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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nnyeonmaje) - Seohyoweon - Unknown
(Ceonnyeonmaje) - Seohyoweon - Unknown
(Ceonnyeonmaje) - Seohyoweon - Unknown
들어가는 말 / 천 년의 마지막 봄
인간에게 있어 천 년(千 年)이란 세월은 과연 얼마나 장구한 세월일까?
그 누구도 천 년의 마지막 봄을 다시 겪을 수 없을 것이다. 과거 천 년 전의 사람들이 아득한 전설 속에 묻혔듯이,
우리도 봄의 아지랑이 속에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천 년의 마지막 봄은 2999 년 3 월!
너무도 머나먼 훗날이기에 우리는 아예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천 년이라는 시공(時空)은 인간의 그리 길지 않은 수명(壽命)에 비한다면 영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과연 천 년 후에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무림(武林)의 비조(鼻祖)를 달마대사(達摩大師)로 본다면 강호무림이라 불릴 시대는 천 년을 약간 넘는
정도이다. 그런 천 년 무림사에 가장 위대한 존재는 달마를 제외한다면 무당(武當)의 시조 장삼봉(張三峰)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正)이 있으면 마(魔)가 있는 법이니, 마도무림의 조종(祖宗)은 전설 속에 묻혀 있다.
마중지존(魔中至尊)!
그는 마공의 창시자이자 상고시대부터 흩어져 있던 비학들을 집대성한 마문(魔門)의 종사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많은 생명을 학살했기에 피비린내 나는 공포의 상징으로 불린다.
마침내 아득한 천 년의 시공을 깨고 영원히 잠들어야 할 전설의 마공절기가 재현된다.
천년마제(千年魔帝)!
이것은 무림시대의 최후를 장식한 마웅(魔雄) 탁옥룡의 고독한 전기이다. 그는 마중지존에 이어 새로운 천 년을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과연 그는 마(魔)로써 무림시대의 종지부를 찍을 것인가?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천 년의 마지막 봄을 보내며 강호제현과 함께 지난 천 년을 음미해 보고 싶다.
徐 孝 源 拜上
序 一 마중지존(魔中至尊)과 불가삼신승(彿家三神僧)
도도탕탕(滔滔蕩蕩)한 무림사에 거대한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 있다.
일천 년 전, 마왕동(魔王洞)을 세우고 천하혈세(天下血洗)를 시작한 고금제일거마(古今第一巨魔)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 마중지존(魔中至尊)!
그는 그렇게 불렸다.
마(魔)의 하늘을 이룩한 그는 고금에 전해지는 온갖 종류의 마공을 익히고, 그것을 마왕류(魔王流)로 통합해
전대미문의 마공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하늘의 징계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국법(國法)은 그에게 있어 못쓰는 종잇장이었고, 인륜(人倫)은 그에게 있어 냉소할 대상에 불과했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출관해 무림거파 하나를 멸문시킴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무려 일갑자 동안
그는 천하를 독패(獨覇)하며 수많은 곳에 피의 바다와 시체의 산을 쌓았다.
대혈겁(大血劫)!
피의 수레바퀴는 구르는데 누구도 그것을 멈출 수 없었다.
어떤 상대도 그를 꺾지 못했다.
그것이 일국(一國)이거나 어떠한 거대문파(巨大門派)라 할지라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그는 영생(永生)토록 꺾이지 않을 존재였기에, 선(善)은 그를 사필귀정(事必歸正)의 금제(禁制)로 몰지 못한
채 숨어 지내야 할 듯 보였다.
그러던 중 세 곳에서 은밀한 실종 사건이 발발했다.
달마조사(達磨祖師)의 사손(師孫)이 되는 혜장(慧藏)!
그는 달마가 남긴 소림의 절기를 완벽하게 터득한 고승이다. 그는 숭산에 입산 후 단 한 번도 산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육십 년 내내 면벽암(面壁庵)에 은거한 채 달마가 남긴 불문의 절기를 수련해 왔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소림절학 중 가장 강하다는 천강복마공(天 伏魔功)과 함께.
그가 사라진 날 다른 곳에서도 한 사람이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동해(東海) 옥룡사의 장문인 옥룡신승(玉龍神僧)!
혈설쌍도(血雪雙刀)의 비밀을 풀어 동해무림 사상 가장 강한 무예를 지녔다는 그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곳에서도 실종이 있었다.
서장(西藏)의 포달랍궁(包達拉宮)의 노주지승(老住持僧) 오랍(烏拉)!
그는 대유마가선공(大幽魔伽禪功)과 더불어 미륵수미신권(彌勒須彌神拳)을 터득한 서장제일인(西藏第一人)이다.
序 二 천년대격돌(千年大激突)
여량산(呂粱山).
남쪽으로는 운무산(雲霧山)이 있고 북쪽에는 운중산(雲中山)과 오대산(五岱山)이 늘어서 있다.
서쪽으로 가면 아산(芽山)을 볼 수 있고, 동쪽으로 가면 곽산( 山)과 부산(浮山)의 연봉(連峰)을 발견할 수
있는 산중지산(山中之山)이다.
어디를 봐도 만학천봉(萬壑千峰)의 어마어마한 도열이 있다.
산세 자체가 거대한 칼이 아니던가.
청천(淸天)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는 마천고봉(摩天高峰)들은 그 하나만 해도 눈을 아찔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데, 칼 모양의 험준(險峻)한 봉우리가 수백 수천 개나 늘어서 있는 것이다.
산서(山西)의 절경은 그로 인해 극(極)에 달하고 있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십이월(十二月)의 말일(末日).
이제 이 밤만 다하면 원단지일(元旦之日)이 시작되는데, 이 날은 유난히 춥고 험했다.
원래는 끊어지거나 단절(斷絶)되지 않는 시간이건만, 인간(人間)은 그 흐름에 태세년월일시(太歲年月日時)를
부(賦)하여 가고 오는 것을 아쉬워한다.
산령(山嶺)도 이 날만은 인간의 심정인 듯 모든 것을 설풍(雪風)에 묻어버렸다.
뼈를 깎고 골수(骨髓)를 얼려버리는 찬바람은 설마(雪魔)와 함께 휘몰아치기에 빛이라 한들 모습을 나타낼 수
없었다.
바람소리가 있을 뿐 산도 보이지 않고 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눈은 원래 흰 것이나 지금은 검게만 보였다. 모든 것이 눈바람으로 인해 잠겨 버렸는데, 심한 눈보라가 그
자체마저 감추어 버린 것이다.
빙하지곡(氷河之谷).
여량산 내에서도 가장 험준한 곳이다.
눈바람이 치지 않더라도 항상 빙무(氷霧)에 잠겨 있고, 바닥에는 흙 대신 빙하(氷河)가 머물고 있기에 생물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설룡(雪龍)이 무리를 지어 얼어붙은 대지 위를 할퀴어 갈 때, 홍색인영 하나가 빠르게 바람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第四章 천 년의 인연(因緣)
1
설무(雪霧)에 잠기는 여량산은 한 폭의 세외선경도(世外仙景圖)였다.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연이은 봉우리가 설무에 잠겨, 아주 흐릿한 곡선을 그리며 수천 리에 걸친 행진을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뚝 끊어진 절벽 아래에서 운해처럼 피어오르는 빙무해(氷霧海)의 장엄함을 접할 수
있다.
남쪽은 유명부(幽冥府)같이 흐릿할 뿐이다. 모든 것이 짙은 안개의 장막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쪽에선 강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휘잉―!
눈보라는 설룡(雪龍)이 꿈틀거리며 하늘을 나는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대지를 강타하고 있었다.
탁옥룡은 쉬지 않고 걷는 중이었다. 그는 영원히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문득 혼자라는 것이 느껴졌고 알 수 없는 고독감이 봇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죽어 버린다 해도 그리
아까울 것 같지는 않았다.
"이곳에 묻히면 시체가 천 년은 가겠지. 꽁꽁 얼어 썩지 않을 테니까! 아……, 후세 누군가 얼어죽은 시체를
보고 나의 사연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탁옥룡은 소맷자락으로 눈바람을 가리며 무작정 걸었다.
그는 이미 방향을 잃고 있었다. 칼날처럼 베어드는 바람은 그가 견디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였다.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걸었다.
몸을 훈훈하게 해주던 월정신단(月精神丹)의 힘도 다한 듯 몸이 손끝 발끝에서부터 얼기 시작했다.
"으으……, 너무 아프구나."
탁옥룡은 손을 마주 비비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신세를 이런 사경으로 몰아넣은 자들에 대한 원한이 일었고, 이 세상에 대한 증오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악의 무리들!"
그는 씹어 뱉듯이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힘이 없어 악도들을 죽이지 못하였지만 죽어 귀신이 된다면 원귀(怨鬼)가 되어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다행히
귀신이 되지 않고 사람으로 환생(還生)한다면 기필코 강호인으로 태어나 이십 년 후 철저히 복수하겠다!"
탁옥룡은 양부와 이수운의 얼굴을 눈에 그렸다.
양부의 모습을 떠올리자 눈물이 일렁였고, 이수운의 아리따운 영상을 되새기자 안타까움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흐릿하게 떠오르는 얼굴은 형체가 정확히 그려지지 않는다. 안개에 가려진 듯 흐릿한 그 얼굴은 탁옥룡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고, 바로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얼굴이었다.
"나를 버린 여인…… 그 여인도 증오한다."
탁옥룡은 차게 말하며 애써 눈물을 감추었다.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존재는 자신을 낳아준 혈친이다. 양부로부터 출생의 비밀을 들은 이후, 한동안 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간절하게 느꼈다.
그러나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자식을 죽이려 한 모친을 용서하기가 힘들었다. 어머니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사라지면서 오는 충격은 너무도 컸다.
'어떤 사연이 있다 해도 용서할 수 없다.'
그는 목에 남아 있는 열 개의 손톱자국을 쓰다듬었다.
"어떤 여인이기에 자신의 뱃속에서 나온 아이의 목에 손을 댈 수 있었을까?"
그는 갑작스런 허탈감을 느꼈다.
'그 여인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인에게서 태어난 나 또한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탁옥룡은 상심해 하며 계속 걸었다.
해가 구름바다 위쪽으로 떠올랐을 시각이었지만 여량산으로 떨어지는 빛살은 없었다.
대낮인데 아주 어두웠다. 폭설(瀑雪)이 내려 모든 것을 가리게 했다.
탁옥룡의 몸뚱이조차 눈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으으……, 춥다."
간간이 눈바람 사이로 들리는 처량한 목소리가 있을 뿐이었다.
"아… 아버지 곁으로 가는 것일까? 한(恨)을 풀고 가야 아들 된 도리를 다하는 것인데……, 이대로 가는
것인가?"
탁옥룡은 무작정 걸을 뿐이다.
가야 하는 곳이 정해져 있었다면 이렇듯 처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힘이 닿는 한 계속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부친의 유해가루가 정해준 길이라 여기며 그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대자연에 비해 너무 왜소했다.
"쿨럭쿨럭……!"
그는 심한 기침을 하며 쓰러질 듯 휘청였다.
아직 어린 몸으로 세찬 눈보라를 뚫고 이렇듯 오랜 시각 동안 걸어온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무엇에 이끌린 듯 그는 그렇게 탈진한 몸을 이끌며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마를 갔을까?
탁옥룡은 의식이 희미해진 상태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우우웅―!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 산이 운다?"
일순 탁옥룡의 머리카락이 빳빳해졌다.
울음은 평화가 깨어졌을 때 나는 소리다.
봄에는 새가 울고, 여름에는 천둥으로 운다. 가을에는 바람이, 그리고 겨울에는 눈으로 운다.
지금 여량산이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은 여진(餘震) 때문이었다.
천 년만의 대지진이 그것으로 끝나기는 아쉬웠는지 또 한 번의 땅울림으로 여량산을 떨게 하는 것이다.
우는 소리는 포효성(咆哮聲)으로 화했다. 수백만 마리의 수사자가 갈기를 세우고 하늘을 향해 울고 있는 듯했다.
노룡(怒龍)의 장음(長吟)이라 해도 이보다 우렁차지 못할 것이다.
우르르르― 릉!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와 함께 땅이 뒤흔들렸다.
탁옥룡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푹 쓰러졌다.
"어엇……?"
그가 눈바닥을 나뒹굴며 비명소리를 낼 때 모든 것을 묻어버리는 굉음이 터져나왔다.
꽈꽈― 꽝!
하늘과 땅이 다시 하나로 뭉치는 것일까?
땅이 뒤틀리며 빙벽(氷壁) 하나가 흰 파도를 토하기 시작했다. 집채보다 백 배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절벽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눈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눈덩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설풍이 더 지독하게 일어나 천지간을 온통 눈으로 메웠다.
눈의 기세는 가히 무적(無敵)이었다. 우뚝하던 바위 봉우리가 눈사태에 깔려 함께 비탈을 굴렀고, 십 리 안이
눈사태로 떠들썩해졌다.
수만의 뇌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소년의 안타까움 어린 절규가 터져나왔다.
"안 돼! 나는 죽을 수 없다. 죽여야 할 원수가 있는데……, 제발 나를 데리고 가지 마라!"
탁옥룡은 해일 같은 눈사태에서 쓸려가며 하늘을 저주하며 부르짖었다.
꽈르르― 릉!
눈사태는 더 큰 울음소리로 그를 조롱했다.
휘몰아치는 눈사태는 반경
이십 리 안의 경물을 이전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뒤바꿔 놓은 후에야 정지되었다.
봉우리 열두 개가 사라졌고 계곡 스물다섯 개가 묻혀 평지가 되었다.
여량산 사상 가장 큰 눈사태였다.
2
아주 깊은 골짜기는 만 년 전부터 눈과 얼음뿐인 빙하지곡(氷河之谷)이었다.
"으음……!"
어디에선가 아주 가냘픈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눈더미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흑의소년 하나가 있었다. 눈 지옥을 도망쳐 나온 마귀인 듯 너무나도 추악한
모습을 한 소년이었다.
얼굴이 철퇴에 맞아 짓뭉개진 듯한 추악했고, 손등 발등과 입술이 얼어 자색으로 화한 후였다.
"여… 여기가 어디일까? 눈사태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나도 모르게 이상한 골짜기
밑바닥으로 떨어졌구나."
그는 위쪽을 바라보며 자지러졌다.
하늘이 동그랗게 보였다. 사면이 꽉 막힌 분지였다. 벽면은 유리보다 매끄러운 빙벽으로 둘러져 있고 높이도
엄청났다. 사람은 물론이고 날랜 원숭이라 해도 감히 기어오를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흑의소년은 밖으로 나가기 틀렸다는 것을 알고는 쪼그리고 앉아 눈을 반개했다.
"아버님의 재를 따라 오다가 여기까지 왔다. 아마도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뒤쫓아 저승으로 오기를 바라셨나
보구나. 슬퍼하지 말자. 수운이도 이미 저승에 가 있을 테니까. 이제 멀지않아 모두를 만나게 될 거야. "
그는 추운 듯 새우처럼 웅크리고 앉았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운명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뿐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서 소년의 추악한 얼굴에 희미하나마 변화가 생겼다.
'아……, 누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하구나! 누구지? 아주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는 것 같아!'
소년의 피부에 소름이 오싹 돋아났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등뒤에서 전해졌다.
그는 공포를 느꼈다. 그 공포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도 훨씬 큰 것이었다.
그는 겁이 나 감히 뒤돌아볼 마음도 갖지 못했다.
'뒤쪽에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있다. 그 존재는……, 죽음보다도 두려운 것이다.'
소년은 죽는 쪽이 오히려 홀가분하다 여겼다.
그러나 공포스런 존재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그 존재만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그런 공포를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봐야겠다는 호기심이 일어났을 때에는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대체 무엇일까?'
본능적인 공포에서 벗어난 그는 엄청난 힘을 지닌 존재가 너무도 궁금하게 여겨졌다.
'무엇이기에 나의 영혼을 압도하는 것일까?'
그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세상사에서는 철저한 패배자였으나 정신력에 있어서는 남에게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소년이었기 때문이었다.
힘은 맑은 상태에서 일어났다.
그는 공포를 억누르는 동시에 말할 수 없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많은 경전을 읽으며 성현들의 지식과 의지로
다져진 그는 아이답지 않게 굳강했다.
"모두 심마(心魔)의 장난이다. 내가 살기 힘들다는 것을 억울하게 여긴 나머지 심마의 농간에 빠진 것이다."
소년은 중얼거리며 천천히 뒤돌아봤다.
순간, 그의 얼굴은 이 세상에서 가장 흉칙하게 일그러졌다.
"아……!"
그의 입술이 딱 벌어졌고 눈빛이 흐트러졌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것을 본 표정이 된 이유는 상상도 못할 무시무시한 존재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 하나를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시뻘건 두 눈알을 가진 사람인데 그 빛은 너무나 큰 공포를 안겨다
주었다.
둘의 눈싸움은 아주 오래 지속됐다.
사실 치열한 눈싸움이 아니었다. 소년에게 있어서는 눈싸움이라기보다 겁먹어 차마 돌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소년의 얼굴에서 공포의 그늘이 사라졌다.
"휴우……, 산 사람인 줄 알았다."
그의 눈빛이 정상대로 환원되어 입술 사이에서 한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에게 극도의 공포를 준 혈안의 존재는
이미 오랜 전에 죽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눈빛이 워낙 강해 살아 있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아……, 얼마나 큰 원한을 갖고 있기에 죽은 상태에서도
이렇듯 무서운 저주의 눈빛을 발하고 있는 걸까?'
그는 이마를 덮은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시체를 향해 다가섰다.
시체의 몸뚱이 표면에는 맑고 투명한 얼음이 한 자 정도 두텁게 둘러져 있었다. 수정보다 맑은 얼음덩이라 얼핏
시체가 우뚝 서 있는 것으로 보였다.
죽은 사람은 붉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붉은 옷자락 여기저기 찢어진 흔적이 있고 그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와 검은빛으로 굳은 상태였다.
죽은 사람은 중년인으로 보였다.
기이하게도 머리카락이 정수리 부분에서부터 둥그렇게 백발(白髮)로 화해 있었다.
"흐음……, 언제 죽은 사람일까? 시체의 형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는 하지만 시체라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소년은 홍의인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근처를 자세히 살폈다.
지각 변동의 흔적이 역력했다. 바닥이 깨어진 곳도 여러 군데 눈에 띄었다. 원래 위쪽에 있던 것은 땅 속으로
들어갔고, 땅 속에 있던 것은 지진으로 인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얼음에 갇혀 죽은 시체 또한 땅속에서 나온 듯했다. 아니, 얼음 속에서 나왔다고 해야 옳은 말이리라.
"동병상련지정이 느껴지는군. 힘이 있다면 얼음을 깨고 이 사람의 시체를 잘 묻어주어 원혼이 되지 않게 하고
싶구나."
중얼거리는 소년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그는 허기지고 탈진한 상태였다. 몸은 꽁꽁 얼어 한 걸음도 움직이기 힘든 상태였다.
그 와중에도 홍의인의 시체가 꼭 산사람 같은 인상을 준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 바람에 이전의 외로움은 시체를
대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치열하게 싸우다 죽은 사람 같구나."
그는 시체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며 계속 시체를 살펴보았다.
시체는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사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어떤 내가고수의 눈빛보다도 무서워
보였다.
그의 왼손은 심장 위쪽에 닿아 있고, 오른손은 불끈 쥐어진 채 가슴 앞쪽으로 조금 내밀어진 상태였다.
"아……, 저 모습은 곧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끼게 하는구나. 다른 사람의 시체는 언제고 썩어 흙으로
돌아가나 이 사람의 시체는 만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시체로 모두가 원하는 장생불괴(長生不
壞)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탁옥룡은 감탄하다가 현기증을 느꼈다. 죽을 때가 가까워진 듯했다.
그는 삶을 쉽게 체념하는 나약한 소년은 아니었으나, 대자연이 준 시련이 너무도 엄청나 살길을 찾으려 하지도
못했다.
"휴우……!"
탁옥룡은 호흡의 곤란을 느끼며 차디찬 바닥에 드러누웠다.
우르르― 릉!
갑자기 머리 위쪽에서 뇌성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 다시 한 번 요란한 벼락치는 소리가 나며 절벽에서 얼음덩이가
우박처럼 떨어졌다.
다시 한 번 눈사태가 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 큰 눈사태는 아니었기에, 탁옥룡이 누워 있는 빙곡까지 세력을 미치지 못했다.
다만, 눈사태로 인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흙벽이 드러나 이채로웠다. 방원이 오 장 정도 되는 흙벽이
나타나며 눈사태는 정지되었다.
탁옥룡은 눈사태가 중지되었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그렇게 일 각이 지났다.
죽음을 기다리며 담담하기만 하던 탁옥룡의 눈빛이 야릇해졌다.
"으음……, 어디선가 선향(仙香)이 나는데?"
탁옥룡은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는 휘청이며 주위를 둘러보며 향기의 진원지를 찾았다. 전신을 훈훈하게 해주는 향기는 눈사태로 인해 새로
나타난 흙벽 아래쪽에서 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음벽 아래에서 나타난 흙은 정말 검고 고왔다.
"흙에서 이런 향기가 날 수는 없는데, 무엇이 있기에 이리도 좋은 냄새가 난단 말인가?"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흙바닥 가까이 다가갔다.
"호오……!"
그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빛이 붉은 꽃 세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꽃송이는 아주 작았고, 꽃을 달고 있는 잎사귀도 매우 작고 귀여웠다.
"이런 앙증맞은 꽃이 눈 속에서 자랐다니……, 정말 신비한 현상이다."
탁옥룡은 기화(奇花)의 끈질긴 생명력(生命力)에 혀를 내둘렀다.
'무슨 꽃이기에 이리도 놀라운 생명력을 갖고 있을까?'
그는 은근한 호기심을 느끼고 꽃송이를 살피다 꽃송이의 생김새가 낯익다 여겼다.
"가만…… 이것은 산해경(山海經)에서 본 산삼화(山蔘花)와 똑같구나!"
탁옥룡의 눈빛이 심하게 떨렸다.
'산삼화가 분명하다면 흙 아래 산삼뿌리가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영약이라는 산삼이
이곳에 자라고 있단 말인가?'
그러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다. 나 같은 불행한 사람에게 그런 기연(奇緣)이 있을라고?'
탁옥룡은 느닷없는 행운을 애써 부정하면서도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어쨌거나 한번 살펴보자."
그는 마른침을 삼키다가 부드러운 흙 위에 다소곳이 자라난 꽃송이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손발을 놀리기 힘든 상태였지만 호기심을 막지는 못했다. 열 손가락을 이용해 부드러운 흙을 파기 시작했다.
흙은 아주 쉽게 파여졌다. 그리고 무엇인가 시원한 것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오……, 뿌리가 아주 크구나!"
탁옥룡은 흥분해 소리치며 손놀림을 빨리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꽃송이 근처를 빙 둘러 파놓고 망연자실해졌다.
꽃송이의 뿌리는 꽃에 비해 십 배 크기였다. 굵기는 오리알만한데 놀랍게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방실방실 웃는
사람 모양을 한 뿌리였다.
"인… 인형(人形)? 설마 이것이 전설상의 인형설삼(人形雪蔘)이란 말인가?"
탁옥룡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늘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데에서 가슴이 벅차는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인형설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신세가 된 나의 눈에 띄다니. 그래, 아버님은
내게 이것을 주시기 위해 바람을 타고 이곳으로 나를 불러 들였던 것이다."
그는 흐느끼다가 두 손으로 인형설삼을 받쳐 들었다.
설삼의 과육(果肉)이 주는 촉감은 얼음덩이가 주는 촉감보다도 차가웠다.
그는 갓난아이를 다루듯 조심조심 다루다가는 그 뿌리에 묻은 흙을 털지도 않고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과육은
이빨로 깨물 기회도 주지 않고 이에 닿아 스르르 녹았다.
뿌리서부터 꽃 잎사귀까지 통째로 먹어버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간 뱃속이 얼음물로 가득 찬 듯 차가워졌다.
"으윽……!"
탁옥룡은 갑자기 치솟는 열류(熱流)를 느끼고 신음소리를 냈다. 오장육부가 타서 재가 되는 듯했다.
"이럴 수가? 차가운 기운이 갑자기 용광로의 불길같이 뜨거운 기운으로 화하다니!"
그는 너무도 아픈 나머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벌렁 나뒹굴었다.
그는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흙바닥에 누워 그대로 혼절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잠들지 않았다. 그의 근육이 제멋대로 불끈불끈 일어나며 옷을 북북 찢어버리는 것이다.
근육이 불룩불룩 팽창하며 누더기같이 너덜너덜한 흑삼을 걸레같이 찢어냈다. 머리카락도 뽑히고는 이내
번들거리는 새로운 모발을 키워냈다.
아……, 이것은 탈태환골(奪胎換骨)의 현상이 아닌가?
또 한 가지의 신기한 변화가 있었다.
탁옥룡의 숨결에 색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숨결은 언제부터인가 흰빛을 띠고 있었다.
근육은 꿈틀 꿈틀거렸고 숨결은 누에실같이 흰 기운을 흘리며, 그의 몸 주위에 신령스러운 백무를 일으켰다.
영약의 기운이 녹아 사지백해로 퍼지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아쉬운 것은 그가 운기조식법을 몰라 약 기운을 모두 흡수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그가 인형설삼의 약효를 진원지기로 환원시켰다면, 순간적으로 이백 년 내공을 얻고 만독불침지신(萬毒不浸
之身)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영약의 기운으로 인해 탈태환골 된 탁옥룡은 이전과 전혀 다른 신체의 소유자가 되었다.
수십 년 외공(外功)을 익힌 사람같이 강인한 피부와 십 리 밖의 토끼를 볼 수 있는 매의 눈빛보다도 날카로운
안광을 지닐 수 없었다.
또한 열흘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글을 읽는다 해도 흐려지지 않을 엄청난 정신력도 갖게 되었다.
게다가 탁옥룡의 피 한 방울, 살 한 점이 모두 영약이라 할 수 있으니 그 또한 신비로운 일이었다.
3
십주야(十晝夜)가 지나갔다.
탁옥룡은 열흘 내내 미동도 않고 잠에 취해 보냈다. 죽음보다 깊은 잠이었다.
열하루째 새벽이 될 때였다.
"하암……!"
빙하곡이 하품소리와 함께 깨어났다.
탁옥룡은 길게 기지개 켜며 눈을 떴다. 찰나적으로 섬전(閃電)을 방불케 하는 안광이 번쩍 나타났다가는 사라져
갔다.
그는 주위가 아주 환하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 해는 아직 뜨지 않았는데 이렇게 환히 보이다니……, 내가 어두움을 뚫어보는 안력을 지니게 되었단
말인가?"
탁옥룡은 감탄해 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몸이 새털같이 가볍게만 느껴졌다. 십수 년간 문약(文弱)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탁옥룡에게 있어 사지백해에 힘이
솟구치는 느낌은 정녕 신선한 것이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후려친다면 단단한 얼음을 깨뜨릴 수 있을 것 같구나. 인형설삼을 먹고 힘이 몇 배 세어진
듯하니 역시 영약은 영약이다!"
탁옥룡은 기뻐하다가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예전의 절망감을 잊은 지 오래였다. 충분히 탈출할 자신감에 가슴이 든든해졌다.
"꼭 나간다. 그리고 세상을 혼란시키는 무리들을 모두 쓸어버릴 것이다. 탁가장의 원수 옥룡마궁은 초토로 화할
것이다. 백 년이 아니라 천 년이 지나더라도 나의 복수심은 흐려지지 않으리라!"
그는 맹세를 하고 또 맹세를 했다.
하늘에서는 수일 간 멈추었던 눈발이 다시 날리기 시작했다. 지진으로 인해 그 모습을 드러냈던 빙하곡은 이제
얼마 후 눈에 파묻혀 또다시 설곡으로 화해 버릴 것이다.
탁옥룡은 빙하곡을 벗어날 작정으로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인형설삼으로 인해 전보다 백 배 좋아진 안력 덕에 그는 절벽 사이에 틈이 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엄청난 지진 때문에 절벽에 금이 갔었구나. 흠……, 저 사이를 통해 간다면 이 음침한 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도 같다."
탁옥룡은 절벽 틈바구니로 향하다 한 곳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두터운 얼음에 둘러싸여 있는 홍의인의 시신
때문이었다.
"살게 된다면 저 분을 묻어드리겠다고 맹세했었지."
탁옥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체 곁으로 다가갔다.
아무런 연장도 없이 얼음을 깨고 시신을 꺼내는 것이 힘든 일이었다. 그는 믿을 것이라고는 자신의 주먹뿐이라
여기며 주먹이 으스러져라 불끈 거머쥐었다.
손이 부르르 떨리며 강한 힘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에― 잇!"
탁옥룡은 기합소리를 내며 얼음에 주먹을 쳐댔다.
주먹에 얼음이 닿는 찰나 폭음이 일어났다. 쇳덩이같이 단단하던 얼음이 산산이 박살나 깨지면 안에 있던
홍의인의 시체가 앞으로 넘어졌다.
탁옥룡은 얼른 시체를 받쳐 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와아……, 나의 힘이 이렇게 강해졌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강한 힘에 스스로 감탄하며 홍의인의 시체를 반듯이 눕혔다.
홍의인의 시체는 강시(疆屍)였다. 빳빳이 얼어죽은 시체에서 전해지는 느낌은 차갑고 단단한 쇳덩이 같았다.
"이런 복식은 수백 년 전에나 사용하던 것인데……? 흠,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에나 입었던 옷인 것
같군. 그렇다면 근 천 년 전의 복장이 아닌가?"
탁옥룡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죽어 있으면서도 눈빛을 거두지 않는 홍의인의 눈까풀을 감겨주기 위해서였다.
이때 아주 가벼운 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응……?"
탁옥룡은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홍의인의 불끈 쥐어져 있던 오른 주먹이 활짝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로 빛나는 물체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얼핏 보아 비녀(簪)였다. 투명한 핏빛 옥으로 만든 것인데 길이는 두 치 정도였다.
"이렇게 신령한 빛을 내다니……, 왜 이것이 이 사람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을까?"
탁옥룡은 혈옥차(血玉 )를 손에 쥐었다.
그 느낌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혈옥차 표면에서 홍채(紅彩)가 아른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 빛에 안력이
희미해져 무늬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배(紙背)를 철할 안력을 지니게 된 탁옥룡인지라 광채로 인해 흐릿해진 혈옥차 표면의 무늬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魔王簪(마왕잠)>
비녀의 머리 부분에 새겨진 글이 그것이었다.
"섬뜩한 이름이다. 어이해 비녀의 이름을 마왕이라고 했을까?"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비녀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또 다른 글씨가 새겨져 있는지 살폈다.
그는 마왕잠이라고 쓰인 뒤쪽에서 흠집 비슷하게 남아 있는 몇 개의 글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손톱으로 새긴
글인데 깨알보다 가늘었다.
<불가삼신승(佛家三神僧)의 협공(協攻)을 얕잡아본 것이 후회스럽다.>
내공을 실낱보다 가늘게 뽑아낼 수 있는 초고수가 아니라면 작은 마왕잠 위에 장문(長文)의 글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글은 계속 이어졌다.
<더욱 분한 것은 천하마공(天下魔功)을 집대성한 지존마공(至尊魔功)이 본좌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신승의 후예들이 천하를 주름잡을 것이고 본좌의 이름은 차차 잊혀지리라.
억울하게도 후사를 두지 못했으니 그 누가 본좌의 복수를 해줄 것인가? 언제고 인연 있는 자가 본좌의 신물(信
物)인 마왕잠을 찾는다면 이 글을 보리라 믿는다.
그대는 마왕동주(魔王洞主)에 인연(因緣)이 있는 사람이다. 사천성(四川省) 구정산(九頂山) 칠선봉(七仙峯)
으로 가라. 자야(子夜)에 마왕동부(魔王洞府)를 연다면 본좌의 진전(眞傳)을 구경할 것이다.
그대의 근골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것이라면 그대는 제이의 마중지존(魔中至尊)이 되리라.
빙하곡에서 죽어가며 마중지존이 적는다.>
그런 내용이 마왕잠 뒤쪽으로 가득 덮고 있었다.
탁옥룡은 안광을 집중시켜 마왕잠 위의 글을 다 읽은 후 신비감에 도취되었다.
"마중지존이라……. 흠, 정말 거창한 이름이다. 이 사람은 아마도 선인(善人)은 아닌 것 같구나.
불가삼대신승에게 죽었다고 쓴 것으로 보아 삼대신승이란 분들이 이 분의 악행을 보다 못해 죽였을 것이다."
탁옥룡은 제나름대로 상상하며 마왕잠을 품에 넣었다.
그는 강호무림에 대한 문외한이었다. 만일 그가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마중지존이라는 전설적인 마왕의
존재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마중지존(魔中至尊)!
무림사상 더 강할 수 없다는 마의 제왕과의 연분은 이렇게 시작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그 복연을 실감하지 못했다.
탁옥룡은 동토(凍土)를 깨고 시신을 묻었다. 그리고 눈을 맞으며 절을 올렸다.
"당신이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당신의 뜻은 나에 의해 전해질 것이오."
4
천하가 아주 시끄러워졌다.
옥룡마궁의 발호 때문이고 천 년만에 처음이라 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 때문이었다.
풍운을 부채질한 것은 포달랍궁(包達拉宮)의 중원침입이었다.
과거 옥룡마궁이 정파의 태두(泰斗)였을 시절, 옥룡마궁주와 싸워 양패구상한 바 있던 사람이 바로 현재의
포달랍궁주였다.
그는 옥룡마궁이 봉문을 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수하들을 중원으로 보내 옥룡마궁의 강호장악에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포달랍궁은 중원에 분타를 만들지 않았다. 그럴 경우 중원인의 오해를 사기 쉽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들은 천하 각대문파 중 옥룡마궁에 원한을 갖고 있는 문파의 장문인들에게 한 장의 배첩을 전했다.
<본 궁은 중원무림계에 끼여들어 세력을 차지하기 위해 중원으로 나온 것이 아니오.>
혈미륵(血彌勒) 모찰륵(牟刹勒)이 쓴 글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본인은 사적인 일로 인해 강호에 포달랍궁의 승려들을 들여보냈소. 천명하건대, 본궁의 승려들은 오직 마궁의
고수들만을 상대할 뿐 타파 사람들과는 자웅을 겨루지 않을 것이오.
만에 하나 옥룡마궁 사람이 아닌 타파 사람과 싸우는 본 궁의 승려가 있다면 그 명단을 천하의 어떤 주루든 간에
방(榜)을 써서 붙이시오. 자초지종을 알아본 후 궁법(宮法)을 어긴 자임이 밝혀진다면 그자의 목을 잘라 해를
입은 사람의 가족에게 보내겠소.
본궁이 바라는 것은 공야무군(公冶武君)이 수급뿐이오. 그것을 얻는다면 미련 없이 중원을 떠날 것이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금검(金劍), 은검(銀劍), 동검(銅劍), 철검(鐵劍)의 승려들이 하는 일에 방해를 말라는
것이오.>
포달랍궁은 중원무림계 전체와 싸우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무공이 중원의 어떤 문파보다도 뛰어나다는 자부심을 숨기려 하지도 않아 유아독존격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도 중원인들에게 있어서는 가뭄의 단비 같은 일이었다.
옥룡마궁의 횡포에 숨죽이고 있던 강호문파들은 양대거파의 격돌 속에서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한세가(恨世歌)가 지어져 강호무림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 마궁(魔宮)은 피로 세상을 씻고, 포달랍궁은 피로 마궁을 씻는다.
오호라, 소림(少林)은 어이해 봉문(封門)인가. 차라리 모두 악몽(惡夢)이기를!
힘이 없어 마궁에 저항하지 못하는 협도인들이 신세를 한탄하며 부르는 노래였다.
천하 정세는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싸움은 양궁지전(兩宮之戰)으로 축소되었다.
옥룡마궁 측으로서도 언젠가는 포달랍궁이 중원으로 오리라 예견하고 있었기에, 이역사단(異域四團)의 흉맹(兇
猛)한 오랑캐 고수들을 보내 그들을 막게 했다.
회회공자(回回公子)의 이름이 그로 인해 욱일승천(旭日昇天)했다.
그는 포달랍궁의 고수 이십사 명의 협공을 한 자루 반월신도(半月神刀)로 막아냈다는 전설을 만들었다. 그의
무공은 이역사단주 중 가장 빼어났다.
그의 신도법은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의 존재와 더불어 옥룡천자 역시 더욱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런 수하를 거둘 수 있는 그의 능력 때문이었다.
옥룡천자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아직 이름과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구존(九尊)과 더불어 천하정세를 논하며 은둔생활중이었다.
아직 자신이 나설 때는 아니기 때문일까?
혈미륵이 나타나면 자신도 나타나겠다는 듯 그의 얼굴은 천하일비(天下一秘)로 불려졌다.
그의 얼굴이 부서졌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어떻게 부서졌는지가 비밀일 뿐 그의 얼굴이 부서졌기에 천하가 부서졌다고 서슴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허다했다.
철서생(鐵書生)과 혈미륵(血彌勒)!
옥룡마궁주와 포달랍궁주 두 사람만이 천하의 인걸(人傑)인 듯한 가운데 세 가지 신기한 일이 입에서 입으로
소문났다.
<대파산(大巴山)에 옥룡마궁도들의 묘(墓)가 있다. 벌써 일천 명이 죽어 시산(屍山)을 쌓았다.>
정말 놀라운 소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곳은 천시대묘(千屍大墓)라 불렸다. 무림금지(武林禁地)라고도 불렸고, 달리 마인지묘(魔人之墓)라고도
불렸다.
그곳을 본 사람은 없다. 그 자세한 위치를 아는 사람도 없다.
다만, 옥룡마궁 사람으로 그 근처를 지나치는 사람은 영락없이 실종된다는 것이다.
그 안에는 옥룡마궁에 지독한 원한을 가진 사람이 숨어산다고 했다.
제법 무공이 고강한 옥룡마궁의 궁도들이 그 소문을 비웃으며 찾아갔지만 그들 역시 실종되고 말았다.
가기만 하면 불귀지객(不歸之客)이 되는 천시대묘(千屍大墓)!
그것이 바로 첫 번째 비밀이었다.
둘째 비밀은 봉문한 소림사 안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절기를 무수히 실전(失傳)시켜 종이호랑이가 된 소림사가 봉문한 상태에서 은밀히 힘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옥룡마궁이 십오 년 봉문한 상태에서 백 배 세력으로 자란 일이 소림사에서 되풀이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세 번째 비밀스러운 일은 사천성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아주 신비한 일이었다. 처음 그 일을 목격한 사람의 말을 빈다면 이렇다.
<구정산(九頂山) 전역이 보기(寶氣)에 싸였다. 특히 자시(子時)가 되면 보기가 너무도 엄청나 눈이 멀 정도다.
그 빛을 핏빛이다.>
사천성 구정산에서 무가지보(無價之寶)가 나타났다는 말은 천하정세에 영향을 끼칠 만했다.
그 보물을 얻는 문파는 마궁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해진다는 근거 없는 풍설까지 나돌자 더욱
시끌시끌해졌다.
너도나도 사천행(四川行)이었다.
그것을 얻은 문파는 바로 천하제일문파(天下第一門派)가 되리라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대파산 천시대묘와 소림사의 의혹은 구정산의 신비로움에 비할 때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할 정도였다.
천하는 너무도 광활하다.
수만 명으로 이루어진 옥룡마궁, 포달랍궁이었지만 남칠십삼개성 구석구석을 모두 점거할 수는 없었다.
구정산에서 일이 그것을 증명했다.
천하가 시끄러워져도 나서지 않았던 수많은 기인이사들이 구정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막신타자(大漠神舵子)와 벽안서시(碧眼西施)!
미추(美醜)에 있어 쌍절(雙絶)이라 불렸던 두 명의 세외고인이 소문을 듣고 구정산에 나타났다고 했다.
그들은 육십 년 전부터 죽었다고 소문난 사람이었다.
옥룡궁의 창시자인 옥룡대제의 설혈쌍도(雪血雙刀)에 패해 다시는 무림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한 그들이었다.
그런 전대마두들마저 구정산 어귀에 모습을 나타내자 사람들은 구정산에 진짜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모두 아연실색했다.
그들의 시신은 칠선봉(七仙峰) 정상으로 가는 어귀에서 발견된 것이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다
썩은 시체로 화한 상태였다.
그 일이 있은 후에도 네 명의 기인이 구정산으로 향했다.
절대독왕(絶代毒王)!
고독(蠱毒)과 부시독(腐屍毒)으로 천하를 질타했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독존(毒尊)이라는 천하제일독(天下第一毒)과 더불어 무림쌍독(武林雙毒)이라 불렸던 사람이다.
