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와송) 몰락한 영주님의 사정 1 - 146화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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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영주님의 사정

저자 : 포와송
출판사 : 연필
출간정보 : 2020.09.17

*책소개 :
#회귀물 #영지물 #쌍방구원 #하극상 #집착츤데레공 #허당수

전쟁 중 야반도주했다가 인생을 말아먹었던 망나니 영주 루이센.


처절한 후회 끝에 죽었다가 눈을 떠 보니,
야반도주를 하던 그날로 돌아와 있었다!

두번 다시 야반도주는 없어!

이번에는 절대 영지를 떠나지 않고, 지켜 내고자 결심하는데…….

홀로 항복을 선언하러 간 적진 한가운데서 만난 선봉장은


회귀 전, 자신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여 인생을 말아먹었던
귀족혐오자이자 미친개로 이름을 떨친 용병, 칼튼이었다.

“내가 죽으면, 자네도 죽어.”

루이센의 설득에 현실을 인정한 칼튼.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공작님은 왜 저를 도와주시죠?”

그의 시선은 계속 루이센에게 머물기 시작한다.

1화

프롤로그. 회귀 전

어느 골목길, 네 명의 남자가 거지 한 명을 구타하고 있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곳이지만 지나가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네 명의 남자가 질 나쁘기로 유명한 건달들인 데다, 맞는 사람이 이름 모를 거지였기
때문이었다.
운 나쁜 거지, 루이센은 몸을 웅크리고 폭력을 견뎠다. 둥그런 몸은 꼭 하수구에서 기어 올라온 생쥐 같아
생리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반항할수록 더 오래 맞을 뿐이라는 걸 알기에
입을 꾹 다물고 양팔로 머리를 감쌌다. 마른 지푸라기 같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아, 지독한 놈. 소리 한번을 안 내네.”

건달들은 혀를 내둘렀다. 반응을 해야 패는 맛이 나지. 가만히 웅크리고 있으니 패는 재미도 없었다.

“재미없다. 카드나 치러 가자.”

“그래.”

“더러운 놈.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건달은 덜덜 떨리는 루이센의 등에 가래침을 뱉었다. 그리고 낄낄거리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루이센은 벽을 짚고 일어섰다. 그는 다리를 절면서도 천천히 앞으로 내디뎠다. 다리를 잘못
맞았는지, 발을 디딜 때마다 아찔한 통증이 전해졌다.

그는 바닥에서 눈을 긁어모아 피 묻은 입가를 닦아 냈다.

‘나쁜 놈들…….’

먼저 제안을 한 건 건달들이었다. 자기들 네 명을 따라오면 동화 하나를 주겠다고 했다. 루이센은 벌써 이틀이나


굶었고, 하루 종일 구걸하고 잡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빵 한 쪼가리도 구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먹을 것이
간절했다. 동화 하나면 벽돌처럼 딱딱하지만 얼굴만 한 빵을 살 수 있었다. 그거 하나면 이삼일은 너끈히 버틸
수 있었다. 눈까지 내리는 마당에 오늘도 아무것도 못 먹는다면 자신은 정말 죽으리라.

끔찍하도록 싫지만 건달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놈들은 남의 머리채를 잡고 자기 좋을 대로 굴다가 나


몰라라 하려는 것이다. 루이센이 약속한 돈을 달라고 하자 너도 즐겼지 않냐는 중 개소리를 지껄이다가 갑자기
화를 내며 루이센을 두들겨 팼다. 처음부터 루이센에게 돈을 줄 마음이 없었던 거다.

‘돈을 안 주면 안 주는 거지 때리긴 왜 때려.’

훌쩍, 루이센은 코를 삼켰다. 건달들에게 맞은 곳이 욱신거렸다. 온몸이 아프고 열이 올라 눈앞이 흐릿했다.


몸의 고통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비참함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감히 내 발도 쳐다보지 못할 놈들이…….’

루이센은 평생 굶주림도 삶의 고단함도 모르고 살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아니에스 공작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공주였다. 그는 공작가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일찍 공작위를 이었다. 남부의 비옥한 평야가 모두 그의 것이었다.

그는 왕국에 네 명밖에 없는 대영주 중 한 사람으로, 수많은 봉신을 거느렸고 그들로부터 직접 조세를 거두고
재판할 권리가 있었다. 왕국의 남부에서 그는 왕과 다를 바 없는 권위를 누렸다.

또한 그는 대영주로서 왕족과 혼인하고 왕의 대관식을 주최할 권한이 있었다. 왕조차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고
왕비는 그를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인 왕자의 놀이 친구로 삼았다.

그는 왕궁을 집처럼 뛰어놀며 자랐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것만 입고, 먹었고 갖고자 한 것은 모조리
가졌다. 그는 결핍을 몰랐고 그의 인생에는 그림자 한 점 드리우지 않았다.

완벽한 시절이었다.

루이센 아니에스는 별 볼 일 없는 동네 건달 따위가 감히 쳐다볼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루이센의 앞에 무릎


꿇고 복종해야 했다. 그들은 루이센의 한마디에 생사가 오가는 하찮은 존재였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내가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어서!

삼 년 전 봄, 왕이 쓰러졌다. 왕은 몹시 늙고 병들어 있었기에 모두가 예상하던 일이었다. 문제는 늙은 왕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점이었다.

하필 왕에게는 쟁쟁한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인 엘리온은 후궁 소생이지만 왕의 첫 번째 자식으로 왕위계승에 정당한 권리가 있었고, 뛰어난 학식과
인품으로 일찍이 왕재로 칭송받았다.

둘째인 페리스는 왕비의 소생으로 정당성에는 흠잡을 데가 없었고, 학식과 인품이 엘리온에 미치진 못하지만
성격이 좋아 호감을 샀고 유력한 귀족들이 모두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왕이 쓰러지자 2 왕자 페리스는 왕비인 어머니의 힘을 빌려 왕궁을 장악했다. 1 왕자 엘리온은 그 직전에 도망쳐


자신의 지지세력이 있는 북부로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두 왕자를 따라 왕국은 두 파벌로 갈라졌고 내전이
시작되었다.

루이센과 아니에스 공작가는 2 왕자 페리스의 편에 섰다. 2 왕자 페리스가 루이센과 친척이자 유일한 친구였기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반년가량 이어진 내전의 승자는 1 왕자 엘리온이었다. 2 왕자 페리스는 내전 도중 사망하였고, 1 왕자가 왕궁을


장악한 뒤 왕비는 공식적으로 유폐되었다. 왕은 여전히 사경을 헤맸으니, 실질적으로 왕국은 1 왕자의 손에
떨어진 셈이었다. 1 왕자는 2 왕자 페리스의 세력에게 철퇴를 휘둘렀다.

아니에스 공작가도 피할 수 없었다. 그해 가을, 공작령으로 1 왕자의 검이라 불리는 칼튼이 군사를 이끌고 왔다.

칼튼이 누구인가. 천민 출신이지만 뛰어난 무력을 인정받아 1 왕자에게 전격 발탁된 인물이었다. 귀족들에게는 1
왕자의 검이라는 별칭보다, 1 왕자의 망나니, 도살자, 귀족 학살범으로 더 이름을 날렸다. 그는 운 좋게
귀족가에 태어났다고 떵떵거리는 인간들을 혐오했고 무능력한 영주들을 경멸했다. 그리고 루이센은 그 두 가지에
모두 해당되었다.

칼튼이 온다는 소식에 루이센은 극도로 겁에 질렸다.

‘칼튼이 날 죽일 거야. 끔찍하게 죽일 거라고.’

루이센은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방에 틀어박혔다. 다가올 전투에 대한 건 모조리 가신들에게 떠넘기고 술만


마셨다. 그는 겁에 질렸고 태어나서 난생처음 겪는 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누려 온 평화로운 삶은 독이 되어 돌아왔다. 하루, 하루가 갈수록 두려움은 커졌고 더는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루이센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
도망치자. 그가 쫓아오지 못할 곳으로 멀리, 멀리 도망치자.

그는 재산을 싸 들고 전투가 한창인 틈에 성을 빠져나갔다. 그에게는 여러 봉신과 친척과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로 가 몸을 의탁하려고 했다. 막연히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리라 믿었다. 공포에 질려 제정신이
아니었다고는 하나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아니에스 공작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잃자 세상은 너무나 차가웠다. 믿었던 친구도 친척도 다 그를 외면했다.
도망칠 때 챙긴 재산은 강도와 사기꾼에게 모두 빼앗겼고 그를 따라온 하인도 쫓기다 죽었다. 뒤늦게 루이센은
영지로 돌아왔으나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다.

루이센의 도주에 분노한 칼튼은 영지민을 학살하고 그걸로 분이 풀리지 않아 영지 곳곳에 불을 질렀다. 공작성의
성벽에는 가신들의 수급이 내걸렸고 시체 냄새를 맡고 몰려든 까마귀가 불길한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불길은 끝없이 번져 나가 평아를 불태웠다. 수확 철을 맞이해 노랗게 익은 밀들이 새빨간 불길에 집어삼켜졌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살아남은 이들은 목 놓아 울부짖었다.

그 광경으로부터 루이센은 또다시 도망쳤다. 자신이 불러온 비극을 감당할 수 없어 외면을 선택했다.

그 뒤로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었다. 칼튼이 여전히 자신을 쫓아오는 것 같았다. 어둠 속을 바라보면 검은


기사의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잠을 자면 어김없이 불타는 황금들판에 서 있었다. 죽은 이들은 망령이 되어 루이센을 따랐다. 그들은 손톱을
세우고 루이센의 얼굴을 그었다. 목이 잘리고, 얼굴이 뭉개지고, 불에 탄 처참한 모습으로 루이센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떠돌이에게는 가혹한 세상이었다. 오랜 내전과 기근으로 나라는 궁핍했고 사람들은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차했다. 일상생활은 파탄 난 지 오래였고 동정, 연민 같은 감정은 사치였다. 루이센은 자기
힘만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내가 이렇게 무력하고 한심한 사람이었던가?

타고난 신분과 가문의 부유함을 잃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셈도 잘 못했고, 농사지을 줄도 몰랐고,
물건을 옮길 만큼 튼튼하지도 못했다. 싸움도 못했다. 세상 물정도 몰랐다. 자기 힘으로 벌어먹고자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돈은 금방 떨어졌다. 옷을 팔고 신발을 팔고 머리카락까지 팔았으나 금방 한계가 찾아왔다. 루이센은


난생처음으로 굶주림을 경험했다. 내장이 꼬이고 하늘이 노래졌다.

아파. 너무 아파. 배고파. 뭐든 좋아. 뭐든 먹고 싶어.

눈이 돌아갔다. 굶주림 앞에서 드높던 자존심은 산산이 조각났다. 귀족다운 교양, 도덕, 가치관 모든 것이
붕괴되었다.

한 끼 식사에 몸도 마음도 다 팔았다.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했고, 구걸하고, 도둑질도 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그 시간들은 나라는 존재가 산산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먹은 음식은
눈물이 나게 맛있었다. 공작일 시절에는 쳐다도 안 봤을 정체 모를 스프를 오열하며 퍼먹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났다. 이제 루이센에게 귀족이던 시절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몸은 장작처럼 말랐고


안색이 노랗고 검었다. 두 눈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병색이 완연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까 두려워
몸을 웅크리고 다니다 보니 등이 굽고 목은 자라처럼 길게 늘어졌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한 손은 퉁퉁 붓고
부르터 피가 흘렀다.

사실 할 줄 아는 건 놀고먹는 거밖에 없는 루이센이 삼 년을 버틴 것도 기적이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어찌저찌 살아남아 딱 삼 년 차였다. 이제는 정말 먹고 죽으려 해도 가진 게 없었다. 그의 화사한
외모는 거친 길거리 생활에 망가져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눈앞이 아찔해 현기증이 일었다.

이틀 전, 어느 가정집 뒷마당에 숨어 있다가 개밥을 훔쳐 먹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이 마지막 식사였다.
사람 먹을 음식도 부족한 형편에 개밥이라고 해도 상할 대로 상한 음식물쓰레기였다. 그나마도 감지덕지라
루이센은 허겁지겁 먹었다.

‘뭐든 먹고 싶어. 뭐든 좋아. 먹고 싶어.’

이럴 때 떠오르는 것은 공작이던 시절, 그냥 입맛이 없다는 이유로 거의 손대지 않았던 저녁 식사들이었다.

넓고 긴 테이블에 빼곡히 올라온 산해진미들. 남기지 말걸. 하나도 남기지 말고 싹 다 먹을걸. 지금 주면


접시까지 핥아 먹을 수 있는데.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때는 왜 그 삶의 소중함을 몰랐단 말인가.

결국 루이센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울면 힘 빠지는데. 그러면서도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눈길은


미끄러웠고 다리는 부실했다.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자 그는 중심을 잃고 크게 비틀대다 쓰러졌다.

쿵.

눈길은 차가웠다. 그의 하나뿐인 옷이 젖어 들고 있었다. 옷을 말릴 곳도 없고 갈아입을 곳도 없는 형편이었다.


조금이라도 덜 젖게 빨리 일어나 눈을 털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찬 옷을 입고 노숙을 하다 폐병에 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루이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눈 속에 처박은 채로 오열했다.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했다. 죽더라도 귀족으로 죽었어야 했다. 이런 삶을 살 바에야.

그랬다면 영지민도 가신들도 죽지 않았을 거다. 그들을 모두 죽이고 살 정도로 가치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자신은 어디에도 쓸모가 없었다. 귀족이 아닌, 아니에스 공작이 아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아, 이렇게 죽을 거라면 차라리…… 그때 도망치지 말 것을.

루이센은 후회했다. 셀 수 없이 반복한 후회는 익숙해지는 법이 없어, 매번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의
몸은 너무 쇠약해져서 극심한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 몸이 차갑게 식어 가면서 의식이 멀어졌다. 칼날 같은
추위도 배고픔도 조금씩 사라졌다.

‘이렇게 죽을 바에야…….’
2화

1 장. 과거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쿵!

쿵!

으아아악!

콰앙!

거대한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과 비명 소리가 루이센의 의식을 일깨웠다.

“영주님, 영주님. 얼른 일어나세요. 전투가 시작되었단 말이에요. 네?”

“으으…….”

날 좀 내버려 두란 말이야. 나 방금 전에 죽었거든?

루이센은 자신을 깨우려는 손짓을 밀어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어디선가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 왔다.

‘이게 무슨 술 냄새야?’

내전 이후, 술은 입에도 못 대 봤다. 기근이 이어지면서 금주령이 내려졌고 술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았다.
당장 오늘 먹을 빵도 못 구하는 루이센 같은 부랑자는 술을 마시기는커녕 술 냄새도 맡기 힘들었다.

그런데 왜 지금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고 있지?

몽롱한 머리를 가열 차게 굴렸다. 기억을 조금씩 더듬더듬 따라갔다.

그날, 성에서 야반도주한 지 삼 년째 되던 겨울에 루이센은 죽을 뻔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지나가던 남자가
루이센을 구했다.

그는 종교적인 이유로 순례길에 오른 순례자로, 한쪽 팔이 없어서 외팔의 순례자라고 불렸다. 본명은 모르고,
항상 수도자들이 쓰는 깊은 후드를 쓰고 있어 얼굴도 볼 수 없었다. 무척 수상한 자였지만, 외팔의 순례자는
루이센을 정성을 다해 돌봤다.

그는 자신의 침대를 내어 주었고, 아낌없이 장작을 때 방을 데웠으며, 약과 음식을 기꺼이 건네주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임에도 그는 루이센을 헌신적으로 간호했다. 그 덕에 루이센은 그 겨울에 죽지 않고 기운을 차렸다.

루이센은 외팔의 순례자에게 크게 감동했다. 세상에 이렇게 자비롭고 현명한 사람이 있다니. 그는 외팔의
순례자에게 빠져들어, 외팔의 순례자를 혼자 마음속으로 성자님으로 부르며 그를 신봉했다.

그를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배웠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외팔의 순례자가 해 주었던 많은 이야기가


루이센에게 진정한 안식을 선물해 주었다. 죄의식에서 비롯된 망령들에서부터 벗어나,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루이센은 후회하고, 뉘우치며 죽은 이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할 수 있게 되었다.

외팔의 순례자를 만난 이후 루이센은 더 이상 배를 곪지도 않고 천장과 벽이 있는 집에서 잘 수 있게 되었으나


루이센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외팔의 순례자를 만난 지 일 년쯤 되던 그해 겨울. 루이센은 결국
숨을 거두었다.

‘낡은 오두막이었던 거 같은데…….’

끝없이 불안하고 두려운 밤이었다. 겨울이 깊어,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면 창문이 곧 깨질 것처럼 덜그럭거렸다.
그날이 루이센의 마지막이라는 걸 알고, 외팔의 순례자는 난로에 장작을 가득 밀어 넣어 두었다. 그 덕에 불길이
요란하게 타오르며 장작이 검은 먼지로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이따금 방 안을 울렸다.

그렇게 기이한 소리가 울릴 때마다, 루이센의 마음도 함께 흔들렸다. 죽음이 너무 무서웠다. 자신의 탓으로 죽어
버린 이들과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살아온 삶을 돌아보는 것이 괴로웠고 이제 돌아볼 나날이 없다는 것
또한 무서웠다. 아, 인간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과정이 이다지도 길고 지루하며 끔찍하단 말인가.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왔다.

“형제님.”

외팔의 순례자, 루이센만의 성자.

그는 루이센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루이센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루이센은 그가 어디선가 구해 온


와인으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 고해성사에 가까운 유언을 토해 냈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그게 루이센이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자신은 분명 그때 죽었다.

‘근데 왜 술 냄새가 나지? 난 죽은 게 아닌가? 아닌데? 난 죽었는데?’

온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던 기억은 절대 꿈이 아니었다.

“그럼 지옥에 온 건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굉음과 비명 소리를 생각하면 여기가 지옥이 맞는 것도 같았다. 끔찍한 두통에 뱃멀미처럼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나는 술 냄새에 구역질이 났다. 꼭 술을 진탕 마신 다음 날
같았다.

지옥에도 숙취가 있나?

“지옥이요? 하긴. 여기가 지금 지옥이 아니고 뭐겠어요.”

머리 위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나?

루이센은 눈을 떴다. 실내는 어두웠으나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제법 화려하다 싶은 붉은


머리카락에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으나, 어리바리한 인상 때문에 왠지 평범해 보이는 남자였다.
루이센의 수석 시종인 루거였다.

“루거? 어? 네가 왜 여기 있어?”

루거는 야반도주를 하던 밤 루이센과 함께 도망쳤는데, 루이센을 무사히 빠져나가게 하려고 루이센 대신 칼튼의
병사들에게 잡혀 죽었다. 도망치느라 제대로 시체도 수습해 주지 못한 것이 루이센에게 큰 후회로 남아 있었다.

“정신 좀 차리세요. 지금 한가하게 술이나 마실 때가 아니라고요.”

“지금?”

루이센은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 안의 풍경이 익숙했다. 초록과 황금으로 장식된 사치스러운 방은 과거
루이센의 침실이었다. 대대로 아니에스 공작가의 주인이 사용하는 가주의 방. 영지보다 수도에 있던 날이 더 긴
루이센이지만 그가 평생 써 온 침실을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여길 다시 보게 되다니.’

이 방은 공작성과 함께 불타 사라졌다. 칼튼의 짓이었다.

“여기 냉수 드시고 정신 좀 차리세요.”

루거가 컵을 건넸다. 루이센은 무심코 컵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지옥에 와서인지, 자신의 과오로 사라진
성을 봐서인지 목이 타들어 가고 있는 참이었다.

“윽.”

냉수는 얼음처럼 차가워 머리가 띵해졌다.

이거 좀 이상한데?

루이센은 자신의 뺨을 인정사정없이 꼬집었다. 생생한 통증이 전해졌다.

‘뭐야, 나 지금 살아 있는 거야? 죽은 거 아니고?’

죽은 사람은 아플 수가 없지. 그럼 저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끔찍한 굉음은 다 뭐란 말이지? 루이센은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우아아아아아아아!

막아! 물러서지 마라!

살려 줘!

공작의 방에서는 공작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외성의 성벽에서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수성전이라 더 유리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가 밀리고 있었다. 루이센 쪽의 병사들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해 어리숙한데 반해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의 병사들은 모두 정예병이었다. 승리를 예감한 것처럼 성벽 너머 푸른 깃발이 위엄 있게
펄럭였다. 푸른 사자는 왕가의 상징이었다.

푸른 수사자의 깃발.
그걸 보니 옛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1 왕자 엘리온이 2 왕자를 지지하던 세력을 반역도로 선포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귀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아니에스 공작령으로 군사를 보냈다.

1 왕자의 검, 도살자, 귀족학살자, 온갖 끔찍한 별칭이 붙은 칼튼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공작성으로 왔다.

칼튼은 왕가의 이름으로 항복을 권유했다. 표면적으로는 왕과 봉신의 관계였지만, 아니에스 공작가는 오랜 세월
남부의 주인으로 군림해 왔다. 내심 왕가를 깔보던 공작가의 가신들은 왕가에 굴복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공작가는 성문을 닫고 항전을 선택했다. 믿는 바는 있었다. 남부의 수많은 영주가 공작가의 봉신이니, 버티다
보면 지원군이 올 거라는 계산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었고 공작성이 함락되는 데에는 사흘이 걸렸다.

단 삼 일.

“루거. 전투가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났지?”

“예? 그것도 기억이 안 나세요? 술 말고 다른 것도 드신 거예요?”

“며칠이냐고.”

“어제 시작했으니…… 이틀째죠.”

이틀째! 지금은 루이센이 야반도주를 한 바로 그날 밤이었다.

“허, 말도 안 돼.”

루이센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고? 하필이면 가장 후회하고, 또 후회하던 그날 밤으로?
믿기지가 않았다. 루이센은 주먹을 쥐고 창틀을 내리쳤다.

퍽.

“으……. 아픈데…….”

“벽돌을 손으로 내리치니 아프시죠. 이상한 거 주워 드신 거 맞죠? 네? 저는 공작님이 시키신 일을 하느라 이


난리통에도 발바닥에 불이 나게 돌아다녔는데, 팔자 좋게 연기나 빨고 계시다뇨!”

“……안 했다니까.”

아닌가, 했던가?

하여튼 이때 루이센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연초 같은 걸 즐겨 하는데, 죽음의 공포까지
닥쳐오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좀 했던 거 같다.

“됐습니다. 지금이 적기예요. 전투가 한창이라 아무도 우릴 신경 안 써요.”

“어? 뭐가?”

루이센이 멍하니 되물었다. 어쩐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술을 먹고 이상한 꿈이라도 꾼 걸까? 하긴 이 루이센


아니에스가 거지가 될리가 없…….
“도망쳐야죠. 말도, 돈도 다 준비해 뒀어요.”

음. 꿈이 아니었구나. 진짜로 있었던 일이었어. 루이센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과거로 돌아오다니……. 그런 이야기를 읽은 적은 있지만…….’

옛날 아주 먼 옛날,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세상을 떠돌며 많은 사람을 도왔다. 세상은 그를 성자라 칭송했으나
그는 행복할 수 없었다. 과거에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행을 되풀이하면서도 괴로워했다. 어느 날
그는 신에게 소원을 빌었다. 소중한 사람을 되살려 주세요. 성자를 안타깝게 여기던 신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성자의 시간을 과거로 돌려, 그가 그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도록 했다.

왕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도덕을 가르치고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지어낸 허구였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루이센은 성자가 아닌데도!

‘왜 내가?’

그는 죄인이었다. 잘못된 선택으로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대기근이 일어날 빌미를 제공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몇인데 자신이 성자와 같은 기회를 얻는단 말인가.

3화

그는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도 망나니였다. 영지는 내팽개치고, 수도에서 놀고먹고 마시면서 젊음을 낭비했다.
그는 나태했고 무관심했고 세상을 우습게 여겼다. 성자를 만나 잘못을 뉘우치고 구원받기는 했으나, 여전히
지옥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 타락한 영혼이었다.

‘혹시…… 외팔의 순례자, 나의 성자님이 날 도와주신 걸까?’

루이센은 가슴이 크게 벅차올랐다. 그래, 그렇게 헌신적이고 자비로운 분이라면 이 불쌍한 인생을 위해 큰 기회를
양보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성자님이 되돌리고 싶은 일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든가! 어쨌든 모든 건 성자님의
은혜였다.

“공작님, 공작님. 얼른 가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예요.”

“잠깐만.”

성자님을 향해 감사 기도를 한번 올려야지. 그러나 루거는 루이센이 기도할 틈을 내주지 않았다.

“여유 부리실 때가 아니라니까요. 도살자 놈이 얼마나 악랄한지 영주님도 아시잖아요. 사지를 말한테 매달아서
찢어 죽이고, 그걸로 모자라 시신을 욕보였대요. 잔인하고 악독한 놈이라고요. 그놈은 귀족을 혐오한대요.
그놈에게 잡히면 곱게 죽지도 못할걸요? 그놈은 전권을 쥐고 오고 있어요. 그놈이 영주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구요!”
루거는 부르르 떨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요. 우린 질 거예요. 무조건 질 거라구요.”

“그래서 영지를 버리고 도망치자고? 전투가 한창인데?”

“뭐 어때요. 저들도 다 영주님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건데. 영주님이 살아야 다 같이 사는 거예요.”

“…….”

루이센은 한숨을 삼켰다. 과거 자신은 옳다구나! 하고 도망쳤다. 그때는 도망가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영지에서 도망친 뒤 어떻게 살지에 대해서는 고민도 안 했다. 그가 살아온 것처럼 아무것도
안 해도 어떻게든 되겠거니, 막연히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멍청하고 안일한지!

“됐어.”

“네?”

“난 도망칠 생각 없어. 네가 떠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널 탓하진 않을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도망치지 않을 거다. 자신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서도, 루이센 자신의 삶을 생각해서도 도망치지 않는 것이


맞았다. 그 고생을 두 번은 못 한다. 차라리 귀족으로 죽고 말지.

아니, 어떻게 얻은 새 인생인데 귀족으로 떵떵거리면서 살 거다.

항복해야지.

그게 모두가 살 방법이었다.

***

공작가의 전력은 처참했지만 나름 잘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칼튼이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센의 야반도주를 알아챈 그는 반나절도 안 돼서 성을 함락시켰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을까?

그자는 호전적이고 손속이 잔인하며, 전투에서 뒤로 내빼는 법이 없었다. 콧대 높은 귀족을 짓밟고, 굴욕을 주고,
복종시키는 일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귀족의 신분이 높을수록, 한심할수록 그는 기뻐했다. 루이센은
그가 제일 좋아할 만한 먹잇감이었다.

칼튼은 당장 성을 점령하고 오랜 전통과 명예를 짓밟고 조롱하고 싶어 들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시간을


끈다는 것은 1 왕자의 뜻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자님께서 그렇게 설명했었지.’

루이센은 성자님의 놀라운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믿고 신뢰했다.

아니에스 공작가는 네 개밖에 없는 대영주 가문. 왕의 권위에 버금가는 권력가다. 1 왕자는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이상으로 생각하였으나 그러기에는 정통성이 살짝 부족했다. 2 왕자에 비해 지지하는 귀족들이 적었다는 것도 그의
오랜 콤플렉스였다.

내전에 승리한 뒤 그는 자신의 약점을 귀족들의 충성으로 메우려 하고 있었다. 아니에스 공작가는 왕을 선출할
권리를 가진 대영주였다. 1 왕자가 내전에 승리했어도 대영주의 충성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니에스 공작이 1 왕자에게 얼마나 충성하느냐에 따라 그의 명줄이 달라졌을 거라고, 성자는 말했다.

‘그러니 이쪽에서 굽히고 들어가는 모양새를 취해야 해. 점령되기 전에 항복하는 것이 최선이다.’

버티다가 꺾이는 모습은 1 왕자의 뜻에 어긋나 버린다. 끝까지 복종하지 않는 아니에스 공작은 1 왕자의 정통성에
흠이 갈 것이다. 1 왕자는 그런 굴욕을 참지 않겠지. 칼튼은 신이 나서 날뛸 것이고 자신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을 과거의 루이센은 조금도 몰랐다. 그는 2 왕자의 처형 소식을 듣고 겁에 질렸다. 1 왕자가 그저


자신을 죽이려고 할 거라고만 생각해, 가신들에게 절대로 절대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 놓고 도망쳤지만.

루이센은 입술을 깨물며 회의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작전실로 쓰이고 있는 회의실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전술용 지도가 놓인 테이블 앞에 총관과 재무관이 앉아 있었고, 그 외에 관료들과 집사가 서 있었다.
전투가 한창이라 기사단장과 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루이센이 나타나자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그들은 놀란 표정으로 루이센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영주님,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셨습니까! 뭐가 또 필요하신가요?”

재무관이 살갑게 맞이해 주었다. 살이 쪄서 넉넉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영지의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에 영주인 루이센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는 루이센의 등장을
놀라워하고 있으니, 루이센이 방에 콕 틀어박혀 있는 것을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재무관의 빈정거림을 못 알아들었을 루이센이지만, 오랜 방랑의 세월이 그에게도 눈치라는 걸 기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루이센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영주님이십니다. 말씀을 조심하시죠.”

집사는 루이센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루이센은 차마 그를 보지 못했다. 회귀 전, 집사는 루이센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아내기 위해 칼튼에게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팔다리가
잘린 채로 도랑에 버려져 숨졌다고 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저희는 무척 중요한 이야기 중이었습니다만.”

총관이 말했다. 그의 엄격한 시선 앞에 루이센은 어깨를 작게 떨었다.

그에게 총관은 항상 어려운 사람이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를 대신해, 총관은 영지 대리를 하면서 루이센을
길렀다. 그는 무척 엄한 스승이었고 너무나 유능해 절로 주눅이 드는 가신이었다. 성이 점령당하자 총관은
자살했다. 칼튼은 죽은 총관의 시신의 목을 잘라 성벽에 내걸었다. 루이센은 영지로 돌아왔다가 다 썩어 문드러진
총관의 머리를 보았다.

다른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작성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전부 목이 잘려 성벽에 걸렸다. 칼튼의 보복이었다.

루이센은 엄지손톱끼리 틱, 틱 부딪쳤다. 그들의 죽은 모습과 악취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불안과 초조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자신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살아서 다시 만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어. 얼마나 이날을 후회했는지 떠올려, 루이센 아니에스.

‘성자님, 제가 용기를 주세요.’

루이센은 마음의 등불이 되어 준 그를 떠올리며 손으로 작게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힘을 줘 말했다.

“우리는 항복을 해야 하네.”

그의 한마디에 총관의 얼굴이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재무관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립니까, 영주님. 방에만 계셔서 잠시 깜박하셨나 본데 지금 밖에서는 전투가 한창입니다.”

으아아악!

때마침 이름 모를 병사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죽었을 것을 모두가 직감하고 공기가 더없이 무거워졌다.

“……알고 있네.”

“그럼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셨는지 알겠군요.”

“알아. 하지만 그래도 항복을 해야 하네. 칼튼의 전력에 우리는 상대도 안 돼. 점령은 시간문제야.”

“우리 병사들은 잘 버티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나?”

“지원군이 올 겁니다. 아니에스 공작가의 봉신들이 우리를 도울 겁니다.”

“지원은 오지 않아. 그들은 우리를 저버릴 거네.”

지원군은 오지 않는다. 공작가의 봉신들은 모두 그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루이센이 미래에서 직접 경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공작가의 가신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아니에스 공작가는 왕국 이전부터 이 지역의 지배자였습니다. 봉신들이 우리가 저버리고 왕가와 손을 잡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신하이고 우리는 그들의 유일한 군주입니다. 아니에스 공작가가 남부에서 어떤 존재인지,
제가 항상 가르치고 잊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총관의 말에 가신들이 동조했다.

“맞습니다. 남부 사람의 의리는 수도의 갈대 같은 귀족들과는 다릅니다.”

“영주님이야 수도에 오래 계셨으니 모르시겠지만 말입니다.”


아니, 시대가 변했다니까.

내전이 벌어지기 이전부터 왕자들은 자기 세력을 만들고 싸워 왔다. 1 왕자는 중소 규모의 영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서 오래된 봉신 계약을 깨 버리고,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 가자고 유혹했다. 그 결과 아니에스 공작가의
봉신들도, 이미 공작가를 섬겨야 할 주군이 아니라 제 가문의 배를 불릴 통통한 먹잇감으로 보고 있을 터였다.

실제로 공작가가 몰락하길 기다린 것처럼, 아니에스 공작가의 봉신들은 공작령을 두고 미친 듯이 싸워 대지


않았나.

‘이런 말을 해 봐야 믿지 않겠지.’

공작가의 가신들은 유능하지만, 공작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데다 보수적이었다.

“잘 생각해 보게. 그들이 우리를 도우려면 칼튼이 검을 빼 들기 전에 군사를 보냈겠지. 어느 가문 하나 우리에게


지원군을 보낸 곳이 있나?”

재무관이 살짝 동요했다. 이들이라고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4화

“또한 1 왕자도 칼튼도 우릴 죽일 생각은 없어. 그들이 원하는 건 우리의 항복이네. 공작가가 왕자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될 일이야.”

“1 왕자가 노리는 것이 우리의 굴복이라면 더더욱 물러서면 안 될 일입니다! 남부의 지배자라는 우리의 명예가
걸린 일입니다.”

“명예가 밥을 먹여 주나!”

“그게 아니에스 공작가의 주인이 되어 하실 말씀입니까! 이 황금들판의 주인이 고작 왕자가 부리는 도살자에게
겁을 먹고 내빼다뇨!”

총관이 화를 냈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겁……은 나지만 우리 모두를 위한 선택이네.”

1 왕자가 공작가를 포기하면 칼튼은 잔인하게 공작령을 부숴 버리겠지. 그렇게 되면 루이센이 경험한 미래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2 왕자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을 때도 똑같이 말씀하셨죠. 우리 모두를 위한 선택이라고.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병사와 재물만 잃고 반역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중앙정치에 관여하지 말라고 그렇게 간언을
드렸거늘!”
루이센은 입을 다물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다 자신의 무능함과 안일함이 불러온
일이니까. 내전도, 왕위 다툼도 루이센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무 생각이 없이 흘러가듯 살았다. 2 왕자의 측근이 된 것도 심각한 고찰 같은 거 없이, 친척이니까 그와


붙어 다니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영주님은 그저 겁을 먹으신 것뿐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항복을 해서 목숨이라도 구걸하려는 생각이시겠죠.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라도 제발 자신이 영주라는 책임감을 가지실 순 없습니까?”

“됐습니다. 이제 와서 무슨.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우리끼리 알아서 합시다. 영주님은 이만 돌아가셔서 드시던


술이나 마저 드시지요. 좀 씻으시든가. 술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총관의 질책보다, 일말의 기대도 담기지 않은 재무관의 말이 더 가슴을 파고들었다. 가신들은 루이센을 무시하고
그가 등장하기 전 나누던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총관의 질책에 루이센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다 이유가 있는데, 나는 모두를 살리려고 하는 말인데.
루이센의 진심은 회의실의 어느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호의적인 집사가 루이센에게 다가왔다.

“우리 도련님. 많이 두려운 모양인데, 방에 돌아가 쉬시지요. 이곳은 성의 어른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요.”

아직도 도련님이야. 루이센이 영주가 된 지 이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집사에게 루이센은 여전히 도련님이었다.
믿고 따를 수 있는 영주님이 아니라. 비단 집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회의실에 있는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을
제대로 영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답답함과 무력감이 동시에 루이센을 덮쳐 왔다. 그는 기세 좋게 뛰쳐나갔던 것과 달리, 성과 없이 터덜터덜


상처만 입고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끄응,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가신들에게 무례하다고 욕할 수도 없는 게, 루이센은 이 나이 먹도록 제대로


영주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여섯 살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공작이 되었다. 총관이 영주 대리를 했고 루이센은 훌륭한 영주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총관의 교육은 아주 엄격했지만 루이센은 마지못해 억지로 끌려다닐 뿐이었다. 가정교사를 피해
다락방에 도망치기 일쑤였고 공부도 무술도 통치도, 뭐 하나 진득하니 제대로 해 본 역사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고서는 영지의 일을 모조리 가신들에게 떠넘긴 채 수도에서 사치와 향락에 빠져 지냈다.
영지에서 보내오는 돈을 물처럼 쓰면서 나쁜 친구들만 사귀었다.

그의 평판은 최악이었고 사고도 마구 쳤다. 돈을 쓸 줄만 알았지 그 돈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도 몰랐다. 영지도


가문도 관심 없었다. 다들 알아서 잘하는데 내가 뭐 하러 일해야 하지? 영지에 문제가 생겨도 나 몰라라 했다.
거름 냄새가 풍기는 촌 동네보다 화려한 수도가 더 좋았다. 루이센이 수도에서 놀아나는 동안, 영지를 가꾼 것은
가신들이었다.

그러다가 어설프게 왕위 쟁탈전에 끼어들고, 영지의 기둥뿌리를 뽑아 가며 2 왕자를 지지하다가 패배했다. 처신을
잘못해서 인맥도 제대로 만들어 두지 않았고, 1 왕자와 사이도 나빠서 본보기로 찍히기까지 했다. 타고난 혈통은
좋았으나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랐고 정치에 무지했으며 눈치가 나빠 늘 호구 잡혔다.

한마디로 루이센은 없는 게 나은, 제발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해 줬으면 하는 영주였던 것이다!

‘그런 놈이 전투가 한창인 밤에 뜬금없이 항복하자고 주장하니……. 나 같아도 꺼지라고 하겠다.’

그래도 사람들이 착해서, 내쫓진 않았다. 욕도 안 하고, 침도 안 뱉고. 회귀 전에 겪은 갖은 모욕들을 떠올리자


온순한 가신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솔솔 피어올랐다. 저렇게 좋은 사람들인데 옛날에 나는 왜 번번이
무시당했다고 화를 냈을까.

태어날 때부터 떠받들어지는 데 익숙해서,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떠받들어지는 만큼 책임져야 할 게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지.

‘성자님의 말씀이 맞아. 뭐든 공짜는 없다니까. 사람이 밥값을 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이제라도 루이센은 밥값을 하려고 했다. 영주의 밥값이란 이런 전투 상황에 나서서 영지민을
무사히 살리고 영지의 미래를 지키는 것일 테지!

‘그러려면 항복을 해야 하는데……. 가신들이 내 말을 안 들으니, 항복 사절을 보내는 방법은 쓸 수가 없고…….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루이센이 기억하는 대로라면 당장 오늘 밤은 넘기겠지만 내일 밤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가신들이야 잘 버티고


있다고 하지만 루이센은 칼튼이 전력을 다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칼튼이 미친놈이라고 불려도, 실력 하나는 확실하단 말이야.’

칼튼이 대놓고 귀족들을 박해하고, 귀족 대부분이 그의 적이라도, 그가 1 왕자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귀신같은 용병술과 무력 덕분이었다.

루이센은 공작성이 포위되었던 그날, 첫 전투를 떠올렸다. 루이센은 먼발치에서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칼튼은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죽음의 기사 같았다.

창을 한번 휘두르면 겹겹이 포위했던 병사들이 쓰러지며 길을 열었고, 중무장한 기사들이 나가떨어졌다. 루이센은
수도에 머물며 난다긴다하는 기사들을 많이 봐 왔지만, 살면서 그런 무시무시한 인간은 처음 봤다. 전장에 서지
않은 그를 겁에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아니면 직접……. 아, 그런데 한창 전투 중인데 거길 뚫고 지나갈 수도 없고.’

칼튼을 만나 항복하기도 전에 싸움에 휘말려 죽을 게 뻔했다. 루이센은 생각에 잠겨 방 안을 왔다 갔다 정신


사납게 거닐었다. 그 모습을 불안한 얼굴로 보던 루거는 슬그머니 또다시 야반도주를 충동질했다.

“사람들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더 버티기 힘들 거래요. 저쪽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 오늘 밤에라도 함락될 거
같다고요. 총관님이 거짓말하는 거 같아요. 우린 더 이상 승산이 없다구요. 지원군은 안 올 거고.”

“도망은 너 혼자 가라니까.”
“제가 공작님을 두고 어디를 가요! 전 죽어도 공작님 옆에 있을 거라고요. 제 충성심을 무시하시지 마세요.”

“그럼 같이 있게?”

“그, 그치만……. 공작님은 그 도살자 놈에게 어떤 수모를 겪을지 눈에 선하지 않으세요? 그놈이 잔악무도한 건
다 아시잖아요!”

“…….”

“기억나시죠? 제가 다 말해 드렸잖아요. 세상에, 자작의 아들을 말에 매달아서 사지를 찢어 버렸다잖아요!


공작님이 그런 치욕스럽고 끔찍하게 죽는다고 생각하면……”

루거는 말재주가 좋았다. 같은 말을 해도 루거가 하면 이상하게 더 실감 나고 귀에 팍팍 꽂혔다. 그가 손발을


동원해 칼튼의 악명을 이야기하자, 루이센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만해. 가뜩이나 심란한데 더 무서워지잖아.”

루이센은 겁에 질려 팔을 감싸 안았다.

루이센이 막 야반도주를 할 때 칼튼이 직접 자신을 추격했었다. 그날은 오래도록 악몽으로 남아 루이센을


괴롭혔다. 칼튼은 루이센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서 창을 던졌다. 그 창이 간발의 차로 루이센을 빗겨
났다. 루이센 대신 창을 맞은 나무는 그대로 두 동강이 났고.

그때를 다시 떠올리면 지금도 식은땀이 흘렀다.

루이센이 살면서 진짜로 죽음을 코앞에 두고 실감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니에스 공작으로 호의호식하며
안전하게 살아온 자신은 그 경험을 쉽게 떨쳐 내지 못했다.

오랜 시간 칼튼이 자신을 죽이러 온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지냈다. 칼튼을 닮은 죽음의 기사는 루이센을 끈질기게
따라왔다. 성자님에게 구원받지 못했다면 평생 망상을 떨쳐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루이센은 칼튼이
무서웠다.

“그러니까 우리 떠나요, 공작님. 공작님도 무섭잖아요. 여기서 공작님이 할 일도 없고……. 아니, 여기


사람들은 공작님이 사라지면 더 좋아할걸요?”

“으음…….”

“이거 보세요. 숲지기에게 받아 온 지도에요. 이 지도대로 따라가면 몬스터를 피해서 숲을 가로질러 빠르게
더블레스령으로 갈 수 있어요.”

루거는 루이센을 설득하기 위해 지도를 펼쳤다. 루이센도 익히 잘 아는 지도였다. 과거 루이센과 루거는 이


지도의 길을 따라 이웃 백작령인 더블레스로 도망쳤다. 그리 좋지 못한 기억이었다.

루거는 더블레스 백작이 루이센을 지켜 주고 최고의 대접을 해 줄 거라고 말했으나, 루이센은 완전히 찬밥
신세였다. 더블레스 백작은 루이센을 응접실에 가둬 두다가 몇 마디 묻고는 쫓아내 버렸다. 그래서 루이센은
상심해서 아니에스 공작성으로 돌아왔던 거고.

어쨌든 지도는 확실했다. 숲을 왕복하는 동안 몬스터의 그림자도 못 봤으니까. 잘못 길을 잡았다면 칼튼의


군사들의 주둔지로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잘 피해 갔다.
……어?

“지도 줘 봐.”

“여기요!”

루거는 루이센이 마음을 바꿨다고 믿고 기쁘게 지도를 건넸다.

5화

루이센은 지도를 펼쳐 확인해 보았다. 아니에스 공작성의 북쪽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숲의 입구.
거기서부터 뻗어진 길을 손가락으로 따라 훑었다.

“이쪽, 길의 왼쪽으로 가면 더블레스령이지?”

“네, 맞아요.”

루이센은 더블레스와 정반대편, 숲의 오른쪽에서 조금 떨어진 구릉지대를 짚었다.

“이쪽이 칼튼의 막사고?”

“네. 맞아요. 그쪽이 전투가 한창인 정문 방향이요. 우리가 갈 길이랑은 정반대예요. 전투에 엮이지 않고
무사히 도망칠 수 있어요.”

“오른쪽이란 말이지.”

“아뇨. 왼쪽이요. 우린 왼쪽으로 가야 한다니까요?”

루거는 그걸 그새 헷갈리냐고 타박하며 루이센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이놈은 내가 그 정도로 바보인 줄 아나!
루이센은 울컥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루거가 착각해 주는 게 차라리 나았다.

“가자. 지금 바로 떠난다.”

“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역시 우리 공작님, 과감하시고 결단력 있으십니다!”

루거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신이 나서 루이센에게 검은 로브를 건네며 쓸데없는 아부를 늘어놓았다. 루이센은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루거의 아부가 좋았는데 지금은 기분이 나빴다.

아니, 뭐 저런 알맹이 없는 아부를 하지? 예전의 자신이 이런 뻔한 아부를 듣고 우쭐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루이센은 과거의 자신을 욕해 주고 루거의 아부를 그만 듣고자 말을 돌렸다.


“그만하고 얼른 출발하자.”

루이센은 지도를 잘 말아 들었다.

“어? 지도는 제가…….”

“됐어. 숲에서는 내가 앞장설 거야. 넌 따라오기나 해.”

하인이 지도를 들고 앞서고 주인은 편하게 뒤따라가는 것이 자연스럽기에 루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루이센은 원래 변덕이 심했다. 그리고 투명할 만큼 생각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
더블레스령으로 가는 것 말고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더블레스령은 안전할 거예요. 칼튼도 거기까지 쫓아오진 못하겠죠!”

루거는 희희낙락하며 앞장섰다. 숲에서는 루이센이 앞장서더라도 말과 재물을 숨겨 둔 곳까지는 루거가 안내해야
했다. 한결 가벼워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루이센은 속으로 말했다.

‘속여서 미안하다, 루거. 이번엔 너도 나 때문에 죽지 않을 거야. 너도 그게 더 나을 테지.’

애당초 루이센은 더블레스령으로 갈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후회를 했는데 또 도망치겠는가. 루이센은 머리가
나빴지만 뻔히 보이는 지옥 길에 발을 들일 머저리는 아니었다.

루이센의 목적지는 완전히 반대쪽. 칼튼의 막사였다.

***

공작성의 뒷문으로 빠져나오자 숲의 초입부가 나타났다. 밤의 숲은 마치 거대한 괴물 같았다. 온통 새까만


어둠만이 존재했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등 뒤에서는 전투의 소리가, 앞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도 기묘한 침묵이 어깨를 짓눌렀다.

밤의 숲이 위험하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그리고 상식과는 별개로 루이센은 숲을 무서워했다. 도시에서


쫓겨나서, 추격을 피하려고, 먹을 걸 찾겠다고 숲에 여러 번 들어갔다.

그는 매번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들짐승은 얼마나 사나운지, 몬스터는 또 어찌나 많은지 모른다. 그것들을
잡겠다고 사냥꾼이 설치해 둔 덫은 또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 언제 한 번은 그 덫에 잡혀서 발목을 잃을 뻔했다.
굶주림에 눈멀어서 독버섯을 집어 먹기도 했고.

살아 있는 게 용하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니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 자라서 몰랐는데, 의외로 자신은 목숨이 질길지도 모르겠다.

‘으으…….’

쓸데없는 생각으로 긴장을 풀어 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은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뭔가가 있었다.
‘꼭 죽음의 기사가 나올 거 같잖아…….’

전설에 따르면 달빛도 스며들지 못하는 깊은 숲에, 홀로 떠도는 머리가 없는 기사가 있다고 한다. 그는 한때
누구보다 명예로운 기사였으나, 타락하여 주군을 배신하고 신성한 기사의 맹세를 어겼다고 한다. 그는 극형에
처해 목은 성벽에 내걸렸고 몸은 숲에 버려졌으나 영원히 숲을 떠돌며 죄지은 자들의 영혼을 거두어 간다고 한다.

떠돌이 시절 루이센이 잠시라도 쉴라치면, 어김없이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며, 어둠 너머에서 죽음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루이센을 벌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사신과 같았다. 루이센에게 안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자에게 잡히면 육신은 갈가리 찢겨 들판에 널려 개밥이 되고, 영혼은 영원히 사로잡혀 고통받으리라. 언제,
어디서고 어둠 속에 자리를 잡고 루이센을 바라보며 도망치고 또 도망치도록 채찍질했다.

그를 떠올리자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심한 오한이 들었다. 두려움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지금도 누군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목 언저리에 와 닿는 바람이 싸늘하여 칼날과 같았다.

‘아니, 아니야. 죽음의 기사 같은 건 세상에 없어.’

물론 죽음의 기사는 전설에 나오는 허구의 존재였다. 루이센을 쫓던 죽음의 기사는 그저 루이센의 죄책감이
만들어 낸 수많은 망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실제로 성자를 만나, 자신의 과오와 마주하게 된 이후로 검은
기사를 보는 일은 없었다.

뒤를 돌아보자 루거가 멍하니 서 있었다. 여기에는 루이센과 루거, 두 사람뿐이었다.

‘그래. 다 망상이야.’

루이센은 애써 공포감을 떨쳐 내려 애를 쓰며, 숲으로 발을 들였다.

***

루이센과 루거는 묵묵히 걸었다. 갈수록 길이 좁아지고 풀이 무성하게 무릎까지 올라왔다. 오래 묵은 나무들은
몸통이 굵고 빽빽했고 그 사이를 새까만 어둠이 가득 메웠다. 그나마 그들을 비추던 달빛마저 무성한 나뭇가지에
가려졌다.

‘아, 앞에 뭐가 있을 거 같아.’

루이센은 울 것 같은 기분으로 한 발, 한 발 앞섰다. 그가 들고 있는 등불은 발밑을 보긴 충분했지만, 숲의


어둠을 거둬 가기엔 너무나 작고 약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풀잎들이 길게 흔들렸다. 으. 루이센은 질겁을
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무서워 죽겠네.’

다시 돌아가도 자신이 앞장섰겠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그는 힐끗 루거를 바라보았다. 루거는 한마디
말도 없이 묵묵하게 루이센을 따라오고 있었다. 평소의 그 방정맞은 입담은 어디에다 두고. 차라리 뭐라고 말을
해 줬으면 덜 무서울 텐데.

“공작님.”
“어? 어어. 그래.”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요?”

“맞게 가고 있어.”

루이센은 발뺌을 했다. 어차피 루거는 아니에스 출신이 아니다. 수도에서 태어나 살다가 루이센을 따라 처음
이곳에 왔으니 숲의 지리 따위 얼마나 알겠는가. 그런데 루거가 갑자기 멈춰 섰다.

“왜 거짓말하세요?”

툭, 내뱉은 말에 루이센은 심장이 쿵 떨어질 것만 같았다. 눈치도 빠른 자식! 다른 때는 어리바리하면서 이럴


때만 날카롭지. 얼굴을 굳힌 루거는 루이센에게 도망치자고 조르던 그 하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싸늘해 보였다.

“지금 반대로 가고 계시잖아요.”

“아, 아닌데?”

루이센은 말을 더듬었다.

젠장. 그는 자신의 처참한 순발력과 연기력에 탄식했다.

“역시.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겁많은 공작님이 지도랑 등불을 들고 앞장서신다니. 길이 이렇게 험한데 저한테
짜증 한번 안 내시고. 다른 꿍꿍이가 있으셨던 거네요.”

“그게…….”

“왜 칼튼의 막사 쪽으로 가는 거죠? 죽으려고 환장하셨어요?”

“안 죽어! 내가 죽기는 왜 죽어.”

“그럼 뭐 하시려고요? 이제 와서 항복하고 살려 달라고 비시게요?”

“…….”

침묵이 곧 긍정이었다.

“진심이세요? 공작님, 미치셨어요?”

루거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래, 미친 짓으로 보이겠지. 루거의 눈에는 루이센이 사자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미쳤지. 미쳤어. 어쩐지 순순히 떠난다 했어. 젠장.”

“속인 건 미안한데……. 걱정 마.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공작님이 무슨 생각 같은 걸 한다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인간이!”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무례한 발언이긴 했지만 루이센은 뭐라고 하지 못했다. 루거는 자신의 망나니 시절을 모두 옆에서 지켜봐 온
사람이기에 루이센의 반박은 힘이 없었다. 게다가 루거는 자신의 야반도주를 돕다가 죽기까지 하지 않았나.
루이센은 루거에게 큰소리칠 입장이 아니었다.

“됐어요. 공작님을 앞세운 내 잘못이지. 이제라도 돌아가요.”

“안돼. 난 칼튼을 만나야 돼. 더블레스로 가고 싶으면 지도를 줄게. 너 혼자라도 가.”

“그게 안 된다니까요! 공작님을 두고 저 혼자 어떻게 가요? 꼭 같이 가야 해요.”

“혼자 가.”

루거의 충심이 가슴을 울렸으나 루이센의 마음은 확고했다.

“정 그러시면 억지로라도 모셔 가겠습니다.”

루거는 주먹을 꽉 쥐며 다가왔다. 더 말을 안 듣는다면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듯이 비장했다.

“야, 이거 하극상이야!”

루이센은 뒷걸음질 쳤다.

“어쩔 수 없죠. 공작님 더블레스로 못 데려가면 어차피 죽는데.”

“정신 차려! 너 너무 겁을 먹은 거 같은데……. 나만 믿으라니까?”

“공작님을 믿느니 우리 집 복실이를 믿겠습니다!”

“복실이는 내 개잖아. 너무하네, 진짜! 너 원래 이렇게 막 나가는 놈이었어?”

설득이 안 된다. 루이센은 빠르게 판단했다. 그는 지도와 등불을 루거 품에 떠안기듯 던졌다. 루거가 주춤하는
순간, 돌아서서 달렸다.

“미안하다!”

6화

“공작님!”

루이센은 미친 듯이 달렸다. 가야 할 길은 대충 외우고 있었으니 붙잡히지만 않으면 되었다. 루거가 바짝


달려왔다.

쟨 왜 저렇게 잘 뛰어?
루거는 달리는 사슴처럼 잘도 뛰었다. 루이센은 젖먹던 힘까지 짜냈다. 얼굴이 새빨개졌고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세 걸음 이상 걸어야 하면 무조건 마차를 타던 루이센이 나무뿌리와 돌로 울퉁불퉁한 숲길에서 제대로 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얼마 못 가 루이센은 장렬하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고 루거는 허탈한 표정으로 루이센의 손목을 잡았다. 루이센
딴에는 매우 힘을 낸 셈이었지만 추격전은 매우 짧게 끝났다.

“그러게 왜 쓸데없이 힘을 빼세요?”

루거는 허탈하게 물었다.

“…….”

난들 이렇게 금방 넘어질 줄 알았나. 마음만큼은 숲을 두 번 가로지르고도 남았는데. 루이센은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가오던 루거가 걸음을 멈추었다.

“시발.”

루거가 나직하게 욕을 했다.

“……?”

지금 욕한 거야? 나한테? 루이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내가 널 속였다지만 욕은 좀 그렇지 않나? 내가 일단 그래도 주인인데…….”

“아니, 공작님 말고 앞에요.”

“어?”

루이센은 앞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 사이로 노란 눈동자들이 둥둥 떠 있었다. 케륵, 케르륵 하고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키에 녹색 피부, 깡말랐지만 배만 올챙이처럼 툭 튀어나왔고 얼굴은


기괴하게 생긴 난쟁이가 나타났다.

“고블린이 왜 여기에…….”

고블린.

숲에 사는 몬스터였다. 그들은 해가 들지 않은 깊은 습지에 살며 정해진 영역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을 두려워해서 이런 길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텐데 왜 여기 나타난 거지?

“제 뒤로 숨으세요.”

루거는 이미 칼을 빼 들고 있었다. 루이센도 얼떨결에 그의 등 뒤로 숨었다.

고블린의 수는 셋인데 이쪽에서 검을 든 건 루거뿐이었다. 흔히 귀족은 싸우는 자라고 불리며 검술은 귀족의 소양
중 하나지만, 루이센쯤 되는 대영주는 일반 귀족과 달리 통치하는 자에 속했다. 다스리는 자는 싸우는 자를
부리면 될 뿐. 그래서 검술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쓰지도 못하는 검이니 챙기지도 않았다. 배우고 싶지도
않았지만 배워 둘걸!

물론 루이센이 다칠까 봐 편지칼도 못 쓰게 했던 사람들이니 루이센이 검술을 배우겠다고 했으면 가신들이 기를


쓰고 말렸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눈앞의 고블린이 문제였다. 고블린들은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 왔다. 다행인 건 루거가 생긴 거랑
다르게 검을 제법 쓴다는 점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제가 먼저 공격을 해서 길을 내겠습니다. 왼쪽으로 달리세요. 원래 가려던 대로 더블레스 방향으로 가시란


말씀입니다.”

“……그래.”

케륵, 케륵!

고블린이 다 같이 덤벼들었다. 동시에 루거는 앞으로 달려가 고블린의 목을 노렸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노련한 동작으로 검을 뽑았다. 검은 망설임 없이 고블린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끼엑! 하는 비명과 함께 고블린 하나가 즉사했다. 포위망에 빈틈이 생겼다.

지금이다!

루이센은 망설임 없이 빈틈 사이로 달려 나갔다. 그가 향한 방향은 오른쪽이었다.

“공작님! 아, 빌어먹을! 왼쪽이라고요!”

“미안!”

루거는 고블린에게 막혀 쫓아오지 못했다. 두 마리의 고블린도 루거에게 막혀서 루이센을 따라오지 못했다.

이대로 칼튼의 막사까지! 그런데 어둠 속에서 고블린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고블린은 뒤늦게 합류한 건지
루이센과 동료들을 보고 놀라다가 바로 루이센에게 덤벼들었다.

“윽!”

루이센은 고블린의 손톱을 피하며 뒷걸음쳤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목구멍에서는 쇠비린내가 풍겼다. 허벅지
근육이 경련하듯 떨렸다. 비틀거리는 몸을 받느라 몇 번이고 꺾인 탓에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발목이 시큰거렸다.
고블린은 날렵했고 루이센은 계속 뒤로 도망치다가 툭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걸리면서 뒤로 나자빠졌다.

쿵.

“공작님!”

루거가 소리쳤으나 그는 루이센을 도우러 올 수가 없었다. 고블린이 케케켁, 하고 기분 나쁘게 웃으며 루이센에게
다가왔다. 고블린의 작고 누런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인간과 달리 촘촘하고 뾰족한 수십 개의 이빨이 입맛을
다시듯 딱딱거렸다. 더럽고 끔찍했다. 공포에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 루이센은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면서
뒷걸음질 쳤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케케륵.

루이센의 반항은 아무 효과도 없었다. 고블린은 몽둥이를 높게 치켜올렸다. 고블린의 머리통만 한 몽둥이였다.
루이센의 연약한 머리는 한 방이면 천국행일 게 분명했다. 고블린은 보기와 다르게 힘이 셌다. 괜히 몬스터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한 방 감인 게 나은가?

어설프게 오래 살아 고생하느니 그냥 한 방에 죽는 게 속 편하고 좋긴 했다. 살아 있는 것이 너무도 죄스럽고


고통스러워 차라리 콱 죽어 버렸으면 했던 적이 몇 번이던가. 와인으로 입술을 적시고, 자신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사신의 낫을 기다릴 때 루이센은 두려웠지만, 이 고된 삶을 끝낼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기도 했다. 그러고
과거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그치만…… 지금 여기서 죽으면 내가 야반도주하다가 죽었다고 생각하겠지?’

전투 중에 야반도주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운 나쁘게 고블린을 만나고, 처맞아 죽은 영주.

세상에 이렇게 한심한 인간이 있나!

회귀 전보다 더 멍청하고 우스운 죽음이었다. 여기서 죽으면 회귀 전보다 더한 머저리로 왕국에 이름을 날릴 게
분명했다. 아니에스 공작가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동네 꼬마들조차 ‘아니에스 공작 같은놈!’이라고 욕을
하겠지.

죽어도 여기서는 억울해서 못 죽어! 생각해 봐, 루이센. 몬스터는 어떻게 해야 하지?

루이센은 외팔의 순례자, 그가 신봉하는 성자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눈이다!’

루이센은 흙을 쥐고 고블린의 눈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고블린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이렇게


무력하게 죽을 거 같냐는 분노가 담겨 제법 강력한 한 발이었다. 그와 동시에 고블린의 몸이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날아갔다. 고블린은 몸을 경련하며 쓰러졌다.

‘……?’

내 발길질이 그렇게 셌나? 아니면 발길질 한 번에 고블린을 죽일 수 있는 숨겨진 능력이 있었던 건가? 나한테
그런 대단한 능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

루이센은 눈을 끔벅였다. 다시 보니 고블린의 몸에 투척용 창이 꽂혀 있었다. 루이센이 발을 찬 순간에 창이


날아와 죽인 것이었다.

‘고블린을 발로 안 찼으면 나도 창을 맞았을 거야.’

루이센은 소름이 끼쳐 부르르 떨었다.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고블린의 너머를 바라보자 초점이 바로 잡히면서
뭔가가 어둠 속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죽음의 기사.

어둠 속에 서 있는 것은 죽음의 기사였다.
그는 검은 갑옷에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타고 있는 말조차 검었다. 그림자가 그대로 기사가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고블린의 숨을 거둔 것은 그였다. 그는 천천히 말을 움직여 루이센에게 다가왔다.

덜그럭. 덜그럭.

갑옷이 부딪혀 소리를 냈다. 쇳소리가 귓속을 긁어내리는 것같이 오싹했다.

‘아니야. 죽음의 기사 같은 거, 다 내 망상이었어. 사라져. 그런 건 없어.’

그렇다면 창을 맞고 죽은 고블린은 뭐란 말인가. 이자는 진짜였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사라지는 환상이 아니라


진짜였다.

루이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그의 팔다리가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덜덜 떨렸다. 심장이 꽉 조여 왔다.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아득했다.

순간 루이센은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도, 자신이 예견된 비극을 막기 위해 칼튼의 막사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모조리 잊어버렸다. 그저 오랜 습관처럼, 두려움에 잠겨 들었다.

‘나를…… 나를 심판하러 온 거야. 기어코 나를 쫓아왔구나. 내 몸을 갈기갈기 찢고 영혼을 지옥으로


처박으려고!’

루이센은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죽음의 기사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으나 팔다리가 마비된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꿈틀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하는데.’

루이센은 무력하게 부르르 떨었다. 비 오듯이 땀이 흘렀다. 투구 사이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과 마주했다.

고블린을 앞뒀을 때와는 전혀 다른 공포와 위압감이 루이센을 짓눌렀다. 숨이 턱턱 막혔다. 그의 시선에 옭매여진
것처럼 루이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 길고 느리게 흘러갔다.

그때 죽음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루이센 아니에스?”

“……?”

투구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은 사람의 것이 분명한 낮은 음성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싹한 그 목소리가 루이센의 정신을 현실로 돌려놓았다.

‘어? 말을 하잖아? 날 불렀어.’

그제야 눈앞의 남자에게 멀쩡하게 머리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자는 죽음의 기사가 아니었다.

“맞군.”

그의 목소리는 왠지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왜지? 루이센의 착각이나 자격지심이 아니었다. 그는 루이센을
깔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담긴 혐오가 강렬히 루이센에게 내리꽂혔다. 대체 누구길래? 거지로 떠돌던 시절,
질리게 받아 본 눈빛이기에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그대는…….”

기사는 루이센이 질문하게 두지 않았다. 그는 느닷없이 루이센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루이센의 몸은


종잇장처럼 달랑 들려 기사가 집어 던지는 대로 끌려갔다. 루이센은 짐짝처럼 말의 뒤에 실렸다. 안장이 루이센의
말랑한 배를 가격했다.

“끅!”

기사는 말을 돌리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검은 기사는 루이센을 잊은 것처럼 속력을 냈다. 그의 검은 흑마 역시


성인 남자 두 명을 태웠다고는 믿기지 않을 속도로 달려 나갔다.

7화

“공작님!”

“악, 이 새끼 잡아! 뭔 힘이 이렇게 쎄!”

등 뒤에서 루거의 애타는 외침과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루이센은 자기 한 몸 챙기기도 버거웠다. 숲길은
정리가 되지 않아 거칠었다. 말발굽이 힘차게 땅을 박찰 때마다 흙먼지가 일고 돌이 루이센의 머리로 튀어 올랐다.

루이센은 온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삐끗하면 떨어진다! 무서울 정도로 속력을 내는 말에서 떨어진다면 필시
중상이었다. 그의 몸을 고정할 것도 없고 붙잡을 것도 없으니 온몸이 저릿하도록 힘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

말이 나무뿌리를 피해 뛸 때면, 루이센의 몸도 위로 크게 뛰었다. 어찌저찌 안간힘을 써서 떨어지진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딱딱한 말안장이 루이센의 명치를 가격했다.

“악, 윽! 악! 악!”

탄력적인 말 궁둥이가 루이센의 뺨을 도닥이고, 말꼬리가 정신없이 루이센의 몸을 내리쳤다. 머리에 피가 몰렸고
눈앞이 시커멓게 변했다.

차라리 죽여……라고 생각이 들 때쯤, 말이 멈췄다. 더는 버틸 수 없어. 루이센은 말에서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퍽,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루이센은 꼬리뼈에서 올라오는 아찔한 고통을 느끼며 머리를 땅에 박을 듯이 숙이고 우웩, 으웩 구역질을 했다.
아직도 달리는 말 위에서 덜렁거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눈가에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허억, 허억.”

루이센이 헛구역질하는 사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와하하하하.”
웃어? 지금 내가 웃겨?

“숲에서 웬 머저리를 주워 오신 겁니까? 사냥 나가신 거 아닙니까? 설마 오늘 밤은 그놈을 드시려고요?”

“저건 비실비실한게 맛도 없겠는데요?”

그들은 건달처럼 무례하고 버르장머리 없었다.

내가 강도들에게 끌려온 건가?

루이센은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눈앞이 흐렸다. 임시로 세운 천막 같은 것을
배경으로, 다수의 남자가 보였다.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었다. 용병이라기엔 너무 좋은 차림새인데,
기사나 병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유분방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수사자가 수놓인 깃발이 거세게 펄럭였다. 푸른 수사자. 왕가의 상징이자 왕의 상징이었다.
왕이 있는 곳, 왕이 행차하는 전장, 그리고 왕명을 전하는 전령만이 수사자의 깃발을 자랑스레 내걸 수 있었다.
수사자 깃발은 곧 왕의 의지였다. 지금은 다 죽어 가는 왕 대신 1 왕자의 뜻이겠지만.

어쨌든 수사자의 깃발을 꽂고, 공작성의 코앞에 머무는 이들의 정체는 뻔했다.

‘칼튼의 군대다…….’

루이센은 무심코 검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왜 이제야 눈치챘지? 그 기사는 평생토록 루이센이 두려워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가 어딘가에 정착하려고 할 때면 짙은 새벽안개 사이로 따각, 따각 하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칼튼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그럼 루이센은 혼비백산해서 정신없이 달렸다. 목구멍에서 피가 날 정도로 달리다
지쳐 쓰러지고 나면 어느새 아침이 와 있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제대로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칼튼에게서
도망치는 것만 생각하며 루이센은 무작정 걸었다.

성자님을 만나 눈이 뜨여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죄책감이 만들어 낸 망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마음이 안정되자


검은 기사는 더 이상 루이센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저 모습을 잊을 수는 없었다.

‘이 남자가 칼튼인가……?’

칼튼. 출신은 불분명해 어느 귀족의 서자라느니 용병왕의 자식이라느니 이런저런 설의 난무했다. 그러나 사실
왕국 서북부의 어느 영지에서 말을 기르던 천민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칼튼은 어릴 때 영지에서 도망쳐 몬스터가 많은 북부로 향해 용병으로 활동하다가 1 왕자의 눈에 들어 그의 가신이


되었다. 내전에서 이름난 기사들을 꺾고 수많은 승리를 가져오면서 가장 주목받은 인재 중 하나였다.

하지만 특유의 거친 성정과 적대적인 태도로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그 탓에 내전 후 1 왕자가 왕위에 오르고
세력 구도가 새롭게 자리잡히면서 그가 가장 먼저 제거되었다.

귀족 모욕죄였나? 누가 봐도 토사구팽을 위한 전형적인 빌미였다. 대외적으로는 처형당했다고 하지만 처형 직전에


도주를 했다거나, 어느 산채에 들어가 산적이 되었다거나, 종교에 귀의했다거나.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했다.

어쨌든 내전을 막 마친 시점인 지금은 1 왕자의 신임이 두텁고 영주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존재였다. 루이센은 그
이상으로 무서워하고.
“……자네, 나를 아나?”

루이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놈이 공작님,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죠.”

칼튼이 가리킨 끝에는 루거가 있었다. 칼튼과 함께 사냥을 나갔던 다른 사람들이 루거의 양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 그렇군.”

그 소리가 들리다니 뭐 하는 놈이야? 루이센은 혀를 내둘렀다. 칼튼의 말에 병사들이 크게 술렁였다. 그 소리가


루이센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정말 저 사람이 귀족이야?

아닌 거 같은데? 왜 귀족은 좀 더 멀끔하잖아?

루이센의 몰골은 그만큼 말이 아니었다. 진흙과 고블린의 피를 뒤집어쓴 데다, 말 뒤에 매달려 오느라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도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거지처럼 보였다. 루이센은 그제야 자신의 꼴을 자각하고 살짝 늦은 감이
있지만 의연해 보이도록 노력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흙을 터는 척 두들기며 일어서서, 온 힘을 짜내어 등을 곧게 폈다. 머리를 털고 옷을


단정히 정리했다. 그런다고 깔끔해지지는 않았지만, 귀족적인 우아함이 몸에 배어 나왔다. 도망자로 지낸 세월이
혹독했지만 귀족으로 지낸 세월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이 루이센에게 녹아 있었다.

두려움을 미뤄 두고 귀족다운 모습을 취하자, 공예품처럼 섬세하고 고상한 미모가 드러났다. 달빛 아래 그의 뺨이


희게 빛났고 금발머리칼은 별무리처럼 반짝였다.

그의 외모가 드러나자 거지 같은 차림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차림이기에 음유시인의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사연 깊은 귀족 청년으로 보였다. 병사들 사이에서 오, 하고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다시 소개하지. 아니에스 공작, 루이센 아니에스다.”

루이센은 고개를 꿋꿋하게 들고 칼튼을 바라보았다. 투구에 감춰진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저 그의 눈빛이 살벌해 오금이 저렸다.

기죽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 나는 도망자, 거렁뱅이, 왕국 최고의 머저리가 아니야. 지금은 대영주, 루이센
아니에스 공작이야.

루이센은 도망치지 않기 위해 계속 되뇌었다.

성자님이 그랬다. 암만 무서워 봤자 쟤도 사람이라고. 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그 역시 사람이 만들어 둔 규율과


신분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이 몸은 광활한 농토의 대영주. 어디 가서 꿀릴 거 없다.

아니에스 공작이라고? 저 성의 주인 말이지?

병사들은 또다시 크게 동요했다. 침착한 건 칼튼뿐이었다. 그는 비웃음을 흘렸다.

“정말 아니에스 공작님이셨습니까? 설마 했는데. 이 밤에 고매하신 귀족 나리께서 빚쟁이 피해 야반도주하는


놈들처럼 숲을 헤매고 계신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칼튼의 적의는 명백했다. 그의 어조는 대놓고 비아냥거리고 있었고 그의 두 눈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신분을
의식해 존대를 쓰고 있지만 루이센을 얕보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아, 무섭다. 무서워 죽겠다.

루이센은 칼튼이 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자기 머리를 후려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반박했다.

“야반도주라니. 절대 아니네.”

“그러면 무슨 일로……. 아, 그건가? 달밤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사내 둘이?”

칼튼은 루이센에게 보란 듯이 저급한 손짓을 해 보였다. 칼튼이 웃음을 터트리자 병사들이 따라 웃었다.

“이놈들이! 공작님에게 무슨 무례냐! 천한 놈이 공작님을 모욕하다니!”

루거가 날뛰자 칼튼의 눈빛이 더 험악해졌다.

‘아, 좀, 조용히 좀 해 봐.’

루이센은 루거를 원망 섞인 눈으로 쳐다보았다. 칼튼도 진짜로 재밌어서 웃는 게 아니라고. 그는 그저 루이센의


자존심을 긁고 싶을 뿐이었다. 그 예로 눈이 안 웃지 않는가.

그리고 루이센은 모욕에 익숙했다. 회귀 전의 루이센이었다면 발끈했겠지만 지금의 루이센은 달랐다. 이보다 더한
모욕도 받아 봤고 더한 웃음거리도 되어 봤다. 때리지도 않고 말로만 괴롭히는 건 대수롭지 않았다.

“그것 역시 아니네. 나는 자네를 만나러 왔어.”

“저를요?”

“설마 숲에서 그런 식으로 만날 줄은 몰랐으나, 어쨌든 와야 할 곳에 와 만나야 할 사람을 제대로 만난 거네.”

칼튼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루이센이 도망치다가 우연히 잡혀서 딴소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괜찮아. 괜찮아.’

루이센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몰래 챙겨 온 흰 깃발을 꺼냈다. 아니에스 공작가를 상징하는 황금빛 밀이 수놓아진
깃발이었다. 그는 칼튼의 앞에 두 무릎을 꿇고 깃발을 받친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때와 같은 자세로.

고작 왕자의 대리인에게는 과한 감이 있긴 하지만 루이센에게 칼튼은 왕자의 대리인 이상이었다. 그에게 자신과
영지의 미래가 걸려있으니까. 루이센의 무릎 한 번에 말소리가 뚝 끊기고 정적이 감돌았다. 그 틈을 타 풀벌레가
소리 높여 울었다.

“로버트 아니에스와 타나 아니에스의 아들이자, 아니에스 공작, 그리고 황금 언덕의 주인인 나 루이센
아니에스는 위대한 청사자의 아들과 그 대리인 앞에 무릎 꿇고 자비를 구합니다.”

이번에는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경악에 빠진 막사 전체가 루이센과 칼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한 줄기 흐르고 칼튼의 말이 작게 투레질을 했다.
8화

“항복을 하시겠다고요? 제정신이십니까, 공작님?”

칼튼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웃음소리가 삐죽삐죽 날카로워 루이센의 뒷덜미를 콕콕 쑤셨다.

“이제 와 항복이라뇨. 그 잘난 목숨이 아까웠으면 진작에 성문을 열고 우릴 맞이하셨어야지. 댁이 뻗대는 바람에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개고생하는데. 지금까지는 그 잘난 이름만 대면 다들 납작 엎드려 드렸나 본데…….”

칼튼은 루이센의 어깨를 발로 툭툭 쳤다. 루이센의 몸이 크게 휘청, 휘청였다.

“아쉽게도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전쟁을 벌였으면 책임을 지셔야지, 영주님.”

칼튼이 기어코 검을 꺼내 들었다. 스르릉, 하고 울리는 소리에 루이센은 쭈뼛 몸을 움츠렸다. 그의 검 끝이


루이센의 코앞에 다가왔다.

“당신을 가장 먼저 죽이고 네 영지도 쓸어 주지. 나는 좋게 끝내는 법을 몰라. 내게 싸움을 걸어온 놈은 끝까지


조져야 맘이 풀린다고. 특히 너 같은 귀족 놈은 더더욱.”

이 미친놈 같으니.

루이센은 하얗게 질렸다. 그의 눈에 서린 분노는 진심이었고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도살자니, 학살자니 하는
별명이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귀족을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루이센은 떠돌면서 귀족을 증오하는 자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어느 한 사람이고
품고 있는 사연과 증오가 칼튼에 뒤지지 않았으나 그들은 동시에 귀족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칼튼에게는 그
두려움이 없었다.

‘이러다 진짜 죽겠어.’

루이센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뭐든 해야 한다. 무슨 말이라도. 아니, 아무 말이면 안 된다.


칼튼을 뒤흔들고 그가 분노를 억누를 무언가, 제대로 된 한마디를 해야 했다. 그리고 루이센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기적적으로 얻은 두 번째 기회를 멍청하게 날려 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어떻게 칼튼에게 목숨을 구걸할지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해 왔다. 숲길을 걷는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말을 가다듬었다.

다만, 칼튼은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고 앞뒤 없는 놈이었다. 아무리 적이라도 영주를 발견했으면 정중히 대접은
하지 않더라도 짐짝 취급은 안 하는 게 상식 아닌가? 그리고 항복을 했으면 말을 들어 보기라도 해야지 칼부터 빼
들어?
칼튼의 검이 움직였다.

생각해. 루이센 아니에스, 정신 차려, 생각해!

루이센은 자신을 채찍질했다. 하지만 머리가 새하얗게 질려, 많은 말 중에 딱 한 문장을 내뱉었다.

“내가 죽으면 자네도 죽어.”

아.

아, 이게 뭐야.

망했다.

완전 시비 거는 말이잖아?

“뭐?”

칼튼은 더 무시무시해졌다. 루이센은 끅, 하고 딸꾹질을 했다.

“하려던 말은 그게 전부입니까? 참 멋진 유언입니다.”

“아니, 아니!”

하려던 말이 맞긴 했다. 맞긴 한데, 칼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신중히 고른 단어로 만든 서두와 논리


정연한 중간 말을 다 날려 버리고 딱 저 한마디만 한 게 문제였다.

아, 왜 하필이면! 설명 다 하고 마지막에 멋지게 하려고 한 말인데!

수습을 해야 해. 지금이라도!

루이센은 칼튼이 뭐라고 할세라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를 죽여서 어쩔 셈인가? 1 왕자와 다른 귀족들의 분노를 자네가 감당할 수 있겠나?”

“어쩌긴요. 왕자님께 보고하고 시킨 일을 잘해 내었으니 상을 받겠지요.”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거 같나? 이 몸은 일대의 대영주. 나의 봉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아직도 공작님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 거 같습니까?”

“아니. 날 도와줄 귀족은 없겠지.”

씁쓸하지만 몸으로 겪은 일이었다. 아니에스 공작가의 봉신이라고 해도 왕자들의 왕위 쟁탈전과 내전으로 패가


갈린 지 오래다. 기세가 살아 있는 절반은 1 왕자의 편이었고, 2 왕자의 편은 힘을 잃어 루이센을 도울 형편이
못되었다.

“내 편은 없지만 자네의 적은 많지. 날 죽이면 그걸 빌미로 자네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그깟 귀족들이 뭐라고 한들 끄떡도 없습니다. 저는 왕자님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니까요. 1 왕자는 내가 누굴
죽이든 벌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잘난 귀족 놈이든 간에.”
“그래. 근데 그건 내전 중일 때의 이야기잖나.”

내전이 시작될 때, 1 왕자는 패배를 거듭하며 북부 요새까지 쫓겨났다. 다시 승기를 잡은 1 왕자는 강한 모습을
보여 자신의 세력에게 건재함을 과시하고 2 왕자를 따르는 귀족을 엄벌해야 했다. 칼튼의 잔인함은 양쪽 진영
모두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딱 알맞은 것이었다. 1 왕자는 일부러 칼튼의 행동을 방치했을 것이다.

“정신 차리게. 내전은 끝났어.”

“…….”

동요했다. 루이센은 투구 너머로 그의 눈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역시 상황이 빠르게 변하고


있음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천민의 아들에서 왕자의 최측근으로 빠르게 신분 상승을 한 건, 단순히 힘만 세서가
아닌가 보지? 그가 힘만 센 멍청이가 아니라면 루이센에게 더 유리했다.

“1 왕자는 순리대로 왕이 될 테고, 본인도 그걸 잘 알 테지. 귀족들은 그에게 더 이상 적이 아니야. 자신에게


충성과 재물을 바칠 신하들이지.”

내전이 끝나기 무섭게, 1 왕자는 이전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적 편에 섰던 귀족이라 해도
왕이 된 이상은 그저 신하일 뿐이었다. 절대 왕의 권위를 침범하지 못하며 충성과 세금을 바칠 아랫사람.

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죽일 듯이 싸웠어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손잡는 건 일도 아니다.


결혼도 하고, 인질도 교환한다. 그게 지배계급의 생리였다.

칼튼은 아군이고 적군이고 가리지 않고 원한을 샀으니, 귀족들은 똘똘 뭉쳐 칼튼을 제거하고자 할 것이었다. 내전
중일 때야 실력이 뛰어나니 두고 볼 테지만 이제 전쟁할 일도 없는데 천민이 감히 귀족에게 대항하게 가만두겠는가.
그동안의 수모를 갚고자 이를 득득 갈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 상황을 두고, 1 왕자는 칼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제거하기에는 재능이 아깝고, 힘들 때
도움받았다는 마음의 빚도 있고. 하지만 품고 가기에는 너무 잔인하고 난폭하다. 그 성정을 제어만 할 수 있으면
최고의 사냥개가 될 텐데.

“그래서 여기로 보낸 거야. 자네가 눈치껏 행동할 수 있는지, 자신의 분노를 자제할 수 있는지 보려고.”

“……왕자가 날 시험한 거라고?”

“그래. 그게 아니면 지금 자네를 왜 여기로 보냈겠나? 알다시피 우리 영지는 정예병이 전부 포로로 잡혀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상태야. 남부에 1 왕자 편에 선 귀족들의 사병만 움직여도 충분히 정리될 테지.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

“한마디로 자네가 물을 거 안 물을 거 구분하는 사냥개인지 그냥 미친개인지 시험하는 거라고. 나를 죽이면


자네도 죽는다는 건, 그런 의미라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루이센은 준비한 말을 마무리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듯하게 들렸을까?

칼튼에게 잘난 듯이 떠들긴 했지만, 사실 전부 루이센의 생각이 아니었다. 전부 떠돌이 시절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이야기와 성자님의 가르침을 조합해 만들어 낸 것이었다.
루이센에게 지금 보인 통찰력의 절반에 절반만 있었어도 그렇게 비참하게 안 살았을 거다. 루이센은 그만큼
머리가 좋지 못했다. 이마저도 평소 기억력을 생각하면 잊어버리고 남았을 말인데, 목숨이 걸린 일이라고
쥐어짜니 또 생각이 났다.

그리고 이건 루이센에 대한 시험이기도 했다. 1 왕자가 원하는 건 아니에스 공작가가 자신의 권위 앞에 납작


엎드리는 그림이었다. 그 가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떻게 처신을 할지, 왕이 된 자신에게 충성할 존재인지,
루이센도 시험해 본 것이다.

회귀 전, 칼튼과 루이센은 둘 다 거하게 실패했다. 두 사람 다 1 왕자의 상상을 뛰어넘어 최악의 수만 골라,


화려하게 인생을 말아먹은 것이다. 루이센은 전투 도중 야반도주했고, 그에 열받은 칼튼이 미쳐 날뛰면서 다
죽이고 다 불태웠고.

‘1 왕자도 우리가 이렇게 막 나갈 줄은 몰랐을 거다.’

그 탓에 1 왕자는 왕이 되자마자 대기근을 맞이해 죽을 듯이 고생한 걸로 알고 있다.

어쨌든 할 말은 다 했다. 칼튼의 반응은? 칼튼은…… 칼튼이었다. 그는 매우 짜증을 내며 빈정거렸다.

“그렇게 왕자님의 의중을 잘 아시는 분이 농부를 끌어모아 수성전을 펼쳤습니까? 이 수확 철에?”

“그건…… 내부적인 사정이 있었어.”

루이센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니까. 미래를 보고 와서 마음을 바꾸었다는 말을 하면 저


솥뚜껑 같은 손에 목이 졸리고도 남겠지.

“하, 내부 사정. 그것참 속 편한 소리십니다? 주절주절 길게 말하면 아, 그러십니까, 할 줄 알았습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저도 빈손으로 갈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이렇게 길게 말했는데! 자신의 인생에 두 번은 불가능할 정도로 조리 있게 설명했는데! 전혀 안 들어 먹자


루이센도 슬슬 열이 받았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하면 생각하는 척이라도 좀 해라!

“그럼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지?”

“뭐요?”

“너도 네 입지가 불안한 걸 느끼니까 왕자한테서 떨어져 남부까지 온 게 불만인 거 아냐? 그래 놓고 이유 모르게
찜찜하니까 괜히 사냥이나 하면서 시간 끌고.”

“내가? 내가 불안하다고?”

“내 말을 못 믿겠으면 여기서 내 목을 잘라 보든가. 다가올 신년에는 네놈 목이 성벽에 걸릴 거다.”

“이게 진짜!”

칼튼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영주님! 하는 루거의 외침과 허어억, 하고 경악하는 소리가 멀리 퍼졌다.


루이센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칼튼의 투구의 작은 틈, 그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을 노려보았다.
9화

칼튼은 검을 든 채로, 루이센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파란 눈동자는 겁에 질려 있었으나 아무 의혹도 없이


무고했다. 누군가를 속이려는 눈동자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루이센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튼의 가슴을 후벼팠다. 칼튼이 어렴풋이 느끼는 불안과 위화감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루이센이 한 말 중에 어느 것 하나 반박할 말이 없어 더 화가 났다.

“젠장!”

칼튼은 검을 땅에 집어 던졌다.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루이센은 텅 빈 자루처럼 쭈글쭈글 몸을 구부렸다.

헉. 살았다.

루이센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칼튼은 땅을 걷어차고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투구마저 벗어 던졌다.

상상보다 훨씬 더 잘생긴 외모에 루이센은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검은 투구 아래 저렇게 미끈한 얼굴이


있을 줄이야. 특히 끌로 깎은 것 같은 거친 느낌의 턱선이 그의 사나운 눈초리와 잘 어울렸다. 검은 머리칼이
땀에 젖어 흐트러져 있었는데 깔끔하진 않지만 그래서 더 야성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다시 합시다.”

칼튼은 턱짓으로 루이센의 손을 가리켰다. 루이센은 그때까지도 손에 꽉 쥐고 놓치지 않았던 흰 깃발을


바라보았다.

“아.”

다시 말이지.

루이센은 다시 무릎을 꿇고 깃발을 높이 바쳤다. 자비를 구하는 말을 두 번 반복하진 않았다. 말할 새도 없이


칼튼은 뺏어가듯이 깃발을 낚아채 갔다.

그리고 칼튼은 흰 깃발을 들어 올리며 승리를 선언했다. 막사가 떠나갈 듯이 병사들이 환호하고 그에 맞춰 횃불이
하늘 높이 타올랐다. 루이센은 무릎을 꿇은 채로 밤하늘에 나부끼는 흰 깃발을 바라보았다. 깃발에 수놓아진
황금색 밀알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

매우 간소한 항복 절차를 마친 뒤에는 일사천리였다. 칼튼의 군대는 능숙하게 짐을 꾸리고 천막을 철거했고,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군사들을 정렬했다. 순식간에 정리가 끝나고 칼튼의 군대는 공작성을 향해 진군했다.

칼튼은 가장 선두에서 군사를 이끌었다. 그의 곁을 따라가던 부관이 걱정스레 물었다.


“이렇게 가도 정말 괜찮은 걸까요?”

“첩자의 말대로라면 함정은 아니니까.”

“그렇다고는 합니다만…….”

미리 공작성에 깔아 둔 첩자와 염탐꾼의 말에 의하면, 공작성 쪽은 성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차 다른 함정을


꾸릴 여력이 없다고 했다. 루이센이 함정을 파고 항복하는 척했을 가능성은 여러모로 검토해 봐도 낮았다.
그럼에도 칼튼의 부관이 걱정하는 것은 그만큼 지금 상황이 이례적이기 때문이었다.

귀족들만큼 쓸데없는 절차에 집착하는 이들이 또 있을까. 성이 함락되고 나서 더 도망칠 곳이 없더라도, 꼬박꼬박
하인과 기사들을 앞세우고 멋지고 위대한 척은 다 하면서 항복 선언을 하는 게 귀족이었다. 그런데 하인 하나
달랑 데리고 무릎부터 꿇다니?

부관은 믿기지 않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루이센이 느리게 말을 몰며 따라오고 있었다. 빛에 그을리지 않은
매끄럽고 흰 피부와 밝은 금발 머리는 더러운 몰골을 하고 있음에도 빛이 났다.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그는
급할 것 없다는 듯이 느긋했다.

저런 여유라니. 과연 대영주라는 건가.

“아니에스 공작이라면 호구에 망나니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 또 귀족은 귀족인가 봅니다. 저런


느긋함이라니.”

“재수 없는 놈.”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저 여유는 뭐란 말인가. 칼튼은 짜증을 내며 루이센을 노려보았다.

‘윽, 내가 또 뭘 잘못한 건가? 그만 쳐다봐.’

루이센은 울고 싶었다. 왜 자꾸 자기를 노려보냔 말이다. 말을 타는 것만도 힘들어 죽겠는데.

사실 루이센은 말을 더럽게 못 탔다. 느긋해 보이는 것도 속도를 내려야 낼 수가 없어서였다. 당당한 자세도
그저 말에서 안 떨어지려고 온몸에 힘을 주고 뻣뻣하게 버티고 있는 거고.

그러나 승마는 귀족의 기본적인 소양. 귀족 하면 말에 타고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떠올리는
칼튼과 그의 일행은 차마 루이센이 말을 못 타서 저러는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물론 루이센의 그럴싸한 외모
역시 착각에 단단히 한몫했다.

‘젠장. 일단 패고 말을 듣는 건데.’

칼튼은 아니에스 공작령으로 올 때부터 기분이 나빴다. 내전의 뒷수습이 끝나지 않았건만 1 왕자의 주변은 이미
다 끝난 분위기였다. 공을 나누고 상을 나누느라 시끌시끌했다. 호형호제하던 놈들이 서로 물어뜯고, 사지를
찢어 죽이니 뭐니 욕을 해 대던 놈들이 친척이랍시고 편을 들어준다. 물론 대놓고는 아니고 물밑에서.

그런 난장판이 벌어지는 와중에 귀족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칼튼의 앞날에 재를
뿌리는 일이었다.

감히 천민 놈이 주제도 모르고 덤벼!?


딱 이 심리였다. 아직은 칼튼의 공이 크고 1 왕자가 그를 아끼니 대놓고 말하진 못하지만 삶아 먹을 차례라는 둥
돌려 돌려 비아냥거리곤 했다. 전쟁 중에는 칼튼이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쳤던 것들이 이제는 자신을 조롱했다.

열이 받는데 확 뒤집어엎을 수도 없고.

이런 상황에서 아니에스 공작령을 진압하러 남부로 보내진 일은 화를 부채질했다. 1 왕자 옆에 딱 자리를 잡고


공을 하나라도 더 인정받아도 모자랄 판인데. 귀족 놈들이 1 왕자에게 자신에 대해 어떻게 이간질을 해댈지
머리가 다 아팠다.

귀족들은 수도에서 등 따숩고 배부르게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동안, 천민인 자신은 그 뒤치다꺼리나 하라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내가 귀족이었으면 이런 취급을 받았을까. 이제 내전이 끝났으니 천민은 꺼지라는 건가.
시시때때로 자격지심도 들었다. 1 왕자가 직접 명을 내렸으니 거부할 수도 없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아니에스 공작령을 박살 냄으로써 자신의 건재함을 널리 알리자 싶었다. 어지간한 귀족들보다
더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에스 공작이란다. 그자를 굴복시킴으로써 자신을 무시하기 시작한 귀족들에게 공포를
각인시키자고 결심했다.

그런데 막상 성문을 앞에 두자 영 찜찜한 거다.

너무 쉬운데, 쉬우면 좋은 건데, 뭔가 마음이 좀 그래. 왜 그러지?

고민을 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고, 왠지 모를 거부감에 하루면 끝날 전투를 질질 끌고 있는 형편이었다.


지휘관이 되어서 전투는 내팽개치고 밤중에 사냥을 하고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시간을 끌 겸, 답답한
속도 풀 겸.

그 답을 숲에서 잡아 온 루이센 아니에스에게서 얻을 줄은 몰랐지. 자신도 몰랐던 속내를 제대로 찔린 셈이라,


칼튼은 더더욱 기분이 나빴다.

루이센 아니에스가 어떤 놈인가!

2 왕자에게 끌려다니다가 반역자 신세가 된 저 멍청한 놈이었다. 차라리 제대로 줄이나 서서 자기 이득을
챙겼으면 몰라. 2 왕자에게 호구 잡힌 것처럼 물자와 병력을 대다가 다 잃었다.

더군다나 수도에서 망나니 행세를 하느라 봉신의 맹세를 한 영주들이 각자 딴 왕을 모시겠다고 나설 정도로
통제력을 상실했다. 그럼 수도에서라도 자기 기반을 만들어 뒀어야 하는데, 이 지경이 되도록 감싸 주는 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탯줄 잘 잡고 태어난 망나니라는 평판에 멍청한 호구라는 평가가 더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공작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아니 공작에게 자식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쥐도 새도 모르게 길거리에서
비명횡사했을 놈.

그게 루이센에 대한 칼튼의 평가였는데…….

‘저런 놈도 아는 걸 내가 몰랐다니.’

루이센의 이야기는 이 시점의 칼튼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전쟁은 끝났다. 1 왕자는 왕이 될 것이고 젊은 왕이
북부에서 주워 온 용병과 오랜 봉신 관계인 귀족들 중에 누구를 우선시할지는 논의할 가치도 없는 문제였다.
루이센의 지적은 칼튼의 방심한 옆구리를 쿡 찌른 것과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더 짜증 났다.
세상 사람들은 귀족을 푸른 피가 흐르는 고귀한 존재라고 말한다. 같은 사람이지만 차원이 다른 특별한
자들이라고. 그래서 그들이 군림하는 것이 당연하며, 자신 같은 천민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하는 거라고.

칼튼은 모든 인생을 걸고 그 말을 부정해 왔으나, 이번만큼은 루이센의 통찰력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저런 호구


새끼도 아는 걸, 이 몸은 생각지도 못하다니. 실컷 사람을 도발해 놓고 저 느긋함이라니. 저게 푸른 피의
위대함인가?

‘그럴 리가 없어. 어쩌다 운이 좋았던 거겠지. 쓸 만한 조력자가 있었거나.’

칼튼은 절대 자신이 루이센보다 못하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에게 설득당해 항복을 받아들인 게
사실이니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그냥 무시하기엔 너무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마치 수도 상황이나 이 뒤에
벌어진 일들을 눈으로 본 것처럼.

‘……두고 보자.’

이 불쾌함은 반드시 갚아 줄 테니. 칼튼이 이를 갈고 루이센이 왠지 모를 한기에 부들부들 떠는 사이 성문에


가까워졌다. 칼튼은 군대를 멈추게 하고 공작성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성벽 위는 칼튼의 군대가 물러가 휴식을 취하는 분위기였다. 난데없이 등장한 칼튼의 군대에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푸른 사자의 깃발 옆에 황금 밀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저게 왜 저기 있어?

그리고 깃발에 이어, 루이센을 발견했다.

영주님이 왜 거기서 나와?

성 위에서는 윗사람을 불러와라, 뭐 어째야 하냐, 금방 난장판이 되었다.

“저놈들 진짜로 놀란 거 같은데요?”

부관이 말했다.

“연기 같지 않아요. 너무 어수선하고……. 진짜 영주가 항복하러 온 걸 몰랐던 모양입니다.”

칼튼도 성벽 위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부관의 말에 동의했다.

“내부에 문제가 있다더니, 진짜였나 보군. 항복은 영주의 독단이야.”

“공작이 가신들을 무서워하는 거 같습니다. 성안에서 입지가 없나 본데요?”

그렇다고 맨몸으로 숲을 가로질러 항복을 하러 와? 이거 막장도 그냥 막장이 아닌데?

“돌아가는 꼬라지 한번 볼만하겠어.”

“이렇게 되면 공작이 배신자가 되는 거 아닙니까? 따로 공작을 격리해 둬야 하는 건 아닐지……”

“내버려 둬. 죽이기야 하겠어?”

잘난 척한 대가를 치르라고, 공작. 칼튼은 심술궂게 웃었다.


10 화

***

이틀간의 전투가 허무할 정도로 칼튼의 군대는 간단히 공작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의 주인인 루이센이 앞에
서서 손짓을 하자, 아무리 위협을 해도 열리지 않던 성문이 스르륵 간단히 열렸다.

성벽 위의 사람들은 루이센이 왜 성 밖에 있는지, 적들과 같이 나타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으나 영주가


성문을 열라는데 열 수밖에 없었다.

칼튼의 군대는 성에 들어가자마자, 능숙하게 병사들의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성을 장악했다. 애초에 병사들의
대부분은 농민병이었다. 성문이 열리자 경악하며 도망치기 바빠 손을 쓸 것도 없었다.

가신들은 외성에서 달려온 전령의 소식을 듣고, 내성의 문 앞에 모여 있었다. 칼튼의 환영이라기보단 사실상
루이센을 잡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잠시 대화를 나눌 시간을 드리지요.”

칼튼의 친절한 제안에 루이센은 하얗게 질렸다. 잘난 척하던 뻔뻔한 기세는 어디로 가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
표정이었다. 툭 치면 꽤애액, 하고 울 것 같았다. 칼튼이 그 모습을 기쁘게 감상했다.

‘아, 제발!’

허튼짓 못 하게 영주와 가신들을 분리해 두는 게 상식 아니냐고!

그러나 칼튼이 무서워서 항의도 한마디 못 하고, 어버버 하는 사이 그는 가신들과 함께 회의실로 밀어 넣어졌다.
루이센은 쭈뼛거리며 돌아섰다.

회의실은 끔찍한 정적으로 가득 찼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것처럼, 공작성의 가신들이 모두


자신만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이 루이센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루이센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리고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입을 뗐다.

“항복했다네.”

“미치셨습니까?”

평소에도 입이 가벼운 재무관이 소리를 질렀다. 소리만 지르지 않았을 뿐, 사람들의 반응은 다 비슷했다.
제정신이야? 미쳤어? 영주가 돌아 버렸어! 말은 하지 않아도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럼 이제 우리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반역자로 찍히지 않았습니까? 그냥 넘어가진 않겠지요.”

“저 잔악무도한 놈을 보낸 이유가 뭐겠습니까? 공작가에 생존자를 남겨 두지 않고 끝내겠다는 겁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항복을 하신 겁니까!”

기사단장이 속이 터진다는 듯 주먹을 꽉 쥐고 가슴을 내리쳤다. 검과 갑옷을 빼앗겨 볼품없는 기사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여린 하인들은 끔찍한 최후를 떠올리며 눈물을 지었다.

“걱정할 거 없어. 우리는 모두 무사할 거네.”

“어떻게요?”

재무관이 물었다.

“1 왕자가 바라는 건 공작가의 멸망이 아니니까.”

루이센은 칼튼에게 했던 설명과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1 왕자가 칼튼을 이곳에 보낸 이유,
루이센을 시험하려 한다는 것 등.

“그래서 칼튼 경에게도 합의를 받았네. 공작령 내에서 절대 약탈은 없을 거고, 우리 영지민들을 괴롭히지도 않을
거야.”

“정말입니까?”

약탈이 없다는 말에 재무관이 놀랐다. 군대를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재물이 들어가기 때문에, 어지간히 부유한
가문이 아니고서는 약탈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다. 특히 칼튼처럼 용병 출신들은 강도나 다를 바가 없이
인정사정없기로 유명했다.

“칼튼은 왕자의 명에 따라 1 왕자의 편에 서지 않은 남부 영주들의 충성맹세도 받아 내려고 하고 있어. 우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니, 그쪽도 생각이 있다면 조심할 거야.”

루이센의 주장에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답지 않은 영민한 모습에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호의적인 집사는 감탄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의심을 먼저 했다.

듣기에 그럴듯하긴 한데, 말한 사람이 루이센이라서 문제였다.

‘영주님이 저렇게 똑똑한 말을 할 리가 없는데…….’

‘저 말을 믿어도 되는 거야? 저 망나니가 아무 말이나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공작가의 가신들은 루이센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일 년에 한 달도 제대로 영지에 머무르지 않는 영주다. 영지


일은 나 몰라라 하고 놀아나기 바쁜 영주. 가만히 있으면 좋을 텐데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고도 모자라,
정치에 잘못 발을 들여서 조용한 가문을 내전의 소용돌이에 내던지지 않았나.

그럼에도 가신들은 아니에스 공작이라는 위치를 존중했기에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루이센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영지를 이끌어온 총관을 바라보았다. 그는 루이센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시선이 쏠리자, 총관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공작님의 판단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미 성문은 열렸고 칼튼의 병사들이 성을 장악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처분을 기다리는 일뿐이지요.”

“아니, 총관님. 그렇다곤 해도…….”

“아니면 별수 있습니까?”

총관은 루이센의 말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불안한 기분으로 루이센은 총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실망했습니다. 영주님.”

루이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루이센에게 총관은 그냥 가신이 아니었다. 그의 스승이었으며 아버지 대신인
존재였다. 그의 통제가 지긋지긋해서 엇나가는 한편으로는 그를 실망시키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도 총관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아팠다.

“제대로 된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벌이시다니요.”

“미안하네…….”

“항복을 하더라도 공작가의 격에 맞는 절차가 있는 법입니다. 그걸 다 무시하고 홀로 적진으로 가 무릎을


꿇으셨으니,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겁에 질려 가문의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고 하겠지.”

“그걸 아시는 분이…… 일을 저지르셨습니까?”

총관은 솟구치는 화를 참으려는 듯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언제나처럼 차분한 어조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제가 누누이 가르쳐 드렸지요. 뭘 하든, 아니에스 공작가의 명예를 생각하시라고.”

“그랬지…….”

루이센은 웅얼거렸다. 총관의 앞에 서면 언제나 열 살짜리 어린애가 되는 기분이었다. 총관은 루이센의


망나니짓도 무심함도 탓하지 않았으나 딱 하나, 공작가의 명예에 관한 일에는 양보가 없었다.

공작령은 왕국민을 먹여 살리는 곡창지대였다. 이곳에서 나는 밀이 없이는 왕국은 버틸 수 없었다. 아니에스


공작가는 한 번도 침범을 받지 않고 왕가보다 더 오래 이 땅을 통치해 왔다.

총관은 이 땅을 사랑했고, 그만큼 아니에스 공작가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자기 인생을 공작가에
바쳤다는 걸 알기에 루이센도 그의 앞에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자신은 영주로서 가장 옳은 선택을 한 거다. 총관의 마음이 상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명예니 자존심이니 하는 것들이 목숨을 구해 주진 않아.”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망나니짓으로 허송세월을 하셨습니까?”


“…….”

“그냥 살고 싶으셨다고 솔직히 말씀하세요. 영지를 위했다는 핑계를 대시지 말고. 열여섯 살 이후로 한 달이라도
제대로 영지에 머무르신 적이 있습니까? 수도의 친구분들과 촌 동네 따위는 가기 싫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총관의 말에서 오랜 시간 쌓아 온 섭섭함이 느껴졌다.

‘내가 그런 말까지 했나?’

루이센은 할 말이 사라졌다. 솔직히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야반도주하기 이전은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이 흐릿했다.
물에 물 탄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대로 재미만 쫓아 살았던 탓이다.

“말싸움은 그만하고 해산합시다. 총관님의 말씀대로 이제 우리는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니.”

재무관이 중재를 하기 위해 나섰다.

“영주님의 판단이 맞기를 빕시다.”

“허, 참. 우리가 어쩌다 용병 놈의 지시나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는지!”

총관은 끝까지 루이센에게 실망한 것을 숨기지 않고 떠났다. 기사단장은 앞서서 나갔고 재무관은 루이센과 총관의
사이에서 눈치를 봤으나 이내 총관을 따라나섰다. 각 기관의 장들이 회의실을 나가자 나머지 사람들도 하나둘
그의 뒤를 따라 회의실을 나섰다.

그들은 루이센에게 뾰족하고 적대적인 시선을 보냈다. 한숨을 쉬거나 작게 욕설을 지껄이는 이도 있었다.
루이센이 영주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배신자라고 돌팔매질을 당했을 분위기였다.

“괜찮으십니까, 영주님?”

집사가 남아 루이센을 위로했다.

“다들 공작가와 영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그렇습니다. 정복당한 것이 남부 역사상 처음이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는 거죠. 차차 영주님을 이해할 겁니다.”

“……고맙네.”

루이센은 한숨을 내쉬었다. 위로를 하는 집사도 영주로서 루이센의 판단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루이센의
행동에 대한 분노보다는 그에 대한 연민이 더 강해서 참는 거지.

‘과거가 제대로 발목을 잡는구나.’

다 자업자득이다. 그러게, 누가 망나니짓을 하고 살래. 이래서 사람이 평소에 착하게 성실하게 잘 살아야 한다고
하는구나.

루이센은 아무도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속이 상하긴 했지만, 담담히 받아들였다. 대충 이렇게
될 줄은 알았다. 각오한 것보다 더 속이 쓰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해 온 일이
있는데 못 믿는 게 당연하지.

그래도 괜찮았다. 어쨌든 가장 후회하던 최악의 밤은 어느새 지나갔고, 새로운 아침이 왔으니. 이제 불행한
미래는 사라졌다. 더는 비참하게 떠돌지 않아도 되고 영지민들을 죽게 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터였다.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다.

창밖을 바라보자, 아침 햇살 아래 공작성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펼쳐진 밀밭은 수확 철을 맞이하여


어느 때보다 황금빛으로 무르익고 있었다.

***

공작성이 함락당한 그날, 공작가를 상징하는 황금 밀 깃발 옆으로 푸른 사자의 깃발이 내걸렸다. 그와 동시에
공작가가 패배했다는 소식은 남부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누구도 아니에스 공작의 승리를 점친 사람은 없었다. 항전을 선택한 아니에스 공작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러나 막상 공작가에 푸른 깃발이 걸린 모습을 보자 남부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 위상이 예전만
못하더라도 아니에스 공작가는 여전히 남부의 지배자였던 것이다.

1 왕자의 대리인이라지만 천민 출신 용병에 불과한 칼튼. 그런 자에게 무릎을 꿇은 공작의 심정은 어떤가? 앞으로
공작가와 이 남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많은 사람이 공작성을 주시했으나 공작성에서는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칼튼과 그 부하들은 놀라울 정도로 노련한 솜씨로 공작성을 장악하고, 공작성의 모든 병력을 무력화시켰다.
그들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출입을 일제히 금지했다.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거야.”

“그 칼튼이잖아. 공작성에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을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지 모르겠어.”

“그럼 공작은 어떻게 되는 거야?”

사람들은 지옥도가 펼쳐졌을 것을 예상했다. 칼튼과 그의 군대는 그만큼 악명높았다.

“살아는 있겠지만…… 대영주의 자존심에…… 살아도 사는 게 아니겠지.”

이 부분만큼은 다들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루이센의 처지를 동정하기도 하고, 이런 상황까지 끌고
온 그를 멍청하다고 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루이센이 더없이 절망적이고 비참할 거라는 의견에는
다 동의했다.

11 화

2 장.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공작성의 구석. 외진 곳에 위치한 손님방 앞에 루거가 섰다. 문을 지키고 선 병사가 루거가 들고 온 쟁반을
검사했다. 그러는 동안 루거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센은 자신이 쓰던 영지에서 가장 좋은 방, 즉 영주의 방을 칼튼에게 뺏기고 여기로 쫓겨났다. 본인의 말로는
칼튼에게 양보한 거라는데, 대부분 하인의 눈에는 쫓겨난 것으로 보였다.

‘어쩌다 대 아니에스 공작의 신세가 이렇게…….’

병사가 검사를 끝내고 문을 열었다. 루거는 고개를 까딱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루이센은 벌써 일어나 시중도
없이 옷을 갈아입고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루이센은 언제나 최고급 물건들에 둘러싸여 수십 명이나 되는 하인의 시중을 받던 사람이었다. 비싸고 귀한 게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았다. 당연히 수도의 저택도 세련되고 화려했다. 영주의 방도 다소 세련된 맛은 떨어지지만
공작의 품격에 맞는 고상하고 예스러운 멋이 살아 있었다.

‘그에 비해 이 방은…….’

방은 넓고 깨끗하지만 가구는 낡았고 장식들은 촌스러웠다. 휑하고 허전한 게 꼭 빈 창고 같아서 더 허름해


보였다.

거기다 시중드는 하인도 없었다. 공작성의 하인들은 전부 칼튼과 그 부하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데 바빴다. 루거
한 사람이 남아 루이센의 시중을 들긴 하지만, 여러 명이서 나누던 일을 혼자서 하려니 루거는 식사를 제때
챙기고 방을 깨끗이 유지하는 것만도 힘이 부쳤다. 그러다 보니 루이센은 알아서 직접 물을 떠다 세안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필요한 것을 스스로 챙겼다.

하인이 옷 시중을 들지 않으면 잠옷을 입은 채로 하루 종일 기다리고, 손가락 까딱도 안 하던 루이센을 기억하는


입장에서는, 알아서 하는 모습이 어찌나 처량 맞아 보이는지 모른다.

‘하……. 공작님이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어서는…….’

루거는 식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식사의 질도 전만 못했다. 빵과 스프, 야채 요리와 고기 요리 하나. 수도의
가난한 남작도 이보다는 더 잘 먹을 텐데. 너무나 달라진 루이센의 생활에 시중드는 루거마저 비참해질 정도였다.
집사는 루이센만 생각하면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루이센은 달랐다.

“오늘도 진수성찬이야!”

그는 전과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식사를 기쁘게 맞이했다. 루거는 어이가 없어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할 말이라도 있어? 먹으면서 들으면 안 되나? 나 배고픈데.”

긍정적이라고 해야 할지, 속이 없다고 해야 할지. 가장 자존심이 상하고 비참해야 할 당사자, 루이센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아니에요. 드세요.”

“응.”

루이센은 밝게 대답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우선 빵을 크게 잘라 와앙 하고 입안에 밀어 넣었다. 우적우적 빵을


씹다가 뜨끈한 스프를 한입 먹었다. 그런 다음에는 차분히 야채 요리와 고기 요리를 공략했다. 그는 진심으로
행복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공작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잘 먹었지……?’

루거가 기억하는 루이센은 뭘 먹든 항상 시큰둥했다. 왕실 요리사가 야심 차게 만든 음식을 먹을 때도, 십 년에


한 번 난다는 귀한 재료로 만든 요리를 먹어도 감탄하는 꼴을 못 봤다. 그만큼 입도 짧아서 저택의 요리사들이
무척 마음고생을 했었는데……. 지금은 소금 간 한 게 전부인 닭 다리를 연골까지 씹어 먹고 있었다.

‘세 시간 전에 입이 심심하다고 사과 세 알을 먹어 치운 분이…….’

이럴 때 보면 꼭 자신이 모시던 영주님이 아닌 것 같았다. 사고 안 치고 술도 안 하고 얌전히 있는 것이야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해를 한다지만, 속에 거지가 들어앉은 것 같은 이 변화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폭식으로 심리적 압박감을 해소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렇게 충격이 컸던 걸까. 루거는 착잡하게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루거가 무슨 오해를 하는지는 상상도 못 한 채, 루이센은 그저 밥이 맛있어서 행복했다.

‘역시 빵은 여기 게 제일 맛있어.’

벽돌처럼 딱딱하고 거친 빵도 없어서 못 먹었는데. 밀만 써서 만든 흰 빵은 입안에 물고만 있어도 사르르 녹을


정도로 부드러워서 황홀할 지경이었다.

‘최고야. 항복하길 잘했어.’

그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되면 루거가 갓 만든 따듯한 밥을 가져다준다. 손만 뻗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게 테이블에는 과일이


놓여 있다. 먹고 싶은 건 말만 하면 되고, 루이센은 가만히 앉아 받아먹기만 하면 됐다.

방이 허름하다고 루거는 한탄을 하지만, 지붕도 있고 벽도 있고 난방도 되는 침실은 루이센에게 궁전 같기만 했다.
헛간에서 하룻밤 자고 가려면 집주인에게 온갖 아양을 다 떨어야 했는데. 자다가 서리를 맞을 일도 없고
들개에게 습격당할까 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필요도 없다.

부드러운 침구에 몸을 둘둘 말고 자면 다음 날 어찌나 개운한지 몸이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이 모든 혜택이


공짜였다. 루이센은 아무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아니에스 공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대접을 받았다.

과거에는 숨 쉬듯이 당연하게 누리던 것이 너무나 새롭게 다가왔다.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아 얻은 것이라서일까,
더욱 우쭐하게 되었다.

한창 식사를 하는데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칼튼의 병사가 나타났다. 루이센은 숟가락을 든 채로
얼어붙었다. 설마. 또? 행복한 시간은 이걸로 끝인가?

“공작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십니다.”

“식사 중인데…….”

“지금 바로, 지체 없이 오시랍니다.”


“……알겠네.”

루이센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루거가 준 물그릇에 손을 씻었다.

“부른다고 꼭 이렇게 밥 먹다 말고 달려가야 합니까? 맨날 밥 먹을 때 불러내는데,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니에요?”

루거가 작게 속닥거렸다. 루이센도 좀 동의했지만 그렇다고 밥을 마저 먹고 가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가야 해.”

루이센은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뜨끈뜨끈한 음식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를 두고 갈 거야? 정말? 이라고 반쯤 발라 먹은 닭다리가 애틋하게 루이센을 불렀다. 내가 남기고 가면 이


멀쩡한 음식들이 그대로 버려질 텐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래도 가야 했다.

