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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스도와 文化

H. 리처드 나이버 著

金 在 俊 譯

大 韓基督敎書會
Christ and Culture

by

H. Richard Niebuhr
tr. by

Jae Joon Kim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Seoul , Korea
차 례

머 리 말 ................ ..............................................................5

제 1 장 : 영속적인 문제

1. 운 제 ...................... ........... ......... .... .... .. ............. ....... 9


2. 그러스도의 정의 (定義)에 판 하여 ... ... ... ... ... ... ... ........... .... 19
3. 문화의 정의 (定義)에 판하여 ........ .... .... ........... ........... .. . , 3'1
4. 천형 적 해당을 ............... ... ....... ...... ......... .. ..... ............. 47

제 2 장 : 문화에 대 렴 하는 그리 츠 도

1. 새 백성과 “세 상 ...... ........ ............................. ...... ......... . 52

2. 툴스 토이 의 문화 배 척 ......................... ... ....... ................ 62


3. 필 요하냐 부척 철 한 엽 창 ..... .... ... ................. .. ... ... ........... 71
4. 신학적 문 제들 ...................... .... ........... ..... ...... ............ 82

제 3 장 : 문화의 그리스도

1. 영지주의와 아벨 라르드에 있어서 문화와의 조화 ............... 89


2. “문화-프로테 스탄터 증”파 리 출 ....................................... 96

3. 운화석 신앙에 대 한 변 호 ...... ........ ............................... 107

4. 신학적 만론 ...... .. ........ ...............................................113

제 4 장:문화위에 있는그리스도

1. 중립 적 교회 .............. ............ .. ................................... 120


2. 그러 스도와 문화의 종합 .... .... .. ................. .. ................ 124
3. 종합의 문제점 ............................................................ 144

제 5 장 : 역섣적인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

1. 이원론자의 신학 .. .. ... ....... .. ... ..... .. ..... .. ....... ... .. .......... .. 151
2. 바울파 마르시온의 이원론척 동기 ................. ................ 161
3. 루터와 현대의 이원론 .... ... .... .. .. ... ..... ..... ........ .... ..... ... 171
4. 이원론의 장점파 결정 ... ... ..... .......... . ... .... ..... .......... ... . 185

제 6 장 :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1. 신학석 신녕 ....... .. ...... ... ............. ....... ................ .... ..... 190
2. 제 4 복음서의 개변주의적 동기 .. .. ................................ 195
3. 어거스틴파 문화의 개변 ... ........ ....... .. .. .. .. ... .... ....... ..... 205
4. 모오리 스의 견해 .. .......... ... ....... .. .... ... ..... ................ .. " '217

제 7 장 : 하나의 “결론척인 비과학적 후기 ”

1. 결정적안 결론 ........ ................ ...... .. ...... ....... ........ ....... 229

2. 신앙의 상대 주의 ..... ........ .... .... ......... .. .......... ...... ... ...... 233
3. 사회적 살존주의 .. ..... .. ......... ..... ... .............. ... ...... .... . "'240
4. 의존적 자유 ... ..... .... ... .. ...... .. ................ ..... ................. 248
머 리 말

교회 카 그의 주〈主)되시 는 그러 스도와 그의 공서 생 활체 (共樓生活體)


인 문화 사회와의 두 방변에 대하여 갖는 이중의 고투에 관한 이 논문
은 다년간의 연구와 회 상과 강의 의 결과의 엘부이 다. 이 자료를 체
계 화하고 문서 화한 직 정 적 안 커 회 는, 어 스단 장로회 신학교 (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 서 이 제 목에 판한 알 련 의 캉
연을 하고 출판하라는 요청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다. 냐의 판찰과 생
각을 5회의 강연으로 축소시키고 다시 또 그것을 정리하벼 해설한 배
후에는, 그 복장한 자료를 파악하고 조직화하는 수다한 마른 노력
이 숭어 있다. 어스탄 신학교에서의 강연에 앞서, 내가 예일 대학교
신학부 학생들에게 강의한 기독교 윤리의 역사와 유형에 판한 강좌
가 있였던 것이다.
어떤 저술이 그렇게 장기간에 걸 쳐 준비되었을 째, 그 저자가 진
빚은 너무냐 많고 커서, 하냐하냐 공개하여 강사의 말씀을 드란다는
것은 거북한 느껑이 았다. 그것을 다 합당하게 사의를 표할 수는 없
으며 또 그렇게 할 능력도 없기 혜문이다. 이 책에는 나 자신의 노
력에 의하여 이해펀 결실이 반영되어 있지만, 또한 다른 분들의 생각
을 차용(借用)한 것이 사실상 적지 않다. 이왕 내 강좌에 참석했던
학생들 중에서는 이 책을 읽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이것은 내가 선 ­
생에게 주의를 환기시킨 사실 또는 설명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귀
절을 말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다는 사실을 지적한 각주을
아무데서도 찾 아 보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의 내용과 관련된 제목으
로 논문을 써 낸 학생들도 같은 업장에 있다는 것을 말견할 것이
다. 그러나 이렇게 수없이 많은 분들에게 하나하나 공개하여 강사
를 드리지 못한다는 사실은 어색한 일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서로 즐
거운 일이라 하겠다. 이 넓은 공통체 속의 한 사 랑무로서 다른 사랑

5
에게 빚지지 않은 소유물이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사살 일 진대 우러
가 값 없이 받았으나 값 없이 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카장 많이 신세쳤다고 생각하는 분은‘ :영생을 두고 교회와 문


화의 문제에 천냄한 신학자요 역사가인 에른스트 트렬취 (Ernst T roe-
ltsch) 일 것이다. 냐의 이 책은 그의 저서인 ‘그러스도 교회의 사회적

교훈’ 이 라는 책 의 보족(補足). 또는 부분척 정 정 (討正)을 시 도한 데 불


과한 것이다. 트렬취는 그러스도교 역사 얀에서 안간파 그 휠동의 마
양성파 캐별성의 연구가얼마나 중요하마는 것을 냐에 게 가르쳐 준 분
이다. 그는 이 풍부한 다 양성을 마 리 섣정펀 판념 속에 강제 로 맞추려
는 것을 싫어하연서도, 미토스(신화) 안에서 로고스(말씀)를 찾으며
역 사 얀에 서 이 성 (理性)을, 존재 안에 서 본질을 찾으려 고 추구하였 다.
그는 나에게 역사척 객체뜰뿐 이니라 역사적 주체 즉, 역사의 판찰자
또는 해석자가 더 많 이 상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카르쳐 주었 마.
교회와 세상과의 대 결 에 판한 트휠취 의 해명을 내가 이 논문에서 정
정하려고 노력한 점이 있다연, 그것은 주로 내가 그의 역사적 상대주
의 를 신학석, 그러고 신중심석 (꽤 中 心的) 상대주의의 빛 가운데서 이
해하려고 시도한 그것이다 유한한 것을 철대화하려는 것은 신 앙에서
탈선된 것일 뿐 아니라, 이성에서도 탄선된 것이라는 것을 냐도 믿고
있다. 그러나 이 유한한 인간파 그 활동의 상대적안 역사의 전부가
철대안 하나닝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겠다. 이사야서 10
장, 고런도 전서 12장, 어거스틴의 ‘신(神)의 도성(都城)’등은 역사
의 상대성들이 의미 를 갖게 되 는 맥락을 시사해 주고 있다. 본서의 분
석 속에서, 나는 트휠취의 세 가지의 유형을다섯 가지의 주요유형으
로 바꾸었 마. 이 것 은 융 (C J- Jung)의 ‘심 리 학적 제 유형 ’ (Psycholo-
gicαl Types)에 서 유익 한 암시 를 받은 것 은 물론이 거 나 와 걸슨 (Etienne
Gilson) 교수의 ‘중세 기 의 이성 과 계시’ (Reason and Reνe lation 지
the Middle Ages)에서 가장 많은 도웅을 받았다.
많은 동료들파 친구들이 논의와 비판파 격려로, 운헌척 교류에 불
가결한 통일성과 정밀성을 내게 환기시키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
았다. 이 저착의 통일성파 정밀성은 자료의 복장성파 처착자의 능력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것인레, 01 점에 대하여 그들은 냐에게 막대한
도웅을 주었다. 냐는 냐의 동료안 슈배 트 (Paul Schubert) 교수와, 모

6
머 리 말

리 스(Raymond Morris) 교수, 그러 고 내 형 파 야매 언 라인흩드와 홀


다 니이버 교수 (Professors Reinhold and Hulda Nieb빼 r) , 이 책 의 끝

창을 첨가할 것을 시사한 하아퍼 형제 출판사의 더돌리 주버 씨 (Mr.


Dudley Zuvπve
얀 r 아
0 f Ha
밍rp
‘'pe얀r & Bro
아t버
he잉r잉, 그리 고 내 아내 에 게 특별한 강

사의 뜻을 표한다. 나는 어스틴 장로회 신학교의 스터트 (Stitt) 교장


과 그의 동료들이 이 책을 현재의 시 안석 (試案的) 인 결론에 이끌에 주
는 데 도와 주신 것을 감사한다.

미국 커네티컷 주 뉴우헤이븐에서

H. 리처드 니이버

7
제 1 장

영속적안 문제

1. 문 제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다방면의 논의가 지금 진행되고 였


다. 역 사가와 신학자, 정치 가와 교안, 카툴럭 과 프로테 스탄트, 기독
교인과 반〔反) 기 독교인이 제 각기 이 에 가담하고 있 마. 이 것은 공적
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파에 의하여, 사적으로는 양상의 갈동에 의하
여 진챙되고 있다. 에떤 경우에는 일반 교육 얀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칼등, 또는 경제 생활 안에서의 기독교 윤리의 갈퉁과 같은 특수한 논


제에 집중되는 일도 있으며, 또 셔떤 해에는 사회 질서를 위한 교회의
책엄, 또는 기독교안이 세상으로부터 다시 분리되어야 할 펄요성 둥
왕뱅한 문제들을 다루는 일도 있다.
이 토의는 그것이 다방면안 만큼 또한 혼란하기도 하다. 이 토의 과
제가 기독교 문명의 대표자들과 온천허 세속화된 사회의 비〔非〕기독
교적 변호자들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것이 이미 명백히 규정되어 있는
만큼, 새로 운 의혹이 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독
실한 기독교안이 세속주의자와 동일한 걸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예 를 든마연, 공립학교 교육에서 종교를 배제하는 것
이라든지, 영백한 바기독교적 정치 운동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지지
퉁이 그런 것이다. 너무냐 많은 소리들이 들려 왔고, 사회 문제에
대한 너무나 많은 자신에 찬, 서로 다른 기독교적 해당이 주장되어
왔으며, 너우냐 많은 과제들이 제기되였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안들
은 당황하고 불확실성으로 고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와 문영의 운제는 결코 새로 제기된 것이

9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야 우리에게 도움이 필 줄 얀마. 이 분야
에 있에서 기독교의 흔란은 언제나 있어 왔 ò 며 전 기독교 세대를 통

하여 하나의 영속적안 운제로 되어 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안들의 반복되는 고투는 한 벤도 단일한 기독교석


해답을 가져온 적이 없마는 것을 상기하는 것도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이 도달한 해답이란 하나의 전형적인 해맙들의 연속이
어서, 신앙을 위하여 세상에서 투쟁하는 교회의 전략연을 대표한 데
불파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대장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요 에
느 부판이 판여 할 것 이 아닌 만큼 후자의 판리 밑 에 속할 수 없는 것
이다. 인간 문화의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해당과 이에 대한 기독
교안을의 해탑은 별개의 것이다. 그러냐 기독교인들은 그러스도가
그들의 다양한 사엽 을 사용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사엽을 완성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하 각 장(章)에서 논술하려는 내용의 목석
은 그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전형적안 해답들을 영
시함으로써 마양한, 흔히는 충돌되는 기독교 그룹들의 상호 이해에
공헌하려는 것이마. 이 노력의 배후에 놓여 있는 믿음, 곧 그리스도
는 살아 계신 주넘이어서 역사와 생활의 전체에 해답을 주고 있마는
것파, 그 해맙의 양식은 그의 모든 해석자들의 지혜를 초월하면서 동
시에 그들의 부분적안 통찰파 이에 필연적으로 짜라오는 충돌을 이용
하신다는 것이다.
이 영속적인 문제는 확살히 예수 그러스도가 안간으로 세상에 계살
동안에 일어녔다.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한 유대안으로 계셨으며 ...
최후의 숨결을 거둘 순간까지 그는 한 유대안으로 머물러 있었다 "1
그리하여 그는 유대 문화의 격렬한 도천에 대결하였마. 란비 콜라우
스너 CRabbi Klausner) 는 그 당시의 바리새인파 사두개안들에게 만드
시 느껴졌으리라고 추측되는 예수와 문화의 문제블 현대적인 용어로
서숭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가 유대 문영에 도전했마는 근거 위
에서 바리새인들파 사두개안들이 예수를 거부한 사실의 정당성을 변
호하였 다. 예 수는 유대 문화의 소산이 였으며 , 따라서 복음서 에 나타

난 윤리적, 종교적 교훈 가운데에는 유대교 문서에서 찾아 볼 수 없

1. Joseph Klausner. JesμS of lVazareth. p. 368.

10
셰 l 장 영속적안 운제

는 문귀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닝의 능력


으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를 건설 할 것에만 소망을 두며 일
반 사회 생활로부터 종교와 윤리를 찾 아 냄으로써, 유대 문화를 위
험 에 빠뜨려 놓았다고 클라우스너 는 말하고 있 다. “유대 교는 다만 종
교얼 뿐이거나 또는 다만 윤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기초위
에 세워진 민족의 온갖 요구를 총합한 것이다 유대교는 하냐의
민족 생촬이다. 만족적 종교와 인간의 윤리적 원칙을 말살시키지 않
고 서로 포용하는 생활이다. 그런데 예수는 와서 민족 생활의 모든
요구를 송두리째 배격해 버렸다 그대신에 그는 그의 신판과 결
부된 윤리적 · 종교적 체계밖에 안 되는 것을 세워 놓았다 "2 그가 만
일 그 당시의 율법 중에서 욱은 것을을 제거하고, 종교적, 민족적 문
화를 개혁하는 데 종사했었더라면, 그는 그 사회에 위대한 복리를 가
져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화를 개혁하는 것보다도 오히
려 그것을 무시해 버렸다. “그는 문화와 긴밀히 판련돼 있는 그의 민
족의 지식과 예 숭파 문화를 확장시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 종교에 온
천허 사로잡힌 문화를 폐기하려고 온 것이다 그는 사회 정의 대신
에 악에 대한 우저항을 명령하였으며, 그것은 결국 온갖 사회 질서의
장실을 가져오고 말 것이마. 그는 사회적 법규와 가정 생 활의 보호를
말하지 않고, 도리어 이혼은 전적으로 금지하라고 명하였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는” 것을 칭찬하였다. 노동파 경 제석, 정치
적 성취에 흥마를 표시하는 내신에 공중에 새나 들에 백합화로 표칭
펀 걱정 없고 노력 없는 생촬을 권하고 있다. 그는 일상 생활에서의
분배의 정의까지도 우시하여 말하기를, “누가 냐를 재판판이냐 분배
자로 삼았단 말이 냐 ?"고 하였다. 그러므료 “예수는 불질 문명 에 판
한 모든 것을 무λ| 하였으며, 이련 의미에서 그는 둔명에 속하지 않았
다”고 클라우스너 는 말 하였다 3 그러므로 그의 민족은 그를 배 격한
것이다 그러고 “ "1 유대석 기독교의 2천 년 역사는, 유대민 족이 잘옷
한 것이 아니었다 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4

그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이 다 그들의 문화를 보존한다는 영묵 아

2. I d i d. , p. 390.
3. I bi d. , pp. 373- 375.
4. Ibi d. , p. 39 1.

11
래에서 예수를 배척한 것도 아니며, 2천 년 간의 바유대적 기독교와
비기독교적 유대교는 예수가 문화에 위협을 주었다는 것보다는 않은
다른 영제플의 타당성을 입증할 것이다. 그러나 이 2천 년 동얀, 다
만 이 문제만을 중심으로 격성한 고투를 계속해 왔다는 것만은 확살
하마. 다만 유대안뿐 아니라, 그러이스안파 로마안, 중세기안파 현대
인, 서양안파 동양안 이 모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를 예수가 위
협한마는 이유로 그를 배척하였먼 것이다.
그리이 스 ·로마 문명이 복음에 공격을 가한 이야기 는 서 양 문화와
교회의 모든 역사에 한 극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다. 흔히는 이것이 다
만 정치척 박해라는 이름A로서만 일컬 어지고 있었지만, 사회적 경건
에 근거한 대중의 증오, 문학적 논박, 철학적 반대론, 사제들의 항거,
그러고 경 제적 안전 보장 퉁 이 다 합하여 그러스도를 배격하는 데 가
담한 것이다. 즉 문제는 다만 정치적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문화석
인 변에서도 광뱀위하게 일 어난 것이다. 사살, 국가로서는 다른 기
판이나 그룹을보마도 훨씬 후에야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항쟁
을 걸어 왔던 것 이다.5 근년에 와서 다시 공개적안 충돌이 일어났다.
국 가주의나 공산주의 사회의 대변자에 의해서 뿐 아니라, 휴우머니즘
과 민주주의 운영의 열렬한 투사들에 있어서도 그러스도는 문화적 판
섭의 적」즈로 간주되었다.
이 렇게 예 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운동이 생긴 역사척, 사회적 상
황응 지극히 다양적이어서 , 적대자들의 개인적 또는 칩단적 동기는 여
려 가지로 다른 것이 있다. 기독교적 신념에 대척하는 철학적, 과학
적 신념 들은 기독교 신념 자체 보다도 훨씬 더 예리하게 서로 대럽되
어 였다. 문화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성에 판한 한, 이 여러
가지의 잉1 판들 가운데서 상당한 일치점을 말견할 수 있다. 고대의
유성론자들과 현대의 유물론자들, 기독교를 무신론으로 바난하던 경
건한 로마 인들, 기독교의 유신론적인 신양을 정죄하는 19세 기 무깐
론자들, 그러고 민족주의자들파 휴우머니스트들, 이들 모두가 복음

5. Johannes Geffcken , Der Aιsgang des Griechisch.Roemischeπ Heideπ­


tums , 1920, p. 1 갈동의 다른 측연을 알아 보려 연 다음 책 을 보라 . Ca m-

l.ridge Anc ent History , Vo l. XlI. 1939. C.N. Cochrane , Christian‘ ty
aπ d Classκal Culture. 1940.

12
제 1 장 영속척안 운제

에 냐다낸 동일한 요소에 거리낌을 느끼고 있였으며 기독교로부터


그들의 문화를 보호하려고 비슷한 논쟁을 전개하고 있는 것 A로 보
인다.
이 항상 반복되 는 주장 중 가장 투렷 한 논쟁 점 은, 기 본(Gibbon) 이
로마 제국의 경우에서 진술한 것과 같이, 기독교안들은 “현세의 생
활을 멸시하고 영생불멸을 확신하는 데 열중한다”는 것이다 6 이 좌
우에 날선 믿음은 로마 제국의 수호자들을 격분하게 했먼 것파 마찬
가지로 현대 문명의 찬양자들을 격노하게 하였다. 낡은 질서를 보수
하려는 사랑들이냐 극단의 혁명주의자들이나 계속적인 말천을 믿는
사랑들이냐 문화의 몰락을 예견하고 버판하는 사람에게 도 마찬가지였
다. 이 문제는 주념과는 무관하고 그의 제자들에만 잘옷을 돌릴 만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업을까염려하지 말라, 땅에 재 물
을 쌓아 두지 말라, 육신올 죽이고 영혼을 죽이지 뭇하는 자를 두려
워하지 말라는 동의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에서 제자들은 자커들의 신
념의 확실한 근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일부 기독
교 안들에게만 있는 특수한 성격 , 즉 이 세상 끝 날이 당장 올 것으로
믿는 사 랑들, 또는 극단의 신령파들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여러 역사판파 판련되며, 정신과 물질의 판계성 에
대한 다양한 이녕과 판켠되어 있다. 0 1 것은 사랑을 어리둥철하게 만
드는 태도이다. 왜냐하면, 현세척 생활을 멸시하는 것 A로 여겨치
는 것과 짝하면서도 현존하는 인간에 대하여는 지대한 관섬을 가지고
있 A며. 모든 안간적 사엽이 멸망할 것을 예측하연서도 그것을 두려
워하지 않는다는 견지에서 그 러 하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 라 확신이
키 빼문이다. 기독교가 문화를 위협하는 것은 이 점에서라고 본다.
측 모든 안간석 성취라는 것이 돌 위에 돌 하나 덧 놓이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예언한 것 혜문이 아니라, 그러스도가 안간들로 하여
금 이란 재난에서 오히려 챔착하게 하고, 그들의 소망을 딴 세계혹
돌릴 수 있게 한다는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거대하면서도 불안전
한 운화 전통을 보존하려는 안간의 끊임 없는 노력에서 그 동력을 박
탈하는 것을 격분해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켈서스(Celsus) 같은

6. The D ecline and Fall 01 the Romaη Empjre , Modern Libraryed., VoL
1 , p. 402.

18
사람도 옆셔놓고 치독교를 공걱하는 것을 중지하고, 기독교 션자에
게 호소하여 말하기를, 신자들이 국방과 재건의 공석 (公的) 의 무에 서
울러남우후써 위협을 받고 있는 로마 제 국을 더 위태롭게 하는 것을
중지해 달라고 한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레난이 기독교에 석의〔敵意)
를 가진 것도 이런 점에서였다. 즉 신자들은 현실 생활에 충분한 관
섭을 가지고 있지 않기 해문에, 낡은 질서블 박멸하고 새 질서를 건
설하려는 총력천에 용강하게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기옥교 신영을 종교적 아펀이라고 생각하였다. 문화를 초월하
여서는 삶의 의 01 가 없다는 것을 충분허 각성해야 할 백성들을 마취
시키려 고 집권자가 사용한 마약이라는 것이다.
또 하냐의 문화적 만(反)기독교주의자들이 여러 시대에 여러 신조

로써 그러스도를 대척한 공통적인 논점은, 그러스도가 인간을 유안


하여 하나넙의 은헤어}만 의지하게 하고 안간 자신의 성취에 선진하
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만앨 j료마 사 람들이 하냐닝에게만 의치하
라는 그러스도의 벙령에 고지식하게 순종했더라면 그 결파가 어떻게
되였겠는가? 그들은 마치, 저 유대안처렁 자기 땅이라고 부를 국
토도 옷 가지고, 저 기독교인처럼 죄수가 되어 볼려 마녔을 것이 아
니겠느냐고 켈 서스는 물였다 7 현대의 문화철학자로서 니콜라이 하르

트만 (Nikolai Hartmann) 갇은 야 는, 이 하나닝 을 의 지 한다는 신앙


에서 안간 노력의 칩중을 펄요로 하는 문화 윤리의 궁극적인 。1
융배반 (Antinomy)을 말견한마고 하였다 8 마르크스주의자플은 안간
이 역사를 만든다고 민기 띠1 운에 , 하나닝의 은혀1 에 의지한다는 것은
하늘의 소망에 강력한 만픔 땅에서는 수면제밖에 안 띈다고 말하는
것이다. 민 주주의석 , 휴우머니즘적 사회 개혁론자들은 기독교 신지­
들을 “정 적 주의 자" (靜寂 초義딸)라고 미 난한다 한련, 대 중석 지 자〔智
者)들은, “하냐닝은 스스로 돕는 자플 돕는다” 또는 “안간은 하냐
넙을 의지해야 한마. 그걱냐 만일의 경우블 대미하고 있어야 한
다”고 말함으로써 은총에 대한 그들의 판용 있는 불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7. Origen , Contra Celsus , Wl, Ixix (Ante.Nicene Fathers , Vo l. W, p. 656).


8. NicoJai Hartmann , Ethics , 1932 , VoJ. m, pp. 266 ff ,
14
체 1 장 영속척안 운세

운화카 그리스도아 그의 고회플 계속 비난하는· 세째 요첨품 기독


교가 펀협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위에서 말한 비난들처럼 그러
광뱀위한 것은 아니기도 하다, 기독교에 대한 공산주자의자들의 ll] 냥
은 이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먼 연협한 신앙이 다른 어떤
신앙에 대 하여 갖는 반대가 아니 라, 불신앙。l 신앙에 대 하얘 갖는 비
난이 기 때 문이 다. 기본 (Gibbon)의 말에 의 하연, 고대 로마 운영은 기
독교를 배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로마 운영은 판용주의를 취
하였기 쩨운이라는 것이다. 굉장히 정다한 관습과종교틀을가지고 있
는 로마 운영은, 그 제국을쿠성하고 있는 여러 민족들의 혼란판 천통
들파 의식들을 서로 용냥하고 존경해 줄 혜에만 존속될 수 있는 것。l
다. 그러으로, “어 떤 종파가 안류의 공동 사회로부터 자신을 격려
시커 자기녀1 만야 하나닝애 매한 지식올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
기들의 혜배 형식 이외의 것은 다 불경건한 우상 숭배라고 펀잔을
한마연, 그 밖의 천체가 다 연합하여 。1 란 불손한 종파에 대하석 격
폼찰 것은 당연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9 유대언을도 신들과 우상
에 대하여 는 기독교인들과같은 견해를가지고 있지만, 유대안에 대한
로마안의 태도는 훨씬 판매할 수 있었다. 유대안은.요랜 전통을 지니·
고 있는 분리완 민족A로서 일반 사회 생활로부터 불러나서 자기내
쩌려만 옹기종기 살아가는 것을 만족하게 얘기고 있었기 혜품이다.
그러나 기독교안들은 로마 사회의 회원들로서, 그 사회 한가운데셔
공공연하게 또는 은근하게, 그들의 여러 종교들을 바난했다. 그러묘
포 기독교안들은 로마 사회의 판습과 교육의 ·신성한 유대를 단철시킨
자들이 며, 그 나라의 종교적 제도를 거 역한 자들이요, 그 선조들。1
진려라고 믿고 신성한 것으로서 존경하던 것을 오만하게 멸시한 반역
자울이라고 지목되었던 것이다.10 우리가 여기서 한 마다 더 하고 지
나가야 할 것은, 로마 제국의 관용주의에는, 현대 만주주의 국가에서
화 같이, 어떤 한제가 있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관용 정책이 홍알
을 유지하기 위한 하냐의 사회 정책으호 살챙되었기 빼문이다. 에셔한
종교를 가진 사랑에게든 간에 로마 황제에게 ;성배하는 알만은 캉요되

9. Op. cit. , Vol. I , p. 446.


10. ]bid.: p. 448.

15 .
고 있었넌 것이다 11 그러냐 그러스도와 기독교안은 다 같이 그 극만
적안 유알신 신앙 혜문에 문화의 통알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 유알
신 신앙은, 많은 신들과 많은 종파들을 지 상〔地上) 또는 천상〈天上)의
한 군주의 통제하에 통얼시키려는 이방 종교의 보펀주의와는 전혀 마
른 한 분 하나닝을 믿는 신앙이다. 이렌 유일신 신앙이 국가적 또는
제국적 문화의 내변자들에거l 제기하는 정치적 운제는, 현대에 있어
서는 거의 없어진 것으로 보여졌 A나,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만기독교적, 특히 유애인 배격 운동에서 다시 투렷하게 드러나게 되
었다. 12 왕을뿐 아니라, 다른 정치 켠력의 표증까지도, 신성£로 보
호되어 있어야 하는 행펀임에도 불쿠하고, 01 유일신 신앙은 그들의
거룩한 후광(後光)을 박탈해 버리기 띠1 문이었다. 세상의 나라듣을 얻
기 위하여 사단에게 절하는 일을 일축해 버련 그리스도의 태도는 기
독교인들에게도 전승되어, 그플이 섬기는 주 하나념과 일치되는 그
러스도만을 예매하려 했다. 만주주의, 미국, 독알, 또는 로마 제국이
그 의무와 종교적 충성을 받을 수만 있다면, 많은 신들을 예배할 수
있다고 하는 태도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를 옹호하는 모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위와 같은 태도는 용남될 수 없다. 판용주의
적안 현대 운영이 그러스도와 적대적인 업장에 있 A면서도 그것이 밝
히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자기들의 종교적 살행을 종교적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 돼문이다. 즉, 종교적이라는 용에는 공적으로 안정된
거룩한 기판과 판련되어 있는 어떤 특수한 의식에만 국한하여 사용하
는 것이다. 그리고 또 종교라는 것을 경제, 예술, 과학, 정치, 기술
둥 수다한 관삽사 중의 하냐로밖에 안정하지 않는 것도 무낸하게 지
내는 이유의 하나라 하겠다. 즉 기독교적 유알신 신앙은 정치나 살엽
계에 간섭하지 말며 다른 종교들파 사이 좋게 지낼 것을 배우라는 명
령 을 반대 자들에 게서 듣는다. 다만 종교적 칩 단으로서 의 주장뿐 아니
라, 그리스도와 하나넙의 주장에 대한 온갖 고려까지도 다른 신들,
소위 가치들이라는 것이 지배하는 영역우로부터 추방되어야 한마고

11. Cambridge Ancient History , Vol. 때, pp. 409 ff.; 356 ff.; C. N. Cochrane,
op. cit. , p p. 115 ff.
12. Cf. Karl Barth, The Church aη d the Political Problem 01 0μr Day,
1939; Hayes, Carlton J.H. , Essays in Nationalism , 1933.

16
제 1 창 영속적안 운제

말하기도 한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비난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


가지이다. 즉 기독교는 사회의 종교적 생활을 공격함A로써 그 사회
를 위테롭게 만든다는 것, 기독교는 사회석 제 도들에게서 그 제의석
신성성을 박탈한다는 것, 기독교는 판용적안 다신흔(多神論) 의 경건
한 미신을 용납하기를 거부함£로써 사회적 통일을 위협한다는 것들
이다. 0 1 렌 비난은 거짓 종교라고 규정한 것들에 대하여는 강경책을
때고 있는 기옥교적 조직체에 대해서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독
교 신앙 자체에 내해서도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문화의 적 이라는 의마에서 그러스도와 기독교에 공격을 가하는 사
랑들의 또 마른 요점을이 있다. 그리 스도가 실 천하고 또 가르치 는
이른바 용서라는 것은 정의의 영령과 자유인으로서의 도덕적 책임에
배치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악에 대한 분노와 항거 , 맹세와 결혼, 염
려 와 재 산 동에 판한 산상수훈〔 山 t훌훌팅1\)은 사희 생 활의 의 무와 양럽
할 수 없다. 낮은 자를 높 이 는 기독교의 주장은, 한펀£로는 귀 족들
과 니이체주의자를, 다흔 한펀으로는 프플레 타리아의 대변자를 비위
에 거슐러게 하였마. 그러스도의 지혜가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에게
는 무익해지나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운화를 옹호하는 철 학적 지도자를 당황하게 하며 또한 그들의
경별강을 자극했던 것야마.

그리 스도와 기 독교 신앙에 대한 이런 공격이 그 문제의 성질을 강


조하고 그것 을 밝히 드러낸다. 흔히는 기괴한 형 식으로 할지라도 기
독교에서의 문제점은 이러한 공격 자체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배 격하
는 이교언 (異敎人)뿐 아니라, 그러스도를 안정하는 신자들까지라도 그

리스도의 주장을 헨살 사회와 판랜시킨다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말


견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이다. 고투와 화옥, 승리와 화해 둥은 기독교
안£로 자처 하는 자와 반(反)기 독교인들이 서 로 만냐는 데서 만 드러 나
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태한 토론은 오히려 기득
교안 자신 을, 그 개인 양성의 숭은 갚。 l 에 서 더 자주 얼 어냐고 있마.
그러므로 이것은 신앙파 불신앙 사이에서 되어지는 투쟁이나 타협 이
아니라, 신앙파 신앙 사이에서 되어지는 씨름파 화해인 것이다. 그러
스도와 문화의 문제는 복음을 유대교화하려는 사랑을파 헬라화하려는
사람에 대한 바울의 투쟁에서도 드러닝던 것이다. 그 러 나 동시에 복

17
음을 헬라 용어와 헬라 사상의 형식으로 해석하려는 그의 노력에서도

나타나 있다. 이것은 또한 초대 교회 가 로마 제국파 대결한 투쟁에서


도 나타났으며,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그 때 세계의 여러 가지 종교와
여러 가지 철학파 대럽한 데서도 볼 수 있고, 그 당시에 유챙하던 관
습파 도녁적 원칙파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이념파 사회 조직의 형식
과 대립한 데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콘스탄틴 시대의 안정, 대신조(大
信 條)들의 형성, 교황제의 수립 , 수도원 운동, 어거스틴적 플라튼주
의, 토마스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종교개혁파 문예부흥, 부흥 운동

파 계 몽사상, 자유주의와 사회 복음-이란 것들은 역사 속에 나타난


많은 영속적안 문제의 몇 가지에 불과한 것이 다. 이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또 어느 세대에서나 나타나 있다. 이성과 계시, 종교와 파
학, 자연법파 신법 에1 1 法 ) , 국가와 교회, 무저항과 압제 퉁의 문제로
도 나타 나 있 다. 그러고 또 이것은 개신교와 자본주 의, 경 건 주의와
국가주의, 청교도주의와 민 주주의, 카툴릭 주 의와 영국 국교, 기 독교
와 진보 사상 등의 판계성이라는 특밸 연구의 부문에서 도 보여 지고
있다 .

이것 은 본질적으로 보아 가 독교와 문명이라는 문제 에 속한 것이 아


니다. 그것이 교회 , 신조, 윤리 , 또는 사상 운동 퉁A로 정의 된다 할
지라도 그 지-체는 엔제나 그러스도와 문화의 양극 사이에서 움직 이
고 있 다. 이 두 켠위의 판계가 이 문제를 구성하는 것이다. 기 독교
카 이성파 계시의 문제블 다루는 경우, 결국에 가서 문제되는 것응
그리스도 안의 계시 와 운화 안의 이 성 의 관계안 것이 마. 합리적인 융
리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 을 구분하든지, 대조시키 든지, 결부시
키든지 간에 이것은 문화 내 에서 괄전펀 옳음파 그름에 대 한 이해와,
그러스도로 말미 암이- 영시된 선파 악에 대한 이해 를 연구하는 노 력 안
것이마.

교회 또는 국가에 대한 충성 의 문제 가 제기되었 을 해, 그러스도와


문화 사회가 진정한 충성의 대상으로 그 배경 에 서 있는 것이다. 그
러 므로 기독교인이 자신들의 영속적안 문제 를 다룬 주요한 방법들을
옐거하기 전에, 우리는 이 그러스도와 운화라는 두 용어가 무 엇을
의마하는 가를 진술할 필요가 있 다고 본다 . 그러냐 。1 일을 잔행시키
는 데 있 어서 우펴는 어떤 선업관념을 가지고 그 중 어느 하나냐 또

.1 8
제 1 창 영속적안 문제

는 둘 다를 정의항파 동시에, 기독교적 해탑의 어느 하냐를 말함으로


써 짤 암을 다한 것같이 생각해서는 안 완다는 것-을 깊이 주의해야
할 것이마.

2. 그리스도의 정의 (定義) 에 판 하여

기독교인을 흔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짜르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종더 정확하게 기술한다변, 기독교적
콩통체에 속한 사람으로 자처하는 자라고 할 것안데 , 기독교 공동체
란 것은 에수 그러스도 -그의 생애와 말파 챙살파 운명一가 그들 자
신과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옐쇠로서 최고로 중요한 것이라고 인
정하며, 그가 하나닝과 안간파 선파 악에 대한 지식의 주요 원천이며,
끊임 없는 양상의 동‘산자, 그리고 악으로부터의 구원자라고 믿는 사람
들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냐 “예수 그러스도를 맏는다”는 것은 개인
적으로나 공동체적£로나 너무도 각양각색이며, 그의 본질적안 성질
에 대한 설영이 또한 너무냐 다른 것이어서, 기독교에서의 그러스도
가 과연 한 주(主)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기
독교안들 또는 기독교 공동체의 얼부에서는, 예수 그러스도는 위대
한 교사요 또 법을 준 분이어서, 그가 밀한 하나닝과 도먹뱅이 안간
의 마음과 의치를 사로장기 혜문에 아무도 그를 파할 수 없다고 한
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기독교는 예수로 말마암아 선포된 새
법이요, 새 종교였던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그것은 그들이 택한 이유
요, 또 다른 변으로는 그것이 그들을 택한 것이어서, 그들의 마음
으로부터 고투〔함關) 하연서 결단한 것 이 완다. 또 어떤 사람들에 게
있어서는, 예수 그러스도는 교사요 진리와 법의 계시자라는 것보다도
예수 자신이 그의 성육신(成肉身), 죽음, 부활, 그의 현존 생활 속에
서 하냐닝 자신의 계시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가 그된 그 자체 로
말마 암아, 그가 당한 고난, 십 자가에 서 의 수난우로 말미 암아, 그리
고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승리로 말미암아, 그 존재와 본성이
하나닝 되시는 증거를 나타내어 믿는 사람에케 하나닝으로서의 주장
을 행사하며, 그렇게 한A로써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새 생명으로

19
부활하게 하는 것으로 되어 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럼들에거1 는, 기
독교는 새 교훈이라거나 새 생영이라는 것보다도 우선 새 공동체,
거 룩한 공쿄회 (公敎會)로 되 어 있 다. 그러 하여 그들의 주목하는 중
싱을 차지한 그리스도익 사엽은 이 새 사희의 건설이며, 이 새 사
회는 말씀파 성례건을 동하겨 그의 은혜를 중개하는 것 o ;료 되어
있마.

“예수 그러스도를 믿는다”는 의마에는 이 밖에보 수다한 다른 견해


틀야 있다. 그켜냐 기독교거l 매한 이 각야한 견해가 한 분명한 성격
파 안격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적안 통일성을 애매하게 할 수
는 없는 것이마. 그의 교훈들과 행동들파 수난이, 통일된 한 폭으로
이 루 어져 있는 것이다. 기 독교안에게 권위 릎 행사하는 그러스도, 또
는 기 독교안이 권위로 맡아들야 는 그러 스도는 신약성 서 에 나타난 에
수 그리스도라는 사살만은 그대로 난아 있마. 그리고 이것은 일정한
교훈파 일 정한 성격파 알정한 운영을 가진 일정한 안격안 것이다. 한
해 논쟁의 과제가 되었던, 예수가 “참우로” 살아 있었느냐 하는 문제
라든지 신약성서의 이 기록이 사싶을 사살대로 기록한 믿을 만한 것
이냐 하는 문제 등은 여전히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
제는 아난 것이마. 신약성서에서의 예수 그러스도는, 우리가 현실 역
사 안에서 살아가며, 또 역사 안에서 기억하고 우리의 믿음파 행동을
형성해 가는 것같이 그 역사 안에 있기 때운이다. 그러고 이 에수 그
리스도는 일정한 안격이어서 헬육의 안간으로 나타나든지, 부활한
주로 나다나든지 간에 그는 한 분이시고 같은 분이시다. 그는 소크
라테스나 플라돈 또는 아리스토텔 레스나, 석가나, 공자나,모하메드
냐, 혹은 아 모즈느냐 이사야 같은 사랑을파 둬섞여서 분간 없이 될 수
는 없는 것이마. 불폰 수도사가 그를 설명할 갱우에는 수도원적안
성격을 그에게 반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가 그블 묘사
한다연 그는 극단적인 혁명가로서의 모습을 나타내게 될 것이마. 호
프얀 (Hoffman) 이 예수를 그린다연 온후한 신사로 만들어 낼 것이
다. 그러냐 여기에 그의 원 초상화가 언제까지나 남아 있마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후세의 사람들이 제멋대로 그런 그의 그림들은 결
국 이 본래의 초상화에 바교하여 , 모든 만화적안 것을 시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원 초상화에서는 그는 언제나 한 분, 같은 모습

20
제 1 장 영속적안 문제

£로 안식되어 있다, 기독교언의 경험 안에 나타난 그의 역할야 각각


다르다 할지라도, 그 역사하시는 이는 같은 그리스도이시다. 교회의
창설자안 그리스도는새 법을준그러스도이시다. 하냐넙에 대한 진리
를 가르천 교사로서의 그러스도는 그 자신 얀에 진리의 계시를 가지
고 았는 그러스도이시마. 그의 살파 피를 주신 이가 또한 새 계명
을 준 그분이 라는 시-실은 성 례전주의 자(聖禮典主義者)들이 라도 부안하
지 옷할 것이다. 아무리 소종파들이 라 할지라도 죄를 사해 주시는
윤리적 권위자안 그리스도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 “육신을 가진
이 로서의 그러스도”에 대해서는 더 얄지 않기로 작정한 사랑이ν라
할지 라도 “처음부터 목격 한 자요, 말씀의 전파자”인 이 들로 말미 암
아 그 행적이 기록완 그가 곧 부촬 승천하신 그러스도라는 것을 부
인하지 옷할 것 야 다. 기 독교인의 경 험 이 아무리 다양하다 할지 라도,
또는 그들의 권위자안 그리스도에 대한 기술이 아우리 각양각색이라
할지 라도, 이것만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그
들의 권위 요, 이 권위를 마양한 모송으로 행사하는 그는 하나의 같은
그리스도라는 점이 다.

하나의 같은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려


할 해, 또는 그에게 다양한 권위 를 주는 것은 우엇인가를 구명하려
할 때, 우리는 물론, 기독교 공동체의 끊임 없는 논쟁점에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두 가지 낸제에 봉착한다 . 첫째는
인격이라는 형식 안에 나타나는 원칙을 개념이라든지 명제라든지 하
는 방법에 의하여 적절하게 진술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
이요, 둘째로는 그 인격에 대하여 무엇을 말한다 할 때, 우리는 교회
나 역사나 문화 안에서 어떤 사랑이 그에 대하여 기 술하려고 시도한
어떤 독특한 입장과 판련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마. 그러묘로 어떤
이 는 단순히 반복하여 말하기 를, “예 수 그리 스도는 예 수 그리 스도이
다” 하는 식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리고 성서 실증주의를 채택하여,
신약성서 와 그 종폐의 여러 해석에 의존하려 한다.

그러나 이란 단언과 제스추어에 우리 스스로를 국한시 키는 것은 불


펄요할 뿐 아니라 바랑직한 바도 아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적당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것은 불충분하게 나마 말할수 있기 째운이다.
우리가 그려스도의 본섭과 본철을 지석하지는 뭇한다 할지라도, 적어

21
도그 본질 이 냐타냐는 현상의 엘 마만은지적할 수 있는것이다. 모든
기줄은 다 얼종의 설 명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것 이 객판적 실 재의
설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스도에 래한 온갖 기술이 다 불완
전하여 그를 만난 다른 사 랑들에게 온천허 만족을 줄 수는 얹다 할지
라도, 기독교안의 권위인 예수 그리 스도는 천혀 기술할 수 없 다고 말
할수는 없다.
그리스도를 기숭하려는 옥적 으로, 도덕론자는 다소 자의적 (향、 강的)
안 땅 법 으로라도 예수 그러스도의 먹행을 지척하며 그것 을 정의하는
것을 강행할지도 모른 다. 그러냐 그것은 같은 목적을 가진 다른 방
연에서의 설영으로 보충되어야 할 것 이 사실이 다. 그러므로도덕석 기
술이 형이상학적 또는 역 사걱 기 술보다 본질 에 더 가깡 마고 주장할수
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닥행윤 말할 해, 우리는 그의 품격 의 탁
월성을 의미한다 . 다시 말하면, 한현으로는 그 자신의 생할에서 모
본을 냐타낸 품격, 또 한펀A 로는 그가 그의 신도들과 천교를 나누
는 품격을 의미한마. 어떤 기독교안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그러스도의
모본과 법이 요구하는 덕으로 알려지 며, 다른 기독교언에게 있어서
는 그것 이 중생 , 곧 많은 형제들의 첫 열애인 그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것을 통하여 그들에게 주어지는 은사라고 알려져 있다 . 그러 냐
기 독교인들이 법 을 강조하든 은혜 를 강조하든, 역 사척 예 수를 중요시
하든 선 재 (先tE) 하시고 부활 승천 하 신 주를 중요시 하든 간에 예수 그
러스도의 덕행 자체에는 다 릉이 없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먹행을 논하는 데 있어서 종교적 자유주의자들은 그의
사랑을 무엇 보다도 높이 평 가한다 . 13 이 지극한 사랑을 그의 안에 서
발견한다는 것 이 자유주의 사상가듣의 탈선적 안 생 각이 었 다고 말할 수
는 없다 . 공관복음서 에 는 사랑에 대한 인증(引證) 자료가 아무리 결 핍
돼 았다 할지라도, 그 나머 지 의 전 신약성 서 와모든세 대의 신도의 증
거가 예수 그러스도의 윤리에 있어서 사랑이 가장 큰 댁행이었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마 . 그러고그러 스도가 제자들에제 영한 것 이 라든지,

13. C f. A. Harnack , W hat is Christianity? , 1901, pp. 78 ff. 다만 자유주 의


자들뿐 아 니라, 라인흘드 나이떠도 하르낙파 동조하얘서 사랑올 예수의
윤리 의 옐 쇠 라고 말 하 였 마. C f. Aη l nterpretation of Christian Ethics,
1935 , chap. n.
22
제 1 장 영속적안 문제

제자들로 하얘금 그렇게 되도록 그카 능력을 주신 것이라든지 다 사


랑을 중섬으로 하여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약성서를 탑
독하고 거기 기록된 예수의 모습을 연구할 때, “예수의 사랑의 윤리
의 절 대주의와 완천주의 "14라든지, 또는 다음에 인용하는 진술에 척
망한 만큼 서술적인 가치 를 가진 키사들을 수접할 수가 있겠는가 하
는 첨은 의문이라고 생각펀다.

예수가 야기적, 의식적(없式 的)안 연결에서 떼냐 유앨한 도덕척 원적으로 안


정하여, 한 근원, 한 동 기 로 요약한 것은 사랑이다. 그는 아무 다른 것도 알
치 않았다. 다만 사랑 자체,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형식을 취하든지, 원수
툴 사랑하는 형식으로 냐타나든치, 사마리아 사항에 래한 사랑으로 나타나든
치 간에, 그것은 다만 한 차치 사랑일 뿐이다. 이것으로 그의 영혼은 온천허
중만해 있치 않을 수 없였다 그리고 영흔 이 그것을 향하얘 죽은 후에도 그

것만은 여천허 낭아 있는 것이었다 .15

그러냐 예수께서 사랑을 위한 사랑을 명한 데는 없다. 그러고 “사랑


이 온전히 그 영혼에 차 있마”든지, 그는 윤리는 “사랑의 이녕 A로”
특성지워져 있다든지 할 만큼 그의 공격적안 감정과 정서 를 온천히
친절로 극복했다고 말할 아무 자료도 발견할 수 없다. 예수의 풍격과
병령에서 말견되는 사랑의 덕은 하냐넙에 대한 사랑파 하나닝 안에서
의 이웃 사랑이요, 사랑을 위한 사랑의 덕은 아니였다. 이 인격의 통

일은 하나닝을 향한 그의 방향의 단순성과 온천성에 었다. 그것이 사


랑이든 믿음이든 또는 두려움이든 간에 그 판계는 하나닝과 그와의 판
계였마. 사랑은 예수에게 있어서 어떤 극단적인 태세로 나타났다는 것
이 사실이다. 그 러 나 그 극단척이란 것은 한 정옐이 다른 아무 정옐
로도 제 약받지 않을 정도로 방출한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아
무 다른 철대척안 선에 대한 사랑으로도 타협되지 않고, 다만 한 하
나닝에게만 천적 A로 정성을 바친다는 의미에서의 극단성을 말한마.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닥챙의 불균형은 다만 다신론적 · 유알신론적 의
미에서 만 말할 수 있는 것이요, 꼭같 이 중요할지도 모르는 마른 덕

14. Niebuhr, op. cit. , p. 39.


15. Harnack, op. cit. , p. 78.

23
챙들을 배제한다는 의마에서 말할 것은 아니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말
한 소위 중용(中庸) 즉 지나침과 부족, 또는 친철파 분노의 중간강
같은 것은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는, 하
나닝밖에는 쿠극적우로 사랑할 만한 존재, 궁극적으로 헌신한 만한
대싱-0 1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념 아버지이다. 하냐님밖에 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였다. 그에게만 감사할 것이며, 그의 냐라만을 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으로 예수의 품격 과 교훈에 나타난 하나넙 사랑
은 아버지의 접이 강도의 굴혈로 된다든지 , 아버지의 자녀가 학대를
받는다든지 할 경우에 분노로 나타날 수 있었으며, 분노의 동기 가 될
수도 있었단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분노의 덕의 의마 를 강조하
는 것도 당연하며 또 가능한 것이마. 그러고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 행
동이냐 교훈에 있어서 하나닝에 대한 신앙파 그 앞에서의 겸비를 사
랑보마도 훨씬 더 강조했마는 것도 말할 수 있마.
예수의 이 먹행의 성질을 이해하려면, 그의 신학에 대하여 어느 정
도의 주의를 기울알 펄요가 있다. 예수을 기 술함에 있어서 사랑이라
는 용어에 전적으로 의거하려는- 경향은 하나닝과 사랑을 일치시키는
경향파 밀접한 판계플 가지고 있다. 부성〔父性)이 하나닝 속성의 거
의 천부안 것갇이 생각하며, 짜라서 하나닝을 사랑한다는 것은 부성
의 원리를 사랑하는 것으르 간주한다 .16 또는 하나닝은 “세계의 질서
의 기초가 되는 것만큼 또한 세계의 혼돈을 초월한 우극적 통일임 이

확실하다”고 정의한다. “이 하나냥의 통일은 구극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이고 창조적안 것이다. 그러묘로 하나닝은 사랑이시다 그는 모

든 것을 포성하는 선의 (善意)이다 . 17 확살히 이것은 예수의 신학을 대


표하는 것은 아니다. 하냐닝은 사랑이지만, 사랑이 그의 하냐넙안 것
은 아니다. 하나닝은 한 분이시지만, 하냐가 그의 하나 닝은 이-니마.
그리 스도가 사랑하시 는 하나닝은 “하능파 땅의 주 ”이 신 하나닝 이 시 다.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 이 삭의 하나님 , 야곱의 하나닝 이 다 . 그는
비와 해를 주관하는 능력이 다. 그의 허락이 아니고서는 참새 한 마리
도 죽지 않는 것이며 , 도성(都城)도 그가 모르고는 망할 수 없우며,
그리 스도 자신도 그의 허락 없이는 십자가에 뭇박힐 수가 없는 것이

16. l bid., pp. 68 ff. , 154 f.


17. Niebuhr , op. cit., pp. 38 , 49, 56.

24
제 1 창 영속적안 문제

다. 하나념에 내한 예수의 사랑의 위대성파 특。 1 성은 그의 우주적 사


랑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모든 믿음 없는 자에게는 아버지 갇다고
는 도저허 보얘지지 않는 초월적 능력에 대한 그의 충성 으로 나타났
다. 예 수의 업 에 서 나오는 “아버 지 ”라는 말은, 부성 (父性)과 하나닝 과
의 일 치라는 경우의 용어보마도 훨씬 더 위대하고, 더 진 실 하고, 더
영웅적인 용에안 것이다.
예 수의 사랑의 덕에 대한 그 특수한 성질을해명 하는 데 있어서, 그
컷이 하나 닝에 대한 그의 전적 충성에 근거한 것에라고 언영하는 경
우에, 어 떤 이 는 아마도 그가 이중의 사랑을 실행 하고 가르쳤다고
항변할 것이다. 즉 이 웃파 하나닝에 대한 사랑의 두 초청을 가진 윤리
였 다는 것이다. 그 두 초점 이란 것은 “ 아버지 되시는 하냐념과 안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이다 18 그러냐 야렌 진출은, 01 른 바 야중의 계명
이라는‘ 것이 예수께서 창얀한 것이든지 전부터의 것을 재 확인한 것
이든지 간에 그것은 결코 하나닝파 이웃을 통퉁한 위치에 두고한 말
은 아니였다는 점 을 잊고 하는 말이다. 이것은 야 물에 대하여 동퉁으
로 온천한 충성을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닝에게만 마음파
영파 돗파 힘을 마하는 사랑을 바치는 것이요, 이웃은 제 옴야 점
유하고 있는 가치와 통일한 선 위에 두라는 것뿐이다. 뿐만 아니
라, 인간 염혼의 가치에 “우한” 또는 “본질적” 따위의 말을 사용한다
는 것은 예수의 본의에는 완천히 생소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하냐넙파의 판련 없이는 이 무 가치도 말하지 않는다. 안간의 가치는
참새냐 꽃의 가치와 같이 하냐닝에 대한 가치안 것이다. 창 기 쁨의
카치 측정은 하늘에서의 기 쁨에 따른마. 가치라는 것은 하나념과의
판계에 있어서의 가치이키 때문이다. 그 러 므로 예수께서 는 인간성에
서만이 아니라, 모든 파조물 안에서 신성성 을 말견하였던 것이 다. 물
론 새 들보다도 그의 제자들이 하나닙 앞에서 값비싸다는 그의 말씀에
서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 지 만, 여하튼 예수의 행동파 교훈에 냐
타난 이웃 사랑의 덕 은 하냐닙을 사랑한다는 것파 같은 의미에서는
결코 적당하게 기 술할 수 없다는 것이 사살이다. 그리스도가 이웃을
사랑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같야 한 것 이 아니라, 하

18. Harnack, op. cit., pp. 55, 68-76에 서 도 그렇 게 말하고 있으며 , 표헬응 꼭
갚지 않A냐 이것은 자유주의적 개혁 교회의 상식£로 되어 있다.

25
나님이 그리스도자신을 사랑하는 것같이 사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
한복음에 서 는 “네 이 웃을 네 옴같야 사랑하라”고 한 유대 적 진술로서
는예수의 행동과 요구를 석망하거1 표시할 수 없음을 이해하고, 그 계
영을고쳐서 “내가 너회를 사랑한 것같이 너 희도 서 로 사랑하라”는 것
으로 하였 다 19 뿐만 아니 라, 에 수 그러 스도의 사랑은 한 안애 C仁愛)
의 표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닝의 아가페라는 결 정 석 행위라
는 것을 제자플은 밝히 。1 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대 교안들이 예수
그러스도에게서 체득한 것, 그러고 우리가 그를 상상만 하는 것이 아
니 고, 똑바로 그 자신을 응시 한다변 반드시 받 아들이 지 않을 수 없
는 것은, 그가 하나닝과 사람을 사랑한다는 인애를 특징으로 한 안
격 은 아니었마는 것 이다 . 그가 하나닝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사
랑한다는 것은 공통펀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다만 공통된 근원
을 가진 두 구별 된 덕이마. 하나념 을 사랑한다는 것 은 유일한, 참 선
한 이를 찬양하는 것이며 모든은사(恩 !IJ!,)를 주는 이에 대한 좌사안 것
이다. 이 것 은 거룩한 기쁨이다. 01 것은 “존재 CB e ing)에의 잔성 ”이다.
그러나 시-람을 사랑한다는것은 찬양보다는불쌍히 여기는것이다. 이
것은 캄사라기보다도 주는 것파 용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안간의
사악 ($평)파 불경성 (不敬性 )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마. 이것은
인간이 있는 그대 로 수 락하는 것을 응함이 이니라, 회 개할 것을 요구
하는 것 이 마. 하나닝 에 대 한 사랑은 미 소유척 (非 所有的 ) 안 이1 로스요,
사람에 대 한 사랑은 순수한 아기-페 이 다. 하나닝 을 사 랑 한마는 것 은
열 정 ( passion) 이요, 시 랑을 사땅한마는 것은 동정 (compass ion ) 이t:-}. 얘

기에는 이원 성(二元性)이 았다. 그러냐 그것은 하냐넘파 사람이라는


두 큰 가치에 같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
은 사람의 아들 임 과 동시 에 하나닝 의 아들인 그가 하나닝 사랑하기
를 사람이 당연히 사랑해 야 할 그대 로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를
마만 하나넙만이 사랑하살 수 있는 강력한 긍흘로 사랑하는 이원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사랑은 하냐넙의 아들의 사랑이었다고 말하는 것 이외에는 예수
의 사랑의 덕을 기술할 다른 아무 적당한 방법이 없을 것 같다. 그의

19. 요 13:34, 15:12, 참고로는 악 12: 28- 34 , 마 22: 34-40 , 농 10: 25- 28.

26
제 1 장 영속적안 운제

영혼에 충만했먼 것은 사랑이 아니라 하냐닝이었다.


그에게는 다른 탁월한 미덕들도 있었마는 것을 야와 비슷하게 71 줄
하지 않을 수 없마. 그를 희망의 사랑으로 보게 하는 종말론적 〔終末論
的) 해석과, 그를 절대 순종의 사랑으로 보는 살존주의가 그의 사랑
을 파장하던 자유주의자의 둬릎 이었다. 이에 앞서 정통적 프로테
스탄트에서 그리스도를 모뱀자요 또 신앙의 먹을 주는 이로 믿는 일
과, 수도원에서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겸비에 놀라고 끌려드는 알 퉁
이 있었다 . 신약성서의 그러스도는 이렌 여 러 가지 먹을 가지고 있
으며, 그 댁들은 세속적, 문화적 지혜의 견지에서 봉 때에는 극단
적이고 균형을 잃은 것같이 보이는 그의 행동과 교훈에서 드러냐 있
다. 그러냐 그는 이렌 덕을 스스로 실천하거나 또는 그를 따르는 사
땀을에게 요구할 해에, 오직 하나닝에 대한 판계 속에서만 그러하였
먼 것이다. 왜냐하면, 이렌 덕 들은 언제나 천능하고 거룩하신 분과
직연하고 있는 사랑틀의 행동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렌
덕 들 이 극단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희망페라는 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마. 종말흔자로서 가장 잘
알려진 사계의 대변자안 알에르트 쉬바이처에 의하변, 예수의 특색은
사랑의 사람이라는 것보다도 대망의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에
시야적 약속의 실현을 열렬 하게 희망하고 있였다. 역사가 온천허 뒤
칩 힘으로써 악은 결국 극복되고 하나념의 주권이 확립될 것이 므로 이
사건에 대한 준비 외에는 그로서는 다른 아무 데에도 판싱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에시야가 강림하리라고 열
렬히 기마라는 사랑으로서의 행위가 이 대망에 의하여 결정되리라는
것은 선험적 (先險的)이라고 할 만큼 당연한 견 해가 아니겠는가? "고
쉬바이처는 말하였 다 20 여l 수의 교훈도 그 행위와 마찬가지로 이 희
망파의 판제에서 설명되었다. “만일 그 냐라의 종말론적 실현이 그의
섣교의 기본 요소였다연, 그의 윤리판도 전적우로 이에 좌우될 것이
다. 즉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한 준바로서의 회개가 그 주제로 되지 않
을 수 없 다 ...... . [ ‘회개 ’ 는〕 장차 옹 보펀적 완전을 성취하기 위 한 도
덕적 갱신인 것이마 예수의 윤리는 .... .• 전석 A로 초자연적 완성

20. A. Sch .veitzer, The Qμest 01 the H istorical Jesus , 1926 , p. 349.

27
에 대한 기대에로 정향되어 있다 "Zl 종말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에케 전 달한 것은 예 수 안에서 메시야적 미래
가 임박했다는 신 냄으로 말미암아 고양된 종말론적 기대 였다는 것이
다. 그러므로 초대 기독교의 윤라는 위대한 희망의 윤리로 표시되었
다는 것이다 .
예수를 사랑의 영웅£로 설영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경우에 있에
서 그것이 갚은 진리를 제공했던 것파 마찬가지로, 예수를 종말론적
안 배 경 에서 묘사한 종 말론자들이 현대에 공헌한 것도 큰 것이었마.
그들의 노작은 쉬바이처가 목적하는 바에 큰 도움을 주었마. 쉬바이
처는 “펀대와 현대 신학계에 예수의 존재가 결정적우로 영 웅석 위대
성을 가지고 있마는 것을 그러려 한” 것이었마 22 예 수의 희망적안
기대에 는 극 단 적인 것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하찮은 영광을 쿠하
든지 또는 도무지 영광을 기대하지 못하든지 했으므로, 이 점 에서 예

수와 그들은 달랐 마. 보통 도덕 은 마소 냉 소석인 색채 를 띤 자기 만족
에 머 윤든지 , 그렇 지 않으r넌 산에 대한 석당한 기디l 에서 양보하든지
하는 것이다 . 최고선에 대한 열렬헨- 기대는 윤리 자체의 변화를 가져
오지 않을 수 없는 것 이다.
그 러 나 1세기 팔레스딘의 둔명에서 멀리 떠 냐서는 예수의 이 철딱
한 기대 를 설영할 수 없는 것이며, 그가 그 제자들에게 이것을 전승
한 정도도 바로 이해한 수 없는 것이마. 그러나 종말론자들은 흔히
이 점을 망각하고 있는 듯하마. 예수의 희망은 하나닝 안에, 하나냥
을 향하여 있었다. 종말론자가 주장하려는 점은, 이렌 것이마 . 즉 예
수의 희 망의 소재 (iη)는 교의 (dog ma ) 였£며 , 예 수의 희 망의 대 상 (jor)

은 자연의 변질, 즉 안간이나 안간 아난 모든 것 -모든 지상적 존재 형


태의 변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쉬바이처는, 종말폰적 해석 을 정
의하여 말하기를, 종말론척 해석은 “예 수의 생애에 나타난 교의적 요
소를 비판적 £로 검 토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 말론은 ‘교의적 역사’
에 불파하다-즉 신학적 신앙에 의 하여 조성 된 역 사에 불파하마
교의적 고려가 ...... 예수의 결의를 인도했다”고 한 것이다 23 그 러으로

예수는 말세가 가까와서 시간이 열마 남지 않았다는 그릇펀 신념에 희

21 ‘ A. Schweitzer, The My stery of the Kingdom of God, 1914, pp. 94 , 100.


22. Ibid., p. 274.
23. Qμest of the liistoricιl Jesus , pp. 248 , 249 , 357.

28
제 1 창 앵속적안 문제

망융 갤였고, 제 시건의 일정한 경료를 그의 교의척 모형에 강력히 맞


추어 진행시키려 했다고 생각되였다 그러냐 사설, 신약성서에 묘사
펀 예수가 열혈한 희망에 산 것이 명백하다 핫지라도, 미래의 창시자
Cauthor) 로서의 그에게 제시된 살재는 교의적 으로 파악펀 역사의 경로
는 아니였음이 명백하다. 역사에 대한 그의 종말론적 견해는 시간이
엽마 남지 않았다는 점에 서 만 유일하고 중요하게 진보 사상파 탈랐던
것이 아니다. 그는 도대체 역사를 우선적으로 다룬 일이 없었다 . 그
는 다만 시간파 공간의 주되시는 하나념을 상대로 하였다. 그는 살아
계신 하냐님에게 희망을 두었다.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말미암아 사귀
들이 쫓겨 냐갔다. 하나념 의 사죄 (敬뿜)가 드러 나 보였마. 시 간들은
하나닝 손 얀에 취여 있였다. 그러므로 시간파 계젤에 대한 예고란 것
은 격에 맞지 않는 생각이었다. 여1 수의 열렬한 기대는 하나님 자신,
그의 영광의 나타낭과 그의 의(뚫)가 겨1 시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예
수에게 있에서 하나닝의 나라는 하나닝의 뚜렷한 동치에 비하면 오히
려 벨로 행복한 정지 가 아니었다. 하냐닝은 지금도 통치하신다. 그
러나 그의 통치 는 이제부터 모든 사람에게 나타냐게 됩 것이다. 예수
의 윤리가 그의 역사판에 의존하지 않았 듯이 그의 역사관도 그의
윤리에 의존하지 않은 것으로 브인 다. 즉 물 마 하나닝에 대한 그의
신앙의 반영이마.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신약성서의 예수를 설명하
는 데 있어서 극단의 종말론적 희망과 그에 따 르는 회개를 예수의 챙
위와 교 훈 의 판건(關짧)이라고 주장란다면, 그것은 신약성서의 사실에
배치된다고 아니할 수 없다. 예수의 격렬한 선언들 중에서 대부분은
캉차 올 나라의 기대에 판;년펀 것이라기보다는 매일매일의 자연적
자건들 안에서 하냐님의 현실적인 통치 를 싶핸하는 것이였다. 걱정하
지 말라고 한 그의 교훈도 미래의 대 파열파 갱신에 핀-한 것이라기보
다 일상 생 첼- 중의 하냐념의 보호에 판한 것이다. 그러고 원수블 사
랑하라는 교훈에 있어서도 하냐닝께서 B] 와 해를 의안파 불의한 자에
게 함께 보내 주 신마는 매얼매일의 일만석안 사실파 판계된 것이었
다 .24 예 수의 영웅적인 성격에는 희망만이 뚜렷한 것이 아니라, 영웅
적 사랑 과 영웅식인 신앙이 함께 뚜렷하역 이 요든 것은 또한 지금도,

24. Pr 6:25- 34 , 5:43- 48

29
긍후에도 잘아 게신 하나념과의 판계 안에 그 원천을 가지고 있다. 혜
수의 윤리의 열쇠는 종말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닙의 아들
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리 스도의 복종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기독교적 설존

주의자들은 극단석인 복종의 먹이 예수의 윤리의 특칭이라고 하였다.


그들의 선배가 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와 그의 교훈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한 가지 가장 탁월한 점에 캡중시키는 빅낭볍을 그들도 취한
것이었다. 그리하켜 불트얀은 말하기를, 예수가 선포한 하나닝의 뜻
파 그의 윤리를, 인 간에 대한 그리이스 사상의 이념과 자율(틴律)파
가치론(띈{直論)에 근거한 헨대 윤리와 구별하여 이해하려띤, 즉 유대
척 경건파의 판계와 상이점들을 고찰해야만 한다고 한다. 그러하면
“예 수의 윤리는 유대인의 윤리와 꽉같은 복종의 윤리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예수는 복종의 이념을 천 저하게 인식 하고 있었다는 점
이 간단하변서도 근본적안 치이임을 알게 원 것이마" 25 불트만은 에
수의 철대 복종의 원리 흘 설명함에 있어서 , 여1 수는 하나닝파 사랑
사이에 중개적안 권위를 두지 않았마는 점을 지석하였다. “그것이 하
나닝의 영령이라고 보여질 예, 그에 대하여 진섬으로 수긍하는 경우
에만, 진정한 절대 Cradica l) 복종이 성립되는 것이다 스스로 깨
단지 못하고 다만 권위에 복종한다는 의미에서 순종하는 것은 진정한
복종이라 할수 없다 뿐만 아니라, 철대 복종이란 것은 인간시 그
전 존재를 다 포함시 키 는 떼에만 았을 수 있는 것이다 . “그가 명령
받은 대로 무엇을 복종한다는것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뷰종석 존재
가 되 는 경 우에 만 절대 복종인 것 이 다 그러 고 그가 이 것 이 냐 처 것 야
냐의 선택에 직 1건했을 때 중립적 인 위치플 찾 o 려 하지 않을 뿐 아니
라, 선파 악 사이에서 결단의 점을 기쁘게 지는 것을 의미한다 .26
뿐만 아니라, 사랑이란 말의 해석에 있어시도, 이상에 말한 것과
같은 사실을 말견한다. 예수는 복종하되, 철저허 복종하였마. 그것은
처음부터 신도들의 눈에 띈 일이았다 . 그들은 예수가 죽는 데 이르기
까지 복종한 데 대하여 놀랑게 생각하고 있었다. 갯세마네에서의 그의
고민파 기도에서 그의 복종의 모송을 보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돗을

25. Rudolf Bultmann , Jest,α and the Word, 1934. pp. 72-73.
26. Ibid. , pp , 77 , 78.

30
제 1 장 영속적안 운체

이루려 항이 아니라, 오칙 그를 보내신 야의 룻을 이루려고 하능로부

터 내려왔마는 것을 제자들은 보았던 것야다. 야 한 분의 복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땅이 의롭게 되다는 것을 그들은 커뻐하였다. 그들
은 예 수카 하나남 의 아들에 시 연서 , 고난받음으로써 복종을 배 우고 하
늘에 있는 대제사장되신 것을 믿고 위로를 받았다 27 그들은 이 절
래 복종。1 란 것이 중개적인 권위안 율볍을 초월하는 것과 연결판 것
이어셔 모든 사상파 동카와 모든 드러단 행위를 포함한 것을 알고 있
였다. 그러므로 누쿠를 막론하고 복종의 책임에서 도피할 수는 없였
먼 것이다.
그러나 이 살존주의적 묘사안 복종하는 그러스도의 츠상에는 어떤
부족한 정야 았다. 켜커서는 한 가지 먹이 다른 모든 덕의 열쇠가
되도록 설명했을 뿐 아니라, 이 렐쇠되는 덕 자체가 본질적 ó 로 추
장화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덕챙은 극단화한 하나넘의 현
섣에 서 추출(抽出)한 추상이 다. 이 살존주의 자가 말하는 예 수는 마가
나 바울야나 요한의 문서에 나타난 그것 보다도 칸트의 것에 더 가장
디. 불트만은 복총의 복음적 이념의 진정한 내용올 발견하지 옷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예수는 “의무나 선에 대한” 아무 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였마. “그러고 하나념께서는 그를 지끔 여커서, 온갖
생활의 구체적 상태 안에서 반드시 컬단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두
셨다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에 대한
하냐닝의 요청이 무엇임을 반드시 알고 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어떤 엘정한 표준으로 무장하고서 결단의 위 기를 맞이하는 것
이 아니다 . 그는 튼튼한 키초 위에 서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혼자
서 콩허한공간에 서 있다그(예수)는오직 하나닝의 뜻 앞에 서
있는 캐안을 보았다 예수는 어떤 것은 해야 하고 어떤 것은 안
해야 한다는 테 대한, 얀안에게 공통될 이지척 이론야라는 의미에셔
의 윤리를 카르천 것이 아니였다 "28 뿐만 아니라, 하나념의 돗에는
으레 복종해야 한다고 했지만, 예수의 하나넘 캐녕은 그의 복종 캐
냄파 얀찬가지로 공허하고 형식적안 것이었다고 그들은 말하고 였
다. 마치 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넘은 인간애의 상대자였던 것

27. 빌 2:8 , 악 14:36 , 요 6:38, 롱 15: 10 , 히 5:19 , 5:8.


28. Op. cit. , pp. 108, 85 , 84. C f. pp. 87 88.

31
과 같이, 살존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닝은 도덕적 결단의 상대자
로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결단하지 않을 수 없케 하
는 능력이에서 “사랑이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한 사실적인 파악에
서만 찾을 수 있는” 그이가 하나넘이다. “자기 자신의 생활의 본질。 l
자기 결단-의 충분한 자유 안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알지 옷하는 인간
에게 있어서는 하나닝 자신도 사라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9 사밴
적 또는 자연주의적 신판에h鋼)에 대한 실존주의적 항거 의도는 이해
할 수 있마. 그러나 20세기의 자유 개념을 예수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신약성서의 그퍼스도에 대한 하나의 풍자화 o펴행IJ 휩)로 옐어지게 펀다.
하냐넘에 대하얘 섣대 복종한 예수는 또한 하나닝의 돗이란 모든 자
연파 모든 역사의 창조주요 주재자되시는 이의 뭇임을 잘 알고 있었
기 띠1 문이마 . 하냐넙의 뭇어1 는 구조외- 내용이 있는 것이마. 그는 십
계명의 빌-령자이다. 그는 긍흘을 기빼하시고 제물을 즐기지 않는다.
그는 그의 영령에 복종하기룹 요구할 뿐 아니라, 그를 밍고 그를 사
랑하기 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고 그가 창조하고 또 사랑하는 인간들
이 또한 서로 사랑하기 를 요구한다. 이 예수는 철저히 복종하였 다.
그 러 나 그는 또한 믿음파 사랑만이 복- 종을 가능케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 그러고 이 모든 은사들은 마 하나닝이 주는 것임을 알았
다. 그의 복종은 “우조건적”이타는 말로 표시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닝과의 판계에서 그와 만냐는 결단의 순간에 되어지는
것이었다. 그러으로 이 성격의 철저함은 그 자체 안에 있는 것도 아
니요 철저한 사랑과 희망과 민음에서 분러시킬 수 있는 무엇도 아니
었다. 이것은 아들로서의 복종이었다. 복종을 강요하는 어떤 원칙에
복종한다는 것만으로는 규정 지을 수 없는 그러한 아들의 복종이 다.
개신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에 주의 를 집중시키는 것과, 수도
원에서 그리스도의 깊은 겸비에 판성을 모A는 것을 고찰한다연, 그
것이 둘 다 같은 결 파를 안도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마. 그는 극단
의 신앙파 철저한 겸손S로 특정을 상았마. 그러나 신앙파 겸손은 그
덕옥(德目) 자체로서 다루어질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에 대한 관계
성에서 다루어질 성질의 것이다. 즉, 마른 이들의 옥전에서 챙동하

29. Op. cit. , pp. 103, 154.

32
체 1 장 앵속적인 운제

는 관슴이 다. 안간에 대한 예수의 신앙。1 라는 판점에서 그를 고찰할


때, 그는 매우 회의적안 인물로 보안 다. 그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
예언자를 폴로 쳐 죽야고 그의 묘벼를 꾸미는 안간들을 상대하는 컷
이 옳다고 믿는 때문야다. 그는 그의 사회에 존속하고 있는 제도냐
전통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 대해서도 별로 신뢰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 념어질 것。1 며 가장 굳센 사람까지도 시련
의 날에 견디지 못할 것올 알고 있였다. 신약성서의 예수가 인간성의
선한 것을 받고 또 그것을 신뢰함으로써 그 속에 강추셔진 션을 。1
끌어 낼 수 있다고 민논 이야 71 같은 것은 감상척인 소설에서만 기
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냐 이러한 회의적인 태도에도 불
쿠하고 그에게는 놀랄 만큼 불안이 없였다. 그는 천지의 주재 자를 아
버지라 부르연서, 그 아버지 하나닝에 대하여 영웅적안 잔양을 가지
고 있었다. 그는 가족도, 먹을 것도, 거처도 없는 궁핍한 자로서 오
직 하나넘께 그를 의탁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배엘매얼 먹을 것을 줄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고 맨 냐중에는 그의 치욕의 죽음을 요구한
그 하냐념께 그의 영혼을 바쳤다. 그 하냐닝껴] 그는 또한 그의 민족
을 의탁하였다. 스스로 제 살 궁리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 의만 구하는 민족에게는 하냐닝께서는 펄요한 것을 마 주신다고
믿었기 때 문이었다. 보통 안간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부류의 신앙은
극단적이 라고 느껴질 것야다. 인간을 냐케 하고 또 붙들셔 주기도 하
지만 그와 동시에 죽음을 선고하는 하나닝의 권력에 대하여 깊은 의
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
념 아들의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은 자연의 아들들이나 안간의 아들
들。1 냐 또는 맹 목적 기회의 아들들에게 있에서는 너무나 극단적안 믿
음이기 때문이C-}.

예수의 경바(說싹)도 파도한 것이었다. 그는 죄안과 추방만들과 함


께 살았다. 그는 제자블의 말을 씻였다. 그는 제사장들파 군인들에
케 냉매와 욕설을 받았다. 그가 마시 살아 나시고 부활하신 주넘우로
안정된 떼, 그의 겸 비의 위대함이 그의 신자들에게 놓랑파 의혹을 일
으컸다. 그는 부요하였으나, 스스로 반곤하케 펀 것은 그렇게 됨으
후써 많은 사란을 부요하게 하려는 것이었마. 그는 하냐닝의 형상이
었우나 종의 형체 를 취하였다. 그는 만물아 그로 말마암아 지읍을

33
받은 말씀 Cthe Word) 자신이었으냐 그는 육체를 이루고 오셨다.
사람의 빛인 생명이 안간들의 암흑 속에 들어온 것이다. 잔살로 예
수 그라스도의 겸바에는 균형 잡히지 않은 무엇이 있다. 싶존주의
자들의 뒤를 이에 일어난 새로운 학파들이 예수를 과도하거1 겸바

한 사람이었다고 이해하려는 것은 우리한 태도라고만 할 수는 없


다. 그러나 예수의 경바는 하냐념 앞에서의 겸비였다. 그리고 다
만 아플로서의 겸바로얀 이해될 수 있는 것이였다. 그는 사람들 앞
에서 열동강을 가지는 부류의 갱이를 가져 본 적도 없였고 그렇게 나
타내거나 쉰하거나 전수〔傳授)한 일도 없였냐. 그는 바리새안에게나,
대제사장에 게 나, 빌라도에게나, “저 여우”라고 한 해훗 앞에서 자 71
포기적안 흔석을 보인 알。 l 없였다 . 그의 메시야적 자기 의식이 어떤
의마에서 진살한 것이였든지 간에, 그는 켠위를 가지고 말했 A역 권능
을 행사할 자신을 가지고 행동하였다 . 그가 “선한 선생닝”이라는 칭
호를 거부한 것은 다른 선생들이 자기보다도 더 존경할 만하다는 것을
의마항이 아니었다. 다만 “하나닝밖에는 선한 이기- 없느니라” 하는
것을 말하려 한 것뿐이였마. 그의 생애에는 그가 죄안 들에게 무슨 혜
택을 업혀 주어서 죄인들이 불안과 사과의 표적을 가지고 마니게 하
는 그런 얼은 전혀하지 않았다. 그의 겸비는 죄인들로 하얘금 새로운
위신을 가지게 하는 겸바였으며 “선하다 “의롭다”하는 자기 변호적
인 가장으로 말마암아 낮아졌던 자에게 합당한 위신을 부싹하는 것이
었다. 이것은 말하자연 존대하는 겸비요, 경바하는 존대여서, 만얄 그
의 생애가 근본적 A로 하나님과 판계되어 있마는 것을 계산에서 빼어
놓는다면, 부조리(不調쩔〕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양
천하다거 니 수줍다거 나 하는, 자기 자신의 분수를 넘 지 않고 또 마른
사람의 우월감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그렌 것과는 온전히 마른 종류
의 겸비이다. 이것은 또한 헬라안의 미덕안 절제, 즉 자기 자신의 저l

한 안에 머블려 있어서 질투하는 신들의 바위를 건드리지 않는마는


것파도 다를 것이다. 그리스도의 겸비는 존재의 분량 얀에서 자기의
정확한 소재(所在)é를 지키는 “철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닝에 대한

절대 신뢰와 그 결과로 산이라도 옮걸 수 있을 힘을 얻는 겸비이마.


그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비밀은 그의 하냐넙 판계에서만 말아 낼 수

있는 것이닥‘

34
제 l 장 영속적안 문제

그러므로 예수의 덕행 중 어느 하나만을 가지고서라도 그의 풍격과


교훈을 이해하는 옐쇠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하냐하냐는
다 확실히 극단적안 것이어서 다만 하냐닝과의 판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훌륭한 것 중 어느 하나만을 가지고 그의
전 부를 기술하려 는 것보다도, 우리가 이상에서 참고한 것과 그 밖에
여러 가지 를 천체적 A로 보아 그를 설명하는 것이 물론 더 정상석인
것이다 . 어 쨌든 간에, 그의 특이함파 영웅적인 모숭, 그의 인 격의 극
단적안 것과 장염함 동을, 특히 도 덕적인 면에서 고찰할 해, 그것은
그가 하나 닝에 게 절대 헨신함과 일펀 난싱 그를 신뢰한 그것에 기안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그를 하냐닝의 아들이라는 말로 부르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 적당한 상정석 용어도 없다는 것을 딸견할 수
있 는 것이다 .

그러므로 각이한 문화를 가진 안간들이 예수 그러스도를 맏는 신앙


에 들어올 해, 그들은 예외 없이 하나넙윤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서 아들을 알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
다. 예수 그리스도를 맏고 그에게 복증하는 판계에 들어간 사람은 그
리 스도가 어김없이 지 석하는 하냐넘파의 관계 를 가지지 않을 수 없
는 것이다 . 하나념의 아들인 그는 인깐들이 사회 생촬에서 가지 는 여
러 가지 가치들에서 떠나 오직 한 분 선하신 하냐넘만을 가르친 것이
다. 사령 들이 의지하고 사는 모든 켠력들에서 떼나 오직 한 분 전능
하신 하나 닝을 지 향하게 하 였 다. 역사의 여러 가지 해와 계절 들에 따
라 사랑들이 희망도 가져 보고 공포도 가져 보고 하는 데서 떠나 모
든 시간의 주 가 되시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바라며 두려워하게
하 였마. 그는 온갖 제약판 것 에서 떠나 무제약의 것을 항:하게 하였 다.
그러나 그는 현세에서 떠나 다른 세계로 주의를 몰리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모든 세계, 현세와 내세, 물질 계와 정신계 둥 모든 세계

에서, 이 모든 세계 를 창조하신 이, 그러고 이 모든 세계에 매하여는


온전히 티-자 ( 他者)안, 오직 한 분 하나닝 에 게로 지항:하게 하였마.

그러나 이것은, 도덕적으로 고찰할 혜, 그리스도의 만연(半힘j) 밖에


설 명 하지 옷한 것이다. 그 다른 반연이 란 것은 이상에서 장시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넘파 사람파의 판계 안에처 인간을 사랑하는그것이다.
그가하나 넘 잎 에서 사랑과희망파믿음과복-종파 겸 바로하나닝의 도덕

35
척 아들 。1 되어 있는 판계상, 그는 또한 아어지 릇을 사 랑들에 게 냐다
내 는 도덕적 중보자가 되는것 이다. 二L 가온천한 안간적 에혹스를 가지

고 하냐냥 아버지 블 사랑했기 혜문에, 그는 또한 온천한 하나남의 아


가페를 가지고 안간을 사랑하게 되었 다. 하냐넙 은 사랑이시기 해운。 1

마. 그가 하나넙 아버 지의 뜻에 절대 복종하였기 때문에 그는 사람


을 향하여 권위를 행사할 수 있였다. 그 자신의 뭇에 복종하라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의 돗에 복종하라고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닝 얀에 희망을 가지고 있기 해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약
속을 줄 수 있었다. 그가 신실하신 하냐념에게 온전 혀 신뢰하였 기 혜
문에 사람을 향한 그 자신의 신실성에도 신뢰 성 이 있었마. 그가 온
천한 안간적 겸바로 하나님을 높였 기 때문에 그는 또한 모든 무자
격한 안간블에게 좋은 선 불 을 줍 o 로써 안간을 겸 ul 하게 하였다. 에

수 그러스도의 아버 지가 어떠하신 데 짜라, 아들인 그도 그 렇 게 펀


것이마. 하냐닝 아버 지에 대싼 아들의 판계는 이 렇 게도 볼 수 있고

저 렇 게도 볼 수 있는 불분영한 것이 아니라, 0 1 것파 저것 을 함께 봉
수 있는(a mbi va lent) 것 이 었 마. 이 것 은 이 중의 운동을 내 포하고 있 다 .
사 란파 함께 하냐 넘을 향하고 하나념과 함께 사람을 향한다. 현세로
부터 타계로 헝:하고 타계로부터 현세 에 향한다. 행 위로부더 은헤 로,
은혜로부터 행위로, 시간우로부터 영원 에, 영원에서부터 시간적안 것
에 향한다. 하나닝의 도덕적 자걱 A로 볼 해, 예수 그러 스도는 하나
닝 절 만, 사람 철만의 중간적 존재안 것이 아니 라 단일한 안격우로서
온천한 사량으로 하냐닝을 향한 것이었으며 그의 아버지와 온선히 합
치 완 하냐닝 o 로서 사람을 향한 것이었다. 그는 중보적 ( mediato띠1)
존재 요, 중간석 ( med ian ) 존재 는 아니 었 마. 그는 중앙에 있 어 서 하냐
닝의 사랑파 사람의 사랑을 빛 내 는 분이 아니다. 그는 중간에서 한펀
으로 하냐닝께 복종하고 다른 한펀으로 가야사에게 복종한마거 냐, 하
냐닝을 받고 또 자연을 밍는다거나, 하냐냥에게 희 망을 두고 또 안
간 행동에도 희망을 건 다거냐 하는 이가 아니다. 그는 하나닝 A로부
터 사란에게, 사람으로부터 하나닝에게로 계속적으로 교매하는 운동
의 초점 으로 존재한 분이시마. 그러고 이 운동들은 질적 A로 다른 것
이어서, 말하자연, 아가페와 에 로스, 권위와 봄종, 약속과 희망, 겹
비와 영화, 진살파 신되 둥 이다.