독존이 죽었다고 소문난 후 그는 자연스럽게 천하제일독이 되었다. 그의 거처는 옥룡마궁이라도 범접하지 못할
금지가 된 절도였다.
천산신의(天山神醫) 오두평(吳斗平)!
새화타요 무림의 편작(扁雀)이라 불리던 사람이 구정산으로 온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는 오래 전 철서생에게 죽은 천산환영궁주(天山幻影宮主)와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은 사람이었다.
환영궁주는 철서생 손에 죽었고 환영궁은 그로 인해 멸절(滅絶)되었다. 천산신의는 그 일로 인해 충격을
받았는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그가 구정산에 모습을 드러냈다.
광개(狂 )!
세 번째 기인인 그는 개방( ) 최고 배분이었다. 현임 개방주는 그에게 사손(師孫) 뻘이었다.
그의 나이는 백오십 세에 달했고, 독주(毒酒)와 구육(狗肉)만 갖고 있으면 비록 무덤 안쪽이라 해도 극락같이
산다는 광개가 팔십 년만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대체 구정산의 보기(寶氣)는 어떤 것이기에 세상에 까맣게 잊고 살던 기인들이 속속 나타난단 말인가.
네 번째 기인 역시 구정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그는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그만한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第五章 천하기인(天下奇人)들의 최후
소년은 추레한 옷차림을 하고 구정산에서 백 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있었다. 얼굴이 아주 추악한 흑의인인데
나이는 십오 세에 불과했다.
그는 불타는 듯한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온 천하를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소문에 끌려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아, 마중지존(魔中至尊)의 절기를 얻는다면 모든 한을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아주 낭랑했다.
그는 바로 탁옥룡이었다. 여량산을 떠난 지 보름만에 구정산이 멀리 보이는 곳에 이른 것이다.
오는 도중에 그는 어렴풋이나마 전설상의 마왕인 마중지존에 대해 듣게 되었다. 워낙 오래 된 천 년 전의 얘기라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고강한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구정산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구정산에 보물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수차 듣게 되었다.
"우연치고는 이상한 우연이다. 마왕잠을 얻고 겨우 목표를 정했다 싶었는데 이런 소문을 듣게 되다니……."
그는 고개를 저으며 머리 위쪽에 손을 댔다. 마왕잠은 그의 머리를 고정시키는 비녀 삼아 쓰이고 있었다.
탁옥룡은 얼음보다 차가운 마왕잠을 한참 동안 쓰다듬다가 부지런히 걸었다.
그는 자신의 목적지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는 사실에 상당한 부담감을 가져야 했다.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속속 운집되고 있다면 자칫 마왕지존의 유물을 뺏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뜨거운 차 한 잔 식을 시간이 지났다.
탁옥룡은 소로를 따라 걷다가 유람객들을 부르고 있는 작은 마을 어귀로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 마을은 본래
한산한데 지금은 낙양(洛陽)이나 개봉부(開封府)같이 번잡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무사들이었다.
"옥룡마궁측에서도 보기(寶氣)의 신비함에 끌려 밀사(密使)를 보낼 예정이라네. 보물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보물은 조만간 옥룡마궁의 손에 들어갈 것이야."
"헤헤……, 그렇지 않을 걸세. 보물은 하늘이 정한 주인이 있는 법이 아닌가? 천하의 반을 얻은 옥룡마궁이나
인심을 얻는 데에는 실패했고 공적(公敵)이 되었으니 보물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네."
사람들이 떠들며 지나쳐 갔다.
그들은 탁옥룡을 슬쩍 바라보다가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문둥이를 본 듯한 혐오스러운 표정들이었다.
탁옥룡은 그다지 노여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 남에게 추악감을 주어 남이 자신을 볼 때마다 구역질을
한다는데 아주 익숙한 상태였다.
그러나 원한이 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 빚을 꼭 갚겠다. 무사가 된다면 제일 먼저 옥부용을 찾아 그 계집의 얼굴을 짓뭉개 버릴 것이다.'
그는 옥부용의 얼굴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번잡한 거리를 타고 아주 구수한 육향(肉香)이 후각을 자극했다.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이층 주루가 있었다.
<仙居樓(선거루)>
제법 커다란 현판을 달고 있는 주루 안에서 풍기는 고기 굽는 냄새는 탁옥룡의 허기진 배에 쪼르륵 소리를 더했다.
"인형설삼 기운으로 십여 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텼지만 이제는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구나. 그러나 탁가의
후예로 어찌 빌어먹을 수 있는가?"
탁옥룡은 먼지뿐인 주머니를 뒤져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주루에서 멀리 떨어진다면 허기가 없어지지 않을까 했지만, 창자에서는 천둥 치는 소리가 나고 콧구멍은 고기
냄새를 조금이라도 더 맡기 위해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탁옥룡이 허기진 표정으로 주루를 스쳐 지나가려 할 때였다.
"허어……, 보기 드문 근골(筋骨)이로다. 몸 전체에서 신광(神光)이 일다니……. 이곳에서 인중룡(人中龍)을
볼 줄이야."
연달은 감탄사와 함께 탁옥룡의 어깨 곁을 스치며 가로막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흐음……, 상처가 크구먼?"
그는 탁옥룡 앞에 서서 동정심을 표했다. 그것은 탁옥룡이 얼굴이 망가진 후 처음 듣는 인정스러운 말이었다.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누런 베옷을 걸친 노인이었다.
아주 청수하게 생긴 노인인데 큼지막한 나무 상자를 쥐고 있어 이채로웠다.
'나를 보고 감탄했단 말인가?'
탁옥룡이 얼떨떨해 할 때였다.
"사부, 제자는 배가 몹시 고파요."
아주 영롱한 목소리가 나며 푸른 그림자 하나가 탁옥룡의 머리 위를 타넘어 노인 바로 곁으로 떨어져 내렸다.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내린 미소녀는 노인의 왼쪽 소매를 붙잡고 늘어졌다. 미소녀는 취의(翠衣)를 걸치고
있는데, 옷매무새와 얼굴 생김새가 너무나도 깜찍하고 귀여웠다.
두 개의 진주알 같은 눈망울이 특히 아름다웠고 상당히 오똑한 코와 오만한 기운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강했다.
"사부, 천산(天山)에서 여기까지 오는 중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잖아요? 저기 가서 홍소육
(紅燒肉)과 해삼탕(海蔘湯)을 먹자고요."
취의소녀의 응석은 황의노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게 했다.
"허허……. 옥지(玉芝)야, 너의 응석은 천산에서보다 더하구나."
"얼마 후면 무가지보가 사부님 것이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 사도(師徒)의 무공은 천하제일이 되겠지요. 호호
……, 그렇게 되면 환영궁(幻影宮)의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讐)인 공야무군(公冶武君)의 수급은 아주 쉽게
취할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소녀는 당세제일인인 옥룡마궁주 옥룡천자의 목을 자르겠다는 말을 함부로 내뱉았다. 그것은 자칫 살신지화를
불러일으킬 만한 말이기도 했다.
노인은 제자가 끔찍한 말을 하는 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 허기를 채우자꾸나!"
그는 미소녀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탁옥룡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신기를 담고 있었다.
"자네의 상처는 아주 심한 것이네. 하지만 약을 잘 쓴다면 나을 수 있네."
"상처가 낫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탁옥룡은 그의 호의에 감복해 두 손을 모았다.
"허허……, 괜찮다면 함께 식사를 하지 않겠는가?"
노인의 손이 주루 쪽을 가리켰다.
탁옥룡은 너무도 허기진 터라 황송해 고개를 끄덕이려 하다가 갑자기 입술을 다물었다.
옥지라고 불린 미소녀의 눈빛이 그를 냉담하게 만들었다.
'나를 모멸하고 있다.'
탁옥룡은 자신에게 집중된 옥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조롱에 가슴이 뒤틀렸다. 그는 애써 감정을 억제하며 정중히
사양했다.
"호의나마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호오, 대가 센 아이로군.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나저나 보기(寶氣)에 현혹되어 왔다면 당장
걸음을 돌리도록 하게, 이곳은 용담호혈(龍潭虎穴)이라네."
노인은 손가락으로 구정산 중 가장 높은 봉우리 하나를 가리켰다. 그 봉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은은한 홍채(紅彩)
로 덮여 있었다. 노을보다 수백 배 밝은 빛이고 아주 신비로웠다.
"오……, 저것이구나!"
탁옥룡은 보기에 현혹되어 입을 크게 벌렸다. 그 빛은 이상하게도 낯이 익었다.
'그래, 마왕잠의 빛과 너무도 닮았다.'
탁옥룡이 감탄을 하고 있을 때였다.
"흐음, 모를 일이로다. 어린 녀석의 출현이 천기(天機)에 어떤 작용을 하기에 구정산의 보기가 최절정에 달한단
말인가?"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의노인과 미소녀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생면부지의 앉은뱅이 노인 하나가 손바닥으로 몸을 이동시키며
다가서고 있었다.
노인은 단 한 손바닥만으로도 몸을 날렵히 이동시켰다. 다른 손에는 큰 고깃덩어리가 쥐어져 있었다.
"쩝쩝……, 역시 고기는 개고기가 제일이여."
노인은 고깃덩어리를 입안에 넣고 죽죽 찢어먹으며 탁옥룡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는 거지였다. 흰 머리카락이 세 자 넘는 길이로 흐트러져 등판을 덮고 있었다.
눈가에서는 진물과 고름이 흘러내렸고 손등이며 얼굴 피부 위에는 검고 붉은 종기가 무수했다. 가히 추물 중의
추물이라 할 만했다.
"아마도 네놈은 구정산의 보기와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다. 흠……, 노부가 만에 하나 보물에 눈독을 들이고
여기 온 사람이라면, 네놈의 살가죽을 홀랑 벗겨서라도 어떻게 보기를 더욱 강하게 했는지 알아봤을 것이다."
거지 노인의 목소리는 아주 거칠었다.
탁옥룡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뉘시온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흐흐……, 노부는 광개(狂 )다."
아……, 광개라면 전대의 대기인 중 하나가 아닌가?
그는 불쑥 고깃덩어리를 내밀었다. 먹음직스러운 고기 냄새가 탁옥룡의 후각을 자극했다.
"다른 것은 모르나 노부는 굶은 사람을 분간하는 데에는 재간이 있다. 천산신의(天山神醫)의 식사 대접은 거절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흐흐……, 이 미친 거지의 개고기 대접은 거절하지 못한다."
그가 쥐고 있는 것은 들개의 뒷다리였다. 고깃덩어리에는 광개의 침이 번질번질 묻어 있었다.
탁옥룡은 구역질을 느꼈다.
그가 겪어본 것 중 가장 더러운 대접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양하지 않았다. 더러운 몸뚱이와 침이 묻은
개다리이지만 그를 위한 후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탁옥룡은 그것을 얼른 받아 한 입 덥석 물어뜯었다.
"보통 놈이 아니구나. 흐흐……, 이런 곳에서 마음에 드는 녀석을 만나게 될 줄이야!"
광개는 탁옥룡이 타액 묻은 개다리를 건네 받고 맛있게 먹자 박장대소를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너는 노부가 본 녀석 중 세 번째로 뛰어난 놈이다."
"애석합니다, 첫째라면 모르나 어이해 셋째라 하십니까?"
"흐흐……, 아직 진흙을 털지 못했기에 세 번째로 칭했다. 진흙을 털어 버린다면 노부가 본 기재 중 최고다."
탁옥룡은 사뭇 궁금함을 금치 못했다.
"다른 두 사람은 누구 누구 인지요?"
"소림일심행(少林一心行)과 환영궁(幻影宮)의 환영서생(幻影書生)이다. 둘 다 세상에서는 찾지 못할
사람들이지."
두 사람의 이름은 탁옥룡에게 낯선 것이었다.
광개는 침방울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일심행은 소림 장문인이 되어야 할 몸으로 무작정 면벽(面壁)에 들어 소림 최고절기 천강복마수(天 伏魔手)를
절전(絶傳)케 했으니 백도죄인(白道罪人)이다. 환영서생은 음약(淫藥)을 먹고 사매(師妹) 환영선자(幻影仙
子)를 강제로 범해 그 벌로 무공을 잃고 파문(破門)당해 사라진 환영궁의 죄인이지."
"두 사람이 다 사라졌다면, 하하……. 제가 곧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겠군요?"
"흐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탁옥룡은 넌지시 물었다.
"현 천하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옥룡천자가 아닙니까? 그는 왜 말하지 않습니까?
"그는 광마(狂魔)다. 사람의 범주를 넘은 자다. 무수한 마두들을 끌어모아 옥룡궁의 전통에 먹칠을 한 아주
고약한 자다."
광개의 눈에서 원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마궁에 원한이 있군요?"
탁옥룡은 개다리 뜯어먹기를 멈췄다.
"흐흐……,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세히 말한다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 왔다고
할 수 있다."
"확인이라니요?"
"흐흐……!"
광개는 대답 대신 기괴한 웃음을 흘리고는 탁옥룡의 몸을 또 한번 살폈다.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준다면 네게 노부가 여기 온 사연을 말해주겠다. 어떠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느냐?"
"어떤 부탁입니까?"
"별 것 아니다. 노부를……, 이제부터 노형(老兄)이라 부르라는 것이다."
"예에……?"
탁옥룡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연배로 따진다면 그는 자신의 양부조차 할아버지라 칭해야 할 정도로 늙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초면에 불쑥
결의형제를 맺자는 제안에 할말을 잃었다.
"흐흐……,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으나 쓸 만한 사람은 없다. 백 수십 년만에 정말 쓸 만한 사람을 만나
망년지우(忘年之友)로 삼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제가 어찌 할아버지를 형이라 부르겠습니까?"
"전통에 속박된다면 대장부가 되지 못한다. 당장 노형이라 부르거라!"
광개의 말은 아주 엄숙했다.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탁옥룡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 마음을 정한 듯 옷깃을 여미고는 정중히 배례의 자세를 취했다.
"좋습니다, 노형님! 개다리 하나를 얻어먹은 아우 탁옥룡이 처음으로 노형님께 절을 드립니다."
탁옥룡은 무릎을 땅에 대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허리를 펴고 말았다.
광개의 손바닥에서 무형강기가 일어 그를 막은 것이다.
"마음으로 정했으니 무슨 형식이 필요하겠느냐? 앉거라."
탁옥룡은 붕 떠올랐다가 가부좌를 한 채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
'내 몸을 공깃돌 놀리듯 하다니, 이 분은 절세고수(絶世高手)시다. 아……, 이 분의 절기를 전수받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탁옥룡은 자신이 기우(奇遇)에 접했음을 알고 저으기 흥분했다.
광개의 표정은 의외로 진지했다.
"노부는 개방죄인( 罪人)이다."
"죄인이라니요?"
"그렇다. 지금 옥룡마궁의 충견(忠犬) 중의 충견인 수만 명 개방제자들에 대한 죄인이다."
"개방도 마궁에 속합니까?"
"그렇다. 이역사단은 주로 살인을 맡고 있고, 개방은 연락을 맡고 있다. 개방도들이 마궁의 수족이 되지
않았다면 마궁은 천하도처에 흩어져 있는 여러 마두들을 끌어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표정은 안쓰러울 정도로 침통했다. 그는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아……, 그들은 마궁을 따른다기보다 십절죽부령(十絶竹符令)에 복종하고 있다. 이역사단이 그들 조종(祖宗)
들의 유언에 따라 마궁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듯 말이다."
탁옥령은 아직 강호의 지식이 미흡했다.
"십절죽부령이라니요?"
"그것은 개방 최고 권위를 지닌 것이다. 태상방주(太上 主)의 신물(信物)이기도 하지."
"으음, 대단한 신물이군요."
"지금 그것의 주인은 개존( 尊)이라는 자다. 그는 옥룡구존(玉龍九尊) 중 하나이고 천자호법(天字護法)에
속한다."
"그 사람은 노형님과 아는 사이입니까?"
광개는 회한 어린 괴소를 흘렸다.
"알다 뿐이냐? 흐흐……, 사실 그 녀석은 노부에게서 무공을 배웠다."
"예에, 그렇다면……?"
"그 녀석은 노부의 전인으로 사십 년을 보냈다. 하지만 성질이 포악해 결국 노부의 손에 의해 제명(除名)
당했었지."
탁옥룡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되었다.
"아……, 놀라운 일이군요."
"비참한 일이지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 녀석은 그 일로 인해 개방을 원망했고 노부를 저주했다. 놈이
영부의 주인이 되어 개방도들을 함부로 다루고 있는 이유는 그때의 원한이 지극히 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찌 그 사람의 물건이 되었는지요? 그는 제명당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비밀을 풀기 위해 여기 왔다."
광개는 말하며 두 다리를 쓸었다.
넓적다리 위쪽에서부터 흐물흐물 녹아 버린 두 다리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십 년 전이다. 노부는 은거지에서 지독한 독에 당했다. 덕분에 두 다리를 잃고 말았다. 원래는 죽어야 했는데
몸뚱이가 단단해 독에 녹지 않았던 것이다."
"누… 누가?"
"그것은 모를 일이다. 그는 노부가 갖고 있던 십절죽부령을 훔치기 위해 노부를 독으로 암산했다. 그런 독을 쓸
사람은 천하쌍독(天下雙毒)뿐이다. 분명 천하쌍독 중 한 사람일 것이다."
탁옥룡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사람들의 명호가 거론될 때마다 다시금 그들의 존재를 되물어야 했다.
"천하쌍독은 누굽니까?"
"독존(毒尊)과 절대독왕(絶代毒王)이 바로 천하쌍독이다. 노부가 여기 온 이유는 절대독왕이 이곳에 왔다는
소문 때문이다. 그가 나를 해하고 나서 영부를 훔쳐 개존에게 전했는지를 알고 싶어 온 것이지. 한데 이상한
것은 절대독왕과 마궁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것이다."
광개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독존이 더 유력한 흉수이나 그는 이미 죽었다고 소문이 난 상태다. 이십 년 전 옥룡대제(玉龍大帝)와 싸우다
양패구상한 이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독은 천하제일이지. 옥룡대제가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죽은
이유는 독존과의 싸움에서 입은 독상이 도졌기 때문이다."
그는 무림의 비밀을 아주 많이 알고 있었다. 비록 천하에서 가장 해박하다 할 수는 없지만 그는 이갑자 이래 살아
있는 무림의 역사라 할 수 있었다.
그는 탁옥룡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다음 품 안에서 누런 양피지 비급 한 권을 꺼냈다.
"보기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노형은 떠나야겠다. 이것은 네게 주는 선물이다."
"무엇입니까?"
"허허……, 너 같은 기재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것이다."
광개는 껄껄 웃으며 비급을 전했다.
< 十大絶學(개방십대절학)>
겉장에 그런 글이 쓰여 있었다.
탁옥룡은 한눈에도 그것이 개방이라는 강호거파의 절기가 수록된 비급임을 알 수 있었다.
"아……, 이 귀한 것을……?"
"너는 천운(天運)을 타고났다. 장차 큰 사람이 될 것이다. 그때 개방을 도와달라는 의미에서 너와 결의형제를
맺은 것이다. 만에 하나 노형이 절대독왕에게서 의문을 풀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네가 노형의 유지를 이어받아
개방의 십절죽부령이 마궁에 들어간 연유를 알아봐 주기 바란다."
광개는 말을 마치고는 손바닥으로 땅을 쳤다.
"허허허……, 세상의 기재를 동생으로 두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도다!"
광소성과 함께 그의 몸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는 취선유영(醉仙遊影)의 신법을 시전해 순간적으로 아주
멀리 사라져 갔다.
"아……, 기인이시다."
탁옥룡은 혀를 내두르며 비급으로 시선을 돌렸다. 개다리를 건네던 따뜻한 온정이 책에 담뿍 담겨 있었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신공기초가 수록되어 있었다.
타구봉법(打狗棒法), 포박술, 권장지법(拳掌指法), 취팔선보(醉八仙步)를 비롯한 개방 비전절예가 깨알만한
글자로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나 하나가 대단한 절기였다.
천하제일의 절기로는 부족하지만 강호고수가 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절기들이었다.
'이 절기를 익힌다면 최소한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겠다.'
탁옥룡이 그것을 매만지며 감탄의 눈빛을 흘리고 있을 때 어둠을 뚫고 스쳐 지나치는 흑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그
사람은 순간적으로 탁옥룡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단히 빠르다. 노형님에 비길 만하다?"
탁옥룡이 흑영이 사라져 간 쪽을 바라보며 혀를 내두를 때였다. 뒤쪽에서 다시 한 번 경미한 소리가 났다.
"으음……, 아직 떠나지 않았구먼?"
낯익은 음성이 고막을 때렸다. 잠시 전에 만났던 황의노인이 나타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색은 백지같이 창백했다.
"할아버지, 어인 일이십니까?"
탁옥룡이 깜짝 놀라 묻자 황의노인의 눈에서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혹시 검은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을 못 봤나?"
"봤습니다. 아주 빨리 저쪽으로 갔습니다."
"으음……, 한 발 늦었군."
황의노인은 탄식하며 몸을 휘청였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쉬다가 탁옥룡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에게 추태를 보여 미안하네!"
"아닙니다. 한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제자 아이가 납치당했네."
"예에……?"
황의노인은 비통한 표정이 되어 탄식했다.
"구정산으로 온 것이 잘못이었네. 아아……, 공연한 허욕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기연을 얻기 위해 온 것이
실수였네."
"누가 그 소녀를……?"
"절대독왕이란 자일세."
탁옥룡은 다시 한 번 그 명호를 듣고는 나직이 외쳤다.
"절대독왕?"
"그 자는 오래 전부터 노부를 경쟁 상대로 여기고 있던 자네. 공교롭게도 그 자의 독공과 노부의 의술은 견원지간
(犬猿之間)이었네. 그는 노부가 보물을 취할까 두려워 제자 아이를 납치해간 것이네.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서지."
황의노인은 사실은 천하의 기인이었다.
그는 천산신의(天山神醫)라는 불리는 천하제일의 신의로 당세의 성자였다.
목이 잘린 자가 피를 흘리기 전이라면 회생시킬 수 있을 정도라 했다.
천산신의는 탄식하다가 보기에 휩싸여 있는 산 위를 응시했다.
"저 신비한 보물은 절대독왕에게 가기 쉽네. 아……, 정말 애석한 일이라네. 의형(義兄)의 원한을 풀려면 필히
무가지보를 취해야 하는데……."
"의형은 어느 고인(高人)이신지요?"
"환영신군(幻影神君)이네. 그는 옥룡천자가 철서생으로 행세하던 시절 무참히 살해당한 정파의 기인이네.
노부가 천산에 숨어살다 여기 온 이유는, 마궁주를 죽이기 위한 무공이나 보물을 얻어 그 아이에게 주기
위함이었는데 모두 수포로 돌아갔네. 의술로는 구하지 못할 타락한 세상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네."
천산신의는 아주 상심한 상태였다.
그는 절대독왕에게 제자를 납치당했다는 데에서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마저 상실하고만 것이다.
일패(一敗)란 범인들에게 있어 흔한 일이다. 하지만 천산신의 같이 자부심 많은 기인에게 있어 패배했다는
사실은 지극히 괴로운 일이었다.
"독공일로(毒功一路)에 든 자가 의술일로(醫術一路)에 든 노부를 능가하다니……, 이것이 쓸데없는 책이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천산신의는 탄식하다가 품안에서 책자 한 권을 꺼냈다.
<天山醫書(천산의서)>
네 자가 선명한 금박으로 적혀 있었다.
천사신의는 분을 못 이기고 그것을 찢으려 하다가 탁옥룡의 맑은 눈빛을 보고는 생각을 돌린 듯 책자를 내밀었다.
"받게."
"예에? 어찌 제가 이 것을 받겠습니까?"
"허허……, 노부는 이제부터 의원이 아니네. 보물 구하는 일에 실패했으니 복수행을 시작하는 일이 목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네. 노부는 이제부터 살인자가 될 것이며 의술을 쓰는 의원으로 남지 않을 것이네. 이것을
자네에게 선물할 테니 잘 익혀 자네를 지키고 사람을 구하는데 쓰기 바라네. 당부할 것은 읽고 외운 다음 태워
버리라는 것이네."
천산신의는 씁쓸히 말한 다음 책자를 탁옥룡에게 전했다.
그리고는 눈을 반개한 채 서쪽을 향해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는 천리전음(千里傳音)
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그의 전성이 끝나자 먼 곳에서 광폭한 음성이 들려왔다.
"으하하……, 잘 생각했도다. 손녀딸은 여기 두고 가니 어서 데리고 구정산을 떠나라!"
그 직후 아주 우렁찬 음성이 뒤를 이었다. 바로 광개의 외침이었다.
"으하하……, 독왕! 네놈이 바로 여기 머물러 있었구나!"
천둥 같은 외침이 사라지기도 전에 만균(萬鈞) 뇌정(雷霆)이 떨어져 거석을 박살내는 굉음이 구정산을 들썩였다.
꽈― 꽈꽝!
연이은 폭음이 능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누가 독왕을?"
천산신의가 흠칫 놀랐다.
"저의 노형님이십니다."
탁옥룡이 크게 말하자 천산신의가 아연실색했다.
"소… 소년의 노형이라니?"
"광개라는 분이십니다. 조금 전 저와 결의형제를 맺었지요."
"오……, 광개! 그 분이 살아 계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가보세."
천산신의는 탁옥룡의 완맥을 거머쥐고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순간적으로 한 점이 되었다. 탁옥룡으로서는 숨이 막힐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십수리를 가로질러 칠선봉 아래쪽에 펼쳐져 있는 울창한 숲 앞에 이르게 되었다.
"분명 이쪽에서 들려왔는데?"
천산신의는 탁옥룡을 팔과 허리 사이에 끼여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갔다.
십여 걸음 갔을까?
경미한 바람소리와 함께 두 사람 앞으로 들이닥치는 금포복면인 하나가 있었다.
그의 두 팔을 내밀고 있었는데 녹의소녀 한 명이 들려 있었다.
"옥지야!"
천산신의는 깜짝 놀라며 금포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그는 움찔하며 몸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복면인의 손바닥에서 일어나는 무형강기의 힘이 그를 꽉
눌러버린 것이다.
천산신의의 얼굴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으음……, 태음일원신공(太陰一元神功)을 펼치다니……?"
"눈매가 매섭구나. 노괴는 어떤 자인가?"
복면인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다. 그리고 지극한 한기를 싣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이 알지 못할 희미한 동요를
띠고 있는 눈빛이었다.
"천산에서 왔다.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쌍도지주(雙刀之主)를 죽이자는 것이다."
천산신의가 냉담하게 말하자 복면인은 나직이 웃었다.
"하하……, 환영궁의 벗이었구나. 그렇다면 본좌로서는 싸울 흥조차 나지 않는다. 하수와 싸워 명예를 더럽힐 수
없지."
복면인은 손가락 하나를 튕겼다.
피잉―!
푸른빛이 도는 지력이 쏟아져 나왔다. 그 속도는 가히 전광(電光)이었다.
옷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천산신의의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토록 무서운 고수를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피할 수 없는 수법이다. 너무나도 무서운 공력이고 너무나도 무서운 출수다. 노부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시전하는 듯하구나!'
천산신의는 눈두덩을 꿈틀거리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손가락으로 탁옥룡의 허리춤을 찍었다.
탁옥룡은 바짝 긴장한 상태에서 연마혈(軟麻穴)을 점혈당했다.
"으음……!"
그는 신음소리를 내고 축 늘어졌다.
천산신의는 탁옥룡의 몸을 내려놓고는 복면인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아이다. 죽이지 마라!"
"후후……!"
복면인은 실소를 흘릴 뿐이었다.
"네가 철서생(鐵書生)임을 안다. 너와 싸우고 싶다."
천산신의가 엄숙히 말하자 복면인은 음험히 웃다가 비스듬히 흔들었다.
"어리석은 자! 일초면 승부를 낼 수 있다."
흰 그림자가 뿌려지더니 땅에 누워 있던 탁옥룡의 몸뚱이가 실 끊어진 연처럼 훌훌 날아가 숲으로 떨어졌다.
"네… 네가 어찌 그 아이까지?"
천산신의는 안타까움과 분노에 부르르 떨었다.
"본좌를 본 사람은 죽는 것이 법이다. 나를 따라와라!"
복면인은 차갑게 외치고는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는 바람을 타고 유령처럼 날았다.
천산신의는 주먹을 불끈 쥐다가 탁옥룡이 날아간 쪽을 바라봤다.
"불쌍한 아이……. 장수다복(長壽多福)할 상(相)이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휘휘 젓다가 복면인을 따라 갔다. 그도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났을 때,
"으으……, 지독한 자다!"
숲 속에서 비틀거리며 걸어나오는 피투성이 소년이 있었다.
오공(五孔)으로 피를 줄줄 흘리며 걸음을 옮기는 소년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그는 영문도 알지 못하고 멀리
날아갔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이다.
연마혈의 점혈은 자연히 풀리는 혈도였다.
그가 용케도 죽지 않은 이유는 인형설삼을 먹어 탈태환골한 신체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금강불괴지신은
아니었지만 웬만한 내가공력에는 능히 견딜 수 있는 그였다.
만일 그를 죽이려 했던 복면인이 멀쩡한 그를 보았다면 화가 나 백 장 높이 솟구쳐 올랐을 것이다.
탁옥룡은 분루를 흘렸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영문도 모르고 당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했다.
"그 노인장은 아니다. 분명 금빛 옷을 걸친 자이리라. 그 자가 내게 무슨 원한이 있어 나를 친단 말인가?"
주변 어디에도 천산신의나 복면인은 보이지 않았다.
탁옥룡은 허탈감을 느끼며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그는 구정산 깊숙한 곳까지 와 있었다.
얼마를 갔을까?
"으음……, 그 애송이가 이리도 지독할 줄이야! 으윽……, 놈이 천하를 얻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고막 속으로 파고드는 신음소리가 있었다.
피범벅이되어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흑의노인 하나가 모습을 보였다.
그 배에는 사발 두 개 만한 구멍이 파여 있었다. 구멍에서 오장육부가 줄줄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 몸을
하고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가히 기적이었다.
"흐흐, 이리도 허망하게 죽을 줄 알았다면 살아 생전에 착한 일을 많이 했을 텐데……."
흑의노인은 죽음을 기다리며 중얼거렸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선인(善人)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전대의 마두였던 그도 죽음에 이르러서 참회를 하는
것이다.
"흑시……, 독왕(毒王)이란 분이 아니십니까?"
전신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추면소년이 그를 향해 다가섰다.
"흐흐……, 노부를 알고 있다니? 웬 녀석이냐?"
흑의노인의 얼굴은 핏물로 뒤덮여 본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저는 탁옥룡이라 합니다."
피투성이 추면소년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그가 전대마두인 절대독왕에 대해 알 리 만무했지만 광개와 대적한 인물이라면 그밖에 없으리라 판단했다.
"흐흐……. 그래, 어떻게 노부를 아느냐? 그리고 이곳은 이미 대도살장(大屠殺場)인데 어떻게 살았느냐?"
"대도살장이라니오?"
"칠선봉이 시체로 덮였다. 옥룡천자가 친위고수들을 이끌고 와 닥치는 대로 죽였다. 흐흐……, 허황된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온 기인이사들이 떼주검으로 화한 것이다."
죽어가는 노인은 바로 절대독왕(絶代毒王)이었다.
탁옥룡은 마른침을 삼키며 바짝 다가갔다.
"혹시 저의 노형님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것을 묻기 위해 왔습니다."
"네 노형이 누구냐?"
"잠시 전 노인과 싸운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절대독왕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있었지. 흐흐, 하지만 그는 너의 노형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
"그 분이 광개라면 바로 저의 노형님이십니다."
탁옥룡의 말이 끝나자 절대독왕은 혀를 내두르며 탁옥룡을 직시했다.
"네… 네가 광개의 의제(義弟)라고? 그럴 수가……?"
절대독왕은 혀를 내두르며 탁옥룡을 자세히 살펴봤다.
"제 말은 사실입니다. 그 분은 제게 개방의 비급까지 주셨습니다. 분명 그 분의 목소리를 들었었는데 지금 어디
계십니까?"
탁옥룡이 또렷하게 응대하자 절대독왕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한 곳을 가리켰다.
"그는 저기 있다."
그가 가리킨 지점에는 시커먼 피고름이 풀숲을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어… 어디요?"
탁옥룡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고름이 바로 광개다. 흐흐……, 그는 독강(毒 )에 맞아 녹아버렸다. 노부보다 내공이 강한 광개는 죽고
노부가 아직 죽지 않는 이유는 노부 역시 칠성수준의 독강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탁옥룡은 가슴이 턱 막혔다.
"저… 저 핏물이 저의 노형님이시라니요? 말도 안 돼! 누… 누가 노형님을……?"
"천하의 그 누가 우리를 상대하겠느냐? 옥룡천자가 있을 뿐이다. 그가 단 일장으로 우리 둘을 쓰러뜨렸다.
광개는 즉사했지만……. 크흐흐……, 노부는 독혈인(毒血人)이라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옥… 옥령천자!"
탁옥룡은 몸을 휘청이며 피고름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바닥에 질퍽한 피고름이 광개라는데, 눈물을 흘리며 피고름을 움켜쥐려 했다.
"안 돼! 손을 대면 손이 녹는다. 노형을 생각하는 정리가 대단하나…… 그 독혈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절대독왕은 급히 외치며 손을 품안에 넣었다. 이어 그는 둘둘 말린 종이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것을 익힌다면 그것을 만지고도 녹지 않을 수 있다."
그는 힘이 다했는지 풀썩 고개를 떨구었다.
"광개, 그 늙은 거지가…… 어떻게 너같이 어린 꼬마를……"
그는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광개와 절대독왕 같은 절세적 고수들로서는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누구도
그들이 이런 산 속에서 고혼이 되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독왕이 던진 두루마리는 탁옥룡의 왼쪽에 떨어져 뒹굴었다.
<毒王經(독왕경)>
그런 글이 적힌 두루마리였다.
탁옥룡은 그것이 아주 귀중한 물건이라는 것을 느끼기보다 속절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남지 않았다. 모두 다 죽었어…… 천산신의라는 그 할아버지도 죽은 것일까?"
그는 치솟는 분노에 주먹을 불끈 쥐며 하늘을 우러렀다.
"내게 힘이 주어진다면 첫째로 옥룡마궁을 없애겠습니다. 그것이 비록 마의 힘일지라도 그것을 빌고 싶소!"
탁옥룡은 절규하다가 마왕잠을 꺼내 쥐었다.
그러자 마왕잠에서 일어나는 한기가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며 사지백해를 아주 시원하게 했다. 극심했던 고통이
그로 인해 사라질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왕잠이 벌떼처럼 소리를 내며 미동하기 시작했다. 붉은빛이 더 강해졌고 우는 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신기한 일이다. 검이 운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비녀가 운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탁옥룡은 신비감에 취해 마왕잠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마왕잠은 어떤 힘에 끌려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것은 어디인지를 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마치 자석(磁石)이 쇠를 당기는 듯하군. 무엇이 이 비녀를 끌어당기고 있을까?"
탁옥룡은 마왕잠을 쥐고 눈을 들었다.
멀리 붉은 봉우리 하나가 보였다. 일곱 개의 작은 봉우리를 갖고 있어 칠선봉(七仙峰)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붉은
광채에 덮인 모습으로 망막에 들고 있었다.
"저곳으로 가잔 말이냐?"
탁옥룡은 비녀에 대고 말했다. 비녀는 옥석이라기보다 살아 있는 존재 같았다.
웅― 웅!
마왕잠의 울음소리는 아주 구슬펐다. 헤어진 혈육을 만나고 싶어 애처롭게 우는 사람의 음성이 그와 비슷할
것이다.
"좋아, 함께 가자. 네 원주인 마중지존이 내게 무엇인가를 준다고 했으니 함께 가서 그것을 얻자. 그 분이 원래
악독한 분이었다 해도 나는 그 분의 물건을 얻는 것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를 강하게 하는 일이라면
말이다!"
탁옥룡은 힘차게 말하며 걸음을 떼어놓았다.
무엇인가가 발에 밟혔다. 절대독왕이 죽으면서 남긴 독왕경 두루마리였다.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갈 수가 없군."
탁옥룡은 핏물로 화해 버린 광개와 참혹하게 죽은 절대독왕을 위해 각기 자그마한 봉분을 하나씩 만들어 주었다.
그는 광개의 무덤 앞에 배례를 올렸다.
"노형님, 만나자마자 이별이군요. 어쨌거나 강호라는 곳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인간의 연을 맺은 분이 바로
노형님이십니다. 노형님의 뜻에 따라 십절죽부령을 찾아 개방으로 전하여 노형님의 고혼을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탁옥령은 마왕잠을 등불처럼 세워든 채 힘차게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천 년의 운명을 향해!
第七章 천년제일마(千年第一魔)의 탄생
1
탁옥룡은 상쾌한 느낌과 함께 정신을 되찾았다.
역골액이 가득 찼던 작은 물웅덩이는 바짝 마른 상태였다. 그의 오른 주먹은 그 안에 놓여져 있었다.
"아… 아니? 상처조차 없다!"
탁옥룡은 주먹을 거머쥐고 일어나 혀를 내둘렀다. 주먹은 전이나 다름없었다. 부서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대단하군. 역골액이란 것이 나의 뼈를 다시 잇게 하다니……, 마중지존 사부는 진정 신인이시다."
그는 마중지존의 치밀한 안배에 감탄해 하며 금강백옥괴를 바라봤다. 그것은 아주 차가운 빛을 흘린 채 무정히
도사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너를 나의 원수로 삼겠다. 네가 파괴당한다면 내가 뜻을 이룰 것이고, 네가 파괴당하지 않는다면 내가
소멸될 것이다."
탁옥룡은 백옥괴를 노려보다가 다시 주먹을 거머쥐었다. 그러다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금 저것을 후려친다면 다시 나의 주먹이 으스러질 것이다. 힘을 더 기른 다음 부수자!"
탁옥룡은 주먹에서 힘을 뺐다.
그는 무모한 도전을 일삼을 만큼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고통이 익고서야 마공을 얻는다는 마공지문의 명시를
상기하며 일보 후회했다.
그는 땅바닥에 걸터앉아 혈영금강마공의 구결을 외웠다.
요상편(療傷編)!
그것은 상세를 영약의 도움 없이 치료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오장육부가 자리를 바꾸고 피가 거꾸로 흐르는
정도로 다친다면 영약의 도움 없이 살 수는 없다.
잠행공(潛行功)!
그것은 신법을 일으키기 위한 운기행공으로 몸을 아주 가볍게 하는 비결이다.
이 외에 내가기공을 이용한 신기막측한 초식도 익혔다.
허자결(虛字訣)은 진기의 힘을 아주 부드럽게 변화시켜 상대가 혈영금강마공의 출수를 알지 못한 채 당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그리고 탄자결(彈字訣)과 진자결(震字訣), 회자결(廻字訣), 파해결(破解訣) 등등이 있었다.
탁옥룡은 백옥괴의 단단함을 파괴하기 위한 비결을 구결과 더불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집요한 정신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구결을 완전히 외우고 있었지만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마공을 시전할 수 없는 상태였다.
물론 그의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혈영금강마공이 지극히 오묘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배가 고프면 벽곡단을 먹었다. 벽곡단 한 알은 사흘 버틸 힘을 주었다. 물과 벽곡단만을 먹으며 그는
동물같이 살았다. 주거의 편안함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는 구결을 연구했고 백옥괴를 연구했다.
한 보름 정도 지났을 때 그는 한 가지 분명한 이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금강백옥괴는 내가 친 힘을 두 배로 반탄시킨다. 그러기에 부딪치면 내 주먹이 으스러지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런 수법을 쓴다면 두 배로 돌아온 힘을 네 배로 돌려보내 저것을 박살낼 수 있지 않을까?"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금강백옥괴 앞으로 가서 섰다.
백옥괴를 친다면 주먹이 으스러진다는 사실이 그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호되게 당한 고통을 상기하며 그는
자신의 주먹을 어루만졌다.
"가장 선결되어야 할 것은 주먹이 으스러지는 고통 따위는 간단히 참아 넘길 만한 인내력을 갖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내가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은 금강마권(金剛魔拳)이 아니라 인내력일 것이다."
탁옥룡은 힘차게 말하며 주먹을 내쳤다.
"깨져라!"
주먹이 금강백옥괴에 닿는 찰나 둔탁한 폭음과 함께 백옥괴에 희미한 흠집이 새겨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는 또다시 주먹이 으스러지는 극렬한 고통에 휩싸여야 했다.
"크으윽……!"
탁옥룡은 오랫동안 연구한 보람도 없이 깨진 주먹을 감싸 쥐고는 뒤로 벌렁 나뒹굴었다.
