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nyeonmaje) - Seohyoweon - Unkn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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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마제] - 서효원

들어가는 말 / 천 년의 마지막 봄
인간에게 있어 천 년(千 年)이란 세월은 과연 얼마나 장구한 세월일까?
그 누구도 천 년의 마지막 봄을 다시 겪을 수 없을 것이다. 과거 천 년 전의 사람들이 아득한 전설 속에 묻혔듯이,
우리도 봄의 아지랑이 속에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천 년의 마지막 봄은 2999 년 3 월!
너무도 머나먼 훗날이기에 우리는 아예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천 년이라는 시공(時空)은 인간의 그리 길지 않은 수명(壽命)에 비한다면 영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과연 천 년 후에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무림(武林)의 비조(鼻祖)를 달마대사(達摩大師)로 본다면 강호무림이라 불릴 시대는 천 년을 약간 넘는
정도이다. 그런 천 년 무림사에 가장 위대한 존재는 달마를 제외한다면 무당(武當)의 시조 장삼봉(張三峰)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正)이 있으면 마(魔)가 있는 법이니, 마도무림의 조종(祖宗)은 전설 속에 묻혀 있다.
마중지존(魔中至尊)!
그는 마공의 창시자이자 상고시대부터 흩어져 있던 비학들을 집대성한 마문(魔門)의 종사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많은 생명을 학살했기에 피비린내 나는 공포의 상징으로 불린다.
마침내 아득한 천 년의 시공을 깨고 영원히 잠들어야 할 전설의 마공절기가 재현된다.
천년마제(千年魔帝)!
이것은 무림시대의 최후를 장식한 마웅(魔雄) 탁옥룡의 고독한 전기이다. 그는 마중지존에 이어 새로운 천 년을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과연 그는 마(魔)로써 무림시대의 종지부를 찍을 것인가?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천 년의 마지막 봄을 보내며 강호제현과 함께 지난 천 년을 음미해 보고 싶다.
徐 孝 源 拜上

序 一 마중지존(魔中至尊)과 불가삼신승(彿家三神僧)
도도탕탕(滔滔蕩蕩)한 무림사에 거대한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 있다.
일천 년 전, 마왕동(魔王洞)을 세우고 천하혈세(天下血洗)를 시작한 고금제일거마(古今第一巨魔)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 마중지존(魔中至尊)!
그는 그렇게 불렸다.
마(魔)의 하늘을 이룩한 그는 고금에 전해지는 온갖 종류의 마공을 익히고, 그것을 마왕류(魔王流)로 통합해
전대미문의 마공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하늘의 징계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국법(國法)은 그에게 있어 못쓰는 종잇장이었고, 인륜(人倫)은 그에게 있어 냉소할 대상에 불과했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출관해 무림거파 하나를 멸문시킴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무려 일갑자 동안
그는 천하를 독패(獨覇)하며 수많은 곳에 피의 바다와 시체의 산을 쌓았다.
대혈겁(大血劫)!
피의 수레바퀴는 구르는데 누구도 그것을 멈출 수 없었다.
어떤 상대도 그를 꺾지 못했다.
그것이 일국(一國)이거나 어떠한 거대문파(巨大門派)라 할지라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그는 영생(永生)토록 꺾이지 않을 존재였기에, 선(善)은 그를 사필귀정(事必歸正)의 금제(禁制)로 몰지 못한
채 숨어 지내야 할 듯 보였다.
그러던 중 세 곳에서 은밀한 실종 사건이 발발했다.
달마조사(達磨祖師)의 사손(師孫)이 되는 혜장(慧藏)!
그는 달마가 남긴 소림의 절기를 완벽하게 터득한 고승이다. 그는 숭산에 입산 후 단 한 번도 산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육십 년 내내 면벽암(面壁庵)에 은거한 채 달마가 남긴 불문의 절기를 수련해 왔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소림절학 중 가장 강하다는 천강복마공(天 伏魔功)과 함께.
그가 사라진 날 다른 곳에서도 한 사람이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동해(東海) 옥룡사의 장문인 옥룡신승(玉龍神僧)!
혈설쌍도(血雪雙刀)의 비밀을 풀어 동해무림 사상 가장 강한 무예를 지녔다는 그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곳에서도 실종이 있었다.
서장(西藏)의 포달랍궁(包達拉宮)의 노주지승(老住持僧) 오랍(烏拉)!
그는 대유마가선공(大幽魔伽禪功)과 더불어 미륵수미신권(彌勒須彌神拳)을 터득한 서장제일인(西藏第一人)이다.

일백 년 넘는 좌선으로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을 이루었고, 미소만으로 만악(萬惡)을 물리친다는 활불


오랍이 종적을 감춰버린 것이다.
<노납은 십중십(十中十) 돌아오지 못한다.
노납은 절기가 절전(絶傳)되는 것을 막기 위해 포달랍궁 이대신공구결(二大神功口訣)을 사내(寺內)에 남겨
두었다. 후세인 중 가장 뛰어난 자가 그것을 얻으리라. 그리고 노납을 찾으려 하지 마라.>
그런 글이 그의 연공실(練功室)에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소림사 혜장(慧藏)!
옥룡사 옥룡신승(玉龍神僧)!
포달랍궁 오랍(烏拉)!
이른바 불가삼대신승(佛家三大神僧)이라 불리던 세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세상 사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격변하기 쉽다.
무림사의 경우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무림사의 운명은 보통 몇몇 절세고수의 거취로 인해 결정 지어지기
쉬운 법이기 때문이다.
그를 세 명의 활불(活佛)이 사라졌다는 것은 천하 이목이 촉각을 곤두세우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까마득한 일천 년 전의 일이기에 이제는 전설처럼 되어 버렸지만,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중대한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불가삼대신승(佛家三大神僧)의 실종!
과연 그 비밀은 무엇인가?

序 二 천년대격돌(千年大激突)
여량산(呂粱山).
남쪽으로는 운무산(雲霧山)이 있고 북쪽에는 운중산(雲中山)과 오대산(五岱山)이 늘어서 있다.
서쪽으로 가면 아산(芽山)을 볼 수 있고, 동쪽으로 가면 곽산( 山)과 부산(浮山)의 연봉(連峰)을 발견할 수
있는 산중지산(山中之山)이다.
어디를 봐도 만학천봉(萬壑千峰)의 어마어마한 도열이 있다.
산세 자체가 거대한 칼이 아니던가.
청천(淸天)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는 마천고봉(摩天高峰)들은 그 하나만 해도 눈을 아찔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데, 칼 모양의 험준(險峻)한 봉우리가 수백 수천 개나 늘어서 있는 것이다.
산서(山西)의 절경은 그로 인해 극(極)에 달하고 있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십이월(十二月)의 말일(末日).
이제 이 밤만 다하면 원단지일(元旦之日)이 시작되는데, 이 날은 유난히 춥고 험했다.
원래는 끊어지거나 단절(斷絶)되지 않는 시간이건만, 인간(人間)은 그 흐름에 태세년월일시(太歲年月日時)를
부(賦)하여 가고 오는 것을 아쉬워한다.
산령(山嶺)도 이 날만은 인간의 심정인 듯 모든 것을 설풍(雪風)에 묻어버렸다.
뼈를 깎고 골수(骨髓)를 얼려버리는 찬바람은 설마(雪魔)와 함께 휘몰아치기에 빛이라 한들 모습을 나타낼 수
없었다.
바람소리가 있을 뿐 산도 보이지 않고 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눈은 원래 흰 것이나 지금은 검게만 보였다. 모든 것이 눈바람으로 인해 잠겨 버렸는데, 심한 눈보라가 그
자체마저 감추어 버린 것이다.
빙하지곡(氷河之谷).
여량산 내에서도 가장 험준한 곳이다.
눈바람이 치지 않더라도 항상 빙무(氷霧)에 잠겨 있고, 바닥에는 흙 대신 빙하(氷河)가 머물고 있기에 생물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설룡(雪龍)이 무리를 지어 얼어붙은 대지 위를 할퀴어 갈 때, 홍색인영 하나가 빠르게 바람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유성처럼 치솟아 오르는 붉은 그림자는 만관거석(萬貫巨石)이라도 뿌리째 뽑혀 나갈 바람 속에서도 신형을


휘청이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눈바람이 그의 몸 근처에 이르러서는 기세를 잃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이었다.
붉은 그림자가 움직일 때마다 눈바람이 정지되었다.
그토록 심한 설풍이건만 그의 몸뚱이만은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흐흐……, 어느 놈이 감히 본좌 마중지존(魔中至尊)에게 도전장(桃戰狀)을 보냈단 말인가?"
아……, 절대무적 마중지존(魔中至尊)!
이제껏 단 한 번의 패배를 경험해 보지 않았으며 천하를 혈겁의 공포 속에 몰아넣은 그가 출현한 것이다.
그는 달린다고 말하기보다 난다고 말해야 좋을 정도로 신비하고 날렵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몸을 표풍(飄風)
같이 움직이는 어기비행술(馭氣飛行術)이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놈이건 박살을 내버리리라. 본좌가 우주(宇宙)에서 가장 막강한 존재임을 알게 해주리라."
너무도 사악한 음성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인간의 목소리 같지 않았다. 마귀(魔鬼)나 사신(死神)의 귀음(鬼音)이라 해야 좋을 정도로 듣기
역겨웠다.
그의 목소리는 잔혹하고 살기에 차 있어 근처를 때리고 지나치는 눈바람조차 얼어버릴 것 같았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빨리 달렸다.
얼마를 달렸을까?
그는 광설풍에 휘말려 곧 쓰러질 듯 보이는 아주 가파른 단애(斷涯)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주위는 눈바람에 잠겨 어둡기만 했다. 다만 잔혹한 웃음소리를 내는 홍의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시뻘건 빛이
주위를 훤히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주 짙은 혈무(血霧)가 그의 몸을 백 여덟 겹의 붉은 비단같이 칭칭 동여
매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놈이 감히 본좌에게 비무(比武)를 청했느냐? 본좌는 비록 죽음의 신이 도전했다 해도 피하지 않는다.
어서 모습을 나타내라. 몇 놈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의 눈에서 지독스러운 혈광이 뻗어나올 때였다.
"아미타불……."
홍의인영이 스치고 지나갔던 얼음 바닥에서 부스스 일어나는 체격이 아주 큰 백의노승 하나가 있었다.
녹옥으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목에는 염주알을 목걸이처럼 걸고 있는 노승이었다.
눈썹이 눈같이 희고 길이가 반 자나 되어 신성(神聖)스럽게 보이는 백미노승의 얼굴색은 열세 살 소년의 볼같이
불그레했다.
홍의인은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흥, 누군가 했더니 달마가 세운 소림사(少林寺)의 곰팡내 나는 돌중이로군. 백도의 허수아비들을 쓸어버릴 때
네놈 하나만 살아 도망친 일이 있었지, 흐흐……!"
그는 키득키득 웃다가 서쪽을 노려보았다. 혈무를 뚫고 폭사되는 안광은 얼음산을 녹여버릴 듯 뜨거웠다.
그는 혈무로 몸을 가린 채 잔혹하게 내뱉었다.
"거기 또 한 놈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황의노승 하나가 있었다.
"허허……, 중원천하의 고수 중 최고라 칭해지는 마중지존(魔中至尊) 시주답게 이목이 지극히 영활하구려."
약간 서툰 한어(漢語)로 말하는 노승은 키가 아주 커 일 장에 달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너무 말라 대나무 하나가
승포를 걸치고 있는 듯했다.
그의 피부는 쇳덩이같이 단단해 보였다. 이유는 수십 년 간 금식(禁食)하며 연일 폐관참선(廢關參禪)했기
때문이다.
"흐흐……, 중원인이 아니냐?"
마중지존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렇소. 노납은 소림 장문인의 청으로 머나먼 서장(西藏)에서 불원천리 십만 리(里)를 달려온 사람이오."
"서장……?"
마중지존은 눈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서장에서 너 같은 고수가 나올 곳은 단 한 군데 포달랍궁(包達拉宮)뿐이다. 혹 그곳 출신이 아닌지
모르겠구나?"
"노시주는 무공뿐만 아니라 식견 또한 대단하구려."
"흐음, 포달랍궁에서 나왔단 말이냐?"
노승은 염주를 돌리며 담담히 응대했다.
"그렇소."
마중지존은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흐흐……, 본좌는 중원을 정복한 후 새황을 발아래 둘 작정이었다. 그 중 본좌가 제일 큰 호기심을 느끼는 곳은
바로 포달랍궁이다. 그곳의 노주지 오랍(烏拉)이라는 자의 대유마가선공(大幽摩伽禪功)이 막강하다기에 한 번
가서 비무해 볼 작정이었지."
노승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허허……, 정말 잘 된 일이오. 빈승 오랍을 찾기 위해 포달랍궁까지 가는 수고를 덜게 되었으니 말이오."
"뭐야? 그렇다면 네가 오랍이란 말이냐?"
"그렇소이다."
"으음, 혜장이 제법 강한 놈을 초빙했군. 하지만 너희 둘 정도로는 나의 천초(千招)도 막지 못한다."
마중지존은 여전히 오만했다.
그가 서장의 활불이자 포달랍궁의 주인인 오랍신승(烏拉神僧)을 보고도 눈 하나 깜박 하지 않을 때였다.
땅 땅―!
어디선가 은은하고 맑은 쇳소리가 났다.
매우 강한 진기를 지니고 있는 쇳소리는 눈바람을 뚫고 걸어오고 있는 청의노승의 손에서 나고 있었다.
청의노승은 입가에 자비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데, 양손에 두 자루 일척단도(一尺短刀)를 쥐고 두 개를
맞부딪쳐 맑은 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단도는 빛이 붉었고, 왼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빛이 눈보다 흰 것이었다.
마중지존은 청의노승을 보자 다소 당황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예의 득의한 웃음소리를 내지 않는 것으로 지금
그답지 않게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청의노승은 유령처럼 미끄러지며 마중지존을 중심으로 한 삼재진(三才陣)의 일각을 점(點)했다.
"아미타불……, 마중지존 시주가 빈승의 얼굴을 잊을 리가 없을 텐데……?"
청의노승의 자비스럽던 얼굴이 근엄하게 변했다.
"으음, 본좌의 십성(十成)에 달한 혈영금강마공(血影金剛魔功)에 격타당하고도 죽지 않았었단 말이냐?"
마중지존이 오랜만에 입술을 열었다.
"다행히 죽지 않았소. 오히려 구 년 전 시주의 마공에 몸뚱이가 반 넘게 박살이 난 덕분으로 사문의 신공을 얻는
기연을 만나기까지 했소. 오늘 그 빛을 갚기 위해 온 것이오."
"동해(東海) 옥룡신승(玉龍神僧)! 너의 태음일원신공(太陰一元神功)이 그 정도였더냐?"
"대저 무공지도에는 한계가 없는 법이 아니겠소? 허허허……!"
옥룡신승의 웃음소리는 청아한 가운데 한기(寒氣)를 담고 있었다.
"크흐흣……, 본좌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향화(香火)에 젖어 냄새나는 중들의 고깃덩어리이다. 뜻하지
않게 천하에서 가장 냄새나는 불가삼대신승(佛家三大神僧)의 살점을 한 곳에서 맛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이로다. 카하핫……."
마중지존은 한바탕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실로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돌연 실종되었던 천하삼대고수인 불가삼대신승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절대악(絶對
惡)인 마중지존을 격패시키는 일이었다.
마중지존은 삼신승을 대하고도 전혀 두려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가 깊숙이 진기를 들이키자 한순간 혈무가 십 배가 늘어나며 뇌성(雷聲)이 일었다. 산정(山頂)이 그의 운기
(運氣)로 인해 지진을 만난 듯 흔들렸다.
"마중지존! 혈영금강마공을 십이성 익혔으나 가장 귀중한 인의(仁義)를 잃었으니 무림인 중에서 가장 천하다 할
수 있다."
"아미타불……, 지난 한 갑자 세월 동안 노마(老魔)에게 죽은 수천 명의 원혼을 위해 살계(殺戒)를 깨기로
맹세했도다."
"천하의 역도(逆道)! 마의 힘은 결국 유한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법을 지키기 위해 살생하지 말라는
불법을 어기는 우리 세 비구(比丘)를 세존(世尊)도 용서하실 것이다."
불가삼신승이 일제히 외치며 쌍수를 치켜들었다.
소림사 혜장의 손에서는 백설보다 흰 기류가 일어나 기둥을 이루며 마중지존을 향해 뻗어나갔다.
포달랍궁 오랍신승의 손에서는 누르스름한 기류가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구 년 전 마중지존과 겨뤄 만초(萬招)만에 한 번 패한 바 있는 동해 옥룡신승의 홍백쌍도(紅白雙
刀)가 연달아 맞부딪치며 땅땅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름처럼 일어나던 혈무가 삼대신승의 합공이 펼쳐지는 순간 장벽에 부딪친 듯 멈추어졌다.
꽈르르― 릉―!
여량산 최고봉을 향해 미친 듯 휘몰아치던 눈바람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서 하늘 쪽으로 퉁겨졌다.
만균뇌정(萬鈞雷霆)의 강타에 땅덩이가 뒤흔들리며 십 장 두께의 만년빙(萬年氷)에 균열이 생겼다.
쩌저저― 정―!
인간 한계를 넘어선 사인의 대결은 그 시작부터가 가공했다.
소림의 천강복마공(天 伏魔功)!
포달랍궁의 대유마가선공(大幽魔伽禪功)!
동해 옥룡사의 태음일원신공(太陰一元神功)!
삼대신승이 펼쳐내는 무공은 단 일성만 익혀도 천하 고수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는 개세의 신공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합공으로도 혈무가 뻗어나가는 것을 막았을 뿐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다.
파파팟―!
마중지존의 모습은 여전히 짙은 혈무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 상태에서 일각이 지나자 반구형으로 내려앉은 혈무가 돌연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태양처럼 빛을 발하던 혈무가
다소 위축된 것이다.
세 줄기 전혀 성질이 다른 진기의 힘에 휘말린 마중지존의 입술 사이에서 괴로운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음, 네… 네놈들이 이리 강하다니!"
그는 난생 처음으로 상대방의 공세로 인해 고통을 느껴야 했다.
이십 세에 강호에 출도한 후 지난 육십 년간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인물. 이제껏 칠천 명을 죽였고,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약함을 보이지 않았던 무림 최강의 인물이 휘청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삼대신승의 얼굴 또한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미타불……!"
"세존의 가호가 있기를……."
"삼신승의 탕마대공덕(蕩魔大功德)을 위해 무량대(無量大)의 신력이 있으라!"
혜장선사는 벌써 땀으로 목욕을 했다.
대나무같이 마른 오랍승의 살색은 백짓장같이 창백해졌고, 옥룡신승은 눈빛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조금도 진기를 멈추지 않았다.
육신이 아스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공력을 내뿜었다.
우르르르― 릉!
혈무가 출렁일 때마다 뇌성이 일어났다.
절벽이 바닥에서부터 뒤흔들렸고 십 리 밖의 수목이 고목(枯木)으로 화했다. 집채만한 돌덩이가 나뒹굴었고,
흙바람 눈바람이 일어나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순간을 재현시켰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우우―!"
돌연 마중지존의 입에서 장소성이 일어났다.
심령마저 파괴한다는 악마신후(惡魔神吼)였다. 내공이 절정에 이르지 못한 자라면 고막이 터지고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고통 속에 사선을 넘게 된다.
"버러지들! 모조리 피떡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마중지존의 눈빛이 강렬한 혈광을 뿜어냈다.
번쩍―!
혈무를 뚫고 폭사돼 나오는 두 줄기 혈섬(血閃)이 번뜩이자 위축되던 혈무가 돌연 수만 마리의 혈사떼로 화하더니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쩌저저정―!
해일같이 뻗어나가는 핏빛 기류에 영겁의 세월 동안 얼어 있던 지반이 쩌억 갈라지며 아가리를 드러냈고,
하늘마저 가공할 마의 기세에 눌려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세 줄기 진기의 힘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혈무가 강하게 뻗어나올수록 더 강한 힘으로 맞받아 쳤다.
땅덩이가 흔들리고 설풍이 역류하기를 한 시진이 지났다.
"으음……!"
마중지존의 입술 사이에서 신음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놈들이 이렇게 강하다니, 마(魔)의 천하(天下)를 이룩하려는 나의 꿈이 여기에서 끝난단 말인가?'
마중지존은 이 상황을 믿기 힘든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삼대신승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백만관(百萬貫)이 넘는 암경(暗勁)은 가히 무한지경에 이르렀다. 혈영금강마공이
막대한 암경으로 인해 위축되는 가운데 그의 몸을 가리고 있던 혈무가 점점 희박해졌다.
점차 그의 모습이 삼신승의 눈 안으로 들어왔다.
혈지(血池)에 담갔다 꺼낸 듯 핏물이 그득한 두 눈이며, 혈옥(血玉)으로 빚은 듯 혈광을 뿌려대는 피부가
핏빛의 홍의보다 짙었다.
특이하게도 모발만은 삼단같이 번들거리는 흑발이었다.
삼대신승은 지난 일갑자의 세월 동안 마중지존의 모습을 본 최초의 인물이었다.
"으으, 이 더러운 돌중들! 본좌가 어찌 네놈들에게 지겠느냐!"
마중지존은 이를 갈며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냈다.
마성이 폭발한 탓인지 모발이 창날처럼 빳빳이 치솟고 홍의가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혈영금강마공은 오로지 파괴를 위한 무공이다.
수비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으며, 혈무에 담긴 강살진기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파훼되고 만다.
콰류류류―!
불사조(不死鳥)같이 살아나는 마의 기운은 삼신승을 땅 속으로 꽂아 넣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오오……, 세존이시여! 천강복마력으로 천하제일거마의 혼백을 구천지옥으로 보낼 수 있게 힘을 주십시오!"
혜장은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천강복마력을 배가시켰다.
포달랍궁에서 온 오랍은 눈을 감고 이가 으스러져라 악물며 혼신공력을 발휘하느라 말할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옥룡신승 역시 미동도 하지 못한 채 진원지기를 쏟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꽈꽝― 꽝!
네 줄기 전혀 성질이 다른 내공지기가 격돌하면서 산정이 차츰차츰 깎이기 시작했다.
마중지존은 시간이 지날수록 패색을 짙어졌다.
'크으……, 마공이란 초수를 길게 끌수록 약해진다. 그 속도는 정종무공(正宗武功)이 약화되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마중지존은 초조한 기색을 하며 먼 곳을 바라봤다.
'지금 도망치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 도망친 후 이 놈들 셋을 하나하나 찾아다닌다면 쉽게 죽일 수 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입술을 악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 육십 년간 단 한 번도 패퇴하지 않은 나다. 내가 어찌 이 시시한 자들에게 눌려 피한단
말인가?'
마중지존은 이를 으드득 갈며 장소성을 길게 뽑았다.
"우우우―!"
그의 장소성은 백 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이 놈들, 너희들은 죽음이 무섭지 않느냐? 그렇게 진기를 과다히 소모하면 끝내 죽고 만다!"
삼신승은 하나같이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삼재진세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셋 중 단 하나라도 자리를 떠난다면 진세에 틈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 갇힌 야수처럼 발광하는 혈무와 마치 조각이 되어버린 듯 미동도 않고 혼신의 내공을 뿜어내고 있는
불가지공은 매순간마다 가공할 폭음을 토해냈다.
공전절후(空前絶後)한 대결!
무림사상 이토록 치열한 싸움은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싸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공대결(內功對決)로 일관되었다.
삼신승은 마중지존의 초식이 천하에서 가장 정교하고 원활한 사공괴초(邪功怪招)임을 알기에 마중지존에게 초식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마중지존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외쳤다.
"으드득! 너희들이 정녕 본좌와 더불어 동귀어진(同歸於盡) 하기를 바라느냐?"
"아미타불……, 노납들은 전인(傳人)을 두고 왔다. 노납들이 죽는다면 그들이 노납들을 대신해 천하를 위해 힘
쓸 것이다. 다행히도 노마는 오만해 이제껏 전인을 두지 않았다. 노마와 함께 죽을 수 있다면 노마의 절기가
노마 대(代)에서 끝날 것이고, 천하는 우리 셋의 희생으로 인해 대대로 평화로워진다!"
셋 중 내공이 가장 강한 혜장의 말이었다.
그는 천강복마수법(天 伏魔手法)을 절정 수준으로 익힌 덕에 신체를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으로 단련시킬
수 있었다.
백련정강으로 만든 도끼로 내리친다 해도 그의 피부를 상하게 할 수 없다.
그의 사조(師祖)가 바로 역근세수경(易筋洗 經)의 창시자 달마대사(達磨大師)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으으……, 너희 같은 놈들과 싸우는 것이 제일 귀찮은 일이지."
마중지존은 세 사람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데 곤욕스러움을 느끼며 이를 갈았다.
삼신승은 전신 혈맥이 으스러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휩싸였다. 그런데도 피하지 않는 이유는 양패구사(兩敗俱
死)할 각오를 하고 비무에 임했기 때문이었다.
꽈꽝―!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원단지일(元旦之日)이 시작되었다.
이미 새벽이었다. 동이 훤하게 텄고 눈발은 지난밤에 비해 한결 미약했다.
마중지존은 여전히 혈무로 몸을 감고 있었지만 그 농도는 지난 밤에 비해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변화했고 얼굴도 주름살로 덮인 후였다.
하룻밤 사이에 그는 평생의 세월보다 더 늙어버린 것이다.
"크으……, 이제라도 늦지 않는다. 진기를 거두면 모두 다 살 수 있다!"
"……."
마중지존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최후까지 진기를 발휘하기에 바쁠 뿐이었다.
우르르― 릉!
산세를 변화시키는 대접전은 이제 막바지에 달했다.
내공의 힘이란 무한(無限)할 수 없는 법이다. 계속적으로 소모하다 보면 결국 끝이 나는 것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내공력의 한계였다.
열흘 동안 진기를 발휘할 수 있는 그들이었지만 혼신내공을 다해 싸우느라 하룻밤 사이에 무한진기가 소모되고
말았다.
마중지존 역시 피가 역류되고 전신이 저려왔다.
"으으, 네… 네놈들은 벌써 혼절해도 열 번은 혼절했을 정도로 고통을 경험할 텐데 그래도 손을 쓰겠느냐?"
"그것이 바로 정(正)과 사(邪)의 차이다."
포달랍궁의 오랍신승이 사자후로 말을 받았다.
마중지존은 오랍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邪)? 흑도(黑道)라고 칭하는 것은 참겠지만 어이해 사(邪)라 하느냐? 너희가 바르기에 내가 삐뚤어졌단
말이냐? 흐흐, 무공으로 천하를 얻고자 하는 본좌의 뜻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본좌가 정(正)이고, 이에
대항하는 불경 읽기에 미친 중놈들이 사(邪)다."
그는 숨이 가쁜 듯 잠시 말을 끊고는 다시 내뱉었다.
"죽음마저 무시해 버리는 미친놈들! 본좌는 삶을 아끼는 사람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본좌가, 죽음마저 시시하게 보는 중놈들하고 싸워 최후를 봐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 원통할
뿐이다!"
마중지존은 내공이 급격히 소진되자 급히 삼 성의 진력을 회수했다. 그것은 패배를 자인하는 일이었다.
순간, 천하삼대신공(天下三大神功)이라는 천강복마수법과 대유마가선공, 태음일원신공의 힘이 균형 깨진 틈
사이로 물밀 듯 밀려갔다.
꽈르르르― 릉!
수십만 관의 화약이 한꺼번에 터지는 듯한 굉음의 폭발 속에 핏빛 그림자 하나가 아주 멀리 솟구쳐 올랐다.
"크아악!"
마중지존이 암경에 휘말려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가는 것이었다. 불패신화를 창조한 그의 첫 패배였다.
"이… 이제 기력이 다했도다!"
"포달랍궁으로 가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유감은 없다."
"으으……, 마중지존을 물리쳤다."
삼성승은 마중지존이 새벽 하늘 멀리 날아감과 동시에 벌렁벌렁 나뒹굴었다.
"두… 두고 보자! 마의 힘이 언제고… 언제고 너희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리라!"
마중지존의 목소리가 저 먼 곳에서 났다.
그는 광풍에 휘말려 맥없이 날아가다가는 밑이 없는 얼음 골짜기로 떨어져 가는 중이었다.
전인미답의 얼음 골짜기는 태초(太初)부터 빙하(氷河)로 뒤덮인 곳이었다. 아득한 빙곡으로 떨어져 내리는
마중지존의 외침은 희미하기만 했다.
"아악!"
그도 인간인 듯 결국에는 비명소리를 냈다.
그것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은 없었다. 삼신승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 구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서 얼어죽고 말리라.
누가 구해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 해도 백 일 이상은 살 수 없고, 다시는 무공을 쓰지 못할 것이다.
승자가 없는 격돌이었지만 삼신승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어떻게든 무림에서
마중지존을 제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무가 동귀어진으로 끝남과 동시에 한동안 미약해졌던 눈보라가 기승을 부렸다.
바람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갑자기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났다.
와르르르―!
만장절벽을 뒤덮고 있던 일 장 두께의 얼음벽이 비무 동안에 균열되어 있다가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희디흰 빙무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눈사태는 마중지존이 사라져 간 골짜기 안을 얼음덩이로 가득 메우며 근처를 지진(地震)속으로 몰아넣었다.
꽈르르― 릉!
이제 보이는 것은 얼음덩이뿐이었다.
온천하의 얼음이 이곳에 다 모인 듯, 산 하나가 허물어지며 빙하곡은 어젯밤과는 완전히 다른 지형으로 변화했다.
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삼신승과 절대마왕의 격돌이 있었다는 것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전설이며 신화일 뿐이었다.
두터운 얼음장 밑으로 묻혀버린 이 격돌은, 아득한 옛날 악신(惡神)을 상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세 곳의 선신(善
神)들이 백일을 싸워 악신을 물리쳤다는 옛날 이야기로 구전(口傳)되어질 것이다.

第一章 빗나간 운명(運命)… 파계(破戒)


1
일천 년(一千 年)이 지났다.
세월이라 함은 흐르기를 바랄 때 흐르지 않고, 흐르지 않기를 원할 때에는 섬전(閃電)이나 전광(電光)같이 빨리
흐른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후사(後嗣)를 두어 하다 못한 일을 잇게 한다. 대(代)를 잇는데 따르는 것은 창시자의
의지이다.
그것은 곧 전통(傳統)이다.
천하의 어떤 무리보다도 전통을 따르는 무리가 강호인이다.
혹자는 백(白)으로, 혹자는 흑도(黑道)로 각기 개성을 지니고 면면(綿綿)하게 이어지는 무림의 문파 수는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많다.
중원은 사람이 많고 하늘과 땅 사이가 광활하기에 수천 개의 문파가 있어도 각기 활보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름을 얻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수천 개의 문파가 있고 수만 명의 기인이사(奇人異士)가 천하를 종횡하지만 이름을 날리는 문파나 사람은 별로
없었다.
명문거파도 나름대로 구분이 있다.
하나는 수백 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소수거대문파(小數巨大門派)이며 다른 하나는 불같은 기세로 일어나는
신흥방파이다.
신흥방파의 운명은 그 누구도 점칠 수 없다.
몇 년 지나 망할 것인지, 아니면 소림(少林)이나 무당(武當)과 같이 오랫동안 이어질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하여간 당금 천하에 있어 가장 강성(强盛)한 문파는 태산북두격인 소림이나 무당이 아니었다. 그들의 시대는
장강에 밀려버린 옛날이 되어 버렸다.
천하인들이 인정하는 천하제일방파는 새로이 등장한 한 방파이다.
<옥룡궁(玉龍宮)>
남악(南嶽)의 영봉(靈峰) 축융봉(祝融峰)이 무림제일지(武林第一地)라 불리는 이유는 거기 옥룡궁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궁주 옥룡제군(玉龍帝君)!
그는 설옥(雪玉), 혈옥(血玉)의 두 자루 쌍도만으로 천하에 적수를 두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옥룡궁이 소림사나 무당파를 제치고 천하최강의 문파가 된 것은 옥룡제군(玉龍帝君)의 개인적 탁월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의발전인인 일봉일룡(一鳳一龍)의 혁혁한 활약 때문임을 만천하가 알고 있었다.
일룡 철서생(鐵書生) 공야무군(公冶武君)!
그는 옥룡궁의 소궁주(少宮主)일 뿐 아니라 천하백도에 있어 소맹주(少盟主)같이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전설을 갖고 있던 몇몇 거마(巨魔)가 그의 손에 제거되면서 철서생이란 명호는 천하를 뒤흔들었다.
자칭 마중지존(魔中至尊) 이후의 마도제일인이라 자부하던 청해거마(靑海巨魔)가 만초(萬招)만에 철서생의
설옥룡도(雪玉龍刀)에 정수리서부터 사타구니가 반으로 갈라져 죽지 얹었다.
어디 청해거마뿐이랴.
융중삼마(隆中三魔)도 그랬고, 동정일신군(洞庭一神君)도 그랬다. 북해사악(北海四惡)이 죽은 후부터
철서생의 이름은 욱일승천(旭日昇天)하게 되었다.
옥룡궁의 창시자 옥룡제군은 듬직한 제자가 있기에 안심하고 눈을 감고 죽었다 했다.
그러나 철서생이 없었다 해도 옥룡궁의 이름은 혁혁했을 것이다. 바로 일룡을 능가하는 일봉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봉(一鳳) 옥룡선자(玉龍仙子)!
그녀는 혈옥룡도(血玉龍刀)로 사흘 밤낮 동안 남칠성(南七省)의 효웅(梟雄) 선풍칠십이걸(旋風七十二傑)을
죽인 것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린 여인이었다.
그녀가 무술에만 능했다면 그저 명망 높은 여걸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뛰어난 것은 무(武)보다
미색(美色)이었다.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
여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칭호가 그녀에게 바쳐진 것이다.
그녀의 양볼에 보조개가 패이면 대라신선(大羅神仙)이 넋을 잃고, 그린 듯한 눈썹이 찌푸려지면 천하가
근심한다고도 했다.
그야말로 침어낙안(沈魚落雁)이요, 폐월수화(閉月羞花)였다.
철서생의 명성이 혁혁한 데에는 그녀와 정혼한 사이였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자부심을 지닌 철서생은 거마를 쓰러뜨리고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지만, 사매(師妹)
일봉 앞에서는 오금을 펴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옥룡선자는 혼례를 사부의 삼년상(三年喪) 이후로 미룬 것으로도 천하를 감탄케 했다.
더욱 놀라운 공고는 다음과 같았다.
<옥룡제군의 삼년상이 끝난 후, 일봉일룡이 천하무림동도를 모아놓고 비무(比武)할 작정이다. 그 자리에서
승자가 되는 사람이 바로 이대(二代) 옥룡궁주(玉龍宮主)가 된다.>
궁주 지위는 사내에게 가기 쉬운 법이다.
하지만 옥룡선자는 진정 여장부였기에 그녀의 활약은 사형되는 철서생에 뒤지지 않았다.
그들 사형사매는 매사에 있어 친근하나 궁주 지위를 얻는 일에 있어서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지독하리만치
치열했던 것이다.
그것은 옥룡제군의 유언(遺言) 때문이었다.
옥룡제군은 죽기 전에 철서생과 옥룡선자를 한 자리에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었다.
<천하는 넓고 악인(惡人)도 많다. 너희들 중 탕마(蕩魔)에 있어 더 많은 공을 쌓은 사람이 궁주가 되거라.
궁주되는 사람은 쌍도합벽(雙刀合劈)으로 옥룡천년절기(玉龍千年絶技)를 제수 받으리라. 그로 인해 궁주의
지위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으로 되리라. 그 이전에는 천하제일이라 여기지 마라.>
옥룡제군은 죽기 전에야 그가 이제껏 전인에게 전수한 것이 최고절기가 아님을 밝혔고, 둘 중 궁주가 되는 사람이
최고절기를 얻어 천하에서 제일 가는 고수가 될 것임을 천명했다.
두 사람이 악을 소탕하는 일에 광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궁주는 곧 천하 최고의 절기를 얻기에 일룡일봉은 탕마멸사(蕩魔滅邪)에 보다 전념했다. 둘은 그 일로 인해 항상
떨어져 사는 처지가 되었다.
옥룡선자는 남칠성(南七省)을 종횡했다.
철서생이 질타한 지역은 북육성(北六省)으로 그로 인해 그는 변황 쪽의 고수들과 빈번한 마찰을 빚어야 했다.
그는 천산(天山) 환영궁(幻影宮)과 싸워 곤욕을 치르며 최악의 경지까지 몰리게 되었다.
천하의 무학에는 각기 장단점이 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해도 극성무공(極性武功)의 소유자에게는 몰리게 되는 법이다.
철서생은 환영궁주를 죽이는 대가로 치명상을 입었다. 얼굴이 으스러지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얼마나 으스러졌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 사건 이후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훼손된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더군다나 철서생의 천하의 미장부였고, 천하제일의 미녀를 아내로 둘 사람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철서생의 성격은 급속도로 횡폭해졌다. 그의 손속은 사마의 무리처럼 독랄해졌으며 비정해졌다.
포달랍궁(包達拉宮)의 무승(武僧)이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그를 능지처참시킨 일은, 이전의 그였다면 차마
하지 않았을 엄청난 일이었다.
포달랍궁이 그 일로 인해 그를 원수로 지목했다.
철서생은 그 불미스런 일로 인해 포달랍궁의 제일고수인 모찰륵(牟刹勒)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다.
혈미륵(血彌勒) 모찰륵(牟刹勒)!
그는 포달랍궁의 젊은 지배자이다. 그는 포달랍궁에서 천 년간 전해오는 일백 종 무공기예를 완벽하게 터득했으며,
지난 천 년간 누구도 익히지 못했다는 대유마가선공(大幽魔伽禪功)을 익힌 절정의 고수자이다.
그는 술과 고기를 즐기며 여체(女體)도 탐했다.
그런 연유로 중원에서는 광승(狂僧)으로 알려졌으나 서장에서는 오랍(烏拉) 이후 가장 존경받는 무승이 되었다.
모찰륵은 야망이 대단한 인물로 그의 꿈은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이었다.
원로승들의 만류로 인해 야망을 접어두고 있었는데, 철서생이 포달랍궁의 제자를 죽임으로써 그에게 중원행을 할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중서대결투(中西大決鬪)!
천하인들의 관심 속에 혈미륵과 철서생은 중원과 서장의 명예를 지고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다.
대결은 칠주야(七晝夜)를 끌었다. 결과는 승자는 없고 패자뿐인 싸움이었다.
철서생은 난생 처음 상대를 꺾지 못했고, 혈미륵은 포달랍궁의 책임자로 천 년만에 처음으로 승포에 자신의 피를
묻히는 낭패를 봐야 했다.
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어 대결장을 떠났다.
그들이 다시 싸울 약속을 했는지 그 일을 잊어버리기로 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 일은 어떤 암운(暗雲)의 예고였다.
가히 천하 최강이라 불릴 두 사람이었기에, 그들의 양패구상(兩敗俱傷)으로 세상의 운명은 급박하게 치닫게
되었다.
2
폭설(暴雪)이다.
삼일 밤낮을 두고 내린 눈으로 천지간이 하나로 일통되었다. 태초(太初)에 갈라진 하늘과 땅이 마침내 눈으로
인해 하나가 된 것이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흰빛뿐이다.
무산(巫山) 신녀봉(神女峰)은 맑은 날이라 해도 진면목을 운무로 가리고 있기에 이렇듯 폭설이 내리는 날에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콰류류류―!
양자강(揚子江)의 물은 거세다.
무산으로 오르는 벼랑에는 추위에 떠는 원숭이의 울음소리와 눈보라 치는 소리가 있을 뿐이다.
눈바람 소리와 후성(喉聲)이 한데 섞이는 추운 겨울 속을 가로지르는 한 인영이 있었다.
"아……, 천하가 광활하다는 것을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알겠다."
맑은 목소리가 나며 백의인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그는 뼈를 깎는 한기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얇은 홑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걷고 있었으나 나아가는 속도는 지극히 빨랐다. 또한 눈 위를 걷고 있는 데도 능공허도(凌空虛道)의
경지에 이른 듯 눈 위에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았다.
"산사(山寺)에서는 이런 표표(飄飄)한 기분을 느끼기 힘들다."
목소리로 미루어 그가 약관 정도의 나이임을 알 수 있었다.
걸치고 있는 옷은 너덜거리는 승포였고 신고 있는 신발은 올이 굵은 새끼로 만든 짚신이었다.
허리띠는 땅에 놔두면 천 년이 지나도 누가 주워 가지 않을 추레한 무명끈이며 죽립 또한 아주 낡았다.
그러나 추레해 보이는 것은 옷차림뿐 그의 전신에서는 알 수 없는 신기가 뻗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남을 압도하는 기운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용하는 거산(巨山)과도 같은 기운이었다. 그러한 기운으로
인해 청년의 모습은 보다 신비하게만 보였다.
청년은 눈을 뚫고 산을 넘을 작정인 듯 조금도 쉬지 않았다.
물이 흘러가듯 유유히 가기 수십 리를 지나 사냥꾼도 발을 들이지 못할 산중에 들어섰을 때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사형(師兄)!"
눈보라를 뚫고 다급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시키는 대로만 해라. 다 잘 될 테니까!"
사내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눈보라 속에서 들리는 음성이지만 승복 차림의 청년에게는 바로 곁에서 들리는 음성인 듯 또렷하게 들려왔다.
청년의 걸음이 문득 멈춰졌다.
'무림인(武林人)인데……, 대체 무슨 일일까?'
그는 약간의 호기심을 느끼는 듯 청력을 배가시켰다. 이어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그의 고막을 날카롭게 두들겼다.
"흐흐……, 좋구나!"
매우 탐욕스러운 웃음소리가 산중에 메아리쳤다.
"이, 이럴 수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바로 너로구나!"
악에 바친 여인의 목소리가 처절하게 들렸다.
"탕마행(蕩魔行)을 위해 천하 주유를 하는 이유는 남의 곤궁을 돕기 위한 법이다."
승복차림의 청년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기에 소리나는 곳을 향해 신형을 날아올렸다.
그는 물결에 흔들리는 갈대같이 부드럽고도 가볍게 움직여 탄지지간에 이백여 장을 가로질렀다.
눈 덮인 산곡(山谷) 안에서는 참으로 볼썽사나운 광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백의여인 하나가 몸을 심하게 휘청이고 있었다.
"이… 이러지 마라!"
여인은 악을 쓰며 손을 휘젓고 있는데 술에 만취한 듯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녀에게서 일 장 떨어진 곳에 검은 장포를 두르고 검은 두건을 쓴 괴인 하나가 조롱에 찬 눈빛을 하며 그녀의
몸뚱이를 탐욕스럽게 쓸어보는 중이었다.
그의 망막에 걸리는 것은 환희 드러나 보이는 여인의 앞가슴이었다.
두 개의 팽팽한 젖무덤이 살집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흔들거리는 것은 옷이 찢어졌기 때문이었다.
"네년은 정말 곱구나. 흐흐흐, 나는 기다릴 수 없다."
복면인의 눈빛이 보다 흉흉해졌다.
"으윽, 최… 최음약(催淫藥) 이외에 또 무엇을 썼느냐?"
백의여인은 나무 기둥을 부둥켜안은 채 겨우 신형을 바로잡았다.
"후훗……, 산공독(散功毒)을 썼지."
복면인은 소매 속에서 빈 약병 하나를 꺼냈다.
"그… 그것을 어찌?"
"네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네가 조금만 약했더라도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러운 놈! 이런 짓을 하기 위해 나를 인적 없는 산중으로 불렀단 말이냐? 과… 과거의 너는 다 어디로
갔느냐?"
여인의 눈에서 살망(殺芒)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녀의 육체는 의지와는 다르게 힘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지독하고 강렬한 최음약에 그녀의 몸뚱이는 점차 뜨거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흐흐……, 사람이란 세월에 따라 변하는 법이다."
복면인은 여인의 기력이 쇠진할 것을 감지하고는 여유 있게 다가섰다.
바로 그때였다.
"아미타불……, 금수(禽獸)가 따로 없도다. 인간 중 불법을 모르는 자가 바로 금수로다."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 사이로 떨어져 내리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승복차림의 청년이 참다못해 몸을 날린
것이다.
"흥, 웬 애송이냐?"
복면인은 방해자가 나타나자 흠칫 놀랐으나 강호 경험이 풍부한 듯 즉각적으로 살수를 시전했다.
그의 손바닥이 뒤집어지며 장영이 무수히 피어났다. 금석을 가루로 만들고도 남음이 있는 무자비한 장세였다.
"뒈져라!"
청년이 사자후(獅子吼)로 외치며 쌍장을 내밀었다.
"어림없다!"
꽈앙―!
벼락치는 소리가 나더니 신음소리가 뒤따랐다.
"무적금강력(無敵金剛力)? ……너는 소림전인(少林傳人)이구나?"
복면인은 경호성과 함께 세 걸음 물러나 있었다.
청년은 반보 뒤로 물러났을 뿐이었다.
"아미타불……, 승인은 이름을 잊기 위해 승인이 된 사람이다. 본인이 소림사이건 아니건 상관하지 마라."
"무림의 태두(泰斗) 소림사가 남의 일에 방해를 놓는 시시한 문파더냐?"
복면인의 옷이 풍선같이 부풀어올랐다.
"아미타불……, 탕마(蕩魔)하는 것이 소림일 뿐이다. 다른 것은 알 필요 없도다. 너 같은 짐승을 다루는 데에는
불법도 필요 없다."
청년승은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중지(中指)가 안으로 꼬부라져 있었다.
복면인의 눈빛이 일순 파르르 흔들렸다.
"탄… 탄지신통(彈指神通)! 으음……, 보기보다 아는 것이 많구나. 하지만 이것만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복면인은 악을 쓰며 소매를 어지럽게 흔들었다.
츠츠― 츳!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한 무더기 우모독침(牛毛毒針)이 빗발치듯이 퍼부어졌다. 교묘하면서도 독랄한
기습이었다.
"어엇―?"
청년승은 절정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으나 강호 경험은 아직 일천했다. 복면인의 느닷없는 암기공세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청년승은 다급히 쌍장을 내뻗었으나 몇 개의 독침이 파고드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으윽―!"
청년승은 피부가 뚫리는 고통을 이길 수 없는 듯 몸을 휘청였다.
"크흣, 왜 쓸데없이 나서는 거냐?"
복면인의 신형이 떠오르며 청년승의 눈앞으로 다가서더니 도끼날 같은 일장을 내뻗었다.
콰르릉―!
너무도 쾌속한 공세였다. 복면인의 일장이 청년승의 머리에 박살낼 순간이었다.
"차― 앗!"
독침에 맞고 비틀거리던 청년승이 입술을 질끈 물며 오른손을 활짝 폈다. 그의 손바닥에서 갑작스럽게 희뿌연
백무가 일어났다.
"허억, 유백강기(有白 氣)―!"
복면인이 기겁할 때 흰빛 기류가 그의 장력을 산산이 흩트리며 그의 가슴에다가 백색장인을 새겼다.
퍼엉―!
복면인은 피범벅이되어 이 장 훌훌 날아올랐다.
그는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오르다가 아주 기묘한 칠금신법(七禽身法)으로 몸의 자세를 바로잡고 이를 갈았다.
"네놈이 쓴 수법이 무엇인지 모르나…… 언제고 너는 그 수법을 쓴 죄로 사문이 멸문당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는 악을 쓰다가 허공에서 몸을 뒤집었다.
그는 대붕전시(大鵬展翅)에 비연천림(飛然穿林)을 잇따라 시전해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 갔다. 경공 하나만
보더라도 그가 단순한 채화음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으음, 비록 미숙한 경지이지만 나만이 익힌 천강복마수법(天 伏魔手法)인데 그것을 맞고도 살아나다니…….
아아, 덕분에 살계(殺戒)를 어기지는 않게 되었으나 후환을 남겼구나."
청년승은 암기에 당한 고통보다 상대가 자신 때문에 피를 흘렸다는 사실에 더 괴로워했다.
그가 낭패감에 사로잡힐 때였다.
"흐으윽……!"
백의여인이 갑작스레 큰 신음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그녀의 얼굴은 도홧빛으로 물든 후였다. 그녀는 전신을
와들와들 떨며 이를 악물었다.
"여시주, 어디가 아프시오?"
청년승은 깜짝 놀라며 그녀 옆에 좌정했다.
"오호, 아미타불……!"
그는 북망산같이 솟아난 두 개의 육봉과 선연한 유실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게다가 절색의 여인에게서
풍겨지는 달콤한 방향은 처음 맡아보는 여인의 체향이었다.
'여체를 적나라하게 보게 되다니……, 이는 부처님이 내게 주시는 시험이리라.'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용기를 내며 눈을 떴다.
"여시주, 소승이 돕겠소."
그는 더듬더듬 말하며 여인의 맥문을 잡았다.
승려의 신분으로 여인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사문의 계율에 어긋나는 행위지만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 순간 여인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며 그의 가슴속에 젖가슴을 비벼댔다.


"아아… 안아 줘요."
"아… 아니? 이게 어인 일이오? 소… 소승은 승려외다!"
청년승이 기절초풍 놀랄 때 여인의 얼굴이 그의 얼굴에 가 닿았다. 죽립이 속절없이 눈 위로 떨어지며 두 사람의
입술이 한데 포개졌다.
"흐읍……!"
청년승의 영준한 얼굴이 홍당무같이 달구어질 때 그의 콧속으로 아주 향긋한 냄새가 흘러 들어갔다. 그 향기에
접하자 불두덩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욕화가 치밀어올랐다.
"최음제……?"
청년승은 책에서 본 바를 기억하고 자지러졌다.
여인을 멀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은 마음뿐 그의 몸은 여체와 더욱 밀착되고 있었다.
'실로 지독한 최음제다. 나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니 이 여인이 어찌 이겨낸단 말인가?'
최음약의 기운이 너무 강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인의 얼굴이 너무도 아름답기에 때문일까?
청년승은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둔부를 어루만지고 여인의 팽팽한 육봉에 얼굴을 묻었다.
눈바닥이 두 사람의 몸에서 이는 열기로 물바다로 화했다.
서로의 옷이 벗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감정을 억제할 이성적인 여유를 가질 수도 없었다. 지금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탐닉뿐이었다.
어느샌가 둘은 알몸이 되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육체는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어 있었다.
"으음……!"
청년승은 난생 처음 대하는 흥분에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흐윽, 어… 어서!"
여인은 불꽃과도 같았다.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는 춘풍은 청년승을 재로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의 사지는 백사처럼 청년승을 휘어감고는 떨어질 줄 몰랐다.
청년승은 거칠게 여체를 애무했다. 서툰 손길이기에 애무라기보다 학대였다. 탄력 있는 여체는 그의 세찬 손길에
살집이 이리 뒤틀리고 저리 뒤틀렸다.
"흐응, 제발… 제발!"
여인은 청년의 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원망스럽다는 듯 기성을 발하며 몸을 더욱더 밀착시켰다.
움직임이 거세졌다. 콧김에는 사막의 바람같이 열기가 실렸고, 신음소리에는 쾌락을 이기지 못하는 청춘이 담겼다.
청년승은 무서운 열기를 발하는 그녀의 몸 한곳으로 자신의 열기를 쏟아냈다.
"하아악!"
여인은 극렬한 고통에 눈을 까뒤집으며 한껏 몸을 휘었다.
몸의 고통을 덜기 위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춘약의 열기는 오히려 청년승을 더욱 감싸게 만들었다.
두 남녀의 자신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우성을 치며 사위로 흩어졌다. 격정이 몸놀림에 두터운 눈바닥이 납짝하게
다져졌다.
"아아……"
여인은 청년의 몸 아래 깔려 바둥대더니 한순간 몸을 오싹 떨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탈진한 듯 눈을 감고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음양화합으로 전신을 휘감던 최음제가 해소된 것이다.
청년승은 비로소 광욕(狂慾)의 늪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동정을 상실해 허탈하기는 했으나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장탄식을 터뜨렸다.
"아……, 내가 파계(破戒)해 버리다니……. 소림장문인(少林掌門人)이 될 내가 여색으로 몸을 망치고
말았다."
그는 옷을 걸치며 자신을 모질게 질책했다.
그의 파계로 인해 최음약에 걸려 죽어가는 여인을 회생(回生)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수양이 깨어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잔인한 운명의 사슬을 얽어맨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한순간의 열정을 잊지 못하는 듯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인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하반신의 혈흔(血痕)으로 인해 숫처녀의 미색을 털어버리고 성숙한 여인의 농염함을 갖게 된 여인은 십전완미의
절색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맑은 정신을 되찾은 청년승의 눈에는 그저 차디찬 돌처럼 보일 뿐이었다.
"모든 기대를 깨뜨리게 되었다. 이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파계를 하고 말았다. 아……, 이 죄를 어찌
씻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반벌거숭이가 되어 몸을 일으켰다.
"색에 빠져 몸을 망치고 말았다. 아미타불……, 세존이시여. 소승의 파계를 돌이키는 방법을 일러 주십시오!"
그는 절망스럽게 외치며 주변의 바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바위에 머리를 박아 죽을 작정인 듯싶었다.
콰앙―!
금강지체를 연성한 청년승은 오히려 바위를 깨부수고 말았다.
"아아……, 세존이시여!"
청년승은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고는 미친 듯이 달렸다.
"으아아!"
그가 스쳐 지나가는 주변의 나무기둥들이 갈대처럼 꺾어졌다.
콰― 쾅!
우지끈―!
그는 왜 자신이 이곳에 와 있는지 잊었다. 아직도 채 식지 않은 열기를 지닌 농염한 여체가 눈 속에 누워 있다는
것도 그는 잊고 있었다.
파계했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잊게 한 듯 그는 무작정 달려갔다. 참담한 파계의 현장에서 멀어져야만 한다는
본능이 있을 뿐이었다.
눈은 점점 폭설로 화했고 그의 뒷모습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여인의 몸은 소록소록 내리는 눈에 덮여 반정도 눈 속에 묻혔다. 그녀의 몸은 차갑게 식어 갔다. 호흡소리는
실낱같이 가늘어졌고 붉게 물들었던 뺨 위에는 얼음이 옅게 뒤덮였다.
대략 뜨거운 차 한 잔이 식을 시간이 지났을까?
저 먼 곳에서 나는 듯 달려드는 홍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이 근처에서 웬 폭음이 일었는데……?"
그는 중얼거리며 골짜기 안을 치달렸다.
"아… 아니?"
그는 눈 속에 묻혀 있는 나녀를 발견하고는 입을 딱 벌렸다. 그는 급히 눈을 걷어내고 여인을 안았다.
"오오……, 미신(美神)이도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있단 말인가?"
탄성을 발하는 홍의인은 놀랍게도 승려였다.
나이는 삼십대 중반으로 얼굴에는 얼마 전에 부상을 당한 듯 붉은 칼자국이 나 있었다. 하지만 매우 뛰어난
용모였으며, 그의 전신에서는 감히 범접치 못할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다소 움푹한 눈과 메부리코로 미루어 중원인은 아닌 듯싶었다.
"이 여인을 얻었으니 중원의 절반은 얻은 셈이다."
그는 백의로 여인의 알몸을 감싸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발걸음은 아주 가벼웠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십 수장씩 날아갔다. 그는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절세고수였던 것이다.
3
가을이 핏빛 단풍(丹楓)으로 불타올랐다.
눈길을 어디에다 두어도 단풍림의 바다다.
온천하에 불을 지른다면 아마 이 같은 천지홍채(天地紅彩)의 절경을 볼 수 있으리라.
하늘빛마저 붉음으로 타오를 때 점창산(點蒼山) 깊숙한 곳에서 여인의 자지러진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흐으윽!"
점창은 오악(五嶽)의 장인이라 불리고 있는 천하의 명산답게 산세가 수려하고 계곡이 깊기에 궁관(宮觀)과 도관
(道觀)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여인의 비명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아아… 악……!"
시간이 지날수록 여인의 비명소리는 더욱 애처로워졌다.
그 소리는 단풍림에 둘러싸인 세칸 모옥(茅屋) 중 오른쪽 방안에서 들리는 중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모옥 밖에서는 단풍같이 붉은 승포를 걸친 장년 승려 하나가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합장 배례하고 있었다.
사자(獅子) 같은 인상을 주는 사람인데, 귀가 아주 크고 길게 늘어져 불상을 연상케 하는 용모였다. 얼굴
한쪽으로 긴 자상이 나 있지만 그다지 흉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악!"
여인의 비명소리는 노을이 단풍같이 붉을 즈음 절정에 이르렀다. 불호성을 외우는 장년 승려의 장엄한 표정도
함께 붉어졌다.
그것은 한순간에 이르러 생산(生産)의 희열로 이어졌다.
"으아… 앙……!"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가 나며 여인의 애절한 비명소리가 거두어졌다.
"오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세존이시여! 석심부인(石心夫人)의 병약한 몸에서 저리도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는 한 생명을 만들게 내셨도다!"
홍의승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자 안심이 된 듯 승포자락으로 이마의 땀을 씻어냈다.
방문이 활짝 열리며 흑의노파 하나가 밖으로 걸어나왔다. 노파는 희색이 만면한 표정으로 홍의승려 앞으로
다가섰다.
"아주 귀골(貴骨)의 사내아이십니다. 노신이 아이를 받아본 지 수십 년이나 되었지만 이 아이만큼 귀엽고
영리하게 생긴 아기는 처음입니다."
"허허……, 모두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공덕이로다. 부처님이 공덕이 없었다면 석심부인의 다 망가진
몸뚱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로다."
홍의승려는 아주 흡족해 하며 소매 속에서 자색 나는 옥석 하나를 꺼냈다. 크기가 주먹만한 자옥석은 부르는 것이
바로 값이 될 정도로 귀하디귀한 물건이었다.
"수고했소."
"예에? 이… 이것을 주시는 겁니까?"
흑의노파는 승려가 자옥석을 내밀자 눈을 휘둥그래 떴다.
"넣어 두시오. 난산의 산모와 더불어 밤낮을 고생한 대가로는 오히려 부족할 것이니까."
"하오나 이렇게 귀한 것을……."
흑의노파는 황송해 하면서도 땅에 꿇어앉아 옥석을 건네 받았다. 그리고는 히죽 웃으며 입술을 뗐다.
"스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입니다. 속가의 사람을 위해 이리도 큰 공덕을 들이시다니……, 갓난 아기씨를
소산하신 귀부인의 상공(相公)되시는 분이 장차 스님을 찾아 후히 사례할 것입니다요."
승려는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그는 약간 침중한 얼굴이 되어 노파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가 소승과 어떤 사이라 여기시오?"
"아마도 그 아기씨는 전생에 스님께 큰 빚을 준 사람의 환생체(還生體)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스님을 만나
누구도 하지 못할 엄청난 보살핌을 받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흐음……!"
홍의승려는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석심부인이 누구인 지는 아직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 여인이 과거 무림여인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태어난
아이는 그 여인이 원하지 않은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모자(母子) 모두를 거두겠다는 생각을 바꿔야 될지도
모르겠구나.'
홍의승려는 궁리하다가 마음이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모옥 안에서 여인의 절규성이 들렸다.
"저… 저주한다. 으으, 사형! 네… 네놈이 내게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이냐?"
승려는 그 말을 듣고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런 투의 말은 귀가 닳도록 들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파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노파는 홍의승려에게 이끌려 졸지에 산파(産婆)가 되었고, 인적이 없는
산중으로 와 산모와 더불어 사흘 밤낮을 꼬박 샌 참이었다.
산모는 사흘 동안 비명소리 이외에 어떠한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가끔 멍한 눈빛을 지었고 어떤 때에는 한
시진이 넘게 울기를 계속하기도 했었다.
가끔 광기에 찬 웃음소리를 쏟기도 했는데 제대로 알아들을 소리를 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으으, 너… 너를 죽이리라. 죽… 죽이고야 말리라, 호호호……."
광기에 찬 웃음소리에 이어 아주 애절한 아이 울음소리가 났다.
"아앙……!"
숨이 넘어가듯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흑의노파는 깜짝 놀랐다. 동시에 눈을 감고 서 있던 홍의승려가
붉은 그림자로 화해 모옥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흑의노파로서는 그가 어떻게 움직여 모습을 감추었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흑의노파가 사색이 되도록 놀랄 때 괴로움에 찬 음성과 함께 모옥문이 활짝 열렸다.
"아미타불……, 한순간만 늦었더라면 어머니가 아이를 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뻔했도다."
홍의승려가 침통한 얼굴로 걸어나오고 있는데 그의 품에는 갓 태어난 핏덩이가 안겨 있었다.
그의 뒤쪽 방안의 광경은 실로 살풍경했다.
방안에는 피가 번지르르 했고 핏구덩이에 쓰러져 눈을 까뒤집고 있는 흰옷 입은 여인 하나가 있었다. 여인은
핏물로 젖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홍의승려의 품안에 안겨 애절히 우는 아기의 목 둘레에는 날카로운 손톱자국 열 개가 선명히 나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아주 미약했다.
"아앙……!"
끔찍하게도 생모에 의해 목을 졸렸기 때문이었다.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아이의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홍의승려는 갓난아이를 안고 뜨락으로 내려서며 눈길을 하늘로 돌렸다.
'승려로서 색계(色戒)를 주저하지 않았던 나였으나…… 큰 충격으로 정신과 기억을 잃은 천하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의 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내가 얻고 싶은 것은 그녀의 영혼이지, 그녀의 허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승려는 허탈한 표정으로 방 안에 누워 있는 석심부인을 돌아보았다.
'아……,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내고, 그녀를 해한 자가 누구인지 찾아내 통쾌히 복수해 준 다음 그녀를 나의
여인으로 만들 작정으로 십 개월 간 중원을 떠나지 않았는데…….'
승려는 쓰디쓴 표정을 하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아픈 듯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네 녀석은 모정과는 인연이 없구나. 네 어머니는 너를 볼 때마다 악몽(惡夢) 같은 기억을 돌이키고 그때마다
너를 죽이려 할 것이다. 불쌍한 녀석……, 다른 사람에게는 다 있는 어머니거늘 네게는 거두어줄 어머니가
없구나."
홍의승려는 착잡히 중얼거린 다음 흑의노파를 바라봤다.
"노시주께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이 있소."
"무… 무엇인지요?"
흑의노파는 홍의승려가 잠깐 보인 경신술 덕에 혼비백산한 상태였다.
노파는 무림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에 승려의 움직임을 불법의 조화로움으로 여겼다. 홍의노승을 대하는
투가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홍의승려는 피식 웃으며 아이를 내밀었다.
"받으시오."
"예에……?"
"이 아이는 부모의 인연을 갖지 못하고 태어난 불행한 아이요. 자식 없는 사람에게 주어 양부모의 정이나마 듬뿍
받게 해 주시오."
"이 아이에게 양부모를 찾아달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홍의승려는 엄숙히 말한 다음 품 속에서 한 갑의 명주를 꺼냈다. 그것은 저잣거리의 전방에 나가 판다면 일각이
되지 않아 백만 냥을 손에 쥘 수 있는 보물이었다.
"이것을 드리겠소."
홍의승려는 아이의 몸과 옥갑을 노파에게 전했다. 노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손에 쥐고 말았다.
홍의승려는 할 일을 마친 듯 나직이 탄식했다.
"철서생(鐵書生)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가 옥룡궁(玉龍宮)에 행한 봉문(封門)을 풀기를 기다리며 마냥
이역에서 지낼 수는 없다. 아……, 언제고 다시 오욕으로 얼룩져 있는 중원 땅을 다시 밟을 날이 있겠지. 그
누구와 겨뤄도 백초 안에 꺾을 수 있는 절세고수가 되어 말이다."
그는 마음을 작정하고는 모옥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찰나지간에 모습을 감췄다.
"스… 스님……?"
흑의노파는 아래턱을 덜덜 떨다가 모옥을 향해 말을 더듬었다. 모옥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 소리도 나지 않았다.
"스니… 임……!"
흑의노파는 다시 한 번 크게 불렀다.
역시 대답은 없었다. 노파는 의아해 하는 얼굴을 하고 방문을 슬며시 열어봤다.
방안은 텅 빈 후였다. 홍의승려도 없고, 산고(産苦)를 이기다 못해 탈진한 여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뒤쪽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아……, 저곳으로 떠나셨구나! 불력(佛力)이 대단하신 분이니 새같이 훨훨 날아 이미 하늘 위로 사라져
버리셨으리라."
노파는 중얼거리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그새 잠들어 있었다.
"쯧쯧……, 흉터가 크게 남겠구나. 불쌍한 녀석. 너를 낳은 여인의 손에 의해 목졸림을 당하다니……. 그
아름다운 부인이 사람의 탈을 쓴 마귀일 줄 내 어찌 알았겠느냐?"
노파는 열 손가락 자국을 지닌 채 잠에 빠진 아이가 애처로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아이를 품안에 꼭 안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분을 양부모로 모시게 해 주마. 이 할미는 나이 칠십이고 일가친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외로운 늙은이라 널 키울 수가 없구나."
노파는 품속에 간직한 옥갑을 매만졌다.
"천하에 어디 너의 부모가 될 사람이 없겠느냐? 아이야, 너는 가장 뛰어난 부모를 모신 귀공자로 자라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널 부러워하게 될 것이고 너의 부모 될 사람 또한 너를 자랑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너는
아주 부자니까.'
노파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단풍림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갔다. 그녀의 왜소한 뒷모습은 곧 사라졌다.
휘이이잉―!
추풍(秋風)이 건들 불며 낙화낙엽(落花落葉)이 분분했다.
그 핏빛 단풍잎이 떨어지는 것이 꼭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 날 한 아이가 태어났고 버림받았다는 것은 단 두 사람만의 기억 속에 남는 일이었다. 점창의 깊은 계곡 안에서
가장 처절한 운명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第二章 예기치 못했던 파멸(破滅)


1
천하무림계는 지난 십오 년간 지극히 평화로웠다.
물론 사소한 다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국지적인 일이고, 강호전역을 놓고 볼 때 지극히 순탄했다 할
수 있었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일어난 옥룡궁의 돌연한 봉문(封門)이 그 시작이었고, 각대문파 역시 시비 일으키기를
자제했기에 미묘한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림(武林)은 대하(大河)와 같다. 그 강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거대한 격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당파는 대천강진(大天 陣), 지살검진(地煞劍陣)을 신진고수들로 결성해 상청관(上淸觀)을 더욱 엄히 지키게
했다.
소림사는 일심행(一心行)이라는 촉망받던 수제자의 돌연한 면벽(面壁)으로 인한 충격에서 어느 정도 헤어나
새로운 장문인감을 정하고, 그에게 절기 전수를 시작하는 것으로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오대(五臺), 공동( ), 아미(峨嵋)는 서로 교류를 갖고 삼 년에 한 번씩 비무대회를 열어 자파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이렇듯 구대문파(九大門派)의 자숙은 평화를 더욱 완숙한 것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외세를 확충시키는 시기가 아니었다. 내실을 기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작금의 시기였다. 이유는 평화 이후에
올 대풍운(大風雲)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풍운이 포달랍궁(包達拉宮)에서 일어난다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 혈미륵(血彌勒)이 철서생과 양패구상한 후 복수를 할 작정을 하고 폐관수련 중이다. 그가 서장제일신공(西藏
第一神功)인 대유마가신공(大幽摩伽神功)의 정화를 얻는 날 포달랍궁에서 무수한 고수가 몰려나와 중원을
짓밟으리라!
포달랍궁이 중원의 공적으로 여겨지게 된 데에는, 은거 중이지만 사실상의 정도맹주(正道盟主)라 할 수 있는
철서생 공야무군(公冶武君)의 배첩(拜帖)이 많은 힘을 발휘했다.
그는 혈미륵이 자신과 싸워 패한 한을 품은 이상으로 혈미륵과 싸워 상처 입은 것을 원한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가 봉문하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했다.
하나는 협행을 하다가 죽은 옥룡선자(玉龍仙子)의 넋을 달래기 위함이었으며, 또 하나는 포달랍궁과 한판 대결을
위해 내실을 다지자는 것이었다.
그는 전과 달리 아주 거친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봉문한 가운데 암암리에 수소문해 거효(巨梟)들을 수하로 불러들여 옥룡궁의 힘을 옥룡대제(玉龍大帝)
시절보다 세 배 강하게 하는 중이라고 했다.
모두 포달랍궁의 침공에 대비한 것으로 장차 일대풍운에 대비하기 위함이라 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을 믿었다. 그의 과거 업적이 있으니 누가 그의 말을 믿지 않겠는가? 그러나 가장
변화하기 쉬운 것이 바로 인심(人心)이었다.
대풍운의 시작은 포달랍궁의 침공이 아니라 옥룡궁의 복파대전(復派大典)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옥룡궁이 십오 년 봉문의 목적은 포달랍궁의 세력을 막자는 것이 아니고, 바로 중원제패(中原制覇)였다는 것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2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인데 천하는 뒤숭숭하기만 했다.
산서성(山西省)에서 큰 지진이 나 수만 명이 집과 전답을 잃었다는 소문이 있고 얼마 후 천재지변보다 수백 배
더한 엄청난 파문이 천하를 질타했다.
옥룡궁의 문이 십오 년 만에 열림과 동시에 천하 도처에서 혈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폭풍(大暴風)!
강호가 돌연 걷잡을 수 없는 폭풍 속으로 빠져들었다.
<옥룡령(玉龍令)에 항서(降書)를 쓰지 않는 문파는 옥룡궁의 적으로 간주되어 백도에서 제명된다!>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이 옥룡첩(玉龍帖)으로 인해 천하가 돌연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워졌다.
수백 명의 옥룡사자(玉龍使者)가 그런 배첩을 천하에 뿌리고 다녔고 그 내용은 곧 사실화되었다. 옥룡궁은
유아독존(唯我獨尊)을 기치로 올리고 군파(群派)를 하나하나 쓰러뜨렸다.
그들의 힘은 가히 가공할 정도였다.
그들은 복파대전을 연 지 한 달이 되기 전 천하의 절반에 옥룡궁의 분타를 만들었고 수백 개 문파를 휩쓸었다.
피를 흘리기 쉬운 것이 무가(武家)의 싸움이 아니겠는가?
옥룡궁의 저의가 선(善)인지 악(惡)인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천하제패 작업 때문에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일이었다.
피바람이 분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옥룡궁의 행동이 점점 사도(邪道)로 기운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봄이 깊어졌다.
봄은 원래 짧기에 이내 염천(炎天)의 성하가 우울한 무림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더운
여름이 될 듯했다.
사월(四月)인데도 벌써 땀이 몸을 축축이 적실 정도였다.
3
산서성(山西省).
북방이라 할 수 있는 산서성 깊숙한 곳에 여름이 아무리 깊다 해도 더위를 느끼지 않는 산촌이 있다.
청계곡(淸溪谷)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골짜기 안이 바로 그곳이다. 맑고 찬물이 흘러 흰 바위를 감고 지나갈
때마다 영롱한 물소리가 났다. 때로 바람이 불면 파도치는 소리도 났다.
어디를 봐도 심록(新綠)이다.
이런 곳이라면 속세의 혼탁함을 잊을 수 있기에 은자(隱者)의 보금자리로 손색이 없었다.
한낮의 더위가 몰아칠 시각이건만 청계곡은 여전히 시원했다.
이 때, 청계곡의 청음(靑陰)을 바라보며 유유자적히 걷는 소년서생 하나가 있었다. 푸른 옷을 걸친 미소년인데
나이는 열 다섯 정도였다.
그는 팔과 허리 사이에 두툼한 고서(古書) 세 권을 끼고 천천히 걸어 인적 없는 숲 속으로 걸어 들었다.
오만해 보이는 입매무새며 맑은 우수를 담고 있는 눈빛, 타는 듯 붉은 입술을 가진 미소년은 지극히 영준했다.
미소년은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게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가 큰 바윗돌 하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의 웃는 모습은 아주 아름다웠다.
"방해받지 않고 글공부 할 곳은 여기뿐이다."
그는 싱글거리며 바위 곁으로 다가갔다. 녹음(綠陰)이 뚝뚝 떨어져 그의 살을 푸른빛으로 물들일 듯했다.
"서고에 가득 찬 만권고서를 다 읽으려면 밤을 새워도 시간이 모자란데 그 아이의 응석까지 받아줘야 하다니…
…."
그는 손바닥으로 바위면을 쓸고 털썩 앉으며 책 세 권을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바로 그때였다.
흰 조약돌 하나가 날아들다가 바윗돌에 부딪치며 큰 소리를 냈다. 둔탁한 소리는 미소년의 촉각을 바짝 곤두서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어엇?"
그는 돌이 날아든 곳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바윗돌에서 이 장 떨어진 곳에 언제 나타났는지 백의소녀 하나가 있었다.
소녀는 찻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죽통(竹筒)과 오향과(五香菓)를 담은 기름종이 봉투를 들고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눈썹이 아주 곱고 코가 오똑한 데다가 풋풋한 아이티마저 사라져 육향을 물씬 풍겨내는 천하의 미소녀였다.
"호호, 옥룡(玉龍) 오라버니가 여기 올 줄 알고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지요."
"흐음, 낮잠을 잔 것이 아니었구나?"
"잠든 척했을 뿐이에요, 호호……. 그렇지 않다면 오라버니와 함께 야유(野遊)를 즐길 수 없었겠지요."
미소녀는 탱탱한 둔부를 살랑살랑 흔들며 미소년 곁으로 다가섰다. 음탕한 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입안이 군침으로
가득 찰 일이었다.
미소년은 화를 못 참겠다는 듯 벌레 씹은 표정이었다.
"어제는 바둑 두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밤새 나를 괴롭혀 나의 글공부를 방해하더니 오늘은 또 뭐냐?"
"호호……, 옥룡 오라버니는 학문에 있어 이미 탁대숙(卓大叔)의 경지를 훨씬 능가하는데 또 무슨 읽을 것이
있습니까? 모든 것에 있어 중요한 것은 중도(中道)와 중용(中庸)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지
않습니까?"
미소녀는 옥보로 다가서며 대나무로 만든 찻물 통과 과자 봉투를 쳐들었다.
"오라버니를 위해 오늘 새벽 내내 빚은 것입니다."
"싫다."
미소년이 냉담히 거절하자 백의미소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였다.
"호호……, 저의 뜻이기도 하거니와 탁대숙의 뜻이기도 합니다. 탁대숙은 산서기재(山西奇才) 탁옥룡(卓玉龍)
이 글을 읽다 탈진해 조사(早死)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거짓말 마라."
"정말이에요."
미소년의 이름은 탁옥룡이었다. 그는 고서로 눈길을 돌렸다.
"내가 너의 말을 어찌 믿겠느냐?"
"여기 탁대숙이 적은 봉서가 있습니다."
미소녀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서찰이?"
탁옥룡이 고개를 갸웃하자 미소녀는 그의 손을 바짝 잡아당겨 자신의 앞가슴 쪽으로 가져갔다.
"바로 이것입니다."
"어디……?"
탁옥룡은 궁금해 하다가 갑자기 입술을 꾹 깨물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서찰을 잡은 것이 아니라 물컹한
육봉을 덥석 쥐었던 것이다.
그가 그제서야 당했다 싶어 썩은 콩 깨문 표정이 되었다.
"호호호……, 오라버니를 골탕 먹일 길은 이 길밖에 없다니까! 봐요, 나는 여자라 성장이 빨라 오라버니보다도
키가 한 치는 더 크지 않아요? 나는 시집을 가도 좋을 처지인데 오라버니는 허구한 날 서동으로 지내기만
하잖아요?"
미소녀는 탁옥룡을 골탕 먹인 것이 고소한지 깔깔거리며 배꼽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미소녀의 웃음소리는 이내 상심에 찬 한숨소리로 화했다. 더 웃기에는 탁옥룡의 얼굴
표정이 너무도 험악했기 때문이었다.
미소녀는 손을 감싸쥐었다.
"어머…… 화났어요?"
탁옥룡은 미소녀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는 것을 크나큰 수치로 여기는 듯했다. 그는 입술을 질끈 물며 한동안
숨도 쉬지 않았다.
미소녀가 은근히 겁먹은 표정으로 다가갔다.
"오라버니, 소녀는 장차 오라버니의 아내가 될 여인입니다."
"으음……!"
그래도 탁옥룡의 입매는 풀리지 않았다.
"소녀는 오라버니의 정혼녀입니다. 어이해 소녀를 꼭…… 뱀 보듯 하십니까?"
미소녀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아침 이슬처럼 맑은 눈물이 소녀의 매끄러운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여인의 눈물은 큰 힘을 나타낸다. 탁옥룡의 눈썹이 그로 인해 꿈틀거렸다.
'수운(愁雲)아, 나도 네 마음을 안다. 네가 이백부(李伯父)께서 돌아가신 후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되어
어디에든 정을 붙이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내게는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단다.'
탁옥룡은 속으로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희디흰 손으로 미소녀의 삼단같이 고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미소녀의 키는 탁옥룡에 비해 조금 컸다. 소녀이기에 소년보다는 체격의 발육 속도가 빠른 것이다.
그래도 탁옥룡에게서는 헌앙한 기품이 풍겨 그가 훨씬 더 어른스럽게 보였다.
"울지 마라."
그가 부드럽게 미소녀를 달랬다.
"그럼……, 소녀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지요?"
미소녀가 그제서야 안도하며 고개를 들었다.
"용서하고 안 하고 할 것이 있느냐? 그렇지 않아도 심심하던 참이었다. 너와 더불어 송뢰(松 : 솔바람)와 청향
(淸香)을 즐기겠다."
"호호……, 제가 복령차(茯 茶)와 오향과를 갖고 온 뜻이 바로 그것이지요."
미소녀는 언제 울었더냐 싶게 방긋 웃음 지었다.
미인의 웃음 또한 힘있는 것이다. 미소녀의 양볼에 파인 보조개로 인해 근처가 아주 환해지는 것 같았다.
둘은 곧 흰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았다.
솔바람이 소년 소녀의 옷자락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소녀의 입술 사이에서 영롱한 웃음소리가 굴러나왔다. 아주
맑은 웃음소리는 그녀의 맑고 순수한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그녀는 이수운(李愁雲)이라는 이름의 소녀였다.
나이는 탁옥룡과 동갑이었으나 태어난 달이 탁옥룡에 비해 세달이 늦어 둘은 오누이 동생으로 칭했다.
그녀는 조정(朝庭)의 충신이었던 호북절도사(湖北節度使) 이광계(李光計)의 외동딸이다.
이광계는 탁옥룡의 아버지 탁천영(卓天影)과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사이였다. 둘 중 학문이 뛰어난 사람은
탁천영이었지만, 그는 벼슬에 뜻이 없어 황성(皇城)으로 가지 않았다.
반면, 이광계는 학문으로 세상을 바르게 하리라 맹세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과에 장원(壯元)했고, 벼슬길에
나선 지 십오 년만에 호북절도사라는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의 생활은 화려했고 탁천영의 생활은 검소했다.
그러나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탁천영뿐이었다. 이광계는 충절이 지나친 나머지 간신배(奸臣輩)의 모함을 받고
능지처참형(陵遲處斬刑)을 받고 말았던 것이다.
이수운도 원래는 죽어야 할 처지였다.
그녀가 죽지 않은 이유는 탁천영이 황금만관(黃金萬貫)을 풀어 형리에게 건네준 다음 이수운을 형장에서 빼냈기
때문이었다.
평생 청빈을 낙으로 여기며 산 탁천영에게 그런 재물이 있었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하여간 이수운은 그 일 이후 탁가장원(卓家莊園)에서 살았다.
그녀는 수개월 간 울음과 불면으로 밤을 지내우며 보냈지만 얼마 전부터 그럭저럭 아픈 과거를 잊고 예전의
명랑함을 찾게 되었다.
원망할 것은 인심뿐이다. 이광계는 너무도 충직했기에 일찍 부러지고 만 것이다.
이수운은 아버지가 모함을 받아 죽었다는 사실로 인해 세상을 원망했으나, 탁천영의 가르침 덕에 본래의
청정무구한 마음을 찾게 되었다.
외아들로 자란 탁옥룡에게도 아주 잘 된 일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귀찮은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이수운이 연일 탁옥룡의 서재에서 생활하기에 글공부에 지대한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 일도 그러저러한 일 중 하나였다.
둘은 한 쌍의 원앙같이 나란히 앉았다. 수려한 풍광 속에 있는 둘의 모습은 한 폭의 선남선녀도 같았다.
이수운은 칼로 깎은 듯 아름다운 탁옥룡의 옆모습에 흠뻑 취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다.'
그녀의 눈빛은 황홀경에 가득 찼다.
탁옥룡은 간간이 눈길을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공허감에 가득 차 있었다. 학문이라
해도 그의 헛헛한 마음을 채울 수 없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 곰팡내 나는 글 속에서 나를 빨아들일 어떤 것을 찾기 위해 서귀(書鬼)가
되었으나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는 옆에 이수운이 있다는 것조차 잊었다.
'그 길을 찾는 지름길은 글공부를 계속하는 길뿐임을 알기에 계속 글을 벗삼고 있기는 하나……, 내 마음은
언제나 공허하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범인이 알지 못할 높은 이상이었다.
하루종일 서고에 틀어박혀 있는 그를 보고 꿈이 크다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의 안목일 뿐이다.
탁옥룡이 온종일 글을 벗삼고 있는 이유는 자신이 할 바를 아직 정하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지, 어린 나이에 벌써
속세에 뜻을 잃었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둘은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앉아 있을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탁옥룡은 땅거미가 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알고 명상에서 깨어났다.
그때 무엇인가 보드라운 것이 어깨에 느껴졌다. 이수운이 언제부터인지 탁옥룡의 어깨를 베고 잠들어 있었다.
"어젯밤에 나를 위해 과자와 차를 끓이느라 잠을 설친 모양이군. 아……, 자는 모습이 이렇게 정말 곱구나!"
탁옥룡은 자신의 팔에 닿은 것이 이수운의 탱탱한 젖봉우리 임을 알았다. 그녀의 뺨은 그의 어깨 위에 얹혀져
있었다.
그는 행여 그녀가 깰세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초경이 다가오자 하늘에서는 벌써 별이 총총 떨어졌다.
"흐음……!"
이수운은 몸을 뒤틀다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하, 이제 정신이 드느냐?"
탁옥룡이 빙그레 웃자 이수운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어머나! 제… 제가 깜빡 잠들었나 보군요? 한데 왜 저를 깨우지 않았나요? 벌써 날이 저물었는데!"
이수운은 탁옥룡의 팔을 베고 잠들었다는 것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잘 익은 사과 빛으로 물들였다.
탁옥룡은 대답 대신 부드럽게 말을 전했다.
"자, 이제 가자꾸나. 아버님이 걱정하시겠다."
"예, 오라버니."
이수운이 얼른 일어났다.
둘은 손을 마주 잡고 부지런히 걸었다. 밤이라 아주 어두웠지만 청계곡(淸溪谷)의 지형은 그들에게 있어 아주
익숙했으므로 돌부리에 걸리지 않고도 걸을 수 있었다.
둘은 흑운에 잠긴 희미한 월광을 등에 지고 걸었다.
얼마를 갔을까?
둘은 소로에 접어들어 탁가장원(卓家莊園) 쪽을 향해 부지런히 갈 때였다.
"소장주(少莊主), 어디 가셨다 이제 오십니까?"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사람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나이 칠십 정도 됐을까. 단삼(短衫)을 걸치고 손에 죽장을 든 노인인데 얼굴 표정이 아주 기괴했다. 잔뜩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탁가장원의 노복인 진충이었다.
"진노인, 우리들을 찾아 나섰구료?"
탁옥룡은 노인을 수고롭게 했다 싶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구, 소장주님! 난리가 났습니다."
진충이 얼른 꿇어 엎드렸다.
"난리라니? 대체 무슨 일이오?"
탁옥룡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도 마십시오, 한 떼의 파락호들이 몰려와 장원을 황금 백량(百兩)에 팔라고 강짜를 놓고 있습니다."
"장원을 팔라니? 무… 무슨 소리요?"
"정오 지나서의 일입니다. 옥룡궁(玉龍宮)인지 뭔지 하는 무림의 무사들이 와서 장원을 점거했습니다."
"점거?"
탁옥룡의 검미가 역팔자(逆八字)로 변했다.
"국법(國法)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아주 무지막지한 놈들입니다."
진충 노인이 이를 바드득 갈자 이수운이 놀란 토끼눈이 되어 말했다.
"옥룡궁이라면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들은 황제(皇帝)도 따르지 않는 강호인들인데, 그 우두머리는 자칭
옥룡천자(玉龍天子)라고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의 위세는 사실 황제보다도 더합니다. 간신배들 중 그들의 노예가
된 자들이 이미 수백에 달한다고 합니다."
"옥룡궁이 그리 유명하냐?"
무림정세에 어두운 탁옥룡이 고개를 돌리자 이수운은 두려운 듯 땀을 흘렸다.
"네,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사람도 함부로 죽인데요."
진충 노인이 소매 속에서 봉서 한 장을 꺼냈다.
"노장주(老莊主)께서 이것을 소장주께 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소인은 소장주를 찾기 위해 청계곡을 뒤지고
다니다가 지쳐 이곳에서 소장주가 언제나 오시나 학수고대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진노인은 봉서를 전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님이?"
탁옥룡은 얼른 봉서를 건네 받았다.
'혹 관가(官家)로 가 현령에게 말해 관졸을 불러 오라시는 밀명이 아니실까? 아니야. 그런 일이라면 진노인에게
직접 명해도 될 텐데?'
탁옥룡은 눈썹을 찌푸리며 봉서를 뜯었다.
봉서 안에는 용사비등(龍蛇飛騰)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장원으로 돌아오지 마라! 어디든 가서 숨어 지내거라. 며칠 후 집안이 안정이 되면 사람을 시켜 너를 부르겠다.
>
화급한 중에 쓴 듯 흘겨 쓴 글씨였으나 너무나도 잘 쓴 글씨였다. 당세제일문(當世第一文)이라는 말을 듣는
청계은현(淸溪隱縣) 탁천영의 필적다웠다.
"돌아오지 말라시니……, 이게 어이된 일인가?"
탁옥룡이 나직이 뇌까리며 고개를 저었다.
"예에……?"
이수운의 얼굴에 경악지색이 떠돌았다. 진충노인도 얼떨떨한 듯 휑한 눈빛을 던질 뿐이었다.
탁옥룡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시시한 일을 명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상당한 위험을 내포한
서찰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이수운에게 말했다.
"진노인과 함께 숨어 지내거라."
"오라버니는요?"
이수운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탁옥룡은 장원 쪽을 가리켰다.
"나는 집으로 가야겠다."
"탁대숙이 오지 말라 하셨는데도요?"
"그러기에 가는 것이란다."
탁옥룡은 다짐하듯 말한 다음 진노인에게 말했다.
"수운이를 데리고 가시오."
"소… 소장주! 차라리 노복이 가겠습니다. 어이해 소장주께서 귀신 같은 무리들에게 점거당한 장원으로 가신단
말씀입니까?"
"남들이 나를 문약하다 하나 나도 대장부요. 대장부로 어이해 아버님의 곤궁을 보고 모른 척할 수 있겠소?"
탁옥룡은 당당하게 응대하고는 급히 걷기 시작했다.
이수운과 진충노인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무언중 마음의 일치를 본 듯 서둘러 탁옥룡을 뒤쫓았다.
탁옥룡은 그들을 차마 떨칠 수 없다 여기며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만류하지 않았다.
4
탁가장원은 청계곡에서 십리 떨어진 금룡거(金龍居)에 위치한 장원이다. 장원 둘레에는 자죽림(紫竹林)이
무성해 낮이라도 해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장원을 세운 사람은 탁천영의 팔대조(八代祖)이다.
그는 황제를 바로 곁에서 모시던 큰 충신이었다. 그러다 만년에는 벼슬에 회의를 느껴 황제의 윤허도 받지 않고
홀연히 황도(皇都)를 떠나 이곳 금룡거에 아름다운 장원을 세웠던 것이다.
장원 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탁가후예(卓家後裔)된 자는 의당 황금과 허욕을 사갈(蛇蝎)시 해야 한다.>
탁천영의 팔대조가 친히 쓴 탁가의 가훈이 그것이었다. 그 가훈은 누대에 걸쳐 지켜져 왔다.
탁욕룡은 부지런히 걸어 자죽림이 보이는 곳까지 갔다.
"불야성(不夜城)이라니……?"
그는 자죽림 안쪽에 있는 자신의 집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져 있다는데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부친이라면 그런 일을 하지 않음을 잘 알기에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벌써 장원이 점거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자죽림 어귀에 서서 치를 떨 때였다.
"흐흐……!"
등뒤에서 거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눈앞으로 불쑥 무사 한 명이 나타났다.
백의를 걸쳤고 등에 쌍검을 비끌어 메고 있는 자의 가슴 부위에는 한 마리 용이 수놓아져 있었다. 용의 쩍 벌어진
아가리에는 여의주가 물려 있었다.
여의주에는 글이 수놓아져 있었다.
<天下君臨(천하군림) 武林一通(무림일통)>
그것은 매우 독특한 표식이었다.
강호인이라면 그의 신분이 어떤 것인지 즉시 알 것이다. 여의주는 곧 그가 옥룡궁도(玉龍宮徒)임을 말한다.
또한 흰 옷을 걸쳤다는 것은 그의 지위가 백삼대(白衫隊)에 속함을 알리는 것이다.
백삼대는 꽤 높은 지위였다.
하늘보다 높다는 금삼호법(金衫護法) 아래 은삼(銀衫)이 있고, 그 아래 자삼(紫衫)과 청삼(靑衫), 홍삼(紅
衫)의 지위가 있다.
그 아래가 백삼대이다. 백삼대의 수는 수백인데 하나같이 강했다.
그들부터 진정한 옥룡궁도라 할 수 있었다.
백삼대 아래 위치한 흑삼대(黑衫隊)와 회삼대(灰衫隊)는 백삼대 고수들의 하인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었다.
백삼대 고수는 탁옥룡 바로 앞에 나타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왜 이곳을 기웃거리느냐?"
그의 목소리는 빙굴(氷窟)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이 차가웠다.
"이곳은 나의 집이다. 이를 일컬어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 하는구나!"
탁옥룡은 소년답지 않게 눈을 부라리며 그를 꾸짖었다.
"흐흐……, 어쩐지 영기(靈氣)와 재기가 번뜩인다 했더니 고집불통 탁가영감의 자식놈이었구나. 탁가 늙은이는
보기 드문 추물(醜物)인데, 어이해 네놈은 이리도 미끈하게 생겼느냐?"
"네가 뉘기에 감히 나의 가친을 함부로 욕하느냐?"
탁옥룡의 눈빛이 형형하게 불타올랐다.
백삼대 고수는 탁옥룡을 얕잡아봤으나 그의 성난 눈빛을 보고는 은근히 겁을 집어먹어야 했다.
'근골이 훌륭한 놈이다. 으음, 산촌에 숨어 사는 은현의 아들 중 이리도 강한 기질을 지닌 자가 있단 말인가?'
백삼대 고수가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갑자기 뒤쪽에서 비명성이 터져나왔다.
"아악……!"
"크으윽……!"
탁옥룡이 깜짝 놀라 돌아서자 홍색무복을 걸친 자가 나는 듯 달려들었다. 그 역시 가슴에 옥룡문장을 새겨넣고
있는 자였다.
홍의인의 옆구리에는 백의소녀 하나가 붙잡혀 있었다.
"훗훗……, 탁가장원에 와서 정말 귀한 것을 얻었다."
홍의인은 탁옥룡의 머리를 훌쩍 타넘어 수하인 흑의인 바로 앞으로 내려섰다.
"향주(香主), 웬 계집입니까?"
"흐흐……, 주운 계집인데 미색이 아주 출중하다. 수일 간 노리갯감으로 삼은 다음 궁(宮)으로 보내면 사부인
(四夫人) 중 한 분이 이 계집을 시비로 삼을 것이다. 흐흐……, 나는 대가로 향주에서 더 높은 지위로
승진하리라. 궁주의 성은(聖恩)을 믿고 방탕히 날뛰는 사대이역단(四大異域壇)의 오랑캐들이 능멸하지 못할
높은 지위로 말이다."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이 악마 같은 놈!"
탁옥룡이 눈을 부릅뜨고 홍의인의 등판에 주먹을 후려쳤다.
펑!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탁옥룡은 오른손을 축 늘어뜨린 채 뒤로 일곱 걸음 물러나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윽……!"
그의 연약한 주먹으로 무림고수를 가격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가 주저앉은 뒤쪽으로는 끔찍하게도 머리통이 산산이 박살난 시체 한 구가 있었다. 바로 진충노인이었다.
"수… 수운이를 내려 놔라!"
탁옥룡은 손이 부서지는 아픔도 잊고 몸을 일어나려 했다.
그보다 앞서 시커먼 발바닥이 다가와 그의 가슴을 거칠게 짓밟았다. 바로 이수운의 몸뚱이를 끼고 있는
홍의장한이었다.
그는 독목(獨目)이었다.
그는 피 보기를 즐기는 자였다. 그래서 그는 강호에서 독목혈수라(獨目血修羅) 라고 불렸고, 십오 년 전 홀연히
실종되었다가 옥룡궁의 향주 지위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향주라고는 하나 강호상에서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녹림맹주(綠林盟主)에게 절기를 배운 자였다.
그의 사부 역시 지난 달 녹림맹을 통째로 옥룡궁에 바친다는 맹세를 한 바 있었다.
독목혈수라는 악독한 웃음을 흘리며 입술을 뗐다.
"네놈은 모를 것이다. 내가 금종조(金鐘早)를 익히기 위해 이 십 년간 바위를 이불 삼아 덮고 잤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탁옥룡의 주먹에 맞기는 했으나 약간의 간지러움을 느꼈을 뿐이었다.
"크으으!"
탁옥룡은 분노를 발하며 욕설로 꾸짖으려 했으나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답답한 신음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오만방자한 글선생의 무리들! 황금 백 냥으로 작은 장원 하나를 사겠다는 것은 너희들에게 있어 평생 다시없는
천재일우(天載一遇)의 기회이거늘 감히 배짱을 퉁긴단 말이냐?"
독목혈수라는 탁옥룡의 가슴을 밟은 채 앞서 탁옥룡을 가로막았던 백의인을 향해 싸늘히 말했다.
"그 영감을 이리 끌고 나와라!"
"예, 향주!"
백의인은 재빨리 허리 숙여 인사한 후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비룡재천(飛龍在天) 수법으로 가볍게 날아올랐다가 자죽림 너머로 사라져 갔다.
잠시 후, 백의인은 일진선풍을 일으키며 독목혈수라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여기 대령했습니다!"
백의인은 멱살을 붙잡고 끌고 나온 청삼노인을 땅으로 내팽개쳤다.
"으으……, 이 천륜(天倫)도 모르는 마의 무리들!"
청의노인은 흙투성이가 되어 뒹굴면서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꼿꼿한 정신으로 굴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힘이
없이 당하기만 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이 순간 그는 탁옥룡을 발견하고는 아연실색했다.
"옥… 옥룡아! 네… 네가 어찌?"
"아… 아버님!"
탁옥룡은 연로한 부친이 괴롭힘을 당하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대항하기에 너무도 미약했다.
"흐흐……, 너희 쥐새끼보다도 천한 글서생 나부랭이들을 죽이고자 함이 아니다. 모든 것을 순리대로 하고자
함이다. 옥룡궁 사람들이 무예의 힘을 빌어 양민을 해한다는 나쁜 소문을 내면 참형당하리라는 것이 옥룡천자(玉
龍天子)의 지상명령이기에 너희들을 순순히 대해 주는 것이다."
독목혈수라는 그제서야 탁옥룡의 가슴에서 발을 떼어놓았다.
"옥룡천자의 명령만 없었다면 너희는 벌써 죽은 목숨이다."
그는 소매 속에서 꽤 커다란 가죽주머니를 탁천영 앞에 내던졌다.
"그 안에는 황금 일백 냥이 있다. 그것을 갖고 썩 꺼져라!"
그의 차디찬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탁옥룡은 벌떡 일어나 그의 두 다리를 부둥켜안으며 넘어지려 했다.
"이 사악한 놈들아!"
그러나 탁옥룡은 허공을 움켜쥐며 앞으로 고꾸라져야 했다. 독목혈수라가 보법을 밟아 아주 간단히 피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크흐……, 제법 성깔이 있는 독종이군."
독목혈수라는 탁옥룡의 끈질김을 비웃는 듯 더욱 잔혹스러운 표정을 하며 탁옥룡의 등판을 짓밟았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나며 탁옥룡의 오관이 참담하게 뒤틀렸다. 그래도 그는 이를 악물며 애써 비명을 참았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굳건한 태도였다.
"그… 그 아이를 놓아 주시오!"
청의노인이 그 꼴을 보다 못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키가 아주 작고 곰보였다. 이목구비가 제멋대로여서 지극히 추악한 모습이었다. 그가 바로 탁옥룡의
아비라는 것은 쉽게 믿지 못할 일이었다.
탁가장주 탁천영의 머릿속에는 사해팔황(四海八荒)을 덮는 학문이 들어 있었다. 붓을 들어 시구를 짓는다면 천추
(千秋) 동안 회자(膾炙)되어질 명시가 된다.
하지만 그는 지금 초라하고 옹색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장원을 내어 드리겠소. 그러니 그 아이를 놓아 주시오."
노안이 눈물로 젖는 것이 보기 측은했다.
"잘 생각했다. 흐흐……, 진작에 응했다면 거래가 웃는 낯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독목혈수라는 자신만만했다.
그는 이제껏 임무를 맡아 단 한 차례도 실패한 바가 없었다. 그가 부여받은 임무는 산서의 요충지인 청계곡에
분타(分舵)를 세우고 산서의 무림제파(武林諸派)를 통괄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굳이 탁가장원을 분타 자리로 택한 이유는 탁가장원이 천 리 안에 이름난 문인가문(文人家門)이기
때문이었다.
탁가장원에 분타를 세운다면 옥룡궁 산서분타 열 개 중 탁가장 분타가 제일 유명하게 될 것이다.
"으하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살리는 것이 무공을 배운 사람의 도리이지."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곧이어 얼굴이 흙으로 더럽혀진 탁옥룡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야음을 깨뜨렸다.
"수운이를 내려놔라!"
탁옥룡은 두 손으로 상반신을 떠받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흙으로 인해 지저분했지만 얼굴 가운데에서 두 줄기 냉광이 흘러 아주 무시무시해 보였다.
독목혈수라는 그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다가 이수운을 쳐들었다. 이수운은 점혈당해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이 계집 말이냐?"
"그렇다!"
탁옥룡은 차게 말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독목혈수라의 발에 짓밟혀 이미 갈빗대 네 개가 부러진 상태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통에 겨워 할 것이지만
그는 다친 사람 같지 않았다. 오히려 움찔하는 쪽은 독목혈수라였다.
"조그만 놈이 제법인데? 무공을 익힌다면 삼 년 안에 나를 능가하는 고수가 되겠다."
그는 쥐눈알 같은 눈알을 두리번대다가 탁천영을 잡아온 백의인을 향해 말했다.
"장소삼(張少三)!"
"예, 향주!"
"본좌는 분명 황금 백 냥을 전했다. 너도 그것을 보았겠지?"
"예,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총순찰(總巡察)이나 호법당 고수가 물어도 그렇게 답하겠지?"
장소삼이라 불리운 백삼대 고수는 허리를 굽신거렸다.
"헤헤……, 물론이지요."
"됐다. 그럼, 두 분을 정중히 배웅해 드려라."
독목혈수라는 득의해 하다가 자죽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 서라!"
탁옥룡이 외치며 뛰어가려 하자 장소삼이 앞을 막았다.
"가세, 소장주! 배웅을 해드리라는 향주님의 명을 지켜야 하네. 흐흐……, 지옥문(地獄門)까지 정중히 바래다
드리지."
그는 상전인 독목혈수라의 진의를 알아차린 후라 아주 잔혹한 눈빛을 흘렸다. 그의 두 주먹은 불끈 쥐어진
상태였다.
탁옥룡은 분노로 인해 이성을 잃었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수운을 악마들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수… 수운아, 오라버니가 간다!"
탁옥룡은 백의인은 안중에 없는 듯 비틀비틀 그 곁을 스치고 지나치려 했다.
"흐흐……!"
음침한 괴소가 그의 고막을 강하게 때리더니 장삼의 털북숭이 팔이 그의 목에 닿았다.
"목뼈를 고운 가루로 만들어 주겠다.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천자께서 전수한 쇄골수(碎骨手)니까!"
그가 살수를 쓰려 할 때였다.
"아앗, 잠깐!"
탁천영이 다급히 외치며 다가섰다.
"뭐냐? 노인의 차례는 이 놈 다음이다!"
"제발 살려 주시오. 나의 아들을 살려준다면, 황금 만 냥을 드리겠소."
"뭐라고? 세 끼 중 단 한 끼도 육식을 하지 못하는 빈궁한 처지에 황금 만 냥이라고?"
장소삼은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호기심을 느끼는 눈치였다.
황금 만 냥이라면 한 가족이 백 년간 호사할 수 있는 큰 재물이다. 범인에게는 상상 속의 재물일 뿐 현실감조차
없는 정도의 거액이었다.
탁천영은 아들을 바라보다가 품안에서 목갑(木匣) 하나를 꺼냈다.
"이것을 다 드리겠소."
"그게 뭐냐?"
"보시오!"
탁천영은 목갑을 멀리 내던졌다.
목갑이 땅에 떨어져 뒹굴며 안에서부터 수십 개의 야명주가 굴러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나 하나가 용안(龍
眼)만한 크기를 지닌 것들이었다.
"어엇? 이 귀한 것이 고린내 나는 서생에게 있을 줄이야!"
장소삼은 보물을 보자 눈이 뒤집힌 듯 탁옥룡을 내팽개치더니 명주알이 흩어진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으헤헤……, 궁색한 늙은이가 아니고 재신(財神)이었구나."
그는 명주알을 주먹 가득 쥐며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일순간에 거부가 된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똑― 똑― 똑―!
어디선가 목탁음이 들려오더니, 야음을 뚫고 날아드는 일단의 무림고수들이 있었다.
빠르게 다가서는 자들은 모두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걸치고 있는 옷은 한결같이 회색승포였다.
"어엇, 누… 누구냐?"
장소삼은 명주알을 모조리 주워 들고 얼른 품속에 갈무리했다.
순간, 회의승 중 하나가 앞으로 들이닥치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우수와 함께 금색단검(金色短劍)이
뻗어나갔다.
쐐애― 액―!
한 줄기 금섬(金閃)이 뻗어나가며 장소삼의 몸뚱이가 위에서 아래쪽으로 반으로 끊어지며 근처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그의 시체가 내장을 쏟아내며 나뒹굴었다.
그는 자신의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게 황천으로 간 것이다.
회의승려들은 박쥐같이 날렵히 움직여 자죽림을 넘고 있었다. 그들의 신영은 하나같이 초절했다.
한 사람만은 가지 않았다. 장소삼을 반 토막 낸 사람은 장소삼이 지니고 있던 명주를 거머쥐고 기이한 눈빛을
발했다.
"모를 일이로다. 이것은 본궁(本宮)에만 있다고 소문난 청묘안주(靑猫眼珠)가 아닌가? 그러나 중원에서는 어떤
것도 취해서는 아니 된다는 지존(至尊)의 명을 어길 수 없지."
그는 중얼거리다가 손을 흔들었다.
청묘안석이 빗살로 뿌려지며 사방 여기저기에 틀어박힐 때 회의승려는 장원 안으로 날아 들어가고 있었다.
어찌나 쾌속하게 움직이는지 회색선이 장원으로 길게 그어지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직후, 장원 안에서
단말마가 연이어 터져나왔다.
"아악!"
"크으으……!"
"감… 감히 옥룡궁 사람을 해하다니, 보복이 두렵지 않느냐?"
"이들은 중원인이 아니다, 으악……!"
쉴새없이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진득하게 번지는 혈향이 장원을 가득히 메웠다.
개궁한 이래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옥룡궁의 불패신화가 청계산의 고색창연한 장원에서 깨어지는 것이다.
얼마 후 자죽림 안으로 짓쳐들었던 일단의 회의승려들은 한결같이 피묻은 모습이 되어 나는 듯이 달려나왔다.
모두 빈 손인데 한 사람만은 빈 손이 아니었다. 옷이 갈가리 찢긴 미소녀 하나를 쳐들고 있는 회의승 하나가
있었다.
"하늘이 내린 아이다. 용모는 천상의 뛰어남을 나타내고, 근골(筋骨)은 여인 중 가장 좋다. 이것도 인연이
아니겠는가?"
그는 우두머리인 듯 중인을 통솔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일장의 혈겁(血劫)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종식되었다.

第三章 마중협(魔中俠) 회회공자(回回公子)


1
청계곡의 새벽은 역시 절경(絶景)이다.
사라짐이 못내 아쉬운 듯 능라 마냥 산허리를 두르고 있는 안개 사이로 보이는 절곡은 가히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갓 기지개를 켠 무정한 조양이 안개를 빠르게 몰아가고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드느냐?"
산 깊숙한 곳에서 나는 창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게 물소리가 흐르는 개울 옆으로, 베 수건에 물을 적셔 들고 잘생긴 소년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는
청의노인이 있었다.
왜소한 체구에 추악한 면모의 노인이지만 눈빛이 현기(玄機)를 담고 있어 매우 신비했다.
"아… 아버님, 수운이는?"
미소년은 탁옥룡이었다. 그는 밤새 혼절해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이다.
"끌… 끌려갔습니까?"
"아니다, 없어졌다."
"예에?"
탁천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집은 시산(屍山)이다."
"아버님……."
"어젯밤 아비가 너를 구한 직후 천벌이 떨어졌다. 그 안에 있던 자들은 모두 죽었는데, 수운이의 시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탁옥룡은 너무도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그게 어찌된 일입니까? 모두 죽다니요?"
"자세히는 모른다. 지금 옥룡궁의 총순찰(總巡察)이라는 사람이 와서 근처를 뒤지고 있다. 인근 고을 사람들이
자초지종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학살을 당하기까지 했다. 발각당하면 우리 부자는 죽게 된다. 그들은 모두 반
미친 상태다."
탁천영은 상심한 얼굴로 지난 밤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는 명주가 가득 담긴 옥갑을 내던져 장소삼의 주위를 흩트린 다음 아들을 들쳐업고 무작정 숲으로 도망쳤었다.
그가 허겁지겁 백여 장 갔을 때 이곳 저곳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 탁천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 속으로 도망쳐 한참을 숨죽이며 지냈다.
그러다 잠시 전 금창약을 빌리기 위해 사냥꾼의 초막(草幕)을 찾았다가 탁가장에 또 한 번의 괴변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탁가장은 근처 일천 리 안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산세(山勢)의 초점이라 탁가장이라면 만학천봉으로 통하게
된다. 그들이 우리 장원을 노렸던 이유가 그것이었던 것 같다."
"아……, 그나저나 수운이는 어디로 갔을까요?"
"죽었다고 봐야겠지."
탁옥룡은 얼굴을 툭 떨궜다.
탁천영은 주름진 손바닥으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도 진한 부정이 손바닥의 온기로 전해졌다.
"세상은 크게 어지럽다. 천기가 돌변해 군마가 날뛰고 있다. 진작부터 무엇인가 큰일이 있을 듯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일이 너무 빨리 닥친 것이다."
"알고 계셨습니까?"
"거의 알고 있었다. 마궁(魔宮)이 천하를 얻기 위해 무림인이건 양민이건 가리지 않고 죽인다는 것을 말이다."
탁옥룡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마궁이라면……?"
"옥룡궁이 바로 마궁이다. 그들은 본래 정파였으나 지금은 사파 중 사파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옥룡마궁(玉
龍魔宮)이라 칭한다. 하필 네 이름을 닮은 마의 무리들이 날뛰다니……."
탁천영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문(文)에 있어서는 천하의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의미가 크다.
그는 문에 빠져 무(武)를 등한히 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일자무식의 마졸(魔卒)들에게 선산(先山)을
빼앗기는 치욕을 겪었으니 어찌 분기탱천하지 않겠는가.
"아버님, 소자가 있습니다. 소자는 기필코 아버님과 소자가 몸담고 있던 장원을 꼭 되찾겠습니다."
탁옥룡은 눈물을 글썽이며 부친의 손을 꼭 쥐었다.
탁천영은 고개를 저었다.
"혼세(混世)에 태어난 것이 후회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이 일을 네게 잇게 하고 싶지는 않다. 너는 이 길로
황도(皇都)로 가거라. 동문수학한 글벗 중 대관(大官)인 사람에게 너를 맡길 작정이다."
"그… 그것은 아니 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한다."
"아니 됩니다, 아버님!"
탁옥룡이 완강히 거부하자 탁천영은 표정을 엄하게 굳혔다.
"아비는 다 틀렸다. 지난 밤 뭇매를 맞아 오장육부가 자리를 바꿔 살기 힘든 몸이다. 그리고 이곳은 호혈(虎穴)
이다. 우리 부자(父子)……, 특히 나를 찾는 자들이 많다. 지난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를 통해 알려 하는
자들이 많고 그들은 모두 사악한 마도이다. 아비가 그들의 이목을 돌릴 테니 너라도 이 사선(死線)을 넘어야
한다."
탁옥룡은 부친의 소매를 세차게 쥐었다.
"아니 됩니다, 어찌 그들을 찾으려 하십니까?"
"이곳은 천라지망(天羅之網)에 덮여 있다. 사경 즈음에 온 자들은 어젯밤 죽은 자들에 비해 열 배는 강한
자들이다. 그리고 악독하기는 그들보다 훨씬 더하다. 게다가 경신술이라는 것을 구사해 백 리 안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다."
"싸워야 합니다."
탁천영은 비장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어리석은 소리다. 그들은 탁가장주의 시체가 없다면서 인근 주민들을 들볶고 있다. 내가 가야 풍운이 멎는다.
최소한 나의 시체라도 발견되어야 한다."
"아버님, 가시면 저들에게 죽습니다."
"아비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받을 수는 없다. 이것은 속세에서 가장 험악한 강호의 일이다. 강호인들은
범인들과 다르다. 그들은 집요하고 무자비하다. 특히 옥룡마궁은!"
탁옥룡은 닭모가지 하나 비틀 힘이 없는 부친이지만 그 기상이 존경스러웠다.
"그러시다면 소자도 아버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자식된 도리로서 어찌 아버님을 사지에 남겨둔 채 떠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네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니 나를 따를 필요 없다."
탁천영의 입술 사이에서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
탁옥룡은 뒤통수에 무거운 쇠뭉치를 맞는 듯해 한동안 눈만 껌벅껌벅 했다.
"너와 나 사이에는 혈연(血緣)이 없다. 있다면……, 기른 정이 있을 뿐이지."
탁천영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아… 아버님, 어… 어이해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까?"
탁옥룡은 부친이 공연한 말로 자신을 떼어놓으려 한다 생각했다.
"사실이다. 이런 때 밝히게 되어 매우 유감스러우나……, 너는 나의 양자일 뿐이다. 원래는 네가 십팔 세가
넘으면 말해주려 했었다."
"제… 제가 어찌 아버님의 아들이 아닙니까?"
"나는 이제껏 아내를 취하지 않았다!"
탁옥룡은 점점 두려워졌다. 하늘처럼 존경하던 부친이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그럴 리가! 아버님은 일 년에 한 번 어머님의 제사를 지내기까지 하셨지 않습니까? 흑의부인(黑衣夫人)이
바로 저의 어머님이시라면서……."
"그 여인은 너를 내게 맡긴 여인일 뿐이다. 점창산(點蒼山)에서 천하의 지사(志士)를 찾아 강호를 떠돌다가,
뜬소문을 믿고 나를 찾아와 너를 맡긴 것이다. 그 여인은 네게 어머니도 아니고, 내게 있어 부인도 아니다."
탁옥룡은 너무도 엄청난 사실에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으으……!"
"그 여인은 아주 늙은 노파였다. 나를 만날 때는 죽기 직전이었고 너는 당시 두 살이었다. 그 여인은 너를
맡기며 평생 양육비라면서 청묘안석이라는 서역 보물을 한 상자나 전하고 숨을 거뒀다."
"아……."
탁천영은 애써 탁옥룡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그 여인은 유언으로 너를 천하기재로 키워 달라고 했다. 너를 버림받은 불쌍한 태생이라 했지."
"버… 버림받았다고요?"
"……."
탁천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생긴 상처인지 아느냐?"
탁천영은 아들의 목 부위를 가리켰다.
목 부위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열 개의 지흔(指痕)은 탁옥룡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니고 있던 흉터였다.
"이것은 네게 친어머니 되는 여인이 너를 목 졸라 죽이려 했기에 생긴 상처라는 것이 그 노파의 말이었다."
탁옥룡은 너무도 기가 막힌 듯 크게 호흡을 들이키고는 벌렁 나뒹굴었다. 그는 돌에 머리를 찧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사실이었던 것이다.
탁천영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그 일만은 말하지 않으려 했었는데……."
그는 상심해 중얼거리며 늙은 얼굴을 눈물로 적셨다.
부자의 모습은 석상과 같았다. 너무도 고요하고 아름다워 비극적인 장면이라기에는 적당치 않아 보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탁옥룡은 채찍으로 실컷 두들겨 맞은 것처럼 고통을 느끼며 희미하나마 정신을 차렸다. 제일 먼저 탁천영의 말이
뇌리를 때렸다.
―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 너는 버림받은 아이다!
탁옥룡은 손으로 목을 쓰다듬었다.
열 개의 지흔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와 함께 평생을 지낼 비극의 상처였다.
"나를 낳은 여인이……, 나를 죽이기 위해 나의 목을 열 손가락으로 움켜쥐었고 그래서 이런 상처가 남았단
말인가?"
그는 공허하게 뇌까리다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버님이?"
그는 탁천영이 보이지 않음을 알고 깜빡 놀랐다.
탁옥룡은 불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둘러보다가 바윗돌 위에 목탄으로 쓴 글을 보게 되었다.
<떠나라! 이곳은 너의 고향이 아니다. 나는 일개 문사이고 너를 십삼 년간 길러준 사람에 불과하다. 나의
미련함으로 인해 너의 여생이 괴롭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 글은 탁천영의 글이었다.
"떠날 수 없습니다! 제… 제게는 아버님뿐입니다. 길러 주신 은혜를 잊는다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탁옥룡은 주먹을 불끈 쥐고 산을 내려왔다.
그는 탁가장원이 있는 곳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몸이 물에 빠졌다 나온 솜같이 탈진할 때쯤 그는 탁가장원에서
이 리 떨어진 곳에 이를 수 있었다.
탁가장원으로 가는 길은 꽉 막혀 있었다. 돌이나 나무로 막힌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장벽 때문이었다.
하나같이 금강신(金剛神) 같은 거대한 역사들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었다. 모두 근육투성이의 튼튼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옷을 뚫고 나올 듯한 근육은 바로 무력의 상징이었다.
그들의 얼굴 표정은 너무나도 냉혹했다. 아니, 차갑다는 것조차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무표정했다. 그들의 수는
도합 여덟이었지만 열여섯 사람이 일렬로 서 있는 듯 어마어마하기만 했다.
'무시무시한 자들이다. 한 주먹으로 황소 열 마리는 때려잡을 자들이다.'
탁옥룡은 그들의 거대한 체격에 치를 떨었다. 무력에 대한 혐오감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타났다.
"흐음, 소형제는 누군가?"
어디에선가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매우 청수하게 생긴 황의인이 그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박 속같이 흰 피부를 지니고 있는 자였다. 코가 유달리 높았으며 머리 위에 천을 둘둘 말아
누에고치 같은 형상을 꾸미고 있어 신기했다. 지니고 있는 것 중 신기한 것은 반월(半月)을 닮은 한 자루
보도였다.
그는 땅을 밟지 않고 허공을 밟으며 다가섰다. 그가 나타나자 차가운 공기가 온화해지는 듯했다.
"회회공자(回回公子)!"
"부용호위(芙蓉護衛) 팔대금강(八大金剛)이 사공(四公)의 으뜸이시자 천하제일의 미장부이신 회회공자를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건장한 여덟 명의 장사가 그를 향해 넙죽 절했다.
회회공자는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며 탁옥룡 곁으로 다가섰다.
탁옥룡은 그의 신비한 모습에 감탄하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옷자락에 한 마리 금룡(金龍)이
수놓아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옥룡마궁의 금자호법(金字護法)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상징했다.
금자호법은 천자구장로(千字九長老)와 궁주사부인(宮主四夫人)을 제외하고는 옥룡궁에서 가장 높은 지위라 할
수 있었다.
금자호법의 수는 극소수이며, 그 중 강호에 알려진 존재는 옥룡사공자(玉龍四公子)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관외(關外) 회회교(回回敎)의 회회공자(回回公子).
서장(西藏) 밀교(密敎)의 밀교공자(密敎公子).
운남(雲南) 만사곡(萬蛇谷)의 만사공자(萬蛇公子).
돈황(敦皇) 라마교(喇 敎)의 금강라마(金剛喇 ).
이들이 바로 사공자였다.
이들은 세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이역(異域)의 일국(一國)이나 일방(一方)의 패자(覇者)를 사부나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그들이 지금 이역단(異域壇) 사단(四壇)의 각 단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역사단은 옥룡마궁의 선봉들이었다.
그들은 종교의 힘으로 뭉쳐 소교주(少敎主) 되는 사공자에게 죽음으로 충성했고, 그로 인해 옥룡마궁의 세력은
일로 확대되는 중이었다.
이런 연유로 셋째 공통점이 만들어졌다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옥룡천자를 숙부라 부르며 옥룡천자의 명을 받을 뿐, 옥룡마궁의 엄하고 지독한 법에는 자유스러운
상태라는 것이다.
회회공자는 회회교의 소종사(少宗師)이다.
그가 익힌 파천반월도법(破天半月刀法)은 무림의 일절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그는 회회교의 법에 따라 살인을
극히 자제하고 있기에 마중협(魔中俠)이라 불린다.
그는 탁옥룡이 인상을 찌푸리자 싱긋 웃으며 가슴의 옥룡마궁 표식을 가리켰다.
"이것은 오래지 않아 떼어질 것이네. 유언을 지키기만 하면 하시라도 궁을 떠날 사람들이 바로 사공자라네."
"무… 무슨 말씀이시오?"
"하하……, 자네는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일이네."
회회공자는 쓴웃음을 짓다가 조금 더 다가갔다.
그는 봉두난발에 찢어진 옷차림이지만 천부적인 용모를 드러내고 있는 탁옥룡을 예의 주시하다가 입술을 벌렸다.
"어이해 이곳으로 왔는가? 벌써 수십 명이 죽었는데 두렵지 않은가?"
"두… 두렵지 않소. 왜냐하면 이곳은 나의 땅이기 때문이오."
"자네 땅이라고? 하하……, 그것은 옛말이네. 자네가 이곳의 누구인지 모르나 이곳은 어제 이후 옥룡궁의 영토가
되었네."
"그렇지 않소."
탁옥룡이 발끈 화를 내자 회회공자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시세(時勢)를 알아야 준걸(俊傑)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괜찮으나 옥부용부인(玉芙蓉夫人)은 지금
심기가 편찮은 상태이네. 자칫하다가는 말로 인해 살신지화(殺身之禍)를 초래하게 되니 어서 돌아가게."
"나는 탁가장원의 소장주요. 누가 나를 쫓을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소."
"으음……!"
회회공자는 흠칫 놀라며 탁옥룡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번갯불 같은 정광(精光)을 날리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천년마제 제 1 권
.
"탁천영이라는 노인은 소형제와 비슷한 데가 없네."
"아니오, 나는 그 분의 아들이오. 그러니 어서 비켜주시오."
회회공자는 탁천영이 해를 입기를 원치 않았다.
"고집스럽군. 흠, 거짓이라면 얼른 말을 철회하고 돌아가야 할 것이고, 사실이라면 급히 입을 다물고 도망가야
할 상황임을 모르는가?"
"나는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않소. 비키시오!"
탁옥룡이 눈을 부릅떴다. 핏발이 곤두선 눈에서 서릿발보다 차가운 안광이 폭사되었다.
회회공자는 이백 년 내공을 지닌 옥룡마궁의 십대고수(十大高手) 중 한 사람이나 그 눈빛 앞에서는 으스스
떨어야 했다.
'하늘이 내린 기재다. 몸 주위에서 서광(瑞光)이 서리고 있다. 제대로 무공을 익힌다면 천하고수가 될 것이다.'
그는 탁옥룡의 천부적인 근골을 알아보고 감탄하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탁천영은 죽었네, 그러니 돌아가게."
탁옥룡은 고막에 뇌성벽력이 터지는 것 같았다.
"돌아가셨단…… 말이오?"
"그는 인근 마을 사람들을 해치지 말아 달라며 간곡히 부탁한 다음 바위에 머리를 찧어 자결했네."
"그… 그럴 리가? 거짓말 마시오!"
"내가 왜 소형제을 속이겠는가?"
회회공자가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말할 때였다.
"호호호……, 회회공자는 항상 너그러우시군요. 하오나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를 다루는 데에는 말보다 매가 더
나은 수단입니다."
갑자기 영롱한 목소리와 함께 짙은 향풍(香風)이 몰려들었다.
흰 구름이 떨어져 내리듯 회회공자 옆으로 떨어져 내리는 백의여인이 있었다.
나이는 스물 정도로 아주 탄력적인 몸매를 지닌 여인인데, 걸치고 있는 옷이 몸에 착 달라붙는 가죽옷이라 몸매가
너무도 완연히 드러났다.
여인은 아주 풍성한 젖가슴을 갖고 있었다. 가죽옷이 젖가슴으로 인해 터져 버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흰 가죽옷에는 연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호호……, 이 꼬마가 그 늙은이의 아들이라면 늙은이가 자결하느라 못다 토해낸 말을 이어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인은 육감적인 몸뚱이를 흔들어 대며 비릿한 육향을 풍겼다.
회회공자는 질색을 하며 얼른 허리를 숙였다.
"숙모(叔母), 이 아이는 어디선가 고생을 해 머리가 약간 이상해졌을 것입니다. 일을 확대시켜서는 아니
됩니다."
회회공자는 백의미인에 비해 열 살이나 더 들어 보였으나 여인에게 숙모라 칭했다.
"호호……, 한 가지라도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 총순찰(總巡察)된 사람의 임무입니다."
여인이 웃을 때마다 버들강아지 같이 허리가 간드러지게 꺾여졌다. 이렇듯 농염한 몸뚱이와 더불어 잠자리를 가질
사람은 가히 행운아라 할 것이다.
"숙모, 흉수는 십오 년만에 중원으로 들어온 포달랍궁(包達拉宮)의 금검수(金劍手)들임이 밝혀졌지 않습니까?
이런 아이에게 마저 살수를 쓴다면 소문이 나빠질 것입니다."
"흥, 소문은 이미 나쁘게 났어요. 소림사와 무당파가 한데 뭉쳐 본궁을 공적(公敵)으로 몰아세울 준비를 하는
중임은 공자께서 잘 알지 않습니까?"
여인은 바로 옥부용(玉芙蓉)이었다.
그녀는 옥룡천자의 네 부인 중 하나였다. 옥룡천자에게는 한 명의 정실부인과 세 명의 후실이 있다.
정실은 혈작약(血芍藥)인데 강호인들 앞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 속의 인물이다.
둘째가 옥부용이고, 셋째는 형당주(形堂主)이기도 한 철정향(鐵丁香)이다. 넷째는 가장 냉혹하다는 은목단(銀
牧丹)이었다.
이들은 한때 천하제일미남으로 불려졌던 과거 철서생(鐵書生)의 부인들이었다.
철서생이 지금의 옥룡천자이다.
그는 옥봉(玉鳳)이 죽은 후 상심해 여인을 곁에 두지 않다가 혈작약을 아내로 삼는 것을 시작으로 연달아 네 명의
부인을 얻었던 것이다.
모두 아름답고 강한 여인들이나, 손속이 독랄하고 심성이 표독해 여인같이 여겨지지 않는 냉혈인간들이기도 했다.
옥부용은 회회공자의 남성에 끌린 듯 몸을 그의 어깨에 슬쩍 들이댔다. 그리고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하오나 공자가 나이 어린 숙모와 함께 조용히 지낼 생각이라면, 흐응…… 나이 어린 숙모는 모르는 체할
테지요."
"이… 이러시면……."
회회공자가 뱀에 물린 사람같이 질색할 때였다.
"내 아버님은 어디 계시냐?"
탁옥룡의 악쓰는 소리가 두 사람의 고막을 때렸다.
옥부용은 탁옥룡 때문에 흥이 깨져 분한 듯 표독한 표정을 하다가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생쥐 같은 놈!"
옥수가 내뻗어짐과 동시에 칼날 같은 경기(勁氣)가 탁옥룡의 얼굴을 휘감아들었다.
섬뜩한 파공성과 함께 지독한 고통이 뒤따랐다.
"아악!"
탁옥룡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몸을 휘청였다. 그의 열 손가락 사이에서 선혈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크으으……!"
탁옥룡은 아주 고통스러운 듯 비명소리를 내다가 그대로 나뒹굴어 정신을 잃었다. 모든 것은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 어린아이에게 그토록 잔인한 수법을 쓸 것까지야!"
회회공자는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표정을 잔뜩 찌푸렸다.
"호호……, 죽는 것보다는 낫지요. 회회교의 법에 따라 생명을 중시하는 회회공자는 말 한 마디가 어린 생명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관건이 될 것입니다."
옥부용은 수하들인 팔금강이 보고 있는데도 부끄럽지 않은 듯 붕망산보다 높이 솟아오른 젖무덤을 회회공자의
가슴에 비볐다.
회회공자는 술 취한 사람같이 얼굴을 붉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겠소."
"호호호……!"
옥부용은 그제야 만족해 웃었다.
탁옥룡은 피범벅이되어 길게 누워 있었다.
그의 생명은 색녀(色女)와 마중협(魔中俠) 사이의 흥정거리에 불과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회회공자를 만나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이다.
2
밤이 깊다.
탁옥룡은 청계곡과 금륭거에서 오십 리 떨어진 낡은 관제묘(關帝廟) 안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막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이상하게도 얼굴이 고약을 바른 붕대로 칭칭 동여매여져 있었다.
입안으로 달콤한 향내가 남아 있었다.
탁옥룡은 나무갑 하나와 서찰 한 장을 쥐고 있었다. 그의 눈길이 무의식적으로 서찰로 향했다.
<이름 모를 소형제에게―
옥룡궁의 만행을 막지는 못하고 도리어 선봉장이 되고 있는 나를 용서해 주게. 아버님의 유언이 없었다면
옥룡궁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네. 이유를 댄들 자네는 모를 것이네.
분명한 것은 천하가 머지 않아 옥룡궁에 장악될 것이라는 사실이네. 저항이 거세지고 있으나 십 년 안에
공전무후한 천하통일이 벌어질 것이네.
숨어사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걸세.
옥룡궁에 부모를 잃은 사람의 수는 이미 수천 명이네. 자네만의 고통은 아니니 자제하라는 말일세.
자네에게 월정신단(月精神丹) 한 알을 먹여 죄를 조금이나마 씻고자 하네. 함께 둔 목갑 안에는 자네가 아버지라
말한 탁천영 노인의 뼈를 태운 재가 들어 있네.>
탁옥룡은 그 대목에 이르자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공허했다. 텅 빈 가운데 알 수 없는 것들이 어지럽게 나타나 마음을 괴롭혔다. 그것은 몸의
괴로움으로 이어져 갔다.
"원수들! 나를 살린 것을 후회하리라!"
그는 중얼거리며 나무갑을 열었다.
안에 든 것은 고운 재였다. 그것은 바로 탁천영을 화장한 유골가루였다.
탁옥룡의 눈에서 붉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아버님……!"
그는 혈루(血淚)로 옷섶을 적셨다. 그는 눈알이 빠질 정도로 울었다. 그러나 소리는 내지 않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탁옥룡은 얼굴이 거북하다 여기며 손을 들어 얼굴을 덮고 있는 붕대를 떼어냈다. 회회공자가 어떤 약을 발랐는지
모르나 상처는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촉감이 이상했다. 옥같이 매끄럽던 얼굴을 만지는 느낌이 아니었다.
"이럴 수가! 거북이 등가죽을 붙였단 말인가?"
탁옥룡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다시 한 번 훑었다.
코가 없었다. 의당 있어야 할 오똑한 콧날 대신 찌부러진 코뼈만 만져졌다. 입술이 있어야 자리에는 너덜너덜한
살점이 잡혔다.
"으으……, 나의 얼굴이 사라졌다. 내… 내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탁옥룡은 반미친 사람같이 외치다 한순간의 일을 기억했다.
몸매가 지극히 날렵한 백의여인의 손바닥이 그의 얼굴에 닿던 순간의 기억이 아주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얼굴이 박살나는 고통이 다시금 느껴졌다.
"그래, 그 요녀가 나의 얼굴을 뭉개 버렸구나!"
탁옥룡은 그제서야 자신의 얼굴이 상처투성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 큰 실망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분할 뿐이었다. 용모가 훼손되었다는 것보다 추악한 자들에게
당했다는 것이 그를 괴롭혔다.
"아버님, 길을 일러주십시오!"
그는 가루가 된 유골함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달이 유난히 쓸쓸한 정취를 자아냈다.
그는 목갑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옥룡궁 때문에 돌아가신 양부의 뼛가루를 옥룡마궁의 상자 안에 담기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가 흘러 손바닥으로 떨어지며 작은 소리를 냈다.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탁옥룡이 절규할 때 갑자기 광풍(狂風)이 일어났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쳐 뼈가 타고남은 가루를 아주 높이
날려보냈다.
"아… 아버님……!"
탁옥룡은 목놓아 외치며 재를 움켜쥐기 위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손가락에 스치는 것은 바람뿐이었다. 감정 없는 바람은 재를 몰아 아주 멀리 사라져 갔다.
"저곳이다. 아… 아버님이 저곳을 가리키신다."
탁옥룡은 술 취한 사람처럼 걷기 시작했다.
그는 바람을 따라 걸었다. 아니, 아버지의 재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것을 따라 걷는 것이다.
비틀거리며 걷는 탁옥룡의 얼굴은 보기 드문 추물이었다.
얼굴 한가운데 장인(掌印)이 남아 있고, 그로 인해 코가 완전히 박살이 났고 입술이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두
눈이 상하지 않은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아버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는 바람에 날리는 잿가루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탁옥룡의 눈에는 핏물 대신 원광(怨光)이 흘렀다. 그는 얼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 아버님……."
쉬어 빠진 목소리에는 원한이 그득했다. 찬바람이 한기 섞인 목소리로 인해 꽁꽁 얼어버릴 것 같았다.
그는 걷고 또 걸었다.
재는 이미 허공에 산화된 후였다. 그는 눈을 멍하니 뜨고 무작정 걸었다. 몇 번이고 쓰러졌고 그때마다 벌떡벌떡
일어났다.
새벽이 타오를 때쯤 탁옥룡은 산서성에서도 험준한 곳에 이르러 냉정을 찾았다.
"이곳이 어딜까? 정말 험한 산이다."
탁옥룡은 저 높은 곳에 만년설(萬年雪)이 있음을 알고 혀를 내둘렀다. 이상한 것은 밤새 걸었는데도 지치지 않은
것이다.
회회공자가 복용시켜 준 월정신단(月精神丹)의 약효가 아직 남아 그의 몸을 온화하게 만들고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얼어죽었을 것이다.
다른 곳은 여름이나 이곳은 한겨울이었다.
눈바람이 씽씽 불고 있었다. 항상 겨울인 산상(山上)인데 사람이라고는 탁옥룡뿐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지형이 아주 황폐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 이제 보았더니 바로 얼마 전 지진(地震)을 만났다는 여량산이구나! 내가 나도 모르게 백 리를 걸어
여량산 안으로 들어섰어."
탁옥룡은 지진이 일어나 산세가 마구 틀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량산의 지진은 천 년만의 천재지변으로 알려진 엄청난 재앙이었다. 그것은 옥룡마궁의 복파대전 즈음 일어나
인심을 흉흉하게 하는데 기여한 바가 컸다.
눈바람에 휩쓸리는 여량산의 황량함은 바로 탁옥룡의 심중(心中)과도 같았다.

