이 극약이라 해도 난 먹겠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옥병의 약을 단숨에 입 속으로 털어넣었다.
"귀하!"
북리웅풍은 깜짝 놀라 그를 만류하려 하였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장천림은 약을 삼켜버린 것이다.
"......!"
망아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장천림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녀의 소복을
집어 걸쳐주며 말했다.
"난 부인을 원망하지 않소."
그때였다. 망아가 갑자기 오열을 터뜨리며 그의 품에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흑......!"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남녀라고 북리웅풍은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 일이란 왕왕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법이었다. 장천림과 망아. 그들 두 사람은 이미
영적(靈的)으로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감정은 그들 두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고독을 경험한 사람들끼리만
오갈 수 있는 감정이었다.
북리웅풍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장천림은 망아를 껴안고 있었다. 그는 마치 다정한 연인인 양 망아의 긴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고, 망아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누가 그들을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라고 하겠는가? 마치 아주 오래된 연인인 듯 보일 뿐이었다.
장천림은 한동안 망아의 머리칼을 쓰다듬더니 이윽고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고 있었다.
"만일 당신이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 말은 북리웅풍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워낙 작은 음성이었다. 장천림은 고개를 숙여 망아의 작은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인 것이었다.
북리웅풍은 볼 수 있었다. 장천림이 뭐라고 말했는지는 몰라도 그 말을 들은 후 망아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아닌가.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음, 하고 낮고 달콤한 신음을 발하더니 가냘픈 두 팔을 뻗어 장천림의 목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장천림은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
북리웅풍은 고개를 돌렸다. 방 안은 갑작스럽게 춘경으로 변해 버렸다. 그로서는 더이상 두 사람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문득 그는 왜 아직 장천림이 쓰러지지 않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붉은 옥병 속의 약은 바로 진짜 해약이었던 것이다. 이때 장천림은 망아의
귀에 속삭이고 있었다.
"당신을 데리러 오겠소. 언제든...... 일이 끝나는 대로......."
망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백유성의 아내였으나 그를 사랑할 수 없었다. 장천림을 간호하는 동안 그녀의 마음은 온통 그에게 쏠리고
있었다. 그를 영원히 자신의 곁에 붙들어 두고 싶었다. 그런 욕심이 그녀로 하여금 그에게 만성독약을 먹이게 한
것이었다.
장천림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그래서 그녀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 역시 망아가 좋았다. 왜냐하면 그들 두 사람은 상통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천림은 백가소의 복수를 위해 인생을 모두 걸었다. 그러나 그가 백가소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녀를 사랑하기에는 너무도 시간이 없었다.
그는 백가소의 원한을 갚기 위해 생명까지도 걸었으나 망아를 보는 순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여인은 바로
그녀같은 여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양자가 다같이 잘못 매듭지어진 운명에 참담하게 실패한 경우에 속했다. 그런 부류의 남녀가 짧은 시간 동안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지도 몰랐다.

홍무(洪武) 15 년 9 월 19 일.
중인들은 무거운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을 지켜 보고 있었다.
방 안에 누워있는 사나이. 그는 바로 장천림이었다.
장천림은 혼수상태였다. 북리웅풍에 의해 철주부를 빠져 나온 이후 그는 줄곧 혼수상태를 헤매고 있었다.
북리웅풍은 장천림의 상태에 대해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사실 망아의 정신상태는 정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녀가 해약이라고 준 것이 어느 정도 효력이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해약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었다.
사실 그의 판단은 어느 정도 맞는 것이었다.
장천림이 복용한 것은 해약임에는 틀림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먹은 만성독약의 양이 과다했다. 그래서 해약의
효력이 부족한 것이었다.
한편, 장하영 일행은 북리웅풍이 자신들을 대신하여 철주부로 들어간다고 했을 때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장천림을 안고 나타났을 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것으로 그는 두 번씩이나 일행을 도왔다.
그는 자신을 참회객(懺悔客)이라고 했다. 그밖에는 아무 것도 밝히지 않았다. 비록 그가 두 차례에 걸쳐 일행을
도왔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을 돕는 지 분명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 이상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 장하영, 석회림, 조천백이 묵고 있는 곳은 한 채의 농가(農家)였다. 농가의 한 방에서 장천림은 열이 펄펄
끓는 몸으로 혼수상태로 있었다.
장하영이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곳에 더이상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무림맹에서 우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이상 머지 않아 노출되고
말 거야."
"......."
"어쨌든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 시기는 빠를 수록 좋아."
조천백도 동의를 표했다.
"네 말이 맞다. 어쨌든 이곳은 적지니 지금이라도 떠나자."
그러나 반대하고 나선 것은 북리웅풍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러분의 말도 맞으나 문제는 이 분이오."
그는 장천림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지금 상세를 치료하지 않으면 더욱 악화될 뿐더러 만일 도중에 습격이라도 받게 된다면 그때는 더욱 위험하게
되오. 우선은 상세를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요."
장하영은 탄식했다.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오. 그러나 지금 무슨 수로 치료를 한단 말이오?"
석회림이 말했다.
"나도 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소. 그러나 천림의 독은 만성독약인지라 간단히 해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오. 천림의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영약이 필요하오."
북리웅풍의 눈이 빛났다.
"어떤 영약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세 가지중 하나만 있어도 되나...... 지금 구할 수가 없소이다."
"......?"
"구지설련자(九枝雪蓮子)나 학정홍(鶴精紅), 또는 소림의 비전영약인 대환단(大還丹) 중 하나만 있다면
가능하오. 하지만 어디서 그런 것을 구한단 말이오?"
순간 북리웅풍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소림의 대환단?"
조천백이 실소했다.
"대환단은 소림의 진산지보이거늘 그들이 어찌 그것을 내주겠소? 그림의 떡일 뿐이오."
그러나 이미 북리웅풍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일행을 향해 포권을 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여러분은 나에게 하루의 시간을 주시오. 만일 하루 안에 돌아온다면 반드시 대환단을 구해 오겠소. 그러나 혹시
그 안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때는 전력을 다해 이곳을 빠져 나가시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사라졌다.
"......?"
방 안에 남게 된 삼인은 한결같이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장하영에게로 모였다. 장하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도 몰라. 그는 자신을 참회객이라고만 밝혔다네. 무협에서도 그의 도움을 받았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는 참회객이 그에게 준 영패 이야기를 꺼냈다.
"그 영패는 금어령(金魚令)이란 것으로 무림맹에서 아주 중요한 신물이었네."
그 말에 조천백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그도 무림맹의 인물이 아닐까?"
석회림도 동감이라는 듯 말했다.
"맞아. 무림맹의 인물이 아니고서야 어찌 금어령을 갖고 있단 말인가?"
장하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네. 무림맹의 인물이라면 우리를 도울 까닭이 없지 않은가?"
"......."
중인들은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하기야 무림맹의 인물이 그들을 도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하루만 더 기다려 보자구."

그것은 모험이었다.
세상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타인을 위해 모험을 감행할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어쩌면 전무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부류의 인간은 그런 모험을 아주 당연하게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북리웅풍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대환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그가 철주부에 나타난 것은 석양이 피처럼 붉게 흘러내리는 황혼녘이었다.
그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그를 발견한, 철주부의 대문을 지키던 무사들은 깜짝 놀랐다.
너무나도 비참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북리웅풍은 도저히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을 입고 있었다. 그는 전신에 최소한 열여섯 군데
이상의 검상을 입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가슴은 파헤쳐져 늑골까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런 상태로 살아서 철주부까지 걸어
왔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는 대문에 당도하자마자 푹 쓰러지며 말했다.
"오현대사를......."
그 한 마디뿐이었다.
오현대사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심한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인명(人命)이 중하냐...... 사문의 지보(至寶)가 중하냐......'
그는 불문의 인물이었다.
그는 소림의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되어 있었으며 그만큼 소림에서는 비중이 큰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한 알의 소림지보가 있었다. 바로 대환단(大還丹)이었다.
한 알이면 능히 이십 년의 내공화후를 얻을 수 있으며,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비전의 영약이었다.
그런 귀중한 영단이 그에게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소림의 차기 장문인이 될 인물이기에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도록 소지하게 된 것이었다.
그와 같은 인물이 만에 하나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된다 해도 구명의 영단으로 회생할 수 있도록 안배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환단은 소림에서도 불과 수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 물건이었다.


그야말로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지금 오현대사는 침상에 누워 있는 한 청년을 내려다보며 착잡한 감상에 젖고 있었다. 상대가 북리웅풍이기에
그는 더욱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이런 중상을 입었는지는 몰라도 대환단이 아니라면 목숨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하나 뿐인
대환단을 사용한다면 훗날 그 사실이 소림의 원로원에 알려져 필히 문책을 당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대환단을 소지하고 있는 것은 비밀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가 대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들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갈등하는 것은 오현이 너무나도 양심적인 위인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한다......? 더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분명 죽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결정을 내렸다.
'아무리 보물이 귀중하다 해도 인명보다 귀할 수는 없는 법....... 영단이란 어차피 인명을 구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설사 문책을 받는 한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로다. 아미타불.......'
그는 하나뿐인 대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정작 사경을 헤매도록 중상을 입고 있는 북리웅풍은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한 것이었다.
그는 오현대사가 대환단을 가지고 있을 지 확실한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오현의 비중으로 볼 때 가능성은 충분했다.
또 오현이 대환단을 지니고 있다 해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얻을 수가 없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 그의
대의명분을 자극하는 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자해했다. 스스로의 검으로 몸을 가르고, 중상을 입혔다.
고육지계(苦肉之計)!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걸고 도박하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오현이 대환단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의 생명만 허비하는 셈이 될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무모한 도박을 하는 것은 자신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결국 그는 생명을 건 도박에 성공했다.
그는 혼미 중에 입 안으로 들어오는 향긋한 영단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는 대환단을 삼키지 않고 입 안에 머금고 있었다.
"아미타불......."
오현대사는 그에게 대환단을 복용시킨 후 불호를 외우며 밖으로 나갔다.
그런 후 비틀거리며 방 안을 나가는 인영이 있었다. 북리웅풍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단을 삼키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철주부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참회객!"
농가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장하영 일행은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서는 북리웅풍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도무지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리웅풍은 손에 쥔 대환단을 내밀며 말했다.
"대환단이오....... 어서...... 복용시키시오......."
그 말을 내뱉은 후 그는 정신을 잃어 버렸다.
장하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일이 워낙 급한 지라 더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석회림이 대환단을 살펴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틀림없는 소림의 대환단이야. 그가 이걸 어떻게 얻었을까?"
물론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장하영은 피투성이가 된 북리웅풍을 바라보며 내심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짐작되는 것이 있는 반면에 그의 의혹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왜......? 대체 왜 그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한단 말인가?'
제 21 장 탈출(脫出)

탈출은 쉽지 않았다. 일단 철주부가 있는 내향에서 최소한 백 리(百里)는 벗어나야 안심할 수 있었다. 더구나
더이상 시일을 끌 수 없었다.
마침내 장하영 일행은 출발했다.
비록 소림의 대환단을 복용시켰다고 하지만 장천림의 상세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약효가 퍼지기까지 적어도 수
일은 필요했다. 그것은 백유성에게 심장을 다친 여파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 명의 병자를 데리고 출발했다. 장천림 외에도 참회객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었다.
참회객은 스스로 입힌 상처가 너무도 깊었다. 그는 대환단을 자신이 복용하지 않았으므로 상세가 악화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장하영 일행은 할 수 없이 한 대의 마차를 빌렸다.
장천림은 만삭에 가까운 임부(妊婦)로 변장시켰다. 그것은 조천백의 기술이 아니면 불가능한 고도의
역용술이었다.
북리웅풍은 해소병이 걸린 팔순의 늙은이로 변장시켰다. 석회림은 마부가 되었으며 장하영은 농사꾼, 조천백은
그와 비슷하게 닮은 형제지간으로 역용했다.
그들은 전형적인 농부집안 사람들로 화전(火田)을 일구기 위해 타지로 떠나는 것으로 꾸몄다.
