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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

İSTANBUL ÜNİVERSİTESİ
EDEB İ YAT FAKÜLTES İ
Kore Dili ve Edebiyatı Anabilim Dalı

한국사 3 주차 강의 (Kore Tarihi 3.haftasi)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목표: 고려의 성립과 발전과정을 이해한다.
내용:
1. 고려의 성립과 발전
가.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나. 고려 초기의 정치발전
다. 고려의 통치제도
라. 거란, 여진과의 관계
마. 문벌 귀족사회의 동요

1. 고려의 성립과 발전

가.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의 통일

1) 고려의 성립

당이 멸망한 이후(907) 중국에서는 50 여 년간 5 대 10 국으로 불리는 혼란기가


이어졌고, 북방지역의 거란이 국가를 세우고 중국을 압박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신라의 분열로 후삼국이 성립되어 각기 경쟁하였다.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된 후,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후고구려(태봉)를 세운 궁예가
점차 세력을 넓혀 나갔다. 송악(개성)의 호족인 왕건은 궁예의 부하가 되어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나주 지역을 점령하는 등의 활약으로 점차 성장하였다. 궁예는
자신을 살아 있는 미륵불이라고 칭하고, 주변 인물들을 숙청하며 무리하게 정국을
이끌었다. 이에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라 하고(918),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936), 거란에 멸망한 발해의
유민까지 흡수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이루었다. 한편 중국에서도 조광윤이 송을
건국하여(960) 통일을 이루었으나, 이후 북방의 거란이 세운 요와 대립하였다. 그
과정에서 송은 요와 대립하던 고려와 친선 관계를 맺었다.

2) 고려의 후삼국 통일
태조 왕건은 안으로는 각 지역의 호족과 선종 승려들을 포섭하는 한편, 세금을 줄여
민심을 얻었다. 또 중국의 5 대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 안정을 꾀하였다.
고려는 후백제의 침입을 받은 신라에 구원병을 보내는 등 친신라 정책을 펴면서
후백제와 대결하였다. 아울러 발해가 거란에 멸망하였을 때(926), 발해 유민을
대대적으로 포용하였다.
후백제의 견훤은 경주를 습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즉위시켰다. 태조는
신라를 돕기 위해 출병하였지만, 대구 공산전투에서 패하는 등 후백제군에
고전하였으나, 고창전투의 승리로 우위에 서게 되었다. 한편, 신라의 경순왕은
나라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고려에 항복하였다(935).
이 무렵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났다. 견훤이 왕위를 넷째
아들 금강에게 물려주려 하자, 장남인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켰다. 이후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에 항복하였으며, 왕건은 신검의 군대와 전투에서
승리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외세의 도움 없이 민족의 재통일을 이루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고려는 옛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방세력을 지배층으로 포섭하고,
발해유민까지 받아들여 실질적인 민족 통일을 이루었다.
고려는 신라에 비해 정치에 참여하는 세력의 폭이 넓어졌다. 고려 사회의 주도
세력은 지방에서 새롭게 성장한 호족 세력이었으며,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사상과 옛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적 전통을 흡수하였다. 그 결과보다 다채로운
귀족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지방 문화도 발달하여 새로운 민족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림> 고려의 후삼국 통일


3) 태조의 정책
태조 왕건은 지방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호족들을 우대하며 호족의 딸과 정략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호족에게 관직과 토지, 성씨(姓氏) 등을 내려 주고, 그들의 지역
지배권을 일정하게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기인 제도와 사심관 제도를
만들어 지방 호족들을 통제하였다.
태조는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교적 민본 이념을 내세워 백성의 조세 부담을
가볍게 해 주었으며, 불교를 숭상하여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행사를 열도록 하였다.
한편, 태조는 건국 초부터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활용하여, 청천강과 영흥지방까지 영토를 넓혔다. 또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시하였으며, 독자적인 연호로 ‘천수(天授)’를 사용하였다.