第四章 천 년의 인연(因緣)
1
설무(雪霧)에 잠기는 여량산은 한 폭의 세외선경도(世外仙景圖)였다.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연이은 봉우리가 설무에 잠겨, 아주 흐릿한 곡선을 그리며 수천 리에 걸친 행진을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뚝 끊어진 절벽 아래에서 운해처럼 피어오르는 빙무해(氷霧海)의 장엄함을 접할 수
있다.
남쪽은 유명부(幽冥府)같이 흐릿할 뿐이다. 모든 것이 짙은 안개의 장막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쪽에선 강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휘잉―!
눈보라는 설룡(雪龍)이 꿈틀거리며 하늘을 나는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대지를 강타하고 있었다.
탁옥룡은 쉬지 않고 걷는 중이었다. 그는 영원히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문득 혼자라는 것이 느껴졌고 알 수 없는 고독감이 봇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죽어 버린다 해도 그리
아까울 것 같지는 않았다.
"이곳에 묻히면 시체가 천 년은 가겠지. 꽁꽁 얼어 썩지 않을 테니까! 아……, 후세 누군가 얼어죽은 시체를
보고 나의 사연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탁옥룡은 소맷자락으로 눈바람을 가리며 무작정 걸었다.
그는 이미 방향을 잃고 있었다. 칼날처럼 베어드는 바람은 그가 견디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였다.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걸었다.
몸을 훈훈하게 해주던 월정신단(月精神丹)의 힘도 다한 듯 몸이 손끝 발끝에서부터 얼기 시작했다.
"으으……, 너무 아프구나."
탁옥룡은 손을 마주 비비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신세를 이런 사경으로 몰아넣은 자들에 대한 원한이 일었고, 이 세상에 대한 증오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악의 무리들!"
그는 씹어 뱉듯이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힘이 없어 악도들을 죽이지 못하였지만 죽어 귀신이 된다면 원귀(怨鬼)가 되어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다행히
귀신이 되지 않고 사람으로 환생(還生)한다면 기필코 강호인으로 태어나 이십 년 후 철저히 복수하겠다!"
탁옥룡은 양부와 이수운의 얼굴을 눈에 그렸다.
양부의 모습을 떠올리자 눈물이 일렁였고, 이수운의 아리따운 영상을 되새기자 안타까움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흐릿하게 떠오르는 얼굴은 형체가 정확히 그려지지 않는다. 안개에 가려진 듯 흐릿한 그 얼굴은 탁옥룡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고, 바로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얼굴이었다.
"나를 버린 여인…… 그 여인도 증오한다."
탁옥룡은 차게 말하며 애써 눈물을 감추었다.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존재는 자신을 낳아준 혈친이다. 양부로부터 출생의 비밀을 들은 이후, 한동안 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간절하게 느꼈다.
그러나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자식을 죽이려 한 모친을 용서하기가 힘들었다. 어머니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사라지면서 오는 충격은 너무도 컸다.
'어떤 사연이 있다 해도 용서할 수 없다.'
그는 목에 남아 있는 열 개의 손톱자국을 쓰다듬었다.
"어떤 여인이기에 자신의 뱃속에서 나온 아이의 목에 손을 댈 수 있었을까?"
그는 갑작스런 허탈감을 느꼈다.
'그 여인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인에게서 태어난 나 또한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탁옥룡은 상심해 하며 계속 걸었다.
해가 구름바다 위쪽으로 떠올랐을 시각이었지만 여량산으로 떨어지는 빛살은 없었다.
대낮인데 아주 어두웠다. 폭설(瀑雪)이 내려 모든 것을 가리게 했다.
탁옥룡의 몸뚱이조차 눈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으으……, 춥다."
간간이 눈바람 사이로 들리는 처량한 목소리가 있을 뿐이었다.
"아… 아버지 곁으로 가는 것일까? 한(恨)을 풀고 가야 아들 된 도리를 다하는 것인데……, 이대로 가는
것인가?"
탁옥룡은 무작정 걸을 뿐이다.
가야 하는 곳이 정해져 있었다면 이렇듯 처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힘이 닿는 한 계속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부친의 유해가루가 정해준 길이라 여기며 그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대자연에 비해 너무 왜소했다.
"쿨럭쿨럭……!"
그는 심한 기침을 하며 쓰러질 듯 휘청였다.
아직 어린 몸으로 세찬 눈보라를 뚫고 이렇듯 오랜 시각 동안 걸어온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무엇에 이끌린 듯 그는 그렇게 탈진한 몸을 이끌며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마를 갔을까?
탁옥룡은 의식이 희미해진 상태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우우웅―!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 산이 운다?"
일순 탁옥룡의 머리카락이 빳빳해졌다.
울음은 평화가 깨어졌을 때 나는 소리다.
봄에는 새가 울고, 여름에는 천둥으로 운다. 가을에는 바람이, 그리고 겨울에는 눈으로 운다.
지금 여량산이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은 여진(餘震) 때문이었다.
천 년만의 대지진이 그것으로 끝나기는 아쉬웠는지 또 한 번의 땅울림으로 여량산을 떨게 하는 것이다.
우는 소리는 포효성(咆哮聲)으로 화했다. 수백만 마리의 수사자가 갈기를 세우고 하늘을 향해 울고 있는 듯했다.
노룡(怒龍)의 장음(長吟)이라 해도 이보다 우렁차지 못할 것이다.
우르르르― 릉!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와 함께 땅이 뒤흔들렸다.
탁옥룡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푹 쓰러졌다.
"어엇……?"
그가 눈바닥을 나뒹굴며 비명소리를 낼 때 모든 것을 묻어버리는 굉음이 터져나왔다.
꽈꽈― 꽝!
하늘과 땅이 다시 하나로 뭉치는 것일까?
땅이 뒤틀리며 빙벽(氷壁) 하나가 흰 파도를 토하기 시작했다. 집채보다 백 배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절벽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눈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눈덩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설풍이 더 지독하게 일어나 천지간을 온통 눈으로 메웠다.
눈의 기세는 가히 무적(無敵)이었다. 우뚝하던 바위 봉우리가 눈사태에 깔려 함께 비탈을 굴렀고, 십 리 안이
눈사태로 떠들썩해졌다.
수만의 뇌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소년의 안타까움 어린 절규가 터져나왔다.
"안 돼! 나는 죽을 수 없다. 죽여야 할 원수가 있는데……, 제발 나를 데리고 가지 마라!"
탁옥룡은 해일 같은 눈사태에서 쓸려가며 하늘을 저주하며 부르짖었다.
꽈르르― 릉!
눈사태는 더 큰 울음소리로 그를 조롱했다.
휘몰아치는 눈사태는 반경
이십 리 안의 경물을 이전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뒤바꿔 놓은 후에야 정지되었다.
봉우리 열두 개가 사라졌고 계곡 스물다섯 개가 묻혀 평지가 되었다.
여량산 사상 가장 큰 눈사태였다.
2
아주 깊은 골짜기는 만 년 전부터 눈과 얼음뿐인 빙하지곡(氷河之谷)이었다.
"으음……!"
어디에선가 아주 가냘픈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눈더미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흑의소년 하나가 있었다. 눈 지옥을 도망쳐 나온 마귀인 듯 너무나도 추악한
모습을 한 소년이었다.
얼굴이 철퇴에 맞아 짓뭉개진 듯한 추악했고, 손등 발등과 입술이 얼어 자색으로 화한 후였다.
"여… 여기가 어디일까? 눈사태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나도 모르게 이상한 골짜기
밑바닥으로 떨어졌구나."
그는 위쪽을 바라보며 자지러졌다.
하늘이 동그랗게 보였다. 사면이 꽉 막힌 분지였다. 벽면은 유리보다 매끄러운 빙벽으로 둘러져 있고 높이도
엄청났다. 사람은 물론이고 날랜 원숭이라 해도 감히 기어오를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흑의소년은 밖으로 나가기 틀렸다는 것을 알고는 쪼그리고 앉아 눈을 반개했다.
"아버님의 재를 따라 오다가 여기까지 왔다. 아마도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뒤쫓아 저승으로 오기를 바라셨나
보구나. 슬퍼하지 말자. 수운이도 이미 저승에 가 있을 테니까. 이제 멀지않아 모두를 만나게 될 거야. "
그는 추운 듯 새우처럼 웅크리고 앉았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운명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뿐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서 소년의 추악한 얼굴에 희미하나마 변화가 생겼다.
'아……, 누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하구나! 누구지? 아주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는 것 같아!'
소년의 피부에 소름이 오싹 돋아났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등뒤에서 전해졌다.
그는 공포를 느꼈다. 그 공포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도 훨씬 큰 것이었다.
그는 겁이 나 감히 뒤돌아볼 마음도 갖지 못했다.
'뒤쪽에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있다. 그 존재는……, 죽음보다도 두려운 것이다.'
소년은 죽는 쪽이 오히려 홀가분하다 여겼다.
그러나 공포스런 존재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그 존재만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그런 공포를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봐야겠다는 호기심이 일어났을 때에는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대체 무엇일까?'
본능적인 공포에서 벗어난 그는 엄청난 힘을 지닌 존재가 너무도 궁금하게 여겨졌다.
'무엇이기에 나의 영혼을 압도하는 것일까?'
그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세상사에서는 철저한 패배자였으나 정신력에 있어서는 남에게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소년이었기 때문이었다.
힘은 맑은 상태에서 일어났다.
그는 공포를 억누르는 동시에 말할 수 없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많은 경전을 읽으며 성현들의 지식과 의지로
다져진 그는 아이답지 않게 굳강했다.
"모두 심마(心魔)의 장난이다. 내가 살기 힘들다는 것을 억울하게 여긴 나머지 심마의 농간에 빠진 것이다."
소년은 중얼거리며 천천히 뒤돌아봤다.
순간, 그의 얼굴은 이 세상에서 가장 흉칙하게 일그러졌다.
"아……!"
그의 입술이 딱 벌어졌고 눈빛이 흐트러졌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것을 본 표정이 된 이유는 상상도 못할 무시무시한 존재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 하나를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시뻘건 두 눈알을 가진 사람인데 그 빛은 너무나 큰 공포를 안겨다
주었다.
둘의 눈싸움은 아주 오래 지속됐다.
사실 치열한 눈싸움이 아니었다. 소년에게 있어서는 눈싸움이라기보다 겁먹어 차마 돌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소년의 얼굴에서 공포의 그늘이 사라졌다.
"휴우……, 산 사람인 줄 알았다."
그의 눈빛이 정상대로 환원되어 입술 사이에서 한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에게 극도의 공포를 준 혈안의 존재는
이미 오랜 전에 죽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눈빛이 워낙 강해 살아 있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아……, 얼마나 큰 원한을 갖고 있기에 죽은 상태에서도
이렇듯 무서운 저주의 눈빛을 발하고 있는 걸까?'
그는 이마를 덮은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시체를 향해 다가섰다.
시체의 몸뚱이 표면에는 맑고 투명한 얼음이 한 자 정도 두텁게 둘러져 있었다. 수정보다 맑은 얼음덩이라 얼핏
시체가 우뚝 서 있는 것으로 보였다.
죽은 사람은 붉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붉은 옷자락 여기저기 찢어진 흔적이 있고 그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와 검은빛으로 굳은 상태였다.
죽은 사람은 중년인으로 보였다.
기이하게도 머리카락이 정수리 부분에서부터 둥그렇게 백발(白髮)로 화해 있었다.
"흐음……, 언제 죽은 사람일까? 시체의 형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는 하지만 시체라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소년은 홍의인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근처를 자세히 살폈다.
지각 변동의 흔적이 역력했다. 바닥이 깨어진 곳도 여러 군데 눈에 띄었다. 원래 위쪽에 있던 것은 땅 속으로
들어갔고, 땅 속에 있던 것은 지진으로 인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얼음에 갇혀 죽은 시체 또한 땅속에서 나온 듯했다. 아니, 얼음 속에서 나왔다고 해야 옳은 말이리라.
"동병상련지정이 느껴지는군. 힘이 있다면 얼음을 깨고 이 사람의 시체를 잘 묻어주어 원혼이 되지 않게 하고
싶구나."
중얼거리는 소년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그는 허기지고 탈진한 상태였다. 몸은 꽁꽁 얼어 한 걸음도 움직이기 힘든 상태였다.
그 와중에도 홍의인의 시체가 꼭 산사람 같은 인상을 준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 바람에 이전의 외로움은 시체를
대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치열하게 싸우다 죽은 사람 같구나."
그는 시체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며 계속 시체를 살펴보았다.
시체는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사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어떤 내가고수의 눈빛보다도 무서워
보였다.
그의 왼손은 심장 위쪽에 닿아 있고, 오른손은 불끈 쥐어진 채 가슴 앞쪽으로 조금 내밀어진 상태였다.
"아……, 저 모습은 곧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끼게 하는구나. 다른 사람의 시체는 언제고 썩어 흙으로
돌아가나 이 사람의 시체는 만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시체로 모두가 원하는 장생불괴(長生不
壞)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탁옥룡은 감탄하다가 현기증을 느꼈다. 죽을 때가 가까워진 듯했다.
그는 삶을 쉽게 체념하는 나약한 소년은 아니었으나, 대자연이 준 시련이 너무도 엄청나 살길을 찾으려 하지도
못했다.
"휴우……!"
탁옥룡은 호흡의 곤란을 느끼며 차디찬 바닥에 드러누웠다.
우르르― 릉!
갑자기 머리 위쪽에서 뇌성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 다시 한 번 요란한 벼락치는 소리가 나며 절벽에서 얼음덩이가
우박처럼 떨어졌다.
다시 한 번 눈사태가 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 큰 눈사태는 아니었기에, 탁옥룡이 누워 있는 빙곡까지 세력을 미치지 못했다.
다만, 눈사태로 인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흙벽이 드러나 이채로웠다. 방원이 오 장 정도 되는 흙벽이
나타나며 눈사태는 정지되었다.
탁옥룡은 눈사태가 중지되었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그렇게 일 각이 지났다.
죽음을 기다리며 담담하기만 하던 탁옥룡의 눈빛이 야릇해졌다.
"으음……, 어디선가 선향(仙香)이 나는데?"
탁옥룡은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는 휘청이며 주위를 둘러보며 향기의 진원지를 찾았다. 전신을 훈훈하게 해주는 향기는 눈사태로 인해 새로
나타난 흙벽 아래쪽에서 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음벽 아래에서 나타난 흙은 정말 검고 고왔다.
"흙에서 이런 향기가 날 수는 없는데, 무엇이 있기에 이리도 좋은 냄새가 난단 말인가?"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흙바닥 가까이 다가갔다.
"호오……!"
그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빛이 붉은 꽃 세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꽃송이는 아주 작았고, 꽃을 달고 있는 잎사귀도 매우 작고 귀여웠다.
"이런 앙증맞은 꽃이 눈 속에서 자랐다니……, 정말 신비한 현상이다."
탁옥룡은 기화(奇花)의 끈질긴 생명력(生命力)에 혀를 내둘렀다.
'무슨 꽃이기에 이리도 놀라운 생명력을 갖고 있을까?'
그는 은근한 호기심을 느끼고 꽃송이를 살피다 꽃송이의 생김새가 낯익다 여겼다.
"가만…… 이것은 산해경(山海經)에서 본 산삼화(山蔘花)와 똑같구나!"
탁옥룡의 눈빛이 심하게 떨렸다.
'산삼화가 분명하다면 흙 아래 산삼뿌리가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영약이라는 산삼이
이곳에 자라고 있단 말인가?'
그러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다. 나 같은 불행한 사람에게 그런 기연(奇緣)이 있을라고?'
탁옥룡은 느닷없는 행운을 애써 부정하면서도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어쨌거나 한번 살펴보자."
그는 마른침을 삼키다가 부드러운 흙 위에 다소곳이 자라난 꽃송이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손발을 놀리기 힘든 상태였지만 호기심을 막지는 못했다. 열 손가락을 이용해 부드러운 흙을 파기 시작했다.
흙은 아주 쉽게 파여졌다. 그리고 무엇인가 시원한 것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오……, 뿌리가 아주 크구나!"
탁옥룡은 흥분해 소리치며 손놀림을 빨리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꽃송이 근처를 빙 둘러 파놓고 망연자실해졌다.
꽃송이의 뿌리는 꽃에 비해 십 배 크기였다. 굵기는 오리알만한데 놀랍게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방실방실 웃는
사람 모양을 한 뿌리였다.
"인… 인형(人形)? 설마 이것이 전설상의 인형설삼(人形雪蔘)이란 말인가?"
탁옥룡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늘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데에서 가슴이 벅차는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인형설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신세가 된 나의 눈에 띄다니. 그래, 아버님은
내게 이것을 주시기 위해 바람을 타고 이곳으로 나를 불러 들였던 것이다."
그는 흐느끼다가 두 손으로 인형설삼을 받쳐 들었다.
설삼의 과육(果肉)이 주는 촉감은 얼음덩이가 주는 촉감보다도 차가웠다.
그는 갓난아이를 다루듯 조심조심 다루다가는 그 뿌리에 묻은 흙을 털지도 않고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과육은
이빨로 깨물 기회도 주지 않고 이에 닿아 스르르 녹았다.
뿌리서부터 꽃 잎사귀까지 통째로 먹어버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간 뱃속이 얼음물로 가득 찬 듯 차가워졌다.
"으윽……!"
탁옥룡은 갑자기 치솟는 열류(熱流)를 느끼고 신음소리를 냈다. 오장육부가 타서 재가 되는 듯했다.
"이럴 수가? 차가운 기운이 갑자기 용광로의 불길같이 뜨거운 기운으로 화하다니!"
그는 너무도 아픈 나머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벌렁 나뒹굴었다.
그는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흙바닥에 누워 그대로 혼절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잠들지 않았다. 그의 근육이 제멋대로 불끈불끈 일어나며 옷을 북북 찢어버리는 것이다.
근육이 불룩불룩 팽창하며 누더기같이 너덜너덜한 흑삼을 걸레같이 찢어냈다. 머리카락도 뽑히고는 이내
번들거리는 새로운 모발을 키워냈다.
아……, 이것은 탈태환골(奪胎換骨)의 현상이 아닌가?
또 한 가지의 신기한 변화가 있었다.
탁옥룡의 숨결에 색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숨결은 언제부터인가 흰빛을 띠고 있었다.
근육은 꿈틀 꿈틀거렸고 숨결은 누에실같이 흰 기운을 흘리며, 그의 몸 주위에 신령스러운 백무를 일으켰다.
영약의 기운이 녹아 사지백해로 퍼지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아쉬운 것은 그가 운기조식법을 몰라 약 기운을 모두 흡수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그가 인형설삼의 약효를 진원지기로 환원시켰다면, 순간적으로 이백 년 내공을 얻고 만독불침지신(萬毒不浸
之身)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영약의 기운으로 인해 탈태환골 된 탁옥룡은 이전과 전혀 다른 신체의 소유자가 되었다.
수십 년 외공(外功)을 익힌 사람같이 강인한 피부와 십 리 밖의 토끼를 볼 수 있는 매의 눈빛보다도 날카로운
안광을 지닐 수 없었다.
또한 열흘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글을 읽는다 해도 흐려지지 않을 엄청난 정신력도 갖게 되었다.
게다가 탁옥룡의 피 한 방울, 살 한 점이 모두 영약이라 할 수 있으니 그 또한 신비로운 일이었다.
3
십주야(十晝夜)가 지나갔다.
탁옥룡은 열흘 내내 미동도 않고 잠에 취해 보냈다. 죽음보다 깊은 잠이었다.
열하루째 새벽이 될 때였다.
"하암……!"
빙하곡이 하품소리와 함께 깨어났다.
탁옥룡은 길게 기지개 켜며 눈을 떴다. 찰나적으로 섬전(閃電)을 방불케 하는 안광이 번쩍 나타났다가는 사라져
갔다.
그는 주위가 아주 환하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 해는 아직 뜨지 않았는데 이렇게 환히 보이다니……, 내가 어두움을 뚫어보는 안력을 지니게 되었단
말인가?"
탁옥룡은 감탄해 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몸이 새털같이 가볍게만 느껴졌다. 십수 년간 문약(文弱)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탁옥룡에게 있어 사지백해에 힘이
솟구치는 느낌은 정녕 신선한 것이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후려친다면 단단한 얼음을 깨뜨릴 수 있을 것 같구나. 인형설삼을 먹고 힘이 몇 배 세어진
듯하니 역시 영약은 영약이다!"
탁옥룡은 기뻐하다가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예전의 절망감을 잊은 지 오래였다. 충분히 탈출할 자신감에 가슴이 든든해졌다.
"꼭 나간다. 그리고 세상을 혼란시키는 무리들을 모두 쓸어버릴 것이다. 탁가장의 원수 옥룡마궁은 초토로 화할
것이다. 백 년이 아니라 천 년이 지나더라도 나의 복수심은 흐려지지 않으리라!"
그는 맹세를 하고 또 맹세를 했다.
하늘에서는 수일 간 멈추었던 눈발이 다시 날리기 시작했다. 지진으로 인해 그 모습을 드러냈던 빙하곡은 이제
얼마 후 눈에 파묻혀 또다시 설곡으로 화해 버릴 것이다.
탁옥룡은 빙하곡을 벗어날 작정으로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인형설삼으로 인해 전보다 백 배 좋아진 안력 덕에 그는 절벽 사이에 틈이 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엄청난 지진 때문에 절벽에 금이 갔었구나. 흠……, 저 사이를 통해 간다면 이 음침한 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도 같다."
탁옥룡은 절벽 틈바구니로 향하다 한 곳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두터운 얼음에 둘러싸여 있는 홍의인의 시신
때문이었다.
"살게 된다면 저 분을 묻어드리겠다고 맹세했었지."
탁옥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체 곁으로 다가갔다.
아무런 연장도 없이 얼음을 깨고 시신을 꺼내는 것이 힘든 일이었다. 그는 믿을 것이라고는 자신의 주먹뿐이라
여기며 주먹이 으스러져라 불끈 거머쥐었다.
손이 부르르 떨리며 강한 힘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에― 잇!"
탁옥룡은 기합소리를 내며 얼음에 주먹을 쳐댔다.
주먹에 얼음이 닿는 찰나 폭음이 일어났다. 쇳덩이같이 단단하던 얼음이 산산이 박살나 깨지면 안에 있던
홍의인의 시체가 앞으로 넘어졌다.
탁옥룡은 얼른 시체를 받쳐 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와아……, 나의 힘이 이렇게 강해졌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강한 힘에 스스로 감탄하며 홍의인의 시체를 반듯이 눕혔다.
홍의인의 시체는 강시(疆屍)였다. 빳빳이 얼어죽은 시체에서 전해지는 느낌은 차갑고 단단한 쇳덩이 같았다.
"이런 복식은 수백 년 전에나 사용하던 것인데……? 흠,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에나 입었던 옷인 것
같군. 그렇다면 근 천 년 전의 복장이 아닌가?"
탁옥룡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죽어 있으면서도 눈빛을 거두지 않는 홍의인의 눈까풀을 감겨주기 위해서였다.
이때 아주 가벼운 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응……?"
탁옥룡은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홍의인의 불끈 쥐어져 있던 오른 주먹이 활짝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로 빛나는 물체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얼핏 보아 비녀(簪)였다. 투명한 핏빛 옥으로 만든 것인데 길이는 두 치 정도였다.
"이렇게 신령한 빛을 내다니……, 왜 이것이 이 사람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을까?"
탁옥룡은 혈옥차(血玉 )를 손에 쥐었다.
그 느낌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혈옥차 표면에서 홍채(紅彩)가 아른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 빛에 안력이
희미해져 무늬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배(紙背)를 철할 안력을 지니게 된 탁옥룡인지라 광채로 인해 흐릿해진 혈옥차 표면의 무늬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魔王簪(마왕잠)>
비녀의 머리 부분에 새겨진 글이 그것이었다.
"섬뜩한 이름이다. 어이해 비녀의 이름을 마왕이라고 했을까?"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비녀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또 다른 글씨가 새겨져 있는지 살폈다.
그는 마왕잠이라고 쓰인 뒤쪽에서 흠집 비슷하게 남아 있는 몇 개의 글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손톱으로 새긴
글인데 깨알보다 가늘었다.
<불가삼신승(佛家三神僧)의 협공(協攻)을 얕잡아본 것이 후회스럽다.>
내공을 실낱보다 가늘게 뽑아낼 수 있는 초고수가 아니라면 작은 마왕잠 위에 장문(長文)의 글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글은 계속 이어졌다.
<더욱 분한 것은 천하마공(天下魔功)을 집대성한 지존마공(至尊魔功)이 본좌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신승의 후예들이 천하를 주름잡을 것이고 본좌의 이름은 차차 잊혀지리라.
억울하게도 후사를 두지 못했으니 그 누가 본좌의 복수를 해줄 것인가? 언제고 인연 있는 자가 본좌의 신물(信
物)인 마왕잠을 찾는다면 이 글을 보리라 믿는다.
그대는 마왕동주(魔王洞主)에 인연(因緣)이 있는 사람이다. 사천성(四川省) 구정산(九頂山) 칠선봉(七仙峯)
으로 가라. 자야(子夜)에 마왕동부(魔王洞府)를 연다면 본좌의 진전(眞傳)을 구경할 것이다.
그대의 근골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것이라면 그대는 제이의 마중지존(魔中至尊)이 되리라.
빙하곡에서 죽어가며 마중지존이 적는다.>
그런 내용이 마왕잠 뒤쪽으로 가득 덮고 있었다.
탁옥룡은 안광을 집중시켜 마왕잠 위의 글을 다 읽은 후 신비감에 도취되었다.
"마중지존이라……. 흠, 정말 거창한 이름이다. 이 사람은 아마도 선인(善人)은 아닌 것 같구나.
불가삼대신승에게 죽었다고 쓴 것으로 보아 삼대신승이란 분들이 이 분의 악행을 보다 못해 죽였을 것이다."
탁옥룡은 제나름대로 상상하며 마왕잠을 품에 넣었다.
그는 강호무림에 대한 문외한이었다. 만일 그가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마중지존이라는 전설적인 마왕의
존재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마중지존(魔中至尊)!
무림사상 더 강할 수 없다는 마의 제왕과의 연분은 이렇게 시작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그 복연을 실감하지 못했다.
탁옥룡은 동토(凍土)를 깨고 시신을 묻었다. 그리고 눈을 맞으며 절을 올렸다.
"당신이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당신의 뜻은 나에 의해 전해질 것이오."
4
천하가 아주 시끄러워졌다.
옥룡마궁의 발호 때문이고 천 년만에 처음이라 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 때문이었다.
풍운을 부채질한 것은 포달랍궁(包達拉宮)의 중원침입이었다.
과거 옥룡마궁이 정파의 태두(泰斗)였을 시절, 옥룡마궁주와 싸워 양패구상한 바 있던 사람이 바로 현재의
포달랍궁주였다.
그는 옥룡마궁이 봉문을 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수하들을 중원으로 보내 옥룡마궁의 강호장악에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포달랍궁은 중원에 분타를 만들지 않았다. 그럴 경우 중원인의 오해를 사기 쉽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들은 천하 각대문파 중 옥룡마궁에 원한을 갖고 있는 문파의 장문인들에게 한 장의 배첩을 전했다.
<본 궁은 중원무림계에 끼여들어 세력을 차지하기 위해 중원으로 나온 것이 아니오.>
혈미륵(血彌勒) 모찰륵(牟刹勒)이 쓴 글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본인은 사적인 일로 인해 강호에 포달랍궁의 승려들을 들여보냈소. 천명하건대, 본궁의 승려들은 오직 마궁의
고수들만을 상대할 뿐 타파 사람들과는 자웅을 겨루지 않을 것이오.
만에 하나 옥룡마궁 사람이 아닌 타파 사람과 싸우는 본 궁의 승려가 있다면 그 명단을 천하의 어떤 주루든 간에
방(榜)을 써서 붙이시오. 자초지종을 알아본 후 궁법(宮法)을 어긴 자임이 밝혀진다면 그자의 목을 잘라 해를
입은 사람의 가족에게 보내겠소.
본궁이 바라는 것은 공야무군(公冶武君)이 수급뿐이오. 그것을 얻는다면 미련 없이 중원을 떠날 것이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금검(金劍), 은검(銀劍), 동검(銅劍), 철검(鐵劍)의 승려들이 하는 일에 방해를 말라는
것이오.>
포달랍궁은 중원무림계 전체와 싸우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무공이 중원의 어떤 문파보다도 뛰어나다는 자부심을 숨기려 하지도 않아 유아독존격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도 중원인들에게 있어서는 가뭄의 단비 같은 일이었다.
옥룡마궁의 횡포에 숨죽이고 있던 강호문파들은 양대거파의 격돌 속에서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한세가(恨世歌)가 지어져 강호무림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 마궁(魔宮)은 피로 세상을 씻고, 포달랍궁은 피로 마궁을 씻는다.
오호라, 소림(少林)은 어이해 봉문(封門)인가. 차라리 모두 악몽(惡夢)이기를!
힘이 없어 마궁에 저항하지 못하는 협도인들이 신세를 한탄하며 부르는 노래였다.
천하 정세는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싸움은 양궁지전(兩宮之戰)으로 축소되었다.
옥룡마궁 측으로서도 언젠가는 포달랍궁이 중원으로 오리라 예견하고 있었기에, 이역사단(異域四團)의 흉맹(兇
猛)한 오랑캐 고수들을 보내 그들을 막게 했다.
회회공자(回回公子)의 이름이 그로 인해 욱일승천(旭日昇天)했다.
그는 포달랍궁의 고수 이십사 명의 협공을 한 자루 반월신도(半月神刀)로 막아냈다는 전설을 만들었다. 그의
무공은 이역사단주 중 가장 빼어났다.
그의 신도법은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의 존재와 더불어 옥룡천자 역시 더욱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런 수하를 거둘 수 있는 그의 능력 때문이었다.
옥룡천자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아직 이름과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구존(九尊)과 더불어 천하정세를 논하며 은둔생활중이었다.
아직 자신이 나설 때는 아니기 때문일까?
혈미륵이 나타나면 자신도 나타나겠다는 듯 그의 얼굴은 천하일비(天下一秘)로 불려졌다.
그의 얼굴이 부서졌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어떻게 부서졌는지가 비밀일 뿐 그의 얼굴이 부서졌기에 천하가 부서졌다고 서슴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허다했다.
철서생(鐵書生)과 혈미륵(血彌勒)!
옥룡마궁주와 포달랍궁주 두 사람만이 천하의 인걸(人傑)인 듯한 가운데 세 가지 신기한 일이 입에서 입으로
소문났다.
<대파산(大巴山)에 옥룡마궁도들의 묘(墓)가 있다. 벌써 일천 명이 죽어 시산(屍山)을 쌓았다.>
정말 놀라운 소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곳은 천시대묘(千屍大墓)라 불렸다. 무림금지(武林禁地)라고도 불렸고, 달리 마인지묘(魔人之墓)라고도
불렸다.
그곳을 본 사람은 없다. 그 자세한 위치를 아는 사람도 없다.
다만, 옥룡마궁 사람으로 그 근처를 지나치는 사람은 영락없이 실종된다는 것이다.
그 안에는 옥룡마궁에 지독한 원한을 가진 사람이 숨어산다고 했다.
제법 무공이 고강한 옥룡마궁의 궁도들이 그 소문을 비웃으며 찾아갔지만 그들 역시 실종되고 말았다.
가기만 하면 불귀지객(不歸之客)이 되는 천시대묘(千屍大墓)!
그것이 바로 첫 번째 비밀이었다.
둘째 비밀은 봉문한 소림사 안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절기를 무수히 실전(失傳)시켜 종이호랑이가 된 소림사가 봉문한 상태에서 은밀히 힘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옥룡마궁이 십오 년 봉문한 상태에서 백 배 세력으로 자란 일이 소림사에서 되풀이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세 번째 비밀스러운 일은 사천성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아주 신비한 일이었다. 처음 그 일을 목격한 사람의 말을 빈다면 이렇다.
<구정산(九頂山) 전역이 보기(寶氣)에 싸였다. 특히 자시(子時)가 되면 보기가 너무도 엄청나 눈이 멀 정도다.
그 빛을 핏빛이다.>
사천성 구정산에서 무가지보(無價之寶)가 나타났다는 말은 천하정세에 영향을 끼칠 만했다.
그 보물을 얻는 문파는 마궁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해진다는 근거 없는 풍설까지 나돌자 더욱
시끌시끌해졌다.
너도나도 사천행(四川行)이었다.
그것을 얻은 문파는 바로 천하제일문파(天下第一門派)가 되리라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대파산 천시대묘와 소림사의 의혹은 구정산의 신비로움에 비할 때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할 정도였다.
천하는 너무도 광활하다.
수만 명으로 이루어진 옥룡마궁, 포달랍궁이었지만 남칠십삼개성 구석구석을 모두 점거할 수는 없었다.
구정산에서 일이 그것을 증명했다.
천하가 시끄러워져도 나서지 않았던 수많은 기인이사들이 구정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막신타자(大漠神舵子)와 벽안서시(碧眼西施)!
미추(美醜)에 있어 쌍절(雙絶)이라 불렸던 두 명의 세외고인이 소문을 듣고 구정산에 나타났다고 했다.
그들은 육십 년 전부터 죽었다고 소문난 사람이었다.
옥룡궁의 창시자인 옥룡대제의 설혈쌍도(雪血雙刀)에 패해 다시는 무림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한 그들이었다.
그런 전대마두들마저 구정산 어귀에 모습을 나타내자 사람들은 구정산에 진짜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모두 아연실색했다.
그들의 시신은 칠선봉(七仙峰) 정상으로 가는 어귀에서 발견된 것이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다
썩은 시체로 화한 상태였다.
그 일이 있은 후에도 네 명의 기인이 구정산으로 향했다.
절대독왕(絶代毒王)!
고독(蠱毒)과 부시독(腐屍毒)으로 천하를 질타했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독존(毒尊)이라는 천하제일독(天下第一毒)과 더불어 무림쌍독(武林雙毒)이라 불렸던 사람이다.
독존이 죽었다고 소문난 후 그는 자연스럽게 천하제일독이 되었다. 그의 거처는 옥룡마궁이라도 범접하지 못할
금지가 된 절도였다.
천산신의(天山神醫) 오두평(吳斗平)!
새화타요 무림의 편작(扁雀)이라 불리던 사람이 구정산으로 온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는 오래 전 철서생에게 죽은 천산환영궁주(天山幻影宮主)와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은 사람이었다.
환영궁주는 철서생 손에 죽었고 환영궁은 그로 인해 멸절(滅絶)되었다. 천산신의는 그 일로 인해 충격을
받았는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그가 구정산에 모습을 드러냈다.
광개(狂 )!
세 번째 기인인 그는 개방( ) 최고 배분이었다. 현임 개방주는 그에게 사손(師孫) 뻘이었다.
그의 나이는 백오십 세에 달했고, 독주(毒酒)와 구육(狗肉)만 갖고 있으면 비록 무덤 안쪽이라 해도 극락같이
산다는 광개가 팔십 년만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대체 구정산의 보기(寶氣)는 어떤 것이기에 세상에 까맣게 잊고 살던 기인들이 속속 나타난단 말인가.
네 번째 기인 역시 구정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그는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그만한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第五章 천하기인(天下奇人)들의 최후
소년은 추레한 옷차림을 하고 구정산에서 백 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있었다. 얼굴이 아주 추악한 흑의인인데
나이는 십오 세에 불과했다.
그는 불타는 듯한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온 천하를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소문에 끌려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아, 마중지존(魔中至尊)의 절기를 얻는다면 모든 한을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아주 낭랑했다.
그는 바로 탁옥룡이었다. 여량산을 떠난 지 보름만에 구정산이 멀리 보이는 곳에 이른 것이다.
오는 도중에 그는 어렴풋이나마 전설상의 마왕인 마중지존에 대해 듣게 되었다. 워낙 오래 된 천 년 전의 얘기라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고강한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구정산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구정산에 보물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수차 듣게 되었다.
"우연치고는 이상한 우연이다. 마왕잠을 얻고 겨우 목표를 정했다 싶었는데 이런 소문을 듣게 되다니……."
그는 고개를 저으며 머리 위쪽에 손을 댔다. 마왕잠은 그의 머리를 고정시키는 비녀 삼아 쓰이고 있었다.
탁옥룡은 얼음보다 차가운 마왕잠을 한참 동안 쓰다듬다가 부지런히 걸었다.
그는 자신의 목적지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는 사실에 상당한 부담감을 가져야 했다.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속속 운집되고 있다면 자칫 마왕지존의 유물을 뺏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뜨거운 차 한 잔 식을 시간이 지났다.
탁옥룡은 소로를 따라 걷다가 유람객들을 부르고 있는 작은 마을 어귀로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 마을은 본래
한산한데 지금은 낙양(洛陽)이나 개봉부(開封府)같이 번잡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무사들이었다.
"옥룡마궁측에서도 보기(寶氣)의 신비함에 끌려 밀사(密使)를 보낼 예정이라네. 보물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보물은 조만간 옥룡마궁의 손에 들어갈 것이야."
"헤헤……, 그렇지 않을 걸세. 보물은 하늘이 정한 주인이 있는 법이 아닌가? 천하의 반을 얻은 옥룡마궁이나
인심을 얻는 데에는 실패했고 공적(公敵)이 되었으니 보물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네."
사람들이 떠들며 지나쳐 갔다.
그들은 탁옥룡을 슬쩍 바라보다가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문둥이를 본 듯한 혐오스러운 표정들이었다.
탁옥룡은 그다지 노여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 남에게 추악감을 주어 남이 자신을 볼 때마다 구역질을
한다는데 아주 익숙한 상태였다.
그러나 원한이 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 빚을 꼭 갚겠다. 무사가 된다면 제일 먼저 옥부용을 찾아 그 계집의 얼굴을 짓뭉개 버릴 것이다.'
그는 옥부용의 얼굴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번잡한 거리를 타고 아주 구수한 육향(肉香)이 후각을 자극했다.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이층 주루가 있었다.
<仙居樓(선거루)>
제법 커다란 현판을 달고 있는 주루 안에서 풍기는 고기 굽는 냄새는 탁옥룡의 허기진 배에 쪼르륵 소리를 더했다.
"인형설삼 기운으로 십여 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텼지만 이제는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구나. 그러나 탁가의
후예로 어찌 빌어먹을 수 있는가?"
탁옥룡은 먼지뿐인 주머니를 뒤져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주루에서 멀리 떨어진다면 허기가 없어지지 않을까 했지만, 창자에서는 천둥 치는 소리가 나고 콧구멍은 고기
냄새를 조금이라도 더 맡기 위해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탁옥룡이 허기진 표정으로 주루를 스쳐 지나가려 할 때였다.
"허어……, 보기 드문 근골(筋骨)이로다. 몸 전체에서 신광(神光)이 일다니……. 이곳에서 인중룡(人中龍)을
볼 줄이야."
연달은 감탄사와 함께 탁옥룡의 어깨 곁을 스치며 가로막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흐음……, 상처가 크구먼?"
그는 탁옥룡 앞에 서서 동정심을 표했다. 그것은 탁옥룡이 얼굴이 망가진 후 처음 듣는 인정스러운 말이었다.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누런 베옷을 걸친 노인이었다.
아주 청수하게 생긴 노인인데 큼지막한 나무 상자를 쥐고 있어 이채로웠다.
'나를 보고 감탄했단 말인가?'
탁옥룡이 얼떨떨해 할 때였다.
"사부, 제자는 배가 몹시 고파요."
아주 영롱한 목소리가 나며 푸른 그림자 하나가 탁옥룡의 머리 위를 타넘어 노인 바로 곁으로 떨어져 내렸다.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내린 미소녀는 노인의 왼쪽 소매를 붙잡고 늘어졌다. 미소녀는 취의(翠衣)를 걸치고
있는데, 옷매무새와 얼굴 생김새가 너무나도 깜찍하고 귀여웠다.
두 개의 진주알 같은 눈망울이 특히 아름다웠고 상당히 오똑한 코와 오만한 기운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강했다.
"사부, 천산(天山)에서 여기까지 오는 중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잖아요? 저기 가서 홍소육
(紅燒肉)과 해삼탕(海蔘湯)을 먹자고요."
취의소녀의 응석은 황의노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게 했다.
"허허……. 옥지(玉芝)야, 너의 응석은 천산에서보다 더하구나."
"얼마 후면 무가지보가 사부님 것이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 사도(師徒)의 무공은 천하제일이 되겠지요. 호호
……, 그렇게 되면 환영궁(幻影宮)의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讐)인 공야무군(公冶武君)의 수급은 아주 쉽게
취할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소녀는 당세제일인인 옥룡마궁주 옥룡천자의 목을 자르겠다는 말을 함부로 내뱉았다. 그것은 자칫 살신지화를
불러일으킬 만한 말이기도 했다.
노인은 제자가 끔찍한 말을 하는 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 허기를 채우자꾸나!"
그는 미소녀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탁옥룡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신기를 담고 있었다.
"자네의 상처는 아주 심한 것이네. 하지만 약을 잘 쓴다면 나을 수 있네."
"상처가 낫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탁옥룡은 그의 호의에 감복해 두 손을 모았다.
"허허……, 괜찮다면 함께 식사를 하지 않겠는가?"
노인의 손이 주루 쪽을 가리켰다.
탁옥룡은 너무도 허기진 터라 황송해 고개를 끄덕이려 하다가 갑자기 입술을 다물었다.
옥지라고 불린 미소녀의 눈빛이 그를 냉담하게 만들었다.
'나를 모멸하고 있다.'
탁옥룡은 자신에게 집중된 옥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조롱에 가슴이 뒤틀렸다. 그는 애써 감정을 억제하며 정중히
사양했다.
"호의나마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호오, 대가 센 아이로군.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나저나 보기(寶氣)에 현혹되어 왔다면 당장
걸음을 돌리도록 하게, 이곳은 용담호혈(龍潭虎穴)이라네."
노인은 손가락으로 구정산 중 가장 높은 봉우리 하나를 가리켰다. 그 봉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은은한 홍채(紅彩)
로 덮여 있었다. 노을보다 수백 배 밝은 빛이고 아주 신비로웠다.
"오……, 저것이구나!"
탁옥룡은 보기에 현혹되어 입을 크게 벌렸다. 그 빛은 이상하게도 낯이 익었다.
'그래, 마왕잠의 빛과 너무도 닮았다.'
탁옥룡이 감탄을 하고 있을 때였다.
"흐음, 모를 일이로다. 어린 녀석의 출현이 천기(天機)에 어떤 작용을 하기에 구정산의 보기가 최절정에 달한단
말인가?"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의노인과 미소녀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생면부지의 앉은뱅이 노인 하나가 손바닥으로 몸을 이동시키며
다가서고 있었다.
노인은 단 한 손바닥만으로도 몸을 날렵히 이동시켰다. 다른 손에는 큰 고깃덩어리가 쥐어져 있었다.
"쩝쩝……, 역시 고기는 개고기가 제일이여."
노인은 고깃덩어리를 입안에 넣고 죽죽 찢어먹으며 탁옥룡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는 거지였다. 흰 머리카락이 세 자 넘는 길이로 흐트러져 등판을 덮고 있었다.
눈가에서는 진물과 고름이 흘러내렸고 손등이며 얼굴 피부 위에는 검고 붉은 종기가 무수했다. 가히 추물 중의
추물이라 할 만했다.
"아마도 네놈은 구정산의 보기와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다. 흠……, 노부가 만에 하나 보물에 눈독을 들이고
여기 온 사람이라면, 네놈의 살가죽을 홀랑 벗겨서라도 어떻게 보기를 더욱 강하게 했는지 알아봤을 것이다."
거지 노인의 목소리는 아주 거칠었다.
탁옥룡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뉘시온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흐흐……, 노부는 광개(狂 )다."
아……, 광개라면 전대의 대기인 중 하나가 아닌가?
그는 불쑥 고깃덩어리를 내밀었다. 먹음직스러운 고기 냄새가 탁옥룡의 후각을 자극했다.
"다른 것은 모르나 노부는 굶은 사람을 분간하는 데에는 재간이 있다. 천산신의(天山神醫)의 식사 대접은 거절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흐흐……, 이 미친 거지의 개고기 대접은 거절하지 못한다."
그가 쥐고 있는 것은 들개의 뒷다리였다. 고깃덩어리에는 광개의 침이 번질번질 묻어 있었다.
탁옥룡은 구역질을 느꼈다.
그가 겪어본 것 중 가장 더러운 대접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양하지 않았다. 더러운 몸뚱이와 침이 묻은
개다리이지만 그를 위한 후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탁옥룡은 그것을 얼른 받아 한 입 덥석 물어뜯었다.
"보통 놈이 아니구나. 흐흐……, 이런 곳에서 마음에 드는 녀석을 만나게 될 줄이야!"
광개는 탁옥룡이 타액 묻은 개다리를 건네 받고 맛있게 먹자 박장대소를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너는 노부가 본 녀석 중 세 번째로 뛰어난 놈이다."
"애석합니다, 첫째라면 모르나 어이해 셋째라 하십니까?"
"흐흐……, 아직 진흙을 털지 못했기에 세 번째로 칭했다. 진흙을 털어 버린다면 노부가 본 기재 중 최고다."
탁옥룡은 사뭇 궁금함을 금치 못했다.
"다른 두 사람은 누구 누구 인지요?"
"소림일심행(少林一心行)과 환영궁(幻影宮)의 환영서생(幻影書生)이다. 둘 다 세상에서는 찾지 못할
사람들이지."
두 사람의 이름은 탁옥룡에게 낯선 것이었다.
광개는 침방울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일심행은 소림 장문인이 되어야 할 몸으로 무작정 면벽(面壁)에 들어 소림 최고절기 천강복마수(天 伏魔手)를
절전(絶傳)케 했으니 백도죄인(白道罪人)이다. 환영서생은 음약(淫藥)을 먹고 사매(師妹) 환영선자(幻影仙
子)를 강제로 범해 그 벌로 무공을 잃고 파문(破門)당해 사라진 환영궁의 죄인이지."
"두 사람이 다 사라졌다면, 하하……. 제가 곧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겠군요?"
"흐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탁옥룡은 넌지시 물었다.
"현 천하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옥룡천자가 아닙니까? 그는 왜 말하지 않습니까?
"그는 광마(狂魔)다. 사람의 범주를 넘은 자다. 무수한 마두들을 끌어모아 옥룡궁의 전통에 먹칠을 한 아주
고약한 자다."
광개의 눈에서 원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마궁에 원한이 있군요?"
탁옥룡은 개다리 뜯어먹기를 멈췄다.
"흐흐……,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세히 말한다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 왔다고
할 수 있다."
"확인이라니요?"
"흐흐……!"
광개는 대답 대신 기괴한 웃음을 흘리고는 탁옥룡의 몸을 또 한번 살폈다.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준다면 네게 노부가 여기 온 사연을 말해주겠다. 어떠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느냐?"
"어떤 부탁입니까?"
"별 것 아니다. 노부를……, 이제부터 노형(老兄)이라 부르라는 것이다."
"예에……?"
탁옥룡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연배로 따진다면 그는 자신의 양부조차 할아버지라 칭해야 할 정도로 늙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초면에 불쑥
결의형제를 맺자는 제안에 할말을 잃었다.
"흐흐……,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으나 쓸 만한 사람은 없다. 백 수십 년만에 정말 쓸 만한 사람을 만나
망년지우(忘年之友)로 삼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제가 어찌 할아버지를 형이라 부르겠습니까?"
"전통에 속박된다면 대장부가 되지 못한다. 당장 노형이라 부르거라!"
광개의 말은 아주 엄숙했다.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탁옥룡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 마음을 정한 듯 옷깃을 여미고는 정중히 배례의 자세를 취했다.
"좋습니다, 노형님! 개다리 하나를 얻어먹은 아우 탁옥룡이 처음으로 노형님께 절을 드립니다."
탁옥룡은 무릎을 땅에 대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허리를 펴고 말았다.
광개의 손바닥에서 무형강기가 일어 그를 막은 것이다.
"마음으로 정했으니 무슨 형식이 필요하겠느냐? 앉거라."
탁옥룡은 붕 떠올랐다가 가부좌를 한 채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
'내 몸을 공깃돌 놀리듯 하다니, 이 분은 절세고수(絶世高手)시다. 아……, 이 분의 절기를 전수받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탁옥룡은 자신이 기우(奇遇)에 접했음을 알고 저으기 흥분했다.
광개의 표정은 의외로 진지했다.
"노부는 개방죄인( 罪人)이다."
"죄인이라니요?"
"그렇다. 지금 옥룡마궁의 충견(忠犬) 중의 충견인 수만 명 개방제자들에 대한 죄인이다."
"개방도 마궁에 속합니까?"
"그렇다. 이역사단은 주로 살인을 맡고 있고, 개방은 연락을 맡고 있다. 개방도들이 마궁의 수족이 되지
않았다면 마궁은 천하도처에 흩어져 있는 여러 마두들을 끌어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표정은 안쓰러울 정도로 침통했다. 그는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아……, 그들은 마궁을 따른다기보다 십절죽부령(十絶竹符令)에 복종하고 있다. 이역사단이 그들 조종(祖宗)
들의 유언에 따라 마궁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듯 말이다."
탁옥령은 아직 강호의 지식이 미흡했다.
"십절죽부령이라니요?"
"그것은 개방 최고 권위를 지닌 것이다. 태상방주(太上 主)의 신물(信物)이기도 하지."
"으음, 대단한 신물이군요."
"지금 그것의 주인은 개존( 尊)이라는 자다. 그는 옥룡구존(玉龍九尊) 중 하나이고 천자호법(天字護法)에
속한다."
"그 사람은 노형님과 아는 사이입니까?"
광개는 회한 어린 괴소를 흘렸다.
"알다 뿐이냐? 흐흐……, 사실 그 녀석은 노부에게서 무공을 배웠다."
"예에, 그렇다면……?"
"그 녀석은 노부의 전인으로 사십 년을 보냈다. 하지만 성질이 포악해 결국 노부의 손에 의해 제명(除名)
당했었지."
탁옥룡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되었다.
"아……, 놀라운 일이군요."
"비참한 일이지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 녀석은 그 일로 인해 개방을 원망했고 노부를 저주했다. 놈이
영부의 주인이 되어 개방도들을 함부로 다루고 있는 이유는 그때의 원한이 지극히 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찌 그 사람의 물건이 되었는지요? 그는 제명당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비밀을 풀기 위해 여기 왔다."
광개는 말하며 두 다리를 쓸었다.
넓적다리 위쪽에서부터 흐물흐물 녹아 버린 두 다리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십 년 전이다. 노부는 은거지에서 지독한 독에 당했다. 덕분에 두 다리를 잃고 말았다. 원래는 죽어야 했는데
몸뚱이가 단단해 독에 녹지 않았던 것이다."
"누… 누가?"
"그것은 모를 일이다. 그는 노부가 갖고 있던 십절죽부령을 훔치기 위해 노부를 독으로 암산했다. 그런 독을 쓸
사람은 천하쌍독(天下雙毒)뿐이다. 분명 천하쌍독 중 한 사람일 것이다."
탁옥룡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사람들의 명호가 거론될 때마다 다시금 그들의 존재를 되물어야 했다.
"천하쌍독은 누굽니까?"
"독존(毒尊)과 절대독왕(絶代毒王)이 바로 천하쌍독이다. 노부가 여기 온 이유는 절대독왕이 이곳에 왔다는
소문 때문이다. 그가 나를 해하고 나서 영부를 훔쳐 개존에게 전했는지를 알고 싶어 온 것이지. 한데 이상한
것은 절대독왕과 마궁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것이다."
광개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독존이 더 유력한 흉수이나 그는 이미 죽었다고 소문이 난 상태다. 이십 년 전 옥룡대제(玉龍大帝)와 싸우다
양패구상한 이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독은 천하제일이지. 옥룡대제가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죽은
이유는 독존과의 싸움에서 입은 독상이 도졌기 때문이다."
그는 무림의 비밀을 아주 많이 알고 있었다. 비록 천하에서 가장 해박하다 할 수는 없지만 그는 이갑자 이래 살아
있는 무림의 역사라 할 수 있었다.
그는 탁옥룡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다음 품 안에서 누런 양피지 비급 한 권을 꺼냈다.
"보기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노형은 떠나야겠다. 이것은 네게 주는 선물이다."
"무엇입니까?"
"허허……, 너 같은 기재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것이다."
광개는 껄껄 웃으며 비급을 전했다.
< 十大絶學(개방십대절학)>
겉장에 그런 글이 쓰여 있었다.
탁옥룡은 한눈에도 그것이 개방이라는 강호거파의 절기가 수록된 비급임을 알 수 있었다.
"아……, 이 귀한 것을……?"
"너는 천운(天運)을 타고났다. 장차 큰 사람이 될 것이다. 그때 개방을 도와달라는 의미에서 너와 결의형제를
맺은 것이다. 만에 하나 노형이 절대독왕에게서 의문을 풀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네가 노형의 유지를 이어받아
개방의 십절죽부령이 마궁에 들어간 연유를 알아봐 주기 바란다."
광개는 말을 마치고는 손바닥으로 땅을 쳤다.
"허허허……, 세상의 기재를 동생으로 두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도다!"
광소성과 함께 그의 몸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는 취선유영(醉仙遊影)의 신법을 시전해 순간적으로 아주
멀리 사라져 갔다.
"아……, 기인이시다."
탁옥룡은 혀를 내두르며 비급으로 시선을 돌렸다. 개다리를 건네던 따뜻한 온정이 책에 담뿍 담겨 있었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신공기초가 수록되어 있었다.
타구봉법(打狗棒法), 포박술, 권장지법(拳掌指法), 취팔선보(醉八仙步)를 비롯한 개방 비전절예가 깨알만한
글자로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나 하나가 대단한 절기였다.
천하제일의 절기로는 부족하지만 강호고수가 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절기들이었다.
'이 절기를 익힌다면 최소한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겠다.'
탁옥룡이 그것을 매만지며 감탄의 눈빛을 흘리고 있을 때 어둠을 뚫고 스쳐 지나치는 흑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그
사람은 순간적으로 탁옥룡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단히 빠르다. 노형님에 비길 만하다?"
탁옥룡이 흑영이 사라져 간 쪽을 바라보며 혀를 내두를 때였다. 뒤쪽에서 다시 한 번 경미한 소리가 났다.
"으음……, 아직 떠나지 않았구먼?"
낯익은 음성이 고막을 때렸다. 잠시 전에 만났던 황의노인이 나타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색은 백지같이 창백했다.
"할아버지, 어인 일이십니까?"
탁옥룡이 깜짝 놀라 묻자 황의노인의 눈에서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혹시 검은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을 못 봤나?"
"봤습니다. 아주 빨리 저쪽으로 갔습니다."
"으음……, 한 발 늦었군."
황의노인은 탄식하며 몸을 휘청였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쉬다가 탁옥룡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에게 추태를 보여 미안하네!"
"아닙니다. 한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제자 아이가 납치당했네."
"예에……?"
황의노인은 비통한 표정이 되어 탄식했다.
"구정산으로 온 것이 잘못이었네. 아아……, 공연한 허욕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기연을 얻기 위해 온 것이
실수였네."
"누가 그 소녀를……?"
"절대독왕이란 자일세."
탁옥룡은 다시 한 번 그 명호를 듣고는 나직이 외쳤다.
"절대독왕?"
"그 자는 오래 전부터 노부를 경쟁 상대로 여기고 있던 자네. 공교롭게도 그 자의 독공과 노부의 의술은 견원지간
(犬猿之間)이었네. 그는 노부가 보물을 취할까 두려워 제자 아이를 납치해간 것이네.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서지."
황의노인은 사실은 천하의 기인이었다.
그는 천산신의(天山神醫)라는 불리는 천하제일의 신의로 당세의 성자였다.
목이 잘린 자가 피를 흘리기 전이라면 회생시킬 수 있을 정도라 했다.
천산신의는 탄식하다가 보기에 휩싸여 있는 산 위를 응시했다.
"저 신비한 보물은 절대독왕에게 가기 쉽네. 아……, 정말 애석한 일이라네. 의형(義兄)의 원한을 풀려면 필히
무가지보를 취해야 하는데……."
"의형은 어느 고인(高人)이신지요?"
"환영신군(幻影神君)이네. 그는 옥룡천자가 철서생으로 행세하던 시절 무참히 살해당한 정파의 기인이네.
노부가 천산에 숨어살다 여기 온 이유는, 마궁주를 죽이기 위한 무공이나 보물을 얻어 그 아이에게 주기
위함이었는데 모두 수포로 돌아갔네. 의술로는 구하지 못할 타락한 세상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네."
천산신의는 아주 상심한 상태였다.
그는 절대독왕에게 제자를 납치당했다는 데에서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마저 상실하고만 것이다.
일패(一敗)란 범인들에게 있어 흔한 일이다. 하지만 천산신의 같이 자부심 많은 기인에게 있어 패배했다는
사실은 지극히 괴로운 일이었다.
"독공일로(毒功一路)에 든 자가 의술일로(醫術一路)에 든 노부를 능가하다니……, 이것이 쓸데없는 책이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천산신의는 탄식하다가 품안에서 책자 한 권을 꺼냈다.
<天山醫書(천산의서)>
네 자가 선명한 금박으로 적혀 있었다.
천사신의는 분을 못 이기고 그것을 찢으려 하다가 탁옥룡의 맑은 눈빛을 보고는 생각을 돌린 듯 책자를 내밀었다.
"받게."
"예에? 어찌 제가 이 것을 받겠습니까?"
"허허……, 노부는 이제부터 의원이 아니네. 보물 구하는 일에 실패했으니 복수행을 시작하는 일이 목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네. 노부는 이제부터 살인자가 될 것이며 의술을 쓰는 의원으로 남지 않을 것이네. 이것을
자네에게 선물할 테니 잘 익혀 자네를 지키고 사람을 구하는데 쓰기 바라네. 당부할 것은 읽고 외운 다음 태워
버리라는 것이네."
천산신의는 씁쓸히 말한 다음 책자를 탁옥룡에게 전했다.
그리고는 눈을 반개한 채 서쪽을 향해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는 천리전음(千里傳音)
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그의 전성이 끝나자 먼 곳에서 광폭한 음성이 들려왔다.
"으하하……, 잘 생각했도다. 손녀딸은 여기 두고 가니 어서 데리고 구정산을 떠나라!"
그 직후 아주 우렁찬 음성이 뒤를 이었다. 바로 광개의 외침이었다.
"으하하……, 독왕! 네놈이 바로 여기 머물러 있었구나!"
천둥 같은 외침이 사라지기도 전에 만균(萬鈞) 뇌정(雷霆)이 떨어져 거석을 박살내는 굉음이 구정산을 들썩였다.
꽈― 꽈꽝!
연이은 폭음이 능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누가 독왕을?"
천산신의가 흠칫 놀랐다.
"저의 노형님이십니다."
탁옥룡이 크게 말하자 천산신의가 아연실색했다.
"소… 소년의 노형이라니?"
"광개라는 분이십니다. 조금 전 저와 결의형제를 맺었지요."
"오……, 광개! 그 분이 살아 계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가보세."
천산신의는 탁옥룡의 완맥을 거머쥐고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순간적으로 한 점이 되었다. 탁옥룡으로서는 숨이 막힐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십수리를 가로질러 칠선봉 아래쪽에 펼쳐져 있는 울창한 숲 앞에 이르게 되었다.
"분명 이쪽에서 들려왔는데?"
천산신의는 탁옥룡을 팔과 허리 사이에 끼여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갔다.
십여 걸음 갔을까?
경미한 바람소리와 함께 두 사람 앞으로 들이닥치는 금포복면인 하나가 있었다.
그의 두 팔을 내밀고 있었는데 녹의소녀 한 명이 들려 있었다.
"옥지야!"
천산신의는 깜짝 놀라며 금포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그는 움찔하며 몸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복면인의 손바닥에서 일어나는 무형강기의 힘이 그를 꽉
눌러버린 것이다.
천산신의의 얼굴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으음……, 태음일원신공(太陰一元神功)을 펼치다니……?"
"눈매가 매섭구나. 노괴는 어떤 자인가?"
복면인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다. 그리고 지극한 한기를 싣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이 알지 못할 희미한 동요를
띠고 있는 눈빛이었다.
"천산에서 왔다.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쌍도지주(雙刀之主)를 죽이자는 것이다."
천산신의가 냉담하게 말하자 복면인은 나직이 웃었다.
"하하……, 환영궁의 벗이었구나. 그렇다면 본좌로서는 싸울 흥조차 나지 않는다. 하수와 싸워 명예를 더럽힐 수
없지."
복면인은 손가락 하나를 튕겼다.
피잉―!
푸른빛이 도는 지력이 쏟아져 나왔다. 그 속도는 가히 전광(電光)이었다.
옷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천산신의의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토록 무서운 고수를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피할 수 없는 수법이다. 너무나도 무서운 공력이고 너무나도 무서운 출수다. 노부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시전하는 듯하구나!'
천산신의는 눈두덩을 꿈틀거리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손가락으로 탁옥룡의 허리춤을 찍었다.
탁옥룡은 바짝 긴장한 상태에서 연마혈(軟麻穴)을 점혈당했다.
"으음……!"
그는 신음소리를 내고 축 늘어졌다.
천산신의는 탁옥룡의 몸을 내려놓고는 복면인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아이다. 죽이지 마라!"
"후후……!"
복면인은 실소를 흘릴 뿐이었다.
"네가 철서생(鐵書生)임을 안다. 너와 싸우고 싶다."
천산신의가 엄숙히 말하자 복면인은 음험히 웃다가 비스듬히 흔들었다.
"어리석은 자! 일초면 승부를 낼 수 있다."
흰 그림자가 뿌려지더니 땅에 누워 있던 탁옥룡의 몸뚱이가 실 끊어진 연처럼 훌훌 날아가 숲으로 떨어졌다.
"네… 네가 어찌 그 아이까지?"
천산신의는 안타까움과 분노에 부르르 떨었다.
"본좌를 본 사람은 죽는 것이 법이다. 나를 따라와라!"
복면인은 차갑게 외치고는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는 바람을 타고 유령처럼 날았다.
천산신의는 주먹을 불끈 쥐다가 탁옥룡이 날아간 쪽을 바라봤다.
"불쌍한 아이……. 장수다복(長壽多福)할 상(相)이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휘휘 젓다가 복면인을 따라 갔다. 그도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났을 때,
"으으……, 지독한 자다!"
숲 속에서 비틀거리며 걸어나오는 피투성이 소년이 있었다.
오공(五孔)으로 피를 줄줄 흘리며 걸음을 옮기는 소년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그는 영문도 알지 못하고 멀리
날아갔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이다.
연마혈의 점혈은 자연히 풀리는 혈도였다.
그가 용케도 죽지 않은 이유는 인형설삼을 먹어 탈태환골한 신체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금강불괴지신은
아니었지만 웬만한 내가공력에는 능히 견딜 수 있는 그였다.
만일 그를 죽이려 했던 복면인이 멀쩡한 그를 보았다면 화가 나 백 장 높이 솟구쳐 올랐을 것이다.
탁옥룡은 분루를 흘렸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영문도 모르고 당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했다.
"그 노인장은 아니다. 분명 금빛 옷을 걸친 자이리라. 그 자가 내게 무슨 원한이 있어 나를 친단 말인가?"
주변 어디에도 천산신의나 복면인은 보이지 않았다.
탁옥룡은 허탈감을 느끼며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그는 구정산 깊숙한 곳까지 와 있었다.
얼마를 갔을까?
"으음……, 그 애송이가 이리도 지독할 줄이야! 으윽……, 놈이 천하를 얻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고막 속으로 파고드는 신음소리가 있었다.
피범벅이되어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흑의노인 하나가 모습을 보였다.
그 배에는 사발 두 개 만한 구멍이 파여 있었다. 구멍에서 오장육부가 줄줄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 몸을
하고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가히 기적이었다.
"흐흐, 이리도 허망하게 죽을 줄 알았다면 살아 생전에 착한 일을 많이 했을 텐데……."
흑의노인은 죽음을 기다리며 중얼거렸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선인(善人)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전대의 마두였던 그도 죽음에 이르러서 참회를 하는
것이다.
"흑시……, 독왕(毒王)이란 분이 아니십니까?"
전신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추면소년이 그를 향해 다가섰다.
"흐흐……, 노부를 알고 있다니? 웬 녀석이냐?"
흑의노인의 얼굴은 핏물로 뒤덮여 본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저는 탁옥룡이라 합니다."
피투성이 추면소년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그가 전대마두인 절대독왕에 대해 알 리 만무했지만 광개와 대적한 인물이라면 그밖에 없으리라 판단했다.
"흐흐……. 그래, 어떻게 노부를 아느냐? 그리고 이곳은 이미 대도살장(大屠殺場)인데 어떻게 살았느냐?"
"대도살장이라니오?"
"칠선봉이 시체로 덮였다. 옥룡천자가 친위고수들을 이끌고 와 닥치는 대로 죽였다. 흐흐……, 허황된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온 기인이사들이 떼주검으로 화한 것이다."
죽어가는 노인은 바로 절대독왕(絶代毒王)이었다.
탁옥룡은 마른침을 삼키며 바짝 다가갔다.
"혹시 저의 노형님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것을 묻기 위해 왔습니다."
"네 노형이 누구냐?"
"잠시 전 노인과 싸운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절대독왕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있었지. 흐흐, 하지만 그는 너의 노형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
"그 분이 광개라면 바로 저의 노형님이십니다."
탁옥룡의 말이 끝나자 절대독왕은 혀를 내두르며 탁옥룡을 직시했다.
"네… 네가 광개의 의제(義弟)라고? 그럴 수가……?"
절대독왕은 혀를 내두르며 탁옥룡을 자세히 살펴봤다.
"제 말은 사실입니다. 그 분은 제게 개방의 비급까지 주셨습니다. 분명 그 분의 목소리를 들었었는데 지금 어디
계십니까?"
탁옥룡이 또렷하게 응대하자 절대독왕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한 곳을 가리켰다.
"그는 저기 있다."
그가 가리킨 지점에는 시커먼 피고름이 풀숲을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어… 어디요?"
탁옥룡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고름이 바로 광개다. 흐흐……, 그는 독강(毒 )에 맞아 녹아버렸다. 노부보다 내공이 강한 광개는 죽고
노부가 아직 죽지 않는 이유는 노부 역시 칠성수준의 독강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탁옥룡은 가슴이 턱 막혔다.
"저… 저 핏물이 저의 노형님이시라니요? 말도 안 돼! 누… 누가 노형님을……?"
"천하의 그 누가 우리를 상대하겠느냐? 옥룡천자가 있을 뿐이다. 그가 단 일장으로 우리 둘을 쓰러뜨렸다.
광개는 즉사했지만……. 크흐흐……, 노부는 독혈인(毒血人)이라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옥… 옥령천자!"
탁옥룡은 몸을 휘청이며 피고름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바닥에 질퍽한 피고름이 광개라는데, 눈물을 흘리며 피고름을 움켜쥐려 했다.
"안 돼! 손을 대면 손이 녹는다. 노형을 생각하는 정리가 대단하나…… 그 독혈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절대독왕은 급히 외치며 손을 품안에 넣었다. 이어 그는 둘둘 말린 종이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것을 익힌다면 그것을 만지고도 녹지 않을 수 있다."
그는 힘이 다했는지 풀썩 고개를 떨구었다.
"광개, 그 늙은 거지가…… 어떻게 너같이 어린 꼬마를……"
그는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광개와 절대독왕 같은 절세적 고수들로서는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누구도
그들이 이런 산 속에서 고혼이 되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독왕이 던진 두루마리는 탁옥룡의 왼쪽에 떨어져 뒹굴었다.
<毒王經(독왕경)>
그런 글이 적힌 두루마리였다.
탁옥룡은 그것이 아주 귀중한 물건이라는 것을 느끼기보다 속절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남지 않았다. 모두 다 죽었어…… 천산신의라는 그 할아버지도 죽은 것일까?"
그는 치솟는 분노에 주먹을 불끈 쥐며 하늘을 우러렀다.
"내게 힘이 주어진다면 첫째로 옥룡마궁을 없애겠습니다. 그것이 비록 마의 힘일지라도 그것을 빌고 싶소!"
탁옥룡은 절규하다가 마왕잠을 꺼내 쥐었다.
그러자 마왕잠에서 일어나는 한기가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며 사지백해를 아주 시원하게 했다. 극심했던 고통이
그로 인해 사라질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왕잠이 벌떼처럼 소리를 내며 미동하기 시작했다. 붉은빛이 더 강해졌고 우는 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신기한 일이다. 검이 운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비녀가 운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탁옥룡은 신비감에 취해 마왕잠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마왕잠은 어떤 힘에 끌려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것은 어디인지를 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마치 자석(磁石)이 쇠를 당기는 듯하군. 무엇이 이 비녀를 끌어당기고 있을까?"
탁옥룡은 마왕잠을 쥐고 눈을 들었다.
멀리 붉은 봉우리 하나가 보였다. 일곱 개의 작은 봉우리를 갖고 있어 칠선봉(七仙峰)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붉은
광채에 덮인 모습으로 망막에 들고 있었다.
"저곳으로 가잔 말이냐?"
탁옥룡은 비녀에 대고 말했다. 비녀는 옥석이라기보다 살아 있는 존재 같았다.
웅― 웅!
마왕잠의 울음소리는 아주 구슬펐다. 헤어진 혈육을 만나고 싶어 애처롭게 우는 사람의 음성이 그와 비슷할
것이다.
"좋아, 함께 가자. 네 원주인 마중지존이 내게 무엇인가를 준다고 했으니 함께 가서 그것을 얻자. 그 분이 원래
악독한 분이었다 해도 나는 그 분의 물건을 얻는 것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를 강하게 하는 일이라면
말이다!"
탁옥룡은 힘차게 말하며 걸음을 떼어놓았다.
무엇인가가 발에 밟혔다. 절대독왕이 죽으면서 남긴 독왕경 두루마리였다.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갈 수가 없군."
탁옥룡은 핏물로 화해 버린 광개와 참혹하게 죽은 절대독왕을 위해 각기 자그마한 봉분을 하나씩 만들어 주었다.
그는 광개의 무덤 앞에 배례를 올렸다.
"노형님, 만나자마자 이별이군요. 어쨌거나 강호라는 곳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인간의 연을 맺은 분이 바로
노형님이십니다. 노형님의 뜻에 따라 십절죽부령을 찾아 개방으로 전하여 노형님의 고혼을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탁옥령은 마왕잠을 등불처럼 세워든 채 힘차게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천 년의 운명을 향해!

第六章 고금제일(古今第一) 마왕동부(魔王洞府)


1
칠선봉은 하나의 핏덩이였다. 붉은 광채가 어디서 나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는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칠선봉 여기저기에는 시체 무더기만 가득했다. 그리고 도처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이 남긴 혈서가 눈에 띄었다.
― 마궁(魔宮)이 우리를 죽였다!
이런 와중에도 머리 잘린 시체, 팔다리가 끊어진 시체 사이를 걷는 흑의인 하나가 있었다.
"어서 가자. 자시(子時)가 다 된 듯하다."
그는 바로 마왕잠에 이끌려 칠선봉 위로 향하는 탁옥룡이었다.
그는 정말 신비로운 힘에 끌려 산 위로 올라갔다. 시체도 눈에 보이지 않았고, 험한 바위도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는 지남어(指南漁)로 방향을 찾는 사람같이 마왕잠의 경미하게 끄는 힘으로 방향을 정해 무작정 걷는 것이었다.
얼마를 갔을까?
처절한 비명성과 절규가 터져나왔다.
"아악……!"
"크으으……!"
"라… 라마대력공(喇 大力功)이 산산이 허물어지다니……."
"지… 지독한 곳이다. 어떤 고수도 살지 못한다!"
칠선봉 꼭대기에서 떨어져 내리는 시체 십여 구가 있었다.
돌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시체는 모두 라마승(喇 僧)들이었다. 그들은 땅에 떨어지며 급속히 부패되었다.
참혹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
탁옥룡은 그들이 마궁의 이역사단에 속하는 자들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냥 그대로 지나쳐 갔다.
이제는 죽음조차 무관심해진 것이다.
"으으……, 노부마저 이기지 못하는 독이 있단 말인가? 분명 천년마제(千年魔帝)의 전설이 머물러 있는 곳인데
독진(毒陣)의 힘이 너무 강해 풀지 못하는군."
또 어디선가 창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여인의 음성이 화답했다.
"사부님,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희생이 커지면 장차 포달랍궁과 소림사를 상대로 싸울 때 낭패를 보기
쉽습니다."
"으음……, 사실 그것 때문에 굳이 무모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대유마가(大幽魔伽)와 천강복마(天 伏
魔)는 육 년 안에 출현한다. 그때 마궁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천년마동의 비밀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인연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요."
"혈작약(血芍藥), 너는 항상 지혜롭다. 애석한 것은 네가 미색을 지니지 못해 그 아이가 너를 정실(正室)로
두고도, 이제껏 단 한 차례 너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산 위에서 내려오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둘 다 금포에 금빛 복면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주 빨리 산을 내려갔다. 산정(山頂)에서 시작되는 죽음의
혈무(血霧)가 너무나도 지독한 기세로 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후 모퉁이를 돌아 산꼭대기를 향해 걷는 소년이 있었다.
손바닥 위에 마왕잠을 놓고 부지런히 걷는 소년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그는 어느 새 죽음의 피안개 속으로 들어간
후였다.
어떠한 고수도 뚫을 수 없다는 죽음의 안개!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 내공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마무(魔霧)였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세상을 왜곡시키는 기문진과 사악한 독진(毒陣)조차 그를 몰아내려 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탁옥룡의 몸을 아주 순순히 받아들였다.
칠선봉을 휘감는 혈무는 얼마 전 마중지존의 유해가 얼음 속에서 나왔을 때부터 칠성봉 위에서 피어올랐다.
그리고 마왕잠이 구정산을 향해 오는 동안 점점 짙어져 천하에 구정산 칠선봉 여섯 자를 퍼뜨렸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탁옥룡이 모든 일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무작정 걸을 뿐이었다.
혈무를 뚫고, 기문진과 독진을 뚫고 가기를 계속했다.
"아……, 이제 갈 곳이 없다."
불현듯 정신을 차린 탁옥룡은 산정에 우뚝 서 있는 흰빛 암벽 앞에 이르러 발을 멈췄다.
마왕잠은 더 크게 울었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 너의 원주인이던 그 분이 내게 보여 주겠다던 마왕동(魔王洞)은 어디에 있느냐?"
탁옥룡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마왕잠이 아주 크게 울다가 그의 손바닥을 벗어났다.
피잉―!
마왕잠은 화살보다도 빨리 나아가 암벽 속으로 파고들었다.
둔탁한 소리에 이어 자물쇠가 열쇠로 인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정말 놀라운 일이 굉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꽈르르르― 릉―!
높이 이 장에 달하는 암석이 반으로 갈라지며 아래로 향한 계단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저 바위가 마왕잠을 빨아먹고 내게 길을 내주는구나. 아……, 정말 오묘한 기관 장치가 아닌가? 열쇠와
자물쇠는 흡력(吸力)을 갖고 있어 서로 빨아당기는 것이다."
탁옥룡은 기관을 만든 사람의 지혜에 감탄하며 걸음을 옮겼다. 공연히 가슴이 설레였다.
그는 계단 어귀에서 글을 보게 되었다.
<마왕동부(魔王洞府)―
세상을 피로 씻을 사람에게만 입동(入洞)이 허락된다.
마중지존(魔中至尊)>
마왕잠을 지니고 죽었던 마중지존의 친필과 같은 글귀가 계단 위쪽 벽에 한 자 깊이로 새겨져 있었다.
그 의미를 새겨본다면 참으로 끔찍했다. 혈세천하(血洗天下)를 맹세해야 하는 일이니 정의로운 의협이라면
발걸음을 돌리게 만들 문구였다.
"제가 시신을 묻어 드리겠다는 약속을 지켰듯 제게 마왕동부를 구경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는군요?"
탁옥룡은 조심스럽게 돌계단을 내려섰다.
첫 계단을 밟고 내려서자 통로를 만들어 냈던 바윗돌이 굉음을 내며 하나로 합해졌다. 계단 두 번째 돌판은
바위를 닫히게 하는 기관이었던 것이다.
실로 철저하게 계산된 기관장치가 아닐 수 없었다.
탁옥룡은 암흑 대신 보광(寶光)을 보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야광주가 계단 위, 아래, 좌우에 박혀 있어 안은 휘황찬란했다. 마치 밤하늘을 가득 채운 은하수를
보는 것 같았다.
계단은 아주 길었다. 탁옥룡은 침착하게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안으로 내려갔다.
나선형으로 휘어지는 백팔계단을 내려가자 육중해 보이는 철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철문에도 역시 마중지존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마왕동에 든 것을 환영한다. 하지만 아직 동주(洞主)는 아니다.>
탁옥룡은 마른침을 삼키며 철문에 손을 댔다.
그그그긍―!
육중한 철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탁옥룡의 힘에 의해 열리는 것이 아니라 기관장치에 따라 열리는 것이다.
문안은 넓은 석실이었다. 문까지 감안하면 정확히 오각형(五角型)을 이루고 있었다.
"참으로 신묘한 곳이군."
탁옥룡은 안으로 들어가며 감탄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석실로 들어서자 육중한 철문은 큰소리를 내며 닫혔고, 그로 인해 안팎이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탁옥룡은
동부를 만든 사람의 지혜를 믿었기에 붕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들어온 철문을 포함해 도합 다섯 개의 문이 오각형 벽면에 설치돼 있었다.
각 문마다 표찰이 부착돼 있는데 탁옥룡이 들어선 철문의 표찰은 이러했다.
<출문(出門), 마제(魔帝)만이 나갈 수 있다.>
탁옥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달리 출구가 없는 곳이군."
다른 흥분을 달래며 나머지 네 벽면의 철문에 부착된 표찰을 하나씩 살폈다.
<불사문(不死門), 영생불사(永生不死)의 도를 찾을 수 있다.>
<마공지문(魔功之門), 고통과 함께 마력(魔力)을 얻는다.>
<만보지문(萬寶之門), 입문하며 천하제일부호가 된다.>
<환락지문(歡樂之門), 천하미녀(天下美女)를 모두 얻으리라.>
환락지문 바로 옆은 마제출문(魔帝出門)이었다.
마제출문만 손잡이를 갖고 있지 않았고, 다른 문은 각기 하나씩의 손잡이를 지니고 있었다.
"흠……, 어디든 택해 들어가야만 한다. 마제출문으로는 나갈 수 없으니 나머지 네 곳 중 하나를 골라야겠지."
탁옥룡은 방 중앙에 서서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했다.
영생을 꿈꿀 수 있는 불사(不死)!
천하를 웅패할 힘을 얻을 수 있는 마공(魔功)!
세상의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보(萬寶)!
꽃 같은 미녀들을 취할 수 있는 환락(歡樂)!
그 어느 하나 탐내지 않을 수 없는 유혹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마중지존의 성격상 네 가지 모두를 주지는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탁옥룡은 잠시 고민하다 입술을 악물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사람을 베는 기술이다. 미녀도 아니고 보물도 아니다. 그리고 길게 살고 싶지도 않다!"
그는 마음을 정하고는 마공지문(魔功之門) 앞에 섰다.
"기꺼이 고통과 함께 마력(魔力)을 얻겠소."
그는 철문 위에 쓰인 글을 뇌까리고는 손잡이를 쥐고 앞으로 힘껏 끌었다.
순간, 굉음과 함께 발밑이 푹 꺼지는 것이 아닌가?
"아악……!"
탁옥룡은 갑자기 닥친 추락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단말마의 비명소리를 내며 아주 오랫동안 떨어져 내려갔다.
너무도 급작스런 변괴였고 예상할 수도 없는 함정이었다. 그가 떨어지며 문이 닫혔다.
오각형 석실 안은 조금 전과 같은 무인지경이 되었다.
2
언제부터인가 어둠 속에서 메아리치는 신음소리가 있었다.
"으음……, 지독한 곳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답답하고 음습한 찬 공기가 있을 뿐이다."
그곳은 장방형 철실(鐵室)이었다.
가로 사 장, 세로가 삼 장에 달하는 매우 넓은 방이고, 천장까지의 높이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주 높았다.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단 한 생명이 바닥에 누워 주먹을 불끈 쥐고 있을 뿐이었다.
"마공지문(魔功之門)으로 들어오면 고통과 함께 마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말을 믿었는데……."
중얼거리는 사람은 바로 탁옥룡이다.
그는 마공지문의 손잡이를 움켜쥐는 찰나 발동한 기관 장치에 의해 깊이를 알 수 없는 암굴(暗窟)로 떨어졌었다.
그리고 꽉 막힌 철실 안에서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의 안력은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을 정도였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철실 안에 가득한 짙은 어둠은 그냥 공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매우 짙은 흑무(黑霧)였다.
흑무에는 사람의 신경을 초조하게 하는 이상한 약기운(藥氣運)이 스며 있어, 숨을 몇 번 들이키다보면 저도
모르게 갑갑증이 나고 미쳐 발작할 정도로 초조하게 되는 것이다.
탁옥룡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겨우겨우 이끌며 방 구석을 뒤지고 다녔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으음, 마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주는 것이로군."
탁옥룡은 허탈지경에 빠졌다.
바깥에서였다면 벌써 다섯 번이나 해가 떴다 졌을 시간이 지났던 것이다.
허기와 목마름은 차라리 고통이 아니었다. 희망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괴로움이었다. 어디를 봐도 문은 없었다.
암흑과 고통스러운 몸뚱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극도로 날카로워진 신경 때문에 피로에 지쳤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중지존은 왜 이런 엄청난 함정을 만들었을까? 아……, 나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나를 이리도
곤혹스럽게 한단 말인가?"
그는 처절히 외치며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신의가 없는 사람이오, 지옥으로 들어가 보게 된다면 이 빚을 단단히 따져 물을 것이오!"
탁옥룡은 탈진한 상태가 되어 벌렁 드러누웠다. 이제는 지쳐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의식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탁옥룡은 철실이 뒤흔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쇠사슬이 돌을 긁으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아주 거친 소리가 나며 머릿속을 뒤집기 시작했다.
"으윽, 정말 듣기 싫은 소리다!"
그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쇠와 쇠가 어긋나는 지극히 날카로운 소리는 쉬지 않고 그의 고막을 강타했다. 그 소리에는
강한 힘이 실려 있어 탁옥룡의 내장이 음파의 영향에 뒤틀렸다.
창자가 꼬이는 고통, 그리고 피가 역류(逆流)하는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크으으……!"
탁옥룡은 코에서 피를 줄줄 흘렸다.
끼이이― 끼이이―!
소리는 더욱 커졌다. 탁옥룡은 그 소리가 자신의 몸뚱이를 갈아 버리리라 여기며 아예 두 손을 귀에서 떼어냈다.
죽음을 달게 맞이할 작정을 하니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했다.
"신의 없는 마중지존! 오냐, 나를 죽일 테면 죽여 봐라! 당신같이 신의 없는 자 때문에 울며 죽지는 않는다!"
탁옥룡은 크게 외치며 눈을 부릅떴다.
소리는 더욱더 커졌다. 예리한 음파는 하나하나 칼날이 되어 그의 육신과 정신마저 갈가리 찢어버렸다.
탁옥룡은 오장육부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피가 역류하는 고통을 겨우겨우 참으며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얼마가 지났을까!
쇠가 긁히는 소리가 더욱 커지는 가운데 전에 보지 못하던 어떤 것이 망막 안으로 들어왔다.
천장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검은 안개 같던 흑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후였다. 어둠이 걷힌 것만으로도
고통의 일부가 가신 느낌이었다.
천장은 황금판이었다. 빛나는 보석들이 이상한 무늬를 형성하고 있었다.
"저것이 무엇일까?"
탁옥룡은 황금판에 박힌 수많은 보석알이 어떤 글을 만들고 있음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신경을 집중시켰다.
한참을 보니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혈영금강마공(血影金剛魔功)의 일보는 끈질긴 생명력(生命力)이다.
그대는 마공지주(魔功之主)가 될 자격이 있다.
아직 죽지 않고 이것을 보았다는 것은 그대의 생명력이 천하에서 가장 질긴 것임을 암시한다.
축하한다, 그대와 나는 사도지간(師徒之間)으로 이어졌다.
일어나 배사지례를 취하고 마왕마존궁(魔王魔尊宮)을 찾으라.
마중지존.>
정말 눈이 번쩍 뜨일 말이었다.
"내가… 자격이 있다고?"
탁옥룡은 피투성이가 되어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보니 그토록 괴롭히던 소리가 그친 후였다.
정신을 집중해 글귀를 읽다보니 소리가 끊어졌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아……, 모든 것이 나의 끈기를 시험하자는 것이었던가!"
탁옥룡은 심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얼음 속에 갇힌 시체가 되어 자신과 조우했던 마중지존의 신의를 잠시나마 의심했던 것이 후회스럽기만 했다.
'그래, 마공지문은 고통과 함께 마력을 얻는 곳이다. 이 정도 고통도 감내하지 못하고 어떻게 마공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몸이 움직인다기보다 정신이 움직인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저의 어리석음과 편협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탁옥룡은 천장을 우러르며 크게 말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땅에 댔다. 세 번 절을 올렸다. 그것은 사부를 향해 하는 배사지례였다.
탁옥룡이 세 번째 절을 마쳤을 때였다.
우르르르― 릉―!
굉음이 일어나더니 철실 전체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벽면 중 하나가 뒤쪽으로 돌아가며 환한 통로가 나타났다.
붉은 비단이 깔린 통로인데 천장에 박힌 용안(龍眼)만한 야명주에서 일어나는 보광이 통로를 대낮같이 밝게 했다.
탁옥룡은 통로가 자신을 위해 나타났음을 알고 신비함 가운데 긍지를 느끼며 비단을 밟으며 걸어갔다.
"마중지존께서는 진정 신인이시다. 후인의 심사까지 헤아린 완벽한 기관장치 하나만으로도 그 분의 놀라운 능력을
알 수 있다."
통로는 삼 장으로 끝이 났다.
통로의 끝은 석실이었다. 석실의 좌우에는 각기 금문(金門)이 하나씩 나 있었다. 그리고 통로의 맞은편 쪽에는
마왕도(魔王圖) 하나가 그려져 있고, 그 앞에는 제단이 있었다.
제단에는 향로와 금반이 놓여 있었다. 금반 위에는 봉서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그 중 탁옥룡의 주의를 끈 것은 마왕도였다.
핏빛 장포를 걸친 중년인의 전신상(全身像)이 그려져 있는데, 그는 지금 한 손으로는 천룡(天龍)을, 다른 한
손으로는 비사(飛獅)를 때려죽이는 중이었다.
그의 눈빛은 시뻘갰다. 그의 오만한 표정은 탁옥룡이 한 번 본 것이었다.
"바로 그 분이시군. 아……, 누가 그렸는지 모르나 너무도 잘 그렸다. 머리카락이 검은빛이라는 것이 다를 뿐
표정까지 똑같지 않은가?"
탁옥룡은 마왕도의 정교함에 감탄하다가 금분에 올려져 있는 봉서를 손에 쥐었다. 봉서 안에는 누런 종이가 들어
있었다.
<제자(弟子)를 환영한다. 여기서 나가는 순간 천하가 네 앞에 굴복하리라.>
용사비등한 필체였다. 탁옥룡이 지금까지 대한 글들 중 가장 훌륭한 글씨였다.
<나는 마중지존이라는 사람이다. 북위(北魏) 때 태어나…….>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천 년 전이 아닌가?"
살아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의 눈에 발견되었던 시신이 천 년 세월을 지나온 것이라는 사실에 그는 다시금
격동했다.
물론 강호상에서 마중지존이라는 전설적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듣기는 했지만, 이렇듯 정확한 연대를 알고 보니
더욱 경배하는 마음이 되었다.
<나는 원래 왕가출신(王家出身)이다. 그러나 왕권에는 운이 없었다. 패권(覇權)을 노리는 제왕(帝王)들이
나의 왕가를 멸절시켰던 것이다.
나는 방랑문사(放浪文士)가 되어 천지간을 떠돌아다녔다.
세상에는 뜻이 없었고, 혹 방사(方士)나 도인을 만나 연단술(煉丹術)이나 장생불사술(長生不死術)을 익히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 소박한 꿈이었다.
나는 오악(五嶽), 구산(九山), 오호(五湖), 사해(四海)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한 곳에 이르러 운명이
바뀌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마왕궁(魔王宮)의 주인이 된 일이다.
마왕궁은 난전(亂戰)을 피해 한 곳에 모인 마도고수(魔道高手)들의 집단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이 조용해질 때 세상으로 나가 인간과 모든 재화를 소유하겠다는 야욕을 갖고 은거하다가 화산 폭발로
다 죽은 천 명의 마도고수들이다. 그들은 모두 뛰어났다. 그들은 세상을 정복할 준비를 했으나 써먹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나는 마왕궁에 들어 삼 년을 보냈다. 내 나이 이십이 되었을 때 나는 천 명의 절기를 얻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나는 마성(魔性)과 호승심을 얻었다. 나는 그 직후 강호로 나왔다. 그리고 고수라 지칭하던 인물들을
찾아 비무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어느 누구도 나의 일초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와 싸운 사람은 모두 죽었다. 나는 삼 년 후부터
마중지존(魔中至尊)이라 불렸다.
모두 나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나는 더 무서운 인물이 되었다…….>
그 글은 마중지존이 불가삼대신승(佛家三大神僧)과 비무하러 가기 전에 써둔 글이었다.
<분한 것은 천하에 인재가 없어 제자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마왕잠(魔王簪)을 마왕동의 열쇠로 만들어
천하기재에게 전할 작정이다.
지금 이 글을 보는 사람은 내게 그것을 얻은 사람이리라.>
그는 자신의 경력을 아주 소상히 밝혔다.
그가 활약하던 시기는 소림사(少林寺)가 세워진 지 칠십 년이 되지 않던 시기였다.
달마대사는 마중지존이 태어났던 해 죽었으니 정말 오래 전의 일이었다.
<나는 천하십대기학(天下十大奇學)을 패배시키는 것을 소원으로 삼았다. 그것은 거의 달성되었다.
그리고 나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천하마공(天下魔功) 중 십대절기(十大絶技)를 집대성했다는 것이다.
그것과 함께 혈영금강마공(血影金剛魔功)을 얻게 되면 제이의 마중지존, 아니 노부보다 더 뛰어난 마중지존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안에 있다. 하지만 내공을 익힌 후에야 초식을 익히게 될 것이다. 초식을 익히기는 쉽다.
어려운 것은 혈영금강마공을 십성 수준까지 익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이십년연공(二十年練功)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속성법(速成法)이다.
이십 년 연공에는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고통은 적다. 반면 속성술에는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비록 팔다리가 끊어진다 해도 비명소리를 내지 않는 인고지심(忍苦之心)이 필요하다. 선택은
제자에게 맡긴다. 능력에 자신이 있다면 오른쪽 속성문(速成門)으로 들라. 그리고 속성하는데 따르는 죽음의
위험을 피하고 싶다면 왼쪽 이십 년 연공실로 들라.
과정은 다르나 궁극적으로 얻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 이 봉서의 뒷면에는 혈영금강마공의 구결(口訣)이 적혀
있다. 그리고, 향로 안에는 백 개의 혈영신단(血影神丹)이 있다. 구결을 외우고 일백 개의 신단을 복용한다면
혈영금강마공을 일성(一成) 익히게 된다.
이제 그대는 신단을 하루에 한 알씩 먹어가며 속성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이십 년 연공의 길을 택하는 것이
좋은가 결정해야 할 것이다.>
마중지존이 제자에게 남기는 글은 아주 다정했다. 그도 결국에 있어서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정석대로 익힌다면 이십 년이 걸린다고?"
탁옥룡은 망연자실했다. 지금 그의 나이 십오 세였다. 앞으로 이십 년이 지나면 서른다섯 살이 된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죽음의 위험이 있다 해도 속성문을 택하리라."
탁옥룡은 주저없이 속성문을 택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고 있었다면 아마 택하지 않았으리라.
그는 마음의 결정을 본 후 봉서를 뒤집었다.
깨알만한 글씨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것은 마중지존이 창안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마도내공법 중 가장 무서운
수법이었다.
인육과 선혈을 먹음으로써 내공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해서 무림인들은 입에 담기조차 꺼려하는 혈영마공(血影
魔功)!
마도수법이 아니고 불가정종무공(佛家正宗武功)인 금강신공(金剛神功)!
그 두 가지에 마중지존의 심득(心得)이 더해져 만들어진 것이 바로 혈영금강마신공이었다.
현재는 그 이름조차 전설이 된 수법이었다.
탁옥룡은 방대한 구결을 보고 혀를 내두르다가 허기를 느꼈다.
"혈영신단이 있다고 하셨지."
탁옥룡은 얼른 향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흰 구슬이 백 개 들어 있었다.
밀랍으로 쌓여 오랜 세월이 지난다 해도 썩지 않게 잘 보관된 일백 개의 혈영신단이 바로 그것이었다.
탁옥룡은 그 중 하나를 꺼내 밀랍을 벗겼다.
안에 든 것은 핏빛의 단약이었다. 옅은 비린내와 향기가 뒤섞여 풍겼다.
"피로 반죽을 한 듯하구나. 하지만 몸을 위해 좋은 것이리라."
그는 끔찍한 냄새에 식욕을 잃었지만 먹을 것이라고는 혈영신단밖에 없기에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다.
혈영신단은 침에 닿자 스르르 녹아 물이 되었다. 그 맛은 아주 훌륭했다. 약물이 식도를 타고 들어가자 몸이
훈훈해지고 피부 위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흐음……, 보기보다는 괜찮군."
탁옥룡은 잠시 후 아주 맑은 기분이 되어 구결을 읽기 시작했다.
구결은 아주 난해했다. 한 자 한 자에 담긴 의미가 심오난측했다. 천하기재인 탁옥룡이나 구결을 빨리 읽을 수
없었다.
그는 구결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배가 고프면 혈영신단 한 알을 꺼내 먹었다.
잠도 자지 않았다. 잠자는 시간조차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정신이 흐려지지 않은 이유는 혈영신단에
머릿속을 맑게 하는 영약이 들어서였다.
순식간에 사십구 일이 지났다.
목욕 한 번 못한 탁옥룡은 거지 중의 상거지가 되었으나, 눈빛은 전과 달랐다.
그의 눈빛은 아주 시뻘갰다. 아직 혼탁하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광채의 밝기는 상당했다.
"흠……, 백일 간 외워야 할 것을 너무 빨리 외웠군. 그러나 혈영금강마공은 혈영신단을 일백 개 복용해야
얻어지는 것이니 지금 당장 속성문 안으로 들 수는 없다."
탁옥룡은 그 동안 편안히 잠을 잔 적이 없어 늘어지게 한숨 자려 하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럴 때가 아니다. 그 분들의 진전(眞傳)이 있지. 그것을 익힐 시간이 없었는데 남은 시간 동안 그것을 익히면
되겠구나."
탁옥룡은 쾌재를 부르며 품에서 세 권의 비급을 꺼냈다.
<개방십대절기( 十大絶技)>
<천산의서(天山醫書)>
<독왕경(毒王經)>
범인이라면 내용이 복잡하고 이해하기 까다로워 진저리를 치며 겨우 읽을 책들이었지만 탁옥룡에게는 아주
흥미롭기만 했다.
지독히도 난해한 혈영금강마공을 읽은 다음인지라 그 뜻이 아주 쉽게 이해되었다.
탁옥룡은 배가 고프면 혈영신단을 먹었고, 머릿속이 혼돈되면 초보 단계이지만 운기행공을 통해 정신을 맑게 했다.
세 권 경서를 완전히 암기하는 가운데 예정된 백 일이 지났다.
책이 타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소년은 부싯돌로 불꽃을 일으켜 세 권의 비급을 태우는 중이었다.
"예전에도 성현들의 좋은 가르침이 담긴 책을 다 외운 다음 책을 불살라 버리곤 했었지. 후후……, 지금
무림비급을 불살라 버리는 처지가 될 줄이야."
불타고 있는 세 권의 책자 안의 구절구절 모두가 소년의 뇌리 속에 박혀 있었다.
방대한 양을 모조리 암기했다는 것은 그의 암기력이 남달리 뛰어나다는 것을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
소년은 재를 바라보다가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속성문(速成門), 열 번의 사경(死境)을 모두 통과하면 혈영금강마공의 주인이 된다.>
열 번 죽음의 함정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움을 주었다. 그러나 소년은 주저하지 않고 그 문을 밀었다.
문을 열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이 필요했다. 그 힘은 바로 일성 수준의 혈영금강마공이었다.
백일연공을 제대로 연성한 소년은 무난히 철문을 밀고 들어설 수 있었다.
소년 탁옥룡은 문 뒤에 나 있는 긴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통로는 아주 길었다. 양쪽 벽에는 거미줄이 허다했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 내려 바닥은 진창이었다.
"음산하다. 어디선가 귀신이 나올 듯하다."
탁옥룡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계속 걸었다.
백보(百步)를 갔을까?
통로가 꽉 막힌 곳이 나타났다.
통로를 가로막은 것은 아주 크고 단단한 백옥석(白玉石)이었다. 백옥석에서는 몸서리칠 정도로 강한 한기(寒氣)
가 일어났다.
백옥석에서 열 걸음 앞쪽에는 돌탁자 하나가 있었다. 그 위에는 한 항아리의 벽곡단과 함께 쪽지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금강백옥괴(金剛白玉塊)는 신비한 옥석이다.
백 근의 힘으로 치면 이백 근의 힘으로 보답하고 천 근의 힘으로 치면 이천 근의 힘을 반탄시킨다.
하지만 만관(萬貫)의 힘이 실린 주먹이라면 능히 금강백옥괴를 칠 수 있다.
이것은 권(拳)을 금강권(金剛拳)과 무적권(無敵拳)으로 만들기 위한 관문이다.
주먹이 백 번 부서지는 고통이 따를 것이나, 굴하지 않고 계속 친다면 금강마권(金剛魔拳)을 갖게 된다.>
역시 마중지존의 필적이었다.
"내 주먹으로 부서져야 이곳을 나서는 것이구나. 흠……, 어디 한 번 있는 힘을 다해 쳐보자."
탁옥룡은 인형설삼을 복용한 뒤 탈태환골이 되어 힘이 아주 좋아졌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게다가 혈영금강마공을
일성 정도 익혔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 정도쯤이야!"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은 다음 금강백옥괴 앞으로 다가가 오른 주먹을 힘껏 후려쳤다.
그는 이미 자갈을 산산이 박살낼 수 있는 괴력(怪力)을 지닌 상태였다.
그의 주먹은 개방 풍운신권(風雲神拳)의 수법에 따라 금결백옥괴의 중간 부분에 가 부딪쳤다.
콰아앙―!
벼락치는 소리가 나더니 백옥괴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그러나 백옥괴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박살난 쪽은 오히려 탁옥룡의 주먹이었다.
"으으……, 주… 주먹이 으스러졌다."
탁옥룡이 오른손을 축 늘어뜨리고 열 걸음 뒤로 물러나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의 주먹은 피범벅이 된 후였다. 살과 뼈라 짓이겨져 온통 피투성이였다.
"과연 내가 친 힘보다 두 배 강한 힘으로 나의 주먹을 으스러뜨리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다."
탁옥룡은 천리 길을 가야 하는 처지로 한 걸음 내딛다가 발목이 부러진 기분이 되었다.
그가 자신의 으스러진 주먹을 보며 낭패감을 젖었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다시 회복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각을
허비해야 할 것인가?
이 때,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쏴아아―!
백옥괴 바로 아래쪽에서 샘물이 솟고 있었다. 전에는 없던 물줄기인데 놀랍게도 검은빛 나는 약수(藥水)였다.
"아……, 내가 금강백옥괴를 쳤기에 샘이 솟는 것인가?"
탁옥룡은 물줄기를 보고 감탄하다가 물줄기 바로 앞쪽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가 서 있음을 보게 되었다.
<역골액(易骨液), 부서진 뼈가 이어진다.>
그것은 마중지존의 필적이었다.
탁옥룡은 으스러진 주먹을 왼손으로 받쳐 들고 샘물처럼 솟는 역골액 앞으로 다가갔다.
"이 약수가 부서진 뼈를 잇게 한다고?"
그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상처가 빨리 회복되어야 다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주먹이 온전히 회복되려면 한 달은 걸릴 텐데……."
그는 반신반의하며 물 속에 주먹을 담갔다. 세상에 이토록 신묘한 액수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으음……, 시원하기는 하군."
순간, 주먹이 얼어붙을 듯하며 동시에 타는 듯했다. 역골액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팔꿈치까지를 거품으로
뒤덮었다.
"으아악!"
탁옥룡은 그 지독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야만 했다.

第七章 천년제일마(千年第一魔)의 탄생
1
탁옥룡은 상쾌한 느낌과 함께 정신을 되찾았다.
역골액이 가득 찼던 작은 물웅덩이는 바짝 마른 상태였다. 그의 오른 주먹은 그 안에 놓여져 있었다.
"아… 아니? 상처조차 없다!"
탁옥룡은 주먹을 거머쥐고 일어나 혀를 내둘렀다. 주먹은 전이나 다름없었다. 부서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대단하군. 역골액이란 것이 나의 뼈를 다시 잇게 하다니……, 마중지존 사부는 진정 신인이시다."
그는 마중지존의 치밀한 안배에 감탄해 하며 금강백옥괴를 바라봤다. 그것은 아주 차가운 빛을 흘린 채 무정히
도사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너를 나의 원수로 삼겠다. 네가 파괴당한다면 내가 뜻을 이룰 것이고, 네가 파괴당하지 않는다면 내가
소멸될 것이다."
탁옥룡은 백옥괴를 노려보다가 다시 주먹을 거머쥐었다. 그러다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금 저것을 후려친다면 다시 나의 주먹이 으스러질 것이다. 힘을 더 기른 다음 부수자!"
탁옥룡은 주먹에서 힘을 뺐다.
그는 무모한 도전을 일삼을 만큼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고통이 익고서야 마공을 얻는다는 마공지문의 명시를
상기하며 일보 후회했다.
그는 땅바닥에 걸터앉아 혈영금강마공의 구결을 외웠다.
요상편(療傷編)!
그것은 상세를 영약의 도움 없이 치료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오장육부가 자리를 바꾸고 피가 거꾸로 흐르는
정도로 다친다면 영약의 도움 없이 살 수는 없다.
잠행공(潛行功)!
그것은 신법을 일으키기 위한 운기행공으로 몸을 아주 가볍게 하는 비결이다.
이 외에 내가기공을 이용한 신기막측한 초식도 익혔다.
허자결(虛字訣)은 진기의 힘을 아주 부드럽게 변화시켜 상대가 혈영금강마공의 출수를 알지 못한 채 당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그리고 탄자결(彈字訣)과 진자결(震字訣), 회자결(廻字訣), 파해결(破解訣) 등등이 있었다.
탁옥룡은 백옥괴의 단단함을 파괴하기 위한 비결을 구결과 더불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집요한 정신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구결을 완전히 외우고 있었지만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마공을 시전할 수 없는 상태였다.
물론 그의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혈영금강마공이 지극히 오묘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배가 고프면 벽곡단을 먹었다. 벽곡단 한 알은 사흘 버틸 힘을 주었다. 물과 벽곡단만을 먹으며 그는
동물같이 살았다. 주거의 편안함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는 구결을 연구했고 백옥괴를 연구했다.
한 보름 정도 지났을 때 그는 한 가지 분명한 이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금강백옥괴는 내가 친 힘을 두 배로 반탄시킨다. 그러기에 부딪치면 내 주먹이 으스러지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런 수법을 쓴다면 두 배로 돌아온 힘을 네 배로 돌려보내 저것을 박살낼 수 있지 않을까?"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금강백옥괴 앞으로 가서 섰다.
백옥괴를 친다면 주먹이 으스러진다는 사실이 그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호되게 당한 고통을 상기하며 그는
자신의 주먹을 어루만졌다.
"가장 선결되어야 할 것은 주먹이 으스러지는 고통 따위는 간단히 참아 넘길 만한 인내력을 갖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내가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은 금강마권(金剛魔拳)이 아니라 인내력일 것이다."
탁옥룡은 힘차게 말하며 주먹을 내쳤다.
"깨져라!"
주먹이 금강백옥괴에 닿는 찰나 둔탁한 폭음과 함께 백옥괴에 희미한 흠집이 새겨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는 또다시 주먹이 으스러지는 극렬한 고통에 휩싸여야 했다.
"크으윽……!"
탁옥룡은 오랫동안 연구한 보람도 없이 깨진 주먹을 감싸 쥐고는 뒤로 벌렁 나뒹굴었다.
물소리와 함께 한참동안 비었던 역골액이 물웅덩이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백옥괴, 이 놈……!"
탁옥룡은 엉금엉금 기어가 역골액에 주먹을 담갔다. 그리고는 곧 정신을 잃었다.
그런 일은 수없이 반복되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시도했지만 결과는 대동소이했다. 주먹이 으스러지고 그때마다 역골액에 주먹을 담가야 했다.
가장 커다란 변화는 역골액에 으스러진 주먹을 담그고도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다. 그의 인내력이 처음에 비해
더할 수 없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백옥괴 표면에 난 흠집이 점점 커졌다. 탁옥룡의 키도 조금씩 자랐다.
금강백옥괴의 씨름은 아주 긴 세월을 끌었다.
2
이백여 개의 벽곡단이 사라졌다.
탁옥룡은 벌거숭이였다. 옷은 걸레쪽처럼 헤졌고, 청년으로 성장한 그의 몸에 전혀 맞지 않아 벗어버린 것이다.
수치를 느낄 이유도 없었다.
그는 혼자가 아닌가?
그의 두 주먹은 수백 차례 부서졌다가 아물기를 계속했고, 금강백운괴의 표면에는 무수한 주먹 자국이 남았다.
탁옥룡은 단정히 정좌하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천천히 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붉은 기운이 코 밖으로 나왔다가 빨려 들어가기를
계속했다.
"후우……!"
그는 한참 동안 운기행공을 한 후 눈을 떴다. 붉은빛은 전에 비해 상당히 맑아졌다. 혼탁한 기운은 아직
여전했다.
"이제 운기가 내 마음대로 되는구나. 후후……, 실로 오묘한 구결이었지만 결국 나의 것으로 되고 말았다."
탁옥룡은 진기의 힘을 끌어모았다가는 흩트리고, 흩트렸다가는 한 곳에 모으기를 수천 차례 되풀이해 왔었다.
마침내 진기의 힘을 신체 중 한 곳에 모으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는 주먹을 들어보며 중얼거렸다.
"주먹이 으스러지는 정도는 내게 고통도 되지 않는다. 분한 것은 마중지존의 전인으로 여태 시시한 금강백옥괴
따위를 깨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주먹을 거머쥐고 금강백옥괴 바로 앞으로 갔다.
흠집 투성이인 금강백옥괴은 여전히 당당했다. 그것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듯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탁옥룡은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주먹이 부르르 떨렸고 빛이 살색에서 핏빛으로 변했다. 그는 전신의 힘을 오른 주먹에 모았다. 눈빛이 더욱
밝아졌다.
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뼈마디가 우둑우둑 거리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이야압―!"
탁옥룡은 성난 기합소리를 내며 주먹을 힘차게 내뻗었다.
꽈앙―!
백옥괴가 들썩이더니 그의 주먹으로 막강한 반탄력이 전해졌다. 그는 주먹이 으스러짐을 느꼈으나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바로 이때를 노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놈은 반탄력을 내느라 허점을 나타내는 중이다. 나의 오른
주먹과 너의 목숨을 교환하겠다!"
탁옥룡은 오른 주먹이 으스러지건 말건 관계하지 않고, 왼쪽 주먹을 들어 백옥금강괴 가운데를 후려갈겼다.
꽈꽈꽝―!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돌조각이 동굴을 가득 메웠다.
"으윽……!"
탁옥룡은 무수한 파편이 가슴에 박히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소리를 내며 뒤로 나뒹굴었다. 매캐한 돌가루
내음과 함께 비산하는 파편조각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과연 그는 성공한 것일까?
그는 오랫동안 혼절해 있다가 정신을 되찾았다. 미끈하면서도 시원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의 몸은 절반 정도 검은
약수에 잠겨 있었다.
"역골액이 담고 있던 물꼬가 터져 버렸구나."
탁옥룡은 몸 어디에도 상흔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는 전면을 응시했다. 그토록 그를 괴롭히던 금강백옥괴는 사라진 후였다. 마침내 꿈속에서도
그리던 뒤쪽 부분이 환히 보였다.
"하하핫……!"
탁옥룡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통쾌한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그의 몸은 언제부터인가 핏빛이 되었다. 그리고 얼굴의 상처도 전에 비해 덜한 상태였다. 코뼈가 사라지고 입술이
없어져 추악하기는 했으나 다친 얼굴로 보이지는 않았다.
역골액이 상흔(傷痕)을 지워버려 본래 그렇게 태어난 사람같이 보일 뿐이었다.
그의 근골(筋骨)은 강철보다 단단한 상태였다. 피부의 끈질김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그가 인형설삼을 복용한 후
얼굴을 다쳤다면, 상처조차 남지 않고 본래의 용모를 회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용모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자신이 추악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스무 걸음이나 갔을까?
그는 철벽 앞에 이르러 발을 멈추었다. 철벽 앞에는 두 개의 향로가 놓여 있었다. 모두 한아름이 넘는 커다란
옥향로였다.
"김이 나고 있는데?"
탁옥룡은 얼른 다가가 향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른쪽 향로에는 검은 물이 가득 담겼고, 왼쪽 향로에는 흰 물이
가득했다.
"흠……, 이것이 대체 무엇일까?"
탁옥룡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오른손을 검은 물 안으로 집어넣었다.
"으아악!"
탁옥룡은 처절한 비명소리를 내며 손을 쳐들고는 뒤로 나자빠졌다.
"이럴 수가! 손… 손이 다 타버렸다!"
그의 손은 시꺼멓게 탔다. 살가죽이 홀랑 벗겨진 상태였다. 그 스스로도 단단하다고 여겼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대체 이것이 무엇이기에……?"