무림맹의 검문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불과 한 마장도 가지 못해 그들은 조사를 당해야 했으며, 가는 곳마다 감시의 눈길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은 여러 차례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장하영의 임기응변이 주효했다. 이들은 먹고 살기가 고달픈 화전민이었고, 화전을 새로이 일구기 위해
만삭이 된 임부 아내를 데리고 해소병에 걸린 노인과 함께 형제가 타지로 떠나는 것이다.
이런 외형은 사람들에게 동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처음 사흘 간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들은 결국 정체를 발각당하고 말았다.
내향에서 오십 리쯤 떨어진 곳에서 다시 검문을 당했다.
"임신 몇 개월인가?"
염소 수염의 중년인이 마차 안의 휘장을 들춰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장하영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해, 해산달이 가까워 옵니다요."
"그래?"
중년인은 눈을 번뜩이며 마차 안을 둘러 보았다. 안에는 일가족으로 보이는 네 명이 있었다.
임신부로 보이는 얼굴이 검은 여인이 하나, 팔순이 넘어 보이는 병든 늙은이 한 명, 그리고 얼굴이 닮은 형제
농삿꾼이 두 명이었다.
중년인은 임부를 바라 보았다. 임부는 눈을 꼭 감고 잠든 듯 했다. 문득 그는 음침하게 말했다.
"내가 맥을 짚을 줄 아니 아기가 건강한 지 살펴 주지."
장하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 자가 진짜 의원이라면 맥을 짚는 순간 가짜라는 것을 알아 챌 것이다.'
그러나 장하영은 침착했다. 그는 황송한 듯 말했다.
"고, 고맙습니다요. 그럼 부탁 드립니다요."
중년인은 마차 밖에서 손을 뻗어 임신부의 팔목을 잡았다. 한편 마부석에는 석회림이 앉아 있었다. 석회림은
주변을 둘러 보았다.
중년인은 네 명의 수하들을 대동하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한 번에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진다.'
이때였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마차 안으로 반쯤 몸을 들이 밀었던 중년인이 뒤로 물러났다. 그의 팔뚝이 댕겅 잘린 채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회림!'
장하영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석회림은 차갑게 말했다.
"알았네!"
슈욱! 슈슈슉!
장하영이 팔을 떨치자 수십 개의 철정(鐵釘)이 날아갔다. 그것은 하나같이 극독이 발라진 것으로 몸에 적중되면
일 각 안에 숨이 끊어지는 무서운 암기였다.
"으악!"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네 명의 무림맹 무사들은 미처 수비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철정을 맞고 거꾸러졌다.
"가자!"
히히히힝!
요란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내달렸다.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마차는 관도를 질주해 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정체는 노출되었고, 무림맹 산하의 무사들은 속속 연락을 받고 추적대를 결성했다.
가는 곳마다 가로막는 자들이 구름처럼 늘어만 갔다. 이제 장하영 일행은 정면돌파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두두두두......!
마차는 전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잡아라!"
무림맹의 인물들은 벌떼처럼 달려 들었다. 석회림은 마차의 지붕 위로 올라가 뒤쫓는 인물들을 향해 자신이
특수하게 제조한 화탄을 던졌다.
콰쾅......! 펑! 펑!
"으아악!"
비명과 비명.......
혈전은 계속 이어졌다. 일행이 달아나는 길은 그야말로 혈로(血路)였다. 수많은 시체들이 마차의 뒤에 남겨졌다.
그러나 이런 식의 탈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은 사로잡히거나 저지당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들은 마차를 끌고 있었으며, 마차 안에는 장천림과 북리웅풍이 누워 있었다. 만일 개개인이 모두 문제가
없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으나 중상을 입은 두 명의 인물은 자구의 능력이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무림맹의 인물들이 던진 암기와 궁노에 의해 그만 두 마리의 말이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무림맹의 수십 명 고수들에게 포위될 수밖에 없었다.
삽시간에 수십 명의 고수들이 마차를 포위했다.
장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이곳이 우리의 무덤이 될 모양이군."
아닌 게 아니라 달아날 길이라곤 없었다. 수십 명의 군웅들은 무서운 살기를 띈 채 좁혀들고 있었다.
"까짓 것, 이쯤에서 산화한다 해도 아쉬울 것은 없네!"
조천백이 비장하게 말하며 지붕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조천백은 평소에는 둔중한 느낌을 주는 인상이었으나
지금만큼은 두 눈에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장하영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천백. 생각 나나? 혈명단에서 탈출할 때 말이야."
그 말에 조천백은 하하! 웃었다.
"하긴 그때에 비하면 오늘은 훨씬 부드러운 편이지. 날씨도 좋고 말이야."
조천백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청명한 하늘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멀리 새떼가 날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장하영은 군웅들이 거리를 좁혀오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각자 한 다섯 놈쯤만 동행하고 지옥으로 가면 큰 손해는 아니겠지?"
조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흘흘! 천림 몫까지 치면 몇 놈 더 데리고 가야지."
"그럴까?"
장하영은 단단히 손에 쥔 구환도(九環刀)를 움켜 쥐었다. 무림맹도에게 빼앗은 병기였다.
이때였다. 그들의 귓전에 한 가닥 기진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의 일은 나에게 맡기시오......."
"......!"
그 음성은 마차 안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마차 안. 이제까지 죽은 듯이 누워 있던 북리웅풍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마부석으로 힘겹게 빠져 나왔다.
그가 나서자 석회림, 장하영, 조천백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제 내가 나서야 할 때가 온 것 같소......."
북리웅풍의 눈에서는 이상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하영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북리웅풍에
대해 강한 의혹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아주 비장한 것이었다. 마지막 결심을 한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눈빛이었다.
장하영은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장하영의 질문은 엉뚱한 것이었다. 이 상황에 그런 질문을 하다니.
그러나 석회림이나 조천백도 그 사실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삼인의 눈은 일제히
북리웅풍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북리웅풍은 해소병이 걸린 늙은이로 변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안색이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비감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삼인을 바라보지 않고 품에서 금어령을 꺼냈다. 그것은
장천림이 철주부로 들어갈 때 사용했던 것이었다.
"......?"
삼인이 의아해 하는 가운데 그는 금어령을 움켜쥐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나의 정체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실 것이오."
"......."
삼인은 침을 삼켰다. 그들은 포위된 상태였으나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다른 아무 것도 중요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 금어령은 무림맹에서 오직 열여섯 개밖에 없는 신물이오. 이것은 각 파, 즉 십육 대 문파에 하나씩밖에
돌아가지 않은 것으로 이 금어령은 화산파(華山派)의 것이오."
"......!"
삼인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화산파라면......!"
장하영의 눈동자에는 경악이 어렸다. 그는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귀하는......?"
북리웅풍은 담담히 말했다.
"그렇소. 나는 천인검 북리웅풍이오."
"......!"
충격이었다. 삼인은 너무나 놀라 입을 벌렸다. 그러나 북리웅풍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중에 전해 주시오. 그 소녀에게 미안할 뿐 아니라...... 장형에게는 죽을 죄를 지었다고......."
그는 삼인이 경악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보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는 본래 네 마리의 말이 모는 사두마차였으나 지금은 두 마리가 죽었으므로 쌍두마차였다. 북리웅풍은 죽은
말을 마차에서 분리해 냈다.
"내가 길을 뚫는 즉시 마차를 모시오. 최대한으로 추적을 막아 보겠소이다."
"......."
세 사람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북리웅풍이 설마 강호사공자 중의 한 명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북리웅풍은 마차에서 내리더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앞에는 백여 명에 가까운 무림맹 군웅들이 있었다.
그는 음성을 돋우더니 군웅들을 향해 외쳤다.
"소생은 북리웅풍이오! 여러분이 이 금어령을 안다면 길을 비켜 주시오!"
북리웅풍은 금빛 찬란한 물고기 모양의 신물을 번쩍 들어 올렸다.
마차를 둘러싼 군웅들은 웅성거렸다. 그들은 느닷없이 한 명의 늙은이가 나와 금빛 물고기 신물을 들어 올리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금어령은 무림맹 인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듯 했다. 이때 군웅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당신이 정말 북리대협이시오?"
북리웅풍은 담담히 말했다.
"그렇소. 아니라면 금어령을 어찌 가지고 있을 수 있겠소?"
그 말에 중인들은 모두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였다.
"거짓이오! 백유성 대협을 죽인 흉수도 금어령을 갖고 있었소! 저 자는 가짜요!"
그의 말이 끝나자 군웅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그렇소! 저 자는 가짜일 것이오!"
"시간 끌 것 없소! 공격합시다!"
군웅들은 일제히 그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핫......!"
문득 북리웅풍은 앙천광소를 터뜨리더니 신형을 날렸다. 그는 다짜고짜로 한 무사의 검을 빼앗더니 눈부신 검광을
날렸다.
"으아악......!"
단숨에 네 명의 무사들이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북리웅풍은 전광석화같은 신법으로 무리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그는 생명을 포기하고 있었다.
군웅들 속으로 뛰어든 그는 온 몸에 수십 자루의 칼이 닿는 것을 느끼며 검을 휘둘렀다.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그가 야차(夜叉)처럼 날뛰자 포위망의 한 쪽에 틈이 생겼다.
"가자!"
장하영이 박차를 가했다.
히히히히힝!
두 마리의 말이 앞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힘차게 앞으로 내달렸다. 그 바람에 마차는 덜컹! 하고 흔들렸다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앗! 달아난다!"
"막아라!"
군웅들이 앞을 막으려 했으나 석회림이 뿌린 우박같은 암기 세례를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마차는 마침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차에 탄 삼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뒤쪽에서 처절한 비명과 아우성을 들었다.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한 젊은 영웅이 숭고한 희생(犧牲)을 치르며 산화(散花)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홍무(洪武) 15 년 11 월.
개봉부 교외.
작은 야산을 끼고 두 채의 모옥이 있다. 모옥의 주변에는 약전(藥田)이 있었는데 약전에는 갖가지 약초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돌보는 사람이 없었던지 약초들은 제멋대로 자라거나 시들어 있었다.
모옥의 벽에는 약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이곳은 의원의 집인 듯 했다. 그런데 방 안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
삼인(三人).
그들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침중한 표정들이었다. 문득 누군가 입을 열었다.
"천림. 이제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입을 연 사람은 바로 조천백이었다. 그렇다. 이곳은 석회림의 집이었으며 방 안에 모여있는 사람은 장천림,
장하영, 조천백 등이었다.
조천백의 말에 장천림은 음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글쎄....... 당분간은 여기저기 떠돌면서 머리나 식힐까 하네만......."
그는 극적으로 내향을 빠져나온 후 서서히 체력을 회복했다. 그후 동료들에게 북리웅풍의 희생으로 탈출하게 된
경위를 들었다. 그 얘기를 듣고 그는 허탈감을 금치 못했다.
북리웅풍이 스스로 죄책감을 보상한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어쨌든 강호사공자의 마지막 일인이었던 그가
죽은 이상 복수할 대상이 없어지고 말았다.
백가소를 죽음으로 이끈 자들은 이제 모두 저승으로 갔다.
장천림은 막막한 기분이었다. 초긴장 상태로 살아온 복수행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대상을 잃은 지금 전신에 맥이
빠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 백제성의 금문장으로 돌아가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왠지 이제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물론 그에게도 한 가지 미련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철주부에 있는 망아였다.
'망아.......'
그녀를 떠올리자 그는 가슴이 쓰라리면서도 한 가닥 달콤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언제고 그는 망아와 다시 만날 것이다. 다만 아직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동안 그는 유람이나 다닐까 하고 생각했다.
"......."
중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장천림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장천림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화제를 돌렸다. 그는 장하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할 셈인가......?"
장하영은 씨익 웃었다.
"훗훗! 나야말로 정말 마땅치가 않군. 황궁의 병졸 노릇도 이젠 신물이 났고....... 어떤가? 천림 자네가
귀찮아 하지만 않는다면 자네의 병졸 노릇을 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말하자면 장천림과 함께 있겠다는 뜻이다. 그 말에 모두들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이때였다. 문득 생각난 듯 조천백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 집의 주인인 회림은 어디 갔지?"
그렇다. 정작 주인인 석회림이 없었다. 그 말에 장천림의 표정이 우울하게 변했다. 그는 지금 석회림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석회림은 무덤 앞에 앉아 있었다.