나. 고려 초기의 정치발전

1) 왕위계승 다툼
태조는 각 지역의 유력한 호족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들이 낳은 왕자들은 호족인
외가의 세력을 바탕으로 왕위 계승 경쟁을 벌였다.
태조가 죽은 후 기반이 약했던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외척 세력 사이에 왕위 다툼이
벌어졌다. 반란이 일어나는 등 정치가 불안한 가운데 혜종이 3 년 만에 병으로 죽자,
정종이 새로 왕위에 올랐다. 정종은 서경 천도를 추진하여 불안정한 왕권을
강화하려 노력하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림> 태조의 왕비 출신지역

2) 광종의 개혁정치

광종은 26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다양한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호족들이 불법적으로 가진 노비를 해방시켰으며, 과거제를
실시하여 자신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인물을 뽑을 수 있었다.
또한, 광종은 정책에 불만을 품은 건국 공신과 호족들을 숙청하는 등 왕권을 강화한
후 자신을 황제라 부르게 하고, 연호를 사용하였다.

3) 성종의 유교정치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경종은 개국 공신 세력을 다시 등용하면서 새로운 안정을


모색하면서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국가 운영을 쇄신하기 위해
중앙의 5 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정책 비판과 건의에 대한 글을 올리게 하였고,
최승로는 시무 28 조를 올려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 국가 운영을 주장하였다. 그는
불교는 개인 수양을 위한 종교로, 유교는 국가 통치를 위한 정치 이념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불교 행사 억제, 지방관 파견, 궁궐 내 군인과 노비 감축,
삼한 공신 자손에 대한 처우 개선, 노비 관련 재판 개선 등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최승로는 중앙 집권적이고, 유교 도덕적인 정치의 시행을 지향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앙 집권에 필요한 통치 제도를 정비하여 2 성 6
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 관제를 수립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향리 제도를
마련하였다. 또한, 국자감과 과거제를 정비하고, 지방에 경학․의학박사 등을
파견하여 유학 교육 진흥에 노력하였다.

다. 고려의 통치제도

1) 중앙 정치

성종은 당의 3 성 6 부제를 받아들여 2 성 6 부로 고쳐 운영하였다. 2 성은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으로 구성되고, 중서문하성은 국가 정책을 계획하여
결정하였고,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상서성은 6 부를 통해 실제 정무를
나누어 집행하였다.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 국왕의 숙위를 맡았고. 어사대는 관리들의 감찰,
삼사는 화폐와 곡식 출납에 대한 회계를 맡았다. 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이라 불렀고, 직위가 낮았지만, 언론 활동을 통하여 왕이나 고위
관료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제약할 수 있어, 정치 운영에서 견제와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맡았다.
한편,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 관료들은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에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을 논의하였다. 도병마사는 주로 국방과 군사 문제를 논의하였고,
식목도감은 국왕의 명령과 정책을 법으로 정리하였다.

2) 지방 행정

고려 초기에는 호족들이 각 지역을 다스렸으나, 성종 때 주요 지역에 12 목이


설치되면서 지방 행정 조직이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전국을 개경 부근의 경기,
북쪽 국경 지역의 양계, 양계 이남을 5 도를 나누어 통치하였다. 양계에는 병마사를
보냈고, 5 도에는 안찰사가 파견되어 도내 지역을 순찰하였다. 또 개경(개성)․서경
(평양)․동경(경주)을 중시하여 3 경이라 불렀는데, 뒤에는 남경(서울)이 동경을
대신하였다.
5 도 아래에는 부․목․군․현 등을 두고, 군과 현에 수령을 파견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수령이 파견되면서 호족들은 점차 수령을 보좌하고 행정 실무를 맡는
향리로 변화해 갔다. 지방에는 수령이 파견되는 주현과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있었다. 속현의 경우에는 향리가 조세 및 공물 징수, 노역 징발을 담당하였다. 이
외에도 향, 부곡, 소 등의 특수 행정 구역을 두었다.