탁옥룡은 아래턱을 덜덜 떨다가 철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철벽 위에는 글이 적혀 있었다.
<금강마권(金剛魔拳)은 일보(一步)일 뿐이다.
지금부터가 진짜 수련이다. 여기서는 금강마장(金剛魔掌)을 얻어야 한다. 오른쪽 향로 안에는 극열왕수(極熱王
手)가 담겨 있고, 왼쪽 향로에는 한빙액(寒氷液)이 담겨 있다.
두 손을 향로에 담그고 손바닥을 금강불괴지신으로 수련하라. 금강마장을 연성하게 되면 맨손으로 보검을 잡는다
해도 손바닥이 베어지지 않는다.
구결을 부지런히 외우며 고통을 이기다 보면 성공할 것이다. 고통을 이길 자신이 없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되돌아나가라.
이십 년 연공의 수련도 늦지 않은 길이다.>
탁옥룡이 처음 그 글을 보았다면 오히려 비웃었을 것이다.
금강마권을 수련하면서 그의 인내심은 거의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른쪽 향로에 담긴 극열왕수의
맛을 본 후이기에 그는 조금도 비웃을 수 없었다.
"결코 돌아나가지는 않는다!"
탁옥룡은 이를 악물고 바짝 다가갔다.
"구결을 외우고 고통을 참는다면 성사한다고 하셨다. 그 말대로 금강마장을 얻으리라!"
탁옥룡은 처절히 부르짖으며 두 손을 양쪽 향로 안에 담갔다.
피시― 식―!
오른손에서는 검은 김이, 왼손에서는 흰 김이 피어올랐다. 너무도 고통스러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흐으윽……!"
그는 이를 악물며 구결을 외웠다.
하지만 양손이 동시에 타버리고 녹아버리는 고통이 정신을 혼란시켰다. 극열왕수와 한빙액이 주는 고통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고통 중 가장 지대했다.
탁옥룡은 참고 또 참았다.
그의 인내심은 대단했다. 고통의 극한에 이르자 육체적 아픔은 어느 정도 마비되어 갔다. 그러나 극도의 탈진으로
의식이 희미해졌다.
'이겨내야 한다!'
탁옥룡은 전신을 와들와들 떨면서도 애써 신형을 유지했다.
그의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혈영금강마공의 구결뿐이었다. 그는 그것을 외우고 또 외웠다. 처음에 매우
힘들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외우는 속도가 빨라졌다.
상당한 시각이 지나면서 그는 두 손의 고통을 잊고 구결 암송에 몰두할 수 있었다.
망아지경(忘我之境), 바로 금강삼매지경(金剛三昧之境)이 그것이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구결을 외웠다.
"으음……, 정말 이상한 일이다. 열 손가락에서 느낌이 살아나다니……?"
탁옥룡은 눈을 뜨고 향로를 들여다봤다.
오른쪽 향로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왼쪽 향로도 마찬가지였다. 검고 흰 액체는 어디 가고 맑은 물뿐이었다.
"어엇? 극열왕수와 한빙액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지?"
그는 두 손을 향로에서 빼냈다.
오른손은 흑수(黑手)였고, 왼 손은 백수(白手)였다. 그것은 그의 외공이 십이성 절정 수준에 달했다는 증거였다.
"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금강마장의 주인공이 되었구나. 역시 사부님 말씀대로 하면 모든 것을 성공으로
이끈다."
그는 기뻐하며 철벽에 손을 댔다.
철벽 표면에서 쇳가루가 피어오르며 두 개의 장인(掌印)이 선명히 새겨졌다. 가히 노화순청에 이른 장력이었다.
철벽은 장인이 새겨진 채 뒤쪽으로 벌렁 넘어졌다.
"와아……, 내 손바닥에서 이런 힘을 발휘된단 말인가?"
탁옥룡은 잠시 굳어졌다.
가공할 힘을 얻었다는 사실에 일말의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기쁨이 따르는 두려움이기도 했고 일신무공에 대한
책임감이기도 했다.
"나의 두 손은 마왕장(魔王掌)이 되었다. 마왕장으로 옥룡마궁 무리들을 쓰러뜨린다면 마공의 주인이라 해서
나를 원망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나의 길을 가는데 있어 원망을 듣는다 해도 상관하지는 않는다."
그는 마음을 모질게 다지고는 통로를 따라 갔다.
마공을 수련하면서 그는 예전의 소년문사가 아닌 강한 심성의 무인이 되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중지존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백 걸음을 못 가 석문 앞에 이르렀다. 석문은 활짝 열린 상태였다.
방안은 네모반듯했다. 방 가운데에는 옥으로 만든 팔선탁 하나가 놓였고, 그 위로 금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부님이 주시는 것이다."
탁옥룡은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굉음과 함께 석문이 닫히며 방안은 아주 어두워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
탁옥룡은 암흑에 휩싸였지만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어떤 외부적 변화에도 익숙해졌다. 세상에 그를 놀라게 할 만한 일은 많지 않았다.
돌연 금음(琴音)과 소성(簫聲)을 듣게 되었다.
삘리리― 릭!
띵땅― 띵땅― 띵!
소성과 금음이 어우러지며 아주 기이한 환각이 일어났다.
전라의 여인들이 수없이 많이 나타났다. 방안이 갑자기 환해지고 여인들의 교태로운 웃음소리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호호……, 귀여운 공자님!"
"흐응……, 나의 젖가슴을 좀 애무해 줘요."
"아……, 여기를 봐요."
풍만한 젖가슴이 눈앞으로 다가섰다. 여인들의 몸은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매우
육감적이고 농염하다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나… 나는 무공수련 중이오."
탁옥룡은 크게 외치며 뒤쪽으로 물러났다.
웬만한 유혹은 견뎌낼 그였지만 이렇듯 뇌쇄적인 유혹 앞에서는 일순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본능적인
욕구 때문인지 아랫도리에 힘이 불끈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호호……, 어서 나를 안아 봐요."
"아아……, 공자님!"
여인네들의 포동포동한 팔다리가 점점 다가섰다.
"이러지 마시오!"
탁옥룡은 자신이 색(色)에 흔들리는 것을 우려하며 눈을 질끈 감고는 혼심의 힘을 다해 앞쪽을 후려쳤다.
꽈르르르― 릉―!
벼락치는 폭음성이 터지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눈을 뜨니 다시 암흑이었다.
"휴우……, 잡귀(雜鬼)들이 다 사라졌구나."
탁옥룡은 겨우 안도하며 안력을 높였다.
인형설삼을 복용한 덕에 어둠도 꿰뚫을 수 있는 안력을 가진 그는 점차 칠흑 같은 어둠에 적응할 수 있었다.
탁자가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그는 조심조심 다가가 탁자 위에 있는 금갑을 손에 쥐었다. 금갑은 뚜껑이 열린 상태였다. 그 안에 든 것은
양피지 한 장뿐이었다.
그 위에 무엇이 적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무엇이 적혔을까? 영 보이지 않는군."
탁옥룡은 애써 글을 보려 했지만 여전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짜증이 났다.
이 순간, 또다시 거문고 소리와 옥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삘리리― 삘리리리!
띵― 땅― 때땡!
금음과 소성이 어우러지며 이번에는 지독히도 섬뜩한 환상이 연출되었다.
"으흐흐……, 네놈이 여기 있었구나!"
"이노옴! 네놈이 감히 여기 숨어 복수할 힘을 기르겠다는 것이냐? 흐흐……, 네놈을 잡아 껍질을 벗기겠다!"
험악한 목소리와 함께 몇 사람이 들이닥쳤다.
옥부용과 회회공자가 쌍장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금빛 옷을 걸친 사람이 그를 향해 칼을 휘둘러댔다.
"이 원수들!"
탁옥룡은 눈을 부라리며 그들과 함께 드잡이질을 벌이기 시작했다.
퍼퍼펑―!
요란한 폭음이 연이어 터지며 석실이 뒤흔들렸다.
탁옥룡은 극심한 허탈감을 느꼈으나 계속 눈을 부릅떴다. 원수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똑똑히 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투영된 모습은 명확하지가 않았다.
"나타나라! 숨어서 공격하지 마라."
탁옥룡은 악을 쓰며 손발을 마구 휘둘렀다.
금강마장과 금강마권이 석벽에 작렬할 때마다 돌가루가 피어났다. 보검으로도 베어지지 않는 굳강한
철강석벽이었지만 그의 가공할 공세는 석벽을 온통 파헤쳐 놓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날뛰기 한 시진이나 지났을까?
탁옥룡은 흠뻑 땀에 젖고서야 비로소 냉정을 되찾게 되었다.
"바보 같으니라고! 모두가 심마(心魔)의 환영인 것을……."
탁옥룡은 허탈한 탄식을 흘리며 손발을 늘어뜨렸다.
띵― 띵― 삘리리―!
소성과 금음이 계속되었으나 더 이상 환각이 일어나지 않았다. 탁옥룡의 머릿속은 텅 빈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기이한 음향과 함께 반대쪽 문이 열리며 소성과 금음이 사라졌다. 문에서 광채가 흘러들어 방안을 밝혔다.
"휴……, 이제야 시험대를 지났다."
탁옥룡은 최후의 순간에서 냉정을 찾았다는 것을 뿌듯해 하며 탁자 곁으로 다가갔다.
금갑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놀랍게도 그 안에 있는 양피지는 백지였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단 말인가?"
탁옥룡은 일순 당황하다가 금갑을 들여다봤다. 글은 양피지 위가 아니라 금갑 바닥에 적혀 있었다.
<안력(眼力)은 무림인에게 있어 지극히 중요한 것이나, 안력에만 의지해 적과 싸우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왜냐하면 눈이란 정확한 듯하면서도 실수가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 이치를 이제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금강심(金剛心)의 경지이다.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경지가 그것이다.>
마중지존이 전수하려 했던 것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었다.
탁옥룡은 자신이 사명을 지키게 되었음을 기뻐하며 방을 빠져나갔다.
백 걸음이나 갔을까?
그는 이상한 모래밭에 당도하게 되었다. 모래밭의 너비는 십 장에 달했다. 모래밭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모래가 강처럼 흐르는 유사(流沙)였다.
"흠……, 기러기 털도 빠진다는 모래로군."
탁옥룡은 모래밭의 초입에서 발을 세우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우측 벽으로 비스듬히 열려 있는 석문이 보였다.
탁옥룡은 얼른 그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아주 묵직해 보이는 철구(鐵球) 두 개였다. 그리고 벽곡단이 든 항아리와 침상도
마련돼 있었다.
침상 위에는 양피지가 한 장 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몸을 가볍게 하는 비법을 얻어야 한다.
백관철구(百貫鐵球)를 발목에 차고 유사를 걷는 연습을 해라. 백관철구를 차고 유사 위를 사뿐히 걸어다닐
정도가 되어야 장차 백로마현(百路魔現)의 신법을 얻을 것이다.
또한 상대가 쓰는 검에서 이는 검풍(劍風)을 이용해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다.>
마중지존이 벽곡단을 남겨두고 침상까지 마련해 두었다는 것은, 이곳에서의 수련이 아주 오랜 시일을 잡아먹을
것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저 무거운 쇠를 발에 달고 모래 위를 걸어야 한다고? 휴우……, 내가 언제나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탁옥룡은 혀를 내두르다가 철구 앞으로 갔다. 들어보니 꽤 묵직했다. 그 가운데에는 구멍이 파여 있었다.
"발을 여기다 끼우라는 뜻이군."
탁옥룡은 주저하지 않고 두 발을 구멍에다 끼워 넣었다.
그런 상태로 걸음을 옮기려 하니 몸이 천근같이 무거워 걷기 힘들었다. 겨우 한두 걸음 걸을 수는 있었지만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익숙해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다. 그러나 철구를 차고 모래밭을 걸을 정도가 되기 이전에 철구를 땅에
내려놓지 않겠다."
탁옥룡은 자신에게 맹세하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서둘러서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차분히 절차를 밝기로 했다. 이제 그는 사물을 직관할 수 있는 능력과 상황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능력마저 깨우쳤다.
그의 나이는 이미 열일곱이었다.
얼굴이 추악하기는 하나 근육의 발달은 천하의 어떤 호걸 못지 않았다.
우수에 젖은 눈빛에는 혜지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 눈빛 속에는 번뜩이는 핏빛 마성(魔性)이 섞여 있어 신비감과
함께 두려움을 풍기기까지 했다.
3
탁옥룡은 금강각(金剛脚)과 홍모지신(鴻毛之身)을 갖기 위한 수련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의 다리는 백 관의 쇳덩이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에 비한다면 날아다닌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항상 운기행공했다. 내공이 강해진다는 것은 곧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마공은 속성법이다. 그것은 정종무학과 가장 큰 차이를 갖는다. 그랬기에 여타 종류의 마공은 익힌 지
몇 달이 안 되어 최고수준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혈영금강마공만은 젼혀 달랐다.
그것은 후천적(後天的)인 힘을 기르는 것이 아니고 선천적(先天的)인 잠재력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다.
혈영금강마공으로 인해 일어나는 마성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악마심(惡魔心)이다. 심성이 강해진다는
것은 곧 마공이 극강해지는 것을 뜻한다.
탁옥룡의 얼굴은 아주 무뚝뚝하게 변화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그가 십오 세 때까지 서고에 틀어박혀 글공부를 한 사람이라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를 강하고 독하게 하는 것 중 하나는 목에 남아 있는 열 개의 손가락 자국이었다.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비극의
흔적…….
그는 가끔 그것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이 상처를 낸 여인을 만나서는 아니 된다. 그럴 경우,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패륜극이 벌어질 테니까!"
그는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열흘이 지난다 해도 중얼거리는 시간은 일 각도 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마공 연마에 열중했다.
벽곡단은 점차 적어졌다. 그와 함께 그의 몸도 점점 가벼워졌다.
스슥― 슥―!
탁옥룡은 백관철구 두 개를 매달고도 제비같이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유사를 건널
수는 없었다.
차라리 물이라면 수면의 탄력을 이용할 수 있겠지만, 유사는 오히려 그의 발을 끌어들였다. 모래에 발을 딛는
순간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신법은 가히 최고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백관철구를 메단 채 개방십절식 중 하나인 취팔선보(醉八仙步)를 유연하게 펼칠 수 있었다. 그 한 가지만으로도
그의 무공 수준이 현임 개방방주를 능가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소리 없이 흐르는 유사 앞에 서있는 젊은이 하나가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핏빛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나의 혈영금강마공은 오성 수준에 도달했다. 이 정도면 백관철구를 차고 유사를 건널 만한 내공은 된다."
그는 힘있게 뇌까리며 흐르는 모래 위로 발을 내디뎠다.
유사는 아주 빨리 흘렀다.
그의 발은 유사 속으로 반치 가량 파묻혔다. 그 순간 모공에서부터 핏빛 기류가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유사면과
평행해졌다.
그는 강을 건너는 물뱀같이 아주 조심조심 유사를 건넜다.
내딛는 걸음 걸음이 아주 신중했다. 차라리 열흘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유사를 거의 건넜을 때 그의 몸은 물 속에서 갓 일어난 사람처럼 번들거렸다.
"으하하하……!"
그는 유사 건너편에 두 발을 디디며 광소를 터뜨렸다. 웃음소리로 인해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하하……, 드디어 해냈다. 하하핫……!"
그는 앙천대소성과 함께 두 손으로 발 근처를 후려쳤다.
펑― 펑―!
두 번의 둔탁한 소리와 함께 쇳가루가 분분히 피어올랐다. 그 동안 그의 발을 옭아매며 수많은 시간을 뺏어갔던
백관철구 두 개가 산산이 박살나 버린 것이다.
철사풍(鐵沙風)이 사라졌을 때 그는 수십 장 밖을 달리고 있었다.
"하하……, 내가 이렇게 빨리 움직이게 되다니……. 마치 바람이 되어 떠가는 듯하구나!"
빛살처럼 움직이는 인물은 청년 탁옥룡이었다.
탁옥룡은 알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마공 구결을 연구한 결과 몸을 가볍게 하는 비결을 완벽히 터득하게 되었다.
그는 나는 듯 달리다가 아주 넓은 석동으로 드는 암문(暗門) 앞에 이를 수 있었다.
문 위에는 글이 적혀 있었다.
<축하한다. 이제 반을 왔다.
이제 남은 것은 안이비설(眼耳鼻舌)을 단련하는 것과 지(指), 골수(骨髓), 피부(皮膚)를 단련시켜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껏 거쳐온 길에 비한다면 탄탄대로다. 백일 안에 그것을 얻고 나서 십대절기(十大絶技)를 얻으라.>
마중지존의 웅휘한 필체가 그의 가슴 가득 패기를 피어오르게 했다.
"사부님, 제자 기필코 혈영금강마공을 십성 수준으로 익히고 이어 십대절기를 익히겠습니다. 이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는 문에 대고 절을 한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신체 각 기관을 금강불괴지신으로 단련시키는 여러 가지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마중지존이 굳이
이런 장비를 만들어 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본래 내가고수는 내공 수련에만 치우친다.
그러기에 내공이 사라지면 힘이 다해 폐인이 되고 만다.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되어도 그렇고, 독이나 산공분에
당해 내공을 잃기라도 하면 그 즉시 무력한 사람이 된다.
상대와 싸우다가 내공이 흐트러지기라도 한다면 내공지기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패하게 된다.
그러나 혈영금강마공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내공이기도 했고 외공이기도 했다. 내외공을 겸비하는 이유는 단 하나, 강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강해져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했다.
마중지존의 전인이라는 것은 전무림과 적이 되어 싸워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륜전(車輪戰),
연쇄전(連鎖戰)을 겪고도 지치지 않는 몸뚱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금강불괴지신을 위한 수련 과정은 마중지존의 치밀한 계산에 따라 마련되었다.
탁옥룡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체를 단련했다.
지력을 단련시키는 데에는 점정(點井), 점촉(點燭), 점철(點鐵), 점천(點天)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점정이라 함은 물을 찌르는 것을 말한다. 점촉은 촛불을 찌르는 것이고, 점철은 글자 그대로 손가락을 빳빳이 해
금석(金石)을 찔러 손가락을 단련하는 방법이다.
가장 고차적인 방법은 허공을 찌르는 것이다.
지력을 능숙히 구사하기 위해 뒤따라야 하는 것은 뛰어난 안력이다. 그 점에서 탁옥룡이 더 익힐 것은 없었다.
그는 이미 뛰어난 안력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인형설삼을 먹어 굳강한 신체를 소유한 그는 피부를 단련시키리 위해 철침이 가득 박힌 쇠방석 위를 뒹구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석실에서 수련할 것은 다양했지만 이전의 수련에 비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옥 같은 관문을 거치는 동안 그는 탄탄한 기초를 수련했기 때문이다. 강인한 정신력과 초인적인 집중력 덕분에
그의 수련에는 막힘이 없었다.
탁옥룡의 내공은 일취월장했다.
처음에는 진보가 느렸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속도가 빨라졌다.
그런 이치는 다른 사람의 경우와 완전히 달랐다. 웬만한 기재라면 처음에 쉽게 습득하지만 지날수록 속도가 늦게
된다.
하지만 탁옥룡은 처음 무학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느라 속도가 늦었지만, 무공이 무엇인지 완벽히
이해하고 나서부터는 어떤 어려운 것일지라도 쉽게 터득했다.
혈영금강마공의 수준은 날로 심오해졌다. 이제는 굳이 외공을 익히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탁옥룡은 차디찬 돌바닥에 정좌하고 있었다.
그의 형체는 두터운 혈무(血霧)에 덮여 있었다. 아주 거친 호흡 소리가 혈무 안에서 들렸다. 토납(吐納)할 때
나는 숨소리였다.
피안개는 매우 짙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짙어졌고 차지하는 범위도 점차 확대되었다.
그는 혈무에 잠긴 채 아주 오랜 시간을 보냈다.
운기행공을 오래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공력이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안정된 기초를 의미한다.
군검(群劍)에 포위되어서도 위축되지 않고 절기를 시전하기 위해서는 정력이 필요하다. 그 기초 위에 오관의
힘이 제대로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탁옥룡은 오랜 시간 운기행공한 다음 코로 혈무를 빨아들이고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아주 맑았다. 은은한 혈광(血光)이 돌기는 했으나 잠을 자지 못해 눈이 충혈된 것이 아니었다.
"아……, 드디어 이룩했다."
그는 눈물을 글썽였다.
마공을 수련하면서 지극히 비정해진 그가 눈물을 보일 만큼 감객무량해 했다는 크게 놀랄 일이었다.
마침내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천년 동안 실전(失傳)되었던 혈영금강마공을 마음먹은 대로 시전하고 거두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이제
마중지존의 부활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탁옥룡은 눈물을 거두고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제 이런 것들은 필요 없다. 후후……, 나는 이제 철부지가 아니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수련이 아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이 엄청난 마공을 마음껏 전개할 수 있는 기(技)뿐이다. 으하하하!"
탁옥룡은 웃으며 손바닥을 휘저었다.
피구름이 뿜어졌다. 벼락치는 소리가 일어나더니 사방에서 돌가루가 튀었다.
꽈꽝― 꽝―!
모든 집기들이 그의 혈강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탁옥룡은 벗삼아 지내던 것을 다 박살낸 후에야 득의해 하며 한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강철문이었다. 문은 꽉
닫혀 있었다.
그리고 문 위에 쓰인 글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이 문은 자금사(紫金砂), 만년한철(萬年寒鐵), 금강오동(金剛烏銅) 세 가지로 합금(合金)된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문이다.
혈영금강마공을 십 성 수준으로 익히지 않은 사람이면 문에 장인(掌印)을 남기지 못한다. 문은 한 자 깊이
이상의 장인이 남아야 발동하는 기관에 따라 열리게 된다.
자신이 있다면 문을 쳐라. 시도는 단 한 번이다.
한 번으로 문을 열지 못한다면 문 속에 든 기관이 작동돼 동부가 붕괴되고 그와 함께 죽으리라.>
매우 엄중한 경고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탁옥룡의 눈에는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훗훗……, 까짓것 죽어 봅시다."
그는 입가에 비웃음을 흘리며 두 손을 철문 쪽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은 혈옥색(血玉色)으로 화해 있었다.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혈무가 흘러나갔다.
꽈꽝―!
만균뇌정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철문에 한자 반 깊이의 장인 두 개가 선명히 새겨졌다.
탁옥룡은 전신의 모든 힘을 쏟아내고는 호흡을 멈추었다.
마중지존이 주문한 것보다 반 자 깊이 이상의 장인을 새겼기에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마중지존의 전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동부에서의 수련에 그는 모든 정력과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문을 열지 못한다면 그 능력의 한계일 것이다.
그르르― 릉―!
석동 전체가 진동하더니 육중한 철문이 옆으로 밀려 사라져 갔다.
"사부, 이제 마중지존의 제자로서 자격이 있겠지요?"
탁옥룡은 당당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의 일보 일보는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천하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움직이었던 것이다.

第八章 마왕출사(魔王出師)
1
문 뒤는 엄청나게 화려한 대전(大殿)이었다.
금으로 된 태사의와 마구리를 주옥(珠玉)으로 장식한 탁자가 있었다.
수없이 많은 책이 꽂혀 있는 서재가 벽 전체를 둘렀고, 당세에는 찾아보기 힘든 고대의 진귀한 자기병과 무수한
호로가 진열되어 있는 장식대도 있었다.
바닥에는 자주색 주단이 발목까지 깊숙이 파묻히도록 깔려 있었다.
"정말 신성한 곳이다. 아……,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이 사악한 기운은 이곳이 바로 천하마성(天下魔聖)의
거처였던 곳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리라."
탁옥룡은 일곱 가지 빛이 어우러지는 화려함을 찬탄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제일 화려한 팔선탁 앞에 섰다. 팔선탁 위에는 홍삼 한 벌이 놓여져 있었다. 그 은은한 빛은 그것이 수화의
침범을 막고 도검의 칼날까지 막는 천잠사의(天蠶紗衣)임을 알게 했다.
그 외에 열 권의 고서(古書)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데 고서 맨 위에는 봉서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탁옥룡은 팔선탁 앞 의자에 앉아 봉서를 개봉했다.
<그대는 곧 마왕동주(魔王洞主)다.
본좌 마중지존이 일대동주이고, 그대는 이대동주이다. 그 지위는 곧 천하마도(天下魔道)의 대종사(大宗師)라는
것을 뜻한다.
이제 남은 것은 초식을 익히는 것뿐이다. 그대를 위해 십대절기(十大絶技)를 남겼다.
검(劍), 장(掌), 권(拳), 지(指), 도(刀), 금나수(擒拿手), 음공(音功), 수법(手法), 그리고 신법(身
法)인데 모두 쉽게 익힐 수 있다. 혈영금강마공을 보유하고 있는 이상 초식 익히기는 어렵지 않다.
이제 얼마 되지 않아 노부의 모든 진전을 얻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었다고 자부하지 마라.
천하제일인은 무공만으로 얻는 지위가 아니다. 위업을 이뤄야 하고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임기응변(臨機應
變)이 좋아야 한다.
그대의 성취를 위해 무림사(武林史) 열다섯 권을 남겨두었다. 거기에는 강호의 역사, 인물, 지리에 대한 것이
소상히 적혀 있다.
기실 본좌는 그것을 집필하기 위해 천하를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유용히 쓰기 바란다.
한 가지 밝힌다면 그대가 이 글을 보는 것으로 인해 이제부터 마왕동부의 모든 소유권은 본좌에게서 그대에게로
이양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그대의 것이다. 이제 본좌도 그대의 허락이 있어야 이 안으로 들 수 있다.>
이 글은 시체가 되어 만난 바 있던 마중지존의 유언이기도 했다.
탁옥룡은 글을 다 읽은 후 봉서에 내려놓고 절을 올렸다.
"사부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는 탁자 위에서 홍삼을 집어 몸에 걸쳤다. 그것은 신축성을 지니고 있어 아주 잘 맞았다.
"하하……, 이제야 사람이 된 듯하구나."
탁옥룡은 이제야 금수와 같은 생활이 끝이 났다 여기며 미소를 지었다. 그 동안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지내왔던 것이다.
그는 고서를 한 권 한 권 살피기 시작했다.
<제일권(第一卷), 환우멸절검( 宇滅絶劍)>
단 일초검학인데도 책 두께가 상당했다. 대부분이 운검(運劍)의 묘(妙)에 대한 주해였다.
환우멸절이란 어검술(馭劍術)이었다.
그것을 익히게 되면 검을 내공의 힘으로 조종해 십 리 안에 있는 어떠한 적이라도 검을 날려 고혼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마중지존은 첫머리에 이렇게 써두었다.
<이것은 마도 검학 중 최절정수법이다. 그러나 천하최고의 검학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동해(東海) 옥룡대라천검(玉龍大羅千劍)과 겨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혈쌍도(雪血雙刀)와 일천검(一千劍)
은 동해옥룡사(東海玉龍寺)의 비전절기인데 꽤 고강하다.
본좌는 내공의 우위로 그 주인 되는 자를 패배시킨 바 있으나 그렇다고 초식의 우열을 완전히 밝혔다 할 수 없다.
옥룡사의 후예를 만난다면 성급히 해치지 말고 그에게 옥룡대라천검술을 펼칠 기회를 두어 어떤 검초가 뛰어난지
겨뤄보기 바란다.
아쉬운 것은 동해사의 후예 중 과연 그것을 얻을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마중지존은 천하검학 중 오묘한 몇 가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광마라는 소문답지 않게 냉철한 지혜를
갖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강했던 이유는 뛰어난 지식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탁옥룡은 환우멸절검초를 읽은 다음 단약과 약수로 허기를 메우고, 두 번째 비급을 손에 쥐었다.
<제이권(第二卷), 혈영패천강(血影覇天 )>
쌍장을 흔들어 만 개의 장영을 만들어 적을 현혹시키는 수법이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데 유리하며, 엄청난
내공과 안력이 있어야 이룰 수 있는 절기이다.
"그토록 힘겹게 금강마장을 얻어야 했던 이유는 바로 혈영패천강을 익히기 위함이었구나."
탁옥룡은 감탄해 하면서 주석을 읽었다.
<혈영패천강장에 견딜 수 있는 수법은 소림(少林)의 무적금강력(無敵金剛力)뿐이다.
특히 천강복마수(天 伏魔手)를 익히고 무적금강력을 쓰는 사람이라면 혈영패천강 아래 살 수 있다.
그럴 때에는 다른 초식으로 죽여라.>
탁옥룡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금무림에서 소림의 명성이 쇠퇴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천하 최강의 문파였나 보군. 하기는 무림사에 천 년을
유지해 온 잠재력을 지닌 문파니까."
그는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사의 절기와 꼭 비교해 보리라 작정했다.
다음으로 권법이 있었다.
<제삼권(第三卷), 벽력낙성권(霹靂落星拳)>
쌍권으로 삼십 장 밖 만근거석을 쪼갤 수 있는 수법은 천하에 단 두 가지뿐이다.
벽력낙성권과 포달랍궁에 비전되어지는 미륵수미신권(彌勒須彌神拳)이 그것이다. 그 가공함은 천 년 전부터
무림계에 공공연히 떠도는 전설적인 권공이다.
다행히도 금강마권을 익힌 탁옥룡에게 있어 벽력낙성권은 이미 반 넘게 익힌 수법이라 할 수 있었다.
네 번째 고서는 지공(指功)을 담고 있었다.
<제사권(第四卷), 유화탈백지(流花奪魄指)>
발출할 때 소리를 내지 않는 지력이었다.
밀교(密敎)의 무영무음지력(無影無音指力)이 비슷한 위력을 발휘하기에 지공쌍절(指功雙絶)이라 칭해진다.
하지만 유화탈백지력의 공격 범위는 아주 멀어 그 점에서 무영무음지를 능가했다.
"마왕동부의 절기가 가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천하는 넓구나. 이만한 절기에 대적할 절학들이 고대에도 존재했으니
말이다."
탁옥룡은 다섯 번째 비급을 손에 들었다.
도법(刀法)을 설명한 책이었다. 단 일초도법(一招刀法)인데 십 장 안 어떤 것이건 파괴하는 도강(刀 )을
뿌리는 수법이었다.
<제오권(第五卷), 심극일분도법(心極一分刀法)>
회회교(回回敎)의 조사(祖師)가 익힌 파천반월신도(半月破天神刀)와 겨루어 손색이 없는 도법이기도 했다.
다음에는 편법(鞭法)이 있었다.
<제육권(第六卷), 지옥혈편법(地獄血鞭法)>
굳이 채찍을 쥐지 않더라도 시전할 수 있기에 천하에 가장 위력적인 편법이라 할 수 있다.
부드러운 것이면 어떤 것이든 이용해 지옥혈편법을 펼쳐낼 수 있다. 새끼줄이라 해도 괜찮고 허리띠로도 충분하다.
다수의 적을 상대할 수 있으며, 특히 보검이나 보도를 지닌 적을 상대하는데 있어 유용히 쓰일 수 있는 절기였다.
그 다음에는 금나수법이 수록된 얄팍한 비급이 있었다.
그것은 소림사 대금나수(大擒拿手)와 더불어 정사의 금나수 이대절기가 되는 것이었다.
<제칠권(第七卷), 역천공공금나수법(逆天空空擒拿手法)>
손을 너무도 빨리 움직여 손이 없어지는 듯한 착각을 보인다 하여 공공(空空)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그 수법에
잡히게 되면 꼼짝 못하기에 역천이라 불리는 것이다.
다음에는 음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라마교(喇 敎) 천룡범창(天龍梵唱)이 음공 중 제일절기라 하나 최강은 될 수 없다.
라마교 천룡범창은 최소한 일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닌 고승 열여덟이 있어야 시전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시전할
때 정좌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동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마중지존의 음공은 한 사람의 능력으로도 능히 펼칠 수 있고, 마음대로 움직이며 시전할 수 있다.
<제팔권(第八卷), 쇄금강후(碎金剛吼)>
장소성으로 호신강기를 박살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탁옥룡은 단지 주해(註解)를 읽는 것만으로도 황홀감을 금할 수 없었다.
"아……, 무학은 끝이 없구나."
아홉 번째 신법이 적힌 비급이었다.
<제구권(第九卷), 백로마현술(百路魔現術)>
환영궁에 전해지는 환영잠신술(幻影潛身術)보다도 변화막측한 신법의 최절정 경지이다.
맨 마지막 고서에는 수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제십권(第十卷), 흡혈백옥수(吸血白玉手)>
손바닥에서 흡인력을 발휘해 상대방의 심장에 가득 찬 선혈을 빨아들인다 해서 흡혈백옥수라 불리는 절기이다.
지독히도 독랄한 수법이지만 그 위력은 무한하다.
탁옥룡은 열 권의 고서를 내려놓고는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 열 가지 절기와 더불어 여생을 같이 하겠군. 하나 하나 유감없이 사랑해 주고 항상 너희들과 함께 하겠다."
그는 즉시로 고서의 절기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대전에는 지하연공실(地下練功室)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구결을 암송한 다음에는 연공실로 가서
절기를 익히게 된다.
주거에도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먹을 것, 마실 것, 심지어 바둑과 마작(麻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의 생활은 아주 자유로웠다.
그것은 출관(出關)이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탁옥룡은 주인으로 행세하며 모든 것을 자유롭게 이용했다.
그에게 휴식이란 달콤한 시간은 없었다. 쉼없이 배웠고 꾸준히 연구했다.
무공의 길에 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백 일이 꿈같이 지났다.
마왕동 십대절학을 담은 열 권의 고서는 하나같은 모습으로 없어졌다. 모두 재가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침내 제십권마저 재가 되어 버렸다.
2
새벽은 하루에 한 번은 꼭 있다.
산서성(山西省)의 새벽은 항상 운무와 함께 비롯된다. 산이 험하기에 골이 많고, 그러기에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와 구름이 새벽녘에 한결 돋보이는 것이다.
산서 깊은 곳을 걷는 젊은이 하나가 있다.
아니 젊은이라고 속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는 핏빛 장포를 걸쳤고, 등에는 상고신검(上古神劍) 한
자루를 메고 있는데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걷는다기보다 둥둥 떠간다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어기비행술(馭氣飛行術)을 시전해 지극히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한 줄기 혈선(血線)이 그어졌다.
그는 안개를 뚫고 치달려 가다가 한 곳에 이르러 발을 멈췄다.
신록이 유난히 아름다운 골짜기 하나가 그의 망막에 들었다. 그의 눈빛은 그로 인해 상념에 빠졌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다른 것이 없는 산이며 나무였지만 죽립인에게 있어서는 돌 하나, 나무 한 그루가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모두 그대로 있구나."
그는 중얼거리며 계곡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그는 근처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이르러 눈살을 찌푸렸다.
"기문진(奇門陣)이 펼쳐져 있다. 흐음……, 감히 나의 고향을 점거하고 인적을 막는 자들이 있단 말인가?"
죽립인의 음성은 청년의 목소리였다. 마성이 깃든 듯 아주 차갑고 비정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곳을 향해 몸을 폭사시켰다. 경미한 파공성과 함께 불그레한 그림자가 뿌려졌다. 그는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수십 장씩을 지나쳤다.
그가 울창한 숲 안에 이르렀을 때였다.
"서라!"
그의 고막을 때리는 호통소리가 있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보이지 않고 다만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본궁의 친구는 아닌데 무슨 일로 산서단(山西壇)을 찾느냐? 혹 산서단을 치다가 실패하고
들어간 혈수나찰(血手羅刹)과 한 패거리는 아니냐?"
"……"
죽립인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흐흐……, 붉은 옷을 걸친 것으로 보아 분명 그 고약한 계집년의 한패거리이겠군. 흐흐……, 그렇다면 살아
돌아갈 마음은 버리는 것이 좋다."
땅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하늘 위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죽립인은 귀담아 듣다가 오랜만에 입술을 뗐다.
"나는 혈수나찰이 누구인지 모른다."
"흐흐……, 뜻밖에 어린놈이로군. 신법으로 보아 제법 늙은 고수인 줄 알았다."
"노괴는 옥룡마궁 사람인가?"
"흐흐……, 빌어먹을 놈! 차라리 절간에 와서 여기 스님들이 살고 있느냐 묻는 것이 현명한 일이리라!"
노인의 목소리가 욕설로 화할 때 죽립인은 가볍게 소매를 흔들었다.
"입이 거칠구나. 그 죄로 노괴의 이빨을 모두 부서뜨리리라."
바람이 일어나더니 숲 언저리에서 솔잎이 흩어지다가 그의 손바닥 안으로 한줌 쥐어졌다.
"무슨 짓이냐?"
괴노인의 궁금해 하는 목소리가 여운을 맺기 전에 죽립인의 손이 뒤집어졌다.
피피피핑―!
솔잎이 적엽비화(摘葉飛花)에 화해 숲 속으로 파고들었다.
"케― 엑―!"
숲을 진동시키는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숲 언저리로 떨어져 내리는 흑의노인 하나가 있었다.
노인의 입에서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그의 철같이 단단하던 이빨이 솔잎에 닿으며 모래같이 사그러졌고,
혀가 걸레같이 찢어졌다.
"크윽……, 내… 내가 여기 숨었는지 어찌 알았느냐?"
흑의노인은 바둥바둥거리다가 사지를 늘어뜨리고 죽립인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옷자락에는 청색옥룡문장(靑色玉龍紋章)과 더불어 오만한 글귀가 수놓아져 있었다.
<天下君臨(천하군림) 武林一通(무림일통)>
죽립인은 자신의 정확한 출수에 대해 우쭐대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노괴는 마궁에서 어떤 지위냐?"
"산… 산서단 호법이다."
흑의노인은 기가 죽어 감히 일어날 생각도 못했다.
"탁가장원(卓家莊園)이 있었는데 그것은 없어졌느냐?"
"그곳이 바로 산서단이다."
죽립인은 뒷짐을 쥔 채 옆으로 돌아섰다.
"단주(壇主)는 누구냐?"
흑의노인은 상대의 기도에 완전히 제압당해 술술 털어놓았다.
"검존(劍尊)의 전인이시자 은삼호법(銀衫護法) 중 한 분이신 진천검왕(振天劍王)이시다."
죽립인의 심문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총순찰 옥부용은 어디 있느냐."
"그… 그 분은 일이 있는 곳에 계신다. 총순찰의 지위는 원래 그런 것이다. 아마도 혈수나찰이나 일심검제(一心
劍帝)를 쫓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 있느냐?"
"모… 모른다. 나는 하수에 지나지 않는다. 제… 제발 죽이지 말아다오."
흑의노인이 죽립인과 몇 마디를 나누면서 공포에 질려 버렸다. 그의 직감으로 상대는 천 명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살마(殺魔)였다.
죽립인은 가볍게 턱을 쳐들었다.
"일어나 나를 탁가장원으로 안내해라!"
"일… 일어날 수 없다. 너무 고통스럽다."
흑의노인은 아래턱을 떨며 손으로 품을 뒤졌다.
죽립인은 그의 비굴한 모습을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죽립 사이에서 붉은 빛이 뿌려졌다. 그의 눈빛이
핏빛으로 화해진 것이다.
"모두 일곱! 어서 나서라!"
홍의인의 차디찬 말소리가 흐르자 여러 군데서 경호성이 터져나왔다.
"으음……!"
"천하삼기(天下三奇)보다도 뛰어난 것 같군."
"대체 누구기에 이리도 강하냐? 왜 산서단을 찾느냐?"
그들은 흑의노인의 비명소리를 듣고 나타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숲을 나와 감히 대적하기를 두려워했다.
죽립인은 냉랭하게 씹어뱉었다.
"일각(一刻) 안에 탁가장원을 비워라. 그때까지 탁가장원을 중심으로 오리 안에 남아 있는 자가 있다면 모두 내
손에 죽는다."
지극히 오만한 명령이었다. 팔짱을 낀 그의 모습은 하나의 거대한 돌덩이 같았다.
"으음……, 옥룡궁의 힘이 일심맹(一心盟)과 포달랍궁(包達拉宮)으로 인해 전만 같지 않다고 하나 역시
천하제일 문파다. 네가 누구이건 어떤 고수이건 본궁에 죄를 짓고는 오래 살지 못한다."
"정체를 밝히고 자초지종을 말해라!"
숨어 있는 사람들은 은근히 협박을 가하며 죽립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죽립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일각은 아주 빨리 지나갔다.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죽립인은 일각이 지나가자 고개를 약간 쳐들었다.
"선산이 있는 곳에서 피를 흘린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피로 인해 탁가장의 한이 사라질 것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차게 말하며 숲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순간, 죽은 듯 누워 있던 흑의노인이 죽립인의 허점을 노리고 손을 어지럽게 흔들었다.
피피핑―!
금석을 뚫어버리는 독침이 죽립인의 몸을 뒤덮는 찰나 그는 흐릿한 그림자로 화해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고,
무수한 독침은 그 근처를 휩쓸며 무산되었다.
"아… 아니,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빨이 박살난 흑의노인이 자지러지게 놀랄 때 허공에서부터 냉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나를 찾느냐?"
느닷없이 막강한 권풍이 일어났다.
"아악!"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흑의노인의 몸이 무수한 핏조각으로 화해 사라졌고, 반경 일곱 자에 달하는 구덩이가
파여졌다.
'의 수법이 이 정도로 위력적일 줄은 몰랐다. 이런 하수들을 상대로는 절기를 시전할 필요조차 없겠다.'
죽립인은 허공에 둥실 떠 구덩이를 바라보다가 숲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다.
숲은 기문진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숨어 있는 자들이 믿는 것은 기문진의 막강한 위력뿐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동료의 죽음을 보고도 나서지 않은 것이다
죽립인은 그것을 모르는 듯 거침없이 숲 안으로 날아들었다.
"됐다!"
"혈수나찰도 당한 기문진이다."
"놈은 이제 눈과 귀가 멀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일 때였다.
"후후……, 옥룡마궁도 제법이군. 누가 천성변환진(天星變幻陣)에 구궁사상진(九宮四象陣)을 가미한
천성구궁쇄진(天星九宮碎陣)을 쳐두었는지 모르나 이 정도로 나를 막지는 못한다."
죽립인의 목소리가 숲 속에서 차갑게 피어올랐다.
꽈르르― 릉!
뇌성이 터지며 비명소리가 두 군데에서 났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피바람이 일었다. 한 무더기 혈무(血霧)
가 바람에 쓸리듯 유유히 숲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얼핏 보였다.
"너도 빠질 수 없다!"
냉혹한 일갈과 함께 폭음과 비명성이 어우러졌다.
꽝―!
"케에에… 엑……!"
"사신(死神)인 줄 모르고 남아 있었던 것이 후회스럽다."
"크으윽……, 사람이 아니다!"
숲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자들은 죽립인이 십 장 밖에서 쳐낸 사공괴초(邪功怪招)에 당해 창졸지간에 피떡으로
화했다.
죽립인은 일곱 사람을 간단히 죽인 다음 숲을 지나쳤다.
그의 독랄한 손속은 강호에 예사롭지 않은 풍운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죽립인은 자죽림(紫竹林)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장원 한 채를 볼 수 있었다.
"놈들이 소박하던 장원에 군더더기를 많이 붙여 추악하게 만들어 놓았군. 안에 있는 자는 하나도 살지
못하리라!"
죽립인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자죽림을 뛰어넘었다.
그는 자죽림 하늘 위에서 한 무더기 피구름으로 화했다. 혈무에 둘러싸인 마치 불길한 혈운처럼 담장으로 향했다.
순간, 수십 군데서 함성이 일며 수백 개의 철화살이 전광처럼 폭사해 올랐다.
피핑― 핑―!
"갑노(匣弩)로 놈을 떨어뜨려라!"
"죽여라!"
그러나 죽립인을 맞춘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화살이 쏘아지는 순간 이미 자죽림을 넘어가 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화살보다도 빠른 움직임이었다.
"옥부용을 죽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그 계집도 멀지않아 내 손에 죽는다, 하하핫……!"
죽립인은 장원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광소를 터뜨렸다.
그의 몸은 보이지 않고 혈운만 번뜩였다. 광기 어린 외침이 장원 구석구석을 진동시켰다.
"모두 다 죽는다. 이 날을 위해 육 년을 고행 속에서 보낸 탁옥룡이다!"
죽립인의 눈에는 강렬한 혈광이 흘러나왔다.
아……, 그렇다. 그는 바로 마중지존이며 천년마제의 후예가 된 탁옥룡이었다.
탁옥룡은 살기와 마성(魔性)에 젖어 장원을 뒤지고 다녔다. 너무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그를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탁옥룡은 수백 장을 움직이다가 탁가장원의 중심 되는 곳에 이르렀다.
아름다운 누각 한 채가 서 있었다.
<견정헌(堅定軒)>
아름다운 추억이 젖어 있는 그 누각은 과거 탁천영이 탁옥룡에게 글을 가르쳐 주던 곳이었다.
'아버님……!'
탁옥룡은 한줌 유골이 되어 버린 양부를 떠올리며 잠시 상념에 젖었다.
이 때, 견정헌에서 급히 뛰어나오는 반 벌거숭이 중년인 하나가 있었다.
"제길, 무슨 소란이냐? 혈수나찰이 다시 오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는 몸에서 지분 냄새를 풍겼다.
방금 전까지 벌거벗은 여인 셋과 함께 육체의 향연을 벌였기에 여인의 진한 살내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견정헌 안에서 여인네들의 교성이 흘러나왔다.
"호호……, 단주님이 우리들을 괴롭히던 힘을 다 쓴다면 대라신선이라 해도 단주님 손에 죽을 겁니다."
"구존(九尊) 중 넷째이신 검존(劍尊)의 수제자 진천검왕이 있는 곳으로 왔으니 바보가 아니겠습니까?"
"아……, 잠시 쉬어야지."
견정헌 넓은 침실에서 알몸으로 꿈틀대는 여인들은 서로 끌어안으며 희희덕거렸다. 그녀들은 아직도 교접의
쾌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닥쳐올 무서운 운명을 알지 못했다.
"케에… 엑!"
처절한 비명성과 함께 핏물이 튀었다.
반 벌거숭이 진천검왕의 몸뚱이가 견정헌 바로 앞에서 수천 조각이 되어 흩어지며 그 자리로 죽립인이 떨어져
내렸다.
"나의 집이 마굴(魔窟)로 화했다. 더러운 자들의 살내음이 가득 차 있다. 으으……, 이곳은 더 이상 나의
고향이 아니다!"
단 일장으로 옥룡마궁에서 백대고수 안에 드는 진천검왕을 박살낸 사람은 바로 마중지존의 제자 탁옥룡이었다.
그는 탁가장원이 음욕과 황음(荒淫)함으로 가득 찬 마굴로 화했다는데 전율했다.
그가 바라던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고요함과 편안함, 이수운의 다정한 속삭임, 그리운 양아버지에 대한 추억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육 년의 세월 동안 달라진 것은 달라진 것은 탁옥룡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이 바뀌었고, 고향마저 바뀐
것이다.
탁옥룡은 극도로 흥분했다. 분노와 함께 살기가 물씬 치솟았다.
"으드득……, 피로 씻겠다! 피로 씻으리라!"
탁옥룡의 몸을 뒤덮은 혈무가 급속히 확대되었다.
뇌성벽력이 일어나며 땅덩이가 흔들거렸다. 소용돌이치는 기류의 폭출에 주변의 전각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으아아……!"
핏빛 모발을 철사처럼 세우고 양주먹을 불끈 쥔 탁옥룡의 모습은 아수라와 같았다.
진천검왕의 비명소리에 놀라 견정헌 앞쪽으로 들이닥치던 백여 명의 산서단 고수들은 그것을 보고 기절초풍 놀라
뒤쪽으로 사라져 갔다.
"사람이 아니다!"
"혈… 혈마(血魔)다!"
"전설의 혈영공(血影功)이 나타났다. 핏빛 기류에 닿는 순간 몸이 으스러진다!"
그들이 감히 대적할 생각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차― 앙!
탁옥룡이 손을 쳐들자 검이 뽑혀져 손아귀에 잡혔다.
"만보전(萬寶殿)의 신병이기(神兵異器) 중 가장 날카로운 혈섬검(血閃劍)! 네가 피맛을 못 본 지 일천 년은
되었을 게다."
탁옥룡이 꺼낸 검은 마왕동 만보전에 있던 신병이기 중 가장 무서운 위력을 지녔다.
혈섬검과 마왕잠은 과거 마중지존이 애지중지 하던 양대보물의 하나로 탁옥룡이 마왕동주 자격으로 지니고 있는
신물(信物)이기도 했다.
혈섬검에서 검강(劍 )이 일어나더니 검이 그의 손을 벗어나 허공으로 올랐다.
곧장 이십 장 높이까지 치솟은 혈섬검은 허공에서 방향으로 바꾸며 지상으로 향했다. 이어 벼락치는 기세로
떨어져 지상을 향해 떨어졌다.
"환( )― 우(宇)― 멸(滅)― 절(絶)―!"
탁옥룡은 빙글 회전하며 전면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진기로 검을 조종했다.
번쩍―!
혈섬검은 살아 있는 새같이 사위(四圍)를 꿰뚫으며 날았다. 검은 보이지 않고 핏빛 검강이 번뜩였다.
붉은 번개가 지축을 끊어버릴 듯한 가운데 수급이 검강에 닿기도 전에 끊어져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아악……!"
동쪽에서 비명소리가 난다 싶자 서쪽에서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캐애액!"
"아아악!"
정수리에 구멍이 나서 죽은 자, 가슴에 큰 동혈이 파여 심장을 쏟아내며 죽어자빠지는 자, 오체분시가 된 자 등
죽는 모습도 가지가지이고 비명소리도 각인각색이었다.
혈섬검은 사람이 있는 곳이면 주저없이 날아가 피보라를 일으켰다.
탁옥룡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 반경 일백 장 안이 시산으로 화했다. 바닥은 핏물로 가득했고 역겨운
피비린내를 발했다.
혈섬검은 도망치는 자를 단 하나도 허락하지 않았다.
혈섬검은 숨소리가 다 멎은 후에야 위세를 잃고 탁옥룡의 손바닥 안으로 날아들었다.
"검신이 더욱 붉어져 보기 좋군."
탁옥룡은 차게 말한 다음 검을 검집에 꽂았다.
그는 천천히 견정헌 쪽으로 돌아섰다. 가뿐 숨소리와 함께 세 여인이 누각 안에서 기어나왔다.
"대… 대협(大俠)!"
"소… 소녀들은……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마궁환락당(魔宮歡樂堂)에 속한 것은 원해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였습니다. 거둬주신다면 대협의 시비가
되겠습니다. 아니, 개보다도 충직하게 주인을 섬기겠습니다."
모두 벌거벗고 있었다.
희멀건 궁둥판을 번쩍 쳐들고 엉금엉금 기는 여인들의 늘어진 젖가슴에는 이빨 자국, 손톱 자국이 많았다. 무수한
멍자국은 여인들이 침상에서 수없이 많은 격전을 치렀음을 말한다.
탐스러운 넓적다리와 터질 듯한 육봉에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는 지극히 뇌쇄적이었다.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저희들은 무공을 모릅니다."
"마궁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는 불쌍한 계집들입니다. 가… 가련히 여기시고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여인들이 지분으로 덮인 얼굴 가득 눈물을 뿌렸다.
탁옥룡은 아무런 대꾸 없이 손바닥을 들어 맨 왼쪽 여인을 겨냥했다. 폭음과 함께 벌거숭이 여인은 목 윗부분이
산산이 박살난 시체가 되어 축 늘어졌다.
아……, 뜨거운 피를 지닌 인간으로서는 상상치 못할 너무도 가혹한 살수였다.
"지독한 놈!""
"에잇, 목숨을 구걸한 우리들이 어리석었다!"
두 여인이 이를 갈며 위로 날아올랐다.
무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녀들 역시 마궁의 제자였다. 궁여지책으로 탁옥룡을 속이려
했지만 실패한 것이다.
그녀들이 이 장 떠오를 때 탁옥룡은 손가락 두 개를 퉁겼다.
펑― 펑―!
두 번의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향기롭고 탐스럽던 몸뚱이가 피떡으로 으스러져 사방에 피비를 뿌렸다.
"훗훗……, 너희에게서 내공의 기운이 느껴지거늘 어이해 무공을 모른단 했더냐?"
탁옥룡은 피를 보자 기분이 좋아진 듯 득의해 웃었다. 그는 잔혹한 눈빛을 흘리다가 한 곳을 노려봤다.
"조금 전 날아들었다는 것을 안다. 어서 나타나라!"
그는 대나무 숲으로 돌아섰다.
"으음……, 정말 놀라운 마공(魔功)이다. 천하에 이런 고수가 있다니……. 흠, 네가 마궁고수가 아니기
천만다행이다."
숲 안에서 걸어나오는 백의복면인이 있었다.
그는 등에 손잡이가 녹슨 검을 하나 짊어지고 있었다. 피를 밟기 싫은 듯 마른땅을 골라 걸었다.
탁옥룡은 번갯불 같은 안광을 발하며 냉랭하게 물었다.
"웬 놈이냐?"
"어검술에 의한 섬광이 십 리 밖까지 퍼졌다. 누가 세상에 드문 어검술을 펼쳤는가 궁금해 지나던 길에 들린
사람이네. 무혈검(無血劍)이라 부르게나."
그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편하게 해 주는 음성이었다.
"무혈검? 훗훗……, 그럼 검이 아니군. 검은 피맛을 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
탁옥룡이 비웃자 복면인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본인의 검은 사마를 퇴치하기 위한 탕마검(蕩魔劍)이네. 하지만 굳이 피를 묻힐 필요는 없네."
복면인의 눈빛은 지극히 날카로웠다. 두 사람은 말을 나누며 눈싸움을 시작했다.
탁옥룡의 안광은 혈광(血光)이고, 복면인의 눈빛은 신광(神光)이었다. 두 사람은 눈싸움을 하며 옷을 땀으로
적셨다.
"으음……!"
탁옥룡은 복면인의 눈빛이 너무도 깊다 느꼈다. 그 안으로 빨려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들게 했다.
무혈검은 역시 내심 부르르 떨었다.
'아……, 정말 무서운 안광이다. 옥룡천자의 안광이라 해도 이 사람같이 사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속옷을 땀으로 적셨다. 눈싸움은 반시진이나 계속되었다.
탁옥룡은 상대가 악착같이 심력 대결을 펼쳐오자 눈을 부릅뜬 채 입을 열었다.
"마궁도는 아니로군?"
"마궁의 적이다. 나는 천하에 퍼진 마궁도들을 찾아다니며 비무를 하여 무림을 떠나게 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럼 나와 싸울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무혈검은 무거운 어조로 응대했다.
"마궁이 나의 적인 이유는 사마의 무리이기 때문이다. 너는 지금 무명(無名)이나 얼마 안 가 마궁보다 더한
마두가 될 자다. 그러기에 미리 제거하려는 것이다."
"쯧쯧……, 꽤나 할 일이 없는 자군."
탁옥룡은 비웃으며 금강마안공(金剛魔眼功)을 발휘했다.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십 배 밝아졌다.
"어엇?"
무혈검은 눈이 녹는다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탁옥룡의 환청 같은 음성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하하핫……, 마궁도가 아니기에 용서하겠다. 앞으로는 내 일에 함부로 끼여들지 마라."
무혈검이 다시 눈을 떴을 때 탁옥룡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으음……, 정말 두려운 자다. 분명 전설의 혈영공을 익힌 사람인데 설마 마중지존의 절대마공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미 절전된 지 천 년이나 된 마중지존의 마공이 어떻게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후예를 두지 않았으니 마중지존의 마공은 영원히 묻혀 버렸다."
그는 이미 까마득한 점으로 화해 버린 탁옥룡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일심맹(一心盟)이 주목해야 할 자다. 자칫하다가는 마궁이나 포달랍궁보다 위험한 존재가 되리라."
무혈검은 시산으로 가득한 장원을 둘러보고는 두 손을 합장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선인이 되시게."
그는 오랫동안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며 있다가 홀연히 사라져 갔다. 그의 신법은 탁옥룡에 비해 그리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第九章 천하일절 혈영마협(血影魔俠)


1
다음 날 미시(未時) 무렵이다.
탁옥룡은 환향(還鄕)의 슬픔을 이기기 위해 스무 근의 술을 마신 상태로 산서성을 벗어나 하남성(河南省)
청화진(靑化鎭)이란 마을 어귀를 걷고 있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못한다, 하하……."
그는 허공을 우러르며 웃었다. 기쁜 웃음이 아니고 공허한 웃음이었다.
'그토록 가고 싶어하던 고향이었는데, 발견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는 고독감을 느꼈다.
천하에서 버림받은 존재 같다는 기분이 그를 슬프게 했고, 아름답던 시절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상실감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터벅터벅 걸었다.
검을 메고 있어 무인으로 보일 뿐 다른 점으로 봐서는 무림인이라 할 수 없었다.
'마궁의 분타란 분타는 모조리 내 손에 무너진다. 그러다 보면 마궁의 옥부용이 나를 찾아올지도 모른다.'
탁옥룡은 옥룡마궁이 축융봉(祝融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는 것을 서둘지는 않았다. 어차피 옥룡마궁주는 그가 처단해야 할 마지막 수괴였다. 그 전에
옥룡궁도들을 더 많이 죽여 마음을 달래 작정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때, 여인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초여름의 울창한 송림(松林) 안에서 흐느끼고 있는 청의여인이 하나 있었다.
"흐흑……, 아무도 돕지 않다니. 흐흑……, 너무도 원통한 세상이다."
청의여인은 오른손에 단검을 쥐고 있었다. 단검에는 극독(極毒)이 발려 있는지 검광이 아주 짙푸르렀다.
"이것으로 심장을 찌르며 한 많은 세상을 떠날 수 있다. 배반자를 죽일 힘이 없으니……, 무슨 낯으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혼백 앞에 설 것인가?"
여인은 흐느끼다가 움켜쥐고 단검으로 심장을 겨누었다. 단검이 젖가슴 사이에 닿을 때였다.
땅……!
갑자기 쇳소리와 함께 단검이 그녀의 손에서 퉁겨나갔다.
"아… 아니? 검이 갑자기 부러지다니……?"
청의여인은 빈 손이 되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이는 스물을 갓 넘겼고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여체를 지닌 화용월태(花容月態)의 미인인데, 너무 울어 눈이
통퉁 분 상태였다.
여인이 깜짝 놀랄 때 죽립인영이 여인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떤 한이기에 자결하려 하시오?"
청아한 목소리가 그녀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뉘… 뉘십니까? 고인(高人)께서 단검을 부러뜨리셨습니까?"
청의미녀는 사내를 보고 있다는 것조차 두려운지 얼굴을 퍼렇게 물들였다.
"나는 과객이오. 우는 소리를 듣고 왔소. 무례하게 단검을 끊은 죄를 용서하시오."
청아한 목소리의 죽립인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력으로 반 토막이 난 독검을 주워 들고는 끊어진 부분을 맞붙인 다음 힘을 가했다.
독검의 날은 아주 예리했다. 그래도 칼날을 꼭 쥐고 있는 그의 손바닥을 베기에는 너무도 무뎠다.
"아아……!"
청의여인은 탁옥룡이 독검을 쥐고 있다는데 경악하고 말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반 토막 난 독검이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실로 요술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탁옥룡은 그녀에게 독비수를 내밀었다.
"목숨을 함부로 여기지 마시오."
"어… 어떻게 검을 붙이셨습니까?"
"훗……, 그리 힘든 일은 아니오."
탁옥룡은 실소를 지으며 독검을 건네주었다.
여인은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청아하고 손바닥이 아주 희다는데 약간의 호기심을 느끼는 듯했다.
그러나 탁옥룡은 남이 얼굴을 볼세라 죽립을 눌러 쓴 상태였다. 다른 사람은 그의 아래턱조차 볼 수 없었다.
"왜 자결하려 하셨소?"
탁옥룡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혼백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다.
청의여인은 완전히 압도당해 무릎을 꿇고 입술을 떼었다.
"소녀는 절산(切山)의 토호(土豪)인 창염신옹(蒼髥神翁)의 딸입니다. 이름은 사마옥봉(司馬玉鳳)이라
합니다."
"아주 좋은 이름이군요."
"소녀는 얼마 전까지 마을 사람들을 깔보며 지냈습니다. 가문의 재물이 황금 만 관에 달하고, 차지하고 있는
영토가 장원을 중심으로 백 리에 달했기 때문이지요. 하오나…… 지금은 그랬던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지금
소녀가 갖고 있는 것은 원한뿐입니다."
탁옥룡은 그녀의 처지가 육 년 전 자신의 신세가 비슷하다 여기며 연민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삼 년 전, 아버님께 파문당한 역도(逆徒) 하나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아버님을…… 능지처참시켰습니다."
"으음……!"
사마옥봉은 맑은 옥루를 뚝뚝 떨구었다.
"소녀는 구사일생(九死一生) 혈로를 뚫고 여기까지 왔으나, 흑흑……. 차마 삶을 계속할 수 없어 죽음을 작정한
것입니다."
"어떤 자이기에 그런 만행을 자행했소?"
"그 자는 옥룡마궁의 향주(香主)가 되어 돌아왔습니니다. 그 자는 본장의 삼보(三寶)를 마궁지존(魔宮至尊)
에게 받쳐 향주 지위에서 당주(堂主) 지위로 오른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탁옥룡은 슬몃 호기심이 일었다.
"삼보라니?"
"그것이 혈겁을 불렀습니다. 그 자가 삼 년 전 죄를 지었던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얼마 전 포달랍궁 고수들이
들이닥쳤던 것도 그 때문이고……."
"포달랍궁?"
사마옥봉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꾹꾹 눌러 닦았다.
"예, 그들은 하나같이 신비한 고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삼보를 황금과 바꾸겠다면서 창염장을 찾았다가 빈
손으로 되돌아갔지요. 삼보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단 세 사람뿐입니다. 저와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지금은
그 놈에게 잡힌 제 동생입니다."
"흐음……!"
"그것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단로(丹爐)와 옥소(玉簫), 옥선(玉扇)인데 모두 엄청난 비밀을 갖고 있습니다."
여인의 말이 거기에 이르자 탁옥룡은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알겠소, 함께 가봅시다."
"으음……!"
사마옥봉은 사내 내음에 취해 몸을 약간 떨었다.
탁옥룡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그녀의 비단결 같은 피부에 가슴이 설레였다.
"어디로 가야 하오?"
"저… 저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사마옥봉이 동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이 여운을 맺기 전에 탁옥룡은 붉은 그림자를 끌며 백여 장 멀리 날아올랐다.
사마옥봉은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 되어 입을 딱 벌렸다.
'아……, 세상에 이렇게 빨리 나는 사람이 있다니. 이것이 바로 화신지경(化神之境)이라는 것이 아닐까?'
사마옥봉이 아연실색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되어 단숨에 이십 리를 가로질렀다. 사마옥봉으로서는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아……, 대협. 좀 천천히 가시옵소서."
"더 빨리 가야겠소."
탁옥룡은 다소 급한 어조로 응대했다.
"예에? 더 빨리요?"
"보시오, 저곳에서 검은 연기가 일어나고 있소. 아마 큰 싸움이 일어난 듯하오."
탁옥룡은 사마옥봉이 미처 보지 못하는 산 너머 흑연을 가리켰다.
그는 사마옥봉의 부드러운 손목을 꽉 쥐며 신법을 최대로 발휘했다. 사마옥봉은 귓전을 씽씽 지나치는 바람에
질려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바로 최상승 경공 어기표풍술이 그것이었다.
대략 향 반 자루가 탈 시간이 지났을 때 두 사람은 한판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장원 근처에 이를 수
있었다.
차창― 창―!
"차― 앗!"
"어림없는 수작 마라!"
웅장한 장원이 불붙어 타오르고 있었다.
푸른 경장을 걸친 미녀 하나가 은검(銀劍)을 든 복면고수 이십사 명을 이끌고 안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장원에서는 백여 명이 몰려나와 복면인들을 상대로 접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수적으로는 복면인들이 열세였지만
승기를 잡은 쪽은 복면인들이었다.
사마옥봉은 싸움판을 구경하면서 조그맣게 말했다.
"청의여인은 제가 아는 여인입니다. 얼마 전 삼보를 황금과 바꾸겠다며 온 포달랍궁의 여인입니다. 스스로를
좌비연(左飛燕)이라 했습니다. 다시 온 이유는 역시 삼보 때문일 것입니다."
"배반자도 있소?"
"없습니다. 그는 안에 있을 것입니다."
"가봅시다."
탁옥룡은 훌쩍 날아올랐다.
그는 치열한 접전장을 가로지르면서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빨리 움직였다. 두 사람은 이내 장원 깊숙한
곳으로 날아들었다.
사마옥봉은 그를 가산(假山)이 있는 아름다운 정원 쪽으로 안내했다.
"저 안이 바로 장주의 거처입니다."
사마옥봉은 흥분된 기색이었고 생기에 불타고 있었다.
"안에서 비명소리가 나고 있소.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있는 것 같소."
탁옥룡은 그림자같이 움직여 가산 바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흐흐, 이게 누군가? 옥봉이가 아닌가? 그래 어이해 들어왔지? 흐흐,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냐"
거친 목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다가섰다. 얼굴에 칼자국이 가득한 황삼인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옷자락에는 핏물이 묻어 있었다.
"퉤에!"
사마옥봉은 그가 다가서자 침을 뱉았다.
"흥, 고약한 년! 네년이나 동생 놈이나 모두 똑같다. 네 동생은 삼보가 묻힌 곳을 말하지 않아 착골수혼(錯骨授
魂)에 죽고 말았다."
황의인은 거칠게 내뱉으며 한 곳을 가리켰다.
피범벅이 되어 길게 누워 있는 십오세 소년이 하나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사마옥봉은 소년을 보고는 얼굴을 하얗게 물들였다.
"아아……, 네… 네가 천룡이를 죽이다니!"
사마옥봉은 너무도 엄청난 충격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탁옥룡은 급히 그녀를 부축해 안았다.
"흐흐……, 그 년이 포달랍궁을 불렀음에 틀림없으니 네놈도 필경 포달랍궁의 땡땡이 중놈이겠구나?"
황의장한은 이를 갈며 귀두도(鬼頭刀)를 쳐들었다.
"네가 창염장의 반도냐?"
탁옥룡의 말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말소리에 실린 한기만으로도 반도의 몸이 위축되었다.
"반… 반도가 아니다. 이… 이곳의 주인이고 옥룡마궁의 제자다. 나를 해친다면 무… 무서운 보복을 받게
된다."
그는 상대할 마음을 잃고 귀두도를 떨어뜨렸다. 상대의 몸에서 풍겨지는 강렬한 마성은 도저히 그가 감당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흥, 싸울 자신이 없었다면 아예 죄를 짓지 말았어야지!"
탁옥룡은 차게 말하며 한 걸음 움직였다. 발이 닿았다 떨어지는 곳에 한 자 깊이 족인(足印)이 새겨졌다.
"나… 나는 그냥 떠나겠다. 삼보에 대한 미련을 버릴 것이니, 나… 나를……!"
황의인은 사색이 되어 주춤주춤 물러섰다.
탁옥룡의 오른손 중지(中指)를 퉁겼다.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황의장한의 이마 한가운데 동전 만한 구멍이
뚫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는 구멍으로 뇌수를 뿜어내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탁옥룡은 그의 시체 곁을 스치고 지나가 소년 사마천룡 곁에 이르렀다. 그는 소년의 맥을 쥐며 세심히 진단했다.
"흠……,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이 아이가 죽는다면 사마옥봉도 상심해 따라 죽을 것이니 살려야겠다."
탁옥룡은 사마천룡의 굳은 몸을 매만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천산의서(天山醫書) 안의 기오막측한 여러 가지 의술을 생각하다가 한 가지 해결책을 찾아냈다.
"회혼대정법(廻魂大正法)을 쓴다면 숨을 이을 수 있다!"
그는 장심을 사마천룡의 정수리에 대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힘이 일어나 사마천룡의 백회혈(百會穴)을 통해 사지백해로 흘러들었다.
으드득― 으득―!
착골수혼이라는 모진 고문으로 어긋났던 뼈마디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장육부도 곧 제자리를 잡았고, 잠시 끊겼던 숨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흐음, 맥이 뛰고 피가 돌기 시작했으니 살아나겠군."
탁옥룡은 그제야 안심하며 정수리에서 손바닥을 떼었다.
바로 그때, 아주 아리따운 음성이 곁에서 들려왔다.
"호호……, 창염신옹(蒼髥神翁)이 중원제일의(中原第一醫)라더니 역시 맞는 소리로다. 창염신옹을 신의로 만든
삼보(三寶)를 취해 가기보다 그대를 데리고 가는 것이 낫겠다."
탁옥룡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장원 밖에서 마궁고수들과 싸우던 청의여인 좌비연(左飛燕)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도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쪽으로는 복면승들이 도열해 있는데 옷자락이 선혈로 얼룩졌다. 마궁 고수들은 그들의 손에 모두 도륙되었던
것이다.
"포달랍궁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포달랍궁에는 정파삼대신공 중 하나인 대유마가신공과 천하제일 권법인
미륵수미신권(彌勒須彌神拳)이 있다지?"
탁옥룡이 일어나며 천천히 말하자 모두들 경악의 표정이 되었다.
대유마가신공이 포달랍궁에 있다는 것은 천하인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미륵수미신권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비밀이었다.
사실 포달랍궁주 혈미륵 모찰륵이 중원진출을 결심하게 된 동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수백 년간 절전되었던 미륵수미신권을 얻었고, 그로 인해 엄청난 자신감을 갖고 중원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좌비연은 모찰륵의 전인은 아니었지만 모찰륵에게 많은 절기를 배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모찰륵에게 딸같이
귀여움을 받고 있는 몸이었다.
'으음, 어떻게 궁주의 비밀을 알고 있단 말인가?'
좌비연은 손에 땀을 쥐다가 천천히 말했다.
"창염장 사람은 아니군."
"잘 봤다. 나는 어디서나 객(客)이다."
"뛰어난 의술을 지녔는데 본 낭자와 동행할 마음은 없는가? 응한다면 후한 상을 받을 것이고, 원한다면 창염장에
남겨 두어 마궁고수들이 감히 복수하지 못하게 해주겠다."
탁옥룡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사마천룡에게 고정시켰다.
"어디로 가자는 말이냐?"
"환자가 있다. 신의를 필요로 하는 병자가 있다. 나는 존귀하신 혈미륵궁주의 명을 받고 신의나 영약을 구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는 포달랍궁의 좌비연이다."
"포달랍궁의 의술도 신의 경지에 달하지 않았느냐?"
좌비연은 다소 부끄러움을 느끼며 볼을 살짝 붉혔다.
"그렇기는 하나…… 고치지 못하는 병을 가진 분이 있다."
"그게 누구냐?"
"말할 수 없다."
좌비연은 다소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같이 가다오. 너의 인생이 바뀔 정도의 보답을 얻을 것이다."
탁옥룡은 사마천룡의 얼굴이 화색이 감돌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가지 않겠다. 포달랍궁에는 호감이 없다. 하지만 환자의 병세를 말한다면 의서의 주인으로 충고를 해줄 수는
있다."
"으음……!"
좌비연은 크게 모욕감을 느끼며 주먹을 거머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를 쳐죽여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책무를 생각해 억지로 감정을 눌러 참았다.
그녀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광기(狂氣)에 찬 중년여인이 있다. 말을 하지 못하고, 식사도 제대로 못한다. 벌써 이십 년째 되는
고질병이다."
"광기라고? 증상은 어떠하냐?"
"언제나 악몽을 꾸시는 듯 항상 추위에 떠시고 간간이 비명소리를 내신다. 알아들을 만한 말을 하지 못한다."
"흠……, 묘한 병세로군."
탁옥룡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천산의서 안의 여러 가지 요결을 되새기다 문득 한 가지를 머리에 떠올렸다.
"천년연실(千年蓮實)에 화리담(火鯉膽)을 섞어 만든 백물탕(百物蕩)을 쓴다면 광기가 한결 나아질 것이다."
"백물탕?"
"의술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제할 수 있는 탕재다. 문제는 천년연실과 화리담이다."
"그것은 충분히 구할 수 있다."
"잘됐군, 그럼 어서 떠나라."
탁옥룡은 비정히 말하며 사마옥봉을 뉘여 놓고 곁에 쭈그려 앉았다.
'뭐 이런 작자가 다 있지?'
좌비연은 그의 지독히도 냉담한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으음……!"
사마옥봉이 가래를 토하며 눈을 떴다.
탁옥룡은 그녀의 심정을 아는 듯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떼었다.
"동생은 죽지 않았소. 울지 마시오."
"예에……?"
"보시오, 저기 누워 있지 않소?"
"오……, 정말이군요!"
사마옥봉은 동생 사마천룡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동생 곁으로 다가앉았다.
"흑흑……, 천룡아! 천룡아! 살아나 다행이다!"
좌비연은 여전히 떠나지 않고 한 마디 던졌다.
"흠……, 의술뿐 아니라 점혈탄혈(點穴彈穴)에도 일가견이 있구나. 너는 어떤 명호를 갖고 있느냐? 중원에 온
후 너 같은 기인은 처음이다."
"귀찮은 계집이군."
탁옥룡이 몹시 짜증스런 기색을 지었다.
"네… 네가 나를 욕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좌비연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일장을 내질렀다. 장영이 수십 수백 개 뿌려졌다.
콰류류류―!
무수한 장영이 폭풍처럼 몰아치건만 탁옥룡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놈이 죽음을 자초하다니……?'
좌비연은 차마 탁옥룡을 죽일 수 없기에 장심에서 오성의 진기를 회수했다.
꽈르르― 릉!
탁옥룡을 뒤덮어가던 막강한 장세가 탁옥룡의 호신강기에 휘말려 더 반탄력으로 좌비연의 몸을 휘감았다.
"아악……!"
좌비연은 두 팔이 탈골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퉁겨져 날았다. 포달랍궁 고수 셋이 급히 그녀를 부축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은검을 꺼냈다.
장원 안이 싸늘한 검기로 휩싸였다.
탁옥룡은 혈광을 번뜩이며 한 마디 한 마디 끊어 외쳤다.
"어― 리― 석― 구― 나―!"
쇄금강후(碎金剛吼)에 의한 목소리이고 사람을 가려서 위력을 발휘하는 엄청난 음공이었다.
"으윽, 고막이 터졌다!"
"크으……, 마궁구존보다도 강하다!"
포달랍궁 고수들은 눈빛을 흩트리며 몸을 휘청였다.
사마옥봉은 그들이 갑자기 휘청이는 이유를 모르고 얼떨떨해 했다. 막강한 쇄금강후였지만 그녀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포달랍궁 고수들이 겨우 신형을 바로잡을 때 담장 너머에서 좌비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 빚은 나중에 갚을 수 있으니 어서 떠나자!"
그녀는 처연히 외치고는 탈골된 두 팔을 늘어뜨린 채 멀리 사라져 갔다. 젊은 승려들은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장원은 곧 쓸쓸한 장소로 화했다.
"나도 떠나야겠구나."
탁옥룡은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사마옥봉을 바라봤다.
"가겠소."
"아……, 벌써요?"
"하하……, 회자정리(會者定離)가 아니겠소? 하지만 내가 없어도 안전하게 만들어 준 다음 떠날 것이니 겁먹지
마시오. 장원 둘레에 기문진을 설치하겠소. 출입법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낭자에게 몇
가지 기예를 전수하겠소."
"고… 고맙습니다. 하오나 지금 떠나시면 너무 섭섭합니다. 은공께 한끼 식사라도 대접해 올리고 싶습니다."
"미안하오. 나는 할 일이 많소."
탁옥룡은 차게 말하며 장원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수십 장 밖으로 날아가며 지형을 자세히 살폈다. 기문진을 설치하기 위한 지세를 관찰하고는 적당한 진법을
생각했다.
우르르― 릉―!
그의 손이 흔들릴 때마다 작은 산이 만들어졌다. 창염장은 거대한 기문진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탁옥룡은 반 시진 정도 신공을 발휘해 진세를 완성하고는 사마옥봉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다 됐소. 이제 출입법을 일러드리겠소."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차가웠다.
"대협께 드릴 것이 있습니다."
사마옥봉은 미리 준비해 둔 물건을 내밀었다.
한 치 높이 녹옥로(綠玉爐), 녹옥로와 같은 재질의 녹옥으로 만든 옥소(玉簫)와 옥선(玉扇)이 그것이 소반에
담겨 탁옥룡 쪽으로 전해졌다.
"이것이 혈풍을 부른 물건입니다. 원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은 아오나 이 물건의 주인은 대협이시기에 드리는
것이니 사양하지 마십시오."
탁옥룡은 뜻밖의 일에 약간 당황했다.
그녀가 내민 삼보는 가문이 참화를 당할 만큼 진귀한 보물이었다. 그녀의 고운 심성이 그를 감격케 했다.
'가만…… 글이 새겨져 있군?'
탁옥룡은 삼보를 살피다 기이한 문양을 발견해 냈다. 뛰어난 안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읽지 못할 미세한
글귀였다.
<금단선공(金丹禪功)>
<불영백팔선(佛影百八扇)>
<취영미리보(翠影迷離步)>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흐음, 이것은 천백 년 전 의무쌍절(醫武雙絶)이라 불렸던 녹옥상인(綠玉上人)의 삼대절기가 아닌가? 고대
무림사에 적혀 있던 것들이 삼보에 수록되어 있다니……, 이 모두 녹옥상인의 절기이고 그가 남긴 보물이었군.'
탁옥룡은 글을 바라보다가 담담히 물었다.
"삼보에는 무학(武學)이 적혀 있는데 그것을 아시오?"
"예에?"
"하하……, 모르시는군. 그렇다면 나의 무공을 배우기보다 그것을 익히도록 하시오. 내가 구결을 종이에 적어
드리겠소."
"아……, 비밀을 푸시다니 정말 기적입니다. 아버님은 삼백 년 내공의 주인만이 비밀을 풀 수 있다 하셨지요."
사마옥봉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경탄일색이었다.
탁옥룡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이것을 세상에 남긴 사람은 훗날 무당(武當) 장삼풍진인(張三豊眞人)과 함께 선가쌍기(仙家雙奇)라 불리던
녹옥상인(綠玉上人)이시오. 그 분의 절기는 절전되었다고 소문났었는데 창염장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오."
"이 물건 위에 적힌 것이 그토록 대단한 것입니까?"
"그렇소."
"어… 어느 정도인지요?"
탁옥룡은 확신하듯 대답했다.
"십성을 익힌다면 적어도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낄 수 있소."
"아……!"
사마옥봉은 아연실색했다.
탁옥룡은 녹옥삼보 중 녹옥선(綠玉扇)을 쳐들었다. 그는 신비스런 녹광을 뿌리는 녹옥선을 세심히 살폈다.
죽립을 뚫고 나오는 붉으레한 눈빛은 아주 강렬했다.
"이 위에 적힌 불영백팔선(佛影百八扇)은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선초요. 내공이 백년 공력 이상이어야 시전할
수 있다는 것이 흠이나 삼성 수준만 익힌다면 어느 누구라도 낭자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오. 보시오!"
탁옥룡은 낭랑히 말하고는 녹옥선을 활짝 폈다.
촤르르륵―!
무수한 선영(扇影)이 일어나며 그의 모습이 사마옥봉의 망막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녀는 수천 수만 줄기로
뻗어나오는 녹광에 아득함을 느끼고 몸을 휘청였다.
순간, 수만 갈래의 녹광이 하나로 합치더니 사마옥봉의 몸을 휘감았다.
"아악―!"
사마옥봉은 자신도 모르게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하하……, 놀라지 마시오."
탁옥룡의 목소리가 그녀의 뒤쪽에서 났다. 녹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그는 녹옥선을 접어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마옥봉은 아직도 놀람과 감탄 속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것이 바로 불영선초(佛影扇招)요. 그 위력은 본인도 놀랄 정도였소."
"아……, 불영선초를 미리 알고 계셨군요?"
"아니오."
"네에?"
탁옥룡은 녹옥선을 말아쥐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
"지금 처음 보았소. 그러기에 제 위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 것이오."
"지금 처음 보셨다고요?"
"그렇소."
"……?"
사마옥봉은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녀는 탁옥룡의 신기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것이 엄청난 고련을 거쳐 터득된 것임을 알고 있다면
감탄하기에 앞서 그의 인내력에 칭송의 말을 건넬 것이다.
"누나……!"
힘찬 외침과 함께 정적이 깨어졌다. 전신을 피로 물들이고 있던 사마천룡이 벌떡 일어나 사마옥봉 앞으로
달려들었다.
"오, 천룡아! 이렇게 널 다시 만나게 되다니……!"
사마옥봉은 동생을 부둥켜안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사마천룡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그대도 남자였다. 모진 고문 속에 저승의 문턱까지 갔다온 그였지만 여전히
당당했다.
"누나, 그 못된 자는 어디 있습니까? 누나가 어떻게 돌아왔어?"
사마천룡은 아주 영리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글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지 몰라도 얼굴빛이 아주 희었다.
탁옥룡은 오누이간의 해후를 보고 은근한 부러움을 느꼈다.
'수운이가 생각나는구나……, 살아 있다면 성숙한 여인이 되었을 텐데……!'
그러면서 그는 사마천룡의 근골이 아주 뛰어남을 발견하고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오누이의 다정한 대화를 방해하기 싫어 한쪽으로 물러나 짐보따리에서 붓과 먹통을 꺼냈다. 그는 흰 천을
꺼내들고는 그것을 땅 위에 펼쳐 놓았다.
"오누이가 다시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그는 천 위에 글을 써 내려갔다. 그가 적는 구결은 녹옥상인이 남긴 삼대절초였다.
탁옥룡은 삼보에 새겨진 구결을 기록하며 그것이 혈영금강마공과 상반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금단선공은
자신의 마공과는 극성(極性)이라 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정종수법(正宗手法)이다. 금단선공을 꾸준히 익힌다면 별다른 외공 수련 없이도
금강불괴지신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탁옥룡은 창염장의 남매에게 기연이 있게 되어 다행이라 여기며 녹옥삼절기의 끝을 마무리 지었다.
"대협(大俠), 구명지은(救命之恩)만도 결초보은(結草報恩)해야 하는 것인데 원수까지 갚아주셨군요."
사마천룡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났다. 그와 사마옥봉이 탁옥룡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탁옥룡은 실소를 짓고는 전에 비해 한결 부드럽게 말했다.
"무림인으로 의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너무 송구스러워 말게나, 소형제!"
그는 소매를 흔들었다. 소매 속에서 무형강기가 일어났다. 그들 남매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었다. 남매는
구름을 타고 오르는 기분이 되어 허리를 폈다.
탁옥룡은 그들의 경악과 존경에 찬 얼굴 앞으로 글이 가득 적힌 천조각을 내밀었다.
"녹옥삼보 위의 구결을 다 적었소. 이것을 익힌다면 창염장은 얼마 안가 천하대문파(天下大門派)가 될 것이오."
"은공(恩公)!"
사마옥봉은 얼굴을 도화 빛으로 물들이며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탁옥룡의 사내다움과 초절한 기예에
완전히 반하고 말았다.
탁옥룡은 그녀의 정열적인 눈빛을 바라보다가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죽립을 쳐들었다.
"난 이런 사람이오."
사마옥봉의 표정이 삽시간에 공포로 질렸다.
"허억… 사…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그녀는 얼굴을 퍼렇게 물들이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드러난 탁옥룡의 모습은 진정 꿈에 대할까 두려울 정도였다.
코는 뭉개져 형체를 찾을 수 없고, 입술도 짓이겨져 허연 이빨이 드러나 보였다. 온전한 살색은 보이지 않고
자색 껍데기가 있을 뿐이었다.
탁옥룡은 사마옥봉이 사색이 되어 넘어진 것을 보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나는 여인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나를 낳은 여인마저 나를 죽이려 했으니까!'
그는 일이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더 냉혹한 표정이 되어 죽립을 꾹 눌러썼다.
"대협! 제… 제 어리석은 누이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마천룡이 겁먹은 얼굴을 하고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땅에 댔다.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대협, 용서해 주십시오. 누나는 소견 좁은 여자입니다."
"하하……, 무엇을 용서한단 말이냐?"
탁옥룡은 크게 웃으며 손바닥으로 사마천룡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예전의 자신을 보듯 그가
대견스러웠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려지며 전음집밀 소리가 흘러나왔다.
"누이와 더불어 잘 살거라."
그는 사마천룡에게만 들리도록 다정히 말한 다음 꼿꼿이 날아올랐다.
"어엇―?"
사마천룡이 눈을 동그랗게 뜰 때 이미 수십 장 밖으로 간 탁옥룡의 목소리가 창염장 안에 가득히 울려 퍼졌다.
"창염장을 둘러싼 기문진을 통과하는 방법은 구결과 함께 적어두었으니 출입할 때 꼭 그대로 해야 한다."
목소리의 여운이 끊어지기 전에 그는 몇 리 밖으로 사라져 갔다.
"아……, 신인(神人)이시다!"
사마천룡은 그가 사라져 간 쪽을 바라보며 이마를 땅에 댔다.
겨우 제정신을 차리는 사마옥봉은 자신의 엄청난 실수를 자책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아, 그 분이 나를 경박한 계집으로 아시고 떠나셨으니……. 어떻게 해야 죄를 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심하게 어깨를 들먹였다. 그 모습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2
천하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혈영마협(血影魔俠)!
흑도에게는 마(魔)로, 그리고 백도에게는 협(俠)으로 불리게 된 한 인물의 혜성(慧星) 같은 등장 때문이었다.
단신으로 옥룡마궁의 분단(分壇) 칠 개소와 분타(分舵), 분향(分香) 스물다섯 군데를 피로 씻은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는 죽립(竹笠)과 보검(寶劍), 홍삼(紅衫)을 상징으로 했다.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와 싸워 살아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산서성(山西省)
에서 혈풍을 일으키기 시작해 하남(河南)과 호북성(湖北省) 전역을 피로 씻었다.
그는 형산(衡山) 축융봉을 향해 간다고 했다.
그가 누구인지, 왜 옥룡마궁을 적으로 삼으며 고금에 드문 살생을 자행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하여간 그의 존재는 이내 삼기(三奇), 일천자(一天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일천자라 함은 옥룡천자(玉龍天子) 공야무군(公冶武君)을 말하며, 삼기란 당대 최고의 기인 셋을 일컫는다.
일심검제(一心劍帝) 무혈검(無血劍)!
포달랍궁 궁주 혈미륵(血彌勒)!
묘중기인(墓中奇人)!
삼기의 활약이 있기에 일천자가 아직 천하를 얻지 못한 것이라 했다. 그리고 이제 혈영마협이란 괴인의 출현으로
인해 옥룡마궁이란 이름이 뿌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혈영마협(血影魔俠), 과연 그는 누구인가?
<제 2 권으로 이어집니다.>

第一章 마공무적(魔功無敵)
밤은 깊고 나그네는 외롭다.
탁옥룡은 지금 삼경인데도 쉬어 가지 않고 밤을 벗삼아 고독히 걷고 있었다.
"좋은 밤이다."
그는 붉은 옷자락을 바람에 펄럭이며 나는 듯 걸었다.
'칠일 간 옥룡마궁의 분타 수십 군데를 격파했으니 그들이 나라는 사람에 대해 주시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는 간간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잔혹한 웃음소리를 냈다.
"후후……, 철서생인지 옥룡천자인지 하는 자의 심장이 혈섬검(血閃劍)에 구멍이 뚫릴 날이 멀지 않았다."
그는 중얼거리며 더 빨리 움직였다.
그는 호북성(湖北省)을 지나 안휘성(安徽省)으로 든 상태였다. 안휘성이 그로 인해 유린당한다면 이어서 강서성
(江西省) 형산 근처이 이제 공포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의 복수심은 대단했다.
하루아침에 단란한 생활이 파괴되고, 양부의 죽음과 이수운의 실종, 그리고 얼굴마저 으스러진 그로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한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게다가 옥룡마궁의 횡포로 희생된 사람들의 아픔이 더한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구화산(九華山)을 횡으로 가로질러 동쪽 기슭을 타고 표표히 움직였다. 마왕동부에서 고된 수련을
감안한다면 편안한 휴식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이름 모를 계곡 어귀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 악!"
채찍질 소리와 함께 더불어 구슬픈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났다.
"말을 해라, 죽기 전에!"
표독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짜짝짝― 짝!
채찍 소리는 점점 거세졌고 비명성도 그와 함께 높아졌다.
탁옥룡은 차마 그냥 지나쳐 갈 수 없었다.
"저 계곡 안에서 나는 소리인데……? 흠, 이런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조차 살풍이 있단 말인가?"
그는 죽립을 질끈 눌러쓰고 훌쩍 날아올랐다.
그의 신법은 강호에 나온 이후 더 쾌속해져 야밤 아래서는 신형인지 새 그림자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밤 공기를 깨는 비명소리는 꽤 먼 곳에서 났다.
그 소리는 겉보기 무인지경이나 실상은 천라지망(天羅之網)인 거대한 골짜기 안에서 나고 있었다.
'흐음, 대단한 매복(埋伏)이군.'
탁옥룡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안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후후……, 이런 곳에 소굴을 만드는 무리라면 필경 사악한 무리일 것이다. 나를 그냥 지나가게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리라.'
그는 수십 명이 숨어 있는 것을 간파하고는 더 날렵히 움직였다. 짙은 야음이 그의 잠입을 가려줬다.
일 마장 정도 갔을까?
"흠, 정말 뜻밖인데? 이런 화려한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있단 말인가?"
탁옥룡은 큰 바위 뒤에 숨어 혀를 내둘렀다.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은 상상치 못할 세외선경(世外仙景)이었다. 수십 채의 누각이 연달아 서 있었다.
기이하게도 누각마다 종루(鍾樓)가 설치되었고,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언뜻 언뜻 눈에 띄었다.
"저 가운데 있는 누각을 중심으로 해서 기문둔갑술(奇門遁甲術)이 펼쳐져 있다. 그냥 들어가다가는 길을 잃기
쉽상이다."
탁옥룡은 수십 개의 누각으로 인해 포위된 형상인 한 채의 거대한 석전(石殿)을 바라봤다.
석전은 흰돌로 이루어져 흰 코끼리를 연상케 했다.
"아악……!"
비명소리는 그 안에서 들렸다.
탁옥룡은 주위를 샅샅이 쓸어본 후 두 손으로 죽립끈을 조였다. 그가 결행할 의사를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 습관적
행동이 그것이었다.
그는 오래지 않아 누각과 가산, 그리고 화단으로 인해 꾸며진 기문둔갑술이 어떤 것인지 파악했다.
"뜻밖인데? 이런 기문진은 중원에서는 잘 쓰지 않는 진법이다. 복호장룡진(伏虎藏龍陣)은 라마사원(喇 寺院)
의 이승들이 호법 수단으로 설치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는 기문진이 복호장룡대진임을 알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문(死門)과 휴문(休門) 사이에 있는 유일한 생문(生門)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일곱
명의 매복이 있었다.
"치밀한 자들이다. 가히 나는 새라 해도 지키는 자들의 허락이 없이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곳이다."
탁옥룡은 진기를 끌어올려 몸을 아주 가볍게 했다.
피잉―!
어디선가 예리한 휘파람 소리가 났다. 향전(響箭) 하나가 허공으로 쏘아진 것이다. 향전 쏘아진 소리로 인해
주위가 약간 뒤숭숭해졌다.
'응……? 다른 누가 있다.'
구름덩이가 떠오듯 지극히 빠른 신법을 시전해 복호장룡대진을 향해 다가서는 괴인 두 명이 있었다.
앞장 선 사람은 허리에 사척장도(四尺長刀)를 찬 금포노인이었다. 흰 수염을 두 자 넘게 길렀는데 눈빛이
번갯불보다 밝았다.
바로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은 낡은 옷을 걸친 노인으로 금봉(金棒)을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진세에 익숙한 듯 서슴지 않고 안으로 날아들었다.
기문진의 요로(要路)를 지키는 매복들은 그들과 교분이 있는 듯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향전은 그들이
들어감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향전은 일 리 밖에서 쏘아졌는데, 그 여운이 끝나기 전 벌써 안으로 들어왔다. 강호에서 본 자들 중 가장 강한
자들이다. 무혈검(無血劍)이라는 복면인을 제외하면 말이다."
탁옥룡은 뜻밖의 일에 접하게 되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숨어 있던 곳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주 경미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흐릿한 그림자로 화했다. 낮이라면 혈영(血影)일 것이나 밤이라 흑영이었다.
그것은 야음에 묻히는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탁옥룡은 뭇 사람의 이목(耳目)을 간단히 속이고 기문진 안으로 잠입해 백석전(白石殿)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백석전 앞에는 조각상이 있었다. 조각상은 일 장 높이 옥룡상(玉龍像)으로 입에서 불줄기가 뿜어졌다.
옥룡상 둘레에는 백팔 개의 불상(佛像)이 도열되어 있었다. 실로 귀부신공(鬼斧神工)의 경지에 이르렀다 할 수
있는 멋들어진 조각 작품들이었다.
한쪽으로 비석이 보였다. 일곱 자 높이의 비석인데 붉은 주사로 글이 새겨져 있었다.
<돈황 라마교(喇 敎)와 중원제일 옥룡궁(玉龍宮)은 동심(同心)의 형제지파다.
라마교주께서 원적하시며 하신 유언은 옥룡궁이 천하일통하게 도우라는 것이었다. 라마교 삼천 승(三千 僧)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교주의 유언을 지켜야 한다.>
누가 써 두었는지 모를 용사비등한 글이었다.
'라마교라면 옥룡마궁에 충성하겠다고 맹세하고 중원으로 나온 사대이역단 중의 일파가 아닌가?'
탁옥룡의 눈에서 혈광이 일어났다. 뜻밖의 행운을 잡은 기분이었다.
'이역사단의 위치는 완전한 비밀이다. 회회단(回回壇), 밀교단(密敎壇), 라마단(喇 壇), 사곡단(蛇谷壇)의
사단(四壇)은 옥룡마궁의 정예 중 정예다. 이역사단의 힘은 마궁이 갖고 있는 전력의 육할에 해당된다. 개방이
나머지 이할이고 그 밖의 분타가 나머지 이할을 차지한다.'
탁옥룡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곳이 라마전 중원분타라면 그가 강호에 나와 발견한 마궁의 휘하세력 중 가장 큰 분타가 되는 것이기에 가벼운
흥분마저 느꼈다.
이때, 백석전의 문이 열리며 네 사람이 걸어나왔다.
급히 들어갔던 두 명의 노인이 앞서 걸어나왔다. 그 중 거지노인은 옆구리에 길쭉한 보따리를 하나 끼고 있었다.
뒤쪽에는 아주 어여쁘게 생긴 미부인 하나가 서 있고, 곁에는 아직 머리를 깎지 않은 장년 승려 하나가 시립했다.
미부인은 선혈 묻은 채찍을 들고 있었다.
"그 놈은 아주 독종(毒種)입니다, 내가 입을 열게 하지 못한 놈이니. 호호……, 대사숙(大師叔), 육사숙(六
師叔)도 입을 열게 하려면 무진 고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거지 노인은 미부의 우려를 일축했다.
"헤헤……, 그것은 염려 마라. 입을 열게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이 어린 놈을 회회단(回回壇)으로
데리고 가기만 하면 된다."
"회회단이오?"
미부인의 눈에 질투의 빛이 역력했다.
"흐흐……, 옥부용(玉芙蓉)은 총순찰(總巡察)이 된 후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그녀가 혈수나찰(血手羅刹)
을 생포해 그곳으로 데려갔다는 말은 이미 들었겠지?"
"흥, 그 계집이 잡은 것이 아니라 그 계집의 허벅지 사이에 녹아버린 회회공자가 혈수나찰을 잡았겠지요. 이
미련한 라마공자(喇 公子)에 비한다면 회회공자는 천의무봉한 경지이지요."
거지 노인은 힐끗 장발의 승려를 보고는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라마공자가 한어(漢語)를 모른다고 욕을 막 하면 아니 된다. 하기는 한 계집으로 두 사내를
받든다는 것은 힘든 일이겠지."
미부는 채찍을 손목에 감아쥐었다.
"흥, 저만 그런가요? 옥부용이도 그렇고 철정향(鐵丁香)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흐흐……, 하여간 너의 재간은 알아준다. 오상서(吳尙書)란 놈을 위시해 조정고관 칠십 명을 주구(走狗)로
부리게 된 것은 모두 네 덕이 아니냐?"
거지노인은 옆구리에 낀 마대자루를 툭툭 쳤다.
"너의 고문법이 서툴러 주룡령기(朱龍令旗)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지 못해 옥의 티이나, 천하에서 고문을 가장 잘
하는 옥부용도 본궁 사람이니 이 어린 종자는 필경 주룡령기가 있는 곳을 토설하고 말 것이다."
"호호……, 그 누구라도 주현룡(朱玄龍)의 쇠같이 질긴 입을 열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옥부용이 아니라
독존사부(毒尊師父)님이라 도 어렵지요. 물론 궁주(宮主)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것만은 자신합니다."
말하는 미부의 가슴에는 은(銀)으로 만든 모란화(牧丹花)가 꽂혀 있었다.
그녀가 걸친 옷은 반투명한 나삼이었다. 그래서 사타구니의 은밀한 부위와 팽팽한 젖가슴 위의 붉은 유두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틀림없어요. 저는 확신합니다. 그 놈은 매를 맞다가 그냥 죽어갈 놈입니다. 그 놈은 아주 지독한……."
미부인은 냉혹히 말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백석전 앞 돌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그들 네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홍의괴인 하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홍의괴인은 물론 탁옥룡이었다. 그는 아래턱을 약간 들고 그녀를 향해 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소리가 없는, 그리고 지극히 차가운 웃음이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는 하나 삼십 장 안에 떨어지는 낙엽성(落葉聲)도 들을 수 있는 청력을 지닌 그녀의 귀가
탁옥룡의 발걸음 아래 귀머거리가 된 것이다.
"아……?"
미부인이 깜짝 놀라자 다른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비로소 탁옥룡의 존재를 발견했다.
"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느냐?"
"복호장룡진을 뚫었단 말인가?"
두 명의 노인 역시 경악에 젖고 말았다.
"우와―!"
체격이 당당한 라마승이 탁옥룡을 향해 황소 울음소리를 내며 훌쩍 날아올랐다.
그는 삼 장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몸을 뒤집어 십여 개의 환영(幻影)을 뿌렸다. 우람한 체구답지 않게 그의
몸놀림은 아주 유연했다.
탁옥룡은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천마십이변(天馬十二變)은 좋다. 하지만 너무 성급하다."
탁옥룡은 라마승이 신법을 다 펼치기를 기다렸다.
상대의 허점을 노려 기습을 가할 수 있었지만 굳이 손을 쓰지 않았다.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라마승은 자신이 다스리는 곳이 침입자가 출현했다는 사실에 크나큰 수치심을 느끼는 듯했다.
"차아아―!"
그는 격한 분노를 표하며 손을 내밀었다. 뼈가 어긋나는 음향과 함께 그의 두 손이 세 배 부풀어올랐다.
"대수인공(大手印功)!"
탁옥룡은 그의 수법을 보고 차게 웃었다.
"후후……, 네가 라마공자(喇 公子)란 놈이냐? 회회공자란 자는 그래도 귀공자 같은데 네놈은 털북숭이
산돼지로구나!"
그는 중원어가 아닌 사막 지방의 사투리로 말했다.
마왕동부에 소장된 서가에서 그는 변방의 언어를 어느 정도 습득했었던 것이다.
"우헤헤헤……, 중원에 나와 말이 통하는 놈을 죽여 보기는 처음이다. 네놈의 뛰어난 언변을 높이 사 고통 없이
죽여 주겠다."
라마공자의 눈빛이 아주 이상했다. 은은한 자광(紫光)이 서려 있었다.
'필경 피에 독을 담고 있는 놈이다.'
탁옥룡은 눈빛만으로 그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즉시 알 수 있었다.
열두 개의 환영으로 나뉘어졌던 라마공자의 몸뚱이가 하나로 합해지더니 그의 몸이 하나의 거대한 기둥으로 화했다.
우르르― 릉!
무시무시한 기공이 뇌성을 내며 탁옥룡 곁으로 날아들었다. 상당히 위맹한 공세였다.
탁옥룡은 만만치 않다 여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초로 죽이기 위해서는 절기를 써야겠구나!'
그는 속으로 뇌까리며 두 손을 끌어올렸다. 그의 두 손이 팔꿈치 어름까지 핏빛으로 물들었다. 전신이 짙은
혈무로 뒤덮였다.
라마공자가 그것을 보고 움찔하였다.
"어엇? 무슨 수법이냐?"
탁옥룡은 짤막한 기합성을 발하며 쌍장을 내질렀다.
양손에서 각기 적룡(赤龍)을 방불케 하는 기류가 흘러나왔다. 바로 마중지존의 십대절학 중 혈영파천강(血影破
天 )이 초현된 것이다.
꽈르르릉―!
피구름이 멀리 퍼지는 듯하더니 라마공자의 대수인공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라마공자가 아연실색하며 몸을 빼려 했다. 그러나 태산도 깨뜨릴 금강마장(金剛魔掌)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탁옥룡의 두 손바닥이 그의 상반신을 휩쓸었다.
콰― 콰쾅―!
라마공자는 허리까지 핏가루로 으스러지며 어처구니없이 죽었다. 사대이역단의 하나를 관장하던 절세고수인 그가
비명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한 것이다.
그의 시체가 나뒹굴자 모두 대경실색했다.
"허억, 라마공자가 죽다니……?"
"믿… 믿을 수 없다. 저 놈은 노부와 백초 이상을 겨뤘던 고수인데……?"
미부인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병신, 몸은 강철 같아 침상에서 나를 들들 볶더니만……. 으음, 위기가 되니까 속절없이 죽어 자빠지는군."
탁옥룡은 비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저 멧돼지까지 힘을 합했더라면 너희 넷을 죽이느라 꽤 애를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놈이 죽은 이상 너희
셋은 간단히 처치될 것이다."
"미… 미친 놈!"
거지노인이 눈을 부릅떴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사 척 장도를 든 노인이 손을 휘저었다.
"개존( 尊), 암만해도 보통 놈이 아니오. 저 놈의 옷차림을 보니 아마도 북방에서 피바람을 일으킨 혈영마협
(血影魔俠)이란 놈 같소."
"혈… 혈영마협?"
거지노인은 뜨악한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두 노인은 다름아닌 옥룡마궁의 최고 지위에는 있는 구존(九尊)에 해당되는 자들이었다. 거지노인이 개존이며,
장도를 멘 노인이 도존(刀尊)이다.
"개존……?"
탁옥룡은 상대가 개존이라는 사실에 피가 머리끝으로 치솟는 기분이 되었다.
'제대로 걸렸다. 굳이 찾지 않더라도 돌아가신 광개(狂 ) 노형님의 한을 풀 수 있겠군. 정말 다행이다.'
탁옥룡이 냉혹한 미소를 지었다.
은모란(銀牧丹)을 가슴에 단 여인이 허리를 살랑거리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두 분 사숙은 심려 마세요. 저 놈이 혈영마협이 아니라 달마대사의 할애비라 하더라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은모란, 자신이 있느냐?"
"호호, 라마공자는 제 하인이지만 라마승들은 라마공자를 신으로 섬깁니다. 그들이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그들은
라마공자가 죽었기 때문에 미쳐 놈과 동귀어진(同歸於盡)할 것입니다."
여인은 바로 은모란이었다.
그녀는 궁주사부인(宮主四夫人) 중 하나였다. 형식적으로는 옥룡천자의 부인이며 라마공자에게는 숙모라 불렸다.
헌데도 이제껏 그녀는 라마공자와 간통했으니 정말 모를 일이었다. 옥룡마궁의 규율이 그토록 느슨한 것인가,
아니면 은모란에게 별다른 이유가 있었는가.
하여간 그녀는 수년간 살을 섞었던 라마공자가 죽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흔들며 이상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발했다.
"우우―!"
"와아―!"
사방에서 함성이 나며 수백 명이 파도치듯 다가섰다.
모두 라마승들이었다. 그들은 탁옥룡 근처에 뒹굴고 있는 라마공자의 시체를 보고 반 미친 상태였다.
어떤 자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어떤 자는 한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꽉 다물고 있는 상태였다.
은모란은 그들이 다가서자 애써 슬픈 체를 하며 분연히 외쳤다.
"저 놈은 혈영마협이란 자요. 저 자가 라마공자를 죽였소. 라마교의 고승들은 필히 복수해야 하오."
"으으……!"
"복수다……! 복수!"
"호사절기(護寺絶技)를 쓰자……!"
라마승들이 이를 갈며 외치자 은모란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탁옥룡을 응시했다.
"네놈이 혈영마협이건 아니건,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우리들은 네놈이 죽을 때까지 차를 마시며
기다릴 것이다."
탁옥룡은 냉담하게 말을 받았다.
"쯧쯧……, 라마교의 호사절기인 천룡범창(天龍梵唱)으로 나를 죽일 수 있으리라 믿는 모양인데……. 후후,
어림없는 수작이다."
은모란의 안색에 핏기가 싹 가셨다.
"아… 아니? 그것을 어찌 아느냐?"
"후후, 너 따위는 알 것 없다. 또한 너는 천룡범창이 나를 죽이는가 죽이지 못하는가 알기 전에 죽을 것이다."
"미친 소리!"
"후후, 너희 셋 모두 죽는다. 아주 잔혹한 손속으로 말이다. 하지만 회회단이 어디 있는지 말한다면 고통 없이
죽여 주겠다."
탁옥룡은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뿌렸다.
무음의 지강이 발출되었다. 어떠한 기류도 보이지 않건만 옷자락이 찢기며 은모란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네… 네놈이 나의 옷을 찢다니……!"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찢겨진 나삼 밖으로 환히 드러났다.
탁옥룡의 유화탈백지력(流花奪魄指力)이 그녀의 나삼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벗은 몸을 보이게 된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벌거벗고 저잣거리를 뛰라 해도 능히 그럴
만한 탕녀(蕩女)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놀라는 이유는 탁옥룡의 지력 때문이었다.
"으음……, 밀교(密敎)의 무음무영지력(無音無影指力)보다도 오히려 뛰어난 지력이구나!"
은모란은 얼굴을 파랗게 물들였다. 만일 그가 그녀의 목숨을 원했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회회단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옷이 찢어졌듯이 너의 심장이 찢어질 것이다."
탁옥룡은 수백의 적을 주위에 두고도 아주 태연하기만 했다.
"흐흐……, 두고 보자니 기가 막히군. 네놈이 약간의 절예를 배워 본궁 분타 몇 곳을 박살냈다는 것은 안다만,
흐흐……. 어느 안전(眼前)이라고 날뛰느냐?"
사 척 장도를 쥔 노인의 눈에서 시퍼런 청망이 토해졌다.
"노괴는 또 누구냐?"
탁옥룡의 눈길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흐흐, 옥룡궁의 태상장로(太上長老)인 도존(刀尊)이다."
"흠, 옥룡구존(玉龍九尊) 중 하나인 모양이군?"
"바로 그렇다."
"하하……, 그럼 너도 회회단의 거처를 알고 있겠구나?"
도존은 뒷짐을 쥔 채 오만하게 응수했다.
"물론이지."
"그럼 저 추악한 계집을 통해 아는 것보다 노괴를 통해 아는 것이 낫겠군."
"흐흐……, 일초섬광도(一招閃光刀)를 피한다면 네놈에게 회회단의 위치를 알려주겠다."
도존은 평소 남에게 시비를 거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무공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무공이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낀다고 자부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사 척 장도를 서서히 쳐들었다. 도갑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하얀 도신이 나타났다.
"이것은 파천반월도(破天半月刀)와 함께 천하쌍도(天下雙刀)라 불리는 섬광신도(閃光神刀)다!"
탁옥룡은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파천반월도가 천하쌍도 중 하나라는 말에는 이의가 없다만 섬광신도 따위가 천하쌍도 중 하나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뭐… 뭐라고?"
"후후, 그것은 빠르기만 할 뿐 기가 들어 있지 않다. 그러기에 천하도법 중 열 손가락 안에 끼지도 못한다."
도존은 지독한 모멸감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 미친 소리!"
"잘 들어라. 천하십도(天下十刀)는 심극일분도(心極一分刀)와 파천반월도(破天半月刀)에서 시작되어,
항마신도(降魔神刀), 단천열지도(斷天裂地刀), 혈전도(血戰刀), 자광도(紫光刀), 환환무상도(幻幻無常刀),
능마환광도(凌魔幻光刀), 일도단홍(一刀斷虹), 그리고 개천망망도(開天茫茫刀)로 끝이 난다. 섬광신도의
이름은 그 뒤에 있다."
"으음……, 절전절학(絶傳絶學)의 이름을 잘도 주워 대는구나."
도존은 탁옥룡의 해박한 지식에 다소 기가 질렸다.
"네 말이 맞는 말이기는 하나……, 네가 말한 열 가지 도법 중 현존하는 것은 회회교의 비학인
파천반월도법뿐이다."
그는 뱀눈을 번뜩이며 섬광신도를 높이 쳐들었다.
그의 기수식(起手式)은 아주 웅휘했다. 반면, 탁옥룡은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무기력해
보이고 허점 투성이였다.
도존은 도를 내리치려다가 땀방울을 흘렸다. 그의 얼굴이 벌레 씹은 얼굴로 일그러졌다.
"빠른 섬광신도를 피하기 위해서는 보행(步行)이 유동적(流動的)이어야 한다. 네가 그것을 간파할 줄이야."
그는 탁옥룡의 기괴한 자세에서 엄청난 살기를 느껴야 했다. 그 힘은 오직 도존에게만 미쳤다. 도존은 손에 땀을
쥐며 감히 도를 내려치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도존은 심기에 압도당해 도를 쳐든 채 뒷걸음질 쳤다.
"회… 회회단은 회하(淮河)가에 있다."
셋 중 가장 강한 도존이 이초도 쓰지 못하고 물러나자 개존과 은모란이 은근히 두려워하며 그를 따라 물러났다.
"도망갈 수는 없지."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백석전 위로 오르는 계단에 발을 댔다.
"서… 서라!"
은모란이 악을 썼으나 탁옥룡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돌에 족인이 파여졌다. 그가 세 걸음째 내디디려 하자 수백 명의 라마승들이 백석전을 빙
둘러 포위하고 입을 모아 범패(梵唄)를 시작했다.
범패는 보통 듣기 좋은 불가의 창법이다.
하지만 라마승들의 천룡범창(天龍梵唱)은 듣기 좋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역겨운 소리였다. 듣는 사람은
오장육부가 비틀리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탁옥룡은 라마교의 호사절기에 당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마왕동부에서 겪은 금강마(金剛魔)의 고행 가운데에는 그보다 수십 배 엄청난 시련도 끼어 있었다. 천룡범창
따위로 나를 해할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을 노리고 시전되는 천룡범창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계속 걸어 백석전 위로 올라갔다.
"차― 앗!"
도존이 참다못해 섬광도법을 발휘했다.
번― 쩍―!
번갯불이 번뜩였다. 보이는 것은 도신(刀身)이 아니었다. 푸른 도기(刀氣)가 보일 뿐이었다. 찰나지간
이십팔로(二十八路)를 노리는 엄청난 도기가 탁옥룡의 전신으로 날아들었다.
"훗훗……, 내가 충분히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알 텐데?"
탁옥룡은 혀를 끌끌 차며 허리를 약간 틀었다.
파파팟―!
섬광신도는 애꿎은 백석전 바닥만 후려쳤다.
순간, 탁옥룡은 도존 바로 곁으로 다가가 도존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바로 역천공공금나(逆天空空擒拿)
였다.
도존은 팔목을 잡히는 찰나 피가 역류해 힘을 전혀 쓸 수 없었다. 엄습해 오는 공포가 그를 지배했다.
"너… 너는 누구냐? 어이해 이리도 강하냐?"
"노괴가 나를 혈영마협이라 부르지 않았더냐?"
탁옥룡은 잔혹하게 말하며 도존의 맥문을 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도를 쥔 도존의 손이 자신의 목을 향해 움직였다.
"제… 제발……!"
도존의 얼굴이 더 하얗게 될 수 없을 정도로 하얘졌다.
"후후……!"
탁옥룡은 잔혹한 웃음을 흘리며 팔에 힘을 가했다. 섬광신도가 도존의 천돌혈에서 혈적(血滴)을 흘리게 할
때였다.
"야앗!"
은모란이 허점을 노리고 있다가 기합소리를 내며 탁옥룡의 등판에 일격을 가했다.
작고 귀여운 여인의 손바닥이라고는 하나 금석을 녹여 버리는 용금장(鎔金掌)의 힘이 실려 있었다. 그녀의 손이
탁옥룡의 등에 닿으며 큰소리를 냈다.
퍼엉―!
은모란은 팔을 늘어뜨리며 주르륵 물러섰다.
"크으윽, 호신강기로 팔을 으스러뜨리다니……?"
그녀의 오른팔은 피떡으로 화한 후였다. 그녀의 장력 정도로는 혈영금강마공의 주인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탁옥룡은 은모란이 자신을 치고는 오히려 나자빠진다는 것을 모르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팔에 힘을 가했다.
도존의 목이 조금씩 베어졌다.
"크으윽, 제… 제발……."
천하를 진동시키는 도존이지만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벌벌 떨고 말았다.
탁옥룡이 손을 딱 멈췄다.
"목숨값을 할 만한 것이 있다면 목숨과 바꿔라.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이대로 죽을 수밖에 없다."
"무… 무슨 비밀을 알고 싶으냐?"
"후후……, 노괴의 목숨 값만한 것이면 된다."
도존은 아래턱을 떨며 애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렇다면 네게 옥룡궁의 최대 비밀을……."
바로 그때였다.
"천한 늙은이!"
그제껏 잠자코 있던 개존이 눈을 부릅뜨며 양 소매를 흔들었다. 바람이 일어나며 푸른 모래가 뿌려졌다.
휘류류류―!
모래바람이 탁옥룡과 도존의 몸을 휘감았다.
"케에에― 엑!"
도존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자위에서 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그것도 잠깐 그의 숨결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지독한
독모래였던 것이다.
탁옥룡은 그제서야 그의 손을 놓았다. 개존은 탁옥룡마저 쓰러지기를 바랐으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뛰어난 독공이다. 무상청멸독(無常靑滅毒)! 후후……, 독존(毒尊)이냐, 독왕(毒王)이냐?"
"네… 네가 만독불침(萬毒不侵)이란 말이냐? 무상청멸독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다니……?"
개존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뒤로 물러났다.
"독존이냐 독왕이냐?"
탁옥룡은 다시 다그쳐 물었다.
"독존이시다. 그… 그 분이 노부에게 주셨다."
"그가 살아 있느냐?"
"그 분은 옥룡궁 태상호법(太上護法)이시고 궁주의 장인(丈人)이다."
탁옥룡은 뚜벅 뚜벅 다가섰다. 죽립을 깊숙이 둘러쓰고 다가서는 그의 모습은 사신(死神)과 같았다.
"그럼 나의 노형님을 독으로 암산하고 십절죽부령(十節竹符令)을 훔쳐간 자도 그였더냐?"
"뭐… 뭐라고? 설마 너의 노형이 만리를 주유하며 살던 광개(狂 )라도 되느냐?"
"바로 말했다. 나는 그 분의 의제(義弟)다."
"으으……!"
개존은 너무 놀라 들고 있던 보따리를 떨구었다.
"으음……!"
보따리가 떨어지며 소년의 신음소리가 났다.
탁옥룡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개존의 얼굴 앞으로 흰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놔라!"
"무… 무엇을 달란 말이냐?"
"십절죽부령!"
개존은 벌레 씹은 표정이 되어 몸을 휘청였다. 그는 낭패한 표정을 짓다가 품에서 대나무 패 하나를 꺼냈다.
"여기 있다. 노부를 파문시킨 광개를 죽인 독존께서 노부에게 하사한 것이다."
개존은 대나무 패를 힘껏 던지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승풍추랑(昇風推浪)으로 멀리 날아오르다가 품 안에서 검은 쇠구슬을 꺼내 힘껏 집어던졌다.
"뒈져라!"
쇠구슬은 아주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개존은 마지막 순간까지 암수를 구사했다.
탁옥룡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왼손을 슬쩍 흔들었다.
"다른 것은 받지 않는다. 다시 갖고 가라!"
섬전같이 날아들던 쇠구슬이 허공에서 방향을 틀었다. 선회한 쇠구슬은 개존에게로 날아들었다.
개존은 도망치다가 사색이 되었다.
"아… 안 돼!"
그가 자지러지게 외칠 때 쇠구슬이 그의 등판에 가 닿았다.
펑―!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불꽃 한 송이가 만들어졌다.
개존의 몸뚱이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매캐한 유황냄새가 퍼져나갔다. 그가 던졌던 쇠구슬은 지독하게
강한 화탄(火彈)이었던 것이다.
"마궁은 실력 반, 사술(邪術) 반으로 형성되었다. 암기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무리들이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은모란은 라마승들 사이에 서 있는데 탁옥룡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주 사악했다.
"빠드득―!"
은모란의 흰 이가 갈리며 눈빛은 더욱 흉흉해졌다.
그러나 탁옥룡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혈광에 비한다면 십분의 일의 공포도 주지 못했다.
은모란은 탁옥룡을 바라보며 저주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네… 네놈이 나의 모든 것을 망치는구나!"
그녀의 표정에는 공포가 역력했다.
탁옥룡은 그녀를 응시했다. 특별히 직시한 것이 아니었는 데도 매우 강한 눈빛이었다.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인 법이다."
은모란이 이를 갈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피눈물을 뿌리며 아주 애절히 외쳤다.
"라마교의 고승들! 우리는 돌아가신 라마공자의 복수를 해야 하오!"
이국의 말로 하는 말이었다.
"우리들이 다 죽더라도 꼭 복수해야 하오!"
그녀의 음성은 아주 신비했다. 라마승들은 흡사 주술에 걸린 듯 그녀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불타는 복수심을
뿜어냈다.
"섭혼미음공(攝魂迷音功)을 익히다니. 흠, 마궁의 무리들은 동해옥룡사(東海玉龍寺)의 불문신공으로 강해진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소문이군."
탁옥룡은 저으기 감탄하는 눈치가 되었다.
섭혼미음공은 사공(邪功) 중의 사공이었다. 음성으로 상대의 영혼을 조종하는 수법이 그것이었다.
라마승들의 표정은 은모란의 처절하고 신비한 목소리로 인해 점점 상기되었다. 혹자는 목을 놓아 통곡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눈빛이 점점 사나워졌다.
은모란의 목소리는 더욱 고조되었다.
"천룡범창과 함께 복호장룡검진(伏虎藏龍劍陣)을 쓴다면 저놈이 비록 삼두육비(三頭六臂)라 해도 죽을
것이오!"
은모란은 알몸인 상태에서 큰소리로 말하며 뒤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모든 것을 라마승들에게 맡기고 일단 꽁무니를 빼는 것이었다.
라마승들은 아주 우직했다. 난폭했으나 교활하지는 않았다.
"우……!"
"놈을 죽이자. 소교주님이 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무슨 낯으로 삶을 계속하겠는가?"
"대교주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유언에 따라 옥룡궁을 도와야 한다!"
라마승들은 크게 외치며 백석전을 포위해 들어왔다.
"혈섬검아, 네가 요녀(妖女)의 피맛을 봐야겠다."
탁옥룡은 등에서 삼척고검(三尺古劍)을 풀어 내렸다.
혈섬신검(血閃神劍)의 냉광이 밤을 사라지게 했다. 그는 혈섬검 자루에 달린 작은 단추를 눌렀다.
검신이 저절로 세 치 뽑혀졌다. 작은 단추는 검이 뽑혀지게 하는 용수철 장치였던 것이다. 날카로운 소리에 이어
용 울음소리가 났다.
스르― 릉―!
혈섬검이 저절로 위로 솟구쳤다. 혈섬검은 살아 있는 듯 스르르 허공으로 날아올라 짙은 혈광에 묻었다.
라마승들은 생동하는 검의 움직임에 아연실색해 했다.
"가라!"
탁옥룡이 외치는 순간 혈섬검은 사라지고 대신 붉은 빛줄기 하나가 허공에 그어졌다.
"어엇?"
"검… 검신(劍神)이다!"
라마승들이 너무도 신묘한 그의 무학에 질겁하고 말았다.
한편, 저 멀리 도망가고 있던 은모란의 얼굴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어… 어검배공술(馭劍排空術)!"
그녀의 눈빛에는 진회색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다.
삶은 어느 누구에게든 단 한 번뿐이다. 다만 언제 어떻게 죽느냐가 다를 뿐이다.
"아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나더니 은모란의 세류요(細柳腰)가 반으로 갈라졌다. 시뻘건 내장이 쏟아져 나와 땅을 적셨다.