이 무덤은 그의 아내의 무덤이었다. 본래 그의 아내는 매우 병약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장천림을 돕기 위해
아내를 집에 두고 떠났던 것이다.
그의 아내는 체질적으로 병약해서 항상 그가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가 떠나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병이 심화되어 죽고 만 것이었다.
"미안하오....... 정영(鄭英)."
정영은 그의 아내의 이름이었다. 석회림은 사나이다. 사나이기에 아내의 건강이 극도로 나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장천림을 따라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끝난 지금 그는 다시 돌아와 아내의 무덤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는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정영....... 나같이 무정한 사내를 만나서 당신이 명을 다하지 못했구려. 내...... 이제는 당신의 곁을
떠나지 않겠소. 영원히...... 당신을 지켜주겠소."
이때였다. 말없이 그의 옆에 와 앉는 인물이 있었다.
"천림......."
장천림이었다. 그는 석회림이 자신 때문에 아내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무덤을 향해 절을
했다. 석회림은 소매로 눈물을 쓱 훔친 다음 말했다.
"하하......! 천림. 이제는 후련하겠지? 모든 일이 끝났으니 말이야."
장천림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나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할 수만 있다면 무엇으로든 보상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보상을 받을 석회림 또한 아니지 않는가.
"회림......."
그는 그저 석회림의 손을 굳게 잡을 뿐이었다. 그러나 석회림은 언제 눈물을 흘렸더냐 싶게 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하하하하! 천림! 우리는 좋은 친구야! 그렇지 않은가?"
"......."
장천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혈명단에서 생사를 함께 해온
이들이기에 그들 사이에 더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던 것이다.
세월여류(歲月如流).
세월은 물처럼 흐른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었다.
설혹 파란만장한 일이 어떤 한 인간에게 얽혀 있다고 해도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은 망각이라는 늪으로 잠겨버리고
만다.
철주부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혈풍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세인들의 뇌리에서 점차 멀어져가고 있었다. 다만
강호사공자의 죽음만이 무림인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의혹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만일 그 이후로도 강호사공자를 죽인 흉수들이 무림에 횡행했다면 물론 무림은 더욱 시끄러웠을 테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호는 잠잠해졌다. 강호사공자가 죽은 후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림인들은 비록 흉수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대부분 다행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혈풍(血風)은 가라앉았다.
무림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가공했던 기억도 잊혀져 가고 사람들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눈이 내리고 있었다.
중원에 겨울이 온 것이다. 유난히도 많은 눈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인간의 온갖 추악함을 덮어 주려는 듯 흰
눈이 대지를 온통 뒤덮어 가고 있었다.
제 22 장 마지막 결사(結社)

한 인간(人間).
그에게 있어서의 삶이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는 산다는 것의 의미를 하나의 목적에 국한시키고 살아왔다.
그것은 바로...... 복수! 그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복수는 그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에게 또 다른 인생의 의미 하나가
추가되었다.
그에게 삶의 새로운 의미를 추가시켜 준 것은 한 여인이었다. 또한 그녀는 그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선물을
주었다.
임신(姙娠)이었다. 그 여인은 그의 아이를 임신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고 어리둥절한 심정이었으나 차츰 시간이 흐를 수록 그것은 그에게 생의 전부를 보상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가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려는 순간 여인이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이다.
여인이 납치되었다는 것은 그의 아이 또한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침내 그는 여인을 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니 그의 인생 전부를 되찾기로 결심했다.
설사 그 일로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 행위로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애정을 느꼈으며 생명의 탄생을 기대하게 했던
그녀를 구하는데 목숨을 바치는 것만이 가장 값진 일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여인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는 혼자 힘으로는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천하에서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은 없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어쩌면.......
그라면 날 도와줄 지도 모른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그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모든 것은 옛날로 돌아왔다.
조천백은 여전히 개봉부의 시끄러운 저자 거리에서 차(茶)를 팔기 시작했다. 그는 바쁜 와중에서도 농담을 하고
즐겁게 차를 팔았다.
그의 찻집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그가 덕담을 잘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직접 끓이는 차맛이 훌륭하기
때문이었다.
북적대는 사람들.......
조천백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꿈같은 일이기도 했다. 자신이 다시 개봉으로 돌아와 찻집을
경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되찾은 모든 것은 명확한 현실이었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지난 일은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후후.......
산다는 것은 아주 좋은 거야.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것은 더욱 말이야.......
조천백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잎을 다듬고 있었다. 그는 온갖 종류의 차에 대해서 통달하고 있었다. 차라는
것은 정성을 기울이는 것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그는 차 한 잔을 만드는 데도 온 정성을 다 기울였다. 그것은 손님에 대한 예의였으며 그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그러니 조천백이 경영하는 작은 찻집이 장사가 안 될 리가 없었다.
어떤 때는 작고 초라한 찻집에 공자대부(公子大夫)들이 들를 때도 있었다. 그들은 차를 마시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하곤 했다.
"자네 집 차맛은 정말 일품이네. 대체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가?"
그렇게 물으면 조천백은 항상 똑같은 대답을 한다.
"헤헤! 별 것 아닙니다요. 그저 차잎을 만질 때 기도하곤 합죠. 이 차를 마시는 분들의 만수무강을
말입니다요."
조천백. 그는 사람 좋기로 소문이 난 찻집 주인이었다.
오늘도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차를 끓이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의 찻집은 그다지 넓은 편이 아니었다. 저자거리 한복판에 있었으므로 목이 마른 사람들이 잠깐씩 와서 차를
마시고 금세 자리를 비우기 때문에 그다지 넓은 장소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쪽 창가에 죽립을 쓴 한 인물은 벌써 한 시진 이상이나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는 외지인이거니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공연히 자꾸만 그 쪽으로 신경이 쓰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힐끔힐끔 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변함없는 자세로 죽립인은 앉아 있었다.
'......?'
그는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무엇하는 작자길래......?'
그는 고개를 흔들며 쓴웃음을 흘렸다.
'에라, 신경쓸 것 없지 않은가? 나는 그저 차나 팔면 되는 것이고........'
그는 신경을 끊기로 했다. 이 날의 수입은 꽤 좋은 편이었다. 그는 저녁이 되자 온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끼며
수입을 계산하고 있었다.
"허허....... 오늘은 평소의 두 배는 벌었는 걸?"
그때였다.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하셨군요. 형님......."
어디선가 들어본 음성이었다.
"......?"
조천백은 고개를 들었다. 죽립인이었다. 그가 계산대 앞까지 와 있는 것이었다.
"귀하는 뉘신데......?"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죽립인이 죽립을 젖히는 순간 그는 그만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자...... 자네는......? 아니 어떻게 여길......!"
죽립인은 나이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이는 청년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피부가 창백한 일개 소년으로 보일
정도였다. 소년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왼뺨에는 가느다란 상흔이 미세하게 나 있었다.
백리진강(百里眞强)이었다.
그는 두 눈에 경련이 이는 듯한 주름을 잡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형님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조천백은 심금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동안 백리진강을 까맣게 잊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마치 자신의 어떤 한 부분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듯한 묘한 감회를 느꼈다.
그것은 잊고 싶었던 어떤 부분이기도 했고, 또는 추억으로 나타나는 잔향같은 것이기도 했다.
"어..... 어떻게 된 건가? 죽었다고 하더니만......."
그렇다. 강호에 알려지기로는 백색마인이 이수에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가
이렇게 멀쩡하게 다시 나타날 줄이야.
"후후....... 죽은 것이나 다름 없지요."
"......?"
백리진강은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생각나는 사람이라곤 형님밖에 없었습니다."
"......!"
조천백은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백리진강이 무척 강한 소년이라고 알고 있었다. 때로는 그에게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백리진강은 너무나도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백리진강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세."
그는 백리진강을 찻집의 안채로 인도해 갔다.

사인(四人)이 모두 모인 것은 해가 넘어가고도 며칠이 지난 후였다.
원단(元旦)이 칠팔 일 흘렀으나 개봉부에는 아직도 명절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오랫만에 다시 한 자리에 모인
그들은 조천백의 말을 듣고 반응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건 안 돼! 난 반대야!"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장하영이었다. 그는 그동안 장천림과 함께 여기저기 바람을 쐬다가 조천백의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것이었다.
조천백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시종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단호히 거절한 것이었다.
"이유는......?"
조천백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장하영도 역시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사실 난 전부터 그 놈을 알고 있어. 놈은 자신을 아들처럼 사랑하던 양부를 배신한 놈이야. 아울러 그가 행한
일들을 들춰보면 도저히 인간성이라고 없는 놈이야. 그런데 우리가 그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냐? 누가 뭐라해도 난 반대다."
장하영의 어조는 차갑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천백이 말한 사람은 바로 백리진강이었으며
그는 백리진강을 도와 한 가지 일을 하자는 제안을 꺼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
장내의 중인들은 침묵에 빠졌다. 이때였다. 문이 열리며 백리진강이 들어왔다.
처음 그는 아주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방 안에서 장천림을 보는 순간 문득 안색이 기이하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
장천림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이럴 수가......! 저 아이가 바로 그 아이였단 말인가?'
장천림은 경악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
그는 길가에서 만두를 훔쳐 먹다가 잡혀 매맞는 아이를 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아이가 물었다. 어디로 가야
천하제일의 무공을 배울 수 있느냐고......!
그런데 그때의 그 아이가 바로 백색마인 백리진강이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운명이란 기구한
것이었다.
장천림은 문득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자네가...... 바로 그때 그 아이였을 줄은 몰랐군."
"......."
백리진강도 멍하니 장천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그도 장천림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눈에 그를 알아본 것이었다.
두 사람의 재회는 실로 팔 년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두 사람 다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때, 방 안의 사람들은 그들이 서로 아는 사이인 듯 하자 모두 눈길을 장천림에게 향했다. 은연 중에 장천림의
의견이 이번 일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석회림이 말했다.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나?"
"그렇네. 아주 오래 전 일이었지. 허허! 운명이란 정말 공교로운 것이군. 난 미처 생각도 못했어. 그 아이가
바로 이 친구였다니......."
장천림의 말에 석회림이 담담히 말했다.
"그럼 자네가 결정하게."
그 말에 장천림은 눈을 감았다. 짧은 동안에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지나갔다. 그는 이미 조천백으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백리진강이 그들에게 도움을 원하는 것은 한 여인을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일은 너무나도 위험부담이 큰
일이었다. 자칫하면 모두가 죽음의 구덩이로 끌려들어갈 수가 있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가소의 일로 그들 사인이 얼마나 무서운
위기를 겪었던가? 이제 간신히 되찾은 평화를 다시 깨뜨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작 백리진강이 바로 그때의 어린 소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망설이게 되었다.
"......."
중인들은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전권이 그에게 달려 있다는 듯이.
이윽고 장천림은 눈을 뜨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저 아이를 알고 있네. 물론 저 아이의 성격이 몹시 편협하고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지. 그러나 그 점
때문에 저 아이가 악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것은 다만 한(恨) 때문에 비롯된 일일 뿐이네."
한(恨). 중인들의 두 눈이 한결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장천림의 말이 계속 되었다.
"사실 우리들 모두 가슴에 한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일세. 저 아이...... 진강도 마찬가질세. 다만 어릴 적부터
깊은 한이 가슴에 쌓여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가 심하게 나타났던 것 뿐일세. 이것은 저 아이만의 책임이 아니라
이 시대 강호인 모두의 책임이네."
"......."
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굳어진 낯빛으로 장천림을 바라볼 뿐이었다.
장천림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따라서 나는 저 아이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네."
"......!"
모두의 안색이 저마다 변했다.
방 안은 한동안 보이지 않는 바람이 한바탕 회오리를 일으키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조천백이었다.
"너희들이 어떤 생각을 하던 나는 진강을 돕겠다. 나는 사실 차 파는 일이 지겨워 미치겠거든."
그의 말은 거짓이었다. 중인들은 그가 얼마나 찻집 주인노릇하는 것을 즐거워 하고 있는 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백리진강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했을 뿐이다.
이때 석회림이 음울한 음성으로 나섰다.
"나도 찬성이다. 정영(鄭英)이 없는 개봉은 싫어졌어......."