물소리와 함께 한참동안 비었던 역골액이 물웅덩이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백옥괴, 이 놈……!"
탁옥룡은 엉금엉금 기어가 역골액에 주먹을 담갔다. 그리고는 곧 정신을 잃었다.
그런 일은 수없이 반복되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시도했지만 결과는 대동소이했다. 주먹이 으스러지고 그때마다 역골액에 주먹을 담가야 했다.
가장 커다란 변화는 역골액에 으스러진 주먹을 담그고도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다. 그의 인내력이 처음에 비해
더할 수 없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백옥괴 표면에 난 흠집이 점점 커졌다. 탁옥룡의 키도 조금씩 자랐다.
금강백옥괴의 씨름은 아주 긴 세월을 끌었다.
2
이백여 개의 벽곡단이 사라졌다.
탁옥룡은 벌거숭이였다. 옷은 걸레쪽처럼 헤졌고, 청년으로 성장한 그의 몸에 전혀 맞지 않아 벗어버린 것이다.
수치를 느낄 이유도 없었다.
그는 혼자가 아닌가?
그의 두 주먹은 수백 차례 부서졌다가 아물기를 계속했고, 금강백운괴의 표면에는 무수한 주먹 자국이 남았다.
탁옥룡은 단정히 정좌하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천천히 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붉은 기운이 코 밖으로 나왔다가 빨려 들어가기를
계속했다.
"후우……!"
그는 한참 동안 운기행공을 한 후 눈을 떴다. 붉은빛은 전에 비해 상당히 맑아졌다. 혼탁한 기운은 아직
여전했다.
"이제 운기가 내 마음대로 되는구나. 후후……, 실로 오묘한 구결이었지만 결국 나의 것으로 되고 말았다."
탁옥룡은 진기의 힘을 끌어모았다가는 흩트리고, 흩트렸다가는 한 곳에 모으기를 수천 차례 되풀이해 왔었다.
마침내 진기의 힘을 신체 중 한 곳에 모으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는 주먹을 들어보며 중얼거렸다.
"주먹이 으스러지는 정도는 내게 고통도 되지 않는다. 분한 것은 마중지존의 전인으로 여태 시시한 금강백옥괴
따위를 깨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주먹을 거머쥐고 금강백옥괴 바로 앞으로 갔다.
흠집 투성이인 금강백옥괴은 여전히 당당했다. 그것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듯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탁옥룡은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주먹이 부르르 떨렸고 빛이 살색에서 핏빛으로 변했다. 그는 전신의 힘을 오른 주먹에 모았다. 눈빛이 더욱
밝아졌다.
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뼈마디가 우둑우둑 거리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이야압―!"
탁옥룡은 성난 기합소리를 내며 주먹을 힘차게 내뻗었다.
꽈앙―!
백옥괴가 들썩이더니 그의 주먹으로 막강한 반탄력이 전해졌다. 그는 주먹이 으스러짐을 느꼈으나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바로 이때를 노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놈은 반탄력을 내느라 허점을 나타내는 중이다. 나의 오른
주먹과 너의 목숨을 교환하겠다!"
탁옥룡은 오른 주먹이 으스러지건 말건 관계하지 않고, 왼쪽 주먹을 들어 백옥금강괴 가운데를 후려갈겼다.
꽈꽈꽝―!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돌조각이 동굴을 가득 메웠다.
"으윽……!"
탁옥룡은 무수한 파편이 가슴에 박히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소리를 내며 뒤로 나뒹굴었다. 매캐한 돌가루
내음과 함께 비산하는 파편조각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과연 그는 성공한 것일까?
그는 오랫동안 혼절해 있다가 정신을 되찾았다. 미끈하면서도 시원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의 몸은 절반 정도 검은
약수에 잠겨 있었다.
"역골액이 담고 있던 물꼬가 터져 버렸구나."
탁옥룡은 몸 어디에도 상흔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는 전면을 응시했다. 그토록 그를 괴롭히던 금강백옥괴는 사라진 후였다. 마침내 꿈속에서도
그리던 뒤쪽 부분이 환히 보였다.
"하하핫……!"
탁옥룡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통쾌한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그의 몸은 언제부터인가 핏빛이 되었다. 그리고 얼굴의 상처도 전에 비해 덜한 상태였다. 코뼈가 사라지고 입술이
없어져 추악하기는 했으나 다친 얼굴로 보이지는 않았다.
역골액이 상흔(傷痕)을 지워버려 본래 그렇게 태어난 사람같이 보일 뿐이었다.
그의 근골(筋骨)은 강철보다 단단한 상태였다. 피부의 끈질김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그가 인형설삼을 복용한 후
얼굴을 다쳤다면, 상처조차 남지 않고 본래의 용모를 회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용모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자신이 추악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스무 걸음이나 갔을까?
그는 철벽 앞에 이르러 발을 멈추었다. 철벽 앞에는 두 개의 향로가 놓여 있었다. 모두 한아름이 넘는 커다란
옥향로였다.
"김이 나고 있는데?"
탁옥룡은 얼른 다가가 향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른쪽 향로에는 검은 물이 가득 담겼고, 왼쪽 향로에는 흰 물이
가득했다.
"흠……, 이것이 대체 무엇일까?"
탁옥룡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오른손을 검은 물 안으로 집어넣었다.
"으아악!"
탁옥룡은 처절한 비명소리를 내며 손을 쳐들고는 뒤로 나자빠졌다.
"이럴 수가! 손… 손이 다 타버렸다!"
그의 손은 시꺼멓게 탔다. 살가죽이 홀랑 벗겨진 상태였다. 그 스스로도 단단하다고 여겼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第八章 마왕출사(魔王出師)
1
문 뒤는 엄청나게 화려한 대전(大殿)이었다.
금으로 된 태사의와 마구리를 주옥(珠玉)으로 장식한 탁자가 있었다.
수없이 많은 책이 꽂혀 있는 서재가 벽 전체를 둘렀고, 당세에는 찾아보기 힘든 고대의 진귀한 자기병과 무수한
호로가 진열되어 있는 장식대도 있었다.
바닥에는 자주색 주단이 발목까지 깊숙이 파묻히도록 깔려 있었다.
"정말 신성한 곳이다. 아……,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이 사악한 기운은 이곳이 바로 천하마성(天下魔聖)의
거처였던 곳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리라."
탁옥룡은 일곱 가지 빛이 어우러지는 화려함을 찬탄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제일 화려한 팔선탁 앞에 섰다. 팔선탁 위에는 홍삼 한 벌이 놓여져 있었다. 그 은은한 빛은 그것이 수화의
침범을 막고 도검의 칼날까지 막는 천잠사의(天蠶紗衣)임을 알게 했다.
그 외에 열 권의 고서(古書)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데 고서 맨 위에는 봉서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탁옥룡은 팔선탁 앞 의자에 앉아 봉서를 개봉했다.
<그대는 곧 마왕동주(魔王洞主)다.
본좌 마중지존이 일대동주이고, 그대는 이대동주이다. 그 지위는 곧 천하마도(天下魔道)의 대종사(大宗師)라는
것을 뜻한다.
이제 남은 것은 초식을 익히는 것뿐이다. 그대를 위해 십대절기(十大絶技)를 남겼다.
검(劍), 장(掌), 권(拳), 지(指), 도(刀), 금나수(擒拿手), 음공(音功), 수법(手法), 그리고 신법(身
法)인데 모두 쉽게 익힐 수 있다. 혈영금강마공을 보유하고 있는 이상 초식 익히기는 어렵지 않다.
이제 얼마 되지 않아 노부의 모든 진전을 얻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었다고 자부하지 마라.
천하제일인은 무공만으로 얻는 지위가 아니다. 위업을 이뤄야 하고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임기응변(臨機應
變)이 좋아야 한다.
그대의 성취를 위해 무림사(武林史) 열다섯 권을 남겨두었다. 거기에는 강호의 역사, 인물, 지리에 대한 것이
소상히 적혀 있다.
기실 본좌는 그것을 집필하기 위해 천하를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유용히 쓰기 바란다.
한 가지 밝힌다면 그대가 이 글을 보는 것으로 인해 이제부터 마왕동부의 모든 소유권은 본좌에게서 그대에게로
이양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그대의 것이다. 이제 본좌도 그대의 허락이 있어야 이 안으로 들 수 있다.>
이 글은 시체가 되어 만난 바 있던 마중지존의 유언이기도 했다.
탁옥룡은 글을 다 읽은 후 봉서에 내려놓고 절을 올렸다.
"사부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는 탁자 위에서 홍삼을 집어 몸에 걸쳤다. 그것은 신축성을 지니고 있어 아주 잘 맞았다.
"하하……, 이제야 사람이 된 듯하구나."
탁옥룡은 이제야 금수와 같은 생활이 끝이 났다 여기며 미소를 지었다. 그 동안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지내왔던 것이다.
그는 고서를 한 권 한 권 살피기 시작했다.
<제일권(第一卷), 환우멸절검( 宇滅絶劍)>
단 일초검학인데도 책 두께가 상당했다. 대부분이 운검(運劍)의 묘(妙)에 대한 주해였다.
환우멸절이란 어검술(馭劍術)이었다.
그것을 익히게 되면 검을 내공의 힘으로 조종해 십 리 안에 있는 어떠한 적이라도 검을 날려 고혼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마중지존은 첫머리에 이렇게 써두었다.
<이것은 마도 검학 중 최절정수법이다. 그러나 천하최고의 검학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동해(東海) 옥룡대라천검(玉龍大羅千劍)과 겨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혈쌍도(雪血雙刀)와 일천검(一千劍)
은 동해옥룡사(東海玉龍寺)의 비전절기인데 꽤 고강하다.
본좌는 내공의 우위로 그 주인 되는 자를 패배시킨 바 있으나 그렇다고 초식의 우열을 완전히 밝혔다 할 수 없다.
옥룡사의 후예를 만난다면 성급히 해치지 말고 그에게 옥룡대라천검술을 펼칠 기회를 두어 어떤 검초가 뛰어난지
겨뤄보기 바란다.
아쉬운 것은 동해사의 후예 중 과연 그것을 얻을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마중지존은 천하검학 중 오묘한 몇 가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광마라는 소문답지 않게 냉철한 지혜를
갖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강했던 이유는 뛰어난 지식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탁옥룡은 환우멸절검초를 읽은 다음 단약과 약수로 허기를 메우고, 두 번째 비급을 손에 쥐었다.
<제이권(第二卷), 혈영패천강(血影覇天 )>
쌍장을 흔들어 만 개의 장영을 만들어 적을 현혹시키는 수법이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데 유리하며, 엄청난
내공과 안력이 있어야 이룰 수 있는 절기이다.
"그토록 힘겹게 금강마장을 얻어야 했던 이유는 바로 혈영패천강을 익히기 위함이었구나."
탁옥룡은 감탄해 하면서 주석을 읽었다.
<혈영패천강장에 견딜 수 있는 수법은 소림(少林)의 무적금강력(無敵金剛力)뿐이다.
특히 천강복마수(天 伏魔手)를 익히고 무적금강력을 쓰는 사람이라면 혈영패천강 아래 살 수 있다.
그럴 때에는 다른 초식으로 죽여라.>
탁옥룡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금무림에서 소림의 명성이 쇠퇴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천하 최강의 문파였나 보군. 하기는 무림사에 천 년을
유지해 온 잠재력을 지닌 문파니까."
그는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사의 절기와 꼭 비교해 보리라 작정했다.
다음으로 권법이 있었다.
<제삼권(第三卷), 벽력낙성권(霹靂落星拳)>
쌍권으로 삼십 장 밖 만근거석을 쪼갤 수 있는 수법은 천하에 단 두 가지뿐이다.
벽력낙성권과 포달랍궁에 비전되어지는 미륵수미신권(彌勒須彌神拳)이 그것이다. 그 가공함은 천 년 전부터
무림계에 공공연히 떠도는 전설적인 권공이다.
다행히도 금강마권을 익힌 탁옥룡에게 있어 벽력낙성권은 이미 반 넘게 익힌 수법이라 할 수 있었다.
네 번째 고서는 지공(指功)을 담고 있었다.
<제사권(第四卷), 유화탈백지(流花奪魄指)>
발출할 때 소리를 내지 않는 지력이었다.
밀교(密敎)의 무영무음지력(無影無音指力)이 비슷한 위력을 발휘하기에 지공쌍절(指功雙絶)이라 칭해진다.
하지만 유화탈백지력의 공격 범위는 아주 멀어 그 점에서 무영무음지를 능가했다.
"마왕동부의 절기가 가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천하는 넓구나. 이만한 절기에 대적할 절학들이 고대에도 존재했으니
말이다."
탁옥룡은 다섯 번째 비급을 손에 들었다.
도법(刀法)을 설명한 책이었다. 단 일초도법(一招刀法)인데 십 장 안 어떤 것이건 파괴하는 도강(刀 )을
뿌리는 수법이었다.
<제오권(第五卷), 심극일분도법(心極一分刀法)>
회회교(回回敎)의 조사(祖師)가 익힌 파천반월신도(半月破天神刀)와 겨루어 손색이 없는 도법이기도 했다.
다음에는 편법(鞭法)이 있었다.
<제육권(第六卷), 지옥혈편법(地獄血鞭法)>
굳이 채찍을 쥐지 않더라도 시전할 수 있기에 천하에 가장 위력적인 편법이라 할 수 있다.
부드러운 것이면 어떤 것이든 이용해 지옥혈편법을 펼쳐낼 수 있다. 새끼줄이라 해도 괜찮고 허리띠로도 충분하다.
다수의 적을 상대할 수 있으며, 특히 보검이나 보도를 지닌 적을 상대하는데 있어 유용히 쓰일 수 있는 절기였다.
그 다음에는 금나수법이 수록된 얄팍한 비급이 있었다.
그것은 소림사 대금나수(大擒拿手)와 더불어 정사의 금나수 이대절기가 되는 것이었다.
<제칠권(第七卷), 역천공공금나수법(逆天空空擒拿手法)>
손을 너무도 빨리 움직여 손이 없어지는 듯한 착각을 보인다 하여 공공(空空)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그 수법에
잡히게 되면 꼼짝 못하기에 역천이라 불리는 것이다.
다음에는 음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라마교(喇 敎) 천룡범창(天龍梵唱)이 음공 중 제일절기라 하나 최강은 될 수 없다.
라마교 천룡범창은 최소한 일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닌 고승 열여덟이 있어야 시전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시전할
때 정좌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동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마중지존의 음공은 한 사람의 능력으로도 능히 펼칠 수 있고, 마음대로 움직이며 시전할 수 있다.
<제팔권(第八卷), 쇄금강후(碎金剛吼)>
장소성으로 호신강기를 박살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탁옥룡은 단지 주해(註解)를 읽는 것만으로도 황홀감을 금할 수 없었다.
"아……, 무학은 끝이 없구나."
아홉 번째 신법이 적힌 비급이었다.
<제구권(第九卷), 백로마현술(百路魔現術)>
환영궁에 전해지는 환영잠신술(幻影潛身術)보다도 변화막측한 신법의 최절정 경지이다.
맨 마지막 고서에는 수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제십권(第十卷), 흡혈백옥수(吸血白玉手)>
손바닥에서 흡인력을 발휘해 상대방의 심장에 가득 찬 선혈을 빨아들인다 해서 흡혈백옥수라 불리는 절기이다.
지독히도 독랄한 수법이지만 그 위력은 무한하다.
탁옥룡은 열 권의 고서를 내려놓고는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 열 가지 절기와 더불어 여생을 같이 하겠군. 하나 하나 유감없이 사랑해 주고 항상 너희들과 함께 하겠다."
그는 즉시로 고서의 절기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대전에는 지하연공실(地下練功室)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구결을 암송한 다음에는 연공실로 가서
절기를 익히게 된다.
주거에도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먹을 것, 마실 것, 심지어 바둑과 마작(麻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의 생활은 아주 자유로웠다.
그것은 출관(出關)이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탁옥룡은 주인으로 행세하며 모든 것을 자유롭게 이용했다.
그에게 휴식이란 달콤한 시간은 없었다. 쉼없이 배웠고 꾸준히 연구했다.
무공의 길에 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백 일이 꿈같이 지났다.
마왕동 십대절학을 담은 열 권의 고서는 하나같은 모습으로 없어졌다. 모두 재가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침내 제십권마저 재가 되어 버렸다.
2
새벽은 하루에 한 번은 꼭 있다.
산서성(山西省)의 새벽은 항상 운무와 함께 비롯된다. 산이 험하기에 골이 많고, 그러기에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와 구름이 새벽녘에 한결 돋보이는 것이다.
산서 깊은 곳을 걷는 젊은이 하나가 있다.
아니 젊은이라고 속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는 핏빛 장포를 걸쳤고, 등에는 상고신검(上古神劍) 한
자루를 메고 있는데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걷는다기보다 둥둥 떠간다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어기비행술(馭氣飛行術)을 시전해 지극히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한 줄기 혈선(血線)이 그어졌다.
그는 안개를 뚫고 치달려 가다가 한 곳에 이르러 발을 멈췄다.
신록이 유난히 아름다운 골짜기 하나가 그의 망막에 들었다. 그의 눈빛은 그로 인해 상념에 빠졌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다른 것이 없는 산이며 나무였지만 죽립인에게 있어서는 돌 하나, 나무 한 그루가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모두 그대로 있구나."
그는 중얼거리며 계곡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그는 근처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이르러 눈살을 찌푸렸다.
"기문진(奇門陣)이 펼쳐져 있다. 흐음……, 감히 나의 고향을 점거하고 인적을 막는 자들이 있단 말인가?"
죽립인의 음성은 청년의 목소리였다. 마성이 깃든 듯 아주 차갑고 비정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곳을 향해 몸을 폭사시켰다. 경미한 파공성과 함께 불그레한 그림자가 뿌려졌다. 그는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수십 장씩을 지나쳤다.
그가 울창한 숲 안에 이르렀을 때였다.
"서라!"
그의 고막을 때리는 호통소리가 있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보이지 않고 다만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본궁의 친구는 아닌데 무슨 일로 산서단(山西壇)을 찾느냐? 혹 산서단을 치다가 실패하고
들어간 혈수나찰(血手羅刹)과 한 패거리는 아니냐?"
"……"
죽립인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흐흐……, 붉은 옷을 걸친 것으로 보아 분명 그 고약한 계집년의 한패거리이겠군. 흐흐……, 그렇다면 살아
돌아갈 마음은 버리는 것이 좋다."
땅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하늘 위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죽립인은 귀담아 듣다가 오랜만에 입술을 뗐다.
"나는 혈수나찰이 누구인지 모른다."
"흐흐……, 뜻밖에 어린놈이로군. 신법으로 보아 제법 늙은 고수인 줄 알았다."
"노괴는 옥룡마궁 사람인가?"
"흐흐……, 빌어먹을 놈! 차라리 절간에 와서 여기 스님들이 살고 있느냐 묻는 것이 현명한 일이리라!"
노인의 목소리가 욕설로 화할 때 죽립인은 가볍게 소매를 흔들었다.
"입이 거칠구나. 그 죄로 노괴의 이빨을 모두 부서뜨리리라."
바람이 일어나더니 숲 언저리에서 솔잎이 흩어지다가 그의 손바닥 안으로 한줌 쥐어졌다.
"무슨 짓이냐?"
괴노인의 궁금해 하는 목소리가 여운을 맺기 전에 죽립인의 손이 뒤집어졌다.
피피피핑―!
솔잎이 적엽비화(摘葉飛花)에 화해 숲 속으로 파고들었다.
"케― 엑―!"
숲을 진동시키는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숲 언저리로 떨어져 내리는 흑의노인 하나가 있었다.
노인의 입에서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그의 철같이 단단하던 이빨이 솔잎에 닿으며 모래같이 사그러졌고,
혀가 걸레같이 찢어졌다.
"크윽……, 내… 내가 여기 숨었는지 어찌 알았느냐?"
흑의노인은 바둥바둥거리다가 사지를 늘어뜨리고 죽립인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옷자락에는 청색옥룡문장(靑色玉龍紋章)과 더불어 오만한 글귀가 수놓아져 있었다.
<天下君臨(천하군림) 武林一通(무림일통)>
죽립인은 자신의 정확한 출수에 대해 우쭐대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노괴는 마궁에서 어떤 지위냐?"
"산… 산서단 호법이다."
흑의노인은 기가 죽어 감히 일어날 생각도 못했다.
"탁가장원(卓家莊園)이 있었는데 그것은 없어졌느냐?"
"그곳이 바로 산서단이다."
죽립인은 뒷짐을 쥔 채 옆으로 돌아섰다.
"단주(壇主)는 누구냐?"
흑의노인은 상대의 기도에 완전히 제압당해 술술 털어놓았다.
"검존(劍尊)의 전인이시자 은삼호법(銀衫護法) 중 한 분이신 진천검왕(振天劍王)이시다."
죽립인의 심문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총순찰 옥부용은 어디 있느냐."
"그… 그 분은 일이 있는 곳에 계신다. 총순찰의 지위는 원래 그런 것이다. 아마도 혈수나찰이나 일심검제(一心
劍帝)를 쫓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 있느냐?"
"모… 모른다. 나는 하수에 지나지 않는다. 제… 제발 죽이지 말아다오."
흑의노인이 죽립인과 몇 마디를 나누면서 공포에 질려 버렸다. 그의 직감으로 상대는 천 명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살마(殺魔)였다.
죽립인은 가볍게 턱을 쳐들었다.
"일어나 나를 탁가장원으로 안내해라!"
"일… 일어날 수 없다. 너무 고통스럽다."
흑의노인은 아래턱을 떨며 손으로 품을 뒤졌다.
죽립인은 그의 비굴한 모습을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죽립 사이에서 붉은 빛이 뿌려졌다. 그의 눈빛이
핏빛으로 화해진 것이다.
"모두 일곱! 어서 나서라!"
홍의인의 차디찬 말소리가 흐르자 여러 군데서 경호성이 터져나왔다.
"으음……!"
"천하삼기(天下三奇)보다도 뛰어난 것 같군."
"대체 누구기에 이리도 강하냐? 왜 산서단을 찾느냐?"
그들은 흑의노인의 비명소리를 듣고 나타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숲을 나와 감히 대적하기를 두려워했다.
죽립인은 냉랭하게 씹어뱉었다.
"일각(一刻) 안에 탁가장원을 비워라. 그때까지 탁가장원을 중심으로 오리 안에 남아 있는 자가 있다면 모두 내
손에 죽는다."
지극히 오만한 명령이었다. 팔짱을 낀 그의 모습은 하나의 거대한 돌덩이 같았다.
"으음……, 옥룡궁의 힘이 일심맹(一心盟)과 포달랍궁(包達拉宮)으로 인해 전만 같지 않다고 하나 역시
천하제일 문파다. 네가 누구이건 어떤 고수이건 본궁에 죄를 짓고는 오래 살지 못한다."
"정체를 밝히고 자초지종을 말해라!"
숨어 있는 사람들은 은근히 협박을 가하며 죽립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죽립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일각은 아주 빨리 지나갔다.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죽립인은 일각이 지나가자 고개를 약간 쳐들었다.
"선산이 있는 곳에서 피를 흘린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피로 인해 탁가장의 한이 사라질 것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차게 말하며 숲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순간, 죽은 듯 누워 있던 흑의노인이 죽립인의 허점을 노리고 손을 어지럽게 흔들었다.
피피핑―!
금석을 뚫어버리는 독침이 죽립인의 몸을 뒤덮는 찰나 그는 흐릿한 그림자로 화해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고,
무수한 독침은 그 근처를 휩쓸며 무산되었다.
"아… 아니,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빨이 박살난 흑의노인이 자지러지게 놀랄 때 허공에서부터 냉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나를 찾느냐?"
느닷없이 막강한 권풍이 일어났다.
"아악!"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흑의노인의 몸이 무수한 핏조각으로 화해 사라졌고, 반경 일곱 자에 달하는 구덩이가
파여졌다.
'의 수법이 이 정도로 위력적일 줄은 몰랐다. 이런 하수들을 상대로는 절기를 시전할 필요조차 없겠다.'
죽립인은 허공에 둥실 떠 구덩이를 바라보다가 숲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다.
숲은 기문진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숨어 있는 자들이 믿는 것은 기문진의 막강한 위력뿐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동료의 죽음을 보고도 나서지 않은 것이다
죽립인은 그것을 모르는 듯 거침없이 숲 안으로 날아들었다.
"됐다!"
"혈수나찰도 당한 기문진이다."
"놈은 이제 눈과 귀가 멀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일 때였다.
"후후……, 옥룡마궁도 제법이군. 누가 천성변환진(天星變幻陣)에 구궁사상진(九宮四象陣)을 가미한
천성구궁쇄진(天星九宮碎陣)을 쳐두었는지 모르나 이 정도로 나를 막지는 못한다."
죽립인의 목소리가 숲 속에서 차갑게 피어올랐다.
꽈르르― 릉!
뇌성이 터지며 비명소리가 두 군데에서 났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피바람이 일었다. 한 무더기 혈무(血霧)
가 바람에 쓸리듯 유유히 숲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얼핏 보였다.
"너도 빠질 수 없다!"
냉혹한 일갈과 함께 폭음과 비명성이 어우러졌다.
꽝―!
"케에에… 엑……!"
"사신(死神)인 줄 모르고 남아 있었던 것이 후회스럽다."
"크으윽……, 사람이 아니다!"
숲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자들은 죽립인이 십 장 밖에서 쳐낸 사공괴초(邪功怪招)에 당해 창졸지간에 피떡으로
화했다.
죽립인은 일곱 사람을 간단히 죽인 다음 숲을 지나쳤다.
그의 독랄한 손속은 강호에 예사롭지 않은 풍운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죽립인은 자죽림(紫竹林)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장원 한 채를 볼 수 있었다.
"놈들이 소박하던 장원에 군더더기를 많이 붙여 추악하게 만들어 놓았군. 안에 있는 자는 하나도 살지
못하리라!"
죽립인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자죽림을 뛰어넘었다.
그는 자죽림 하늘 위에서 한 무더기 피구름으로 화했다. 혈무에 둘러싸인 마치 불길한 혈운처럼 담장으로 향했다.
순간, 수십 군데서 함성이 일며 수백 개의 철화살이 전광처럼 폭사해 올랐다.
피핑― 핑―!
"갑노(匣弩)로 놈을 떨어뜨려라!"
"죽여라!"
그러나 죽립인을 맞춘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화살이 쏘아지는 순간 이미 자죽림을 넘어가 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화살보다도 빠른 움직임이었다.
"옥부용을 죽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그 계집도 멀지않아 내 손에 죽는다, 하하핫……!"
죽립인은 장원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광소를 터뜨렸다.
그의 몸은 보이지 않고 혈운만 번뜩였다. 광기 어린 외침이 장원 구석구석을 진동시켰다.
"모두 다 죽는다. 이 날을 위해 육 년을 고행 속에서 보낸 탁옥룡이다!"
죽립인의 눈에는 강렬한 혈광이 흘러나왔다.
아……, 그렇다. 그는 바로 마중지존이며 천년마제의 후예가 된 탁옥룡이었다.
탁옥룡은 살기와 마성(魔性)에 젖어 장원을 뒤지고 다녔다. 너무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그를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탁옥룡은 수백 장을 움직이다가 탁가장원의 중심 되는 곳에 이르렀다.
아름다운 누각 한 채가 서 있었다.
<견정헌(堅定軒)>
아름다운 추억이 젖어 있는 그 누각은 과거 탁천영이 탁옥룡에게 글을 가르쳐 주던 곳이었다.
'아버님……!'
탁옥룡은 한줌 유골이 되어 버린 양부를 떠올리며 잠시 상념에 젖었다.
이 때, 견정헌에서 급히 뛰어나오는 반 벌거숭이 중년인 하나가 있었다.
"제길, 무슨 소란이냐? 혈수나찰이 다시 오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는 몸에서 지분 냄새를 풍겼다.
방금 전까지 벌거벗은 여인 셋과 함께 육체의 향연을 벌였기에 여인의 진한 살내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견정헌 안에서 여인네들의 교성이 흘러나왔다.
"호호……, 단주님이 우리들을 괴롭히던 힘을 다 쓴다면 대라신선이라 해도 단주님 손에 죽을 겁니다."
"구존(九尊) 중 넷째이신 검존(劍尊)의 수제자 진천검왕이 있는 곳으로 왔으니 바보가 아니겠습니까?"
"아……, 잠시 쉬어야지."
견정헌 넓은 침실에서 알몸으로 꿈틀대는 여인들은 서로 끌어안으며 희희덕거렸다. 그녀들은 아직도 교접의
쾌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닥쳐올 무서운 운명을 알지 못했다.
"케에… 엑!"
처절한 비명성과 함께 핏물이 튀었다.
반 벌거숭이 진천검왕의 몸뚱이가 견정헌 바로 앞에서 수천 조각이 되어 흩어지며 그 자리로 죽립인이 떨어져
내렸다.
"나의 집이 마굴(魔窟)로 화했다. 더러운 자들의 살내음이 가득 차 있다. 으으……, 이곳은 더 이상 나의
고향이 아니다!"
단 일장으로 옥룡마궁에서 백대고수 안에 드는 진천검왕을 박살낸 사람은 바로 마중지존의 제자 탁옥룡이었다.
그는 탁가장원이 음욕과 황음(荒淫)함으로 가득 찬 마굴로 화했다는데 전율했다.
그가 바라던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고요함과 편안함, 이수운의 다정한 속삭임, 그리운 양아버지에 대한 추억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육 년의 세월 동안 달라진 것은 달라진 것은 탁옥룡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이 바뀌었고, 고향마저 바뀐
것이다.
탁옥룡은 극도로 흥분했다. 분노와 함께 살기가 물씬 치솟았다.
"으드득……, 피로 씻겠다! 피로 씻으리라!"
탁옥룡의 몸을 뒤덮은 혈무가 급속히 확대되었다.
뇌성벽력이 일어나며 땅덩이가 흔들거렸다. 소용돌이치는 기류의 폭출에 주변의 전각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으아아……!"
핏빛 모발을 철사처럼 세우고 양주먹을 불끈 쥔 탁옥룡의 모습은 아수라와 같았다.
진천검왕의 비명소리에 놀라 견정헌 앞쪽으로 들이닥치던 백여 명의 산서단 고수들은 그것을 보고 기절초풍 놀라
뒤쪽으로 사라져 갔다.
"사람이 아니다!"
"혈… 혈마(血魔)다!"
"전설의 혈영공(血影功)이 나타났다. 핏빛 기류에 닿는 순간 몸이 으스러진다!"
그들이 감히 대적할 생각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차― 앙!
탁옥룡이 손을 쳐들자 검이 뽑혀져 손아귀에 잡혔다.
"만보전(萬寶殿)의 신병이기(神兵異器) 중 가장 날카로운 혈섬검(血閃劍)! 네가 피맛을 못 본 지 일천 년은
되었을 게다."
탁옥룡이 꺼낸 검은 마왕동 만보전에 있던 신병이기 중 가장 무서운 위력을 지녔다.
혈섬검과 마왕잠은 과거 마중지존이 애지중지 하던 양대보물의 하나로 탁옥룡이 마왕동주 자격으로 지니고 있는
신물(信物)이기도 했다.
혈섬검에서 검강(劍 )이 일어나더니 검이 그의 손을 벗어나 허공으로 올랐다.
곧장 이십 장 높이까지 치솟은 혈섬검은 허공에서 방향으로 바꾸며 지상으로 향했다. 이어 벼락치는 기세로
떨어져 지상을 향해 떨어졌다.
"환( )― 우(宇)― 멸(滅)― 절(絶)―!"
탁옥룡은 빙글 회전하며 전면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진기로 검을 조종했다.
번쩍―!
혈섬검은 살아 있는 새같이 사위(四圍)를 꿰뚫으며 날았다. 검은 보이지 않고 핏빛 검강이 번뜩였다.
붉은 번개가 지축을 끊어버릴 듯한 가운데 수급이 검강에 닿기도 전에 끊어져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아악……!"
동쪽에서 비명소리가 난다 싶자 서쪽에서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캐애액!"
"아아악!"
정수리에 구멍이 나서 죽은 자, 가슴에 큰 동혈이 파여 심장을 쏟아내며 죽어자빠지는 자, 오체분시가 된 자 등
죽는 모습도 가지가지이고 비명소리도 각인각색이었다.
혈섬검은 사람이 있는 곳이면 주저없이 날아가 피보라를 일으켰다.
탁옥룡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 반경 일백 장 안이 시산으로 화했다. 바닥은 핏물로 가득했고 역겨운
피비린내를 발했다.
혈섬검은 도망치는 자를 단 하나도 허락하지 않았다.
혈섬검은 숨소리가 다 멎은 후에야 위세를 잃고 탁옥룡의 손바닥 안으로 날아들었다.
"검신이 더욱 붉어져 보기 좋군."
탁옥룡은 차게 말한 다음 검을 검집에 꽂았다.
그는 천천히 견정헌 쪽으로 돌아섰다. 가뿐 숨소리와 함께 세 여인이 누각 안에서 기어나왔다.
"대… 대협(大俠)!"
"소… 소녀들은……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마궁환락당(魔宮歡樂堂)에 속한 것은 원해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였습니다. 거둬주신다면 대협의 시비가
되겠습니다. 아니, 개보다도 충직하게 주인을 섬기겠습니다."
모두 벌거벗고 있었다.
희멀건 궁둥판을 번쩍 쳐들고 엉금엉금 기는 여인들의 늘어진 젖가슴에는 이빨 자국, 손톱 자국이 많았다. 무수한
멍자국은 여인들이 침상에서 수없이 많은 격전을 치렀음을 말한다.
탐스러운 넓적다리와 터질 듯한 육봉에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는 지극히 뇌쇄적이었다.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저희들은 무공을 모릅니다."
"마궁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는 불쌍한 계집들입니다. 가… 가련히 여기시고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여인들이 지분으로 덮인 얼굴 가득 눈물을 뿌렸다.
탁옥룡은 아무런 대꾸 없이 손바닥을 들어 맨 왼쪽 여인을 겨냥했다. 폭음과 함께 벌거숭이 여인은 목 윗부분이
산산이 박살난 시체가 되어 축 늘어졌다.
아……, 뜨거운 피를 지닌 인간으로서는 상상치 못할 너무도 가혹한 살수였다.
"지독한 놈!""
"에잇, 목숨을 구걸한 우리들이 어리석었다!"
두 여인이 이를 갈며 위로 날아올랐다.
무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녀들 역시 마궁의 제자였다. 궁여지책으로 탁옥룡을 속이려
했지만 실패한 것이다.
그녀들이 이 장 떠오를 때 탁옥룡은 손가락 두 개를 퉁겼다.
펑― 펑―!
두 번의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향기롭고 탐스럽던 몸뚱이가 피떡으로 으스러져 사방에 피비를 뿌렸다.
"훗훗……, 너희에게서 내공의 기운이 느껴지거늘 어이해 무공을 모른단 했더냐?"
탁옥룡은 피를 보자 기분이 좋아진 듯 득의해 웃었다. 그는 잔혹한 눈빛을 흘리다가 한 곳을 노려봤다.
"조금 전 날아들었다는 것을 안다. 어서 나타나라!"
그는 대나무 숲으로 돌아섰다.
"으음……, 정말 놀라운 마공(魔功)이다. 천하에 이런 고수가 있다니……. 흠, 네가 마궁고수가 아니기
천만다행이다."
숲 안에서 걸어나오는 백의복면인이 있었다.
그는 등에 손잡이가 녹슨 검을 하나 짊어지고 있었다. 피를 밟기 싫은 듯 마른땅을 골라 걸었다.
탁옥룡은 번갯불 같은 안광을 발하며 냉랭하게 물었다.
"웬 놈이냐?"
"어검술에 의한 섬광이 십 리 밖까지 퍼졌다. 누가 세상에 드문 어검술을 펼쳤는가 궁금해 지나던 길에 들린
사람이네. 무혈검(無血劍)이라 부르게나."
그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편하게 해 주는 음성이었다.
"무혈검? 훗훗……, 그럼 검이 아니군. 검은 피맛을 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
탁옥룡이 비웃자 복면인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본인의 검은 사마를 퇴치하기 위한 탕마검(蕩魔劍)이네. 하지만 굳이 피를 묻힐 필요는 없네."
복면인의 눈빛은 지극히 날카로웠다. 두 사람은 말을 나누며 눈싸움을 시작했다.
탁옥룡의 안광은 혈광(血光)이고, 복면인의 눈빛은 신광(神光)이었다. 두 사람은 눈싸움을 하며 옷을 땀으로
적셨다.
"으음……!"
탁옥룡은 복면인의 눈빛이 너무도 깊다 느꼈다. 그 안으로 빨려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들게 했다.
무혈검은 역시 내심 부르르 떨었다.
'아……, 정말 무서운 안광이다. 옥룡천자의 안광이라 해도 이 사람같이 사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속옷을 땀으로 적셨다. 눈싸움은 반시진이나 계속되었다.
탁옥룡은 상대가 악착같이 심력 대결을 펼쳐오자 눈을 부릅뜬 채 입을 열었다.
"마궁도는 아니로군?"
"마궁의 적이다. 나는 천하에 퍼진 마궁도들을 찾아다니며 비무를 하여 무림을 떠나게 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럼 나와 싸울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무혈검은 무거운 어조로 응대했다.
"마궁이 나의 적인 이유는 사마의 무리이기 때문이다. 너는 지금 무명(無名)이나 얼마 안 가 마궁보다 더한
마두가 될 자다. 그러기에 미리 제거하려는 것이다."
"쯧쯧……, 꽤나 할 일이 없는 자군."
탁옥룡은 비웃으며 금강마안공(金剛魔眼功)을 발휘했다.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십 배 밝아졌다.
"어엇?"
무혈검은 눈이 녹는다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탁옥룡의 환청 같은 음성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하하핫……, 마궁도가 아니기에 용서하겠다. 앞으로는 내 일에 함부로 끼여들지 마라."
무혈검이 다시 눈을 떴을 때 탁옥룡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으음……, 정말 두려운 자다. 분명 전설의 혈영공을 익힌 사람인데 설마 마중지존의 절대마공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미 절전된 지 천 년이나 된 마중지존의 마공이 어떻게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후예를 두지 않았으니 마중지존의 마공은 영원히 묻혀 버렸다."
그는 이미 까마득한 점으로 화해 버린 탁옥룡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일심맹(一心盟)이 주목해야 할 자다. 자칫하다가는 마궁이나 포달랍궁보다 위험한 존재가 되리라."
무혈검은 시산으로 가득한 장원을 둘러보고는 두 손을 합장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선인이 되시게."
그는 오랫동안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며 있다가 홀연히 사라져 갔다. 그의 신법은 탁옥룡에 비해 그리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第一章 마공무적(魔功無敵)
밤은 깊고 나그네는 외롭다.
탁옥룡은 지금 삼경인데도 쉬어 가지 않고 밤을 벗삼아 고독히 걷고 있었다.
"좋은 밤이다."
그는 붉은 옷자락을 바람에 펄럭이며 나는 듯 걸었다.
'칠일 간 옥룡마궁의 분타 수십 군데를 격파했으니 그들이 나라는 사람에 대해 주시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는 간간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잔혹한 웃음소리를 냈다.
"후후……, 철서생인지 옥룡천자인지 하는 자의 심장이 혈섬검(血閃劍)에 구멍이 뚫릴 날이 멀지 않았다."
그는 중얼거리며 더 빨리 움직였다.
그는 호북성(湖北省)을 지나 안휘성(安徽省)으로 든 상태였다. 안휘성이 그로 인해 유린당한다면 이어서 강서성
(江西省) 형산 근처이 이제 공포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의 복수심은 대단했다.
하루아침에 단란한 생활이 파괴되고, 양부의 죽음과 이수운의 실종, 그리고 얼굴마저 으스러진 그로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한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게다가 옥룡마궁의 횡포로 희생된 사람들의 아픔이 더한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구화산(九華山)을 횡으로 가로질러 동쪽 기슭을 타고 표표히 움직였다. 마왕동부에서 고된 수련을
감안한다면 편안한 휴식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이름 모를 계곡 어귀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 악!"
채찍질 소리와 함께 더불어 구슬픈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났다.
"말을 해라, 죽기 전에!"
표독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짜짝짝― 짝!
채찍 소리는 점점 거세졌고 비명성도 그와 함께 높아졌다.
탁옥룡은 차마 그냥 지나쳐 갈 수 없었다.
"저 계곡 안에서 나는 소리인데……? 흠, 이런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조차 살풍이 있단 말인가?"
그는 죽립을 질끈 눌러쓰고 훌쩍 날아올랐다.
그의 신법은 강호에 나온 이후 더 쾌속해져 야밤 아래서는 신형인지 새 그림자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밤 공기를 깨는 비명소리는 꽤 먼 곳에서 났다.