<그림> 고려의 지방 행정기구

3) 군사제도

중앙군에는 국왕의 친위 부대인 2 군과 수도 경비와 국경 방어를 맡은 6 위가 있었다.


중앙군은 4 만 5 천여 명으로, 직업 군인과 양민으로 구성되었다. 직업 군인은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받았고, 그 역할은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지방군은 주로 일반 농민이었으며, 양계에는 주진군, 5 도의 군현에는 주현군이
있었다. 군인은 양인이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였다.

4) 관리등용과 교육제도

관리는 과거와 음서 등으로 등용되었다.


과거는 문관을 뽑는 제술과와 명경과, 기술직을 뽑는 잡과 등으로 나뉘었다. 법제상
양인신분 이상은 과거 응시가 가능하였지만, 제술과와 명경과에는 주로 귀족과
향리의 자제가 응시하였다. 제술과는 문학적 재능과 정책 등을 명경과는 유교
경전의 이해 능력을 중시하였다. 또한, 잡과는 법률․회계․지리 등에 필요한 기술관을
뽑는 시험이었다. 무관을 뽑는 무과는 없었고, 대신 무예와 신체 조건이 좋은 사람을
장교로 선발하였다.
음서는 공신, 종실의 자손, 5 품 이상의 고위 관리 자손 등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료가 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교육은 주로 관리 양성과 유학 교육을 위한 학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중앙에는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국학), 지방에는 향교가 만들어졌다. 고려 중기에 최충이 사학인
문헌공도를 세웠는데, 이를 시작으로 세워진 사학 12 도가 융성하였다. 사학이
융성하면서 국자감의 교육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라. 거란, 여진과의 관계

<그림> 고려 전기 동아시아 정세
1) 거란의 1 차 침략

거란은 여러 부족으로 분열하여 거주하다가, 10 세기 초반 요를 세웠다. 고려는 건국


당시부터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시하고, 송과 친교를 유지하였다. 이후 요는
송과 대결하기에 앞서, 후방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를 공격하였다(993).
거란은 1 차 침략에서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의 교류를
단절하라고 요구하였다. 당황한 고려는 서경 이북의 땅을 넘겨주고 평화 조약을
맺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으나, 거란의 침략 의도가 송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것에 있다고 파악한 서희는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였다.
고려는 송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 주를 획득하였다.

<그림> 서희의 외교 담판
2) 거란의 2 차 침략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다시 고려에 침략하였다(1010 년). 당시 강조는


정변을 통해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새롭게 왕위에 올렸다. 강조는 거란군의
침략에 맞서 고려군을 이끌고 나섰지만, 거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거란 군주는
그에게 귀순을 제의하였지만, 강조는 이를 물리치고 처형당하였다.
강조의 패배로 고려는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은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갔다. 거란은 고려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여 후퇴하였다. 이때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물러가는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다.

3) 거란의 3 차 침략

거란은 2 차 침략 당시 고려가 약속하였던 국왕의 거란 방문과 강동 6 주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다시 침략하였다(1018 년). 1919 년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켰다(귀주 대첩). 이처럼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계속 막아냄으로써 송, 거란, 고려 3 국 간의 세력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후 고려는 거란과 외교 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양국의 교류는 활발한
편은 아니었지만, 거란에서 보낸 대장경은 고려 대장경 편찬에 자극을 주었다.
한편, 고려는 강감찬의 건의로 개경 주변의 방어를 강화하고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그림> 거란의 침략과 격퇴

4) 여진과의 전쟁과 영토 개척

여진은 만주 일대와 함경도, 평안도 지역에서 부족 단위로 흩어져 생활하고 있었다.