이번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장하영에게 몰렸다. 장천림은 그에게 물었다.
"하영. 너는?"
장하영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자네의 병졸 노릇을 하기로 했잖아? 그러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의견일치.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 사인은 백가소의 복수를 위해 이미 한 번 목숨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너무나 많은 고생을 했으며 강호계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다행히 천우신조로 모든 일을 무사히
끝내고 이제는 조용히 살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또다시 강호로 뛰어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번의 일은 어쩌면 과거에 비해 더욱 어려운 일인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은 장천림이 말한 한(恨)이란 말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도 저마다 깊은 한(恨)이 있었기에 백리진강의 한을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백리진강. 그는 과거에는 백색마인이란 이름으로 천하를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나약한 한 소년에
불과했다.
그는 중상을 오래도록 치료하지 못해 내력(內力)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따라서 자력으로는 환사금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천백을 찾은 것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조천백이 자신을 도와주리라고는 자신할 수 없었다. 다만 일말의
희망을 품고 찾아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들 사인이 모두 그를 위해 나서겠다는 것이 아닌가?
"고...... 고마워요....... 형님들......."
백리진강은 마침내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백색마인이 아니었다. 다만 나약하고 감정이
풍부한 소년일 뿐이었다.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장천림이었다.
"이건 자네의 일일 뿐더러 우리 모두의 일이기도 하다. 진강. 우리 자세히 계획을 세워보자."

만겁마옥(萬劫魔獄).
아는가? 세인들이여! 만겁마옥이 있다는 것을?
다시는 세상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중죄(重罪)를 지은 자들.......
그들은 설사 참형(慘刑)을 당할 지언정 만겁마옥에 들어가는 것만은 두려워 한다는 사실을. 만겁마옥은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만겁마옥이 있는 지형의 험악함은 물론이려니와, 만겁마옥을 수비하는 자들의 악랄함은 치가 떨릴 정도였다.
만겁마옥에 투옥된 자들은 극악무도한 살인범들이거나 아니면 대역죄(大逆罪)를 범한 역도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만겁마옥은 관부(官府)의 뇌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강호의 대마두나 녹림의 대도적같은
흉인들도 투옥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곳에 투옥된 자들에게 위협을 주기 위한 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만겁마옥. 그곳은 문자 그대로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만겁마옥은 검문산(劍問山)의 한 절곡에 있었으며, 그곳을 수비하는 자들을 관군과 황궁에서 파견된
무사들이었다.
만겁마옥은 대명조가 건국됨과 동시에 생겨났다. 원(元)의 잔당들이나 원조에 붙어 한족을 능멸하던 자들, 또는
극악무도한 흉인들을 가둔 곳이었다.
명조에서는 이들에게 영겁의 고통을 주기 위해 온갖 극랄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그곳은 홍무제 주원장의 철혈정치(鐵血政治)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의 수인(囚人)들에게는 등급이 매겨져 있다.
특급(特級), 일급(一級), 이급(二級), 삼급(三級)이 그것이었다.
삼급 이하의 수인은 없었다.
비록 삼급이라고 해도 그들은 하루 종일 중노역에 시달려야 하며, 하루에 단 한 끼의 식사밖에 하지 못하며 하루
종일 수없는 매질과 고문을 당해야 했다.
삼급 수인이 그럴진대 하물며 이급이나 일급 수인들의 고통이야말로 부언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환사금을 구하기 위한 작전(作戰)은 장하영이 주관하게 되었다.
장하영은 다시 한 번 과거의 능력을 써먹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 일을 총괄하게 된 것은 본래 관부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만겁마옥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백리진강으로부터 만겁마옥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하니 그들이 감행해야 할 모험이 바로 만겁마옥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결정한 이상 그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만겁마옥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했다.
장천림도 이야기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석회림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백리진강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백리진강이 환사금을 구하려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죽일 놈들....... 연약한 여인을 그런 곳에 투옥시키다니......!"
석회림이 이를 갈며 말하자 장하영은 담담히 설명했다.
"아마도 그녀를 만겁마옥에 투옥시킨 것은 금위대장 추성결일 것이다. 그 자의 성격은 나도 잘 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지 않고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지."
"그래서?"
석회림이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하자 장하영은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그가 진강을 잡지 못하고 놓친 것은 그의 명예에 먹칠을 한 셈이다. 따라서 그는 환사금을 인질로 삼고 있으면
언젠가는 진강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올 것이라는 점을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백리진강은 음울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내가 자신의 그물에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하영은 담담히 말했다.
"그만을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는 대명의 충실한 무장일 뿐이다."
자신의 지난 행적을 비추어 볼 때 추성결이 결코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때 장천림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하영. 계획은 섰는가?"
장하영은 히죽 웃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도합 삼 단계의 작전을 이미 완벽하게 세워 두었다."
"삼 단계?"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해졌다. 장하영이 세운 작전이라면 설사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든다
할지라도 그들 사인은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만겁마옥이 있는 검문산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만겁마옥의 지형도를 입수한 뒤 작전을
설명하겠다."
장천림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지금 떠나자."
모든 준비는 끝났다.
조천백은 두 번째로 휴업(休業) 쪽지를 찻집 문 앞에 걸었다.
그는 찻집의 문을 닫으며 잠깐 생각했다.
'과연 다시 돌아와 찻집을 열 수 있을까......?'
한편 석회림은 아내의 무덤에 찾아갔다. 그는 아내의 무덤 앞에 앉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당신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또 어기게 되었소....... 그러나 당신은 이런 나를 이해해 줄 것이오.
왜냐하면 우리 부부와 같은 이별을 겪은 자를 그대로 바라볼 수는 없기 때문이오. 그들이 행복하게 맺어지는 것을
당신도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도 쾌히 승낙을 한 것이오.......'
석회림은 아내의 무덤을 쓰다 듬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장천림과 장하영, 백리진강은 모옥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백리진강은 자신의 일로 인해 사인이 또다시 목숨을 건 모험을 하게 된 것을 못내 미안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을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었다.
문득 장하영이 입을 열었다.
"진강. 내가 왜 너의 일을 맡겠다고 승낙한 줄 아느냐? 애당초 나는 네 놈이 무척 싫었는데 말이야."
"......."
백리진강에게는 장하영이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그는 자신을 노골적으로 싫어하고 있었다.
"후후후....... 네 눈빛을 닮은 아이들이 있었지. 자그마치 천 명이나 되는 많은 아이들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오직 사인밖에 남아있지 않지. 왜냐고? 그들은 모두 죽었거든."
백리진강은 부르르 떨었다.
'천 명 중에 겨우 사인만이 남았다고?'
실로 가공할 일이었다.
이때 장천림이 담담히 말했다.
"하영. 지난 일을 굳이 꺼낼 것 없지 않은가?"
장하영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천림. 너도 나처럼 느낄 거야. 이 녀석을 처음 보았을 때 말이야. 너도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느냐? 녀석의
눈이 바로 우리들의 눈을 닮았다는 것을 말이야."
장천림은 술잔을 들어올렸다.
"나는 진작 알고 있었지."
"그래....... 바로 그 때문이야. 그래서 나도 응낙을 한 거라구. 제기랄......!"
장하영은 그 날 폭음을 했다. 그가 생전 이렇게 폭음을 한 경우는 없었다.
그는 치밀하고 차분한 위인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이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장천림은 술에 취한 그를 침상에 눕히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나선 백리진강은 말이 없는 그가 점점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문득 장천림이 입을 열었다.
"진강. 너는 그녀를 사랑하느냐?"
백리진강은 흠칫했다. 그의 얼굴에는 소년다운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그런 것 같아요."
"그런 것 같다고?"
"저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자꾸만 그녀를 떠올리게 되고......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장천림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그렇군.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지도 몰라. 나 역시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해 그런 느낌을 잘
알지 못하지."
"......."
백리진강은 왠지 그가 좋아졌다. 아주 친한 형제를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백리진강이나 장천림이나 따지고 보면 비슷한 인간형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행복한 과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생애를 사는 동안에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장천림은 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소 정신상태가 이상한 여인, 망아였다.
망아는 언젠가 그가 자신이 찾아와 줄 것을 기다리며 철주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장천림은 이번 일이 끝나면 그녀를 찾아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녀와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지에는 자신이 별로 없었다.
그녀의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백유성에 대한 기억들이 지워지지 않는 한 두 사람이 행복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지도 몰랐다.
"그녀를 구한 후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느닷없는 질문에 백리진강은 흠칫했다. 그는 아직까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문득 그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 올랐다.
"저는...... 그녀와 함께 아주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어요."
"그래.......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장천림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月). 반으로 갈라진 달이 무구하게 누리를 비추고 있었다.
제 23 장 만겁마옥(萬劫魔獄)

홍무(洪武) 16 년 2 월.
검문산(劍門山)의 험악한 지세를 관통하는 한 대의 수레가 있었다. 그 수레는 중죄인(重罪人)을 실은
호송마차였다. 수레는 삼엄한 경비에 둘러싸인 채 검문산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수레는 두 명의 죄인을 싣고 있었는데 그들의 목과 손목, 심지어는 다리에도 칼이 씌워져 있었다. 그들의 머리는
봉두난발이었으며 입고 있는 옷도 거의 찢어지다시피 했다.
죄인을 실은 수레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만겁마옥(萬劫魔獄)에 당도했다. 일단 도착한 후에 죄수를 인계하는
절차는 간단했다.
수레를 호송해온 병사들은 호패를 보였으며, 죄인에 관한 기록이 적혀 있는 서류를 넘겨주는 것으로 일단 호송의
임무를 마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만겁마옥의 옥리들에게 수레 전체를 인계하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되돌아갔다.
만겁마옥의 옥주(獄主)는 추성결이었다.
그는 삼 개월 전 스스로 자원하여 이곳의 옥주로 임관했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아직도 집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장강 연변의 매화림에서 백리진강을 놓친 이후, 그는 기필코 그를 자신의 손으로 잡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었다.
그에게는 확실한 인질이 있었다. 환사금이 바로 그가 확신하는 미끼였다. 그녀만 있다면 언제고 백리진강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환사금이 임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놈은 온다. 반드시 자신의 계집을 구하기 위해 올 것이다. 아니, 자신의 자식을 구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이곳으로 올 것이다. 후후후......! 놈을 잡지 않는 한은 결코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추성결.
그는 이런 인간이었다. 만일 그가 이토록 집념이 강한 인간이 아니었다면 황궁에서 그만한 지위를 누릴 수 없었을
지도 몰랐다.
"옥주님. 새로운 죄수가 들어왔습니다!"
문득 밖에서 수하의 보고가 들려 왔다. 그는 상념에서 깨어나며 고개를 들었다. 다소 의아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어리고 있었다.
"새 죄수라고?"
그가 이곳에 부임한 이래 아직까지 새로운 수인은 한 명도 없었다.
"들어 와라."
수하가 들어왔다. 그는 쟁반에 서류를 담은 채 받쳐 올렸다.
"여기 서류가 있습니다."
추성결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서류를 읽어 보았다.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의 눈살이 서서히
찌푸려지고 있었다.
"아주 지저분한 놈들이로군......."
과연 서류에는 수인에 관한 죄과(罪果)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번에 호송되어온
자들이야말로 정말 형편없는 작자들이었다.
등급: 삼급.
성명: 모삼충(毛三蟲).
나이: 삼십팔 세.
죄명: 황궁 내전(內殿)에 잠입하여 궁녀 스물 네 명을 강제 추행한 혐의. 특히 안상궁(安尙宮)을 겁간하여
금의위에 잡혔음. 변태적인 취미가 있는 자로써 타고난 색광임.
등급: 삼급.
성명: 진자앙(陣子殃).
나이: 사십일 세.
죄명: 황궁 일대를 횡행하며 고관대작의 보고를 털고 그의 후첩들을 희롱한 작자임.
추성결은 어이가 없었다.
'겨우 이 정도로 만겁마옥에 들어왔단 말인가?'