그것은 거의 찰나지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라마승들은 그녀가 죽은 후에야 혈섬검이 이미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혈섬검은 탄지지간에 일백 장을 날아 은모란의 가늘고도 풍만한 몸뚱이를 썩은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혈섬검은 다시 방향을 틀어 탁옥룡의 손아귀로 날아들었다.
탁옥룡은 혈섬검을 거둬들이고는 라마승들을 향해 서장어로 말했다.
"라마공자가 내 손에 죽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마궁 사람이었기에 내게 죽은 것이다. 너희 같은
하수들마저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너희들의 충성심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그러니 물러나라!"
탁옥룡의 목소리에는 내공을 흩트리는 진기의 힘이 실려 있었다.
"으윽……!"
"가공할 공력이다!"
라마승들은 몸을 휘청거리며 오만상을 찌푸려야 했다. 그래도 겁먹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역단(異域壇)의 무서움이 새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옥룡마궁은 이렇듯 이역고수들의 초개 같은 희생을
토대로 성장한 것이다.
그들은 물러나는 대신 더 다가섰다.
"보승법래―!"
"동귀어진(同歸於盡)!"
"피로 피의 빚을 갚는 것이 중원무림의 이치이니 그를 따르라!"
승려들의 눈에서 포독한 살광이 쏟아졌다.
탁옥룡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기보다 그들의 용맹함을 높이 인정했다.
"다 죽이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나의 양부 되시는 분이 내게 승려를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그들이 다가서기를 기다렸다.
라마승들은 막대한 암경(暗勁)을 형성하며 다가섰다. 그들의 내공이 한데 합해지며 백석대전이 뒤흔들렸다.
우르르― 릉!
복호장룡진의 진세가 한결 강해졌다.
태산 같은 암경이 밀어닥치자 탁옥룡은 호신강기를 오성 수준으로 끌어올려서야 신형을 안정시킬 수 되었다.
"우우―!"
라마승들은 파도가 모래사장을 쓸 듯 다가섰다. 어떤 것도 그들을 물러나게 할 수 없을 듯 보였다.
탁옥룡은 천천히 그들을 쓸어보았다.
"하하하……, 이제 한 가지 수법을 알려주겠다. 귓구멍을 씻고 듣거라!"
라마승들은 그의 초절한 공력에 바짝 긴장했다.
"우― 우―!"
허공에서 터지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장소성이 이름 모를 골짜기를 휘감았다.
"어엇!"
"으으……, 전설상의 쇄금강후(碎金剛吼)다!"
"크으윽……, 내공이 소멸됐다!"
불굴의 투혼으로 다가서던 라마승들의 얼굴색이 일제히 땡감같이 노랗게 물들었다.
내공이 약한 자는 쇄금강후가 나는 찰나 오공으로 피를 쏟으며 나뒹굴었다. 내공이 강한 자라 해도 일각 이상 서
있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라마승들이 썩은 짚단 쓰러지듯 넘어졌다.
"우우우―!"
장소성은 더욱 요란해졌고 그로 인해 악의 소굴이던 백석대전이 지진을 만난 듯 뒤흔들리다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꽈르르릉― 꽈꽝―!
백석전의 기둥이 부러지고 천장이 내려앉을 때 홍영 하나가 그 안에서 날아올라 아주 멀리 사라져 갔다.
"하하하……, 목숨이 붙어 있을 때 돌아가라. 중원은 너희들이 나설 곳이 아니다."
그와 함께 쇄금강후도 차츰 흐려졌다.
라마승들은 그제서야 음공의 여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다수 목숨은 건졌지만 내공이 약한 일부는 심맥이
끊어져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으으……, 이런 굴욕을 당해야 하다니……."
"놈은 마신(魔神)이다."
"전설의 마중지존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다."
단 일인에게 이역사대분단 중 하나가 와해된 것이다. 라마승들은 탁옥룡의 충고대로 귀향을 생각해야 했다.
第二章 소천자(小天子) 주현룡(朱玄龍)
1
구화산 기슭이 맑은 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달이 주위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을 때였다.
"흠, 매우 영준한 소년인데 어이해 옥룡마궁에 잡혀 곤욕을 치렀을까?"
시냇가에서 젊은 목소리가 들렸다. 붉은 옷을 걸친 청년 하나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의 발아래는 피범벅이 된 홍안미동(紅顔美童) 하나가 반듯이 누워 자고 있었다. 그의 몸은 피떡이 되었으나
얼굴빛은 불그레했다.
"근골은 참 좋은 아이다. 어렸을 때부터 영약을 복용했기 때문인 것 같군. 그러나 무가(武家)에는 적당하지
않은 약골이기도 하다. 후후……, 천산의서 중에 있는 역근세수대법(易筋洗 大法)을 써서 살려놓기는 했으나
내가 왜 이름 모를 어린아이를 위해 지체하는 지 모르겠군."
홍삼인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마왕동부를 나온 이후 세상에 대해 냉소적인 그였기에 사람을 구하고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어지럽게 흔들었다. 핏빛 기류가 뿜어져 소년의 전신 대혈 속으로 파고들었다. 진기로 회혼지력
(回魂之力)을 일깨우는 중이었다.
"으음……!"
죽은 듯 누워 있던 소년이 오랜만에 몸을 뒤틀며 눈을 떴다. 은행알 같은 눈알이 신성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빛을 하고는 누운 채 입을 크게 벌렸다.
"나 주현룡(朱玄龍)은 굴하지 않는다. 주룡령기(朱龍令旗)가 있는 곳은 죽는다 해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힘차게 말하며 눈을 꾹 감았다.
그는 도존과 개존에 의해 라마단에서 회회단으로 옮겨지려다 탁옥룡 덕에 사경에서 벗어난 소년이었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탁옥룡은 소년의 목소리에 항거치 못할 기운이 실려 있음에 내심 놀랐다.
'흐음, 어린 나이인데 기질이 강하군. 장차 큰 인물이 될 아이다.'
그는 은근히 감탄하며 입술을 뗐다.
"주씨소형제(朱氏少兄弟)! 황제지성(黃帝之姓) 갖고 있는 사람답게 뛰어나구먼.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자네를 구하기 위해 한 시진 동안이나 추궁과혈(推宮過穴)한 나를 실망케 하는 것일세."
"날…… 구했다고?"
소년 주현룡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탁옥룡을 쓰윽 바라보더니 비웃으며 눈을 다시 감았다.
"사악한 놈! 잔꾀에 속지 않는다."
"잔꾀라니?"
"네놈 또한 옥룡궁의 한 사람임을 안다. 네놈의 몸에서는 사악한 마의 기운이 일고 있다. 내가 고문당하면서도
주룡령기의 위치를 말하지 않자 회유책을 쓰는 것임에 틀림없다. 날 속일 생각은 마라."
탁옥룡은 그의 굳은 심지에 고개를 끄덕이며 낭랑히 웃었다.
"하하……, 어린 나이답게 상상력이 풍부하구나."
"흥, 가짜 주현룡을 금릉(金陵)에 남겨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하나 주룡령기가 없는 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고 봐라. 곧 회남왕부(淮南王府)에서 내가 가짜로 바뀌었음을 알고 군사를 일으킬 것이니까."
"회남왕부? 무슨 소리냐? 그곳에는 황제의 혈족(血族)이 머물러 산다고 알고 있는데?"
탁옥룡이 깜짝 놀라 묻자 주현룡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무 말 않는다. 왕은 군말 없이 죽어 간다."
어린 소년치고는 정말 대단했다. 그의 그런 태도에 탁옥룡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왕가(王家)의 후예인지 모르겠다. 어쩐지 귀골(貴骨)이라 했더니……. 흠, 옥룡궁이 황궁까지 손길을
뻗쳤다면 정말 두려운 일이다. 무림에서의 풍운이 온 천하로 다 퍼진다는 증거가 아닌가!'
탁옥룡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나를 오해하고 있네. 하지만 굳이 오해를 풀고 싶은 마음은 없네. 사실 나는 갈 길이 바쁜 사람일세. 자네에게
금자(金子)를 주고 갈 테니 그것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나로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네."
탁옥룡은 작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주현룡의 배 위로 집어던졌다.
금자가 서로 부딪쳐 짤랑 소리를 낼 때 탁옥룡은 한 덩이 붉은 구름으로 화해 아주 멀리 사라져 갔다.
"정… 정말이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다친 곳이 하나도 없구나!"
주현룡은 벌떡 일어나 앉아 자신의 몸을 살피고는 초조한 기색이 되었다. 그는 금자 주머니를 쥐고 눈을
깜빡이다가 아무 데나 대고 크게 소리쳤다.
"가지 마라! 나는 겁이 많다. 자칫하다가 들개의 밥이 되면 어떡하느냐?"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흐흑……!"
그는 자신의 목소리로 인한 메아리를 듣고 말할 수 없는 고독감을 느끼는 듯 조그만 소리로 울었다. 아무리
대견스러워도 아직은 어린 아이였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흐흑……!"
그는 구슬 같은 눈망울을 떨구며 비칠비칠 일어났다.
"흠……!"
바로 근처에서 침중한 숨소리가 났다.
"어엇……?"
주현룡은 숨소리를 듣고 아연실색하다가 상대를 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 돌아와 주었구나."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인가가 있는 곳까지 바래다 주겠다."
탁옥룡은 주현룡이 소리치는 것을 듣고 돌아왔다.
그것은 마성(魔性)도 누르지 못하는 천성적인 품성과 의협심(義俠心) 때문이었다. 마음은 차가워졌어도 약자에
대한 자비심은 여전했다.
"헤헤……, 고맙다. 기왕이면 회남왕부까지 데려다 다오."
주현룡은 몹시 기뻐했으나 어조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거만한 아이다.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듯하다.'
탁옥룡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강호에 나와 이처럼 편안한 웃음을 흘려보기는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하하……, 말투가 공손치 못하구나."
"네가 나를 도와 내가 차지해야 할 지위를 차지하게 해준다면 너를 천하신민(天下臣民)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앉혀 주겠다."
주현룡이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이었다.
"하하……, 그런 것은 바라지 않는다."
"쯧쯧, 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나는……."
주현룡은 오만한 표정으로 무엇인가 말하려 하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입을 다물었다.
탁옥룡도 굳이 물으려 하지는 않았다.
'어린 나이 때에는 항상 사물을 가장하는 법이지. 불쌍한 아이의 허장성세이니 귀엽게 봐주자. 황제의 아들
행세를 하는 모습이 귀엽지 않은가?'
탁옥룡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자."
"나는 걸어서는 못 간다."
"뭐라고?"
주현룡은 마치 하인을 대하듯 말했다.
"너는 걸음이 날래니 한 시진 안에 마필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대령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
"말이라고?"
"그렇다."
"흠……, 이제 적당히 할 수 없느냐?"
탁옥룡은 어이없어 하다가 손을 가볍게 흔들어 그의 맥문을 거머쥐었다.
"왜… 왜 이러느냐? 설마……, 마각(馬脚)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겠지?"
주현룡은 다소 겁먹어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탁옥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위로 표표히 날아올랐다.
"어엇? 사람이 아니라 선인이셨구료?"
주현룡은 몸이 까마득히 날아오르자 자지러지게 놀랐다. 탁옥룡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나는 듯 달렸다.
"와아, 대단한데? 헤헤…… 꼭 구름을 타고 나는 기분이야?"
주현룡은 신이 나는 듯 아이처럼 웃고 또 웃었다.
2
회하(淮河)가 도도히 흐르는 안휘(安徽) 깊은 곳을 달리는 홍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그는 두 필을 뒤로 해 옷이 피로 물든 소년 하나를 업고 있었다. 소년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소년은 자면서 꿈을 꾸는 듯 헛소리를 하곤 했다.
얼마를 갔을까?
시진(市鎭)에서 밥 짓는 푸른 김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일 때, 관도 모퉁이를 돌아가는 홍의인의 망막 안으로
드는 일단의 무림고수들이 있었다.
수십 명의 복면인들이 나는 듯 달리고 있었다.
"무슨 일로 전 제자를 한 곳으로 모으시는 것일까?"
"이런 일은 오 년만에 처음이다."
"보통 일이 아닌 것 같군."
복면인들은 빠른 속도로 달리며 작은 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범어(梵語)……? 중원인이 아니로군.'
홍의인은 그들이 볼 수 없게 바위 뒤에 숨어 눈빛을 빛냈다.
복면인 중 하나가 하는 말이 고막을 때렸다.
"동쪽으로 사십 리만 가면 지존(至尊)을 볼 수 있다."
"긴급한 명령이니 서둘러 가야 한다. 피곤하더라도 거기 가서 쉬자."
역시 그들은 범어로 말했다.
홍의인은 그들이 스쳐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차가운 눈빛을 흘렸다.
"지존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신법으로 보아 보통 수준 이상인데……?"
그는 바로 탁옥룡이었다. 그는 회하가에 있다는 회회단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어찌할까 궁리하다가 지존이란
자를 찾을 결심을 했다.
'혹 마궁의 우두머리일지도 모른다. 마궁의 무리가 아니고서는 떼를 지어 천하를 활보하는 무리가 있기 힘든
세상이니까.'
탁옥룡은 기회를 잡을 경우 그냥 지나쳐 버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집요하게 추적하는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방향을
틀어 그들 뒤를 따랐다.
3
갈수록 복면인들의 수가 많아졌다.
탁옥룡은 수백 명이 한 곳으로 모여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적송애(赤松涯)라는 야산이 복면 고수들의
집결지였다.
탁옥룡은 천하에서 가장 빠른 신법을 시전해 복면인들보다 훨씬 빨리 풍운의 집결지 근처로 이르렀다.
따그닥― 따그닥―!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났다. 한혈거마(汗血巨魔) 여덟이 이끄는 팔두마차(八頭馬車) 하나가 적송애 밑으로
다가서며 내는 소리였다.
마차는 천하에서 가장 화려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마차는 백팔 명의 호법들에 의해 포위당한 상태였다. 말을 몰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요염하게 생긴
청의소녀였다.
탁옥룡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야 이단의 괴고수들이 어떤 문파 소속인지 알 수 있었다.
"흐음, 좌비연(左飛燕)이 아닌가? 이들이 포달랍궁(包達拉宮)임을 알겠다."
이때 아주 경미한 소리가 곁에서 났다. 울창한 숲을 뚫고 다가서는 복면인 하나가 있었다.
"후후……, 또 보게 되는구먼?"
백의인은 신비한 신법으로 다가서며 탁옥룡 앞으로 떨어졌다.
"무혈검(無血劍)! 그대 또한 포달랍궁 사람인지 진작 알았어야 했다."
탁옥룡의 목소리는 냉혹했다.
출현한 사람은 틀림없는 무혈검이었다.
그는 너무 강한 인상을 남겨 탁옥룡은 그의 눈빛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하……, 불청객(不請客)이기는 마찬가지라네."
무혈검의 부드러운 전음이 탁옥룡의 귀로 파고들었다.
"불청객이라고?"
"하하……, 구름 속의 운룡같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포달궁주 혈미륵(血彌勒)과 그의 수하들을 보기 위해
하루 전부터 여기 와 기다리고 있었다네. 헌데 삼기(三奇)를 능가한다는 혈영마협(血影魔俠)을 볼 줄이야."
"혈미륵이란 사람이 여기 온단 말이오?"
"그는 이미 왔네. 저 거대한 마차는 포달랍궁 사람들이 성차(聖車)라 하는 것이네. 포달랍궁주가 부인(夫人)과
함께 머무는 곳이지."
탁옥룡은 다소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이 되었다.
"부인……? 중이 부인을 갖고 있단 말이오?"
"글쎄……, 그의 부인인지 다른 사람의 부인인지 모르나 사람들은 마차 안의 여인을 석심부인(石心夫人)이라
부르네."
"석심부인이라고?"
"하하……, 이러나저러나 단신이라 적적했는데 잘 됐군. 천하 수십 군데를 피로 씻어 욱일승천의 기세를 탄
혈영마협과 벗이 되다니 말일세. 헌데 업고 있는 미소년은 누구인가?"
"내 동생이오."
탁옥룡은 귀찮은 듯 뚝 잘라 말하며 뒤돌아 서려 했다.
복면인들의 집회가 포달랍궁이라면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옥룡마궁의 격파에
있었다.
"떠나서는 안 되네. 무슨 이유로 여기 왔는지 모르나 꼭 한 번 나를 도와주어야 하네."
무혈검이 아주 엄숙히 말하며 진로를 가로막았다.
"도와 달라고?"
탁옥룡은 나직한 비웃음을 흘렸다.
"나와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한 당신을 왜 돕겠는가?"
"얼마 후, 나하고 자네가 철천지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만은 나를 도와주게."
무혈검의 목소리는 매우 진지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을 갖고 있었다.
무혈검의 안광은 정기로 가득 찼다. 마기를 지닌 탁옥룡의 눈빛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뛰어난
빛임에는 사실이었다.
"사실 나는 너와 싸울 작정이었다. 너의 마기가 너무 짙기에 너의 살기를 제거하겠다는 것이 내가 지금껏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래도 오늘은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너의 무공이 강하기 때문이다."
탁옥룡은 냉담하게 응수했다.
"흥, 그것이 도움을 청하는 태도인가?"
"이유는 없다. 어쨌든 천하의 억조창생을 살리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후후……, 어리석군. 나는 내 모발 하나를 억조창생보다 귀하게 생각한다."
"으음……!"
무혈검은 몹시 분노한 듯 눈빛을 싸늘하게 빛냈다.
"아함……!"
여태 잠들어 있던 주현룡이 하품을 하며 눈을 떴다.
그는 바로 앞에 녹슨 철검을 하나 쥔 백의인이 서 있자 크게 당황한 듯했다.
"어엇?"
탁옥룡은 그가 소리를 내 주위를 자극시킬까 은근히 걱정했다.
"쉬익, 조용히 해라."
"헤헤……, 신나는데?"
주현룡은 아주 자그맣게 말하며 탁옥룡에게 바짝 매달렸다. 그는 주변의 상황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한바탕
싸움이 일 듯한 분위기에 흥미진진해 하였다.
이제는 주현룡이 탁옥룡을 태산같이 믿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탁옥룡은 어린 동생을 보살피는 큰형 같은 기분이 되어 주현룡을 부드러운 손으로 쓰다듬으며 무혈검을 향해
말했다.
"좋아, 사정을 들어주마.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뭐냐?"
"나의 동생을 회남왕부까지 무사히 데려다 다오. 나는 갈 길이 바쁜 몸이라 그곳까지 갈 여유가 없다."
무혈검은 가볍게 흠칫 했다.
"왕부……?"
주현룡은 비로소 자신의 신분을 확실히 밝혔다.
"나는 초봄에 돌아가신 천자(天子)의 아들 주현룡이다. 지금 나와 얼굴이 똑같은 가짜가 내 행세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천자의 지위를 상징하는 주룡령기를 갖고 있지 못해 아직 천자가 되지 못한다. 나는 모든 것을
밝히기 위해 회남왕부를 찾는 중이다. 거기에는 나의 외숙이 있다. 그는 백만 정병을 부리는 지위에 있다."
그의 당당한 어조에 탁옥룡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자의 아들이라니? 그렇다면 진짜 소천자란 말인가?'
탁옥룡은 다시금 주현룡을 살펴보고는 전신에 서린 보기와 위엄을 새삼 느꼈다.
'사실인지도 모른다. 옥룡마궁이 이 아이를 매우 중요시한 것을 보면 사실일 수도 있다.'
그의 생각에 여기에 이를 때 무혈검이 얼른 합장하며 무릎을 땅에 댔다.
"오……, 소천자(少天子) 현룡제(玄龍帝)시란 말씀이십니까?"
그는 절을 올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탁옥룡은 무혈검이 주현룡의 황당한 말을 대번에 믿는 것이 약간은 의아했다.
주현룡은 졸라맨 머리 뒤쪽에서 작은 옥도장 하나를 꺼내 쥐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는 탁옥룡으로서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무혈검이 절을 한 이유는 그 물건 때문이었다.
<大明玄龍帝(대명현룡제)>
웬만한 무림고수라면 도장에 새겨진 글을 정확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주현룡은 무혈검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자 조금 득의해 하며 탁옥룡의 어깨를 툭 쳤다.
"이 사람은 수석어전시위장(首席御前侍衛長)이다. 그 지위는 현재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상서(尙書) 오자춘(吳
子春)의 지위를 능가하는 것이다. 이는 곧 현룡제의 칙령(勅令)이……."
그는 말하다가 스르르 잠에 빠졌다. 탁옥룡이 슬쩍 수혈을 점했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가 비록 황제라 해도 나하고는 사실 연관이 없다."
탁옥룡은 냉정히 말한 다음 무혈검을 바라보았다.
무혈검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전과 달랐다. 전보다 더한 감탄이 서려 있는 눈치였다.
"지난번에 비해 더 신비하고 고강해졌군. 흠, 적으로 삼기에는 너무도 두려운 대상이다. 그래도 만에 하나 네가
오 년 전 구정산(九頂山)에서 일어난 혈보광과 연관이 있다면……, 장차 너와 나 둘 중 한 사람은 사라져야
한다."
무혈검은 아주 나직이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끊고 침묵을 지켰다.
탁옥룡은 사실 황제를 업고 있었다. 미소년 주현룡은 주홍무제의 적자였다.
그는 의당 황제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옥룡마궁이 간신 상서 오자춘과 짜고, 가짜 주현룡을 만들어 황제 지위를 뺏은 후 그를 라마단으로
압송했던 것이다.
오상서란 자는 이수운의 아버지를 죽게 한 자이기도 했다. 탁옥룡은 아직 그 사실까지는 모르기에 매우 냉담했다.
그는 자신이 업고 있는 사람이 황제가 아니라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사람이었다.
"이 아이를 회남왕부까지 데려갈 작정이었으나 나는 할 일이 많아 그곳까지 가기 힘들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나
너라면 내가 신뢰할 수 있다. 지금 네가 하는 부탁을 들어 줄 테니 이 아이를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 다오."
"의… 의당 할 일이오."
무혈검은 얼른 고개를 끄덕인 다음 적송애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네가 할 일은 혈작약(血芍藥)의 호법으로 오는 자들을 가로막는 일이다!"
"혈작약?"
"그 여인은 구존지존(九尊之尊)이라 불리는 마궁 태상호법 독존(毒尊)의 제자이고 철서생의 정실부인이다."
탁옥룡은 옥룡마궁의 인물이 출현한다는 사실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옥룡천자의 부인이 이곳으로 온단 말이냐?"
"그렇다."
"무슨 일로?"
무혈검은 중요한 비밀을 아주 상세히 알고 있었다.
"마궁은 현재 포달랍궁의 중요 인물을 생포한 상태다. 마궁은 그 사람들을 인질로 포달랍궁을 위협할 작정이다."
"흠, 그래?"
무혈검의 눈빛이 다소 침중해졌다.
"혈미륵이 중원에 흩어진 모든 제자를 한 곳에 모은 이유는 혈작약이 명했기 때문이다. 혈미륵은 어지간해서는
굴복 않는 성질이나 이번만은 굴복했다. 그는 인질을 살리기 위해 엄청난 약속을 할 작정이다."
"무슨 약속을 말이냐?"
"중원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궁을 견제하던 가장 큰 세력이 사라지게 된다. 너와 내가 막아야
할 일이 바로 그것이다."
무혈검은 전음으로 말한 후 먼저 날아올랐다.
'소림 신법이다. 천상제(天上梯)를 가장 완벽히 시전하는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일 것이다.'
탁옥룡은 그의 신법에 감탄해 하며 뒤따라 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소리 없이 적송애 기슭으로 날아들었다.
팔두마차가 오십 장 밖에 서 있었다. 팔두마차의 문은 활짝 열린 상태였다. 마차의 문을 통해 안의 정경이
보였다.
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두 명은 여인이고 한 사람은 중년승려였다. 승려는 마차 앞좌석에 앉았고, 두 명의 여인은 마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중 한 여인은 얼굴을 검은 면사(綿絲)로 가리고 있었다. 다른 한 여인은 꽃같이 아름다운 청의여인으로 지금
면사를 한 백의여인의 어깨를 주물러 주는 중이었다.
마차 안은 아주 넓었다.
탁자 하나가 있고 방 두 개가 따로 꾸며져 있을 정도였다. 마차 안은 청의미녀가 면사여인의 어깨를 주무를 때
나는 옷깃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조용했다.
중년승려는 홍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사자같이 근엄한 얼굴인데 지금 눈을 반개하고 있었다. 그의 팔목에는 철주(鐵珠)가 감겨 있었다. 철주알의
굵기는 용눈알만 했다.
그것은 염주이기도 했고 가공할 암기이기도 했다.
탁옥룡이 그 안을 세심히 살피고 있을 때 무혈검이 전음으로 들려왔다.
"홍의승려가 바로 혈미륵이다. 그는 대유마가선공을 터득한 후 한 가지 절전신공을 얻었다. 그 때문에 자신을
얻고 강호로 나왔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후훗……, 별 것 아니오. 그것은 미륵수미신권일 것이오."
"으음……!"
무혈검은 너무도 담담히 말하는 탁옥룡의 어조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절전무공까지 정통하구나. 단순한 살마라고 볼 수 없이 뛰어난 자다. 정말 무섭군.'
탁옥룡은 더한 설명을 곁들였다.
"미륵수미신권은 확실히 뛰어난 절학이오. 하지만 승가제일공부(僧家第一功夫)는 아니오."
"그럼 무엇이 승가제일절학이냐?"
무혈검이 캐묻자 탁옥룡은 지체없이 대꾸했다.
"그것은 천강복마공(天 伏魔功)이오."
"흠, 그것까지 아는가? 그 위력이 미륵수미신권보다 고강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뭔가?"
무혈검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하하……, 선사가 그렇게 적었기 때문일 뿐 다른 이유는 없소."
"선사……? 누가 자네의 사부인가?"
무혈검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으나 탁옥룡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마차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좌비연이 과거 병자(病者)라 했던 사람이 바로 저 여인일지 모른다. 피곤한 기색이기는 하나 앉아 있을
상황이라면 나의 처방대로 행해 어느 정도 병이 나은 것일까?'
탁옥룡은 혈미륵과 석심부인으로 생각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중이 아내를 취한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게만 여겨졌다. 그러나 혈미륵의 장엄하고 경건한 표정은 비웃음을 일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강한 자다. 내 곁에 있는 무혈검과 더불어 내가 중원무림계에서 만난 고수 중 최강자다……. 역시 천하는
넓군.'
탁옥룡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뭇 고수들이 모여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마차 안에 있는 한 면사여인의 가는 숨소리가 어쩐지 마음을 긁기 때문이었다.
'석심부인……, 저 여인이 왜 나의 신경을 건드릴까?'
탁옥룡이 이런 감정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돌연, 석심부인이 광소를 터뜨리며 벌떡 일어났다.
"오호호호……!"
탁옥룡과 무혈검은 크게 놀랐으나 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그들로서는 늘상
보아왔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호호……, 흐흑흑……."
석심부인은 웃다가 울었다.
혈미륵은 그녀를 바라보며 측은한 눈빛을 했다. 그는 소리 없이 불호성을 내다가 청의미인을 향해 말했다.
"우비홍(右飛鴻), 그래도 내 웃음소리에 생기가 있지 않느냐?"
"예, 한결 나아지셨습니다."
"흠, 다행이지."
혈미륵은 한숨을 쉬다가 마차 밖을 향해 말했다.
"좌비연!"
"예, 지존!"
마부석에 있던 좌비연이 얼른 땅으로 내려가 오체복지했다.
"만에 하나 오늘 거래가 잘못되어 본좌가 중원을 떠나는 일이 있다면……."
혈미륵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장중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과거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과거 같지
않게 신중하고 정중해졌다고 느낄 것이다.
"너하고 우비홍은 중원에 남아라!"
"예에?"
"창염장이란 곳에서 만난 홍의신의(紅衣神醫)를 찾아라. 그에게 부탁해 부인을 구할 약을 얻어라.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주어라. 최악의 경우 너희 둘이 그의 첩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좌비연은 다소 수치스러운 빛을 띠다 정중히 아뢰었다.
"명… 명심하겠습니다만 그는 이미 그 안에 없습니다."
"없다고?"
"예, 창염장은 텅 비었다 합니다."
혈미륵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비었다니?"
"사실 제가 따로 사람을 보내 근처를 다시 살피라 했었습니다. 그러나 발견한 것은 텅 빈 장원뿐이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기문진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언제고 만날 것이 아니겠느냐?"
혈미륵은 애써 희망을 가지려 했다.
그의 시선이 한 곳으로 고정되었다. 그의 눈에서 일어나는 푸른 기운이 매우 엄숙했다. 그는 천천히 마차에서
내려섰다.
적을 대하면서도 그의 행동은 과연 일파의 지존답게 신중함이 있었다.
"왔으면 어서 모습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第三章 실패로 돌아간 계략(計略)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붉은 그림자 하나가 소나무 숲 속에서 뛰어나왔다.
"호호……, 과연 이목이 대단하시군."
금빛장포에 붉은 복면을 하고 손에 핏빛 작약을 쥔 여인은 유령같이 마차에서 삼 장 떨어진 곳에 내려섰다.
"으음……, 혈작약(血芍藥)!"
"과연 뛰어나다. 우리의 이목을 피하고 예까지 접근했단 말인가?"
마차를 호위하던 포달랍궁 고수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다.
혈작약(血芍藥)!
옥룡마궁주의 정실부인인 그녀가 출현한 것이다. 아직 그녀의 진면목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혈작약은 작약화를 옷섶에 꽂으며 마차 안을 향해 말했다.
"궁주, 당신은 수양딸이며 제자인 혈수나찰(血手羅刹)이 본궁에 떨어진 상태임을 이미 아실 것이오."
"안다, 그래서 여기 왔지 않느냐?"
혈미륵은 번갯불 같은 안광을 발하며 그녀를 직시했다.
"호호……, 그 계집은 오백 리 밖에 있소. 하지만 명재경각(命在頃刻)이오. 궁주가 이 길로 중원을 떠난다는
언질을 주지 않는다면, 오늘 낮이 되기 전 혈수나찰의 목이 담긴 나무 상자가 궁주께 전달될 것이오."
"너희들이 설마 그 아이를 죽이려 하느냐?"
혈미륵이 어깨를 떨자 혈작약은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혈수나찰은 아주 강하오. 이유는 궁주의 진전(眞傳)을 모두 얻었기 때문이오. 따라서 우리들이
고문을 가할 경우 포달랍궁의 진산절기(鎭山絶技) 몇 가지가 우리에게 밝혀질 수도 있소."
"으음……, 사악하고 치졸한 수단이로군."
혈작약은 눈을 가늘게 떴다.
"호호……, 그것은 약과요. 그 아이는 숫처녀인지라, 지금 본궁의 우람한 장사들이 혈수나찰과 교접할 것을
꿈꾸고 있소."
"감히!"
혈미륵의 승포가 풍선같이 부풀었다. 혈작약은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을 잡고 있기에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혈작약은 손가락으로 사위를 가리켰다.
"포달랍궁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인 이상 우리측으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았다 말할 수 있지요."
"흥, 감히 싸울 작정이냐? 그럴 작정이었다면 인질을 쓰지 않았을 텐데?"
"호호,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이유가 있소. 궁주가 승낙하지 않는다면 포달랍궁의 세력은 이 날 중으로
이할 정도만 남게 될 것이오. 즉, 여기 있는 사람 중 팔할이 폐인이 된다는 뜻이오."
혈미륵은 애써 분노를 자제하고 있었다. 과거의 그였다면 이런 곤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혈작약은 그를 주머니 속의 물건 다루듯 쉽게 여겼다.
"혈수나찰을 되돌려 받고 이곳에 설치된 매복을 피하기 위해서는…… 호호, 곧 중원을 떠난다는 약속을 해야 하오.
그것이 바로 본궁의 조건이오."
"으음……!"
혈미륵은 몹시 곤궁한 표정이 되었다. 혈작약은 칼자루를 쥔 사람은 자신임을 확인한 듯 아주 당당히 행동했다.
"시간이 별로 없소. 오백 리 밖에는 혈수나찰이 잡혀 있고 이곳에는 엄청난 함정이 설치돼 있소. 피차 희생을
줄이는 길은 단 하나 뿐이오."
그녀가 혈미륵을 회유해 말할 때였다.
"으하하, 옥룡천자의 정실부인이 여기 있단 말인가? 나를 자꾸 피해 다녀 초조했었는데 이제 혈작약을 인질로
잡으면 되겠구나!"
우렁찬 사자후(獅子吼)와 함께 야산 속에서 표표히 떠오르는 백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백의인은 단 한 번 움직여
육십여 장을 가로질렀다. 모두들 그를 알아보고 대경실색했다.
"일심맹주(一心盟主)!"
"일심검제(一心劍帝)가 나타났다!"
"무… 무혈(無血)의 검성(劍聖)이다!"
혈미륵은 느닷없는 불청객의 출현에 눈살을 찌푸렸다.
'저 자가 어떻게……?'
혈작약은 움찔해 들고 있던 혈작약화를 떨어뜨릴 정도였다.
"설… 설마 서로 짠 것은 아니겠지? 일심맹과 포달랍궁이 힘을 합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그녀는 정말 당황했다. 무혈검의 출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였던 것이다.
"하하, 포달랍궁과는 적도, 친구도 아니다. 내가 나타난 이유는 일심맹주된 사람으로 옥룡마궁의 여마 하나를
잡자는 것뿐이다."
무혈검이 웃자 혈작약이 이를 갈았다.
"훼방을 놓다니……. 흥, 그럴 수 없다!"
그녀는 악을 쓰며 혈미륵을 바라보았다.
"본궁과 포달랍궁의 화평을 기념하기 위해 일심검제의 목을 제단에 바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으음……!"
혈미륵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정파무림을 대표하는 무혈검 일심검제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궁주, 네 양딸이 죽는 것을 바라느냐?"
혈작약이 치를 떨자 혈미륵이 참다못해 일심검제 무혈검을 바라보았다.
"구파맹주(九派盟主), 어서 돌아가시오."
"하하……, 나는 모찰륵궁주(牟刹勒宮主) 때문에 온 것이 아니오. 혈작약이 목표일뿐이오. 이 일은 일심맹과
옥룡마궁 사이의 일이오. 나하고 궁주 사이에 비밀리에 통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혈작약도 잘 아는 일이 아니겠소?
내가 이 여인을 해한다 해도 마궁은 포달랍궁을 욕할 수 없는 것이오."
무혈검이 득의해 말하자 혈작약은 야멸차게 외쳤다.
"오냐, 그 말은 맞는 말이다. 그리고 네놈으로 인해 천하정세를 바꿀 거래가 틀어지고 혈수나찰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놈들 중 팔할이 시체로 화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번쩍 손을 쳐들었다.
"나타나라!"
"예, 대령했습니다!"
높은 산꼭대기에 사람 모습이 나타났다.
은빛장삼을 걸친 장한 하나가 철소 하나를 쥐고 일어났다. 그는 사악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살아 있는
뱀이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목뿐이 아니었다. 손목에도, 발목에도 뱀이 감겨 있었다.
"으하하……, 사곡(蛇谷)의 사신(蛇神)을 불러 거만한 땡땡이 중놈들을 죽여 버리리라!"
그는 사곡공자(蛇谷公子)라는 자였다.
운남(雲南)의 금지라는 사곡의 소주인 자로 마궁사공자 중 하나인 자였다. 그는 음침한 눈빛을 하며 피리를 입에
댔다.
삘리리―!
날카로운 소성이 메아리쳤다. 듣기에도 몹시 역겨운 피리음에 모두들 눈살을 찌푸렸다.
"어엇?"
"뱀이 기어온다! 무수히 많다!"
"저… 저 많은 뱀떼가 언제 나타났단 말인가?"
팔두마차를 중심으로 넓게 퍼져 있던 포달랍궁 고수들의 얼굴빛이 시퍼래졌다.
그들을 넓게 포위하며 다가서는 수만 마리의 뱀떼가 있기 때문이었다. 뱀떼 사이에는 포대를 멘 흑의인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사곡의 제자들이었다.
삘리리― 삘리―!
흑의인들의 수는 백 명인데 사곡공자와 같은 쇠피리를 들고 피리소리를 내 뱀떼를 부르고 있었다.
혈미륵은 거대한 사진(蛇陣)에 빠졌음을 알고 마궁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혈작약 쪽이 아니라 무혈검에
대한 성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선뜻 결정을 못 내리자 혈작약은 사곡진의 힘을 믿고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호호, 포달랍궁측이 동귀어진(同歸於盡)을 바라지 않으리라 믿는다. 나도 굳이 너희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어서 결정해라!"
그러나 더 의기양양해 하는 쪽은 무혈검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눈빛을 하며 산기슭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하……, 뭘 하는가? 살수 전문가가 쉬고 있으면 되는가? 나는 사람을 죽이지 못해 자네에게 도움을 청했지
않은가?"
"하하……, 그렇소?"
아주 차가운 웃음소리와 함께 숲 안에서 핏빛 그림자가 날아올라 허공을 가로질렀다.
탁옥룡이 주현룡을 업은 채 날아오르는 것인데 날개 달린 새보다도 빨리 움직여 모두를 경악케 했다. 가장 놀라는
사람은 사곡공자였다. 그는 신비의 고수가 날아들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허억……?"
그는 탁옥룡이 백여 장을 훌훌 날아 다가서자 까무러칠 듯 놀랐다. 혈룡이 날 듯한 기세로 천공(天空)을
가로지르는 탁옥룡의 기세에 겁부터 집어먹었다.
"에잇, 사곡칠대신사(蛇谷七大神蛇)를 받아라!"
사곡공자가 겨우 두려움을 씻고는 탁옥룡을 향해 손발을 휘저었다.
쉬이이익―!
그의 팔목과 발목에 칭칭 감겨 있던 붉고 푸른 독사 일곱 마리가 화살같이 비산하며 탁옥룡을 향해 날아올랐다.
앞장선 것은 비사(飛蛇)였다.
머리에 뿔이 하나 달렸는데 핏빛 가죽 하나만으로도 사중왕(蛇中王)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혈선비망(血線飛
)은 사곡공자와 심령상으로 통하는 짐승이었다.
카오오―!
혈선비망의 울음소리는 어떤 내가고수의 외침도 갖지 못한 지극한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요사한 짐승!"
탁옥룡은 허공에서 일단 몸을 멈췄다.
혈선비망은 날아들어 그의 오른쪽 넓적다리를 몸통으로 한 바퀴 칭칭 동여맨 다음 아가리를 짝 벌렸다.
탁옥룡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독을 뿜으며 덤벼드는 혈선비망 따위는 무시한 채 혈선비망을 따라
날아드는 여섯 마리 독사를 응시했다.
혈선비망만은 못하지만 이미 영물(靈物)이 된 천년독사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흡혈백옥수(吸血白玉手)를 쓸 기회를 찾지 못해 심심했는데 네놈들이 그 기회를 주는구나!"
탁옥룡은 허공에서 신형을 멈춘 상태였다.
그의 두 손이 천천히 소매 속에서 빠져나왔다. 두 손의 빛은 너무 희어 사람의 손 같지 않았다.
천상옥수(天上玉手)라고나 할까. 정말 아름답기만 한 손이었다.
그가 두 손을 꺼낼 때 혈선비망은 아가리를 딱 벌렸다가는 탁옥룡의 넓적다리를 힘껏 베어 물었다. 여섯 마리
뱀이 전광같이 빠르게 달려들었다.
"하하……!"
탁옥룡의 쌍수(雙手)가 비스듬히 뿌려졌다. 뱀의 비린내와 흰손 그림자가 한데 어울리더니 함께 피모래가 우수수
떨어졌다. 보검으로 베어지지 않는 독사들이 한순간에 가루가 된 것이다.
케에에엑―!
탁옥룡의 넓적다리를 물고 늘어지려던 혈선비망은 턱이 깨어진 채 허공으로 펄쩍 날아올랐다.
탁옥룡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후훗……, 차라리 쇠기둥을 무는 것이 날 뻔했다. 천잠사의의 도움이 없었다 해도 네 이빨로는 내 피부에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
탁옥룡은 퉁겨지는 혈선비망을 향해 일지를 튕겼다.
피잉―!
적색기류가 시원하게 뻗어나갔다. 그 빛은 혈선비망의 살가죽 빛깔보다도 붉었다. 혈선비망의 쇳덩이같이
단단하던 머리통이 산산이 박살났다.
일곱 마리 뱀이 죽는 데에는 탄지지간이 걸렸을 뿐이다. 탁옥룡이 뱀을 죽이는 데, 세 가지 전혀 다른 절기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아본 사람은 혈미륵과 무혈검, 그리고 혈작약에 지나지 않았다.
"혈… 혈영마협이 아닐까? 으으……, 놈이 라마단을 쑥밭으로 만들었다는데……, 이제 보았더니 일심맹주의
친구였구나!"
혈작약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위로 날아올랐다.
"서라!"
무혈검이 크게 외치며 추격했다.
"두고 보자! 혈미륵 네놈은 혈수나찰의 목을 돌려받을 것이고, 일심맹주 네놈은 일심맹도 백 명의 목이 든
쇠상자를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달아나는 혈작약의 신법은 아주 뛰어났다. 그녀는 잠룡승천(潛龍昇天)과 비슷하나 전혀 다른 옥룡등공(玉龍騰
空)을 써서 아주 높이 떠오르며 소매를 어지럽게 흔들었다.
츠츠측―!
소매 속에서 무수한 독침과 함께 세 개의 독탄이 튕겨나왔다.
"이런!"
무혈검은 허공에서 몸을 바로잡으며 호신강기를 발휘해 독침 세례를 겨우 피했다.
펑― 펑― 펑―!
세 번의 폭음과 함께 근처가 흑무에 잠겼다. 독탄이 깨어지며 지극히 매운 연기가 방원 십 장 안을 가득 메웠다.
무혈검은 손을 움찔하다가는 나직이 탄식했다.
"아……, 차마 살계(殺戒)를 어길 수 없구나."
그는 신기를 발휘할 듯하다가는 손을 거두었다. 그의 검이 무혈검이 아니었다면 혈작약의 목은 벌써 댕강
날아갔을 것이다.
혈작약의 모습은 검은 안개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흑무에 잠겨 중인의 이목을 피해 도망가며 천리전음(千里傳音)으로 외쳤다.
"사진(蛇陣)을 써 모두 쳐죽여라!"
그녀의 천리전음술이 퍼져 나갈 때 차고 당당한 목소리가 먼 산위에서 들려왔다.
"하하……, 하인 된 자의 생명을 아끼는 자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탁옥룡이 주현룡을 업고 우뚝 서 있었다.
번쩍 쳐들려 있는 그의 오른손에는 사곡공자가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잡혀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뱀떼를 몰며
다가서던 자들은 아연실색해 피리불기를 중단하였다.
"허억, 곡주(谷主)가 잡혔다!"
"모… 모두 물러나자. 곡주가 다치게 된다면 운남에서 중원으로 들어온 보람이 없다!"
사곡의 수하들은 피릿소리를 멈추며 일제히 물러섰다.
탁옥룡에게 붙잡힌 사곡공자가 악을 썼다.
"바보 같은 놈들! 나는 죽어도 괜찮으니 어서 사진을 발동시켜라!"
"호, 제법인데?"
탁옥룡은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사곡공자는 잔혹한 눈빛을 흘리며 수하들을 향해 다시 외쳤다.
"나는 죽어도 좋다. 대신 복수는 꼭 해다오!"
그의 명령이 사곡고수들을 당황케 했다.
피리소리가 끊기자 사진이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했다. 뱀떼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릴 때였다.
그 동안 잠자코 있던 포달랍궁주 혈미륵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양손을 쳐들었다. 중인의 눈길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혈미륵은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오늘의 집회는 이곳으로 끝이 났다. 모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혈수나찰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중원인을 각기 일천 명씩 죽여라. 이제 본궁은 중원무림계와 공존을 포기한다!"
혈미륵은 진기를 모아 외친 다음 무혈검 쪽으로 다가갔다.
결단을 내린 혈미륵의 지시에 포달랍궁 고수들은 아주 침중해졌다. 그러나 궁주의 지시는 그들에게 있어
천명이었다.
혈미륵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족인이 파여졌다. 딱딱히 굳은 땅에 칼로 깎은 듯한 한 자 깊이 족인을 새기며
걷는 솜씨는 보통이라 할 수 없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는 동안 포달랍궁 고수들은 썰물이 빠지는 듯한 기세로 흩어졌다.
그들이 가는 곳에서 뱀떼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한순간의 차이가 엄청난 일을 만든 셈이었다. 사진은 지시를
잃고 우왕좌왕 하다가 일패도지했다.
"케에― 엑―!"
"으으……, 실기(失機)했다."
"사곡의 삼백 년 기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줄이야!"
뱀떼를 부리던 자들은 포달랍궁 고수들의 질풍 같은 기세 아래 추풍낙엽같이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은 사곡공자를 주축으로 이루어진다. 사곡공자가 피리를 불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은 진세의
위력이 반 넘게 상실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천지간에 비린내가 그득할 때 혈미륵은 단호한 표정을 하고 무혈검 앞을 가로막았다.
"귀하 덕에 본궁은 사활(死活)을 걸게 되었소."
"미안하게 되었소. 하지만 억조창생을 위하는 마음에서 한 일이니 용서하시오. 생각건대 궁주의 양딸은
살해당하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나도 짐작하고 있소."
무혈검은 일순 의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렇소……?"
"하하……, 내가 귀하를 막는 이유는 귀하 덕에 인질 교환이 실패해 화를 못 참고 시비를 걸자는 것이 아니오."
"그럼?"
혈미륵은 호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귀하에게 한 가지 청이 있어 막은 것이오."
"청이라니?"
"홍의신의를 열흘만 빌려 주시오."
무혈검은 혈미륵의 제안을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홍… 홍의신의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사곡공자를 잡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오."
"혈영마협 말이오?"
"그렇소. 그가 혈영마협인지는 처음 알았으나 본궁은 얼마 전부터 그를 홍의신의라 부르며 그를 찾는 중이었소."
혈미륵은 단호히 말하며 석심부인이 있는 마차 안을 가리켰다.
"내가 혈수나찰의 생사가 걸린 일에 접하고도 의연했던 것은 그 아이의 목숨보다 백 배 귀한 저 여인의 생사가
귀맹(貴盟)에 걸려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오."
"무슨 소리요?"
"석심부인은 이후 한 달을 살지 못하오. 그리고 현재로서 그녀를 구할 사람은 오직 귀하의 친구 홍의신의뿐이오.
그에게 말해 석심부인의 이십 년 고질병을 낳게 해주시오. 그러면 오늘 이후 본궁과 일심맹은 혈맹(血盟)이 될
것이오. 혈수나찰이 죽는다 해도 귀하를 원망하지 않겠소."
혈미륵은 크게 말하며 두 손을 한데 합했다. 그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다.
무혈검은 포달랍궁과 결맹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에 가슴에 설레었지만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으음……, 혈영마협이 의술의 대가인 줄은 이제야 알았소. 하지만 유갑스럽게도 나로서는 그에게 명할 수
없소."
"명할 수 없다니?"
"그는 나의 친구가 아니오. 따진다면 장차 나의 적이 될 사람이기도 하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혈미륵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는 자신이 조롱당하는 기분이 되었다.
"하하……!"
웃음소리와 함께 두 사람 사이로 훌쩍 떨어져 내리는 홍의괴인 하나가 있었다. 탁옥룡이 사곡공자를 잡아 들고
사뿐히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혈미륵은 그와 무혈검을 번갈아 바라보며 몹시 의아해했다.
탁옥룡은 두 사람이 한 말을 들은 후였다. 그는 혈미륵을 바라보며 거만하게 말했다.
"석심부인이란 여인은 재기불능이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광기는 이미 골수 속으로 파고들었소. 선연(仙緣)이 없다면 오래지 않아 발작해 죽을 것이란 말이오."
"그것을 어찌 아는가?"
탁옥룡은 석심부인 쪽을 살피며 확신에 찬 어조로 응대했다.
"의원은 환자의 맥을 굳이 짚지 않더라도 숨소리와 행동거지, 피붓빛으로 병세를 아오. 그래서 말하는 것이오."
혈미륵은 참담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살길은 어떤 것인가? 선연이라 함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후후……, 내 동생을 데리고 먼길을 떠날 친구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말해 주겠소."
탁옥룡은 능청스레 말하며 업고 있던 주현룡을 무혈검에게 내주었다.
'대담하고 겂 없는 자다. 세력을 꾸민다면 일 년이 안 가 옥룡마공보다 더한 마의 세력을 만들 자다.'
무혈검은 주현룡을 받아들며 눈빛을 흩트렸다.
지금 이 순간으로 인해 그의 마음속에 있어 가장 큰 적은 옥룡천자에서 혈영마협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탁옥룡은 지금 그를 친구로 여기며 행동하고 있었다. 순간적인 거래일지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어서 떠나시오."
"으음……!"
무혈검은 떠나기를 약간 주저했다.
탁옥룡은 죽립을 다소 내리며 전음으로 말했다.
"시세를 아는 것이 준걸이라 하지 않소?"
무혈검 역시 눈치 빠르게 전음으로 응수했다.
"혹시 석심부인을 구할 약이 없다는 뜻은 아니겠지? 혈미륵이 가장 귀히 여기는 석심부인을 살리게 된다면 굳이
서둘러 날 떠나보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바로 그렇소. 내가 사실을 말하면 혈미륵은 지극히 분노할 것이오. 그 이전에 떠나야 주현룡을 안전히 보호할
수 있으니 어서 가시오."
탁옥룡은 역시 전음으로 말하며 소매를 흔들었다. 무형강기(無形 氣)가 뿌려졌다.
무혈검은 급히 신공을 일으켜 저항해 보려 했다. 그러나 그는 항거하지 못할 힘을 느끼며 일곱 걸음 물러나야
했다. 탁옥룡의 내공이 그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탁옥룡에게도 크나큰 놀라움이 되는 일이었다.
'으음, 일곱 걸음밖에 물러나지 않다니……? 최소한 십 장 물러날 줄 알았는데…….'
무혈검은 침중하게 말했다.
"우선은 거래 조건을 지키겠다. 나중에 보자. 그때 꼭 할 말이 있다."
그는 주현룡을 안은 몸을 솟구치며 아직도 오 백 넘게 남아 있는 포달랍궁 고수들의 머리를 타 넘어 아주 멀리
사라져 갔다.
탁옥룡은 그가 안전한 곳으로 간 것을 확인한 다음 움켜쥐고 있던 사곡공자의 몸뚱이를 땅에 내팽개쳤다.
"으으……, 왜 나를 죽이지 않느냐?"
사곡공자는 흙투성이가 되며 이를 갈았다.
그는 마왕동 비전 연쇄역천점혈수(連鎖逆天點穴手)에 제압당한 상태였다. 말을 할 수는 있으나 혓바닥을 끊을
힘조차 갖고 있지 못했다.
탁옥룡은 그의 말에는 대답도 안 했다. 그는 혈미륵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미친 여인을 구하는 데에는 세 가지 인연이 닿아야 하오."
혈미륵은 석심부인을 구할 수 있다는 비결을 접하자 화색을 띠며 재촉했다.
"세 가지가 무엇이냐?"
"하나는 열여덟 가지 사독(蛇毒)을 끓여 만든 독즙이오. 그것은 이름하여 연혼독즙(煉魂毒汁)이라는 것이오."
"어떻게 만드느냐?"
"오늘 중으로 만들 수 있소."
"네가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냐?"
"하하……"
탁옥룡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사곡공자의 몸을 발로 툭 차며 말을 이었다.
"이 자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오. 이 자는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리고 재료는 근처에
지천으로 널려 있소. 수천 마리 뱀의 사체 중 약이 되는 것을 골라 연혼독즙을 만드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소."
"흐음, 알겠네."
혈미륵은 한 고비 넘었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탁옥룡의 다음 말이 그를 당황케 했다.
"첫 번째 기연은 역근회혼대법(易筋回魂大法)을 써야 하는 것이오. 그것은 내가 알고 있으나 귀하의 여인을
위해 쓸 마음은 없소."
"뭐… 뭐라고?"
혈미륵의 얼굴이 푸르둥둥하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쳐죽일 기세였다.
"세 번째는 아무리 뛰어난 의원이라도 할 수 없는 것이오. 그것은 석심부인이란 여인 스스로 정신을 되찾는
것이오. 이상 세 가지가 한 달 사이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석심부인은 내화의 발작을 이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오."
탁옥룡은 크게 웃다가 뒤돌아 섰다.
"서라! 역근회혼대법을 시전하고 가라!"
혈미륵은 노해 외치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흥, 포달랍궁의 잔재주가 천하제일인 줄 알았더냐? 나를 막다가는 석심부인이 죽기 전 네놈이 먼저 죽을
것이다!"
탁옥룡이 더 빨리 움직여 그를 그림자로 뒤덮었다.
"어엇?"
혈미륵은 어마어마한 암경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휘청였다.
"전설상의 백로마현(百路魔現)이 아니면 이럴 수 없다!"
그가 사색이 될 때 흰 손 하나가 날아들어 그의 승포자락을 잡아챘다.
찌이― 익―!
혈미륵의 등판이 환히 나타났다.
"으으……, 이런 치욕을 겪다니!"
혈미륵이 이를 부드득 갈 때 탁옥룡의 웃음소리가 이십 장 밖의 허공에서 들렸다.
"하하……, 다시 한 번 내 눈에 띈다면 천 년 전 오랍(烏拉)이 진 죄를 네가 목숨으로 갚아야 되리라!"
웃음소리와 함께 혈광이 폭사되었다. 붉은 물체가 벼락치는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꽈꽝―!
땅바닥에 이 장 깊이 구덩이가 하나 파였다.
모래바람이 수 장 높이로 일어났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몸의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구덩이를 만든 것은 바로 혈미륵의 옷쪼가리였다.
혈미륵은 주먹을 거머쥔 채 먼 하늘을 바라봤다. 탁옥룡은 한 점이 되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으음, 마중지존(魔中至尊)의 절기를 얻은 자가 아닐까? 그의 절기가 아니고는 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혈미륵은 치욕감에 이어 공포감을 느꼈다.
공포감은 적대감과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얼굴이 밀랍같이 굳어져 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굴복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저 놈으로 인해 나의 유아독존(唯我獨尊)이 깨어지게 되다니 도저히
용납치 못한다. 사람 중 최고는 의당 본좌가 되어야 한다."
혈미륵은 질투에 겨워 외치며 일권을 내쳤다.
"이여엽―!"
노도와 같은 경기가 폭풍처럼 뻗어나갔다.
꽈아앙―!
벼락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탁옥룡이 옷자락을 던져 판 구덩이 바로 곁에 더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으하하하!"
혈미륵은 그제서야 기분이 한결 좋아진 듯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第四章 복수(復讐)의 화신(化身)


허공을 가로지르는 혈선은 죽립의 홍의인이었다.
탁옥룡은 당금천하에서 가장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인물의 심기를 뒤틀리게 하고는 부지런히 달렸다.
그는 강줄기를 따라 달렸다. 그가 스쳐가 강물 위로 높은 파문이 일곤 했다. 너무도 빠른 움직임에 의한
현상이었다.
대략 한 시진이나 달렸을까?
"후후……, 저곳이군."
탁옥룡은 한 곳에 이르러 죽립을 조금 기울였다.
다른 사람으로서는 보아도 그냥 지나칠 만한 곳이 있었다. 회하를 굽어보는 언덕 위로 허름한 토성(土城)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는 정말 엄청난 힘이 솟구치고 있었다.
"기문진의 힘이다. 저곳이 바로 회회단(回回壇)이다. 일월(日月)이 공병(共竝)하는 진세는 회회교에만 있다."
탁옥룡은 쾌재를 부르면 사람 그림자가 없어 보이는 토성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아직 산그늘을 벗어나지 않았을 때였다. 비둘기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비둘기는 십여 마리가 토성
안으로 날아들며 내는 소리였다.
"철통을 달고 있는 전서구(傳書鳩)들이군?"
탁옥룡의 안광은 핏빛 번개 그것이었다.
그는 비합전서구를 발견하자 인적 없는 토성이 용담호혈(龍潭虎穴)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나의 짐작대로다."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손을 위로 쳐들었다.
그의 손바닥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허공을 가로지르던 비둘기 한 마리가 엄청난 흡인력(吸引力)에 끌려 탁옥룡의 손아귀 안에 잡혔다.
"녀석, 너를 죽이지는 않는다."
탁옥룡은 비둘기 털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비둘기는 아주 온순히 행동했다.
구구구―!
비둘기는 부리를 탁옥룡의 팔목에 대고 비비기까지 했다.
탁옥룡은 개방십대절기가 수록된 비급을 통해 비둘기를 다루는 법을 익힌 후였다.
"역시 개방의 비둘기로군."
탁옥룡은 비둘기 발목에 매달린 철통의 모양을 보며 쓴웃음을 흘리다가 철통 안에서 쪽지 한 장을 꺼냈다.
쪽지 안에는 이상한 점(點)과 선(線)이 가득했다. 그것은 암호문이었다. 다른 문파 사람은 알지 못할 것이나
개방의 순찰당(巡察堂) 사람이라면 그것을 보고 해독할 것이다.
탁옥룡은 능히 암호문을 해독할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흐음, 상황을 보니 비둘기가 만에 하나 매나 독수리에게 잡히는 경우를 대비해 일시에 일백 마리를 날려 보내는
백구전서(百鳩傳書)다. 이는 개방에서 존망이 걸린 일이 아닌 경우 사용하지 않는 것인데……?"
탁옥룡이 수십 마리 비둘기 중 한 마리만을 잡은 이유는 어떠한 비둘기이건 지니고 있는 쪽지의 내용은 다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쪽지 위의 암호는 이러했다.
<혈수나찰을 급히 낙양 별부(別府)로 압송하라. 포달랍궁과의 일은 혈영마협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가
일심맹(一心盟)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후후…… 내가 일심맹이라고?"
탁옥룡은 비웃으며 쪽지를 다시 철통에 넣은 다음 비둘기를 날려보냈다. 비둘기는 날개를 퍼드득거리며 흙성
안으로 날아들었다.
"낙양에 있다는 별부는 또 어떤 곳일까? 잘 하면 뜻하지 않은 수확을 거둘 수 있겠다."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토성을 향해 움직였다.
그는 숲 그늘을 택해 비호같이 움직였다. 그가 스쳐 지나가는 데에도 나뭇잎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탁옥룡은 절세적인 신법을 시전해 천라지망으로 포위되어 있는 토성 가까이 다가갔다. 도처에 매복(埋伏)이
있었다. 그러나 탁옥룡의 잠입을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탁옥룡은 기문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는 회회교 비전 기문진을 아주 간단히 통과할 수 있었다.
일마 장 갔을까?
"호오……?"
탁옥룡은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흙성 안쪽은 바깥에서 보아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세외선경(世外仙景)이 펼쳐져 있었다.
고구거각(古樓巨閣)이 즐비했는데 놀랍게도 제갈무후(諸葛武侯)의 팔진도(八陣圖)에 따라 세워진 것이었다.
탁옥룡은 잠입은 완벽했다.
장내는 부산한 상태였다. 비둘기가 떼를 지어 날아오는 것과 함께 고루거각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몰려나와
이런저런 말을 떠들었다.
대부분이 회회교(回回敎)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머리에 이상한 고깔을 쓰고 있어 회회교도임을 대번에 알게 했다.

그 외에도 옷차림이 추레한 사람들이 허다했다. 그들은 바로 개방도였다.


회회교 사람들을 대하는 개방도들의 태도는 몹시 공손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불만과 실의에 차 있었다.
마치 있지 않아야 할 곳에서,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같은 모습이었다.
탁옥룡은 가산(假山) 뒤쪽에서 숨어 주위를 살피다가 낯익은 자들을 보게 되었다.
'잘 만났다!'
탁옥룡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잔혹한 살광(煞光)이었다.
그가 발견한 사람들의 수는 여덟이었다. 하나같이 구척 거한들이고, 손에 낭아곤(狼牙棍)과 장봉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누각 중 가장 아름다운 이층 석루 바로 앞을 지키고 있었다.
누각 앞에서 허름한 옷차림의 백발노인 하나가 오체복지한 상태에서 석루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타구봉을 쥐고 있었다.
"총순찰(總巡察)께서는 어이해 아직 나오시지 않는지요?"
그는 거한들을 향해 아주 공손히 물었다.
"흐흐……, 노방주는 좀더 기다려야 할 게요."
"공자(公子)와 총순찰과의 운우지락(雲雨之樂)은 이제부터가 잠입가경이오."
"무슨 긴급한 일인지는 모르나 자칫 잘못해 총순찰의 눈밖에 난다면 우리들은 살아남지 못하오."
여덟 명의 거한은 하나같이 금종조(金鐘早), 철포삼(鐵袍衫) 외에도 또 한 가지의 외문기공을 익히고 있었다.
상피신공(象皮神功)!
그들의 피부는 도끼로 찍는다 해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정도로 굳강하게 단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팔대금강신(八大金剛神)이라고 불린다. 악명이 자자한 옥룡마궁에서도 손꼽히는 살수들이었다. 개중에는
사람의 간을 생식(生食)하는 것을 취미로 하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으음……, 정말 급한 일이오."
백발거지는 초조한 기색을 면치 못했다.
그의 별호는 절수개(鐵手 )였다. 그는 개방의 현임 방주인 개존( 尊)의 사질(師姪)이다. 원래의 개방방주는
광개의 전인인 풍운신개(風雲神 )였다.
그러나 풍운신개는 이미 죽었다. 그는 타협하지 않은 바람에 능지처참 당해 죽은 것이다.
철수개는 무공은 강하나 간담이 적어 마궁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개방의 전통을 수호하는 것만을
일말의 위안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전전긍긍해 할 때였다.
"호호……, 철수개 영감이 무슨 일인가?"
석루의 문이 삐끔 열렸다.
안에서 비릿한 육향이 흘러나왔다. 반라(半裸)의 여인 하나가 석루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우 아름다운
여인인데 눈매가 사나워 독살스럽게 보였다.
"총… 총순찰! 혈수나찰을 급히 낙양 별부로 압송하라는 대부인의 긴급명령이 왔습니다."
"별부로? 아직 고문을 다 끝내지 않았는데 압송하란 말인가?"
철수개는 정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일이 틀어졌다 합니다."
"으음, 그래도 그렇지."
총순찰의 눈빛이 새파래졌다.
"흥, 아마도 내가 대유마가선공을 배워 자기보다 강해질까 두려워서일 것이다. 천시묘(千屍墓) 격파를 위해
연공중인 지존(至尊)께 그 계집을 보낸다고 별다른 수가 나겠는가? 나도 아직 그 계집의 입을 벌리지 못했는데
말이다."
총순찰은 짜증스럽다는 듯 말했다.
순간, 어디선가 붉은 그림자 하나가 날아들었다. 죽립을 쓴 홍삼인이 팔보간섬의 신법으로 허공을 밟으며 철수개
바로 곁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엇!"
"저 놈은 또 누구냐?"
"감히 외인을 들게 하다니……, 호위들이 나태해졌구나!"
팔대금강신은 성나 외치며 무기를 뽑으려 했다.
"하하……,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싶은데 너무 박정하시구료?"
홍의인의 죽립 아래에서 너무도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구… 구면이란 말이냐?"
"누구냐? 무슨 일로 여기 왔느냐?"
팔대금강신은 공세를 펼치다 말고 움찔하며 손을 멈추었다.
"하하, 가져갈 것이 참 많구나, 탐스러운 모가지가 여러 개 있으니……. 하나 하나 따는데 재미가 있겠군."
홍의인은 탁옥룡이었다. 탁옥룡의 눈에서 살광이 쏟아져 나가자 죽립이 붉어졌다.
팔대금강신이 그 눈빛에 부르르 떨 때 반라의 여인이 문을 활짝 열고 나섰다.
"호호……, 회회단을 단신으로 찾는 용사가 있을 줄이야. 이것이야 말로 세상에는 기인이사가 많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여인은 옷을 걸치고는 있으나 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옷이 너무 얇아 속살이 훤히 다 드러나
보였다. 허벅지 사이의 은밀한 수림까지 내비쳤다.
"천한 계집!"
탁옥룡은 여인이 풍성한 젖가슴을 덜렁거리며 다가서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 채웠다. 그리고 아리따운 소녀의 얼굴이 뒤따라 기억되었다. 두 사람이 비참히
죽지 않았다면 탁옥룡은 무림고수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흠……, 살결이 흰 놈이다. 그리고 체격은 내가 본 사내 중 가장 튼튼하고 날렵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서른 정도 돼 보이는 반라미녀의 눈에서 음탕한 광채가 일어났다.
'회회공자, 그 놈은 이미 바람 빠진 풍선이다. 지난 해부터 나를 즐겁게 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세상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남녀간의 환락으로 아는 여인이었다.
구름같이 틀어올려진 머리에 꽂힌 옥부용화(玉芙蓉花)가 유독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강호인이라면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 여기기 이전 공포를 느낄 것이다.
"호호, 나는 영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무엇을 바라고 여기 왔는지 말해 봐라. 사정이 허락되면 원하는 것을
주겠다."
"주겠다고?"
"호호……, 여기가 회회단임을 안다면 이곳에 없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여인은 자신만만했다.
그녀는 바로 옥부용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옥룡천자의 첩이고, 사실은 회회공자를 정부로 두고 있는 천하제일의
요화(妖花)였다.
음탕한 눈빛에는 미륵불(彌勒佛)이라도 녹아 버릴 것이다.
희고 부드러운 넓적다리, 처녀의 종아리 같이 곧고 쭉 뻗은 다리의 선, 풍성한 둔부를 매달고 있기에는 너무도
가는 허리, 북망산 보다도 높은 두 개의 젖무덤, 그리고 사내에게 희롱당해 아주 커진 두 개의 포도송이는 음탕
그 자체였다.
"호호호……!"
옥부용은 웃으며 일부러 몸을 비비 꼬았다. 비릿한 육향이 더욱 강해졌다. 음탕한 눈길은 뇌살적이었고 콧소리는
고혹스러웠다.
"흥, 나는 미혼소(迷魂笑) 따위에 걸리지 않는다!"
탁옥룡이 차게 말하자 옥부용은 흠칫 굳어졌다. 음탕한 미소가 사라지며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호홋……, 나의 미혼소마저 알고 있다니 정말 신비롭군. 그래, 무엇을 바라고 여기 왔느냐?"
"바라는 것은 이 안에 있다."
"말해 봐라."
"아마 그것을 주기 싫어 할 것이다."
탁옥룡은 손바닥을 들어 턱면을 쓰다듬었다. 그는 냉혹하게 끊어 말했다.
"내게 바라는 것은 네년의 수급과 심장이다!"
"뭐… 뭐라고?"
백옥같이 희고 깨끗하던 옥부용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네… 네놈이 감히 나를 죽이러 왔단 말이냐?"
옥부용은 그제야 잔혹한 본성을 드러냈다. 눈썹을 찌푸리고 입술을 일그러뜨리자 그녀의 모습은 야차(夜叉)나
나찰보다 음험해 보였다.
"그렇다. 그런 더러운 물건을 얻기 위해 온 것이 어리석은 일이지만, 아니 취(取)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구나."
"호호호……, 네놈이 회회단을 무엇으로 아는지 모르겠구나?"
옥부용은 이를 갈다가 철수개에게 명했다.
"철수개!"
"예!"
"당장 만상용호풍운진(萬象龍虎風雲陣)을 펼쳐 저 고약한 놈의 창자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시오."
철수개는 고개를 번쩍 쳐들며 입을 딱 벌렸다.
"만… 만상용호풍운진이오?"
"그렇소. 어서 명을 내리시오."
철수개의 이마에서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그는 이빨을 딱딱 마주쳤다.
"하오나 그… 그것은 진을 펼친 사람도 살 수 없는 동귀어진의 진이옵니다."
"군말이 많다. 어서 진을 쳐라!"
옥부용은 아주 냉정히 외치고는 팔짱을 꼈다.
'만상용호풍운진이 실패한다면 회회무사들로 하여금 놈을 치게 하자. 놈이 강하다고는 하나 차륜전(車輪戰)을
당하지는 못한다.'
그녀의 독심은 실로 무서웠다.
"으음, 하는 수 없구나."
철수개가 옷소매로 식은땀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탁옥룡을 향해 측은한 눈빛을 던졌다. 굳이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탄식하며 손을
들어올렸다.
만상용호풍운진은 천 명으로 구성된 천하에서 가장 큰 진세로 개방의 최대절학이기도 했다.
"개방방주인가?"
탁옥룡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
철수개가 눈가를 찡그렸다.
"후후……, 그럼 즉시 개방최고의 절학인 만상용호풍운진과 함께 십팔로복마진(十八路伏魔陣), 삼십육로(三十
六路) 운룡대진(雲龍大陣)을 일으켜 회회교도들을 잡으라!"
"뭐… 뭐라고?"
철수개가 얼떨떨해 할 때 탁옥룡이 오른손을 쳐들었다.
"이것의 주인으로 명하는 것이다."
그의 손에는 성스런 빛을 발하는 대나무패 하나가 있었다. 마디가 열 개인 검은 패였다.
"오오……, 십절죽부령(十節竹符令)! 무상영부를 갖고 계신단 말이오?"
철수개의 머리카락이 빳빳해졌다.
탁옥룡이 꺼낸 것은 개방 최고권위인 십절죽부령으로 방주조차 거역할 수 없는 영부였다.
"어서!"
탁옥룡이 다시 한 번 재촉하자 팔대금강신 중 둘이 십절죽부령을 알아보고 이를 빠드득 갈며 장검을 힘껏 쳐냈다.
"뒈져라!"
쐐애애액―!
검기충천(劍氣 天)이었다. 그들은 각기 탁옥룡과 철수개를 노려왔다.
"흥,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 너희들에게 개방의 풍운신권(風雲神拳)을 알려 주겠다."
탁옥룡이 왼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콰― 콰쾅―!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검편(劍片)이 뿌려졌다.
"으악!"
"크으으, 상피신공을 으스러뜨리다니. 으윽……, 광개(狂 ) 이후 개방의 최고 고수다."
두 명의 금강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핏물로 뒤집어쓴 채 십여 걸음을 물러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들은
몸뚱이가 단단하기 때문에 죽는데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들이 숨을 채 끊지 못해 돼지 멱 따는 소리는 내자 그의 의형제들이 보다 못해 피눈물을 흘리며 보도로 그들의
목을 내리쳤다.
두 사람은 목이 잘리고서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외공이 강한 사람은 의술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것은 외가고수이기에 갖는 유일한 결점이었다.
"네… 네놈이 우리 삼십 년 의형제 중 둘을 죽이다니!"
"짓이겨 버리겠다!"
"죽어라!"
육대금강신이 낭아곤과 장도(長刀), 그리고 장봉을 쳐들고 다가서는 기세는 천군만마가 몰려드는 기세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당당히 서 있는 탁옥룡의 몸집이 더 커보였다. 그것은 그의 기도가 남다르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너희들 앞에서 아주 왜소했었지. 후후……, 사실 이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며 금강마의 고행을
참았었다."
탁옥룡은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되었다.
그는 지금 탁가장원을 향해 가는 심정이었다. 팔대금강신이 길을 막아 얼마나 야속했었던가?
육금강이 발도장을 찍으며 포위망을 좁혔다.
"흥, 개방고수였었더냐?"
"네놈 하나로 인해 개방 십만제자가 능지처참 당할 줄 알거라!"
그들의 호통소리가 회회단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콰류류류―!
성질 급한 자가 장력과 함께 낭아곤을 흔들어댔다. 쇠침이 무수히 박힌 쇠방망이가 탁옥룡의 두개골을 깨기
직전이었다.
"하나!"
탁옥룡의 왼손 중지가 가볍게 튕겨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낭아곤을 후려치던 자의 머리통 가운데 술사발만한 구멍 하나가 파여졌다.
그 자의 비명소리가 시작되기도 전에 탁옥룡의 수를 헤아리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둘― 셋― 넷―!"
둔탁한 폭음이 뒤를 따랐다.
"다섯― 여섯―!"
비로소 육금강의 비명소리가 합창되어 들렸다. 그들의 뇌에서 쏟아져 나오는 뇌수로 인해 근처가 잿빛으로
물들었다. 두부 같은 뇌수가 다 쏟아져 나온 다음에야 핏물이 흘렀다.
"이… 이럴 수가? 이것은 개방의 수법이 아니다!"
옥부용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너… 너는 누구냐?"
그녀가 부르르 떨며 외치다 탁옥룡이 죽립을 벗었다.
"나를 잘 봐라!"
그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났다.
"웨엑―!"
"귀… 귀신이다!"
"으으……, 저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 모두 구역질을 했다.
드러난 탁옥룡의 얼굴은 오관이 일그러져 너무도 잔혹하고 추악했다. 도저히 인간의 형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기괴한 형상이었다.
"후후……, 옥부용! 이 빚을 갚기 위해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
탁옥룡은 냉혹히 말하며 천천히 다가섰다.
"이 놈, 썩 가라!"
옥부용이 악을 쓰며 연이어 쌍장을 흔들었다.
펑― 펑― 펑―!
십여 장이 연달아 작렬되었지만 탁옥룡은 휘청이지도 않았다.
"으으―!"
옥부용은 기가 막혀 다시 한 번 사색이 되며 권장지(拳掌指)를 연달아 쳐냈다. 무수한 초식이 시전되며 탁옥룡의
가슴을 후려쳤다. 그때마다 폭음이 일어났다.
옥부용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허억,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
그녀가 사색이 될 때 흰 손 두 개가 그녀의 목가로 다가섰다.
"아악!"
옥부용은 지독한 공포를 휩싸여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등줄기가 축축히 젖어 들었다.
짜― 짝!
탁옥룡의 두 손바닥이 그녀의 부용같이 고운 얼굴에 두 개의 장인(掌印)을 남겼다. 그와 함께 그녀의 너무도
고운 얼굴이 피곤죽으로 화했다.
"아악……, 내… 내 귀! 코, 내 입술……. 흐으윽, 다 어디로 갔느냐?"
옥부용은 얼굴이 으스러진 아픔보다 용모가 훼손된 고통을 더 뼈저리게 느꼈다.
"천한 계집! 양아버지의 한을 갚는 것이 아직 남았다. 징계가 다 끝난 것은 아니다."
탁옥룡은 팔금강을 박살내 버리고 옥부용의 얼굴을 짓이기고도 한이 풀리지 않은 듯 더 사납게 외쳤다.
"혈… 영마협이다!"
"바로 본궁 최대의 적인 혈영마협이다!"
모두들 그제서야 탁옥룡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오호호호……!"
옥부용은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얼굴이 으스러져 버리는 찰나 미쳐 버리고 말았다. 그녀에게 있어 미색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쳤다 하여 탁옥룡의 살기를 없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복수의 화신이었다.
"후훗……, 이제 네 심장이다!"
탁옥룡은 손을 꼿꼿이 세워 옥부용의 젖가슴을 노렸다.
순간, 어디선가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손… 손을 멈춰라!"
탁옥룡의 손끝이 옥부용의 젖가슴 바로 앞에서 정지되었다.
이미 출수된 수법을 도중에 멈추는 것은 초일류급 고수들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 계집을 살리고 싶다면 그 여인을 놓아다오."
언제 나타났는지 석루 지붕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백의인 하나가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축 늘어진 흑의여인
하나가 잡혀 있었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회회공자(回回公子)였다.
그는 수년 전에 비할 수 없이 수척했다. 그리고 나이도 오십 정도는 되어 보였다. 눈빛이 아주 날카롭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눈빛에는 비밀이 담겨 있었다.
'라마공자라는 자의 눈빛에도 독광(毒光)이 스며 있었는데 회회공자의 눈빛에도 독기운이 들어 있다.'
탁옥룡은 그를 보고 옥부용의 심장을 파내려던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팔을 완전히 내리지는 않았다.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이 여인이 죽는다!"
회회공자의 손에는 파천반월도(破天半月刀)가 들려 있었다.
그 날카로운 도봉(刀鋒)은 흑의여인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여인은 모진 고문으로 인해 피투성이였다.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혈수나찰과 옥부용을 바꾸자!"
회회공자의 눈빛은 흐트러질 대로 흩어져 있었다.
"후후……, 무공에 자신을 잃었구료?"
탁옥룡이 비웃는 것인지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게 말하자 회회공자가 몸을 약간 휘청였다.
"무… 무슨 소리냐?"
"귀하는 호흡소리가 거칠고 눈빛에 독광이 스며 있소. 그것은 귀하가 수년간 채양법(採陽法)의 제물이 되어
내공을 많이 상실했고. 애석하게도 미심고(迷心蠱)에 당해 심령을 남에게 금제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오."
회회공자의 표정이 누렇게 변했다.
"미심고라니?"
"아마 옥부용이 귀하에게 그것을 썼을 것이오."
"미친 소리 마라! 옥부용을 내 쪽으로 보내라."
탁옥룡은 옥부용의 긴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후후……, 그럴 수는 없소."
혈수나찰의 목을 겨누고 있던 회회공자의 파천반월도가 파르르 떨렸다.
"혈수나찰이 죽는 꼴을 보고 싶단 말이냐?"
"그 계집이 죽건 살건 나와는 상관없소."
회회공자는 맥이 탁 풀리는 모습이었다.
"뭐라고? 으음……, 너는 일심맹의 혈영마협이 아니냐?"
"혈영마협이라 불리는 사람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일심맹이라는 말에는 수긍할 수 없소."
탁옥룡은 천천히 말하며 손을 옥부용의 심장에 가져갔다.
"그… 그러지 마라! 제… 제발……."
회회공자가 안쓰러운 모습으로 하소연했다.
탁옥룡은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젖가슴 속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케에에― 엑―!"
옥부용은 잠시 신지를 상실했다가 살이 뚫리는 고통을 느끼며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크으윽……, 네놈이 누구기에 이리도 잔인하냐?"
그녀는 입에서 울컥울컥 피를 쏟아냈다.
탁옥룡은 전음으로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바로 하늘 같은 분을 여의게 한 산서성 탁가장원의 어린 소년 탁옥룡이다!"
"큭……, 뭐라고?"
"잘 기억해 봐라."
"그… 그때 그 애송이가 바로 너라고?"
옥부용의 눈이 훌렁 뒤집어졌다.
탁옥룡의 손이 그녀의 갈비뼈 속으로 파고들었다가 빠져나왔다. 그는 핏물이 떨어지는 심장을 빼들고 잔혹하게
웃다가 높이 집어던졌다.
욕부용의 심장은 아주 멀리 날아갔고, 옥부용은 왼쪽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시체가 되어 벌렁 나뒹굴었다.
"으으……, 네놈이 기어코!"
회회공자는 악을 쓰며 혈수나찰의 등판에 일장을 가했다. 혈수나찰이 맥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회회공자의 몸이 도기(刀氣)와 하나로 합해졌다.
"반월파천―!"
마침내 천하쌍도법(天下雙刀法)의 하나가 시전되었다.
파츠츠츳―!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날아드는 도기는 반경 오 장 이내를 뒤덮었다. 가히 천하의 절학다운 강맹함이었다.
"나의 경고를 잊었군. 그대의 내공은 이전만 못하다. 절기인 파천반월도(破天半月刀)조차 제대로 쓰지 못한다.
미심고 때문이다."
탁옥룡이 한 자 한 자 끊어 말하며 일지를 튕겼다.
땅―!
쇳소리가 나더니 회회공자의 몸이 도기 밖으로 드러났다. 그의 합곡혈(合谷穴)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흐윽……, 지공으로 도강(刀 )을 깨다니……?"
회회공자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귀하가 십성의 수준으로 시전했다면 나의 지력으로 귀하의 도강을 깨지 못했을 것이오. 하지만 그대의 내공이
절반밖에 안 되기에 도강이 깨어진 것이오."
"그… 그게 정말이냐?"
"그렇소."
회회공자는 파천반월도를 늘어뜨리고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옥룡궁이 왜 내게 독을 먹인단 말이냐? 믿을 수 없다."
"후후……, 그 사정이야 옥룡마궁 측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나로서는 그 사연까지 알 수 없소."
탁옥룡은 철수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철수개는 개방의 장로들과 함께 희희낙락해 하는 중이었다. 당금천하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혈영마협이 그들의
태상방주(太上 主)이기에 감격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탁옥룡은 천하에서 가장 추악한 얼굴 가운데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방주, 회회공자와 그의 부하들을 모두 온전히 놓아 보내시오."
"예에?"
"활로(活路)를 터주라는 말이오."
철수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만, 왜 그런 명을……?"
"하하, 이 사람은 나의 은인(恩人)이기 때문이오."
깊은 회한에 젖어 있던 회회공자가 갑자기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 그랬었단 말인가? 과거 그 무기력한 소년이 너란 말이냐?"
그는 과거 산서성 금룡거(金龍居)에서의 일을 기억한 듯했다.
탁옥룡은 염화시중의 미소를 보였다.
"한 번 구한 은혜를 이것으로 갚겠소. 이제 다시 만날 때에도 마궁 사람이라면 옥부용이 죽었듯 죽을 것이오."
"으음……, 도법을 잃지 않았다면 너 정도는 간단히 처치했을 것이다."
탁옥룡은 과거의 정분을 생각을 충고를 잊지 않았다.
"후후……, 마궁은 이역사단을 노예로 알 뿐 친구로 여기지 않소. 그것을 알아야 하오."
"그… 그럴 리가?"
"후후, 옥부용이 그대를 정부로 취한 이유는 분명 상부의 명 때문일 것이오."
회회공자는 가슴이 뻥 뚫린 상태로 죽어 있는 옥부용의 시체를 바라보며 멍한 표정이 되었다.
"명이라고?"
"그렇소. 그녀가 옥룡천자의 부인이라고 하나 그것은 완전한 형식이오."
"으음……!"
탁옥룡은 회회공자에게 입은 은혜를 생각해 가급적 그와는 적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옥부용은 그대와 살을 섞어 그대를 마궁의 죄인으로 만든 것이오. 그대는 그 덕에 꼼짝없이 마궁의 주구가
되었소. 그 바람에 그대는 과거와 다른 사람이 되었소. 아주 추악하고 나약한 사람이 된 것이오. 그렇게 된
이유는 자신도 모르게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오."
"네 말이 맞다면, 선사(先師)의 유언 또한 옥룡궁이 조작한 가짜라는 말이 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회회교는
마궁에 완전히 조롱당한 문파가 되는 것이다. 중원에서 이미 오백 명이 죽었는데……."
그는 무엇인가 깨달은 듯했다.
탁옥룡의 음성은 쇄금강후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은 회회공자의 흐릿해진 한 신지를 되찾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네 추측대로라면 너는 회회교의 은인이다. 하지만 거짓이라면 회회교의 모든 고수가 너를 추살할 줄 알아라!"
회회공자는 피묻은 손을 옷자락에 쓱쓱 닦다가 위로 날아올랐다. 그의 신법은 아주 유려했다. 미심고에 당하지
않았다면 탁옥룡이 간과치 못할 고수였을 것이다.
'무혈검만 비길만 하다. 몇 가지 결점만 고친다면 지금보다 세배 강한 고수가 될 텐데…….'
그는 매우 애석해 하며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으음……!"
아주 가는 신음소리를 내며 드러누워 있는 여인 하나가 있었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그녀는 혈수나찰이라
불리는 여인이었다.
"구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탁옥룡은 지극히 비정했다.
그러나 그는 구하기로 작정했다. 천산의서를 그에게 전한 천산신의의 부탁을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가 혈수나찰 바로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옥부용의 고문법이 천하제일이라더니 사실이로군. 착골수혼(錯骨搜魂) 이외에 세 가지 다른 고문을 썼구나."
탁옥룡은 여인의 몸을 슬쩍 살핀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역근회혼대법(易筋回魂大法)을 시전해 주지 않는 한 살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한가한 몸은
아니다.'
그는 치료의 어려움을 감안하고는 구하기를 포기하려 했다.
"으윽……!"
혈수나찰이 고개를 슬쩍 틀었다. 이제껏 다른 쪽으로 돌려졌던 그녀의 얼굴이 탁옥룡의 눈에 정확히 들어왔다.
"앗! 이… 이럴 수가!"
탁옥룡은 너무도 놀라 시꺼멓게 죽은 피부를 더 시꺼멓게 물들였다. 비록 고문에 일그러졌지만 혈수나찰의 얼굴은
청초하고 요염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탁옥룡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모습었다.
"이수운(李愁雲)!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단 말인가?"
탁옥룡은 몸을 휘청이다가 그녀의 맥문을 거머쥐었다. 그의 손에서 혈영금강마공에 버금가는 신비한 힘이
일어났다.
금단선공(金丹禪功)!
녹옥상인(綠玉上人)의 삼대 절기 중 하나로 탁옥룡이 도중 틈틈이 익힌 금단선공의 힘이 발휘되었다.
마공을 쓰지 않은 이유는, 그럴 경우 혈수나찰의 내공과 융화되지 않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탁옥룡의 손바닥이 금광(金光)을 흘렸다. 반 시진 지나지 않아 그는 땀으로 옷을 적셨다. 반면, 혈수나찰의
얼굴은 도홧빛으로 물들어 보기 좋았다.
탁옥룡은 그녀가 위기를 넘겼다 여기며 그녀의 혈도 한 곳을 쳤다.
"으음……, 누구냐?"
혈수나찰이 감았던 눈을 스르르 떴다.
"아……!"
탁옥룡은 그녀의 눈빛만으로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눈빛은 분명 그의 정혼녀(定
婚女) 이수운의 눈빛이었다.
'죽지 않았단 말인가?'
탁옥룡의 추악한 얼굴이 감동으로 가득 찼다.
"더… 더러운 놈! 이 손을 놔라. 나는 낭군(郞君)이 있는 여인이다!"
혈수나찰이 악을 썼다. 틀림없는 이수운의 목소리였다.
"낭군이 있다고?"
탁옥룡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이 되는 말이었다.
"죽을지언정 결백을 더럽히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유마가신공과 미륵수미권의 구결은 말하지 않는다. 깨끗이
죽여다오!"
"한 가지 물을 게 있소"
탁옥룡은 착잡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뭐냐? 이 추악한 놈아!"
혈수나찰은 입을 뗄 때마다 욕을 했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었다. 해후(邂逅)치고는 너무도 가슴 아픈 만남이었다.
탁옥룡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입술을 열었다.
"혹…… 이수운(李愁雲)이라는 여인이 아니오?"
격동으로 인해 심하게 떨리는 음성이었다.
"호호, 혈수나찰 이수운을 몰라 묻는 게냐? 옥부용과 회회공자는 나의 가장 큰 원수이다. 그리고 너의 마궁에
조종당하는 오자춘이란 놈도 나의 원수다!"
혈수나찰이 이수운이라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나를 모르시오?"
탁옥룡은 격앙된 어조로 물었다.
"퉤엣―!"
이수운은 냅다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으음……!"
그는 너무도 노해 눈에서 혈광을 토했다.
'수운아! 나는 너를 기억하고 있는데 너는 나를 까맣게 잊었단 말이냐?' 천년마제 제 2 권
탁옥룡은 심한 배반감을 젖고 말았다.
"호호……, 이 사악한 놈아! 내게는 낭군이 있고 하늘 같은 양아버님과 양어머님이 계시다. 죽는다 해도 유감은
없다. 어서 깨끗이 죽여라!"
이수운은 악에 받쳐 계속 떠들어댔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철수개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듯 나섰다.
"태상방주! 이 계집의 주둥아리를 닥치게 하지 않으신다면 속하가 이 계집의 목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호호……, 버러지 같은 놈들!"
이수운은 공포를 느끼지 않는 듯 계속 당당히 행동했다.
탁옥룡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그녀의 혼수혈을 찍었다.
"으음……!"
이수운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탁옥룡은 그녀의 고운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만졌다.
'옛날이나 다름없이 아름답구나. 그러나 지금의 너는 과거 탁가장의 이수운이 아니다. 네가 나를 잊었으니 나도
너를 잊어주마. 하긴 과거에 네게 참 매정히 행동했었지. 네가 나를 기억하고……, 아니 지금 이렇게 살아 나를
찾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살아준 것만도 고맙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철수개를 바라보았다.
"방주에게 명이 있소."
"예, 그 계집을 어떻게 처단할까요?"
"처단하라는 것이 아니오."
"그럼……?"
탁옥룡은 이수운은 품에 안고 일어섰다.
"포달랍궁에 데려다 주시오."
"예에?"
"내 방주에게 한 가지 대법구결(大法口訣)을 적어주겠소. 그것을 포달랍궁에 전하면 포달궁주가 이 여인과
양어머니 되는 석심부인을 살릴 것이오."
"아, 정말 모르겠습니다."
철수개는 계속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누가 탁옥룡의 내심을 알겠는가? 그는 강호에 나온 이후 처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 철수개는 날쌘 부하 스무 명과 함께 이수운을 호송하고 떠나갔다. 이수운이 포달랍궁에
귀환하게 된다면 천하의 판도는 또 바뀔 것이다.
탁옥룡은 남아 개방도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의 머리는 텅 빈 상태였다. 하지만 정혼자로 인해 대세를 그르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개방제자들에게 준엄한 영을 내렸다.
마궁의 금제(禁制)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어 그는 광개가 전한 십대절기를 충성심 강하고 자질이 뛰어난 자들에게 쾌히 전수해 그들의 무공이 훨씬
강해지게 했다.
개방은 강호백도에 많은 빚을 졌다. 그 빚을 갚으려면 활약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탁옥룡의 생각과 개방도들의 생각은 그런 점에서 일치되었다.
단신으로 행동하던 탁옥룡은 회회단에 와 졸지에 십만 제자들을 호령하는 사람이 되었다. 개방의 태상방주라면
천하에서도 가장 존귀한 존재에 해당된다.
그는 회회단의 몇 가지 지형을 고치게 하고 새로운 기문진을 설치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 하루는 정말 중요한
하루였다. 개방으로서는 이십 년간의 전락(轉落)을 씻는 하루였다.
또한 혈영마협이 라마분단에 이어 회회분단까지 괴멸시켰다는 위대함이 만천하에 전해진 하루이기도 했다.
개방의 장로들은 방의 결속을 다치고 방침을 새로이 정해 이미 천하의 모든 분타에 통고했던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였다.
그 동안 옥룡마궁의 눈과 귀 역할을 하던 개방이 다시 정파로 돌아섰다는 것은, 마궁이 장님이며 귀머거리로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음 날 저녁, 탁옥룡은 개방 장로들과 연회를 베푼 다음 개방임시 총단을 훌쩍 벗어났다.
그는 다시 죽립을 쓰고 있었다. 등에 걸린 혈섬신검이 유일한 벗이라면 벗이었다.
"냑양(洛陽)으로 가자. 옥룡천자가 그곳에 있다니 정말 잘 된 일이다. 그를 죽인 다음 그의 목을 들고
축융봉으로 가자."
그의 독보(獨步)는 쉴 새가 없었다.

第五章 암습, 설혈비도(雪血飛刀)


천년고도(千年古都) 낙양(洛陽).
천하의 모든 문화가 한데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소이다. 그 얼마나 많은 유적이 있고, 기재가인(奇才
佳人)이 있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많은 유적 중 석탑으로 유명한 낙성사(落星寺)가 있다.
낙성사는 유서 깊은 아주 거대한 사찰이다. 사시사철 복을 빌고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향화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이른 새벽 무렵, 향화객이 아직 찾지 않는 낙성사를 향해 오는 홍의인 하나가 있었다.
"교활한 놈들, 고도(古都) 낙양성의 절 속에 비밀소굴을 만들어 놓았군. 후후……, 하여간 개방이 그들을 위해
이십 년 일하느라 그들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큰 힘이 되었다. 이 후, 나는 헛걸음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이 나의 이목(耳目)이 되어줄 테니까."
홍의인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그는 밤을 새워 달려왔는데도 지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강호행이 거듭되면서 오히려 더 강해졌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의 내공은 밑바닥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오했다. 그것은 인형설삼 덕분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너무나도 커다란 마음의 상처가 그의 정신을 차돌같이 단단하게 만들어, 그의 마공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큰공을 했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탁옥룡은 사문(寺門)을 향해 갔다.
그는 걸어가지 않았다. 그를 자세히 보는 사람은 그가 메마른 황토 위를 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고 미끄러진다는
것을 알 것이다.
붉은 사문은 꽉 닫혀 있었다.
<落星寶刹(낙성보찰)>
사문 위에 걸려 있는 거대한 현판이 유독 눈에 들었다. 아주 잘 쓴 필체였다.
탁옥룡은 서슴없이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쿵― 쿵― 쿵!
둔탁한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뜨렸다.
"어느 시주이시오?"
대문 귀퉁이에 붙어 있는 작은 문이 빠꼼 열리며 사미승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난히 머리통이 큰
사미승이었다.
"뉘시기에 이 새벽에……?"
베옷을 입은 사미승은 불청객을 훑어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미타불……!"
그는 문 밖으로 걸어나오며 합장했다.
"본사는 검객이 방문할 만한 곳이 아니외다."
그의 목소리는 나이답지 않게 아주 의젓했다. 그것은 수양이 깊어서가 아니었다.
'흐음, 축골공(縮骨功)으로 몸뚱이를 축소시키고 있을 뿐 아이는 아니다.'
탁옥룡은 사미승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미승은 합장하는 체하면서 손바닥 하나를 소매 속에 찔러 넣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아주 공손하고 단아했지만
아래턱을 약간 떨고 있었다.
이마에는 땀을 송글송글 맺고 있었다.
'혹시 나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 자일지 모른다. 일부러 축골공을 써서 체격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구린 구석이 있는 자다.'
탁옥룡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맹룡(猛龍)이 아니었다면 강을 건널 작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 척하며 천천히 말했다.
"주지스님과 벗이신 분이 보름간 이곳에 머물러 계신다는 것을 알고 왔소."
"예에……?"
"하하, 공야(公冶)라는 복성(復性)을 가진 시주가 이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온 것이오."
사미승은 그제서야 경계심을 늦추었다.
"아, 공야 대감을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그런데 그 분과 어떤 사이신지요?"
"그에게 빚을 진 것이 있어 빚을 받으러 온 사람이오. 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시면 고맙겠소."
"그… 그것은……."
사미승은 잠시 멈칫 했다.
그는 탁옥룡의 모습을 또 한 번 유심히 살폈다. 아주 잠깐 동안 그의 눈에서 번갯불을 방불케 하는 광망이
흘러나왔다.
'진짜 고수다.'
탁옥룡은 그가 무슨 수작을 하는지 모른 척 지켜보기로 했다.
사미승을 가장한 자는 다시 합장하며 말했다.
"그 분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 드릴 수는 있소. 하지만 본사는 사람을 살상하는 병장기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금지하고 있소이다."
탁옥룡은 그도 그러리라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소?"
"굳이 안으로 드시겠다면, 등에 걸머지고 계신 삼척고검(三尺古劍)을 소승에게 맡기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빈 손으로 들어가란 말인가?"
사미승은 눈을 끔뻑이며 제법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강요는 하지 않소이다. 싫으시다면, 헤헤……, 소승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지요."
"하하……, 빚을 받으러 왔다가 빈 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탁옥룡은 웃으며 검자루에 손을 댔다.
그가 검을 끌어내리려 할 때였다. 돌연, 모기 소리보다 가는 전음성이 고막을 때렸다.
"혈영마협(血影魔俠)! 그대가 회회단을 정복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의 웅지는 높이 살 만한 것이나 그대의
정체는 이미 놈들에게 노출된 후다. 검을 벗고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그것은 아주 맑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누가 내게 전음을 보낼까?'
탁옥룡은 음성이 들려온 방향을 살펴봤다.
물론 고개를 돌리거나 어깨를 떨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는 정확히 방향과 거리를 판단해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려
있는 흑의인영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예의 여인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 모두 그대를 죽이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중이다. 진짜 중들은 다 잡혔고, 현재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가짜 중이다. 네 앞에 있는 자는 천면객(千面客)이라는 자다. 역용술에 능한 자로, 옥룡천자의
비밀십시위(秘密十侍衛) 중 하나이다."
그녀의 조급한 말이 거기에 이르자 탁옥룡은 눈길조차 던지지 않고 역시 전음으로 물었다.
"공야무군이 안에 있기는 한 것이오?"
예의 여인은 탁옥룡이 잠깐 사이 자신이 숨어 있는 곳을 정확히 찾아 전음으로 대답한다는데 크게 놀라워했다.
'역시 명불허전이다. 혈미륵보다 강하고, 일심검제보다도 강하다는 소문대로다.'
신비여인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그는 있소. 그대를 죽이기를 기다리고 있소."
탁옥룡은 다시 묻지 않고 등에서 태연히 검을 끌어내렸다.
사미승으로 변장한 천면객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흐흐……, 이제야 잡혀주는구나. 세 가지의 사관(死關)을 모두 통과하지는 못할 것이다. 네놈이 비록 삼두육비
(三頭六臂)일지라도 죽을 수밖에 없다.'
그는 득의해 하며 혈섬신검(血閃神劍)을 건네 받았다. 그리고는 감탄해 말했다.
"아주 좋은 검이군요?"
"그렇소. 자금사(紫金沙)와 설화빈철(雪花賓鐵), 만년한철(萬年寒鐵)을 섞어 만든 천하제일신검(天下第一神
劍)이오."
"아……, 매우 날카롭겠군요?"
탁옥룡은 상대의 정체를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응수했다.
"하하……, 검신에 머리카락을 얹혀놓고 분다면 머리카락이 그대로 잘라질 것이오. 그리고 힘을 주지 않고 친다
해도 금석(金石)을 두부처럼 벨 수 있소."
"오호!"
"가장 무서운 것은 검신에 검결을 일으켜 내공을 주입할 경우 핏빛 보광이 일어나 십 장 안 사람들을 눈멀게
한다는 것이오."
천면객은 내심 겁을 집어먹었지만 짐짓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아……, 정말 대단하군요?"
"그러나 약점이 있소."
"어떤 약점입니까?"
탁옥룡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살인하지 않을 때에는 뽑지 말라는 금제(禁制)가 그것이오. 즉 살인을 하고 피를 볼 작정을 해야만 뽑을 수
있는 물건이라는 말이오."
천면객은 혈섬신검을 움켜쥐고는 빙글빙글 웃었다.
"헤헤……, 누구의 가르침인지 모르나 정말 무섭군요. 하지만 물건이라는 것은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겠지요?"
"글쎄, 그렇지는 않소."
"무… 무슨 뜻이지요?"
탁옥룡은 뒷짐을 쥔 채 낙성사 현판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 검은 나와 심령상 통하고 있소."
"아……!"
"그 검은 내게 위기가 닥칠 경우 우는 신검이오."
탁옥룡은 꽤 오래 이야기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와 얘기를 나누면서 천이통(天耳通)을 시전해 낙성사 안에 얼마나 많은 고수가 머물러
있는가 알아보자는 것이 그의 속셈이었다.
천면객은 그의 깊은 심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위기가 닥친다면 운다고? 크흐흐……, 미련한 소리만 골라서 하는구나!'
그가 속으로 비웃자 탁옥룡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 가지 다른 특징은 내가 아니면 이 검을 사용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오."
"헤헤……, 정말 이상한 말씀이군요? 시주의 말씀은 하도 황당해 믿기가 어렵습니다."
탁옥룡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천면객은 탁옥룡이 자신의 안내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혈섬검을 두 손으로 떠받든 채 뒤돌아 말했다.
"공야대감의 손님이 들어가시니 잘 접대하십시오!"
그는 안쪽을 향해 말한 다음 돌아섰다.
"자, 들어가시지요."
"흠, 검을 갖고 여기서 기다릴 작정이신가?"
"헤헤……, 그래야겠지요. 본사는 세상을 위해 자비행(慈悲行) 하는 것을 창사의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가 득의해 할 때 머리를 파랗게 깎은 승려 둘이 문 가까이 다가섰다. 그들은 탁옥룡을 향해 합장배례했다.
"아미타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소승들이 내선원(內禪院)으로 안내해 드리겠소이다."
둘 다 아주 공손했다. 물론 비수를 숨긴 웃음이었다. 이름하여 소리장도(笑裏藏刀)였다.
"고맙소. 떠날 때 황금 천 냥에 해당하는 보주(寶珠)를 족적(足跡)으로 남기겠소."
탁옥룡은 담담히 말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낙성사는 아주 넓었다. 마당은 텅 빈 상태였다. 겉보기에는 너무도 평화로웠다. 그러나 내가고수라면 충분히
살기를 느낄 것이다.
탁옥룡도 물론 그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내색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가 열 걸음 정도 걸었을 때 예의 아름다운 음성이 들려왔다.
"혈영마협, 그대의 패기(覇氣)는 높이 사지만 더 이상은 가지 않는 것이 좋소. 이미 진세가 발동되었소."
탁옥룡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 한 번 들은 목소리인데……, 잘 생각이 나지 않는군.'
탁옥룡은 눈살을 찌푸리며 어디서 들은 목소리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아……, 고집으로 인해 죽는군요. 나로서도 이제 어찌 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있어 옥룡궁의 힘이 삼분의
일이나 줄었는데, 그대가 고집을 부려 천하가 곤궁에 빠지는군요."
여인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탁옥룡은 귀머거리처럼 행세했다. 그는 두 명의 승려를 따라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지나쳤다.
일 마장 정도 가자 울창한 죽림(竹林)이 나타났다. 죽림 근처에서 이는 살기는 한계를 넘고 있었다.
두 승려는 죽림 앞에 이르러 발을 멈췄다.
"저 안에 내선원이 있소."
"들어가 보시지요."
둘은 더 이상 가지 않았다.
"고맙소."
탁옥룡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죽림 사이로 나 있는 소로 어귀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붉은 몸뚱이가 푸른 죽엽
(竹葉)으로 물들 때였다.
"차아앗!"
"쓰러져라, 혈영마협―!"
두 명의 승려가 기다리고 있었던 듯 악을 쓰며 그의 등을 향해 승포자락을 어지러이 흔들었다.
피피피핑―!
푸른 그림자가 어지러이 뿌려졌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독침이 뿌려지는 것이다.
"흥!"
탁옥룡은 미리 알고 있었던 듯 뒤돌아보지도 않고 냉소와 함께 백로마현보(百路魔現步)를 일으켰다.
그가 오른쪽으로 한 걸음 움직이자 무수한 독침보다도 더 많은 환영(幻影)이 만들어졌다. 온통 핏빛의 사람
그림자뿐이었다. 여기를 봐도 탁옥룡이요, 저기를 봐도 탁옥룡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무수한 독침이 허공을
꿰뚫는 것으로 무산되었다.
"사… 사술이다!"
"으윽……, 눈치 챘었단 말인가?"
기습에 실패한 가짜 승려들은 기겁하며 바싹 굳어졌다.
"가소로운 무리들! 자비로운 불도장(佛道場)에 피를 묻히게 되어 유감이나 주저하지는 않는다."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핏빛 장영이 쏟아졌다.
만화난락(萬花亂落)!
핏빛 꽃송이가 무수히 떨어졌다. 가짜 승려들은 자지러지게 놀라 위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혈장은 이미 그들의 몸
가까이 이르러 있었다.
콰류류류―!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파괴하는 금강마장(金剛魔掌)이 그들의 몸을 스쳤다.
"케에엑―!"
"이… 이렇게 강한 자가 있다니……?"
가짜 승려들은 죽림 앞을 피로 물들이며 피모래로 화해 스러져 갔다. 그들은 탁옥룡의 일초지적도 될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는 그들이 시체로 화하는 찰나 주위를 둘러보며 차게 외쳤다.
"공야무군! 네가 여기 머물러 연공 중임을 알고 왔다. 어디로 도망가든 나를 피하지 못할 것이니 어서
나타나라!"
그가 사자후로 외칠 때 아주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다.
"흐흐……, 잘 왔다. 정말 잘 왔다, 혈영마협! 나는 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네가 공야무군이냐?"
"그렇다. 흐흐, 나를 만나고 싶다면 주저 없이 들어와라."
"오냐!"
탁옥룡은 당당히 말하며 소로를 따라 신형을 폭사시켰다.
그의 몸이 혈선으로 화하는 찰나 여기저기서 냉갈이 터져나왔다.
"쏴라―!"
"옥룡마전(玉龍魔箭)이다!"
"혈전(血箭)으로 구궁(九宮)을 가린다!"
육합(六合)에서 신기한 독화살이 쏟아졌다. 길이는 두 치 가량, 전체가 인광으로 번뜩이고 있는 핏빛
쇠화살이었다.
피피피핑―!
굳센 철전들은 독모래를 날리며 탁옥룡 근처를 휘감았다. 죽림은 없어지고 붉은 화살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달이 움직이면 꽃 그림자가 따라 움직인다(月移花影)―!"
탁옥룡의 목소리가 먼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그는 어느새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무수한 옥룡마전이 그를 따라 날아오른다는 것이었다.
우르르― 릉!
붉은 회오리가 만들어질 때 탁옥룡은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켰다.
"꽃을 움직여 나무에 접붙인다(移花接木)―!"
그의 두 손에서 혈영패천강(血影覇天 )이 전개되었다.
꽈르르― 릉!
그를 따르던 무수한 화살 다발이 방향을 되돌려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육합(六合)을 피로 씻고(六合血洗), 사해(四海)에서 혈룡(血龍)이 난다(血龍勝四海)―."
잔혹한 목소리가 죽림을 뒤흔들더니 혈전이 원래 속도보다 훨씬 퉁겨지며, 반경 일백 장 안 구석구석을 향해
어지럽게 쏘아졌다.
"케에― 엑!"
"으으……, 가공할 내공이다!"
"이것은 전설로만 알고 있던 마공이 아닌가?"
"놈은 이미 마화지경(魔化之境)에 이르렀다!"
혈전이 뿌려지며 역겨운 피보라가 물씬 피어올랐다.
대나무 아래, 땅속, 죽엽 사이사이에서 숨어 있던 자들이 혈전에 꿰뚫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수는 수백에
달했다.
"으하하하……!"
탁옥룡은 허공을 밟아가며 죽림 한가운데로 날아들었다.
일 장 높이 죽루(竹樓) 하나가 서 있었다. 죽루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죽루 문 앞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자들이 있고, 그를 몸뚱이 사이로 태사의를 놓고 앉아 있는 자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태상의의 인물만 금포에 복면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삼(紫衫) 차림으로, 옷자락마다 천하군림(天下君臨) 무림일통(武林一通)이라는 오만한
글귀를 수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의외로 오만하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얼굴이었다.
"혈… 혈영마협답다!"
"라마단과 회회단이 삽시간에 무너진 이유는 이래서였군."
"사… 사신(死神)이겠지만…… 결국 인간이 아니겠는가?"
모두 비장한 각오들이었다.
탁옥룡은 죽루 삼 장 앞에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그는 옷자락 하나 다치지 않은 깨끗한 모습이었다.
"후후, 대접은 황송할 정도로 융숭했다."
"천만에! 네가 그 정도는 뚫을 줄 알고 있었다."
안에 있는 자 역시 대범하게 말했지만 내심 은근히 떨고 있는 눈치였다.
탁옥룡은 옥룡궁의 최고 정예들인 자삼인들에 대해서는 일별도 주지 않았다.
"후후……, 빚을 받으러 왔다는 말은 들었겠지?"
"들었다. 그래 무슨 빚이냐?"
"네 목으로만 갚을 수 있는 빚이다."
태사의의 인물은 당당히 응수했다.
"크후훗……, 나를 죽일 수 있다고 믿느냐? 네가 마공을 발휘해 나의 수하들을 무수히 죽였다고는 하나 낙성사에
있는 전 수하들 중 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수다. 너는 결국 나와 싸우기도 전에 지쳐 죽을 것이다."
"차륜전(車輪戰)을 쓸 작정이신가?"
"후후……, 역시 총기가 있구나. 일단 구룡선풍진(九龍旋風陣)으로 너의 내공 중 삼할을 축내겠다.
구룡선풍진은 너와 더불어 백초를 싸울 수 있으리라 자부한다."
금포인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차창― 창―!
문 앞에 일렬로 늘어서 있던 자들이 검을 일제히 빼들었다. 아홉 줄기 검기가 한데 어울렸다. 현란한 검광이
구름보다도 높이 솟아올랐다.
"백 초까지 갈 것 없지. 단 구 초(九招)면 된다!"
탁옥룡은 미끄러지듯 검진 안으로 걸어 들었다.
츠츠츠츳―!
검기가 그를 향해 꼬리를 물고 다가섰다. 그의 몸이 수천 토막으로 나누어질 듯했다. 하지만 무수한 검기 중
그의 옷자락을 베어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진을 쓴 것이 잘못이었다. 허점을 드러낸 셈이니까.'
탁옥룡은 진도(陣圖)를 따라 보법을 밟다가 손을 잇따라 열 번 튕겼다. 손이 흔들릴 때마다 머리통이 박살났다.
마지막 한 번의 손길은 문을 박살내는데 쓰였다.
콰아앙―!
문 부서지는 소리가 아주 요란해 비명소리가 그 소리에 묻혀 버렸다. 구대시위(九大侍衛)는 너무도 간단히 죽어
갔다.
탁옥룡은 정녕 사신인 양 죽루 안을 밟고 있었다.
"으음……, 네가 이 정도일 줄이야! 혈작약이 보고한 것이 과장이라 여겼는데, 아니었구나."
금포인은 의자에서 반쯤 일어난 상태였다.
"후후……, 네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도 나를 해치지 못한다."
탁옥룡은 차게 말하며 손을 쳐들었다.
금포인은 눈알을 굴리다가 갑자기 의자 손잡이 부분을 내리쳤다.
"너는 속았다!"
그는 득의해 하며 의자째 뒤로 넘어졌다. 순간, 바닥이 통째로 떨어져 내렸다.
꽈르르릉―!
탁옥룡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엇?"
그는 바윗덩어리와 함께 밑으로 떨어져 내려야 했다. 뇌성벽력과 함께 돌모래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이 요사한 놈!"
탁옥룡은 칠 장 정도 내려간 후에야 신형을 바로잡았다.
그는 바윗덩어리를 호신강기로 받아내며 일 장 더 내려가 지면을 밟았다.
"암습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나를 화나게 해 더 많은 자들이 죽게 하는 누를 범한 것뿐이다."
탁옥룡은 위를 향해 외쳤다. 어느새 철문은 닫혀 있어 금포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자칫하다가 놓칠 수 있겠군. 빨리 나가야 한다."
그는 철문을 박살낼 작정을 하고 기공을 끌어올렸다. 옷이 풍선같이 부풀었다. 눈알에서 더 짙은 혈광이 일어났다.

그가 떠오르려 할 때 갑자기 신음소리가 들려와 그를 주춤하게 했다.


"으음……!"
탁옥룡이 떨어져 내린 지하동부 귀퉁이에서 들리는 신음소리였다. 흰 옷을 걸친 사람 하나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응……? 나보다 앞서 함정에 빠진 사람이 있단 말인가?"
탁옥룡은 깜짝 놀라 백의인 곁으로 다가갔다.
백의인은 중년인이었다. 그의 얼굴은 밀납같이 희었다. 눈썹이 상당히 길고 코가 오똑해 매우 청수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여보시오."
탁옥룡은 의구심 떨칠 수 없어 바짝 다가가다가 갑자기 몸을 휘청거렸다.
"살기(煞氣)다!"
그는 순간적으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순간, 신음소리를 내는 중년인의 꽉 쥐어져 있던 두 손이 활짝 펴졌다.
피핑―!
혈광(血光), 백광(白光)이 동시에 날아들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두 줄기 빛은 탁옥룡의 몸으로 틀어박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나는 기해혈(氣海穴), 다른 하나는 명치 속으로 파고들었다.
"으윽……!"
탁옥룡은 두 손을 축 늘어뜨리며 이를 악물었다.
너무도 허를 찌르는 계략에 당하고 만 것이다. 그는 대체 무엇이 자신의 금강불괴지신을 파괴했는지 알 수 없었다.
백의인은 언제 신음소리를 냈더냐 싶게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으며 일어났다.
"물론 너와 싸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경우 나는 막대한 내공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강적이 너뿐 아니라
여럿 있기에 모험을 피했던 것이다. 후후……, 솔직히 네놈이 두려워서 암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네… 네가 진짜 공야무군(公冶武君)이구나!"
탁옥룡의 눈알에서 섬뜩한 혈광이 흘러나왔다.
"허억, 설혈쌍도술(雪血雙刀術)에 당하고도 내공을 잃지 않았단 말이냐?"
다가서던 자는 기겁을 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옥룡비학(玉龍秘學) 따위로 나를 죽일 수 있다고 믿었더냐?"
탁옥룡은 주먹을 불끈 뒤로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으음……, 목이 백 개도 넘는 놈인 줄 몰랐다."
백의인은 사색이 되어 급히 위로 날아올랐다.
지독히도 빠른 몸놀림이었다. 그는 화살보다도 빨리 날아오르며 철판 아래 이르러 벽면 한 곳을 후려쳤다.
우르르― 릉―!
기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철판이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백의인은 허공에서 신형을 틀어 더 높이 사라져 갔다.
"서… 서라!"
탁옥룡은 힘겹게 한 마디 외쳤지만 힘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단 일초를 펼칠 힘을 갖고 있을 뿐이다. 너… 너를 죽이는데 그 일 초를 써야 한다."
탁옥룡은 그제서야 입술 사이로 핏물을 흘렸다.
'속다니……, 내가 속다니!'
그는 가슴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그는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공야무군이 겁먹어 도망치기는 했으나 그것은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았다.

탁옥룡은 너무도 고통스럽기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고집스럽게 버티고 서 있었다.


탁옥룡은 석상(石像)이 된 듯이 움직일 줄 몰랐다. 몸에 난 두 군데 상처에서는 선혈이 흘러나왔다. 한 자루는
그의 창자를 끊었고, 한 자루는 그의 간장 속으로 파고든 상태였다.
그의 무쇠 같은 몸을 꿰뚫은 두 자루 비수는 옥룡궁의 최고 병기는 설혈쌍비도(雪血雙飛刀)였다.
탁옥룡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눈빛에 떠돌고 있는 혈강도 마찬가지였다.
얼핏 보아서는 다친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혈영금강마공의 놀라운 점이었다. 그것을 익힌 사람은
사지(四肢)와 목이 끊어지지 않는 한 삶을 지속한다.
탁옥룡이 얻은 상처는 즉사할 상처였다. 그런데도 아직 내공을 잃지 않는 것은 혈영금강마공을 십성 수준으로
익힌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시체같이 서 있을 때 저 위쪽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내렸다. 쌍도(雙刀)를 던져 암습한 백의인이 금색면구
(金色面俱)를 쓴 차림이 되어 나타나 있었다.
"본좌가 네게 감쪽같이 속았단 말인가?"
그는 일 리를 날아갔다가 돌아온 상태였다.
"네가 의당 쫓아와야 하는데 쫓아오지 않아 되돌아왔다."
그의 눈빛은 자신에 차 있었다.
탁옥룡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하는 듯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후훗……, 나의 음양파혼비도술법(陰痒破魂飛刀術法)은 어김없이 적중이 되었지. 지금 네가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이 상식을 벗어난 일이나 알쏭달쏭하기는 하나 최후의 발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네놈은
금강불괴신이기에 겨우 버티고 있는 것에 지니지 않는다."
그는 탁옥룡의 몸 상태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오른쪽을 보았다.
금포에 금빛복면을 한 자가 시립하고 있었다. 그는 죽루 안에서 옥룡천자 행세를 하던 자였다.
"묘존(妙尊)께 영광스러운 일을 맡기겠소."
금색면구의 백의인이 진짜 옥룡천자였다. 당세제일인답지 않게 비겁한 암수를 펼쳤지만 틀림없는 옥룡천자
공야무군이었다.
"예, 지존(至尊)!"
금포인은 얼른 머리를 숙였다.
"혈영마협의 수급을 잘라 본좌에게 전하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묘존은 능구렁이가 다 된 강호거마이고 옥룡구존 중 제 팔위(第八位)였다.
그는 본래 묘수공공(妙手空空)이라 불리던 자였다. 마작과 신투술(神偸術)에 능해 강호행 이십 년만에 천만금을
모은 자였다.
그는 그것을 모두 옥룡마궁에 바쳤고, 그로 인해 옥룡마궁에서 열 손가락 안에 끼이는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나이 구십에 달한 자였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탁옥룡을 내려다보았다.
탁옥룡은 굳어버린 듯 꼼짝도 않고 있었다.
"이 노옴! 궁주님의 명은 곧 천명(天命)이다. 네놈은 찰나지간의 기회를 놓쳤다. 이제는 도망가지 못한다."
그는 허세를 부리며 동굴 아래쪽으로 몸을 날릴 자세를 취했다.
"야― 앗!"
그는 대갈일성을 치며 밑으로 떨어질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탁옥룡을 속이기 위한 잔꾀에 불과했다. 기세와는
달리 그는 여전히 지하함정으로 내려서지 않았다.
오래 묵은 노마답게 그는 아주 신중했고 교활했다.
탁옥룡은 동굴 안에 징징 울리는 기합소리 아래서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의 발밑은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모두 탁옥룡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허허……, 놈은 완전히 죽은 듯합니다."
묘존은 그런 모습을 보고서야 어느 정도 안심하는 듯했다.
"……."
옥룡천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경계심을 담고 있었다. 그는 담담히 서 있는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은 여차 하면
날아올라 모습을 감출 작정을 하고 있었다.
'괴상한 놈이다. 자칫하다가 놈의 마공에 당한다면 이십 년 고생해 이룩한 모든 것이 사라진다. 모험해서는 안
된다.'
그는 나름대로 판단하며 묘존을 향해 지시했다.
"내려가 보시오."
"예, 천자!"
묘존은 넙죽 절한 다음 오동잎이 가을 바람에 떨어져 내리듯 아주 천천히 동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탁옥룡은
그가 가까이 다가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야― 앗!"
묘존은 기합소리를 내며 탁옥룡의 등판에 공공사혼강(空空邪魂 )이라는 자신의 독문수법을 발휘해 냈다.
퍼어엉―!
벼락치는 소리가 나더니. 탁옥룡의 몸뚱이가 앞으로 뻣뻣하게 나뒹굴었다.
"으음……, 이제 보니 천잠사로 짠 옷을 걸쳤었구나!"
묘존은 그의 몸을 강타할 때 막강한 반탄력을 느끼고 손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꾹 눌러 참아야 했다.
"크흐흣……, 하여간 별것이 없음이 밝혀졌지 않은가?"
묘존은 들으라는 듯 크게 말하며 재차 쌍장을 가했다. 오른손 왼손이 번갈아 내밀어졌다.
탁옥룡의 몸뚱이가 실 끊어진 연처럼 퉁겨져 올랐다. 강시처럼 빳빳해진 상태였다.
"으하하……, 이제 네 목을 자르겠다!"
묘존은 천하를 들썩이던 정사제일고수 혈영마협을 연달아 두들겨 팼다는 데에 크게 통쾌감을 느꼈다. 그는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다시 쌍장을 가했다.
꽈꽝―!
탁옥룡의 몸이 또 한 번 공 튀기듯 퉁겨 올랐다.
이번에는 동굴 위쪽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의 몸은 뻣뻣한 쇠기둥으로 화한 듯했다. 장력에 연타를 당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차아아앗!"
묘존은 탁옥룡을 뒤따르며 혼신 공력을 다해 일장을 날렸다. 검붉은 기류가 일어나 탁옥룡의 몸을 휘감았다.
장세가 동굴 벽을 뒤흔들 때 탁옥룡은 구름이 바람에 날려 올라가듯 장력의 힘을 빌어 아주 빨리 동굴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몸의 무게가 없는 듯 몸을 빳빳이 하고 그대로 치솟는 탁옥룡의 움직임에는 큰 의혹이 있었다.
"으음……, 놈이 무슨 사술(邪術)을……?"
"좋지 않다."
누각 안의 사람들이 모두 경각심을 높였다.
옥룡천자의 눈빛이 심하게 흐트러졌다.
"설… 설마 전설의 금강마공(金剛魔功)을 익혔단 말인가?"
그는 동굴 위쪽으로 날아오른 탁옥룡을 보고 얼른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우우우―!"
탁옥룡이 정말 오랜만에 입술을 벌렸다. 무시무시한 장소성이 낙성사를 뒤흔들었다. 동시에 그의 전신뼈 마디에서
거친 소리가 났다. 그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짙은 혈무(血霧)로 잠겼다.
"혈… 혈영공(血影功)까지!"
옥룡천자는 아연실색하며 탁옥룡을 향해 쌍장을 내질렀다.
태음일원신강(太陰一元神 )의 힘이 일어나며 막대한 암경(暗勁)을 폭풍처럼 뻗어나갔다.
꽈르르르― 릉―!
탁옥룡이 태음일원신강 안쪽으로 몸을 집어던지는 것과 동시에 그곳을 중심으로 한 이십 장 이내가 풍비박산됐다.
콰콰콰― 콰쾅―!
지진이 일어나는 듯 땅 전체가 뒤흔들렸다. 죽림이 대나무 산(山)으로 화했고, 흑운(黑雲)이 일어나 근처를
휘감았다.
실로 천지개벽의 순간이었다.
모두 눈이 멀고 귀가 멀어야 했다. 가장 비참하게 된 사람은 묘존이었다.
그는 탁옥룡을 쫓아 나오려다 옥룡천자와 탁옥룡의 강기가 한데 부딪치는 사이로 말려들어 오체분시가 되어야 했다.
그의 몸은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형체도 남지 않고 가루가 되었다.
"으윽……, 두고 보자!"
흰 그림자 하나가 광풍흑운(狂風黑雲)을 뚫고 아주 높이 날아올랐다. 치솟는 인물은 옥룡천자였다. 그는 아주
빨리 날았으나 영활한 몸놀림은 아니었다. 술 취한 듯 비틀거렸지만 일진선풍(一陣旋風)이 되어 아주 멀리
사라져 갔다.
"으음, 죽이지 못했다. 아……, 혈영금강마공을 모두 다 시전해 냈는데도 죽이지 못하다니…… 수치스러울
뿐이다."
신음성과 함께 벌렁 나뒹구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그는 근처를 핏물로 적셨다. 오공에서 뿜어지는 주변을 축축이 적셨다. 그는 아주 추악한 자였다. 너무도 추악해
나이가 얼마인지조차 분간되지 않을 정도였다.
"으윽……!"
그는 큰 대자로 나뒹굴며 신음소리를 냈다.
오래지 않아 음침한 웃음과 함께 추악한 청년 곁으로 떨어지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으헤헤……, 네놈은 결국 낙성사에서 처음 만나 내 손아래 죽어야 할 신세로구나. 헤헤……, 나는 네놈을
죽임으로 인해 공석(空席)이 많이 생긴 구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는 훌쩍 떨어져 내리며 원래보다 두 배 거대한 체격으로 변화했다. 그의 손에는 핏빛 보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흐흐……, 네놈의 검 아래 네 목이 달아나리라!"
그는 바로 사미승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천면객이었다. 그는 의기양양해 하며 혈섬검을 빼낼 기세였다.
"아… 아니? 검이 뽑히지 않다니?"
그는 검자루를 움켜쥐고 오만상을 찌푸려야 했다.
기이하게도 혈섬검의 검신과 검집이 한데 맞물려 아무리 힘을 줘도 뽑히지 않았다.
대격돌 속에서 용케 목숨을 부지한 옥룡마궁 별부고수들이 현장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들은 천면객이 검을 뽑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자 비웃음을 흘렸다.
"크흐, 대시위(大侍衛)께서 검 한 자루를 못 뽑으시다니……."
"천지마저 놀라 후퇴한 상황인데 혈영마협은 언제 호랑이 같이 날뛰었느냐 싶게 축 늘어졌으니 정말 놀랍다."
"아까 보인 수법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다시는 그 수법을 쓰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은 참담한 모습으로 피 속에 누워 있는 탁옥룡을 응시하다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섰다.
"젠장, 할 수 없군."
검을 뽑다가 지친 천면객은 검 뽑기를 단념하고 검집째 들어 탁옥령의 미간을 향해 손을 내리쳤다.
"죽어랏―!"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케에에― 엑―!"
가슴에 검을 꽂고 뒤로 나뒹구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바로 천면객이었다. 그는 탁옥룡의 미간을 후려치는 순간 반탄 되어 튀어 오른 혈섬검에 심장이
뚫려 버린 것이다.
"허억, 죽은 놈이 사람을 죽였다!"
"도… 도망가자―!"
모두 혼비백산해 몸을 날렸다. 그들이 갈가마귀 떼같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게
흑의여인이 내려섰다.
"정말 대단합니다."
그녀는 다가서며 엄지손가락을 쳐들었다.
"귀하야말로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입니다."
그녀는 감탄해 말하며 다가서다가 갑자기 입을 딱 벌렸다.
'아……, 완전히 혼절한 상태가 아닌가? 그런데도 천면객을 죽이다니……, 이 사람의 몸뚱이가 얼마나
단단하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흑의여인은 탁옥룡에게 전음을 보낸 장본인이었다. 그녀는 탁옥룡이 의식불명임을 알고 가까이 다가섰다.
"흠……, 설도(雪刀)가 명치 속으로, 그리고 혈도(血刀)가 창자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게다가 태음일원신강에
심맥(心脈)마저 뒤틀렸다."
그녀는 의술에 지극한 조예를 갖고 있는 듯싶었다. 그녀는 탁옥룡의 맥을 잡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끝났어. 한 시진도 못 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듯 치료를 포기했다.
"으으윽!"
탁옥룡은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며 두 줄기 혈루(血淚)를 쏟고 있었다. 그것은 슬픈 눈물이 아니고 분한
눈물이었다.
흑의여인은 그것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도(魔道)로 들어간 아버님으로 인해 이렇게 비참하게 된 사람은 이미 수십만 명이다. 아……, 여인의
몸이라고는 하나 아버님의 악행에 속죄가 될 일을 하고 싶었는데……."
그녀는 탄식하다가 문득 입술을 깨물었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손발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그 방법이라면……."
대체 무엇을 결심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빨리 마음을 결정해야 한다. 일각 안에 사자(使者)들이 와 뒷수습을 할 것이다.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빨리
정해야 한다."
그녀는 한 가지를 노심초사 궁리했다.
"하자! 그것이 나의 길이다."
흑의여인은 비로소 마음을 정한 듯했다.
그녀는 탁옥룡을 옆구리에 끼고는 혈섬신검을 천면객의 심장에서 빼내 가지고 훌쩍 날아올랐다. 그녀는 낙성사의
지리에 익숙한 듯 이리저리 움직여 모습을 감췄다.
탁옥룡은 죽음의 순간에서 극적인 구원을 얻은 것이다.

第六章 몸을 바친 구원(救援)
빛이 비치지 않아 컴컴한 동굴이 있다.
곰이나 승냥이의 거처로밖에 쓰이지 못할 황폐한 동굴 속에 언제부터인가 너무도 아름다운 몸뚱이가 나타나 있었다.
여인은 후리후리한 키에 잘 빠진 몸매의 소유자였다.
복면으로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백옥으로 다듬은 듯한 몸매를 본다면 얼굴 또한 일품일 것이다.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발아래 몸은 희고 얼굴은 시꺼먼 괴청년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의 오관에서는 더운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이 사람의 막강한 내공력 뿐이다. 내가 할 일은 나의 순음지기(純陰之
氣)로 이 사람의 원양지기(元陽之氣)를 일으켜 이 사람 스스로 운기행공을 하게 돕는 것이다."
여인은 중얼거리며 동굴 밖을 바라봤다.
"아버님, 소녀를 용서해 주십시오. 소녀는 아버님의 자식으로 이십 년간을 천하악(天下惡)의 선봉이 된 것을
죄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처지는 동정하나, 소녀로서는 악보다는 정도(正道)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인은 희멀건 궁둥이를 쳐들며 허공을 향해 절을 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벌거벗은 청년의 몸 위로 가서 엎드렸다. 처음으로 사내의 몸을 접한 여인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청년의 두 손을 잡아 자신의 젖가슴을 쥐게 했다. 매끄럽고도 풍성한 육봉(肉峰)을 쥐는 청년의
손아귀에는 힘이 들어 있지 않았다.
"아……, 하늘의 도움이 없는 한 힘든 일일지 모른다."
여인은 안타까워하며 계속 청년의 손을 움직였다.
청년의 손은 그녀의 이곳 저곳을 쓰다듬었다. 모두 힘없는 손길이었다. 여인은 언제부터인가 땀을 흘렸다.
청년은 여전히 차가웠다. 간신히 숨은 붙어 있으되 시체와 다를 바 없었다.
"흑……, 제발 천하를 위해 일어나요."
여인은 한 시진 가량 애쓰다가 지쳐 청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가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였다.
"흐으윽……!"
다친 짐승의 거친 호흡소리와 함께 그녀의 허리를 바짝 조이는 힘찬 손길이 있었다.
추악한 청년이 눈을 번쩍 뜨고 있었다. 그는 여인의 눈을 올려다보더니 아주 거친 손길로 여인의 복면을 찢어냈다.