36
체 ! 장 영속적안 운제

도댁적인 것 이외의 마 른 변에서도 함께 고찰하여야 예수 그러스도


를 정망하게 기술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나 또는
신학에서 지적판 바와 같이 이런 각 방변으로서의 연구는 결국 진행됨
에 따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예수 그러스도가 사랑에게 행사한 권
능파 강화력은 자신에게서만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닝의 아들
로서의 그 자신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의 아들됨 안에서 이것은 이
중의 갈을 통하얘 냐타난다. 하나닝을 향하얘 사는 사랑, 사랑으로
더 불어 사는 하나 넘이 그것이마. 그를 믿고 그의 하는 일에 충성한다.
는 것 은 사람으로 하여 금 세 상으로부터 하나님 께 로, 하나닝 으로부터
세상으로 이중적인 운동을 하게 한마. 신학이 이 사실을 바로 설명하
는 데 살패한다 할지 라도, 기 독교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가지고 그리
스도와 함께 생활하는 경우에는 。 1 것에 눈 뜨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닝을 위하얘 모든 것을 버리라는 도전을 받고 있
음과 동시에 언제나 또한 이 세상으로 냐아가서 영령받은 모는 일을
가르치고 실행 하라는 분부를 듣고 있기 해운。l 마.

3. 문화의 정으I C定義) 에 관하여

우리는 이제 그러스도의 의미에 대한 불충분싼 정의로부터 문화라


는 의마 를 규정하는 일로 옮기게 되었다. 그것도 그러스도를 정의
하던 해와 비슷하게 극히 희박한 형태로밖에 규정 지을 수 없을 것
이 다. 그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 교회는 끊임없이 고
투(줍關〉하고 있다고 말할 때 우려가 그 말을 어떤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알까 ?
이 어 휘 에 대히여 신학자들이 내리는 정의는, 그 성질상 병신도들
이 내리는 정의와 같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평신도로서는 전문적 안
인류학자로 말마암아 제기된 논제에 개입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
나 적어도 처음에는 신학적인 설영이 붙지 않은 현상에 대한 정의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기독교안들 중에서 논의되는 점은
바로 야 신학적 설 영 안 것이다. 어떤 신학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문화
라는 것운 옴전히 세 속적 인, 그 본질상 우신적 (無神的)안 것으로 되어

37
있야서 예수 그러스도의 하나닝에 대하여는 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
나 천혀 판켠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또 어떤 신학자
에 의하연 문화란 다만 소극적인 의미, 즉 하나닝을 적대하거나 우상
숭배로 하는 갱우에만 무신적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신학자에 의하
연 문화는 하나닝 또는 하나닝의 법칙에 대한 자연적, 합리적 지식에
든든허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기독교안으로서는, 적어도 그 출
발에 있어서는 아주 신중하기 때문에, 이상에 열거한 그 어느 하나에
도 가담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논하고 있는 문화란 것은 헬라 · 로마 문명이라든가 중세기
또는 서양 운영이라든가 하는 어떤 특수한 사회의 그것에 국한된 것
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인류학자들이 하는 것파 같이, 어떤 신
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본질상 서양 문영파 판제되셔 있다고 생각
한다 이 서양 문명이란 말이 1 세기부터 시작된 하나의 계속되는 역
사적 사회를 지칭하는 것안지 또는 토인바가 말 하는 바와 같이, 일정
한 그리 고 다른 문화들을 흡수하여 친화(親和)한 한 문화 체 계 를 말

하는 것안지블 막론하고, 그것 을 기독교 문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 그러 므로 에 른스트 트휠취 (Ernst Troel tsch) 는 기 독교와 서 양 문화
는 너무나 불가분적으로 서로 영키어 있기 때운에 기독교안으로서,
다른 문화 아래 있는 사람에게 자기의 신앙을 제대로 말해 줄 수 없
으며, 다른 문화 아래 있는 사광은 또한 그 자신이 서양 세계의 한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
그러나 트휠취 자신도 그러스도와 서양 운영 사이에 있는 긴장성에
대하여 상당한 경 계를 보이고 있었마. 그리하여 서양안 사이에서도
예수 그러스도가 단순히 서양 문명 사회의 한 사람으로 되어 있지 않
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 뿐만 아니라, 동양의 기독교인이나
또는 어떤 새 문명의 단생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서양 운명적안
그러스도에만 판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양석안 신앙파는
구멸되는 그러스도, 즉 마른 문화들에 적합하는 그러스도에 대하여도
판심을 가지고 있마. 그러므로 우리가 논하고 있는 문화란 것은 어떤

30. Ernst T roeltsch , Christiaη Thought , 1923, pp. 21-35. 그려 고 그의 저 서 Die


Absolμtheit des Christentμms, 1929 ( 3 rd ed. ) 과 Gessammelte Schriften ,
Vol, n , 1913 , pp. 779 ff. 참고.

3R
제 1 창 영속적안 푼제

특수한 현상을 말하는 것。1 아니라, 일 반적인 것을 의마한다. 그렇다


고, 일반적인 것이 특수한 형식을 취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살파
서양 기독교안으로서는 서양적안 용어로밖에는 문제를 다룰 수 없다
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우리는 또한 문화란 것을 안간 사회 조직의 어떤 특옐한 변에만 판
련시켜 정의하려는 좁은 태도를 취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카령 과학
과 철학에 대한 그리스도의 판계라든가 계시(혈示)와 이성(理性)의 문
제라든가 그러스도와 정치 조직의 판계라든가 교회와 국가의 문제라든
가 하는 것 에 국한시 키 는 것 파 같다. 부르크하르트 CJakob Burkhardt)도
이란 의미에서 “문화”를 종교와 국가에서 구벨하였다. 그는 이 세 가
지 세력, 즉 종교와 국가와 문화를 “서로 온천히 이질적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정의대로 한다연, 문화란 것은 종교냐 국가와 달라
서 온천히 바권위 주의적 (nonauthoritarian) 안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
은 “물질 생활의 향상 또는 정신적 도덕적 생활의 한 표현으로서 자연
적 으로Cψoηtaηeously) 일 어 난 모든 것의 총칭 이 다. 즉 온갖 사회 적
교류, 기숭, 예술, 문학, 파학 등이 마 그것이다. 이것은 다양하고
자유로운 영역이나 반드시 보펀적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여하튼
그것에 대하여 강제적 권위를 행사할 수도 없는 것이다 "31 이련 의
미에서의 문화의 최첨단은 언어 (speech )이다. 이란 정신의 최전선의
표현은 예술에서 말견된다. 불론 문명의 이런 요소에 대한 그러스도
의 판계는 특수한 운제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 사이의
경제선을 명확하게 그을 수는 없으며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에서
일 어냐는 것파 문화에서 생긴 다는 것 사이에 분영한 경계를 정할 수
도 없다. 그러고 권위주의와 자유와의 구별도 부르크하르트가 생각
한 것같이 확연하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문화는 종교를 배제하는
성질의 것으로 정의한마는 것은 극히 자의척(짱、意的) 이며 또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마. 그리고 후자가 A례 그리스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도 잘옷이다. 그것은 우리가 논하고 있는 문제 중에
서 종교에 판한 것이 제일 어려운 주재이며 그 중에서도 우리의 사회
척 제 신념과 그리스도와의 판련성이 가장 어혀운 문제거리이 기 해문
이다. 그리고 문화라는 말을 운영이라는 말에서 쿠멸하여 정의한마

3 1. F orce and Freeιom, 1943 , p. 107; cf. 140 ff.

39
연 그것은 문화를 너무 좁은 뭇으로 규정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연,
운영이란 것은 더 진보한, 어쩌띤 더 도시적이고, 기술석이고, 노련
했다고까지 할 수 있는 사회 생활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32
우리가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주제로 논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안간
활동의 전석인 파정파 그 활동의 전적안 결과를 가리켜 혹은 문화라
하며 혹은 운영이라 하는 것이 통상적인 언어로 되는 것이다 .33 문화
란 것은 안간이 자연적 안 것 위에 억지로 뒤집어 씌운 “안공적 안, 제
이의 환경 ”이다. 이것은 언어, 관승, 이념, 신념, 전홍, 사회 조직,
전해받은 공예품, 기술석 진전, 그러고 가치 등A로 구성된 것이다.

이 “사회석 유산 곧 “독특한 살재 " (reality sui generis) 란 신약성


서 기자들야 “세상”이라는 말 속에 흔허 포함시킨 것이어서 여러 가
지 형식 ò ;료 표시되였지만, 여하튼 기독교 신자도 다른 사람들과 마
찬가지 로 이에 속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이 른 바 문화란 것이 곧 이것-윤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문화의 “본질”을 정의하려고 들지는 뭇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주-요한 특칭들을 기술할 수는 있다. 우선, 이것은 사회 안

에서의 인간 생 활에 불가파하게 얽히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사회


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살고 경험하는 바외- 과학적 A로

판찰한 바에 의 하면, 문화의 븐질적 인 사실은 안간들을 항구적 그룹


들로 조직화한 것이마”라고 말리노브스키는 말하였다.35 이것이 본
질적인 사살인지 아난지는 막론하고, 이것이 사실의 본질적인 한 부
분임에는 틀림 없마. 개안을로서 문화를 각자의 t낭볍대로 사용할 수
도 있고, 그들 문화의 요소를 언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32. Bronislaw Malinowski , art. “ Culture" , Eη ëyclo상짜 a of Social Sciences,


Vo!. f'f , pp. 621 ff.; Christopher Dawsoll , R '1ligioη and Cuitμre, 1947,
p. 47, Oswald Spengler , The D eclin~ of th ~ W est , 1926, Vo l. 1. pp. 31
f. , 351 ff
33. C f. James Harvey Robinson. ar t. “ Civilization" , Eηcyclopedia Britannica,
14th ed. , Vo l. V , p. 735; Carl Brinkmann , ar t. “ Civilization>> , Eηcy­
cloþedia of Social Scieηces, Vo l. m, pp. 525 ff.
34. Malinowski , loc. cit.
35. Ma!inowski , A S cientific T heory of Ctμture and _Other Essays, 1944, p.
43.

40
제 1 자 C영속척안 운제

윌·이 사용하든치 변경하는 것은 개안적으로가 아니라, 사회적 A로 하


는 것이다 .36 문화는 사랑들이 받고 또 물려 주는 사회척 유산이다.
온천허 사사로운 것이어서 사희 생활 속에서 끌어낸 것도 아니고 그 속
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 것은 문화의 한 부분야하고 말할 수 없다. 그
와 동시에 사회 생 휠 이란 것은 언제나 문화적인 것이다. 인류학은 순
천한 자연적인 사회, 즉 고도로 구벨되고 숭득완 승판파 판승, 사
회 조칙의 형식 등의 특색야 없 는 낭만적인 사회라는 생각을 완전히
말살해 버린 것 같다- 운화와 사회적 살존은 멜 수 없는 판계에 있

둘째 로, 문화는 안간의 성취 이다. 인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노
력해서 이루었다는 사실을 들어 。 1 것을 자연과 구별하는 것이다 . 캉
은 자연이다. 그러냐 운하는 문화이다. 석영 (石英)은 자연이다. 그러
나 그것으로 만든 펠 촉은 문화이다. 고함 지르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요, 언어 는 문화적인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마음과 손이 만든 것
이다. 어느 공장, 어느 얘에 안간。1 고얀하고 힘써서 만든 그 무엇을
우리에게 유산으르 준 것이 곧 문화이다. 안간 아난 것의 얘개를 통
하여 주어진 것이라든지 또는 안간을 통해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결과에 대한 의도나 진행 과정에서의 통제 없이 되는 대로 온 것이
라연 그런 것은 운화라 할 수 없다. 그 러으로 문화는 언어, 교육, 전
통, 신화, 과학, 예술, 철학, 정치, 뱅플, 의식, 신앙, 발영, 기술
등을 포함한다. 그러고 운화가 이렇게 과거 안간들의 노력의 결정으
로 주어진 것이라연 이것을 받는 시-랑도 자기로서의 노력과 성취 없
이는 결코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연의 선물은 안
간의 의도나 의식적 노력 없이 받아지고 전 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러나 운화의 선 물은 그 받는 사랑 펀에서 애쓰는 것이 없이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언어는 애써 노력한 후에만 얻어진다. 끊엄 없
는 노력 없이는 정부가 유지될 수 없다. 파학적 방법은 매 세대마마
다시 거듭 실증함으로만 가능하게 된마 . 출질적으로 나타냐는 문화 활
동까지도 그것 을 쓰는 법대로 쓸 줄 아는 학습 파정을 경파하지 않고

36. 운화에 대 한 개 언과 시-회 의 판계 에 있에서는 Ruth Benedict , Patterns 0/


Cμlture, 1934 , Chapters VlI. VlII을 참조하라.

41
‘’

는 쓸모 없는 것으로 되셔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고대 문화의 표적


들을 식멸하는 데 있어서든지 또는 현대 운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든지 이 특정만은 언제나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간이 알
정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 놓은 무엇을 다루고 있는 것이며 인간이
할 수 있고 또 하여야 한 무엇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안간이 만들
고, 안간이 의도하는 세계라연 그것이 곤 문화의 세계인 것이다.
세째로, 인갓의 성취물이란 것은 다 어떤 목척 또는 목적들을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말하자연 운화란 것은 가치의 세계이다 . 우리가 자연
에 대하여 가치 문제흘 논한마든지 또는 자연석 현상에 대하여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있느냐 없느 냐 하는 것은 아직 더 토론할 얘지가 있
는 문제다. 그러나 운화현상에 판한 한이렌 문제는 결코 얼어나지 않
는다 . 인간이 만든 것이라든지 또는 만들고 있는 것은 에외 없이 어
떤 옥석을 위하여 그러하는 것이마. 이것은 어떤 선한 것에 봉사하려
는 의도에서 생기는 것이마 37 고안자나 사용자의 마음에 있는 어떤
옥척과 판련시키지 않고서 이것을 운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원시 미
술이 우리에게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의미와 표정우
로 형식, 음률, 색채 등을 통하얘 안간의 판심을 표시하는 것이기 해
문이 마. 그러고 우리도 이렌 것에서 같은 판심을 느끼기 때운이다. 옛
날의 도자기 파펀을 우리가 즐겨 연구하는 것은 옛 사랑이 무엇을 목
적했으며 무슨 앙볍으로 그것을 성공시키려 했는가 하는 것을 알아
내기 위해서이마. 우리가 과학과 철학, 기술과 교육 등에 판하여 바
관할 해 그것은 옛 것이든 지금 것이든 간에, 그 작자의 의 도한 가치
와 우리 가 느끼는 가치에 판련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게 펄 것이마. 인간의 엽적이 목적한 바는 째로 변할 것이 사실이다.
실용을 목적하고 만든 것이 섬미적(審美的)안 만족이냐 사회적 조화를
위하여 .!i!..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문화에 부딪치는 한, 그것
을 가치 판계외 분리시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란 안간척 성취와 판련되는 가치는 주로 안간을 위한 선이라는
가치이다. 문화가 이바지하 려는 목표가 이념석안 것이냐 자연적인 것

37. 말리 노브스키 도 문화의 중성 개 녕 을 논할 예 “ an organized system of


purposive activiti es" ( ~목적을 가진 팔동의 조직된 체계)라고 장의하였다.
A Sci eηtific Th eory of C,μtμre , chps. V , 꺼 •

42
제 l 장 영속적안 운체

냐, 또는그가치 이념이 정신적 이상을 위한 것이냐자연척 복리를위


한 것이냐, 즉 생러척 존재로서의 안간을 위한 목적이 냐 하는 문제는
문화척 사회 내의 철학자들이 논의를 거듭할 만한 주제이 마. 그러나
어떠한 경 우를 막론하고 안간은 자기 지-신의 복리에 이바지 하여야 한
다는 점파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라는 점에는 합치되어 있다 .38 인간
이 문화에서 실헨하려는 자기 활동의 목적을 규정 짓는 데 있어서
무엇 보다도 자기 자신 을 최 고의 가치 로 간주하여 또한 다 른 모든 가
치 들의 원 천 무로 생 각하면서 그 일을 시 작하는 것은 나무라지 못할
사실이다 좋 다는 것은 그를 위하여 좋마는 뜻이다. 문화에 있어서,
가령 동물들을 길들인다든지 또는 멸 종시 킨 다든지 하는 것을 결정하
는 갱우에 그 동물이 사람에게 유익하냐 아나 냐를 넌 저 보는 것이 사
실이다. 신이나 또는 신들을 예배하는 것도 그것이 인간 생 활을 유지
하며 진 보시 키는 데 필요하냐 않느냐 하는 데서 결정 되는 것이며, 이념
또는 이상(理想)에 있 어서도 인간의 자기 살현 을 위 하여 그것을 추구
하는 것이마. ‘인간에게 좋은 것 ’ 을 추구하는 것이 문화 사엽의 주요
한 것 임에 는 틀 림 없 으냐 그 렇 다고 이 인간중심 주 의 (anth ropocentri sm )
가 어떤 배타석안 종류의 것이라고 규정 지을 것은 아님이 확 실하다.
인간이 어떤 다 른 존재의 복리 를 위하여 노력하며 또 무엇을 산출하기
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 는 일 일 뿐 아니라, 진 실 로 그들의 문화
촬등에 있 어서 인간 존재 를 초원 하는 동기 플 워하여 알하고 있다는
사실을 λL 여 주고 있 다. 토템 (동불 또는 어 떤 자 연을융 자기 종 족의 조
상이라고 만고 숭 배 하는 것-역자주) 숭배 시대 로부 터 현대 사회에 이 르
기까지 안간은 인 간 이상의 존재 질서 를 포함한 무엇에 자신들을 일
치시키 고 있는 것 이마. 그들은 자신 들을 생명의 대 표자로 자인한마.
그러 하여 에 솔파 종 교에서 뿐 아니 라, 사회 조직과 법 플에 있어서도
인간 이외의 어떤 존재에까지 어느 정 도 생영의 존숭(尊 옳) 을 표하고
있는 것이마. 그틀은 이성석 (理性的) 존재자의 질서에 있어서 자신들
을 그 대 표자로 안정 하고 있는 것이마. 그리 하얘 ‘이성에 좋은 것’을
실현하려 고 이} 쓰는 것이 마. 그들은 또한 신들을 섣가고 있다 . 그러 나

38. Nikolai H artmann , Ethics (1 932 ) 눈 어 떤 의 마 에 서 는 한 위 대 한 운화 철


학이 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서는 시 종 가치 의 초월적 , 객 갚적 성격을 강
조하 였 A 며 동시에 인간 가치의 우위성 을 옹호하고 있마.

43
이 모든 것을안간을위하얘 하고있다는살용주의적 경헝:은 극복될 수
없는 것 A로 보 인다. 운화란 넓은 의미에서 참으로 안칸본위주의석인
것은 아니며, 다얀 어떤 특수한 운화가 있을 뿐이며, 그 특수문화 안
에서도 어떤 특수한 사회 또는 그 사회의 특수한 계급만이 자신들을
그 가치의 중심 또는 원천이라고 생각하고있다는점은 알단첨가되어
야 한다. 그러하여 그들이 어떤 보편적안 것의 대표자로 자기들의 특
수한 신분을 주장함으로써 자기들에 좋은 것을 추구하는 자신들의 노
력을 정당화하려고 힘쓰고 있음은 상기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운제는 그형식과 종류가각양각색 임 이l 도 불구하고
어느것이나 마 가치의 장정적, 물질적 실현을 기하고 있마는 것이 득

징이마. 이것은안간이 싶현하려는모든선은필연적£로 잠정적, 또는


불질적 인 것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그것이 문화 엽석의 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문화를 물질적이라고 말찰 때, 그
것이 인칸 운화 촬동이 언제냐 그들의 육체적, 장정적 존재로서의 만

족을 위한 노력이라는 의미로 여긴 다면 그것은 잘풋이마. 운화의 경제


적 해석에 있어서까지도 문화가 불질석 재화 (goods) 이상이라는 것을
안정하고 있마. 다시 말하연, 문화가 안간의 육-체적 존재, 즉 식물,
의복, 생식, 경제 질서 둥 그 이상의 무형의 가치를 추구하는 데 관성
을 가지고 있음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냐 그란 무형의 벼물잘석
선들도 잠정적, 물잘적 형태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신과 인격
ù 로서의 ‘인간에게 좋은 것’까지라도, “그 머무는 장소와 이릎”을 가
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펀으로 영성과 영예, 다흔 한펀 ù 로 미
(美), 진 (휩) , 선 (휩1) -이 것 은 정 신적 가치 론의 불만족스러 운 상정 들
을 사용한 것이지만-등이 감정, 상상, 또는 지적 식견에 나타나야

하는 것이마. 인간은 상상으로 깨달은 바를, 만질 수 있고 보이고 들


리는 쿠체석인 것으로 쿠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 이 다. 조화와 균
형, 양식, 질 서와 음률, 의미와 이념 동 인간이 자연, 사회척 사건,
또는 꿈의 세겨l 에 부딪칠 때에 직판 또는 추쿠한 것을 무한한 노고
를 거듭하면서 벽이냐 화폭에 그러며, 켈학이냐, 과학의 체계로 종。l

에 안쇄하며 롤에 써기며 쿠타르 j츄어 넣 A벼, 시, 노래, 또는 교향


악으로 노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질서와 정의에 대한
너1 천과 영광어l 대한 희망이 많은 고난을 겪은 후에 성문화된 볍률,

44
제 1 장 영속적안 운제

극적인 의식, 정부의 구성, 제국들, 금욕 생활 동우로 구체화된다.


이렌 모든 목적하는 바카 우상하고 없어지는 재료로 성취되는 것이
기 때문에 문화 활동은 그것이 실현됨파 함께 그 가치들을 보존하려는
데 그만큼 또 많은 판성을 가지는 것이다. 안간은 자기들 사회 안
에서 물려받은 것과 자기들이 만든 것을 보존하려는 복잡한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엔제나 엄청난 정력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마. 그들의
집들, 학교플, 그리고 신천들, 도로, 기구 퉁이 끊임 없는 수리를 요
한마. 사막파 밀림이 모든 경작지를 위협한다. 그브다도더 큰 위험은
과거의 정신적 엽적이 허 물 어지는 일이 다. 법율파 자유의 체제, 사회
교류의 판습, 사색의 방법, 교육과 종교의 제 기판, 예술, 언어 , 도
덕 동의 법도-이런 것들은 그 성정안 성벽이나 문헌을 계속 수리하
는 것만우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대 세대마다 “마음의
비석에” 새롭게 다시 써야 되는 것이마. 단 한 세대만이라도 교육 을
중지해 보라. 파거의 위대한 엽적들의 총체계가폐허로 화하고 말 것
이다. 문화는 인간계가아난 자연력의 침해에서보마도 안간생활과 사
장의 혁명적 비판적 능력 A로부터 오는 파괴에서 보존하기 위하여 최
대의 고투를 펄요로 하는 사회적 전통안 것이다 .39 습판이나 공예품

에 대한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할지라도, 인간의 보존 노력 없이


는 문화의 대 부분은 파멸되고 말 것이다.
마지 악」즈로, 모든 문화의 특정 은 다원주의 를 지 향하고 있다는 것
을 주의해야 한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안간이 구하는 문화의
가치는 단 하냐가 아니다. 사회는 그 다수한 가능성을 실 현하려고 시
도한다. 그 하나하나가 고도로 복잡한 것 이 며 각기 많은 옥표와 교체
펀 관계 를 가지고 있는 많은 기판들로 쿠성되어 있다 40 가치는 많다.
그것은 한연오로는 사땅이 많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문화란 것은
사 랑에체 좋은 것을 이루려는 것인데, 사랑에는 남자와 여자, 아이와

.3 9. Henry Bergson 은 The T wo Sources of Morality and Religion (l 935)


얘서 품화에서의 보수주의 의 구살에 애하여 명철 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특히 제 1 , 2장 칩 조. 그리 고 Lecomte du Noüy, If.μman Destiny , 1947,
chaps, IX., X 참고 .
40. Ruth Benedict, Patterns of c:μltμre, 1934 , chap. ll; Malinowski , A
Scieπt ific Theory etc. , chaps. X, Xl 참고.

45
에른, 다스리는 자와 마스림 을 받는 자 등의 다른 유형이 았다. 그러
고 어떤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도 특별한 직엽층, 칩단 등에서 그들
의 판송적안 개념에 따라 다르다. 뿐만 아니라, 개인들은 그들 각자
의 특수한 주장과 취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자는 그 개성에 있
어서 육신파 마음의 욕구, 자기, 또는 다안이나 자연 빛 초자연적 존
재자에 대한 판성 등 복장다단한 욕쿠를 가지고 있다. 가령 경 제적,
생물학적 해석을 문화에 적응한 다 하더라도, 그리고 경제적 생붙학
적 가치가 근본적인 것임을 시인한다 할지라도, 그 밖의 다른 거대한
상부 건축의 가치 들이 반드시 계산에 들어야 할 것이다 41 그러나 우
리가 푼화에 부딪치 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경험으로 말한다면 이련
해설에서 주장하는 그런 통얼성도 인정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사회
에서 추구하는 가치. 그리고 각양 제 도의 활동 에 의하여 획득하는 가
치는 진살 로 수가 많다. 거기에는 아 주 다 르고 또 이교할 수도 없는
것도 있어서 사회는 수다한 그룹의 많은 사람을이 수마한 좋은 것들
을 성취 하고 보존해 온 것을 파도한 충돌 없이 어느 정도 결속시키려
고 힘쓰는 것뿐이다. 문화는 언제냐 평화와 번영, 정 의 와 질 서, 자유
와 공동복리 , 진리 와 미 (美) , 파학석 잔리 와 도댁 석 선 (월) , 기 숱적
숙련 파 살 제 적 지해, 거룩함과 생활 의 연 결을 추구하고 있마 . 이란

수 마한 가치들 가운데 는 하나닝의 나라도 한 몫 들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진주들 가운데서 제일 괄흉한 진주로 대접받는다는 것은 드문
일 이 되겠지만, 에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 복음, 교회, 영원한
생명 등이 수마한 운화들 중의 하나로 자리장을 수 있을 것이마. 그
러 나 울론 그 거대 한 마원주의 안에 서의 몇 요소로밖에 간주되지 않
을 것이마 .
이상에서 우리는 운회의 명백한 특정 들 중의 몇 가지 를 말하였다.
우리 기독교인은 그러스도의 권위 아래서 잘며, 동시 에 이 운화의 권
위 아래서 살며, 또 모는 기 독교안들 위 에 이 문화는 자기 권위를 주장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해 인간의 근본 문제는 은혜와 자연의 문
제라고 선언한마. 그 러 나 인간 실존에 있어서는 운화에서 분리펀 자연

41 말하자연, Friedrich En gels 의 성부건축이 비 교적 득링성을 가진 것으로


논한 것이 1890 년 그가 Jose ph Bloch 에게 보낸 펀지 에 나타나 있마.
v. Adoratsky, K arL M ar x , Sε!ected Work s, Vo l. 1 , p. 38 1.

46
제 1 장 영속적안 운제

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야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는 자연에서


도피할 수 없는 것만큼, 문화에서도 도피할 수 없다. “자연의 사랑
(Natαrmeηsch) 이 란 존재 하지 않는다 "42 “원시 안의 눈 o 로 이 세 계 를
보는 사 랑은 하냐도 없기 때문이다 "43

4. 전형적 해답들

이 주어진 두 복합적 실 재- 그리스도와 문화- 는 기독교안의 양


성파 기독교인 사회에서 끝 없는 대화를 말천시킬 것이다. 하나닝을
향한 일펀단섬에서 그러스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시적이고 장마한
문화에 서 떠 냐도록 지도하였다. 파거 의 많은 가치 들을 보존한다는 의
미에서 문화는그리스도블배척한다. 그것은그러스도가사랑들에게 오
칙 은혜에만 의지하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하나념의 아들
그 자신이 또한 종교적 문화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어린양과 양
들을 육성하기 위하여 그의 제자들을 보내었다. 영:들은 문화 없이 육
성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 대화는 부정과 긍정, 재건, 타협, 그러
고 새로운 부정으로 진행한마 . 개안이냐 교회냐를 막론하고 이 끊임

없이 해답을 추쿠하는 마당에서 마시는 반대 의견이 나오지 않을 정


도의 정지점 ( 停止點)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다양성 가운데서 어떤 질서를 찾아 사실상 어떤 점에서
이 대화를 정지시키며 또한 특수한, 부분적안 대답을 규정할 수도 있
다는 것이 가능하마. 왜냐하면, 그 대답들은 각기 다른 지역과 다른
사회에서 동일하게 다시 거듭 얼어냐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라기보다도 그 문제 자체의 성질과 그 용어의 의미에
달란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 그러스도와 운
화라는 거창한 대화도 좀더 지성적으로 다루어지며 따라서 토의의
열애도 어느 정도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각장에서는 그
런 천형적 해답이 제시되고 설명될 것인데 요한과 바 울, 터툴리안,

42. Malinowsky, Eηcyclopedia 01 Social Scieηces, Vol. f{ , p , 62 1.


43. Ruth Benedict , op. cit. , p. 2.

47
어 거 스틴, 토마스 아퀴 나스와 루터 , 리 출파 폴스로이 등의 기 독교안
들과 판련하여 소개필 것이마. 여기서 , 이 천형적 해맙의 간단한
대략석 서술이 주어질 것안데 그것은 그 다음에 올 논술의 지침이
될 것이마. 이 전헝적 해당은 마섯 가지 유형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며, 그 중에서 세 유형은 서로 판련된 것으로서 그러스도와
문화가 서로 구밸되면서 피차 긍정되는, 중간행에 속하는 것 이 다.
그러냐 천체를 통하여 볼 해 이상한 동질적 유사점들이 발견될 줄
안다.
첫째 유형은 그러스도와 문화가 서로 대립된 것을 강조하는 해당이
다. 기독교안이 생활하고 있는 사회의 판슴이 어떤 것이든, 또는 인
간이 성취한 어떤 엽적을 이것이 보존하고 있든지 없든지 를 막론하고
그퍼스도는 이것에 반대의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며, 따라서 그는 사
람들에게 “양자택일" (兩者擇- )을 강요하는 것 A로 이해하고 있는 것
이다. 초대 교회사에 있어서 유대안들이 예수를 배 격한 것은 기독교언
이 유대적 문화에 적의〔敵향、)를 표시한 테 대한 결 과여서, 이에 대하
여 클라우스너 (Klausner)는 유대 인연을 변호하고 있 다. 그러 고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인에게서 법적 보호를 박탈한 것은 그들이 헬라·로마
문명을 도피하거나 공 격 한 데서 생긴 것이라 한다. 중세기에 수도원
규정 이 라든지 소종파 ω、宗派)운동에 있어 서 기 독교적 문화를 지 향하
는 사람은 “세상”을 포기하고 “거기서 나와 스스로 칼 라 서라”고 한
것도 같은 살례라 한다. 현내에 있어서도 이런 유 형 의 해담은 선교
사들이 새로 믿는 사람들에게 소위 이교적 사회의 판승파 기판에서

온천히 나와야 한다고 권고하는 데 서 드러난다. 그 밖에 서양에서도


영세적 인 기독교안이나 그런 그룹의 적은 우리로 말미암아 흔히 생겨
지는 해 탑야 며 부분적 ò 로는, 기 독교적 신앙과 자본주의 또는 콩산주
의를 대렵시키며 또는 산엽주의와 국가주의, 카툴럭파 프르테스단트
퉁을 진정한 기독교 신앙파 대립시키 는 사 람들로 말미암아 이런 주장
이 밝혀지고 있다.

그 마음 부류는 그러스도와 문회의 사이에 근본적안 일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유형의 해망이마. 여기서는 흔히 그러스도가 안간 문화사상
〔文化史上)에 서 위 대 한 영 웅A로 나타난다. 그의 생 활고F 교훈은 최 대 의
인간 엽적 이 라고 본다. 그들의 밍는 바에 의하면, 가치를 지헝:하는 안

48
제 1 장영속척안문쩌

간의 열망이 그러스도 안에서 그 장청에 달했다고 한다. 그는 파거의


모든 선한 것을 재확안함파 동시에 둔명의 파정을 정당한 목표로 안
도한다. 뿐만 아니 라 그러 스도 자신도 푼화의 한 부분이 다. 그것 은
그도 전승하고 보존해야 할 사회적 유산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있어서는 기독교와 서양 문명, 예수의 교훈, 또는 예수에 대
한 교훈파 민주주의 등의 판계에 특벨한 판심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인들로 말마암아 이러한 해답이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스도와 동
양 문명의 일5<1 라든지, 그러스도와 마르크스 사회의 정신과의 얼치라
든지를 강조하는 사람플도 혹시 있음을 본다. 초기에는 이런 선에서
의 해압이 그러스도와 문화를 “대링”시키는 유형의 해답파 동시에 제
공되였었다.

그 밖에 마른 세 유형의 해탑은그러스도와 문화의 두 큰 원칙 사이


에 있는 위대한 차이점을 분명히 유지함과 동시에 이 둘을 어느 정도
의 통일성 안에서 결속해 보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 세 그룹은 그러스
도와 문화의 두 권위를 어떻게 결부시키느냐 하는 그 수법 여하에 따
라 서로 쿠별되고 있다. 셋 중의 하나안 제 3 의 유행은 이상에 이미

말한 제 2 의 유형파 바슷한 것이어서 그리스도는 운화적 열망을 성취


시키고 진정한 사회 기구를 회복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변서토, 그
에게는 문화에서 산출된 것도 아니요 운화에 끽접 공현하는 것도 아
닌 무엇이 또한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 생활파 그 문화에 대하얘
연속션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불연속선을 가지고 았다. 안간 문화
와의 접 속선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안도할
수 있게 펀마. 그러나 그것은 마만 극히 초보석안 데 그칠 뿐이요, 인
칸이 그에게 참으로 도달하려 연 불연속적인 위대한 >11 약이 절대로 필
요한 것이다. 더 자세허 설명한다연 진정한 문화는 모든 안간 엽적,
인간으로서의 온갖 가치 탐구, 모든 인간 사회 동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완다. 그러 스도는 인간의 열 망이 일찌 기 상상도 뭇했고 인간의 노력
이 그것을 획득할 수도 없었다. 위로부터의 선물을 가지고 인간 생활
속에 들어왔다. 다만 그가 안간을 초자연적 사회, 새로운 가치 중심에
판련시켜 주는 해에만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스도는 전
실로 문화의 그러스도이다. 그러나 동시셰 그는 문화 위에 있는 그
리 스도이 마. 이 종합형 은 토마스 아퀴 냐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

49
여 가장 찰 씌표되고 있다. 그러냐 초대나 현대에 있어서 그 밖에도
많은 대표자들이 이에 가담하고 있다.
또 하나의 중간적 해당의 그룹이 았다. 그것은 이 책에서 제 4의
유형으로 기술펀 것야다. 얘기서는 그리스도와 문화 양자의 。l 중석,
붕가피적인 권위를 안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양자간의 상반성도 긍
정한마. 이렇게 해압하려는 사랑플은, 기독교인은 평생 동안, 서로
탑의되지 않는 두 권위에 동시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생기는 긴장성 안에서 살아가게 u} 렌이리는 것이마. 그들은 그라스
도의 주장을 세속 사회의 그것에 적용시키려는 이상에 진숭한 재 2,
저1 3 의 그룹들의 태도를 배격한다. 그 점에서는 그들은 “문화에 대렵
하는 그러스도”를 신봉하는 자들과 동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냐넘
어1 대한 복종이 사회 제도에 대한 복종을 전제로 하며 사회에 충성파
그 사회의 심판자안 그머스도에 대한 복종을 동시에 요청하는 점에서
그 신녕을 달리한다 . 01 리하여 사람은 두 가지 도덕에 복종하게 펀다.

그러고 두 세계, 즉 서로 연속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매체로 상반되는


두- 세계의 시만 노웃을 동시에 하지 않을수 없게 판다. 그리스도와 문
화의 양극성파 긴장성 얀에서 안생은 역사의 피안(彼뿜)에 놓여 있는
의인(義認)의 희망 얀에서 불얀정하고 최악된 생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루터가 아마도 이 유형의 해담에서 최대의 대표자
로 안정필 것이마. 그러나 루터파가 아난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루터의 이렌 태도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았다.
마지막A로 제 5 의 유형은 제 3 의 것파 같이 중재적안 해탑이어서
그것 은 개 변주의 지-(coηνerszoηist) 의 해 결 방엽 이 다. 이 것 을 주장하는
사밤들은 제 1 파 제 4 의 해 당자와 동조하얘 안간 본성 은 타락되고 바 틀
어져 았는데 그것이 문화연에 나타날뿐아니라, 문화로말미암아전승
된마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러스도와 모든 인간적 제도와 관습파는
서로 대립되는 것임을 안정한다. 그러냐 야 반립 (antithesis) 은 제 1 의
그룹에서와 같이 기독교인을 세계에서 분러시키는 데로 이끌어 가는

것도 아니고, 제 4 의 그룹에서와 같이 다만 초역사적 쿠원을 바라고


참A라는 것도 아냐마. 그리스도는 각자의 문화와 사회 얀에 있는 안

간을 개변시키는 분이다. 그는 인간을 향하얘 문화에서 떠나라고 말


씀하는 것아 아니다. 운화릎 떡나서 자연도 없£역, 사회을 떠나서

50
제 1 장 영속적언 문제

사랑이 스스로 개성하거냐 우상숭배에서 하냐념께로 돌아올 수는 없


기 해운이마. 이런 유형의 해답의 커다란 윤팍은 어거스틴에게서 냐
타난 것이라 할 수 있 A며, 존 칼빈。l 이것을 명료하케 했고, 그 밖
에 많은 마른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의 견해와 판련되 어 있다.
영속적안 문제에 대하여 이러한 해당들이 제시될 때는, 거기에 는
이미 마소 인위석안 구조가 세워져 있음이 명백하다. 유형이란 것은
그것이 수마한 역사걱 인물들파 운동들을 다년간 연구하기 전에는
구성 펼 수 없다 할지라도, 언제나 다소간은 구성 적 개녕에 속한마.
가설적안 도식에서 떼나 풍부하고 복장한 개별적인 사건들로 돌아오
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 어느 개안이나 그룹이 온천허 그 어느 유형
에 꼭 들어맞는 것을 말견할 수는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44 모든 역사
척 안물들은, 그들을 지칭하는, 어떤 다른 부류의 생각에 더 많은 유
사성을가지고있다는것을 보여 준다. 유형론적 방엽은역사적으로 정
확을 기 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언으로 하여금 그들의 영
속적안 운제와의 오랜 씨름의 마당에서 다시 나타냐 는 주요한 동기들
의 연속성파 의의를 환기 케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방 볍 이 오늘 우리 세대에 있어서, 그러 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내한 해
답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어떤 방향을 정해 주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맏는다.

44. C. J. Jung , Psychological Types (1 924 ) 는 유형 론의 표본으로서 암시 와 깨


달음을 주는 바 많다. 유형올 개옐적안 데 적용찰 가능성에 대하여는특히
pp. 10 f. , 412 ff 릎 참고하라

51
제 2 장

문화에 매립하는 그러스도

1. 새 백성과 “세상”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해야 한 문제의 첫 해닦은


기독교안에 대한 그리스도의 전적 안 권위블 단호허 긍정하는 것파 문
화에 대한 충성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 순
서로 보든지 연대적 순서로 보는지 첫째 엽장이라고 하기에 함당한 주
제이다. 논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주닝이시라는 일반 기독교
웬칙에서 직캡적으로 추출펀 것이기 때문이며, 연대적으로는 이것
이 초대 기독교안들의 특수한 태도였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살이기
때문이다. 이란 것이 다 더 논의할 여지 없이 확정된 것은 아니냐,
이 해담은 교회사의 가장 초기에 주어진 것이며 표띤으로 보아 다른
입장들보다 논리적으로 더 정연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약성서의 각 문서에 이란 태도가 얼마쯤 나타나 있는 것이 사살
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그러한데는하나도 없다 . 제 1 복음서에는 새
율법과 낡은 플법을 대조 · 기술하였다 그러나 기득교인도 모세의 법
전을 지키라고 했을 뿐 아니라, 유다1 안 사회 지도자들이 요구하는 것
까지도 그대로 순종하리-고 하였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세상”을 배
격하는 데 있어서 극단적인 대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해는 기
독교인들이 핍박받는 상태에 놓여 있였다는 점에서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논점에 대하여 가장 영백하게 표시한 것이 요한 1
서라 하겠다.

1. 미- 5:21 48, 5:17-20;23:1-3.


52
제 2 장 운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경건파 신학의 。l 작은고천에는사랑의 교리에 대한 싱원한 이해와


아릅마운 진숭이 있기 배문에 기독교인들이 보화로 얘겨왔다. 여기서
기독교 신착에 대한 간결한 요 약이 이루어졌다. 즉 “하나닝 은 사랑이시
다”라는귀 절이 다. 그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논 말씀은 기 독교 윤
리의 집약적 공식화이다. 여기서 는 사랑의 세 파제, 즉사 힘 을향한하
나닝의 사랑, 하나닝을 향한 사람의 사랑, 형제를 향한 형재의 사랑,
이 셋의 판계가서로 나누앨 수 없는 한폭의 도쇼같이 적혀 였다. ‘사
랑은 여커 있 A 니 우리가하나넘을 사랑한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닙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나 ..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닝이 이같이 우리를사
랑하셨 A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마 누구든지 하
나닝을사랑하노라하고그형제 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
하나닝을 본 사랑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변 하냐닝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1 우리 안에 온천히 이루느니라 보는
바그형제 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보지 뭇하는하나닝을사랑할 수
없느니라 "2 여기서 저자의 중성적 판성은사랑이라는 이념에 있으변
서도그만큼또한그러스도의 주권에도판성을가지고있다. 그러스도
야말로 사랑의 천체 왕국에 열쇠가 되어 있다. “하나념의 사랑이 우
리에게 。1 렇게 나타난 바되였으니 하냐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성은 처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성이니라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플을 위하여 옥숭을 버리는 것이 합당하니
라‘ "3 사랑들 이 하나닝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사람을 향한 위대한 하나닝의 사랑을 드러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
예 문이 다. 자기 목숭융 바치 기 까지 사람을 사랑하신 그리 스도, 그리
고 하늘에서 사란들을 위하여 중보해 주시는 그러스도, 그가 또한
사 람들을 향하여 하나닝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 랑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요한 1서의 저자는 하냐닝의 사랑에 신뢰하는 것만큼 예수
그러스도의 계명에 복종하라고 사랑들에게 강권하고 있다 4 복음파
새 율볍과는 알 치되어 있다 5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

2. 요일 4: 10-12, 19-20을 결부시킨 것이다.


3. 요얼 4:9; 3:16.
4. 요일 2:3- 11; 3:4- 10, 21-24; 4:21; 5:2-3.
5. C. H. Dodd , The Johannine Epistles, 1946, p. xxxi.

53
수 그리스도의 야릉을 민고 그카 우리에게 주신 계맹대로 서로 사랑
할 것이니라. ‘ 6 야 요한 1서 기자가 잘 알고 있는 사랑에 매한 이중
의 계명, 7 즉 하나닝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그 사랑의
운동의 첫 시작이 사람으로푸터 하나넘 께로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닝
A로부터 사람을 향한 것이마. 이것을 확 안 한 결파로 어 떤 밴혁이 얼
어난 것을 본다. 즉 기독교안의 생 활에서 제 일 먼저 요구되는것은 하
나닝 을 믿는 것 이 아닐 수 없다는것이며 , 그하냐닝 신앙파하나닝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맏고 받아들이는 것파는 불가분의 판렌을 가지
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영적안 그러스도에만 층성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
도에 게도 충성해야 한다는 것 이 요한 1 서 기자에게는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역사척 에수는 다만 역 사적 인물엘 뿐 아니라,
하나닝의 아들이어서 사랑파 의와 일을 성취시키는 능력파 명령하는
권위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념 아배지와 본걸적으로 연합되어 있
마는 것이마 8 이 예수 그러스도릎 사랑하고 맏는마는 두 파제와아울
러 그 밖에 다른 야녕, 즉 죄를 사하여 주는 것파 성령의 은사와 영원
한 생명 등에 도 밀첩한 판펀을 가지고 있 다. 그 러 냐 이상에 서 말한두
가지가 기독교인의 생활을 규정하는 중성이 펀다. 즉 예수를 그러스
도 하나닝의 아들로 시언하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의미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면 기독교의 친교에 동참할 수 없 다는 것이마 .
。 1 기독교의 적극석 의의에 대한 간결한 진술에는 동시에 같은 정
도의 강력한부정적 연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스도와행제에 대한 충성
의 이변(꽃며)에은 문화 사희에 대한 배격이 나타나 았 다. 하나님의 자
녀로서의 형제단괴- 이 세상 사이에는 영백한 분리션이 그어져 있치 해
문 이다. 두 귀절 9 을 제외하고서는 “세상”이란용어는 이 기자가 의미
한 바에 의하면 교회 이외의 사회 천체를 의마한다. 신자도 물론 그
안에서 잘고 있 서는 하다 10 그러나 기독교안에 대한 그의 지시는,

6. 요알 3 :23.
7 요알 4 ’ 2 1.
8. C f. ibid. , 1 ‘ 1-3; 2:1 --2; 2:22-24; 3:8b; 4:2-3 , 9-10 , 14-15; 5:1- 5;
그 밖에 C. H. Dodd , Th e Johannine Epistles , pp. xxx.xxxvi; 1-6; 55-58.
9. 요알 2:2; 4: 14.
10. C f. Dodd , op. cit. , pp. 27 , 39-45.

54
제 2 창 문화에 대렁하는 그리스도

‘세상에냐 세상에 있는 것틀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올 샤


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는 것이 다 .11
여기서 “세상”이란 것은 악의 세력 아래 점령되어 있는 영역이어서
암흑의 지역이벼, 빛의 냐라의 시민플로서는 들셔가서는 얀 되는 곳
이다. 그리고 “세상”은 거칫파 미워함과 잘안으로 그 특색을 삼는
다. 야것은 가안의 후예 야다 .12 이것은 세속 사회로서 “육신의 정욕
과 얀목의 정욕과 생의 교만으로 지배되에 있다. 도드 CDodd)의 벤
역에 의하면 “정욕과 천박성과 허영, 그리고 유물주의와 이기주의로
가득한 이교 사회”를 의미한마. 13 에것은 일시척이요 지나가는 가치
에 판켠펀 문화언 만연 ,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있
다. 이것은 사멸하는 절서이며 동시에 살해하는 질서이다. “이 세상
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간다”고 하였다 14 이것이 사멸하는 섣서
라고 한것은 야것。1 일시적안 복리에 판한 것에며 동시에 그 안에 증
오와 허위라는 내적 모순을 가지고 있기 혜문이며 그리스도가 악마의
역사를 파멸시키는 것 해문이며, 동시에 그러스도를 맏는 신앙。 1 곧
。1 세상을 극복하는 승리카 되커 때문이다 15 그러므로 신자의 충성은
온천허 새 절 서, 새 사회와 그 주닝에게로 향하는 것이마.
“문화에 매랩하는 그리스도”라는 엽장이 이상에 인용한 성구들에서
극단적인 형 태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얘기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은 행제, 즉 믿음을 같이하는 기독교안 꺼리를 의미한 것이라고 설명
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최를 대속하러 오셨다는 것은
의섬할 여지 없 이 주장되셔 있다. 여기서 요한 1서 기자가 세상 죄라
고 한 것은 어느 정도 개안적£로 본 모든 인간들의 죄를 의마한 것
으로 생각펀다. 그러나 여키서 진술된 것만으로써는 기독교 인이 자기
가 살고 있는 사회 를 유지하거나 개변시키기 위하얘 그 사회 기판의
사엽에 동참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명언한 바도 없고, 그렇다고 그
국가나 재 산을 거 부하라고 한 데 도 없마. 풍론 이 저자는 “세 상” 끝 날

l!. 요일 2: 15.
12. 요일 5:19; 1:6; 2:8-9, ll; 3: 11-15.
13. Op. cit. , p. 42.
14. 요일 2:17; 2:8
15 요일 3:8 ; 5:4-5.

55
이 너무냐 가까이 왔다고 생각랬기 때문에 이런 점들에 대하얘 논의
할 기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란 상태에 있어서
는 밴하는 문화에 대한 관싱에서 떠나 오직 그리스도와 형제들에게
충성하는 것만이 전적 ξ로 요쿠되는 것이다.
덜 섬원하나 이 와 ùl 슷한 태도를 표시 한 것 이 2세기 기독교 문서
에 냐타나 았다. 그러 나 그 중에서도 터둘러안은 극단적안 래도블 취
하고 있다. 그 당시에 가장 애 독되던 서적들 중에서 ‘ 12사도의 교
훈,’ ‘헤르마스의 옥자, ’ ‘바나바의 서한,’ 그리고 ‘클레엔트의 제 1서
한’ 둥은 그러스도를 문화에서 분리시키는 생활 방식을 말하고 있 마.
그 중에 어떤 것은 요한 1서에서보다도 더 율법적이다. 그러스도 가
주되신다는 의미도 그러스도 또는 성서 에서 주어진 율법적인 연에 서
만 이해하려 한마. 하나닝의 은헤로 주어지는 새 생명 같은 것도 그
것을 값 없이 받는 은사와 현존한 현실로 생 각하는 것보다도 꼭종함 o
j료써 주어지는 보수로 여 기 는 것이었다 16 기독교인의 생 활의 관질이
은혜에 있다고 주장하든지 또는 율법 에 있다고 강조하든지 간에 그
자체는 어전히 새로운 것이었으며 고립된 사회였던 것이다 . 2세기에
공통A로 퍼져 있던 이런 유형의 이념은, 기 독교인은 유대 안이나 이
방안 이외에 저1 3 의 “민 족 즉 새 액성을 쿠성하고 있다는 신냄에
서 생긴 것이였마. 그러므로 클레벤트는 말하기를 “모든 것을 보시
고 모든 신들을 다스리시며 모든 육체 의 주가 되시는 하나 닝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러스도와 우리 플 택하셔 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통하
여 특별 한 백성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다 . 17 하르낙은 이 초대 신자
들의 신앙 내 용을 총팔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 그들은 생각
하기 흘 , 우리는 세계 보다도 더 오랜 존재이 다. ~ 세계는우리를 위하
여 창조되었다 . Q) 세계는 우리를 위하여 운영되고 있 다. @ 이 세계
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예속되었 무며 우리를 성기도록 되어 있다. (링

이 세계의 모든 것, 역사의 시작과 저주와 종말은 우리에게 계시되


였으며 우리의 눈에 꿰뚫어 보이고 있 다. @ 우리도 세계를 성판하는
데 동참할 것이며 싱판에 따르는 영원한 복리를 차지할 것이다 "18 이

16. H . Lietzmann , The B egin껴ngs 01 the Christiaπ Church , 1937, pp.


261-273.
17. 1 Clemeηt lxiv, 1; Epistle 01 B arnabas , xi ii.xiv 참고.

56
제 2 장 문화에 대랭하는 그리스도

새 사회, 새 민족, 또는 새 백성은 그들에게 율 엽을 준 그들의 왕안 예


수 그러스도로 말미 암아 창건펀 것에라는 사살야 그 근본적 인 신녕。1
다. 그 전체 개념의 논리 계열을 말한다연 그러스도의 왕국에 속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고 간에 다 악의 통치 맡에 있다는 그것이마 . 01 것
은 두 걸이라는 교리로 표현되었다. “두 걸이 있우니 생명으로 안도
하는 걸파 사망으로 언도하는 걸이 그것이 다. 그 러 냐 그 두 걸의 차
이는 태만하다 "19 생명으로 인도하는 걸이란 곧 기독교인의 걸이 다.
이 걷은 새 율뱀 의 명령을 만뷰함으로써 밝혀진다. 다시 말하면 하
나닝 을 사랑하라는 것 , 황금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파 악을 대 항
하치 말라는 것 등을 살천하라고 캉조하는 것에다. 구약성서에서 안
용한 교훈도 몇 가치 포함되애 있다. 죽음의 걸이라는 것은 악한 생
황의 파정을 말한 것으로서 기독교인에 되느냐 악한 자가 되느냐의
물 중의 하냐를 택하라는 것이다. 이렌 기독교 윤리에서는 복음의
볍칙야 안정되지 않는 사회에도 어떤 다른 볍칙이 작용하고 있다
는 사실을 안정하치 않으려는 것 같다. 즉 그러스도가 지배하는 사
회에도 선파 악이 섞여 있고, 님1 기독교척 문화에도 그 표준에 하
라 선파 악。1 섞여 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마. 새 백성
과 옛 사회 사이에는 명백한 선이 그어져 있다. 그러스도의 율법 에
복종하는 것과 단순한 무법성 사이에 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다. 그
러나 아래의 클레벤트의 커도에 나타난 컷으로 본다면, 문화적 제 제
도 속에 또는 그 위에 하나닝의 통치가 살현되 어 있다는 것올 어느
정도 안정한 것도 샌실이다. “우리로 하얘큼 당신의 천능하고 영광
스러운 이름에 복종하게 하시벼 또한 땅 위의 통치자들파 총독들에
게 복종하게 하옵소서”한 것이라든지 이어서 “주념, 당신께서 높으시
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권능으로 그들을 주장하셨사오니 우리로 하

18. A. H arnack , Mi sSioη aπ d Expansioπ of Christiaη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 1904, Vo l. 1. p. 302; c f. Frank Gavin , Church and Society
in the Secoη d Centμry , 1934; Hippolytus, Apostolic Tradition 에 은거 하
여 초예 기독교안 생활올 기솔한 것이다. 그 생활의 특징은 “협동 안격
과 사회척 바탕’의 사상으로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의 카창 자랑
스러 운 사살은 그가 한 ‘지체’로 되에 았다는 것이며 그의 가장 온질적안
바탕은 그카 ‘속해 있다’는 그것이다. p. 3; cf. pp. 5, 8.
>>

19. The Teaching of The Tψelνe Apostles, I, 1; cf. Barnabas, x ix-x.;,,;


Shepherd of H ermas, Mand, 6, i.

57
여금 그들의 영광파 존귀가 당신께로부터 주야진 것임을 알게 하옵
시고 그들에 게 순종하는 것이 당신의 뜻에 만항함이 아닝을 알게 하
옵소서”한 것우로 보 아 알 수 있는 것이다 20
신약성서 기자 이외에 , “그리스도와 문화를 대립 ” 시키는 유형의 초

71 기독교의 최 대의 대 표자는 터툴리안이였응에 틀림없다. 이 렇 게 말


하연 어떤 이는 공 그가 우리의 가설적안 형태에 꼭 들어맞는 분이
아니라는 청을 첨가하는 동시에 그기- 마른 모든 유형파 서로 판련
되는 특섹들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을 지적할 것 이마. 그는 상위일체흔
자얘서 예수 그러스도 안에 그 자신을 제시하시는 하나닝 은 창조주이
시며 응시 에 성령이심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냐 그 문장의 내용에
나타난 것 A로 보아 예수 그러스도의 절대 권위 를 주장하고 있마. ‘그
러스도는 〔하냐념이 약속하신〕 은혜와 징계의 최고의 머리이며 주재
자이시다. 그는 안류의 교화자요 또 훈련자이시며 하나님의 친아들이
마 "21 터툴리 안이 그러스도에 대한 절대 충성을 표시한 것은 마음에
안 용하는 문쿠에서도 말견할 수 있다. “그러스도 예수, 우리 주 닝은
〔내가 이 렇 게 표헨하는 데 대하여 그가 장시 용납해 준마면 !) 그가
누쿠시 든 간에, 그가 어떤 하나님의 아들이든 간이], 어떤 실체로서
그가 사 람이 요 또 하냐님이든 간에, 어떤 신앙에 대하여 그가 교사로
되든 간에, 그가 약속한 보상이 무엇이든 간에, 그가 세상에 계살
동안, 그 자신이 무엇이라는 데 대하여 스스로 선포한 것, 그가 무엇
이었다 는 것, 그가 준행하고 있는 하나닝의 뜻이 무엇이라는 것 , 그
가 요청하는 인간의 의무가 무엇이라는 것 둥을 말한 그대혹 마 실행
한 것만은 사실이다 "22 어떤 경우에서 든지 기독교인우로서 그러스도
에 대한 우선적 고찰은 “그가 하나님의 능력 이 요 영이시며 말씀파 이
성파 치헤이시며 하나 님의 아들이시다” 하는 것 이마. 그리고 기독교
안A로서의 고백은 “우리는 말한마. 고문~i료 찢어지고 피투성이 되
면서 도 우리 는 부르짖 는다. ‘우리 는 그러 스도릎 동하여 하나닝 을 여l

20. 1 Clemeη t, lx, 4-ixi , 1.


21. Apo:ogy , chap. xxi. 이 귀 절과 또 다른 인용구을은 Ante . Niceη e Fathers ,
Vols. lß , N 중에 있는 TertulJj an 저작집 벤역 에서 안용한 것이다
22. Th e Prescription Against Her etics , chap. xx.
23. Aρology , xxi ii , xx.

58
제 2 장 운화에 에렵하는 그리스도

배 한다. ’ 고 "23 이 렇 게 예 수 그리 스도의 주권 (Lordship)에 모든 것 을

정중시킹과 동시에 터툴라얀은 그러 스도의 계 명들, 곧 형제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계명, 악에 대항하지 말라, 노하지

말라 , 음욕을 품지 말라는 퉁의 계명 을 포함한 모든 명령에 순종하는


염격한 도덕파 그러스도의 주권을 결부시키는 것이 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챙위에 냐타내는 점에 있에서 어느 청교도보다도 못지 않게
얻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2"- 그는 요한 1 서의 특칭안 적극적이
요 따릇한 사 랑 대신에 주로 소극적인 도댁, 즉 죄를 피하라든지 , 장

차 용- 무서운 성관에 대 "1 하라든지 하는 것을 더 강조하였다. 그리하


여 그는 하나넙 아들로 말미 암은 하냐넘 의 은혜 를 갇사허 받으라는
교훈 같은 것은 그리 캉조되지 않았던 것이다.
터 풀리안이 문화의 주장을 배격하는 태도도 그에 짜라 날카롭게 드
러 난다. 신자의 투쟁은 자연을 상내 로 할 것이 아니라 문화를 상내
로 할 것 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죄가 가장 많이 있는 곳은 문화의
영역이기 해문이다. 터툴리안은 웬죄가 사회를 통하여 천승된마는
사상에 밀접하게 접근하고 있다. 즉 나면서부터 아기 들의 주위를
둘 러싸고 있 는 추악한 송판파 그 모든 안 공적안 훈랜을 온통 제거해
버란다 면, 그들의 영혼은 선하게 남아 있을 것 이 라는 생각이다 . 우주
와 영혼은 본래 선한 것이다. 그것은 하냐닝의 지으신 것 이기 혜문
이다. 그러 나 “우리 가 영심해야 할 것은 모든 것 이 누구로 말마암아
창조되었느니 하는 것뿐 아니라 누 F로 말미암아 또한 비풀 어졌느냐
하는 것 이다 그러하여 “타 락한 상태와 최초의 순결 사이에 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25 터툴리얀의 생각에서 부꽤와 문화 가 어느
정도로 일 치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마음의 안용구에서 그 사상을 엿
볼수 있을 것 이다. 즉그리스도는 “촌뜨거와 야만 인들을 어떤 운영안
A로 만들 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다만 사 랑들로서 이미 계몽되
였 고 그들의 문화 그것 해문에 미망〈迷홍)에 걸 려 있는 안간틀을 진리

24. C f. Apalogy. xxxix, xlv; D e Spectaculis; De Coroηa; 0η R epentance.


25. D e Spectacμlis , ii 에 서 안용한 것 이 다. 자연 그대 로의 영 혼 이 선하다는 교
리 에 대 하여 는 Apology , xii , The Soul’ s Testimony , A Tr eatise 0η the
80μ 1, 39장에서, 송관올 통하여 영흔이 부패했다는 것을 논하고 있다. 그
러 나 41 장도 참고하라.

59
를 알도록 하 71 위하여 오신 것이다 "26

이것 은 그가 정최하는 사악 OJ11惡) 이란 것이 무엇이며 기독교안들이


배격해야 한다는 세상이란 것이 무엇인 가를 알아보변 더 뚜렷이 드러
난다. 그가 가장 사악하다고 안정한 것은 불론 이교 사회약 그 종교
이다. 그 다신론적인 우상숭배, 그 신조와 의식, 그 정욕적인 것과
싱엽화된 것 동 다 27 이렌 종교가 온갖 다른 사회척 활동파 기판에
침투되 에 있기 때문에 기독교안은 그러스도에 대한 충성 과 그것들을
타협시키려는 끊업 없는 위험에 부딪치고 았다는 것이다. 그러 나 기독
교암은 “일상 생활의 모든 사 건들에 쓸모 없는 자”라는 비난을 터
풀리안이 그대로 시안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말하기 를 a우리는
이 세싱에서 그대들과 함께 살고 있마. 광장이나 로옥 이나목욕탕이나
노점이니- 여판이냐 주(j).':j)마다 마카오는 시장이나 그 밖에 어떤 성- 엽

장소에든지 함께 섞여 살고 있다 너우기 그는 이 런 딸까지 하였 마.


“ 우리는 그대들파 힘께 항해하고 있마 . 우러는 그대들파 함께 맡 칼

며, 또 갚은모양으로 상엽 에 도 그대들과 연결되어 있마. 각잉: 예슬에


있어서도 그대들의 꽉-리플 위히-어 우리의 노작(勞 f까을 공공 재산£로
제공하고 있마 "28 그러나 이 모든 연론은 핍박자로부더 신자릎 보
호하는 입장에서 진술한 것이요 그가 신자를 대할 때에는 여러 가지
사회 적 회항 또는 직장에서 사직 하라고 권연 하고 있다. 그것은 그
들이 이 교 신앙으로 부패해 있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
의 정신파 율법에 반대되는 생활 양식을 요쿠하고 있기 해문이마 .
마찬가지로 정 치 생활도 기피하 三1-고 하였다 . “세성 의 존귀와 영광을
열심£로 추구하는 자들은 죽은 자들이마 ” 라고 터툴리안은 말한마.
“ 우리는 그대 들의 공공 집회에 참석해야 하겠 마는 긴박한 이유플 딸
견할 수 없 다. 그리고 국가의 사건들보 다도 더 우리 에게 생소함을
느끼는 것은 없 다 "29 정치적 권력을 행 사하는 것과 기독교 신앙 사
。 1 에 는 내적 모순이 있다. 뱅역의 의 무를 기피해야 한마는 것은 그것
이 이교의 종교적 의식파 황제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하는 데 가담해

26. Apology , xxi.


27. 0η I dolatry; Apology , x-xv
28. Apology , xlii
29. Ibid. , xxxviii. 그 밖에 XXl 칭 에 서 도 터 툴리 안은 말하고 있 다.

60
제 2 장 운화에 대럽하는 그라스도

야 해야 한다는 것올 내포하고 았기 해운일 뿐 아니라, 베드로를 비


무장화시킴으로써 모든 뱅정의 무장을 해제시킨 계명을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법정에 호소하는 것까지도 합당하게 여기지 않는
형화의 아들이 전쟁에 가담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30 무역

은 전쟁처럼 강경하게 금지할 수가 없으며 어 떤 점에서는 의로운


정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하냐념의 종들에게 적용하기에는”
역시 거의 부당하다 할 것이다. 그것은 우상숭배의 일종안 ‘담욕’을
떠나서 이익 획득의 진정한 동기는 있을 수 없기 해문이다 31
철학과 예숭에 대한 터툴리안의 배 격 태도는 뱅역에 판한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렬 하다. 그는 그 당시 의 일부 기 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파
헬라 철학자들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연결시키려고 노력하는 데 대하
여 아무런 공강도 표시 하지 않았다. “스토아, 플라톤, 또는 변증법적
철학으로 엘룩진 기독교블 접어치우라 ! "고부르짖는다. “우리는예수
그러스도를 가진 다음에 또다시 기요한 논쟁올 일삼을 필요가 없
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또 다른 신앙을 원
할 이유가 없는 것이마”라고 하였다 32 소크리셰스의 수호신 (diamon )

해서 터툴리안은 한 악마를 발견한다. 헬라의 제자는, 그에게 있어서


는 “하늘의 제자”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가지 고 있지 않마 . 첼라의
제자들은 진리를 부패하게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명예블 탐한
다. 그들은 말얀 하고 살행은 못하는 자들이다. 이 비기독교 사상가
들어1 게 도약간의 진리가있다면, 그것 은그들이 그통찰을성서에서 끌
어냈을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예술에도 부패의 오점이 펴지고 있다.
운착척 조예를 전적으로 기 피한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 “그러므
로 문학 공부는 신자에게 허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가르치 는 것
은 만대하여야 한다. 그것은 문학 교수 노릇을 하려면 그 운학 속에
첨투되어 있는 우상 예찬을 소개하거나 긍정하지 않을 수 없기 해문
이다 "33 극장에 판하여는 그 연기가 경박하고 잔안할 뿐 아니라 가
장 고상한 바극파 음악이라 할지라도 죄의 사역자됨에는 마 찬가지라

30. 0η Idolatry , xix; De Corona , xi.


31. 0π Idolatry , xi.

32. Prescript on Against Heretics , vii; Apology , xlvi.
33. On Idolatry , x.

6l
고 그는 보았다. 터툴리얀은 최후의 심판의 광갱에 대하여 만족한 쾌
감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에게 신으로 높 임을 받던 군주
플, 세상의 지자(智者)들, 철학자, 시인, 마극 작가들 , 극작가와 경기
자듭이 마 함께 암흑 속에 서 이 를 갈고 통곡하든지 또는 불바마 을결
속에서 둬 흔들바 고 있을 그 띠} 에 그블에꺼1 천대받던 옥수의 아듣 은
높이 돌려 영광받는 그 광장에 기 쁨을 느낀 것이마 34
이 북 샤프리 카의 위 대 한 신학자는 “문화에 대 립 하는 그러 스도”의
엽장을 매 표하는 기녕탑윤 세운 셈야다. 그러나 그의 표현은 그의 본
의보다도 더 파격하고 꾸준했던 것을 침작할 수 있다 35 문화가 이교
석 이라 한지라도 사실상 그 자신도 교회도 때써 포 문화에 의지하든지
또 는 가담하든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교회사상 만문화 운동의 최선봉에 선 거싱-(巨 像)이었다는 데는 틀럼
없 을 것이마.

2. 톨스토이의 문화 배척

초대 기독교의 이 주제 (motif) 가 각양 기판플파 문명 사회와 카

정파 국가, 학교와 사회적으로 설치된 교회와 상엽파 공엽 등으로


부더 불러나는 수도원 운동으로 전개된 경로를 우리는 여기서 기숭하
려 하지 않는다. 사실상 여러 가지의 수도원주의가 생겨났£며 그 중
어맨 것은 터툴리얀이나 요한 1서의 그것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위치
릎 차지하고 였음이 물론이다. 그러나 이 운동의 주류-예를 든다
면 ‘에 네 덕 트의 규칙 ’ (The Rμle of St. Beη edict)으로 대 표된 것 같은­

는배다적 기독교 천통을 지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운동。l 결파

34. De Spεctaculis, xxx.


35. C f. C. N. Cochrane , Christianity and Classical C:μltμre , 1940, pp.
222 ff. , 245 f 터툴리 안의 윤리 에 매한 더 자세한 논의는 Cha rI es
Guignebert, Tertullien , Etude sur ses Sentiments a 1’ E'gard de 1’ EmPire
et de la Societé Ciνile, 1901 , 파 Theoder , Bhandt Tertulliaηs Ethik (l 929)
를보라.

62
제 2 창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척으로 문화에, 언정된 사회적 종교를 포함하여, 어떤 공헌을 남겼다


할지라도 그것은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부산물이였음에 틀림
없 다. 그 본뭇은 문명 으로부터 분리 하여 그러 스도의 율뱀 에 복종하며
사 람들의 정치, 경제 , 파학, 또는 예술 등에서 추구하는 목적파는 온
천허 구별된 완전을 추구함으로써 기 독교인의 생 활의 완성에 이르려
는 데 있었던 것이다. 개신교의 소종파인들-쉽의적, 사회학석 의미
에서 말하는-은 그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하얘 같은 유형의 대맘
을 주고 있다. 16, 17세 키 중에 카툴럭 과 프로테 스단드 쌍방에 서 함께
얼어난 수다한 소종파들은 세속화된 교회에 반대하고 그러스도의 주
권에만 복종한다는 것을 표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지금까지 남아 있
는 소종파는 극 소수에 불과하다. 에 노나이 트파 (The Menonites) 는 이
태도를취하는소종파중의 가장순수한대 표라할수있다. 그들은정
치 운동에 가담하는것을 전적으로 반대하며 뱅역을 거부할 뿐 아니라
경제 생활파 교육에 있어서도 그들 자신의 독특한 판승파 규례를 염
수한다. 퀘 이 커 파 (The Society of Friends) 도 그들의 형 제적 인 우애 를
설행하는 것파 뱅역을 거부하는 전에서는 유형적으로 볼 때 같은 부
류에 속한다 할 것이나, 그렇게 파격한 것은 아니며 또 꼭 들어맞는
형은 아니다. 하여간 현대 퀘이커파가 그러스도를 문화의 내표자로
간주하는 기독교의 태도에 반대 입장을 취하는 펀에 더 가까야 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마. 36 그 밖에도 수벡의 다른 소족파들-과, 그중의
대다수는 소멸되였지만, 개안적으로는 수천으로 헤아릴 수 있는 사랑
들이 그러스도에게 충성하기 위하여는 부득불 문화에서 후퇴하고 세
상을 위한 모든 책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심정을 가지고 있
었다. 우리는 그렌 사랑들을 언제나 어디서든지 얀나게 된다 . 19세기

와 20세기 초엽 에는 이런 입장에 대하여 사랑들이 벨로 흥미를 느끼


지 않았다. 대부분처 기독교안들은 그들의 문제에 대하여 다른 연
에서 해답이 성랩되었다고 믿었기 해문이마. 그러나 같은 시대, 같
은 장소에서 같은 환경에 처해 있으면서 그 자신의 독특한 방식 A로,
터툴리 안보다 뭇하지 않게 과격하고 또 체계 았게 반대폰을 주장한

36. 중세기 및 현대 종파주의의 논리라는 뱅위 안에서 최선의 논평은 E.


T roeltsch , The Social Teachings of the Christian Churches, 1931 , pp,
328 ff. , 691 ff. 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63
사랑이 단 하나 았다. 그는 레오 툴스토이 (Leo Tolstoy) 였다 . 우리
는 그의 이론에 대하여 특별한 판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그
자신의 생활파 예술에서 표시한 그 위대하고 극적인 신녕과 서양파
동양, 기독교와 그 이전의 모든 면에 청투된 그 캄화력의 광염위한
것으로 보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툴스토이 의 큰 위기는 그가 중년 기 잘 지나 많은 곤란을 겪은 후 뷰
음서 의 예수 그러스도를 자기의 유일한, 그러고 명백한 권위로 받아
들인 그 순간에 결단펀 것이었다. 귀족3로 태어았고 풍부한 유산을
받았을 뿐 아니라 ‘천쟁파 펑화,’ ‘안냐 차레리나’의 작자로 유명한
그였지얀 그는 자기 존재의 무의마함과 사최가 평가하는 모든 가치
틀의 무가치함을 느낌무로써 자신의 생활에 결정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나 . 그는 이 정망에서 안정」즈로 솟아오늘 수 없었마. 그는 실재
에 근거한 불가피석 진리로서 예수의 교훈을 안정하고, 동시 에 다
른 모든 권위의 오류를 시인하지 않고서는 그의 삶의 전적인 상태 에
서 새로운 촬동으로 옮걸 수가 없었던 것이다 37 플스로이에게 있
어서는, 예수 그러스도 는 언제냐 위대한 입 1섭자로셔 그의 계명은 안
간의 진정한 본성과 타락하지 않은 이성 의 명령에 부함되는 것이였
다. 예수가 참으로 하신 것은 사랑들에게 새 계영 을 주려는 데 있
었으매 그 계명은 만물의 본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실강한 것。 1
그의 희 싱의 중심을 이 루고 있다. 그는 그의 생애의 대 변혁에 관
하여 아래와 같이 썼다. “나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그의 계영에서 이
해하였마. 그러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냐에게 축복이 되며 동시 에 모
듣 사람에게 축복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이 계명을 지 키는

것 이 만불의 근원되는 이의 돗이 며 그 근원에서 나의 삶도 유래한 것


임을 나는 깨달았마 이 계영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가능케 하는
유 일 한 것이마 이것을 깨달았을 해 나는 예수가 메시야, 그러스

도일 뿐 아니라, 선살로 세계의 구원자란 것을 이해하고 또 믿게 되


었마 . 이 세상에서 고초당하고 있는 나와 나의 오든 이웃을 위하여

37. The Tolstoy Ce ηteηary Editioη , London , 1928-37중의 “ The Christian


Teaching" , Vo l. XII, pp. 209 ff. 의 서섣. 이책에서는 이하에서 위의 책을
안용할 예 에 는 마만 ‘ Works’라 고만 쓸 것 이 다. 그리 고 “ A Confession",
Works , Vo l. xi pp. 3 ff.; “ What 1 Believe’, Vo l. xi. pp. 307 ff.

64
제 2 장 문화에 대랩하는 그리스도

단하냐의 나찰 걸은 이것뿐임을 냐는 알고 있다. 나와 나의 모든 이


웃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계명을 이루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 피할 곳
도 없 는 것이다. 그것 은 그리스도의 계명이 전 인류에게 최고의 복리
를 제공하는 것임을 내 가 깨달을 수 있였기 째 문이다 "38 툴스토이 가
이 새 율법, 특히 마태 복음 5장에 기록된 것을 글자 그대 로 해석하는
것 파 그것 을 꼭 그대로 지키려고 준엄하게 결의한 것은 그의 회심을
가장 극단적 인 사건으로 만들었다. 그의 작은 저작, ‘냐의 신앙’ 또
는 ‘나의 종교’에서 그는 신 약성 서릎 이해하려는 그의 노력파 또한
신약성서를 이해하려면 본문에 첨 가된 교회의 온갖 주석을 제거하고

본문의 글자 그대 로 이해해야 한마는 그의 결론에 도달한 해에 이로소


그의 고투 o슴關) 가 끔났다는 자기 경 험 을 진솔하였 다. 그 때 그러 스도
의 계명들은 하나닝의 영원한 법칙 의 선 포란 것이 명백해졌마 . 그는
모세의 율법을 폐하였다. 그가 온 것은 옛 율법을 재강조하기 위함이
라든가 자신이 삼위일체의 제 2위 안 격임을 가르치기 위 해 서가 아니었
다 39 툴스토이는 자기가 이 새 율법을 영백한 5개 항목에 총 필-하려고

커도한 것이 공 복음올 충실하게 해석하는 것이라고 맏었던 것이 마.


첫째 계 명은 “모든 사랑과 화펑하게 살라. 어느 누구에게라도 분노로
대하는 것을 정망하다고 생각지 말라 너와 다른 사 람들 사이에
무슨 적의라도 있거든 마리 그 적의를 없애 버 려라. 그리하여 그것이
타올라서 너 를 멸망시 키지 옷하케 하라 둘째 계영은 “성 (性) 판계의
욕망을 하냐의 향락으로 삼지 말라. 한 남자는 한 아내 만을 가지 고 한
아내는 한 남펀만을 가져야 한다. 그러하여 자기 아내 나 자기 남펀 이

외 에 다른 사 람과 성적 연합을 멍하는 것은 어떤 구실에서든지 용납하


지 말아야 한다 “영백하고 실행성 있는 세째 계명은 아무와도 어
다서든지 무엇에 대해서든지 결코 맹세하지 말라. 모든 맹세는 악한
목적을 위하여 강요된 것이다 네째 계명은우둔하고 악한 ” 현재
사회 질서 를 파열시키는 것이벼 그것을 간만 명료하게 또 실천성 있케
이렇게 말 하였다 . “행악자에게 폭력 으로 항거하지 말라.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말라. 그들이 너를 해리거든 참A라. 그들이 네 재산을 가


져 카거 든 주어 버리라. 너회 를 일시 키거든 알하라. 네가 네 소유라

38. “ What I Believe ,>> Works , VoJ. xi , pp. 447, 448.


39. Ibid. , pp. 353 ff. , 307 ff.
65
생각하는 것을 그들이 가져가거든 그대로 주라 마지막 계영은 원
수를 사랑하라는 것파 연결된 것이어서 “영백하고 중요하고 싶행 성
있는 규뱀이다 제 냐라와 다른 나라의 차별을 만들지 말라. 그
렌 차옐로 말미암아 생기는 모든 것에 가담하지도 말라. 외국파 원수
를 맺지 말라. 전쟁하지 말라. 전쟁하는 데 가당하지도 말라. 전쟁
을 위한 군비도 가지지 말라. 마만 어떤 민족이나 어떤 국가임을 막
론하고 모든 사랑에 대하여 내 냐라 백성에게 대하듯 하라 "4 0 이 다
섯 가지 율법 을 공포함으로써 그러 스도는 하냐닝 의 나라플 건설 하였
다고 툴스토이는 맏였던 것이다. 그려나 그 중에서도 무저항주의가
전체의 영죄가 펜다고 생각하였다 .
우리가 고찰한 이렌 유형의 다른 살 례에서도 보는 대 로 , 예수 그
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려는 경건에 그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은 모
든 문화적 제도에 대한 철저한 반항 태도이다. 툴스로이 에 의하띤, 01
문화적 제도란 것은 착장한 과오의 기 반 위에 서 있는 것이어서 인간
의 현세 생활에 울가피적으로 섞여 있는 악을 시안하며, 삶은 외적안
뱀칙 에 의하여 지 배되는 것이므로 안간이 자기 노력에 의하여 축복 받
을 수는 없 다는 것을 믿£며 죽음의 콩포, 자기의 실존파 창 생명을
일치시키는 것, 무엇보다도 폭력을 믿고 또 그대로 실행하는 것 등이
문화의 그릇펀 기반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안
간성 자체 안에 있다는 데 대하여는 터툴리안에 비하면 거의 생각
하지 않고 있였다. 안간이 항쟁해야 할 악은 문화 안에만 있다는
것이다 . 더구나, 툴스로이는 문화가 안간성 얀에 미치는 영향의 뱅
위와 깊이가 엘마나 크다는 것을 제대로 。 l 해하지 못한 것 같다 .
그러므로 그는 의식적 〔意짧的)안 신앙과 쿠체적 제 제도, 그러고 사
회의 허울 좋은 판습들에 그의 공격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란 데 로부터 자기 혼자만 불러 가 반(半)수도원적 인 생활을 영
워하는 것으로만 만 족 하치 않고 더 나아가 그러스도의 율법이라는 깃
발 아래에서 문화에 대항하는 십자군이 되었던 것이다.

문화의 모든 국변이 버난의 대상이 펀다 . 국가와 교회와 재산 제도

40. Ibid. , pp. 376 f. , 386, 390 , 392 f. 404. C f. “ The Gospel in Brief,>> Works ,
Vo l. xi , pp. 163-167.

66
제 2 장 문화에 대렁하는 그러스로

가 다 악의 소굴임은 물론야지만 철학, 과학, 예술 동도 역시 정죄의


대상이 띈다. 툴스토이에게는 선한 정부라는 말은 있을 수 없였다.
“혁명가들은 말하기를, ‘야 정부 조직은 나쁘고 저것은 좋다.’ ‘이것
은 없애 버리 고 저것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냐 거독교안은
이 렇 게 말한다. ‘냐는 정부 촉직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그리 고 앨마만큼이 신한 것이고 엘마만큼이 악한 것안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도대체 정부를 지지하려 하지 않는다 국가적 의
무라는 것은 예외 없이 기독교안의 양심에 거술린다. 다시 말하띤 충
성의 서약, 납세, 볍 률 집행, 군대 의무 등야 마 그렇다 "41 국가와

기독교적 신앙은 양립할 수 없다. 국가는 켠력욕파 폭력 행사의 근


거 위에 서 있음에 반하여 기독교안의 생활은 사랑과 겸손과 용서와
우저항 등이어서 。1 런 생활은 정치적 볍령이나 제도와는 온천허 떠냐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국가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기 보다는 국가


의 기 초속에 잠입 하얘 안으로부터 붕괴시 킨마. 그러 냐 바울야 말하는
국가란 악을 제지하는 중간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견해는 툴스토이에
게는 아무런 감 명도 주지 뭇하였다. 그는 삶에 대한주요 염행자가 국
카라고 보 았기 해운。1 다.42 국가의 악행에 대항하기 위하여는 완전한
불참〔不參)의 걸을 취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모든 사람을
평화롭고 무정부적인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한 비폭력적 투쟁을 계
속하는 걸밖에 없마고 보았다.
바록 교회들이 스스로를 기독교안이라고 부르고 있다 할지라도 그
들은 다 같이 예수 자신의 기독교에서는 멀리 벨-어져 있다는 것이다.
블스토이 는 말하기 를 교회 는 그들 자신의 무오성 (無誤性)을 주장하는 자
기중심적 조직체라고 하였다. 교회는 국가의 종이며 폭력과 ’특 권의 통
치 릎 옹호하는 자이며 불형등파 재산 소유를 변호하며 복음을 위조하
거냐 애애하게 하 는 기판이라고 하였마. “교회라는 이릉을 가진 모든
교회 들은 다 반〔反)기 독교적 제 도들이 다 그것은 그들의 “교만파 패
역파 고칩파 완고와 죽음” 해문에 기독교안의 생활의 겸손파 참회와
온유와 말전파 생명에 온천허 적대하고 있마 .43 국가의 경우에서와

41. “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Works , Vo l. xx , pp. 275 f.


42. Ibid. , pp. 281 ff.
43. lbid. , p.32.

67
마찬가지로 그객한 제도의 개혁이란 것도 전혀 불충분하마. 그리스도
는 교회를 창설하지 않았다. 그러고 그러스도의 교리 를 이해한 사람
이연 교회를 개혁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 교회와 그 의의 를 파멸시
켜 버리려 ” 할 것이마 44 이 교회에 매한 파제도 국가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그의 논악의 주제가 되어 있약. 교회는 악마의 말영품。 1


마. 적어도 정직한 안간이라면 복음을 믿으연서, 동시에 신부나 설교
자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 것이마. 모든 교회는 다 마찬가지로 그
러스도의 율뱀을 배반하고 있다. 교회와 국가는 둘 다 폭력파 기만의
제 도화를 대 표한다 45

경제 제도에 대한 툴스로이의 공격도 꼭같이 바타협적이다. 자기의


재산을 전적으로 포기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 재산을 판리할 약간
의 책임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인적 불챙의 일부를 조성
하고 았었다 . 재산권이란 것은 강탈을 기초로 하고 폭력무로 유지해
가는 것이라고 그는 밍였마. 2세기의 과격한 기독교인이냐 또는 대부
분의 수도사들보마도 더 파격한 그는 경제 사회에 있어서 분엽 제도
에까지 반기를 들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 분엽 제도란 것은 특권 안
사들, 즉 예술가, 지식안, 또는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 금
그들이 타안의 노동력 을 빨아먹 고 살연서 도 자기 들은 노동자들보다

더 높은 질서의 존재자이며 , 또는 자기들의 사회적 공헌은 너무나 크


기 때문에 , 수공엽 노동자들에게 파도한 짐을 지운 손해를 배상하고도
남음。 1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방펀이 되었다는 것이다 . 우선 첫째 가
설(假說)은 안간 평등이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의하여 거부펀다. 사회
에 대한 특쉰자듣의 공헌이란 것은 영백히 유해한 것은 아니라 할지
라도 의심스러운 공헌이라는 것이다. 그러으로 툴스토이는 지식안야
냐 지주나 군안들에게 권고하기를 자신들을 스스로 속이지 말고 스스

44. Ibid. , pp. 69, 10 1.


45. “ 지 옥의 회 복" ( T he Restoration of Hell) 야 하는 유형 한 우화(萬話〕 중에 서
그는 그리스도가 승리한 후에 지상에 다시 악의 권세가 수립된 경로를 특
히 교회의 설랩을 두고 설 영하였다- 교회를 말영한 악마는 마왕 벨제-룹에
게 보고하기를 “나는 사람플이 그리스도의 이릎으로 내 교훈을 믿도록 꾸
며 놓았읍니다 그을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믿지 않도록 되어 있읍니다” 하
였다 . Works , Vo l. xii. pp. 309ff. 참고. 그리고 “ Religion and Morality,"
“ What is R eligion?" “ Church and State." “ A n Appeal to the Clergy,"
이 천집 중 위위 책 속에 수록되었으드로 동시에 창고하라.