추성결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서류를 읽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하는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죄명은 대단치 않지만...... 황궁의 대인들께서 워낙 원한을 가지고 있어 특별히 이곳에서 고생을 시키라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추성결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네가 알아서 해라. 놈들을 만날 생각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 그는 환사금을 인질로 하는 동안 언젠가는 백리진강이 이곳에
쳐들어올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도박이었다. 그러니 한낱 좀도적이나 색광 따위가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삼충과 진자앙의 진실한 정체를. 그는 다만 삼급 정도의 경죄를 저지른 풋내기들이라 여기고만 있었다.

삼급의 수인들은 중노역에 종사한다.
그들은 남녀의 구별이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똑같은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바위를 나르거나
잘게 부수는 일, 또는 잘게 부순 바위를 걸러 사금(砂金)을 채취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고통스런 것은 참을 수 없는 열기(熱氣)였다.
검문산의 지하에는 용암이 흐르고 있어 만겁마옥의 작업장에 흐르는 물은 펄펄 끓고 있었다.
게다가 코를 찌르는 유황(硫黃) 냄새로 인해 하루 종일 골치가 지끈거리기까지 했다.
이곳 작업장에서 강제노역을 하는 삼급 수인들은 너무나 더워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남자들은 그런대로
사타구니에 천 한 장을 가리고 있어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난처한 것은 여자 수인들이었다. 여인들은 남자와 달리 옷을 벗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한계 상황에
놓이면 기본적인 수치심마저 없어지는 법인가?
이곳에서 일하는 여자 수인들은 놀랍게도 남자와 다름없는 차림새였다. 그녀들 역시 엉덩이와 하복부만을 간신히
가린 작은 천 한 장만을 두른 채 일하고 있었다.
비오듯 땀이 쏟아져 내린다. 구슬같은 땀방울이 여인들의 투실투실한 젖가슴 사이 계곡을 흘러 뚝뚝 떨어지곤
했다.
게다가 일을 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거나 허리를 숙일 때마다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어찌보면 아찔할 정도로 육감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옥이나 다름없는 만겁마옥에서 늘 이런 모습을 대하다
보면 그 풍경도 낯익은 것이 되고 만다.
실상 이곳의 여인들이 옷을 벗고 일하게 된 것은 옥리(獄吏)들 탓이었다. 옥리들이 강제 규정을 만들어 여인들도
남자 수인들과 똑같은 차림을 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노역을 하다가 죽는다 해도 누구 하나 서러워 하는 자도 없을 뿐더러 상부에 간단한 보고만 하면 끝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인명경시 풍조가 만연한 곳이 이곳 만겁마옥이었다.
만겁마옥의 법이 곧 이곳의 법이었으며 모든 것은 옥리들에 의해 결정되고 행해진다.
옥리들은 이곳에 배속되면 최소한 오 년 이상 근무해야 교체가 되므로 나름대로 이곳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유희를 만들기도 했다.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여자 수인들을 벗게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채찍을 들고 여수인들을 감시하면서 툭하면
채찍을 휘두르거나 장난을 치곤 했다.
"빨리빨리 움직여! 꾀 부리는 것은 통하지 않아!"
짝! 짜악! 짝!
채찍이 길다란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면 여수인들의 새하얀 등판이나 허리, 때로는 엉덩이에 붉은 선이 새겨진다.
"아아악!"
채찍이 몸을 휘감으면 살갗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에 여수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진다. 때로는 무릎꿇고
애원하기도 하고 때로는 봐달라고 매달리기도 했다.
옥리들은 더욱 잔인하게 여수인들을 다루어 지리함을 이기려 했다. 그들은 여수인들의 나체나 다름없는 몸을
감상하며 온갖 장난을 친다.
채찍으로 마구 치면 여수인들은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지르고, 때로는 한 장밖에 없는 천이 걷혀 올라가 희뿌연
허벅지 안 쪽까지 드러나곤 했다. 그 광경에 옥리는 눈이 벌겋게 충혈되며 쾌감을 즐기는 것이었다.
"흐흐흐...... 더러운 년! 아랫도리를 많이도 굴렸구나."
이곳은 지옥이었다.
어떤 옥리들은 여수인을 끌고 가 바위 뒤편에서 정욕을 채우곤 했다. 이런 일을 문제삼는 자는 없었다. 도리어
여수인들은 옥리들의 만족을 채워줌으로써 하루 정도 편히 쉬고 음식을 보급받을 수 있다면 너도나도 나서기도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떤 여수인들은 일부러 옥리들을 유혹하기까지 했다.
또한 여기저기서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광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떤 옥리는 남자 수인 대여섯 명에게 윤간(輪
姦)당하는 여수인을 보며 즐거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남자 수인들은 한껏 억눌렸던 욕망을 풀기 위해 짐승처럼 변하곤 하는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곳에 있는 여수인들은 대부분 과거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던 고귀한 여인들이었다. 대부분
황궁의 나인이거나 고관대작의 아내들이었다.
그러므로 피부가 곱고 미색이 절륜한 경우가 많았다.
"정말 소름끼치는 곳이군."
바위를 짊어지고 운반하던 진자앙이 낮게 말했다.
"......."
"빌어먹을!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이곳은 지옥이나 다름없군."
곁에서 자갈 부대를 메고 따르던 모삼충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삼 일을 둘러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군.
그 말에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곳에는 삼급 수인들만 있다. 이곳은 등급마다 작업장이 다르다. 이급 수인들은 금광석을 채취하는
막장에서 일하고, 일급 수인은 다른 곳에 있다고 들었다."
"음, 그럼 특급?"
진자앙의 얼굴에 안광이 번뜩 일어났다.
"맞아. 특급이야. 추성결은 그녀를 특급으로 분류해 놓았을 것이 틀림없다."
모삼충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많지 않다. 한 시라도 빨리 특급 수인들이 있는 곳을 찾아야 된다."
그 말에 진자앙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는 안색이 굳어졌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한데......."
"뭐지?"
진자앙은 난색을 표하며 말 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건 좀......."
모삼충은 문득 진자앙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깨달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모삼충은 결심한 듯 중얼거렸다.
"할 수 없지. 대(大)를 위해 소(小)를 버릴 수밖에."
무슨 뜻인가? 대는 무엇이고 소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삼급 수인들이 일하는 작업장에 일대소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얼마 전 만겁마옥으로 들어온 두 명의 수인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희대의 색광으로 소문난 이력 그대로 행동한 것이었다. 엄격한 옥리들의 감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수인들을 틈만 나면 겁탈한 것이었다.
"아악! 놓아라!"
으슥한 암석 뒤편에서 째지는 듯한 비명이 울렸다. 그곳에는 진자앙과 모삼충이 한 여수인을 겁탈하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로 인해 비오듯 땀이 흘러내려 여수인의 온 몸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진자앙은 망을 보고 모삼충은
여인의 두 다리를 붙잡고 다짜고짜로 밀어부치고 있었다.
"악! 흐윽! 이 나쁜 놈!"
여수인은 삼십대로 보였다. 과거에는 고귀한 신분의 여인인 듯 눈매가 곱고 피부색이 우윳빛이었다.
탄력 넘치는 젖가슴이 모삼충의 손에 의해 뭉개지고 있었다. 여인은 발버둥쳤으나 무자비한 모삼충의 완력을 당할
수가 없었다. 모삼충은 그녀의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린 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마침내 여수인은 포기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모삼충은 욕망을 채운 후 여수인의 젖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는 잔혹한 빛이 아니라 한 가닥 연민의 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퇘에! 이 나쁜 놈! 무사할 줄 아느냐?"
겁탈당한 여수인은 침을 뱉았다. 침은 모삼충의 가슴팍에 달라 붙었다.
"헤헤! 뭘 그러느냐? 너도 즐겼으면서. 이봐, 친구! 이번엔 자네 차례야."
모삼충은 음충맞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망을 보던 진자앙이 다가왔다.
여수인은 공포의 표정을 드러냈다. 비록 이곳에서는 순결도, 정조도 통하지 않았으나 아직까지 그녀는 한꺼번에
두 사람을 상대한 적이 없었다.
"무, 물러가라! 이 더러운 놈들아!"
표독스런 눈빛으로 노려보며 외치는 그녀를 바라보며 진자앙은 머뭇거렸다. 그때 그의 귓전에 누군가의 전음이
흘러 들었다.
(천림. 순간의 자비로 일을 그르치지 마라. 어차피 그녀는 죽은 목숨이다.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는
않았겠지? 자칫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그것은 모삼충, 즉 석회림의 전음(傳音)이었다.
진자앙으로 변장한 사람은 다름아닌 장천림이었다. 그는 심한 갈등을 느꼈다.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라지만
인간으로서 범할 수 없는 파렴치한 짓을 하기에는 마음이 허용치 않았다.
이때 여수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천림의 얼굴에서 갈등하는 빛을 발견한 것이었다.
(천림! 허를 보이면 끝이다! 뭘 망설이는 거냐!)
석회림의 다급한 전음이 울렸다. 장천림은 입술을 깨물었다.
'용서하시오. 여인이여!'
그는 여수인에게 다가갔다. 여수인은 손으로 땅을 짚고 뒤로 물러났다.
"다, 다가오지 마라!"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두 걸음도 가기 전에 문득 그녀는 두 다리가 번쩍 치켜
들리는 것을 느꼈다.
"아악!"
장천림이 뒤에서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여인은 발버둥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장천림은 뒤에서 그녀를 공격했다.
여인은 머리를 바닥에 찧으면서 당해야만 했다.
처절한 비명소리에 여기저기서 일하던 수인들이 달려왔다. 그러나 장천림은 태연히 여인을 공격했다.
"뭣들 하는 거냐!"
호통소리와 함께 우르르 대여섯 명의 옥리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바위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옥리들 앞에서 허락도 없이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옥리들은 그만 눈이 뒤집혔다.
"이런 건방진 놈들!"
"뒈져랏!"
쐐애애액!
채찍이 날아갔다. 그러나 모삼충과 진자앙은 가만히 당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채찍을 손으로 감아들고 옥리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잘 한다!"
수인들은 빙 둘러서서 그 광경을 구경했다. 실로 오랫만에 보는 쾌거였다. 그들은 옥리들에게 억눌리고 억눌린
설움을 대신 보상받는 듯한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모삼충과 진자앙은 벌써 다섯 명의 옥리들을 때려 눕히고 있었다. 발목에 채워진
쇠사슬을 적절히 이용하여 휘두르는 바람에 옥리들이 피를 토하며 나가 떨어지곤 했다.
"헤헤헤! 너희들만 사람이냐?"
"우리도 재미 좀 보자는데 왜 안 된다는 거냐!"
마침내 수십 명의 옥리들이 덤벼 들었다. 아무리 날쌔다 해도 모삼충과 진자앙의 행동에는 제약이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급 작업장으로 보내라!"


모삼충과 진자앙.
만겁마옥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킨 그들은 무려 일주야 동안이나 감금된 채 음식마저 중단되는 징계를
받았다.
그후 그들은 이급 작업장으로 보내졌다. 일종의 승급(?)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급 작업장은 삼급 작업장보다 훨씬 고생스러운 곳이었다.
지옥 중에서도 더 심한 지옥이랄까? 그러나 두 사람은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이급 작업장엔 더 빼어난 미녀들이 있소?"
옥리에게 끌려 가면서도 모삼충은 징글맞게 웃고 있었다.
모삼충과 진자앙이 옮겨진 곳은 하루 종일 햇볕이라곤 볼 수 없는 동굴 속에서 금광석을 캐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이전보다 더한 중노역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들은 며칠 일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역시 두
명의 여죄수들을 건드렸으며 옥리들과 대판 싸움을 벌이다 붙잡힌 것이었다.
"일급 수인으로!"
열흘 동안 금식(禁食)과 오백 대의 태형을 받은 두 사람은 이제 발목뿐 아니라 손목에도 족쇄가 채워진 채 일급
수인으로 승급되어 다시 작업장이 옮겨졌다.
일급 수인들은 대부분 역모를 꾸미다 체포된 전직 고관이거나 사대부 출신들이었다. 그들 사이에 색광에 불과한
두 사람이 들게 된 것이었다.
이 작업장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작업장에는 매케한 유황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유황연을 맞으면 허파가 뒤집혀질 듯한 기침이 나왔다.