"아… 안 돼요!"
여인은 그의 손길을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청년에게 잡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청년은 복면을 찢어버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 나의 얼굴을 봐서는 안 되는데……."
여인은 얼굴을 가리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다행히도 괴성을 발하며 그녀의 몸을 바짝 조이는 청년이 바랐던 것은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그녀의 탐스러운 붉은
입술이었다.
두 개의 입술이 한데 합했다. 그리고 혀가 물 속을 노니는 한 쌍의 은어(銀魚)와 같이 어울렸다. 그것은 아주
긴 유희였다.
두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서로 자리를 바꿨다.
청년은 소문답지 않게 거칠고 뜨거웠다. 그는 얼음보다도 차다는 혈영마협 탁옥룡이었으나, 지금의 그는
활화산보다 더한 열기를 발휘하는 한 청년일 뿐이었다.
"흐윽……!"
여인은 지독히도 거친 애무에 심한 아픔을 느꼈다. 애무라기보다 고문에 가까웠다.
탁옥룡은 거의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는 원양지기를 자극한 뜨거운 육체 덕분에 죽음의 문턱에서 깨어났지만 아직 정신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을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상대가 누구인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흐음……!"
그는 여인의 향기에 흠뻑 젖고자 육봉 사이에 얼굴을 부비며 유실을 탐했다.
치솟는 욕정은 그의 원양지기를 더욱 자극했고, 그의 몸은 여인의 허벅지 사이로 더욱 파고들었다.
"아… 안 돼요……."
여인은 스스로 원한 일이었지만 너무도 두려운 마음에 그를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저항은 미약했기에 탁옥룡은
자신의 불기운을 쏟아낼 쾌락의 습지를 공략할 수 있었다.
여인은 너무도 강렬한 통증에 입술을 질끈 깨문다. 눈물이 상큼 배어 나온다. 사내의 목을 휘어감는 여인의
비단결 팔에 푸른 힘줄이 돋는다.
"하악……!"
탁옥룡에게는 희열의 연속이었지만 여인에게는 고통뿐인 듯 여인의 비명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여인은 전신이 터져나갈 듯한 아픔에 젖어 후회와 자책을 반복했다. 정신적으로 위로하기에는 몸의 고통이 너무
컸던 것이다.
춘풍(春風)이 가라앉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탁옥룡은 언제부터인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이 여인의 매끄럽고 가는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있다는데 크게 놀라고 말았다.
"아… 아니?"
그에게 안겨 있는 여인은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그것은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탁옥룡은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여인의 허리에서 손을 풀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음양화합회생법(陰陽和合回生法)을 알고 계셨소?"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것을 아십니까?"
탁옥룡은 그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자세히 보고 다시 놀랬다.
반달같이 휘어진 눈썹, 칼로 깎아 만든 듯 오똑한 콧날, 붉은 열매 하나를 베어 물고 있는 듯한 입술…….
그 절색의 미모는 탁옥룡이 아는 얼굴이었다. 세상사에서 수년간 유린된 바 있어 과거의 인물들에 대한 기억을
좀더 명확히 하고 있는 그였다.
"아……, 낭자(娘子)였구료. 그래서 음양화합회생술을 아시는구료?"
그 말에 여인이 기겁을 했다.
"저… 저를 아십니까?"
"하하……, 옥지(玉芝)라는 방명(芳名)을 갖고 계시지 않소?"
"아… 아닙니다, 소녀는……."
여인이 까무러칠 듯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잘못 보았을까? 천산신의(天山神醫)의 제자인 옥지 낭자임에 틀림없는 듯한데……?'
탁옥룡이 과거를 되새길 때 여인이 벌떡 일어났다.
"소녀를 잊어 주십시오. 소녀는…… 사람이 아닙니다. 호선(弧仙)입니다. 한 번 나타났다가 영원히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여인은 크게 외치고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낭… 낭자!"
탁옥룡은 크게 소리치며 뒤따르려다가 털썩 쓰러졌다.
"으음, 현기증이 심하다. 살아나기는 했으나 내공은 아직 흐트러진 상태다. 신비한 여인을 그냥 보내다니……,
내겐 구명지은인(救命之恩人)인데……."
탁옥룡은 애석하며 정좌를 했다.
'왜 놀라 떠났을까? 분명 옥지낭자인데……?'
그는 천산신의를 따라 구정산으로 왔던 새침한 소녀 옥지를 기억해 봤다. 그 귀엽고 깜찍한 모습은 조금 전
이곳을 떠난 미녀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지 않았던가?
그는 의혹에 젖다가 일단 요상대법(療傷大法)을 시전해 내상을 치유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묵묵히 앉아 한 가지 구결을 암송했다. 그것이 그의 흐트러진 진원지기를 한데 모으게 했다. 내상 부위가
시큰거렸다. 다행히도 참을 만한 고통이었다.
옥지로 생각되는 여인의 고귀한 희생 덕분이었다.
탁옥룡은 오래지 않아 혈무에 휘감겼다. 그의 혈영금강마공은 거의 완벽한 단계였다. 핏빛 기류는 골수(骨髓)
에서 빠져나와 모공(毛孔)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갔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핏빛 구름덩어리가 보일 뿐이었다.
그는 일주야(一晝夜) 내내 운기행공한 다음에야 눈을 떴다.
번쩍―!
아주 날카로운 눈빛이 일어났다가 찰나적으로 사라져 갔다.
"흠……, 알 수 없는 일이다. 녹옥삼보를 보고 익힌 세 가지 무공이 운기행공 중 자꾸 떠오르다니……. 그리고
마음이 전과는 달리 편안해지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천하의 어떤 무공에도 한 가지 나은 점은 있기 마련인가
보군."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옷은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다. 그 위에는 혈섬검이 놓여져 있었다.
"너무도 큰 은혜를 입었다."
그는 옥지로 생각되는 여인을 생각하며 심한 죄책감까지 느꼈다.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다니……,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빚을 안고 말았다."
그는 옷을 걸치고는 혈섬검을 쥐었다. 그의 표정은 아주 잔혹하게 변했다.
'옥룡천자란 놈을 살려 보냈다만 다음에 만나면……, 아니 이 길로 그 놈을 쫓아가 처단하리라!'
탁옥룡은 암습당한 지난 일을 상기하며 가슴 가득히 살기를 품었다.
그는 검자루를 약간 비틀며 검자루에 달린 단추를 눌렀다. 검신이 세 치 정도 저절로 튕겨져 나왔다.
탁옥룡은 검자루에서 손을 놓았다. 검은 그의 내공력으로 인해 허공으로 퉁겨 나왔다. 검강(劍 )이 뿌려지며
검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마중지존의 검술은 모두 어기배검술(馭氣排劍術)이었다.
탁옥룡은 내공의 힘을 이용해 벽면에 글을 새겼다. 정말 잘 쓴 글인데 그 내용은 아주 섬뜩했다.
― 천년한(千年恨)과 탁가한(卓家恨)을 함께 푼다. 시산(屍山)이 이룩되어도 행하고 만다!
탁옥룡은 흡인공을 발휘해 검을 쥐었다.
"후후……, 혈섬검아! 네 몸에 옥룡천자란 놈의 피맛을 보여줄 날이 있으리라."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검을 검집에 넣으려 했다. 한데 혈섬검이 저절로 경미하게 떨었다.
웅― 우웅!
탁옥룡의 눈살이 그로 인해 찌그러졌다.
"혈섬은 마검(魔劍)이다. 마검이 우는 이유는 근처에 정종무공(正宗武功)이나 현문무공(玄門武功)을 익힌 자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천이통을 시전했다. 아주 경미한 소리가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과연 동굴 쪽으로 날아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는 모두 넷이다. 하나같이 위풍당당하게 생긴 노고수들이었다.
"가공할 검기는 저곳에서 발휘되었소."
"으음……, 모두 조심해야 하오."
네 사람은 눈치를 살피며 동굴을 향해 다가섰다. 그들이 동굴 어귀에서 십장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하하……, 어느 고인(高人)들이 나의 검을 울게 하시는가."
동굴 안에서 앙천대소가 터져나왔다.
천하에서 가장 추악하게 생긴 젊은이 하나가 등에 삼척고검을 걸고 위풍당당하게 걸어나오고 있었다.
죽립을 쓰지 않은 탁옥룡이 바로 그였다.
그러나 전신에서 뿜어지는 강렬한 마기와 불 같은 홍의만으로 그를 짐작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그대가 혈영마협인가?"
"단신으로 낙성사 옥룡별부에 들어가 마궁 고수 이백여 명을 주살(誅殺)하고 옥룡천자와 양패구상(兩敗俱傷)한
사람인가?"
"역시 이 근처를 떠나지 않았군. 마궁도들은 그대가 아직 낙양 근처에서 머물러 있다 여기며 천라지망을 치고
있네."
넷 모두 탁옥룡의 끔찍한 얼굴을 보고 놀라워했다.
탁옥룡은 용모에는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추악하나마 빙그레 웃으며 입술을 뗐다.
"당신들이 혈영마협을 찾았단 말이오?"
웃으며 하는 말이나 아주 차가웠다. 네 명의 고수는 모두 빙굴에 떨어진 듯한 한기를 느껴야 했다.
맨 오른쪽에 있는 노인은 유난히 푸른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었다.
청성(靑城) 청발상인(靑髮上人)!
오십 년 전 황산비검(黃山比劍)에 나타나 구파제일검(九派第一劍)의 자리를 쟁취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 옆에 있는 인물은 통천신군(通天神君) 조자운(趙子雲)으로 공동파 사람이다. 그의 절기는 복마검(伏魔劍)
대구식(大九式), 소구식(小九式)이며 검왕(劍王)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옆의 황삼노인은 매화신군(梅花神君)으로 화산파(華山派) 전대 장문인이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소림 율법원주(律法院主)가 되는 일정(一靜)이라는 고승이다.
넷 모두 정파명숙(正派名宿) 중에서도 명숙이었다.
그들은 옥룡마궁이 천하의 반을 얻자 그 일을 수치로 알고 은거해 세상에서는 죽었다고 소문난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탁옥룡을 향해 합장하며 말했다.
"본맹주(本盟主)게서 마기(魔氣)가 아직 낙양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귀하를 찾으라
했소."
"아미타불……, 우리 모두 일심맹(一心盟)에 들어 있소. 우리는 일심구장로(一心九長老) 중 네 사람이오."
탁옥룡은 대수롭지 않게 응대했다.
"그럼 무혈검(無血劍)의 수하들이로군?"
"수하라는 말은 가당치 않소. 일심맹에 든 사람은 맹주나 맨 말단이나 평등하기 때문이오."
모두 화난 표정들이었다.
현재 마궁이나 포달랍궁의 기세에 눌리고 있어 빛을 발하고 있지는 못하나 천하백도의 주인공이 되는 일심맹이다.
일심구장로라면 정사를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혈영마협이 태중에 있기도 전에 이미 중원천하를 질타하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너무도 당돌한 탁옥룡의 태도에 은은한 노기마저 띠었다.
"무혈검……, 그가 나를 찾기라도 했소?"
탁옥룡이 팔짱을 꼈다. 그런 모습은 남에게 오해를 사기에 적당했다.
'거만한 자다.'
'일거수일투족이 살기와 자만에 차 있다. 장차 옥룡마궁보다 더한 마풍을 일으킬 자라는 맹주의 말씀대로다.'
비교적 수양이 높은 일정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핏빛 검광을 보고 따라 왔소. 맹주는 귀하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오."
"초빙을 받다니 영광이군. 안내하시오."
탁옥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먼저 가라는 신호를 했다.
네 사람은 무언중 합의를 보고 한 곳으로 날아올랐다. 네 사람의 신법은 각기 달랐다.
청성의 유성과천신법(流星過天身法),
공동파의 청운적성신법(靑雲摘星身法),
화산의 암향표(暗香飄),
소림사 비전 이형환위술(移形環位術).
모두 자파무공에 있어서는 최고의 수준에 이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달리는 속도는 거의 같았다. 그들은 천마
(天馬)를 무색케 할 정도로 빨리 달렸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혈영마협에게 수모를 안겨 주려는 의도에서였다.
오 리쯤 갔을까?
"허허……, 혈영마협이 대단하다 여겼던 것이 실수인 듯 하외다."
청발상인이 크게 웃었다. 탁옥룡이 따라 오는 기세가 없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놈이 오기를 기다립시다."
매화신군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여유를 보였다.
이때, 어디선가 하품 하는 소리가 났다.
"하아암……!"
네 기인이 달려가는 곳에 있는 노송 아래서 언제부터인가 소나무 그루터기를 베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홍의인
하나가 있었다.
"어엇……?"
"어… 어느새 우리들을 추월했단 말인가?"
"내공뿐만 아니라 신법도 신의 경지구나!"
네 기인은 하품하며 일어나는 사람이 탁옥룡이라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고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허어……, 장강(長江)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옛말대로다."
"최근 일소일선(一簫一扇)의 쌍협객(雙俠客)이 정도의 으뜸이며, 서장(西藏) 혈수나찰이 마궁의 회회공자와
함께 후기지쌍수(後起之雙秀)요, 혈영마협은 이미 삼기(三奇)를 능가하는 정도다. 라는 노래가 있는데
사실이구료."
넷은 더 이상 경공 대결을 삼가고는 앞장 서 탁옥룡을 인도했다. 탁옥룡은 무표정히 그들을 따라갔다.
일행은 점점 깊은 산 속으로 갔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구나. 흠, 왜 한 자리에 모였을까?'
탁옥룡은 일심맹도들의 수가 의외로 많다는 데 조금 놀라워했다.
그들은 이내 유리처럼 매끄러운 석벽 아래에 당도했다.
바위 위에 휜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흰 가사를 걸치고 목과 손에 염주를 두른 중년
승려였다.
그는 아주 청수하게 생겨 첫인상 치고는 정말 좋은 느낌을 주었다.
"허허……!"
그는 달려오는 다섯 사람을 향해 크게 웃었다. 쇠종 치는 듯 큰 웃음소리에는 막강한 내공이 숨어 있었다.
"허허……, 역시 철서생은 마협을 죽이지 못했도다."
그는 웃으며 탁옥룡을 바라봤다.
"하하……, 이제 보았더니 무혈검이시구료? 어쩐지 행동이 유약하다 싶었는데 스님이셨군."
탁옥룡은 크게 말하며 대번에 십오 장을 날았다. 그는 허공에서 재주를 돌려 백의승려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전보다 더 고강해졌네."
합장하는 승려는 바로 일심맹주 무혈검이었다. 피를 보지 않은 성검의 소유자는 불문 출신이었던 것이다.
"피차 일반이오."
탁옥룡이 냉담하게 대꾸하자 분위기가 아주 삭막해졌다.
"일단은 받게."
무혈검은 비단 주머니를 그에게 건넸다. 봉황이 수놓아진 호화로운 주머니였다. 탁옥룡은 무심코 주머니를 받았고,
무혈검은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무혈검은 탁옥룡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뗐다.
"빈승은 선연으로 인해 내공력을 키워 피를 보지 않고도 마궁주를 잡을 자신을 얻었네."
"오, 그렇소?"
"그래서 마궁주를 따라가 잡을 작정이네."
"부하들을 부른 이유가 그 때문이오?"
"그렇네."
탁옥룡은 여전히 무뚝뚝하게 그를 대했다.
"한데 나는 왜 불렀소?"
"그 이유는 한 가지를 묻고 싶어서이네."
"하하……, 무엇을 묻고 싶소?"
무혈검은 표정은 아주 신중해졌다.
"자네가…… 바로 마중지존(魔中至尊)의 후예인가 아닌가를 직접 확인하고 싶네."
마중지존이라는 네 자가 힘차게 들렸다.
탁옥룡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한때는 공조를 한 처지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장벽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正)과 마(魔)의 차이였다.
무혈검은 탁옥룡이 긍정도 부정도 않자 고개를 끄덕였다.
"면벽(面壁) 이십 년간 어느 정도 깨달은 것이 있네. 그것은 자비를 위해 마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탕마(蕩魔)의
이치이네. 빈승은 자네가 수긍했다 여기고, 이제부터 자네를 정파공적(正派公敵)으로 지목하겠네."
탁옥룡의 두 눈에서 혈광이 번뜩였다.
"공적?"
"마중지존의 후예인 때문이지. 그대의 혈수로 인해 천하가 일천 년 전과 같이 시산혈해로 화하는 것을 볼 수
없네."
그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그의 얼굴은 장엄했다. 얼핏 보면 부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인간의 고뇌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옥룡마궁은 옥룡사(玉龍寺)의 절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네. 게다가 군마(群魔)들의 탐욕으로 무장했고, 무수한
독공(毒功)과 모략으로 이룩되었네."
"……."
"그 힘은 강하나 정파가 한데 합할 경우 격파할 수 있는 것이네. 하지만 마중지존이 세상에 남긴 것은 정파의
영원한 난제(亂題)이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것이지. 그래도 단념치 않고 싸워볼 작정이네."
탁옥룡은 그를 직시하며 냉담하게 말을 받았다.
"죽음을 걸고 싸우겠단 말이오?"
"그렇다네."
"하하……, 당신이 내 손에 죽는다면 정파맹이 일패도지하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마궁이 아주 좋아할 텐데
괜찮겠소?"
"아미타불……."
무혈검은 괴로운 듯 불호성을 길게 끌었다.
탁옥룡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무혈검에게는 적개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난 그대와 싸우고 싶지 않소. 이유는 나도 모르오. 다만 그대의 몸에서 피가 나는 것을 바라지 않을 뿐이오.'
탁옥룡은 전과 달리 근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일로 나를 부른 것이라면 나중에 기회를 봐 따지기로 합시다. 나는 갈 길이 바쁜 사람이오. 그대의
수하들에게 옥룡천자의 목을 빼앗기기 싫어서라도 일찍 떠나야겠소."
그는 떠날 의사를 밝혔다.
"아미타불……, 이미 백팔나한대진(百八羅漢大陣)이 형성되었네. 마중지존의 후예라면 그냥 떠날 수 없네.
싸우던가, 아니면 마중지존의 후예가 아니라고 부정하던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야."
무혈검은 엄하게 말하며 승포 속에서 녹슨 철검을 끄집어 냈다. 그는 붉은 녹이 뚝뚝 떨어지는 검집을 매만지며
말했다.
"빈승은 이제껏 피를 보지 않았네만, 시주가 마중지존의 후예라면 혜장조사(慧藏祖師)의 유지에 따라 피를 볼
수밖에 없네."
"혜장?"
무혈검은 아주 경건한 표정을 지었다.
"옥룡(玉龍)과 오랍(烏拉), 두 분 신승과 함께 마중지존을 죽인 분이 바로 그 분이시지. 그 분은 마중지존이
인간이 아니고 마왕이기에 살계(殺戒)를 어겼노라 적어 두셨네. 그리고 그의 후예라면 역시 인간이 아니니 살계
(殺戒)에 저촉당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네."
한 자 한 자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천 년 전의 혈겁(血劫)에서 빚을 받아낼 쪽은 마왕동(魔王洞)이오. 하지만, 긁어 부스럼을 만들겠다면 후후…
…, 굳이 사양하지 않겠소."
탁옥룡의 어조가 아주 거칠었다.
자신의 의도는 아니더라도 사문에 대한 도전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진짜 마중지존의 후예인가?"
"그렇다면?"
무혈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아니기를 바라네, 아니기를 말일세."
"후후……, 부정할 수 없는 일이오."
무혈검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탁옥룡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마중지존의 후예라는 것을 충분히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천년마제의 전설이 실현되어서는 안 되는데……. 아……, 어이해 천 년간 세상을 떠났던 마제가 부활했단
말인가?'
그는 탄식하며 두 손을 한데 합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부처님이시여, 소림승인(少林僧人)들이 살계(殺戒)를 어김을 용서하소서!"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자신이 택한 불도와 자신이 처한 환경이 전혀 걸맞지 않기에 흘리는 회한의 눈물이었다.
그는 애써 자비스러운 표정을 했다. 그것은 아주 슬픈 표정이기도 했다. 세상의 악은 그 얼굴 앞에서 모두 다
수그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탁옥룡에게는 역겨움을 주는 표정이었다.
'나는 저런 얼굴 저런 모습이 싫다!'
탁옥룡은 마성(魔性)으로 인한 뒤틀림을 느꼈다.
"진을 치라!"
무혈검이 엄숙히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웅(熊)―!"
한 떼의 승려들이 날렵히 나타나 일렬로 늘어서며 각기 웅형권식(熊形拳式)을 취했다. 곰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눈앞의 거석을 산산이 박살내는 듯한 형용이 그들의 권식으로 인해 이루어졌다.
"호(虎)―!"
큰소리와 함께 십팔인의 회의승려가 맹호출림(猛虎出林)으로 돌진해 나와 웅형진 사이 사이에 끼여들었다.
"표(豹)―!"
표범같이 거친 동작의 고수 열여덟이 진세의 후미를 이루었다.
"학(鶴)―!
"사(蛇)―!
선학(仙鶴)과 비사(飛蛇)의 동작이 서른여섯의 새로운 승려들에 의해 이룩되었다.
"화타(華陀)가 남긴 오금경(五禽經)을 익혔구나. 이것이 바로 소림사의 백팔나한대진인가?"
탁옥룡은 얼굴을 찌푸렸다.
백팔 명이 나타난 것이 분명한데 그의 눈에 보이는 사람의 수는 수천 수만에 달했다.
한 사람 한 사람 허튼 방위에 서 있지 않았다. 모두 꼭 있어야 할 곳에 서 있었다. 그러기에 진짜 인원보다 수백
배 많은 인원으로 보였다.
백팔나한진은 퇴로(退路)를 허용하지 않았다.
공격적인 면에서는 미흡함이 있는 것이 불가절학(佛家絶學)이다. 그러나 수비에 있어서는 가히 난공불락이었다.
그 안에 빠진다는 것은 그들의 허락이 없이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무혈검으로 인해 원형대로 재현된 소림절학 일백팔나한진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무혈검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오랫동안 고련한 흔적이 역력했다. 어디를 봐도 허점은 없었다.
탁옥룡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몇 차례이고 진세가 바뀌고 포위망이 압축되는 것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는
조롱의 웃음뿐이었다.
'이정제동(以靜制動)이다. 정으로써 동을 제압할 줄 알다니, 보통 광마(狂魔)와는 다르다.'
무혈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공을 익힌 사람은 통상 심성이 희박해지는 법이다. 상대가 강하다 여기면 안정력을 잃고 흔들리는 것이 마공을
익힌 사람들의 특성이다.
한데 탁옥룡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방어할 생각을 못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가장 철저한 방어였다.
백팔나한은 무혈검께서 직접 진세의 구결을 전수받고 수천 번이나 진세를 반복 연습했었다.
이제껏 백팔나한진으로 쓰러뜨린 거마의 수는 열 사람의 모든 손가락으로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았다. 그런데
모든 위용이 탁옥룡의 의연함 앞에서 흔들리고 마는 것이다.
사실 탁옥룡은 진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자리의 누구를 제일 먼저 죽이고, 그 다음 누구를 죽이면 진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수비에 치중하는 이유는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는 무혈검 쪽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얼굴이 아주 추악하기에 그 웃음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소림의 절학으로는 나를 막을 수는 없소."
"뭐… 뭐라고?"
무혈검이 주먹을 거머쥐었다.
"후후……, 세상은 나의 사문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소. 귀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오."
"네가 마중지존의 후예임을 안다. 그러기에 너와 싸우려는 것이다."
무혈검이 반박하자 탁옥룡은 차분하게 응대했다.
"그것만 알 뿐 그 이전의 일은 몰라서 하는 소리요, 사람들은 혈영공(血影功)에만 정신을 쓰지 금강신공(金剛神
功)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오."
"금… 금강신공?"
"하하……, 나의 무공의 원류는 바로 소림절학(少林絶學)이라는 말이오. 내가 익힌 마공은 소림의 불문절학인
금강신공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소."
무혈검은 정색을 하며 빠르게 말을 받았다.
"그… 그럴 리가! 어이해 소림절학에서 마공이 일어난단 말이냐? 그것은 정녕 말도 되지 않는다."
"흥, 마(魔)가 무엇인지 아시오?"
탁옥룡이 피식 웃자 무혈검이 단호히 잘라 답했다.
"그것은 비선(非善)이다!"
탁옥룡은 그가 그런 대답을 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비선(非善)이 즉마(則魔)라 함은 틀린 말이오."
"틀릴 수 없다. 그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법이다."
"천만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소. 인간세상에 있어서 과연 무엇이 영원하다 할 수 있겠소?"
정말 놀라운 말이었다.
정과 마의 인물이며, 잔혹한 살인마로만 알려져 있는 혈영마협의 입에서 아주 심오한 이야기가 토로될 줄이야…….
무혈검은 그에게 압도당함을 느꼈다.
'보면 볼수록 신비하다. 아는 것이 무진장의 경지에 이르렀다. 나의 판단이 너무 미숙했단 말인가?'
무혈검은 숨을 크게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럼 뭐가 마(魔)냐?"
"후후……, 마가 뭐겠소?"
탁옥룡은 실소를 흘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는 승려 하나 하나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마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오. 그것은 비선(非善)이 아니고 인간본성 중 하나인 심성을 드러내는 것뿐이오."
"아미타불……, 인간이면 으레 선행해야 한다."
탁옥룡은 당대의 성자인 무혈검과 진리를 논할 만큼 정연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하하……, 그대의 선(善)은 곧 불법일 것이오. 나의 법(法)은 곧 마(魔)이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천연(天然)한 기운이오."
"천연하다고?"
"그렇소. 그것은 무당의 선천강기(先天 氣)와 비슷하오. 나의 사문에서 전해지는 마공은 다른 사공과는
판이하게 다른 선천적잠재마공(先天的潛在魔功)이오. 그러기에 뿌리를 소림사에 두고 있는 것이오. 금강신공은
인간의 순정한 잠재력을 끌어내는 방법이 아니겠소?"
무혈검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탁옥룡은 처음으로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표명했다.
"그러나 내가 익힌 금강신공은 순수한 힘이 아니라 마성(魔性)에 찬 분노를 이끌어내는 것이오. 그것은 잔잔한
바다가 아니고 폭풍을 만난 바다와 같이 출렁이는 것이오. 나의 마음은 세상으로 인해 더럽혀졌소. 그러기에 내가
일으키는 마공은 나를 더럽힌 세상을 씻는데 쓰여지는 것이오."
무혈검은 논법으로 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나를 마도고수라 칭하는 것은 좋으나 나를 인간 이하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오."
"세 치 혓바닥이 날카롭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너는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마귀라는 것이다."
무혈검은 크게 소리치며 손을 후려치려 했다. 백팔나한진이 그의 신호에 따라 탁옥룡을 향해 몰아치게 될 때였다.
"으윽!"
무혈검은 팔꿈치를 들어올린 채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는 팔을 내리지 못했다. 탁옥룡의 손바닥에서
일어나는 잠재력이 그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소림사 사람들을 해하고 싶지 않소. 모두 물러나라 하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구로혈현(九路血現)에 이어,
풍권잔운(風捲殘雲)과 뇌진구소(雷震九 ), 그리고 봉황우비(鳳凰于飛)를 펼쳐 모두 시체로 만들 수밖에
없소."
탁옥룡은 차분히 말한 다음 진력을 회수했다.
무혈검은 겨우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팔을 내리는 공격 신호를 보낼 수 없었다.
"어… 어떻게 진의 파해법을 아느냐?"
그의 눈은 화등잔만하게 확대된 후였다.
"사부가 저술한 비급 안에 천하기문대진(天下奇門大陣)의 격파법이 수록되어 있었소. 백팔나한진이 후대에
만들어졌어도 그 원리는 일맥상통하는 것이오."
탁옥룡은 팔짱을 끼고 냉막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 원리를 응용한다면 백팔나한진, 무당의 양의천강검진(兩儀天 劍陣)과 태청검진(太淸劍陣)의 파훼도
가능하오. 정파절학으로는 나를 꺾을 만한 것이 없소."
"으음……, 마중지존이 그리도 강했단 말이냐?"
"하하, 그 분은 정도 최고 절기를 천강복마공(天 伏魔功)이라 하셨소. 그리고 그것 또한 혈영금강마공(血影金
剛魔功)아래 격파당할 것이라 적으셨소. 나는 그 말을 믿을 뿐이오."
탁옥룡은 크게 말한 다음 뒤돌아 섰다. 그는 높은 벼랑 위를 바라보다가 훌쩍 날아올랐다.
그는 놀랍게도 곤륜파(崑崙派)의 비전수법인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을 능수능란하게 시전해 이십 장 날아
올랐다.
"하하……!"
그는 크게 웃으며 과천성신법(過天星身法)에 이어 제운종(蹄雲從)을 펼치며 멀리 모습을 감췄다.
모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회심의 일격으로 준비되었던 백팔나한진은 제대로 시전되지도
못한 채 갇힌 자를 놓아 주어야 했다.
무혈검은 땀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아……, 마공뿐만 아니라 정파의 모든 절기에 통해 있을 줄이야! 별호에 마협(魔俠)이 붙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잠깐 사이 십 년은 늙어 보였다. 그러나 입가에 지어진 비장한 표정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러나 탕마행(蕩魔行)은 중단되지 않는다. 강호에 시산을 쌓는 자는 죽어야 마땅하다."
그는 중얼거리다가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표표히 날아오르며 사자후로 외쳤다.
"모두 갑시다. 자칫하다가 마궁과 대접전을 벌이는 것을 놓친다면 큰일이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오."
그는 혈영마협에게 패한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과연 소림의 고승답게 속가고수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第七章 무림의 신성(新星), 소선쌍협(簫扇雙俠)


1
탁옥룡은 천하에서 가장 추악한 얼굴을 굳이 죽립으로 가리려 하지 않고 훌훌 날아 하남성 깊숙한 곳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는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기는 고수가 아니라면 그가 스쳐 지나가는 것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빠른 신법이었다.
"그 여인이 옥지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하는데, 가만……?"
그는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몸을 세웠다.
"흐흑……!"
여인의 짙은 흐느낌 때문이었다.
황토길 가에 언제 세워졌는지 모를 작은 무덤 하나가 서 있었다. 갓 만들어졌는지 무덤에는 풀이 돋아 있지
않았다.
"저… 저는 어찌 살라고……."
무덤을 얼싸안으며 흐느끼는 소부 하나가 있었다. 머리를 풀어 헤친 여인인데 입고 있는 옷은 상복이었다.
"마궁에게 모든 것을 잃고 말았으니……, 이제 남은 길은 단 하나, 이 험악한 세상을 벗어나는 길뿐입니다."
여인은 피눈물을 뿌리다가 손을 쳐들었다.
순간, 도광이 근처를 현란케 했다. 여인은 일 척 길이의 보도를 꺼내 쥐고 그것을 응시하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죽자!"
여인은 보도로 목을 찌르려 했다. 보도의 파란 날이 흰 목덜미를 꿰뚫기 직전이었다.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한 줄기 지력이 날아들었다. 단도는 쇳소리를 내며 여인의 손을 떠났다.
"아… 아니?"
상복 입은 여인이 깜짝 놀랄 때 붉은 그림자 하나가 사뿐히 날아 내렸다.
탁옥룡이 흰 손바닥 위에 일척보도를 내려놓고 상복 입은 여인 앞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언제 단검을 회수하고
내렸는지 가히 귀신과 같은 동작이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굳세게 사시오."
탁옥룡은 여인에게 검을 내주다가 은근히 놀랬다.
'아……, 천하를 바꿀 여인이다!'
화용월태(花容月態)라는 수식어는 이 여인을 위해 만들어진 말일 것이다.
추수와 같이 맑고, 새벽 이슬같이 신선해 보이는 여인이었다. 반달 같은 아미가 특히 고왔다. 미인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두루 갖춘 십전완미(十全完美)였다.
여인은 탁옥룡을 바라보며 두 줄기 눈물을 떨구었다.
"왜…… 저를 죽게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까?"
목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영롱했다.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오. 무슨 원한이 그리 심해 자결하려 하는지 연유를 말해 줄 수 없겠소?"
탁옥룡의 말투는 아주 진지했다.
"아, 굳이 관여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여인은 눈물을 주르르 떨구며 무덤을 끌어안았다.
"이 무덤에 누가 누워 있소?"
탁옥룡은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흐흑……!"
여인은 흐느끼는 뺨을 무덤에 댔다. 고운 뺨에 흙이 묻어 더러워지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절세가인의 눈물은
탁옥룡의 차디찬 가슴마저 녹여버렸다.
"서러워 마시오.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이 많소. 그리고 서로 힘을 합한다면 역경을 능히 이겨 나갈 수 있소."
탁옥룡은 불현듯 의협심을 일으키며 여인의 어깨에 손을 댔다.
그의 손끝에서 여인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말할 수 없이 좋은 향내가 났다.
탁옥룡은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향으로 목욕을 한 듯하다니…… 모를 일이다.'
뭔가 의혹이 느껴졌다.
이 순간, 흙무덤을 얼싸안고 울던 여인이 빠르게 몸을 틀었다. 탁옥룡은 아랫배에 극렬한 통증을 느꼈다.
"으윽!"
그는 쓰러질 듯 휘청이며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네… 네가 왜 나를?"
탁옥룡이 눈에서 혈광을 흘릴 때 여인은 재빨리 날아 십 장 밖으로 물러났다.
"호호, 독존침(毒尊針)에 맞은 이상 일 각 이상을 살 수 없다. 일각 후 네놈의 해골을 거두러 오겠다. 그리고
나는 이 일로 인해 제일부인(第一夫人)의 지위에 오르리라."
전과는 완전히 다른 표독한 목소리였다.
"독… 독존침? 이것이 독존침이냐?"
탁옥룡은 이를 악물며 아랫배를 더듬어 길이가 세 치 가량 되는 철침 하나를 꺼냈다. 철침 끝은 극독이 발라진 듯
아주 파랬다.
"허억, 네가 독존침을 손으로 꺼내다니……. 으음, 천자(天子)가 너를 죽이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여인은 사색이 되어 아주 멀리 날아올랐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도망쳤다.
탁옥룡은 그녀가 아주 멀리 간 후에야 천천히 좌정했다.
"어리석게도 마궁 계집의 미인계(美人計)에 걸리다니……. 으음, 너무도 엄청난 산공독(散功毒)이다. 영약의
도움이 없다면 칠주야내내 운신행공을 한다 해도 본신의 공력을 찾지 못하리라."
탁옥룡은 독존침을 떨구며 입술을 악물었다.
마궁의 철통 같은 이목이 새삼스럽게 놀라움을 주었고, 그들의 철저한 암습이 그를 더욱 분노케 했다.
탁옥룡은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산공독 기운이 피를 타고 전신으로 흘러나가며 몸 이곳 저곳이 마비되었다. 내공으로 독을 한 군데로
몰아넣기에도 이미 늦은 후였다.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독이다. 이런 독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독존(毒尊)뿐이다. 이 독은 광개노형(狂
老兄)이 당한 그 독이다.'
그는 분했으나 속수무책인 상태에 이르렀다.
"만독불침지신을 허물어뜨릴 정도로 지독한 독이 있다니, 세상은 정말 넓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물론 고통에 익숙한 그는 그 정도에는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을 수 있었다.
"그 계집은 오래지 않아 돌아온다. 그 전에 운기행공해 독을 몰아내야만 하는데…… 길이 없다."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장삼의 앞섶을 열어젖혔다.
"옥룡천자라는 자에게 당하고도 부족해 이제는 더러운 마궁 계집한테 암습을 당한단 말인가?"
품안에서 붉은 주머니 하나가 떨어졌다. 그것은 무혈검에게 받은 주머니였다.
"대체 무엇을 준 것이지?"
그는 다소 혼미한 상태에서 주머니를 쥐었다. 안에는 딱딱한 어떤 것이 들어 있었다. 그는 무심코 묶은 부분을
풀었다. 주머니가 빼꼼히 열리며 보광이 일어났다.
"이것이 무엇일까?"
탁옥룡은 안에서 소기(小旗) 하나와 작은 나무갑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깃발은 세 치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아주 붉었다. 질 좋은 적색 비단에 황금색 실로 용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주
정교한 솜씨로 제작된 삼각기였다.
나무 상자는 자단목으로 제작된 것으로 향내가 짙었다.
그는 두 가지 물건을 살펴보다가 주머니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어전대장군(御前大將軍) 혈영마협에게 주는 칙령(勅令).
― 현룡제(玄龍帝)>
곁에 그런 글이 쓰여 있었다.
"후후……, 어전대장군이 아니라 바보장군이 아닌가? 마궁의 꾀에 번번이 속았으니 말이다."
탁옥룡은 한탄스러워 하며 쪽지를 펴봤다. 그 안에는 아주 잘 쓴 글이 적혀 있었다.
<어전대장군에게 주룡령기(朱龍令旗)를 전해 자신의 대업(大業)을 이루게 하는 것이 짐의 뜻이다.
짐은 그대 덕에 무사히 회남왕부(淮南王府)에 도착했다. 짐은 회남왕부의 군사를 동원해 금릉왕성(金陵王城)을
점거한 가짜 무리들을 소탕할 작정이었는데, 왕부에 와 뜻을 바꾸게 되었다.
회남왕(淮南王)은 금릉에 있는 자들이 옥룡마궁의 밀사(密使)들로 일반 군사로는 해할 수 없는 자들이라 했다.
그들은 강호고수만이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짐은 생각다 못해 그대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작정했다. 이 일은 막중대사(莫重大事)이다. 무혈검이라는
사람에게조차 부탁을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일이다.>
황제의 밀지(密旨)는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황궁과 무림이 관연된 천하대변혁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짐은 그대에게 강호계의 생사대권(生死大權)을 맡기는 동시에 대명전통수호(大明傳統守護)라는 엄중한 책임을
전한다.
짐은 그대를 믿는다. 그대는 짐의 명에 따라야만 한다.
짐은 그대가 금릉으로 가 오상서(吳尙書)와 그를 비호하는 무리들을 모두 소탕해 주기 바란다. 그것이
어전대장군으로 할 책무다.
주룡령기를 사용하면 천하 어떤 사람이든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그것은 일을 성사시킬 때까지만 빌려 주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자전청양신단(紫電靑陽神丹)을 한 알 전해 그대의 공로를 기린다.>
정말 뜻하지 않던 일이었다.
주룡령기는 황군을 동원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권위의 신물로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야욕가에게
전해진다면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뀐다.
그런 주룡령기를 탁옥룡에게 전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신뢰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탁옥룡에게 진정 놀랍고도 반가운 일은 예기치 않게 신단을 얻게 되어서였다.
"오……, 이 안에 있는 것이 전설로만 알려져 있는 자전청양신단이란 말인가?"
탁옥룡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옥갑을 열었다. 안에 든 것은 밀랍으로 싸인 용안만한 단약이었다.
"혈영신단(血影神丹)보다 백배 귀한 약이 아닌가? 이 약을 만드는 약방문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 주인은 당장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가 될 수 있다."
탁옥룡은 주현룡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를 어린 소년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새롭게 느껴졌다. 그는 진짜 천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탁옥룡을 태산같이 믿고 있었다.
탁옥룡은 주룡령기를 조심스레 품 안에 지닌 다음 자전청양신단을 감싼 밀랍을 벗겼다. 진한 향기가 폐부를
시원하게 했다.
"천자께서 날 구했소."
그는 신단을 입에 넣고 정좌에 들었다. 단약은 침에 닿는 순간 녹아 물이 되었다. 그리고 열기와 냉기를 동시에
발하며 사지백해로 퍼져나갔다.
탁옥룡의 몸이 부풀어오르며 핏빛 기운이 일어났다. 산공독이 해소되며 본연의 공력을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는 곧 망아지경에 젖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산공독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다.
"하하하……!"
그는 통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감았던 눈을 떴다.
"해독되지 않는 독은 없다. 현룡제의 하사품으로 인해 독상에서 벗어났으니 의당 그를 위해 어전대장군이
되어야겠군."
탁옥룡은 왼손 다섯 손가락을 빳빳이 폈다.
손가락 끝은 검게 변색돼 있었다. 독기운이 손가락 끝으로 모인 것이다.
그가 진기를 가하자 다섯 손가락에 몰린 독기운이 삼매진화(三昧眞火)로 인해 타버리며 검은 연기로 화했다.
손가락은 곧 제 살색으로 되돌아왔다.
"흥, 그 계집은 간이 좀더 커야 한다. 그랬다면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을 죽이는 영광을 누렸을 것이
아닌가?"
그는 미인계를 써서 자신을 희롱한 여인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했다. 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던 추악함을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일 뿐이었다.
"꼭 찾아 얼굴 가죽을 벗겨야지. 개방 사람들에게 물어 본다면 그 계집이 누구인지 즉시 알 수 있을 것이다."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신법을 시전했다.
그는 아주 빨리 날 수 있었다. 내공은 구사일생 덕에 한 단계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어기비행술(馭氣飛行
術)로 유유히 날았다.
2
탁옥룡은 허창성(許昌城) 부근에 이르러 끔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천지를 진동했다. 모두 머리통이 부서져 죽었는데 수는
삼백에 달했다.
"으음, 가공할 일이다. 누가 대담하게 이런 살겁을 자행했단 말인가?"
탁옥룡은 시체더미를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 그는 시체를 하나하나 자세히 살피다가 또 한 번 놀랬다.
"가만, 모두 회회교(回回敎) 사람들이 아닌가? 마궁 수하들을 누가 이리도 해쳤을까? 일단 독공으로 쓰러뜨린
다음 잔혹하게 머리통을 박살내 죽였음에 틀림없다."
탁옥룡은 죽은 자들이 모두 회회교도라는데 새삼 놀라워했다.
그들은 이역사단 고수 중에서 가장 용맹한 고수가 아니었던가. 탁옥룡이 아닌 다름 사람이었다면 그들을 회회단
밖으로 쫓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탁옥룡은 근처를 살피다가 시선을 한 곳에 모았다.
멀리 언덕 위로 어떤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사건(文士巾)을 쓴 사람인데, 마의를 걸치고 있었다.
"아……, 이렇게 치욕스럽다니!"
그는 허공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음성으로 미루어 사십 전후로 보였다.
"한때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을 자부했는데 한계를 느끼다니……, 이것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다."
그는 크게 외치며 눈물을 떨구었다.
탁옥룡은 회한에 찬 목소리를 듣고 신기해 하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는 백 장을 단숨에 지나쳐 마의인 바로
뒤에 이를 수 있었다.
마의인은 그가 나타났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가 걸친 옷은 아주 허름했다. 오른쪽에는 커다란 철상자 하나가 떨어져 있고 뚜껑이 활짝 열린 상태였다. 그
안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약병과 침(針), 쑥이 가득했다.
"아……, 선사께 유감일 뿐이다."
마의인은 분루를 끊지 못했다.
그의 발 아래에는 언제부터인가 길게 누워 칠공으로 더운 피를 쏟아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전신이 핏물에 젖어 제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인데, 가장 큰 상처는 아랫배에 난 도상(刀傷)이었다. 그는
보도로 복부를 관통당한 후 몸 수십 군데를 난도질당한 것이었다.
그리고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이제 나는 마의불수(麻衣佛手)라는 이름을 버릴 것이고,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마의인은 중얼거리다가 약병 하나를 집었다. 그 안에는 먹으면 즉사할 비상이 가득했다.
"또 다른 함정이 아닐지 모르겠구나."
그의 등뒤에서 냉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탁옥룡이 마의인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하는 말이었다.
"누구냐?"
마의인은 의외로 그리 놀라워하지 않았다.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혈영마협이다."
탁옥룡은 상대의 의중을 떠볼 요량으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기를 가했다.
"강호인 같군. 며칠 전 주루에서 그런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지.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다. 무(武)는
기(技)일 뿐 도(道)는 아니다. 사람 죽이는 재간 따위는 내게 의미가 없다. 나는 사람 구하는 일만을 귀히
여기고 있다."
"의원이오?"
"떠돌이다. 나의 의술이 천하에 있는 어떠한 병도 고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떠돌며 다친 사람을 보는 대로
고치는 사람이다."
탁옥룡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빈정대듯 한 마디 던졌다.
"좋은 일을 하고 있구료?"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나 자신의 의술이 고금제일의 의술임을 밝히기 위해 하는 일일뿐이다."
마의불수의 말은 매우 침통했다.
'마궁도인데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닐까?'
탁옥룡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에 진기를 일으켰다. 여차 하면 일장을 칠 기세였다.
이때, 쓰러진 사람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으으……, 속아 산 것이 한스럽다."
피범벅이 된 사람의 입술 사이에서 나온 음성이 탁옥룡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가 아는 목소리였다.
"회회공자(回回公子)?"
그는 피투성이 괴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괴인의 얼굴은 철저히 짓뭉개진 상태였다. 그의 아내라 할지라도 그를 몰라볼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만은
여전했다.
"회회공자가 이런 꼴이 되다니……."
탁옥룡은 얼른 마의불수를 제치고 회회공자 앞으로 다가갔다.
"아는 사람이오?"
마의불수가 놀라 물었다.
탁옥룡은 대답 대신 회회공자의 몸을 자세히 살펴봤다. 마의불수는 그의 진맥법을 본 후 크게 놀랐다.
"비전(秘傳)되다가 실전된 천산의파(天山醫派)의 진맥법을 아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가 크게 놀랄 때 탁옥룡이 그를 바라봤다.
"추풍투골(追風透骨), 용사탈마(溶邪奪魔)의 비약을 갖고 있다면 내게 주시오."
마의불수는 고개를 저었다.
"대라청명단(大羅淸明丹)과 보심구전단(補心救轉丹)이 있기는 하나 그 사람에게는 무효요."
"왜 무효라 하시오?"
"그는 묘강(苗疆)의 미심고독에 당한 상태에서 엄청난 외상까지 입었소. 오장육부가 으스러졌고 심맥이 뒤틀렸소.
대라신선이라 해도 구하지 못하오."
마의불수는 아주 못난 중년인이었다.
눈은 쥐눈을 방불케 했고, 입술은 얄팍했으며, 코는 유난히 컸다. 그러나 추악함을 사그러뜨릴 만한 현기(玄氣)
가 어린 얼굴이었다.
"그 사람은 시산(屍山)에 파묻힌 채 발견되었소. 일 각만 빨리 발견했다면 어느 정도 수명을 연장시키게 했을
것이나……."
탁옥룡은 나직이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하하……, 속가의술(俗家醫術)과 무가의술(武家醫術)은 다르오. 이유는 내공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때문이오. 어서 두 가지 약을 주시오."
"주기는 하겠소만 구할 수 없을 게요."
"장담할 수 있소?"
"만에 하나 그 사람이 살아난다면 나는 평생을 그대의 종이 되겠소."
마의불수는 불끈 화내며 약상자 안에서 단약 두 개를 찾아내 탁옥룡에게 건네 주었다.
탁옥룡은 두 가지 약을 재빨리 가루로 내어 회회공자의 입안에 넣어 준 다음 손바닥을 활짝 폈다. 놀랍게도
손바닥이 금(金), 혈(血) 두 가지 다른 빛을 냈다.
다섯 손가락은 모두 핏빛으로 변했고 장심은 끓어오르는 황금색이었다.
"금단신공(金丹神功)에 혈영공(血影功)을 겸해 혈영금단마공(血影金丹魔功)을 연구해 두길 잘했다."
탁옥룡은 손바닥을 회회공자의 백회혈에 댔다.
"으음……!"
회회공자는 전율감을 느끼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탁옥룡은 장강의 물줄기 같은 진기의 힘을 쉬지 않고 발휘했다. 그의 혈영금단마공의 진력을 받은 회회공자의
몸이 피구름으로 덮였고 탁옥룡의 몸도 그렇게 되었다.
진기에 의한 치유는 무려 한 시진이나 계속되었다.
"웨엑―!"
회회공자는 입을 벌리며 한 사발이나 되는 검은 피를 게웠다.
탁옥룡은 그제서야 손바닥을 떼어냈다.
"일단 독은 제거됐다."
마의불수는 그제야 탁옥룡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고 벌레 씹은 표정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탁옥룡은 곧바로 추궁과혈술(推宮過穴術)에 돌입했다.
그의 손가락은 너무도 빨리 움직여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순식간에 회회공자의 삼십육대혈과 십이경맥을
타통시켜 진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었다.
회회공자가 비로소 눈을 스르르 뜨며 말했다.
"혈… 혈영마협, 네 말대로…… 무가의 의술은 일반적인 의술과 다르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정신을 차린 후였던 것이다.
"말할 것 없소. 쉬어야 하오."
"아……, 회회교 고수는 몰살했다. 혈작약(血芍藥)이 이끄는 마검대(魔劍隊)에게 독살당한 것이다. 그… 그
계집은 내가 비밀을 알았기에 이제 쓸모 없다고 하며 가차없이 살인멸구(殺人滅口)한 것이다."
탁옥룡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마음에 맺힌 것을 실컷 말해야 풀릴 병세다.'
그는 회회공자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사… 사실 선사는 그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 그들은 나를 비롯한 어리석은 사람들을 종으로 부려먹기 위해
선사를 살해한 후, 선사의 얼굴 가죽을 벗겨 만든 인피면구를 쓴 가짜 회회교주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밀교(密
敎), 사곡(蛇谷), 라마교(喇痲敎)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탁옥룡은 옥룡마궁의 끔찍한 수법에 치를 떨었다.
"실로 악독한 놈들이오."
"마궁을 도우라는 명을 한 사람은 가짜였다. 그… 그것을 이제야 알다니……, 지난 수년간 속아 주구가 되었으니
죽어 어떻게 선사를 뵈온단 말인가?"
그는 말하다가 힘이 빠진 듯 스르르 잠에 취했다.
탁옥룡은 그가 더 편히 잘 수 있게 수혈(睡穴)을 점해 주었다.
여태껏 둘을 지켜보고 있던 마의불수가 정중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 정녕 신비로운 수법입니다. 제가 이제야 주인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마의불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탁옥룡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경외로움으로 가득했다.
"하하……, 잠시의 격분으로 한 말을 지킬 필요는 없소."
탁옥룡은 웃으며 진력을 발휘했다.
"어엇?"
마의불수는 구름덩이가 날아오르듯 둥둥 떠올랐다가 지면으로 내려섰다. 탁옥룡이 발휘한 무형강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더 감격한 듯 또다시 절을 했다.
"회혼의파(回魂醫派)의 십칠대 장문인 마의불수(麻衣佛手) 당소기(唐少奇)가 천하제일의를 주인으로 섬기는
예를 드리오."
탁옥룡은 가볍게 놀랐다.
"회혼의파 사람이오?"
"오, 회혼파를 아십니까?"
"알고 있소. 회혼파는 속가에서 가장 뛰어난 의술을 비장하고 있는 곳이오. 절전되었다고 알았는데 그 후계자를
보게 되다니 정말 반가운 일이오."
마의불수는 공손하게 말을 받았다.
"본파는 절전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름을 날리는 것이 금기인 지라 어느 곳에서든 이름을 드러내지 않아 이제껏
무명(無名)일 따름이지요, 주인!"
그는 말끝마다 주인이라는 말을 붙였다.
"정녕 나를 주인으로 섬기겠소?"
"제가 어찌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겠습니까? 주인을 돕는 한편, 주인의 신묘한 의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의술을 바란다면 쾌히 전수하겠소. 그러나 나를 주인으로 섬긴다는 것은 사양할 수밖에 없소."
마의불수는 잔뜩 실의 어린 표정이 되었다.
"왜요?"
"나는 적이 많소. 악한 자들로 나의 적이고, 선한 사람들도 나의 적이오."
"허허……, 죽음은 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자를 주인으로 섬긴 이상 주인의 적은 곧 소인의 적이지요."
마의불수는 마음을 완전히 정한 후였다.
탁옥룡은 잠시 궁리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받아들이기로 정했다.
"회혼의파 사람이라면 나의 수하가 될 자격이 있소. 그대를 이제부터 마왕동주(魔王洞主)의 수석의(首席醫)로
삼겠소."
마의불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마… 마왕동주이십니까?"
"마왕동을 아시오?"
"전… 전설이 있지 않습니까? 마왕동은 천 년마다 열리고, 그때마다 천하를 피로 씻는 마제(魔帝)를 토해낸다는
……."
탁옥룡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내가 두렵소?"
"아… 아닙니다.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분의 수하가 되었으니……, 허허. 이제부터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
"하하……, 강호에 나온 이후 배짱이 맞는 사람을 찾지 못해 적적했었는데……. 하하, 정말 뿌듯하오."
"감사합니다, 주인."
마의불수는 연신 두 손을 모으며 예를 표했다.
이때, 탁옥룡의 고막을 때리는 쇳소리가 있었다. 저 먼 곳에서 검기가 일고 있었다. 대략 삼 리 밖이었다.
탁옥룡이 머물러 있는 곳이 언덕이 아니라면 그것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얼른 일어나며 조그맣게 말했다.
"회회공자에게 침술을 시전하시오. 나는 한 가지 일을 살펴본 후 돌아오겠소."
"어디를 가시는지요?"
"하하……, 무림계의 일이오. 알 것 없소."
탁옥룡은 웃으며 날아올랐다. 그는 순간적으로 한 점이 되어 사라져 갔다.
마의불수는 망연자실해 하다가 환한 표정이 되었다.
"아……, 주인으로 섬길 만한 분이다. 한순간에 나를 완전히 매혹시켰으니……, 이것은 내게 엄청난 행운이다."
3
탁옥룡은 전광을 무색케 할 정도로 빨리 달렸다. 삼 리 길은 그에게 있어 아주 짧은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나는 듯 달리다가 일 대 일의 대결을 볼 수 있었다.
복면여인 하나가 녹광(綠光)을 뿌리는 피리를 어지러이 흔들어 대며 한 명의 흑의여인을 쓰러뜨리기 직전이었다.
그녀의 수법은 아주 매서웠다.
"네 수하들은 내 동생에 의해 유인당했다."
여인의 목소리는 수법만큼이나 차가웠다.
"으음……, 나를 핍박하지 마라. 내가 다치면 무서운 일이 생긴다."
흑의여인은 신묘한 보법을 밟아 소초(簫招)를 겨우겨우 피했다. 너무나도 매혹적인 얼굴이었다. 한 가닥 수심이
깃들여 있어 더욱 아름다운 얼굴이기도 했다.
가슴에 혈흔이 나 있는데 아마도 청의복면 여인의 솜씨 때문인 듯했다.
"호호……, 너를 잡는다면 천하가 평화로워질 수 있다."
복면여인이 야멸차게 웃으며 다시 초식을 전개하려 할 때였다.
"하하하……!"
큰 웃음소리가 근처를 뒤흔들었다.
허공을 밝으며 싸움판으로 날아드는 홍의청년이 있었다. 등에 홍색보검을 걸머진 아주 추악하게 생긴 청년이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단숨에 오십 장을 날아왔다.
그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싸움이 중지되었다.
복면여인은 너무도 놀라 들고 있던 옥소를 떨어뜨릴 정도였다.
"아……!"
그녀는 아련한 한숨소리를 내며 눈까풀을 파르르 떨었다.
나타난 홍삼청년은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복면여인에게 잡히기 직전이었던 흑의여인을
바라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낭자, 절기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굳이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의 맑은 목소리는 얼굴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바로 탁옥룡이었다.
"어이해 막강한 절기를 사용하지 않소? 그리고 왜 그냥 떠나가소오? 소생은 낭자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소."
탁옥룡이 부드럽게 말하는 이유는 몰리던 흑의여인이 바로 자신을 구한 신비여인이기 때문이었다.
배꽃같이 흰 얼굴에 우수를 담고 있는 여인의 얼굴은, 붓으로 그릴 경우 그 뛰어남을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한 옥용이었다.
흑의여인은 탁옥룡이 나타나자 크게 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 대협께서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요?"
"낭자……? 소생을 구하지 않았소?"
탁옥룡은 그녀가 자신을 전혀 모른 체하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흑의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대협이 뉘신지 모릅니다."
"진정…… 나를 모른단 말씀이오?"
"호호, 소녀는 공야홍(公冶紅)이라는 여인입니다. 세상 출입이 적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처지입니다. 하여간
대협 덕에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어 천만 다행스럽습니다."
흑의미녀는 낭랑히 말하며 뒤쪽으로 물러났다.
탁옥룡은 붉은 그림자로 화해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이대로 떠날 수 없소.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이렇듯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있을 수
없소."
탁옥룡의 손은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마치 한 쌍의 연인처럼 너무도 스스럼없는 모습이었다.
"흑……!"
지켜보고 있던 청의여인은 그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뿌리며 위로 훌훌 날아올랐다.
탁옥룡은 그녀가 떠나는 데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정색하며 지난날을 상기시켜 주었다.
"낭자는 옥룡별부(玉龍別府)에서 나를 구한 그 여인이오. 내가 옥지(玉芝)냐 했을 때 훌쩍 떠난 나의
구명지은인이오."
"옥룡별부요?"
공야홍은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이제 생각이 나시오?"
탁옥룡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순간, 탁옥룡에게 왼손을 잡힌 여인은 오른손을 번쩍 들어 그의 가슴을 강하게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가 나며 탁옥룡이 몸을 휘청였다.
"으음……, 혈영마협은 금강불괴지신에다가 불사신(不死神)이라던데, 과연 헛소문이 아니로구나."
공야홍은 주먹을 쥐고 몹시 아픈 표정을 했다.
"왜… 왜 나를 암산했소."
탁옥룡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아래턱을 덜덜 떨었다.
"호호, 네놈이 혈영마협임을 알고 암습하지 않을 재간이 있겠느냐? 네놈은 의당 죽어야 한다."
공야홍의 목소리는 전과 달리 아주 잔혹했다.
"무슨 말이오?"
"호호……, 나는 옥룡미랑(玉龍美娘)이다. 소협(簫俠)으로 불리는 계집이 나를 잡으려 했던 이유는 내가
옥룡천자의 딸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옥룡천자의 딸이라고?"
탁옥룡은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머리카락이 빳빳해졌다.
옥룡천자의 딸이라면 그에게 있어 불구대천의 원수와 다를 바 없었다.
공야홍이 아주 기이한 수법을 시전해 팔뚝의 근육과 뼈를 축소시켜 탁옥룡의 금나수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바로
화골신권(化骨神拳)이라는 비법이었다.
공야홍은 열 걸음 물러나며 교소를 터뜨렸다.
"네놈은 내가 누군지 알았어야 했다. 호호호……, 내가 옥룡미랑 공야홍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를 돕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큰 웃음소리였지만 조금은 처량하게 들렸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탁옥룡을 구한 여인의 모습과 판에 박은 듯
닮았다.
'나의 눈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탁옥룡은 괴로운 나머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공야홍의 말이 계속되었다.
"네놈이 철정향(鐵丁香)의 미인계마저 간단히 돌파했다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네놈은 오래 못 간다. 가부(家
父)는 천시대묘(千屍大墓)를 격파한 직후 너를 쫓아 죽일 작정이시다."
그녀가 앙칼지게 웃으며 몸을 빼치려 할 때였다. 먼 곳에서부터 날아드는 황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공야무군의 계집아! 나의 누나는 어디 있느냐?"
황의인은 단번에 삼십 장을 날아 공야홍 바로 앞을 가로막았다. 황색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그는 손에 녹옥선(綠
玉扇)을 쥐고 있었다.
"선… 선협(扇俠)? 나의 호법들은 어디에 있고 네놈만 나타나느냐?"
공야홍이 움찔하자 선협이라 불린 황의청년은 냉소를 치며 섭선을 펼쳤다.
"흥, 네 호법들 따위는 죽는 데 십 초도 안 걸렸을 정도로 천한 무리이다. 이제 네년의 목이 내 주머니 안으로
굴러들어 올 때가 되었다."
현란한 녹광(綠光)이 뿌려졌다. 수천 수만 개의 녹색 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듯했다.
선협은 섭선을 펼침과 동시에 공야홍 주위를 빙빙 돌았다. 수백 개의 환영을 만들며 움직이는 솜씨는 실로
유연했다.
공야홍이 눈살을 찌푸리고 만반의 준비를 할 때였다.
"이럴 수가! 창염장(蒼髥莊)의 사마천룡(司馬天龍)이 며칠 사이에 절세고수가 되었단 말인가?"
탁옥룡이 깜짝 놀라 전권(戰圈)으로 뛰어들었다.
선협은 그제서야 그를 알아봤다. 그는 깜짝 놀라며 얼른 무릎을 꿇었다.
"아… 아니, 은공(恩公)이 아니십니까?"
"하하……, 취영미리신보(翠影迷離神步)에 불영백팔선(佛影百八扇)을 절정수준으로 익혔구나. 대체 무슨 선연
(仙緣)이 있었느냐?"
"녹옥로(綠玉爐) 중에서 두 개의 녹옥대환단(綠玉大環丹)을 찾아 누이와 나눠 먹었습니다. 그로 인해
백년공력을 얻고 무림고수가 되었던 것이지요."
선협은 복면을 벗은 후였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십육 세 소년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났다. 그는 창염장의 어린 장주 사마천룡이었다.
사마천룡은 탁옥룡을 다시 보게 된 것이 기쁜 듯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누나와 저는 무림고수가 된 후 은공을 찾아 강호로 나왔습니다. 저희는 비로소 은공이 혈영마협임을 알았습니다.
저희들은 옥룡마궁도를 처치해 가며 계속 은공을 찾고 있었습니다."
탁옥룡은 그가 대견스럽기만 하였다.
"하하……, 그랬었냐?"
"이 근처로 오게 된 이유는 은공이 낙양에서 죽었다는 헛소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 계집을……."
사마천룡은 공야홍 쪽을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서 있던 장소는 텅 빈 장소로 화해 있었다.
"놓쳤군."
사마천룡이 애석해 하자 탁옥룡은 공야홍이 언제 떠났는지 다 아는 듯 말했다.
"녹옥삼절기(綠玉三絶技)를 십이성 익혔다 해도 그 여인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
"예에?"
"그 여인은 무공을 숨기고 있다."
"그… 그럴 리가요?"
사마천룡이 혀를 내두를 때였다.
"흥!"
어디선가 차가운 냉소성이 들렸다. 청의여인이 되돌아와 옥옥소(綠玉簫)를 쥐고 두 사람 곁으로 다가서는
중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전과 달랐다. 좀전까지의 떨림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후였다. 지금은 너무도 단호한
눈빛이었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다.'
청의여인은 입술을 질끈질끈 물었다.
"누… 누나……?"
사마천룡은 청의여인이 코웃음 치며 다가서는 것을 보며 아주 놀랬다.
"천룡아, 쌍옥합벽진(雙玉合劈陣)을 쳐야겠다. 천하를 위해 좋은 일을 할 때가 아니겠느냐?"
"무슨 소리입니까?"
사마천룡이 얼떨떨해 할 때 탁옥룡의 눈빛이 따라 흐트러졌다.
'그랬었군. 바로 사마옥봉(司馬玉鳳)이었을 줄이야! 그녀를 간과한 바람에 실망감을 주게 되어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다.'
탁옥룡은 자신의 둔감함을 한탄했다.
공야홍을 핍박하던 여인이 바로 사마옥봉의 화신임을 이제야 알고 은근히 후회했다.
사마옥봉의 기세는 살기등등했다. 사마천룡이 놀라워하는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가 되었다.
"누나, 이 분이 바로 저희들의 은인 혈영마협임을 모르십니까? 죽립을 쓰지 않아 몰라보시는 것입니까?"
"안다."
"그러시다면 왜……?"
"우리는 싸워야 한다."
사마천룡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싸우다니요? 이제껏 이 분을 그리워하며 며칠을 뜬눈으로 지샌 누님이신데, 어이해……?"
"그것은 지난 일이다. 이 자는 마궁주의 딸을 살려준 희대의 광마일뿐이다. 일심맹이 이 자를 정파공적(正派公
敵)으로 지명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누나, 이성을 차리십시오!"
사마천룡이 소리치자 사마옥봉은 어느 정도 냉정을 찾는 듯 그 자리에 멈춰서며 탁옥룡을 바라봤다.
탁옥룡은 단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다.
사마옥봉은 안타깝게 그를 응시하며 더듬더듬 물었다.
"왜… 공야홍을 풀어줬지요?"
"그것을 알고 싶소?"
"말씀해 주십시오.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소… 소녀는 은공을 핍박한 죄로 이 자리서 혀를 깨물고
자결하겠습니다."
"흠, 그러면 말할 수 없소."
"예에?"
"하하……, 나는 낭자가 죽으라고 살려 주지 않았소. 더욱이 험한 세상의 무림인이 되라고 살려 준 것도
아니오."
탁옥룡은 냉정히 말한 다음 사마천룡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마천룡은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반가워 춤을 춰도 부족할 정도인데, 언성을 높이고 살기를 뿌리는 처지가
되었으니 서글플 따름이었다.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탁옥룡은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소선쌍협(簫扇雙俠)의 눈부신 활약에 대해 많은 말을 들었다. 네가 그 중 하나라니 반갑기만 하구나. 과거
내게 은혜를 입었다 해서 내게 미안해 할 것은 없다. 나는 대가를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야속하십니다. 저희 남매는 은공을 찾기 위해 강호로 나왔습니다. 소선쌍협이라 불리게 된 이유 또한 은공이
일러주신 녹옥삼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알았겠지만 나는 정파가 아니다."
성격이 충후한 사마천룡은 잠시 흠칫했다.
"그… 그것은……!"
"옥봉낭자의 말이 맞다. 나는 일심맹주에 의해 정파공적으로 지목된 사람이다. 굳이 나와의 인연을 기억해
정파에서 따돌림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탁옥룡은 차분히 말한 다음 천천히 걸어갔다.
"은공!"
사마천룡은 벌떡 일어나 그 뒤를 따르려 했다.
"천룡아, 그냥 둬라!"
사마옥봉이 아주 차게 말하며 발을 크게 굴렀다. 발자국이 깊게 파여졌다. 그녀는 눈물을 뿌리며 위로 날아올랐다.

사마옥봉이 훌훌 떠나가자 사마천룡은 탁옥룡을 바라보며 급히 말했다.


"누님을 용서해 주십시오. 은공이 죽었다는 헛소문 때문에 눈물을 많이 흘려 지금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언제고
이 불충(不忠)스러움을 씻겠으니 제발 저희 남매를 나쁜 사람으로 보지 말아 주십시오."
사마천룡은 남자답게 말한 다음 사마옥봉을 뒤쫓아갔다. 그의 신법은 사마옥봉의 신법보다 훨씬 빨랐다.
탁옥룡은 뒤돌아 서서 저으기 감탄해 말했다.
"무공이란 단 시일에 익히기 힘든 것인데 정말 빨리 고수가 되었다. 지금 이 정도이니 장차 얼마나 강한 고수가
되겠는가? 얼마 후 정파는 저들 남매를 맹주(盟主)로 모시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는 씁쓸한 기분이 되어 발걸음을 돌렸다.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이 어찌도 이리 기구하단 말인가?'
탁옥룡은 연신 탄식을 하며 마의불수와 회회공자가 있는 쪽으로 되돌아갔다.
마의불수는 회회공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회회공자는 마의불수의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의 점혈을 스스로 풀다니 정말 뛰어난 사람이다.'
탁옥룡은 그들 앞으로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마의불수는 그의 신묘한 신법에 깜짝 놀라 입을 딱 벌렸다.
회회공자는 그가 나타난 것을 알고 있었는지라 전혀 놀라지 않고 얼른 이마를 땅에 댔다.
"전에 맹세한 대로 이제부터 주인으로 섬기겠습니다."
"무슨 맹세를 말이오?"
"회회단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말씀이 사실이라면 회회교의 은인이시라고……."
"하하……, 기억이 나오. 하지만 나로서는 과거의 빚을 갚은 것에 지나지 않소."
"탁가장원에서의 빚은 빚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회회공자는 눈물을 거둔 상태였다. 그의 참담한 모습은 탁옥룡 얼굴보다 훨씬 추악했다.
"저는 회회교주로서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그들에 속아 색의 노예가 되었고 부하들을 모조리 희생시켰으니……,
얼굴을 들고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신세입니다. 속하를 거둬 주시지 않는다면 죽을 도리밖에 없습니다."
"……."
"말씀해 주십시오."
"회회공자, 친구로서 지냅시다. 주종관계라면 싫소."
"꼭 그래야 합니다. 저는 종이 되기에도 부끄러운 자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정사종사(正邪宗師)로 적격이십니다.
저는 그것을 압니다. 다른 사람들은 혈영마협을 공포스럽게 여기나 저는 혈영마협이 과거의 누구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주인을 인간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를 거두어 주신다면 신명을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회회공자는 간절히 청원하며 또다시 이마를 땅에 댔다.
"할 수 없구료."
탁옥룡은 부드럽게 말하며 소매에서 진력을 발휘했다.
회회공자의 몸은 저절로 떠올랐다. 그는 탁옥룡의 내공에 새삼 감탄하는 눈치였다.
탁옥룡은 마의불수를 손으로 지적하며,
"회회공자는 제일 먼저 마의불수에게 내공을 전수하시오. 나의 수하는 고수여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대를 실명검사(失名劍士)라 칭하겠소."
회회공자는 아주 감격해 하는 눈치였다.
"감사합니다, 주인!"
"일단 개방을 찾아 몸을 맡기고 나를 기다리시오."
"떠나시려고요?"
"갈 데가 있소."
탁옥룡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그의 의문을 해소시켜 주었다.
"천시대묘(千屍大墓)에 가봐야겠소."
"아……, 옥룡천자가 그곳으로 갔다는 것을 아시는군요?"
"그렇소."
"조심하셔야 합니다. 옥룡천자도 대단하거니와 천시대묘의 묘중기인(墓中奇人)은 옥룡천자보다 더 무서운
자입니다. 그 자의 시독강기(屍毒 氣)는 어떠한 무공이든 간에 파괴해 버리는 절대적인 수법입니다. 마궁은
천시묘를 치기 위해 수백 차례 호법을 보냈습니다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옥룡천자가 그곳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회회공자는 천시대묘에 대해 아는 것을 소상히 이야기했다.
"고맙소. 큰 도움이 됐소."
탁옥룡은 두 사람에게 개방 사람들과 연락이 닿는 방법을 자세히 일러준 다음 단신으로 남하(南河)했다.

第八章 절대금지(絶對禁地) 천시대묘(千屍大墓)


우― 우―!
부엉이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뒤덮었다.
달이 없는 밤이라 더욱 어두웠다. 별빛이 아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으나 주위를 밝히기에는 모자람이 많았다.
은하수가 하늘을 희게 물들이는 것을 보며 대별산(大別山) 기슭으로 치달려 가는 홍의인의 모습이 숨겨지는
이유도 밤이 너무 어둡기 때문입니다.
"이쪽이다."
홍의인은 중얼거리며 아주 빨리 달렸다. 그의 발바닥은 백 장 간 다음에야 지면을 밟곤 했다.
그는 도끼로 찍어버린 듯한 모습을 한 곡구에 이를 수 있었다.
두 개의 만장절벽이 얼굴을 마주 하고 있는 사이로 장정 다섯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겨우 지날 폭이 좁은 곡구
하나가 뚫려 있었다.
놀라운 것은 초입부터 시산(屍山)이 쌓여 있다는 것이었다.
십여 년 전에 죽은 시체부터 시작해 최근에 죽은 시체까지 다양했고, 하나같이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무엇을 움켜쥐려 하는 손짓이나 결국 빈 손이었다.
"끔찍하군. 이것이 한 인간의 손에 의해 이룩되었단 말인가?"
탁옥룡은 몸서리를 치다가 벽면에 쓰여 있는 글씨를 보게 되었다. 모두 두 줄인데 내용은 각기 달랐다.
― 천시대묘(千屍大墓)가 옥룡궁도(玉龍宮徒)를 부르니 용기 있는 자만 들어오너라!
― 들어온 자는 살아 나가지 못한다!
읽기에도 섬뜩한 내용이었다.
"흠, 이 글이 바로 천하삼기 중 하나라는 묘중기인이 쓴 글이구나."
홍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호호, 마궁도가 아닌 듯한데 왜 안으로 들려 하는지 모르겠군?"
낭랑한 웃음소리가 나며 홍영 하나가 사뿐히 날아들었다.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여인이 신광을 뿌리며 홍의청년
뒤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탁옥룡은 홍의복면여인이 내려서자 추악한 얼굴에 어두운 그늘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그는 괴로움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호호……, 나를 알아보는구나."
복면여인이 까르르 웃었다.
"내가 혈수나찰(血手羅刹)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두려워할 것은 없다. 내가 냉혈녀이고 무자비하다 소문났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나의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홍의여인은 바로 이수운(李愁雲)이었다.
다 죽게 되어 회회단에서 포달랍궁 고수들 쪽으로 옮겨졌던 그녀가 말끔히 회복된 모습이 되어 탁옥룡 앞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탁옥룡을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정혼자라는 것도, 그리고 천하를 떠들썩하게 하는 혈영마협이라는 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호호……, 나는 마궁에게만 지독하다. 너는 마궁 사람이 아니니 나를 두려워 할 것 없다. 물론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면 또 다를 것이겠지만!"
이수운은 차갑게 말하며 탁옥룡을 자세히 살폈다.
'매우 추악한 자다. 그 분과는 너무나도 판이하다……. 이런 용모를 갖고도 버젓이 다니고 있으니 심보만은
알아줘야겠군.'
이수운은 탁옥룡의 곤혼스러운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곡구 안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안은 지옥문(地獄門)이니 무슨 목적으로 여기까지 왔든 간에 들어가지 마라."
탁옥룡은 행여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우려해 목소리를 변성시켜 말했다.
"포달랍궁 혈수나찰께서 여기 나타나시다니 놀랍소. 그러나 소생은 남의 말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오."
"호호……, 굳이 안으로 들어가겠단 말이냐?"
"그렇소."
이수운 마치 하인을 대하듯 그를 다루었다.
"왜 하필 이때에 저 안을 찾느냐?"
"이런저런 말에 모두 다 대답하는 것은 내 성격에 맞지 않소. 비키거나 막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시오."
탁옥룡의 목소리는 아주 잔혹했다.
"흥, 내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다니 보통 놈이 아니군. 그럴수록 점점 이유를 알고 싶다."
이수운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녀는 자심의 내공을 과시하고 싶은 듯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천근추를 발휘해 세 치 깊이의 족인을 찍었다.
물론 그 정도로는 탁옥룡에게 놀라움을 줄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도 달라졌지만……, 너도 과거의 이수운은 아니다. 탁가장이 마궁에 시사혈해로 씻김과 동시에 그 안에 살던
사람 모두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나는 탁옥룡이 아니고 혈영마협이며, 너 역시 이수운이 아니고 혈수나찰이다.
그것이 전부다.'
탁옥룡은 괴로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마음을 모질게 먹어도 과거의 일은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만일 이수운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서슴없이 정체를 밝혔을 것이다.
"혈수나찰, 그대의 무명(武名)은 알고 있으나 내가 천시대묘 안으로 가는 것을 막을 정도는 되지 못하오."
"흥, 나는 막아야 한다. 너로 인해 원대한 계획이 흐트러지게 할 수는 없다."
"무슨 계획이 있소?"
"호호……, 네게 그것을 말할 까닭은 없지. 다만 네가 근처를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잠재우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이수운은 차고 나직이 말하며 두 손을 한데 합했다. 그녀의 옷이 조금 부풀어올랐다.
탁옥룡은 그녀가 대유마가신공을 펼치려 하는 것을 알고 피식 웃었다.
"후후……, 내공을 얼마나 사용할지 모르나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십성 공력으로 펼쳐야 할 게요."
"호호……, 단 이성이면 너를 잠재울 수 있다."
"글쎄, 나의 단단한 몸뚱이 때문에 고생을 하고 말 텐데?"
"네가 금강불괴가 아닌 이상 나의 손바닥 아래 쓰러지지 않고 배길 도리가 있겠느냐?"
이수운은 큰소리치며 손바닥을 활짝 벌렸다.
콰르르릉―!
파공성과 함께 뿌연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바로 불가삼대신공(佛家三大神功) 중 하나인 대유마가신공이었다.
탁옥룡은 두 손을 내려뜨린 채였다. 그는 신공지기가 다가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놈이 정말 금강불괴라도 된단 말인가?'
이수운은 은근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와 함께 전보다 더한 호승지심이 일어났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신공에 진기를 더했다.
"쓰러져라!"
뇌성벽력이 일며 탁옥룡의 몸이 뿌연 기류에 잠겼다.
콰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흙바람이 일어났다. 탁옥룡은 선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수운은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크게 세 걸음 물러나며 두 손을 훌훌 털었다.
"으음……, 지독한 호신강기다. 네가 누구이기에……?"
이수운은 자지러지게 놀라 탁옥룡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그녀의 떨리는 눈빛이 묘한 매력을 주었다.
"설… 설마 죽었다던 혈영마협은 아니겠지?"
이수운이 아래턱을 떨었다.
"하하……, 누가 내가 죽었다고 했소?"
탁옥룡이 맑은 웃음을 터뜨리는 이수운의 눈망울이 한껏 커졌다. 그녀는 입술을 질근질근 물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네가 나를 구했다던데, 그게 사실이냐?"
"글쎄……, 회회단 안에서 다 죽어가던 여인 하나를 포달랍궁의 성차(聖車) 있는 곳으로 보낸 일은 있소."
"으음……!"
이수운은 침음성을 내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혈영마협이라는 이름은 혈수나찰보다 백배 더한 두려움을 주는 이름이 된 지 오래였다.
그녀는 눈을 깜빡깜빡 거리다가 공수(供手)의 예를 취했다.
"네게 구명지은 입은 것을 고맙게 여긴다."
"과찬이오."
"하지만…… 너의 모든 언행은 본궁에 노여움을 줄 뿐이다. 너는 지극히 뛰어난 의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나의
양모(養母)이신 석심부인(石心夫人)을 구해주지 않았고 본궁을 조롱했다."
전에 비해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그리고 본궁이 천시대묘 주인 묘중기인(墓中奇人)과 옥룡천자와의 싸움을 이용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계획을
세웠는데, 그것을 방해하려……."
"옥룡천자가 이미 안으로 들어갔소?"
탁옥룡이 오랜만에 묻는 말이었다.
"그는 한 시진 전에 정예고수 백팔 명을 이끌고 들어갔다. 묘중기인은 여러 가지 기문진(奇門陣)과 독공을
이용해 그의 수하들을 쓰러뜨리다가 얼마 전부터 옥룡천자와 더불어 겨루는 중이다."
"저 안에서 말이오?"
이수운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흠, 그럼 내가 들어가 봐야겠군."
탁옥룡은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리며 곡구 쪽으로 돌아섰다.
"잠깐!"
이수운이 급히 소리치며 앞을 가로막았다.
탁옥룡은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며 냉막하게 그녀를 대했다.
"왜 막느냐? 모자라는 무공으로 나를 막아볼 작정이냐?"
"무공이 모자람은 안다. 그러나 네가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일이 틀어진다."
"틀어질 일이 무엇이냐?"
이수운은 그의 강렬한 기도에 점점 수그러졌다.
"사부와 사대장교대사(四大掌敎大師)가 와 계신다. 네가 들어가면 변화가 생겨 진세가 틀어진다. 그렇게 되면
옥룡천자를 생포하려던 우리의 계획에 막대한 차질이 생긴다."
"하하……, 그렇다면 더 서둘러 들어가야겠다. 옥룡천자의 목은 남에게 양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탁옥룡은 웃으며 손바닥을 흔들었다.
우우웅―!
수백 개의 장영(掌影)이 휘날렸다. 허(虛)와 실(實)이 분간되지 않는 신기막측한 수법이었다.
'아……, 포달랍궁에 비전되는 천 권의 비급 안에도 이런 절묘한 정초식은 없다.'
이수운은 기절초풍 놀라며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와 함께 탁옥룡의 장세가 봄눈 녹듯 스러졌다. 그것은 허초였던
것이다.
탁옥룡은 이수운이 뒤로 물러나자 장초를 회수하고 그녀의 머리 위쪽을 타넘어 곡구 안으로 달려갔다.
혈룡(血龍)이 독무(毒霧) 안으로 자취를 감추는 데에는 탄지지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천시대묘로 가는 길은 지옥도(地獄道), 그것이다.
독사(毒蛇)나 독충(毒蟲)마저 없다. 보이는 것은 살과 해골이며 코끝을 스치는 것은 부폐한 장독(葬督)이었다.
한숨만 들이마셔도 그대로 절명하고 말 극독이었다.
여기저기 해골산이 쌓여 있었다. 사람의 기척은 어디를 봐도 없었다.
"내 비록 만독불침지체이지만 조심해야 한다. 독왕경(毒王經) 안의 피독대법(避毒大法)을 사용하자."
탁옥룡은 죽은 독왕(毒王)이 남긴 독왕경 안의 한 가지 구결을 암기했다. 그것은 신묘한 피부호흡술(皮膚呼吸
術)이었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토해내 독기가 폐부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누를 범하지 않기 위해 창안된 피독수법이었다.
독왕이 남긴 절기 중의 절기가 그것이었다.
탁옥룡은 피부로 숨쉬며 계속 달려갔다.
그는 골짜기가 둘러보다 수십 개의 전혀 다른 미로(迷路)가 하나의 거대한 진세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천시대묘를 세운 사람은 기문진에도 달통한 사람이다. 흠……, 이 정도 재주라면 강호로 나와 옥룡마궁과
정면으로 싸워볼 만한데, 왜 숨어 그들이 자신을 찾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는 의아해 하며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어디를 봐도 검은 안개뿐이었다.
그는 안력을 일으켜 주위를 살피고는 손가락으로 움직여 바닥에 여러 개의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쪽은 휴문(休門)이다. 이쪽으로 가면 길을 잃는다."
그는 진세를 변화를 하나씩 그려가며 뛰어난 오성(悟性)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가장 위험한 길은 바로 이곳이다. 이곳은 사문(死門)이다."
그는 자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 중궁(中宮)임을 알았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진세 안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진세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들어선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걷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것을 알기에 앉아 기문진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이쪽에는 감리(坎離)가 저쪽에는 건곤(乾坤)이 있다. 생문(生門)을 찾으려면 진(震)의 방위를 따라야 한다."
그는 기문진이 주로 팔괘(八卦)와 구궁(九宮)의 방위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고 더욱 집요하게 궁리했다.
건간감곤손진리태(乾艮坎坤巽震離兌)…….
팔괘는 하나하나 자연(自然)을 가리킨다.
건(乾)은 곧 천(天)이다. 곤(坤)은 곧 지(地)이다. 그것은 음양(陰陽)의 두 기둥이기도 했다.
감(坎)은 태양(太陽)의 자리이고, 곧 화(火)다. 리(離)는 수(水)를 말한다. 감리는 빙화(氷花), 음양(陰
陽)과 같은 말이다.
그는 생문을 찾기 위해 복희씨가 세상에 밝혔다는 팔괘의 이치를 따지다가 그것이 곧 팔진도(八陣圖)에 연관됨을
느꼈다.
"팔괘 구궁에 팔진을 이용했군. 그것을 정(正)이 아니고 반(反)으로 했기에 진세가 아주 복잡해진 것이다."
그는 팔진도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천지풍운(天地風雲),
용호조사(龍虎鳥蛇).
팔진도는 네 가지 자연(自然)과 네 가지 신수신금(神獸神禽)으로 구성된다. 각 방위의 특성을 알지 못하는
자라면 마땅히 팔진도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그는 팔진도 이어 오행상생지리(五行相生之理)를 따졌다.
"진세는 천기에 따라 변화한다. 날씨와 기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이 진세를 친 사람은 나와 비슷한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다. 호락호락하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그는 오랜만에 치밀한 지혜를 사용했다. 그것은 무공을 이용해 싸우자는 것과 또 다른 싸움이었다.
그는 일각 넘게 궁리했다.
"후후……, 가장 귀중한 것을 잊었다. 이 사람은 도가의 기문진 이전에 불문(佛門)의 미타공(彌陀功)과
사대개공(四大皆空)의 이치를 진의 기초로 삼아두었던 것이다."
그는 분석을 마치고는 바닥의 선과 점을 지웠다.
"공공천문대진(空空天門大陣)임을 이제야 깨닫다니……, 독무가 눈을 가리고 절벽이 안력에 공포감을 주기
때문에 심마가 일어나 착각을 했던 것이다. 안력을 믿지 말라는 사문의 교훈을 이제야 절감하게 되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한 곳을 택해 걸어갔다.
그는 곧바로 가지 않았다. 몇 걸음 가다가는 뒤돌아 섰고, 그러다가는 비스듬히 걷기도 했다. 독무는 그를
죽이지 못했다. 그는 꽃밭을 걷는 사람같이 유유자적 걸었다.
얼마 후, 그는 탁 트인 곳에 이를 수 있었다.
거대한 돌기둥이 남아 있는 웅장한 건축의 폐허가 눈에 들어왔다.
"호오, 이것은 상고시대의 유적이 아닌가?"
그는 건축에 대해 일가의 견해가 있기에 그것이 자신의 사문인 마왕동이 세워지기 이전의 유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산동(山東)에 뿌리를 두고 있다가 소탕되었다는 활시교도(活屍敎徒)들의 은거지다."
탁옥룡은 활시교도라는 방파를 기억할 수 있었다.
활시교는 사교(邪敎)다.
그들은 국법을 무시했고 천자를 섬기지 않았다. 그래서 토벌된 집단이었다.
무술에 대해서는 뛰어난 바가 없었으나, 시독술(屍毒術)과 포진술(布陣術), 최혼술(催魂術)에 뛰어난 삼절(三
絶)로 번성할 때에는 십만 명의 교도를 이끌었을 정도였다.
그들이 나타나지 않은 지도 천이백 년이 넘었다.
"흠, 완전히 멸망된 것으로 알았는데……. 이곳이 바로 천시대묘란 말인가?"
그는 분지 가운데 있는 유적지를 바라보며 지면 위를 미끄러졌다.
십 장 높이의 돌기둥이 공포감을 주었다. 그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무수한 인부들이 희생당했음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보는 감회를 새롭게 할 것이다.
그는 돌기둥 열 여덟 개로 떠받쳐져 있다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완전히 무너진 대전 바닥이 보이는 곳에 이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삼 장 거리를 격해 내공 대결을 벌이는 중이었다.
탁옥룡을 향해 얼굴을 보이는 사람은 금포에 금색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는 시퍼런 기류를
발휘했고, 왼손으로는 흑색기류를 발휘했다.
한꺼번에 두 가지 신공을 발휘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양심신공(兩心神功)을 익히고 있는
사람이었다.
"저 수법은 바로 옥룡사 비전수라는 옥룡태음일원강(玉龍太陰一元 )이다. 왼손에서 발휘하는 것은 독강기(毒
氣)이고."
탁옥룡의 입꼬리에 살기가 깃들여졌다. 금포인이 바로 옥룡천자라는 것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옥룡천자와 겨루고 있는 사람은 장발괴인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두 다리와 왼팔이 없는 불구자였다. 남아 있는
것은 오른팔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 장심에서 먹물보다 짙고, 붉은 기운이 감도는 흑적무(黑赤霧)를 발출해 옥룡천자의 양대강기와
겨루는 중이었다.
두 사람 모두 말을 하지 않았다.
우르르― 릉―!
내공 격돌에 의한 은은한 파공성이 그들의 말을 대신할 뿐이었다.
"오래 갈 싸움이다. 적어도 사흘은 끈다. 흠……, 옥룡천자는 많은 부하를 이끌고 왔다는데 어이해 혼자
있을까?"
탁옥룡이 중얼거릴 때였다.
"하하……, 이유는 그들의 부하들이 모두 독진(毒陣) 안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혈미륵(血彌勒)!"
탁옥룡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는 허공에 둥둥 떠있었다. 내공으로 떠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금응을 타고 둥실 떠있는 것이다. 그는 중천
(中天)을 점했고, 동서남북의 하늘에도 집채만한 금응 한 마리씩이 떠돌고 있었다.
"여기서 너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혈미륵은 옥룡천자를 잡게 되었다는 것보다 탁옥룡을 다시 보게 된 것이 더욱 기쁜 듯 쾌재를 불렀다.
"하하……, 궁주가 왔다는 말은 들었소. 하지만 옥룡천자의 목은 남에게 양보해 주지 못할 것이니 알아서
하시오."
탁옥룡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새를 타고 떠 있는 다섯 사람은 모두 바로 곁에서 말하는 듯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후후……, 옥룡천자보다 너를 잡는 것이 더 급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잡아 석심부인을 치료케 할
것이다."
혈미륵은 금응을 부려 십 장 정도 하강하게 했다.
포달라바궁의 활약이 눈부셨던 이유는 바로 금응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만 리 이상을 난다. 그랬기에 마궁은
다수의 수하로도 그들을 능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좋다, 혈영마협! 옥룡천자의 목을 네게 양보할 테니 석심부인을 치료해 다오. 네게는 정말 유리한 조건이다."
혈미륵은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탁옥룡은 그의 제안을 일축했다.
"하하……, 네가 막는다 해도 옥룡천자는 내 손에 죽는다. 일단 이 천하고 더러운 놈을 박살낸 다음 너의
오랑캐들과 싸워보겠다."
그는 불구괴인과 옥룡천자가 싸우는 곳으로 다가갔다.
"으으……, 방해하지 마라! 이 자는 내 손으로 죽여야만 한다."
오른팔만 갖고 있는 괴인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의 눈알은 왕방울 만했다. 그리고 잿빛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 자를 죽이지 못한다. 꼭 내가 죽여야 할 자이기 때문이다. 이 자가 오기를 기다리며 이십 년을
여기서 짐승만도 못하게 살아왔다."
괴인은 울부짖듯 말하다가 두 번의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훌훌 날아올랐다.
"크으윽!"
그는 십 장이나 날아 돌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나뒹굴었다.
내공대결에서 잠시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이 패인이었다. 초고수들의 내공 대결에서 터럭만큼의 차이는 곧
패배를 의미했던 것이다.
옥룡천자는 차가운 눈빛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네놈이 살아났다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랐었다. 그래서 묘중기인을 죽인 직후 너를 잡아죽일 작정이었다."
그는 태연을 가장하며 당당히 말했다. 허공에 떠있는 혈미륵 정도는 눈에 차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훗훗……, 네 덕에 묘중기인을 간단히 죽였으니 정말 고맙다. 이제 너의 목을 세상에서 없애 주마!"
그는 차게 말하며 품 안을 뒤졌다. 그의 손이 품을 빠져나오며 백광과 홍광이 일어났다. 한 자 넘게 보이는 두
자루 보도가 그의 손에 쥐어져 광휘를 발했다.
"이것은 설도(雪刀)와 혈도(血刀)다. 이 두 가지는 본좌가 옥룡궁주임을 말하는 옥룡궁의 신물이기도 하다.
며칠 전, 네놈의 살 속으로 파고들었던 두 개의 암기는 이것을 그대로 본따 만든 축소품이었다."
탁옥룡은 적개심을 불태우며 눈을 가늘게 떴다.
"훗……, 전설적인 물건답게 뛰어나다만 나의 무딘 살을 베기에는 날카롭지 않다."
"후후……, 네놈이 천년마제(千年魔帝)의 화신(化身)이라는 것도 이미 들어 알고 있다. 이래저래 네놈은
죽어야 한다. 일전에 본좌가 너를 두려워해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는 것을 이 자리서 알려 주겠다."
옥룡천자는 자신만만하게 외치며 한 마디 덧붙였다.
"본좌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는 것도!"
이때 새 울음소리와 함께 두 사람을 오행방위(五行方位)로 포위하는 승려 다섯이 있었다.
혈미륵과 포달랍궁의 사대장교승(四大掌敎僧)이 새 등에서 떨어지며 오행진을 친 것이다. 그와 함께 살기가
충천했다.
혈미륵은 사대장교의 사질(師姪)이었다. 그러나 궁주(宮主)라는 지위는 지존(至尊)의 지위였다.
사대장교는 배분상 혈미륵의 사숙(師叔)이나 혈미륵이 자결하라고 명한다면 자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혈미륵에게 충성해야 했다.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기에 혈미륵이 온갖 염문을 뿌린다 해도 고스란히 받아들일 뿐 아무런 이견도 내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사대장교를 동행해서인지 혈미륵의 위풍당당함은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했다.
"너희 둘 모두 잡아야겠다. 너희 둘이 싸우기를 기다렸다가 손을 썼다는 추문을 남기고 싶지 않으니 함께 덤벼라.
모두 마도(魔道)이니 벗이 될 만하지 않는가?"
그가 오만히 말하자 탁옥룡이 그를 노려보았다.
"포달랍궁과 옥룡사는 과거 소림사와 함께 마왕동을 협공한 전례가 있다. 너희 두 파가 힘을 합한다 해도 놀라지
않겠다."
그는 아예 팔짱을 꼈다.
옥룡천자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는 비웃음을 흘렸다.
"어리석은 자들. 마궁의 힘은 무한하다. 그 힘은 만년 동안의 어떠한 세력보다도 광활하다. 너희들 쥐새끼가
쌀을 훔쳐먹듯 마궁의 힘을 좀먹는다 해도 마궁의 기초는 흔들릴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입에서 마궁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자신도 이제는 백도라는 허울을 쓰지 않았다.
"흐흐……, 사실 본좌의 가장 큰 적은 묘중기인이었다. 그 자가 저런 꼴이 되어 누운 이상 본좌는 홀가분할
뿐이다."
그는 쌍도를 쥐고 신공과 독공을 동시에 끌어올렸다. 그는 자신이 천하제일인인 양 행동했다.
그러나 혈미륵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탁옥룡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곳에서라면 권위를 부릴 수 있는
옥룡마궁주였으나, 이 안에서는 친구보다 적을 많이 가진 자에 불과했다.
분위기는 지극히 살풍경했다.
각기 천하제일을 자부하며 만용을 부렸지만 정작 누가 천하제일인 지는 두고볼 일이었다.
가장 곤혹스러워 하는 사람은 옥룡천자였다.
'포달랍궁은 각오했으나 혈영마협까지 나오다니……. 으음, 자칫하다가는 여기서 죽기 쉽다.'
그는 보도를 교차해 들었지만 도망갈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어디를 봐도 퇴로는 없었다. 그런 그를 둘이 협공해 온다면 정말 끝장이었다.
그가 전전긍긍해 할 때 혈미륵이 협상을 제의했다.
"혈영마협, 석심부인을 돕겠다고 말하기만 하면 우리 두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본궁은 너로 인해
중원무림계와 등을 지는 한이 있다 해도, 네가 석심부인을 치유하기만 하면 기꺼이 돕겠다. 어떠냐?"
탁옥룡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싫다."
"으음……!"
혈미륵은 분개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이렇게 무시당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탁옥룡이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혈미륵, 내가 당신을 돕고 싶지 않아 그러는 것이 아니다. 도울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다. 석심부인의
병세는 그녀 자신이 힘을 얻어야 나을 수 있는 병이다."
"정… 정말이냐?"
"그렇다."
혈미륵은 그래도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양녀인 수운이를 구한 사람이 그대인 줄 아는데, 그런 오묘한 재간으로도 석심부인을 구하지 못한단 말이냐?"
탁옥룡은 냉담하게 잘라 말했다.
"귀찮게 자꾸 묻지 마라!"
"으윽……, 이 놈이?"
혈미륵은 분기탱천하여 이를 악물었다.
지켜보고 있던 사대장교가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들끼리의 언어로 말했다.
"궁주, 둘 다 죽여야겠소."
"주저하지 마시오. 천재일우의 기회외다."
"오늘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오."
"옥룡천자를 죽이기 위해 그간 수천 명이 희생되었소."
모두 힘있게 말했다.
혈미륵은 약간 동요하는 듯했다. 궁의 일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옥룡천자를 죽여야 마땅했다. 그런데 탁옥룡
때문에 일이 틀어진 것이다.
이때 옥룡천자가 쌍도를 맞부딪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싸우기 위해 나타난 것이냐, 구경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냐?"
그는 탁옥룡과 혈미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냉정을 가장하는 눈빛이나 한 줄기 공포의 빛은 숨기지 못했다.
"흥, 네가 옥룡마궁을 천하제일문파로 키웠다는 것이 의심스럽다. 너란 놈은 보면 볼수록 가치가 떨어진다.
성급히 죽이려 하지 않는 이유는, 언제 찾는다 해도 간단히 죽일 수 있는 놈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탁옥룡은 아주 오만히 웃었다.
옥룡천자로서는 지독한 치욕이었다. 이십 년 이래 천하 위에 군림해 온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무시를
당한 것이다.
"으으……, 네놈부터 죽여 주마!"
혈미륵은 탁옥룡의 말에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옥룡천자는 전과 달리 옹졸해졌다. 무공은 강해졌으나 기도는 전에 비해 훨씬 뒤진다.'
혈미륵은 탁옥룡의 판단이 정확하다 여기며 넌지시 입을 벌렸다.
"공야무군. 이십 년 전 네가 본궁의 제자 사십 명을 암살했기에 우리 둘이 싸운 적이 있었지?"
"후후……, 기억력이 좋군."
"본좌는 그때 너의 태음일원강과 겨뤄 승부를 보지 못했다. 그때 너는 본궁 사람을 해친 일이 전혀 없다며 죄를
부정했었다."
옥룡천자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랬었다."
혈미륵은 그의 기도를 세심히 관찰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때 본좌는 네놈의 얼굴 표정을 보고 네가 진실을 말하지 않을까 의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네놈의 마각(馬脚)은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숨길 것이 무엇 있겠느냐?"
"흥, 네가 옥봉(玉鳳)을 참살하고 설도와 혈도를 모두 탈취해 옥룡사의 최고절기를 훔쳐 배웠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옥룡천자는 냉담하게 부인했다.
"옥봉은 병들어 죽었다. 그 아이를 내가 암산했다는 것은 뜬소문이다."
"세상이 다 알고 있다, 너의 죄를!"
혈미륵은 엄숙히 말하며 손을 쳐들었다.
탁옥룡보다 옥룡마궁과 시비를 가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결정한 것 같았다.
'낭패다.'
옥령천자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몹시 겁먹은 상태였다. 강적이 여섯이나 있으니 두렵지 않을 리
만무했다.
옥룡천자에게 절대절명의 순간이 시작되려 할 때였다.
"멈춰라―!"
분지를 떨어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중년여인의 목소리인데 동쪽 벼랑 위에서 들려왔다. 깎아지른 벼랑 위에 서 있는 금의여인 하나가 있었다. 손에는
핏빛 작약화(芍藥花)를 들고 있는데, 그 잎사귀는 흑의여인의 목에 닿아 있었다.
"앗, 혈작약(血芍藥)?"
"으음……, 수운이가 잡히다니!"
포달랍궁 사람들이 일제히 놀랐다.
탁옥룡도 이수운이 인질이 되자 가슴을 철렁 내려앉았다.
'수운아, 어이해 무림여인이 되어 그런 곤욕을 겪는 것인가?'
탁옥룡은 당장 위로 날아오르고픈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냉정한 채 서 있어야 했다. 그것이 첫사랑 이수운을 돕는 길이었다. 순간적인 감정을 이기지 못해
그녀를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혈작약은 이수운을 곧 죽일 듯한 기세를 하며 중인을 내려다보았다.
"그 분을 공격한다면 이 계집이 죽는다!"
혈작약은 몹시 동요한 상태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수운과 싸우다가 복면을 찢긴 듯 본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놀랍게도 여인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한 몰골이었다. 얼굴빛은 시꺼맸다. 게다가 작고 붉은 고름
주머니가 얼굴을 뒤덮고 있어 썩은 시체의 얼굴보다도 흉칙했다.
두 눈알이 없다면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흉물이었다.
"혈미륵, 혈영마협을 가로막아라. 그 분이 내쪽으로 무사히 온다면 옥룡궁의 명예를 걸고 이 계집을 네 곁으로
보내 주겠다."
혈미륵은 고뇌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어서 그 아이를 어서 돌려다오!"
"호호……, 중답지 않게 애정이 많다는 것을 안다. 석심부인과 혈수나찰이 너의 모든 것임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러기에 혈수나찰을 잡아 너하고 타협하려는 것이다."
혈작약은 혈미륵이 동요하자 득의만면해 했다. 그런 얼굴이 더 추악해 보였다.
옥룡천자는 그녀를 보고 입술을 질끈질끈 물었다.
두 사람은 세상이 다 아는 부부사이였다. 그런데도 옥룡천자는 그녀가 나타난 이후 반가워하기는커녕 더 깊은
고민의 늪으로 빠진 듯한 인상이었다.
혈작약은 독존의 딸이다.
독존은 옥룡마궁의 태상호법(太上護法)이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였다.
옥룡천자가 부인이며 가장 믿음직스러운 수하인 혈작약을 보고 왜 그리 괴로워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혈작약의 제안에 혈미륵은 마음을 정한 듯 이를 악물며 탁옥룡을 바라봤다.
"그냥 서 있어 다오."
"옥룡천자를 죽이지 말라는 것인가?"
"그렇다."
탁옥룡은 다소 다그치듯이 물었다.
"양딸 때문인가? 그 여인의 목숨이 마궁주의 목보다 더 가치 있고, 천하사람들보다 더 귀중한가?"
"내게는 그렇다. 미안하지만 나를 도와다오. 다시는 이런 부탁을 하지 않을 것이다."
혈미륵은 자신의 지위도 잊은 채 하소연을 하였다.
'이수운은 행운이다, 이렇게 끔찍이 사랑을 주는 양아버지를 두었으니……. 아, 그녀가 잘 자랄 수 있게 된
것을 천지신명께 감사드린다.'
탁옥룡은 속으로 기원을 하고는 옥룡천자을 바라봤다.
"한 가지 물을 게 있다."
"뭐… 뭐냐?"
"낙성사에서 본 네 얼굴은 진짜냐, 가짜냐?"
옥룡천사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
"하하……, 내가 생각건대 그 얼굴이 진짜다. 소문으로는 너의 얼굴이 박살났다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탁옥룡은 옥룡천자가 여전히 대꾸를 않자 조소를 흘리며 전권에서 벗어났다.
그는 옥룡천자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도망치는 것도 모른 체하며 쓰러진 묘중기인 곁으로 갔다.
'죽었다면 정말 미안한데…….'
탁옥룡은 묘중기인 곁으로 다가가며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묘중기인은 탁옥룡 때문에 패한 셈이었다. 그는 길게 누워 있었다. 두 다리가 없고, 왼팔마저 없어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마치 피묻은 고깃덩어리를 보는 듯했다.
"으… 음……."
그는 미약하나마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청력을 집중시키지 않는다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신음소리였다.
"아……, 아직 죽지 않았다!"
탁옥룡은 그의 상세를 확인하며 아주 놀라워했다.
'이것이 활시교의(活屍敎)의 사법(邪法)이다. 숨은 끊어졌으나 활시공 때문에 온기가 남아 있는 것이다.
반인반시공(半人半屍功)이 천이백 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셈이군.'
탁옥룡은 묘중기인의 심장이 뛰지 않고서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공을 되살려 준다면 오래 살 수 있다."
탁옥룡은 묘중기인의 오른손을 잡았다.
"놓아다오……."
묘중기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힘겹게 말했다. 그 눈빛은 처량해 보였다.
"나… 나를 만지지 마라. 나는 시독(屍毒)을 지니고 있다. 내 피부를 만진다는 것은 독약을 만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를 구하려 하는 마음은 고마우나……, 나는 사람과 함께 있지 못할 독인(毒人)의 신세다."
"그것은 알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알… 알고 있다고?"
탁옥룡은 낭랑히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하하……, 나는 독왕경을 배웠소. 그래서 구하려 하는 것이오."
"아……!"
묘중기인은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탁옥룡은 얼른 그의 혈도 열여덟 군데를 점했다. 묘중기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사람의 살을 맞부딪지 못할
독인의 신세였다.
다행히도 탁옥룡은 금강불괴지신이기에 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몸에 손을 댈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사람 중에 섞여 공연히 사람을 해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활시교 사람답지 않게 의협(義俠)이다. 마궁 사람만을 골라죽이기 위해 이런 곳에서 의롭게
살고 있으니…….'
탁옥룡은 추악한 괴인 묘중기인의 무공과 정신력에 감탄했다. 그의 얼굴은 탁옥룡의 얼굴과 비슷했다. 장력에
의해 뭉그러진 얼굴이어서 비슷하게 보일 것이다.
탁옥룡이 간단하나마 응급조치를 끝냈다.
"워낙 내공이 심후해 회생시키는 데에는 문제가 없겠다. 독왕경을 익혀두기를 잘했다."
이때, 혈미륵의 음성이 먼 곳에서 들려왔다.
"혈영마협, 오늘 일은 정말 고맙게 여긴다. 너의 도움을 빚으로 여기고 언제든 너를 한 번 도와주겠다."
그는 금응을 타고 있었다. 그의 품에는 혼절한 이수운이 안겨 있었다.
"그러나 석심부인을 돕지 않는 이상 영원히 나의 적이고, 포달랍궁의 적이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라!"
그는 크게 외치며 금응과 함께 아주 높이 날아올랐다.
탁옥룡은 그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이수운이 행복하게 살기만을 기원했다.
'혈미륵,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모두 수운이를 위해서 양보한 것이다. 부디 잘 보살펴다오.'
그의 눈길은 이수운이 사라져 간 서천에서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第九章 기녀(妓女)의 애심(愛心)