“안 가면 칼튼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루이센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

비명과 울음소리가 넘칠 거라는 세간의 예상과 다르게 공작성 안은 조용했다. 루이센이 항복 당시 한 이야기가
칼튼에게 어떤 깨달음을 남긴 모양이었다.

칼튼은 부하 관리를 철저하게 하면서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도록 매사에 주의를 했다. 어찌나 군기가 세던지,
가끔 들리는 칼튼의 호통 소리에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까지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칼튼의 병사들은 대부분 용병 출신이라 거칠고 잔인하긴 했지만 통솔은 잘되었다. 그들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집사의 말을 듣자 하니, 간혹 혈기 넘치는 하인들과 시비가 붙는다고는 하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실랑이 정도라고 한다.

이로써 지금까지 칼튼의 점령지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건들이 칼튼의 병사들이 통제가 안 되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칼튼의 허락 아래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지난 일을 부러 항의할 사람은 없었다. 남의 영지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

루이센은 칼튼이 집무실로 쓰고 있는 방에 도착했다. 공포와 걱정으로 그의 마음은 불안하게 떨려 왔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후하, 후하. 심호흡을 했으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문을 열까요?”

“그래.”

열라고는 했지만 정말 죽을 것같이 무서웠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루이센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칼튼은 한창 책상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는 루이센이 들어오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중 나올 것도


없는 거리인데 성큼성큼 다가와 반갑게 루이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싸자 루이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심장이 아파.

그러거나 말거나 칼튼은 루이센을 끌고 가 소파 상석에 앉히고 자신은 대각선 방향의 낮은 위치에 앉았다.

“오셨습니까, 공작님. 갑자기 불러서 죄송합니다.”

“예, 뭐…….”

“제가 배운 것이 많이 없어 시도 때도 없이 영주님의 조언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세요.”

칼튼의 태도는 흠잡을 데 없이 정중했다. 그는 루이센을 윗사람으로 대하며 존중을 보였고 꼬박꼬박 존대를 했다.
루이센의 어색한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웃음과 친근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 점. 바로 그 점이 루이센은 무서웠다.

‘언제 또 돌변할지 몰라.’

며칠 전, 루이센이 항복한 그날 밤의 일이었다.

칼튼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고 루이센도 초대했다. 갈까 말까. 자신이 끼기 애매한 자리였지만
초대를 거절했다가 칼튼에게 불만이 있다는 뉘앙스를 풍길까 봐 조심스러웠다. 다른 가신들은 모두 안 갈 테니
자신이라도 참석하여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고민하던 루이센은 연회에 참석했다.

칼튼의 승리를 드높일 놀림거리쯤, 얼마든지 되겠다. 그렇게 마음의 각오를 하고 갔는데 의외로 칼튼은 루이센을
깍듯이 대접해 주었다. 칼튼의 부하들도 조심스러워하면서 루이센의 비위를 맞추어 주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 처음에는 조심하고 경계했으나 연회 음식은 전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맛있었고 고급술은
입에 착착 감겼다. 그렇게 조금씩 긴장이 풀어지고 경계가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연회의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그런 와중에 칼튼이 루이센에게 다가왔다.

12 화

“한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공작님.”

“어, 그래.”

칼튼은 웃으며 루이센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이렇게 공손한 칼튼을 보고 있자니 루이센은 새삼 자신이 오늘 아주
큰 일을 해냈다는 걸 깨달았다.
병에 걸려 죽고 과거로 돌아오고 몇 번이나 죽을 뻔한 끝에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던 일을 바로잡고. 그 무서운
칼튼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힘으로 그 모든 걸 해냈다는 성취감이 루이센을 우쭐하게 만들었다.

성자의 말대로 칼튼은 귀신도 괴물도 아닌 그냥 사람, 평범하지는 않지만 사회의 규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흔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죽일 듯이 분위기 잡을 때는 언제고 공손히 술을 따르고 있고. 아주 솔직히 말하면 약간은
그가 우스웠다.

‘칼튼도 별거 아니었네.’

루이센이 스치듯 그렇게 생각한 순간, 칼튼이 웃음기를 싹 지우고 얼굴을 굳혔다. 그의 눈에 화산이 터지듯이
분노가 번져 나갔다. 어? 루이센이 뭔가 반응하는 것보다는 칼튼의 손이 더 빨랐다. 칼튼은 루이센의 멱살을
잡아 들어 그대로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쿵!

상이 두 쪽으로 부서지면서 그릇들이 와장창 깨졌다. 멀쩡한 상이 부서질 정도이니 루이센의 몸에 와 닿는 충격은
엄청났다. 루이센이 갑작스러운 고통에 낑낑댔다. 갑자기 왜 아픈 건지 뭐가 벌어진 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칼튼이 무표정한 얼굴로 루이센 머리에 술을 부었다.

“으윽, 이게 무슨, 무슨 짓인가? 내가 누군 줄 알고.”

“아니에스 공작님이시죠. 잘나신 대영주님.”

“그걸 아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샹들리에의 화려한 불빛은 칼튼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웃음기를 지워 낸 칼튼의 눈에는 강렬한 혐오와
살의만 남아 있었다.

“야, 나는 너 같은 놈만 보면 사지를 찢어 버리고 싶어. 어쩌다 귀족으로 태어나서 평생 떵떵거리고 살면서 날


무시하는 놈들 말이야. 내가 너 같은 놈들 족치고 싶어서 용병이 됐거든?”

내전으로 이름을 날린 용병다운 말이었다. 칼튼이 전쟁터에서 귀족 머리통을 깨는 걸 보고 1 왕자가 데려다


썼다더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다.

그걸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루이센은 그저 무서웠다. 사실 칼튼이 자길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루이센은 속수무책이었다. 어느 누구도 루이센을 구해 줄 수 없었다.

시중을 들던 하인들은 어느 순간 사라졌고, 칼튼의 부하들은 가만히 칼튼만 보고 있었다. 칼튼이 명령을 내리는
순간, 저들은 언제 하하호호 웃었냐는 듯이 칼을 빼 들어 과거의 학살을 반복하겠지.

“그래도 내가 지금 공을 세워 둔 게 아까워서 참고 잘해 보려고 하거든?”

칼튼의 손이 루이센의 목을 쥐었다. 그의 손은 거칠고 단단하여 루이센의 가느다란 목쯤은 가볍게 비틀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손아귀 안에서 루이센의 심장박동이 쿵쿵, 하고 울렸다.

귀족 도살자!
상대는 칼튼이었다. 루이센이 평생토록 도망쳐 온, 언젠가 자신을 죽이러 올 검은 기사.

루이센의 몸이 덜덜덜 떨렸다. 하루도 채 되지 않은 회귀 후의 기억은 날아가 버리고, 오래된 공포가 온몸을
장악했다. 그는 어느 순간 다시 영지를 버리고 도망친 영주, 쫓기는 도망자가 되어 있었다.

무서워. 살려 줘. 아아. 저자가 기어코 나를 죽이러 왔구나! 성자님, 제발, 저자에게서 저를 구해 주세요.

루이센은 가슴 속 깊이 빌었으나 이곳에 성자는 없었다.

“공작님은 나를 좀 더 무서워하는 게 좋을 거야.”

굳어 있는 루이센에게 알겠나요? 라고 칼튼은 간지러울 정도로 정중한 어조로 되물었다.

대답. 대답을 해야 해. 루이센은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칼튼은 루이센을 놓아주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으며 정중하게 행동했다.

그 이후로 칼튼이 루이센을 위협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연회 날의 기억은 루이센이 성자를 만나 겨우 잊었던
깊은 공포를 되살려 놨다. 이제는 그것을 진정시켜 줄 성자도 없이 루이센은 홀로 계속 두려움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귀신 같은 놈. 칼질을 할 게 아니라 점쟁이 같은 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물론 칼튼이 주는 술을 받으면서 잠깐 칼튼을 무시하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게 표정에 티가 났을 수도 있지만


장담컨대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스쳐 지나가듯이 무심코 떠올린 생각이었을 뿐이니까. 그런데
그걸 알아차리다니.

설령 눈치를 챘다고 해도 보통 그냥 넘어가지 않나? 칼튼은 정말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루이센을 테이블에


메다꽂았다. 루이센이 아니에스 공작만 아니었으면 들고 있던 술병으로 대가리를 깼을 게 뻔했다.

‘미친놈. 진짜, 예고를 하고 집어 던지던가.’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 더 무서웠다. 루이센은 칼튼 앞이면 눈을 내리깔았다.

후하후하. 속으로 심호흡을 내뱉으면서 루이센은 조심스럽게 칼튼에게 물었다.

“그, 래서 무슨 일인가?”

“북쪽 창고 어딘가에 무기고가 있던데 지도만 봐서는 도통 모르겠더군요. 어딨는지 아십니까?”

“…….”

창고 같은 거, 루이센도 몰랐다. 그런 건 하인들이 알아서 관리하는 거 아닌가?

“쓸 만한 게 있다면 가지고 가고 싶습니다. 뭐가 있는지 직접, 다니시며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북쪽에 창고만 해도 다섯 개가 넘네만…….”

“네. 부지런히 다니셔야겠네요. 제 능력이 부족해 이렇게 공작님께 폐만 끼치는군요.”


“어제는 남쪽 창고에서 식량 포대를 나르느라 아직도 허리가 아픈데…….”

“그러게 말입니다. 하다못해 공작가의 가신들이 건강하기만 했어도 공작님이 이렇게 고생하시진 않을 텐데요.”

“하. 하. 하.”

루이센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기냐 진짜.

공작가의 가신들이 꾀병을 부리는 중이라는 건 칼튼도 알고 루이센도 알고 있었다. 그걸 다 알면서 기어코 가신들
이야기를 꺼내는 건 협박이었다. 네가 말 안 들으면 네 가신들 가만히 안 둘 거야, 라는. 이러니 루이센이 벌벌
떨면서도 칼튼이 부르면 먹던 밥도 내려놓고 달려올 수밖에.

가신들은 그냥 루이센의 행동에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 파업 중이었다. 루이센에게 알아서 하라고 하더니, 정말
방에 틀어박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전쟁에 패배했지만 그렇기에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일단 가장 문제는 칼튼에게 식량과 무기를 내주고
전쟁배상금도 줘야 한다는 점이었다.

루이센은 가신들을 찾아가서 설득했다. 방 안에 들여보내 주지도 않아서 애꿎은 방문만 두드려 댔다. 칼튼이 우릴
다 죽일 거다, 너네 무섭지도 않냐, 나 좀 살려 달라, 애원도 하고 협박도 해 봤다. 그래도 가신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총관에서부터 말단 행정관료까지 아무도 일을 다시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니 칼튼이 일부러 괴롭히려고 일거리를
던져도 네네, 하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업자득이니까.

“그럼……. 열쇠는 어디 있나?”

“총관이 가지고 있다고는 하는데, 아닐 수도 있고. 모르겠습니다.”

열쇠부터 찾아야 하는구나. 하. 루이센은 힘없이 일어섰다. 그리고 들어올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

루이센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열쇠를 찾아다녔다.

공작성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건물이 하나 있고, 그 외에도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 그걸 내성이라고 불리는 낮은
성벽이 감싸고 있고 언덕을 조금 내려가면 시내라고 부르는 큰 도시가 있었다.

내성만 하더라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평지가 많아 건물도 자연스럽게 높이가 낮고 면적을 넓게 지어 놓은


탓이었다. 창고지기의 방에 갔다가, 열쇠만 따로 보관하는 방으로 갔다. 열쇠만 보관하는 방이 따로 있는 것도
루이센은 처음 알았다.

그런데 거기엔 북쪽 창고 열쇠가 없었다. 한참을 뒤져서 총관이 빌려 갔다는 기록을 간신히 찾아냈다. 허탈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

평생 태어나서 자란 성인데 너무 새로웠고 아는 게 없었다. 하다못해 누가 문 옆에 책자를 확인해 보라고 말만 해


줬어도 한참 뒤지진 않았을 텐데.

‘가신들의 마음을 돌려놓긴 해야 하는데.’

어차피 칼튼은 진짜 중요하고 어려운 건 루이센에게 시키지 않았다. 창고도 열쇠를 굳이 찾을 게 뭐야.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문 부수고 들어갔을걸. 루이센의 재산이니 멋대로 건드릴 수 없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소리는 다
그냥 자신을 부려 먹으려는 개소리일 거다.

칼튼이 떠난 이후가 진짜 문제였다. 수확기가 지나고 곧 겨울이었다. 남부의 겨울이 다른 곳보다 따듯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겨울은 혹독했다. 철저히 대비를 해도 힘겨운 것이 겨울이었다.

‘겨울에 1 왕자의 즉위식이 있어서 수도로 떠나야 하니까 그전까지 영지를 정상적으로 만들어 놔야 해.’

루이센은 자신의 힘이 영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제 영지를 잘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성자님을 영지로 모시려면 잘해야지. 한심한 꼴도 보이지 말고.’

루이센의 성자. 이름 모를 외팔의 순례자.

그를 찾아 영지로 모셔, 이제까지 입은 은혜를 모두 갚는 것이 루이센의 또 다른 목표였다.

외팔의 순례자를 떠올리면 루이센은 가슴이 아파 왔다. 비참하고 가진 것 없는 자신을 구원해 줬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보답할 게 없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바쳐 그에게 보답할 수 있으리라.

항복한 다음 날 바로 루거에게 사람 찾는 법을 물어봤는데, 칼튼이 성을 봉쇄해 둔 상태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힘내자. 칼튼을 빨리 떠나보내야 성자님을 찾을 테니까.’

13 화

그러려면 배상금 문제를 얼른 해결해야지.

루이센은 힘을 내서 총관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다가 총관의 집무실 앞에서 하인들 무리와 마주쳤다. 그들은
루이센을 알아보고 일단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으나 뒤로 돌아서자마자 쑥덕였다.

“영주님이다.”
“어디 갇혀 있는 거 아니었어? 저렇게 돌아다닐 수가 있나?”

“못 들었어? 칼튼 하인 노릇이나 한다잖아.”

“세상에. 내가 다 자존심이 상해. 저런 사람도 영주라고…….”

어찌나 노려보는지 등이 다 따가울 지경이었다. 루이센은 못 들은 척하며 허둥지둥 총관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칼튼이 시키는 일을 하느라 성안을 돌아다니는 동안 마주친 하인들은 대게 다 비슷한 반응이었다. 혀를
차고 한심해하고.

훌쩍. 루이센은 코를 삼키고 눈에 힘을 줬다. 그래도 눈물이 맺혀서 천장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좀 가슴 아픈데…….’

루이센이 끔찍한 비극을 막아 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니 당연한 반응이지만 유난히 지금은 가슴이 찡하고
아팠다.

‘음…….’

루이센은 가슴팍에 손을 더듬었다. 자켓 안쪽의 주머니에 비장의 ‘그것’이 숨어 있었다. 얇은 천에 감싸인


붉고 단단한 ‘그것’.

육포였다.

루이센은 한때 끔찍하게 굶어서 그런지 배가 고프면 자꾸 이성을 잃어버리려고 했다. 떠돌이 시절로 돌아가
쓰레기라도 주워 먹으려고 거리를 헤매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가슴 속에 비상용 육포 두어
조각을 품고 다니기 시작했다.

떠돌이 시절 굶는 게 일상이어서 그런지 과거로 돌아온 뒤에 배가 고프면 심하게 우울해지곤 했다. 반대로 배가
부르면 다 괜찮았다.

루이센은 육포를 우물우물 먹기 시작했다. 뭔가를 씹으니 배고픔이 달래지면서 우울함도 서서히 사라졌다.

‘역시 배가 고픈 거였어. 배가 고프면 우울해진단 말이지.’

모두 아무것도 몰라 주니 루이센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법도 할 상황이지만 그에 비하자면 그는 덤덤했다.

‘때리는 것도 아니고, 돌을 던지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떠돌이 시절 경험한 원색적인 욕과 구타는 루이센을 강하게 만들었다. 루이센은 육포를 입에 물고 총관의
집무실을 뒤졌다.

‘이게 있었네.’

열쇠와 함께 총관의 책상 서랍에서 급히 쑤셔 넣은 거 같은 북쪽 창고 장부가 발견되었다. 북쪽 창고에 무기고가


있다더니, 수성전을 준비하면서 쓸 만한 게 있나 확인한 모양이었다.

‘이것도 가져가면 창고 정리는 안 시키겠지.’

오늘은 일찍 끝나겠다. 루이센은 기뻐하며 장부를 한번 쭉 훑었다. 장부는 그림과 설명을 곁들어서 무척 자세했다.
‘이건 옛날에 쓰던 가물 때 물 대는 도구고……. 이건 새 농작 기구 실험하다 실패하고 넣어 둔 거 같고…….’

농사를 짓는 지역이 대부분이다 보니, 사용하던 농사 도구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생각해 보면 공작가에서는
농사에 관한 연구도 상당히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루이센이 관심이 없다 보니 그의 대에 와서는 뜸해진
거 같지만.

하나하나 둘러보다가 문득, 루이센의 눈에 들어온 도구가 하나 있었다.

‘오, 성령의 불길.’

거창한 이름이지만 메뚜기 잡는 데 쓰는 불을 내뿜는 도구였다. 남부는 곡창지대다 보니 몇 년에 한 번 메뚜기


떼가 날아오곤 했다.

‘음, 메뚜기……. 그 지옥에서 올라온 저주받을 악마 새끼들.’

괜히 성령의 불길이라는 이름이 붙는 게 아니다.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이며 나타나 일 년 내내 고생하며 지은


곡식을 싹 털어 가 폐허만 남기는 그놈들을 보면 절로 신을 찾게 되기 마련이다.

루이센도 어릴 때 어른들이 쓰던 걸 봤는데, 마법이 걸려 있어서 불길이 곡식은 놔두고 메뚜기들만 불태워 버리는
것을 보고 있자면 성령의 불길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이거 진짜 끝내주지.’

……어?

사랑스럽게 성령의 불길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영지에 닥쳐올 위기가 하나 더 있었다!

때는 칼튼이 공작령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떠난 뒤의 일이었다. 반 이상이 불에 타 황량해진 들판 위로 새까만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화재 진압에 이미 진이 다 빠졌던 사람들은 메뚜기 떼가 곡식을 쓸어 가는 것을 망연자실
바라보았다고 한다.

당시 루이센은 두려움과 죄책감에 남부를 떠나, 무작정 위로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칼튼이 저지른 학살과 대화재가 워낙 어마어마하고 충격적인 사건이며 루이센의 야반도주 또한 워낙 재밌는
이야깃거리라 메뚜기 사건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휘청휘청하며 버티고 있는 남부지역에 살짝 발을 걸어
넘어뜨린 정도? 사실 대부분 관심도 없었다. 왕국 역사에 길이 남을 멍청한 영주와 잔인한 도살자에 비하면
곤충은 너무 재미가 없지 않은가.

루이센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가 더블레스령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남부로 왔다가, 또 도망쳤을 정도의 시간이니까……. 아직 여유 시간이


좀 있어.’

정확한 날짜는 모르기에 루이센은 회귀 전 자신의 행적을 더듬어 가며 추측했다.

앞의 두 사건이 워낙 큰 사건이라 그렇지, 메뚜기 떼도 한해의 소출을 좌지우지하는 큰 문제였다. 이놈들은


내버려 두면 사람과 가축까지 공격해 댔다.
일단 메뚜기 떼가 온다고 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윗마을, 아랫마을도 손을 잡고 이놈들을 잡으러 나섰다.
아니에스 공작가처럼 부유한 곳도 이런데 그 해 농사지어 그 한 해 먹고 사는 영지는 더 심각했다.

‘메뚜기 떼를 막아야겠어.’

다행히 우리에게는 아니에스 공작가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이자 남부에서 가장 사랑하는 농기구, 성령의 불길이
있었다.

‘근데 이거 어떻게 쓰는 거더라?’

루이센은 영주가 되고 몇 번의 메뚜기 습격 사건을 겪었지만 늘 그렇듯 가신들이 알아서 대비했다. 루이센이 한
거라고는 불타는 메뚜기들을 구경하며 박수를 친 것이 전부. 그나마도 어렸을 때의 기억이다. 커서는 수도에만
있었으니까.

‘그래도 본 게 있는데 뭐라도 생각이 날 거야…….’

끄응. 한참을 고민해 봤지만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그럼 그렇지!

루이센은 울고 싶어졌다. 괜히 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이번에는 마음을 달랠 육포도 남아 있지 않았다.

***

루이센은 못 하는 게 많았다. 떠돌이가 되기 전까지 스스로 뭘 해 본 적이 없다 보니 문제해결 능력이 심하게


떨어졌다.

떠돌이 생활을 시작한 뒤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는다. 밤이 되면 잘 곳을 찾는다.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덩이를 걷어차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은 외팔의 순례자였다.

그래서일까. 회귀 후의 루이센은 유난히 더 그의 말을 자주 떠올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성자님은 말씀하셨지.

‘모르면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중간은 간다.’

그럼 지금 루이센처럼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때는?

‘스스로 알아내겠답시고 힘 빼지 말고 제일 똑똑한 놈 옆으로 가라!’

루이센은 총관을 찾아갔다. 영지가 돌아가는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오랜 시간 영주 대리를 해 온 총관이니


말이다.

똑똑똑.

루이센은 문을 두드렸다.
“총관. 나야. 루이센.”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문 옆에는 총관을 감시하는 병사가 서 있었고, 방 안에서는 인기척이
들렸다. 안에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이 분명했다.

“총관. 우리 이야기를 좀 하지. 진짜 중요한 문제야. 영지에 위기가 닥칠 거 같은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메뚜기 떼가 올 거야.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해?”

메뚜기 떼. 그 말에 방 안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다. 됐다! 먹혔다! 루이센이 기뻐하는데 방에서 나온 이는
총관이 아니었다.

“재무관이 왜 거기서 나오나?”

“……간병하고 있었습니다.”

“아.”

“총관님은 꾀병은 아닙니다. 의사가 몇 번이나 다녀갔어요.”

“의사가 뭐라고 하나?”

“과로에 스트레스에. 뭐 뻔한 이야기죠. 그런데 메뚜기 떼라뇨? 그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잡것들이 왜요?”

재무관이 관심을 보였다. 역시 그도 남부의 사나이였다.

그럼그럼. 남부 사내라면 메뚜기에 치를 떨어야지.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루이센은 곧 메뚜기 떼가 들이닥칠


거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음. 메뚜기 떼가 나타날 거라는 예측은 없었는데요.”

“예측을 할 수 있나?”

“네. 그것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으니까요. 보통 나타나는 경로가 있고, 세를 불려 나갈 때 그쪽


영지에서 미리 소식을 전해 줍니다만……. 올해는 들은 게 없습니다.”

“올해는 내전이 있었지 않나.”

“아, 그렇군요.”

그럴 수 있겠다고 재무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흠, 메뚜기 떼라.’

솔직히 물어보니 대답해 주긴 했지만 재무관은 메뚜기 떼가 올 거라는 루이센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정보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성에 갇힌 영주님이 뭘 알고 메뚜기 떼 이야기를 하겠는가. 영지의 실권자인 총관도 못
들은 정보인데.

‘그래도 영주님이 영지 일에 뭔갈 물어본 건 처음 있는 일이야.’

뭐에 꽂혀서 갑자기 메뚜기 떼 타령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럴 때는 성심성의껏 대답해 줘야겠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몇 년 주기로 늘 있던 일이니까 각 마을에 대비하라고 전해 주면 촌장이랑 마을 자경단이
알아서 하곤 합니다. 마을마다 성령의 불길을 비치해 두고 있죠.”

“그렇군.”

“이번에 수성전을 준비하면서도 성령의 불길만은 놔두었으니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만…… 미리 경고를 할 수가


없으니 어찌할지…….”

재무관은 말을 흐렸다.

14 화

“칼튼 경이 문제로군?”

“예.”

공작성이 점령되면서 공작령의 행정은 마비 상태였다. 거기에 칼튼이 외성까지 전부 봉쇄해서 외부로 연락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단체 활동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메뚜기 떼라도 공작가의 명령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걸 허락할 리가 없었다.

“상황을 보면, 들어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칼튼은 매우매우 조심하고 있었다. 2 왕자를 따르던 영주들은 적군이었고, 1 왕자를 따르는 영주들은 언제
뒤통수를 때릴지 모르는 아군이었다. 제 발로 항복한 루이센이 그나마 믿을 만하다지만 절대적으로 믿는 건
아니었다. 그냥 루이센이 만만해서 놔둘 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냥 놔두면? 성령의 불길이 영지마다 있다면 잘 막을 수도 있지 않나?”

“그건 어려울 겁니다. 젊은 남자들이 병사로 차출되어서 일손이 가뜩이나 부족할 텐데……. 수확도 예년보다
늦어지고 있을 테니 피해도 더 클 겁니다.”

“으음……. 알겠네.”

칼튼에게 부탁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열 받는다고 황금들판의 절반 이상을 불태운 놈이 메뚜기 떼 같은 걸


신경이나 쓸까 모르겠지만.

“뭐 생각하시는 방법이 있으신지요?”

“……없진 않네. 걱정하지 말고 있어. 다녀와 보고 알려 주겠네.”

루이센의 모습은 듬직해 보였다. 재무관은 속으로 무척 놀랐다.


‘영주님이 뭘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말하다니. 정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애초에 루이센은 스스로 뭘 나서서 하는 법이 없었다. 너무 주변에서 다 알아서 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다. 루이센은 물을 마시다 컵에 벌레가 들어가면, 벌레가 들어갔다는 말도 안 하고 컵에 물을
버리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그냥 누군가 알아채고 해결해 줄 때까지 가만있었다.

주변에 하인들이 워낙 많고, 루이센에게 눈을 떼지 않고 챙기다 보니 그런 버릇이 들어 버린 것이다. 뒤늦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하인들도 고쳐 보려고 했으나 이미 굳어 버린 행동 방식을 억지로 고치려다 보니
루이센이 불편해했다. 그리고 간섭할 사람이 없는 수도로 가 버렸다.

‘그러고 보면 영주님이 항복하겠다고 나선 것도 특이한 일이었지.’

그저 겁에 질려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자신도 그럴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루이센은 겁에 질린다고 뭘 나서서 할 사람이 아니었다.

‘큰 위기가 닥치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도 있으니…… 좀 철이 드시는 건가.’

아니, 아니다. 아직은 기대하기 일렀다. 애초에 왜 갑자기 메뚜기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칼튼의
시달림에서 벗어나려고 아무 말이나 지어내는 걸 수도 있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러다가 문득 재무관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메뚜기 떼가 이동하는 경로에 늘 연락을 주던 영지 말입니다. 로레스 남작가라는 곳인데.”

“거기가 왜?”

“거기 영주가 식사 초대를 해 놓고 칼튼을 일부러 반나절이나 기다리게 했다가 사지가 찢겨 죽었지요.”

“……헉.”

루이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열쇠를 찾아오기로 하고 성령의 불길 때문에 떠오른 문제를 생각하느라 칼튼의
심부름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 나 얼른 가 봐야겠어!”

루이센은 허둥지둥 돌아서더니, 체통도 잊고 마구 달려가 버렸다. 영주다운 위엄이라곤 없는 모습에 재무관은
생각했다.

‘아직 기대하긴 일러. 역시.’

***

아니에스 공작가의 집무실.

칼튼은 장부를 살피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눈이 빡빡하다 했더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루이센을 내보내고
계속 앉아 글자만 들여다보고 있었으니 아무리 튼튼한 몸이라도 어디 한군데가 불편하기 마련이었다.

칼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빌어먹을 아니에스 공작가.
예상보다 이곳에서 너무 오래 지체하고 있었다.

남부로 올 때, 칼튼의 목적은 빨리 수도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해서 기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식량을 넉넉하게
챙기지 않았다. 남부야 먹을 것이 넘쳐 나니 현지에서 조달하자는 계획이었다.

그의 계획은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맞아떨어져서, 한껏 꾸물거렸음에도 정복 자체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게 발목을 잡을 줄이야. 공작가에서 식량을 받지 않으면 출정할 수가 없는데 실무를 진행해야 하는 가신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에서 손을 놔 버린 것이다.

사실 이럴 때는 가신들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일을 시키든가, 창고 문을 박살 내고 눈에 보이는 대로 싹


가져가든가, 하는 식으로 해결하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칼튼의 상황이 문제였다. 루이센의 지적대로 칼튼은 지금 몸을 사려야 하는 시기. 앞서 말한 두


방법을 쓰지 못하니, 가신들을 대신해 칼튼이 직접 전리품과 보급품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팔자에도 없을 남부 공작성의 행정을 보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다행히 칼튼이 마을 사제를 쫓아다니면서 글을


배웠고, 행상을 호위하면서 장부 보는 법을 배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범한 용병이었다면 빈손으로 떠나든,
목숨 걸고 다 털어 버리든 둘 중 하나였겠지.

하여튼 그 루이센 아니에스. 그 인간이 문제였다.

대체 얼마나 못났으면 가신들이 이런 시기에 파업을 한단 말인가.

꼴에 자기 탓인 건 알아서 뭐든 해 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건 보인다만, 정말 놀라울 정도로 루이센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단 며칠 만에 공작 본인보다 칼튼이 공작성의 재정 상황에 더 빠삭해졌으니 알 만한 노릇이었다.

정말 하나같이 실망뿐이었다. 사실 칼튼은 공작성에 들어올 때만 해도 약간은 루이센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루이센이 보여 준 통찰은 분할 정도로 날카로웠고, 그의 태도는 미래를 내다본 것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칼튼에게 항복하러 와서 개소리를 늘어놓지 않고 깔끔하고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었다는 점도 놀라웠다.

칼튼이 만나 본 귀족들은 전부 그를 무시했다. 그의 무력과 잔인함을 두려워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네까짓 게


어쩔 거냐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그 속내를 잘 숨겨도 칼튼이 조금 인내하며 누그러진 모습을 보이는
순간 딱 너도 별거 아니었다는 듯이 깔아 보기 시작했다.

루이센을 승전 파티로 부른 것은 칼튼 나름대로 그를 떠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칼튼의 기대는 빠르게 박살 났다.
방심한 루이센의 눈에서 보인 무시를 칼튼은 놓치지 않았다.

내가 다른 건 다 참아도 무시 받는 건 못 참지.

칼튼은 그 즉시 루이센의 멱살을 잡았다. 사실 몸을 사려야 하는 입장에서 좀 더 참았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칼튼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게, 누가 사람 눈앞에 두고 무시를 하래?’

그리고 그냥 멱살을 잡아 테이블 위에 세게 루이센을 내려놓은 것뿐이 아닌가. 때린 것도 아니고 피를 본 것도


아니고. 그동안 자신을 무시한 놈들에게 내린 처벌을 생각하면 이만하면 아주 온건한 대응이었다.
어쨌든 실망했음에도 칼튼은 루이센에게 잘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 이후로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고 존댓말도
꼬박꼬박 쓰며 그를 높여 주었다. 출정이 늦어지는 걸로 그를 탓하지도 않았다. 짜증이 나서 힘든 일을 시키면서
분풀이를 하기야 했지만.

‘이만한 게 어디야?’

옛날 같았으면 이미 피바람이 불고도 남았다. 그런데 루이센은 그것도 모르고 말을 걸어도 단답형에, 농담을 해도
대꾸도 안 했다. 좋은 말을 해 줘도 흥, 시비를 걸어도 흥. 무시로 일관하는 꼴이 칼튼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이건 뭐, 더러워서 상대도 안 한다는 건가.

그러니 묵묵히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더러워서 상대를 안 하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루이센이야 칼튼에게 완전히 기가 눌려서, 뭘 시켜도 찍소리도 못 내고, 긴장해서 대답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었지만. 그 속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칼튼은 물론이고 하인들마저도 말이다.

루이센의 외모가 문제였다. 도자기 인형처럼 흰 피부에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진 루이센은 그냥 멍청하게 앉아
있어도 어딘가 몽상에 잠긴 예술가처럼 몽롱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거기에 어린 시절 혹독하게 배운
무표정과 우아한 몸가짐은 그를 더 귀족답고 고상하게 만들었다.

특히 살짝 고개를 숙이면 금빛 속눈썹이 파란 눈동자 위로 길게 드리우며, 고난을 견디는 순고한 천사같이 의연한
모습이 되었다. 그럴 때면 칼튼은 자신이 악마라도 되는 것 같아 더 열이 받았다.

‘열쇠 하나 못 찾아와서 나를 기다리게 해?’

기다린 적은 없다. 그에게 시킨 일은 어차피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았고. 그냥 편하게 놀고먹는 꼴이 보기


싫어서 시키는 일이니까. 하지만 막상 루이센이 나타나지 않자 괜히 짜증이 나는 거다.

‘다 놔두고 칼이나 휘두르러 갈까?’

칼튼은 단검을 꺼내 휙휙 돌리며 손장난을 쳤다. 그러는 사이, 어디선가 달려오는 기척이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루이센이 차분한 발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남자가 저러고
있으면 재수 없을 만도 한데, 루이센의 얼굴에는 그게 어울렸다. 평생 햇볕 아래 선 적이 없는 것 같은 흰 피부,
고생을 모르는 얼굴. 화려하고 연약한 금발 머리.

모든 것이 칼튼과는 정반대였다.

온몸으로 자신이 귀족이라고 외치는 루이센은 존재만으로 칼튼의 속을 긁었다.

15 화
“이야, 이게 누구야. 공작님 아니십니까? 하도 안 오셔서 저 같은 건 잊어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칼튼은 애써 웃으며 짜증을 숨겼다. 그러나 루이센은 또 눈을 내리깔았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한편, 루이센은 죽을 맛이다. 칼튼이 또 돌변해서 자신을 공격할까 겁이 나 눈부터 피하긴 했지만 그의 손에
들린 단검이 너무나 신경 쓰였다.

‘단검은 왜 들고 있는 거야? 미치겠네. 던지려고 그러나? 내가 늦어서?’

사람이 좀 늦을 수도 있지 그걸 못 참아서 단검을 꺼내 들고 기다리고 있다니. 루이센은 칼튼이 왜 왕자를 왕으로


올리고도 숙청당했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저 성질머리면 왕자도 무서워서 내치겠다.

“…….”

루이센은 마른 침을 삼켰다. 한참 뛰어왔더니 입에서 피 맛이 났다.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자네 부탁을 어떻게 잊겠어.”

루이센은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방심하면 볼썽사납게 헉헉댈 거 같기도 했고 칼튼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태도가 더 칼튼을 화나게 한다는 건 몰랐다. 루이센은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무지했고, 특히 외모에 관해서는 떠돌이 시절의 처참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기억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칼튼의 표정이 더 사나워졌다. 그의 시선이 트집 잡을 것을 찾는 것처럼 루이센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루이센의


손에 머물렀다.

“그런가요? 그럼 열쇠랑 장부는 어디 있습니까?”

헉, 맞다. 루이센은 그제야 자신이 빈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너무 급한 마음에 전부 총관의 집무실에 두고 와


버린 것이다.

“그…… 내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이 나서 말이야.”

“공작님께 제 부탁보다 급한 일이라니, 그런 것도 있습니까?”

루이센은 땀을 뻘뻘 흘렸다. 웃으면서 사람을 갈구는 화법이 어디서 배운 건진 몰라도 명치를 훅훅 찌르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칼만 잘 휘두르는 줄만 알았지 칼튼에게 이런 입심이 있는 줄은 몰랐다.

루이센은 방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크흠, 실은 내가 아주 좋은 계획이 떠올랐는데 말이야.”

이렇게 말하니까 사기꾼 같은데? 루이센은 칼튼이 뭐라고 하기 전에 얼른 덧붙였다.

“자네가 남부 영주들의 항복을 받아 내는 문제로 고심하는 걸 알고 있네.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데.”

궁금하지 않나? 어떤가?

루이센이 운을 띄웠음에도 칼튼은 시큰둥했다. 그런 문제로 고심한 적 없다고, 온몸으로 그는 말하고 있었다.

“자네의 용력이나 자네 군사의 강성함은 내가 잘 알지. 하지만 전투를 안 하고 항복시킬 방법이 있다면 그게 더
쉬운 길이 아니겠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공작님이 제 걱정을 다 해 주시니 영 수상해서요.”

똑똑한 놈. 역사에 길이 남을 자수성가한 용병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나였다면 의심은 무슨, 박수까지 쳐
가면서 어디 한번 말해 보라고 했을 텐데.

루이센은 태연하고자 애를 썼다.

폐가 터져라 복도를 달리던 루이센은 불현듯 미래의 기억을 떠올렸다.

회귀 전, 국내 정세가 어지러운 틈을 타 메뚜기 떼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남부에 상륙했다. 그 당시 남부인들은


메뚜기 떼와의 싸움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정치고, 권력이고 나발이고 일단 먹고 살아야 후일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루이센은 칼튼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메뚜기 떼가 날아오고 있다는 소문을 내게. 그러면 영주들이 앞다퉈 항복을 할 거야. 메뚜기와의 전쟁을
준비하려면 자네와 힘겨루기를 할 여력이 없을 테야.”

“……메뚜기요?”

무슨 헛소리야? 칼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메뚜기? 내가 아는 그거? 손가락만 한, 풀 먹는 그 초록색 곤충?

“그래. 메뚜기.”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튼이 단검을 꽉 쥐었다.

“저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내전이 끝나고, 아니에스 공작가가 칼튼에게 패배하고, 칼튼의 악명이 다시 한번 왕국에 퍼졌음에도 남부의
영주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작성에 머무르면서 칼튼도 몇 번이나 항복하고 1 왕자를 지지하라는 협박을
보냈다. 그래도 천민 출신 용병에게 머리를 숙이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고 버티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인간들이 고작 벌레가 좀 떼로 몰려온다고 항복을 한다고? 칼튼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사람 놀리나?


짜증이 나려는데 루이센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나는 더없이 진심이야. 내가 뭐 한다고 자네랑 장난을 치나?”

겁먹어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형편인데, 장난이라니. 심장마비로 죽을 일 있나.

“진심이라면 더욱 실망스럽군요. 생각하신 게 고작 그거라니. 전쟁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칼튼은 비웃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루이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래서 윗동네 놈들이란.’

메뚜기의 진정한 무서움을 모른다니까.

그 조그만 메뚜기가 먹어 봐야 얼마나 먹는다고, 우습게 볼지도 모르겠지만 그놈들은 하루에도 몇만 명 분의


식량을 먹어 치운다. 곡식이고, 들판의 풀이고, 과일나무고 할 것 없이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어 치운다고 봐야
했다.
정치 싸움에서 패배하면 권력을 잃고 많은 재물을 빼앗긴다. 그래도 입에 풀칠할 정도의 식량은 남겨 준다.
하지만 메뚜기 군집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면 남는 것은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황무지뿐.

“이 시기에 메뚜기 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빈손으로 겨울을 맞이하게 된다네.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게
되지.”

영주의 힘이란 곧 세금과 영지민의 수에서 나오는 법. 메뚜기 떼를 방치하면 세수가 줄고, 영지민의 수도 준다.
어찌저찌 겨울을 견뎌 봄이 와도 뿌릴 씨앗이 없고 일할 사람이 없어 고난은 끝이 나지 않는다.

“자네에겐 별거 아닌 거 같아도 남부의 영주들에게는 영지의 운명이 걸린 문제야. 최악과 차악을 고르자면 차악을
고르겠지.”

최악은 칼튼을 상대하느라 메뚜기 떼에게 당하는 거고, 차악은 칼튼에게 항복하고 편하게 메뚜기 떼에 대비하는
것이다.

메뚜기 떼가 뜬 순간, 칼튼은 더 이상 최악의 존재가 아니었다.

“제가, 제 군대가 그 벌레 새끼만도 못하다고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쨌든 무조건 항복을 할 거야. 그냥 소문을 퍼트리는 것보다는 공작가의 이름으로 공문을
내면 좋겠군. 사람들이 공작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으니.”

드디어, 루이센은 이 빙빙 둘러 가는 긴 이야기의 본론을 말했다.

칼튼의 예리한 지적대로 루이센은 칼튼을 걱정하지 않았다. 칼튼이 머리가 빠질 정도로 고민하는 게 있더라도
루이센이 알 바 아니었다.

그럼에도 칼튼에게 도와주겠다고 운을 띄운 것은, 다 자신을 위해서였다.

루이센이 바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딱 하나. 외팔의 순례자와 함께 부유한 공작가의 주인으로 평생 고향에
처박혀 호의호식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메뚜기 떼에게 밀 한 알도 빼앗길 수 없었다.

메뚜기와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다행히 그들에게는 마도공학의 총집대성인, 위대한 발명품 ‘성령의 불길’이 있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먹구름 같은 메뚜기 떼를 화려하게 불태우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공작가의 이름으로 공문을 보내야 하는데, 칼튼이 순순히 허락하지 않을 게 뻔했다. 루이센이
애걸복걸하면 할수록 칼튼은 더 기고만장해서 루이센의 애를 태울 게 분명했다.

해서 루이센은 칼튼이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공문을 보내길 바랐다. 겸사겸사 루이센이 칼튼을
도와줬다는 빚도 지울 수 있도록.

“어떻게, 내 말대로 해 보겠나? 자네도 손해 볼 게 없지 않나?”


하루빨리 남부를 정리하고 수도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칼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크, 루이센 아니에스. 이런 계략도 낼 줄 알고 많이 똑똑해졌어.’

루이센은 자화자찬하며 이 영광을 성자님에게 돌렸다.

칼튼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공작님의 의견 잘 들었습니다.”

“그래. 공문을 작성하는 건 내가 도와주지.”

“아,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

“저는 공작님이 말씀하신 대로 따를 생각이 없거든요.”

“아니! 왜?”

아직도 메뚜기가 우스워? 내가 이렇게 잘 설명해 줬는데? 루이센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영주님 말을 못 믿겠습니다.”

“어? 무조건 항복한다니까?”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고……. 그보다는 뭐라고 할까. 이거 영 공작님 좋은 일만 시켜 드리는 거 같아서


말입니다.”

“어?”

“다른 속셈이 있으신 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공문을 보내는 것이라든가?”

“……내, 내가 뭐 하러…….”

“공문 보내는 걸 허락해 드리는 대가로 제가 뭘 뜯어갈지 겁나서라든가?”

어떻게 알았지? 귀신 같은 놈. 사람 속마음을 듣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든가, 그런 거 아냐? 칼튼이


초능력자였다면 1 왕자에게 버림받지도 않았겠지만…….

루이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칼튼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아닌데? 나는 정말 순수한 의도로 자네를 도우려는 건데?”

루이센은 일단 우겼다. 칼튼은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이 피식, 비웃었다.

“저도 공작님을 믿고 싶습니다만 제가 워낙 고생을 많이 해 사람을 잘 못 믿는지라…….”

“그래서……?”

“공작님이 성의를 더 보여 주시면 믿을 것 같기도 하고요.”


“뭘 바라나?”

“공작님 말대로 메뚜기 떼에 대한 소문을 내고 영주들의 항복을 기다리겠습니다. 대신 소문이 퍼졌는데도 항복 안


하는 영주가 있거든 저를 좀 도와주시죠.”

“내가?”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건 루이센도 알고 칼튼도 알고 세상이 알았다.

“제 곁에만 계셔 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출정할 때 나도 따라가라?”

“예.”

칼튼은 친절하게 웃었다. 루이센은 소름이 쫙 끼쳤다. 그러니까 나를 전쟁터로 끌고 다니면서 화살받이를
시키겠다, 이 속셈이렸다!

16 화

전쟁터라니! 끔찍했다. 일단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 위험한 장소로 가고 싶지도 않으며, 전투 중의 어지러운 틈을


타 칼튼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거길 따라간단 말인가! 칼에는 눈이 없고 살짝 실수로 스쳐도 이 연약한 몸은
생사를 넘나들게 뻔했다.

“내가 싫다면……?”

“모든 이야기가 없던 걸로 되는 거죠. 공문도 없고요.”

다 들켰네. 다 들켰어.

이미 루이센의 속셈을 다 간파해 놓고 모르는 척이라니. 음흉한 건 귀족의 소양인데, 이렇게 보니 칼튼이
자신보다 더 귀족에 어울릴 거 같았다.

‘하……. 생전 안 쓰던 머리를 굴려 본건데…….’

난생처음 시도해 본 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하나 보다. 루이센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공작님의 조력은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칼튼은 다시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그 가증스러운 미소에 루이센은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메뚜기 떼에 대한 대비는 어떻게 합니까?”

“메뚜기가 워낙 큰 문제다 보니 이미 대비는 되어 있네. 성령의 불길이라고 하는 메뚜기만 태워 버리는 아주


대단한 마법도구가 있어. 마을마다 하나씩 배치되어 있지.”

루이센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성령의 불길을 발명한 것은 아니에스 공작가를 또 한 번 황금들판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칼튼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메뚜기만요? 사람은요? 사람은 태울 수 없습니까?”

“사람을 왜 태우나?”

“그럼 됐습니다. 이름만 거창하지 쓸모없네요. 그런 걸 만들 시간에 무기를 만들었으면 왕국의 판도가 바뀌었을
텐데.”

칼튼은 성령의 불길에 대한 흥미를 빠르게 잃었다. 그 모습에 루이센은 울컥했다.

“성령의 불길은 민생을 위해 개발한 물건이야. 황금들판의 수호자라는 공작가의 신념이 담긴 것이니, 그렇게
폄하하지 말아 주게. 자네는 이해 못 하겠지만.”

“뭐라고요?”

칼튼이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아니, 단검은 왜 고쳐 쥐는데? 루이센은 아차, 했다. 말실수를 해 버렸어.
뒤늦게 돌아온 이성에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왠지 사과하긴 싫었다. 루이센 자신도 모르고 있던,
공작가 일원으로서의 자부심이 싹튼 것이다.

“……음, 그럼 이만 실례하지.”

루이센은 도망을 선택했다. 버틸 만큼 버텼어! 이 정도는 도망쳐도 괜찮을 거야! 그는 후다닥 집무실에서 도망쳐
나왔다.

***

루이센은 방을 나와 빠르게 걸었다. 칼튼이 갑자기 쫓아와 잡아챌 것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다행히 모퉁이를
돌아도 칼튼은 나타나지 않았다.

휴.

이제야 좀 마음 편히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푹 숙이는데, 익숙한 사람이 복도 너머에서 나타났다.

“어? 공작님.”

루거였다. 그는 어떤 하녀랑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아, 공작님.”

하녀는 루이센에게 인사를 하더니 후다닥 달아났다. 루이센이 지그시 노려보자 루거는 멋쩍게 웃었다.

“이거, 이거? 주인이 지금 영지의 위기를 피하려고 동분서주하는데 수석 시종이 되어서 하녀랑 노닥거려?”

“노닥거리다뇨. 이거 두고 가신 거 같아서 가져다드리려고 가는 중인데.”

루거가 건넨 것은 루이센이 총관의 집무실에 두고 나왔던 북쪽 창고의 열쇠였다.

윽. 루이센은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칼튼에게서 도망친 참인데 도로 가야 해?

못 본 걸로 하자. 나는 저 열쇠를 잊어버린 거다. 루이센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너 그거 총관의 집무실에 다시 두고 와라.”

“예? 이거 중요한 거 아니었어요?”

“몰라. 방으로 갈 거야.”

일단 밥을 먹고 총관이든 재무관이든, 공문에 대해 물어봐야겠다.

루거는 자연스럽게 루이센의 옆에 따라붙었다.

“그 인간이 뭐래요? 무슨 일 있어요?”

“왜?”

“아니, 열쇠를 찾으시다 말고 총관님 방까지 찾아가셨다면서요. 근데 정작 찾으시던 열쇠는 필요 없다니까


궁금해서 여쭙는 거죠.”

“아. 다른 이야기를 좀 했어.”

“다른 이야기 뭐요?”

“이것저것.”

루이센은 긴장이 풀리면서 힘이 빠졌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루거가 수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그조차 귀찮았기에 무시했다.

루거는 복도를 걷는 내내 투덜댔다. 칼튼의 부하들은 거칠어요, 그놈들은 너무 거만해요, 칼튼이 공작님을 너무
괴롭혀요, 역시 그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어쩌고저쩌고. 하여튼 칼튼과 그의 부하들을 욕하는 내용이었다.

루이센은 대충 한 귀로 흘리다가 한마디 했다.

“너 말조심해라. 왜 자꾸 칼튼 경이 아니라 그 작자니 그 인간이니 하는 식으로 불러?”

“경은 무슨요. 진짜 기사도 아니잖아요. 그렇게 불리면 민망하지도 않은가? 천민 주제에 건방지게. 지 주제를
알아야지.”
루거는 코웃음 쳤다. 루거답지 않게 시니컬한 웃음이어서 루이센은 좀 의아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루거도 귀족 출신이었다. 셋째라 작위를 잇지는 않았어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다른 귀족들이 흔히 생각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 귀족가였더라……?’

추천장을 받으면서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이 영 흐릿했다. 술을 좀 작작 마실걸. 누가 루거를 추천해 줬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무튼 좀 조심해. 넌 내 수석 시종이니, 잘못하면 내가 오해를 받는다고.”

“아무렴요. 제가 영주님에게 해를 끼칠까요.”

그건 그렇지. 그러고 보니 루거에게 좀 짠한 마음이 들었다. 수도에서 공작의 시종으로 화려하게 살다가 먼
남부까지 끌려와 온갖 고초를 다 겪었으니. 심지어 회귀 전에는 자신을 지키다 죽기까지 했고.

“……조금만 참아. 칼튼 경은 조만간 떠날 거니까.”

메뚜기 떼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영주들이 항복하면 칼튼도 지체 없이 떠날 터였다. 한동안은 정신이 없을 테니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오겠지.

“정말요? 왜요? 그놈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네?”

루이센은 귀찮아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주 중요한 용건이 생각났다. 루이센이 자유로워지면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었다.

“너 아는 마법사 있어?”

“마법사요? ……왜요? 전에 말한 그 찾는다는 사람 때문에요?”

“응.”

“이름도 나이도 외모도 모르는 사람을 찾으려면 정보 길드보다는 마법사가 필요하긴 하겠네요. 대체 누굴
찾으시는 거예요? 제가 아는 한 공작님이 그런 사람을 찾을 이유가 없을 텐데요.”

외팔의 순례자. 루이센의 성자.

처음 회귀해서는 정신이 없고 상황이 다급해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목숨을 건지고 더 먼 미래를 고민하던
중, 반드시 지켜야 할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루이센은 시간이 될 때마다 그 목표를 곱씹었다.

‘이제 돈도 있고 권력도 있으니 내가 입은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어.’

루이센은 그분을 생각하자 다시 코끝이 찡해 왔다. 자세한 내력은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아 모르지만, 그가 험난한
삶을 살았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가진 거친 손이나 몸의 흉터들, 가끔 보이던 날카로움은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이 가질 것이 아니었으니까.

‘고생 안 하고 편하게 사실 수 있게 도와드려야지. 그분이 한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그분을 지켜 주는 거야.’

그러려면 일단 어딨는지 찾아야지.


“한시라도 빨리 찾고 싶어. 네가 발이 넓으니까 좀 알아봐. 칼튼이 떠나면 바로 시작할 수 있게.”

“그건 어렵지 않은데……. 그 사람이 누군데요?”

“있어, 내 은인.”

루거의 얼굴에 궁금증이 떠올랐다.

‘은인? 누가 아니에스 공작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지?’

지금은 죽고 없는 왕비와 2 왕자도 루이센에게 잘해 주긴 했지만 일방적으로 베풀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루이센에게 모자람이 없는데 누가 은인이 될 수 있겠는가.

루거는 무척 궁금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루이센의 눈빛이 흐려지고 안색이 질리고 있으니 그를 먼저 쉬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방으로 가요. 바로 드실 수 있게 제가 빵이랑 이것저것 가져다 두었어요.”

그 한마디에 루이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특한 놈. 그래, 얼른 가자!”

밥이다, 밥. 흐흐. 루이센의 눈이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돌아간 것을 루거는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

루이센은 재무관의 도움을 받아 공문을 작성했다. 그 과정에서 메뚜기 떼에 대한 소식이 성안에 자연스럽게 퍼져
갔다.

소식의 출처가 루이센이라는 말에 다들 반신반의했으나, 일단 메뚜기라면 눈이 돌아가고 보는 몇몇 행정관들이


일선에 복귀했다. 재무관도 공문을 도와주면서 자연스럽게 그 대열에 합류해 업무를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루이센에게는 굉장한 희소식이었다. 가신들의 화가 누그러진 것에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이센을 부려
먹을 명분이 흐려지면서, 칼튼은 더는 루이센을 불러내지 않았다.

공문은 전령을 통해 공작령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내전 이후 줄곧 문을 닫아걸고 소식이 없던 공작가에서 공문이


내려오자, 다들 의아해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몸은 착실히 메뚜기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아니에스 공작가는 황금들판의 수호자. 끝없이 펼쳐진 밀밭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는 이들이었다. 오랜
세월 쌓아 온 명성은 루이센의 대에서 무너질 정도로 가볍지 않았다.

마을의 촌장들은 창고에서 고이 보관하던 성령의 불길들을 꺼내었다.

“철저한 준비만이 살길이야! 알았나!”

“물론입니다!”

공작성이 수성전을 벌일 때보다 더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루이센의 잽싼 움직임 덕분에 농사일에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도 철저히 메뚜기 떼를 맞이할 준비가 끝났다.

16 화

전쟁터라니! 끔찍했다. 일단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 위험한 장소로 가고 싶지도 않으며, 전투 중의 어지러운 틈을


타 칼튼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거길 따라간단 말인가! 칼에는 눈이 없고 살짝 실수로 스쳐도 이 연약한 몸은
생사를 넘나들게 뻔했다.

“내가 싫다면……?”

“모든 이야기가 없던 걸로 되는 거죠. 공문도 없고요.”

다 들켰네. 다 들켰어.

이미 루이센의 속셈을 다 간파해 놓고 모르는 척이라니. 음흉한 건 귀족의 소양인데, 이렇게 보니 칼튼이
자신보다 더 귀족에 어울릴 거 같았다.

‘하……. 생전 안 쓰던 머리를 굴려 본건데…….’

난생처음 시도해 본 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하나 보다. 루이센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공작님의 조력은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칼튼은 다시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그 가증스러운 미소에 루이센은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메뚜기 떼에 대한 대비는 어떻게 합니까?”

“메뚜기가 워낙 큰 문제다 보니 이미 대비는 되어 있네. 성령의 불길이라고 하는 메뚜기만 태워 버리는 아주


대단한 마법도구가 있어. 마을마다 하나씩 배치되어 있지.”

루이센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성령의 불길을 발명한 것은 아니에스 공작가를 또 한 번 황금들판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칼튼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메뚜기만요? 사람은요? 사람은 태울 수 없습니까?”

“사람을 왜 태우나?”

“그럼 됐습니다. 이름만 거창하지 쓸모없네요. 그런 걸 만들 시간에 무기를 만들었으면 왕국의 판도가 바뀌었을
텐데.”

칼튼은 성령의 불길에 대한 흥미를 빠르게 잃었다. 그 모습에 루이센은 울컥했다.

“성령의 불길은 민생을 위해 개발한 물건이야. 황금들판의 수호자라는 공작가의 신념이 담긴 것이니, 그렇게
폄하하지 말아 주게. 자네는 이해 못 하겠지만.”

“뭐라고요?”

칼튼이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아니, 단검은 왜 고쳐 쥐는데? 루이센은 아차, 했다. 말실수를 해 버렸어.
뒤늦게 돌아온 이성에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왠지 사과하긴 싫었다. 루이센 자신도 모르고 있던,
공작가 일원으로서의 자부심이 싹튼 것이다.

“……음, 그럼 이만 실례하지.”

루이센은 도망을 선택했다. 버틸 만큼 버텼어! 이 정도는 도망쳐도 괜찮을 거야! 그는 후다닥 집무실에서 도망쳐
나왔다.

***

루이센은 방을 나와 빠르게 걸었다. 칼튼이 갑자기 쫓아와 잡아챌 것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다행히 모퉁이를
돌아도 칼튼은 나타나지 않았다.

휴.

이제야 좀 마음 편히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푹 숙이는데, 익숙한 사람이 복도 너머에서 나타났다.

“어? 공작님.”

루거였다. 그는 어떤 하녀랑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아, 공작님.”

하녀는 루이센에게 인사를 하더니 후다닥 달아났다. 루이센이 지그시 노려보자 루거는 멋쩍게 웃었다.

“이거, 이거? 주인이 지금 영지의 위기를 피하려고 동분서주하는데 수석 시종이 되어서 하녀랑 노닥거려?”

“노닥거리다뇨. 이거 두고 가신 거 같아서 가져다드리려고 가는 중인데.”

루거가 건넨 것은 루이센이 총관의 집무실에 두고 나왔던 북쪽 창고의 열쇠였다.

윽. 루이센은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칼튼에게서 도망친 참인데 도로 가야 해?

못 본 걸로 하자. 나는 저 열쇠를 잊어버린 거다. 루이센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너 그거 총관의 집무실에 다시 두고 와라.”


“예? 이거 중요한 거 아니었어요?”

“몰라. 방으로 갈 거야.”

일단 밥을 먹고 총관이든 재무관이든, 공문에 대해 물어봐야겠다.

루거는 자연스럽게 루이센의 옆에 따라붙었다.

“그 인간이 뭐래요? 무슨 일 있어요?”

“왜?”

“아니, 열쇠를 찾으시다 말고 총관님 방까지 찾아가셨다면서요. 근데 정작 찾으시던 열쇠는 필요 없다니까


궁금해서 여쭙는 거죠.”

“아. 다른 이야기를 좀 했어.”

“다른 이야기 뭐요?”

“이것저것.”

루이센은 긴장이 풀리면서 힘이 빠졌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루거가 수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그조차 귀찮았기에 무시했다.

루거는 복도를 걷는 내내 투덜댔다. 칼튼의 부하들은 거칠어요, 그놈들은 너무 거만해요, 칼튼이 공작님을 너무
괴롭혀요, 역시 그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어쩌고저쩌고. 하여튼 칼튼과 그의 부하들을 욕하는 내용이었다.

루이센은 대충 한 귀로 흘리다가 한마디 했다.

“너 말조심해라. 왜 자꾸 칼튼 경이 아니라 그 작자니 그 인간이니 하는 식으로 불러?”

“경은 무슨요. 진짜 기사도 아니잖아요. 그렇게 불리면 민망하지도 않은가? 천민 주제에 건방지게. 지 주제를
알아야지.”

루거는 코웃음 쳤다. 루거답지 않게 시니컬한 웃음이어서 루이센은 좀 의아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루거도 귀족 출신이었다. 셋째라 작위를 잇지는 않았어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다른 귀족들이 흔히 생각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 귀족가였더라……?’

추천장을 받으면서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이 영 흐릿했다. 술을 좀 작작 마실걸. 누가 루거를 추천해 줬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무튼 좀 조심해. 넌 내 수석 시종이니, 잘못하면 내가 오해를 받는다고.”

“아무렴요. 제가 영주님에게 해를 끼칠까요.”

그건 그렇지. 그러고 보니 루거에게 좀 짠한 마음이 들었다. 수도에서 공작의 시종으로 화려하게 살다가 먼
남부까지 끌려와 온갖 고초를 다 겪었으니. 심지어 회귀 전에는 자신을 지키다 죽기까지 했고.
“……조금만 참아. 칼튼 경은 조만간 떠날 거니까.”

메뚜기 떼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영주들이 항복하면 칼튼도 지체 없이 떠날 터였다. 한동안은 정신이 없을 테니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오겠지.

“정말요? 왜요? 그놈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네?”

루이센은 귀찮아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주 중요한 용건이 생각났다. 루이센이 자유로워지면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었다.

“너 아는 마법사 있어?”

“마법사요? ……왜요? 전에 말한 그 찾는다는 사람 때문에요?”

“응.”

“이름도 나이도 외모도 모르는 사람을 찾으려면 정보 길드보다는 마법사가 필요하긴 하겠네요. 대체 누굴
찾으시는 거예요? 제가 아는 한 공작님이 그런 사람을 찾을 이유가 없을 텐데요.”

외팔의 순례자. 루이센의 성자.

처음 회귀해서는 정신이 없고 상황이 다급해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목숨을 건지고 더 먼 미래를 고민하던
중, 반드시 지켜야 할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루이센은 시간이 될 때마다 그 목표를 곱씹었다.

‘이제 돈도 있고 권력도 있으니 내가 입은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어.’

루이센은 그분을 생각하자 다시 코끝이 찡해 왔다. 자세한 내력은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아 모르지만, 그가 험난한
삶을 살았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가진 거친 손이나 몸의 흉터들, 가끔 보이던 날카로움은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이 가질 것이 아니었으니까.

‘고생 안 하고 편하게 사실 수 있게 도와드려야지. 그분이 한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그분을 지켜 주는 거야.’

그러려면 일단 어딨는지 찾아야지.

“한시라도 빨리 찾고 싶어. 네가 발이 넓으니까 좀 알아봐. 칼튼이 떠나면 바로 시작할 수 있게.”

“그건 어렵지 않은데……. 그 사람이 누군데요?”

“있어, 내 은인.”

루거의 얼굴에 궁금증이 떠올랐다.

‘은인? 누가 아니에스 공작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지?’

지금은 죽고 없는 왕비와 2 왕자도 루이센에게 잘해 주긴 했지만 일방적으로 베풀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루이센에게 모자람이 없는데 누가 은인이 될 수 있겠는가.

루거는 무척 궁금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루이센의 눈빛이 흐려지고 안색이 질리고 있으니 그를 먼저 쉬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방으로 가요. 바로 드실 수 있게 제가 빵이랑 이것저것 가져다 두었어요.”


그 한마디에 루이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특한 놈. 그래, 얼른 가자!”

밥이다, 밥. 흐흐. 루이센의 눈이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돌아간 것을 루거는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

루이센은 재무관의 도움을 받아 공문을 작성했다. 그 과정에서 메뚜기 떼에 대한 소식이 성안에 자연스럽게 퍼져
갔다.

소식의 출처가 루이센이라는 말에 다들 반신반의했으나, 일단 메뚜기라면 눈이 돌아가고 보는 몇몇 행정관들이


일선에 복귀했다. 재무관도 공문을 도와주면서 자연스럽게 그 대열에 합류해 업무를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루이센에게는 굉장한 희소식이었다. 가신들의 화가 누그러진 것에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이센을 부려
먹을 명분이 흐려지면서, 칼튼은 더는 루이센을 불러내지 않았다.

공문은 전령을 통해 공작령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내전 이후 줄곧 문을 닫아걸고 소식이 없던 공작가에서 공문이


내려오자, 다들 의아해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몸은 착실히 메뚜기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아니에스 공작가는 황금들판의 수호자. 끝없이 펼쳐진 밀밭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는 이들이었다. 오랜
세월 쌓아 온 명성은 루이센의 대에서 무너질 정도로 가볍지 않았다.

마을의 촌장들은 창고에서 고이 보관하던 성령의 불길들을 꺼내었다.

“철저한 준비만이 살길이야! 알았나!”

“물론입니다!”

공작성이 수성전을 벌일 때보다 더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루이센의 잽싼 움직임 덕분에 농사일에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도 철저히 메뚜기 떼를 맞이할 준비가 끝났다.

17 화

한편, 남부의 영주들에게도 소식은 전해졌다. 언제 공작성의 문이 열려 소식이 전해질까 촉각을 곤두세우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공작성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에 공문이 전해지기 무섭게 메뚜기 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영주들은 깊은 혼란에 빠졌다.


‘이게 진짜인가?’

만약 사실이라면 굉장히 큰일이었다. 하루빨리 메뚜기 떼와의 전면전을 준비해야 했다. 직접적으로 우리 영지
하늘을 지나가지 않더라도, 그 수가 불어나면 무슨 화가 미칠지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메뚜기 떼에 매진하자니 공작성에 똬리를 튼 칼튼과의 불안정한 정세가 마음에 걸렸다.

‘고립된 공작가인데, 어떻게 알고 메뚜기 떼가 온다고 하겠어? 이거 다 함정인 거 아니야?’

아니에스 공작이 칼튼을 도와서 수를 쓰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자니 메뚜기 떼로 인한 참사를


아는 남부인으로서의 피가 들끓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쳐 버리겠네!

영주들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뺨이 홀쭉해지도록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결론을 내렸다.

‘그래. 공작가를 한 번만 더 믿어 보자!’

그래도 황금들판의 수호자이자 오랜 세월 이 남부에 군림한 가문이 아닌가! 현 영주가 망나니로 이름 날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니에스 공작이었다. 그 가문의 가신들도 하나 같이 유능한 자들이었고.

남부의 영주들의 고민은 하나같이 비슷했고 생각의 흐름도 같았다. 그들은 사신을 급히 공작성으로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공작성의 문밖으로 남부 전역의 난다 긴다 하는 가문의 깃발이 모여들게 되었다.

“이게 말이 돼?”

칼을 휘두를 기회만 노리던 칼튼은 그 소식을 듣고 뭐라 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까, 허탈하다고 해야 할까. 일이 잘 풀려 좋긴 한데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화가 나기도


하고.

칼튼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으며 그만큼 많은 감정을 경험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또 처음이었다.

칼튼은 외성벽으로 나가서, 막사를 세우고 그곳에서 사신들을 만났다. 그들이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성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주의 사신들은 오히려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아 다행이라는 태도였다. 그들은 여전히 거드름을 피웠으나
괜히 트집 잡는 일 없이 칼튼과 일을 마무리하려고 들었다.

사신들이 전하는 말은 대개 비슷했다.

1 왕자에게 충성을 바치겠다, 전쟁배상금은 얼마까지 줄 수 있다, 이 이상은 우리 영지 다 털어 가도 못 주니까


받아들이고 오지 마라.

왕국 한 바퀴를 두를 수 있을 정도로 쓸데없이 긴 인사말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을 화려한 수식어로 더 긴


이야기를 했지만 어쨌든 요약하자면 저랬다.

‘흥정도 안 해?’

흥정이라고 하니 어딘가 시장바닥 같지만, 귀족들만큼 흥정에 목숨 거는 작자들도 없었다. 남의 돈은 펑펑 쓰면서


자기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 있어도 금화 한 푼이라도 더 깎겠다고 아득바득 목소리를 올리는
자들이었다.

이게 이럴 리가 없다. 저놈들이 순순히 재산을 내놓을 리 없어.

귀족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가득한 칼튼은, 그 자리에서 직접 셈을 해 보았다.

그 결과 사신들이 제안한 금액은 딱 그 영지를 털어 전리품으로 받아 낼 수 있는 정도였다. 물론 더 받으려면 더


짜낼 수 있지만 그러려면 평판을 내던져야 했으니 이 정도가 딱 적절했다.

이 상황이 영 찜찜하긴 했으나, 칼튼은 사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신들은 더 질질 끌지 않고 깔끔하게


떠났다.

칼튼은 성벽 위에 서서 뿔뿔이 흩어지는 사신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결국, 다들 메뚜기 떼를 자신과 자신의
군대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판단했다 이것인가?

“남부가 나를 갖고 노는 기분이야.”

칼튼의 말에 그의 부하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정말 아니에스 공작 말대로 될 줄이야.’

루이센이 메뚜기 떼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전령이 떠날 때만 해도 이런 사태는 예상도 못 했다.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었고, 루이센을 출정에 데리고 가면 골탕을 먹일 수 있으니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손해를 안 보긴커녕, 루이센의 말을 따른 덕분에 더 큰 이득을 얻게 되었다. 가만히 앉아 전투 한번 하지


않고도 전투를 치른 값을 얻어 냈으니 말이다.

만약 전투를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칼튼은 승리를 자신하였지만 지금만큼의 성과를 낼 수 없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이해가 안 돼. 이해가.’

칼튼은 성벽에서 성으로 돌아와, 곧바로 루이센의 방을 찾아갔다. 성안으로 발을 들일 때만 해도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얼굴만 봐도 속이 뒤집어지는데 뭐 하러 찾아가겠는가. 그런데 발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루이센의
방문 앞이었다.

루거가 문 앞에 있다가 칼튼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척하지만 얼굴로는 욕을 하고 있었다.
칼튼은 확 혼쭐을 보여 줄까 하다가 성가셔서 그냥 참았다.

루이센은 방에 있었다.

“칼튼입니다.”

루이센은 마침 녹은 버터처럼 침대 위에 늘어져서 게으름을 온몸으로 즐기던 차였다. 가신들이 복귀한 이후


칼튼이 자신을 찾지 않아 얼마 만인지 모를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헉, 뭐야.’

루이센은 후다닥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잽싼 움직임 덕분에 칼튼이 방으로 들어와
루이센을 발견했을 때, 루이센은 고상한 모습을 되찾았다. 허리를 곧게 편 자세가 바르고 경건해 보였다.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루이센은 차분한 얼굴로 칼튼을 응대했다.

“칼튼 경. 무슨 일 있나?”

“성벽에서 사신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아, 그래?”

루이센은 성을 나갈 수 없으니 자세한 상황은 몰랐다. 루이센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느 가문의 누가 왔지? 모두 사절을 보냈나? 다들 항복을 하겠다고 하지?”

“아뇨. 아직 세 곳에서 항복 의사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뭐 하는 미친놈들이야? 메뚜기가 우스워? 루이센이 인상을 썼다.

“어느 가문이?”

“세테, 비너드, 홀가 입니다. 이 가문의 사람들에 대해 아십니까?”

“으음…….”

루이센은 고심했다.

모르겠다!

이렇게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공작령에서 먼 중소 영지의 영주가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칼튼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루이센은 우물쭈물했고, 칼튼은 이번에는 오해하지 않고 루이센의 속내를 제대로 눈치챘다.

“모르십니까? 공작가와 꽤 가까운 위치에 있는 영지인데도요? 세테는 공작가와도 교역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기억이 날 것도 같고…….”

거짓말이다. 하나도 기억 안 난다.

루이센은 말꼬리를 흐렸다. 칼튼은 그를 빤히 보았다.

‘……정말 모르겠단 말이야.’

루이센은 칼튼의 허를 두 번이나 찔렀다. 일이 전부 루이센의 말대로 풀리는 걸 보면 멍청하지는 않았다.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래서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아는 게 없지? 아는 게 뭐라도 있어야
통찰력도 발휘하는 거 아닌가? 저런 날카로운 안목을 가지고, 왜 왕자들 싸움에 잘못 끼어서 자신을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을까?

‘알아주던 망나니였다던데…….’
저 말갛고 차분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술 먹고 깽판 치는 것이든 여자를 밝히는 모습이든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술과 유흥보다는 우아하게 살롱을 걸으며 그림을 감상한다든가, 그림처럼 앉아 음악을 듣는 게 더 어울릴 거


같았다.

칼튼의 지긋한 시선에 루이센의 입안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뭐야, 왜 저래? 내가 또 뭘 잘못했는데?’

어젯밤에 부엌을 턴 거 들켰나? 아니면 성자님께 잘 어울릴 거 같아서 보석 반지 하나를 슬쩍 챙긴 게 들켰나?


뭐지? 왜 저렇게 보는 거지?

루이센은 속으로 바들바들 떨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칼튼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성 아랫마을이 무척 조용하더군요. 그곳의 상황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성 아랫마을이라면 공작성의 내성벽과 외성벽 사이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공작성과 제일 가까운 마을이기에
사실상 도시에 가까워 부유하고 치안도 괜찮았다.

갑자기 거긴 왜?

“성 아랫마을에 무슨 일 있나?”

루이센이 되묻자 칼튼은 피식, 웃었다. 바람이 빠져나오는 듯한 미소가 어쩐지 루이센의 신경을 거슬렸다.
루이센이 막일꾼으로 취직했을 때, 일한 지 반나절 만에 골병이 들자 사람들이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봤다.

그럼 그렇지, 하는 시선.

루이센은 매우 거슬려 그 표정이 무엇인지 따져 물으려고 했으나 타이밍이 나빴다. 그가 입을 열려던 그때, 문이
열리더니 칼튼의 부하와 루거가 동시에 나타나 거의 동시에 외쳤다.

“공작님! 큰일 났어요!”

“메뚜기 떼가 날아오고 있답니다.”

칼튼과 루이센이 모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센은 조금 전의 불쾌함은 다 잊고 환호했다.

드디어!

혹시나 뭐가 틀어져서 메뚜기 떼가 안 나타나면 그건 또 공작가의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 걱정하고 있었던 차에
들려온 희소식이었다.

“정말로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고?”

“예. 정찰조가 강 너머 쪽에서 검은 게 떼 지어 오는 걸 발견했답니다.”

“메뚜기가 맞아?”

칼튼은 너무나 믿기지 않아 자꾸 되물었다. 영주들의 항복을 예상할 수는 있다. 그래. 좀 말도 안 되지만
루이센은 여기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지만……. 자연재해까지 예측을 한다고?
18 화

“네.”

부하는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루이센의 예상이 또 한 번 맞아떨어졌다는 건데. 내 눈으로 보지 않으면
못 믿겠다.

“확인을 해 봐야겠어.”

“종탑으로 가지. 거기가 이 일대에서 제일 지대가 높으니까 잘 보일 거야.”

루이센의 말에 칼튼도 적극 동의했다. 루이센은 그냥 메뚜기 떼가 불타는 장관을 놓치기 싫어서 낸 제안이었다.

어쨌든 이해관계가 일치해, 두 사람은 종탑으로 향했다.

***

공작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종탑.

칼튼과 루이센은 그 꼭대기에 올라섰다. 종탑치고는 낮았지만 공작성은 얕은 구릉 위에 있었고 주변이 전부


평야였다. 날씨가 아주 맑아 멀리도 잘 보였다. 멀리 강이 있는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면서, 그 방향을 따라 잘
익은 밀들이 길게 드러누웠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어딘가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하늘은 까맣고, 땅에서는 인근 마을에서 모인 자경단들이 일사불란하게 대형을 갖추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루이센의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그리고 메뚜기와 인간이 맞부딪혔다. 그 순간 일제히 성령의 불길에서 강력한 불이 쏟아져 나왔다. 거대한 불길이
맑은 하늘을 장식하며 화려하게 타올랐다. 앞서 오던 메뚜기들은 재가 되어 우수수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메뚜기 떼는 주춤하지 않았다. 그들은 양 떼처럼 몰려들어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쌍안경으로 본 전선은 아비규환이었다.

주먹만 한 거대한 메뚜기가 날아다니며 퍽퍽, 하고 머리를 때렸다. 그것들은 살을 깨물고, 옷자락을 갉아 먹었다.
스스스슷, 하는 날갯소리가 귀를 사로잡았고, 시야를 가득 메운 메뚜기들 때문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극심한
공황상태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럼에도 사람들은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령의 불길을 사용하며 메뚜기를 태우고 또 태웠다. 재가 비처럼
내리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그래. 이거지!’

루이센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가슴속 깊이 숨어 있던 남부인의 피가 끓어올랐다.

약탈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메뚜기와 인간.

생존을 건 두 종족의 싸움은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수많은 메뚜기가 죽었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메뚜기들은
죽은 동료를 애도하는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바람을 타고 수십 개의 무리로 나뉘어 사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검은 연기와 탄 냄새만을 남기고 첫 전투는 끝이 났다.

또 다른 곳에서 메뚜기와의 전투가 벌어지겠지. 하지만 오늘의 전투를 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대비했고 최선을 다해 싸웠다.

루이센은 인간의 승리를 자신했다.

“하핫.”

긴장이 풀리며 자연스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굉장하지 않나?”

맑은 햇살을 받으며, 루이센은 청량하게 웃었다. 칼튼은 떨떠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예에……. 진짜 메뚜기네요.”

사실 칼튼은 메뚜기는 안중에 없었다. 물론 신기한 구경이긴 했지만 그보다는 루이센이 더 신기했다.

이걸 어떻게 예측한 거지? 메뚜기에 대해서는 영지의 누구도 모르고 있던데.

맑은 하늘 아래 본 루이센은 정말 예쁘장한 곱게 자란 도련님이었다. 아름답지만 놀라운 지략을 가졌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정말 모르겠어.’

똑똑한 걸까, 멍청한 걸까.

유능한 걸까, 무능한 걸까.

이타적인 걸까, 이기적인 걸까.

칼튼은 갑자기 속이 불편해졌다. 시원스럽게 웃는 루이센은 비로소 예쁜 조각상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훤히 보인다고 생각한 그의 행동, 그의 머릿속이 깜깜하고 아득하게 느껴지면서 강한 호기심이 칼튼을
이끌기 시작했다.
***

메뚜기 떼와의 전쟁은 인간의 승리로 끝났다. 미리 대비한 덕분에 피해도 거의 입지 않았다.

‘이번 위기도 잘 넘겼어.’

루이센이 기억하기로 더 큰 사건은 없었으니, 이제 정말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한숨 돌리기 무섭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의 원흉은 역시나 칼튼이었다.

칼튼의 집무실에서 나와 루이센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물이 쪽 빠진 듯 흐물흐물해진 모습에 루거가 괜찮냐고


물었다

“안 괜찮아.”

“칼튼이 뭐래요?”

“비너드가로 출정할 거래.”

메뚜기가 상륙하자 남은 세 가문 중 두 가문이 급히 항복 사절을 보냈다. 루이센은 남은 하나도 항복해 오길


바랐지만 그들은 묵묵부답, 소식이 없었다.

“비너드……면 여기서 멀었죠?”

“멀지. 그래서 기병만 데리고 가서 친다더라.”

말이 출정이지, 비너드 가문의 영지는 세가 크지 않으니 제대로 된 전투가 벌어질지도 의문이었다. 가문 하나쯤은
그냥 무시해도 되지 않을까? 대세가 정해지면 비너드 가문도 얌전히 1 왕자를 따를 텐데. 하지만 칼튼의 의견은
다른 모양이었다.

“나도 따라오래.”

“미쳤대요?”

루거가 기겁을 했다.

“공작님을 어디로 끌고 간다고요? 전쟁터로? 제정신이래요?”

“몰라…….”

“공작님 데려가 봤자 쓸모도 없을 텐데? 설마 공작님을 앞세워 설득한다거나 그런 걸 노리는 걸까요? 그거 안 될


텐데!”

“너는 말을 해도…….”
루거의 무례한 발언에 루이센도 동의했다.

“진짜 내가 쓸모 있을 거 같아서 데려가는 거 같진 않아.”

“그럼요?”

“인질로 데려가는 것이 거나……. 날 골탕 먹이려고 하거나……?”

“건방진 새끼. 진짜. 천한 놈이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서 돌아 버렸나.”

루거의 얼굴에 강한 혐오감이 담겼다.

“너 진짜 말조심 좀 하라니까.”

“아니, 열 받잖아요. 큰일 났네. 기병만 데리고 가면 영주님도 말을 타야 하잖아요.”

“…….”

사실 그 부분이 제일 문제였다. 루이센의 승마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냥 못 타는 게 아니고 심각할 정도로 못


탔다. 누가 고삐를 잡아 주지 않으면 말에 오르지도 못했고, 달리기는커녕 걷는 것도 힘겨웠다.

그런데 능수능란한 칼튼의 기병과 함께 출정한다? 루이센이 보기에도 미친 소리였다.

“그냥 말을 못 탄다고 말하시죠?”

“……말했어.”

둘러서 승마 솜씨가 서툴러 방해만 될 것이다, 라고 말해 봤지만 칼튼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귀족이 말을
못 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라는 얼굴로 비웃는 게 보였다.

“출정 따라가기 싫어서 엄살 부리는 걸로 보이나 봐.”

“……어쩌죠?”

“괜찮을 거야.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겠지…….”

그 따라가기만 하는 게 제일 문제라고, 루거는 지적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지적을 하면 뭐 하겠는가. 이제


와서 그들이 바꿀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루이센과 루거는 말없이, 어딘가 숙연한 분위기로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야, 우리 영주님 대단하지 않냐? 칼튼이랑 영주들 항복으로 거래하고, 메뚜기도 막고.”

귀가 솔깃한 이야기였다. 루이센과 루거는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았다. 창문 너머 공터에 하인 몇


명이 모여 잡담을 하고 있었다. 창문을 등지고 있어 루이센이 지나가고 있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똑똑하신 거 같아.”

흠흠, 루이센은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요즘 날 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긴 했지.’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도 정중하게 하고 노골적으로 욕하거나 한숨 쉬는 일도 사라졌다. 늙은 하인들은 루이센을
보며 감동했고 어떤 하녀는 수줍게 직접 구운 과자를 건네주기도 했다.

‘좀 뿌듯하고 좋은데?’

칭찬은 언제나 짜릿해. 그것도 자신을 욕하던 사람들이 돌아선 것이라 더 좋았다. 고생한 만큼 자부심도 차올랐다.

그런데 또 다른 목소리가 우우하고 야유했다.

“얻어걸린 거겠지.”

“어떻게 이게 얻어걸릴 수 있냐? 메뚜기 떼에 미리 대비했지, 그걸로 영주들 다 항복시켰지, 그 덕에 칼튼 놈도


덕 보고 빨리 떠나니 우리 영주님 더 무시하지 못하지.”

“그 양반이 성에 갇혀 있는데 메뚜기 떼를 어떻게 알아? 총관님도 재무관님도 아무도 모르시던데.”

“수도에 계시다 왔잖아. 뭐 들은 게 있겠지.”

“수도는 무슨. 맨날 술 취해서 진상 부리던데. 여자 배우들이랑 놀아나기 바쁘고.”

“……어쨌든 이번 일로 우리 공작가의 위상을 제대로 보여 줬잖아!”

“자기가 무너뜨린 권위, 다시 세운 것뿐이지 않냐?”

두 하인은 팽팽하게 대립했다.

“내가……배우들이랑 놀았던가……?”

“네. 기억 안 나세요?”

“음.”

루거가 수상하다는 듯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루이센은 은근슬쩍 그의 시선을 흘려보냈다.

그러는 사이에도 하인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그래도 우리 영주님, 사람이 갑자기 좀 변한 거 같지 않아?”

“지난번에 칼튼 놈 병사들이랑 말싸움이 났는데 나타나서 날 감싸 주시더라니까? 내 하인에게 불만 있으면


자기한테 말하라고.”

“술도 안 마시고, 식사도 깔끔하게 해치우고. 까탈도 안 부리고. 사람이 뭔가 수더분해졌다고 하나.”

“칼튼이 얼마나 살벌하게 갈구는데 그것도 다 참고 계시고. 원래 그렇게 참을성이 좋은 양반이었나?”

“아니. 절대 아니. 인내심이라고는 내 다섯 살짜리 아들만도 못하셨지. 위기의 상황에서 사람은 변한다더니
진짠가 봐.”

루이센의 변화를 하인들도 서서히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사소하게는 식사에 불평을 하지 않는 것부터, 칼튼의
불합리한 대우에 꿋꿋하게 견디며 하인들을 보호하는 모습은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큰 놀라움을 선사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대도 있는 법. 루이센의 평판이 좋아질수록 이를 악물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19 화

“칭찬할 걸 칭찬해라. 솔직히 그동안이 너무했던 거지. 이 지경이 되도록 정신을 못 차리면 그게 멍청이지.”

“야, 그래도.”

“솔직히 영주님만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했겠어? 다 자업자득이지. 밑에 마을은…….”

더는 참지 못하고 루거가 나섰다.

“이놈들이!”

루거가 창문을 열어젖히자 하인들이 빠르게 도망을 쳤다.

“제가 얼굴을 다 봐 놨어요. 가만 안 둬.”

“너 쟤들 이름도 모르잖아.”

“그건 그렇지만…….”

“냅둬. 없는 곳에서는 왕도 욕하는데 뭘.”

“그래도…….”

루거는 루이센의 눈치를 보며 졸졸 따라왔다.

“신경 쓰지 마세요. 공작님을 좋게 말하는 사람들이 생기니까 더 세게 욕하는 거예요. 다들 공작님 칭찬이
자자해요.”

“신경 안 쓴다니까.”

“진짜예요. 영주님이 공작가의 권위를 바로 세웠다고 다들 그래요.”

“어, 그래.”

괜찮다니까 루거는 자꾸 루이센을 위로하려 들었다. 성가셔진 루이센은 대충대충 대답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루이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예전 같으면 술 마시면서 엉엉 울고 있었을 분이…….’


루이센은 의연하게 넘기고 있었다. 이럴 때면 확실히 루이센이 변했다는 것이 와닿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처럼 무디게 구는 모습이 낯설어 루거의 얼굴에 불안이 서렸다.

***

불안 속에 출정일이 정해졌다. 루이센은 머리를 쥐어짜 내 안 따라갈 방법을 생각했으나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출정 전날 밤이 되었다. 밤이 깊도록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뜻밖의 손님이 그를 방문했다.

3 장.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루이센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덩치에, 중년 남자.

공작가의 기사단장이었다. 그는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자신의 회색 수염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늘 멋지게


다듬고 다녔는데, 지금은 삐죽삐죽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그대로 느껴졌다.

“기사단장? 아, 일단 들어오지.”

그가 무슨 일이지?

루이센은 의아했지만 일단 들어오게 했다. 늦은 시간이라 루거도 돌려보내서 방에는 루이센뿐이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촛불이 드리자 그의 얼굴에 자리 잡은 주름살이 더 깊게 파였다. 많이 늙고 지친 모습에 루이센은 낯선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래전 죽은 사람을 살아서 마주 보는 기분이 참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기사단장은 조금 머뭇거리다 말했다.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런가?”

루이센은 어색하게 얼굴을 만졌다. 잘 모르겠는데. 왠지 그런 말을 듣는 게 민망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내일 출정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소식을 들었군.”

“저희가 따라가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기사단장이 깊게 머리를 숙였다.

“아닐세. 칼튼이 허락 안 했을걸.”

“…….”

루이센이 기사들을 데려가야겠다고 말했다면, 혹은 기사들이 따라가겠다고 주장했다면 칼튼도 굳이 거절하지


않았을 것도 같지만. 이 부분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기사단장도 그걸 아는지 어딘가 멋쩍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색함이 흐르던 끝에 기사단장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백금으로 만든 매끈한 팔찌가 담겨
있었다.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팔찌를 낀 팔을 휘두르면 방패처럼 쓰실 수 있습니다.”

루이센은 오랜 기억 속에, 기사단장이 애지중지하던 팔찌가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기사단장이 큰 공을 세워, 그


상으로 선대 공작이 선물한 것이었다. 기사단장은 이 팔찌를 매일같이 닦고 광을 내며 아꼈고 자신의 자부심으로
삼았다.

“이걸 내게 줘도 되겠나?”

“쓰실 일이 없길 바랍니다만 혹시 모르니까요. 험지로 떠나시는데 드릴 것은 이것뿐이라 죄송합니다.”

“괜찮은데…….”

“어차피 여기서는 쓸 곳도 없습니다.”

“…….”

누구 것인지 모를 한숨에 촛불이 흔들렸다. 일렁이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루이센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기사단장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어렵사리 꺼냈다.

“자네에게 정말 미안해.”

기사단장이 정성껏 기른 기사들은 2 왕자에게 보내져 지금은 생사도 불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루이센에게 불평도
하지 않고 그를 지키기 위해 전선에 섰다. 근데 루이센은 그것조차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회귀 전에는 야반도주로,
이번엔 항복으로. 현재의 선택은 루이센에게 최선이었지만 그는 모를 테니까.

기사단장은 잠시 침묵을 하더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저희는 영주님의 기사입니다. 어떻게 사용하시든 감히 불만을 품지 말아야겠지요.”

“…….”

“하지만 솔직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아니에스 공작가의 기사로서, 저희는 모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영주님이 몰라주시는 것이 야속합니다”
칼튼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다는 것,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전투가 루이센의 항복으로 무의미해진 것, 루이센이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독단으로 행동한 것.

그 전부가 루이센이 자신들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했고 섭섭하고 야속했다.

“영주님이 이곳을 싫어하시는 거 압니다. 저희, 가신들을 불편해하는 것도요. 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저희를 설득해 주실 순 없었습니까?”

“……내 마음이 너무 급했어.”

루이센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 순간에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그들의 입장 차이는 좁아질 것 같지 않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좋은 말로 달래고 넘어갈 법도 한데, 루이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루이센의 사과가 진심이라는 게
전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사단장이 일어섰다. 용건은 팔찌를 전하는 것뿐이었다는 듯 깔끔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기사단장은 방을 나갔다. 문을 닫을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정중한 태도에 루이센은 한숨이 나왔다.

기사단장에게는 아직 루이센에 대한 원망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위험한 곳으로 떠난다는 루이센을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건네러 온 것이다.

“고지식한 양반 같으니라고.”

그런 사람이니 더 이번 일로 상처를 입은 거겠지. 마음고생을 하는 오랜 신하를 바라보는 것은 루이센에게도


고역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 사이에 있었는지 미리 알았더라면. 자신이 좀 더 아니에스 공작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면.

가정해 봐야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루이센은 씁쓸함을 떨칠 수 없었다.

조용히 잠 못 이루는 밤이 흘러갔다.

***

어김없이 시간은 흐르고 아침이 밝아 왔다. 루이센은 루거의 시중을 받으며 비장하게 준비를 마쳤다.

셔츠 위로 체인메일을 입고 비에 젖지 않도록 방수 처리를 한 질긴 가죽 코트를 걸쳤다. 검도 찼다. 오른손에


기사단장이 준 팔찌를 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투박하지만 모두 루이센에게 맞춰 만든 최상급 무구라 몸에 잘
감겼다.

루이센은 곱상한 외모와 흰 피부 때문에 기사 같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날렵한 차림새가 귀공자 같은 면모를
돋보이게 했다.

모이기로 한 공터로 나오자, 칼튼과 그 부하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하하하하.

무슨 농담을 한 건지 다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냥이라도 가는 듯한 분위기였다.

“판금갑옷은 안 입길 잘한 거 같죠?”

루거의 속삭임에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그는 철판으로 온몸을 감싸는 판금갑옷과 랜스를 챙기려고
했다. 전투에 나가니 그 정도 무장은 해야 안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생각해 보니, 루이센은 기사 훈련을 받지 않아 판금갑옷을 입고 움직일 수가 없었고 그걸 타고 말을 모는


것은 더더욱 무리였다. 눈물을 머금고 판금갑옷을 포기했다.

칼튼의 부하들은 기마병이라고 해도, 흔히들 생각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갑옷으로 무장한 모습과는 달랐다.
메일을 입은 사람도 드물었다. 질긴 가죽 갑옷에 중요 부위에만 철판을 덧댄 차림이 대부분이었다.

판금갑옷은 비싸고, 유지하는데 많은 돈이 들어갔다. 혼자서 입고 벗을 수 없어 복잡했고. 그 점을 생각해 보면


용병에 가까운 이들이 제대로 무구를 갖췄을 리 없었다.

“지금 차림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과해 보이는데 판금갑옷 입고 왔으면 웃음거리가 됐을 거야.”

루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애당초,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이 왜 저렇게 위기감이 없냐 이거다.

‘암만 봐도 훈련 가는 것 같단 말이지.’

비너드가를 공격하는 거, 그냥 부하들 감 잃지 말라고 훈련 삼아 가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신나 보이는 칼튼의 태도가 그의 의심을 더 부추겼다. 어쩐지, 보병은 놓고 기마병만 소수로 데려간다고 하더니.

루이센과 눈이 마주치자 칼튼이 다가왔다.

“공작님. 이제 출발할 겁니다.”

“내가 방해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잘 따라다니기만 하시면 됩니다.”

“…….”

그리고 나서 칼튼은 능숙하게 말에 올랐다. 말 고삐를 당기며 말의 방향을 돌리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말과
한 몸인 것 같았다. 루이센이 십여 년 동안 말 타는 것만 연습해도 못 따라갈 움직임이었다. 말에 올라탄 그는
남자라면 누구나 동경할 만큼 멋졌다.

‘나도 말은 어릴 때부터 계속 탔는데 왜……?’

이런 게 재능의 차이일까. 루이센은 의기소침해졌다.

“공작님, 말에 오르시죠.”
“어, 어……. 잘 잡고 있어야 해.”

“물론이죠.”

루거의 부축을 받으면서 루이센은 간신히 말에 올라탔다. 시야가 높아지자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는 말고삐가
생명줄이나 되는 것처럼 꽉 움켜쥐었는데, 말도 그의 불안을 눈치챘는지 작게 히힝, 하고 울며 머리를 털었다.

‘으……으…….’

루이센은 신음했다.

“온 힘을 다해 빠르게 달린다! 여기 누구 그사이에 말 타는 걸 잊은 멍청이는 없겠지?”

‘여기요. 여기.’

루이센은 손을 들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차마 들 수 없었다.

20 화

어느 틈에 자신의 말에 탄 루거가 루이센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귀족의 하인답게 말을 아주 잘 탔다.

“제가 옆에서 보조해 드릴게요. 길도 평지고 괜찮을 거예요.”

“그래. 너만 믿는다…….”

일행이 출발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따라만 다니자. 무슨 일이야 있겠어.’

루이센은 심호흡을 하며 말을 움직였다.

이때 루이센은 몰랐다.

죽은 듯이 일행들만 따라다니는 것, 자신이 그 쉬운 것조차 못 할 줄은 말이다!

***

마을의 한복판.
길에는 루이센과 루거 둘만 남아 있었다. 칼튼 무리는 저 멀리 빠르게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니까 루이센은 지금 성을 벗어나기도 전에, 낙오되었다.

“하아…….”

루이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루거는 난감한 얼굴로 루이센을 올려다보았다. 루이센도 딱히 방법이 없어 한숨만 내쉬었다.

내가 이렇게……승마가 엉망이었나……?

처음에는 괜찮았다.

일행은 천천히 말을 출발했다. 루이센도 조금 아슬아슬하지만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다들 오랜만에 성을 나가서 들뜬 것이 문제일까. 아니면 그들 앞을 막을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고, 길이


뻥 뚫려 있다는 게 문제였을까.

칼튼과 그 부하들은 서서히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고 정신을 차려 보니 그들은 아예 전력 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루이센의 서툰 말솜씨로 능숙한 전사들을 따라갈 수는 없는 일.

출발할 때만 해도 선두에 있던 루이센은 점점 뒤로 밀려나다가, 아예 동떨어지게 되었다.

어떻게든 쫓아가야 해. 칼튼이 뭐라고 트집을 잡을지 모르는 데다 무엇보다 창피하다고!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몸은 안 따라 주니 속이 타들어 갔다. 루이센은 애꿎은 말을 닦달하며 성질을 부렸고,


짜증이 난 말은 그냥 갑자기 멈춰 서 버렸다.

“말아. 왜 그래? 우리 얼른 가자? 응?”

루이센이 고삐를 흔들어 보고, 발도 굴러 보고, 별짓을 다 했지만 루이센의 말은 콧방귀만 흥, 하고 뀌었다.

그러는 시간에도 칼튼과 부하들은 저 멀리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루이센이 애타게 그들을 불러 봤지만
말발굽 소리에 묻혀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장담컨대 저들은 루이센을 잊었으리라.

루거만이 본분을 잊지 않고 루이센의 곁에 남았다.

“자자, 착하지? 우리 얼른 따라가자?”

루거는 자신의 말에서 내려, 루이센의 말을 움직이게 하려고 애를 쓰다가 두 손을 들었다.

“이거 안 되겠는데요? 말이 꿈쩍도 안 할 거 같아요. 단단히 화가 났어요.”

“공작가의 말 중에서 가장 순하고 얌전한 놈이랬는데.”

“그러게요……”
“얘도 날 태우려면 짜증이 나겠지.”

루이센은 또 한숨을 쉬었다. 루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제는 칼튼 무리의 꼬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죠?”

“어쩌겠어. 걸어서라도 따라가야지.”

걸어서 가고 있다 보면, 그가 사라진 걸 알아채고 돌아와 주겠지. 아니, 그대로 잊어버리고 비너드의 영지까지
가 주면 고맙고!

어쨌든 따라가려고 노력했다는 게 중요하다. 낙오된 게 절대 고의는 아니라고 티를 내야지. 그리고 마을 한복판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루이센은 말에서 내렸다.

건방진 말은 루이센이 자기 등에서 내린 것을 반기며 귀신같이 얌전해져서는, 루거가 고삐를 잡고 끌자 순순히


따라왔다.

루이센과 루거, 그리고 말 두 마리는 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고 보니 회귀해서 성 밖을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네.’

외출이라고 해 봐야 칼튼의 심부름을 할 때 성안을 빙빙 돈 것이 전부였다. 칼튼에게 항복하러 갈 때도 숲의 길을


이용했으니 마을을 보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두 번 다시 못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성 아랫마을은 공작성이 불타면서 같이 사라졌다. 오랜 세월을 떠나 있었지만 고향이라서 그런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저긴 꽃집이지? 그 옆에는 담배 가게가 있고? 청과물점이 이 근처에 있는데…….’

그리움에 잠겨 두리번거리던 루이센은 2 층 건물의 창가에 선, 어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루이센에게


인사를 하지도, 숨지도 않고 그저 루이센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푹 파인 눈가 탓인지, 그녀의 눈빛은
형형했다.

‘누구지?’

모르는 여자였다. 루이센은 수도에서 제법 요란한 연애 관계를 맺었지만 영지에서는 그런 상대를 만든 적이


없었다. 하지만 괜히 지레 찔려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아까부터 들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말에 정신이 팔려 인지하지 못했지만 분명히 뭔가 이상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외성과 내성을 잇는 큰 도로는 마을에서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였다. 언제나 사람도 많고 말과 마차도 많은


곳이었다. 이 길이 이렇게 한산한 것을 루이센은 생전 처음 봤다.

길에는 사람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루이센과 루거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아무리 성문을
봉쇄했더라도 마을 안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생활 소음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사람이 모두 떠난 유령도시 같았다.

‘뭐지……?’

루이센이 불안감에 잠겨 있는데, 루거가 루이센의 옆에 붙으며 심각하게 말했다.

“공작님, 다시 말에 타셔야 할 거 같은데요.”

“어?”

루거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경계심 가득한 시선을 따라가니 사람들이 서 있었다.

골목, 집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나와 루이센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고 몸에는 땟국물이 흘렀다. 뺨이 홀쭉하고 안색이 나빴다. 퀭한 두 눈에 핏발이 일어서 공포스러웠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된 거야?”

루이센은 중얼거렸다.

아니에스 공작령은 풍요로운 곳이었다. 평범한 마을 사람들도 살이 뽀얗게 올랐고 넉넉함이 겉모습에서도
드러났다. 그중에서도 성 아랫마을 사람들은 영주 성에서 가장 가까운 만큼 더 부유한 사람들이 살았다. 평생
배고픔을 모르고 살았을 사람들이었다.

잠시 성문이 봉쇄되었어도, 아직 겨울이 되기 전이었다. 미리 비축한 식량과 물자가 있으니 당장 문제가 되진


않을 터였다.

마을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영주님, 영주님이 맞으시죠?”

루이센은 선뜻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폭동이라도 일어날 기세가 아닌가.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분노에 차 있었다.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물어보면서 좀 더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루이센이 신중하게 대답을 고르는데, 루거가 루이센의 앞으로 나섰다. 그는 루이센을 한 팔로 가리며 그를
보호하듯 서서 외쳤다.

“그래. 이분이 루이센 아니에스 공작님이시다! 어느 안전인 줄 알고 길을 막아서느냐!”

미치겠네. 루거야! 입 다물어!

“걱정 마세요. 공작님인 걸 알았으니 비킬 거예요.”

아니. 아니. 내가 나인 걸 알아 버린 게 문제라고!

루이센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영주다.”

“영주가 여기 있어!”

“영주가 성에서 나왔다!”

소란이 커지며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모습이 무척 위협적이라 루이센은 루거의 곁에 바짝 가까이
붙었다.

“뭐 하는 놈들이냐!”

루거는 예상과 다른 반응에 당황해 도리어 호통을 쳤다.

“우린 이 마을 사람이요! 영주님께 요구할 게 있소!”

“영주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청할 게 있다면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루거는 단칼에 거절했다. 루이센이 들어보자고 말할 새도 없었다.

“절차? 절차라고?”

“말해 봐야 들어주지도 않잖아!”

“댁들이 우리 집 창고 털어갈 때는 절차 밟고 가져갔냐!”

“아니, 잠깐만. 뭐라고?”

루이센이 되묻자, 수십 명이 되는 사람들이 멋대로 제 말을 쏟아 냈다.

“가져간 걸 돌려주쇼!”

“식량은 싹 쓸어 가, 배급도 없어져, 성에서 나가지도 못해! 다 죽으라는 소리냐!”

“성 밖은 갓 수확한 밀로 넘쳐 나는데 성안은 굶어 죽고 있소!”

마을 사람들의 원성에 하늘이 크게 진동하였다. 울음소리와 고함 소리. 수많은 말소리가 한데 뒤섞여 무척


혼란스러웠다.

‘무슨 소리야? 굶어 죽는다니?’

정말 마을 사람들이 굶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 대체 왜? 가져갔다는 건 또 뭐고, 배급은 뭐야?

루이센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맘때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전쟁을 위해 뭘 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간 속에 잊어버린 게 아니라


애초에 머릿속에 담아 둔 적이 없어 까맣게 모르는 거였다.

“자세히 좀 말해 보게. 내가…… 내가 아는 게 없어서…….”


앞으로 나서려는 루이센을 막은 것은 루거였다.

“공작님은 가만히 계세요. 위험합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런 무뢰배들을 직접 상대하실 필요 없습니다.”

“뭐? 우리더러 무뢰배라고?”

잔뜩 성이 난 한 남자가 루거의 멱살을 잡으려 달려들었다. 루거는 간단하게 남자를 제압해 앞으로 던져 버렸다.
무술을 배운 루거에게 평범한 마을 사람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것만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고작 마을 사람에게 위협을 당한 것에 분노한 루거는 기어코 활을 들고 말았다.


그는 활로 남자를 겨냥했다.

얘가 미쳤나!

루이센은 기겁을 하며 루거의 팔을 붙잡았다.

“말리지 마세요! 감히 평민 주제에 귀족을 공격하다니요!”

“헛소리하지 말고 활 내려! 내 영지민이야!”

루이센은 기어코 루거의 활을 빼앗았지만 이미 늦었다.

“영주의 하인이 영지민을 죽이려고 했다!”

“아니, 아니야!”

이제는 아무도 루이센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군중의 인내심은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루거의 행동이 도화선이 되어 분노가 걷잡을 수 없어 퍼져 나갔다.

이성을 잃고, 분노가 쏟아져 나오면서 군중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왜곡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21 화

“영주가 영지민을 죽이려고 했다!”

“영주가 우릴 죽이려고 한다!”

“아니라니까!”

“빵을 달라!”

“성문을 열어 달라!”
“영주님, 피하시죠. 폭도들을 일일이 상대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야!”

진짜 돌겠네! 루거 말은 또 왜 잘 듣는 건데?

루이센은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게 걷고 있었는데?

“말에 타세요. 우선 여길 빠져나가야 해요.”

루이센은 루거가 시키는 대로 말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말이 뒤로 몸을 빼면서 등자에 발을 걸 수가 없었다.

“영주가 달아나려고 한다!”

루이센이 말에 타려는 걸 본 사람들은 다급해져서 루이센에게 달려들었다. 루이센이 다시 말 위에 억지로


올라타려고 하자, 사람들이 루이센을 향해 덤벼들었다. 말은 겁에 질렸다.

히이이잉!

말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몸을 뒤흔들었다. 막 등자를 밟고 안장에 타려던 루이센은 그대로 땅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으윽!’

강한 충격에 루이센은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때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루이센을 향해 날아왔다.

루이센은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휘둘렀다.

탕!

팔찌가 만들어 낸 작지만 단단한 방패에 무언가가 튕겨 나갔다. 울림 소리가 꼭 작은 단검 같았다.

‘뭐야? 어디서 날아온 거야? 누구야?’

루이센이 놀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봤을 때, 그는 이미 흥분한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후였다.

‘아…….’

사람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부시게 역광이 쏟아졌고, 사람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실핏줄이 일어선 시뻘건 눈 수십 쌍이 루이센을 향해 형형한 빛을 뿜고 있었다,

굶주리고 분노한 사람들.

회귀 전에는 어디를 가나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떠돌이에 힘없는 루이센은 그들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구걸을 하다가, 일을 해 주고 대가를 달라고 했다가, 그냥 그 자리에 있어서. 셀 수 없을 만큼 이런 식으로


둘러싸여 죽을 정도로 맞았다.

‘도망, 도망쳐야 해.’


옛 기억이 떠오르자 가슴 속 깊이 숨어 있던 공포감이 그를 장악했다. 두려움은 이성을 잡아먹었고 그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는 아니에스 공작도, 귀족도 뭣도 아닌 그저 가난하고 힘없는 거지, 고향을 잃고 떠도는 떠돌이로
돌아갔다.

가슴이 쿵쿵, 하고 뛰었다. 그런데 정작 두 다리가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지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누군가 루이센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영주를 잡았다!”

루이센은 휘청였고 그 틈에 또 다른 누군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지이익, 하고 옷소매가 찢겨져 나갔다.


루이센은 종이인형처럼 휘둘리며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다.

루이센은 넋을 놓은 채로 이리저리 휘둘렸다.

귀에 익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공작님! 공작님! 어디 계십니까!”

흑마를 탄 검은 기사.

칼튼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

“칼튼 경, 여기!”

루이센의 소리가 그에게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지? 그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돌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럼 안 되는데!’

순간 루이센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사람이 듣지 못하면 사람을 태운 말을 끌어오면 되겠지!

루이센은 온 힘을 다해 손길을 뿌리치고 왼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휘익, 가늘고 긴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람 빠진 소리는 언뜻 소리 지르는 것만 못해 보였으나, 칼튼의 말은 확실히 반응했다.

검은 말이 머리를 돌려 루이센을 향했고, 칼튼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이 루이센과 마주쳤다.

칼튼은 즉시 반응했다. 그는 말고삐를 당기더니 루이센은 감히 어떻게 한 건지 상상도 못 할 움직임으로 크게


도약했다. 거대한 흑마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넘어 순식간에 루이센의 앞에 도달했다.

“썩 꺼져!”

칼튼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군중은 움찔했다. 분노해 눈이 돌아가긴 했어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수많은 전선을
넘어온 칼튼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그들은 루이센을 놓았다.

칼튼은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루이센을 낚아챘다. 그는 루이센을 어린애 들 듯이 가볍게 자신의 옆구리에 꼈다.

“얌전히 계시죠.”
루이센은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경험을 떠올려 보면, 눈을 뜨고 있어서 좋을 게 없었다.

그 생각은 정답이었다. 칼튼은 루이센에게 다가올 때처럼, 도약했다. 하늘을 나는 것에 비할 만한 감각에


루이센은 비명을 집어삼켰다.

칼튼은 아주 간단히 성난 군중을 뛰어넘었고 빠른 속도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감히 칼튼 앞을 가로막을 겁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칼튼은 마을 어귀에 도착해 루이센을 내려놓았다.

“우욱.”

땅에 발이 닿기 무섭게 루이센은 구역질을 했다. 그 모습을 칼튼은 동정도 경멸도 아닌 눈으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큰일 날 뻔했어.’

잠시 후, 어지럼증이 좀 가신 루이센은 고개를 들었다. 칼튼이 건넨 수통으로 입을 헹구고 나자 비로소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지?”

“마을 외곽입니다.”

“자네가 날 두 번이나 구해 주었군.”

“예, 뭐.”

칼튼도 무척 놀랐다. 잘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성문이 열리길 기다려 보니 루이센과 그 하인이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너무 들뜨긴 했다. 성에서 글씨나 들여다보고 있다가, 남부의 탁 트인 들판을 달리려니 어찌나 피가
끓던지. 그러다 보니 점점 속도가 높아졌고, 부하들과 경쟁하듯 달리다 보니 루이센을 잊었다.

어느 순간 루이센이 시야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어련히 잘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을


타는 게 귀족 아닌가. 말은 돈이 많이 드는 생물이었다. 말을 능수능란하게 타는 건 귀족의 상징이자 특권이었다.

설마 그렇게 끔찍하게 말을 못 탈 줄은 몰랐지.

나중에야 부랴부랴 루이센을 찾으러 왔던 길을 돌아갔다. 칼튼이 도착했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폭도로 돌변한
뒤였다.

루이센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서 몰랐지만 성 쪽에서는 이미 폭동의 소식을 듣고 칼튼의 병사들이 오고 있었다.
칼튼이 한발만 늦었어도 루이센은 폭동을 진압하는 데 휘말려 더 크게 다쳤을 것이었다.
“큰일 나실 뻔했습니다.”

“미안하네.”

루이센은 입술을 깨물고 자신이 본 광경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한 말을 다시 하나씩


되새겼다.

‘식량과 물자를 가지고 갔고, 배급이 중지되었다고 했지.’

머릿속에 하나하나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수성전을 준비하면서 전시체제에 들어갔고 물자를 징발한 거다. 그 대신 배급으로 생계를 보장해 준다. 영지전이
벌어질 때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루이센이 갑자기 항복을 하면서 벌어졌다. 칼튼의 군대가 들어오고 가신들과 병사들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행정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어 배급이 중지되고 만 것이다.

병사들은 전부 구금되었고 성의 하인들은 칼튼의 부하들 시중을 들기도 벅찼다. 거기다 행정 관료들은 상사의
파업으로 일에 손을 놨고. 그나마 칼튼을 상대하며 일을 하는 건 루이센 정도였는데 루이센은 이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결국은 또 내 잘못인가.’

루이센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제야 대책이 없다고 한 총관의 말도, 몇몇 하인들이 보이던 적대감도, 칼튼의 비웃음도 다 이해가 갔다.
칼튼이 얼마 전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성 아랫마을 상황은 안 궁금하냐고. 그건 분명 성 아랫마을에 뭔가
있다는 걸 그도 알았다는 뜻이었다.

“자네는…… 마을 사람들이 저런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었나?”

칼튼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압니다. 그러는 공작님은 정말 모르셨습니까?”

“……알았으면 저렇게 뒀겠어?”

루이센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마을 사람들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스스로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칼튼은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루이센을 비웃어 줄 때가 왔다. 그렇게 잘난 척을 해 대더니 영지민들이 굶는 것도 모르고 있었냐고.


칼튼은 내심 이 상황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닥쳐오자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루이센은 기절할 것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충격과 후회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태어날 때부터 완전무결하고 오만한 귀족나리는 어디로 가고, 죄책감에 질식할 거 같은 창백한 청년만이 남아
있었다. 어리고 무지하며, 연약한 청년 말이다.

그는 절망이라는 낭떠러지 위에 서 있어, 툭 치면 끝도 없이 떨어져 내릴 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안고 있었다.

‘그만두자.’
이것도 저것도 그냥 다 귀찮아졌다. 칼튼은 루이센을 비웃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상황이나 정리하기로 했다.

“정신이 드셨으면 성으로 돌아가시죠.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잠깐만.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루이센은 칼튼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직접 마을 상황을 보고 싶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그러니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 아닌가. 자네와 함께면 안전할 테니까.”

“제가 왜…….”

칼튼은 루이센의 손을 뿌리치려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루이센의 파란 눈동자가 마치 자신만이


구원자라는 듯 간절히 바라보는 통에 말이 쏙 들어갔다.

‘그냥 성에 데려다 놓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루이센이 충격을 받든 말든 칼튼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루이센 때문에 계획이 일그러졌으니 화를
내도 모자랐다. 성가신 일을 벌이지 못하게 성으로 데려다 놓고 비너드가의 영지로 떠나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차, 해서 싫다고 말하려 했지만 루이센의 얼굴이 햇살이
비춘 것처럼 밝아지는 걸 보자 또 말문이 막혔다.

22 화

“고맙네.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내가 꼭 갚겠네.”

“딱 한 바퀴입니다.”

“응. 그래. 나도 염치가 있는데 그 이상을 바라겠나.”

칼튼은 루이센을 태우고, 말을 출발시켰다. 루이센은 칼튼의 옷을 꽉 쥐었다. 루이센은 마음의 각오를 하는지
숨을 깊게 삼키고 뱉었다.

‘내가 왜 고개를 끄덕인 거야?’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루이센의 긴장이 느껴졌다. 그것도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성가시기 짝이 없는데, 몸은
착실히 말을 몰고 있으니 정말 모를 일이었다.

칼튼과 몸을 붙이고 말을 타는 상황에서, 그렇게 무서워하던 칼튼도 지금만큼은 루이센의 안중에 없었다.

마을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했다.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그나마 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움직이고 소리칠 힘이라도 있으니. 남은 사람들은 집 안을
빠져나올 힘도 없어 보였다. 모든 길이 텅 비었고 활동이 멈췄다. 언제 이 상황이 나아질지 기약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끝을 모르는 불안은 그들을 집어삼켰다.

마을의 한구석에는 성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전쟁이 벌어진다는 소식에 무작정 안전할 줄 알고
성으로 피난 왔거나, 병사로 징집된 농부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임시 천막을 집으로 삼고 입고 있는 옷을 침대로 삼아 살고 있었다. 본격적인 추위가 찾아오진 않았지만


노숙을 하기엔 어려운 날씨였다. 지치고 병든 이들은 루이센이 지나가자 또르르, 눈을 굴리기만 했다.

무기력한 눈동자였다. 그 안에서 루이센은 깊은 굶주림을 읽었다.

루이센도 잘 아는 고통이었다.

굶으면 처음에는 배가 고팠다. 그러다가 장이 꼬일 것처럼 아프면서 머릿속에는 온통 먹을 것만 가득 찼다.