‘ 68
제 2 창 문화에 대렁하는 그리스도

로 노동하얘 자가와 다른 사량들익 새께」를 유지하라고 하는 것이마.


툴스토이 자신은 이 원칙 을 실천하기 위하여 제 손으로 제 양복을 지
어 업고 제 구두를 만들고 제 정 원을. 가꾸고 제 음식을 요리 하기에
애 썼마 46

터툴리얀마 마찬가지로 툴스포이도 자가 자신-올 키워 준 철 학, 과


학, 예술 능에 만항하였마. 처음 두 가지, 즉 철 학파 과학은 무용
할 뿐 아니라 유해하다. 그것은 안생의 의의와 챙동에 대한 근본 문
제에 해탑을 줄 능력이 없을 뿐 아 니라 허위의 근거 위에 수럽되어
있기 해문이다 실험 파학이 “ 물질파 에너지는 존재한다 ” 는 교의를
확립하기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경주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실
제 생활에 아무렌 개선도 가져 오지 옷한다. “우리 유럽인들이 지금
소위 ‘파학척’ 촬동이라고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것이 수세 기 후에
는 쾌락과 비극의 꺼지지 않는 유산을 후손에게 남겨 놓고 말 것이
라고 냐는 확언한마 "47 철학은 우리에게 모든 것은 허무하다는 지식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 뭇한다. 그러나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 런아이에게는 나타내” 주신다는 말씀 그대로 산상수훈을
짜르는 평벙한 농민들은 이 위대한 학자들이 이해하지 옷하는 바의
〔秘義)를 잘 이해하고 있다. “특별한 재능파 지성석안 천품은 진리 를
깨닫고 선포하기 위하여 필요하기보마도 거짓의 말영파 그 진술을 위
하여 필요하다 "48 예 술가로서 의 툴스토이 는 예 울과 완전히 갈라질 수

는 없였던 모양 이다. 그는 적어도 에 슐에는 선한 것파 악한 것의 구 별


이 았다고하였다. 악한예숭이라는 멈주 속에 그 자신의 회섭 전의 창
작 중 2 펀의 소품을 제외한 전부를 포항시켰 다. 모든 것은 득권 계
급을 위하여 고안된 “뉘족” 문화이어서 ‘행릿’ (Hamlet) 이 나 ‘제 9 교향
악’ ( Ninth Symphony) 까지 도 그 부류에 포함완다고 하 였 다. 그러 나 예

술 중에는 강정 의 진지한 표현파 교류를 위 하얘 유용한 것도 있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런 예술은 보펀적으로 적응되는 것이어서 대중에게
이해되는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척 도덕 의식에 일치 되는 것이라

46. “ What Then Must We Do?" , Works , Vo l. xiv, pp. 209 ff. , 69f f., 311 ff.
47. “、Nhat I Believe," 찌'orks, Vol. xi , p. 420; cf “ A Confess ion ,>> Vo l. XI,
pp. 23 ff. ‘ On Life ," Vo l. xii , pp. 12 f.
48 “ Reason and Religion ," Works , Vo!. xii , p. 202; cf. “ A Confession ,’
Vol, xi , pp. 56 ff. , 73 f.

69
하였다 49 그가 부저항주의와 참 종교에 판한 설교냐 책자를 써 내든
데 그의 위대한 문학적 재능을 기울이지 아니한 대신에, 그는 비유와
。 1 야기책들을 써 내였마. 즉 “사 랑 있는 곳에 하나닝이 계시다
“ 주(主) 와 사람” 둥이 다.

툴스토이도 마흔 위대한 인물들이 어떤 틀에 꼭 을어맞지 않는 것


파 마찬가지로 우리 가 말하는 유행에 꼭 들어맞지 않는 것이 사실。1
다. 그도 요한 1 서 저자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찬양함과 동시에 “육신
의 정욕파 현세의 자랑”을 배격하였다 . 그도 더툴리안과 마찬가지로
사회 제도들을 과격하게 콩격하였마. 그가 개인적 특권들을 포기하고
불러가 빈곤을 택한 점에서는 수도사와 강 았 다. 그러나 툴스토이는
이 모든 사란들보다 다른 점이 았었다. 그것은 그와 예수 그러스도와
의 판계성이였마 . 즉 다른 사람플은 다 자기 개인의 주닌에게 자기
개안 으로서의 현신적 경건을 바쳐 왔으나 툴스토이는 그 점이 이상할
만큼 결 핍되어 있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시는 그리스도의 법이 그
러스도 자신보다도 훨씬 더 의의 갚은 것이었다. 액심 고르키 (Maxim
Gorky)의 툴스토이 회상록에 보면, 툴스토이가 그러스도에 대하여 말
할 얘 그에게는 “전열도 없고 그의 하는 말에 강정도 없고 진정한 붕
꽃도 없었다” 고 한 귀절이 있다 50 그의 저서에서 받는 느낌은 대체로
그렌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닝의 은
혜에 대한 그의 이해는 거의 없마 하켜도 좋을 정도다. 기독교적 계시
익 역사석 본성이라든지 타락파 구원의 심리적, 도덕적, 영적 의의라
든지에 대한 이해도그에게는 결 핍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멤률가
안 터툴리얀보다도 더 율법주의적이었다 . 그러나 현대 역사 안에 았
어 서, 또는 그 자신도 한 부분이었고 또 그 산물이었던 현대 문화의
조건 밑 이서 보연, 툴스토이가 여전히 반(反) 문화적 기독교의 분명한
대표자로 남아 있음에는 틀림없마. 51
이란 유형의 인물을 장황하게 열거하려면 한이 없다. 하나하나 상
숭한마연 그 안에서도 허마한 분파 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동파

49 “ What 1s Art?" , Works , Vo l. xv iii , pp. 231 ff.


50. Maxim Gorky, Reminiscences αf L ~o Nikolaevich Tolstoy , 1920. p. 5.
51. 폴 스토야 의 생 애 와 사엽 에 매 한 충 분 한 기 록을 원하는 이 는 Aylmer Maude,
L ife of Tolstoy 와 Ernest ]. Si mmon , L eo 1'olstoy 를 참고하라.

70
제 2 장 문화에 얘렵하는 그리스도

서의 카툴랙, 정교회와 종파적 프로테스탄트, 천년왕국주의자와 신매


주의자, 그러고 고매, 중세 및 근래의 기독교인들게에서 수많은 분
파를 찾을 수 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만의 권위를 안정하
는 것과 현행 문화를 배격하는 점에 있어서는 다 공통된 태도를 취하
고 있음이 명백하마. 그 문화를 기독교척이라고 부르든 않든, 그렌 것
은 그들에게 아무 마를 것이 없였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문화는
다 이교적이요 부패한 것이었기 해문이다. 또한 이란 기독교안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사고 땅식이 묵시척이든 신바척이든, 그랜 것도 그러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였다. 묵시적얀 경우에는, 그들은 이 옛
사회가 조만간 지나가고 새 질서가 역사 안에 들어온다는 것을 예연할
컷이다. 산비적인 경우에는, 그들은 이 헛되고 잔정적언 문화적 현상
때문에 숭겨잔 영원한 섣서의 실재를 경험하고 또 선포할 것이다. 01
청에 판하얘 기독교인들에게 물어 봉 중대한 문제는, 그들이 하냐냥
나라를 역사적으로 생각하느냐 신비적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냐닝 냐라가 가까이 왔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 신냄에
의하여 행동하느냐 또는 그것이 바교적 멜라 옐어 져 있고 또 비교적
약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점에 있는 것야다. 이것
은 카툴럭 이 나 프로테 스단트냐 마찬가지 이 다. 수도원척 특색 이 프로
테스탄트 소종파들에게 다시 냐타냐 있다. 루터파의 키에르케고르
CKierkegaard)가 종교개혁 。 l 후의 문화적 기독교계를 공격한 것은
위클리프 (Wiclif)가 중세커 사회석 신앙을 공격한 것과 마찬가지로
비 타협 적 인 것 이 었다. 01 런 안물들파 그 운동은 다종다양(多種多樣)
하였마 할지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와의 문제에 대하여 뚜렷한 공통
대탑을 주고 있다는 것만은 사살이마.

3. 필요하나 부적절한 입장

기독교안의 딜레머에 대한 이러한 해결책에 대하여 반대론을 제기


하기는 쉬운 것이다. 그러나 지성적인 기독교인으로서 그 자신이 의
식 척 으로 이 엽 장을 취 하지 는 뭇한마 할지 라도 。1 엽 론자(立論者)들의
진지성파 그 입장이 역사 얀에서 가진 위치가 중대하마는 것파 교회와

71
세상파 2.] 천적안 얀냥에 있어서는 펼요하마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마.

설익고 혼탁한 두뇌흘 가진 안간들::>] 반문화 운동에서 날뛰는 일이


많은 것은 마른 부문에서와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도 위선이 벤식하고
있음이 물론이다. 그러나 이 유형의 위대한 대표자들의 충성과 성살
성은 가장 매력적인 성질의 것이다. 그들의 생활에는 키에르케고르
적 “반복”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말로 한 것을 행동으
로 냐다 :.1]었 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러스도에 대한 충성을 고백하기
위하여 쉬운 걸을 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소신을 위하여 가
정파 재산파 정부의 보호를 용갇하게 포기함으로써 육신척 , 정신적
고난에 참가했던 것이다. 그들은 비국교도들에게 퍼붓던 사회적 조소
와 증오를 받아들였다. 도미시안 황제 치하의 기독교의 시대로부터
국가사회주의의 독일과 민주주의의 미국에서의 어호와의 증인의 강
금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순교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우리 시
대에 있는 기독교 평화주의자들도 같은 그릎에 속할 것이다. 마 그
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고난당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마음 속으로
냐 마른 사람들 보기에냐 기독교 영사로서 고생하고 죽고 하는 경
우에서 받는 괴로웅보다도 예수 그러스도에게 순종하기 배문에 받는
고난이 더 뚜렷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운화에 대립하는 그리
스도”라는 해 탑이 마음을 끄는 이 유의 하나는 행 동우로써 하는 고액 의
이러한 영백한 반복 해문이t:-}.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 자신과 다
른 사랑들에게 우리가 예수 그러스도블 우리 주님이라고 말한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t:-}.
역사상 이랜 기독교인 들이 사회의 제 제도에서 불러나 이블 거부
하는 것은 사회와 둔화 쌍방에 극히 중대한 알이었다 . 그들은 그러스
도와 가이사, 계시와 이성, 하나념의 뜻파 사람의 뭇 사이에 명액한
쿠 벨을 유지하여 왔마. 그들은 교회와 사회에 변혁을 가져왔으나 그
것은 결코 그들야 당초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였다. 이런 종류의 운동
파 그 운동자들은 흔히 그들이 배격한 문화의 역사에서 영웅적 역할
을 담당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누르시아의 베네믹트 CBenedict of
Nursia)에 관한 온탈렘 베 르트 C Montalembert)의 말은 어떤 의미에서
이란 배타석 기 독교의 모든 대표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72
제 2 장 문화에 대럽하는 그리스도

‘역사가들은 그의 (그는 수도사를 가려킹-역자주) 천재성과 영철한통창

력을 다투어 찬양하였다. 그들은 그카 유랩을 갱생시키며 사회의 붕


괴를 막으며 정치 질서를 재건하며 공공 교육을 채수렵하고 문학파
예숭올 보존하는 등의 일을 기도하였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냐

내가 확살허 믿는 바는 그는 그 자신의 영혼파 그의 형 제안 수도사들


의 영혼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갱생시키기를 품꾸지 않았다는 것이
다"!)~ 물론 하냐하냐의 영 혼을 다시 냐케 함으로써 다 펀 것 같이 생
각하는 것이 파격한 커독교인의 태도에 만족올 줄 수 있는 적절한 판
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회 개혁으로 만사가 다 해결된다고 생각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만족하마. 사회 개혁에서는 그들야 기대하지
아니한 일을 성취하는 예가 많마. 제 2 세 기의 기독교인들은 가이사
의 통치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으나 그것 해문에 교회의 사회적 승
리를 가져오는 걸을 열 어 주었고, 따라서 이방 세계를 기독교 문명
으로 개변시키는 결파를 가져왔다. 수도원주의는 결국 문화석 전통
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데 위대한 공척을 남기었다. 그러고 얘기서 위
대 한 교회척, 정치적 치도자들을 수마하게 산출하였다. 그리고 이 수
도원주의가 많은 제도들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그 제도플은 그 창살
자들〔수도사들)이 버리고 떠난 제도들이였다. 프로테스탄트의 소종파
인들은 정 치적 , 관숭석 전통에 중요한 공헌을 남기였다. 사회의 모
든 성 원()향員)들에 게 종교적 자유를 확보하게 한 것 이 그 중의 하나라
하겠다. 퀘이커 교도을파 툴스토이주의자들은 다얀 압제 정치의 온갖
방 볍을 폐기시키 려는 데만 옐중하였£냐 그것 때문에 감옥을 개혁하
고, 군비 축소, 상호 견 제에 의한 국제 형화 의 모든 기구 창설 등에
공헌한 바가 컸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반문화척 기독교인이 문화의 개혁에 중대한 구실
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안정하였마. 그러냐 동시에 우리는 그들이 이
런 결과를 직접척우로 또는 단독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근본
적안 질문에 그들보다 다른 대답을 제공한 신자들의 중개에 의해서
만 그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터툴
리 안이 아니 라 오리 겐, 알렉 산드러 아의 클레 멘트, 암브로스, 그리 고

52. De Montalembert, The Mo캔s 01 the West , 1896, Vo l. I, p.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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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거스탄이 로마 문화의 개혁을 시착한 것이었마. 베네믹트가 아니
라 프랜시스, 도마니크, 클례어보의 베르나르드가 중세기 사회의 개
혁을 성취한 것이다. 조오지 폭스 (George Fox) 가 아니라 펜 (William
Penn) 과 울연(John Woolman) 이 영 국파 마 국의 사회 제 도를 변화시

킨 것이다. 그러냐 어느 경우에냐 그 추종자들은 배타적안 그러스도


에 대한 배타석인 충성 이외의 무슨 다른 데로부터 오는 영감을 짜라
칼 정 도로 극단론자들의 교훈을 타협 시 키 지 는 않았다.
문화의 문제에 대한 극단적 기독교안들의 해답은 파거에 있어서 필
요했던 것과 같이 지금도 확실히 필요하다. 이것은 그 자체를 위하여
필요하마. 만일 그것을 제거한마면 다른 해답을 제공하는 기독교안
그룹이 균형을 앓고 말겠기 떼문이다. 그러스도의 권위 가 문화의 권
위에 판계되는 점이 이러하므로 모든 기독교인이 흔히 이 세상과
이 세상 나라들의 장다성파 잠정성, 그들의 이해 판계에서의 타웹
행 동, 그들의 현생(現生〕에 대한 사랑과 죽읍에 대한 공포로 생기
는 압박감둥을 단연 배격하는 것이 곧 그러스도의 명령이라고 느끼는
것이마. 퇴거와 포 기의 운동이 모든 기독교안 생활에 없지 뭇할 요소
안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문화에 대한 책임적인 참여 운동도
그와 뭇지 않게 필요하다. 이렌 균형이 결핍될 빼 기독교 신앙은 개안
적 벤영이나 공공적〔公共的) 평정(平靜)을 위한 공리주의적 도국로 전
락해 버린다. 그러고 주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어떤 자기 상상에 서 산
출펀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개인 생활에서 필요한 것은 교회의 생존
에 도 필요하다. 만알 로마서 13장이 요한 1 서 로 말마 암아 균형 잡히지

않았다면 교화가 국가의 도쿠가 되어 버렸을 것이며 , 짜라서 사람들에


게 초정치적〔超政治的) 운명과초정치적 충성을지시해 줄 수없았을 것
이다. 그러고 또한 권력욕에 굶주련 자나 안일 〔安速)을 탐하는자 이외
에는정치적 책임에 동참하려 하지 옷할 것이다. 예수그러스도의 권위
를전적으료 인정한마연 극단석안 해답이 나오지 않을 수 없 다. 사람들
이 자기 들 의 운영에 대하애 실 망할때뿐 아니라그들이 이에 만족해 할
때에도 그러하다. 그들이 하냐닝의 냐라를 바라고 기다리는 의미에서
뿐 아니라 일시적인 사회의 허물어지는 담장밑에 사람들이 애몰되지 않

도록 당장을 쳐받들고 있을 경 우에도 그러하다. 영원을 시간적인 용에

로 벤역하거냐 시간을 영원-으로 벤역하지 뭇하는 한, 또 그러스도와

74
제 2 장 문화에 대랩하는 그려스드

문화를 혼합하지 못하는 한, 교회 안에서 극단적인 해답은 역시 없을


수 없을 것이마.
이것은 불가피한 대답이다. 그러나 또한 적절하지 옷한 내담이기
도 하다. 그것은 교회에서 서로 대립된 그룹이 상대방에 대하여 용
이하게 치적한 수 있는 것으로 보 아 알 수 있마. 이것이 부적절하다
는 이유의 하냐는 우선 그들이 이것을 말로는 긍정하면서 챙동으로는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문화를 전적으로 거부하고 오직
그리스도얀을 온천허 신뢰한다는 것이 파연 카능하냐 하는 것을 생각
해 보면 알 것 이 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하나의 단순한 자연적 존
재로만 보신 것이 아니라 문화 안에서 인간이 된 존재자로 보신 것이
었다. 인간이 다만 문착 얀에 있는 존재자일 뿐 아니라 문화로 속
속플이 천투펀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문화석 언어로 말할 뿐 아니라
그것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안간의 주위에 있는 객판적 세계가
안간의 엽적으로 말미암아 제약띈다는 것뿐 아니라, 그 객판적 세계 를
이 해하는 그의 마음의 형식과 태도가 또한 문화로 말마 암아 주어진
것이다. 그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철학사나 파학을 마치 그의 외부

에 서 돌아 가는 것같이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문화의 지도자들에


케서 보다 다른 형태 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것
이다. 문화는 그와 동떨어져 있는 외부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
는 것이다. 그가 가령 어느 정도 외부적인 어떤 제도를 배척한마 한
지라도 그것으로 안하여 그가 정치적 신념이나 경 제 적 관슴에서 자신
을 제외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신녕이 냐 판습은 벨써부터 그의
마음속에 자리장고 있었기 때문이마. 만일 기독교인이 유대교의 언어
와 사고 방식파 도 먹적 교훈을 가지고 그퍼스도에게 오지 않는마연 그
는 로마의 그것들을 가지고 올 것이다. 만알 로마의 그것들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면 그 대신에 독일이나 영국이냐 러시아 나 미국, 인도, 또
는 중국의 그것도 가지고 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극단적 키독교안
은 자기플이 표연적으혹는 배척하고 있는 문화 또는 문화의 어느 부
분을 언제냐 이용하고 있는 것이마. 요한 1서의 기자는 그가배 격 하는
영지주의 철학의 용어를 차용하였다 53 로마의 클레엔트는 반〈半)스로

5 3. C f. C. H . Dodd. op. cit. xx. xxix, xlii. et pa~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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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철학적 사상을 샤용 하 였다. 터툴리얀은 그가 말하는 거의 모든 경
우에 자가가 로마안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너무 냐도 로
마의 법적 전동 안에 서 육성되었고 그 첼학에 의지했었기 때 문에 그
도움 없이는 기독교의 사건을 진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54 툴스토
이 에 내하여도 그가 1 9세 기 러시아 사람이라는 점에서 보연 잘 이해
할 수 있다 . 즉 그 시대 의 문화 운동에 의식석 또는 우의식적 A로 가
담한 사실과 러시아적 신비주의에서의 안간파 자연의 공동체적 의식
안에서 그플 볼 때 그는 밝히 이해되는 것이다. 극단적 기독교 그릎
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의 경우는 마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그러스도
플 얀날 떼 그들의 문화, 즉 그들 자신의 한 부분무로 되 어 있기 예

문에 그것을 배제한 수 없는 그들의 문화의 상속자로서 그러스도를


얀나는 것이다 . 그들은 보다 영시작인 재 제도나 표한에서는 회거한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냐 대부분은 다만 취사선택하거냐 그들까 사회
의 중계를 통하여 받은 우엇을 그러스도의 권위 아래서 수정하는 데
지 냐지 않는 것이마 .
운화적 성파를 보존, 선택, 또는 변혁하는 것은 사실일 뿐 아 니라
배 타적안 기독교안으로서도 망하지 않을 수 없는도덕석 A로불가피한
요청 이 다 그것은 그가 기독교인의 한 사랑이며 동시에 한 인간이기
해운야다. 만얼 그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고백하려띤 그는 운화에
서 유래한 언어와 이념을 방펀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그 의
마는 고쳐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가령 “그러스도 “ 메시야 “주
“ 하냐넘 아들 또는 “말씀” 둥 이미 았던 문화적 용어를 사용하
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가 “사랑”이 무엇임을 설명하려면 “에로
스 ‘필란트로피 아’ (philaη throPiι) , “아가폐 ” 등의 말을 쓰게 될 것

이마 . “자비 “충성 “사랑” 등의 용셔에 있어서도 불콘 마찬가지

이 다. 마시 말하자연 그는 기 존〔많存) 운화 가운데 서 예 수 그리 스도 가


의마한 내용파 가장 가까운 용어를 찾아 내어 그 내용에 짜라 다소의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 이렌 것은 그가 다만 서로 교통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자기 의 신앙 대상이 나 신앙 내용을 알기 위해서 도

54. Cf. C. De Lesle Shortt , The lnflμence of Philosφhy 0η the M ind of


T ertullian , and Beck Alexander , Roemisches Recht bei Te rtμllian uη4
Cyþriar.ι

76
제 2 장 운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반드시 그리해야 한마. 그가 예수 그러스도의 명령대로 이루어 가려

할 때, 한펀으로는 그가 자기 사회의 문화와는 다른 용어로 명령딸은


것을 자치 자신의 문화 용어로 벤역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이며,
또 한펀으로는 그의 사회 생활에 알맞는 특수한 규칙을 차용함으로

써 얼반적안 원칙에 정말성과 의미 를 제공한 요청도 받고 있는 것이


다. 안식일을성얼〈뿔日)로지키지 않는사회에서는안식일에 대한예수
의 말씀은어떤 의미를가지고 다루어져야할 것인가? 그것이 제약펀
형태혹 소개되어야 할 것안가? 또는 이국적 ( 異國的 ) , wl 기독교적 문화
라는 의미에서 일축해 버려야할 것인가? 1세기 팔레스틴 의 그것보다
근본적 A로 다른 우주판을 가지고 았는 문화 안에서 하늘어1 계신 아
버지께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마 할 것인가? 마귀의 존재 자체블
믿지 않는 고장에서 마귀를 내쫓았다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
가? 우리는 문화를 파할 수가 없다. 우리는 예수가 살고 있던 그 문
화플 재현 (再現) 하려고 노력하든지 그렇지 않으연 예수의 말씀을 우리
의 사회 질서 안에 벤역하여 들이든지, 두 가지 중의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영도 그 이웃의
성질에 대한 문화척 이해 를 내포한 에떤 특수한 언사를 통하지 않고
는 지켜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문화 안에 자리 장고 있는 특수한
존재자로서의 그에 대한 특수한 행동으로 나타내지 않고서는 그 이웃
사랑을 나타낼 수 없을 것이마. 즉 그블 한 가정의 일원으로든지 종

교 단체의 한 사람이라든지 국가적 친쿠 또는 원수라든지 부자 또는


가난한 자라든지 퉁의 문화 안에서의 그의 위치를 무시하고 그를 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으로 극단적 기독교인이 그러스도에게 순
종하려는 노력은 이기독교적 문화로부터 오는 이념과 규율을 두 영
역에 재도입하는 것이 된다. 즉 세상에서 물러앉은 기독교 공동체
의 통치권 안에와 바깜 세상을 향한 기독교안의 행위 규율 안에 도
업하는 것이다.
배썩 기독교의 경향은 그러스도에 대한 충성, 하나닝과 이웃에
태한 사랑 등의 계영을 기독교인의 천교의 권내에만 국한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른 복음의 요청이 역시 강화되어야 한
다. 그러 나 마르틴 다 벨리 우스(Martin Dibelius) 와 그 밖에 많은 사
랑들이 지석한 바와 같이 “예수의 말씀은 기독교 운화를 위한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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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규칙을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 가령 그것이 그렇게 응용펀마 할
지라도 그것으로 알 상 생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충분한 해답을 얻
을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55 다 른 데로부터 오는 도움이 필요하마.
즉 초 대 기독교에 있어서 는 유대 사회와 헬라적 유대 사회의 일반적 윤
리에서 도웅을 받았다 . 2세기의 기독교 윤리, 가령 ‘ 12사도의 교훈’
( Th e T eaching 01 the Twelve ) 이 나 ‘바나바의 서 간’ ( E pist! e 01 Barnabas)
등에 포항된 것은 신약성 서 와는 마른 외폐적안 자료을 엘마나 많이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 이다. 유대안이나 이방안
으로부터 구벨된 새 “만족”으로 자처 하는 이 기 독교 안 들은 자기 들
이 떠 나 온 그 옛 사회의 볍파 판습을 빌어마가 일상 생 활 의 필요
에 충당시켰마 . 그러나 그 볍이나 판슴시 가지고 있는 권위를 그대
료 받아들안 것은 아니였다. 수도원 규칙에 있어서도 갱우는 마찬
가지였마 누르시아의 에너l 닥드는 그의 모든 규융파 충고블 위한 성
서적 근거를 찾고 있었다. 그러 나 신약성서뿐 아니라, 성서 전체로
서도 그에게 충분한 자료플 제공하지 못하였다 . 그는 새 공동체 를 마
스려 가는 땅펀으쿄서의 규융을윤 사회 생 딴에서 얻은 안간 갱험 의
만영에서 찾지 않을 수 없였다. 성서적 안 것과 비성서적인 규율들을
함께 제시한 정신 자체가 벨씨 푼화와 판~,:ì 없이 다만 기독교안으
로만 행동한마는 것이 엘마나 불가능하마는 것을 보 여 주고 있는 것
이다. ~1 툴리안。 1 젤재와 안내 룹 권연하는 경우에 언제냐 나타나는
것은 스토 아 철학의 내용이었 마. 툴스로이가 우저항을 말하는 갱우
에 는 루소 (Rousseau) 석 사상이 그 안에 풍겨 있 었 다. 가령 예 수 그리
스도로부 터 추출한 것 이 외 에 다 른 아무 유산도 사용하지 않는 경우
가 있 다고 하더 라도 이 은거 척 C띤居的) 공동체는 그들 자체 로서 의 새
문화를 발전시키 는 페로 지헝:하지 않을 수 없 냐 는 것이 사실이마.

말영 , 인간의 성취, 가치의 잠정적 실현 , 공 동 생환체 의 조직 등이


이에 따 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마. 사회석 종교의 교리와 의식이 폐
기펀마 할지라도 그 대신 새 교리와 새 의식이 발전되 지 않을 수
없 마. 종교적 행사가 계속되 는 한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다.
그퍼 으로 수도 사 들은 그들 자신의 의 식 을 그들의 수도원 안에 서 만

55. Martin D ibe lius, A Fresh Approach to the New Te stament , p. 219.

78
제 2 장 문화에 대렵하는 그리스도

들어 내였으며 퀘이커의 무언(無言〕 예배가 마치 미사와 같이 형식화


되었다. 툴스토야의 교라는 러시아 교회의 교리와 같이 단호하게 선포
되였다. 국 가블 배 격한 그들은 필연적으로 그들 자신의 어떤 정치 조
직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으뜸될 사랑은
모든 사람의 종에 되라”는 교훈 외에 다른 어떤 이녕의 도움을 받아
이 를 실현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예언자 또는 수도원장이라
불렀 다. 그 치 리 회 (治理會)를 지 방회 라고 하였마. 그들은 공론(公論)
을 따라 펙일성을 강요하기도 하며 그 사회에서 추땅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그들은 그들 생활의 일반적인 변에서 뿐 아니라 특수한 변 에
았에서까지도 내푸적 질서를 유지하려고 기도하였다. 현행하는 재
산 제도를 배격했마 할지라도 “네 재산 전부를 괄아 가난한 사람에
게 주라”고 한 충고 이 상의 무엇 이 펀요하게 펜다. 그들 도 사랑인 이
상 빈곤 중에라도 먹고 업고 거처할 무엇을 가지지 않을 수 없기 째
문이다. 그러므로 물풍을 획득하고 분배하는 망도가 안출되고 짜라
서 새로 운 경제 문화가 수립되는 것이다.
극단척 기독교인은 자기가 배격하변서 도 자신 을 온전허 거기서 분
리시킬 수 없는 이 른 바 이교 사회와 판련 지을 때, 직접 그러스도에게
서 나온 것이 아닌 어떤 다른 원칙들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기서 그에게 문제펀 것은 중간거〔中間期)의 생활이마. 배타적인 기독
교안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종말론자든 신령주의자든 간에 “ 엘마 동
안”만이라는 것을 계산에 넣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새 설서 가 밝아오
는그 때 와 그것이 온천히 승리하는혜의 중간 시대, 일시적이요 불잘
척인 것이 아직 정신적안 것으로 변화되지 옷하고 있는 동얀을 상정
〔想定)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멈위에 있는 문화의
세계로부터 자신들을 온천히 분러시킬 수 없으며 그들 자신 안에 있
는 이 문화적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 세계가 암흑 속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그 세계에서의 버교적 옳은 것과 비교적 잘옷된
것파를 구멸하는 것은 없을 수 없으며, 이에 대한 기독교안의 판련도
역시 구분이 있어야 할 것이 다. 터툴리안이 자기 아내에게 펀지하
변서 자기가 만일 먼저 죽는 경우에 재가(再隊)하는 알이 없도록 하
라고 권고하 였 다. 이것은 그가 어떤 질투나 소유욕(所有愁)에서 그러
는 것이 아닝을 말하고 있마. 그런 육정적 (carnal)안 동기는 부활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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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에는 다 제거 되기 해문이라는 것 이다. “거기서는 우리들 사야에
아우 육욕 적 인 부끄러 움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제가하

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율법이 단 한 벤만의 결혼을 허락


하는 것과 결 혼보다도 처녀료 있는 것이 더 좋다는 데 근거한 것 이
마 . 결혼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이라는 것보다도 다만 악이 아니라
는 것뿐이 다. “예수 께서 ‘노아의 홍수 때에 그들이 장가가고 시집가

고 팔고 사고했다’고 말씀 하신 것은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하


냐닝의 훈 계에서 떠나게 하는 육 신파 세 상의 으뜸 가는 악이라는 것
을 확언하신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터 툴리안은 자기가 죽는 째
자기 아내 는 금욕 생활의 더 큰 선 행 〔풀行)으로 부릅받을 줄 알아야
한마고 권고하는 것이다 . 그러나 그 후에 그는 둘째 펀지를 보내연서
。 1 렇게 말하 였 다. 만일, 이-우리 해도 개기-해야 하겠거 든 “제 2 의 최
선" ò 로, 석어도 “주 안에서 결 혼하라”하였마. 마시 말 하면 받는 자

와 결흔한 것이요 불신자와는 하지 말라는 뜻 이다 .56 결국 부촬 하


기까지의 중간 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성생활 질서를 상대적 선악
〔풀惡L으로 평가하려는 것이 터툴리안의 태도라 하겠마. 동정녀에 비
하변 결혼은 상대적 A로 나쁘마. 그러 나 일생에 단 한 먼만의 결혼
생 활은 재흔 치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
혼의 악을 행하게 되는 경우에 는 신자와 결혼하는 것이 상대적 A로 선
하다. 만일 터툴리안이 이런 식으로 추궁을 한다 면 그는 계 속적 A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생각된마. 즉 부득이 불신자와 결혼하
는 경우가 있다연 적어도 일부일 처(-夫一쫓) 제 도의 결혼이 일 부다처
적인 것보 다는 덜 악하다 . 그러고우질서한사회에 있어서는 일부다처
도 전혀 무책임한 성판계에 비하면 상대적 A로 선한 것 이라고 말하게
펄 것이라는 것이다.
중간 시대와 이교 사회의 존재와의 판련에서 싱대적인 뱀을 안정할

필요성 에 대한 살례혹서 퀘이커 교도의 역사를 을 수가 있다 . 즉 노예


법이란 악제도가 존재하는 이상, 적어도 노예를 “공정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든지, 괄고 사고 하는 일이 있는 한 적어도 정찰
제가 수립되어야 하겠다고 한 것 둥이다. 기독교 평화주의자의 경

56. “ To His Wife, " ( Aπti-Niceηe Fathers , Vo l. f( ) ; Cf, aIso “。n Monogamy,’
‘ On Exhortation to Chastity. ’
80
제 2 장 운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우에 있어서도 그렌 것을 상 71 할 수 있다. 전쟁을 위한 기구와 훈련


등에 대하여 전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배격하띤서도 군바축소며 어떤
종류의 무기는 사용을 긍지하라는 약정 등을 추진시키고있는 것 퉁이
그 좋은 실례라 하겠마. 툴스토이 백작의 말이 자치 아버지의 비극에
대하여 말한 것은 적어도 배타적 기독교인 A로서 당하지 않을 수 없
는 비극의 한 부분이였마. 즉 아무리 배타적이라 할지라도 그 자신
이 “얼마 동안”이라는 그 기간의 문제에 대한 책임에서 도파할 수
는 없기 때문이다. 그 자신으로서는 가난한 생활을 택할 수가 있었
다. 그러냐 그와 같은 신녕을 가지지 못한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그
것을 택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경찰의 보호를 원 ;<1 않았으며
그렬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경찰력의 보호를 요하는 한 가족
의 일원이었다. 그리하여 가난한 톱스토이는, 싫어하면서도 애매한
책임강을 가지고 자거의 부요한 저택에 살고 있였다. 이 무저항주의
자는 폭도들에게 청해당할 해 생명을 걸고 막았마. 백작 부안 알렉
산드라는 그렌 문제들을 극적으로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툴스
토이 같은 이로서도 악한 제도들 가운데서 양성과 공의의 규율이 사
람들 위에 권력으로 임해야 할 펄요를 절살허 안정했다는 것이다. 그
가 소유 토지 를 포기하연서도 가족들 때문에 거기 얽얘여 있을 그 때
그 토지를 판리할 책임이 그의 아내에게 맡겨졌었다. 그러나 그 아내
는 책임을 강당랄 만한 능력을 가지고 었지 못하였다. 그 아내의 부
적합한 판리 아래에서 우능하고 부정직한 판리인들야 그 농지 구역
안에 큰 혼란을 일£켜 버렸다. 치리를 잘옷한 결과로 무서운 불상
사가 생겼다. 부주의한 탓으로 한 농부가 모래 구멍에 산 채로 파
묻혀 죽었다. 그의 말은 이 사건에 판하여 。1 렇게 썼다. “냐는 아
버지께서 그렇게까지 흥분하는 것은 별로 봇 보았다. ‘그란 알은 생
걸 수가 없어 ! 생길 수 없어 ! ’하고 아버지는 어머니께 말하는 것

이었다. ‘만일 당신이 토지를 원한다면 그 대신 그것을 잘 처리해야


하오. 그 걸 뭇하겠거든 아예 다 내놓아 버리시오.’ "57
극단적인 기독교인이 악하다고 배걱하면서도 거기서 떼나지 못하는
그들 사회의 운화에 석응해 가는 실례로서의 。l 란 이야기는 허다하

57. Countess Alexandra Tolstoy, The Tragedy of couηt Tolstoy , 1933, p.


65; cf, pp. 161- 165, and Simmons, op. cit. , 631 ff. , 682 f. et passim.
81
다. 그러고 그들은 자기들의 1ol1 판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그러 냐
그 기쁨은 확살허 미 숙한 것이며 근거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 반적안
기독교의 딜레머 를 강조한 데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주의자
들파 다른 그룹파의 차이는 주로 이란 데 있다. 즉 극단 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처해 있는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은
참으로 세상에서 떠나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계속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 이다 . 어떤 경우에 는 그런 딜레머 가 그들의 저서 중에 더 영백하게
나타나 있다. 말하자연 터툴퍼 안이 철착파 정부의 가치에 대하여 논
할 해 사살은 자기 자신에게 반대하기 위 하여 논하고 있는 것같이 보
이는 것이 마. 흔히 이컨 것이 드러나지 않게 감추어져 있다. 그러다
가 만내되는 행위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어쨌든 극단적인 기독교안은
그러스도와 문화의 운제에 대하여 해 결을 보지 뭇했다는 것을 고백하
고 있마. 마만 일정한 노선을 따라 해결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마 .

4 신 학적 문제들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운동에 있어서 기독교인이 그의 덜레매

를 마루 려 할 경우에 망하는 난제는 다만 윤리적인 것에 있을 뿐 아


니라 또한 신학적안 것이l 도 있마. 그피고 윤리적인 해결은 신학적안
이해에 의존하며 신학적안 것이 또한 윤리석인 것에 의존한마. 하냐
님의 본성파 인간의 본성, 하나닝의 챙동파 안간의 행동에 판한 운
제는 극단적 기독교안이 문화적 사회에서 자신을 분러시키려 할 혜
또는 그가 마 른 기독교인 그룹들파 논쟁을 개시할 경우에 계속적 A
로 알어냐는 것이다. 그 중 네 가지 문제와 이에 매한 그들의 극단적
인 대암을 여기에 간단히 서술하려 한마.
첫째는, 이성 (理性) 파 계시의 문"11 이마. 극단주의지-들의 운동에서는
이 “이성”이라는 용어 플 문화 사회 안에서 말견되는 지식의 방뱀파
내용을 의미하는 것우로 사용하려는 경향을 취하고 있마. 그리고 “계
시”라는 말은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연유되고 기독교사회 안에 머물려
있는 기독교적 하나닝에 대한 지식파 의우블 지적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란 정 의 (定義) 는 이성을 훼손하고 계 시 를 앙양하려는 의도

82
‘、

제 2 창 문화에 에웹하는 그려스도

와 결부되어 있다 .58 카장 델 극단적이라고 볼 수 있는 요한 1서 71 자


에 았어서도 야렌 대립적안 것이 나타냐 였다. 기독교인이 걸어가는
빛의 왕국에 대립되는 암흑의 세계라든지 기독교안은 거룩한 이로 말
미암사 가릎 부음받은 자이으로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마. 역사상 계
시 를 이성에 대치하려는 입장을 취하는 자의 최대의 실례는 물론 터툴
리안이다. “냐는 믿는다. 왜냐하연 그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이다”라고
그가 말한 것이, 보똥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의미에
서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계시와 이성의 대립
을 강조한 것만은 사살이다. 그는 아래와 같은 명문을 남기고 있마.
“그대가 하냐님의 어리석은 행사들을 믿음으로써 세상에 대하얘 ‘어
리석은 자’가 되기 전에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지 못할 것이
다 하나닝의 아들이 십자가에 뭇박허셨마. 나는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마.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써문이다. 하나념의 아들이 죽으셨다. 이것은 기어코 맏
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마 Cþrorsus
credibile est , qμia ineptμ m es. J, 그러고 그는 장사되었고 또 마시 살아
나셨다. 그 사살은 확살하다. 왜냐하연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기 해
문이다 "59 그러나 이란 기독교적 교리 일만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에
서 그의 계시 옹호를 위한 반〈反)이성주의자로서의 위내성을 말견한다
는 것보다도, ó1 앞에서도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철학파문화적 지혜

에 대한 그의 공격에서 그의 만이성적 태도를 더욱 뚜렷이 볼 수 있


는 것야다. 문화적 이성에 대한 이와 바슷한 태도는 수않은 수도사들
과 초기 퀘이커 교도들파 기다 프로테스탄트 소종파안을 가운데서
도 딸견된마. 툴스로이의 특색도 。 l 런 것이었다. 문화 안에 유포(流꺼í)
되고 있는 인간 이성이란 사람을 하나념에 대한 지식과 구원에 펄요
한 진리로 인도하지 뭇하는 것이므로 부적당한 것일 뿐 아니라 오류
〔誤變)요 동시에 기만적인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야였다. 터툴
리안이나 툴스토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부패하지 않은 안칸 영혼

58. 이 렌 형 태 로 이 성 파 계시 를 대 립 시 키 는 일은 다만 “문화에 대 립 하는 그리 스
도” 운통자 들에게만 국한판 것이 아니다 정치적 또는 경제적 부문에 있어
서 극단 적 기 독교 안을보다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지식의
문제에 대하여 배타적안 태도를 취하는 이들이 있다.
59. ()n the Flesh of Christ‘ ch. v.

83
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자연적” 지식과 문화 안에서 발견되는 부쾌한
이 해와의 사이에 염 연한 구별을 둔다. 뿐만 아니 라 그들은 영 (spirit) ,
또는 내적 광영으로 말 미암아 주 어진 계 시 와 역사적£로 주어지고 성
서를 통하여 천승펀 계시와의 사이에도 구벨을 둔다. 그들은 기독교
척 세계 이외에서 돌아가고 있는 이해와 기독교 안에 있는 지식파의
사이에 있는 구렬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그러스도와 문화의 운제를 풀
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둘째로, 그러스 도와 문화 문 찌에 내한 해답에 개재한 과재는 죄의
본성과 만연성의 문제 이 마 . 극단주의자들의 논리적 해당은 이런 것안
듯하마 즉 문화 안에는 죄가 가득하다. 그 러 나 기독교인들은 어둠에
서 나와 빛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세상우로부터
분리하는 근본적안 이 유는 거룩한 꽁동체를 부패에서 보존하려는 데
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 예 플 든 다연 어떤 퀘이커 교도냐 툴스로
이 같은 이들은 원죄의 교리 자체가 타협석안 기독교 자신 을 정당화
하는 척도 가 펀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마 . 여기서 그들은 신학계에 한
중요한 공한올 한 것이었마. 그것은 곧 안간의 죄 유전 을 사회적
견지에서 섣영하려는 경향 이마. 유쿠한 죄악의 역사를 형성한 책임은
아이들이 문화의 부패 속에서 육성되어 거기에 있는 것이요 교양받지
옷한 본성이 부패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죄와 거룩
함의 문제에 매한 이 런 해당은 배타석 기독교안 자신 들 가운데서도
천적안 지지를 받지 옷하였다. 한 가지 병액한 것은 거룩한 생활에 대
한 그러스도의 명령은 기독교안 자신을 안에서 항거에 봉착하는 것이
었 마. 그것은 그가 문화를 제승폈마는 것 때문이라기보마도 그의 주
어진 본성이 그러하기 때 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째문이다. 터툴리
안으로부터 툴스토이에 이 르기 까지 극단주의 자들의 금욕적 생 활, 성
(性), 음식파 금식, 분노, 수변에 이르기까지 그 실천하기 어려움은

그들이 당연하는 죄의 유혹이 다만 문화에서만 온다는 것보다도 그


틀 자신의 본성 속에서 샘 솟고 있다는 것을 철캄하였던 것이 다. 이보
다도 더 의의 갚은 것은 기독교인은 자기의 죄악적 사살에 직연한
다는 것이 기독교와 세속주의를 구분하는 유일한 구획선 임을 그들
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최 없노라 하연 우리는 스
스로를 속이는 자요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요한은 말

84
제 2 장 운화에 대 립 하는 그리스도

하 였 다. 툴스토에도 이와 통얼 한 근본적 이념에 도달하고 있다. 그가


지 주들파 재판자들과 제사장을파 병사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죄악성을 합법화하지 말라고 연설할 빼에 그는 이렇 게 말하였다. 소
유 토지를 포기하고 그 모든 권리를 매 리는 것은 영웅적안 챙위이다.
“그러 냐 당신들이 그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아마 가장 가까운
추측일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진리로 안정하고 이에 대하여 거짓말
하는 것을 파하는 일은 당신들이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이마 그들이
반드시 고백 해 야 할 진 실은 공 그들이 공통선 ( common good)에 봉사
하고 있지 않마는 것야다.60 만일 사 람이 자기 죄악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곧 가장 큰 죄라면 그러스도의 거룩함과사랑의 죄스러움의 쿠분
선이 기독교안과 세상 사이에 그어지 는 구분선파 일치펼 수는 없을 것
이다. 죄는 그 자신의 얀에 있는 것이요 그의 영혼과 몽 밖에 있는 것
이 아니다. 만 일 죄가 극단적 기독교에서 지 적한 처음 해답 내용보다
도 더 갚은 데 뿌리 박고 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것이 사살 이라면
세 상을 이기는 기독교적 신앙의 천략도 운화로부터 퇴거하여 새 로. 얻

은 거 룩함을 수호하려는 전략보다 다른 무엇을 포함해야 할 것이마.


이런 문제 와 밀접한판련을 가진 것은 율법 과 은혜와의 판계에 판한
문제이다. 배타적 기독교 안을 공박하는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그들
이 율볍주의자여서 기독교 사상과 생활에서 의 은혜 의 중요성을 둥한
시한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기독교블 한 택 함받은 공동체를 위
한 새 율법"로 간주하여 기 독교는 만안을 위한 복음이라는 점을 망
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만큼은 참말이다. 그들은 날마다의 행위
에 기독·교 신앙이 표시되기를 강요하는 것이 사살이기 해문이다. 만
일 그까 형 제 를 사랑하는 행통파 자가 희생, 겸손, 무저항, 자발척
빈곤 풍에 있어서 다른 모든 사랑들보다 다른 점이 없다면 그가 예
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무엇 A로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런 챙동을 계 속 강조하는 동얀에 자연히 장세한 규율을 만들어 이를
정의하며 이런 규율을 준수하는 테 주요한 관성을 가지며, 따라서 하
나념 의 은혜 에 의지한다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의 의지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지석한 바와 같

60. “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 Works, Vo l. xx p. 44 2.

85
이 요한 1 셔 기자는 은혜와 융엽을 결부시켜서 하냐님이 먼저 우려플
사랑하셨으므로 우리가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격 하여 우리 가 또한
하냐닝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 였 다. 터 툴리안
은 이보다 더 율법적이었 A며 많은 수도사들도 그러 하 였 다. 그러
나 이 “행위로 의롭마함을 얻으려 는” 자들을 대 항하여 프로테스단
트 가 얼 어 났 마. 그 런데 툴스로 이는 그 극단적안 행 위 주의자의 대표라
하겠 다. 그에게 았어서는 예 수 그러스도는 진 정 한 의미에서 다얀 새
율법의 교시-로 되 어 있 키 해문이며, 이 율법은 명백한 계명들로 진술
할 수 있음과 동시에 그것 을 준수하는 문제는 안간 자신 안에 본래부
터 있는 선 한 의 지 의 능력을 총집결함으로써 해 결할 수 있다고 주 장
했 기 때문이다. 그 러 나 율법주의 로 기울어지 는 경향파 아울러 터툴리
얀, 수도사, 소종파주의 자들 , 그리 고 툴스토 이 에 게 서 까지 도 그리 스
도 안에 있는 하나 넙£로 말미암 아 죄 사함받는 은헤어1 전적으로 의
지해야 한 다는 심정이 또한 반영되어 였다. 그러스도는 결 코 계 쇄 펜
새 사회 를 창건하고 새 율법을 제정한 이 가 아니다. 전 세계 의 죄
를 속량한 분이며 기독교인파 바 기 독교안 사이에 있 는 유 일한 차이 는
그 하는 엘 에 있 는 것 이 아니 라, 그 정 신 에 있는 것 이 라 하였다. 기
독교 안도 불신 자 와 마찬가지 일을 하 고 있 마. “ 같은 읍식을 먹으

며 같은 의복을 입우며 같은 습판을 가지 고 있 A며 생존을 위 한 동


일 한 필수품들을 필요포 하고 있 마 한 께 송선하며 함께 말을 칼며
소유까지도 함께 가지는 알 이 있 으며 함체 싸 운마. 그러면 서 도 기독
교인은 모든 일을 마르게 하고 있 다. 그가 마른 법을 가지고 있 기 때
문이 아니 라 그 가 은헤 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은혜 를 반영시 키 는 것뿐
이다. 그가 자기 자신을 구 렐 해야 하기 해문이 아니 라 도리어 그 자
신플 구 별 할 필요를 가지고 있 지 않 기 때문이마 . 61
“문화에 대립한 그리스도” 운동으로 말미 암아 일 어난 가장 해결
곤 란한 문제는 자연의 장조주, 역 사의 지애자, 그러 고 파 조물 에 내
재한 영파 기독교인 공동체 안에 있는 영, 이 런 이 들파 예 수 그리 스
도와의 판계성 문제이다. 극단적 기득교의 대 표자들 중 어떤 소종
파인들, 그러고 툴스토이 같은 이 는 삼워일체 교리를 아무 윤리적

61. TertuIlian , Apology , Xlii; cf. Tolstoy, “ Kingdom of God," Works , VoL
X X , pp. 452 ff.

86
체 2 장 문화에 대웹하는 그리스도

의미도 없는 것으로 여걸 뿐 아냐라, 부패한 교회의 부패한 말명 이


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플도 。1 상위일체론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
들에서 도띄할 수는 없였£며 짜라서 그것을 자가류의 논리에 의하
여 해결하려 하였마. 그 밖에 요한 1 서 기자와 터툴리얀 같은 이들
은 정통 교리의 창설자 중 하냐로 되어 었 다. 이 극도로 윤리적이
요 섣 제적 인 기독교인들이 삼위일체론파 그 해결의 문제에 긍정적
또는 부정적무로 지대한 판성을 가지고 있다는 그 자체가 벨써 야
삼위엘체론이 흔허 주장되는 것파 같이 그렇 게 사면적 (思뺨的)안 위치
에 있는 것도 아니고 챙위에 불필요한 것도 아니라는 증거 를 나다내
고 있는 것이라 하겠마. 극단척 기독교안에케 이 상위일체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계기 는 그들이 그러 스도의 주켠에 생각을 칩중시킬
때인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옹호하려 한다. 그의 계명의
내용을 정의하려 한다. 그의 법 파 통치를 자연을 지배하는 능력파 판
련시키려 하며 세속사회 얀에서의 안간의 운영을 주판하는 권력파 판
계시키려 한다. 이 극단론자들이 。 1 렌 문제들을 마룰 때에 오는 극도

의 유혹은 그들의 융리적 이원론을 실재의 본체론적 이분론(=分論)으


로 변칠시키려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그들의 배 격은 자연파 자연의
신에 대한 불신과 연결되기 쉽다. 그러스도에 대한 그들의 신뢰는 그
리스도와 그의 신도들 속에 내재한 영에 의지하는 것으로 밴하는 일
이 많다. 결국 그들은 이 세계를 그리스도에게 반대되는 원리에 의하
여 지배되는 물질적 영역과 영척안 하나념에 의하여 안도펴는 정신적
영역의 둘로 구분하려는 유혹에 걸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터
툴리 안의 몬다니 즘파 영 적 프랜시 스주의 (Spiritual Franciscanism ), 퀘
이커 교도의 내적 광명 교리와 툴스토이의 정신주의 퉁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극단주의 운동의 첨단에서는 언제나 마니교적 이단이 발
달되고 있 는 것이마. 만일 이 경향이 배더적 기독교로 하여금 예수
그러스도와 자연, 또는 자연의 창조자와의 판계성을 애얘하게 한다
면, 다른 한펀으로는 역사 얀에서의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와의 정촉을
잃게 하고 정신적 원리를 이에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폭스
(George Fox) 가 일종의 기 독교, 즉 그의 판단에 의 하면 세 상과 타협 한
기독교를근본적으로 개혁한 것으로 자처했을혜 그는 영적 경혐 의 강
조와판련되었 S며, 그것은 결국 그의 운동의 어떤 부분에서는 시-살상

87
성서와 성서적 예수 그러스도를 포기하고, 인간의 최고 권위로서 개안
적인 양심을왕좌에 모신것이 되었다. 툴스토이는역사적 예수그러스
도를 불다〔佛햄) 안에, 예수 얀에, 공자 안에, 그리고 자기 자신 얀에
내재하는 영으로 내치시 켰다. 왜 극단주의 기독교인들이 맨 처음 그을
이 출발한 원리 즉 그러스도의 권위에서 그들을 이탈시키는 정신주의
(spiri tuaIism)의 유혹에 걸려드는지 그 속 깊은 데를 이해하기는 곤란
하다. 아마도 그러스도는 단 혼자서 예배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단 혼
자서 따라갈 수도 없는 것이며, 극단적 기독교가 교회 얀에서 하나
의 중요한 운동으로 되어 있기는 하면서도 동시 에 기독교의 다른 유
형, 즉 그들파 반대되는 그룹파의 평형 없이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
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88
제 3 장

문화의 그러스도

1. 영지주의와 아벨라르드에 있어서 문화와의 조화

허떤 문화 얀에 복음이 들어올 해 거치에는 예수가 그들 사회의 메


시야요, 그들 사회의 희망과 열망의 정취자요, 그들 사회의 진정한
신앙의 완성자요, 그 카장 거룩한 정신의 원천이라고 환호하는 사랑
들이 있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를 위하여 사회적 제도들을 배격하는 극단주의자들과 온천히 대렵되
는 것으로 보인 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운영을 펀들어 그러 스도를 배
척하는 무리, 즉 기독교 신앙을 “ 멸 시하는 문화안’의 부류에 속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주를 믿는 신자라는 의마에서 기독교안 일
뿐 아니라, 다른 신도들과 함께 그 공동체를 유지해 가려고 애쓰는
의미에서 도 기독교안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문화적 공동체 안
에서 아무런 생소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와 세상, 사회법
과 복음, 은혜 의 작용과 안간의 노력, 구원의 윤리와 사회적 보존 또
는 진보의 윤리 둥파의 사이에 있어서 그렇게 큰 긴장을 느끼지 않고
있다. 그들은 한펀으로는 그러스도를 통하여 문화를 해석한다. 즉,
문화 안에 있는 가창 중요한 요소들은 그러스도의 사엽과 안격에 가
장 일 치되 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펀으로는 문
화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의 교훈과 행동, 그
리고 그리 스도에 판한 교리 둥에서 문명 안에 있는 최선의 것파 일
치된다고 보이 는 것들을 선택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와 조화시킨다. 신
약성서와 사회 판승 사이에 있는 어쩔 수 없는 부조화점(不調和點〕은
삭제해 가면서 그리할 것임은 물론이 다. 그들은 만드시 유행되는 문

89
화 전체에 기독드교척 재가〔췄可)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
니다. 다만 진실한 사실이라고 생각되는 것만을 위하여 그리하는 것
이다. 그 러스도의 경우에 있어서 본다면, 그틀은 합리적이요 항구적
언 것을 역사적이요 우연적인 것에서 분러시킨마. 그들의 근본척인
판섬은 현세적인 데 았 다 찰지라도 다계적인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
다. 다만 초원척 안 세제는 시 간적 S로나 성 격적으로나 현세 생촬파
계속펀다고 이해하려 한마.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엽도 현
사회 생 활 얀에서 장차 올 더 좋은 내세 생활을 위하여 인간들을 훈
랜시키는 것으르 여긴 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교육자, 혹은 위대한 철
학자, 또는 개혁자로 간주되는 알 이 많다 . 두 세계 사이의 싣연 ( 深써j)
에 마리 블 놓는 것 과 같이 , 극단적 기 독교인이 냐 반(反)기 독교언들에
게는 녕지 못할 쿠령텅이로 보。 l 는 것에 그틀은 쉽게 다리플 가설하
는 것이마. 어띤 경우에는 그 구령텅이를 아주 무시해 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갱 우에 는 역사적 발굴품이나 고대 사고 잉: 식의 파펀 퉁에서 안
출한 떤러한 자료들로 에워 버리기도 한다 뉴우먼 (F. W. Newman)이
나, 제 임 즈 (W illiam James) 등은 이 련 부류의 기 독교안을 성 리 학적 으
로 기 술하여 말하기 블 “한 벤 난 "c once. born) 사람, 또는 “건 강한 마음”
의 소유지. Che althy-minded) 라고 하였 다. 사회 학적 A로 그들 은 이 혁 명 론
자뜰이 리 하겠 다. “시 간의 파열 "(c n: cks in time) 말하자연 타락, 성육

신, 심판, 부훤- 등 을 개업시키려 하지 않는 사랑들이기 해문이마 . 현


대 사상에서 이 유형은 찰 알려져 있다. 이것은 수세대 동안 프 로테스
단트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자유"(liberal)
또는 “자유 주의”등의 용어로정의한 것은적절한 표현이 아니었마. 오
히 려 문화-프로테 스탄티 즘 (Cultme-Protestantism) 이 라고 영 명 하는 것 이
더 합당할 것 이다 그러나 이 유형의 출현은 현대에 국한된 것도 아
니며 개혁 교회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종류의 운동은 기독교의 가장 초기에도 있었마. 기독교가 유
대안 사회 가운데서 일어 나서 바울과 그 밖에 여러 선교사들을 통하
여 헬라-로마의 세계에 전수( 傳受)되자 지중해의 도가니 속에서 들끓
고 있던 여 러 가지 문화적 요소의 복잡한 교착 (交짧)에 휩 쓸려 플지

1. Karl Barth 카 이 용어 를 딸영 한 것 으로 기 억 하고 있 다. 특히 그의 Protes-


tantische Theologie im 19. Jahrhundert, 1947, chap. DI .

90
제 3장 운화의 그려스포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대 및 현대의 이땅안 기독교안을야 그러


스도와 문화 문제에 대하여 고성한 온갖 양태가 유대안 기독교인 가
운데 에 밸써 부터 나타냐 있었다. 바울과 할례 당과의 충돌이 라든지
그 후에 생긴 나사렛 당 또는 에 비 온파 CEbiorütes) 와의 충돌은 기 독교
척이라기보다는 유대교적안 그룹 또는 운동이 그 때에 벨써 였였다
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 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 당시 유대적 전통
의 어느 중요한 부분, 또는 선만으로서의 특수한 메시야적 희망 동을
포기하지 않£연서 동시에 에수 그러스도에게도 충성을 계속할 갚을
찾는 것이었다 .2 그틀에게 있어서 예수는 약속된 메시야일 뿐 아니라
그들 사회에서 이해되어 온 바와 같이 약속받은 자의 메시야였다.
초대 이방인 기독교에 있어서는 그러스도와 문화의 문제 조철에 판
하여 어느 정도 문화에 대한 적극척안 판성과 예 수에 대한 커본적안

충성을 결부시키는 경향이 많았다. 후세의 극단적 기독교인들은 이 모


든 것을 타협 또는 배 교(背敎)라는 지 옥 속으로 무차별하게 추땅시 키
려는 경향을 가지게 되였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
다. 그리스도를 온천허 문화적 용어로 해석하고 사회 적 신념 또는 판

승파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아무런 긴박강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극


단적 경 향을 대표한 그룹은 헬라 문화의 세계에서는 기독교적 영지
주의자들이였다. 그 대표자들- 바실리데스 (Basilide s) , 발펜티누스
(Valentinus) , Pistis Sophia 의 저 자 등등 -은 그 당시 의 대 부분의 교
회에서 이단자로 정최되었으며 후세의 극단적 기독교인 들에게도 그
렇게 안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자기들이 충성된 신자라고
생각하고 았였다 . 그들은 기독교적 이념에서 출말하였으며 하나닝파

사랍에 대한 기독교척 학설 을 헝성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카툴럭괴


영지주의자와의 논쟁은 스스로 기독교언이라고 느끼는 사람들 시-이에
서의 논쟁이었고 기독교인과 이교도와의 논쟁은 아니었다 . 3
이런 영지주의자블의 생각에 있어서는 “예수의 모습이 본질적안 것

2. 유대 걱 기 독교에 판하여 는 H. Lietzmann , The Beginnigs of the Chris.


tian Church , pp. 235 ff . ; J. Weiss, History of Primitiνe Christianity ,
Vo l. pp.707 f f. 를 보라.

3. F. C. Burl itt. Chμrch aη d Gnosis, 1932, p. 8; cf. also Cambridge Aη-
cient History , Vo l. XII , pp. 467ff.; A. C. McGiffert, History of Christ-
iaπ Thoμght , Vo l. !, pp. 45 ff.

91
이었다. 예수를 제외한다변 그들의 체계는 온전히 분해되고 말 것이
었 다”고 버 어 킷 (Burkitt) 교수는 설득력 있 케 논의 를 전개 하였 마. 그
들이 하려고 한 것은 복음을 그 당시의 파학과 철학에 조회-시키려는
것이었마. 마치 19세기의 기독교 변증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
리를 진화론적 용어로 서 울 하려 한 것과 같이, 이 사람들은 그 당시
즉 툴레 마 ( Ptolemy) 시 대 의 천문학과 soma.sema 즉 ‘ 육신은 영 혼의

무덤’이라는 그 당시의 심리학적 표어에 의하여 지성인에게 제시판


화려한 이념 올 가지고 기독교 를 해명하려 한 것이였다 4 역사상 표둔

시대의 계봉기에 유행되는 궤변적 변론처럼 사라지기 쉬 운 것은 없다.


특히 최근 과학적 발견의 밝은 햇빛 아래에서는 단순히 시-변적안 것
보다 더 쉰게 소멸되는 것은 이-마 없을 것이마. 그러나 옛날의 영지
주의자들이 오늘날 정신뱅학에서 그러스도 이해의 엘쇠릎 말견했마고
맏는 사힘을, 또는 핵분엘에서 종말론 문재의 해답을 얻였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보다 더 환상적안 것은 아니었다고 민는다. 그들은 조잡
하고 낡아싸진 유대석 신고}에1 I 없) 과 역사판에서 복음을 해방시키며,
기독교 신앙을 지식안의 지성에까지 끌어올리려고 노력하였던 것이
마. 그리하여 기독교의 인기를 높이며 그 능랙을 증진시키려는 것이

었 다 5 그들은 마신론 ( 多떼論)과 우상숭배 의 조잡한 형 식 에 서 벗어


나 존재의 정신적 갚이륜 안식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의 교리 체계 를 수립하려 하였
마. 그 교리 내용을 말한다연 , 타락된 물질계에 갇히고 미흑되어 있
는 영흔들에 대한 우주석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었우며,
참된 속량적안 계시자, 존재의 성연(深淵)파 인간의 상승 또는 천락
(轉落)에 판한 참펀 지식의 회복자도 예수 그러스도라는 것이었다.6
이것이 영지주의자들이 그 당시의 문화에 기독교를 조화시키려 한 가
장 영백한 요소였우며, 그러스도의 안격과 사업에 대한 그들의 “파
헥적 “철학적” 해석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모든 문

4. Burl이 tt , op. cit .• pp. 29-35. 48. 51. 57 f .• 87-91


5. Albert Ehrhard , Die Kirche der Maertyrer , 1932, p. 130.
6. C f. Burl이 tt , op. cit .• pp. 89 f. Nicolai Berdyaev 의 사상에 친숙한 현대 신
학도들에케는 이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은 아우 생소한 느낌을 주지 뭇할 것
이다. 베르자예프는 자신을 기독교 영지주의자라고 불렀다. 특히 그의 저
서 Freedom and the Spirit (1 935)을 읽 으연 얄 것 이 다.

92
제 3장 문화의 그려스도

회 속에 기독교를 동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설명된 기독


교는 한 종교적 또는 철학적 체계로 되어 버란마. 물론 최선의, 유
일하고 참펀 것이라고 안정은 받고 있 A나 여전히 많은 것들 중의 히­
나임에 는 틀림없다. 인간의 앵혼을 마루는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인
칸의 전 생활에 주권적안 명령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마. 예수그러스
도는 영의 쿠주요 삶(천체)의 주는 아니었다. 하나닝 아버지는 만물의
근원 도 아니며 그 통치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새 백성, 또는 교회 대
신에 그들은 계몽된 자들의 모임을 가졌마 그들은 문화 저펀에 있
는 종국을 찾는 자이면서도 문화와 갈등이 없는 채 문화 안에 살 수
있는 자들이었다. 문화적 생활에 동참하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 득
이한 사건이 아니었다. 아무 커마란 문제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영지주의자에게는 가이사에게 경배하거나 전쟁에 참가하는 것올 거
부할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적극적 A로 해야 할 이
유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사회적 앙력 때문에 판습파
법률에 복종한다는 것 뿐이 다. 대 중적 , 공식 적 (公式的)~로 하는 우상
숭배 를 그렇게 성각하게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너무 지성적이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어떤 결과를 초래한다는 데
대하여도 그들은 너무나 지성적이었마. 그러므로 순교는 우걱〈愚直)
한 일이라고 비웃 었다 . 7 영지주의자의 소견에 의하변, 예수 그리스
도를 아는 지식이란 것은 운화 생 활 안에 자리장고 있는 안간 성취
의 절정으로서 영적, 정신적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한 영흔들
만이 능허 가질 수 있는 것이며 , 이것은 그러한 영혼들의 진보와 종
교석 획득이마. 이것은 물론 윤리와 판계되어 있다-어떤 경우에는
아주 엄격한 생활 행위로 냐타냐지만 또 어떤 해에는 방종, 음란한
일까지도 시인한다. 이 윤리는 그리스도의 계명이라든지, 새 공동체
에 대한 신자의 충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마. 이것은 물질적, 사회
적 세계 위에 있는 지극히 고귀한 운영에 대한 개안적 열망의 윤리였
마. 그러으로 동시에 이 대수롭지 않는 세상에 대한 개안적인 적응의
융리이기 도 하마. 문화 운제의 견지에서 볼 때 그리스도를 그 당시
의 파학과 철학에 조화시키려 한 영지주의자들의 노력은 하나의 방

7. Irenaeus, Against H eretics , fi , XXX i11, 9; cf. Ehrhard , op. cit. , pp. 162,
170 f.

93
펀이였고 목적이 아니었다. 그플이 성취한 것은 그것이 의식적이거냐
계획적이거나 또는 무의식적이거냐를 막론하고 그 노력의 총결론을
말한다변 새 신앙과 묵은 세계 사이에 있는 모든 긴장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엘마나 복음을 보존할 수 있었는
가 하는 것은 벨문제이다. 여기서 지석해야 할 점은 영지주의자들은
문화에 대해서나 그러스도에 대해서나 늘 골라장는 선택의 태도를 취
하고 있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자기 들의 판점 에서 저속하다
고 생각되는 것은 불문 에 붙이고 가장 종교적이요 기독교적이라고 보
얘치는 것만을 육성하였 다 8
이 영지주의 운동은 그 극단석안 대표자들이 교회에서는 이단으로
정죄받았음에도 불쿠하고 기독교 역사 안에서 가장 강력한 운동£
로 냐타나 있다. 그 중심적안 것을 따진마면, 그들은 기 독교를 교회
로보다는 종교로 해석하려 하였£며, 교회란 일종 의 종교적 회합A
j료 해석했으며 새 사회로는 해석하지 않았마. 그들은 예수 그러스도
를 한 종교적 진리의 계시자로 만 본 것이 아니 라 일종의 신A로 보았
다. 즉 종교적 예배의 대상으로 보았 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삶의 주
(主)로 모시는 것은 아니였£며, 특허 만물의 창조주요 통치자인 하냐
념의 아들로는 보지 않았 다. 영 지 주의 7~' 종교는 보존하연 서 기 독교 율
리는 상실했다고 말 하는 것은 너무냐 단순한 해석이 마. 즉 “ 종교”와
“윤리 ”라는 용어를 기독교의 특성£로 안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 가 문
화적 입장을 시인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 즉 삶의 다원론적 개념 을 안
정하는 것이어서 생활 안에서 여러 활동 분야를 첨가할 수 있게 된다.
이에 짜르는 난청은 영지주의의 경우에 서 드러난 대로 이른바 종교라
고불리워지는 것이 윤리에서 분리될 해 그것은교회에서 말하는종 교
와 관이(判짧)한 것£로 펀다 는 사실이다 . 곧 하나의 형이상학이요,
、 하나의 “ 영지 " CGnos is) 요, 일종의 신비적 종파는 되나, 전 생활을 자
배하는 신앙이 되지는 못한다.

8. 초래 에 있 어 서 의 문화적 기 독교의 다른 또 하나의 운동은 Lactanti us 와


그 동지 신학자 빛 정치가들이마. 그들은 콘스탄턴 시대의 안정치에 로마
제도와 기독교를 혼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Coc hrane 의
Christianity and Classical Cμlture , P t. n, 특히 chapter V 에 훌융하 게
기 숭되어 있마 .

94
제 3장 문화의 그려스도

이 영지주의에 의 하여 제기된 운제, 즉 종교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


계와 문화에 매한 종교의 판계는 이 른 바 기독교 운영이 말말됨에 따
라 감소되지 않을 뿐 아냐라 더욱 격화되어 가고 있다 . 중세기 사회는
극히 종교석이었고 그 종교는 기독교였다는 것은 의심찰 수 없는 사
실이마. 그 러 나 그러스도가 이 문화의 주 (主) 였는가 하는 문제에는 해
답을 얻지 뭇하고 있 다. 그 사회 얀에 서 종교적 제도가 우우lCf:1't位)를
차지하고 았었다든지 그 제도 안에서 그러스도가 우위를 차지하고 았
였다든지 하는 것만으로는 이 문제에 해담을 주었다고 말한 수 없는
것이다. 이 종교적 사회(미국-역자주) 안에 있어서도 그러스도와 문화
와의 판련성 문제는 여천허 계 속되고 있으며, 이교석 로마 안에 있는
기독교언을을 당황하게 했으며 그 해결 을 위한 노력도 각양각색이
었던 것과 같다 수도원 운동의 각이(各異)한 형식파 터툴리 얀 이
후의 어떤 중세기 종파들파 그러고 아벨라르드 CAbélard)에게서의 해
압 동을 고찰한마연, 그 탑얀은 2세기의 기독교 영지주의에서의 해
당과 비슷한 것임을 말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벨라르드 사상의 내용
은 영지주의 와 다른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정신에 있어서는 매우
"1 슷하다. 그는 마만 교회가 신앙을 진술하는 방엽과 더불어서만 싸
웠던 것 같다 . 즉 교회의 신 앙 진솔 방법이 유대인과 마른 비기독교
안,특히 헬타 철 학자들을 존경하고 추종하는 사랑들로 하여금 그들이
진심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것까지도 수락하지 옷하게 하기 해운에 그

방엽의 졸렬성을 공격한 것이었다 9 그는 신앙을 진숭하는 데 있어서


하냐념과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신조와 행위에 대한 그리스도의 명
령을 문화 내 의 최선의 요소와 일치시키는데까지 나아갔다. 기독교는
실채 에 판한 철학적 지식, 생활 개선의 윤리로 표시되었다. 그의 도

먹석 속죄론은, 기독교안으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속죄론을 대치


하기 위한 것뿐 아니라 오직 한 벤만의 속죄 행위라는 통전적 개념
도 대치하려는 것이다. 아벨라르드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위
대한 도먹 교사였다. “그가 육신으로 계살 때 그의 전 생활 행위
는 ...... 우리를 카르치려는 의도에서 된 것이였다 "10 그것은 그러

스도 이전의 소크라테스냐 플라돈이 한 것을 더 높은 정도에서 실

9. C f. 1. R. McCallum , A béLard’ s Christiaπ TheoLogy , 1948, p. 90.


10. Ibid. , p. 84.

95
행한 것이라 하였다. 철학지-들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국
가와 그 시민을 놓보는 데 있어서 ...... 생 활로 냐 교훈으로나 그들은

복음척 또는 사도적 완전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이 분영 하마. 그러 하


여 그들은 기독교라는 종교와 비교할 때 마급〔 未及〕한 점이 거의 없거
나 아주 없을 정도로 되어 있다. 사실상 그들은 이 도덕적 열정과 그
성취로 말미암아 우리와 연 결 되어 있는 것이다 . "11 이런 진술은 비기
독교안에 대한 넓고 안자한 마음을 보여 주는 것일 뿐 아니라 그
복음 이해에 있어서 극단적 기독교인들과는 엄청나게 다른 것을 보여
주고 있 A며, 이것이 더욱 의의 깊은 점 이마. 아벨라르드의 윤리도 이
와 같은 태 도 를 보여 주그 있 다. 그의 Scito te 1ψsμm 에 서 우리 는 산
상수훈이 신자에게 어려운 계영들이라는 인상을찾아볼수 없다 . 산상
수훈은 lJ].르케 살려는 선량힌- 안간들을 친철하고 판대하게 인도하는
말씀들이며 그들의 정신적 지표〔훈標)를 제공한 것이다 12 그리스도
와문화사이에서 생기는 온갖 충돌은 다제거되었다. 교회와 세상 사
이에 있는 긴장성은 사살 교회 측이 그러스도를 잘웃 이해한 데서 생
기는 것이라고 아벨라르드는 판정하고 았다.

2. “문화 - 프로테스탄티즘”과 리즐

중세기 문화에 있어서는 아벨라르드가 비교적 고독한 경지 에 있


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그의 추종자는 많게 되었다. 그러하여 이
단이었던 그가 새 로운 정통으로 되었 다. “운화의 그리스도”라는 주제
믿에서 서 양의 크고 작은 사상가들 이 수천으로 헤 아릴 만큼 많은 논
의 를 제시하였다. 사회 또는 교회의 지도자,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마
투어 이 를 논하였마. 이것은 합리주의 측에서도 나오고 낭만주의 축
에서 도 나왔마. 보수파에 서 도 자유파에 서 도 나왔마. 루터 파, 칼 빈 파,
소종파들파 카툴럭에서 제각기 자기 들의 의견을 쿠성하였마. 이 문제
의 판점에서 본다연, “합리주의 “자유주의 “근본주의 ” 동의 유챙에

11. I bid., p. 62; cf. Maurice De Wulf, History of Medieνal Philosophy ,


1925 , Vol. 1, pp. 161-166.
12. J. R. McCallum , Abailard’ s E thics, 1935.

96
제 3창 문화의 그리스도

(catchwords) 들은 그러 중요한 의 의 를 가지고 있지 않마. 이 용어 들은


문화적 사회 안에 어떠한 여러 노선들이 있다 하는 것을 지척하고는
았으나, 그리스도가 서로다른모든 문화의 주안공이라고 해석하는사
땅을야 주장하는 근본적안 통일성은 애매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많은 지도자들파 운동들 가운에서 한 사랑을 특별히 택한다


면, 존 록 Oohn Locke)을 들 것 이 다. 그의 저서 ‘기 독교의 합리 성 ’
(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은 다만 이 성 을 사용할 뿐 아니 라,
그 이성을 “합리척”인 방법」뜨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
았다. 즉 모든 극단을 피 하고 중용지도(中庸之道)를 취 하는 영 국적
문화의 특정 을 말휘 한 것 이 다. 라이 프니 츠 (Leibnitz)도 이 에 속하는
사람이며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종교’라는 의미에서 복음을 해영
한 칸트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부류에 속할 것이다. 이 경우에 “이성”
이란 말은 인간의 분석 또는 종합적 지능의 특수한 챙사플 의비한 것
이 어 서 그 당시 최 고 문화의 상정 이 였 다. 제 퍼 슨 (Thomas Jefferson)
도 그 그룹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
서 누구냐 그렇게 되커를 원하셨다는 그 유알한 의미에서만 냐는
기독교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선언한 것은 그 자신에
케 좋은 인상을 낭긴, 신약성서 속의 예수의 교훈블을 연밀하게 참
조한 다음에 발표한 것이었마. 예수의 교리가 우리에게 전해지기까
지에는 몬다셀 로 (Monticello) 판결의 현안(賢人)(제퍼슨을 카르킹-역자

주)이 판단한 대 로 탈락되 고 오전(誤傳)되 어 본래 의 말씀보다 휠씬 결


함야 많은 것이 사살야마. “그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하나의 도
먹적 체계가 천승되어 있우며, 만일 그가 우리에게 남긴 풍부한 단펀
들의 문체와 정신에 그 도덕적 체계로 채워 놓는다면 안간의 교훈으

로서는 가장 완전하고 장염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스도는 두 가지


일을 하셨다. “φ 그는 유대안의 자연신론을 정정하여 그들의 유엘
신 신앙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 신의 속성파 통치에 대하여 더 정당
한 이 념을 제공하였다.~ 동족이나 친구에 관한 그의 도덕적 교훈
은 가장 정확하다는 철학자들의 것보다 더 순결하고 은전하며 유대
인의 것보다는 휠씬 더 윌등하마. 그의 도덕적 교훈은 동족이냐 친
군, 01 웃과 자국만에게 뿐 아니라 전세계안 알만에 대한 박애심을 깨

97
우치는 데 있어서 철학자들이나 유대안보다 휠씬 우윌하다. 뿐얀 아
니라 더 나아가 사랑과 화평 과 공동 요구와 상부상조의 연대 적 단결
로 전 인류를 한 카족으로 연합하는 데 크케 우월하다 "13 철학자
들, 정치가들, 혁영카들, 시인들, 또는 소설가들로셔 제퍼슨과 같

은 견지 에서 에 수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다 같은 주제를 반복하고 있


마. 즉 예수 그러스도는 위대한 계봉가이다 . 위대한 교사이다. 모든
사람 을 문화포 인도하여 지헤와 도 덕척 완전과 화형을 얻게 하는 위
대한 교사라는 것이다 어떤 따1 에는 예 수 는 위래한 공리주의지-로 칼

채 를 받는 다. 어떤 해에 는 합리 적인 인간으로, 어떤 때에든 정서적 안


안간으로 선전 된 다. 그들이 어 떤 법주에 의하여 그를 이해하든지 간에
그의 목적 하는 바가 무앗 이라는 청에 대하여는 근본적 으로 동일하다.
즉 에수는 도덕적 훈떤에 의하야 형화롭고 협조척안 사회 를 성취하는
것을 생 애의 목표로 삼고 일 하 였다는 것이마.
19세기 , 교회의 많은 지도적 신학자들이 이 운동에 가담하였다. 쉴
라야 에 르마허 (Schleiermacher) 의 ‘종교 캉연 칩 ’ ( Speeches on Religion)은

이란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의 ‘기 독교 신앙’ (Christian Faith) 이란 저


서에는 그렌 점이 그리 명확하게 표시되지 않았지만, 전자에서는 특
히 “ 종교를 별시하는 자들 가운데 있는 문화인”을 나타내는 청년 커
질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문화 n 란 용어는 사회 얀에서 가장
자의식적안 지정척 , 성 마척 시람들의 전문적 엽척을 의미하며 통시 에
쉴라이에르마허 자신을 지시한 것이다. 그는 그보다 먼저 있던 영지
주의자들 이냐 아벨라르드와 같이, 넓은 의비에서 문화의 대표자로 자
처한 것이였다. 그도 그들파 마찬가지로 그러스도의 결함은 그러스도
에게 있뉴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교훈파 의식에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도 그들의 일 반적 안 전형 (pattern)에 따라 그리 스도를 종교척 용어 로
취급하려 하였마. 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는 신약성서의 예 수 그러
스도라기 보다는 유한파 무한 사이 에 있는 중보적 원리로서 의 그러 스도
로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문화 얀에 속하여 있다. 왜냐하연, “무

13. 1803td 4웰 21 앨 Benjamin Rush 박사에게 보 L션 펀치 에서 언용. P. S.


Foner , Ba .'ic V.lritings of Thoma s J efferson , pp. 660-662. Cf. Thomas ,
The L ife aη d Alorals of Jesμs of Nazareth , extracted textually from
the Gospels.

98
제 3장 문화의 그려스도

한을향한 감각파 취 향 문화의 모든 작용에 수반되 는 “거룩한 음


악”이 없 이는 문화 자체가 에마르고 썩어 버 리기 해문이 다. 이 종교
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그를 따르기 위하여는 가정 이나 친척을
떠 냐야 한다고 말씀하시 지 않는다. 그는 그들의 가정 과 사회 에 들어 오
셔서 모든 알시석안 의우들 위에 하냐의 무한에서 오는 후광을 더 해
주는 은혜로운 입지} 로 되시는 것이다 .14
갈 바르트는 쉴라이에 르마허의 두 가지 관심의 이원성과 통일성을
강조하여 명철한 찬의 〔펌意)와 비판을 가하였다. 바르트의 말에 의 하

면, 쉴라이에르마허는 한펀으로는 그러스도 중심의 신학자가 되려고


컬정하고, 다른 한펀으로는 문화의 사엽에 온천히 동참함으로써 손색
없는 현대인이 되려고 결심한 것이었다. 즉 그는 파학의 발달, 국가
의 유지, 예 술의 육성, 가정 생활의 정화, 철학의 헝:상 등 에 한결갚이
마음을 썼던 것이다. 그는 이 렌 이중적인 임무를 추잔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긴장을 느끼지 않았다. 즉 두 주안을 성 긴다는 느낌이 없었먼
것이다. 바르트의 이런 쉴라이에르마허 평은 한 작품이 너무 치우
천 것얼는지 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종교 깅연집’이라든지 그의 윤
리에 판한 저서들을 읽어 보연, 우리는 그가, 그리 스도를 문화에 조
화시키는 동시에 카장 그러스도에게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요소들을
푼화에 서 뽑아 내어 그것을 그리 스도에게 일치시키는 청에서 대표자
라는 것 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 이다 15
19세기의 사상이 칸트, 제퍼슨, 쉴라이 에 르마허 등으로부터 헤켈,
에 머 슨, 리 출 (Albrecht Ritschl) 등에 게 로 옮겨 져 서 , 이 성 의 한계 안
에서의 종교가 인간성의 종교로 됨에 따라 문화의 그리스도라는 주
제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시 선포되었으며 , 그와 동시 에 그러 스
도를 배 척 하는 문화인들파 극단적안 기독교안들은 이에 반대하여 다

14. 0η Religioη, tr. by John Oman , 1893; cf, pp. 246 , 249, 178 et p assim
15. K . Barth , D ie Protestantische Theologie im 19. Jah rhμndert, 1947, pp
387 ff.; c f. K. Barth , “ Schleiermacher" in his D ie Theologie uη d die
Kirche , 1928 , pp. 136 ff.; Richard B. Brandt , The Philosop hy of
Schleiermach er , 194 1, pp. 166 ff. , Schleiermacher 가 기 독교 윤려 와 천
학적 윤리의 통일 성에 대하얘 가장 척결하게 진솔한 것은 그의 논문 “덕
의 이 념 에 대 한 철 학적 논고”이 다. 그것 은 Saemmtliche W erke(Reimer) ,
Pt. II! , Vo J. n, pp. 350 ff 에 있 약.