1
밤이 지나고 낮이 되었다.
탁옥룡은 그때까지 천시대묘(千屍大墓)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묘중기인의 거처로 생각되는 동부(洞府)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곳에는 하나의 서재, 하나의 연공실이 있을 뿐이었다. 잠자는 장소는 없었다. 묘중기인은 무슨 원한이 그리
컸기에 이제껏 단 한 순간도 잠자지 않고 무공연마에 몰두해 왔던 것이다.
탁옥룡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고서(古書) 한 권이 쥐어져 있었다.
<활시대법비결(活屍大法秘訣)>
활시교주만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용케도 절전되지 않고 있었군."
탁옥룡이 차분히 책장을 넘길 때였다.
"크윽……!"
기침소리가 나며 바닥에서 부스스 일어나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얼굴이 추악하고 살과 피가 독으로 물든
천하에서 가장 끔찍한 인물 묘중기인이 반나절만에 눈을 뜬 것이다.
"나… 나를 구하다니……,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척추가 세 토막난 나를 어떻게 구했단 말인가?"
탁옥룡은 고서를 탁자 위에 내던지며 말했다.
"활시교의 책을 읽었소. 덕분에 묘중기인의 내공법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어 구할 수 있었던 것이오."
"허어, 대단하도다!"
"하하……, 기인의 생명력이 더 놀랍소."
묘중기인은 탁옥룡의 모습을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
"으음……, 아직 어린아이인 듯한데 어떤 신분인가?"
"나는 혈영마협이라 불리고 있소. 사문은 마왕동이오."
탁옥룡이 잘라 말하자 묘중기인의 눈이 휘둥래졌다.
"그럼, 마중지존의 후예란 말인가? 전설대로 천 년 동안 잠자던 마제의 혼이 살아났단 말인가?"
"하하……, 나도 사람이고 기인 또한 사람이오. 그것이 전부일 뿐 아니겠소?"
묘중기인은 은근한 두려움과 함께 감탄에 젖었다.
"마성(魔性)을 이길 정도로 내공이 강하단 말인가? 그… 그렇다면 마중지존보다도 고강한 셈이 아닌가?"
"선사는 많은 절기를 창안하셨소. 하지만 그것을 익히고 시전하시지 않은 채 돌아가셨소. 그 분은 위대한 분이오.
나는 그 분 덕에 고수가 될 수 있었소."
탁옥룡은 말하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잠깐! 그냥 떠난단 말인가?"
묘중기인은 손바닥으로 바닥을 때리며 탁옥룡 앞을 가로막았다. 사지 중 남은 있는 부분이 한 손밖에 없었지만
그의 몸놀림은 의외로 빨랐다.
탁옥룡은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막으시오? 나 때문에 패해 원한이 생겼소?"
"원한은 없다."
"그럼……?"
묘중기인은 다소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나를 도와 달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더 도울 것이 있소?"
묘중기인은 눈빛을 강렬하게 빛냈다.
"옥룡천자는 다시 여기 오지 않는다. 그는 내가 죽었다고 여길 것이고, 그러기에 다시는 여기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가 강호로 나가 그를 찾아 죽여야 한다. 그래서 도와달라는 것이다."
"이치에 맞는 말이오만 내가 어떻게 기인을 돕는단 말이오? 그대의 몸뚱이를 조종하는 장본인은 결국 그대가
아니오?"
"나는 독인이기 때문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은 내 곁으로 오는 것만으로도 독에 녹아 죽는다."
탁옥룡은 그의 딱한 처지를 감안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겠지."
"그래서 강호땅을 밟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독기를 발산하지 않는 방법이라도 있소?"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쇄독관(鎖毒棺)에 들어가는 것이다."
묘중기인의 비교적 밝은 음성으로 말하자 탁옥룡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이 무엇이오?"
"독을 막는 옥으로 만든 관이다. 나를 그 안에 넣어 지고 다닌다면, 나는 독으로 남을 해하지 않고 강호를
돌아다닐 수 있다."
묘중기인의 눈빛에는 간절한 하소연뿐이었다.
"제… 제발 부탁이다. 옥룡천자만 죽일 수 있다면 나의 영혼을 네게 맡기겠다."
"굳이 내게 부탁하는 이유가 뭐요?"
"당연하지 않은가? 세상에서 단 한 사람 너만이 나의 독기를 벗하고도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탁옥룡의 반응을 기다렸다.
탁옥룡은 고민 고민하다가 입술을 벌렸다.
"왜 여기 머물며 마궁도를 끌어들였는지 말해 준다면 관을 지고 옥룡천자에게로 인도해 주겠소."
묘중기인의 표정이 더욱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 그것은 묻지 말아다오."
"할 수 없군. 그냥 떠날 수밖에!"
탁옥룡은 아주 비정하게 말했다.
"제… 제발! 이제부터 주인으로 섬기겠으니 제발 이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시오!"
묘중기인은 애절하게 말하며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천령개에 댔다. 그는 눈에서 독광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머리통을 치며 동부 안은 시독에 젖게 되오. 주인 또한 무사치 못할 것이오."
"하하……, 협박은 통하지 않소. 왜냐하면 내가 바로 혈영금강마공의 주인이기 때문이오."
"으음……!"
묘중기인이 좌절하여 고개를 떨구자 탁옥룡은 그제서야 진심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대를 운반해 준다는 부탁은 들어주겠소."
"정… 정말이십니까?"
"하하……, 그대의 용맹함이 나를 기쁘게 했소. 강호에 나와 만난 사람 중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 바로 그대요.
얼굴이 흉하다는 것도 나와 흡사하고 말이오."
"허허……, 이를 일컬어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하는구료, 주인!"
묘중기인은 그제서야 얼굴을 활짝 펴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그의 표정은 아주 순박했다.
탁옥룡은 그런 모습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비밀이 많은 듯한데…….'
콰르르― 릉―!
대별산 전역이 뒤흔들렸다. 천시대묘에서 큰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시독으로 가득 찬 무림의 금지 천시대묘는
그렇게 사라졌다.
등에 커다란 옥관(玉棺)을 진 추면청년 하나가 아주 빠른 속도로 대별산 기슭을 지나치고 있었다.
"괜찮소?"
그가 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허허……, 아주 편하오. 주인의 경공은 천하제일이라고 서슴없이 칭찬하고 싶소."
관에서 들리는 대답이었다.
"하하……, 한 열흘 궁리하면 그대의 시독이 외부로 발산되는 것을 막아낼 비법을 생각해 낼 자신이 있소.
그때까지만 참으시오."
"허허……, 주인 말만 믿겠소."
"일단 금릉(金陵)으로 가봅시다. 그대에게 기름진 음식 맛을 보여 주겠소. 그대가 여태 먹고 살던 독사(毒蛇)와
지네보다 훨씬 맛있을 것이오."
추악한 청년은 웃는 목소리로 말하며 아주 멀리 사라져 갔다.
2
금릉성(金陵城:;지금의 남경(南京))이 타고 있다. 불에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노을에 타고 있었다.
곱게 그려진 단청(丹靑)과 고루(高樓)에 이어지는 거각(巨閣)의 행진은 눈을 아찔하게 만들 정도였다. 세상의
모든 화려함이 운집된 것이다.
금릉성을 한 바퀴 돈다면 천하의 문물을 거의 다 볼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미기(美妓)도 있다. 누각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 안에서 웬 아름다운 여인이 생긋 웃으며 손짓을
한다면 그곳이 바로 기루(妓樓)다.
마방(馬房)도 무수했다. 그곳은 쾌활림(快活林)으로 인간세상의 풍류가 있는 곳이다.
표구( 九)로 수십만금(數十萬金)을 날리는 사람, 마작(麻雀)으로 수천금(數千金)을 따 주머니를 불룩히 하며
희희낙락해 하는 사람이 교차되는 사람이 가득하다.
모두 활기에 차 있었다.
강남(江南)에는 말(馬)이 그리 많지 않다. 예로부터 남선북마(南船北馬)라고 하지 않던가.
수나라 때 운하가 개설된 이후 그런 이치는 모든 사람에게 통했다. 수로(水路)는 성내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고, 커다란 배라 해도 무난히 오고 갈 수 있었다.
범선이 왔다 갔다 하고 상인배들의 물건 파는 소리가 매우 요란한 저잣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이때 멀찌기서 인파가 갈라지며 괴인 하나가 들어섰다.
그는 한 번 보는 것으로도 깜짝 놀랄 대상이 되었다. 너무도 기괴한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저럴 수가……!"
"세상에……?"
사람들은 그를 보는 순간 하던 일을 멈췄다.
"관… 관을? 저렇게 큰 관을 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니……."
"와… 옥관(玉棺) 하나만으로도 저 사람은 부호(富豪)다."
사람들이 놀라는 이유는 괴인 때문이라기보다 그의 등에 메어져 있는 아주 거대한 옥관 때문이었다. 관의 길이는
구 척에 달했다. 매우 무거워 보이는 강옥(鋼玉)으로 되어 있었다.
관을 지고 아주 유유히 걷고 있는 사람은 홍삼을 걸쳤고, 방갓을 깊숙이 눌러써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관 이외의 소지품으로 고검(古劍) 한 자루가 있었다. 고검 끝에는 붉은 수술이 매달려 불어오는 바람이 표표히
흩날렸다.
그는 사람들의 주위를 끄는 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걸어갔다.
그는 왕궁(王宮)의 높은 다락과 창을 든 병사들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일단 시선을 멈추었다.
"타초경사(打草驚蛇)의 누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삼경을 택해 오모(吳謀)를 찾자."
그는 휘휘 주의를 둘러보다가 높은 누각 하나를 발견했다.
누각의 화려함은 근처 일백 장 안에서 최고였다. 누각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비단옷을 걸친 장한 넷이 지나는 행인들을 유심히 살피다가 돈줄이나 있어 보이면 냉큼 다가가 소매를
잡아끌었다.
"헤헤……, 월향(月香)이가 오늘 비번입니다. 하지만 손님이 원하신다면 월향이가 얼른 목욕을 하고 나올
것입니다."
상대에 따라 하는 얘기도 틀렸다.
"오늘 새벽 장안(長安)에서 온 아이가 있습니다. 아직 남자 맛을 못 본 싱싱한 아이입니다. 금자를 한 닢만 더
쓰신다면…… 헤헤, 오늘밤은 그 아이와 더불어 보내실 수 있습니다."
"호걸, 예로부터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궁둥이 큰 아이, 가슴이 풍성한 아이, 늘씬한 아이,
얼굴이 갸름한 아이, 발이 작은 아이 등 모두 다 있습니다."
호객을 하던 장한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으며 침방울을 튀기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큼지막한 관 하나를 지고 다가서는 홍의괴인이 보였다. 그는 묵직해 보이는
관을 지고서도 휘청거리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기루 앞에 이르렀다.
"후후……, 어느 파 무인인지 모르나 시비를 일으키려 하다가는 낭패를 당할 것이오. 본루는 막강한 호원무사(護
院武士)를 갖고 있소. 더욱이 관부(官府)와 손이 닿아 있소."
가슴에 칼을 안은 황의대한 하나가 바짝 다가서며 하는 말이었다.
"흠, 돈을 받고 술과 음식을 파는 곳이 아니란 말인가?"
홍의괴인의 목소리는 아주 냉막했다.
'으음, 얼음굴 속에서 살다 나온 놈인가?'
황의대한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다시 말했다.
"시비를 일으킬 작정이 아니란 말이오?"
"물론이다. 너와 같은 졸개와 싸워 무슨 낙이 있겠느냐?"
"졸… 졸개?"
황의대한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흐흐……, 보자보자 하니 못하는 말이 없군. 어디서 굴러먹던 뼈다귀인지 모르나, 흐흐……. 군방기루(群芳妓
樓)의 일검사(一劍士) 앞에서는 수작이 통하지 않는다!"
그는 노갈을 토하며 칼을 쳐들었다.
쐐애액―!
푸른 도기가 일어났다. 방갓이 반으로 갈라지고 그와 동시에 신비인의 얼굴이 반으로 쪼개질 듯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어엇?"
황의대한은 손을 고정시킨 채 입을 딱 벌렸다.
그는 칼을 내리치다가는 벌레에 물린 듯한 따끔함을 느끼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형(大兄)―!"
"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장한들이 근처로 다가섰다.
황의대한은 빳빳이 굳은 채 가쁜 숨을 토했다. 혀마저 굳어버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한 중 점혈법에 약간의 조예를 갖고 있는 자가 그의 혈도를 만져 보았으나 허사였다. 황의대한은 남이 자신의
몸을 만질 때마다 오만상을 찌푸렸다.
모두 귀신에 홀린 표정을 할 때였다.
"쯧쯧……, 북쪽 지방에 갑자기 마귀에 홀려 몸이 딱딱하게 변하는 고질병이 돈다는데 벌써 금릉성까지 퍼졌군."
홍의인이 중얼거리듯 하는 말소리였다.
"대협, 이… 이런 일에 대해 아십니까?"
"이 분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시고 부디 회생할 수 있는 처방을 일러 주십시오."
"제발 한 목숨 살려 주십시오!"
장한들이 관을 멘 홍의인 곁에 모여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자 홍의인은 지나가는 말처럼 운을 뗐다.
"글쎄, 말오줌에다가 닭똥 마른 것을 섞어 먹인다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
"말… 말오줌에다 닭똥이요?"
모두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다.
"늙은 말의 오줌이어야 하고, 백 리를 쉬지 않고 달린 다음 눈 오줌이어야 한다네. 닭똥도 보통 것이 아니라,
신발에 백 번 밟힌 것이라 지신(地神)의 숨결이 작용해 효험이 있다고 하네."
홍의인의 괴이한 처방에 모두들 인상을 찡그렸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허어, 정말 이상한 묘방이로군요."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사양치 못하고 잡는 법이니 시험해 볼 수밖예요."
장한들은 머리를 조아리고는 말오줌과 닭똥을 구하느라 부산히 뛰어다녔다.
홍의인은 피식 웃다가 기루 안으로 들어갔다.
매파이기도 하고 뚜쟁이기도 한 중년여인 하나가 월동문(月洞門) 아래를 지키고 있다가 그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히익, 관… 관을 지고 오다니 실성한 놈이 아니냐?"
"하하……, 귀빈을 푸대접하면 되는가?"
홍의인은 차분히 말하며 소매를 흔들었다.
그의 소매 속에서 큰 대추만한 야명주(夜明珠) 세 개가 떨어져 나왔다. 돈이라면 귀신에게 멧돌질을 시킨다고
하지 않는가.
"호호호……,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중년여인은 너무 황송해 몸둘 바를 몰랐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야명주 하나라도 건질까 갖은 방책을 떠올렸다.
홍의인은 잠시 있다가 냉정히 말했다.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이……. 아니, 금릉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이 하나를 부르게. 이 주루에 그런 아이가
없다면 다른 곳에서 임시로 빌려 와도 좋네. 일각 안에 금릉 제일미인을 내 앞에 대령시키면 그 모두 자네 것이
될 걸세."
"호호홍……, 자신 있습니다요. 왕가 공자님들도 한 번 보고 반하는 아이가 하나 있습지요."
중년여인은 보석 세 알을 재빨리 주워 들고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갔다. 평생 이런 횡재는 처음이었다. 야명주 세
알의 가치는 군방기루 한 달 수입과 맞먹을 정도였던 것이다.
잠시 후, 준비를 마친 듯 중년여인이 허겁지겁 달려와 절을 넙죽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인도하게."
중년여인은 그 뚱뚱하고 굵은 허리를 애써 숙이며 월동문을 지나 회랑(回廊)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띵― 띵!
비파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그리고 아름다운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나홀로 연화(蓮花)를 사랑하니
진흙에 나서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고 아름답기 때문이며,
맑은 물결에 씻기어 간사해 보이지 않음이라.
가운데는 허전하나 밖은 곧기 때문이고,
덩굴도 없고, 향기가 멀리 퍼져나가 좋고
우뚝 솟으나 소박하기 때문이며,
아……, 멀리서 볼 수는 있으되 가깝지 않아 만져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진흙에서 피어나 맑고 탐스러운 꽃송이를 피우는 연꽃을 노래한 애련가(愛蓮歌)였다.
하지장(賀志章)의 말탄 모습은 흔들흔들 배탄 모습이며,
술 취한 눈빛이 몽롱하니 샘에 떨어져 물 속에 그냥 잠든다,
여양왕(汝陽王)은 서말 술을 마시고서야 정사를 돌보니,
길에서 누룩만 봐도 군침이 도네.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가 어떤 기녀의 입에서인지 흥취 있게 불려졌다.
홍의괴인은 비파음에 고개를 끄덕 끄덕거리며 중년여인을 따라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는 많은 방문을 지났다. 갈수록 더 깊어졌고 더 화려해졌다.
홍의인은 관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는 관을 비스듬히 세워 들고 중년여인을 따라가는데 누군가와 얘기를 하는지
간간이 입술을 달짝거리곤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웃기도 했다. 남의 보면 꼭 미친 사람 같았다.
관 안의 시체와 말을 나누는 듯하던 홍의괴인은 주렴이 쳐진 방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춰 섰다.
"호호홍……, 저 안에 매화(梅花)가 있습니다."
중년여인이 눈을 찡긋거리며 관을 가리켰다.
"그것은 다른 곳에 두고 들어가시지요."
홍의인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이미 합의를 보았소."
"합의라니오?"
"후후……, 나의 친구는 독방에서 말술을 먹고 싶어하오. 그러니 큰 방 하나를 잡아 관을 넣어두고, 그에게 술
열두 동이만 갖다 주시오."
"관… 관에 사람이 있습니까?"
홍의인은 웃으며 관을 통로에 내려놓았다. 그는 관을 내려다보며 입 밖으로 말했다.
"내가 옮겨주지 않는다 해도 몇 장 정도는 갈 수 있겠지?"
"허허……, 염려 마시오. 주인, 그나저나 술 냄새 때문에 이십 년 간 잠자던 술벌레가 미쳐 날뛰고 있소이다
그려."
관에서 걸쭉한 목소리가 들렸다.
'윽, 사람이 누워 있다니……?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관에 누워 산단 말인가?'
중년여인은 오싹오싹 닭살이 돋는 기분이었다.
홍의인은 중년여인에게 몇 가지를 더 부탁한 다음 주렴을 젖히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보이는 것은 열여덟 폭 병풍이었다. 병풍 앞에는 양볼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십팔 세 어린 기녀 하나가
있었다. 활짝 핀 꽃보다 아름다운 꽃은 갓 벌어지는 꽃이다.
기녀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녀는 붉은 비단 옷에 황금 비녀, 그리고 보석 귀걸이를 하고 있는데, 품에 비파 하나를 안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이 꼭 한 폭의 선녀도였다.
짙은 지분냄새가 아쉬울 뿐이었다.
여인 앞에는 산해진미가 차려진 팔선탁 하나가 있었다. 방은 열 사람이 머물러도 넓다 할 방이었다. 그 방은
하룻밤을 빌리는데 백금이 들어 어지간한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지극히 호사스런 장소였다.
"흠……, 네가 매화냐?"
홍의인은 나직이 말한 다음 기녀 바로 앞에 가서 앉았다.
"예, 상공."
매화는 얼른 일어나 홍의인 곁으로 다가섰다. 전족한 발 탓인지 걸을 때마다 뒤뚱거리는 모습이 귀엽고
앙증맞았다.
"상공, 소녀가 상의를 벗겨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발 닦을 물이 곧 준비될 것이니 그 다음 술을 드십시오."
매화의 얼굴은 아주 아름다웠다. 화장을 하지 않는다 해도 절세미인이라 불릴 것이다.
그녀가 벌어들이는 돈은 커다란 상점 열 개가 버는 돈보다 많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몸 주인에게 가는 것일 뿐
매화라는 아이는 언제나 웃음을 파는 기녀일 따름이었다.
"하하……, 그런 시중은 필요 없다. 나는 삼경 즈음에서 떠날 것이다."
"밤… 밤을 새시지 않으시렵니까?"
"그렇다."
"그… 그럼 술도 드시지 않고 일을……."
매화의 아름다운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홍조 띤 모습은 아주 고혹적이었다.
"일이라니……?"
홍의인은 얼떨떨해 되묻다가 상황을 파악하고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사실은 그래서 온 것이 아니다."
"아니시라니요?"
매화가 놀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찾는 이유는 즐기려 함이 아니라 몇 가지 물을 말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하십시오."
"오상서(吳尙書)를 아느냐?"
순간 죽립 사이로 뻗어나오는 붉은 안광이 있었다.
매화는 그 눈빛에 접하는 순간 오싹한 공포심을 느끼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알…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고 있느냐?"
"그저께 오상서 댁의 호위무장(護衛武將) 하나가 와서 소녀와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그때 오상서 댁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탁옥룡은 사뭇 호기심이 일었다.
"이상한 일이라니?"
"그 분은 몹시 불만이셨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그 분이 최고 지위였는데, 강호고수들 때문에 마구간 하인 취급을
받게 되다시피 됐다며 오상서를 비난하셨지요."
"강호고수?"
매화는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옥룡궁(玉龍宮)이라 얼핏 들었습니다."
"흠……."
홍의인은 잠시 턱을 괴었다.
'내가 처치할 자는 옥룡궁도와 오상서, 그리고 가짜 현룡제다.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궁리해
봐야겠다.'
그는 죽립을 쓴 채 긴 상아젓가락을 놀려 상 위에서 고깃덩어리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매화는 그를 시중 들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 송구스러운 듯 손을 내밀었다가는 허탈히 떨어뜨렸다.
홍의인은 일각 동안 음식을 들었다. 그는 술 한잔을 따라 마시고는 매화를 바라봤다.
"너를 하루 취하는 값이 얼마냐?"
"보통…… 금자 열 냥입니다. 금릉에서는 제일 비쌉니다. "
"기녀의 수명을 얼마로 여기느냐?"
매화는 정말 괴상한 손님이라 생각했다. 어린 나이부터 기루에 몸을 담았지만 이토록 괴이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서른이 되기 전 끝나지요."
홍의인은 가볍게 끄덕이다 다시 술을 한 잔 따랐다.
"나가서 네 몸주인 되는 자를 불러 와라."
매화의 안색이 싹 변했다.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나 싶어 교구를 파르르 떨었다.
"예에……?"
"하하……, 시키는 대로 해라.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다."
"예, 상공."
매화는 겨우 안도하며 얼른 걸어나갔다.
한식경이 못 되어 살이 찌고 키가 아주 큰 젊은 건달 하나가 들어섰다.
평소 그는 금릉내에서 두려울 것이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옥관을 메고 방문한 홍의인의 대해 어떤 귀띔을
받았는지 사뭇 공손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들어오게!"
홍의인은 차갑게 말하며 소매를 흔들었다.
순간, 도저히 항거하지 못할 진기의 힘이 장한의 몸뚱이를 팔선탁 앞으로 오게 했다.
"으윽……, 전설로만 듣던 능공섭물공(凌空攝物功)? 절세고수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절기인데……?"
그는 사색이 되어 얼른 꿇어앉았다.
"소… 소인은 아무 죄도 없소이다. 고아 아이를 데려다 배불리 먹여주고 옷 잘 입혀 준 죄밖에는 없소이다.
소인은 아직 매화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않았소이다."
홍의인은 손을 내저었다.
"죄를 묻자는 것이 아니다."
"그… 그럼 어인 일로?"
"매화를 내게 팔아라."
장한은 느닷없는 요구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홍의인과 매화를 번갈아 보았다. 매화 역시 황당한 모습이었다.
홍의인은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보였다.
"오만 냥을 주겠다."
"오… 오만 냥……?"
장한은 입을 딱 벌렸다. 너무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것은 군방기루 모든 기녀들의 몸값보다 많았다.
"이 자리서 주겠다. 어서 대답해라."
홍의인의 손에는 용안만한 구슬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화… 화룡신주(火龍神珠)!"
장한은 재물에 밝는 자답게 보물을 알아보는 눈을 갖고 있었다. 그는 눈알이 휘둥그레져 얼른 허리를 숙였다.
"헤헤……, 팔겠습죠. 이것은 십만 냥 값이니…… 거스름돈 오만 냥은 곧 갖다 드리겠습니다."
그는 황송해 하며 넙죽넙죽 절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
"예에?"
홍의인은 아주 괴상한 주문을 했다.
"대신 내일 새벽 관을 있는 대로 사 모아서 왕궁으로 보내라. 그러면 네 몫은 하는 것이다."
"관을 말입니까?"
장한은 기뻐하다가 두려운 눈치가 되었다.
홍의인은 냉혹히 코웃음 치며 손가락 하나를 튕겼다. 장한은 반신이 뻣뻣해짐을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홍의인의 음성이 차가워졌다.
"토설하거나 하면 제명에 죽지 못한다. 그렇게 알고 가봐라."
"아…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헤헤……, 소인은 이래봬도 입이 무거운 놈이올시다. 보물과 사람을
알아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습지요. 헤헤……, 혈영마협이심을 이제야 알아본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장한은 아랫도리를 후들후들 떨며 화룡신주를 내려놨다.
그는 강호의 식견에도 제법 밝은 자였다. 홍의인의 복장과 죽립, 그리고 보검을 보고 상대의 정체를 간파한
것이다.
홍의인은 옆으로 돌아앉으며 술잔을 쥐었다.
"왜 그것을 내려놓느냐?"
"헤헤……, 이것이 아무리 귀하다 한들 신외지물(身外之物)이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받지 않고 대협을 도와
훗일 명예를 얻고, 헤헤…… 있는 재물이나마 풍족히 쓰며 살겠습니다."
"하하……, 역시 사람은 문화가 풍부한 곳에서 커야 하겠군."
활달하게 웃는 홍의인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그의 소문은 강호전역까지 상태였다. 기루의 주인까지 그를 알아볼 정도였다. 그는 장한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혈… 혈영마협이란 분이십니까?"
매화가 벌벌 떨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렇다."
매화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 소녀가 천하제일인을 뵙게 될 줄이야. 이제껏 혈영마협이란 분에 대한 소문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소녀의 소원은 얼굴을 한 번 뵙는 것이었습니다."
탁옥룡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내 얼굴은 보지 않는 것이 낫다. 아주 추악하기 때문이다."
"그…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사내의 모습이란 아름다움보다 강인함에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보지 않는 것이 낫다."
매화는 간절함이 깃들은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찮은 기녀의 청이라 거절하시는군요?"
탁옥룡은 술잔을 내려놓고 몸을 돌려 앉았다.
"고집이 센 아이구나. 정히 보고 싶다면 마음을 단단히 먹거라!"
그는 천천히 방갓을 벗었다.
"으음……!"
매화의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뭉그러졌다 할 수 있는 추악하고 살기에 찬 얼굴이 그녀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이제 만족하느냐?"
탁옥룡은 조소를 짓고는 다시 방갓을 썼다.
매화는 눈시울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했다.
"미… 미천한 소녀를 벌해 주십시오."
"괜찮다. 정히 죄값을 하고 싶다면 조금 후에 나와 함께 오상서의 집까지 가자. 나는 금릉의 지리에 밝은 사람
하나가 필요하다. 그래서 너를 산 것이다. 너는 내일부터 양민이 될 것이니 이것을 갖고 새 삶을 시작하도록
해라."
탁옥룡은 장한에게서 돌려 받은 화룡주를 매화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 손이 너무도 아름다우십니다. 무사들의 손은 보통 이렇지 않은데."
매화는 그의 손을 꼬옥 쥐고 뺨에 갖다댔다. 그녀의 뺨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3
초경의 저녁은 어둑어둑했다.
탁옥룡은 언제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자음자작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매화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탁옥룡을 따라 술을 마시다가 그만 취해 얼굴을 홍시감 마냥 붉게
물들이게 되었다.
탁옥룡은 그녀가 술에 취하는 것을 만류하지 않았다. 아무리 고주망태가 되었다 한들 자신의 일지로 맑은 정신을
되찾게 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매화는 비파를 안고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황운(黃雲)이 이는 성벽 모퉁이에 까마귀가 날아들어
가지 위에 홀로 앉아 깍깍 소리를 내네.
베를 짜는 장안성의 아가씨.
연기 같은 장막 너머 정든 사람의 목소리를…….
매화는 자신의 지나온 세월에 대한 설움이 복받치는 듯 태백(太白)의 오야제(烏夜啼)를 다 읊지 못했다.
탁옥룡이 주흥이 일어 나머지 부분을 대신했다.
꾸냥은 베짜던 손을 놓고 정랑(情郞)을 그리워하며
외로이 독수공방(獨守空房)하니 베게에 눈물이 떨어진다.
그가 시를 맺자 매화는 놀라 술기운을 잃을 정도였다.
"아……, 이제 보았더니 문장(文章)도 대단하시군요?"
살인광마로만 소문난 혈영마협이 아닌가. 그의 가슴속에 수만 권의 시부가 암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하하……,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해 놀라는구나?"
"아… 아니옵니다, 너무도 잘 어울리십니다."
"훗훗……, 그렇다니 고맙다."
"소녀는 사내들을 잘 압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람은 못 보았습니다. 아니, 이제야 처음 보았습니다."
매화의 눈빛은 영롱한 빛을 발하며 영혼을 빨아들였다.
"소녀에게 소청이 있습니다."
"뭐냐?"
"소녀를…… 안아 주십시오. 대협의 품에 안겨 보고 싶습니다. 대협은 냉혈한이 아님을 알기에……."
탁옥룡은 붉게 달아오른 매화의 양볼을 응시했다.
"내가 두렵지 않느냐?"
"가까이 하고 싶을 뿐입니다."
매화는 다소곳이 일어나 탁옥룡 곁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팔이 탁옥룡의 어깨 위에 둘러졌다.
'비단결처럼 부드럽구나. 옛날 수운이 손도 이랬었지.'
탁옥룡은 긴장감을 느꼈다. 여색을 경계하는 것은 어떤 고수가 되는 것보다 더한 두려움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매화를 뿌리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는 일부러 냉정해지려
하며 매화의 볼을 어루만졌다.
매화는 그의 앞으로 돌아와 무릎 위에 걸터앉았다.
"아……, 상공!"
매화는 교태가 뚝뚝 떨어지는 콧소리를 내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탄력 있는 젖가슴이 주는 기분이
묘하게 가슴을 진동시켰다.
탁옥룡이 그녀를 어찌할까 할 때였다.
"허허……,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면 의당 정성을 다해야 하는 법이고 언제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어디선가 걸쭉한 목소리가 들렸다. 탁옥룡의 귀에만 들리는 목소리였다. 옆방에서 들리는 전음집밀 소리인데 바로
묘중기인의 목소리였다.
"술맛이 좋소?"
탁옥룡도 전음으로 응수했다.
"꿀맛 이상이오. 주인, 이제부터 귀머거리가 될 것이니 체면 차리실 것 없소이다."
"하하……, 내가 여색에 끌릴 사람 같소?"
"주인,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상처를 준 사람이 있고, 특히 여인을 싫어하는 사람 뒤에는 너무나도 큰
상처를 준 여인이 있는 법이지요."
인간사의 진리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탁옥룡에게는 큰 상처를 준 여인이 하나 있다. 그의 목에 지인(指印)을 남긴 여인이 그 여인이다. 목의 상처는
점점 희미해져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혼에 남긴 상처는 지울 수 없다.
탁옥룡의 몸은 차게 식어 갔다.
매화는 그것을 느꼈는지 얼굴을 그의 가슴에서 떼어냈다.
"소녀가…… 싫으십니까?"
"아니다, 너는 곱다. 사내라면 모두 너를 좋아할 게다."
"그… 그럼 소녀가 더러운 여인이라……."
"너의 심성은 청초하다. 기녀이나 더럽혀지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안다."
탁옥룡은 매화를 가볍게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벽 쪽을 향해 말했다.
"삼경에 가나 지금 가나 마찬가지일 것이니 어서 떠납시다."
"허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외다, 주인.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삼매진화(三昧眞火)로 시독(屍毒)을 태운
다음 주인 곁으로 가겠소."
묘중기인은 큰 소리로 대답하며 파공성을 냈다.
잠시 후, 군방기루가 떠들썩해지더니 탁옥룡의 방 오른쪽 벽에 큰 구멍이 나며 옥으로 만든 관이 저절로
날아들었다.
"아악?"
매화는 자지러지게 놀라며 탁옥룡의 목에 매달렸다.
탁옥룡은 그녀를 안아들며 탁자 위에 풀어놓았던 혈섬고검(血閃古劍)을 쥐었다.
"쇄독관(鎖毒棺)을 험하게 다루더라도 이해하시게."
"허허……, 염려 마시오."
탁옥룡은 술값으로 금자 열 개를 꺼내놓고는 오른발을 들어 원앙각 수법으로 쇄독관을 걷어찼다.
콰앙―!
쇄독관은 막강한 힘에 의해 천장을 뚫고 날아올랐다.
"하하하……!"
탁옥룡은 크게 웃으며 관을 쫓아 비상했다.
밖은 아주 어두웠다.
탁옥룡은 일부러 그믐을 택해 금릉에 왔던 것이다. 군데군데 불야성(不夜城)이 되어 있는 주루와 기방이 있기는
했으나 거의 모든 곳은 어두웠다.
그는 쇄독관을 팔과 허리 사이에 끼고 허공을 가로질렀다.
매화는 아연실색했으나 그런 기색을 숨겼다. 그녀는 간간이 손짓을 해 방향을 가리켰다.
탁옥룡은 훌훌 날다가 금릉의 남쪽 부근에 이르러 사뿐히 떨어져 내렸다. 그는 숲 안으로 박쥐같이 날아든 다음
관을 내려놓았다.
"묘노인(墓老人)이 할 일은 상서를 비호하는 마궁도들을 하나도 살려 보내지 않는 것이오."
"염려 마십시오."
"그럼 계획한 대로 일을 처리합시다."
탁옥룡은 관을 보며 말하다가 매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이제 떠나거라."
"소녀는 떠날 수 없습니다."
매화의 대답이 아주 의외스러웠다.
"떠날 수 없다니?"
"대협의 시녀로 남겠습니다. 그것을 거절하시려면, 차라리 소녀를 이 자리에서 죽여 주십시오."
"곤란한 이이로군."
탁옥룡이 낭패를 할 때였다.
"허허……, 험상궂은 혈영마협의 시녀가 되기보다는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나의 옷도 빨아주고
밥도 지어준다면, 내 쾌히 네게 절기를 전수해 삼 년 내로 여인 중 최강자로 만들어 주겠다."
묘중기인이 관 뚜껑을 열고 일어섰다.
"아앗!"
매화는 그의 썩은 얼굴을 보고 사색이 되다가 급기야 혼절하고 말았다.
묘중기인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쯧쯧……, 그런 담력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려 하느냐?"
탁옥룡은 묘중기인을 보고 나직이 감탄했다.
"독기가 한결 감소되었구료?"
"주인을 따르고 나서부터는 이상하게 독기가 외부로 나가지 않습니다. 실내라면 다른 사람에게 시독을 전파할
것이나 이곳은 탁 트인 곳이라 그런 우려가 없습니다."
"거참……, 이상한 일이군."
탁옥룡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뼉을 탁 쳤다.
"하아, 그렇군."
그는 붉은 장포를 벗어 들었다.
"바로 천잠보의(天蠶寶衣) 때문이오. 이 옷은 피독(避毒), 피화(避火), 피수(避水)의 보물이지요.
묘노인에게 선사하겠소. 더 이상 시독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오오……!"
묘중기인은 뭉그러진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보면 볼수록 다정다감하다. 누가 이 분을 마도거마라 하겠는가? 협객으로 불려도 부끄럽지 않다. 과거의 나라
해도 남을 위해 이러지는 못했을 것이다.'
묘중기인은 감격에 젖어 눈시울을 붉혔다.
"주인, 감사히 받겠습니다."
탁옥룡은 홍삼 대신 흰 단삼(短衫) 차림이 되어 미소 지었다.
"어전대장군(御前大將軍)의 차림으로는 어색하니 오자춘(吳子春)이란 간신의 집에 들어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적당한 옷을 꺼내 입는 일 같소."
그는 드물게 농을 던지고는 묘중기인의 어깨를 툭 치며 위로 날아올랐다. 그의 쾌속한 신법은 묘중기인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묘중기인은 풀밭에 쓰러져 있는 매화를 내려다보고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근골이 의외로 괜찮군. 한번 제자로 키워 봐?"

第十章 금릉성의 피바람(血風)


1
금릉성 중앙에는 궁궐을 방불케 하는 장원 한 채가 서 있다. 그곳은 지금 병권(兵權)을 비롯해 정사의 대권을
쥐고 있는 오자춘의 권속들이 머물러 있는 곳이다.
오자춘은 검을 차고 황제의 방을 출입하는 세력가로 유명했다. 그는 현룡제의 태사(太師)라고도 했다.
현룡제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그것은 수렴청정과 비슷한 정도였기에 진짜 황제는 오자춘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의 거처는 장원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
그곳은 아주 밝았다. 서른여섯 군데에 기름불이 타오르는 거대한 청동화로가 있고, 화로마다 무사 열두 명이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보초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숨어 있는 저들의 수는 나타나 있는 사람들에 비해 열 배 많았다. 그 중에는 전설적인 무명을 날리던 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모두 호시탐탐한 눈길로 잠입자가 있나 없나를 살피는 중이었다.
"포달랍궁의 혈수나찰이 오상서의 목을 노리고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회남왕부에서도 자객(刺客)이 올지 모른다!"
간혹 경계하는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러나 일천 호위병은 지금 눈 뜬 장님 신세였다.
한 사람이 유유히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화원의 그늘과 처마 밑을 이용해 누구에게도 모습을 들키지 않고
계속 깊숙한 곳으로 움직여 갔다.
바로 오가장원을 월장한 탁옥룡이었다.
그는 주룡령기(朱龍令旗)의 권력을 수여 받은 어전대장군의 자격으로 조정(朝廷)을 위태롭게 하는 간신배를
죽이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진짜 적은 간신이 아니라 옥룡마궁이었다.
'금릉에 있는 마궁도들이야 말로 가장 무서운 자들이다.'
탁옥룡은 한 걸음 한 걸음에 주위를 기울였다.
얼마 후, 그는 장원 안의 금역(禁域) 근처에 이르렀다.
금역의 담장은 아주 높아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담 아래에는 호성하(護城河)가 파여 있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살기는 다른 곳에 비할 수 없이 강했다.
'임독양맥(任督兩脈)이 트인 고수 열여덟 명이 숨어 있다.'
탁옥룡은 살기를 느끼고 근처를 예리하게 주시했다.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신안(神眼)의 소유자답게 그는 숨어 있는 자들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마궁 특유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복장으로 미루어 모두 자삼대(紫衫隊) 소속임을 알 수 있었다.
우두머리는 아주 냉막하게 생긴 백발노인이었다. 그는 큰 나무 아래 숨죽이고 앉아 침입자를 철통같이 경계하는
중이었다. 백발노인의 옷은 흑색이었다.
'십팔천강검진(十八天 劍陣)이다.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소리를 낸다면 이곳이 순간적으로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워진다.'
탁옥룡은 지형을 살피다가 손을 머리 뒤쪽으로 가져갔다. 그의 손에 잡혀지는 차가운 물건이 있었다.
마왕잠(魔王簪)!
마왕동주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이며 동시에 마왕동의 열쇠가 되는 물건이었다. 그것은 탁옥룡이 출관하며 취해
이제껏 머리 뒤쪽에 꽂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회천유성비(廻天流星飛) 수법을 쓴다면 감쪽같이 해치울 수 있다.'
그는 마왕잠을 손에 쥐고 한 가지 구결을 외웠다.
그것은 어검비기(馭劍飛技)이기도 했고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암기술이기도 했다.
탁옥룡의 손이 혈수로 물들 때 마왕잠이 아주 경미한 파공성을 내며 허공으로 발출되었다. 미세한 파공음은
내가고수들의 이목을 뛰어넘었다.
쐐애액―!
마왕잠은 날아드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든 자의 미간(眉間)을 향해 갔다. 아주 작은 소리와 함께 핏줄기가
뿜어졌다.
마왕잠은 살아 꿈틀꿈틀 움직였다. 모두 탁옥룡의 내가기공에 따른 움직임이었다.
팍― 팍!
마왕잠이 지나친 곳에는 미간에 동전만한 구멍이 난 시체들이 나뒹굴 뿐이었다.
"으윽……?"
우두머리인 흑의노인이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며 잔뜩 경각심을 높였다. 그러나 마왕잠은 이미 그의 미간
가까이 다가섰다.
피잉―!
이미 열일곱의 머리에 구멍을 낸 마왕잠이었지만 그 속도나 기세는 첫 번째 호위무사를 시체로 만들 때나
마찬가지였다.
흑의노인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이제 죽었구나, 라고 좌절할 따름이었다.
"됐다."
탁옥룡이 불쑥 나타나는 동시에 마왕잠이 기세를 잃고 그의 손아귀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마왕잠을 머리 묶음 속으로 끼우고는 흑의노인의 맥문을 거머쥐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으나
흑의노인으로서는 피할 기회를 찾지 못할 정도로 완전무결했다.
탁옥룡은 역천금나수(逆天擒拿手)로 노인의 내공을 제압한 다음 냉혹하게 물었다.
"오자춘은 어디 있지?"
"그… 그 분은 안에 계시다. 그러나 돌아가는 것이 좋다."
"선자불래(善者不來)다. 자신이 없었다면 담을 넘지 않았다."
"너… 너는 누구냐?"
"어전대장군이다."
흑의노인의 얼굴 근육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으음……, 진짜 현룡제가 도망쳤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의 명에 따라 왔느냐?"
"그렇다."
"흐흐……, 그러면 돌아가거나 항복하라. 오자춘은 괴수가 아니다. 그는 노부 앞에서도 벌벌 기는 자다."
탁옥룡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무슨 소리냐?"
"우리는 국법을 따르지 않는 강호고수들이다. 너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를 테지?"
흑의노인이 자신만만히 말하자 탁옥룡은 냉막하게 말을 받았다.
"옥룡마궁이겠지. 그리고 갈 곳은 지옥이다!"
흑의노인이 기겁할 때 맥문을 타고 그의 심장을 박살내는 한 줄기 막강한 진기의 힘이 있었다.
퍼억―!
노인의 눈알이 세 치 가량 튀어나오며 입술 사이에서 검붉은 핏물이 쏟아졌다.
탁옥룡은 그의 시체를 내려놓고 곧바로 날아올랐다. 유령처럼 유연하게 높은 담을 넘어갈 때였다.
"대단한 놈이나 오지 말았어야 했다!"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비도(飛刀) 두 개가 날아들었다. 하나는 흰빛이고 하나는 핏빛이었다.
피핑―!
두 자루 비도는 번개같이 빨리 짖쳐들었다.
"설혈쌍소도(雪血雙少刀)?"
탁옥룡은 비도가 가까이 날아들자 차게 내뱉으며 쌍지를 퉁겼다. 마왕동부의 십대절기 중 유화탈백지력(流花奪魄
指力)이었다.
따― 땅―!
두 자루 한철비도(寒鐵飛刀)가 쇳가루로 화해 사라졌다.
"으음……, 누구기에 지공으로 비도를 떨구느냐?"
기절초풍 놀라는 사람은 담으로 둘러싸인 별궁(別宮) 가운데 서 있는 거대한 전각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금포를
걸친 자로 위풍당당한 모습인데 피부색이 잿빛이었다.
"후후……, 금포로 보아 마궁구마(魔宮九魔) 중 하나겠군?"
탁옥룡은 웃으며 금포노인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금포노인은 전신을 베는 강렬한 마기에 눌려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누구냐? 보통 자객은 아닌데?"
"오자춘을 죽이러 왔다. 그 자를 불러내라!"
탁옥룡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석문이 활짝 열리며 안쪽에서 다섯 사람이 걸어나왔다.
염소 수염을 기르고 호화로운 비단옷을 걸친 노인이 가운데 섰고, 그 양쪽에 금포노인 하나씩 섰다. 앞뒤에는
은포노인이 호위했는데, 모두 내가고수들이었다.
그들의 우두머리 되는 자는 오른쪽의 금포노인이었다.
"환존(幻尊), 그 자는 혈영마협이네. 홍의 대신 백의를 걸쳐 몰라볼 뿐이지."
오른쪽 금포노인의 담담한 말이었다. 그는 혈존(血尊)이라는 자였다.
옥룡마궁 태상호법인 독존의 결의형제(結義兄弟)이며, 과거 천혈신마강기(天血神魔 氣)라는 사문기공(邪門奇
功)으로 천하를 피로 씻던 자였다.
그는 소림사 원결(圓結)에 의해 제명당했는데, 십육 년 전 자삼대 고수들을 이끌고 소림사 안으로 들어가 살풍을
일으키고 나온 자이기도 했다.
"흐흐……, 혈영마협이기에 이리도 강했었구나. 역시 명불허전이다.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불사신답다.
철정향도 너를 죽이지 못했고, 네가 천시대묘에 나타나 혈작약을 두렵게 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환존은 동료들이 나타나자 한결 안도가 되는 듯 여유 있게 말하며 혈존 곁으로 다가갔다.
"기인 어르신네들 꼭 저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헤헤……, 그래야 이 오자춘이 매달 금 백만 냥씩을 축융봉(祝融
峰)으로 보낼 수 있지 않겠소이까?"
비단옷을 걸친 노인이 염소 수염을 비비꼬며 하는 말이었다.
"네가 오자춘이냐?"
탁옥룡이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렇다."
오자춘은 금포노인들의 무서운 위력을 알기에 한껏 오만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구나!"
탁옥룡이 손바닥을 펴자 홍광이 일어났다.
"주… 주룡령기?"
"으음……, 현룡제를 구한 사람은 일심검제(一心劍帝)라고 알았는데 네놈이었더냐?"
"네놈이 주룡령기를 쥐고 있다니!"
모두 크게 놀라워했고 한편으로는 득의만면해 했다.
"흐흐……, 함정으로 들어와 목을 바치는 것도 고마운데 그 귀한 주룡령기마저 두 손으로 바치다니 가상하기만
하다."
혈존이 제일 기뻐했다.
탁옥룡은 피식 웃다가 차게 말했다.
"후후……, 너희 모두 죽는다. 감히 국사(國事)에 끼여들어 강호인들의 청빈함에 먹칠을 한 죄는 죽음으로밖에
씻을 수 없는 것이다."
"어리석은 놈! 옥룡궁의 진짜 고수는 천자가 아니고 구존임을 아직도 모르느냐?"
혈존이 눈을 부릅뜨자 탁옥룡은 냉소를 치며 주룡령기를 치켜올렸다.
"흥, 그래서 도(刀), 개( ), 묘(妙) 삼존(三尊)이 수하고혼(手下孤魂)이 되었더냐?"
주룡령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암기가 되어 혈존의 목을 향해 폭사되었다.
"기다렸다!"
혈존은 크게 소리치며 쌍장을 뻗어냈다.
꽈르르르― 릉―!
혈영금강마공을 시전할 때와 흡사한 핏빛 기류가 일어났다. 웅후한 기류가 구룡령기를 완전히 뒤덮자 혈존의
입가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주룡령기가 허공을 가르는 낌새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네놈의 나이로는 노부만한 내공을 갖고 있을 리 없지. 얼른 주룡령기를 회수하자. 그 다음 오자춘을 죽이고
이곳을 떠나자. 주룡령기만 있으면 허수아비들은 필요 없다.'
그는 진기를 급히 회수하며 주룡령기를 취하려 했다.
순간, 한동안 사라졌던 파공성이 나며 홍광이 길게 늘어지며 섬광처럼 뻗쳐왔다.
"어엇……?"
혈존은 놀라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주룡령기가 자신의 강기를 뚫고 날아들기 때문이었다.
파파팍―!
그의 전신을 뒤덮던 핏빛 호신강기가 깨지며 혈선이 그의 목을 관통했다.
"케에― 엑―!"
혈존의 목에서 피보라가 일어났다.
주룡령기가 그의 목을 뚫고 나오며 토해지는 단말마의 비명 소리였고, 그가 최후로 질러보는 마지막 소리였다.
그의 시체가 허무하게 나뒹굴자 탁옥룡은 자신만이 뽑을 수 있는 혈섬검을 뽑아 들고 사위를 검강 안에 가두었다.
"환우멸절검(還宇滅絶劍)―!"
핏빛 검강이 수천 가닥 일어났다. 그물망처럼 교차되는 검강은 급속도로 축소되었다.
"허억!"
"이… 이런 신묘한 검술이 있단 말인가?"
모두 아연실색하다가 눈을 부릅떴다. 그들은 반격 한번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목잘린 시체가 되었다. 허공으로
네 개의 수급이 날릴 때 혈섬검은 이미 검집 안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십 년 이래 천하를 진동시키던 옥룡구존 중 다섯이 졸지에 사라진 것이다.
탁옥룡은 왼손에 주룡령기를 쥐고, 오른손으로는 오자춘의 뒷덜미를 쥔 채 훌쩍 날아올랐다.
"가짜가 있는 데로 가자!"
탁옥룡은 오자춘을 이끌고 비상하며 쇄금강후(碎金剛吼)를 펼쳤다.
"우우우―!"
그의 장소성이 오가장원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우르르릉― 꽈꽝―!
벼락치는 소리가 나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옷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악을 쓰는
모습이 도처에서 보였다. 개중에는 고막에서 피를 흘리는 자도 있었다.
"무… 무슨 일이냐?"
"누가 왔단 말인가? 사신(死神)이라도 왔단 말인가?"
아수라장과 함께 불야성(不夜城)이 시작되었으나 탁옥룡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후였다.
2
금릉성이 발칵 뒤집혔다.
어제까지 천하를 쥐고 흔들던 오자춘이 목 없는 시체가 되어 저잣거리에 버려진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체 곁에는 곤룡포를 입은 소년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그는 조용한 표정으로 죽었는데 얼굴은 아주 희었다.
오랫동안 빛을 못 봐 그리 희어진 얼굴인데, 그 정체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외람되게도 황제의 옷을 걸치고 죽어 있는 소년이 있다는데 놀랄 따름이었다.
세상이 한바탕 시끄러워졌다.
그러는 가운데 군방기루의 주인이 퍼뜨리는 소문이 있어 모든 사람이 또 한 차례 놀라야 했다.
― 오자춘은 혈영마협께서 처단했다. 간신배는 의당 죽어야 하지 않는가! 나는 혈영마협의 수하로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 분과 밀담을 나눈 바 있다.
그는 그 일로 인해 불량배 시절의 악명을 씻고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가 혈영마협의 이름을 팔고 다닐
때 혈영마협은 아주 먼 곳에 가 있었다.
3
도도한 회하(淮河)를 굽어보고 있는 토성(土城) 하나가 있었다. 그곳은 대낮이라 해도 항상 흑운(黑雲)에 잠겨
있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토성 가까이 가는 사람이라면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창해(蒼海)에 빠진 듯한 환각을 느낄
것이다.
만상대라절진(萬象大羅絶陣)!
토성은 그런 진세로 인해 보호되고 있었다.
가을, 어디를 봐도 붉은 단풍이다. 물마저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단풍림이 물 위에 비쳐 그런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하……, 바로 저곳이오."
어디선가 낭랑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천하에서 가장 추악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그의 치아는 백설같이 희었다. 손가락은 가늘고
길어 추악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옥관(玉官) 하나를 짊어지고 있는데, 옥관 위에는 머리를 궁장으로 틀어올린 미소녀 하나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주인께서 천하제일고수라는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하루 반 나절도 걸리지 않고 금릉에서 회하로 올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궁장미녀의 양뺨은 잘 익은 사과빛이었다. 아름다운 두 눈에는 생기(生氣)가 빛나고 있었다.
"허허……, 지난 밤 가짜 현룡제의 목을 베어 죽인 일은 이미 천하에 소문났을 것입니다."
관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이 음성이었다. 이들은 바로 탁옥룡과 매화, 그리고 정체불명인 묘중기인 일행이었다.
탁옥룡은 관 위에 매화를 앉히고도 무거운 기색 없이 아주 빨리 움직였다.
백관철구(百貫鐵球)를 발목에 차고 유사(流沙) 위를 걷던 경신법의 소유자였기에, 쇄독관과 몸매가 가는 매화를
함께 진다 해도 전혀 무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탁옥룡이 축지성촌술(縮地成寸術)로 다가갈 때였다.
"주인, 이제 돌아오십니까?"
어디선가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결이 아주 희고 눈이 큰 장한 하나가 청삼자락을 바람에 표표히 날리며 훌훌 날아들었다.
그는 탁옥룡 앞으로 떨어져 내리며 쌍장(雙掌)과 두 무릎, 그리고 반듯한 이마를 흙에 대었다. 바로 오체복지
(五體伏地)의 예의였다.
"오호……!"
탁옥룡은 준수한 청의장한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과거의 준수한 모습을 그대로 되찾다니 대체 그 사이 어떤 기연(奇緣)이 있었는가?"
"기연을 준 사람은 마의불수(麻衣佛手)였습니다."
말하는 청의장한은 바로 회회공자(回回公子)였다.
매화는 관 위에서 회회공자를 보고 은근히 얼굴을 붉혔다.
'아……, 기녀로 몸이 더럽혀지지 않았다면 나도 저런 미장부와 사랑을 나누어 봤을 텐데…….'
이심전심(以心傳心)이던가?
"주인의 재간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디서 저런 경성미인(傾城美人)을 찾았습니까?"
회회공자가 매화를 보고 아련한 눈빛이 되었다.
사랑은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법이다. 오랫동안 만나 이루어지는 정(情)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 사랑이다.
회회공자는 미인을 수없이 경험한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미인이라면 그에게 추녀로 보일 정도다. 그러나 매화가
주는 느낌은 다른 여인과 완전히 달랐다.
그는 인생 경험이 풍부한 사람답게 다른 사람이라면 알지 못할 매화의 뛰어남과 순수함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탁옥룡은 두 사람의 눈치를 알고 빙그레 웃으며 매화를 관에서 내리게 했다.
"이 아이는 매화라는 아이이고 천하삼기(天下三奇) 중 한 사람인 묘중기인의 의발전인이네. 자네가 매화를
데리고 개방의 임시 총단이 된 이곳을 자세히 구경시켜 주게."
탁옥룡은 매화를 그에게 맡기고는 지극히 빠른 신법을 시전해 개방 임시 총단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왔다는 소문이 난 후인지라 수많은 사람이 운집해 그를 기다렸다. 개중에는 못 보던 사람들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
상강어부(湘江漁夫) 염비(閻飛)!
세상이 싫어 낚싯대를 쥐고 상강의 어부가 된 무림기인(武林奇人)의 모습이 돋보였다. 그의 손에 쥐어진
낚싯대로는 비록 하늘에 걸린 달이라도 낚아챌 수 있다고 했다.
신주사의(神珠四義)!
옥룡마궁이 신주에 분타를 세운 이후 자취를 감춘 신주사의도 개방 사람들 틈에 끼여 있었다.
건곤신척(乾坤神尺) 이자량(李子良),
추혼필(追魂筆) 등운(鄧雲),
단소진팔황(短簫震八荒) 육발(陸發),
쌍환탄천(雙環彈天) 묵룡(墨龍).
이들이 회회단에 있게 된 데에는 혈영마협이 바로 개방 십절죽부령주(十節竹符令主)라는 소문이 멀리 퍼진
때문이었다.
어디 그들뿐인가?
일심맹(一心盟)이 삼고초려해 일심맹에 들기를 빌었으나, 일심맹의 부탁을 저버리고 훌쩍 떠났다는 일화를 갖고
있는 이사(異士) 다섯도 보였다.
수리백도(袖裏百刀) 당홍(唐虹)!
마궁에 멸망한 사천당문(四川唐門)의 후예로, 소매 속에 일백 개의 수리도를 감추고 있다는 천하제일(天下第一)
의 암기왕(暗器王)이다.
투심수(偸心手) 오방(吳方)!
맨손으로 두 자 강철을 뚫어버린다는 대마인수(大麻印手)의 소유자이다.
청면우사(靑面羽士),
귀면우사(鬼面羽士),
소면우사(笑面羽士).
일컬어 무림삼우사(武林三羽士)라 불리는 풍진이인(風塵異人)들도 보였다. 그들은 광개(狂 )의 제자 풍운신개
(風雲神 )와 더불어 결의형제를 맺었던 개방의 오랜 친구들이었다.
그들 모두 혈영마협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부분이 실망하는 눈치들이었다.
'안광이 너무 사악(邪惡)하다.'
'몸을 맡기기에는 부적당한 자다. 아……, 개방사람들의 과장된 말을 듣고 온 것이 실수인 듯하다.'
탁옥룡은 철수개(鐵手 )를 위시한 개방구장로( 九長老)의 영접을 받고 있었다.
"상방주(上 主)께서 마궁은 물론이거니와 포달랍궁마저 제압했다는 소문을 듣고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철수개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하는 말이었다.
"옥룡별부에서 상방주가 살해당했다는 낭설이 있었으나, 저희 개방도들 중 그 소문을 믿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하……, 사대이역단 중 최강의 고수라는 회회공자마저 수하로 거두셨으니 역시 상방주이십니다."
개방도들의 텁텁한 냄새는 인정미 넘치는 냄새였다.
탁옥룡이 그들과 몇 마디 말을 나눌 때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림인들이 다가섰다.
"허엄, 우리들은 이제 돌아가야겠소이다."
맨 앞에 선 사람은 수리백도(袖裏百刀)였다. 그 옆에는 투심수(偸心手)가 서 있었다. 그 외에도 칠십여 명이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철수개 쪽으로 와 언성을 높였다.
"이곳보다는 일심맹으로 가는 것이 나을 듯하오."
"죄송하게 되었소."
"개방을 원망하지는 않소. 다만 우리들이 귀가 얇아 여기 온 것을 후회할 뿐이오,"
군웅들이 언성을 높이자 철수개는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몰랐다.
탁옥룡은 대충 눈치를 채고 전음으로 물었다.
"갑자기 웬 고수들이 저리 많이 왔소?"
"마궁에 저항하며 유랑하는 무인들입니다. 몸을 의지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다가 혈영마협의 소문을 듣고 여기
온 사람들이지요."
"흠……!"
탁옥룡은 헛기침을 한 다음 철수개 곁을 지나 군웅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아직 관을 메고 있었다. 관을 메고 있기에 그의 모습이 더더욱 광마(狂魔)로 보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중인을 쓰윽 둘러보고는 천천히 말했다.
"어디서 어떤 말을 듣고 소생을 찾아 오셨는지 모르나 소생 때문에 개방을 미워하며 떠나게 할 수는 없소."
그의 말소리는 아주 청아했다. 그리 큰 말소리는 아닌데 못 알아듣는 사람도 없었다.
그의 안광은 강호에 갓 나왔을 때에 비해 말할 수 없이 담담해 보였다. 혈광(血光)은 거의 사라진 후였다. 이미
안광이 안으로 갈무리된 오기조원지경(五氣朝元之境) 이상의 경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소리에 실린 냉기만은 어쩔 수 없었다.
'음……, 무서운 인물이다.'
'옥룡천자마저 겁먹는 자라는 소문대로다. 다만 이 자의 마성(魔性)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군웅들은 그의 기도에 은근한 두려움을 느꼈다.
"하하……, 나 때문에 이곳을 떠나실 작정이라면 뜻을 바꾸도록 하시오. 왜냐하면 나는 본질적으로 개방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오."
군웅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는 말이었다. 특히, 철수개를 위시한 개방도들은 사색이 되었다.
탁옥룡은 그들의 마음을 헤아린 듯 빙긋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개방의 십절죽부령은 만천하가 공인하는 의협(義俠)의 자리요. 따라서 나는 의협이 되지 못하기에 서슴없이
이곳을 떠나려는 것이오."
모두 상대를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행여 탁옥룡이 노해 살수를 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혈영마협은 위험스런 인물이었다.
탁옥룡은 품에서 죽부 하나를 꺼냈다.
마디가 열 개인 죽부는 바로 천하에서 제자가 많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십만개방도들의 생사를 떡 주무르듯 하는
물건이었다. 개방도들은 십절죽부령이 나타나자 일제히 오체복지했다.
"조사(祖師) 참배!"
"개방만만세( 萬萬歲)!"
그들은 십절죽부령을 대하는 예절을 취하며 이마를 땅에 대었다.
탁옥룡은 영부를 쥐고 말을 이었다.
"이것은 나의 의형이신 광개(狂 )께서 내게 부탁해, 개방반도 개존( 尊)의 손에서 다시 개방으로 돌아오게 된
물건이오."
군웅들은 그 말에 약간 동요되었다.
"광개의 동생이란 말인가?"
"오……, 그렇다면 무림최고 배분이 아닌가?"
"광개의 의제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탁옥룡은 군웅들을 둘러보며 힘차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것을 회수하는 것으로 광개의 의제된 도리를 다한 것이오. 한데 나로 인해 명문거파 개방의 이름에 누가
된다면 나는 가차없이 이것을 개방주에게 드리고 떠나겠소."
그는 미끄러지듯 철수개가 엎드려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한 가지 신법만으로도 군웅들은 입을 딱 벌려야 했다.

"오……, 두 다리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먼… 먼지조차 일지 않다니!"
"몸을 홍모(鴻毛)보다도 가볍게 움직인다는 경지가 바로 저것이다. 이제야 안계(眼界)가 열리지 않았는가?"
무공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일수록 더욱 놀랐다.
탁옥룡은 주저 없이 십절죽부령을 철수개에게 쥐어주었다.
"나로 인해 개방이 정파(正派)에서 마도(魔道)로 타락하는 것은 슬픈 일이외다. 이것은 내가 지니기에는 너무도
깨끗한 것이니, 방주가 회수해 나보다 뛰어난 영웅에게 드리도록 하시오."
"말…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다."
철수개는 정색을 하며 받기를 거절했다.
"하하……, 나의 사문을 알지 못하기에 하는 말이오. 내가 누구의 전인임을 안다면 이것을 받을 수밖에 없소."
"예에……?"
철수개가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떨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 그 말씀의 진의는 바… 바로 강호에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까?"
"어떤 소문을 들었소?"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
탁옥룡은 철수개의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소."
"소… 소문으로는 상방주의 사문이 바로… 마중지마(魔中之魔)요 절대거마(絶代巨魔)인, 고금제일마(古今第一
魔) 마중지존(魔中至尊)의 마왕동(魔王洞)이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옥룡마궁에서 상방주를 모함하기
위해 퍼뜨린 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소, 모두 사실이오.
철수개는 기철초풍할 듯이 놀랐다.
"예에? 마… 마중지존의 후예란 말씀이십니까?"
"하하하……!"
탁옥룡은 크게 웃으며 머리 뒤에서 마왕잠을 빼들었다.
그 차가운 빛은 중인의 안광을 흐리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마왕잠 하나만으로 삼라만상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나의 신분이오. 마왕동부를 여는 열쇠 마왕잠이 이것이오. 그러기에 나는 십절죽부령을 개방에
돌려주려 하는 것이오. 개방이 나로 인해 타락하는 것은 차마 보고 싶지 않소."
탁옥룡은 마왕잠을 내보이고는 다시 비녀 삼아 머리카락을 고정시키는데 이용했다.
잠깐 사이 장내는 무덤 속처럼 조용해졌다.
흐르는 것은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였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리지 않았다.
철수개 이하 모든 사람이 천년마제의 엄청난 전설에 겁먹는 눈치가 될 때였다.
"으하하……, 나는 안다. 천년마제의 전설은 전무림에 진 빚을 갚기 위한 것이지 복수하기 위함이 아님을
말이다!"
쇄독관 안에서 사자후(獅子吼)가 났다. 묘중기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중인의 고막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그러기에 나 묘중기인은 천년마제의 화신체인 혈영마협의 종이 되기를 목놓아 간청했던 것이다."
군웅들은 옥관 속에 있는 존재가 스스로를 묘중기인이라 밝히자 그만 질겁하고 말았다.
"관 안에 묘중기인이 있단 말인가?"
"으음……, 삼기인의 하나가 혈영마협의 종이라니……?"
"혈영마협의 어떠한 점이 묘중기인마저 굴복케 했단 말인가?"
삼산오악을 유랑하며 마궁을 멸망시킬 기인의 출현을 기대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의 표정은 아주 착잡해졌다.
탁옥룡은 침묵 속에 있기 거북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굳이 정도인임을 표방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정(正)과 마(魔)는 천하인들이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는
혈영마협으로의 길을 걷는 것으로 충분하다.'
갑자기 등이 무거워졌다. 묘중기인이 천근추를 발휘해 탁옥룡의 걸음걸이를 방해하는 것이다.
"주인, 정도로 환원할 천재일우의 기회외다. 이런 기회는 다시 있지 않을 것이오."
그는 누운 채 십만 근(十萬斤)의 힘을 발휘했다.
탁옥룡의 발이 땅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발은 두치 오푼 정도 땅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를 이만큼이나 짓누를
수 있는 사람은 천하를 통틀어 다섯도 되지 않을 것이다.
탁옥룡은 승극도허(昇極渡虛)로 몸을 가볍게 하여 역시 전음으로 대답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나를 알아주는 몇 사람이면 족하오.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지 않소. 그리고
그들의 마음은 의심이 아니고 사실일지도 모르오. 사실, 나도 언제고 마성이 폭발해 광마로 변할까 두렵소."
"허허……, 마성(魔性)은 정력(定力)보다 아래요. 노복(老僕)은 며칠간 주인을 유심히 지켜봤소. 주인의
몸에는 신기한 기운이 있소. 그것은 막강한 힘이고 어떠한 것으로도 오염되지 않는 불굴의 의지요. 속하는 주인이
천 년 전 마중지존보다 열 배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소. 마중지존은 마성으로 인해 몸을
망쳤으나 주인은 그런 누를 범하지 않을 것이오."
두 사람의 대화는 모두 전음으로 이루어졌다.
탁옥룡은 번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성과의 싸움!
그것은 옥룡마궁과의 싸움보다도 더 무섭고 부담스러운 싸움이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싸움이기도 했다.
마공으로 천하제일인이 되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천하가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는 열협(熱俠)이 바로 그였다.
혈영마협의 끓는 피를 누가 알 것인가?
<제 3 권으로 이어집니다.>

第一章 정인(情人)의 환상(幻想)


군웅들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남아 있자니 그들은 마중지존의 후예를 옹호하는 사람들로 분류될 것이고, 떠나자니 개방과의 불편한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상황이 미묘해지고 군웅들이 갈피를 잡지 못할 때였다.
"주인……!"
멀리서 회회공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포달랍궁(包達拉宮)의 밀사(密使)가 왔습니다. 밖에서 주인을 뵙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속히 나와 보십시오."
그의 천리전음술은 이십 리 밖에 있는 사람에게도 의사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신공이었다.

"포달랍궁에서?"
탁옥룡은 관을 걸머멘 채 훌훌 날아올랐다. 그는 너무나도 신묘한 신법을 시전해 중인의 망막에서 사라져 갔다.
회회공자는 매화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회하를 굽어보는 버드나무 언덕 위에 다정히 서 있는데, 그에게서 이 장 떨어진 곳에는 일인이조(一人一鳥)
가 내려앉아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유난히 기름져 보이는 흑의미인(黑衣美人)은 몹시 초조한 기색이었다.
끄― 아― 아― 악―!
거대한 금응(金鷹)이 쇠기둥 같은 두 다리로 웅장한 몸을 지탱하며 흑의여인 바로 뒤쪽에 서 있었다.
그들이 말없이 기다리고 있을 때 먼 곳에서 번개같이 들이닥치는 사람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홍색 천잠사 대신 흑의를 걸친 탁옥룡이 쇄독관을 진 채 허공을 밟아가며 세 사람 근처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고 땅을 밟았다.
흑의미인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사뭇 침통했다.
'이수운, 왜 끝까지 나를 괴롭히느냐? 아……, 너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픔을 네가 아느냐?
내 손에 죽고 싶어 다시 나타났느냐?'
탁옥룡은 회회공자가 장읍하는지도 몰랐고, 매화가 꿇어앉는지도 몰랐다. 그의 눈길은 흑의여인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약간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는 흑의미녀는 바로 과거 그의 정혼자였던 포달랍궁 소궁주 혈수나찰 이수운이었다.
이수운은 탁옥룡의 화난 듯한 표정을 보고 입술을 질끈질끈 물고 있었다. 찾아왔다는 사실조차 역겹다는 듯
그녀의 눈빛은 마치 혐오스런 악마를 대하는 눈빛이었다.
"할 말이……, 아니 전할 말이 있어 왔다."
이수운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소매 속에서 긴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포달랍궁의 뜻이다."
"혈미륵이 보냈느냐?"
"펴 봐라."
이수운은 혹시라도 탁옥룡과 손끝이 부딪칠까 두려워 봉서를 집어던지고는 금응 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가벼운 동작조차 탁옥룡을 슬프게 했다.
그는 봉서를 가볍게 받아 들고 천천히 펴보았다.
<결국 천년마제의 화신과 공존치 못함을 깨달았다. 마궁을 치기 이전 너를 치겠다.
천시대묘에서의 일도 결국 너 때문에 틀어졌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물론 그때 네게 빚을 갚겠다 한 것은 지킨다. 개방을 돕고 너를 위해 대묘(大墓)를 세워 주는 것으로 그 빚을
갚을 것이다.
용기가 있으면 본좌의 딸과 함께 찾아와라.
― 혈미륵, 합장하며.>
매우 웅장한 필체로 쓰인 글이었다.
탁옥룡은 서찰을 일목십행(一目十行)으로 즉시 읽고는 손에서 삼매진화(三昧眞火)를 발휘했다. 종이는
찰나지간에 재로 화했다.
"흥, 너희 까까중들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으음……!"
이수운은 그의 잔혹한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는데, 이 자의 모습으로 보아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 죽어 마땅한 자다. 이 자의 오만한
광기가 자신을 죽게 한 것이다.'
이수운이 입술을 질끈 물고 말했다.
"나를 따라 가겠느냐?"
"하하……, 지옥이라 해도 두렵지 않다."
"자신만만하군."
"세상이 가르쳐 준 것이지. 사악한 자들,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무자비해지라는 것을!"
탁옥룡은 차게 말하며 관을 끌러 내려놓았다.
묘중기인이 관 안에 누워 말했다.
"주인, 애써 함정에 빠지실 필요 없소."
"염려 마시오, 묘노인."
"조… 조심하셔야 하오. 특히, 혈미륵의 대유마신공과 미륵수미권을 말이오."
"그것은 알고 있소."
묘중기인은 혈미륵에 대해 놀랍게도 상세히 알고 있었다.
"혈미륵은 위급해지면 비장의 무기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일월태양환(日月太陽環)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나타나면 얼른 그의 미간(眉間)을 노려 척천일검술(拓天一劍術)을 발휘하시오."
관 안에서 소리가 나자 은근히 놀라던 이수운은 그 대목에 이르러 입을 딱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가 일월태양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나도 최근 들어 안 것인데, 사부는 그것을 이제껏 단 한 번, 철서생
(鐵書生)의 얼굴을 박살낼 때 사용했을 뿐이라고 들었다. 한데 이 자가 어찌 그것을 안단 말인가?'
이수운은 사색이 되어 쇄독관을 바라보았다.
묘중기인은 포달랍궁 무공에 극성(極性)이 되는 척천일섬술의 비결을 구술해 주었다.
"그 자를 잡는다면 포달랍궁의 대유항마진세(大幽降魔陣勢)가 간단히 무너질 것이오. 속하는 여기서 주인이
돌아오신 후 속하와 더불어 축융봉(祝融峰)으로 가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겠소. 훗훗, 사실 혈미륵 모찰륵
따위는 이후 백 년을 수련한다 해도 주인을 능가할 수 없소."
탁옥룡은 대할수록 묘중기인에게 호감이 갔다.
"하하……, 그가 들으면 섭섭해 하겠소."
"그 자는 고집스러운 자이며 아주 탐욕스럽소. 중답지 않은 자이지요. 자신이 천하제일인이라고 믿는 자이고,
적으로 판단한 자에게는 사신같이 가혹하외다. 하지만 주인 앞에서는 태양 앞의 얼음덩이같이 녹아 버리고 말
것이오."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호호……, 혈영마협의 종답게 혓바닥 놀리는 재간이 상당하구나!"
이수운은 악을 쓰며 관에다 일장을 가했다. 바로 미륵수미권식(彌勒須彌拳式)이었다.
콰르르릉―!
누런 기류가 일어나 관을 휘감았다.
"부서져라!"
이수운이 앙칼지게 소리칠 때 쇄독관이 장풍권 안에서 일 장 높이 떠올라 미륵수미권을 간단히 피했다.
"크훗……, 어리석은 계집!"
쇄독관은 빠른 속도로 날아 이수운의 가슴을 들이받으려 했다.
"엇, 누구이기에……?"
이수운은 아연실색해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쇄독관을 피하기에는 이미 늦은 후였다.
'아,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이수운이 눈썹을 파르르 떨 때였다.
"됐소. 멈추시오!"
탁옥룡의 음성과 함께 쇄독관이 허공에서 일단 정지되었다.
"훗훗……, 주인이 아니었다면 너는 내 손에 죽었다. 사실 나의 적은 마궁과 포달랍궁 양쪽이다. 네 사부
혈미륵이 나의 주인 손에 죽지 않는다면, 조만간 묘중기인에게 죽을 것임을 모찰륵 그 썩어빠진 중대가리에게
말해라!"
묘중기인은 그답지 않게 경망되게 말한 다음 뒤쪽으로 날아갔다. 그의 공력은 최근 들어 부쩍 증가된 상태였다.
회회공자를 백 초만에 패배시킬 수 있는 경지였다.
"치이, 온갖 마의 도배는 다 모여 있구나."
이수운은 벌떡 화를 내며 금응 위로 올라갔다. 금응의 등에는 편안히 탈 수 있는 안장이 매달려 있었다.
"타라!"
이수운이 차게 외치며 고갯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너의 살 내음도 싫다."
탁옥룡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바닥을 휘저었다.
끄아아악―!
조신(鳥神)같이 의젓하게 버티고 있던 금응의 그 일장에 금빛 깃털을 우수수 떨구며 괴성과 함께 훌훌 날아올랐다.

"왜 이러는 것이냐? 약속을 어기겠단 말이냐?"


이수운은 탁옥룡이 새를 쫓자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금응은 이미 십 장 허공을 날고 있었다. 아래편을
내려다보았지만 바닥에 탁옥룡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추악하고 악랄한 놈이 어디에 있담?"
이수운이 분함을 토로할 때 탁옥룡의 목소리가 바로 아래에서 들려왔다.
"쯧쯧, 나는 여기 있다."
그는 새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흥, 나도 네놈이 내 뒤에 앉는 것이 싫었는데 잘 되었다. 호호……, 사실 마궁이 사라지면 제일 먼저 네놈을
찾아 과거 나의 몸을 떡 주무르듯 했던 일을 따져 보려 하던 참이었다."
이수운은 탁옥룡이 새 다리를 잡고 날아오르자 안심하며 안장에 걸터앉았다.
까아― 악―!
금응은 아주 높이 날아올랐다. 주위 경물이 아주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갔다. 금응은 순식간에 십 리를 날았다.
"참, 네가 중얼거리던 낭군(郞君)이란 자는 누구냐?"
탁옥룡의 목소리가 이수운의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호호……, 네놈보다 만 배 훌륭한 분이다."
이수운의 목소리는 처량함을 싣고 있었다. 묻는 탁옥룡의 찢어지는 가슴에 비한다면 천 분의 일도 안 되는
것이겠지만 꽤나 쓰디쓴 경험이 있는 듯했다.
"그… 그 분은 나의 영원한 우상이시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 이수운의 목소리는 몽롱해졌다.
탁옥룡은 누가 그녀를 그토록 사로잡았을까 고뇌하며 비통한 기분이 되었다.
"그 분은 너무나도 아름다우시다. 나를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이 많으나…… 그 분은 정말 아름다우시다.
피부는 백옥(白玉)보다 희고, 특히 눈썹이 우아하셨다. 흐흑, 그 모습은……."
"흥, 우는 것을 보니 놈이 너를 버리고 떠난 모양이구나."
탁옥룡이 비웃자 이수운은 악에 받쳐 외쳤다.
"날 버린 것이 아니다!"
이수운이 악에 바쳐 말했다.
"하하, 그럼 죽기라도 했더냐?"
"그래, 그 분은 돌아가셨다, 소… 소년으로. 그… 그러기에 영원히 나의 가슴에 미소년(美少年)으로 남아
계시는 것이다."
이수운의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설마……?'
탁옥룡의 가슴이 폭포수처럼 진동했다.
"그… 그 분은 탁옥룡(卓玉龍)이라는 분이시다."
이수운이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탁옥룡!"
탁옥룡은 너무나 놀라 쥐고 있던 새 다리를 놓칠 정도였다.
이수운의 넋두리는 계속되었다.
"그렇다. 그 분은 진짜 인중옥룡(人中玉龍)이셨다. 내가 옥룡마궁을 미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분을 죽게 했기
때문이다."
탁옥룡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두 뺨은 물기로 젖었다. 세차게 요동치는 격동으로 세상이 뿌옇게 보였다.
'이제껏 나를 품고 있었단 말이냐? 오해한 것은 네가 아니고 나였단 말이냐? 내가 어리석게도 너를 의심했었단
말이냐?'
탁옥룡은 자신이 탁옥룡임을 말하고 싶었다.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어안고 자신을 밝히며 감격적으로
해후하고 싶었다.
그가 입술을 떼려 할 때였다.
"그 분은 너와 정반대다. 아주 착하시며, 아주 아름다우시다. 그러기에 네놈이 나의 살을 만졌다는 것이
치욕스러울 뿐이다. 흐흑……!"
"나와는 정반대라고?"
"그렇다. 너는 마의 화신이고 그 분은 모든 아름다운 것의 화신이시다."
"마의 화신……, 마의 화신!"
탁옥룡의 손바닥이 땀으로 젖었다.
'이수운이 그리워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아니다. 그녀는 무공을 알지 못하던 문사 시절의 나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다.'
그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세상은 같으나 사람은 변했다.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휙휙 지나가는 산과 강을 내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희미했다. 주변의 풍경이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같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후후……!"
갑자기 그의 입술 사이에서 찬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수운은 그의 목소리에 실린 한기에 몸을 떨어야 했다.
'진정 두려운 고수다. 사부가 대진을 치고 있기는 하나 이 놈을 꺾을 보장은 없다. 마궁에서 바라는 것은 놈의
수급이니 여기서 놈을 죽여 버릴까?'
이수운의 손이 땀에 젖었다. 그녀는 눈빛을 독랄하게 하다가 품안에서 구슬하나를 꺼냈다.
혈화백발주(血花百發珠)!
그것은 전설상의 물건이었다. 핏빛 꽃송이 일백을 피워내는 아주 지독한 암기였다.
'이것을 던지자. 이 무서운 자와 정당히 비무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이 자는 인간이 아니고 마궁보다
두려운 악의 화신이다.'
이수운은 이를 갈다가 혈화백발주를 쥐고 크게 말했다.
"너는 사부가 왜 너를 부르는지 아느냐?"
"나를 죽이고 싶어서겠지."
"호호……,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면 왜 너를 죽이고 싶어하는 그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느냐?"
탁옥룡은 심한 정신적 혼란에 젖어 있는 상태라 건성으로 대답했다.
"내가 있을 경우 천하제일인이 될 수 없어서겠지."
"아니다."
"아니라고? 그럼 이유가 뭐냐?"
이수운은 땀에 젖는 혈화백발주를 움켜쥐고는 애써 가슴을 진정시켰다.
"호호……, 사부는 과거와는 다른 분이다. 그 분이 바라는 것은 천하제일인의 지위도 아니고 사랑하는 분의
안위뿐이다. 그러기에 너를 죽이려는 것이다."
"내가 너를 죽일까 두려워한단 말이냐?"
탁옥룡이 급히 되묻자 이수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 때문은 아니다."
"그럼?"
"어머님 때문이다."
탁옥룡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어머님……? 석심부인(石心夫人) 말이냐?"
"그렇다."
"모를 일이로군. 나를 죽이면 그녀가 산단 말이냐?"
이수운은 마음을 정한 듯 탁옥룡을 청했다.
"올라와 봐라. 이유를 말해 줄 테니까."
"좋다."
탁옥룡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몸을 뒤집어 새 등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몸이 이수운의 눈앞으로 다가갈 때 그녀는 금응을 조종해 급강하했다.
탁옥룡은 잠시 동안 허공에 둥실 뜬 신세가 되었다.
"이런……!"
그가 크게 놀라 금응을 따라 가려 하였다.
"호호, 이제 죽을 때가 되었구나!"
이수운이 금응을 조종해 다시 위로 날아오르게 하고는 수중의 혈화백발주를 탁옥룡 쪽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피― 잉―!
핏빛 선 하나가 그어졌다.
"흥, 그것으로 나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여기느냐?"
탁옥룡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손가락을 흔들어 대었다. 혈화백발주는 지강에 적중돼 그대로 터졌다.
꽈꽈― 꽝―!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구슬이 깨지며 무수한 독침이 쏟아져 나왔다.
"이럴 수가? 혈영강기로도 박살나지 않는 것이 있단 말인가?"
탁옥룡은 크게 놀라며 위로 날아오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럴 경우 그는 새를 따라잡을 기회를 잃게 되고, 곧바로 까마득한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그가 당황할 때 독침은 사정없이 그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파파팍― 팍―!
둔탁한 소리가 잇달았다. 이수운은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암습은 포달랍궁의 전통이 아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휘휘 내두르다가 인기척을 느꼈다. 비린내가 물씬 풍겨 왔다.
"후후, 가소로운 계집!"
그녀 눈앞에 서 있는 혈의인 하나가 있었다.
"네… 네가 어떻게?"
이수운의 눈알이 휘둥그레졌다.
탁옥룡은 가슴에 무수한 독침을 꽂은 채 새의 목을 사뿐히 밟고 서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잔혹한 계집! 네년을……."
탁옥룡의 눈알은 두 개의 홍주(紅朱)였다.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듯한 눈빛을 보고 겁먹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무적지공(無敵
之功)이었다.
이수운은 사색이 되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아……!"
탁옥룡이 이를 갈며 금나수로 그녀의 맥문을 낚아챘다.
"흐윽!"
이수운은 공포에 질려 숨을 멈췄다.
"네 머리통을 박살내겠다. 아주 잔혹한 수법으로!"
느닷없는 기습에 마성이 폭발한 탁옥룡은 이를 갈며 주먹을 쥐고 그녀의 머리통을 후려쳐 갔다.
이수운은 사색이 되어 눈을 감았다.
'죽음의 순간이 없을 줄 알았는데, 결국 죽게 되는구나. 아……, 이 악마 때문에 살았으니 놈에게 죽는다 해도
유감은 없다.'
이수운은 죽음의 순간이 닥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으응?"
이수운은 의아해하며 실눈을 떴다. 탁옥룡은 손을 늘어뜨린 채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한에 젖은 듯한
모습이 너무도 슬퍼 보였다.
'갑자기 실성하다니… ? 이것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닌가? 모든 내공을 회수하고 멍하니 있다!'
이수운은 쾌재를 부르며 오른손을 슬며시 들었다. 그녀의 손그림자가 흐릿하게 뿌려졌다.
파팍―!
탁옥룡의 목 언저리에 손도장 하나가 새겨졌지만 오히려 이수운의 얼굴이 아주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윽……, 내 손이 도리어 아프다니……?"
이수운은 전율하며 다시 공포에 떨었다.
탁옥룡은 두 번씩이나 그를 죽이려 한 그녀를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슬며시 풀어 주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말할 듯 하다가는 눈을 감았다.
"네가 갑자기 성인군자가 된 것이냐?"
이수운은 얼떨떨해 하다가 갑자기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오오……, 이럴 수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격동으로 인해 심하게 떨렸다.
탁옥용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씁쓸히 말했다.
"너를 해하지는 않겠다. 계속 가자."
이 순간, 이수운이 그의 목에 매달리며 서럽게 흐느꼈다.
"오라버니! 바로 오라버니셨군요. 으흑흑……!"
"아… 아니, 어떻게……?"
탁옥룡이 어찌할 바 몰랐다.
"흐흑……, 이것을 지닌 분은 오라버니 한 분뿐이십니다. 어쩐지 목소리가 오라버니와 비슷하다 했어요."
이수운의 부드러운 손바닥은 그의 찢어진 옷자락 사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희미한 열 개의 지인(指印)!
이수운은 그것을 보고 탁옥룡을 알아봤던 것이다.
"오라버니의 시신이 없어, 혹 죽지 않을 수도 있다 여겼습니다. 흑흑……."
"쯧쯧……, 네 오라비가 누구지 모르나 잘못 알았다. 네가 내 목에 매달리면 그가 무척 싫어할 것이다."
탁옥룡은 아주 차게 말하며 무정히 그녀의 팔을 뿌리쳤다.
"……?"
그녀는 얼굴을 흑빛으로 물들이며 그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아… 아니? 이럴 리가?"
그녀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으나 탁옥룡의 말투가 더 냉혹해졌다.
"나를 너의 정랑으로 삼고 싶으냐? 하하……, 그렇다면 내가 쾌히 너를 첩으로 맞이할 수도 있다."
"으음, 너… 너무도 큰 실수를 했다."
이수운은 처절한 표정이 되어 급히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탁옥룡의 얼굴은 더 일그러졌고, 가슴속으로 흐르는 장부의 눈물은 더 짙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이수운은 한참만에 냉정을 찾고 품에서 가죽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여기 금창약이 있다. 바르면 혈화백발주에 당한 외상을 치료할 수 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곧 나의 피가 침을 녹여 버릴 것이니 신경 쓰지 마라."
"너… 너는 진짜 천년마제냐?"
"후후……, 그렇다."
탁옥룡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궁이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마궁은 너로 인해 뿌리째 뒤흔들리고 있다. 마궁 수하들 중에서도 네가
무서워 분타를 이탈하는 자가 부지기수다."
이수운은 주머니를 거둬들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제일 먼저 너를 죽이려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함정을 파며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마음대로 하라고 그래라."
"사부가 너를 부르는 이유도…… 사실 마궁의 함정 중 하나다."
탁옥룡은 미간을 꿈틀거렸다.
"마궁의 입김이 작용한단 말이냐?"
"그렇다. 아버님은 지금 이성을 잃고 계시다. 아버님은 어머님을 구하기 위해 너와 동귀어진을 불사할
작정이시다."
"석심부인이 지금 어디에 있기에 그러느냐?"
이수운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사문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밀교단(密敎壇)에 갇혀 계시다. 천시대묘에서 일이 벌어질 때 어머니는 납치당하셨다. 독존(毒尊)이
어머니를 납치해 밀교단에 가둔 것이다. 그리고 아버님에게 밀서를 보냈다. 어머니를 구하고 싶다면 너의 목을
가져오라는 내용을 담은 밀서를 말이다."
"흐음……, 혈미륵이 그래서 너를 시켜 나를 찾았단 말이냐?"
"그렇다."
탁옥룡은 상황의 전말을 알게 되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좋다. 그럼 당장 밀교단 쪽으로 방향을 틀어라."
"뭐… 뭐라고?"
이수운의 눈알이 동그래졌다. 그 모습은 과거나 다를 바 없었다.
"하하……, 밀교단은 황산(黃山) 연화봉(蓮花峰)에 있음을 알고 있다. 어서 그곳으로 가자."
"네가 어머님을 어찌 하려고?"
탁옥룡은 오만하게 말을 받았다.
"혈미륵 같은 하수와 싸우기 싫어서 석심부인을 혈미륵에게 보내 주려는 게다. 나를 의심한다면 경공으로 갈 테니
어서 나를 내려다오."
"너는 머리가 백 개 달린 뱀 같아 보면 볼수록 모르겠다."
이수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새를 조종했다.
까아아― 악―!
북방을 향해 날던 새가 허공에서 큰 반원을 그리며 방향을 틀었다. 금빛 그림자가 허공을 유린했다. 새가 나는
속도는 전광(電光) 그것이었다.
새는 황산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밀교단에는 무수한 독진(毒陣)이 있다. 그러나 너라면 능히 뚫을 수 있다."
"다른 것은 모르나 사람 머리 부수는 데에는 재간이 있지."
탁옥룡의 자부심에 가득한 어투에 이수운은 야멸차게 그를 쏘아붙였다.
"흥, 너의 놀라운 무공은 언제고 너를 망칠 줄 알아라. 지금 천하인들은 마궁 때문에 너의 출현을 보고도
좌시하지만, 마궁이 사라지면 네가 마궁에 이어 정파의 공적이 되어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어떤 적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마왕동의 전통이기도 하다."
탁옥룡은 차분히 대꾸한 다음 새 등에 주저앉았다.
그는 태연히 운기행공했다. 그의 몸은 곧 한 덩이 피구름으로 화했다. 이수운에게 자신이 바로 혈영금강마공의
주인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태도였다.
"아……, 정말 신기한 수법이다. 어떤 것도 부순다는 마의 혈무 혈영마공(血影魔功)!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힘이다."
이수운은 공포스러워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목에 옥룡 오라버니만이 지니고 있는 열 개의 손가락 자국이 있을까? 잠시 흥분해 이 자를 오라버니로
착각했다.'
그녀는 혈무 속에 묻혀 있는 탁옥룡을 응시하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얼굴 모습으로 본다면 전혀 아니다. 내가 아는 오라버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다. 맑은 눈망울,
오똑한 콧날, 다정한 음성…….'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다 할 수 있는 혈영마협을 추억 속의 소년문사와 비교해 보았다.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문득문득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지곤 했다. 그것은 그녀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오라버니가 기억상실을……?'
그녀는 자신의 상상에 불현듯 놀라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어찌 오라버니가 이런 악마가 될 수 있단 말인가?'

第二章 기억을 찾은 석심부인(石心夫人)


1
단풍(丹楓)에 타는 황산 기슭으로 초경의 야음을 뚫고 달리는 흑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수운이를 위해서라도 석심부인을 구해야 한다."
치달리는 사람의 얼굴은 아주 추악했다.
얼굴로 그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여인을 구해 수운이를 기쁘게 해야 한다."
그는 바로 혈영마협 탁옥룡이었다.
탁옥룡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감춰야 하는 것을 잊고 싶은 듯 혼신공력을 다해 달려갔다. 그는 회회공자에게
마궁의 분타가 어디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들었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달려갔다.
얼마를 갔을까?
"이 근처에 입구가 있다고 들었는데……?"
탁옥룡은 울창한 원시림 앞에 이르러 일단 신형을 멈췄다.
모든 것이 검었다. 붉은 단풍도, 흰 바위도 시꺼멓게 보였다. 암흑이 모든 것을 가리고 있었다.
물론 결국 그 형상은 태양이 떠오름과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이다. 숨겨진 것이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탁옥룡은 냉정한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바라보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독안개가 흐르고 있다."
그는 중얼거리며 원시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안력은 백 장 밖에 개미 기어가는 것을 살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숲 사이를 흐르는 한 줄기 검은
독안개를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 안개가 이는 곳을 향해 움직여 갔다.
안개는 바위 골짜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위골짜기 안쪽은 아주 짙은 어둠 때문에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매우 강한 진세다. 이것은 독존만이 칠 수 있는 절대독진(絶對毒陣)이다. 그리고 해독약을 먹지 않고도 이것을
뚫을 수 있는 사람은 무림쌍독(武林雙毒)의 직전제자들뿐이다."
그는 독진을 유심히 살핀 다음 피독공(避毒功)을 발휘했다.
코로 숨쉬는 것이 멈춰졌다. 그는 피부로 숨쉬며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독진은 두 가지로 구성된다.
변화막측한 지형지세를 애용한 기문진(奇門陣).
오독(五毒)을 섞어 만든 맹독(猛毒).
그 두 가지로 인해 골짜기는 절대독진이라 불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평범한
골짜기에 지나지 않는다.
탁옥룡은 동굴로 날아드는 박쥐같이 움직였다.
"흠……, 삼단(三壇)이 연파당하자 방어를 철저하게 했으나 천년마제 앞에서는 모두 무용지물이다."
탁옥룡은 절대독진 속을 유유히 뚫고 들어갔다.
얼마를 갔을까?
그는 절대독진이 끝나는 곳을 지키고 있는 열여덟 명의 검사들을 볼 수 있었다. 홍삼검대(紅衫劍隊)들인데
모두들 암기통을 쥐고 주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탁옥룡은 손가락을 꿈틀하다가 마음을 돌리고는 그냥 지나쳐 갔다.
'저런 하급 무사들을 제거해 보았자 바뀌는 것은 없다.'
십팔홍삼검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탁옥룡은 건물 십여 채를 지나쳐 갔다.
밀교단에는 대략 이천 명이 머물고 있었다. 이곳은 마궁의 최후 보루이기도 했다. 그들이 사라지면 마궁은 드디어
본 모습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탁옥룡은 밀교고수들의 철저한 방어를 능수능란한 잠입술로 돌파하다가 칠층석탑 앞에 이를 수 있었다.
그곳은 불야성(不夜城)이었다.
탑의 난간마다 불이 밝혀져 있었다. 거대한 불기둥으로 보이는 탑을 지키는 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대단한데? 후후……, 석심부인이 이 안에 있기 십상이다.'


탁옥룡은 나는 새도 들키지 않고 날아들지 못할 정도로 엄밀히 방어되고 있는 칠층석탑을 바라보다가 얼핏 눈에
드는 큰 돌 하나를 주워 들었다.
돌은 그의 손아귀 안에서 그대로 두부같이 부서졌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금석을 으깨는 수법은 혈영금강마공의 허무파해결(虛無破解訣)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돌가루를 쥐고는 손을 흔들었다. 돌가루는 한 덩이가 되어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지면과 거의 평행으로
날아간 돌가루는 이십 장을 날아간 다음에야 소리를 냈다.
"케에― 엑―!"
"암… 암기다!"
칠층석탑이 졸지에 지옥탑(地獄塔) 같이 시끄러워졌다.
"적이다!"
"크윽……, 누가 절대독진을 뚫고 왔단 말이냐?"
모래 속에 은신해 있던 수십 명의 보초가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고, 이곳저곳에서 병기를 든 자들이 속출했다.
그들은 돌가루가 날아든 곳으로 모여들었다.
이 순간, 탁옥룡은 탄신비행(彈身飛行)이라는 사도절기를 발휘해 석탑의 맨 꼭대기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어엇!"
"누… 누가……?"
석탑의 꼭대기를 지키던 호법 두 명이 아주 우연하게 탁옥룡을 발견했다.
그들이 비명소리를 내려할 때 탁옥룡의 금강마지(金剛魔指)가 발출되었다.
퍽― 퍽―!
호법 둘은 창졸지간에 목이 구멍이 뚫린 시체로 화했다.
탁옥룡은 그들의 시체가 소리를 내지 않도록 사뿐히 받아 난간에 걸쳐두었다. 멀리서 올려다본다면 여전히 경계를
서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작은 문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이 눈에 띄었다.
"와……!"
"어디냐? 벌써 도망갔단 말이냐?"
밖에서 이는 소란으로 내부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석탑의 창가에서는 내부 경비무사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뭔가 수군거리고 있었다.
탁옥룡은 그들의 넓적한 궁둥판을 힐끔 바라본 다음 고양이처럼 소리내지 않고 걸어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의 정경도 칠층과 판에 박은 듯 비슷했다.
탁옥룡은 미끄러지듯 움직여 삼층까지 갈 수 있었다.
삼층은 조금 다른 구조였다. 우선 창문이 없었다. 그리고 지키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다른 층의 경망스러운
호위들과는 달리 밖을 내다보지 않고 석문 좌우를 지키고 있었다.
탁옥룡은 벽에 납작 붙어 석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석문에는 커다란 빗장이 채워졌고 어른 머리통만한 자물쇠가 하나 달려 있었다.
이때 아래층에서 나는 듯 올라오는 백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여인인데 아주 잘 생기고 탐스러워 보였다.
'호오, 아는 얼굴을 보니 반갑군.'
탁옥룡의 눈에서 이는 살기가 짙어졌다.
"조심해야 한다. 정체 모를 괴고수 하나가 보초들을 주살한 다음 도망쳤다. 잡히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으니
모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야 한다!"
여인의 목소리는 아주 카랑카랑했다.
"철정향(鐵丁香) 숙모(叔母)!"
키가 크고 덩치가 우람한 황의장한이 여인 곁으로 다가섰다.
"호호……, 밀교공자(密敎公子), 아직도 나를 숙모라 부르는 거요?"
여인은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황의장한의 목에 두 팔을 걸었다. 그들은 보초들의 이목이 무섭지 않은 듯
만나자마자 아주 정열적으로 입맞춤을 했다.
"우헤헤……, 사흘 동안 함께 자지 못했다고 더 찰거머리 같으시군?"
밀교공자는 미심고에 걸려 음탕히 웃으며 두 손으로 그녀의 풍성한 둔부를 더듬었다.
"흐응……, 너무 세게 쥐지 말아요."
철정향은 아픈 시늉을 하며 그의 뺨을 살짝 깨물었다.
"헤헤……."
밀교공자는 당장 옷을 벗고 살을 섞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는 둔부를 더듬던 손을 들어 그녀의 가슴속에 밀어넣었다. 젖가리개 없이도 풍만한 젖무덤이 잡혔다. 그는
육봉을 쥐고 부어터질 정도로 주물러대며 엉큼스럽게 말했다.
"훗훗……, 놈이 누구든 잡는 순간 물고를 내야겠소."
"호호……, 내 젖덩어리를 주무르는 재간을 놈에게 발휘한다면 틀림없이 삼 초 내에 이길 수 있지."
욕정에 가득 찬 탕녀탕아의 몸짓은 역겹기만 했다. 그들이 호흡소리가 거칠어져 갈 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석문
앞으로 다가갔다.
"흥!"
냉소성이 적막을 깨더니 장영 수백 개가 석문 앞을 덮었다.
파팍― 팍―!
둔탁한 소리와 함께 뇌수가 뿌려졌다. 남녀의 애무를 멍한 표정으로 보던 밀교의 고수들이 난데없는 장력에
머리통이 박살나 버린 것이다.
그들의 시체가 속절없이 나뒹굴 때 차가운 목소리가 남녀의 고막을 때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정도면 아주 재미있었다."
"으으……, 바로 너였단 말이냐?"
철정향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후후……, 나를 알아보시는구료, 불쌍한 여인! 그래, 그때 황토무덤 안에서 잠자고 있던 지아비가 그립지도
않소? 벌써 다른 남자를 사귀었으니 말이오."
탁옥룡은 그녀의 미인계를 비웃으며 한 걸음 다가갔다.
소복을 입고 무덤 앞에서 통곡하다 탁옥룡을 기습한 여인이 바로 철정향이었다. 그녀는 옥룡천자의 사대부인 중
하나였다.
"대담한 놈!"
밀교공자와 철정향은 나란히 서서 각기 병기를 빼들었다.
가관스럽게도 밀교공자의 거친 손길로 인해 철정향의 투실투실한 젖무덤 두 개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둘 다
멍투성이였으니 애무의 격렬함을 알 수 있었다.
철정향은 공포의 존재 혈영마협을 대하고도 그다지 두려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호호……, 네가 바로 흉수인 줄 이제 알아 유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탑 주위의 멋진 기관 장치를 선보였을
텐데 말이다."
"후후……, 내게 비수를 흔들던 솜씨로 보아 모든 것에 능한 줄 안다. 굳이 자랑하지 않아도 너를 높이
인정한다."
"호호……, 혈영마협에게 칭찬을 듣다니 태어난 후 가장 큰 영광이다."
철정향은 까르르 웃다가 단검 하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번쩍―!
단검 끝에서 검강이 피어나며 뼈를 깎는 듯한 한기가 일어났다.
"설산한옥도(雪山寒玉刀)는 태상호법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너의 호신강기를 벨 수 있는 신품(神品)이지."
차앙―!.
밀교공자가 두 개의 만자탈(卍字奪)을 한데 맞부딪쳐 푸른 불똥을 일으켰다.
"크훗……, 지옥만탈(地獄卍奪) 또한 네놈의 새빨간 두 눈알을 터뜨리는데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다!"
위대한 사랑의 힘 때문인가?
둘은 혈영마협이라는 이름이 주는 공포도 모르고, 의기양양하게 외치며 양의진세(兩儀陣勢)에 따라 덮쳐 들었다.
사람 그림자 수십 개가 뿌려졌다.
츠츠츠츳―!
차가운 빛이 일어나며 파공성이 연달았다. 금석이 가루가 나고 옥이 박살날 듯한 도강과 만자탈기가 흘렀다.
"하하……, 가상하구나. 지옥까지 나란히 들어가 정사를 즐기게 해주는 것으로 너희들의 사랑을 맺어주겠다."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탁옥룡의 몸이 수없이 나타났다. 그의 신형은 두 사람이 일으키는 환영(幻影)보다 십 배나
더 많았다.
"허억, 백로마현(百路魔現)!"
밀교공자가 크게 놀라며 십지를 쳐냈다. 만자탈이 앞서고, 무영무음지(無影無音指)가 그 뒤를 따랐다. 소리
내지 않은 지력은 만자탈 뒤에 숨어 허상을 덮쳐 갔다.
"제법인데?"
탁옥룡은 큰소리로 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낙성벽력마권(落星霹靂魔拳)―!"
수백 개의 권영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며 두 개의 만자탈과 무음무영지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파팍―!
만자탈 박살난 쇳조각이 어지러이 뿌려졌다.
탁옥룡의 내공에 의해 허공을 뚫는 쇳조각은 유성이 깨어져 하늘을 덮는 듯한 대장관을 방불케 했다.
섬칫한 소리가 일더니 두 군데에서 피보라가 일었다.
"으아악! 내… 내 얼굴……!"
철정향은 두 손으로 얼굴을 쥐고 쓰러졌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뭉클뭉클 새어나왔다.
"케에엑!"
밀교공자는 손바닥으로 복부를 쥐어뜯으며 나뒹굴었다.
남녀의 몸이 한 덩이로 포개질 때 탁옥룡의 손바닥이 금강마장(金剛魔掌)으로 화해 지면을 휩쓸었다.
콰― 쾅―!
두 개의 몸뚱이 대신 비린내 풍기는 피모래가 바닥을 덮었다. 그들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와 함께 세상에 태어난 것이 죄다."
탁옥룡은 차게 말한 다음 석문 앞으로 갔다. 그는 자물쇠와 빗장을 바라보다가 비웃음을 흘렸다.
"나의 주먹을 단련시키던 금강백옥석(金剛白玉石)보다 단단한지 시험해 보리라."
그는 중얼거리며 주먹을 흔들었다.
꽈아앙―!
빗장과 자물쇠가 동시에 박살났다. 그리고도 힘이 남아 석문이 균열되어 뒤쪽으로 우르르 넘어졌다.
탁옥룡은 석문 뒤쪽에 있는 석실 바닥에서 서 있었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다만, 시체인지 사람인지 모를 몸뚱이 하나가 피를 뒤집어쓰고 길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
"으음……!"
피투성이 여인은 가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리 혹독히 고문했단 말인가?! 아……, 마궁도들이 양민에게도 가혹하다는 것을 아나 이것은 정말
너무한 일이다."
탁옥룡은 쓰러진 사람에 대해 연민의 정을 금치 못했다. 그는 여인에게 다가서다 크게 놀랐다.
"너무도 지독한 일이다. 곁에 가기만 해도 죽는 너무도 악독한 부시고독(腐屍蠱毒)에 당한 것이다."
그는 여인의 상세를 살피고는 옥룡마궁의 치밀한 독계를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석심부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렇게 철저히 당한 이유는 혈미륵 때문일 것이다. 이 여인을 자신의
목숨보다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혈미륵이라면 부시고독에 여지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존, 너의 독공만이 천하제일은 아니다. 과거에는 천하제일이었을 것이나…… 독왕으로 인해 그렇게 되지
않는다."
탁옥룡은 부시고독을 없애는 방법이나 해약(解藥)을 만드는 약방문도 알고 있었다. 또한 해약을 쓰는 대신
내공력으로 고독을 없애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오갑자(五甲子) 내공이면 부시고독을 녹인다.'
탁옥룡은 다음 두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지금 그의 손은 파괴와 죽음을 상징하는 금강마장이 아니었다. 천산신의와 독왕이 만들어 준 생사수(生死手)였다.
"이 여인을 꼭 구해내야 한다. 나의 모든 것을 망가뜨린 마궁의 힘이 무력하다는 것을 이 여인의 회생으로
밝히리라."
그는 응급조치로 역근회혼법(易筋回魂法)을 시전했다.
그의 손은 아주 날렵하게 움직였다. 보통 의원이라면 감히 건드리지 못할 사혈(死穴)을 마구 강타했다.
석심부인으로 생각되는 여인은 죽은 듯 누워 비명소리도 내지 않았다.
탁옥룡의 손바닥이 닿는 곳마다 좁쌀만한 붉은 점이 나타났다.
그의 손은 너무 빨리 움직여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백팔대혈을 잇달아 타통시켰다. 그와 함께 한 가지 이상한
일이 느껴졌다.
"이 여인은 칠 세 이전에 임독양맥(任督兩脈)이 타통된 절정고수다. 한데 오래 전에 무슨 일인가로 심령상의
엄청난 충격을 받고, 뇌호혈(腦戶穴)이 마비되어 천지현관(天地玄關)이 폐쇄되었다."
그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여인의 상세가 생각보다 훨씬 위중하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독상뿐만 아니라 엄청난 내상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심한 난산고(亂産苦)를 겪어 순음지기마저 다쳤다. 이 여인에게서 나온 아이라면……, 이 여인의 모든
기운을 앗아갔기 때문에 아마 천하기재가 되었을 것이다."
탁옥룡은 너무도 많은 진력을 쏟아내 땀으로 목욕을 한 후였다.
'여기서 치료할 수는 없겠군.'
그는 급히 여인을 옆구리에 끼었다.
꽈꽈― 꽝―!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석탑이 기우뚱했다. 불기둥이 일어나며 주위가 용광로 안같이 달궈졌다. 외부에서 공세를
펼쳐온 것이다.
돌더미가 우르르 떨어져 내렸고 여기저기서 독침이 날아들었다.
"흥, 결국 내가 혈섬검(血閃劍)을 뽑게 만드는구나!"
탁옥룡은 냉막히 말하며 손을 쳐들었다.
그의 검 뽑는 자세는 다른 검사들과 달랐다. 그는 검자루를 한 번 비틀었다가 단추를 눌렀다. 혈섬검의 검신이
세 치나 튀어 올랐다.
우― 웅―!
탁옥룡은 검을 왼손에 쥐었다. 그는 우수검(右手劍)뿐만 아니라 좌수검(左手劍)에 있어서도 초절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의 몸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길고 붉은 마왕검기(魔王劍氣)가 형성되어 그의 몸과 여인의 몸을 가릴 뿐이었다.
번쩍―!
붉은 검기가 무지개처럼 날아올랐다.
어검비신(馭劍飛身)!
검을 날리며 검의 기운을 따라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천 년 실전 절기가 탁옥룡에 의해 재현된 것이다.
"우―!"
공포스러운 쇄금강후(碎金剛吼)가 곁들여졌다.
검기가 칠층탑의 허리를 부수며 야음을 휘황찬란하게 밝히는 동시에 장소성이 터지자 마궁도들의 고막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크으으……, 혈영마협이다!"
"천년마제다, 막는다 해도 소용없다!"
"밀교는 이제 마지막이다!"
모두 고막을 틀어막으며 나뒹굴었다.
한 줄기 홍광이 그들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검기가 이르는 곳마다 피의 꽃이 피곤 했다.
"하하하……, 철서생에게 가서 내가 열흘 안으로 찾아가 목을 잘라버리겠다고 전해라!"
탁옥룡은 군마(群魔)를 희롱하며 멀리 사라져 갔다.
2
탁옥룡은 동굴 안에 앉아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이수운의 초조한 기색을 하며 탁옥룡의 발 아래 누워 있는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릴 수 있겠느냐?"
"염려 마라, 마중지존의 후예는 자신 없는 일에는 절대 나서지 않는다."
탁옥룡은 담담히 웃으며 동굴 밖을 가리켰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좋아, 호법(護法)을 서겠다. 하지만 만에 하나 석심부인을 해하려 하는 낌새가 보인다면 가차없이 죽이겠다."
이수운은 불끈 화를 내다가 휭하니 나갔다.
탁옥룡은 석심부인을 구하고도 칭찬의 말 대신 노한 말을 듣는 데에도 전혀 노여워하지 않았다.
'수운, 저 아이는 원래 토라지길 잘했지.'
탁옥룡은 이수운이 나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눈길을 석심부인 쪽으로 돌렸다.
혈미륵만이 볼 수 있다던 석심부인의 얼굴이 환히 나타나 있었다. 그 모습은 아주 우아했다.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하를 진동시킬 미태의 소유자였다.
"혈미륵은 이 얼굴을 수운에게마저 비밀로 했었는데, 흐음…… 이 여인에게 그런 매력이 있단 말인가?"
탁옥룡은 석심부인을 자세히 보다가 요상대법을 시전했다.
그는 여러 가지 수법을 능수능란히 구사했다. 천산신의의 의술, 독왕의 피독술법과 절묘한 요상술, 그리고
활시교(活屍敎)의 비밀스러운 수법까지 동원되었다.
모두 선천강기를 구사하는 요법이었지만 그는 내공의 소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석심부인은 별호답게 눈을 감고 아무런 표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반나절이 지나자 탁옥룡의 막대하던 진기도 바닥이 날 정도가 되었다. 그는 석심부인의 뇌호혈 부위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석심부인이 죽게 되고 탁옥룡마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이제까지 들인 공은 모두 헛것이 될
것이다.
그는 우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게 했다.
"나의 피는 곧 인형설삼(人形雪蔘)의 영기가 서린 보혈(寶血)이다. 이 여인의 흩어진 내공을 살리는 데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탁옥룡은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피를 석심부인의 입안에 흘려 주었다.
"으음……!"
보혈의 약효가 있었는지 석심부인이 오랜만에 눈을 떴다.
그는 탁옥룡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공허하게 중얼거렸다.
"사… 사형은 인면수심이십니다."
석심부인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그러나 한이 실린 목소리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저… 저는 그렇지 않아도 사형의 여인이 될 여인인데……, 어이해 설도(雪刀)를 노리고 저를 암산하십니까?"
그녀의 말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설도라면 옥룡쌍도 중 하나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 여인이 옥룡마궁 여인이란 말인가?'
탁옥룡이 놀랄 때 석심부인은 힘이 빠진 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
"으윽… 흐윽……!"
석심부인은 아주 고통스러운 표정이 되어 몸을 뒤틀었다.
"갑자기 왜 이럴까? 아픈 데가 없을 텐데?"
탁옥룡은 급히 그녀의 맥을 짚어 진맥을 하면서도 그 증상을 밝혀낼 수 없었다.
"제… 제발 아이를 낳지 말기를……, 나의 손에 죽을 나의 아이를 낳아서는 아니 된다. 아… 아이를 죽여야
한다."
석심부인은 한참 동안 애낳는 시늉을 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호호호……, 죽어라!"
석심부인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녀의 두 손이 활짝 벌려져 탁옥룡의 목에 닿았다.
탁옥룡은 그의 힘이 막강하다 여겼으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진정하시오!"
그는 오른손으로 석심부인의 두 손을 한데 묶어버리며 왼손으로 석심부인의 혈도를 쳤다.
"으음……!"
수혈이 짚인 석심부인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줄줄이 기억하는군. 좋은 징조다. 잘하면 오랜 혼몽 속에서 깨어날 수 있다."
탁옥룡은 기뻐하다가 석심부인의 천령개에 손을 댔다.
슈슈슉―!
그의 몸 주위로 핏빛 기류가 일어났다. 그것은 마중마(魔中魔)의 경지이며, 어떠한 것이라도 부셔 버리는 천하의
마공 혈영금강마공의 힘이었다.
"뇌호혈에 깃든 사악한 힘을 혈영금강마공으로 몰아내자."
탁옥룡은 혼신공력을 한데 모았다. 내공의 힘이 실낱처럼 가늘게 되어 석심부인의 뇌호혈 속으로 파고들었다.
석심부인은 처음에는 극심한 추위에 떠는 듯하더니, 뒤이어 전신을 태울 듯한 열기를 느끼며 몸을 뒤챘다.
"아아악!"
탁옥룡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입정한 노승을 방불케 했다.
시간이 꽤 흘렀다. 혈무는 한결 흐려진 상태였다.
'성공했다. 이 여인을 이십 년 간 금제시켜 온 심마(心魔)를 완전히 몰아냈다.'
탁옥룡은 극도의 피로함을 느끼며 석심부인의 천령개에서 손을 떼어냈다.
"호호……, 이제 네가 죽을 차례다!"
등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수운은 보검을 쥐고 탁옥룡의 목에 갖다 대었다.
탁옥룡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은 들었다만……, 네가 그 장본인임을 이제야 알겠다."
"호호……, 너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기적을 이루는 마의 신이다. 너를 지금 쓰러뜨리지 않는다면 다시 기회를
찾지 못할 것이다."
이수운은 탁옥룡의 목 깊숙이 검을 꽂을 기세였다.
"나를 죽일 자신이 있는지 모르겠다."
"죽일 자신이 없다면 비굴하게 암습하지 않았다."
탁옥룡은 명재경각(命在頃刻)의 순간에도 아주 의연했다.
"그럼 나의 목을 내리쳐 봐라."
"오냐!"
이수운은 주먹을 불끈 쥐고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동강낼 기세였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검에 힘을 가하지 못했다.

"아……, 차마 너를 죽일 수는 없구나. 하지만 너의 무공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장차 마궁보다 더한 무림의 적이