그 소리는 겉보기 무인지경이나 실상은 천라지망(天羅之網)인 거대한 골짜기 안에서 나고 있었다.
'흐음, 대단한 매복(埋伏)이군.'
탁옥룡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안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후후……, 이런 곳에 소굴을 만드는 무리라면 필경 사악한 무리일 것이다. 나를 그냥 지나가게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리라.'
그는 수십 명이 숨어 있는 것을 간파하고는 더 날렵히 움직였다. 짙은 야음이 그의 잠입을 가려줬다.
일 마장 정도 갔을까?
"흠, 정말 뜻밖인데? 이런 화려한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있단 말인가?"
탁옥룡은 큰 바위 뒤에 숨어 혀를 내둘렀다.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은 상상치 못할 세외선경(世外仙景)이었다. 수십 채의 누각이 연달아 서 있었다.
기이하게도 누각마다 종루(鍾樓)가 설치되었고,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언뜻 언뜻 눈에 띄었다.
"저 가운데 있는 누각을 중심으로 해서 기문둔갑술(奇門遁甲術)이 펼쳐져 있다. 그냥 들어가다가는 길을 잃기
쉽상이다."
탁옥룡은 수십 개의 누각으로 인해 포위된 형상인 한 채의 거대한 석전(石殿)을 바라봤다.
석전은 흰돌로 이루어져 흰 코끼리를 연상케 했다.
"아악……!"
비명소리는 그 안에서 들렸다.
탁옥룡은 주위를 샅샅이 쓸어본 후 두 손으로 죽립끈을 조였다. 그가 결행할 의사를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 습관적
행동이 그것이었다.
그는 오래지 않아 누각과 가산, 그리고 화단으로 인해 꾸며진 기문둔갑술이 어떤 것인지 파악했다.
"뜻밖인데? 이런 기문진은 중원에서는 잘 쓰지 않는 진법이다. 복호장룡진(伏虎藏龍陣)은 라마사원(喇 寺院)
의 이승들이 호법 수단으로 설치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는 기문진이 복호장룡대진임을 알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문(死門)과 휴문(休門) 사이에 있는 유일한 생문(生門)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일곱
명의 매복이 있었다.
"치밀한 자들이다. 가히 나는 새라 해도 지키는 자들의 허락이 없이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곳이다."
탁옥룡은 진기를 끌어올려 몸을 아주 가볍게 했다.
피잉―!
어디선가 예리한 휘파람 소리가 났다. 향전(響箭) 하나가 허공으로 쏘아진 것이다. 향전 쏘아진 소리로 인해
주위가 약간 뒤숭숭해졌다.
'응……? 다른 누가 있다.'
구름덩이가 떠오듯 지극히 빠른 신법을 시전해 복호장룡대진을 향해 다가서는 괴인 두 명이 있었다.
앞장 선 사람은 허리에 사척장도(四尺長刀)를 찬 금포노인이었다. 흰 수염을 두 자 넘게 길렀는데 눈빛이
번갯불보다 밝았다.
바로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은 낡은 옷을 걸친 노인으로 금봉(金棒)을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진세에 익숙한 듯 서슴지 않고 안으로 날아들었다.
기문진의 요로(要路)를 지키는 매복들은 그들과 교분이 있는 듯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향전은 그들이
들어감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향전은 일 리 밖에서 쏘아졌는데, 그 여운이 끝나기 전 벌써 안으로 들어왔다. 강호에서 본 자들 중 가장 강한
자들이다. 무혈검(無血劍)이라는 복면인을 제외하면 말이다."
탁옥룡은 뜻밖의 일에 접하게 되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숨어 있던 곳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주 경미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흐릿한 그림자로 화했다. 낮이라면 혈영(血影)일 것이나 밤이라 흑영이었다.
그것은 야음에 묻히는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탁옥룡은 뭇 사람의 이목(耳目)을 간단히 속이고 기문진 안으로 잠입해 백석전(白石殿)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백석전 앞에는 조각상이 있었다. 조각상은 일 장 높이 옥룡상(玉龍像)으로 입에서 불줄기가 뿜어졌다.
옥룡상 둘레에는 백팔 개의 불상(佛像)이 도열되어 있었다. 실로 귀부신공(鬼斧神工)의 경지에 이르렀다 할 수
있는 멋들어진 조각 작품들이었다.
한쪽으로 비석이 보였다. 일곱 자 높이의 비석인데 붉은 주사로 글이 새겨져 있었다.
<돈황 라마교(喇 敎)와 중원제일 옥룡궁(玉龍宮)은 동심(同心)의 형제지파다.
라마교주께서 원적하시며 하신 유언은 옥룡궁이 천하일통하게 도우라는 것이었다. 라마교 삼천 승(三千 僧)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교주의 유언을 지켜야 한다.>
누가 써 두었는지 모를 용사비등한 글이었다.
'라마교라면 옥룡마궁에 충성하겠다고 맹세하고 중원으로 나온 사대이역단 중의 일파가 아닌가?'
탁옥룡의 눈에서 혈광이 일어났다. 뜻밖의 행운을 잡은 기분이었다.
'이역사단의 위치는 완전한 비밀이다. 회회단(回回壇), 밀교단(密敎壇), 라마단(喇 壇), 사곡단(蛇谷壇)의
사단(四壇)은 옥룡마궁의 정예 중 정예다. 이역사단의 힘은 마궁이 갖고 있는 전력의 육할에 해당된다. 개방이
나머지 이할이고 그 밖의 분타가 나머지 이할을 차지한다.'
탁옥룡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곳이 라마전 중원분타라면 그가 강호에 나와 발견한 마궁의 휘하세력 중 가장 큰 분타가 되는 것이기에 가벼운
흥분마저 느꼈다.
이때, 백석전의 문이 열리며 네 사람이 걸어나왔다.
급히 들어갔던 두 명의 노인이 앞서 걸어나왔다. 그 중 거지노인은 옆구리에 길쭉한 보따리를 하나 끼고 있었다.
뒤쪽에는 아주 어여쁘게 생긴 미부인 하나가 서 있고, 곁에는 아직 머리를 깎지 않은 장년 승려 하나가 시립했다.
미부인은 선혈 묻은 채찍을 들고 있었다.
"그 놈은 아주 독종(毒種)입니다, 내가 입을 열게 하지 못한 놈이니. 호호……, 대사숙(大師叔), 육사숙(六
師叔)도 입을 열게 하려면 무진 고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거지 노인은 미부의 우려를 일축했다.
"헤헤……, 그것은 염려 마라. 입을 열게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이 어린 놈을 회회단(回回壇)으로
데리고 가기만 하면 된다."
"회회단이오?"
미부인의 눈에 질투의 빛이 역력했다.
"흐흐……, 옥부용(玉芙蓉)은 총순찰(總巡察)이 된 후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그녀가 혈수나찰(血手羅刹)
을 생포해 그곳으로 데려갔다는 말은 이미 들었겠지?"
"흥, 그 계집이 잡은 것이 아니라 그 계집의 허벅지 사이에 녹아버린 회회공자가 혈수나찰을 잡았겠지요. 이
미련한 라마공자(喇 公子)에 비한다면 회회공자는 천의무봉한 경지이지요."
거지 노인은 힐끗 장발의 승려를 보고는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라마공자가 한어(漢語)를 모른다고 욕을 막 하면 아니 된다. 하기는 한 계집으로 두 사내를
받든다는 것은 힘든 일이겠지."
미부는 채찍을 손목에 감아쥐었다.
"흥, 저만 그런가요? 옥부용이도 그렇고 철정향(鐵丁香)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흐흐……, 하여간 너의 재간은 알아준다. 오상서(吳尙書)란 놈을 위시해 조정고관 칠십 명을 주구(走狗)로
부리게 된 것은 모두 네 덕이 아니냐?"
거지노인은 옆구리에 낀 마대자루를 툭툭 쳤다.
"너의 고문법이 서툴러 주룡령기(朱龍令旗)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지 못해 옥의 티이나, 천하에서 고문을 가장 잘
하는 옥부용도 본궁 사람이니 이 어린 종자는 필경 주룡령기가 있는 곳을 토설하고 말 것이다."
"호호……, 그 누구라도 주현룡(朱玄龍)의 쇠같이 질긴 입을 열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옥부용이 아니라
독존사부(毒尊師父)님이라 도 어렵지요. 물론 궁주(宮主)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것만은 자신합니다."
말하는 미부의 가슴에는 은(銀)으로 만든 모란화(牧丹花)가 꽂혀 있었다.
그녀가 걸친 옷은 반투명한 나삼이었다. 그래서 사타구니의 은밀한 부위와 팽팽한 젖가슴 위의 붉은 유두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틀림없어요. 저는 확신합니다. 그 놈은 매를 맞다가 그냥 죽어갈 놈입니다. 그 놈은 아주 지독한……."
미부인은 냉혹히 말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백석전 앞 돌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그들 네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홍의괴인 하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홍의괴인은 물론 탁옥룡이었다. 그는 아래턱을 약간 들고 그녀를 향해 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소리가 없는, 그리고 지극히 차가운 웃음이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는 하나 삼십 장 안에 떨어지는 낙엽성(落葉聲)도 들을 수 있는 청력을 지닌 그녀의 귀가
탁옥룡의 발걸음 아래 귀머거리가 된 것이다.
"아……?"
미부인이 깜짝 놀라자 다른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비로소 탁옥룡의 존재를 발견했다.
"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느냐?"
"복호장룡진을 뚫었단 말인가?"
두 명의 노인 역시 경악에 젖고 말았다.
"우와―!"
체격이 당당한 라마승이 탁옥룡을 향해 황소 울음소리를 내며 훌쩍 날아올랐다.
그는 삼 장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몸을 뒤집어 십여 개의 환영(幻影)을 뿌렸다. 우람한 체구답지 않게 그의
몸놀림은 아주 유연했다.
탁옥룡은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천마십이변(天馬十二變)은 좋다. 하지만 너무 성급하다."
탁옥룡은 라마승이 신법을 다 펼치기를 기다렸다.
상대의 허점을 노려 기습을 가할 수 있었지만 굳이 손을 쓰지 않았다.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라마승은 자신이 다스리는 곳이 침입자가 출현했다는 사실에 크나큰 수치심을 느끼는 듯했다.
"차아아―!"
그는 격한 분노를 표하며 손을 내밀었다. 뼈가 어긋나는 음향과 함께 그의 두 손이 세 배 부풀어올랐다.
"대수인공(大手印功)!"
탁옥룡은 그의 수법을 보고 차게 웃었다.
"후후……, 네가 라마공자(喇 公子)란 놈이냐? 회회공자란 자는 그래도 귀공자 같은데 네놈은 털북숭이
산돼지로구나!"
그는 중원어가 아닌 사막 지방의 사투리로 말했다.
마왕동부에 소장된 서가에서 그는 변방의 언어를 어느 정도 습득했었던 것이다.
"우헤헤헤……, 중원에 나와 말이 통하는 놈을 죽여 보기는 처음이다. 네놈의 뛰어난 언변을 높이 사 고통 없이
죽여 주겠다."
라마공자의 눈빛이 아주 이상했다. 은은한 자광(紫光)이 서려 있었다.
'필경 피에 독을 담고 있는 놈이다.'
탁옥룡은 눈빛만으로 그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즉시 알 수 있었다.
열두 개의 환영으로 나뉘어졌던 라마공자의 몸뚱이가 하나로 합해지더니 그의 몸이 하나의 거대한 기둥으로 화했다.
우르르― 릉!
무시무시한 기공이 뇌성을 내며 탁옥룡 곁으로 날아들었다. 상당히 위맹한 공세였다.
탁옥룡은 만만치 않다 여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초로 죽이기 위해서는 절기를 써야겠구나!'
그는 속으로 뇌까리며 두 손을 끌어올렸다. 그의 두 손이 팔꿈치 어름까지 핏빛으로 물들었다. 전신이 짙은
혈무로 뒤덮였다.
라마공자가 그것을 보고 움찔하였다.
"어엇? 무슨 수법이냐?"
탁옥룡은 짤막한 기합성을 발하며 쌍장을 내질렀다.
양손에서 각기 적룡(赤龍)을 방불케 하는 기류가 흘러나왔다. 바로 마중지존의 십대절학 중 혈영파천강(血影破
天 )이 초현된 것이다.
꽈르르릉―!
피구름이 멀리 퍼지는 듯하더니 라마공자의 대수인공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라마공자가 아연실색하며 몸을 빼려 했다. 그러나 태산도 깨뜨릴 금강마장(金剛魔掌)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탁옥룡의 두 손바닥이 그의 상반신을 휩쓸었다.
콰― 콰쾅―!
라마공자는 허리까지 핏가루로 으스러지며 어처구니없이 죽었다. 사대이역단의 하나를 관장하던 절세고수인 그가
비명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한 것이다.
그의 시체가 나뒹굴자 모두 대경실색했다.
"허억, 라마공자가 죽다니……?"
"믿… 믿을 수 없다. 저 놈은 노부와 백초 이상을 겨뤘던 고수인데……?"
미부인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병신, 몸은 강철 같아 침상에서 나를 들들 볶더니만……. 으음, 위기가 되니까 속절없이 죽어 자빠지는군."
탁옥룡은 비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저 멧돼지까지 힘을 합했더라면 너희 넷을 죽이느라 꽤 애를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놈이 죽은 이상 너희
셋은 간단히 처치될 것이다."
"미… 미친 놈!"
거지노인이 눈을 부릅떴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사 척 장도를 든 노인이 손을 휘저었다.
"개존( 尊), 암만해도 보통 놈이 아니오. 저 놈의 옷차림을 보니 아마도 북방에서 피바람을 일으킨 혈영마협
(血影魔俠)이란 놈 같소."
"혈… 혈영마협?"
거지노인은 뜨악한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두 노인은 다름아닌 옥룡마궁의 최고 지위에는 있는 구존(九尊)에 해당되는 자들이었다. 거지노인이 개존이며,
장도를 멘 노인이 도존(刀尊)이다.
"개존……?"
탁옥룡은 상대가 개존이라는 사실에 피가 머리끝으로 치솟는 기분이 되었다.
'제대로 걸렸다. 굳이 찾지 않더라도 돌아가신 광개(狂 ) 노형님의 한을 풀 수 있겠군. 정말 다행이다.'
탁옥룡이 냉혹한 미소를 지었다.
은모란(銀牧丹)을 가슴에 단 여인이 허리를 살랑거리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두 분 사숙은 심려 마세요. 저 놈이 혈영마협이 아니라 달마대사의 할애비라 하더라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은모란, 자신이 있느냐?"
"호호, 라마공자는 제 하인이지만 라마승들은 라마공자를 신으로 섬깁니다. 그들이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그들은
라마공자가 죽었기 때문에 미쳐 놈과 동귀어진(同歸於盡)할 것입니다."
여인은 바로 은모란이었다.
그녀는 궁주사부인(宮主四夫人) 중 하나였다. 형식적으로는 옥룡천자의 부인이며 라마공자에게는 숙모라 불렸다.
헌데도 이제껏 그녀는 라마공자와 간통했으니 정말 모를 일이었다. 옥룡마궁의 규율이 그토록 느슨한 것인가,
아니면 은모란에게 별다른 이유가 있었는가.
하여간 그녀는 수년간 살을 섞었던 라마공자가 죽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흔들며 이상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발했다.
"우우―!"
"와아―!"
사방에서 함성이 나며 수백 명이 파도치듯 다가섰다.
모두 라마승들이었다. 그들은 탁옥룡 근처에 뒹굴고 있는 라마공자의 시체를 보고 반 미친 상태였다.
어떤 자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어떤 자는 한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꽉 다물고 있는 상태였다.
은모란은 그들이 다가서자 애써 슬픈 체를 하며 분연히 외쳤다.
"저 놈은 혈영마협이란 자요. 저 자가 라마공자를 죽였소. 라마교의 고승들은 필히 복수해야 하오."
"으으……!"
"복수다……! 복수!"
"호사절기(護寺絶技)를 쓰자……!"
라마승들이 이를 갈며 외치자 은모란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탁옥룡을 응시했다.
"네놈이 혈영마협이건 아니건,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우리들은 네놈이 죽을 때까지 차를 마시며
기다릴 것이다."
탁옥룡은 냉담하게 말을 받았다.
"쯧쯧……, 라마교의 호사절기인 천룡범창(天龍梵唱)으로 나를 죽일 수 있으리라 믿는 모양인데……. 후후,
어림없는 수작이다."
은모란의 안색에 핏기가 싹 가셨다.
"아… 아니? 그것을 어찌 아느냐?"
"후후, 너 따위는 알 것 없다. 또한 너는 천룡범창이 나를 죽이는가 죽이지 못하는가 알기 전에 죽을 것이다."
"미친 소리!"
"후후, 너희 셋 모두 죽는다. 아주 잔혹한 손속으로 말이다. 하지만 회회단이 어디 있는지 말한다면 고통 없이
죽여 주겠다."
탁옥룡은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뿌렸다.
무음의 지강이 발출되었다. 어떠한 기류도 보이지 않건만 옷자락이 찢기며 은모란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네… 네놈이 나의 옷을 찢다니……!"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찢겨진 나삼 밖으로 환히 드러났다.
탁옥룡의 유화탈백지력(流花奪魄指力)이 그녀의 나삼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벗은 몸을 보이게 된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벌거벗고 저잣거리를 뛰라 해도 능히 그럴
만한 탕녀(蕩女)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놀라는 이유는 탁옥룡의 지력 때문이었다.
"으음……, 밀교(密敎)의 무음무영지력(無音無影指力)보다도 오히려 뛰어난 지력이구나!"
은모란은 얼굴을 파랗게 물들였다. 만일 그가 그녀의 목숨을 원했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회회단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옷이 찢어졌듯이 너의 심장이 찢어질 것이다."
탁옥룡은 수백의 적을 주위에 두고도 아주 태연하기만 했다.
"흐흐……, 두고 보자니 기가 막히군. 네놈이 약간의 절예를 배워 본궁 분타 몇 곳을 박살냈다는 것은 안다만,
흐흐……. 어느 안전(眼前)이라고 날뛰느냐?"
사 척 장도를 쥔 노인의 눈에서 시퍼런 청망이 토해졌다.
"노괴는 또 누구냐?"
탁옥룡의 눈길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흐흐, 옥룡궁의 태상장로(太上長老)인 도존(刀尊)이다."
"흠, 옥룡구존(玉龍九尊) 중 하나인 모양이군?"
"바로 그렇다."
"하하……, 그럼 너도 회회단의 거처를 알고 있겠구나?"
도존은 뒷짐을 쥔 채 오만하게 응수했다.
"물론이지."
"그럼 저 추악한 계집을 통해 아는 것보다 노괴를 통해 아는 것이 낫겠군."
"흐흐……, 일초섬광도(一招閃光刀)를 피한다면 네놈에게 회회단의 위치를 알려주겠다."
도존은 평소 남에게 시비를 거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무공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무공이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낀다고 자부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사 척 장도를 서서히 쳐들었다. 도갑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하얀 도신이 나타났다.
"이것은 파천반월도(破天半月刀)와 함께 천하쌍도(天下雙刀)라 불리는 섬광신도(閃光神刀)다!"
탁옥룡은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파천반월도가 천하쌍도 중 하나라는 말에는 이의가 없다만 섬광신도 따위가 천하쌍도 중 하나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뭐… 뭐라고?"
"후후, 그것은 빠르기만 할 뿐 기가 들어 있지 않다. 그러기에 천하도법 중 열 손가락 안에 끼지도 못한다."
도존은 지독한 모멸감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 미친 소리!"
"잘 들어라. 천하십도(天下十刀)는 심극일분도(心極一分刀)와 파천반월도(破天半月刀)에서 시작되어,
항마신도(降魔神刀), 단천열지도(斷天裂地刀), 혈전도(血戰刀), 자광도(紫光刀), 환환무상도(幻幻無常刀),
능마환광도(凌魔幻光刀), 일도단홍(一刀斷虹), 그리고 개천망망도(開天茫茫刀)로 끝이 난다. 섬광신도의
이름은 그 뒤에 있다."
"으음……, 절전절학(絶傳絶學)의 이름을 잘도 주워 대는구나."
도존은 탁옥룡의 해박한 지식에 다소 기가 질렸다.
"네 말이 맞는 말이기는 하나……, 네가 말한 열 가지 도법 중 현존하는 것은 회회교의 비학인
파천반월도법뿐이다."
그는 뱀눈을 번뜩이며 섬광신도를 높이 쳐들었다.
그의 기수식(起手式)은 아주 웅휘했다. 반면, 탁옥룡은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무기력해
보이고 허점 투성이였다.
도존은 도를 내리치려다가 땀방울을 흘렸다. 그의 얼굴이 벌레 씹은 얼굴로 일그러졌다.
"빠른 섬광신도를 피하기 위해서는 보행(步行)이 유동적(流動的)이어야 한다. 네가 그것을 간파할 줄이야."
그는 탁옥룡의 기괴한 자세에서 엄청난 살기를 느껴야 했다. 그 힘은 오직 도존에게만 미쳤다. 도존은 손에 땀을
쥐며 감히 도를 내려치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도존은 심기에 압도당해 도를 쳐든 채 뒷걸음질 쳤다.
"회… 회회단은 회하(淮河)가에 있다."
셋 중 가장 강한 도존이 이초도 쓰지 못하고 물러나자 개존과 은모란이 은근히 두려워하며 그를 따라 물러났다.
"도망갈 수는 없지."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백석전 위로 오르는 계단에 발을 댔다.
"서… 서라!"
은모란이 악을 썼으나 탁옥룡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돌에 족인이 파여졌다. 그가 세 걸음째 내디디려 하자 수백 명의 라마승들이 백석전을 빙
둘러 포위하고 입을 모아 범패(梵唄)를 시작했다.
범패는 보통 듣기 좋은 불가의 창법이다.
하지만 라마승들의 천룡범창(天龍梵唱)은 듣기 좋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역겨운 소리였다. 듣는 사람은
오장육부가 비틀리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탁옥룡은 라마교의 호사절기에 당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마왕동부에서 겪은 금강마(金剛魔)의 고행 가운데에는 그보다 수십 배 엄청난 시련도 끼어 있었다. 천룡범창
따위로 나를 해할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을 노리고 시전되는 천룡범창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계속 걸어 백석전 위로 올라갔다.
"차― 앗!"
도존이 참다못해 섬광도법을 발휘했다.
번― 쩍―!
번갯불이 번뜩였다. 보이는 것은 도신(刀身)이 아니었다. 푸른 도기(刀氣)가 보일 뿐이었다. 찰나지간
이십팔로(二十八路)를 노리는 엄청난 도기가 탁옥룡의 전신으로 날아들었다.
"훗훗……, 내가 충분히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알 텐데?"
탁옥룡은 혀를 끌끌 차며 허리를 약간 틀었다.
파파팟―!
섬광신도는 애꿎은 백석전 바닥만 후려쳤다.
순간, 탁옥룡은 도존 바로 곁으로 다가가 도존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바로 역천공공금나(逆天空空擒拿)
였다.
도존은 팔목을 잡히는 찰나 피가 역류해 힘을 전혀 쓸 수 없었다. 엄습해 오는 공포가 그를 지배했다.
"너… 너는 누구냐? 어이해 이리도 강하냐?"
"노괴가 나를 혈영마협이라 부르지 않았더냐?"
탁옥룡은 잔혹하게 말하며 도존의 맥문을 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도를 쥔 도존의 손이 자신의 목을 향해 움직였다.
"제… 제발……!"
도존의 얼굴이 더 하얗게 될 수 없을 정도로 하얘졌다.
"후후……!"
탁옥룡은 잔혹한 웃음을 흘리며 팔에 힘을 가했다. 섬광신도가 도존의 천돌혈에서 혈적(血滴)을 흘리게 할
때였다.
"야앗!"
은모란이 허점을 노리고 있다가 기합소리를 내며 탁옥룡의 등판에 일격을 가했다.
작고 귀여운 여인의 손바닥이라고는 하나 금석을 녹여 버리는 용금장(鎔金掌)의 힘이 실려 있었다. 그녀의 손이
탁옥룡의 등에 닿으며 큰소리를 냈다.
퍼엉―!
은모란은 팔을 늘어뜨리며 주르륵 물러섰다.
"크으윽, 호신강기로 팔을 으스러뜨리다니……?"
그녀의 오른팔은 피떡으로 화한 후였다. 그녀의 장력 정도로는 혈영금강마공의 주인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탁옥룡은 은모란이 자신을 치고는 오히려 나자빠진다는 것을 모르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팔에 힘을 가했다.
도존의 목이 조금씩 베어졌다.
"크으윽, 제… 제발……."
천하를 진동시키는 도존이지만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벌벌 떨고 말았다.
탁옥룡이 손을 딱 멈췄다.
"목숨값을 할 만한 것이 있다면 목숨과 바꿔라.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이대로 죽을 수밖에 없다."
"무… 무슨 비밀을 알고 싶으냐?"
"후후……, 노괴의 목숨 값만한 것이면 된다."
도존은 아래턱을 떨며 애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렇다면 네게 옥룡궁의 최대 비밀을……."
바로 그때였다.
"천한 늙은이!"
그제껏 잠자코 있던 개존이 눈을 부릅뜨며 양 소매를 흔들었다. 바람이 일어나며 푸른 모래가 뿌려졌다.
휘류류류―!
모래바람이 탁옥룡과 도존의 몸을 휘감았다.
"케에에― 엑!"
도존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자위에서 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그것도 잠깐 그의 숨결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지독한
독모래였던 것이다.
탁옥룡은 그제서야 그의 손을 놓았다. 개존은 탁옥룡마저 쓰러지기를 바랐으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뛰어난 독공이다. 무상청멸독(無常靑滅毒)! 후후……, 독존(毒尊)이냐, 독왕(毒王)이냐?"
"네… 네가 만독불침(萬毒不侵)이란 말이냐? 무상청멸독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다니……?"
개존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뒤로 물러났다.
"독존이냐 독왕이냐?"
탁옥룡은 다시 다그쳐 물었다.
"독존이시다. 그… 그 분이 노부에게 주셨다."
"그가 살아 있느냐?"
"그 분은 옥룡궁 태상호법(太上護法)이시고 궁주의 장인(丈人)이다."
탁옥룡은 뚜벅 뚜벅 다가섰다. 죽립을 깊숙이 둘러쓰고 다가서는 그의 모습은 사신(死神)과 같았다.
"그럼 나의 노형님을 독으로 암산하고 십절죽부령(十節竹符令)을 훔쳐간 자도 그였더냐?"
"뭐… 뭐라고? 설마 너의 노형이 만리를 주유하며 살던 광개(狂 )라도 되느냐?"
"바로 말했다. 나는 그 분의 의제(義弟)다."
"으으……!"
개존은 너무 놀라 들고 있던 보따리를 떨구었다.
"으음……!"
보따리가 떨어지며 소년의 신음소리가 났다.
탁옥룡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개존의 얼굴 앞으로 흰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놔라!"
"무… 무엇을 달란 말이냐?"
"십절죽부령!"
개존은 벌레 씹은 표정이 되어 몸을 휘청였다. 그는 낭패한 표정을 짓다가 품에서 대나무 패 하나를 꺼냈다.
"여기 있다. 노부를 파문시킨 광개를 죽인 독존께서 노부에게 하사한 것이다."
개존은 대나무 패를 힘껏 던지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승풍추랑(昇風推浪)으로 멀리 날아오르다가 품 안에서 검은 쇠구슬을 꺼내 힘껏 집어던졌다.
"뒈져라!"
쇠구슬은 아주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개존은 마지막 순간까지 암수를 구사했다.
탁옥룡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왼손을 슬쩍 흔들었다.
"다른 것은 받지 않는다. 다시 갖고 가라!"
섬전같이 날아들던 쇠구슬이 허공에서 방향을 틀었다. 선회한 쇠구슬은 개존에게로 날아들었다.
개존은 도망치다가 사색이 되었다.
"아… 안 돼!"
그가 자지러지게 외칠 때 쇠구슬이 그의 등판에 가 닿았다.
펑―!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불꽃 한 송이가 만들어졌다.
개존의 몸뚱이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매캐한 유황냄새가 퍼져나갔다. 그가 던졌던 쇠구슬은 지독하게
강한 화탄(火彈)이었던 것이다.
"마궁은 실력 반, 사술(邪術) 반으로 형성되었다. 암기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무리들이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은모란은 라마승들 사이에 서 있는데 탁옥룡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주 사악했다.
"빠드득―!"
은모란의 흰 이가 갈리며 눈빛은 더욱 흉흉해졌다.
그러나 탁옥룡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혈광에 비한다면 십분의 일의 공포도 주지 못했다.
은모란은 탁옥룡을 바라보며 저주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네… 네놈이 나의 모든 것을 망치는구나!"
그녀의 표정에는 공포가 역력했다.
탁옥룡은 그녀를 응시했다. 특별히 직시한 것이 아니었는 데도 매우 강한 눈빛이었다.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인 법이다."
은모란이 이를 갈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피눈물을 뿌리며 아주 애절히 외쳤다.
"라마교의 고승들! 우리는 돌아가신 라마공자의 복수를 해야 하오!"
이국의 말로 하는 말이었다.
"우리들이 다 죽더라도 꼭 복수해야 하오!"
그녀의 음성은 아주 신비했다. 라마승들은 흡사 주술에 걸린 듯 그녀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불타는 복수심을
뿜어냈다.
"섭혼미음공(攝魂迷音功)을 익히다니. 흠, 마궁의 무리들은 동해옥룡사(東海玉龍寺)의 불문신공으로 강해진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소문이군."
탁옥룡은 저으기 감탄하는 눈치가 되었다.
섭혼미음공은 사공(邪功) 중의 사공이었다. 음성으로 상대의 영혼을 조종하는 수법이 그것이었다.
라마승들의 표정은 은모란의 처절하고 신비한 목소리로 인해 점점 상기되었다. 혹자는 목을 놓아 통곡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눈빛이 점점 사나워졌다.
은모란의 목소리는 더욱 고조되었다.
"천룡범창과 함께 복호장룡검진(伏虎藏龍劍陣)을 쓴다면 저놈이 비록 삼두육비(三頭六臂)라 해도 죽을
것이오!"
은모란은 알몸인 상태에서 큰소리로 말하며 뒤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모든 것을 라마승들에게 맡기고 일단 꽁무니를 빼는 것이었다.
라마승들은 아주 우직했다. 난폭했으나 교활하지는 않았다.
"우……!"
"놈을 죽이자. 소교주님이 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무슨 낯으로 삶을 계속하겠는가?"
"대교주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유언에 따라 옥룡궁을 도와야 한다!"
라마승들은 크게 외치며 백석전을 포위해 들어왔다.
"혈섬검아, 네가 요녀(妖女)의 피맛을 봐야겠다."
탁옥룡은 등에서 삼척고검(三尺古劍)을 풀어 내렸다.
혈섬신검(血閃神劍)의 냉광이 밤을 사라지게 했다. 그는 혈섬검 자루에 달린 작은 단추를 눌렀다.
검신이 저절로 세 치 뽑혀졌다. 작은 단추는 검이 뽑혀지게 하는 용수철 장치였던 것이다. 날카로운 소리에 이어
용 울음소리가 났다.
스르― 릉―!
혈섬검이 저절로 위로 솟구쳤다. 혈섬검은 살아 있는 듯 스르르 허공으로 날아올라 짙은 혈광에 묻었다.
라마승들은 생동하는 검의 움직임에 아연실색해 했다.
"가라!"
탁옥룡이 외치는 순간 혈섬검은 사라지고 대신 붉은 빛줄기 하나가 허공에 그어졌다.
"어엇?"
"검… 검신(劍神)이다!"
라마승들이 너무도 신묘한 그의 무학에 질겁하고 말았다.
한편, 저 멀리 도망가고 있던 은모란의 얼굴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어… 어검배공술(馭劍排空術)!"
그녀의 눈빛에는 진회색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다.
삶은 어느 누구에게든 단 한 번뿐이다. 다만 언제 어떻게 죽느냐가 다를 뿐이다.
"아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나더니 은모란의 세류요(細柳腰)가 반으로 갈라졌다. 시뻘건 내장이 쏟아져 나와 땅을 적셨다.
第六章 몸을 바친 구원(救援)
빛이 비치지 않아 컴컴한 동굴이 있다.
곰이나 승냥이의 거처로밖에 쓰이지 못할 황폐한 동굴 속에 언제부터인가 너무도 아름다운 몸뚱이가 나타나 있었다.
여인은 후리후리한 키에 잘 빠진 몸매의 소유자였다.
복면으로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백옥으로 다듬은 듯한 몸매를 본다면 얼굴 또한 일품일 것이다.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발아래 몸은 희고 얼굴은 시꺼먼 괴청년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의 오관에서는 더운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이 사람의 막강한 내공력 뿐이다. 내가 할 일은 나의 순음지기(純陰之
氣)로 이 사람의 원양지기(元陽之氣)를 일으켜 이 사람 스스로 운기행공을 하게 돕는 것이다."
여인은 중얼거리며 동굴 밖을 바라봤다.
"아버님, 소녀를 용서해 주십시오. 소녀는 아버님의 자식으로 이십 년간을 천하악(天下惡)의 선봉이 된 것을
죄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처지는 동정하나, 소녀로서는 악보다는 정도(正道)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인은 희멀건 궁둥이를 쳐들며 허공을 향해 절을 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벌거벗은 청년의 몸 위로 가서 엎드렸다. 처음으로 사내의 몸을 접한 여인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청년의 두 손을 잡아 자신의 젖가슴을 쥐게 했다. 매끄럽고도 풍성한 육봉(肉峰)을 쥐는 청년의
손아귀에는 힘이 들어 있지 않았다.
"아……, 하늘의 도움이 없는 한 힘든 일일지 모른다."
여인은 안타까워하며 계속 청년의 손을 움직였다.
청년의 손은 그녀의 이곳 저곳을 쓰다듬었다. 모두 힘없는 손길이었다. 여인은 언제부터인가 땀을 흘렸다.
청년은 여전히 차가웠다. 간신히 숨은 붙어 있으되 시체와 다를 바 없었다.
"흑……, 제발 천하를 위해 일어나요."
여인은 한 시진 가량 애쓰다가 지쳐 청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가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였다.
"흐으윽……!"
다친 짐승의 거친 호흡소리와 함께 그녀의 허리를 바짝 조이는 힘찬 손길이 있었다.
추악한 청년이 눈을 번쩍 뜨고 있었다. 그는 여인의 눈을 올려다보더니 아주 거친 손길로 여인의 복면을 찢어냈다.
"아… 안 돼요!"
여인은 그의 손길을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청년에게 잡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청년은 복면을 찢어버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 나의 얼굴을 봐서는 안 되는데……."
여인은 얼굴을 가리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다행히도 괴성을 발하며 그녀의 몸을 바짝 조이는 청년이 바랐던 것은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그녀의 탐스러운 붉은
입술이었다.
두 개의 입술이 한데 합했다. 그리고 혀가 물 속을 노니는 한 쌍의 은어(銀魚)와 같이 어울렸다. 그것은 아주
긴 유희였다.
두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서로 자리를 바꿨다.
청년은 소문답지 않게 거칠고 뜨거웠다. 그는 얼음보다도 차다는 혈영마협 탁옥룡이었으나, 지금의 그는
활화산보다 더한 열기를 발휘하는 한 청년일 뿐이었다.
"흐윽……!"
여인은 지독히도 거친 애무에 심한 아픔을 느꼈다. 애무라기보다 고문에 가까웠다.
탁옥룡은 거의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는 원양지기를 자극한 뜨거운 육체 덕분에 죽음의 문턱에서 깨어났지만 아직 정신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을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상대가 누구인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흐음……!"
그는 여인의 향기에 흠뻑 젖고자 육봉 사이에 얼굴을 부비며 유실을 탐했다.
치솟는 욕정은 그의 원양지기를 더욱 자극했고, 그의 몸은 여인의 허벅지 사이로 더욱 파고들었다.
"아… 안 돼요……."
여인은 스스로 원한 일이었지만 너무도 두려운 마음에 그를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저항은 미약했기에 탁옥룡은
자신의 불기운을 쏟아낼 쾌락의 습지를 공략할 수 있었다.
여인은 너무도 강렬한 통증에 입술을 질끈 깨문다. 눈물이 상큼 배어 나온다. 사내의 목을 휘어감는 여인의
비단결 팔에 푸른 힘줄이 돋는다.
"하악……!"
탁옥룡에게는 희열의 연속이었지만 여인에게는 고통뿐인 듯 여인의 비명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여인은 전신이 터져나갈 듯한 아픔에 젖어 후회와 자책을 반복했다. 정신적으로 위로하기에는 몸의 고통이 너무
컸던 것이다.
춘풍(春風)이 가라앉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탁옥룡은 언제부터인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이 여인의 매끄럽고 가는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있다는데 크게 놀라고 말았다.
"아… 아니?"
그에게 안겨 있는 여인은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그것은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탁옥룡은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여인의 허리에서 손을 풀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음양화합회생법(陰陽和合回生法)을 알고 계셨소?"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것을 아십니까?"
탁옥룡은 그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자세히 보고 다시 놀랬다.
반달같이 휘어진 눈썹, 칼로 깎아 만든 듯 오똑한 콧날, 붉은 열매 하나를 베어 물고 있는 듯한 입술…….
그 절색의 미모는 탁옥룡이 아는 얼굴이었다. 세상사에서 수년간 유린된 바 있어 과거의 인물들에 대한 기억을
좀더 명확히 하고 있는 그였다.
"아……, 낭자(娘子)였구료. 그래서 음양화합회생술을 아시는구료?"
그 말에 여인이 기겁을 했다.
"저… 저를 아십니까?"
"하하……, 옥지(玉芝)라는 방명(芳名)을 갖고 계시지 않소?"
"아… 아닙니다, 소녀는……."
여인이 까무러칠 듯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잘못 보았을까? 천산신의(天山神醫)의 제자인 옥지 낭자임에 틀림없는 듯한데……?'
탁옥룡이 과거를 되새길 때 여인이 벌떡 일어났다.
"소녀를 잊어 주십시오. 소녀는…… 사람이 아닙니다. 호선(弧仙)입니다. 한 번 나타났다가 영원히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여인은 크게 외치고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낭… 낭자!"
탁옥룡은 크게 소리치며 뒤따르려다가 털썩 쓰러졌다.
"으음, 현기증이 심하다. 살아나기는 했으나 내공은 아직 흐트러진 상태다. 신비한 여인을 그냥 보내다니……,
내겐 구명지은인(救命之恩人)인데……."
탁옥룡은 애석하며 정좌를 했다.
'왜 놀라 떠났을까? 분명 옥지낭자인데……?'
그는 천산신의를 따라 구정산으로 왔던 새침한 소녀 옥지를 기억해 봤다. 그 귀엽고 깜찍한 모습은 조금 전
이곳을 떠난 미녀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지 않았던가?
그는 의혹에 젖다가 일단 요상대법(療傷大法)을 시전해 내상을 치유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묵묵히 앉아 한 가지 구결을 암송했다. 그것이 그의 흐트러진 진원지기를 한데 모으게 했다. 내상 부위가
시큰거렸다. 다행히도 참을 만한 고통이었다.
옥지로 생각되는 여인의 고귀한 희생 덕분이었다.
탁옥룡은 오래지 않아 혈무에 휘감겼다. 그의 혈영금강마공은 거의 완벽한 단계였다. 핏빛 기류는 골수(骨髓)
에서 빠져나와 모공(毛孔)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갔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핏빛 구름덩어리가 보일 뿐이었다.
그는 일주야(一晝夜) 내내 운기행공한 다음에야 눈을 떴다.
번쩍―!
아주 날카로운 눈빛이 일어났다가 찰나적으로 사라져 갔다.
"흠……, 알 수 없는 일이다. 녹옥삼보를 보고 익힌 세 가지 무공이 운기행공 중 자꾸 떠오르다니……. 그리고
마음이 전과는 달리 편안해지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천하의 어떤 무공에도 한 가지 나은 점은 있기 마련인가
보군."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옷은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다. 그 위에는 혈섬검이 놓여져 있었다.
"너무도 큰 은혜를 입었다."
그는 옥지로 생각되는 여인을 생각하며 심한 죄책감까지 느꼈다.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다니……,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빚을 안고 말았다."
그는 옷을 걸치고는 혈섬검을 쥐었다. 그의 표정은 아주 잔혹하게 변했다.
'옥룡천자란 놈을 살려 보냈다만 다음에 만나면……, 아니 이 길로 그 놈을 쫓아가 처단하리라!'
탁옥룡은 암습당한 지난 일을 상기하며 가슴 가득히 살기를 품었다.
그는 검자루를 약간 비틀며 검자루에 달린 단추를 눌렀다. 검신이 세 치 정도 저절로 튕겨져 나왔다.