아무리 체력이 강한 자라도 이곳에서는 육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유황독이 골수까지 침투하여 온 몸이 썩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한편, 모삼충과 진자앙으로 변장한 두 사람은 일급 수인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알고보니 이곳의 수인들은 대부분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대다수 대명제국을 건국한 공신(功臣)
들이었다. 그러나 대명이 반석에 오른 후 홍무제 주원장에 의해 배척된 자들이었다.
주원장은 건국의 신화를 이룬 후 건국 공신들을 배척하는 비정(非情)의 정치를 펼쳤다. 그것은 황제의 권능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로 인해 명을 건국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충신들과 장군들은 역적의 누명을 쓰고 이곳 만겁마옥에 갇힌 것이다.
"이럴 수가 있나? 이 땅에서 원을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를 세웠던 사람을 이렇게 만들다니......?"
모삼충, 즉 석회림이 흥분하여 중얼거렸다. 장천림은 한숨을 쉬었다.
"알고 보면 권력(權力) 만큼 추한 것도 없는 법이다. 권좌에 오르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적으로 보인다고 하지
않더냐?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고 버림받은 사람만 불행할 뿐......."
유황연이 자욱한 작업장에서 한 때 대륙을 질타하며 원을 몰아내고 중원에 한족의 나라를 세웠던 장수들이
버러지처럼 꿈틀거리며 일하고 있었다. 실로 비참한 일이었다.
이곳에는 여자 수인들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들은 나이도 들었으며 유황독으로 전신이 짓물러 음욕을 느끼게
할 육체도 지니고 있지 못했다.
(이번엔 어떤 방법을 쓰지?)
모삼충, 즉 석회림이 고민스런 표정으로 전음을 전했다.
(다른 방법을 써야지. 똑같은 방법을 써봐야 의심만 살 뿐이다.)
(어떤 방법을?)
(이곳의 인물들은 한 때 장수들이거나 충신들이었다. 감정을 자극하여 작은 반란을 일으키는게 어떨까?)
장천림의 전음에 석회림은 눈을 반짝였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그럼 어떤 방법을 쓰지?)
"으으! 이 놈들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으아아! 우릴 풀어 주지 못하겠느냐!"
이십여 명의 옥리들은 아우성을 쳤다.
그들은 한 동굴에 처박혀 있었다. 실로 꿈에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늙고 병들어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져 버릴 늙은이들이 대다수인 일급 수인 지역에서 반란(叛亂)이라니!
반란을 주도한 자는 모삼충과 진자앙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힘을 쓰지 못하는 일급 수인들을 지휘하여 스물네
명의 옥리들을 동굴로 몰은 후 유황연기를 불어넣어 사로잡은 것이었다.
"으하하하하! 네 놈들도 유황을 실컷 마셔봐라!"
"크크크크ㅋ! 어떠냐? 뼛골이 녹아나는 맛이지?"
눈이 짓무르고 뼈가 삭은 것은 물론 온 몸의 피부가 녹아 내리고 있는 일급 수인들은 어린애처럼 기뻐 날뛰며
옥리들을 조롱했다.
옥리들은 동굴에 갇힌 채 독한 유황연기 속에서 기침을 하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려 해도 나올 수가
없었다.
석회림과 장천림이 유황천(硫黃泉)을 동굴 쪽으로 흘러가게 하여 폭이 이 장(二丈)이 넘는 부글부글 끓는 유황의
내(川)를 동굴 입구에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만일 밖으로 나오려면 유황천을 통과해야만 했다. 유황이 직접적으로 피부에 닿으면 어떻게 되는 지는 옥리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채 동굴 속에서 고함만 쳐대고 있었다.

"으음!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두 달도 안 되는 사이에 그런 말썽을 부린단 말이냐?"
보고를 받은 추성결은 왈칵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는 현재 만겁마옥주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백색마인 백리진강을 잡기 위한 일념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사소한 일들이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런데 수하들이 계속 그를 귀찮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놈들이 워낙 교활하여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키니...... 차라리 죽여 버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 말에 추성결은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규칙 위반이 아닌가?"
그렇다. 이곳의 규칙은 어떤 경우라도 수인들을 죽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자연사를 하던가 스스로
자살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의로 죽이지 않는 것이 수인들에게 영원한 고통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수인들을 죽인다는 것은 도리어 사면을 내리는 격이 되는 셈이었다.
"그럼 다시 특급으로 올릴까요? 그곳이라면 놈들도 더이상 발악하지는 못할 것으로......"
추성결은 잠시 생각했다.
'고작 추행 혐의로 들어온 놈들을 특급으로? 그건 좀 뭣한데......'
이때 문득 그의 머리에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참, 놈들의 특기가 뭐라고 했지?"
수하는 흠칫하며 대답했다.
"놈들은 지독한 색광들입니다."
"색광이라......."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 계집이 지금쯤은 꽤나 배가 부를 텐데....... 그렇다면...... 후후......'
추성결은 많이 변했다. 한 인간이 변하게 되기까지는 어쩌면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을 지도 몰랐다.
그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좌절이나 격변에 달려 있는 문제였다.
과거의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당당한 무인이었다. 그러나 만겁마옥에서의 생활은 그를 차츰 변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지옥같은 곳에서 옥리들이 그렇듯이 잔인하고 변태적인 즐거움을 누릴 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곳이 인간계가 아니라 지옥계였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수인들은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없었다. 그 점이
그의 성격을 변하게 한 요인이었다.
마침내 그는 결정을 내렸다.
"후후후......! 좋다. 특급으로 승급시켜라. 일단 특급 십삼 호와 한 방에 가두도록!"
"옛?"
수하는 놀라 멍청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황급히 대답했다.
"존명!"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끈질긴 것이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한 방울의 물과 공기만 있으면 놀랄 만큼 오래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것도 일반적인 경우를 말한다. 만삭이 가까운 여인이 만겁마옥에서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고 있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환사금은 살아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만겁마옥에서도 가장 지독한 곳이었다. 이곳에는 특급수인들만 수감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과거에는 중신(重臣)들이었거나 혹은 변방국가의 족장들, 또는 한 때 용맹을 떨치는 장수들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는 있어도 끝까지 지킬 것은
지키고 있었다.
(보았나......?)
(봤다.)
(진강이 반할만 하군.......)
(다행이군. 아직은 건강해 보인다. 이제 구출해 내는 일만 남았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어젯밤 이곳으로 수감된 수인들이었다. 처음에는 삼급 수인으로 들어왔다가 불과
두 달만에 특급으로 승급한 인물, 즉 모삼충과 진자앙이었다.
지금 그들은 환사금과 한 방에 있었다. 그들을 환사금과 함께 집어넣은 의도는 뻔한 것이었다.
그들이 호색한들이라는 것을 알고 환사금을 괴롭히려는 의도인 것이었다.
환사금은 동산만하게 부른 배를 안고 구석진 곳에 앉아 있었다.
아름다웠다. 숱한 고초를 겪은 여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는 순결한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둥글게 부푼 배를 손으로 안고 앉아 있는 그녀에게서는 모성(母性)의 숭고함이 보이고 있었다.
장천림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환사금이 이곳에서 삶을 유지하고 있는지.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이곳의 특급 수인들은 모두 사십오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한결같이 환사금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유일한 여자이기도 한 그녀를 마치 자신들의 며느리나 되는 듯이 정성으로 돌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조금씩 나누어 임신한 그녀에게 보태 주었다.
영양이 부족하면 태아가 부실해지고 그렇게 되면 임산부도 건강을 해치게 된다.
환사금은 비록 지옥 속에 있었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피부과 칠흑같은 머리칼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특급 수인들은 살아서 만겁마옥을 나갈 희망이 없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환사금이 이곳에 들어온 것은 도리어 그들에게 한 가닥의 희망의 빛을 던져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희망없는 인간들 속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성그러운 생명을 잉태(孕胎)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옥같은 하루하루를 위안 받으며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에 장천림과 석회림은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여긴 인간들이 제법 있군, 그래.)
석회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은 모순된 구조일 수 있었다. 그들은 백가소의 복수를 위해 무림맹과 대결한 적이 있었다. 외면적으로 볼 때
무림맹은 백도 무림의 결집체였다.
더구나 그들이 척살해야 할 대상은 강호사공자였다.
백도 무림의 후기제일인인 그들과의 대결에서 얻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겉으로는 선인이었던 그들의 내면은 그야말로 추악함이 아니었던가.
이곳은 천하의 중죄를 지은 죄수들을 가둔 만겁마옥이었다. 그러나 살이 썩고 뼈가 곯아가고 있는 추악하기
그지없는 수인들의 내면에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 사실에 장천림과 석회림은 세상이 잘못 투성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빌어먹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여자를 구해내야겠네.)
장천림은 석회림의 전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동감이었다.
두 사람은 만겁마옥을 탈출할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날개를 달지 않는 한 탈출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것은 어딘가에 헛점이 있기 마련이었다. 두 사람은 그 헛점을 찾기로 했다.
제 24 장 유정(有情)의 결말(終末)

홍무(洪武) 16 년 4 월 3 일.
만겁마옥의 옥문(獄門)을 지키는 다섯 명의 병사들은 험악한 검문관의 산로를 통해 다가오고 있는 두 명의 인물을
보고 왠지 기이한 느낌을 들었다.
이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검문산의 다른 곳은 나뭇꾼들이 다닐 수 있어도 만겁마옥이 있는
곳만은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했다.
또한 어떤 자라도 사전의 통보 없이는 이곳을 방문할 수 없는 것이 규칙이기도 했다. 따라서 늘 통보를 받고
방문객을 대비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런데 지금 옥문을 향해 좁은 소로를 걸어오고 있는 이인의 방문객에 대해서는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다.
"저 자들이 누구지?"
병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을 줄 수 없었다. 차츰 두 명의 인물이 다가왔다.
한 명은 갓 사십쯤 되어 보이는 강인한 인상의 사나이였고, 한 명은 오십대의 노인으로 그의 시종쯤으로 보였다.
만겁마옥의 수비장은 두 사람이 다가오자 앞을 막아섰다.
"귀하들은 누구요?"
그가 존칭은 붙인 것은 두 사람의 내력이 범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순간, 오십대의 사나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놈! 이 분이 뉘시라고 감히 그렇게 부르느냐?"
"......!"
수비장은 움찔했다. 그는 수하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모두 당황하고 있었다. 이때 사나이가 손을
저었다.
"아서라, 저 놈이 뭘 안다고 그러느냐? 다만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의 옥주가 추성결이 맞느냐? 그리고 과거 황궁에서 근무한 것도 맞느냐?"
"......!"
수비장은 안색이 변했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상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그러나 그는 얼른 머리를
굴렸다.
'이크....... 아마도 더 높으신 분인가 보군.'
"예예....... 맞습니다요. 하온데......?"
이때였다.
"그래도 저 놈이? 썩 안으로 연락을 하지 않고 무얼 꾸물거리느냐?"
다시 오십대의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수비장은 그만 얼이 빠져버렸다.
"아, 알겠습니다!"
그는 황급히 안으로 직접 달려 들어갔다.

추성결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그것은 얼마 전 특급뇌옥으로 승급한 사내들의 동태 때문이었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특급수인으로 들어간 그들이
더이상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그 속에서 두 사람이 환사금을 괴롭히기를 바랬다. 그런데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도리어 환사금을 극진하게
돌보고 있다지 않는가?
'빌어먹을 ......! 도무지 제대로 되는 것이 없군.'
그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대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냐?"
그는 짜증스럽게 버럭 외쳤다.
"그, 그게......."
옥문을 지키던 수비장은 울상을 지었다. 추성결은 눈썹을 곤두세웠다.
"누구냐니까?"
"그...... 그것이....... 대장님을 안다고 하면서...... 황궁에서 온 듯한 두 분이었습니다."
추성결은 그만 화가 났다.
"뭐라고? 그럼 신분도 확인하지 않고 들여 보냈단 말이냐?"
이때였다. 또다른 수하가 들어오더니 쟁반 위에 배첩을 받쳐들고 왔다.
"또 뭐냐?"
수하는 무릎을 꿇고 배첩을 바쳤다. 그 배첩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 전(前) 동창 부영반 장하영이 뵙기를 청하오.