배고픔 앞에 귀족으로서 쌓아 온 자긍심도, 예의와 체면 같은 것도 한 줌 먼지처럼 사라지고 오직 본능만 남아
짐승처럼 헐떡였다.

썩은 과일, 곰팡이 슨 빵, 흙 묻은 풀뿌리.

뭐든 배 속을 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좋다고 구역질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입안에 밀어 넣었다. 먹을 걸 구할 수


있다면 뭐든 했다. 상상도 못 해 본 노동을 하고, 구걸하고, 훔치고, 몸을 내던지고.

그러다 허기가 사라지고 비로소 정신이 들면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비참하고 역겨워 울부짖었다. 나 자신이
무너져 내리던 그 순간에도 입안에 들어온 음식은 달콤했다.

루이센은 그들이 지금 느끼고 있을 괴로움을 같이 느끼며 공감했다.

으음.

속이 뒤틀리는 아픔에 루이센은 낮게 신음했다.

왜 이렇게 될 때까지 마을에 내려와 살펴보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못 했을까. 언뜻 귓가를 스쳐 갔던 징조들을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코앞에서 이런 참사가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잘하고 있다고 우쭐했다니.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만 성으로 돌아가지.”

루이센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하지만 마음에 담긴 참담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칼튼은 조용히 말을 몰아, 성으로 돌아갔다.


***

성에 도착해 루이센은 곧장 총관의 방으로 향했다. 영주 대리인 그만큼 영지 사정에 밝은 사람도 없을 테니까.

“총관!”

격양된 루이센이 들이닥쳤다. 총관은 루이센의 몰골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출발할 때만 해도 멀끔했던


음유시인의 노래 속 왕자님 같은 모습은 어디로 가고, 찢기고 구른 꼴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출정은요?”

“……출정은 취소됐어. 마을 한복판에서 내가 낙오되었고, 마을 사람들에게 휘말렸네.”

“폭동이 일어난 겁니까?”

“그래.”

총관은 크게 놀랐다. 루이센이 말을 타고 따라간다고 할 때부터 그 서투른 승마 솜씨로 한 번쯤 고생할 줄은


알았다. 그런데 설마하니 마을을 벗어나기도 전에 그 잘 닦인 도로에서 낙오되어 폭동에 휘말릴 줄이야. 길게
설명을 듣지 않아도 노련한 총관의 머릿속에 상황이 그려졌다. 굶주린 마을 사람들 사이에 영주가 나타났으니
당연히 큰일이 났을 것이 분명했다.

“루거는요? 수석 시종이라는 놈이 영주님을 지키지 않고 뭘 한 겁니까!”

이럴 때를 대비해 무술에 능숙한 루거를 호위를 겸해 대동시킨 것이었는데!

“그럴 상황이 아니었어. 그보다 자네는 마을이 어떤 상태인지 아는 거 같군?”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설마 성문을 벗어나지도 못할 줄은…….”

“아니,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루이센은 욱해서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이 다 굶어 죽고 있는데, 그걸 내게 왜 말하지 않았어? 저런 상황인데 공작가의 총관이라는 자가


일을 내팽개치고 있을 때인가!”

총관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모르고 계셨습니까?”

총관은 오히려 루이센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

“무리해서 2 왕자님을 지원했고 그 상황에서 수성전을 벌여야 하니 마을에서 징발을 하고 배급을 하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영주님의 동의도 분명 받았고요.”

총관은 철저한 사람이니 분명 루이센의 동의가 없이 징발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루이센이 기억 못 하는
게 맞았다.

자신은 글을 읽는 데 서툴렀다. 서류 작업이라곤 여섯 살부터 총관이 시키는 대로 서명하는 게 전부였다. 눈이


돌아갈 것처럼 바쁘고 겁에 질린 상황에서 수없이 많은 서류와 편지에 서명을 하는데, 그 와중에 그 글씨들을
차분히 다 읽지 못하고 넘겼다.

거기다 루이센에게는 벌써 몇 년 전에 지나간 일이었다. 영지가 불타고 모두 죽어 버린 충격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걸 잊어버리기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일까. 마을 사람들이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루이센은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정말 잊어버리신 겁니까? 어떻게 그런……. 직접 서명하시지 않았습니까?”

총관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루이센이 제 손으로 직접 서명한 게 일 년 전 일도 아니고, 고작 한 달이나 겨우


지난 일이었다. 설마 그가 잊어버렸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다. 루이센이 성 아랫마을 상황을 알면서도,
칼튼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총관도 부러 성 아랫마을 상황을 쉬쉬하면서, 뒤로는 재무관과 은밀히 그들을 구제할 방법을 따로 궁리
중이었다.

“하아.”

총관은 노골적으로 실망을 드러냈다.

“제가 늘 말했지요. 어느 때건 황금들판의 주인이라는 걸 잊지 마시라고.”

“……왕국의 진정한 보고는 이 황금들판이라. 그리고 그곳을 지배한 아니에스 공작가야말로 진실로 명예로운
가문이라 그 명예에 걸맞게 행동하며 이 땅을 지키라고. 알고 있네, 총관.”

어려서부터 총관에게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이야기였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루이센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지켜본


적 없던 말이고.

루이센은 너무나 부끄럽고 괴로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총관의 시선이 자신을 찌르는 바늘 같았다.
루이센은 벌떡 일어나 몇 번이고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얕은 구릉 아래로 펼쳐진 평야는 이제 막 노을에 젖어 들고 있었다. 노랗고 빨간 그 황금빛 들판이 보기 괴로워


루이센은 눈을 감아버렸다.

시야를 차단하자 남는 건 더 큰 괴로움뿐이었다.

과거로 돌아와 보니 자신은 기억하던 것보다 더 끔찍하게 멍청했고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어쩌자고. 진짜 무슨 생각을 하고 산 거야?

온 사방이 벽에 감싸여 짓눌러지는 기분이었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만큼 실망이 너무나 컸다. 돌연 간에 숨
쉬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로 세상의 모든 것이 무서워졌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부끄러움에 그냥 이대로
영원히 숨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절망 속에 루이센은 습관적으로 자문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성자님.’

루이센이 악몽을 꾸고 깨어나 어둠 속에서 서성이는 죽은 자들이 무서워 흐느껴 울 때, 성자는 루이센의 등을
다정히 쓸어 주었다.

성자는 말했다.

어둠이 무섭거든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러트릴 게 아니라 눈을 부릅뜨고 불을 켜라고. 눈을 돌리고 피하면
두려움은 끝도 없이 커져서 자신을 짓누르는 법이라고.

그 말을 루이센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래. 피해서는 안 돼.’

루이센은 눈을 떴다. 가슴에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고향의 풍경이 보였다. 이 풍경을 얼마나 절실히 그리워했는지,
얼마나 돌아오고 싶어 했는지를 다시 떠올렸다.

총관은 기대 없이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루이센은 인내심이 약하고 장애물이 생기면 금방 포기하는 성미였다. 특히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고 상처받곤 했다. 이번에도 울면서 자포자기하겠지.

그런데 테이블로 돌아온 루이센은 어딘가 달랐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항복한 것에 후회는 없어. 자네 말대로 아니에스 공작가는 이 황금들판을 지킬 의무가
있으니까. 나는 내 일을 했어.”

“…….”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굶고 있는 문제는……. 잊고 있었던 내 잘못이니……. 내가 바로 잡겠어.”

루이센의 탄생부터 지켜봐 온 총관이었지만 이렇게 단호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되 후회는
없었다. 루이센의 두 눈은 굳은 의지로 가득했고,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가 엿보였다.

총관은 크게 놀랐다. 물렁물렁한 솜인형 안에 단단한 심지가 생긴 것 같지 않은가. 훌쩍 어른스러운 얼굴을 한


루이센에게서 총관은 자신이 평생토록 존경하던 선대 공작을 발견했다.

“방법은 있으십니까?”

총관은 저도 모르게 조금 더 공손해졌다.

23 화
“칼튼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 그에게 도움을 구해야 해.”

“마을 사정은 그자도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창고의 곡식을 풀든, 수확한 밀을 들여오든 할 수
있는데도 가만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칼튼의 말 한마디면 다 해결된다는 말이지?”

“제 말뜻은 그게 아닙니다.”

“알아. 그가 우리를 돕지 않을 거라는 뜻이지. 그래도 물러설 수 없는 일 아니겠나.”

“그렇긴 합니다만…….”

“칼튼 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사람들을 모아. 허락이 떨어지면 성 아랫마을 사람들을 바로 구제할 수
있게 계획을 짜 두란 말이야.”

“사람이 모이는 걸 칼튼 경이 두고 볼까요?”

“그의 부하들이 막거든 내 이름을 대. 내가 칼튼의 허락을 받았다고.”

“괜찮겠습니까?”

총관은 영 불안해 보였다. 루이센의 말대로 해도 되는 걸까. 자칫했다가 더 큰 화를 불러오는 건 아닐까.

“메뚜기 떼를 대비하는 일도 내가 직접 칼튼 경을 설득했어. 어떻게든 허락을 받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약간 칼튼에게 당한 감이 있긴 하지만 그 부분은 슬며시 잊기로 했다. 총관과 가신들을 안심시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좋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위한 일이야. 내게 앙금이 남았어도, 부디 그들을 생각해 주게.”

루이센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 모습에 총관의 눈빛이 흔들렸다.

루이센의 나이 여섯 살. 선대 공작 부부가 영지에 돈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영지민을 위해 밤낮으로


고군분투하다가 옮은 것이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전염병은 금방 진압되었으니, 황금들판의 수호자다운 고결하고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그 대가로 루이센이 너무나 어린 나이에 영주가 되었다.

선대 공작 부부의 장례식날. 총관은 루이센을 안으며 그를 평생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정말 온 정성을 다해 불면


날아갈까 행여라도 다칠까 애지중지하며 그를 키웠다. 하지만 너무 감싸기만 해서 손쓸 수 없는 망나니가 되어
버렸다. 총관은 루이센의 행태에 수없이 실망하고 낙담했다. 그렇다고 해도 루이센은 자신의 영주님이었다.

자신의 청춘을 다 바쳐 애정으로 키워 낸 존재.

그런 영주님이 영지를 위해 힘을 보태 달라고 한다. 총관이 할 대답은 단 하나였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영주님.”


총관 역시 루이센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총관이 돕는다면 남은 일은 문제가 없다. 루이센은 비로소 안도하며
웃었다.

‘칼튼을 설득만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설득하겠다고 다짐하며, 루이센은 방을 나섰다.

***

루이센이 총관과 만나고 있는 시간, 칼튼은 총관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영지의 행정에 관한 서류는 거의 다 이
방에 있었다.

칼튼이 찾는 것은 수성전에 대비해 물자를 징발하겠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영지민의 재산을 징발하는 건 영주의
허락이 없이 가신들이 멋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영주의 인가를 받기 위해 서류가 만들어졌을 것이었다.

집무실만 봐도 총관이 유능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서류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칼튼은
원하는 것을 금방 찾아냈다.

‘이거네.’

칼튼은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종이의 하단, 영주의 인가를 받는 공란에 아니에스 공작의 서명이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상황의 급박함을 증명하는 듯 급한 필적이지만 삐침이나 흘리는 모양이 루이센의 서명과 같았다.

‘뭐야, 서명이 있잖아.’

그걸 발견하고 칼튼은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었다.

함께 마을을 둘러보는 동안, 칼튼은 루이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그가 받은 충격과 혼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했다.

공작령은 유난히 루이센에게 실권이 없고 가신들의 힘이 강한 곳이니, 루이센 모르게 가신들이 멋대로 벌인 일이
아닐까 하고.

그런데 아니었다. 루이센이 직접 허락한 일이었다.

‘자기는 모른다며? 알았으면 그렇게 놔뒀겠냐고 말했잖아?”

충격에 덜덜 떨어 놓고, 그렇게 절박하게 마을 상황을 알고 싶다고 말해 놓고 다 거짓말이었나?

칼튼은 책상을 걷어찼다. 우직 하는 소리가 났다. 너무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역시 귀족이야. 태생이 사기꾼에 염치를 모르는 족속들이지.


귀족이 귀족 짓을 했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들지?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고 실망스럽지?

‘그 얼굴에 깜빡 속아 넘어가서 그래. 귀족에게 또 속은 게 화가 나는 거지. 그런 거야.’

칼튼은 자신의 불쾌함을 그렇게 해석했다.

‘그 얼굴이 문제야, 그 얼굴이.’

칼튼이 애꿎은 책상을 걷어차며 화풀이를 하는데 칼튼의 부하가 그를 찾아왔다.

“저기……. 대장님?”

루이센을 찾으려고 뿔뿔이 흩어졌던 이들이 소식을 듣고 다시 성으로 돌아왔고, 칼튼의 다음 지시를 듣기 위해
집무실에 모여 있었다.

“가자.”

칼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섰다. 칼튼이 성질을 부리는 것에 익숙한 부하는 그러려니 했다.

“마을은 어떻게 됐지?”

복도를 걸으며 칼튼이 물었다.

“대충 정리되었습니다. 다 마을 사람들이라 병사들이 오니까 알아서 흩어졌다고 합니다. 해서 큰 충돌은 없었고
끝까지 도망 안 가던 놈들만 잡아다 감옥에 가뒀습니다.”

“적당히 놔뒀다가 내일 풀어 줘.”

“네.”

칼튼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먹을 것도 좀 챙겨 주고.”

“예. 아, 그리고 아무래도 공작님의 시종도 얼떨결에 같이 잡혀 온 모양인데요. 혹시 공작의 시종을 잡아 둔


걸로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놈?”

칼튼은 루이센의 시종을 떠올렸다. 시종일관 루이센 뒤에서 거들먹거리는 놈이었다. 제법 매끈하고 준수하게
생겼지만 그 특유의 거만한 표정이 어찌나 재수 없는지, 외모가 빛을 보지 못했다.

안 그래도 칼튼의 신경에 거슬리던 놈이었다. 칼튼과 부하들을 대놓고 무시하는 게 열 받아서 혼쭐을 내려다가,
공작의 직속 시종을 건드릴 수 없어 참던 차였다.

“사칭 아니야?”

“예? 신원은 확실합니다.”

“아니야, 내가 볼 때 마을 놈이 처벌이 무서워서 공작님 하인이라고 사칭하는 거 같아.”


칼튼은 씩 웃었다. 공작의 하인이면 바로 꺼내 줘야겠지만 마을 사람이라면 좀 놔둬도 되잖아? 루이센 때문에 열
받았는데, 감옥에서 고생할 루거를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아, 넵.”

부하는 알겠다는 듯이 킬킬거렸다. 루거의 건방진 언행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놈과 부딪히지 않은 놈이
없었다.

치고받고 싸우던 마을 사람들이랑 한 감옥에 있으니 곱게 기다리진 못할 거다.

“이참에 그놈, 세상 쓴맛 좀 볼 겁니다.”

“사람이 고생도 좀 하고 살아야지.”

“맞습니다.”

역시 우리 대장님이야.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으시지!

부하는 한 번 더 칼튼의 사악함에 마음속 깊이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

칼튼과 부하는 집무실로 갔다. 다른 부하들도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내일 아침에 다시 출발하자고
말을 맞추고 있었다.

루이센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루이센은 큰 각오를 한 모습으로 방에 들어왔다.

무슨 적진에 바쳐진 포로도 아니고.

칼튼은 그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있었군. 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아닙니다.”

칼튼은 나가려는 루이센을 말로 붙잡았다.

“여기서 그냥 하시죠.”

“지금?”

칼튼의 부하들의 시선이 루이센에게 쏟아졌다.

자신의 두 배는 될 법한 거친 용병들이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압박감이 어마어마했다. 루이센을 보는


시선은 당연하지만 곱지 않았다. 오늘 루이센 때문에 모든 일정이 틀어졌으니까.

루이센은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비장하게 칼튼을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성 아랫마을에 배급을 다시 시작하고 싶네.”

“안 됩니다.”

칼튼은 고민도 해 보지 않고 딱 잘랐다. 이 문제의 답은 이미 오래전에 내린 상태였다.

“내일 다시 출정을 떠날 겁니다. 그런데 신경 쓸 여유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배급을 하기엔, 인력도 없고 시간도 없고 물자도 없었다.

“사람이 부족하면 우리 공작가의 사람들을 쓰면 되네. 지휘는 내가 아니라 총관이 할 거야. 아주 믿음직하지?”

“글쎄요.”

“필요한 식량은 스스로 마련하겠어. 자네에게 주기로 한 식량에 손대지 않겠네.”

루이센이 너무 자신하니 칼튼도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식량은 밖에서 들여오지 않는 한 그 사람들을 다 먹이기엔 모자랄 텐데요?”

애초에 물자가 부족해서 징발한 상황이었다. 거기서 칼튼에게 내주기로 한 식량을 제외하면, 성문을 열지 않는 한
자급자족은 불가능했다.

“성문을 개방하는 건 절대 안 됩니다. 꿈도 꾸지 마시죠.”

“다른 방법이 있네. 그럼 허락하겠나?”

“네, 그래도 싫습니다.”

칼튼은 얄미울 정도로 단박에 대답했다. 하지만 루이센도 물러서지 않았다.

“성 아랫마을 사람들 상태를 자네도 알지 않나. 모두 병들고 굶주리고 있어. 이대로 방치했다간 사망자가 나올
거야.”

“그래서요?”

“저들은 아무 죄가 없지 않나. 그저 휘말렸을 뿐이지.”

“평범한 사람들은 어리석은 영주를 만난 것도 죄입니다. 열심히 살아도 영주의 삽질 한 번에 훅, 인생이


날아가죠.”

“……부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게.”

루이센은 간절하게 애원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칼튼에게는 가소로워 보일 뿐이었다.

“공작님은 제가 놀러 온 것 같으십니까?”

“……아니.”

“전 이곳을 점령하러 왔지 봉사하러 온 게 아닙니다. 제가 왜 자비를 보여야 하죠?”


24 화

칼튼은 말문이 막힌 루이센을 노려보며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솔직히 저는 영주님이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가만히 계셨잖아요? 그런데 왜 내 출정 날


이제야 안 것처럼 연기를 하면서 배급을 다시 하겠다는 겁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수상하지 않습니까?”

“……그야 진짜 이제야 알았으니까?”

“그 서류에 서명한 지 한 달도 안 됐습니다. 그새 잊었다고요?”

“아니. 잊은 게 아니라 몰랐네.”

“몰라요?”

“그…… 내가…… 글씨를 잘 못 읽어.”

루이센은 구구절절 자신이 얼마나 글을 안 읽으며, 내용도 안 보고 서명만 해 왔는가를 말했다. 수치를 모르는
루이센도 얼굴이 창피함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니까 내용은 모르고 시키는 대로 서명을 하신 거다?”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구실도 못 하는 이 기분.

정말 말하기 싫었으나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어떤 부끄러움도 참을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내 진심을 자네가 믿겠나?”

“글쎄요.”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미래를 약속할 수도 있어. 다시 한번 무릎을 꿇을까?”

루이센은 덥석 무릎도 꿇었다. 그러자 칼튼의 부하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왕국에 넷밖에 없는 대귀족이, 천민 용병인 칼튼에게 또 무릎을 꿇었다!

이 소식이 퍼지면 루이센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온 세상의 비웃음을 살 게 분명했다.

그러나 루이센은 조금도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영지민을 구할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요즘 세상에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고결한 모습이었다.
무릎 꿇은 아름다운 루이센과 그를 내려다보며 술잔을 비우는 험악한 인상의 칼튼.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영지민의 목숨을 빌미로 협박하는 악당과 부당한 요구에 희생하는 성자 같았다.

잘못은 루이센이 했다. 뒷수습도 루이센의 몫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나쁜 놈인 거 같지?

칼튼은 짜증이 났다.

“뭐든? 그럼 고작 무릎으로 되겠습니까? 몸이라도 바치셔야 진심이 보이죠.”

“몸?”

되묻기 무섭게 루이센은 칼튼이 말한 뜻을 눈치챘다.

그러니까, 몸을 내 달라. 그런 의미로.

루이센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루이센이 머뭇거리자 칼튼은 매우 유쾌해졌다.

단지 루이센을 모욕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루이센이 받아들이라고 한 제안이 아니란 말이다.

‘거봐, 자비를 베풀라니 어쩌니 하면서 착한 척해도 결국 자기가 제일 중요하지.’

이런 치욕은 못 견딜 거야.

칼튼은 차분히 루이센이 자길 모욕했다고 난리를 치길 기다렸다.

‘이참에 루이센도 감옥에 처넣어 버려야지. 자기가 사지로 내몬 영지민이랑 자기 시종이랑 같이 있으면
딱이겠네.’

그런데 루이센의 동요는 칼튼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였다. 칼튼이 자길 모욕하려고 꺼낸 말이라는 건
알지만, 만약 받아들인다면?

하룻밤 보내는 걸로 성 아랫마을 사람 전부를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동화 몇 잎 얻자고 네 명도 상대했는데……. 이거 완전, 남는 장사인데?’

하여튼 뭘 하든 귀족인 게 좋긴 좋았다. 하룻밤 값을 치러도 이렇게 차이가 나니 말이야. 더 고민할 것도 없어,
루이센은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

방 안의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마음속 깊이 되물었다.

지금 내가 뭐라고 들은 거지?

그들은 모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칼튼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칼튼이 되물었다.

“좋다고 했네. 그걸로 자네가 내 진심을 믿어 준다면야 뭐든지 하겠다고 했지 않나.”

루이센은 너무나 태연했다. 그는 모욕감을 참는 것 같지도 않았고 분노하지도 않았다. 마치 빵을 사기 위해 돈을


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자연스럽고 무덤덤했다.

급기야 루이센은 목을 감싸고 있는 풍성한 천을 풀어 버렸다. 셔츠의 깃이 벌어지면서 그의 흰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의 손길은 과감했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케켁.

칼튼의 부하가 너무 놀라 헛기침을 했다. 칼튼의 부하들은 칼튼의 부하답게 막무가내에 신분의 지엄함을
개무시했지만, 이 상황이 얼마나 천지개벽할 상황인지는 알고 있었다.

칼튼의 핵심적인 부하들은 모두 용병 출신으로, 평민 이하의 신분이었다. 그들에게 루이센 같은 대귀족은 구름


위의 존재였다.

‘그냥 어중이떠중이 귀족도 아니고 대영주라는 사람이, 대장 앞에 무릎 꿇고 옷을 벗다니. 이게 지금 현실이야?’

엄밀히 말해 목만 풀었을 뿐이지만, 칼튼과 그 부하들에게는 옷을 다 벗은 것과 다를 바 없이 충격적이었다.

‘이, 이래도 되는 거야?’

칼튼의 부하들이 루이센을 한 번, 칼튼을 한 번 바라보았다. 칼튼의 표정도 범상치 않았다. 칼튼은 고집스럽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큰일 났다!

칼튼은 욱하고 지는 걸 싫어했다. 칼튼은 한번 상황을 싸움으로 인식하면 모든 걸 내려놓고 진심으로 싸웠다.
상대가 귀족이라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소한 기 싸움이라도 꼭 이겨 먹으려고 들었다.

그 악착같음이 지금의 칼튼을 만들어 낸 것이지만 저런 표정을 할 때면 칼튼은 꼭 큰 사고를 치곤 했다. 칼튼의
부하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부하들의 예상 그대로 칼튼은 머리 꼭대기까지 오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랑 해보자는 거지?’

칼튼은 루이센을 믿지 않았다.

루이센은 너무 쉽게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다. 루이센이 진심으로 몸을 바칠 생각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대답이


나왔을까?

칼튼은 아니라고 봤다.

‘자기가 몸을 바치겠다고 하면, 놀라서 말릴 줄 알았겠지?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지.’

애초에 세상 어느 귀족이 영지민들을 살리겠다고 자기 몸을 바친단 말인가.


귀족이 어떤 존재인가. 그들은 다 뼛속까지 오만함과 특권 의식에 젖어 영지민들을 짜내어 제 배를 불리면서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피에는 사악하고 이기적인 피가 흘렀다.

영주로서 영지민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했다고 사람들 앞에 내보이려고 이러는 게 분명했다.

‘좋아,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다 나가.”

“예?”

칼튼의 부하들이 되물었다. 칼튼은 루이센에게 눈을 고정한 채로 또박또박 말했다.

“귀하신 분 알몸이 어떤지 구경하고 싶으면 남아 있든가.”

“아, 아닙니다.”

칼튼의 부하들은 후다닥 일어났다. 그들은 도망치듯 방을 나갔고, 혹시 누가 붙잡을까 봐 문까지 꽉 닫았다.

방에는 이제 칼튼과 루이센만 남았다. 루이센은 언제나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반대로
칼튼의 표정은 당장 루이센을 물어뜯을 것처럼 험악했다.

“진심을 보이셔야죠?”

“알겠네.”

칼튼의 재촉에 루이센은 느릿하게 무릎으로 기었다.

루이센은 무릎으로 꾹꾹 카펫을 누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신발이 무겁게 끌려가고, 양쪽 다리와 다리가 부딪힐 때,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작은 소리는 루이센을 더 긴장시키면서 칼튼의 귓가를 긁었다.

아주 조금씩.

약간 초조할 정도로 천천히,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 들었다.

칼튼은 가만히 지켜보며, 루이센이 더는 못 해 먹겠다고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루이센은 그의 시선 때문에
그를 향해 강하게 이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미치겠네.’

루이센은 가슴이 떨려 죽을 것 같았다. 과감하게 나선 것은 좋았는데, 막상 칼튼을 눈앞에 두자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칼튼이 얼마나 거칠게 나올까? 안 그래도 칼튼과 눈이 마주치는 것도 무서운데, 더한 것도 해야 한다.
두려움 위로 자신이 잘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 더해지자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심장 소리가 쿵쿵, 하고 소리를 높여 갔다.

그럼에도 루이센은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뭐든 하겠다고 다짐했으니 이 정도로 굴하지
않을 거다.

이윽고, 루이센의 무릎이 칼튼의 발끝에 닿았다. 루이센은 칼튼의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돌겠네. 어디까지 할 셈이야?’

칼튼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 기 싸움을 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오래 금욕했고 술을 마셨다. 이성이 맛 가기 딱 좋은 상태에서 완벽한 귀족인 루이센이 순종적으로 자신의


발치에 앉아 있는 건 무척 자극적이었다. 아니에스 공작을 상대로 이런 기분이 들다니, 자신이 너무 얌전히 지낸
게 틀림없었다.

루이센이 칼튼의 바지춤으로 손을 뻗었을 때는, 그냥 될 대로 돼 버려! 라는 충동이 들었다.

바지의 매듭이 풀리지 않자, 루이센은 당황한 듯 칼튼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안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이게 잘 안 되어서…….”

루이센의 눈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루이센의 손은 간단한 매듭도 못 풀 정도로 굳어 있었다.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온몸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가 느끼는 압박감이 숨김없이 칼튼에게로 전해졌다.

‘뭐야? 진심이잖아?’

강렬한 직감이 칼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칼튼은 자신의 동물적인 직감을 무척 신뢰하고 있었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루이센의 손을 잡았다.

“아, 내가 해 보려고 하는데…….”

루이센이 칼튼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기어코 손을 빼 바지의 매듭을 풀려고 했다.

“됐습니다.”

“어?”

칼튼은 루이센의 양팔 사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엇, 하는 사이에 루이센은 종잇장처럼 가볍게


끌려갔다.

25 화

“머리를 다친 거 같진 않은데…….”

그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루이센을 조심스럽게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루이센을 피하는 것처럼 멀찍이
뒷걸음질을 쳤다.
‘왜 저래?’

루이센은 잠깐 인상을 썼다가 자신의 몰골을 떠올렸다. 몸에서는 땀 냄새가 진동을 했고 바닥을 구른 탓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넘어지면서 손바닥이 까진 건지 피가 굳어 엉겨 있었고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넝마나 다름없었다.

‘피할 만한 몰골이네.’

마을 일에 온 신경이 쏠려 자신이 이런 상태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내 몰골이 말이 아닌 걸 깜박하고 있었다네. 씻고 하는 게 좋겠지?”

헛다리 짚는 루이센의 대답에 칼튼은 다시 한번 루이센의 속내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를 공작님은 몸을 바치라는, 허무맹랑하고 저질스러운 농담을 완전


철석같이 믿어 버린 것이다!

“아뇨.”

칼튼은 정색했다.

“안 씻는 게 좋다고?”

루이센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칼튼은 더 정색했다. 원래 이렇게 말귀가 안 통하는 양반이었어?

“아니요!”

“그럼 뭔가?”

“미치겠네. 됐다고 했습니다. 그만하셔도 된다고요. 애초에 공작님에게 몸 바치라는 거, 놀리려고 한


소리입니다. 진심이 아니었다고요.”

“놀린 거라고?”

“네. 저 그렇게 쓰레기 아닙니다. 설마 공작님이 진심으로 받아들이시는 줄 몰랐죠.”

“진심이 아니면 왜 그렇게까지 하겠어?”

“그야 기 싸움이라든가…….”

“아니, 뭐든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자네랑 기 싸움 해서 뭐해.”

“보통 귀족은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 상황까지도 기 싸움을 합니다.”

그런가?

루이센이 기억을 더듬어 보니 다들 그러긴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대영주인 루이센에게도 겁 없이 시비를
거는 놈들이 있었는데, 칼튼이라면 오죽했을까.

귀족이 싫어서 날뛰다가 1 왕자에게 버려진 성질머리이니…….


루이센은 대충 그러려니 했다. 사실 그에게는 칼튼의 요구가 진심인지 놀림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내 진심은 충분한가?”

루이센이 물었다.

“……예. 충분합니다.”

칼튼은 떨떠름하게 답했다.

‘할 말이 그게 다야?’

정말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칼튼이 막지 않았다면 기어코 루이센은 칼튼의 바지를 벗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겠지. 꽤나 치욕스러운 상황일 텐데도 루이센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럼 허락해 줄 건가?”

루이센의 눈동자가 희망으로 빛났다. 새파란 게 반짝반짝해서 칼튼은 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시냇물을 떠올렸다.

‘이렇게 넘어간다고? 대인배인 거야, 속이 없는 거야?’

칼튼은 문득 루이센의 희멀건 한 얼굴이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불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이렇게까지 안 하지 않나?’

루이센은 너무도 무모했고 칼튼은 루이센을 두고 예측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타협을 해야겠다.

‘뒤에서 또 어떤 기상천외한 짓을 벌이게 두느니……. 눈앞에 두고 감시하는 게 낫겠어.’

루이센이 바라는 대로 해 주는 게 괜히 끌려가는 것 같아 탐탁지 않았으나, 칼튼은 덜 불안한 쪽으로 선택을


내렸다.

“좋습니다. 공작님이 뜻하시는 대로 하시죠.”

고심 끝에 칼튼의 허락이 떨어졌다.

“정말인가?”

“네. 대신 자신하신 대로 물자도 인력도 스스로 해결하셔야 합니다.”

“물론이네!”

루이센은 웃었다. 순간 촛불을 하나 더 켠 것처럼 방 안이 환해졌다. 구김살 없는 미소가 화사하고 반짝였다. 그


얼굴 하나는 봐 줄 만하다고, 칼튼은 생각했다.

“어쩌실 계획입니까?”

칼튼은 루이센이 뭘 믿고 저렇게 밝게 웃는지 알고 싶어졌다.

“자세한 건 가신들과 이야기를 해 봐야겠지. 나는 아는 게 없어서 말이지.”


“생각해 두신 게 있는 거 아닙니까? 식량이 부족한 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건 내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나중에 알려 주지. 걱정 말게. 자네에게 숨기는 건 없을 거야. 그럼 난


바로 총관에게 가 보겠네.”

루이센은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방을 떠났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어째 더 불안한데.’

칼튼은 루이센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루이센의 저 동글동글하고 예쁜 머릿속에 또 어떤 기상천외한


생각이 흘러가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루이센이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칼튼의 부하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부하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칼튼과 방 안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자신들이 방을 나간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너무나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공작님 나가시던데요.”

부하 한 명이 소심하게 말을 걸었다. 눈을 도록도록 굴려 보았지만 방 안의 풍경과 칼튼의 얼굴만으로는 거사가


벌어진 건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칼튼은 부하들의 호기심에는 관심이 없었다.

“출정을 미룬다. 공작이 하고 싶다는 대로 해 줘. 그리고 공작이랑 총관, 기사단장 감시하고 수상한 거 있으면
말해. 특히 아니에스 공작.”

“어디 가시게요?”

“연무장.”

칼튼은 자기 할 말만 하고 방을 나가 버렸다. 부하들은 더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었다. 칼튼의 굳은 표정은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의혹은 크게 부풀어만 갔다.

“그래서 대장님이랑 공작님이랑 했다는 거야, 안 했다는 거야?”

“공작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라잖아. 안 했으면 저렇게 말 안 하지.”

“어허……. 둘이…….”

칼튼의 부하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방을 치우러 들어온 하인들도 엿들었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니 칼튼이
그렇고 그런 요구를 했고, 단둘이 시간을 보낸 뒤에 칼튼이 루이센의 부탁을 들어준 거니 그 의혹은 매우
합당했다.

그렇게 루이센과 칼튼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조금씩 수상한 소문이 시작되고 있었다.

***
루이센은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루이센이 시킨 대로 총관이 가신들을 소집한 덕분에 회의실에는 이미 사람들이
루이센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이센이 회의실로 들어오자, 가신들은 모두 크게 놀랐다. 루이센의 상태는 그만큼 심각했다. 질긴 가죽 코트는
찢어지고,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고운 머리칼은 엉망진창이었다. 손바닥에는 피가 엉겨 붙어 있었고, 찢어진
바지 사이로 무릎이 쓸린 것이 보였다.

“공작님!

“괜찮으신 겁니까? 성 아래에서 고초를 겪으셨다더니, 세상에!”

총관에게 성 아랫마을에서 일어난 폭동에 대해 전해 듣기는 했지만, 루이센이 이렇게 다쳤을 줄은 몰랐던지라
모두 아연실색했다.

다칠까 봐 달리기도 못 하게 하고 안고 다니며 모두가 고이고이 기른 루이센이었다. 모진 고초를 겪은 모습을


보자 아무리 자업자득에 못 미더운 영주님이라 해도 가슴이 미어졌다.

“영주님 손에 피가 납니다! 의사부터 부르고, 주치의! 여기 없나! 어?”

“일단 약초를 가지고 오죠. 세상에. 쓰라리진 않습니까? 어디 또 아픈 곳은요? 아, 일단 앉으세요.”

익숙한 과보호였다. 공작성의 가신들은 무심코 습관적으로 루이센을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도 너무
오랜만이라 루이센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맸다.

“다들 진정 좀 하게. 자네들 호들갑에 영주님이 말씀을 못 하시지 않나.”

기어코 총관이 한마디를 하자 상황이 진정되었다. 총관은 회의실을 조용히 시키고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루이센에게 쏠리며 자연히 발언권이 그에게 넘어갔다.

“상황은 다들 알고 있겠지?”

“예.”

루이센은 가신들을 면면히 살폈다.

“내가 먼저 나서서 챙겨야 했는데 미안하다. 하지만 자네들도 그래. 내가 모자란 영주라는 걸 다 알면서 그렇게
한 번에 일을 손에서 놓으면 되겠나? 아무리 내가 원망스러워도 말이야.”

“…….”

가신들의 고개가 무겁게 아래로 향했다. 성 아랫마을 사람들 사정을 알면서 ‘이참에 영주님이 혼쭐나서 철 좀
들었으면’ 같은 마음으로 외면했으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루이센이 먼저 사과를 하며 지적을 해 오니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오늘 있었던 일로 마을 사람들을 질책하지 말게. 자네들이나 나나 다 같이 저지른 잘못이야. 지난 일은 덮어


두고 이 위기를 넘기는 데 최선을 다하자고.”

“네. 영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칼튼 경에게 허락은 내가 받아 왔어. 그러니 지금부터 자네들은 성 아랫마을에 배급을 준비하게.”

“정말입니까? 정말 그자가 허락을 해 주더랍니까?”

“그래.”

루이센이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칼튼 경에게 내어 준 식량은 손대면 안 되네. 우리 것만으로 해야 해.”

“그럼 성내에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며칠을 못 갈 텐데요.”

“성안에 갇힌 사람들이 많아요. 성문을 열어서 가까운 지역부터 식량을 사들이면 간단하게 해결됩니다만…….”

“칼튼 경이 성문을 열어 주진 않을 거야. 부족한 식량은 내가 해결해 보겠네. 일단 있는 것만으로 며칠 버틸지


계산해 봐. 인력도.”

늘 어린애 같고 못 미덥던 영주님이 영지민들을 위해 저 무시무시한 칼튼에게 허락을 받아 내다니! 모두가 놀랐고,
루이센이 앞서서 자신들을 이끄는 모습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머리를 잘 굴려 봐야겠군요. 낭비가 없어야 할 겁니다.”

“예. 그럼……. 인력은 어쩌죠?”

“성의 하인들과 기사들까지 전부 동원하면 빠듯하더라도 운영할 수 있을 겁니다.”

“원래 성의 경비를 맡던 이들을 다시 불러 모으겠습니다. 군이 해체되고 성안에 머무르던 병사들도 찾아보죠.”

루이센이 몇 마디 던져 주자, 가신들은 능숙하게 자신들끼리 회의를 이어 나갔다. 오랜 세월 영주 없이 영지를


운영해 온 가신들의 노련함이 돋보였다. 성 아랫마을 사람들을 향한 미안함과 루이센의 늠름한 모습이 그들의
의욕을 부채질했다.

26 화

‘여기서 내가 더 할 건 없겠어.’

루이센은 팔짱을 끼고 가신들의 열렬한 대화를 지켜보았다. 귀담아듣고는 있는데 솔직히 계속 듣고 있으려니
머리가 아파 왔다.

‘총관이 잘해 주겠지.’
이런 건 잘하는 사람에게 맡겨야지. 배우는 건 위기를 넘긴 뒤 천천히 해도 괜찮을 거다.

루이센이 총관을 바라보았다. 총관은 루이센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지만 그의


정중한 인사와 자애로운 눈빛에서 루이센을 향한 대견함이 느껴졌다. 성인이 되고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잘했다는 말 한마디도 없었지만 루이센은 그게 칭찬임을 알아봤다.

총관이 루이센의 노력과 그가 해낸 일을 인정해 주었다. 루이센은 비로소 마음이 놓이면서 뿌듯함이 차올랐다.

‘좋았어.’

루이센은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슬그머니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누군가 루이센을 황급히 뒤따라 나왔다.

“영주님.”

기사단장이었다. 그 늙은 기사의 주름진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다. 그는 결연하게 루이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루이센은 당황하며 말리려고 했는데 기사단장은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어? 뭐가?”

루이센은 멍하니 되물었다. 뭔데 무릎을 꿇고 그래?

“제가 따라가 영주님을 지켰어야 했습니다. 영주님이 고초를 겪으신 걸 보자 이제야 제 잘못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제 고집 때문에,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영주님을 위험에 빠뜨렸는지…….”

늙은 기사는 죄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다치시고…….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영주님과 선대 영주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기사단장은 정말 죄스러웠다. 기사가 따라갔다면, 루이센이 하인과 함께 낙오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기사들이 루이센을 돕고 지켰을 테니까.

기사단장은 루이센이 승마가 서툴다는 것도, 자신을 지킬 힘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루이센이 저 거친


용병들을 잘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걸 알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니 그저 죄스럽고 자신의
안일함이 원망스러웠다.

만약 칼튼이 루이센을 찾지 못했다면? 그대로 계속 성난 군중 속에 휘말렸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하고 끔찍했다.

“이놈을 벌하여 주십시오. 영주님. 기사로서의 의무보다 제 감정을 우선한 것은 절대 용서받으면 안 됩니다.”

“아니, 무슨 벌까지. 괜찮아. 나 멀쩡해.”

“아닙니다. 그냥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저는 영주님의 기사로 남을 자격이 없는 놈입니다.”

기사단장의 자책을 듣고 있자니, 루이센은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루이센은 어쩔까 하다가 일단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기사단장이 당황했다.

“자네가 날 따라오겠다고 했어도 내가 거절했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제가 그걸 받아들이면 안 됐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영주님의 안전에 관한 것인데…….”

“내가 싫다는데 자네가 뭘 어쨌겠나. 코앞에 두고도 성 아랫마을 사정을 몰랐던 내 잘못이지.”

“그건 영주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가신들이 좀 더 면밀하게 보필했어야 했습니다!”

“아니. 내가 서명했으니 내 잘못이지. 미안하네.”

“아닙니다. 영주님. 잠시 영지에 위기가 오긴 했지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겁니다. 기나긴 아니에스


공작가의 역사에 이 정도 위기가 없었을까요.”

기사단장은 도리어 루이센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자신 때문에 루이센이 과도하게 자책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군의 마음까지 생각하는 정말 기특한 기사였다. 루이센은 기사단장이 아주 좋은 말을 해 줬기에 냉큼 말꼬리를
붙잡았다.

“말 잘했네. 그래. 살다 보면 사람이 실수도 하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자네의 충성을 내가 모르겠어? 자네는 날 위해, 자네가 목숨처럼 아끼는 물건도 내주지 않았나.”

루이센은 기사단장이 준 팔찌를 내보였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눈먼 검도 막았다. 루이센은 조심스럽게 팔찌를
빼서 다시 기사단장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자네가 신경 써 준 덕분에, 내가 무사히 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 귀한 물건 빌려줘서 고맙네.”

“영주님…….”

“내가 자네 마음을 더 헤아려 주지 못해 미안해.”

기사단장은 누구보다 기사로서의 도리를 잘 지켰다. 이 고지식한 남자는 주군에게 버려지고도 끝까지 공작성을
지켰다. 그의 최후는 기사도에 걸맞았고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은 충성심은 존중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후세에 귀감이 되기는커녕 도망친 주군으로 인해 죽어서도 개돼지만도 못한 대우를 받아야 했으니,
루이센은 자신이 사과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감히 누굴 벌한단 말인가. 나는 도망쳤고 그는 남았는데.

“자네는 늘 도리를 다했어. 미안해할 건 나야.”

루이센은 자신이 몇 번을 더 미안하다고 해도 그 안에 담긴 사무치는 죄책감은 전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미래가 완전히 달라져서 이제 회귀 전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으니까.

그 일은 이제 아무도 모르는, 루이센만의 기억이 되었다. 그걸 알면서도 상대도 알아듣지 못할 사과를 하는


까닭은 루이센의 머릿속에만 남게 된 기사단장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함이요, 이 죄책감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루이센은 잠자코 기사단장의 손을 잡아 주었다.

“항상 고맙네.”

“영주님…….”

기사단장은 루이센의 손을 보며 놀랐다. 초봄에 피어나는 잎사귀처럼 작고 여리기만 하던 손이었는데 어느새 크게


자라나 자신을 감싸고 단단히 받쳐 주고 있지 않은가. 기사단장은 비로소 루이센이 자라 어른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어린 루이센을 돌보며 기뻤던 일, 루이센과 가신들이 어긋나며 가슴 앓았던 일, 루이센이 망나니가 되었다는
소식에 자책하던 일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벌을 받아도 모자란 기사에게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해 주는 주군이라니. 언제 이렇게 듬직해졌단 말인가.

기어코 기사단장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깊게 파인 주름 사이사이를 적시며 눈물이 흘렀다.


늙은 기사의 눈물에는 살아온 세월만큼의 복잡한 감정이 담겨 무겁기 그지없었다.

“다시는 영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영주님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따르겠습니다.”

기사단장은 무겁게 맹세했다.

‘아니,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날 뭘 믿고?’

루이센은 의문이 들었으나, 이 진지한 상황에 재를 뿌릴 정도로 입이 가볍진 않았다. 루이센은 경건하고 품위
있는 태도로 기사단장을 다독이고 할 일을 마저 하라고 회의실로 돌려보냈다.

‘고맙긴 한데……. 날 너무 믿으면 안 될 텐데……. 그러다 진짜 큰일 날 텐데…….’

미래의 지식 덕분에 잠깐 똑똑해지긴 했지만 루이센은 기본적으로 머리 쓰는 걸 싫어했고 매사가 건성이었다.


자신이 썩 믿음직하지 못한 성격이라는 건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언제 한번 다시 이야기해 봐야겠다.

루이센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

공작성에는 감옥이 몇 개 있었다. 루이센은 미리 칼튼의 부하에게 낮에 잡혀 온 마을 사람들이 갇혀 있는 장소를


물어봐 두었다.

잡혀 온 마을 사람들은 지하 감옥에 있었다. 혐의가 확실하고 죄질이 나쁜 범죄자들이 재판을 받기 전에 따로


가둬 두는 용도의 감옥이었다.

일반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다 잡힌 자는 영지에서 추방당한다. 주동자가 아닌 경우에는 벌금이나 노역으로 처벌을
대신하기도 하는데, 이는 영주의 재량에 달려 있다.
하지만 영주를 해치는 경우, 이때는 무조건 사형이었다. 영주의 자비 아래, 영주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영지민이 영주를 공격한다는 건 체계를 붕괴시키는 심각한 반역 행위였기 때문에 봐주는 경우가 없었다.

낮에 잡혀 온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루이센을 다치게 한 사람들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이들을 단순히 부추김에 넘어간 사람들로 볼지, 영주를 공격한 역도로 볼지는 영주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영주에게는 영지에서 일어난 범죄를 재판할 고유의 권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재판할 권리도 칼튼에게 빼앗긴 상태였지만, 칼튼이 잡혀 온 사람들은 마음대로 하라고 했기에
루이센의 선택에 그들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공작성에 발을 들이는 것도 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 그 장소가 지하 감옥이라니 사람들의 불안은 극에


달해 있었다. 생사여탈권을 쥔 루이센이 나타나자, 지하 감옥은 애원으로 가득 찼다.

“잘못했습니다, 영주님.”

“저는 절대 영주님을 해치지 않았습니다요, 정말입니다.”

소리가 웅웅, 하고 울려 정신을 어지럽혔다. 그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영주님! 접니다! 여기에요!”

“루거?”

루거가 감옥방에 대여섯 명 되는 마을 사람들이랑 같이 갇혀 있는 게 아닌가.

“너 왜 거기 있어?”

루이센이 놀라, 성큼성큼 다가갔다. 루거는 창살에 딱 달라붙어 애타게 루이센을 불렀다.

“영주님. 아이고. 영주님. 드디어 저를 구해 주러 오셨군요?”

“너 여기 있는 줄도 몰랐는데? 왜 이런 데 있는 거야?”

“아까 낮에 칼튼이 영주님 데리고 가고, 저도 따라가려는데 이놈들에게 휘말리는 바람에 잡혀 왔어요.”

어쩐지 안 보이더라니. 루거는 자신이 겪은 고초를 늘어놓았다. 모진 고생을 한 듯 분에 가득 차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루거의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였다.

“일단 나와 봐.”

루이센이 병사를 시켜 문을 열게 하자, 루거가 어정쩡한 자세로 나왔다. 등도 제대로 못 펴고 녹슨 경첩처럼


삐걱거렸다. 옷깃만 스쳐도 파르르 떠는 꼴이 어디서 제대로 몰매를 맞은 모양새였다.

27 화
‘음……. 아주 얻어 터졌구만.’

장담컨대 얼굴만 멀끔하지 옷 아래는 만신창이일 거다. 루이센은 루거가 있던 감옥방 안을 바라보았다. 여기 갇힌
사람들은 다른 방의 사람들과는 반응이 남달랐다. 루이센에게 살려 달라고 빌지도 않고, 흉흉한 눈으로 루이센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디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 보라는 듯이, 온몸과 눈으로 ‘배 째!’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저런 사람들과 루거를 같이 넣어 놨으니, 감옥 안에서 루거가 겪었을 고초가 대충 예상이 되었다.

‘일부러…… 이런 사람들이랑 루거를 넣어 둔 건가…….’

칼튼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거가 평소에도 거들먹거리고 다니면서 미움을 사는
성격이라는 건 루이센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자식, 언젠가 입 놀리고 다니다가 처맞을 줄 알았지.

솔직히 자업자득이었다. 회귀 전에는 몰랐는데, 회귀하고 보니 루거가 하고 다니는 꼴은 자신이 보기에도 재수가
매우 없었던 것이다. 자신에게는 잘하지만, 다른 하인이나 칼튼의 병사들 대하는 걸 보면 뒤통수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였다. 남들 눈에는 그게 오죽했을까.

“아이고, 죽겠다. 공작님. 진짜 저것들 아주 악질입니다. 제가 공작님의 시종이라는 걸 알면서도 막…….”

“……네가 거들먹거렸겠지.”

“아, 공작님! 저 억울해요!”

“그러게 너는 왜 꼭 말을 그렇게 해서 화를 키워?”

“제가 뭘요? 제가 못 할 말 했어요?”

“늘 그렇잖아. 오늘 마을에서 일만 해도 그래. 그 상황에서 영지민들을 도발해야겠어? 꼭 일을 키우려는 것처럼


말이야.”

“그럴 리가요! 제가 뭐 하러요? 그 흉악한 놈들이 영주님에게 먼저 무례하게 굴었잖아요. 저는 공작님의 수석


시종으로서 할 말을 한 거예요.”

“활은 왜 빼 들어?”

“얼마나 위험했는지 아세요! 그 상황에 영주님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저 하나인데! 뭐라도 해야죠. 저는 제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저놈들 편을 들다니……. 정말 너무하십니다.”

루거는 울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 모습을 보니 루이센도 약간 마음이 누그러졌다.

“이게 어디 공작님 탓이겠어요? 저놈들이 나쁜 거죠. 저놈들이 선량한 마을 사람인 척하면서 저를 모함하고
영주님을 속이고 있는 거라구요.”

“…….”
“어디 감히 영주를 공격해? 사형시키죠. 살려 두면 안 될 것들이에요.”

얘는 원래 이렇게 극단적이었나. 루이센은 혀를 찼다.

‘사형.’

그 한 단어에 지하 감옥은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을 지르고 애원하고, 루이센의 귀가 다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됐어. 그만해. 자네들도 진정하게. 사형 안 해.”

“공작님! 엄한 처벌로 위엄을 보이셔야죠!”

“됐어. 아무도 안 죽여. 그럴 처지도 아니고. 낮에 있었던 벌은 나를 돕는 걸로 충분해.”

“네?”

루거와 마을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사형은 면해 보자는 심정으로 애원했으나 죽을 정도로 매질을 당하거나
추방당하는 것까지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영주를 공격한 죄는 컸다.

“영주님을 돕는 게 벌이라고요?”

“그래. 지금 바로 마을로 내려갈 거니까. 한시라도 빨리 마을 사람들에게도 먹을 걸 나눠 줘야 하지 않겠나?”

“!”

루이센의 말에 마을 사람들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말씀이라면…….”

“배급을 다시 시행하기로 했어. 가신들이 논의 중이네. 하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걸리니 나는 우선 마을로 내려가
될 수 있는 대로 먹을 걸 나눠 줄 거야. 손이 필요해. 힘이 있는 자들은 나와 함께 가세.”

루이센의 예상에 가신들의 회의는 해가 진 뒤에나 끝날 것 같았다. 어두우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배급이
제대로 시행되는 것은 다음 날 아침이나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자니 한시라도 빨리 영지민들의 배고픔과 불안을 달래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신은 회의에 크게 도움이 안 되니 그 시간에 마을에 내려가 사람들을 돌보며 안정시키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게 루이센의 판단이었다.

일할 사람들이 없으니, 개중에 잡혀 올 정도로 팔팔한 놈들을 데려다 써먹으면 딱 좋겠지.

루이센의 말에 루거가 크게 반발했다.

“공작님! 저놈들이 저를 때렸습니다. 공작님의 시종을 때리는 건 공작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거랑 같아요. 아주
싹수가 더러운 놈들이란 말입니다!”

“내가 됐다잖아. 내 권위는 지금 네가 도전하고 있는 거 같다?”

“아닙니다, 제가 감히…….”
루이센의 단호함에 루거는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다 들어줬는데?’

루이센이 언제부터 이렇게 선을 그을 줄 알게 됐지? 루거는 눈치껏 입을 꾹 다물면서도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넌 가서 치료나 받아.”

루이센은 루거에게서 등을 돌려, 병사들에게 감옥 문을 열게 시켰다.

“자, 다들 움직여. 아, 힘이 없는 사람은 남고. 뭐 좀 먹긴 했나?”

“좀 전에 병사들이 물과 비스킷을 좀 주고 가서 먹었습니다요. 그쪽 대장님이 시켰다고요.”

“그래?”

칼튼이 따로 챙겼다니 의외였다. 보기와는 다르게 칼튼은 좀 섬세한 면이 있는 거 같다고, 루이센은 생각했다.

아무튼 비스킷의 힘인지, 아니면 희망 덕분인지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루이센은 그중 장정 대여섯
명을 골라서 그들과 함께 창고로 갔다.

수레 하나에 커다란 솥과 장작, 미리 만들어 뒀다가 딱딱하게 굳어 버린 빵들, 그리고 마른 육포 같은 것을


되는대로 챙겼다. 칼튼이 시키는 일을 한답시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더니, 성안의 지리나 창고에 보관된
물품이 눈에 익어 헤매지 않고 단번에 척척 찾아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칼튼 덕분이긴 했지만……. 이것만은 절대 고마워하고 싶지 않았다.

***

루이센이 마을에 내려오자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한창 북적거릴 도시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해가 지기 전에 얼른 자리를 잡고 시작하지.”

루이센은 사람들을 이끌고 도시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을 둘러싼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으나, 큰
우물이 하나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다.

낮에 루이센이 폭동에 휘말렸다는 소식이 벌써 마을에 퍼진 모양이었다.

루이센 일행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져 루이센의 눈치만 살폈다. 사람들 사이에 감도는 불안함이 곧
터질 것처럼 일렁였다.

“괜찮을까요?”

따라온 기사들이 주변을 향해 날을 세웠다. 루이센은 속으로는 겁을 먹었지만 그럴수록 턱을 치켜들며 의연해
보이려고 애썼다.
“괜찮으니 여기로 하지.”

루이센은 따라온 마을 사람을 두 패로 나눴다. 한 패는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끌어모으게 했고 나머지는 자신을


돕게 했다.

루이센은 사람들을 시켜서, 장작을 깔고 지지대를 세워 솥을 고정했다. 잔치가 있을 때나 쓰는 커다란 솥은


몇십인 분의 스프를 끓여도 충분했다.

우물에서 바로 물을 길어 붓고 빵과 육포도 잘게 썰어 넣었다. 씹어 먹기도 힘든 딱딱한 빵과 육포가 습기를


머금으며 흐물흐물하게 변해, 물이 끓어오를 즈음에는 묽은 스프가 되었다.

루이센은 살짝 맛을 봤다.

육수도 없고 건더기도 없었다. 빵, 물, 육포. 그게 전부였지만 빵에 들은 버터와 육포의 짠맛과 고기 맛이 새어


나와 그럴듯한 맛을 냈다. 이 정도면 먹어 줄 만하겠다.

양이 부족하면 물을 붓는다. 그러다 너무 묽어졌다 싶으면 빵을 넣고, 간이 부족하다 싶으면 육포를 집어넣으면
됐다. 그러다 또 너무 짜다 싶으면 물을 붓고. 불이 꺼지지 않는 한, 영원에 가까운 스프였다.

사실 다른 때 같았으면 쳐다도 안 봤을 정도로 대충 만든 음식이었다. 하지만 한참을 굶은 사람에게는 이만한 게


없었다. 제대로 된 빵과 고기를 줘 봤자 소화도 못 시키고 탈이 날 게 분명했다. 루이센도 떠돌이 시절에,
마음씨 좋은 부인이 준 빵을 먹고 거하게 체해 본 적이 있어서 잘 알았다.

루이센의 경험상 이럴 때는 차라리 묽은 스프를 줘서 배를 채우고 몸을 데우는 것이 나았다. 적은 음식으로 양을


많이 만들 수 있고, 조리가 빠르기까지 하니 이 상황에서는 최고의 음식인 셈이었다.

“영주님, 나눠 주는 건 저희가 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루이센에게서 국자를 가져가려고 했다. 영주님에게 배식까지 시킬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루이센은 거절했다.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 내가 직접 나눠 줄 거네. 자네들은 주변을 신경 써 줘.”

루이센이 단호하게 말하니,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은 기합이 들어 눈을 번뜩이며 경계를 섰다.

“이쪽으로 오세요! 영주님이 친히 스프를 나눠 주실 겁니다!”

“여기 먹을 것이 있습니다! 그릇이든 컵이든 가지고 얼른 와요!”

미리 시킨 대로 루이센이 데려온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져 소리쳤다. 굳이 목이 아프게 소리치지 않아도


고소한 스프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든 상태였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하늘 같은 영주님이 국자를 들고 서 있는 데다 기사들의 기세가 범상치 않으니 겁을 먹은 것이다. 음식 냄새에


눈이 돌아가려고 하다가도 낮에 폭동이 일어난 일을 떠올리자 절로 몸이 굳었다.

‘이러다 날 새겠어.’

루이센은 사람들을 쭉 둘러보다가 사람들 중 가장 어려 보이는 소년을 지목했다.


“너 이리로 오렴.”

“저, 저요?”

솥에 눈을 떼지 못하고 군침을 삼키고 있던 소년은 깜짝 놀랐다.

“빨리 와 봐.”

루이센이 재촉했다. 영주가 부르는데 이거 안 갈 수도 없고, 근데 무섭긴 하고. 소년은 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쭈뼛쭈뼛 다가갔다.

28 화

“자.”

루이센은 나무 그릇에 스프를 한가득 떠서 소년에게 건넸다. 소년은 얼떨결에 받아 들기는 했지만 정말 먹어도
되는지 의심스럽게 루이센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먹고 기다리고 있으렴. 내일 아침에 성에서 배급이 나올 거니까 어른들에게도 전하고.”

“정말요?”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밀가루랑 장작이랑 그런 거. 근데 너네 빵 만들 힘은 있니?”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나눠 주면 더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인력이 부족해 어려운 게 가장 아쉬운 점이었다.

배고픈 사람들이 요리를 해 먹을 수나 있을까? 배고픔은 이성을 앗아 갔다. 괜히 눈이 돌아가서 날것을 주워


먹고 탈 나면 큰일인데. 그래서 루이센이 무리해서 마을까지 스프를 주러 내려온 것이기도 했다.

“당장은 힘들지만 성에서 징발해 간 것도 다 보상해 줄 거야.”

“진짜요? 언제요? 영주님 돈 있어요? 근데 진짜 우리 영주님 맞아요? 전 처음 보는데.”

“내가 영주 맞아. 너야 당연히 처음 보겠지. 나 같은 사람을 언제 또 볼 일이 있었겠니?”

루이센은 소년의 두서없는 물음에 차근차근 답해 주었다. 무심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친근한 말투에 소년도
용기가 생겼다.

“근데요, 우리 전쟁에 져서 망한 거 아니에요?”


“망하기는. 아니에스 공작가가 이런 걸로 망할 거 같아? 성문만 열리면 다 해결될 거야.”

허세가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메뚜기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으니, 지금쯤 성 밖은 수확한 밀이 마을마다 창고
가득 쌓여 가고 있을 거다. 그걸 성안에 들여올 수 없고, 당장 성안에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렇지.
공작가의 재정 상태가 어려운 건 아니었다.

내전으로 행정과 인사에 구멍이 나 버려 크게 휘청인 건 맞지만, 공작가가 보유한 금이나 보석, 채권 등을
처분하고 포로로 잡혀 있던 사람들이 돌아오면 빠르게 안정이 될 거라는 게 루이센이 본 전망이었다.

생각해 보니 다 칼튼이 문제였다. 성문만 안 걸어 잠그면 되잖아?

그렇지만 칼튼을 욕하기 어려운 게, 같은 1 왕자 편인 귀족들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루이센 본인이었다.

“아무튼 걱정하지 마라. 나와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마. 그리고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예상지 못한 사과에 소년은 귀가 새빨개졌다. 하늘 같은 영주님이 자신 같은 평범한 마을 사람에게 직접 사과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라 당황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미안해하는 루이센의 얼굴이 너무도 예뻤다.

“아, 그…….”

“가서 먹어. 배고플 텐데.”

루이센은 소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떨결에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걸어 나온 소년은 물끄러미 루이센을 보다가,
허겁지겁 스프를 마시기 시작했다. 향신료 하나 안 들어간 묽은 스프였지만 막상 먹어 보니 짭짤한 맛이 괜찮았고
무엇보다 싸늘한 몸을 덥혀 주는 것이 좋았다.

소년과 루이센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루이센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이거 먹어도 되는 건가요?”

“먹어, 먹어.”

“언뜻 들었는데 배급이 다시 시작되는 거 맞나요?”

“맞네. 최대한 빨리 다시 할 거야. 지금 성에서 다들 그 논의 중이야.”

루이센은 스프를 떠 주면서도 사람들의 물음을 하나도 허투루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끼칠 여파를
생각하면서 하나하나 차분히 답했다. 소년에게 한 것과 같은 약속과 사과도 잊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속도는 느렸지만 그만큼 심사숙고한 대답이라 진정성이 느껴졌다. 루이센의 진심 어린 마음이 따듯한
스프 한 그릇과 함께 전해졌다.

다른 사람이 음식을 나눠 줬다면 이만큼 효과는 없었을 것이다. 국자를 잡고 약속을 하는 사람이 아니에스 공작,
루이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랜 세월 비록 루이센이 망나니로 이름을 날리며 영지 일을 등한시하고 이번 위기를 불러왔어도, 기나긴 세월 이


땅을 지배한 아니에스 공작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한순간에 사라지진 않았다. 루이센이 몸소 행동하는 걸 보며
마을 사람들은 잠시 잊었던, 황금들판의 수호자를 향한 그리운 믿음을 떠올렸다.

‘그래. 영주님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어쨌거나 우리 영주님인데 우리가 믿어 드려야지.’

‘좀 못 미더워도 어차피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있나.’

처음에는 불신과 원망으로 루이센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차츰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공작령의 사람들은 온화한 기후처럼 너그럽고 느긋한 성정이었다. 난데없이 찾아온 전쟁의 공포가 모든 것을
망치긴 했으나 그 본성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루이센이 직접 마을로 내려와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다독이고 그들의 불안을 덜어 주자, 거칠어졌던 사람들도 금세 온순한 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음에도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몰려왔다. 국자를 든 팔이 저리고 목이 아파 왔으나


루이센은 끄떡하지 않았다.

“물을 더 퍼서 솥에 부어. 빵도 더 집어넣고. 너희들은 가서 거동이 힘든 사람들을 도와다오.”

루이센은 계속 음식을 나눠 주었다. 이 한 그릇의 스프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기적으로 다가오는 줄 알기에 지칠
줄 몰랐다.

***

어느덧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스프에도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도 완전히 져서 횃불을 밝혀야 했다. 밤에
움직이는 건 루이센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았다.

“이제 성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이상은 위험합니다.

“아직 사람들이 남아 있는데…….”

루이센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계속하는 게 나을까, 돌아가는 게 나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사람들 사이에
칼튼이 혼자 멀뚱히 서 있는 게 보였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머리 하나 툭 튀어나온 그 덩치를 모르는 척하긴
어려웠다.

언제부터 저기 저러고 있었던 거야?

눈이 마주치자 칼튼이 다가왔다.

“왔으면 날 부르지 그랬나?”

“끼어들기 어렵더군요. 밤이 늦었으니 이만하고 돌아가시죠.”

“……그래.”

칼튼이 말하니 루이센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정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영주님 그거 못 들어요. 놔두세요.”


루이센은 마을 사람들에게 뒷정리를 맡겼다. 칼튼은 루이센 옆에 서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저래?’

칼튼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루이센이 물었다.

“왜 그렇게 보나?”

“아뇨…….”

칼튼은 말꼬리를 흐리다가 불쑥 물었다.

“낮에 그 꼴을 당하고, 다시 마을에 내려올 마음이 듭니까?”

“어?”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무모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칼튼이 한 걸음 불쑥 다가왔다. 거대한 남자의 몸이 가까이 오자 루이센은 긴장했다. 칼튼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이 루이센의 얼굴을 파헤치듯이 훑었다.

“보면 겁이 없으신 건 아닌데.”

“날 놀리나?”

루이센이 울컥해서 물었다.

“아닙니다. 그냥 신기해서요.”

“내가 뭘?”

“이렇게까지 하실 줄 몰랐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얌전히 성에서 회의나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마을로 튀어 내려오시고 말입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내 영지인데 뭐 어떤가. 그리고 이번에는 기사들도 같이 왔어. 안전에 신경 썼다네.”

“예, 뭐. 기사들이라도 데려오지 않았다면 진짜 미치셨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루이센은 칼튼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걱정이 되어서 따라온 건가? 에이,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칼튼이 날
걱정할 리가 있나. 루이센은 순간 떠오른 의심을 저 멀리로 던져 버렸다.

“어쩐지 질서가 잘 지켜진다 했더니 자네가 지켜보고 있어서였나 보군?”

“도와드린 거 아닙니다. 감시한 거지.”

아니 누가 뭐래? 왜 정색을 해. 까칠하기는. 루이센은 속으로 칼튼을 욕했다.

“다음에는 돌발 행동을 하시려거든 미리 알려 주시죠.”


“그럴 일이 또 있겠나.”

루이센은 단언했다. 그러나 칼튼은 조금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술을 끊겠다고 다짐하는 중독자를 보는 거


같은 눈으로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아니, 왜?’

루이센은 억울했다.

“같이 돌아가시죠. 공작님이 다치기라도 하면 제 책임이 될 테니까요.”

그야 그렇지만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지? 루이센은 의아했으나 따로 간다고 우기는 것도 이상한지라 그러라고
했다.

***

성에 돌아오자 회의는 얼추 끝이 나 있었다. 밤이 늦었기에 해가 뜨기를 기다리며 가신들은 각 부서에서 나눠서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러 흩어졌다. 루이센은 맡은 일도 없었거니와, 얼른 들어가서 쉬라는 가신들의 재촉에
방으로 돌아왔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푹신한 침대에 머리를 대고 보니, 참 파란만장한 하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에 나간다 했더니, 낙오에, 폭동에 휘말리고, 칼튼이랑……그럴 뻔하고……. 만약 칼튼이 말리지 않았다면
…….

루이센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쓸데없는 생각만 자꾸 드는 걸 보니 잠이 올 거 같지 않았다. 팔다리가 무겁고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가만히 침대에 앉아 있자니, 낮에 본 사람들 모습이 떠올랐다.

‘마을 사람들은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오늘은 먹을 게 있었다지만 내일은? 모레는? 칼튼이 언제쯤 떠나서 성문을 열 수 있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근심 걱정이 루이센을 짓눌렀다.

‘안 되겠다.’

루이센은 침대를 나와 거칠게 잠옷을 벗어 던졌다. 이럴 땐 몸을 써야지.

외출복을 입고 그는 방을 나왔다.

밤의 성은 조용했다. 불침번을 서는 병사들의 횃불만 간혹 보였다. 자고 있을 루거나 병사들을 부르기도 애매한


시간. 루이센은 홀로 조용히 축사로 향했다.

공작성은 넓었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은 이름 모를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특히 축사 근처는


일부러 관리를 하지 않아 더 무성하고 우거졌다.

루이센은 챙겨 온 삽을 옆구리에 끼고 잡초들 사이에서 뭔가를 찾아 헤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이쯤에 있을 거 같은데.’

29 화

루이센이 찾는 것은 ‘땅속의 노파’. 독초로 잘 알려진 뿌리식물이었다.

이 땅속의 노파라는 식물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잡초지만 그 뿌리는 흉악한 마귀처럼 생겨서 전설 속에 나오는
만드라고라를 떠올리게 했다. 주먹 크기에 주름이 지고 사마귀가 난 고약한 노파의 얼굴 같은 뿌리가 달려 있어
그 이름도 땅속의 노파라고 불렸다. 생긴 것이 끔찍한 데다 먹으면 심각한 설사와 복통을 유발해 독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먹지 않았다.

가난한 동네에서는 그나마 말이나 돼지에게 사료로 주었지만, 풍요로운 남부에서는 가축에게도 가엾다고 주지
않는 그런 음식이었다.

지금은 독초 취급이지만, 몇 년 뒤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식량이 된다.

내전 이후, 왕국에는 오랜 기근이 지속되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맸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들은 이럴 바엔 배부르게 죽자는 마음으로 돼지가 먹는 땅속의 노파를 빼앗아 구워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먹어 보니, 이 땅속의 노파는 생각보다 훨씬 맛이 좋았고 배도 불렀고, 죽지도 않았다!
설사와 복통도 없었다.

이 이야기가 널리 퍼지자, 사람들은 연구 끝에 땅속의 노파에게 생기는 독은 빛을 쬐어 생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캐자마자, 껍질만 잘 벗겨서 익혀 먹으면 안전한 것이다!

땅속의 노파는 어디서든 잘 자랐고, 손이 덜 가는 데 반해 밀이나 다른 작물보다 훨씬 많은 수확량을 거둘 수


있었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왕국에 한 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왕국 차원에서 땅속의 노파를 키워 먹기를 적극


권장했고, 왕이 직접 땅속의 노파를 구워 먹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그런 노력 끝에, 땅속의 노파는 서민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식재료로 자리 잡게 되었다.

뭐? 땅속의 노파? 마귀의 음식? 땅속의 어르신이시다!

나중에는 귀한 어르신으로 불리게 되는 아주 요긴하고 기특한 식물이었다.


루이센도 이 어르신을 아주 좋아했다.

특히 농사일을 도와주던 시절에는 새참으로 큰 대접에 잘 삶은 땅속의 노파가 나왔는데 그게 어찌나 맛있던지. 그
맛에 힘든 노동도 견뎌 낼 수 있었다.

루이센은 그때의 아련함을 떠올리며 풀숲을 뒤졌다. 자주 먹어 보고, 또 많이 캐 본 식물이라 어렵지 않게


원하는 걸 찾을 수 있었다.

‘찾았다!’

루이센은 가지고 온 삽으로 식물의 줄기 아래를 파고 살살 잡아당겼다. 그러자 늙은 마녀의 얼굴처럼 흉악스럽게
생긴 뿌리가 주렁주렁 딸려 왔다.

루이센은 입맛을 다셨다. 아주 못되고 음산하게 생긴 게 맛이 아주 좋아 보였다. 이상하게 이건 못생길수록


맛있단 말이지. 그 포슬포슬한 특유의 단맛을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낮은 웃음소리가 흐흐흐, 하고
흘러나왔다.

이 땅속의 노파가 이제부터 마을 사람들의 배식에 큰 힘을 보탤 것이다. 부족한 식량을 대체하기에 이만한 게
없었다.

본래는 총관에게 보여 줄 몇 뿌리만 캐 가려고 했으나 막상 땅속의 노파를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배 속이


허전하고 입이 심심한 것이 딱 야식 타이밍이었다.

‘몇 개만 더 캐서 구워 먹어도 되겠지?’

루이센은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좋아. 야식을 먹어도 잔소리할 사람은 없겠어.

물론 루이센이 야식을 먹는다고 혼낼 사람도 없지만 그래도 공작의 체면을 지키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맘이었다.

루이센의 머릿속이 야식으로 가득 찼을 무렵, 짙은 나무그림자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칼튼은 너무도 황당하여
어이가 없었다.

루이센이 슬금슬금 방을 기어 나오던 때, 칼튼도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루이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사들과 함께 마을에서 스프를 나누어 주며 영지민을 달래던 루이센을 떠올렸다. 그 위험을 겪고도 손수 팔을
걷고 나서는 영주와 그런 영주의 마음에 진심으로 감동하는 영지민이라니!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광경, 그 중심에 서 있던 루이센의 모습이 자꾸만 생각났고 그럴 때마다
속이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칼튼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밖으로 나왔다. 발소리를 죽이고 밤공기에 동화되어 걸으면서도 루이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귀족스러운 무심하고 고고한 표정을 하고 있는 루이센. 깨질 것같이 연약한 청년의 얼굴. 물가에 내놓은 것 같은
불안함. 사람을 돌볼 줄 아는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 또 영지민을 위해 자기 몸도 내던지는 파격적인 행동까지.

칼튼은 그중 어떤 것이 가장 루이센의 본질에 가까울지 고민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생각을 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졌다.

루이센은 아주 이상했다.

그가 미래를 내다보는 것처럼 영리한 사람이라면 영지에 전쟁을 불러온 어리석음은 무엇이며, 그가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자기 몸을 던지는 희생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치밀한 사람이었다면 몸을 내던질 정도로 무모할 리
없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영지를 사랑했다면 그의 무지함은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말, 행동, 그동안의 행적. 어느 것 하나 앞뒤 맥락이 맞지 않았다.

오늘 하루만 해도 덜떨어진 놈이었다, 이기적인 위선자 귀족이었다가, 허술하고 연약한 청년이었다가, 헌신적인
지도자였다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락가락했다.

사실은 한 몸에 인격이 여러 개라거나……. 그런 허무맹랑한 상상까지 들 정도였다.

‘거기서 무릎은 왜 꿇어서……. 사람 심란하게.’

루이센이 몸을 내놓으라는 자신의 얼토당토않은 말에 냉큼 무릎 꿇지만 않았어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다가와


놓고 덜덜 떨지만 않았어도. 칼튼은 루이센에 대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과 떨림을 안고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그의 눈동자와 창백한 뺨은 안쓰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인정하긴 싫지만 자신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루이센을 떠올리면 허리 아래에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열기가
솟구쳤다. 이렇게 헌신적이고 희생적이며, 애처로운 남자가 소문의 그 망나니가 맞을까?

칼튼이 밤 산책을 하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데, 갑자기 루이센이 툭 튀어나왔다. 머릿속에 있던 사람이
튀어나오니 칼튼도 무척 놀랐다.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보니, 루이센은 삽을 하나 들고 어디론가 살금살금 가는 게
아닌가.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약간의 불안과 루이센을 향한 호기심이 칼튼의 발길을 이끌었다. 칼튼은 조용히 루이센의 뒤를 따랐다. 마침내
루이센은 축사 근처의 공터에 서더니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 밤에 웬 삽질이야? 숨겨 둔 보물이라도 있는 걸까?

식량 부족도 인력 부족도 다 알아서 하겠다는 루이센의 호언장담을 생각해 보면 숨겨 둔 비장의 수가 하나쯤 있을


법도 했다. 칼튼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루이센이 캐낸 것은 주먹만 한 크기에 사람 머리처럼 생긴 뿌리였다. 흐릿한 달빛이 전부였지만 칼튼은
그것이 뭔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것은 땅속의 노파, 유명한 독초였다.

흐흐흐.

루이센의 음흉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달빛에 비친 루이센의 탐욕스러운 표정은 어딘가 광기마저 느껴졌다.

루이센의 이상한 짓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루이센은 마른 풀을 그러모으더니 불을 피우고, 물에 닦은 땅속의


노파를 그 안에 던져 넣었다. 그는 모닥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한 태도로 긴 나뭇가지를
이용해 땅속의 노파를 이리저리 굴렸다.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야?’


너무도 이상하고 기괴한 풍경에 칼튼은 선뜻 나설 수 없었다. 야밤에 남몰래 독초를 캐며 음산한 웃음을 짓는
영주라니. 사실은 악마숭배자였다든가 하는 전개가 펼쳐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잠시 후, 불길 속에서 수상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라도 했다면 칼튼은 당장 이곳을 떠나 신전으로 달려가


고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어떤 기이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루이센은 불 속에서 땅속의 노파를
꺼내어 껍질을 제대로 벗기지도 않고 허겁지겁 한 입 베어 먹었다.

‘저걸 왜 먹어?’

더는 봐 줄 수 없어, 칼튼은 급히 루이센의 앞으로 튀어 나갔다.

“지금 뭘 드시는 겁니까?”

칼튼은 루이센의 턱을 잡고 강제로 땅속의 노파를 뱉게 했다.

“이, 읍. 읍!”

루이센의 저항은 잠자리의 날갯짓처럼 연약하고 무의미했다. 루이센의 입안에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칼튼은 루이센의 턱을 놓아주었다. 루이센은 칼튼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내 식사를 방해하는 거야? 날 그렇게까지


괴롭히고 싶어?

“공작님을 제가 또 한 번 살려 드린 겁니다.”

“살려? 자네 때문에 멀쩡한 음식 다 버렸잖아!”

정성껏 구운 땅속의 노파가 칼튼 때문에 뭉개져서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루이센은 아까워서 눈썹을 그러모았다.
저거 주워 먹으면…… 안 되나?

“음식이요?”

칼튼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땅속의 노파를 야식으로 먹으려고 했다는 거지?

땅속의 노파에는 독이 있었다. 먹자마자 죽는 심각한 독은 아니다. 하지만 심한 복통과 설사를 일으켜서,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사망에 이를 수 있었다.

칼튼의 고향에서는 땅속의 노파를 말 먹이로 썼다. 마구간 한 편에 산처럼 쌓여 있는 땅속의 노파는 꼭 마녀의
머리만 잘라 쌓아 놓은 것처럼 기괴했다.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은 모습인데도, 그걸 집어 먹고 쓰러지는 애가
한 해에 한 명씩은 있었다.

루이센 정도 되는 귀족이라면 의사의 치료를 받을 테니 죽지야 않겠지만 죽을 만큼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게 뭔지나 알고 드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30 화
“알지. 땅속의 노파가 아닌가.”

“아신다고요? 알고도 이걸 먹으려고……. 뭐, 자해라도 하시려고요?”

“자해? 내가 그런 걸 왜 해?”

루이센은 칼튼이 뭔가를 매우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네가 뭔가 오해했나 보군. 자해라니. 갓 캐낸 땅속의 노파에는 독이 없어. 나는 이걸 밀을 대신할 식량으로


삼으면 어떨까 해서 캐러 온 거야. 내일 총관에게 보여 줄 생각으로 말이야.”

“그럼 왜 드시려고 했습니까?”

“힘들게 캤으면 맛은 봐야지!”

땅속의 노파를 빵이나 과일열매 같은 평범한 음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루이센을 보니, 칼튼은 어이가
없었다.

“자네가 말하는 땅속의 노파에 독은 햇빛을 받으면서부터 생긴다네. 그러니까 캐자마자 바로 구울수록 좋다고.”

“공작님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확실해요?”

“확실하네. 내가 먹어 봤어.”

미래에는 연구 결과가 있겠지만 지금은 없으니 루이센의 경험이라고 우길 수밖에 없었다. 의심이 많은 칼튼은
쉽게 납득하지 않았다.

“언제요? 공작님이 이런 걸 왜 먹습니까? 남부는 식성이 다르다고 하지 마시죠. 여기라고 다르지 않던데요.”

“어? 아……. 옛날에.”

이 시점의 루이센이라면 이런 걸 먹을 일이 없긴 했다. 루이센은 대충 얼버무렸다.

“옛날에 어렸을 때. 남들 모르게 혼자 많이 먹었어.”

어릴 때 먹어 봤다고 하면 칼튼이 어떻게 알겠어?

루이센은 박박 우겼다.

“나 혼자 주워 먹은 거라 사람들은 잘 몰라. 나도 커서는 안 먹었는데 갑자기 이게 생각나더라고. 하여튼 그래서


땅속의 노파는 안전해. 내 말이 맞다네.”

“……많이 드셔 봤다고요?”

“그래. 없어서 못 먹을 정도였지.”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옛날을 추억했다. 땅속의 노파도 없어서 굶어 죽을 뻔한 시기가 있었다. 서북부의 춥고
험난한 겨울이었다. 그때 외팔의 순례자가 루이센을 구해 주지 않았다면 죽었을 것이다.

“이거라도 배부르게 먹는 게 소원일 때가 있었어.”

외팔의 순례자를 만나고 굶지야 않았지만, 배불리 먹을 형편이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추위와 굶주림은 떠돌이들의
숙명이니 말이다.

그때를 떠올리며 루이센의 눈동자가 잠시 몽롱해졌다. 그 모습에 칼튼의 눈빛이 흔들렸다.

‘많이…… 먹어 봤다고……. 이딴 걸? 왜?’

칼튼에게 땅속의 노파는 소나 돼지에게나 주던 먹이였다. 심지어 남부 사람들은 먹을 게 넘쳐 나서 그런지


돼지에게도 더 좋은 걸 먹였다. 땅속의 노파 같은 걸 먹이는 건 불쌍하다고.

천민인 자신도 안 먹는 풀뿌리를, 이 일대의 왕이나 다름없는 루이센이 땅속의 노파 같은 걸 먹는단 말인가?

“이게 말이지, 겉보기에는 좀 징그러워도 잘 익히면 속은 달고 맛있어. 부드러워서 소화도 잘되고 영양가도 높지.
이걸로 스프를 끓이면 말이야…….”

루이센은 땅속의 노파가 보기와는 달리 얼마나 훌륭한 어르신인지, 맛있고 좋은 음식인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이는 칼튼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말하는 걸 들어 보면 진짜 많이 먹어 본 거 같긴 한데…….’

직접 먹어 보지 않았다면 저렇게 진지하고 그럴듯하게 지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너무도 부유하고 풍족해 황금들판이라고 불리는 대평야의 주인이 왜? 이 땅의 모든 것이 자기 것일 텐데?’

왜?

어쩌다가?

공작가는…… 공작에게 밥도 안 줬나……?

칼튼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려치듯이 한 가설이 떠올랐다.

루이센이 가신들에게 방치, 내지는 학대를 당하고 자란 거라면?

자신의 영지 안에서 영주란 한 나라의 왕이나 마찬가지이다. 가신들은 왕에게 하듯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지시에 따른다. 영주와 가신들 사이의 위계질서는 법으로 보장되어 엄격한 절대불변의 규칙이었으나,
세상일이라는 게 늘 순리대로 돌아가지만은 않았다.

때로는 영지운영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주과 가신들의 기 싸움에 영지 하나가
아작 나기도 하는 판이었다. 특히 영주가 만만할수록 가신들의 패악이 극에 달하기 마련이었다.

만약 영주가 어리고, 가까이서 돌봐 줄 친척이 없다면?

말이 좋아 주군이지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나마 방치를 하면 다행, 심각한 경우에는 가신들이 합심해
어린 영주를 학대하기도 했다. 결코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간혹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아니에스 공작도 여섯 살에 영주가 되었다고 했지. 가신들 손에 의해 키워졌고.’


아무리 대단한 아니에스 공작이라고 한들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노련한 가신들이 성을 장악하고
루이센을 따돌리려고 했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커다란 성에 혼자 방치된 어린 루이센. 그는 배가 고팠을 거고 먹을 것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돼지가 먹는 걸 보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착각하고 땅속의 노파를 먹게 된 게 아닐까.

그러니까 아니에스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땅속의 노파를 저렇게 잘 알고 있는 거겠지.

‘그래. 그럴듯해. 아니,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어.’

루이센이 제대로 챙김을 받고 자랐다면, 넘쳐 나는 산해진미를 놔두고 돼지 먹이를 먹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루이센에게 아주 독특한 식성이 있어서 흙을 파먹고 다녔던 게 아니라면.

아니, 설령 루이센이 흙 파먹는 취미가 있더라도 충성스러운 가신들이라면 독이 있다고 알려진 땅속의 노파를
먹게 놔둬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루이센은 최소한 방치, 최악의 경우 학대를 받고 자랐다고 봐야 말이 되었다.

‘이럴 수가.’

칼튼은 일순 어지럼증을 느꼈다. 태어나 지금까지 최고급만 두르고 먹으며 극진하게 보살핌받고 자랐을 것 같은
루이센이, 저 고상한 얼굴 아래 불우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아니지. 함부로 추측할 일이 아니야.’

칼튼은 이성적이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 속을 모르는 루이센은 모닥불 속에서 미처 꺼내지 못한 땅속의 노파만 애타게 바라보았다.

아이고, 아까운 거 다 타 버린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오해가 풀렸으면 나 이거 좀 꺼내겠네. 이대로 두면 다 타 버려서 말이야.”

“하……. 예, 마음대로 하시죠.”

“그래!”

루이센은 잽싸게 모닥불에서 땅속의 노파를 꺼냈다. 좀 타긴 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루이센은 칼튼을 올려다보았다. 루이센은 짧은 고민 끝에 칼튼에게도 땅속의 노파 하나를 내밀었다.

“자네도 먹을 텐가?”

“아뇨. 싫습니다.”

칼튼은 정색했다.

“아, 그래…….”

루이센은 머쓱하게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후후 불어 가며 땅속의 노파의 껍질을 벗겼다. 뽀얀 속살이 드러나고,
구운 땅속의 노파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입맛을 돋웠다.

‘어차피 망한 공작의 체면. 그냥 편하게 먹자.’

무릎도 꿇고 다리 사이도 길 뻔했는데 뭐 어때?

루이센은 아예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땅속의 노파를 먹기 시작했다. 칼튼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칼튼이 보기에 불에 구운 땅속의 노파는 화형당한 마녀의 머리 같아 영 보기 불쾌하기만 했는데, 그걸 맛있게


먹고 있는 루이센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더 지끈거리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 진짜…… 먹는 겁니까?”

그러자 루이센은 움찔하며 냉큼 눈을 내리깔았다.

‘이것도 이렇게 보니…….’

너랑 말 섞기 싫다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혼날까 봐 지레 겁먹은 어린애 같았다. 긴 속눈썹 아래로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이렇게 기가 죽어 있어?’

이러니 얼토당토않은 농담을 진짜라고 믿고, 남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 올 정도로 심리적으로 내몰려 있는 게
아닌가. 그래. 루이센의 행동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칼튼은 귀족 나리의 불우한 성장 과정을 불쌍해할 만큼 물렁한 사람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봐서 그는 개새끼가
맞았다.

하지만 자신이 이상하다고 욕하던 루이센의 행동들이 자기 딴에 과거를 딛고 뭔가 해 보려고 아등바등했던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아주 약간, 양심이 찔렸다.

어린애가 자기 몸보다 큰 짐을 들고 낑낑대며 걷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발을 걸어 넘어뜨린 기분이라고 할까.

자신과 대등하거나 더 잘난 사람을 엿 먹이는 건 개새끼 짓이지만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건 쓰레기였다.
칼튼은 지금 왠지 쓰레기가 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는 개새끼나 쓰레기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칼튼 안에서는 엄연히 큰 차이가 있었다.

“음……. 이건 너무 타 버렸고……. 먹을 게 별로 없구만.”

루이센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는 타 버린 땅속의 노파들을 하나하나 주워 들었다. 루이센의 얼굴은
아끼는 신하를 잃고 애도하는 왕처럼 경건하고 침통했다. 그리고 아까 칼튼 때문에 떨어뜨린 땅속의 노파를
바라보았다.

딱 알맞게 익었는데……. 제일 잘 익은 한 덩이가 풀밭을 뒹굴고 있었다.

칼튼의 예리한 눈썰미는 루이센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놓치지 않았다.

널리고 널린 독초 뿌리인데 저게 뭐라고?


루이센이 이해가 안 되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못 먹고 자랐으면 저럴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널리고 널린 독초도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이 있었겠지. 칼튼은 괜히 짜증이 났다.

“까짓거 더 캐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한 뿌리만 더 캐 드리면 됩니까?”

칼튼은 루이센이 던져둔 삽을 들었다. 루이센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어……. 아, 세 뿌리 정도만 더 캐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칼튼은 공터를 휙휙 둘러보더니, 능숙하게 땅속의 노파를 찾아 캐내었다. 그는 삽질도 수준급이었다. 금세 세


뿌리를 캐고는 자루에 담았다.

31 화

“지나가는 사람이 볼 수도 있으니, 드실 거면 방에 가서 드시죠.”

“어, 그래.”

“자루는 방까지 들어다 드리겠습니다. 가시죠.”

“……자네가 왜?”

“왜, 도와 드려도 불만입니까?”

불만은 아니고 불안하긴 하지.

루이센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칼튼은 또 허, 하고 한숨 비슷하게 탄식했다.

“가시죠.”

그러나 칼튼은 친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자기 멋대로 성큼성큼 먼저 앞서갔다.

‘뭔데 진짜?’

칼튼의 묘한 시선과 반응에 루이센은 무척 찜찜했다. 루이센은 칼튼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남자다운 이목구비 위로 달빛이 드리웠고, 그 탓인지 굉장히 심란해 보였다.

‘왜 저러지? 미쳤나?’

갑자기 왜 도와주는지 루이센은 칼튼의 변화무쌍한 심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는 내가 눈치가
있었던가. 루이센은 포기가 빠른 청년이었다.

칼튼이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장 땅속의 노파를 집어 던질 정도로 화를 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무 짐작도 하지 못했다.

***

다음 날.

공작성은 해가 떠오르기 무섭게 온 성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창고 문을 열어젖히고 마을로 보낼 물자를 수레에


싣기 위해 하인들 모두가 동원되었다.

하인들은 성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알음알음 성 아랫마을의 사정을 들은지라 일이 늘어났음에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 아랫마을에 가족이나 애인, 친구를 둔 사람들이 많았기에 다들
자기 일처럼 도왔다.

루이센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북적이는 소리를 듣고 아침이 왔음을 알아차렸다. 어제 땅속의 노파를 캔 뒤,
총관을 만나 상의하고, 확인할 것이 있어 책을 보다 보니 밤을 새운 것이다.

‘내 인생에 책을 보다가 밤을 새우는 날이 올 줄이야.’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루이센은 뻐근한 눈을 꾹꾹 누르며 일어섰다. 아침에 가신들과 식사를 함께하기로
약속을 잡아 둔 상태였다. 루이센은 루거의 수발을 받아 준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공작성에는 커다란 연회홀이 있었다. 저녁 만찬이 있을 때 쓰는 식당이랑 다르게 가솔들을 모아 식사하는 용도로
만들어져서 조금 더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루이센이 도착하자, 의자에 앉아 있던 가신들이 동시에 일어섰다. 하나같이 피로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오셨습니까, 영주님.”

“간밤에 잠을 설치신 겁니까? 눈가가 어두우십니다.”

“아, 약간.”

“저런……. 그래도 쉬어 가면서 하셔야지요.”

루이센이 자리에 앉자, 시종들이 음식을 나르면서 식사는 무난하게 시작되었다.

먹을 게 풍부한 지역이다 보니 공작가의 식탁은 온갖 음식으로 다채롭게 상을 가득 채우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딱 먹을 만큼만, 소박하게 차려졌다.

농부의 것에 비교될 만한 식탁이지만 떠돌이 생활로 음식이라면 모두 공평하게 사랑하게 된 루이센은 즐겁게
식사를 했다. 예전 같으면 밥투정을 했을 텐데, 가신들은 루이센이 한결 더 성숙해졌다고 속으로 감탄했다.

식사를 하면서 가신들은 어제 회의에서 결정된 것들을 이야기해 줬다. 루이센은 들어도 잘 모를 테니 형식적인
보고였지만 그래도 영주인 루이센에 대한 존중이 느껴졌다.
한바탕 무거운 이야기가 오가고, 재무관이 가볍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어제저녁에 마을로 내려가 영주님이 직접 스프를 나눠 주셨지요? 그게 상당히 효과가 있었나 봅니다.”

기사단장이 그 말을 이어받았다.

“저도 마을에 갔다 온 기사들에게 들었습니다. 좀 전에 마을에 다녀온 기사들 말이, 걱정한 것보다 침착한
분위기라더군요.”

“영주님이 직접 스프를 나누어 주며 영지민들을 달랜 이야기가 밤사이 싹 퍼졌답니다. 그래서 배급을 돕겠다고
해가 뜨기 무섭게 성문 쪽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영주님이 나서 주신 덕분에 배급이 한결 수월하게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루이센을 바라보는 가신들의 시선은 불과 며칠 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폭동에 휘말리고도 겁먹지 않고
영지민을 위해 마을 한복판으로 내려간 루이센의 대범함에 다들 감동을 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앞서 나서는 모습은 실로 황금들판의 수호자라는 그 이름에 걸맞았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제 그 험한 꼴을 보셨는데……. 저 같았으면 무서워서 성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갔을


거예요.”

쏟아지는 칭찬을 들으며, 루이센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민망해 죽겠네. 마치 일곱 살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걷는 게 씩씩하다느니, 눈빛이 영리하다느니 하던 그


시절 말이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야.”

속이야 어쨌든 루이센은 매우 어른스러운 태도로 칭찬을 받아넘겼다.

“그렇지만 안심하긴 이릅니다. 당장 식량이 떨어지면 폭도로 변할 겁니다.”

마을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장은 아무래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마침 좋은 지적이었다.

“안 그래도 그것에 관해 내가 자네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네.”

루이센은 손짓을 했다. 하인들이 커다란 접시에 한가득 쌓인 땅속의 노파를 가지고 왔다. 어제 칼튼이 캐 준 그
땅속의 노파였다.

껍질을 다 벗겨 낸 그것은 본래의 흉측한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노란 속살은 먹음직스러웠고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이건 무슨 작물입니까? 처음 봅니다. 냄새가 아주 좋군요.”

식탐이 많고 식재료에 빠삭한 재무관이 물었다. 냄새에 이끌려 그의 손이 들썩들썩했다.

일단 첫인상은 합격인가. 껍질을 벗겨서 내오라고 시키길 잘했다. 시각적인 것도 무시 못 하니까.

“땅속의 노파라네. 자네들도 아는 그거.”


“이게요?”

재무관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의 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해졌다.

“그건 좀 더 이렇게……. 사람 머리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불에 구워서 껍질을 벗겨 낸 거야. 완전히 다른 식물 같지?”

“네. 그렇긴 하지만……. 이런 걸 왜…….”

“설마 영지민들에게 밀 대신 먹이시려고요? 먹으면 바로 죽는 독은 아니라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먹었다간 큰일


납니다.”

“아니. 내 이야기를 들어 보게.”

루이센은 루거에게 책을 하나 건네받았다. 한 뼘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두께의 책이었고 표지에는 멋들어지게


‘아니에스 공작가 연대기’라고 적혀 있었다. 가문에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적어 둔 기록서였다.

“그건 예전의 기록이 아닙니까?”

“맞네. 내 할아버지의 아버지 대의 기록이지. 여기 보면 냉해가 닥쳤을 때 땅속의 노파를 대신 먹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어.”

“이걸 먹었다고요?”

“그래. 그해 겨울이 상당히 혹독했던 모양이야. 그리고 여기 표시된 대로 작물 도감 56 번째를 참고했다고 적혀


있지.”

루이센은 또 한 번 손짓을 했다. 이번에도 루거가 작물 도감을 건넸다. 작물 도감 역시 루이센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평생 식용 작물에 대해 연구해 온 유서 깊은 자료였다.

“여기 보면 땅속의 노파가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부터 독이 생긴다고 적혀 있네.”

땅속의 노파에 대한 선조의 기록을 찾아낸 것은 총관이었다. 어젯밤 루이센이 땅속의 노파를 캐 가서 보여 주니,
총관이 이런 기록이 있었음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루이센은 바로 책을 찾아보았다. 글을 읽는 데 서툰 만큼 밤을 새워서야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왜 지금까지 안 먹었을까요?”

“굳이 땅속의 노파 같은 걸 먹을 만큼 먹을 게 부족해진 적이 없지 않나? 생긴 것도 찜찜하고…….”

먹을 게 넘쳐 나는 와중에, 굳이 땅속에서 썩어 가는 사람 머리처럼 생긴 걸 캐 먹을 이유가 없었다.

“그건 그렇군요…….”

“선대 공작님들이 남긴 기록이라면 믿을 만은 합니다만…….”

“참고로 나와 총관, 그리고 루거도 어젯밤에 이걸 먹었다네. 아주 훌륭한 야식이었어. 배도 안 아프고 말이야.”

“이런 걸 직접 드셨단 말입니까?”


“내가 직접 캐 오기까지 한걸.”

“그런……!”

가신들은 크게 놀랐다. 루이센은 의사를 찾으러 가는 기사단장을 붙잡아 앉혔다.

“책의 말대로, 아무렇지도 않더군. 총관은 어떤가?”

“저도 괜찮습니다. 먹을 만하더군요.”

“으음…….”

“루거는?”

“저도 괜찮았지만…….”

루거는 그래도 땅속의 노파 같은 건 먹기 싫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으음……. 정말 괜찮다면야…….”

“선조 공작님들의 기록이니 믿을 만하기도 하고…….”

존경받던 선조들의 기록에 루이센이 몸으로 실험해 본 결과가 더해지자,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마음으로는 찜찜하지만 머리로는 납득하여, 조금 더 밀어붙이자 긍정적인 대답이 나왔다.

‘선조님 감사합니다!’

루이센은 선조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보냈다. 죽어서도 이 망나니 같은 후손을 도우시니, 존경하는 마음이
솟구쳐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다.

루이센은 보란 듯이 땅속의 노파 하나를 접시에 덜어, 나이프로 잘게 조각내어 먹었다. 살짝 소금과 후추를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총관도 루이센을 따라 땅속의 노파를 먹었다.

그걸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재무관은 에잇, 하며 땅속의 노파에 손을 뻗쳤다. 식욕이 강한 그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습니까?”

“보기와는 다르게…… 맛있네요.”

재무관은 왠지 진 기분이었다. 그의 증언에 다른 이들도 땅속의 노파를 조심스레 접시로 가져갔다.

“땅속의 노파라면 성안 어디든 널려 있으니 보급하기도 편할 거 같습니다.”

“일단 먹는 것으로 인식이 된다면,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체 식량으로


조건은 좋습니다만…….”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순순히 먹을까요?”

타당한 지적이었다. 그에 관해서도 루이센은 생각해 둔 게 있었다.


32 화

“오늘부터 내가 다시 광장에 내려가서 이 땅속의 노파를 나누어 주고 영지민들에게 직접 먹는 모습을 보여 줄


거라네.”

회귀 전에는 왕이 써먹고 효과를 본 방법이었다. 루이센은 검증된 수법을 그대로 따라 할 생각이었고.

“선조의 기록에 더해 무엇보다 공작님이 직접 나선다면…….”

“영주님이 매번 성 아랫마을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 부분은 괜찮겠습니까? 영주님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제 해 보니 괜찮을 거 같더군.”

“해 볼 만한 이야기입니다. 영지민들도 납득을 하겠군요. 무엇보다 상황이 이러니 말입니다.”

“그렇지. 그렇지.”

땅속의 노파가 먹을 수 있는 거라고 인식되자, 가신들은 빠르게 땅속의 노파를 이용한 대책을 내었다.

‘역시 공작가의 가신들은 유능해.’

물꼬만 터 주면 알아서 끌고 가는 게 아주 루이센의 마음에 들었다. 루이센은 총관을 보며 성공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루이센 님도 황금들판의 수호자인 거야. 선대 공작님들을 빼다 박으셨어.’

루이센은 선조님들의 업적과 그걸 잊지 않은 총관이 유능한 덕분이라고 말했지만, 총관이 보기에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루이센이 예전과 같은 망나니였다면 아무리 선조의 기록이 있어도 가신들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루이센이 칼튼을 상대로 꿋꿋하게 버티고, 메뚜기 떼를 예견하고, 또 영지민을 책임지려 애쓰는 모습을
보였기에 가신들도 루이센이 내세운 대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루이센을 향한 믿음이 차곡차곡 쌓여
온 결과였다.

‘언제 이렇게 대견해지셨을까.’

땅속의 노파라는 작물을 찾아낸 것도 놀랍지만, 불철주야로 영지민을 위해 노력하는 루이센의 모습이 총관을 더
흐뭇하게 했다. 총관은 가슴 깊이 우러나는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아래로 작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식사가 끝났고 루이센은 하인 몇을 불러 땅속의 노파를 캐 오게 시켰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좀 비어, 루거를
데리고 성의 앞뜰로 나가 보았다.

하인들이 몹시 분주하게 오고 가고 있었다. 뭐 도울 거 없나. 루이센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수레에 실어야


하는 밀가루 포대를 발견했다.

“이거 같이 나르자.”

루이센의 제안에 루거는 칠색 팔색을 했다.

“아, 공작님. 그냥 방에 들어가자니까요. 이걸 저희가 왜 옮겨요. 하인들 시켜요.”

“시끄러워. 뭐라도 해야지. 빨리 저 반대쪽 잡아.”

“아니, 왜 굳이 사서 고생을…….”

루거는 투덜거리며 밀가루 포대의 반대쪽을 들었다. 루이센도 팔을 걷어붙이고 밀가루 포대의 반대쪽을 들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집사가 달려왔다.

“아이고! 영주님. 이런 험한 일은 하인들에게 시키시죠.”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네.”

“아닙니다! 그러다 다치십니다! 루거, 네 이놈! 영주님께 이런 일을 시키다니. 수석 시종이라는 놈이 말이야!”

집사는 루거를 향해 노성을 질렀다. 루이센을 대하는 봄바람 같은 목소리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루거는 억울하게
해명했다.

“저는 공작님이 시키셔서 든 건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리지는 못할망정! 공작님은 여기서 쉬시죠. 저놈은 제가 데려가 교육을 다시
시켜야겠습니다.”

집사는 안 그래도 바깥에서 데려온 루거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지라,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루거를 끌고 갔다.
혼자가 된 루이센은 밀가루 포대를 마저 들려고 했다. 그러나 하인들이 달려와 빼앗아 가는 바람에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루이센은 성안을 배회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려 봤지만 다들 루이센에게 쉬라며, 험한 일 하지 말라고 돌려보냈다.
장작을 패려고 도끼를 들었다가 하인들에게 애원에 가까운 만류를 들은 뒤, 루이센은 돕기를 포기했다. 그는
터덜터덜 힘없이 구석으로 가서 벽에 등을 기댔다.

‘아, 이 느낌. 오랜만인데.’

루이센이 톡, 건드리면 터지는 이슬방울이라도 되는 것 같은 조심스러움.

숨 쉬는 것도 대신 해 줄 것처럼 극진한 대우.

너무나 익숙한 과보호였다.

루이센은 향수에 젖어 들었다. 옛날에는 이랬었지. 얼마나 오냐오냐 귀하게 자랐는지 모른다. 유일한 공작가의
후계자고, 자주 넘어지곤 했으니 조마조마한 가신들의 마음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치만…… 밀가루 포대 좀 든다고 안 다친다고! 내가 장작을 얼마나 잘 패는데.’

애초에 루이센이 정말 약한 몸이었으면 수도에서 망나니 생활을 즐기지도 못했다. 매일 술 마시고 파티 다니면서
흥청망청하는 거, 보통 튼튼하고 건강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었다.

떠돌아다닐 시절. 농사일도 해 봤고 나무꾼을 따라다니며 나무도 해 보고 갖은 고생은 다 했다. 추운 겨울


길거리에서 잠도 자 보고 하여튼 그렇게 살아 본 결과 깨달았다.

‘난 몸치인 거지, 몸이 약한 게 절대 아니란 말이야.’

몸이 약한 거랑 몸을 못 쓰는 거랑은 전혀 별개였던 것이다. 다들 연약한 영주님이라고 부둥부둥만 하니 진짜


내가 몸이 약한 줄 알았지!

‘고맙긴 한데……. 이 나이에 이렇게 건드리면 깨질 것처럼 대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

여섯 살짜리 애도 아니고, 성인이 된 지가 언제인데 이렇게 오냐오냐란 말인가. 좀 많이 남 보기 부끄러웠다.

머리를 싸매고 열을 식히는데, 뒤통수에 강렬한 시선이 닿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창문 너머로 칼튼이 서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루이센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카, 칼튼 경. 언제부터 거기 있었나?”

“공작님이 하인들에게 도끼를 뺏길 때요.”

그 민망한 꼴을 다 봤다는 거잖아! 루이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칼튼처럼 완벽하게 자수성가한 남자가
보기에 자신이 얼마나 애처럼 보일지 뻔했다.

“너무 무례한 거 아닙니까? 공작님도 사람들을 도우려고 하는 건데요. 장작도 못 패게 쫓아내다니.”

“그야 뭐……. 내가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라서…….”

이해가 안 되겠지! 내가 바보 같아 보이겠지! 과보호를 하는 건 다른 사람들인데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란


말인가. 루이센은 우물쭈물하며 변명을 했다.

그 말이 칼튼에게 어떤 오해를 불러올지는 상상도 못 했다. 칼튼은 루이센의 말을 자기 식대로 해석했다.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이니……. 지켜 주는 사람이 없다고 이렇게 바보 취급해 왔겠군.’

칼튼은 루이센이 칼튼을 발견한 것보다 더 오래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루이센이 성안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서
거절당하는 모습을 다 보았다는 말이었다.

루이센은 어린애가 아니고 병자도 아니었다. 신체 건강한 다 큰 성인이었다. 자기 힘으로 자기 의사대로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을 바보 취급해도 유분수지. 잘 하고 있는 장작 패기도 못 하게 쫓아낼 건 뭐란 말인가. 칼튼의
눈에는 루이센의 의사를 무시하는 걸로밖에 안 보였다. 누가 자신에게 그렇게 했다면 주먹을 날렸을 거다.

쭉 지켜보니 공작성 사람들은 루이센을 아무것도 못 하는 머저리 애 취급하는 거 같았다. 루이센은 그런 대접이
익숙해 보였고. 그동안 루이센이 이 성에서 어떤 대접을 받아 왔는지 자명해졌다. 어젯밤에 품게 된 의심은 점점
더 힘을 얻었다.

루이센이 자라면 권력은 자연히 그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권력을 빼앗기기 싫은 가신들이 고를 선택지는
하나였다. 루이센이 다 자라도 제대로 영주 노릇을 못 하게 만드는 것. 일부러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도 않고,
영지 일에서 멀어지게 하였을 수 있다. 루이센이 점점 자라 머리가 크자, 아예 수도로 쫓아 버렸을 수도 있다.

루이센은 수도에 가서 친척인 왕비와 2 왕자를 만났을 것이다. 그들은 루이센을 이용하고 싶어 해 친근하게
대했을 거고, 방치되어 외롭게 자란 루이센은 왕비와 2 왕자를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통찰력과 안목을 가지고, 2 왕자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열렬히 지지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영지를 전쟁에
내모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두고 의지할 곳이 그들뿐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다 영지로 돌아오게 되고, 루이센도 나름대로 영지 일에 손을 대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가신들이 그걸
순순히 따랐을 리 없었다. 가신들은 루이센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루이센의 의견에 무조건 반대를 했을 거고,
루이센의 일거수일투족을 방해했을 것이다.

‘그러면 목숨 걸고 숲을 건너 적진에 항복하러 올 수밖에 없겠어.’

루이센이 자신의 뜻을 강행하고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려고 하니, 가신들은 파업이라는 강수를 둔 거고. 그러다
루이센이 생각보다 잘해 냈고, 영지 단위의 큰 위기가 닥치니 파업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겠지.

‘그래. 그렇게 보면 다 이해가 된단 말이지.’

몸을 내던지는 극단적인 선택, 가신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려는 모습. 그리고 루이센이 보인
모순적인 행동들.

루이센이 방치 내지는 학대받으며 자랐다는 가설을 끼워 넣자, 매듭 끈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모든 의문이 술술


풀렸다.

칼튼은 루이센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새빨간 게 꼭 울 것만 같았다.

‘하, 어쩐지 영 이상하더라니.’

칼튼은 완전히 확신했다. 너무나 귀족답고 완벽해 보이는 루이센의 이면에 아픈 과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뭐라도 도움이 되겠다고, 한밤중에 남몰래 땅속의 노파를 캐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에게는 아픈 기억
속의 음식일 텐데.

그런 줄도 모르고 자신은 부모 잘 만나 자기 잘난 줄 알고 살아온 귀족 놈이라고 괴롭혔으니. 아주 약간 가슴이


콕콕 찔려 왔다.

“하시려던 일은 잘되었습니까?”

칼튼은 다른 때보다 아주 약간 더 친절한 어조로,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33 화
“아, 응. 잘되었어. 선조들 덕분이지.”

루이센은 칼튼에게 선조들의 도움을 톡톡히 받은 이야기를 해 줬다. 어쩐지 말이 술술 나왔다.

“자네 말대로 조상을 잘 둔 덕을 내가 톡톡히 보고 있어.”

“그건…….”

칼튼은 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이센은 천진난만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나는 다시 마을 광장으로 갈 생각이야. 땅속의 노파를 먹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줘야지.”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네. 난 먹는 건 자신 있거든.”

“위험하지 않냐는 말입니다. 기사들이 따라갑니까?”

“글쎄. 배급 수레를 호위해야 하니 한 명쯤 따라오려나?”

“…….”

뭐라도 해 보려는 모습이 가상하기 그지없었다. 칼튼이 조금만 더 마음이 여렸다면 살짝 눈물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칼튼은 눈물 대신 못마땅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마을에 가실 때 저도 함께 가죠.”

“……자네가 왜?”

루이센은 척수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감시하러 가는 겁니다. 도움은 기대도 하지 마시죠.”

아니, 따라오는 게 도와주는 거 아닌가?

칼튼 하나만 데리고 가면 루이센의 호위로 따라올 기사들을 전부 다른 일을 시키러 보내도 되었다.

루이센은 칼튼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곧은 눈썹과 주름 잡힌 미간 아래로 시원하게 뻗은 콧대가 멋졌다.


이렇게 보니 새삼, 칼튼도 상당한 미남이었다. 늘 사람 하나 죽일 듯이 노려봐서 느낄 수 없었지만.

‘어?’

그러고 보니 칼튼이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지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살벌한 기세가 누그러져서 훨씬 덜 무서워
보였다. 칼튼의 외모를 찬찬히 감상할 여유도 그래서 나온 것이었다. 다른 때라면 냉큼 눈을 내리깔았을 테니까.

‘어쩐지 말이 술술 나오더라니!’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 칼튼은 처음이었다. 루이센은 굉장히 놀랐다. 칼튼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가 따라가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자네 뭔가 좀…….”

뭐라고 물을까? 갑자기 나를 왜 노려보지 않냐? 친절해지긴 했는데 왜 이렇게 맘이 찜찜하지?

“싫으시면 그냥 혼자 가시죠.”

“아냐. 자네가 같이 가 주면 고맙지, 나야.”

루이센은 의문을 꾹 눌러 삼켰다.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해 좋은 기회를 놓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게다가
어쩐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

잠시 후, 루이센은 땅속의 노파를 담은 수레에 올라타 성 아랫마을로 향했다. 그 옆에 칼튼이 말을 타고


따라왔다.

루이센은 광장에서 내려와 땅속의 노파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에 받아 가며 땅속의 노파를
삶아 으깨 그 자리에서 스프를 만들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제는 하다 하다 돼지 먹이를 먹으라는 거냐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격양되며 위험해졌는데 여기서 칼튼은 아주 톡톡하게 제 몫을 해 줬다.

칼튼은 루이센의 곁에 선 채로, 팔짱을 끼고 군중을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 아무도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무기를 따로 뽑지 않아도 철갑옷을 입은 것 같은 단단한 몸과 커다란 팔뚝은 위협적이었다. 더구나 성정이
잔악무도하기로 유명하기까지 하니, 성난 황소도 고개를 숙일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덕분에 루이센은 안심하며 땅속의 노파를 구워 먹었다. 고생하던 추억이 가득한 땅속의 노파는 언제 먹어도
맛있었다.

루이센이 직접 나서서 설명하고, 근거를 대고, 증명하려는 듯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땅속의 노파를 먹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도 더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 루이센은 기세를 몰아 앞으로 사람들 앞에서 땅속의
노파로 만든 음식만 먹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루이센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성에서는 순차적으로 물자를 실은 수레가 출발했다.

자원도 인력도 모든 게 부족한 상황에서 급하게 시행된 배급이었다. 아주 느리게 진행되지만 루이센이 계속
광장에 머무르며 마을 사람들을 달래고 독려한 덕분에, 사람들은 참을성 있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배급이 시행된 지 삼 일 차.

루이센은 아침이 되자 어김없이 일어나 마을로 향했다. 마을의 광장에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이 벌써 모여 있었다.
아무리 성 아랫마을이 공작성과 가까워도 살면서 영주를 코앞에서 볼 일이 없다 보니, 루이센이 매 끼니를
광장에서 먹는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구경 나온 것이다. 관중은 많을수록 좋기에 루이센은 쏟아지는 시선을
태연히 받아 냈다.

마을 광장에는 루이센의 전용으로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일종의 무대인 셈이었다. 루이센이 테이블에 앉아
잠시 기다리니 하인이 구운 땅속의 노파를 가지고 왔다.

루이센은 포크와 나이프로, 능숙하게 땅속의 노파의 두꺼운 껍질을 벗겨 내고 속살을 잘라 먹었다.

“오오, 진짜 먹네?”

“그런다니까! 삼 일 내내 드시는데 멀쩡하셔. 우리도 먹어도 되지 않을까? 저쪽 공터에 널려 있던데.”

루이센이 먹는 모습을 보며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군중들 속에서 마을 청년 하나가 홀린 듯이 앞으로 나섰다.

“저기 영주님, 저도 먹어 봐도 될까요……?”

루이센은 이 청년이 몹시 굶주려 있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건장한 팔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고 그의 시선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땅속의 노파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이지.”