99
른 방향에서 해밥을 제콩하고 었였다. 그러하얘 그러스도와 문명과의
구 별을 유지함파 동시에 이 양자에 대한 충성도 유치하려고 하였다.
오늘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전 세대를 문화척 프로테스탄다증 시대
라고 부르는 데까지 이르렀다 . 그러나 무조건하고 그렌 것은 물론 아
니 다. 우리 는 키에 르케 고르나 모오리 스(F. D. Maurice) 같은 19세 커
신학자들의 도움으로써 이 경 향에 비 판을 가해 가면서 그리 하는 것 이
다. 그리스도를 문화에 합치시키는 운동은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그 젤정에 달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의 가장 대표적안 신학자안 리층
이 아마도 문화의 그리스도 유형의 가창 훌륭한 현내적 섣명을 제
공한 사랑이라 하겠다. 제퍼슨이나 칸트와는 달라서 리층은 신약성
서의 여1 수 그러스도에게 정근되어 있다 . 진살로 그는 애떤 변에서 본
다변 복음서와 초대 교회사 연구에 대한 현대 학자의 정확성을 총
칩중시킨 선구자라 하겠 다. 그는 그러스도를 샤랑하고 교회블 멸시하
는 문화안을보다도 휠씬 더 교회 의 신조를 고수한 사랑이었마. 그는
그 자신을 기독교 공통체의 일원으로 자처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
써만 죄와 구원에 대하여 진지하게 말할 수 있케 되는 것이라 하였
다. 그러나 그는 또한 문화적 공동체에 대한 책임도 성실하케 부담하
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학, 국가, 경제 생활과 거숭 퉁에 대하여 그
의 동시대안안 롤스토이와는 극단적으로 만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
었다.
리층의 신학에는 두 주춧돌이 있다. 그것은 계시와 이성 (理性)이 아
니라 그리스도와 문화였다. 모든것에 대하여 자명한, 이성의 어떤 궁
극적 진리 를 추구함으로써 커 독교의 자기 비 판이 가능하며 또한 그것
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는 사상을 그는 얀호허 거부했다. 즉, 몇 가
지 종교적 제도에 대한 교의적 선언을 수락한다거나, 살재에 대한 어
떤 유력한 강정이나 강각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고찰함A로써 그렬 수
있다는 사상을 배격했다. “신학이란 것은 71 독교의 본래척 내용을 적
극적안 형식으로 진술하는 것이어서 그 재료 내용은 신약성서 이외의
다른 아무데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16 성서의 켠위에 대
한 프로테스탄트 교리는 이 펄요성의 기 초를 구성해 주지는 않지만,

16. A. Ritschl, Rechtfertigμng uη d Versoehnung , 3 rd ed., 1889, Vo l. I!,


p. 18.

100
제 3 창 문화의 그리스도

확증해 주고 있다. 즉 교회가 그러스도의 기초안 것이 아니라, 그리


스도가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교회〕 창설자의 안격이 ..

기독교인의 세계판의 열죄요 기독교안의 자기 바판 및 도덕적 노력의


표준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도와 같은 특별히 종교적안 챙
동이 어떻게 실천되어야 한다는 표준도 그러스도 자신에서밖에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17 그러므로 리층은 그의 신학적 임무를 시작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얼원이라는 첨에서 출발하였마.
그런데 이 기독교 공동체란 것은 신약성서에 진술된 예수 그러스도
이외의 다른 아무데서도 그 원천을 말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또 하나의 출말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연
을 지배하려는 인간 의지블 그 원리로 상고 있는 문화적 공동체인 것
이었다. 현대안A로서 또는 칸트주의지一로서의 리출은 안간의 상황은
근본척 4로 자연파 대립하는 상태라고 이해하고 있다. 응용파학과 71
울에 의하여 자연력을 정복하는 것을 인간의 최대 엽적으로 여기
는 것이 일반의 생각이였다. 01 자연 정복의 사살은 리층에게도 깊
은 안장을 주었다. 그러 나 도덕 적 사상가로서 또는 칸트주의 자로서 의
그는 안칸성 자체 위에 양상의 내적 법칙을 새겨 주는 윤리적 야성 〈理
性 )의 성파에 더 큰 관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유하면
서도 서로 의존하는 유먹(有德)한 안간들로 구성된 사회 얀에서의 유
닥한 존재라는 이상적 목표를 헝:하여 개인파 사회 생촬을 지도하려
하였마. 융리적 영역에 있어서 안간은 이중의 문제에 당면한다. 그
는 그 자신의 본성을 극복해야 할 뿐 아니라 외부적안 지연계가 자기
자신의 높은 취지(趣릅)에 대하여 무판성하마는 점에서 오는 살망을
또한 극복해 야 하는 것 이 다. 리 출은 “자연파는 스스로 구별판 안간이
라는 점과 자연을 대항 또는 극복함A로 그 자신을 유지해 가려고 노
력하는 안간”이라는 것을 기정 사살로 수락하였다 18 안간은 자기 자
신이거나 다른 사랑이거나 간에 그 안격적 생명을 그 자체 안에 목적
을 가지고 있는 것 ξ로 매우해야 한다. 모든 문화는 그 출발점이 자
연과의 충돌에 있는 것이며, 그 목표는 인간석, 도덕적 존재자로서

17. A. Ritschl, The Christiaη Dαtriηe of Justification and Reconc‘liatioπ:


The Positive Develoþmeηt of the Doctriπe , 1900, p. 202.
18. lbid. , p. 219; cf. 222 ff.

101
의 승리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칸트의 용어대로 하연 목적의 왕국
이요, 신약성서걱인 용어로서는 하나님의 냐라를 성취하려는 것이마.
이 두 가지 출발쉽을 가진 리층은 양극\兩웰)의 긴장성, 존재의
재 단계 또는 기타의 것을 채용힘으로써 두 구별된 원리릎 결합시키

려 고 노랙 하는, 말하자연 중도적 기 독교인의 부류에 속한다고 말한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해결 망볍을 지향하는 경향이 그의 저서 중
얘기자기서 발견되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전체
걱무로 블 해 그는 그런 것을 문제시하지 않았다 다른 기독교안들이
당연하는 난문제 들은 하나닝 , 그러 스도, 또는 기 독교인의 생 활 등에
대한 그들의 잘돗된 해석에서 나온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마. 예를
든다떤, 하나닝에 대한 참된 교리와 사죄에 대한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케 하는 시관석인 방엽을 취하는 대산에 형이상학적 관냄을 사
용함으로써 생기는 오류(誤慘)와 같은 것이라 하였마. 그의 견 해에는
확설히 이원성 (二元性) 이 있마. 그러나 진 정 한 의미에서의 충돌은 운
화와 자연 사이어1 만 았다는 것이다. 기 독교는 두 초점을 가진 타원형
으로 볼 것이요, 한 중심을 가진 원A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초점은 의인(義 핍) 또는 사죄요, 다른 한 초점은 안격자들로 판 온
전한 사회를 획득하기 위한 윤 리 적 노력이다. 그러나 이 두 이녕 사
이에는 아무 충돌도 없마. 사죄란 것은 죄안들로 하여금 거듭거풍 살
패한 다음에도 또다시 얼어나 그들의 윤리적 임무를 수행하케 하는 하
나닝 의 우익 (cornpanionship) 블 의 미 하기 때 문이 다. 교회 와 문화 공옹
체 사이에도 이원성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 충돌도 있을 수
없다고 리층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를 세상에서 걱리시키는
수도원 운등이나 경건주의적 행 위플 가장 준렬하게 공격하였다 19 만

알 기독교 교회가 그 안에서 되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판련시


키는 공동체라연, 그것은 또한 그 안에서 보펀석 하나닝 나라를 성취
하기 위하겨 각이〔各異)한 국만들지 사랑으로 연합하여 한 성원〔成員)
을 이룬 진정한 윤리적 사회의 형성이기도 할 것이다 20 기독교인의

소멍파 직엽에는 이원성이 았다. 그러나 중세기 카폴럭에서만 그 사

19‘ C f. his Geschichte des Pietismus , 3 γols. 1880-1886.


20.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η Religion , 1895, p. 5; Jαstification aηd
Reconciliation , pp. 133 ff.

102
제 3장 운화의 그려스도

이에 충돌。1 있였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안의 동기가 。l


웃 사랑에 았다연, 그는 도먹석 공동체 얀에서 가정, 경제, 국가, 또
는 정치 등의 생활을 진행시컴£로써 하나님 냐라를 추쿠하는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가정, 사유 재산, 개인의 독자성과
존엽(권위에 순복하는 의마에서)" 둥은 도덕적 건천성과 품격의 조
성에 없어서는 얀 될 본질적 선인 것이다. 다얀 공통선 (common good)
을 위한 시민으로서의 사엽에 종사함A로써 또는 그의 사회적 소명
에 충실함으로만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 진살할 수 있는 것이다 21 하
나닝의 일파 사람의 일 사이에 이원성이 있다는 것을 리출도 생각하
고 있다. 그러냐 기독교안은 하냐닝을 의지하고 자치 노력을 퉁한시
한다는 반기독교적 문화인들의 혹평은 결코 타당한 것이 아닝을 말하
고 있다. 하냐닝파 사람은 하냐닝 냐라플 실현할 공동 엄무를 가지고

있기 해문이다. 그러고 하냐넙은 그러스도와 양성을 통하여 안간의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이요 외부로부터 그 위에 역사하는
것이 아니기 해문이다. 구극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자신 안에 이원성
이 있음을 본다. 그는 제사장임파 동시에 예언자이다. 그는 응혜에
의존하는 , 성례천적이요 기도를 함쓰는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동시에
자연을 정복하는 자유안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제도들을 통해 윤리적
으로 정 진하는 운화적 공동체에도 속해 있는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런 갈 등이 나 긴창도 없다. 제사장이 사죄를 위하여 중보하는 것
은 예언자의 이상이 실현되게 하기 위함이며 기독교 공동체의 창설
자는 동시에 문화사(文化史)에 획기적인 천진을 보게 한 도덕적 영웅
이었기 때문이다 .22
리출이 기독교와 문화의 완전한 화해를 성취한 것은 주로 그의 하
나닙 나라 이념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이 용어에서 무엇을 의미하
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상고한다연 우리는 그가 예수를 문화의 그리스
도로 해석한 데 두가지 듯이 있음을 알게 띨 것이다. 그 하냐는 안간
들의 가치를 실현하고 보존하려는 안간의 온갖 노력에 있어서 예수가
그 지도자라는 것이요, 다른 하냐는 19세기의 문화적 제 이냄£로 이

21.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 pp. 53 f.; cf. .ll“sti!icatio까 aπd
Recoπciliation, pp. 661 ff
22. Just떠 cation and Recoπciliation, chap. \1.

103
해펀 그리스도라는 것야다. “하나념 냐라라는 기독교적 이녕은 안류의
연한을의미한마. 그연합은 모든성원들의 전혀 자연적 사정과특수사
정윷 초월한 호혜적(互惠性) 도먹 행위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며 외연
적으로냐 내적으로나 가장 포팔적안 것이마”라고 리출은 말하였다 23
만알 여기에 하냐닝의 현현(願現)에서 바라는예수의 종말론적 희망야
결핍되 어 있마는 것이 사실이라연, 하늘과 땅의 주 가 되시는 초월석
하냐닝의 현재적인 통치 플 믿는 비종말론적 신앙도 또한 결띔되 어 있
다. 오든 것은 사감과 사람의 일에 판련되어 있다. “하나넙 ”이 란 만
어는 하나의 삽입어처럼 보안다. 후세의 리층주의자들이 “하나닝 냐
라”란 말을 “안긴의 형제됨 (brotherhood) " 이란말로 바꾼 것이 오히려
제격 일 는지 모른다. 이 운화적 사엽에서의 안간 노력의 옥석에 대한 말
은 19세기 사상과 온전히 합치된다. 위에서 이마 말한 바와같이 리출
이 말하는 예수 그러스도의 하냐넘 나라 개냉이란 것은 실질적 A로는
칸트의 목적의 왕국이란 것과 같은 것이며 , 전 안류를 사랑파 평화와
공동 요구와 상호부조(재 ICJs사助)에 의 하여 한 가족으로 모은다는 제퍼
슨의 생각과 밀접하게 판련되어 있다. 그 정치적 판점에 있어서는 테
니슨의 “전 인류의 의회와 세계의 연망”이라는 말과 통한다. 이것은
민주주 의 석 문화로 말마암아 평가된 위대한 가치들의 종합이다. 즉
자유와 개인의 본질척안 가치와 사회적 협동파 세계 평화 등의 종합
이마 .

그 러 나 리층을 펑하는 데 공정을 기하기 위 하여 한 가지 꼭 말해얘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가 문화 블 동하여 그러스도를 해석했다 할지
라도 그는 문화 가운데 서 그러 스도에 게 가장 알맞는 요소들만을 택 하
여 그것으로 그러스도플 설영했마는 점이다. 리층에게 있어서 문화의

열쇠라고 느껴진 것은 칸트의 높은 윤리적 이상주의였다. 그런데 19세


기의 운영 천성커에는 그 이외에도 많은 다른 운동들이 성행하였 마.
그러 나 그는 일부 시-랑들이 한 것 과 같이 , 자본주의 , 국가주의 또는
물짚주의 둥 당시의 사조(탤、湖)를 예수 그러스도에게 결부시 키 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가 기독교를 하냐의 목적을 위한 방편£로 사용했마
한지라도 그 당시 운화가 지니고 있던 많은 다른 목적들 중에서 그는
기독교에게서 가장 합당한 목적을 택한 것이마. 가령 그가 예수 그려

23. Ibid. , p. 284.

104
제 3 창 문화의 그려스도

스도의 하냐닝의 속성 가운데서 어느 한 속성을 택했다면, 그- 하냐는


권력이나 정의보다도 사랑의 바탕이였으며 그 결과로 생긴 신학은 풍
자석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기독교적임에 틀럼 없었던 것이마. 뿐만
아니라 리출은 그러스도블 설명하는 데 정당을 기하기 위하여 또 한
가지 극력 주장한 것이 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아무리 역사적 살례
를 그대로 모방한다 할지라도 안간 자신들로서는 문화 안에서 도저허
성취할 수 없는 무엇을 그러스도께서 완성하셨다는 것이다. 즉 그는
사죄의 중보자가 되었우며 지금도 중보하고 계시마는 것, 그는 안간
의 노력이나 지혜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불멸성을 밝히 드러내
보이셨다는 것 등이다. 자연에 대한 안간의 종주권에는 한계가 있다.
그도 그의 육체적 성잘 해문에 제한을 받고 있었다. 그가 견제할 수
없는 많은 자연럭에 의하여 그는 제한 받고 있었마. 그리고 “그가 지
지받고 있는 자연력으로부터 많은 방해블 받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안간 문명의 전진하는제 세력에 자신을 알치시켰마” 할
지라도 그는 그에게 반항하는 자연의 체계를 그 자신의 노력 S로 정
복하기를 바랄 수는 없였다.이 상태에 있어서 고동 종교의 교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종교와의 관계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초세상적안
하나넙 곁에 서 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였마. 그러고 그는 초세상
적안 목표에 도달할 운영을 가지고 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였다 24
이러한 그의 진술도 역시 성 마태냐 성 바울에 의한 복음서보다도
성 임 마누옐〔칸트를 의 마 함- 역 자주)의 복음서 에 가?강다는 것은 물론
이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한 리출의 견해 를 이 이싱 더 상술할
필요는 없 을 것이다. 즉 예수에 대한 충성성이 사람블로 하여금 옐마
나 활발하게 온갖 문화 사엽에 능동적으로 동참하게 하였는가, 또는
모든 위대 한 제 도들을 보존하는 데 옐마나 간절한 판섬을 가지케 하
였는가 하는 것 둥을 하냐하냐 전시할 펄요는 없을 것이다. 리출의
저서블 읽지 옷랬윷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이야기조차 듣지 뭇한 사
람이 라 할지 라도 오늘날의 기 독교언, 특히 프로테 스탄트에게는 이 일
반적인 개요(빠要〕가 확살허 친숙하게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부

24. Ibid. , pp. 609 ff.

105
분적으로는 그 자신의 영향력 혜 문 이 였지만, 그보다도 그가 세 계 대
천 이전의 세계에 널리 퍼지고 갚이 뿌리 박힌 사상을 명백하게 표현
한 대표자였기 해문이다 . 그러스도와 문화에 대한 그의 이해〔理解)는
싹러 지도적 신학자들파 교인들의 비 난으로 인하여 본질적으로 재생성
되 었 다. 라우웬 부쉬 (Walter Rausch enbusch)의 사회 복음 운동도 대 체
로 그리즈도와 복음에 대한 그 와 동일한 해석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

만 라우웬부쉬가 도덕변에서 더 캉력하고 신학연에서 보다 약했마는


차이 가 있을 뿐이 마. 독일 의 하르낙 ( Ha:- na ck ) , 영 국의 가아바 (Garvie) ,
미 국의 애 튜즈 (Shai ler Matth e ws)와 폐 칸토쉬 (D. C. Macintosh) , 스위
스의 라가즈 (Ragaz) , 그러 고 그 밖에 도 다른 많은 사랑들이 각기 자기
류에 따라 에수가 인간의 종교적 , 윤리적 문화의 위대한 대표적 안물
이라는 것을 표 명하 였 마. 대중적 신학에서 는 기독교 사싱 전체 릎 한
공식 속에 축소하여 “하나닝은 아버지시고 인류는 형제이다”라는 말
로 표시 한다.

이 모든 기독론파 구원론의 배 후에는 한 공통펀 개녕이 있다. 그것


은 알반에게 승 인펀, 다시 불을 필요도 없는 얘 론의 알부를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곧 안간파 자연의 갈퉁이 란 것은 안간 상태의 특정이라
는 개 념이다. 도녁적 존재자요 지성적 영 (靈) 인 안간은 주로 자기 바

깜에서, 부분척으로는 자가 안에서, 바인격적인 자연력의 반항에 직


변하고 있는 것이마. 삶의 문제가 이란 견지에서 이해될 배, 예수 그

리스도를 자연을 정복하려는 노력과 자연을 호월하려는 열망을 인한


인간의 정신적, 문화적 동기의 대 지도자 라고 생각해야 하고 이해해야
한마는 설명은 거의 불가피한 결론이라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로서의
일반척인 견 해는 안간의 근본적 상황이 자 연 괴의 충돌에 있는 것이
아니 라 하나닝과의 충돌에 있우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충돌의 중섬
에 서 서 제 불과 중보자 가 된다는 것이다. 운화-신학은 결코 이 견 해
블 환영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견 해대로 말한다연 이 런 부류의 기
독교인들, 즉 인간의 딜레머와 그 해 결책을 이렇게 이해하는 사랑들

은 인간의 운화 생활에 우지한 자들이며 천국 복응을 왜곡시키는 사


람들이라는 것이마.

1 06
제 3 장 운화의 그리스도

3. 문화적 신앙에 대한 변호

오늘날 운화적 프로테스탄티즘에 반대하는 상영위한 반동은 그러스


도와 문화 문제에 대한 이 유형 (운화의 그리스도- 역자주)의 해답의 풍
요성을 모호하게 되는 경헝: 이 있다. 그러나 문화석 기독교를 가장
격렬하게 배격하는 사랑들은 자신들이 배끽하켜는 바로 그 유형의 일
반적 태도에 동참하고 있마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 엽장에 대한 무
모한 취급을 상가하라는 경고를 받고 있는 것야다. 그러고 끊임없
이 진행되 는 그러스도의 문화이식 운동은 그러스도의 통치권을 확장
하는 데에 불 가파한 뿐 아니라 갚은 의의가 었마는 것을 잊어서는 안
펀다.

근본주의 자들이 이 른 비- 자유주의 , 즉 문화석 프로테 스판티즘을 그렇


게도 자주 공격 하는 그 자체가 문화에 대한 하냐의 충성을 표시 하는
것이 다. 많은 근본주의자들의 판성은 문화적 뚱성을 시사하고 있마.
천부는 아니 라 할지 라도 대 부분의 반(反)자유주의자들은 예 수 그러 스도

의 주권보다도 옛 문화의 우주론적 또는 생 물학석 개 녕 을 보수하려 는


데에 더 많은 관성을 갖고 있다. 창조의 양식파지구 피렬에 판한 고대
문화의 이냄 을 수락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의 시금석 을 삼는 다. 이보다도 더 중에한 것은 그들이 그러스도에게


판계시키 는 판읍들은 적어도 신약성서와의 판계보다도 사회척 판승과
의 판계가 더 깊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그들의 적애자들의 그것파
동일하다. 긍주(禁酒).:를 실천하는 것파 초대 미 국의 사회 조직을 그대
로 보존하 는 것을 예 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파 일치시키는 운동은 문
화적 기 독교의 유형임에 틀림 없 다. 그들이 보수하려는문화가 그들의
경 쟁자 들이 존갱 하는 문화와는 다르다 할지라도, 민주주의척 개안의
자유플 안정하는 기독교를 “부르조아 기독교”라고 비난하는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기독교 비판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로마 카흘
렉 교회에서 19세기 와 20세커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는 것도 흔히는
13세 기 문화에 돌아 가고 싶다는 의욕에서 충동받기 때문이었다. 그리
하여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명보다 다른 종교적, 경제척 , 정치
적 제도들과 철학적 이념 둥A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마. 현대안이 이란

107
식으로운화적 프로테스탄트를 공격하는 한, 결국중요한 점에서 서로
근본적 인 합치를 보고 있는 사람들끼리 의 집안 싸움에 불과한 것 이 라
하겠다 . 그 요점이란 것은 그러스도는 문화의 그러스도이며 안깐들의
최대 엄우는 그의 최선의 문화를 유치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기독교

운동에 있어서 문화적 프로테스탄트와 운화적 카폴럭처럼 서로 비슷한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고 미 국 기독교보다 더 독일 기독교에
카까운 것은 없을 것이며, 노동자 교회보다 더 중산 계급의 교회와
흡사한 것은 없을 것이마. 용어는 마르나 논리는 언제나 갚다 . 욕 안
간은 그들의 가장 아릉마운 이상, 가장 고귀한 제도들, 가장 좋은 철
학을 언제나 그러스도와 일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극단적 해답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블에
게 도 그 반대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가치가 숭어 있다. 예수 그피스도
를 문화적으로 해석하는 운동이 그러스도의 권력을 안류에게 미치게
한 역시적 공헌이 엘마냐 위래하다는 것은 의성할 여지가 없다. 순교
자의 파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격언은 아마도 절반의 진리밖에 가지고
있지 옷할 것이다 만알 옛 사람들은, 판습에 적응하다는 대중적이고
공식적안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단연 거부하고 꾸준히 절개를 지키는
기 독교인플의 일판성 에 크게 캄동을 받았다는 것 이 사설이 라면, 그들
에게 가장 흘륭한 교사들의 도덕적, 종교적 철학과 기독교의 메시지
와의 조화라든지, 일반안의 모범이 되어 있는 영웅들이 기독교안의
챙동파 함치된다는 사섣에도 강동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25 이 일
에 있어서는 문화 측에서도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순교
자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무멍은 사회 갱생 운동의 묘상
〔댐똥、이 되었다. 헬라안들은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같은 점을 발견한
다. 그것은 우리 세대의 안도인들이 그러스도의 죽음파 간디 (Gandhi)
의 죽음이 비 슷하다고 말하는 것 파 같다. 그리 스도를 문화의 쿠주혹
해석하는 기독교인들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세력을 퍼치려는 것보다
도 주로 그들의 운화를 구원하거나 개헥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

25. 2세커에 이교도들에게 강통을 준 치독교의 。1 원성에 대하여는 H. Lietz-


mann 교수의 처서 The P.αmding 0/ the Chμrch Uniνersal, 1938, pp_
193 ff. 에 잘 기 휴되 어 있 다A. D. Nock, Conversion, 1933 도 참고
하라.

108
제 3장 운화의 그리스도

럼 에 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들로 하여금 자기 들의 언어 로 복음을 。l


해 하게 하며 자기 들의 상(像)으」로 그리 스도의 품격 을 깨 닫게 하며 그
들 자신의 철학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닝의 계시를 설명하
케 하는 모든 결파를 가져왔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권력을 확장하
는 데 큰 공헌을 하게 된 것이었마. 그러나 그들 자신의 힘우로 이
일에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운화를 배
격하는 극단파 이외에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다
른 기독교안들이 이 일의 대부분을 실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호썩
기독교안들이 이 방향에 강한 추진력을 제공한 것도 사싶이다. 가령
복음서를 “통속어" (通 洛語)로 벤역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살은 그 그
룹이 영백히 보여 준 바이다. 그러냐 이런 위험을 연하기 위하여 벤
역을 금지한다는 것은 생소한 사회 속의 죽은 언어에마 복음을 매장
해 두는 또 하나의 다른 위험을 멈하는 것이 된다. 문화적 프로테스
탄트를 비 난하는 사람들은 성 서 적 사고 방식 」즈로 돌아오라고 강권한

마. 그러냐 성서 안에는 각이〔各異)한 많은 문화들이 표시되어 있다


는 사살을 그들은 종종 잊어버리는 것 같다. 마치 성서적 용어가 단
일하지 않은 것같이 성서적 우주판이나 심리학도 단일하지 않은 것이
다. 하냐님 의 말씀은 인간에 게 전달필 쩨 인간의 말로 전달된마. 그
런데 안간의 말이 란 그들이 관련되 고 있는 개 념 들을 짜르는 문화적
산물이다. 얀일 신약성서의 기자들。 l 하나닝의 아들 예수에 대하여
말하는 데 있어서 “메시야 “주 “영 ” 둥의 단어블 사용할 필요가
있었 다연 후세에 이 신약성서 기자들의 말이나 예수 그러스도 자신
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이 그와 같은 노선에서 “이성 “지
혜 “해방자 “화신" (化身)둥의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도 당연한 일
일 것이다.

문화적 기 독교안들이 그리 스도의 통치 영 역 을 확장하는 데 공헌했


다는 것은, 적어도, 미 천한 자들에게 보내는 그러 스도의 호소를 교만
의 원천 A로 만든 사량들도 결국 마지옷해 안정하고 있다. 문화적 기

독교안은 그 사회의 지도 계급을 향하여 말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종교를 멸시하는 문화안들에게 말한다. 그들은 그 당시의 과
학, 철학, 정치 , 경 제 퉁 제 운동에 친숙한 자들의 보다 세련된 언
어로 설명한다. 그들은 귀족 또는 중산 체급, 흑은 그 운영 안에서

109
득세 하는 그룹들에 게 로 나아가는 선교사들이 다. 01 렌 환경 에 았으
므로 그들은 반드시 그펠 리는 없겠지만, 흔히 그들이 상대하는 자들
의 계급 의식에 동참하기 쉽다. 그러하여 그들이 무지(無知)하고 저
속한 신도의 무리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애써 보여 주기위하여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슬픈 파오이다. 그러나 사회적무로 낮
은 지위에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그러스도가 그들의 비천함
에 동참했다는 사실에보다도 강자(彈者)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린다는
데에 더 않은 갇사를 느끼는 사람들이 빠지는 꼭같은 죄라 하겠다.
。 l 련 고찰은 잠깐 그만 두고라도 사회의 지도적 지위에 있는 그룹을
기독교안이 되게 하는 것이 직정 대중을 회개시키는 선교 운동에 옷
지 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획-싣하마 . 바울은 그의 회
개와 능력에 있어서 하나의 상정적 안물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멸 시
하던 문화인으로서 그러스도의 추종자 카 된 수많은 사란들의 대표
자이다.
문화의 그러스도라는 입장을취하는사당들은이런 또는 이와 w] 슷한
방법으로 복음의 뢰-펀척 의미와 예수가 택함받은 성도의 소수 집단의
구주일 뿐 아니라 세계의 쿠주 라는 진리를 살증하려 한다. 뿐만 아니
라, 신약성서에 냐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파 생애에서 그 중점적
인 요소들을 지적해 냉으로써 극단적 기독교인들이 간파한 점을 보
충하였다. 그리스도는 그 시대에 적응하였다 . 그는 그의 사회 법규들
을 안정하였마 그는 그의 민족인 이스라옐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
하여 제자들을 보내었다. 그는 세기의 종말을 지적했을뿐 아니라, 시
간 안에서의 심판 마시 말하면 살로암 탑의 붕괴와 예루살렘의 멸망
둥을 말하였마. 그는 그의 민족파 그의 시 대의 정치석 파당파 함께

논의하였마. 그는 예언자보 다 뛰어난 안물이었지만 역시 이사야처렴


예연자석 엽장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의 평화에 큰 관심을 가지
고 있였마. 그가 일시석 가치 를 영혼의 생영과 같은 정도로 귀중하게
뇌긴 것은 아니었으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사해 주시며 동시어}
육신의 뱅도 고쳐 주었다. 그는 근본적안 원리들과 벨로 가치가 없는
천통들을 구별하였 마 . 그는 그 시 대 안 중에 서 보통 사랑들보마는 전
국에 더 가까이 있는 지혜 로운 사람들을 딸견하였마. 그는 제자블에
게 오직 하냐닝의 나라와 그외 의릎 구하라고 영령하였 A냐, 그떻 마

110
제 3장 운화의 그려스도

고 그 밖에 다른 선 C善)은 천연 부정하라고 말한 것은 아니였마. 그는


가정의 제도에 관하여 우판섭하지도 않았다. 성전 질서도 존중하였£
며 일시적 A로 억압을 받고 있는 피압제자의 자유에 대하어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칩권자에 대한 의우 이행 〔隨行)도 안정하였다.
즉 그의 타계 적〔他界的〕안 신앙은 연제나 현세석안 판심을 동만하는 것
이었다. 그의 신적 행위의 선포와 실증은 얘기서 지금 해야 할 안간적
활동에서 분리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미래의 왕국은 현재
에까지 뻗쳐 있마. 만일 세속적인 지혜플 가르치는 지자(智者) 라든가
사회 제도의 재건을 꽤하는 개혁자와 같은 안불로 예수 그러스도를
해석하는 것이 잘옷이라 할지라도, 그 반면에 그와 같은 해석 들은 저
주받은 현 사회 안에 사용되는 지도 원리에는 전혀 판심이 없고 다만
하늘에서 내려올 새 예루살렘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우로서의 예수만을
강조하는 또하나의 잘옷에 대하여 적어도 균행을 가져오는공헌은 안
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극단적 기독교안에게 있어서는 그러스도의 종주권이 명백하게 표시
되는 영역 이외의 전 세계는 일률적 A로 암흑의 나라인 것이다. 그러
나 문화적 기독교인들은 사물을 그렇게 알율적으로 속단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회 얀의 각이(各異)한 운동에는 각기 명백한 차
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각이한 운동들을 관찰함£로써 그 중
에서 교회의 사영파 접촉될 수 있는 점을 발견하며 동시에 그 운화를
개혁할 가능성도 보게 되는 것이다. 극단주의자들은 아리스티푸스
(Aristippus) , 데 모크리 투스 (Democritus) , 에 파 규러 스파 (E picureans)

를 배 격하는 것파 꼭같이 소크라테스, 플라톤, 스토아파를 배격한


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폭정〔뽕政)과 제정〈帝政)이 동알시되며 강도와
뱅사가 폭력을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무분옐하게 배 격을 받는다. 그리
고 손재 주 있 는 사 립 들이 새 긴 상〔像〕보다도 파 디 아스 (Ph idias)의 조

각물이 더 많은 우상숭배 적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근대 문


화는 통틀어 개인 주의적이요 이기석이요 세속적이요 유물론적이라고
단정한다 . 그러나 운화적 기독교안들은 어느 운영에나 쉬내한 극성
(極性)들이 았다는 것을 안정하며 그 중에는 예수 그러 스도께서 긍정
하시는 운동들이 섞여 았다는 것을 안정한마. 즉 세계의 통일괴- 질서
를 지향하는 철학의 운동, 자기 희생과 공통선을 지향하는도덕 운동,

111
정의블 위한 정치적 배려, 종교적 진살성에 내한 교회적 판성 릉을셔
느 의마에서는 안정했다는 점을 이해한다. 그러으로 그들은 문화와의
접 촉을 꺼 리 지 않는마. 그리 하여 그들은 예 수를 지자 L 智 者 ), 예 언자,
진정한 대제사장, 절대 공정한 재판자, 대중의 행복을 위한 열정에
불다는 개혁자 등으로제시한다. 동시에 그들은세속적 부패와 투쟁하
는모든 세력들을 격려한다. 영지주의자블은 교회가은거적 종파로 화
하는 것을 막는 데 공한하였다. 아벨라르드는 중세기 사회의 첼학석,
과학적 계몽을 위하여 준비 하였£며 고행 〈함 行 )제도의 규칙 을 개선하
는 데 힘이 되였마. 문화 프로테스탄트주의자들은 산엽 문화가 그 독
특한 부패에서 졸。 1 킬 것을 끊임없이 설교하고 있마.
이 입장에 매하여 아래와 같은 반대론이 있을 것이마. 즉 문화

란 것은 너 무 나 각양각색이므로 문화의 그리스도는 결 국 란덕꾸러기


(chameleon) 가 되 고 말 것 이 마. 문화와의 연 결 에 서 말하는 “그러 스
도” 는 각 시내에서 자기 들 이 안격 화힌- 이념에 부 여 (附與) 한 신적 이Ijl

的) 특질이 의미하 는 정서적 존갱어에 불파하다는 것이다. 이 용어가

어떤 째에는 지자, 혹은 철학자, 어떤 때에는 수도사, 어떤 배에는


7꺼혁 자, 석 맏 씌 어} 는 만 주주의 고취 7:} C줬 吹者 〉, 그려 고 마시 군양을
지칭하는 내용을 가잔다. 01 반대론은 물론 많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
다. 기독교화띈 밀 의 종과들야 말하는 기석을챙하는초자연적 영웅과
“공산당원증 (red card)을 가지 고 았는 예 수 통무” 사야 에 어떤 비 슷한
정이 았는가? 스토아 학파의 지혜보다 나은 것을 가르치는 교사와 “아
무도 모르는 그 사람 "(The Man Nobody Knows) 파의 사이 에 는 어 떤 유
사첨야 았는가? 그려나 문화의 그리스도라는 영장을 취하는 기독
교안을 옹호하는 의미에서 두 가지는 대담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진살로 여러 국면을 가지고 있다. 풍자화도 어떤 때에는
다른 아무것으로도 나타내지 옷할 어떤 국면을 밝히는 엘이 있마.
물쩨로, 기독교언은 히브리 예언자들, 헬라의 도덕 철학자들, 로마의
스로아 학파들, 스펴노자와 칸트, 안도주의적 개혁가들파 동양 신비
파 등파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천근성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 사
싶은 기독교안의 풀안정성보마는 오히려 안간 지혜의 명백한 얀정성
을 시사해 준마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른바 문화의 위대한 전통이
라고 불러우는 것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하고서 통일을 찾는다는

112
제 3창 문화의 그리스도

것은 극허 곤란하다. 그러스도의 도웅으로써만 그러한 통알성을 식벌


할 수 있다. 야 사상을 신학적으로 구성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려는
생각을 가지는 것도 우리가 아닐 것이다. 즉 성령은 아들에게서만 냐
온 것이 아니라 아버치로부터도 냐온 것이므로, 그러스도를 아는 지
식의 도움으로써 이 세상의 영들파 하나닝£로부터 오는 영을 분간할
수 있마고 말하게 된다.

4. 신학적 반론

예수를 문화의 그러스도로 제시한 사랑들에 대하여는 교안들뿐


아니라 바기독교안들도 반대론을 말하였다.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에
대하여는 정통파에서도 반대하였치만, 이교 (異敎)의 논객들도 반론

을 써 내였다. 기독교 자유주의는 바르트에게서도 배격을 받았지만


듀우이 (John Dewey) 에 게 서 도 배 격 을 당하였 다. 마르크스주의 자가 기
독교 사회 주의를 싫 어 하는 것은 정통적 칼빈주의자나 루터파가 그러
하는 것보다 옷지 않다. 우리는 지금 문화 측에서 제기한반론들을하
냐하냐분석하는 것이 우리의 파제는아니다. 그러나 문화적 기독교가
극단적 기 독교보다 사랑들을 이 끌어 그리 스도의 제자를 삼는 데 더
유효하지 못했다는 사살만은 지척하고 념어가야 할 것이다. 문화적
• 기독교가 옥척하는 바가 불신 사회, 특히 어떤 특수 그룹, 말하자
연 지식충, 정당, 또는 근로충 등에 복음을 소개하는 데 있는 한, 그
것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알이 많다. 왜냐하면 흔허는 철저히
나아가지 옷하며 , 문화 운동을 약화시 킬 성 싶은 요소를 전파하는 데 는
영거주춤해 버리기 해문이다. 아무리 그러스도를 문화에 적응시키려
고 애써도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거첨돌을 온천히 제거할 수 없
는 것 이 다. 그러므로 문화적 기 독교안도 다른 모든 기 독교안들이
부낯치는 한계선, 즉 “세상”과 싸우느냐 세상파 짝하느냐 하는 결단
첨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문화의 그러 스도를 전하는 전도자들이 운영 의 가치 에 최고
의 충성을 바치 는 사람들의 요구에 충분히 응할 수 있는 데까지 냐아
가지 뭇한다연, 그들이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동료 신자들을 심판

11 3
하는 일에 지나치게 쏠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운
제에 대한 문화 측 해답이 신약성서에 있는 예수의 모습을 끊임없이
왜곡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조화를 지향하는
그들의 노력 때운에 영지주의자나 문화적 프로테스탄트는 다 같이 욱
시적 복음과 새로운 예수의 생애를 그려 내는것은이상하게도 바랍직
한 알이라고 알고 있다. 二들유 신약성서 의 복장한 이야기와 해석에서
어떤 단펀들을 택하여 그것을 여l 수의 특색이라고 주장하며, 거기에 많
은 설 1 을 껏붙여서 그들 냐릉의 신화적안 예수를 재 건한 마. 어떤 사

람은 요한복음 첫 귀절 을 택하며, 또 어떤 이는 산상수훈을, 어떤 사


람은 천국에 대한 선포를 택하여 그것으로 기독론의 열쇠를 삼는다.
이것은 언제나 그들의 시대적 흥마와 요구에 합치되는 무엇올 가지고
있다. 청중파의 어떤 접촉점을 찾A 려는 것이 그들 설교의 전체를 지

배하고 있다 . 그리하여 그들이 그려 내는 예수의 모습은 어떤 추상적


개녕을 인견화한 것보다 조금도 나을 바 없는 것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예수는 영척 지식이나, 논리적 이성이나, 무한에 대한의식, 내
적인 도덕플, 또는 형제애 둥의 이념을 뜻한다. 그러냐 결국 이런 환
상적안 그리스도 묘사는 성서에 기록펀 치사(記事)의 힘에 의하어 우
너 지고 만다. 감독이 나 종교회의의 공적 결의야 있든 없든, 신약성
서의 증언은 그 자체의 힘£로 이들을 극복해 버란다. 2세기에는 신
약 경천의 형성에서, 1 9세기와 20세기에는 계속적인 성서학자들의 엽
적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는 것이 명시되었다.
이런 자기류의 학파들이 그려 내 는 모슴보다도 그는위대하고 더 놀라
웅마. 이 욱시적 복음서가 그려 내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은 그리스도
자신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성서의 그리스도는 그들이 발견하지 뭇
한 다른 날과 행동을 보여 주고 있 다. 조만간 다음 사실이 밝혀진마.
즉 그 초자연적 존재는 혈육을 지난 한 안간이었 A며, 그 신바가는 한
도덕 교사였고, 그 도녁 교사는 하냐닝의 권능으로 사귀들을 몰아

낸 사람이며, 성육신한 사랑의 영은 진노의 예연자였 A며, 선을 위하


얘 순사(쩌死)한 그는 부활한 주념이었다는 점 이마. 그의 계명들은 리
층주의가 이른바 각 사람의 소영에 대한 의무와 그러스도의 법을 융
화시켰을 해보다 훨씬 극단적안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 그리고 그러
스도의 사명은 마만 안간적 압거l 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전형석 해방

11 4
제 3 장 문화의 그려스로

자의 상(像 )-으료는 결코 환원띨 수 없는 것이다.


문화의 그러 스도를 주장하는 사랑들에 대 한 이 런 종류의 특수한
반대론은 이 밖에도 많이 들 수 였다. 만대론의 수가 많든 적든 간에
그 논거는 동일하마. 즉 그시대의 운화에 충성한다는것 이 그대로 그
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이 된다는 주장은 결국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우상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버리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 비난이 너무 지나치게 첨예화(失銀化)됨으
로써 혹평이 되고 마는 일이 많다. 안간의 맹정은, 척어도 모든 기독
교의 법정은 제자들의 충성과 배신(背信)을 평카할 자격을 가지고 있
지 않다 . 그러나 문화적 기독교의 입장에 나타난 명백한 위험성 때문
에 대부분의 기독교 운동에서는 끊임없이 문화적 기독교의 엽장올 거
부해 왔으며, 그거부의 태도에 있어서도 문화적 기독교커 극단적 , 반
대 흔의 태 도릅 채용하기를 거부하는 것보다도 더 완강하였던 것이다.
배타석 신자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화석 기독교에서도 신
학적안 문제에 부맺치게 완다. 그것은 최, 은혜, 상위일체 둥의 이론
들이 섣천 적 문제로만 보이는 것 속에 얼마나 많이 판련되어 있 다는
사실을치척하는 것이다. 극단은 극단파 서로 통한다. 문화의 그러스
도 주창자들은 둔화에 대 렵 하는 그러 스도를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교회
의 신학에 대한 그들의 알반적 태도와 그들이 취하는 어떤 특수한 신
학적 업장에 있에서 이상하게도 서로 동얼하다. 극단주의자들과 마

찬가지로 그들도 신학 자체를 의성한마. 그러나 그 의심하는 이유는


서로 반대 펀다. 극단주의자들은 신학으로 말미암아 세상적인 지 혜가
계시의 영 역을 칭벙한다는 이유에서 신학을 불신한다. 그러나 운화
적 기독교에서는 불합리하다는 점에서 신학을 의심한다. 양자가 다
이성파 계 시를 분러시키는 경향을 취한다. 그러나 이 두 원 리 에 대한
평가는 각각 다르마. 문화적 기독교에 있어서는, 0 1 성은 하나닝파 구
원에 대한 지 식의 대로 (大路) 가 되어 있마.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합리적안 진리와 선(善)에 대한 위 대한 교사였다 그는 종교
척, 도덕적 이성의 역사 안에 냐타난 천채이 다. 그리고 계시란 것은
지능이 낮은 일 반안에게 지성적안 진리 를 가르치기 위한 우화척 (萬話
的)언 장식이다. 그러고 역사 안에서의 이성의 성장에 본질적인 파정
에 대한 종교적 이 픔에 불과하다". 이것이 뭄희·걱 기독교안들의 일반

115
척 사상 경향이다. 그러나 극단주의자플 자신이 어느 정 도 이성에 의
손하지 않융 수 없는 것과 갚이 문화적 기 독교인들도 순수한 역사적
사실에 판여하지 않고는 그뜰의 함리호1- 작엽을 진행시킬 수는 없는
것이며, 이 성 이 우한자와 도덕율을 마루는 경우에는 어떤 절 대자 자
신의 자기 계시적 행동과 판켠을 맺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기 독교
영지 주의 자 들 은 이교도들과 함께 “ 말씀 이 육 신윤 이 루었 다” 는 그L 백에

동침하 였 으며 동시에 “본디오 빌라도 에게 그l 난받은” 예수에게 강력하


게 의 지하였다 . 존 록(John Locke)에게 있어서는 키독교는 모두가 얘
우 합리적이었마 . 그러나 기독교에 는 이 성 을 넘어서는 것이 하냐 있
었다. 이 합리적인 사란도 그것만은 합리적으로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예수는 그러스도이시다”라는 획인이다. 리출주의자들은, 예
수가 인간의 설천 이성 말달의 역시- 안에 속한다고 보았 다. 그러나 그
들도 자기 들 의 죄를 용서하시 는 그러스도의 용서 행 위 만은 초자 연적
요소블 가지고 있다고 고 백하 였 다. 예수블 하나닝의 아들이라고 부르
는 것은 지성적인 가치 판단에서이다. 그러나 이 말이 참A로 의미를
가지려연 벨로 지성적이 아난 또 하나의 무엇이 가산되어 야 한다. 하
나의 부진근수(不밟根數)가 냥는다. 그것은 이 교도들이 흔히 말하듯, 불
합리하고 개인적안 이익 해문에 교회 의 권위나 기독교석 판습에 굴복

한 이 른 바 합리주의 자 들의 바 겹 성 때문안 것은 아니다. 그보 마도 이


부 잔근수는 그들의 개인적 또는 시 회 적 역사 안에 예수가 현존함A로
써 그들 자신의 추론이 역사적£로 조건 지 어졌 다는 사살에 있는 것 이
다. 뿐만 아니라, 추론은 이성 자체가 부여할 수 없는 신 념을 긍정 하
고 있다는 논리적 의존성 해운이다.
。1 두요점은 서로 밀접하게 판펀되어 있 다. 우리는 이것 을 어렌 부
정적인 형태로 진술해 볼 수 있을 것 이다. 즉 역사 얀의 예수 그러
스도는 모든 기독교적 합리주의자 들의 불가피한 테스트 케이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그의 나터-냥이 말씀이 육신을 이룬 것이 아니


고 하냐의 우연이었다면, 즉 만물의 궁극적 전형과 옥석의 나타남이
라기보다도 하나의 우말적안 사건이었다면 , 기독교 합리주의자들의 온
갖 추론은 오류〔誤露)로 화할 것이다. 그들은 어느 정도 이런 사실을
안정하고 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만일 그가 안간 역
사 안에서 그 역사의 의마에 대한 모는 약속파 지표(指標)를 성취한

116
제 3창 문화의 그려스도

이가 아니었다연, 그리고 그가 역사 안에서의 참 희망과 의의를 선정


하는 분이 아니라연, 이 합리주의자들의 추론은 오류이다. 그것은 사
리(事理〕에 맞지 않기 해문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신의 도
덕 률에 온전히 뷰종하였음에 도 불구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았마연, 만일 사랑과 순전한 복-종의 종국이 우능력 하고 우(無)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안간에 대한 도덕적 요청이라든지 이에 대한 인
간의 가능성이라든지가 이 사살 안에서 자취를 강추고 말 것이다. 이
러한 의미에서 적어도 문화석 기독교인은 이성의 생활에 온천허 흡수
필 수 없는 어떤 계시의 임재에 직면하게 되며 부분적으로라도 긍정
하지 않을수 없게 완마.
극단적 기독교안파 문화적 기독교안은 죄, 은혜와 율법 , 상위일체
의 견해에 있어서 서후 퉁한다. 원죄 사상, 즉 인류 전체에 미치고
있는 의미에서의 통전적 부패성이란 것은 두 그룹에 다 같이 생소하
다. 양펀에서 마 같이 최는 동물석 정욕파 사회적 제도의 두 가지에
서 기인 (超因)한마고 보는 것이다. 극단주의자들은 문화 전반〔全般)
을 야에 포함시킨다. 운화석 기독교안들은 죄악을 어떤 특-옐히 나쁜
제도들, 말하자연 우지(無知)하고 마신적안 종교, 모든 사랑을 이기
주의로 유혹하는 청쟁의 관습, 그러고 라우웬부쉬가 말하는 어떤
“ 초인간적안 악의 세력” 등에 국한시키려 한마. 하얘간 둘 다 인간성
안이l 죄 없는 어떤 영역을 설정하는 데 동의한다. 한펀에서는 거
룩한 공동체 안에, 다흔 한펀에서는 안격적 정신이라는 고차원적인
의의 보루(앓壘)에 이 란 영역이 있다고 본다. 영지〔靈智)를 얻는 순
간의 순수 이성 안에, 행위 이전의 순수 의도 안에, 사죄와 성결을
받은 개안적 종교 생활 안에 또는기도를통해 인간은 죄의 세계를 초

월한마고 말한다. 그리고 이란 묵상 중에 안간은 자기의 본성과 자기


사회 안에 있는 악을 정복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만일 우리가 죄 없노라 하면 자기를 속야는 것야니라” 한 요한의
경고가 들려옴을 느끼게 펀다. 칸트도 안간의 의향을 부패케 하는 근
본악을 간파하였 A며, 오토CRudolf Otto)는 거룩한 하냐닝 앞에 대변
할 해 안간 이성은 부정감〔不햄感〕에서 파조적 의식을 갖는마고 하였
다. 문화적 기독교안으로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또한 그의
동료 신자들과 동일한 결론을 얻게 될 것이마. 즉, 안간의 도먹적,

117
종교적 엽적까지도 거의 존중하지 않으며, 이 세상을 고통에서 구출
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위한 어떤 지레점을 인간이 딸견하리라는 것을
벨로 믿 지 않는 신자들의 업 장을 짜르게 된다.
극단주의 자들과 같이 문화의 그리 스도 신자들도 율법 파 은혜 의
양극성을 논할 때 율법 펀으로 기울어진마. 안간은 하나넙파(사변
석, 살천적) 이 성의 법 칙에 순종함으로써 진리 해득자와 천국 시만
A로서 의 높은 운영을 성취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한마. 하나닝
의 은총 행위는 안간들의 게획에 대한 보조에 불과하다. 어떤 경 우에
는 하나닝파 그의 사죄와, 감사의 기도까지도 어떤 안 간적 목적을 위
한 방펀으로 보이 게 된 마. 안간이 자연에 대 하여 신석 (神的)인 종주
권〔宗主橋)을 주장하기 위하애는 하나닝 의 은혜를 믿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 다. 문화적 기독교는 척어도 현대에 있어서는 언제나 극단으
로 자기 신뢰에 기울어지는 휴우머니즘적 운동을 만들에 낸마 . 그들
은 은혜 의 교리, 특허 은혜에 의지하라는 교리를 싫어한다. 그것은
그 교리가 인간의 의의를 강소시키며 안간의 의지 를 약화하기 해문이
라는 것 야 다 . 그려 나 그와 만배 방향에 있는 운동틀도 얀플어 낸다 . 이

사섣 에서 우러냐는 이 운동 자체가 옐마나 역설적인 것을 말하고 있


다. 우리는 “두렵고 옐라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여야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열하시는 이는 하나닝이시키 혜문이다 율볍
파 은혜의 관계를 말하는 신학이 티1 합리적이라는 데 래하석 합리주의
자들이 아무리 용캄하게 공격한마 할지라도 그들도 결국은 하냐닝 냐
라는 선블이며 동시에 책임이라는 겸손한 고백으로 폴아가지 않을 수
없게 펀다. 그러하여 옛날의 문제를 되풀이할 뿐이다.
끝으로, 우리는 둔화의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해석하려고 노렉하
는 사람들이 어 떻게 상위일체 문제를 논하고 있는 가를 지척하지 않을
수 없다. 극단적 키독교안들은 적어도 현대에 있에서 상위일체론은
기독교 안들이 자커들의 받는 것을 이해하려는 데서 생겼 다는 것보다
도 기독교 신앙 안에 문화의 철학올 도입한 결과로 생긴 것 이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철학에 몰두하는 기독교 인들도 그 공식을 좋아하
지 않는다. 영지주의자들은 상위보다도 더 많은 수를 요구하였고, 자
유주의자들은 더 적은 수를 요구하였다. 이 노선을 따르는 사랑들은
다 예수를 안간 안에서 일하는 내재석 , 신적 (페l的) 정신 (spirit) 과 일 치

118
제 3장 운화의 그려스로

시 키 려 한다. 그러 냐 문제는 이 내 재척 , 합리 적 , 정 신적 , 도덕 적 인 원
리가 자연과 그 자연을 산출하고 지배하는 능력 둥과 어떤 판계를 가
지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복잡한 사변에 의하여
이것을 해영하려 하연마. 그러나 현대인은 자연즈ζ호부터 하나님께로
추리해 가는 옹갖 논증을 거부하고 결국에 가서는 하냐넘이 깜무로
계시냐고 하는 얀타까운 문제를 일£키고 말았다. 그러고 안간의 종
교적, 도덕적 가치 판단들이 또한 존재 여부에 대한 판단이기도 한
가를 질운하게 되었다. 그는 운화석, 윤리적 생활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지진과 불 속에 냐타난 능력과 조용히, 작은
목소리로 안간의 마음속에 속삭이듯 말하는 그분 사이에는 어떤 일
치점이 있는 것인가, 안간이 자연에 직면할 때 그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자는 무자비하고 맹목적인 힘안지 ,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인지를 쿠명하는 문제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전능한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궁극에는 운화를 보존하려는 사랑들의 사변석안
문제가 아니라 아주 근본적인 문제안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종말론
적 1'1 전, 즉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무자비하고 캄캄한 멸망의 운영이
자기의 이상적 세계 위에서 임박해 있음을 보았을 때만 일어냐는 문제
가 아니 다. 안간의 과학과 그의 건축은 자연의 주어 진 질서 에 순응하
지 않는 경우에는 도저히 설 수 없마는 사살을 말견할 때에도 알어냐
는 운제이다. 그리하여 운화적 기독교의 정신주의와 이상주의는 자
연주의의 도전을 받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이 도전에서 “하
나님은 영이시다” 라고 말하는 것은 다만 3분의 1의 진리만을 주장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다른 문제도 생겨난
다. 즉 역사적 제 사건들이 운영 안에 냐타난 내재적 정신(영)들은
그러스도의 영파 모순되기도 한다는 점을 드러낼 때 얼어난마. 이리
하여 예수가 문화의 그러스도라는 점을 정직하게 고백하려연 이보다
도 훨씬 그 이상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다소간 영
백해지는 것이다.

119
제 4 장

문화 위에 있는 그러스도

1. 중립적 교회

어떤 분야에서든지 무엇을 분석하혀 할 때 빠지기 쉬운 유흑은, 안


간이나 사물이나 운동을 꼭 두 갈래로 구분하려는 버릇이다. 공정하
게 나눈다는 것은 이동분을 의마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 사물은 정
신적인 것이 아니연 물리적안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석안
것은 합리적안 것이 아니면 바 합리적인 것이다. 그러고 물 리걱안 것
은 물질 혹은 운통앨 것이다. 그러 므로 우리카 그리 스도를 이해하려
할 때에도, 신도를 “한 번 난” 사랑파 “거듭 난” 사람의 두 가지로 냐
눈다. 기독교 공동체는 교회와 종파로 나건다. 이러한 지성 의 기호
〔쩔好)는 원초적이고 어쩔 수 없는완강한 경향안 ‘내 펀’ ‘너] 펀’, ‘우
리’ ‘남’ 등의 양분 개녕에서 유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원안이야
어떻든 간에 그 결과는 명백하다. 즉 이렇게 이둥분하는 버릇 때문에,
우리는 굉장히 많은 수의 흔성 분자를 제외시키는 것이다. 백파 흑의
구분우료 시작할 때 그 권외로 버림받은 대다수는 회색당 (友色黨)이라
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를 교회와 종파로 나눌 혜 그 대부분은 혼합체
임을발견할것이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운제를논하는데 있어서도 동
얼하다. 만일 그리스도와문화란 것이 기독교안이 판성하는 두 원리라
면 대부분의 기독교안이은 아마도 타협을 지향하는 사랍들일 것이다.
말하자연 그들은 문화를 배격하고 그리스도에게 배타적인 헌신을 결
챙(決行)하는 업장파 문화에 충성하면서 그 안에 그리스도를 포항시키
는 입강을어떤 불합리한 방식으로 혼합시키는사람들알 것이다. 그들
은 요한 1서와 영지 주의자, 베너l 믹트와 아벨라르드, 툴스로이와 리출

12 0
제 4창 문화 위에 였 는 그리스도

사。1 에서 여러 가치의 변천윤 냐타내는 사랑을로 보일 것이다.


기 독교 운동의 최 대 다수, 즉 여 기 서 말하는 중랩 적 교회 (the church
of the centre)는 반문화척 극단주의 자와 문화에 그리 스도를 적 응시 키
려는 문화주의자와의 쌍방을 마 거부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노
력이란 것이 옐마나 최악석안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러스도와 문화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덮

어놓고 타협으로 간주한것은아니었다. 이들에게 근본적인 문제는 그


리스도와 세상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론 이것도 중요한 문제이
나, 하나넙파 인간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
도 이러한 판첨에서, 이 러 한 신념으로 다루어 진다. 그러므로 중랩적
교회 얀에도 각기 다른 그룹이 수다하였으나, 사희 생활 속에서의 그
들의 책임에 대하여 질문 을 받을 혜 그들은 몇 가지 점에서 인 치하고

있다. 그 일치점은 신학적 용어로 형성 되 었으며 , 그러한 신조를 기독


교안의 생활의 살제 문제에 적응시키려 할 때에는, 극단적인 비판가
들이나 무비판적 맹종자에게는 다 같이 불분명한 느낌을 주는 일 이
많다. 그 러나 이것은 상대성 원리냐 양자설〔陽子說)이 말영풍, 의학
계, 성지어 는 정치계 에까지 미천 영향파 마찬가지로 그 영향력이 컸
다. 수만 명이 그 영향을 받고는 있지만 그 학설을 이해하는 사랑은
거의 없다. 중링적 교회가 문화 운제를 마루는 데 있어서 그 신념을
진술한 신학적 조항의 하나는, 곧 예수 그러스도는 천지를 창조하신

천능하신 하냐닝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이마. 이들은 이 조항파 더


불어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토론 속에 모든 문화의 근거가 되는 자
연의 개 념을 도입한다. 그런데 이1 자연은 선한 것이요, 하나닝께서
올바로 정돈하신 것이며, 여1 수 그리스도는 이 하나닝에게 복종하셨고
또 이 하나닝과 분리할 수 없도록 연합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 신
념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그리스도와 세상이 단순히 서로 대립되어 있
을 수는 없다. 그러고 문화로서의 “세상”은 하냐닙 없는 영역이라고
만 볼 수도 없 다. 즉, 문화란 적어도 자연 A로서의 “세상” 위에 건설
펀 것이기 때운에 자연의 창조주요 통치자이신 이에 의하여 긍정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기 혜문이다.
모든 중립적 그흉 사이에 서로 일치 된 또 하나의 신녕이 있다. 즉
인간은 그 본성£로 볼 에 하나닝에게 복종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121
점 이 다-이 하나닝은 전능하신 창조주에 게 서 분리 된 그러 스도도 아니
요, 예수 그러스도에게서 분리펀 자연의 창조주도 아니다. 그들이 의
미하는 하냐넙은 ‘그리스도 얀에 있는 하나닝,’ ‘하나닝 안에 있는
그리스도’이마- 그리고 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복종은 자연적 문
화적 인간의 구체적 현실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마는 점이마. 그
의 성(性) 생활, 먹고 마시는 것, 다안을 명령하고 복종하고 하는 판
계는 하냐닝의 명령 아래에서, 하나님의 마스림을 받고 있는 하나님
의 영역안 것이마. 인간의 활동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인간의 지성과
의지 릎 사용하지 않은 채, 순순히 본능적인 차원에서 일어날 수 없 A
매, 또한 인간은 필연의 세계에 살연서도 자유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

피조물인 때문에, 문화란 그 자체가 하나닝의 요청의 하나이다. 하나


닝의 지으신 바요, 또 명하신 바안 안간은 자기에게 주어 지지 않은
것은 자기 힘으로 성취해 나가야 한마. 즉, 하나닝에게 복종함」즈로
써 많은 가치 를 추쿠해야 할 것이다. 중립적 교회 안에는 금욕주의의
멈위에 대하석 그 확신하고 있는 바가 마양하지 만, 그럼에도 불쿠하
고 금욕주의 는 문화적 생활의 여 러 분야와 보조를 맞추어 야 한다는
점에서 견해가 일 치한마.

이러한 교회의 특정이라고 볼 수 있는 주요 운동의 또 하나는 죄의


보펀성파 근본성에 대한 어떤 신념의 합치이다. 우리가 이상에서 논한
바와 같이, 극단적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거룩한 공동체 릎 죄의 지배
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 만연에 문화적 기독교안은 죄가
인간 인걱의 싱연에까지 도달한다는 것을 부안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심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인칸이 자기 자신 안에서
는 개인적으로 보나 공동체적으로 보거냐, 거룩함을 발견할 수 없다
는 신념을 가지고 있마. 이 점에 있어서는 그들의 합치점을 말하기 곤
란하다. 카툴럭파 프로테스단트, 토마스주의자들파 루터파 둥이 이
문제를 중심으로 서로 끝없는 변론을 계속하고 있기 때운이다. 피차
오해하는 점도 물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성례전을 거행하는 것, 은
혜로 속량받으려는 희망을 가지는 것, 문화적 제도에 대한 태도가 같

마는 점은 죄의 보펀성과 근본성에 대한 그들의 신념에 근본적인 알


치를 보여 주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말로 표현될 때, 그 설영은 서
로 화해하기가 다소 어렵다는 점뿐이다.

1 22
제 4장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어느 펀으로나 극단적인 위치를 배격하는 이 신자들은 은혜와 율법


에 대하얘도 공통된 신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어느모로 보든지 율
법주의자로 자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 역시 마른 점이 있다.
그러하여 프로테스 탄트는 카툴 을 향하여 “행위 로 의롭게 되려는”자
들이 라고 비 난한다 . 그 반면에, 카톨릭은 현대 프로테스단트에 대하
여 좋은 사회 공학 (good social enge neering)의 도움S로 자기 들이 하

나님 나라를 건섣할 수 있마고 생각하는 독자석안 사람들이라고 말한

다. 그러나 이런 논란은 서로가 아벨라르드와 리출에 대한 비난에 불


파하다. 이들의 중립적 입장 속에는 더 큰 일치점이 있는 것이마. 토
마스와 루터는, 영지주의냐 또는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 운동을 위주
하는 현대주의자들에게보다 훨씬 더 은혀1 란 주제에 가강마. 중립적
기독교안들은 은혜의 우위성파 복종하는 챙위의 펄요성에 대하여 아

공히 안정하고 있마. 다만 언제나 선챙석안 하나님의 사랑과 안간의


형제 애 와의 판계를 분석하는 데에 다양한 설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인간의 문화석 활동을 하나닝의 은혜에서 분리시키지 뭇한다.
그것은 그플이 하는 모든 얼이 은혜로써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기 때
문이다. 동시에 그들은은혜의 경험을 문화활동에서 분러시키지도옷
한다. 인간 사회에 있어서 보이는 형제에게 봉사하지 않는 자가 어떻
케 보이지 않는 하냐닝의 사랑에 응담하여 그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는 때문이다.

이런 공통펀 특칭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적 기독교인들


은 그러 스도와 문화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 어서 통일펀 한 그룹을 이
루치 옷하고 있다. 거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구분된 부류가 있마. 그
리고 그들 각자는 어 떤 특수한 경우 또는 어떤 특수한 과제에 판하여
는, 그들 교회 얀의 마른 운동들보다도 어떤 과격한 파와 더 친밀히
합류하는 일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셋을 종탑론자 , 이원론
자, 개변 주의자 (con versionists) 라고 이릅해 왔마. 이제 우리는 이 각
파의 천형적안 대표자를 검토함A로써 이 용어들의 의미를 영시하기

로 한다. 이 일을 꾀함에 있 어 서 우리는 마시 한 번 풍부한 다양성 파


색다른 개성을 가진 역사적 인물들을 어떤 가설적안 플에 맞추어 넣
으려는 위험을 염할 우려가 있 다는 점에 영심해야 할 것 이다. 이 안
물들 이 우리가 만든 규격 속에 양전히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다

123
툴라안, 아벨라르드, 툴스토이, 리층 등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의 단순화 작엽은 그들의 가장 뚜렷한 특정과 주도적 동
기들을 지적하는 데 공헨하는 바 있을 것이다.

2. 그리스도와 문화의 종합

기독교안이 그러스도와 운화의 문제를 다루는 경우에 있어서, 언제


든지 그 중의 어떤 사랑들은 그러스도와 문화가 “이것이냐 저것이냐”
의 판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의 판계에 있는 것이라
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문화적 기독교안들의 본을 짜라시 그
리스도와 문화를 함께 긍정하려는 태도를 취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연 그들 문화주의자들은 신약성서의 기록으로서는 정당화한 수
없는 어떤 마른 빙엠을 등하여 그러스도의 본성을 단순화함으로써 예
수의 정신과 현챙 사조(思湖)와의 화해 를 성립시컸기 애문이마. 영지
주의자들 은 이 보이는 세계는 어느 정도 비실재요 환상적인 것」즈로 여
겼기 때문에 그러스도블 온전히 타계척안 존재로 삼으려 하였?며; 현
대주의자들 은 σn 수를 온전히 현 사회에 적응시키려 했기 해문에, 눈
으로 일찍 부 지 못하였고 귀로 일찍 듣지 못하였던 새 것이라는 요소
블 제외하고, 샤상이냐 행동에 있어서 예수릎 온전히 이 세상 사람:
로얀 그리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합주의자는 그리스도와 운화를
둘 다 긍정함으로써 그러스도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 함께 주가 되신
다고 고백한다 . 시대 사조에 그러스도를 일치시키려는 사람들은 사람
을 신화하든지 하나닝 을 안간화하든지 하여 하냐닝 과 사람의 구분선
을 제거한다. 그러하얘 예수 그러스도를 하나닝으로 예배하기도 하고
사람A로 예 배 하기 도 한다. 종합주의 자들은 하나님 과 사람 사이 의 구
분션을 명 백 하게 보존한마. 그러 함으후써 주 예수는 하나닝 이 변서 사
랑이어서 한 안격 안어l 두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ó1 두 본성은 서
로 혼동되지도 않는다는 역설적안 신념을 고백한다. 문화적 기독교안
들이 복음을 시대 정신과 화해시키는 방법은 복음이 존재에 대한 사
변적 진리 또는 가치의 실제적 지식을 계시했마는 데 있마. 그러냐진
정한 종합주의자는 쉽게 가치 를 존재에 종속시키지도 않으먹 가치에

124
제 4 장 운화 위에 있논 그리스도

존재 를 종속시 키 지도 않는다. 그는 예 수 그러 스도가 말씀 CLogos) 이 면


서 동시에 주닝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러스도와 문화를 함
께 긍정할 경우에 그들 의 충성을 요구하는 그러 스도는 그 성격 에 있
어서 안이한 화해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연서 그러하는 것이다 . 그들
이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그와 비슷한 우엇이 있마 . 즉 문화
는 그 기원 (起源)에 있 어서 신척 이면서 동시 에 인간적이며, 거룩하연
서도 범죄적이며, 펄연 파 자 유를 함께 가진 영역이며, 이성파 계시가
함께 적용되는 장소이다. 종창주의 자 는 그러스도의 의미를 이 해함에

있 어서는 운화석 신자와는 구옐되며, 동시 에 운화를 평가함에 있어서


는 극단주의자와 갈라지 는 것이다 .

종합주의자의 견지에서 불 해 그러스도외- 문화 사이에는 간격 (gap)


이 있오며 , 조화를 지향하는 기독교는 이 간격올 충분히 진지하게 다
루지 옷하였고 극단주의자들은 당초부터 극복할 의도조 차 가지고 있
지 않았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지시한 저 세상적 쿠원의 목표는,
현대 주의자들 이 영혼불멸이나 인격적 종교라는 것을 통하여 이 목표
의 찾기 어려운 몇 가지 요소를 처리하듯 0 ], 복음이 라는 오라토리오 속
에서 거기에 붙어 있는 몇 가지 장식음(裝節音)에 의하여 찾아질 수 있
는 것 은 아니 다. 즉, 그것은 주요한 주선율이마. 그러고 핸재 의 행동
에 대한 하나닝의 요청은 즉 사회 생활의 위기와 인간끼리의 정망하
고 바른 판계의 수럽에 판련판, 박하(해혜)와 회향의 11 조를 비치 는
것 파 마찬가지로, 해야 할 어떤 일로취급필 수는 없 다. 모든 것을 팔
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 는 냐를 짜 르라, 다른 사랑을 >11 펑 하지 말
라, 왼 뺨을 치거둔 오른뺨까지 돌려대라, 자기 를 낮추어 모든 사랑의
종야 되라, 가족올 버리바, 내일 알 을 염려하지 말라 등의 그러스도
의 영령 을 운 영 사회 의 살생 활 요건에 맞추어 보려는 의도에서 계영
을 비유로 생각한마든지, 장차 이상국이 될 해에 가능하든지 , 개인
적 성 격과 선의에 돌런 다든지 하는 것은 종합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용납될 수 없 다. 그 계영들은 너 무 나 분영하마. 그러나 하나닝이 창
조주이시으로, 안간의 본성에 주어진 요구에 응할 책임은 무시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그 명령을 이해하는 안간의 자유 의 지도 무시 될
수 없다. 인간은 자녀를 가진다. 그것 은 이성만A로는 성적 충동을
억제할 수 없기 에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목적 을 위 해서 도

1 25
지어져 있기 채문에 그련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푸정하지 않는 한,
운화 이천의 자연석 요구에 불응한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간
은 생활로 그것을 긍정한마. 안간은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
다. 二l것은 그가 사회석, 지적 , 그리고 자유하게 지어져 있기 때문

이다. 그는 어떤 그룹의 한 사람£로 되지 않을 수 없 다. 그러나 그


는 캐미 굴에 있는 한 마리 개미라 든지 수정(水品) 속의 한 분자와
같은 것은 아니다. 예수 그러스도의 법 이외에 또 다른 법들이 있다.
그것도 영령석이며 또한 하냐님께로부터 난 것이마 . 이 이 원성을 논

함에 있어서, 문화석 기독교나 극단주의 자들의 취하는 길은 그러스도

와 문화 두 펀을 마 함께 진지하게 마루지 뭇한 바가 있다. 예냐하면


그들은 그러스도의 성실성에도 , 창조주의 불변성 에 도 공정을 기하지
뭇했기 때운이다. 어느 한펀에서 실패하면 다른 한펀도 거기 포함되
기 해문이다. 우리는 “그러 스도냐 문화냐 ” 물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말할 수 없마. 그것은 둘 마 하나닝과판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사
이에 아무 큰 쿠벨이 없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운화”플
말할 수도 없마 . 우리 가 “그리 스도와 더 불어 문화”를 함께 긍정 한다
할지라도 우리 의 번파 목적파 상황의 모든 성 질 애 는 뚜렷한 이원성
이 있음을 충분히 주의 하연서 말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진솔한 것은 중립석 기독교안의 신앙의 다른 얘러 유형
의 종합주의자 사이에 대부분의 합치를 보고 있는 점이다 . 그러냐
기독교 인 의 생촬의 이원성을 분석하며 그 명백하게 다른 요소들을
한 통일된 사상과 행동 쿠조 안에 결합하 려 할 경우에, 종합주의자
와 기타 유형의 차이점 이 생겨냐는 것이다 . 01 유형의 약간의 살례
를 옮으로써 그 방법을 어느 정도 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싣례는
여 러 시대, 여러 그룹에서 들 수 있을 것이마. 초대 교회, 중세 와 현
대, 로마 카툴릭파 영국 카롤럭 , 그러고 다른 데 비하연 덜 분명하지
만 프로테스단트에서도 들 수 있을 것 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종합주
의자의 견해를 영백히 표시한 기록이 말견되지 않는마. 그러나 본
문 (text)을 파꾀 하지 않은 채 , 01 종합주의 입 장으로 해 석 될 수 있
는 주제 (motif)는 많이 진술되어 있마. 그 중에 몇 개를 든다연, “내
가 율엽파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알지 말라. 펴l 하 러 온 것이 아니
라 완전케 하러 왔노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천지는 없

126
제 4장 운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에 칠지 연정 율맹은 일정알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


로 누주든지 이 계명 중에 치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
이 카르치는자는 천국에서도 지극허 작다 이르리라"1 “가이사의 것은
가야사에게 돌리고 하냐남의 것은 하나념에게 폴리라 "2 “각 사랑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 권세는 하 나넘 께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


나니 모든 권세는 마 하나닝이 명하신 바라 권세는 하나닝의 일
이니라 "3

특히 계시 와 철학적 지혜의 운제 에 판한 종합주의적 해 닦의 시안적


노력은, 2세기의 변 증학자들, 그 중에서도 순교자 저스틴 CJustin Ma-
rtyr)에게서 볼수 있마 . 그러고 터툴리안의 동시애인안 알렉산드 러아
의 클레엔트가 이 유행〔類型)의 가장 위대한 대 표자이다. 예수의 날차
로운 영령파 그것 을 운화적무로 이해하는 자연의 주 장을 그가 조화시
키 려 한 기 록은 그의 작은 단행 본, ‘구원 받을 부자’ ( Who is the Rich
Man That Shall be Saνed)에 나타냐 있 다. 그러 고 더 자세 하게 는 그의
‘교훈자’ (Instrμctor) 와 ‘잡록’ ( The Miscellanies) 에 기 록 되 어 있 다. 그
는 부〔훔)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 에서 부자에 대한 그리 스도의 영령
과 가난한 자에 대한 그의 약속을 교회에 서 문자 그대로 사용함으로
써 부자로 하여금 구원의 희망을 완전히 상살하게 할까 염려했던 것
이마. 그러므로 그 렌 영령에 대한 정신적 의마 블 이 해하도록 해야 하
며 , 소유물 에 의 지하지 말라는 스로아 학파의 태 도와 감사함즈니료 자
선을 버1 풀라는 기 독교의 덕챙 을 가르쳐서, 부자로 하여금 그의 부유
함 중에서 훈련파 육성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가난
한 자, 천국을 상속할 온유한 자가 주께 축복받은 자요, 부유하게 살
지 못하는 자가 축복받는 자안 것은 아니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4 여
기 까지 는, 클레 벤트와 운화적 기 독교 안은 합치 띈다. 그러 나 그는 여
기에 스토아화된 기독교 또는 기독교화된 스토아 철학을 새로 첨가시
켰다. 복음을 부자의 요구에 적응시킨 이 정중한 태도를 훨씬 념어서
서 그는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주닝의 사랑에 응답해야 할 영백한 기

1. 마 5:17-19; cf. 23:2.


2 마 22:21
3. 홈 13 : 1, 6.
4. Who is the Rich Man That Shall be Saved, xvi (Aηte-Niceηe Fathers ,
Vo l. 0.

127
독교인의 소영을 제시하고 있다 . “우리 모든 자의 목숨파 맛 먹는 그
의 옥숭을 우리 하나하나블 위하여 주셨 다. 그 러므로 그는 우리도 또
한 서로 냥을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주라고 명령하신다. 만 일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형제에게 벚쳤다면, 그리고 주닝 무로 더불어 그렌 계약

을 맺었다연, 너켈하고 서투르고 덧없는 세상 재 물들을 그렇게 모아


놓고 인색 하게 굴 까닭이 무엇인가? "5 기독교안의 경제 행위를 지도
하는 두 가지 동 기가 있으며, 갱 제적 사회 안에는 두 생활의 단계가
있음을 봉 수 있다 . 스토 아적 초연성 (detachment) 파 기독교적 사랑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전혀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 둘이 서 로 모순되는 챙동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른 행
동A로 안도하는 것이다. 재산올 가지고 있으연서도 재산에 배이지
않는 사란파 재산올 천허 가지 지 않는 사람은 꼭같은 것이 아니다.
이 둘이 서로 불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 쿠원으로 향하는 걸에서의 두
쿠별된 단계 를 보여 주는 것 이다. 자기 수양 (修養)의 방법으로 구원을
추구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쿠원 행동에 응답하는 것은 동일한 인간
행위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둘이 온전히 상반되는 것도 아니다.

클레벤트는 그의 저서 ‘교훈자’에서 기독교안의 훈련 에 판하여 말


하고 있 다. 그에 의하연, 주께서는 친절 하고 지헤로운 교사여서 그에
게 맡겨 진 영혼들을 향상시켜 유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을 옥척하고 있 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목적하신 바가 교육이라는
위대한 문화 사엽이었을 뿐 아니라, 그 훈련의 성질 에 있어서도 기원
A. D. 200 1션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도덕적£로 진지하고 지혜 로운 어느
이교〔異敎) 교사가 그 제자들에게 했으리라고 생각되 는 것과 별로 다
를 것이 없다고 클레벤트는 말하였 다 6 진실로 기독교 윤리의 첫 교
수인 이 클레 엔트는 그의 살제적 교훈의 진리 를 보증해 주는 자로서
플라론, 아리 스로텔례 스, 제노CZeno) , 그러고 아리스토파네스와 메난
더 (Menander)에 이르기까지를 얀싱하고 인용할 수 있는 사 랑이었 다.
예수 그러스도는 말씀 공 하나닝의 이성이다. 그러므로 실 제 적 사건
들에 대한 그러스도의 추론 (reasoning)은 모든 선하고 건전한 추론과
같다고 클레엔트는 말하였다. 이란 의마에서 기독교 융리와 ‘교훈자’

5. Ibid. , xxxvii.
6. C f. H.O. Lietzmann , The Foundjηg of the Church Uniνersal, chap. xiii.

128
제 4창 문화 위에 있는 그려스도

의 언행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스토아파의 도덕 교본과 그 내용이 거


의 같은 것이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화장하는 것, 신 신는 것,
공동 욕탕,성 판계, 연회석상 등에 관한 기독교 윤리카 자세하게 갱
토되었다. 걷는 자세, 자는 자세, 축복받는 자로서 마땅한 웃음법 둥
이 매우 근엄하게 기록되었다. 어려 가지 예뱅 가운데서 몇 가지 만
참고로 인용한다면 이런 것이 있다. 우리가 음식 먹을 해에는 “손과
의 자와 턱을 더 렵 혀 서 는 안 된다 “음식 을 먹 을 해 에 는 말을 하지 말
라. 업 안에 가득 물고서 말하면, 그 음성이 듣기 싫 고 제대로 나오

지 않기 때문이마 “마살 혜에는 옐굴을 찌푸리지 말라 또 마


시기 전에 눈을 보기 흉 하게 굴러지 말라 “주께서 우리를 위하
여 인간이 되셨을 해 어떤 모양으로 마셨겠는가를 생각하는가? 여1 젤
있고 점잖게 하지 않았겠는가? 신중하게 하지 않았겠는가? 그 외에
도 그자신이 포도주를마신 것은 확살하다 "7 이렇게 클레벤트는그의
고상한 규율과 근살한 행동을 예수 그러스도의 말씀이냐 모뱀에 결부
시키려고 늘 애썼다 . 그러나 그 판계는 벤벤이 억지로 한 듯한 느낌이
았으며, 흔히는 쿠약성서 전체를 하냐님의 로고스안 그러스도에게 귀

속시킴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였다. 얼마 안 되는 펙파 생선으로

5천명을 먹였다는 것을 간소한 식사를 더 좋아했다는 교훈으로 적용


하였다. 수염을 깎아서는 얀 된다는 것을 말할 빼, 그는 이것이 자연
을 거스르는 것이 될 뿐 아니라, 하냐념께서 “너희 머리칼 하나하나
를 마 세 고 계시다”는 예수닝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라고 하였
다. 턱수 염의 수효도 온 몽의 수효도 알고 계시으로, 하나님께서 그
의 뭇을 짜라 헤아려 놓A신 것을, 하나닝의 돗을 거역하고 사랑이
마음대 로 뽑올 수는 없는 것이다 8 이런 종류의 수많은 세칙들은 그

당시 사 렘- 들에게는 물론 우리에게는 더욱 유치해 보일 것이다. 그러


나 클레멘트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절제와 검약〔險約), 자제 등무
로 기독교안 을 훈렌하는 데 판성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좋은 운화에
서 볼 수 있는 선하고 건전한 모든 것, 양속〔良{tì-)을 깨뜨리는 음란
을 피하는 것 둥은 기독교안에게 요청되는 근본적 명령 A로 되어 있
다. 가령 기독교가 어떤 이미에서 문화와 대립된다 할지라도, 판습을

7. Op. cit. , Book n, chaps. 1 , n ( Ante.Nicene Fathers, Vol. n).


8. Ibid. , Book m, chap. iii.
129
경멸하는 개안적 캉청에서 생 71 는 반문화 운동 같은 것파는 아무 상
관도 없다는 것을 클레벤트는 분영허 알고 있다. 안식일을 맴하는 경
우에 있어서도, 안식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염하는 사람과 그 계영
을 충분히 알연서 엄한 사랑을 혼동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또는 십
자가에 옷박한 강도와 십 자가에 옷박한 그러 스도를 마 갚이 국가의
희생붙이라고 해서 같은 것£로 여기는 일은 하지 않는다. 기독교안
도 온갖 일상적 안 유혹에 희생될 수 있마는 것을 클레멘트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챔착하고, 단정하고, 존경항 만한 생활의 윤리가 곧
기독교 윤리라는 그의 판성은, 안이한 땅법으로 제자 노릇하기를 원
하는 사람들의 판성과는 미교도 얀 될 만픔 거리가 먼 것이다 . 그는
문화안들에게 그러스도를 소개한 의무 같은 데는 전혀 판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마만 미숙한 사랑 들을 지혜롬게 훈련하려는 데 전심한

것뿐이었다. “사랑이 고귀하고 선하게 되는 것은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배움£로써 되는 것이 기 때문이다 "9 그의 모벙 안물은
그리스도, 위대한 목자이다. 클레엔트의 이 모든 신중한 도덕적 교훈
은 주닝을 사랑하고 내 양을 치 라고 히신 그러스도의 계명을 들은
자로서의 노작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옷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클레멘
트를 오해하고 만다.

클레멘트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안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선한 문


화의 표준에 맞는 선한 사람이어야 한마는 것이다. 개인적 행위의 근
실성에는 갱제척 거래에서의 정직파 정치적 권위에의 복종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인의 생활의 전체 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
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 (church-goer)의 존경찰 만한 도덕 생활 그 이
상의 존재의 단계가 있마. 그러스도께서는 냉정한 현자( 賢者)의 도
덕성보다도 더 위대한 완전을 얻게 하고 실현하게 하라고 사람들을
초청하신다. 그것은 하냐닝을 사랑하되 보수를 바라거나 형벌을 두려
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닝 자신얀을 위하여 사랑하는 생
활, 하나닝의 사랑에 응답하여 이웃이냐 원수를 섭기는 자말적안 션
의 생활, 율법을 초월한자유의 생활 등이다 . 10 이런 종류의 생활은 이

9. The Miscellaηies, Book r, chap. vi.


10. The Miscellanies , 특히 Book N , chaps. xxi-xxvi; Book V, i-iii ; Boo k
W, x - xi v 에 있는 참 영지자의 생 :헬 기록을 읽으라.

130
제 4장 운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세장에 속한 생활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살현할 희망과 그


현실성의 예견〔據見)은 현재 생활을 충족케 하고 있다. 목사와 저술기
로서의 클레멘트의 모든 노작은 확살히 이 목적을 지헝'C指向)하고 있었
다. 즉 사랑들로 하여금 그가 믿 는 하냐닝을 아는 충분한 지식을 얻
케 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행동을 충분히 실현하게 하려는 것이
다. 그가믿는 그리스도는문화에 대립하는 이가 아니다. 다만 사람틀
이 자기 노력으로도 성취할 수 없는 것을 그러스도가 그의 역사〔投 事)
로 。1 루게 해 주시며, 문화의 가장 좋은 산물을 이 일의 도 구로 사용
하는 분이시다. 를-레멘트는 기독교안에게 자기 수 양파 지적 훈련에 정
진하기 른 켠연한다. 그리하얘 결국에 가서는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문화냐 그들의 지혜에 대하여 스스로 염려할 펄요가 없는 생 활 에 이
르도록 준비하게 하려는 것이였다. 클레벤프의 그리스도는 문화의 그
리스도임파 동시에 모든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이다.
클레멘 트로 말미앙아, 01 세상 생활의 요청파 신약성서의 종합이
윤리변에서 뿐 아니라, 철학과 신앙의 관련에서도 성취되였다. 그는
그 당시의 사변적 체계에 예수를 전적으로 조화시키려는 해석을 추
구하지도 않았£며, 그렇다고 헬라 철학은 세상 지혜라고 배 격 하는
일도 하지 않 았다. 헬라 철학은 오히려 “진리의 영철한 이미지” 이어
서 하나넘이 헬라 사람들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히
브리 안을 그리 스도에 게 인도한 율 법 파 같이 ‘헬 라언을’ 그리 스도에 게 ’
이끌어 온 선생이었다 "11 클례엔트가 철학뿐 아니라 그 이외의 다른
문화 즉 예 술 , 정치, 경제 등에 있어서도 그의 이념을 발천시켰더라
면, 그는 그 분 야에서도 동엘한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하나넘께서는
“문화를 사 용하라고 권하신다. 그러 나 우리 로 하여 금 세 속 문화 얀에
서 배회하며 거기서 시간을 허비하케 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변
하나닝께서 각 세대에게 유익하도록 적당한 시기에 문화를 주신 것은
주닝의 말씀을 위하여 마리 훈련시키려는 의도에서 하신 것이기 혜문
이다 "12

클레벤 트 가 문화에의 존중파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결부시키려 한


때는, 아직 도 교회 가 불법 단체로 취급받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그의

11. lbid. , Book 1 , ii , v; cf. \'1 , Vll-V 1ll.