될 것이니 너의 내공은 없애 버리겠다!
"참으로 천하게 변하다니 유감이다."
"변… 변하다니? 과거의 나를 안단 말이냐?"
이수운은 교구를 부르르 떨며 다그쳤다.
"말해 봐라!"
탁옥룡은 차분한 어조로 말해 주었다.
"나의 수하 실명검사(失名劍士)는 과거 회회공자다. 그는 네가 누구인지 내게 알려주었다. 네가 탁가장원의
이수운이라는 애송이고, 탁가장원이 마궁 분타로 화하며 피로 씻겼기에 마궁에 한을 갖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 그래서 나를 아는군."
이수운은 몹시 실망한 눈치였다.
이때 어디선가 한 줄기 지력이 날아들었다. 강렬한 쇳소리와 함께 보검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보검은
검자루조차 보이지 않게 깊숙이 박혀들었다.
"아… 아니?"
이수운이 깜짝 놀랄 때 온화한 목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는 중년여인이 있었다.
"어린아이가 간담이 크구나!"
"어… 어머님!"
이수운은 석심부인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석심부인은 자신이 어머니라고 불린 것이 어이가
없는 듯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나를 어머니라고 했느냐? 네가 누구이기에 나를 어머니라고 하느냐? 나는 너보다 세 살 정도 더
들었을 뿐인데."
석심부인은 그렇게 말하다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한동안 고뇌에 찬 표정을 짓고는 허탈감에 중얼거렸다.
"긴 악몽(惡夢)인 줄 알았더니, 아…… 나도 모르게 이십 년을 지냈단 말인가?"
석심부인의 목소리는 아주 맑았다. 한 점의 사기(邪氣)도 깃들여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어머님, 정신을 차리셨군요. 아……, 어머니는 포달랍궁의 주모(主母)이신 석심부인이시고, 소녀는 어머님의
양녀인 이수운입니다."
이수운은 얼른 다가가 절을 했다.
"포달랍궁?"
석심부인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나를 구한 사람이 포달랍궁 사람이었단 말인가?'
그녀는 혼미한 과거를 기억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미약을 당한 후, 누군가에게 유린을 당했다는 어렴풋한
상황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젓고는 이수운을 노려보며 아주 차게 말했다.
"내가 기억을 잃고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나 포달랍궁은 나의 친구가 될 수 없다. 포달랍궁은 내 손에 망해야
한다."
"예에……?"
"포달랍궁이 원흉이다. 포달랍궁이 공야사형(公冶師兄)의 얼굴에 흉터를 남기지 않았더라면 원한스러운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공야사형이라니요?"
"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석심부인은 차분히 말한 다음 뒷짐을 졌다. 그런 모습은 아주 엄숙하고 기품이 있었다.
"나는…… 옥봉(玉鳳)이다. 옥룡궁의 이대제자이지."
이수운과 탁옥룡이 함께 놀랐다.
"옥… 옥봉……?"
"일봉(一鳳) 옥룡선자란 말이오?"
석심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는 옥봉이다. 나는 옥룡사형(玉龍師兄)이 쓴 산공분과 한 가지 음독한 약에 당해 정신을 잃었었다."
"아……!"
"사형이 나를 암산한 이유는 포달랍궁이 사형의 얼굴을 망가뜨려 사형의 마음이 심마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사형은 궁주가 되기 위해 나를 암산했고, 내게서 설도를 뺏어갔다."
실로 엄청난 비사였다.
석심부인이 바로 죽었다던 옥봉일 줄이야!
이 사이 세상에 밝혀지면 온 천하가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또한 옥룡천자는 낯을 들 수 없는 천하의 패륜아가
되고 만다.
"나는 옥룡궁으로 가야 한다. 사형은 미쳤다. 사형을 궁법(宮法)에 따라 처단하고, 그런 사실을 선사 옥룡제군
(玉龍堤君)께 고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옥룡군 제자인 나의 임무이다."
탁옥룡은 그답지 않게 정중히 그녀를 가로막았다,
"정말 놀랍소. 하지만 지금 가실 수는 없소."
"왜?"
"아직 치료가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오. 이런 상태로 내공을 사용하면 다시 내상이 도져 정신을 잃게 되오."
옥룡선자 옥봉은 빛나는 눈동자로 차분하게 탁옥룡을 살펴보았다.
"네가 나를 구한 장본인이구나?"
"그렇소."
"아……, 추악한 아이인데 매우 뛰어난 의술을 갖고 있군. 네가 나를 구했다니, 이 고마움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탁옥룡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의원 말을 잘 듣는 것이 고마움에 대한 표현이오. 이 후 사흘간 보약을 먹고 침술을 시전받아야
앞으로 수십 년간 내상이 발작하지 않을 것이오."
"나는 급하다, 급히 가야 한다."
옥봉은 서두르려 했지만 탁옥룡은 요지부동으로 그녀를 방해했다.
"나를 일장으로 물리칠 수 있다면 떠나도 좋소. 그렇게 하지 못하신다면 내 말을 들으시오."
옥봉은 버들잎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으음……, 너는 옥룡궁의 절학을 모르는 아이로구나? 내 비록 태음일원신강의 진전을 얻지는 못했다만
옥룡구대절기(玉龍九大絶技)에 능통했다. 너는 나의 반초(半招)도 받아내지 못한다."
"하하……,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이오."
탁옥룡은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좋아!"
옥봉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휘저었다.
콰류류류―!
냉풍오령장(冷風五靈掌) 수법이 시전되어 동굴 안을 음산한 공기로 가득 메웠다.
― 옥룡보다 옥봉이 뛰어나다!
이십 년 전 강호에 퍼졌던 평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의 장초는 거의 완벽했고 아주 매서웠다.
오랜 강호행으로 역전의 경험을 갖고 있는 옥봉답게 그녀는 방비할 틈도 주지 않고 사납게 공격했다.
탁옥룡은 호신강기도 발휘하지 않고 몸으로 장력을 받아냈다.
꽈아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침통한 신음소리가 났다.
"으음……, 금강불괴지신?"
옥봉이 손을 훌훌 털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대체 너는 누구냐?"
"하하……, 약속대로 내 말을 따라야 하오."
옥봉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는 수 없지. 신의를 지키는 것이 옥룡궁의 전통이니까. 너와 함께 가겠다. 하지만 사흘 후에는 나를 막지
마라."
"그건 염려 마시오."
탁옥룡은 빙긋 웃으며 혈섬검을 등에 졌다.
옥봉과 말을 하고 있자니 마음이 이상하게도 포근했다. 그녀는 그가 알지 못하는 모성(母性)을 주었다. 탁옥룡은
그 힘 아래 아주 고분고분해졌다.
이수운은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너무도 엄청난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옥봉은 그녀를 그다지 반겨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어머니라 부르며
다가서기란 얼굴이 얇은 이수운으로서 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부께 말해야 한다.'
이수운은 자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듯 달려가는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개방 임시총단으로 갈 것이다. 금응을 타고 가면 그들이 개방에 이를 때 사부와 더불어 그들을 가로막을 수
있다.'
그녀는 초조한 기색을 짓다가 급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3
이역사단(異域四團)이 밀교단을 끝으로 전멸했다.
중원남북이 삽시간에 어지러워졌다. 옥룡마궁의 발호는 이제 더 이상 없을 것이라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제는 혈영마협이 천하제일인이 되어 과거 옥룡마궁의 했던 것 같은 독패강호(獨覇江湖)를 할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속속 생겨났다.
― 혈영마협이 바로 전설 속의 천년마제다!
이제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의 존재는 향후 강호 판도를 분별 짓는 태풍의 중심이 되었다. 옥룡마궁이 지는 태양이라면, 천년마제라 불리는
혈영마협은 갓 떠오른 태양이었다.
4
청학령(靑鶴嶺) 아래의 청학진(靑鶴鎭).
강남의 승경(勝景) 중에서도 가장 정취를 주는 청학진을 향해 나는 듯 달리는 일남일녀가 있었다.
흑의에 죽립을 쓴 괴인과 흰 옷에 얼굴을 몽면으로 가린 여인이 노을을 등에 지고 청학진 안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저 마을에 들러 허기를 때운 다음 밤을 새워 쉬지 않고 달린다면 내일 새벽쯤 회하에 이를 수 있소."
죽립으로 얼굴 가린 괴인의 말이었다.
"나는 이미 다 나은 듯한데 어이해 나를 내버려두지 않는지 모르겠다."
몽면여인의 목소리는 중년의 음성이었다.
"하하……, 의원이 되어 자신의 손으로 구한 사람이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마음입니다."
"너는 내가 철서생을 찾아가면 죽으리라 짐작하고 있다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그는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그는 아주 강합니다, 아주머니."
그들은 바로 탁옥룡과 석심부인이었다.
두 사람은 모자(母子)처럼 다정히 걸어 주기(酒旗)를 펄럭이고 있는 주루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루 안은 한산했다.
두 사람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소채(蔬菜)와 어회(魚膾)를 비롯한 몇 가지 맛깔 나는 음식과 더불어
여아홍을 주문했다.
'언뜻 보면 아주 차가운데 실상은 열혈한이다. 이 아이의 출신이 어떤 것인지 점점 알고 싶어지는군.'
옥봉이 그렇게 생각할 때 음식이 나왔다.
두 사람이 음식을 반 정도 비웠을 때, 허름한 옷차림의 중늙은이 하나가 탁옥룡 앞으로 다가왔다.
"헤헤……, 상방주께서 오신다는 전갈을 듣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식사에 방해가 될까 두려워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늙은이는 공손히 허리를 숙인 다음 오른손으로 옷자락을 슬쩍 들추었다. 그의 허리에는 포대가 매어져 있었다.
'개방의 칠결제자(七結第子). 그렇다면 이 사람은 향주(香主)의 지위다.'
탁옥룡은 포대의 형식을 보고 그가 개방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은 채 나직이
물었다.
"내가 오기를 급히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라도 있소?"
"이를 말씀이십니까? 상방주가 언제 오시나 알기 위해 제자 이천 명이 흩어져 요소 요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개방의 향주는 심각을 표정을 지으며 음성을 낮추었다.
"그 사이 마궁의 침공이 있었습니다."
"으음……!"
"다행히 기문진과 묘중기인의 활약으로 격퇴하기는 했습다만 사상자(死傷者)들이 아주 많이 생겼습니다."
탁옥룡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그런 일이 생겼소?"
"오늘 아침입니다. 그들은 다시 임시총단을 칠 작정입니다."
"흠, 그렇다며 시체의 산을 남길 수밖에!"
탁옥룡은 그에게 전음으로 몇 가지를 지시했다.
향주는 지시를 받자 허리를 넙죽 숙인 다음 주루 밖으로 물러갔다.
'그들이 서두르기 시작한다. 이는 바라던 바다.'
탁옥룡의 눈빛은 아주 차가웠다.
'심지가 깊은 아이다. 강호에 드문 대영웅(大英雄)이 옥룡궁이 아닌 다른 방파에서 나타났군.'
옥봉은 탁옥룡의 모든 점에 놀라워했다. 두 사람이 식사를 다할 때였다.
점원이 마른 행주를 쥐고 다가섰다.
"헤헤……, 맛있게 드셨습니까?"
나이 어린 점원은 간사하게 웃으며 다가서다가 소매 속에서 쪽지 한 장을 꺼냈다.
"이게 뭐냐?"
탁옥룡이 고개를 들고 묻자 점원은 얼른 쪽지를 내려놓았다.
"소인께 은자 두 닢을 주시고 이것을 대협께 전하라 하신 여협이 계셨습니다."
그는 서둘러 그릇을 소반에 담고는 물러갔다.
'누가 내게 이런 것을 보낼까?'
탁옥룡은 흰 손가락을 놀려 쪽지를 펴보았다.
<급히 할 말이 있다. 어서 마을 어귀 관제묘(關帝廟)로 나와라. 네 생사(生死)에 관한 중대한 문제다.
― 너를 아는 여인.>
서명도 없어 누가 썼는지 알지 못할 쪽지였다.
"누가 보낸 것이냐?"
옥봉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하……, 저는 추악한데 여인들이 저를 찾으니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탁옥룡은 쪽지를 펴서 보여주었다.
"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상대는 제가 혼자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았다."
옥봉은 따로 차 한 주전자를 주문했다.
탁옥룡은 나는 듯 달려 다 쓰러져 가는 관제묘 어귀에 이를 수 있었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를 바라보는 흑의인 하나가 있었다. 칼로 깎은 듯한 콧날을 가진 여인인데 눈빛이
아주 아름다웠다.
"흠, 새를 타고 왔군?"
탁옥룡의 얼굴이 그녀로 인해 일그러졌다.
흑의여인은 혈수나찰 이수운이었다. 이수운은 탁옥룡이 혼자 나타나는 것을 보고 피식 웃다가 소매를 흔들었다.
봉서 한 장이 번개같이 날아가 탁옥룡의 심장에 꽂힐 듯했다.
그것은 강기의 벽에 부딪혀 나비가 꽃에 내려앉듯 탁옥룡의 손바닥에 전해졌다.
"펴봐라!"
이수운은 크게 말하며 뒤쪽으로 날아올랐다.
탁옥룡은 그녀가 떠나가는 것을 보고 불길한 낌새를 느끼며 얼른 봉서를 뜯었다.
<석심부인을 포달랍궁으로 데려가기 위해 자네를 이곳으로 부른 것이다. 모든 것을 잊고 서장에서 여생을 보낼
작정이니 쫓지 말게. 물론 쫓을 재간도 없을 것이네.>
바로 혈미륵이 쓴 글이었다.
"으음,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로 나와 옥봉부인을 떼어놓고 그 사이 옥봉부인을 납치했단 말인가?"
탁옥룡은 주먹을 불끈 쥐고 주루 쪽을 바라보았다.
하늘 위를 나는 십여 마리 금응(金鷹)이 있었다. 아주 먼 곳이라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중 가장
큰 금응을 타고 있는 사람이 홍의인임을 얼핏 짐작케 했다. 그는 백의인영 하나를 안고 있었다.
끄― 아― 아― 악―!
금응은 아주 높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감히 나를 희롱하다니!"
탁옥룡이 치를 떨 때 가까운 곳에서 큰 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십 장 오른쪽 숲에서 훌훌 날아오르는 한 마리
금응이 있었다.
"호호, 우리는 포달랍궁으로 들어간다. 네가 천하제일인이 된 다음 중원으로 다시 나오마. 그때 못 따진 것을
죄다 따져 보기로 하겠다."
이수운은 탁옥룡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로 서 있는 것을 비웃으며 금응을 타고 높이 날아올랐다.
오십 장이나 떠올랐을까?
"으하하!"
웃음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탁옥룡이 쇄금강후로 웃으며 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혈섬검은 용 울음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이수운은 금응 등에서 이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호호……, 미친 놈! 설마 그것으로 나를 잡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녀의 말이 여운을 맺기 전에 탁옥룡은 검을 힘껏 집어 던졌다.
"바로 맞았다!"
혈섬검이 한 줄기 홍무지개로 화했다.
번― 쩍―!
벼락치는 기세로 허공을 꿰뚫는 혈섬검의 기세는 가히 경천동지할 정도였다.
"어… 어검술(馭劍術)―!"
이수운은 사색이 되어 금응 등에 납작 엎드렸다. 금응은 그녀와 심령상으로 통하는지 그녀의 뜻을 알고 급히
방향을 틀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금응십팔전(金鷹十八轉)!
금응은 깃털을 날리며 급선회했지만 혈섬검은 어느새 지척까지 이르렀다.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은은한 뇌성이
울려 퍼졌다.
케에에― 엑―!
혈섬검에 관통된 금응이 단말마의 비명소리를 내며 거꾸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금응의 목과 몸은 분리된
후였다.
"아악!"
이수운은 자지러지는 비명소리를 내며 금응과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으으……, 놈은 검신(劍神)이다!'
이수운은 사색이 되어 몸이 박살날 순간을 머리에 그리며 절망감에 젖었다.
이때 혈무가 다가서더니 그녀는 비단이불에 감기는 듯한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며 추락을 멈추었다. 탁옥룡이
그녀를 받아든 것이다. 그의 왼손에는 혈섬검이 쥐어져 있었다.
"네… 네가 이 정도였더냐?"
이수운은 겁에 질려 심장이 멎을 정도였다.
탁옥룡은 허공에서 일단 신형을 정지시킨 다음 수 리 밖으로 날아가는 금응 떼를 향했다.
"네 딸이 내 손에 있다. 나의 아주머니를 포달랍궁으로 잡아가려 했다가는 네 딸이 죽을 것이고, 포달랍궁이
나의 손 아래 피로 씻긴다."
그의 목소리는 천리전음술에 따라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한참 후, 이수운을 옆구리에 끼고 서 있는 탁옥룡의 머리 위로 날아드는 거대한 금응 한 마리가 있었다.
금응 위에 앉은 홍의승려는 탁옥룡의 어검술이 두려운 듯 오십 장 높은 곳에서 새를 멈추게 하고는 이를 으드득
갈며 외쳤다.
"네놈이 왜 본궁의 일에 끼여드느냐?"
"너희들의 일이 아니다. 그 분은 중원인이다. 그래서 너희들이 그 분을 서장으로 납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홍의승려는 물론 혈미륵이었다. 그는 억지를 부렸다.
"납치? 흐흐……, 석심부인은 제 집을 찾는 것이다."
"그 여인은 석심부인이 아니고 옥봉이다."
"석심부인이다!"
"고집을 부릴 일이 아닌 줄 잘 알 텐데?"
혈미륵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소 가라앉은 어조로 답했다.
"그 여인은 나의 여인이다. 어떤 것도 그 여인을 내 곁에서 빼앗지 못한다. 네가 석심부인을 밀교단에서 구한
것은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
"네가 바란다면 네게 포달랍궁주의 지위를 주겠다. 그러면 수천 명의 고수가 너를 따라 마궁을 치는데 선봉이 될
것이다. 좋은 조건이 아니냐?"
탁옥룡은 가소롭다는 듯 냉소를 쳤다.
"흥, 어떠한 것도 그 분을 내 곁에서 멀리하게 할 수 없다."
"뭐… 뭐라고?"
"그 분은 환자다. 아직 다 낫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분을 존경하고 있다. 그 분도 나를 조카같이 귀여워해
주신다. 네 딸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 분을 내려놓아라. 너는 딸을 데리고 어서 서장으로 떠나라!"
"흐흐……, 애송이가 못하는 말이 없군."
혈미륵은 싸우지 못하는 것이 분한 듯 옷을 풍선같이 부풀렸다. 그는 탁옥룡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탁옥룡이
자신의 모든 것을 망쳐 놓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결정해라! 네 딸의 목이 내 손에 의해 잘리는 것을 바라느냐?"
"그…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탁옥룡은 강경하게 외쳤다.
"그럼 나의 아주머니를 내려놔라!"
"그…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녀는 이미 수십 리 밖으로 갔다."
혈미륵의 말에 탁옥룡은 울화가 부글부글 치밀어 올랐다.
"흥, 감히 잔꾀로 나를 우롱하다니! 포달랍궁 정도는 반나절 안에 초토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천년마제가 바로
나임을 아직도 모르느냐? 나를 노엽게 해 포달랍궁이 영원히 문을 닫는 혈겁을 겪고 싶단 말이냐?"
"유아독존이구나!"
"싸울 자신이 있다면 덤벼라. 너 따위의 도전은 언제든지 쾌히 받아주겠다."
혈미륵은 볼을 실룩실룩거렸다.
천하제일을 자부하는 그였지만 탁옥룡을 만나고서부터는 그런 자부심이 꺾인 그였다. 그는 이내 마음을 정한 듯
결연한 어조로 내뱉었다.
"좋다, 내일 새벽 너와 비무하겠다. 그 자리서 살아남는 사람은 단 하나일 것이고 그 사람이 곧 석심부인의 벗이
될 것이다."
"장소는?"
"내가 너를 찾겠다. 나는 금응을 타고 다니니 너보다 십 배 빨리 움직일 수 있다."
탁옥룡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기다리겠다."
"흐흐……, 석심부인은 기억을 찾건 안 찾건, 옥봉이건 아니건 포달랍궁의 미신(美神)이다. 설득하면
포달랍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혈미륵은 자신 있게 말하였지만 표정은 초췌했다.
'그 여인은 떠날 것이다. 아……, 그 여인이 옥봉일 줄이야! 설마 한 일이 사실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가
옥봉이라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나를 원수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최대의 비밀을 말해 준다면
나를 은인으로 여기고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혈미륵은 속으로 궁리하다가 크게 말했다.
"나의 딸을 잘 보살피고 있거라. 내일 새벽, 석심부인의 거취를 두고 생사비무할 때까지 어떠한 해를 가한다면,
네가 지은 죄로 인해 죄없는 양민 일만 명이 피를 뒤집어쓰고 죽을 줄 알아라!"
그는 새를 조종해 위로 날아올랐다. 새 울음소리만이 요란할 뿐이었다.
"아……, 내가 왜 옥봉부인 때문에 큰 적을 만드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탁옥룡은 전과 달리 우수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옥봉부인은 그에게 있어 아주 신비한 존재였다. 그녀와 함께 있자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지고 힘이 솟았다.
'혈미륵도 그런 신비함 때문에 그녀를 떠나보내려 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걷기 시작했다.
이수운은 점혈당한 후였다. 그는 개방 임시총단이 있는 곳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第三章 천하제일미장부(天下第一美丈夫)
1
탁옥룡은 어기표풍술(馭氣飄風術)을 발휘해 개방 임시총단에서 칠십 리 떨어진 곳에 이를 수 있었다.
이수운은 그제까지 새근새근 잠자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주 사랑스러웠다. 연분홍 뺨에 새겨진 볼우물이 강렬한
염기(艶氣)마저 발했다.
탁옥룡은 간간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곤 했다.
'새벽이 되면 너를 보내 주겠다. 그리고 다시는 너를 찾지 않겠다. 네가 찾는다면……, 모르는 척 너를 죽여
번민을 끊을 것이다.'
그는 강호에 나온 이후 처음이라 할 정도로 아주 처량한 심사가 되어 걸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가 상심에 있어서도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걷다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였다. 길 모퉁이
근처에서 살기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은연중 포위당한 상태였다.
'막강한 검세다. 흠, 마궁의 비밀고수들이 나를 알아보고 검진을 친 것일까?'
그는 발을 멈추고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고인들이오? 모두 열 둘! 숨어 있다는 것을 아니 어서 나타나시오."
죽립을 뚫는 혈광은 너무도 공포스러웠다.
"기다렸다, 천년마제!"
"혈영마협! 마중지존이 백도에 진 빚을 네 수급으로 갚거라!"
이곳저곳에서 열 명이 걸어나왔다.
모두 일심맹도(一心盟徒)였다. 그들은 마궁에 죽은 구파장문인의 뒤를 이어 구파의 신임 장문인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탁옥룡은 그들을 쓸어보다가 한 곳을 바라보았다.
"너는 왜 나오지 않느냐?"
큰 바위 뒤에서 이상한 호흡소리가 났다.
천천히 일어나는 백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얼굴이 아주 영준한 미소년 하나가 녹옥선(綠玉扇)을 쥐고 쓴웃음을
흘렸다.
'천룡이도 일심맹에 들었단 말인가? 으음……, 그렇다면 저쪽에 숨어 있는 사람은 사마옥봉이기 쉽다.'
그는 창염장의 사마천룡을 알아보고도 눈빛에 동요를 갖지 않았다. 그는 사마천룡을 모르는 체하며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너도 나타나라!"
그의 시선은 큰 나무 뒤에 머물렀다.
"호호……, 과연 대단한 이목이다."
차가운 목소리가 나더니 청의여인 하나가 녹옥소를 쥐고 걸어나왔다. 바로 소협(簫俠)이라 불리게 된
사마옥봉이었다.
"호호……, 나는 일심검제께 일심맹의 탕마호법(湯魔護法) 지위를 제수 받은 사람이다."
탁옥룡이 아름다운 여인을 벗하는 것이 그녀를 노엽게 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본맹은 너희 두더지 굴을 노리던 마궁도 수백 명을 사로잡았다. 잔당이 몇 있기는 하나 오래지 않아 잡힐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너의 두더지 굴로 들어가지 못하고 십이천성검진(十二天星劍陣) 아래 시체가 되어야 한다."
사마옥봉이 검진의 우두머리였다.
그녀는 천(天)을, 사마천룡은 지(地)의 주축이 되고 있었다. 진세는 그들이 끼여 있기에 더욱 강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마궁도들을 제압하다니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어 고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탁옥룡은 아주 오만하게 응수했다.
'비정한 놈!'
사마옥봉은 눈물을 왈칵 쏟을 듯했다. 그러나 강호에서의 경험이 그녀를 아주 냉막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며 아주 차게 말했다.
"네게 빚을 지고 있으나 너를 죽여야 한다는 데에는 달라질 것이 없다. 너는 죽어야 마땅할 백도의 적
천년마제이기 때문이다."
"하하……, 내가 죽으면 마궁을 막기 힘들 텐데?"
"마궁은 감히 덤비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럴 자신이 없었다면 너를 가로막지 않았을 것이다."
탁옥룡은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무슨 일이 그토록 자신을 주었느냐?"
"호호, 너를 찾아다니다가 발각된 계집 하나가 있다. 그 계집을 잡는다면 마궁은 우리에게 굴복당할 것이다.
지금 맹주가 그 계집과 겨루고 계신다. 그 계집은 반 시진 안에 잡힌다."
사마옥봉은 숨을 돌리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오늘 밤 천하에서 두 가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다. 이는 바로 백도가 영광을 찾는 새로운 장이 될 것이다."
"나를 찾다가 쫓기게 된 여인은 누구냐?"
탁옥룡의 낯빛에 심각한 변화가 생겼다.
사마옥봉은 그런 그의 모습을 즐기듯 술술 털어놓았다.
"호호……, 공야홍(公冶紅)이 너를 찾아 개방 총단 쪽으로 가다가 발각당했다. 그 계집이 왜 몰래 너를 찾으려
했는지는 곧 밝혀질 것이다."
"공야홍?"
탁옥룡은 크게 놀라며 얼른 귀를 쫑긋 세웠다. 그는 천이통의 단계를 뛰어넘는 육심통령대법(六心通靈大法)을
이용해 주위를 살폈다.
"그녀의 목소리다."
그는 차분히 말한 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살기 등등한 표정들이었다.
"길을 비켜라. 자칫하다가는 혈섬검 아래 고혼이 된다."
정파명숙들을 두려움도 잊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십이천검성진이 너를 죽일 것이다!"
"혈영마협, 넌 여기서 죽어야 한다!"
"네가 오래지 않아 마중지존보다 더한 광마가 된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우리 모두 동귀어진할 각오로 왔다!"
사위를 에워싼 십이천성검진의 진세는 막강했다. 탁옥룡은 그것을 격파해야만 자유로워질 것이다.
'죽이고 싶지는 않은데…….'
탁옥룡은 어찌할 바 모르다가 사마옥봉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질투와 원망의 빛이 가득했다. 그녀는 그가 안고 있는 이수운을 간간이 쏘아보고 있었다.
탁옥룡은 눈길을 돌려 사마천룡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뇌에 찬 표정이었다.
탁옥룡은 그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천룡아!"
"예… 예……?"
사마천룡이 갑자기 몸을 휘청였다. 탁옥룡이 너무도 부드럽게 말을 걸기 때문이었다.
"하하……, 길을 비켜줘야겠다."
탁옥룡은 웃으며 사마천룡을 향해 다가갔다.
"서라―!"
"차앗―!"
사마옥봉을 위시한 정파명숙들이 검을 빼고 검세를 일으켰다.
츄리리릭―!
시퍼런 검기가 교차하며 치밀한 검진을 형성했다.
"은공(恩公)!"
사마천룡은 눈앞으로 다가서는 탁옥룡을 향해 감히 옥선을 쳐들지 못했다.
"비켜라, 네가 비켜야 싸움이 나지 않는다."
탁옥룡이 담담히 말하자 사마천룡은 우는 표정이 되었다.
"그… 그러면 일심맹을 배반하는 일이 됩니다."
"그럼 일심맹을 배반해라!"
"예에?"
"하하……, 내가 너를 거둬주겠다. 너는 일심맹주 밑에서 자라다가는 빛을 다 발휘하지 못할 아주 뛰어난 아이가
아니냐?"
"배… 배반이오?"
사마천룡이 솔깃해 하자 모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되었다. 특히 사마옥봉은 노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천룡아, 그 자는 광마다. 어서 그 자를 죽여라!"
사마천룡은 잠시 고뇌하다 마음을 정한 듯 결연하게 외쳤다.
"누님, 이 분은 우리 남매에게 녹옥삼보의 절기를 주시고, 우리들의 생명을 구해주신 은인이십니다. 저는 누님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분께 진 빚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서슴없이 탁옥룡 곁으로 다가갔다.
"가자, 급하다!"
탁옥룡은 진세가 허물어지가 그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육심통령대법으로 파악한 소리를
따라 나는 듯 달려갔다.
그의 움직임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모두들 그제서야 사마천룡이 비켜난 뜻을 알았다. 그리고 검을 떨어뜨렸다.
"그 자는 무적(無敵)이다."
"십이천성진으로도 그 자를 막지 못한다."
명숙들은 패배를 자인하는 표정이 되었다.
"흑흑……!"
뜻을 이루지 못한 사마옥봉은 참담한 심정이 되어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탁옥룡은 쉬지 않고 십 리를 달렸다. 그는 허공을 타고 날면서도 계속 천이통을 전개했다.
'분명 이 근처인데?'
별빛으로는 밝아지지 않는 짙은 어둠 속을 흐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 비켜 주십시오."
"잡아야 한다."
"제… 제발 저를 막지 마십시오."
"너는 철서생의 딸이다. 그러기에 너를 잡아야 한다."
"아……!"
여인의 탄식성과 함께 청명한 음성이 이어졌다.
"너는 착한 아이다. 마성에 물들지 않았다. 너를 해하고 싶지는 않으니 나를 따라 일심맹으로 가자. 악을 버리는
것이다. 정말 좋은 일이다."
"저… 저는 할 일이 있습니다. 혈영마협을 찾아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한 가지 중대한 비밀을 말해야 합니다."
흑의여인이 백의승려와 이 장 거리를 두고 서서는 하소연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지극히 뛰어났다. 이수운이 청초하고 깔끔한 미모라면, 그녀의 미모는 백합(白合)같이 고고하고
숭고한 미모였다.
그녀 앞에 합장하고 서 있는 백의승려의 얼굴은 활불같이 장엄했다.
"혈영마협은 오지 못한다. 그는 오는 도중 소선쌍협과 정파명숙들이 형성한 천성검진에 잡혔다. 그는 개방으로
가지 못할 것이다."
"그 분은 무적입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암습당하지 않는 이상 쓰러지지 않을 분입니다."
여인은 신념에 찬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허……, 사람의 힘은 유한한 법이다. 특히 마의 힘은!"
백의승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하하……. 이게 얼마만이오, 일심검제(一心劍帝)?"
흑의청년이 낭랑히 웃으며 두 사람 사이로 끼여들었다.
죽립을 목뒤로 걸고 있는 추악한 청년으로 한쪽 가슴에 아리따운 여인을 안아들고 있었다.
"혈… 혈영마협! 검진을 뚫었더냐?"
백의승의 얼굴빛이 싯누래졌다. 그는 바로 일심맹주로 추대된 소림사의 고승 무혈검이었다.
"하하……, 나를 높이 사 주는 사람이 곤궁에 처해 있기에 온 것이외다."
탁옥룡은 웃으며 흑의여인 곁으로 다가갔다.
일심검제에게 길이 막혀 있던 여인은 바로 공야홍이었다. 그녀는 촌여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변복(變
服)을 하면서까지 개방 임시총단으로 가 탁옥룡을 만나기 위함이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공야홍은 탁옥룡을 보자 반갑고도 착잡한 듯 아주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탁옥룡은 그녀를 바라보며 전음으로 물었다.
"왜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나를 찾소? 철서생이 어떤 함정을 파는 것이오?"
"그게 아닙니다."
"그럼?"
공야홍은 꽃잎 같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전음성이지만 달콤한 음성은 여전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상공을 노리는 사람이 개방에 잠입했습니다. 그 사람은 정파명숙입니다. 그는 상공을
감쪽같이 암산하기 위해 그곳에 잠입했습니다."
"마궁 사람이오?"
"마궁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청의를 걸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독존의 밀명을 받고 개방에 잡입했습니다."
공야홍은 그렇게 말하며 떠나려 했다.
"잠깐!"
탁옥룡의 손에서 능공섭물 진기가 발휘되었다.
공야홍은 여인 중에서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삼갑자 내공을 갖고 있었으나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왜… 왜 소녀를……?"
공야홍이 몸을 떨자 탁옥룡은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낭자가 진정 공야무군의 친딸이 아닌지 알고 싶어 만류하는 것이오."
공야홍은 착잡한 표정이 되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보셨습니다. 소녀는 철서생의 딸이 아닙니다."
"흠……, 그럼 본성(本性)은 뭐요?"
"백가(白家)입니다."
"백이라……, 혹 본명은 백옥지(白玉芝)가 아니오?"
"아… 아닙니다, 절대로 저는……."
공야홍은 사색이 되어 높이 날아올랐다. 그녀는 탄지지간에 자취를 감췄다.
"마궁주 철서생의 딸과 암통하다니 보통 일이 아니다. 너와 마궁 사이에 비밀 거래라도 있단 말이냐?"
무혈검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이미 천강복마공(天 伏魔功)을 십이성 공력으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하하……, 스님은 나를 잘 아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구료."
탁옥룡은 비웃으며 뒤돌아 섰다.
장력으로 치고 싶으면 치라는 듯 허점을 훤히 보이며 그는 아주 태연히 걸어갔다. 너무도 대담한 행동이었다.
무혈검은 손바닥을 땀으로 적시면서 고뇌에 찬 표정을 지었다.
"내일 일심맹의 흥망을 걸고 너와 겨루겠다. 나는 너로 인해 살계(殺戒)를 어길 것이고, 다시 이십 년 면벽에
들어 강호에 출도해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을 것이다."
그는 크게 말하며 위로 날아올라갔다.
탁옥룡은 그가 사라져 가는 것을 힐끗 바라보다가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혈미륵… 무혈검……, 왜들 나와 싸우려 하는지 모르겠군."
2
탁옥룡은 사마천룡과 나란히 걸어 회하가에 이르렀다.
"상방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개방 사람들은 탁옥룡이 십절죽부령을 철수개에게 넘겼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상방주라고 불렀다.
그들끼리는 이미 결정을 내린 후였다.
―혈영마협을 마(魔)라 한다면 개방도 마(魔)가 되리라!
철수개가 며칠 전, 모든 제자들을 불러놓고 그렇게 선포했다.
그는 탁옥룡을 완전히 믿기로 하고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의 결정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이 그의 말을 믿고 개방에 남기로 했다.
정파는 반으로 나뉘어진 셈이었다.
명문거파(名門巨派)는 일심맹으로 뭉쳤다. 나머지 문파는 마궁에서 장악당했다가 탁옥룡 덕에 정파로 돌아온
개방을 중심으로 하여 점점 큰 세력으로 화했다.
아직 수뇌가 정해지지는 않았으나, 모두들 마음속으로 자신들의 수뇌는 혈영마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탁옥룡은 몇 사람의 환영을 받았다.
실명검사(失名劍士)가 된 회회공자, 묘중기인의 전인이 된 매화, 개방주 철수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다만, 관 안에 있어야 할 묘중기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무공을 모르는 마의불수(麻衣佛手)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탁옥룡은 그를 환영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한 사람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응……?'
놀라움을 주는 사람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청의노인이었다.
공야홍이 경계하라고 한 빛깔이 바로 청색이었지만 탁옥룡은 너무 놀라 노인이 청색 옷을 걸쳤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연륜과 지혜로 인해 선기스러워 보이는 노인은 계피학발이었지만 마치 소년처럼 온화함을 느끼게 했다.
탁옥룡이 눈길을 노인에게 고정시키자 회회공자가 얼른 허리를 숙였다.
"주인, 이 분을 아시는지요? 이 분은 최근 개방을 찾은 강호고수 중 가장 높은 배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
탁옥룡은 그답지 않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회회공자가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바로 천산신의(天山神醫)십니다."
"허허……, 노부는 천산신의라는 사람이오. 혈영마협이라는 엄청난 이름에 호감을 느끼고 찾아왔소."
계피학발의 천산신의가 다가와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탁옥룡은 반가움에 얼굴을 활짝 폈다.
"할아버지, 저를 모르십니까?"
그는 이수운을 사마천룡에게 넘기고는 손을 모으며 장읍을 했다.
천산신의라면 구정산 기슭에서 그에게 천산의서를 준 기인이 아닌가? 참으로 뜻밖의 재회였다.
천산신의는 손가락 끝을 파르르 떨었다.
"허허……, 혈영마협이 아니시오? 장차 정사(正邪)의 맹주가 되실 천하제일고수!"
"할아버지, 저는……."
탁옥룡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싶었다.
순간, 천산신의의 열 손가락이 소매 속에서 빠져나와 탁옥룡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파팍― 팍―!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탁옥룡의 옷이 시뻘겋게 젖었다.
"어― 엇?"
"저 늙은이가!"
모두 기절초풍 놀랄 때 천산신의는 훌쩍 날아올라 중인의 머리 위를 타넘어 갔다.
"서라!"
회회공자는 극도로 분노하며 주먹을 움켜쥐고 그 뒤를 따르려 했으나, 이때 그의 고막 속으로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들키지 않고 쫓아가라. 그 분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라. 그러나 그 분께 해를 입혀서는 아니 된다."
바로 탁옥룡의 목소리였다.
회회공자는 비로소 자신의 주인이 큰 화를 입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추격에 나섰다.
탁옥룡은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쓰러지지도 않았고, 고통스러운 표정도 아니었다.
'독강지공(毒 指功)으로 나를 암산할 줄이야. 아……, 공야홍이 말한 사람이 바로 천산신의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공야홍은 분명 구정산 아래서 만난 백옥지(白玉芝)의 화신이다.'
탁옥룡은 금강불괴지신이라 죽지 않은 것이다. 그는 멀리 사라져 가는 천산신의를 바라봤다.
천산신의의 경공은 탁월했다. 수많은 사람 중 그를 따를 사람은 단 둘이었다. 탁옥룡, 그리고 회회공자가 바로
그들이었다.
탁옥룡은 가슴팍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분명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상처부위가 몹시 쓰라렸다. 그가 강호에 나와 입은 상처 중 설혈상소도(雪血雙小刀)에 당한 치명상 다음으로 큰
상처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쓰디쓴 소리를 내자 거친 목소리가 나며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헤헤……, 주인답지 않소."
마의불수가 홍의거한(紅衣巨漢)과 함께 다가서고 있었다.
홍의거한은 그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두 다리와 왼팔은 철비철각(鐵臂鐵脚)이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옷은 탁옥룡이 입었던 천잠보의였다.
"허허……, 주인을 뵙소."
그는 마의불수와 함께 장읍을 취했다.
"아, 묘중기인이시구료?"
탁옥룡은 그제서야 그를 알아보았다.
"예, 마의불수 덕에 시독을 골수 안으로 잡아넣을 수 있었소. 게다가 의수(義手)와 의족(義足)을 달고 움직이게
되었으니 감격스러울 뿐이오."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도 있었다. 팔 하나만 달랑 남아 추한 몰골로 관 속에서만 생활하던 그가 어엿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하하……, 과연 회혼문(回魂門)의 회생술(回生術)은 놀랍군. 우욱……!"
탁옥룡은 말하며 구역질을 참는 표정을 했다. 마의불수가 얼른 다가섰다.
"잘 된 일입니다."
"지금 놀리는 거요?"
마의불수는 주름진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었다.
"헤헤……, 주인께 드릴 영단 열두 개가 있소이다. 그것은 약효가 아주 좋아 대부분이 낭비될 예정이었는데,
헤헤……, 주인께서 내외상(內外傷)을 입으셨으니 약효가 쓸데없이 소모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열두 개의 영단이라니?"
"헤헤……, 제가 그간 골방에 틀어박혀 만든 것이지요. 회회공자에게 쓴 결과 약효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졌소이다. 두 시진 밖에 걸리지 않는 일입니다. 속하와 함께 밀실로 가시지요."
탁옥룡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무엇을 하잔 말인가?"
"헤헤……, 일단 가시자니까요?"
마의불수는 탁옥룡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묘중기인은 그와 묵계가 된 듯 마의불수와 함께 탁옥룡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모든 사람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존경받던 기인 천산신의가 암습자로 화한 다음 도망쳐 간 것이 첫 번째 놀라움이다. 그리고 탁옥룡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두 번째 놀라움이다.
그리고 탁옥룡의 이름 모를 수하들이 하는 행동이 세 번째 놀라움이 되었다.
"가… 가겠소. 옷이 찢어지면 낭패니 이러지들 마시오."
탁옥룡은 두 사람의 호위를 받아가며 안으로 들어갔다.
3
목옥(木屋) 지하석실.
탁옥룡은 상의를 벗은 채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는 마의불수를 믿고 눈을 감았다.
마의불수는 크기와 빛깔, 향기가 다른 열두 개의 단약을 한데 섞어 가루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단약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헤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예술입니다. 속하는 주인을 만난 이후 심득을 얻어 비전회생법을 터득했던
것이지요."
그는 검은 고약을 들고 다가섰다.
"나를 어쩌자는 것이오? 나의 내공은 더 이상 이를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하오. 몸뚱이는 더 이상 단단할 수 없이
단단하고."
"헤헤……, 다른 것은 다 괜찮습니다만 얼굴이 문제지요."
"나… 나의 얼굴?"
"상처를 지워야 합니다."
"이 얼굴을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탁옥룡은 눈을 뻔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묘중기인은 그런 일이 벌어지기를 예상한 듯 얼른 손가락 퉁겼다. 파공성과 함께 향기가
뿌려졌다.
"윽……, 미혼향(迷魂香)을?"
탁옥룡은 현기증을 느끼며 다시 드러누웠다.
"헤헤……, 두 시진이면 됩니다. 걱정 마시오. 속하들이 어찌 해가 되는 일을 하겠소이까?"
마의불수의 목소리가 꿈결같이 들렸다.
탁옥룡은 천산신의에게 암습당한 상태인지라 미혼향의 약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탁옥룡은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암흑뿐이었다.
"고약을 바른 천으로 얼굴을 가렸군?"
"헤헤……, 바로 그렇습니다."
마의불수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이제 다 되었소이다, 주인. 고약 칠한 천을 벗기기만 하면 속하가 꾸민 일의 성패가 가려질 것이외다."
그의 목소리는 득의에 차 있었다.
탁옥룡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의불수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겠지만 나의 경우는 회회공자와 다르다. 나는
금강불괴지신이라 상처가 낫지 않는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입술을 떼었다.
"나의 얼굴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게나."
"제가 주인께 무엇을 했는지 아시는군요?"
"하하……, 나의 얼굴에 난 상처를 지우려 함을 아네. 그러나 그것은 의술로도 불가능한 일일세. 회회공자는
독으로 인해 피부가 상했기에 천년속단유(千年續斷臾) 같은 영약으로 치료하면 살이 다시 나겠지만, 나는 뼈가
다쳐 약을 쓴다 해도……."
탁옥룡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마의불수가 얼른 말을 받았다.
"헤헤……, 천년속단유에 지룡혈보(地龍血寶)를 섞으면 어떻겠소이까?"
마의불수는 손가락을 놀려 탁옥룡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고약 칠한 붕대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탁옥룡은 가벼운 희망을 가졌다.
"그… 그러면 핏줄이 살아나겠지. 하지만 지룡혈보 같은 귀한 약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활시교 천시대묘 안에서 구했습죠."
"흐음, 그것을 구했다니 반갑네만 그렇다 해도 부서진 뼈를 다시 살리지는 못할 것이네."
마의불수는 사뭇 자신 있다는 표정이었다.
"글쎄올시다."
"삼목금섬(三目金蟾)이 있기 전에는 힘드네."
"바로 그렇습니다."
탁옥룡은 다소 놀라움에 젖어 물었다.
"삼목금섬도 구했단 말인가?"
"헤헤……, 속하가 철수개 방주에게 부탁해 아주 힘들게 구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인면지주(人面蜘蛛)의 피를 얻기 전에는 상처를 없애지 못할 것이야."
탁옥룡의 목소리가 저으기 떨렸다.
사실 그는 자신의 파손된 얼굴을 치유할 처방은 알고 있었다. 그가 백방으로 노력하고 구하려 했다면 모든 약을
얻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구태여 자신의 얼굴을 치료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이 회복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헤헤……, 그것은 속하가 십오 년 전에 북천산(北天山) 고동(古洞) 안에서 잡아 약병에 보관해 두며 감상하던
것이었지요."
마의불수는 그렇게 말하며 붕대를 다 풀었다.
"오오……!"
묘중기인의 탄성이 방안에 가득했다.
"아……, 무림제일미남자(武林第一美男子)이외다!"
마의불수는 놀라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검은 붕대 밑에서 나타난 탁옥용의 얼굴은 그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내… 내 얼굴이 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탁옥룡은 상체를 일으키며 손가락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촉감이 아주 부드러웠다.
'이럴 수가! 거북이 등가죽 같이 거칠기만 하던 나의 얼굴이 비단결같이 매끄럽기만 하다니…….'
그는 흥분에 젖어 얼굴을 붉게 물들었다.
"헤헤……, 이것을 보십시오."
마의불수는 약간 못생긴 얼굴 가득 환한 웃음꽃을 피우며 커다란 구리 거울 하나를 쳐들었다.
탁옥룡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구리 거울을 응시했다.
동경(銅鏡) 안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탁옥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탁옥룡이 본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얼굴이었다.
얼굴빛은 아주 희었다. 병적(病的)인 백색은 아니었고, 싱싱한 건강미를 담고 있는 흰빛인데 양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소년 같았다.
힘차게 뻗은 검미(劍眉)는 두 자루 칼이었다.
묵검(墨劍)이 바로 그의 눈썹인데 두 개의 타는 듯한 눈동자와 어울려 너무나도 강렬한 맛을 던졌다.
깎은 듯 오똑한 콧날, 고집과 오만함이 드리워져 약간 찌푸려진 입 매무새, 그리고 강인해 보이는 턱의 선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이 나란 말인가?"
탁옥룡이 말을 더듬자 거울 속의 천하제일 미남자도 말을 더듬었다.
"주… 주인! 속하가 주인을 위해 큰일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죽는다 해도 유감이 없소이다."
마의불수는 감격해 땅에 꿇어앉았다.
묘중기인(墓中奇人)도 감탄해 마지않았다.
"오……, 내가 본 얼굴 중 가장 뛰어나외다. 주인, 마의불수가 허락 없이 한 일이기는 하나 잘 된 일이니
용서해 주시오. 사실 속하가 마의불수를 부추겨 주인의 얼굴 상처를 지우게 한 것이외다."
"내… 내가 어찌 여러분을 꾸짖겠소?"
탁옥룡의 눈시울은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화를 낸다면 가식일 것이오. 이제는 과거의 모습이 되어 감정의 변화를 추악한 얼굴로 속일 수가 없겠소."
그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얼굴은 그의 과거와 같은 것이었다. 그의 용모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것은 이목구비의 단정함만으로
아름다워진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얼굴 가득 대장부의 기개가 있기에 영웅의 풍모로서 손색이 없었다.
탁옥룡이 두 사람의 충정을 위로해 주고 있을 때였다.
"주인님!"
방 밖에서 큰소리가 났다. 매화의 음성이었다. 매화는 지하석실의 문 앞에 서서 크게 외쳤다.
"주인님, 혈미륵이 전갈을 보냈습니다!"
그녀가 두 번 거듭 탁옥룡을 찾을 때 석문이 안쪽에서 열리며 아주 아름답게 생긴 미청년 하나가 싱긋 웃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너… 너는 누구냐?"
매화가 깜짝 놀라 손을 쳐들었다.
"감히 연공실에서 나오다니!"
매화는 바싹 긴장하며 다짜고짜 오지를 퉁겼다.
피피핑―!
며칠만에 일류고수로 성장한 그녀는 제법 지력을 발출할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하하……, 내가 정말 많이 달라지기는 달라졌군?"
미청년은 웃으며 흑삼을 슬쩍 흔들었다. 매화가 쏟아낸 다섯 줄기 지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매화는 그의 놀라운 수법에 놀라기 이전 그의 목소리에 크게 놀랬다.
"앗, 주인님이십니까? 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매화가 크게 놀랄 때 마의불수가 헛기침을 하며 걸어나왔다.
"으헤헤……, 가서 용정차(龍井茶)를 끓여 오너라. 나와 네 사부는 주인을 이렇게 만들기 위해 두 시진 동안
비지땀을 흐렸다."
"허허……, 매화야. 너의 사숙(師叔) 마의불수의 의술이 천하제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사부도 확실히 알았다."
묘중기인도 웃으며 따라 나왔다.
"아아……!"
매화는 너무나도 뛰어나게 생긴 미청년이 바로 혈영마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휘청이기까지 했다.
'진정 천하의 미장부이시다. 너무도 아름다우신 주인님이셔.'
그녀는 잠시 황홀감에 젖었다.
만일 그녀가 그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았고, 또 새로이 마음을 준 회회공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의 시비가
되기를 자청했을 것이다.
탁옥룡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 혈미륵이 어떤 전갈을 보냈느냐?"
"금응을 탄 사람 하나가 와서 이것을 전했습니다."
매화는 소매 속에서 봉서를 꺼냈다. 그는 얼른 받아 개봉했다.
<너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쳤다. 나는 너를 죽이고 중원천하를 피로 씻을 작정이다. 포달랍궁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중원인들을 모조리 쳐죽일 것이다.
곧 십리백사평(十里白沙坪)으로 와라.>
한 글자 한 글자 원한으로 가득했다.
'옥봉부인과의 담판이 실패로 끝났음에 틀림없다. 옥봉부인이 이십 년 세월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분해 이런
글을 적은 것이다.'
탁옥룡은 쪽지를 접어 품에 지녔다.
"나가서 죽립을 하나 구해 오너라."
그는 매화에게 지시하고는 팔짱을 끼고 무엇인가를 골똘히 궁리했다.
묘중기인이 허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인, 혈미륵이란 자는 우둔한 자이나 충직스럽소. 그는 제 딴에는 보살행을 한다고 자부하고 있소. 그가
중원을 피로 씻을 작정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그는 유난히 키가 커 탁옥룡의 어깨 너머로 편지 안의 내용을 한자도 빠짐없이 살펴본 후였다.
"그는 나 때문에 가장 귀중한 것을 잃었소. 그래서 나를 죽이려하는 것이오. 그러나 곧 냉정을 찾을 것이오."
"가장 귀중한 것이라니요? 혈수나찰이라는 어린 소녀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아니오."
"그럼……?"
탁옥룡은 실로 엄청난 비밀을 숨김없이 말해주었다.
"그는 나 때문에 석심부인을 잃었소. 석심부인은 나로 인해 이십 년 동안 잃어버리고 있던 기억을 찾게 되었소.
놀랍게도 그녀는 옥룡(玉龍) 옥봉(玉鳳) 중 옥봉이었소."
"옥… 옥봉!"
묘중기인의 흰 머리카락이 칼같이 되어 삐죽삐죽해졌다.
"하하, 놀라우나 사실이오. 옥룡제군에게서 설도를 물려받은 옥봉이 바로 포달랍궁의 보물 석심부인이었소."
"그… 그럴 리가……?"
묘중기인의 경악은 극에 달했다.
탁옥룡은 그런 그의 반응을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며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옥봉은 철서생에게 암살당해 설도를 뺏기고 쓰러졌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던 혈미륵에게 발견되었던 것이오."
탁옥룡은 밀교단에 가서 석심부인을 구한 일부터 시작해, 청학령에서 조호이산지계에 속아 석심부인을 납치당한
일을 소상히 이야기해 주었다.
매화가 죽립을 들고 지하로 들어섰다.
탁옥룡은 죽립을 건네 받아 푹 뒤집어쓰며 아주 뛰어나게 변화한 얼굴을 가린 다음 갓끈을 질끈 조였다.
"나 혼자 할 일이니 따라 나설 생각 마시오."
그가 걸음을 내디디려 할 때였다.
"속… 속하는 주인을 따라 가겠소."
묘중기인이 비지땀을 흘리면서 따라 나섰다.
"하하……, 도움은 필요 없소."
"도움이 아니외다. 사실…… 옥봉은 속하가 아는 여인이오."
"아……, 그렇소?"
"그녀를 만나 꼭 할 말이 있소. 그래서 만나러 가는 것이오. 속하가 따라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오."
"그렇다면 함께 갑시다."
탁옥룡은 쾌히 승낙한 다음 계단을 통해 위로 나갔다.
계단 칠십여 개를 올라야 평지가 나타났다. 지하석실로 들어가는 통로를 지키는 사람은 바로 선협 사마천룡과
개방주 철수개였다.
둘은 매화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듯 탁옥룡이 걸어나오자 얼른 그의 얼굴 부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죽립에 지나지 않았다.
탁옥룡은 그들의 호기심을 알기에 한번 죽립을 벗고도 싶었으나 때가 아니라 여기고 침착히 말했다.
"천룡아."
"예, 은공."
"너는 이 길로 이곳을 떠나라."
사마천룡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예에?"
"하하……, 나를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할 일이 있다는 말이다."
"휴우……, 난 또……."
사마천룡은 어린 마음에 크게 놀랐던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일심맹주를 찾아가라. 가서 내가 담판을 지을 작정이니 비무를 바란다면 나를 찾아오라는 말을 전해라."
"담판이오?"
"축융봉으로 갈 때가 되었다. 그 이전에 시시한 일을 다 마무리 지어야 한다."
탁옥룡은 일심맹주 무혈검의 대결 따위는 아주 사소한 일로 간주했다. 천년마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 누이를 만나거든 이렇게 전해라. 공야홍은 사실 과거 나를 구한 은인이라 구했으니 나를 오해
말라고!"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사마천룡은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탁옥룡은 한 줄기 흑선이 되어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묘중기인이 홍선 하나를 그리며 그의 뒤를 이었다. 가히
천하제일의 경공들이었다.

第四章 밝혀진 탄생(誕生)의 비밀


1
십리백사평(十里白沙坪).
흰 모래가 십 리에 걸쳐 펼쳐져 있기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너른 모래밭이다. 한쪽으로는 산허리를 감싸고 도는
강이 보였다.
이 때, 새벽 안개를 뚫고 모래사장 위로 날아드는 두 명의 절세고수가 있었다.
"혈미륵이 보이지 않는군."
"약속을 지키지 않을 자는 아닐 텐데?"
바로 탁옥룡과 묘중기인이었다.
두 사람이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모래밭 여기저기서 사람이 뛰어나왔다.
텅 빈 모래밭이 사람 그림자로 메워지는 데에는 찰나지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수는 모두 일흔둘로 하나같이 기이한 화기(火器)를 손에 쥐고 있었다.
묘중기인은 그들을 둘러보고는 조그맣게 말했다.
"칠십이화룡대진(七十二火龍大陣)입니다. 혈미륵이란 자가 동귀어진을 작정한 모양입니다."
그의 말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처절한 음성과 함께 여러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흐흐……,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간 더러운 중원 놈!"
혈미륵이 사대장교(四大掌敎)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파랗게 밀었고, 홍포 대신 희디흰
백색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바짝 말랐다. 눈은 십 리 넘게 들어가 장엄하고 위풍당당하기보다 귀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탁옥룡과 묘중기인이 그 정도에 놀랄 사람들은 아니었다.
탁옥룡은 차분히 가라앉은 어조로 한 마디 던졌다.
"네 딸은 순순히 풀어 주겠다. 대신 나의 아주머니이자 중원의 여인인 옥봉부인을 이쪽으로 보내라."
"흐흐……, 내게는 딸이 없다. 이수운은 이제 포달랍궁 사람이 아니니 네가 잡아죽이든 시녀로 쓰든 마음대로
해라."
혈미륵은 거의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은혜 모르는 계집은 없으니 찾지 마라!"
"없다니……?"
"흐흐……!"
혈미륵은 계속 음산히 웃었다.
"죽였단 말이냐?"
탁옥룡의 눈빛이 시뻘개졌다. 불 같은 노화가 치밀었다.
"으흐흐……!"
혈미륵은 여전히 웃기만 했다.
"설마…… 그 여인을 죽인 것은 아니겠지?"
탁옥룡이 주먹을 불끈 쥐 묘중기인이 탁옥룡 앞쪽으로 나섰다.
"옥봉을 죽였다면 활시독공(活屍毒功)을 써서 칠십이화룡대진을 찰나지간에 백골산(白骨山)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추악한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이를 갈며 말하는 묘중기인의 기세는 혈미륵보다 훨씬 더했다.
"너… 너는 누구냐?"
혈미륵은 탁옥룡만을 주의해 보다가 그제서야 묘중기인 또한 신비고수라는 것을 알고 크게 놀랬다.
"옥봉을 어떻게 했는지 말해라, 이 뚱뚱한 돌중 놈아!"
묘중기인이 욕설을 하자 혈미륵이 눈살을 찌푸렸다.
"으음……, 한 번 들은 욕설이군. 어디서 본 사람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형편없는 놈! 천시대묘(千屍大墓)를 세운 사람이 바로 나다."
"뭣이? 죽은 묘중기인이란 말이냐?"
묘중기인은 냉막하게 말을 받았다.
"나는 죽지 않았다."
"으음!"
혈미륵은 오만상을 찌푸리다가 주먹을 풀었다.
'혈영마협 하나도 쓰러뜨리기 불가능한데 천하의 기인이라는 묘중기인마저 나타나다니……. 아……, 포달랍궁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혈미륵은 전의를 잃고 말았다.
탁옥룡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혈미륵, 그 분을 죽였다면 너의 수하 모두가 능지처참 당할 줄 알아라!"
"죽이지 않았다. 내… 내가 어찌 그녀를 죽이겠느냐?"
혈미륵이 상심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떠나갔다."
탁옥룡은 눈빛을 가늘게 발하며 다그쳐 물었다.
"어디로 갔느냐?"
"모른다. 그녀는 내가 한 가지 말을 하자 미쳐 버렸다. 미쳐서 무작정 떠나갔다. 나는 그녀를 잡아두기 위해
비밀을 말했던 것인데……, 그녀는 오히려 미쳐버리고 말았다."
탁옥룡은 의구심을 금치 못했다.
"비밀이라니?"
"그녀에게는…… 아이가 하나 있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순간적으로 광기(狂氣)에 사로잡힌 것이다."
"아… 아이라고?"
묘중기인이 놀라 뒤로 쿵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렇다. 그 여인은 한 아이를 낳았다. 나는 내가 그 여인을 어떻게 구했는가 말해 그 여인이 내 곁을 떠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인데……, 그 여인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에 경악해 미쳐 버리고 말았다."
"으으……, 누… 누구의 아이더냐?"
묘중기인이 묻는 말이었다. 그는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몰랐는데……."
혈미륵은 고뇌에 찬 표정이 되어 말했다. 그도 말을 더듬고 있었다.
"석심부인이 낳은 아이는……, 바로… 바로 옥룡천자 공야무군의 아이였던 것 같다. 석심부인은 자신이
옥룡천자에게 능욕당해 공야무군의 아이를 낳은 줄 알고는 미쳐 어디론가 떠났던 것이다."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크윽……, 그 놈이… 그 놈이……!"
묘중기인이 허공을 우러르며 입술을 벌렸다. 그의 코와 입술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나…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간 것은 참을 수 있었는데 옥봉까지 능욕해 아이를 낳게 하다니!"
묘중기인이 처절히 외치다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묘노인!"
탁옥룡은 얼른 다가가 그의 맥을 짚었다. 맥이 아주 불규칙했다.
"음……, 골수 속으로 들어간 시독이 심령상의 충격 때문에 미쳐 심장 속으로 역류(逆流)해 들어갔다. 시독공
(屍毒功)을 버리기 전에는 살 수 없다. 차라리 잘 된 일이다. 활시교독공(活屍敎毒功)은 버린다 해도 전혀
아까울 것이 없는 것이니까."
탁옥룡은 묘중기인을 옆구리에 낀 다음 혈미륵 쪽으로 걸어갔다.
혈미륵은 그의 당당한 걸음에 위축되어 옷을 땀으로 적셨다. 포달랍궁의 지존으로서 너무도 미흡한 태도였다.
탁옥룡의 음성은 아주 차가웠다.
"혈미륵, 나의 수하가 왜 피를 토하고 쓰러졌는지 모르나 이유는 분명 너 때문이다. 그 빚은 내가 갚아야 한다."
"포… 포달랍궁의 무공은 너의 적이 될 수 없다. 나는 네 손에서 서슴없이 죽겠다만……, 나의 부하들은 죽이지
말아다오."
혈미륵은 체념해 말하며 털썩 꿇어앉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석심부인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녀를 보살피며 지낸 이십 년은 영생(永生)이었고 가장 기쁜 시간이었다."
"흥!"
"그녀는 철서생 공야무군에게 능욕당해 아이를 낳았으니 그 아이는 분명 철서생과 옥봉의 아이다."
혈미륵은 허탈한 표정으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지난 비밀을 숨김없이 말했다.
"나는 석심부인에게 그 아이가 죽었다고 했으나 사실 죽지 않았다. 그 아이는 중원 어딘가에 살아 있다.
석심부인을 찾거든 그것을 말해다오."
"유언 삼아 들어주겠다. 말해 봐라."
탁옥룡은 천천히 손을 쳐들고 있었다.
혈미륵은 짧은 탄식을 흘리고는 아주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 아이는…… 흑의산파(黑衣産婆)가 데리고 갔다. 아마 명가(名家)의 양자가 되었을 것이다."
"흑의산파……?"
탁옥룡의 얼굴이 충격적으로 일그러졌다.
혈미륵은 말은 계속되었다.
"석심부인은 미쳐 자신이 나은 아이를 죽이려 했다."
탁옥룡은 마치 둔기에 강타당한 듯 아찔한 충격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당시 그 여인이 옥봉인지 몰랐기에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탁옥룡은 너무도 무서운 상상에 이빨을 딱딱 마주쳤다.
"그… 그래서……?"
"나는 그 아이를 포달랍궁의 소궁주로 키우려 했다가 마음을 바꿔, 그 아이를 양민으로 키울 요량으로
흑의산파에게 맡겼다. 그 아이는 훌륭한 가문의 양자가 되었을 것이다. 증거는 한 갑의 묘안석(苗眼石)과 그
아이의 목에 남아 있는 열 개의 지인(指印)이다."
"지… 지인이라고?"
탁옥룡은 너무도 놀라 묘중기인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렇다. 그것은 내가 이제껏 어떤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 중의 비밀이다. 석심부인에게 그 사실을 전해
다오."
혈미륵은 착잡히 말한 다음 손으로 천령개를 치려 했다.
그의 손이 머리통을 박살내기 직전 탁옥룡의 손이 역천공공금나수(逆天空空擒拿手)로 움직여 그의 맥문을
거머쥐었다.
"죽으면 안 된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 자세히 말해야 한다, 그 아이에 대해……."
그의 목소리는 강호인이 된 후, 처음이라 할 정도로 냉정을 잃고 있었다.
"그 아이에 대해 알아서 무엇 하려느냐?"
혈미륵이 영문을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
탁옥룡은 아래턱을 덜덜 떨다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조근조근 따져 물었다.
"그러니까 목에 손가락 자국 열 개가 있고, 검은 옷을 입은 여인에 의해 어떤 집안의 양자가 된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옥룡 옥봉 사이의 원하지 않은 아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무슨 소리냐?"
"말해 봐라. 그럴 수 있는지,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지 말이다!"
"설… 설마 네가……?"
혈미륵은 그제서야 어떤 낌새를 눈치챈 듯했다.
"아… 아니다!"
탁옥룡은 냉담하게 부인하고는 그의 맥문을 풀어주었다. 그는 입술을 질끈질끈 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다. 너… 너의 말은 모두 거짓이다."
탁옥룡이 고개를 저을 때 혈미륵의 손이 아주 빨리 움직여 그의 앞섶을 열었다.
탁옥룡의 웃옷이 벌어지며 목 부위의 흰 살이 드러났다. 불그스레한 손가락 자국 열 개가 선명히 남아 있었다.
"오오……!"
혈미륵은 그것을 보고 두 손을 한데 합했다.
"분명 석심부인의 손가락 자국이다! 혈영마협… 네가 바로 내가 구한 아이였단 말인가?"
"닥쳐!"
탁옥룡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의 혈도를 찍었다.
"으음!"
혈미륵은 현기증을 느끼며 그대로 쓰러졌다.
"차아앗!"
탁옥룡은 기합소리를 내며 백로마현술(百路魔現術)로 무수한 환영을 일으키며 군승(群僧) 사이를 오갔다. 수천
수만 개의 지영(指影)이 일어났다.
그때마다 신음소리가 났다.
"으음!"
"크윽!"
칠십이화룡대진을 이루던 사람들과 포달랍궁의 사대장교, 도합 칠십육 명이 그대로 점혈당해 쓰러져 나뒹굴었다.
탁옥룡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놀라운 수법이었다.
"내 추악한 출생(出生)에 대해 아는 사람은 이들뿐이다. 이들은 마왕동의 독문점혈에 당했다. 내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이들을 해결치 못한다."
탁옥룡은 그제서야 손을 놓았다.
그는 불현듯 불어오는 강바람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친부모를 찾은 것이다. 그를 낳은 여인이 석심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부친이 당대의
마두 옥룡천자임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분 앞에 있을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었구나. 그 분이 바로 나를 세상에 남긴 여인이기에…
….'
실로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혈미륵의 입을 통해 자신이 비로소 그는 비밀스런 출생의 내력을 모두 풀게 되었다.
부모를 찾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기쁨이다. 그러나 탁옥룡은 기쁨을 느끼기 이전에 무던한 쓰라림을 느껴야
했다.
"추악하다.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 추악하다. 차라리 저 강물 안으로 들어가 죽어버릴까."
그는 도도히 흐르는 회하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앞을 가려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원수인 옥룡천자일 줄이야!
그는 자신을 여러 번 죽이려 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탁옥룡 역시 그를 죽이는 것을 소원으로 하고 있지
않았던가?
'바뀌었다. 모든 것이 나의 신세로 인해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는 탄식했다. 자신도 모르는 탄식이었다.
'혈미륵의 말은 사실이다. 나는…… 옥룡과 옥봉이 만든 아이다. 옥룡이 옥봉을 겁탈해 낳은 비극의 태생이다.'
그는 괴로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인물이 바로 아버지라는 것이 슬펐다.
"나라도…… 죽이려 했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낳고 죽이려 했던 장면을 상상했다.
원하지 않았던 아이, 자신의 손으로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바라지 않은 아이…….
아……, 목에 난 열 개의 지인에 얽힌 사연이 그토록 엄청난 것일 줄이야.
그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은공―!"
그것은 괴로워하는 탁옥룡에게 가뭄의 단비같이 반가운 목소리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선협 사마천룡이 얼굴을 도홧빛으로 물들이며 나는 듯 달려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사마옥봉이
따르고 있었다.
장내에 도착한 그들은 포달랍궁 정예고수들이 모조리 점혈당해 누워 있다는 데 혀를 내둘렀다.
'와아……, 정말 막강하다!'
'고금제일고수야!'
두 사람은 탁옥룡이 잠시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다가서 양쪽으로 나뉘었다.
사마옥봉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탁옥룡이 먼저 말을 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탁옥룡은 그녀가
왔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잘 왔다, 천룡아."
탁옥룡은 사마천룡을 보고 입술을 뗐다.
그만이 갖는 살기가 전혀 없는 아주 힘없는 말소리였다. 그는 묘중기인을 가리켰다.
"이 사람을 데리고 마의불수를 찾아라. 가서 이 사람을 용독액(溶毒液)에 담가 시독을 빼낸 다음 식초와 숯을
섞어 만든 용액에 넣고 하루 동안 삶으라고 해라. 그래야 모든 시독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마의불수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다만."
"명심하겠습니다."
"한데 왜 여기까지 왔느냐?"
"일심검제를 찾아가다가 배첩을 건네 받고 여기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마천룡은 무릎을 꿇은 채 소매 속에서 누런 배첩 한 장을 꺼냈다.
천년마제 제 3 권
탁옥룡은 떨리는 손으로 건네 받아 천천히 펴보았다. 글씨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도전을 쾌히 응낙한다. 네가 산다면 백도는 언제고 멸망한다. 마궁을 치는 것보다 너를 치는 일이 급하다
여기고 마궁주를 잡기 위해 마련한 것을 네게 쓰겠다.
탕마호법 선협이 장소를 알고 있으니 함께 와라.
일심행(一心行) 합장(合掌)>
탁옥룡은 글을 다 읽은 다음 회하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번민을 강물에 실어보낼 수 있다면 두 다리와 두 팔이 잘린다 해도 유감없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무리 정신을 가다듬으려 해도 그는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탄생의 비밀을 알게 되어 이렇게 번민하게 되는구나.'
그는 착잡한 표정이 되어 한숨을 내쉬다가 비로소 사마옥봉을 바라보았다.
"일심행이 무혈검의 본명이오?"
"예, 그 분이 바로 일심검제십니다."
"갑시다."
"예."
사마옥봉은 앙칼진 모습을 전혀 보이지 못했다.
'이 분이 슬픈 기색을 하다니……. 아, 이 분에게 이런 인간적인 모습이 있었다니 내가 이제껏 이 분을 잘못
보았다.'
그녀는 공손한 기색을 하고 먼저 달려갔다.
사마천룡은 누이가 탁옥룡을 앞세우며 떠나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혈영마협이 나의 매부가 되어야 할 텐데……, 그래도 누나가 고분고분해져 천만다행이다. 후우, 하지만
일심맹이 있는 한 좋은 인연을 맺기 힘들겠어."
그는 고개를 젓다가 품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 집어던졌다.
투욱―!
허공에서 자색 불꽃 한 송이가 피었다. 그것은 개방의 신호탄이었다.
잠시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오리라. 그리고 모두 혈영마협의 엄청난 무공에 경악하며 포달랍궁 사람들을 지고
개방 임시총단으로 가리라.
그 누구도 모래밭에서 엄청난 급변이 있음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2
둘은 나란히 달려갔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사마옥봉은 자신이 절세고수가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듯 여러 가지 신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움직였다.
탁옥룡은 축지성촌으로 유유히 따라갈 뿐이었다.
'정말 추악한 세상이다.'
그의 마음은 아직도 유유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폭풍우를 만난 바다같이 들끓고 있었다. 그가 쫓던 자가
바로 자신을 낳게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잠시도 끊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바로 공야무군일 줄이야!
'그런 추악한 자가 바로 나의 생부(生父)라니……, 아비가 자식을 죽이려 하고…… 자식은 아비를 죽이려
했으니 과연 이것이 올바른 세상인가?'
그는 모든 것을 떨치고 싶었다. 어떤 것도 이제 그에게 웃음을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였다.
먼 곳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수리 밖에서 탁옥룡을 부르며 다가서는 황의장한 하나가 있었다. 그는 실명검사로
불리게 된 회회공자였다.
실명검사가 탁옥룡을 향해 나는 듯 달려오고 있었다.
"잠깐 쉬었다 갑시다."
탁옥룡은 사마옥봉에게 한 마디 던지고는 실명검사가 달려오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실명검사가 회회교 비전신법을 시전해 백 장을 달릴 때 그는 이 리를 날아와 바로 그 앞에 떨어져 내렸다.
"주인, 큰일이 생겼습니다."
실명검사는 크게 말하며 허리 숙여 장읍했다.
그는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혈영마협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산신의를 쫓아가는 일은 어찌 되었소?"
탁옥룡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물었다.
"그를 따라 가다가 혈작약(血芍藥)을 보게 되었습니다."
실명검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말을 이었다.
"혈작약은 천산신의가 나타나자 수하들을 시켜 그를 잡게 했습니다."
"흠……!"
"그리고 주인은 죽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천산신의가 그럴 리 없다고 하자, 주인이 혈미륵과 싸운다는 말을
했습니다. 천산신의는 주인이 죽지 않았다는 말에 쓴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쳐서 자결하려 했습니다."
"……."
"혈작약은 급히 막으며 지금 죽으면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러면 환영문(幻影門)은 최후까지 마궁을 벗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탁옥룡은 실명검사가 의아해 할 정도로 침묵을 지켰다.
실명검사는 감히 의혹스러움을 표시하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혈작약은 천산신의의 암습이 실패한 이유는 바로 공야홍 때문이라 했습니다. 공야홍은 주인을 두 번이나
도왔다고 말했습니다."
"으음……."
탁옥룡은 공야홍의 얼굴을 그리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래, 놀라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산신의와 공야홍이 지금 혈작약에 의해 연금당해 있다는 것입니다."
"연금이라니?"
실명검사는 과거에 자신이 품었던 의혹까지 겸해 나름대로 판단했다.
"예, 혈작약은 자신의 남편 공야무군의 양딸인 공야홍 때문에 주인이 두 차례나 사경을 벗어났다며 몹시 노해
있습니다. 그녀가 방약무인한 것을 오래 전부터 의아하게 여겼는데, 그녀가 공야무군보다 높은 지위로 보이기까지
하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공야무군은 지금 어디 있는가?"
"그는 축융봉에서 한 가지 마공을 익히고 있다고 합니다. 독공의 일종인데……, 주인과 생사대결을 하기 위해…
…."
탁옥룡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자네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겠네."
"권한이라니요?"
"묘중기인과 마의불수를 잘 이끌게. 자네는 마궁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으니, 그들의 약점을 틈 타 그들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네."
실명검사는 의아함을 금치 못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주… 주인은?"
"훗훗……, 나는 지금 가장 무서운 적과 싸우고 있네. 그것은 나도 꺾지 못할 대상이라네."
"누… 누구이기에?"
"그것은 사람이 아니네. 어떤 엄청난 대상이네. 아니, 내가 싸워야 할 것은 바로 나라고 할 수 있지."
탁옥룡은 신비하게 말한 다음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실명검사는 죽립을 통해 그의 옆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희어진 얼굴인데, 두 줄기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탁옥룡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말했다.
"자네에게 한 가지 선물할 것이 있네."
그는 등진 채로 혈섬보검을 풀었다.
"이것을 자네에게 주겠네. 파천반월신도(破天半月神刀)에 비해 날카로움이 뒤지지 않을 걸세."
"주인, 제… 제가 어찌 이것을 갖겠습니까?"
"이것은 명령이네."
탁옥룡은 실명검사의 손에 혈섬신검을 쥐어주었다.
"이것은 그냥 뽑을 수 없는 것이네. 검을 뽑기 위해서는 아주 정교한 동작이 요구되네. 검자루를 아주 빨리
뒤틀고 단추를 눌러야 하는데, 그것은 마왕동의 환우멸절일검(還宇滅絶一劍)의 운검술(運劍術)을 아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이네. 그것을 자네에게 전수해 주겠네."
그는 그러고도 부족한 듯 손가락을 하나를 펴며 말했다.
"그리고 파천반월도와 더불어 천하쌍도법(天下雙刀法)인 심극일분도(心極一分刀)를 전수하겠네."
"주… 주인! 어이해 영원히 떠날 사람같이 말씀하십니까?"
실명검사는 안타깝게 외쳤다. 그러자 탁옥룡의 소매 속에서 막강한 진기의 힘이 일어나 그의 몸뚱이를 강제로
꿇어앉게 했다.
탁옥룡은 즉시 지력을 발휘했다.
"보게나."
굳은 땅바닥에 글씨가 파여졌다.
― 환우멸절검(環宇滅絶劍)!
― 심극일분도(心極一分刀)!
탁옥룡은 마왕십절기(魔王十絶技) 중 두 가지의 구결을 적은 다음 손가락을 거두었다.
"그 두 가지는 십이성 익혀도 마성을 일으키지 않는 수법이네. 구결을 완전히 외운 다음 일어나라는 것이 나의
명령이네."
"주… 주인?"
실명검사는 아주 이상한 낌새는 느꼈다.
"하하……, 사실 자네가 원망스럽네. 자네가 금룡거에서 옥부용에게 죽을 나를 구하지 않았다면 이런 쓸쓸한
이별은 없었을 텐데……."
탁옥룡은 크게 말한 다음 위로 날아올랐다.
"주인……?"
실명검사는 몸을 움찔했으나 함부로 일어나지 못했다.
― 구결을 다 외우기 전에는 일어나지 말라!
탁옥룡의 강경한 명령이 귀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나…… 주인을 천년마제라 부르고, 주인을 인간이 아닌 마귀라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주인은
이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협사(俠士)십니다. 천 년 전의 전설 때문에 주인을 헐뜯는 자들은 모두 제 손에 죽을
것입니다. 사실…… 주인은 이미 십육만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계시고 그들 모두 주인을 믿습니다. 주인이
마두라면, 우리 모두 서슴지 않고 마졸(魔卒)이 될 것입니다."
실명검사는 탁옥룡에게 천리전음으로 말했다.
탁옥룡은 잠깐 사이를 달려 사마옥봉 곁에 이를 수 있었다.
'검을 놓고 오다니?'
사마옥봉은 이상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갑시다."
탁옥룡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길을 재촉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사마옥봉이 아미를 찌푸렸다.
"별 것 아니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천룡이에게 전해 주었으면 고맙겠소. 내가 본 후기지수(後期之秀) 중 가장
뛰어난 아이가 천룡이오. 나의 노형님과 독왕선배도 내가 천룡에게 이것을 주는 것을 허락하실 것이오."
탁옥룡은 품에서 자신이 직접 쓴 책자 두 권을 꺼냈다. 그것은 그가 틈틈이 적어 만든 비급이었다.
<개방오절기( 五絶技)―
탁가장주(卓家莊主)가 심득(心得)으로 십절기(十絶技)를 오절기로 고치나 그 위력은 정에 비해 못하지 않으리라.
>
<파해독경(破解毒經)―
독(毒)은 약(藥)과 같다. 독만을 쓰는 자는 마(魔)다. 그러기에 파해독경을 꾸며 천하독공을 몰아내려 한다.>
한 권은 광개의 개방절학을 바꾼 것이고, 다른 한 권은 독왕경을 연구해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승화시킨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오. 석 달 정도 더 연구해야 끝이 날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굳이 끝을 낼 필요가
없을 것 같소."
탁옥룡은 비급을 사마옥봉의 손에 쥐어줬다.
"이… 이것을 왜……?"
"하하……, 기왕 무림인으로 만든 이상 초강자(超强者)로 만들어야 보람이 있지 않겠소? 이유는 그것뿐이오."
"알겠습니다, 제가 천룡에게 전하겠습니다."
사마옥봉은 두 권의 비급을 품에 넣은 다음 바삐 달려갔다.
탁옥룡은 쓸쓸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 갔다.
'옥봉, 당신한테는 무엇 하나 전해줄 것이 없구료.'

第五章 죽음(死)을 위한 준비
1
멀리 험준한 산봉우리가 보인다.
사마옥봉은 탁옥룡을 인도하고 가다가 아주 높은 산마루 아래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탁옥룡을 돌아보았다.
"오는 도중 줄곧 생각해 보았는데……, 천황봉(天皇峰) 위로는 가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일심검제가 나를 천황봉 위에서 기다리고 있소?"
"예, 그 분은 비장한 각오십니다. 한데 소녀가 보기에 일심맹주는 지금 은공……, 아니, 상공(相公)을
오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탁옥룡은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해? 하하하……, 그는 오해하지 않았소. 나는 천년마제요. 사실 그대로 나는 사람의 탈을 쓴 추악한
악마요."
사마옥봉을 눈물마저 글썽였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소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천 년 전의
전설로 상공의 협행마저 부인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는 곧 마(魔)로 화신(化身)할 것이오. 낭자는 내가 얼마나 두려운 사람인지 모를 것이오."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날카로웠다.
마음속의 한을 말로 풀어버리려는 듯 그의 몸짓은 과장되고 처절했다.
"하하……, 나는 아주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 재간을 갖고 있소. 낭자는 나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아야 하오."
"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의협심의 발로가 아니겠습니까? 일단 소녀가 먼저 맹주를 찾아
자초지종을 말씀드린다면 극한 대결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훗훗……, 낭자는 나의 본심이 어떤 것인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어."
탁옥룡의 목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본… 본심은 아주 훌륭하시지요. 겉보기는 흉악하나……."
사마옥봉은 고개를 저으며 갑작스레 돌변한 그의 태도에 바싹 긴장했다.
"크흐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 알려주지. 내가 어떠한 자인지, 얼마나 지독한 자인지 알려주마."
탁옥룡은 잔혹스레 말한 다음 사마옥봉을 향해 걸어갔다. 죽립을 뚫고 나오는 두 줄기 혈광이 아주 무서웠다.
"왜…… 그런 눈빛을……?"
사마옥봉은 경계심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흐흐……, 내가 어떤 자인지 알아야 하니까!"
탁옥룡은 음침히 말한 다음 사마옥봉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흐윽?"
사마옥봉은 한순간 사색이 되었다. 탁옥룡이 그녀의 젖무덤을 덥석 움켜쥐었던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사마옥봉은 귓부리를 빨갛게 물들이며 탁옥룡의 뺨을 향해 오른손을 휘둘렀다.
"흥, 앙탈해도 소용없다. 나의 마성(魔性)을 건드린 것이 잘못이었다."
탁옥룡은 왼손으로 사마옥봉의 오른손 완맥을 거머쥔 다음 그녀를 와락 끌어당겼다.
"놔… 놔요!"
사마옥봉은 자지러지게 놀라며 몸을 뒤챘다. 그러나 탁옥룡의 힘을 뿌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찌이― 익―!
탁옥룡은 급기야 사마옥봉의 가슴 옷자락을 길게 찢어냈다. 희디흰 앞가슴이 훤히 나타났다. 수줍은 유실이
앙증맞게 자리잡고 있었다.
사마옥봉은 자지러지게 놀라 탁옥룡을 바라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정… 정말 지독하구나! 네가 이런 색마일 줄이야! 그러면 그때 왜 나를 구했느냐?"
"흐흐……, 그때에는 나의 마성이 완전치 않았다. 봐라! 지금의 나는 완전한 마(魔)다. 나의 얼굴이 그것을
증명한다!"
탁옥룡은 일부러 죽립을 번쩍 들어올렸다.
태양처럼 빛나는 헌칠한 용모는 천하에 다시없을 미장부임에는 틀림없었다.
"아, 정… 정말 혈영마협이냐?"
사마옥봉은 너무나도 뛰어난 얼굴을 보고 경악해마지 않았다.
"흐흐……, 이것이 나의 진정한 얼굴이다. 나는 과거 마공을 다 익히지 못해 추악한 얼굴을 하고 다녔던
것이다."
탁옥룡은 일부러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너무도 아름다워 인상을 찌푸린다고 미모가
훼손되지 않았다.
사마옥봉은 탁옥룡의 얼굴을 보고 넋을 잃고 말았다.
"이… 이렇게 멋질 수가!"
"흐흐……, 그럼 내게 몸을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겠구나!"
탁옥룡은 아주 크게 말하며 그녀를 왈칵 끌어안았다.
사마옥봉은 가슴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몸을 뒤틀었다.
"이… 이러지 마세요. 제… 제발…."
"흐흐……, 너를 바쳐라."
탁옥룡은 큰 웃음소리를 내며 그녀의 육봉을 더듬고 점차 그녀의 은밀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사마옥봉의 얼굴이 밀랍보다 희게 변했다.
"흑……, 제발……!"
사마옥봉은 애절히 소리치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바로 그때였다.
"이런 인면수심(人面獸心)을 봤나?"
"천추에 길이 저주받을 마의 자식!"
"퉤엣!"
사방에서 욕설이 터져나왔다. 계피학발의 강호노명숙(江湖老名宿)들이 탁옥룡을 향해 날아들며 언성을 높였다.
"네놈이 사람이냐?"
"감히 무슨 짓을 하는 게냐?"
노명숙들이 눈에 불을 켜자 탁옥룡은 거칠게 응수했다.
"흐흐……, 다 늙은 놈들이 재미가 있을 만하니까 방해를 놓는군."
그는 사마옥봉을 거칠게 밀어냈다.
사마옥봉은 반벌거숭이가 되어 풀숲으로 나뒹굴었다. 그녀는 말을 하지 못했다. 탁옥룡이 아혈(啞穴)을 가볍게
점했기 때문이었다.
'아… 알고 일부러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사람들에게 마두라는 낙인이 찍히기 위해? 왜 그런 짓을 서슴없이
한단 말인가?'
사마옥봉은 누워 있기에 죽립으로 덮인 탁옥룡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탁옥룡은 거칠게 말하고 있으나 거친 표정이 아니었다. 죽립으로 가려진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가득했다. 그는
삶을 너무도 저주하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질끈 물다가 중인을 둘러보았다.
"일심검제는 어디 있느냐? 그 보잘 것 없는 중놈이 감히 나를 부르다니……. 흐흐, 심장을 꺼내 과연 심장이
얼마나 큰가 알아보겠다."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청아한 음성이 들리며 흰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아미타불……, 본승이 짐작하던 대로 마성(魔性)이 발작했구나. 이 상태가 바로 본승이 경계하던 마중지존(魔
中至尊)의 참모습이다."
팔보등공(八步登空)으로 다가서는 백의인은 중년 승려였다.
"흐흐……, 너는 내게 몇 번 더 패한다 해도 정신을 못 차릴 돌대가리다. 하는 수없이 네 돌대가리를
박살내리라!"
탁옥룡은 더 거칠게 말했다. 그와 함께 그의 몸 주위로 혈무(血霧)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피구름이 그를 휘감자 무혈검의 입가에 비장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혈영마(血影魔)!"
그는 혈영마협이라는 별호에서 협(俠) 자를 빼고 혈영마라 칭하며 두 손을 한데 합했다.
"너는 마궁의 어떤 고수보다 강하다. 네가 더 발작하면 마궁은 남아나지 못한다. 그러나 네가 있다는 것은
마궁이 천하를 지배하는 것보다도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본맹은 너를 공적으로 지목한 것이다."
"흐흐……, 가소로운 놈들! 마왕동의 무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려주겠다."
무혈검은 무거운 어조로 말을 받았다.
"너의 무공이 강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결국 사필귀정(事必歸正)인 법이다."
"카하하……, 마중지존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법(無法)이다. 알겠느냐? 네 돌중놈의 머리를 박살낸 다음 여기
있는 모든 놈들을 참살하리라!"
광소성에 실린 살기가 중인을 으스스 떨게 했다.
"아미타불……."
일심검제 무혈검은 정말 처음으로 눈에서 살광(煞光)을 쏘아냈다.
'부처님, 제가 살심을 품은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십 년 전 색계(色戒)를 어긴 죄악을 용서해 주셨듯 자비를
베푸소서.'
무혈검은 장엄한 표정을 하다가 손을 폈다.
"비무하기 적당한 장소가 있다. 그곳으로 가자."
"흐흐……, 어디든 따라 가겠다. 네놈 따위를 죽이는 데에는 십 초 이상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아미타불……, 불법무적(佛法無敵)!"
일심검제 무혈검은 엄숙히 말한 다음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탁옥룡의 경신술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치달렸다.
그가 흰빛을 끌며 날 때 탁옥룡은 천황봉이 무너져라 장소성을 지르며 붉은 구름덩이가 되었다.
"우우우―!"
두 사람은 평행선을 그으며 천황봉 위로 날아올랐다. 가파른 절벽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뚝 끊어진 절벽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넓적한 흰 바위 위로 오를 수 있었다.
그 바위가 바로 천황봉의 최고정(最高頂)이었다. 그 위로 오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내공이 있어야 한다. 자칫
발걸음을 헛디딘다면 천 길 벼랑 아래로 떨어져 분신쇄골할 것이기 때문이다.
휘잉―!
바람이 아주 강하게 불었다.
무혈검의 승포가 어지러이 흩날렸다. 그는 탁옥룡이 뒤따라 바위 위로 내려서는 것을 보며 합장배례했다.
"본승은 걸어내려 갈 생각이 없네."
"카하하흐……, 그럼 죽을 작정이냐?"
"그렇네. 하지만 혼자 이승을 떠나지는 않네. 천하에서 가장 강한 그대 혈영마와 동귀어진해 열락의 길로 가려
하는 것이네."
그는 아주 냉담하게 말했다.
그의 두 손바닥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의 두 손은 언제부터인가 푸른 물감을 바른 것처럼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본승은 오래 전 대사부(大師父)께 천강복마공이라는 탕마수법을 전수받았네. 본승은 이십 년 전 큰 죄를 지어
죽어야 했으나 천강복마공의 전인이기에 차마 죽지 못했네. 이유는…… 천강복마공의 주인 되는 자는
천강복마공을 익혀 강호에 나타나는 마를 소탕해야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네."
그의 목소리는 아주 자비스러웠다.
"흐흐……, 탕마행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럼 나와는 공존할 수 없는 입장이시군. 나는 세상에 마를 퍼뜨리기
위해 살았으니까!"
탁옥룡의 목소리는 아주 컸다.
천황봉을 중심으로 십 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빠짐없이 탁옥룡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무혈검의 자비심에 가득 찬 표정을 비웃는지 연방 괴이쩍은 웃음소리를 냈다.
"카하하……, 덤벼라! 혈영금강마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가르쳐 주겠다. 백도의 무공이 얼마나 천한 것인지
만천하가 알게 하겠다!"
탁옥룡은 음산히 웃다가 말을 멈췄다.
우르르르― 릉―!
바람에 쓸리던 하늘이 검어지며 마른 벼락소리가 났다.
바람이 더욱 강하게 불었다. 검은 구름이 일어나 하늘을 가렸다. 한 마리 흑룡(黑龍)이 천지를 굴복시키는 것
같았다.
'불존이시여, 이 마왕을 제압할 힘을 주소서.'
무혈검은 대자대비한 부처의 법력을 속으로 빌며 손바닥에 끌어올린 천강복마공의 힘을 두 줄기 청무로 발출했다.
우르르― 릉―!
은은한 뇌성벽력이 일어났다.
그의 내공의 힘은 과거 불가 삼대신승이었던 혜장신승(慧藏神僧)의 내공에 비해 두 배나 강했다. 그가 일으킨
천강복마공은 지극히 강해 십 장 밖의 만근거석을 두부같이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푸른 기류가 일어나자 근처가 웅풍(雄風)에 휘감겼다. 기류는 거대한 섬광으로 뻗어나갔다.
"으하하……!"
탁옥룡은 예의 광소를 터뜨리며 섬광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붉은 기류가 푸른 기둥을
압도했다.
'정말 강하다!'
무혈검의 얼굴이 일순 흑빛으로 화했다.
붉은 기류가 확산되며 온몸이 불구덩이에 빠진 듯 화끈거렸다. 그러나 그는 진기의 힘을 늦추지 않았다.
탁옥룡의 혈영금강마공을 몸으로 받아내며, 자신의 천강복마공으로 탁옥룡의 금강불괴지신을 박살내자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하압―!"
그의 입술 사이에서 불문사자후(佛門獅子吼)가 시작되었다.
꽈르르― 릉―!
천강복마공의 기세가 한결 강맹해졌다. 혈영금강마공이 그로 인해 위축되는 듯했다.
천하 백도맹주가 승리할 것인가, 아니면 천년마제의 화신체인 혈영마협이 압도할 것인가?
향후 천하무림의 향방이 이 한판의 대결에 달려있기에, 모든 사람이 천황봉 위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른 벼락소리를 고요하게 만드는 파공성이 연달았다.
꽈르르― 릉― 꽈꽝―!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몇 번 일어났을까?
"으아아… 악!"
한 마디 처절한 비명소리가 중인의 고막을 뒤흔들었다.
허공으로 훌훌 날아올랐다가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그는 비명소리를 내며
아득한 운해(雲海)를 뚫고 사라졌다.
"왜… 왜…… 손속을 거뒀단 말인가?"
떨리는 목소리가 떨어지는 자를 배웅했다.
바위를 딛고 서 있는 백의승려 하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들여다보며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바로 무혈검이었다.
그는 영광스럽게도 천황봉 비무에서의 승자가 되었다. 한데도 그는 승자답지 않게 몹시 괴로워했다.
"와! 일심검제 일심행대사(一心行大師)가 바로 천하제일고수라는 것이 드디어 사실화되었다."
"천년마제가 죽었다!"
"천 년 전에는 삼대신승이 협공해 마중지존을 죽였으나, 이제는 일심행대사 한 분이 그를 죽인 것이다!"
"일심맹 만세―! 일심맹은 오늘 이후 천하를 지배할 것이다. 모든 마의 세력을 퇴치하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리
라―!"
사방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일심검제 무혈검이 쌍장으로 혈영마협을 죽였다는 것이 입에서 입으로 소문나며, 십 리 안에 있는 일심맹도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정말 예측하지 못한 역전이었다.
마궁을 단신으로 뒤흔들었고, 군협들의 간장을 서늘하게 했던 혈영마협이 불가고수 일신검제에게 제거될 줄이야.
일심검제는 주위에 누가 나타나 하례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탁옥룡이 떨어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아주 이상했다.
"맹주, 축하드립니다. 역시 맹주십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 일심검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자는 내가 아니오."
일심검제는 침통하게 말을 이었다.
"승자는 혈영마협이오."
"예에?"
"무… 무슨 겸손의 말씀을?"
모두 크게 놀라워하며 치솟았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일심검제는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바위 위에 주저앉았다.
"아미타불……, 이 어리석은 불제자(佛弟子)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십 년 전 강호출도 때에는 섣부른 행동을 해
색계를 어겼고, 이제는 섣부른 판단으로 천하기협(天下奇俠)을 해했습니다."
그는 합장하며 눈물을 떨구었다.
"맹주?"
"이… 이게 어이된 일이십니까?"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군웅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심행(一心行)은 연신 불호를 외우며 눈을 반개(半開)했다. 그는 태산같이 보였다. 어떠한 말도 그를 움직이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광마(狂魔)가 아니었다. 이제야 확실히 그를 알 것 같다. 그의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그를 오해해 죽게
하다니! 아……, 냉혹하기만 하던 그가 왜 내게 아량을 베풀어 대신 죽었단 말인가?'
일심행은 비참한 표정을 하고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2
천하가 벌컥 뒤집혔다.
― 일심맹주가 천년마제인 혈영마협을 죽였다!
천황봉에서 들려온 소문이 삽시간에 남칠북육(南七北六)의 강호계를 벌집 쑤시듯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혈영마협은 십초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
그를 죽인 일심검제는 무신(武神)으로 추앙되었다.
물론, 혈영마협의 악행이 심했기 때문도 아니고, 그의 명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었다. 단 한 가지 이유는 그의
무공이 천하제일이라고 평가받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정(正)이냐 사(邪)냐를 항상 의심받던 혈영마협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고수였다.
그는 마궁주마저 두려워 떨던 상대가 아니었던가?
백도인들은 백도상에서 천하제일고수가 탄생되었다는 것을 큰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마궁마저 쓰러지리라.
혈영마협을 참살한 일심검제는 이제 불수를 마궁 쪽으로 돌려 단 일장으로 축융봉을 차지하고 있는 마궁을 박살내
버리리라.
모두의 생각은 한결같았다.
한데 천황봉 비무 다음 날, 비합전서롤 통해 천하에 퍼진 엄청난 소문이 있었다.

― 일심맹은 혈영방(血影 )과 공존 못한다.


혈영방 사람은 최후의 일인까지 일심맹과 싸우기를 단지(斷指)로 맹세했다. 강호에서 왼손 새끼손가락이 없고,
상복(喪服)을 입은 고수를 만난다면 그가 혈영방임을 알라!
혈영방의 탄생!
그들의 본거지는 과거 회회단이 있었던 개방의 임시총단이 되었다. 개방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혈영마협을
추모하기 위해 혈영방을 창건한 것이다.
한바탕 피바람이 일 조짐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사람은 사라진 후에야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혈영마협은 그제서야 존경받는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단식(斷食)에 든 사람이 허다했다.
― 혈영마협은 분명 암습을 받아 협공당해 죽었다. 일심검제 따위가 어찌 제 실력으로 그를 꺾을 수 있겠는가?
흥분이 가라앉으며 일심맹을 욕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일심맹은 혈영마협을 죽인 방파라는 것으로 인해 천하 위에 군림할 듯 했지만 그것도 잠깐에 불과했다.
일심맹은 도처에서 적을 만나야 했다.
혈영방은 강호를 휩쓸며 일심맹도들을 무조건 잡아들였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실명검사였다. 그는 혈섬신검을 쥐고 천하를 질타하며 일심맹 사람 수천을 잡아 혈영방에
가뒀다.
그로 인해 강호가 풍비박산 날 때 한 가지 소문이 축융봉에서부터 시작되어 천하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옥룡궁(玉龍宮) 복파대전(復派大典)을 여니 천하무림동도의 참석을 바란다. 은원을 그 자리서 씻을 예정이니
참가하지 않는 자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힘은 여전했다. 그리고 혈영마협이 없는 천하인지라 그들은 전에 비할 수 없이 강한 대상으로만 보였다.
이제 세상은 혈영마협이 나타나기 전의 강호판도로 돌아가 버렸다.
진정 혈영마협은 죽었단 말인가?
일심맹주를 면벽(面壁)에 들게 하고, 혈영방을 창설케 한 인물, 마궁이 다시 기를 펴게 하며 사라진 인물은 과연
사자(死者)의 명단(名單)에 올랐단 말인가?
3
햇살조차 스며들지 않은 깊은 골짜기이다.
언제부터인가 짐승같이 살고 있는 청년 하나가 있었다. 그는 나무 뿌리와 풀잎을 씹어먹으며 허기를 메웠고, 밤이
되면 팔베개를 하고 맨땅에 누워 잤다.
사실 야인(野人)이 되기에는 너무도 미끈한 청년이었다.
그는 송옥(宋玉)이라 하는 전설상의 미남의 화신같이 뛰어난 용모를 하고 있었다.
밤하늘의 북두성(北斗星)을 닮은 성안(星眼), 칼날을 방불케 하는 검미(劍眉), 한일자로 그어진 채 좀처럼
벌려지지 않는 붉은 입술은 명장(明匠)의 조각상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산짐승도 별로 없고, 가을에 누렇게 말라가는 초엽(草葉)만을 벗삼아 가며 골짜기에서 며칠을 보냈다.
꽈르르― 릉―!
폭포가 떨어지고 있다. 그는 흑의를 바위 위에 걸쳐두고, 나체가 되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은 아주 차가웠다. 그러나 그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북해의 얼음세상이나, 지옥의 유황불에서도 살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는 폭포수 밑까지 헤엄쳐 가 폭포수에 강타당하고 있는 매끄럽고 단단한 바위 위로 올라가 정좌해 앉았다.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그는 정신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심마(心魔)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비록 죽지도 못하는 몸이 되었으나 마음만은 내 뜻대로
조종하리라.'
그의 표정은 비장했다. 아쉬운 것은 나이답지 않게 쓸쓸해 보이는 고독감이었다.
꽈르르― 릉―!
수천만 근의 폭포수가 그를 덮쳤다. 그는 좀처럼 마음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
"아……, 답답하기만 하다."
그는 탄식하다가 눈을 떴다. 눈빛이 물빛을 뚫고 나왔다. 그 빛은 타는 듯한 붉은 빛이었다.
얼음보다 차가운 물기둥 속에 잠겨 있었지만 그의 내화(內火)는 식을 줄 몰랐다. 그는 눈을 멍하니 뜨고 물을
응시했다. 소를 벗어나 그냥 흘러가는 물이 너무도 유유해 보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갑자기 그의 눈 안으로 드는 붉은 종이가 있었다. 폭포수와 함께 위에서 한 장의 종이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물보라에 섞여 물 속으로 잠겼다가는 다시 밖으로 드러나곤 했다.
"세속의 물건이군."
청년은 비웃으며 눈을 감았다.
폭포는 하염없이 그의 머리를 때렸다. 그는 계속 세 시진 동안 폭포수를 맞으며 앉아 있다가 어둑어둑해질 때에야
비로소 소를 건너 옷을 벗어둔 곳까지 왔다.
물을 나설 때 아주 우연히 그의 손에 쥐어지는 한 장의 종이가 있었다. 물에 축축이 젖은 붉은 종이인데, 그가
간과해 버렸던 바로 그것이었다.
"매우 질긴 종이다. 물에 잠겼는데도 풀어지지 않았군."
그는 저으기 감탄하며 쪽지를 손에 쥐었다.
천천히 접힌 부분을 풀었다. 검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번지기는 했으나 알아볼 수는 있을 정도는 되었다.
<옥룡궁(玉龍宮) 복파대전(復派大典)을 중양지절(重陽之節) 정오에 축융봉상(祝融峰上)에서 거행하니
무림동도들의 많은 참석을 바란다.
― 옥룡궁주 친서(親書).>
그것은 연회에 오기를 청하는 초청장이었다.
"나의 아버지 된 자가 만들어 퍼뜨린 물건이란 말인가?"
그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런 것을 보게 되다니……, 마음이 한순간에 들끓는다. 그러나 지금은 뜻이 바뀐다 해도 소용없는 상태다.
금강불괴지신이라 살기는 했으나 내공은 구할 넘게 잃은 상태이다. 매일같이 운공한다 해도 천 일은 꼬박
운공해야 과거의 공력을 되찾을 수 있다.'
그는 배첩을 내던지며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목 바로 아래 두 개의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후후……, 일심검제는 뛰어난 분이니 잘 알아서 하리라. 내가 양보해 놀랐을 것이나, 곧 나의 뜻을 알고
천하제일인으로 백도를 호령하리라."
그는 중얼거리며 옷을 걸쳤다.
품안에 있던 무엇인가가 바위 위에 떨어지며 맑은 소리를 냈다.
"흠……, 이것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유감이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바위 위에 떨어진 물건을 주웠다. 그것은 현룡제가 하사한 주룡령기였다.
― 이 깃발은 곧 천자지명(天子之命)이니 백조제관(百朝諸官) 과 억조창생(億兆蒼生)은 영기를 지닌 자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정말 거창한 문구를 지닌 깃발이었다.
"후후……, 그 아이는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 모두 다
잊혀지리라. 어떠한 괴로운 일일 지라도 세월이 치유해 준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짐승같이 살다가 죽을
뿐이고, 강호는 과거 내가 없던 그대로 어디론가 흘러가겠지."
그는 씁쓸히 중얼거리며 옷을 입었다.
그는 큰 나무 아래 가서 잠을 청했다.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물 속에서 주워 보았던 배첩의 내용이 그의
머리를 혼란시키기 때문이었다.
'옥봉……, 그 분은 어찌 되었을까? 나를 낳았다는 말을 듣고 미쳐 어디로 떠나셨다는 혈미륵의 말은
사실이었을까? 아……, 미워하려 하지만 정말 미워할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도 피해자이니까. 하지만…… 나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너무 추악하다. 그의 아들인 것이 슬프다.'
그는 바로 탁옥룡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 있었다. 아니, 그는 죽을 작정이었는데 죽을 수 없었다. 금강마(金剛魔)
의 고행으로 단련된 몸이라 천강복마공에 격중되고도 살아 있는 것이다.
과거 마중지존의 시신이 천 년 넘게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이치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탁옥룡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아주 착잡한 상태인지라 그런지 하늘이 더 어둡게만 보였다. 그는 눈을 뜬 채 밤을 지샐 작정을 했다.
우― 우―!
어디선가 구슬픈 승냥이 울음소리가 날 때였다. 들려오는 물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디서 나는 소리가 이리도 이상할까? 마치 물이 끓고 있는 듯하지 않는가?"
탁옥룡은 잠도 오지 않는 참인지라 호기심을 느끼며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는 일 리
걸어 처음이라 할 수 있는 장소에 이르게 되었다.
삐죽삐죽한 돌이 수만 개나 돋아 있었다.
"이런 칼산이 있었군."
그는 내공을 잃었으나 신안(神眼)은 잃지 않았기에 근처의 경물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이상한 소리는 골짜기
끝에서 들려왔다.
"흠, 무엇일까?"
그는 점점 더한 호기심을 느꼈다.
'낮에는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한밤에만 나는 소리인 듯한데 대체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는 오래지 않아 매끄러운 암벽 아래 파여진 작은 동굴을 볼 수 있었다. 울음소리 비슷한 소리는 그 안에서
들리고 있었다. 동굴에는 인공의 흔적이 많았다.
동굴 위쪽으로 아주 희미한 세 자 글씨가 보였다.
<蕩魔至尊洞府(탕마지존동부)>
힘찬 글자 옆으로 세 필로 새겨진 두 줄의 글이 있었다.
<비밀(秘密)을 푸는 자는 기연(奇緣)을 얻게 될 것이다.
물이 끓는 비밀을 풀고 기연이 있는지 시험해 보라.>
호승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
"탕마지존동부라니?"
그는 탕마지존이란 곳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문구를 풀어본다면 정(正)에 해당될 것이다.
동굴은 꾸불꾸불 이어졌다.
그는 음침한 곳을 걷다가 갑작스레 밝은 곳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용안만한 야명주 하나가 천장에 박혀 있는
네모난 석실이 있었다.
그르르― 릉―!
물은 분수같이 일 장이나 끓어올랐다가는 언제 끓었더냐 싶게 구멍 안으로 깊숙이 빨려들어 마른 바닥을 드러냈다.
그 이외 다른 것은 없었다.
어디에도 들어가고 나가는 문도 보이지 않았다.
"비밀을 풀라고 했는데 무엇이 비밀이란 말인가?"
탁옥룡은 못가에 서서 근처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석벽뿐이었다.
"흠……, 상고기인 중 장난을 일삼기 좋아하는 자가 죽어서까지 후세인을 희롱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일 각 동안 방안을 둘러보다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되돌아나가려 했다.
그르르― 릉―!
물이 다시 끓어올랐다. 그러나 전과 같이 힘찬 기세가 아니라 아주 미세한 물줄기로 뿜어졌다.
"이것이 인공으로 인한 것인가? 물이 높낮이를 맞추며 끓어오를 수 있게 하는 사람이라면 마왕동주보다 더한
기관의 명인이다."
탁옥룡은 감탄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물은 한참만에 다시 끓어올랐다. 그는 무슨 비밀이 담겨 있는가를 생각하며 물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불기둥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끓어올랐다가는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새벽이 되자 물은 다시는 끓어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들어야 한다. 나는 중간부터 들었기에 비밀을 풀지 못했다. 오늘 밤에도 물이 끓는지 지켜보자."
탁옥룡은 석실바닥에 주저앉아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동굴 안은 야명주로 밝혀져 있기에 언제 날이 새고 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르르릉―!
물이 치솟는 것으로 밤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탁옥룡은 지혜로운 눈을 깜빡이며 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처음 물줄기는 무척이나 힘찼다.
'내가 들은 소리가 바로 이 소리다. 처음의 물줄기가 가장 세차고, 소리 또한 가장 세차다.'
탁옥룡은 첫 번째 물줄기가 천장을 때리는 것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다음 물줄기는 일각 뒤에 있었다. 그것은 그리 세찬 분출은 아니었다. 물은 서른세 번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다시 새벽이 되었는지 분출을 멈추었다.
탁옥룡은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밖은 정오 무렵으로 바뀌었다.
그는 석실에 머문 채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무엇이든 비밀이 되는 것은 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질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비밀이 있을 텐데……?"
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다시 저녁이 되었다.
탁옥룡은 물이 끓어오르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그래, 내가 이 동부를 만들었다면……."
그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어떤 후인에게 절기나 보물을 전한다고 할 때 귀중하게 생각한 것이 어떤 점일까?'
그는 동부를 창건하 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연(因緣)일까? 하지만 이런 곳에 있는 동굴을 사냥꾼이나 나무꾼이 제일 먼저 찾기 쉽다. 단순한 인연으로는
볼 수 없다. 후인이 될 사람은 기재(奇才)이고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육체보다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눈을 감고 한참 동안 궁리했다.
무엇이 가장 귀중한 것인가. 과연 전대의 고인은 무엇을 원했던 것인가.
"나라면……."
탁옥룡은 천천히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정력(定力)을 제일 높이 살 것이다. 끈질긴 인내력을 나의 후예가 될 사람의 첫 번째 기질로 삼으리라."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은 삼 장 높이였다. 그는 물이 첫 번째 솟아올라 천장을 스쳤던 곳을 바라보았다.
"누구든 물소리를 듣고 여기올 때면 물은 저 높이까지 솟구치지 않는다. 저 높이까지 솟구치는 일은 하루 중 단
한 번, 처음 솟구칠 때뿐이다."
그는 나름대로 판단하며 천장까지의 높이를 재어보았다.
한 번에 솟구치기에는 꽤 높았다. 그는 잠시 궁리하다가 주룡령기를 꺼내 쥐고 물기가 축축한 곳을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주룡령기가 딱딱한 돌 속으로 파고들었다. 여간해서는 생각지 못할 판단이었다.
순간, 쇠사슬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돌바닥이 쩌억 갈라졌다.
스르릉―!
단단한 바윗덩어리로 보이던 돌바닥이 갈라지며 계단이 나타났다.
"하하……, 나의 짐작대로다."
탁옥룡은 자신이 비밀을 풀었다는 것을 크게 기뻐했다. 그의 웃음은 철모르는 소년의 웃음처럼 신선했다.
그는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상당한 호기심이 일었다. 계단은 서른세 개로 끝이 났다. 계단의 끝에는 거미줄 투성이인 석문 하나가 있고, 그
앞에는 연화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연화대에는 봉서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탁옥룡은 먼지가 뽀얗게 덮인 봉서를 쥐고 중얼거렸다.
"양피지인데도 이렇게 썩다니……, 적어도 천 년이 넘는 세월 전에 만들어진 물건인 것 같구나."
그는 감탄하며 귀퉁이가 떨어진 양피지를 펴보았다.
<탕마지존동의 비밀은 고행력(苦行力)과 무굴내심(無屈耐心)이다. 활수천(活水泉)은 자시(子時)에
솟아올랐다가 인시말(寅時末)에 끝나고 모두 서른세 번 치솟는다.
활수천이 솟는 소리 중 밖으로 퍼지는 것은 앞의 다섯 번뿐이다.
안에 드는 사람은 그 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고,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하루를 석실 안에서 보냈을
것이다.
이 글을 볼 수 있는 연자(緣者)여,
노납들의 글을 의심하지 않고 믿어준 것을 고맙게 여긴다.
우리는 활수천이 닿은 곳에 열쇠가 있음을 알아낸 그대의 지혜에 선물을 할 작정이다.
석문 안에는 우리 세 승려의 절학(絶學)이 있을 것이다.
우리 셋은 안으로 들어가 서로 심득(心得)을 비교해 새로운 창안 절학을 만들 작정이고 얼마를 더 살던 간에
안에서 죽을 작정이다.
문을 열고 들어와 탕마지존의 절기를 얻으라,
소림사(少林寺) 혜장(慧藏),
옥룡상인(玉龍上人),
포달랍궁(包達拉宮) 오랍(烏拉).>
끝의 서명이 그를 경악케 했다.
"이… 이것은 바로 불가삼대신승(佛家三大神僧)의 이름이 아닌가?"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불가삼대신승이라면 천 년 전 마중지존과 목숨을 건 사투(死鬪)를 벌여 마중지존을 패배시킨 전설적 존재가
아닌가?
그들은 마중지존과 함께 동귀어진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한데, 그들 삼대신승이 이렇듯 불가의 성지(聖地)를 남겼을 줄이야!

第六章 탕마지존동(蕩魔至尊洞)의 기연
1
석문을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쪽은 종유동굴이었다. 탁옥룡은 넓은 종유동굴을 바라보다가 세 구의 해골을 볼 수 있었다.
해골은 모두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살은 썩어 진토가 되었지만 뼈대의 골격은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았다.
품자형(品字型)을 이루고 있는 해골 가운데 석판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탁옥룡은 급히 걸어가 석판을 살폈다. 석판 위에는 금강지력(金剛指力)으로 쓴 글이 남아 있었다.
<마중지존을 꺾을 절학을 만든다는 것이 우리 세 불제자(佛弟子)의 공통된 소원이었다.
마중지존은 본래 불가정종 무공인 금강공(金剛功)에 토대를 두고 절기를 익혀 고수가 된 사람이다. 그의 절학을
능가할 신공 역시 불가정종 무공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그랬기에 그를 여량산(呂梁山)에서 패배시킨 우리는 이곳으로 와 숙고하게 된 것이다.
우리 셋은 내상이 커 일 년 이상을 버티지 못한다.
일 년 안에 마중지존을 능가할 절기를 만들지 못한다면, 훗날 마의 무공이 영원토록 정의 무공을 능가할 것이
아닌가?
마중지존은 비록 광폭했지만 아주 지혜로운 자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사장(死藏)시키지는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
그것은 정녕 무서운 일이다. 우리 어리석은 불제자들은 득도(得道)하는 마음으로 숙의했다. 서로의 절기를
허심탄회하게 교환했다.
마침내 죽음이 바로 앞에 닥치고야 우리 어리석은 불제자들은 결국 뜻을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정도 최고
절학의 창안을 뜻한다.
탕마삼장법(蕩魔三掌法)!
마도를 탕멸할 구결은 아래에 있다.>
아주 긴 글인데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놀라웠다.
"이럴 수가! 이들이 선사 마중지존을 격파한 후에도 한 곳에 모여 절기를 연마했단 말인가?"
탁옥룡은 그들의 불 같은 협의지심(俠義之心)에 혀를 내두르며 아래쪽을 마저 살폈다.
<탕마삼장(蕩魔三掌)―
일장(一掌), 정도무적(正道無敵).
이장(二掌), 불법무변(佛法無邊).
삼장(三掌), 제행무상(諸行無常).>
초식명은 모두 불법의 한 구절인데, 그 내용은 각기 한 가지의 오묘한 내공운기(內功運氣)였다.
제일장 정도무적은 소림사의 절기와 유사했으며, 제이장 불법무변은 옥룡절기와 흡사했고, 제삼장 제행무상은
포달랍궁절기와 비슷했다.
세 초식 중 어느 것이 뛰어나다 비교하기는 무리였다. 모두 장단점이 있는데 세 가지 모두 비슷한 점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서로의 심득을 교환하며 창안한 것이리라.
"흥, 이것은 혈영금강마공만 못하다. 무공이란 강(强)하고 급(急)해야 하는 법. 이렇게 유약(柔弱)해서야
상대를 죽일 수 있겠는가?"
탁옥룡은 자신이 익힌 마중지존의 마공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에 탕마삼장을 비웃으며 석판을 내려놓았다.
'마왕동은 천하제일이다. 삼대신승 정도가 어찌 마왕동의 절기를 능가하겠는가? 선사를 암습한 겁쟁이 중놈들!'
그는 가차없이 돌아서 나갈 작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그를 옭아맸다.
"과연 어느 것이 진정 강한 것일까?"
탁옥룡은 삼대신승이 죽기 전 창안한 절기가 헛것임을 밝히고 싶었다. 남에게가 아니고 바로 자신에게 확인시키고
싶었다.
"이 세 가지를 익히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마왕동의 절기에 비할 수 없이 허약한 것이니까. 나의
내공이 거의 다 흐트러졌지만 반나절이면 완벽 이상으로 익힐 수 있다."
그는 석판을 붙잡고 눈길을 한데 모았다.
그는 마왕동의 절학을 연성하는 데 육 년이란 세월을 소유했다. 한데 탕마삼장을 반나절만에 완벽히 터득할 수
있다면 그 한 가지만으로 심오함에서 비교된다.
"으음……!"
탁옥룡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럴 수가! 이렇게 심오한 구결이 있을 줄이야? 혈영금강마공의 허점을 모조리 설파해 놓고 있다.'
그는 손바닥에 땀을 쥐기 시작했다.
탁옥룡의 괴로워하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고뇌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가 읽는 구결은 이제껏 그를 지탱해
주던 마공구결에 비할 때 극성(極性)이 되는 구결이었다.
그것은 그의 마공 향상에 큰 해가 되는 것이다. 혈영금강마공과는 완전히 다른 운기행공술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읽기를 중단할 수 없었다.
2
종유석이 가득한 동굴 안은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동굴 안에는 해골이 되어 죽은 세 명의 노고승과 그들이 죽기 전 남긴 글을 읽으며 망아지경(忘我之境)을 헤매는
흑의청년 하나가 있었다.
그는 무념무상한 세계를 달리고 있었다.
구결은 한 자 한 자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오묘한 이치이기도 했다.
공(空)은 어떤 것인가, 색(色)은 어떤 것인가, 우주(宇宙)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가장 강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인간의 힘은 근육의 힘이 아니라 정신력(精神力)이다.
그 힘은 토납(吐納)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보통 내공(內功)이라 불린다. 내공은 구결에 의해 이룩되고 그
힘은 구결의 성질에 따라 달라진다.
강(强)과 유(柔).
허(虛)와 실(實).
급(急)과 완(緩).
내공구결은 서로 다른 점을 갖고 있다. 어떤 것을 취하느냐에 따라 내공의 성질도 달라지게 된다.
어떤 것은 강(强)으로 약(弱)을 누루고, 쾌(快)로 늦은(緩) 것을, 파(破)로 합(合)을 깨어뜨린다. 그러기에
위력이 살인적이고 파괴력이 엄청나다.
그러나 청년이 읽고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구결이었다. 그것은 고요한 가운데 일어나는 힘을 말하고 있었다.
정(靜)!
마음이 삼매지경(三昧之境)에 들어 가을날 호수같이 맑고 고요한 경지를 말한다. 폭풍뇌우가 몰아쳐도 그 고요한
경지를 깨지 못한다.
허(虛)!
마음은 텅 비어 있다. 그러기에 마력(魔力)이 거기 들지 못한다. 욕망도 들 수 없고, 호승지심도 들 수 없다.
유(柔)!
이유제강(以柔制强)이라 하지 않는가. 부드러운 것은 강한 것을 이긴다. 이유는 부드럽기에 꺾이지 않기
때문이다.
광(曠)!
마음의 테두리는 아주 넓어 끝을 볼 수 없다.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세계가 바로 거기에 있다.
정(定)!
고요함을 지키는 정(靜)과 비교된다. 이것은 감내하는 힘을 말하며 굴하지 않은 경지이다.
무(無)!
마음의 거울은 백지같이 깨끗하다. 그러기에 허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변화하지 않고 굴복당하지 않는
것이다.
정(正)!
사(邪)에 빠져들지 않은 바른 마음이다.
이것이야말로 청년이 읽는 구결의 제일 큰 특징이었다. 그것은 청년이 이미 익히고 있는 한 가지 내공구결과
흡사하면서도 너무나도 판이하게 다른 비결이었다.
'선천강기(先天 氣)임에는 같으나 그 힘의 근원이 마(魔)가 아니고 정(正)이라는 것이 판이하다. 이것은
인간의 순정지심(純正之心)에서 일어나는 조금도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기운이다. 그러기에 강하나 겉으로는
부드럽게 보이고, 번개같이 빠르면서도 아주 천천히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전혀 새로운 심도무학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잠재력을 일으켜 선천강기를 만들어내는 데에서는 혈영금강마공과 같다. 그러나 파괴의 힘이 아닌 대비(大悲)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너무도 판이하다.'
그는 더 이상 고민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한 가지 오묘한 것을 깨달은 후이기 때문이었다.
'이 힘은 원한이나 살기(煞氣)로 인해 발동되는 힘이 아니다. 평화로운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다. 가히 신공(神
功)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심오한 구결을 깨달은 청년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탁옥룡의 표정은 아주 부드러웠다. 과거 일심검제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얼굴보다도 훨씬 평온해 보였다. 눈빛에
서려 있던 핏빛 기운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십주야(十晝夜) 내내 구결을 읽으며 보냈던 것이다.
'마공과 신공의 차이는 손바닥의 위아래와 같다. 결국 사람의 마음은 단 하나이다. 그것을 악의 거울로 보느냐,
선의 거울로 보느냐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일 뿐이다.'
그는 자책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이치를 진작 몰랐던 것이 유감이다.'
그는 매우 편안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크게 기뻐했다.
"후후……, 죽었다면 이런 이치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어리석게도 한(恨)이 두렵고 서러워 도망치려 했지
않는가? 정면으로 싸워야 하는 것을 왜 세상에서 떠나려 했었는지 모르겠다."
탁옥룡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오랜만에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아주 맑았다.
"탕마삼장은 혈영금강마공 이상이다. 마중지존 선사도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다. 내가 선사의 전인으로 마왕동부의
절학을 완벽히 익히고, 이제 새로운 절기마저 연성해 것을 탓하시지는 않으리라."
그는 해골로 화해 버린 삼대신승을 돌아보았다.
"사실 이 분들이 여기 든 이유는 선사에 대한 경쟁심이 아니겠는가? 탕마삼장은 선사 마중지존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내가 얻는다면 사문에 부끄럽지 않고, 삼대신승 역시 흡족해 하실 것이다."
그는 편안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는 망아지경에 들었다.
하루가 지났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 다시 이틀 사흘이 지나 합장에 든 지 칠일째 되는
날이었다.
탁옥룡의 몸을 중심으로 한 몽롱한 백무(白霧)덩어리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천령개 위쪽에서 피어올랐다. 보일
듯 말 듯한 기운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졌다.
탁옥룡의 모습은 결국 백무에 잠겨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무극(武極)의 경지였다.
3
중양절(重陽節;九月九日)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삼산오악의 효웅(梟雄)들은 마궁에 바칠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부리나케 축융봉으로
말을 몰았다.
반면 정파 사람들에게는 폭풍전야와 같은 시간이었다.
혈영방 사람들이 축융봉으로 대거 몰려갔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일심맹의 우두머리는 소수 정예를 이끌고
축융봉으로 간다고 했다.
세상은 이렇듯 급변에 돌입하고 있었다.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산길을 한적히 걷는 백의인 하나가 있었다.
나이는 약관(弱冠) 남짓으로 그의 모습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으리만치 준미했다. 가히 조화의 극(極)이라고나
할까?
얼핏 그를 보는 여인은 모두 한숨을 지어야 했다. 그의 영준함을 가슴에 품고 많은 세월을 안타까움에 보내야 할
것이다.
그는 호남성 쪽을 향해 걸어갔다.
다른 무림인들은 건마(健馬)와 쾌속선(快速船)을 타고 호남성으로 가는데 비해 그는 유유자적 걸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아름답다!
그의 목소리는 그윽하고 부드러웠다. 바람소리가 그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그는 그윽한 눈길로 사위를 둘러보았다.
강물, 호수, 아름다운 산봉우리,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그가 터벅터벅 걸어갈 때였다.
차차창―!
요란한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산너머에서 검기가 일고 있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
승려들의 범패성이 고막을 때렸다.
백의미청년은 눈길을 산너머 쪽으로 돌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이 타락하다 보니 이제는 산사(山寺)에 머무는 중들까지 칼부림을 하게 되었단 말인가?'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이때 느닷없이 사람의 인영이 들이닥치며 사나운 음성이 들려왔다.
"서라!"
"한 걸음만 더 옮기면 죽는다!"
모두 자의를 걸치고 있는데 그들의 옷자락에는 용이 그려져 있었다.
'마궁 자삼대(紫衫隊)로군.'
백의미청년이 인상을 찡그리자 다섯 명이 미끄러지듯 다가서 그를 에워쌌다.
"흐흐……, 우리들을 알기는 하느냐?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구나?"
"쯧쯧……, 헌칠하기는 하나 문약(文弱)하구나. 내가 너만한 용모였다면 벌써 천하 여인의 십분의 일은
건드렸을 것이다, 흐흐……."
그들은 옥룡마궁의 고수들답게 포악성을 드러냈다.
'이들이 나를 세상에 떨어지게 한 어떤 사람의 부하들이란 말인가?'
미청년은 그들의 눈빛에서 이는 광기(狂氣)를 보고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마궁도들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고 계속 닦달했다.
"흐흐……, 거기서 꼼짝 말고 있거라!"
"괜히 호기심을 느끼다가는 제명에 죽지 못한다."
그들 다섯은 팔짱을 끼고 빙글빙글 웃었다.
옥룡마궁은 천년마제가 죽은 이후 무슨 연유에서인지 살생을 훨씬 줄였다. 그렇기에 문약한 서생 따위를 죽이는
일은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백의미청년은 천안(天眼)과 천이대공(天耳大功)을 시전해 산너머를 살피고 있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얽혀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었다. 그 중 삼 분의 일 가량은 중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가마 한
대를 호위하며 진세를 펼치고 있었다.
일백팔나한대진(一百八羅漢大陣)!
승려들은 천하에서 가장 막강한 진세를 시전하는 중이었다.
그들을 포위공격하는 자들의 수는 오백에 달했다.
"모두 쓸어버려라!"
"요사한 일심맹승(一心盟僧)들을 모두 도륙내라! 모가지 하나에 황금 열 냥이 걸려 있다!"
옥룡마궁 고수들은 승기를 잡고 날뛰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진세가 워낙 완벽해 가마를 지키는 사람들은 그마나 버틸 수 있었다.
청년은 상황을 파악하고는 다섯 사람을 향해 말했다.
"가마에 탄 사람이 일심검제(一心劍帝)냐?"
갑자기 하대하는 말이었다.
다섯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화를 내기보다 최면에 걸린 듯 순순히 대답했다.
"아… 아니다, 일심검제의 상전이다."
"일심검제에게 상전이 있었던가?"
청년은 중얼거리다가 소매를 흔들었다.
그런 모습은 아주 거만했다.
"나를 저곳으로 인도해라."
마궁도는 모두들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네… 네놈이?"
"이 놈이 갑자기 실성을 했나?"
청년은 그들의 살기에도 아랑곳없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나는 대비객(大悲客)이다. 너희들에게 소궁주(少宮主)가 되는 사람이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이상한 정서를 담고 있었다.
"소… 소궁주라니?"
"뭐… 뭐라고 했냐?"
다섯은 상대의 보이지 않은 위기에 중압감을 느끼며 얼굴에 비질비질 땀을 흘렸다.
백의인은 나직이 외쳤다.
"어서 안내해라!"
다섯 모두는 고막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소림사 사자후 신공이라 한들 청년의 외침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으으……!"
"크으……!"
다섯은 몸을 휘청이다가 겁먹은 얼굴을 하고 더듬더듬 말했다.
"우… 우리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오.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진세가 깨어져 중놈들이 도망치기 때문이오."
"진… 진짜 소궁주라 하더라도 안으로 드실 수 없소. 태상호법의 영패(令牌)가 있어야 입진(入陣)이
허락되오."
그들이 위기에 눌려 벌벌 떨었다.
"어리석은 자들! 그러나 이제부터는 착하게 살아라."
청년은 침착히 말한 다음 손바닥을 벌렸다. 그의 손에서 희뿌연 기류가 일어났다.
자삼대 다섯은 거의 동시에 석상같이 되어 굳어 버렸다.
입을 벌리고 있으나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그대로 깊은 잠을 빠져들었다. 달콤한 꿈을 꾸는지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었다.
"깨어나면 마성을 잃게 되리라."
미청년은 순간적으로 오십여 장을 가로질렀다. 흰빛이 뿌려지는 가운데 그의 몸은 진세 외곽지대에 이르렀다.
"와아―!"
"모두 쓸어버려라! 이 세상은 본궁의 것이다. 으하하……, 가마 안에 탄 어린놈을 죽이는 것으로 그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옥룡마궁도들의 함성이 아주 요란했다.
백팔나한진으로 보호되고 있는 황금가마 안에는 어린 소년 하나가 타고 있었다.
그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었다. 곤룡포(袞龍袍)를 걸치고 있는데 오른손에는 독이 발린 비수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그 끝은 심장에 닿아 있었다.
"진이 깨어지는 순간 독비수가 나의 심장을 뚫는다."
중얼거리는 미소년은 태양 같은 존재였다. 만인이 우러러 볼 당세의 천자 현룡제(玄龍帝)가 바로 그였다.
"옥새는 나만이 아는 장소에 숨겨져 있다. 옥새 없이는 아무도 천자가 되지 못한다. 게다가 령기(令旗)도
사라졌으니……."
그는 최후의 순간 자결을 결심하고 있었다.
콰콰― 콰쾅―!
주변에서 요동치는 진세의 소용돌이는 그가 감당하기에 상당히 큰 고통이었다. 기류의 파동으로 피부가 베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그는 당당한 천자의 신분이지만, 마궁에 잡혀 짐승만도 못한 경험을 많이 했기에 아주 비범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백팔나한진은 붕괴 직전이었다.
우르르― 릉―!
벼락치는 소리가 잇달았다.
승려들은 오공으로 피를 쏟고 있었다. 그러나 자리를 벗어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죽어도 진을 망가뜨리지는
않는 의지력은 소림사를 천 년간 강호의 태산북두로 만든 원동력이기도 했다.
"하하하……, 어전대장군(御前大將軍)이 왔다. 어떤 놈들이든 간에 현룡제를 해하지 못한다!"
큰 웃음 소리와 함께 붉은빛 하나가 떠올랐다.
피융―!
혈선(血線) 하나가 그어졌다. 용 그림이 그려진 소기(小旗) 하나가 붉은 선을 끌며 옥룡마궁도 속으로
날아들었다.
붉은 광채는 점점 더 짙어졌다. 둘레가 한 아름이 넘어 보이는 핏빛 기류가 닿는 곳에는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케에에― 엑―!"
"크으윽!"
"어… 어떤 자이기에 이리도 강하단 말이냐?"
"도… 도망가자, 무신(武神)이 나타났다!"
도처에서 피보라가 일어났다. 삽시간에 수백 명이 죽어 넘어진 것이다.
옥룡마궁도들이 깃발에 의해 으스러져 죽을 때, 둥둥 떠서 황금가마 앞으로 떨어져 내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하……, 그러면 그렇지. 누가 그대를 죽일 수 있었겠는가?"
현룡제는 독비를 떨어뜨리고 활짝 웃고 있었다. 죽음 직전에 살아난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폐하, 신(臣)에 대해 묻지 말아 주십시오."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사람은 오체복지한 다음 손을 위로 쳐들었다.
옥같이 흰 손바닥이 흔들어지더니 수백여 명을 참살한 주룡령기(朱龍令旗)가 허공에서 방향을 꺾어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놀랍게도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황제가 갖고 있는 물건이었다. 그것이 언제 현룡제에게서 타인에게 넘어갔는지, 현룡제가 언제 절세고수를
부하로 두었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소림승려들은 얼떨떨해 했다.
"오……, 대체 누구기에?"
"진정 무신의 경지다."
현룡제를 구한 사람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두 신비했다. 특히 눈빛이 신비로웠다.
그는 현룡제와 말을 나누고 있었다. 현룡제는 보통 목소리로 말을 하는데, 그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자네는 생사대권(生死大權)을 지고 있네. 그러니 비록 부모(父母)를 죽인다 해도 황제의 어명으로 용서받네.
하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현룡제는 웃으며 곤룡포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게 느껴져서였다.
"잠시만 숨어 계십시오. 그러면 곧 희소식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누구인지는 당분간 비밀로 해주십시오."
백의인은 말을 한 다음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한순간에 모습을 감췄다.
현룡제는 무엇이 즐거운지 계속 웃고 있었다.
"하하……, 그대만 믿네."

4
강호는 삼분(三分)된 지 오래였다.
옥룡군이 강호의 반을 차지했다. 그 나머지 반은 혈영방이, 나머지 반은 구파(九派)를 주축으로 한 일심맹이
차지하고 있었다.
옥룡궁의 힘은 아직도 위대했다.
이역사단이 그들의 전부가 아님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가장 무서운 살수는 독인단(毒人壇)이었다.
독인단의 우두머리는 마궁의 태상호법 독존이었다.
독인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하나같이 칠독(七毒)을 식량으로 삼는 사람 이하의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무기를 갖고 다니지 않았다.
손이 바로 살인병기이기 때문이었다.
호남성으로 드는 관도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는 백의인 하나가 있었다.
그는 얼핏 보아 문사(文士)로 보였다. 얼굴을 죽립으로 가리고 있는 사람인데 전체적으로 풍기는 인상이 아주
부드러웠다.
그는 가을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것을 보며 형산(衡山) 쪽을 향해 걸었다.
노을이 그의 흰옷을 붉게 물들였다.
"천하가 핏빛이었다. 그러나 핏빛은 사라지리라."
그는 청아한 소리로 중얼거리며 계속 걸었다.
해가 완전히 떨어졌을 때 그는 형산의 높은 봉우리가 바라보이는 마을에 이르렀다.
마을은 불야성이었다. 마을 사상 가장 번화한 시기가 바로 이 즈음이었다.
수백 명의 호걸들이 건마를 타고 몰려와 마을의 주루와 객잔을 다 차지하고 마을 안을 주향(酒香)으로 덮어버렸다.
그들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형산까지의 거리가 세 시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천리 밖 시진에 사는 창기들이 몸을 팔기 위해 산하촌(山下村)에 왔다는 말이 떠돌고 있었다.
강호인들은 돈 씀씀이가 헤프다. 닷 냥 주고 살 것을 스무 냥 주고도 산다. 그러나 위험하기가 화약고 같아
자칫하다가는 머리가 박살나 죽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이치를 몸으로 체험한 듯 칼을 찬 사람을 보기만 하면 아주 고분고분했다. 심지어 침을
뱉는다 해도 손바닥으로 침을 닦은 후 씨익 웃을 정도였다.
칼이 무서워서라기보다는 황금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곳곳에서 극(劇)이 벌어지고 있었다. 구경꾼들의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어떤 곳에서는 원숭이와 곰을 부려
여러 가지 재간을 보이고는 바구니를 돌려 은조각을 모으는 자도 있었다.
백의인은 마을 안을 둘러보다가 지붕이 바닥에 붙어 있은 듯 작고 허름한 술집을 찾았다.
그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곳은 너무도 초라해 마을이 온통 북새통인데도 한적하기만 했다.
오순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점원, 주방, 계산의 일을 모두 다 하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식객(食客)은 단 세 사람인데도 몹시 분주했다.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두주(斗酒)를 마시며 연방 안주를
주문하기 때문이었다.
"우리 하락쌍흉(河洛雙兇)이 백도인의 괄시를 받고 살기보다 이 참에 마음을 바꿔 마궁도(魔宮徒)가 됨이 낫지
않는가?"
털북숭이 사내가 묻자 얼굴이 마른 자가 말을 받았다.
"마도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방문외도(傍門外道)라고는 하나 독인(毒人)과 오랑캐를 앞세워 무림을 정복하는
무리와 한 패거리가 된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둘은 삼류무사(三流武士)였다. 그러나 말하는 모습은 아주 진지했다. 천하대세에 따라 적절히 움직여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럴 바에는 비무대회가 끝날 때까지 숨어사는 것이 어떤가? 구경하다가 재수 없이 죽는 수도 있으니까
말이세."
"헤헤……, 이번 구경은 목숨보다 가치 있는 것입니다. 혈영사절(血影四絶)의 뛰어남을 직접 보고 싶어 하락
고을에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혈영사절이란 명호는 당금 천하에서 선풍(旋風)같이 휘몰아친 이름이었다.
일절(一絶) 독비수(獨臂 ),
이절(二絶) 실명검사(失名劍士),
삼절(三絶) 녹옥선마(綠玉扇魔),
사절(四絶) 마의불수(麻衣佛手).
이들 네 사람의 이름은 당금 천하를 울리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혈영쌍미(血影雙美)가 있었다.
매하선자(梅花仙子),
혈수나찰(血手羅刹) 이수운.
쌍미는 혈영방의 꽃이었다. 놀랍게도 혈수나찰이 현재 혈영방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다.
혈수나찰은 본래 포달랍궁주의 전인이 아닌가.
포달랍궁주가 혈영마협에 쓰러져 폐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혈수나찰이
어찌 사부의 원한도 잊고 혈영방의 수뇌가 될 수 있었을까?
― 혈수나찰은 혈영마협이 죽은 이후 석녀(石女)가 되었다. 그녀가 웃는 것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녀는 포달랍궁의 절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본 사람이 퍼뜨린 소문이 그것이었다.
하락쌍흉은 나름대로 들은 소문을 자랑하며 어떻게 처세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으음……!"
구석진 곳에 앉아 술을 마시던 작은 체구의 흑의인 하나가 쓴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누런 얼굴에 일그러진 오관을 하고 있었다. 손은 아주 부드러워 얼굴빛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눈매가 예리한
사람이라면 그가 역용한 것임을 쉽게 알아낼 것이다.
'그들을 찾아야 한다. 그들에게 이것을 전해야 한다.'
그는 오랫동안 앉아 한 가지 일을 고민하다가 급기야 마음의 결정을 보았다.
"술값 여기 있소."
그는 작은 소리로 말하고는 금자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내던졌다.
그가 문 밖으로 나가자 하락쌍흉 중 하나가 탄식을 흘렸다.
"으음……!"
그의 눈에서는 잠깐 신광(神光)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하락쌍흉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은 초절한 눈빛이었다.
"그곳으로 가기를 작정한 것 같다. 하는 수 없군. 명에 따라 목을 잘라 갖고 산으로 돌아갈 수밖에."
털북숭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얼굴이 마른 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빌 뿐이오."
그는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털북숭이는 누런 금덩이 하나로 술값을 치른 다음 그 뒤를 쫓아갔다.
그는 문을 나가기 이전 백의인을 슬쩍 바라보았다.
백의인은 술집 주인과 더불어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떤 곳이라는 등등의 시시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훗……, 아닌가?"
털북숭이는 피식 웃다가 밖으로 나갔다.
백의인은 잡담을 끝내고는 주인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저 사람은 언제 여기 왔습니까?"
"헤헤……,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흑의장한이 들어오고 난 바로 다음이었습니다. 한데 주량이 상당한지 열
말들이 술독 두 개를 게눈 감추듯 비우지 뭐겠소?"
"고맙소, 노인."
청년은 미소 짓다가 금조각 하나로 술값을 치렀다.
"아이구!"
주인은 네 사람이 낸 술값이 이제껏 사십 년 술장사해 번 돈의 두 배라는데 경악하며 연방 허리를 숙였다.
백의인은 어둠을 모르는 듯 빠른 속도로 걸었다.
'하락쌍흉이란 자는 보통이 아니다. 그들의 몸에서는 막강한 사기(邪氣)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왜 삼류무사
행세를 하고 있을까? 그들이 아마 흑의인을 쫓고 있을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보통 일은 아니다.'
그는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듯 보이나 사실은 무공이 너무도 강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안광이 안으로 갈무리되는
반박귀진의 경지를 넘은 지 오래였다.
그는 하락쌍흉이란 자들이 간 곳을 따라 움직였다.
한편, 하락쌍흉은 야음을 타고 소리 없이 뒤쫓고 있었다. 그들의 표적인 왜소한 흑의인이었다.
흑의인은 그들이 뒤쫓는지도 모르고 주위를 살피며 걷고 있었다.
"이것을 전해야 한다. 그래야 희생을 줄일 수 있다. 아버님은 완전히 미치셨다. 아……, 내가 이런 일을 하면
양어머니가 노해 사부를 죽일 것이나 죄 없는 수천 명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 사부도 내가 용기 있게 이런 일을
하기를 바라고 계시다."
그는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소책자 한 권이 쥐어져 있었다.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히 베어 있었다. 무게도 얼마 나가지 않는
작은 책자를 들고 가는 것이 아주 힘겨워 보였다.
<독진밀해도(毒陣密解圖)>
다섯 자가 먹으로 쓰여 있었다.
"이것을 혈영사절에게 전하면 혈영사절은 독진을 통과할 것이다. 태상호법이 믿는 독진이 무너진다면 옥룡궁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숨죽이고 뒤따르던 하락쌍흉이 전음으로 합의를 본 다음 위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흑의인의
전후를 가로막았다.
"더 갈 수 없소!"
"그것을 이리 주시오. 모르는 척하겠소."
길 옆 거목 뒤에 은신해 있는 백의청년은 비로소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흐음……, 혈영사절을 운운해 어딘지 이상하다 했더니 가짜 하락쌍흉이고, 사실은 옥룡궁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느닷없이 앞뒤가 가로막힌 흑의인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당… 당신들은 누구요?"
하락쌍흉은 능글맞게 웃었다.
"궁에서부터 쭈욱 따랐소이다."
"대부인(大夫人)의 밀명(密命)으로 따라 왔소. 소궁주(少宮主)가 태상호법의 침소에 잠입해 독진밀해도를
훔쳐낸 것을 아시고 우리 두 늙은이를 비밀스럽게 불렀던 게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전과 달랐다.
"마… 마존(魔尊)과 검존(劍尊)?"
흑의인은 그들의 정체를 간파한 듯 몸을 휘청였다.
그렇다. 털북숭이는 건곤마장법(乾坤魔掌法)으로 천하를 주름잡다가 마궁구존 중 세 번째가 된 마존이다.
얼굴이 마른 자가 구마 중 넷째로 검존이다. 그의 허리띠가 바로 연검(軟劍)이며, 그것이 발출되면 사위가
검기에 의해 갈라진다 했다.
두 마존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소궁주, 벌써 세 번째요. 배반을 하면 죽는 것이 본궁의 법인데도, 소궁주는 신분이 있기에 두 번이나
용서받았소. 그런데 또다시 배반하시다니!"
"우리는 소궁주가 그것을 들고 혈영사절이 머물고 있는 곳을 찾는다면 가차없이 암습해 죽이라는 대부인의 명을
받고 왔소."
흑의인은 소책자를 가슴에 품고는 와들와들 떨었다.
"이… 이러지 마세요."
가는 음성으로 미루어 아마도 여인인 듯 싶었다.
앞을 가로막은 마존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시오. 그리고 함께 들어갑시다. 조금 더 가면 혈영방 조무라기들에게 발각당하게 되오."
두 마존은 작은 소리로 말하며 진세를 압축시켰다.
"안… 안돼!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나의 아버지가 비록 마궁의 궁주라고는 하나, 나는 마궁 소궁주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뭣이? 마궁이라고?"
마존과 검존의 눈빛이 사악해졌다.
바로 그때,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다가서는 백의인 하나가 있었다.
"하하……, 어떤 자들이 연약한 여인을 괴롭히느냐?"
줄곧 그들을 뒤따르던 백의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웬 놈인지 모르지만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다!"
마존은 차게 말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백의인을 향해 쌍장을 흔들어댔다.
그의 장력은 원래 파공성을 내지 않았다. 지극히 차고 음유한 기운이 흐를 뿐이었다. 막강한 암경(暗勁)이
백의인을 요절낼 순간이었다.
콰앙―!
폭음과 함께 비명소리가 뒤따랐다.
"으윽……, 호신강기로 나의 음살건곤강기(陰煞乾坤 氣)를 퉁겨 버린단 말인가?"
마존이 사색이 되어 일 장이나 날아올랐다. 그의 두 손은 꺾여 축 늘어졌고 오장육부가 자리를 바꾼 후였다.
쐐애액― 액―!
검존은 초조한 기색이 되어 연검을 빼내 흑의인을 검기 안으로 휘감았다.
"배반자! 너를 죽이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다!"
그는 잔혹하게 말하며 검세를 한결 돋웠다. 흰빛이 사위를 갈랐다. 과연 천하를 진동시킨 검존다운 솜씨였다.
"하하……, 허공을 향해 검을 치는 모습이 재미있군."
백의인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렸다. 놀랍게도 그의 품 안에는 흑의인이 안겨 있었다.
"어엇, 어떻게 피했느냐?"
검존은 사색이 되어 연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가 겨우 몸의 자세를 바로잡을 때 백의인은 흑의인과 함께 땅을
밟고 있었다.
모두 탄지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백의인은 지면(地面)을 밟은 후에야 언제 안았는지 모르게 안고 있는 흑의인의 손을 놓아주었다.
"뉘… 뉘십니까? 당금천하에 대협만한 고수가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죽은 혈영마협보다도 오히려
고강한 분 같으십니다."
흑의인은 가냘픈 여인의 음성으로 말했다.
'공야홍……! 아니, 백옥지의 목소리가 아닌가?'
백의인은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상당히 놀라워했다.
"에잇, 멸천화독무(滅天火毒霧)를 받아라!"
일초를 실패한 검존은 순간의 기회를 노리고는 소매를 어지러이 흔들어댔다.
츠측― 측―!
아주 고약한 냄새와 함께 독무(毒霧)가 일어났다.
"흐으윽……!"
독무가 채 접근하기도 전에 흑의여인은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풀썩 쓰러졌다.
"으하하……, 반도의 최후는 그런 것이다."
검존은 득의해 하며 위로 날아오르려 했다.
"고약한 노괴!"
갑자기 그의 머리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백의인이 찰나지간에 허공을 점하며 그의
퇴로를 봉쇄한 것이었다.
"네… 네가 사람이냐 귀신이냐?"
검존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백의인의 손이 흔들리더니 검존의 몸이 석상같이 굳었다. 파고음도 느끼지 못한 사이에 그는 점혈당하고 말았다.
'으으……, 진정 무서운 놈이다.'
백의인이 그의 완맥을 거머쥐었다.
"해약을 내놓아라."
"해… 해약은 없다."
검존은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없다고?"
백의인의 어조가 전과 달리 아주 차가워졌다.
"죽… 죽이라는 명을 받았다. 해약은 건네 받지 않았다."
"누가 명했느냐?"
"대… 대부인이다. 바로 혈작약이 그 분이다. 그 분은 공야소궁주가 독진밀해도를 혈영사절에게 전할 기세면
지체없이 죽이라고 했다."
"으음……, 그 천한 계집이!"
백의인은 치를 떨다가 완맥을 잡은 손바닥에서 진기를 발휘했다.
"크으윽!"
검존은 전신의 혈맥이 오그라드는 고통에 젖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백의인의 목소리가 천둥치듯 들렸다.
"공야무군은 어디 있느냐?"
"연… 연공실에 계시다."
"그 위치는 어디냐?"
"궁 안이다. 하지만 자세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없다. 궁주가 연공하는 장소를 아는 사람은 태상호법과
대부인뿐이시다."
검존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흑의여인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을 뒤챘다.
"흐… 윽……!"
그녀는 아주 괴로운 듯 손가락으로 가슴살을 후벼팠다. 핏물이 튀고 코와 입술에서 검은 독혈이 흘러나왔다.
"잔인한 자들! 저 여인이 어떻게 철서생의 양녀가 된 줄은 모르나 소궁주 지위이거늘 어이해 가차없이 죽이려
한단 말인가?"
백의인은 탄식하다가 독존의 몸에다가 막강한 기운을 발휘했다.
검존의 오장육부가 순간적으로 가루로 화했다. 그는 고통도 느낄 새도 없이 숨을 거두었다. 그나마 행복한
죽음이었다.
"낭자, 정신차리시오!"
백의인은 흑의여인을 안아들었다.
"나… 나는 틀렸습니다. 대신 이… 이것을 혈영사절에게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뇌옥(牢獄)에 갇힌 저의 사부
천산신의는 사실 좋은 분이시니……, 그 분을 구해 달라 말씀해 주십시오."
흑의여인은 너무나도 빨리 생기(生氣)를 잃어갔다.
"낭자는 죽지 않소."
백의인은 부드럽게 말하며 손가락 하나를 빳빳이 세웠다.
그의 손가락이 금광을 띄웠다. 도가선천강기(道家先天 氣) 중 으뜸이라는 금단선(金丹禪)의 절기가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공을 모은 후 여인의 유근혈(乳根穴)에 일지를 가했다.
"으… 음……!"
여인은 힘이 쭉 빠짐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백의인은 잇달아 십여 지를 쳐낸 다음 손길을 거두었다.
"오풍초(烏風草)와 비천오공담(飛天蜈蚣膽)이 있어야 살릴 수 있다. 다른 것은 약이 되지 못한다. 너무나도
무서운 독이다."
백의인은 고개를 젓다가 품안에서 수건 한 장을 꺼냈다.
그는 아주 다정한 손길로 여인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았다. 피와 함께 역용약이 지워졌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여인의 얼굴은 정말 아름다웠다.
장미의 향기를 가득 품은 화려한 용모였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은 물기를 머금었고, 주사를 바른 듯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달콤한 향기가 뿜어질 것 같았다.
꺼져 가는 불꽃이기에 더 아름다워 보였다.
"낭자는 죽어서는 아니 되오. 아시겠소? 꼭 사셔야 하오."
백의인은 그녀를 안아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당신의 사부도 꼭 구해주겠소, 옥지."
第七章 슬픈 이름, 대비객(大悲客)
1
사방에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네 사람이 백의인을 포위하며 다가서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모두 상복차림이었다.
그들은 두 다리와 왼팔이 철로 된 독비괴인(獨臂怪人), 손에 녹옥선(綠玉扇)을 쥔 미소년, 고색창연한 고검(古
劍) 한 자루를 쥔 장한, 그리고 웃는지 찌푸리는지 모를 괴이한 표정을 한 중년인이었다.
"흐음……, 정말 의외로운 일이로다. 공야무군의 양딸이 본방에 비밀을 전하려 하다가 자파고수들에게 당하니
말이다."
독비괴인의 말이었다. 그는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독비수(毒臂 )!
그는 보통 그렇게 불렸고 최근 들어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살수(煞手)로 정평이 나 있었다. 혈영사절 중의
일절이 그였다.
"공야무군의 양딸과 공야무군의 부인이 서로 암투를 벌인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독비수는 차게 중얼거리다가 턱끝을 끄덕였다.
"어쨌든 간에 천한 마궁의 계집일 뿐입니다."
녹옥선을 쥔 미소년이 잔혹한 눈빛을 지으며 걸어나왔다.
녹옥선마(綠玉扇魔)!
그는 정파의 협객이었다가 가장 단시일에 살인마로 화신한 사람이었다.
그의 섭선은 마궁도들에게 있어 망나니가 휘두르는 칼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혈영사절 중 가장
나이 어리나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일신무공은 혈영사절 중 세 번째였다. 그러나 삼 년 후라면 그가 혈영사절 중 가장 강해지리라는 것이 강호인들의
평가였다.
녹옥선마는 잔혹스러운 눈빛을 흘리다가 녹옥선을 펴들었다. 부챗살이 퍼지며 살광이 일어났다.
"흐흐……, 정체를 밝히고 항복해라. 본방은 자비심을 갖고 있지 않다. 네가 누구라는 것을 확실히 밝히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쳐죽이겠다."
나이답지 않게 냉혹한 목소리였다.
"……."
백의인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자태는 아주 의연했다. 무언중 사람을 압도하는 데가 있는 기세였다.
녹옥선마는 백의괴인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자 화를 내며 진기를 끌어올렸다.
"혈영방은 할 일이 많은 문파다. 시시한 일로 시간을 소모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혈영사절이다. 왜
마궁도들과 함께 본방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나타났는지 그 자초지종을 밝혀라!"
그가 다그치자 백의인이 오랜만에 입술을 떼었다.
"나는 가문의 일을 처리하러 강호로 나왔다네. 가문의 일만 마무리 짓는다면 곧 강호를 떠나 영원히 은거할
사람이네."
그 목소리는 아주 신비로웠다. 나이를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한 목소리였다.
"가문이라니?"
녹옥선마가 눈을 부라리자 다시 캐묻자 백의인은 품에 안은 공야홍의 등을 다독였다.
"나는 옥룡 옥봉의 아들이라네. 다시 말해 나의 가문은 바로 옥룡궁이지."
"공… 공야무군의 아들이란 말이냐?"
녹옥선마가 경악에 차 외치자 독비수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옥… 옥봉의 아들?"
독비수는 너무도 엄청난 충격에 몸을 휘청이다가 겨우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럴 수가! 이 아이가 옥봉의 아들이란 말인가?'
독비수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기로 맹세하지 않았던가? 만약에 그것을 어긴다면 나는 무림인이 지켜야 할
신의를 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비밀을 밝힐 수 없는 자신의 입장 때문에 더욱 괴로워했다.
"으하하……, 그럼 공야홍의 오빠로구나? 잘 됐다. 너를 잡아 공야무군을 이쪽으로 끌어내려라!"
녹옥선마는 의기양양히 외치며 옥선을 흔들었다.
촤르르륵―!
무수한 선영이 일어났다. 현란하면서도 오묘했고, 유하면서도 강했다. 가히 무림의 일절이라 할 수 있는
절초였다. 하지만 그는 상대를 너무 몰랐다.
"훗훗……, 불영백팔선(佛影百八扇)은 시시하다. 그걸 가지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수는 없지."
백의인의 목소리가 녹옥선마 뒤쪽에서 났다.
너무도 놀랍게도 그는 녹옥선마의 초식이 시전되기도 전에 모든 허점을 알고 아주 간단히 피해버린 것이다.
"나… 나의 초식을 알아보다니……?"
녹옥선마는 그제서야 상대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검존과 마존 같은 고수가 그의 손에 맥없이 쓰러진 것도
이해가 되었다.
백의인은 넷 중 하나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빛을 마주 하게 된 사람은 마의불수였다. 그는 나이 들어 무공을 익힌 사람이고 혈영사절 중 가장
하수였다.
'이 자가 왜 나를 쏘아볼까?'
백의인은 마치 수하를 대하듯 말했다.
"두 가지 얻을 것이 있다. 그것을 내게 다오. 그러면 공야홍이 너희들에게 전하려 했던 독진밀해도를 주겠다."
"무… 무엇을 달라는 것이냐?"
"너의 약상자 안에 들어 있은 오풍초와 비천오공담이다."
"뭐라고? 그… 그 귀한 것을?"
마의불수는 대경실색해 커다란 상자를 등뒤로 감췄다.
그 안에는 그가 최근 들어 잠을 설치며 만든 많은 해독약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마궁과의 대결 때 쓰일
물건이었다.
"안 된다. 이것은 나의 물건이 아니고 혈영방의 물건이다. 방주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에게도 줄 수 없다."
그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약탈당하기를 자초하겠는가? 의원이라면 의당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야 하는 법이거늘 어이해 약을 내어주지
않는단 말인가? 혈영방이 그리도 몰인정하단 말이냐?"
백의인은 몹시 화난 듯 말소리에 진기를 실었다. 그의 목소리는 중인에게 고통을 전했다.
"으음……!"
"크으윽……!"
비교적 공력이 약한 마의불수와 녹옥선마는 진기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휘청였다. 독비수와 실명검사는 몸을 약간
움찔했다가 바로잡았다.
"놀라운 고수로다."
"공야무군에게 너 같은 아들이 있다니……, 너는 혹 마궁이 키운 비밀무기가 아니냐?"
독비수는 아주 침통한 표정이 되어 눈빛을 흩트렸다.
"하하……."
백의괴인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사가 되어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웃음에 실린 감회는 아주 처참했다.
'미안하오. 여러분들을 모르는 체 할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안타깝소. 하지만 나는 죽은 사람으로 남고 싶소.
가문의 일을 처리한 다음 미련 없이 강호를 떠날 예정이라오.'
웃는 백의인의 몸집은 중인에게 아주 낯익은 것이었다. 그의 눈빛이 혈광이었다면 모두 그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빛나는 정광을 발하는 그가 바로 과거의 혈영마협 탁옥룡이라는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탁옥룡은 앙천대소를 터뜨리다가 갑자기 웃음을 거뒀다.
"여러분들과 내기를 하고 싶소."
"내기라니?"
우두머리 되는 독비수가 되묻자 탁옥룡은 다소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지면 여러분들이 하라는 대로 할 것이고, 내가 이기면 여러분들은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하오."
"이기고 지고를 어떻게 가리느냐?"
독비수는 내기에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네가 누군지 꼭 알아야 한다. 네가 정말 옥봉의 아들인지, 실종된 석심부인이 너의 어머니인지……, 그리고 네
아버지가 그 놈인지를 알아내고야 말겠다.'
탁옥룡은 혈영사절을 둘러보며 담담히 말했다.
"사대일(四對一)! 초수는 삼초로 제한합시다."
그는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공력을 분출했다.
쩌― 저정―!
지반이 뒤흔들리며 먼지바람이 일어났다.
탁옥룡의 몸을 중심으로 반경 오 장 이내의 땅이 밑으로 두 장 정도 가라앉으며 나는 소리였다.
"……?"
"……!"
모두들 아연실색해 말도 하지 못했다.
'으윽, 탁공자(卓公子)만한 내공이다. 아니, 어찌 생각하면 그 분의 내공보다도 강하다.'
실명검사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탁옥룡의 일초 신기가 발휘되지 않았다면 사 대 일로 겨루자는 제안이 우스갯소리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사대 일의 비무가 아주 적당하다고 느꼈다.
혈영방의 신위가 탁옥룡으로 인해 지옥 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제껏 한 번도 꺾이지 않았다는 혈영사절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혈영마협의 화신으로 강호에 이름을 날린 이후 처음으로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탁옥룡은 그들 하나하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과 오래 드잡이질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바쁜 사람이다."
그가 빈정거리자 독비수가 최고령자 자격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후후……, 이초를 양보해 주마."
탁옥룡은 혈영사절의 호승심을 일으키기 위해 더 오만히 말했다.
혈영사절의 자부심이 무참히 꺾였다. 자신들을 상대로 이초 양보해 주겠다는 것은 그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더군다나 상대가 공야무군의 아들임을 자처하기에 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독비수는 다른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냉정을 잃지 말게나. 격장지세에 넘어가서는 아니 되네!"
그는 역전의 노장답게 제일 빨리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과거 삼기 중 하나로 불리던 묘중기인의 화신이었다.
"마궁을 박살내기 위해 연마한 절진을 펼친다면 이초 안에 저 자를 잡을 수 있을 걸세. 그때 의문을 풀기로
하세."
독비수는 크게 외치며 오른팔을 쳐들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푸른기류가 일어났다.
뒤이어 마의불수가 외치며 한 방위를 차지했다.
"서백(西白)!"
"남주(南朱)!"
실명검사는 곧 혈섬검을 뽑을 기세였다.
"북현(北玄)!"
가장 어린 녹옥선마 사마천룡은 기합소리를 내며 옷을 풍선같이 부풀렸다.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
네 가지 신수(神獸)의 형상이 네 사람의 동작으로 인해 재현되며 십 장 안이 암경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우르르― 릉―!
우렛소리가 연달았다. 맹렬히 회전하는 기류로 인해 사위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누가 창안한 것일까? 불문정종수법 같은데……. 으음, 분명 묘노인이 만든 것이리라. 그의 비밀스런 과거는
대체 무엇일까? 대할수록 신비롭기만 하구나.'
탁옥룡은 진세의 막강함에 긴장하며 신공을 일으켰다. 그의 몸 주위로 몽롱한 백무가 피어올랐다.
"일초, 진건곤(震乾坤)―!"
독비수의 기합과 함께 사상대진(四象大陣)이 위력을 발휘했다.
우르르― 릉―!
네 명이 한데 합격술을 펼치자 가공할 암경이 일어났다. 산 하나가 통째로 붕괴되는 기세였다. 그야말로
백만균뢰정(百萬鈞雷霆)이었다.
"하하……, 좋소. 정말 훌륭하군!"
허공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났다. 탁옥룡이 둥실 떠서 하는 말이었다. 사상대진의 일초는 무위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에잇, 이초 파천황(破天荒)―!"
독비수는 자신의 지혜로 창안된 합벽진이 간단히 실패하자 화를 내며 재차 발동을 명령했다.
콰류류류―!
네 사람이 풍차같이 빠르게 돌며 모래바람이 세차게 일어났다. 구십구 마리의 독룡(毒龍)이 꼬리를 흔들며
날아가는 듯한 기세였다.
"강(强)과 쾌(快), 파(破)에서는 압권이나 대법(大法)을 몰라 구멍 투성이다. 이것으로 마궁을 치려 했더냐?"
탁옥룡은 진세를 두려워 않고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콰콰― 쾅―!
네 줄기 강류가 희뿌연 기류와 충돌했다. 네 사람의 막강한 강기는 탁옥룡의 몸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봄눈 녹듯
사라졌다.
"이… 이것은 꿈이다."
"으윽……, 주인이 가르쳐 준 절기가 무산되다니……?"
모두 사색이 될 때 탁옥룡의 맑은 음성이 구중천을 갈랐다.
"하하……, 정도무적(正道無敵)임을 아는가?"
네 사람의 몸이 일시에 뻣뻣해졌다. 소리도 없는 힘이 날아들어 그들 넷을 순간적으로 제압해 버린 것이다.
탁옥룡은 그제서야 신공을 거두고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네 사람은 스스로 운기해 혈도를 풀려 했지만 이룰 수 없자 참담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주인이 저승에서 원망하실 것이다!"
"모두 자결합시다. 이런 치욕을 안고 어찌 방도들 앞으로 가겠소!"
넷 모두 비분강개해 혀를 깨물고 죽을 기세였다.
"나는 세 가지를 명하겠소."
탁옥룡의 목소리가 그들의 뇌리를 시원하게 했다. 정말 이상한 힘을 갖고 있는 목소리였다. 네 사람의 눈빛이
탁옥룡의 한몸에 거둬졌다.
"혈영방을 해산하라는 것이 첫째요. 중앙비무대회에 참가하지 말라는 것이 둘째이고, 내가 전에 말한 두 가지
영약을 달라는 것이 셋째요. 그것을 모두 들어준다면 떠나는 것을 막지 않겠소."
탁옥룡의 호쾌한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호호호……!"
어디선가 귀기 서린 목소리가 들렸다.
흑의인영 하나가 모습을 보였다.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 하나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중인 있는 곳을 향해 바람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오호호호……!"
광기에 찬 웃음소리가 다가섰다.
흑의여인은 아주 지저분했다. 수십일 간을 진흙 구덩이에서 보낸 듯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가 흙투성이었다.
"호호……, 세상을 증오한다."
흑의여인은 자지러지게 웃으며 중인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무작정 치달려 갈 때였다.
"사… 사매(師妹)! 나는 네가 불에 타 재가 된다 해도 알아볼 수 있다!"
한 사람이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점혈당해 꼼짝도 하지 못하던 독비수 묘중기인이 훌쩍 날아 산발여인을
뒤쫓아가는 것이었다. 그의 신법은 아주 특이했다.
옥룡행공법(玉龍行空法)으로 옥룡상인의 후계자만이 익힐 수 있는 것이었다.
"으음, 잠재력을 일으켜 내가 시전한 점혈법을 풀다니……?"
탁옥룡은 독비수가 자신의 점혈을 풀자 상당한 놀라움에 젖었다.
'묘노인의 사매라면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목소리가 귀에 익은 이유는 무엇일까?'
탁옥룡은 야음 속으로 사라져 가는 두 사람을 보고 의혹에 찬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핑― 핑―!
느닷없이 향전 쏘아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요란했다.
"큰일이다!"
"으으……, 하필 이런 때에……?"
"제… 제발 우리들을 놓아다오."
혈영삼절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묘중기인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을 때보다 백 배 더 놀라는 모습들이었다.
"혈영방의 향전이다.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니다. 우리들을 가게 해다오. 제발……."
실명검사는 하소연하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가만, 이 자는 마궁주의 아들이라고 밝혔다. 거짓말 같기는 하지만 이 자에게 풀어달라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핑― 핑―!
향전 쏘아지는 소리가 더욱 요란해졌다. 이어 수 리 밖에서 폭음이 연발했다.
우르르― 릉― 꽝―!
불기둥이 치솟고 있었다. 형산 기슭이 화마로 덮여 갔다. 검은 연기가 충천하며 십 리 안이 매운 냄새로
휘감겼다.
이때 검은 연기를 뚫고 달려오는 한 떼의 무사들이 있었다.
나는 듯 달려드는 자들의 옷자락에는 옥룡문(玉龍紋)이 그려져 있었다.
"으하하……, 과연 대부인의 말씀대로다."
"혈영사절이 자리를 비울 것이니 틈을 노려 암습하라는 대부인의 말씀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아시는 분답게 아주
정확했다."
"너희 혈영방은 형산으로 오지 않았어야 했다."
"흐흐……, 혈영마협의 졸개들이 감히 본방에 저항하려 하다니……. 이제껏 봐주었던 것은 본방 사람들의 희생을
줄이자는 이유 때문이지 너희들의 힘이 막강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광마들의 웃음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탁옥룡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삼엄한 포위망에 사로잡혔다.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키는 각기 달랐다. 그러나 눈빛은 하나
같았다.
독광(毒光)!
푸른빛이 철철 넘치는 두 눈동자는 마귀의 눈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의 콧김마저 모두 독무(毒霧)였다.
수는 백이십팔로 하나같이 강철 같은 뼈에, 도검으로 베어도 상처가 나지 않는 강한 피부를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향전은 그들 때문에 쏘아졌던 것이다.