루이센은 포크에 껍질을 깐 땅속의 노파 하나를 푹 찍어 청년에게 내밀었다. 청년은 망설였다. 땅속의 노파 같은
걸 먹기엔 꺼림칙하다. 하지만 거절하기엔 너무 배가 고팠다. 밀가루를 배급받긴 했지만 어린 동생들을 먹이고
다른 생필품으로 바꾸니 덩치 큰 그의 배를 채우긴 모자랐다.

“껍질을 까 놓으니 보기에 그렇게 나쁘지도 않지?”

“그건 그렇지만…….”

땅속의 노파에서는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이런 냄새라면 돌덩이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청년은 눈을 딱 감고 땅속의 노파를 먹었다. 상상 이상으로 부드러운 단맛이 혀를 사로잡았다. 흉측한 겉모습과는
달리 포실포실한 식감에 마음의 장벽이 한층 더 낮아졌다. 청년은 순식간에 루이센이 준 것을 다 먹어 치우고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여기 앉아서 먹고 가게. 충분히 있으니까 배불리 먹고 집에 갈 때 챙겨 가고.”

“감사합니다, 영주님.”

청년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청년에게 자극을 받아 두어 사람이 더 땅속의 노파에 관심을 보였다.
루이센은 기꺼이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허락했다.

병사로 차출되었다가 발이 묶인 농부의 아들, 포목점 사장의 딸, 얼떨결에 성에 갇힌 노인, 그리고 아니에스
공작.

이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렇기에 더욱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칼튼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하였다. 한밤중에 땅속의 노파를 캐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솔직히 미친
건가 했는데, 사람들의 편견을 극복하고 땅속의 노파 따위를 자발적으로 먹게 만들다니.

‘그렇게 힘들게 자랐으면 식탐이 생길 만도 한데…….’

루이센은 현란한 포크와 나이프 솜씨로 땅속의 노파 껍질을 벗겨 다른 사람들의 접시에 나누어 주었다. 루이센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퍼져 있었다.

이는 칼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재수 없는 귀족이라는 편견을 거둬 내자, 루이센의 다양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무심한 표정도 잘 보면 아무 생각 없을 때와 골똘히 생각할 때가 달랐다. 배가 고프면 사나워졌고, 반대로 배가
부르면 나른한 고양이처럼 안색이 환해지며 행동이 느려졌다. 음식을 먹는 걸 가장 좋아하지만,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그만큼 좋아했다.

‘공작은 가신들의 농간만 아니었으면 좋은 영주가 되었을 거야.’

어딜 가나 권력 다툼이라는 게 문제였다. 칼튼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식사에 열중하는 루이센과 그런 루이센을 지켜보는 칼튼.

두 사람을 바라보는 하인들의 시선은 자못 의미심장했다. 하인은 땅속의 노파를 뒤집고 있는 하녀에게 속닥거렸다.

“봐 봐, 칼튼 경이 우리 영주님한테서 눈을 못 떼는 거.”

하녀도 힐끔 칼튼과 루이센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저 눈빛 좀 봐. 예사롭지가 않아.”

“거봐. 그 소문이 사실이라니까? 내 말이 맞지?”

성 아랫마을에 닥친 위기가 조금씩 해결될 기미가 보이면서, 공작성의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르던 철부지 망나니가
누구보다 훌륭하게 영주 노릇을 해내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칼튼으로부터 약탈을 막고 영지민을 보호한 것, 메뚜기 떼를 예언하고 잘 대비한 것, 그로 인해 남부에 공작가의


위상을 세운 것 등.

지금까지 평가절하되었던 루이센의 업적들도 재평가되기 시작하면서, 루이센의 인기가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다만, 밝은 빛이 비치면 어두운 그림자도 생기는 법.

루이센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을 받으면서, 동시에 수상쩍은 소문이 공작성의 하인들 중심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시작은 칼튼의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과연 칼튼과 루이센이 짧지만 진한 어른들의 시간을 보냈는지 궁금해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 있던 공작성의 하인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말았고 그 대화를 자신의 친구에게, 친구는 또 그
친구에게 전하며 소문이 퍼져 나갔다. 물론 처음에는 다들 반신반의했으나, 칼튼이 루이센을 감시한다며
쫓아다니기 시작하자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칼튼이 루이센에게 배급을 빌미로 몸을 요구했다!

칼튼이 루이센에게 반해 쫓아다니는 중이다!


이 두 가지가 떠도는 소문의 주요 골자였다. 소문의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쉬쉬하며 조심했지만 언제까지고
비밀일 수는 없었다. 하인들 사이에 쫙 퍼진 소문은 결국 집사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집사는 이 문제를
총관에게 알렸다.

34 화

4 장. 커다란 오해와 작은 진심

처음에 집사의 말을 들은 총관은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십니까? 몸을 요구하다니. 칼튼 경이 무슨 동네 건달도 아니고.”

“경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용병이니 어차피 그 비슷한 거 아닙니까?”

집사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 총관도 서서히 웃음을 잃고 물었다.

“근거 있습니까?”

“칼튼의 부하들이 쑥덕거리는 이야기를 들은 하인이 있습니다. 그 애의 말로는……. 배급 건으로……. 하, 이거


남사스러워서…….”

집사는 입가를 매만지고 입을 달싹이다 간신히 말을 이었다.

“칼튼의 부하들 앞에서 몸을 요구하고 영주님을 무릎 꿇렸답니다. 그리고 부하들을 전부 방에서 쫓아냈고요.
처음에는 배급에 반대하던 양반이, 그런 다음에 완전히 마음을 바꿔서 뭐든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허! 그럼 우리 영주님 따라다니는 게…….”

“다 더러운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감시라고…….”

“다 핑계지. 자기 부하들 시켜도 되는 거잖습니까. 지금까지도 그랬고. 이제 와서 감시는 무슨. 그 핑계로 붙어


다니면서 수작 부리는 걸 게 뻔하더랍니다.”

총관은 일순 강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벽을 짚었다.

짧은 발음으로 쳥간, 하고 자기를 부르며 따라오던 루이센, 맨날 넘어져서 안고 다니는 버릇을 했더니 자신만
보면 두 팔을 벌리던 루이센.

귀하디귀하게 키웠다. 친자식이 있어도 이보다 사랑할 수 없었을 거다. 너무도 작고 어린 주군이라 아까워서 매질
한 번 못 해 보고 그렇게 오냐오냐 길렀다.

한때는 망나니가 되어 버려 절망도 했지만 어느새 이렇게 어엿하게 자라 현명한 영주님이 되어 위기 속의 공작가를
이끌게 되었다. 그 늠름한 모습에 이 늙은이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총관은 갑자기 분노에 차올랐다.

“이 개자식이! 우리 영주님께 어찌 그런 개수작질을!”

총관은 벽에 걸린 칼을 뽑았다.

집사가 화들짝 놀라 온몸으로 총관을 막았다.

아니, 평생 책상물림만 하던 사람이 누구한테 칼을 들이대려고.

“아아, 총관님. 진정하시고…….”

“지금 어떻게 진정을 합니까? 집사는 이딴 소문이 도는데 진정이 된다고요!?”

“아니, 나도 화가 나죠. 나는데……. 일단은 소문 아닙니까.”

“…….”

“일 크게 만들어서 좋을 거 없습니다. 이런 소문이 도는 걸 알면 영주님이 수치스러워하실 수도 있고…….”

집사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일을 크게 만들었다가 루이센의 명예에 금이 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영주님의


완전무결한 인생에 칼튼 따위의 오점을 남겨서는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총관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칼을 내렸다. 자신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칼튼의 마수에서 루이센을 지킬 수
있으리라.

“……영주님은 아무것도 모르십니까?”

“네. 모르시는 거 같습니다. 일단 하인들 입단속을 철저히 시켜 놨습니다.”

“예, 잘하셨습니다. 절대 이 이상 그 소문이 퍼져서는 안 됩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칼튼 놈인데…… 영주님과 절대 단둘이 둬서는 안 됩니다. 집사와 내가 항상 영주님 옆을


지킵시다.”

“예. 수석 시종인 루거에게도 영주님 곁을 비우지 말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자주 자리를 비워서 못 미더운
자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영주님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니까요.”

“예.”

총관과 집사는 결연하게 눈을 마주쳤다.


그 후, 총관은 루이센이 성으로 돌아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마을로 뛰어나가 칼튼을
쫓아내고 루이센을 안전히 성으로 모셔오고 싶었지만, 자신이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이윽고 해가 지고, 루이센이 돌아올 때가 되었다.

“영주님이 내성의 성문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래. 영주님을 마중 나가야겠다.”

기사의 말에 총관은 냅다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저 멀리서 루이센이 말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석양을 등지자
루이센의 머리칼이 주황빛으로 반짝였다. 흰 말에 올라탄 루이센의 모습은 음유시인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고귀한
귀족 같았다. 우아하고 아름다워 절로 감탄이 나왔다.

총관의 마음에 뿌듯함이 가득 차려는 순간, 그는 루이센의 옆에 바짝 붙어 오는 칼튼을 발견했다. 그런데 칼튼도,
루이센에게서 눈을 못 떼고 있는 게 아닌가. 그의 온 신경이 루이센을 향해 있다는 게 총관에게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허. 꼴에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이게 다 우리 영주님이 잘난 탓이다. 총관은 탄식했다. 칼튼의 음흉한 속내도 모르고 루이센은 꼬박꼬박 칼튼의
말에 대꾸하며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어느새 총관의 앞에 루이센과 칼튼의 말이 멈추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영주님. 오늘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총관이 루이센을 배웅했다.

“저도 있습니다?”

“예.”

총관은 노골적으로 칼튼을 무시했다.

“어쩐 일로 말을 타고 오셨습니까? 가실 때는 수레를 타고 가셨던 걸로 아는데요.”

“돌아오려는데 타고 올 수레가 없더라고. 칼튼 경이 말 타는 요령을 가르쳐 준다길래 도전해 봤지.”

루이센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에서 낙오한 일로 루이센도 느끼는 바가 있었다.

‘내 승마 실력, 이대로는 안 되겠다!’

그래서 말을 잘 타는 칼튼에게 이참에 배워 보자고 호기롭게 도전했다.

‘내가 미쳤지. 이 인간에게 뭘 배우겠다고.’

칼튼은 그리 좋은 선생이 아니었다. 그는 몸을 쓰는 데 타고난 사람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칼튼은 잔소리를


했지만 루이센은 단 하나도 알아먹지 못했다. 칼튼은 짜증을 냈고 루이센은 그 짜증을 받아 내느라 죽을 맛이었다.
“노력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총관은 그렇게 말하며 칼튼과 루이센 사이를 가로막았다.

“마침 저희가 영지 일에 대해 영주님께 의논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함께 가시죠.”

자연스럽게 넘어가려는 척을 했지만, 칼튼은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을 알아차리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총관과 집사가 능숙하게 숨긴 적의를 놓치지 않았다.

‘이것들 봐라?’

자신과 루이센을 떨어뜨려 놓으려는 것이 뻔히 보였다. 영지 일을 언제부터 루이센과 의논했다고?

루이센의 인기가 치솟으니까 위기감을 느낀 것이겠지. 루이센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칼튼이 함께하는
덕분이니, 일단 칼튼과 루이센을 떨어뜨려야겠다는 속셈인 게 뻔히 보였다. 루이센을 데려가서 칼튼과 이간질을
하든, 루이센에게 얌전히 지내라고 구슬리든가 하겠지.

맹세컨대 칼튼은 공작성 내부의 알력다툼에 낄 마음이 없었다. 루이센의 사연이 안타깝지만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형편에 누가 누구를 돕겠나. 하지만 루이센이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꼴이 신경이 쓰여서 루이센을
따라다닌 것뿐이었다.

그런데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날을 세우고 자신을 경계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몹시 불쾌해서 심술이 났다. 누가
날 싫어하면 그럴 이유를 만들어 주고 싶은 법이잖아?

칼튼은 웃으며 루이센의 말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말과 함께 루이센도 덩달아 따라왔다.

“일단 말에서 내리셔야죠. 혼자 내리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아니. 못 해.”

루이센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말 등은 인간적으로 너무 높았다. 게다가 말은 아까부터 루이센이 마음에
안 들어서 흥흥대고 있었다.

“내리시는 동안 잡아 드리겠습니다.”

칼튼은 손을 내밀었다. 이에 총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제 손을 잡으시지요, 영주님.”

총관도 루이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말 등에 바짝 붙은 루이센에게 두 개의 손이 등장한 상황. 칼튼과 총관,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튈 듯 살벌한 시선이 오갔다.

그 사이에서 루이센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총관은 허리도 안 좋은데 무리하지 말게. 칼튼 경이 있는걸.”

루이센은 칼튼의 손을 잡았다.

“읏, 차.”

루이센은 칼튼의 손을 잡고 간신히 말에서 내렸다. 땅에 착지하며 비틀거리는 루이센의 몸을 칼튼이 잡아 주었다.
꽤 무게를 실었음에도 칼튼의 손은 흔들림이 없었다.

칼튼은 루이센의 몸을 안듯이 잡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총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비열한…….”

“총관. 괜찮나? 얼굴이 너무 빨개. 어디 아픈가?”

“석양 탓이 아닐까요?”

“아, 그런가?”

루이센은 태평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두고 무언의 싸움이 벌어지는 데도 눈치 하나 못 채고 속 편한


루이센을 보며, 집사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무리 놀랍도록 변했다지만 자신의 주변에 무관심한 천성은 변하지
않았다.

총관은 칼튼과 루이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며 두 사람을 갈라놨다. 자연스럽게 손을 놓치게 되면서 칼튼이
인상을 썼다.

“사안이 급한 영지의 일이 있습니다. 영주님, 얼른 가시죠.”

“어? 그래? 그럼 가야지.”

칼튼이 루이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급한 일이라. 그거 저도 궁금한데요.”

“공작가 내부의 일입니다. 칼튼 경이야말로 쉬시죠. 영주님 쫓아다니느라 피곤하실 텐데. 밤에 영주님이랑
볼일도 없을 거고요.”

“왜 볼일이 없습니까. 만들기 나름이지. 제가 공작님이랑 얼마나 친해졌는데. 제가 북부에서 가지고 온 비장의
술이 있습니다. 오늘 말 타느라 고생하셨으니 상으로 나눠 드리죠.”

“오, 북부의 술이라! 그럼 총관과 이야기를 나눈 다음 칼튼 경과 술을 마시면 되겠지? 내가 자네 방으로


찾아가겠네.”

“안 됩니다!”

“좋죠.”

칼튼은 보란 듯이 환하게 웃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남을 이겨 먹는 일은 실로 기쁜 일이었다. 그는 승리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35 화
기묘한 대치 상황을 정리한 건 칼튼의 부하였다.

“대장! 대장님!”

칼튼의 부하는 칼튼을 오매불망 기다렸다는 듯이 다급히 달려왔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던 타이밍에 방해꾼이
나타나자 칼튼은 짜증을 냈다.

“뭐야?”

칼튼의 부하는 그런 태도에 익숙해, 겁먹지 않고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의 한마디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충분했다.

“비너드가에서 항복 사절이 왔습니다.”

총관과 집사, 루이센까지 칼튼의 부하를 주목했다.

비너드가라면 2 왕자를 지지하던 남부의 영주들 중, 유일하게 칼튼에게 항복을 하지 않은 가문이었다. 칼튼은
그들을 벌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루이센의 낙오와 이어진 배급으로 일정을 미루고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칼튼은 비너드가의 성문을 박살 내고 영주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을 것이었다.

“이제 와서 항복 사절이 왔다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칼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늦어도 심각하게 늦은 감이 있었다. 메뚜기가 공작령을 지나간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철저한 대비 덕분에
메뚜기와의 전쟁은 인간의 승리였다. 거대한 메뚜기 떼는 여러 무리로 갈라져서, 이제 그렇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라고 들었다.

“항복을 할 거면 진작에 하지, 왜 이제 와서 사절을 보낸 거지?”

루이센은 총관을 바라보았으나, 총관도 상황을 모르는 눈치였다. 칼튼의 부하는 계속 말을 했다.

“그런데 비너드가의 사절이란 사람들, 상태가 이상합니다.”

“어떻게 이상한데?”

“저희들이 자기들을 속이고 있답니다. 막 횡설수설을 하면서 난동을 피우고요. 막 우리는 못 믿겠다고 아니에스
공작님 모셔 오라고 난리입니다.”

“나?”

루이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공작님이요. 공작님이 오실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할 거라면서요.”

그 옆에서 칼튼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자기들이 지금 강짜 놓을 때야? 못 믿겠다면 못 믿으라고 해. 알 게 뭐야. 언제는 우리가 말로 해결했어?”


“하핫, 맞는 말씀입니다, 대장.”

칼튼의 막돼먹은 발언에 부하는 좋다고 낄낄댔다. 언제 봐도 칼튼과 그의 부하들은 죽이 잘 맞았다.

이럴 땐 말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쩔 수 없이 루이센이 끼어들었다.

“칼튼 경은 좀 진정하고. 나도 무슨 상황인지 궁금한데 같이 가는 게 어떤가?”

“글쎄요.”

칼튼은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강하게 반대도 안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완강한 반대가 튀어나왔다.

“안 됩니다.”

총관이었다.

“같은 영주라고는 하나 비너드는 자작가. 자작 본인이 와서 영주님을 만나 뵙게 해 달라고 청해도 만나 줄까


말까인데, 사절 주제에 공작님을 오라 가라 하다니요.”

“상황이 상황이지 않나. 비너드가의 사절들이 왜 그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칼튼의 목적은 남부 영주들을 1 왕자의 이름 아래 복속시키는 것.

이번 비너드가의 항복이 확실해지면, 그 임무가 끝났으니 더 남부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칼튼이 떠난다는 것은
공작성이 자유를 되찾는다는 의미였다. 공작가의 가신들과 루이센을 얽매고 있는 족쇄가 사라지고 모든 권한이
루이센에게 돌아오게 될 터였다.

아니에스 공작가의 모든 이들이 숨죽이며 간절히 기다려 오던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비너드가의 항복 사절은
루이센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안전이라면 걱정할 거 없어. 여기 칼튼 경이 같이 가는걸.”

“그것도 문제입니다.”

“만약 정말 항복 사절이 공작성으로 오는 사이에 위험에 빠졌던 거라면,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지 않나.”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총관은 루이센의 설득에 조금씩 마음이 약해졌다.

“흠.”

칼튼도 루이센을 비너드가의 사절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총관이 반대하며
자신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자 청개구리 심보가 튀어나왔다.

“좋습니다. 같이 가시죠.”
“정말?”

“예, 대신 사고 안 치고 제 옆에 딱 붙어 있겠다고 약속하셔야 합니다.”

“내가 어린 애인가?”

“얌전히 성에 계실래요?”

“아니. 사고 안 치겠네. 약속하지.”

루이센의 빠른 태세전환에 칼튼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달라졌단 말이지.’

전처럼 웃으면서 친절한 척은 안 하는데 날카로움이 줄어들고 비꼬지도 않게 됐다. 좀 착해진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루이센도 요 며칠 사이 칼튼이 좀 덜 무서웠다. 왜 갑자기 태세전환을 하는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루이센은 좋게 생각했다.

‘하긴 내가 봐도 요즘 나, 좀 잘하고 있단 말이지.’

칼튼도 그래서 좀 부드러워진 게 아닐까! 하하!

“그럼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총관이 끼어들었다. 그는 루이센과 칼튼을 단둘이 두지 않겠다는 의지에 불탔으나, 정작 루이센이 협조해 주질
않았다.

“총관은 성을 지키고 있어 줘야지. 총관이 영주 대리인데 둘 다 성을 비우면 안 되지 않나.”

“맞습니다. 두 분이나 갈 필요는 없죠.”

칼튼은 냉큼 맞장구를 쳤다. 그 꼴에 총관의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그럼 적어도 시종을 대동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루거를 불러오죠.”

총관은 루거를 불러오겠다며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기 무섭게 루이센은 칼튼에게 돌아섰다.

“됐으니까 빨리 출발하지.”

“시종을 데려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루거 그 자식, 또 어디서 농땡이 피우겠지. 걜 기다리다간 날 새네.”

“그러시면 뭐.”

칼튼은 루이센을 자신의 말에 태웠다. 루이센을 따로 말에 태웠다가는 그거야말로 날밤을 새울 일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총관이 봤다면 기절할 일이었지만 칼튼과 루이센은 총관이 돌아오기 전에 훌쩍 자리를 떠났다.

***
성문을 향해 쭉 뻗은 가도를 따라, 우수한 군마는 두 사람을 태우고도 빠르게 달렸다. 너무 높고 빨라 루이센이
정신 줄을 살짝 놓을 때쯤 성문에 도착했다. 굳게 닫힌 성문은 다가오는 이가 칼튼이라는 게 확인되자 쉽게
열렸다.

성문 바로 바깥에 임시로 지은 천막이 있었다. 이전에도 항복 사절들이 찾아왔을 때 이 천막에서 일을 다


처리했다. 칼튼의 부하들이 천막 주변에 서 있다가 칼튼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칼튼의 품 안에 루이센이
안기다시피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공작님도 함께 오셨군요.”

칼튼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양손으로 루이센을 안아 말에서 내리는 걸 도왔다. 루이센이 혼자
말에서 못 내리는 건 알고 있었고, 괜히 시간 끌기 싫어서 도와준 것뿐이지만 그걸 본 부하들은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상황이야?

“사절은?”

“……천막, 천막이요. 안으로 들어가시죠.”

칼튼의 부하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루이센과 칼튼을 천막 안으로 안내했다. 천막 안에는 다섯 명의 남자가 있었다.
그중 넷은 갑옷을 입고 있었고, 하나만 부드러운 천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사람이 항복 협정을 진행하러 온
사절의 책임자라는 걸 바로 알아보았다.

“그쪽이 사절의 책임자입니까?”

칼튼이 물었다. 그러자 책임자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앉아 있다 보니 칼튼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데도, 어떻게 된 건지 칼튼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루이센은 딱 감이 왔다. 저 자식,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귀족 놈이구나.

“네가 칼튼이냐. 나는 볼튼. 비너드 자작가의 장자이자 후계자이지. 이 사절의 책임자다. 천출이라더니 귀족을
향한 예의도 모르나?”

아니나 다를까, 볼튼은 귀족이었다. 그는 칼튼을 보고도 기죽지 않고 한껏 거들먹거렸다. 자기가 귀족이라는 데
심취해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칼튼이 화나서 한 걸음 걸어 나갔다. 그제야 볼튼이 움찔했다.

“조, 좋아. 하긴 뭐 보고 배운 게 있겠어. 내 자비를 베푸마. 대신 네가 한번 말해 봐라. 네 부하들이 내게


헛소리를 하던데.”

볼튼은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입을 나불댔다.

‘으아아.’

루이센은 칼튼의 팔을 붙잡았다. 칼튼이 볼튼을 죽여 버릴 거 같았다.

“괜찮아요. 안 죽입니다.”
“죽이지만 않을 거잖아. 항복 사절을 때리면 자네 악명만 높아진다네. 항복 협상이 틀어질 수도 있고.”

루이센이 간절히 매달리자 칼튼의 표정이 아주 약간이지만 부드러워졌다. 볼튼은 그제야 루이센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어, 어어! 고, 공작님 아니십니까!”

볼튼은 벌떡 일어서서 겸손한 태도로 루이센에게 인사를 했다. 그의 머리가 무릎에 닿을 것처럼 깊이 숙여졌다.

“세상에. 공작님 안녕하셨습니까. 저 볼튼 비너드입니다. 작년에 신년파티에서 인사를 드린 적이 있지요.”

“그랬던가?”

“그때 오 분 넘게 말씀도 나누었습니다만……. 그나저나 저희를 위해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이 볼튼, 공작님의


자비로움에 절로 고개가 무거워지고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볼튼은 감동해 눈물을 훔치는 척하며 루이센에게 굽신댔다. 조금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은 태세


전환에 칼튼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루이센도 오랜만에 이런 노골적인 아부를 받으려니 어색했다.

‘말하는 거 보면 멀쩡해 보이는데.’

겉보기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먼 길을 달려왔으니 의복이 흙먼지로 더러워졌고 얼굴에 피로감이 남아 있긴


했으나 크게 고생을 한 거 같진 않았다. 이만하면 비교적 평탄한 여행길을 지나온 것 같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말해 보게. 나를 보겠다고 난동을 피웠다고?”

“난동이라니요, 아닙니다. 어떻게 감히 그러겠습니까. 다만, 저희가 너무나 억울하고 기가 막혀 언성이


높아지긴 했습니다.”

“뭐가 그렇게 억울한가?”

루이센이 묻자 볼튼은 노기에 가득 차 칼튼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차마 루이센의 앞에서 화를 낼 수 없기에 꾹


억누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36 화

“왜 얼마 전에 공작성에서 공문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메뚜기가 온다고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작은 영지라, 온


힘을 다해 메뚜기 떼와 싸우기도 벅차지요. 전쟁을 같이 할 여력이 안 됩니다.”

“그렇지.”
“그래서 영주께서 항복을 위해 아들인 저를 보냈습니다. 저희는 꾀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공작성으로 왔지요.
저희 영지에서 공작성까지 쉴 새 없이 달리면 삼 일이면 도착합니다.”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칼튼에게 듣기로도 그 정도 걸린다고 했다.

“공작성에서 공문이 나간 지 삼 일 뒤 우리가 출발해 삼 일을 걸려 이곳에 왔습니다.”

“응?”

루이센도 이상함을 눈치챘다. 공작성에서 공문이 나간 지 육 일이 지나도 한참이 지났다.

“그런데 여기 와 보니, 저들이 하는 말이 공문이 나간 지 한참 지났고 메뚜기떼는 지나간 지 오래라는 거


아닙니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육 일밖에 안 지났단 말입니다! 저희가 기가 막히고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나로서는 자네의 말이 더 이해가 안 되는데.”

“예?”

“육 일이라니. 공문이 나간 건 그보다 훨씬 전이야. 자네들 말고 다른 영주들의 항복 사절은 다 다녀갔고,


메뚜기떼도 거의 다 지나갔어.”

“그, 그럴 리가요! 저희는 쉴 새 없이 왔단 말입니다. 오는 길에 안개가 짙게 낀 곳이 있어 거기서 좀 속도가


늦어지긴 했어도……. 쉬지 않고 왔는데요. 그렇지?”

볼튼이 자신의 일행에게 동의를 구했다. 볼튼의 일행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쉴 새 없이 이동했습니다. 정확히 세 번의 밤을 지냈습니다!”

비너드가의 사절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소리쳤다.

“어떻게 생각하나?”

루이센은 칼튼에게 의견을 구했다. 칼튼은 피식, 비웃었다.

“남들이 항복할 때는 고집부리며 버티다가, 막상 전쟁이 코앞으로 닥치니 허겁지겁 항복 사절을 보낸 거 아닙니까.
이제 와서 항복하기 쪽팔리니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어낸 거고요.”

“우리 비너드 자작가는 유서 깊은 남부의 명가! 그런 비열한 수를 쓰지 않는다! 정말입니다. 정말 저희는 공문이
내리고 육 일이 지났단 말입니다.”

“글쎄, 아니라니까. 열흘이 넘게 지났어.”

루이센은 볼튼을 잘 살폈다. 눈동자가 멀쩡한 걸로 봐서는 뭘 잘못 먹은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볼튼은


혼란스러워하다가 루이센을 의심했다.

“공작님, 혹시 저놈들에게 불미스러운 방법으로 강요를 받으신 거라면…….”

루이센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존심도 없는 것처럼 아부를 하다가 자신이 불리하면 바로 돌변하는 것이 참
귀족다웠다.
“내가? 이 아니에스 공작이 협박을 받고 거짓말을 한다는 건가?”

루이센이 싸늘하게 말하자 볼튼은 금세 꼬리를 말았다.

“……아, 아니요……. 공작님의 진심을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어찌 감히. 그저 너무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공작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대체 저희의 시간은 어떻게 된 거란 말입니까…….”

볼튼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칼튼의 부하들이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루이센까지 같은


소리를 하니 혼란이 극에 달했다.

볼튼과 그 일행이 대화를 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루이센은 천막을 나왔다.

“저 말이 사실일까?”

“거짓말이죠. 비너드가의 후계자께서는 연기가 수준급이시군요.”

칼튼은 볼튼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센은 조금 달랐다.

“기왕 거짓말을 할 거면 좀 더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지 않겠나? 강도를 만나 붙잡혀 있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것도 그렇긴 합니다만. 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까.”

“음, 정말 사악한 요정에게 홀리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마법사라든가?”

“마법사가 한 짓이라면 흔적이 남았을 겁니다. 마법에 홀린 것치고는 지나치게 멀쩡하더군요.”

“그런가…….”

비너드가의 사절들 이야기는 믿기에는 허무맹랑하지만 무시하기에는 찜찜했다. 공작령 안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이만 성으로 돌아가시죠.”

“협상은?”

“이대로는 협상을 진행할 수 없으니, 내일 다시 이야기해 봐야겠습니다.”

“저 사람들 괜찮으려나?”

“하루 정도 내버려 두면 정신을 차리겠죠.”

칼튼은 부하들에게 짧게 지시를 내리고, 루이센을 말에 태웠다. 말을 타는 루이센도 태우는 칼튼도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칼튼과 루이센이 같은 말을 타고 떠나고, 칼튼의 부하들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작성 하인들이 수군거리던 소문이 사실인가 봐.”

공작성의 하인들이 ‘칼튼이 루이센을 짝사랑하고 있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칼튼의 부하들도 들었다. 그들은
문제의 그 소문이 자신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설마 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 자기 말을 끔찍이 아끼는 칼튼이라, 그들의 의심은 거의 확신으로 변해 갔다.


***

자신들을 두고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모르는 두 사람은 느긋하게 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칼튼은 천천히 말을
몰았고 루이센은 여유가 생겨 주변을 돌아보았다.

넓은 길에 칼튼과 루이센만 남아 있었다. 깊은 밤이라 사방이 조용했다. 말을 따라 몸이 흔들릴 때마다, 칼튼의


몸이 루이센의 등에 닿았다. 그럴 때면 그의 체온과 함께 쿵, 쿵 하고 그의 심장박동이 전해졌다.

이 밤에 칼튼과 단둘이 말을 타고 마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났다. 인생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다더니, 검은 기사에게 쫓기고 있다는 망상 속에 보낸 세월이 어느새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비너드가와 항복 협상이 끝나면, 자네의 임무도 끝이 나는 거지?”

루이센이 물었다.

“예. 비너드가가 마지막이니까요.”

“그럼 더 여기에 머물 이유가 없겠군. 수도로 돌아갈 거지?”

“……돌아가야죠.”

칼튼은 수도로 돌아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도 어쩐지 그 말을 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공작님은 어쩌실 겁니까?”

“나? 나야 여기 있어야지. 밀린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동안 내팽개쳤던 영주 노릇을 좀 해 볼 생각이야.”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이번이 가신들을 밀어내고 공작님이 주도권을 되찾을 좋은 기회더군요.”

“가신들을 밀어낼 것까지야…….”

“이런 건 할 때 확실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

루이센은 어딘가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호전적이고 극단적인 게 칼튼다운 대답이라고 납득하고 넘어갔다.

‘칼튼이 떠난 다음이라…….’

회귀 전, 칼튼의 등장은 루이센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다.

그리고 한 번의 죽음 후, 전쟁의 한복판으로 회귀해, 칼튼에게 항복을 하면서 첫 시작을 열었다. 그래서인지
칼튼이 떠난다는 사실이 한 무대가 끝나고 막이 내리는 것처럼 다가왔다.

캄캄한 어둠 위로 부쩍 차가워진 바람이 스쳤다. 그 바람이 가슴에 들어찬 것처럼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비너드가의 사절들이 겪은 일이 마음에 걸려. 한 며칠 주변을 면밀하게 살피고 철저히 준비해서
떠나게.”
루이센은 사뭇 진지하게 조언했다.

칼튼은 가만히 루이센의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공작령을 떠나면, 그를 말에 태울 일도 없겠지. 그러자
무심코 말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혀를 거쳐 튀어 나갔다.

“……그럼 다시 못 만납니까?”

무슨 말이 이래. 아쉬운 사람 같잖아. 심지어 루이센의 조언과 전혀 맥락이 맞지 않는 질문이었다.

칼튼은 그답지 않게 중언부언 말을 덧붙였다.

“공작님은 한동안 수도로 올 생각이 없으신 거 같아서요. 제가 남부로 올 일은 또 없을 거 같으니…….”

“글쎄. 왕자의 대관식을 준비하는 게 대영주의 의무이니 수도에 가긴 할 거야. 그때 다시 보지 않겠나.”

“대관식이라……. 까마득하군요.”

왕자의 곁을 오래 떠나서인가, 아니면 이 밤이 너무 고요해서인가 대관식이 너무나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그때는 지금이랑 많은 게 다르겠죠.”

“그렇지. 왜, 막상 떠나려니 아쉽나?”

루이센이 장난을 섞어 말했다.

“아니요. 절대로요. 하루라도 빨리 수도로 돌아가고 싶은걸요. 벌써부터 발이 들썩거립니다.”

칼튼도 장단에 맞추듯 과장해 받아쳤다. 그러나 말만큼 마음이 들뜨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안중에 없었다. 왜
이러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루이센이 웃을 때, 그 들썩임이 그대로 자신의 몸으로
전해지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

루이센은 성으로 돌아와 총관에게 칼튼과 자신이 비너드가의 사절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나 총관도
다른 가신들도 사절들에게 벌어진 일의 원인을 쉽게 짐작하지 못했다. 그들이 알기로 공작성 주변에는 위험할 게
없었다.

다음 날도 루이센은 성 아랫마을의 광장으로 향했다.

“영주님, 늘 똑같은 거 드시려면 지겹지 않으십니까?”

“늘 맛있다네.”

“전부터 생각했지만 참 맛있게 드시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칼튼이 없어서인지 영지민들은 좀 더 편안하게 루이센에게 다가오고 말을 걸었다. 기사 두 명이 루이센의


양옆을 지키고 있었지만 칼튼에 비하면 존재감이 약했다.
칼튼은 비너드가의 사절과 항복 협상을 마무리해야 하기에 루이센을 따라오지 않았다. 칼튼이 없는 티가 확실히
났다. 그래도 다행히 여론이 루이센에게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위험한 일은 없었다.

“제가 땅속의 노파로 빵을 구워 봤는데 꽤 괜찮은 거 같아서 영주님도 맛보시라고 가지고 와 봤어요.”

땅속의 노파로 만든 빵이 또 별미인 건 어떻게 알고!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빵을 만들다니. 땅속의 노파가
영지민들에게 받아들여진 것 같아 기뻤다.

37 화

마을 사람 하나가 한 소쿠리 가득 빵을 가지고 와서 광장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줬다. 루이센은 광장에서 마을


사람들과 둘러앉아 빵을 먹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땅속의 노파로 만든 빵은 폭신하진 않지만 찰기가 있고 씹으면
단맛이 배어 나왔다.

“어떤가요, 영주님?”

“맛있어. 땅속의 노파가 가진 단맛이 아주 잘 살았어.”

“전 버터 맛이 살짝 아쉬운 거 같아요.”

“버터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마을 사람들은 루이센을 앞에 두고도 자기들끼리 편하게 대화했다. 그만큼 자신이 이들에게 익숙해진 것 같아
루이센은 뿌듯했다.

루이센은 빵을 먹다가 영지민들에게 물었다.

“영지에 뭐 이상한 일 없나?”

“이상한 거요?”

“안개가 끼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사라진다거나 날짜를 혼동하고 혼란스러워한다거나 그런 거. 공작성으로 오는


길에 이상한 일을 겪은 사람이라든가?”

“글쎄요.”

“음, 실종 사건이야 종종 일어나지만…….”

“마법사나 사악한 요정 같은 건?”

“숲에 마물이 살기야 하지만 요정은 모르겠네요.”


영지민들은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아, 안개는 좀 끼는 편이에요. 올봄에 저수지를 새로 만들면서 그쪽에서 그렇게 안개가 끼더라고요.”

“저수지 때문이야? 다른 이유는 아니고?”

“그렇죠. 저수지 생기고 유난히 심해졌으니까.”

“그렇구나.”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비너드가의 사람들이 지났다는 안개는 저수지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안개였던 건가?’

마법이나 요정을 의심하고 있던 루이센은 김이 빠졌다.

‘그럼 거짓말인가? 뭐 그런 빤히 들통날 거짓말을 해?’

지난밤 총관은 비너드 자작과 그 아들을 예전부터 교류하여 알고 있었으며, 겉보기와는 다르게 공작가에
충성스러워 그런 거짓말을 할 사람들은 아니라고 말했다. 비너드가의 사절들 말을 거짓말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게 총관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루이센도 하루 종일 머리 아프게 고민하고,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녔지만 영 소득이 없었다.

‘하기야 이 사람들도 나처럼 한 달 넘게 성에 감금된 상태이니, 성 밖의 상황을 알 리가 없지.’

루이센은 빵을 크게 베어 물었다. 심란한 때에도 입맛은 팔팔하게 살아 있었다.

***

루이센이 마을을 여기저기 쏘다니는 사이, 칼튼은 항복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하룻밤 동안 내버려 뒀더니
비너드가의 사절들은 정신을 차리고 현실 파악을 했다. 그들은 협상을 빨리 마무리 짓고 영지로 돌아가길 원했고,
칼튼도 마지막이니 적당히 조건을 타협했다.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하고, 비너드가의 사절은 부리나케 공작령을 떠났다.

칼튼과 그 부하들도 일이 끝났기에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칼튼의 부하들은 벌써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드디어 여길 뜰 때가 되었네요. 밥도 맛있고 하인들 시중도 받고 좋았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제대로 싸워 볼 일이 없어서 답답하다고 난리였으면서.”

“그래도 여기 밥이 맛있긴 했습니다. 어떻게 된 게 맹물도 맛있는지.”

“그럼 우린 언제 떠납니까? 모레? 내일? 설마 오늘 떠나자고 하시진 않겠죠?”

하루라도 빨리 수도로 돌아가고 싶어 하던 칼튼이기에, 부하들은 칼튼이 당장 오늘이라도 떠나자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칼튼의 태도는 미적지근했다.

“글쎄.”

칼트는 어젯밤 루이센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한 일주일쯤 주변을 좀 살핀 다음에, 제대로 준비를 해서 출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칼튼답지 않게 확답도 아니었고, 목소리에 망설임이 깃들어 있었다.

“예? 일주일이나요?”

부하들은 놀라서 칼튼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광장을 지날 때라 칼튼은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찾느라 신경이 딴 데
가 있었다. 그는 루이센이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심하라니까 무방비하기는.’

칼튼은 루이센을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그런 칼튼을 보고 부관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요즘 부쩍 심하게 둘이 가까워진 거 같은데……. 수상한 소문도 돌고. 설마 공작님 때문에 떠나길 망설이시는
건가?’

부관은 저도 모르게 물어 버렸다.

“대장, 진짜 공작님 좋아합니까?”

“뭐?”

뭐 그런 어이가 없는 농담을 하지? 칼튼은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나 부관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했다.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진지하게 해?”

“진지하니까요. 벌써 소문이 파다하단 말입니다. 대장이 공작님에게 반해서 쫓아다닌다고요.”

“하, 소문. 너흰 내 부하란 놈들이 그 말을 믿어?”

칼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칼튼이 윽박지르자, 칼튼의 부하들이 조심스럽게 한마디씩 붙였다.

“근데 대장이 공작님께 유난히 잘해 주긴 하지 않습니까?”

“맞아요. 공작님의 사정을 다 봐주시고 손수 호위까지 서면서 따라다니셨잖습니까? 어제는 말에도 태워 주셨죠.
허우대 멀쩡한 공작님을 그렇게 유별나게 챙기시는데 말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요.”

칼튼은 기가 막혔다.

‘내가 공작을 좋아한다고?’

절대 아니었다. 칼튼의 취향은 똑똑하고 어른스러워서 자신에게 기대지 않는 사람이었다. 루이센이 제법 영리하긴
하지만 어른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물가에 내놓은 애 같았다.

루이센의 숨은 사정을 알게 되어, 미안한 마음에 조금 챙겨 줬더니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어떻게 그걸


사랑에 헬렐레하는 걸로 볼 수가 있지? 그런 한심한 작자로 보였을 걸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이 굴욕적이었다.

칼튼이 가장 사랑하는 건 승리였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들을 죄다 깔아뭉개고 당당히 높은 자리에 서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였고. 한가하게 연애놀음에 전념할 여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거기다 루이센은 귀족이었다.

‘내가 귀족에게 반했다고? 뭐 그런 끔찍하고 징그러운 소리가 다 있지?’

칼튼은 으, 하며 치를 떨었다. 물론 루이센의 생김새가 보기 드물게 예쁘고, 대영주라는 후광과 본인의 몸가짐
덕에 더 특별해 보인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모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였지 자신의 눈에 그가
예쁘고 특별해 보인다는 말은 아니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칼튼은 완강하게 부정했다.

“아니라면 다행입니다만……. 사실 지금 우리는 자기 앞가림하는 것만도 빠듯하지 않습니까.”

부관이 칼튼에게 작은 쪽지를 건넸다. 수도에서 보내온 쪽지로, 항복 협상이 진행 중일 때 도착해 부관이 대신
받아 맡아 두고 있었다.

“수도의 에니스에게 온 편지입니다.”

에니스라면 왕자의 하녀로 칼튼이 남부로 내려오기 전에 미리 포섭해 둔 여자였다. 그녀에게 편지가 왔다는 건
수도에서 칼튼에게 불리한 정황이 펼쳐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칼튼은 심각한 얼굴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미리 정한 암호문으로 작성되어 다른 사람은 내용을 읽을 수 없었다.
급히 휘갈긴 글씨가 어지러웠다.

편지의 내용은 짧았다. 에니스는 얼마 전, 귀족들이 왕자를 만나러 와 분쟁 지역을 화제에 올렸다는 이야기를
하며 하루빨리 왕자의 곁으로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부 출신 귀족들의 정황이 수상하니 조심하라고
덧붙여 말했다.

‘뭘 조심하라는 거지?’

아니에스 공작령은 너무도 평화로웠고, 왕국 최고 권력자가 뒤바뀌는 혼란스럽고 치열한 시기의 여파가 조금도
미치지 않은 것만 같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공작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줘야……. 아니, 아니지.’

자칫하다가는 칼튼도 거기에 휘말릴 수가 있었다. 괜히 남부 귀족들의 권력 다툼에 얽혔다간 뼈도 못 추리는 수가


있었다. 지금은 에니스의 말대로 서둘러 남부를 떠나는 게 옳았다.

내전의 여파로 현재 가장 내실이 있는 군대를 보유한 건 칼튼이었다. 만약 분쟁 지역에 파견될 만한 군대를


꼽자면 칼튼이 될 확률이 높았다.

굳이 내전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이 상황에 분쟁 지역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칼튼을 그쪽으로 보내 버리기 위해
밑밥을 까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흠을 잡아 깎아내릴 게 없으니 수도에 발을 못 붙이게 하겠다 이거겠지.
칼튼은 이를 악물었다. 귀족들의 수작질은 아주 지긋지긋했다. 맘 같아서는 죄다 목을 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하루빨리 왕자의 곁으로 돌아가야 해.’

지금 칼튼을 보호해 줄 만한 사람은 1 왕자 엘리온뿐이었다. 왕자는 칼튼에게 심리적인 빚이 있으니, 계속 그의


근처에서 알짱거려야 수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고마움도 잊어버린다. 왕자는 팔랑귀는 아니었지만 사람이라는 게 계속 비방하는
말을 들으면 그런가? 싶어지는 법이었다.

칼튼은 하루빨리 수도로 가야 했다. 공작성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남부로 내려올 때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과 초조함이 되살아났다.

‘그래. 내 앞가림을 하기도 빠듯하지.’

루이센이 가신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든 말든, 남부 귀족들의 권력 다툼에 휘말리든 말든, 칼튼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는 남을 걱정하느라 여기저기 오지랖을 부리고 다닐 때가 아니었다.

“밤낮없이 준비한다고 했을 때 출발 준비가 되기까지 얼마나 걸리지?”

“삼 일 정도입니다.”

“이틀. 이틀 안에 준비를 끝내. 발이 빠른 놈들과 느린 놈들을 나눠. 나와 너희는 쉴 새 없이 수도로 달린다.”

“부대를 나눠서 이동하실 겁니까?”

“그래.”

“남부로 내려올 때처럼 하면 되겠네요. 알겠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루이센은 여전히 맛있게 빵을 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번쩍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더니, 칼튼을
발견하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 그의 미소가 찬란하게 빛났다.

처음에는 눈도 못 마주치고 벌벌 떨었는데. 변한 루이센의 태도를 보자 칼튼은 그와 너무 가까워졌음을 깨달았다.

38 화

칼튼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루이센에게 반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떠도는 것도 그럴 만했다. 남들 눈에 유별나게 보일 정도로


루이센을 신경 쓰고 있던 거였다.
귀족을 걱정해서 떠나길 망설여?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그동안 너무 편하게 지내서 그래. 남부 특유의 느긋한 분위기에 젖어 들어 마음 또한 안일해진 거지. 전투도
하지 않았는데 재물이 굴러 들어오니까 위기감도 없고 말이야. 하지만 이제 다시 날카롭게 조일 때다.

칼튼은 경각심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루이센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리라.

칼튼은 일부러 더 단호하게 루이센을 무시하고 말을 돌렸다.

***

그날 밤, 총관이 회의실에 루이센과 가신들을 모았다. 그곳에서 루이센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칼튼이
이틀 뒤에 모든 군사를 데리고 떠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또 무슨 일이 터진 건가 조마조마하던 가신들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그들은 벌써 칼튼이 떠나 모든 고생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환호하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 루이센은 얼떨떨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루이센에게 그동안 잘해 주었다고, 고맙다고
말하니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방으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을 때까지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루거가 콧노래를 부르며
루이센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괜히 우울한 루이센은 그 노랫소리가 무척 거슬렸다.

“너는 기분 좋아 보인다?”

“당연하죠! 칼튼이 떠난다는데! 공작님은 안 기뻐요?”

“기쁘지.”

칼튼이 떠난다, 회귀 전에 겪은 고난이 다 끝난다는 의미였다.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는데 막상 눈앞에 닥치자
기쁘기보다는 심란했다.

아니에스 공작령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다음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암담해졌다. 백지 시험지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불안함은 괜한 걱정으로 생각을 튀게 만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갑자기 떠난다는 거야? 이틀 뒤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수도까지는 꽤 먼 길이었다. 이틀 안에 칼튼의 군대가 전부 이동할 준비가 될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비너드가의


사절들이 겪었다는 일도 마음에 걸렸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성 밖에 미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적지 않은 인원이 큰 재물을 들고 이동하는 것이니, 적어도 한 번쯤 선발대를 보내어 확인해 본 뒤
출발해야 하는 게 아닐까.

어젯밤, 조심하라는 루이센의 제안에 칼튼도 수긍하는 것 같았다. 며칠 더 여유 있게, 충분히 준비해서 출발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마음을 바꿨지?’

칼튼에게 직접 들은 게 아니라, 총관을 통해 전해 들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비너드가의 사절단과 항복 협상이


어떻게 끝났는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가 언제 떠날 건지 정도는 직접 알려 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상하기도 했고 섭섭하기도 했다.

루이센의 속마음도 모르고 루거는 신이나 떠들었다.

“공작님도 좋으시죠? 우리 칼튼이 떠나면 바로 짐을 챙겨서 수도로 가요!”

“수도로? 여기서 할 일 많아.”

“공작님이 여기서 뭐 하는 일이 있다고요.”

“영지를 돌봐야지. 내가 영주잖아.”

“언제부터 영지일 같은 거 신경 썼다고 그러세요? 공작님이 없어도 총관 같은 사람들이 알아서 잘하잖아요? 여긴


공작님 필요 없는 거 같던데.”

하여튼 시종이라고 하나 있는 게. 루거의 말에 루이센은 더 의기소침해졌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 더욱


그랬다.

“그런 지루하고 어려운 일들은 전부 다른 사람한테 시켜요. 그러라고 가신들이 있는 거 아닌가요? 그


사람들한테도 할 일을 줘야죠. 우리는 수도로 가서 술도 마시고 성대하게 파티도 열고. 전처럼 신나게
살자구요.”

“파티는 무슨. 친구들 다 죽었다…….”

“그럼 새 친구 사귀면 되죠. 다들 공작님과 친해지지 못해서 안달인걸요. 왜 그렇게 우울한 소리만 하세요? 역시
우리에게는 수도가 더 잘 맞는 거 같아요.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 있으니까 걱정만 늘고 성격도 우울해지는
거라고요.”

“나는 지금 진지해. 앞날이 깜깜하다고.”

가장 두려운 건 아무래도 자신이 바꾼 일들로 인해 미래의 지식이 쓸모없어지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부족한
능력을 미래의 지식으로 메꾸어 버텼는데, 밑천이 다 떨어지게 생겼다.

루거는 루이센을 위로하듯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공작님께는 제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그리고는 공작령이 얼마나 별로인지, 수도에서 우리가 얼마나 즐거웠는지를 이야기했다. 없던 추억도 만들어 낼
정도로 매끄러운 말솜씨였다. 하지만 루거의 현란한 말재주가 루이센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칼튼한테 좀 더 천천히 가라고 하자. 나도 마음의 각오를 좀 하고 말이지.’


오늘은 이미 너무 늦었으니, 내일.

칼튼을 만나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

***

다음 날, 루이센은 성 아랫마을에 내려가는 대신 총관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제 곧 칼튼이 떠나면서 성문이 열릴


것이기 때문에 다른 할 일이 생겨났다.

루이센은 총관을 쫓아다니면서 일을 배우고, 가신들과 회의실에서 칼튼이 떠난 이후 무엇을 우선해 처리해야
하는지 등을 논의했다. 그가 하는 것이라고는 상석에 가만히 앉아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가신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도망치고 농땡이 피우기 바빴던 루이센이 얌전히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기적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남을 때는 총관이나 재무관이 내어 준 숙제를 했다.

이 나이가 되어 숙제라니. 공부라니.

조금 억울했지만 다 자신의 업보였다.

그러는 틈틈이, 루이센은 칼튼을 만나려고 시도했다. 전에는 툭하면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칼튼이 어쩐 일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루이센이 바쁘기도 했다. 루이센이 칼튼을 찾아가려고 할 때마다 하인이나 기사들이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서 총관이 부른다며 그를 끌고 갔다. 그래서 총관에게 가 보면 총관은 엄청난 숙제 거리를 던져 주었고.

‘어째 이상하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아기 새처럼 루이센만 찾는 가신들도, 루이센 본인도 아닌, 칼튼이었다.

이전에는 루이센이 찾지 않아도 별 용건도 없이 다가오던 사람이 지금은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를 않았다.
기다리다 루이센이 먼저 찾아가면 자리에 없다거나 바쁘다는 이유로 헛걸음하기 일쑤였다. 눈을 부릅뜨고
기다리다가 칼튼이 성에 나타난 걸 보고 쫓아가 보면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를 피하는 건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서 루이센은 슬슬 열이 받았다.

‘아니, 바빠서 못 만나는 거야 이해를 한다 이거야. 그치만 떠나기 전에 인사를 와야 하는 거 아닌가?’

누가 뭐래도 루이센은 이 성의 주인이었다. 남의 성에 자리를 잡고 한 달 넘게 살다가 떠나려면, 그 전에 인사는


해야 하는 게 예의고 도리였다. 물론 두 사람이 좋은 일로 만나게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동안 꽤 잘 지냈고,
앞으로 수도에서 다시 만나게 될 텐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며칠 전, 칼튼이 마을에서 루이센의 인사를 무시하고 가 버린 것까지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땅속의 노파를 자꾸 먹어 보라고 해서 그런가? 그냥 농담이었는데. 왜 피하지? 피할 이유가 없지 않나? 수도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냐고 물어봐 놓고?’

그날 밤을 다시 떠올려 보았지만 루이센이 잘못한 건 없었다. 그때의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하고 좋았다.

사실 이대로 헤어져도 루이센은 아무 문제 없었다. 사람들 말대로 칼튼이 빨리 떠나 주면 고마운 일이었다.


칼튼이 출발을 서두르다가 사고가 나는 것 또한 루이센이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루이센은 칼튼을 이런 식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겠지만, 루이센에게 칼튼이 공작령을 떠나는 것은 의미가 더 컸다. 루이센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던 전쟁이 끝이 난다. 영지를 버리고 도망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긴 여정이 드디어 막을 내리는
것이다.

루이센은 칼튼을 아주 오랫동안 두려워했고, 그에게 쫓겼다. 그의 등장으로 루이센의 완벽한 인생이 박살 났다.
회귀를 한 뒤에는 많은 게 달라졌다. 칼튼도 어느 정도 자신을 인정하는 것 같았고 루이센도 칼튼이 전처럼
두렵지 않았다. 그와의 관계는 루이센이 회귀한 뒤 바른 선택을 했다는 상징 같은 거였다.

그렇기에 루이센은 칼튼을 잘 보내 주고 싶었다.

‘이럴 때는…….’

성자님은 말씀하셨지. 우물쭈물하다가 인생 종 친다고. 그쪽에서 나를 피한다면, 피하지 못할 때를 노려서


쳐들어가면 되는 거였다.

루이센은 아무도 없는 깊은 밤이 찾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

적당한 시간이 되자 남몰래 방을 나왔다. 하인들을 만나면 또 방해할 거 같았기 때문에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칼튼의 방으로 향했다.

칼튼의 침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루이센은 그대로 돌진했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루이센이 쓰던 침실이었기


때문에 구조가 눈에 훤했다. 침대까지 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침대에 칼튼이 누워 있었다.

‘잘 자고 있군.’

그러거나 말거나. 의욕으로 가득 찬 루이센을 막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루이센은 칼튼을 깨우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손이 미처 칼튼의 어깨에 닿기도 전에, 칼튼이 루이센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어? 억?”

루이센은 그대로 끌려갔다. 그의 몸이 반 바퀴 돌면서 푹신한 침대에 내던져졌다.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칼튼은 매끄러운 동작으로 한쪽 팔로는 루이센의 가슴팍을 꽉 억누르며 다른 손으로 단검을 목에 가져다 대었다.
39 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루이센은 눈을 둥글게 뜨고 다급히 말했다.

“칼튼 경. 나야, 나.”

“공작님…….”

칼튼이 잠이 덜 깬 얼굴로 인상을 썼다. 목소리도 잠겨 있었다.

“그래. 나 공작님이야. 알겠지? 이 단검부터 치우자.”

“아, 죄송합니다. 잠결에 그만.”

잠결에 칼을 휘둘러? 이거 큰일 낼 사람이구만? 잠버릇 한번 고약하기도 하지. 게다가 칼튼은 알몸이었다.


루이센은 잠옷 차림이었기 때문에 얇은 천 하나를 사이로 칼튼의 맨살의 감촉이 전해졌다.

단단한 근육의 감촉이 선명했다. 특히 루이센의 허벅지에 은근슬쩍 와 닿는 특정 부위의 감촉이 아주 아주


노골적이었다. 이거 다리야? 다리가 하나 더 있는 거야? 그만큼 존재감이 아주 강렬했다.

루이센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공작님이 왜 여기 계십니까? 이런 하늘하늘한 차림으로.”

칼튼은 루이센의 허리를 거리낌 없이 만지작거렸다. 잠이 덜 깼나! 루이센은 몸을 바르작댔다. 칼튼이야 옷을


만지는 거겠지만 루이센은 그가 몸을 더듬는 거 같았다.

“난 입을 게 잠옷밖에 없었어. 지난번에 몰래 방을 나가서 땅속의 노파를 캔 걸 루거한테 들켰거든. 그 뒤로


루거가 옷을 전부 치워 버렸거든. 밤 중에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이 야심한 밤에 잠옷만 입고 침대에 기어들어 온 이유가 고작 그거라고요?”

“침대에는 자네가 잡아당긴 거지. 누가 기어들어 왔다고…….”

루이센은 자신이 왜 칼튼에게 변명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변명했다. 루이센의 시선이 허공을
배회했다. 칼튼의 눈빛이 이상하게 진득해서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었고, 그렇다고 밑을 보자니 그의
가슴팍에서부터 매끄러운 복근과 그 아래까지 다 보여 민망했다. 요상 야릇한 분위기에 아주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공작님이 무슨.”

칼튼은 루이센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뭐라는 거야? 이제 좀 비키게! 옷도 좀 입고! 이거 원 민망해서…….”

칼튼은 드디어 침대 밖으로 나가 옷을 입었다. 루이센도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왔다. 왠지 그냥 계속 침대 위에


있으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이센은 테이블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았다. 곧 칼튼이 루이센의 앞에 앉았다. 상의, 하의 모두 꼼꼼하게
챙겨 입은 걸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쩐 일이십니까?”

칼튼이 물었다. 루이센은 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좀 더 매끄럽게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조금 전 상황으로 인해 정신이 없었다.

“왜 이렇게 빨리 떠나나? 이틀 뒤라며? 아니, 하루가 지났으니 이제 내일인가?”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출발 준비는 잘되어 가나?”

“네.”

“뭐 필요한 건 없고?”

“네.”

뭐야, 대답이 왜 이렇게 성의가 없어? 루이센은 못마땅했다.

“가져가야 할 게 많지 않나. 이렇게 급히 떠날 준비를 하다 보면 분명 문제가 생길 텐데.”

“……그 이야기를 하러 오신 겁니까? 이미 다 결정된 일입니다.”

칼튼은 눈썹을 찡그리며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더 여지를 안 주려고 딱 자르는 어투는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루이센은 그동안 칼튼의 눈치만 봐 온 덕분에 칼튼도 자신이 무리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어 말을 돌린 것임을
눈치챘다.

‘그치. 이틀은 너무 서두르는 거라니까? 자기도 알면서 왜 이렇게 서두르지?’

이유가 있을 텐데. 루이센은 눈에 힘을 주고 칼튼을 살폈다. 칼튼은 뭐가, 라고 말하는 것처럼 턱을 살짝


치켜올렸다.

“비너드가의 사절 이야기는 확인해 봤고?”

“아니요.”

“무슨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데 정찰이라도 보내서 안전을 도모하는 게 어떤가?”

“그럴 여유 없습니다.”

“그러다가 습격을 받으면 어쩌나? 비너드가의 사절이 겪은 것 같은 이상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단 말이야.”

“습격이 있을 것에 대해서는 대비가 되어 있습니다.”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칼튼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서 나아가면 되고, 공격하는 놈들이 있다면 쳐부수면 그만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습니다. 제 앞길을 막을 건 없습니다.”

칼튼은 어떤 문제가 닥치더라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의
용력은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고 통솔력도 좋고 머리도 잘 돌아갔으니, 뭐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젊은이다운 패기가 돋보였다.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 정도 위치까지 올라온 것을 생각해 보면 납득이 가는 오만함이지만, 그의 몰락을 알고 있는


루이센에게는 불안하게 다가왔다.

과연 칼튼의 상황은 루이센이 회귀하기 전이랑 비교해 더 나은 상황인가?

루이센은 생각에 잠겼다.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았고 루이센과의 관계도 양호했다. 남부에서 잃었을 전력도 그대로 보존했고 상당한
전리품을 얻었다. 하지만 그랬다고 그의 미래가 안정된 건 아니었다.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귀족들은
여전했기에 칼튼이 믿을 만한 건 자신이 세운 공과 1 왕자의 신뢰뿐이었다.

이 시기에 루이센은 친구와 친척들에게 문전박대당하며 쫓기고 있었다. 배신감에 치를 떨며 복수를 다짐하기도
하고 생전 처음 느끼는 비참함에 울기도 하고 하여튼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이맘때 칼튼이
서북부로 몬스터 토벌을 나갔다는 말도 있고 변방으로 쫓겨났다는 말도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루이센은 칼튼이 왜 이렇게까지 서두르는지 깨달았다.

“한시라도 빨리 1 왕자의 곁으로 돌아가려는 거군. 수도에 무슨 일이 생겼나? 자네를 또 어디 전쟁터로 보내려고
해?”

“그 이야기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아니. 그냥 짐작한 걸세.”

과거 기억을 토대로 대충 찍은 것이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대충 얼버무렸다.

“공작님의 영민함은 번번이 저를 놀라게 하네요.”

칼튼은 갑자기 허탈해졌다.

‘누가 누구를 걱정한다는 건지.’

남부의 귀족들 싸움에 엮이지 말라는 에니스의 충고를 무시하고, 루이센에게 수도의 상황과 함께 남부의 정황이
수상하다는 것을 말할지 말지 하루 종일 고민한 것이 어쩐지 바보같이 느껴졌다.

루이센을 자기편 하나 없는 이곳에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서, 수도로 같이 가자고 말할까 고민도 했더랬다.
루이센의 어리숙한 모습을 보면 또 마음이 약해져서 이것저것 말할까 봐 일부러 피해 다닌 건데 그 노력도
쓸모없어졌다.

똑똑하고 부유하고 대영주에 공작이라는 작위까지 갖고 있는 루이센이었다. 당장은 암울해도 그의 앞길은


창창했다. 바람이 부는 들판에 작은 등불 같은 신세인 자신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아주 잠시 내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칼튼이 루이센의 우위에 있었지만 자신과 루이센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인 것이다. 루이센은 아무리 실수를 해도 안전하고 자신은 아무리 승리를 해도 불안전하단 말인가.

수도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겠냐고? 루이센이 수도에 올 때까지 자신이 거기서 버티고 있을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는 판국이었다.

오랜 열등감이 꿈틀거리며 칼튼의 뱃속을 뜨겁게 달구었다.

하루 이틀로 많은 게 달라지지 않는다.

루이센은 회귀 전의 기억을 토대로 한 말이었지만 칼튼에게는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보내고
있는 일분일초 사이에도 1 왕자가 어떻게 마음을 바꿀지 몰라 초조했다. 하물며 하루 이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공작님이 상관하실 바가 아닙니다.”

칼튼은 표정을 지우고 싸늘하게 말했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날카롭고 뾰족하고 어딘지
모르게 공격적인 말투가 루이센의 귀를 찔렀다.

“잊으셨나 본데 저는 공작령을 점령하러 온 사람입니다. 빨리 떠나 주면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할 이야기가 끝나셨으면 이만 돌아가시죠.”

냉엄한 축객령에 루이센은 허무하게 방을 나왔다.

누구의 눈에 띄든 말든, 루이센은 괘념치 않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칼튼의 부하와 순찰을 도는 하인들 몇
명과 마주치고 왜 칼튼 방에서 나오냐는 물음을 들어야 했지만 루이센은 대충 성의 없이 넘겼다.

이제 와서 누가 누구의 적이고 어쩌고를 따지기에는 너무 가까워지지 않았나?

칼튼의 선을 긋는 발언에 서운한 한편으로 칼튼의 불안정한 처지를 이해했기에 마음이 영 복잡했다. 루이센은
칼튼이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를 칼튼을 보며 깨달았다.

‘그야 불안하지…….’

미래가 불안하기는 루이센도 마찬가지였다.

루이센이 생각하기에도 회귀한 뒤의 자신은 정말 잘해 주었다. 영지도 영지민도 무사했고, 가신들의 인정도 받아
냈다. 남부에 아니에스 공작가의 명성도 드높였다.

공작가 안팎으로 자신의 능력을 뽐내어 존재감을 드러냈으니, 회귀 전처럼 허망하게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이
사라졌다. 지금처럼 공작가의 위엄을 유지한다면 1 왕자라고 할지라도 루이센을 막 대할 수 없을 거라고 짐작했다.

모든 게 잘되었는데도, 루이센은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잘했다. 많은 것들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래서 문제였다. 미래의 지식으로 영지와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
루이센이 모르는 미래가 차근차근 다가오고, 또 알 수 없는 위기가 생겨날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의
지식이 도움이 안 되는 때가 오겠지.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루이센은 낙관적인 성품이었으나, 자신의 능력에 있어서는 한없이 비관적이었다.

‘내가 또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떻게 해?’

마을을 오가면서 루이센은 자신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닌 존재인지 실감했다. 자신의 별거 아닌 행동 하나에
수많은 사람의 삶이 좌지우지되었다. 그가 생각 없이 내린 판단 하나가, 평범한 사람들이 성실하게 쌓아 온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40 화

황금들판의 수호자.

뜬구름처럼 느껴졌던 호칭이 눈으로, 피부로 실감이 되었다. 그 이름의 무게는 어느 때보다 무겁게 루이센을
짓눌렀다.

한번 잘못된 선택을 한 내가 또 망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나? 없었다. 루이센은 모든 게 잘못되고 비참해질
거라는 막연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두려움은 이성을 잡아먹고, 그를 불안과 우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생각은 좋지 않아…….’

루이센은 머리를 탈탈 털었다.

‘우울해질 때는 성자님이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몸을 힘들게 하라고 했는데.’

루이센은 성실한 신도였기에, 공작성의 복도를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가다 보면 이 불안의 끝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것처럼.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칼튼이 떠나는 날이 되었다.

막 어렴풋이 해가 비추는 시간은 깊은 밤보다 더 조용했다. 싸늘하게 식은 새벽 공기가 으슬으슬했다. 출발할


준비가 끝났다.

칼튼이 나오자 부하들이 말을 가지고 왔다. 그는 윤기가 흐르는 말의 털을 쓰다듬으며 말의 컨디션을 점검했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빠르게 달려 수도로 갈 예정이었다. 그의 이동 속도를 따라올 수 없는 이들은 다른 길로 먼저
출발했다.

어떻게 보면 수도에서 남부로 올 때보다 더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남부


귀족들이 무슨 음모를 꾸민다는 말을 들으니 신경이 쓰였다.

루이센의 말대로 선발대를 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다.

칼튼은 공작성을 바라보았다.

어마어마하게 넓고 오래된 건물이었다. 내심 여기 왔을 때 너무 커서 놀랐던 기억이 났다. 그때만 해도 하루빨리


여길 뜨고 수도로 가고 싶었는데, 막상 떠나려니까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이런저런 골치 아픈 일은 많았지만 이
근래 몇 년 사이 가장 편안한 생활이었던 것이다.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항상 맑은 날씨와 높은 하늘, 탁 트인 들판을 보고 있자면 절로 느긋하고


너그러운 마음이 들었다. 남부 사람들이 타지 사람들에게 안일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여유로운 이유를 알았다.
이런 데서 살면 마음 급할 게 아무것도 없겠지.

‘그래도 마지막인데, 인사 정도는 제대로 할 걸 그랬나.’

칼튼은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이제는 떠날 때였다.

“출발하자.”

“예.”

칼튼의 말에 모두 말에 올라탔다. 칼튼도 말에 올라타려는데 성 쪽에서 새벽안개를 뚫고 반짝반짝한 머리통이


튀어나왔다. 루이센이었다.

“아, 다행이야. 아직 안 갔군.”

칼튼은 예상하지 못한 루이센의 등장에 놀랐다.

“배웅은 없는 걸로 하지 않았나요?”

말투는 까칠했으나 묘하게 부드러운 어조였다.

“아, 이걸 부탁하고 싶어서 말이야.”

루이센은 작은 꾸러미와 편지를 내밀었다. 칼튼은 받지 않고 멀뚱히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수도에 가거든 나트랑 후작에게 이걸 전해 주겠나?”

“나트랑 후작이라면 전임 총사령관 아닙니까?”

“맞아. 지금은 은퇴한 양반이긴 한데, 아무튼.”

“은퇴했어도 후작씩이나 되는 분이 절 만나 주지 않을 겁니다.”

“내 이름을 대면 그분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조금 늦은 생일선물이라고 말하고, 꼭 좀 전해 주게.”


“이거 부탁하려고 뛰어오셨습니까?”

“조금 전에 막 생각이 났거든.”

칼튼은 인상을 썼다. 이 새벽에 갑자기 지인의 생일선물 떠올리고 칼튼에게 전해 달라고 오는 건 아무래도
억지였다. 이제 그가 직접 사람을 보내도 될 일이었다. 그편이 더 모양새가 좋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이센은
빠르게 자신의 말을 이었다.

“나트랑 후작은 괴팍하지만 낭만을 아는 노인네지. 자네의 욱하는 성미도 전사다운 기개라고 좋게 봐 줄 사람이야.
수도에 가면 그런 사람들을 찾아. 전장의 무서움을 알고 자네의 무모한 야망을 가장 높게 평가해 줄 사람들.”

“그럼 이건…….”

선물과 편지는 칼튼이 나트랑 후작을 만날 구실인 셈이었다. 공을 세웠으나 평판은 최악인 데다, 작위도 직위도
아무것도 없는 칼튼이었다. 그가 나트랑 후작 같은 사람을 만나려면 아니에스 공작의 친서 정도는 구실로 대야 할
테니까.

사실상 칼튼에게 주는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이별 선물을 들고 나올 줄이야. 칼튼은 의심스럽게 되물었다.

“왜 저를 도와주시죠?”

자신의 행동은 루이센의 원한을 사도 할 말 없는 수준이었다. 욱하는 성미를 주체 못 해 루이센에게 가장 못되게


굴었다.

“그러게.”

기껏 밤새 고민하다가 달려와 선물을 줬더니 의심이 돌아오다니.

그마저도 칼튼다워, 루이센은 웃음이 나왔다. 지난밤 칼튼과 대화를 한 뒤, 루이센은 불안감에 잠겨 내내 칼튼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칼튼이 급하게 떠나는 것도 계속 마음이 걸렸다.

왜일까. 그 이유를 찾다가 조금 전이 되어서야 답을 찾았다.

“나는 자네가 잘되었으면 해.”

회귀 전, 루이센과 칼튼은 이 아니에스 공작성에서 같은 시점에 똑같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 루이센에게 칼튼은
여전히 어려운 존재였지만, 그럼에도 칼튼이 다른 미래를 맞이하길 바랐다.

그의 미래가 달라진다면 자신의 미래 역시 달라지지 않을까?

사실 전혀 연관이 없는 비이성적이고 미신적인 믿음이지만 어쨌든 루이센은 그가 잘되는 걸 봐야 마음이 편할 거


같았다. 말도 안 되는 논리인데 그걸 진심으로 실행해 보겠다고 밤중에 없는 구실을 만들어 내서 뛰어나온 자신이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얼른 받아.”

루이센은 칼튼의 손에 꾸러미를 억지로 떠안겼다. 칼튼은 꾸러미를 든 채로 루이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칼튼은 살면서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은 처음 들어 봤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들도 아무도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
준 사람은 없었다.
‘정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또 루이센에게 한 방 먹었다. 정말 끝까지 예측을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칼튼의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렸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거 같기도 하며 등골이 오싹하면서 머리에 열이 올랐다.

주변의 소리가 멀어지면서 루이센을 제외한 모든 게 지워졌다. 세상에 그와 자신만이 남은 것 같았다. 루이센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든 감각이 그를 향했다.

루이센의 파란 눈이 허공을 배회하다가 다시 칼튼 자신을 향하는 것, 바람에 살짝 흐드러진 머리칼과 옅은


홍조까지 칼튼의 눈에 담겼다. 어색함을 메우려는 루이센의 낮은 웃음소리에 심장이 찌르르 떨려 왔다.

내가 왜 이러지? 갑자기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너무 놀라서 그런가?

칼튼은 혼란스러웠다. 때마침 칼튼의 부하가 그를 불렀다.

“대장.”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칼튼은 정신을 차렸다. 부하들과 루이센이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출발하셔야 합니다.”

“먼 길 가는 사람을 내가 너무 붙잡아 두었군. 조심히 가게.”

칼튼은 괜찮다고, 더 붙잡아 두라고, 말할 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성이 조금 돌아왔기에 적절한 말을
선택했다. 작별 인사였다.

“……예. 공작님도 몸조심하세요.”

루이센은 인사를 마치고 성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칼튼은 눈을 떼지


못했다. 루이센이 문을 닫고 사라진 뒤에야 간신히 그는 말에 올라타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고도 몇 번이고
아쉬움에 뒤를 돌아봤으나 가야 할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

루이센은 못 잔 잠을 몰아 자다가 한낮이 되어 깨어났다. 칼튼과 그 부하들은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사라진


뒤였다.

루이센은 칼튼에게 넘겨주었던 영주의 방으로 돌아왔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에는 칼튼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집사와 하인들이 루이센을 위해 가장 먼저 청소한 덕분이지만 왠지 허전하고 낯선 기분에 루이센은 잠시
멍하니 책상을 바라보았다.

공작성은 축제 분위기였다. 기다려 마지않던 해방일이었다.

성안 사람들을 감시하는 사람도, 행동의 제약도 사라졌다. 낯선 이들이 공작성을 제집처럼 누비는 꼴을 지켜보던
불쾌감도 끝났다. 숨을 죽이고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워할 필요가 없어졌다.
활짝 열린 성문은 고난의 시기가 끝났음을 보여 주는 상징과 같았다. 성문이 열리기만 학수고대하던 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기다렸다는 듯이 밀을 실은 수레가 들어왔고, 피치 못 할 사정으로 갈라졌던 가족과 연인들이
눈물의 재회를 했다.

구름 없이 탁 트인 높은 가을하늘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시원스레 퍼져 갔다.

잔인하기로 이름 높은 칼튼이기에 공작성이 함락됐을 때만 해도 다 죽는다는 분위기였는데, 막상 칼튼이 떠나고


보니 잃은 게 많지 않았다. 사망자도 적었고 성의 인프라도 망가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루이센의 항복을 비웃던 여론도 완전히 뒤집혔다. 그 잔악무도한 칼튼에게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메뚜기 떼로부터 남부를 구하고 영지민을 지켰다.

그는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음으로써 많은 것을 얻은 영리한 영주로 이름났다. 공작가는 한물갔다는 소리를 하던


이들도 안색을 바꾸어 역시 아니에스 공작가라고 칭송했다.

호사가들이 어떻게 떠드는지 관심을 가질 새도 없이 루이센은 바쁜 일상을 보냈다.

세금을 거둬야 하고, 밀린 재판을 진행하고, 행정도 정상화했다. 남부의 영주들이 안부와 염탐을 위해 사람을
보낼 테니 그들을 상대할 준비도 해야 했고. 전 같으면 가신들에게 모두 맡겼겠지만 루이센은 배우면서 한다는
생각으로 조금씩 조금씩 일을 해 나갔다.

하다 보면 되겠지.

칼튼이 떠나기 전에는 그렇게 불안하더니 상황이 닥치자 불안감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성자님 말대로 사람이라는 게 신기하게 닥치면 어떻게든 한단 말이지.’

루이센은 또 한 번 성자님의 현명함을 칭송했다.

41 화

그렇게 정신없이 며칠이 지났을 무렵, 푸른 사자의 깃발을 든 남자가 공작성에 도착했다. 1 왕자가 보낸
전령이라고 주장한 그는 고드릭이라는 이름의 기사였다. 루이센도 왕궁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남자였다.

루이센은 직접 그를 맞이했다. 그는 무척 피로하고 지쳐 있었다.

“왕궁에서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오기라도 했나? 무척 피곤해 보이는군?”

“아뇨. 더블레스 백작 저택에 들러 충분히 쉬었습니다만 여기로 오는 숲에서 길을 헤매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몬스터 무리와 마주쳐 작은 싸움도 벌였습니다.”

“길을 어떻게 헤맸기에 거기서 몬스터를 마주쳤나?”


루이센도 지나 본 길이라 잘 알지만, 그쪽은 어떻게 가도 몬스터 부락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숲에 안개가 무척 짙게 끼더군요. 그래서 방향을 잃고 한참 헤맸습니다.”

안개?

안개라고 하니 비너드가의 사절이 맞닥뜨렸다는 짙은 안개가 떠올랐다. 숲과 그 길은 거리가 멀고, 숲에서 안개가
끼는 일은 흔하니 연관이 없는 이야기겠지만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칼튼은 괜찮으려나?’

루이센은 그가 걱정되었지만, 눈앞에 사절이 있어 일단 마음 한구석으로 미뤄 두었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게 된 건가?”

“왕자님께서 공작님께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고드릭은 지친 얼굴을 하고도 힘을 내어 1 왕자의 말을 전했다. 예법에 맞춘 장황한 서술을 거둬 내자면 1 왕자가
전령을 보낸 목적은 간단했다.

“나더러 수도로 오라고? 지금 이 시점에 말인가?”

“예. 시국이 어수선한 점은 이해하나, 칼튼 경과 함께 오면 오히려 더 안전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칼튼 경은 어딨습니까?”

“그는…… 이미 여길 떠났네만…….”

“예?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고드릭으로서는 큰 낭패였다.

“떠난 지 오래되었습니까?”

“며칠 되었네만…….”

“……이런. 그라면 한참 멀리까지 갔겠군요. 이를 어쩐다.”

고드릭은 고민하다가 방법을 짜내었다.

“제가 공작님보다 먼저 출발해 칼튼 경을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그동안 여정을 준비하시지요.”

“글쎄……. 지금은 영지 내부를 다스리기도 바쁜 상황이야. 내 대리인을 보내지.”

루이센이 딱 잘라 거절하자 고드릭은 당황했다. 루이센 아니에스가 수도에 오는 걸 거절해? 하지만 그는 진심


같았다. 고드릭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전하의 건강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늘 안 좋으시지 않았나.”
“이번에는 심각한 모양입니다.”

루이센은 얼굴을 굳혔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졌다. 왕이 위독하다면 루이센은 수도로 가야 했다. 차기
왕을 내정하고, 대관식을 준비하는 것이 대영주로서의 의무이자 권리였으니 말이다.

“다른 대영주들도 전하가 위독하시단 걸 아나?”

“아뇨.”

“알겠네. 그런 상황이라면 안 갈 수가 없지.”

루이센은 하인에게 일러 고드릭이 쉴 수 있게 도와주라고 명했다. 그런 다음, 알현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신들을 불러 모았다.

“왕자가 나더러 수도로 오라고 하네.”

“그게 전령이 온 이유에요?”

“그래. 표면적인 구실은 포로 송환에 대해 논의하자는 것인데, 전하께서 위독하시다는군.”

“……왕자가 다음을 준비하려고 하는군요.”

“다른 대영주들도 수도로 모인다고 합니까?”

“아직은. 나를 가장 먼저 불렀다는군.”

“으음……. 아무래도 1 왕자님이 영주님께 따로 할 이야기가 있나 봅니다.”

총관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어째 좀 찜찜하지 않습니까?”

재무관이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기사단장도 동의했다.

“맞습니다. 하필 칼튼이 떠나기 무섭게 전령이 도착한 것도 이상합니다. 숲에서 안개 때문에 길을 헤매다가
몬스터를 만나다니. 그런 일은 잘 없는데 말입니다.”

가신들의 의문에도 일리는 있었다. 루이센도 딱 그런 점들이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하지만 의혹뿐이지 않나. 차기 왕의 말을 어길 만한 구실은 못 되지.”

“예. 그거야 그렇지요.”

“허, 이제야 영지 일 좀 제대로 처리하나 했더니만…….”

재무관이 한탄했다.

이후 루이센과 가신들은 더 이야기를 나누어 봤지만, 루이센이 수도로 가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수도에서 처리해야 하는 게 있으면 미리 알려 줘. 이참에 채권도 처분하고 볼일을 다 끝내야겠어.”


“예.”

“만약 왕께서 돌아가신다면……. 대관식을 준비해야 하니 꽤 오래 머물러야 할 거야. 총관이 지금까지처럼


고생을 더 해 줘야겠어.”

“아닙니다. 영주님께는 더 중요한 일이 있으시니까요.”

이번에는 영주 노릇에 전념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시원찮게 되었다. 이렇게 내키지 않는 수도행은 처음이었다.

“전령이 숲에서 며칠을 헤맸다고 했죠? 그럼 서둘러 움직여야겠군요. 그사이에 전하의 상태가 어떻게 나빠졌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그렇지. 바쁘겠지만 서둘러 주게.”

“어쩔 수 없지요. 사실 다른 것보다 호위가 걱정입니다. 영지에 남아 있는 기사의 수가 적어서…….”

“아, 그거라면 걱정 없네. 전령이 우리보다 앞서가서 칼튼을 불러오겠다더군.”

“칼튼이요?”

그 말에 총관이 화들짝 놀랐다. 다른 가신들도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왜 하필 그 개자식을 다시 부른단 말입니까? 차라리 우리 영지의 기사들을 다 데리고 가십시오!”

“아니,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그놈과 단둘이 수도까지 여행이라니, 안 될 말씀이십니다!”

루이센은 얼떨떨했다.

이게 그렇게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반대할 일이야?

“걱정하지마. 칼튼 경이 그래도 나에게는 잘해 준다네. 그렇게 막돼먹은 사람이 아니야.”

“잘해 줘서 문제란 겁니다!”

이거 충격받을까 봐 뭐라고 자세히 설명은 못 하고! 총관은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이런 꼴을 보려고
내가 이 나이 이때까지 살고 있나!

가신들의 마음이야 어쨌든, 고드릭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칼튼을 부르겠다며 떠났다. 어차피 가는 길은 같았기에
중간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루이센은 수도로 향할 준비를 시작했다.

여행을 준비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루이센 하나에 딸린 시종과 기사들, 루이센의 짐과 그들의 짐까지 다
합치면 그냥 저택 하나가 통째로 움직인다고 봐도 좋았다. 이번에는 다른 때보다 서둘러야 했기에 많이 줄이고
생략했지만 여전히 챙길 게 많았다. 여정을 담당하는 것은 수석 시종인 루거라, 루거가 무척 바빠졌다.

수도에 가자고, 가자고 소원하던 루거였던지라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막상 가게 되자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말수도
부쩍 줄어들었고 딴생각도 많아졌다.
얘는 또 왜 이럴까.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수도로 떠나기 전에 할 일이 너무 많아 루거의 마음까지 챙겨 줄 여유가 없었다. 루이센은
가신들과 루이센의 공백 기간 동안의 일, 수도에서 해야 할 것이나 처신에 대해 논의했다.

이윽고 루이센이 영지를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

쭉 뻗은 길을 따라 마차는 막힘없이 달려 나갔다. 길을 따라 늘어선 드넓은 들판은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식사 시간이 되면 멈추어 식사를 했고, 밤이 되면 가까운 마을에서 잠을 청했다.

루이센이 수도와 공작성을 오갈 때면 지나던 길이고 마을이라 영주 일행의 등장에도 마을 사람들은 침착했다.
찜찜함을 잔뜩 안고 출발한 길이었지만 여행길은 놀라울 정도로 평탄했다.

루이센은 책을 무릎 위에 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고, 기사들의 대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입을 꾹 다물고 주변을 경계하기 바쁘더니, 아무 일 없이 평야만 계속되자 농담을
하는 둥 여유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른하고 지루한 분위기가 일행을 감싸고 있었다.

루이센은 고개를 돌려 루거를 바라보았다. 루거는 먼 곳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수도에 가자고 노래를
부르더니, 여행길 내내 루거는 정신이 딴 데 팔린 사람 같았다.

“우리 얼마나 왔어?”

“조금만 더 가면 공작령을 벗어나요.”

루이센이 묻자 루거가 답했다. 그 말에 고개를 쭉 내밀자 저 멀리에 작은 숲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멀었네.”

“졸리면 주무세요.”

“아냐, 지금 자면 이따 밤에 못 자.”

루이센은 하품을 하며 마차의 벽에 머리를 기댔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루거가 루이센의 몸 위로 얇은 담요를
덮어 주고,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한곳으로 몰아 정리해 주었다. 그 손길이 제법 다정스러워 루이센은 졸음이
쏟아졌다.

“그냥 주무세요. 주무시다 보면 금방 도착할 테니까요.”

금방은 아니지.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졸음이 거세게 몰려왔다. 루이센의 눈이 감겼다.

***
“영주님!”

비명과 같은 외침에 루이센은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뭐야, 아주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무슨 일이야?

마차 안에는 루거도 안 보였다.

루이센이 마차 문을 열자 한낮인데도 한 치 앞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짙은 안개가 껴 있었다. 그리고 늑대를 닮은


몬스터들이 일행을 공격하고 있었다. 다이어울프라는 몬스터였다.

‘왜 다이어울프가 여기 있는 거야?’

이 근방은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이라 주기적으로 몬스터 토벌을 했다. 이렇게 떼 지어 다이어울프가 나올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각 개체의 힘이 강한 몬스터는 아니지만 단체로 무리 지어 다니면서 전략을 짜 사냥을 하기에
무척 까다롭고 위험한 상대다.

안개 속에 형형한 붉은 눈동자 수십 쌍이 보였다.

아우우우우우.

다이어울프의 울음소리가 허공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다이어울프들이 일제히 마차를 바라보았다.

42 화

루이센은 마차의 문을 닫고 안으로 숨어들었다. 이럴 때 자기처럼 힘없고 높은 사람은 괜히 나대지 말고 얌전히


어디 처박혀 주는 것이 오히려 기사들을 돕는 일이었다.

“영주님을 지켜라!”

“마차를 중심으로 방어 진형을 갖춰!”

아무도 예상 못 한 갑작스러운 습격이었던 데다, 안개가 너무 짙어서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은 훈련받은 대로 일사불란하게 루이센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안개가 너무 짙어 몬스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반면 다이어울프는 안개 따위는 방해가 안
된다는 듯이 날렵하게 움직이며 기사들을 공격했다.

진열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다이어울프 한 마리가 기사들을 뚫고 마차에 부딪쳤다. 마차가 옆으로
넘어졌다.
“으악!”

루이센은 마차와 함께 쭉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러면서 소파 장식에 머리를 찧었다. 띵, 하고 현기증이 났다.
그러는 사이에 다이어울프는 마차 문을 뜯어냈다.

“이 개새끼가 어딜 감히!”

기사는 다이어울프를 창으로 찌르며 떼어 냈지만 또 다른 다이어울프 세 마리가 마차로 달려들었다. 한 놈은


기사의 팔을 물어뜯었고, 다른 두 놈은 루이센을 향해 입질을 해 댔다. 어쩐지 루이센을 잡아가려는 것 같았다.

루이센은 책을 마구 휘둘렀다.

“저리 가!”

루이센 나름의 저항이었지만 그런다고 물러설 몬스터가 아니었다. 놈들은 기어코 루이센의 다리를 물어 마차
밖으로 끄집어냈다. 다이어울프의 날카로운 이빨이 루이센의 종아리를 파고들었다.

“아악!”

“영주님!”

강제로 끌려 나온 밖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짙은 안개 사이로 사람들이 다이어울프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받는 것이 보였다. 비명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쓰러지고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 다이어울프들은 다 어디서 나타난 거야?’

일행을 감싼 짙은 안개마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안개.

비너드가의 사절 때도, 1 왕자의 전령 때도 계속 안개가 문제였다.

다이어울프들은 루이센이 차분히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다이어울프 하나가 루이센의 망토를 물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루이센은 버둥거렸지만 몬스터에게서 벗어나긴 역부족이었다. 그는 몬스터에게 질질 끌려갔다.
다이어울프에게 물린 상처가 땅에 쓸리며 살을 에는 고통이 이어졌다.

망토가 목을 조여 숨이 막히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다이어울프는 루이센을 끌고 산비탈을 올랐다. 다이어울프는


날렵하게 장애물을 피하며 달렸지만 루이센은 나무며 돌부리에 치이고 부딪혔다. 뼈가 부러진 것처럼 아리고 살이
찢겨 피가 흘렀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다이어울프는 산 깊숙한 작은 공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루이센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져서
스스로 일어날 힘도 없었다.

“으윽.”

루이센은 땅에 머리를 박고 구역질을 삼켰다. 몸을 둥글게 말고 켁켁, 기침을 했다.

다이어울프들은 루이센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일정 거리를 두고 루이센을 둥글게 감쌌다. 루이센이 고개를 들자
경고하듯 으르릉, 거렸다.
‘뭘 하자는 거지?’

루이센의 입안이 바짝 말랐다. 마차만 한 크기의 늑대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에 소름이 끼쳤다. 커다란 송곳니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온몸이 몬스터가 드러내는 살기에 짓눌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몬스터가 인간을 공격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자신들의 영역이 침범당했거나, 먹으려고.

다이어울프는 몬스터치고는 영리한 편이었지만 그래 봤자 몬스터였다. 굳이 인간인 자신을 살려서 끌고 와서,


공터에 던져 놓고 감상할 이유가 없었다. 어린 다이어울프에게 사냥을 가르치기 위해 일부러 약한 개체를 살려
가기도 한다고 듣긴 했지만, 여기 어디에도 어린 다이어울프는 보이질 않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루이센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그 안개는 뭐고, 몬스터의 이상한 행동은 또 뭐고.

그런 와중에 저벅, 저벅, 하고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발소리였다.

짙은 수풀 너머, 조용히 나타난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루거.’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루이센은 소리쳐 그를 부를 뻔했다. 그러나 다이어울프들이 그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입을 꾹 틀어막았다.

‘날 구하러 따라왔구나!’

정말 눈물이 나도록 루거가 반가웠다. 이 자식이 어디로 사라져서 안 보이나 했더니!

그러나 루이센의 반가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루거는 혼자였다.

아무리 루거가 시종치고는 검을 좀 휘두른다고 해도, 루이센이 알기로 다이어울프 열 마리를 혼자 상대할 정도로
능력자는 아니었다. 그 정도 능력이 있었으면 시종이 아니라 기사가 되었겠지.

즉, 루거가 와 봤자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는 말이었다.

‘젠장. 차라리 칼튼이 나타났으면…….’

1 왕자의 전령은 칼튼을 먼저 불러오겠다고 가더니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칼튼과 합류한 뒤에


움직일 것을.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공작님.”

루거가 루이센을 부르자 루이센은 기겁을 했다.

‘몰래 다가가서 몬스터 뒤통수를 갈겨도 모자랄 판에 날 부르면 어쩌자는 거야?’

심지어 루거는 모습을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당당히 루이센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이상했다.


‘저 자식, 왜 이렇게 침착해?’

모시는 주인이 몬스터에게 둘러싸여 언제 사지가 찢겨 나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루거의 얼굴에는
다급함이라거나 긴장감, 걱정 같은 감정이 보여야 맞았다. 그런데 루거는 너무 태연했다.

마치 이 상황이 특이할 게 없다는 듯이 말이다. 심지어 다이어울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언제 자신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을지 모르는데 저렇게 무심할 수 있나? 꼭 공격을 받지 않을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루이센이 아는 루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위험에 빠진 루이센을 보고 놀라야 하고, 그를 구하겠다고
달려와야 했다. 남들에게는 오만방자할지라도 루이센에게는 헌신적인 시종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겉모습도 평소와 달랐다. 루거의 창백한 얼굴은 시체처럼 굳어 있었다. 그 특유의 어리바리한
분위기가 사라지자 본래 가진 날렵한 외모가 드러나면서 차갑고 반듯한, 잘 벼려진 검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붉은빛이 도는 갑옷은 루거의 붉은 머리칼과 잘 어울려, 평생 좌절을 모르고 살아온 잘나가는 기사 같았다. 척
보기에도 시종인 루거가 갖기에는 너무 좋은 갑옷이었다.

루거가 좋은 갑옷을 입을 수도 있었다. 루이센이 그에게 지급하는 월급은 상당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가
너무도 잘 차려입었다는 점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몬스터의 공격이었다. 그런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예견한 것처럼 갑옷을 챙겨 입은 모습은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설마 몬스터가 습격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거나.’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불길한 예감이 루이센의 뒷덜미를 서늘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에이, 아니겠지.

루이센은 간절히 부정했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예감이 틀리길 바랐다. 루거가 누구인가. 회귀 전 루이센을
살리기 위해, 칼튼에게 붙잡혀 죽기까지 하지 않았나. 그런 헌신적인 시종이 자신을 공격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은 잔인했다. 이런 종류의 예감은 언제고 틀리는 법이 없었다.

루거가 가까이 오자 다이어울프는 깨갱, 거리며 개처럼 꼬리를 말고 물러섰다. 고개를 땅으로 처박고 몹시 두렵고
어려운 존재를 대하듯 루거를 피하며 그의 앞길을 열어 주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몬스터가 사람에게 복종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가능 여부를 판단할 때가 아니었다. 루이센은


똑똑히 목격했다. 다이어울프들은 루거를 따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이어울프가 루이센을 여기까지 물고 온 것도
루거의 뜻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너 뭐 하는 새끼야?”

루이센은 루거를 노려보았다. 루거는 오, 하고 감탄했다.

“울고불고하고 계실 줄 알았는데 침착하시네요? 별로 놀라지도 않으시고.”

“……기가 막혀서 눈물도 안 나오거든. 날 납치해서 어쩌려고. 누가 사주했지?”

루이센은 루거의 단독 행동은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아무리 한심해도 이 나라에 넷밖에 없는 대영주였다.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단독으로 벌일 일이 아니었다.
“이상하다. 어떻게 이렇게 똑똑한 소리를 하지?”

“넌 내가 등신인 줄 알아?”

“아니, 등신 맞잖아요. 제가 누구보다 공작님을 잘 아는데. 이런 상황에서 공작님이 침착하게 머리를 굴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의외로 루거는 늘 그렇듯 약간의 건방짐과 정중함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어서 오히려
루이센은 소름이 끼쳤다.

“생각 없고 안일한 게 공작님의 가장 큰 장점이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하셨지?”

루거는 장갑을 낀 손으로 루이센의 얼굴에 난 생채기를 꾹 눌렀다. 그리고 살살 어루만졌다. 차가운 가죽이 상처
위를 스치는 감촉이 몹시 이질적이었다.

“다치셨네요. 저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오고 싶진 않았어요. 마지막까지 공작님의 충실한 하인으로 남고


싶었는데. 그러게 그날 밤 저랑 같이 도망치셨으면 이렇게 다치지도 않았을 거잖아요.”

“뭐?”

루이센은 얼빠지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라는 거야? 루거의 말이 머릿속에서 조각조각 났다가, 회귀
전의 기억에 맞게 다시 조립되었다.

회귀 전, 루이센은 영지에서 도망쳤다. 도망치는 데 필요한 물건들, 도망치는 경로, 도망치는 방법. 그 모든
것들을 준비한 건 루거였다.

‘내가 도망칠 준비를 하라고 명령한 적이 있던가?’

43 화

루이센은 명령하지 않았다. 도망치자는 루거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고, 지금 가야 한다는 그의 말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니까 루거가 옆에서 말하는 대로 어버버 끌려간 것이다. 멍청하고 수동적인, 실로 회귀 전 자신이 할 법한
짓이었다.

처음에 칼튼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고 나에게 속살거린 게 누구였지? 루거였다. 칼튼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을
전하며 루이센을 공포로 몰아넣은 것 역시도 루거였다.

당시의 루이센은 인생에서 처음 맞이하는 위기에 몹시 겁에 질려있었다. 상황에 압도되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평소에도 수동적이라 스스로 아무것도 안 하던 루이센이었다.

과연 루거가 없었다면 루이센은 스스로 영지에서 도망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처음으로 루이센은 의문이 들었다. 야반도주를 선택한 건 자신이지만, 정말 그게 완전히 자신의 의지였다고 볼 수
있을까?

빠르게 휘몰아치는 생각 끝에 루이센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대체 왜?”

왜 그렇게까지 한 건데? 루이센은 루거를 시종으로서 신뢰했다. 그렇기에 루거가 마음먹는다면 언제든 루이센을
죽이고, 납치할 수 있었다. 왜 루이센이 스스로 영지를 떠나게 만든 거지? 그런 번거로운 짓을 왜?

갑자기 루거를 고용할 당시의 일이 떠올랐다.

대략 오 년 전쯤. 당시에 루이센에게는 총관이 엄격한 심사를 거쳐 뽑은 수석 시종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차 사고가 일어나 수석 시종이 다치면서 급히 주변의 인맥으로 일시적으로 시중을 들 시종을 구했다.

어디까지나 임시직이었고 루이센 혼자 수도에 머물던 때라, 루이센이 대충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용했다. 그게
루거였다.

루거는 루이센의 입안의 혀처럼 굴었고 많은 즐거운 놀이를 가르쳤다. 어느 틈인가 원래 수석 시종의 복귀가
유야무야되고 루거는 계속 자신의 곁에 남았다.

루이센의 주변에는 고용인들이 아주 많았고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나타났다가 떠나갔다. 루이센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에 익숙했기에 원래 수석 시종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도, 루거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 시종은 재밌는 녀석이구나 정도였다. 만약 회귀 전에 야반도주 사건과 루거가 자신을 대신해 죽지 않았다면
루이센은 루거를 잊었을 것이다.

‘잠깐만. 그럼 회귀 전에 루거가 날 위해서 죽은 건 뭐야. 진짜 죽은 거 맞아?’

세상에 어떤 스파이가 먹잇감을 위해 죽겠는가.

‘그럼 뭐야. 그때 죽은 것도 거짓말이야?’

뒷골이 찡하게 땅겨 왔다. 자신을 위해 죽었다고 믿었던 루거가, 사실은 스파이에 의도적으로 접근해 자신을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니.

배신감에 치가 떨리고, 그 치밀함이 무섭기까지 했다.

“네 뒤에 있는 놈은 누구야? 뭘 바라고 이런 짓을 사주한 거지?”

회귀 전, 루이센은 루거의 수작에 넘어가 그대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네 뒤에 있는 그자는 내 죽음이 아니라 몰락을 바라는 건가?”

루이센의 말에 루거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공작님을 배신했는데, 궁금한 게 고작 그거에요?”

“그럼 뭐가 더 필요한데?”
“왜 공작님을 배신했는지 그런 거요.”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해?”

“정말……. 공작님다운 말이네요. 전 공작님 그런 오만한 점, 좋아해요. 대귀족이라면 그래야죠.”

이상하게도 루이센의 귀에는 루거가 감탄하는 것처럼 들렸다. 평소에 루거가 자주 하던 말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들으려니 기분만 더러웠다.

“자, 이제 수다는 그만 떨죠.”

루거는 질긴 가죽끈을 꺼내어 루이센의 손과 발을 묶었다.

루이센은 반항해 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뒤통수가 얼얼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오랜 방랑으로 다져진 멘탈은 당장 받은 충격을 미루고 생존에 대해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게 했다.

루거의 배후는 무슨 개수작인지는 몰라도 루이센을 살려서 무언가를 꾸미려는 것 같았다. 자신의 능력으로 여기서
도망치기란 역부족이니, 힘을 빼 봤자였다. 괜히 반항하다가 다치면 자신만 손해였다.

자신이 사라지면 공작성의 사람들이 모든 힘을 동원해 자신을 찾을 것이다. 차라리 얌전히 따라가는 척하면서
단서를 남기는 편이 더 나았다.

루이센이 머리를 굴리는데 루거는 약병을 하나 꺼내어 루이센의 코 밑에 가져다 댔다. 수면향이었다.

“주무시고 나면 도착해 있을 거예요.”

꽃냄새 같으면서도 역겨운 향이었다. 향을 계속 맡고 있자니 어지럽고 졸음이 쏟아졌다.

‘아, 잠깐만. 이러면…… 안 되는데…….’

루이센은 고개를 저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몸이 축 늘어졌다.

그때였다. 멀리서 빠르게 말발굽 소리가 다가오더니 짧은 창이 루거를 향해 날아왔다.

“읏!”

루거는 창을 쳐 냈으나, 작은 창에 실린 힘을 못 이기고 뒷걸음쳤다. 뒤이어 나타난 것은 칼튼이었다.

“공작님!”

그는 자신에게 덤벼든 다이어울프 세 마리의 목을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몬스터가 아니라 들개도 저렇게 빨리
처리할 수 없을 텐데. 다이어울프의 거대한 몸이 둘로 갈라지면서 날아가는 모습은 기절하고 싶을 만큼
엽기적이었다.

그 사이로 루거가 칼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칼튼은 어렵지 않게 검을 막았다. 칼튼이 루거를 보고, 그 뒤의
루이센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놈, 공작님 시종 맞죠? 이 몬스터들은 또 뭐고요?”

칼튼이 물었으나, 루이센은 대답하지 못했다. 수면향에 취해 간신히 버티던 루이센의 정신이 유혈이 낭자하는
잔인함에 지쳐 나가떨어진 것이다.

칼튼은 기절한 루이센과 루거, 그리고 자신만을 노리는 다이어울프를 보았다.

그는 공작성에 남겨 둔 미련을 잊으려는 것처럼 미친 듯이 이동을 하고 있었다. 짐이 많아 생각한 것처럼 속도가


나지 않아 답답했다. 그런데 갑자기 1 왕자의 전령이라는 사람이 뒤따라오더니, 루이센이 수도로 올 테니 그를
호위하라는 게 아닌가.

마침 하늘을 봐도 들판을 봐도 루이센의 얼굴만 떠오르는 상태였던지라,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그는 냉큼


말머리를 돌려 길을 돌아왔다. 부하들이 제대로 따라오건 말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폭주하듯이 달려
공작가의 일행을 발견하나 싶었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이어울프에게 물려가는 루이센이었다.

이런 재회는 상상도 못 했는데. 루이센은 왜 볼 때마다 위기에 처해 있지?

칼튼은 급히 루이센의 뒤를 쫓았다. 그랬더니 지금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대충 예상이 갔다.

‘시종놈이 스파이였고, 이 몬스터들을 부리고 있는 거겠지.’

몬스터를 어떻게 부리는지 모르겠지만, 루거의 배신은 칼튼에게 전혀 놀랍지 않았다.

“너 이 새끼, 전부터 수상쩍다 했지.”

“천것이 주제도 모르고 나서는구나.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아니긴. 친애하는 우리 공작님 일인데.”

칼튼은 검을 고쳐 쥐며 루이센의 앞을 막아섰다. 루거가 형형한 눈으로 칼튼을 노려보았다. 살기와 깊은 원한


같은 게 엿보였다. 검을 든 자세와 기세가 전부 예사롭지 않았다.

“시종이 보이기엔 날카로운 기세야.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보지?”

칼튼이 못 알아볼 정도라면, 루거의 검술이 무척 뛰어나다는 의미였다. 칼튼은 호승심이 끓어올랐다. 강한 자와
싸워 승리하는 것은 언제나 칼튼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평소에 자신을 무시하던 놈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칼튼의 등 뒤에 루이센이 있었다. 혼자라면 모를까 루이센을 보호하면서 싸우는 건 위험했다. 그리고 왠지
자신이 루거랑 싸우기 시작하면 저 몬스터들이 루이센을 들고 튈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칼튼이 취할 행동은 하나였다.

‘튀자.’

판단이 서자 칼튼은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루거를 향해 검을 날렸다. 루거는 말 위에서 내려치는 공격을
막는 대신, 옆으로 피하며 칼튼의 말을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다이어울프가 루이센을 향해 덤벼들었다.

전부 칼튼의 예상대로였다. 칼튼은 말에서 뛰어내리면서 말이 루거의 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움직였다. 그리고
빠르게 루이센에게 달려가, 다가온 다이어울프의 목을 날렸다.

다이어울프의 진형에 공백이 생겼다. 칼튼은 루이센을 들쳐 안고 그 틈으로 몸을 날렸다. 영리한 칼튼의 말은
주인을 따라붙으며, 칼튼이 말에 오를 수 있도록 속도를 늦추었다.
우선 루이센을 말에 얹고, 칼튼이 말에 올라탔다.

“도망치게 둘 것 같으냐!”

루거가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노성을 질렀다. 칼튼은 루거가 따라오지 못할 줄 알았다. 놈에게는 말이 없으니까.
그러나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루거는 다이어울프의 위에 올라타더니, 칼튼과 루이센을 쫓아오기 시작했다.

‘몬스터가 사람을 등에 태우는 게 된다고?’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었으면 믿지 못했을 모습이었다. 대체 뭐 하는 놈인지, 보면 볼수록 기가 막힌


놈이었다.

산비탈을 타고 추격전이 벌어졌다. 지형은 칼튼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장애물이 많아 말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반면 다이어울프는 제집처럼 산비탈을 뛰어다녔다. 몇 번이고 다이어울프의 이빨이 말을 스쳤다.

루거가 긴 창을 휘둘렀다. 칼튼은 요령껏 몸을 기울여 피했다. 반격을 할 타이밍이었지만 한 팔로 루이센을 안고


말을 몰아야 하기에 공격을 받아칠 여유가 나지 않았다.

‘이러다 다 죽겠는데.’

칼튼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의 날카로운 오감에 물비린내와 함께 폭포 소리가 감지되었다.

‘다이어울프는 물에 약하지.’

칼튼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말의 목을 어루만졌다.

“미안하다. 너까지 챙기진 못하겠어. 알아서 살아남아라.”

칼튼은 말을 더 빠르게 몰았다. 그리고 타이밍을 보아 단검을 꺼내서 다이어울프를 향해 던졌다. 칼튼의 솜씨는
정확했다. 단검은 빠르게 날아가 다이어울프의 눈구멍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루거의 진영이 흔들렸다.

그러나 칼튼의 몸도 단검을 던지느라 중심이 기울었다. 칼튼의 말이 크게 비틀거렸다. 뛰어난 사냥꾼인
다이어울프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칼튼은 루이센을 단단히 끌어안고 미리 봐 둔 방향으로 몸을 내던졌다.

그 밑은 까마득한 폭포였다.

칼튼을 공격하려고 도약했던 다이어울프들이 당황해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하지만 땅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몇 마리의 다이어울프들이 폭포에 처박혔고, 곧이어 칼튼과 루이센은 밑으로 떨어졌다.

풍덩!

뒤늦게 따라온 루거가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일어난 물거품 속으로 칼튼과 루이센이 사라진 뒤였다.

“천한 놈이 감히…….”

루거의 분노가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그는 자신이 타고 있던 다이어울프를 마구 때려죽였다. 동족이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있음에도 남은 다이어울프는 깨갱, 거리며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윽고 분풀이를 끝낸 루거는 폭포 아래를 수색하기 위해 떠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개가 걷히고 산은


고요해졌다. 주인을 잃고 다친 말의 울음소리조차 폭포 소리 아래 조용히 묻혔다.

44 화

5 장. 따로, 또는 같이

똑똑똑.

멀리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던 그 소리가 조금씩 다가오면서 고막을 흔들고
잠들었던 루이센의 의식을 불러왔다.

등으로 전해지는 냉기가 너무나 싸늘했기에 반대로 상대의 온기는 강렬해서 무심코 그 품을 파고들다가 눈을 떴다.
루이센은 누군가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에는 단단한 벽을 보는 것 같은, 누군가의 벌거벗은 가슴팍이 있었다. 아주 훌륭한 가슴이긴 한데 왜


일어나자마자 이런 게 보이는 거지?

루이센은 눈동자를 도로록 굴렸다. 상대에게 폭 안긴 것처럼 가까워서 눈만 굴려서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루이센을 단단히 감싼 팔, 다리에서 상대의 체온이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정신을 잃고 모르는 가슴을 보면서 깨어난 게 오랜만이긴 한데 낯설진 않았다. 망나니로 살던 가락이 있는걸.
그는 이럴 때 난리를 쳐 봐야 상대도 놀라고 나도 놀란다는 걸 알았기에 침착하게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가 더 빨랐다.

“일어나셨습니까?”

이 목소리는 칼튼이었다. 칼튼은 루이센이 깨어난 걸 알고 일어나 앉았다. 루이센도 냉큼 일어나 앉았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두 사람을 덮고 있던 가죽 망토가 스르륵 미끄러졌다. 루이센의 시선이 슬그머니 칼튼의 하체로
향했다.

칼튼은 바지를 입고 있었고, 루이센도 속옷만 입긴 했지만 완전히 나체는 아니었다.

‘아, 다행이다.’

루이센은 스치듯 생각하며 칼튼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루이센은 냉큼 일어나 앉아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들이 있는 곳은 아주 좁고 긴 동굴이었다. 물비린내와


흙냄새, 그리고 살짝 짐승 냄새도 섞여 났다. 동굴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여긴 어디지? 내가 왜 자네랑 이 꼴로…… 끌어안고 있는 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

“내가 기절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

난데없는 안개 속에서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 루거가 첩자라는 게 밝혀졌고, 칼튼이 나타나는 걸 보고 기절한
것이 생각났다. 뭐 하나 빠짐없이 생생했다.

“그 뒤에 공작님을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추격을 따돌리고 동굴을 발견해 들어왔습니다.”

“……옷은?”

“폭포로 뛰어드는 바람에 쫄딱 젖어서요. 저쪽에서 말리고 있습니다.”

“폭, 포로 뛰어들어?”

폭포? 좀 미친 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칼튼이 가리킨 곳에는 루이센과 칼튼의 옷이 보였다. 그의 말대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진짜 뛰어내렸나 보군…….”

정신을 잃어 기억이 없는 상태임에도 루이센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뭐 어떤 상황이면 폭포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게 되지? 내가 그 짓을 하고도 살아있다고? 루이센이 침묵하자, 칼튼은 그 뜻을 오해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체온이 떨어지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불을 피우자니, 놈들이 쫓아올 것 같더군요.


그렇다고 알몸으로 밤을 지새울 수도 없으니 끌어안고 있었고요.”

칼튼은 자신에게 흑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정말로요.”

“그래. 이런 상황이니 이해한다네. 자네가 고생이 많았겠어.”

그렇게 해명하지 않아도 오해 안 하는데. 칼튼이 자신에게 흑심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예…….”

한 점 의심도 없는 루이센의 담백한 대답에 칼튼은 머쓱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그건 저도 모릅니다. 공작님을 데리고 도망치느라 바빴으니까요.”

“……그렇군.”

일행에는 기사도 있었지만 루이센을 수행하기 위한 비전투원들이 더 많았다. 그들이 과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몬스터의 이빨을 피할 수 있었을까.

루이센이 마차에서 끌려 나와 다이어울프에게 잡혀갈 때, 그 짧은 순간에도 가까이서, 그리고 멀리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었다. 일행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마 상당히 많은 사람이 죽었겠지.
속이 울렁거려 루이센은 입가를 막았다.

그 모든 일이 루거로 인해 벌어졌다는 사실이 루이센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루거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진짜 괜찮을 리 없었다. 루거를 고용해 곁에 둔 것은 자신이었다.

“이제 공작님의 이야기를 해 주시죠. 루거, 그놈 대체 뭐랍니까? 완전 다른 사람 같더군요.”

루이센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지. 근사한 갑옷을 입혀 놓으니, 거만한 시종이 아니라
그럴싸한 기사처럼 보였다. 그에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말투는 너무도 평소의 루거 같아서 아이러니했다.

그래서 더 루이센이 알던 루거는 거짓이었음이 실감이 났다. 입이 방정이지만 충성스러운 하인의 모습은 다
거짓이라 이거지.

“루거가 첩자였더군.”

“그랬군요. 누구의 첩자인지는 알아내셨습니까?”

루이센은 고개를 저었다.

“배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어. 자네는 별로 안 놀라는군? 나는 루거가 첩자라는 거, 정말 놀랐는데 말이야.”

그 상황을 벗어나 안전한 곳에 오자, 미뤄 뒀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루이센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배신감과 충격에 가슴이 아려 왔다.

“그럴 만한 놈 같아서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루거가 그렇게 보였나? 내게는 충실한 하인이었는데.”

“공작님이 유난히 그놈을 편하게 생각하시는 거 같긴 했습니다만 충성스러웠는지는 모르겠군요. 늘 공작님을 두고


어딘가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마을에서 낙오되셨을 때도 일부러 도발했고요.”

“……아.”

그러고 보니 마을에 낙오되어 폭동에 휘말렸을 때. 루이센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눈먼 칼을 떠올렸다. 그게


루거의 짓이었을까?

돌아보면 그것만이 아니었다. 루이센이 칼튼에게 항복한 이후, 루거는 자주 사라졌고 무심코 넘기기에는
의미심장한 순간들이 있었다.

“사실 저는 공작님이 그놈의 뭘 보고 그렇게 믿으셨던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루이센은 입을 꾹 다물었다.

‘루거는 날 위해 자네에게 잡혀서 죽었어.’

그래서 수상쩍은 행동들을 무시하고 덮었다. 의심할 만한 상황이어도 의심하지 않았다. 루거는 죽음으로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했으니까.

하지만 루거는 루이센이 야반도주하려고 했던 것도 전부 자신의 안배였다는 듯이 말했다. 자신이 그때


야반도주하지 않고 항복하는 바람에, 자신이 정체를 드러내게 된 거라고.

그렇다면 회귀 전, 루거는 정말 죽었을까? 루이센을 대신해 붙잡히는 것도 전부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루이센은 루거의 시신을 보지 못했다. 정황상 그가 죽었을 거라 추측하고 강하게 믿었을 뿐.

“그러게. 내가 바보였어.”

루이센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했다.

루이센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고, 덜 마른 머리카락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시종일관 불안하게
허공을 배회했다. 볼품없는 꼴이지만 그래서인지 더 안쓰러워서, 칼튼은 괜스레 손을 움찔댔다.

평소의 칼튼이라면 멍청하게 그런 놈을 믿냐고 비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루이센은 마냥 가엽기만 했다. 오죽
외롭고 힘들었으면 루거 같은 놈을 믿었을까. 주변에 온통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뿐이니 정신을 아무리 바짝
차려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너무 심했어. 칼튼은 루이센을 위로할 만한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칼튼은 위로보다는 비아냥이 더 익숙한
사람이라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칼튼이 간신히 짜낸 말은 이게 고작이었다. 루이센은 아차, 하며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네. 잠깐 생각에 빠져 있었어. 일단 구해 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공작님을 무사히 수도까지 모시라고 명을 받았는데 이렇게 되어…… 저야말로 유감입니다.”