12. Ibid. , Book 1 , v.

131
" 1 러한 태도는 위내한 사회 제도의 유지와 개선을 위한 의무감에서라
기보다, 건전한 도먹파 학문을 지속하려는 교회의 책임강에서 취해진
것이다. 이것은 문화를 기독교화하려는 것보다도 기독교안을 문화적
으로 만들려는 데 더 밟은 관심을 표시하고 았다. 기독교 역사상의
최대의 종합주의자라고 생 각할 수 있는 토마스 아퀴 나스 (Thomas
Aquinas) 는 기독교의 모든 위대한 제도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선
적으로 수락했고 또 성취했다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의 대표자일 것
。1 다 . 부분적 £로는 로마 카툴릭 교회 가 그에 게 전적 무로 찬동했기

해문이 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의 사상적 체계의 지적, 실제석 타단


성, 폼 그러스도와 문화 문제를 위한 해결 방뱀이 많은 기독교인둘의
표준적 방뱀이 되었기 해문이였다. 리출주의적안 해답을 포기한 많은
기 독교안들이 로마 교회 에 전적 (i펙箱)하는 일은 거 부 하면서 도 토마스
주의에는 찬동하는 이유가 여기 았다. 한펀 영국 교회 안에서는 사상
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토마스의 체계는 규범적인 것으
로 수락되고 있다. 기독교인 카운데에,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가 어
떤 구획선을 정할 때 그 선이 대 교파들의 역사적 구분파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도 그러 스도와 문화의 문제 에 대 하얘 “둘 다” 긍정 한마는 식


의 해탑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그러스도는 휠씬 문화를 초월해
있마. 그러고 그는 그러스도와 문화와의 사이에 았는 구분을 결코 워
장허려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생활 태도가 벌써 이 두 주장, 두 희
망, 두 출딸 동의 통알의 망업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청빈〈淸負)파
동정 C童貞)파 복종의 서약에 충살한 수도사였다. 극단적 기독교인들파
함께 그는 세속 세계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에 있는 수
도사이면서도 또한 문화의 수호자, 학문의 육성자, 국만의 재판자,
가정 의 보호자, 사회적 종교의 통솔자였다. 토마스란 안불 안에 서 상
정화된 이 위대한 중세기 조직체 자체가 놀랄 만한 실제적 종함의
결과를 드러낸다. 수도원주의자들이 운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한다는 이유로 과격한 항거 운동을 일£킨 것은 세속화된 교회블
상대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반항 운동이 지금에 와서는 그 극단

적안 성격을 상실하지 않은 채 교회 안에 펀입되어 있다. 이 종합은


쉽게 획득 또는 유지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긴장파 역동석안 운

132
제 4 장 운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동들로 가득 차 있였으며, 따라서 늘 긴장감이 풀리지 않았다. 교.회


의 두 면 , 즉 세상 안에 있는 교회와은둔된 교회가 다 함께 부패되였
다. 그러나 각기 그 상대방의 개혁에 공현하였다. 교회와 문명의 딴
함, 현샤n 와 타계 , 그러 스도와 아리 스로텔레 스, 개 혁 파와 보수파 풍의

연합은 후세의 상상과 선전에서 이상화된 모습과는 훨씬 마른 것이었


음이 사실이마. 그러나 이런 종합은 현대 사회에서는 성취필 가망이
거의 없는 종류의 것이다. 현대 사회에는, 다른 요인(要因)을도 있겠
지만, 주로 둔 가지 선 결조건(光要條件)을 가지고 있지 않 기 때문이다.

즉 문화적 종교 제도로 말미암아 복음이 희미하게 되는것을 항거하논


진지하고 극단적안 기독교가 갚고 넓게 펴져 있지 옷하다는 점과, 0]
충실 한 반론을 자신 속에 맞아들뇌 연합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위대
한 문화적 교회도 존재하지 않마는 점이다.

토마스 이-퀴 나스도 알버 어 트 대 왕 (Alb2rt the Great) 과 같이 , 이 일


이 이루어지게 한사람 〔원안 -역자주) 이라기보다도그 되어진 엽적 (결과

- 역자주)의 대표자라 할 것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탤레스처럼 그도


그 사회 적 발전의 말 기 에 동장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 사회의 근
본 원리만을 그가 제시하였고, 그 효능은 플라톤과 아리스로댈레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후세를 위하여 예치되어 있었다. 그의 사상 체
계에서 보변, 철학과 신학, 국가와 교회, 세속 윤리와 기독교 윤리,
자연법과 신법〔神法) , 그러스도와 문화 동의 사이에 혼동 없는 결 합을
성취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요소로부터 그는 이론적 , 싶제척 치혜의
대 구조를 세웠다 . 이 구조는 마치 시가지와 시장 안에 든든히 뿌리
박고 있는 대 사원, 가옥파 궁전, 대학교 등파 같아서 인간 문화블
대 표하며, 한 번 그 운안에 들어서연 그 안에서는 음향과 색채, 행

동과 그림, 모든 세속적 판심을 초월한 생활의 상징 등풍 고요하고


광활하고 기이한 새 세계가 전개된다. 후세의 쉴라이에르마허처럼,
그도 기독교를 멸시하는 문화안을 가운데서 그들을 상대로 논하였다.
그도 그들과 함께 그 당시의 지성안들에게 공통된 철학을 가지고 말
하였다. 그것은 회회교도들과 유대인들이 재발견하고 발달시킨 아리
스토댈레스 철 학이었마. 그러나 터툴리안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고 어린아이에게는 계시하시
는 하냐넙 나라의 신비를 안정하고 있었다.

133
우리는 여기서 토마스가 문화의 운라와 복음익 윤리를 종합하려 했
넌 태 도에 중점 을 두고 논하려 한마. 살천적 철학과 실천 신학의 。f
러 분야에서와 마찬가지 로, 안생의 목석, 인간의 덕행, 그러고 볍에
판한 그의 이론에 있어서도 그는 문화적 이성 3로 식렬된 필요조건파
예수가 말한 것을 신적〈꽤的) 영령파 약속이라는 한체제 안에 결합시
켰다. 예수가 말한 것이란 교양인이 알고 있는 만물의 목적에 근거한
희망, 그러고 그러스도의 단생, 생애, 죽음, 부활에 근거한 희망을
말한마. 종합에 대한 그의 모든 노력은 삼위알체 교리가 운자 그대로
의 표현이라는 신냄에서 유도된 것이었다(그 토대 위에 서 있지는 않
더 라도). 즉 자연의 창초와 여1 수 그러 스도와 내 재 영 (內tE靈) 은 한 본
질에 속한다는 교리 이 다. 사람은 한 진리 로 나아가는 세 가지 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 진리로 가는 걸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마. 그리고 이 세 진리는 진리에 판한 하냐의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영에 판한 문제는 제외하고 다만 자연에 판한 운화의
지식파 그러스도에게 서 받는 신앙의 내용에 대하여 논하려 한다 13

누구든지, 특히 기 독교안은 상술한 문제에 대하여 묻고 대넙함으로


써 자기가 당연히 해야 할 것이 무엇안 가 하는 문제 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냐의 의도는 무엇 인가? 냐의 목석은 무엇안가? 이
안간의 근본척 존재 그 본성의 궁극 목적을 발견하려고 추쿠하며, 이
에 대한 합당한 대답을 얻 은 해에 는 , 눈앞의 소원이나 욕망 같은 것
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것이마. 헬라안의 이성, 아리스토델
레스가 말하는 이성, 즉 이 운화의 이성이 이해하는 자연 (본성 〕 은 그
성격상 목적을 가지고 있마. 자연은 하냐닝이 지 A신 바이며 따라서
사 람을 향한 하냐넙의 목적파 인간의 요구을 계시하는 성격 을 가지고
있마. 이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본성 〔자연)은 하냐넙의 선물이며 동
시에 인간의 활동이라고 생각할때, 우리의 존재에 내포된 목적은-우
리는 지성파 의지 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 어 있는 한-우리의 가능성을
완천히 살현시키는 데 있다. 즉 보펀석 진리 속에 냐타난 진리, 보펀

13. Thomas 의 윤리 에 대 한 이 토의 는 Sμ mma Theologica , Part H, Section


1 , 특히 Qq. i-v, Iv-Ixx , xc-cviii; cf. Sμmma Coη tra Gentiles , Book nr.
모든 안용은 Dominica 교부들의 역 본에 의 항. E. Gilson , Moral Valμ es
and the Moral Life , The System of St. Thomas Aqμinas, 1931 도 참고
하라-

134
제 4창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적 선 속에 냐타난 의 지 로 살현시 켜 야 한다고 토마스는 확신한다. “안


칸의 의지는 보펀적 선에 머물지 않는 한 얀정을 얻을 수 없마. 그런
데 보펀적 선은 아우 파조물 안에서도 말견될 수 없고 다만 하냐넙 안
에서만 찾을 수 있다 . 그러므로 하냐넙만이 안간의 마음을 채워 주신
다 " 14 그러고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것 곧 최선의 활동파 최선의 능
력도 사변적인 이해(理解)이다. 그러으로 “인간의 최후 그리고 완전한
행 복은 신적 본질 (divine essen ce)에 대 한 바 전 안에 서 얀 찾아질 수
있다 “모든 이성적안 존재는 。 l 신석 본질을 이해하는 데서 그 최
후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마. 그러묘로 이해에 의하여 안간 이성은
그 목적우로서의 하냐닝을얻는 것이다 "15 이상에 말한 것으로 볼때
토마스는 기독교적 아리스로텔레스주의자라 하겠마. 그는 살제적인 생
활보다 사변적인 생활을 더 우월한 것 A로 여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석 이론을 재주장한 사람이다. 다만 지적 바선의 대상을 하나닝
이 라고 영영한 것뿐이마. 그가 수도원 생촬을 왕좌에 모신 것은 부패
한 세상에 대한 항거 의식에서가 아니라 불변의 실재를 영상하기 위
하겨 감각적이고 잠정석인 세계블 초월하려는 노력에서였다. 이렇게
정의함으로써 구극석 옥석을 향한 열망파 인간의 실제 생활파 비사
색적안 사회 속에서 일상석안 목적 달성, 즉 건캉, 정의, 일시적 살
재에 대한 지식 , 경제석 재화 등을 얻기 위한 노력을 조화시키는 일
은, 아리스토멜레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토마스에게 있어서도,
온천히 가능한 것이였마. 이 모든 재물은 행복을 위하켜 필요한 것이
다. “우리가 사물을 정당하깨 고찰한다면, 인간의 모든 직업은 진리를
영상하 는 사링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16 그러나 토마스는
실제적 인 사랑파 진리 탐구자로 구성펀 사회의 이원적 윤리에 한 가지
첨가한 것이 았다. 그것은 아리스로텔레스에게서보다도 신약성서에서
더 많이 찾아 낸, 인간의 구극적 옥적에 대한 이해이다. “현 생활의 상
태 속에서 완천한 행복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마 현세
에서는 인칸이 많은 악파 변천에 종속되 어 있기 때문이다. 안간이 그
의 문화 안에서, 창조할 때 하나넘께서 주신 본래적 선물혹서의 문화

14. Summa Theologica , 11-1, Q. ii. art. viii.


15. lbid. , Q. lll , art. viii; Sμmma coηtra Geηtiles, Book m, chap. xxv.
16. Sμηzma Theologica , II.l, Q. iv; Sμ nzma coηtra Geηtiles, m, xxxvii.

135
를통하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의 불완전한챙복에 불파하다. 01
것을 넘어 영원 안에 또 하나의 목적 이 있다. 모든 안간 노력은 이
옥적을 위한 하나의 부족한 준비에 불파하다. 이 궁극적 행복의 획
득은 안간으로시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이것 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하얘 하나넘우로 말미암아 안간에게 값 없 이 주어지는 것 이다. 이것
은 영상에 의하여 블완전한 행복을 얻는 사 람들에게 주어질 뿐 아니
라, 오히려 ,,] 철학적, 닝l 수도원적 환경 가 운데서 자 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바 르거1 산 사랑들에게도 주어 진다 . 이것은 또한 최 안에게 도
주어진다 .1 7 토마스는 인간이 단정한 실제 생훤 에서 욱상 생활의 불
완천 한 챙 복」즈로 올라 가고, 마시 거 기 서 영원한 축복의 완전한 행 복
으로 올라간다는 어 떤 상승적 계 단을 만둡으로써 안이 한 그의 종 합
체계 룹 구성하려 고는 하지 않았 마. 단 계가 있기는 하마. 그러냐 사란
이 그 하나하나의 단계 를 올라 가려 면 그 때 마다 바 약 01용짧〉이 요청 된
다. 그리고 그 비약은 한 중간적 단계를 넘어뛰게 한마 . 뿐만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 는 계단은 몽시 가파르 기 해 문에 언제나 인간 노력 이
외에 위고 부터 주어지는 성 례천적 능력야 있어야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 안에서의 생촬파 그러스도 안에 서의 생촬에 서 치니는 인간의


이중석 행복이 있는 것같이, 운화 안에서 의 안간 생활에도 또한 실행
파 영상에서 오는 이중적 행복이 있다. 그리하여 행 복에의 걸 은 많」즈
나 그 걸들은 한 체 계 를 이푸고 있마. 선한 습판의 훈련을 통하여 도
덕 생촬에 이 르는 문화의 걸이 있고, 자기 통솔석인 이 성 의 길도 있
A며, 예수의 극단적 인 조언에 복종하는 금욕주의적 인 걸도 있다 자
말적인 사랑, 믿음, 그리 고 회망의 은헤르운 갚도 있다. 그러나 이 마
지막 걸은 사 람이 찾을 수 있 는 것도 아니 며 사람이 자기 힘으로 걸
어 같 수 있는 걸도 아니다. 토마스는 도덕적 선 이 노력을 통하여 온
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인간파 자버스 러운 생활에 필요한
행동의 슴판을 형성 하고 유지하려연 , 사회냐 개안이 막대한 노 력 을
기 울여야 한마 는 것을 밝히 말하 였마. 신중, 극기 , 용기 , 정의, 그러
고 사유(思推), 언어 , 음식 둥에 판한 특수 판습, 기타 인간 행동들
이 생 촬에 필요하다. 그 러 나 동물에게는 극복필 수 없는 본능이 주야

17. Summa Theologica , II.I, Q. 111 , ar t. ii , Q. v.

13ô
제 4 창 운화위에 있는 그리스도

쳤다고 하는 것파 같이, 그것이 자유로운 영혼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


다. 사람은 그 자신의 송낙과 협력 없이는 다스려질 수 없는 것이다.
그가 힘들여 얻은 것은 또한 힘들여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단
순히 도덕 생활에 불과하다”고, 어떤 배타적 기독교인들이 적서도 멸
시하는 체하는 그 도덕은 사실은 안간의 위대한 엽적인 것이다. 그것
은 안간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안간의 자유와 또판 강박석(彈追的〕
안 안간의 필연성의 고귀한 산물이다. 이것이 없이는, 불완전하면서
도 만드시 요청되는 목표인 바 사회 생 활 안에서의 행복은 성취할 걸
이 없는 것이다. 만일 안간이 평범한 사람으로서, 곧 시만으로서,“속
안£로서 "(philistine) 또는 “중산 시 민 "(bourgeois)으로써 의 덕 성 조차
가지고 있지 옷하마연, 어떻게 명상 생 활의 덕파 챙복을 동경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선한 행동의 슴판을 육성하는 것이 안간의
책임에 속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 영역에서까지도 그가 온천히 제 혼

자서 。1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동얀에도 그는 가정 , 국가, 교회


몽 주요 사 회 적 제도들을 통하여 도와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보 조와 지 도를 끊엠 없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복음을 통

하여 그의 앞에 놓여진 다른 행복。 l 있다. “그 행복은 인간의 본성


이 상의 것이며, 따라서 신성 (神性)에 확실히 동참하게 하는 하나닝 의
도우심 없 이 는 사 람으로서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
러으로 거 기에 는 하나닝의 은사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어떤 원리들이
위로부터 첨 가되 어야 한다. 그러하여 그가 자연적 원리에 의하여 인
간이 타고난 목적 을 지향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은사로 말
마암아 초자연 적 지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마.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
없이 그리하는 것은 아니다. 18 토마스는사랑이 그마음파 영혼과 뭇파
힘을 다하 여 하냐닝을 사랑하고 다른 사량을 자기 몽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닝 의 계 명 이 요쿠하는 선이 얼마냐 창엄 하고 초인간적 안가를 충
분히 안 식 하고 있마. 그러나 많은 문화적 기독교인들은 이 점에 대하
여 그렇 지 못한 듯하다. 신앙이 없이 다만 인간 의지의 행위만으로
이것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닝을 그는 인정한다. 영광의 희망-이
희망이 주 어 질 예 그 활 71 띤 생 활 이 아무리 매력적이라할지라도-은
아떤 인 간척 결 심의 결파로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

18. Ibid. , nI, Q. xlii , art. i.

137
。 l 불가능한 덕행인 것도 아니다. 그것이 행운의 우발적인 선물인 것
은 아니다. 또는 해때로 이상한 도댁적, 정신석 천재들을 산출시키는

변먹적 성질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러스도를 통하여 하나닝으


로 말미암아 주어지고 약속된 것이다. 처음 익은 열애는 주어졌고 그

싼성 은 약속된 것 이 마. 그 은혜 를 받는 자는 그러 스도의 성 품 (nature)


에 참여한마.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하여 갈지 않는마.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서 향상된 자들이다. 그들의 덕은 능동적이요, 자연스러운 헨
신적 사 랑이 라는 선(善)이 마. 그런데 사람들이 아무미 이 란 신학적 인
덕행 곧 그러스도적안 삶을 동경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다만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을 준비할 수 있을 뿐이요, 그들이 이 은사를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고 이 은사는 의로운 시민이나 금욕적 수도사에게보
다도 먼저 십자기- 위의 강도에거l 주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법에 대한 토마스의 학설에도 이와 같은 종합적 결합의 특색이 았


다. 사람은 법 아래, 말하자연 문화 안에 있기 전에는 자유하는 생활
을 영위(營짧)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볍은 반드시 참 법이어야 한
다. 강자의 의지에서 파생펀 법야어서는 얀펀다. 사물의 본성 안에서
발견된 것이야 한다. 토마스는 안간의 사회 생활 볍칙을 복음서에서
찾우려 하지 않았다. 이 법칙들은 이성£로써 말견되어야 한다. 그것
은 넓은 원칙에서 한 자연볍을 구성한다. 그것은 공통적 인간 존재의
주어진 조건 하에서 인간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모든이성적인 안간에
게 식별될 수 있는 법이며, 궁극에는 창조주요 통치자안 하나님의 마
음 안에 있는 영원한 볍에 근거펀 것이다. 이 원칙들을 만법에 적용
하는 경우에 그 형태는 때와 장소를 따라 마르다 할지라도, 그 원칙
들은 여진히 같은 것으로 남아 았다. 문화는 문화를 위한 법칙을을
식벨한다. 문화란 것은 하냐님이 주신 자연 안에서 하나닝이 주신 。 l
성의 노작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l 성적 안간이 말
견하고 응용하는 법 이외에 또 하냐의 법이 있다. 그것은 하나닝으로
말미암아 계시완 신법〔빼法)이다. 그것은 하냐님의 예언자들을 통하
여 그리고 무엇보마도 그의 아들을 동하여 계시되었으며, 그 내용은
부분적우로 자연법과 일치되며, 또 어떤 부분에서는 안간의 초자연적
생활의 법칙우로서 자연법을 초월한다. “도적질하지 말라”하는 계영
은 계시에서 뿐 아니라, 이성 S로써도 말견된다. 그러나 “네 모둔 소

138
세 4 깅- 운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유를 팔아 가난한 사랑에게 주라‘는 것은 신법에서만 말견된다. 이것


은 정직의 덕 이상의 덕을 가지고 있는 사랑, 이 사멸할 존재 얀에서
의 정의 이상의 완전을 지향하는 희망을 가진 시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마 19
이 근거 위에서, 토마스는 위대한 사회석 제도들을 변 호했융 뿐 아
니라, 그들의 성격에 맞는 도덕적 원척들에 따라 그들을 인도할 수도
있었던 것이마. 예를 든다면, 사유재산 제도 같은 것은 극단적안 기
독교인들에게는 몹시 의심받는 것이 지만, 토마스는 이것을 정당한 것
A로 변 호 하였마. 그것은 “자연맹에 반대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인
간 이성으로 말미암아 고안(형案)펀 것이다. 이록 외부적안 재물을 개
인적으로 지 배하는 것이 공정하고 바른 처사라 할지라도, 그것을 온
천히 사석, 이기주의척안 데 사용하는 것은 변호할 수 없다는 점을
이 성 은 알고 있 다는것 해 문이 다 20 이 익 을 위한 상행 위 는 유덕 (有德)
한 것은 아니냐 합겁척이마. 그것은 반드시 공정한 가격파 고리(高쭈1])
를 금하는 것 등의 원칙들로 통제 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고리 대금법
윤 금지했마는 것만이 그 이유언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것 "21
을 판다는 것은 불합리하기 해문이 다. 정부, 국 가, 그리고 그 정치석
권력의 사용에 대하여도 같은 이론을 적용하였다 22 하나닝께서 인간
을 사회 적 존재로 창조 하셨 고, 사회 는 안간적 안 수준(Ie vel) 에 있 어 서 는

합법적 인 지도가 없이는 성립될 수 없기 해문이다. 국가 위에 교회가


있다 . 교회는 사람들을 초자연적 목표로 지향시키여 성혀1 천적 도움
을 받게 할 뿐 아니라, 신 법(페l 法)의 판리자로서 세상 생활의 질서를
도와 준다. 어떤 경우에는 이 성으로써는 섣챙력의 부족을 느끼며, 따
라서 계시의 은헤로운 도움을 요구하기 해문이t:-} . 그리고 이성은 행
동의 내 적안 샘터와 동기에까지 마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옷하기 때
문이다 23 그러냐 교회 또한 이중석 기구, 곧 세상 안에 있는 종교적
체도우로서와 수도원적 제도로서 의 두 가지이다. 토마스의 종합 이론
에 의 하연, 이 모든 제도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판련되어 있으므로 그

19. Thom as 의 뱀 에 판한 학설은 Summa Theologica , 11.1, Qq. xc.cviii 을 보라.


20. Ibid., n. II, Q. lxvi , ar t. 2.
2 1. Ibid., n. II , Qq. lxxvii , lxxviii
22. “ On the Governance of Rulers. n
23. Summa Theologica , II-I, Qq. xci , x , cviii.

139
하나하나가 각자의 특수한 목석 에 봉사하연서 동시 에 서 로 봉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이 구조의 위계적 성격을 강조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 고 명령 계통이 위에서부터 아래 로 뻗쳐가는 군대 조직을 연상할
수도 있마. 신성한 입엽자요 통치자안 하냐념 으로 부터 시작하겨 지
상에l 서의 래리안안 교황 을 머리로 한 교회를 통하 져 그 밑에 군주들
과 귀족 계급둘, 아래 로 아래로 내려가 마칩내는 다얀 복종할 것밖
에 없는 최후의 백성에게 도달하는 것 이마. 이 위계적 원칙 에 내하얘
토마스는 아무 의문도 알 A키지 않았마. 그가 파리에서 신학석사 학
위 강연에서 말한 바와 같이 , 그리 고 그 후에도 여러 벤 반복하여 주
장한 대로, 그의 근본석안 신념은 “하늘의 주요 왕이신 이가 영원부
터 이 볍을 제정하셨다. 그러고 그 섭리의 은사는 그 사이에 있는 여
러 사 람들은 통하얘 가장 낮은 자에까지 이 르는 것이마” 라는 것이였
다 .24 그러나 만일, 토마스가 모든 그의 논조에 있어서, 모든 제도와
모든 개안 곧 이성적 존재의 독립성을 어느 정도 안정하는 일을 배려
(쩍è.lfP、)하지 않았너카면 , 그의 종합 이 론은 그만큼 매력 있고 성공적안
것이 될 수 없었을 것이마. 각자는 자기 냐픔의 목적을 가지고 있마.
각자는 그 행동의 목표와 법칙에 대한 공통적 이성을 통하여 , 각각
제 나 름 의 이해블 가지고 있다. 각자는 제 나릅 의 의지, 또는 제 냐픔
의 자기 원칙을 가지고 있다. 위계 (hierarchy)는 현존한다. 그러나 그
것은 동양의 성 〔省 ) 과 같은 것。 l 아니다. 그것 은 공동된 정신과 피치
자의 동의 (同효)를 전제로 하며 , 각자의 그룹야나 개안에게 각기 자기
의 직접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독 립성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
1 3세기 문화 안에 이 공통된 정신이 나타나 있으며, 그 당시의 모
든 제도들이 파차 큰 긴장을 느끼는 알 없이 통알을 이룬 것이 사살
언 이상, 로마스의 종합론은 하나의 지성적 성공이었을 뿐 아니라,
그러스도와 문화의 사회적 통일 에 대한 철학적 , 신학적 표현이 었다.
이 통알성이 성취되 자마자 파괴된 것은 종교개헥 이냐 르네상스에 의
하여 가 아니 라, 그것 들과는 벨도로 1 4세 기 의 모든 충돌파 긴장 강에샤
그렇게 된 것이었마. 우리가 후세의 기독교에서 이와 비슷한 종합의
실례를 찾으려 할 때 그 유형(類型)의 적당한 예시〔例示)를 찾기에 곤

24. Gerald Vann , St. Thomas Aqzμηas, pp. 45 f. 에 그캠 게 안용되 어 있 마.

140
제 4장 운화위 에 있는 그리스도

란을 느끼지 않을 수없다. 사랑들은 툴스토이와 리층의 유력한 동시


대 안안 페 키 (Joachim Pecci) , 교황 레 오 13세 (L oo xm) 를 종합파에
속하는 기독교안으로 해석하려 한다. 그의 획기적인 교황 재위 중에,
그는 로마 카툴럭 교회를 그 고링주의에서 쿠출하였 A벼 진정한 기독
교는 낯선 세상 안에 있는 외국안과 같은 사회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제거하였다. 사희 생활에 판한 그의 교황 회람 서한에서 그는 “기독
교안의 결혼“기독교적 국가헌법“안간자유“기독교인시민으
로서의 주요 임무 “근로 계급의 조건” 등에 대하여 진술하였다. 그
는 기독교인으로서 일반 생활에 지혜롭게 동참하는 문제에 판성을 표

시하고 있다. 그러고 주요 제도들의 유지와 개혁을 위한 그의 책임감


을 표영하였다. 그는 교육을 진전시키고 철학을 장려하는 데 활발하
였다. “신적 지혜의 은총이 강하게 또 강미롭게 모든 사물을 배열하
는 것을 자연적£로 도와서 안류에게 공급한 것은 멸시할 바도 아니
요 등한시할 것도 아니다. 그 중에서 으뜸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철학
을 바르게 사용하는 일 이다고” 하였다 .25 그와 동시에 아무 긴장강도
없이 그는 그리 스도의 주권을 선포하였다. “그는 모든 선과 의 의 근
원이다. 인류는 그러스도의 희생£로 말미암지 않고는 노예 상태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없우며 그의 능력 없이는 그것 을 보존할 수도 없는
것이 기 해운이다”고 하였다.26

이렇게 폐오 1 3세와 그추종자들이 토마스적 근거 위에서 새로운 종


합을 주장하고 있우냐, 사실은 그들을 종합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스도와 문화의 종합이 그들이 목적하는 바임에는틀림 없 o 냐, 그
들은 토마스가 그 당시에 수행한 것같이 현재의 문화, 현재의 철학,
현재의 제 도들을 그리 스도와 종합시 키 려 고는 하지 않았마. 그들이 “이
방안”들에게 자신들의 업장을 설명할 해, 그들은 상대자와 공통된 입
장을 취하거냐 공통된 철학적 근거 위에서 논의하는 것이 아니었마.
그들은 다만 토마스 시대의 철학을 그들에게 권하고 있는 것이다. 토
미-스가 “통치자들의 정치”에 대하여 진술한 것같이 레오 1 3세도 “기

25. “ The Study of Scholastic Philosophy,'’ in J. D. Wynne, The Great En.


cyclicals of Pope Leo XIII, p. 36.
26. “ Christ our Redeemer," in Wynne, p. 463. Cf. also “ On the Consecra-
다。n of Mankind to the Sacred Heart of Jesus," Wynne , p. 454 ff.

141
독교 만주주의 ”에 대 하얘 논하였 다. 그러 나 레 오는 봉건사회의 가장
적 (家長的) 정 신으로 이 를 말하였 고, 토마스가 중세 기 정 신에 동참한
것같이 레오도 현대 정치 운동에 동참한 자로서 이를 논한 것은 아니
었다 27 그가 추구한 것은 그리스도와현대 문화의 종합이 아니라, 새
로운 문화의 철학과 제도들을 재건하려는 것이었마. 이것은 종합주의
적 유행에 속한마는 것보다도 문화석 기독교의 알종안 것이마. 그들
의 근본적인 충성은 일종의 문화에 바쳐지고 있다. 그 문화는 물론
예수 그러스도 특히 그의 교회가 중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문화이
다. 그러나 예수의 통치와 주권이 그들의 교리와 조직체와 운화적 종
교의 제도들의 승판들파 너우나 합치되어 있기 해운에, 토마스주의의
특색안 역동적 평형이 결핍되었다. 마만 수락판 학설 자체, 즉 옛 토
마스의 학설이 현재에 반사〔反照、) 또는 굴철 (J협 折) 펀 것을 볼 수 있을
뿐아마 . 레오 13세 는 이 렇 게 썼다. “그러스도의 입이라는 말에서, 우
리 는 도덕 의 자연적 교훈 들 또는 옛 사람들이 얻은 초자연적 지식 ,
즉 예 수 그리 스도 자신의 설영파 해석과 재가〔눴피)로 말미암아 완성
되고 최고의 경 지에 오른 모든 지식 을 의미할 뿐 아니 라, 또한 모든

교리, 특히 그가 우리에게 남겨 준 제도들을 의마하는 것이마. 그 중


써 서 쿄 희 (the Church) 가 머 리 (chief)이 다. 진실 로 , 교회 가 포용하거 나
포함하지 않는 제도가 어다 있는가? 교회의 직 우블 통 하여, 그러스
도께 서 그렇게도 영광스렵게 터 를 세워 주신 것이으로, 그는 하나넙
께서 그에게 맡기신 그 직무를 항국화하기 를 원하셨마. 그러하여 한
펀으로 는 인 간의 구원을 위 한 모든 효과적 안 도웅을 교회 에 부여 하며 ,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최내의 중요성을 교회에 주어 시람들
로 하놔 금 그 자신에게 꽉-종하는 것같이 교회에 복종하게 하며 생 활
의 각 부문에서 엽심으로 교회의 지도에 딱라가게 하신 것이다고”하
였다 28 이와 같은 입장은 프로테스탄트의 사회복음적 기독교를 로마
카툴럭 식으로 옮겨 놓은 데 불파한 문화적 기독괴이다. 왜냐하연 프
로테스탄트의 사회복음주의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카 민주주의 사회와
자유로 운 종교와 자유의 윤 리의 창설자이며 완성자라고선전하기 애운

27. Leo xrrr , “ Christian Democracy," Wynne , p. 479 ff. 를 보라.


28. Wynne 의 저 서 pp. 469 f. “ Christ Our Redee mer." 내 가 말견한 대 로 는,
Leo XIII 의 생 애 와 사엽 에 매 한 가장 객 판척 안 치 슬은 Josef Schmidlin ,
Paþstgeschichte der Neμze iι Vo l. II (1 934 )에 있 마.

142
제 4장 운화 위에 었는 그리스도

이다. 이렌 내용에 서의 로마 카툴럭과 프로테스탄트의 논쟁은 결국


집안 싸웅야다. 둘 다 문화에 우선적 관섭을 가지고 있다. 다만 사회
조직체에 대한 그들의 이념파, 인간 엽적에 의하여 실현하려는 그들
의 가치 판단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 그러묘로 그들의 논쟁도 교회
안에서보마도 문화 사회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 카폴릭과 프로테스탄
트의 。l 논쟁은 국가의 조직, 교육의 내용과 판리, 노동조합의 통제,
진정한 철학의 선택 등을 주제로 하고 있마. 그들은 이 세 상의 세속
적 임 무에 동참하느냐 얀하느 냐 하는 문제 라든지 율뱀 과 은혜 의 문제
라든지, 죄의 근본성 등에는 연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레오 1 3세가 카툴럭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며 리출이 프로테스탄트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라스도와 문화의 종합에 대한 종더 냐은 실례블 우리는 영국 교
회 감독 버툴러 CJoseph Butler)에게서 말견한다. 그는 그의 저서 ‘좀
교의 유바 ’ ( Analogy of Religion) 와 윤리 문제 에 대 한 그의 여 러 설교
에서 파학, 철학, 계시, 합리석 자기애 (愛)의 문화 융리 08세기 영국
식의) 동파, 하냐넙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 양상의 윤
러를 결합시키려 하였마. 토마스 아퀴나스에 비하면 버플러의 사상은
산만하고 빈약하여 대 사원이라기보다도 매끈하게 지은 시골 교회 같
은 느낌이 있다. 거기에는 무지개같이 뻗친 홍예문도 없 A며 버텀벽도
없다. 그리고 제단도 그리 높지 않다. 미국에서는 윌리염스(Roger
Williams) 가 그러 스도와 문화의 문제 에 해 답을 주어 보려 하였 마. 특
히 정치 제도에 있어서, 사회 안에서의 이성의 주장파 복음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말씀 사이에 정당한 쿠벨을 나타내 려 하였마. 이 점에 있
어서 그가 양자의 쿠벨을 설명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냐 그것을 하나로
연합하는 데는 살패하였마. 그리하예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종합했다
기보마도 평행선을 그렸마고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평행주의는 결국
영적안 것파 현세적안 것, 개인 도덕과 사회 윤리로 생활을 양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하여 문화석 기독교를 실천 하는 경우에 그 사
회 윤리의 수락을 결성하든지, 그렇지 않4면 루터주의자들의 해결책
을 따르든지 하는 걸밖에 없게 되었다.

현대 기독교에 종합적 해답이 부재한 것은 우리 문화의 본성 때문


인지 또는 그러스도에 대한 현대석 이해 해문안지, 우리는 지 금 여기

143
서 그것을 분석하려 하지 않는다. 이렌 해밥을 갈망하는 사함은 많
다. 01 것이 주어져야 한다는요청이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아무련해
탑도 보이 지 않는다. 위대 한 사상가의 산물로서 든, 그보다도 더 중요
한 사회 생활에서의 설제 활동, 여론의 조성, 모든 사람에게 스며 있
는 살아 있는 믿음으로서 둔 그란 해 답은 보이 지 않는마.

3. 종합의 문제점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한 해탑으로서 종합주의적 유형을 제

시하는 것은, 토마스적 체계를 수락하든 안하든 간에, 모든 기독교


안에게 환영받을 수 있는 알임 에 틀림없다. 사람이 통잎을 추쿠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기독교안에게 있어서는 그블이 유일
하신 하나닝을 믿는다는 그 근본적인 신앙 때문에 더욱 그러하마. 기
독교인무로서, 경험파 반성의 결파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려는 노랙
때문에 자연파 문화를 거부한다는 것이 자기 마음에 전적으로 긍정되
지 않을 때 , 더 나아가서는 그 거부 챙위 자체가 사랑의 계병에 래한
불복종을 내포하는 것임을 싣강할 때(사회 제도들은 그 사랑의 도쿠
들이 므로) 그는 둘 중에 어느 하나도 부정 하지 않 o 면서 그러 스도와
문화 사이에 모종의 화해를 성렵시키려고 한 것이 사살이마. 자아 안
에 도덕적 통일을- 가져오려는 충동은, 이성에 대한 영렬한 탐구욕파
브조C 步꽤)-블 같이한마. 즉 이성의 온갖 원칙의 동일, 이성이 지향할
모든 실재의 통일펀 한 가지 원칙을 말견하려는 것이다. 이성과 계시
의 종합에 있이서 철학자의 탐구와 예언자의 선포가 아무 혼란 없야
결합될 때, 이성은 그 칼망자에게 만족을 약속한 것으로 보알 것이다.
도덕파 이성의 통일을 지향하는 충동은 사회의 봉일을 위한 사회적
요청과 불가분의 판련을 가지고 있다. 사회 자체가 많은 사람이 하냐
되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모든 분쟁은 사회의 병이며 평화는 샤회 건
강의 펠명이다. 교회와 국가의 연합, 국가와 국가, 계급과 계급의 엔
합, 그러고 이 모든 것파 초자연적 주〔主)요 동효자인 분과의 연합, 이
것은 신자의 파치 옷할 욕망이다. 종합주의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보
마 우선석안 요청우로 보안다. 그는 그의 연합시키는 영으로, 안칸의

144
제 4창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본성, 에성, 그리고 사회 안에서 역사하실 경우에 그러할 뿐 아니라,


그가 그 자신의 말씀들〔성서-역자주)파 그의 말씀(그리스도-역자주)
올 통하여 계시하신 것으로도 그 러하다. 구약성서의 교회뿐 아니라

신약성서의 교회에 대하여도 그 위래한 선포는 “들으라 ! 오 이 스라


옐아, 주 우리 하냐닝은 한 주닝이시마 ” 하신 그것이다. 종합주의적
유형의 해당은 이 요구와 명령에 응해 주는 것같이 보이으로, 언제냐
키독교안의 마음을 끌게 마련안 것이다. 01 것이 그들에게 제시 될 해
그 형식에 대하여는 그들이 거부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할지
라도 그들은 여천허 거기셔 궁극적 해답의 상칭을 보는 것으로 여;갈

것이다.
아마도 엘마의 극단적, 배타적 기독교안을 제의하고서는 모든 신자
카 마 일반 사회에서의 덕챙괴- 공정한 사회 제도의 중요성에 대한 종
합주의자들의 확신에 찬동할 것이다. 다음에 다시 언급할 것이지만,
어거스틴 파와 루터파에서는 이 덕행과 제도를 다른 빛 가운데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추종자와, 하나닝의 공동 사회 안에 있는
각자시민들을 위하여는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같이 안정하고 있
다. 토마스식의 종합주의와 구 옐 되는 점은, 안간괴- 그 세계의 주어진
창조완 본성 안에서 정당성의 근거 를 발견하려는 토마스의 판섬점 이
다. 그의 주장, 즉 “당 위 "Cought)는 “현존 "Cis)에 근거해 았다는 것〔그

“현존”이 다시 또 하냐닝의 마음 얀에 있는 “당위”에 근거 하여 있지만)


은 제가 좋을 내로 생각하 는 위험을 안식하고 았는 모든 사람에게 그
주장의 현실주의 를 호소하고 있다. 그 위험은 사회 생활에 뿐 아니 라,
그런 신앙 생활에 내포돼 있는 위험이다. 장차 올 하나닝 나라에 주의
를 접중할 때 , 사 람플은 지금도 하나닝이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부
정하기 쉬운 것이다. 지금 우리 가가지고 있지 못한무엇을 갈망할 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하냐 냥께로부터 은것이 아니라 악마에

게서 온 것이라고 확신하기가쉬운 것이다. 통치자이신 하냐넙은 천에


도 통치하셨고 지금도 통치하고 계시며, 그의 통치는 만물의 본성 얀
에 세워져 있으며, 짜라서 사람은 이미 세워진 기초 위에 건축해야 한
다는 종합주의자들의 결정적인 선언은 위대한 강화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하여 그는 아무 다른 기독교인 그룹에서도 능히 추 종하지 옷할 만

한, 그 러 냐 마 같이 참여할 필요가 있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즉 창조

145
추와구세주는 하나야라는원칙, 그러고 구원이 아무리 창조를 초월한
마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창조된 것의 파기 C破棄)를 의마하지 않는마는
원칙이다. 살제적으로 말한다연 속량받은 자들의 챙동은 아무리 율랩
을 초월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율볍 생활 이하의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그리고 율볍은 다얀 인간의 말명으로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는 하냐닝의 듯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신념에서 종합주의자들은 신
자가 불신자들파 협동해야 할 사엽에 대한 합리적안 근거를 기독교인
들에게 제꽁하였마. 바록 터플러안이 불신자들을 향하여 “우리가 당
신들파 함께 항해하며, 당신들과 함께 싸우며, 당신을파 함께 경작하
며 .. .... 교통에 있어서도 당신들과 연합해 있다”라고 말했다 할지라도,
그는 기독교안으로서 그런 연합 전선에 가담하는 이흔적 근거를 영시
한 알이 없으며, 어떻게 또는 어느 뱀위 안에서 협동이 가능한가를 지
시하지도 않았다. 그 반연에 문호썩 기독교안은 기독교의 독특한 원칙
을을 애매하게 할 정도로 불신자들파 공동노선을 만들어 버린다. 다
만 종합주의자만이 세상 일을 진행시키는 데 있어서 신자로 하여금
즐겹게 그리고 지혜롭게 불신자와 협력하게 하며, 동시에 기독교적 신
앙파 생활의 특수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으로 보이리라.
이 종합주의적 해답의 성취 에 나란히하여, 다른 한 입장이 있다.
그것 은 피조물을 위한 창조주의 계획에 대한 합리척 지식 이상의 것,
자연 볍척의 명령파 확인에 대한 호의적 복종 이상의 무엇을 복음은
약속하고 요청 한다는 사실의 단호한 입 증이 다. 이 극단적 비 판가들
은 클폐 벤트와 토마스가 사랑의 목표와 법 에 대 하얘 얼마나 높은 견해
를 가지고 있다는 사살을 잊어버리는 일이 너무 많마. 종합주의자들
에게 있어서는, 기독교안의 생활은 따치 여l 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종의 생활파 같다. 그들은 그들의 의무를 온천히 다했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들에서 알하고 식탁에서 시중들고 집 안팎을 정돈한
다 할지라도 여전히 냐는 무약한 종이라고 하는것이마. 그러나 이 무
익한 종이 끔날에 임금의 잔치에 초대받게 펜다. 그러하여 그들은 이
중의 준벼를 해 온 셈이 된다. 그들의 모든 천한 일이 기다리 는 마
음의 블꽃으로 말마 암아 변화를 받는다. 그들의 월급 봉투에 대한
대망이 아니라, 돈으로살 수 없는 값 없이 주어지는 기쁨에의 대망이
다. 거기에는 언제나 더 많은 것, 다은 것이 붙어 있다. 거기에는 연

146
제 4 장 운화위에 있는 그려스도

제냐 “이 모든 것파 그리고 또 천국”이 주어 지 는 것이다. 진정한 종


합 주 의자에 있어서는 그 더 많이라는 것이 애당초부터 계산에 들어

있 는 것이요, 추후에 덧붙여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러냐 문화석 기


독교에 있 어 서 는 추후의 생 각 (after thought) _으로 여 겨 지 기 가 일쑤이 다 .
교회뿐만 아니라 문화에 대하여도 종 합주의자의 공헌은 크다. 시 양
문 맹 사에 있어서 클레벤트, 토마스 등과 그 제자 및 동료들이 끼천
감화는 헤약릴 수 없 을 정 도로크다 . 예숭과 파학, 철학, 볍 학, 정 치,
교육 , 그리고 경 제 제 도 등에 싱원(深 遠)한 영향을주었 마. 이 그룹의

사 람들로 말미암아 헬라의 지혜와 로마의 법 이 현대 문화에 중개 되었


다. 우리 문 맹 안에서 가장 캉한 강화력을 가진 단 알 한 종교 제도안
로마 카툴럭 교회 를 형성 하고 지도한 사람도 그들이 었 다 . 그리고 그
밖에 비 교석 적은 범위에서 효과적안 공헌을 남긴 여러 종교 제도들
과 운동을 형성 하는 데도 그들의 협조가 컸었 다.
이런 식으로 그러스도와 문화의 문제를 다루는 것 이 신앙 생활과
교희 생 활 에 미 친 가치 를 회고할 때, 우리는 이 문제를 만드시 이런
방볍으로 다뤄야 한다는 것과 여기서 나오는 해당이 진리 또는 진리
들에 대 한 필연 적안 긍정이 되리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게 된다. 그
러냐 이 것이 진리의 전부요, 유 일 한 진리란 생각은 전 혀 부당하다.
종합주의 자의 특수한 공식 에 대 한 특정 한 반론은 옐도로 하고라도, 다­
릎 그룹의 기독교안들 눈으로 볼 해, 종합주의자의 기획 자체 안에,
그 자체 가 필 연적 오류(誤꿇)에 부딪칠 요소가 있 다는 것 이 다. 그리
스도와 문화, 하냐닝의 일 과 사랑의 일 , 일시적안 것과 영원한 것, 법
과 은혜 둥을 사상파 실 천의 한 체계에 넣어 버리려는 노력은 결국
거의 불가피 석우로 상대적안 것 을 절대화하며 무한한 것을 유한화하
며 생명적안 것 을 물질화하는 경 향 을 가지게 될 것 이다. 파조물의
구조 자체 안에 하나넙의 법이 새겨져 있음을 확 인하고 이성 을 사용

하여 그 법을 알고 또 그 법대로 자신 을 통어〔統細) 해 가 야 한마는 것


과 그 법은, 이성적안 언어와 개 냄 안에서 조행 된 마는 것은 로서 마 른
일이마. 그리고 이것은 언제냐 문화적 제약 아래 있는 것 이다. 창조
주의 법 칙이 상대적 성격을 가잔 모든 창조의 공식 안에서 충분허 안
식 펀마변 종합이 가능할지 모른마. 그러냐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
안에 주어 진 종합주의석 해답을 검로할 때, 창조어l 나타난 하나닙의

147
캡칙에 대한 문화석 견해와 그 볍 자체를 동일 시하는 폐단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마는 것이 사 실이 마. 인간의 천성에 대한 클띄1
엔트익 이해는 흔허는 슬플 정도로 지역석 특색을 지난다. 로마스 아
퀴나스익 자견 낄서에 대한 위계적 견 해 도 역사 적 이 요, 중세 기석이
다 . 지역석 , 역사석 진리들은 그 헨실에 상응한다는 의미에서 잔리 알
지 모르냐 역사 단펜석임을 연치 옷젤 것 이녁 , 따라서 지냐치게 강
조할 "'11 는 ù1 진리로 되는 것이마. 종합주의, 그것은 단펀석, 역사석
안 것으로 구상되었고 , 창조의 볍칙을 상대적 공식 안에서, 그러고
속량의 법칙에 ::J1한 단펀석안 예견과 함께 이해하고 있는 것안 만큼,
그 자 퍼 가 지역적이요, 상정 걱안 것이 되지 않올 수 없는 것 이다. 그
러므로 종합주의 자가 。 l 사실을 안정하는 경 우에는 그들 자신의 해맙
이외의 다른 것도 암아들얄 용의가 생걸 것 이마 . 그란 경우에 그는 사
실상 이 렇 게 말한 것 이다. 즉 모든 문화는 계속하여 우한허 변화하도
록 되어 있는 것 이 며, 짜라서 종 합적 요안에 대한 자기 들의 입장은,
교 회약 사회 구조 안에서의 사회석 엽적파 마찬가지로 알시석 이 요,
불확정 적인- 것이라고 말판 것이마.
토마스에 대하여 흔히 말하기블, 그는 그의 전 시대 를 통하여 역사
적 이해가 결핍되었 다고 한다. 현대 사상에 의하면, 이성은 계속적
인 역 사의 운행 안에 서 문화의 천 부문에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
그객으로 사회 제 도들은 그 속페 확삼히 항구석안 요소를 가지고 있
음에도 불-7-하고 우잔 꾀 변 하 는 것이어 서 , 모든 안 간의 엽적은 일시
석이요 지나가는 것 이 라는 기독교적 사고와 일치 되는 것이라한다.
종합주의 자가 이 사라져 버릴 것을 가지고, 어떤 의미에서든지 간에,
기독교안의 생활 에 대한 자기 학설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것.2..._로 여기
게 된다연 운화의 변천으로 말 0 1 암아 그것이 우l 협을 당하는 경우에,

그는 그 상부 구조를 보존하기 위 하에 그 일 시석 안 기 초플 수호하려


고 을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려므로 그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하겨 종 합 주 의석안 해답이 주어질 배 그 해답을 받아들안 사람들이
복음 자체 보다도 복음파 종 합판 그들의 문화를 수호 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완다는 것은 논리석으로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 이 두
가지가- 녁우냐 밀접하게 교착되어 있기 해 문에 항구석 복음시 잠정적
문화에 휩쓸혀 들어간 느낌을 준마. 복음파 결합원 문화가 중세 기 석

1 48
제 4장 운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이 든현 대적이든, 봉건적이든민주적이든, 농경 문화든도시 문화든간


에, 그리고 그 종합자가 로마 교회든, 영국 교회든 또는 프로테스탄
트이든 간에 그들은 그 문화의 보존파 회복을 위하여 헌신하는 경향
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종합주의 는 결국 문화적 기독교의 알종이
된다. 문화적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은 이 학파의 고질 이라 하
겠다.

그러고 종합을 위한 또 하나의 노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스도와


복응을 제 도화하는 경향을 가지 케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뱀이
교회의 법에 일 치하지 아니하고, 그의 은혜의 효능이 사회석 종교적
제 도 즉 교회의 직우에 국한되지 아니하며, 그리 스도의 주권 이 그의
후제자로 자처하는 사랑들익 통치와 동일시되지 아니한다면 그런 종
합이 가능하다고 생각될는지 모른마. 사회적 종교적 제도안 교회란
것이 다른 모든 알시적 질서와 같은 한 부분이며, 국가, 학꼬, 경제
제 도 둥파 마찬가지로 안간 엽석에 속 하는 것안 한, 종합주의적 해답
이 가능하게 펀 마는 것 안지도 모른마. 그러 냐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

가? 만 일 그러스도의 법, 은혜 , 그러고 통치 가 제도화된 것이 아니


라띤, 온갖 종합론은 여선히 잠정적안 것이 될 것이며 격렬한 꽁격 의
대 상이 될 것이 다. 그리고 자유하는 주닝의 행동 o 로 말마암아 개벤
또는 경질(폈젤)되어 사람들이 종교적 제 도에보다도 그러 스도 자신의
영령에 복종하도록 되 어 질 것이다.

이 모든 반대론들은 결 국 한 요점 A로 귀결된마. 즉 통일 파 평화는


기 독교안의 영 원한 희 망이 며 목표라는 것, 그러 고 안간의 고안〔考案)
우로된 일시적 구현인 이 통일은 결국 찬탈(옳짧)을 대 표한 것이어서 ,
시간이 영원의 권세를 행사하며 안간이 하나닝의 권력을 행사하려는
것이라는 점이마. 그러나 자기의 기도하는 바를 하나의 순천한 상징
적안 행동으로 여기고, 으 례 실수찰 수 있는 시도(試圖)를겸 손하게 자
인(自認〕하며, 하냐닝이 시작하시는 하나닝의 행위의 도움이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안간 편에서의 행위에 불파하마고 안 정하는 의마에
서 의 종합주의 라연 그것 은 다음의 운제 와는 전혀 다르마. 즉 하냐 닙
나라 안에서 모든 것이 합치되는 그 방법 대하여 권위적안 설명을 진
술한 것이라는 의마에서의 종합주의와는 천혀 다르다. 그러냐 선자 의
경우는 참된 의마에서의 종항주의는 아니 마.

1 49
토마스주의에 반대하는 다른 바판으로서 이원론자, 개변론자, 그러
고 극단주의자 들이 았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언급만 하고 넘어가려
는 것이 있마. 그것은 그러스도와 문화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에는 기
독교적 완전을 향한 등급을 설정하려는 경향 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살
이 마. 기독교안을 저급의 법에 순종하는 자와 고급의 법에 순종하는
자로 냐누며, “심리척 안 사람 "(psychi야)파 “영지적 안 사람" ( Gnostics) ,
세속적안 사람파 종교적안 사람 퉁으로 나누는 데서 생기 는 온갖 잘
뭇。 l 야에 포함된마. 기독교안의 생활에 단계가 있는 것만은 사살이
마. 그러 나 유한(有限)의 단계 를 계 속적 ξ로 올라가연 무한에 더 가까
와잔마든지, 또는 제도화된 질서 , 교육의 방법, 예배의 유 형, 판단의
표준 퉁이 그 단계 들파 상호 판계를 가지고 있다든지 하는 것은 결 코
아니다. 교안으로서의 책임성에 대한 성숙도에 따라 요구 사항파 기
대 사항을 조정하는 목회적 판리는, 영상 생활이 실제 생활보 마 더
그러 스도의 모습에 가강다든지 , 수도사가 경 제 안 또는 정치 안보다- 더
완전하게 그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판단과는 완전
히 다른 문제이다. 그 렌 판단은 인간파 죄안들의 염위 얀에서 는 할
수 없는 일 이다. 그러나 종합주의자들로서는 단계에 판한 이녕의 도
응 없이는 세상 생펠과 그리 스도 간에서펴 생판을 설합시켜 낼 수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문화적 기독교인을 제외한 모든 그룹에서 종 합주의자에게 제기 하는
반대론의 요점은 이란 것이다. 즉 종항주의자가 안간의 볍죄와 그러
스도의 쿠속이 절대 필요하며 위대하 마는 점을 아무리 고백한마 할지
라도, 사실상 그들은 모든 안간의 행위 안에 내포된 근본악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결하려고는 하지 않는마는 것이다. 이란 내용의 반대론
을 가장 효파적으로 제기한 사람이 이원론자들이으로 우리는 이제 。 l
주제 를 다음 장에서 다루기르 한다.

150
제 5 장

역설적안 관계를 가진 그러스도와 문화

1. 이원론자의 신학

그리스도와 문화를 종합하려는 노력 은 기독교사 전반을 통하여 날


카로운 공 격 의 대상이 되었다. 극단론자들의 항변에 의하면, 이 종합
운동은 결국 문화적 타협;으로 근엄한 복음을 위장한 변형이 어서, 생
영으로 안도하는 좁은 걸을 안야한 고속도로로 넓힌 것이다. 문화적
기독교안의 반대론에 의하면, 종합흔자들은 미숙한 고대 사상의 잔재
(殘澤)를 복음적 진리 인 것 같이 보존하려 는 자들이 다. 그러 나 가장 강
력한 반대 론은,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아닌, 또 하냐의 중립적 그룹
에서 제기 되었다 . 다시 말하면 “둘 다” 라는 업장에서 그리스도와 문
화의 운제에 해답을 제시하려는 또 하나의 그룹이다. 이 그룹에 붙일
더 좋은 이 름이 말견되지 않으으로 우리는 우선 이원 론자라고 부르기
로 한다. 그러나 마니교에서 하듯이 이 세상을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 , 하나 닝 의 나라와 사단의 냐라 동으로 양분하는 의미에서의 이
원론자란 말은 아니 마. 이 그룹의 사람들이 그리 스도와 문회에 대 한
종합론자의 결 합과 정 의 (定뚫)에 는 찬동하지 않는 것 이 사살이 마. 그
러냐 그러 스도에 대한 충성과 문화에 대한 책임을 똑똑히 구렬하연서
동시에 그 둘을 결부시 킬 정당한 이유 를 추쿠하고 있는 점에서는 그
들도 종함콘자와 같은 것 이 다.
만일 우리가 이원 론자를 이해하려연, 그들이 선 자리 를 주목해야 하
벼 이 문제 를 취급함에 있어서 그들의 입장을 이해 해야 한다. 그들에
게 있어서 는, 생활의 근본 과제는 극 단적 기독교안 들이 기독교 공동
체와 이 교적 세상 사이에 쿠분선을 그을 해 부딪치는 문제가 아니다.

151
문화적 기독교에서와 같이 언간은 어다서든치 자연파 충돌하게 마켠
이며, 그러스도블 문화의 정신적 세력 펀에 서 있는 분이라고 할 혜
의 문제도 아니다. 이원론자는 위에 말한 양자와는 같은 점이 있고
종합주의자와는 다른 점이 있다. 즉종합론자는 온건하고발전적인세
상을 그 마음 속에 그리고 있으나, 이원론자는 충돌 가운데 살고 있
으며 한 위대한 논쟁점 앞에서 살고 았다. 그 충돌은 하나닝과 안간
의 충돌이다. 그보다도 이원론지듣은 살존척 사상가들이므로 하나넘
파 우리 사이의 충돌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즉 문제
점은 하나닝의 의와 나의 의 사이에 놓여 있다. 우리의 모든 활동,
우리의 국가와 우리의 교회, 우리의 이교적 또는 기독교적 사엽, 이
란 오든 것들파 더불어 한펀어l 는 우리가서 있고, 그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닙, 하나닝 안에 있는 그라스도가 다른 한현이 된다. 이런 상황
안에서 보면, 그러스도와 문화에 대한 문제는 사람이 자신에케 괄을
질문이 아니라, 하나닝이 사람에게 물을 질문안 것이다. 이것은 기독
교인파 이 교도에 관한 질문 이 아니 라, 하나닝 과 사 람 에 대 한 질운
이다.

이 원론자 의 심리적 유래가 어 떻게 펀 것이든 간에, 문화 문제를 다


푸는 그의 논리적 출말점은 하나 님과 안간의 전쟁에서 생긴, 화해와
용서의 위대한 행위이다. 그 행위를 우리는 예수 그러스도라 부른다.
싹기에 충돌이 있었고 또 지금도 있다는 사 실 , 하냐닝의 은혜와 인간
의 죄라는 사살 들이 이 출얄점에서부터 이해되는 것이다. 이원론자
들이 이 출발점에 도달하기까지에 는 많은 난판이 있었다. 각자는 자
기 자신의 의지가 아난 다 른 어떤 의지로 말 마암아 자기의 가던 걸-읍
정지망하고 또 그 걸에서 전헝:되기 전에는 잘뭇된 길로 걸어가고 있
었다는 것을 만감하게 지석하는 것이다 . 하냐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
은 자명한 이성의 진리로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 마. 그렇게는 어느 한
사 랑에게도 주어졌으리라고 맏지 않는다. 어떤 운호}석 기독교인, 말 하
자연 자연신론자 CDeists) 같은 시람들은 。l 렌 신념을 가진 자의 부류
에 속한다. 최란 용서받게 되어 있 A며 , 그 용서가 곧 은총이라고 생
각하는 것은 그러스도의 심자가에 나타난 패악 (1추惡)파 선량〔 善良)의
갚음파 높음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은혜에 대한 갚앙파 그와
상관된 죄에 대한 지식- 이것윤 십자가릎 통하어 온마-은, 하냐닝

152
제 5장 역션적안 판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

자신인 진리와 선의 형상을 모독허며 파기(破棄)하려고꾀하는 안간들


이 살고 있는 이 무서운 세상에 진지하게 직면해 보지 옷한 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신의 자비와 인간의 도덕적 과요를 안이하게 수락하
는 것과는 온전히 다른 질서에서 나온 것이다. 이원론자의 출발점언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기적이다. 즉 아무 공로도 없는 죄안들을
값 없이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며 회개와 희망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기적이다. 즉 그들의 생활을 주장하는 암흑의 세
력, 특히 죽음에서 구원하여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것들을 통챙자가
되게 하는 기적이마.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명령하는 교훈은너무높아
서 날마마 그들은 그 교훈파 그리스도 자신을 거부한다 할지라도 그
리 스도는 여전히 그들의 쿠주로서 , 그들이 타락할 때 마마 다시 끌어
올려 생명의 걸에 서게 하는 것이다.

하냐 넙의 은혜의 계시에서 이 새로운 출말이 이루어졌마는 사실은,


은혜와 죄에 판한 한 그 근본적인 상황이 변할 수 없마는 말이 된다.
은혜는 하나닝 안에 있고 죄는 안간 안에 있다. 하냐넘의 은혜란
mana 와 같은 능력이 아니며, 안간의 행동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중
개될 수 있는 어떤 살체가 아니다. 은혜는 언제나 하나닝의 행동 얀
에 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것은 인간이 하냐닝파 대결하
는 역사석 전쟁의 완층지대를 넘어서 인간에게 도래한 화해의 행위이
다. 그러스도의 은혜스러운 무엇이 그 은헤스러운 챙동에 감격한 바
울이나 루터의 응답 속에 반사되더라도, 바울이나 루터 자신은그것을
의식하지 도 옷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본다 할지라도 한 반영
Creflection)~로 밖에는 보지 않는 것이다. 그 은혜스러움을 사람들이
자기 자신 얀에 놓A 려 할 혜에는, 그것이 즉석에서 사라지고 만다.
마치 내가 냐의 은인을 배반하고 그것이 냐의 녁행이라고 생각할 째,
그 은혜 끼친 이에 대한 나의 감사가 사라져 버리는 것파 같다. 주를
알고 그에게 나아와 그를 신뢰하는 믿음은 믿는 그 자신의 본래의 가
능성에서 우러냐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냐닝의 신살이 반영된 것

이다. 그가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냐님과 사랑의 만남에 있어서 사람이 그 화해의 말씀을 들은 후의
상황도, 듣기 전 상황과 마찬가지로, 은혜는 온천히 하나님 펀에만 있
는 것이마. 그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넙의 은혜임파 동시에 은찌

153
의 하냐닝이시다.
그러냐 죄는 사랑 얀에 있는 것야요, 사랑은 최 얀에 있는 갯。1 다.
십자가에 옷박한 영광의 주 앞에 설 해, 인간들의 모든 사엽과 얼을
주의 선 (훈) 의 표준에서 보면 아주 부적당한 것 일 뿐 아니라, 더렵고
타 락된 것임을 알게 펀마. 인간 부패성의 뱀위와 그 철 저성에 대한
이 해에 있 어서 는 이원론자와 종합론자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마.
그 병위에 관하여는, 클레멘트와 토마스,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말하기 를, 안간의 이 성 이 흐려질 수 있 다. 그러나 그 본성이 방향율
잘-뭇 잡은 것 은 아니 라고 말한 다. 그들에 의 하면 냐쁜 추론(reasoning)
을 고치는 걸은 더 좋은 추폰을 제공하는 데 있마. 그러 고 신적〔神的)
안 교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 다. 뿐얀 아니라기독교적 형 식 안에 있는
안간의 종교적 문화, 즉 거룩한 교회의 제 도와 교리는, 그 거 룩한 제
도 안에서 고쳐야 할 소소한 악들이 아우리 많이 또 자주 나타 난다
할지라도 여전히, 악한 부패 의 권외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러
냐 루터의 부류에 속 하는 이원 론자들은 안간의 모든 행위에 부패와
타락이 있음을 인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계시된 하냐
넙의 거룩함 앞에서는, 철학자의 지혜 와 우식 자의 우둔함이 다를 것
이 없으며 , 살인자의 죄와 법판의 처 형 사이에는 다틀 것이 없 다. 모
독자로 말미암아 성소를 더럽히는 일과 제사장들로 말미 암아 그것을
성 결 하게 하는 얼도 다를 것 이 없으며, 욕정적안 뱀죄와 영적인 옐광
사이에 도 마름이 없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들이 온천허 꼭같은 것이
라는 말은 아니다 . 다만 하나닝의 거 룩하섭 앞에 대연할 때에는 거기
에 중대 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마. 마치 제일 높은 고층
건을파 가장 낮은 오막살이 블 비 교하는 것이 버l 텔고이 세 ( Betelgeuse,
오 리온 성좌에 있는 제일 높은 옐 이 픔 역자주)앞 에 서는 문제 가 되지 않

는마는 것파 같다. 인간 문화는 부꽤한 것이고, 그러고 이 부패는 모

든 인간의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 들의 엽석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안간의 엽적 으로서의
철학만 이 그런 것이 아니라, 신학도 그런 것이다. 유대 율뱀을 변호
하는 유대안뿐 아니라, 기독교석 교훈을 변 호 하는 기독교안도 마찬가
지이다. 만일 여기서 우리가 이원론자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 일 만은
꼭 기억해야 한다. 즉 그는 다른 사 람을 심판하지 않는다〔자기가 볍

154
제 5장 역설적안 판계를 가진 그려스도와 운화

한 죄 혜문에 하나닝 앞에서 자거의 주장을 포기하치는 하지만). 다


만 자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나누일 수 없이 자기와 연합되어 있는
천 인류, 그러고 또 자기 자신에게 내리고 있는 성판에 대하켜 증언
할 뿐이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의 최에 대하여 말할 해, 이들은 바
울이 유대교 율법을 열심£로 지키연서 그러스도를 박해했던 사살과
루터가 수도원척 서약의 문자와 정신을 지키기에 열렬하였던 사살을
들어 설명한다. 이들은 이성의 부패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진리 탑
쿠자가 진리에 도달하려고 열성 6 로 노력하연서도 이루지 못하는 것
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부-패에 대하여 말한마는 것은 결국 문
화인이 면서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닝 은혜 의 거 룩함과 대 연한다는 엽
장과 상황에서 말 하는 것이다. 마음£로 기억해야 할 점은 , 하냐넘
앞에서의 인자의 태도란 인간이 다른 여러 가지 갱우에 취‘하는 태도
에 덧붙여 가지는 또 하나의 태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자연이나 타인이나 또는 이성의 개냄 같은 것을 직연한 후에 하
나 닙께 가지는 부차적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하나넙파 대
변한마는 것은 근본적 이 요, 상존적 (常存的 ) 안 상황이 다- 사랑이 자기
가 하나 닝을 항거하고 있다는 사실, 또는 그가 “무 엇(i t)에 항거할해”
그카 항거하는 대상이 하나닝이라는 사살을 끝까지 무시하려고 끊임
없이 시 도한다 할지라도 그러하다.
문화의 부패성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도 이원론자와 종합론자 간에
차이가 있다. 죄의 종교적 의마가 도덕적 또는 지적〔知的) 용어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는 두 학파에 서 마
안정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마만 이원론자는 파조물적, 인간적, 지
상적안 것들이 거룩함 앞에 대변할 혜 자기들의 부정을 느끼는 정도
가 더 심원하마는 것일뿐이다. 1 자기의 선을 주 장하기 위하여 하나
님께 항변하던 용 이 결국 고백하기를 “내가귀 로 당신에 판한 것을들
었읍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눈이 당신을 보고 있읍니마. 그러므로
내가 냐 자신을 증오합니 마. 그러고 먼지와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한 것 같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나타난 하냐닝의 거
룩함은 너우나 정밀한 성격의 것이어서, 은혜의 부정적 측면을 이루는

1. Cf. Rudolf Otto, The Idea of the Holy , 1924, pp, 9ff.; A. E. Taylor.
The Faith of a Moralist , 1930 , Vol. 1. pp. 163 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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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간의 최를 그 렌 막연한 원시적 강정의 용 어 로 정의하는 것 을 허용하
지 않는다. 부정, 부끄러움, 불결 , 더럽힘 풍의 느낌은 안간의 자아
와 그 사회 의 본성 에 대하여 객관적인 도덕적 판단을 내렬 해에 따라
오는 강정이마 . 여기에 하나넘 앞에 선 사함이 있다 . 그는 하나님께
로부터 그의 생영을 받았마. 하나닝이 받들어 주고 하나 닝 이 용서하
셨다. 하나 닝 에게 사 랑을 받았고 생명도 받았다. 그렌데 이 안간이
자기의 생명괴- 자기의 존재의 근거안 그이 를 공객하는 데 가담하고
있마. 그는 그가 거부하는 바로 그 행동에서 자기가 주창해야 할 그

이 를 부정하고 있는 것 이다. 그는 그분의 진실하성 없 이 는 반역 할


수조치 없을 그분을 만역하고 았는 것이다. 모든 인간 행위, 모든 운
화는 죄의 본잘인 무신성〔無神性〕으로 플들 여져 있마. 무신성 이 란 것
은 하냐넙 없이 살려는 의 지로 나타난마. 그를 무시하고 자기 자신
이 자기의 근원과 시초가 되려고 한마 . 그에게 신세질 것도 없고, 용
서받을 것도 없다고 한다. 자기 자신 안에서 독립과 안정을 가지려
한다. 결국 자기가 하냐넘치 럼 되려는 것이다 . 여기에는 수천의 다른
형식이 있£며, 그 표현 방법 에 있어서도 가장 장 마한 방도릎 보이고
있다. 독선적 도 덕의 자기 만족과 자기 획증적인 이성적 안간의 자기
만족A로 냐타난다. 그러나 이란 모든 것이 마 헛되 다고 실 망하는 형
태 로도 니-타난다 . 이것은 이 종교성, 무신론, 반신론 등으로도 나타 난
다. 그러나 가는 데마다 하냐닝을 의식 적무로 이끌고 다니는 경건 한
형 태 로도 나타난다. 이 것 은 하나닝 이 재 가(我可)하신 바라는 주장으
로도, 어떤 사회의 볍을 공격하는 데 열렬한 모양으로도 나타나며 율
볍도 잘 모르는 법 밖의 인간들보 마 자기 가 휠씬 우월하다는 안정을
받지 않고는 마음이 풀리 지 않는 옐 렬한 준병 주의 자로도 나타난다. 영
속적안 신성 제 국을 창건하려는 노력에 실 패 한 후, 하나님의 은혜에
서 독럽하려 는 욕망이 결국에는 교리와 성례 천 속에 모든 필요한 진
리 와 은혜 를 처장해 둔 신적 (godlike) 교회 를 섣립 하는 운동으로 표시
펀마. 깅-자의 도먹을 통하여 마른 사람 들에게 자거의 의지 릎 부파
시킬 수 없음을 알 혜, 신이 되려는 의지 는 노예 도덕의 방법을 채택
한다. 인간이 자기 육신의 운명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 마는 것을 확

인할 해, 그는 그가 믿는것 들은살 제로 그자신의 통어 (純細) 밑 에 있


다고 생 각한다. 예 를 든다 면 진 실 , 정절 같은 것 은 자기 가 하려연 할

156
제 5장 역설적언 판겨l 를 가진 그리스도와 운화

수 있는 것으로 여 71 고 자기 정직 밑에 스스로를 숨기려 한다. 이 〈녕


역 얀에서는, 적어도 그는 은혀l 없이도 살 수 있는 독립된 한 선한
사랑, 자력으로 공급하지 뭇할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신(神)처럼 살려는 의지, 즉 하나넙 없이 살려는 의
지는 인간의 가장 고상한 노력 속에 나타난마는 첨을 이원론자는 즐
겨 지적한다. 그고상하마는 것은물론 인간적 표준에서 하는 말이다.
이치블 짜지는 것이 자기의 직우라고 생각하는 안간들은 이성을 높여
만블의 성판자, 통치자의 자리에 앉혔마. 그들은 그 이성을 인간 안
에 있는 신적 요소라고 부른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직무를 맡은
사람들은 법 률을 신화(神化)한다〈부분적 4로는 자기 자신들도 신화한
다). 독립적이요 만주적인 시만들은 어떤 권위 아래도 있지 아니한,
한 권위적 인 자기 양성 얀에 한 작은 신을 가지고 다난다. 기독교안

£로서의 우리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자가 되려 하며, 사람융


사랑하는 자, 그러스도의 새로운 성육신 노릇을 하려 하며 쿠원받은
자라기보마도 쿠원하는 자가 되려고 한마. 우리를 차지하시고 우리
를 택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주넙 에게 의지하려는 것보다도 우리 자
신이 획 득한 참 종교 안에 안거 〔安居〕하려 한다. 우리 가 하나넙 을 우
리의 통제 하에 두려고 꽤한다는 표현이 너무 지나친 것얼지 모른다면
적어도 우리가 하나닙 펀에 서서 세상파 매결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
안되기 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떤
안정도 없다는 생각S로 우한한 신뢰심을 가지고 세상과 함께, 오직
그리스도만을 향하여 산다는 태도블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이마.
이리하여 이원론자들의 견해에 의하변, 문화의 전당은 전체적으로
균열(龜 짧) 이 생겼고, 미친 듯이 기울어졌다. 자기 모순 속에 았는 건
축 기 사가 지 각(地뤘)의 갈라진 단층〔斷層) 위 에 하늘을 동경 하는 탑을
세우는 것파 같마. 종합주의가 법과 사회 제도들의 합리적안 내용을
즐기는 반변에, 이원론자는 궤변학자와 살증주의자들의 회의론파 더
불어 집권욕(執빼: 愁)과 모든 사회적 제도들을 스스로 합리화하는 강
자〔꿇者)에의 의지 블 지석하여 이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군주들, 귀
족둘, 민주주의자들, 중산 계급과 무산 계급, 그리고 감독교회, 장로
교회, 회중교회 둥에 있어서, 아무리 이성의 부드러운 장캅으로 권
력의 손을 가리운다 할지라도 그것이 온천히 숨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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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올 지석한마. 괴-학의 노직 속에서 이성은 혼란돼 있다 . 그것은한펀
으료는, 온천히 중럽적안 태도로 둔제를 처리하는 겸허성을 발휘하연
서, 마흔 한편A로는 힘을 위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 배문이었다 . 운
화 내에 있는 이성적 요소들에 대한 종합주의자들의 모든 변호론에
서 이원론자들은 이 치영석인 결점을 발견하였다. 안간의 일플 안어l
있는 이성이란 것은 결코 그 이기 석, 우신성, 왜곡(줌따1)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시유재산 제도른 말한다연, 그것이 다만 도
둑을 막아 준마는 의미만이 아니라, 강제 로 페앗거나 안다안에게서
속여 얻은 토지에 사는 정착만을 보호하게 원 해와 같이 외국안의 소
유를 약달하는 것도 안정해 주게 된마는 것이마. 합리석안 제도는 커
다란 윌-합리 위에 건설되 어 있마. 독신(獨身)과 결혼 제도는 수많은
죄 플 막~을 뿐 이 나 마 덮어 주고 있마. 그러으로 이원론자들은 인간 운
화 전체 가 우신적 C4!Th mili的)이 요 죽음에 이 르는 뱅 이 라고 선언함으로써
극단 론자와 보조(步쐐)블 같이하는 셈이 된마.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또 이런 마른 정도 있다. 즉 이원론자는 그 자신도 그 운화에 속해
있는 자로서 도저히 가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고 하나닝께서 문화 얀에서, 또 문화로 말미암아 그를 붙들어 주
신다는 것도 알고 있마. 만 알 하나닝께서 그의 은혜로 이 죄악 중에
있는 세상을 붙들어 주시지 않으신다연 이 세상은 1 분동 안이라도존
속할 수 없거 때문이라는 것이마.

이런 상황 속에서, 이원폰자는 역설 (paradoxes)이라고 보여지는 언


어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완다. 왜냐하연 그는 안간 펀 에
서서 하나닝을 만나지만 , 그가 들은 하나닝의 말씀은 인간 펀이 아난
처쪽에서 오는 것으로 설멍하려 하기 때운이다. 이 긴장 속에서 그는
계시와 이성, 율볍파 은혀], 창조주와 구속주 등의 대립된 형태의 용
어로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그의 말이 역설적일
뿐 아니라, 그의 챙위도 또한 그러하다. 그는 율볍 아래 있다. 그러
냐 율볍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것이다. 그는 최언
이지만 의롭다. 그는 의심하는 자 같A나 믿는다. 그는 구원의 확증
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칼날 위로 걸어가는 것같이 불얀
정하다. 그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로와졌다. 그러나 모든 것은
맨 처음의 그것과 같은 것 A로 남아 있다. 하냐닙께서는 그리스도 안
158
제 5장 역설적안 판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

에 그 자신 을 계시하셨다. 그러나 계시 안에 그 자신을 숨기고 계신


다 신자는 그가 멈는 이가 누구인 것을 알고 았다. 그러나 그는 믿
음으로 말미암아 걸으며, 보는 것 4로 걷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역설적안 서술 가운데서, 그러스도약 문화의 문제에 대한
이원론자의 해답을 위하여 특히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율법파은혜, 그러고하냐닝의 진노(震愁)와긍흉이다. 이원콘자는그
리스도의 법 이 모든 사람에게 권위로 임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의미에
셔 극단주의자들과 요조를 같이한마. 그러고 그것 을 문자 그대로 받
이 플야 려 는 점 과, 문화적 또는 종합폰적 기 독교안들이 복음의 교훈
을 문화적으로 희미하게 만들려는 데 대한 반대 운동에 있어서도 극
단주의자들파 동조〔同調〕한마. 그리스도의 볍은 인 간 본성의 법에 덧붙
여진 것이 아니라, 평뱀하고 정상적인 인간들을 위한 법전이라는 것
이다. 그것은 어떤 정신적 초인〔超人)을 위한 특수 규율이 아니라는
것 이 다. 그러 나 인간이 자기 수양(修養)으로 그 율법 또는 그 밖에 다
른 율법 올 잘 지킨다 하더라도, 그것무로 말미암아 그가 자기의 범죄
적안 딜페머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그들은 주장한
다. 그리고 이 법이 자기들의 터전이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제도들,
가령 수도원 규정 , 평화주의 자들의 판례 , 공산주의 적 공동체 등도 그
우신적, 이기적인 죄악에 있어서, 그들보마 더 조잡한 양식의 판습
또는 사회보 마 나은 데가 없다는 것이다. 안간의 손 안에 있는 하나
님의 법 은 죄의 도쿠이 다. 그러나 하나넘께로부터 오는, 그의 업으로
부터 들려 온 하나닝의 엽은 은혜의 방펀이 된다. 그러나 그 빙펀도
일종의 소극적안 앙펀이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살망하
케 하고 뜰 이켜 하나님을 항:하게 하는 의미에서의 망펀인 것이마. 그
러하여 죄 인이 하냐님의 긍흉 속에 자기 자신을 먼지고 그 긍흘만 믿
고 살 폐 그 법은 하나의 새 형식 4로, 그 사람의 심정에 씌어지듯
이, 회 복된다 . LH 적 본성의 엽이요 어쉰 외부적안 계영이 아니다. 그
러면서 도 이 엽은 역시 하나남의 법이어서, 자기 자신의 법이 아니라
타자(the Other)의 의 지로서 용서 받은 자에 게 주어 진마. 이 리 하여 볍
어} 매한 대화가 진행된마. 이것은 역설적안 것£로 보인다. 왜냐하연
그것은 하나의 독백(獨白) 의 형식으로 진술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마.
즉 하냐닝파 인간 영흔의 극적인 만남과 재회의 장변에서만 명백해지

15.9
는 의 미 를 말하려 하기 해문이다. 01 위대한 행동에 대한 이원론자들
의 속기록을 보연, 안간 생활의 뱅은 결국 율법이 아니요 은혜이며,
그 은혜는 은혜가 아니라 안간에게 과한 무한한 명령인 율법이다. 사
랑은 불가능한 가능이며 구원의 희망은 그렬 성싶지 않은 획중 이라는
둥을 말하려는 듯하마. 이란 진술은 추상적 S로 말한 것뿐이다. 그살
재는 사람파 하나넙 사이에서의 끊임 없는 내화와 갈둥이다. 그 물음
파 대답, 패배같이 보이는 하나넘의 승리, 승리로 바뀌는 안간 패배
둥으로 계속하얘 나타난다.

이원론자가 그의 역설적인 언어로 진숭하려는 상황은, 하냐넙 앞에


서의 안간은 단순한 통일성에 직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살에서 더욱
복잡하게 펀다 . 이원론자는 언제나 삼위일체론자이다. 적어도 이위
(二位) 일체론윤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 성자와 성부위 판계는 역
동석 (dynamic) 이 다. 그러 나 그들은 그 밖에 자연 속에 와 그리 스도와 성
서에 나타난 제시에서 보는 대 로 하나닝 안에는 긍흉과 진노의 이원
성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안간은 자연에서 이성, 질서, 그러고 생영

을 주는 션을 만나볼 뿐 아니라, 또한 폭력, 충돌, 그러고파멸도만


난마. 성서섹서 그는 “재앙야 한 도시에 맥렀는페 그것이 주께서 하
신 일이 아니겠느냐? .. 하는 예언자의 말을 듣는다. 그러고 성자가에
서 ‘7.는 인간 사악의 희생 A로서뿐 아니라, 만물을 주재하시는 권능
자의 손으로 죽음에 내 어 줌을 당한 하나닝 의 아들을 본다. 그러 나
이 십자가에서 우리는 안간의 속량을 위하여 값 없이 그 자신파 그의
가장 사랑하는 자를 주시는 자미에 판한 지식을 얻는마. 진노로 보이
던 것 이 지금은 고쳐 주기 위 하여 펀달하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러
냐 이 사랑이 또한 영령으로 되어 사랑을 멸시하고 반역하는 자들에
게 진노로 나 타난다. 진노와 사랑은 끝 날까지 서 로 영 키 어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원론자의 빠지기 쉬운 유혹은 이 두 원리를분
리하켜는 것이마 . 그리하여 두 하나닝을 모시거나 신격(미),格)에 두 구
분을 만들거 나 하는 일이다. 진정한 이원론자는 이 유흑을 물 리친마.
그러나 계속석£로 긍흘과 진노 사이에서 생기는 긴장 안에서 잘아간
마. 그가 문화의 문제를 마룰 째 그는 안간 시-회 생활의 암흑연을 잊
지 뭇한마. 마시 말하면 악덕, 범죄, 전쟁, 처벌 등이 자비하신 하냐
닝의 손에 쥐안 우기이며 동시에 안간의 분노와 불신 태도의 확증이

16 0
제 5장 역설적안 판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운화

라는 것을 언제냐 생 각하고 있다.

2. 바울과 마르시온의 이원론적 동기

그리스도와 문화의 운제에 대한 위의 해답들에서보다 이원론의 경


우에 있어서는, 에떤 사상 유파를 논하는 것보다 그들의 사고 안에
있는 동기 (motiJ)를 논해야 한마. 이란 땅향의 연쿠에 대한 비교석 영

백하고 체계화된 실례들을 말견한다는 것은 마른 경우보마 더 곤란하


다. 그리고 그 동기가 흔히는 운화 문제의 어떤 특수 영역 안에 국한
되거나 마소 격리된 상태 안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어떤 사상가에 의
하여 。 l 성과 계시를 마루는 데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마. 그러나 그
사상가가 정치 문제를 논할 때에는 이것을 적용하지 않을는지도 모른
다. 이 동기는 이성파 계시의 운제 해결에 있어서 종합주의자들의 해
결과 더욱 비슷한 태도를 취하는 신자들이, 정부와 전쟁에 기독교안
이 가담할 여부〔與否)를 토의하는 중에도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 이

것이 많은 기독교안들의 사상 가운데서 중요한 위치블 차지하고 있 A


나, 특히 루터 같은 사람의 저서에는 그 동기가 너우냐 강력하게 캉조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하냐의 쿠 옐판 그룹 또는 학파로 간주하는
것도 허용될 것£로 생각된다 .
바울도 그런 그룹의 한 성 원(成員)이 라고 간주할 것 인지 아난지 는
별문제 라 할지 라도, 후기 에 그러 한 그룹의 대 표자들이 된 사람들은 그
의 정신적 후손이 란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고 그 동기는 종합론자, 극
단론자들-운화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의 사상 경향에서보다도
바울의 사상 가운데 더 단호하게 나타냐 있다. 바울이 본 대 로 말한
다연, 안생의 문제점은 하나닝의 의와 인간의 의 사이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한다면, 하나넘 이 선하시 으로 사람을 선하게 만들려 고 원하는
그선과, 사량이 스스로자기 자신 안에 가지려고추쿠하는독럽적선
의 두 가지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시와
화해와 영 강의 계속적 행동으로 말마 암아 안생의 운제를 정의 〔定義)
하시며, 해결하신다. 예수 그리 스도가 이 인간의 생활과 사상 안에서
그 중섭이 되어 있다는 점에 대하여는 더 말할 역지도 없다. 그 사람

161
에게 있어서 그퍼 스도는 ‘하냐 닝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마. 그
는 하냐닝의 심판의 중보자이며, 사죄 Ci/&.罪)를 위한 제물이며, 사람을
하나닝에게 화목케 하는 자이며 , 평화와 영생을 주는 자이며, 성령 이
시며, 사람을 위한 대도자(代j함者) 이며, 교회의 머리요, 새 안류의 시
조요, 보이지 않는 하나닝의 형상이며, “한 주닝이어서 그를 통하여
만물 이 있고그를 통하여 우리가 존재하는” 분이시다 . 그의 십자가 위
에서, 바울은 세상을 향하여 죽었고 세상은 바울을 향하셔 죽었다.
이제부터 산마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
도 아래서의 삶을 의마한다 . 그러스도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며
아무것 도 원하지 않는다 . 이 사도의 그리 스도는 예 수였 다. 나사렛 의

랍비 를 바울의 주와 일 치시컨 것이 문제될 수 있었던 때는 파거이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 상에서 보았고, 그의 마음 안에 거하고 , 그의

몽파 영혼을 차지하신 이가 곧 죄인의 친쿠요 자기 충족적인 의안의


심판자이며 산상 설교에서의 예엔자, 입법지-시요, 바울의 동료인 유
대인에게 정죄받은 명자들을 고진 자시며 , 그의 동료 로마언에게 섭
자가 행 을 받은 자시 요, 동료 사도들에 게 육신으로 냐타났 듯이 바울
에게 부활하여 보이신 그분이었다는 것은 가장 확실한 사실이마 2
바울의 입장에서 본마연, 그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닝과의 만넘-은운
화석 제도와 특정들, 모든 인간적 엽적을 이중의 의미에서 상대화하
였마 그것들은 모두 죄 아래 포함되었다. 그럼에도 불쿠하고 안간은
주닝의 은혜의 거룩한 침입을 향하여 열려 있마. 인간이 문화적 S로
유대 안이 든, 이 방안이 든, 야만안이 든, 헬 라인이 든, 하냐닝 의 진노 앞에
서는 법죄한 안간으로서 같은 수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닝의 신
노는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결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났다 이성을
통하여 알려진 법이든 파거의 계시를 통하여 알려진 법이든 간에, 그
것은 곽같이 안간을 정죄한다. 또 그 볍은 인간의 불법파 자기중성
주의 에 서 쿠출하는 데 꼭같이 무능력 하며 , 꼭같이 하나닝 의 진노와 은
혜의 도구로 되어 있다. 하나 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영광파 은혜를 계시하싱£로써, 모든 불신앙적안 종교를 정최하셨다.
그 종 교가 안간이 나 새 , 짐 승, 파충류 CJIIfl蟲類) 동의 형 상을 예 배 하는
것이든지 또는 토라(율법)를 믿는 것이든, 의식 을 강조하는 것이든,

2. C f. 특히 F . C. Porter , The M ind of Christ iη Paμ1 , 1930.

162
제 5장 역설걱안 판계를 가진 그려스도와 문화

윤리적 법을 지키는 것이든 간에 하나넘 앞에 서 정죄받는 청에서는


다 마찬가지이다. 이성에 근거를 둔 지식이든 계시에 근거를 둔 지식
이 든, 예수 그러스도의 얼굴에 나타 난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에 비하
면 아우것 도 아니다. 그러스도께서 현자의 지혜와 선한 자의 의로 웅­
을 멸하셨다. 그들은 다 각기 다른 방엽으로 그러 스도를 배척하였 a
나 그 배척한 정도는 동일하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께서 무지한 자의
어리석음파 약한 자의 법행올 시인〔是認)한 것은 아니다. 이련 자들도
죄 아래 포함되어 있으며 죄의 백성 A로 매여 있마. 만 일 가장 고귀
하다는 안간의 정신적 성취가 그러스도의 영광스러운 엽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의 섭자가의 빛으로
비추어 불 해 그것이 부패한 것으로 나타난다연, 플러적 가치의 전적
부석당성과 부패를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이란
판련 속에 서 바울이 만 일 가정 , 학교, 국가, 종교적 공동체 등의 운
화 제도에 대하여 더 정밀하게 말할 기회를가졌더라면, 그는 같은모
양£로 그것 들을 마루었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의 불의플 빛 가운데 드러내셨다 .