추성결은 부르르 떨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당황하여 소리지르고 있었다.
"어서...... 어서......모시어라! 아니다, 내가 직접 나가겠다......!"
추성결의 모습을 본 수비장은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휴우! 과연 대장님보다 훨씬 높은 분이신가 보군. 하마터면 실수할 뻔 했다.'
꽝!
굉음이 터졌다. 동시에 동굴을 가로막고 있는 철창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자욱한 돌가루와 먼지가 날리는
가운데 말소리가 들렸다.
"어서 가자. 회림!"
"히히! 그래. 지금쯤 그도 당도했을 테지."
한 가닥 가냘프게 떨리는 여인의 음성이 뒤를 이었다.
"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죠?"
"후후....... 우리들은 아우의 부탁을 받고 제수씨를 구하러 온 사람들이오."
자욱한 돌가루가 날리는 가운데 한 명의 임신부와 두 명의 꾀죄죄한 인물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다름아닌
장천림과 석회림, 환사금이었다.
이때 폭음 소리를 듣고 우르르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호통 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이냐?"
"막아라! 탈출하려 한다!"
과연 수십 명의 경비병들이 소리 지르며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돌먼지가 자욱한 동굴 앞에서 멈추었다.
잠시 후 그들은 먼지 속에서 유유히 걸어나오고 있는 세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이남일녀였다. 또한 만겁마옥의 죄수들이기도 했다. 경비병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쳤다.
"서라!"
"감히 어딜 달아나려는 것이냐?"
"어리석은 것들! 달아날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장천림과 석회림은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병사들을 향해 유유히 걸어갔다. 그들의 손과
발을 묶은 쇠사슬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사실 쇠사슬 따위가 문제될 리가 없었다. 그들은 혈명단에서 수많은 잡술(雜術)을 익혔다. 따라서 쇠사슬을
간단히 벗어날 수 있었다.
"길을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다친다."
석회림이 경비병들을 향해 외치며 무엇인가를 던졌다.
펑!
폭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 올랐다. 연기는 삽시간에 동굴을 뒤덮었다.
"헉! 연막이다!"
경비병들은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연막이 아니었다. 연기 속에는 일종의 강한 매운 기운이
포함되어 있었다.
"에...... 에취!"
병사들은 연신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기침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시야가 자욱한 연기로 차단되어
있었다.
장천림과 석회림은 그들 사이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유유히 걸어나왔다.
그러나 경비병들을 통과했다고 탈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완전히 이 지하세계를 벗어나려면 앞으로도
열 여덟 개의 철창을 지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보다 큰 문제는 이 만겁마옥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만겁마옥이 생긴 이래로 단 한 명도 탈출에 성공한 자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이 절지(絶地)이기 때문이었다.
'안배가 제대로 맞아 떨어지기만 한다면......'
장천림은 천운(天運)을 빌었다.
'마지막으로 단 한 번....... 하늘이여!'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돌아갈 길은 없었다. 아니 있다해도 그는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추성결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장대인......!"
지금 그의 눈 앞에 있는 인물은 방금 전 만겁마옥을 정문으로 통과해온 인물이었다. 삼십대의 중년인으로 변장한
인물은 다름아닌 장하영이었다.
장하영은 슬쩍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손을 움직이자 본래의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 사라졌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추성결은 한쪽 무릎을 꺾었다.
"일어나게. 일개 야인(野人)에 불과한데 이럴 것까지는 없네."
장하영은 황궁 내에서 서열상으로 본다면 추성결의 상관이었다. 추성결은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씀을....... 비직은......"
장하영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접견실을 둘러보았다. 그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접견실은 과거
황궁의 집무실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조촐하기 그지 없었다.
'이런 곳에서 자신을 유폐시키다시피 하다니....... 무서운 집념이구나.'
그는 추성결을 바라보며 물었다.
"추성결. 어째서 이런 곳으로 왔소?"
추성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비직이 못나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장하영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 스스로가 선택한 길인가? 아니면 강요에 의한 것인가? 만일 강요에 의했다면 내가......"
"제 스스로 선택한 길입니다. 누구의 강요도 없었습니다."
추성결의 의지에 찬 말에 장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자네의 능력을 이런 데서 썩히는가? 설사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해도 그동안의 자네의
공만으로도 충분히......"
"비직 스스로가 못견디기 때문입니다. 황궁을 떠날 때 서약했습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결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장하영은 내심 중얼거렸다.
'자네의 신념은 높이 살만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 여인의 운명이 달려 있다네. 미안하지만 자네는 영원히 그
임무를 완성할 수 없을 걸세.'
추성결은 문득 의아한 듯 물었다.
"부영반께서는 어째서 궁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인지......?"
"나 말인가?"
장하영은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접견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한 때는 황금과 권능으로 둘러싸인 곳이었지만 돌아보면 그곳은 내겐 무덤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네. 손만 뻗으면
얼마든지 미녀를 안을 수 있고 아쉬운 것 하나 없는 곳이었지만 정작 그곳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네."
추성결은 궁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사람에게 누구나 있어야 할 것, 바로 뜨거운 감정이 없었네."
"......?"
"내 혈관 속에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네. 그러나 황궁에서는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네. 우정도 사랑도......
그곳에는 존재하지가 않았지."
"그럼...... 지금은 그 모든 것을 얻으셨습니까?"
"후후! 최소한 한 가지는 얻었지."
"그게 무엇입니까?"
"이리 가까이 와보게."
"......?"
추성결은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장하영은 손짓해서 그를 불렀네.
"자네가 궁금하다니 지금 알려 주겠네. 가까이 오게."
추성결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한 때 하늘같은 그의 상관인 장하영의 명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약간
의심이 일긴 했지만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비록 겉으로는 공경한 듯 했으나 사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장하영의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장하영에게 다가가면서 진기를 가득 끌어올리고 있었다. 여차하며 반응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바로......."
장하영은 느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때였다. 추성결은 잠깐 잊어 버렸다. 방 안에는 그 두 사람 외에도 또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가 장하영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다가가는 동안 뒤에 서있던 오순 가량의 늙은이의 눈빛이 번뜩였다.
슉!
미세한 경풍 소리가 일어났다.
'아차!'
비로소 추성결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으며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그러나 검자루에 손이 닿기도 전에
목덜미가 뜨끔했다. 옥침혈(玉沈穴)에 작은 침이 박혀버린 것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고목처럼 쓰러졌다.
"와아아......! 잡아라! 탈출이다!"
산봉우리를 향해 수백 명의 병사들이 쫓고 있었다. 그 앞에는 이남일녀가 산봉우리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장천림과 석회림이었다.
그들은 열여덟 군데의 관문을 뚫고 마침내 지하세계를 빠져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극적(劇的)인 탈출이었다.
그들이 탈출하는 동안 수인들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탈출이 더욱 용이하게 된 것이었다. 수인들은 만겁마옥에서
죽으나 싸우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경비병들은 그들을 잡을 수 없었다. 장천림은 석회림과 함께 환사금을 데리고 무사히 지하뇌옥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길은 오직 한 곳뿐이었다. 정문으로 돌파하여 빠져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겁마옥을 지키는 수백
명의 병사들과 피비린내나는 혈전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만일 환사금만 없었다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만삭이 된 그녀를 무사히 탈출시키려면 애당초
계획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산봉우리를 향해 달렸다. 봉우리 위에는 푸른 하늘과 깎아지른 벼랑밖에 없었다.
병사들도 산봉우리를 향해 추적해 왔다. 그들은 세 사람이 봉우리로 오르는 것을 보며 의아했다. 그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장천림 일행은 봉우리에 당도했다. 봉우리 아래 쪽에서 병사들의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석회림은 발 아래의 낭떠러지를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야 할 텐데......."
장천림은 염려스러운 듯 환사금을 바라보며 물었다.
"몸은 어떻소......?"
그 말에 입술을 악물고 있던 환사금은 손으로 아랫배를 만지며 신음을 발했다.
"아아......! 진통이......."
장천림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어찌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번도 이런 경우를 당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환사금은 스르르 바닥에 주저 앉더니 잔뜩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으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했다.
"아니......?"
석회림도 눈이 동그래졌다. 환사금은 만삭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급박한 순간에 출산할 기미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 이걸 어떻게 한다?"
석회림도 속수무책인 표정이었다. 주저앉은 환사금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실로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때 장천림의 안색이 굳어졌다. 봉우리 아래쪽에서 수백 명의 병사들이
까맣게 몰려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회림! 진천자(震天子)는 몇 알이나 남았지?"
석회림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 두 개뿐이야."
"큰일이군."
장천림은 땅에 주저앉아 신음하고 있는 환사금을 바라보며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월의 하늘은 끝없이 푸르기만 할 뿐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와아아!"
함성은 점점 가까와지고 있었다. 이윽고 병사들의 모습이 봉우리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던져!"
장천림의 말에 석회림은 망설이지 않고 무엇인가를 던졌다.
쾅---!
"으아악!"
폭음과 함께 산봉우리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석회림이 던진 것은 진천자로 일종의 화탄(火彈)이었다. 화탄이
터지자 막 봉우리로 올라 오려면 병사들이 무더기로 비명과 함께 날아갔다.
화탄이 터지자 병사들은 더이상 올라오지 못하고 도로 산봉우리 아래로 후퇴했다.
장천림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시간은 번 셈이군."
"문제는 한 개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야. 그것마저 사용하고 나면 속수무책이다. 빌어먹을! 대체 뭐하느라고 아직
보이지 않는 거야?"
"아악! 아아......!"
갑작스런 환사금의 비명소리에 두 사람은 부르르 떨었다. 환사금은 다리를 벌린 채 아랫배를 부여잡고 고통에 찬
신음을 발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하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야말로 낭패였다. 하필이면 이런 때 해산하려 하다니, 하늘도 무심했다.
이때였다. 봉우리 아래를 내려다 보던 석회림이 부르짖었다.
"이, 이런 제기랄! 우린 이제 끝장이군!"
장천림은 급히 봉우리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봉우리 아래에서 병사들이 화포(火砲)를 장치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거대한 철통으로 연결된 것으로 한 마장
이상 떨어진 곳으로 화탄을 쏘아올릴 수 있는 것이었다.
석회림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있는 곳은 고작해야 이십여 장 정도의 공간밖에 없었다. 달아날래야
달아날 곳이 있을 턱이 없었다.
만일 화탄이 봉우리를 향해 발사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들은 흔적도 없이 날아갈
것이다.
두 사람은 절망을 느꼈다. 한 쪽에서는 해산하기 직전이고, 봉우리 아래에서는 화탄을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땅으로 숨거나 하늘로 솟아 오르지 않는 한 죽음을 면할 방법은 없었다.
이때였다.
"저기 온다!"
석회림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말에 장천림은 고개를 하늘로 향했다. 순간 그의 눈에서 희망의 빛이
번쩍였다.
과연......! 서쪽 하늘로부터 하나의 연(鳶)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연은 거대했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연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연에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연에 탄 사람은 장천림과 석회림을 발견하자 손을 흔들었다.
"제기랄! 빨리 오라구! 여유부릴 시간이 없단 말야!"
석회림도 조급하게 손을 흔들었다.
연은 바람을 타고 이쪽으로 순식간에 날아왔다. 연이 가까워졌다. 연 위에 탄 사람은 다름아닌 백리진강이었다.
"진강! 빨리 움직여라......!"
석회림이 소리치자 백리진강은 연에서 뛰어내렸다. 석회림은 연이 달아나지 않도록 끈을 당겨 바위에 묶었다.
"사금!"
백리진강은 땅에 주저앉아 신음하고 있는 환사금을 발견하고 달려가 그녀를 부둥켜 안았다.
"다, 당신은......?"
환사금의 땀에 젖은 얼굴에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눈을 부볐다. 마치 눈 앞의 현실이 꿈인
아닌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저, 정말 진강...... 당신이 맞나요?"
"맞소! 나요! 사금......."
백리진강은 눈물을 흘리며 환사금을 끌어 안았다.
"아아! 믿을 수 없어요. 제가 꿈을 꾸는 건 아닌지요......?"