고려는 여진족에게 경제적 도움과 관직 등을 주는 회유 정책을 펼쳤으나 12 세기
이후 요가 쇠퇴하면서, 여진족은 부족을 통일하고 고려 국경까지 남하하여 고려군과
자주 충돌하였다. 고려는 윤관의 건의에 따라 별무반을 조직하고(1104 년),
총력적으로 동원한 17 만 명을 별무반에 소속시켰다. 이후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을 추진하여 동북 9 성을 설치하였다(1107 년). 그러나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어 방어가 어렵게 되자, 조공을 약속받고 동북 9 성을 돌려주었다.
그 뒤 세력을 키운 여진족은 만주 일대를 장악한 후, 금을 세우고(1115 년) 요를
멸망시켰다. 이어 송을 남쪽으로 몰아내고 화북 지방을 차지한 금은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 내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의 주장에 따라 고려는 금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림> 척경입도비
* 윤관이 여진 정벌 후 9 성을 개척하고 고려 국경을 알리는 비를 세우는 장면이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북관유적도첩”에 실려 있다.

마. 문벌 귀족사회의 동요

1) 문벌귀족의 형성

고려 시대에는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가 확립되면서 점차 문벌 귀족이 형성되었다.


귀족들은 여러 대에 걸쳐 높은 관직과 권력을 독차지하여 문벌을 이루며 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직을 세습하고, 관직에 따라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았으며, *공음전의
혜택을 누렸다. 또 고리대를 통해 백성의 토지를 빼앗기도 하였다. 상호 간의 결혼을
통해 지위를 유지하였고, 다른 문벌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왕실과
혼인하려 하였다. 12 세기 이후 백성은 귀족과 관리의 수탈, 여진 정벌 등으로
무거운 세금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몰락한 백성은 고향을 떠나거나, 문벌 귀족의
토지를 경작해야 하였다. 농민 중 일부는 농업 생산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신분을
상승시키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이 때문에 사회적 불안이
커졌다.
2) 이자겸의 난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집안은 왕실과의 계속된 혼인을 통해 가장 유력한


외척 가문이 되었다. 특히 이자겸은 예종과 인종에게 딸들을 시집보내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큰 역할을 하면서 최고 권력자가 되어 권력이 국왕을 넘어설
정도였다.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위협을 느낀 인종과 측근 세력은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이자겸이 먼저 척준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1126).
그러나 인종은 척준경을 이용하여 이자겸을 몰아내고, 이후 척준경마저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일으켰으며, 문벌 귀족
사회가 붕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림> 왕실과 경원이씨 가문의 혼인관계

3)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자겸의 난으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자 인종은 왕권 강화, 민생 안정, 국방력


강화를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고, 묘청과 정지상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서경(평양)
출신의 신진 관료들이 성장하면서, 김부식을 대표로 하는 개경 귀족들과 갈등이
커졌다.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고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개경의 땅 기운이
약해졌다는 풍수지리설이 널리 퍼졌다. 묘청 등은 이를 이용하여 인종에게
서경으로의 천도를 건의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인종은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지었다. 묘청 등은 이와 함께 고려를 황제국이라 부르고, 독자적 연호를 쓰며,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부식 등 개경 세력의 반대로 천도가 어렵게 되자,
묘청 등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135). 반란은 김부식이 이끄는 정부군에 의해
1 년 만에 진압되었고, 서경 천도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정리)
고려는 3 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며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이뤄냈다.
거란의 요가 쇠퇴한 이후 성장한 여진족은 금을 건국하고 고려에 사대를 요구하여
수용하게 되었다.
북진정책이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국내 정치세력은 외척 이자겸의 난과 신진세력의
반란 등을 겪으며 지배층의 갈등이 심화된다.
후삼국을 통일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한 고려는 지방의 호족세력을 통합하고
통치 체제를 정비해가면서 귀족사회를 형성하였다.
고려의 신분은 귀족, 중류층, 양민, 천민의 4 계층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신분상승이 가능한 사회였으며,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도 높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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