그러냐 운화 안의 어떠한 위치에서든, 그러고 모든 문화 속에서 문


영 생활 안에 있는 모든 안간의 활동파 지위가 우엇이든, 그들은 모
두 그러스도의 쿠속 사엽의 공석에 역시 동일하게 종속되었다. 그의
십 자가와 쑤활을 통하여 , 그는 그들을 그들의 자기 중심 성 이 라는 감옥
과 죽음의 공포와, 절망과, 불신앙에서 구속하셨다 십자가의 말씀은
결혼한 자와 결혼 안한 자에게, 도덕가와 부도덕한 자에게, 종파 자

유안에게, 복종 하는 자와 불복종하는 자에게, 지혜 로 운 자와 어리석


은 자에게,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다 함께 임하였다. 이 속량A
로 그들은 새롭게 났다. 그들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닝 안에서
새로운 출말을 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로부터 강럼하는 새로운 영을
받았다 . 외부로부터의 강암을 느끼는 것 없이도 하나닝에 대한 사랑
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들을 강앙하게 되었다. 이것은 율법 A로써
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던 것이마. 죄에서 자유함을 얼고 율업에서
자운함을 엠는 그들은 사랑의 능력을 받아 의를 즐기며, 법사에 참A
며 , 친절하였다. 그러스도의 영의 내석 샘에서부터 사랑, 기쁨, 평화,
안내, 친절, 착함, 진 살, 온유, 극 :;-1 (克己) 등이 흘러 나온마. 새로운

163
기독교 문화의 업법자로서카 아니라, 그러스도는 삶의 새로운 원리
중개자로서 새 인류를 창조하는 위대한 사엽을 하셨고 또 하고 계시
는 것 이다. 그 삶은 하나닝파 더불어 있는 형화의 삶이다.
。1 것올 모두 종말론적 용어로 설명한다는 것은 잘못일지 모른 다.
다시 말하연, 바울은 안간 문화를 당장최후 성판 앞에 서 있고 새 시
대가 곧 시작된다는 견지에서 보았다는 듯이 섣명하는 것은 부망한
지 모른다. 그리 스도의 십 자가에 서 안간의 노작은 성 판받았다. 그리
고 그의 부휠에서 새 삶이 이미 역사 얀에 도입되어 왔다. 누구든지
하냐념의 선과 모든 불경건에 대한 하나념의 진노에 눈 돈 사랑이라
면 누구나 인간 문화가 이미 심판받았고 정죄받았다는 것을 밝히 얀
다. 만일 오래 참으시는 안내가 어떤 사람파 그 사람의 행위를 더 오
래 제 속되케 한다연 , 그러고 최후의 섣만이 지연펀마변, 그것은 바울
의 복음을 더 멀리 전 파 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 속에 결 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새 삶은 다만 열 종의 약속이나 희망 일 뿐 아니
라 현재석 실재이다. 그것은 사랑야 하나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파

자기 자신 및 자커 사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의 영얘를 맺는 것으로


입증될 수 있 다. 언간 실존 안에서의 대 혁명은 지냐간 일도 아니요
장차 올 일도 아니다. 이것은 현재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스도의 엽적과 안간의 노작을 이렇게 이해함으로써, 바울은 극
단척 기옥교안 처럼, 새 기독교적 율법을 가지고 자기와 자기 제자들
을 운화 세계에서 이탈시켜 구원받은 자의 걱리된 공동체 안으로 옮
겨가는 일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안간들의 믿음 없고,
희망 없고, 하나닝 없이 사는 온갖 행동과관습에 가담하지 말라고경
고한 것은 당연하다. “-욱신의 일들은 분명하다. 폼 읍행과 부정과 호
색파 우상숭배와 복술과 적의와 분쟁파 시기와 분노와 이기와 분리와
작당파 투기와 술취함과 방텅-과 또 그 비슷한 것들이니, 그런 일하는
자들은 하나넘 나라를 유엽£로얻지 옷할것이니라”하였다 3 그러나
이 런 악한 잎들을 별리한 사랑은 그것 해문에 하나넘 나라블 상속받을
것이라고 암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고 선한 도녁적 습판A로 훈
년하는 것이 성령의 은사를 받키 위한준비의 한계단고 말한 것도 물
론 아니다. 칼라디아안파 고런도안, 할려1 당파 신령파 등의 신도로부

3. 칼 5 :19- 21.

1 64
제 5장 역 섣척안 판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

터 그카 배운 것은-얀알 그가 형생 그러스도와 복음을 가지고 씨릉


한 나머지 배워야 할 것이 있었다연- 곧 반〔反)가독교 정신은 이교
문화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새 법£
로 엣 법을 대치하거니- 헬라 철학의 자랑을 기독교적 영지 C靈첩1 )의 자

랑 o 로 바꾸는 것으로도 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퉁알 것이다.


죄의 첨투력은 신자의 행동파 생활의 어느 부문에든지 퍼잘 수가 있
다. 애 찬(愛 餐)을 베풀연서 미워할 수도 있으며, 방언을 말하연서 영
적 교만에 빠질 수도 있고, 쿠제하거 냐 순교하연서도 죄를 범할 수

있다. 그 전쟁은 혈파 육의 전쟁이 아니고 인간의 마음과 섭정 안에

있는 영적 원리들 사이에셔 되는 싸웅인 만큼 그 공격에서 피할 곳이


없는 것이다. 새로운, 기독교 문화라는 것 안에서도 피난처 를 말견할
수논 없는 것이 마. 기독교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그들의 피할
곳은 부활하신 그러스도의 품 안에 있 다 . 이 세상에 판한 한, 그들은
그 들의 구원 을 성취하는 데 그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
떤 공통체 나 생활의 지위에서든지 그러스도의 영 안에 사는 그들의 은
사는 주께서 이마 안정하신 바라는 것이마. 사 람이 먹고 마시는 것이
나 성일을 지키 는 것 둥의 문화적 판습을 변경함으로써 그러 스도의
통치에 더 가까이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고 독신 생활을 하기
위하여 가정 생활 을 배렌다든지, 재산에 종 노릇하는 데서 벗어난다
든지 , 정치 당국자들의 통치 에서 피 한다든지 함으로써 그리 스도에 게
더 가까오F지는 것도 아니다 .

그러 나 비-울은 그러스도 안에 있는 새 삶의 복음을 선표할 해, 거


키에 일종의 문화적 기 독교인 의 윤리를 첨가시켰다. 믿음, 희망, 사
랑 안에 있는 새 삶은 아직도 연약하며, 사탄파 죄와 죽음을 상대로
투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 뿐만 아니라 암흑의 권세 아래 명백히 종속
되어 있는 사회 얀에서 살지 않을 수 없 기 해문이다. 이 윤리는 부분
척£로는 기 독교 문화의 윤리요, 다른 한 부분으로는 문화 간의 상호
판계를 위한 윤리였 다. 기독교 문화를 위해서는, 성적 문란, 도적절,
케 £름, 술 주정 , 그 밖의 악덕을 금지 하였다. 결혼과 이혼에 판한규
율을 규정했A며 , 넘-펀파 아내, 부모와 자녀의 판계를 가르쳤 다. 신
자끼 리의 싸움을 조정 C調停〕하는 것 을 다루었 ξ며 작당 (作黨)과 이 단을
방지하기에 힘썼다. 종교적 집회의 행위를 위하여 지시하였고 가난한

165
기독교인 사회를 위한 재정적 지원도 언급하였다 . 이 윤리는 71-톡교
인과 그들의 교회가 이기독교적 사회 제도에 대하여 갖는 판계 를 논
하는 한 각양각색이었마. 정치적 진권지들에게는 그 권세가 하나 넙께
후부터 주어진 것이으후 그들과 그들 의 엽플에 순종하는 것이 기독교
인의 의무 라고 하였다. 그러띤서도 신자끼리의 소송 사건을 세상 재
판소에 고소하는 것 은 불가하다고 씌 망하였 다 . 경 제 제도들에 관하여
는 노예 제도까지도 거의 우판심하게 마루 었우며 £례 그런 것£로
간주하고 있마 . 마만 "1 기독교 사회의 종교적 제도나 습판에 대해서
만 철저히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라고 하였마. 이 기독교 문화의 율
리, 또는 문화 안에서의 기독교안 생판에 관한- 윤리는 여러 가지 근
원을 가지고 있마. 여러 가지 싣례로 보아 예수의 말씀이 기초석안
중요 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의 교훈에서 직접 인용한 것
은 그러 많지 않마. 그 나머지 여러 자세한 교 훈들은, 십계명이나 기
독교 선통이냐 바윷 자신의 상식에 ú1 추어 바 르고 적당하마고 생각되
는 공통 개냄에 근거한 것 이마. 전홍이나이성의 이용파는 밸도로, 직
접적 인 영감을 법이나 권고의 근원즈~~료 상은 것은 없 마.

닝l 울온 그믹 스도와 운화의 운제 에 대 하석 종항 론적 해 당의 t낭향으

로 웅직 이 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 문화의 윤리를 그러


스도의 영의 윤라에 관켠시키는 방식은 콜레엔르나 토마스가 취한 것
파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우선 그 순서가 마르다. 종합폰자는 문
화에서부터 그러스도에게로 또는 교사로서의 그러스도로부터 구원주
로서의 그러스도에게로 움직여 간다. 그러냐 바울은 문화의 심판자
또는 구원자로서 의 그러 스도로부터 기 독교적 운화로 나아간다 . 이 순
서의 차이는 보다 의의 갚은 것파 연결되어 있마. 종합론자들은 운화
생활 그 자체 안에 어떤 적극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그
문화 자체의 가능 성 을 가지고 불완전하냐마 진싶한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 종 합론은 석극적안 가치 획득을 지향하고 있다 .
그러나 바 울 에게 있어서는 문화란 어떤 소극적인 기능밖에 가지고 있
지않다. 바울의 생각에 의하면, 기독교 사회의 제도들과 그 사희플
위한 ‘쉽-어느 정도까지는 이교 운화의 제도들도 물론-은 그대로 퓨­
연 인간들을 띨양A로 인도젤- 최악의 세력을 방지 하도록 된 것우로 보

이며, 적극적인 선을 획득하기 위하애 있는 것은 아니마. “음욕의 윤

1 66
제 5장 역설척인 판계를 카진 그리스도와 운화

획을 파 하 기 위하얘 각 남자는 자기의 아내플 취하고, 각 여자는 각


기 자신의 남현을 취 할지 니 라”하였다. 정 부의 집 권자들은 “행 악자들
에게 염할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기 위한” 하냐님의 종들이라 하였
다 4 법률의 기능은 죄를 억제하거냐 드러내기 위한 것이요, 사럼을 하
나넙의 의로 안도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두 윤리는, 삶의 걸의 두
단계을 위한 두 윤리라든지 미숙한 기독교안과 성숙한 기독교인을
위한 두 가지 윤리라든지가 아니라, 삶 안에 있는 모순되는 경향성에
판한 윤리이다. 하냐는 중생파 영원한 생영의 윤리요, 다른 하나는
타락의 예방을 위한 윤리이다. 기독교적 행식 안에서 불 때, 그것은
죽음의 윤리는 천혀 아니며, 죽는 것 (dying)을위한윤리이다. 그러므
후 여기에 도덕적인 것파 신학석 안 것의 두 종류의 덕행이 있는 것이
아니마. 거기에는 맏음파 희망에 불가분적〔不可分的)~로 결부된, 그
리스도 안에서의 사랑 이외에 다른 덕행이란 없마. 얘기서부터 다른
모든 훌륭한 덕이 생겨나온다. 기독교 문화의 윤리, 또는 기독교인들
이 살고 았는 그 문화의 윤리는 그 자체로서는 덕행이 없다. 기껏해
야 바 악역 (nonviciousness)의 윤리 라 하겠 마 그러 나 삶은 언제 나 죄
이든 은혜이든 그 어느것에 매여야 하며, 중랩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이원론자이다. 그의 두 윤리는 서로 만대되
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밀접하게 엮어잔 한 체계의 부분을 서로 형
성하는 것 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두 윤리는 삶파 죽음이라는 두 반
대되 는 종국에 판켠되어 았으며 , 두 다른 전선에 서서 전략을 수립하
기 해 문 이마. 두 천선이란 것은 하나닝파 안간이 만냐는 천선파, 죄
와 암 흑의 세력으로 더불어 싸우고 있는 전선이다. 그 하냐는 하냐님
의 앙 도적안 자비에 항복한 자로서의 기독교안의 윤리요, 다른 하나
는 모든 불의에 대립하는 하나닝의 총팔석안 진노에 유의하는 윤리
이다. 바울의 이원론은 마지막 투쟁과 새로운 탄생의 시간 안에 살
고 있다는 의마에서의 기독교인의 안생판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다
른 한펀, 자연적 기초 위에 서 있는 모든 문화 생활은 너무나죄와 진
노에 애여 있기 때문에 일시적인 문화의 종국은 물론 모든 일시적인
창조의 일시석인 종국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승리에 삼켜질 것이라는
그의 신앙과 관련되어 있마. “육체”란 것은 그의 생각에 의하연, 다

4. 고전 7:2; 옴 13:4.

167
만 한 윤리적 원리, 곧 안간의 정신 생활 안에 있는 부쾌한 ‘ Ii..소플
나타낼 뿐 아니라, 사랑이 거기서부터 쿠원함을 받아야 할 어떤 신체
척인 형식도 의미한 것이마. 은혜 안에 있는 삶이란 다만 하나넙으로
부터 오는 삶일 뿐 이니라, 인간의 옴 밖에 있는 삶이t:-~. “우리가 아

직 이 장악 안에 있는 동안 우리는 걱정하며 탄식한다 우리가


몽 안에 사는 동안은 주께로부터 떠나 있는 것이다 "5 자신에게는 죽
고 그러스도와 함께 부촬한다는 것은 영석안 사건이다. 그러나 땅 위
의 옴이 죽고 하늘의 옴을 새로 엽 기 천에는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것
이다. 인간이 옴으로 사는 한, 그는 문화와 문화석 제도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문화가 그러스도와 함께하는 생활로 선진
시키기 해운이 아니라, 다만 범죄적이요 일시적인 세상에서 어느 정
도 범죄릎 제한해 주기 때문에 필요하다. 바울의 이 두 가지는 동퉁
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응 결 코 아니마. 그의 마음과 정신은 천
국파 영생의 윤리에 전적으로 바쳐져 있였다. 새 생영이 아직 도 숭겨
있고 교회 자체들 안에서 무질서가 재현되고 있는 동안, 다만 잠시
동안의 필요가 율법과 교훈과기독교 문화융리의 권면을 그에게 강요

한다.
2세 기 중에 , 그러 스도와 문화의 문제 에 대 한 이 원론척 해 답 이 종 이
상한 바울 추종자 마르시온에 의하여 혼란스렵고 변덕적£로 재현되
었다. 그는 흔히 영지 주의지-로 알려지고 있다. 왜냐하면 거의 무리할
정도로 기독교적 신양을 유대적 문화에서 분리하고 왜곡시키려고 광
분했 A벼, 특히 구약성서와 거기에서 파생된 요소들을 그리스도교의
성서에서 배제하려고 안간힘을 썼기 때운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영
지주의적 이녕을 그의 신학에 사용하였 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를
극단적 기독교안의 부류에 관련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가 교
회로부터 분리펀 한 종파를 창설하였고 그 종파는 엄격한 금욕주의로
특징을 삼았기 때문이다. 그는 흔히 이 정도블 넘어서서 일종의 마니
교안이 됐다고 생각된다. 마니교는 실재에는 두 개의 원리가 있고 세
계는 하나님과 악의 권세로 구분했다. 그러나 하르낙 (Harnack) 과 그

밖에 얘 려 학자들 이 명 시 (明示〕한 바같이 , 마르시 온은 무엿보다도 먼


저 바울주의자였으며,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복읍

5. 고후 5:4. 6. 아래 기록될 6 장, 주 2를 보라.

168
제 5장 역설척안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

은 경이 중의 경。1 요 놀라움파 황홀을 알으키는, 달러 ll] 할 데 없는


특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6 그는 그리스도의 법에서 출말한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의 선과 자비의 계시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냐 그는 두
가지 점에서 이 복음과 조화될 수 없었다. 그 하냐는 정의를 수호하
는 진노의 하냐닝으로 나타난 구약성서의 신판에1;觀)이였고, 다른 하
나는 이 세상에서 이련 하나닝의 진노와 공포에 직면하여 그 명령대
로 살아야 한마는 인간의 실생활이였다. 다만 구약성서만이 그를 괴
롭혔더라연 그는 아마도 쿠약성서를 무시하고, 은혜를 위한 세상에

서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생각되는 사랑의 윤리와 자비하신 아버지 찬


조주의 신학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현실 세계는 마르시온
이 본대로 말한다면 “우둔하고 악하고, 궁뱅이들과 함께 기어다니며,
비극의 함정, 치욕의 대상”밖에 안 되는 곳이였다. 그렇 마띤 모든 은

혜의 하나념, 긍흉의 아배지께서 。1 렌 것을 만드셨다고 어떻게 생각


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그는 “재생산되는 혐오스런 부속물들,
출생 으로부터 마지막 부패〔죽음)에 이르기까지 안간 육신의 구역잘
냐는 온갖 더러움”에 책임 져야 하지 않겠는가 7 7 이라한 세상에서도,

가정 , 국가, 경 제 제도들, 그러고 엄격한 정의 등이 각기 그 장소를


가 지고 있음에는 틀림 없으냐, 그 전체적 인 배치로 보아 서투른 솜씨
와 조잡한 재료블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의
영역 안에 있는 삶파 긍흘에 응탑하는 긍흘의 축복 풍은 온천허 다른
영역에 속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스도와 자연의 근거 위에 서 있는 문화에 대한 이란 이해에서


마르시온은 자기의 해결책을 찾았던 것이다. 즉 인간은 투 신〔神)과
판련되어 있마는 신앙 속에서 그의 해탑을 찾 았다. 악한 재료로써 이
세계를 창조하고 정 의로우면서도 솜씨 부족한 제한된 신과, 정의와
물질로 혼합펀 세계로부터 극력 벗어나려고 애쓰는 안깐들을 그러스
도로 말미암아 구원해 주시는 아버지되시는 선한 하나닝의 두 신이라

6. A. v. H arnack , M arcioπ , Das Eνangelium vom Fremden Gott, chaps.


m, V[; c f. H. Lietzmann, The Beginniηgs of the Christian Chμrch,
pp. 333 ff
7. Marcion 의 견해를 기술한 Harnack 의 글 . Qp. α t. , pp. 144. 145; cf. pp.
94 , 97.

169
는 것이다. 그는 두 윤리를 안정한다. 정의의 윤리와 사랑의 윤리 가
그 것 이다. 그러나 전자는 불가파적으로 부패와 결부되어 있 마. 그러
고 그리스도의 삶과 설교와 교재는 오직 후자와만 판계 있다 8 그러
므로 마르시온은 될 수 있는 대로 기독교인을 육체적 또는 문화적 세
계 로부터 끌어내려 하였으며, 성적 생활은 극도로 억제되고, 금식은
종교적 의식 이 상의 것으로 강조되며, 복음에 상응하는 안간 상호간에
긍흘 과사랑의 판계가 실현펀는 공동체를형성하려고 노 력히였마 9 그
러면서도 안간은 아직도 육신척으로 살고 있커 때문에 그 선하신 하
냐닝으로 말 미 암을 그들의 쿠원을 위한 준비와 희망 속에서 살 수밖
에 없는 것이 라 하였 마.

그러므로 마 르시온의 해답은 진정한 의마에 서 이원론적이라기보 마


도, 결 과석£로 보 아 일종의 배타적 기독교인의 부류(j','ß類)에 속한 마
할 것이마. 참된 이원 론자는 두 서로 잡아당기는 양극 사이의 긴장 안
에 서 산다. 마르시온은 그 두 극성을 따 로따 로 분러시켜 버렸마. 정
의와 사랑, 진노와 긍흉 , 창조와 구속 , 문화와 그러스도를 따로따로
걸;라 버렸마. 그러으로마르시온적인 기독교인 은 죄의 세계 밖에서 갈
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죄와 정의가 불가파척£로 연합되어 있는 자
연의 세계 에 서도 펼 수 있는 대 로 탈출하려고 하는 것 이다. 이런 환경
아래서는, 긍흉의 복음은 새 율냄으로 되어 버 리며 그 쿠원받은 공동
체는 하나의 새로 운 문화 사회 로 되었 다.

이 원론적 동기는 어 거스틴에 게도 매우 강조되었다. 그러냐 개변론


적인 사상이 더 많은 특색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의 견해는 마음에
미루기로 한다. 중세기 기독 교에서는 이원론적 해탑이 특수한 지역 얀
에서 나타냐 있 었 마. 그것 은 스코투스 (Scotus) 주의 자들파 요캄 (Occam)
주 의자들이 계시와 이성에 판한 종 합적 방법을 포 기하연서 도 영:자 각
각의 타당성은 함께 보 존하려 고 했을 해와 같은 경 우이다. 이 것은 또
한 교회와 국가의 문제에 판한 위클리 프의 해당에서도 냐타나고 있
다.

8. Harnack, op. cit. p. 150.


9. [bid. , pp. 186 ff.

170
제 5장 역설적인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뭄화

3. 루터와 현대의 이원론

마르틴 루터는 이 유형의 가장 뚜렷한 대표지-라 핫 것이다. 그러나


그도 바울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사석 안물은 너 무냐 복잡한
인물이어서 엘정한 규격에 꼭 들어맞출 수 없다. 그러스도와 둔최의
운제에 대한 그의 해탑으로 그의(그의 최선의 저작은 결 코 아니라 할
지 라도) ‘기 독교인의 자유’ (Treatise 0η Christiaη Liberty) 와 ‘강도와 살
인 폭도인 농민을 책 함’ ( Against the Robbing and M urdering Hordes 01

Peas“nts) 이라는 두 저서를 대조해 보변, 거기에 이원흔적 특색이 뚜


렷하게 드러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저서는 성급하거나 분개
함이 없는 바울의 사랑의 찬가와 할려l 당에 대한 그의 가혹한 공격 10이
서로 마르듯이, 서로가 다르다. 그러나 루터의 작풍의 간격은 바울의
경우에서보마 훨씬 더 심한 데가 있마. 그것은 개인적 성격 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요소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마. 루
터는 그 비상한 동란〔動염l)의 시기에 저한 사회 전체에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바울 당시 로 말한다면 키 케 로 (Cicero) 와 아우렐 리 우스 (Marcus
Aurelius) 와 바울을 한데 합한 책임만큼 우거운 것을느꼈던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사랑우로 역사하는 믿음, 이웃 사랑에 범사
를 견마라고 주장한 루터로서, “누구든지 할 수만 있거든 찔러라, 때
려라, 죽여라” 하고 영주〔領主)들을 걱려한 것은 너우 심하마 아니할
수 없다. ‘기독교인의 자유’라는 그의 저서에는 아래와 같은 운귀가
씌어 있다. “믿음으로부터 주 얀에서의 사랑과 기쁨이 흘러 냐온-다.
그러 고 사랑으로부터 기 쁘고, 즐캡 고 자유로운 마음A로 이 웃을 섭 기
는 봉사가 생겨난마. 그 이웃 봉사는 그 이웃이 은혜를 느끼든 안느
끼든, 칭찬하든 욕하든, 소득이 있든 없든, 그런 것에는 아무 판성도
가지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체서 모든 것을 모든 사랑에
게 풍성하게 또 한없이 나누어 주시며, 해를 선언파 악인에게 함께
비춰 주시는 것같이, 그의 자녀뜯도 뱀사에 그렇게 하며 범사에 참는
것이다 그러고 그들이 그러스도를 통하여 하나닝을 불 해 하나님께

10. 갈 5: 12.

171
서는 그렇게도 위대하신 시혜자(1íflí惠者)시라는 것을 알고 즐거운 마음
으로 값 없이 주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11 그러나 농만들을
대항하는 그의 책은 읽어 보면 아래와 같은 심한 말들이 씌어 있마 .
• 이 사건에 있어서 영주들이 나 군왕들이 기역해야 할 것은 그들이 이
란 자들이l 게 사용하기 위한 검을 맡은 하냐넘의 알꾼이며, 그의 진노
를 집행할 종야라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는 장 잘 시간도 없다.
안내와 긍흘을 운운할 곳도 없다. 지금은 칼을 쓸 시절이요, 은혜 에
풀 해는 아니다 "12 그렇게 날키로운 것은 아니지만, 루터에게 있어
서 이란 종류의 이원석 선언의 뱅링은 다른 데서도 많이 발견된마. 그
는 이성과 철학, 상엽 (business) 파 거래 (trade), 종교적 제도와 의식
(熾式), 그러고 국가와 정치에 대하얘 이중석안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루터에게 있는 이란 이율배반〔二律背反)파 역설 때문
에 사람들은 흔히 루터가 생활을 부분석으로 나눠 생 각하고 있었다는
암시 를 받게 된마. 즉 루더는 세상적인 완손이 하고 있는 일을 기독
교적인 오른손이 얄아야 할 펄요가 없마고 가르쳤마는 것 이다. 그의
말언은 해로 이 견 해 를 지지해 주는 것우로 보인다. 그는 일시석 인 삶
과 영적인 삶, 외부석안 것파 내적안 것 , 육신파 영혼, 그러스도의

통치 영역과 인간의 문화냐 엽적의 세상 등 사이에 날카로운 구벌을


만들고 있다. 이련 것들 사이에 혼동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얼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농민 반란에
대하여 쓴 소책자를 변호한 문서에 。 l 런 말이 씌어 있다. “두 나라가
있다. 하냐는 하냐넙의 나라요, 다른 하냐는 세상 나라이다 하
나닝의 나라는 은혜와 자비의 나라이다 그러나 세상 나라는 진
노와 가혹의 나바이마 이제 。1 두 나라릎 흔동하려는 사랑들은,
현재 우리 나라의 거짓된 광신자들이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진노를 하나님의 나라에 펴부£여 자비 를 세상 나라에 두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마귀 를 천국에 모셔 들이고 하나닝을 지옥에 두는 것파
같응 것이다 "13

그러나 루터가 양자를 구밸하기는 하였으나 분러시키지는 않았 다.

11. Works of Martin Luther , Philadelphia. , 1915- 1932 , Vo l. ll. p. 338.


12. lbid. , Vo l. N , pp. 251 f.
13. Works , Vo l. pp. 265. ~.

172
제 5장 역설척안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운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활과운화 얀에 있는 생활, 하냐닝의 나라와세


장의 나라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안은 자비와 진노를 겸
하신 한 하나닙에게 복종하는 단알한 행동을 취해야 하며, 분리펀 영
혼을 가지고 이중석안 충성과 의무를 수챙하는 것이 아니다. 루터는
기독교안의 문제의 종합론석 해결책을 배격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그
와 마찬가지로 하냐님의 통알성과 문화 얀에서의 기독교안 생활의 통
일성을 유지하는 데 단호하였다. 그가 종합론을 배격한 데는 여러 가
지 이유가 있다. 종합론은 그러스도의 철저한 계명들을 있는 그대 로
수략-언제나, 모든 사랑들에게 우제약석 A로 요청되는 계명 A로­
하지 않고, 일부 보다 완천한 기 독교인들이l 게 만 타당한 계 명 4로 변
질시키려 했기 해문이다. 또한 그것은 복음과는 조화되기 어려운 방
법우로써 사랑들의 양상에 불안과 위안을 제공하려 했다. 그러고 또

그것은 일반적안 유덕한 생활을 살아 보려는 노력이나 성자적 C뿔者的)


인 발자취 를 따르려 는 노력 을 함께 종먹 는 무신적 (無꽤的) 불경 건의
죄블 너무냐 쉽게 간과하려 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러스도를 다
른 선생들파 구원자들에게 너무 지나치게 판련시컴£로써, 업법자。1

시며 동시에 구원주이신 그러스도의 유일한 염위를 적절하게 나타내


지 뭇하였다는 둥의 。l 유 혜운이었다. 루터의 사상과 그의 기독교 도
덕의 개혁자로서의 생애의 기초는, 복음이 인간에게 명령한 교훈윤
철대적 주님의 절대적안 요구였다는 그의 신냄에 근거한 것이다.14

이러한 살정은 문화 안에서의 생촬은 복음과 양럽할 수 없다고 하


여 배격한 배타석 기독교안으로서의 루터를 연상케 할지라도, 루터
를 그 부류에 속할 수 없게 하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루려에

14. 기 독교 윤려의 사장카로서 또 개혁자로서의 루터의 발전 파정올 기술한 훌


륭한 저 서 로서 Ka r1 Holl 교수의 Gesammelte Aμifsaetze zur Kircheπge­
schichte , Vo l. 1, 6 th ed. , pp. 155 ff. 에 있 는 “ Der Neubau der Sittlich-
keit"를 소개 한다. 그러 냐 H oll 의 기 술은 불행 하게 도, 너 무 안〔 反)카롤 럭
적안 연견에 울든점 이 있다. 그것은 루터에게 적의 를 가지고 있는 저숭 가
Grisar 의 루터 만대폰에 대항하려는 의도에 영향된 것 A로서 추터의 옥창
성이 Augustine 보다도 더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의 이
논문은 널리 사용되고 있는 Ernst Troeltsch 의 Social Teachings of Chri-
stiaη Churches, Vo l. 1I 에서 취급펀 루터의 윤리판보다 우수하다. 운화-of!
대한 루터의 태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Holl 의 견해는 루터가 개변주의
자에 가까운 것으로 표시하고 있으나 냐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기 어렵다.

173
께 있어서 그러스도의 엽은 극단석 기독교에서 밍고 있는 정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령권을 가지고 있으연 , 온천히 자말척이요 몰아적
(沒我的) 안 섬 정 으로 하냐닝 을 사랑하고 이 웃을 사랑하며 일시 석 안 것
이냐 영원한 것 이나 간에 자기 이익이라는 것에는 순간의 한눈도 팔
지 않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그가 민기 때문이다. 그 후에 투터의
도먹석 , 종교적 발전의 제 2 단계가 왔마. 그것은 윌-법과 익:속우로서
의 뷰음은 인간의 드러난 행위에 직접적~..!효 판렌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원천에 관펀된 것임을 철 저 히 이해한 때였마. 즉 하나닝 께서
인간 영흔을 재강죠해 주시는 분량에 짜라 인간은 땀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마는 것을 깨달은 배였다. 업법자로서의 그러스도는 모든 안
간으로 하여금 그들은 죄안이요 사랑 없고 민음 없는 자라는 것을 고
백하게 한다. 그러스도는 악한 냐무가 선한 열미} 를 맺지 옷한다는 것
과 그들은 악한 나무라는 것을 자인하게 한다. 따라서 그들이 의 롭게
행동함우후씨 의롭게 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엿보다도 먼저 그들

이 의 홉케 됨우로써만 의롭게 행할 수 있다는 것 도 보 여 준마. 그런데


그들 자신은 불의한 자들 이라는 정 도 알려 준다 15 그러냐 구 주로서의
그리스도는 안간들 속에서 있는 자신 ( 自 信)을 파별한 마음에, 하나닝
이} 헤한 신되을 창 조히 여 , 거기서부터 이웃 사당도 샘 터 나오게 한
다. 인간이 그 창조주블 밍지 않을 째, 그는 자기와 그의 재물에 대
한 걱정 때문에 다른 사람을 봉사할 수 없우며, 다만 자기 자신만을
낌 기게 되 는 것이마. 인 간은 자기 사랑의 악한 쇠고랑에 얽혀 있기 해
문에 이타석 OFI] 他的)안 행 위를 하든지 하나닝을 섬기는 일 을 한마 찰
지라도 그에 대한 보수나 칭찬을 반드시 기대하는 것이다 . 그러스도
는 그의 법파 속량의 행위로 말미암아 이 자기애의 쇠고랑을 끊어 버
i:'-]::ι, 인간을 의롭게 하살 수 있고 또 의롭게 하시는 오직 한 분이산
하나닝을 신뢰하는 신앙을 창조해 주신다. 그들 자신 안에서가 아니
라, 그들이 믿는 그분의 겸손하고 은혜로우신 삼정에 대한 응맙 속에
서 의롭게 되는 것이다. 루터는 자기애 를 자신이 정복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마만 자기가 하나닝 안에서 안전을 딸
견한 해에만 정복되는 것임을 알았다. 오직 그 때부터 자기에 대한

15. C f. “ T reatise on Good Wor ks ," W orks , Vol. I , “ Trea tise on Christia n
Li bert y," Works , Vol‘ II ; cf , Holl, op. cit. , pp. 217 ff ., 290 f.

174
제 5장 역설적안 판계를 가진 그려스도와 운화

걱정에서 해방되어 올아적 태도로 이웃을 자유롭게 섬기게 완다는 것


을 깨달았다.
이것이 루터의 이원주의의 기초이다. 그리스도는 도역 생 활의 근본
운제 를 처 리 한마. 그는 행 동의 원천 (펌、良)을 정 결하게 한다. 그는 안
간의 모든 행동이 일어냐는 궁극적인 공동체를 창조하시며 재창조한
마. 더우기 여기서도 여전히 직접적으로 외석 행동들을 판리하거나
인간이 자기 사엽을 추진시키는 직 접적인 공동체를 구성하거 나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오히 려 그는 자존심 을 찾 아 또 사람파 하나넙 앞
에서 안정을 받을 수 있기 위하여 특별한 직엽 또는 특수한 공동체를
말견하려고 애쓰는 그 내적 결핍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준다. 그는 경
건한 사람들을 수도원 또는 작은 회당 안에서 해방시켜, 모든 일상
직엽을 통하여 그들의 현살적 이웃에 봉사하게 한다.
루터는 문화 생활 안에서도 그러스도를 따를 수 있고 또 마땅히 따
라야 할 것을 루 터 이전의 어느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들보다도 더욱

확고히 주장하였마. 그리고 그는 문화 생활 안에서 준행해야 할 법칙


은 기독교 교회의 법에서 독립되어 있다는 사살을 또한 어느 누구보
마도 더 밝히 께달은 것이었다. 철학이 바록 믿음에의 걸을 제공하지
뭇한다 할지라도, 진실한 사람은 철학의 걸을 따라 얻을 수 있는 데
까지는 갈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말씀을 통하여 성령으로 거듭나
고 영철해진 사람이 라 할지라도” 인간의 자연적 지혜는 “그에게 있어
서 하나닝의 일 을 위한 공정하고 영광스러운 도우가 되는 것이라”하
였 마 .16 경건은 물론, 어학, 미술, 역사 등으로 청년을 교육하는 것은
자유로운 기독교안에게 보다 큰 기회 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
화 교육도 실시할 의우가 있다 17 “음악은 신학에 마음 가는 하나님의
고귀한 선 붙 이다”고 루터는 말 하였마. 많은 것을 준다 할지라도 냐는
나의 석은 음악 지식과 바꿀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18 “괄고 사고
하는 것은 필요한 것이므로 상엽은 기독교안에게 개방펄 직엽이어야
한다. 그것은 폐기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태도를 실행해야 할 것

16. H.T. Kerr , A Compend of Luthers’ Theology , pp. 4-5; c f. 종교개 혁 이


철학에 마 친 영 향에 대 한 Holl 의 잔솔, op. cit. , pp. 529 ff. 를 참조하라.
17. “ 71 독 교 학교들을 설랩 하고 유지해 가게 하라고 독일의 선 도시의 의원들에
게 호소한 것 이 있 마 " Works, Vol. N , pp. 103 ff.
18. Kerr , op. cit. , p. 147.

175
이다 "19 정치척 활동과 군사까지라도 일상 생활보다 더 중요한 것。1

며, 딱라서 그 부문에서 이웃을 섬기고 하냐닝을 순종하는 생활을 하


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20 하나넙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는 알에 배치
되는 몇 가지 직엽은 물론 배제되었다. 루터는 그 배제돼야 할 직무
중에 결국 수도원 생활도 포함시켰다. 이 모든 직엽들, 타안을 봉사하
는 이 모든 문화 사엽들에는 그 특수한 사엽을 위한 기울적 법칙도
필연척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어떤 문화사엽에든지 종

사할 자유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사업으로 말만l 암아 객관적 선


을 정취하기 위한 방법을 택할 자유도 가지고 있는 것이였 다. 복음서
에서 발진다푸스의 의료법을 발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
의 계명 가운데 서 국가적 범죄자를 처리하는 특수한 법률을 찾올 수
없는 것을 루터는 잘 알고 있었다. 루터는 천재적 인간에 대하여 큰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들은 각양 운화 부문에서 전통적인 것을 답습
하는 것보다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란 첨즈L로 보아 그러스도와 문화의 문제 에 대한 루터 의 해결책은
행 위 의 “본질 "CWhat) 과 “ 땅법 " CHow) 에 대 한 이 원론이 라 하겠 다. 문화
가 우리 에 게 요쿠하는 교훈과 실행 을 진실하게 또 사랑스럽 게 실천 할
수 있는 지식파 차유를 우터는 그터스도로부터 한는 것이다. 푸터 의
윤리에 판한 심리학적 천제는, 안간은 역동적인 존재이며 영원히 활
동석 이 라는 신념이다. “인간의 존재와 본성은 단 한 순간이라도 무위
(無薦), 무활동, 또는 어떤 사물에 영주(永住) 또는 도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연 생명이란 결코 휴식하는 것 이 아니기 때문이다 " 21
행동에의 충동은 하나닙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성에서 오는 것안 듯 하
다. 이 지향과 정신은 신앙의 한 기능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성과
문화에서 온다. 배고픔은 우리를 음식으로 향하게 한다. 신앙의 유무
(有無)가 타안을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판심을 가지고 있는 선
한 이웃으로서 음식을 먹는가 아니면 불안과 우절제와 이기심 을 가
지고 먹는가를 결정한다. 우리의 영양학과 사회의 영양적 판승-정한

19. “ On Tradi ng and Usury,’ W or ks , VoI. N , p. 13.


20. “ Secular Authority: To What Extent 1t Should be Obeyed ,>> W orks , VoL
m, pp. 230 ff.; “ Whether Soldier s, Too, Can Be Saved ,>> Works , VoL
V , pp. 34 ff.
21 “ Treatise on Good Works ,>> Works, Vo I. 1. pp. 198 f.

176
제 5장 역설척안 판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운화

음식파 부정한 음식에 판한 히브리석 규-례라둔가 교회법에서의 금식


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고-이 언제 무엇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결
정한다. 그리고 우리의 호기심이 우리로 하여금 지식을 추쿠하게 한
다. 그러냐 우리의 종교적 태도는 어떻게 그것을 추쿠할 것안가를 결
정한다. 즉 명예를 획득하기 위하여 할 것안가, 또는 봉사를 위하여
할 것안가, 어떤 권세를 얻기 위하여 할 것인가, 또는 하냐넘의 영광
을 위하여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마. 그러고 이성과 문화는 어떤
방볍£로, 어떤 분야에서 지식을 획득해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
여 준다. 의사, 건축가, 옥공, 또는 정치가 등으로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한다는 쿠체얀을 복음서에서 찾아 낼 수가 없는 것파 마찬가지
로, 봉사의 바른 정신을 얻는, 신념적안, 희망적인 , 겸손한, 언제나
시정(是표〕을 환영하는 방엽은 아무리 많은 기숭적 문화적 지식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마. 과학적 또는 기술적 지식의 증가가 우리 안에
있는 정신을 갱신하는 것은 아니다. 오허려 바른 정신이 이 세상에서
의 우리의 특수한 직무에 대한 지식파 숙련을 추쿠하게 하며, 그러하
여 우리로 더 좋은 봉사릎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는 이 두 가지가 서로 판련되어 았으변서도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사실로 되어 있다. 이것들을 우분렬하게 혼동한
다는 것은 둘을 다 부패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냐념의
계시에서 지질학적 지식을 기대할 때 우리는 계시 를 잃어버리게 된다.
또는 지질학에서 하냐넘 신앙을 찾£려 한마연, 우리는 하나닝과 암
석을 함께 잃고 말 것이다. 우리가 만알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구조
에서 헨대의 정부를 위한 법률을 추출(抽出)한마면, 그것은 안간 자신
들의 독선적 독럽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선한 은사에 의지하는
신 앙적 공동체의 정신을 대신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정치적 구조를 하나닝의 나라와 같이 생각한다연, 그리고 교황 제도

와 왕국을올 통하여 하나닝께로 더 가까이 가기를 기대한다변, 우리


는 하나닝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을 것이며 그러스도를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의 정치적 문제들까지도 바릎 정신 A로 처
리할 수 없게 띨 것이다.
큰 긴장성이 언제나 남아 있다. 기술과 정신은 서로 챔투되어 있으
투L로, 쉽게 구별되지도 않우며 하냐넘께 순종하는 단일 행동 얀에서

17 7
엽사리 재결합되지도 않는다. 기 술은 일시적인 사물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 (spirit)은 기독교안파 영원의 판계에서의 기능이다. 이 정
신은 지극허 인격적 안 것이다. 그것은 안간 안에 있는 가장 깊은 것
이라 하겠 다. 그 러 나 기술은하나의 습판이며 숙련이요, 그가 속한 사
회 안에서의 직책 이나 직엽의 기능이다. 신앙의 기독교적 정신은 하
나 닝 의 긍흉을 향하여 정향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기술은 하나닝
의 공의를 비웃음으로써 일 어나는 사악($惡)을 방지하려고 하는 경우
가 많다. 기 독교안은 순간순간마다 영 원한 하냐념 냐라의 시 민으로서
그 자신, 특히 그의 이웃의 당연한 현 세 생활의 잠정적인 가치에 판
계하고 있다. 정치 가로서 국가의 광범위한 벤영을 위하여 당장 식량
에 쓸 곡식말을 가는 경우에 이렌 충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이
런 충돌은 오을날 점점 더 증가되고 있다. 일 시적으로 우리의 일 용한
양식을 얻기 위 하여 우리의 최선의 지식을 사용한다. 그러나 영원의
시민 무로서의 우리는 이런 것 때문에 걱 정하지 않는다(적어도 걱정하
지 않아 야 할 것이 마). 이 긴장성 은 개안파 사회라는 양극에 연결 되
어 있기 해운에 더욱 그 도가 강하다. 그 자신으로 말한 다변 하나의
개안으로서 하나닝께 무한히 신뢰하며, 그 신뢰의 결 과로 세상에서의
보수를 바라지 않으띤서,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명령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낄 것 이다. 그 러 나 그와 동시에 그는 한 가족의
아버 치로서 생계를 세워 가며 그 자녀에게 의식〔衣食)을 제용하는 하나
님의 도구임을 알고 있마. 이렌 의미에서 그는 하나 님께 복종한 다는
한 마음만으로 자기의 받을 임금을 무(無)로 돌릴 수는 없게 펼 것이
다. 그 긴장은 분노하는 대석에게서 타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분노의
도구로 사용펼 때에 더욱 날카롭게 나타난다 . 루터는 이 점에 있어 서
는 매우 영백하다. 사람이 다만 자기 자신이나 자기 소유물에 대한

책임만을 느껄 해는, 그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도적 이냐 꾸어달라


는 사링블, 또는 폭군이나 원수에 대하여 자기를 방어하지 않는 태도
를 취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 나 지방 장관의 위 킥
에서 다른 사람들을 보호할 책임 을 맡고 있는 갱우에는, 폭력으로 그
의 이 웃을 침범하는 자에 대하여는 폭랙을 사용하여 그들을 방어하는
것이 하냐넘 께 순종하는 것이 되는 것이마. 자비가 파멸적인 결 과를
카져오는 경우에 , 자바 를 챙사하려 한마든지 거룩하게 되려 하는 자

178
제 5장 역설적안 판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운화

는 더 큰 얻죄자안 것이다 22 하나님께서 자연적, 역사적 재난들 속에


서 “가이한” 알을 하시는 것같이-즉 자비가 아니라 진노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알 一 그는 또한 순종하는 기독교안에게 “기이한” 일을 하
케 하신다. 즉 자비를 숨기면서 , 자바의 도쿠로 쓰이는 기이한 얼을
하게 한마.
시간파 영원 , 진노와 자비, 문화와 그리스도 등의 사이에 끼여 살
고 있는 진 정한 루터주의자들은, 삶이란 비극파 희열을 함 께 가지고
있는 것임을 말견 한다.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이 딜레머를 해결할
걸이 없마. 기독교안도 마은 모든 사람들파 마찬가 지로 , 이 세상에
현재하는 모든 악한 사건들이 끝냐고 선한 해가 올 것이라는 공풍적
희 망 을 은사로 가지고 있는 것이마. 그러나 그들에게 이중의 행복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마. 삶이 있는 동얀은 죄가 짜르기 때문이다. 더
좋은 운화에 대한 희망은 “그둘의 주요한 판심사가 아니다. 다만 그
들 자신 의 독 특한 축복, 즉 그러 스도 안에 있는 진리가 더 풍성해지
기 릎 바말 뿐이 마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들의 죽음에서 두 가지
위대한 미 래 의 축복을 가지고 있다. 그 첫째는 죽음 을 통하여 이 세
상 사악 UHl 표) 의 모든 비극이 끝난다는 것 .. .... 그러고 죽음의 또 하나
의 축복은 죽음이 현세 생활의 고통과 재난에 종국을 가져올 뿐 아니
라 (그보마 더 훌륭한 것은) 죄와 악의 종국을 고하는 것이다
우뇌 의 생 활은 죄 때문에 온갖 위 기로 차고 념치는 것이다. 죄는, 뱀
파 같이, 우리를 각 방면 S로 깜싸고 있다. 우리는 죄 없이 살 수가
없개 되어 있다. 그 러나 가장 의로운 죽음은 우리 를 이 위기에서 건
져 준 다. 그러하켜 우리의 죄 를 깨끗이 끊어 버란다 "23
그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한 루터의 해답은 이런 역 동석 , 변증
법걱 사상에 속한 것 이 었 다. 그 러 나 그의 제자로 자처하는 많은 후진
들 은 정적이고, 비변증법적안 것으로 제시 했 다. 그들은 서 로 긴말한
연결성을 지나고 있 는 루터의 윤리플 두 평행된 도 댁우로 대치해 놓았
다. 신앙이란 것 은 하나의 신념을 의마하는 문제로 되어 버리고, 순간
순간 근본석인 신 뢰 감으로 하나 닝을 향하여 있는근본적, 신뢰석 태도

22. cf. 특히 “ Secular Authority ," Works, Vo l. m, pp. 236f f. C f. Kerr , op.
cit. , pp. 213 ff
23. “ The Fourteen of Consolation," ~Torks, Vol. 1. pp. 148 f.

179
가 되지 옷찬 것처럼, 기독교인의 자유[ 문화속에 있는온갖특수 부
운에서의 자율로 되어 버렸마. 영척인 생활파 현세적인 생활을 형행
적으로 분러시켜 생각하는 이원론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복음은
문화 세 계 안에 서 사랑무로 작용한다는 루터 의 상호작용론 (In teraction-
ism)을 혼동하는 것은 큰 착오라 아니할 수 없다.

이원론적 동기가 루터 이후의 기옥교에 있어서 바 평행석(非平行的) 안


형태로 나타난 일도 있다. 그 러나 그 표현의 대부분은 루터에 비하면
천박하고 추상석이었다. 역설석안 말 파 양연석안 작푼을 통 하여 키에
르캐고르는 기독교안의 생활의 이원적 성격을 지척하였다. 그 자신은
한 논섣가이며 동시에 심미적(希곳的)안 저숭가로서, 문화의 사랑이연
서도, 심미적 작가나 문화인으로서가 아니라 종교적 작자혹 이해되기
를 원하였던 것이다 24 그는 “나훈 위한 잔리”로서의 진리에 대한 철학
적 진숭의 불가능성을 철학석으후 논증하려 하았다. 그에게 있어서 기
독교인의 생활은 이중적 국연을 가지고 있다 . 즉 영원과의 긴밀한 내
석 판계, 그러고 동시 에 타인과 사물에 대한 전혀 드러나 보 이 지 않는
외석 판계이다. 이렌 판점에서, 그는 루터의 이원론적 윤리에 내하여
긍정적 주장을 하려 혔다기보다는 그것을 자기 냐름의 이원론적 윤리
를 주사하켜 고 한 샤람우로 보인 다. 그 자신이 그의 독자석인 임두플
수행한 사랑이다. 즉 신앙의 정신 안에서 자기 임우의 도구릎 사용

한 독자석인 위치 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볼 것이다. 죄 의식과 온천한


겸손과 은허1 에의 신뢰 안에서, 키에르케고르(그의 문화 안에서는
교양인이었다)는 문학없와 동시에 옥사 후보생(이것은 그에게 있는
또 하나의 이원성이었마)~로서 그의 사엽에 전념한마. 그러냐 이것

은 그의 본질적안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안로서 그는 섬미석 작가


의 모호한 (d ubious)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 으며 , 교훈석 인 글을 쓴
다는 것은 그에게 더욱 모호한 사엽이였다. 진정한 의마에서 그가 투
쟁한 이원성은 유한과 영원의 운제였다. 이것이 그섹 모든 저작의 특
색이었던 만름, 그는 그러스도와 문화의 운제의 연처리 를맴돌았을뿐
결코 맞붙어 싸운 일은 없었마. 그가 참여한 논쟁윤 그 자신파의 고
독한 논쟁이였마. 어떤 정우에는 그가 원하는 것이 하나의 기독교인
이 되려는 것보다도 일종의 그리스도가 되려는 것같이 보이는 일이

ι4. Cf. The P onit of V‘e ,ι for My Work as aπ Author , Part I.

180
제 5장 역설척안 관계를 가진 그려스도와 운화

많다. 즉 영원파 유한 (有限)이 한 인격 안에 연합된 존재 , 무엇보 다


도 냐를 위하여 영원한 희생 자가 수난했다는 것 보다도 세상 죄를 위
하여 내가 수난당한마는 그란 그러스도가 되려는 것이었다 . “개체”호
서의 그의 고독 속에서 , 그는 기 독교 안 의 참된 사랑의 성격을 아릅맙
게 분석하였다. 그 러 나 그는 사 랑받을 존재에 대해서 보다도 사랑이라
는 덕 자체에 더 많은 판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그리스도와 운화
의 운제 를 마루는 경우에 한해서 는 종합주의 자나 이원 론자보 다도 배
타적 기 독교의 정신을 더 많이 가지 고 있었 다. 배타적 기독교 중에서
도 수도사의 정 신보다도 은자(隱者)의 정 신에 더 가깡다. 그는 말하기
를 “영적인 인간이란 것은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존채라는 점에서 우리
와 마른 인간이다. 영적 인간으로서의 위 치 (rank)는 고독을 견다는 능
력과 바례 한다. 안간이란 끊임없이 타자(他 者)들, 즉 군중을 요쿠하고
있기 해문이마 그러나 신약성서의 기독교는 이 영적 인간의 고
독을 엄밀하게 기대하고 있 A며, 또 그것파 판련되어 았 다. 신약성
서의 기 독교는 하냐닝을 사랑하고, 사랑을 마워하며, 자기 를 미워하
며, 짜라서 마른 사 랑들올 미 워하며 , 아 버 지, 어머니, 자기 자녀, 아
내 둥을 미워하라는 것 A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괴로운 고독을 위
한 가장 강한 표현안 것이다 "25 이런 것은 너 무나 극단적안 표현이
며 신약 성서를 너 무나 추상적으로 다룬 것이므로, 키에르케고르의
다른 진술들로 말 마 암아 균형이 잡혀질 수 있 다는 것은 물론이 다. 그
러나 고독 한 개체라 는 것이 그의 사상의 주제 가 되어 있다는 것만은

사살 이다 . 개안들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에 대한 진정한 의식이 없다. 따라서 “우리”를 위한 감정은 거의 전
적으로 결핍되 어 있마. 그러므로 문화 사회란 것은 키에르케고르의
판심사가 옷된 마. 국가, 가정, 그리고 교회 속에서 그는 다만 그리
스도로부터 떠난 결함 만을 발 견한 다. 그는 덴마아크 안에서 오직 자
기 한 사링만이 기 독교안이 되려고 투쟁 하고 있다고 자처하였마. 그
리스도와 동시대적이 판다는 것의 의미는, 사회 적 종교 곧 국교 (state
church) 가 키에르케 고르 자신의 운학 작품에서보마도 더 쉽게 표현될
수 있어 야 한마고 그는 생각한 모양이다 26

25 . Attack upoπ “ Christeη dom," p. 163


26. κierkegaa rd 에 대 한 가장 좋응 소개 서 는 Robert Breta Il (ed. ) , A Kierke-

181
키에르케 고르는 결국 19세기의 기독교인의 한 사랑으로서, 그 당시
의 문화적 기독교 또는 기독교화된 문화에 항의한 것이다. 다시 말하
연, 그 당시 중앙 유렵에서 루터의 이원론을 사용하여 복읍을 걸들임
A로써 모든 긴장을 완화한 데 대한 항면이었던 것이다. 이원흔적 답
변은 다른 사람들이 더욱 진싶하게 제공했다. 즉 그러스도에게 복종
하기 위하여 문화의 주장을거부할수없£면서도, 그리스도가 문화와
엘마나 깊이 영키어 있는가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제
공되었다. 트렬취 (Ernst Troeltsch) 는 이 문제를 이중의 델레머로 경
험하였다. 즉 한펀으로는, 그는 서양의 운화적 종교였던 기독교의 절
대성에 판한 운제를상대로 투쟁하였으며, 다른 한펀으로는양심의 도
덕파 사회적 도덕 사이에 생 기는 충돌에 판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
도덕이란 국가와 국민 , 파학과 예술, 경 제 와 기 술 등으로 말미임-아
대표되는 제 가치의 획득파 보수를 지향하는 것이다. 기독교 자체가
역사적이고 변천하는 운영의 다른 어느 부분들보다 마를 것 없는, 하
나의 문화적 전통이 아니었던가? 트렬취는 이 문제에 대하여 운화적
기독교안의 해답을 그대로 받아들 일 수가없었다. 기독교는진살로상
대적이었마. 그 러 나 이것 을 통하여 인 간에게 절대적안 주장이 엄한다.
이 주장이 다만 서양인에케만 임했다 할지라도, 이것이 상대성 가운
데 나타난 하냐의 젤대임에는 틀럼없는 것이다.27 트휠취는예수의 주
장을 양성의 윤리와 일 치 시켰마 . 아무리 양심의 성 장이 역사적인 것
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것은 자유의 인격성을승득하고 옹호해야한
다는 명령과 더불어 역사적 안간에 게 대결하는 것이다. 그 자유 인격
이란 것 은 단순한 운영으로부터 독 립판 것이며 내적 A로 연합되 고 밟
혀진 것이며 그,와 동시 에 모든 사람의 자유 인격을 존중하고 안류의
도덕 적 유대 cm뺨)에 의하여 그들을 연합하는 것이다. 양심의 도덕은
불폰 언제냐 자연에 대결하는 투쟁 에 참여할 것이다. “하나닝의 나라
는 역사를 초월하기 때문에, 역사를 제한하거나 규정하지 뭇한다.
지상(地上)의 역사는 최후의 인격적 결단파 성화(聖化)의 기초와 천제
로 남아 았다. 그러나 세상 역사는 그- 자체 얀에서, 이성파자연적 본

gaard Anthology; A. Dru Ced.) , The Joμηzals of Sif>reη Kierkegaard;


David Swenson , Something about Kierkegaard 둥이 다.
27. Glaμbenslehre , pp. 100 ff; 또 Christiaη Thcμght, 1923 , pp. 22 ff.

182
제 5장 역섣척안 판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

능이 혼합된 그 자신의 걸을 걷고 있다. 그러고 그것은 상대적 안 정


조로, 일시적인 공간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속박에도 결코 매일 수 없
다 "28 그러나 자연과의 투쟁은 안간이 견디어 나가야 할 유일한 것
은 아니다. 그의 윤리적 의식 안에는 양섬 이외에 또 하나의 도덕이
있다. 그는 문회적 가치의 획득을 지향〔指向)하고 있다. 그 문화석 가
치란 것은 그의 제도들이 나타내고 있는 객판적, 의무적안 선을-정
의, 평화, 진리, 복지 둥을 말하는 것이다. 양심파 문화적 가치의 도
턱은 밀접하게 판계되어 었다 한지라도 그 ‘두 연은 다만 서로 달라
치기 위하여 만나는 것뿐이다 양성은 초역사적이다. 그것은 죽음을
비웃는다. “살아 있거냐 죽어 있거나 선한 사랑에게는 아무 재난도
덮쳐 올 수 없 마”고 하였다. 그러나 문화적 가치의 도덕은 역사적이
며, 따라서 사라질 사물의 보종에 판성하고 있다. 그러으로 개안석
안 공적 챙위 이외에서는 종합이 있을 수 없다. 결국에 가서는 우리
는 다만 믿음으로써만의롭게 되는 것이다.29 트휠취 자신이 바이마르
(Weimar) 공화국 안에서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려 할 때 이런 긴장을
날카롭게 경험 하였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그러스도의 주장이란 것은,
보다 축자석(쫓字的)이요 극단적안 복음서의 이해 라기보마도, 그 당시
에 유행하던 문화적 기독교인의 신약성서 해석에 더 가까운 것이었음
이 영백 하마. 그럼에도 불쿠하고 그러스도와 문화 사이에 있는 긴장
성은 여전히 없 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계속적안 투쟁의 생활 없
이는 해 결쉴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 이원론적 해결의 많은 변형들이 유행하고 있다 30 예를 든다
면 흔히 말하는 바와 같이 신앙파 파학은 서로 충돌할 것도 아니며,
서로 적극적인 판련을 가질 것도 아니다. 이들은 서로 같은 표준에서
비교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주장 같은 것이마. 인간은
이 두 영역에 살고 있는 위대한 양서류〔兩農類) 이다. 그러므로 어느

2 3. Ibid. , Section. ll , P t. r, ‘ The Morality of the Person and the Consci-


ence , pp. 39 ff.
29. Ibid. , P t. ll , “ The Ethics of Cultural Values" , pp. 71 ff.
30. 이 이 원흔들 중 에 는 망판척인 병행주의, 또는 도덕 생활의 다원적 분할주
의 퉁이 었 다 Reinhold Niebuhr 의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
(1 932 ) 와 A. D. Lindsay 의 The Two Moralities; Our Dμty to God and
to Society(l 940) 둥 이 마.

183
한켠의 생각파방법을 다른 한현 에 적용 하려 는 것을피해야한다 .31 야
。l 원론은 교회와 국가를 분리시키는 실 제 적 행사와 그것을 정당화 하
는 학설 에서 나타난다. 미 국의 윌리 엄스 ( Roger Williams)는 이 련 이
원 론의 상정이 요 표본이라 하겠 다. 그는 정치 와 복음을 연합하려는
영국 국교와 청교도 등의 종합주의 또는 개변주의 를 배 격하였마. 양
자의 연합은 둘을 다 부패하게 하기 때문이라 한마. 즉 영석 힘파 불
터석 강압을 연합시킴으로써 복음을 부패하게 하는 것이며, 그 본성
에 전혀 생소한 요소를 도업함£로써 정치를 또한 부패케 하는 것이
다. 그는 또한 기 독교적 영 성 (spirituality)의 기 초 위 에 공화국을 건
설 하려 는 퀘이커 교도의 노력 에 대하여도 찬성하지 않았마. 그것은
정 치 적 A로는 정 당하지 뭇하고, 기 독교석 으로는 왜곡(종曲 )완 것 이 기
해문이었다 32 그리 스도에 대한 충성과 사회적 종교를 받아들이 는 것
을 동시에 수챙하는 것은 그러스도와 가이사를 동시 에 받 아들 이 는 운
제보마도 그에 게 있어서 더 어려운 것이었다. 영국 국교와 청교도와
갱례교를 떠 난 후에 이 진 리 탐쿠자의 태 도는 운제 해결을 위하기보
다도 일종의 생활 방식 Cmod:μ s νψeηdi) 이었마. 정치적으로나 교회석 A
로 나 윌리 엄스는 프로테스탄트의 공통적 이 원론의 대 표자로 남아 있다.
。i 원흔적 해답은 이론적무로 냐 실제적£로 문화 주창자들에게도 안
정을 받고 있마.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는 정 치 옹호자들, 경
제 생 활의 자율성 을 주장 하는 경 제 학자들, 종합주의 자냐 문화적 기 독
교안에 의하여 제의 된 이성과 신앙의 결합을 반대하는 철학자들 동은
결 코 반(反〕기독교적 태도에 속하는 사랑들이 아난 경우가 많다. 하르
트만 (Nikolai Hartmann) 같은 사람은 기 독교적 신 앙파 문화적 윤리 의
반립 성 (antitheses)을 주장했 A나, 그것 은 문화 펀에 유리 하게 해 결되
어야 한다는 아무 암시도 없이, 이율배반 C= 律背反)의 성립을 안정 하
였 다. 이성의 생활 안에서 신앙의 근거를 말견하지 뭇 하고 있는 실증
주의자들 까지도 신앙을 전 적으로 폐기 하려 하지 않는다. 신앙은 안

31. 이 입 장의 건형 적 안 주장은 J. Needham 의 The Great Amþhibium (1 93 1)


에 있 다.
32. C f. The B lcudy T ene nt of Persecμtion, George Fox Digg’ d Out His
Bμrrows, Exþe rimeπts in Sþiritual Life and llealth , and Le tters. E xp..
eriments 이 외 의 위 의 모든 문헨은 Pμblications of the Narragansett Clιb
에서 쉽게 찾아올 수 있다.

18 ¥
제 5장 역설척인 판계를 카진 그리 스도와 운화

칸 살존의 다른 질서에 속하고 있기 쩨문이란 것이다 33


교안이나 아니냐를 막론하고, 이련 해결 방법을취하는사란들은도
덕적 진지 성뿐 아니라, 이성적 깊이까지도 가지고 있지 옷하다. 이원
콘은 그리 스도의 방향」즈로 가벼 운 예 의 (禮議) 나 표하고 지 나가려 는 세
속적 인간들의 피 신처 나, 또는 운화에 대 한 약간의 경 의 (敬意)C를 표해
야 한다고 느끼는 경건한 정신주의자들의 피신처는 될지 모른다. “진
짜정 치 "(Real- Politik) 의 영 역에서는 복음이 영향을 마치지 못하도록 하
는 정치인들파, 가난한 자가 천국을 차지하리라는 말씀에 개의치 않고
이득 행위에만 전념하려는 경제인들은 이원론을구실로그들에게 펀러
한 합리 성을 제공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악용은 그 입장 자
체의 특색에서라기보다도 각기 다른 태도들과의 그관련에서 더 많이 생
겨냐는 것이다. 극단척 기독교가 난폭한 수도사들, 부도덕한 수도원,
도덕적 과장 등에 빠졌으며, 문화적 기독교와 종합론자들이 안간들에
게 권력욕과낡은우상들의 재현 (再現)을정당화시킨 것 둥이 그살례라
하겠다. 도덕적 완천성과 신 실성 은 이러한 입장들 중의 어느 하나도
따르지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 아래서의 완전성에 이르려는 신실하고
열정적안 노력의 결 과로 안간들이 그러한 어느 입장 특히 이원론을
채택해 왔던 것은 사샅이냐.

4. 이원론의 장점과 결점

위대한 주창자들에 의하여 제창판 이원론적 통기에는 활력 파 장점


이 었다. 이것은 “중간 시간”에 살고 있는 기독교안의 현살적인 투쟁
을 반영해 준다. 그리고 은혜의 시칸에 살월서 그가 열렬하게 희망하
고 있는 그 영광스러운 시대의 윤리를 그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칼풍
속에서 투쟁하고 있음을 반영시켜 준다. 이것은 선전 (campain) 계획
이라기 보 다도 경혐의 보고이다. 0 1 것이, 한펀으로는 그러스도와 그
의 영의 능력의 보고라연, 마흔 한펀으로는 모든 인간 실존에 았는

33. A.J. Ayer, Language , Truth and Logic (1 936)을 읽£라. 이 책은 종교와
윤리 릎 엄격한 의미에서 검토한다연 우의미한 것업을 진솔하였다. 그것은
다만 감정 의 표현 에 불과하다는 것 이 약.

185
죄의 위력 파 만연 성 의 안식에서 정지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내
적 충돌에 대한 바울의 자기 고벡이나 루태의 “용 강 하게 죄를 지어
라 "(Pecca fortiter) 는 인상 깊은 솔직 성 을 보여 준다. 이 런 고백 은 성
자의 이 야기 가운데 서 는 흔하지 않는 사건이 다. 신자들뿐 아니 라, 그
들의 공동체 안에까지 죄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안정하는 것은, 극

단주의 자나 종합폰자틀이 말 하는 거 룩한 나라와 완전한 사회 의 경우


보다도 기독교안 스스로에 대한 또는 교회에 대한 지식을 더 적합 하
게 표시한 것이라 하겠다. 이흔원석 주장은, 그 내적 일 판성이라는
판점 에서 보아 잘 이해될 수 있든 없든, 경험에 합치펀다는 점 에서는
。1 해될 수 있고 설득력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원론자만이 기독교안의 경험 에 대한 유 일 한 보고자란 것


은 아니 다. 다만 우리 가 앞서 진술한 모든 그룹의 어느 보고보 다도
。1 원론자들이 하나념, 사람, 은혜 , 죄 등의 생동적인 성걱 에 대하여
더 많이 논술랬다는 것뿐이다. 신앙에 대한 극단적 기목-교인들의 이
녕 에는 다소 정석안 것이 있마. 그들에게는 그것이 하냐의 새 율법 이
며 새 교훈이었다. 종합론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대부분 그러 하마. 다
만 기독교안 의 생 촬의 더 높은 성취에서 만 역동적안 요소가 안정되 어
있다. 그러냐 이쉰흔자들은 행콩의 윤리플 제시한다. 곧 하나님의 행
동, 인간의 행동, 악한 권력들의 행동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윤리는, 악행에 대 립되는 정연(整然、) 하게 배엽된 법 파 덕 목C德 目)으로
쿠성띨 수 없으며, 따라서 다만 암시석이요 또는 윤곽만을 보여 줄
수밖에 없마. 왜냐하연 산 행동이란 것은 암시하거나 시사하는 걸 밖
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유 Cfreedom)의 윤리라 할 것인데, 율법
o 로부터 해방Cliberty)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 라, 인간에 게 주어지는

행동 Caction upon man)에 응답하는 창조적 행동이라는 의미에서 그러


한 것이다. 실존의 역동적 안 본성을 잘 이 해한 때문에, 이원 론자들은
기 독교적 지식과 기 독교적 행동 그 양자에게 크고 독특한 공헌을 했
마. 그들은 그러스도의 사엽의 싱오성 과 능력에 주목 하였 다. 그것이
어 떻게 안간의 심정과 정신의 성연을 뚫고 들어가, 생명 의 원천(源果〕
을 정 화하는가에 주시했다. 그들은 인간의 사악〔재3 惡)에 대한 모든 파

상적 분석을 물리치고, 인간 부패성의 갚은 뿌리를 드러내 보 이려고


힘썼다. 이런동찰에 수반되어, 그러고 부분적으로는그 결 파로 말미 양

186
제 5장 역설척언 판계를 차잔 그리스도와 운화

아, 그들은 기독교와 문화, 그 양펀에 활기 를 회복시켰 다. 기독교에


대하여는 그라스도 안에 있는 하나넙의 은혜가 옐마냐 위대하마는 데
대한 새로운 이해와 천투적 생활을 위한 새로운 결성, 그리고 살아
계신 주닝을 대신해 온관습이냐 조직 퉁」즈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왔다.
문화에 대 하여 는, 우사(無私; disinterestedness)의 정 신을 가져 옴ξ로써
문화의 법 또는 복음의 뱅 이 직정 요쿠하는 바냐 또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 。 l 득을 추쿠하지 않게 했 o 며, 주어진 상황 속에서
무엇이 이 웃에 봉사하는 것안가, 그 주어진 상황이란 참으로 어떤 것
인 가 하는 것에 더 많은 관성을 가지게 하였다.

이원론에도 불흔 그 장점에 늘 결점이 붙어다니는 것 이 사살이


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하여는 마른 두 기독교 그룹도 제속하여 주의
를 환기시키고 있마. 이성에서 이미 고찰한 그 입장 자체의 악용에
판한 고려는 그만 두기로 하고, 다만 두 가지 가장 자주 언급되는 비
난에 대 하여 말하기 로 한마. 즉 이 원론은 기 독교안을 반〔反)율볍 주의
혹 안도하며 동시 에 문화적으로 보수주의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
런 두 가지 정죄에 대하여는 설명을붙일 무엇이 있다. 사회와 이 성 의
모든 볍칙파 인간의 모든 사엽을 상대화하는 것은-인간석 표준에 의
한 측정이 높든 낮든 간에, 모든 것은 죄 아래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교리 를 통하。~- 경솔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거나 절망석인 사 람들
에게 문영 생활 엽칙을 외면할 구실을 제공한 것이 사실이마. 그들은
아래와 갚은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바울이 나 루터를 내세웠다.
즉 사밤이 율법 에 대 하여 죄 로 물들어 (sinfully) 순종하든지 죄로 물

들어 불순 종 하든지 , 또는 그들이 죄 후 물든 율엽 에 순종하든지 불순


종하든지 , 그들이 진리를 죄로 룹들어 담쿠하든지 죄로 불든 회의주
의자의 삶을 추구하든지, 그들이 독선적우로 도역적이든 망종적으포
우도덕적이든 간에, 이 모든 데에는 아무런 다를 것이 없 다는 주장이
다. 이 런 율엽 이하, 문화 이하의 행위를 장려하는 것이 이원론자의
본의가 아니었마는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그가 초율법적 생활을 알
고 있으며 동시에 문화 얀에 있는 죄블 깨닫고 있기 째문이다. 그러
나 그는 최소한 유혹에 영합하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형식을 우모
한자 또는 약지-들 앞에 제공했 다는 (유흑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책임
운 안 정해야 한마. 0 ] 런 것이 사살이라 할지라도, 그것 쩨문에 그가

187
말하는 죄의 만연성과 모든 인간 행위와 은혜와의 차야점이 결 코 우
가치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말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하지
는 뭇했다는 것을 시사해 준마. 문화적 기독교인파 종합주의 기독교안
들은 문화의 업에 순종하라는권고와 더불어 이원론자의 편에 서야할
것을 암시한다. 그러냐 그 만변에, 그들은 이 원론자들이 반드시 설교
해야 하는 파제, 즉 그 순종에 따르는 최악성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
다. 교회가 마태복읍파야고보서 플 닙 1-울 서간들파판련시켜 채택한것
은 마르시옹이 한 일보마 훨씬 지해후왔다 .

바울파 루터 는 둘 마 문화석 보수파라는 득색 을 지 녀 왔다. 그들이


운화적 개혁 을 촉진시킨 풍극석 공석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나 그들이 그 당시의 주요 문화적 제도들파 판례 중 다
만 한 가지, 득 총교석 제 도와 관습만의 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마는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마. 그 이외의 것들에 있에
서 는, 가령 노여l 제도, 사회 계균 제도 등은 국가와 경제 생 환의 존
속과 함께 비교석 변함 없이 그대로 되어 가기를 원하고 있운 것이 시­
실인 성싶다. 그들이 귀족, 시만, 소바자, 상인, 노예, 상천 들에게
그틀의 행위 흔 개선할 것을 바라고 요챙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냐 그
것은 사회적 관례라는 본질적으로 불벤하는 콘텍스트 안에서의 개선
을 희망한 것이었다. 가정 생활에서까지도 그들의 견 해대 로 본마연,
남펀과 아내, 부모와 자녀가 그러스도 안에서 서혹 시랑하라는 권고

에도 불구하고 족장 제도적 성격을 다분히 보유하고 있었마.

이런 보수주의는 직접 이원론적 엽장과 연결되어 있음이 사실안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회적 변혁을 일 A킨 것은 대체로
그들 자신의 본의에서 생겨난 결과는 아니었다. 그러고 그것은 그들
보마 마른 그룹들의 도움 없이는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법률, 국가,
그러고 다른 여러 가지 제도들은 사회적 유대 속에서 안간이 적극석
인 이웃 봉사를 깎된 생활로 향상하게 하는적극석인 대챙 기판이라고
호지 않고, 마만 일종의 제 제 력 (制겠力) 즉 멈 죄 를 악는 제 방이 나 우정
부적 혼란의 예방자후 보는 경우에 이 제도들이 보수주의로 홀러갈 것
운논리적 펄연안 것이다. 뿐얀 아니라 이원론들에 의하면, 이런 제도
들은 전적으로 알시척이며, 죽어 가고 있는 세상에 속한 것이라 한다.
이 점에 판련되어 일어냐는 뭄제가 하냐 있다. 바울과 루터 두 사람

188
제 5장 역살적안 판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운화

이 냐타냐 있듯이, 이원론에는 일시성〔一|함性) 또는 유한성을 죄와 긴


밀하게 판련시컴 A로써 창조와 타락을 매우 가깡게 접근 시켰으껴,
따라서 하나넙의 창조 사엽에 엄청난 과소평 가를 돌리는 경 향이 있는
것 같다. 마르시 온과 키 에르케고르 속에 서 이 단적 안 색 채 로 제시 된 이
사상운 그들의 위대한 선배들후 말미암아 암시된 것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죄 때문에 모든 사 람 이 정 죄 아래 있다는 그의 제 1 원리 블
채강조하기 위하여서만 창조 사싱야 의의 깊게 사용되었 마. 그러고
그가 “육체 " (Flesh) 라는 단어 를 분명 치 않게 사용한 것 은 창조된 봄
(Body)이 선하다는 이념에 대하져 그가 근본적무로 확신을 가지지 돗
하고 있었다는 것을 냐타낸 것이다. 루터에 있어 서는 하냐닝의 진노
가 다만 죄에 대해서만 임한 것이 아니라, 현 세계 전반에 엄한 것 이
다. 그러으로 이련 이들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자기에 대한 죽음을 통
하여 그러스도 안에서의 새 생영 에 들어가는 것을 동경 찰 뿐 아니라,
또한 몽의 죽음£로써 이 일시적안 절서에서 벗어나는 것 도 갈망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죽고 그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하냐냥 안에서 의 삶
을 누리는 것은 물흔 더 중요한 일 이다. 그러나 자기 중성적안 것과
유한성이 너무나 밀접하게 접근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의 차얀(此뿔)
에서는 영석 벤형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사상은 결국 모든 일시
적안 문화 사엽에서 안간은 다만 일 시적이요 사멸하는 것들과 판계되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러 므로 기독교안의 문화석 의우
가 아우리 중대하다 할지라도, 그들의 삶은 그 안에 있는 것은 아니
다. 그들의 삶은 그리 스도와 함께 하나닝 안에 감추어 져 있는 것 이 다.
다른 여러 연 에서 이원론자와 거의 다를 것이 없는 개변주의자의 옹
기가 이 원콘자의 동기 와 주 별되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18 9
제 6 창

문화의 변혁 자 그러스도

1. 신학적 신념

그러 스도와 문화의 판계 에 대한 개 벤주의 자 (conversi o ni st)의 이 해는


이 원론자와 가장 가깜다. 그러 나 그 밖에 중요한 다른 기 독교인들의
패 도들파도 유사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마태복음과 야고보

고서로부터 시작하여 바울 서신을 거쳐 재 4 복음서에 이른다든지, 또


는 더 둘피안A로부 터 영지주의자들, 그러고 클레엔트에서 어거스턴에
이 른 다든지, 또는 롤스토이 , 리 출 , 키 에 르케 고르로부터 모오 ~l 스 (F. D.
Maurice)에 이르러 본마연, 개변주의자는 뚜렷한 독자적 인 동기를 가
지고 있마는 것을 밝히 폴 수 았을 것이다. 그러스도와 문화의 문제
에 대한 캐변주의석안 해당 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교회 전통의 중요
한 본류(本流)에 속하고 있 마는 것은 획 실하마. 그들이 그러 스도 안
에 서의 하냐닝의 역사(않事)와 문화 안에서의 안간의 노작을 구벨하
는 데 극도로 강경하다 할지라도, 배타석 기독교에서 처럼 운명에서
이달하는 걸을 취하거냐, 툴스토이주의자들같이 사회 제 도들의 배격
에 가혹하마거나 한 알은 없는 것이마. 그틀이 그들의 주닝께 복종해
야 할 의우와 더불어 사회 얀에서의 그들의 지 위 를 수 락한마 할지라
도, 그들은 이 세상과 모든 세상 행로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날카
로운 심 판을 완화하려 고는 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 독론은 종 합론자와
이원론자에 비슷하다. 그러슨도가 새 율법을 주신 이라는 것보다도
그가 속죄주라는 것을 주장하며, 하냐닝은 인류의 최 선의 정신석 원
천을 표칭하는 분이라는 것보다도 인간 이 만냐는 분이라는 것을 강
조한다. 개밴주의자들아 이해한 바에 의 하연, 그러스도의 사업응공간

190
제 6장 운화의 뻔혁자 그리스도

적, 외부적안 언간 챙동에 우선적으로 관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는 안간의 마음을 심사하며 잠재 의식적 삶을 심판한다. 사람의 가
장 갚고 가장 근본적안 것을 마룬다. 그는 안간의 가장 완강하고 독
살스려운 뱅, 즉 영의 페결핵, 죽음에 。 1 르는 영을 고친마. 그는 안
간의 가장 깊은 데 숭어 있는 번식력이 강한 죄, 즉 하나넘어1 대한
인간의 불신, 무애 C無 휠) , 설망을 용서한마. 그는 이것을 이녕과 권고
와 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단순화시키지 않 ò 며, 깊은 겸손으로 안간
틀파 함께 살며 , 그들을 위 하뇌 죽음을 당하고, 하나닙 의 은총에 내

하얘 논증하기보다도 무덤에서 다시 살아남A로써 그것을 시위한마.


그들의 죄판〔罪觀)은 종합론자보다도 이 원론자에 더 가깡마. 죄 는 안
간 영흔 속에 깊이 쁨리 박고 있£며, 안간 행위 건만어l 속속들。1
퍼져 있무며, 그 영상〈病狀)은 아무리 각양각색엘지라도 그 부패성
에는 차벨이 없마. 그러므로 안간이 자기 영광을 높이는 모든 운화
활동, 그것이 개인적안 것이거나 사회적안 것이거냐, 한 국가의 일원
으료서나 안류의 일원으로서냐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하나념의 심판
아래 놓여 있마. 하나닝께서는 자기의 。 l 익을 구하지 아니하시는분이
시다. 그들은 이 문화의 자가 모순성 안에서 문화의 자기 파날성을
발견한마.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런 문화가 하냐남의 주권적 통치 밑
에 있다는 것을 그들은 믿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안은 주닝께 순종
하는 가운데서 문화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변 론자가 이원론자로부터 구멸되는요점은 그들이 이원론자보다도
문화에 매하는 태도가 더 적극적이요, 희망적이라는 점이다. 보마 긍
정적안 이들의 입장은 세 가지의 신학석 신념과 밀접하게 판련되어 있
다. 그 첫째는창조와판련되어 있마. 이원론자는 그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 한 속량에 너무나 치중하기 해문에, 창조는 이 속량의 위대
한 행위에 대한 알종 의 서론 (prologue)에 불파한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러스도 안에서 “ 만물이 창조펴였으나 하늘파 땅에서 보야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을파 왕위나 주권이나 지배냐 권위냐 만물이 다 그로
말 0 ] 암고 그블 워하쳐 창조되었느니라 "1 한 바울의 말을 그들도 긍정
하는 것이 사살 이냐, 이 귀절은 그리 강조된 사상이 아니었고 마만
화해라 는 매 주 제 를 도입하기 위한 서온£로 사용관 것이었마. 그러

1. 골 1 : 16.

191
나 개변론자에 있어서는, 하나념의 창조적 활동과 ‘하나닝 얀에 있는
그리스도’와는 두 주요 주저l 이어서 어느 하나라도 속량 개념에 압도
되거나 압도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창조완 세계 안에서 알하는 피
조자인 인간은 그의 맏음 없는 생각으로는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 아
래서 헛된 사불 속에 살고 있마고 믿을지 몰라도, 여전히 그는 그리
스도의 통치 밑 에 서 창조적 능력 과 하냐념 의 말씀의 질서 화 (ordering)
에 의하여 잘고 있다고, 개변주의자들은 보고 있마. 하기는 이원론자
들드 이와 비슷한 말을 종종 하는 것이 사살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
나닝의 진노, 특히 자연계 안에 냐다냐는 진노에 너무나 많이 판심을
가지기 애문에, 자연의 통치자가 에푸는 혜택에 대하여는 자옷 의혹
을 느껴게 되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개변주의자의 이론이 그의 적
극적인 창초판에 마치는 영향은 대만하다. 인간이란 파초불。 l 비록
억지로 받윤 갈고, 교육을 받고, 사회 를 조직하며, 또는 자기 존재와
더불어 주어진 질서를 왜 곡(뿜패)되게 다스린다 할지라도, 파조물 안
간 펀에는 여전히 하나닝의 창조적, 잘서화의 사엽에 대하여 긍정적
이고 잘서 있는 반응을 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개변
주의자듣의 주장야다. 그들이 창조에 랙하싹 큰 판심을 가지 고 있는
것으로 인하여, 이원론자가 등한시 한 기독폰으l 일변을 말전시킨 경향
。1 있 마. 한펀으로는, 말씀 즉 하나닝 의 아들이 창조에 동참하였다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한 옛날에 그러한 잎이 있었다는 의미에
서가 아니라, 하나닝의 생각파 능력 안에 있는 만물의 논리석, 순간적
인 시초와 직접적안 기원(起源) 이라는 의미에서 동참했다. 그러고 다

른 한펀으로는, 아들의 성 육신에 서 나타난 하냐념 의 구속 사엽 에 큰 판


심을 가짐으로써, 다얀 그의 죽음, 부활, 그리고 극단능우로 올 재링에
나타난 구-속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마. 그렇다고 캐변주의
자가 역 사적 예 수를 버 리 고 로고스(말씀)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니 다.

