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배경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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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배경 지식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에피쿠로스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 죽음이 왜 두렵지 않은가? 이는 감각
이 사라져서이다. 그에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모두 감각에서 비롯된다. 죽음은 바로 감각을 빼앗기에 이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진다.(『영혼의 역사』).

그래도 죽음은 사람에게 두려움 그 자체이다. 이러한 두려움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재의 삶을 완성
하는 데에 있다. 삶의 완성이란 개별 사건들을 의미 있게 재구성하여 나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현재 객관화시킴으로써 구체적으로 원치 않는 삶을 과감하게 거절하는 힘을
갖게 된다.r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매일경제 칼럼).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한다. 육체와 상징으로서의 죽음 말이다. 이런 상징으로서의 죽음이 이루어질 때 산


자들은 죽은 자를 넘어서서 새로운 삶을 홀가분하게 살아갈 수 있다. 다만 육체가 죽고 난 뒤에 상징으로서
죽지 않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부정적인 유산을 남길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박정희였다.(「박근
혜,또는 두 개의 죽음 사이에서」한겨레 칼럼).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정념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은 두려움이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보았다. 우선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

움을 없애기 위해 항상 다음과 같은 명제를 기억하라고 한다. ‘죽음이 인간에게 마무것도 아

나라고 생각하는데 익숙해져라.’ 에피쿠로스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우선 죽음에 의해 감각아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모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바로 감각으로 인해 느낀다.

그런데 죽음은 우리에게서 감각을 빼앗아간다. 만약 우리가 죽음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죽을 운명을 지닌 삶도 즐겁게 된다. 우리에게서 불멸에 대한

욕망아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는다면 삶에서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이를 때 죽음이

고통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두렵다고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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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도 어리석다고 비판한다. 죽음에 이르게 되면 오히려 고통스럽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죽을

것을 미리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나타나지 않으며 죽음이 나타나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산 자에게는 존재하

지 않으며 죽은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고통을 주지 않으며 고통을 줄 수

도 없다. 단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하여 두려움을 느끼는 것일 뿐이다 에피쿠,

로스는 소포클레스와 같이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일단 태어났다면 가능한

한 빨리 죽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더 나쁘다고 비판한다 자신은 살아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축을‘것을 설득할'수는*없기 때문이다. - 장영란 지음『영혼의 역사』

이번에 사면되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구치로 들어가는것을 보면서, 사람은 두 번 죽는다는

정신분석학의 명제가 떠올랐다. 그 명제에 의하면,사람은 한 번은 생명체로서 죽고,또 한

번은 상징적으로 죽는다. 여기서 상징적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이 사회적 상징체계 안의 적

합한 자리에 안착하는 것을 뜻한다. 마땅하고 올바른 장례와 충분한 애도 그리고 타당한 의

미부여 속에서 인간은 상징적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상징적 죽음이 이루어질 때,산 자

들은 죽은 자 너머의 새로운 삶을 홀가분하게 이어갈 수 있다.

통상 사람은 육신의 존재로서 먼저 죽고 뒤이어 상징적 죽음에 이른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육신보다 먼저 상징적으로 죽은 존재가 되었다. 구치소로 가는 차 속에 언뜻 비친

그는 올림머리가 •풀린 상태였는데,그렇게 그의 사회적 실존을 동여매던 상징적 매듭도 풀린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상징적 매듭이 풀린 뒤의 삶,단순한 생명체로서의 삶뿐일 것

이다. 그는 사면 후 명예 회복과 복권을 위한 모든 노력을 다 할수는 있겠지만,그것은 그가 자신이 이미


상징적으로 죽었음을 모르고 있음을 말해줄 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겪고 있는 이런 운명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상징적 운명과도 깊은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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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진다. 모두 알다시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생명체로서는 1979년에 죽었다. 하지만 죽음의

형식, 그러니까 측근이었던 중앙정보부장이 술자리에서 쏜 총에 죽었다는 점이 어떤 상징적

부적합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상징적으로는 제대로 죽지 않았던 셈이고,그 때문에 우리 사

회 성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주 오래 그에게 ‘사로잡힌’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두 개의 죽음 사이에 유폐된 망령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유산은 더 나쁘게 이어졌다.