탁옥룡은 검자루에서 손을 놓았다. 검은 그의 내공력으로 인해 허공으로 퉁겨 나왔다. 검강(劍 )이 뿌려지며
검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마중지존의 검술은 모두 어기배검술(馭氣排劍術)이었다.
탁옥룡은 내공의 힘을 이용해 벽면에 글을 새겼다. 정말 잘 쓴 글인데 그 내용은 아주 섬뜩했다.
― 천년한(千年恨)과 탁가한(卓家恨)을 함께 푼다. 시산(屍山)이 이룩되어도 행하고 만다!
탁옥룡은 흡인공을 발휘해 검을 쥐었다.
"후후……, 혈섬검아! 네 몸에 옥룡천자란 놈의 피맛을 보여줄 날이 있으리라."
탁옥룡은 중얼거리며 검을 검집에 넣으려 했다. 한데 혈섬검이 저절로 경미하게 떨었다.
웅― 우웅!
탁옥룡의 눈살이 그로 인해 찌그러졌다.
"혈섬은 마검(魔劍)이다. 마검이 우는 이유는 근처에 정종무공(正宗武功)이나 현문무공(玄門武功)을 익힌 자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천이통을 시전했다. 아주 경미한 소리가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과연 동굴 쪽으로 날아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는 모두 넷이다. 하나같이 위풍당당하게 생긴 노고수들이었다.
"가공할 검기는 저곳에서 발휘되었소."
"으음……, 모두 조심해야 하오."
네 사람은 눈치를 살피며 동굴을 향해 다가섰다. 그들이 동굴 어귀에서 십장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하하……, 어느 고인(高人)들이 나의 검을 울게 하시는가."
동굴 안에서 앙천대소가 터져나왔다.
천하에서 가장 추악하게 생긴 젊은이 하나가 등에 삼척고검을 걸고 위풍당당하게 걸어나오고 있었다.
죽립을 쓰지 않은 탁옥룡이 바로 그였다.
그러나 전신에서 뿜어지는 강렬한 마기와 불 같은 홍의만으로 그를 짐작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그대가 혈영마협인가?"
"단신으로 낙성사 옥룡별부에 들어가 마궁 고수 이백여 명을 주살(誅殺)하고 옥룡천자와 양패구상(兩敗俱傷)한
사람인가?"
"역시 이 근처를 떠나지 않았군. 마궁도들은 그대가 아직 낙양 근처에서 머물러 있다 여기며 천라지망을 치고
있네."
넷 모두 탁옥룡의 끔찍한 얼굴을 보고 놀라워했다.
탁옥룡은 용모에는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추악하나마 빙그레 웃으며 입술을 뗐다.
"당신들이 혈영마협을 찾았단 말이오?"
웃으며 하는 말이나 아주 차가웠다. 네 명의 고수는 모두 빙굴에 떨어진 듯한 한기를 느껴야 했다.
맨 오른쪽에 있는 노인은 유난히 푸른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었다.
청성(靑城) 청발상인(靑髮上人)!
오십 년 전 황산비검(黃山比劍)에 나타나 구파제일검(九派第一劍)의 자리를 쟁취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 옆에 있는 인물은 통천신군(通天神君) 조자운(趙子雲)으로 공동파 사람이다. 그의 절기는 복마검(伏魔劍)
대구식(大九式), 소구식(小九式)이며 검왕(劍王)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옆의 황삼노인은 매화신군(梅花神君)으로 화산파(華山派) 전대 장문인이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소림 율법원주(律法院主)가 되는 일정(一靜)이라는 고승이다.
넷 모두 정파명숙(正派名宿) 중에서도 명숙이었다.
그들은 옥룡마궁이 천하의 반을 얻자 그 일을 수치로 알고 은거해 세상에서는 죽었다고 소문난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탁옥룡을 향해 합장하며 말했다.
"본맹주(本盟主)게서 마기(魔氣)가 아직 낙양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귀하를 찾으라
했소."
"아미타불……, 우리 모두 일심맹(一心盟)에 들어 있소. 우리는 일심구장로(一心九長老) 중 네 사람이오."
탁옥룡은 대수롭지 않게 응대했다.
"그럼 무혈검(無血劍)의 수하들이로군?"
"수하라는 말은 가당치 않소. 일심맹에 든 사람은 맹주나 맨 말단이나 평등하기 때문이오."
모두 화난 표정들이었다.
현재 마궁이나 포달랍궁의 기세에 눌리고 있어 빛을 발하고 있지는 못하나 천하백도의 주인공이 되는 일심맹이다.
일심구장로라면 정사를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혈영마협이 태중에 있기도 전에 이미 중원천하를 질타하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너무도 당돌한 탁옥룡의 태도에 은은한 노기마저 띠었다.
"무혈검……, 그가 나를 찾기라도 했소?"
탁옥룡이 팔짱을 꼈다. 그런 모습은 남에게 오해를 사기에 적당했다.
'거만한 자다.'
'일거수일투족이 살기와 자만에 차 있다. 장차 옥룡마궁보다 더한 마풍을 일으킬 자라는 맹주의 말씀대로다.'
비교적 수양이 높은 일정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핏빛 검광을 보고 따라 왔소. 맹주는 귀하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오."
"초빙을 받다니 영광이군. 안내하시오."
탁옥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먼저 가라는 신호를 했다.
네 사람은 무언중 합의를 보고 한 곳으로 날아올랐다. 네 사람의 신법은 각기 달랐다.
청성의 유성과천신법(流星過天身法),
공동파의 청운적성신법(靑雲摘星身法),
화산의 암향표(暗香飄),
소림사 비전 이형환위술(移形環位術).
모두 자파무공에 있어서는 최고의 수준에 이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달리는 속도는 거의 같았다. 그들은 천마
(天馬)를 무색케 할 정도로 빨리 달렸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혈영마협에게 수모를 안겨 주려는 의도에서였다.
오 리쯤 갔을까?
"허허……, 혈영마협이 대단하다 여겼던 것이 실수인 듯 하외다."
청발상인이 크게 웃었다. 탁옥룡이 따라 오는 기세가 없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놈이 오기를 기다립시다."
매화신군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여유를 보였다.
이때, 어디선가 하품 하는 소리가 났다.
"하아암……!"
네 기인이 달려가는 곳에 있는 노송 아래서 언제부터인가 소나무 그루터기를 베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홍의인
하나가 있었다.
"어엇……?"
"어… 어느새 우리들을 추월했단 말인가?"
"내공뿐만 아니라 신법도 신의 경지구나!"
네 기인은 하품하며 일어나는 사람이 탁옥룡이라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고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허어……, 장강(長江)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옛말대로다."
"최근 일소일선(一簫一扇)의 쌍협객(雙俠客)이 정도의 으뜸이며, 서장(西藏) 혈수나찰이 마궁의 회회공자와
함께 후기지쌍수(後起之雙秀)요, 혈영마협은 이미 삼기(三奇)를 능가하는 정도다. 라는 노래가 있는데
사실이구료."
넷은 더 이상 경공 대결을 삼가고는 앞장 서 탁옥룡을 인도했다. 탁옥룡은 무표정히 그들을 따라갔다.
일행은 점점 깊은 산 속으로 갔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구나. 흠, 왜 한 자리에 모였을까?'
탁옥룡은 일심맹도들의 수가 의외로 많다는 데 조금 놀라워했다.
그들은 이내 유리처럼 매끄러운 석벽 아래에 당도했다.
바위 위에 휜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흰 가사를 걸치고 목과 손에 염주를 두른 중년
승려였다.
그는 아주 청수하게 생겨 첫인상 치고는 정말 좋은 느낌을 주었다.
"허허……!"
그는 달려오는 다섯 사람을 향해 크게 웃었다. 쇠종 치는 듯 큰 웃음소리에는 막강한 내공이 숨어 있었다.
"허허……, 역시 철서생은 마협을 죽이지 못했도다."
그는 웃으며 탁옥룡을 바라봤다.
"하하……, 이제 보았더니 무혈검이시구료? 어쩐지 행동이 유약하다 싶었는데 스님이셨군."
탁옥룡은 크게 말하며 대번에 십오 장을 날았다. 그는 허공에서 재주를 돌려 백의승려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전보다 더 고강해졌네."
합장하는 승려는 바로 일심맹주 무혈검이었다. 피를 보지 않은 성검의 소유자는 불문 출신이었던 것이다.
"피차 일반이오."
탁옥룡이 냉담하게 대꾸하자 분위기가 아주 삭막해졌다.
"일단은 받게."
무혈검은 비단 주머니를 그에게 건넸다. 봉황이 수놓아진 호화로운 주머니였다. 탁옥룡은 무심코 주머니를 받았고,
무혈검은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무혈검은 탁옥룡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뗐다.
"빈승은 선연으로 인해 내공력을 키워 피를 보지 않고도 마궁주를 잡을 자신을 얻었네."
"오, 그렇소?"
"그래서 마궁주를 따라가 잡을 작정이네."
"부하들을 부른 이유가 그 때문이오?"
"그렇네."
탁옥룡은 여전히 무뚝뚝하게 그를 대했다.
"한데 나는 왜 불렀소?"
"그 이유는 한 가지를 묻고 싶어서이네."
"하하……, 무엇을 묻고 싶소?"
무혈검은 표정은 아주 신중해졌다.
"자네가…… 바로 마중지존(魔中至尊)의 후예인가 아닌가를 직접 확인하고 싶네."
마중지존이라는 네 자가 힘차게 들렸다.
탁옥룡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한때는 공조를 한 처지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장벽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正)과 마(魔)의 차이였다.
무혈검은 탁옥룡이 긍정도 부정도 않자 고개를 끄덕였다.
"면벽(面壁) 이십 년간 어느 정도 깨달은 것이 있네. 그것은 자비를 위해 마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탕마(蕩魔)의
이치이네. 빈승은 자네가 수긍했다 여기고, 이제부터 자네를 정파공적(正派公敵)으로 지목하겠네."
탁옥룡의 두 눈에서 혈광이 번뜩였다.
"공적?"
"마중지존의 후예인 때문이지. 그대의 혈수로 인해 천하가 일천 년 전과 같이 시산혈해로 화하는 것을 볼 수
없네."
그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그의 얼굴은 장엄했다. 얼핏 보면 부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인간의 고뇌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옥룡마궁은 옥룡사(玉龍寺)의 절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네. 게다가 군마(群魔)들의 탐욕으로 무장했고, 무수한
독공(毒功)과 모략으로 이룩되었네."
"……."
"그 힘은 강하나 정파가 한데 합할 경우 격파할 수 있는 것이네. 하지만 마중지존이 세상에 남긴 것은 정파의
영원한 난제(亂題)이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것이지. 그래도 단념치 않고 싸워볼 작정이네."
탁옥룡은 그를 직시하며 냉담하게 말을 받았다.
"죽음을 걸고 싸우겠단 말이오?"
"그렇다네."
"하하……, 당신이 내 손에 죽는다면 정파맹이 일패도지하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마궁이 아주 좋아할 텐데
괜찮겠소?"
"아미타불……."
무혈검은 괴로운 듯 불호성을 길게 끌었다.
탁옥룡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무혈검에게는 적개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난 그대와 싸우고 싶지 않소. 이유는 나도 모르오. 다만 그대의 몸에서 피가 나는 것을 바라지 않을 뿐이오.'
탁옥룡은 전과 달리 근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일로 나를 부른 것이라면 나중에 기회를 봐 따지기로 합시다. 나는 갈 길이 바쁜 사람이오. 그대의
수하들에게 옥룡천자의 목을 빼앗기기 싫어서라도 일찍 떠나야겠소."
그는 떠날 의사를 밝혔다.
"아미타불……, 이미 백팔나한대진(百八羅漢大陣)이 형성되었네. 마중지존의 후예라면 그냥 떠날 수 없네.
싸우던가, 아니면 마중지존의 후예가 아니라고 부정하던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야."
무혈검은 엄하게 말하며 승포 속에서 녹슨 철검을 끄집어 냈다. 그는 붉은 녹이 뚝뚝 떨어지는 검집을 매만지며
말했다.
"빈승은 이제껏 피를 보지 않았네만, 시주가 마중지존의 후예라면 혜장조사(慧藏祖師)의 유지에 따라 피를 볼
수밖에 없네."
"혜장?"
무혈검은 아주 경건한 표정을 지었다.
"옥룡(玉龍)과 오랍(烏拉), 두 분 신승과 함께 마중지존을 죽인 분이 바로 그 분이시지. 그 분은 마중지존이
인간이 아니고 마왕이기에 살계(殺戒)를 어겼노라 적어 두셨네. 그리고 그의 후예라면 역시 인간이 아니니 살계
(殺戒)에 저촉당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네."
한 자 한 자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천 년 전의 혈겁(血劫)에서 빚을 받아낼 쪽은 마왕동(魔王洞)이오. 하지만, 긁어 부스럼을 만들겠다면 후후…
…, 굳이 사양하지 않겠소."
탁옥룡의 어조가 아주 거칠었다.
자신의 의도는 아니더라도 사문에 대한 도전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진짜 마중지존의 후예인가?"
"그렇다면?"
무혈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아니기를 바라네, 아니기를 말일세."
"후후……, 부정할 수 없는 일이오."
무혈검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탁옥룡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마중지존의 후예라는 것을 충분히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천년마제의 전설이 실현되어서는 안 되는데……. 아……, 어이해 천 년간 세상을 떠났던 마제가 부활했단
말인가?'
그는 탄식하며 두 손을 한데 합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부처님이시여, 소림승인(少林僧人)들이 살계(殺戒)를 어김을 용서하소서!"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자신이 택한 불도와 자신이 처한 환경이 전혀 걸맞지 않기에 흘리는 회한의 눈물이었다.
그는 애써 자비스러운 표정을 했다. 그것은 아주 슬픈 표정이기도 했다. 세상의 악은 그 얼굴 앞에서 모두 다
수그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탁옥룡에게는 역겨움을 주는 표정이었다.
'나는 저런 얼굴 저런 모습이 싫다!'
탁옥룡은 마성(魔性)으로 인한 뒤틀림을 느꼈다.
"진을 치라!"
무혈검이 엄숙히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웅(熊)―!"
한 떼의 승려들이 날렵히 나타나 일렬로 늘어서며 각기 웅형권식(熊形拳式)을 취했다. 곰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눈앞의 거석을 산산이 박살내는 듯한 형용이 그들의 권식으로 인해 이루어졌다.
"호(虎)―!"
큰소리와 함께 십팔인의 회의승려가 맹호출림(猛虎出林)으로 돌진해 나와 웅형진 사이 사이에 끼여들었다.
"표(豹)―!"
표범같이 거친 동작의 고수 열여덟이 진세의 후미를 이루었다.
"학(鶴)―!
"사(蛇)―!
선학(仙鶴)과 비사(飛蛇)의 동작이 서른여섯의 새로운 승려들에 의해 이룩되었다.
"화타(華陀)가 남긴 오금경(五禽經)을 익혔구나. 이것이 바로 소림사의 백팔나한대진인가?"
탁옥룡은 얼굴을 찌푸렸다.
백팔 명이 나타난 것이 분명한데 그의 눈에 보이는 사람의 수는 수천 수만에 달했다.
한 사람 한 사람 허튼 방위에 서 있지 않았다. 모두 꼭 있어야 할 곳에 서 있었다. 그러기에 진짜 인원보다 수백
배 많은 인원으로 보였다.
백팔나한진은 퇴로(退路)를 허용하지 않았다.
공격적인 면에서는 미흡함이 있는 것이 불가절학(佛家絶學)이다. 그러나 수비에 있어서는 가히 난공불락이었다.
그 안에 빠진다는 것은 그들의 허락이 없이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무혈검으로 인해 원형대로 재현된 소림절학 일백팔나한진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무혈검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오랫동안 고련한 흔적이 역력했다. 어디를 봐도 허점은 없었다.
탁옥룡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몇 차례이고 진세가 바뀌고 포위망이 압축되는 것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는
조롱의 웃음뿐이었다.
'이정제동(以靜制動)이다. 정으로써 동을 제압할 줄 알다니, 보통 광마(狂魔)와는 다르다.'
무혈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공을 익힌 사람은 통상 심성이 희박해지는 법이다. 상대가 강하다 여기면 안정력을 잃고 흔들리는 것이 마공을
익힌 사람들의 특성이다.
한데 탁옥룡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방어할 생각을 못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가장 철저한 방어였다.
백팔나한은 무혈검께서 직접 진세의 구결을 전수받고 수천 번이나 진세를 반복 연습했었다.
이제껏 백팔나한진으로 쓰러뜨린 거마의 수는 열 사람의 모든 손가락으로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았다. 그런데
모든 위용이 탁옥룡의 의연함 앞에서 흔들리고 마는 것이다.
사실 탁옥룡은 진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자리의 누구를 제일 먼저 죽이고, 그 다음 누구를 죽이면 진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수비에 치중하는 이유는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는 무혈검 쪽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얼굴이 아주 추악하기에 그 웃음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소림의 절학으로는 나를 막을 수는 없소."
"뭐… 뭐라고?"
무혈검이 주먹을 거머쥐었다.
"후후……, 세상은 나의 사문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소. 귀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오."
"네가 마중지존의 후예임을 안다. 그러기에 너와 싸우려는 것이다."
무혈검이 반박하자 탁옥룡은 차분하게 응대했다.
"그것만 알 뿐 그 이전의 일은 몰라서 하는 소리요, 사람들은 혈영공(血影功)에만 정신을 쓰지 금강신공(金剛神
功)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오."
"금… 금강신공?"
"하하……, 나의 무공의 원류는 바로 소림절학(少林絶學)이라는 말이오. 내가 익힌 마공은 소림의 불문절학인
금강신공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소."
무혈검은 정색을 하며 빠르게 말을 받았다.
"그… 그럴 리가! 어이해 소림절학에서 마공이 일어난단 말이냐? 그것은 정녕 말도 되지 않는다."
"흥, 마(魔)가 무엇인지 아시오?"
탁옥룡이 피식 웃자 무혈검이 단호히 잘라 답했다.
"그것은 비선(非善)이다!"
탁옥룡은 그가 그런 대답을 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비선(非善)이 즉마(則魔)라 함은 틀린 말이오."
"틀릴 수 없다. 그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법이다."
"천만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소. 인간세상에 있어서 과연 무엇이 영원하다 할 수 있겠소?"
정말 놀라운 말이었다.
정과 마의 인물이며, 잔혹한 살인마로만 알려져 있는 혈영마협의 입에서 아주 심오한 이야기가 토로될 줄이야…….
무혈검은 그에게 압도당함을 느꼈다.
'보면 볼수록 신비하다. 아는 것이 무진장의 경지에 이르렀다. 나의 판단이 너무 미숙했단 말인가?'
무혈검은 숨을 크게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럼 뭐가 마(魔)냐?"
"후후……, 마가 뭐겠소?"
탁옥룡은 실소를 흘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는 승려 하나 하나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마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오. 그것은 비선(非善)이 아니고 인간본성 중 하나인 심성을 드러내는 것뿐이오."
"아미타불……, 인간이면 으레 선행해야 한다."
탁옥룡은 당대의 성자인 무혈검과 진리를 논할 만큼 정연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하하……, 그대의 선(善)은 곧 불법일 것이오. 나의 법(法)은 곧 마(魔)이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천연(天然)한 기운이오."
"천연하다고?"
"그렇소. 그것은 무당의 선천강기(先天 氣)와 비슷하오. 나의 사문에서 전해지는 마공은 다른 사공과는
판이하게 다른 선천적잠재마공(先天的潛在魔功)이오. 그러기에 뿌리를 소림사에 두고 있는 것이오. 금강신공은
인간의 순정한 잠재력을 끌어내는 방법이 아니겠소?"
무혈검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탁옥룡은 처음으로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표명했다.
"그러나 내가 익힌 금강신공은 순수한 힘이 아니라 마성(魔性)에 찬 분노를 이끌어내는 것이오. 그것은 잔잔한
바다가 아니고 폭풍을 만난 바다와 같이 출렁이는 것이오. 나의 마음은 세상으로 인해 더럽혀졌소. 그러기에 내가
일으키는 마공은 나를 더럽힌 세상을 씻는데 쓰여지는 것이오."
무혈검은 논법으로 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나를 마도고수라 칭하는 것은 좋으나 나를 인간 이하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오."
"세 치 혓바닥이 날카롭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너는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마귀라는 것이다."
무혈검은 크게 소리치며 손을 후려치려 했다. 백팔나한진이 그의 신호에 따라 탁옥룡을 향해 몰아치게 될 때였다.
"으윽!"
무혈검은 팔꿈치를 들어올린 채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는 팔을 내리지 못했다. 탁옥룡의 손바닥에서
일어나는 잠재력이 그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소림사 사람들을 해하고 싶지 않소. 모두 물러나라 하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구로혈현(九路血現)에 이어,
풍권잔운(風捲殘雲)과 뇌진구소(雷震九 ), 그리고 봉황우비(鳳凰于飛)를 펼쳐 모두 시체로 만들 수밖에
없소."
탁옥룡은 차분히 말한 다음 진력을 회수했다.
무혈검은 겨우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팔을 내리는 공격 신호를 보낼 수 없었다.
"어… 어떻게 진의 파해법을 아느냐?"
그의 눈은 화등잔만하게 확대된 후였다.
"사부가 저술한 비급 안에 천하기문대진(天下奇門大陣)의 격파법이 수록되어 있었소. 백팔나한진이 후대에
만들어졌어도 그 원리는 일맥상통하는 것이오."
탁옥룡은 팔짱을 끼고 냉막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 원리를 응용한다면 백팔나한진, 무당의 양의천강검진(兩儀天 劍陣)과 태청검진(太淸劍陣)의 파훼도
가능하오. 정파절학으로는 나를 꺾을 만한 것이 없소."
"으음……, 마중지존이 그리도 강했단 말이냐?"
"하하, 그 분은 정도 최고 절기를 천강복마공(天 伏魔功)이라 하셨소. 그리고 그것 또한 혈영금강마공(血影金
剛魔功)아래 격파당할 것이라 적으셨소. 나는 그 말을 믿을 뿐이오."
탁옥룡은 크게 말한 다음 뒤돌아 섰다. 그는 높은 벼랑 위를 바라보다가 훌쩍 날아올랐다.
그는 놀랍게도 곤륜파(崑崙派)의 비전수법인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을 능수능란하게 시전해 이십 장 날아
올랐다.
"하하……!"
그는 크게 웃으며 과천성신법(過天星身法)에 이어 제운종(蹄雲從)을 펼치며 멀리 모습을 감췄다.
모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회심의 일격으로 준비되었던 백팔나한진은 제대로 시전되지도
못한 채 갇힌 자를 놓아 주어야 했다.
무혈검은 땀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아……, 마공뿐만 아니라 정파의 모든 절기에 통해 있을 줄이야! 별호에 마협(魔俠)이 붙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잠깐 사이 십 년은 늙어 보였다. 그러나 입가에 지어진 비장한 표정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러나 탕마행(蕩魔行)은 중단되지 않는다. 강호에 시산을 쌓는 자는 죽어야 마땅하다."
그는 중얼거리다가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표표히 날아오르며 사자후로 외쳤다.
"모두 갑시다. 자칫하다가 마궁과 대접전을 벌이는 것을 놓친다면 큰일이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오."
그는 혈영마협에게 패한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과연 소림의 고승답게 속가고수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포달랍궁에서?"
탁옥룡은 관을 걸머멘 채 훌훌 날아올랐다. 그는 너무나도 신묘한 신법을 시전해 중인의 망막에서 사라져 갔다.
회회공자는 매화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회하를 굽어보는 버드나무 언덕 위에 다정히 서 있는데, 그에게서 이 장 떨어진 곳에는 일인이조(一人一鳥)
가 내려앉아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유난히 기름져 보이는 흑의미인(黑衣美人)은 몹시 초조한 기색이었다.
끄― 아― 아― 악―!
거대한 금응(金鷹)이 쇠기둥 같은 두 다리로 웅장한 몸을 지탱하며 흑의여인 바로 뒤쪽에 서 있었다.
그들이 말없이 기다리고 있을 때 먼 곳에서 번개같이 들이닥치는 사람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홍색 천잠사 대신 흑의를 걸친 탁옥룡이 쇄독관을 진 채 허공을 밟아가며 세 사람 근처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고 땅을 밟았다.
흑의미인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사뭇 침통했다.
'이수운, 왜 끝까지 나를 괴롭히느냐? 아……, 너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픔을 네가 아느냐?
내 손에 죽고 싶어 다시 나타났느냐?'
탁옥룡은 회회공자가 장읍하는지도 몰랐고, 매화가 꿇어앉는지도 몰랐다. 그의 눈길은 흑의여인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약간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는 흑의미녀는 바로 과거 그의 정혼자였던 포달랍궁 소궁주 혈수나찰 이수운이었다.
이수운은 탁옥룡의 화난 듯한 표정을 보고 입술을 질끈질끈 물고 있었다. 찾아왔다는 사실조차 역겹다는 듯
그녀의 눈빛은 마치 혐오스런 악마를 대하는 눈빛이었다.
"할 말이……, 아니 전할 말이 있어 왔다."
이수운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소매 속에서 긴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포달랍궁의 뜻이다."
"혈미륵이 보냈느냐?"
"펴 봐라."
이수운은 혹시라도 탁옥룡과 손끝이 부딪칠까 두려워 봉서를 집어던지고는 금응 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가벼운 동작조차 탁옥룡을 슬프게 했다.
그는 봉서를 가볍게 받아 들고 천천히 펴보았다.
<결국 천년마제의 화신과 공존치 못함을 깨달았다. 마궁을 치기 이전 너를 치겠다.
천시대묘에서의 일도 결국 너 때문에 틀어졌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물론 그때 네게 빚을 갚겠다 한 것은 지킨다. 개방을 돕고 너를 위해 대묘(大墓)를 세워 주는 것으로 그 빚을
갚을 것이다.
용기가 있으면 본좌의 딸과 함께 찾아와라.
― 혈미륵, 합장하며.>
매우 웅장한 필체로 쓰인 글이었다.
탁옥룡은 서찰을 일목십행(一目十行)으로 즉시 읽고는 손에서 삼매진화(三昧眞火)를 발휘했다. 종이는
찰나지간에 재로 화했다.
"흥, 너희 까까중들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으음……!"
이수운은 그의 잔혹한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는데, 이 자의 모습으로 보아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 죽어 마땅한 자다. 이 자의 오만한
광기가 자신을 죽게 한 것이다.'
이수운이 입술을 질끈 물고 말했다.
"나를 따라 가겠느냐?"
"하하……, 지옥이라 해도 두렵지 않다."
"자신만만하군."
"세상이 가르쳐 준 것이지. 사악한 자들,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무자비해지라는 것을!"
탁옥룡은 차게 말하며 관을 끌러 내려놓았다.
묘중기인이 관 안에 누워 말했다.
"주인, 애써 함정에 빠지실 필요 없소."
"염려 마시오, 묘노인."
"조… 조심하셔야 하오. 특히, 혈미륵의 대유마신공과 미륵수미권을 말이오."
"그것은 알고 있소."
묘중기인은 혈미륵에 대해 놀랍게도 상세히 알고 있었다.
"혈미륵은 위급해지면 비장의 무기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일월태양환(日月太陽環)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나타나면 얼른 그의 미간(眉間)을 노려 척천일검술(拓天一劍術)을 발휘하시오."
관 안에서 소리가 나자 은근히 놀라던 이수운은 그 대목에 이르러 입을 딱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가 일월태양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나도 최근 들어 안 것인데, 사부는 그것을 이제껏 단 한 번, 철서생
(鐵書生)의 얼굴을 박살낼 때 사용했을 뿐이라고 들었다. 한데 이 자가 어찌 그것을 안단 말인가?'
이수운은 사색이 되어 쇄독관을 바라보았다.
묘중기인은 포달랍궁 무공에 극성(極性)이 되는 척천일섬술의 비결을 구술해 주었다.
"그 자를 잡는다면 포달랍궁의 대유항마진세(大幽降魔陣勢)가 간단히 무너질 것이오. 속하는 여기서 주인이
돌아오신 후 속하와 더불어 축융봉(祝融峰)으로 가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겠소. 훗훗, 사실 혈미륵 모찰륵
따위는 이후 백 년을 수련한다 해도 주인을 능가할 수 없소."
탁옥룡은 대할수록 묘중기인에게 호감이 갔다.
"하하……, 그가 들으면 섭섭해 하겠소."
"그 자는 고집스러운 자이며 아주 탐욕스럽소. 중답지 않은 자이지요. 자신이 천하제일인이라고 믿는 자이고,
적으로 판단한 자에게는 사신같이 가혹하외다. 하지만 주인 앞에서는 태양 앞의 얼음덩이같이 녹아 버리고 말
것이오."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호호……, 혈영마협의 종답게 혓바닥 놀리는 재간이 상당하구나!"
이수운은 악을 쓰며 관에다 일장을 가했다. 바로 미륵수미권식(彌勒須彌拳式)이었다.
콰르르릉―!
누런 기류가 일어나 관을 휘감았다.
"부서져라!"
이수운이 앙칼지게 소리칠 때 쇄독관이 장풍권 안에서 일 장 높이 떠올라 미륵수미권을 간단히 피했다.
"크훗……, 어리석은 계집!"
쇄독관은 빠른 속도로 날아 이수운의 가슴을 들이받으려 했다.
"엇, 누구이기에……?"
이수운은 아연실색해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쇄독관을 피하기에는 이미 늦은 후였다.
'아,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이수운이 눈썹을 파르르 떨 때였다.
"됐소. 멈추시오!"
탁옥룡의 음성과 함께 쇄독관이 허공에서 일단 정지되었다.
"훗훗……, 주인이 아니었다면 너는 내 손에 죽었다. 사실 나의 적은 마궁과 포달랍궁 양쪽이다. 네 사부
혈미륵이 나의 주인 손에 죽지 않는다면, 조만간 묘중기인에게 죽을 것임을 모찰륵 그 썩어빠진 중대가리에게
말해라!"
묘중기인은 그답지 않게 경망되게 말한 다음 뒤쪽으로 날아갔다. 그의 공력은 최근 들어 부쩍 증가된 상태였다.
회회공자를 백 초만에 패배시킬 수 있는 경지였다.
"치이, 온갖 마의 도배는 다 모여 있구나."
이수운은 벌떡 화를 내며 금응 위로 올라갔다. 금응의 등에는 편안히 탈 수 있는 안장이 매달려 있었다.
"타라!"
이수운이 차게 외치며 고갯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너의 살 내음도 싫다."
탁옥룡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바닥을 휘저었다.
끄아아악―!
조신(鳥神)같이 의젓하게 버티고 있던 금응의 그 일장에 금빛 깃털을 우수수 떨구며 괴성과 함께 훌훌 날아올랐다.
第三章 천하제일미장부(天下第一美丈夫)
1
탁옥룡은 어기표풍술(馭氣飄風術)을 발휘해 개방 임시총단에서 칠십 리 떨어진 곳에 이를 수 있었다.
이수운은 그제까지 새근새근 잠자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주 사랑스러웠다. 연분홍 뺨에 새겨진 볼우물이 강렬한
염기(艶氣)마저 발했다.
탁옥룡은 간간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곤 했다.
'새벽이 되면 너를 보내 주겠다. 그리고 다시는 너를 찾지 않겠다. 네가 찾는다면……, 모르는 척 너를 죽여
번민을 끊을 것이다.'
그는 강호에 나온 이후 처음이라 할 정도로 아주 처량한 심사가 되어 걸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가 상심에 있어서도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걷다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였다. 길 모퉁이
근처에서 살기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은연중 포위당한 상태였다.
'막강한 검세다. 흠, 마궁의 비밀고수들이 나를 알아보고 검진을 친 것일까?'
그는 발을 멈추고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고인들이오? 모두 열 둘! 숨어 있다는 것을 아니 어서 나타나시오."
죽립을 뚫는 혈광은 너무도 공포스러웠다.
"기다렸다, 천년마제!"
"혈영마협! 마중지존이 백도에 진 빚을 네 수급으로 갚거라!"
이곳저곳에서 열 명이 걸어나왔다.
모두 일심맹도(一心盟徒)였다. 그들은 마궁에 죽은 구파장문인의 뒤를 이어 구파의 신임 장문인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탁옥룡은 그들을 쓸어보다가 한 곳을 바라보았다.
"너는 왜 나오지 않느냐?"
큰 바위 뒤에서 이상한 호흡소리가 났다.
천천히 일어나는 백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얼굴이 아주 영준한 미소년 하나가 녹옥선(綠玉扇)을 쥐고 쓴웃음을
흘렸다.
'천룡이도 일심맹에 들었단 말인가? 으음……, 그렇다면 저쪽에 숨어 있는 사람은 사마옥봉이기 쉽다.'
그는 창염장의 사마천룡을 알아보고도 눈빛에 동요를 갖지 않았다. 그는 사마천룡을 모르는 체하며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너도 나타나라!"
그의 시선은 큰 나무 뒤에 머물렀다.
"호호……, 과연 대단한 이목이다."
차가운 목소리가 나더니 청의여인 하나가 녹옥소를 쥐고 걸어나왔다. 바로 소협(簫俠)이라 불리게 된
사마옥봉이었다.
"호호……, 나는 일심검제께 일심맹의 탕마호법(湯魔護法) 지위를 제수 받은 사람이다."
탁옥룡이 아름다운 여인을 벗하는 것이 그녀를 노엽게 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본맹은 너희 두더지 굴을 노리던 마궁도 수백 명을 사로잡았다. 잔당이 몇 있기는 하나 오래지 않아 잡힐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너의 두더지 굴로 들어가지 못하고 십이천성검진(十二天星劍陣) 아래 시체가 되어야 한다."
사마옥봉이 검진의 우두머리였다.
그녀는 천(天)을, 사마천룡은 지(地)의 주축이 되고 있었다. 진세는 그들이 끼여 있기에 더욱 강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마궁도들을 제압하다니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어 고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탁옥룡은 아주 오만하게 응수했다.
'비정한 놈!'
사마옥봉은 눈물을 왈칵 쏟을 듯했다. 그러나 강호에서의 경험이 그녀를 아주 냉막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며 아주 차게 말했다.
"네게 빚을 지고 있으나 너를 죽여야 한다는 데에는 달라질 것이 없다. 너는 죽어야 마땅할 백도의 적
천년마제이기 때문이다."
"하하……, 내가 죽으면 마궁을 막기 힘들 텐데?"
"마궁은 감히 덤비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럴 자신이 없었다면 너를 가로막지 않았을 것이다."
탁옥룡은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무슨 일이 그토록 자신을 주었느냐?"
"호호, 너를 찾아다니다가 발각된 계집 하나가 있다. 그 계집을 잡는다면 마궁은 우리에게 굴복당할 것이다.
지금 맹주가 그 계집과 겨루고 계신다. 그 계집은 반 시진 안에 잡힌다."
사마옥봉은 숨을 돌리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오늘 밤 천하에서 두 가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다. 이는 바로 백도가 영광을 찾는 새로운 장이 될 것이다."
"나를 찾다가 쫓기게 된 여인은 누구냐?"
탁옥룡의 낯빛에 심각한 변화가 생겼다.
사마옥봉은 그런 그의 모습을 즐기듯 술술 털어놓았다.
"호호……, 공야홍(公冶紅)이 너를 찾아 개방 총단 쪽으로 가다가 발각당했다. 그 계집이 왜 몰래 너를 찾으려
했는지는 곧 밝혀질 것이다."
"공야홍?"
탁옥룡은 크게 놀라며 얼른 귀를 쫑긋 세웠다. 그는 천이통의 단계를 뛰어넘는 육심통령대법(六心通靈大法)을
이용해 주위를 살폈다.
"그녀의 목소리다."
그는 차분히 말한 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살기 등등한 표정들이었다.
"길을 비켜라. 자칫하다가는 혈섬검 아래 고혼이 된다."
정파명숙들을 두려움도 잊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십이천검성진이 너를 죽일 것이다!"
"혈영마협, 넌 여기서 죽어야 한다!"
"네가 오래지 않아 마중지존보다 더한 광마가 된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우리 모두 동귀어진할 각오로 왔다!"
사위를 에워싼 십이천성검진의 진세는 막강했다. 탁옥룡은 그것을 격파해야만 자유로워질 것이다.
'죽이고 싶지는 않은데…….'
탁옥룡은 어찌할 바 모르다가 사마옥봉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질투와 원망의 빛이 가득했다. 그녀는 그가 안고 있는 이수운을 간간이 쏘아보고 있었다.
탁옥룡은 눈길을 돌려 사마천룡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뇌에 찬 표정이었다.
탁옥룡은 그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천룡아!"
"예… 예……?"
사마천룡이 갑자기 몸을 휘청였다. 탁옥룡이 너무도 부드럽게 말을 걸기 때문이었다.
"하하……, 길을 비켜줘야겠다."
탁옥룡은 웃으며 사마천룡을 향해 다가갔다.
"서라―!"
"차앗―!"
사마옥봉을 위시한 정파명숙들이 검을 빼고 검세를 일으켰다.
츄리리릭―!
시퍼런 검기가 교차하며 치밀한 검진을 형성했다.
"은공(恩公)!"
사마천룡은 눈앞으로 다가서는 탁옥룡을 향해 감히 옥선을 쳐들지 못했다.
"비켜라, 네가 비켜야 싸움이 나지 않는다."
탁옥룡이 담담히 말하자 사마천룡은 우는 표정이 되었다.
"그… 그러면 일심맹을 배반하는 일이 됩니다."
"그럼 일심맹을 배반해라!"
"예에?"
"하하……, 내가 너를 거둬주겠다. 너는 일심맹주 밑에서 자라다가는 빛을 다 발휘하지 못할 아주 뛰어난 아이가
아니냐?"
"배… 배반이오?"
사마천룡이 솔깃해 하자 모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되었다. 특히 사마옥봉은 노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천룡아, 그 자는 광마다. 어서 그 자를 죽여라!"
사마천룡은 잠시 고뇌하다 마음을 정한 듯 결연하게 외쳤다.
"누님, 이 분은 우리 남매에게 녹옥삼보의 절기를 주시고, 우리들의 생명을 구해주신 은인이십니다. 저는 누님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분께 진 빚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서슴없이 탁옥룡 곁으로 다가갔다.
"가자, 급하다!"
탁옥룡은 진세가 허물어지가 그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육심통령대법으로 파악한 소리를
따라 나는 듯 달려갔다.
그의 움직임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모두들 그제서야 사마천룡이 비켜난 뜻을 알았다. 그리고 검을 떨어뜨렸다.
"그 자는 무적(無敵)이다."
"십이천성진으로도 그 자를 막지 못한다."
명숙들은 패배를 자인하는 표정이 되었다.
"흑흑……!"
뜻을 이루지 못한 사마옥봉은 참담한 심정이 되어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탁옥룡은 쉬지 않고 십 리를 달렸다. 그는 허공을 타고 날면서도 계속 천이통을 전개했다.
'분명 이 근처인데?'
별빛으로는 밝아지지 않는 짙은 어둠 속을 흐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 비켜 주십시오."
"잡아야 한다."
"제… 제발 저를 막지 마십시오."
"너는 철서생의 딸이다. 그러기에 너를 잡아야 한다."
"아……!"
여인의 탄식성과 함께 청명한 음성이 이어졌다.
"너는 착한 아이다. 마성에 물들지 않았다. 너를 해하고 싶지는 않으니 나를 따라 일심맹으로 가자. 악을 버리는
것이다. 정말 좋은 일이다."
"저… 저는 할 일이 있습니다. 혈영마협을 찾아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한 가지 중대한 비밀을 말해야 합니다."
흑의여인이 백의승려와 이 장 거리를 두고 서서는 하소연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지극히 뛰어났다. 이수운이 청초하고 깔끔한 미모라면, 그녀의 미모는 백합(白合)같이 고고하고
숭고한 미모였다.
그녀 앞에 합장하고 서 있는 백의승려의 얼굴은 활불같이 장엄했다.
"혈영마협은 오지 못한다. 그는 오는 도중 소선쌍협과 정파명숙들이 형성한 천성검진에 잡혔다. 그는 개방으로
가지 못할 것이다."
"그 분은 무적입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암습당하지 않는 이상 쓰러지지 않을 분입니다."
여인은 신념에 찬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허……, 사람의 힘은 유한한 법이다. 특히 마의 힘은!"
백의승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하하……. 이게 얼마만이오, 일심검제(一心劍帝)?"
흑의청년이 낭랑히 웃으며 두 사람 사이로 끼여들었다.
죽립을 목뒤로 걸고 있는 추악한 청년으로 한쪽 가슴에 아리따운 여인을 안아들고 있었다.