우두머리 된 자는 피리 하나를 쥐고 있었다. 그는 혈영사절 중 세 명이 석상같이 뻣뻣하게 서 있고, 백의인
하나가 그들과 대치해 있는 것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흠……, 천만 뜻밖인데? 본궁이 혈영방을 치기 직전 혈영사절 중 셋을 사로잡은 자가 있다니 말이다."
그는 독마(毒魔)라는 자였다.
독존의 전인이고 혈작약에게는 사형이 되는 자였다. 강호계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이나, 옥룡궁 안에서의
지위는 상당히 높은 자였다.
그는 탁옥룡을 응시했다. 눈빛은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흐흐……, 네가 안고 있는 계집이 바로 본궁의 신위에 먹칠을 한 계집이라는 것을 너는 아는지 모르겠다."
"글쎄……?"
탁옥룡은 담담히 말하며 공야홍을 등에 업었다.
"흐흐……, 그 계집이 쥐고 있던 한 권의 소책자를 알고 있느냐?"
"독진밀해도라는 것 말이냐?"
"그렇다."
"내가 갖고 있다."
탁옥룡은 소매 속에서 소책자를 끄집어냈다.
그것을 본 독마는 간특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 그것은 버리는 게 좋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나의 사매인 혈작약이 만든
가짜이지."
"가짜라고?"
"그렇다. 그것은 혈작약의 뛰어난 지략의 소산(所産)이다. 혈작약은 그 고약한 계집년이 세 번에 걸쳐 배반할
것임을 이미 예측하고, 혈영방의 괴수들이 혈영방도들에게서 멀리 떨어질 계획을 꾸몄던 것이다."
"……."
탁옥룡은 잠자코 듣기로 했다.
독마는 득의양양한 기세로 떠들었다.
"흐흐……, 그 계집은 마존과 검존에 의해 추격을 받았다. 당연히 한바탕 싸움이 일어날 테고, 혈작약은
혈영사절이 그런 소동에 나타나 협공당하는 어린 계집을 도우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했다. 그녀는 마존과 검존을
보낸 직후 나를 찾아와 오백 마검대(魔劍隊)와 삼백 독검단(毒劍壇)을 부려 혈영방을 치게 했다."
그는 불길이 이는 곳을 가리켰다.
"보아라. 혈영방은 빈집같이 되어 불타고 있다. 카하하……!"
정말 간악한 일이었다.
공야홍은 생명을 걸고 독진밀해도를 훔쳤다. 그런데 그것은 치밀한 함정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혈작약은 그녀를 이용해 혈영사절을 혈영방도들에게서 떨어지게 한 다음, 심복을 부려 혈영방도들을 협공케 했던
것이다.
가히 입신의 경지에 달한 계략이었다.
"카하하……, 일심맹은 너희 덕에 풍비박산되었고, 너희들은 멋모르고 날뛰다가 쓰러지게 된 것이다."
독마가 연신 광소를 터뜨리자 탁옥룡은 소책자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참으로 훌륭한 계략이었다. 그러나 네가 쓸모 없다고 한 이 독진밀해도는 사실 귀중한 용도를 갖고 있다."
"용도라니?"
"이 책에는 정의를 사랑하는 한 여인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무적도(無敵刀)가 되었다."
독마는 그의 깊은 의도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무적도……?"
"이것을 일컬어 무적도라 한다."
탁옥룡은 냉막히 말하며 책장 한 장을 찢었다. 그는 얄팍한 종이 한 장을 찢어낸 다음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저 놈이 무슨 짓을……? 제법 무공이 강한 듯하나 종이 따위를 던져 독인을 죽이지는 못할 게다.'
독마는 눈알을 굴리다 다소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자, 일편단심으로 인한 무적도의 신위를 알려주마!"
탁옥룡은 차게 말하며 손바닥을 뒤집었다. 얄팍한 종잇장이 천천히 떠올랐다.
피― 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종이가 모습을 감췄다. 그저 흰빛이 번뜩였을 뿐이었다.
"케에엑!"
탁옥룡에게서 오 장 밖에 있던 흑의복면인의 목이 댕강 끊어졌다.
독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허억, 비지단혼(飛紙斷魂)의 절전절기?"
"이도(二刀)― 삼도(三刀)― 사도(四刀)―!"
탁옥룡은 독진밀해도를 잇달아 찢어내 사방으로 나누어 던졌다. 종이는 그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종이가 아니라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암기로 화했다.
독인들의 몸뚱이는 강철보다 단단했으나 날아드는 종이에 맞는 순간 두부같이 끊어져야 했다.
"으아― 악―!"
"크아악―!"
독인들의 몸이 육구로 변하여 나뒹굴며 진한 독혈(毒血)이 뿌려졌다. 무적을 구가하던 독단의 고수들이었지만
탁옥룡 앞에서는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사… 사신(死神)!"
독마는 너무도 놀라 나무 피리를 내던지고 높이 날아올랐다.
'도망가야 한다. 외단(外壇) 졸개들이 왜 저런 고수의 출현을 내단(內壇)에 전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사색이 되어 줄행랑을 놓았다.
"검을 빌려다오."
탁옥룡은 실명검사 앞으로 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절세신공에 아연실색하던 실명검사는 그 말에 탁옥룡이 누구인지 알고 눈을 번쩍 떴다.
"주… 주인님……?"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차― 앙―!
탁옥룡은 그의 등에서 혈섬신검을 끌어내린 다음 검자루를 교묘히 비틀어 핏빛 검신을 뽑아냈다. 검이 맑은
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검은 사라지고 대신 한 줄기 혈홍(血紅)이 만들어졌다.
번― 쩍―!
찬연한 무지개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것도 잠깐 섬광 끝에 검은 물체가 걸리더니 빛이 사라지고 대신 피보라가
일어났다.
"아― 악―!"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시뻘건 핏물이 허공에 뿌려졌다.
백장이나 멀리 도망갔던 독마의 허리가 일검양단 되어 버린 것이다.
혈섬신검은 허공에서 방향을 꺾으며 탁옥룡의 손아귀로 돌아왔다. 탁옥룡은 검을 검집 안에 거둬들인 다음
실명검사에게 돌려주었다.
"너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만 내가 너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단호했다.
"주… 주인?"
실명검사의 얼굴의 희어졌다.
"은공―!"
"주인, 어이해 이러십니까? 속하들에게까지 숨기시려 하다니, 정말 야속합니다."
마의불수와 사마천룡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탁옥룡은 피끓는 마음을 애써 감춰야 했다.
'미안하네. 그러나 나는 혈영마협이 아니라 불륜의 씨앗일 뿐이네. 자네들은 나를 잊어야만 하네. 나는 저주받은
인간이라네.'
그 역시 그들과 재회를 나누고 함께 얼싸안고 싶었지만 끝까지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너무도 다정하기에
무정함을 가장했다.
"나는 옥룡옥봉의 아들이다."
탁옥룡은 차게 말하며 마의불수가 쥐고 있는 약상자를 열었다. 그는 공야홍에게 해독약을 먹여준 후 공야홍을
들쳐업고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세 사람에게 너무도 낯익은 것이었다.
'분명 주인이시다!'
'어이해 우리들을 모르는 체하신단 말인가?'
'전과 너무도 달라지셨다. 우리들이 추악하기에 우리들을 버리는 것인가?'
세 사람의 눈에는 물기뿐이었다.
탁옥룡은 그들을 돌아보다가 손가락을 연달아 세 번 퉁겼다. 혈도가 풀리며 세 사람이 일제히 몸을 움직였다.
"주인!"
"절 받으십시오."
"주인이 저희들을 버리실지라도 저희들은 주인을 버릴 수 없습니다. 주인께 버림받은 이상 이 절을 끝으로 이
세상을 떠날까 합니다!"
실명검사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혈섬신검을 빼들었다.
그는 검을 정수리에 대고는 탁옥룡을 올려다보았다.
"저희들의 주인이 아니시라면, 제가 자결하는 것을 막지 말아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그는 크게 말한 다음 검에 힘을 가하려 했다.
"잠… 잠깐!"
탁옥룡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정… 정녕 주인이십니까?"
실명검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탁옥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나를 강요하느냐? 아……, 나를 몰라주다니. 어이해 나를 괴롭힌단 말이냐?'
그는 속으로 외치다가 죽립을 슬쩍 쳐들었다.
"아……, 역시 주인이시군요?"
"헤헤……, 마의불수의 최고 걸작이 바로 저 얼굴이도다."
"은공, 야속합니다!"
세 사람이 일제히 오체복지했다.
탁옥룡은 얼굴을 다시 죽립으로 가렸다. 그는 세 사람의 기쁨이 조금 가시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말했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말아주게."
"예?"
실명검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옥룡옥봉의 아들이라는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탁옥룡은 처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말게. 그리고 내가 살아났다는 것은 자네들 셋만이 아는 비밀로 해주게. 그리고 나를 대비객(大
悲客)이라고 부르게. 내가 혈영마협이라는 것을 밝히는 사람이 있다면 영영 나의 적이 될 것이네."
"주… 주인?"
"어이해……?"
세 사람이 얼떨떨해 하자 탁옥룡은 손을 저어 그들의 말을 막았다.
"나는 대비객이네. 그리고 잠시 동안 혈영방이란 방파의 벗이었다가 홀연히 사라져 갈 신비인이네. 나를
주인으로 부르지도 말게. 자, 어서들 불이 나는 곳으로 가보세. 만약 주인이라고 부르면 나는 그 즉시 모습을
감출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되네."
실명검사는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명… 명심하겠습니다. 주… 아니, 대비객 어르신네."
마의불수와 사마천룡도 덩달아 기뻐했다.
"대비객 어르신네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헤헤……, 살아나신 것만도 기쁜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방주님이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탁옥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방주는 누군가?"
"주… 아니, 대비객어르신네, 그 분은 혈영마협이 금룡거의 탁옥룡 공자라는 것을 아시고 눈물로 보름을 꼬박
지새우신 분이십니다."
"내가 탁옥룡임을 알고 울었다고?"
"바로 혈수나찰 이수운 낭자가 방주이십니다."
"음……!"
탁옥룡은 그 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괴로운 기색으로 물었다.
"내가 탁옥룡임을 말했단 말인가? 왜 그런 일을 했는가? 그 아이가 괴로워할 텐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 중 누구든 간에 혈미륵의 혈도를 풀어주지 않을 경우 자결하겠다고 마구
흐느껴 우셨습니다."
탁옥룡은 어쩔 수 없는 듯 고개를 휘휘 젓다가 물었다.
"참, 혈미륵은 어디에 있는가?"
"방도들과 함께 있습니다. 아직도 자고 있습니다."
"저런, 풍부혈(風府穴)과 양지혈(陽池穴)을 연달아 치면 깨어나는데."
"속하들이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
탁옥룡은 눈살을 찌푸리며 핀잔을 주었다.
"속하가 아니고 벗이네."
"명… 명심하겠습니다."
실명검사는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 분은 자결할 기세였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저는 그 분이 탁가장원의 여인임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두 분이 정혼한 사이임을 아는 저로서는 주인을 잃고, 또다시 주인의 정혼녀를 잃을 수는
없었습니다."
"……."
"그래서 묘중기인과 상의했습니다. 묘중기인은 말하는 것이 좋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께 말씀드리게
되었지요."
탁옥룡은 탄식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 그녀가 뭐라 하던가?"
"처음엔 믿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는……, 열 개의 지인(指印)을 보고 알았어야 했는데……, 하시며
혼절하셨습니다."
실명검사는 탁옥룡의 눈치를 살피고는 말을 계속했다.
"그 분은 사흘 내내 피를 토하며 신음하시다가 정신을 차리셨고, 그 직후 중인의 추대를 받아 혈영방주가
되시었습니다. 혈영마협의 부인 자격으로서죠."
"애석하게 되었네."
"애석하다니요?"
실명검사가 고개를 갸웃하자 탁옥룡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혈영마협은 정혼자와 회포도 풀지 못하고 죽었으니 애석하지 않은가?"
"그… 그게……?"
실명검사는 할 말을 잃었다. 혈영마협 스스로 자신이 혈영마협임을 부인하니 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너무도 많이 변하셨습니다. 눈빛도 그렇고 말소리도……."
"하하……, 그래서 나는 대비객이네."
탁옥룡은 크게 웃었다.
사람들은 의문이 많았으나 한 마디 말도 묻지 못했다. 물을 경우 탁옥룡이 떠날 것이 겁났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일행은 나는 듯 달려 불바다 속으로 날아들었다. 상복을 입은 사람들의 시체가 눈에 띄었다.
그 중 탁옥룡이 잘 아는 사람의 시체가 축 늘어져 있었다.
"철수개(鐵手 )―?"
탁옥룡은 폭약에 의해 하반신이 완전히 박살나 죽은 채 시체를 보고는 얼굴을 하얗게 물들였다.
第八章 운명의 사슬을 벗다
1
너른 곡구에는 개방도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혈영방은 임시로 골짜기 하나를 거처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이 수만 발의 불화살에 의해 유린당했던 것이다.
혈작약은 실로 대단한 여걸이었다. 공야홍을 하나의 미끼로 사용했다는 것은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신묘한
계략이었다.
― 공야홍은 마존과 검존에게 죽는다.
― 마존과 검존은 혈영사절에게 발각당한다.
― 혈영사절이 없는 사이 개방도를 주축으로 모인 혈영방은 불바다로 변화한다. 적어도 힘의 오할 이상이 이 일로
인해 소멸된다.
혈작약이 꾸민 계략은 모두 다 적중되었다. 공야홍이 죽지 않았다는 일만이 계획에서 어긋난 일이었다.
살이 타는 냄새와 끊임없이 터지는 화탄(火彈)이 지옥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으악!"
"이… 이렇게 분하다니!"
사방에서 들리는 단말마는 지극히 처절했고 적어도 칠백 명이 죽은 후였다.
죽은 모습은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날아드는 불화살에 맞아 타 죽은 자들, 습격한 마검대와 독검단의 고수들에 의해 사지가 끊어져 죽은 사람들이
그것이었다.
혈영방의 연전연승하던 기세가 이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꺾였다고 할 수 있었다.
차앙― 창―!
"우― 우―!"
"으하하……, 모두 쳐죽여라! 목 하나에 황금 백 냥이 걸려 있다. 우리들의 노고로 인해 중양절 대회는 아주
평화로운 연회장이 될 것이다."
마궁고수들의 목소리가 불바다 속에서 들려왔다.
혈영방은 초토로 화한 후였다. 마궁고수들은 혈영방이 거처로 잡은 골짜기를 휩쓸었고, 오백 평 정도만을
유린하지 못한 상태였다.
골짜기 안에서는 치열한 결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최후까지 항전하라―!"
"조금 있으면 사절이 온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특히 독인들을 경계하고 무기로 공격하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싸움을 격려하는 두 여인이 있었다.
한 여인은 귀여운 용모였고, 한 여인은 조금 마른 편인데, 마른 여인이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들은 다름아닌 매화선자(梅花仙子)와 혈수나찰이었다.
바로 혈영쌍미로 불리는 두 여인이 혈영방의 정예 사백여 명을 지휘하며 마궁도들의 대공세를 막는 중이었다.
싸움이 치열해질 때였다.
"으하하……, 파천반월도(破天半月刀)를 아느냐?"
한 곳에서 혈광이 일어났다.
"녹옥선(綠玉扇)도 있다!"
"헤헤……, 나는 독침(毒針)이 전문이지."
기다리던 삼절이 당도하며, 마궁도들이 후미에서부터 허수아비같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츠측― 측―!
세 명의 상복 고수들이 들이닥치며 마궁도들은 삼분되었다.
"삼절이다―!"
"와―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
"혈영방은 무너질 수 없다! 모두 힘을 다해 싸우자―!"
결투는 그로 인해 새로운 양상이 되었다.
다시 시산혈해(屍山血海)가 쌓여졌다. 수천 명이 드잡이질을 벌이며 수십 리가 불길에 휩싸였다.
막상막하(莫上莫下)!
마궁을 상대로 이렇듯 난형난제의 형국으로 유지할 수 있는 방파는 혈영방뿐이리라.
차앙― 창―!
"으아― 악!"
"크으― 윽!"
싸움이 점점 치열해졌다. 삼절의 활약이 눈부셨고 쌍미인의 무공은 군마의 간장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마궁의 기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불길을 보고 새롭게 몰려온 자들이 있었다.
자삼대(紫衫隊) 칠백.
홍삼대(紅衫隊) 사백.
싸움이 형산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혈영방에 있어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대비객은 대체 어디 가셨느냐?"
"그 분이 왜 오시지 않는가?"
신기막측한 절예로 독인을 베어넘기는 실명검사와 사마천룡의 얼굴빛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들이 일기당천(一騎當
天)이라 한다면 탁옥룡은 절대(絶對)였다.
'그 분이 나타나 장소성을 지르는 것으로 싸움이 끝날 텐데…….'
실명검사가 독인 열다섯을 상대로 하고 싸우고 있을 때였다.
"아미타불……!"
갑자기 불호성이 나며 사방에서 승려들이 나타났다.
제일 앞에선 사람은 앙상히 마른 백포 중년승려였다. 그 곁에는 백의죽립인이 서 있었다. 둘은 답허능공으로
전장으로 뛰어들며 사위를 휩쓰는 강기를 발휘해냈다.
미륵수미권과 대유마강기의 힘이 잇달아 발휘되었다.
꽈꽈― 꽝―!
벼락치는 소리가 날 때마다 강철보다 단단하다는 독인들의 몸이 두부같이 으스러졌다.
"사… 사부님? 어떻게?"
독인 셋과 싸우던 혈수나찰이 백의승려를 보고 자지러지게 놀랐다.
"허허……, 대비객 덕에 혈영마협의 점혈에서 풀려났다. 지금 깨어난 것이 천만다행이다. 잠시만 늦었어도
혈영방은 완전히 멸망했을 것이다."
웃는 백의승려는 바로 혈미륵 모찰륵이었다. 그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탁옥룡이었다. 둘은 묵계를 한 후인 듯했다.
"고맙소, 궁주."
탁옥룡이 전음으로 말하자 혈미륵은 사뭇 감회 어린 어조로 말을 받았다.
"아미타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누워 수십 일을 보내며 많은 생각을 했었네. 그 결과 중은 여인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네. 허허……, 자네 어머니 되는……, 아니 자네를 낳은 여인은 이제 내게 관심
밖이네. 단 하나 위안이 되는 것은 빈승으로 인해 천하제일협(天下第一俠)이 출현했다는 것이라네."
혈미륵과 탁옥룡은 독인들을 쓰러뜨려 가며 전음으로 말을 나누었다.
탁옥룡은 혈영삼절과 함께 골짜기 안으로 들어와 제일 먼저 모찰륵을 찾았다.
모찰륵은 그에게 있어 구명의 은인이었다. 그를 구한 사람이고, 그의 어머니 되는 여인을 구한 사람이 바로
혈미륵 모찰륵이기에 그를 구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대비객 탁옥룡과 포달랍궁 고수들의 출현으로 전세는 일거에 역전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싸움은 삼경(三更)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마궁도들 중 돌아간 자의 수는 오십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시체로 남아야 했다.
물론 혈영방도 골짜기 안에서 정예고수 천칠백을 잃어야 했다. 마궁도 이천사백이 같이 죽었으나 정말 뼈아픈
희생이었다. 특히 철수개가 죽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탁옥룡은 중인과 동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는 아직 공야홍을 업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공야홍과 그의 옷자락에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치열한 싸움판에 끼였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수운은 그가 탁옥룡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혈미륵과 담소 나누기에 바빴다.
다른 사람들은 시체 치우는 일을 시작했다. 몸이 성한 사람은 마궁의 재침에 대비해 보초를 섰고, 부상자는 누워
치료를 받으면서도 애써 신음소리를 참고 있었다.
장내는 아직도 역겨운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탁옥룡의 검미는 그로 인해 역팔자로 꺾였다.
'무림은 추악하다. 아……, 천년마제로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혈향(血香)이나 이제는 추악한 악취일 뿐이다.'
그는 굳은 듯 서 있었다.
"대… 대비객!"
등에 혈섬신검을 진 혈영방 최고고수 실명검사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탁옥룡 곁으로 다가섰다. 그의
옷은 피로 흥건히 물들어 있었다.
"방주를 뵙는 것이 어떨지요?"
"대비객으로서는 혈영방주를 만나 할 말이 없네. 혈미륵 궁주를 해혈하며 몇 가지 이야기를 했으니, 이 후 그
분께 의논하게. 그리고 대비객을 따르지 말게. 이것은 지난 시절 정을 나눴던 사람으로 하는 마지막 부탁이네,
알겠나?"
탁옥룡은 그의 귀에만 들리도록 전음으로 말하며 위로 날아올랐다.
그가 이십 장 떠올랐을 때였다.
"대비객, 정체를 숨겨 주겠다는 약속은 꼭 지킬 것이나 나의 제자이며 양딸 되는 아이를 버려두고 가게 할 수는
없을 것 같네. 수운이의 마음이 이 정도일 줄이야. 아……, 자네가 탁가장의 탁옥룡임을 왜 말하지 않았나?"
혈미륵이 이수운과 말을 나누다가 급히 고개를 돌리고 전음으로 말했다.
탁옥룡은 대답도 하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 갔다.
이수운 영롱한 눈망울을 깜빡이며 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사부, 저 분이 대비객이신가요?"
"그렇다. 그는 모든 것을 해결한 유일한 기재다. 그에게는 사실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는 잘 해낼
것이다."
혈미륵은 합장하며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사부께 저런 친구가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허허……, 나의 친구가 아니라 천하무림의 친구다. 그는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사람인지라 이해심이 많단다.
어려운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그에게 부탁해라."
혈미륵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이수운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혈영삼절, 그리고 백사십리평에서 혈영마협에게
점혈당했다가 대비객에 의해 되살아난 칠십이 명의 포달랍궁 고수들뿐이었다.
혈미륵은 탁옥룡이 간 곳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다 해낼 것일세. 사실 자네가 해내지 못한다면 나는 자네를 구한 사람으로 세상에 있을 면목이 없을
걸세.'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서려 있었다. 탁옥룡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인물이기에 그러리라.
2
형산은 밤에도 아름답다.
보이는 것은 없으나 어슴푸레한 그림자만으로도 아름답다. 그러기에 오악(五嶽) 중 남악(南嶽)이라 불릴 수
있었으리.
계수(溪水)가 흐르는 바위 위로 두 사람이 보인다.
"으음……!"
여인의 숨소리가 들렸다. 검은 옷을 걸친 미녀가 숨을 토해내며 유난히 긴 속눈썹을 쳐들었다.
"아… 아니?"
그녀는 눈앞에 백의인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누… 누구냐?"
"하하……, 나는 공야낭자와 적이 아니오. 낭자를 구하기 위해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만 알아주시오."
"나… 나를 구했다고?"
흑의미녀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얼굴을 활짝 폈다.
"아……, 그렇군요. 소녀는 검존이 던진 독모래에 당했었지요. 한데 어떻게 소녀를 구하셨습니까? 혈작약이
만든 해독약이 없이는 저를 구할 수 없었을 텐데요?"
"낭자는 해약이 어떤 것인지 알 것이오."
"알기는 합니다. 오풍초와 비천오공담이지요. 아주 구하기 힘든 약초입니다."
백의인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역시 천산신의의 여제자답소."
"소녀를…… 아시옵니까?"
흑의미녀는 물론 옥룡천자의 수양딸 공야홍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상대에 대해 바싹
경각심을 높였다.
"아니오. 나 대비객은 낭자에 대해 하나도 모르오."
고개를 젓는 백의인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낭자는 환영궁 소궁주인데 지금은 마궁 소궁주가 되었소. 게다가 양아버지 되는 사람의 부인에게 반도로 낙인
찍혀 제거될 뻔했소."
"그… 그것을……?"
탁옥룡은 그녀와 약간 간격을 두고 앉았다.
"그뿐이 아니오. 낭자 덕에 혈영방이 치명타를 입었소."
"치명타요?"
"그렇소."
탁옥룡은 그녀가 정신을 잃은 후 일어난 일을 간략히 이야기했다.
공야홍은 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그랬구나! 그 추악한 마녀가 독진밀해도를 보이는 장소에 놓아두어 이상하다 여겼더니, 나를 이용해
혈영방 사절을 끌어낼 작정이었었다. 그것도 모르고 이용당하다니……."
공야홍은 분을 못 이기고 자신의 손으로 천령개를 치려 했다. 탁옥룡은 얼른 손을 내밀어 그녀의 완맥을
거머쥐었다.
"놓… 놓으십시오."
공야홍은 눈물을 뿌리며 어깨를 들먹였다.
"낭자를 원망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소. 사실, 한 번 일어나야 할 싸움이었소. 낭자 잘못만은 아니오."
"흐흑……, 제가 원망스럽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이 원망스럽습니다."
"공야무군은…… 낭자의 친아버지가 아니고 양부모요. 그리고 그는 환영궁을 멸망시킨 장본인인데, 어이해 그의
양녀가 되었소?"
탁옥룡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문제가 다소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 분은 양아버지가 아니십니다. 흐흑……!"
공야홍이 눈을 꾹 감았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양아버지가 아니라니? 그럼…… 친아버지란 말이오?"
탁옥룡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차… 차마……, 흐흑!"
공야홍은 흐느끼며 고개를
그녀로서는 도저히 밝힐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녀는 극도로 상심하여 절규하였다.
"어… 어머니, 왜 저를 낳으셨습니까?"
그녀는 울컥 피를 토하며 뒤로 넘어졌다.
"낭자……!"
탁옥룡은 그녀가 피를 쏟으며 쓰러지자 얼른 다가가 그녀의 맥을 잡았다. 맥이 아주 가늘게 뛰고 있었다.
"음, 심맥(心脈)이 틀어졌다. 추궁과혈해야 한다."
탁옥룡은 얼른 그녀 곁에 정좌하고 앉았다.
'마음 약한 여인이다. 그리고 큰 비밀을 알고 있는 여인이다.'
탁옥룡은 속으로 말하며 그녀의 요혈에 주물렀다.
봉긋한 젖가슴과 매끈한 아랫배, 미끄러운 넓적다리와 회음부(會陰部)까지도 그의 손에 닿았다. 그러나 탁옥룡은
색욕을 느낄 수 없었다.
상심 끝에 혼절한 여인을 두고 딴마음을 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의 추궁과혈이 막바지에 이를 때였다.
"사매, 내가 그 놈을 쳐죽이겠네. 사… 사매를 이 지경으로 만든 놈이니까!"
어디선가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발여인 하나를 등에 업은 상복차림의 복면인이 눈물을 떨구며 산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은 분명 묘중기인이었다.
그는 봉두난발의 괴녀를 등에 업고 흐느꼈다.
"나… 나는 사매를 사랑했어. 그래서 죽지 않았던 것이야. 사매를 해한 자의 복수를 하기 위해 비굴하나마
목숨을 연명했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이십 년을 뜬눈으로 지새웠다고."
그의 두 다리는 철족이었지만 달리는 속도는 아주 빨랐다.
"놈은 야비한 놈이야. 그리고 겁쟁이지. 나… 나는 그 놈을 죽이고 놈을 조종하는 노독마(老毒魔)를 쳐죽일
것이네. 사매, 그때까지만 살아 있게."
그는 광기에 젖어 미친 듯 달렸다.
탁옥룡은 추궁과혈을 마치고는 공야홍을 등에 업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묘중기인의 사매가 대체 누구일까? 그는 왜 활시교 수법이 아닌 불문경공법을 사용할까?'
탁옥룡은 여러 가지 의문점을 느끼며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공야홍은 그의 등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몸은 아주 부드러웠다. 그리고 몸에서 풍기는 향취는
갓난아이의 몸에서 나는 젖냄새와 조금 비슷했다.
묘중기인은 혼신공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탁옥룡은 단 사성 공력만으로도 그를 따를 수 있었다.
묘중기인은 형산의 지리에 익숙한 듯 주저하지 않고 길을 택했다. 갈수록 산이 깊어졌다.
"놈은 아마 옥룡전(玉龍殿)에 있을 거야. 놈이 모르는 비밀통로가 하나 있지."
묘중기인은 중얼거리며 치달렸다.
"훗훗……, 놈은 내가 모든 비밀을 말해주었다고 여기나, 사실은 암도에 대한 것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네.
놈은 옥룡궁도들의 목숨을 미끼로 내게서 모든 비밀을 뺏어 갔지. 나는 독에 당했기에 하는 수 없이 굴복하고
말았어. 흐흐……, 놈은 정말 교활한 짐승이지."
그는 미친 사람 같아 보였다.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거칠기 짝이 없어 다른 사람은 그 말뜻을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그 놈을 죽여야 하네. 우리 두 사람의 손으로!"
묘중기인의 머리카락은 칼날같이 빳빳했다.
복면을 집어던진 그의 얼굴은 아주 추악했다. 그러나 시독(屍毒)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꽤나 청수한 얼굴이었다.
나이도 생각보다 훨씬 젊었다.
사십대 중반 정도였다. 그는 세상에 칠십이 넘은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사실은 그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 어서 가세, 다른 사람이 그의 목을 취하기 전에."
그의 경공 속도는 탁옥룡이 생각하는 그의 무공에 비해 두 배는 빨랐다. 그 동안 무공을 모두 다 발휘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탁옥룡은 그제서야 묘중기인의 진면목을 본 기분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밀로 덮여 있었다. 활시교의 사공 비급을 얻었다는 것 이외에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었다.
묘중기인은 매복이 없는 곳을 골라 치달렸다. 네 사람은 그러는 가운데 옥룡궁의 영토 안으로 들어섰다.
옥룡궁은 불야성이었다.
축융봉(祝融峰) 위에 서 있는 옥룡궁은 건물 수백 개로 이루어진 대성(大城)으로 천하에서 가장 어마어마한
건축물이었다.
거대한 궁전은 지금 벌집 쑤신 듯 시끄러운 상태였다. 대암습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매복의
수가 전에 비해 곱절로 늘어났다.
나는 새라도 옥룡궁 근처를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묘중기인이 가는 길에는 매복이 없었다.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보다도 지리에 더 밝은 듯 보이는
묘중기인의 정체는 의문스럽기만 했다.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백검명(白劍明)! 네놈을 죽여 네놈의 간을 씹겠다."
그는 한 사람의 이름을 외웠다.
그것은 탁옥룡이 언젠가 한 번은 들은 이름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들어 지금은 잘 생각나지 않는 이름이기도
했다.
'옥룡궁 안으로 잠입하려는 것일까? 한데 묘중기인이 이 근처의 지리에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은가?'
탁옥룡은 묘중기인에게서 이십 장 뒤쳐져 추적을 계속했다. 묘중기인은 누가 따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얼마를 달렸을까?
"이곳이다, 사매! 사매도 잘 아는 곳이지. 우리 사형제가 이 안에서 비무를 하곤 했었지. 사실 나는 사매보다
강했으나 차마 사매를 이길 수 없었다."
묘중기인은 암곡 안으로 들어가 한 곳에서 우뚝 섰다.
바위에 큰 틈이 나 있었다. 짐승굴로 보이는 동굴이 빠꼼 모습을 드러냈다.
"흐흐……, 이곳으로 가면 대라신선이라 해도 우리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묘중기인은 더러운 차림을 한 산발여인에게 다정히 말하고는 바위 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아주 경미한 파공성이 나며 어둠 속에서 빛이 번쩍였다.
"호호……, 암도는 막힌 지 이십 년째다, 이 바보야!"
숲 속에서 금의여인 하나가 뛰어나왔다. 가슴에 혈작약화(血芍藥花)를 꽂고 있는 몽면여인이었다.
"터뜨려라!"
그녀가 차게 외치자 호응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존명!"
순간, 묘중기인이 들어간 동굴 틈 주변으로 불기둥이 솟구쳤다.
퍼― 퍼펑―!
거대한 바위들이 와르르 떨어지며 그 틈을 대번에 틀어막았다.
'이럴 수가! 혈작약이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인가?'
뒤따르던 탁옥룡은 혼비백산 걸음을 멈췄다. 묘중기인은 그가 도울 짬도 없이 암습을 당해 매장된 것이다.
탁옥룡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흘렀다.
"호호……!"
금의여인 혈작약이 까르르 웃는 가운데 이곳저곳에서 네 명의 복면인이 날아왔다.
"대부인!"
"독비수를 잡은 이상 혈영방은 한풀 꺾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작약사위(芍藥四衛)라는 비밀호법들이었다.
"혈영방에는 대비객이라는 괴고수가 있다. 그뿐이 아니다."
혈작약이 웃음을 거뒀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차갑고 사악했다.
"모찰륵이 깨어나 혈영방을 돕는다는 전갈도 있다. 혈영방은 암습으로 인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더 강해졌다."
그녀는 혈영방에 대해 아주 상세히 알고 있었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사위는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본궁과 어깨를 겨룰 만하다. 본궁은 그들이 쳐들어오기 이전 일심맹주를 처치해야 한다. 일심맹주는
어리석게도 단신으로 궁주와 비무를 청했다. 호호……, 놈은 오늘 밤 안으로 잡힐 것이다. 놈을 잡은 직후
전렬을 정비해 혈영방을 다시 치도록 하자!"
작약사위는 대답이 없었다.
"뭘 하는 게냐?"
혈작약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작약사위는 죽은 듯 말을 하지 않았다.
"어엇? 모… 모두 다 죽었단 말이냐?"
혈작약의 옷이 풍선같이 부풀어올랐다. 그녀의 간교한 눈망울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렇다, 그들은 죽었다."
어디선가 차가운 목소리가 났다.
혈작약을 향해 걷는 백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백의인이 여인 한 명을 등에 업고 허공을
밟으며 다가서고 있었다.
"작약사위가 죽었다고? 믿… 믿지 못한다."
혈작약은 사색이 되어 다시 수하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미간(眉間)에는 콩알보다 조금 작은 홍점(紅點) 하나가 박혀 있었다. 그것은 피가 맺혀 만들어진
점이었다. 그들의 뇌가 으스러지며 만들어진 죽음의 흔적이기도 했다.
"어… 어떤 놈이냐?"
혈작약의 눈알이 새하얗게 뒤집어졌다.
"으으……, 이제 보니 네가 업고 있는 계집은 바로 백옥지라는 년이 아니냐?"
"그렇다, 나는 대비객이다."
탁옥룡은 그제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는 혈작약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작약사위를 죽여 버릴 정도였다.
혈영마협 시절에 비해 두 배 강한 무공수준이 된 것이다.
"대… 대비객? 그럼 혈영방이냐?"
혈작약은 잔혹한 눈빛을 발하며 손을 품에 넣었다.
"아니다."
"그럼?"
"나는 옥룡궁 사람의 자식이다."
혈작약은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뭐… 뭐라고?"
"나는 옥룡궁 사람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대비객이다. 출생이 슬픈 것이기에 대비객이라 하는 것이다."
탁옥룡의 말이 거기에 이르자 혈작약이 품에서 손을 뺐다.
"미친 놈! 죽어라―!"
그녀의 손에서 핏빛 모래가 사방으로 퍼졌다.
모래 한 알은 황소 열 마리를 죽일 수 있는 독을 품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추혼적살독(追魂赤煞毒)
이라 그것이었다.
쏴아아아―!
모래바람이 일어나며 파도치는 소리가 났다.
'누구도 추혼적살독 아래 살아남을 수 없다!'
혈작약은 탁옥룡이 비명소리를 지르며 쓰러지기를 기다렸다.
"독존의 독공은 독왕의 독공만 못하군?"
탁옥룡은 담담히 말하며 소매를 흔들었다.
담담한 백무가 일어나더니 그토록 살벌하던 독모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독… 독왕의 후예냐?"
혈작약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으음……, 네가 누구이기에 이리도 강한지 모르겠다. 하… 하여간 본궁 사람이라니 반갑다."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며 도망칠 길을 찾으면서도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하지만 그토록 넓은 천지가 그를 대하자
겨자씨보다 작게 보였다.
'도망칠 길은 없다. 놈은 태산만 하다.'
그녀의 옷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일심검제가 궁주와 싸우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찌된 일이냐?"
탁옥룡은 싸움에 임한 사람 같지 않았다.
"그… 그는 소협(簫俠)과 함께 비무를 청했다. 지금 옥룡전에서 비무하는 중이다. 그러나 패해 죽을 것이다.
궁주는 전에 비해 다섯 배 강한 내공을 갖고 있다. 일심검제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
"다섯 배?"
혈작약은 연신 좌우로 눈망울을 굴렸다.
"그… 그렇다. 그것은 독약(毒藥)에 의한 힘이다. 그 힘은 앞으로 닷새간 계속된다."
"지독하군."
"그는 닷새 동안 평생에 쓸 힘을 모두 쏟아낼 것이다. 닷새 후면 폐인이 된다. 그러나 그때에는 적이 없을
것이니……, 옥룡궁주라는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탁옥룡은 침음성이 섞인 어조로 물었다.
"천폭화독(天爆火毒)을 먹였느냐?"
"그… 그것까지 알고 있군."
"그 스스로 독약을 먹었느냐?"
혈작약은 체념을 한 듯 모든 사실을 술술 털어놓았다.
"아니다."
"그럼?"
"그는 딸을 구하기 위해 천폭화독을 먹어야 했다."
"공야홍 말이냐?"
탁옥룡은 손바닥에 땀을 쥐었다.
"그렇다. 그는 어리석게도 과거를 버리지 못했다. 그는 천산신의와 공야홍을 나와 사부보다 귀중히 생각하고
있다. 우리 사도(師徒)는 결국 그를 포기했다."
"포기라니?"
혈작약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허수아비일 뿐이다. 사실, 그에게 모든 것을 준 사람은 나와 나의 사부다. 그러니 다시 빼앗는다 해도
유감은 없을 것이다."
허수아비라는 말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음……, 마궁의 실권은 혈작약에게 있는 듯하다는 회회공자의 말대로군.'
탁옥룡은 뒤짐을 쥐며 옆으로 섰다.
"독존이…… 공야무군보다 지고한 위치라는데 사실이냐?"
그로서는 아버지라 생각되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무척 힘든 일이었다.
"공야무군? 호호……, 그는 이미 죽었다."
혈작약의 말이 큰 놀라움을 주었다.
탁옥룡은 일순 등골이 오싹해졌다.
시선이 절로 그녀에게 향해졌다.
"죽… 죽다니?"
혈작약은 간특한 눈빛을 발하며 협상을 청했다.
"어떠냐, 그 비밀을 말해준다면 퇴로(退路)를 열어주겠느냐?"
"비밀이라고?"
"나만이 말해줄 수 있는 비밀이다."
혈작약은 자신만만한 표정이 되었다. 악계와 독계에 능한 여인답게 자신을 살리는 방법에도 능했다.
탁옥룡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진짜 큰 비밀이라면 네 목보다는 가치가 있겠지. 어서 말해봐라."
"호호……, 역시 판단이 빠른 자군."
혈작약은 득의해 하며 다소 여유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탁옥룡은 숨을 멈추고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기로 했다.
마침내 당금 무림 최대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현재의 옥룡궁주는 공야무군이 아니다. 벌써 이십 년 전부터 그러했다.
첫 마디부터가 큰 충격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냐?"
"호호……, 지금의 옥룡천자(玉龍天子)는 철서생(鐵書生)이 아니라는 말이다."
"뭐… 뭐라고?"
혈작약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눈가에 웃음마저 띠었다.
"철서생은 이십 년 전 혈도(血刀)를 바치고 사라졌다. 지금의 옥룡천자는 철서생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다."
"미친 소리!"
탁옥룡이 언성을 높이자 혈작약은 흠칫 숨을 죽였다.
"거… 거짓이 아니다. 나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탁옥룡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무형의 힘에 굴복되어 말을 더듬거렸다.
"다 들으면 의문이 풀릴 것이다. 나는 나의 목숨을 사랑하고 있다. 거짓말을 하다가 죽을 어리석은 계집이
아니다."
탁옥룡은 애써 격동을 가라앉혔다.
"알겠다. 어서 말해봐라."
"휴우……."
혈작약은 한숨을 쉰 다음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했다.
"수십 년 전부터 시작하자. 옥룡대제(玉龍大帝)가 독존(毒尊)사부를 해한 것이 발단이었다."
탁옥룡은 긴장된 가운데 듣기만 했다.
"옥룡대제는 독존 사부와 싸운 내상 때문에 일찍 죽었다. 그러나 사부는 두 다리를 잃어야 했다. 그리고 엄청난
치욕을 겪어야 했다. 사부는 복수를 맹세했다. 사부는 옥룡궁을 완전히 휩쓸 작정을 했다.
"으음……, 계속해라."
"하지만 옥룡궁에는 수천 명의 고수가 있다. 그들을 처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일한 길은 설혈쌍도
(雪血雙刀)를 얻는 길이었다."
"그렇지, 그것은 궁주 신물이니까."
"우리 사도는 지혜를 모으다가 한 명의 어리석은 자를 거느리는 것으로 거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혈작약의 눈빛이 반들거렸다.
이십 년간 천하인을 속이는 대음모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일을 말한다는 것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는 모습이었다.
"그는 역용술(易容術)의 조예를 갖고 있는 자였다. 우리 사도는 그를 종으로 부릴 작정을 하고 계획을 꾸몄다.
그에게는 사매가 있었다. 그의 사매는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자의 딸이었고, 아주 아름다워 내가 시기하던 두
계집 중 하나였다."
탁옥룡은 침묵 속에 잠긴 채 혈작약이 펼친 대음모를 하나하나 머리에 새겨두었다.
"나는 그의 거처로 가 기회를 살피다가 약을 썼다. 최음약(崔淫藥)을 썼던 것이다. 그 자는 동물이 되어
날뛰다가 차를 끓여오던 사매을 덮쳤다. 옷이 찢어졌고 괴성이 요란했다. 구경하는 것만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혈작약은 기나긴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하는 듯 편안한 바위를 정해 걸터앉았다.
"얼마 후, 그의 사매는 반 미쳤고 그는 그제서야 냉정을 찾고 기절초풍 놀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그는 영문을 모르는 늙은 사부에게 잡혔다. 뭇매를 맞고 제명을 당하는 일이 바로 뒤따랐다. 그는 분하다고
외치며 떠돌아다녔다. 나는 그를 뒤쫓으며 그가 쓰러지기를 기다렸다가 나타나 구해주었다."
"치졸하기 짝이 없는 계략이군."
혈작약은 탁옥룡의 비난을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그는 나를 은인으로 섬겼다. 나는 그에게 미심고(迷心蠱)를 먹여 충복으로 삼았다. 나는 그의 사문에 대한
복수심을 부축였다. 그는 나의 말에 넘어가 사문을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차도살인극(借刀殺人劇)을 일러주었다."
"누구의 칼을 빌었느냐?"
"철서생의 칼이다."
혈작약의 비밀은 점입가경으로 접어들었다.
"나는 그 어리석은 자를 철서생으로 역용케 해 그의 사문 사람 몇을 죽이기로 했다. 그의 사부는 자신의 제명당한
제자가 살인한 지도 모르고 철서생의 소행이라 여겼다. 때마침 철서생이 그곳을 지나가자 달려나가 싸움을
걸었다."
그녀는 아득한 옛날 일이었지만 생각만 해도 즐거운 듯 잠시 웃음을 터뜨리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철서생은 얼떨떨해 하며 그를 맞았다. 싸움은 치열했다. 나는 싸움을 구경하다가 늙은이의 거처로 가서 독을
썼다. 모두 죽었고, 이 일 또한 철서생이 한 일로 오해받게 만들었다. 내가 독을 써 사람을 죽일 때, 그
어리석은 자의 사부는 철서생에게 몇 초 양보 받고는 의아해 하며 장원으로 돌아왔다. 나는 숨어 기다리다가 그
늙은이마저 죽였다."
탁옥룡은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으음……, 혹시 환영궁(幻影宮)에서의 일이 아니냐?"
"호호……, 놀랍군. 바로 맞췄다."
"그럼, 지금의 옥룡천자는 바로 환영신군의 제자란 말이냐?"
"그렇다. 그 자는 바로 환영서생(幻影書生) 백검명(白劍明)이다."
탁옥룡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의 아버지가 그 사람일까? 그리고…… 백옥지는 나의 동생일까?'
그가 초조한 표정으로 품에 안고 있는 공야홍을 내려다보았다.
"그 일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혈작약이 회심의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사도는 환영서생을 종으로 부리며 서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철서생의 이름을 빌어 살인극을 벌여
혈미륵이란 미련한 중놈을 분노케 하기 위함이었다."
"그 일까지 네 계획이었단 말이냐?"
탁옥룡은 치를 떨고 말았다.
"그렇다. 혈미륵은 철서생이 포달랍궁 사람을 죽였다 믿고 마침 그곳으로 오던 철서생을 찾아가 비무를 청했다.
철서생은 환영궁에 이어 다시 오해를 받자 낭패해 하며 맞서 싸웠다. 결국 둘 다 크게 다쳤다. 혈미륵도 크게
다쳤고, 철서생은 얼굴이 부서지기까지 했다."
"환영궁에서 부서졌다는 소문이 났었는데 아니었더냐?"
"아니다. 그것은 내가 지어낸 헛소문이다. 호호……, 그것이 너무나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혈작약은 약간의 한기를 느낀 듯 두 팔로 가슴을 안고는 평석 위를 왔다갔다 거닐었다.
"강호인들은 철서생의 얼굴이 부서져 악인이 되었다고 믿게 되었고, 혈미륵이 진짜로 그의 얼굴을 박살냈던
것이다. 어쨌든 철서생은 내상을 입고 가다가 나한데 붙잡혔다."
"으음……!"
"나는 당시 천하제일 고수인 그 자를 간단히 잡고, 그 자에게서 옥룡궁의 보물인 혈도(血刀)를 빼앗았다. 한데
그 자는 두 다리와 팔이 끊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옥룡궁의 무공구결을 말하지 않았다."
탁옥룡은 머리가 쭈뼛 섰다. 뇌전이 뒤통수를 강타하는 기분이었다.
"두… 두 다리와 한 팔?"
"호호……, 놈은 과연 철서생이었다. 하지만 약한 구석이 있었다. 옥봉의 이름을 들먹이자 금방 기세가
누그러졌던 것이다. 그는 결국 구결을 실토했다."
실로 경천동지할 비밀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 자는 무공을 잃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부탁했다. 옥궁 사람은 하나도 다치지 말라는 그의 부탁이었다.
그러면 자신도 영원히 함구하겠다고 했다."
"그… 그래서?"
"쾌히 승낙했지. 그리고 약속을 지켰다. 과거의 옥룡궁 무리는 모두 뇌옥에 갇혀 있으나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옥… 옥봉은 어찌 되었느냐?"
"옥봉은……."
혈작약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그녀는 눈알을 반들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옥봉은 환영서생 때문에 쓰러졌다."
"환… 환영서생?"
"흥, 놈은 여색에 미쳤다. 놈은 내가 놈의 부인인데도 옥봉을 보자 마각(馬脚)을 드러냈다. 옥봉을 만나
철서생인 체하고 잡으라 했건만, 놈은 최음약을 써서 옥봉을 겁탈하려 했던 것이다."
"으으……!"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다.
탁옥룡은 분노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품에 안고 있던 공야홍을 떨어뜨렸다. 만일 그의 추측이 맞다면 그녀는
자신과 이복남매가 되는 셈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무서운 일이었다.
"호호……, 그 애는 환영서생이 사매인 환영선자(幻影仙子) 유청청(柳靑靑)을 겁탈하여 뱃속에 남긴
씨앗이다."
"유청청의 딸이라고?"
"그렇다. 그 애는 천산신의에게 구출 받은 유청청이 낳았다. 환영서생은 육 년 전 구정산(九頂山)에서
천산신의를 만나 자신에게 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놈은 그때부터 우리들을 미워했다. 그 계집이
아니었다면 옥룡궁은 한결 더 강해졌을 것이다."
탁옥룡은 당장이라도 혈작약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약속은 지켜야 했다. 그리고 아직
결정적으로 확인해야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어서…… 말해 보아라."
"그 계집은 눈의 가시다. 하지만 환영서생은 이용가치가 있기에 그 계집이 미워도 여태껏 살려놨던 것이다."
"천산신의는?"
"그 영감은 뇌옥에 있다. 혈영마협을 죽인다면 영감과 그 계집, 그리고 환영서생을 풀어준다는 것이 내가
환영궁의 바보들에게 제시한 조건이었다."
탁옥룡은 그제서야 한 가지 의문을 해소하게 되었다.
"으음……, 그랬군."
"호호……, 하지만 혈영마협은 일심검제에게 죽었지. 호호……, 일이란 그렇게 우연스레 벌어지기 마련인
법이다."
천하의 나쁜 꾀는 죄다 갖고 있는 혈작약이었지만 그녀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발설한 엄청난 비밀은 남에게는 흥밋거리 정도일 수 있겠지만, 탁옥룡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출생을 밝힐
수 있는 중대한 단서였던 것이다.
탁옥룡은 공야홍, 아니 백옥지를 다시 품에 안았다.
'이 아이가 과연 나의 동생일까?'
그녀를 안고 있는 그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도 애써 감정을 자제했다.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 혈작약에게
틈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혈작약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말을 이었다.
"환영서생은 옥봉에게서 설도(雪刀)를 취하는 데 성공했다."
"옥봉은 어찌 되었느냐?"
"그 바보는…… 무림일미인 옥봉을 취하지 못했다."
"취하지 못했다니?"
"그 바보는…… 마침 그곳을 지나던 자에게 무림일미 옥봉의 몸뚱이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탁옥룡으로서는 전혀 상상치도 못한 존재가 출현했다. 그것은 자신의 비극적 출생을 벗길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이기도 했다.
"뭣이……? 그게 누구냐?"
"중이라고 했다."
"중이라고?"
탁옥룡은 머리를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한 사람의 얼굴이 크게 떠올랐다.
혈미륵 모찰륵!
석심부인을 이십 년 간 보살핀 사람이다. 하지만 석심부인의 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소문난 그의 얼굴이
뇌리에 가득 찼다.
'혈미륵……, 그가 나의 아버지일까?'
탁옥룡은 입술이 말라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환영서생이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태산 같은 짐을 반 이상을 덜은 듯했다.
그는 폭포수처럼 치솟던 격동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이 되었다.
'아……, 옥봉의 아들도 아니고 환영서생의 아들도 아닌 것을 모르고 너무도 괴로워했구나! 이것이야말로 참고
기다리다 보면 웃을 날이 있다는 말 그대로가 아닌가?'
그는 공연히 옥룡천자의 아들인 줄 오해했던 것이 우습기만 했다.
"하하하하……!"
그는 크게 웃다가 혈작약을 쏘아보았다.
혈작약은 몸을 움츠리며 그의 태도를 살폈다.
"모든 것을 말했다. 너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
탁옥룡은 쾌히 승낙했다. 저지른 죄악을 생각하면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겠지만, 그의 고뇌를 씻어준 것을
감안하며 한 번쯤 살려 주어야 옳았다.
"오냐, 떠나도 좋다."
"고… 고맙다."
"그러나 곧 나를 다시 만날 줄 알거라!"
"호호……, 그것은 걱정 없다."
혈작약은 살았다 싶자 득의해 웃으며 위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폭풍을 타고 오르는 금빛 꽃송이같이 날렵히 움직여 아주 멀리 사라져 갔다.
"아……, 너무도 홀가분하다. 운명의 사슬을 반은 벗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검게 탄 바위 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폭약의 함정 안으로 들어간 묘중기인과 산발여인의 존재가 생각났다.
"이런…… 내가 혈작약의 비밀을 듣는 데에만 너무 정신이 팔렸구나!"
두 사람의 시체라도 잘 묻어야 사람의 도리였다.
"묘노인, 미안하오. 내가 너무 늦었소."
그는 그들의 죽음을 모두 자신의 죄라 여기며 무너진 바위굴 앞으로 다가갔다.
"아… 아니?"
그의 눈에서 광망이 일어났다.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가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검게 그을린 바위 무덤 속에서 기어나오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第九章 옥룡(玉龍)과 옥봉(玉鳳)


1
사지(死地)로부터의 귀환이었다.
돌조각을 손으로 헤치며 굴 밖으로 기어나오는 사람은 유난히 흰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죽… 죽어서는 안 돼!"
그는 중얼거리며 힘겹게 바위를 밀쳤다.
"놈… 놈을 죽인 다음에야 죽을 수 있다. 사매, 그렇지 않은가?"
그는 품에 옷차림이 더러운 여인 하나를 안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화탄의 화기에 절반이나 불에 그을린 상태였다. 하지만 몸뚱이는 그을리지 않았다. 원래 두 다리에
한 팔이 없는 사람이기에 불에 탈 것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불을 퇴치하는 보물을 지니고 있었다.
"으윽……, 죽을 수 없다."
노인은 바로 묘중기인이었다.
"아……, 천잠보의(天蠶寶衣)가 이 사람을 살렸다!"
탁옥룡은 그제서야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묘중기인이 걸친 상복은 숯이 된 후였다. 그 밑으로 홍삼이 나타났다. 그것은 탁옥룡이 그에게 하사한 마왕동주의
보의(寶衣)였다.
불과 물, 그리고 독기운을 몰아내는 천하의 보의 덕분에 묘중기인은 불바다 속에서 살 수 있었고, 신비여인 역시
그의 품에 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돌조각을 헤치며 기어나왔다.
탁옥룡은 그냥 서 있었다. 돕고 싶지 않아 돕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도우면 이 처절한 삶의 의지는 빛을 잃는다.'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주먹을 거머쥐고 소리쳤다.
"조금만 더 힘을 내시오, 조그만 더!"
돌가루가 뿌려졌다. 묘중기인의 쇠다리는 산산이 박살난 후였다. 그는 겨우 몸뚱이를 돌 속에서 끌어내며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탁옥룡은 반가워 말하려다가 그의 두 눈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의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눈 대신 두 개의
구멍이 있었다.
"으으……, 네놈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 절대로… 절대로 나의 투혼을 꺾어버리지 못한다. 으하하……!"
묘중기인은 광소를 터뜨리다가 뻥 뚫린 눈구멍으로 탁옥룡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살기가
흘러 탁옥룡의 간장을 서늘케 했다.
묘중기인은 시력 대신 육감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것은 시력보다 더 뛰어났다.
그는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왜…… 그냥 두었지?"
"많이 다쳤소?"
탁옥룡은 변성으로 말하며 다가섰다.
"흐흐……, 그러나 앞으로 두 시진은 버틴다. 그 정도 시간이면 옥룡궁의 도배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다. 우선
너부터 죽이리라!"
묘중기인의 손이 쳐들려졌다.
"남을 죽이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오. 제일 급한 것은 일신의 상세를 치료하는 것이오."
"흐흐……, 저승에 가서 지껄여라!"
묘중기인은 이를 으드득 갈며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먹물 같은 시독강기(屍毒 氣)가 일어났다. 그것은 천시대묘 안에서 보다 몇 배 고강했다.
꽈르르르― 릉―!
벼락치는 소리가 뒤따랐다.
"이… 이상하군? 왜 피하지 않았을까?"
묘중기인은 손바닥을 쳐든 채 고개를 갸우뚱했다.
시독강기에 적중되는 폭음은 없었지만 살아남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대로 핏물이 되었다고만
여겼다.
한데, 청아한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하하……, 나는 죽지 않았소."
청아한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으으……, 죽지 않았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 너는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는데…… 분명 피하지는 않았는데?"
"물론 피하지 않았소."
묘중기인은 자신의 아는 무학적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호신강기로 나의 장력을 물리쳤단 말이냐? 그… 그렇다면 왜 반탄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단 말이냐?"
"나의 내공이 특수하기 때문이오."
"뭣이? 어떤 것이 너의 내공이냐?"
탁옥룡은 담담하게 응대했다.
"나의 내공력은 부드럽소. 그러기에 상대방이 장력으로 나를 친다 해도 나의 호신강기는 반탄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이오."
"믿을 수 없다. 네… 네가 누구기에 그리도 강하단 말이냐?"
묘중기인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나는 귀하를 오래 살게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오."
"뭐… 뭐라고?"
"하하……, 아직도 모르겠소?"
탁옥룡은 웃으며 다가갔다. 그는 백옥지를 한쪽에 내려놓고 그 앞에 앉았다.
"오오……, 이제 보았더니?"
묘중기인의 머리카락이 칼날같이 빳빳해졌다.
"주… 주인! 바로 주인이시구료?"
그는 그제서야 탁옥룡의 존재를 확신하고는 감동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오, 나는 대비객이오."
탁옥룡은 낭랑히 웃고는 그의 천령개에 손바닥을 댔다.
"아……, 살아 계시리라 믿었습니다."
묘중기인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탁옥룡의 손바닥에서 막강한 진기가 뿜어졌다. 무한에 가까운 진기가 묘중기인의 백회혈(百會穴)로 스며들며
그의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으음……!"
묘중기인은 사지백해에 열류가 가득함을 느끼며 탁옥룡을 올려다보았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의
눈으로 살피는 것이었다.
"전에 비할 수 없이 고강하외다."
"하하……, 나는 대비객이라는 사람이라니까."
"허허……, 과연 주인답소. 전에는 천년마제로 놀라게 하시더니, 이제는 탕마지존(蕩魔至尊)이 되었구료?"
탁옥룡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탕마지존을 아는가?"
"잘 아오. 탕마지존의 전설은 천년마제의 전설과 더불어 이어지고 있소. 전설에는 천년마제가 나타나면
탕마지존도 따라 나타난다고 했소."
천년마제는 살(殺), 한(恨), 피(血)로,
탕마지존은 대비(大悲) 도움으로,
아……, 천 년 빙하곡(氷河谷)의 마중지존은 언제 눈을 감는가?
탕마지존을 보고서야 눈을 감으리.
묘중기인은 한 가지 노래를 읊조렸다.
'눈이 없기에 나의 모든 것을 더욱 자세히 알아본다. 심안(心眼)을 떴으니 두 눈이 없다 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탁옥룡은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묘중기인 앞에서는 정체를 속일 수 없었다. 혈영마협이건 대비객이건
묘중기인과 주종관계를 맺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묘중기인은 탁옥룡을 보며 입술을 떼었다.
"주인, 꼭 할 말이 있소."
"말해 보시오."
"나의 말이 거짓말 같더라도 들으셔야 하오."
묘중기인은 말에 앞서 품에 안고 있던 산발여인을 땅바닥에 뉘였다. 지옥에서 기어나온 듯 추악한 여인이기에
원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묘중기인은 아주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절을 하시오."
"예에……?"
"이 여인은 주인의 어머니 되는 여인이오."
"무… 무슨 소리요?"
"이 추악해진 여인이 바로 옥봉이고 석심부인이오."
탁옥룡의 입술이 딱 벌어졌다.
"맙소사! 옥봉…… 이란 말입니까?"
묘중기인의 어조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주인이 옥봉의 아들임은 최근에야 깨달았소. 그리고 아까 산 아래 쪽에서 옥룡과 옥봉의 아들임을 자처하는
사람을 봤을 때, 그 사람이 주인임을 느낄 수 있었소. 주인은 정녕 옥봉의 아들일게요. 옥봉이 아닌 여인으로
주인 같은 기재를 낳을 여인은 천하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오."
"이… 이 여인이 어머니라고?"
탁옥룡은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산발여인은 바로 석심부인이었다. 미쳐 발광하다가는 형산으로 오게 된 것인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크윽……, 어머니를 몰라보다니……!"
탁옥룡은 흐느끼며 옥봉의 살을 매만졌다. 살이 얼음장 같이 찼다.
"어… 어머니!"
그가 흐느끼고 있을 때 묘중기인의 손이 슬며시 움직였다.
'죽여야 한다, 악의 씨앗을!'
그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탁옥룡의 위치를 정확히 가늠하고 있었다.
"용서하시오,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을!"
묘중기인의 오른손 장심이 탁옥룡의 두개골을 후려쳤다.
꽝―!
벼락치는 소리가 나더니 미약한 신음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으윽!"
묘중기인은 길게 탄식하며 힘없이 손을 떨구었다.
"크으……, 용서하시오, 주인!"
아……, 과연 탁옥룡은 죽은 것일까?
그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옥봉을 부둥켜안고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왜 이러는 거요?"
"허억―?"
묘중기인은 자신의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경실색했다.
"내가 탕마지존임을 알면서도 나를 암습으로 죽일 수 있다고 여겼소?"
탁옥룡은 죽을 위기를 겪었지만 전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은 분명 옥룡(玉龍)일 것이오."
"뭐… 뭐라 했느냐?"
"그대가 바로 철서생 공야무군이라 했소."
"흐흐……, 미쳤군. 철서생은 옥룡궁에 있다. 어이해 내가 그란 말이냐?"
"철서생, 속일 것 없소. 방금 전 혈작약에게 모든 비밀을 들었소."
묘중기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으음……!"
"옥룡이 둘임을 그때 알았소. 그리고 당신이 바로 진짜 옥룡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소."
"나… 나는 묘중기인이다!"
"하하……, 다행스럽게도 나는 옥룡의 아들이 아니오."
탁옥룡은 진실을 밝히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뭐… 뭐라 했느냐?"
"옥룡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했소."
"뭐… 뭐라고? 그럼…… 옥봉이 너의 어머니가 아니란 말이냐?"
탁옥룡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오."
"모… 모르겠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옥봉이 나의 어머니일 수는 있으나 옥룡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란 말이오."
묘중기인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그렇게 될 수도 있느냐?"
"그렇소. 나의 아버지는 혈미륵이거나…… 혈미륵이 아닌 제삼의 인물이오. 나는 이제야 그것을 알았소."
묘중기인의 주름진 얼굴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혈미륵은 아니다. 그는…… 옥봉의 몸을 취하지 않았다."
"으음……, 그럼 다른 사람임에 틀림없군."
탁옥룡은 고뇌에 찬 표정이 되었다.
아버지!
모든 사람에게 있는 아버지라는 존재였지만 탁옥룡은 미궁에 빠져 갈피를 못 잡는 기분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묘중기인, 아니 진짜 옥룡인 공야무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나를 아저씨라고 불러 줄 수 있겠느냐?"
"옥룡임을 인정하십니까?"
"아… 아니다. 그냥 아저씨라 불러 달라는 것이다."
탁옥룡은 그의 심정을 헤아리고 기꺼이 호칭했다.
"하하……, 옥룡임을 밝힌다면 뇌옥에 갇힌 진짜 옥룡궁 사람들이 죽을까 두려워 정체를 밝히지 못하시는군요,
아저씨?"
"오호……, 아저씨라고 했느냐? 하하, 내… 내게 조카가 생기다니."
공야무군은 웃다가 울었다.
다른 사람은 그의 마음을 잘 모를 것이다. 그의 명성은 이십 년 동안 천하를 진동시켰지만, 그 자신은 그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처참하게 산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너의 어머니를 네게 돌려주겠다. 그… 그리고 다시는 너의 어머니를 머릿속에 담지 않겠다."
공야무군은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뒤돌아가려 했다.
"아저씨, 저와 함께 옥룡궁으로 가셔야지 어디로 가십니까?"
탁옥룡이 능공섭물 진기를 발휘했다.
"네가 있으니 나… 나는 갈 필요 없다."
"하하……, 아저씨는 축융봉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옥룡궁을 다시 일으킬 의무를 갖고
계십니다."
탁옥룡은 옥봉의 혈도를 타통시키기 시작했다.
이미 광기가 골수까지 침범한 옥봉이기에 그녀의 정신을 되돌려 놓기란 너무도 힘든 작업이었다. 하지만
탁옥룡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기도 했다.
그는 역리(逆理)에 따라 살았다. 그러기에 모든 역리하는 힘은 그의 탕마력 앞에 봄눈 녹듯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흙과 오물로 전신을 더럽히고 있던 옥봉이 눈을 스르르 떴다. 눈빛은 아주 맑았다. 광기(狂氣)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
옥봉은 눈을 뜨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주 미끈하게 생긴 미서생 하나가 그녀를 바라보고 싱글싱글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옥봉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너… 너는 누구냐? 그리고 여기는 어디냐?"
"어머니, 소자 문안드립니다."
미서생이 그녀를 향해 세 번 절했다.
"나…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다니? 네가 누구냐?"
그녀가 눈을 휘둥그래 뜨자 미서생이 목 부위 옷섶을 풀었다.
"어머니, 이것을 알아보시겠습니까?"
열 개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런 자국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탁옥룡뿐이리라.
"저는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네… 네가 나의 아들이라고? 혈… 혈미륵이 말한 아이가 바로 너란 말이냐?"
옥봉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으으……, 아니다! 나… 나는 아들이 없다. 너는 나의 아들이 아니다. 네… 네 아버지 되는 자를 찾아가라!"
그녀는 차게 말하며 눈을 꾹 감았다.
"저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릅니다. 어머니께서 그것을 제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아… 아버지를 모르다니? 너… 너는 옥룡의 아들이……."
옥봉이 놀라 다시 눈을 뜰 때 어디선가 다정다감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매, 내게는 이런 출중한 아들이 없다네."
"사… 사형?"
옥봉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사색이 되었다.
"아… 아니?"
그녀는 목소리의 임자가 오른팔만을 갖고 있는 장님 노인임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이럴 수가! 이 분이 옥룡 사형이란 말인가?'
옥봉이 혼란스러워하자 공야무군은 이야기를 하듯 과거지사를 말했다.
"옥룡은 이십 년 전 바뀌었네. 이십 년 전 서장에서 중원으로 돌아와 옥봉을 찾은 자는…… 진짜가 아니고
가짜였네."
"아아……!"
"그 자는……."
공야무군은 모든 것을 얘기해 주었다.
이야기는 사경(四更)까지 계속되었다. 옥봉은 그제서야 모든 비밀을 알 수 있었다.
옥봉은 탁옥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탁옥룡이 혈영마협의 화신이고,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대비객임을 알게 되었다.
"네 아버지는…… 나도 모른다."
그녀의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예에?"
"아……, 사실 나는 이제껏 나를 범한 사람이 최음약을 쓴 가짜 옥룡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니……."
탁옥룡은 혈작약을 통해 들은 얘기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럼 다른 사람이 있었단 말씀이십니까?"
"이제 생각하니 그런 것 같다. 당시 에미는 최음약에 중독되어 이성을 잃었었다. 기억하는 것은…… 희미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것뿐이다. 그것이 사람이면, 그가 아마 너의 아버지 되는 사람일 것이다."
"혈미륵은 아닙니까?"
"그는 아니다. 그는 사실 동자지신(童子之身)이다. 동자공을 익히고 있기에 이제껏 여색을 곁에 두지 않았다.
그는 소문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다."
"아……!"
탁옥룡은 다시 태산 밑에 깔리는 것 같았다.
혈미륵이 부친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는데, 모친의 말대로라면 그는 부친이 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누군인지 영원히 모를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는 고뇌하다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신세에 관한 일이 꼭 알고 싶은 일이기는 하나 천하대세가 더 급합니다. 어머니, 소자를 보내 주십시오."
"오… 오냐! 너를 보내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아……, 너야말로 진짜 옥룡궁의 주인이다. 네가
설도와 혈도를 찾기만 하면 마의 무리는 옥룡궁에서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찾겠습니다."
"그것을 얻은 다음, 뇌옥으로 가서 갇힌 사람들을 구해라. 그리고 신호를 보내면 나는 이 분과 함께 옥룡궁으로
들어가겠다."
모자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후, 옥봉은 공야홍을 업고 공야무군과 함께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그들은 혈영방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탁옥룡은 그들을 배웅한 다음, 죽립을 눌러썼다.
"환영서생, 너의 어리석음은 징계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독존과 혈작약! 너희 사도는 능지처참 당한다!"
그는 차게 내뱉다가 위로 날아올랐다.
흰빛이 언뜻하며 그의 모습이 자취를 감췄다.
2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성채가 안개에 잠겼다.
마궁은 지난 밤부터 모든 부하들을 궁 안으로 끌어들였다. 최후의 결전을 위해 천라지망을 치는 중인데 그 기세는
정말 엄청났다.
다섯 개의 검진(劍陣)!
스물네 개의 독진(毒陣)!
백팔 개의 기관!
그 모든 것이 발동되어 옥룡마궁을 철통같이 보호했다.
마궁은 중양절 아침에야 열릴 예정이었다. 그 이전에는 나는 새라 해도 안으로 들 수 없을 것이다.
스스슥―!
새벽안개가 주는 몽롱한 느낌과 비슷한 인상을 주는 흰 그림자 하나가 독진을 간단히 돌파하며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탁옥룡이 날아가는 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으나 그를 발견할 만한 안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옥룡전으로 가자.'
그는 옥룡과 옥봉에게서 궁 안의 구조와 지형에 대해 소상히 들은 후인지라 거침없이 안쪽으로 날아들었다.
어머니를 찾은 날의 새벽 안개가 그를 지켜 주는 것 같았다.
옥룡궁을 보호하는 것 중 가장 무서운 것은 검진이었다.
오행변환쇄혼진(五行變幻碎魂陣)!
금수목화토(金水木火土)의 오행검(五行劍)이 뭉쳐 옥룡궁의 최전방을 맡는다. 그 위력은 백길 위쪽을 나는 새를
가루로 만들 정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담 아래쪽을 보호하는 것만 못했다.
독존환무대진(毒尊幻霧大陣)!
독검을 든 일흔두 명이 지살검진(地殺劍陣)을 변화한 검진을 치고 있다. 그 위력은 보이지 않는 장소에 숨겨져
적을 독안개로 녹여 삽시간에 백골로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었다.
벽력신화대진(霹靂神火大陣)!
검(劍), 그리고 화탄(火彈)로 구성되는 진세이다. 어떠한 고수라도 그 안에 갇히면 견딜 수 없다.
태극혈세검진(太極血洗劍陣)!
옥룡궁의 연무장을 중심으로 펼쳐진 검진이 그것이다. 그것은 혈영사절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한 번
발동되면 죽음이 있은 후에야 끝이 난다.
가장 무서운 것은 내궁 안에 있다.
흰 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물 한 채가 서 있었다. 그 모습은 황궁보다도 수 배 뛰어났다. 당세의 천자인
현룡제(玄龍帝)라 하더라도 그러한 건물에서 잠을 자보지 못했을 것이다.
건물 주위에는 기화이초(奇花異草)가 가득한 화단이 있다. 화단에서는 화향(花香) 대신에 살기가 일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는 일백팔 명으로 하나같이 임독양맥(任督兩脈)이 타통된 절정고수들이고, 각기 다른 검식을 쓸 줄 아는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숨어 있기를 계속했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라 해도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그들이 행동하는
시기는 단 하나, 태상호법의 명령이 있을 때뿐이었다.
꽈르르― 릉―!
백팔혈나한진(百八血羅漢陣)으로 보호되고 있는 옥룡전 안에서는 파공성이 일고 있었다.
"아미타불……!"
불호성이 파공성 사이로 흘러나왔다. 힘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옥룡전의 중정(中庭) 안에 서 있었다.
그는 코와 입으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두 손에는 푸른 기류가 일고 있었다. 그러나 금강석을 박살낸다는
천강복마공법(天 伏魔功法)은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의 강기 안에서 유유히 움직이는 금포인 하나가 있었다.
금빛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은 두 눈에서 살광을 쏟아내며 음침히 웃었다.
"일심검제, 본좌는 너의 백팔장을 맨몸으로 받아냈다."
"아미타불……, 마의 힘이 이리도 강하단 말인가?"
백포승려는 초조한 얼굴이 되어 두 손을 한데 합했다.
"흐흐……, 너는 일초 상대도 되지 않는데 다시 덤비려 하느냐?"
"본승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복면인은 한껏 오만을 떨었다.
"흐흐……, 죽기를 각오하지 않았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감히 어떤 힘이 너를 이 안으로 들어서게 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빈승은 불법에 따라 움직인다."
당당히 말하는 백포승려의 목에는 염주가 걸려 있었다. 염주알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흐흐……, 불법은 이미 힘을 잃었다. 마법(魔法)이 세상에서 으뜸간다. 네놈은 그것을 마지막 교훈으로 알고
죽거라!"
백포승려는 다시 손을 합했다.
"아미타불……, 기꺼이 죽겠노라!"
이때 간절한 하소연 소리가 두 사람을 멈칫하게 했다.
"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두 사람의 대결을 바라보던 청의여인 하나가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양손은 건장한
장한의 털북숭이 손에 잡힌 상태였다.
"맹주, 대세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혈영마협이 사라진 이상 옥룡천자는 천하무적입니다. 옥룡천자에게 목숨을
구걸하십시오. 저 잔혹한 자에게 생명을 빼앗기시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말해서는 아니 된다."
백포승려는 바로 일심맹의 맹주인 일심검제였다.
그는 고개를 가로젓다가 소매 속에서 금패(金牌)를 꺼냈다. 그것은 구파장문인 부릴 수 있는 신위를 갖고 있는
것이었다.
<一心盟主令(일심맹주령)>
일심검제가 금패를 꺼내자 금포복면인 옥룡천자는 득의만만해 했다.
"흐흐……, 정말 잘 생각했다."
일심검제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승자가 이것을 갖게 될 것이다. 빈승이 죽게 되면 일심맹은 옥룡마궁에 병합될 것이고 구파는 전통을 잃을
것이다."
"잘 말했다. 그러나 너를 따라 온 용기 있는 계집은 죽이지 않고 살려준다는 약속은 지킬 것이니 안심해라."
"고맙다, 공야무군."
옥룡천자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본승은 너를 얕잡아 보았다. 하지만 너와 동귀어진(同歸於盡)할 수 있으리라 자신하기에, 일심맹주령을
내기조건으로 걸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본좌도 네가 그런 꿍꿍이가 있을 줄 알고 있었다."
"아미타불……, 이제서야 마궁의 힘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힘이라 해도 불법보다는 못하다. 그것이
마지막 할 말이다."
일심검제는 자비스럽게 말하며 금패를 땅에 던졌다.
땡그렁―!
천하 정파무림을 호령할 수 있는 영부가 바닥에 떨어지며 맑은 음향을 발했다.
일심검제는 싸움판을 지켜보고 있는 청의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주는 탕마호법(蕩魔護法)으로 본맹을 위해 많은 일을 했소. 본승은 그것을 참 고맙게 여기고 있소."
"맹주, 일단 굴복하십시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사셔야 합니다."
"아미타불……, 빈승은 색계(色戒), 살계(殺戒)를 어긴 파계승(破戒僧)이라오. 큰 죄인이고 천하를 망친
장본인이오."
일심검제는 눈길을 옥룡천자 쪽으로 돌렸다.
"일단 소협(簫俠)을 출궁시켜 주시오."
"흐흐……,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옥룡천자는 뒷짐을 쥐고는 부하들에게 명했다.
"일심검제를 따라 온 그 계집을 밖으로 내보내라. 사람들이 그 계집의 입을 통해 일심맹주가 본좌와 겨루다가
일심맹주 지위를 본좌에게 건네주고 죽었다는 것을 알게 하라!"
"예, 궁주!"
두 명의 장한은 크게 말하며 소협 사마옥봉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사마옥봉은 점혈당해 무공을 잃은 상태였다. 그녀는 울며 소리쳤으나 사내들의 억센 힘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중정이 아주 고요해졌다.
정원에는 두 가지 힘이 뒤섞여 있었다. 마의 힘과 불력이 그것이었다. 겉보기 강한 것은 마의 힘이었으나 더
편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일심검제였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보다 다섯 배 이상 강한 고수를 눈앞에 두고도 입가에서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아미타불……."
일심검제는 합장한 다음 말했다.
"본승은 한 가지를 묻고 혼탁세계를 떠날 작정이라오."
"흐흐……, 무엇을 묻고 싶어하는지 잘 안다."
옥룡천자의 눈빛은 아주 사악했다.
천폭화독(天爆火毒)!
그는 닷새 동안에 평생을 쓸 잠재력을 모두 폭발시키는 엄청난 독약을 먹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일심검제의
천강복마공에 일백팔 번이나 격타당했으면서도 옷자락 하나 찢어지지 않았다.
"알고 있다니?"
일심검제가 눈빛을 흩뜨렸다.
옥룡천자는 나지막하게 되물었다.
"무산(巫山)에서의 일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냐?"
"으음!"
일심검제의 얼굴빛이 확 달라졌다.
'나의 짐작이 사실이었을까? 이 자가 나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다.'
그는 평생토록 씻을 수 없는 과거를 떠올렸다.
옥룡천자는 뒷짐을 쥔 채 중정을 왔다갔다 거닐었다.
"훗훗……, 네놈이 나를 보고 그때 그 사람이 아닌가 의아해 하고 있듯이, 나도 네가 그때의 그 중대가리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그는 독사같이 매서운 눈빛을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것을 물어보려 했는데, 네놈이 먼저 입술을 떼는구나."
"으음……."
일심검제는 몸을 휘청이다가 손을 다시 합장했다.
'자비스러운 부처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눈가를 붉히다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렇다면 당시 그 복면인이 너였더냐?"
"그렇다."
"본승은 그때 환영신침(幻影神針)에 맞았다. 그래서 천산파(天山派)의 내분인 줄 알았다."
옥룡천자는 빙글빙글 웃었다.
"흐흐……, 오해할 만도 하지."
"으음, 그럼…… 그 여인은?"
"어리석은 놈! 네놈을 이십 년 면벽케 한 우물(尤物)이 누구였는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일심검제는 수치심에 젖어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모… 모른다."
"으하하……, 네놈이 끌어안은 그 계집은 당시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라 불렸다."
"천하제일미?"
일심검제가 몸을 휘청였다.
휘청이는 사람은 그뿐이 아니었다. 처마 밑에 숨어 있는 사람도 그 말에 몸을 휘청이고 있었다.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미청년 하나가 있었다.
'허억, 이럴 수가……!'
이를 악무는 미청년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그가 안아들고 있는 여인은 그 덕에 무림여인이 되었던 사마천룡의
누나인 소협 사마옥봉이었다.
사마옥봉을 데리고 가던 두 사람은 이미 시체가 되어 화단 안에 뒹굴고 있었다.
탁옥룡은 수천 명을 맹인으로 만들고 가장 깊숙한 곳으로 잠입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환영서생을 죽이고
설혈쌍도를 취해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정말 엄청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第十章 천하대은인(天下大恩人)
1
일심검제는 몸을 한참동안 바로 잡지 못했다.
"그… 그 여인이 바로 이곳의 여주인이란 말이냐?"
"흐흐……, 그 계집은 내가 본 계집 중 가장 아름다웠다. 독가시를 갖고 있는 미인인지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지."
"아미타불……, 그게 사실이라 말할 수 있느냐?"
옥룡천자는 당황하는 그의 모습을 즐기듯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계집은 정말 어리석은 계집이다. 그 계집은, 흐흐……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멍청히 나타났다가 당했던
것이다."
"으음……."
"나는 원래 설도만을 취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계집의 몸을 보고는 그만 음욕을 일으키고 말았다."
"아미타불……."
일심검제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그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어 연신 불호를 외웠다.
옥룡천자는 지난 일을 생각하자 분노가 치솟은 듯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그때 네놈이 나타난 것이다. 당시 나는 절대고수가 아니었는지라 네놈을 상대할 수 없었다. 네놈은, 흐흐……
계집의 맛을 보고는 뱀에 물린 듯 질겁을 하고 도망쳤지. 나는 무산을 허겁지겁 떠나는 네놈을 뒤쫓았었다. 나는
네놈이 소림사(少林寺)로 들어가는 것까지 살폈었다."
일심검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람도 없건만 그의 승포가 세차게 펄럭였다.
옥룡천자는 기고만장해 하며 다그쳤다.
"흐흐……, 당시는 네놈이 누구인지 확실히 몰랐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점의 미흡함도 없이 다 알고 있다.
네놈은 탕마행을 하기 위해 강호로 나왔다가 파계하고는 면벽에 든 소림 일심행(一心行)이고, 그때 그 벙거지를
쓴 거지 중놈의 화신이다. 그렇지 않느냐?"
일심검제, 아니 일심행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납같이 굳은 표정을 했다.
옥룡천자는 킬킬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네놈에게 대은인(大恩人)이다. 네놈은 내 덕에 여색을 맛보았다. 그것도 가장 뛰어난 여체를!"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뿐이냐? 네놈은 그 일로 인해 이십 년 면벽해 천강복마공을 비롯한 불문절학을 완벽히 익혀 소림 천 년 사상
가장 뛰어난 고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너는 소림장문인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미타불……, 어리석은 중생들이여!"
일심은 괴로워하며 손을 쳐들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불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모든 계율을 어겼다. 죽어야 한다.'
그는 눈물을 흘리다가 손으로 머리를 치려 했다.
바로 그때, 지극히 청명한 음성과 함께 백의인 하나가 날아들었다.
"안 됩니다! 스님은 천하대은인(天下大恩人)이십니다!"
그는 일심행 바로 앞에 이르러 절을 했다.
옥룡천자가 흠칫하여 크게 외쳤다.
"웬 놈이냐?"
그러나 백의인은 그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일심행만을 바라보았다.
"스님은…… 큰 은인이십니다. 돌아가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은인이라니? 시주는 누군가? 이 어리석은 죄인을 은인이라 하다니?"
"스님 덕에 가장 큰 것을 얻은 사람입니다."
말하는 청년은 너무도 출중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일심행과 비슷한 얼굴 윤곽이었다. 그는
머리를 조아린 채 말했다.
"스님은 두 가지 큰 공덕을 세우셨습니다."
"두 가지 공덕이라니? 본승은 색계를 어겼고, 살계마저 어긴 불문의 파계승일 뿐이네."
"어긴 것이 아닙니다."
"그럼……?"
백의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광을 발하는 그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감돌았다.
"스님은 이십 년 전 무산에서 색계를 어김으로 인해 한 여인을 구했고, 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구… 구하다니?"
"인면수심의 제물이 될 여인을 구했고, 강한 인물이 될 아이를 하나 만드셨습니다. 이는 색계를 어긴 것이
아니고 가장 큰 공을 쌓으신 것입니다."
일심행은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었다.
"모를 말이로다. 옥… 옥봉이 아이를 낳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뿐이 아닙니다."
청년은 눈물을 떨구며 말을 계속했다.
"스님은 살계를 어겼기에 가장 큰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자비라고……?"
"스님은 천년마제(千年魔帝)를 제거하기 위해 살계를 어겼지만, 그로 인해 천년마제는 죽어 탕마지존으로
화신했습니다."
"탕마지존이라니?"
"스님은 제 얼굴을 보셔야 합니다."
청년은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칼날 같은 눈썹과 불굴의 의지를 담고 있는 눈빛, 태산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을 강인한 입 매무새…….
"저를 잘 보십시오. 제… 제 얼굴이 어떻다 여기십니까?"
"으음……,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일심행은 그를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님은……, 얼굴을 동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그래, 나와 비슷하군. 자네가 뉘기에?"
일심행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바싹 긴장했다.
청년이 다시 이마를 땅에 댔다.
"제게 한 가기 소원이 있습니다."
"무슨 소원인가?"
"제… 제가…… 스님을……."
그는 말을 더듬었다. 땅바닥이 눈물로 젖고 있었다.
"제가… 스님을 단 한 번이라도 아버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 아버지……?"
일심행은 너무도 엄청난 충격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달마 이래 소림 최강의 고수이며, 절대 패하지 않는 천강복마신공을 지닌 그가 아버지라는 한 마디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청년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저… 저는 아버님의 아들입니다. 아버님이 무산에서 옥봉이라는 여인에게 잉태하게 했던 아이가 바로
저입니다!"
"아아……!"
일심행은 극심한 정신적 충격과 혼란에 그만 신음소리를 내며 정신을 잃었다.
바로 그때였다. 여태 지켜보고 있던 옥룡천자가 득의의 웃음을 터뜨렸다.
"카하하……, 네가 일심행의 아들이란 말이냐? 그럼 네 에미는 바로 옥봉이로구나? 카하하……, 정말
재미있구나!"
탁옥룡은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백검명!"
"어엇! 네… 네가 어찌 그 이름을?"
옥룡천자의 얼굴에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웃음과 득의함, 비웃음이 모두가 싹 가셨다.
탁옥룡은 눈을 부릅뜨고는 일심행을 가리켰다.
"이 분은 모든 것을 버리려 하셨기에 모든 것을 얻었다. 뜻하지 않은 아들마저!"
"으으……!"
"그러나 너는 모든 것을 얻으려 했기에 하나도 얻지 못했다. 네 딸마저 너를 버렸다. 그것은 알겠지?"
"너는 누구냐?"
탁옥룡은 당당하게 자신의 내력을 밝혔다.
"나는 일심행의 아들 대비객이다!"
"대비객이 바로 너로군? 한데, 예전에 한 번은 본 듯하구나?"
"훗훗……, 여러 번 보았지. 물론 그때의 나는 본래의 내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탁옥룡은 그제서야 제 목소리로 말했다.
"혈… 혈영마협? 으으……, 그렇다면 천년마제가 바로 일심행이 낳은 아들이었단 말이냐? 천년마제는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이냐?"
옥룡천자의 눈알이 새빨개졌다. 아니 자색으로 물들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것이 유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천하에서 가장 겁먹어 하는 얼굴이 옥룡전 정원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그는 혈영마협에 대해 아예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걸음으로 뒷걸음질쳤다.
"거… 거짓말이겠지? 설… 설마 그럴 수가……."
"나는 혈영마협이 아니다. 나는 참회하며 살아갈 작정을 한 대비객일 따름이다."
탁옥룡은 차분히 말한 다음 한 걸음 다가갔다.
"나를 천년마제로 여기지 마라. 두려워하지도 마라. 네가 두려워 할 것은 너의 어리석음과 너의 비열함뿐이다.
너의 딸마저 추악히 여긴 그 인면수심이 바로 네가 가진 가장 큰 적이다. 그것이 바로 심마다!"
"으으……, 나의 딸은 지금 어디 있느냐?"
"흥, 네게는 딸이 없다. 나는 백옥지란 사랑스러운 여인을 알고 있으나 그 여인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내… 내 딸을 어찌했느냐? 그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 그 아이는 내게 생명보다 귀하다."
옥룡천자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다.
"호호……, 대비객이 혈영마협일 줄이야."
웃음소리와 함께 옥룡전 지붕 위로 날아드는 여인 하나가 있었다. 혈작약이 웃으며 나타나는 것이다.
"호호……, 혈영마협이 죽으면 공야홍이 아버지 곁으로 올 듯도 한데……. 호호, 그렇지 않을까?"
그녀의 말소리는 한 자루 비수가 되어 옥룡천자의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죽… 죽이면 딸을 볼 수 있소?"
그가 혈작약을 보며 간절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이지요, 여보."
혈작약은 흥미진진하다는 듯 기와 위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옥룡천자는 그녀를 힐끔 바라보다가 탁옥룡을 쳐다보았다.
"마음을 정했다. 딸을 구하기 위해 너를 죽이기로!"
그는 잔혹하게 웃으며 주먹을 거머쥐었다.
축융봉 정상, 이십 년 간 천하를 피바람 속에 몰아넣은 마의 궁 안에서 일 대 일의 대결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흐흐……, 복면은 거추장스럽다. 사실 이제는 숨겨야 할 것은 하나도 없다."
백검명은 음침히 말하며 복면을 벗었다.
드러난 그의 얼굴은 상당히 청수한 편이었다. 다만 두 눈에서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독광이 남달랐다.
으드득― 으득―!
그의 뼈마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몸이 뒤틀리며 웅장무비한 옥룡궁이 조금씩 흔들렸다.
'독공(毒功) 중 가장 무섭다는 천지절독강(天地絶毒 )이다.'
탁옥룡은 긴장하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와 사마옥봉이 누워 있었다.
싸움이 일어날 경우 두 사람의 생명은 보전 받기 힘들다. 그는 싸움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금제를 받아야 했다.
옥룡천자는 그가 당황하는 것을 보자 득의해 웃으며 혼신공력을 일으켰다.
"뒈져라―!"
우레소리가 나며 그의 몸이 거대한 검은 회오리로 화했다.
탁옥룡은 탕마지존동에서 배운 신공을 발휘해 자신과 아버지, 그리고 사마옥봉의 몸을 호신강기의 막으로
보호했다.
꽈꽈― 꽝―!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다섯 배가 강해진 옥룡천자 백검명의 독강은 실로 가공했다. 주변 십 장 이내는 비산하는 독기로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으윽……!"
탁옥룡은 몸이 으스러지는 듯해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러나 초인적인 정력을 발휘하며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카하하……, 네 아비 때문에 네가 다시 죽는구나? 이번에는 영영 살아나지 못할 줄 알거라!"
백검명은 크게 기뻐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는 독응같이 십 장 날아올랐다가 허공에 무수한 환영을 만들었다.
탁옥룡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검명의 내공은 천폭화독으로 인해 그를 능가하고 있었다. 장력으로
맞부딪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그는 피할 수 없었다.
우르르― 릉―!
수천 수만 개로 흩어졌던 백검명의 몸뚱이가 하나로 합치며 두 줄기 독강이 일어나 탁옥룡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멸천멸지(滅天滅地)!"
그의 목소리가 옥룡궁을 뒤흔들 때였다.
"정― 도― 무― 적(正道無敵)―!"
탁옥룡이 손바닥을 합장했다가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백설같이 흰 기류가 일어나 시꺼먼 독광과 마주쳤다.
탕마지존동에서 익힌 탐마삼장 중의 하나였다.
꽈앙―!
태산이 허물어지는 듯하더니 탁옥룡의 얼굴빛이 희어졌다.
"으윽!"
그는 피가 거꾸로 흐름을 느끼며 겨우 신형을 바로잡았다.
"카하하……, 네놈과 장력을 맞부딪치니 기운이 더 강해지는 것 같구나!"
백검명은 주저하지 않고 다시 장력을 쳐내려 했다.
그의 천폭화독은 일장 대결로 인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의 피 속으로 퍼져 들어갔다. 그로 인해 그의 내공이
더욱 강해졌다.
"너를 찢어죽이겠다. 그 다음 나의 딸을 구하겠다."
백검명이 잔혹히 말할 때였다.
"아……, 아버지! 소녀는 구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허공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수십 마리의 거대한 금응(金鷹)이 있었다.
흰 승포를 걸친 승려가 맨 앞에 있고, 그 뒤에 흑의미인이 따라 오고 있었다. 말을 한 사람은 흑의미인 뒤에
앉아 있은 초췌한 얼굴의 젊은 여인이었다.
매떼는 순간적으로 옥룡궁의 하늘을 뒤덮었다.
"포… 포달랍궁?"
지붕 위에 있던 혈작약의 눈알이 한 치 정도 튀어나왔다.
새 등에서 수십 명이 잇달아 떨어져 내렸다. 날렵한 경공으로 미루어 초상승고수임을 짐작케 했다.
"아버님……!"
백검명 앞으로 가 흐느끼는 여인은 바로 백옥지였다.
"네… 네가……?"
백검명이 딸을 알아보고 감격과 놀라움에 젖었다. 딸을 보는 순간 그의 광기는 거의 수그러들었다.
"야속하십니다."
혈미륵과 함께 나타난 흑의미인이 탁옥룡 곁으로 다가섰다.
"수… 수운아!"
탁옥룡은 몸을 휘청였다.
"아……, 상공이 이길 것은 확신하나 상공이 저를 두고 떠날 것 또한 확실한 일이기에 금응을 타고 왔습니다.
소녀는 죽으면 죽었지 오라버니를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시어머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어머님을 뵈었구나?"
이수운은 얼굴 가득 눈물을 적셨다.
"그 분은…… 진짜 옥룡과 함께 오라버니께서 설도와 혈도를 갖고 하산하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것을 얻은
후에야 입궁하시겠다는 것이 그 분의 말씀이십니다."
"그것은 곧 얻을 것이다."
탁옥룡은 미소 지으며 이수운의 손목을 쥐었다. 이수운은 눈물이 주르르 흘렸다.
"흑……, 오라버니!"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해야 할 일은 며느리로서 시아버님 되시는 분을 보살피는 길이다."
"시아버님이라니오?"
"하하……, 나라고 아버지가 없겠느냐? 여기 이 분이 바로 나의 아버님이시다."
탁옥룡은 웃으며 일심행을 가리켰다.
일심행은 누워 있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정신을 차린 후였다.
"아미타불……, 나를 거둬 주신 대사부께서 나는 본래 속세와의 인연이 많은 사람이라 했었는데……."
그는 아들을 보며 눈물을 해후의 격동을 이기지 못했다.
"아버님!"
탁옥룡은 얼른 다가가 절을 했다.
일심행은 와락 아들을 안아 일으켰다.
"나의 아들이라니…… 자랑스럽다. 그러나 나의 아들이기 이전 옥룡궁의 아들이고, 천하의협의 아들이지."
"저를 받아주시는 것인지요?"
일심행은 운명을 받아들이며 마음을 진정시킨 후였다.
"허허……, 중은 본래 타인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나로 인해 태어난 나의 아들에게 어찌 정을 주지 않겠느냐?
아비는 사실 이제껏 세상의 어떤 것에도 정을 주지 못했는데……, 너로 인해 세상을 좋아하게 되었다."
일심행과 탁옥룡이 부자지간으로 말을 나누자 모두 놀라고 기뻐했다.
"하하……, 소림장문인이시고 일심맹주이신 무혈검이 바로 방주님의 진짜 아버지이셨단 말인가? 장차 지난
시절의 죄를 어찌 씻어야 할까?"
실명검사가 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사마천룡은 누이 사마옥봉을 끌어안고 안도의 눈물을 흘렸고,, 혈미륵은 주위를 호시탐탐 살폈다.
"아직 기뻐하기에는 이르다오, 중원맹주(中原盟主)!"
그는 탁옥룡의 귀로만 들리도록 전음으로 말했다.
"일단 금응을 타고 이곳을 빠져나갔다가 세력을 모아 다시 치는 것이 좋겠소."
"그럴 필요 없습니다."
탁옥룡은 아버지와 말을 나누다가 그 곁으로 다가갔다.
혈미륵은 침통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쳐들었다. 그가 손가락을 가늘게 떨며 가리키는 것은 한 덩어리의 검은
구름이었다. 놀랍게도 백검명은 짙은 독무에 덮여 있었다.
"저것이 무엇입니까?"
탁옥룡이 놀라 묻자 혈미륵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앞을 보시오."
독무 앞에는 언제 뿌려졌는지 모를 인골(人骨)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아… 아니?"
탁옥룡은 무서운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혈미륵은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백검명을 설득하려던 옥지 여시주의 몸이 백검명의 몸에서 흘러나온 독기운에 녹아 뼈가 되고 만 것이오."
탁옥룡은 싸늘한 냉기가 그대로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옥지 낭자가…… 죽었단 말이오?"
그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백옥지는 그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이었다. 청백지신을 희생해서 자신을 살린
사랑스런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천하를 뒤엎을 힘과,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의술을 지닌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법이다.
그는 허연 해골을 응시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혈미륵은 백옥지가 녹아 죽는 것을 본 유일한 목격자였다.
"보승법래…… 업보로다 업보."
그가 불호성을 외우며 백옥지의 극락왕생을 기원할 때였다.
"으으……, 내가 딸을 죽이다니……. 크으으…, 모든 것을 얻으려 하다가 다 잃었다는 말이 맞단 말인가? 내…
내 몸에서 흘러나온 독기가 나의 딸을 녹여 줄일 줄이야!"
검은 구름 안에서 백검명의 처절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으드득! 모… 모두 네년 때문이다."
백검명은 이를 갈다가 뒤쪽으로 떠올랐다. 검은 구름이 폭풍처럼 몰려갔다.
"제… 제발……!"
도망치려는 혈작약의 목소리가 중인의 고막을 때렸다.
"흐흐……, 네년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 종으로 잘 부려먹었다. 처음 나를 종으로 삼을 때 내 손에 죽으리라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백검명은 혈작약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 나를 놓아다오. 그래야 천폭화독의 독기를 풀 수 있다는 것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으드득, 딸이 죽었다. 천폭화독 때문에 죽은 것이다. 모두 네년 때문이다. 제일 먼저 네년을 죽인다!"
백검명의 열 손가락이 혈작약의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목뼈가 부러지고 칠공에서 피가 튀었다.
"끄으으……!"
혈작약은 혀를 빼물며 눈을 뜬 채 숨을 거두었다.
갖은 악계와 독계로 무림인들을 우롱하고 군림천하의 야망을 꿈꿔 온 야욕의 화신치고는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으흐흐……!"
백검명은 혈작약의 목뼈를 부러뜨려 죽인 다음 중인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숨을 죽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흐……, 너희 모두 죽는다. 너희들의 목숨으로 나의 딸의 혼을 위로하겠다!"
그는 잔혹스레 말하며 천천히 다가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깊은 족인이 새겨졌다. 흙이 독기에 피식피식 타버렸다.
"모두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잠시 숨을 멈추시오. 저 자의 피가 뿌려지는 독향을 마시면 죽게 되오."
탁옥룡이 사자걸음으로 당당히 걸어나갔다.
"흐흐……, 네놈이 나를 막겠다고?"
백검명은 이를 으드득 갈며 손을 쳐들었다.
우르르르― 릉―!
마궁 전역이 뒤흔들렸다. 독무가 일어날 때 탁옥룡의 눈에서는 신광이 쏟아졌다.
"불법에는 한계가 없다. 너는 악인이나 죽기 전 도를 깨닫는다면 광활한 부처의 가슴에 안길 수 있다."
"미… 미친 놈!"
"네가 악인으로 죽는다 해도 너의 딸 옥지로 인해 너의 영혼은 속죄 받을 것이다."
탁옥룡은 한탄스레 말하다가 두 손을 한데 합했다.
"미친 놈! 진짜 죽여주마!"
백검명은 이를 갈며 검은구름을 더 강하게 뿜어냈다.
우르르― 릉―!
광풍노도와 함께 옥룡궁에 지진이 일기 시작하였다. 땅이 쩌억쩍 갈라지며 그토록 웅장하던 건물들이 뒤흔들렸다.
"불법무변(佛法無邊)―!"
탁옥룡은 혼신공력을 한데 모아 탕마삼장법(蕩魔三掌法) 중 제 이초를 시전해 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만, 한 줄기 은은하고 항거하지 못할 힘이 흐를 뿐이었다.
콰― 콰콰쾅―!
역겨운 비린내를 발하며 사위를 휩쓸던 독무가 산산이 흩어졌다. 군웅들은 급급히 삼십 장 밖으로 피신했다.
강기의 충돌로 바닥에는 오장 넓이의 거대한 구덩이가 패였다. 독기의 영향으로 푸른 기운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그리고 전신 혈맥이 터진 백검명의 모습이 군웅의 눈으로 들어왔다.
"크윽……, 단 일장으로?"
백검명은 쩍쩍 갈라지는 자신의 몸의 내려다보며 와들와들 떨었다.
"이… 이럴 수가?"
폭음과 함께 그의 몸이 산산이 부서졌다. 아주 미세한 피가루가 허공으로 뿌려질 뿐이다. 비명소리도 없었다.
가짜 옥룡천자로 천하를 호령한 그였지만 추악한 이름만 남긴 채 시신 한 조각 보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순간, 먼 곳에서 창노한 음성이 터지며 장내를 진동시켰다.
"백팔혈나한 일어나라! 노부가 안전한 곳으로 갈 때까지 놈들을 막아라―!"
설도와 혈도를 양손에 나눠진 금포노인 하나가 아주 높은 건물 위에서 옥룡전을 향해 외치고는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선풍(旋風)같이 떠올랐다.
"우우―!"
"으흐흐, 지존을 위해 죽자―!"
"이 순간을 위해 지키고 있었다."
옥룡전 근처 화단 안에 은신해 있던 백팔 명의 독인(毒人)들이 사악한 웃음소리를 내며 옥룡전 안으로 날아들었다.
"검을 다오."
탁옥룡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여기 대령했습니다."
실명검사가 혈섬신검을 끌러서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탁옥룡은 그것을 끌어안으며 천천히 날아올랐다. 그는 무신처럼 꼿꼿이 사십 장이나 치솟았다.
"제행무상(諸行無常)―!"
그의 몸이 휜 구름덩어리로 화했다.
"허억!"
백팔혈나한이 그 위세에 놀라 석상처럼 굳어졌다.
백무 안에서부터 찬란한 혈광이 피어올랐다. 그 광휘에 세상이 어둠으로 변했다. 암흑의 공간 저편에서 붉은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진정 무학의 극치가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었다.
파츠츠츳―!
한 가닥 붉은 무지개가 백무를 뚫고 나와 백팔혈나한의 몸을 휘감았다. 너무도 아름다운 광휘에 취한
백팔혈나한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황홀감에 젖을 따름이었다.
"케에― 엑―!"
"카아악!"
사방에서 사람 목이 날아올랐다. 백여덟 개의 목이 몸통과 분리되는 데에는 촌각도 걸리지 않았다.
실로 인간 한계를 넘는 어검기예(御劍機藝)였다.
검이 한 바퀴 회전하다가 탁옥룡의 손아귀 안으로 날아들었다.
"우우―!"
탁옥룡은 장소성을 흘리며 허공을 타고 날아갔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이백여 장씩 가로질렀다.
몇 번 움직였을까?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허겁지겁 도망쳐 가는 금포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독존(毒尊)!
만악의 조종자인 그가 도망가고 있는 것이다.
"도망가야 산다. 중원을 떠나야 한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마굴 안에서 공포를 느끼며 허겁지겁 달아나기에 바빴다. 갑자기 가벼운 미풍이 자신을 스쳐
간다 싶었다.
"노독마 때문에 애간장 태우는 사람이 많은데 그냥 떠나면 되겠소?"
바로 앞에서 비웃는 소리가 났다. 그를 가로막고 웃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네… 네놈이……?"
독존의 눈알이 훌렁 뒤집어졌다.
"후후……, 옥룡대제로 말하자면 나의 외할아버지이시지."
탁옥룡은 담담히 말한 다음 팔짱을 꼈다.
그의 몸뚱이는 하나의 가공할 만한 무기였다. 독존은 마성으로 이룩한 모든 것을 탁옥룡의 기도에 의해 잃어야
했다. 손이 너무도 무거웠다.
땅― 땅―!
설도와 혈도가 그의 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것을 쥐고 있기에는 너무도 허약해진 것이다.
"살려다오, 제… 제발……!"
독존은 땅에 엎드리며 개처럼 얼굴로 흙바닥을 비벼댔다.
참담한 광경이었다. 천하의 군림자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던 노마가 갑자기 초라한 늙은이로 변했다. 그는
엉금엉금 기었다.
독존은 탁옥룡 곁으로 다가와 탁옥룡의 두 다리를 휘감았다.
"제… 제발 이 불쌍한 늙은이를 살려다오. 나는 힘이 없다. 나… 나를 죽인다고 무슨 더 좋은 일이 있겠느냐?"
그는 덜덜 떨며 말하다가 갑자기 두 손에 힘을 줬다.
"같이 죽자! 그것이 노부로서는 최선이다!"
독광을 발하며 그는 탁옥룡의 다리를 두 손을 힘껏 조였다. 지난 바 모든 독공을 발휘해 동귀어진할 기세였다.
우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기괴한 음향에 이어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케에― 엑―!"
독존은 두 팔이 부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뒤로 벌렁 나뒹굴었다.
탁옥룡은 손도 쓰지 않고 만악의 근본을 처단한 셈이었다.
"크윽, 독… 독기운이……?"
독존은 금강불괴지신을 기습하다 오히려 팔이 으스러져 나뒹굴게 되었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독기를 느꼈다.
무공이 사라지자 그의 피 속에 스며 있던 독이 그의 몸을 괴롭히는 것이다.
으득― 으득―!
그의 몸이 새우같이 오그라들었다.
"카아악……, 나… 나를 죽이고 떠나다오!"
그는 걸음을 옮기는 탁옥룡을 향해 애절히 외쳤다. 오장육부를 태우고 뼈마저 녹여버리는 극독의 침범에는 그는
고통스럽게 굴렀다.
"크아……, 어서… 어서 죽여다오!"
탁옥룡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었다. 그는 설도와 혈도를 쥐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아버님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다. 아……, 하지만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그는 아주 오랜만에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마음은 소년문사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낭랑히 글을 읽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공은 이제 그에게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2
옥룡궁의 부활!
그것은 무림사상 가장 큰 경사였다. 젊은 맹주 탁옥룡은 축융봉 옥룡궁 이외에 천하사단(天下四壇)을 두고 의
(義)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금룡거(金龍居) 탁가장원(卓家莊園)!
그곳에는 그의 첫째 부인 혈수나찰 이수운이 있고, 그의 양아버지 탁천영의 가묘(假墓)가 있다.
소림사(少林寺) 면벽암(面壁岩)!
그곳에는 여생을 면벽으로 지낼 결심을 한 그의 아버지 일심행과 그가 읽어야 할 많은 책이 있다.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단 둘, 바로 탁옥룡 모자(母子)뿐이다.
포달랍궁(包達拉宮)!
그곳에는 그가 아저씨라 부르는 인자한 승려 하나가 있다. 중원이 위기에 빠지면 언제든지 날아올 수많은 금응이
항상 대기중이다.
환영궁(幻影宮)!
그는 지금 그곳에 있었다.
궁이 내려다보이는 무덤 하나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 천하여협(天下女俠) 백옥지낭자지묘(白玉芝娘子之墓) 부(夫) 탁옥룡 읍립(泣立)!
탁옥룡은 천산신의와 함께 서 있었다.
천산신의는 눈물을 흘리며 제자의 무덤에 술을 부었다.
"옥지야, 옥룡궁주가 너를 아내로 인정했으니 죽더라도 편히 눈을 감겠구나."
천산신의는 아주 수척한 상태였다. 그는 뇌옥에 갇혀 무진 고생을 하다가 풀려난 상태였다. 그가 무덤을 끌어안고
소리 없이 흐느낄 때였다.
"맹주님, 중원으로 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혼례식에 늦게 됩니다."
혈섬검을 등에 진 장한 하나가 탁옥룡 곁으로 다가섰다. 과거에는 회회검사로 불렸지만 지금은 탁옥룡이의 충복이
된 실명검사였다.
탁옥룡은 점잖게 말했다.
"잠시 더 있다 가세. 지금 이 할아버지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실명검사는 머리를 긁으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큰일이군. 두 분의 궁주부인이 신랑을 기다리는 것은 하는 수 없는 일이나…… 황제 현룡제마저 학수고대하며
기다려야 하니 신하된 도리로 불충이 아닌가?'
그는 다시 재촉하지도 못하고 곤란해 했다. 그의 손에는 붉은 배첩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삼가 고합니다.
천하 무림동도께서는 축융봉으로 와 중원맹주 탁옥룡 맹주의 혼례에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두 명의 신부 이수운 낭자와 사마옥봉 낭자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축제에는 천하에 의풍(義風)을 일으킨 탁맹주의 전도를 축하하기 위해 금상황 현룡제도 참석하실 것이고…….
>
배첩은 아주 길었다. 그것은 마의불수가 골머리를 썩히며 지은 것인데 그로 인해 문장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붉은 배첩이 바람에 팔랑거렸다. 그 바람은 탁옥룡의 머리카락도 펄럭이게 했다.
빙하곡부일천년마제(氷河谷府一千年魔帝).
불사마혼(不死魔魂)…….
이제 그 노래는 끝을 변화시켜야 마땅하다.
탕마지존(蕩魔至尊)이 천년마제(千年魔帝)의 한을 풀었다!
<大 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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