‘군사적 양자(養子)’둘이 그보다 더 많은 피를 뿌리고 대통령이 되었으며,‘경제적 양자’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그보다 더 많은 시멘트를 국토에 들이부었다. •마침내 대통령이 된 그의

친딸 또한 박정희식 체제 운영의 비밀을 다시 한 번 폭로했거니와,그것은 공사분리 이전 상

태의 심성,심리적 친소관계를 권력 배분의 원리로 삼는 극단적인 자의적 지배,그리고 국민

의 절반 이상을 블랙리스트 대상으로 삼기를 마다 않는 적대의 정치였다.

그렇다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마땅하고 올바른 상징적 죽음의 형식은 무엇이었을까? 두

번의 쿠데타를 저지르고 숱한 사람을 고문하고 살해하며 권력을 유지했던 자에게 적합한 상

징적 죽음은 독재자에게 저항하는 민중의 봉기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는 일이어야 마땅하

다. 그러므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겪은 탄핵과 구속은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가 받아 마땅했

던 상징적 죽음을 완수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1979년에 이루어졌어야 마땅한 일이 2017년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뼈아픈 일이다. 하

지만 그 긴 시간이 아무런 성취 없이 지나간 것은 아니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을 통

해 우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상속자들을 법적으로 응징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었다. 그리

고 마침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오롯이 의지의 표명만으로 의회를 움직이고 법적 과정을 작동시켜 아무
런 피 흘림 없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마땅하고 올바른 상징적 죽음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박정
희 전 대통령에게도 상징적 죽음을 부여한 것이다. 이제야말로 우리 사회는 박정희 너머의 세계를 향해 가
벼운 발걸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된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러시아의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인간의 삶에 대해 “삶은 두 개의 영원한 어둠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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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존재하는 짧은 빛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 두 개의 어둠은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두 개의 어둠을 매우 다르게 취급한다. 우리는 첫

번째 어둠(출생 이전의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반면 두 번째 어둠(죽음 이

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공포에 휩싸인 채 몸서리친다.

프랑스 작가 라로슈푸코는 “태양이나 죽음은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떠올릴 때면 미국의 정신과 의사 아돌프 마이어의 조언,즉 “가렵지

않은 곳은 긁지 말아라!”는 충고를 따르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사실 인간

의 역사는 우리가 죽음을 마주 대하지 않도록 해주는 보안경들로 가득 들어차 있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

다. 일례로 마크 트웨인은 죽음의 문제에 대해.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는 태어나기 전

에 영겁의 세월을 죽은 채로 있었지만 그러한 사실이 내게는 일말의 고통조차 준 적이 없다.”

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정신과 의사 어빈 얄롬에 따르면 물리적인 죽음은 우리를 파괴하지만 죽음에 대해서 생각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다. 죽음을 직면하는 것은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기보다는

삶의 의미를 일깨워줌으로써 삶을 충실하게 살도록 해줄 수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모리 슈워츠 교수는 제자에게 “죽게 되리라

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자기가 죽는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지.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

는 다른 사람이 될 텐데.”라고 말했다. 그 후 그는 제자에게 “어떻게 죽어야 활지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울 수 있다네.”라고 조언했다.

시인 루미는 “내가 죽을 때 잃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이러한 질문

과 관련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사후에 내가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될 것들”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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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완성하지 못한 많은 일들”이라고 답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답변은 스스로 충실하게 살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반면,충실한 삶을 살수록 죽음의 공포도 줄어들 수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죽음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삶을 심리학적으로 완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에 대한 심리학적인 완성(psychological consummation)은 삶속의 개별 사건들을 의미 있

게 재구성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가치 부여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을 말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는 이유는 그러한 경

험이 우리에게 원치 않는 일을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이 원하던 것을 빼앗겼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바랐던 것인지 깨닫게 되

기도 한다. 알베르 카뮈가 말했던 것처럼 “사실은 우리가 가장 호기하기 힘들어했던 것이 결‘

국에는 정말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닐 수 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

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니체는 축음의 문제와 관련해서 ‘영원한 반복’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만약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해보라. 현재의 삶이 영원

히 지속되고 평생 당신에게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당신아•이.

것을 싫어하게 된다면, 이때는 오직 한 가지 해석만이 가능하다. 당신은 한 번뿐인 삶을 제대

로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당신의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 하더라도 스

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운명을 창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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