좀 더 다정하게 말할 순 없는 건가. 칼튼은 자신의 건조한 말투가 갑자기 마음에 걸렸다.

그 와중에도 루이센은 의연해 보이려고 애를 썼다. 칼튼에게 더 이상 한심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지.

“1 왕자의 전령을 만났나 보군. 자네 혼자인가? 부하들은 어쩌고?”

“급한 일인 거 같아…… 제가 앞장서 왔습니다. 거리가 꽤 벌어져 있어서, 아직 이런 사달이 난 것을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런가…….”

“그래도 걱정 마세요. 공작성으로 안전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공작성으로?”

루이센은 눈을 깜박였다.

“공작성으로 돌아가실 것 아닙니까?”

“아니. 나는 이대로 수도로 갈 생각이네.”

“지금 바로 수도로 가시겠다고요?”

“그래.”
칼튼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공작성에 들렀다가, 재정비를 하신 뒤 출발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밖에는 공작님을 노리는 수상한 놈들이 있고,
공작님 곁에는 지금 저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 수도까지 가긴 어렵습니다.”

칼튼의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루이센도 생각은 있었다.

“루거는 공작성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지금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건 그의 손아귀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아.”

“제가 있으니 공작성까지는 괜찮습니다.”

칼튼은 자신만만했으나 루이센은 고개를 저었다.

“공작성에 돌아간 뒤도 문제야. 빠른 시일 내로 다시 수도로 출발해야 하는데, 공작성에는 그럴 인력이 없어.”

루이센과 함께 수도로 가던 인원이 현재 공작성에서 차출할 수 있는 인원의 최선이었다. 그나마도 생사가


불분명하니 공작성에서 다시 정비를 한들 지금보다 나을 거 같지 않았다.

“차라리 한동안 공작성에 머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건 안 돼.”

“습격을 받았다고 하면 왕자도 이해할 겁니다.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게는 대영주로서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네. 목숨을 걸고라도 왕성에, 전하의 곁으로 가야 해.”

칼튼은 아둔하지 않기에 루이센의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45 화

“설마…… 왕이…….”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튼은 허, 하고 짧게 탄식했다. 왕의 죽음이라면, 시일을 다투는 중요한 문제이며 목숨 걸고 수도로 향할 만한


일이었다.

“어차피 위험을 감수하고 갈 거라면 괜히 시간 끌 거 없이, 루거의 예상을 벗어나는 게 낫지.”

“그야 그렇습니다만…….”
“자네 부하들과 합류해서 함께 수도로 가세. 나 때문에 속도가 늦춰지기야 하겠지만……. 내가 그만큼 보상을
하겠네.”

칼튼은 생각해 봤다. 루이센의 말대로 왕이 위독하다면 수도로 향하는 길이 한시가 급했다. 칼튼이나 루이센이나
현 왕이 죽기 전에 수도로 가야만 했다.

더구나 공작가의 전력을 생각해 보면 며칠 고생을 하더라도 자신의 군대에 루이센이 합류하는 게 더 나았다.
문제는 루이센이 여기서 칼튼의 군대가 있는 곳으로 가는 동안의 고생을 버틸 수 있냐는 것이었다.

“힘든 길이 될 겁니다. 훌륭한 침실은 고사하고 길에서 노숙하는 일이 허다할 거고요. 시중을 드는 하인도
없습니다.”

“괜찮네. 그 정도는.”

루이센의 대답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보다 더 험한 일도 겪었고 고생도 했다. 어떻게 되찾은 신분인데, 또 루거
같은 놈들 때문에 잃을 수는 없었다.

“저희는 낙오되는 일이 많아, 합류하기 위해 정해 둔 규칙이 있습니다. 여기서 대충…… 삼 일…….”

칼튼은 루이센의 가는 다리를 힐끗 보았다. 루이센은 그제야 자신이 알몸이나 다름없다는 걸 기억해 냈고, 바닥에
떨어진 망토를 주섬주섬 끌어다 몸을 가렸다. 칼튼은 아쉽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일주일은 더 걸리겠군요. 이 산속을 벗어나는 데만 일주일입니다.”

칼튼은 루이센의 다리를 못 본 척 말을 고쳤다.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잘 버텨.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자네를 성가시게 하진 않을 거야.”

“……성가시진 않습니다. 공작님은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 차라리 곁에 두는 게 제 맘에 편하기도 하고요.”

“……아니라고…… 할 수가 없군.”

번번이 위기의 순간마다 칼튼이 나타나 구해 줬기에, 루이센은 칼튼이 자신을 골칫거리로 봐도 할 말이 없었다.

“이 여정은 전적으로 자네에게 맡기겠어. 답답해도 도중에 버리지나 말아 주게.”

“그럴 리 있겠습니까. 무사히,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수도로 모실 겁니다.”

칼튼은 정색했다.

“……농담이었는데.”

루이센은 머쓱해져서 중얼거렸다. 몸이 휑한 게, 슬슬 속옷만 입고 마주 앉아 있는 이 상황이 참을 수 없이


어색해졌다.

***

이야기를 마친 뒤, 두 사람은 떨어져서 조용히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루이센은 동굴 벽에 기대어 자신의 몸을


살폈다. 여기저기 욱신거린다 했더니, 다이어울프에게 물려 가며 여기저기 쓸리고 부딪힌 상처로 가득했다.

그래도 당장 치료가 필요할 큰 상처는 없었다. 다이어울프의 흉악한 이빨이라면 루이센의 다리를 절단 내고도
남았을 텐데 찰과상에 그친 걸 보면, 처음부터 루이센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네. 이 정도면 걸을 수 있어.’

튼튼하고 병들지 않은 젊은 몸이었다.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아니, 버텨야 했다. 루이센은 흘깃 칼튼을
바라보았다. 칼튼은 눈을 감고 벽에 기대어 있었다.

‘짐이 되면 안 되니까.’

루이센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피로와 스트레스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동굴 벽에서 한기가 올라와 뼈가
시렸다. 으슬으슬한 기분에 루이센은 몸을 웅크렸다.

이렇게 있자니 떠돌이 시절이 절로 떠올랐다. 외롭고 쓸쓸하고, 절망뿐이던 시절이었다.

루이센은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 시절을 다시는 경험하지 않으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결국은 또
누군가를 피해 도망치는 신세가 되어 버리다니.

사람의 운명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건가.

‘아니야. 아니지. 전이랑은 달라.’

공작가는 건재했고, 공작가의 사람들은 루이센을 원망하지 않았다. 공작가는 온 힘을 다해 루이센을 구하려고 할
것이다. 적이었던 칼튼 역시 지금은 루이센의 편에 서서 루이센을 지켜 줄 것이다. 모든 것이 회귀 전과는
달랐다.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좋은 상황이었다. 루이센이 온 힘을 다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지금까지 잘해 왔으니, 괜찮을 거야.’

그렇게 애써 자신을 위로해 보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쉽게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자신은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나
많았다.

굳이 이런 시기에 그런 복잡한 방법으로 자신을 끌어내려고 한 이유가 뭘까?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벌였지?


온전히 자신의 탓이라고 여겼던 자신의 몰락에 다른 배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니. 누가? 왜? 뭐를 위해서?

그렇지 않아도 미래가 두려웠던 차에, 루거에게 배신당하고, 알 수 없는 적까지 나타나자 더욱더 겁이 나기
시작했다. 막연한 공포는 루이센의 이성을 집어삼켰고, 자꾸만 더 부정적으로 루이센을 몰고 갔다. 그동안
자신이 얻은 성과는 잊히고 추위와 고통만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몸을 웅크리고 팔짱을 껴도 그 쓸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묵묵히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이윽고 해가 떠올랐다. 루이센과 칼튼은 덜 마른 옷을 억지로 꿰어 입고 동굴을 나섰다. 동이 막 터 오르기


시작한 시간이라 사방이 온통 새파랬다. 루이센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숲 한가운데였어.’

사방이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였다. 어디를 둘러봐도 거기서 거기 같아서, 당장 첫걸음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들을 태워 줄 말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목을 축이려고 해도 수통이 없어 풀잎을 핥아 새벽이슬을
먹어야 할 정도였다.

‘어디로 가야 하지?’

시작부터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디로 가야 루거를 피할 수 있지? 어디로 가야 제대로 가는 거지?

‘이럴 때 성자님은 어떻게 하라고 하셨지?’

존경하는 그분의 가르침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 막막하고 암담해.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게 내 미래인가.’

스멀스멀 불안감이 솟아났다. 모든 것이 잘못될 거 같은 기분이 들면서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루이센이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그때 칼튼이 루이센의 어깨를 툭 쳤다.

“?”

“뭘 멍하니 계십니까? 가시죠.”

그러더니 먼저 성큼성큼 앞장서서 갔다. 루이센은 얼떨결에 뒤를 쫓아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가는 건가?”

“네.”

“어떻게?”

루이센이 보기에는 다 똑같아 보였다. 길이랄 것도 따로 없고 어디를 둘러봐도 무성하고 끝없는 수풀뿐이었다.

“제 부하들이 어디쯤에서 절 기다리고 있을지는 짐작이 갑니다. 군이 지날 길이니, 이 일대의 지형은


숙지했고요.”

“그래도 여긴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지 않나?”

“이제 막 해가 떠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저쪽이 동쪽이죠. 방향만 잡으면 나머지는 쉽습니다. 가면서 이것저것
보면서 길을 잡아 가면 되는 거고요.”

칼튼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이걸 믿고 따라가도 되는 건가? 여전히 불안했지만 달리 대안도 없었기에


그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산길을 걸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은커녕, 짐승이 다니는 길조차 없는 숲이었다. 수풀이 무성하여 한
걸음을 가려고 해도 풀을 젖히며 가야 했다. 때때로 풀잎에 손등이 베이기도 했고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다리를
부딪치는 건 예사였다.

어딘가에 부딪힐 때마다 루이센은 허리를 숙이며 통증을 삼켜야 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통증이 찌르르
전해졌다. 복장도 문제였다. 정장은 땀을 조금도 흡수하지 못했고, 구두는 쉽게 미끄러졌다.

‘힘들어.’
그래도 쉬었다 가자는 말은 나오지가 않았다. 쉰다고 금방 나아서 잘 따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칼튼에게 이
이상 성가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묵묵히 다리만 움직여 걷고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루이센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루거는 왜 더블레스 백작령으로 가자고 했지? 단순히 가까워서? 아니면 다른 이유?

‘더블레스 백작이 루거의 배후인 건가?’

루이센은 더블레스 백작을 떠올렸다. 그냥 예의 바르고 공손한 귀족, 정도라는 인상이었다. 숲을 하나 두고


영지가 밀접해 있는 것치고는 교류가 없었다. 더블레스 백작의 나이가 루이센의 아버지뻘로 세대 차이가 났고,
백작이 일찍부터 1 왕자의 수하였다. 루이센과는 접점이 거의 없었기에 그 정도 거리감이 딱 자연스러웠다.

야반도주해서 숲을 지나 더블레스 백작령으로 갔을 때, 더블레스 백작을 만난 것이 루이센이 기억하는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때 어땠더라……?’

한참을 기다려 겨우 만났는데 위로는커녕 응접실에 잠시 가둬 뒀다가 자기 할 말만 하고 내쫓았었다. 당시에는


홀대받아 분노했으나, 그것 말고 충격받을 일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는 잊어버렸던 것 같다. 당시의 대화 내용도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그 정도 일이었던 거 같고.

그러나 루이센은 자신의 기억에 의심이 들었다.

‘정말 특별한 게 없었을까? 그냥 기억을 못 하는 거 아니야?’

세상일과 타인에게 너무도 무심했던 과거의 자신이기에, 영 못 미더웠다.

‘……쓸모가 없어.’

루이센은 자신이 너무도 한심스러워 우울해졌다. 그는 무심코 가슴팍을 더듬었다. 늘 여기에 육포 한 조각을 넣어
뒀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어딘가 흘렸나. 우울할 때는 육포인데. 잃어버린 육포 한 조각이 뭐라고 루이센은 크게
상심했다.

‘배고파. 힘들어. 아파.’

배 속이 허전하니 자꾸만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떠돌이 시절에 고생한 기억들, 그리고 그때 느꼈던 고통이 마치
지금의 일인 것만 같았다.

46 화
‘이렇게 해서 가도…… 내가 뭘 할 수 있지?’

이래 가지고 수도까지 무사히 갈 수는 있을까? 수도에 간다고 무슨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수도에 도착하면
뭘 해야 하지?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날 위해 죽었다고 생각한 놈도 첩자였는데.

당장 배고픈 거 하나 해결 못 하는 내가 뭘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보이기 시작했다.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그런 몸을 지탱하고 있던 마음까지


꺾이자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루이센이 크게 휘청였다.

“읏.”

넘어진다. 지면과 충돌에 대비해 루이센은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땅에 처박히는 일은 없었다.
칼튼이 빠르게 뒤돌아서서 루이센의 팔을 낚아챈 것이다. 칼튼은 루이센을 부축했다.

“아, 이런…….”

루이센의 고개가 기운 없이 푹 아래로 떨어졌다. 칼튼은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을 해야지.’

칼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칼튼이 루이센은 신경도 안 쓰고 가는 것 같아도, 사실 그의 온 신경은 루이센을 향해


있었다. 루이센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 몸이 점점 구부정해지는 것, 전부 의식하고 있었다.

사실 칼튼은 좀 힘들어지면 루이센이 도와 달라고 할 줄 알았다. 아직 초반이니 속도를 유지하며 루이센의 체력과
인내심을 확인해 보는 중이었다. 루이센이 더는 못 가겠다고 하면, 그때는 그 핑계로 업고 가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루이센은 넘어질 지경이 되어서까지 힘들다는 말 한마디, 내색 한 번을 안 하는 게 아닌가.


루이센이 이 정도까지 버틸 줄은 칼튼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앞으로 조심하겠네.”

루이센은 눈을 깜박였다. 눈빛이 멍한 걸 보고 칼튼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보기보다 잘 버틴다고 말하더니,


진짜네. 아니, 이건 정도를 모르는 건가?

“잠깐 쉬었다가 갑시다.”

“아니. 괜찮네. 그냥 가지.”

“아뇨. 이 상태로 걷다가 더 크게 다치십니다.”

“……알겠네.”

칼튼의 제안에 루이센도 거절하지 않았다. 칼튼은 작은 바위 위에 루이센을 앉혔다.

“잠깐 혼자 계실 수 있겠습니까?”

“어디 가게?”

“네. 잠깐. 금방 돌아올 겁니다. 어디 가시지 말고 얌전히 계세요.”


“그래. 걱정 말고 갔다 와.”

루이센은 흔쾌히 답했지만 칼튼은 못 미덥다는 얼굴이었다.

“이상한 게 있다고 쫓아가지 마시고 여기 가만히 계시는 겁니다. 괜히 돌아다니지 마시고요. 이상한 게 나타나면
절 꼭 부르세요. 혼자 뭘 하려고 하지 말고. 아시겠습니까?”

“내가 어린애인 줄 아나?”

“……아무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어?

지금 대답을 피했어? 루이센이 눈을 부릅떴다. 칼튼은 끝까지 신신당부를 했다. 루이센은 팔짱을 끼고 뚱하게
칼튼이 멀어지는 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숨을 크게 골랐다.

‘휴, 앉으니까 살겠네.’

어디 쏘다닐 힘도 없었다. 발이 아파 죽겠다. 루이센은 신발을 벗고 발을 주물렀다.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맑은 소리가 들리고 그 사이사이 풀벌레의 노랫소리가 퍼져 나갔다. 사람도
짐승도 다니지 않아 길도 없는 숲속에 홀로 가만히 앉아 있자니, 마치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이 들었다.

과거의 자신은 기억하던 것보다 더 안일하고 나태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 이래서야 앞으로의 여정을 잘 갈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 루이센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고 있는데 칼튼은 금방 돌아왔다.

“이거 드세요.”

칼튼이 가져온 것은 어린애 손바닥처럼 생긴 약초였다.

“이건 살살풀이지? 여기서도 자라는 모양이지?”

살살풀은 진통과 해열 효과가 있는 풀이었다. 루이센은 외팔의 순례자가 가르쳐 줘서 알고 있던 약재였다. 외팔의
순례자를 만났을 무렵 루이센의 건강은 심하게 망가진 상태였기에, 통증을 줄이라고 외팔의 순례자가 살살풀을 캐
오곤 했다.

“맞습니다. 공작님이 이걸 어떻게 아십니까?”

가난한 서민들이 약사도 의사도 찾아가지 못해 캐 먹는 풀이기에, 대다수 귀족은 살살풀을 몰랐다.

“아는 사람이 줘서 먹어 봤지.”

“이걸요? 그 사람도 특이하네요. 공작님 같은 분께 이런 걸 주다니. 의사를 부르면 될걸요.”

“의사를 부르기 어려울 때가 있어서……. 내가 곱게 자라긴 했지만 또 한 고생 했던 때가 있었지.”

빈털터리로 왕국을 떠돌 때가 말이지. 루이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칼튼은 헉, 하고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루이센에게 의사도 못 부를 만한 힘겨운 시간이라면, 바로 그 ‘
가신들에게 학대받던 어린 시절’이 아니겠는가.

‘얼마나 구박을 받았으면 어린 애가 아프다는 소리도 못 하고 풀을 뜯어 먹어?’

공작가의 가신들 좀 더 괴롭힐 걸 그랬다고 칼튼은 후회했다. 다음에 만나면 가만 안 두겠다고 다짐했다.

칼튼의 이런 오해를 알 리 없는 루이센은 살살풀을 받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쓰면서 신맛에 풀냄새가 진동하니
좋은 맛은 아니었다. 꾸역꾸역 삼키자 속이 안 좋았다. 어제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맛없는 걸
먹으려니 눈물이 났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자, 루이센은 더없이 처량 맞아졌다. 칼튼은 더는 가만히 지켜볼 수 없어 툭, 하고 말을


꺼냈다.

“……공작님 잘못이 아닙니다.”

“어?”

“누구나 힘든 때가 있는 법이죠. 그리고 루거의 일도 그렇습니다.”

“……? 난 괜찮은데.”

안 괜찮은 얼굴로 자꾸 괜찮다고만 하니, 칼튼은 속이 답답해져 저도 모르게 말이 빨라졌다.

“괜찮긴요. 그런 분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얼굴을 하고 계셨습니까? 보는 사람도 없는데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걷는 내내 안 좋은 생각만 하셨죠?”

“어…….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얼굴에 다 티가 나십니다. 루거 놈 때문인 거 같은데……. 뭐가 뭔지 알았으면 뒤통수를 맞으셨겠습니까.”

루이센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 표정이 울음을 참는 것 같아 보여 칼튼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사실에 얼른 덧붙였다.

“그쪽에서 작정하고 숨겼으니 뭐가 뭔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저도 그놈이 언젠가 거하게 일을 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나름 자신이 달변가라고 생각했는데, 혀가 뻑뻑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한 수작을 부리더군요.”

“몬스터를 부리는 거?”

“예. 그딴 것도 하는 놈이 작정하고 속이는데 어떻게 당하겠습니까? 놈이 공작님을 죽이려는 생각이 없어서


다행이지요. 그놈이 작정했으면 공작님은 한 방에…….”

칼튼은 자신의 입에 주먹을 쑤셔 박고 싶었다. 뭘 이딴 식으로 나불대지? 뭐? 죽이려고 하지 않아 다행이야?


이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건가 시비를 털려고 하는 건가.

“살아 있어야 루거 놈 대가리를 깨죠. 속은 게 공작님 탓도 아니고……. 아무튼 제 말은……. 무사하셔서


다행이라는 겁니다.”

어떻게든 말을 마치긴 했는데…….

루이센의 표정을 보기가 무서워 칼튼은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칼튼이 말을 멈추자 정적이 흘렀다.
너무너무 어색했다.

칼 하나 들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게 쉽겠어.

위로는 정말 어려운 거라는걸 칼튼은 난생처음 깨달았다. 언제 남을 위로할 일이 있었어야 말이다. 대신 그는


루이센이 좋아하는 걸 내밀었다.

“오다가 보여서 챙겨 왔습니다. 드세요.”

칼튼은 땅속의 노파 두 알을 내밀었다. 신경 써서 햇빛에 노출되지 않도록 품속에 챙겨 왔던 게 분명해 보였다.

“!”

루이센이 눈을 둥글게 떴다.

땅속의 노파다!

먹을 거다!

밥이다!

순간 칼튼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이리 귀한 것을……. 정말, 내가 먹어도 되나?”

루이센은 목소리를 떨 정도로 감동했다. 아니, 그 정도로 귀한 건 아닌데. 루이센이 너무 감동하니까 오히려
칼튼이 머쓱해졌다.

‘아무 말 하지 말고 이것부터 쥐여 줄 걸 그랬나.’

어째 자신의 말보다 먹을게 더 효과가 좋은 것 같았다. 그래도 효과가 있으니 다행이긴 하다만…….

“그럼 이걸 저 먹으려고 가지고 왔겠습니까? ……아직 불을 피우긴 어려울 거 같으니 생으로 드시죠.”

나를 위해 찾아온 거구나. 루이센은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라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루이센은 땅속의 노파를 한입 베어 물었다. 와작, 하는 소리와 함께 달달한 즙이 혀를 적시자 루이센은 전율했다.
땅속의 노파를 생으로 먹기 찜찜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루이센은 이 맛도 좋아했다. 특유의 단단한 식감과
은은하게 퍼지는 단맛, 그리고 생으로 먹을 때만 느껴지는 특유의 향긋함이 맛있었다.

루이센은 순식간에 땅속의 노파 하나를 다 먹어 치웠다. 그는 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 날숨과 함께


우울감이 몸에서 빠져나오는 거 같았다. 배가 든든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이 나면서 낙관적인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안 된다니까.’

가슴팍에 땅속의 노파라도 하나씩 품고 다녀야겠다고, 루이센은 다짐했다.

칼튼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도 생겼다. 혼자 왕국을 떠돌면서 몇 번이나 죽을 뻔하고, 세상 쓴맛을 다 봤다.
게다가 진짜 죽기까지 했다. 그런 루이센에게 칼튼의 서툰 위로는 남다르게 와닿는 점이 있었다.

“자네 말이 맞아.”

“네?”

“루거가 날 죽이려고 했으면 이미 저세상 사람이겠지. 안 그래서 정말 다행이야.”

죽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과거로 돌아와 잘살아 보겠다고 아등바등하니, 회귀 전에는 모르고 죽었던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지 않았나. 뭐가 돼도 되겠지. 수도로 가서 어떻게 할지는 수도에 가 봐야 아는 거고! 뭐 언제는
자신이 잘나서 공작령을 구하고 여기까지 왔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루이센을 위해 약과 먹을 것을 구해 주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한창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


있느라 와닿지 않았지만, 지금 루이센에게는 칼튼이 있었다.

칼튼이야말로 자신이 회귀해서 가장 크게 바뀐 관계가 아니었던가. 지금 루이센은 칼튼에게 쫓기는 게 아니라


칼튼과 함께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회귀 전과 달라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불안감이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일순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살살풀의 효과가 도는 덕분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프지 않고
배가 부르고 그래야 정신도 건강한 법이었다.

“예?”

칼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비꼬는 건가? 저절로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루이센은 너무도 개운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47 화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위로 고맙네. 자네 덕에 마음이 빨리 정리가 되었어.”

칼튼은 자신의 말 어디에 감명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보다는…… 땅속의 노파가 더 효과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루이센이야 여러모로 특이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가 더 효과가 있었든 간에 루이센이 기운을
차렸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칼튼의 입술도 호선을 그렸다.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자네가 없었으면 난 루거한테 납치되어 있을걸? 루거, 개자식. 내가 준 밥을 처먹어 놓고 내 통수를 쳐? 그거


아나? 그 자식 봉급도 엄청나게 받아 갔다고. 다음에 만나거든 다 토해 내게 해 줄 테다.”

루이센은 주먹을 쥐고 허공에 날렸다.

“루거뿐만 아니라, 루거의 뒤에 있을 누군가도 반드시 찾아내어 복수할 거야.”

루이센은 다짐했다.

“찬성입니다. 그놈을 족칠 때 저도 불러 주셔야 합니다.”

“자네도?”

“네. 그 자식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데 저도 끼워 주셔야죠.”

이제 보니 칼튼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바짓단은 진흙투성이에 머리는 헝클어졌고 수염도 삐죽삐죽 자라고 있었다.
수도에는 언제 도착할지 모르고, 부하들과 떨어졌으며, 아끼던 말을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칼튼로 루거와
루거의 배후에게 원한을 갖기 충분했다.

“좋아. 자네도 껴.”

루이센은 손을 내밀었고 칼튼은 흔쾌히 맞잡았다. 흙 묻은 손이지만 피차 신경 쓰지 않았다. 어깨가 떨어질


정도로 크게 악수를 하고 손을 놓았다. 루이센은 남은 땅속의 노파 하나를 반으로 나누어 한쪽을 칼튼에게 건넸다.
이럴 땐 술잔을 나누는 법이지만 이거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칼튼은 얼떨결에 땅속의 노파를 받았다.

칼튼은 땅속의 노파를 먹을 생각이 없었다. 먹어도 괜찮다는 걸 알지만 기분이 영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하루
이틀 그냥 굶고 말지. 근데 막상 루이센이 손에 쥐여 주니까 됐다고 전처럼 매몰차게 거절하는 말이 안 나왔다.

“이거 나눠 먹고 같이 힘내자!”

루이센은 이어서 루거를 잡으면 어떻게 할지, 루거의 배후가 더블레스 백작인 거 같다는 의심 같은 것을 두서없이
쏟아 냈다. 루이센은 우울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표정이 어두워지다가, 땅속의 노파를 한입 베어 먹고는 다시
밝아졌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칼튼도 땅속의 노파를 한입 먹었다. 루이센이 맛있게 먹고 있는 걸 보자니 거부감도 안
들었고 맛도 사실 루이센이 극찬하는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

땅속의 노파를 먹고,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타고 갈 말이 없으니까 이동 속도가 너무 느렸다. 걷고 또 걷고.


그냥 계속 그렇게 걸었다. 그러다가 루이센이 한계일 즈음에 칼튼이 쉬자고 했고, 루이센이 앉아서 쉬는 동안
칼튼은 물이나 먹을 것을 구해 왔다.

루이센의 몸은 여전히 피로했지만 칼튼이 손을 잡아 준 덕분에 조금 나았다. 루이센이 무심코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 때면, 칼튼이 손을 꾹 쥐고 당기는 바람에 더 깊이 빠져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해가 질 무렵에는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칼튼이 버려진 짐승 굴을 찾아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굴은 좁았고 불을 피울 수 없었기에 칼튼과 루이센은 망토 하나를 나눠 덮고 몸을 꼭 붙인 채로 잠이 들었다.

루이센은 칼튼에게 엉기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면 칼튼에게 안기다시피 잠들어 있었다. 산속이라
겨울이 빨리 찾아오는지, 밤이 춥긴 추운 모양이라고 루이센은 생각했다.

그렇게 무작정 걷기만 하는 게 삼 일째 되던 날.

루이센은 지칠 대로 지쳤다. 아무리 칼튼이 잘 챙겨 준다고 해도 강행군이었다. 두 사람은 걷는 내내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루이센이 휘청이거나 할 때마다 칼튼이 루이센을 단단히 지탱해 주었다. 한시도 지체하지 않겠다는
루이센의 의지가 강하게 전해졌다.

‘보기보다 근성이 있어.’

생긴 건 세상에서 제일 까탈스럽게 생겨서 굳건한 면이 있었다. 인내심도 있고 근성도 있었다. 그 사실이 칼튼의
입가에 웃음기가 서리도록 했다.

그렇게 노력은 한 끝에, 두 사람은 드디어 길다운 길을 발견했다. 두 명이 나란히 서면 꽉 찰 정도로 좁은


길이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다니는 길이었다.

“이 길로 쭉 가면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산도 벗어나는군.”

“이쯤 왔으니 추격은 완전히 벗어났다고 봐야겠군요.”

“그럼 불을 피울 수 있겠군?”

루이센이 눈을 반짝였다. 추격자가 있을까 봐 그동안은 불을 피우지 않았다. 어제, 루이센이 너무 힘들어하니까
불을 피울 수 있을 만큼 가면 칼튼이 사냥을 해서 요리를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약속대로 저녁에는 고기를 잡아 드리죠.”

“좋았어!”

루이센은 두 손을 꽉 쥐며 작게 환호했다. 루이센이 웃으니 칼튼도 무심코 따라 웃었다. 야생동물을 잡아 봐야


뭐가 맛있다고 저렇게 좋아하는지.

“당장은 땅속의 노파를 먹어야 하지만요.”

“그래도 이게 있는 게 어딘가?”

루이센은 자켓으로 소중히 감싸 둔 땅속의 노파를 꺼냈다. 배가 고파 우울해지는 일이 없도록, 미리 캐서 햇빛에


닿지 않게 잘 챙겨 둔 것이었다.

그는 땅속의 노파를 반으로 나누어 하나는 칼튼을 주고 하나는 자신이 먹었다. 칼튼은 익숙하게 루이센에게
받아서 땅속의 노파를 먹었다. 사실 아직도 기분이 별로지만 루이센이 먹는 걸 보면서 같이 먹는 것 정도는 할
만했다.

“길이 있으니 마을도 있을 겁니다. 한번 찾아볼까요?”


“사람들 눈에 띄어도 괜찮을지 모르겠네. 나는 딱 봐도 범상치 않잖아? 이런 얼굴은 한 번 보면 잘 못
잊는다고.”

자칫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사실이었다. 하루 종일 땀 흘리며 걷고, 흙바닥에 누워 자고, 제대로


씻지도 않았지만 루이센의 얼굴은 여전히 희고 고왔다. 그의 금발은 반짝거렸고. 누가 봐도 귀족이라, 오히려
이런 꼴로 산속을 걷고 있는 게 이상해서 눈에 띄었다.

“그것도 그렇네요. 얼굴을 가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칼튼도 순순히 인정했다.

“가진 게 없으니 말이지.”

루이센과 칼튼의 옷에는 얼굴을 가릴 만한 후드가 없었다. 그렇다고 망토를 뒤집어쓰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마을에 들르는 것이 좋을 거 같은데요.”

조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지붕과 벽이 있는 곳에서 따듯한 음식을 먹으면서 쉬어야 할 거 같았다. 루이센이 점점
힘들어하는 게 보였다. 숲속에서는 쉬어도 제대로 쉬는 게 아닐 것이다. 상황 때문에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지만
칼튼은 루이센이 걱정되었다.

‘업히라고 해도 듣질 않고. 하다못해 말이라도 있었다면 좋겠지만.’

그 상황에서는 최선이었지만, 성인 남자 둘을 태우고도 거뜬한 자신의 군마를 잃어버린 것이 꽤 속이 쓰렸다.


그게 있었다면 지금보다 두 배는 속도가 빨라졌을 텐데 말이지.

‘루이센이 자는 동안 마을을 찾아서 조랑말이라도 훔쳐 올까?’

길 위는 조용하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추는 것이 아름답고 루이센이 땅속의 노파를
먹는, 아작아작하는 소리가 풀벌레 소리에 어우러졌다. 빈털터리로 알 수 없는 세력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상황이라기엔 너무도 평화로워, 꼭 산책로라도 걷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칼튼은 그 잔잔함 속에서 이질적인 기척을 감지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걸 느끼자마자
칼튼은 루이센의 손을 잡아당겨 루이센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고 지체 없이 칼을 뽑았다.

“?”

루이센은 어리둥절했다. 한 박자 늦게 커다란 나무 사이에서 남자 다섯 명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기세 좋게 튀어나온 것과 달리, 그들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잘 먹지 못했는지 말랐고, 병이 든 사람처럼 안색이


어둡고 입술은 거칠었다. 퀭한 두 눈에는 핏발이 서서, 무척 흉흉해 보였다. 그들은 도끼, 곡괭이, 삽 같은
것들을 무기 삼아 들고 칼튼과 루이센의 앞을 막아섰다.

“머, 멈춰!”

“살아서 이 길을 지나고 싶으면 가진 걸 다 내놓아야 할 거야!”

“그, 지금 먹고 있는 것부터 이리로 내놔!”


남자들이 외쳤다. 루이센은 멀뚱히 그들을 바라보았고 칼튼은 피식, 웃었다.

“뭔가 했더니 그냥 강도네요. 그냥 지나가죠.”

칼튼은 가소롭다는 듯이 검을 검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무기까지 들 필요 없는 상대였다. 그러자 강도들은 크게


동요하며,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며 속닥였다. 그 속닥이는 소리는 루이센에게도 아주 잘 들렸다.

“지나간다는데 어쩌죠?”

“막아야지!”

“그치만 저 사람 엄청 쎄 보이는데…….”

“우린 다섯이고, 저쪽은 둘이야! 게다가 먹을 걸 가지고 있잖아!”

지금 다 들리게 뭐 하는 거지?

그들은 강도보다는 농사꾼에 더 어울렸다. 입고 있는 옷이며, 농기구를 든 것이며. 아니, 농사꾼이 겨울을
준비해야지, 왜 이런 산속에서 강도짓이란 말인가. 심지어 사람들이 자주 오가지도 않아서 강도짓 하기에도
어려운 길 위에서.

“너무 어설픈데.”

너무도 어리숙한 모습에 루이센마저도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초짜인가 봅니다.”

칼튼은 강도들을 쭉 훑어보다가 한 사람을 지목했다. 루이센과 비슷한 체격의 남자였다.

“저놈 신발 어떻습니까?”

“어? 편해 보이네.”

루이센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갑자기 신발이 왜?

“그럼 저걸로 하죠.”

“뭘 어쩌려고?”

칼튼은 씨익, 웃으며 강도들에게 다가갔다.

48 화
루이센은 칼튼이 뭘 하려고 하나 가만히 지켜보았다.

“가, 가까이 오지 마!”

강도들은 무기를 마구 휘둘렀다. 그러나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칼튼의 앞에 그들은 너무나 왜소해
보였고, 그들이 든 무기도 어린애 장난감 같았다.

“야.”

칼튼은 보란 듯이 주먹 쥔 손목을 돌렸다.

“너네 가진 거 다 내놔.”

칼튼은 강도들에게 달려갔다. 루이센은 머리를 짚었다.

그러니까 지금 강도들에게 역으로 강도짓을 하겠다고.

말릴까.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루이센은 눈치껏 멀찍이 뒤로 물러섰다.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사실 발이
너무 아프기도 했다.

‘그러게 상대를 보고 덤벼야지…….’

루이센은 저 어설픈 강도들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칼튼은 주먹만으로 강도들을 상대했다. 칼을 피하고 강도의 팔을 잡아 비틀었다. 강도가 든 도끼로 날아오는
죽창을 쳐 내고 강도를 던져 버리고 어안이 벙벙한 놈을 차례로 때려눕히고 쓰러뜨렸다.

농사꾼치고는 체격이 좋은 성인 남자 다섯도 칼튼 한 명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칼튼은 봐주는 법이 없었고,


강도들은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패대기쳐지다가 쓰러졌다.

“사, 살려…… 살려…….”

“닥치고 저 구석에 가 있어.”

칼튼은 강도를 때려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한 강도의 발에서 신발을 벗겨서 루이센에게 가져왔다.

“신으세요. 좋은 신발은 아니지만 오래 걸으려면 이게 더 나을 겁니다.”

“음…….”

신발 주인이 산송장처럼 축 늘어져 자신의 신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쯤 되니 누가 강도고 누가 선량한 시민인가.
루이센은 의문이 들었다.

“그러게…… 강도짓은 왜 해 가지고…….”

강도들 사정을 봐줄 처지가 아니기에, 루이센은 애써 외면하며 신발을 갈아 신었다. 구두보다는 강도의 부츠가
훨씬 편했다. 산에 사는 사람들의 신발이라 튼튼하고 밑창이 두터워 구두보다 나았다.

칼튼은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놈들이 사는 마을이 이 근처에 있는 모양입니다. 오늘은 거기서 밤을 보내죠.”


강도들을 두들겨 패면서 그건 또 언제 알아냈지? 루이센은 슬쩍 강도들을 바라보았다. 강도의 마을에 가는 게
어쩐지 찜찜했다.

“괜찮을까?”

“어차피 우리 얼굴을 보았으니 입막음을 해야 합니다. 산적 놈들이니 처리야 쉽죠.”

처리라니. 그 말이 마치 어디다 묻어 버리겠다는 듯이 들렸다. 그것은 루이센만의 오해가 아닌지 강도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칼튼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센도 자신이 슬슬 한계라는 걸 알아서, 타협을
하기로 했다.

칼튼은 쓰러진 강도에게 다가가 발로 툭툭 쳤다.

“너희 마을로 안내해.”

“마, 마을이요? 안 됩니다! 거기 가면 큰일이 납니다!”

강도들은 마을로 가자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거기가 네놈들 본거지라서? 뭐 강도 대장이라도 있나 보지?”

“아니요. 아닙니다, 나리. 저희는 원래 이 산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입니다요. 마을에는…… 마을은 정말


위험합니다…….”

강도들의 얼굴에는 분명히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자신들이 사는 마을에 데려가기 싫어한다기보다는, 정말
마을에 있는 무언가에 겁을 단단히 먹은 것 같았다. 자기들이 사는 마을에 무서울 건 뭐지?

“마을에 뭐가 있길래?”

루이센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강도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말을 해도 되나 망설였다.

“대답 안 해?”

칼튼이 윽박지르자 강도들이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몬스터, 몬스터가 있습니다!”

“몬스터?”

“웬 놈이 몬스터를 끌고 와서 우리 마을을 차지했습니다요! 마을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강도는 눈물을 흘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루이센과 칼튼은 의미심장하게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대충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칼튼 역시 같은 걸 느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좀 천천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 봐.”

루이센은 강도들을 달랬다. 강도들은 울면서 앞다퉈 이야기를 했다. 물꼬가 트이자 강도들은 울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정리하자면, 강도들의 사연은 이랬다.
그들은 원래 강도가 아니라, 산속에 사는 화전민이었다고 한다. 어디에나 볼 수 있는 작고 소박한 마을이었다.
그런데 열흘 전, 웬 남자 하나가 몬스터를 끌고 나타났다. 그는 아무 이유도 없이 몬스터에게 마을을 공격하게
했다.

“사람이 몬스터에게 명령을 한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칼튼이 강도들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더 험악하게 윽박질렀다.

“정말, 정말입니다요. 저희도 보고 안 믿기는데, 정말 놈이 그랬습니다. 우리 마을을 가리키면서 공격하라고


했다고요.”

이 다섯 남자는 운 좋게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로 너무 두려운 나머지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달리 갈 곳이 있는 게 아니라서 마을 주변만 맴돌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먹을 것이 다 떨어져 손가락만 빨고 있을 때, 칼튼과 루이센이 길 위에 나타났다. 그들은 루이센이


무언가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순간 이성을 잃어 강도짓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다고 강도짓을 하면 쓰나. 차라리 가까운 마을로 내려가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받았어야지.”

루이센의 질책에 강도들의 표정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그게…… 저희가 유민이라…….”

강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처지를 듣고, 루이센은 탄식했다. 유민은 어느 영지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전쟁, 폭정을 피해서, 농사가 망해서, 범죄를 짓고 도망쳐서 유민이 되었다.

유민이 생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으나, 대개 사람들은 유민을 꺼려 했다. 태어난 마을에서 죽을 때까지 사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기에, 신분이 불분명한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다. 유민들이 어딘가 정착을 하고 싶어
해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산이나 숲에 몰래 정착해 사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명백한 불법이라, 이들이 어디에도 가지 못한 동기가
확실했다.

루이센도 왕국을 떠돌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 심정이 이해가 가서 더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어떤 남자가 몬스터를 끌고 왔다고?”

“예. 그자가 명령을 하니까 몬스터들이 우르르 마을로 들이닥쳤습니다.”

강도의 이야기는 루거를 떠올리게 했다. 사람이 몬스터를 부리는 일이 흔하지 않으니까. 루이센은 무심코 칼튼의
옷소매를 쥐며 그를 바라보았다.

‘루거랑 비슷하지?’

칼튼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센은 다시 강도에게 물었다.

“어떤 몬스터였지?”
“이름 같은 건 잘 모르겠는데……. 몸집이 황소만 하고 꼭 개처럼 생겼던 것 같습니다요.”

“개? 늑대처럼 생긴 건 아니고?”

“예예. 늑대 같기도 하고. 아주 무시무시하게 생긴 데다 이빨은 또 얼마나 날카롭던지…….”

묘사를 들어 보니, 다이어울프가 맞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게 얼마 전이었지?”

“한 열흘…… 정도 된 거 같습니다요.”

“열흘이라…….”

열흘이라면 루이센이 다이어울프의 습격을 받기 훨씬 이전이었다.

루이센은 칼튼의 옆으로 바짝 붙어 강도들에게 들리지 않게 속닥거렸다.

“사실일까?”

“……거짓말하는 거 같진 않습니다.”

으음. 루이센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강도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루거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가기엔…… 마음에 걸리는데.”

“저도 그렇습니다. 저 사람들 마을에 가 보는 게 어떨까요?”

“몬스터가 있으면?”

“제 생각에는 마을을 공격한 몬스터는 이미 떠났을 거 같습니다. 오는 내내 늑대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없거든요.”

“아. 그것도 그렇군.”

다이어울프는 밤마다 울어 대니 말이다. 돌이켜 보면 루이센도 늑대 울음소리 비슷한 걸 들은 적이 없었다. 혹시


몰라 강도들에게 물으니 그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루이센과 칼튼은 강도들의 마을에 가 보기로 결정했다. 다섯 명의 강도들을 길잡이로 삼아 그들은 마을로 향했다.
마을로 가면서 루이센은 강도들에게 이것저것 캐물었다.

“몬스터를 끌고 온 남자. 그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봤나?”

강도들은 루이센을 어려워하면서도 착실히 대답했다.

“제대로 보진 못했습니다……. 순례자 같은 옷을 입어서 얼굴이 안 보였어요. 체구가 작았던 것 같은데…….”

“뭔가 기분 나쁘고 음침했던 기억이 납니다. 몬스터들이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데 히죽거리고 있었습니다요.”

몬스터를 끌고 나타난 남자는 묘사를 들어 보면 루거와 많이 달랐다. 루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인가?


“몬스터가 언제 공격할지도 모르는데 잘도 봤군?”

“그날따라 안개가 너무 짙어서 옆 사람도 잘 안 보이는데…… 그 남자는 잘 보이더라고요. 꼭 안개가 비켜 가는


것처럼.”

“안개?”

“예. 평소에 안개가 끼는 곳도 아니고 해서 다들 이상하다……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안개…….”

그놈의 안개는 또 여기서 튀어나와? 비너드가의 사절단이 봤다는 안개, 루이센이 다이어울프에게 습격받을 때 본
안개, 마을이 습격당할 때 함께 나타났다는 안개.

다 연관이 있는 것 같아 루이센은 심란해졌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일행은 강도들이 도망쳐 나왔다는 마을에 도착했다.

49 화

마을은 루이센의 키만큼 높은 목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산속에서는 보기 드물게 훌륭한 목책이었다.

“원래 몬스터가 많은 지역인가?”

“아니요. 이 주변이 깊은 산이다 보니 사나운 짐승이 많아 높게 쌓은 겁니다요. 몬스터는…… 그냥 고블린만


가끔 보였고요.”

루이센은 강도들과 밖에서 기다리고 칼튼이 먼저 가서 마을 안을 정찰했다.

마을 안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칼튼의 짐작대로 몬스터 무리는 이미 마을을 떠난 뒤였다. 칼튼이 괜찮다고


신호하자, 루이센과 강도들은 뒤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 안은 폐허나 다름이 없었다. 농기구나 잡동사니가 길에 널려 있고 부서진 집들도 보였고 여기저기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강도들은 울면서 허둥지둥 자신의 집을 찾아 달려갔고, 칼튼과 루이센은 함께 마을을
살펴보았다.

“칼튼 경, 여기.”

루이센이 건물의 나무문을 가리켰다. 반쯤 부서진 날카로운 발톱으로 여러 번 긁은 흔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문을
닫고 숨자 문을 부수려고 긁은 것 같았다.

그 이후에도 두 사람은 네발 달린 짐승 발자국과 이빨 자국, 털 같은 것을 찾았다.


“다이어울프 같지?”

“네. 다이어울프 같습니다. 땅에 흘린 피 상태를 보아하니, 강도들 말대로 열흘가량 지난 게 확실합니다.”

“……열흘이면…… 내가 습격당하기 칠 일 전이군. 날 공격한 놈들이랑 같은 놈들일까?”

“다이어울프가 두 무리가 있는 게 아니라면…… 여길 습격한 다이어울프와 공작님을 습격한 다이어울프가 같은


놈들이라는 겁니다만…….”

루이센과 칼튼이 산을 빙 돌아 이동하느라 그렇지, 거리만으로 놓고 보면 루이센이 습격당한 장소와 이 마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히 오갈 수 있는 거리였다.

게다가 사람의 명령에 따르는 몬스터라는 게 그렇게 흔할 거 같지 않았다. 루이센을 습격한 몬스터 무리와 이
마을을 습격한 몬스터 무리가 같다고 보는 쪽이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열흘 전이면 루거는 나랑 공작성에 있었어. 이 마을에 다이어울프를 끌고 온 건 루거일 수가 없지.”

“루거가 아니라면, 한패인 다른 놈이 있는 걸까요?”

“그럴 수 있지.”

정황상으로 보면 루거에게 패거리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루거는 루이센의 짐을 꾸리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때 패거리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자신을 공격할 준비도 함께
했던 건가.

“어쩐지 너무 바쁘다 했지.”

빌어먹을 자식. 그래 놓고 힘들다고 나한테 징징거렸어? 루이센의 속에서 불이 끓어올랐다. 칼튼은 루이센의
어깨를 토닥였다. 후, 길게 숨을 몰아쉬며 분을 삼키는데 갑자기 강도들이 뛰어왔다. 그들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얼빠진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좀 알아듣게 이야기해 봐. 뭔데?”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뭐가?”

칼튼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강도는 힉, 하고 겁을 먹으며 하얗게 질렸다.

“핏자국은 있는데 아무도 안 보여요!”

“몬스터가 나타났으니, 살아있는 사람들은 다 도망쳤겠지.”

“아니, 그게 아니라……. 죽은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서 온 강도가 횡설수설하고 있는데 뒤따라 달려온 다른 사람이 외쳤다.

“시신이, 시신이 안 보여요!”


“무슨 소리야?”

루이센이 되물었다. 다른 강도들도 혼비백산해서 루이센과 칼튼 쪽으로 몰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사람, 죽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몬스터가 습격한 후, 그들은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몬스터에게 죽은 마을 사람들의 시신이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핏자국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시신은 없다는 게 그들이 당황한 이유였다.

“누가 치운 거 아닌가? 다른 사람들도 살아 있을 수 있잖아.”

루이센이 반론을 제기했다. 강도들은 내심 자신들 외에 다른 사람들도 살아 있기를 바랐기에 루이센의 논리 없는


주장에도 쉽게 설득되었다.

“그, 그런가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강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칼튼이 루이센에게만 들리게 답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이 치운 게 아닐 겁니다. 시신을 옮긴 흔적은 없거든요.”

강도들이 말하는 이상한 점을 칼튼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마을 사람이 돌아와 시신을 옮긴 거라면, 바닥에 끌린 자국이 나거나 핏자국이 길게 나야 하는데 여긴 그런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럼?”

“적어도 제 발로 일어나 걸어가진 않았겠죠.”

“음…….”

물려 갔거나 먹혔거나.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은 잔인한 이야기였다. 루이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걸 보고


칼튼은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 벌어진 마을에 오래 남아 있어 좋을 게 없었다.

“여긴 더 볼 게 없을 거 같습니다. 이만 출발하시죠. 해가 지기 전에 머물 곳을 찾아야 합니다.”

칼튼의 조언에 루이센은 마을을 쭉 둘러보았다. 작고 조악한 마을이었지만 애정을 가지고 정성을 들여 가꿔 온
마을이라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더욱 이 마을에 닥친 참상이 애달프게 다가왔다.

“……알겠네.”

루이센도 이 마을에서 일어난 참사가 안타까웠으나, 당장 그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이어울프가 여길


지나갔다면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쫓기는 신세에, 칼튼 없이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
누굴 도울 처지가 아니었다.

“아시는 게 있으면 뭐든 알려 주십쇼. 제 부모가 놈들에게 죽었습니다. 누가 원수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칼튼과 루이센이 속닥거리고 있으니, 강도들이 조심스레 물어 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과 이웃 그리고 가족을 잃은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능력이 되지 않아 마을 주변을 떠돌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한시도 편했던 적이 없었다.

간절한 그들을 바라보며 루이센은 미안함에 목이 멨다. 나를 노릴 거면 나만 공격하지. 왜 애꿎은 마을을


공격한단 말인가.

“우리도 아는 게 없어. 설령 있다 해도 모르는 게 좋을 거야.”

칼튼은 단호하게 답했다. 모진 것 같지만 그의 대응이 현명했다. 남부의 대영주와 그를 노리는 정체불명의 세력이
얽혀 있는 일이었다. 범상치 않은 힘으로, 몇 년씩 치밀하게 루이센을 노린 놈들이니, 평범한 세력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때로는 아는 것만으로 목숨을 앗아 가는 진실도 있는 법이라는 걸 칼튼이나 루이센이나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대신 루이센은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더 말해 주지 못해 미안하네. 너무 걱정하지들 말게.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계속 산속에서 지낼


생각인가?”

“……떠나야지요. 그 몬스터 놈들 때문인지 산속에 동물이라곤 씨가 말랐으니……. 먹고살 길이 없습니다.”

“갈 데는 있고?”

“……없습니다.”

강도들은 부끄러운 듯 대답했다.

루이센은 갈 곳 없는 그들의 신세가 남 일 같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십수 년간 일군 터전을 잃고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그 심정이 오죽 처참할까. 비록 강도질을 하려다 만나게 된 인연이라지만 그냥 무시하기에는 마음이 쓰여,
약간의 조언을 주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서 들판으로 나가게. 거기서 남쪽으로 보름 정도 걸으면 마을이 하나 나올 거야. 최근에
인구가 많이 줄어 영지민을 받고 있으니 자네들도 받아 줄 거네.”

루이센이 공작령에 대해 공부하면서 어떤 마을은 일손이 부족해 힘들어한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그곳을 알려 준


것이었다. 루이센은 또 땅속의 노파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이제 굶주림에 지쳐 강도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루이센에게는 대단치 않은 정보였으나, 강도들에게는 아니었다. 강도들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가며 감사해했다.

“감사합니다, 나리, 감사합니다.”

또다시 목적 없이 길거리를 떠돌게 생긴 그들에게는 목적지가 생긴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더구나 딱 봐도


귀족 같아 보이는 루이센이 보증하는 것이었으니까.

루이센이 좋은 역할을 해내자, 이번에는 칼튼이 나섰다.

“우릴 여기서 본 것은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될 거다. 만약 발설할 시에는…….”


칼튼은 칼을 톡톡 치며 입막음도 잊지 않았다. 루이센의 조언과 칼튼의 경고는 딱 적절한 감사와 두려움을 느끼게
하여, 강도들로 하여금 더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했다.

남자들은 루이센과 칼튼에게 인사를 하고, 마을을 뒤로한 채 떠났다. 그래도 힘겹게 살아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마음이 굳건했다.

루이센과 칼튼도 길을 마저 걷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해가 떨어져, 머물 곳을 찾았다. 두 사람은 모닥불을


피우고 그 곁에 앉아 땅속의 노파를 구웠다. 불을 피웠지만 결국 또 땅속의 노파였다.

두 사람은 배를 채우고, 마을에서 챙겨 온 물건들을 정리했다. 그런 다음 바닥에 모포를 깔며 잘 곳을 정리했다.


나란히 누워 루이센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으면 아까 본 마을의 풍경이 떠올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루이센은 뒤척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란히 누워 있다 보니 칼튼의 얼굴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눈 밑이


어둡고 수염이 삐죽삐죽 자라나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으나, 칼튼에게는 그런 지저분함도 방랑하는 거친
남자 같은 느낌으로 잘 어울렸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으나,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50 화

“잠이 안 오나?”

루이센이 묻자 칼튼이 눈을 떴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추었다.

“그러는 공작님은요?”

“좀 신경 쓰여서.”

“뭐가요?”

“다이어울프들 말이야. 아까 마을은 왜 공격한 거 같나?”

칼튼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마을에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렇지? 유민들이 만든 마을이니 거기에 마을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없을걸?”

“지나가다가 우연히 눈에 띈 게 아닐까요? 다이어울프가 길을 따라 이동했을 리 없고, 사람들 눈을 피하자면,


오히려 깊숙이 숨은 마을을 발견하기 쉬웠겠네요.”

“그럼 그냥 지나가지. 왜 공격을 했지?”


“식사 조달이거나, 훈련이거나가 아니었을지.”

“……둘 다였을 수도 있고.”

참담함에 루이센은 말을 잃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던 핏자국을 생각하니 괜히 등골이 오싹하고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계속 루이센이 뒤척이자 칼튼이 보다못해 말했다.

“그놈들에게 마을이 공격당한 건 공작님 잘못이 아닙니다. 운이 나빴을 뿐이죠.”

“……그래도 그게 아니야.”

나는 미래에서 왔지. 루이센은 이 말을 삼켰다. 자신이 조금 더 영리하고 눈치가 있어서, 좀 더 많은 걸 알고


있었다면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미리 알고 메뚜기 떼에 대비했던 것처럼.

“공작님이 세상 모든 일을 다 알 순 없습니다. 안다고 해도 다 대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겨울이


혹독하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꼭 얼어 죽는 사람이 나오잖아요.”

칼튼이 루이센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해, 루이센은 뜨끔했다.

“그래도 미안하잖아.”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인걸요. 공작님이 미안해한다고 한들 뭐가 달라집니까. 잠이나 주무세요. 그리고


고민하실 거면 낮에 하세요. 걸으면서 할 일도 없지 않습니까.”

칼튼의 말은 무심하고 냉정했으나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은 잠을 자서 체력을 보충해, 내일 일을 도모할


때였다. 루이센은 억지로 눈을 붙이고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죄책감이나 생각들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자 슬슬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네 말대로 지금은 생각 안 할 거야……. 수도에 도착하고 나면, 그 마을에 살아 있는 사람이 더 있는지
찾아볼 거야. 농사지을 땅도 주고 정착할 수 있게 도와줘야지.”

루이센은 반쯤 졸음에 잠겨 웅얼거렸다.

“거긴 공작령도 아닌걸요.”

“나 남부의 대영주야. 남의 영지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예. 예. 그러시겠죠.”

“권력은 있을 때 써야지. 그치?”

그러고는 루이센은 금방 곯아떨어졌다.

“……공작님?”

“…….”

“루이센 아니에스?”
“…….”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칼튼은 루이센의 곤히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루이센의 발치로 가서 그의 신발과 양말을 벗겼다. 신발을 오래 신고 있었던 탓에 구린 냄새가 풍겨 왔으나,
칼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루이센의 발은 고된 일을 해 본 적 없어 굳은살 하나 없이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모양도 가지런하고 하얀 게


예뻤다. 괜히 만지작거리고 간질여 보고 싶은 충동에 칼튼은 당황했다.

‘뭐야? 왜 이래?’

그냥 냄새나는 발인데 왜 이런 기분이 들지?

칼튼은 알 수 없는 충동을 꾹 누르며, 하려던 일을 계속했다. 그는 마을에서 챙긴 수통에 물로 루이센의 발을


씻겼다. 다음으로 천으로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으며 발과 발목을 꾹꾹 마사지했다. 발과 종아리의 굳은 근육을
요령 좋게 만지자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렇게만 해 줘도 다음 날 걷는 데 한결 나아질 것이다.

칼튼은 마찬가지로 마을에서 챙긴, 연고를 살살 펴 발랐다. 그러는 동안에도 루이센은 쿨쿨,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칼튼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잘 자네.’

누가 자기 발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모를 정도면 그만큼 많이 피곤했다는 건데 짐이 되기 싫다는 듯이 힘든 티를


내지 않는 모습이 퍽 대견했다.

칼튼은 다시 양말과 신발을 신겼다. 그래도 루이센이 깨지 않아 다행이었다. 자신이 그를 뒤에서 몰래 챙기는 걸
들킨다고 상상만 해도 낯간지럽고 손발이 베베 꼬였다.

칼튼은 루이센의 옆에 도로 누웠다. 눈을 감으니 모닥불을 켜 놨음에도 주변이 서늘하고 어쩐지 옆이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죽은 듯한 고요함은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루이센을 슬그머니 끌어안았다. 그러자 품에 가득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고, 눈을 감아도 루이센의 숨소리가
전해져 마음이 놓였다.

***

다음 날 새벽. 루이센은 칼튼 품에 푹 안겨 깨어났다.

‘날이 그렇게 추운가…….’

모닥불이 있어도 칼튼을 끌어안고 자다니. 루이센은 민망함에 머리를 슥슥 만지작거렸다. 칼튼은 금방 일어나
고기를 잡아 올 테니 얌전히 있으라는 엄포를 놓은 뒤 먹을 것을 찾으러 떠났다.

회귀만 하지 않았어도 벌써 서른은 됐을 나이에 눈 떼면 잃어버릴 나이의 어린이 취급이라니. 루이센은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고 보니 칼튼이 몇 살이지?’

루이센의 회귀 전 나이를 더하면 거의 서른 줄이었다. 칼튼의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서른을 넘겼을 거 같진
않았다.

‘잘하면 내가 형이겠는데……?’

자신을 형, 하고 부르는 칼튼을 생각하자 소름 끼쳤으나 한편으로는 꽤 마음에 들었다.

‘다음에는 몇 살인지 물어봐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후, 칼튼이 돌아왔다.

“숲에 야생동물이 아예 없더군요…….”

고기를 먹여 주겠다고 호언장담했기에 칼튼은 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고기보다 더 굉장한 전리품이
그의 곁에 있었다. 말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작고 아담한 체격이라 어리숙해 보이지만 쫑긋 솟은 귀가 사랑스러운,
당나귀였다.

“웬 당나귀야?”

고삐까지 맨 걸 보면 야생당나귀는 절대 아니었다. 루이센은 벌떡 일어나 칼튼 앞으로 다가갔다. 당나귀가 푸르르,


도리질을 쳤다.

“아까 강도 한 명이 그러더군요. 마을에 공용으로 쓰던 당나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열흘 전에 도망쳤다고요.


혹시나 해서 찾아봤더니 근처에 있길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또 언제 들었어?”

“오며 가며요. 내일부터는 이 녀석을 타고 가세요. 순한 녀석입니다.”

칼튼은 당나귀의 목을 쓰다듬었다. 당나귀는 그새 칼튼에게 정이 붙어서 웃는 것처럼 눈을 감으며 힝힝댔다. 까만


눈망울이 너무 귀여워 루이센은 손을 뻗었다.

“아!”

당나귀는 루이센에게 입질을 했다.

“하나도 안 순한데.”

어디가 순해? 칼튼을 볼 때와 달리 루이센을 보는 당나귀의 눈은 전투적이었다.

“왜 눈을 그렇게 떠? 칼튼한테는 엄청 귀엽고 순하게 굴면서.”

루이센이 툴툴대자 당나귀가 가소롭다는 듯이 흥, 하고 콧바람을 냈다. 칼튼이 웃음을 터트렸다.

“공작님은 정말 이 녀석들이랑 친하지 않으시네요. 공작성에서 키우는 말 하고도 사이가 나쁘시더니.”

“자네가 유난히 친한 거 아니고?”

루이센은 투덜거렸다.
“이런 녀석들은 예민하고 경계심이 강해요. 그렇게 무턱대고 다가가시니 싫어하는 겁니다.”

칼튼은 땅속의 노파를 반으로 쪼개 루이센에게 건넸다.

“일단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보여 주세요. 냄새를 맡을 수 있게 기다려 줘야 합니다.”

칼튼은 반쪽으로 먼저 시범을 보였다. 당나귀는 조금도 경계하지 않고 칼튼이 내민 땅속의 노파를 홀랑 먹어
버렸다.

“그냥 자네를 좋아하는 거 같은데.”

“해 보세요.”

루이센은 머뭇머뭇 당나귀 앞에 땅속의 노파를 들이댔다.

“자, 자. 맛있는 거야.”

당나귀는 꿈쩍도 안 했다. 이게 뭐 하는 건가. 루이센은 그냥 땅속의 노파를 자신이 먹어 버릴까 했는데 칼튼은
기다리라고 눈짓을 해서 꾹 참았다. 조금 기다리자, 당나귀가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조심스레 땅속의
노파를 받아먹었다.

“!”

“이제 살살 손을 뻗어서 만져 보세요. 살살.”

루이센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당나귀의 머리를 쓸었다. 당나귀의 털은 보기보다는 더 부드럽고 따듯했다.


당나귀가 땅속의 노파를 씹느라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전해져 신기한 기분이었다.

루이센은 실실 웃었다.

“얘 좀 귀엽다?”

“그렇네요.”

칼튼의 시선은 루이센을 향해 있었다.

루이센은 칼튼의 특강 아래,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치긴 했지만 결국 당나귀의 등에 올라타는 데 성공했다.


당나귀가 말보다 키가 작다지만, 안장도 등자도 없이 제대로 올라탄 것은 큰 성과였다. 루이센은 큰 성취감을
느끼며 칼튼과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

다시 이동을 시작하였다. 루이센은 당나귀를 탔고, 칼튼이 당나귀의 고삐를 잡고 앞장섰다.

당나귀 덕분에 두 사람은 조금 더 편하게, 더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루이센의 승마 실력은


여전했지만, 칼튼이 적절히 당나귀를 달래 준 덕분에 당나귀가 길 한복판에 멈춰서는 일은 없었다.
몸이 한결 편해지니, 루이센은 밤에 미뤄 두었던 걱정도 실컷 했다. 산속 길을 걷다가 또 이상한 일을
맞닥뜨리는 것은 아닌가, 루거의 패거리가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나 한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몬스터 때문에 산짐승마저 사라진 숲은 너무도 고요했기에 세상에는
마치 루이센과 칼튼 두 사람만 남은 것 같았다.

처음의 긴장감은 서서히 사라지고, 두 사람은 여행을 온 사람처럼 잡담을 나누며 걸었다. 대부분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별거 아닌 이야기였으나, 그 안에 가끔은 인상적인 것도 있었다.

51 화

루이센은 칼튼이 마구간에서 살았고 말을 돌보는 일을 하다가 가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자네 승마 솜씨가 예사롭지 않더라니. 그래서 이놈도 잘 다루는 거구나?”

루이센은 당나귀 등을 쓸어내렸다.

“그건 타고난 겁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저보다 말을 잘 타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죠.”

칼튼은 잘난 척을 해 댔다. 무척 재수가 없었지만 칼튼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기에 루이센은 짜증을
담아 칼튼을 노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마을에서 낙오되셨을 때, 어떻게 하신 겁니까? 말을 부르셨죠?”

비너드의 영지로 출정을 나갈 때, 루이센이 마을에서 낙오되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칼튼이 루이센을 구하러
왔을 때는 이미 너무도 아수라장이었다. 루이센이 먼저 소리 없는 휘파람으로 말의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칼튼도
금방 루이센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신호를 부르는 방법, 목초지에 말을 풀어 뒀다가 다시 불러들일 때 쓰거든요.”

“아, 그거 아는 분께 배웠네.”

“혹시 살살풀을 캐다 줬다는 그 사람 말입니까?”

“응. 그분.”

대화를 하다 보니 루이센은 자연스럽게 외팔의 순례자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회귀했다는 사실을 숨기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어린 시절에 만났다는 등, 거짓말을 해야 했으나 외팔의 순례자를 향한 루이센의 열렬한 마음은
숨겨지지 않았다.

“그분은 많은 곳을 다니시며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우셨지. 현명하고 자비로우신, 진정한 성자셨어.”


말을 하다 보니 점점 흥이 오르면서 루이센은 외팔의 순례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를 열정적으로 늘어놓았다.

“그분은 내게 정말 잘해 주셨어. 많은 걸 알려 주셨지. 그분 덕에 세상의 이치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거야.”

“뭘 그렇게 많이 알려 줬는데요?”

“음……. 예를 들면…… 길에서 만난 누가 내 뺨을 치면 반대쪽 뺨도 내밀어 주래.”

“왜요?”

“그러면 그놈이 당황할 거 아니야? 미친놈인가 하고? 그 틈을 노려서 급소를 까 버리면 한 방에 제압할 수 있대.
나는 싸움을 못 하니까 그런 식으로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의미인 거지.”

“……그런 의미로 한 말 같진 않은데요.”

“맞아. 그보다 더 훌륭한 의미가 담겨 있을 수도 있어. 내 머리가 그렇게 좋지 않으니 이렇게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거지.”

루이센은 씁쓸히 웃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칼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칼튼이 보기에 외팔의 순례자라는 놈은
수상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존경할 만한지도 모르겠다.

다만 루이센이 개떡 같은 소리 속에서도 교훈을 찾아 마음에 새길 정도로 그를 숭배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이해했다. 루이센은 꼭 사이비 교주에게 홀린 신도나, 첫사랑에 빠진 젊은 청년 같았다.

‘그놈이 그렇게 좋은가?’

칼튼은 괜히 짜증이 났다. 차라리 그런 이상한 놈보다 내가 낫지 않나? 화가 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속에서 뭔가 욱하고 끓어올랐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산을 벗어나 그 기슭에 위치한 여관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이 도착한 여관은 작은 오두막이었다. 낡고 더러웠으며 어디선가 비린내가 심하게 풍겨 왔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여행자를 상대로 영업하는 곳이라 돈벌이가 될 거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상태가 심각했다.

산속에서 칼튼이 말하길, 칼튼의 부하들은 서로 헤어졌을 때 합류하기 위해 자신들의 위치에 대한 단서를 칼튼이
지나갈 만한 몇 군데 장소에 남겨 놨을 것이라고 한다. 이 여관이 그 장소 중 하나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실내는 더 가관이었다. 실내는 해가 들지 않아 어두웠고 뭔지 모를 뿌연 공기로 가득했다.


누가 들어오든 말든 주정뱅이들은 낮술을 마셔 대고 있었다.

루이센은 의심에 차서 칼튼에게 물었다.

“정말 자네의 부하가 이런 여관에 연락을 남겼을 거라고 생각하나?”

“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루이센은 떨떠름하게 칼튼을 따라가 테이블에 앉았다. 뭐라고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맥주와 정체불명의 스프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루이센은 숟가락을 들고
주춤했다.
“그런 거 먹지 마세요.”

“…….”

루이센은 칼튼의 말대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도 안 먹을 거면 여관엔 왜 처왔나?”

흥, 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주인이 코웃음을 쳤다. 칼튼은 여관 주인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얼마 전에 내 친구가 여길 지나갔을 거 같은데.”

“글쎄. 댁 친구가 누군지 난 모르겠고 저기 게시판이 있으니까 그거나 확인해 보슈.”

여관 주인은 휑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왜 이런 여관 주인들은 다 저렇게 불친절할까. 떠돌이 시절 보았던 여관


주인들은 항상 몽둥이 같은 걸 휘둘러 대곤 했었다.

어쨌든 여관 주인의 말대로 여관의 한쪽 구석 벽에 큰 나무판이 있었다. 인근 마을의 소식지나 여행자들끼리


연락을 남기는 용도의 게시판이었다. 루이센도 예전에 지나간 여관에서 본 적이 있었다.

루이센은 칼튼과 게시판으로 향했다. 낡고 빛바랜 쪽지들이 붙어 있었다. 여행객이 많이 오가지 않는 곳이다 보니
몇 개 되지 않아 금방 다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가 아닌 거 같은데?”

루이센이 당황해 말했다. 루이센이 보기에 칼튼의 부하가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쪽지는 없었다. 게다가 의문의
습격을 받고 낙오된 대장과 비밀스레 합류하는 건데, 이렇게 아무나 다 볼 수 있는 곳에 쪽지를 남겼을 리가 없어
보였다.

“아뇨. 이겁니다.”

칼튼은 게시판의 쪽지 중 하나를 뜯었다. 사랑하는 에니스에게, 라고 적힌 연애편지였다. 네가 그립고,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친구 몇 명과 널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남의 연애편지에 손을 대면 안 되지.”

루이센은 엄하게 훈계했다.

이런 후줄근한 여관에 연애편지를 남기는 사람도 이해가 안 되지만.

“이거 맞습니다. 에니스, 제 부관 여자 친구 이름입니다.”

“?”

“연애편지인 척하는 거죠.”

“아하.”

루이센은 납득했다. 그러니까 자기들만 아는 비밀편지라 이거지?

“내용대로입니다. 가족은 군이고, 친구들은 핵심 전력 몇 명을 말하는 거예요. 아마도, 저희가 사라지자 두


부류로 나뉘었나 봅니다. 한 부류는 전리품을 가지고 수도로 가고, 다른 한 부류가 저희를 찾고요.”

“아, 그렇게 보면 되는군. 근데 정작 어디 있다는 말이 없잖아?”

“그건 여기 유난히 삐침이 긴 철자를 보면 됩니다.”

“아…….”

루이센은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뭔 소린지 도통……? 그는 흐린 눈으로 칼튼을 바라보았다.

“자네들…… 복잡하게 사는군? 체계적이고…… 내 군대도 이렇게까진 안 하는데. 보통 용병들은 글을 쓰기는커녕


읽을 줄 모르지 않아?”

“처음에 구상할 적에 머리 꽤나 아팠죠. 글자도 공부 싫다고 도망치는 놈들 잡아다 가르치느라 고생했습니다.”

“대단하네.”

“용병단 끌고 왕자 최측근 노릇을 하기가 쉬운 줄 아십니까?”

칼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과연, 자수성가와 신분 상승의 상징인 남자다워
루이센은 감탄했다.

“그래서 어디서 만나는 거라고?”

“콘포세요.”

“아, 거기.”

콘포세라면 왕국을 가로지르는 큰 강에서 갈라진 물줄기와 큰 길이 마주하는 곳에 위치한 도시였다. 원래는 군사
용도로 쓰는 성이었는데 교통의 요지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번성하였다.

그런 탓에 귀족들은 콘포세를 선호하지 않았다. 출신이 불분명한 어중이떠중이가 모이는 무질서하고 번잡한
성이라는 인상이었다.

“가 보신 적 있습니까?”

“아니. 거기서 더 가면 호수가 나와. 그쪽에 괜찮은 저택이 있어서 주로 거기에 신세를 졌어.”

아니에스 공작쯤 되면 지나가는 길마다 제발 하룻밤 머물러 주십사 간청하기 마련이라, 굳이 콘포세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자유롭고 엉망이죠. 성문에서 검사도 안 해요.”

“검문을 안 해?”

루이센은 놀랐다. 왕국은 영지 간 사람들의 이동은 자유롭지 않고, 성안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출입 허가증이
있어야 했다.

“안 해요. 성문은 낮이건 밤이건 항상 열려 있고, 누가 들어가든 말든 신경 안 쓰죠.”

“그런 곳도 있었군.”
“그러니 이제 가기만 하면 됩니다. 여기서 반나절 정도 걸리는군요.”

“그래? 얼른 가자고.”

편지를 잘 챙기고, 루이센과 칼튼은 여관을 빠져나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곧 칼튼의 부하들과 합류한다는
생각에 없던 힘도 솟아났다.

***

콘포세 성벽 바깥.

루이센과 칼튼은 수풀에 몸을 숨기고 콘포세의 성문을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문 앞에 검문소가 서고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칼튼의 이야기와 달리, 성문에는 병사가 네 명이나 서서


출입하려는 사람들의 신분과 통행증, 그리고 짐을 꼼꼼하게 검사하고 있었다.

“문이 항상 열려 있다며?”

“그러게요. 저번에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칼튼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무슨 일 있나? 그보다 자네 신분증 있나?”

“없습니다. 공작님은요?”

“……나는 신분증을 들고 다녀 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칼튼은 루이센을 흘깃 보았다. 후드로 가리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후드 아래 드러난 턱선이 갸름하고
아름다워 범상치 않은 사람으로 보였다.

“확실히 눈에 띄는 얼굴이네요. 좀 더 잘 가리는 게 좋겠습니다.”

칼튼은 루이센의 후드를 잡아당겨 턱 끝까지 가렸다.

“아니……. 내 얼굴 말고…….”

아니에스 공작가 정도 되는 가문은 굳이 신분증이 없어도 가문의 이름만 말해도 성문이 열리고 영주들이 맨발로
달려 나와 맞이했다는 의미였다.

52 화
“아무튼…… 이제 어쩌지? 자네 부하들을 찾으려면 성안에 들어가야 할 텐데 저 검문, 잠깐 하고 마는 게 아닌
거 같아.”

일회성 돌발 상황이라고 하기에는 성문 쪽의 분위기가 뭔가 심각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벽을 타야 하나.”

“벽을 타? 성벽을?”

루이센은 놀라 성벽과 칼튼을 바라보았다. 족히 3 층 건물 높이는 되어 보이는 성벽을 사다리도 없이 올라탄다고?

“좀 오래 걸리고, 힘들긴 하겠지만 별수 없으니까요. 공작님은 제 뒤에 업히시던가요.”

“뭐? 자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솔직히 말해 봐. 트롤 혼혈이라거나 그런 거 아니야?”

“농담입니다.”

칼튼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정말 칼튼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이 인간, 나를 들고 폭포도


뛰어내린 인간이잖아. 루이센은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안 되겠다. 여기서는 내가 나서야지.

“……정상적으로 들어가지. 두 발로 멀쩡하게.”

“방법이 있습니까?”

“뭐…… 대충……. 따라오게.”

루이센이 앞장서자, 칼튼이 당나귀를 끌고 순순히 뒤를 따라왔다. 지난 며칠간 칼튼에게 의지해, 칼튼의 뒤만
보며 따라갔기 때문에, 그 반대 상황이 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은 검문이 한창인 성문에서 빙 둘러
갔다.

루이센이 노리는 것은 앞도 뒤도 아닌 애매한 옆구리 쪽이었다. 작은 숲과 맞닿아 있으며 수풀이 유난히 무성한
곳. 루이센은 그곳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그러자 유난히 잘 자란 나무로 무성한 벽면이 보였다. 나뭇가지를 치우자 그곳에는 창문이 하나 있었다. 딱 성인
남자 하나가 몸을 구기고 지나갈 수 있는 크기로 창문을 통하면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철판을 덧대 창문을 막아 두었다는 점이었다.

“여기 이런 게 있을 줄이야. 근데 이거 제대로 막혀 있습니다.”

칼튼은 철판을 두드렸다.

“힘으로 떼면 큰 소리가 날 거 같아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다 요령이 있어.”

루이센은 주변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들고 요령 좋게 철판 주변의 벽돌에 쑤셔 박았다. 그러자 철판에 단단히
연결되어 있던 벽돌이 슬금, 슬금 흔들렸다. 칼튼은 루이센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철판을 잡아당겨 힘을
보태었다. 그러자 철판은 벽돌이 붙어 있는 채로 간단히 떨어졌다.

“이런 건 철판이 아니라, 철판이 연결된 벽돌을 빼면 쉽게 뺄 수 있게 되어 있어.”

“콘포세에 와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여긴 처음인데, 보통 이런 성은 다 개구멍이 하나씩 있더라고.”

아무리 성문이 닫히는 법이 없는 도시라지만, 항상 언제나 제대로 된 문으로는 다니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루이센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것도 그 순례자라는 사람한테 배운 겁니까?”

“아니. 이건 다른 사람.”

외팔의 순례자는 순례자의 통행증이 있어 정문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건 루이센이 홀로


떠돌던 시절, 제법 마음씨가 너그러웠던 거지에게 배운 지식이었다. 두 발로 당당히 정문을 지나갈 수 없는
사람들끼리만 알음알음 비밀스레 전수되는 생활 비법인 셈이다.

루이센과 칼튼은 창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왔다. 루이센은 당나귀도 함께 데리고 들어오고 싶었지만 창문을
통과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밖에 풀어주었다. 혼자서도 숲속에서 잘 버틴 놈이니 괜찮을 것이다.

창문은 인적이 드문, 막다른 골목길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해?”

“일단 광장으로 가죠.”

“광장에도 게시판 같은 게 있지?”

루이센도 종종 본 거 같았다. 그런 걸 누가 쓰나 했는데 칼튼 같은 사람이 쓰는 모양이었다.

루이센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얼굴을 가리고 칼튼의 확인을 받았다. 그런 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큰길로 나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칼튼의 체격이 다소 눈에 띄긴 했지만 용병 길드가 크게 자리 잡은 곳이라 힐끗
바라보고 마는 것이 고작이었다.

성안의 구조는 대개 비슷비슷해서 광장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광장은 몹시 붐벼서 작은 아수라장이었다.


게시판은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영주의 명령이나 영지나 소식 같은 것을 붙여 두는 게시판이었고 다른 한쪽이
자유롭게 원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게시판이었다.

양쪽 다 사람이 아주 많아 게시판에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는데, 루이센에게는 칼튼이 있었다. 칼튼이 인상을
쓰고 다가가면 사람들은 알아서 옆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준 것이다.

“여기 있네.”

여관에서 발견한 쪽지와 같이 사랑하는 에니스에게 라고 적혀 있어 찾기 수월했다. 그런데 편지에 적힌 내용이


여관에서의 것과 무척 달랐다. 낯간지러운 연애편지인 척하지도 않았고, 암호 역할을 하는 삐침도 없었다. 아주
간결하게 한 문장이 남아 있었다.
[X 나 망함]

‘……?’

뭔가 잘못 본 거 같은데?

“내가 잘못 읽었나? 뭐 이상한 게 쓰여 있는데. 이거 맞아?”

“맞는 거 같긴 합니다만.”

칼튼도 당황한 눈치였다.

“뭐가 망했다는 거야?”

“…….”

칼튼이 심각한 표정으로 쪽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공문 붙는 게시판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을 다 밀쳐


내고 게시판 앞에 서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은 하나의 공문이 눈에 들어왔다. 루이센은 더듬더듬 공문을
읽었다.

“아니에스 공작 납치…… 범인은 칼튼……?”

나? 내가 납치됐다고?

몇 번을 다시 읽어 봐도 내용은 같았다. 공문은 공작가에서 작성된 것으로, 아니에스 공작이 칼튼에게 납치되어
찾고 있으니, 뭔가 알거나 발견되는 게 있으면 제보하라는 내용이었다. 종이의 아래쪽에는 영주대리인 자격으로
총관의 서명까지 남아 있으니 위조나 사칭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거…….”

루이센은 놀라서 칼튼의 얼굴을 보고, 칼튼의 손에 들린 쪽지를 다시 보았다.

[X 나 망함]

단순한 네 글자가 눈에 콱 들어와 박혔다.

망했네.

응. 그러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총관!

루이센은 마음속으로 공작가의 가신들을 향해 소리쳤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게시판 앞에 모인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어젯밤에 웬 용병들이 병사들이랑 추격전을 벌이면서 난리를 치다가 잡혀갔잖아. 그 사람들이 칼튼의 부하래.”

“확실한 거야? 난 그놈 군대가 엄청난 전리품을 들고 북쪽으로 갔다고 들었는데?”

칼튼의 부하는 이 쪽지 한 장을 간신히 남기고 병사들에게 잡혀간 것이다. 루이센은 창백하게 질려 칼튼을
바라보았다. 루이센도 들은 말소리를 칼튼이 못 들었을 리 없었다.
“귀족 살해자면 왕자 오른팔이잖아? 그런데 왜 대영주를 납치해?”

“눈이 훼까닥 했나 보지.”

“하기사 천민인 놈이 분에 넘치는 자리에 올랐으니 제정신이겠어.”

칼튼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자신이 귀족을 좀 죽여 대고 괴롭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전


상황에서였다. 납치 같은 짓을 한 적도 없을뿐더러, 루이센을 납치했다는 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칼튼과 루이센이 같이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칼튼은 범죄자 취급을 받고, 그의 부하들은 억울하게
잡혀갔다. 칼튼은 너무도 억울하고 화가 났다.

진짜 루이센을 납치하려던 루거 놈도 귀족 자식이고, 루거를 시켰을 배후도 귀족일 게 뻔했다. 그런데 내가, 내
부하들이 출신이 천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한다고? 칼튼은 눈이 휙 돌아갔다.

가슴속에서 분노가 솟구쳤다. 지금 웃은 새끼, 내가 목을 비틀어 준다. 분노가 시키는 대로 손을 뻗고


휘두르려는데 루이센이 잽싸게 칼튼의 팔을 붙잡았다.

“진정하게. 응? 지금은 참아.”

후드 아래로, 루이센의 파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자신이 모욕을 받은 것처럼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보자, 마구
내지르려던 분노가 턱에 걸린 것처럼 멈칫하였다.

“자네가 뭐라고 욕하든 내가 다 들어 줄 테니까. 응?”

달래는 루이센의 목소리가 불안정했다. 칼튼은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맞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지금은 멋대로 성질대로 날뛸 때가 아니라 참을 때였다. 자신에게는 지켜야 할 루이센이 있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화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죄송합니다. 욱해서 그만…….”

그러고 보니 저번에 루이센이 그 성질머리 좀 참으라고 했었지. 칼튼은 루이센의 눈치를 살폈다.

루이센은 칼튼이 진정한 것만으로 안심했다. 자기 목도 잘라 먹은 이 성질머리. 그래도 잘 참아 다행이었다.

“일단 조용한 데로 가지.”

“네.”

루이센과 칼튼은 광장을 빠져나와 아까의 그 창문을 통해 성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당나귀가 풀을 뜯어 먹고
있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다가와 루이센에게 머리를 들이댔다.

속 편한 녀석이네. 나귀의 털은 짧고 거칠었지만 얌전히 쓰다듬고 있자니 놀라서 술렁이던 마음도 진정이 되었다.
이래서 동물을 키우는 건가. 루이센은 칼튼의 손도 잡아다가 당나귀 머리에 올려놔 도움을 받게 했다.

“자네가 날 납치했다니. 진짜 납치범이며, 몬스터에게 습격받은 이야기는 쏙 빠지고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자네는 알겠나?”

루이센이 물었다.
“루거 놈의 짓이겠죠.”

칼튼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아무도 그놈이 첩자인 걸 모르지 않습니까? 그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 공작님과 저인데, 저희 둘이 같이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제가 공작님을 납치했다고 하는 거,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어디가 그럴싸해? 어떻게 봐도 자네가 납치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닌데.”

루이센은 반박했지만 칼튼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53 화

루거가 공작성으로 돌아가, 충성스러운 하인인 양 연기를 하며 거짓 정보를 뿌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아니라면 왜 칼튼이 루이센의 납치범으로 몰리겠는가.

“……미안하네. 자네는 날 도와준 건데 이상한 누명을 쓰게 되었어. 자네의 부하들도 안 해도 될 고생을 하고.”

자신이 수도로 가야 한다고 우기지 않고 공작성으로 돌아갔다면, 적어도 칼튼이 납치범이라는 누명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루이센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뇨.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지금 상황을 보면, 공작성으로 돌아간다는 건 루거의 아가리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게 확실해졌습니다.”

“그래도…….”

“공작님이 진짜로 납치되는 것보다, 납치되었다고 누명을 쓰는 게 낫습니다. 적어도 공작님의 안전은
확실하니까요.”

칼튼은 말을 하고도 조금 낯이 간지러워 헛기침을 했다.

“제 부하들,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공작님이 무사히 수도에 도착하신다면 자연히 누명도 풀리겠죠.”

“그래. 수도에만 도착하면 자네들이 고생한 거, 내가 절대 잊지 않고 몇 배로 보상해 줄게.”

루이센은 단단히 다짐했다. 주먹까지 꽉 쥐고 결의에 불타는 루이센을 보며 칼튼은 웃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른 게 사람이다. 특히 귀족은 더. 칼튼은 귀족들의 약속을 믿지 않았지만 루이센이라면 반드시
오늘의 약속을 지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부 수도까지 갈 수 있을 때 이야기긴 합니다만.”

“아, 그렇지…….”
루이센은 힘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네의 부하들도 다 흩어졌고…… 자네는 납치범이 되었고……. 루거는 온갖 힘을 동원해 나를 찾고 있는 데다


…… 정체불명의 힘에 동료까지 가지고 있으니…….”

그들이 처한 상황은 최악이었다.

합류하려는 일행은 범죄자가 되어 끌려갔고, 칼튼은 납치범이라는 누명을 써서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져 버렸다.
루이센이 직접 나서서 납치가 아니라고 하면 간단히 풀어질 누명이었으나, 문제는 그럴 경우 루거가 또다시
몬스터를 끌고 와 공격할 가능성이 높았다.

누명을 쓴 채로, 단둘이 수도로 가려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루이센과 칼튼이 가진 거라고는 각자의
몸뚱이와 당나귀 한 마리뿐이었다.

한 며칠 산속을 걷는 거라면 그걸로도 충분하지만, 수도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큰길을 따라, 여러


영지를 거치고, 강을 건너고 배를 타야 했다. 당연히 길목에는 신분을 증명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문제는 두 사람 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루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든, 칼튼이
납치범으로 잡혀가지 않기 위해서든.

“정체는 숨겨야 하고…… 얼굴을 숨기고 다니면 사람들이 수상하게 생각할 거야……. 돈도 없고…….”

회귀 전에는 혼자서 어떻게 북쪽까지 갔더라? 그때는 뭐에 쫓기듯이 그냥 어떻게든 갔다. 말을 하다 보니


루이센은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이상하네. 혼자서 어떻게 그렇게 막힘없이, 그렇게 멀리 갈 수 있었지?’

당시 루이센은 늘 누군가가 자신을 쫓아온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았다. 아무리 영지가 엉망이 되고 가신들이 다 죽었어도, 왕국에서 가장 머저리로 놀림받으며, 귀족의
수치라고 불렸어도, 재산 때문이든 대영주라는 신분 때문이든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찾을 법도 했는데
말이다.

‘그냥 기억을 못 하는 것뿐인가? 내가 주변을 돌아볼 정신이 없어서? 그게 아니면 루거의 패거리들이랑 관련이
있나?’

루이센은 무심코 머리를 부여잡았다. 자신이 직접 겪고 지나온 시간을 하나하나 의심한다는 것은 몹시도 불안하고
우울한 일이었다. 루이센이 가라앉기 시작하려는 찰나, 칼튼이 적절히 말을 꺼내어 생각의 끈을 잘라 내었다.

“변장을 합시다.”

“변장?”

“순례자로 변장을 하면 얼굴을 가리고 다녀도 의심받지 않을 겁니다.”

“그야 그렇지. 순례자들은 죄다 얼굴을 가리고 이름을 숨기니까.”

순례자란 어느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왕국을 떠돌며, 신의 가르침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궁리하는 이들이었다. 이


시대에는 드물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방랑하는 게 자연스러운 직업이었다. 얼굴과 이름을 숨기는 것이
보편적이니, 칼튼의 말대로 순례자 행세를 한다면 얼굴을 숨기는 것도 자연스러울 터였다.
하지만 아무나 후드를 뒤집어쓰고 나 순례자요, 한다고 순례자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순례자에게는 몇 가지
필수품이 있었다. 성서와 성물과 교단에서 발급한 통행증이 그것이었다. 특히 통행증은 순례자의 신분을 보장하는
중요한 물건으로, 다른 물건은 몰라도 통행증을 가지고 있어야만 순례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우린 통행증도 없잖아. 그건 교단에서 고유한 표식을 새겨 놔서 위조도 못 해.”

“그건 괜찮습니다.”

칼튼은 갑자기 바지 끈을 풀었다.

“아니, 뭐 하는 거야?”

루이센이 소리치며 눈을 질끈 감고 당나귀의 눈도 가렸다. 칼튼이 킬킬, 하고 짓궂게 웃었다.

“직접 벗겨도 보셨으면서 뭘 내외하십니까? 더 한 것도 하시려고 했으면서.”

그의 말에 루이센은 절로, 그의 앞에서 무릎 꿇고 그의 바지를 벗기려고 했던 그때를 떠올렸다. 루이센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는…… 끈만 풀었어. 엄밀히 말해서, 바지를 벗기진 않았다고.”

“네네, 지금도 안 벗었습니다. 끈만 풀었지.”

루이센이 실눈을 뜨고 바라보자, 정말 바지는 안 벗었다. 칼튼은 바지 안쪽에 바느질된 주머니를 뜯어내어
루이센에게 던졌다. 그리고 다시 바지 끈을 묶었다. 주머니 안쪽에는 둥근 모양의 구리 조각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뭔데 바지 안쪽에 숨겨 놨어?”

“순례자의 통행증입니다.”

“뭐? 이게?”

루이센은 미간을 찡그려 가며 조각을 살펴보았으나, 영 통행증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통행증을 본 적이 있는데, 이것보다 훨씬 섬세하고 아름다운 물건이었어. 은으로 만들었고. 이런 어설픈
짝퉁으로는 사기 못 쳐.”

“그거 진품 맞습니다. 누가 보면 뺏길 수 있으니 표면을 덮어 두었죠. 대장간에 가져가면 잘 알아서 해 줍니다.”

“진짜 순례자의 통행증이라고? 이걸 자네가 왜 가지고 있는데?”

“죽은 순례자 시체에서 찾았죠. 혹시라도 나중에 사고 치고 급하게 튀어야 되면 그때 써먹으려고 목숨처럼 아껴
둔 겁니다.”

진짜 진짜 아끼던 거라고, 칼튼은 몇 번이고 덧붙였다. 루이센은 칼튼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회귀 전,


칼튼이 사실 처형된 게 아니라 어디론가 도망쳤다는 소문에 대한 신빙성이 올라갔다.

“근데 통행증은 하나잖아?”

“저는 용병으로 위장하려고요. 부유한 집안 출신 순례자는 종종 용병을 고용해 데리고 다니곤 하니까요.”
“음, 그렇지. 용병이랑 순례자라고 하면 눈에 띄긴 해도 수상하다고 잡혀가진 않을 거야. 순례자라고 하면 가끔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 먹을 것도 주고, 잘 곳도 내어 주고, 간혹 돈을 주기도 하니까……. 여행 경비 걱정은
없겠어.”

“순례자 행세는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야 쉽지.”

루이센은 외팔의 순례자를 따라다니며, 그의 행적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기에 순례자들이 신앙에 대해 말할 때,


신도를 대할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흉내 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칼튼의 계획은 매우 그럴듯해서, 루이센은 바로 수긍했다.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가죠. 용병 길드와 대장간에 들른 다음에 신분도 생겼겠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지붕이
있는 곳에서 머물자고요.”

“아, 잠깐만. 그래도 당장 쓸 여비가 있어야지.”

칼튼이 비장의 무기를 꺼냈는데 루이센도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루이센은 후드를 벗고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모았다.

“잘라 가.”

“머리카락을요?”

“응. 긴 금발 머리는 제법 값을 쳐주거든. 혹시 몰라서 안 자르고 놔뒀지.”

회귀 전 루이센이 영지에서 챙겨 온 돈도 다 떨어지고 배가 고파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


머리카락을 팔라고 제안했다. 루이센은 그때 머리카락이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종종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다. 영양 상태가 나빠져서 언젠가부터는 머리카락이 팔 수 있을 만큼 자라지 않게 되었지만.

그런 기억 때문에 과거로 돌아온 뒤에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길러 두었다. 루거가 머리카락을 다듬자고 해도
한사코 거절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겁니까?”

“그럴 리가! 살짝만 다듬어도 빵 하나를 그냥 내버리는 셈인데 아까워서 자를 수가 있어야지.”

빵 한 개가 아쉬워 머리를 기르는 귀족이라니. 이런 사람이 지평선 너머까지 가득 넘실거리는 밀밭의 주인이라니.
칼튼은 어이가 없는 한편으로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오죽하면, 귀족이 되어서 머리카락 파는 것도 알고 있을까.

“자, 얼른.”

루이센의 닦달에 칼튼은 단검을 꺼내어 들고, 반대쪽 손으로 루이센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루이센의
머리칼은 진짜 금처럼 색이 진하고 반짝이는 윤기가 흘렀다. 손끝에 감기는 머리카락의 감촉은 놀랍도록
부드러우면서도, 매끄럽고 탄탄했다.

누구나 탐을 낼 만한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었다. 게다가 루이센에게 너무도 잘 어울렸다. 루이센은 수려한 턱선과
섬세하고 품위 있는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서, 금을 두른 조각상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칼튼은 괜시리 루이센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54 화

칼튼은 괜시리 루이센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까운데요.”

“머리카락은 또 자라는걸?”

“그거야 그렇지만…….”

머리카락을 자르는 거야 별일 아니지만 돈 때문에 자른다는 사실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의 부인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쓰는 게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건데.

“당장 돈을 마련하기엔 이거만 한 게 없잖아.”

루이센의 말은 타당했다. 당장 수중에 동전 하나 없어서, 순례자의 통행증을 고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칼튼은 루이센을 나무 위에 올려 숨겨 두고, 혼자 성안에 가서 도둑질이라도 해야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도둑질보다야 머리카락을 파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럼에도 칼튼은 머뭇거렸다.

루이센은 뚱하게 칼튼을 보다가 알아서 하기로 했다.

“이리 줘.”

루이센은 칼튼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머리카락을 쥐고 그대로 슥삭슥삭 잘라
냈다. 아침에 돌에 갈아 둔 덕에 단검은 아주 예리했고 칼튼이 말릴 틈도 없이 루이센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다.

“자, 됐지?”

루이센은 머리카락 뭉텅이를 칼튼에게 건넸다. 칼튼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얇은 실타래를
모아놓은 것처럼 아름다웠지만 칼튼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머리카락에서 눈을 떼고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귀밑으로 댕겅 잘라 버린 탓에 루이센의 머리는 사방으로


뻗치기 시작하면서, 쥐가 파먹은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몰골이었다. 칼튼은 전혀 웃을 수 없었다. 밖으로 드러낸
목덜미가 어찌나 휑해 보이는지 칼튼의 마음까지 다 시려 왔다.

예전에 칼튼의 부하 중 한 명이 자기가 용병이 된 계기가 마누라가 머리카락 잘라 팔았던 것 때문이라고 술김에
말한 적이 있었다. 마누라가 머리카락을 잘라 팔 정도로 무능한 자신이 싫어서 이 험한 일을 선택했다고. 그걸
들을 때만 해도 칼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작 머리카락이다. 시간이 지나면 또 자라는데 그거 좀 자른 게 뭐
대수라고.

그런데 지금은 그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 용병은 머리카락을 자른 게 문제가 아니라 돈 때문에
머리카락을 잘라 팔 지경으로 몰렸다는 사실이 슬픈 것이었겠구나.

루이센은 칼튼의 마누라가 아니었지만, 그 용병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살면서 이렇게 무능력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이 넘치던 칼튼이었던 만큼 자괴감이 들었다.

“……이번만입니다. 앞으로 이러실 일 없을 거예요. 돈은 제가 뭘 하든 부족함 없이 벌어 오겠습니다.”

사냥을 하든 힘쓰는 일을 하든, 꼭 그렇게 하겠다고 칼튼은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뭐…… 그러던가?”

내 신세를 지는 게 그렇게 싫은가? 칼튼도 이상한데 집착하는 게 있다고 생각하며 루이센은 후드를 잘 뒤집어썼다.

***

두 사람은 다시 성안으로 들어왔다. 여행객이 많이 오가는 도시답게 콘포세는 뒷골목도 상당히 번성했다. 남들
모르게 물건을 처리하고, 출처를 세탁하기에는 제격이었다.

머리카락을 파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헐값에 판매되곤 하지만, 루이센의 머리카락은 길이가
길면서도 영양 상태가 좋아 무척 매끄럽고 탄탄했고 색도 보기 드문 진짜 금발이라서 시세보다 값을 더 쳐주었다.
칼튼은 적당한 흥정과 협박으로 그보다 동전 몇 개를 더 받아 내었다.

그걸 보면서 루이센은 속이 쓰렸다.

‘와, 내가 처음에 머리카락 팔 때 이거 반도 못 받고 팔았는데.’

아무리 칼튼이 흥정을 잘했다지만 이건 가격 차이가 나도 너무 심했다. 그때 머리카락을 너무 헐값에 넘겼던


것이다. 당시에만 해도 루이센은 사람 머리카락으로 가발을 만든다는 건 알았지만 자신의 머리카락을 돈 받고
판다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 걸리적거리는 걸 팔아서 돈을 벌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서 냉큼
팔아치웠었다.

머리카락 가격을 몰라서 그랬다기에는 칼튼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칼튼은 상대의 반응을 보고 흥정할 줄을 알았다.

‘나도 저렇게 했어야 하는 건데. 아깝다, 아까워.’

이미 지난 일이라도 아까운 건 아까운 거였다. 푼돈을 받고서도 좋다고 실실대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자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하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대신 루이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칼튼은 루이센의 그 작은 움직임을 칼튼은 눈여겨 담았다. 머리카락을 팔자고 말하긴 했어도, 대귀족이 되어
가난한 집안 부인처럼 머리카락을 팔게 되었으니 그 속이 편안할 리가 없었다. 대수롭지 않은 척을 했어도 내심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칼튼은 루이센이 안쓰러워, 어깨를 토닥이고 위로를 건넸다.


“돈도 생겼으니 저녁에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요.”

칼튼이 루이센 맞춤형으로 위로를 하자, 루이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끝이 길지 않은 것이 루이센의 장점
중 하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사소한 오해가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갔다.

돈을 들고 루이센과 칼튼은 대장장이를 찾아갔다. 같은 골목에 위치해 장물을 주로 취급하는 늙은 대장장이로,


글을 모르고 말을 못 해 비밀을 지키기에는 제격이었다. 대장장이는 순례자의 통행증을 보고도 의심도 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부탁받은 작업을 해냈다.

겉면에 붙은 금속을 벗겨 내자, 순례자의 통행증은 본래 모습을 드러냈다. 은색패에 양각과 음각으로 빛을
의미하는 교단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영롱하고 시린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이게 무슨 물건인지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평범한 물건이 아니란 걸 알 만큼 정교한 물건이었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루이센은 가죽끈에 통행증을 끼워 목에 걸었다.

루이센의 가짜 신분이 해결되었으니 다음은 칼튼의 차례였다. 칼튼은 그 길로 용병 길드로 가서, 자신의 부하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대고 용병패를 재발급해 주기를 요청했다. 여행 도중에 강도를 만나 잃어버렸다고 하면서.

용병 길드의 직원은 처음에는 칼튼과 루이센을 대놓고 수상하게 바라보며 용병패를 발급해 주지 않으려고 했다.
아니, 신분증도 용병패도 없이 이 삼엄한 콘포세의 성문을 어떻게 통과했단 말인가. 게다가 칼튼의 몰골은
용병이라기보다는 산적에 가까웠다. 강도를 당한 게 아니라 강도 본인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루이센이 은근슬쩍 직원에게 순례자의 통행증을 내보이자, 직원은 의심을 싹 접고 흔쾌히 용병패를 새로
만들어 주었다.

“순례자님 호위로 고용되셨던 거면 진작에 말씀하시지.”

순례자의 통행증은 교회가 발급하고 관리하며, 그 자체로 순례자를 상징한다고 보장했다. 그렇기에 순례자의
통행증을 가진 자는 교회의 보호와 인정을 받는 존재였고 다른 증명이 없이도 순례자로 인정받았다. 그런
순례자가 고용한 용병이라면, 간접적으로 교회의 보호 아래 있는 존재이기에 더 이상의 증명은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이게 진짜 통하네?”

루이센은 놀랐다. 외팔의 순례자를 따라다니면서 순례자의 통행증이 꽤 유용한 물건이라는 건 알게 되었지만, 이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니까요. 그것만 있으면 어떤 꼴을 하든, 어디를 가든 검문을 피할 수 있어요.”

“그래도 어디서 왔냐, 뭐 하러 왔냐, 그런 건 물어볼 줄 알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자기 신앙을 의심받는 걸 두려워하거든요. 괜히 순례자에게 이것저것 캐묻다가, 교회에 불만이
있어 보이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지. 왕국은 유일한 신을 믿고 있고, 왕국의 모든 중대사에 교회의 의견을
반영했다. 공식적인 행사에 성직자가 빠지지 않으며 교회가 주장하는 종교적 절차에 따랐다. 그러다 보니
민간에서 교회가 가지는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영주의 영향력이 약한 시골 마을 같은 곳에서는 교회와 사제가
행정을 대신 이끌기도 할 정도라고 한다.
루이센은 알아주는 망나니에 퇴폐적인 생활을 해 왔고 주변도 다 그런 사람들뿐이라, 종교를 크게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교회란 착한 성직자들이 밥을 주는 곳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어쨌든 이렇게 순례자의 통행증의 힘을 실감하니 칼튼이 달리 보였다.

“이런 걸 비장의 무기로 가지고 있으니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었던 거군? 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거였어.”

“제가 욱하는 건 맞지만,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니거든요.”

칼튼은 묘하게 거들먹거리듯이 말했다. 루이센은 어이가 없었다.

‘그 정도로 자기를 잘 알면 욱하는 성질머리를 죽이려고 해야 하는 게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며 루이센은 통행증을 만지작거렸다. 회귀하기 전, 칼튼은 과연 이걸 제대로 써먹었을까? 이제는


알아낼 수 없게 된 문제였다.

***

이후로도 순례자의 통행증은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두 사람은 이제 어두운 뒷골목을 벗어나 밝은 햇살 아래


당당히 길을 걸었다. 그들의 모습은 산속을 헤매다 튀어나온 탓에 더럽고 후줄근했고, 콘포세의 대로에서도
독보적으로 추레한 몰골이었다.

건장하고 험한 분위기의 칼튼과 얼굴을 꽁꽁 감싼 루이센의 조합은 수상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물건을 사러 들어가면, 상인들은 처음에는 꺼려 하다가 순례자의 증표를 보고 행동을 바꾸었다.
친절하지는 않더라도 무시하거나 내쫓지 않고 묘하게 대우를 해 주었다. 심지어 경계심이 잔뜩 올라, 지나가는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검문을 하던 경비대원조차 순례자의 통행증을 보고는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지나갔다.

덕분에 무사히 순조롭게 필요한 물건을 사고, 깔끔하고 괜찮은 여관에 방을 잡았다.

55 화

여관의 방은 작지만 깔끔했고 침대도 두 개에 욕조가 딸려 있었다. 바로 씻을 거라고 말해 두었기에 종업원들이


목욕물을 즉시 가져다주었다. 루이센은 콘포세의 거리를 다니면서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몰골인지 깨달았기
때문에, 즉시 옷을 벗고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땀과 흙먼지를 꼼꼼히 씻어 내고 욕조에 몸을 담그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제대로 쉰다는 느낌이
들었다. 산속에서는 잠을 잘 때조차 쉰다기보다는 기절하는 것에 가까웠다. 코끝까지 물에 몸을 담그고 루이센은
멍하니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

몬스터에게 습격당하고, 루거가 스파이라는 게 밝혀지고. 칼튼과 쉴 새 없이 걸어 이곳에 왔고, 이제는 가짜로
순례자 행세를 하게 되었다.

공작성을 떠나서 콘포세까지, 새삼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실감 났다. 정말 힘겹고 숨 가쁜 여정이었다.

‘칼튼이 없었으면 더 고생했겠지.’

회귀 전에 왕국을 떠돌던 기억이 있으니, 혼자서도 어떻게든 수도로 향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더 많이
고생하고, 시간도 더 많이 걸렸겠지. 어쩌면 지금도 산속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막 동굴에서 깨어나
길을 떠나려고 하던 때의 막막함은 아직도 생생했다.

칼튼은 굉장히 유능했다. 그가 신분의 한계를 딛고 잠시나마 권력자의 오른팔로 급부상해 왕국 전역에 명성을
떨친 이유를, 옆에서 지켜보니 더더욱 실감했다. 칼튼은 적국에 알몸으로 떨어져도 큰 성공을 거두고 비단옷을
입고 금의환향할 사람이었다.

‘칼튼만 잘 따라다니면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어.’

오늘 낮에 보았던, 칼튼이 흥정을 해서 원래 가격의 절반으로 깎고 그것도 모자라 상인이 먹으려던 복숭아까지
덤으로 받아 내는 모습은 다시 떠올려도 루이센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사람이 능력이 좋으니 먹을 게 절로
생기는구나!

머리 좋고 힘이 센 줄은 알았지만 생활력까지 강할 줄이야. 대체 칼튼에게 부족한 게 뭐지? 성질머리?

‘성질머리가 문제긴 하지. 자기 인생도 말아먹은 그 성질머리…….’

역시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었다. 루이센은 인생의 공평함을 실감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슬슬 몸이 더워져서 루이센은 욕조에서 나왔다. 욕실 안에 놓인 천으로 몸을 닦는데,


아차, 갈아입을 옷을 챙겨 오지 않았다.

‘입던 걸 다시 입기는 싫고…….’

입고 있던 옷은 값비싼 옷감으로 장인이 정성 들여 만든 옷이었으나 이미 걸레짝 같았다. 냄새가 나는 데다가


보기만 해도 피부가 간지러웠다. 기껏 씻었는데 이 더러운 걸 입기에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루이센은 슬그머니 욕실 문을 열고 방을 살폈다. 새로 산 옷은 다른 물건들과 함께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칼튼은 어디 갔나?’

방 안에 칼튼은 없었다.

‘마침 잘되었네.’

루이센은 후다닥 방으로 뛰어가 새 옷을 잡았다. 거친 옷감으로 지어진, 누구나 입을 수 있게 만든 헐렁한


바지와 튜닉이었다. 루이센이 원래 입고 있던 정장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싸구려였으나, 튼튼함만큼은 새 옷이 더
나았다. 몸에 감기지 않으니 더 활동성이 있고 말이다.
루이센이 새 속옷을 입고 바지 사이에 다리를 막 끼워 넣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면서 칼튼이 들어왔다. 루이센은
낯선 사람인 줄 알고 숨으려다가 칼튼인 걸 보고 안심했다.

“자네도 씻고 오는 거야? 욕실에서 같이 씻지.”

“……옆방이 빈방이길래 그냥 그쪽 욕실을 썼습니다.”

칼튼의 대답이 반 박자 정도 늦었으나 루이센은 눈치채지 못했다. 루이센의 관심은 칼튼의 머리카락으로 쏠려
있었다. 칼튼의 머리 색이 진한 갈색 머리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카락 색이 약간 변했을 뿐인데,
칼튼의 인상이 이전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 보였다.

“머리는 어떻게 한 거야?”

“……맥주를 부었습니다.”

“잘했네. 색깔이 살짝만 바뀌어도 확 다른 사람 같아지니까 말이지.”

현상 수배 내용에는 칼튼과 루이센의 인상착의가 글로 적혀 있었다. 이렇게 머리 색을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 의심


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좋은 생각이었다.

염색은 루이센도 생각하긴 했지만 머리 색보다 얼굴이 튄다는 게 더 문제였다. 무슨 머리 색을 하든 너무나도


귀족처럼 생겼으니 후드로 얼굴을 다 가리는 게 나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루이센은 바지를 마저 입었다. 칼튼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눈치가 둔한 루이센이라도,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건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루이센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그는 외모와 신분 덕분에 남녀 가리지 않고 추파를 받아 왔다. 그의 경험상


누군가 자신을 저렇게 열렬히 보면 열에 열은 흑심이 담겨 있었다.

‘설마! 이 나를……? 에이…….’

루이센은 잠시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왜…… 그렇게 봐……?”

“……눈대중으로 산 건데 잘 맞네요. 크지 않을까 했습니다만.”

“아! 그래. 옷 말이지.”

그럼 그렇지. 상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칼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못 괴롭혀서 안달이었는걸. 칼튼이
남색에 관심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루이센은 반짝 스쳐 간 의심을 빠르게 접었다.

예전의 외모를 되찾았다고 칼튼 같은 사람이 나에게 그런 식으로 관심을 가질 리가 없잖아? 너무 자신감이 과했다.
멀쩡한 사람을 오해했다는 생각에 혼자 괜히 민망해져서 루이센은 후다닥 튜닉을 걸쳤다.

그는 문득 칼튼이 손에 뭘 들고 있는 걸 발견했다.

“손에 그건 뭐야?”

“……가위요. 여관 주인에게 빌려 왔습니다. 머리카락, 다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후드로 가릴 거라 상관없는데. 그래도 가위를 빌려 오기까지 했으니 그 성의를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에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테이블 의자를 옆으로 빼서 앉았다.

칼튼은 루이센의 뒤로 와서 섰다. 루이센의 목에 천을 두르고, 가위집에서 가위를 꺼내는 일련의 준비 과정이
이어졌다. 그사이 밤이 되어 촛불을 켰다. 흐리고 약한 불빛 때문에 칼튼은 루이센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자르겠습니다.”

칼튼은 루이센의 머리칼을 크게 손으로 쓸어 넘기고, 아래쪽에서부터 조금씩 잘라 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쥐고 가위로 자르는 단순한 행동의 반복이었다. 칼튼은 무척 집중해서 말없이 루이센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루이센은 늘 남이 머리카락을 잘라 줘서 이런 상황에는 익숙했다. 그런데 상대가 칼튼이라서인가. 칼튼이 가위를


들고 서 있어서인가. 괜히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칼튼의 손길은 어디라고 딱 짚어 말하기 어렵게 묘했다. 머리카락을 쥐는 손길이 어딘가 은근했고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등의 쓸데없는 행동을 했다. 칼튼이 그럴 때마다 머리칼이 두피를 간지럽혔고, 루이센은
손발을 가만두지 못하고 꼼지락댔다.

루이센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에 비친 칼튼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루이센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루이센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칼튼이 옆머리를 크게 만졌다. 그러면서 그의 손가락 끝이 루이센의 귓바퀴를
길게 스쳤다.

“읏.”

루이센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칼튼의 무심한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보면 칼튼에게 사심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내가 또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어. 루이센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다시
칼튼의 손길이 이어졌다.

‘대충 팍팍 잘라 버리지. 누가 본다고…….’

별거 아닌 거에 정성을 다하니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닌가.

루이센은 아직도 칼튼의 다리 사이로 기어서 다가갔던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온몸에 털이 곤두선
것처럼 예민하게 들뜬 그 분위기와 자신을 내려다보는 칼튼의 뜨거운 시선. 그걸 전부 기억하기에 더욱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루이센은 마른 침을 삼키고 혀로 입술을 축였다.

루이센은 이상해 보이지 않도록,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사각사각.

방 안에 가위질하는 소리가 흘렀다. 그 사이사이로 칼튼의 숨소리가 들렸다. 창밖의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루이센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세상의 소리는 너무나 아득해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았고 이 방
안에 그와 자신, 가위질과 숨소리만이 전부인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오해하지 말자. 이건 칼튼이야. 칼튼.’

대범해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한번 의식을 하기 시작하자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칼튼의 손길 하나, 하나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귀에서 시작된 열이 번져 나가 이제는 얼굴이 다 화끈화끈할 지경이었다. 루이센은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입을 꾹 다물었다.

점점 루이센의 목덜미에 힘이 들어가고, 귀가 빨개지고 있다는 것은 칼튼에게도 빤히 보였다. 자신이 가진 모든


집중력이 루이센을 향하고 있으니 그런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이 당연했다.

사각.

길게 튀어나온 머리를 자르자, 루이센의 목 뒷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새하얀 목덜미는 가여울 정도로 가늘고
길었다. 목뼈가 튀어나온 것이 안쓰러운 한편, 입을 가져다 대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치솟았다.

목덜미를 따라 쭉 내려오면, 헐렁한 튜닉 사이로 몸의 선이 드러났다. 아까 방에 들어왔을 때 본 루이센의


알몸이 저절로 떠올랐다.

루이센의 몸은 칼튼처럼 근육이 잘 붙은 단련된 몸은 아니었다. 그러나 목욕을 하고 나와 발갛게 달아오른 흰


피부는 꾹꾹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일게 했다. 잘 익은 복숭아를 보면 그냥 한 번씩 찔러 보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루이센의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고 마구마구 헤집고 싶다. 빨개진 귀를 간지럽히고 싶다. 헐렁한
튜닉 아래 가려진 허리선도 이유 없이 그냥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욕구불만인가.’

56 화

‘……욕구불만인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칼튼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자신은 성적으로는 덤덤한 편이었다. 그것 말고도 즐거운 것은 많았고,
능력을 인정받고 성공하는 것이 더 짜릿했다. 신분 상승을 향한 야망에 밤낮 가리지 않고 인생을 불태우다 보면,
다른 것들은 다 심심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주변 용병들은 자신을 이상하게 봤지만, 칼튼이 생각하기에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랑 헐벗고 뒹구는 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특별히 정조 관념이 투철하다기보다는 상대를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무기도 없이 끌어안고
잠든다는 것이 영 불안해 보였다.

한창 야한 것만 생각날 십 대 시절에도, 전쟁터를 누비며 승승장구할 때도, 칼튼은 한결같이 그런 방면으로는


시큰둥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막 성에 눈을 뜬 남자애처럼, 더 어리고 더 혈기왕성한 시기에도 안 들던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그동안 너무 편하게 지냈나? 사는 게 만만한가?