환사금은 고개를 흔들었다. 백리진강은 그녀를 꽉 끌어 안았다. 얼마만인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목이
쉬도록 불렀던 여인, 환사금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제 안심해. 다시는 당신과 헤어지지 않을 거야."
"아......."
환사금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이때였다.
"악!"
환사금이 돌연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던 것이다.
"왜 그래? 사금!"
백리진강이 놀라 멍한 표정을 짓자 환사금은 아랫배를 감싸며 말했다.
"아기가...... 아기가......."
그녀는 말을 다하지 못했다. 걷잡을 수 없는 진통이 밀려온 것이었다. 이때 장천림이 곁에서 재촉했다.
"해산하려 한다. 어서 가라!"
"해산!"
백리진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희열에 젖은 얼굴로 환사금를 끌어 안았다.
"아아! 우리들의 아이가 태어난다고?"
"이런! 죽고 싶으냐? 어서 데리고 가란 말이다!"
석회림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제서야 백리진강은 정신을 차렸다.
장천림이 급히 말했다.
"진강! 어서 데리고 가라. 이곳에서 아기를 낳을 순 없지 않느냐?"
"그, 그렇지요......."
그러나 백리진강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환사금은 더욱 진통이 오는 지 전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석회림이 욕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어서 가란 말이다! 우물거리다간 이곳에서 모두 뼈를 묻고 말 거야!"
그 말에 백리진강은 안색이 변했다.
"사금....... 이리로......!"
그는 신음하고 있는 환사금을 안고 연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연에 환사금을 태웠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악......!"
갑자기 환사금이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 아닌가?
"으앙......!"
돌연 힘찬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환사금은 비명과 함께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그녀의 치마는
피로 젖었으며 다시 그 사이로 핏덩이가 밀려 나왔다.
운명치고는 실로 묘한 운명이었다. 이 긴박한 순간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 것이었다.
"......!"
장천림, 석회림, 백리진강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남자였다.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체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나은 것은 환사금이었다.
그녀는 벌써 이런 일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핏덩이나 다름없는 아기를 끌어안고는 탯줄을 재빨리 이빨로
물어 끊었다.
아기는 앙증맞은 두 주먹을 움켜쥔 채 힘찬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으앙! 으앙......!"
"아가야....... 울지 마라......."
환사금은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기묘한 표정으로 어린아이를 끌어 안은 채 달래고 있었다. 격렬한 산고(産苦)
도 잊은 듯 그녀는 순간적으로 성스러운 모성애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서...... 가야 해요....... 아기 목욕도 시켜야죠."
"......!"
그 말에 세 사람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진강! 빨리 가라! 이곳은 우리가 맡겠다."
장천림의 말에 백리진강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형님들은......."
"빨리 가라니까!"
석회림이 다시 고함을 빽 질렀다. 백리진강은 할 수 없이 연에 올라탔다. 이때 장천림은 화포의 끝이 봉우리를
향해 겨누어지는 것을 보았다.
병사들은 그들이 있는 쪽을 향해 화포를 장진하고 있었다.
'맙소사!'
그는 아찔함을 느꼈다. 화포가 발사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좁은 봉우리 위에서는 피할 길이 없었다.
그는 문득 공허로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런 공포심도 들지 않았다. 일단 끝이라는 생각이 들자 도리어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는 환사금에게 다가가 팔을 내밀었다.
"아기를 잠깐 안아볼 수 있소?"
그 말에 환사금은 수줍게 웃었다.
"물론이에요. 그런데 아기가...... 아빠를 닮았어요."
장천림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기를 받았다. 그의 눈에 핏딱지도 씻어내지 못한
아기의 가랑이 사이에 매달린 작은 고추가 보였다.
"허...... 사내놈이군."
아기는 눈을 떴다. 그러자 태양처럼 맑고 밝은 눈망울이 그를 올려다 보았다.
"아!"
장천림은 탄성을 발했다. 그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 말할 수 없는 정감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해맑은 얼굴과
맑은 눈동자! 거기에는 한 점의 오욕이나 거짓이 없었다.
'그래! 넌 새로운 세상에서 마음껏 활개치며 살아야 한다. 네게 더이상의 어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장천림은 아기를 한 번 안아 보고는 환사금에게 건네 주었다. 짧은 순간에 그는 무한한 생명의 신비를 느꼈다.
그리고 더이상 생의 미련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바위에 묶어 두었던 끈을 잘랐다.
휘이이잉!
부는 바람을 타고 연이 날아 올랐다. 연은 새로 태어난 아기와 백리진강, 환사금을 태우고 금세 높이높이
날아올랐다.
"......."
석회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천림도 마찬가지였다.
"왠지 허탈하군......."
석회림의 말에 장천림은 싱긋 웃었다.
"이제 우리의 할 일도 대충 끝난 것 같군."
돌연 석회림은 악을 썼다.
"씨팔! 그런데 하영이 놈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정말 우릴 이곳에 매장해 버릴 셈인가?"
이때였다.
콰아앙---!
무엇인가가 터졌다. 순간 산봉우리에 있던 장천림과 석회림은 머리가 빙그르르 도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몸이
부웅 떠오르고 있었다.
더이상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전신이 분해되는 것을 느끼며 세상도, 우주도, 마음조차도 온통 하얗게 비어버린 무(無)와 공(空)의
세계로 귀일하는 것만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그들은 허공 중에서 웃고 있었다. 조금도 후회스럽다거나 억울한 웃음이 아니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웃음을 허공
중에서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되 인간의 뿌리를 가지지 못하고, 일생을 부초처럼 살아온 그들에게 있어 이런 종말은 어쩌면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장천림이 눈을 떴을 때는 한 쌍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
그는 이곳이 저승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저승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주위가 너무나 평온하고 안락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있는 방 안은 아주 정갈하였고, 여인의 세심한 손길이 구석구석 배인 따스한 곳이었다.
눈길을 돌리면 창가에 화병(花甁)이 있고, 화병에는 노란 색의 서향화(瑞香花)가 한 무더기 꽂혀 있었다.
서향화의 향기가 방 안을 은은히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서향화보다 더욱 향기로운 것은 여인의 향기였다.
"이제 정신이 드셨나요......? 너무 긴 잠을 주무셨어요."
장천림은 어리둥절했다.
"망아(忘我)....... 당신이 어떻게......?"
놀랍게도 그를 내려다 보던 여인은 망아였다. 철주부에 있어야 할 망아가 지금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장천림은 한동안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하하하......! 천림. 자네는 무슨 잠을 그리도 오래 자나? 무려 한 달씩이나 자니 말이야?"
"......?"
장천림은 그가 매우 낯이 익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혼란된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눈을 몇 번인가 감았다가 떴다.
비로소 생각이 났다.
'넌 장하영!'
또 한 사람이 들어섰다. 놀랍게도 그는 온 얼굴을 붕대로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즉각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회림!'
두 개의 눈구멍만 빼놓고 붕대로 얼굴을 모두 감고 있었으나 그는 틀림없는 석회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헤헤헤......! 네 놈이 나보다 허약하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다구! 최소한 난 너보다 사흘은 일찍 깨어났단
말이야."
석회림은 그렇게 낄낄거리고 있었다. 장천림은 뭐라 말하려 했으나 음성이 잠긴 듯 발음이 잘 되지 않았다.
이때 또 한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들어서자 마자 큰 소리로 말했다.
"이봐! 천림. 아기 이름 하나 짓게. 아직도 이름을 짓지 못했단 말이야. 어서 멋진 이름 하나 지으라구!"
조천백의 뒤를 이어 들어오는 것은 한 쌍의 부부였다. 장천림은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백리진강과 환사금이었다.
환사금은 화사한 유의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품에는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가 안겨 있었다. 환사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강보에 싸인 아기를 장천림의 손으로 건네주었다.
"......!"
장천림은 자신을 향해 방긋방긋 웃고 있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아기가 바로 그......?"
그는 비소로 발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말을 다 하지 못하고 그만 목이 꽉 막혀 버렸다. 가슴이 벅찬 감동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순진무구한 아기의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앙증맞은 아기의 손이 무엇인가를 움켜쥐려 하는 것을
보았다. 아기의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
'오오!'
그는 눈시울이 젖는 것을 느꼈다. 커다란 감동이 일어났다. 아기의 부드러운 손이 느껴지는 순간 생명의 고귀함이
눈물겹게 다가왔다.
이때 장하영이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해. 좀 늦어서 자넬 제 때 구하지 못했네."
그러나 장천림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아기를 보느라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듣거나 말거나
장하영은 경과 보고를 했다.
"추성결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네. 할 수 없이 그를 제압한 후 봉우리로 달려갔을 때는 자네들은 이미
걸레조각이 되어 쓰러져 있더군. 하하! 하지만 다행히도 끈질긴 목숨을 가지고 있더군. 피떡이 된 채로도
비틀거리며 싸울 태도더군."
"......."
장천림은 비로소 자신이 극적으로 살아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 석회림은 뒤늦게 달려온 장하영과 조천백에 의해 구조된 것이었다.
장하영은 만겁마옥의 옥주인 추성결의 목숨을 미끼로 그들을 구해낸 것이었다. 장천림은 마치 한 바탕의 긴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랬었군. 난 또 이곳이 저승세계인 줄 알았지.'
그는 눈을 감았다. 편안한 기분이었다. 이제 더이상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뭐 한 달씩이나 잤다고? 그런데 왜
또 이렇게 졸리운 거지?
장천림은 눈을 감은 채 슬며시 미소지었다. 공연히 웃음이 쿡쿡 나왔다.
'훗! 진강이 놈, 새파란 놈이 나보다 먼저 아버지가 되다니.......'
이때였다. 하나의 부드러운 손이 뻗어 오더니 그의 손을 잡았다.
"......?"
장천림은 눈을 떴다. 순간 그의 눈썹이 바르르 떨었다. 눈 앞에 한 여인이 있었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 꿈인 것 같군."
그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러자 여인이 섬섬옥수로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니예요. 분명한 현실이랍니다. 결국 당신 곁에 오고야 말았어요......."
여인은 눈시울을 붉혔다. 더이상 소복을 입지 않고 있는 여인, 그녀는 바로 망아였다.
망아는 수줍은 듯 얼굴을 떨구며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장하영님께서 이곳에 오면 당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해서......."
그녀는 얼굴에 이어 하얀 목덜미까지 발그레하게 물들고 있었다. 장천림은 가슴이 터질 듯이 격동하는 것을
느꼈다.
"잘 왔소. 정말 잘 왔소. 정말......."
그는 더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이 순간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나 그리워 했었던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곤 했었다. 몇 번씩이나 그녀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었다.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지만 그 모든 벽이 두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그들은 서로를
이해했고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만남의 시간이 짧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십 년을 만난 것보다 백 년을 만난 것보다 더한 운명적인 느낌을 똑같이
느꼈던 두 사람이었다.
"하하핫...! 자자, 우리는 방해하지 말고 나가자구. 저 두 사람은 할 말이 많을 거야. 안 그래? 회림, 천백,
우린 나가서 술이나 퍼마시자구!"
장하영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방 안의 사람들은 하나 둘 밖으로 사라졌다. 조천백이 마지막으로 나가며
다짐하고 있었다.
"천림. 아기의 이름이나 생각해 두라구. 엉?"
장천림은 중얼거렸다.
"아기의 이름은 벌써 지었다네."
"뭐? 뭔데?"
조천백이 문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성이 백리(百里)씨고....... 이름은 유정(有情)이라네."
조천백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눈알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유정(有情)이라고? 유정...... 유정....... 좋은데?"
그는 중얼거리며 사라졌다.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오월의 향기가 창문을 통해 흘러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향기보다 더욱 짙은 향기가 장천림의 코로 다가들고 있었다.
"사랑해요."
망아가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그녀의 향긋한 입김이 장천림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는 코 앞에 있는 망아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눈...... 감아요."
장천림은 시키는 대로 했다. 눈을 감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느낌만이 가득 다가왔다. 그리고 그 느낌은 온통
그의 영혼을 가득 채웠다.
망아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장천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달콤한 향기가 온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는 수십 마리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수많은 꽃들이 봉오리를 일제히 벌리며 개화(開花)
하는 소리를 들었다.
때는 오월.
창 밖으로 눈부신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오후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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