그러고 성자가의 놀라움을 부언하고 마굿간에서의 탄생만을 찬단(폈


漢)한다는 것 도 아니 다. 그들은 다만 창조와 구속, 성 육신파 속최 동
의 모든 주제를 한 운동 속에 통일하기블 원하는 것뿐이다. 문화에
판한 개변주 9] 자의 사상 속에 나타낸 창조는 윤론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엽에 대한 이들의 이해가 갖는 영향력은 뚜렷하다. 육신이 되어 우
리 가운데 거하신 말씀, 창조의 세계 속에서 아버지의 사엽을 챙하는

192
제 6 장 둔화의 변혁자 그려스도

아들。 1 (그의 잘서화 챙위 없이는 있는 적이 없는) 인간 문화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이마.

인간의 사엽과 판슴에 대한 개변주의자의 견해를 규정하는 제 2 의


신학적 신녕은, 창조 때의 선에서 다락한 인간의 본성에 대 한 이해이
마. 우리가이마 진술한바와 같이, 이원론자는창조 와타락을 거 의 영
지주의적 용어로 표시할 수 있을 만큼 밀접하게 접근시컸마. 마치 유
한한 자아의 창조물이 나 물질 자체 가 타락에 빠진 것 같이 말하는 것
이다. 봄 얀에 있게 된다는것은 그러스도로부터 떠냐 있다는 것을 의
미한다. 육신 안에 선한 것이라곤 없다. 육정적인 것은 곧 죄 아래
팔란 것이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바윷이나 루터 같은 사 랑들에게는
참된 것이다. 그것은 몽 안에 거하는 인간의 영이 죄로 물들어 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폼 자체가 억제할 수 없는 유흑으로 인간을 죄로
이끌어 가기 해문이 ~}.2 그러므로 이 런 기독교인들은 문화적 제도란
얼시척이요 타락된 세계 안에서 한소극적안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불
과하다는 생각A로 기울어지기 쉬운 것이마. 즉 문화 제도는 부패를
막기 위한 질서, 무정부의 예방, 육신 생활의 지도 등 얼시적인 문제
들에만 판계펀 것이라고 생각한 마. 개변주의자는 인간의 근본적인
다락을 주장하는 교리에 찬 동 하는 점에서 이원론자와 합치된다. 그러

나 그는 그 터락을 창조로부터 구분하여 또한 육체적 생명의 상태


로부터 구 1뀔하는 데 극히 널카롭다. 타략은 창조의 반대 요, 결코 그
계속은 아니다. 이것은 전혀 인간의 행동이요, 결 코 하냐닝의 행동은
아니다. 이것이 결과적우로 육체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

2. 논쟁 많은 이 점 에 있 어 서 , Hans Lietzmann , Aπ die Rocme r ( Haπ dbtι


zum Neμe n Testament , Vo l. \IlIJ) , pp. 75 ff. 을 참고하라 . 그가 로마서
7 : 1 4 ~ 25 플 주석 하연서 말하기를 “ 안간의 벙 죄 적 행위는 그의 안에서 역
사하 는 ‘ 악한 충동’ ( evil drive) 에 기 언한다는 견해 는 그 당시 의 유대 신
학에서도 말견된다 , 그러냐 이 검에서 후자(우「대안)에게 생소한 사상은그
충옹이 육체와 연결꾀어 있다는 것안데 이것은 극히 중요한 논청이마 .. ..
바울이 이 교리의 독자적안 창시자냐 또는 바울파 동시대 사랑이고 같은
헬라적 유대안이었던 Philo 가 오래 유행펀 이 교리를 말했다는 사실융 인
정하 느 냐: 하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하게 펼 것이다. 만알 후자를 택한다떤
(역사적 망엽의 규준~로 보아 그것이 더 정확 하다고 보이지만) 아마도 바
울도 Philo 와 갚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첼라 사상적 품위기에서 이것 을
추출한 것이었마고 말할 수 있을 것이마.

J. 93
다고 신체적이거나 형이상학적안 것은 아니다. 이것은 도먹적야요,
인격적인 것이다. 하나닝을 배반한 안간에게 미치는 결과는 전혀 인
간 펀에서만 나타나고 하나닝 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다
락의 결과라는 말의 의마 내용은 “부패”이다. 인간의 선한 본성은
부패해졌다. 이것은 존재해서는 안될 사물처럼 악한것이 아니라, 비
틀어지고 꼬이고 방향이 잘옷된 것이다. 인간은 그가 창조될 혜 그
에 게 주어 진 사랑으로 사랑한다. 그러 나 그는 잘옷 (wrongly) 사랑
하며 잘옷된 질서 속에서 사랑한다. 그는 그의 창조주께서 그에 게 주
신 욕망으로 션을 욕망한마. 그러 나 그에게 선하지 뭇한 선을 옥석하
며 그의 참 선을 잃어 버린다. 그는 과살을 맺는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열린 것이며 쓰다. 그는 그의 살천적 이성의 도움A로써 사회 를
조직한다. 그러나 그는 마이성적인 걸을 치달는 지기 욕심의 강압 째

운어1 사물의 본성을 거슬러 그의 조직화 챙동 자체 안에서 그 조직


을 붕피시킨마. 그러므로 그의 문화는 부패를 헝:한 질서라기보다도
전적우로 부패된 질서 이다. 01 것은 이원 론자에게서와 같다. 이것 은
악이 아니라 전도 (願倒〉된 선이마 . 이것은 존재의 나쁜 연 (badness) 이
아니 라, 전도(煩倒)로서 의 악 (evil) 이 다. 그러 므로 문화의 문제 는 개 변
의 문제이지, 새 창조로 대치한 문제는 아니다. 물론, 그 개변이 너
무나 근본척 인 것이기 해문에 일종의 신생을 초래한다.

창조와 타락에 대한 이런 신념을 가지고 개변주의는 그들의 제 3 의


판점을 연결한다. 그것은, 역사는 근본적으로 다만 안간이 만들어 내
는 사건들의 과정이 아니라, 언제냐 하나념과 인간의 극적인 상호 행
동에서 생겨지는 것이므로 역사 안에서 하냐닝은 어떤 일 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역사판이다. 배타적 기독교안들에게 있어서
는, 역 사란 교회 혹은 기 독교 운화의 발흥(웠!興)파 이 교〔異敎 ) 문명 의

사멸을 기술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문화적 기독교안에 있어서는, 역


사란 자연파 정신의 대결에 판한 이야기이다 그러고 종합론자에게
있어서는, 역사란 영혼이 하냐닝과 궁극적안 교제를 율법 , 이성, 복
음, 그러고 교회의 치하에서 준비하는 기간이다. 이원 론자에게 있어
서는, 역사란 신앙파 불신앙이 투쟁하는 시간, 생명의 약속이 주어진
해와 그것이 완성될 혜의 중간 기간인 것이다. 그리고 개변론자에게
있어서는, 역사란 하나닝의 능력 있는 행위와 이에 대한 안간의 응답

194
제 6창 문화의 변혁차 그리스포

을 기술한 이야기이다. 그는(개변흔차) 다른 동료 기독교안들에 비하


여 “중간 시 간 "Cbetween the times) 보 다 조금 옷하고, 신적 인 “현재 ”
Cdivine “ Now") 보다는 조금 뛰어냐게 살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종말콘적 미래가 종말론척 현채로 되어 있다. 그가 의미하는 영원
이란 것은 시간 이천의 하나닝의 행똥이 나 시간 이후의 하나닝과 함
께하는 생영보다도, 시간 안에서의 하나닝의 엄재를 의미한다. 영

생이란 것은 지금, 여기 있는 실존의 특질 (quality) 이다. 그러므로 개


변주의자들은 ,창조에서 주어진것을 보존한 다거나최후의 속령:에서 주
어질 것을 위한 준비라기보다도 현재의 갱신에 대한 하나님의 가능성
에 더 많은 판성 을 가지 고 있 다. 시 간에 대 한 정 향 (orien tation)의 이
러한 차이는 정확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기독교안의
생휠에는 미래를 향한 긴장이 있음파 동시 에 이-브라함파 이삭파 야

곱의 하나닝을 의지하는 얀정은 물론,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는 안식


도 있는 것이마. 그러냐 최후의 원수안 죽음이 그러스도로 말미암아
멸망되리라는 그 시간을 기대하는 바울의 경우와, “마 이루었다”고 하
는 성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요한의 이해는 서 로 다
른 것이다. 그러스도 안에서 하나넘을 만나는 현재가 곧 역사라는
견해를 가진 개변주의자로서는, 창조와 문화의 세계가 최후로 종말을

고한마는 데 대한 기대보다도 만물을 그에게 끌어올려 변화시키는 그


리스도의 능력 에 더욱 민감할 것은 사실이다. 그의 표현 방식은 시간
척이 아니라, 공간적이다. 그러고 예수 그러스도로부터 흘러 나오는
생명의 운동은 상향적인 운동이다 . 그러스도에 대한 찬양과 흠앙의
힘찬 파도에 의하여 높 이 올려진 인간의 영혼파 행위와 사상의 상승
(rising) 이마 . 이것이 인간 문화에 가능한 본질이마. 즉 하냐닙의 영광
안에 있고 하나념의 영광을 향하여 있는 변화된 안간의 삶이다 . 안간
우로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냐 그 자신을 위하여 몹파 영혼을
카잔 인간올 만드시고,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 세상으로 하여
곰 그를 통하여 구원받케 하신 하나님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2. 제 4 복음서의 개변주의적 동기

개변 론자의 이념과 동가는 신약성서의 여러 곳에 나타나 았다. 요

195
한 1서에도 체시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펀으로는 세상의 암흑 파
무상(떼、常)파 무자바 동에 대 한 너 우 나 많은 언 급이 있고, 다른 한펀
으로는 기독교인의 새 공동체가 낡은 사회에 비하여 너무냐 뚜렷하게
쿠멸되 어 있기 해문에, 이 문서의 경향은 오히려 배다척 기톡교를 1
7-

향하고 있는 것같이 보안마. 개변론이라는 주제는 바울에게서 암시되


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육신파 죽음파 죄의 강압력 둥에 대한 그의
사상으로 말미 암아 압도되 어 버 렸 다. 아마도 그것은 요한복음에서 가
장 밝히 지적되어 있다고 볼 것이마. 그러냐 이 복음서싼 요한 1 서와

의 밀접한 관련성이 암시하듯이 , 물론 거기에는 분리주의적인 논조가


수반되 어 있마. 제 4 복음서의 “야누스적안 살재 "CJanus- like rea li ty)( 야
누스는 고애 로마의 신의 이 름 우로서 두 가지 열굴을 가지고 있는 신이라 한
마- 역자주)라고 일결어진 바, 곧 “내렵자의 연합 보기에는 서로
오순되는 것들의 힘일이 문화 세계에 매한 태도에도 적용될 수 있
마 .3 하여간 개변주의 사상의 기본 이념은 이 복음서에 모두 표시되

었다 . 그리고 이 복음서 저작 자체가 문화적 개변의 부분적 증거이였


마.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 그러스도의 복음을 헬라 사상적 독자의 개
념으로 벤역하려 했을 쁜 아니라 로고스 (Logos) , 지식, 진리, 영원
등의 개념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석함으로써 그 의미 를 새로운 수준
으로 상승시컨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창조주에 대한 개변주의자의 신앙에서 제 4
복음서 에 대한 암시가 이미 주어졌마 .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 관
읍서는 바울이 끝맺은 곳에서부터 시작했다 할 것이다. 즉 말씀의 강
시와 그를 통하여 생겨난 만물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하였다 . 그를 흥

하지 않고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세제는 그를 통하여 만들어진


그의 가정이다. 우릇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선하다는 것을 요한은
이 이상 더 힘차게 말할 수는 없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신체적 또 는
물질석안 것은 하나닝의 특별한 진노 아래 있마든지 인간은 육체룹

3. CL G. H. C. Ma cGregor , The Gosþe! of Johη (The M offatt New T esta -


ment Commentary). 1928 , p. ix , 거 치 에 이 복음서 안에 있 는 antitheses
에 대한 많은 비판카 들의 견해를 종합한 것이 있마. 그리고 E.F. Scotζ
The Fourth Gospe! , 1908 , pp. 11 ff. , 27.

196
제 6 장 문희의 변혁자 그리스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죄 아래 딸려 있다든지 하는 생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요한은 육 (f1esh) 파 영 (spiri t)을 신중히 구분하였다 . “육
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우로 낸 것은 영이마”고 말하였 다. 그러나
신체석, 윌-섣적 또는 일시적인 것은 영석으로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
문에 어떤 방도로든 악에 개엽되어 있다는 생각은 결 코 가지지 않았
다. 뿐만 아니라 자연적 출생 , 먹고 마시는 것 , 바람, 물, 떡과 포도
주 퉁이 영적 생명의 실채를 마루는 데 사용되는 상칭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영적 의마를 내표하고 있다는 것을 이 복음서 기자는 말하 였

다. 영적 사건파 자연석 사건은 “서 로 결함 되어 있즈L며 유추적〔類推


的 )안 .. (i n terlocking and analogous) 것이다 . “이것은 사랑들로 하여금

어떤 신 비척 또는 초연한 영성으로 불러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4


요한은 말씀으로 말 미암은 창조와 그 말씀이 육신을 이룬 데 대한

그의 신 념에서 물질 계냐 정신계를 막론하고 전 세계에 대한 하나닝의


천적안 긍정적 태도를 확신하였다. 창조란 구원이 의미하는 바로 그
것을 뜻한다 . 즉 “하나닝이 세상윤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 A
니 누구든지 그를 맏 A연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리라 . 하나닝이
그 아들 올 세상에 보낸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함이 아니라 그를 통
하여 구원말게 하려 하성이니라” 하는 것을 의미한다 5
제 4 복음서의 명백한 역섣의 하냐는 “세상”야라는 말야 하나념의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펴조물 천 체 특히 인류를 의비하는 것이며, 동
시에 그 말 이 또한 그러스도를 배척하고 어둠 속에 거하며 악한 엘을
하며 하나 닝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하나념 아들의 죽음을 기빼하는
그런 인간 들을 지석하는 데 사용띈다는 사질이다 6 세상을 다스리 는
자는 로고스 가 이니라 악마라고 하 였 다 7 세상 원리는 진리 71- 아니
라 거칫이다. 이것은 샅인과 죽음의 지역 이요, 생명의 영역은 아니라
하였다. 그러나 요한 이 두 가지 구별펀 설재, 즉 창조된 영의 세제와
이에 대 휩 하고 있는 펴조물이 아난( uncreated) 물질의 영역 , 또는 하

4. Edwyn Clement Hoskyns, T he Fcμrth Goψel , 1940, Vol. 1. p. 217,


cf. pp. 23 1, 317 ff.
5. 요 3 : 16 f.
6. cf , 요 7:7; 8:23; 14:17; 15: 18ff.; 17 :25 , et passim.
7. 요 8:44; 12:3 1; 14: 30; 16: 11.

19 7
나닝의 말씀으로 창조된 세계와 악마적으로 형성된 우주를분러시7"1 는
알은 결코 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 타락 사상, 즉창조된 선의 전도
(願倒〕라는 사상이 이 복음서 전체 에 함축되 어 있다. 창조물, 곧 하나닝
의 말씀을통하여 하나닝으로부터 온 이 창조된 세계는 근본척으로 선
하다. 그러냐 이것이 하나념에 대한 응맙 속에서 자기 모순적이요 하
나님에 게 모순되게 CGod -contraditory) 되었다. 창조 행위와 구속 행위

가운데서 하나닝은 이 세상을 사랑한마 . 그렌데 세상은 이 사살을 부


정하고, 알씀을 미워하는 것 A 로써 하냐닝의 사랑에 응답한다 . 이것은

단순한 상황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 하나닝 , 말씀, 세상의 무한한


상호작용 속에서 큰 복잡성을 떠고 있다. 그런데 이 복장성은 이 제 4
복음서 기자 이외의 어떤 다 흔 작풍도 그만큼 장 설명하지 를 뭇하였
으며 안시소차 뭇했넌 것이다. 그는 하나닝 아버지에 대한 예수 그
러스도의 응답과 창조주에 대한 안간 세제의 응담을 끊임없이 대조함
A로써 세상의 왜곡된 본성을 지적하였마. 이-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
종하고 아버지의 일을 행한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 를 존재하게 하신
그이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바, 마귀 를 자기 “아버지”포 삼고
그 뜻에 복종하다. 아들은 아버 지 를 존경 하고 그를 영 광스럽 게 한다.
아버지 도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며 더욱 영광스럽게 하려 고 한다. 그
러나 세상은 하냐닝께서 영광스럽게 창조하셨음에도 불무하고 하나닝
보 다 자기 자신올 영 광스럽 게 창조하려 는 행 동으로써 창조주 의 행 동
에 응담한다. 아들은 아배 지 를 사랑하고 이- 버 지 는 아들을 사랑했으며
또 더 욱 사랑하려 한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닝에게 사랑을 받고 있
음에 도 불구히-고 자기 를 사랑하는 것£로 하나닝 의 사랑에 왜 곡펀 응
압을 한다 . 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석 증언한다. 아버지는 이-들에 대하
여 증언하였고 또 더욱 증엔할 것이마. 그러나 세상은 자기만을 드러
내려 한다. 예수 그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그의 생명을 받는다 그
리고 그에게 생영을 주신 그이에게 자기 생명을 바친 다. 그러 나 세상
은 자기 생영을 스스로 사랑한마 8 그러스도와 아버지와의 。 l 러한 관
계로 보아, 인간의 죄악적인 성질이 밝허 드러난다. 그러나 이 복음

8. 이 주제들은 요한뷰음 전체에 퍼져 있 A나, 특 히 1 5장에 있는 포도원 농부


와 포도 나우와 그 가지의 비유에 서 아버지와 아들파 세싱과의 상호판계를
상정하였다.

198
제 6창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서 인간의 전도펀 세계와 그들의 사엽을 그리스도와 대조함으로써만


타락의 교리를 제시한 것은 아니마. 세상의 부패는 세상과 아들의 관
계에서 나타나는 것이요, 다만 세상이 아버지를 향하여 가지는 태도
에서만 나타냐는 것은 아니다. 하나닝을 사랑하는 자, 곧 그리스도는

세상을 사랑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사랑에 대하여 배척과 중요로


응탑한다. 그는 “한 사랑이 백성들을 위하얘 죽는 것이 천 국민이 망
하는 것보다 유익하다”고 말하는 세상 친구들을위하여 세상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대신 세상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려고 온다. 그는 생
명 을 주려 고 오는데 사랑들은 그에 게 죽음을 준다. 그는 사랑들에 게
그들 자신에 대한 진리 를 말하려고 오나, 사람들은 그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는 하나닝에 대하여 증거하려고 왔다. 그러냐 세상은 자기들
의 창조주와 쿠속주에 대 한 확증우로 대 당하지 않고 율법 수여 자, 성
일(聖日 ) , 그 문화에 판켠하여 증거한다. “그가 자기 백성에게로 왔
£냐 그 백성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요한이 죄와 타락의 교리를 추상석인 용어로 형성하여 이 를 정의하
는 대신에 실례를 들어 설영하고 있음에도 불쿠하고 구태여 그의 죄
판(罪觀)을 정의한다연, 죄란 생명의 원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하여 우방할 것이다. 이미 수락펀 어떤 진리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서
는 거짓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미 긍정된 생명을 멸하는 것이 살인
이마. 생명을 멸하는 행위 안에서 생영은 확안되는 것이다. 증오란
것 은 사랑을 전제로 한마. 생명, 영광, 빛 , 그러고 사랑은 교제와 공
동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또한 존재하는 것
이마. 그러고 이렌 공동체 안에서 안간은 다른 사랑의 행위로 말마암
아 살면서도 거기에 친철하게 응답하기블 거부할 수 있기 애문에 죄
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죄는 삶의 모든 수준에 퍼져 있다. 그러나 그
뿌리는 하나님과 그 말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안간들의 모순 판
계 안에 박혀 있 다. 호스킨스 경 (Sir Edward Hoskyns) 이 “인간 행
위에 대한 요한 복음의 분석은 ...... 두 가지 행위를 신학적 A로 쿠옐

하고 있다 . 즉 자기들의 챙위는 자기 자신들 얀에서 완성된 것이어서


하냐닝의 의 를 받아들일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람들의 행동
과, ( 겉 A로 보기 에는 악 o로 판정펼 행위와 동일할지 몰라도) 그들
의 마음 속에 하냐닝의 의 를 위한 여유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행

199
동, 두 가지 이다. 후자는 신앙을 요청한다. 그것은 그들 자신만으로
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는 신 앙을 배제한다. 그것은 그
들이 자기 충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마” 한 것은 정론이라 하겠 다 9
그러나 요한복음의 안간 행위 분석은 앞둬로 뻗쳐 았다. 즉 하나넙
의 사랑을 너무나 망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사랑은 A 례 자기
의 몫으로 정해진 것같이 생각하켜 자기애 〔 自己愛)를 가지고 하나넙
의 사랑에 응답하는 사람들파, 사랑에 사 랑우로 응답하는 사랑- 마만
말은 매후 갚는마는 태도가 아니라, 이-버지와 아들이l 게 사랑받는 모
든 사람에게 넘치는 봉사의 마음A로 사랑을 베푸는 사광-의 두 가
지 행위를 쿠별하는 것이다.
아버 지 와 아들파 세 상파의 공동체 (community) 안에 서 본 하나닝 의
선하심과 인칸의 완악성에 대한 이러한 신념 위에, 요한은 일종의 역
사판을 결부시켰다. 그의 역사판이란, 역사안에 있는시간석 차원, 즉
파거 와 미 래 가 영 원과 시 간의 판계 (eternity-time relation)에 마분히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복음서 서론에서 알한 창조는 괴-거에
속한 한 사건이 아니라, 모든 현존한 것의 기원〈起 源)과 근거인 것이
다. 즉 존재의 영원한 시작이요 영원한 원리이다. 타락은 역사적 세대
들의 계옐 중에서 처 음에 위치하는 사람의 삶과 결부펀 한 사건 이 아
니라, 현재 하나닝의 말씀에서 옐어져 나가 있는것을의미한다. 세상
의 심판도 지금이다. 그것은 말씀이 입하시는 것과성령의 임재하시는
것으로 주어진 것이다_ 10 처]4 복음의 역사판은 “하나닝의 나라”라는 말
을 “영 생”이란 말로 대치한 것이 그 특색이다. 복음서 학도들이 거의
천부가지석한 바와 같이, 이 영생이란 어귀는어떤 바탕 (quality) , 삶
의 판계,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있는 현재의 공동체,
현재의 영적 예배, 사랑, 진실 응을 의미하는 것이마. 미래를향한 다
소의 긴장은 남아 있다. 어느 경우에나 어느 기독교안에게 있어어도
이 긴장이 완전히 제거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그려나
이 복음서의 중요한 요첨은 새 시작, 새로운 단생, 새 생명은 일시척
인 역사나 육체적 생활을 변경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것은 하나닝파 함께 시작하는, 위로 부터 의, 하늘로 부터의, 영석안

9. Op. cit. , p , 233


10. 요 9:39; 12:3 1; 16:7-11; cf. Scott, φ. cit. , chap. X.

200
제 6장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시착시다.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렇다고 미래의 나라도


아닌) 냐라의 신민권이 다. 요한은 주로 그러 스도 재 럼 의 교리 를 보헤
사의 강럼에 대한 교리로 대치시켰 A며, 그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하
여 。 l 육을 떠난다는 생각을 성령 얀에서 그리스도와 함 께 하는 현재
생 환 야라는 사상으로 대치시켰다. “육은 우익하마 그 출생이라는
적극적안 의 미 에서나 그 죽음이라는 소극적인 의미에서나 육은 쓸
모가 없다. 이 새 시작이란 것은 예수그러스도 안에서 , 또 성령의 강
럼에셔 나타나는 하나넘의 가능성이며 하냐닝의 행동이다. 역사의 종
발에서가 이니 라 각자의 살고있는 살존적 순간에서이다 .11 그러냐 가

능성 이 신바석, ll] 역사적 인간 생활 안에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예수의 생애의 구체적인 사건들파 이에 대한 교안들의 구체
척안 응당을 통하여 살현펀다. “제 4 복음서의 주제는 역사를 의미 았
케 얀드는 바역사, 시간을 의미 있케 하는 무한, 인간을 의미 있게
만들고 이 렴으로 그들의 구주가 되는 하나닝이다 "12 그러므로 이 책
은 역사적 기록과 영적 해석이 복잡하게 교착된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명백한 섹 。 1 다.

인간 문화와 그 제도에 판한 요한의 사상 속에는, 이러한 역사관 속


에 나타나 있는 캐변주의적 주제가 암시적으로 또 째로는 명시적으로
제시되어 있 다 유대교, 영지주의, 초대 기독교의 성례천에 대한 요
한의 명 백한 양면 적 태도는, 그를 개변주의자라고 생 각하고 보면 에
느 정도는 해명 펠 수 있다.
한펀L군 ‘ 그는 유얘교 를 만기독교적안 것으로 제시하였다. 그려냐
다른 한 펀으로 , 그는 “구원은 유대 안에 게 서 온다”는 것 파 그들의 성 서
가그리 스도에 대 하여 증거한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이렌 이원론적 태
도는, 2세치에 있 였 던 여려 갈동파 쿄회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주
장에 판 렌 시 켜 생 각하면 이해될 수 었을 것이다.13 그러냐 또한 그러
스도-문화 제 도로서의 기독교 교회가 아니라-는 유대교의 희망이며
땅 의미이 며 새 시작이라는 견해는 모든 시래, 모든 장소에서 수긍된
다 하겠 다. 여 기서 새 유대교라는 것은 유대교에 래한 그리스도의 개

1 1. Hoskyns, op. cit. , pp. 229; Scott, op. cit. , pp. 247 ff. , 317 ff.
12. Hoskyns, op. cit., p. 120.
13. Scott , op. cit. , pp. 70-77.

201
혁 운동을 이교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자유로 하냐닙 아 버지를 예매하
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유대교를 의마한다. 이와 비슷하게 영지주의에
대한 요한의 태도도 애애하다. 한펀으로, 그는 이 인가 있는 지혜의
종파에 그러스도의 복음올 적응시키는 것을 배격하는 태도를 취한 것
으로 보인다. 이 태도는 요한 1 서 에서와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펀으
로는, 지성에 흥미를 느끼며 영에 관심을 가지는 갱에서 기독교 영지
주의자와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마 14 부분적우로는 역사적 A로
설명될 수도 있지만, 이 이원적 태도는 문화석 종교 사상의 기독교석
변혁이라는 개 변주의적 판점에서 보면 훨씬 이해하기 휩다. 또 요한
은 2세기의 교회, 당시 교회의 교리와 성례천, 그러고 그 조직 동에
대하여도 개변주의자로서의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유대교에 대항하
여 이 문화적 종교를 옹호하혀 한 듯하다 그러 나 그는 금식, 기 도,
성례전 엽수 둥의 외적 형식 에 기독교의 독특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
하는 배타석 기독교인들파는 거리가 먼 사랑이었다.
그는 밀의(密磁) 종교에서 사용하는 어귀 들을 이용하여 기독교 신앙
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한 것£로 보안마. 그러나 그러스도를 그런 밀
의 종파의 주요 안물 중 하냐로 만들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
다 15 그의 À-l 시 잔처}를 통한 그의 관심사 는 종교의 의적 행동엑서 스

스로를 표현하려는 영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변혁 시 키 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모든 상징적 행동은 그의 참된 대상을 향한 진정한 근원과
진정한 방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한이 주기도문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 당시의 그의 독자들이 그것을 마 알고 있었
기 때문알는지도 모른다. 그러냐 마른 성경 기자들은 그것을 반복하
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요한은 문자(letter)가 설령 기독교적안 것이라
할지 라도 영 Cspirit) 파는 구별한 것 이 분명 하마. 그는 주의 만찬과 세
례의 성례전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물질석안 떡파 포도주와 불의
중요성을 부안하거냐 강조하는 일 없이 그러스도와 그의 영에 동참하
는 점을 주장하였다. 16 그러므로 종교적 문화와 안간의 제도들에 관
한 한, 제 4 복음서는 그리스도를 안칸 챙동의 개변자, 변혁자라고

14. Ib닝 .. pp. 86-1 03.


15. C f. R. H. Strachan , The F.αlr th Gospel , 1917, pp. 46-53.
16. Hoskyns , op. cit., pp. 335 ff.; Scott , op. cit. , pp. 122 ff.

202
제 6장 문화의 벤핵자 그려스도

생각하는 것이 명백하다. “아띤지께 참 ð 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냐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 이 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지틀을찾A시느니라” 한 말은유대안파사마리아인은 물론,
기독교안도 염두에 두고 한 것이 분영하다. 그리고 진실과 참펀 찬
양에서 냐온 종교의 모든 형식을 기독교적 형식으로 대치하려는 의 도
는 전혀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문화의 다른 연들에 대한 요
한의 짧은 언급들에까지 개변 주의석 태도를 일판시키려는 것은 무리
한 일일 것이다. 위로부터의 허략이 주어지지 않았다연 빌라도 가 그
리스도에 내하여 아무 권세 도 부릴 수 없었으리라는 그의 특이한 기
사와 아울러 그〔빌라도)의 정의감이 곤경에 빠져 패배되었다는 이야
커라든지 “내 나라가 이 세상 나라였마 면 내 부하들이 싸웠을 것이
다” 한 말 동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을 붙알 수 있 는 것이다. 그
러나 한 마다로 말한다면, 대체로 보아 요한 의 흥미는 이 세상 인간
생활의 정신적 변화를 지향하고 있었마는 것이 사실이며 자연적안 것
을 전폐하고 온천허 영적안 것£로 대신한다거냐 현존의 자연 환경이
나 안간의 육신들을 새로운 신체적, 형이상학적 창조물로 대치한마거
나, 또는 일시 적안 데서 영원한 데로 점차적으로 상승한다거나 하는
것은 생 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 나 우리가 제 4 복음서를 전적으로 개변 주의석 문서 안 것같이
해석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 문서는 많은 문제에 대하여 아무 말도
남긴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이 질서의 보펀석 특정 에는 독특한 경향
성이 수반되어 있다는 사살 해문이다. 기독교안의 생활은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변혁된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그들의 행동이
하나념과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고, 아버치와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 는
것이며, 서로 사랑하라는 계영을 순종하는 것이다. 기독교안은 아들
이 아버 지의 일을 하시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그대로 일하는 생활이
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다만 소수의 사랑에게만 가능한 것무로 보인
다. 그리 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닝의 어런 양이다. 그것은
하나닝께서 그의 독생자블 주기까지 이 세상을 사랑했기 해문이다. 그
러고 그러 스도께서 들리우는 째 그는 모든 사랑을 그에게 로 이끌어
올런다. 17 그러 냐 이 런 보펀석 안 진슐만£로 본다면, 인간 생 활 파 사

17. 요 1:29; 3: 16 ff.; 12:32, 47.

203
엽의 온천한 변화를 예기하는 것같이 보이나, 그 만연에 그러스도에
대한 세상의 반대 의식과 적은 우리에 대한 그러스도의 판심을 기술함
무로써 둘 사이에 균형이 있게 하였다 . 예수께서는 그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말씀하시를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랑을에게 내가 아버

지의 이 릉을 냐타내었나이마 내가 저회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융는 것은 세성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 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안함
이 나 이 마” 하였다 18 스코트 (Scott) 교수가 말한 바와 같이 “제 4 복음
서는 기독교의 보 펀성을 최대한으로 표현 하 며 동시 에 .. .... 신약 운서
중에서의 가장 배타적인 알연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러스도의 교
회와 바깥 세상 사이에 날카로운 경제선을 그어 놓았다. 바깥 세상
은 외국이거나 적국에 불파한 것무로 생각하고 있다 "19 이 러한 이 율
배안은 마음파 같이 이해한 수도 있마. 즉 그것은교회로 하여금분리
주의자니-율법주 의자로부터 돌이켜, 살 아 계신 그리 스도로부터 생명을
받는 자유롭고 영적 이고 역동척 인 공동체 블 이루게 하려는 것이며, 그
반면에 당시 세속 문화에 득벨히 널리 유포되어 았던 신령주의외- 기독
교 신앙의 혼동을 막으려는 것이었다고.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기독
교언의 생활이란 것은 안간의 영 의 중생으로 인하여 개변펀 둔화생 활
이였다. 그러나 성육신된 말씀, 부활하신 주, 그러고 강동을 주는 보
혜 사로 말미 암아 전 안류의 영 이 중생 (重生)한다거 냐 전 문화적 생 활。 l
변혁된다거나 하는 것은 생각지 않았다. 그는 개변주의자들의 동기와
문화에 대럽하는 그러스도 그룹의 분리주의를 결합시킨 것이었마.
개변주의와 분리주의 를 결 합한 또 하냐의 비슷한 실례는 2 세기의
‘디 오그네 투스에 게 보 l션 서 칸’ ( L etters to Diogηetμs)에 도 나타나 있 마.
“지독교안이 마른 사람들보다 다른 점은 그 국석이냐 그 지키는 만승
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 들만의 도시에 거
주하는 것도 아니요 어떤 독특한 언어블 사용하는 것도 아니며, 01
떤 특이한 생활을 가지고 있는 것 도 아니기 때문이마 그블은 각
자의 정해진 운영(lot)에 따라 희랑의 도시에서나야만안 을 가운데서도
거주하며, 옷, 음식, 그 밖에 일상 생활의 행동에 관하여도 그 곳 주

18. 요 17:6, 9, 16.


19. Scott , op. cit. , p. 115; cf. pp. 138 f f.

204
제 6장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민들의 습판에 따른다. 그러연서도 그들은 놀랍고강격적안생활양식


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20 우리를 놀라게 하는 감격적안
생활이란 것은그들이 죽음을하찮게 여긴다는것과 사랑과 온유와 겸
손이다. ó1 렌 것은 하나념께서 창조적이며 동시 에 속량적안 그의 말씀
을 통하여 그들 속에 스며들게 하신 댁이다. 그러냐 기 독교적 생활은
문화 생 활 Cexistence)의 한 변혁 띈 양식 이 라든 가, “ 영 혼이 옴 안에 있는
컷은 기독교인이 세상 안에 있는 것파 같다”는 말을 보연 , 이 저자
는 천 안류가 그들의 온갖 문화와 함께 온천히 개변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넘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마.

3. 어거스틴과 문화의 개변

그러스도를 몽하여 전 세계가 갱생한다는 데 대한 기내는 4세기의


주요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좀더 명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해
에 있에서도 그 보펀척인 요지가 개변 사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렇게 충분하게 드러냐지는 못하였다. 그것은제 4 복음서에서와마찬가
지 로, 개변주의자들은 두전선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즉 배타적
기 독교의 반(反)문화주의 에 대 항하며 , 동시 에 문화적 기 독교의 타협
척 태도에 도 대항해야 하기 혜문이다. 이 두 경향은 기독교카 국교로
펀 이 후 에 더 욱 힘 차게 추진되 었 다. 코크란 CCharls Norries Cochrane)
은 아우쿠스투스 황제의 재건에서부터 콘스탄탄의 혁신을 통하여 에
거스단의 중생에 이 르기까지의 고전 문화의 연구에서, 그 시대의 각양
운등을을 병 철 하게 기숭하였다 21 그의 설명 에 의하 변, 상위알 체 신
론의 원리에 의하여 이교(異敎)를 배제함으로써 인간 사회를 새로 나
케 한다는 것 은, 아다냐시 우스 CAthanasius) 와 암브로우스 CAmbrose) 로
부터 시작되고 어거스턴의 ‘하나님의 도성 ’ (City of Goã)에 서 위대한
절정에 달한 기독교 운동의 주제였마는 것이다.22 이들은, 로마 황

20. Aπte-Nicene Fathers , Vo l. 1, p . 26.


2 1. Christiaηity and Classical Cultαre, A Study of Thought and Action
fr01π Augustus to Augustine , 1940.
22. Ibi d . , pp. 359 ff. , 510 ff.

205
제들파 그 사싱가들이 실패한 인간 문화의 갱신을 위한 건천한 이 론
을 성 취 하였 다 로마의 가이 사들 (Caesars) 과 그 사상가들에 게 있 어 서
는 그들의, 제 1 원리가 치영석안 자기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기 해운
에 그들의 갱신은 효 과을 거두지 뭇했던 것이 냐. 이런 논조로 어거
스틴을 설영하는 것은 우리의 기 독교 윤리석 유형 〔類型)에 판한 우
;;.1 의 도식 에 그흡 정연하게 들 어맞추는 것이다- 종 지냐치게 간결
한 감이 있다. 개연주의적 또는 변혁론적 동기 는 이 신학자에 게 중
대한 과제로 되어 있다. 그는 “‘산들 이 당신 백성에게 평강을 주리후
다’ 한 그 산 을 중 하냐에 판하여 ” 요한복음은 씌 어 졌 다고 하였다 23 그

러냐 이 동기가 그러 스도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그의 다른 한 변 의 사


상 이 동반되 고 있마는 사 실을 잊어서는 안 펀 마. 수도원 주의에 매한
그의 판섭은 그로 하여긍 기 독 교의 극단적 학파와 연합하게 하 였 다.
하늘의 도시와 지상의 도시 를 대럽 시 키는 그의 。 l 율 배만적인 사싱‘을
조직화펀 기 독교와 조직화띈 정치적 공동체의 대럽에 적용할 때 그렇
지 않을 수 없었을 것 이다. 그의 신 (新)플라돈 철학이 그를 둔화적
71독교와 연 결시 켰 마 따바서 그의 개 종 (conversion)은 신약성 서 의
그리 스도에 게 바 기 보다도 플라톤에 게 좋 아 간 것 이 었 다는 말은, 그럴
듯 하다 고까지 는 뭇한다 한지 하도 , 그펠 수도 았을 것 이 라고는 생 각될
것 이 마 . 토미- 스와 토마스주의 자들 은 어 거 스틴 을 그들의 직 계 조상이 라
고 주장한 다. 그들은 가치 들의 정녕한 순서 에 대 한그 의 관심파, 사회
석 권위 을 간의 관계와, 하늘 의 평화에 대한 땅의 평화와 판계는 플론
옴, 이 성, 영혼의 상호판 계에 대한 그의 위계적 판점 에 주의를 환기시
켰마 24 노예 제도와천쟁에 판한 어거스틴의 생각은 이원론적인 용어
로 표현되 었마. 그것은질서에 복종하라는 것인데 , 그 질서 는 죄와 관
렌 된 것으로 서 다만 더 큰 부패을 막기 위하여 있는 것이라 하였다 25
뿐만 아니라 다 른 이원론자 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도 타락한
영이 육신을 끄접어내리는 것보다도 다략성 을 가진 육신이 영을끄집
어내란다는 견 해가 표시되어 있다〔창조에 대한 그의 교리 는 그런 것
이 아니지만) . 최후로 어거 스 탄의 “신앙의 통엘파 일 치된 결 속에 근

23. Tractates on the Gospel Acco rd,νzg to Sι Johη , 1, 2.


24. C f. V. J. Bourke, Aμgustine’ s Quest of Wisdom , 1945, pp. 225 f., 266,
277 에 있 는 것이 보 기가 띈 것이마.
25. City of God , XIX , 7, 15.

206
제 6창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거한 사회에 판한 신선한 비전은” 진살로, “어떤 의미에서 이른바 세


계적 제국에서도 품꾸지 옷할 정도로 ...... 잠재적으로는 천 안류를 포

함할 만큼 넓은 것이라는 의미에서, 세계적이었다 "26고 한 말은 의운


의 여지가 있다. 그의 예정과 영벌〔永원)에 대한 교리는 개인척으로 이
해된 것이므로 죄와 쿠원에서 연대성을 가진 그의 안간판에 완전허
내립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가 세계의 신생의 이념을 가졌다고 주장
하기는 곤란하다. 그러으로 우리는 또 한 벤 어떤 하냐의 유형에 들어
낯추기에 는 너무 큰 한 안불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어거스탄이 그러스도로 말미암는 문화적 변형을 주장한 신
학자 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창조, 타락, 중생에 매한 그의 근
본적 이론에 들어맞는 것이며 이교도와 기독교안의 생활을 함께 경험
한그의 생애, 그리고키독교에 미친 그의 캄화 등우로도 그것을 침착
할 수 있다. 그의 이 론의 잠재적 안 보펀성 도 의 섬할 여 지 가 없마. 어 거
스틴은문화의 개변자변로서의 그러스도의 사엽을글로기술했을뿐아
니라, 그 자신의 옴으로 실례를 보여 준사람이 다. 이 로마의 수사학자
〈修輪學 영 〕는 기독교 설교자가 되였다. 그는 그의 사회가 그에게 준 언
어와 문학의 수련을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에 사용했을 뿐 아니라, 복
음A로부터 받은 자유와 계 발(혐發)의 덕 택 으로 새 로운 빛 가운데 서
그 언어 를 사용하여 그 문화적 전통에 새로운 자유를 가져온 사람이
였다. 이 신플라돈주의자는 아무 철학자도 그에게 가르쳐 준 일이 없
는 성육신의 지식을 영척 살재에 대한 그의 지혜에 참가했을 뿐 아니
라, 그 지혜는 안격화되고새로운 깊이와 방향을 가지게 됐 으며 말씀이
용신을 이루어 안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였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새

로운 통찰력을 창조하게 되었다. 이 웅변적안 도덕 가는 고전적 덕목


에 복음의 새 덕들을 첨가하지 않았£며 자연법과 로마 율뱀 을 새 법
o 로 대치하지도 않았마. 그는 마만 그가 훈련받고 또 가르쳤던 도덕
위에 은혜의 경험의 결 과에 따라서 가치 변이 〔變移〕 또는 방향 재지정
〔再指定〕 을 꾀한 것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은 로마 제 국을 가
。1 사 중심적 공동체에서 중세기 기독교 왕국A로 개혁시킨 위대한
역사적 운동의 지 도자들 중 한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운화 개변
의 의미 를 몽소 체험한 사량이었마. 즉 극단주의자의 뭄화 배척 태도,

26. Coc h ra ne, op. cit. , p. 51 1.

207
문화를 이 상화하는 문화주의 자의 태 도, 선한 운영 에 그러 스도를 첨 부
시키려는 종합주의자의 태도, 극복될 수 없는 비도덕적 사회에서도
복음적으로 살아 보려는 이원론자의 태도 등파는 대조적이마 27 그러나
로마의 법률가안 터툴리안, 러시아의 예술가안 툴스토이, 아리스토벨
레스주의 수도사안 토마스, 유대의 바리새안안 바울, 명목론자〔名 目論
者〕안 루터조차도 개벤주의석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어거스틴의 독
특한 점 은, 그의 이 론이 그의 논증 (demonstration) 을 풍부히 복사(짧
寫〕하고 있다는 점이마.
어거스틴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문화의 변혁자이마. 그 돗은 그리스
도가 안간 생 활의 방향을 전환샤키며 마시 생기를 붕어 넣으며 거듭
냐게 한마는 데 았다. 그 안간 생활이란 것은 온갖 인간 사엽에 표현
된 것으로서 본래는 선한 본성을 가잔 것이었£나 현재는 사실상 선
도되고 부패한 것이며, 그 부패 때문에 시간성과 죽음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이요, 그 저주는 외부로부터 가해진 벌이라기보다도 본질석안
자기 모순에서 오는 것이라 하였마. 그가 본 인생의 현실파 하나님의
가능성은 선힌- 칭조라는 이념에서부더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을 설영할 경우에는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자기가 사면적 또는 실천적 추론에서 거짓된 출발을 몇
벤이고 꾀한 나머지 결국) 성부, 성자, 성신 삼위알체 하나닝으로부
터 재출발하여 거기서부터 자아와 다른 파조물의 이해에로 나아가
게 된 경 위 를 그의 ‘참회 록’ (Coηifessioηs)에 서 고백 하고 있 다. 이 렇 게

시작한 마음에-또는 그의 생활이 그렇게 재출말한이후에 -그는모든


피조물이 다 선하마는 것을, 즉 첫째로 모든 존재와 가치의 근원이며 중
심 이 신 하나넙 보기에 좋았고, 다음으로 아름다움과 피 조물 간의 상호
봉사라는 질서 안에서 볼 때 좋았마는 것을 알았마. 그의 ‘참회록’은
황홀한 표현으로 끝맺으며, 그것은 더 추상석인 형식으로 마른 작품
들 가운데도 반복되었다. “요 하나넙, 당신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만
물을 보셨읍니마. 아, 그것은 얘우 좋았읍니다. 우리도 갚은 만물을
보고 있읍니다. 보라, 모든 것은 참£로 선합니다 나는 그 기록
된 것을 일곱 먼 세였읍니다. 당신께서 지으신 것을 보시고 좋다 하
셨읍니다. 그리고 여넓 먼째후 당신은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셨

27. Ibid. , p. 510.

208
제 6장 운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읍니다. 보라, 이것은 좋았을 뿐 아니라 ..통플어 놓고 보니, P~ 우 좋


았읍니다. 개별적으로 보띤 그것들은 마만 좋은 것이었읍니다. 통툴
어 놓고 보면, 그것들은 좋융 뿐 아니라, 매우 좋았읍니다. 모든 아
릉 다 운 몽들은 아름마웅을 표시합니다. 모든 아릉디-운 지체들로 구성
된 한 몸은 그 지체 하나하냐를 짜로 볼 때의 아릎다움보다 더 아릎랍
승니 다. 그것 은 잘 질서 잡한 혼성 (blending)으로 말마 암아 그 전체 가
완전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마 사람이 좋은 것을 나쁘다고 생
각하는 것파, 선한 것응 선하다는 것을 안간은 알아야 한다는 것은 같
은 문제가 아넘니다. (마치 당신의 파조물들이 그들의 선한 것 때문에
많은 사란들에게 즐거 움을 주는 것과 그들이 당신보다도 자기들을 즐
겁게 하려는 것 띠|운에 당신께서 그들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과는 같
운 문제가 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 ) 뿐만 아니라, 사랑이 어떤 것
을 선하다고 볼 매, 하나넘께서도 그 사람 안에서 그 선한 것을 보살
것입니다. 그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으신 것 안에서 사랑을 받£
셔야 할 것인데 그가 주신 성령 을 말미앙지 않고서는하냐닝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무엇이든

존재하는 것은 어느 정도 선하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그이 즉 그


자신은 어느 정도로 존재하신 이가 아니라 존재 자체이신 그이로부터
그것들이 존재하기 배운입니다 당신의 일들로 당신을 찬양하게
하사 우리 포 당신을 사랑케 하옵시 며 우리 로 당신을 사랑하게 하사
당신의 피 조울들로 안하여 당신을 찬양케 하옵소서 . ’' 28
존재 하는 모는 것 은 선하다고 할지 라도, 어 거 스틴은 18세 키 사상가
들처 럼 존 재 하는 모든 것 은 정 당하마 (right)든지 또는 다만 사회 제 도
만이 잘 뭇 이 으로 원시 상태로- 돌아가면 안간은 행복하리라든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멜다 . 즉 안간의 선한 본성이 부패되고 그 안간의 운
화가 또한 왜곡판 것이어서 부패한 본성이 왜곡된 문화를 산출하고
왜곡펀 운화 가 마시 인간의 본성을 썩게 하는 것이다. 안간의 영석,
성리석, 생리척, 그리고 사회적 부패란 것은 그가 악한 존재가 되였
다는 것 올 뜻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연 어거스틴은 “그 안에 선〔善)
이 없는 본성 이란 있을 수 없다” 고 주장했기 때문이 다. “그러묘로 - 악
마 자신의 본성 까지라도 그것이 본성에 관한 것안 한, 악이라 할 수

28. Confess‘ons, XII I. xxvii , 43; xxxi. 46; xxxiii , 48.

209
썼다. 그것은 전도〔顆 f페)됨으로써 악하게 됐을 뿐이다 "29 인간의 도
덕적 장병도, 그의 본성 얀에 건강의 절서가 다소 였는 경우에만 촌
재할 수 였을 것이며, 그 잘명도 그의 본성만큼 복장하다. 그러나 그
것은 안간의 자기 모순적안 자키 주장이라는 단 한 가지 기원을 가지

고 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그를 만들였을 뿐 아니라 그를 선하게


만든 철대 선 CGoodness) , 그의 최 고의 선안 하나닝 께 복종하고 예 배 하
고 영광 툴리고 의지하도록 창조되였다. 안간의 원천적인 선야 하
나닝을 성기는 것으로 되어 있는 얀큼 그의 원천적인 최는 하나닝으
로부터 떠냐 자기 자신이나 또는 어떤 더 낮은 가치로 돌아가는 것야
다. “인간 의지가 그 자신 야상의 것을 포기하고 더 낮은 것으로 전
향(빡向)할 해 그것이 악。 1 펀다. 그것은 그 낮은 것 자체가 악하 71
때문이 아니라, 전향 자체가 악하기 쐐문이다 "30 원천척 죄(첫 사
란의 죄라고 말 하기 보다도 사란의 첫 죄라고 이릉하는 것이 더 의의
갚을지 모 르겠 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r갈어져 나가는 타략이라
든지 , 하나닝 을 거 역 하는 불복종이 라든지 , 사악〔째惡), 말하자연 본성
에 반대되는것, 안간 본위의 삶, 교만-동 여러 가지로섣명할수있을
것삭다. 특히 , “교받→ 석관 부당하기} 자기블 높삭는 담욕삭 아나고 무
엇이겠는가? " 이것은 언제나 이중의 판점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 1
자기 생명의 근원안 그분으로부터 떠나는 것과 피조물의 선에 집착하
여 그것이 마치 최상의 가치안 것같이 여기는 그것이다. 이 근본 죄에
서 인간 생활의 여러 마른 부조화가 엘어난다. 그 중의 하나는 인간의
이성석, 감정적 정신생리적(탬꾀l 生]뭘的) 븐성의 정연한 원형 속에 칭엽
하는 혼란이마. “불복종이란 것은 그 〔처음〕 죄에서의 불복종에 대한
벨이 아니고 우엇이겠는가 ? 안간의 비잠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안간
의 불복종이 아 니고 무엇인가? 그러하여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려
고 하지 않게 되고, 할 수 없는 알은 하고 싶어하는 결괴를 가져오는
것 이외에 더 큰 바참이 어디 있겠는가? ...... 안간이 자기 자신에게

불복종하는 동안, 즉 그의 마음과 그의 육신이 그의 의 지 에 복종하지


않는 동안,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열마냐 하려고 원했든가 ! "31 안간

29. City of God , XIX , 13.


30. Ibid. , XII , 6.
31 Ibid. , XIV, 15; cf. 그 이하의 장을.

210
제 6창 문화의 변혁자 그려즈도

의 정서적, 이성적 생활 속의 부조화는 그의 성석(性的) 정욕으로 말


미암아 생기는 인간 살존의 커다란 동요에서 절살히 느껄 수 있다.
그러냐 이것은 그의 온갖 다른 퍼마도〔애욕)의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부조화하게 완 영혼은 그 모든 부분에서 부패해졌다. 그것은 그 영혼
의 에느 한 부분이 부조화하게 되었기 해문이 아니라, 그 영혼야 하
나넙파외 근본적안 판계에서 부조화하게 되였기 때문이다.
이 근본 죄의 둘째 결과는, 안류의 사회적 최악성이다. 어거스단은
이렇게 말하였마. “본성적으로는 그렇게도 시-회적이연서, 그 부패성
으로는 그렇케까지 비사회적언 것은 이 안류 이외에 다시 없을 것이
다. 인간의 사회는 ...... 우리의 공통된 본성의 친교로써 어느 정도 결
속되어 있마 찰지라도, 그 대부분은 서로 나뒤어 대렁되고 있다. 가
장 힘씬 자는 다른 자들을 앙박한다. 그것은 모두들 자거의 이약과
욕섣을 짜라가기 해문이다 "32 우정은 배신 해문에 부패된다. “썽촬
의 섣고를 위 한 자연적 피난처”인 가정까지도 그 자체가 안전한 것은
아니다. 도시나 제국의 정치 질서도 전쟁파 탄앙으로 혼란될 뿐 아니
라, 바르 게 행정한다는 그 챙정 자체가 왜곡펀 일을 저잘려 놓는 것
이 폭1 다. 그것은 무지한 자의 악을 막겠다고 애쓰는 것이 새로운 불
의를 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33 무질서는 문화의 모든 부문에 펴
진다. 언어의 마양성파 그 언어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노력, 정의의
전쟁파 부 당한 전쟁, 평화를 수렁하려는 노력파 영토 확장의 노력,
노예 제 도의 불법파 그 불법 가운데서 상전파 종이 각기 정당하게 행
동해야 한다는 요청 동, 그러고 그 밖에도 사회석 생활의 여러 가지
국연들이 안간의 부패와 비참을 말하는 칭조라고 할 것이다. 사란들
이 그 사회 안에서 훈련받은 가장 유덕하다는 그 덕 자체도 왜곡된
것이다. 사 힘들이 용기, 신중, 절제 동의 덕목을 이기석 또는 우상숭
배적안 꼭적을 위하여 사용할 째, 그것은 “화려한 악" 0 로 되기 에문
이다. 그 러 나 이 모든 사회적 죄악성은 근본적으로 선한, 창조된 질
서카 현 존하는 데 의존하는 것이다. “왜곡펀 것이라 할지라도 얀물의
칠서의 어느 부분에 필연적으로 조화되거냐 의존하거나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렇 지 않고서는 그 우질서라는 자체가 존재할 수 없겠기 때문

32. Ibid. , xrr , 27; XVIII, 2.


33. Ibid. , XIX , 5.

211
이다 천챙 없는 형화란 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 종 의 팽화카

없이 천쟁이란 있을 수 없다. 천쟁은 그것이 도전할 어떤 본성의 존


재 흘 천제로 하는 것인데 그 본성이란 것은 어떤 종류의 평화를 상정
(想 n,')하지 않고는 존재 할 수 없 71 배 문이 다 "34 뿐만 아니 라 하나닝
께서는 부패된 인간의 개안석 빛 사회적 성존윷 여러모로 풍치하고
계신다. “그는 션한 본성에 대하여는 가장 선한 청조주이시며, 동시에
악한 의지에 대하여는 가장 정의로운 통치자이시다. 그러므로 사랑들
은 선한 본성을 악허게 사용하지만, 히나님께서는 인간의 악한 의지
까지도 선하게 사욕하신다 세상 통치자들의 악한 의치를 통하여 그
들의 부하들의 부정 을 막기 도 하고 멜하기 도 하신다. 선한 사랑에 게
도 악한 사람에게도 땅의 나라훈 주선 A로써, 그는 “사불 파 시대의 잘
서 를 따 cl ...... 하냐냥 자신이 주 ( 主)로 서 다스러신마" 35

이 전도된 본성파 부패된 문화를 가진 인 류에게 죄가 전 염 시킨 죽


음 에 이 르는 뱅 을 고치고 갱신시키기 위하여 예수 그 리 스도께 서 오셨
다. 그의 생애와 죽응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하나념의 사랑파 깊은 안
간의 최가 사 럼들 암에 밝허 드러났다. 계시와 교훈으로 그는 인 간으
로 하여금 자거의 존재와 션의 근원이신 하냐닝체 귀의 (짧 {:!R) 하케 하
였으며, 사랑의 바른 젤서른 영혼에게 회복시킨으로써, 이기 적 이거냐
우상숭배적인 사랑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하나닝 얀에서 영혼이 사랑해
야 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랑을 카지케 하였다. “이것이 곧 타락완
최안플에게 내마는 중보의 손이다 인간은 하나닝 없。 1 사는 악한

무 리 을 가운데서 거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쿠출


하지 못한마. “진리 자신이 요, 하나닝 이 신 하나냥 아들야 그의 신성
(페I 性) 을 파카 (破棄)하지 않으시 고 인간성 을 입 으셔 서 。 l 신앙을 세 우

시고 기초를 놓으셨다. 그리하여 하나닝 안간을 통하여 안간으로푸


터 안간의 하나닝께로 통하는 걸이 있게 하려 하성이였다. 01 것이 하
냐념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언간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하나닝으
로서의 그는 우리의 목적이시고 사람으로서의 그는 우리의 걸야시
다 36 한펀으로는 안간의 교만을 낮추고, 자기 자신에게서 떠나게 하

34. Ibid. , XIX, 12, 13.


35. Ibid. , XI, 17; 1, 1, 8, 9; IV, 33.
36. Ibid. , X, 24; XI, 2; cf. VII, 31; IX, 15.

212
제 6창 운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며, 다른 한연으로는 하나닝의 사랑을 계시하고 요직 한 분 선하신


이에게 귀의하게 함으로써 그러스도께서는 부패해진 것을 회복시키고
천도된 것을 바르케 하신다. 그는 안간의 강정을 변혁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 S로 감정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파 욕망파 슬뜸
과 기쁨을 그들의 바른 대상에게 집착시킴으로써 그러하는 것이다.
“하나넙의 거룩한 도성에 사는 시만, 이 세상 순례의 생활에서 하나

닝의 뭇을 따라 사는 사랑들은 두려 움, 욕망, 슬폼파 기쁨을 함께 지


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바른 위 치에 있치 해문에,
그들의 이 모든 애착들도 바른 것이 된다 "37 인간이 그들의 천도된
문화 안에서 말달시키는 도벅척 덕성은 새로운 은혜 로 보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개변되 는 것이다. “절제는 하나넙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또 썩지 않게 보존하는 것이여 , 안내는 하나넙 빼문
에 모든 것 을 참는 사랑이며, 정의는 하나닝만을 섬기는 사랑이다.
따라서 정의는 사람에게 맡겨진 다른 모든 것들을 잘 다스리는 것이
다. 지 혜 는 어 떤 사물을 대 할 배 그것 이 하냐넘 께로 나아카는 데 도웅
이 되느냐 방해가 뇌느냐 하는 구렬을 바르게 나1 리는 것을 의미한
다 "38 무엇보마도 이성의 생활, 하나넘 보시기에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안간의 지혜가 새로운 제 1 원리 의 제콩으로 말미암아 새 출발과
새 방향을 가지게 된다. 인간이 스스로의 믿음이냐 그 자신의 질 서를
가지 고 시 작하는 대 신에 속량받은 사람의 추론 (reas야üng)은 하나닝 을
믿는 신앙파 하냐님이 모든 피조물에게 설정한 질서에 대한 사랑으로
부터 시착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념의 계획을 자유로이 찾아 내
는 것이며, 겸손하게 그의 걸을 따라가는 것이다 39 수학, 논리 , 자연
과학, 미 숭 , 공학 퉁이 인간의 사랑을 개변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
라, 하나닝에 대한 새로운 사랑, 즉 그의 전 피조물을즐겁게 하녁 그
의 모든 피조울에게 봉사하는 새 시-랑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 어거스
틴의 업장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기독교안은 이런 문화 활동들을
이용할 수 있고 또 반드시 이용해야 할 뿐 아니라, “인간 대 (對) 안간

37. lbid. , XIV, 9.


38. 0η the Morals of the Catholic Chμrch , XV.
39. 철학과 과학에 대한 어거스턴의 견해에 관하여는 Cochrane, φ. cit., chap.
XI 에 상세히 진술되어 있다.

213
판제에서 펀리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마- 의복과 계급, 도
량형, 화페 등의 관례에 깨하어 4 0 하나닝과 더불어 안간이 새 시작
을 하게 함우로써, 하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새 시작을 하살 해에
일어나게 되는 위대한 변혁에는 모든 것, 정치 생활까지도 예외 없이
그 변화에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알 어거스틴의 개변 주의
적 이념만을 추구해 간마연, 그가 문화의 세계적인 조화와 평화를 선
견(先見)한 기독교인의 대 표자였고 사랑들 앞에 소개했을지도 모른다.
즉 모든 사람의 챙동이 하냐넙의 은혜로우신 행동으로 말미암아 문화
얀에서 재조정되어 모든 사람을 하나닙께로 이 끌어 오고, 모든 사란
이 하나님 을 향하여 일하며 , 그러 함으-로써 하나닝 의 사랑과 영 광을
반영하는 사회 를 예 견한 사람으로 여걸 수 있을 것이다 41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의 사상을 이 방향으로 전개시키지 않았 다.
그는 성육신한 그러스도 안에서 선포되고 약속된, 위대한 종말론적 가
능성의 실현을 희망하면서 살제적 A로 그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마. 즉
창조되고 부패된 인간 세계의 쿠원과 그 인간들의 온갖 문화적 촬동
안에서 안간의 밴혁을 기대하고 있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닝의 피
조물 계에 있는 아름 마움을 배 양 (펄찮) 하고 그 안에 서 즐기 며 몰아적
〔沒我的) 안 사랑의 정신으로 서로 봉사하며,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신냄으로 죽음과 그 두려움을 정멸하며 , 냉 철 한 추론£
로 창조의 질서와 계 획 윤 발견해 내며 , 영원한 말씀의 확신파 표정으
로 모든 일시적 재물을 성려1 천석인 경외C1:&f흉)플가지고 사용함A로써
일시적안 사물들 가운데서 인간 의 모든 챙위가 하나닝께 영광을 돌리
는 헬-동으로 재지항:하게 된 가능성이 어거스단의 사상 가 운데 떠올랐
다 할지라도, 그것은 곧 여지없이 사라지고 말 뿐이었다. 그 대신으로
그에게 주어진 것은 영석 사회 의 종말 론적 환 상이었다. 그 사회 는 택
함받은 개 인들과 천사들로 구성되어, 저주받은 우리들파는 영원한 평
행션을 이루며 잘고 있는 사회이마. 이 택함받은 자는 이로부터 새
인류가 탄생 될 남은 지-들을 말하는 것 이 아니 었 다. 그들은 구원 받은

40. C f. 0η Christian Doctrine , II, 25 , 26.


4 1. City of God , 19권 1 3 장 처음에 있는, 옴파 영혼, 사 랑 과 함께 있는 사람파
하냐념의 형화에 대한 진술은 어띤 경우에 마치 어거스단의 예연안 것같이
표시되는 일이 있 ξL 냐 사살 그런 것이 아니마.

214
제 6장 운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자들이었고 구원시키는 남은 자는 아니였다. 안간의 본성과 운화에


대한 철저한 개변주의적 견해의 토대를 세로 놓은 이 신학자의 근본
신념에서, 거기에 해당하는 결과가 추출〔抽出〕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
해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가 성서와 그 안에 있는 최후 심판의 비
유와 그 속에 품겨 있는 분리주의적 이념에 충실하려고 애썼기 해문
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마. 그러나 성서에는 보펀주의적인 요소도 있
다. 그리고 다른 해에는 언제나 성서에 관하여 문자보다도 그 정신에
치중하던 그가 왜 이 경우에는 운자만 추 종할 뿐 아니라, 그 운자석
인 강각을 과장까지 했을까 하는 의 문은, 그가 성서에 충살하 려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만£로는 옳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의 단서
는 어거스틴의 방어 자세 Cdefensiveness)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자기의 죄와 하냐넙의 은혀l 에 대하여 고백하는 것 S로부터 하나
닝의 정의를 방어하는 데 로 기 울어졌다. 하냐닝 께 서는 그의 선한 계
시블 통하여 기독교안을 선택하셨우나 비기독교인은 선택하시지 않
은 것무로 보 이는 하나넘의 정의이다 . 그는 카폴릭 교회 의 일 원으로
서, 죄와 은혜 에 대하여 고백하는 데로부터 교회 에 대한 이교도들의
비난을 상대로 교회의 정당성을 방어하는 편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일반 문화의 변 혁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기 독교 문화의 방어로 기 울어
졌다. 기독교 문화란 것은 기독교안 사회 제도들과 판습들을 말하는
것이 다. 그는 지옥의 위 협파 천국의 약속에 의하얘, 거듭나지는 못했
우나 위태롭게 되어 있는 안간의 도덕을 땅어 하 였 다. 이 결과로(또는
이것이 원인이 퍼어서) 자기 정당화로 기 울어졌 다. 그러하여 그의 기
독론은 바울이나 루터 의 기독론에 비하얘 약하고 말전되지 뭇한 채로

남게 되 었다. 그는 기독교안의 종교-하나의 문화적 엽적 一을 그리스


도에 대 치하려 한 일 이 한두 언이 아니었다. 그러고 그리스도가 직접
그의 왕-권을 말휘하여 세 상을 구원승F 는 구세주라는 것 보 다도 한 권위
적인 문화 제도의, 즉- 교회 의 창설자라는 것을 더 많이 주장하였마.
그러므로 어거스턴에 있어서 신앙은 흔히 교회의 교훈에 무조건 복종

하는 경향이 있마. 그것이 기독교 문화를 위하여 중요한 얼임에는 틀


림 없 A 나, 그렇다고 그것으로 하나넘에 대한 직접적안 신뢰 를 대신
할 수는 없는 것이마. 선택 교리에 판한 그의 예정본적 형식에서도,
또마시 어거스틴은 방어적 입장을 많이 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안

215
간이 하냐닝을 사랑할 수 있기 전에 하냐넘께서 안간을 택하여 그를
사랑하게 하셨마는 그의 근본적 인 통찰을, 하냐넙 은 어 떤 사람은 선
택하고 어떤 사람은 배척하였다는 신조로 변경시켰다. 따라서 ‘하나
닝의 도성 ’의 영광스러운 환상은 결국 두 개의 도성들, 서로 다른 개
인들료 다르게 구성된 영원허 갈라져 있 을 두 개의 도성 의 환 상으로
되어 버렸다. 여치서 우리는 바울이나 루터의 경우보 다도 더 극단적
안 이원폰을 딸견 하게 된다.
칼반도 어거 스단파 매우 비슷하다. 개변 주 의적 이녕이 그의 사상 파
실천에 뚜렷하다. 복음이 현재의 모든 생활에 침투되게 하켜는 의도
는 루터보마 강하다. 안간은 각자의 직엽 활동에서 그의 맨음과 사랑
을 표시 하며 하나넙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그의 보다 역동적안
직엽판, 국가는 다만 악행을 앙지하기 위하여 있다는 소극적인 직
책만을 가진 것이 아니 라 적극적으로 복리 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손

재하는 하냐넙의 일꾼이라는 그의 국가판, 그러고 교회와 국가가 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주장, 타락의 폐허 가운데서도 여
천히 빛냐는 인간성에 대한 그의 보다 휴우머니즘적 견해, 육체 의 부
활에 더 않은 판성을 가지는 그의 교리 , 무엇보다도 하나 넙 의 주 권
의 현실성에 대한 그의 강조-이 모든 것은 그로 하여금 복음의 약속
과 가능성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넘의 가능성이어서, 안류의
본성과 문화를 변혁시켜 마음 속에 기록된 율엽을 가진 하냐닝의 냐
라로 되게 할 수 있다는 사상을 카지게 하였다. 그러나 이 경 우에서
도, 안류의 파열 된 생명을 그리스도께서 변혁시킨다는 종말론적 희망
은 육체적인 죽음의 종말파 몇 사 란에 게만 주어지는 영광 중의 영생
을 논하는 것 A로 바꾸어진다. 속량을 받는 사랑과 뭇 받는 사람은
다만 영적으로 분리되에 있을 뿐 아니라, 현세 생활의 육체적 조건 에
서도 분리되어 있마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새 하
늘 파 새 땅이 형성된다는 종말론적 희망은, 그러스도가 현재의 하늘
꾀 땅에 다시 올수는 없는것이으로 옛 것이 죽고새 창조가생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신념으혹 수정되었다. 칼빈은 하나넘파 사람
의 영원한 대립성에 시간석 존재와 영원한 존재라는 이원폰을 첨가시
켰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이라는 또 하나의 이원론도
덧붙였다. 그리스도에 의한 변혁파 이로 안한 약속 실현의 추진에 관

2 16
제 6창 문화의 변핵자 그리스도

한 종말론적 희망에 영향을 말고 있는 것이 킬빈주의의 특정이었마


할지라도, 그 속에 있는 이 요소는 엔제나 분리주의적, 억앙적인 (re­
pressive) 특칭을 동만하고 있으며, 오히려 루터파에서 보 다도 더 현저
히 나타나 있다.

4. 모오리스의 견해

기독교 윤 리의 마른 주요 동기들과 구별되에, 그리스도가 문화의


변혁자라는 이념야 어떻게 중요한가 하는 것은, 교회사에 나타난 완
전이란 이 녕 의 강안성파 생동력에 의하면 종더 영시된다. 웨슬리 (Wes­
ley) 는 프로테 스단트 안에 냐타난 완전주의 의 주요 대 표자이 마.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사상은 흔히 배타석 기독교와 혼동된마. 그러나 양
자의 차이는 섬원 C深遠)하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새로운 율 엽 수여자
가 아니 라고 주장함에 있어서, 바울, 요한, 루터, 어거스틴, 그러 고

칼빈파 같은 입 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는 어떤 새로운 종


류의 문화를 위한 헌럽을 그 신 도들에게 줌으로써 낡은 백성에게서
새 백성 을 분러시키는 새 로 운 입볍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그러스도는 생 활의 변혁자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임음을 줌으
로써 그들로 하여금 의롭게 하신마. 그는 인간 행동의 근원을 처리하
신다. 그 는 인 간 사회의 도덕적 시민과 부도덕적 시만을 쿠 l뀔하지 않

는다. 그들은 마 같이 자기 중심적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정


죄 하며 , 하나님 의 용서 하시 는 사랑에 응맙하는 자유의 생 활을 향하여
다 같이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마. 웨슬라도 이 자유의 약속이 현재에
서 이 루어 진다는 가능성 -안간으로서 의 가능성 이 아니 라 하나닙 의 가

능성-을 역설한마. 그러스도의 능력으로 말마암아 신자가 오는 죄에


저 깨끗함 을 받 을 수 있마. 그러하여 그들이 주님처럼 될 수도 있A

며 “이 세상 안에서” 쿠원밭을 수도 있다. 신약성서는 “그러스도의


피카 우리의 임종 해에 우리를 깨끗하게 하리라든지 최후 심판 해에
깨끗하게 하리 라”든지 하는 말을 우려에게 일러 준 것이 아니라, “당
장 지금 ‘우리’, 살아 있는 신자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

217
고 말한다 42 사랑들에게 았어서는 이 가능 성은 목표를 향한 옐렬한
기대와 정 진을 의마한다. 그러나 인간의 기대와 노력은 또 다시 자기
중심 , 자기 권화〔權化〕의 행 동, 종교적 , 도덕 적 자기 수양으로 쉽 사리
천도필 수 있는 것 이 며, 그렇게 될 때 거룩을 자기 소유물로 얘기 고
、g

하나닝을 자기 존경 획득의 도쿠로 삼게 되기 쉬운 것 이다. 죄에 대


한 웨슬리의 교리 가 부적당하고43 그의 후배 들은 교만에 빡졌다 할지

라도, 워l 슬러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가장 큰 판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은 현세적 인간이 하냐 닝의 자녀로 변혁되 어, 자기에게서 해방되어 하
나님의 사랑을 향 하여 살게 되는 현재의 가능성을 말하는 요한의 사
상 이었다 44 웨슬리는 개인주의적안 경향을 가지고 있£므로, 안류에
대 한 그리 스도의 약속보 마도 하나하나의 분리 된 안간에 대 한 약속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마. 그러나 그 중에는 인류에 대한 시사도 없는
것 이 아니었으므로 후세 의 그의 추종자들은 그것 을 발전시컸다. 그
결 과는 종종 감리 교 운동의 창시 자안 웨슬러 자신 의 특칭을 살린다는
것보다도 문화적 기독교의 망향우로 기울어지는 일이 훨씬 많았 마.
에 드워 즈 (Jonathan Edwards)는 창조 , 죄 , 칭 의 〔隔앓) 에 대한 민감
하고 섬요한 판정 과 천년왕국적안 희망과 회개 의 망볍 에 대한 그의
이해 등£로 인하여 , 그리스도는 인간과 그 운화의 갱신자라는 사상
의 운 동을 수립한 최초의 미 국인 이 되었다. 시간이 강에 짜라 이것이
자주 잔부(때府)한 것..2..]료 왜곡되기는 하였£냐, 그 저력이 천혀 없 어
진 일은 없 었다. 그 속에 품겨 있는 펠라기 우스석 마솔로 안하여 사람
들이 죄의 징후에는 관심하연서도 그 뿌리에는 생각하지 뭇했기 해문
에 , 그들이 공사한 운하(運河)에 하나닝 의 은혜 와 능력 을 유입 (流入)
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하여 에드워즈의 개 변 주의
는 퇴색한 부흥운동의 섬리적 기교, 혁신된 영혼의 대량 생산, 사회
복음의 정신변에 대한 사회 과학등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리고 그들은 돼지 죽의 폼질을 개량함으로써 탕자인 안류를 변화시킬
수 있£리라고 기대하 였던 것이다.
툴스토이 , 리층, 키에르케고르, 레오 13세 둥의 안물로 내표되는 19

42 설교 “ On Christian Perfection" 에 서 .
43. C f. R. Newton Flew, The Idea of P erfection , 1934 , pp. 332 ff.
44. C f. 특히 , H ar ald Lindstroem , Wesley and Sanct!“fication , 1946

218
제 6장 운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세기에 이르러, 개변주의적 이냄은 많은 주창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도 가장 주목되 는 인물은 영 국의 신학자 모오리 스(F. D.
Maurice) 이다. 그의 처서는 너무나 다양하게 형가되고 있기 해문에
그의 섬 오〔深짧)하고 포팔척 안 면이 항상 몽롱과 혼란과 단펀적 안 것
을 동반하고 있다 45 그럼에도 불주하고 모오리스의 캄화는 넓게 또
깊게 퍼져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요한적인 사상가이다. 세상에 들어
오신 그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로 오신다는 사싶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왕켠을 행사하는 이는 그리스도 자신이요, 성육한
말씀에서 분리된그대행자-교황이든 성경이든 기독교든 교회든 또는
내 석 광명이든 간에 -가 아니마. 그의 생애의 초기에 그에게 강박해
온 신념은 사람들이 그를 민든 얀 믿든 간에, 그리스도는 안류의 주가
되신다는 것이었 다. 그러으로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펀지에 이
렇게 썼마. “하나닝이 우리 에게 말씀하시기를 ‘그의 안에서 ’ 즉 그리
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냐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
하였읍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사랑의 머리가 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받고 어떤 사람은 얻지 않슴니다. 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육
신을 따라 건는’ 사람들입니다그들은 그러스도가 모든 사랑의
머리라는 것을 믿지 않 ò 며, 해문에 이 믿음대로 행하지도 않습니 다.
· 그 러 나 몇 천만의 사람들이 육신을 짜라 산다 할지 라도, 아니
이 세상의 전 인류가 그렇게 살고 있마 할지라도, 우리 기득교의 진
리와 키-흘릭 신앙을 가진 사람의 눈~..!료 볼 때 그런 것이 안간의 정
상이 라고 할 수는 없읍니 다 진리 는 곧 각 사랑이 그리 스도 안에
있마는 것입니다 그가 그러스도와 연결되지 않았다면 그는 한
시간도 생각하거나 숨 쉬거나 하여 살지 뭇할 것입니다” 하였다 46 모
오리스에 의하연 사람은 천래적 A로 사회적이다. 사람은 아들, 형제 ,
사회의 한 사람 등」즈로 되어 있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이 신

45. C f. A lec R. Vidle r., The Theology of F .D. Maurice , 1948 , pp. 7 ff.
이 ;.<Jj 은 미 국에 서 는 Wintπess to the Light 이 란 제 옥무로 출판되 었 ò 며 ,
오오리스의 사상에 대한 훌륭한 소개가 씌어 있다. 그리고 Mau rice 이해에
없 지 풋할 저 서 로서 그의 아 들 Frederich Maurice 가 쓴 The Life of
Fre derich Denisoη M aurice Chiefly Told in H is L etters , 2 Vols. (1 884)
가 있다 ,
46. Life , Vo l. 1, p. 155.

219
념이 그로 하여금 사회주의자가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되
어 있는 공동체는 다만 안간만으로 된 것이 아니마. 인간 이상의 것
이 함께하지 아니하연 참으로 안간석인 것이 될 수 없마.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더불어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안류의 “영적 조직
체”에 대한 모오리스의 이해 를 짜라 가연, 하냐닝 안에 있는 사랑, 안
간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안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아들의 안
성 (人뾰)과 신 성 C~lþ 앉), 창조하고 속 량하는 말씀, 하냐닝 안에 서 의 안
칸의 이웃 사랑, 이웃 안에서의 하냐닝에 대한 사랑, 가정, 국가, 교
회 둥에 대한 인간의 사랑, 이런 모든 복장하게 얽힌 사랑의 상호 관
계가 각각 그 위치를 지니고 있다 47 그러냐 그 중심은그러스도이다.
그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창조되어 하냐님과 연합하며 서로 연합하
는 가운데서 살게 되어 있다. 그러스도가 삶의 깎펀 본성과 칭조판
사회의 법파 그 사회의 성원(成員〕들의 죄와 만역 등을 드러내 보이신
다. 그는 하나 닝 안에서 서 로 연판된 공동체 안에, 그러고 그 공동체
를 위하여 있는 안간들을 속량하신다. 성서 에 기록펀 “온 역사의 본
질과 의미”는 그리스도의 “ 놀바운 기도 안에” 함축되어 있다. “아버
지꺼1 서 내 안에 겨1 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저희도 내
안에 있어 처 들로 하여금 하냐가 되게 하옵소서”하는 기도이마 .48 그
리하여 모오리스는 결국 “바사회적안 기독교인”과 충돌했을 뿐 아니
라 “비기독교석안 사회주의자”와도 충돌하였다. 천자는 안간파 그러
스도의 판계를 외부적 의식의 근거 위에 두고 있으므로 종교로 그러
스도를 대신하며 안간의 사회 생 활에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그러
나 후자는 인간의 동물적 본성 위에 사회 를 건설하려는 경향으로 겨
울어져 서 공통펀 자기 이익을 사회적 챙동의 기초로 삼는다. 안간은
“동물 더하기 영혼이 아니다 그러나 “안간은 동물적 본성을 가진
영들이다그플을 연합하는 결속은 상엽적안 것이 아니다. 공통의
폭정에 함께 굴종하는 것도 아니며, 폭정자에게 폭력으로 반항하는
것도 아니마그것은 언제나 영적 기만 위에 놓여 있으며, 언제냐
그러하다 교회의 최-교회의 무서운 배교(背敎)-는 교회가 그

47. C f. 특히 The Kingdom of Christ , Vo l. 1 , Part 11 , chaps. n, Ul; cf.


Vidler, op. cit. , chap. rr
48. The Kindom of Christ , Vo l. 1, p. 292.