"혈… 혈영마협! 검진을 뚫었더냐?"
백의승의 얼굴빛이 싯누래졌다. 그는 바로 일심맹주로 추대된 소림사의 고승 무혈검이었다.
"하하……, 나를 높이 사 주는 사람이 곤궁에 처해 있기에 온 것이외다."
탁옥룡은 웃으며 흑의여인 곁으로 다가갔다.
일심검제에게 길이 막혀 있던 여인은 바로 공야홍이었다. 그녀는 촌여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변복(變
服)을 하면서까지 개방 임시총단으로 가 탁옥룡을 만나기 위함이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공야홍은 탁옥룡을 보자 반갑고도 착잡한 듯 아주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탁옥룡은 그녀를 바라보며 전음으로 물었다.
"왜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나를 찾소? 철서생이 어떤 함정을 파는 것이오?"
"그게 아닙니다."
"그럼?"
공야홍은 꽃잎 같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전음성이지만 달콤한 음성은 여전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상공을 노리는 사람이 개방에 잠입했습니다. 그 사람은 정파명숙입니다. 그는 상공을
감쪽같이 암산하기 위해 그곳에 잠입했습니다."
"마궁 사람이오?"
"마궁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청의를 걸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독존의 밀명을 받고 개방에 잡입했습니다."
공야홍은 그렇게 말하며 떠나려 했다.
"잠깐!"
탁옥룡의 손에서 능공섭물 진기가 발휘되었다.
공야홍은 여인 중에서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삼갑자 내공을 갖고 있었으나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왜… 왜 소녀를……?"
공야홍이 몸을 떨자 탁옥룡은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낭자가 진정 공야무군의 친딸이 아닌지 알고 싶어 만류하는 것이오."
공야홍은 착잡한 표정이 되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보셨습니다. 소녀는 철서생의 딸이 아닙니다."
"흠……, 그럼 본성(本性)은 뭐요?"
"백가(白家)입니다."
"백이라……, 혹 본명은 백옥지(白玉芝)가 아니오?"
"아… 아닙니다, 절대로 저는……."
공야홍은 사색이 되어 높이 날아올랐다. 그녀는 탄지지간에 자취를 감췄다.
"마궁주 철서생의 딸과 암통하다니 보통 일이 아니다. 너와 마궁 사이에 비밀 거래라도 있단 말이냐?"
무혈검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이미 천강복마공(天 伏魔功)을 십이성 공력으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하하……, 스님은 나를 잘 아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구료."
탁옥룡은 비웃으며 뒤돌아 섰다.
장력으로 치고 싶으면 치라는 듯 허점을 훤히 보이며 그는 아주 태연히 걸어갔다. 너무도 대담한 행동이었다.
무혈검은 손바닥을 땀으로 적시면서 고뇌에 찬 표정을 지었다.
"내일 일심맹의 흥망을 걸고 너와 겨루겠다. 나는 너로 인해 살계(殺戒)를 어길 것이고, 다시 이십 년 면벽에
들어 강호에 출도해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을 것이다."
그는 크게 말하며 위로 날아올라갔다.
탁옥룡은 그가 사라져 가는 것을 힐끗 바라보다가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혈미륵… 무혈검……, 왜들 나와 싸우려 하는지 모르겠군."
2
탁옥룡은 사마천룡과 나란히 걸어 회하가에 이르렀다.
"상방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개방 사람들은 탁옥룡이 십절죽부령을 철수개에게 넘겼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상방주라고 불렀다.
그들끼리는 이미 결정을 내린 후였다.
―혈영마협을 마(魔)라 한다면 개방도 마(魔)가 되리라!
철수개가 며칠 전, 모든 제자들을 불러놓고 그렇게 선포했다.
그는 탁옥룡을 완전히 믿기로 하고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의 결정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이 그의 말을 믿고 개방에 남기로 했다.
정파는 반으로 나뉘어진 셈이었다.
명문거파(名門巨派)는 일심맹으로 뭉쳤다. 나머지 문파는 마궁에서 장악당했다가 탁옥룡 덕에 정파로 돌아온
개방을 중심으로 하여 점점 큰 세력으로 화했다.
아직 수뇌가 정해지지는 않았으나, 모두들 마음속으로 자신들의 수뇌는 혈영마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탁옥룡은 몇 사람의 환영을 받았다.
실명검사(失名劍士)가 된 회회공자, 묘중기인의 전인이 된 매화, 개방주 철수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다만, 관 안에 있어야 할 묘중기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무공을 모르는 마의불수(麻衣佛手)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탁옥룡은 그를 환영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한 사람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응……?'
놀라움을 주는 사람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청의노인이었다.
공야홍이 경계하라고 한 빛깔이 바로 청색이었지만 탁옥룡은 너무 놀라 노인이 청색 옷을 걸쳤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연륜과 지혜로 인해 선기스러워 보이는 노인은 계피학발이었지만 마치 소년처럼 온화함을 느끼게 했다.
탁옥룡이 눈길을 노인에게 고정시키자 회회공자가 얼른 허리를 숙였다.
"주인, 이 분을 아시는지요? 이 분은 최근 개방을 찾은 강호고수 중 가장 높은 배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
탁옥룡은 그답지 않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회회공자가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바로 천산신의(天山神醫)십니다."
"허허……, 노부는 천산신의라는 사람이오. 혈영마협이라는 엄청난 이름에 호감을 느끼고 찾아왔소."
계피학발의 천산신의가 다가와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탁옥룡은 반가움에 얼굴을 활짝 폈다.
"할아버지, 저를 모르십니까?"
그는 이수운을 사마천룡에게 넘기고는 손을 모으며 장읍을 했다.
천산신의라면 구정산 기슭에서 그에게 천산의서를 준 기인이 아닌가? 참으로 뜻밖의 재회였다.
천산신의는 손가락 끝을 파르르 떨었다.
"허허……, 혈영마협이 아니시오? 장차 정사(正邪)의 맹주가 되실 천하제일고수!"
"할아버지, 저는……."
탁옥룡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싶었다.
순간, 천산신의의 열 손가락이 소매 속에서 빠져나와 탁옥룡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파팍― 팍―!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탁옥룡의 옷이 시뻘겋게 젖었다.
"어― 엇?"
"저 늙은이가!"
모두 기절초풍 놀랄 때 천산신의는 훌쩍 날아올라 중인의 머리 위를 타넘어 갔다.
"서라!"
회회공자는 극도로 분노하며 주먹을 움켜쥐고 그 뒤를 따르려 했으나, 이때 그의 고막 속으로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들키지 않고 쫓아가라. 그 분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라. 그러나 그 분께 해를 입혀서는 아니 된다."
바로 탁옥룡의 목소리였다.
회회공자는 비로소 자신의 주인이 큰 화를 입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추격에 나섰다.
탁옥룡은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쓰러지지도 않았고, 고통스러운 표정도 아니었다.
'독강지공(毒 指功)으로 나를 암산할 줄이야. 아……, 공야홍이 말한 사람이 바로 천산신의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공야홍은 분명 구정산 아래서 만난 백옥지(白玉芝)의 화신이다.'
탁옥룡은 금강불괴지신이라 죽지 않은 것이다. 그는 멀리 사라져 가는 천산신의를 바라봤다.
천산신의의 경공은 탁월했다. 수많은 사람 중 그를 따를 사람은 단 둘이었다. 탁옥룡, 그리고 회회공자가 바로
그들이었다.
탁옥룡은 가슴팍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분명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상처부위가 몹시 쓰라렸다. 그가 강호에 나와 입은 상처 중 설혈상소도(雪血雙小刀)에 당한 치명상 다음으로 큰
상처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쓰디쓴 소리를 내자 거친 목소리가 나며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헤헤……, 주인답지 않소."
마의불수가 홍의거한(紅衣巨漢)과 함께 다가서고 있었다.
홍의거한은 그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두 다리와 왼팔은 철비철각(鐵臂鐵脚)이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옷은 탁옥룡이 입었던 천잠보의였다.
"허허……, 주인을 뵙소."
그는 마의불수와 함께 장읍을 취했다.
"아, 묘중기인이시구료?"
탁옥룡은 그제서야 그를 알아보았다.
"예, 마의불수 덕에 시독을 골수 안으로 잡아넣을 수 있었소. 게다가 의수(義手)와 의족(義足)을 달고 움직이게
되었으니 감격스러울 뿐이오."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도 있었다. 팔 하나만 달랑 남아 추한 몰골로 관 속에서만 생활하던 그가 어엿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하하……, 과연 회혼문(回魂門)의 회생술(回生術)은 놀랍군. 우욱……!"
탁옥룡은 말하며 구역질을 참는 표정을 했다. 마의불수가 얼른 다가섰다.
"잘 된 일입니다."
"지금 놀리는 거요?"
마의불수는 주름진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었다.
"헤헤……, 주인께 드릴 영단 열두 개가 있소이다. 그것은 약효가 아주 좋아 대부분이 낭비될 예정이었는데,
헤헤……, 주인께서 내외상(內外傷)을 입으셨으니 약효가 쓸데없이 소모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열두 개의 영단이라니?"
"헤헤……, 제가 그간 골방에 틀어박혀 만든 것이지요. 회회공자에게 쓴 결과 약효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졌소이다. 두 시진 밖에 걸리지 않는 일입니다. 속하와 함께 밀실로 가시지요."
탁옥룡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무엇을 하잔 말인가?"
"헤헤……, 일단 가시자니까요?"
마의불수는 탁옥룡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묘중기인은 그와 묵계가 된 듯 마의불수와 함께 탁옥룡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모든 사람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존경받던 기인 천산신의가 암습자로 화한 다음 도망쳐 간 것이 첫 번째 놀라움이다. 그리고 탁옥룡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두 번째 놀라움이다.
그리고 탁옥룡의 이름 모를 수하들이 하는 행동이 세 번째 놀라움이 되었다.
"가… 가겠소. 옷이 찢어지면 낭패니 이러지들 마시오."
탁옥룡은 두 사람의 호위를 받아가며 안으로 들어갔다.
3
목옥(木屋) 지하석실.
탁옥룡은 상의를 벗은 채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는 마의불수를 믿고 눈을 감았다.
마의불수는 크기와 빛깔, 향기가 다른 열두 개의 단약을 한데 섞어 가루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단약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헤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예술입니다. 속하는 주인을 만난 이후 심득을 얻어 비전회생법을 터득했던
것이지요."
그는 검은 고약을 들고 다가섰다.
"나를 어쩌자는 것이오? 나의 내공은 더 이상 이를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하오. 몸뚱이는 더 이상 단단할 수 없이
단단하고."
"헤헤……, 다른 것은 다 괜찮습니다만 얼굴이 문제지요."
"나… 나의 얼굴?"
"상처를 지워야 합니다."
"이 얼굴을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탁옥룡은 눈을 뻔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묘중기인은 그런 일이 벌어지기를 예상한 듯 얼른 손가락 퉁겼다. 파공성과 함께 향기가
뿌려졌다.
"윽……, 미혼향(迷魂香)을?"
탁옥룡은 현기증을 느끼며 다시 드러누웠다.
"헤헤……, 두 시진이면 됩니다. 걱정 마시오. 속하들이 어찌 해가 되는 일을 하겠소이까?"
마의불수의 목소리가 꿈결같이 들렸다.
탁옥룡은 천산신의에게 암습당한 상태인지라 미혼향의 약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탁옥룡은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암흑뿐이었다.
"고약을 바른 천으로 얼굴을 가렸군?"
"헤헤……, 바로 그렇습니다."
마의불수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이제 다 되었소이다, 주인. 고약 칠한 천을 벗기기만 하면 속하가 꾸민 일의 성패가 가려질 것이외다."
그의 목소리는 득의에 차 있었다.
탁옥룡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의불수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겠지만 나의 경우는 회회공자와 다르다. 나는
금강불괴지신이라 상처가 낫지 않는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입술을 떼었다.
"나의 얼굴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게나."
"제가 주인께 무엇을 했는지 아시는군요?"
"하하……, 나의 얼굴에 난 상처를 지우려 함을 아네. 그러나 그것은 의술로도 불가능한 일일세. 회회공자는
독으로 인해 피부가 상했기에 천년속단유(千年續斷臾) 같은 영약으로 치료하면 살이 다시 나겠지만, 나는 뼈가
다쳐 약을 쓴다 해도……."
탁옥룡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마의불수가 얼른 말을 받았다.
"헤헤……, 천년속단유에 지룡혈보(地龍血寶)를 섞으면 어떻겠소이까?"
마의불수는 손가락을 놀려 탁옥룡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고약 칠한 붕대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탁옥룡은 가벼운 희망을 가졌다.
"그… 그러면 핏줄이 살아나겠지. 하지만 지룡혈보 같은 귀한 약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활시교 천시대묘 안에서 구했습죠."
"흐음, 그것을 구했다니 반갑네만 그렇다 해도 부서진 뼈를 다시 살리지는 못할 것이네."
마의불수는 사뭇 자신 있다는 표정이었다.
"글쎄올시다."
"삼목금섬(三目金蟾)이 있기 전에는 힘드네."
"바로 그렇습니다."
탁옥룡은 다소 놀라움에 젖어 물었다.
"삼목금섬도 구했단 말인가?"
"헤헤……, 속하가 철수개 방주에게 부탁해 아주 힘들게 구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인면지주(人面蜘蛛)의 피를 얻기 전에는 상처를 없애지 못할 것이야."
탁옥룡의 목소리가 저으기 떨렸다.
사실 그는 자신의 파손된 얼굴을 치유할 처방은 알고 있었다. 그가 백방으로 노력하고 구하려 했다면 모든 약을
얻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구태여 자신의 얼굴을 치료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이 회복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헤헤……, 그것은 속하가 십오 년 전에 북천산(北天山) 고동(古洞) 안에서 잡아 약병에 보관해 두며 감상하던
것이었지요."
마의불수는 그렇게 말하며 붕대를 다 풀었다.
"오오……!"
묘중기인의 탄성이 방안에 가득했다.
"아……, 무림제일미남자(武林第一美男子)이외다!"
마의불수는 놀라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검은 붕대 밑에서 나타난 탁옥용의 얼굴은 그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내… 내 얼굴이 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탁옥룡은 상체를 일으키며 손가락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촉감이 아주 부드러웠다.
'이럴 수가! 거북이 등가죽 같이 거칠기만 하던 나의 얼굴이 비단결같이 매끄럽기만 하다니…….'
그는 흥분에 젖어 얼굴을 붉게 물들었다.
"헤헤……, 이것을 보십시오."
마의불수는 약간 못생긴 얼굴 가득 환한 웃음꽃을 피우며 커다란 구리 거울 하나를 쳐들었다.
탁옥룡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구리 거울을 응시했다.
동경(銅鏡) 안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탁옥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탁옥룡이 본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얼굴이었다.
얼굴빛은 아주 희었다. 병적(病的)인 백색은 아니었고, 싱싱한 건강미를 담고 있는 흰빛인데 양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소년 같았다.
힘차게 뻗은 검미(劍眉)는 두 자루 칼이었다.
묵검(墨劍)이 바로 그의 눈썹인데 두 개의 타는 듯한 눈동자와 어울려 너무나도 강렬한 맛을 던졌다.
깎은 듯 오똑한 콧날, 고집과 오만함이 드리워져 약간 찌푸려진 입 매무새, 그리고 강인해 보이는 턱의 선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이 나란 말인가?"
탁옥룡이 말을 더듬자 거울 속의 천하제일 미남자도 말을 더듬었다.
"주… 주인! 속하가 주인을 위해 큰일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죽는다 해도 유감이 없소이다."
마의불수는 감격해 땅에 꿇어앉았다.
묘중기인(墓中奇人)도 감탄해 마지않았다.
"오……, 내가 본 얼굴 중 가장 뛰어나외다. 주인, 마의불수가 허락 없이 한 일이기는 하나 잘 된 일이니
용서해 주시오. 사실 속하가 마의불수를 부추겨 주인의 얼굴 상처를 지우게 한 것이외다."
"내… 내가 어찌 여러분을 꾸짖겠소?"
탁옥룡의 눈시울은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화를 낸다면 가식일 것이오. 이제는 과거의 모습이 되어 감정의 변화를 추악한 얼굴로 속일 수가 없겠소."
그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얼굴은 그의 과거와 같은 것이었다. 그의 용모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것은 이목구비의 단정함만으로
아름다워진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얼굴 가득 대장부의 기개가 있기에 영웅의 풍모로서 손색이 없었다.
탁옥룡이 두 사람의 충정을 위로해 주고 있을 때였다.
"주인님!"
방 밖에서 큰소리가 났다. 매화의 음성이었다. 매화는 지하석실의 문 앞에 서서 크게 외쳤다.
"주인님, 혈미륵이 전갈을 보냈습니다!"
그녀가 두 번 거듭 탁옥룡을 찾을 때 석문이 안쪽에서 열리며 아주 아름답게 생긴 미청년 하나가 싱긋 웃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너… 너는 누구냐?"
매화가 깜짝 놀라 손을 쳐들었다.
"감히 연공실에서 나오다니!"
매화는 바싹 긴장하며 다짜고짜 오지를 퉁겼다.
피피핑―!
며칠만에 일류고수로 성장한 그녀는 제법 지력을 발출할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하하……, 내가 정말 많이 달라지기는 달라졌군?"
미청년은 웃으며 흑삼을 슬쩍 흔들었다. 매화가 쏟아낸 다섯 줄기 지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매화는 그의 놀라운 수법에 놀라기 이전 그의 목소리에 크게 놀랬다.
"앗, 주인님이십니까? 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매화가 크게 놀랄 때 마의불수가 헛기침을 하며 걸어나왔다.
"으헤헤……, 가서 용정차(龍井茶)를 끓여 오너라. 나와 네 사부는 주인을 이렇게 만들기 위해 두 시진 동안
비지땀을 흐렸다."
"허허……, 매화야. 너의 사숙(師叔) 마의불수의 의술이 천하제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사부도 확실히 알았다."
묘중기인도 웃으며 따라 나왔다.
"아아……!"
매화는 너무나도 뛰어나게 생긴 미청년이 바로 혈영마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휘청이기까지 했다.
'진정 천하의 미장부이시다. 너무도 아름다우신 주인님이셔.'
그녀는 잠시 황홀감에 젖었다.
만일 그녀가 그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았고, 또 새로이 마음을 준 회회공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의 시비가
되기를 자청했을 것이다.
탁옥룡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 혈미륵이 어떤 전갈을 보냈느냐?"
"금응을 탄 사람 하나가 와서 이것을 전했습니다."
매화는 소매 속에서 봉서를 꺼냈다. 그는 얼른 받아 개봉했다.
<너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쳤다. 나는 너를 죽이고 중원천하를 피로 씻을 작정이다. 포달랍궁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중원인들을 모조리 쳐죽일 것이다.
곧 십리백사평(十里白沙坪)으로 와라.>
한 글자 한 글자 원한으로 가득했다.
'옥봉부인과의 담판이 실패로 끝났음에 틀림없다. 옥봉부인이 이십 년 세월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분해 이런
글을 적은 것이다.'
탁옥룡은 쪽지를 접어 품에 지녔다.
"나가서 죽립을 하나 구해 오너라."
그는 매화에게 지시하고는 팔짱을 끼고 무엇인가를 골똘히 궁리했다.
묘중기인이 허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인, 혈미륵이란 자는 우둔한 자이나 충직스럽소. 그는 제 딴에는 보살행을 한다고 자부하고 있소. 그가
중원을 피로 씻을 작정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그는 유난히 키가 커 탁옥룡의 어깨 너머로 편지 안의 내용을 한자도 빠짐없이 살펴본 후였다.
"그는 나 때문에 가장 귀중한 것을 잃었소. 그래서 나를 죽이려하는 것이오. 그러나 곧 냉정을 찾을 것이오."
"가장 귀중한 것이라니요? 혈수나찰이라는 어린 소녀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아니오."
"그럼……?"
탁옥룡은 실로 엄청난 비밀을 숨김없이 말해주었다.
"그는 나 때문에 석심부인을 잃었소. 석심부인은 나로 인해 이십 년 동안 잃어버리고 있던 기억을 찾게 되었소.
놀랍게도 그녀는 옥룡(玉龍) 옥봉(玉鳳) 중 옥봉이었소."
"옥… 옥봉!"
묘중기인의 흰 머리카락이 칼같이 되어 삐죽삐죽해졌다.
"하하, 놀라우나 사실이오. 옥룡제군에게서 설도를 물려받은 옥봉이 바로 포달랍궁의 보물 석심부인이었소."
"그… 그럴 리가……?"
묘중기인의 경악은 극에 달했다.
탁옥룡은 그런 그의 반응을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며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옥봉은 철서생에게 암살당해 설도를 뺏기고 쓰러졌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던 혈미륵에게 발견되었던 것이오."
탁옥룡은 밀교단에 가서 석심부인을 구한 일부터 시작해, 청학령에서 조호이산지계에 속아 석심부인을 납치당한
일을 소상히 이야기해 주었다.
매화가 죽립을 들고 지하로 들어섰다.
탁옥룡은 죽립을 건네 받아 푹 뒤집어쓰며 아주 뛰어나게 변화한 얼굴을 가린 다음 갓끈을 질끈 조였다.
"나 혼자 할 일이니 따라 나설 생각 마시오."
그가 걸음을 내디디려 할 때였다.
"속… 속하는 주인을 따라 가겠소."
묘중기인이 비지땀을 흘리면서 따라 나섰다.
"하하……, 도움은 필요 없소."
"도움이 아니외다. 사실…… 옥봉은 속하가 아는 여인이오."
"아……, 그렇소?"
"그녀를 만나 꼭 할 말이 있소. 그래서 만나러 가는 것이오. 속하가 따라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오."
"그렇다면 함께 갑시다."
탁옥룡은 쾌히 승낙한 다음 계단을 통해 위로 나갔다.
계단 칠십여 개를 올라야 평지가 나타났다. 지하석실로 들어가는 통로를 지키는 사람은 바로 선협 사마천룡과
개방주 철수개였다.
둘은 매화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듯 탁옥룡이 걸어나오자 얼른 그의 얼굴 부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죽립에 지나지 않았다.
탁옥룡은 그들의 호기심을 알기에 한번 죽립을 벗고도 싶었으나 때가 아니라 여기고 침착히 말했다.
"천룡아."
"예, 은공."
"너는 이 길로 이곳을 떠나라."
사마천룡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예에?"
"하하……, 나를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할 일이 있다는 말이다."
"휴우……, 난 또……."
사마천룡은 어린 마음에 크게 놀랐던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일심맹주를 찾아가라. 가서 내가 담판을 지을 작정이니 비무를 바란다면 나를 찾아오라는 말을 전해라."
"담판이오?"
"축융봉으로 갈 때가 되었다. 그 이전에 시시한 일을 다 마무리 지어야 한다."
탁옥룡은 일심맹주 무혈검의 대결 따위는 아주 사소한 일로 간주했다. 천년마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 누이를 만나거든 이렇게 전해라. 공야홍은 사실 과거 나를 구한 은인이라 구했으니 나를 오해
말라고!"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사마천룡은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탁옥룡은 한 줄기 흑선이 되어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묘중기인이 홍선 하나를 그리며 그의 뒤를 이었다. 가히
천하제일의 경공들이었다.
第五章 죽음(死)을 위한 준비
1
멀리 험준한 산봉우리가 보인다.
사마옥봉은 탁옥룡을 인도하고 가다가 아주 높은 산마루 아래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탁옥룡을 돌아보았다.
"오는 도중 줄곧 생각해 보았는데……, 천황봉(天皇峰) 위로는 가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일심검제가 나를 천황봉 위에서 기다리고 있소?"
"예, 그 분은 비장한 각오십니다. 한데 소녀가 보기에 일심맹주는 지금 은공……, 아니, 상공(相公)을
오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탁옥룡은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해? 하하하……, 그는 오해하지 않았소. 나는 천년마제요. 사실 그대로 나는 사람의 탈을 쓴 추악한
악마요."
사마옥봉을 눈물마저 글썽였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소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천 년 전의
전설로 상공의 협행마저 부인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는 곧 마(魔)로 화신(化身)할 것이오. 낭자는 내가 얼마나 두려운 사람인지 모를 것이오."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날카로웠다.
마음속의 한을 말로 풀어버리려는 듯 그의 몸짓은 과장되고 처절했다.
"하하……, 나는 아주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 재간을 갖고 있소. 낭자는 나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아야 하오."
"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의협심의 발로가 아니겠습니까? 일단 소녀가 먼저 맹주를 찾아
자초지종을 말씀드린다면 극한 대결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훗훗……, 낭자는 나의 본심이 어떤 것인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어."
탁옥룡의 목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본… 본심은 아주 훌륭하시지요. 겉보기는 흉악하나……."
사마옥봉은 고개를 저으며 갑작스레 돌변한 그의 태도에 바싹 긴장했다.
"크흐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 알려주지. 내가 어떠한 자인지, 얼마나 지독한 자인지 알려주마."
탁옥룡은 잔혹스레 말한 다음 사마옥봉을 향해 걸어갔다. 죽립을 뚫고 나오는 두 줄기 혈광이 아주 무서웠다.
"왜…… 그런 눈빛을……?"
사마옥봉은 경계심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흐흐……, 내가 어떤 자인지 알아야 하니까!"
탁옥룡은 음침히 말한 다음 사마옥봉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흐윽?"
사마옥봉은 한순간 사색이 되었다. 탁옥룡이 그녀의 젖무덤을 덥석 움켜쥐었던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사마옥봉은 귓부리를 빨갛게 물들이며 탁옥룡의 뺨을 향해 오른손을 휘둘렀다.
"흥, 앙탈해도 소용없다. 나의 마성(魔性)을 건드린 것이 잘못이었다."
탁옥룡은 왼손으로 사마옥봉의 오른손 완맥을 거머쥔 다음 그녀를 와락 끌어당겼다.
"놔… 놔요!"
사마옥봉은 자지러지게 놀라며 몸을 뒤챘다. 그러나 탁옥룡의 힘을 뿌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찌이― 익―!
탁옥룡은 급기야 사마옥봉의 가슴 옷자락을 길게 찢어냈다. 희디흰 앞가슴이 훤히 나타났다. 수줍은 유실이
앙증맞게 자리잡고 있었다.
사마옥봉은 자지러지게 놀라 탁옥룡을 바라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정… 정말 지독하구나! 네가 이런 색마일 줄이야! 그러면 그때 왜 나를 구했느냐?"
"흐흐……, 그때에는 나의 마성이 완전치 않았다. 봐라! 지금의 나는 완전한 마(魔)다. 나의 얼굴이 그것을
증명한다!"
탁옥룡은 일부러 죽립을 번쩍 들어올렸다.
태양처럼 빛나는 헌칠한 용모는 천하에 다시없을 미장부임에는 틀림없었다.
"아, 정… 정말 혈영마협이냐?"
사마옥봉은 너무나도 뛰어난 얼굴을 보고 경악해마지 않았다.
"흐흐……, 이것이 나의 진정한 얼굴이다. 나는 과거 마공을 다 익히지 못해 추악한 얼굴을 하고 다녔던
것이다."
탁옥룡은 일부러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너무도 아름다워 인상을 찌푸린다고 미모가
훼손되지 않았다.
사마옥봉은 탁옥룡의 얼굴을 보고 넋을 잃고 말았다.
"이… 이렇게 멋질 수가!"
"흐흐……, 그럼 내게 몸을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겠구나!"
탁옥룡은 아주 크게 말하며 그녀를 왈칵 끌어안았다.
사마옥봉은 가슴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몸을 뒤틀었다.
"이… 이러지 마세요. 제… 제발…."
"흐흐……, 너를 바쳐라."
탁옥룡은 큰 웃음소리를 내며 그녀의 육봉을 더듬고 점차 그녀의 은밀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사마옥봉의 얼굴이 밀랍보다 희게 변했다.
"흑……, 제발……!"
사마옥봉은 애절히 소리치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바로 그때였다.
"이런 인면수심(人面獸心)을 봤나?"
"천추에 길이 저주받을 마의 자식!"
"퉤엣!"
사방에서 욕설이 터져나왔다. 계피학발의 강호노명숙(江湖老名宿)들이 탁옥룡을 향해 날아들며 언성을 높였다.
"네놈이 사람이냐?"
"감히 무슨 짓을 하는 게냐?"
노명숙들이 눈에 불을 켜자 탁옥룡은 거칠게 응수했다.
"흐흐……, 다 늙은 놈들이 재미가 있을 만하니까 방해를 놓는군."
그는 사마옥봉을 거칠게 밀어냈다.
사마옥봉은 반벌거숭이가 되어 풀숲으로 나뒹굴었다. 그녀는 말을 하지 못했다. 탁옥룡이 아혈(啞穴)을 가볍게
점했기 때문이었다.
'아… 알고 일부러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사람들에게 마두라는 낙인이 찍히기 위해? 왜 그런 짓을 서슴없이
한단 말인가?'
사마옥봉은 누워 있기에 죽립으로 덮인 탁옥룡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탁옥룡은 거칠게 말하고 있으나 거친 표정이 아니었다. 죽립으로 가려진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가득했다. 그는
삶을 너무도 저주하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질끈 물다가 중인을 둘러보았다.
"일심검제는 어디 있느냐? 그 보잘 것 없는 중놈이 감히 나를 부르다니……. 흐흐, 심장을 꺼내 과연 심장이
얼마나 큰가 알아보겠다."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청아한 음성이 들리며 흰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아미타불……, 본승이 짐작하던 대로 마성(魔性)이 발작했구나. 이 상태가 바로 본승이 경계하던 마중지존(魔
中至尊)의 참모습이다."
팔보등공(八步登空)으로 다가서는 백의인은 중년 승려였다.
"흐흐……, 너는 내게 몇 번 더 패한다 해도 정신을 못 차릴 돌대가리다. 하는 수없이 네 돌대가리를
박살내리라!"
탁옥룡은 더 거칠게 말했다. 그와 함께 그의 몸 주위로 혈무(血霧)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피구름이 그를 휘감자 무혈검의 입가에 비장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혈영마(血影魔)!"
그는 혈영마협이라는 별호에서 협(俠) 자를 빼고 혈영마라 칭하며 두 손을 한데 합했다.
"너는 마궁의 어떤 고수보다 강하다. 네가 더 발작하면 마궁은 남아나지 못한다. 그러나 네가 있다는 것은
마궁이 천하를 지배하는 것보다도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본맹은 너를 공적으로 지목한 것이다."
"흐흐……, 가소로운 놈들! 마왕동의 무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려주겠다."
무혈검은 무거운 어조로 말을 받았다.
"너의 무공이 강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결국 사필귀정(事必歸正)인 법이다."
"카하하……, 마중지존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법(無法)이다. 알겠느냐? 네 돌중놈의 머리를 박살낸 다음 여기
있는 모든 놈들을 참살하리라!"
광소성에 실린 살기가 중인을 으스스 떨게 했다.
"아미타불……."
일심검제 무혈검은 정말 처음으로 눈에서 살광(煞光)을 쏘아냈다.
'부처님, 제가 살심을 품은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십 년 전 색계(色戒)를 어긴 죄악을 용서해 주셨듯 자비를
베푸소서.'
무혈검은 장엄한 표정을 하다가 손을 폈다.
"비무하기 적당한 장소가 있다. 그곳으로 가자."
"흐흐……, 어디든 따라 가겠다. 네놈 따위를 죽이는 데에는 십 초 이상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아미타불……, 불법무적(佛法無敵)!"
일심검제 무혈검은 엄숙히 말한 다음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탁옥룡의 경신술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치달렸다.
그가 흰빛을 끌며 날 때 탁옥룡은 천황봉이 무너져라 장소성을 지르며 붉은 구름덩이가 되었다.
"우우우―!"
두 사람은 평행선을 그으며 천황봉 위로 날아올랐다. 가파른 절벽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뚝 끊어진 절벽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넓적한 흰 바위 위로 오를 수 있었다.
그 바위가 바로 천황봉의 최고정(最高頂)이었다. 그 위로 오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내공이 있어야 한다. 자칫
발걸음을 헛디딘다면 천 길 벼랑 아래로 떨어져 분신쇄골할 것이기 때문이다.
휘잉―!
바람이 아주 강하게 불었다.
무혈검의 승포가 어지러이 흩날렸다. 그는 탁옥룡이 뒤따라 바위 위로 내려서는 것을 보며 합장배례했다.
"본승은 걸어내려 갈 생각이 없네."
"카하하흐……, 그럼 죽을 작정이냐?"
"그렇네. 하지만 혼자 이승을 떠나지는 않네. 천하에서 가장 강한 그대 혈영마와 동귀어진해 열락의 길로 가려
하는 것이네."
그는 아주 냉담하게 말했다.
그의 두 손바닥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의 두 손은 언제부터인가 푸른 물감을 바른 것처럼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본승은 오래 전 대사부(大師父)께 천강복마공이라는 탕마수법을 전수받았네. 본승은 이십 년 전 큰 죄를 지어
죽어야 했으나 천강복마공의 전인이기에 차마 죽지 못했네. 이유는…… 천강복마공의 주인 되는 자는
천강복마공을 익혀 강호에 나타나는 마를 소탕해야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네."
그의 목소리는 아주 자비스러웠다.
"흐흐……, 탕마행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럼 나와는 공존할 수 없는 입장이시군. 나는 세상에 마를 퍼뜨리기
위해 살았으니까!"
탁옥룡의 목소리는 아주 컸다.
천황봉을 중심으로 십 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빠짐없이 탁옥룡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무혈검의 자비심에 가득 찬 표정을 비웃는지 연방 괴이쩍은 웃음소리를 냈다.
"카하하……, 덤벼라! 혈영금강마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가르쳐 주겠다. 백도의 무공이 얼마나 천한 것인지
만천하가 알게 하겠다!"
탁옥룡은 음산히 웃다가 말을 멈췄다.
우르르르― 릉―!
바람에 쓸리던 하늘이 검어지며 마른 벼락소리가 났다.
바람이 더욱 강하게 불었다. 검은 구름이 일어나 하늘을 가렸다. 한 마리 흑룡(黑龍)이 천지를 굴복시키는 것
같았다.
'불존이시여, 이 마왕을 제압할 힘을 주소서.'
무혈검은 대자대비한 부처의 법력을 속으로 빌며 손바닥에 끌어올린 천강복마공의 힘을 두 줄기 청무로 발출했다.
우르르― 릉―!
은은한 뇌성벽력이 일어났다.
그의 내공의 힘은 과거 불가 삼대신승이었던 혜장신승(慧藏神僧)의 내공에 비해 두 배나 강했다. 그가 일으킨
천강복마공은 지극히 강해 십 장 밖의 만근거석을 두부같이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푸른 기류가 일어나자 근처가 웅풍(雄風)에 휘감겼다. 기류는 거대한 섬광으로 뻗어나갔다.
"으하하……!"
탁옥룡은 예의 광소를 터뜨리며 섬광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붉은 기류가 푸른 기둥을
압도했다.
'정말 강하다!'
무혈검의 얼굴이 일순 흑빛으로 화했다.
붉은 기류가 확산되며 온몸이 불구덩이에 빠진 듯 화끈거렸다. 그러나 그는 진기의 힘을 늦추지 않았다.
탁옥룡의 혈영금강마공을 몸으로 받아내며, 자신의 천강복마공으로 탁옥룡의 금강불괴지신을 박살내자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하압―!"
그의 입술 사이에서 불문사자후(佛門獅子吼)가 시작되었다.
꽈르르― 릉―!
천강복마공의 기세가 한결 강맹해졌다. 혈영금강마공이 그로 인해 위축되는 듯했다.
천하 백도맹주가 승리할 것인가, 아니면 천년마제의 화신체인 혈영마협이 압도할 것인가?
향후 천하무림의 향방이 이 한판의 대결에 달려있기에, 모든 사람이 천황봉 위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른 벼락소리를 고요하게 만드는 파공성이 연달았다.
꽈르르― 릉― 꽈꽝―!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몇 번 일어났을까?
"으아아… 악!"
한 마디 처절한 비명소리가 중인의 고막을 뒤흔들었다.
허공으로 훌훌 날아올랐다가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그는 비명소리를 내며
아득한 운해(雲海)를 뚫고 사라졌다.
"왜… 왜…… 손속을 거뒀단 말인가?"
떨리는 목소리가 떨어지는 자를 배웅했다.
바위를 딛고 서 있는 백의승려 하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들여다보며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바로 무혈검이었다.
그는 영광스럽게도 천황봉 비무에서의 승자가 되었다. 한데도 그는 승자답지 않게 몹시 괴로워했다.
"와! 일심검제 일심행대사(一心行大師)가 바로 천하제일고수라는 것이 드디어 사실화되었다."
"천년마제가 죽었다!"
"천 년 전에는 삼대신승이 협공해 마중지존을 죽였으나, 이제는 일심행대사 한 분이 그를 죽인 것이다!"
"일심맹 만세―! 일심맹은 오늘 이후 천하를 지배할 것이다. 모든 마의 세력을 퇴치하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리
라―!"
사방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일심검제 무혈검이 쌍장으로 혈영마협을 죽였다는 것이 입에서 입으로 소문나며, 십 리 안에 있는 일심맹도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정말 예측하지 못한 역전이었다.
마궁을 단신으로 뒤흔들었고, 군협들의 간장을 서늘하게 했던 혈영마협이 불가고수 일신검제에게 제거될 줄이야.
일심검제는 주위에 누가 나타나 하례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탁옥룡이 떨어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아주 이상했다.
"맹주, 축하드립니다. 역시 맹주십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 일심검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자는 내가 아니오."
일심검제는 침통하게 말을 이었다.
"승자는 혈영마협이오."
"예에?"
"무… 무슨 겸손의 말씀을?"
모두 크게 놀라워하며 치솟았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일심검제는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바위 위에 주저앉았다.
"아미타불……, 이 어리석은 불제자(佛弟子)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십 년 전 강호출도 때에는 섣부른 행동을 해
색계를 어겼고, 이제는 섣부른 판단으로 천하기협(天下奇俠)을 해했습니다."
그는 합장하며 눈물을 떨구었다.
"맹주?"
"이… 이게 어이된 일이십니까?"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군웅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심행(一心行)은 연신 불호를 외우며 눈을 반개(半開)했다. 그는 태산같이 보였다. 어떠한 말도 그를 움직이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광마(狂魔)가 아니었다. 이제야 확실히 그를 알 것 같다. 그의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그를 오해해 죽게
하다니! 아……, 냉혹하기만 하던 그가 왜 내게 아량을 베풀어 대신 죽었단 말인가?'
일심행은 비참한 표정을 하고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2
천하가 벌컥 뒤집혔다.
― 일심맹주가 천년마제인 혈영마협을 죽였다!
천황봉에서 들려온 소문이 삽시간에 남칠북육(南七北六)의 강호계를 벌집 쑤시듯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혈영마협은 십초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
그를 죽인 일심검제는 무신(武神)으로 추앙되었다.
물론, 혈영마협의 악행이 심했기 때문도 아니고, 그의 명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었다. 단 한 가지 이유는 그의
무공이 천하제일이라고 평가받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정(正)이냐 사(邪)냐를 항상 의심받던 혈영마협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고수였다.
그는 마궁주마저 두려워 떨던 상대가 아니었던가?
백도인들은 백도상에서 천하제일고수가 탄생되었다는 것을 큰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마궁마저 쓰러지리라.
혈영마협을 참살한 일심검제는 이제 불수를 마궁 쪽으로 돌려 단 일장으로 축융봉을 차지하고 있는 마궁을 박살내
버리리라.
모두의 생각은 한결같았다.
한데 천황봉 비무 다음 날, 비합전서롤 통해 천하에 퍼진 엄청난 소문이 있었다.
第六章 탕마지존동(蕩魔至尊洞)의 기연
1
석문을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쪽은 종유동굴이었다. 탁옥룡은 넓은 종유동굴을 바라보다가 세 구의 해골을 볼 수 있었다.
해골은 모두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살은 썩어 진토가 되었지만 뼈대의 골격은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았다.
품자형(品字型)을 이루고 있는 해골 가운데 석판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탁옥룡은 급히 걸어가 석판을 살폈다. 석판 위에는 금강지력(金剛指力)으로 쓴 글이 남아 있었다.
<마중지존을 꺾을 절학을 만든다는 것이 우리 세 불제자(佛弟子)의 공통된 소원이었다.
마중지존은 본래 불가정종 무공인 금강공(金剛功)에 토대를 두고 절기를 익혀 고수가 된 사람이다. 그의 절학을
능가할 신공 역시 불가정종 무공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그랬기에 그를 여량산(呂梁山)에서 패배시킨 우리는 이곳으로 와 숙고하게 된 것이다.
우리 셋은 내상이 커 일 년 이상을 버티지 못한다.