머릿속은 복잡한데 손가락 사이로 사르륵 스치는 머리칼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짧은 머리는 긴 머리와는 또
다르게 만지는 맛이 있었다. 잡다한 생각들이 싹 사라지고 손끝에 걸리는 감촉에만 집중되었다.

‘사람 머리카락이 어떻게 여우 털보다 부드럽지?’

칼튼은 일부러 느릿하게 손을 놀리며 머리카락을 잡는 척 머리를 쓸기도 하고 손으로 여기저기 건드려 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루이센의 목덜미가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대충 해도 되는데.”

참다못한 루이센이 이렇게 말했다. 불편하다는 소리였다. 그제야 칼튼은 자신이 좀 과했음을 깨달았다.

이건…… 정말 이상하게 보이겠어.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루이센의 관심을 돌릴 만한 화제를 꺼냈다.

“밑에서 잠깐 알아봤는데, 콘포세에서 잡힌 제 부하는 네 명이라고 합니다. 바로 공작령으로 이송되었다는군요.”

“다른 사람들은? 자네의 군대는?”

루이센은 빠르게 화제에 집중하여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북쪽으로 갔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직접 본 사람은 없고 소문만 무성합니다.”

칼튼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주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고 루이센이 씻는 동안 여관 주인에게 들은 이야기로,


어차피 루이센에게 들려주려던 이야기였다. 이렇게 변명하듯이 써먹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칼튼은 부랴부랴
가위질에 속도를 냈다.

“잡힌 사람들 상태는 좀 어떻다던가?”

“잡혀갈 때는 괜찮았다고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괜찮을 거야. 우리 영지는 죄인이라도 고문하고 그러지 않으니……. 자네와 무사히 만날 수
있을 거네. 혹시 피해를 보더라도 그 사람들의 뒷일은 내가 다 책임지겠어.”

“알아서 잘 버틸 겁니다. 제 부하들을 그렇게 약하게 안 키웠어요.”

칼튼이 마음을 먹으니 금방 마무리가 되었다.

“끝났습니다.”

칼튼은 루이센의 목에 두른 천을 벗기고 머리카락을 털었다. 루이센은 어색한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돌아섰다.
칼튼은 사람 머리를 잘라 보긴 했어도 머리카락은 처음 자르는 것이라, 썩 잘 자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루이센에게는 짧은 머리도 잘 어울렸다.

머리 길이가 짧아지면서 턱선을 시원하게 드러냈는데 경쾌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가 났다. 섬세한 느낌의
이목구비도 더욱 돋보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머리통이 동글동글해서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긴 머리일 때는 우아하고 고상한 게, 그것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더니 짧은 머리는 또 짧은 머리대로 잘


어울렸다.

‘예쁜 얼굴이라 그런지 어떻게 해도 예쁘네.’


칼튼은 새삼 루이센의 얼굴이 예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잠시 넋을 놓았다. 순간 루이센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는 거의 일을 저지를 뻔했다. 루이센이 칼튼의 진득한 시선과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조금 높은 목소리로 소리치듯 말하지만 않았어도 저질러 버렸을 것이다.

“지도는 어디 뒀지? 앞으로 갈 길을 확인해 보고 싶은데.”

루이센이 타이밍 좋게 질문한 덕분에 칼튼은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었다.

“저쪽에요.”

칼튼은 지도를 찾기 위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지도를 테이블에 펼치자 묘했던 분위기가 조금 현실로
돌아왔다. 루이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정말 조마조마하고 감당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우리가 어디쯤에 있는 거야?”

“여기요.”

칼튼이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아니에스 공작령과 맞닿은 바로 옆 영지로부터 동쪽에 콘포세가 있었다.
아니에스 공작령은 남부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남부를 벗어나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콘포세에서 수도까지는 지금까지 온 길보다 더 먼 여정이었다. 하염없이 길을 걷고, 강을 건너고, 몇 개의
도시를 더 지나야만 수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거밖에 못 왔나? 지금까지 꽤 걸었던 거 같은데.”

“인도를 피해 산을 돌아와서 그렇습니다.”

칼튼이 손끝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시작은 루거를 따돌리고, 루이센이 눈을 뜬 그 산속이었다. 거기서부터
콘포세까지. 그들이 지난 길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산속이었다. 산 하나를 빙 둘러서 콘포세에 도착한
셈이었다.

“갈 길이 멀군.”

루이센은 한숨을 쉬었다.

“산속이니 더 오래 걸렸습니다만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길로 가려고 합니다. 큰길을 따라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는
거죠.”

칼튼은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칼튼이 말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왕국의 동부와 남부를 가르는 강이 나타난다.

“여기, 미틸이라는 도시의 선착장에서 배를 탈까 합니다. 배로 강을 타고 이동하면 더 멀리 갈 수 있죠.”

“그게 제일 빠른 길이지. 나도 미틸에는 가 본 적이 있어.”

미틸은 루이센에게도 익숙한 도시였다. 강 주변으로 가장 번성한 도시가 바로 미틸이었다. 미틸에서 강을 건너는
것이 수도로 가는 가장 최단 거리였기 때문이다. 귀족이나 부유한 사람들은 미틸의 선착장을 이용했기에
콘포세와는 비교도 안 되게 화려한 도시였다. 강을 건너는 배편도 가장 많았다.

“……그런데 미틸에는 교회가 있지 않아?”

“교회가 있죠. 꽤 크게, 사제도 여럿 있는 걸로 압니다.”


“순례자가 되어 교회를 들르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하겠네.”

“네. 그래서 미틸에 가지 않고 조금 둘러서라도 도시 밖의 선착장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저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요.”

“그렇지.”

“어느 정도로 자연스럽게 공작님이 연기를 하실 수 있는지에 따라 경로를 바꾸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

이래 봬도 순례자와 일 년이나 함께 다녔다. 더구나 모자란 눈치와 머리로도 무사히 귀족 행세를 하며 살아왔으니,
루이센은 겉으로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미틸까지는 여기서 얼마나 걸리지?”

“사오일 정도는 걸리겠군요.”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서도?”

“저희한테는 당나귀 한 마리뿐이니까요. 경로가 비슷한 상인이 있다면 마차를 빌려 타는 방법도 있습니다.”

“공용마차 같은 건?”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길이라면 일정 구간에 공용마차를 운영하기도 한다. 돈만 내면 누구든 태워 주는 것이다.

“원래 콘포세에서 가까운 역참마을까지 가는 마차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지금은 운영을 안 한다는군요.”

“왜?”

“최근 들어 치안도 흉흉하고, 몬스터도 더 활동적으로 바뀌어서 길이 막힌 곳이 꽤 된다더군요. 소식이 끊긴


마을도 여럿이고요.”

“내전의 여파인가? 확실히 위쪽으로 올라오니 나라가 어지러워진 티가 나긴 하나 봐.”

“그것만이면 차라리 좋겠습니다만…….”

남부의 병력이 다른 쪽으로 집중되면서 몬스터 사냥에 소홀해진 감이 있었다. 몬스터의 활동 영역이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루거가 다루던 몬스터와 루거와 한패로 보이는 사람이 마을을 공격한 것 등의 사건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껄끄럽고 신경이 쓰이는 이야기였다.

칼튼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쭉 가르쳐 주었다. 미틸에서 강을 타고 올라가 건너가면 왕국의 중부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동쪽으로 향해, 수도로 입성하기 직전 잠시 멈추어 상황을 살핀 후에 수도로 들어가기로 했다. 무난한
경로이기도 하고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말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칼튼은 아쉬움에 자꾸 자신의 애마를 떠올렸다.

“자네 말은 영리하니까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산을 내려가서 농가를 찾아갔겠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칼튼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떠올랐다. 말은 안 해도 칼튼이 자신의 말을 애지중지하며, 남다른 유대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루이센은 그를 위로했다.

“내가 나중에 사람 풀어서 자네 말을 꼭 찾아 주겠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칼튼은 우울함을 떨쳐 내고 다시 지도를 가리켰다.

“강 너머로 가면 왕국의 중부에 도착합니다. 여긴 가장 내전이 치열했던 지역이니……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알지, 알지.”

내전 이후 얼마나 나라가 개판이었는지 루이센도 잘 알았다. 너무 다 안다는 듯한 태도에 칼튼은 못 미더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 다 견딜 수 있어.”

루이센은 자신이 있었다. 침대는 사치요, 지붕만 있어도 감지덕지에, 길바닥에 드러누워 쓰러지듯 잠든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닌 것을. 루이센은 노숙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칼튼보다 경험이 풍부하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루이센은 다시 지도를 살펴보았다. 가는 길에는 루이센에게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장소도 더러 있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기억들이 왕국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라 칼튼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그의 덕분에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루이센을 안심시켜 주었다.

57 화

6 장. 만남은 우연히, 의뢰는 신중히

다음 날 새벽. 루이센은 일찌감치 눈을 떴다. 막 해가 어스름하게 떠오르는 시간. 루이센과 칼튼은 반쯤 감에


의지해 떠날 준비를 했다.

루이센은 어제 입고 잔 옷 위로 로브를 뒤집어썼다. 커다란 자루에 머리 구멍을 뚫고 팔을 달아 놓은 것처럼


풍덩한 로브였다. 로브의 후드를 쓰고, 마을에서 얻은 후드를 한 번 더 겹쳐 썼다. 후드 자락이 코밑까지 내려와
얼굴이 완전히 가려졌다. 헐렁한 품을 굵은 밧줄로 허리띠를 대신해 묶으니 루이센의 체격까지 감춰졌다.

어깨를 구부리고 허리를 숙이면 키도 속일 수 있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다음으로 루이센은 밧줄에 나무로
만든 십자가, 성물을 달았다. 겉모습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순례자였다.

칼튼과 루이센은 길을 쭉 나가 들어온 곳에서 반대쪽에 위치한 성문으로 향했다. 새벽이라도 콘포세의 거리는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먼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주로 머물다 보니 대낮보다도 더 활기차고
시끄러웠다.

처음에 루이센은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지나가는 누구도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 덕분에 마음이 금방 편해졌다.
간혹 루이센의 목에 건 순례자의 통행증을 보고 두 손을 모아 인사하는 사람이 있긴 했다. 그럴 때마다 루이센은
외팔의 순례자가 그랬던 것처럼 정중하면서도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다.

‘좀 성자님 같았으려나?’

동경하는 그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루이센은 내심 들떴다. 그는 저도 모르게 흥이 올라 외팔의


순례자를 떠올리며 그분의 걷는 모습을 따라해 보았다. 거침없이 휘휘 나아가는 걸음을 루이센의 뻣뻣한 몸으로
재현하려고 하자 관절이 나무토막처럼 삐걱댔다. 깜짝 놀란 고양이처럼 영 괴상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칼튼이
루이센의 등을 탕, 하고 쳤다.

“똑바로 걸으세요.”

“……순례자답게 걸어 보려고 했지.”

“담 걸린 사람 같아요.”

“담이라니…….”

나로는 성자님처럼 멋있어 보일 수 없는 건가. 루이센은 힘을 빼고 평소의 사뿐한 걸음으로 돌아왔다.

타박을 하긴 했지만 칼튼은 루이센이 순례자 행세를 잘할 수 있을지는 걱정하지 않았다. 순례자는 출신이
다양하여 루이센의 깃털을 살랑이는 것 같은 나긋한 태도도 이상하지 않았다.

“몸동작은 좀 귀족 같아 보여도 괜찮습니다. 대신 말투만 조심해주세요. 하대를 하는 순례자는 없습니다.”

“알아.”

“살면서 존대를 해 본 적 있으세요?”

있지. 많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생존을 위해 가장 먼저 했던 게 몸에 밴 하대하는 습관을 고치는 것이었다.

“제가 용병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이런저런 경험이 많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러는 용병님이야말로, 절 부르실
때 조심하셔야죠.”

루이센은 부드럽게 존대를 했다. 적당히 정중하면서도 만만해 보이지 않아 칼튼은 만족스러웠다.

“용병님이라고 해도 좋지만 칼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제 새로운 신분 이름이 칼이니까요. 저도 이제부터


순례자님이나 나리 하고 부르겠습니다.”

“예, 그러세요.”
두 사람은 그렇게 두런두런 대화를 하면서 성문을 통과했다. 콘포세에서 칼튼의 부하들이 잡혔기 때문에 성을
나가는 사람들도 들어오는 사람들만큼 철저하게 검사를 받았다. 루이센과 칼튼은 짐이 적었고 순례자의 통행증과
용병증이 있어 비교적 가볍게 지나갔다.

성문을 나와 두 사람은 어제 풀어 둔 당나귀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개구멍 근처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에 개구멍 근처에 사람이 있었다.

평범한 튜닉 차림의 남자와 비교적 젊어 보이는 경비대원 차림의 남자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검은 말 한 마리와
힘겨루기를 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붙어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고 있는데도 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이 뒷걸음질을 치자 두


장정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칼튼과 루이센은 그들에게 더 다가가지 않고 멈춰 섰다.

“경비대원인 거 같지? 이런 데서 뭘 하는 거지? 우리 당나귀는 저기 있네.”

그냥 돌아갈까 싶기도 했지만, 마침 검은 말 바로 뒤쪽에 루이센의 당나귀가 있었다. 당나귀는 앞에서 뭘 하든


말든 우적우적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속 편한 녀석 같으니.

“쟤 어떻게 할까?”

루이센은 칼튼을 돌아보았다. 칼튼은 당나귀가 아니라 놀란 표정으로 검은 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피스…….”

제피스?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루이센은 금방 칼튼의 애마 이름이 제피스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자네 말? 저 검은 말이 자네가 타고 다니던 그 말이라고?”

칼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센은 놀라서 검은 말을 바라보았다. 좀 더 집중해서 보니 털 결이 거칠어지고


야위었지만 귀 끝부터 꼬리 끝까지 새까맣고 아주 잘생긴 얼굴이 눈에 익었다. 몸의 밸런스가 훌륭하고, 다리가
길고 단단하며, 근육이 잘 붙어 있는 게 보기 드물게 훌륭한 군마였다. 찬찬히 살펴보니, 칼튼이 타고 다니는
말이랑 똑같았다.

“자네 말이 왜 여기 있겠어? 산에서 헤어졌다며. 비슷한 다른 말 아니야?”

혹시나 싶어 물었으나, 대답은 검은 말이 보인 반응으로 충분했다. 검은 말, 제피스는 예민한 감각으로 자신의


주인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히힝!

제피스는 단숨에 경비대원의 팔을 깨물고, 몸으로 밀어 내팽개쳤다. 그리고 성인 남자 둘을 단숨에 넘어뜨린 채


칼튼에게 달려왔다.

히힝, 히히힝.
제피스는 촉촉하게 젖어 가는 눈을 하며 칼튼의 어깨에 머리를 부비고 얼굴을 핥았다. 루이센은 말이 그렇게
구슬프게 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칼튼은 연신 제피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함과 반가움을 표현했다.
애틋한 재회에 루이센도 가슴이 찡해졌다.

그러나 여유롭게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제피스의 고삐를 쥐고 있던 두 남자가 일어나, 창을 겨누며


다가왔다.

“거기! 네놈들은 뭐냐?”

경비대원이 큰소리를 쳤다. 다짜고짜 위협부터 하다니. 루이센은 무척 당황했다. 왜 저래? 칼튼은 루이센 앞으로
나서며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우리는 콘포세의 경비대 소속이다. 여기 이분은 경비대장님이시고. 반항할 생각 말고 순순히 항복해라!”

루이센의 예상대로 둘 다 경비대원이었다. 그런데 평상복을 입은 남자가 경비대장이라는 점은 좀 의외였다.


경비대장이면 경비대원들을 총괄하는 꽤 높은 위치의 인물인데, 왜 이런 곳에 평상복 차림으로 있는 거지?

“당장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

“무슨 이유로 다짜고짜 무기로 위협하는 건가요?”

루이센이 물었으나 경비대원은 대답하지 않고 창을 더 바짝 치켜들었다. 경비대장은 그걸 방관했다.

루이센의 심장이 벌렁벌렁 떨렸다. 루이센은 침착하려고 애를 쓰며 순례자의 통행증을 들어 보였다.

“저는 신의 뜻을 따라 방랑하는 자입니다.”

점점 떠오르기 시작한 햇살 아래 통행증이 영롱한 은빛을 흩뿌렸다. 경비대장과 경비대원은 그것을 보고 놀라서
창을 내렸다.

“아……. 순례자님이시군요.”

“그럼 저 사람은…….”

“이 사람은 내가 호위로 고용한 용병입니다.”

“다짜고짜 무기를 겨누다니 콘포세에서는 이런 식으로 순례자를 대하나 보지? 교회에 억하심정이 있나 봐?”

칼튼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어 은근히 교회를 들먹이며 협박했다. 그러자 경비대원은 무척 놀라며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교회에 억하심정이라뇨.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이 말이 죄인이 데리고


있던 말이라…….”

“죄인?”

“아니에스 공작님을 납치했다는 놈의 부하들 말입니다. 이 말은 그놈들의 말입니다.”

칼튼의 부하들이 제피스를 여기까지 데려온 거구나! 왜 제피스가 여기 있는지 의문이 풀렸다. 운 좋게 뒤이어 온
칼튼의 부하들과 합류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칼튼과 떨어진 후, 루거나 다이어울프에게 봉변을 당하거나 혼자 산속을 헤매고 있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아무 일 없었다면, 루이센과 칼튼이 부하들과 합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제피스와의 재회도 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칼튼이 루이센의 납치범으로 몰리면서 칼튼의 부하들이 잡혀갔다.

관습적으로 죄인의 물건은 그들을 잡은 경비대 사람들이 알아서 처분하기에 제피스가 경비대원의 손에 들어간
것이었다.

“죄인들의 말이랑 친해 보이시길래……. 그 납치범 놈들과 한패인 건 아닌가 해서 경비대원의 입장상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먼저 들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순례자님.”

“그런데 저 용병. 신분이 확실한 겁니까? 순례자님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칼튼과 그 부하들도 용병 출신이니
말입니다. 혹시…….”

“아니요! 이 말은 절 보고 반가워한 겁니다.”

루이센이 잽싸게 제피스의 목을 안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칼튼이 제피스의 진짜 주인임을


주장하기는커녕, 제피스와 친해 보이는 것만으로도 잡혀 있는 부하들과 한패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경비대원의 의심은 무척 합리적이고 사실에 가까웠기에 루이센은 필사적으로 변명을 지어냈다.

“이 말은 어린 시절에 수도원에서 기르던 말입니다. 내가 돌보았죠. 그래서 날 알아보고 달려온 것입니다. 저


사람 말고 나요. 순례자인 나.”

루이센이 거짓말을 지어내자 칼튼은 눈치껏 옆으로 한 발 떨어져 서서 제피스와 데면데면한 척을 했다. 제피스는
이런 자세한 상황까지는 몰랐지만 영리한 말인지라 주인의 눈치를 읽고 얌전히 루이센에게 안겨 있었다.

“그러시군요. 사연은 알겠습니다만 저 말은 죄인의 말이니 경비대의 소관입니다. 이만 데려가겠습니다.”

“…….”

루이센이 망설이자, 칼튼이 루이센의 팔을 잡았다.

‘하필이면…… 경비대야…….’

상인이나 용병이 제피스를 데리고 있었다면 일이 더 쉬웠을 텐데. 협박이나 힘으로 제피스를 빼앗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저들을 건드리면 콘포세 성주와 그 뒤에 있는 이 일대의 영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보내 주세요.”

칼튼이 작게 속삭였다. 루이센은 어쩔 수 없이 제피스의 목을 놓아주었다.

58 화
두 경비대는 꾸벅 인사를 하고, 루이센이 말릴 새도 없이 제피스의 말고삐를 쥐고 거칠게 당겼다.

“가자. 빨리 따라와!”

제피스는 아무리 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척 조급했고 틈틈이 루이센과 칼튼의 눈치도 살폈다. 뭔가
켕기는 게 있는 사람들처럼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얼른 안 움직여?”

경비대원이 창의 손잡이로 말 엉덩이를 마구 찔렀다.

히힝.

제피스가 울부짖었다. 그리곤 어쩔 수 없이 한 발, 앞으로 뗐다.

제피스는 정말 영리해서 자신이 칼튼을 곤란하게 한다는 걸 깨달았는지 칼튼에게 도와 달라고 매달리지 않았다.
다만 까만 눈망울로 애처롭게 칼튼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더욱 심금을 울렸다.

‘빌어먹을. 젠장.’

칼튼은 연신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제피스는 칼튼에게 특별한 말이었다. 제피스가 병약한 망아지일 때부터 정성을 다해 돌봐서 유대감이 남달랐다.
가출할 때 함께 나와 수많은 생사고락을 함께한 진정한 동료였다.

성의 경비대장 따위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는데도, 자신의 말인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피스를 탈취해서, 그를 타고 멀리멀리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칼튼은 혼자가 아니었다.

칼튼은 루이센의 안전과 꼭 수도로 데려가겠다는 약속했다. 그러니 지금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참아야만 했다.
칼튼은 애꿎은 주먹만 꽉 쥐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칼튼을 대신에 루이센이 성급히 나섰다.

“잠깐만요.”

“뭡니까?”

루이센의 부름에 경비대원과 경비대장이 뒤돌아섰다.

“어쩌시려고요?”

칼튼이 물었다.

‘나도 몰라!’

일단 멈춰 세우긴 했지만 루이센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제피스를 보내는 건 아니다,
싶었다.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루이센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성자님 제발 당신의 지혜를 제게 나누어 주세요. 간절히 바라면 통한다고
했던가. 순간 루이센의 머리가 번뜩였다.

“왜 그렇게 서두르시는 겁니까?”

“예?”

“경비대장님. 죄인의 말을 몰래 빼돌려서 무엇을 하실 작정이신지요?”

루이센의 말에 경비대원이 발끈했다.

“빼돌리다뇨. 죄인의 물건은 엄연히 경비대의 것입니다. 대장님이 어떻게 처분하시든 자유인데, 빼돌린다는 게
말이 안 되죠.”

“그러니까 이상하단 겁니다. 경비대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정문을 놔두고 개구멍으로 기어 나와서, 죄인의 말을
건네받는 거죠? 그 말을 타고 성문을 당당히 지나오셔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텐데.”

“그건…….”

경비대원은 어물거렸다. 그의 반응에 두 사람 모두 루이센이 정곡을 찔렀음을 알아차렸다. 몰래 무슨 짓을


꾸미다가 루이센과 칼튼에게 딱 걸려 버린 것이다.

“그건 경비대의 일입니다. 순례자님이 상관하실 바가 아니고요.”

그 자리에 앉은 것이 우연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듯, 경비대장은 침착하게 말을 받아쳤다. 하지만 칼튼의 예민한
감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저 사람, 무척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마음이 급하고, 어떻게 보면 겁에 질린 것도 같고요.”

칼튼이 루이센에게만 들리도록 속닥였다. 그렇다고 한들 이 건으로 제피스를 되찾을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설득을 하든 협박을 하든, 일단 물고 늘어질 수 있는 건 다 물고 늘어지자고 생각했다. 루이센은 조금 더
강하게 경비대장과 경비대원을 몰아붙였다.

“콘포세에서 칼튼의 부하들이 잡힌 일로 이곳 영주님이 굉장히 콘포세 상황에 신경을 쓰고 계실 것 같은데 지금


하시려는 경비대의 일, 영주님도 알고 계신가요?”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저는 그저 어떤 사정이 있는 건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그걸 알아서 뭐 하시게요?”

“도와야죠.”

“순례자님이 왜요?”

“말씀하신 대로 제가 순례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신께서 미처 굽어살피지 못하시는 어둡고


그늘진 곳에 대신 빛을 비추는 것. 그로 하여금 그분의 영광과 자비로움을 널리 알리는 것이 바로 저희가 세상을
방랑하는 이유랍니다.”
루이센은 외팔의 순례자를 떠올리며 신중히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었다. 옆에 있던 칼튼은 무척 놀랐다. 루이센은
진짜 순례자 같았다. 사용하는 단어와 표현은 물론이요, 사명감을 띤 어조는 종교에 과하게 몰입한 특유의 느낌이
났다. 하지만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든 받아 줄 것 같은 자비로움을 풍겼다. 경비대원과
경비대장의 경계심도 조금 무뎌졌다.

“저는 자세한 일은 모릅니다. 평소 인품이 훌륭하기로 칭송받던 경비대장님이 남몰래 무슨 일을 한다면, 그럴


만한 절박한 사연이 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죠.”

사실 경비대장이 어떤 사람이고 평판이 어떤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루이센도 경비대장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다만 외팔의 순례자가 다른 사람들을 적당히 띄워 주면서 원래 이럴 사람 아니잖아, 라고 살살 달래면
무거운 입도 술술 열리던 걸 보고 따라 해 본 것이다.

“만나지 않았으면 모르나, 이렇게 마주친 것 또한 그분의 안배가 아니겠습니까? 저나 교회에서 도울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고요.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루이센은 조금 더 누그러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는 기가 막히게 신의 이름이 잘 먹히는


법이었다. 루이센의 노림수는 정확히 경비대장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경비대장은 너무나 갑갑하고 힘들어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던
차에 루이센이 정곡을 찌르자 기왕 이렇게 된 거 사정을 설명하고 자신을 못 본 척해 달라고 애원하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사실은…… 순례자님 말씀대로, 저는 지금 몰래 성에서 나온 것이 맞습니다. 나쁜 짓을 하려던 건 절대


아닙니다. 그저…… 고향에 가려고 했습니다.”

“고향에? 이런 시점에?”

경비대장이 고향 방문을 위해 자리를 비우기에는 콘포세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납치범의 패거리가 하필 콘포세
안에서 잡히는 바람에 콘포세의 경비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삼엄했다.

“저번 달쯤에, 아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고향에 갔습니다. 우린 같은 마을 출신이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내에게 소식이 안 오고 있는 겁니다!”

고향에 도착하면 소식을 보내기로 한 아내에게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가뜩이나 내전이다, 공작 납치다,
뭐다로 흉흉한 시국이었다. 몬스터가 유례없이 기승이라는 소식도 들려왔다. 경비대장은 너무나 걱정이 되어, 몇
번이고 사람을 보내어 상황을 살피도록 했다. 그런데 그렇게 보낸 사람들조차 돌아오지 않고 감감무소식이었다.

“너무 애가 탔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방법이 없나…… 하고 있는데 마침 저 말이


눈에 띈 겁니다. 이 정도 준마라면 하루 안에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죄인의 말쯤, 잠깐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더구나 튼튼하고 날렵한 말이니 더 빠르게 고향에 다녀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비대장은 부하더러 몰래 말을 가지고 오게 시킨 뒤, 자신은 개구멍으로
남몰래 성을 빠져나온 것이었다.

“용병 길드에 의뢰하면 안 되나요?”

“요즘처럼 의뢰가 넘쳐나는 상황에는 이런 일은 돈도 안 되고 경력도 안 된다고 아무도 안 하려고 합니다. 정말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오죽 답답하면 직접 나섰겠습니까.”
“사정은 알겠는데요.”

“제가 자리를 비운 걸 영주님이 알게 되면 큰 벌을 받을 겁니다. 고향은 가 보지도 못하고요. 제발, 저와 제


가족을 불쌍히 여겨 모르는 척해 주시지요, 순례자님.”

경비대장은 진심으로 호소했다. 루이센과 칼튼이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이거다. 이거 잘하면 제피스를 받을 수도 있겠다.

루이센은 흥분을 감추며, 경비대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참 마음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이런 사연이 있는데 제가 어디다 대고 말을 하겠습니까.”

“근데 경비대장님. 계획이 너무 허술한 거 아닙니까? 아무리 저 말이 빨라도 하루 동안 자리를 비우시는 건데,
그걸 누가 눈치채지 못할까요.”

루이센이 위로하고 칼튼이 딴지를 걸었다. 경비대장은 짧은 사이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음……. 이자의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너무 무모한 계획이지요.”

루이센은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좋은 생각이 난 척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경비대장님은 원래 계실 자리로 서둘러 돌아가세요. 몰래 자리를 비운 게


들키면 크게 벌을 받으신다면서요. 대신 제가 경비대장님의 고향을 다녀오겠습니다.”

“순례자님이요?”

“네. 가서 아내분이 무사한지를 확인하고, 경비대장님의 말씀도 전해 드리면 어떨까요?”

“그런 폐를 끼칠 수는…….”

“괜찮습니다. 저는 방랑하는 자이고, 경비대장님은 바위처럼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셔야 하는 분이니,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하늘의 뜻 아니겠습니까. 마음 편히 맡겨 주세요.”

“순례자님……. 그래만 주시면 저는 정말…….”

감동적인 순간, 눈치가 빠른 칼튼이 잽싸게 끼어들어 깽판을 놨다.

“전 못 갑니다. 순례자님. 그건 계약 밖의 이야기 아닙니까? 돈 받은 거 이상은 저, 일 안 합니다. 가실 거면


혼자 가세요.”

“아……. 저 혼자서 어떻게 숲길을 가겠습니까.”

루이센은 쩔쩔매는 척을 했다. 비록 후드가 얼굴을 다 가리고 있어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온몸으로
난감하다는 감정이 전해졌다. 술술 풀려 가던 일이 난관에 부딪히자 경비대장도 덩달아 초조해졌다.

‘설마 저 용병이 못 따라간다고 해서, 도와주기로 한 걸 없던 일로 하진 않겠지?’

경비대장은 간절히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루이센은 칼튼을 한 번, 경비대장을 한 번 번갈아 보며, 충분히 뜸을
들였다. 그러다 경비대장이 초조함에 숨이 넘어갈 것 같을 때 적당히 입을 열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용병은 돈을 좇는 이들이니……. 제가 무리해서 일을 더 시킬 수야 없죠. 그런데 제가
넉넉한 형편은 아니라…….”

루이센이 일부러 뒷말을 흐리며 칼튼을 바라보았다.

“돈은 됐고, 그 말을 주시죠. 마침 말 한 필을 갖고 싶었거든요.”

칼튼이 제피스를 가리켰다.

59 화

“……그건…….”

“여기, 절 호위하는 용병은 제법 유능한 자이니 몬스터로 인해 길이 막힌 것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또 정말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저는 순례자이니 제가 가는 편이 도움을 구하기도 좋고요.”

여차하면 교회에 도움을 구할 수 있다는 암시를 주자 경비대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물론 루이센은 교회에 도움을
구하는 대담하고 위험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 주시면 정말 더 바랄 게 없습니다만…….”

죄인의 물건을 처분하는 건 경비대장의 권한이니, 말을 팔아치우든 누구를 주든 걸릴 게 없었다. 다만 아주 좋은


말이니 용병이나 상인에게 돈을 주고 판다면 쏠쏠하게 벌 수 있으니 그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말을 처분하고 용병 길드에 의뢰를 넣어도 언제 사람을 보낼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게다가 난폭하고
의리 없는 용병보다는 이 마음씨 좋아 보이는 순례자에게 부탁하는 것이 더 믿음직해 보였다. 그가 데리고 있는
용병도 무척 강해 보였고. 그의 말대로 여차하면 교회의 힘을 빌려 쓸 명분도 생기니 말이다.

경비대장은 저울질을 마치고 결단을 내렸다.

“좋습니다. 이 말을 드리겠습니다. 대신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루이센은 경비대장에게서 고삐를 넘겨받았다. 경비대장이 급하게 가족에게 전할 편지를 적는 동안, 칼튼이
루이센에게 속닥였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지금 하루가 급한데…… 남의 심부름이나 해 줘도 될지…….”

일단 루이센의 연기에 장단을 맞추긴 했지만 칼튼은 걱정이 되었다. 갈 길이 멀고 바쁜데 이렇게 다른 데로 새도
되는 걸까? 제피스를 돌려받고 싶다는 욕심은 가득했으나 괜한 짓을 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대신 말이 생기지 않았나. 이 녀석이 있으면 더 빨리 수도로 갈 수 있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럼 하루쯤 허비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더 빨리 수도에 도착하는 게 되는 거야. 이 정도는 괜찮을 거네.
그리고…… 자네에게 특별한 말이 아닌가.”

루이센은 칼튼에게 제피스를 되찾아 줌으로써 그의 희생에 보답하고 싶었다. 애초에 그가 제피스를 잃어버린 것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정말…… 감사합니다.”

칼튼도 평범하게 고맙다는 말도 할 줄 아는구나. 루이센은 놀라서 칼튼을 바라보았다. 칼튼의 눈동자는 봄날의
푸른 들판처럼 다정스러웠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경멸과 혐오가 담겨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친근함과 고마움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고맙기는……. 자네가 내게 해 준 게 얼만데.”

“제 대신 나서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식으로 절 신경 써 준 사람은 없었어요.”

칼튼의 말에 루이센은 가슴 속이 간질간질해졌다. 루이센은 괜히 어깨를 으쓱했다.

칼튼은 크게 감동한 상태였고, 루이센이 귀엽게 나오자 가슴 안쪽이 찌르르 울렸다. 루이센의 어깨를 잡아당겨서,
어색해서 이리저리 흔드는 동그란 머리까지 붙잡아 자신의 품에 안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왠지
지금이라면 루이센도 거부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들었다.

그러나 루이센과 칼튼 사이에 감도는 미묘한 기류는 경비대장의 개입으로 사라졌다. 경비대장은 눈치 없이
루이센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 편지입니다. 꼭 편지 전해 주시고, 돌아오셔서 상황도 이야기해 주세요. 순례자님을 믿고 맡기는 겁니다.
말까지 드렸으니…… 정말 저는 순례자님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만 받고 먹튀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루이센은 그런 속뜻은 전혀 모르는 것처럼 자애롭게 웃었다.

“그럼요. 신의 길을 따르는 이로서 어찌 곤란에 처한 사람을 저버리겠습니까.”

어차피 후드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목소리는 신뢰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경비대장의 편지를 잘 챙기고, 루이센은 당나귀를 경비대장에게 맡겼다.

그동안 정이 들어 데려가고 싶었으나, 당나귀가 제피스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콘포세에


두고 가기로 했다. 다시 콘포세로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고 길을 떠날지는 정하지 않았다. 경비대장의 고향
마을의 사정을 봐서 정하기로 했다. 그렇기에 당나귀와는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루이센은 아쉬움을 가득 담아 당나귀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나귀는 한결같이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당나귀, 잘 돌봐 주게.”
“예. 물론입니다.”

루이센은 제피스에게 다가갔다. 칼튼의 특훈으로 당나귀를 혼자 탈 수 있게 되었다지만 제피스처럼 커다란 말을


타는 건 또 새롭게 긴장되었다. 작고 느긋한 당나귀와 달리 제피스는 칼튼을 닮아서 콧대가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전에 몇 번 제피스를 탈 일이 있을 때도 얼마나 싫은 티를 팍팍 냈는지 모른다.

“내팽개치지만 말아 줘. 날 떨어뜨리면 경비대장이 이상하게 볼 거야.”

루이센은 제피스에게만 들리게 속닥였다. 그러면서도 제피스가 걷어차면 피할 수 있게 몸을 긴장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제피스는 루이센을 보더니, 무릎을 꿇었다. 루이센이 쉽게 탈 수 있도록 몸을 낮춰 준
것이다. 루이센이 안장에 앉자 제피스는 슥, 일어섰다.

시야가 확 높아지면서 칼튼도 작게 보였다.

‘세상에. 짐짝처럼 얹어 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루이센은 처음 제피스를 탔던 때를 떠올리며 감격했다. 짐짝처럼 얹어져서는 제피스의 궁둥이에 머리를 박고,
꼬리에 얻어맞았더랬다. 그런데 이렇게 혼자서 당당히 제피스의 등에 타는 날이 오다니!

제피스는 정말 영리한 말이었다. 칼튼이 제피스에 올라탈 때는 흥, 하며 불편한 티를 냈다. 사정을 모르는
경비대장과 경비대원의 눈에는 제피스가 칼튼이 아니라 루이센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경비대장은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하며 칼튼과 루이센을 배웅했다.

***

경비대장의 고향 마을은 깊은 숲속에 위치했다. 루이센과 칼튼이 가려고 생각한 길과 조금도 겹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경비대장의 고향마을을 찾아갔다가 다시 본래 여정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루를 완전히 허비하는 일이었다.

남을 돕고 있을 여유가 있진 않았다. 사실 경비대장은 칼튼과 루이센의 본래 정체를 모르니 그냥 떠나 버려도


별문제가 없었다. 칼튼이 은근슬쩍 그런 내색을 비추었다. 루이센은 성자님을 다시 만났을 때 떳떳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기에 거절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남의 간절함을 이용해 놓고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너무 인정머리


없고 비겁한 짓이었다. 대신 쉬지 않고 빨리 가자고 칼튼을 달랬다. 칼튼도 급한 마음에 말해 봤을 뿐 양심이
없진 않아서 더 강하게 주장하진 않았다.

제피스는 주인들의 급한 마음을 알았는지 지칠 줄 모르고 달렸다. 성인 남자를 둘이나 태웠는데도 조금도
무거워하지 않고 쌩쌩했다. 제피스가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루이센은 눈물을 삼키며 후회했다.

‘괜히 서두르자고 했어. 빨라도 너무 빠르잖아.’

눈앞이 팽팽 돌았다. 어지러울 정도로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귓가에는 바람 소리가 들었다.
제피스의 탄탄한 다리가 땅을 박찰 때면 몸이 작게 떴다가 아래로 떨어져서 꼬리뼈에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찌릿했다.

제피스의 안장에는 손잡이 같은 게 없었기에 루이센이 의지할 곳은 칼튼뿐이었다. 그는 칼튼의 팔을 꾹 잡았다.


그걸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살면서 이렇게 빨리 달려 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아예 칼튼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바짝 붙이고 칼튼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그것도 모자라 눈도 꽉 감아


버렸다. 칼튼의 품에 폭 안기다시피 하자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와, 심장 뛰는 거 봐. 무서워 죽겠네.’

오죽하면 가슴에서 뛰는 심장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려올까. 루이센은 더 몸을 움츠렸다. 그래서 칼튼이


그답지 않게 어색한 무표정으로 제피스를 재촉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언덕 사이로 난 길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 그늘에 시야가 확 어두워졌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은 좁고 험한 길도 제피스는 두려움을 모르고 달려갔다. 칼튼은 경비대장이 가르쳐 준 길을 기억하고 정확히 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제피스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제피스가 멈춰 섰다. 루이센은 쉬었다 가는 건가 싶어 얼굴이 활짝 피었다.

“쉬었다 갈 건가?”

“내리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칼튼은 제피스에게서 내려와 검을 꺼내 들었다. 그가 굳은 얼굴로 날카로운 기세를 유지하며 주변을 살피었다.
제피스도 몇 번 발을 구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경계했다.

‘뭔데?’

용맹하게 달리던 말발굽 소리가 멈추자 숲속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의 감각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숲속은 너무도 조용해서 칼튼과 루이센, 그리고 제피스만 있는 것 같았다.

‘뭐야? 뭐가 있다는 건데? 나만 몰라?’

루이센은 멍하니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그때, 검은 칼날 같은 것이 루이센을 노리고 날아왔다. 루이센이 그것을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제피스는


날렵하게 옆으로 피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칼튼이 그것과 루이센의 사이로 끼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깡!

쇠와 쇠가 마주친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공격에 실패한 그것은 샤샤샥,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루이센은 그제야
자신을 공격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지네였다.

60 화
평범한 지네가 아니었다. 놈은 일단 컸다. 옆에 있는 나무들만큼 길고 두꺼운 몸통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개로
절개된 몸통은 꼭 잘 달궈 둔 쇠처럼 반지르르한 빛이 흘러 단단해 보였다. 지네의 몸통에 달린 수십여 개의
다리는 붉고, 각자 칼날이 달린 것처럼 날카로웠다.

루이센도 왕국을 떠돌며 못 볼 꼴 많이 봤지만 저런 거대 지네는 처음이었다. 평범한 지네에 물리면 아프고
그만이지만, 이 지네는 물리는 순간 몸을 두 동강 내고도 남을 것 같았다. 몸서리가 쳐지도록 징그러우면서
무시무시했다.

‘지네야? 몬스터야?’

보통 지네와 달리, 안면부에 새빨간 구슬 같은 것이 십여 개 달려 있었는데, 그것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칼튼과


루이센을 살폈다. 십여 개의 눈을 가진 지네는 듣도 보도 못했다. 역시 몬스터인가?

지네는 스스, 하는 소리를 내며 나무를 기어 올라갔다. 지네의 긴 몸통이 둥글게 나무를 휘어 감았고, 수십 개의
다리가 달각달각대면서 움직였다. 놈은 덩치와 다르게 무척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무 위로 이동하더니,
허공에서 루이센을 향해 날아왔다.

“으악!”

루이센은 비명을 질렀다. 놈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루이센만 노렸다. 무리에서 가장 약한 개체를 우선해서 노리는
것이었다. 루이센 혼자라면 분명 지네에게 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제피스가 있었다. 제피스는 다시금
한발 먼저 지네의 공격을 피했다.

쾅!

지네가 달려들던 그 힘을 못 이겨 땅에 처박혔다. 평범한 동물이라면 머리뼈가 박살 났겠지만,

‘으, 으으……. 징그러워……. 무서워……. 징그러워…….’

놈은 다시 샤샷, 하고 나무를 기어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칼튼이 빨랐다. 그는 지네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지네의 가장 앞에 있는 다리 두 개를 잘라 버렸다.

끼아아악!

지네가 비명을 질렀다. 수십 개의 다리가 일제히 촤르륵 펼쳐지면서, 몸통을 기이하게 뒤틀어 댔다. 잘린 다리의
단면에서 진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지네가 고통에 마구 꼬리를 흔들자, 퍽퍽, 하고 나무가 쓰러졌다. 마구잡이로 이어지는 지네의 공격에 칼튼이
루이센을 지키며 틈을 벌렸다. 그사이에 제피스는 루이센을 데리고 멀찍이 떨어지면서 싸움에 휩싸이지 않도록
안전한 곳으로 빠졌다.

다리를 잃은 지네는 공격 대상을 칼튼으로 바꾸었다.


칼튼과 지네가 짧은 공방을 주고받았다. 지네는 수십 개의 다리를 정밀하게 움직여 빠르게 이동해 앞발을
휘두르고, 불식 간에 꼬리를 휘두르기도 했다. 그러는가 하면 높게 치든 머리를 내려치며 송곳니로 칼튼을 뚫어
버리려고도 했다.

사방에서 공격이 날아왔고 하나하나가 강력했다. 공격이 빗나간 자리에는 땅이 움푹 파이거나 나무가 박살이 났다.
지네의 앞발이 칼튼의 검과 부딪힐 때면 캉, 하고 쇠가 부딪히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짝
스친 정도로는 지네의 몸통에 흠집도 내지 못했다.

루이센은 조마조마하게 칼튼을 바라보았다. 칼튼이 강하다는 건 알지만, 상대가 너무 전대미문의 괴물이었다.

하지만 칼튼은 그보다 더한 괴물이었다. 그는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지네의 공격을 받아쳤다. 지네가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 사방에서 공격을 쏟아부어도 칼튼은 여전히 단 한 번도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한 걸음도 밀리지 않았다.

지네의 단단한 외피에도 칼튼은 당황하지 않았다. 칼튼은 관찰하듯 냉정하게 지네를 바라보며 지네의 다리를
하나씩 잘라 냈다. 그럴 때마다 지네는 몸을 마구 뒤틀며 흰 배를 드러냈다.

‘와, 와. 한 번을 안 밀리네.’

충성심이 강한 제피스가 멀찍이 떨어져 꿈쩍도 안 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였다. 이쯤 되자 루이센도 마음을


놓고 싸움을 지켜볼 수 있었다.

상황이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자 지네는 전략을 바꾸었다. 놈은 쉭쉭, 소리를 내다가 몸을 돌려 땅속을 파고들어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이대로 놓칠 칼튼이 아니었다. 칼튼은 지네의 꼬리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키아아악!

지네의 비명 소리가 하늘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멀찍이 떨어진 루이센도 순간 섬찟한 마음이 들 정도로
끔찍한 소리였다. 지네의 긴 몸뚱이가 마구 위아래로 꿈틀거리며 요동을 쳤다. 땅이 쿵쿵, 울렸다.

칼튼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네를 걷어차고, 지네의 머리를 발로 찍어 눌렀다. 그런 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지네의 눈 사이로 검을 쑤셔 박았다.

콰직.

지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낫다. 여전히 많이 남아 았는 지네의 다리가 경련이 일듯 마구
떨렸다. 그러다 이내 지네의 꿈틀거림도 완전히 멈추고, 더듬이도 밑으로 가라앉았다.

“다 됐어?”

“잠시만요.”

칼튼은 확인사살까지 잊지 않았다. 지네의 머리까지 완전히 동강 내고 걷어차 멀리 보낸 다음에야 루이센의


접근을 허락했다.

“윽……. 가까이서 보니 더 끔찍하네. 뭐 이런 게 다 있어? 몬스터야, 지네야?”

“그냥 지네는 아니겠죠. 이 크기에, 이런 힘이면.”


“그치.”

루이센은 지네 몸통을 바라보았다. 흰 배를 까뒤집은 지네의 몸통은 날뛸 때랑은 또 다르게 징그러웠다. 축


늘어진 수십 개의 다리를 보고 있자니 피부가 간질간질해졌다. 으, 하고 루이센은 신음을 흘렸다. 가까이서 보니
더 끔찍한 놈이었다.

칼튼은 루이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토닥였다.

루이센과 칼튼은 지네 사체를 처리할 겸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칼튼이 불을 피우는 동안 루이센은 근처에 대충
주저앉았다.

“우리가 얼마나 온 거지?”

루이센은 콘포세에서 사둔 빵을 뜯어 먹다가 물었다. 칼튼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높이 떠 있었다.

“반나절쯤 달렸으니, 거의 도착했을 겁니다. 지네만 아니었어도 이미 마을이었겠네요.”

루이센은 수통에 담아 둔 물을 마시며 생각했다.

“저 지네 짓일까? 경비대장이 마을이랑 소식이 끊긴 거.”

경비대장은 몇 번이나 사람을 보냈는데, 그 사람들도 전부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했다.

“우리와 같은 길로 이동했을 테니, 똑같이 지네의 습격을 받았을 겁니다. 운이 좋으면 도망쳤겠지만, 글쎄요.”

지네는 칼튼이 상대하기에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먹잇감이
되었겠지. 경비대장이 보냈다는 사람들이 연락 두절이 된 이유는 아마도 지네에게 잡아먹혔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괜찮을까?”

“글쎄요. 마을과는 꽤 떨어진 장소긴 합니다만…….”

칼튼은 말을 흐렸다. 상황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이 지네는 어디서 온 걸까요?”

“응? 여기서 태어난 거 아니야?”

“어디선가 이동해 온 걸 겁니다. 남부에는 원래 거대 몬스터가 서식하지 않아요.”

“그래?”

용병은 몬스터를 퇴치하는 의뢰를 자주 받는다. 칼튼도 몬스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왕국 남부는 용병의
활동이 적다. 다른 지역에 비해 풍요롭고 행정력이 뛰어나 싸울 곳이 적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 몬스터가 없기 때문이었다.

“지네는 저도 처음 보지만, 거미나 개미 형태를 한 몬스터는 종종 본 적 있습니다. 서식지는 여기보다 더


북서쪽이었어요.”

“거기서 내려온 건가? 그치만 중간에 강이 있잖아. 몬스터가 강을 건널 수도 있나?”


“이 정도 되는 몬스터가 강을 건너왔다면 눈에 띄었을 텐데요.”

“모르지. 워낙 뒤숭숭한 세상이니까.”

언제나 전쟁이 문제였다. 군대는 위로, 피난민은 밑으로 정신없이 이동했다. 그사이에 한탕 해 보려는 사람들이
뒤섞였다. 일상적인 체계는 무너지고 그 빈틈을 타서 이상한 것들이 날뛰었다.

루이센은 빵을 마저 먹었다. 칼튼이 불을 지네의 몸에 놓으려는데 수풀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중년 남자 몇 명이


나타났다.

지네 때와는 다르게 칼튼과 제피스는 무덤덤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농민의 옷을 입고 있는 데다, 겁에
질린 모습이 꼭 궁지에 몰린 쥐새끼 같았다. 루이센이 보기에도 크게 경계할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곧 지네를 발견하고 뒤집어질 듯이 놀랐다.

“아악! 괴물! 괴물이다!”

“사람 살려!”

그들은 화들짝 놀라 도망가려다가 지네가 배를 까뒤집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멈춰 섰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손을 잡고, 매우 신중하게 지네를 관찰했다.

“뭐, 뭐야. 죽은 건가?”

“죽었다고? 그 괴물이?”

칼튼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남자 셋은 그제야 칼튼을 발견하고 또 까무러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댁들은 뭡니까?”

“다, 당신들은 뭐요?”

“내가 먼저 질문했는데?”

칼튼은 까칠하게 받아쳤다. 사람들은 지네 사체와 칼튼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저 괴물……. 어떻게 된 거요?”

“내가 죽였소. 댁들 뭐냐니까?”

칼튼은 짜증을 냈다. 짜증 내는 칼튼은 꽤 무서운데, 이 사람들은 겁을 상실했는지 환호를 했다.

“괴물이 죽었대! 이분이 죽였대!”

“아이고! 저놈이 죽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허리 숙여 인사하고 칼튼의 손을 잡아 악수를 해 댔다. 겁이 많은 건지 없는 건지 모를 사람들이었다.


칼튼은 어이없어했다. 루이센은 칼튼의 멍청한 모습에 웃음을 참으며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러분은 누구시고요?”

루이센이 침착하게 묻자, 사람들 중 한 명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우리는 이 앞에 큰 바위 옆 마을에 사는 사람입니다. 지네의 비명 소리가 들리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쫓아온
건데……. 이놈이 이렇게 죽어 있을 줄은!”

그들은 루이센과 칼튼이 가려던, 경비대장의 고향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큰 바위 옆 마을이요? 저희도 그곳에 가던 중이었습니다. 콘포세에 경비대장님의 부탁을 받았거든요.”

“오! 경비대장님이 말입니까? 그분은 우리 마을 출신이 맞으십니다. 제대로 찾아오셨어요.”

마을 사람들은 기꺼이 루이센과 칼튼을 마을로 안내하기로 했다. 마을은 여기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마을까지 가는 동안, 루이센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61 화

통상 큰 바위 옆 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은 숲속 깊이 외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주로 숲에서


나는 자원을 채취해 콘포세 등의 도시에 파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이곳 숲은 울창했고 다양한 자원과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물론 몬스터도 있었으나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냈다. 대단히 좋은 것은 없지만 특별히 나쁘지도 않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마을의 평화가 깨진 것은 바로 한 달쯤 전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숲에 거대 지네가 살기 시작했다.


그것이 어디서 와서 왜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냥 갑자기 아무 전조도 없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치는 것처럼 놈은 이 숲에 살기 시작했다. 놈은 왕성한 식욕으로 닥치는 대로 살아 있는 것들을
먹어 치웠다고 한다. 사람, 동물, 몬스터 가리지 않고 말이다.

“놈은 정말 괴물이었습니다. 날붙이가 전혀 통하지 않았어요. 크기는 또 어찌나 큰지…….”

거대 지네의 힘과 끔찍한 몰골에 마을 사람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거대 지네를 퇴치하기는커녕 자경단이 온 힘을


모아도, 울타리와 지형의 도움을 받아 놈을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게 고작이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마을 속으로 숨어들었다. 감히 지네와 대적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콘포세나 영주 쪽에 도움을 요청하진 않았나요?”

“그러고 싶어도 어디 마을 밖으로 나갈 수가 있어야지요. 어찌나 예리한지…….”

아무리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거대 지네는 귀신같이 사람들이 마을을 나온 것을 눈치채고 공격했다. 마치 숲속


어디에나 지네의 눈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몇 번이고 도움을 요청하러 사람을 보냈으나 전부 지네에게
잡아먹혔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아무도 마을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겨울을 대비해 비축해 놓은 식량이나 까먹고
있으니……. 사실 이번 겨울을 넘길 수 있을지 우리끼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오늘, 지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걸 확인하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끝에


어렵사리 지금 이 세 명의 남자가 나선 것이라고 했다.

“오면서 별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저 괴물이 살아 있으면 어쩌나, 저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나타난 건
아닌가.”

거대 지네의 비명 소리는 너무도 끔찍했다. 소리가 귓속을 긁어내리는 것 같았다. 비명 소리를 향해 다가가는
내내 딱 오늘 여기서 죽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가니 그곳에는 지네의 사체와 사람이 있는 게 아니던가.

사실 칼튼만 혼자 서 있었더라면 그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을 것이다. 자경단이 다 달라붙어도 생채기 하나


못 낸 거대 지네를 혼자서 잡다니. 그게 어디 평범한 사람이겠는가. 하지만 순례자가 함께하고 있으니 짧은
순간에 적어도 위험한 사람은 아니겠다는 판단이 서서 말을 걸게 되었다.

루이센은 마을 사내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내내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콘포세의 경비대장이 몇 번이고 마을에 사람을 보냈다고 했어요. 그 사람들을 보진 못했나요?”

“……지난 한 달 사이에 새롭게 마을에 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네가 루이센과 칼튼을 공격한 것처럼, 경비대장이 보낸 사람들도 공격했을 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아마 살아 있긴 힘들겠지.

“……그래서 완전히 연락이 끊긴 거군요.”

마을 사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어떻게 된 정황인지는 이해가 갔다. 멋모르고 죽인, 저 거대한 지네가 모든
일의 원흉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얼떨결에 문제를 다 해결해 버린 셈이었다.

대충 사연을 다 듣고, 루이센은 슬그머니 걸음을 늦추며 칼튼의 옆에 붙었다.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티를
팍팍 내자 마을 사내들은 조용히 앞장서 갔다. 거리가 벌어지자 루이센은 칼튼의 팔을 당겼다. 칼튼은 루이센의
말을 듣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앞서가는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조심하며 루이센은 칼튼의 귀에 속닥거렸다.

“일이…… 다 해결되어 버렸네?”

“그러려던 건 아닌데, 잘되었죠.”

칼튼도 작게 대답했다.

“일이 간단해졌네요. 이제 마을로 가서 경비대장의 아내에게 편지를 전해 주고 돌아가죠.”

“그래야지.”

루이센의 대답에 기운이 없었다. 칼튼은 용케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내고 덧붙였다.

“출발하기 전에 간단하게라도 밥 먹고 가죠.”


“좋지.”

루이센은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콘포세에서 사 둔 빵을 맛보기를 내심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금방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로는 큰 바위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주변으로는 벽돌
울타리가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지네가 넘보지 못했다는 것치고는 허술하고 높이가 낮아 약간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마을로 들어서자, 입구 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거동을 할 수 있는 마을 주민은 다 나와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되었어? 이분들은 누구시고?”

마을 사람들 얼굴에는 경계심으로 가득 찼다. 가뜩이나 거대 지네 때문에 겁에 질린 상황에서 낯선 사람이


등장하자 불안하게 술렁거렸다.

“여기 이 순례자님께서 콘포세의 경비대장님 부탁으로 우리 마을을 도우러 오셨습니다.”

루이센이 순례자의 통행증이 잘 보이게 섰다. 어디서나 찬란한 은빛을 뿌려 대는 통행증 덕분에 멀리 있는 사람도
충분히 그 빛을 볼 수 있었다. 개중에 신앙심이 깊은 몇몇은 두 손을 모으고 허리 숙여 인사했다. 루이센은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게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지네는? 지네는 어떻게 되었어?”

“이분, 순례자의 호위 용병이신 이 용병님께서 그 괴물 놈을 죽였습니다!”

남자의 말에 크게 술렁거렸다.

“정말입니까? 그 괴물이 죽었다고요?”

“저 사람이 혼자? 그게 말이 돼?”

“그치만 제 눈으로 똑똑히 봤는걸요. 놈이 배까지 뒤집고 죽어 있었습니다. 사체도 불태웠어요.”

“정말? 그놈이 죽은 거야?”

“정말이라니까요. 제가 거짓말을 왜 하겠습니까?”

루이센과 칼튼을 마을까지 안내한 남자들이 본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도 의심을 거두고 거대
지네가 죽었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누구는 소리를 쳤고, 누구는 살았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어떤 사람들은
집에 있는 식구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갔다.

한바탕 난리가 나면서 루이센과 칼튼은 순식간에 이 마을의 은인이 되어, 온 사방에서 감사 인사가 쏟아졌다.
루이센은 칼튼에게 공로를 양보했다. 그가 지네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그의 덕분에 자신도 목숨을 건졌다고 말했다.
순례자의 겸허한 태도는 마을 사람들의 흥을 부추겼다.

어린애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칼튼에게 선물을 건넸다. 작은 도토리 몇 개였지만 마음이 담겨 있었다. 칼튼은
멀뚱하게 아이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도토리? 뭐 어쩌라는 거지?’

보다 못한 루이센이 칼튼의 옆구리를 팔로 찔렀다. 칼튼은 얼떨결에 도토리를 받아 들었다. 아이는 고맙다고
허리까지 숙이고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칼튼이 표정을 구기는 것을 보고 루이센이 물었다.

“왜? 고작 도토리라 마음에 안 차나?”

“이런 데서 금덩어리 받을 거라고 기대했겠습니까?”

“근데 표정이 왜 그래?”

“……그냥요.”

보기완 달리 칼튼은 지금 매우 어색한 상태였다.

사람들은 낯선 것을 두려워한다. 그 낯선 것이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할 때는 더욱 꺼려 한다. 그런 탓에


칼튼이 힘을 드러내고 무용을 떨친 수록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칼튼이 기사거나, 하다못해 어느 귀족의
노예였다면 그렇게 꺼리지 않았겠지만 용병이라는 그의 신세가 그를 더욱 불편한 존재로 만들곤 했다.

물론 그런 대우에 익숙했고, 일부러 더 험악하게 행동해서 자신을 향한 분노를 부추기기도 했으니 새삼 속상할 건
없었다. 호구 잡히는 것보다야 무서운 게 낫지.

그런데 정작 이렇게 온 사방에서 쏟아지는 감사 인사와 칭찬을 듣고, 작은 선물까지 받으니 영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색하고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칼튼은 뚱한 표정으로 도토리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챙기는 걸 보면 싫진 않은가 본데, 표정 펴. 애가 무서워한다?”

루이센이 옆에서 킬킬댔다. 어린애한테 도토리를 선물 받는 칼튼이라니. 웃겨 죽을 거 같았다. 이 꼴을 칼튼의


부하들도 봐야 하는 건데!

한동안 마을 사람들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잠시 기다렸다가 진정이 되자, 이번에는 마을의 촌장이 소식을 듣고
맨발로 달려 나왔다.

“우리 마을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두 분이 저희의 은인이십니다.”

촌장은 감사 인사를 한바탕 쏟아 낸 다음, 침착하게 자신의 집으로 루이센과 칼튼을 초대했다. 마을의 큰
어른다운 진중한 태도였다. 비록 신발은 안 신었지만. 루이센은 촌장을 따라 걸으면서 내내 촌장의 맨발을
힐끔거렸다.

“그런데 마크, 아니 콘포세의 경비대장님 부탁을 받고 오신 거라고요?”

“이 마을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성공한 친구죠. 안나도 우리 마을 출신이고요. 아, 안나는 마크 아내의


이름입니다. 우리 마을이랑 연락이 안 되니까 걱정되어 사람을 보낸 모양입니다. 참 세심하다니까요.”

촌장은 이 작은 마을에서 경비대장을 배출한 것에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런 것도 있고, 아내분이 잘 계시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더군요. 그러고 보니 그분은 어디 계신가요?
인사를 전하고 편지를 전해 드리고 싶은데요.”

루이센은 마을 사람들을 두리번거렸다. 어디에도 배가 부른 임산부는 보이지 않았다. 밖을 돌아다닐 형편은 아닌


건가? 거대 지네 때문에 마을 전체가 고통을 겪는 와중에 잘 지내고 있는 건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촌장이 갑자기 멈추어 다급하게 물었다.

“안나요? 안나가 우리 마을에 있다고 그래요? 안나는 콘포세로 돌아간 거 아니었나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루이센과 칼튼도 멈춰 섰다. 촌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불길한 징조였다.

62 화

길거리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세 사람은 서둘러 촌장의 집으로 들어갔다. 탁자에 앉기 무섭게
루이센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경비대장의 아내분이 콘포세로 돌아갔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안나는 한 달 전에 콘포세로 돌아갔는걸요.”

촌장은 경비대장의 아내, 안나에 대해 이야기했다. 루이센과 칼튼이 알고 있는 대로, 그녀는 아이를 낳기 위해
고향 마을로 돌아왔다. 그러나 마을에 와 짐을 풀기가 무섭게 친정 식구들과 크게 싸웠고, 그대로 도로 짐을 싸
콘포세로 돌아간다며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원래도 사이가 안 좋은 가족이었거든요. 그래도 딸이 아이를 낳으러 왔는데 그렇게까지 싸울 일인가 하고 말하긴
했습니다만……. 가정사니까요.”

“그래도 임산부인데……. 혼자 가게 뒀나요?”

“안나랑 같이 온 노파랑 하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도 같이 갔어요. 작지만 마차도 있었고. 그만하면
충분하죠. 올 때도 무사히 왔고요.”

“그때는 지네가 숲에 없었을 때인가요?”

루이센의 질문에 촌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요.”
“아마?”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도 이미 숲에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그때는 그런 괴물이 숲에 있다는


건 몰랐어요.”

마을 사람들이 거대 지네를 인식한 것은 놈이 마을을 공격하면서부터였다. 그때 처음으로 놈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전까지는 숲이 평소와 다르다는 건 느꼈지만 거대 지네 같은 괴물의 등장은 전혀 예상지 못했다.
숲은 오랫동안 그들이 살아온 안전한 터전이었기에 막연히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올 때도 무사히 왔으니, 돌아가는 것도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고요. 그리고 안나에 대해 더 신경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왜죠?”

“그날 밤이었거든요. 지네가 마을을 공격한 게.”

안나가 떠난 그날 밤에 거대 지네가 마을을 공격했다. 많은 사람이 지네와 싸우다 죽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렸고
모든 생계 활동이 멈추고 마을 안에 고립되었다. 겨울을 대비해 비축해 둔 식량을 축내면서, 언제 지네가 또
마을을 쳐들어올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며 버티던 나날들이었다. 당장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 떠난 사람을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솔직히…… 순례자님께서 묻기 전까지는 안나 일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저기…… 안나가


콘포세에 없다는 건가요?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고?”

“네. 경비대장님 말로는 그래요…….”

“세상에. 이럴 수가.”

촌장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갑자기 차를 가지고 오겠다며 부엌으로 가 버렸다. 부엌
쪽에서 촌장의 울음소리가 났다. 서로 잘 아는 사이 같더니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루이센은 심란한 기분으로 칼튼을 돌아보았다.

“경비대장은 아내가 마을에 갔다고 했고, 촌장은 경비대장의 아내가 왔다가 곧 콘포세로 돌아갔다고 했지만,
어디에도 경비대장의 아내는 없었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복잡하게 생각하실 거 없습니다. 경비대장의 아내가 사라졌고, 괴물 지네 때문에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이야기니까요.”

“……그렇게 말하니 간단하게 들리네.”

루이센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경비대장은 마을 상황도 알아봐 달라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거고,
자신의 아내가 무사한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하필 그녀가 실종되다니. 그것도 거대 지네가 돌아다니는
숲속에서! 아무리 희망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살아는 있을까?”

“가능성이 낮죠.”
칼튼의 말은 잔인하지만 사실이었다. 경비대장의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진작에 어디든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정황상, 그녀가 거대 지네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경비대장에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아이가 태어나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남자에게 한 달 전에 아내가 죽었을 거라고 말하라고?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칼튼은 루이센의 등을 토닥였다.

한바탕 울고 나자 촌장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는 루이센과 칼튼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을 나서 마을 사람들을


모으고 경비대장의 아내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경비대장의 아내를 찾아보기로
했다.

아무도 그녀가 살아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뭐라도 해 보겠다는 마음에 많은 사람이 자원했다.
잔치라도 벌일 듯 들떴던 마을은 비탄에 빠졌다. 장례식처럼 우울한 분위기가 마을을 감쌌다.

***

마을을 뒤로하고, 루이센과 칼튼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들이 마을에 남아 도울 일이 없으니 콘포세로 돌아가
경비대장에게 소식을 전해야 했다.

루이센과 칼튼은 말에 타지 않고 나란히 숲길을 걸었다. 제피스가 얌전히 뒤따랐다. 루이센은 주머니 속에 조심히
넣어 둔 경비대장의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달랑 종이 한 장이 이렇게 무거울 수가 있을까. 받을 사람이 사라진
편지를 돌려주러 가는 기분은 최악이었다.

뒤에서는 마을에서 급히 꾸려진 수색대가 숲을 뒤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때 칼튼이 불쑥 루이센의 입가로 뭘 가져다 댔다. 루이센은 반사적으로 받아먹었다.

“뭔데 이거? 음? 육포야?”

우물우물거리자 짭조름한 맛이 혀를 일깨우면서 감칠맛이 배어 나왔다. 공작성에서 만든 것만 못하긴 했지만 훈제


특유의 연기 향과 고기의 식감은 기분을 한결 나아지게 만들었다.

“근데 이거 언제 산 거야?”

“여관에서 만든 걸 좀 사 뒀습니다. 공작님이 가슴팍을 자꾸 더듬는 게, 허전해하는 거 같아서요.”

“아. 내가?”

가슴속 육포 한 조각 말이지. 그게 그렇게 티가 났단 말이야? 루이센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쁜 짓은 아니지만


남 보기 부끄러운 습관이긴 했다.

“나중에 공작님이 말 안 들으면 써먹으려고 했는데, 지금 써 버렸네요.”

칼튼은 남은 육포가 든 주머니를 루이센에게 넘겼다. 말은 놀리는 거 같은데 신경 써 준 건가. 루이센은


주머니를 받아 칼튼에게도 육포 한 조각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육포를 나눠 먹으면서 가는데 등 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또 뭔데? 루이센이 놀라 뒤돌아보자, 타이밍
좋게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소리치는 게 들려왔다.

“마차! 안나의 마차다!”

“마차를 찾았어! 그리고 사람…… 사람 시체가……. 으악!”

루이센은 칼튼을 돌아보았다. 가 보자. 경비대장의 아내일 수도 있잖아. 말로 하지 않아도 루이센의 뜻이 전해져,
칼튼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발견된 곳은 마을에서 콘포세에 가는 길에서 조금 벗어난 공터였다. 루이센과 칼튼이 있던 곳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마을 사람 여럿이 현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두 명이 탈 수 있는 작은 마차가 반파되어 공터에 널브러져 있었다. 피가 사방에 흩뿌려져 있어 처참한 꼴이었다.

“마차가 길을 벗어나 정신없이 저 방향으로 달려간 흔적이 있어요. 뭔가의 공격을 받고 도망치다가 잡힌 거
같습니다.”

칼튼이 주변을 슥, 보더니 말했다.

“뭔가가 지네일까?”

“아마도요.”

칼튼과 지켜보는데 마을 사람 하나가 루이센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순례자님. 저쪽에…….”

마을 사람 하나가 다가와서 한쪽을 가리켰다. 시신 두 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한 달이나 숲에 방치되어


상당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 루이센은 끔찍한 죽음을 많이 봐 왔기 때문에 무덤덤했다. 그걸 보고 마을 사람은
역시 순례자라 다르다고 속으로 감탄했다.

“누군지 확인되었나요?”

“마을 사람 같지는 않은 게, 아마 같이 떠난 노파와 하인인 거 같습니다.”

“두 사람뿐이던가요?”

“네. 일단은요. 주변을 더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분들 마을로 옮기려고 하는데 그전에 혹시 기도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마을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되살아나 움직인다는 미신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제의 기도로 영혼을 달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순례자는 사제와 엄연히 다른 존재였지만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게 그걸로 보였다. 사실 순례자도 아니지만,
어차피 이런 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기도는 해 드릴 수 있지만 제대로 화장을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전 순례자지 사제가 아니니까요.”

“감사합니다. 순례자님.”
루이센은 시신에게 다가가 짧은 기도문을 외웠다. 말하는 법, 손짓하는 법,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까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외팔의 순례자를 그대로 따라 했다. 그 모습이 굉장히 그럴듯하여 신앙심이 약한 사람도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흉내를 냈다.

칼튼은 루이센이 기도하는 사이 주변을 더 살펴보았다. 기도가 끝나고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옮기기 위해
움직였고, 칼튼이 루이센에게 다가왔다.

“지네에게 습격당한 거 같습니다.”

“확실해?”

“네.”

칼튼은 마차 주변으로 루이센을 데려갔다. 긴 풀을 발로 치우자 바닥에 점선을 마구 그어 놓은 거 같은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

“이게 뭔데?”

“지네 발자국일 겁니다.”

“어떻게 알아?”

“몸통을 끌고 다니지 않고, 몸통 양쪽에 있는 다리로 콕콕 짚으면서 다니니까요.”

루이센은 아까 본 그 지네의 움직임을 떠올리고 으엑, 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징그러워 죽겠네!

“그리고 이쪽으로 오시면 지네 발자국을 따라 핏자국이 나 있습니다. 저쪽 방향으로 이어지고요.”

“경비대장의 아내는 그럼…….”

“여기에 시체가 없는 데다 핏자국을 보면 지네에게 잡혀갔을 것 같습니다. 그래 봤자 살아 있진 않겠지만요.”

“으음…….”

뭔가 찜찜했다. 왜 다른 두 사람은 놔두고 경비대장 아내만 잡아갔지? 먹이로 삼자면 저 하인 쪽이 더 나을 텐데.

루이센은 발자국이 이어진 방향을 가만히 응시했다. 대낮이라 햇볕이 내리쬐고 있음에도 먼 숲속은 음울해 보였다.
지네는 죽었다. 활활 불타 사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럼에도 어쩐지 무언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63 화
“발자국을 따라가 보자.”

루이센이 제안했다. 모르고 지나갔으면 모를까, 지네 발자국과 경비대장의 아내 것으로 추정되는 핏자국이
발견되었다. 어떻게 된 건지, 그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 눈으로 확인을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경비대장에게도 면이 서고.

“저는 콘포세로 돌아가는 게 낫다고 봅니다. 경비대장에게 부탁받은 일은 충분히 했어요.”

칼튼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여겼다. 수색하는 건 마을 사람들만으로 충분했다. 루이센과


칼튼이 힘을 보태든 말든, 결과가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저 세 사람 중에 경비대장의 아내만 잡아간 거, 자네는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

“지네 속마음이야 모르죠. 지네 발자국을 따라간다고, 경비대장의 아내를 찾을 수 있을지 어쩔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혹시 살아 있다면? 그럼 한시라도 빨리 구해야지.”

“그건 마을 사람들이랑 경비대장이 알아서 하겠죠. 우리, 남의 일에 참견하고 다닐 시간 없지 않습니까.”

칼튼의 말대로 남의 일에 참견하고 다닐 여유가 없는 건 맞았다. 하지만 그건 몰랐을 때 이야기였다. 아내를


걱정하고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는 경비대장, 안나의 소식에 부엌에서 혼자 울던 촌장, 지네의 죽음에 기뻐하는
마을 사람들. 그들을 알아 버렸다.

알아 버린 이상 이대로는 홀가분하게 떠날 수 없었다. 이곳을 떠나 멀리, 멀리 가도 걱정이 머리카락 끝에


달랑달랑 매달려 매 순간 신경 쓰이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시간. 시간이 문제라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루이센은 맹렬히 머리를 굴려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경비대장에게 소식을 전하는 건 촌장에게 대신해 달라고 하자. 그럼 우리가 콘포세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으니까 여유가 생기잖아. 응?”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해요?”

“위험한 느낌이 들어. 마을 사람들만 두고 가면 안 될 거 같아. 이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잖아.”

칼튼은 고민했다. 루이센이 뭐라고 해도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내 말을 듣기야 하겠지만…… 나한테 실망하겠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 갈 길을 가 버리는 냉혈한. 칼튼은 그런 냉혈한이 맞긴 했지만 루이센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루이센의 주장이 그럴듯했다. 그의 말대로 콘포세에 다른 사람을 보내면, 반나절 정도 여유가 생긴다.
그럼 수색을 도와도 크게 시간을 낭비하진 않을 거다. 직접 경비대장에게 소식을 전하러 가지 못해도 자기 아내를
찾느라 고생한 걸 알면 체면도 살 거고.
“……좋습니다. 대신 반나절입니다. 시간 지나도 별거 안 나오면 그땐 바로 떠나는 겁니다.”

“당연하지! 그때는 나도 더 고집부리지 않겠네.”

칼튼의 허락이 떨어지자, 루이센은 마을 사람들에게 지네 발자국을 따라가기로 했다고 전했다. 체격이 좋은 마을
청년 몇 명이 루이센을 따라가겠다고 자원했다.

***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지네의 발자국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사이 비가 내리지 않았고 건조한 날씨였던
터라 다행이었다. 발자국을 따라 걷자 커다란 바위에 이르렀다. 마을에서 보면 큰 바위의 너머였다.

큰 바위 주변으로는 공터가 있었는데, 낙엽이 두껍게 쌓여 발자국이 끊겼다.

“여기 어디로 갔다는 건데…….”

루이센은 팔짱을 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위가 있고, 공터가 있었다. 지네가 지나갈 만한 굴이 어디 있나?
신경 써서 봐도 거기서 거기 같아 대신 칼튼을 바라보았다.

“여기 지네 굴이 있다면 저쪽일 겁니다.”

칼튼은 큰 바위를 가리켰다.

“저기?”

“지네는 바위 아래를 좋아합니다. 어둡고 좁은 곳이요.”

“지네처럼 생긴 몬스터를 본 적 있어?”

“아뇨. 그치만 몬스터들은 대체로 생긴 것을 따라가더라고요. 거미형 몬스터는 거미줄을 치고, 개미형 몬스터는
군집을 이루고요.”

“음…….”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어린애만 한 크기의 거미와 개미라니. 윽. 상상만으로도 징그럽고 피부가 간질간질해


루이센은 괜히 팔을 긁었다.

칼튼은 큰 바위로 다가갔다. 바위 주변에 쌓인 낙엽을 걷어 내자 바위와 지면 사이에 좁은 틈이 나타났다. 언뜻


봐서는 자연스럽게 생긴 틈 같았다.

“이게 지네 굴 입구겠네요.”

“이게? 그냥 틈 아니야? 그 지네에 비해 너무 작지 않은 거 같은데.”

“보기엔 이래도 안쪽은 넓을걸요. 이 밑은 부드러운 흙이니, 땅을 파고 들어가 집을 짓기 충분하죠.”

그렇게 말하며 칼튼은 틈새 안으로 작은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가 굴러가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안은 깊고 넓다는 의미였다.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튼의 추리는 틀린 적이 없었다. 똑똑한 사람 말을 잘 들어야지.

“들어가 봐야겠어.”

칼튼은 루이센을 지네 굴 같은 곳에 데려가도 되는 건지 망설였으나, 일단 지네가 죽어 위험하지 않을 거 같았고


눈앞에 안 두면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불안하여 떨어뜨려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루이센에게 자신의 망토
자락을 쥐고 따라오게 했다.

칼튼이 먼저 굴로 들어가고, 그 뒤를 루이센과 마을 청년들이 일렬로 뒤따랐다. 칼튼의 말대로 좁은 입구만


지나자, 안쪽은 편하게 일어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저 앞은 온통 새까매서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작은 횃불에 의지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길은 조금씩 내리막길이어서,
어두운 구덩이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안으로 향할수록 불쾌한 비린내가 풍겼다. 피와 풀이 함께
썩어 가는 듯한 냄새. 거대 지네에게 맡았던 냄새와 같았다. 게다가 벽면에는 지네의 발자국이 사방에 찍혀
있었다.

‘지네 굴이 맞긴 한데…….’

아무리 가도 뭐가 나오지 않았다. 긴 통로가 끝없이 이어지니 처음의 긴장감도 풀리고 지루함이 엄습할 때쯤
갑자기 공간이 변했다. 천장이 높아지고 양옆도 탁 트였다. 통로가 아닌, 방이었다. 드디어 지네 굴의 끝에
도달한 것이다. 그 입구로 들어서기 무섭게 칼튼이 멈춰 섰다.

루이센은 멍하니 따라가다가, 그의 등에 콩 하고 이마를 찧었다.

“왜 그래?”

“저기 앞에 뭐가 있습니다.”

“뭐가 있는데?”

루이센이 열심히 앞을 보아도 어둠이 눈에 익지 않아서 잘 안 보였다.

“바닥이요.”

칼튼의 말에 마을 청년들이 앞으로 나오며 횃불을 이리저리 비추었다. 불빛에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 처음에는 사람 발이 보였다.

여자들이었다. 세 명의 여자들이 나란히 바닥에 누워 있었다. 전부 만삭의 임산부였고 체격과 나이도 비슷해
보였다. 일부러 임산부만 모아, 나란히 전시해 둔 거 같지 않은가. 예상지 못한 모습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이게 지네 짓이라고?

“누가 경비대장의 아내입니까?”

침묵을 깬 것은 칼튼이었다. 그의 물음에 아차, 하고 정신 차린 마을 청년들은 여자들을 살폈다.

“여기, 이 사람이 안나예요.”


세 여자 중 한 명이 사라진 경비대장의 아내였다. 마을 청년들 말로는 나머지도 숲을 끼고 있는 인근 마을의
여자들이라고 했다. 겉보기에는 아주 멀쩡했다. 오랫동안 이 지하에 붙잡혀있었을 텐데도 야위지도, 쇠약해
보이지도 않았다. 이에 용기를 내어 마을 청년들이 더 자세히 여자들을 살폈다.

“숨을 쉬어요! 심장도 뛰고……. 괜찮은 거 같아요.”

여자들은 언뜻 보아서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휴. 루이센은 안도했다. 지네 발자국을 따라오길


잘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네 굴을 발견하지도 못했고, 여자들을 구할 수도 없었겠지.

“얼른 바깥으로 데리고 나갑시다. 한 명씩 안아서 옮겨요.”

지하에는 들것으로 쓸 만한 게 없었고, 밖에 나가 들것을 가지고 오자니 시간이 걸릴 터였다. 안아서 옮기는 게
최선이었다. 여자는 셋, 따라온 마을 청년도 마침 세 명이라 딱 맞아떨어졌다.

마을 청년들이 여자들을 챙기는 사이, 루이센과 칼튼은 뭐 다른 게 없는지 방 안을 살폈다.

루이센은 두리번거리다가 무심코 벽면으로 횃불을 가져다 댔다.

“억.”

벽면이 울퉁불퉁하다 했더니, 그곳에는 거대한 흉상이 있었다.

흉상의 모습은 독특했다.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개의 뿔이 달려 있고, 눈은 세 개나 되었다. 그것은


위로 돌출되어 있어 마치 아래에 누워 있던 여자들을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흉상의 아래로는 돌로 만든 단상이 있었다. 크진 않지만 부드러운 천을 깔아 뒀고, 양옆으로는 금으로 만든


촛대와 함께 중앙에 향을 피우는 향로가 놓여 있었다.

“이건 제단인가?”

모양, 배치가 꼭 교회에서 보던 제단이랑 비슷했다. 은촛대가 아니라 금촛대라는 것, 꽃 대신 짐승 뼈가


장식되어 있다는 것만이 달랐다.

제단의 중앙에는 금 접시가 놓여 있었다. 교회의 제단을 생각한다면, 저 위치에는 신에게 바친다는 의미의 특별한
성물을 놓는다. 그렇지만 루이센이 접시 위의 물건을 들어 살펴보니 손가락만 한 크기의 주머니칼이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날은 무뎠고 장식도 없어 싸구려처럼 보였다.

루이센은 다시 한번, 흉상과 제단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여긴…… 너무…… 이상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이치에 맞지 않고 부자연스러웠다. 왜 지네 굴 안에 이런 제단 비슷한 것이 차려져 있는


걸까? 흉상은 또 무슨 의미고?

거대 지네는 임산부만 골라 자신의 굴로 잡아 와 살려 두었다. 간혹 살려서 싱싱한 상태로 먹이를 저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자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먹이로 저장해 둔 것은 아닌 거 같았다. 그녀들은 너무 정갈하게
누워 있었다. 마치 흉상 앞에 전시라도 해 둔 것처럼.

어떤 몬스터가 그럴 수 있지? 먹는다, 파괴한다. 번식한다. 그것이 몬스터의 본능이었고, 그 본능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몬스터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확실한 건 이 지네 굴에 분명히 사람의 손이 닿았으리라는 점이었다. 금촛대며, 제단이며. 사람이 아니고서야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

‘그럼 누군가 지네를 시켜서 여자들을 잡아 오게 한 건가?’

몬스터를 종처럼 부리는 사람.

루이센은 그런 사람 하나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64 화

‘루거…….’

루거에게는 몬스터를 부리는 힘을 가진 패거리가 있었다. 한 달 전이라면 루거는 공작령에 있을 때이니 루거는
아니다. 이건 그 패거리의 짓일 거라고 추정되었다.

놈들은 그 기괴한 힘으로 은밀히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는 듯했다. 루이센은 그들이 누구인지 몰랐다. 이렇게
이상한 일이 도처에서 일어나니, 떠도는 소문으로라도 들려올 법도 한데 말이다.

‘대체 뭐 하는 놈들이지? 뭘 바라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거야? 이래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루거랑 무슨 관계지?
날 납치하려는 것도 이런 짓거리랑 관련이 있는 건가? 전생에도 이랬나?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루이센은 순간 현기증이 났다. 까마득히 깊은 구덩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칼튼은 조용히 다가와 덜덜
떨리는 루이센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금은 다른 생각하지 마세요. 일단 여자들을 데리고 여길 나가요. 생각은 안전한 곳에 가서 해도 늦지


않습니다.”

칼튼의 단호한 어조에 루이센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래, 그러자. 일단 나가서…… 그다음에 생각해 보자.”

이미 청년들은 한 명씩 여자들을 안고 나가고 있었다. 얼른 뒤를 따라가려고 하는데 살랑대는 바람이 루이센의


뺨을 스쳤다.

‘응? 바람?’

칼튼이 루이센의 어깨를 안고 끌어당겼다. 루이센의 눈앞으로 검은 액체가 찍, 하고 날아왔다. 옷자락이 살짝


스쳤을 뿐인데 녹아내렸다. 으악! 이게 뭐야!
샤샤샤.

머리 위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빨리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거대한 지네가 천장에 달라붙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네의 붉은 눈 십 수 개가 도로록 굴렀다. 지네는 톱날 같은 이빨 사이로 검은 침을 흘렸는데,
땅에 닿자 살벌한 소리를 내며 부식되었다.

“다들 도망쳐요!”

“아아악!”

마을 청년들도 지네를 발견하고, 여자들을 안은 채로 도망쳤다. 뒤쪽에 있는 루이센과 칼튼이 제일 위험했다.


칼튼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루이센을 달랑 안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쾅!

지네가 머리를 바닥으로 찍어 내렸다. 간발의 차이로 칼튼은 그 자리를 피해 통로로 들어갔다. 통로는 좁고
길었고 오르막길이었다. 앞서가는 마을 청년들은 다들 한 명씩 여자를 안고 있었다. 칼튼이 제 속도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지네는 수십 개의 다리를 부산하게 놀려, 벽면을 타고 돌며 그들을 쫓아왔다.

쿵, 쾅, 쿵!

지네가 다리로 벽면을 찍을 때마다 부서질 것 같은 진동이 전해졌다.

“아악! 저놈 죽은 거 아니었어? 혹시 몰라서 불태우기까지 했잖아!”

“……같은 놈이 아니에요.”

“뭐?”

“지네는 암수가 한 쌍으로 다니는데, 젠장. 이제 생각났습니다. 저건 암컷 지네예요.”

칼튼이 죽인 놈보다 더 크고, 더 길고, 심지어 독도 있었다. 저런 게 한 놈도 아니고 쌍으로 돌아다닌다고?


세상이 미친 게 틀림없었다.

루이센은 지네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삼켜 버릴 것처럼 커다란 입을 쩍쩍 벌리는 것을 보았다.

‘으아아아악.’

루이센은 팔로 칼튼의 목을 감싸고 다리로는 그의 허리를 감쌌다. 체면이고 뭐고 떨어지면 죽는다. 그 일념으로
칼튼에게 답삭 안겼다.

지네는 끈질기게 쫓아오면서 틈틈이 이빨을 들이밀었다. 쩌억, 벌어진 이빨 사이로 독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절로 신을 부르게 되는 순간이었다.

신이시여. 어째서 저딴 생물을 세상에 만들었나요? 신은 언제나처럼 묵묵부답이었지만 루이센에게는 칼튼이


있었다.

칼튼은 요령껏 지네의 머리나 이빨 같은 곳을 걷어차며 방어했다. 중간중간 지네 머리를 벽에 처박아 가며 시간을
벌었다. 그 덕에 마을 청년들과 루이센 모두 무사히 굴 밖으로 기어 나올 수 있었다.

바위 주변에는 소식을 듣고 모인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뭐 해요? 얼른 도망쳐요!”

루이센이 외쳤지만 상황 파악이 덜된 마을 사람들은 굼뜨게 움직였다. 칼튼은 루이센을 곧장 제피스 위로 태우고,
자신은 검을 뽑아 들어 전투 준비를 했다.

짧고 불안한 침묵 사이로 웅, 웅, 하고 땅이 울렸다.

그때, 지네가 바위 아래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튀어나왔다. 흙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면서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밝은 햇살 아래에서 놈이 위용을 자랑했다. 꿈틀거리는 긴 몸통은 쇳덩이 같았고, 직각으로 꺾인 긴
다리는 각기 살아 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였다. 다리가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휙, 휙 하고 날카로운 파공음이
났다.

키이이이이익!

지네가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고 공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 지네다!”

“놈이 살아 있어! 으아아아악!”

“사람 살려!”

마을 사람들은 겁에 질려 사방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지네는 꼿꼿이 몸을 세우고 가만히 있었다. 사람들을
쫓아가지 않고 칼튼만 향해 쉿쉿, 하고 위협했다.

“내 눈에는 왜 저게 자네만 노리는 거 같지?”

“자기 남편을 죽인 게 저인 걸 아나 보죠.”

칼튼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웃음이 나와? 나는 다리가 덜덜 떨린다고. 루이센은 칼튼의 배짱에 감탄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렸다.
아니, 사실은 그냥 울고 싶었다.

저런 괴물을 만나게 될 줄 알았으면 이런 의뢰 안 받았어! 분명 시작은 경비대장의 아내를 만나 편지 한 장을


전해 주고 답장을 받으면 될 일이었다. 간단하고 위험하지 않고 훈훈한, 그런 거였다고!

후회해 봤자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쩔 수 없었다. 암컷 지네는 빠른 속도로 칼튼을 향해 달려왔다. 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루이센과 칼튼의 앞으로 왔다. 상체를 들어 올리며 그 추진력으로 이빨을 휘둘렀다. 칼튼이 놈의 이빨을
검으로 쳐 내자, 이번에는 다리를 휘둘렀다.

깡!

쇳소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다리가 튕겨 나갔다. 칼튼은 수컷 지네에게 했던 것처럼 다리를 잘라 버릴


생각이었지만 실패했다. 암컷 지네의 몸이 더 단단하고 강했던 것이다.
첫 공격이 먹히자 놈은 몸을 땅에 딱 붙이고 둥글게 돌았다. 다닥다닥 붙은 다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몸통이
꿈틀거렸다. 순식간에 지네는 루이센과 칼튼의 후방을 점거했고 꼬리와 머리로 동시에 공격을 했다. 칼튼만을
노린 공격이었으나 옆에 있던 루이센도 휘말렸다.

“으왁!”

루이센은 제피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피스가 지네의 꼬리를 훌쩍 뛰어넘으며 회피했다.

칼튼은 머리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어 수월하게 피하면서 반격을 노려 검으로 놈의 눈을 횡으로 긁었다. 그러나
지네는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놈은 수많은 관절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약간의 힘으로도 몸을 크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놈이 머리를 땅에 붙이며 피하는 바람에 칼튼의 검은 놈의 더듬이를 스쳤다.

키약! 캭!

지네는 울부짖으며 그대로 땅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쿠우웅.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칼튼이 꼬리라도 잡으려고 하자 놈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거친 천도 녹여 버리는 독성이 있는 침이었다. 더 다가갈 수 없는 사이 놈은 땅속으로 사라졌다.

“?”

“빌어먹을!”

칼튼이 욕설을 내뱉으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지네는 굉음을 내며 입을 쩍 벌리면서 튀어 올랐다.
칼튼이 바로 직전까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정말 간발의 차이였다.

이거 안 된다. 튀어야지. 루이센은 칼튼에게 가도록 제피스 고삐를 당겼다.

“안 돼. 돌아가. 네 주인 이러다 죽어!”

제피스는 루이센의 말 같은 건 가볍게 무시하고, 전투에 휘말리지 않게 멀찍이 멀어졌다. 루이센은 제피스의
등에서 내렸으나 그가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칼튼에게 달려가도 자신은 짐만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루이센은 어쩔 수 없이 칼튼의 분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암컷 지네는 다양하게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 앞에 있는 칼튼은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어쩌다


지네의 관절에 검을 박아도, 지네는 땅속으로 도망쳤다가 예상지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며 칼튼을 공격했다. 그럴
때마다 칼튼은 몸을 던져 가며 꼴사납게 도망쳐야 했다. 수컷 지네 때는 선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였는데
지금은 서 있기도 힘들어 보였다.

루이센의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런데 정작 칼튼은 웃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게 튀어나온 거지?’

암컷 지네는 수컷 지네랑은 비교도 안 되게 까다로운 상대였다. 힘이 세고 빠르고 거대한 것은 물론이요, 단단한


외피 때문에 눈을 노려야 하는데 체급의 차이가 너무 컸다. 놈은 칼튼이 자신의 눈을 노린다는 걸 알고 두 번
다시 이빨로 공격하지 않을 정도로 영리하기까지 했다.
생김새, 흉포함, 강함, 이 숲에서 벌인 일 등. 모두 따져 봤을 때 네임드 몬스터급이었다. 앞으로 놈의 존재는
유명해질 것이다.

‘저런 놈을 죽이면 덩달아 엄청나게 유명해질 수 있겠지.’

새로운 몬스터의 출현 소식과 함께 놈을 죽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퍼질 것이다. 오크 같은 몬스터를 몇십 마리


죽여도 얻기 힘든 명성을 한방에 얻을 수 있었다. 명성이란 칼튼 같은 용병에게는 상인으로 따지면 금화와 같은
법이었다. 당장 쓰지 않아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러니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칼튼의 검이 지네의 몇 번째일지 모를 다리 관절 사이를 갈랐다. 제법 유효한 타격이 먹혔는데 지네가 다시


땅속으로 숨어 버려 공세를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칼튼은 기회를 노렸다. 몸이 엉망이 될수록 그의 눈빛은 더 예리하게 빛났다. 그는 땅을 툭툭 발로 쳤다. 그리고
지네가 다시 한번 땅속으로 몸을 숨기고 땅 위로 튀어나오는 순간, 그는 검을 아래로 향해 온 힘을 다해 쑤셔
박았다.

키에에에에엑!

지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격은 절반쯤 성공이었다. 원래는 눈을 노리고 있었는데, 아슬아슬하게
눈가를 맞았다. 칼튼은 지네 머리에 얻어맞긴 했지만, 지면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제대로 눈을 찔렀으면 좋았겠지만…….’

한 방으로 놈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 했다. 놈은 반사 신경도 훌륭했으니까. 그래도 괜찮다. 칼튼의


노림수는 이 한 방이 아니었으니까.

지네는 몸을 길게 들었다 땅에 박았다 하며 몸부림쳤다.

키아아아악!

난생처음 느껴 보는 고통이었다. 태초부터 강하게 태어나 한 번도 상처 입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이렇게 몰아붙인 것이 남편을 죽인 인간 놈이라는 사실에 분노와 공포가 엄습했다. 언젠가부터 잊었던
몬스터의 본능이 되살아났다.

살아야 한다. 도망쳐야 해!

그러나 지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쿠르르르릉!

땅속 깊이서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지네가 서 있는 바로 아래 지면이 무너져 내렸다.

65 화
지네가 서 있는 바로 아래 지면이 무너져 내렸다. 지네가 땅속을 마구 헤집고 다녀 지반이 약해진 상태에서,
육중한 몸으로 난동을 피우자 더 버티지 못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큰 바위가 쓰러져 지네의 몸통을 덮쳤다.

캬아아아아악!

칼튼은 유유히 그 지역을 벗어났다. 지반의 붕괴는 정확히 그가 노리고 있던 것 중 하나였다.

지네는 자신이 불리할 때마다 땅을 파고 들어가 숨었다. 당연히 지네가 지나간 자리에는 긴 굴이 생겼다.
어김없이 발밑이 흔들렸다. 이거 무너질 수 있겠다. 때마침 거대한 바위도 보였다. 칼튼은 일부러 지네가
땅속으로 숨도록 유도했고, 큰 바위 옆에서 반격을 노렸다. 그가 노린 대로 땅이 무너지면서 지네가 혼란에
빠졌고 바위에 깔렸다.

칼튼은 진동이 가라앉자 지네에게 다가갔다. 지네는 마지막까지도 칼튼을 보고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이빨을
까딱댔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지네는 몸통이 박살 났다. 바위를 밀어내지도 못했고, 땅속으로 파고들 수도
없었다.

칼튼은 여유롭게 지네의 머리를 발로 밟고, 지네의 새빨간 눈에 칼을 꽂아 넣었다. 몇 번이고. 키이키이, 하고
지네가 울부짖었다. 지네의 꼬리가 마지막 저항을 하듯 퍽퍽 바닥을 내리쳤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힘이 빠지고,
지네는 축 늘어졌다.

칼튼의 승리였다.

“와, 와…….”

루이센은 입을 떡 벌렸다. 한 편의 연극보다 더 극적인 역전이었다. 지네에게 밀리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놈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처음에는 운이 좋았나 했지만 예상했다는 듯이 피하는 칼튼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지반의 붕괴까지 전부 계산해서, 지네를 유도한 게 분명했다.

땅속으로 숨을 수 있는 지네의 유리한 특성을 이용해 지네를 잡다니. 영리하고 순발력 있는 계략이었다. 대단해.
멋있어. 그래도 그렇지 목숨이 오가는 상황인데 어쩜 그렇게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보는 사람이 다
심장 터져 죽는 줄 알았다.

“와, 지네를 죽였어. 저 사람 혼자서.”

미처 멀리 도망치지 못한 마을 사람들, 뭐라도 돕겠다고 도망쳤다 돌아온 사람들도 루이센의 주변에 모여 칼튼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지네는 죽었으나 극적인 역전승에 모두가 넋을 놓았다. 지네가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칼튼이 지네 머리를 잘라 냈다. 그러더니 공을 차듯이 지네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와, 와…… 와아아아아아아!

봇물이 터지듯이 마을 사람들이 열광했다. 드디어 실감이 났다. 저 괴물은 죽었다. 저 용병이 괴물 둘을 죽이고
이 마을을 구한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은 칼튼에게 달려갔다. 사람들은 칼튼을 둘러싸고 앞다퉈 찬사를 쏟아 냈다.
루이센도 그 사람들 사이에 섞여 그에게 다가갔다.

칼튼은 루이센을 보며 재수 없을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 꼴을 보자, 갑자기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성공하긴 했지만 하늘이 칼튼을 외면했다면, 지반이 무너지는 데 칼튼이 휘말릴 수도 있었고 지네의 눈먼
몸부림에 얻어맞을 수도 있었다.

엉망진창인 꼴을 해서 웃긴 왜 웃어? 보는 사람 마음은 타들어 갔는데.

“이…… 정신 나간 인간 같으니.”

“칭찬은 못 해 주실망정 욕이십니까?”

칼튼이 항의했다. 루이센은 더 뭐라고 하려다가 울컥하고 치솟는 감정에 몸을 맡겼다. 그는 성큼 걸어가, 칼튼을
꽉 끌어안았다. 칼튼이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흔들렸다.

“……순례자님?”

역전의 용사답지 않은 멍청한 반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이센은 더 꽉 칼튼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잘했어. 멋있었어. 자네는 정말 최고야.”

칼튼은 숱한 전투를 겪어 왔지만 질투도, 두려움도 없이 직구로 날아오는 칭찬은 낯설면서도 간지러웠다.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속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걸 느꼈다.

칼튼의 손이 잠시 망설이다가, 루이센을 마주 안았다. 그 모습을 보고, 승리에 도취된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자신들도 서로를 껴안으며 그동안의 고생을 위로했다.

멀리 도망친 사람들이 지네의 비명 소리를 듣고 돌아오고도 한참 동안 열띤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 루이센과 칼튼도 꽤 오래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

지네를 죽였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뒤였다. 루이센과 칼튼은 마을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마을을 구한 영웅들에게
거하게 잔치를 벌여 줘도 부족했지만 그날 밤은 조용하게 지나갔다. 지반이 무너진 여파가 마을까지 미쳐
여기저기 부서지고 무너졌기 때문에 그럴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날이 밝자 뜻밖의 사람들이 마을에 도착했다. 콘포세의 경비대장과 영주의 기사였다. 촌장이
경비대장에게 보낸 연락을 받고 경비대장이 경비대 몇을 데리고 달려왔고, 영주의 기사는 숲에 수상한 사람이
있다는 두 달 전의 연락을 받았는데 미적거리다가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마을의 꼴을 보고 놀랐다가, 지네의 사체를 보고는 기절할 뻔했다. 마을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경비대장과 영주의 기사는 각자의 용건으로 루이센과 칼튼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새벽에
마을을 떠난 뒤였다.

빈방에는 해야 할 일은 다 끝났기 때문에 더 머물러 봐야 부담이 될 거 같아 떠난다는 쪽지만이 남아 있었다.


사실은 더 이목을 끌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새벽을 틈타 도망친 것이었지만 그런 사정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어려운 마을 사정을 배려한 줄만 알고 크게 감동했다.

그중 경비대장의 마음은 좀 더 각별했다. 루이센과 칼튼이 실종된 아내를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지네 굴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냥 돌아와 아내의 실종을 알렸어도 됐을 텐데, 아내의 안부를 알아봐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크게 울렸다.

덕분에 아내는 무사히 깨어났다. 지네에게 잡힌 뒤의 모든 일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순례자로 추정되는 이가


자신의 이마를 짚어 주었던 것만은 기억한다고 말했다. 경비대장은 때마침 등장해 가정을 지켜 준 순례자를
떠올리며 우리의 신은 자비로써, 어둠 속에 갇힌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준다는 교리를 되새겼다. 그들이야말로
신이 세상을 비추라고 보낸 사람이 아닐까. 두 부부는 서로의 무사함에 감사하며 순례자의 안전한 순례길을 위해
신께 기도했다.

몇 주 뒤. 경비대장의 아내는 아이를 출산했다. 건강한 딸이었다. 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신의 축복’을 뜻하는
이름으로 지어, 생명의 은인을 기렸다.

***

아니에스 공작성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얼마 전, 수도로 떠났던 일행과 연락이 끊기더니 루거만 홀로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다치고 지친 루거는 일행이
갑자기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으며, 그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칼튼이 그를 납치해 갔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루거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일행 모두가 죽은 데다 루이센이 사라져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에스 공작가는 루이센을 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로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


초조함과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모든 사건을 주도한 루거도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젠장.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칼튼과 루이센이 어디 있는지 모르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칼튼이 폭포 아래로 뛰어든 뒤, 루거는 주변을 샅샅이 찾았다. 금방 찾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루이센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무조건 공작령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루이센은 달팽이 같아서 조금만 위험하면 쪼르르 자기 집으로 숨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식견이 좁아 공작령과
수도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공작성으로 돌아올 거다.’

루거는 조력자에게 다이어울프로 주변을 계속 탐색하게 하고, 홀로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에게는 칼튼이
루이센을 납치했다고 거짓말했다. 누군가 죄를 뒤집어씌울 사람이 필요했고 칼튼은 악명이 높으니 딱 제격이었다.

‘그 새끼만 없었어도 계획은 완벽했는데.’


루이센을 겁줘서 야반도주를 하게 유도하든, 납치에 성공을 하든. 칼튼만 방해하지 않았어도, 지금쯤 루이센은
자신의 손아귀에 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주제도 모르고 사방팔방으로 날뛰면 자기가 뭐나 되는 줄 알아? 그래 봤자 출생의
천함은 바뀌질 않는데.’

루거는 칼튼이 증오스러웠고, 루이센과 칼튼 단둘만 남은 상태가 짜증이 나 견딜 수 없었다.

예상과 달리 아무리 기다려도 루이센이 나타나지 않았다. 첩자질과 납치를 명령한 주군은 계속 닦달을 해 대지,
조력자라는 놈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겠지. 머리가 아파 죽을 거 같은 차에 칼튼의 부하가 잡혀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루거는 부랴부랴 칼튼의 부하들을 만나러 갔다. 그들을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총관이 아무도 그들을 만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루거는 총관을 찾아가 따졌으나, 총관은 회복에만 전념하라면서 루거를 내쫓았다.

총관의 집무실 문을 닫고 나오며 루거는 코웃음을 쳤다.

‘뭐? 당장은 다른 생각 말고 건강 회복에 전념해? 늙은이가 어디서 개수작질이야?’

그건 그냥 대충 갖다 붙인 변명인 게 뻔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걸 보고도, 총관은 한 번도 자신에게


괜찮냐고 물은 적이 없었다.

‘내가 칼튼의 부하들을 못 만나게 하려는 거겠지. 날 의심하는 거야.’

총관은 루이센이 칼튼에게 납치되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루거를 의심했다. 이 사건에 숨겨진
이면이 있다고 믿는 눈치로,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애를 썼다.

오랫동안 공작가를 이끌어온 늙은 가신은 징그러울 정도로 영리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루이센 같은 멍청이를
키웠나 신기할 정도였다.

‘자기가 말 안 해 주면 내가 못 알아낼 줄 아나?’

루거는 총관의 집무실 앞에서 차마 떠나지 못하는 사람처럼 서성이다가 인적이 드문 복도로 향했다. 곧
집무실에서 하녀가 한 명 나와 루거를 뒤따라갔다.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루거에게 다가왔다.

“자기야, 괜찮아?”

하녀는 안쓰러워 루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총관의 집무실에서 잡일을 하는 말단 하녀로, 루거가 오래
공들인 여자였다. 철석같이 루거와 연인이라고 믿고 있으나 루거에게는 유용한 정보원일 뿐이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 접근했으니까. 이번에도 그녀를 통해 많은 걸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내가 외지인이라 총관님은 날 믿지 않으시나 봐.”

루거는 감정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루거의 괴로워하는 연기에 하녀의 마음이 흔들렸다.
나쁜 뜻도 아니고, 아픈 사람이 뭐라도 해 보겠다는데. 이번에는 총관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들은 게 좀 있는데…….”

연인의 약한 모습은 그녀의 동정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주워들은 말 몇 마디 하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울까.

***

‘콘포세. 콘포세라.’

루거는 하녀에게 알아낸 이야기를 되새겼다. 총관이 조심을 하는지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없었다만 잡혀 온
놈들이 칼튼의 최측근이고, 잡힌 곳이 콘포세라는 것은 무척 흥미로웠다.

‘그놈들은 콘포세에서 칼튼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공작님이야 칼튼과 함께하겠지.’

루이센과 칼튼이 공작령으로 돌아오지 않고, 곧바로 수도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래서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 거였어. 내 예상과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공작님은 이렇게 대담하지
못하니 칼튼 놈 생각일 게 분명해.’

칼튼이 루이센을 협박해 수도로 향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루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울컥하고 분노가 솟구쳤다.

‘내가 직접 콘포세로 가야겠어. 공작님은 내 손으로 모셔야지.’

설령 루이센이 콘포세를 이미 지나간 뒤라도 상관없었다. 다이어울프들은 후각이 뛰어나니, 그곳에서부터


추격하면 금방 쫓아갈 자신이 있었다.

루이센을 잡는 것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 내가 모시고 배신한 주인이니, 마무리도 내가 지을 거다. 루거의
생각은 어딘가 모순되었으나 루거 본인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66 화

7 장.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기분이 든다면

지네를 잡은 밤. 루이센과 칼튼은 불이 꺼진 방에 마주 앉아 그날 본 것을 논의했다.

여러 정황을 봤을때, 거대 지네가 여자들을 납치한 것은 누군가의 조종을 받아서라고 확신했다. 몬스터를
조종하는 힘. 그것만 보아도 놈이 루거와 한패임이 분명했다. 루거와 그 패거리의 최종 목적은 루이센의 납치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어떤 목표가 있고, 루이센의 납치는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정보다 너무 없는데다, 전무후무한 일이다 보니 놈들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목표가 무엇인지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놈들은 어디선가 또 사악한 일을 벌이고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내전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고 믿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은밀히 거대한 음모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쨌든 빨리 여길 떠야 한다.’

칼튼의 부하들이 콘포세에서 잡혀 공작성으로 끌려갔으니, 루거는 콘포세에 관심을 보일 것이다. 그러다 지네를
조종한 동료와 합심해 루이센을 추격한다면 잡힐 수도 있었다.

야반도주하듯 새벽같이 마을을 떠난 것은 그런 계산 아래 벌어진 일이었다. 그것이 마을 사람들과 경비대장에게


더 깊은 감동을 남겼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아쉬움을 남겼고, 사람들은 신이 보낸 게 분명한 자비로운 순례자와 용병에 대한 이야기를 더
널리 알리며 오랫동안 잊지 않았다. 루이센과 칼튼 모두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이후로는 끊임없는 이동이었다. 제피스와 콘포세에서 산 음식 덕에 여러모로 수월해진 여행길이었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도시가 윤곽을 드러냈다.

항구 도시, 미틸이었다.

왕국은 서부산맥에서 흘러나온 큰 강이 토지를 이분할하고 있다. 강 이남을 통상적으로 남부라고 지칭한다.
남부에서 왕국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이 강을 건너야 하다 보니 강의 유역에는 크고 작은 항구 도시들이
발달했다.

미틸은 그 중에서도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 강줄기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이 수월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과거에 루이센도 수도를 오갈 때 몇 번이나 지났기에 루이센에게도 친숙한 도시였다. 귀족의 신분으로 미틸에서
온갖 호사를 누렸지만, 정작 이 도시가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야반도주한 뒤였다.

공작성에서 야반도주해 무작정 북쪽으로 올라가던 그때, 루이센은 강을 넘기 위해 미틸로 왔다. 검문 같은 게


없었기에 쉽게 도시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문제는 배였다. 당시만 해도 돈을 주고 표를 사야 배를 탈 수 있다는
개념이 없어서, 루이센은 아무 생각 없이 배를 타려다가 쫓겨났다.

‘다시 생각하니 창피하네.’

옛 기억에 얼굴이 뜨거워져, 마구 손부채질을 했다.

“힘들어요? 햇빛이 좀 세네요.”

칼튼이 루이센의 머리 위로 손을 들어, 햇빛을 가려 주었다. 손이 커서 그런지 그림자도 컸다.

어쨌든 그때 어리버리한 루이센을 보고 어떤 사람이 다가왔다. 배의 표를 대신 사다 주겠다고 해서 돈을 주고


맡겼다. 놈은 그 돈을 들고 홀랑 튀었다. 사기 당한 것이다. 억울하지만 한편으로는 루이센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알 수 있는 일화였다.

‘그래도 그때는 운이 좋았지.’

억울하고 분해서 길가에서 울고 있는데, 지나가던 상인 하나가 다가와 사정을 물었다. 상인은 사기당한 루이센을
가엽게 여겨 자기 돈으로 배 표를 구해다 주었다. 평민들이 타는 3 등급 배였지만 덕분에 강을 넘을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세상엔 좋은 사람이 많았다. 성자님이나, 공작가의 사람들처럼.

‘공작성의 사람들은 잘 지내려나…….’

루이센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다고 공작성이 보일 리는 없지만 괜히 마음이 그랬다. 요즘 부쩍 공작성의


사람들이 걱정되었다. 루거가 그 사악한 힘으로 공작성의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빨리 수도로 가서, 진실을 밝히겠어.’

루거의 손아귀에서 공작성의 사람들을 구해야지. 수도에서 입지를 탄탄히 다져서, 공작성으로 무사히 복귀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영주 노릇을 할 거다. 그때까지 공작성의 사람들이 잘 버텨 주길 바랄 뿐이다. 루이센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

루이센과 칼튼은 순례자의 통행증, 그리고 칼튼의 용병패 덕분에 미틸에 당당히 입성했다.

일단은 순례자 행세를 하고 있으니 두 사람은 얼른 교회에 가서 형식적으로 기도를 올리고, 사제와 마주치지 않게
후다닥 빠져나왔다. 그리고 용병 길드로 향했다. 미틸의 용병 길드에는 안전하고 보수가 두둑한 의뢰를 얻으려는
용병들이 항상 죽치고 있었다.

루이센이 용병 길드로 들어오자 용병들의 시선이 루이센에게 쏠렸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옷으로 가렸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태가 너무나 귀족이었다. 허리춤에 달린 순례자의 통행증이 영롱하게 빛을 뿜어냈다.

‘귀족 출신 순례자구나? 그럼 호위 의뢰인가?’

‘순례자 호위의뢰만큼 만만한게 없지. 저거 내가 의뢰 받아야겠는데.’

용병들은 루이센에게 말을 걸려고 일어섰다. 그때 칼튼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루이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주변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어딜 넘보려고.

산전수전 다 겪은 험한 용병들이지만 칼튼의 건장한 체격과 흉흉한 눈빛에 기가 죽고 말았다. 아씨, 임자 있잖아.
용병들이 일어난 보람 없이 엉덩이를 붙이며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칼튼은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한편, 루이센은 용병 길드의 창구로 향했다.

“역참마을에서 보니, 몬스터를 잡아 오면 돈을 준다고 하던데 맞나요?”

“네네. 맞습니다.”

관성에 찌든 무표정을 짓고 있던 말단 직원이 응대했다.

“증거 가지고 오셨죠? 몬스터 잡았다는 증거 없으면 정산 못해 드립니다. 증거 주세요.”

“여기다가요? 좀 그런데…… 양이 많아요.”

증거도 없이 몬스터 수십 마리를 잡았다고 우기는 용병들이 아주 많았다. 이놈도 그런 놈인가본데. 직원은
짜증스럽게 작은 바구니 하나를 내밀었다. 루이센이 난감해하자, 직원은 바구니를 툭툭 치며 재촉했다. 직원이
루이센에게 건방지게 굴자, 칼튼은 부아가 치밀었다.

“달라는데, 줘야죠?”

칼튼은 짊어지고 있던 포대를 쏟았다.

와르르. 퍽. 푸직.

몬스터의 뿔, 눈알, 코 같은 부산물이 쏟아져 나와 창구에 산처럼 쌓였다. 몬스터 특유의 쾌쾌한 지린내와 썩은
피냄새가 건물 전체로 퍼졌다. 직원은 입을 떡 벌리고 바라봤다.

“이, 이게……다…….”

“정산하고 계시죠. 더 있으니까.”

“더, 더 있다고요?”

당황한 길드 직원을 내버려 두고, 칼튼은 두 자루를 더 가지고 들어왔다. 용병들까지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과하다니까, 진짜.’

몬스터를 잡으면 돈을 준다는 걸 알게 된 칼튼은 미친놈처럼 몬스터를 잡아 댔다. 얼마나 집요하게 몬스터를
쫓아가 잡아 대는지 사정을 몰랐으면 피에 미친놈인가 했을 거다. 사실 사정을 알고도 좀 그렇게 보였다.
나중에는 몬스터들이 불쌍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칼튼은 뭐가 문제냐는 투였다. 그의 시점에서 보면 몬스터는 걸어 다니는 동전이었다. 땅에 떨어진 동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처럼 칼튼도 그랬을 뿐이었다. 물론 혼자였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겠지만 칼튼에게는
딸린 루이센이 있지 않은가. 몬스터 하나를 더 잡으면 루이센에게 육포 하나를 더 사 줄 수 있고, 딱딱한 검은
빵이 아니라 부드러운 흰 빵을 먹일 수 있는데 잡아야지, 그럼.

정산은 한참 걸렸고, 칼튼의 바람대로 두둑하게 주머니를 채울 수 있었다. 용병 길드를 나서며 루이센이
투덜거렸다.

“과하다니까…….”

“돈은 벌 수 있을 때 벌어야죠. 제가 부족함 없이 벌어 오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콘포세에서의 일을 아직까지 마음에 두다니. 내 머리카락 판 돈을 쓰는 게 그렇게 자존심 상할 일인가? 루이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칼튼의 마음은 그런 건 아니었지만 루이센이 그걸 알 리는 없었다.

“물건이나 좀 사러 가죠.”

칼튼은 루이센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루이센은 졸졸 따라갔다. 사람이 많아 자연히 칼튼이 루이센의 어깨를
감싸안고 걷게 되었다. 연인과 같이 오붓한 모양새였으나, 말을 타고 오며 칼튼의 품에 익숙해진 루이센은 조금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칼튼은 신나게 돈을 써 댔다. 새로운 옷, 새로운 신발, 하다못해 속옷과 양말까지 새것으로 싹 다 장만했다.
필요한 걸 사는 것까지는 루이센도 이해했다. 하지만 칼튼은 슬슬 도를 넘어 여행에 아무 쓸모도 없는 것들을
사려고 들었다.
“저거 어때요?”