220
제 6 장 운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고유한 기능을 거부하는 곳에 존재해 왔다. 교회의 기능이란 사란들


에게 그들 의 영적 상태 , 안간의 영의 영원한 71 만, 하나닝 아들의 탄
생, 죽음, 부활파 승천을 통하여 그 기반을 구성하고 있는 현현〔顯、現) ,
그러고 성령의 선울을 안간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49
안간의 깊은 영, 곧 개안으로서와 사회의 일 원」ζ로서 그가 빠져 있
는 자기 모순온 그가 자기 존재의 저l 법을 거부하는 것을 의마한마.
그는 육체적£로나 정신적 A후나 그가 다만 공동체 안에서만 주고
받고 할 수 있는 값진 것들을 자기 흔자서만 소유하려고 애쓴다. 모
요리스는 인간의 자기애, 인간석 분쟁의 비극,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

는 행위, 국가나 교회가 스스로의 영광을 구하는 등의 죄 에 대하여


너무나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기 해운에, 이 른 바 타락, 부패 둥에 대
하여 특 l날 허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 았다. 이란 것이 그의 사상 천
반의 저류가 되어 있다. “내가 스스로 하나닝을 찾기 시작한 해 , 나
를 억누르는 이키주의적안 중앙에서 쿠원 을 받아야 되 겠 마는 감정 이
내 마음을 지 배하고 있었다”고 그는 기록하였다. 50 이기성의 중앙과
그 정령 (網寂) 같이 스며드는 세랙이 계속하여 그를 압박하였마. 그는
상엽 제 도 속에서 이기성을 말견하고,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의 한 지

도자로서 이에 항의하였마. 마음£로 그는 그것이 어떻게 그 항거


자 자신 들에게서도 나타나는가 플 발 견 하 였 다. 즉 이기성은 종교적
인 불들의 개 인주의 속에서 도 냐타났마. 그들은 그들이 뱀 죄 한 족속
에 속해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만, 자기 들만 용서받기플 바라고 있
는 것이마. 자기 소유물로 주장된 믿음으혹 빌 마암아, 또는 자기 자
신의 의 (짧)로 말 마암아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인칸 노력 , 교회의 파
당 들파 종파들이 각기 자커들 또는 자기들의 원리만야 구원의 걸이라
고 주장하는 것 둥에서 그들의 이기 주의가 드러난다. 인간의 죄는 자
기가 자기 자신에게 하냐넙이 되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우
주의 중심 인 것같이 보는 것이 죄의 결파이마. 그리고 인간 상황속의
왜 곡되고 불행한 우말 사건들이 우리의 현존을 결정하는 것 같이 보는
것도 죄의 결 과이마 "51 죄의 첨투성과 파괴성이라는 판점에서 볼 때

49. Life , Vo l. n, p. 272.


50. I bid., p. 15; c f. Vidler, φ. cit. , pp. 42 ff.
5 1. The Lord’ s Prayer. pp. 63 f.

221
‘우리 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는 간구는 거의 부정직한 것같이 보알
수도 있을 것이다. “위에, 밑 에, 안에 온통 악이 있어서 세상에서 우
리를 내결하고, 밀살에서 우리를 위협하며 , 우리 자신들 속에서 또
우리 이외의 모든 다른 사람들 속에서 ‘우리 이 름은 군대마’고 말하
는 소리가 들려올 때 우리가 엘마 냐 곤란하겠는가? ...... 재조정〔再調
整) 의 모든 계획이 이 땅을 억눌러 신음하게 하는 악을 더 악독하게
만드는 것처컴 보일 해, 우리 자신의 역사, 그러고 전 안류의 역사가
생에 대한 온갖 노력을 비웃고 만족하게 죽을 줄 알라고 명령하는 것
으로 보일 째, 오, 그런 기도문은 우리의 살존을 둬덮고 있던 또 하
나의 자기 망상이라는 기만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52 안간
생활의 부패와 자기 모순이 교회 안에, 기독교 운화 자체 안에 나타냐
고 있마는 것이 더욱 중압과 실망을 주고 있다. 그러으로 오오리스는
이렇게 썼다. “냐는 망신들의 종파들-어느 것이든 간에 -그것은 기
독교 원리에 대한 역송이며 항거라고 생각한다 당신들은 우리가
그러스도의 옴에 속한 지체임을 안정하고우리를 진정£로 그러스도에
게 연합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스도에 대한 어떤 관념의 견지
(堅持) 에 우리 를 연 합시 키 려 하고 있 다 "53 “그렇 다 ! 하냐닝 과 대 립

하는 종교, 0 1 것이 현대의 이단이마 그러고 이것이 최후의, 가


장 무서 운 불신앙£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54
모오리스로 하여금 개변 주의자혹 일관하게 한 것은 그러스도가 왕
이라는 원리플 견지한 사살이다 . 그러스도가 왕이라 연 사람들은 다만
그러스도만을 생각할 것이요 자기들의 죄를 생각할 것이 아니다. 왜
냐하면 마치 죄가 사살상 존재의 주요 원리인 것같이 생각하여 거기
에 마읍을 집중시키연, 더 큰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되기 해문이다. 그
러묘로 그는 독일과 영국의 부흥 전도자들파 논쟁하였다. 그들은 “죄
릎 모든 신학의 기초로 삼으려는 것같이 보였기 때운이다. 내가 보기
에는 잘아 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 기초가 되는 것이며, 죄는
하나닝으로 더불어 연함원 인간의 상태에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마.
하나닝은 우리를 그 연합 o 로 부르셨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악

52. Ibid. , pp. 144 f. cf. ]’'he Gospel of John , pp. 91 f.



53. Life ’ Vo l. 1, p. 259.
54. Ibid. , p. 518.

222
제 6창 문화의 변핵자 그리스도

마가 이 우주의 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냐는 그러스도가 모든


의미에서 이 우주의 왕이시며, 악마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부인하게
하려고 매일 매시간 우리를 유혹하는 자이며 동시에 자기 (악마)를 왕
인 것같이 생각하게 하혀고 애쓰는 존재라고 믿는다. 이 두 교리 가
운데서 어느 것이 진리냐 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이마. 냐는 내게 계시된 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살고 그것
을 위하여 죽을 작정이마”라고 하였다.55 이련 이유로 모오리스는
이원론적 경향을 배격하였다. 적 극적인 행동에서 소극적인 행동으로 ,
협조하는 데서 비협조하는 것을 공격하는 데로, 그러스도 안에서의 연
향을 실천하는 데서 교회의 분파자들과 충돌하는 데로, 죄안을 용서
하는 데서 그들을 교휘로부터 배제하는 데로 전향하는 모든 이원흔적
경향을 배걱랬마. 이런 유의 모든 노랙은 악의 능력 그것은 자치 추
쿠, 자기 의욕, 자기 영광의 영 이외의 다른 무엣 A로 촌재하는 듯이
또 우리 자신 밖의 어떤 곳에 자리장고 있는 듯이-의 시안을 내포하
고 있 다. 이런 생 각은 사탄을 시켜서 사단을 내쫓으려는 것과 같마.
가령 사회주의에서 계급의 연대성과 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계급에 호
소함」즈로써 계급의 압박을 제거하려는 것이라든지, 교회 안에서의 차
툴럭 운동이 자신들파 자신들의 원리에 모든 교파가 귀일(歸-)함무로
써 기독교안의 일 치를 성취하려는 것 등이 다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러 하여 기 독교가 그러 스도를 매 신하고 기 독교 문화의 옹호가 그러
스도에게 뷰종하는 것을 대신하게 된 것이마. 이런 것은 악파 타협한
것이 아니라, 악을 우리의 선우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은 안간의
인격파 생활 안에 아무리 선파 악이 교착되어 았다 할지라도, 선파
악의 사이에 타협 이 이루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오리스는 자기
자신이 해로는 부정적인 데에 싸져 들어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하
여 교회와 세상에서 그의 친구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러냐 그가 그렇게 되는 것을 그는 결코 스스로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의 사상이 어떤 새 파당에 의하여 변호책 A로 이용될 수
있을 것도 알고 있였다 . 그러냐 안간이 자기들의 진실한 내적 통찰을
자기 주장A로 바꾸어, 결국 자기가 긍정하는 그 자체 를 부정해 버리
는 고질적 경향이 있음에 배 추어 , 우리는 삶의 유잎한 중심이요, 자

55. Ibid. , p. 450.

223
기 고집 (self-will)을 정복할 수 있는 유알한 능력이신 그리 스도를 새
로이 증거하는 것밖에 다른 대담이 없다 56
모오리스어l 의하연, 인류 를 자기 중삼성에서 그러스도 중심성우로
캐변시키는 엘은 하나닝의 보펀적, 펀재석 가능성이었다 . 그것이 보
펀적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을 다 포함한다는 의미에 서이 마. 그들이
다 같이 말씀으로 지읍받은 파조울이며 헨살석 인 영적 조직체 아래
서 살고 있 기 때 운에 그들 오두 가 그리 스도의 나라의 성 원 (成 員)이 라
는 의미에서 보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다. 그 러고 또 하나의 의미는
현실석인 하나념의 통치 에 대한 보펀석 , 자발적 수락의 가능성이 살
현되게 하기 위하켜 교회는 모든 판싱융 기울이기 를 요청받고 있다는
점 에서의 보쉰싱。 l 마. 그리 스도에 대한 기독교인의 증언 속에마 이중
예 정흔- 하나닝과 더 불어 사 는 생 휠 에 보의 선택과 하나 닝우로부터 의

분리에로 의 선택-과 영원한 형벨의 교리블 포함시킨 것은 소극적 기


독교에서 흘려 나온 일종 의 달션이라고 모오리 스는 보았다 “인간 의지
가 하나 닝의 사랑하는 의지 CIov in g w i!l )에 항거하는 가능성이 어떠하
마는 것을 냐는 감히 말 하켜 하지 않으며, 또 아무에게도 말 하기를
요청하지 않으나 , (다른 사람들에 다}해서보다는 나 자신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해 보연) 그 가능성은 냐에게는 거의 무한이라고 보이는 해


가 종종 있마. 그 러나 만드시 우한이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냐는
안다. 나는 죽음의 신연〈深씨1) 보 다 더 깊은 사랑의 섬연을 믿 지 않을
수 없마. 냐는 이 사랑에 대한 신앙을 강히 버 릴 수 없마. 만일 。 l
신앙을 잃는 마면, 나는 죽음 , 곧 영원한 죽음에 장기게 된 마. 이 사
랑이 세계를 감싸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이 상의 것은 냐
는 알 수 없 다 "57 “ 냐 는 하나닝께서 결국 엔 어느 것 하냐에도 살패하

리라고 믿을 수 없다. 만일 그 일 (사 랑의)이 다 른 자의 손에 취여 있


었다면 그것은 허 사로 돌아갔을지 오른다. 그러 나 아우리 오래 항거
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의 돗은 반드시 , 확살허 이루어지고야 말 것 이
다”고 했다 58

56. Maurice 의 사회 주의 에 대 한 견해 는 cf. Life , Vo l. [, chaps. 1. m; on


the High Church party , ibid., Vo l. 1 , pp. 160 ff. , 205 f.
57. Theological E ssays , 2d ed., p. 360.
58. Life , Vo l. n, p. 575.

224
제 6장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보펀적 구원이 란 것은 각 개 안이 그들의 참된 중심 으로 돌아간다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한마. 말씀을 통한 창조에 의하여 안 간은 사회적
A로 되어 있다. 그들은 아버 지 들 , 형제들, 아내들, 남펀들, 국민들,
그리고 정쳐적, 종교석 , 경제적 사회 안에 서 의 정 신석, 자말석 동참
자들이 다. 그러 므로 그러 스도의 나라의 전 적 실현은 인간의 모든 분리
펀 조직들 대신에 한 새로운 보펀적 사회 를 대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스도가 머리되시는 한 (one) 보펀적 나라 안에 이 모
든 인간 조직체들이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겸 비와 존귀를 통
한 밴혁을 의미한다. 몸의 각 지체가 자기들은 머리가 아니라는 사실
을 즐겹게 수락할 때 오는 겸비와, 그들은 각기 그들 자신의 독득하
고 펄요한 직책을 받아 그 폼의 머리와 또 다른 지체들에 게 봉사하는
지식에서 오는 존귀를 통하여서(그 냐라는 임 한마). 모요비스는 마양
한 민족 문화의 제 가치 를 에리하게 안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국적 (國籍)의 말살을 자신의 박멸보다도 더 싫어하였다. 철학의 학파
들도 종교 생활의 여러 그룹이나 운동파 마찬가지로, 각기 독득한 가
치 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양성 이 무질서를 가져오는 것은 어느
경우에서나 진리에 대한 그들의 부분적인 공헌을 통선석 진리로 오산
〈誤쉴[)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마. 겸비와 봉사가 자기 주장과 자기 영
광을 대치 할 때 변혁이 얼 어난마. 이런 각도에서 모오리스는 문화의
각 부문, 즉 사회적 판송, 정 치 가쿠, 언 어 , 경제 조직 퉁을 마루었

다. 그러 스도의 냐라-이것은 현실성이며 또한 가능성 이다-에 대 한


모오리스의 견 해에 의하면, 프로테스단트에서의 직엽 및 기독교안의
국석에 대한 교리 , 로마스주의에서의 철학파 사회 도댁에 판한 교리,
통일성에 대한 카흘 럭에서의 판성 , 특수 진리에 대한 종파주의자들의
강조-이 모든 것이 한 중요한 적극적 긍정 얀에 결합되였다. 그리하
여 그러 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는 안간 문화의 영역이란 있을 수 없오
며 인간의 자기 고칩을 변혁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종속되지 않는
인간 행위란 있을 수 없 다는 것이다-그것은 아무 리 거룩하다 할지라
도 기형화( deformation)펄 가능성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과 마 찬
가지이마 . 59

59. Cf. 특허 The Kingdom 01 Christ , Pt. 1I, chaps. ii , iii , v; 또한 Vidler,
op. cit. , pp. 183 ff., Raven , C.E., Christiaη Socialism , 1848-1854 , pp. 13 f.

225
모오리스는 보펀성파 종말론적 즉각성을 결부시켰다. 그가 말하는
영원은 요한이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닙이 역사하시는 차원을
말함이요, 시간의 부정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창조가 하냐닙의 영
원한(시간 이천이란 의마가 아난) 사엽인 것같이 쿠속도 ‘그리스도 안
에 있는 하냐넙’이 그 영원한 사엽 얀에서 하시는 일이며, 그것은 언
제나 인간의 시간적 행동에 대립하는 것이마. 그 ‘영원은 안간의 과
거와 현재와 미래 를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그 중 어느
하나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넘은 계셨고, 계시고, 또 계실 것
이다. 그가 통치하시며 또 장래에도 통치하실 것이다. 인간이 바라는
머 좋은 질서는 새 창조에 의한, 물리적 조건의 변경에 의존하는것이
아니마. “우리 주넘께서 그의 나라, 또는 그의 아버지의 나라에 판하
여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 세계의 쿠조를 우시하는 것처럼
말한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가정이나 국카척 제도 안에서 그 나라의
표석을 보았A며, 사람들은 더 높고 더 넓은 친교를 생각하면서 꽁꾸
고 있던 나라에 판하여 말씀하신다지상적 일 뿐안 엽 무와 인간
정부의 흥망이란 한 사소한 일에 불파하다고 멸시하는 고담석 〔띔路的)
신 표현은〈석쉰 신학자들은 야것을 。9 용한다) 그믹스드에제서 배울
수 없다 그가 미래에 대한 안간의 희망을 품고 있였고 또 그것을
확증하 였 다 할지 라도, “우리 현재의 삶의 신성 (패1聖)함을 전적 으로 안
정하는 것과는 모순되는 예상” 을 장려한 일은 없었다. 그러 고 또 “이
땅 또는 육체가 악마의 파조물이요 그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마니
교적안 개녕”을 말씀한 일도 없였다 60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나라
가 이 세상 냐라인 것은 아 니다. 그러스도의 나라는 외 부적 상태
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을 마스리는 것이다. “그가 사
귀를 내쫓을 해 그것이 안간의 영을 개변시킨 것임을 엽증하였다.
교만, 탐욕, 증오 등 우리를 종£로 만드는 높은 곳에 있는 영석 사
악〔那惡)의 능력을 상대로 그는 큰 논쟁을 벌이였다여기 이 내석
영역에서, 이 인간 존재의 뿌리 속에서, 그는 여전히 그의 원수를 정
복하며 그의 신비한 교육을 실시 하고 있는 것이다 "61 충돌의 시간은
지금이다. 그리스도의 승리의 시간도지금이마. 우리는 운화 안에서의

60. The Lord’ s Prayer , pp. 41f., 44.


6 1. Ibid., pp. 48 f.

226
제 6창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안간의 진보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의 발상지가 되는,


하나닙에 의한 안칸의 영적 개변 (conversion)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 하냐닙의 나라는 안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을 외부에
표현 하게끔되어 있다 그 나라는 그주체안 인간의 감정파사상과
말과 챙동에 속속들이 퍼져 나간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전 사회
적 생활에 침투한다 "62 하나닝의 나라는 변혁펀 문화이다. 그것은무
엇보다도 안간 정신을 불신앙파 자치 봉사로부터 하냐념에 대한 지식
과 봉사로 개변시키는 것 이기 해문이다. 이 나라는 싶 재적 (rèal) 이다 .
만일 하나닝이 다스러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키
혜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나라가 임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 c 셨다변 , 안류의 세계는 오래 전에 강도의 소굴로 화해 버
렸을 것이 7] 혜문이다. 매순간과 얘기간은 하냐의 종말론적 현재이
다. 왜냐하연 얘순간마다 안칸은 하나닝파 대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다른 현대 기독교 사상가냐 지도자들에게서보다도 모오리스에


게서 개변주의적 이념이 더 많이, 또 더 영백 하게 표현되 었다. 문화
에 대한 그의 태도는시종일판(始終一貴) 긍정적이다 . 그것은 말씀 없
이는 아우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장 진지하게 가지고 있었
기 해문이다. 그는 철저한 개변주의자여서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
것은 그 가 정치면 이나 경제변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국면어1 있어
서 도 안간 문화의 천도성 〈廳倒性〕을 가장 예 만하게 간파〔看破)하고 있
였기 혜문야다. 그는 결코 이원본적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폼 때문
에 정신이 부패한다는 생각을 천적으로 배격했기 해문이며, 인류를
속량딸은 자와 정죄받은 자의 둘로 갈라 놓는 것을 캉력허 반대했기
배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죄에 대한 소극적 태도를 꾸준히 배격하
였으며 , 교회나 사회 안에서 언제냐 적극적 , 참회적, 그러고 하나닝
을 지향하고 있는 실천을 요청시켰마. 그가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면, 그러고 종합주의자, 이원론자, 극단주의자와
함께 교육 및 종교 사엽에 종사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사엽이 좀더 효
과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문제가 물론 제기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어떤 키 독교 사상이라도 주님의 사상을 능가할 수 없는 것 이여 , 폼은

62. lbid. , p. 49.

227
하나이나 많은 지체가 있는 것처럼 교회도 그러하다는 것을 들어 그
는 이 문제에 대답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228
제 7 장

하냐의 “결론적 안 바 과학적 후까 ”

1. 결정적인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야 그들의 영 속적인 문제에 해하여 제


시한 천형적(典型的〉인 해탑들을 고판하 였다. 그러냐 그것은 결론이1
이 르지도 뭇했고 결 론을 지을 수도 없 였다. 01 것은 한없 이 연장될 수
있는 문제 이 다. 여러 신학자들, 역사가들, 시인들, 그러고 철 학자
들이 근년에 출판한 이 주제에 판한 각양각색의 연구논문들은 동료
시만들과 기독교인들을 계옹시키 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혼란을
주기도 하였 다 더 넓고 더 깊게 파거 를 연구한다면 , 이 문제에

1. 근년에 얄표된 이 부 류의 논문을 중에서 아래에 기 록 하는 저서 을은 이 토흔


의 운제와 그 뱀위를 잘 냐타 낸 것으로 올 수 있올 것이다. John Baillie ,
찌까 at is Christian Civilization?; Karl Barth , Christeηgeme inde μnd
B!‘ ε rgerge meinde ; Church and State ; Nicolas Berdyaev , '1’'he D estiny
of M an; Emil Brunner , J,μstice and the Social Order; Christiaηity and
Ciν il iza tion; Charles Norris Cochrane , Christiaηity and Classical C:μltμre;
Christopher D3wson , Religion and C:μlt“re; R eligion and the Rise of
Western C:μltμre; T. S. Eliot , The Idea of a Christian Society; Notes
Toward a D efinition of c:μ lture; J acques M 'l ritain , T7"μ e H.μmanism;
Reinhold N iebu hr , '1’he Nature and D Jstiηy of M an; Faith and Hist"
ory; M .B. Reckitt (ed.) , P rospect fo r Christendom; Paul Tillich , The
Protestant Era; Arnold Toynbee, Civili 'Zatioηoη Trial ; A S t:d.v of
H istory . Leo xm 이 후의 교황 회 랑 문서 을파 최 근 수십 년때익 세계 교 회
회의 들에서 이 운제의 각 부운이 않이 검토되었다 예 를 듣 마연 Philip
Hughes, The Pope ’ s N ew Order; Joseph Husslei n , Social Wellsprings;
The Churches Surνey Their T ask , The Report of the Coηiference at
O :cford , J uly , 1937, 0η Church , Commμ찌ty and State; 세계교회 제 l
회 대회의 Fin dings and DecιSions ; 이 대회의 준 비 릎 위한 연주 발표,
1 ’he Oxford S eries; },ιan’ s D isorder and God’ s Design.

229
판계한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 1 시야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들
은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파 마찬가지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도 이 문제를 상대로 고투하였고, 말로 또 유력한 결단무로 자기
들의 해답을 제공했다는 것을 알게 필 것이다- 우리는 더 넓은 그물
을 역사의 바다에 던져, 신학뿐 아니라, 정치 , 파학, 운학, 그러고

군부에까지 손을 대어 그 중에서 그리스도에게 충성하연서 문화적 의


무와 갈둥했거나 조정했던 실례를 찾아냈 다 면 더욱 좋 았으리라. 콘스

단틴, 샤 를 레 망 (C harl e magn e ) , 모어 (Thomas More) , 크홈웰 , 글래 드


스톤 (Gladstone ) , 파스칼, 케 플러 , 그러 고 뉴우톤, 단테 , 밀돈, 블레 이
크 (Blake ) , 도스토예 프스키 , 이-돌푸스 (Gustavus Adolphus) , 리 (Robert
E. Lee ) 와 “중국인” 고오든 (GOIδon)-그리고 그 밖에도 수많은 사광
들이 문화적 훤-동 의 모든 부문에서 우리 에게 화려한 엔구의 천망을제
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렌 연쿠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파 사회석
의우 수행을 위한 추론 활동과의 교착된 긴장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고 또 현세석 엘에 사로잡혀 있 는 안간들을 그러스도께서


그렇 게 도 꾸준히 붙장이- 주신마는 사살에 백 찬 놀라웅을 느끼 지 않올
수 없게 된다. 그 연쿠는 유형 o명젠)파 하부 유형 (subtype) , 동기와 대
렵 동기 (countermotzjs) 등을 쌓아 가변서 끝없이 또 유효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여 개념적 전형 (pattern) 과 역사적 실재를 더 밀


캡한 판계로 결부시키며, 역사석 생활의 마채 로운 형식을을 분석하려
는 온 갖 노력에서 생기는 불 확살 성을 강소시키며 , 각 개안의 상호 교
착되고 상호 작용하는 사상파 행위에 더 날카로운 경 계선을 그을 수
있을 것이마.

그러나 아우리 우리가 그 연구를 연장시키고 세 련시킨다 할지라도,


“이것이 기독교인의 해답이다”고 단연할 수 있는 결흔 에 도달할수없
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 독자나 저자가 다 함께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논문을 제공하려는 유혹에 이 끌릴 것은 물론야다 . 왜냐하연 유
형이란 것은 결 코 전적£로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마양한 입장

을 중에서 많은 점이 서로 화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피차에 지니고


있 다는 것이 영백하기 때문이 다. 뿐만 아니라 신학도 다른 학운과 마
찬가지로 어떤 포 팔적안 이 론을 추구하는 것이 살제적으로 크게 유익
하다는 점이 영백하게 뇌기 때운알지도 오른다. 마시 말하띤 이 부

230
제 7장 하나의 “결흔적안 비파학척 후기’

문에서의 건설적인 중요 저작이란, 지금은 분열된 것 중에서 더 많은


통일성을 가져오케 하며 서로 엇갈리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운동들 사이에 더 큰 조화를 실현 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최종적 해답올 얻으려 할 해에는
어느 점에선가 반드시 정지되지 않을 수 없게 된마. 그것은 다만 다
른 역사적 안물들에 닝l 하여 나의 역사석 지식이 부족하다든지, 다른
사상가들에 비하여, 개념 구성 능력이 약하다든지 하는 데서만 기인
(起因〉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한완, 석은 믿음을 받은 유한한 인간
으로서 그러한 최후 단언을 내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찬달〔훌짧) 행위가 될 것이라는 확신과 깨달음 해운이다. 그와 동시에
그렌 행위는 기독교안의 자유를 해치는 것이며, 운화 안에 있는 완결
되지 뭇한 교회 역사까지도 모독하는 것이기 해문이 c} . 만일 우리가
그런 기도〔企圖)을 강행한다연, 교회와 역사 안에서의 우리의 특정한
위치가 곧 최종석안 것이어서, 우리는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의 말씀
을 여기에서 들을 수 있올 뿐 아니라, 하나닝의 말씀 전부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만 한다. 그러고 이 말씀에 대한 추본적 해석에
서 자유를 행사하거나 순종함에 있어서 우리는 유한한 이성과 의지
블 챙사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이성과 의지는 보펀적이라고 가정해
야 한마. 우리 가 기 독교안의 정 답 Cthe Christian answer)을 제 시 하려
한다연, 우리가 교회의 머리를 대 표하는 것이요 그 치체를 대 표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교회 이성을 대표하는 것이요, 손이나 말, 귀나
눈, 염증 난 손가락, 뺏뺏한 판절처럼 그 이성에 종속돼 있음을 대 표
함이 아니게 된다. 기독교 인 의 정답의 제시가 불가능하마는 것은 다
만 상대적인 의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다수의 기독교안의
해탑을 진슬한다든지, 또는 더 명백하고 진실한 해답을 지향하는 데
있어서 어떤 사랑은 다른 사랑들보마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 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사랑이 상대
적으로 보다 포팔적이고 이지적안 해담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
다 하더라도, “여기까지는 네가 올 수 있마. 그러나 이 이상은 더 뭇
간다”는 도덕적 영령에서 우리들의 능력의 제한성에 직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만 한 가지 의마에서, 우리가 더 멜러 나아가야 하며, 결

231
본에 도달해야 한다. 이 진행은 이해라는 평연에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 이 결흔은 이론적안통찰이 나 전망의 영역에서 이루어질수있
는 것 이 아니다. 그것은 고찰에서 행동A로 , 통찰에서 결단요로 이동
함으로써 꾀해지고 획득되는 것이다. 각 신자는 옛날의 천투 기록올

읽는 도중에 의자에 서 벌떡 얼에 나 현재의 전투 한가운데로 참전하는


결심을 함으로써 각자의 “최종적” 결흔에 도달한다. 다른 사람들의 이
론이나 신념에 대한 사변적 통찰이 아우리 많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와 문화로부터 유쾌한 온갖 명령과 가치에 대한 고찰을 아무리 계속
한다 할지라도, 각자 기독교인 또는 책임석인 기독교 공동체로 하여

금 현재의 결 단파 현재의 복 종융 동반하는 이 런 결론에 도달할 무거


운 짐과 펼연성과 죄책파 영예에서 그들을 해방시킬 수는 없는 것이
마. 다븐 시대의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 사고파 챙 동의 유형들에 대한
연구는 다른 모든 부문의 연쿠와 마찬가지로 이 자유의 책임으로부 터
도파를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견해를 따라 우리는 토마스
주 의자 또는 루 터주의자, 툴스토이주의자 또는 어거스틴 주의자라고
스스로 선언한 후에도, 우리는 여 선 히 우리의 특수한 용어로 현재의
운제들에 래하여 결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고 이 결단에서,

오직 이 렇 게 함우로써, 우리 자신 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적당하고


올바른가를 결정하게 된다. 물론 그 사건의 성질 에 따라, 우리의 결
단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올바르기도 하고 동시에 보마 부정
확하기 도 하다는 점이 나타나게 될 것이마.

이것이 우리 연구의 결 론이라 하더라도- 그러스도와 문화의 문제


는 모든 연구를 초월한 영역에서, 각개 신자냐 책임적 공동체의 자유
로운 결단에 의하셔 결말이 지어질 수 있고 또 그렇 게 되어야 한다고
해도- 이 문제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이미 해당한 것과 지금 해압
하고 있는 그방식 에 동참할 의우, 또는 그들의 자유롭고 상 대적이고,
개안적안 선택에 수반펀 논리적 이유에 판한 우리의 탐쿠 등은 불필
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연 믿는마는 것은 그 믿음의 대상자 및
같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과 서로 연합펀 것이기 때문이r:.} . 신앙
안에서 우리는 믿 기 때문에, 우리의 상대성파 상판성을 깨닫는다. 우
리의 살존적안 자유는 우리의 의존성이라는 맥락 안에서 현실적 A로
실시될 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 서 정평 있게 행사된다. 신앙무로 결

232
제 7 창 하나의 “ 결흔적인 "1 파학적 후기”

단한다는 것은 이 맥락의 안식 안에서 결 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


가최션을 다하여 야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그맥락 안에서의 그의 의
무를 수행하는 신자의 의무이마.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신앙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단의 성격
을 푸영함A로써 더 명확하게 알려질 것이다. 외형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결단은 상대적인 통찰파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
이 상대주의적안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안적 결단이다. 그러나 그것
이 개안주의척안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유 안에서 되어진다. 그러냐
그것이 독립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순간적£로 되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벼역사척안 것은 아니다.

2. 신 앙의 상대주의

우리의 문화 안에서 기독교인이 되려고 펴할 때 개안척 A로 도말한


결론은 적어도 네 가지 띤에서 상 대적이다. 즉 그 결 론들은 개안의 부
분적 이 며 , 불완전하며 , 단펀적인 지식에 의존하고 있 다. 그 결 론들은
개안의 신앙파 불신앙의 정도에 짜라 상대적이다. 그 결론들은 각자
가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위 치와 각자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의무에
판계되어 있다 . 그것들은 사물의 상대 적 가치에 판섬올 카지고 있다.
첫째로 지적한 점 에 대하여는 언거롭게 설 명할 필 요도 없올 것이다.
파학은 도덕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는 현 대 사 람들로 말마암아 무지한
선안〔홉:人)들이 행한 악이 출겹게 폭로완 다 할지라도, 도덕이 파학
을 내신 할 수 없다는 것을 얄고 았는 사랑들에 의하껴 그 소행 이 또
한 계 속적으로 폭로되고 또 회 개하게 될 것 이다. 상처 에 기릎과 포도
주를 부어 준 선한 사마리 아 사람을 칭 찬하신 그리 스도라 할지 라도,
현대적인 응급치료 엽으로 훈련받은 사 람 이 성서에 씌어진 실 례를 절
대석안 지 침 A로 생각한다변 그 사람에게 동일한 칭찬을 내리 지 는 않
을 것이다. 의학뿐 아니라 정 치, 경제 및 기다 문화의 각 부문에서
우리는 사물의 성질과 자연의 제 파정에 대한 지식을 근거 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 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 나 그 최선이라는 것
이 언제냐 사회적£로 만펀 석안 지식이벽 개인 적으로는 더 욱 단펀적

233
안 것 ðl 다. 우리의 천문적 지식뿐 아니라 철학적 。1 해- 복장한 세계
에서 우리가 에떤 방향을 찾는 방현으로서의 더 큰 전형들-까지도우
러의 결정올 상대화시킨다. 누구나 다 일종의 자기 철학, 어떤 일안
척인 세계판을 가지고 었다. 그 세계관이 어떤 다른 사란에게는 신화
처럼 보일는지 모른마. 하여간 그 철학 또는 신화가 우리 의 행동에
영향을 주며 그 행동을 상대적으로 얀든다. 20세기의 신화도 1 세기의
신화보다 옷지 않게 우리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상대화시킨다.
우리는 지금 후자 cl 세커의 신 화) 의 기초 위에서 감히 챙동할 수 없다.
즉, 사귀를 내쫓는 일로 정신뱅 환자를 치료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신과 몸의 성질파 그 핀련성을 잘 이해하여 그 최선의 지식
을 이용하게 된다. 그러 나 우리 에게 상대적으로 참되다는 이렌 지식
안에도 사화적 요소가 또한 품져 있다는 것 을 우리는 알아야 한 다.
우리의 해견책파 결 단은 다 상대적이다 . 그 모든 것이 단연척이요
연약한 우리 신앙에 판계되어 있기 해문이마. 그리스도가 다시 오살
얘까지는, 역사 얀에 있는 기독교인이 온천히 믿음대로 갈아서 그의
모든 생각이 믿음에 복종하며 모든 순간파 장소가 그에게는하냐넘 냐
라 안에 있는 것으로 되는, 그런 기독교안은 말 견펀 척도 없고 앙으
로도 딸견되지 못할 것이다 각자는 자기로서는 움직알 수 없는 산과
쫓아낼 수 없 는 마귀와 대 변 하여 왔다. 오늘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하
마.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이교 문화의 천연적인 맹렬한 반항으로 드
러나, 사란들로 하여금 “하나닝의 긍흉파 능력도 이것은 막지 뭇한
다”고 단식하게 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육체 얀에 있는 악일 수
도 있어서, 그 악은 옴 안에 있는 인간 또는 창조에서 시작된 역사
얀에 있는 안간은 하나넘께서도 속량하지 뭇하신다는 판단으로 사람
들을 안도한 다. 또 어떤 경우에 는 하냐념의 선파 능력에 대한 신앙은
언 간 이냐 동물, 또는 자연의 다흔 힘 속에서 악행자들을 보자마자 정
지되고 만다. 어디서든지 신앙이 정지되는 곳에서는 신앙의 결단도
정치되며, 신앙에서의 추론도 정치된다. 거기서부터 불신앙의 결단과
추론이 시 작완다. 만일 인간 사회 를 궁극적으로 통할하는 능력 이 그
사회에 대하여는 안자한 것 이 되지 않고 다만 개안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연 냐는 개인을 섬 기 는 데 로 전향할 뿐 아니라 사회
는 속량받을 수 없다는 나의 신녕에 따라 냐의 사회적 행동을 지도하

234
제 7장 하냐의 “결혼척안 "1 파학척 후기’

게 될 것이다. 만일 자연 속에 나타냐는 능력이 하나닝의 능력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교회냐 사회 얀에서 은혜롭거나 또는 비판적안 정신
과 마주칠 해 하냐념 의식으로 충만해진다 할지라도 자연의 혜택에 대
하여 강사하거냐 자연의 재앙에 대하여 회오(悔홈)를 느끼는 일은 없
을 것이다. 우리가 다 같이 믿음의 같은 단펀들을 가지고 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은 모두 단편적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2세기의 신앙이 협소하였다는 것은 “세 상 ” 을향한 그들의 태도에서 장
드러나 있다. 중세기 신앙의 협소성(俠小性)은 그들의 이단에 내하는
태도에서 나타났다. 현매 신앙의 왜소(쩡小)함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신앙은 그 가장 영확한 싣패가 지적해 주
고 있는 것보다 더 욱 적고 또 단펀적이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추른
하고 행동하여 기독교인£로서의 해답을 제시한 해, 우리는 부분적이
고 조각난 신앙의 근거 위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으로 우리의 해
당 얀에는 지극히 적은 기독교성 (性 ) 밖에 들어 있지 않을지도 모
른다 .

우리의 추론파 결단이 역사적, 문화석 의미에서 상대적이라는 것은


명확하마. 그것은 우리가 지식의 역사적 변천 을 생걱할 해에 그럴 뿐
아니라, 그 역사적 파정 또는 그 사회적 구조 안에서의 우리의 의무
에 대하여 생각할 해에도 그러하마. 크고 세력 있는 교회가 작고 핍
박받는 종파들의 맡은 사명을 책임 있게 수행 하지 뭇한다. 산엽 문
화 안에 있는 기독교안은 마치 봉건 시대에 사는 것처럼 생각하며 행
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탄생시로부터 1950 년 후 세내
에 살고 있기 해문에 500 년이 나 천 년 전에 상던 제자들보다 그러스도
에게서 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이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보다도
우리의 견해를 전혀 이히]하지 옷하는 우리의 동시대인파 우리 사이가
훨씬 더 멀리 옐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석 역사 안에서 이 런
특수한 엽장에 있 기 때문에, 펄연적으로 그러 스도블어떤 배 경 에 바추
어 보게 되는 것이며, 우리 선배들이 경 험한 배경파 엑락과는 마소
다른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의 역사
적 판정파 의무와 함께 우리의 역사적 상황은 우리의 사회적 상황 즉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 치자〔治 者) 와 피치자, 교사와 선생, 육체
노동자와 정신 노동자 웅의 상대성 때문에 더욱 복잡하게 된다. 우리

235
는 어떤 특정한 시간에, 어떤 특정 의무를 카진 특정한 인간으로서
우리의 결단을 지으켜 우리의 추론을 추진하며 우리의 경험을 얻는
것야 틀링 없다.

마저막으로 우리의 온갖 선택에 있어서 계산에 넣어야 할 점은 가


치의 상대성이다. 우리가 다루논 모든 것은 많은 가치 판계( value
re!ation)를 카지고 았다. 우리 자신에게 카치 있는 것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케 가치 였는 것도 였고, 생활에, 이론에, 또는 국가에 가치
있는 것도 있다. 모든 안간은 다 신성한 가치플 가지고 있으며 , 그
킷은 모든 사람야 다 하나님과 판련되어 있기 해문이라는 신앙의 탐
대한 확신으로 출발한다 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다 다 른 유한자들파
의 펀:계 속에 존재하며, 이들 판계 속에서 볼 때 그들은 다 동일한 가
치플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고려에 넣어야 한마. “소자 중하나”
를 넘어지게 하는 자와 그 “소자”을 사랑하는 자와는 그 가치에 있어
서 감지 않다- 제사장, 례위얀, 사마리아안이 하나닝의 가치 평가의
대상으쿄서는 똑갇은 가치를 가지고 였을 것이다. 강도에게 희생당한
그 사밤에게 있어서는 결코 갇은 가치 를 가진 것이 뭇된다. ó1 것 은
그들에 래하여 그가 어떠 것을 생각하고 였든 그것과는 벙캐의 문제
이다. 그러스도 안에서는 유대안파 헬라안도 없고 종파 상전도 없고
남자와 여자도 없다. 그러나 타안파의 관계에 있어서는 많은 가치의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다. 아무것도, 진리까지도, 단 한 가지 판계에
서만 가치를 가지는 것야 아니다-그 본칠적 가치의 개념에서 말하
는 것은 아니다. 비록 진리가 영원한 가치, 하나닝에게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또한 안간 이성, 생활, 사회 질서 , 자
아(自我) 등파의 가치 판계플 가지고 있다. 운화 안에서의 우리의 사
엽 은 인간, 이녕, 자연적 대상과 과정 등과익 모든 상래척 가치에 판
성하얘 있다 정의에서는, 통료 안깐들에 대한 염행 자와 정직한 자와
의 산대적인 가치를 다룬다. 갱지1 에서는, 수많은 존재지~들파 그 다원
적 상호판계에 판련돼 있는 사물파 그 행 흥들의 성대적 가치에 판심하
고 있는 것이마. 모든 문회의 노작(勞作)에 있어서, 우리 상대적 안간
은 우리의 상대적인 판점파 상대적안 가치 평가를 가지고 상대적안
가치플 다루고 있으며, 그렇게 하여 우리의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대성을 안식하고 안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 절

236
제 7창 하나의 “결론적안 비파학적 후기’

대적안 것도 가지고 있지 않마는 것을 의미항은 아니다 이 상대성에


직변할 때, 인간은 세 가지 가능한 걸올 가지게 된다. 첫째로, 그들
은 허우주의자, 철저한 회의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러하여 아무것도
신뢰찰 수 없다는 것을 긍정한다. 물째로는, 그들이 어떤 상대적인
위치에 있는 권위에 도피할 수 있마 즉 어떤 교회, 또는 어떤 철학
둥을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절대석인 것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세째
로, 그들은 그들의 모든 상대적 견해와 가치와 의우가 우한 절대자에
게 종속되어 있다는 신양을 가지고, 그들의 상대성을 용안하는 것이
다. 이 마지막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신념과 겸손으로 그들의 고백
파 결단을 표시할 수 있 A며, 그러하여 그들은 그 절대자에 대하여
같은 관계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완성, 시정, 또는 갈
동까지도 신녕파 겸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단펀적 인 지식 을 통하얘 그들이 보고 들은, 그들에 게
주어진 진러 블 신념을 가지고 진술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진리의 전 부요 그것 이외에 다른 진리가 없다는 태도는 취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단펀적 A로 알고 있는 동일 대상에 대하여
다른 사람 들이 보고 듣은 바를 전혀 외면하기로 작정하는 독단론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믿음£로 같은 예수 그러스도블 쳐다보는
모든 안간 들은 각기 자기가 경험 한 그러스도를 진술할 것이다. 그러
냐 그는 자기의 상대적안 진술을 절대적안 그러스도와 혼동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모오리스는 그가 밀 o.s. Mill) 에게서 배운 원리를을 우
리에게 추천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사람들이 무엇을 시안할 떼는 대
체로 정당하고, 무엇을 부인할 때는 대체 로 잘못을 범하게 된다고 하
였다. 우리가 부인하는 것은 주로 우리가 경험하지 뭇한 무엇에 대하
여서이다. 그렇 다연 그런 것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
다. 유물 주의자는 물잘 의 중요성을 긍정하는 경우에 신임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신에 대하여 아우렌 아는 바도 없다고 말하연서 그 중
요성을 부인한마연, 그의 하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운화가 악하다
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마. 그러나 그 안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다고 흘스토 이가 확언했을 해, 그는 자기의 상대석인 입장을
초월하여 하냐념의 심판권을 그대 로 행사한 것이 된다. 신앙은 한 절
대석안 임장에 대하여 알고 있기 해 문에 신자의 상대석안 상태와 지

237
식을 받아들알 수 있는 것이 마-
만일 우리가 ‘그러스도 안에 계신 하냐닝’의 절대석안 신살성에 매
한 신잉-을 가지고 있지 뭇하다연, 우리 신앙의 상대성을 식밸허-기 곤
란할 것이 사살이마.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쩨문에 우리는 우리의 개
인적 또는 사회석 신념을 절대석인 것£로 만들려고 항상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 나 하나닝의 신설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적마면, 우리
의 행동에 내포되어 있는 죄의 용서에 대한 신뢰와 약간의 신념을 가
지고 석은 맏음의 결단을 내럴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특수
한 시간, 장소, 직엽 등에서 우리가 우리의 상대적안 의무를 수행 하
는 것도 그것이 절대자의 영령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추진될 때에는,
결코 상대주의냐 자기 주장이마고는 말살 수 없마 그러냐 내가 정당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의의 전 부요, 유일한 정의라고 주장할 때 또
는 내가, 냐의 상매성 안에서, 내가 순종하는 가운데 행한 것이 나
자신파 다릎 사랑파 하나님에 게 기익펄 만한 가치가 있어서, 냐 자신
의 행 동 증에서의 선려1 (先例)나 결 과, 냐 른 사란들의 활동 , 무엇보 다
도 그리스도의 -실 동£로 보충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상
대주의적이요 거칫 절대가 되는 것 이마. 그러스도 얀에서, 또는 그러
스도을 응하딱 알 려신 설대에 대한 신앙은 나의 상대적인 무지(無知)
와 지식, 상대석인 불신앙, 그리고 신앙, 시간, 장소, 직엽 등에서 내
가하고 있는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냐도 예외 없 이 완성된, 완
결펀 행동의 의 〔짧) , 모든 강조와 속펑:에서 역사하시는 은혜의 활동
에 의하여 보충 , 시정 또는 용서받을 펄요가 없는 의 는 되지 옷한다
는 것을 분영히 나타낸다.

우리 개인들, 사울을, 운동들의 상대석 가치를 다룰 때 , 이 모든 살


재 들。 } 그들의 싱호관계에서 여 러 가지 가치 를 가지고 있음파 동시 에
(결코 잊어서는 얀 펄 ) 하냐닝과의 판계도 가지고 있마는 것을 기억
하면, 우리는 결코 상대주의에 휩쓸혀 들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만일
내가 다만 하나닝에 대한 내 이웃의 가치만을 안정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그의 가치플 무시한마연, 거기에는 상대적 정의 또는 어떤 종류
의 정 의 도 용남필 여유가 없을 것임이 확실하마 . 그러나 이 경우에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불경건으로 행동하는
것이마 . 왜냐하면 냐는 , 하나닝끼}서 나와 나의 이웃을 그의 독생 자들

238
제 7장 하나의 “결흔적안 에파학적 후 기.

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형제로 창조하신 사살석안 하냐닝 (actual

God)에 대한 신앙을 조금도 행사하지 않고 있기 째문이마. 그리고 만


일 내가 나의 이웃을 마만 나 자신파의 가치 판계에서만 고려한마면,
거기에도 정의를위한 여지가 없게 완다. 다얀 호혜주의(互惠 主義) , 즉
눈은 눈으로, 톱는 손은 톱는 손으로 갚는 것뿐이마. 그러 냐 얀알 내
가 그의 가치 관계 를 모든 그의 이웃파의 판련에서 고려하며 동시에
그것을 하냐넙파의 판련에서도 고려한마연, 그 해에는 거기에 상 대적
정의 를 위한 여유가 생결 뿐 아니라, 절대와의 판계에 바 추어 봄A로
써 상대석 판단의 형성과 재형 성 을 위한 여유도 생길 것이다. 이 절
대 와의 관계 는 때 늦은 생 각 (after thought)으로 여 걸 것 이 아니 마. 一마
치 사형장으로 나가는 죄수에게 동행시 키기 위하여 사제 (司聚)를 파
송하는 것같이 - 그것은 모든 것이 그에게 또는 그릎 위하여 어떻게
되 는가를 결 정 하는, 예 상(forethought) , 또는 함께 하는 생 각 (cothou­
ght)이 될 것이마. 공정한 재판을 위한 배려, 부분석, 상대적 판단들
에 대한 검토와 조정, 어떤 종류의 형벌에 대한 금지 , 법행자의 신체
적, 정신석 보호, 그의 사회 복귀 를 위한 노력-이 모든 것은 모든

상대적 가치 를 초월한 그의 가치 안정을 반영하는 것이 된다. 어떤


상대적 가치가 참으로 절대적안 가치 블 대치하게 될 때에 상대적 정

의는 상대주의적 S로 되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 계급, 또는 그의 혈


연석 민 속 둥을 위한 안간의 가치가 그의 최종의 가치로 수락되는 경
우와 같마. 짐승을 마루는 데까지도 상대주의적안 사랑의 행동과 그
보잘 것 없는 펴조물이라도그것이 생명의 주(主)요 수여자안 분과 관
계되어 있음을 안정하는 사람의 행동파는 서로 다른 결파를 가져온
다. 경제에서나 과학에서냐 예 술에서나 기술에 있어서, 하나닝을 믿
는 신앙의 결단파 거짓된 절대를 믿는 신앙 결단과는 서로 다르다.
그것은 그 결만들이 사물의 상대척 가치 를 우시하기 때문에 그렌 것
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적인 가치 판계를 염두에 두고 있기 해문이다.
하나닝을 믿는 신앙파, 상대적 통찰 및 의무를 이렇게 결부시키는
것은 타협을 내포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연 서로 비교가 되지 않는
관심과 가치 사이에는 타협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며, 절대적안 표준
이란 것은 타협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파괴쉴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언제냐 우리의 이웃과 그 밖의 모든 파조물들이

239
하나닝과의 판계에 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 실 을 잊어버리고 있마.
그러하여 우리는 절대와의 가치 판계를고려에 넣지 않고 상대적 가치
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선택은, 기독교안은, 불-신앙적 행위라 하
겠마-이 모든 것은 너우냐 확설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의
타협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할지라도 그것으로 우라 자신을 변영할 수
는 없마. 마만 우리는우리의 믿음 없음을 자인(自 않) 하게 되고, 우리
마음을 고쳐 주살 은혜에 믿음A로 의 지 해 야 될 것이다. 그러하 연 우
씌한 자의 수난의 뱃가로, 우리의 상처, 즉 스스로 상처 업었 A냐 스
스후 고치지는 뭇하는 그 상처 블 낫게 해 주신다.

3. 사회적 실존주의

우리가 기독교안으로서 문화사 안에서 반드시 내려야 할 결 단에 응


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말 이 았다. 결단은 상대적일 뿐 아니라, 동
시에 실존적인 것이마. 마시 말하연, 그것은 사색적안 탐구에 의하얘
도달할 수 았는 결단이 아니라, 자기에게 참 이 라고 안정되는 것을 근

거로 하여, 현재의 순간에서 행동하는 책임적 주체로서 자유롭게 내


려 야 할 결단안 것이 다. 키에 르케고르-다른 무엇으로도 환원필 수
없는 자아의 싶존성을 현대의 다른 어떤 사상가을보다도 강조댔고
또 거기에 봉사했다는 영예를 안정받고 있는-는 이 영속적인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기독교 정탑이라기보 다는) 어 떻게 우리 자신의 해답

을 얻어야 하며 또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


력에 마소의 지칭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부정하는 것파 그카 긍
정 하는 것을 그내로 받아들안다면 , 우리는 잘옷 안도되기 쉽다는 것
도 알 아 둬야 한다.
‘ 결흔적 안 111 파학적 후기’에서 키에르케고르는 다아 [(iß我 alter ego
즉, 요하네 스 클리 마쿠스Oohannes Climacus)J 를 동하여 기 독교의 문
제릎 다읍파 같이 헨영하게 제시하였다. “기독교를 잘 알지 옷하
지만 ..... 기독교는 각 개인에게 영원한 챙복을 주려는 것이라는 것
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리하여 필요 불가결의 조건 (coηditio sine
qμa ηoη〕으로서의 개 인의 영원한 행복에 대한 무한한 판심을 가지고

240
제 7장 하나의 “경 흔적인 비과학척 후기’

있다고 추정하였다. 즉, 각 개안은 이 판싱 해문에 자기 아마와 어마


까지도 미워하며, 짜라서 세계 역사의 사변적 체계와 윤팍은 경 델하

게 하는 판심이다 "2 이것을 출말점으로 한 다 면 , 성서 또는 1 8세거의


기독교사에 나타난 진리 또는 III 진리란 것이 무엇이든 간에, 객 판성
을 갈리기 위하여 자기 판섬을 결 정적으로 배제한 이 철학자의 객판
적 진리가 무엇이든 간에 -이 모든 것은 그 자신을 위한 진리가 무엇
안가 하는 데만 열정적인 판심을 가지고 있는 개인에게 아무렌 관계
도 없다. 이러한 주체적 진리-나플 위한 진리-는 다만 믿응 안에서
와 결 단에서만 찾 아 볼 수 있다. “결단은 주체 안에 었 다 한 기
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가 무엇이 냐 하는 데서 결정되는 것이 아
니 라, 기독교안의 어떻게에서 결정되는 것 이다 이 어떻게라는 것
이 곧 신앙이다. 기독교인이란 것은 신앙으로 말미임-아서만 되어지
는 것 이 마. 신앙이란 것은 교리의 승인 이 라든지 내척 경험과는 전
혀 다른 것이다. “맏 는다 는 것은 마른 모든 충망물 (appropri ation) 또
는 내연성파는 특허 다른 것이다. 신앙은 내 적 열정으로 견 지 (堅持)
된 불합러성의 반발에 기안된 객판적 불확실성이 마. 야 경우에 내적인
것 에 대 한 열정은 최고도로 캉화되는 것이다 신앙은 불가해성
(不可解性 )에 만족하여 얀주(安住)할 것 이 아니 다. 왜 냐하면 더 자세 히
말한다연, 불가해적안 것 곧 불합리한 것에 대한 판계 또는 그것 으로
부터의 만딸은 신앙의 열정을 표현하는 것이기 해문이다 "3
이것 은 그러스도와 우리 문화의 연전에서 선택의 강요를 당하고 있
는 우리의 상황에 매우 적합한 것으로 보인 다. 우리는 결단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역사와 사색에서 뛰어 나와 행동으로 옮겨 가야 한
다. 결단한마는 것은 개인적 책엄 아래서, 우리에게 창이라고 느껴지
는 것을 근거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참
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신앙의 열정으로서 파악해야 한다. 우리의 결
단에서 우리는 이해 될 수 있는 것을 넘 어 더 냐아가야 한다. 그러 면
서 도 이지적안 것을 만단허 붙 장고 있어야 한다.
그러냐 결 단파 신앙에 대한 이 러 한 교리에는 우리에게 진리가 되지
못하는 것도 많다. 우리의 결단이 개안석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

2. Op. cit. , p. 19.


3. Ibid ., p. 540.

241
나 그것이 캐안주의척안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연 우리가 우리의
결단을, 우리를 위하여, 우리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하는 것 A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결단은 키에르케고르가 의미하는 개안루
의적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또는

우선적으로 자키 자신의 영원한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운이다.


우리가 이 러한 모승으로 우리 자신을 판독〔判讀)할 수 없다는 것은확
실 하다. 그러나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많은 열렬한 신자들을 위하여
야렇 케 말하였다 거기에 펄자까지 끼어 있지는 않다 할지라도, 그
가 신임하는 사랑은 거기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잘 알지 못
했으면서도, 냐는 그가 인간파 안류에게 무한한 행복, 영생을 주려고
하고 있다는 것만은 잘 이해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에게 로 온
사맘들에 게 , 펄요 불가결의 조건 (coπditio siπe qua noη) 으로서 의 동료플
의 영원한 행복에 대한 우한한 판성을 추정 또는 창조한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 판성에 의하여 단순히 사사(私팎)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미워하게 펀마. 그들의 부모, 자기 자신의 생명까지도
미워한다 그러하셔 그들의 주체적안 논리냐 개안의 역사 같은 것은
하찮게 여겨 버린마 실존적인 문제는, 그것이 설맛에서든 신앙에서
든 간에, 마만 “냐”라는 용어만으로 진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
리가 포함되어 있마. 그리하여 모든 “나”는 우리의 구원 혹은 정죄에
서 각자의 운영 에 직띤한다. 우리가 어떻게 될 것안가? 우리는 어다
서 와서 어디로 칼 것안가? 이 전 인류의 행 진, 그들파 함께 나도
행진하고 았는 , 이 행진에 어떤 의미가 였다면 , 그의미는 무엇안가?
왜 우리, 이 인류, 이 특이한 역사적 살재가 이 살존 속에 던져졌는
가? 우리의 죄파〔罪過), 우리의 소망은 우엇안가 ! 우리의 출말파 우
리의 종말에, 우리에케 직변하는 세력은 무엇인가? 이 최악파 허영
파 공허와 무역함에 서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는무엇을 할것인가? 어
떻게 하면 우리는 마정한 하나넘을 모살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살촌적안 질문들을 개안 적으로 제키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우
리는 우리의 인격적 , 개인석 자아를 잊어버리지 않는마. 그러냐 살존
주의자의 질문은 개인주의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독한 해보다
도 우리의 천교 속에서 가장 열정적안 형식 A로 나타난다. 그것은 다
른 인간의 자아들파의 판계플 떠나서는 자신의 자아성(自 我住)을 가질

242
제 7 장 하나의 “결흔적안 비과학적 후기’

수 없는 사회안의 살존척 문제이다.


키 에 르케 고르의 실존주의 는 신앙에 는 부적 합하다고 하여 문화 문제
콸 포 기한다. 그의 살존주의가 살존주의적이고 살천적이라서가 아니
라, 개안주의척이요 추상적이라서 포기하는 것이다. 이 섣존주의는
자아를 사회로부터 추상화하키 를, 마치 어느 사변적인 철학자가 인
간 살존으로부터 이 성 을 추상화하는 것 보다도 뭇지 않게 과 격 하게 하
였커 때 문이 마. 그의 실존주의가 사회 문제를 포기하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책임을 강요하기 띠}문이 아니 라 , 다른 지아들에 대 한, 또는
다 른 자아들을 위한 자기의 책임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나와 내 집
안은 여호와를 성기겠노라”고 한여호수아의 말을문화는 되풀이할수
없는 것이마. 왜냐하면 그의 실존주의의 후예들은 칩이 없기 배문이
다. 그의 “ 싶존하는 개인 들 ”은 바윷의 다음과 같은 열정적안 진솔에
시- 용된 큰 글자로 쓴 ‘냐’ ( 1 )의 뜻조차 모를 것이다. “나는 그리스

도 얀에서 진리를 말하노라. 나는 거칫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심령 안에 큰 슬픔과 끊임없는 고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내 양
성이 성령 안 에서 증언하고 있다. 냐는 내 동족을 위하여 나 자신이
처주받고 그리 스도에게서 끊어치는 것이라도 원하는 바로라 . ‘ 이 동
족이란 것도 그들이 각기 고럽펀 개안들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한
문화 얀에 있는 존재자들이 다. “그들은 이 스라엘 족속이 다. :..:L리 고
그들을 이들 료 삼고, 영광어1 깎여 하케 하였다. 그러고 그들과 계약을
맺 A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섰 다. 그들은 예배블 드러는 특권을 가
졌고, 약 속 을 받았마. 족장들도 그들의 조상이며, 그리스도도 육신적
4로는 그들에게서 나셨다 "4

우리 각자 기독교안은 결단이 개인주의적이 아니라는 둘째 이유를


말한다면, 우리는 “냐블 위한 진리”라는 의미에 서 의 진 리를 기초로
하 여 온천히 고랩된 가운데 서 결단을 내릴 수는 없다는 점이다. 우리
는 온전히 걱러 된 그러스도와 대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스도가 우
리에게 알려진 것은 그릎 둘러싼 수많은 그의 증안틀이, 그를 가리키
며 그의 임재 ( 1찌i:E) 의 이요저모를 설명 하며 그의 말씀의 의미 를 우리
에게 설영하며 그가 성부와 성령 에 대하여 어떤 관계 를 가지고 계신
것을 말하여 우리 의 주의를 일우켜 주었기 해운에 가능하게 된 것이

4. 홈 9: 1-5.

243
다. 직접적안 대변이 없이는, ó] 런 모든 증언이 나에게 아무렌 잔라
도 되 지 옷한다. 그러 냐 동반자, 동역 자, 교사, 확실한 증인들이 없
으면 나는 나 자신의 상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가

장 사소한 지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동반자들과 교사들이 없였


다연 우리는 고양이와 개, 그라고 그들의 이 릅파 특색 퉁까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자신들의 경험 에서 그들파 직접 대변하지 않
았다연, 참으로 그들을 안 것이 옷되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식이 더 중요한 것이라면 직접적 경험은 물론, 그만큼 더 선생이내

동반자가 펄요.하다. 양성의 소리카 곧 사회의 소리는 아니라 할지라


도, 그것을 플은 마른 사감들의 중개적안 도움이 없이는 그것은 이해
되지 않는 것 이 다. 우리 가 우리 자신 얀에 서 고독한 자문지-당(自 問 自 答)
으로 어엔 요청 또는 결단 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카 다흔 자
아 들파 산 대화를 함으로써만 결국 “다른 사땀의 의무는 무엣이든 간
에 냐는 이것을 내 의무로 여긴다 또는 “다른 사람은 무엇을 하든
간에 나는 이 엘을 하지 않윤 수 없 다” 하는 단언을 내 리 게 되는 것
이다. 이 첫 귀걸- “다른 사 랑들이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야야
무엣이든 가에이 었였더라며‘ 그 다음 귀전이 따라옴 수가 없였을
것이다. 우리가 그러스도와 대변하는 일에 았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마가, 마태 , 요한, 바울, 하르낙 , 쉬 바이 처 , 불트만, 도드 CDodd) 등
파의 오랜 대화가 있은 다음에 바로소 나는 내 결론에 도달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스도가 무엇을 의미하든 간에, 냐에게는 그가
이란 것을 의마하고 또 이것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결단에 도달하였
다. 내가 만일 이란 여러 사랑들과의 대화 없이 단 혼자서만 그러스
도를 내변하였더라면, 나는 지금과는 온천히 다른 입장에 서 있케 되
였을 것이다〔만알 그 입장이 가능한 것이라연). 어떤 켠위와 증연을
거 치 지 않고 우리 에 게 말하는 그리 스도는 사실적 안 그리 스도 (actua!
Christ)가 아니 다. 그는 역 사의 예 수 그러 스도가 아니 다. 그는 다얀

냐 자신의 욕구나 깅 박(彈迎)의 투영 (投影)에 불파한 것 이 마. 그러 냐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변에서 내가 다만 증안들의 말을 통해서만 들였
고 냐의 살생 활에 서 한 번도 만나보지 옷한 그리 스도라연 그는 결코
나의 그러스도는 못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실존적 상황
안에서 개안석안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고독한 자아로서 고독

244
제 7장 하나의 “ 결 흔적인 "1 과학적 후기 ’

한 그리스도의 만남 속에서 개인 주의적우로 결단하는 것은 아니다.


결 단의 진실성파 그 자유롭고 개인적안 성격을 강조하는 살존주의
는 우리에게 순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마. 사색적, 영상적안 이
성은 파거냐 미래나 또는 무시간성 안에서도 잘 수 있다. 이것은 인
과의 법칙과 논리 석 연결을 더듬어 간다. 역사척 이성은 1 세기, 4세
기, 또는 13세기 등으로 여 행 하면서 베드로가 살던 세계, 어거스틴
또는 토마스의 세계릎 시 찰찰 수 있다. 이것은 비인격적 이성이며, 추
론자의 간절한 개인적 판섭을 잊어버리려 한다. 그러냐 그 사색가는

반드시 그의 여행에서 돌아오고야 만다. 그것은 그가 인간이기 해문


이다. 하나의 인간A로 서의 그는 자아로서의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마. 그 결단의 때는 파거도 아니요 미래 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현
재에서만 되 어지는 것이다. 사색적인 이성, 즉 무엇이 되어쳤으며
왜 그렇게 되었는가, 또는 무엇이 될 것이며, 왜 그 렇게 되겠는가 하
는 것 둥을 탐색 하는 것은 반드시 살 천 석안 이성, 즉 “나는 지금 무엇
을 해야 하는가?" 하고 묻는 살천전 추론자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현재의 결단하는 순간에 자아는 그 자아성에 눈뜨게 된
다. 그러 고 자아성에 눈뜰 해, 우리는 현재에 눈 뜨는 것이다. 이 현
재의 순간이 결 단의 때이다. 이 현재의 의마는 현재가 자유와 결 단의
시 간적 차원(次元)이 라는 점 이 다.
현재 순간 의 결단적 성격, 그러고 사연적인 판상의 대상안 무시간
성이나 과거나 미래와 현재 사이에는 불연속점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
한 이것 은, 우리 가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 를 다루고 있는 한 우리에
게 중요한 의의 플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제 토마스나 루터가 이성과
계시의 주장 에 내하켜 생각하고 결 단한 바에 매한 연구를 떠냐서 , 우
리 에 내한 그들의 주장을 인정 혹은 불안정하연서 지금 우리 자신의
입장을 결단할 지점에 도달한 것이마. 그리고 이 결단은 현재의 애순
간마다 반복되어야 한다. 이것은 파거의 어떤 결정 에 의거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평화주의자나 강압정책론자가 새 전쟁이 터진 경우에
“살안하지 말라 η 또는 “네 이 웃 사랑하기 를 네 옴같이 하라”고 한 영

령에 복 종해야 한다는 파거의 단안에 의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


리는 미래에 갈 수도 없다. 하나닝 나라가 땅 위 에 임하여 사 란들이
다 완전하게 판마는 것을 믿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당장 그 상태에

245
살 수 있는 것 이 아니기 해문야다. 우리는 지금 결단해야 한다. 01
숭어 있는 왕국과 불완전한 우리의 현상 앞에서 결단해야 하는 것
이다.

그러나, 바록 현재의 순간에 행동하는 책임적안 자아는 사연(멍、辦)과


회상의 미래와 과거는 떠나야 한다는 것이 사살이라 할지라도, 그것
이 과거와 미래에 판계 없는 비역사적안 현재 에 결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1 다. 우리가 결단하는 모든 현재의 순간은 기억파
기대로 가득 차 었다. 그리고 모든 현재의 순간에는 우리가 전에 만
났거나 장차 다시 만날 다른 사랑들이 냐다냐는 것이다. 이 위기의 순
간, 그 위헝한 , 결정적안 현재에 그렇게도 성장〔深長〕한 의마 를 풍 겨
주는 것은, 거기에 결단의 책임을 진 고독한 자아가 서 있 다는 사살
이 아니라 , 어떤 다른 사 랑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려나 이 사란

들이 기억에 남아 있거냐 기억의 대상이 아난 경우에는 그리 중요하


지 않을 것이마. 어떤 뱅사가 돌 격 하는 바로 그 순간, 그는 물론 그
결정적인 현재블 지극히 만강하게 의식하고 있 o 며, 돌진 명령에 복
종할 것안가 아니 할 것안가 하는 자유가 있음도 의식하고 있다. 그
러나 그에게 나타나는 것은 자유롭기만 한 자아와 그 순간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과거의 약정파 캉점에 대한 회상, 기억되고 예상되는 석
U;íJ.) , 충성 4로 결속된 동료들파 더불어 있는 자아이다. 모든 “현재”
는 역사적안 “현재”이다. 거기서 역사적인 자아가 역사척 타인파 역
사적 동료들과 함께 있는 것 이다- 다시 말하면 , 그것은 기역과 예상
으로 가득 차 있는 현재 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현재의 결 단을 초청
으로 하고 집중된마.
기독교안에게는, 그의 문화적 과엽 가운데서 그리스도에게 충성 하
고 뭇하는 것을 결정하는 결 정석안 현재의 결단은 언제나 이런 역사
적안 결단이다.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있£며 동시대적인 그리스도
와 대연하는 것이마. 그러나 이 그러스도는 역사를 가지고 있 A며 기
억되고 예상된 분이다. 이 기독교안은 그러스도와 판계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마. 그는 그러스도의 말씀을 부안하거나 오역한 기역을 가
지고 있다.

그 기독교 안은, 자기 자신파 그리스도에게 판계펀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한 교제 (company)의 일원이다.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이라 합은

246
제 7장 하냐의 “결론적안 바과학적 후기’

바울은 물론 애거스틴의 마음에 있었던 분, 그러고 그의 형제 중에서


치극허 작은 자와 더불에 았는 분파 동시대적야 되는 것이다. 키에르
케고르의 추상적, 개안주의적 살촌주의는, 자기 자신의 사회성에는
물론, 자기 현존의 역 사성 파 그러 스도의 역 사성 에 도 불충살하다. 그
는 이렇게 말한다. “살제로 말생한 것(파거)은〈시와 대조되는경우와
같은 특수한 의마 를 제외하고) 살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
성 A로서의) 진리를 결정하는 요소와 모든 종교성을 결정 하는 유알한
요소안 너 를 위 하여 라는 요소(the for thee)가 없마. 과거 는 살 재 가
아니다냐를 위한, 오직 동시대석안것만이 냐를 위한 살재이다. 너
가 동시대적 A로 사는 그것이 살재。l 다- 너를 위한. 그리하여 모든
안간은 자기가 살고 았는 시대와만 더불어 동시대석알 수 있다- 그
러나 동시대적알 수 있는 것이 또 하냐 있다. 즉 지상에서의 그리스
도의 삶파 더불에서이다. 지상에서의 그러스도의 삶은, 신성한 역사
이며 역사 밖에 홀로 서 있기 해문이다 이 절대자와의 판계에
서 본마연, 오직 헨재라는 시제만이 있다. 01 철대자와 동시대적이
아난 자에게는 싶존이 없다. 또한 그러스도는 절대자이기 때문에, 그
에 대한 판계에서 본마연 단 하나의 상황만이 존재한다는 것도 쉽게
알 수 있 다. 즉 동시 대 성 이 라는 상황이 마. 500 , 700 , 1500, 1800년대
란 있을 수 없다. 그것들은 그리스도를 변경시키지 않는다. 어떼한
경우에 있어서도그것들은 그러스도가 누구였다는것을 계시하지는 않
는다. 그러 스도가 누구안가 함은 오직 신앙으로만 계시 되 기 해문야
다 "5 이 진정한 긍정과 진정치 않은 부정파의 혼동에 대하여, 자아
의 해와 그 육체의 해와의 혼동에 대하여, 그리고 동만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안간의 가련한 고목에 대하여 사람을은 크게 만격의 외컴
을 가지 고 싶어힐- 것이다. 우리는 언류를 대표하는 사상파 행동을 카
진 사람플파 동시대적 이 되는 것야다. 우리는 안류 역사 얀에 있는
천 안류와 동시대적이다 . 거기서는 육신적으로는 죽은 자도 생물학적

으로 잘아 있는 자와 마찬가지로 진살로 안류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손 3 , 4대에 미치는 부조(父祖)의 최와 동시대척이마. 그리
고 그들이 충성되게 계명을 지킨 것에 통참하여 그 보상을 받는다.
우리는 교회, 판 그리스도와 통시대적안 모든 사랑들의 교제와 동시

5. Training in Christianity , pp. 67 f.

247
대성을 가진다. 그러고 우리에게는 또한 가지의 동시대생이 었 다. 젤
대자안 하나닝 , 아브라함과 이 삭과 야곱의 하냐닝 , 죽은 자의 하냐닝
。 l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닝이신 그분, 그러스도 안에서 모든 시간을
함께 결속시키는 분파 동시대석이다. ‘그리스도 얀에 있는 하나닝, ’
‘하나닙 안에 있는 그러스도,’ 우리가 우리의 가장 적은 형제들 가운
데서까지도 얀나기 를 기대 하며 기역할 수 있는분 , 원치 않는종을통
해서도 성판을 집챙하시 는 분파 동시대적이다. 우리 의 결 단은 반드시
헨재의 순간에서 행해져야 한다-그러나 영원 속에 살아 계시 는 분의
역사석, 기억펀 챙 똥들로 말마암아 거룩하게 되어진 역사를 지니고
있는, 역사석 존 재자 들 의 띤전에서 이 루 어진다.

4. 의존적 자유

우리는 우리의 역사석 현재 안에서, 자유와 신앙으로 우리의 개안


석 결단을 짓는다. 그러냐 우리는 이것을 독자적 A로, 이성을 사용하
지 않은 채로 결 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결 단을 자유 안에서 한다.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선택해
야 하는 것이기 해문이다. 선택할 수 없 다면 자유가 없는 것이다. 선
택은 어떤 행동에 우리 자신을 위탁하기 전에 엘마 동안 기다려야겠

마는 걸성 속에 내포되어 있마. 또한 행동에 간성하는 것보마도 하냐


의 판망자가 되리라고 하는 결단 속에 그 선택은 내포돼 있다. 이것
은 우리의 제 2 의적(第二義的)인 선택들을 규제하기 위한 하냐의 권위
를 수락하는 우리 의 동의 C同意、) 가운데 도 나타난다. 우리 가 이 렇 게 자
유 안에서 선택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독자적으로 그리하는 것은 아
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이
거기에 매여 있는 , 온갖 가치들파 세력들 가운데서 우리가 우리의 자
유플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삶을 택하기 전에 우리가 존재
하도록 택하여진 것이다. 그러고 그 생명을 하나의 가치로서 사랑하
도록 결정되어졌다. 우리가 안간 존재 릎 택한 것이 아니라, 안류의
한 성원으로 뽑-힘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본능석인 존재보다도 이성
적 존재자로 되기릎 택한 것이 아니마. 우리가 이치를 딱지는 것은

248
제 7장 하나의 “결론척인 ~l 파학적 후기”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현존


의 시칸파 장소를 택한 것이 아니라, 당직을 맡은 이 시간 또는 전투
중인 이 시간 이 위치에 서 있도록 선받펀 것이다. 우리가 사회적 존
재자가 되려고 택하여 우리 동료 인간들에게 우한량£로 의존하는 것
이 아니며,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선택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건설된 안간 노작〔勞作) 가운데에서 그러고 사회 안에서 의식 (意識)을
가지게 완다. 이 모든 것, 삶, 인류, 이성, 사회, 그리고 문화 퉁은
그것이 다만 어떤 힘일 뿐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가
치이며 선인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부자유 중에서 이 중의 어
떤 것을 누리며 살 수 없다는 것은 사살이다. 산마는 그것 조차도 우
리의 동의〔同意) 없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계속적안 선택에 의
해서만 계속하여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성과 결탁하지
않는 한 이성적이 될 수 없 A며 , 이웃을 신임하지 않고는 사회적。 l
필 수가 없다.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기도하지 않고서는 지금 얘기서
“재 정신으로 ”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 자신이 택하기 전
에 택 해진 무엿이 있는 것이다. 그러하여 우리는 생활, 이성, 사회에
좋은 사물들 중에서 우리의 제 2 의적 (第二義的)인 선택들을 행할 경우
에 우리는 이 이미 택해진 무엇에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 는 이렇게 우퍼의 통제력 밖에 있는 기원들에 의존하는 데서얀


아니라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결과에도 의존하여 자유 결단을 내란
다. 우리가 택한 것이 아난 어떤 결과들에 우리의 자유가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의 문화사는 백 방」프로 보여 준마. 서 쪽을 향하여
항해하기로 한 콤럼버스의 결단, 속죄권(隨罪왔) 매매를 공격하기로
한 루터의 결단 , 식민지들의 독랩을 선언하기로 한 미 국 국회의 결정
-이 런 것 들은 어 떤 예 견〔據見)이 냐 먼 장래 의 결 파블 바바는 데 서 되
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크게는 사회석, 적게는 개안적 으로 우리의
현재 순간에 선맥을 단행하는 경우에 모두가 그렇다는 것이 확실하
다. 우 리 의 행동이 다른 사랑들 펀에 어떠한 반동과 결단을 불러 일
o 킬는지 우리는 예측한 수 없다. 예 를 든다변, 우리가 성실딴 결혼
을 작정하거나 첨략 국가에 대한 땅위전을 강챙할 해, 그 결과로 어
떠한 자연석 또는 도덕적 과정의 교착이 생겨날지 우리는 알 수도 없
고 계 획도 뭇한다. 우리는 선택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

249
이 아난 많은 선택들에 종속되 어 있다.

의존적안 자유의 이와 같은 실존석 상황에 매한 우리의 궁극적 문


제는, 우리가 이성을 따라 선택하느냐 믿음을 따라 선택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추론적안 (reasoning) 불신앙을 따르느냐
추론적안 신앙을 따르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신앙 없는 선택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의지할 수 없는 우연에 의지하는 존재가 되게 할
것이다 . 우연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가 “살존 속A로 투입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우연허 우리는 이 우리의 개체성을
가지고 이 특수한 구조와 함께 이 특수한 여기에 지금 들어온 것이라
고 생각하게 된마. 우연히 우리는 짐승이 아닌 안간으로 되었다. 우
연히 우리는 이성석 존재자가 되었다. 이란 맥락 속에서 우리의 결 단
을 추론한 다연, 그 우연이란 요소가 우리 선택의 내용 자체에까지 검
업하기 시작한다. 그러하여 일종의 순간적이고 자의적 ( 쪼효的)안 자유
가 우리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안에서 횡행한마. 우리에게 던져잔 생
명을 우리 가 또 던져 버리든지, 결혼을 하든지 안 하든지, 문 서항주
의를 쓰든지 싸우든지-이런 문제들은 자유적, 무신론적 싶손주의자
자신이 허 무한 가운데 서 , 다만 결 단에 의 하여 즉 자의 석 (쪼;효的)으로
결정 하는 문제들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가능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선택하고 추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우리는 이것이 선택할 수 있
는 가능성안 것처렴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실지로 이에 부맞
쳐 봉 해 이것은 생명이나 이성 이상의 것이어서, 우리가 바로 그것
을 위 하여 택항을 받았마고 말할 수 있는 능력파 가치인 것이 다. 01
것은 우리가 동의하고 밭애들여 견지(堅持〉해야할 선 (함)이 다. 이것은
우리가 독자석안 자유 안에서 시작하고 선택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
다. 그러연 이 신앙, 우리가 그것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제 2 의적 (第=義的)안 오든 선택을 하도록 요청하는 이 신앙。l
란 무엇안가?

키에르케고르가 신앙을 논할 해에 강조한 것은, 신앙이란 내면성의


열정이어서, 객판적무로는 불확살한 것이며 불합러한 것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라 하였다. 앞서 말한 방법에 의하얘, 얘기서도 우리가 그
를 수략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을 함께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신앙

250
제 7장 하냐의 “결흔적얀 마파학적 후기’

은 타자(他者)를 지향하는 내적 열정이라는 것, 객판적으로 불확살


한 것 만큼 주판석으로는 확실하마는 것, 그것이 불합러한 것과 관
련되어 있마 할지라도 살존에서는 추폰 가능하다는 것 동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신앙 안에 서 그 내연 성 의 열정을 발견한다 할지
라도, 그 열정은 우리 자신에게가 아니 라 딴 타자, 즉 그가 아니연
우리 생활에 아무런 의미도 붙알 수 없는 그 타자에 대한 충성의 격
렬성을 의미 하는 것 이다. 충성이 있는 곳 에는 엔제나 이 。올정 이 있으
며, 거기에는 자아를 위 한 열정의 반성적 의의가 함께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자나 합리주의자나, 누쿠든지 원안 (cause)을 가지고 있는 사

땅은, 그가 신봉하는 원리 가 공격을 당할 해 이 내적 열정이 현존함


을 숭걸 수 없 게 되는 것이마. 이련 의마에서의 신앙은 모든 추론에
앞선 다. 그것 이 진리든 생명이든 이성 자체든 깐에, 어떤 원안이 없
이는 추론을 전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으로 말마 암아 살
고 신앙 안에서 결단한 다고 말할 해, 그것은 적어도 우리가 한 충성
의 대상에 대한 내적 신봉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다만 충성 만을 의마하는 것이 아니마. 그것은 확증 이
기도 하마. 그것은 내석 열정이 지향하고 있는 대 상에 대한 신뢰。 l
다. 그 원안은 우리를 결코 실패로 돌아가게 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
를 실망케 하지 않우리 라는 신뢰이마 . 0 1 란 신뢰는 확실히 알종의 객
판석 불확 실 성을 동만하는 것이 마. 그러냐 이 불확실성이 신앙을 만
들삭 내는 것은 아니마 . 만 알 블확실성이 신앙을 만든마는 이폰을 시
인한다면, 그것은 성향〈 性向)이1 역행하는 행위가 곧 의무라고 정의하
는 도덕론자와 같은 것이다. 내가 내 성향의 항거에 직연하지 않는
한, 의무를 의무로 안식하지 옷찰지 모른다. 마찬 가지로 내가 객판적
불확실성 앞에서 신앙。 l 행사되지 않고는, 나의 신뢰의 멈위를 깨닫
지 옷한지 모른마. 그러나 내가 신뢰한다는 사살에 대한 각성은 나의
신임의 사 싶 성에 반 111 례할지도 모른다. 가령 내가 내 자산을 어떤 알
지 뭇하는 사랑에게 맡걸 애는 그것을 확실 한 은챙에 맡갈 해보마 더
욱 신앙 위에서 행하는 것이라는 사살을 의식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
에 내가 그를 덜 신뢰한다는 의미 는 아니다. 왜냐하연 냐는 여천허
물상적 (物 Æ ÉI 的)이 아난 무엇을 계산에 넣고 있기 해문이다. 즉 직원들,
곰 약 속에 의하여 저l 약맡고 있는 사람들의 충성성과 신뢰 성을 계산

25 1
에 넣고 있기 해문이 마.

그러연 여기에 신앙의 두 흐름이 있다. 충성파 신뢰이 다. 01 둘은


응답석 판계 속에 있마. 나는 충성된 타자를 신뢰한마. 동시에 냐는
그 신실한 타자에게 충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마. 신앙 안에서 행동한마는 것은 같은 원안 (cause) 에 충성
하는모든 사랑둘에 대한 충성파충성된 원안 자체에 충성하는 행동이
마. 만알 진리가 냐의 원인의 이 름이러 면, 나는 진리에 충성하지 않
을 수 없으며 진리에 충성하는 모든 사링- 들에게 충성할 것이며 잔리
가 충성하는 모든 사 람 〔진리가 버리지 않는 그 사람들)에게 충성할
것이다. 냐는 냐의 진러 추구로 말마암아 진리에 속한 모든 사랑들에
게 충성하는 것으로 진 리 에 중살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능력 에
매한 냐의 신앙은 그 원인에 속한 모든 나의 동료들에 대한 신펴에서
분리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충성과 신뢰의 이중적 유 c~ (쩌H땀)
여서, 그런 공동체의 성원〔成員)들을 두루 얽어매고 있마 신앙은 마
만 한 주체로부터만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他者) 펀의 충성 행위
로 말미암아 신뢰로 나타냐는 것이다. 그것은 원인에 대한 충성으-로
냐타나며, 그 원인과 또 나에 게 충성하는 타자들로 알마앙아 주입 판
것이다 6 신앙은 초월적 원안 의 현존 얀어1 있는 자아들의 공동체 니}어l
만살재한마

원인파 공동체 안에서의 충성파 신뢰가 없이는 싣존적안 자아들이


생존하거나 잔유플 행사하거 나 생각할 수 없마. 의인이건 불의한 사
람이건, 우리는 신앙A로 말미암아 산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파괴
되고 기괴한 것이마. 우리의 원안들은 많고 또 서로 충돌한마 어땐
한 원인에 충성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원안은 배반한다. 모든 원안에
대한 우리 의 불신에서, 우리는 우리의 작은 불만족한 만족들을 추쿠
과며 우리 동료들어l 게 불신앙석무로 대 한다.
여 기 에 중대 한 부진근수〔不盡根數)가 드려 난다. 이 른바 실존석 자 아
로서의 우리의 도덕사(道德、및) 가운데 들에온 불합리한 것, 그러 냐 신
녕으로 펀 그 불합리, 삶, 죽음, 이해할 수 없는 기적 등으로 중개된
불합리 , 곧 만물의 근원파 기 초와 홍치외 종국- 우리 가 〔불신파 불충

6. Josiah Royce, P hilosophy of L oyalty and The Problem of Christianity


에 충성과 공동체에 대한 풍부한 참조가 살려 있다.

2 52
제 7 장 하냐의 “결흔척안 "1 파학적 후기 x

속에서) 운영 또는 우연이라고 부르는 그 험-은 거기서 유래하는 모


든 것에 매하겨 신실하고, 온전허 믿을 만하고, 온전히 충성하는가?
이것은 마만 충성에 대하켜 충성된 자에 뿐 아」라 불충성에 대해서
도 충성스러우며, 충성원 자에게 뿐 아니라 불 충성한 자에게도 믿음
직하다는 것처럼 불합러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형이상학석 사
고〔思考) 에 의하연, 이 불합라한 것은 무한斗익 성육신(成肉身)이며,
절대의 시간화이다. 그러냐 이것은 우리의 살존석이고 주체적인 결단
하는 사상 (decision-making thought) 에 대 한 불합리 가 아니 다. 여 기 서
불합리란 것은, 하나닝에게 전적 A로 충성한 에수 그러스도를 배반렀
다는 사살 곧 십자가형 A로 안하여 창조된, 하냐닝의 신실성에 대한
신앙이다. 우리는 창조주의 신실하섬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이
우리의 모든 합라석 계산애1 역행한마는 것을 기술한다. 우리의 합리적
계산:;, 1 란 것은 우리가 삶에서 속고 있다는 것, 삶의 약속이 속량받지
뭇하고 있 다는 것 , 사랑끼 리 의 조약〔條約)이 파기 된다는 것 만 아니 라,
우리에개 주어진,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다는 것, 우리가 계산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우연뿐인데 그
우연도 소수에 불파하마는 것 등의 가설 위에 수립된 것이다. 다음은
보다 큰 부진근수〈不盡恨散)~ 1 마. 달러 추론하는 사랑을, 하나넙 의 신
살하심을 믿고 그가 안생에게 주신 모든 약속을 다 지키심을 믿는 자,
그리고 하나닝이 신 실 하시다고 믿는 모든 사 람들에게 충성 한 자가 우
리 모든 사람들파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종말을 고하지 않을 수 없다
는 것 은 풀리 지 않는 불합리이마 이 결파로 그가 밍는 하냐님에 대
한 신앙。 l 우리에게 말생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냐넙이 세째 날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고 확증하는 어떤 사람이나 문서
를 믿는다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신앙의 하나닝을 신뢰하는 것은
어떤 운서가 믿을 만하마는 것을 멈기 때문안 것은 아니다. 그러냐
하나닝 께서 신살하시며 하냐녕파 형제플에1 거l 춤살하샀던 예수 그리스
도에 대하켜 하냐넙께서 신상을 지키셨마는 것 , 그러 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 서 살 아나 섰 마는 것 , 그 힘 (the Power) 이 신살한 것 만큼 그리


스도의 신살이 힘 있마는 것, 우리를 택하여 살게 하며 죽게 하며 또
생명의 파안(彼 받)에 있는 생명을 차지하게 하는 분을 “우리 아버지 ”
라고 말얄 수 있마는 것은 우리의 신념이마.

253
이 안격파 야 사건을 통하여, 이 신앙은 우리의 역사, 우리의 문화,
우리의 교회, 우리 인간 공동체 안에 도입되였마. 이제 이 신앙이 우
리 속에 말생했으며, 그를 통하여 신앙이 언제나 우리 얀에 있였다는
것을 알며, 이것이 없였더라면 우리가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그리고 신설은 모든 사불 안에 있는 도덕척 이성엄을 알게 펀다.
그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았는 이 신앙의 역사적 성육신 없이는,
우마의 신앙이 유지띨 수 없다. 우리 인간 역사 안에 주어진 역사적
싣재처럼, 그는 우리가 그 위에 건축할 모퉁이돌이며 거치는 반석안
것이다. 그는 다만 그의 신앙파 그의 신앙의 창조를 가지고 그저 있
을뿐이다.

이 신앙의 치초 위에서 우리는 추론한다. 그리하여 불신앙 또는 맏


음직하지 못한 작은 신들에 대한 신앙의 은거 위에서는 이해되지 않
던 많은 문제틀이 이제는 명백해진다. 이 신앙을 신조로 명시하려고
애쓰는 종교인들의 한계를 훨씬 념어서, 이것이 문화 안에서의 우리
의 추론의 근거를 형성한다. 합리적안 정의를 규정 지으려는 우리의
노력, 항리적안 정치 질서를 추구하는 우리의 노력, 아릉다웅파 진리
를 해석하려는 우리의 기도 등을 위한 기초를 형성한다. 이것이 유알
한 기초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 우리의 충
성, 우리의 신념이란 작은 것이에서, 언제나 불신앙에 옐어져 들어가
기 매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사상들을 극복하여 어느 정도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믿음 안에서 우

리는 우리의 섣존적 현재에서 결단을 지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의 신양이 너무나 작으므로, 우리는 항상 이에 대한 긍정파 부정을
결항시키고 있응을 얀다. 그러면서도 하나넘의 신실하성을 믿는 가운
데 서 , 우리 는 믿는 무리 와 또 많은 다른 사랑들로 말미 암아 시 정 (是正)
파 용서약 보충을 기대할 수 있다. 안간플은 그를 배척하나 그는 여
천히 신설하시기 때문이다.
믿음 안에서 우리의 결단을 짓는다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이나 한
그룹 또는 한 역사적 시간이 교회안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비추어 결
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가 그 안에서 우리의 부분적, 상내
적인 얼을 하고 또 거기에 의존하는 신앙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살에 입각하여 결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

254
제 7장 하냐의 “결흔적인 아파학적 후기’

데서 다시 쌀아나셨으며 그카 교회의 머리。 l 실 뿐 아니라 세상의 구


원자라는 사실에 비추에 결얀하는 것을 의미한마. 문화의 세계-안간
의 엽 적 -는 은혜 의 세 계 -카나남 의 냐라-안에1 존재 한마는 사살에
비추어 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255
口 뚫훌 略g흩

B 本 좁山훌院 神學部 및
훌國 프련 è혼 神學校 찍E業
名짧 神얻홉博士
韓國神寧大學長 歷任

그리스도와 文化

1958年 12 月 5日 初版
1991 下 7.月 30 日 15版
著 者 러처드 나이버
譯 者 金 在 俊
發行人 金 Ill:ì 破

發行所 짧團훨A 大韓基督敎뿔會


서 울特 íJlj rIJ 江南뭔 三成3폐 169-1
電굶 553-087 Û"' 7
對홉 010041-31-501395
져로변호 : 3014459
FAX: (02)555-7721
1967年 8 月 26 日 登錄 第 1-77 廳

冊컵중해 33 값 3, 90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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