일 년 안에 마중지존을 능가할 절기를 만들지 못한다면, 훗날 마의 무공이 영원토록 정의 무공을 능가할 것이
아닌가?
마중지존은 비록 광폭했지만 아주 지혜로운 자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사장(死藏)시키지는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
그것은 정녕 무서운 일이다. 우리 어리석은 불제자들은 득도(得道)하는 마음으로 숙의했다. 서로의 절기를
허심탄회하게 교환했다.
마침내 죽음이 바로 앞에 닥치고야 우리 어리석은 불제자들은 결국 뜻을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정도 최고
절학의 창안을 뜻한다.
탕마삼장법(蕩魔三掌法)!
마도를 탕멸할 구결은 아래에 있다.>
아주 긴 글인데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놀라웠다.
"이럴 수가! 이들이 선사 마중지존을 격파한 후에도 한 곳에 모여 절기를 연마했단 말인가?"
탁옥룡은 그들의 불 같은 협의지심(俠義之心)에 혀를 내두르며 아래쪽을 마저 살폈다.
<탕마삼장(蕩魔三掌)―
일장(一掌), 정도무적(正道無敵).
이장(二掌), 불법무변(佛法無邊).
삼장(三掌), 제행무상(諸行無常).>
초식명은 모두 불법의 한 구절인데, 그 내용은 각기 한 가지의 오묘한 내공운기(內功運氣)였다.
제일장 정도무적은 소림사의 절기와 유사했으며, 제이장 불법무변은 옥룡절기와 흡사했고, 제삼장 제행무상은
포달랍궁절기와 비슷했다.
세 초식 중 어느 것이 뛰어나다 비교하기는 무리였다. 모두 장단점이 있는데 세 가지 모두 비슷한 점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서로의 심득을 교환하며 창안한 것이리라.
"흥, 이것은 혈영금강마공만 못하다. 무공이란 강(强)하고 급(急)해야 하는 법. 이렇게 유약(柔弱)해서야
상대를 죽일 수 있겠는가?"
탁옥룡은 자신이 익힌 마중지존의 마공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에 탕마삼장을 비웃으며 석판을 내려놓았다.
'마왕동은 천하제일이다. 삼대신승 정도가 어찌 마왕동의 절기를 능가하겠는가? 선사를 암습한 겁쟁이 중놈들!'
그는 가차없이 돌아서 나갈 작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그를 옭아맸다.
"과연 어느 것이 진정 강한 것일까?"
탁옥룡은 삼대신승이 죽기 전 창안한 절기가 헛것임을 밝히고 싶었다. 남에게가 아니고 바로 자신에게 확인시키고
싶었다.
"이 세 가지를 익히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마왕동의 절기에 비할 수 없이 허약한 것이니까. 나의
내공이 거의 다 흐트러졌지만 반나절이면 완벽 이상으로 익힐 수 있다."
그는 석판을 붙잡고 눈길을 한데 모았다.
그는 마왕동의 절학을 연성하는 데 육 년이란 세월을 소유했다. 한데 탕마삼장을 반나절만에 완벽히 터득할 수
있다면 그 한 가지만으로 심오함에서 비교된다.
"으음……!"
탁옥룡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럴 수가! 이렇게 심오한 구결이 있을 줄이야? 혈영금강마공의 허점을 모조리 설파해 놓고 있다.'
그는 손바닥에 땀을 쥐기 시작했다.
탁옥룡의 괴로워하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고뇌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가 읽는 구결은 이제껏 그를 지탱해
주던 마공구결에 비할 때 극성(極性)이 되는 구결이었다.
그것은 그의 마공 향상에 큰 해가 되는 것이다. 혈영금강마공과는 완전히 다른 운기행공술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읽기를 중단할 수 없었다.
2
종유석이 가득한 동굴 안은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동굴 안에는 해골이 되어 죽은 세 명의 노고승과 그들이 죽기 전 남긴 글을 읽으며 망아지경(忘我之境)을 헤매는
흑의청년 하나가 있었다.
그는 무념무상한 세계를 달리고 있었다.
구결은 한 자 한 자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오묘한 이치이기도 했다.
공(空)은 어떤 것인가, 색(色)은 어떤 것인가, 우주(宇宙)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가장 강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인간의 힘은 근육의 힘이 아니라 정신력(精神力)이다.
그 힘은 토납(吐納)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보통 내공(內功)이라 불린다. 내공은 구결에 의해 이룩되고 그
힘은 구결의 성질에 따라 달라진다.
강(强)과 유(柔).
허(虛)와 실(實).
급(急)과 완(緩).
내공구결은 서로 다른 점을 갖고 있다. 어떤 것을 취하느냐에 따라 내공의 성질도 달라지게 된다.
어떤 것은 강(强)으로 약(弱)을 누루고, 쾌(快)로 늦은(緩) 것을, 파(破)로 합(合)을 깨어뜨린다. 그러기에
위력이 살인적이고 파괴력이 엄청나다.
그러나 청년이 읽고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구결이었다. 그것은 고요한 가운데 일어나는 힘을 말하고 있었다.
정(靜)!
마음이 삼매지경(三昧之境)에 들어 가을날 호수같이 맑고 고요한 경지를 말한다. 폭풍뇌우가 몰아쳐도 그 고요한
경지를 깨지 못한다.
허(虛)!
마음은 텅 비어 있다. 그러기에 마력(魔力)이 거기 들지 못한다. 욕망도 들 수 없고, 호승지심도 들 수 없다.
유(柔)!
이유제강(以柔制强)이라 하지 않는가. 부드러운 것은 강한 것을 이긴다. 이유는 부드럽기에 꺾이지 않기
때문이다.
광(曠)!
마음의 테두리는 아주 넓어 끝을 볼 수 없다.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세계가 바로 거기에 있다.
정(定)!
고요함을 지키는 정(靜)과 비교된다. 이것은 감내하는 힘을 말하며 굴하지 않은 경지이다.
무(無)!
마음의 거울은 백지같이 깨끗하다. 그러기에 허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변화하지 않고 굴복당하지 않는
것이다.
정(正)!
사(邪)에 빠져들지 않은 바른 마음이다.
이것이야말로 청년이 읽는 구결의 제일 큰 특징이었다. 그것은 청년이 이미 익히고 있는 한 가지 내공구결과
흡사하면서도 너무나도 판이하게 다른 비결이었다.
'선천강기(先天 氣)임에는 같으나 그 힘의 근원이 마(魔)가 아니고 정(正)이라는 것이 판이하다. 이것은
인간의 순정지심(純正之心)에서 일어나는 조금도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기운이다. 그러기에 강하나 겉으로는
부드럽게 보이고, 번개같이 빠르면서도 아주 천천히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전혀 새로운 심도무학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잠재력을 일으켜 선천강기를 만들어내는 데에서는 혈영금강마공과 같다. 그러나 파괴의 힘이 아닌 대비(大悲)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너무도 판이하다.'
그는 더 이상 고민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한 가지 오묘한 것을 깨달은 후이기 때문이었다.
'이 힘은 원한이나 살기(煞氣)로 인해 발동되는 힘이 아니다. 평화로운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다. 가히 신공(神
功)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심오한 구결을 깨달은 청년은 바로 탁옥룡이었다.
탁옥룡의 표정은 아주 부드러웠다. 과거 일심검제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얼굴보다도 훨씬 평온해 보였다. 눈빛에
서려 있던 핏빛 기운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십주야(十晝夜) 내내 구결을 읽으며 보냈던 것이다.
'마공과 신공의 차이는 손바닥의 위아래와 같다. 결국 사람의 마음은 단 하나이다. 그것을 악의 거울로 보느냐,
선의 거울로 보느냐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일 뿐이다.'
그는 자책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이치를 진작 몰랐던 것이 유감이다.'
그는 매우 편안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크게 기뻐했다.
"후후……, 죽었다면 이런 이치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어리석게도 한(恨)이 두렵고 서러워 도망치려 했지
않는가? 정면으로 싸워야 하는 것을 왜 세상에서 떠나려 했었는지 모르겠다."
탁옥룡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오랜만에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아주 맑았다.
"탕마삼장은 혈영금강마공 이상이다. 마중지존 선사도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다. 내가 선사의 전인으로 마왕동부의
절학을 완벽히 익히고, 이제 새로운 절기마저 연성해 것을 탓하시지는 않으리라."
그는 해골로 화해 버린 삼대신승을 돌아보았다.
"사실 이 분들이 여기 든 이유는 선사에 대한 경쟁심이 아니겠는가? 탕마삼장은 선사 마중지존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내가 얻는다면 사문에 부끄럽지 않고, 삼대신승 역시 흡족해 하실 것이다."
그는 편안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는 망아지경에 들었다.
하루가 지났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 다시 이틀 사흘이 지나 합장에 든 지 칠일째 되는
날이었다.
탁옥룡의 몸을 중심으로 한 몽롱한 백무(白霧)덩어리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천령개 위쪽에서 피어올랐다. 보일
듯 말 듯한 기운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졌다.
탁옥룡의 모습은 결국 백무에 잠겨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무극(武極)의 경지였다.
3
중양절(重陽節;九月九日)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삼산오악의 효웅(梟雄)들은 마궁에 바칠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부리나케 축융봉으로
말을 몰았다.
반면 정파 사람들에게는 폭풍전야와 같은 시간이었다.
혈영방 사람들이 축융봉으로 대거 몰려갔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일심맹의 우두머리는 소수 정예를 이끌고
축융봉으로 간다고 했다.
세상은 이렇듯 급변에 돌입하고 있었다.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산길을 한적히 걷는 백의인 하나가 있었다.
나이는 약관(弱冠) 남짓으로 그의 모습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으리만치 준미했다. 가히 조화의 극(極)이라고나
할까?
얼핏 그를 보는 여인은 모두 한숨을 지어야 했다. 그의 영준함을 가슴에 품고 많은 세월을 안타까움에 보내야 할
것이다.
그는 호남성 쪽을 향해 걸어갔다.
다른 무림인들은 건마(健馬)와 쾌속선(快速船)을 타고 호남성으로 가는데 비해 그는 유유자적 걸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아름답다!
그의 목소리는 그윽하고 부드러웠다. 바람소리가 그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그는 그윽한 눈길로 사위를 둘러보았다.
강물, 호수, 아름다운 산봉우리,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그가 터벅터벅 걸어갈 때였다.
차차창―!
요란한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산너머에서 검기가 일고 있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
승려들의 범패성이 고막을 때렸다.
백의미청년은 눈길을 산너머 쪽으로 돌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이 타락하다 보니 이제는 산사(山寺)에 머무는 중들까지 칼부림을 하게 되었단 말인가?'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이때 느닷없이 사람의 인영이 들이닥치며 사나운 음성이 들려왔다.
"서라!"
"한 걸음만 더 옮기면 죽는다!"
모두 자의를 걸치고 있는데 그들의 옷자락에는 용이 그려져 있었다.
'마궁 자삼대(紫衫隊)로군.'
백의미청년이 인상을 찡그리자 다섯 명이 미끄러지듯 다가서 그를 에워쌌다.
"흐흐……, 우리들을 알기는 하느냐?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구나?"
"쯧쯧……, 헌칠하기는 하나 문약(文弱)하구나. 내가 너만한 용모였다면 벌써 천하 여인의 십분의 일은
건드렸을 것이다, 흐흐……."
그들은 옥룡마궁의 고수들답게 포악성을 드러냈다.
'이들이 나를 세상에 떨어지게 한 어떤 사람의 부하들이란 말인가?'
미청년은 그들의 눈빛에서 이는 광기(狂氣)를 보고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마궁도들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고 계속 닦달했다.
"흐흐……, 거기서 꼼짝 말고 있거라!"
"괜히 호기심을 느끼다가는 제명에 죽지 못한다."
그들 다섯은 팔짱을 끼고 빙글빙글 웃었다.
옥룡마궁은 천년마제가 죽은 이후 무슨 연유에서인지 살생을 훨씬 줄였다. 그렇기에 문약한 서생 따위를 죽이는
일은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백의미청년은 천안(天眼)과 천이대공(天耳大功)을 시전해 산너머를 살피고 있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얽혀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었다. 그 중 삼 분의 일 가량은 중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가마 한
대를 호위하며 진세를 펼치고 있었다.
일백팔나한대진(一百八羅漢大陣)!
승려들은 천하에서 가장 막강한 진세를 시전하는 중이었다.
그들을 포위공격하는 자들의 수는 오백에 달했다.
"모두 쓸어버려라!"
"요사한 일심맹승(一心盟僧)들을 모두 도륙내라! 모가지 하나에 황금 열 냥이 걸려 있다!"
옥룡마궁 고수들은 승기를 잡고 날뛰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진세가 워낙 완벽해 가마를 지키는 사람들은 그마나 버틸 수 있었다.
청년은 상황을 파악하고는 다섯 사람을 향해 말했다.
"가마에 탄 사람이 일심검제(一心劍帝)냐?"
갑자기 하대하는 말이었다.
다섯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화를 내기보다 최면에 걸린 듯 순순히 대답했다.
"아… 아니다, 일심검제의 상전이다."
"일심검제에게 상전이 있었던가?"
청년은 중얼거리다가 소매를 흔들었다.
그런 모습은 아주 거만했다.
"나를 저곳으로 인도해라."
마궁도는 모두들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네… 네놈이?"
"이 놈이 갑자기 실성을 했나?"
청년은 그들의 살기에도 아랑곳없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나는 대비객(大悲客)이다. 너희들에게 소궁주(少宮主)가 되는 사람이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이상한 정서를 담고 있었다.
"소… 소궁주라니?"
"뭐… 뭐라고 했냐?"
다섯은 상대의 보이지 않은 위기에 중압감을 느끼며 얼굴에 비질비질 땀을 흘렸다.
백의인은 나직이 외쳤다.
"어서 안내해라!"
다섯 모두는 고막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소림사 사자후 신공이라 한들 청년의 외침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으으……!"
"크으……!"
다섯은 몸을 휘청이다가 겁먹은 얼굴을 하고 더듬더듬 말했다.
"우… 우리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오.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진세가 깨어져 중놈들이 도망치기 때문이오."
"진… 진짜 소궁주라 하더라도 안으로 드실 수 없소. 태상호법의 영패(令牌)가 있어야 입진(入陣)이
허락되오."
그들이 위기에 눌려 벌벌 떨었다.
"어리석은 자들! 그러나 이제부터는 착하게 살아라."
청년은 침착히 말한 다음 손바닥을 벌렸다. 그의 손에서 희뿌연 기류가 일어났다.
자삼대 다섯은 거의 동시에 석상같이 되어 굳어 버렸다.
입을 벌리고 있으나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그대로 깊은 잠을 빠져들었다. 달콤한 꿈을 꾸는지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었다.
"깨어나면 마성을 잃게 되리라."
미청년은 순간적으로 오십여 장을 가로질렀다. 흰빛이 뿌려지는 가운데 그의 몸은 진세 외곽지대에 이르렀다.
"와아―!"
"모두 쓸어버려라! 이 세상은 본궁의 것이다. 으하하……, 가마 안에 탄 어린놈을 죽이는 것으로 그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옥룡마궁도들의 함성이 아주 요란했다.
백팔나한진으로 보호되고 있는 황금가마 안에는 어린 소년 하나가 타고 있었다.
그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었다. 곤룡포(袞龍袍)를 걸치고 있는데 오른손에는 독이 발린 비수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그 끝은 심장에 닿아 있었다.
"진이 깨어지는 순간 독비수가 나의 심장을 뚫는다."
중얼거리는 미소년은 태양 같은 존재였다. 만인이 우러러 볼 당세의 천자 현룡제(玄龍帝)가 바로 그였다.
"옥새는 나만이 아는 장소에 숨겨져 있다. 옥새 없이는 아무도 천자가 되지 못한다. 게다가 령기(令旗)도
사라졌으니……."
그는 최후의 순간 자결을 결심하고 있었다.
콰콰― 콰쾅―!
주변에서 요동치는 진세의 소용돌이는 그가 감당하기에 상당히 큰 고통이었다. 기류의 파동으로 피부가 베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그는 당당한 천자의 신분이지만, 마궁에 잡혀 짐승만도 못한 경험을 많이 했기에 아주 비범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백팔나한진은 붕괴 직전이었다.
우르르― 릉―!
벼락치는 소리가 잇달았다.
승려들은 오공으로 피를 쏟고 있었다. 그러나 자리를 벗어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죽어도 진을 망가뜨리지는
않는 의지력은 소림사를 천 년간 강호의 태산북두로 만든 원동력이기도 했다.
"하하하……, 어전대장군(御前大將軍)이 왔다. 어떤 놈들이든 간에 현룡제를 해하지 못한다!"
큰 웃음 소리와 함께 붉은빛 하나가 떠올랐다.
피융―!
혈선(血線) 하나가 그어졌다. 용 그림이 그려진 소기(小旗) 하나가 붉은 선을 끌며 옥룡마궁도 속으로
날아들었다.
붉은 광채는 점점 더 짙어졌다. 둘레가 한 아름이 넘어 보이는 핏빛 기류가 닿는 곳에는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케에에― 엑―!"
"크으윽!"
"어… 어떤 자이기에 이리도 강하단 말이냐?"
"도… 도망가자, 무신(武神)이 나타났다!"
도처에서 피보라가 일어났다. 삽시간에 수백 명이 죽어 넘어진 것이다.
옥룡마궁도들이 깃발에 의해 으스러져 죽을 때, 둥둥 떠서 황금가마 앞으로 떨어져 내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하……, 그러면 그렇지. 누가 그대를 죽일 수 있었겠는가?"
현룡제는 독비를 떨어뜨리고 활짝 웃고 있었다. 죽음 직전에 살아난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폐하, 신(臣)에 대해 묻지 말아 주십시오."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사람은 오체복지한 다음 손을 위로 쳐들었다.
옥같이 흰 손바닥이 흔들어지더니 수백여 명을 참살한 주룡령기(朱龍令旗)가 허공에서 방향을 꺾어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놀랍게도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황제가 갖고 있는 물건이었다. 그것이 언제 현룡제에게서 타인에게 넘어갔는지, 현룡제가 언제 절세고수를
부하로 두었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소림승려들은 얼떨떨해 했다.
"오……, 대체 누구기에?"
"진정 무신의 경지다."
현룡제를 구한 사람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두 신비했다. 특히 눈빛이 신비로웠다.
그는 현룡제와 말을 나누고 있었다. 현룡제는 보통 목소리로 말을 하는데, 그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자네는 생사대권(生死大權)을 지고 있네. 그러니 비록 부모(父母)를 죽인다 해도 황제의 어명으로 용서받네.
하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현룡제는 웃으며 곤룡포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게 느껴져서였다.
"잠시만 숨어 계십시오. 그러면 곧 희소식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누구인지는 당분간 비밀로 해주십시오."
백의인은 말을 한 다음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한순간에 모습을 감췄다.
현룡제는 무엇이 즐거운지 계속 웃고 있었다.
"하하……, 그대만 믿네."
4
강호는 삼분(三分)된 지 오래였다.
옥룡군이 강호의 반을 차지했다. 그 나머지 반은 혈영방이, 나머지 반은 구파(九派)를 주축으로 한 일심맹이
차지하고 있었다.
옥룡궁의 힘은 아직도 위대했다.
이역사단이 그들의 전부가 아님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가장 무서운 살수는 독인단(毒人壇)이었다.
독인단의 우두머리는 마궁의 태상호법 독존이었다.
독인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하나같이 칠독(七毒)을 식량으로 삼는 사람 이하의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무기를 갖고 다니지 않았다.
손이 바로 살인병기이기 때문이었다.
호남성으로 드는 관도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는 백의인 하나가 있었다.
그는 얼핏 보아 문사(文士)로 보였다. 얼굴을 죽립으로 가리고 있는 사람인데 전체적으로 풍기는 인상이 아주
부드러웠다.
그는 가을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것을 보며 형산(衡山) 쪽을 향해 걸었다.
노을이 그의 흰옷을 붉게 물들였다.
"천하가 핏빛이었다. 그러나 핏빛은 사라지리라."
그는 청아한 소리로 중얼거리며 계속 걸었다.
해가 완전히 떨어졌을 때 그는 형산의 높은 봉우리가 바라보이는 마을에 이르렀다.
마을은 불야성이었다. 마을 사상 가장 번화한 시기가 바로 이 즈음이었다.
수백 명의 호걸들이 건마를 타고 몰려와 마을의 주루와 객잔을 다 차지하고 마을 안을 주향(酒香)으로 덮어버렸다.
그들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형산까지의 거리가 세 시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천리 밖 시진에 사는 창기들이 몸을 팔기 위해 산하촌(山下村)에 왔다는 말이 떠돌고 있었다.
강호인들은 돈 씀씀이가 헤프다. 닷 냥 주고 살 것을 스무 냥 주고도 산다. 그러나 위험하기가 화약고 같아
자칫하다가는 머리가 박살나 죽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이치를 몸으로 체험한 듯 칼을 찬 사람을 보기만 하면 아주 고분고분했다. 심지어 침을
뱉는다 해도 손바닥으로 침을 닦은 후 씨익 웃을 정도였다.
칼이 무서워서라기보다는 황금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곳곳에서 극(劇)이 벌어지고 있었다. 구경꾼들의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어떤 곳에서는 원숭이와 곰을 부려
여러 가지 재간을 보이고는 바구니를 돌려 은조각을 모으는 자도 있었다.
백의인은 마을 안을 둘러보다가 지붕이 바닥에 붙어 있은 듯 작고 허름한 술집을 찾았다.
그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곳은 너무도 초라해 마을이 온통 북새통인데도 한적하기만 했다.
오순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점원, 주방, 계산의 일을 모두 다 하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식객(食客)은 단 세 사람인데도 몹시 분주했다.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두주(斗酒)를 마시며 연방 안주를
주문하기 때문이었다.
"우리 하락쌍흉(河洛雙兇)이 백도인의 괄시를 받고 살기보다 이 참에 마음을 바꿔 마궁도(魔宮徒)가 됨이 낫지
않는가?"
털북숭이 사내가 묻자 얼굴이 마른 자가 말을 받았다.
"마도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방문외도(傍門外道)라고는 하나 독인(毒人)과 오랑캐를 앞세워 무림을 정복하는
무리와 한 패거리가 된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둘은 삼류무사(三流武士)였다. 그러나 말하는 모습은 아주 진지했다. 천하대세에 따라 적절히 움직여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럴 바에는 비무대회가 끝날 때까지 숨어사는 것이 어떤가? 구경하다가 재수 없이 죽는 수도 있으니까
말이세."
"헤헤……, 이번 구경은 목숨보다 가치 있는 것입니다. 혈영사절(血影四絶)의 뛰어남을 직접 보고 싶어 하락
고을에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혈영사절이란 명호는 당금 천하에서 선풍(旋風)같이 휘몰아친 이름이었다.
일절(一絶) 독비수(獨臂 ),
이절(二絶) 실명검사(失名劍士),
삼절(三絶) 녹옥선마(綠玉扇魔),
사절(四絶) 마의불수(麻衣佛手).
이들 네 사람의 이름은 당금 천하를 울리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혈영쌍미(血影雙美)가 있었다.
매하선자(梅花仙子),
혈수나찰(血手羅刹) 이수운.
쌍미는 혈영방의 꽃이었다. 놀랍게도 혈수나찰이 현재 혈영방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다.
혈수나찰은 본래 포달랍궁주의 전인이 아닌가.
포달랍궁주가 혈영마협에 쓰러져 폐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혈수나찰이
어찌 사부의 원한도 잊고 혈영방의 수뇌가 될 수 있었을까?
― 혈수나찰은 혈영마협이 죽은 이후 석녀(石女)가 되었다. 그녀가 웃는 것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녀는 포달랍궁의 절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본 사람이 퍼뜨린 소문이 그것이었다.
하락쌍흉은 나름대로 들은 소문을 자랑하며 어떻게 처세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으음……!"
구석진 곳에 앉아 술을 마시던 작은 체구의 흑의인 하나가 쓴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누런 얼굴에 일그러진 오관을 하고 있었다. 손은 아주 부드러워 얼굴빛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눈매가 예리한
사람이라면 그가 역용한 것임을 쉽게 알아낼 것이다.
'그들을 찾아야 한다. 그들에게 이것을 전해야 한다.'
그는 오랫동안 앉아 한 가지 일을 고민하다가 급기야 마음의 결정을 보았다.
"술값 여기 있소."
그는 작은 소리로 말하고는 금자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내던졌다.
그가 문 밖으로 나가자 하락쌍흉 중 하나가 탄식을 흘렸다.
"으음……!"
그의 눈에서는 잠깐 신광(神光)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하락쌍흉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은 초절한 눈빛이었다.
"그곳으로 가기를 작정한 것 같다. 하는 수 없군. 명에 따라 목을 잘라 갖고 산으로 돌아갈 수밖에."
털북숭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얼굴이 마른 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빌 뿐이오."
그는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털북숭이는 누런 금덩이 하나로 술값을 치른 다음 그 뒤를 쫓아갔다.
그는 문을 나가기 이전 백의인을 슬쩍 바라보았다.
백의인은 술집 주인과 더불어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떤 곳이라는 등등의 시시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훗……, 아닌가?"
털북숭이는 피식 웃다가 밖으로 나갔다.
백의인은 잡담을 끝내고는 주인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저 사람은 언제 여기 왔습니까?"
"헤헤……,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흑의장한이 들어오고 난 바로 다음이었습니다. 한데 주량이 상당한지 열
말들이 술독 두 개를 게눈 감추듯 비우지 뭐겠소?"
"고맙소, 노인."
청년은 미소 짓다가 금조각 하나로 술값을 치렀다.
"아이구!"
주인은 네 사람이 낸 술값이 이제껏 사십 년 술장사해 번 돈의 두 배라는데 경악하며 연방 허리를 숙였다.
백의인은 어둠을 모르는 듯 빠른 속도로 걸었다.
'하락쌍흉이란 자는 보통이 아니다. 그들의 몸에서는 막강한 사기(邪氣)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왜 삼류무사
행세를 하고 있을까? 그들이 아마 흑의인을 쫓고 있을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보통 일은 아니다.'
그는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듯 보이나 사실은 무공이 너무도 강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안광이 안으로 갈무리되는
반박귀진의 경지를 넘은 지 오래였다.
그는 하락쌍흉이란 자들이 간 곳을 따라 움직였다.
한편, 하락쌍흉은 야음을 타고 소리 없이 뒤쫓고 있었다. 그들의 표적인 왜소한 흑의인이었다.
흑의인은 그들이 뒤쫓는지도 모르고 주위를 살피며 걷고 있었다.
"이것을 전해야 한다. 그래야 희생을 줄일 수 있다. 아버님은 완전히 미치셨다. 아……, 내가 이런 일을 하면
양어머니가 노해 사부를 죽일 것이나 죄 없는 수천 명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 사부도 내가 용기 있게 이런 일을
하기를 바라고 계시다."
그는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소책자 한 권이 쥐어져 있었다.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히 베어 있었다. 무게도 얼마 나가지 않는
작은 책자를 들고 가는 것이 아주 힘겨워 보였다.
<독진밀해도(毒陣密解圖)>
다섯 자가 먹으로 쓰여 있었다.
"이것을 혈영사절에게 전하면 혈영사절은 독진을 통과할 것이다. 태상호법이 믿는 독진이 무너진다면 옥룡궁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숨죽이고 뒤따르던 하락쌍흉이 전음으로 합의를 본 다음 위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흑의인의
전후를 가로막았다.
"더 갈 수 없소!"
"그것을 이리 주시오. 모르는 척하겠소."
길 옆 거목 뒤에 은신해 있는 백의청년은 비로소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흐음……, 혈영사절을 운운해 어딘지 이상하다 했더니 가짜 하락쌍흉이고, 사실은 옥룡궁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느닷없이 앞뒤가 가로막힌 흑의인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당… 당신들은 누구요?"
하락쌍흉은 능글맞게 웃었다.
"궁에서부터 쭈욱 따랐소이다."
"대부인(大夫人)의 밀명(密命)으로 따라 왔소. 소궁주(少宮主)가 태상호법의 침소에 잠입해 독진밀해도를
훔쳐낸 것을 아시고 우리 두 늙은이를 비밀스럽게 불렀던 게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전과 달랐다.
"마… 마존(魔尊)과 검존(劍尊)?"
흑의인은 그들의 정체를 간파한 듯 몸을 휘청였다.
그렇다. 털북숭이는 건곤마장법(乾坤魔掌法)으로 천하를 주름잡다가 마궁구존 중 세 번째가 된 마존이다.
얼굴이 마른 자가 구마 중 넷째로 검존이다. 그의 허리띠가 바로 연검(軟劍)이며, 그것이 발출되면 사위가
검기에 의해 갈라진다 했다.
두 마존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소궁주, 벌써 세 번째요. 배반을 하면 죽는 것이 본궁의 법인데도, 소궁주는 신분이 있기에 두 번이나
용서받았소. 그런데 또다시 배반하시다니!"
"우리는 소궁주가 그것을 들고 혈영사절이 머물고 있는 곳을 찾는다면 가차없이 암습해 죽이라는 대부인의 명을
받고 왔소."
흑의인은 소책자를 가슴에 품고는 와들와들 떨었다.
"이… 이러지 마세요."
가는 음성으로 미루어 아마도 여인인 듯 싶었다.
앞을 가로막은 마존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시오. 그리고 함께 들어갑시다. 조금 더 가면 혈영방 조무라기들에게 발각당하게 되오."
두 마존은 작은 소리로 말하며 진세를 압축시켰다.
"안… 안돼!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나의 아버지가 비록 마궁의 궁주라고는 하나, 나는 마궁 소궁주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뭣이? 마궁이라고?"
마존과 검존의 눈빛이 사악해졌다.
바로 그때,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다가서는 백의인 하나가 있었다.
"하하……, 어떤 자들이 연약한 여인을 괴롭히느냐?"
줄곧 그들을 뒤따르던 백의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웬 놈인지 모르지만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다!"
마존은 차게 말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백의인을 향해 쌍장을 흔들어댔다.
그의 장력은 원래 파공성을 내지 않았다. 지극히 차고 음유한 기운이 흐를 뿐이었다. 막강한 암경(暗勁)이
백의인을 요절낼 순간이었다.
콰앙―!
폭음과 함께 비명소리가 뒤따랐다.
"으윽……, 호신강기로 나의 음살건곤강기(陰煞乾坤 氣)를 퉁겨 버린단 말인가?"
마존이 사색이 되어 일 장이나 날아올랐다. 그의 두 손은 꺾여 축 늘어졌고 오장육부가 자리를 바꾼 후였다.
쐐애액― 액―!
검존은 초조한 기색이 되어 연검을 빼내 흑의인을 검기 안으로 휘감았다.
"배반자! 너를 죽이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다!"
그는 잔혹하게 말하며 검세를 한결 돋웠다. 흰빛이 사위를 갈랐다. 과연 천하를 진동시킨 검존다운 솜씨였다.
"하하……, 허공을 향해 검을 치는 모습이 재미있군."
백의인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렸다. 놀랍게도 그의 품 안에는 흑의인이 안겨 있었다.
"어엇, 어떻게 피했느냐?"
검존은 사색이 되어 연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가 겨우 몸의 자세를 바로잡을 때 백의인은 흑의인과 함께 땅을
밟고 있었다.
모두 탄지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백의인은 지면(地面)을 밟은 후에야 언제 안았는지 모르게 안고 있는 흑의인의 손을 놓아주었다.
"뉘… 뉘십니까? 당금천하에 대협만한 고수가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죽은 혈영마협보다도 오히려
고강한 분 같으십니다."
흑의인은 가냘픈 여인의 음성으로 말했다.
'공야홍……! 아니, 백옥지의 목소리가 아닌가?'
백의인은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상당히 놀라워했다.
"에잇, 멸천화독무(滅天火毒霧)를 받아라!"
일초를 실패한 검존은 순간의 기회를 노리고는 소매를 어지러이 흔들어댔다.
츠측― 측―!
아주 고약한 냄새와 함께 독무(毒霧)가 일어났다.
"흐으윽……!"
독무가 채 접근하기도 전에 흑의여인은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풀썩 쓰러졌다.
"으하하……, 반도의 최후는 그런 것이다."
검존은 득의해 하며 위로 날아오르려 했다.
"고약한 노괴!"
갑자기 그의 머리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백의인이 찰나지간에 허공을 점하며 그의
퇴로를 봉쇄한 것이었다.
"네… 네가 사람이냐 귀신이냐?"
검존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백의인의 손이 흔들리더니 검존의 몸이 석상같이 굳었다. 파고음도 느끼지 못한 사이에 그는 점혈당하고 말았다.
'으으……, 진정 무서운 놈이다.'
백의인이 그의 완맥을 거머쥐었다.
"해약을 내놓아라."
"해… 해약은 없다."
검존은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없다고?"
백의인의 어조가 전과 달리 아주 차가워졌다.
"죽… 죽이라는 명을 받았다. 해약은 건네 받지 않았다."
"누가 명했느냐?"
"대… 대부인이다. 바로 혈작약이 그 분이다. 그 분은 공야소궁주가 독진밀해도를 혈영사절에게 전할 기세면
지체없이 죽이라고 했다."
"으음……, 그 천한 계집이!"
백의인은 치를 떨다가 완맥을 잡은 손바닥에서 진기를 발휘했다.
"크으윽!"
검존은 전신의 혈맥이 오그라드는 고통에 젖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백의인의 목소리가 천둥치듯 들렸다.
"공야무군은 어디 있느냐?"
"연… 연공실에 계시다."
"그 위치는 어디냐?"
"궁 안이다. 하지만 자세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없다. 궁주가 연공하는 장소를 아는 사람은 태상호법과
대부인뿐이시다."
검존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흑의여인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을 뒤챘다.
"흐… 윽……!"
그녀는 아주 괴로운 듯 손가락으로 가슴살을 후벼팠다. 핏물이 튀고 코와 입술에서 검은 독혈이 흘러나왔다.
"잔인한 자들! 저 여인이 어떻게 철서생의 양녀가 된 줄은 모르나 소궁주 지위이거늘 어이해 가차없이 죽이려
한단 말인가?"
백의인은 탄식하다가 독존의 몸에다가 막강한 기운을 발휘했다.
검존의 오장육부가 순간적으로 가루로 화했다. 그는 고통도 느낄 새도 없이 숨을 거두었다. 그나마 행복한
죽음이었다.
"낭자, 정신차리시오!"
백의인은 흑의여인을 안아들었다.
"나… 나는 틀렸습니다. 대신 이… 이것을 혈영사절에게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뇌옥(牢獄)에 갇힌 저의 사부
천산신의는 사실 좋은 분이시니……, 그 분을 구해 달라 말씀해 주십시오."
흑의여인은 너무나도 빨리 생기(生氣)를 잃어갔다.
"낭자는 죽지 않소."
백의인은 부드럽게 말하며 손가락 하나를 빳빳이 세웠다.
그의 손가락이 금광을 띄웠다. 도가선천강기(道家先天 氣) 중 으뜸이라는 금단선(金丹禪)의 절기가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공을 모은 후 여인의 유근혈(乳根穴)에 일지를 가했다.
"으… 음……!"
여인은 힘이 쭉 빠짐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백의인은 잇달아 십여 지를 쳐낸 다음 손길을 거두었다.
"오풍초(烏風草)와 비천오공담(飛天蜈蚣膽)이 있어야 살릴 수 있다. 다른 것은 약이 되지 못한다. 너무나도
무서운 독이다."
백의인은 고개를 젓다가 품안에서 수건 한 장을 꺼냈다.
그는 아주 다정한 손길로 여인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았다. 피와 함께 역용약이 지워졌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여인의 얼굴은 정말 아름다웠다.
장미의 향기를 가득 품은 화려한 용모였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은 물기를 머금었고, 주사를 바른 듯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달콤한 향기가 뿜어질 것 같았다.
꺼져 가는 불꽃이기에 더 아름다워 보였다.
"낭자는 죽어서는 아니 되오. 아시겠소? 꼭 사셔야 하오."
백의인은 그녀를 안아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당신의 사부도 꼭 구해주겠소, 옥지."
第七章 슬픈 이름, 대비객(大悲客)
1
사방에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네 사람이 백의인을 포위하며 다가서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모두 상복차림이었다.
그들은 두 다리와 왼팔이 철로 된 독비괴인(獨臂怪人), 손에 녹옥선(綠玉扇)을 쥔 미소년, 고색창연한 고검(古
劍) 한 자루를 쥔 장한, 그리고 웃는지 찌푸리는지 모를 괴이한 표정을 한 중년인이었다.
"흐음……, 정말 의외로운 일이로다. 공야무군의 양딸이 본방에 비밀을 전하려 하다가 자파고수들에게 당하니
말이다."
독비괴인의 말이었다. 그는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독비수(毒臂 )!
그는 보통 그렇게 불렸고 최근 들어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살수(煞手)로 정평이 나 있었다. 혈영사절 중의
일절이 그였다.
"공야무군의 양딸과 공야무군의 부인이 서로 암투를 벌인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독비수는 차게 중얼거리다가 턱끝을 끄덕였다.
"어쨌든 간에 천한 마궁의 계집일 뿐입니다."
녹옥선을 쥔 미소년이 잔혹한 눈빛을 지으며 걸어나왔다.
녹옥선마(綠玉扇魔)!
그는 정파의 협객이었다가 가장 단시일에 살인마로 화신한 사람이었다.
그의 섭선은 마궁도들에게 있어 망나니가 휘두르는 칼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혈영사절 중 가장
나이 어리나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일신무공은 혈영사절 중 세 번째였다. 그러나 삼 년 후라면 그가 혈영사절 중 가장 강해지리라는 것이 강호인들의
평가였다.
녹옥선마는 잔혹스러운 눈빛을 흘리다가 녹옥선을 펴들었다. 부챗살이 퍼지며 살광이 일어났다.
"흐흐……, 정체를 밝히고 항복해라. 본방은 자비심을 갖고 있지 않다. 네가 누구라는 것을 확실히 밝히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쳐죽이겠다."
나이답지 않게 냉혹한 목소리였다.
"……."
백의인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자태는 아주 의연했다. 무언중 사람을 압도하는 데가 있는 기세였다.
녹옥선마는 백의괴인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자 화를 내며 진기를 끌어올렸다.
"혈영방은 할 일이 많은 문파다. 시시한 일로 시간을 소모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혈영사절이다. 왜
마궁도들과 함께 본방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나타났는지 그 자초지종을 밝혀라!"
그가 다그치자 백의인이 오랜만에 입술을 떼었다.
"나는 가문의 일을 처리하러 강호로 나왔다네. 가문의 일만 마무리 짓는다면 곧 강호를 떠나 영원히 은거할
사람이네."
그 목소리는 아주 신비로웠다. 나이를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한 목소리였다.
"가문이라니?"
녹옥선마가 눈을 부라리자 다시 캐묻자 백의인은 품에 안은 공야홍의 등을 다독였다.
"나는 옥룡 옥봉의 아들이라네. 다시 말해 나의 가문은 바로 옥룡궁이지."
"공… 공야무군의 아들이란 말이냐?"
녹옥선마가 경악에 차 외치자 독비수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옥… 옥봉의 아들?"
독비수는 너무도 엄청난 충격에 몸을 휘청이다가 겨우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럴 수가! 이 아이가 옥봉의 아들이란 말인가?'
독비수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기로 맹세하지 않았던가? 만약에 그것을 어긴다면 나는 무림인이 지켜야 할
신의를 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비밀을 밝힐 수 없는 자신의 입장 때문에 더욱 괴로워했다.
"으하하……, 그럼 공야홍의 오빠로구나? 잘 됐다. 너를 잡아 공야무군을 이쪽으로 끌어내려라!"
녹옥선마는 의기양양히 외치며 옥선을 흔들었다.
촤르르륵―!
무수한 선영이 일어났다. 현란하면서도 오묘했고, 유하면서도 강했다. 가히 무림의 일절이라 할 수 있는
절초였다. 하지만 그는 상대를 너무 몰랐다.
"훗훗……, 불영백팔선(佛影百八扇)은 시시하다. 그걸 가지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수는 없지."
백의인의 목소리가 녹옥선마 뒤쪽에서 났다.
너무도 놀랍게도 그는 녹옥선마의 초식이 시전되기도 전에 모든 허점을 알고 아주 간단히 피해버린 것이다.
"나… 나의 초식을 알아보다니……?"
녹옥선마는 그제서야 상대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검존과 마존 같은 고수가 그의 손에 맥없이 쓰러진 것도
이해가 되었다.
백의인은 넷 중 하나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빛을 마주 하게 된 사람은 마의불수였다. 그는 나이 들어 무공을 익힌 사람이고 혈영사절 중 가장
하수였다.
'이 자가 왜 나를 쏘아볼까?'
백의인은 마치 수하를 대하듯 말했다.