“……공작새 깃털 달린 모자를 내가 어따 써?”

“이건요?”

“……지금 우리에게 실크 셔츠를 입을 일이 있을까?”

루이센의 타박에 칼튼은 아쉽게 돌아섰다. 깃털 모자도, 셔츠도 루이센에게 잘 어울릴 거 같았는데. 끌려 다니는
루이센은 죽을 맛이었다. 음식 좌판이었다면 또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루이센은 식욕만큼 물욕이 왕성하지 않았다.

“뭘 그렇게 사려고 해? 난 더 필요 없으니까 자네 꺼나 사. 아니다. 짐 늘리지 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루이센이 투덜거리자, 칼튼은 사탕을 사서 쥐어 주었다. 사탕은 꽤 비싼 간식거리였다. 단걸 먹고 싶은 욕심에


거절하진 않았지만 좀 걱정되기도 했다.

“돈 아껴야 하지 않겠어?”

“괜찮아요. 또 벌면 되죠. 저 그 정도 능력은 있습니다. 보셨잖아요?”

칼튼은 잘난 척을 해 댔다. 잘나서 좋겠다, 그래. 루이센은 고개를 저었다.

‘보면 은근히 유치한 데가 있어.’

루이센은 사탕을 우물거리다가 문득 예전부터 품어온 작은 의문 하나를 떠올렸다.

“자네 몇 살이야?”

몇 살인데 성질머리가 그 모양이야? 라는 불평도 살짝 담겨 있었다.

칼튼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러나 싱글벙글하던 칼튼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은 걸 루이센은 놓치지 않았다. 이것
봐라? 왜 모르는 척하지?

“몇 살인지 제대로 들은 적이 없더라고. 제피스가 지금 일곱 살쯤 됐나? 자네가 제피스를 데리고 가출한 게 십


대 때라며. 어…… 그럼…….”

루이센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했다.

“……성인은 됐지? 설마 아직 성인이 아니야?”

“당연히 성인이죠! 제가 어딜 봐서 어린 앱니까?”

“하긴 그 얼굴에, 그 몸에, 그 성질머리에. 스무 살도 안 되었으면 큰일 나지.”

“예, 예. 저 공작님이랑 동갑입니다.”

“그건 아니지? 열다섯 살에 가출했어도 지금 스물두 살 되나? 어? 자네…… 나보다 어려……?”

내가 형이야? 그런 거야?
칼튼은 좌판을 구경하는 척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어? 이거 반응 봐?

루이센은 칼튼의 팔을 잡아당기며 대답을 종용했다. 칼튼은 계속 딴청을 피우려고 했으나, 루이센의 파란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고 예뻐서 계속 모르는 척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나이를 말하고 싶지도 않아, 다른 수를
뒀다.

“전 제가 언제 태어났는지 몰라서, 나이도 잘 모르겠네요.”

“그게 말이 돼?”

“제 가족들이 얼마나 무심한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루이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왠지 나이를 말하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진짜라면
서글픈 이야기가 되어 버리니 더 캐물을 수도 없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에 슬픈 가족사를 꺼내어 받아치다니. 이래서 머리 좋은 놈이란. 루이센은 두 손 다 들고


패배를 선언했다.

“알았어. 더 안 물어보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기 싫다 이거지?”

“아셨으면 됐습니다. 그건 그렇고…….”

칼튼은 낄낄대며 웃으면서 루이센의 귀에 속삭였다.

“저희 아무래도 미행이 붙은 거 같습니다.”

67 화

미행? 농담이지? 루이센이 의심을 담아 바라보자, 칼튼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진짜 미행이 붙었다고? 루이센은 뒤를 돌아보려다가 칼튼의 손에 막혔다.

“앞을 보시고 제가 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따라오세요.”

칼튼은 좌판에서 아무거나 골라 돈을 지불하며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루이센도 얼떨결에 발맞춰 걸었지만 온몸이
나무토막 같았다. 품이 넓은 옷이 아니었다면 미행하는 상대가 이미 이상한 걸 눈치챘을 것이다.

보다 못한 칼튼이 루이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루이센은 차라리 이러는 게 더 편했다.


칼튼은 등 뒤의 기척을 살폈다. 일부러 걷는 속도를 높였다 낮췄다 하며 상대를 가늠했다. 주춤, 주춤하는 꼴이
어딘가 어설펐다. 미행에 능숙하거나 실력자는 아닌 것 같았다.

‘별거 아니야.’

칼튼은 팍, 속도를 높이며 모퉁이를 돌았다. 그는 루이센을 벽 쪽으로 밀어 넣으며 자신도 벽에 붙었다. 그리고
허둥지둥 뒤쫓아온 남자에게 다리를 걸었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팔을 잡아 뒤로 꺾으며 무릎으로 허리를 찍어
눌렀다.

“악!”

단숨에 미행하던 남자를 제압했다. 남자는 버둥거렸으나 칼튼은 꿈쩍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강하게
남자를 짓눌렀다.

“왜, 왜 이러십니까?”

“왜? 그건 내가 물을 말이야. 왜 우리를 미행했지?”

“미, 미행이라뇨! 아악, 일단 팔 좀 놓고…….”

남자는 펄쩍 뛰며 부정했다. 칼튼은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의미로 남자의 머리를 퍽, 하고 때렸다. 루이센은
고통스러워하는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 저사람……?’

남자의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언제 봤더라?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루이센은 금방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이 남자는 회귀 전, 루이센이 사기당해 울고 있을 적에 배 표를 사 준 사람이었다. 야반도주한 이후 멸시와


외면만 받다가, 처음으로 받은 호의였기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때 그 남자의 얼굴이 저 남자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분명히 같은 사람이었다.

‘그때 그 사람은 상인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어쨌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루이센은 뭔가 오해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잠깐만요. 말은 들어 봅시다.”

루이센은 일단 칼튼을 말렸다. 칼튼은 계속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남자를 풀어 줬다. 남자는 이게 기회라는 걸
알았는지 허둥지둥 일어서서 말했다.

“저는 모리슨이고 나카탄 상단 소속 상인입니다. 미행한 거 아니고 그쪽에게 할 말이 있어 따라온 겁니다.”

“그럼 말을 걸면 되지 왜 졸졸 따라와?”

칼튼이 윽박질렀다. 상인 모리슨은 부끄럽다는 듯이 뺨을 붉혔다.

“그게 두 분이 좋은 시간 보내시는 거 같은데 끼어들기가 좀…….”

“좋은 시간이라니.”
“분위기도 말 걸기 어려웠고요. 이렇게 끌어안고 다니셨잖아요. 누가 봐도 데이트…… 억!”

칼튼이 당황하며 모리슨의 허리를 무릎으로 찍었다.

분위기? 좋은 시간? 칼튼에게 끌려다니느라 고생만 했는데 그게 어딜 봐서 좋은 시간이야? 대체 어쩌다 그런


오해를 한 건지 모르겠다. 좋은 사람 같은데 눈치는 영 없나 보다. 루이센은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이 남자에게
받은 도움이 있기에 그의 말을 끝까지 듣기로 했다.

“할 말이라는 게 뭔데요?”

“두 분을 아까 용병 길드에서 봤습니다. 몬스터를 어마어마하게 사냥해 오셨던데 분명 실력자시겠죠. 저희


상단의 호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모리슨은 상단의 책임자로, 얼마 전 남쪽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는 소식에 한탕 해 보고자 내려왔다고 했다. 하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려는 차에, 미틸에서 상단을 호위하던 용병이 장염으로 쓰러져 버렸다.

그들과 계약을 해지하고 새로운 용병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때마침 용병 길드에 갔던 그는 루이센과 칼튼을
보게 되었고, 두 사람에게 호위를 맡겨야겠다고 결정했다.

누구나 실력자를 원한다. 믿을 만한 용병에게 따로 의뢰를 하러 찾아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배에 올라타서부터 그쪽 선착장을 벗어나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 호위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 부근에
몬스터가 기승이라더군요.”

모리슨은 적절한 보수와 배편, 배에서의 숙식 등 모든 것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언제 출발입니까?”

“조금 빠릅니다. 오늘 밤이요.”

“아, 급하긴 하네요.”

오늘 밤 출발이면 당장 짐을 싸서 떠나야 하는데 급한 것에 비해 보수가 적었다. 실력 있는 용병이라면 이 정도


보수에 엉덩이를 가볍게 움직이지 않으니 남는 건 어중이떠중이뿐. 모리슨 쪽에서도 그런 사람을 고용하긴 싫을
테니, 용병 길드에서 본 용병 뒤를 졸졸 따라올 만큼 절실하긴 했다. 덤으로 순례자가 함께한다는 점에서
어중이떠중이 용병보다 신용도 확실하고.

그런 이유라면 칼튼과 루이센 뒤를 쫓아온 이유도 납득이 갔다.

루이센과 칼튼은 눈빛을 교환했다.

‘어떤 거 같아?’

‘상인인 게 확실하기만 하면 괜찮을 거 같습니다. 사실 관계는 용병 길드 쪽에 확인해 보면 될 거고요.’

오늘 밤 배를 타야 한다는 건 사실 루이센과 칼튼에게 굉장히 솔깃한 제안이었다.

용병 길드를 나오자마자 상점가에 오기 전, 두 사람은 배편을 구하러 항구에 갔었다. 당장 오늘 밤 출발하는


배는 좌석이 매진이었고, 다음 배편은 이틀 뒤에나 있었다. 전란의 여파로 배의 운항이 줄어든 탓이었다.
내일 아침에 떠나는 다른 여객선을 알아봐 두긴 했지만, 귀족이 애용하는 여객선이라 그리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틸이 아닌 다른 항구도시로 가 보거나, 오늘 밤 출항하는 배에 몰래 타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나누던 차였다.

‘딱 필요한 제안이야.’

어차피 가야 할 길을 가면서 돈도 벌 수 있었다. 더없이 좋은 제안인 데다 이 사람에게는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


기왕이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고 싶었다. 수상한 점이 보이면 의뢰를 안 받으면 그만이었다.

“용병 길드에 확인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러시죠. 그런데 좀 빨리 답변 부탁드립니다. 사정이 급해서…….”

모리슨은 용건을 마친 뒤, 할 일이 많다며 잽싸게 사라졌다. 그를 오해해 땅에 처박은 것을 사과할 틈도 없었다.


말을 잘만 하더니, 사실은 칼튼에게 겁먹은 걸 수도 있겠다고 루이센은 생각했다.

그나저나 용병 길드에서 일이 어지간히도 튀었나 보다.

“내가 과하다고 했지?”

칼튼은 잘못을 저지른 개처럼 곁눈으로 시선을 피했다.

***

용병 길드에 확인을 한 결과, 모리슨의 소속과 사정이 모두 그가 설명한 것과 같았다. 루이센은 몰랐지만 그가
속한 상단은 꽤 유명한 모양이었다. 길드 측에서도 믿을 만하다고 했다.

두 사람은 길드를 통해 모리슨에게 의뢰를 수락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미리 봐 둔 여관에 가서 씻고 잠시 쉬었다.


필요한 물건은 칼튼이 신나게 사 두었기에 더 필요 없어서 바로 배를 탈 준비를 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할 무렵. 배에 오르기 전 루이센과 칼튼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입소문이 자자한
식당으로 갔다. 배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뻔했다. 루이센은 그전에 괜찮은 음식을 잔뜩 먹겠다는 포부를
품었다.

칼튼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말했다.

“테이블이 꽉 차게 음식 깔아 줘.”

넓은 4 인용 테이블이었다. 여길 다 채운다고? 루이센은 순간 칼튼의 등 뒤에서 후광을 보았다. 피에 미친놈이면


어떻지? 그렇게 돈 벌어서 맛있는 밥을 사 주지 않나! 루이센이 칼튼을 우러러보자, 칼튼은 가슴을 펴며
으스댔다.

“봐요. 좀 과하게 몬스터 잡을 만했죠?”

“응. 그래. 그래.”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엄지를 펼쳐 보였다. 칼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곧 음식이 나와 넓은 사인용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입소문이 난 가게답게 요리 하나하나가 정성스럽고 맛이
좋았다. 빵은 촉촉하고 부드러웠고, 돼지 등뼈에 양념을 발라 구운 것은 바삭하면서 고소했다. 겉을 태울 것처럼
바삭하게 구운 스테이크도 일품이었다. 루이센은 오랜만에 보는 음식을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먹을 만한 음식인가. 미틸까지 오는 내내 콘포세에서 미리 사 둔 음식을 먹었다. 땅속의


노파를 생으로 씹어 먹을 때보다야 나았지만 보존식이라는 게 사실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중간중간 여관에 들러
스튜 같은 걸 먹기도 했지만 거기 음식은 죄다 돼지 먹이 같았다.

돼지 등뼈의 한쪽을 손으로 들고 살 한 점 없이 깔끔하게 한입에 발라 버리고,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루이센의 얼굴 가득 웃음이 떠오르고 즐거움에 어깨가 들썩였다.

칼튼은 맥주를 홀짝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루이센은 깔끔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음식을 먹었고,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신기해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뭐든 못 사 줄까. 칼튼은 자기가 걸칠 것, 입을 것을 살 때랑은 또 다른 뿌듯함을 느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겠다고 아득바득 일하던 동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묻었어요.”

칼튼은 냅킨으로 루이센의 뺨에 묻은 소스를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그제야 음식에 정신 팔린 루이센의 눈에


칼튼이 들어왔다. 두 눈을 접고 웃는데 사랑스러운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어?’

루이센은 등뼈를 쥔 채로 눈을 깜박였다.

“계속 드세요. 부족하면 더 시켜 드려요?”

“어, 아니…….”

뭐지? 날 왜 저렇게 보지?

하지만 루이센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음식에 홀렸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오면서 옆자리에서 떠드는 소리가
그의 귀에도 들려왔다. 옆자리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나타났대.”

마법사.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외팔의 순례자를 찾기 위해, 루이센은 마법사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법칙에
따르지 않아 쉽게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마법사가 지금 여기 있다는 말인가?

68 화
“카바닐 호수 알지? 그쪽에 웬 마법사가 하나 나타나서 사람들 소원을 들어주고 다닌대.”

아, 여기 있다는 게 아니구나.

루이센은 약간 실망했지만 머릿속에 카바닐 호수를 담아 두었다.

마법사란 진리를 추구하며, 깨달음을 얻어 신비로운 힘을 사용하는 자들이다. 대게 세상의 이치를 따르지 않기에
은둔하거나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 대영주인 루이센이라고 해도 마법사를 찾으려면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이 정보가 사실인지 아닐지 모르지만 일단 기억해 두는 것이 좋겠다.

탕!

칼튼이 맥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루이센은 놀라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뇨.”

칼튼은 퉁명스럽게 답하고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좀 전까지 기분 좋지 않았어? 갑자기 왜 화가 났는지
루이센은 알 수가 없었다.

“괜찮은 거지?”

칼튼은 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괜찮은 거겠지.

루이센도 칼튼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캐묻기도 이상해서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카바닐 호수가 어디 있는지 알아?”

“……왕국의 중앙쯤에 있습니다. 수도를 기준으로 보면 서쪽이겠네요.”

“서쪽이라…… 그럼 우리가 가는 경로랑 겹치나?”

“글쎄요.”

칼튼은 그답지 않게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번에는 루이센도 살짝 인상을 썼다.

“우리가 갈 경로가 확실하지 않은 거야?”

“상황에 따라 바뀔 테니까요. 강의 북쪽은 남쪽이랑 비교도 안 되게 치안이 나빠 길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
칼튼이 댄 이유는 합리적이었다. 무성의한 대답의 이유가 그게 전부가 아닌 거 같긴 했지만, 칼튼의 미묘한
감정을 정확히 잡아내기에는 루이센이 둔했다.

“기왕이면 카바닐 호수 근처를 지날 수 있으면 좋겠어. 그 근처라도 말이야.”

마법사에 대한 정보의 진위를 파악해 두면, 수도로 돌아간 다음에 사람들에게 마법사를 찾아오라고 하기 더
쉬워질 것이다.

루이센도 수도로 가다 말고 마법사를 쫓아갈 마음은 없었다. 외팔의 순례자를 찾는 건 루이센에게 중요한 목표긴
했지만 당장 자신의 목에 들어온 칼부터 치우는 게 우선이었다. 뭐가 더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판단할 정도의
머리는 있었다.

“자네는 마법사를 만나 본 적 있어?”

칼튼은 짙은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고 루이센을 바라보다가, 질문과는 상관없는 딴소리를 했다.

“마법사에게 관심 갖는 거, 외팔의 순례자라는 사람 때문이죠?”

“당연하지. 그게 아니면 내가 마법사에게 무슨 볼일이 있겠어.”

이름이든 얼굴이든, 하다못해 고향만 알았더라도 공작가의 힘으로 찾아볼 수 있었을 텐데. 새삼 외팔의 순례자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루이센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내 이야기를 하느라 바빠 그분의 이야기는 하나도 물어보지 않았어. 더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루이센은 한탄했다. 그 모습을 보며 칼튼의 강렬한 눈동자가 이글이글 끓어올랐다.

‘순례잔지 뭔지, 그 새끼가 뭐라고.’

조금 전까지 기분이 아주 좋았다. 루이센의 뺨에 묻은 소스를 닦아 주던 순간 루이센은 온전히 칼튼에게 몰입했다.


시끌벅적한 소음도 음식 냄새도 사라지고, 두 사람만 세상에 남은 것처럼 깊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런데 마법사라는 단어가 들려온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루이센의 관심은 칼튼이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외팔의
순례자에게로 넘어갔다. 루이센은 외팔의 순례자를 떠올리며 미안해했고, 음식은 더 이상 그를 기쁘게 해 주지
못했다. 외팔의 순례자를 향한 루이센의 열망은 식탐도 가볍게 이길 정도였다.

루이센이 얼마나 음식에 집착하는지 알기에, 칼튼은 더욱 속이 뒤틀렸다. 미친 듯이 몬스터를 잡은 것도, 식당을
찾아온 것도 전부 루이센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날 앞에 두고 딴 남자를 생각해?’

가슴이 갑갑하고 그 순례자인지 뭔지 하는 놈을 흠씬 두들겨 패서 루이센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치워 버리고 싶었다.


왜 그런 놈이 어린 루이센의 영웅이었지? 차라리 내가 어릴 때 만났다면 더 잘해 줄 수 있는데. 아니 물론 어릴
때였다면 자신의 신분으로는 감히 루이센 앞에 고개도 못 들었겠지만…….

생각할수록 더 열이 받았다.

“그 순례자가 그렇게 좋습니까?”

칼튼의 베베 꼬인 속내가 그대로 담긴 빈정거림이었다.


“좋지! 그분은 날 구해 준 은인이지. 존경하고 또 존경해.”

루이센에게 빈정거림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굳건한 애정과 신뢰를 확인했다. 칼튼은 누군가 자신을 들어
땅에 후려치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으나, 상처 입은 남자의 마음은 못 할
말까지 내뱉게 했다.

“그 사람, 진짜 순례자는 맞습니까? 순 사기꾼 같은데.”

“뭐? 아니야. 순례자의 증표도 가지고 있었고…….”

“저처럼 어디서 주웠을 수 있죠. 빼앗았을 수도 있고. 공작님이 사람을 너무 좋게만 보는 거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성질머리며, 말하는 거며, 어딜 봐서 종교인인지 모르겠던데요.”

칼튼이 단지 기분이 나빠 없는 말을 지어내는 건 아니었다. 루이센이 외팔의 순례자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했다. 루이센의 미화를 거쳤음에도 언뜻언뜻 드러나는 거친
사고방식이 아무래도 자신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순례자? 어림도 없지.

“그분은 진정한 성자셨어.”

루이센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말 함부로 하지 말게. 그분이 행한 자비와 사명을 다하는 모습을 자네가 몰라서 그래. 물론 언행이 그리 고상한
분은 아니셨을 수 있지만 그 영혼만큼은 누구보다 고결했어.”

칼튼이 말을 막으려 하자, 루이센은 손끝을 나긋하게 저으며 칼튼의 말을 가로막았다. 매우 귀족스러웠으며
평소에 보기 힘든 박력이 있었다.

“그분에 대한 비난은 곧 나를 향한 비난이야. 나는 그분에게 배운 대로 생각하고 그분의 모습대로 행동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자네라도 그분을 욕하는 건 못 참아.”

루이센은 양쪽 주먹을 꽉 쥐고, 씩씩 거친 숨을 내쉬었다. 루거의 배신을 알았을 때보다 더 화를 냈다.

“지금 그 사람 때문에 저한테 화내시는 겁니까?”

“그래!”

“하!”

배신자 루거 놈한테도 안 내던 화를 나한테 내? 그 순례자인지 뭔지가 그렇게 소중해?

칼튼은 억울하고 짜증이 났다. 누명을 뒤집어썼을 때도 이렇게 서운하진 않았다.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한동안 대치 상태가 이어지다가,
테이블을 치워도 되겠냐는 종업원의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섰다.

***
루이센과 칼튼은 제피스를 데리고 선착장에 도착했다. 모리슨이 짐을 싣다가 달려와 그들을 맞이했다.

“의뢰를 받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이 아니셨다면 저희는 호위도 없이…….”

모리슨은 말꼬리를 흐렸다. 루이센과 칼튼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기운은 능수능란한 상인의 입도 막아 버릴
지경이었다.

“음, 두 분 혹시 아까 제가 한 말 때문에 사이 안 좋은 척하시는 거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순례자는


연애도 뭣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꽉 막힌 사람 아닙니다. 순례자는 순례자이지 사제가 아닌걸요.”

대체 이 사람은 아까부터 무슨 오해를 하는 건가. 안 그래도 칼튼이랑 싸워서 불편해 죽겠는데. 루이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아하하. 그럼 그런 걸로 합시다. 자, 배에 오르시죠.”

모리슨은 루이센의 부정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구구절절 모리슨의 오해를 풀어 주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 칼튼의 눈치를 보며 배까지 오느라 지쳐 버렸다. 모리슨은 두 사람을 데려가 머물 방을
안내해 주었다.

“방은 하나입니다. 원래 용병들이 쓰려던 방이라 침대가 두 개인데, 이해 바랍니다.”

이 사람 진짜 왜 이래. 우린 원래 침대 따로 쓴다고. 루이센은 흘낏 칼튼을 보았다. 칼튼은 무표정했고 루이센은


눈치 보느라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본격적인 호위는 배에서 내린 다음이 될 겁니다. 배 안에서는 크게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저희랑 같이


지내시고 간간이 물건 확인만 해 주시면 됩니다.”

모리슨은 자신의 방 위치도 알려 주고, 짐을 싣는 걸 마저 보겠다며 떠났다.

그래, 차라리 가라.

루이센은 흔쾌히 모리슨을 떠나보냈다. 그러나 금방 그 선택을 후회했다.

루이센과 칼튼이 쓸 객실은 침대 두 개로 꽉 찰 정도로 좁았다. 칼튼을 안 보려면 벽에 머리를 박고 있어야 할


지경이었다.

방 안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은 번갈아 서로에게 시선을 던졌다. 한 번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으나
상대가 자신을 힐끔거린단 걸 알기에 더 긴장되었다.

먼저 말을 꺼내면 될 일이긴 했다. 아까의 흥분에 유감을 표하면 칼튼도 계속 저러고 있진 않겠지. 그렇지만
먼저 말을 꺼내기 싫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칼튼이 성자님을 욕하지만 않았어도 될 일이 아닌가.

‘성자님에게 사기꾼이라니. 내가 얼마나 그분을 존경하는지 알면서.’

루이센이 과거로 돌아와 외팔의 순례자에 대해 말한 것은 칼튼뿐이었다.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없었지만 꽤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더 섭섭하고 속상했다.

루이센은 내심 칼튼이 먼저 사과하길 바랐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그럴 일은 절대 안 일어날 것 같았다. 칼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이었다.

‘안 되겠다.’

루이센은 벌떡 일어났다. 나가서 바람이라도 쐐야지. 이 방에 있다간 속 터져 죽겠어. 그는 방 밖으로 나갔다.

칼튼이 그 뒤를 졸졸 쫓아왔다. 루이센은 휙 돌아 칼튼을 노려보았다.

‘왜 따라오는 거야? 자기랑 같이 있기 싫어서 나온 건데.’

따라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럼 지는 거 같아 그냥 돌아서 갑판으로 향했다. 루이센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칼튼은 계속 루이센을 따라왔다.

69 화

칼튼을 피하기 위해 다른 목적 없이 발이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이센은 갑판으로 올라갔다. 저녁노을이 지며 하늘과 강물이 모두 붉었다. 큰 강은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배가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뒤를 돌아섰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미틸의 항구가 멀어지고 있었다. 비로소 남부를 떠나고 있음을 실감했다.

추격을 따돌리고 안전하게 배에 올랐다. 강을 건너면 추격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겠지. 하지만 죽어서야 겨우


돌아온 고향 땅을 떠나 다시 배를 타니, 마음이 복잡했다.

이거 회귀 전처럼 영원히 떠나 있게 되는 건 아니겠지? 아니지. 그때랑은 또 다르니까 말이야.

루이센은 흘깃 칼튼을 보았다. 같이 선 것도, 따로 선 것도 아닌 애매한 거리를 두고 칼튼이 서 있었다.


어정쩡한 거리를 어색함이 가득 메웠다.

칼튼은 멀리 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굳은 눈매가 진지했다. 노을의 붉은 빛이 내려앉은 탓일까. 루이센은
가슴이 꾹 조이는 느낌이 났다. 칼튼 특유의 날 선 분위기는 가끔 이렇게 루이센을 철렁하게 했다.

그가 아직도 무섭냐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루이센은 오래도록 검은 기사의 형상을 한 칼튼이 자신을 죽이러 올
거라는 망상에 시달렸으나, 칼튼은 몇 번이고 루이센의 목숨을 구해 주고, 곁을 지켜 주었다. 두려움이라기보단
좀 더 아찔한 긴장감에 가까웠다. 칼튼이 자신을 어떻게 할 것도 아닌데 방심하면 안 될 거 같다고 할까.

칼튼이 고개를 돌려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미간을 찡그렸다. 아, 너무 오래 보고 있었구나.


루이센이 민망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칼튼도 화가 단단히 난 거 같은데. 계속 이러면 어떻게 하지?’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은 데다, 칼튼과는 수도에 가서도 잘 지내고 싶었다.

‘봐서…… 화해를 하든가 해야겠어……. 화해……는 어떻게 하는 거지?’

루이센의 얄팍한 인간관계에서는 대개 문제가 생기면 어느 한쪽이 무릎을 꿇고 끝냈다. 야반도주 전에는 상대가
꿇었고, 야반도주한 뒤에는 루이센이 꿇었고.

‘칼튼이 무릎을 꿇는 건 상상이 안 가고…….’

먼저 외팔의 순례자를 욕한 것은 칼튼이었으니 자신이 무릎 꿇는 것도 이상했다.

‘어쩐다…….’

끙끙대고 있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들 계셨네요?”

모리슨이 다가왔다.

“하실 일이 없으면 저랑 같이 가시죠. 저희 식구들도 만나 보셔야죠.”

“그래야죠.”

루이센은 칼튼의 의사도 묻지 않고 냉큼 받아들였다. 칼튼이 인상을 썼으나 루이센은 못 본 척했다.

칼튼이랑 단둘이 있다간 숨 막혀 죽을 거 같고, 과거 은인이기도 했던 모리슨이랑 대화도 해 보고 싶었다.


루이센이 모리슨을 따라가자, 칼튼도 뒤따라왔다. 그래도 따라오긴 하는구나. 루이센은 휴, 하고 숨을 내쉬었다.

“모리슨 씨가 일하는 상단 이름이……?”

“나카탄 상단이요. 아마 잘 모르실 겁니다. 원래 윗동네가 저희 주력이거든요. 남부까지 내려올 일이 없었죠.


그동안은.”

“주력 상품은 뭔가요?”

“직물입니다.”

루이센은 모리슨과 그의 상단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나중에 원래 신분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에게 받은


도움을 갚아 주기 위해서였다. 모리슨도, 그가 일하는 상단도 별 특색이 없고 규모도 고만고만했다.

‘공작가의 거래를 맡기긴 좀 애매하고……. 영지 안의 마을을 하나 연결해 주는 게 더 나을 거 같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모리슨의 방에 도착했다. 모리슨의 방은 작게 테이블이 놓인 방이 하나 더 딸려


있었다. 그곳에 모리슨의 동료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남자 셋에 여자가 한 명인데, 나이대는 다채로웠으나
어딘가 다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멀리까지 상행을 나서는 사람들이라 체격이 건장하고 튼튼해 보이기도 했다.

“아까 이야기한 그분들입니다.”

모리슨은 동료들에게 루이센과 칼튼을 소개했다. 루이센은 순례자답게 인사를 했고, 칼튼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두 분이 와 주셔서 다행입니다. 용병들이 갑자기 같이 못가겠다고 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아, 한잔
드릴까요? 여기 앉으시죠.”

모리슨의 동료들은 루이센과 칼튼을 환영했다. 그들은 의자를 내주고,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칼튼은 다
거절하고 벽에 기대어 섰다. 루이센은 다시금 슬쩍 칼튼의 눈치를 봤다. 기분이 안 좋은데 끌고 온 거 같아 살짝
의기소침해졌다.

“남부에서나 배에서는 별일 없지만, 육지로 가면 또 상황이 다르거든요. 몬스터며, 도적들이 여간 기승인 게


아니라.”

“위쪽의 치안이 많이 나쁩니까?”

“네. 영주가 죽든가 병신이 돼서 영지 운영에 손 놓아 버린 곳도 많습니다. 몬스터도 골치 아픈데, 용병이던


놈들이 죄다 도적으로 돌변해서 지나가는 사람 주머니를 털고 다닌답니다.”

돈을 벌지 못하게 된 용병이 강도로 돌변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걸 막으려고 용병 길드가 있긴 하지만


무법자들을 다 통제할 수 없었다. 모리슨과 동료들은 강 이북이 얼마나 불안정한 상황인지를 이야기했다.
루이센은 귀를 활짝 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확인했다.

“세상에 마음 편히 다닐 곳이 하나 없다니까요. 그나마 남부는 좀 사정이 낫나 싶었는데…….대영주가


납치되었다면서요? 아니에스 공작이요. 그 납치를 두고도 이런저런 소문이 많던데요.”

모리슨의 말에 루이센은 뜨끔했다. 아 또 왜 내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민망했지만 또 어떤 소문이 났을지


호기심이 들었다.

“이런저런 소문이요?”

“예, 뭐. 사실은 납치가 아니라 사랑의 도피라느니 그런 거요.”

“예?”

너무 황당해서 루이센은 입을 떡 벌렸다. 후드 때문에 얼굴 표정이 보이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너무 놀라 상대가 의심했을 테니까.

“터무니없는 이야기하고는 하죠. 칼튼의 별명이 귀족도살자인데, 설마 귀족이랑 사랑의 도피를 하겠냐고. 전
그래서 더 가능성 있다고 보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봅니다.”

루이센은 강하게 부정했다. 칼튼이 루이센을 노려보았다. 대체 화가 얼마나 난 건지 뒤통수가 다 뜨끈뜨끈했다.


모리슨 이 사람, 자각 없이 루이센과 칼튼을 오해하며 루이센에게 타격을 주었다.

“아무튼 그것 때문에 검문한다고 어찌나 사람을 괴롭혀 대는지. 그런 의미에서 순례자님이 부럽습니다. 그
통행증 하나면 아무도 안 막을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죠.”

“혹시 실례가 안 되면 통행증, 한 번만 구경해 봐도 될까요?”


“예, 뭐. 보시는 것 정도야. 돌려주시기만 하세요.”

루이센은 기꺼이 통행증을 보여 주었다. 화제 전환이 너무 반가웠다. 모리슨은 통행증을 촛불에 비추어 보았다.
영롱한 은빛이 퍼져 나가자, 모리슨의 눈에도 이채가 서렸다.

“이거 진품이네요. 이런 건 어디서 나셨습니까?”

“교회에서 받았죠.”

“그렇죠. 순례자의 통행증이니까요. 순례를 어디서부터 시작하셨나 해서요.”

“아, 그 말이었나요? 그냥 저 서북부에서 시작했습니다.”

루이센은 말을 얼버무렸다. 순례자가 행적을 숨기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서북부라. 거기서 남부로는 언제 내려오셨습니까? 뒷동네 상황을 잘 모르시는 거 보면 남부에 내려오신 지


오래되신 모양인데. 두 분은 남부에서 만나신 건가요? 아니면 위에서부터 같이?”

어쩐지 모리슨에게 추궁당하는 기분이 들었으나, 루이센은 성실하게 답해 주었다.

“피난 삼아 내려왔습니다. 오래 머물긴 했죠. 콘포세에서 만났습니다.”

“콘포세라. 여기서 멀지도 않은데, 빨리도 친해지셨네요.”

“뭐…….”

“여행하다 보면 그렇죠. 서로 의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고요.”

모리슨은 루이센과 칼튼을 번갈아 보았다. 그 시선이 어째서인지 무척 열렬해서 약간 소름이 돋았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럼요. 그럼요.”

이 사람도 어지간히 남의 말 안 듣네. 그냥 연애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가? 좋은 사람에서 착각이 심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그에 대한 인상이 변했다.

‘장사를 도와줄 게 아니라 짝을 소개시켜 줘야 하나……?’

그래도 다행히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고, 루이센은 모리슨과 그 동료들과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처구니없는 착각만 아니면 모리슨은 유쾌하고 좋은 대화 상대였다.

칼튼은 벽에 기대서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젠장.’

칼튼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루이센은 잘 웃다가도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싹
얼굴을 굳혔다. 눈이 마주쳐도 시선도 피하고, 말도 한마디 걸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칼튼은 루이센에게 못되게 굴었지만 루이센이 이렇게까지 칼튼을 무시한 적은 없었다.
정말 제대로 말실수를 했구나.

‘하, 씨. 내가 왜 그랬지?’

솔직히 유치한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다.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을 사기꾼이라고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는가.
지금은 이렇게 명확하게 하면 안 될 말인 걸 아는데, 그냥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저놈은 또 왜 저렇게 들러붙는 거야.’

모리슨이 루이센과 잔을 부딪치면서 슬쩍 거리를 좁히는 게 보였다. 루이센은 왠지 모르게 모리슨을 마음에 들어
해서, 그가 친근한 척 달라붙는 걸 다 받아 주고 있었다. 가뜩이나 초조해 죽겠는데 그 틈에 딴 놈이 접근해
오다니. 한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칼튼은 이를 악물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랑은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하는데 저놈이랑은 웃고 있잖아.

그때 칼튼은 모리슨과 눈이 마주쳤다. 모리슨은 칼튼을 빤히 보다가 다시 루이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단순하고 별거 아닌 행동이 이상하게 눈에 거슬렸다. 겉모습을 봐서는 어디 하나 수상한 점 없고 붙임성 좋은
상인이었다.

‘저 자식 마음에 안 드는데.’

칼튼은 눈을 가늘게 뜨고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저놈이 거슬리는 건지, 저놈이 루이센에게 친한 척하는 게
거슬리는 건지. 칼튼은 자신의 마음을 도통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이센은 지금 자신에게 매우 화가 났고, 그사이에 엄한 놈이 루이센 옆자리를 꿰찰 수도 있었다. 그건 매우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외팔의 순례자는 어디서 뭐 하는 놈인지 모르지만 모리슨은 눈앞에 있었다.

***

70 화

위기감은 자존심도 이겼다. 칼튼은 방에 돌아오기 무섭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루이센은 황당해서 눈을 깜박였다. 화난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사과를 해?”


“제가 공작님의 은인을 사기꾼이라고 해서 화나셨잖아요.”

“처음에야 그랬지만…….”

“절 무시하시고.”

“내가?”

“갑판에서요.”

“그건 자네가 먼저 화를 내서 그렇잖아? 화난 게 아니면 아까 모리슨 방에서는 왜 그렇게 노려본 거야? 내가 빼


준 의자도 무시하고.”

“……모리슨 그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질투했다고는 말 못 하지. 칼튼은 둘러댔다. 없는 말도 아니었다. 여러모로 이상하긴 했으니까. 루이센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좀 그렇긴 해.”

모리슨에게 고마운 것과 별개로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 모리슨이 자꾸 우리 둘 사이를 이상하게 오해하니까 그게


싫었던 거구나! 루이센은 자기 멋대로 납득했다. 그런 거 싫을 수 있지. 이래 봬도 왕년에 꽤 인기 많았는데,
약간 씁쓸하긴 했다.

“어쨌든 죄송합니다. 말이 심했어요. 존경하는 사람을 욕하면 화가 나겠죠.”

“그래. 나도 식당에서 소리 지른 건 미안했어. 사실 그 순간만 욱했던 거지, 그렇게 화나진 않았어.”

칼튼이 외팔의 순례자를 사기꾼이라 한 것에 분노보다는 섭섭함이 더 컸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을 왜 좋아해 주지
않느냐는 식의 어린애 같은 감정이었다.

“그럼 이제 화해하는 거지?”

루이센은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망설이는데 칼튼이 루이센의 손을 맞잡았다. 어디서 본대로
루이센은 칼튼을 살짝 안으며 등을 툭툭, 두들겼다.

‘좋아. 멋있는 화해였어.’

무릎을 안 꿇고도 잘 해결할 수 있구나. 루이센은 새로운 걸 배운 거 같아 몹시 뿌듯해졌다.

“생각해 보니 자네가 오해할 만해. 나도 자네가 순례자의 통행증 가지고 있는 거 보고 좀 의심했거든. 그분이
진짜 순례자가 맞나 하고.”

우연히 순례자의 통행증을 얻은 사람이 세상에 칼튼 하나뿐일 리 없었다. 회귀 전의 왕국 상황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아수라장이었다. 그때라면 순례자인 척하기는 더 쉬웠을 것이다. 마음속에 이미 의심이 자리 잡았기에,
칼튼이 그걸 입에 올렸을 때 더 과민 반응했다.

“사실 그분이 진짜 순례자든 아니든 상관없어. 사기꾼이어도 말이야.”

“사기꾼이어도 상관없다고요?”
칼튼은 당황했다.

“죽어 가던 나를 그분이 구원하고, 그분의 가르침으로 세상에 눈을 떴어. 그분이 진짜 누구든 내게 은인인 건
변하지 않잖아.”

말은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다. 하지만 행동은 흉내 내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그분은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날 위해 약을 구해 주셨지. 겨울에는 난롯가를 양보해 주셨고, 먹을 게


생기면 꼭 절반을 나누어 주셨어. 나는 그 행동을 믿어.”

외팔의 순례자가 사실은 어떤 사람이었건, 루이센에게는 영원한 성자였다. 세간의 인식이랑은 무관하게
루이센만의 성자였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분이니 내 앞에서 그분을 욕하진 말아 줘. 알겠지?”

“예…….”

“그만 자자고. 피곤해.”

루이센은 훌렁훌렁 옷을 벗고는 침대로 쏙 들어갔다.

칼튼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좋다고? 차가운 강바람이 들쑤시는 것처럼 가슴 한편이
서늘했다. 사과도 했고 화해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짙은 패배감이 남았다.

***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밝았다. 루이센은 느지막이 일어나 눈을 떴다. 처음엔 잠결에 서둘러 일어나려다가 다시 푹
늘어졌다.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동하고 있다니 최고였다.

루이센은 이불을 몸에 말고 뒹굴거리다가 칼튼을 발견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고민 있는 사람처럼


표정이 복잡했다.

“왜 그러고 있어? 잠은 잤어?”

“네.”

칼튼은 멍하니 답했다.

배 안에서의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화물을 둘러보고 배 안을 산책하다가, 모리슨 일행과
카드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다 모리슨 같은 상인이고, 용병들도 고용된 입장이라 다들 각자 자기 할 일을 했다. 루이센은


멍한 칼튼을 데리고 식당에 가서 식사를 챙겨 먹었다. 음식은 예상한 대로 맛이 없었다.

식사를 한 후에는 갑판을 어슬렁거리며 산책하고, 모리슨의 짐이 잘 있는지 화물칸으로 가서 확인도 했다. 그러다
보면 다시 또 식사시간이 되었다. 이번에는 모리슨과 그 일행도 합류해 식당에서 요란하게 카드게임을 했다.
지루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배 안은 나름 유쾌했다. 탑승객은 거의 상인과 고용된 용병들이었다. 업무의 연장
선상에 있는 사람들이라 유별나게 제멋대로 구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자기 무리와 함께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편이었다.

느긋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루이센은 이런 느긋한 기분이 너무 좋았다.

강 한복판에 있으니, 누군가 튀어나와 목덜미를 물어갈 거라는 공포도 사라졌다. 배에서 삼일은 느긋하게
보내겠구나. 그렇게 기대했다.

그 기대는 너무 빨리 깨지고 말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승객들이 식당에 몰려든 시간이었다. 루이센은 배 안의 식사가 얼마나 부실한지, 미틸의
식당에서 더 먹지 못한 음식이 어찌나 아쉬운지를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그때, 비틀비틀 누군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근육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어기적, 어기적 느린 걸음이 도리어
눈길을 끌었다. 남자의 느린 동작에 식당 문이 가려졌다.

“형씨, 빨리빨리 좀 움직입시다!”

막 식당에 들어오던 용병 하나가 짜증을 내며 앞선 남자의 등을 툭, 쳤다. 가볍게 쳤을 뿐인데 앞선 남자는 쿵,


하고 앞으로 넘어졌다.

“뭐, 뭐야?”

넘어진 남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용병이 당황하며 남자를 살피다가 빠르게 사색이 되더니 소리쳤다.

“이 사람 죽었잖아!”

“뭐? 무슨 소리야?”

식당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용병의 일행들이 그에게 다가갔다. 처음에는 다들 용병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넘어진 남자가 다시 일어섰다. 목이 완전히 반대로 돌아간 채로. 그제야 남자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남자는 시체였다.

시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악! 아아아악!”

산 같은 덩치의 용병들이 기절할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칼튼은 눈 깜짝할 사이에 테이블을 넘어와 루이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검을 빼 들었다. 식당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어어어.”

움직이는 시체는 매우 느렸다. 그냥 움직이기만 할 뿐, 사람들을 위협하지도 않았다. 금방 정신을 차린 용병들은


움직이는 시체를 식당 구석으로 몰아갔다.

“이거 뭐야?”
“어? 이 사람, 알로스 상단 사람인데?”

누군가 시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와 동시에 루이센도 움직이는 시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저거 구울인데?”

“구울이요? 그거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거요?”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영혼은 몸을 떠나지 못하고, 그 몸은 살아 움직이게 된다. 그게 바로 구울이라는 몬스터의
정체였다. 한때는 사람이었으니 몬스터라고 봐야 하냐 아니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구울의 탄생에 대해서도
자연 발생한다, 저주다, 전염병이다, 미래에도 설만 난무할 뿐 제대로 밝혀진 건 없었다.

루이센은 자연 발생이나 억울한 영혼설보다는 누군가의 저주나 전염병 쪽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정말 억울한
사람이 구울이 되었다면 공작가의 모든 사람은 구울이 되어 루이센을 쫓아와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구울은 그렇게 위협적인 몬스터가 아니었다. 죽은 사람이 움직인다는 점이 끔찍할 뿐, 느리고 공격력도
약하다.

“저런 거 윗동네에는 많지 않아? 특히 북부 쪽.”

루이센이 과거로 돌아오기 전, 떠돌아다니면서 구울을 종종 봤다. 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기상천외한 일도
아니었다.

“무슨 소리예요? 저런 게 흔하면 영주가 아니라 사제가 왕국을 다스리고 있을걸요?”

“그래?”

루이센이 태연한 것에 칼튼은 더 놀랐다. 이 사람이 이렇게 대담한 사람은 아닌데?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용병들은 구울의 손발을 묶는 데 성공했다. 타이밍 좋게 알로스 상단 사람 하나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이, 이게 어떻게…….”

“이봐. 당신!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상단 주인 누구야? 나와서 해명하라고 해!”

사람들이 알로스 상단 사람을 질책했다. 알로스 상단 사람은 잠시 망설이더니, 눈을 딱 감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했다.

여기 있는 구울, 알로스 상단의 하인이 죽은 것은 지난 새벽이었다. 어제저녁, 배가 출항한 뒤 저 남자가 고열로


쓰러졌다. 그때만 해도 미틸에서 유행한다는 장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장염이 아니었고, 계속
상태가 나빠지더니 새벽이 되어서는 죽어 버린 것이다.

“아니, 그런 일이 있으면 배를 돌렸어야지! 왜 숨겼어?”

“그게……. 배를 돌리면 손실이 엄청나니까…….”

알로스 상단 때문에 배를 돌리면, 배에 탄 상인들이며 용병들까지 전부 알로스 상단에 책임을 물을 것이었다. 안


그래도 남부 행으로 큰 손해를 봤는데 더 피해 볼 수 없어 쉬쉬했다는 말이었다.
“상단주는 어디 있어?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 뭐 하는 거야?”

“단주님도 지금 고열로 쓰러지셨습니다.”

“뭐?”

“저희 상단 사람들 전부 쓰러졌다고요.”

“잠깐만. 그럼 전염병이야?”

전염병.

그 말 한마디에 모든 사람이 알로스 상단 사람과 구울로부터 도망쳤다. 순식간에 식당 안은 불안과 공포로


팽배해졌다.

배에 탄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운명 공동체였다. 모두 같은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한 공간에서


생활했다. 그런 상황에서 전염병이 돈다는 것은 누구도 병을 피해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전염병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강 한복판이었기에 배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안락한 침실이 되고,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는 발이 되어 주었던 배는 움직이는 감옥이 되었다.

71 화

병으로 죽은 남자가 구울이 되어 버렸다. 구울은 불쾌하지만 그 자체로 크게 위협이 되진 않았다. 그보다는 죽은
남자와 함께 지낸 알로스 상단 사람들이 전부 같은 증상을 보인다는 점이 더 큰일이었다.

“전염병이다! 전염병이 돌고 있어!”

사람들이 도망치듯이 식당을 빠져나갔다. 구울과 알로스 상단의 사람이 그들을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패닉에 빠져
달아났다.

루이센과 칼튼도 일단 식당을 빠져나왔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시기에


전염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 어떻게 죽음의 낫이 자신의 목숨을 베어 갈지 모르니
더더욱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전염병을 저주라고 믿는 사람들은 순례자인 루이센에게 달라붙으려고 했다.
칼튼이 온몸으로 막고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루이센은 꼼짝없이 붙들렸을 것이다.

칼튼은 루이센을 방 안으로 밀어 넣고 방문을 잠갔다. 움직이는 시체에, 전염병에, 기도라도 해 달라고 달려드는
사람들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도 이 정도인데 루이센도 많이 놀랐겠지. 칼튼이 루이센을 달래 주려고 말을 꺼내려는데, 루이센이 먼저


로브를 벗었다. 예상과 달리 루이센은 무척이나 침착하고 차분했고, 겁에 질리지도 않았다.

“자네도 빨리 벗어.”

“예?”

“접촉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구울이나 알로스 상단 사람과 마주쳤으니 겉옷 정도는 갈아입는 게 안전해.”

루이센은 확신에 차 있었다. 칼튼은 전염병과 겉옷의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키는 대로 겉옷을 벗고,
포대 자루에 집어넣었다. 다음으로 루이센은 물을 가져다 손을 씻었다.

“자네도 손 씻어.”

칼튼은 얼떨결에 손을 씻었다. 루이센이 너무 침착하니 도리어 이상하게 보였다.

“그렇게 하지 말고, 좀 잘해 봐.”

루이센은 칼튼 손을 잡고 비누 거품까지 내서 박박 닦아 주었다. 루이센의 부드러운 손바닥이 칼튼의 손을 감싸고


문질렀다.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바닥에서부터 손가락 사이 연한 살까지 꼼꼼히 스쳤다.

미끄러지는 감촉에 칼튼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루이센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투박한 자신의 손가락에
얽히자 괜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루이센은 강아지 발을 닦아 주는 것처럼 신중하되 사심은 한
조각도 없었다. 칼튼은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이건 뭐 하는 겁니까?”

“원래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 예방 차원에서.”

미래에는 다 이렇게 한단다. 루이센은 칼튼의 손을 깨끗한 천으로 닦아 주고 물은 버렸다.

“침착하시네요. 더 놀라실 줄 알았는데.”

루이센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라가 망하려면 악재가 겹친다더니. 루이센이 회귀하기 전, 왕국에는 꽤 다양한
병이 유행했다. 강한 전염성을 가진 병도 있었다. 그는 남부를 제외한 왕국 전역을 떠돌아다녔고, 많은 병을
보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외팔의 순례자를 따라다니면서 배운 덕에 루이센에게는 전염병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방랑 생활의 다양한 경험이 루이센을 이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나는 전염병은 걱정 안 돼. 한 번도 그런 병에 걸려 본 적 없거든.”

루이센은 전염병이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오랜 방랑과 굶주림으로 기력이 쇠하고 몸이 망가지고는 병마에
사로잡혔지만, 방랑 초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전염병이 도는 마을을 지난 적도 있고, 전염병자와 같은 마차를 타고 이동한 적도 있었지만 한 번도 옮은 적이


없었다. 몸에 좋다는 건 다 먹고 살아서인지, 태어나자마자 교회의 높은 분께 축복받은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루이센이 보기보다 튼튼하다는 것이었다.

“자네는?”
“저도 병에 걸릴 걱정은 없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아파 본 적이 없거든요.”

“그건 다행이네.”

칼튼이 전염병에 걸렸다는 소리는 들은 적도 없고, 병마도 무서워서 도망칠 거 같긴 했다. 방심할 수야 없지만
두려움에 떨며 방에 틀어박혀 있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보다는 배가 걱정이야. 어떻게 될 거 같아? 배가 계속 갈까? 미틸로 돌아갈까?”

“선장이 내릴 결정이긴 하지만…… 아마 미틸로 돌아가진 않을 겁니다. 이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거


같으니까요.”

애써 온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게 달갑지 않았다.

“제 예상으로는 목적지까지 예정대로 움직일 거 같습니다. 어차피 물가는 수심이 얕아서 배를 댈 수도 없으니,
선장도 최대한 손해를 줄이려고 하겠죠.”

“그럼 다행이지만.”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

루이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생각지도 못했다.

“전염병이 퍼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쪽 도시에서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다간 배가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강 위를 떠돌아야 할 수도 있어요.”

“그런 안 되지!”

루이센과 칼튼에게 가장 최악의 상황은 발이 묶여 버리는 것이었다. 뒤에서는 루거가 쫓아오고 있고, 갈 곳은
멀고, 시시각각 왕은 죽어 가는데 배 위에 발이 묶이다니!

“그럼 어떻게 하지? 이런 데서 시간을 허비할 순 없어.”

“조각배를 탈취해서 도망치든지, 병이 전염병이 아니길 기도하든지 해야겠죠.”

“아아…….”

루이센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왜 하필 내가 탄 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미틸에서 시작된 병이라면 다른 배를 탔어도 비슷했을 겁니다. 어쩌면 이 배 다음에 출발하는 배들은 아예
출항을 못 했을 수도 있어요.”

칼튼이 위로를 했지만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루이센은 팔짱을 끼고 앉아 옛 기억을 헤집었다.

‘이맘때 유행하던 병이 뭐가 있더라……?’

몇 가지 떠오르긴 했지만 알로스 상단 사람들이 걸린 병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병에 걸린 사람을 직접 본


게 아니라서 말이다. 정신이 없어서 구울도 자세히 보지 못했다.
“구울이든, 병든 사람이든 제대로 살펴볼 수 있으면 확실히 알 것도 같은데……. 내가 치료법을 아는 병일 수도
있거든.”

“공작님이요?”

루이센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결심했다.

“식당에 다시 가 보자. 거기에 아직 알로스 상단 사람이랑 구울이 있을 거야. 자세한 이야기도 들어 보고,
알로스 상단주도 만날 수 있으면 만나고. 어때? 자네가 불편하면 나 혼자 만날게.”

“거길 다시 간다고요?”

칼튼은 루이센을 기절시켜서 이 배를 탈출해야 하는 게 아닌가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랑 그 시체와 같이 지냈을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건 영 꺼림칙했다. 하지만 루이센은 혼자라도
식당으로 돌아갈 기세였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예쁘고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머리지만 정말 그 안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루이센은 대체로 얌전하지만 가끔 한 번씩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점이 문제였다.

루이센의 학업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다는 것을 고려하면 의학 같은 전문 분야도 일자무식일 게 뻔했다. 그러나


루이센은 확신에 차 있었고, 이럴 때 가끔 놀라울 만한 통찰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루이센이
고집부릴 때는 항상 이유가 있었고, 그건 정확히 맞아떨어져 긍정적인 결과를 냈다.

‘믿는 구석이 있는 눈치고……. 사람들과 충돌은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 내가 가지 말란다고 안 갈 사람도


아니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이상한 짓을 벌이는 게 루이센이다. 손발을 묶어 감금시키지 않는 한, 몰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 버릴 사람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자신이 옆에 딱 붙어서 돌봐 줘야 했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루이센을 지킬 것은 자신뿐이지 않은가. 여러 고민 끝에 칼튼은 결정했다.

“제가 공작님을 두고 어딜 갑니까?”

칼튼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루이센은 칼튼의 까칠한 화법에 익숙해져서 그냥 웃었다. 말만 이렇게 한다니까.

두 사람은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천을 접어 코와 입을 가리고, 장갑을 꼈다. 칼튼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 못 했지만 루이센이 시키니 그냥 따랐다.

***

예상대로 식당은 대다수 사람이 다 빠져나가 텅 비어 있었다. 그 자리에 대신 구울과 알로스 상단의 사람,
그리고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 모리슨이었다.

모리슨은 루이센과 칼튼처럼 코와 입을 천으로 가리고, 장갑을 낀 채로 긴 봉을 이용해 구울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 모습을 알로스 상단의 사람이 옆에서 오열하며 지켜보았다.
“모리슨 씨?”

“두 분. 방으로 돌아가셨던 거 아닌가요? 무슨 일입니까?”

모리슨은 다소 날카롭게 반응했다. 예상하지 못한 위기에 그도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주변을 경계하는 여우처럼
예민해 보였다.

“네. 좀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다시 왔습니다. 모리슨 씨는?”

“그냥 지나가려는데 이분이 곤란해 보이셔서 말입니다. 아무리 구울이라도 살아 있던 사람인데 방치할 수도 없고.
도와드리려고 왔습니다.”

역시 모리슨이었다. 자신이야 미래를 아니까 이렇게 침착하지, 모리슨은 아무것도 모를 텐데 남을 돕기 위해 나설


수 있다니. 회귀 전, 루이센에게 기꺼이 표를 사 주었던 모리슨의 따듯함을 살짝 엿본 것 같아 가슴이 찡해졌다.

사람이 좀 이상한 착각을 해서 그렇지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이야.

“저희도 도와드릴게요.”

“아, 그러면 고맙죠. 구울은 안 쓰는 창고로 밀어 넣어 둘 생각입니다.

“그냥 목을 치면 안 됩니까?”

칼튼이 물었다.

“다시 움직일 수도 있어서…….”

“맞습니다. 불태우는 게 제일 좋은데 배 안에서 불을 피울 수도 없으니까요. 위험하진 않다지만 보기 안 좋고


위생 문제도 있으니……. 어디 가둬 두는 게 최선이죠. 문을 열고 나올 지능은 없으니까요.”

모리슨의 박학다식함에 감탄하며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튼은 좀 다르게 받아들였다.

“구울에 대해 잘 아시나 봅니다. 흔치 않은데. 저는 그런 걸 구울이라고 부르는지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요.”

“아는 사람은 다 알죠. 순례자님도 이런 놈들에 대해 꽤 잘 아시는 거 같은데 참 아는 게 많으시군요.”

모리슨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칼튼은 모리슨의 말 안에 왠지 뼈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결같이 거슬리는 남자였다.

72 화
‘좀 더 캐내 보고 싶지만…….’

루이센은 모리슨을 마음에 들어 했고, 또 지금도 그런 눈치는 전혀 못 채고 칭찬받았다는 듯이 쑥스럽게 웃고


있길래 칼튼은 일단 한 수 접기로 했다.

“가두기 전에 혹시 기도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순례자님.”

모리슨이 루이센에게 부탁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사제는 아니라 효과는 없겠지만…….”

“예. 사제는 아니시죠. 그래도 이런 건 마음이니까요.”

기도 한번 하는 게 어렵지 않으니 루이센은 기꺼이 앞으로 나섰다. 모리슨이 막대기로 구울을 붙잡아 두고,
칼튼은 언제든 구울을 치워 버리고 루이센을 보호할 수 있게 옆을 지켰다.

루이센은 처음으로 구울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핏기가 사라진 거무튀튀한 안색과 썩은 생선 같은 눈동자는 그가
움직이고 있어도 살아 있지 않다는 걸 알게 했다. 아무리 시체를 많이 봤어도 계속 보기 좋은 비주얼은 아니지만,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귀밑, 턱뼈와 목이 이어지는 지점에 두드러기가 돋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반점이 일반적인 붉은색이 아니라
노란 기가 도는 녹색이었다.

‘녹색?’

뭐가 묻은 건가? 루이센은 손수건을 꺼내서 구울 목을 문질렀다.

어, 안 지워지네.

“뭐 하는 겁니까?”

루이센의 기행에 칼튼이 깜짝 놀라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는 루이센 손에서 손수건을 빼앗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그게 병균 덩어리라도 되는 것처럼. 루이센은 아차 했다. 알로스 상단 사람도, 모리슨도 이상하다는
눈으로 루이센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묻은 거 같아서…….”

루이센은 헛기침을 했다. 칼튼은 루이센의 말에 그가 손수건으로 닦아 낸 구울의 턱 아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턱 아래에 얼룩덜룩한 점이 있네요. 저거 원래 있던 겁니까?”

“아뇨. 점 같은 거 없으셨는데……. 아, 진짜네요. 녹색 반점이 있는데……. 저거 뭐 이상한 건가요?”

알로스 상단 사람이 멍청히 되물었다.

“애초에 사람 피는 붉은색이라 반점이 생겨도 붉거나 검붉은색, 갈색으로 나타납니다. 녹색은 아니죠. 사람이
풀이나 나무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은 몸에는 이런 거 없었습니까?”

칼튼이 비웃듯이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정말 모른다고? 붉은색도 아니고 녹색 반점이 생겼는데 못 알아본다는 게 말이 되나? 다 알고도 일부러 숨기는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가서 다시 물어볼까?”

칼튼이 윽박지르자, 알로스 상단 사람은 울먹이며 소리쳤다.

“일행이 한 번에 쓰러졌는데 그걸 살펴보고 있을 새가 어디 있답니까? 살아 움직이는 시체만도 버거운데! 그리고


죽은 시체가 움직이는데……. 피부가 좀 파래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네요.”

칼튼은 언제 화냈냐는 듯이 태평하게 말했다.

“지금 저 떠보신 겁니까?”

알로스 상단 사람의 항의에 칼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칼튼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한편 루이센은
소란 속에서도 생각에 잠겼다. 칼튼이 남들에게 못되게 구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익숙했다.

‘녹색 반점……. 녹색……. 부자연스러운데…….’

뭔가 기억 하나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다. 루이센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좀 더 살펴보면 확실히 떠오를 것도 같은데.’

하지만 구울의 몸은 이미 부패가 진행된 상태. 옷 사이로 보이는 피부가 까맣게 변하고 있어 봐도 잘 모르겠다.
같은 증상을 보인다는 알로스 상단의 사람들을 만나 봐야겠다고 루이센은 다짐했다.

모리슨은 가만히 보고 있다가 루이센에게 말했다.

“이 병에 대해 짚이시는 게 있나요?”

“아, 아뇨.”

루이센은 얼버무렸다. 확실하지도 않은데 짐작만으로 말을 꺼내기에는 사안이 너무 민감하고 위중했다.

크흠, 루이센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 망자를 위해 기도합시다.”

루이센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두 손을 모았다. 막대로 구울이 움직이지 못하고 꾹 누르는 칼튼을 제외하고는
모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고 텅 빈 식당에 나직하게 기도문을 외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이센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발음이 명확하여 듣는 사람의 마음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알로스 상단 사람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문을 따라 했다. 순례자는 사제와 달라 아무 힘도 없다는 걸 알지만 부디 기적이 일어나 죽은 사람이 편안히
잠들기를 빌었다.

기도가 끝나도 기적은 없었다. 구울은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어딘가를 떠돌기 위해
우어우어 하며 팔을 휘저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알로스 상단의 사람은 오열했다.

구울을 창고로 몰아넣는 건 칼튼이 했다. 막대기로 방향만 잡아 주니 알아서 잘 창고로 들어갔다. 루이센의 설명
그대로였다. 끔찍한 몰골이랑 달리 약했다. 왠지 예전에 망아지를 마구간으로 밀어 넣던 때가 떠올랐다.

그러는 동안 루이센은 알로스 상단 사람의 곁에서 오열하는 그를 달랬다. 괜찮다, 괜찮아질 거다. 그렇게 몇
번이고 말을 하니 그도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동료가 저렇게 되어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모두가 마음을 모아 그의 영혼이 평안하길 신께 빌었으니, 이제


그분이 저이의 영혼을 돌봐 주실 겁니다.”

“읏, 흑, 네. 그렇겠죠? 그래야 하는데…….”

감정이 북받치는지 알로스 상단 사람은 입을 틀어막았다. 루이센은 조심스럽게, 어색하게 들리지 않게 물었다.

“언뜻 듣자 하니 상단의 다른 분들은 모두 쓰러졌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그, 그게…….”

“상황을 알아야 저희도 그에 맞게 행동할 수 있어요. 당신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제 와서 둘러댄들 어쩌겠습니까. 맞습니다. 저만 빼고 다들 쓰러졌습니다……. 아무래도 전염병이 맞는 거


같아요.”

“저런…….”

“……저는, 저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알로스 상단 사람은 밤새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아침 해가 떠오르기 무섭게 교회로 달려가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처럼 말을 쏟아 냈다.

그는 자신을 컬린이라고 소개했다. 컬린은 본래 알로스 상단의 하인으로 고용되었고, 사실상 사람들 뒤치다꺼리를
해 주던 잡일꾼이라고 했다. 행상에 아무 권한도 없고 발언권도 없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쓰러져서
자신만 남아 버렸다.

병간호를 하랴, 구울을 챙기랴, 병에 대한 걸 숨기랴. 고군분투하는 사이에 구울이 탈출하면서 최악의 방식으로
전염병이라는 사실이 퍼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정말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상단 사람들은 다 죽고, 저도 죽을 거예요.”

컬린은 공포에 질렸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전염병으로 죽든지, 분노한 사람들에게 맞아 죽기 전에 강으로 몸을
던지든지, 그 둘 밖에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일단 진정하세요. 심호흡을 하시고……. 좋습니다. 괜찮아요. 컬린 씨는 혼자가 아닙니다.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요.”

루이센의 말에 컬린의 눈이 커졌다.

“정말, 정말요?”

“그럼요.”
“왜요?”

“우리는 한배를 탄 사이가 아닙니까. 그리고 저는 궁지에 빠진 자를 외면하지 말라는 신의 가르침에 따르기 위해
방랑을 선택한 자입니다.”

“아……!”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붉은 저녁노을이 루이센의 머리를 내리쬐었다. 그것은 마치 후광처럼 보였다. 언뜻 후드


사이로 드러난 루이센의 입매는 자비로 그린 것같이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 순례자님…….”

컬린은 감동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루이센의 손을 두 손으로 꽉 맞잡는 걸로 마음을 표현했다.

‘너무 달라붙는 거 아니야?’

칼튼은 컬린을 노려보았다. 그를 루이센에게서 떼어 내고 싶은 충동을 다스리느라 애썼다. 루이센이 컬린에게


알아내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니, 방해하면 안 될 거 같아 가만있지만 컬린이 자꾸 루이센에게 친한 척 치대는 게
불만이었다.

얼굴을 다 가리고 있는데도 저렇게 사람 하나를 홀려 버리다니. 루이센 얼굴을 가리게 한 건 백번 잘한 일이었다.
안 그랬으면 아예 종교를 하나 만들고도 남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튼의 부글부글한 속내와는 상관없이 폐허처럼 변해 버린 식당에 잠시나마 성스럽고 안온한 공기가 흘렀다.
모리슨은 깊은 감명을 받은 것처럼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녁노을이 길에 늘어지면서 그 명암이
모리슨의 위로 드리웠다.

***

컬린은 알로스 상단의 단주 방으로 루이센과 칼튼, 그리고 모리슨을 안내했다. 그는 루이센의 옆에 붙어 가며,
루이센이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줄줄 털어놓았다. 혼자서 불안하던 차에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만나 마음을
확 터놓게 된 것이다.

“저는 상단에 늦게 합류해서 다른 분들이랑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사실 좀 겉돌았죠. 맨날 저만 짐


지키게 하고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그래서 자신만 멀쩡한 게 아닌가, 싶다고 컬린은 한탄인지 안도일지 모를 말을 했다.

“순례자님 덕분에 마음이 놓입니다. 식당에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저 혼자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을 거예요.”

의지해 주는 건 고맙지만……. 루이센은 어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먼저 나서신 건 모리슨 씨인데…….”

루이센은 식당을 빠져나갔다가 나중에야 다시 돌아왔다. 이런 감사는 자신보다는 먼저 식당에 왔던 모리슨이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컬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예. 그렇죠. 모리슨 씨께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컬린은 무척 어색하게 모리슨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73 화

컬린은 무척 어색하게 모리슨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예의는 차렸지만 거리감이 있고, 루이센에게 하는 것처럼
마음을 놓은 것 같진 않았다. 그 점이 뭔가 이상했지만, 모리슨이 원래 알로스 상단 주인과 아는 사이라고 하니
사연이 있겠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칼튼은 루이센처럼 좋게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가 오기 전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모리슨이 어떻게 했기에 컬린이 나중에 온 루이센을 더 구원자처럼 생각하는 걸까? 단순히 모리슨과 알로스 상단
주인의 관계 때문에 불편해한다기에는, 칼튼의 눈에는 모리슨이 그렇게 알로스 상단 주인과 친해 보이지 않았다.
칼튼이 아는 한 배에서 머무르는 시간 동안 모리슨은 상단 주인을 한 번도 따로 찾아가지 않았다. 물론 알로스
상단 쪽은 병자 때문에 정신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심을 잘라 낸 것은 모리슨 본인이었다. 모리슨은 사람 좋은 얼굴로 칼튼의 팔을 툭,


치려고 했다. 칼튼은 잽싸게 정색을 하며 피했다.

“뭡니까?”

“빤히 쳐다보셔서.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뇨. 모리슨 씨까지 따라와야 하나 싶어서 말입니다. 작디작아도 한 상단을 이끄시는 분이니 다른 할 일이
많으실 텐데 상단 사람들은 무사한지 살펴본다거나 해야 하지 않습니까?”

“제 동료들은 다 자기 앞가림은 하니 괜찮습니다. 저도 알로스 상단 분들이 걱정되어서요.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래도 전염병이라는데 무섭지 않으신가 봅니다?”

“사람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모리슨의 모범답안같이 반듯한 대답에 앞서가던 루이센이 모리슨을 돌아보며 감탄했다.

“모리슨 씨는 정말 좋은 분 같아요.”
모리슨은 온화하고 따듯하게 웃었다. 그림으로 그려 선한 인상의 표본으로 남겨도 좋을 만한 미소였으나 칼튼의
마음은 잘못 말린 나무처럼 뒤틀렸다.

***

알로스 상단의 사람들은 전부 상단 주인이 쓰던 방에 모여 있었다. 컬린이 간호를 하기 위해 한 방으로 모두 옮겨


놨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바닥이나 소파에 누워 있었다.

모두 안색이 거뭇하고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나마 상태가 좋은 한 사람만 컬린을 향해 왜 이제 오냐고 욕을 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제대로 말이 되지 못했지만.

컬린은 욕을 먹으면서도 웃었다. 왜 웃지? 루이센이 이상하게 보자 그는 황급히 해명했다.

“아, 다들 아직 살아 있잖아요. 욕할 정도로 기운도 남아 있으시고. 제가 나간 사이에 죽은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루이센은 다시 훌쩍이는 컬린을 토닥이며 알로스 상단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살펴봐도 될까요?”

“네네. 그럼요.”

루이센은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제일 멀리 있는 상단 주인까지 쭉 살폈다. 모두 열이 높았고 그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루이센이 주의 깊게 살핀 것은 그들의 목덜미였다. 귀 뒤쪽에서부터 턱으로 이어지는 부근에 어김없이 구울에서


본 것과 같은 녹색 반점이 있었다. 턱의 그림자가 지고 수염이 자라는 부위라 언뜻 봐서는 모르고 넘어갈 만했다.

“쓰러지기 전에 뭐 특이했던 점은 없나요?”

“음, 배에 타기 전부터 몸이 안 좋다고들 그러시긴 했는데 워낙 술을 자주 드셔서 그냥 그 탓인 줄 알았죠. 아,


근데 갑자기 다리가 안 움직인다는 소리를 하더니 픽 쓰러지는 거예요. 그제야 뭐가 잘못된 거 같아서 다가가니까
몸이 불덩이더라고요.”

컬린의 말에 루이센이 멈칫했다. 다리 마비라고?

루이센은 손톱으로 상단 주인의 다리를 꾹꾹 눌렀다. 장갑을 끼고 있어 아프지 않겠지만 그런 것치고도 반응이
거의 없었다. 마비가 온 게 분명했다.

루이센은 상단 주인의 신발과 양말을 벗겼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걸 무시하고 발목을 살피자, 암녹색 점이
삼각형 모양으로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문신 같지만 장갑을 벗고 살살 만지자 점이 아니라
상처가 난 피가 뭉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발목도 확인해 보니 같은 자국이 있었다.

녹색 반점, 다리 마비, 그리고 삼각형 모양의 세 점.

‘아, 역시.’
과거에 루이센은 이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알로스 상단 사람들이 걸린 병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옮기는
종류의 병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병도 아니지. 이건 독인데.’

이전의 생에서 외팔의 순례자를 만나고 몇 달인가 지났을 때의 일이다. 외팔의 순례자가 몇 달 동안 보인
헌신으로 루이센이 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두 사람은 왕국 중서부 지역을 여행하다가 어느 수도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본래는 소박하면서도 경건한 향취가
머무는 공간이었으나 그때는 병자들의 신음 소리와 악취가 진동했다. 인근의 장원에 전염병이 돌아 병자를
추방하자 수도원에서 그들을 거두게 된 것이었다.

수도사들은 병자들과 함께 죽을 각오로 그들을 받아들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수도사 중 아무도 병이 옮지 않았다.


오히려 병자들을 쫓아낸 장원에서 더 전염병이 기승을 부렸다. 수도사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마침 그곳에 머물게 된 외팔의 순례자에게 도움을 구했다.

외팔의 순례자는 수도원과 장원을 오가며 모두 무심코 넘기던 녹색 반점과 삼각형의 물린 흔적에서 단서를 얻었고
이 병의 진짜 원인을 알아냈다.

네모난 모양의 각진 머리와 그에 비교되게 가늘고 긴 몸을 가진 뱀처럼 생긴 몬스터가 있다. 크기는 성인 남자의
팔뚝 정도로 몬스터치고는 크지 않았다. 그 눈이 붉고 사악한 기운이 흘러 단박에 몬스터임을 알아볼 수 있지만
은밀하고 영리하여 눈에 띄지 않는 편이었다.

놈은 희한하게 송곳 같은 윗니 하나와 아랫니 두 개를 가지고 있는데, 그걸로 지나가는 생물을 물어 댔다.


알로스 상단 사람들의 발목에 남은 삼각형 모양의 세 점은 몬스터에게 물린 흉터였다. 놈의 송곳니에서는 독이
흐르고 있는데 물리고 반나절에서 하루는 지나야 본격적으로 증세가 나타난다.

놈에게 물린 사람들은 자신이 물려 중독된지도 모르고 생활하다가 갑자기 다리의 마비와 함께 쓰러져 버리는
것이다.

중독 증상이 한창 유행하던 전염병과 닮은 데다, 놈이 한 지역에 머물며 순차적으로 사람을 무니, 모두


전염병이라고 착각해 버린 것이다.

외팔의 순례자는 자신의 몸을 미끼로 삼아 놈을 유인했고 장원의 우물 근처에 자리 잡은 몬스터를 잡아 죽였다.


그러자 병자가 더 늘어나지 않았다. 또 수도원에서 몬스터의 독을 채취해 해독제를 만들고, 몬스터의 존재를 널리
알리자 많은 곳에서 전염병으로 오해받고 죽어 가던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다.

그때 루이센은 깨달았다. 외팔의 순례자는 정말 하늘에서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원하라고 내려 준 신의


대리인이구나. 이 땅에 내린 암흑을 몰아내고 정의를 바로 세울 사람이구나.

비록 끝까지 따라가지 못했지만 그의 영웅적인 일대기에 잠시나마 자신이 함께했다는 사실은 잊지 못할 영광이었다.
그리고 그 덕에 과거로 돌아온 지금도 톡톡히 덕을 보지 않는가.

‘성자님, 제가 또 이렇게 성자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루이센은 습관적으로 외팔의 순례자에게 마음 깊이 감사 인사를 올렸다. 떨어져 있어도 나날이 존경심은 커져만
갔다.

“뭐 좀 알아내셨어요?”
컬린이 희망에 차 물었다. 루이센은 애틋한 기분은 잠시 접어 두고 현실로 돌아왔다. 컬린이나 모리슨은 물론이요,
자기 손가락 하나 못 다루는 병자들까지도 루이센의 한마디에 관심이 쏠렸다.

“네, 이거…….”

루이센이 막 대답을 하려는데 뿌우우우, 하고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배에서 흩어진 선원들을 집합시킬 때 울리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배가 갑자기 느려지면서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칼튼이 흔들리는 루이센의 상체를 붙잡아 주었다.
배가 멈춰 버렸음을 모두가 느꼈다. 흔들림이 멈추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복도로 뛰쳐나왔다. 뭔가 큰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멈추는 건데!”

“선장은 뭐 하는 거야!”

곳곳에서 사람들의 원성이 터졌다. 배 안이 시끌시끌했다. 곧 선원들이 돌아다니면서 잠깐 배를 점검하는


중이라며 별일 아니라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러 다녔다.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배가 멈춘
진짜 이유가 금방 밝혀졌다.

노잡이 몇 명이 들것에 실려 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있었다. 알아 보니 그들이 알로스 상단의 사람들과 같은


증상을 보이면서 쓰러졌고, 그 탓에 다른 노잡이들이 놀라 아수라장이 되면서 배가 멈춘 것이었다.

“전염병이 거기까지 퍼졌나 봐요!”

컬린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절규했다.

성난 사람들은 알로스 상단 사람들을 배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 병이 옮을 것이 두려워 알로스


상단의 객실로 쫓아오지는 못했지만, 분노가 병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건 시간문제였다. 배가 멈춰 있는 동안은
더더욱.

소문은 불안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는 밤하늘처럼 배 안의 상황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칼튼은 계속 알로스 상단 객실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해, 루이센을 데리고 빠르게 방으로 돌아왔다.
모리슨도 선장을 만나겠다며 그 자리를 피했고 컬린만 병자들과 남았다.

객실로 돌아와 루이센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칼튼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번에는 손 안 씻습니까?”

“아아, 괜찮아. 전염병 아니야, 그거.”

루이센은 칼튼에게 자신이 알아낸 것을 설명했다. 칼튼은 살짝 실망스러워 보였지만 루이센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74 화

“몬스터 독이라. 생각도 못 했네요. 알로스 상단 사람들은 뭘 하다 그런 몬스터에게 물린 건지.”

루이센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지금보다 적어도 2 년 뒤부터 왕국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서식하는
몬스터라고 알고 있는데, 이 시점에 남부 쪽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 의아하긴 했다.

“그보다 노잡이들이 똑같은 증상으로 쓰러진 게 문제야.”

알로스 상단 사람들만 쓰러졌다면 별걱정이 없었다. 그들이 몬스터에게 물린 것은 배에 타기 전이라고 추정되니까.


하지만 노잡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미틸에 정박한 동안에도 배에만 머물렀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몬스터 독에
당했다는 것은 그 몬스터가 이 배 안에 있다는 의미였다.

“배 안에 몬스터가 있다니.”

칼튼이 심각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얼마든지 병자가 늘어날 거라는 말이 아닌가. 쓰러지는 사람이 늘어나면 배
안의 혼란이 지금보다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래서 조금 전에 모리슨이 물어볼 때 얼버무리신 거군요?”

객실로 돌아오기 전, 모리슨이 뭐 알아낸 거 있지 않냐고 물어봤다. 루이센은 얼버무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칼튼은 루이센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방에 돌아오면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먼저 답이 나왔다.

“응. 사람들이 모르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잘하셨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말해 봐야 사람들이 믿지도 않을 거예요. 배에는 상인이 대다수고 돈


문제가 얽혀 있으니, 희생양을 만들려고 할 겁니다. 괜히 저희 탓을 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쟁이로 몰리면 그나마 약과였다. 자칫하면 너희가 독을 퍼트려 놓고 없는 몬스터 핑계를 대는 게 아니냐고
누명을 쓸 수도 있었다.

“몬스터를 잡은 다음에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더 나을 거 같았어. 우리 둘이서 몬스터를 찾아야 하겠지만.”

“많은 사람이 알게 되어서 소란을 일으키면 몬스터가 숨어 버릴 수도 있어요. 우리 둘만 움직이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칼튼이 그렇게 확신을 주자, 루이센도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전염병이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몬스터만 잡으면 이 소란도 진정이 되겠죠.”

“몬스터를 잡으면 해독제도 만들 수 있을 거야. 쓰러진 사람들이 그때까지 버텨 주기만 하면 치료도


가능하겠지.”

몬스터에 대한 건 말할 수 없었지만, 쓰러진 사람들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는 컬린에게 말해 두었다. 해열제와
범용적으로 쓰이는 해독제라면 당장 사망자가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몬스터를 잡지 못하면 어차피 다 죽겠지만.

‘몬스터가 배 안에 있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쨌든 놈을 잡아야 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물론 말만큼 간단하지는 않았다. 루이센과 칼튼 두 사람이 팔뚝만 한 뱀을 찾아 돌아다니기에는 배가 크고


몬스터가 작았다. 더구나 이쪽은 시간이 여유롭지 않으니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다행히 루이센의 머릿속에는 외팔의 순례자에게 직접 들은 경험과 후대에 발표된 연구 자료가 남아 있었다.
외팔의 순례자의 업적 중 하나이기에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아도 이 뱀 몬스터에대한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해 준
덕분이었다.

“놈은 사람을 먹진 않아. 그냥 물어. 자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곳에 사람이 돌아다니는 게 거슬리는 거야.”

“몬스터다운 이유네요.”

“그놈이 노잡이를 물었지. 그건 배 안을 자기 영역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노를 젓는 칸은 갑판 아래 지하잖아.


그쪽에 뱀이 있지 않을까 해.”

갑판이나 객실 쪽의 승객이 아니라 노잡이가 먼저 쓰러졌다. 노잡이가 있는 지하에 뱀이 똬리를 틀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뱀은 그런 곳을 좋아하니까 마침 그 부분도 맞네요.”

“그렇지.”

다른 때 같았으면 노를 젓는 지하 칸에는 승객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배가 멈추고 노잡이들이 전부


배 안의 숙소로 돌아갔으니 남몰래 찾아보기도 어렵지 않았다.

“그 칸은 텅 비었을 테니까, 우리가 가서 어슬렁거리면 몬스터 놈은 분명 열 받아서 튀어나올 거야.”

칼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몸을 미끼로 삼는 것. 외팔의 순례자가 놈을 잡을 때 쓴 방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간단해 보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수였다. 뱀의 독은 치명적이고, 놈은 그림자 속에 숨는 것처럼 빠르고 날렵했다. 뱀이 발목을
물기 위해 입을 쩍 벌린 그 한순간을 노려야 하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힘은 물론이요, 대담함까지 겸비해야
하는 것이다.

“저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한쪽 팔이 없는 사람도 했는데.”

“그래도 위험하니까 잘 생각해 봐. 성자님은 팔 한쪽이 없지만 남들보다 곱절은 강했어.”

“제가 그 사람보다 약해 보여요?”

“난 봐도 잘 모르겠던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루이센 눈에는 칼튼이나 외팔의 순례자가 대단한 건 알겠어도 둘 사이의 우열은 구분하기
힘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잡아 보이죠. 그럼 공작님도 제가 더 뛰어나다는 걸 인정하실 겁니다.”

칼튼은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괜히 자존심을 세우는 게 딱 어린 티가 나서 귀엽게 보였다.

“뭡니까? 그 웃음은?”

루이센은 칼튼의 지적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히죽히죽 웃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세상에 내가 칼튼이 귀여워
보이는 날도 오고. 미친 건가?

“지금 저 애 취급하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칼튼은 매우 눈치가 빨랐다. 루이센은 뒤늦게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통할 리가 없었다. 결국 칼튼이 얼마나
멋지고 강한지를 온갖 미사여구로 칭찬해 준 다음에야 겨우 칼튼의 기분을 풀어 줄 수 있었다.

***

자정에 가까워질 무렵. 흥분했던 사람들도 제풀에 지쳐 잠들어 갔다. 말소리보다는 숨소리가 더 늘어가고 오가는
발걸음조차 사라졌을 때, 루이센과 칼튼은 슬슬 뱀 사냥을 시작할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은밀하게 방을 나왔다. 그리고 헤매지 않고 곧장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 길을 찾았다. 칼튼이 배의


구조를 외워 둔 덕분에 목적지를 찾는 것은 쉬웠다.

복도에는 순찰을 돌던 선원들도 눈에 띄지 않았는데 그 점이 오히려 불안해 보였다. 당연히 해야 할 일과조차


지켜지지 않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이니까. 강 위에서 맞이하는 밤은 죽은 듯이 고요했고, 달빛만이 수면
위로 부서져 반짝였다.

두 사람은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지하로 향하는 문에 도달했다. 문은 열쇠로 잠겨 있었지만 칼튼이 쇠꼬챙이를 몇
번 쑤셔 넣더니 간단하게 열어 버렸다.

칼튼이 앞서고, 루이센이 뒤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밑은 새까만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노잡이들이
없으니 불도 꺼 둔 모양이었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루이센은 왠지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지하는 갑판이나 객실과는 비교도 안 되게 흔들렸다. 벽에 손을 대면 물살이 배의 바닥에 부딪히는 것 같은


진동이 전해졌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사람 하나는 간단히 삼켜 버릴 거대한 물과 맞닿아 있는 것이 실감이
났다. 철벅, 철벅하고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너무 어두운데.’

아무리 상황이 많이 좋아졌더라도, 어두운 곳은 여전히 싫었다. 어둠 속에 갇히면 어김없이 회귀 전, 외팔의


순례자를 만나기 전의 그 길고 긴 괴로웠던 나날이 떠올랐다.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걸 구분할 수 있게
되었지만 겁나는 건 여전히 겁나는 거다. 더구나 밀폐된 공간이 주는 압박감은 또 달랐다. 숨이 콱 조여오는 것
같았다.

루이센은 무심코 앞서가는 칼튼의 옷깃을 잡았다. 칼튼이 뒤돌아섰다.

‘아, 한심한 모습을 보이겠어.’


그동안 어두운 걸 무서워하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알면 성가시다고 생각할 테니까.

“천천히, 천천히 내려가지.”

루이센은 칼튼의 옷깃을 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오랫동안 홀로 버텨 오며 익힌 허세 같은 것이었다.


칼튼은 말없이 루이센을 보더니, 루이센의 팔을 잡아당겼다.

“제 앞에 서세요.”

“어어?”

루이센은 그대로 이끌려 칼튼의 앞으로 섰다. 좁은 계단을 벗어난 그 밑에는 더 큰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카, 칼튼 경. 잠깐만.”

으으, 저기에 뭐가 있는 거 같아. 귀신이라거나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은 칼날이라거나. 루이센은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칼튼이 허락하지 않았다. 칼튼은 루이센의 등을 안듯이 몸으로 받치며, 그의 턱을 손으로
쥐었다. 루이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겁먹을 거 없습니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어두운 거 무서워하죠?”

“아니…….”

“한번 계속 보세요. 자꾸 보다 보면 뭐든 눈에 익어요.”

“그치만.”

“시도는 해 보셔야죠.”

칼튼은 단호했다. ‘그걸 굳이 지금 해 봐야 할까?’라거나 ‘네가 내 아빠야?’라는 소리가 절로 목까지


치밀어올랐다.

그래도 등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는 칼튼의 몸과 맞닿은 곳에서 전해지는 체온은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칼튼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먹먹하게 하던 강물이 흐르던 소리도 그의 심장 소리 아래 묻히자 아주 약간 용기가
생겨났다.

‘살짝만. 실눈을 떠 볼까?’

루이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으, 진짜 뭐 있는 거 같은데.’

어둠 속에 무언가 사람 같은 게 서 있는 것 같았다.

“저기, 저거 사람 아니야?”

“아무것도 없어요. 사람이 있었으면 제가 알아챘죠.”

“잘나서 좋겠네!”
루이센은 욱해서 소리쳤다. 목소리 끝이 갈라졌는데 칼튼은 그게 웃기다고 웃어 댔다.

“자, 발밑 조심하시고.”

칼튼은 루이센이 계단을 마저 내려갈 수 있게 이끌어 주었다. 몇 개 남지 않은 계단을 억지로 내려오는 사이,
루이센의 눈에도 어둠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금 전 사람이 서 있다고 생각했던 공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보였다.

지하는 그냥 더러웠다. 의자나 노, 나무상자 같은 것이 엉망진창으로 굴러다녔다. 땀 냄새와 약간의 지린내도


풍겼다. 노잡이들이 도망치면서 대충 던지고 간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생활감을 풍기고 있었다.

“별거 아니네.”

“거봐요. 익숙해지면 안 무섭다니까요. 이런 건 안 보려고 할수록 더 무서워지는 법이라고요. 근데 뭐,


무리하실 건 없고. 그냥 불 켜면 되는데요.”

칼튼은 그렇게 말하며 횃불에 불을 붙였다. 루이센은 또 울컥했다.

“아니, 그럼 그냥 처음부터 자네가 먼저 달려 내려가서 불을 켰으면 됐잖아?”

“다 경험이죠, 경험.”

“와. 진짜. 와.”

너무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루이센이 농락당한 기분에 성질을 내는 걸 보며 칼튼은 웃었다. 어느새


루이센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하를 누비고 있지 않은가. 횃불 몇 개 켰다고 그렇게 밝아지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75 화

“그래서 이제 전략이 어떻게 됩니까?”

칼튼의 물음에 루이센은 답했다.

“전략이랄 게 있나? 놈이 나타날 때까지 걸어 다녀 보고 여기가 아니다 싶으면 다른 곳을 가는 거……억.”

루이센은 나무상자에 무릎을 부딪쳤다. 어둠이 눈에 익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신체 능력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루이센은 부딪친 상태에서 중심을 잡으려다가 또 바닥에 떨어진 노를 밟고 휘청였다.

“어휴. 잡으세요.”
보다 못한 칼튼이 손을 내밀었다. 루이센은 사양치 않고 칼튼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그 상태로 계속 배 안을 걸었다. 칼튼은 루이센이 휘청일 때마다 단단히 지탱해 주었다. 물소리만
먹먹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까 감각을 곤두세워 보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상대의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이나 살갗의 감촉이 생생해졌다.

좀 전의 대화가 루이센의 가슴 속을 크게 휘저어놓은 탓인가 더욱더 칼튼이 신경 쓰였다.

지하층의 열악한 환경은 첫인상과 마찬가지였다. 땀 냄새와 물비린내가 나고, 물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하고,
빛이라곤 없이 암울했다. 그런데 칼튼과 손을 맞잡고 걷자니 이 상황도 어딘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달빛 아래
악단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아름다운 연인과 정원을 걸을 때도 느끼지 못한 기분이었다. 정말 세상에 둘만 남은
기분이랄까. 언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이 지하실이 낭만적으로 느껴지다니.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고.’

칼튼이랑 나란히 손잡고 걷는 게 처음이 아닌데도 이런다.

‘아닌가. 그것도 꽤 낭만적인 상황이었……던 게 아니야. 지금 그럴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루이센은 스스로 타박을 했으나 들뜬 기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다가 칼튼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횃불의 흐릿한 불빛에 그의 높고 곧은 콧대가 빛났고, 눈썹뼈와 이마가 도드라졌다. 사나워 보이는 눈썹 아래로
눈동자는 형형했다.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루이센도 덩달아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루이센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주변이 어두워서 다행이다. 안 그러면 얼굴이 빨개진 게 보였을 테니까.

“뱀이 안 나오네.”

루이센은 두근거림을 감추기 위해 딴소리를 했다. 한참을 걸었지만 뱀 몬스터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완전히 이상하게 들릴 말은 아니었다.

“그러게요. 좀 더 난리를 쳐야 할까요?”

“음. 그러는 게 좋겠어.”

“제 손 잡고 한번 뛰어 보실래요?”

칼튼이 루이센 앞에 서서 양손을 내밀었다. 걷는 내내 오묘한 기분을 느낀 탓인가, 마주 보고 서자니 왠지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너무 혼자 의식하는 것도 이상하겠지. 루이센은 태연하려 애쓰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크게 발을 굴려 보았다.

쿵쾅쿵쾅.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걸로는 부족할 거 같아 루이센은 폴짝폴짝 뛰어보았다.

쿵. 쿵. 쿵.

다시 말하자면 루이센은 몸치였고, 그걸 극복해 보고자 운동 같은 걸 하는 것보다는 요령껏 감추기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운동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 왔으니 자기 몸을 쓰는 게 어색했다. 그런 몸으로 몇 번을 연속으로
뛰니 어김없이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으앗.”

칼튼은 루이센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기며, 넘어지는 루이센의 몸을 온몸으로 받아 냈다. 그러면서 자연히 두
사람의 다리가 겹쳐지면서 몸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루이센의 후드가 훌렁 벗겨지면서 머리칼이 드러났다. 시야가
넓어지면서 가장 먼저 칼튼의 가슴팍이 눈에 들어왔다. 상대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요란하게
귓가를 울렸다.

“괜찮으십니까?”

“어……. 어…….”

칼튼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아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루이센은 바로 귓가에서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코끝이 닿을락 말락 할 만큼 가까웠다.

“후드가 벗겨졌어요.”

칼튼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흐트러진 루이센의 머리칼을 쓸어넘길 뿐 후드는 놔두었다. 그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가만히 말없이 루이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칼튼의 눈동자에 자신이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날 선 시선은 사르르 녹아내리면서 그 빈 자리를 뭐라 표현하기 힘든 열정이 가득 채웠다. 다정하면서도 열렬한


표정에 루이센의 뺨이 달아올랐다. 루이센은 미틸의 한 식당에서 칼튼이 자신을 보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싸우느라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그때도 문득 ‘어?’ 하고 생각했었다.

‘나를 좋아하나?’

그런 착각이 드는 표정이고 시선이었다. 루이센은 그의 시선 안에 갇혔다고 느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바라보든


꼼짝할 수가 없었으니까.

루이센이 피하지도 인상을 쓰지도 않자 칼튼의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의 큰 손바닥이 등을 쓸어내릴 것처럼


허리를 쥐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루이센의 눈을 가만히 주시하다가, 루이센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약간은
넋을 놓은 듯, 망설임을 담고 있는 그 시선에 숨이 멎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깔며, 고개를 옆으로 젖혔던 것도
같다.

그대로 입술이 맞닿았어도 이상할 게 없는 분위기였다.

뱀 몬스터만 아니었으면.

갑자기 샷, 하고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루이센과 칼튼은 발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들이 찾던, 네모난 머리에 실처럼 가는
몸을 가진 뱀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루이센을 물것처럼.

“아악!”

루이센은 깜짝 놀라 칼튼에게 뛰어들었다.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매달렸다. 칼튼은 칼튼대로


루이센을 받아 안으면서 뱀을 향해 단검을 내던졌다. 상황이 상황이었음을 고려할 때 놀라울 만큼의 잽싼
대처였다.

하지만 놈은 보통 뱀이 아니라 엄연히 몬스터였다. 몬스터는 몸을 기이하게 틀며 단검을 피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놓쳤다. 루이센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자신이 칼튼에게 답싹 안겨 있음을 자각했다. 매달린 것을
알아차렸다.

사실 이렇게 놀라 안길 필요는 없었다. 뱀 몬스터는 몸통에 비해 머리가 무거운 편이라 주로 사람의 발목을 문다.
그에 대비하여 질긴 가죽으로 된 발목 높이의 부츠를 신고, 나무판과 천을 덧대어 물리더라도 안전하도록 손을 써
둔 것이다. 차라리 뱀이 물게 놔두는 쪽이 더 잡기 쉬웠을 수도 있다. 이빨이 나무판에 박히면 놈도 주춤할
테니까.

이건 조금도 로맨틱하지 않았다. 너무 꼴사나워서 조금 전까지 그들 사이를 맴돌던 오묘한 분위기도 싹 자취를
감춘 뒤였다. 민망함에 루이센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내려 주게…….”

칼튼은 루이센을 내려놓았다. 루이센은 재빨리 칼튼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아……. 미안. 내가 너무 놀라서.”

“아닙니다. 저도 신경이 다른데 팔려서 그만…….”

칼튼도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놈이 이 층에 있고, 저희 도발이 먹혔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시간 문젭니다.”

“……그럼 다시 돌아다녀 볼까? 뛰는 건 좀…… 힘들 거 같아.”

“제가 발을 구르며 다니겠습니다.”

“그래…….”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센과 칼튼은 다시 주변에 집중하며 지하를 돌아다녔다. 그 순간의 열기가 강렬했던 만큼 더 싸늘한 어색함이
감돌았다.

‘차라리 키스를 하는 게 덜 어색하겠어.’

아니. 아니지. 넘어지면 얼른 떨어졌어야지. 내가 왜 그러고 있었지?

뭐에 홀린 기분이었다. 칼튼에게 홀린 건가? 내가? 왕도의 꽃은 다 건드려 본 이 아니에스 공작님이 별명이


도살자인 용병에게?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루이센은 머리를 휘휘 저었다.

퍽. 그러다가 또 뭔지 모를 잡동사니에 무릎을 찧었다.

“윽.”

“윽.”
이번엔 물통처럼 생긴 나무통이었다. 뭐 이렇게 잡다하게 많아? 루이센은 짜증을 내며 비켜 가려는데 순간 의문이
들었다.

‘좀 전에 신음 소리가 두 번 나지 않았어?’

의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루이센은 물통을 걷어찼다. 그 뒤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는 것을 칼튼이 발로 걷어찼다.
그러면서 자연히 루이센의 앞으로 나서며 그를 보호했다. 내외하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놀랍도록 딱 맞아떨어진
협공이었다.

“으악!”

나무통 뒤에 숨어 있던 것은 사람이었다. 그것은 칼튼에게 얻어맞고 날아가 토악질을 했다. 처음에는 어두워
누군지 몰랐지만 가만히 보다 보니 상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컬린?”

웩웩, 거리던 컬린은 제 이름이 불리자 크게 움찔하고 떨었다.

“저 컬린 아닌데요.”

컬린은 억지로 굵게 목소리를 깔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컬린 자신도 어설픈 변명이라고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루이센과 눈이 마주치자 파르르 몸을 떨며 눈을 피했다.

“여기서 뭐 해요?”

루이센이 추궁하듯이 물었다.

“그냥……. 그냥 답답해서 나왔는데요.”

컬린은 어물어물 대답했다.

답답하면 갑판으로 나가야지 왜 노가 있는 지하 1 층으로 내려온단 말인가. 그리고 먼저 내려와 있는데 루이센과
칼튼을 보고 왜 숨어 있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수상했다.

“컬린. 왜 여기 이러고 있어요? 상단 사람들은 어쩌고요?”

“…….”

“뭐라고 말을 좀 해 봐요?”

“…….”

컬린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도망을 치려 했다. 우어어어어, 소리를 치며 달리는 기세는
좋았으나 칼튼이 발을 걸어 간단히 넘어뜨렸다. 칼튼은 컬린의 등을 발로 꾹 눌렀다.

“이,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컬린은 온몸으로 발버둥 쳤다. 하지만 칼튼의 발 하나를 밀어내지 못했다. 칼튼은 여유롭게 컬린의 등을 지그시
밟아 뭉개며 루이센을 보았다.

“이 새끼 좋게 말해서 안 듣네요. 걱정 마세요. 제가 손대면 할아버지 팬티 개수까지 털어놓게 만들 수


있으니까.”

“음……. 그래……. 너무 심하게 하진 말고.”

좋게 말해서는 입을 안 열겠다니 루이센도 더 어쩔 수가 없었다. 도망치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칼튼만큼은 피하게


해 주었을 텐데.

칼튼은 컬린을 솜인형처럼 휙휙 들어 노를 밖으로 빼기 위한 네모난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루이센은 뒤로


돌아서서 귀를 막고 생각나는 노래를 아무렇게나 불러 젖혔다. 그러는 사이 컬린의 비명 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칼튼이 어깨를 두드리길래 루이센은 돌아보았다. 즐거워 보이는 칼튼과 흠뻑 물에 젖은 컬린이 보였다.
컬린은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을 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 새끼 보기보다 악질이에요.”

“어?”

칼튼의 말은 정말 의외였다.

76 화

“그 뱀이요. 배에 들인 게 이놈이라네요.”

“뭐?”

루이센은 깜짝 놀랐다. 컬린이 이 사달을 일으킨 원흉이었다고? 쓰러진 상단 사람을 챙기랴 구울을 잡으러 다니랴,
고군분투하는 불쌍한 청년 아니었어?

“저한테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봐요.”

루이센이 컬린에게 물었다. 컬린은 이성이 좀 돌아와 자신의 치부를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칼튼이 컬린의 등을
발로 툭툭 치자 입을 열었다. 칼튼에게 대체 무슨 짓을 당한 건지 컬린은 거짓말을 꾸며낼 생각도 못 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 뱀이요. 그거 사실 제가 키우던 뱀이에요.”

컬린이 멀쩡한 얼굴로 미친 소리를 하자 루이센은 제 귀를 의심했다.

“키웠다고? 애완동물 키우듯이 그렇게요?”


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사를 키우는 취미를 가진 귀족은 루이센도 몇 명인가 알고 있었다. 보다 보면 눈이 반짝반짝한 게 귀엽다나.


물리면 골로 간다는 살벌함이 짜릿하다나.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이놈은 엄연히 몬스터였다.

생긴 게 다른 몬스터보다 아담한 축이라고 해도 그것이 풍기는 사악한 분위기나 인간을 향한 공격성 등은 절대


평범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몬스터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도망치든 몬스터를 죽이든 해야 옳았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루이센은 더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거, 몬스터인 건 몰랐죠?”

“몰랐죠! 알면 어떻게 키우겠어요. 근데 진짜 몬스터 맞을까요? 뭐 잘못 아신 거 아니에요? 진짜 순하고 예쁜


앤데……. 잘 보면 눈도 반짝반짝하고…….”

컬린은 애완동물에 푹 빠진 사람처럼 자랑을 늘어놓았다. 우리 애가 이렇게 예뻐요, 우리 애가 얼마나 착한대요.


우쭈쭈. 근데 그 예쁘고 착한 애완 뱀이 사람을 물어 죽이는 몬스터다.

‘미쳤네. 미쳤어.’

살다 살다 몬스터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이야기를 사람 입에서 듣는 날이 올 줄이야. 이 대화를 계속해야 하는


걸까? 컬린은 애완 몬스터 자랑에 빠져 말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지? 루이센이 칼튼을 보자, 칼튼은 컬린을 다시 한번 발로 쳤다. 컬린은
번쩍,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본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아. 그러니까 제가 우리 애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느냐면요…….”

알로스 상단이 더블레스 백작령에 머물 때였다. 당시 아니에스 공작령을 중심으로 남부가 전쟁에 휘말릴 것을
예상하고, 그들이 일찌감치 남부로 내려와 기회를 노리던 때였다. 컬린은 상단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어
무척 외로웠는데, 그때 한 남자와 친해졌다.

그는 좀 특이하긴 했어도 소탈하고 좋은 사람이었다고 컬린은 회상했다. 컬린에게 뱀을 선물한 것도 그 남자였다.


루이센은 황당했다.

“누가 몬스터를 선물로 줘요? 아니 몬스터인 걸 몰랐다고 하더라도, 받았을 때 찜찜하지 않았어요? 그걸 준다고
받아?”

“……처음에는 좀 뱀 생긴 게 기분 나쁘기도 하고 그래서 거절했죠. 근데 얘를 데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저 안


괴롭힐 거라고, 절 도와줄 거라면서 막 억지로 안기고 가더라고요.”

처음에는 컬린도 이 뱀이 너무 꺼림칙하고 찜찜했다고 한다. 하지만 먼 타지에서 동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가 유일하게 정을 붙인 게 남자였고, 그가 이별 선물로 주는 것이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숲 같은 데에다 그냥 풀어주려고 했어요. 좀 꺼림칙하니까. 근데 키우다 보니까 또 정이


들더라고요. 제가 많이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컬린의 상황은 무척 좋지 않았다. 알로스 상단은 황금길만 걸을 생각으로 남부까지 왔는데, 남부의 정세는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돌아갔다. 전부 아니에스 공작 때문이었다.
아니에스 공작은 현명하고 겸손한 태도로 칼튼을 구슬려 피해를 막았고, 놀라울 정도의 통찰력으로 메뚜기 떼
등의 문제를 막아 냈다. 남부의 영주들도 난데없는 메뚜기 떼 때문에 줄줄이 칼튼에게 항복하며 전투 한번 없이
남부의 위기가 막을 내렸다.

루이센은 엣흠, 하고 코를 쓱 매만졌다.

‘내가 좀 잘했지.’

칼튼은 기특하다는 듯이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컬린이 이 사람들 왜 이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우리 상단도 상행을 접고 돌아가기로 결정했죠.”

알로스 상단은 전쟁 특수를 노리고 무기를 위주로 준비해 왔다. 그런데 싸움이 벌어지지 않으니 가지고 온 물건을
다 처분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이번 상행으로 알로스 상단은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었다. 상단 주인은
물론이요, 상단 사람들까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그 모든 스트레스는 컬린을 향했다. 말로 끝나면
다행이고 대개 몽둥이와 주먹이 날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상단사람들은 컬린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으로 긴 여행길의 지루함을 달래 왔다. 손해만 보고
돌아가는 길은 얼마나 더 험난할지 뻔했다. 컬린은 이번 여행길에서 분명 맞아 죽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위로가 된 것이 이 새끼 뱀이었다. 새끼 뱀은 동료들처럼 컬린을 괴롭히지 않았고, 컬린의 이야기도


묵묵히 잘 들어주었다. 외롭고 괴로운 상황에서 새끼 뱀은 컬린의 유일한 친구였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뱀을 가슴팍에 품고 있으면 상단 사람들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컬린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가도 갑자기 기가 질려 피했다. 이 뱀이 컬린을 도와준다는 남자의 말이 사실이었던 걸까. 뱀 한 마리가
그렇게 큰 힘이 있으리라고 진심으로 믿진 않았지만 컬린은 점점 더 이 뱀을 아끼게 되었다.

“그야 몬스터니까요. 보통 몬스터가 가까이 있으면 피한다니까요.”

“제가 보통 사람들이랑은 좀 다르다고, 소질이 있다고 그 사람도 그러더라고요.”

“뱀을 준 남자가?”

“네.”

그 남자도 어째 수상한데. 루이센은 칼튼을 바라보았다. 물어보지 않아도 칼튼은 루이센이 바라던 답을 내놓았다.

“몸 반응을 보면 거짓말 같진 않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근데 아까 나한테는 전염병이라 우리 다 죽을 거라고, 도와 달라고 울고불고하지 않았나?”

“아뇨. 아뇨. 그때는 진짜 전염병인 줄 알았어요!”

컬린은 다시 칼튼과 강물을 곁들인 진솔한 대화 시간을 갖게 될까 봐 겁에 질렸다. 그는 손을 휘저으며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전 진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애한테 독이 있는 것도 몰랐어요.”

“그걸 어떻게 몰라요?”


“지금까지 한 번도 입질한 적이 없었거든요. 가끔 혼자 나가서 사냥 같은 걸 하는 거 같긴 했는데……. 뱀이 다
그렇잖아요?”

바로 아까까지만 해도 컬린은 전염병이 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루이센이 알로스 상단 사람들을
살펴볼 때, 컬린도 보고 말았다. 삼각형의 이빨 자국. 너무 특이해서 부정할 수 없었다. 그건 그가 키우던 뱀의
이빨 자국이었다.

그제야 컬린은 상단 사람들이 전염병이 아니라 자신의 뱀에게 물려 쓰러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알았으면 바로 말하지, 왜 말 안 했어요?”

“……그야……. 우리 애가 그런 거 알면 가만 안 둘 거 아니에요……?”

컬린은 자신의 뱀을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 몰래 지하에 내려와 뱀을 찾은 것이다. 얘를 데려가 잘 숨기고
다시는 사람을 못 물게 하면 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싹 사라지고 사태도 진정이 될 거라고 믿었다.

‘그야 더 물리는 사람이 없으면 전염병 의심도 사라지겠지만……. 그게 되겠냐고.’

몬스터는 몬스터다. 사람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으니 동물이 아니라 몬스터인 것이다.

‘아니지. 맘대로 몬스터 조종하는 놈들이 또 있긴 하지.’

루이센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지금 뱀을 살리겠다고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두려고 했다는 건가요?”

“……상단 사람들은…… 그래도 싸요.”

컬린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원한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 어딘가 통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말을 말자.’

컬린이 원래 멀쩡하다가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돌아 버린 건지, 아니면 원래 돌은 자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현재 몬스터를 살리겠다고 아등바등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미친놈이랑은 대화하는 게 아니다. 멀쩡한 사람도
같이 돌아 버리기 때문이다.

“뱀을 잡으러 내려왔다고 했죠? 그럼 그놈을 유인하는 방법도 알겠네요?”

“……알긴 아는데……. 근데……. 말 못 해요. 잡으면 죽일 거잖아…… 억!”

퍽.

칼튼이 컬린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컬린의 목이 부러진 거 아닌가 싶게 앞으로 푹 꺾였다.

“우리가 지금 친절하게 권유하고 있는 거 같아? 뱀 불러.”

칼튼이 윽박질렀다. 컬린은 덜덜 떨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시…… 싫어요.”

“그럼 네가 죽을래?”
“그래도…….”

“아니면 죽는 것보다 괴롭게 해 줄까?”

칼튼이 웃으며 강물을 가리켰다. 컬린은 절망에 가득 차 바르르 떨며 루이센에게 애원했다.

“순례자님, 자비로운 순례자님. 제발 저 악랄한 새끼가 절 괴롭히지 못하게 해 주세요.”

지금 자기가 불쌍한 척할 입장이야? 루이센인 기가 막혔다. 칼튼은 컬린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컬린이
버둥버둥하다 외쳤다. 칼튼을 상대로 제법 오래 버틴 셈이었다.

뱀에 대한 그의 애정은 그 정도로 진심이었다. 소외된 사람과 애완동물의 우정이라니. 나름 가슴이 짠한 소재의


이야기였지만, 그 애완동물이 치명적인 독을 가진 몬스터라는 점에 루이센은 더없이 찜찜함을 느꼈다.

“말할게요. 상자! 상자가 있어요! 아무리 멀리 가 있어도 해 뜰 때가 되면 상자로 돌아와요!”

“그거 어딨어?”

“저, 저쪽에…….”

컬린이 오열하면서 바닥을 가리켰다. 아까 칼튼에게 맞아 튕겨 나가면서 상자도 바닥에 떨어져 굴러다니고 있었다.
칼튼이 컬린에게 더 나올 게 없나 탈탈 터는 사이, 루이센은 직접 가서 상자를 주웠다.

나무 상자는 검은 도료로 칠해졌는데, 그 감촉이나 견고함이 루이센도 감탄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말단 상인이 가지고 다닐 법한 상자가 아니었다. 루이센은 상자를 열어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77 화

“뭐야, 이거!”

“무슨 일이에요?”

칼튼이 컬린을 끌고 달려왔다. 루이센은 놀라 말도 못 하고 상자 안쪽을 보여 주었다. 칼튼 역시 그것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상자의 안쪽, 뚜껑 아래. 뿔이 네 개, 눈이 세 개 달린 산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림이라 많이


간략화되긴 했지만 루이센과 칼튼이 지네 굴 안에서 본 이상한 흉상과 정확히 같은 모습이었다.

“이게 왜…… 여기서 나오죠?”


칼튼이 물었다. 루이센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자연히 컬린을 바라보았다.

“왜, 왜요?”

“이거 준 사람에 대해 아는 대로 다 말해 봐요.”

“예? 그 사람이요? 저도 잘 모르는데…….”

컬린은 생각이 나는 대로 주절주절 말했다. 젊은 청년인데 늘 좋은 옷을 입고 여유로웠으며, 성 내에서 나름


대접받는 위치인 거 같다고 했다.

“이상하거나, 수상했던 점은 없어요?”

“네, 뭐 딱히……. 처음엔 좀 사기꾼 같긴 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 자기가 마법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마법을 보여 달라고 하니까, 자기가 마법을 쓰면 여기 사람들 다 죽는다고 허풍을 떨더라고요.”

“그리고요?”

“제가 허풍 떨지 말라고 하니까, 자기는 보통 마법사들이랑 다르다나? 위대한 누구를 모셔서 마법에 눈을 뜨게
됐는데, 그래서 그 힘은 그분을 위해서만 써야 한대요. 전 안 믿었죠. 그게 말이 돼요? 근데 아무튼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어요. 제가 술 마시고 세상 망해라, 이런 소리 해도 잘 들어 줬고.”

“이름이나, 나이, 사는 곳은 알아요?”

“……이름은 린컬라고 했고, 나이는 몰라요. 젊어 보이는데 또 어떤 때 보면 늙어 보이기도 하고. 더블레스


백작령에서 만나긴 했는데 거기 사는 건 아니라고 하던데요. 잠깐 형제를 만나러 왔다고 들었어요.”

“린컬이면 네 이름을 거꾸로 읽은 것뿐이잖아. 가명을 성의 없이도 지었네. 숨길 생각도 없고. 마법사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결국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잖아?”

“저도 잘 모른다고 했잖아요…….”

컬린은 칼튼의 눈치를 보면서 소심하게 항의했다.

“그럼 이 그림은 알아요? 그 사람이 이 그림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루이센은 상자 안쪽의 그림을 컬린에게 보여 주었다. 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이거 설명해 줬어요. 자기가 모시는 그분의 상징 같은 거래요. 뿔은 권위랑 위엄을 상징하고, 산양인 건
……. 뭐라더라? 뭐라고 했는데. 아 그리고 눈이 하나가 많은 건 진리에 눈을 뜬 걸 의미한대요. 이 말 되게
마법사 같지 않아요? 마법사들은 원래 막 진리 타령하고 그런다잖아요. 저 이번에는 제대로 대답했죠?”

그건 또 뭐야. 무슨 어려운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루이센은 머리가 아파 왔다.

“어쨌든…… 그러니까……. 그놈이 루거 패거리인 거지?”

“그런 거 같네요.”

“빌어먹을! 그래. 세상에 몬스터를 선물로 주는 미친놈이 또 있을 리 없지.”


루이센이 분통을 터트렸다.

‘회귀 전에, 그때도 지금처럼 컬린을 통해서 시작됐던 건가?’

회귀 전, 이 뱀 몬스터가 퍼져서 왕국 중서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외팔의 순례자가 몬스터임을 밝혀내지


못했다면, 왕국 전역으로 퍼져 나가 손쓸 수 없어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죽어 가면서도 그저 전염병인 줄로만
알았겠지.

루거와 그 패거리들은 대체 뭐 하는 놈들이길래 사방에서 이런 사악한 짓거리를 벌여 대는 걸까. 거기에 자신은


무슨 연관이 있어, 노려지게 된 건지도.

‘루거, 대체 무슨 생각이냐? 이놈들의 계획에 나는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거고?’

루거를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하인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알 수
없어졌다.

“그놈들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감도 안 잡혀.”

산속에 숨은 유랑민의 마을 몰살, 임산부 납치, 수상한 재단, 기이한 독을 가진 몬스터를 풀어놔 사람들 죽이기.

영토를 점령하려는 것도 아니고, 한탕 크게 돈을 벌려는 것도 아니다. 권력을 노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은밀하고 조용하게 무언가의 목표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뭘 노리는지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다.

‘마법사? 몬스터를 부리는 능력이 마법이라는 건가? 그럼 모시는 분은 또 뭐야?’

가진 정보는 늘어났는데 루거와 그 패거리의 정체는 더더욱 미궁으로 빠진 기분이었다.