"두 가지 얻을 것이 있다. 그것을 내게 다오. 그러면 공야홍이 너희들에게 전하려 했던 독진밀해도를 주겠다."
"무… 무엇을 달라는 것이냐?"
"너의 약상자 안에 들어 있은 오풍초와 비천오공담이다."
"뭐라고? 그… 그 귀한 것을?"
마의불수는 대경실색해 커다란 상자를 등뒤로 감췄다.
그 안에는 그가 최근 들어 잠을 설치며 만든 많은 해독약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마궁과의 대결 때 쓰일
물건이었다.
"안 된다. 이것은 나의 물건이 아니고 혈영방의 물건이다. 방주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에게도 줄 수 없다."
그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약탈당하기를 자초하겠는가? 의원이라면 의당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야 하는 법이거늘 어이해 약을 내어주지
않는단 말인가? 혈영방이 그리도 몰인정하단 말이냐?"
백의인은 몹시 화난 듯 말소리에 진기를 실었다. 그의 목소리는 중인에게 고통을 전했다.
"으음……!"
"크으윽……!"
비교적 공력이 약한 마의불수와 녹옥선마는 진기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휘청였다. 독비수와 실명검사는 몸을 약간
움찔했다가 바로잡았다.
"놀라운 고수로다."
"공야무군에게 너 같은 아들이 있다니……, 너는 혹 마궁이 키운 비밀무기가 아니냐?"
독비수는 아주 침통한 표정이 되어 눈빛을 흩트렸다.
"하하……."
백의괴인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사가 되어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웃음에 실린 감회는 아주 처참했다.
'미안하오. 여러분들을 모르는 체 할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안타깝소. 하지만 나는 죽은 사람으로 남고 싶소.
가문의 일을 처리한 다음 미련 없이 강호를 떠날 예정이라오.'
웃는 백의인의 몸집은 중인에게 아주 낯익은 것이었다. 그의 눈빛이 혈광이었다면 모두 그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빛나는 정광을 발하는 그가 바로 과거의 혈영마협 탁옥룡이라는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탁옥룡은 앙천대소를 터뜨리다가 갑자기 웃음을 거뒀다.
"여러분들과 내기를 하고 싶소."
"내기라니?"
우두머리 되는 독비수가 되묻자 탁옥룡은 다소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지면 여러분들이 하라는 대로 할 것이고, 내가 이기면 여러분들은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하오."
"이기고 지고를 어떻게 가리느냐?"
독비수는 내기에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네가 누군지 꼭 알아야 한다. 네가 정말 옥봉의 아들인지, 실종된 석심부인이 너의 어머니인지……, 그리고 네
아버지가 그 놈인지를 알아내고야 말겠다.'
탁옥룡은 혈영사절을 둘러보며 담담히 말했다.
"사대일(四對一)! 초수는 삼초로 제한합시다."
그는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공력을 분출했다.
쩌― 저정―!
지반이 뒤흔들리며 먼지바람이 일어났다.
탁옥룡의 몸을 중심으로 반경 오 장 이내의 땅이 밑으로 두 장 정도 가라앉으며 나는 소리였다.
"……?"
"……!"
모두들 아연실색해 말도 하지 못했다.
'으윽, 탁공자(卓公子)만한 내공이다. 아니, 어찌 생각하면 그 분의 내공보다도 강하다.'
실명검사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탁옥룡의 일초 신기가 발휘되지 않았다면 사 대 일로 겨루자는 제안이 우스갯소리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사대 일의 비무가 아주 적당하다고 느꼈다.
혈영방의 신위가 탁옥룡으로 인해 지옥 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제껏 한 번도 꺾이지 않았다는 혈영사절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혈영마협의 화신으로 강호에 이름을 날린 이후 처음으로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탁옥룡은 그들 하나하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과 오래 드잡이질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바쁜 사람이다."
그가 빈정거리자 독비수가 최고령자 자격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후후……, 이초를 양보해 주마."
탁옥룡은 혈영사절의 호승심을 일으키기 위해 더 오만히 말했다.
혈영사절의 자부심이 무참히 꺾였다. 자신들을 상대로 이초 양보해 주겠다는 것은 그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더군다나 상대가 공야무군의 아들임을 자처하기에 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독비수는 다른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냉정을 잃지 말게나. 격장지세에 넘어가서는 아니 되네!"
그는 역전의 노장답게 제일 빨리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과거 삼기 중 하나로 불리던 묘중기인의 화신이었다.
"마궁을 박살내기 위해 연마한 절진을 펼친다면 이초 안에 저 자를 잡을 수 있을 걸세. 그때 의문을 풀기로
하세."
독비수는 크게 외치며 오른팔을 쳐들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푸른기류가 일어났다.
뒤이어 마의불수가 외치며 한 방위를 차지했다.
"서백(西白)!"
"남주(南朱)!"
실명검사는 곧 혈섬검을 뽑을 기세였다.
"북현(北玄)!"
가장 어린 녹옥선마 사마천룡은 기합소리를 내며 옷을 풍선같이 부풀렸다.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
네 가지 신수(神獸)의 형상이 네 사람의 동작으로 인해 재현되며 십 장 안이 암경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우르르― 릉―!
우렛소리가 연달았다. 맹렬히 회전하는 기류로 인해 사위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누가 창안한 것일까? 불문정종수법 같은데……. 으음, 분명 묘노인이 만든 것이리라. 그의 비밀스런 과거는
대체 무엇일까? 대할수록 신비롭기만 하구나.'
탁옥룡은 진세의 막강함에 긴장하며 신공을 일으켰다. 그의 몸 주위로 몽롱한 백무가 피어올랐다.
"일초, 진건곤(震乾坤)―!"
독비수의 기합과 함께 사상대진(四象大陣)이 위력을 발휘했다.
우르르― 릉―!
네 명이 한데 합격술을 펼치자 가공할 암경이 일어났다. 산 하나가 통째로 붕괴되는 기세였다. 그야말로
백만균뢰정(百萬鈞雷霆)이었다.
"하하……, 좋소. 정말 훌륭하군!"
허공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났다. 탁옥룡이 둥실 떠서 하는 말이었다. 사상대진의 일초는 무위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에잇, 이초 파천황(破天荒)―!"
독비수는 자신의 지혜로 창안된 합벽진이 간단히 실패하자 화를 내며 재차 발동을 명령했다.
콰류류류―!
네 사람이 풍차같이 빠르게 돌며 모래바람이 세차게 일어났다. 구십구 마리의 독룡(毒龍)이 꼬리를 흔들며
날아가는 듯한 기세였다.
"강(强)과 쾌(快), 파(破)에서는 압권이나 대법(大法)을 몰라 구멍 투성이다. 이것으로 마궁을 치려 했더냐?"
탁옥룡은 진세를 두려워 않고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콰콰― 쾅―!
네 줄기 강류가 희뿌연 기류와 충돌했다. 네 사람의 막강한 강기는 탁옥룡의 몸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봄눈 녹듯
사라졌다.
"이… 이것은 꿈이다."
"으윽……, 주인이 가르쳐 준 절기가 무산되다니……?"
모두 사색이 될 때 탁옥룡의 맑은 음성이 구중천을 갈랐다.
"하하……, 정도무적(正道無敵)임을 아는가?"
네 사람의 몸이 일시에 뻣뻣해졌다. 소리도 없는 힘이 날아들어 그들 넷을 순간적으로 제압해 버린 것이다.
탁옥룡은 그제서야 신공을 거두고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네 사람은 스스로 운기해 혈도를 풀려 했지만 이룰 수 없자 참담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주인이 저승에서 원망하실 것이다!"
"모두 자결합시다. 이런 치욕을 안고 어찌 방도들 앞으로 가겠소!"
넷 모두 비분강개해 혀를 깨물고 죽을 기세였다.
"나는 세 가지를 명하겠소."
탁옥룡의 목소리가 그들의 뇌리를 시원하게 했다. 정말 이상한 힘을 갖고 있는 목소리였다. 네 사람의 눈빛이
탁옥룡의 한몸에 거둬졌다.
"혈영방을 해산하라는 것이 첫째요. 중앙비무대회에 참가하지 말라는 것이 둘째이고, 내가 전에 말한 두 가지
영약을 달라는 것이 셋째요. 그것을 모두 들어준다면 떠나는 것을 막지 않겠소."
탁옥룡의 호쾌한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호호호……!"
어디선가 귀기 서린 목소리가 들렸다.
흑의인영 하나가 모습을 보였다.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 하나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중인 있는 곳을 향해 바람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오호호호……!"
광기에 찬 웃음소리가 다가섰다.
흑의여인은 아주 지저분했다. 수십일 간을 진흙 구덩이에서 보낸 듯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가 흙투성이었다.
"호호……, 세상을 증오한다."
흑의여인은 자지러지게 웃으며 중인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무작정 치달려 갈 때였다.
"사… 사매(師妹)! 나는 네가 불에 타 재가 된다 해도 알아볼 수 있다!"
한 사람이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점혈당해 꼼짝도 하지 못하던 독비수 묘중기인이 훌쩍 날아 산발여인을
뒤쫓아가는 것이었다. 그의 신법은 아주 특이했다.
옥룡행공법(玉龍行空法)으로 옥룡상인의 후계자만이 익힐 수 있는 것이었다.
"으음, 잠재력을 일으켜 내가 시전한 점혈법을 풀다니……?"
탁옥룡은 독비수가 자신의 점혈을 풀자 상당한 놀라움에 젖었다.
'묘노인의 사매라면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목소리가 귀에 익은 이유는 무엇일까?'
탁옥룡은 야음 속으로 사라져 가는 두 사람을 보고 의혹에 찬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핑― 핑―!
느닷없이 향전 쏘아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요란했다.
"큰일이다!"
"으으……, 하필 이런 때에……?"
"제… 제발 우리들을 놓아다오."
혈영삼절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묘중기인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을 때보다 백 배 더 놀라는 모습들이었다.
"혈영방의 향전이다.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니다. 우리들을 가게 해다오. 제발……."
실명검사는 하소연하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가만, 이 자는 마궁주의 아들이라고 밝혔다. 거짓말 같기는 하지만 이 자에게 풀어달라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핑― 핑―!
향전 쏘아지는 소리가 더욱 요란해졌다. 이어 수 리 밖에서 폭음이 연발했다.
우르르― 릉― 꽝―!
불기둥이 치솟고 있었다. 형산 기슭이 화마로 덮여 갔다. 검은 연기가 충천하며 십 리 안이 매운 냄새로
휘감겼다.
이때 검은 연기를 뚫고 달려오는 한 떼의 무사들이 있었다.
나는 듯 달려드는 자들의 옷자락에는 옥룡문(玉龍紋)이 그려져 있었다.
"으하하……, 과연 대부인의 말씀대로다."
"혈영사절이 자리를 비울 것이니 틈을 노려 암습하라는 대부인의 말씀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아시는 분답게 아주
정확했다."
"너희 혈영방은 형산으로 오지 않았어야 했다."
"흐흐……, 혈영마협의 졸개들이 감히 본방에 저항하려 하다니……. 이제껏 봐주었던 것은 본방 사람들의 희생을
줄이자는 이유 때문이지 너희들의 힘이 막강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광마들의 웃음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탁옥룡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삼엄한 포위망에 사로잡혔다.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키는 각기 달랐다. 그러나 눈빛은 하나
같았다.
독광(毒光)!
푸른빛이 철철 넘치는 두 눈동자는 마귀의 눈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의 콧김마저 모두 독무(毒霧)였다.
수는 백이십팔로 하나같이 강철 같은 뼈에, 도검으로 베어도 상처가 나지 않는 강한 피부를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第十章 천하대은인(天下大恩人)
1
일심검제는 몸을 한참동안 바로 잡지 못했다.
"그… 그 여인이 바로 이곳의 여주인이란 말이냐?"
"흐흐……, 그 계집은 내가 본 계집 중 가장 아름다웠다. 독가시를 갖고 있는 미인인지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지."
"아미타불……, 그게 사실이라 말할 수 있느냐?"
옥룡천자는 당황하는 그의 모습을 즐기듯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계집은 정말 어리석은 계집이다. 그 계집은, 흐흐……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멍청히 나타났다가 당했던
것이다."
"으음……."
"나는 원래 설도만을 취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계집의 몸을 보고는 그만 음욕을 일으키고 말았다."
"아미타불……."
일심검제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그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어 연신 불호를 외웠다.
옥룡천자는 지난 일을 생각하자 분노가 치솟은 듯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그때 네놈이 나타난 것이다. 당시 나는 절대고수가 아니었는지라 네놈을 상대할 수 없었다. 네놈은, 흐흐……
계집의 맛을 보고는 뱀에 물린 듯 질겁을 하고 도망쳤지. 나는 무산을 허겁지겁 떠나는 네놈을 뒤쫓았었다. 나는
네놈이 소림사(少林寺)로 들어가는 것까지 살폈었다."
일심검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람도 없건만 그의 승포가 세차게 펄럭였다.
옥룡천자는 기고만장해 하며 다그쳤다.
"흐흐……, 당시는 네놈이 누구인지 확실히 몰랐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점의 미흡함도 없이 다 알고 있다.
네놈은 탕마행을 하기 위해 강호로 나왔다가 파계하고는 면벽에 든 소림 일심행(一心行)이고, 그때 그 벙거지를
쓴 거지 중놈의 화신이다. 그렇지 않느냐?"
일심검제, 아니 일심행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납같이 굳은 표정을 했다.
옥룡천자는 킬킬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네놈에게 대은인(大恩人)이다. 네놈은 내 덕에 여색을 맛보았다. 그것도 가장 뛰어난 여체를!"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뿐이냐? 네놈은 그 일로 인해 이십 년 면벽해 천강복마공을 비롯한 불문절학을 완벽히 익혀 소림 천 년 사상
가장 뛰어난 고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너는 소림장문인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미타불……, 어리석은 중생들이여!"
일심은 괴로워하며 손을 쳐들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불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모든 계율을 어겼다. 죽어야 한다.'
그는 눈물을 흘리다가 손으로 머리를 치려 했다.
바로 그때, 지극히 청명한 음성과 함께 백의인 하나가 날아들었다.
"안 됩니다! 스님은 천하대은인(天下大恩人)이십니다!"
그는 일심행 바로 앞에 이르러 절을 했다.
옥룡천자가 흠칫하여 크게 외쳤다.
"웬 놈이냐?"
그러나 백의인은 그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일심행만을 바라보았다.
"스님은…… 큰 은인이십니다. 돌아가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은인이라니? 시주는 누군가? 이 어리석은 죄인을 은인이라 하다니?"
"스님 덕에 가장 큰 것을 얻은 사람입니다."
말하는 청년은 너무도 출중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일심행과 비슷한 얼굴 윤곽이었다. 그는
머리를 조아린 채 말했다.
"스님은 두 가지 큰 공덕을 세우셨습니다."
"두 가지 공덕이라니? 본승은 색계를 어겼고, 살계마저 어긴 불문의 파계승일 뿐이네."
"어긴 것이 아닙니다."
"그럼……?"
백의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광을 발하는 그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감돌았다.
"스님은 이십 년 전 무산에서 색계를 어김으로 인해 한 여인을 구했고, 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구… 구하다니?"
"인면수심의 제물이 될 여인을 구했고, 강한 인물이 될 아이를 하나 만드셨습니다. 이는 색계를 어긴 것이
아니고 가장 큰 공을 쌓으신 것입니다."
일심행은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었다.
"모를 말이로다. 옥… 옥봉이 아이를 낳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뿐이 아닙니다."
청년은 눈물을 떨구며 말을 계속했다.
"스님은 살계를 어겼기에 가장 큰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자비라고……?"
"스님은 천년마제(千年魔帝)를 제거하기 위해 살계를 어겼지만, 그로 인해 천년마제는 죽어 탕마지존으로
화신했습니다."
"탕마지존이라니?"
"스님은 제 얼굴을 보셔야 합니다."
청년은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칼날 같은 눈썹과 불굴의 의지를 담고 있는 눈빛, 태산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을 강인한 입 매무새…….
"저를 잘 보십시오. 제… 제 얼굴이 어떻다 여기십니까?"
"으음……,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일심행은 그를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님은……, 얼굴을 동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그래, 나와 비슷하군. 자네가 뉘기에?"
일심행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바싹 긴장했다.
청년이 다시 이마를 땅에 댔다.
"제게 한 가기 소원이 있습니다."
"무슨 소원인가?"
"제… 제가…… 스님을……."
그는 말을 더듬었다. 땅바닥이 눈물로 젖고 있었다.
"제가… 스님을 단 한 번이라도 아버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 아버지……?"
일심행은 너무도 엄청난 충격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달마 이래 소림 최강의 고수이며, 절대 패하지 않는 천강복마신공을 지닌 그가 아버지라는 한 마디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청년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저… 저는 아버님의 아들입니다. 아버님이 무산에서 옥봉이라는 여인에게 잉태하게 했던 아이가 바로
저입니다!"
"아아……!"
일심행은 극심한 정신적 충격과 혼란에 그만 신음소리를 내며 정신을 잃었다.
바로 그때였다. 여태 지켜보고 있던 옥룡천자가 득의의 웃음을 터뜨렸다.
"카하하……, 네가 일심행의 아들이란 말이냐? 그럼 네 에미는 바로 옥봉이로구나? 카하하……, 정말
재미있구나!"
탁옥룡은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백검명!"
"어엇! 네… 네가 어찌 그 이름을?"
옥룡천자의 얼굴에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웃음과 득의함, 비웃음이 모두가 싹 가셨다.
탁옥룡은 눈을 부릅뜨고는 일심행을 가리켰다.
"이 분은 모든 것을 버리려 하셨기에 모든 것을 얻었다. 뜻하지 않은 아들마저!"
"으으……!"
"그러나 너는 모든 것을 얻으려 했기에 하나도 얻지 못했다. 네 딸마저 너를 버렸다. 그것은 알겠지?"
"너는 누구냐?"
탁옥룡은 당당하게 자신의 내력을 밝혔다.
"나는 일심행의 아들 대비객이다!"
"대비객이 바로 너로군? 한데, 예전에 한 번은 본 듯하구나?"
"훗훗……, 여러 번 보았지. 물론 그때의 나는 본래의 내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탁옥룡은 그제서야 제 목소리로 말했다.
"혈… 혈영마협? 으으……, 그렇다면 천년마제가 바로 일심행이 낳은 아들이었단 말이냐? 천년마제는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이냐?"
옥룡천자의 눈알이 새빨개졌다. 아니 자색으로 물들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것이 유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천하에서 가장 겁먹어 하는 얼굴이 옥룡전 정원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그는 혈영마협에 대해 아예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걸음으로 뒷걸음질쳤다.
"거… 거짓말이겠지? 설… 설마 그럴 수가……."
"나는 혈영마협이 아니다. 나는 참회하며 살아갈 작정을 한 대비객일 따름이다."
탁옥룡은 차분히 말한 다음 한 걸음 다가갔다.
"나를 천년마제로 여기지 마라. 두려워하지도 마라. 네가 두려워 할 것은 너의 어리석음과 너의 비열함뿐이다.
너의 딸마저 추악히 여긴 그 인면수심이 바로 네가 가진 가장 큰 적이다. 그것이 바로 심마다!"
"으으……, 나의 딸은 지금 어디 있느냐?"
"흥, 네게는 딸이 없다. 나는 백옥지란 사랑스러운 여인을 알고 있으나 그 여인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내… 내 딸을 어찌했느냐? 그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 그 아이는 내게 생명보다 귀하다."
옥룡천자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다.
"호호……, 대비객이 혈영마협일 줄이야."
웃음소리와 함께 옥룡전 지붕 위로 날아드는 여인 하나가 있었다. 혈작약이 웃으며 나타나는 것이다.
"호호……, 혈영마협이 죽으면 공야홍이 아버지 곁으로 올 듯도 한데……. 호호, 그렇지 않을까?"
그녀의 말소리는 한 자루 비수가 되어 옥룡천자의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죽… 죽이면 딸을 볼 수 있소?"
그가 혈작약을 보며 간절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이지요, 여보."
혈작약은 흥미진진하다는 듯 기와 위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옥룡천자는 그녀를 힐끔 바라보다가 탁옥룡을 쳐다보았다.
"마음을 정했다. 딸을 구하기 위해 너를 죽이기로!"
그는 잔혹하게 웃으며 주먹을 거머쥐었다.
축융봉 정상, 이십 년 간 천하를 피바람 속에 몰아넣은 마의 궁 안에서 일 대 일의 대결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흐흐……, 복면은 거추장스럽다. 사실 이제는 숨겨야 할 것은 하나도 없다."
백검명은 음침히 말하며 복면을 벗었다.
드러난 그의 얼굴은 상당히 청수한 편이었다. 다만 두 눈에서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독광이 남달랐다.
으드득― 으득―!
그의 뼈마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몸이 뒤틀리며 웅장무비한 옥룡궁이 조금씩 흔들렸다.
'독공(毒功) 중 가장 무섭다는 천지절독강(天地絶毒 )이다.'
탁옥룡은 긴장하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와 사마옥봉이 누워 있었다.
싸움이 일어날 경우 두 사람의 생명은 보전 받기 힘들다. 그는 싸움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금제를 받아야 했다.
옥룡천자는 그가 당황하는 것을 보자 득의해 웃으며 혼신공력을 일으켰다.
"뒈져라―!"
우레소리가 나며 그의 몸이 거대한 검은 회오리로 화했다.
탁옥룡은 탕마지존동에서 배운 신공을 발휘해 자신과 아버지, 그리고 사마옥봉의 몸을 호신강기의 막으로
보호했다.
꽈꽈― 꽝―!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다섯 배가 강해진 옥룡천자 백검명의 독강은 실로 가공했다. 주변 십 장 이내는 비산하는 독기로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으윽……!"
탁옥룡은 몸이 으스러지는 듯해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러나 초인적인 정력을 발휘하며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카하하……, 네 아비 때문에 네가 다시 죽는구나? 이번에는 영영 살아나지 못할 줄 알거라!"
백검명은 크게 기뻐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는 독응같이 십 장 날아올랐다가 허공에 무수한 환영을 만들었다.
탁옥룡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검명의 내공은 천폭화독으로 인해 그를 능가하고 있었다. 장력으로
맞부딪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그는 피할 수 없었다.
우르르― 릉―!
수천 수만 개로 흩어졌던 백검명의 몸뚱이가 하나로 합치며 두 줄기 독강이 일어나 탁옥룡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멸천멸지(滅天滅地)!"
그의 목소리가 옥룡궁을 뒤흔들 때였다.
"정― 도― 무― 적(正道無敵)―!"
탁옥룡이 손바닥을 합장했다가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백설같이 흰 기류가 일어나 시꺼먼 독광과 마주쳤다.
탕마지존동에서 익힌 탐마삼장 중의 하나였다.
꽈앙―!
태산이 허물어지는 듯하더니 탁옥룡의 얼굴빛이 희어졌다.
"으윽!"
그는 피가 거꾸로 흐름을 느끼며 겨우 신형을 바로잡았다.
"카하하……, 네놈과 장력을 맞부딪치니 기운이 더 강해지는 것 같구나!"
백검명은 주저하지 않고 다시 장력을 쳐내려 했다.
그의 천폭화독은 일장 대결로 인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의 피 속으로 퍼져 들어갔다. 그로 인해 그의 내공이
더욱 강해졌다.
"너를 찢어죽이겠다. 그 다음 나의 딸을 구하겠다."
백검명이 잔혹히 말할 때였다.
"아……, 아버지! 소녀는 구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허공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수십 마리의 거대한 금응(金鷹)이 있었다.
흰 승포를 걸친 승려가 맨 앞에 있고, 그 뒤에 흑의미인이 따라 오고 있었다. 말을 한 사람은 흑의미인 뒤에
앉아 있은 초췌한 얼굴의 젊은 여인이었다.
매떼는 순간적으로 옥룡궁의 하늘을 뒤덮었다.
"포… 포달랍궁?"
지붕 위에 있던 혈작약의 눈알이 한 치 정도 튀어나왔다.
새 등에서 수십 명이 잇달아 떨어져 내렸다. 날렵한 경공으로 미루어 초상승고수임을 짐작케 했다.
"아버님……!"
백검명 앞으로 가 흐느끼는 여인은 바로 백옥지였다.
"네… 네가……?"
백검명이 딸을 알아보고 감격과 놀라움에 젖었다. 딸을 보는 순간 그의 광기는 거의 수그러들었다.
"야속하십니다."
혈미륵과 함께 나타난 흑의미인이 탁옥룡 곁으로 다가섰다.
"수… 수운아!"
탁옥룡은 몸을 휘청였다.
"아……, 상공이 이길 것은 확신하나 상공이 저를 두고 떠날 것 또한 확실한 일이기에 금응을 타고 왔습니다.
소녀는 죽으면 죽었지 오라버니를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시어머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어머님을 뵈었구나?"
이수운은 얼굴 가득 눈물을 적셨다.
"그 분은…… 진짜 옥룡과 함께 오라버니께서 설도와 혈도를 갖고 하산하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것을 얻은
후에야 입궁하시겠다는 것이 그 분의 말씀이십니다."
"그것은 곧 얻을 것이다."
탁옥룡은 미소 지으며 이수운의 손목을 쥐었다. 이수운은 눈물이 주르르 흘렸다.
"흑……, 오라버니!"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해야 할 일은 며느리로서 시아버님 되시는 분을 보살피는 길이다."
"시아버님이라니오?"
"하하……, 나라고 아버지가 없겠느냐? 여기 이 분이 바로 나의 아버님이시다."
탁옥룡은 웃으며 일심행을 가리켰다.
일심행은 누워 있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정신을 차린 후였다.
"아미타불……, 나를 거둬 주신 대사부께서 나는 본래 속세와의 인연이 많은 사람이라 했었는데……."
그는 아들을 보며 눈물을 해후의 격동을 이기지 못했다.
"아버님!"
탁옥룡은 얼른 다가가 절을 했다.
일심행은 와락 아들을 안아 일으켰다.
"나의 아들이라니…… 자랑스럽다. 그러나 나의 아들이기 이전 옥룡궁의 아들이고, 천하의협의 아들이지."
"저를 받아주시는 것인지요?"
일심행은 운명을 받아들이며 마음을 진정시킨 후였다.
"허허……, 중은 본래 타인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나로 인해 태어난 나의 아들에게 어찌 정을 주지 않겠느냐?
아비는 사실 이제껏 세상의 어떤 것에도 정을 주지 못했는데……, 너로 인해 세상을 좋아하게 되었다."
일심행과 탁옥룡이 부자지간으로 말을 나누자 모두 놀라고 기뻐했다.
"하하……, 소림장문인이시고 일심맹주이신 무혈검이 바로 방주님의 진짜 아버지이셨단 말인가? 장차 지난
시절의 죄를 어찌 씻어야 할까?"
실명검사가 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사마천룡은 누이 사마옥봉을 끌어안고 안도의 눈물을 흘렸고,, 혈미륵은 주위를 호시탐탐 살폈다.
"아직 기뻐하기에는 이르다오, 중원맹주(中原盟主)!"
그는 탁옥룡의 귀로만 들리도록 전음으로 말했다.
"일단 금응을 타고 이곳을 빠져나갔다가 세력을 모아 다시 치는 것이 좋겠소."
"그럴 필요 없습니다."
탁옥룡은 아버지와 말을 나누다가 그 곁으로 다가갔다.
혈미륵은 침통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쳐들었다. 그가 손가락을 가늘게 떨며 가리키는 것은 한 덩어리의 검은
구름이었다. 놀랍게도 백검명은 짙은 독무에 덮여 있었다.
"저것이 무엇입니까?"
탁옥룡이 놀라 묻자 혈미륵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앞을 보시오."
독무 앞에는 언제 뿌려졌는지 모를 인골(人骨)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아… 아니?"
탁옥룡은 무서운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혈미륵은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백검명을 설득하려던 옥지 여시주의 몸이 백검명의 몸에서 흘러나온 독기운에 녹아 뼈가 되고 만 것이오."
탁옥룡은 싸늘한 냉기가 그대로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옥지 낭자가…… 죽었단 말이오?"
그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백옥지는 그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이었다. 청백지신을 희생해서 자신을 살린
사랑스런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천하를 뒤엎을 힘과,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의술을 지닌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법이다.
그는 허연 해골을 응시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혈미륵은 백옥지가 녹아 죽는 것을 본 유일한 목격자였다.
"보승법래…… 업보로다 업보."
그가 불호성을 외우며 백옥지의 극락왕생을 기원할 때였다.
"으으……, 내가 딸을 죽이다니……. 크으으…, 모든 것을 얻으려 하다가 다 잃었다는 말이 맞단 말인가? 내…
내 몸에서 흘러나온 독기가 나의 딸을 녹여 줄일 줄이야!"
검은 구름 안에서 백검명의 처절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으드득! 모… 모두 네년 때문이다."
백검명은 이를 갈다가 뒤쪽으로 떠올랐다. 검은 구름이 폭풍처럼 몰려갔다.
"제… 제발……!"
도망치려는 혈작약의 목소리가 중인의 고막을 때렸다.
"흐흐……, 네년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 종으로 잘 부려먹었다. 처음 나를 종으로 삼을 때 내 손에 죽으리라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백검명은 혈작약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 나를 놓아다오. 그래야 천폭화독의 독기를 풀 수 있다는 것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으드득, 딸이 죽었다. 천폭화독 때문에 죽은 것이다. 모두 네년 때문이다. 제일 먼저 네년을 죽인다!"
백검명의 열 손가락이 혈작약의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목뼈가 부러지고 칠공에서 피가 튀었다.
"끄으으……!"
혈작약은 혀를 빼물며 눈을 뜬 채 숨을 거두었다.
갖은 악계와 독계로 무림인들을 우롱하고 군림천하의 야망을 꿈꿔 온 야욕의 화신치고는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으흐흐……!"
백검명은 혈작약의 목뼈를 부러뜨려 죽인 다음 중인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숨을 죽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흐……, 너희 모두 죽는다. 너희들의 목숨으로 나의 딸의 혼을 위로하겠다!"
그는 잔혹스레 말하며 천천히 다가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깊은 족인이 새겨졌다. 흙이 독기에 피식피식 타버렸다.
"모두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잠시 숨을 멈추시오. 저 자의 피가 뿌려지는 독향을 마시면 죽게 되오."
탁옥룡이 사자걸음으로 당당히 걸어나갔다.
"흐흐……, 네놈이 나를 막겠다고?"
백검명은 이를 으드득 갈며 손을 쳐들었다.
우르르르― 릉―!
마궁 전역이 뒤흔들렸다. 독무가 일어날 때 탁옥룡의 눈에서는 신광이 쏟아졌다.
"불법에는 한계가 없다. 너는 악인이나 죽기 전 도를 깨닫는다면 광활한 부처의 가슴에 안길 수 있다."
"미… 미친 놈!"
"네가 악인으로 죽는다 해도 너의 딸 옥지로 인해 너의 영혼은 속죄 받을 것이다."
탁옥룡은 한탄스레 말하다가 두 손을 한데 합했다.
"미친 놈! 진짜 죽여주마!"
백검명은 이를 갈며 검은구름을 더 강하게 뿜어냈다.
우르르― 릉―!
광풍노도와 함께 옥룡궁에 지진이 일기 시작하였다. 땅이 쩌억쩍 갈라지며 그토록 웅장하던 건물들이 뒤흔들렸다.
"불법무변(佛法無邊)―!"
탁옥룡은 혼신공력을 한데 모아 탕마삼장법(蕩魔三掌法) 중 제 이초를 시전해 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만, 한 줄기 은은하고 항거하지 못할 힘이 흐를 뿐이었다.
콰― 콰콰쾅―!
역겨운 비린내를 발하며 사위를 휩쓸던 독무가 산산이 흩어졌다. 군웅들은 급급히 삼십 장 밖으로 피신했다.
강기의 충돌로 바닥에는 오장 넓이의 거대한 구덩이가 패였다. 독기의 영향으로 푸른 기운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그리고 전신 혈맥이 터진 백검명의 모습이 군웅의 눈으로 들어왔다.
"크윽……, 단 일장으로?"
백검명은 쩍쩍 갈라지는 자신의 몸의 내려다보며 와들와들 떨었다.
"이… 이럴 수가?"
폭음과 함께 그의 몸이 산산이 부서졌다. 아주 미세한 피가루가 허공으로 뿌려질 뿐이다. 비명소리도 없었다.
가짜 옥룡천자로 천하를 호령한 그였지만 추악한 이름만 남긴 채 시신 한 조각 보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순간, 먼 곳에서 창노한 음성이 터지며 장내를 진동시켰다.
"백팔혈나한 일어나라! 노부가 안전한 곳으로 갈 때까지 놈들을 막아라―!"
설도와 혈도를 양손에 나눠진 금포노인 하나가 아주 높은 건물 위에서 옥룡전을 향해 외치고는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선풍(旋風)같이 떠올랐다.
"우우―!"
"으흐흐, 지존을 위해 죽자―!"
"이 순간을 위해 지키고 있었다."
옥룡전 근처 화단 안에 은신해 있던 백팔 명의 독인(毒人)들이 사악한 웃음소리를 내며 옥룡전 안으로 날아들었다.
"검을 다오."
탁옥룡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여기 대령했습니다."
실명검사가 혈섬신검을 끌러서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탁옥룡은 그것을 끌어안으며 천천히 날아올랐다. 그는 무신처럼 꼿꼿이 사십 장이나 치솟았다.
"제행무상(諸行無常)―!"
그의 몸이 휜 구름덩어리로 화했다.
"허억!"
백팔혈나한이 그 위세에 놀라 석상처럼 굳어졌다.
백무 안에서부터 찬란한 혈광이 피어올랐다. 그 광휘에 세상이 어둠으로 변했다. 암흑의 공간 저편에서 붉은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진정 무학의 극치가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었다.
파츠츠츳―!
한 가닥 붉은 무지개가 백무를 뚫고 나와 백팔혈나한의 몸을 휘감았다. 너무도 아름다운 광휘에 취한
백팔혈나한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황홀감에 젖을 따름이었다.
"케에― 엑―!"
"카아악!"
사방에서 사람 목이 날아올랐다. 백여덟 개의 목이 몸통과 분리되는 데에는 촌각도 걸리지 않았다.
실로 인간 한계를 넘는 어검기예(御劍機藝)였다.
검이 한 바퀴 회전하다가 탁옥룡의 손아귀 안으로 날아들었다.
"우우―!"
탁옥룡은 장소성을 흘리며 허공을 타고 날아갔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이백여 장씩 가로질렀다.
몇 번 움직였을까?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허겁지겁 도망쳐 가는 금포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독존(毒尊)!
만악의 조종자인 그가 도망가고 있는 것이다.
"도망가야 산다. 중원을 떠나야 한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마굴 안에서 공포를 느끼며 허겁지겁 달아나기에 바빴다. 갑자기 가벼운 미풍이 자신을 스쳐
간다 싶었다.
"노독마 때문에 애간장 태우는 사람이 많은데 그냥 떠나면 되겠소?"
바로 앞에서 비웃는 소리가 났다. 그를 가로막고 웃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네… 네놈이……?"
독존의 눈알이 훌렁 뒤집어졌다.
"후후……, 옥룡대제로 말하자면 나의 외할아버지이시지."
탁옥룡은 담담히 말한 다음 팔짱을 꼈다.
그의 몸뚱이는 하나의 가공할 만한 무기였다. 독존은 마성으로 이룩한 모든 것을 탁옥룡의 기도에 의해 잃어야
했다. 손이 너무도 무거웠다.
땅― 땅―!
설도와 혈도가 그의 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것을 쥐고 있기에는 너무도 허약해진 것이다.
"살려다오, 제… 제발……!"
독존은 땅에 엎드리며 개처럼 얼굴로 흙바닥을 비벼댔다.
참담한 광경이었다. 천하의 군림자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던 노마가 갑자기 초라한 늙은이로 변했다. 그는
엉금엉금 기었다.
독존은 탁옥룡 곁으로 다가와 탁옥룡의 두 다리를 휘감았다.
"제… 제발 이 불쌍한 늙은이를 살려다오. 나는 힘이 없다. 나… 나를 죽인다고 무슨 더 좋은 일이 있겠느냐?"
그는 덜덜 떨며 말하다가 갑자기 두 손에 힘을 줬다.
"같이 죽자! 그것이 노부로서는 최선이다!"
독광을 발하며 그는 탁옥룡의 다리를 두 손을 힘껏 조였다. 지난 바 모든 독공을 발휘해 동귀어진할 기세였다.
우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기괴한 음향에 이어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케에― 엑―!"
독존은 두 팔이 부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뒤로 벌렁 나뒹굴었다.
탁옥룡은 손도 쓰지 않고 만악의 근본을 처단한 셈이었다.
"크윽, 독… 독기운이……?"
독존은 금강불괴지신을 기습하다 오히려 팔이 으스러져 나뒹굴게 되었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독기를 느꼈다.
무공이 사라지자 그의 피 속에 스며 있던 독이 그의 몸을 괴롭히는 것이다.
으득― 으득―!
그의 몸이 새우같이 오그라들었다.
"카아악……, 나… 나를 죽이고 떠나다오!"
그는 걸음을 옮기는 탁옥룡을 향해 애절히 외쳤다. 오장육부를 태우고 뼈마저 녹여버리는 극독의 침범에는 그는
고통스럽게 굴렀다.
"크아……, 어서… 어서 죽여다오!"
탁옥룡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었다. 그는 설도와 혈도를 쥐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아버님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다. 아……, 하지만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그는 아주 오랜만에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마음은 소년문사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낭랑히 글을 읽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공은 이제 그에게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2
옥룡궁의 부활!
그것은 무림사상 가장 큰 경사였다. 젊은 맹주 탁옥룡은 축융봉 옥룡궁 이외에 천하사단(天下四壇)을 두고 의
(義)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금룡거(金龍居) 탁가장원(卓家莊園)!
그곳에는 그의 첫째 부인 혈수나찰 이수운이 있고, 그의 양아버지 탁천영의 가묘(假墓)가 있다.
소림사(少林寺) 면벽암(面壁岩)!
그곳에는 여생을 면벽으로 지낼 결심을 한 그의 아버지 일심행과 그가 읽어야 할 많은 책이 있다.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단 둘, 바로 탁옥룡 모자(母子)뿐이다.
포달랍궁(包達拉宮)!
그곳에는 그가 아저씨라 부르는 인자한 승려 하나가 있다. 중원이 위기에 빠지면 언제든지 날아올 수많은 금응이
항상 대기중이다.
환영궁(幻影宮)!
그는 지금 그곳에 있었다.
궁이 내려다보이는 무덤 하나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 천하여협(天下女俠) 백옥지낭자지묘(白玉芝娘子之墓) 부(夫) 탁옥룡 읍립(泣立)!
탁옥룡은 천산신의와 함께 서 있었다.
천산신의는 눈물을 흘리며 제자의 무덤에 술을 부었다.
"옥지야, 옥룡궁주가 너를 아내로 인정했으니 죽더라도 편히 눈을 감겠구나."
천산신의는 아주 수척한 상태였다. 그는 뇌옥에 갇혀 무진 고생을 하다가 풀려난 상태였다. 그가 무덤을 끌어안고
소리 없이 흐느낄 때였다.
"맹주님, 중원으로 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혼례식에 늦게 됩니다."
혈섬검을 등에 진 장한 하나가 탁옥룡 곁으로 다가섰다. 과거에는 회회검사로 불렸지만 지금은 탁옥룡이의 충복이
된 실명검사였다.
탁옥룡은 점잖게 말했다.
"잠시 더 있다 가세. 지금 이 할아버지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실명검사는 머리를 긁으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큰일이군. 두 분의 궁주부인이 신랑을 기다리는 것은 하는 수 없는 일이나…… 황제 현룡제마저 학수고대하며
기다려야 하니 신하된 도리로 불충이 아닌가?'
그는 다시 재촉하지도 못하고 곤란해 했다. 그의 손에는 붉은 배첩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삼가 고합니다.
천하 무림동도께서는 축융봉으로 와 중원맹주 탁옥룡 맹주의 혼례에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두 명의 신부 이수운 낭자와 사마옥봉 낭자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축제에는 천하에 의풍(義風)을 일으킨 탁맹주의 전도를 축하하기 위해 금상황 현룡제도 참석하실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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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첩은 아주 길었다. 그것은 마의불수가 골머리를 썩히며 지은 것인데 그로 인해 문장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붉은 배첩이 바람에 팔랑거렸다. 그 바람은 탁옥룡의 머리카락도 펄럭이게 했다.
빙하곡부일천년마제(氷河谷府一千年魔帝).
불사마혼(不死魔魂)…….
이제 그 노래는 끝을 변화시켜야 마땅하다.
탕마지존(蕩魔至尊)이 천년마제(千年魔帝)의 한을 풀었다!
<大 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