“하는 짓만 보면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악당, 뭐 그런 거 같네요. 다 망해라, 같은 거죠.”

칼튼의 말이 또 묘하게 그럴듯해서 루이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루이센이 회귀 전 보았던 세상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으니까. 옛말에 나라가 망하려면 불운이 겹쳐 일어난다고 했다. 자연재해, 전쟁, 기근, 역병. 모두
일어났으니 이단 종교만 활개를 치고 다니면, 망할 징조를 모두 갖춘 셈이었다.

‘이단 종교라. 내가 살아 있을 때는 교회가 이 악물고 처벌해서 그런 건 없었지만…….’

교회는 빛을 상징하는 유일신을 믿었다. 그 외의 신앙은 모두 이단으로 몰며, 엄중하게 처벌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하는 이단심문관이라는 존재가 악랄하기로 유명했다.

신앙심이 투철하고 외골수라 한번 찍히면 온몸의 뼈가 다 으스러지도록 고문을 해서 자백을 받아 낸다나. 그런


살벌한 소문이 있었다. 루이센은 방탕한 생활을 했고, 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사람들이 종종 이단심문관이 널
찾아갈 거라고 협박을 하긴 했는데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세상이 어떻게 되었을지…….’

루이센은 자신이 죽은 다음을 상상해 보려다가 그만뒀다. 자신이 죽고 혼자가 되었을 외팔의 순례자가 떠올라
가슴이 짠해졌기 때문이다.

루이센과 칼튼은 더 이야기를 나누어 봤지만 당장 그럴싸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이 가진 정보가
너무도 적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해가 뜰 무렵이 다가왔다. 뱀이 상자로 돌아올 시간이 되었기에, 루이센과
칼튼은 잠시 이야기를 미뤄 두고 뱀부터 잡기로 합의했다.

뱀 몬스터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컬린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저 멀리로 치워 버린 뒤 기다리자, 곧 뱀이


느릿느릿 기어서 나타났다. 놈은 방심하고 있었다. 칼튼의 검이 아주 간단하게 뱀의 머리를 두 동강 냈다.

뱀 몬스터는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는 채로 죽었다. 놈이 배 안에 몰고 온 공포에 비하면 너무도 별 볼 일 없는


죽음이었다.

***

루이센과 칼튼이 컬린을 끌고 지하실을 나오자 세상은 온통 새파란 빛에 잠겨 있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두 사람은
바로 선장실로 향했다.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선장은 초췌한 얼굴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배에는 전염병이 돌고 있는걸 모르는 척 항구에 갔다가 병이
퍼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고, 그렇다고 배를 격리시킨 채로 두자니 승객들에게 맞아 죽을 것 같았다. 밤을 새워
가며 고민했지만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이러지도 못하겠고 저러지도 못하겠고. 뭘 선택하든 선장은 이 피해를 고스란히 다 떠안아야 했다. 이럴 바에는
그냥 차가운 강물에 뛰어드는 게 낫겠다. 그래, 그렇게 하자, 하고 결심하던 차에 루이센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해독제를 만드는 방법까지 알려 주었다. 선장에게는 루이센이 자신을 돕기
위해 하늘에서 보내 준 천사처럼 보였다.

“어떻게 전염병이 아니라 몬스터라는 걸 알아보신 겁니까? 순례자님들은 움직이는 사제요, 남다른 식견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다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나 봅니다.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장은 머리가 무릎에 닿을 만큼 깊게 허리를 숙여 가며 루이센에게 감사했고, 그 노고를 칭송했다. 그리고


선원들을 불러모으고, 승객 중에 약제사가 있나 찾아 데려오게 했다.

선장의 열의를 보건데 이후의 일은 선장에게 맡겨도 좋을 것 같아 루이센과 칼튼은 객실로 돌아왔다. 컬린도
선장에게 맡겼다. 아무리 몬스터인 걸 몰랐다고는 하지만 처벌을 피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였다. 자세한 상황을
알게 된 승객들에게 맞아 죽지만 않아도 다행일 것이다.

사건이 일단락되었지만 기분이 썩 개운하지 않았다.

루이센은 객실로 돌아오자마자 로브를 벗어 던지고 침대에 걸터앉아 짐 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지네 굴에서 가지고 나왔던 뼈로 만들어진 주머니칼이 들어 있었다. 지네를 피해서 도망치다가 얼떨결에 가지고
나오게 되었는데, 버리기도 찜찜하고 혹시나 단서가 될까 싶어 챙겨 들고 다녔던 것이다.

그것과 뱀이 담겨 있던 나무상자. 두 물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수상한 집단과 불길한 사건에
엮인 물건들 같지 않게 평범했다.

가는 곳마다 루거 패거리가 이상한 짓거리를 해 놓는데, 정작 놈들과는 마주친 적이 없었다. 애매하게 그들이
일을 벌인 자리만 지나가며 얽히게 되니 원. 루이센은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칼튼은 그런
루이센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놈들이랑 시원하게 한번 부딪치는 게 속 편하겠어. 그럼 뭐 하는 짓거리냐고 물어보기라도 하지.”

“공작님을 납치하려고 하는 놈들인데요? 공작님을 보면 좋다고 잡아가려고 할 텐데.”

“그러니까 더! 더 속을 모르겠어! 대체 날 납치해서 뭘 하겠다는 거야?”

“남부가 난리가 나겠죠?”

칼튼은 어느 틈엔가 찬장에서 술병을 하나 꺼내어 흔들었다.

‘저건 또 어느 틈에 챙겨 왔대?’

그렇지 않아도 이런 한 잔이 간절했다. 밤새 돌아다니느라 지치고 피곤해 기절할 것 같은데, 정작 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해 쉴 수가 없었다. 회귀한 뒤에는 되도록 술을 안 마시려고 했지만 오늘은 좀 마셔야 할 것 같아
술병을 받았다. 홀짝홀짝 몇 모금을 마시고 칼튼에게 술병을 돌려주었다.

“하긴. 난리가 나겠지.”

루이센은 사라져도 괜찮다. 하지만 아니에스 공작이 사라지면 공작가가 무너진다. 남부 최고 권력자의 자리와
황금들판을 놓고 뒤로 빼고 있으면 귀족들이 아니지.

“새로운 왕의 입지도 불안해질 거고요.”

칼튼은 루이센의 입에 사탕을 물려 주고 술병을 기울이며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침대가 가까워 두 사람의 무릎이
살짝 부딪혔다.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루이센의 다리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78 화

그때 그 지하실에서. 뱀 몬스터가 아가리를 벌리고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입술이 맞닿았을 것이다.
그리고 루이센과 칼튼 사이가 이전과는 달라졌겠지. 그러고 나서 처음으로 한방에 남는 것이었다. 찾아올 사람도
없고, 문도 잠갔으니 완벽하게 단둘이서만.

루이센은 사탕을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지치고 피곤한데 신경이 이상하게 곤두서며 긴장되기 시작했다. 사람
마음이 참 알 수 없구나. 그동안 맨날 손 잡고 다니고, 같이 말을 타며 부딪히고, 산속을 헤맬 때는 그의 품에서
안겨 깨어났는데. 이제 와서 무릎이 좀 닿는 거리가 신경 쓰이다니.

크흠. 루이센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목이 멘 줄 알았는지 칼튼이 다시 술병을 넘겼다. 그러고 보니 술 한 병을


돌려가며 나눠 마시는 것도 좀 그랬다.

언제 이렇게 칼튼과의 사이가 아무 거리낌이 없어졌지? 당황스러웠지만 총관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간신히 가르쳐
놓은 포커페이스는 이 순간에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루이센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대영주 세 명의 인정밖에 받지 못할 테니, 영원히 불완전한 왕위가 되겠지.”

말을 하고 슬쩍 눈치를 살피는데, 칼튼은 이 상황을 루이센처럼 그리 의식하는 거 같진 않았다.

‘뭐야, 나만 신경 쓰나?’

상대가 자신처럼 의식해도 어색했겠지만, 막상 또 아무렇지 않아 보이자 자존심이 상했다. 한때는 왕도 최고의
인기남이었는데. 자신과 단둘이 되고 싶어 하인에게 뇌물을 갖다 바치던 이들이 수두룩했던 화려한 과거가
무색했다.

“안 그래도 1 왕자, 자네 주군은 좀 입지가 불안하잖아?”

루이센은 약간 심술을 담아 말했다.

“그런 편이죠. 왕권이 흔들리면 귀족들끼리도 싸움이 날 거고 그야말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아수라장이겠네요.
국가가 제대로 기능을 하기 힘들 테니, 조금만 위기가 와도 속수무책일 거고요.”

칼튼의 분석에 루이센은 앞선 불만은 잊고 오, 하고 감탄을 했다. 루이센이 경험한 미래는 정말 그렇게 돌아갔다.
공작가가 무너지자마자 남부는 치열하게 싸웠고, 메뚜기라는 공동의 적을 맞이해 잠깐 뭉쳤다가 또 싸웠다.
곡식이 자라고 과일이 익어 가던 평화로운 땅에 배신과 모략이 난무했으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비교적 여유롭던 남부가 이 지경이니, 원래도 영지 간의 갈등이 심하고 생활이 팍팍하던 다른 지역은 그야말로
초토화였다. 특히 북부 쪽은 사람들이 살던 곳을 버린 채 달아나고, 그 빈 자리는 산에서 내려온 몬스터들이
차지해 골치가 아팠다.

그런 상황이니, 누군가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른 것도 아니었고, 어느 집단에게 유리하게 판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왕국에 닥쳐온 불행으로 이득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삶은 빠르게 궁핍해졌고 모두가 가난하고
병들어 갔다. 루이센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지만 지옥 같은 삶을 많이 지켜보았다. 영웅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미래는 더 상황이 나빠졌겠지.

“그런 걸 보면 진짜 세계 멸망이 꿈인가?”

루이센이 너무도 심각하게 말하자, 칼튼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삼류 연극 악당도 아니고. 그런 진부한 악당이 요즘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음…….”

루이센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미래를 아는 입장에서는 차마 농담처럼 넘길 수가 없었다.

“정말 세계 멸망이 꿈인 악당이 공작님을 노리는 거면 큰일이네요. 공작님 덕택에 저도 삼류 악당에게 노려지게
됐으니……. 보상을 두둑하게 받아야겠어요. 저 몸값 비싼 용병입니다?”

칼튼의 농담에 루이센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니지. 내가 아니었어도 자네도 그놈들에게 찍혔을걸? 명색이 1 왕자의 검 아닌가. 언젠가 분명 자네도
노려졌을 거야. 오히려 나랑 있어서 그런 놈들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내게 고마워해야지. 눈 뜨고 코 베일
일은 피했잖아. 보상은 내가 받아야겠는걸?”

“뭡니까, 그게.”

두 사람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는 사이에 껄끄러운 기분이나 걱정도 사라지고 유쾌해지면서 술기운이
올라왔다. 루이센은 웃으며 팔을 기대며 몸을 젖혔다.

“취하셨죠?”

“아니.”

칼튼은 피식, 웃으며 루이센의 손에서 술병을 뺏어 가고 또 사탕을 입에 물려 주었다. 내가 어린앤가. 하지만
사탕은 입안에서 굴릴수록 달콤했고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게 전해졌다. 실없는 농담을 계속하는 것도 분명
걱정거리를 덜어 주기 위한 거겠지.

루이센은 팔에 기댄 채로 칼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이 진짜 내가 무서워하던 그 학살자가 맞나?’

여행을 하면서 자주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정말 공작가의 가신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무고한 영지민을 학살하고,
황금들판을 불태운 그 남자가 이 남자가 맞나?

루이센이 지켜본 칼튼은 성미가 급하고 욱하고, 객관적으로 나쁜 놈이긴 했지만 악인은 아니었다. 상대를 좀
심하게 가리긴 해도 공감할 줄도 알았고 위로할 줄도 알았다. 그는 영리했고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심리적으로 내몰리고 욱했다고 해서, 자기 평생의 오점이 될 학살을 벌일 수 있나? 회귀 전
칼튼이 학살을 저지른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걸 오로지 칼튼만의 잘못이라고 생각해 오던 것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회귀를 하고 보니, 무심코 지나온 과거 속에는 상상도 못 할 음모들이 도처에 숨어 있었다.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라 믿었던 야반도주에도 루거의 음모가 숨어 있지 않았는가.

모르긴 몰라도 아주 많은 사람이 그런 비슷한 음모에 걸려 죽었을 것이다. 대부분은 자신이 음모에 빠진 것도
몰랐겠지. 뱀 몬스터의 독에 죽어 가면서도 자신이 물린 줄도 몰랐던 알로스 상단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중에 칼튼을 향했던 음모도 있었다면?

칼튼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음모에 발목을 물렸던 건 아닐까.

‘그건 너무 안타까운데.’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일이었다. 루이센 말고는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가 혹시 결백한들 밝혀낼
길조차 없었다. 같은 곳에서, 같은 시기에 잘못을 저질렀다. 자신은 과거로 돌아와 속죄할 기회를 얻었으나
칼튼은 그러지 못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루이센이 기억하는 칼튼은 죄인이겠지.

그것이 너무도 안쓰러워 루이센은 무심코 손을 뻗었다. 칼튼의 억센 머리카락이 루이센의 부드러운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순간 칼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아, 미안.”

루이센이 자신이 벌인 짓을 깨닫고 황급히 손을 거둬들이려 했다. 갑자기 다 큰 남자 머리를 쓰다듬다니 이게


무슨 무례야. 그런데 칼튼이 바로 루이센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한층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을 하고, 그러나
두 눈 속 안에 활활 끓어오를 듯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왜 안 피했습니까?”

뭘 말하는지 구차한 설명은 필요가 없었다. 칼튼이 말을 꺼낸 순간, 루이센과 칼튼 모두 지하실에서의 한순간을
떠올렸으니까. 바짝 맞닿은 몸과 그 사이로 전해지던 누구 것인지 모를 빠른 심장 박동. 그리고 숨결이 뒤섞이며
뺨을 간지럽히던 그 기묘한 열기 속의 순간. 처음 넘어진 것은 실수였지만 너무도 가까워진 거리를 더 좁히려고
했던 것은 분명 실수가 아니었다.

루이센이 의식하는 내내 칼튼은 무심해 보였기에, 그의 질문은 루이센을 당황하게 했다.

‘뭐야, 나보다 더 포커페이스잖아?’

하기야 자신의 둔한 성미에 눈치를 본다고 해서 상대의 감정을 알아차릴 리야 만무했다.

“그냥.”

“그냥이요?”

칼튼이 화를 억누르는 게 전해져 루이센은 황급히 덧붙였다.

“싫지 않았거든. 그 순간에는 그 분위기대로 흘러가도 될 거 같았고.”

솔직히 별생각 없었는데. 분위기 타서 더 한 것도 하는데 고작 입맞춤 정도야.

루이센의 무신경한 대답이 칼튼의 마음속에 불을 질렀다. 루이센이 한때 수도 한량 사이에서도 가장 이름을 날린


풍운아였다는 것은 칼튼도 익히 잘 알고 있지만 직접 경험하는 건 달랐다.

“그냥. 싫지 않아서. 분위기를 탔다라…….”

칼튼은 혼잣말처럼 차분히 말하자, 루이센의 양팔에 소름이 쭉 끼쳤다.

“그럼 또 그런 분위기가 되면 그냥 또 피하지 않으시겠습니다?”

“……아니, 나도 아무나한테 그러는 건 아니고.”

루이센은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아, 말을 잘못한 거 같은데 어떻게 수습하지? 하지만 칼튼은 수습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는 루이센의 손목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카, 칼튼?”

루이센이 놀라 손을 빼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칼튼은 루이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손목에 또다시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술을 꾹 누르고 이어 데일 듯이 뜨거운 혀끝이 맥박이 쿵쿵, 뛰고 있는 얇은 피부
위를 핥고 떨어져 나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칼튼은 팔뚝에,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술기운이 확 올라오며 들뜨는 감각에 루이센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 루이센은 작게 탄성을 질렀다. 꿈틀거리는 목울대 위로 칼튼이 가볍게 이를 세웠다. 루이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칼튼의 손이 어느새 루이센의 목덜미를 감쌌다. 그의 시선은 루이센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어쩔
거냐고.

어쩌긴 뭘 어째. 칼튼의 유혹은 오싹할 정도로 흥분되었고, 단순히 싫지 않은 것을 넘어 루이센도 그를 원했다.

“자네는 지독한 데가 있어.”

루이센은 칼튼의 목에 팔을 둘렀다. 더 가까워질 거리도 없이 맞닿아, 칼튼의 입술이 루이센의 입술 위로


포개졌다. 칼튼이 웃는 게 루이센의 입술 위로 전해졌다.

그렇게 좋나.

루이센은 심술이 들어 칼튼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것조차 자극이 되어 키스가 점점 더 깊어졌다. 몇


번이고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고 다시 맞닿기를 반복했다. 꽤 오랫동안 객실 안에는 촉촉한 소리만이 감돌았다.

79 화

하아, 가쁜 숨을 토해 내기 무섭게 칼튼이 다시 입술을 부딪쳐 왔다. 칼튼은 입맞춤도 그의 성격대로 성급하고
강렬했다. 호흡 부족 때문인지 어지럼증이 일어 루이센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그 빈자리는 흥분이 가득
채웠다.

하하, 루이센은 웃으며 칼튼을 끌어안은 채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칼튼이 얼떨결에 따라오며 루이센의 몸 위로
올라탔다. 흰 시트 위에 루이센의 머리칼이 흐트러지자, 칼튼은 무심코 그 사이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머리카락을 자를 때부터 이렇게 마음껏 헤집고 쓰다듬고 싶었어요.”

“으흠, 그렇단 말이지.”

그때부터 나를 그렇게 의식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렇게 일찍부터.

지금까지 느껴 왔던 묘한 긴장감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칼튼의 과보호인가 싶은


행동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루이센은 실실 웃음을 흘렸다.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수없이 많은 사랑 고백을 듣고, 유혹을 받았으나 지금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아니,
모든 게 달라 보였고 무심코 지나쳤던 순간들이 설레는 기억으로 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칼튼이란 말이지. 그 칼튼.’

그가 두려워 덜덜 떨던 과거가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무서워서 말도 붙이기 힘들었는데 더한 것도 하고.


심지어 그와의 키스는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았다.

루이센과 칼튼은 다시 더 깊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루이센도 칼튼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어 주었다.
칼튼의 머리카락은 뻣뻣해서 금방 까치집이 되었다. 그게 웃겨 루이센은 또 유쾌해졌다.

한 번의 키스와 가벼운 장난. 그것만으로 종잇장 뒤집듯이 기분이 좋아지다니.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거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이토록 가슴에 와닿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 그래. 고민해서 뭐 하냐. 나도 모르겠다. 루거랑 그 패거리들이 뭐 하는 놈들인지 알 게 뭐야.’

회귀 전과 많은 게 달라졌다. 아니에스 공작가는 건재했고, 막대한 재산도 그대로였다. 자신도 공작으로서


잘하고 있고. 무엇보다 무력만으로 왕자의 최측근 자리를 따낸 신분 상승의 상징이자 왕국 최강의 남자가 자신의
옆에 있지 않은가.

‘어떻게든 되겠지.’

옆이 든든해진 덕분에, 루이센 특유의 낙천적인 천성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루이센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눈을 꿈벅였다. 걱정이 사라지자, 날카롭게 일어섰던 신경이 가라앉으면서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금 잠이 와요?”

칼튼의 손이 루이센 옷 속으로 들어와 허리를 만지작댔다. 하지만 그 정도 손길로는 루이센을 깨우긴 힘들었다.
밤새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루이센의 체력은 이제 한계였다.

루이센은 칼튼의 팔을 당겨다 옆에 눕혔다.

“자자. 늘어지게 자고 밥 먹자고.”

루이센은 칼튼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겼다.

“허, 참.”

칼튼은 어이없어했지만 뿌리치고 일어나는 대신 루이센을 마주 안았다. 루이센은 금방 곯아떨어졌다. 토닥이는


손길은 멈췄지만 칼튼의 마음은 아직도 누군가 달래는 것처럼 편안했다.

칼튼은 하룻밤 정도로 지치진 않았지만, 루이센 특유의 향기를 맡으며 루이센의 느린 숨소리와 규칙적인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니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멀리서 뿌우우, 하는 뿔피리 소리가 들려오고 곧 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가 다시 움직이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지만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깊이 잠들었다.

***
루이센의 기대대로 선장은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해냈다. 컬린을 가두고, 항구도시 쪽으로 비둘기를 날려 배 안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선원들을 모아 전염병의 진상을 손님들에게 해명하게 했으며 다시 배를 움직이게 하였다.
약제사를 찾아 해독제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배는 다시 강물을 가르고 힘차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배 안의 전염병은 워낙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에,
선원들이 해명한 내용이 빠르게 퍼져 갔다.

처음에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상행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그런
몬스터가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선장은 내친김에 뱀의 사체까지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사체를 본 사람들은 모두 몸서리를 쳤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징그럽고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었던 것이다. 이런 끔찍한 것이 평범한 뱀일 리 없다. 이놈이
몬스터라는 선장의 설명을 들으며 뱀 사체를 보자 다들 납득했다.

그리고 곧 약제사가 해독제를 완성했다. 루이센이 제공한 조제법 그대로 만들어 낸 것으로, 선장의 지시에 따라
지체 없이 알로스 상단 사람들과 노잡이에게 먹였다. 그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사람들의 열이 내리고 호흡이
진정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이 돌아왔다.

그걸로 배 안의 모든 사람이 안심하였으며, 선원들이 전한 사건의 전말이 진실임을 믿게 되었다. 루이센이랑


칼튼이 객실을 나올 때쯤이 되자, 배 안에 두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루이센이랑 칼튼은 평소보다 반걸음 정도 떨어져서 걸었다.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어색한 뜨뜻미지근한 공기가
감돌았다.

두 사람이 식당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사람들이 소리쳤다.

“저기 왔다!”

“몬스터를 잡아내고 해독제 조제법을 알려 준 게 당신들이라면서?”

자다 깨서 밥을 먹으러 온 것뿐이던 루이센과 칼튼은 예상치 못한 환영에 크게 당황했다. 칼튼은 얼른 앞으로


나며 루이센을 몸 뒤로 숨겼다.

“저기, 그 뱀 몬스터에 대해 좀 자세히 알려 줬으면 좋겠는데요. 신종 몬스터인가요? 어디서 서식하죠?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해독제 제조법이 굉장히 독특한데, 허브 쓰는 방법은 수도사들의 방식인 걸 보면 그쪽에서 알아낸 건가요?”

“자자, 여기 앉으라고!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봐!”

사람 하나 죽일 듯이 무서운 기세로 질문을 쏟아 내는 사람부터,

“고맙네! 고마워! 덕분에 배가 움직였어! 기한 내에 항구에 도착할 수 있겠어! 약속한 날짜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엄청난 위약금을 물어야 하거든!”

“그게 몬스터 짓이라는 건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당신들 정말 대단하군!”

다짜고짜 칭찬과 감사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귀가 멍할 정도로 떠들썩하게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하나같이 걱정으로 잠을 못 자 얼굴이 까칠했지만 진심 어린 기쁨이 떠올라 있었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관심이었다. 이걸 어떻게 빠져나가지? 고민하는데 모리슨이 다가왔다.
그는 평소처럼 자상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흥분한 군중들과 비교가 돼서인지 비교적 냉담해 보였다.

“두 분,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제 일행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잠시 이분들 데려가겠습니다!”

모리슨은 잽싸게 치고 루이센과 칼튼을 끌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직전에 본 표정이 어딘가 싸늘해 보였기에
루이센은 좀 긴장했다.

“할 말이라는 게?”

“핑계죠. 저기 잡혔으면 아마 하루 종일 붙잡혀 있었을 거예요. 밤새 고생하셨는데 좀 쉬셔야죠. 식사는 다른


데서 하시는 게 좋겠네요.”

모리슨은 빵이 가득 든 바구니를 루이센에게 건네주고 사람들을 좀 달래 보겠다며 다시 식당으로 들어갔다. 역시


좋은 사람이야. 루이센은 빵바구니를 끌어안고 모리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네요, 저 사람?”

칼튼이 불평했다.

“우리를 배려해 주는 거지. 사려 깊고 정말 좋은 사람이야.”

루이센은 무심코 모리슨을 칭찬하다가 칼튼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발견했다.

“자네는 모리슨이 싫나?”

“싫고 말고 이전에 잘 모르는 사람인걸요. 공작님이 너무 좋아하는 거지.”

“으흠, 그래?”

이거 봐라? 이제 보니 질투도 하고? 루이센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왜 그렇게 웃어요?”

“아니, 그냥.”

루이센이 까치발을 들고 입을 맞추었다. 쪽, 하고 짧게 떨어지며 속삭였다.

“사람 없는 데로 가자고.”

칼튼의 얼굴에 가득하던 짜증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칼튼은 루이센이 손을 잡아끄는 대로 따라갔다.

불행히도 조용히 식사할 만한 곳을 찾긴 어려웠다. 루이센은 배에 탄 유일한 순례자였기 때문에 무척이나 눈에


띄었다. 배 어디에나 사람이 있고, 간신히 없는 곳을 찾아도 사람들이 알아보고 다가왔다. 한번 붙잡히면 우르르
몰려들 게 뻔해, 피하고 피하다가 두 사람은 결국 객실에 틀어박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배가 항구에 정착했다. 하룻밤 멈춰 있던 만큼 더 서두른 덕분에 본래 예정대로
도착할 수 있었다.

루이센은 모리슨과 갑판으로 향했다. 칼튼은 상단의 짐을 내리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상단 사람들과 짐칸에 가
있었다. 루이센은 괜히 주변을 알짱거리다 다칠 수 있어 모리슨과 먼저 배에서 내리기로 했다. 칼튼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 동안 짐칸을 순찰한다거나 하는, 고용된 용병다운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내 붙어 있다가 떨어지니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루이센은 칼튼 대신, 제피스의 털을 쓰다듬었다.
도도한 제피스는 그러든가 말든가 무심한 표정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순례자님! 나중에 한 번 더 보자고. 내가 술 한잔 살게!”

“이번에 정말 고마웠고 혹시 양털이 필요하면 우리 상단으로 찾아와요. 싸게 잘해 줄게요!”

내릴 순서를 기다리고 있으니, 사람들이 루이센을 알아보고 한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루이센은 민망함에 후드를
자꾸 눌러써야 했다. 다행히 곧 계단이 내려지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관심도 금방 끝이 났다.

“우리도 가죠.”

“네.”

루이센은 모리슨을 따라 배에서 내렸다. 항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 한걸음 걷기도
힘들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어깨를 부딪쳐 루이센이 비틀거리자, 모리슨이 팔을 잡아 주었다.

“괜찮아요?”

“원래 이렇게 항구에 사람이 많아요?”

내가 지나갈 땐 안 이랬던 거 같은데. 항구답게 북적이고 활발하긴 했어도 이 정도로 사람이 많진 않았다.

“다 구경꾼이죠.”

“구경꾼이요?”

모리슨이 저 멀리를 가리켰다. 판금갑옷을 입은 기사 두 명이 보였다.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은 단연코
눈에 띄었다. 그들은 컬린을 나무창살이 달린 마차에 밀어 넣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며칠 사이에 폭삭
늙고 지쳐 혼이 나간 것 같았다.

선장이 미리 연락을 해 두어, 컬린을 잡으러 영주의 기사들이 온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컬린에게 욕을 쏟아부으며
돌이나 썩은 생선 같은 것을 던져 댔다.

루이센은 복잡한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전부 자업자득이지만 뱀 몬스터 따위에 의지하게 된 그 외로움이나


쓸쓸함은 공감이 갔다.

“어떤 처벌이 내려질까요?”

거의 혼잣말로, 대답을 바란 물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모리슨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산 채로 처절하게 불타 죽을 겁니다. 죄악에 물든 자의 최후에 자비란 없어야 하니.”

경멸이 서린 차디찬 목소리였다. 루이센이 놀라 뒤돌아보자, 모리슨은 이제까지 보지 못한 무표정으로 루이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떤 감정도 없는 석상 같았으나, 두 눈빛만큼은 머릿속을 꿰뚫어 볼 것처럼
강렬했다. 그의 두 눈 속에는 십자 모양의 새파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십자 모양의 불꽃!

신은 빛으로 상징된다. 따라서 교회는 불을 신께서 자신을 대신해 인간에게 내린 은총이라 여기고, 사제들을 작은
횃불이라 부른다. 개중 신앙심이 투철하고 수양이 깊은 이들은 눈 속에서 불길이 보이기도 했다.

아주 예전에 왕궁 행사 때 만난 대사제의 눈 속에도 열십자의 불길을 봤다.

‘교회의 사람인가?’

루이센의 머릿속에 불길한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 보죠, 악마숭배자의 성물을 가진 가짜 순례자. 당신의 정체는 뭡니까?”

“무슨 소린지…….”

모리슨은 루이센이 질문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루이센의 가슴팍을 가볍게 손으로 밀었다. 뒤로 넘어지는 순간,
루이센의 정신이 컴컴한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80 화

칼튼은 퉷, 하고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 냈다. 그의 주변으로 한때는 일행이었던 모리슨의 부하들이 쓰러져
있었다.

오늘 아침, 짐 옮기는 걸 도와 달라는 모리슨의 제안을 들었을 때부터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객실에서 루이센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끝난다는 사실에 불쾌했기 때문에 크게
의식하지 않고 무시했다. 그 기분을 무시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처음에는 평범하게 짐을 날랐다. 그러다 점점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루이센은 언제 어떻게 튈지 예상이 안
되어서 눈앞에 없으면 마음이 불편했다. 평지를 걷다가도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인데, 내가 옆에 있어 줘야
하는데. 안 되겠다 싶어 루이센을 찾아가려는데 모리슨의 부하들이 갑자기 칼을 뽑아 들어 기습했다.

그제야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누군가 자신을 계속 경계하고 의식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칼튼은 검을 꺼내어 맞대응했다. 모리슨의 부하들은 모두 훈련이 잘되어 있었다. 개개인의 검술 실력도 무척
뛰어났으며, 한두 번 합을 맞춰 본 게 아닌 듯 연계 동작도 뛰어났다. 고도의 훈련을 받으며 길러진 정예병들로,
어느 영지에 데려다 놔도 한자리할 실력자들이었다.

다만 상대가 칼튼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칼튼은 상식을 벗어난 강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나 대인전에
능숙했다. 그는 순식간에 모리슨의 부하들을 쓰러뜨렸다. 칼튼은 쓰러진 놈의 머리채를 잡아 들었다.
“뭐 하는 놈들이냐? 누가 보낸 거지?”

당연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칼튼도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초조해서, 모리슨과
함께 있을 루이센을 생각하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아무 말이나 지껄인 거다. 놈의 머리를 대충 내팽개치고
갑판으로 뛰어 올라갔다.

사람들이 칼튼의 흉흉한 살기에 놀라 뒷걸음치면서 저절로 길이 열렸다. 배 위에서 칼튼은 루이센을 찾았다.

‘공작님은?’

없다. 어디에도 루이센은 보이지 않았다.

어딨지?

어디로 간 거지?

내가 그 사람을 못 찾을 리 없는데, 왜 보이질 않지?

모리슨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모리슨이 루이센을 끌고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방심했어.’

전부터 모리슨을 수상하다고 여겨 왔다. 이상하게 그가 거슬리고 싫었다. 칼튼은 자신의 직감을 신뢰했다. 다른
때 같았다면 모리슨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모리슨의 정체를 알아내고 루이센의 곁을
지켰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직감을 무시하고 본능이 보내온 경고도 듣지 않았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은, 안일한 행동이었다.

내가 왜 그랬지?

그냥 어느 순간부터 내내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날카롭게 갈고 닦은 감각들이 무뎌지고 온 신경이 다


루이센에게 쏠렸다. 분명 더 많은 신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이센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루이센과 내내 함께 시간을 보냈다. 시답잖은 이야기로 웃고, 입을 맞추고, 밤에는 몰래 갑판으로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또다시 입을 맞추고. 뭘 하지도 않았는데 지루할 새도 없이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허공 위를 걷는 것처럼 붕 떠서, 처음 사탕을 먹은 어린 애처럼 마냥 황홀감에 빠져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복잡한 계략을 쓴 것도 아니고, 기이한 마법에 당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허무하고
어이없게 루이센을 잃어버리고만 것이다. 막막한 후회가 몰려왔다. 목숨이 경각에 달하던 때에도 냉철하게
돌아가던 머리가 지금은 텅 비어 버렸다. 그저 루이센이 이따 보자고 손을 흔들던 모습만 떠올랐다.

히히힝!

익숙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제피스가 칼튼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 제피스. 네가 있었지.’

칼튼은 제피스의 위로 뛰어올랐다. 제피스는 루이센과 함께 있었다. 영리한 놈이니 모리슨이 루이센을 어디로
끌고 갔는지도 기억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랴!”

칼튼은 거세게 말을 몰았다.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항구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루이센을 찾아야 한다. 그의 옆을 지켜야 한다.

***

정신을 차리고 루이센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싸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살짝 실눈을 떠 보았는데, 방 안은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옷도 다 벗겨 갔네.’

루이센은 자신의 몸이 의자 같은 곳에 팔과 다리가 묶여 있다는 것 또한 알아차렸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기절한 지는 얼마나 지난 거야?’

문득 불길한 기분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기절하기 직전 보았던 모리슨의 냉담한 얼굴이 떠올랐다.

“상황 파악이 끝나셨으면 이제 그만 눈을 뜨시죠.”

모리슨의 목소리였다.

‘깜짝이야. 바로 앞에 있었던 거냐.’

루이센은 놀라지 않은 척 태연하게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긴 속눈썹이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올라가면서
새파란 눈동자가 드러나, 똑바로 모리슨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루이센은 다짜고짜 물었다. 가짜 순례자라는 것도 들통난 마당에 존댓말은 집어치웠다. 예의를 차리는 것은 원래
루이센의 성미도 아니었다.

“내가 가짜 순례자라는 거 어떻게 알았지? 설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모리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긍정의 뜻임을 루이센은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내가 가짜 순례자인 걸 알고 의뢰를 맡기겠다고 한 거였구나.’

루이센은 모리슨이 자신들을 미행한다고 오해했던 작은 사건을 떠올렸다. 사실은 오해가 아니라, 정말 미행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었나. 루이센과 칼튼이 오붓해 보여 끼어들기 어려웠네 어쩌네, 그런 헛소리도 허술해 보이기
위한 연기였던 건가!

모리슨의 치밀함에 루이센은 이를 악물었다.

“우릴 왜 미행했지? 의뢰인 척하면서 우릴 곁에 둔 이유가 뭐야?”


루이센이 물었다. 이번에는 모리슨이 대답을 했다.

“미틸의 교회에서 당신들을 처음 봤습니다. 당신에게서 강한 저주의 기운이 풍기더군요.”

교회! 거기서부터였냐!

“일순 악마숭배자가 다가오고 있는 줄 알았죠. 그런데 그자가 마침 죽은 순례자의 통행증으로 가짜 순례자 행세를
하고 있더군요. 이를 수상히 여겨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한 겁니다.”

“저주? 악마숭배자? 난 그런 거 몰라. 순례자인 척한 건 잘못한 거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그동안 당신들을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죠.”

모리슨은 루이센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말을 이어 갔다.

“이에 당신을 이단자로 가정, 교회가 부여한 이단심문관의 권한으로 당신을 심문토록 하겠습니다.”

“정말 이단심문관이라고?”

루이센은 크게 놀랐다. 살면서 이래저래 이단심문관에 대한 이야기를 주워듣긴 했지만 실제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단심문관들은 그 이름대로 이단을 심문하고 밝혀내 처벌하는 일을 맡은 사제를 말했다. 그들의 정체도 활동
내역도 극비로 취급되어 일반 사제들조차 다 알지 못하지만, 이단자에 대한 그들의 악랄하고 잔인한 손속은
유명했다.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상대가 누구든 한번 이단으로 찍히면 무슨 수를 써서든 잡아낸다. 그리고 자백할
때까지 고문하고 또 고문한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는 어떤 거짓말도 살인까지도 용납된다. 그들은 단 하나의
원리원칙을 따른다.

이단은 무슨 수를 써서든 잡아 죽여 씨를 말린다.

지금 루이센은 그런 놈들에게 이단으로 오해받고 있는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루이센은 해명하려고 했으나 모리슨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또 한 번, 모리슨의 눈동자에 푸른 불길이 일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루이센의 주변으로 불길이 퍼져 빙 둘러쌌다. 그 불빛이 방 안을 밝혔다.

루이센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의 눈동자에 공포가 서렸다. 벽면에 듣도 보도 못한 기괴한 고문 도구들이


걸려 있었다. 끔찍한 고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고 했지. 루이센은 저도 모르게 달아나려 몸을 움직였다.

철컹.

쇠로 된 의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땀이 비 오듯이 흐르며 온몸이 덜덜덜 떨렸다.

‘으읏…….’

모리슨은 꼿꼿하게 서서, 한결같이 무기질적인 시선으로 루이센을 내려다보았다. 모리슨에게서 풍겨 오는 엄숙한
분위기가 루이센을 압도했다. 사방은 막막한 기분이 들도록 어두웠고 푸른 불꽃이 루이센을 집어삼킬 듯이
일렁거렸다. 루이센은 자신이 한없이 하찮고 작은 존재가 된 것처럼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시키는 대로 잘만 대답하면 제가 저것들을 쓸 일은 없을 겁니다. 자, 진실만을 말해요. 이 불길이 당신의 말을


증명해 줄 겁니다.”

루이센은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

“내가…… 뭐, 뭐를…… 말하면 되는 건지…….”

“이게 뭔지 알아보겠죠.”

모리슨은 작은 주머니칼을 꺼냈다. 뼈를 깎아 만든 조악한 칼로 루이센이 지네굴의 지하에서 주워 들고 온


것이었다. 옷 주머니 속에 넣어 둔 건데 언제 꺼내 간 거지?

“당신이 가지고 있던 겁니다. 악마숭배자의 성물이죠.”

“그런 게 성물이라고? 그런 장난감 같은 게 성물이라니…….”

“이렇게 허술해 보여도…… 이 칼이 얼마나 많은 제물의 몸을 갈랐는지 알면 놀랄 겁니다.”

제물이라니. 지네굴에 잡혀 왔던 그 여자들이 다 제물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지하에 차려졌던 제단도, 거대한
흉상도 납득이 갔다.

“어디서, 어떻게 이 칼을 얻었죠?”

“그…… 콘포세 근처 마을에 지네굴이 있었어. 거기서 주웠는데.”

루이센은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콘포세 근처 마을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대로
전부 털어놓았다.

“제단이라. 놈들이 할 짓이군요.”

모리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또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뱀 몬스터. 그놈의 짓인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건……!”

루이센은 바로 대답하려다가 순간 망설였다. 미래에서 보고 왔다고 하면, 그걸 이 사람이 믿을까? 어느 성자가


신에게 소원을 빌어 과거로 돌아온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성자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났다고
말하면, 뼛속 깊이 신앙심으로 가득 찬 저 이단심문관이 믿을 거 같지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자길 기만하냐고 더 화낼 거 같은데 어쩌지?

81 화
루이센은 다른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려 했으나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새하얬다.

“놈들이 새로운 몬스터를 만들어 내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그 정보는 어떻게 얻었죠?”

모리슨이 재차 물었다. 그 뱀몬스터가 인간이 새로 만들어 낸 몬스터였어? 놀라운 사실이지만 루이센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모리슨은 루이센이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벽면으로 걸어갔다.

그는 벽에 걸린 수많은 용도를 짐작하기 힘든 기괴한 고문 기구 중에서도 가장 끔찍해 보이는 것을 하나 골라


들었다.

쾅!

그것을 보란 듯이 루이센의 앞에 내려놓았다. 루이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아니……. 내가 말 안 하려는 게 아니고…….”

말을 해도 안 믿을 거 같아서 말을 못 하는 거라니까? 아, 그냥 다 말해 버릴까? 루이센이 망설이자, 모리슨은


가만히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대답을 재촉하는 것 같아 초조함이 흘렀다. 언제라도 모리슨이 고문
기구를 자신에게 들이댈 것만 같아 두려워, 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덜덜 떨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왜 가만히 보기만 하지?’

루이센은 칼튼이 컬린을 심문할 때를 떠올렸다. 칼튼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고, 되묻지도 않았다. 컬린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게 확실해진 순간, 그는 바로 끌고 가 강물에 담가 버렸다. 어차피 입을 열게 될 테니, 괜히
어르고 달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루이센이 떠돌아다니던 시절. 루이센에게 얻어 낼 게 있는 놈들은 주먹부터 날리고 봤다. 그런데
모리슨은 큰일을 낼 것처럼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 정작 루이센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째 입으로만 떠드네?’

모리슨이 사제라서? 그건 아닐 거다. 사제들은 다 이단 종교를 혐오하고 증오한다. 사제들 중에서도 더 극단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만 추려 낸 게 이단심문관일 텐데 그런 자비를 발휘할 리 없었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라고 봐줄…… 리가 없지.’

루이센은 모리슨의 속내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내 머리로는 한계가 있다! 그는 자신이 살면서 본 사람
중에 제일 뛰어난 두 사람을 떠올렸다. 외팔의 순례자와 칼튼. 두 사람이었으면 지금 이 상황을 보고 뭐라고
했을까?

루이센은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하나의 목소리처럼 외쳤다.

‘저놈도 확신이 없으니 입만 터는 거다!’


그래! 그거지!

루이센은 깨달음을 얻었다.

모리슨이 만약 루이센을 악마숭배자로 확신했으면, 루이센이 깨어나기를 마냥 기다렸다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절했으면 한 대로 고문을 시작해서 강제로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음에 루이센이 상황을 파악할
겨를 같은 건 안 주고 탈탈 털었겠지.

모리슨은 루이센이 충분히 겁먹을 수 있도록 기다렸다. 친절하게 자신이 이단심문관임을 알려 주었고, 루이센이
어떤 이유로 의심을 받고 있는지 설명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진 모리슨의 질문도, 루이센이 이단이라고
가정하고 심문하는 게 아니라 정보를 얻어 내려는 것 같았다.

루이센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자신이 외팔의 순례자나 칼튼이 된 것처럼 상대의 의도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자네, 내가 악마숭배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그 한마디에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엄숙한 분위기가 순간 흐트러졌다. 그 중심에 있던 모리슨은 루이센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표정했지만, 루이센은 그가 당황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루이센은 더이상 이 상황도, 자신을 보는 모리슨의 시선도 두렵지 않았다. 루이센은
어깨를 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속옷 차림에 얼굴도 엉망이고, 몸이 결박되어 폼이 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평생
루이센 안에 있던 오만함이 드러나긴 충분했다.

“내가 악마숭배자가 아닌 걸 알면서 나한테 정보를 캐내려고 심문이니 뭐니 하면서 분위기 잡는 거잖아. 맞지?”

“아닙니다.”

“아니긴. 이렇게 내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하는 것부터가 날 이단으로 생각 안 한다는 건데.”

루이센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배에서부터 계속 날 지켜봤지? 어쩐지 이상하게 누가 날 쳐다보는 거 같더라니. 지켜보니 어떻던가? 이단이


아니지? 근데 뭔가 아는 거 같고, 정체를 숨기는 꼴을 보니 그냥 묻는다고 말해 줄 거 같지 않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분위기 잡는 거네. 이단심문관들…… 이단에게는 잔인해도 이단이 아닌 자에게는 손도 못 댄다는 게
사실이었군?”

“…….”

“뭐라고 대답 좀 해 보지 그래?”

루이센은 모리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짧은 눈싸움의 승자는 루이센이었다. 모리슨이 먼저 하, 하고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들었다. 그의 얼굴은 루이센이 익히 알던 친절한 상인 모리슨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 보기보다 눈치가 빠르셨네.”

루이센도 맥이 탁 풀렸다.

내 예상이 맞았구나! 칼튼 님, 외팔의 순례자님 감사합니다! 이 영광을 두 분에게 돌리겠어요!

기세 좋게 말을 하면서도 속은 떨리고 조마조마해서 죽는 줄 알았다. 총관이 가르친 ‘어떤 상황에서든 있는


척하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총관, 나 때문에 지금도 마음고생 하고 있을 텐데. 돌아가면 진짜 말 잘 들어야지.’

루이센은 마음속 깊이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감사했다.

“그래서 귀하는 누구십니까?”

모리슨이 물었다. 루이센은 짜증스럽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거부터 풀어.”

“아, 예.”

모리슨은 루이센의 손과 발의 결박을 풀었다.

지칠 대로 지쳐서 이만 쉬고 싶지만, 그냥 넘어가서야 망나니라는 명성이 아깝다. 루이센은 덜덜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그대로 망설임 없이 모리슨의 뺨을 내리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모리슨의 얼굴이
돌아갔다. 강한 타격감에 루이센의 손목까지 얼얼하게 통증이 왔다.

“이걸로 제 실수는 봐주시지 않겠습니까?”

“봐주긴. 교회에 정식으로 항의할 거라네. 감히 내게 이런 모욕을 겪게 하고 뺨 한 대 맞아 주는 걸로 넘어갈 수


있을 거 같아? 대교주를 찾아가서 자네가 내게 한 짓을 전부 말할 거야.”

“대교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요? 진짜 뭐 하시는 분입니까?”

“루이센 아니에스. 황금들판의 수호자이자 남부의 대영주이다.”

“아……!”

모리슨이 탄성을 질렀다.

“초상화보다 실물이 더 나으시네요.”

“그런 말 많이 들어.”

루이센은 심드렁하게 들어 넘기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난 전하의 부름을 받고 수도로 가던 중이었어. 왕국과 왕권을 수호한다는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수도로
향하던 대영주를 공격하고 납치하다니. 교회가 왕가에 불만이 많은가 봐?”

“아, 아니. 그걸 또 그렇게 확대해석 하시면 곤란합니다. 저는 제 본분에 충실할 뿐. 정치랑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솔직히 그쪽도 의심스럽게 행동했잖아요?”

“아니? 전혀. 자네가 분별을 잃은 걸 왜 내 탓을 하지?”

사실 자신이 봐도 오해받을 만했다고 생각하지만 루이센은 발뺌했다. 뻔뻔함이야말로 귀족의 미덕이 아니던가.

모리슨은 자신이 난처한 상황에 빠졌음을 알아차렸다. 무고한 사람을 거짓으로 협박했는데, 그게 하필 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라!
이단심문관이야 세속적인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신만 따르는 존재라지만, 교회는 구름 위에 건물을 짓고
새벽이슬만 마시며 유지될 수 없었다. 왕국의 땅에 건물을 짓고 왕국민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상, 권력자와 척을
지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왕의 목숨이 간당간당하여 대영주들의 권위가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는 더더욱.

“어떻게 하면 이 일, 넘어가 주실 겁니까?”

모리슨은 루이센의 앞에 섰다. 처음과 비슷한 구도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있었다. 루이센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몬스터를 조종하는 능력을 지닌 자들. 놈들에 대해 아는 대로 전부 말해.”

“악마숭배자들 말이죠.”

루거랑 그 패거리가 악마숭배자란 말이지. 이단심문관이 쫓아다닐 정도로 세력을 이룬 이단 종교라. 루거와 이단
종교라니,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하긴, 내가 루거에 대해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있나.’

루이센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나저나, 당신이 공작님이면 같이 있던 용병은 혹시…… 칼튼입니까? 1 왕자의 수족?”

“맞아.”

“오우, 그럼 항간에 떠돌던 사랑의 도피라는 소문이 아주 없는 소리는 아니었네요?”

“지금 헛소리할 상황인가? 어?”

루이센은 싸늘하게 모리슨을 노려보았다.

“아니, 진심인데……. 어쨌든 그 사람이면 제가 못 이기니까 좀 살려 주세요.”

또 뭐라는 거야? 물어보려고 입을 떼려는데,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큰 검이 모리슨의 머리 위로


쇄도했다. 모리슨은 미리 공격에 대비한 덕에 아슬아슬하게 막았으나, 칼날이 부러지며 뒤로 나뒹굴었다. 익숙한
뒷모습이 루이센을 보호하듯 막아섰다.

“칼튼!”

찾으러 올 줄 알았어! 루이센은 반가워 칼튼의 허리를 냅다 끌어안았다. 칼튼이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놔 봐요. 저 새끼부터 조지고…….”

“공작님, 살려 주세요!”

모리슨이 애원했다.

“역시 우리 정체를 알아챈 놈이군. 살려 보내면 안 되는…….”

“내가 말해 줬어. 괜찮아. 진정해. 아직 물어볼 게 많단 말이야.”


루이센은 칼튼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칼튼은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그대로 얼어붙었다. 칼튼의 얼굴은 당장
모리슨을 두 동강 낼 것처럼 험악했는데, 몸은 얌전히 루이센에게 붙들려 있는 꼴을 보며 모리슨은 혀를 찼다.

“그러고도 제가 헛소리한다고 하실 겁니까? 아, 알았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 부하들은 살아 있습니까? 걔네들


먼저 수습하고 와야겠네요. 변사체로 발견되기 전에.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모리슨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구구절절 변명은 길었지만 칼튼의 분노를 피해 달아나는 것이
확실했다.

“저대로 보내도 됩니까?”

“어차피 다시 돌아올 거야. 나한테 궁금한 게 많을 테니까.”

루이센은 모리슨이 멀어진 걸 보고 팔을 풀었다. 칼튼은 뒤로 돌아섰다. 그제야 루이센이 속옷만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잠깐 가라앉았던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했다.

모리슨, 잡아 죽인다.

82 화

칼튼은 눈도 좋고 눈치도 빨랐다. 속옷만 입은 루이센을 보고, 방 안을 한번 훑어보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이 갔다.

루이센이 저 무쇠의자에 손발이 묶여 앉아 있었을 것이며, 모리슨은 고문 도구를 보이며 그를 압박했겠지.


가뜩이나 어두운 걸 무서워하는 사람을 이 어두컴컴한 방에 처넣고 죄인처럼 발가벗겨서 이런 수모를 겪게 하다니.

칼튼은 더더욱 모리슨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의 두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루이센은 칼튼의 눈이 돌아간 것을 보고, 다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루이센의 손은 차가워서 칼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얼마나 불안했으면.’

자신을 붙잡고 떨어지질 않으려고 하는 걸까.

루이센이 너무도 애처로웠다. 이 방에서 루이센이 혼자서 얼마나 겁먹었던 건지 아직도 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분노에 사로잡혀 뜨거워졌던 머리가 한결 차갑게 식어 갔다. 칼튼은 검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모리슨보다
루이센을 안심시키는 것이 먼저다. 그는 망토를 벗어 루이센의 어깨를 망토로 감쌌다. 초겨울의 공기는 맨몸으로
버티기에는 추워서, 루이센의 마른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던 참이었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놈이 무슨 짓을 하진 않았고요?”

“어, 괜찮았어. 나 멀쩡해. 그 자식 나한테 손가락 하나 못 댔어.”

칼튼은 망토를 들춰 가며 루이센을 앞뒤로 꼼꼼하게 살폈다. 혹시라도 자신이 늦어 그가 다쳤을까 봐 애가 타서


지켜보는데, 그 마음도 몰라주고 루이센은 버둥거렸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고, 루이센의 눈도 생생했다. 마음의 충격을 받은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오히려 두


눈은 생기로 가득 찼고, 표정도 신이 난 것 같았다.

루이센이 몸도 마음도 모두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칼튼은 비로소 안도했다. 그는 쓰러지듯이 루이센을


끌어안았다. 루이센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가만히 지친 숨을 내뱉었다.

구름 위에서 내던져져서, 추락하고 또 추락하다가 땅과 충돌하기 직전에 간신히 구출된 기분이었다. 루이센을
찾아다니는 동안 칼튼은 두려웠다.

어린 시절에도, 가출할 때도, 처음 용병 일을 시작했을 때도. 칼튼은 지금보다 작고 약했지만 겁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만만했으며 두려움이라고는 몰랐다. 자신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세상을 그의
발아래 깔린 무대로만 여겼다.

그러나 루이센을 찾는 내내, 칼튼은 겁에 질렸다. 수십 개의 칼날이 자신을 향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공포가
그의 온몸을 지배했다. 루이센을 영영 찾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자신이 늦어 그가 다치게 될까 봐 무서웠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공포에 칼튼은 압도되어 버렸다. 자신이 루이센을 제때 찾아낼 수 있을지, 이 길이 맞는


건지,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자꾸만 끔찍한 상상만 떠올라 가슴속에는 절망만 가득했다.

루이센도 조심스럽게 칼튼의 어깨를 마주 안아 왔다. 길고 흰 팔이 자신을 끌어안는 걸 느끼자, 그제야 루이센과
무사히 다시 만났음이 실감 났다.

칼튼은 눈을 감고 루이센의 체온을 느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익숙해진 루이센의 냄새가 나서, 조금씩 날카롭게
일어선 감각이 누그러졌다. 칼튼은 안심하면서, 아까까지 자신을 지배하던 공포가 여름 소나기처럼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해.’

너무도 자신답지 않았다. 평생 알아 온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는 루이센을 더 단단히 꼭 끌어안았다.

“무사해서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루이센이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칼튼은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잃어버리고서야 제대로 깨달았다.
루이센이 자신의 곁에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머리가 식고 생각해 보니, 애초에 모리슨은 루이센을 해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다고 칼튼의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모리슨과 그 부하들이 한 번에 덤벼들어도 칼튼의 상대가 못 되었다. 치밀한 계략에
빠진 것도 아니고, 압도적인 힘에 당한 것도 아니다. 그저 방심하고 있다가 당했다.

이번 일로 루이센이 자신에게 실망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칼튼 역시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루이센의 실망한 표정을 보는 것은 싫어, 더 꽉 루이센을 끌어안았다. 자신보다 더 작고
가는 루이센에게 매달리듯이 안겨 고개만 푹 숙였다. 자괴감에 괴로워 낮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앞으로 절대 공작님만 그렇게 혼자 두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로.”

칼튼의 억눌린 목소리에서, 깊은 후회가 느껴졌다. 그답지 않게 의기소침한 모습에 루이센은 내심 당황했다. 이
시무룩하고 우울한 목소리라니. 자기가 잘못을 하고도 뭐 어쩌라고, 할 거 같은 당당한 남자가 이렇게 자책을
하고 있으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자신을 걱정하고, 마음고생을 했다는 것이니까. 달래 줘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좀 무섭긴 했어. 그래서 물어보는 대로 다 대답했는데. 그런 와중에도 자네가 생각이 나더라고.”

“제 생각이요?”

“자네라면 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하고.”

“……제 방식은 공작님이 따라 하긴 힘들 텐데요.”

다 때려 부수고, 모리슨 머리를 날린 다음에 유유히 탈출했을 테니까. 칼튼의 말에 루이센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그거 말고. 눈치 말이야. 자네는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영리하니까 자네 시점에서 생각해 봤지.”

“아…….”

“덕분에 모리슨이 허세 부리는 것도 간파했어. 자네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막 울리더라니까. 평소에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 준 덕분이겠지.”

외팔의 순례자도 생각했지만 칼튼이 질투할 테니 살짝 모르는 척했다.

“생각보다 더 자네 말이 머릿속에 박혔나 봐. 혼자긴 했는데 혼자 같지도 않더라고.”

다시 생각해 보니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린 것은 웃겨서, 루이센은 실실 웃었다. 칼튼은 어느 틈엔가 고개를 들고


루이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도움이 되었다고? 그 상황에서 나를 생각했단 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이렇게까지 나를 의지해 주는 사람은 없었는데. 칼튼은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또


이렇게 간단히 루이센은 칼튼의 기분을 뒤집어 놓았다. 태평하게 웃고 있는 루이센을 보고 있자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칼튼은 충동적으로 루이센에게 입을 맞추었다. 어떻게 이렇게, 매번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거지? 루이센은 늘 놀라웠고 그런 점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루이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번 깜박이다가 슬며시 내리깔았다. 동그래진 눈도, 길게 드리운 속눈썹도
칼튼의 마음에 들었다. 칼튼이 더 깊게 키스를 하자, 루이센은 버거운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면서도 뺨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 미세한 변화들을 칼튼은 전부 집요하게 눈에 담았다. 어느 것 하나 예쁘지 않은 게 없었다. 멋대로 잘려 나간


금발 머리, 부드러운 뺨, 고생이라고는 안 해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깊은 회상에 잠기는
눈동자.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싫어하던 얼굴이었는데. 루이센의 모든 것이 칼튼의 열등감을 자극해 싫었는데,
이제는 모든 게 다 좋았다.

‘좋아, 좋아해.’

칼튼은 무심코 생각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벅차올라, 더 깊이 입을 맞추었다. 루이센의 속을 헤집을
듯이, 그의 속으로 더 들어가 하나가 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칼튼의 손이 루이센의 몸을 쓸어내렸다.

“잠, 깐만!”

루이센이 당황해 칼튼의 어깨를 밀었다.

“모리슨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이 이상은 좀 그렇잖아.”

“그딴 놈 오든지 말든지요.”

칼튼이 다시 덤벼들려는데, 루이센이 필사적으로 막았다.

“난 고문 기구 옆에서는 싫거든.”

“아.”

칼튼은 아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추우니까 너무 떨어지지는 말고.”

루이센이 슬그머니 팔짱을 끼었다. 자기가 떨어지자고 해 놓고 달라붙는 것이 민망한지 괜히 딴청을 부리는 게
칼튼의 눈에는 귀여워 보였다.

‘이러는 것도 좋아.’

좋아?

그러고 보니 내가 좀 전에 뭐라고 생각했지?

칼튼은 알아차렸다. 자신은 언젠가부터 내내, 좋다고, 루이센이 좋아 죽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답지 않았던 멍청한 행동들도 전부 이해가 갔다. 세상에 중요한 게 루이센 하나뿐인 듯이 굴었던 것도,
외팔의 순례자나 모리슨이 싫었던 것도, 극과 극을 오갔던 기분도.

그러니까 자신은 루이센에게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이다. 난생처음으로.

사랑에 빠지면 멍청이가 된다더니. 자신이 지금 바로 그 멍청이였다!

갑작스러운 자각에 칼튼은 혼란에 빠졌다.

***
루이센과 칼튼은 고문실을 빠져나왔다. 고문실은 겉보기에 평범한 오두막이었는데, 천장이 무너져 내려 곧 쓰러질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모리슨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하니, 두 사람은 오두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진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루이센은 칼튼에게 모리슨과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말하는 내내 칼튼이 열렬한 시선을 보내왔다.

“왜? 궁금한 거 있어?”

루이센이 이야기를 끊고 돌아보자, 칼튼은 언제 쳐다봤냐는 듯이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왜 저러는데?’

열렬히 키스를 하다가 갑자기 저렇게 되었다. 눈도 제대로 안 마주치려고 들었다. 그런 주제에 옆으로 떨어지면
또 따라와 찰싹 달라붙는 게 아닌가.

루이센은 칼튼이 왜 저러는가, 진지하게 칼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두 번이나 요행이 일어나지 않는
건지, 칼튼학의 공부가 미진한 탓인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83 화

칼튼이 이상하게 구는 게 뭐, 한두 번인가. 루이센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모리슨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이어


갔다.

“이단심문관이라고요? 그게 실제로 있는 거였습니까?”

“……나도 놀랐다니까. 있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살면서 만나게 될 줄은…….”

“듣기로는 완전 미치광이라는데…….”

칼튼도 전설처럼 이단심문관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다. 그런 잔인한 광신도와 루이센을 단둘이 두다니. 또 한
번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차라리 산적에게 납치를 당하면 돈이나 신분으로 회유를 하지. 그놈들에게는
신분도 돈도 통하지 않는다니, 루이센은 갓난아기처럼 무방비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주의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칼튼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회귀 전의 기억 하나로 모리슨을 무작정 좋게만 봤던 자신의 탓도 있었다.

‘그치만 날 도와준 친절한 상인이 이단심문관인 줄 누가 알았겠어?’


이단심문관이라는 게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고. 루이센도 왕국의 귀족으로 살면서 여러 사제를 만났지만
이단심문관은 전설처럼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게 고작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지치기도 많이 지쳤잖아? 자네가 아무리 예리해도 이단심문관은 알아채기 힘들지.”

애초에 이단심문관이라는 게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는 자들이 아니었다. 깊은 그림자 속에 숨어 은밀히 움직이는
이단 종교를 잡기 위해 스스로도 어둠 속을 들어간다던가. 어쨌든 수백 년 동안 활동하면서 신분을 위장하고
속이는 일만 연구해 온 이들일 테니,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루거 패거리에 대해 알아낼 기회야. 모리슨을 탈탈 털어 보자고.”

“그래야죠.”

칼튼은 결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루이센과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설마 칼튼이 난데없는 첫사랑을
자각하고 혼란에 빠져 있을 줄은 까맣게 모른 채로, 루이센은 제발 모리슨이 돌아오기 전까지 이 어색함이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분위기를 보면 모리슨이 또 뭐라고 말할지 알 만하니까.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모리슨과 부하들이 오두막으로 찾아왔다. 모리슨의 부하들은 상처를 하나씩 달고
있었는데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다. 루이센을 찾는 것이 최우선이다 보니, 제압과 심문을 목적으로
싸운 덕분에 손속에 약간의 자비가 있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한동안은 휴식에 전념해야 할 거 같습니다. 상처를 급소에 깊이도 내놓으셔서.”

모리슨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살아 있는 걸 감사해야지.”

칼튼이 지지 않고 받아쳤다. 평소의 칼튼이었다.

루이센은 안심했다. 계속 얼빠진 채로 있을 줄 알고 걱정했는데 모리슨이 돌아오자 평소의 위압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모리슨과 부하들에게 부담감을 팍팍 주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루이센은 수월하게 모리슨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

모리슨 이단심문관.

그는 최근 급부상하는 세력, 악마숭배자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 하나만을 따라서 신분을 상인으로 위장하고 남부로 왔다. 하지만 쫓다 보니 점점 그 기운은 약해졌고,
나중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어졌다.

그는 고민하다가 상부에 보고하고 정보를 얻기 위해 미틸로 왔다. 그러다가 루이센을 발견한 거다.

부정한 기운이 풀풀 나는 가짜 순례자를.


“내가 가짜인 건 어떻게 안 건가?”

루이센이 물었다.

“순례자의 통행증은 문양이 조금씩 다 다릅니다. 그거 다 외우게 되어 있어요, 이단심문관은.”

루이센은 모리슨에게 돌려받은 순례자의 통행증을 살펴보았다.

‘이걸…… 뭘 보고 외우는 건데……?’

봐도 모르겠다. 과연 교회의 엘리트 사제라 할 만했다. 루이센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체포할까 하다가, 지켜보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두 분이 뭔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거
같았거든요.”

동료를 만난다든가, 혹은 근거지를 찾아간다든가. 곁에 두고 지켜보다 보면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


판단하여 모리슨은 루이센을 미행했다. 미행하는 동안, 루이센과 칼튼이 원하는 것이 빠른 배편이라는 걸
알아냈고, 그걸 미끼로 던져 루이센과 칼튼을 일행으로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심히 옆에서 관찰하는데, 마침 구울이 나타났죠. 평범한 죽음으로는 구울이 되지 않아요. 흑마법, 저주.
그런 이단적 힘에 노출되어 죽으면 구울이 되죠.”

컬린이 악마숭배자에게 홀린 것을 그때야 알아차렸다. 루이센이 가지고 있던 악마숭배자의 성물, 그것에 깃든


사악한 힘이 너무나도 강해 상대적으로 약한 뱀 몬스터는 한발 늦게서야 알게 된 것이다.

모리슨은 악마숭배자의 성물이라는 주머니칼을 혐오스럽게 바라보았다. 루이센의 눈에는 조악한 주머니칼인데,
그의 눈에는 또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컬린은 잔챙이였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악마숭배자 중 하나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굳이 컬린을 체포하려다가 루이센에게 이단심문관인 걸 들키는 것보다, 일단 모르는 척 넘어간 뒤 루이센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고 예의주시했다.

그렇게 길었던 밤이 지나가고, 뱀 몬스터와 관련된 모든 정황이 밝혀졌다.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루이센과
칼튼을 모리슨은 끊임없이 관찰했다.

“다, 다 지켜봤다고?”

루이센이 당황해서 물었다.

“네, 전부요.”

모리슨이 의미심장하게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마치 ‘이러고도 내가 너희 둘을 착각하는 거라고 말할


거야? 아니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입 맞췄다고 다 연인이고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고…….’

민망함에 루이센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거 사생활 침해야, 알아?”


“제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오해는 완전히 풀렸죠. 두 분이 악마숭배자이기는커녕, 그들과 적대적인 관계란 것도
알아냈고요.”

“그리고도 모자라서 더 많은 걸 알아내려고 날 납치했다?”

“죄송하다니까요. 저희도 마음이 절박했던지라. 그놈들, 악독한 놈들이거든요.”

루이센은 자세를 고쳐 잡고 본격적으로 모리슨의 이야기를 들었다.

“악마숭배자. 문자 그대로 악마를 숭배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또 다르게는 흑마법사라고 부르고 있어요.”

악마숭배는 교회만큼 역사가 깊은 이단 종교였다. 그 방식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이번 놈들은 마법의 한
계파에서 시작되었다.

세상의 진리를 찾아내겠다고 마법 연구에 매진하던 이들이 어느 순간 홱 돌아 버리더니, 악마야말로 거짓된


세상을 부수고 진실로 이끌 선지자라고 믿게 된 것이다. 그런 악마를 따르는 자신들은 모두 수행자이며, 악마를
숭배하는 것으로 특별한 힘을 얻게 되었다고 믿었다.

“몬스터를 부리거나, 저주를 내리거나. 저희는 그 힘을 흑마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진짜 악마가 있는 건 아니고?”

“세상에 그런 게 어딨습니까?”

신을 진짜라고 믿고 평생을 바치는 사람이 할 소리인가 핀잔하고 싶도록, 모리슨은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악마숭배자들은 특이한 마법을 쓰죠. 문제는 이놈들이 이상한 망상에 빠졌다는 겁니다. 저 지옥에 있을
악마를 기쁘게 할수록, 더 큰 힘을 얻게 된다고요. 그래서 악마를 기쁘게 하겠답시고 이것저것 미친 짓들을
저지르고 있는 거죠. 제단을 만들고 인신 공양도 하고.”

그 수법이 끔찍할수록, 사람들이 공포에 질리고 혼돈에 빠질수록, 더더욱 효과가 좋다고 말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으니 더 악착같고 집요하단 말이죠. 수법도 음침하고. 막대한 피해를 끼치며 온갖 악행은
다 저지르는데, 포교에는 관심이 없어서 꼬리를 잡기가 힘들어요.”

모리슨의 이야기를 다 들은 루이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그놈들이 이런 이상한 짓들을 벌이는 이유는…… 세상이 혼란에 빠지길 원해서다?”

삼류 영웅소설에나 나올 법한 광적인 미친놈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 나랑 같은 시대에 존재한다고? 루이센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칼튼이랑 웃기라고 주고받았던 그 헛소리들이 전부 사실이라니! 세상이 말세야, 말세.

루이센은 칼튼을 바라보았다. 칼튼도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도 자신과 같은 심정으로 보였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이런 세상이니까요. 난장판이잖아요, 내전으로.”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야. 자네가 이단심문관이라는 걸 알고도 농담하나 싶다고.”


“제가 지금 이교도로 농담할 거 같습니까?”

모리슨이 정색하자 좀 무서웠다. 루이센은 칼튼 옆에 슬그머니 붙었다. 칼튼은 루이센의 손을 잡아 주면서 자기


뒤로 숨기듯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쭈굴거리던 루이센의 마음도 곧게 펴졌다. 모리슨이 또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지긴 했지만 그 정도는 무시할 만했다.

“이제 공작님 이야기를 좀 듣고 싶네요.”

모리슨의 말에 루이센은 칼튼과 눈을 마주쳤다. 칼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신호로, 루이센도 자신이
겪은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습격부터 시작해, 몬스터에게 공격당해 사라진 마을, 거대한 지네와 지네굴 아래의 제단, 등등. 긴 이야기였지만
모리슨은 한 번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법 없이 신중하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한 번을 마주하기 힘든 놈들이랑 엮이셨습니까?”

모리슨은 놀라서 말했다. 이쪽에서는 작정하고 쫓아다녀도 한 번도 부딪히지 못했는데. 마치 하늘이 루이센과
악마숭배자들을 신나게 엮어 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회귀 전에는…… 여기저기서 구울들이 튀어나왔었지.’

저 위 지역에는 흔하구나, 생각했는데 사실 그게 아니라 악마숭배자들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졌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여행을 시작하며 만났던 산적들의 마을에서 시체가 하나도 남지 않은 이유는, 몬스터에게 당한
시체가 전부 구울이 되어 그곳을 떠났기 때문일지도.

루이센이 알던 것보다 미래는 훨씬 더 험난한 시절이었다. 루이센은 무심코 외팔의 순례자를 떠올렸다. 외팔의
순례자는 뱀 몬스터 이후에도 여러 가지 기이한 사건들을 직접 해결해 나갔다. 그는 악마숭배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까? 왠지 그라면 알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리슨과의 이야기는 정말 유용했다. 루이센의 기억과 정보 사이사이의 빈틈을 메꿔 주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왔던 시간들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었다.

84 화

‘그게 다 그놈들 짓이었어.’

어쩐지 너무 빠르게 망해 간다 했다. 자신도, 왕국도.

회귀 전 루이센은 왕국을 떠돌면서 비참할 정도로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했다. 모든 걸 잃고 죽지 못해 살았지만


비단 루이센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비극은 왕국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닥쳐왔다. 사회에 자리 잡았던
믿음과 신뢰는 사치가 되었고 인간의 존엄성은 땅에 떨어져 밀가루 한 주머니에도 가볍게 사람이 팔려나갔다.

그 혼란을 직접 겪고 지켜본 입장에서 절대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루이센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지 않아도 흰 손이 더욱더 새하얗게 질렸다. 칼튼은 쑥스러워하던
것도 잊고 그런 루이센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제 두 분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저희는 남부를 한 번 더 돌아볼 생각입니다. 놓친 단서를 찾아야죠.


원하신다면 함께 가시죠. 공작저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아니. 난 예정대로 왕도로 가겠어.”

“지금보다 더 험난한 여정이 될 겁니다. 이쪽은 내전의 여파로 위험해요.”

루이센의 의지는 확고했다.

“왕성으로 가서 왕자를 만날 거야. 내 군사와 재산을 돌려받고, 대영주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거다.”

그것만으로 루이센은 대영주이자 공작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루이센은 타고난 신분의
고귀함이야말로 자신의 강점이라는 걸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악마숭배자, 그리고 루거와 그 뒤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 이들은 명백히 루이센을 노리고 있으며, 루이센의
몰락을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루이센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져 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그들이 무엇을 노리고
자신의 몰락을 바라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회귀 전처럼 당하지 않는 것이 저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방해하는
방법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확고하시다면……. 좋습니다. 저도 공작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모리슨이 제안했다.

“자네가 왜?”

“세상에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공작님이 순례자인 척하다가 놈들과 자꾸 엮이는 것, 저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공작님을 따라가다 보면, 놈들의 본체와 마주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군요.”

“음…….”

“앞으로도 계속 순례자인 척하실 거죠? 제가 도움이 될 겁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게다가 모리슨이 일행에 추가된다면 전력도 늘어나며, 정체를 숨기고 다가올 악마숭배자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놈들의 음모를 발각할 수도 있고.

‘어쩌지?’

루이센은 칼튼을 바라보았다. 칼튼은 싫어 죽겠다는 얼굴로 모리슨을 쏘아보았다.

‘싫은가?’
아무리 도움이 되어도 칼튼이 싫다는 걸 억지로 주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루이센이 거절하려는데 칼튼이 먼저
말을 꺼냈다.

“좋습니다.”

“어? 싫은 거 아니었어?”

“저자는 싫습니다. 공작님과 저 사이에 다른 사람을 끼고 싶지 않기도 하고. 하지만 교회 측 사람이 있는 편이


더 공작님을 안전히 수도까지 모실 수 있잖아요.”

그러니 자기 고집은 세우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의 한마디 안에 루이센을 향한 독점욕과 함께 배려하는 마음이
동시에 느껴져서, 루이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는 건 반칙 아닌가? 루이센의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칼튼을 끌어안고 기특한 말을
하는 게 요 입이냐고 혼내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모리슨과 그 부하들이 보여 꾹 참아야 했다. 갑자기
모리슨이 따라오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싶은 맘이 불쑥 솟았다.

모리슨은 눈치가 빨랐다.

“아음, 그럼 저는 부하들 배웅하고, 볼일 좀 본 다음에 뒤따라가겠습니다. 교회에 연락도 해야 하고요. 두 분


먼저 길을 가고 계세요.”

그리고는 재빨리 부하들을 끌고 자리를 떠났다. 일부러 자리를 비켜 준 티가 너무 노골적으로 풍겨서 약간


민망하긴 했지만 루이센은 원래 낯짝이 두꺼운 남자였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칼튼에게 몸을 기댔다. 좀 전까지 이상하게 굴었으니 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칼튼은
루이센이 편하도록 가슴으로 받아 주었다.

“하, 내 인생이 어쩌다 그런 미치광이들이랑 엮여 버린 거야.”

칼튼은 루이센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는 걸로 위로를 전했다. 루이센은 칼튼의 품에서 씁쓸한 속을 달래다가
고개를 들었다. 칼튼의 눈동자가 걱정을 담아 자신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걱정돼요?”

“아니.”

악마숭배자들에게 화가 나는 것과 별개로,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칼튼이라면 악마숭배자가 아니라 악마


본인이 와도 쳐부숴 줄 거 같았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인가 시원스레 답이 나왔다.

“뭐 하는 놈들인지 알아내서 차라리 속 시원해. 모르는 것이 무섭지, 알고 나면 더 무서울 것도 없잖아?”

루이센이 칼튼의 말을 인용하자 칼튼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둥글게 휘어졌다. 칼튼은 딱 제 나이대의 청년처럼
산뜻하게 웃었다. 루이센은 가슴이 설렜다. 그와 동시에 고요한 숲속에 울려 퍼지는 낮은 웃음소리가 근사해 왠지
모르게 불끈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안고 있는 단단한 팔뚝이 자꾸만 의식되기 시작했다.

‘밖이긴 하지만……. 숲이고 사람도 없고…….’

실내고 야외고, 그런 걸 따져서야 왕도에서는 망나니라고 이름도 못 내민다. 루이센은 충동에 몸을 맡겨, 칼튼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니야, 다시 생각해 보니까 걱정되는 거 같아. 누가 위로해 주면 좋겠는데.”

칼튼이 웃으며 루이센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몇 번인가 장난스레 입술을 맞대다가 루이센이 입을 벌렸다.
입맞춤은 더 깊게 이어졌다. 칼튼이 루이센을 집어삼킬 듯이 덤벼 와, 루이센의 몸이 점점 뒤로 밀리다가 나무에
부딪혔다.

쿵, 하는 소리가 났지만 루이센도 칼튼도 인식하지 못했다. 모든 신경이 서로에게 향해 있었다. 루이센은 마음껏
칼튼의 등과 단단한 팔을 만졌다. 칼튼의 손도 거침없이 움직였다. 칼튼은 조급하게 덤벼들며 헐렁한 튜닉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손이 민감한 옆구리에 닿자 루이센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으음.”

조용한 숲에 가빠 오는 숨소리와 작은 콧소리가 퍼졌다. 좀 민망하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 사이에 이질적으로


그륵, 하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칼튼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숲 너머에서 노란 눈을 한 멧돼지 서너


마리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원뿔이 나 있는, 살기등등한 몬스터였다.

차라리 사람이었으면 못 본 척 지나가 줄 텐데. 애석하게도 몬스터에게는 그런 배려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놈들은
콧김을 흥흥, 내뿜으면서 튀어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필 이런 때…….”

칼튼은 이를 악물었다. 그 심정에 루이센도 백번 동의했다. 몬스터가 기승을 부린다더니, 아무리 외진


오두막이라 해도 사람의 구역에 몬스터가 보란 듯이 나타나다니. 이 주변의 치안 사정도 알 만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몬스터는 좋게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을.

“뒤로 물러나 계세요.”

“……알았어.”

루이센은 슥 물러섰다.

칼튼은 놀랍도록 힘을 내서, 어느 때보다 압도적으로 빠르게 몬스터를 해치웠다. 하지만 몬스터의 등장으로 식어
버린 불씨가 되살아나지는 못했다. 피 냄새를 맡고 다른 몬스터가 몰려올 수도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빨리
이곳을 떠나야 했다.

***

그날 밤.

미틸의 외곽에 위치한 언덕 아래 숲속. 검붉은 로브를 입은 남자 세 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사이로 손발이
묶인 채로 산재물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고, 노래를 하였다. 그 모습이 교회에서 신께 예배를 드리는 것과 비슷했으나 그
중심에는 네 개의 뿔과 세 개의 눈을 가진 염소 흉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오오.

오오오오오.

남자 한 명이 높이 단검을 치켜들었다.

비명이 울릴 새도 없이 끔찍한 학살의 소리가 퍼지면서 싸늘한 밤공기 위로 더운 김이 풍겨 왔다.

그 의식을 지켜보던 남자 중 하나가 슬쩍 빠져나왔다. 그는 강변에 이르러 거칠게 검붉은 로브를 벗어 던졌다.
옷 아래 감춰졌던 검붉은 갑옷 위로 달빛이 은은하게 내렸다. 그의 붉은 머리카락이 강바람에 마구 흩날렸다.

루거는 멀리 떠 있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강줄기를 따라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저 배 어느 곳 중 하나에


루이센이 타고 있다고 생각하자 초조함이 몰려왔다.

얼마 전, 루거는 루이센이 콘포세를 지날 거라 예상하고 공작가를 떠났다. 루거가 도착했을 때 콘포세에서는


사악한 거대 지네를 물리치고 납치된 여자들을 구한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얼굴을 가렸지만 귀족적인 느낌의 순례자와 말도 안 되게 강한 용병. 그 이 인조에 대한 말을 듣고 루거는


루이센과 칼튼을 떠올렸다.

아니겠지.

루거가 알기로 루이센은 순례자를 흉내 낼 재주가 없었다. 귀족이라면 기본적으로 받아야 하는 신학교육도 제대로
안 받았고, 매해 신년마다 교회에 가면서도 간단한 기도문조차 기억 못 한 게 루이센이었다.

순례자 행세를 하려면 기도 요청도 받고, 때에 따라서는 교리 질문도 받을 텐데 루이센이 그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루이센이 근래 들어 부쩍 달라지긴 했지만 그런 고급 지식은 단기간에 쌓을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루거는 루이센이 순례자인 척하고 있을 가능성을 머리에서 지웠다.

하지만 루이센이 콘포세를 지났다는 것을 곧 확인했다. 콘포세를 샅샅이 찾아다니다가, 한 남자가 팔고 갔다는
금발 머리 한 뭉텅이를 발견한 것이다. 세상에 금발 머리가 루이센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루거는 그것이 루이센의
것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루거는 루이센의 머리를 빗어 주던 것처럼 조심스레 잘린 머리카락 뭉치를 쓰다듬었다. 부들부들한 감촉을 느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누구보다 잘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무관심하던 루이센이었다. 머리카락 같은 거 귀찮으니 잘라


버린다는 걸 어르고 달래 기르게 한 게 자신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매일같이 정성 들여 빗어 내리던 그
머리카락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루거는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주머니에 담았다. 그리곤 잃어버리지 않도록 품에 넣었다.

이거면 루이센을 찾을 수 있겠다.

85 화
루거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동료를 찾았다. 자신을 아홉 번째 숭배자라고 부르는 자였다.

아홉 번째 숭배자는 미틸에 있었다. 콘포세 인근 마을에 있어야 할 놈이 왜 미틸에 가 있는가 했더니, 정성 들여


만든 제사를 망친 순례자를 쫓아 그곳까지 갔다고 했다. 콘포세를 떠들썩하게 한 그 소문의 주인공인가. 기묘하게
얽힌다고 생각하며 루거는 미틸까지 왔다.

아홉 번째 숭배자는 막 강을 건너려던 참이었다. 자기가 쫓던 순례자가 바로 지난밤에 배를 타고 날랐다면서.

루거는 놈을 어르고 달래서, 루이센의 머리카락으로 루이센을 찾아달라 부탁했다. 놈이 요구하는 산재물도
가져다주었다. 어리고, 약하고, 절망으로 가득 차 있는 살아 있는 사람.

지금은 더 이상 산재물이 아니겠지만.

“의식 도중에 나가다니. 건방진 놈.”

아홉 번째 숭배자와 열한 번째 숭배자가 따라왔다. 열한 번째 숭배자는 다이어울프를 끌고 다니며 숲에 숨어 있는


유민들의 마을만 몰살하는 놈이었다. 취미라기보다는 그 자신만의 헌신이었다.

두 사람의 로브를 포함한 온몸에 피와 오물이 튀어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건지 안 봐도 뻔했다. 두 사람은


희열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양손을 흥분으로 잘게 떨었다.

“네놈들 하는 꼴은 역겨워서 봐 줄 수가 있어야지.”

루거는 빈정거렸다.

“도와 달라고 재물까지 싸 짊어지고 온 건 네놈이야. 혼자 고결한 척하기는. 꼴에 기사 지망생이었다 이거야?”

숭배자들은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이 빈정거렸다. 루거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한때 기사가 되고자 했던
것은 루거의 안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이자 성역이었다.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네놈들과 어울리는 일 없었어.”

“네가 아버지가 어딨어. 너네 엄마가 남편을 없앴는데. 아니지, 처녀가 애를 낳았으니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던가?
그럼 우리가 널 모셔야겠네!”

숭배자들은 루거를 조롱하며 낄낄댔다. 루거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할 수만 있다면 놈들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실컷 웃고 나서야 숭배자들은 루거의 어깨를 툭툭 쳤다.

“농담이야. 네 아버지 누군지 알지. 단 하나뿐인 후원자님이신데. 그래서 우리도 널 도와주는 거잖아.”

“자, 공작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려 주마.”

아홉 번째 순례자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의 몸에 묻어 있던 피가 일순 검은 연기로 화하면서 그의 몸을 타고


올라와 팔을 감쌌다. 강물을 가리킨 손가락으로 이어져 멀리멀리 뻗어 나갔다.
“저 강 위에 있네. 마침 내가 찾던 그 순례자 놈들과 같은 배를 탄 모양이야.”

루거는 지도를 떠올렸다. 루이센이 움직이는 위치가 빠르게 그려졌다.

‘금방 따라잡을 수 있겠어.’

거리가 벌어져 있긴 하지만 숭배자들의 힘이라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좀 더 앞질러 가자.’

칼튼은 쫓아가서 상대하기에는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루이센과 칼튼이 올 곳에 함정을 파고, 두 사람을 갈라
놓고, 그런 다음 한 번에 집어삼키는 것이 더 나을 듯했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여, 기습하는 것이 더 완벽하게
루이센을 손에 넣을 수 있겠지.

“같이 가자고. 내가 찾던 순례자도 그쪽으로 간 거 같으니 말이야. 난 내가 공들여 키운 아이들을 죽인 복수를


꼭 해야겠거든.”

아홉 번째 숭배자가 말했다. 그의 아이들은 콘포세를 뒤집어 놓은 거대 지네 한 쌍을 말했다. 그에게 새끼


지네를 구해다 준 것이 바로 루거였다. 그때만 해도 분명 평범한 지네였는데, 어떻게 그런 어마무시한 괴물로
키워 낸 건지 알 수 없었다.

루거는 그들과 함께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명령에 따를 뿐. 그들에 대해 정확히 다 알지는 못했다. 몬스터를
길들이고, 만들어 내고. 그런 기이한 힘을 부린다는 것만 알 뿐.

아홉 번째 순례자가 주문을 외워, 미리 준비해 둔 몬스터를 불러냈다. 거대한 뱀장어 형태의 몬스터가 굽이굽이
헤엄쳐 조각배 하나를 물고 왔다.

이것도 직접 만들어 낸 건가?

루거가 가만히 몬스터를 바라봤다.

“너도 저렇게 만들어 줄까?”

열한 번째 숭배자가 말했다. 루거가 무시하자 숭배자들이 또 낄낄댔다.

“넌 소질이 있어.”

루거는 그 말을 무시하고 아까 의식이 벌어졌던 그 위치로 돌아갔다. 피와 얼룩이 흥건히 남아 있었고, 뼈는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그는 역겨움이 몰려왔지만 꾹 참고 염소 흉상의 아래 놓았던 루이센의 머리카락을 주워
들었다.

무고한 희생자의 피로 흥건하게 젖은 머리카락.

이제는 쓸모를 다했지만 이렇게 버리고 갈 순 없었다. 루거는 손수건으로 꾹꾹 눌러 피를 닦아 냈다.

‘이걸 기르려고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데.’

루거는 언젠가 아침을 떠올렸다. 숙취에 절어 있는 루이센이 잠옷 차림으로 뒹굴거리고 있고, 자신은 그런
루이센의 머리카락에 기름을 발라 정성껏 빗질을 했다. 행복한 시절이었다.
만약 자신이 첩자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도 자신은 루이센의 머리칼을 만져 주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루이센이 여행 경비를 위해 잘라 팔게 만들진 않았겠지. 무능한 칼튼 놈.

자신이라면 절대 그렇게 두지 않았을 터였다. 누구보다 안전하게 루이센을 지킬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상상이었다. 루거는 처음부터 첩자였고, 그의 진짜 주인은 따로 있으니까.

루이센의 시종이 된 것도 전부 진짜 주인의 명령에 따른 것일 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정이 들었고, 그래서 그의


기사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했지만 언제나 그 끝은 허무했다.

아무리 루이센에게 마음이 쏠려도, 자신은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충성으로 주인을 섬기는 기사처럼. 비록
정식으로 기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루거의 마음은 언제나 그 가르침을 품에 담고 있었다.

명령대로, 아니에스 공작을 데려간다.

명령에 따라 루이센을 따랐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어.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루거는 피에 젖은 머리칼을 소중히 주머니에 담았다. 뒤를 돌아보자 숭배자 둘이 그런


루거를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

비슷한 시기의 아니에스 공작성.

영주의 실종이라는 전무후무한 상황에도 공작가의 사람들은 좌절하지도 자포자기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겨울을
대비하고, 밀린 일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공작가를 굳건히 하기 위해 애썼다.

인력도 자본도 부족한 상황이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지난 한 달간의 위기 동안, 루이센은 꿋꿋하게
공작령을 위해 버텼기에 그 모습을 떠올리며 공작가의 사람들도 힘을 냈다.

그 중심에는 총관이 있었다. 그는 이럴 때일수록 공작가가 예전의 힘을 되찾아야 루이센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흔들림 없이 중심을 지켰다. 그러나 오늘 전해진 소식은 그도 조금 감당하기 벅찼다.

총관은 두 눈을 꾹꾹 눌렀다. 그의 손에는 왕에게 보냈던 편지의 답장이 들려 있었다.

2 왕자를 지원하느라 상당수의 인력이 공작가에서 빠져나갔고, 포로로 잡혀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
탓에 루이센이 사라졌음에도 제대로 수색조차 못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공작가에서는 왕에게 루이센의 실종
소식을 알리며, 포로 중 일부라도 돌려보내 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답은 거절이었다. 구구절절 두 페이지에 가까운 답장을 요약해 보면, 루이센이 직접 왕에게 충성을 증명하고
부탁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사실상 루이센을 찾지 말라는 게 아닌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전하께서는 이제 공작님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건가……!’

아무리 루이센이 2 왕자 편을 들었다지만 넷밖에 없는 대영주에게 너무한 처사였다. 남부를 버릴 게 아니라면


이렇게 루이센을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끈거리는 눈을 꾹꾹 누르고 있는데 집무실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공작가의 가신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거친 걸음 소리만으로도 칼튼의 부하임을 알아차렸다.
총관은 처음부터 루거의 말을 믿지 않았기에, 칼튼의 부하들을 잡아왔을 때 그들을 정중히 대하며 자세한 정황을
물었다.

1 왕자의 전령을 만나고, 칼튼이 루이센을 데리러 앞서가고, 그 뒤를 칼튼의 부하들이 쫓았다는 것. 그리고
몬스터의 습격, 격렬한 전투, 누군가 일부러 루이센을 끌고 가려 한 것 등의 흔적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리고 칼튼이 루이센과 함께 움직이고 있어, 두 사람 모두 안전하며 수도로 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루거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도.

모든 걸 알자마자 칼튼의 부하들을 풀어 주었고, 루거를 잡아들이려 했다. 비록 루거는 놓쳤지만 그들은 공작성에
남아 힘을 빌려주고 있었다. 칼튼이 루이센과 함께하고 있기에 자연히 공작가의 가신들과 칼튼의 부하들은 한배를
탄 신세였다.

공작가에서는 흩어진 칼튼의 군사를 한데 모이는 걸 도왔고, 칼튼의 부하들은 부족한 공작가의 인력을 충원해
주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칼튼 부하들의 방문만큼 반가운 게 없었다.

“왕도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그 말에 총관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공작가의 힘을 빌려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칼튼이 왕성에 심어 뒀다는


정보원과 연락을 취하는 일이었다. 그 성과가 생각보다 더 빠르게 나타난 것이다.

“뭐라고 하던가? 공작님의 실종 소식에 대해 왕도 귀족들의 반응은?”

“그리 좋진 않습니다. 이런 소문이 돈다더군요.”

“어떤?”

“남부의 대영주 가문이 교체될 거라고요.”

“뭐라고!”

총관은 노성을 질렀다. 이 아니에스 공작가가 아직 멀쩡하게 건재하고 있거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떠돈단
말인가.

“전하께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나도는 걸 두고 보신단 말인가?”

“그게…… 전하는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날이 극히 드물다더군요. 국정을 모두 1 왕자님이 돌보고 있는데……. 1


왕자님이 그 소문을 방관하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 추측이긴 합니다만……. 1 왕자님이 아니에스
공작님께 부정적인 것은 확실하다고 하는군요.”

“이럴 수가.”

총관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설마……. 이번 납치사건이 1 왕자가 벌인 일은…….”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럼 저희 대장보고 공작님 호위하라고 안 했겠죠.”

칼튼의 부하들은 적극적으로 부정했으나 내심 그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일이 어째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 왕자가 정말 루이센 실종의 배후라면 칼튼은 어떻게 되는 거란 말인가. 자신들은 또 어떻고! 칼튼의
부하들도 1 왕자가 이 일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며, 총관을 위로했다.

“적어도 공작님은 무사하실 겁니다. 저희 대장이 같이 있으니까요. 수도까지는 안전히 갈 겁니다.”

“……그래. 그렇지. 공작님은 세상 물정을 모르니, 칼튼 경이 함께라 정말 다행이야.”

적어도 어디 강도에게 칼을 맞아 비명횡사하거나 굶어 죽을 일은 없을 테니.

칼튼이 루이센과 함께라는 사실에 안심되다니. 총관은 어떻게든 루이센과 칼튼을 떨어뜨리려 애썼던 기억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 그뿐만인가. 칼튼의 부하들은 인력이 부족한 공작가에 큰 도움이 되어 주고 있었다. 한때는 가장 위험하던,
자신들을 억압하던 적이 지금은 서로에게 가장 의지가 되는 상대라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총관은 마른세수를 하고,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먼 타지에서 고생하고 있을 루이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
왔지만 이럴 때일수록 자신이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겠는가.

‘왕자가 어떤 의중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대비를 해 둬야겠어.’

만약 왕자가 이 일의 배후에 있다면, 루이센이 수도에 입성한 뒤에도 안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곳에서는
칼튼도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답이 없는 건 아니었다. 총관은 고심했다.

왕자가 남부의 대영주를 자기 입맛대로 바꿔치기하려고 한다면 반발할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세 명의


대영주들이다. 딱히 루이센이나 공작가와 사이가 좋다고 하긴 어렵지만, 같은 대영주의 입장에서 대영주 가문
변경이라는 전례를 만들어 자신들의 권위가 흔들리는 것이 싫어서라도 그들은 왕자를 막고 루이센을 도우려고 할
것이다. 적의 적은 언제나 우리의 친구인 법.

총관은 급히 대영주들에게 편지를 썼다. 1 왕자가 대영주들의 권위를 침범하려 한다는 다소 왜곡된 내용으로
일부러 더 대영주들을 자극했다. 편지는 칼튼의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전달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총관은 창밖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부쩍 추워진 공기에 자주 감기에 걸리던 어린


루이센을 떠올렸다.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뽀르르 안겨 오던 루이센이 어느새 다 커서 저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혼자만의 모험을 하고 있을 터였다.

부디 이 고난이 이제 막 도약하려는 청년을 주저앉히는 꼴이 되지 않기를, 총관은 간절히 빌었다.

86 화

8 장. 악당은 언제나 우리의 뒤를 노린다


헤어진 다음 날에 모리슨은 루이센과 칼튼을 뒤쫓아와서 일행에 합류했다.

모리슨의 말에 따르면 남부에는 다른 심문관을 보내 본격적으로 주시하고, 새로운 정보를 알아내는 대로 모리슨을
통해 루이센에게도 전달하겠다 약속했다. 루이센이 계속 악마숭배자들에게 노려지는 이상 교회는 루이센을 지킬
거라는 당부도 전했다. 루이센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사실 왕성에 들어간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했으니까.

모리슨이 합류한 일행은 수도를 향해 나아갔다. 루이센과 비슷하게 배를 타고 넘어와 수도로 가는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이용하는 길을 따랐다. 수도까지 최단 거리로 갈 수 있는 길이었다.

처음에는 정체가 발각될 것을 걱정해서 인적이 드문 숲길을 이용해서 크게 우회해 수도로 갈 생각이었다. 비교적
가까운 동쪽 성문이 아니라, 남쪽 성문이나 멀리 서쪽 성문까지 돌아 동선을 꼬아 둘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모리슨이 일행에 합류하면서 계획을 바꾸었다. 적의 정체도 알았고 적들도 루이센이 수도로 간다는 것을 깨닫고
따라오고 있을 테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우회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낮에는 이동하고, 밤에는 적당한 곳을 찾아 노숙하는 나날이었다. 처음에는 루이센도
모리슨과 칼튼을 데리고 수도까지 싸움 없이 갈 수 있을까 걱정했다. 모리슨의 진짜 성격을 알지 못했고 또
이단심문관들은 광신도라고 하니까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았다.

다행히도 모리슨은 이교도를 제외한 모두에게 친절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루이센이 처음 봤던 그대로 한결같이
좋은 사람이라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칼튼 역시 모리슨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마치자, 더 이상 더
까칠하게 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친해지지는 않았지만 무던하게 협력하면서 지냈다.

세 사람은 길을 따라 말을 몰았다.

“공작님만 따라오면 바로 한 놈 걸릴 거 같았는데 영 소식이 없네요.”

모리슨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은근히 악마숭배자가 나타나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다.

‘걔네라고 뭐 맨날 가는 데마다 튀어나오겠어?’

루이센은 모리슨에게 핀잔을 주려다가 귀찮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칼튼의 품에 기대어 가만히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고 있자니 졸음이 밀려왔다. 처음에는 말에 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긴장되어 정신이 바짝 들었는데, 이것도
익숙해지니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지겨워서 잠이 막 왔다.

“그냥 주무세요.”

“으응.”

말 위에서 잠드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지만 칼튼이 있으니까. 루이센은 졸음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칼튼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몸을 기대었다.

칼튼은 루이센을 품에 감싸 안으면서, 루이센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왼팔로 단단히 허리를 끌어안았다. 싸늘한
초겨울의 공기와 대조적으로 칼튼의 체온은 따끈따끈해서 루이센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은근하게 풍겨 오는
칼튼의 냄새도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칼튼은 루이센이 깨지 않게 더 조심스럽게 말을 몰았다. 루이센의 잠든 얼굴이 후드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루이센의 잠든 얼굴은 눈이 내리는 겨울밤처럼 엄숙한 분위기를 풍겨서 지켜보면 눈이
즐거웠다.

“많이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모리슨이 루이센이 잠든 걸 보며 말해 왔다.

“그러실 겁니다. 배에서 내린 뒤에는 계속 노숙이었으니까요.”

칼튼은 루이센이 안쓰러워졌다. 평생 고생이라고는 모르던 사람이 노숙에 지쳐 흔들리는 말 위에서 잠들다니.
많이 피곤했을 텐데도 힘든 내색 하나 하지 않는 점이 가슴을 뻐근하게 했다.

나한테는 좀 더 어리광을 피워도 괜찮은데.

아쉽기도 하지만 꿋꿋하게 버티는 것도 루이센의 매력이니까.

“오늘은 조금 일찌감치 여관을 찾아 쉬도록 하죠.”

“안 그래도 지도에 보면 작은 마을이 있더군요. 거기로 하죠.”

용건이 끝나자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평소에 대화는 거의 루이센을 통해서 한다. 루이센이 끼지 않으면
둘 사이에는 일정에 대한 것 말고는 딱히 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칼튼은 모리슨은 잊어버리고 품속의 루이센에게 더 집중했다. 따끈따끈한 몸을 안고 있으면 루이센에게서 좋은


향기가 퍼졌다. 안고 있는 감촉, 체온, 숨소리. 그런 사소한 것들조차 모두 좋았다. 예전에는 다람쥐처럼
도망치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모든 걸 자신에게 내맡기고 잠들 정도로 자신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새삼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뻐졌다.

행복감을 만끽하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모리슨이 칼튼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모리슨은 가끔 저렇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사람을 쳐다보는데, 칼튼은 그게 좀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다.

“뭘 봅니까?”

칼튼은 까칠하게 대답했다.

“칼튼 경은 겉보기랑 다르게 순애보네요.”

“뭐요?”

“아뇨. 예쁜 사랑 오래오래 가셨으면 해서요.”

오래오래? 지금 사람 놀리나? 칼튼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짜증을 내려는데 조금 떨어진 앞쪽이 시끄러웠다.
칼튼과 모리슨은 검에 손을 올려 언제든 싸울 수 있게 준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꽤 폭이 넓은 시냇물이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물살이 세고 깊어, 시냇물을 건널 수 있도록 다리가
놓여 있었다. 돌로 만들어 마차도 지나갈 수 있도록 한 튼튼한 다리였다. 그 다리의 근처에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리 위에는 판금 갑옷을 입은 남자 세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요?”

“가 보죠.”
가까이 가자 사람들이 다리 주변에 모여 있는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보톤 자작을 모시는 기사다. 이 다리는 보톤 자작님의 은혜로 만든 다리이니, 통행세를 내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다!”

다리 위에 선 남자들이 외쳤다.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노상강도가 여행객을 공격할 때도 못 보던 기사 나으리가


여기 계시네? 칼튼은 코웃음을 쳤다.

“아, 뭐야……. 강도야?”

소란에 루이센이 잠에서 깨어 긴장감 없이 하품을 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하루에도 한 번씩 꼭 강도를 만난 탓에
강도의 등장이 놀랍지도 않았다.

강 이북의 치안은 남부와는 차원이 달랐다. 내전의 주 무대였기 때문에 치안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숲길을 걸으면
몬스터가 나오고, 도로를 걷고 있으면 강도가 나왔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용병들이 강도로 돌변하는 거야 흔한
일이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사람들이 강도가 되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강도나 몬스터 때문에 길이 막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보통 여행객들은 돌아가길 선택하거나,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하지만 루이센 일행은 피하지도 마냥 당해 주지도 않았다.

세계 멸망을 꿈꾸는 악당이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데 고작 강도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수야 없는 노릇. 길을
막으면 전부 힘으로 뚫었다. 몬스터가 가로막으면 몬스터를 죽이고, 강도가 길을 막으면 강도를 죽이고. 칼튼과
모리슨이 화려하게 활약했다.

“그냥 뚫고 지나갈 거지? 돌아갈 곳도 없어 보이는데.”

루이센이 주변을 봤지만 다른 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죠. 마침 짜증도 났는데 잘됐네요.”

칼튼은 말에서 내려 혼자 성큼성큼 다리로 걸어갔다. 루이센은 칼튼이 싸우는 동안 엉덩이나 좀 쉬어 주자는
생각에 말에서 내렸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상인이 다급히 말을 걸었다.

“저기요. 저분 일행이죠? 얼른 막아요! 저 다리 차지한 놈들 아주 악질이란 말입니다.”

“괜찮아요. 그래 봤자 강도죠.”

“아니! 저 사람들 평범한 강도가 아니에요! 괜히 덤볐다가 혼쭐난 사람이 지금 한둘이 아니에요. 통행세를
낸다고 얌전히 지나가게 해 주는 것도 아니고!

“통행세를 내도 못 지나가요?”

“예! 다리를 건너가자마자 시냇물로 집어 던져서 다시 건너오라고 한다니까요. 그럼 또 통행세 내놓으라고 하고.
아주 악질인데……. 기사들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다리 주변만 맴돌고 계셨구나.”

루이센은 별 긴장감 없이 납득했다. 그러다가 문득 상인이 한 말이 흥미를 당겼다.

“근데 저 사람들 진짜 기사라고요? 판금 갑옷을 입었다고 다 기사가 아닐 텐데?”


“진짜 기사 맞아요. 보톤 자작이라는 사람을 모시는.”

진짜 기사라니. 기사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집안에 돈도 좀 있어야 하고, 신분도 평민 이상은


되어야 한다. 어린 시절 기사의 몸종으로 시작해서 오랫동안 수련 기간을 거쳐야 하고.

“기사가 왜 지나가던 사람 돈 뜯고 있죠?”

강도를 때려잡는 게 기사가 할 일인데, 도리어 강도짓을 하다니?

“왜 몇 달 전에 보톤 자작이 영지를 버리고 도망쳤잖아요. 귀족도살자인가 뭔가 그 사람 무섭다고.”

“아.”

회귀 전의 나 같은 바보가 여기 또 있었네.

“영주가 영지민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도망쳤으니 기사의 도리고 뭐고 자기 살길 찾겠다고 얼마 전부터


저리됐답니다.”

루이센은 기사들을 보며 복잡한 기분에 잠겼다. 영주가 영지를 버리고 도망친다는 건 이런 의미이다. 오랜 세월
쌓아 온 전통과 체계가 무너지고 원래는 영지민을 지키는 데 써야 할 칼이 무고한 사람을 향한다.

“그나저나 저 사람들 사정을 잘 아시네요.”

“저희는 벌써 삼 일이나 여기 발이 묶여서……. 노느니 이것저것 알아봤죠.”

“다른 다리를 찾아보시든가 돌아가시지.”

“……여기 말고는 다른 다리도 없거든요……. 다 부서져서.”

“그렇구나. 오늘은 건너갈 수 있겠네요. 좀만 더 기다리세요.”

루이센은 물을 마시고, 깐 호두를 넣어 둔 주머니를 꺼냈다. 먹으면서 구경해야지.

“아니, 저 사람들 진짜배기 기사라니까요. 용병 한 명이서 기사 세 명을 어떻게 이긴답니까! 적당히 봐줄 놈들이


아닌데 빨리 말려요!”

“괜찮아요. 저 친구가 알아서 다 할 겁니다.”

“저도 호두 주세요.”

모리슨도 호두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루이센은 모리슨에게 호두를 주고, 내친김에 상인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87 화
상인은 얼떨결에 호두를 받고도 루이센의 태평함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인 자신도 이렇게 걱정이 되는데
일행이 되어서 말리지 못할망정 간식을 먹으면서 구경해?

루이센과 모리슨이 사이좋게 호두를 나누어 먹고 있는데 때마침 칼튼이 기사의 앞에 섰다. 멀리서 떨어져 보면
칼튼은 체격이 좋았지만 가벼운 튜닉에 망토 차림이라, 판금 갑옷을 갖추어 입은 기사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약해 보였다.

“아니, 지금 호두 먹으면서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 말려야……. 아…… 아! 헉!”

상인은 말을 하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칼튼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이었다. 칼튼은 말 그대로 기사들을


가지고 놀았다. 몇 번 기사들의 공격을 피하더니, 다리를 걸고 팔을 당기며 간단하게 기사들을 시냇물에 처박았다.
세 명의 기사가 칼튼에게 손도 대지 못하고 그대로 패배했다.

칼튼은 루이센에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던졌다. 이것 봐, 내가 이 정도야, 라고 보란 듯이 자랑하는 것 같았다.

‘가끔 저렇게 귀엽게 군단 말이지.’

이게 바로 연하의 매력인가? 루이센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작게 박수를 쳐 주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루이센은 얼른 다시 제피스에 올라탔다. 그사이에 좀 말타기에 익숙해져서, 제피스가 다리를 굽혀 주지 않아도


혼자서 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남들 다 하는 말타기지만 루이센은 뿌듯했다.

루이센이 다가가자, 칼튼도 제피스 위에 올라탔다. 세 사람은 유유히 다리를 건너갔다. 며칠간 다리 주변을
맴돌면서 고민하던 사람들이 허무할 정도로 가뿐했다. 사람들은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기사 셋을 메다꽂는 말도
안 되는 용력에 감탄했다.

“저 사람 누구지? 용병인가? 저렇게 강한 사람이 무명일 리가 없는데.”

수군거리다가 여행객 중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사람들이네! 그 요즘 갑자기 유명해진 순례자 이 인조!”

“아! 아! 그러네! 방금 그 사람 순례자였어.”

“듣자 하니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사람들을 돕는다던데……. 정말이었구먼.”

루이센 일행은 모르고 있지만 그들은 벌써 꽤 유명인이었다. 콘포세 경비대장의 일화, 배에서 일어났던 사건 등은
이미 입소문을 타고 여기저기에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루이센 일행이 앞을 막는 것들을 다 치우면서 나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악명 높은 몬스터나 강도도 해치우게
되었다. 영지 관리인들도 손 놓고 있던 악랄한 놈들도, 루이센 일행이 지나가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또 자신이
배고픈 것만큼 남이 배고픈 꼴을 못 보는 루이센이 길을 가다 마주친 유민들에게 땅속의 노파 같은 먹을 수 있는
음식, 먹어도 되는 약초 같은 것을 알려 주었다.
이러한 행보는 루이센 일행에 대한 소문에 불씨를 댕겼다. 삶이 고되고 힘들수록 영웅담은 인기를 끄는 법이었다.
아무도 그것이 실종되었다는 망나니 공작과 귀족도살자로 불리는 칼튼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로, 루이센의
명성은 왕국 곳곳에 널리 날리고 있었다.

***

부지런히 길을 따라 걸어 저녁 무렵에는 계획대로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은 따듯한 침실과 식당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노숙에 지친 루이센은 굉장히 기대했으나 막상 도착해서 보니 폐허였다.

마을에는 아무도 없었고 곳곳에는 약탈이 벌어진 흔적만 남아 있었다. 전쟁의 여파로 버려진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런 마을을 많이 봐서 놀랍지도 않았다.

세 사람은 금방 포기하고, 적당히 머물러 갈 만한 곳을 찾았다. 그래도 여관의 부엌시설이 남아 있었고, 마을에
강도나 몬스터가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적당히 하룻밤을 지내고 갈 수 있을 듯했다.

그들은 적당히 저녁을 만들어 먹고, 여관의 식당으로 이용됐을 1 층 홀에 나무 테이블을 붙여 그곳을 침실로 삼아
일찌감치 잠에 들었다.

칼튼은 가만히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잠귀가 밝은 편이라 평소에도 깊게 잠들지 못하긴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가만히 누워 있기 힘들었다. 이게 다 모리슨 때문이다. 칼튼은 모리슨을 노려보았다. 모리슨은 얄미울
만큼 쿨쿨 잘 잠들어 있었다.

확 패 버릴까. 근데 그럼 루이센이 깨겠지.

칼튼은 한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왔다. 차가운 바람을 좀 쐬다 보면 갑갑함도 좀 풀리겠지.

마을은 버려졌던 상태 그대로 흉물스럽게 변해 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모퉁이 너머에서 뭐가 튀어나올 거 같은


느낌이었다. 어지러운 마을의 풍경은 그 당시의 혼란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겨울밤의 하늘은
맑고 차가웠다.

‘오래오래 예쁜 사랑을 하라고?’

모리슨은 놀리려고 한 말이었겠지만 낮에 들은 그 말이 이상하게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오래?’

얼마나? 어떻게? 오래갈 뭐가 있기는 한가?

칼튼은 인상을 썼다.

루이센과 칼튼은 너무도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루이센은 대영주였고, 2 왕자의 친구였고, 남부에 거점을 두고
있다. 반면 칼튼은 천민출신 용병에, 1 왕자의 수족이고, 강 이북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내전과 악마숭배자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평생 가까워질 일이라곤 없었을 터였다.

지금이야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수도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과연 그 목표를 이룬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계속 지금 같을 수 있을까?
칼튼은 회의적이었다. 그의 눈에는 수도에 도착한 이후 벌어질 미래가 너무나 빤히 그려졌다.

루이센은 수도에 가면 1 왕자와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1 왕자도 대영주인 루이센을 계속 적대시하진 못할 테니,
루이센은 곧 과거와 같은 영광을 되찾겠지. 그때 가서도 루이센이 지금처럼 자신에게만 의지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더 좋은 집안에, 더 많이 배운 잘난 사람들이 루이센의 손길만 기다릴 텐데.

쓰임이 다하면 버려지는 일은 용병에게 너무도 익숙했지만, 가슴이 욱신거렸다.

설령 루이센이 자신을 곁에 두려고 해도 문제였다. 칼튼은 1 왕자의 수족이었다. 자신과 동료들의 흥망성쇠는
전부 1 왕자의 손에 달려 있어, 끊임없이 1 왕자에게 자신의 충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루이센과 가까이 지낸다면, 그는 칼튼을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작은 의심으로도 완전히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게 지금 칼튼의 상황이었다.

수도에 도착하면, 루이센에게 말이라도 한번 걸려면 주변의 눈치를 살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것이었다.

일이 잘 풀려도 애당초 계속 이어 나가기 힘든 관계였다. 루이센은 공작령으로 돌아갈 것이고, 자신은


분쟁지역으로 보내지든가 1 왕자의 곁에 남겠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니, 이 관계도 자연스럽게
잊히는 날이 올지 모른다.

그렇다고 다 버리고 루이센을 쫓아가?

칼튼은 야망이 있었다. 누구보다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 제대로 된 성과 작위를 받고 싶었다. 나 같은 말똥이나
치우던 어린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고자 했다. 다행히 능력도, 시대도 칼튼을 따라 주었다.
지금이 지엄한 신분의 벽을 부수고 뛰어넘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평생 목숨을 걸고 쫓아온 꿈이었다.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온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에 포기하기에는 거기에


걸어온 인생이 너무도 길었고, 칼튼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밤바람이 싸늘하게 뺨을 스쳤다. 풀벌레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마음은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가만히 서
있는데 그의 뒤에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딴에는 발꿈치까지 들어가며 발소리를 죽이려고 했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어, 칼튼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왁, 하고 팔을 뻗어 오는 타이밍에 맞춰 칼튼은 뒤돌아섰다.

“앗.”

놀란 루이센이 허우적대면서 칼튼의 품에 쏙 안겼다. 칼튼은 웃으면서 루이센의 등을 끌어안았다.

“뭐야. 놀래키려고 했는데.”

“안 잤어요?”

“응.”

루이센은 음,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가 툭 내뱉었다.

“자네가 데리고 나가 줄 줄 알고 기다렸지.”

매일 밤마다 그랬기에 오늘도 그럴 줄 알고. 루이센은 민망한지 웅얼거렸다. 칼튼은 가슴이 벅차올라 루이센을 꽉
끌어안았다. 그걸로는 부족해 쪽쪽, 하고 입이며 볼에 마구 입을 맞추었다. 루이센은 윽, 하고 소리를 내면서도
칼튼을 피하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시작된 입맞춤은 이내 깊어졌다.

이마를 맞대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자니, 루이센이 작게 웃었다. 달빛에 루이센의 갸름한 얼굴이 은은하게 빛났다.
칼튼은 루이센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고 빤히 내려다보았다.

끝이 뻔히 보인다. 그렇지만 이 얼굴을 평생 잊을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아, 마음이 거세게 요동쳤다. 신분


상승이고 야망이고 나발이고. 이 얼굴 하나만 뜯어먹고 살아도 평생 행복하지 않을까?

칼튼은 루이센 눈동자에 비춘 자신을 발견했다.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순간의 감정에 모든 걸
걸다 죽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런 한심한 인간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지금 자신이 그런 사람들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우스웠다.

“미치겠네. 어떻게 하죠?”

칼튼은 한숨을 내쉬며 루이센에게 엎어졌다. 맥빠진 모습에 루이센은 영문도 모른 채로 칼튼의 등을 끌어안고
살살 좌우로 흔들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피융!

“!”

칼튼은 루이센을 안고 몸을 돌려 공격을 피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다.

‘강도인가?’

강도들이 낮 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밤에 급습하는 일도 흔했다. 그런데 단순 강도라기엔 어쩐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은 가장 강해 보이는 사람을 제일 먼저 제거하려고 한다. 하지만 화살은 루이센을 노리고 날아왔다.

칼튼은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곧바로 그 위화감의 정체가 드러났다.

88 화

어둠 속에서 절그럭, 절그럭 하고 갑옷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세 명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낮에 다리를 막고


있던 세 명의 기사들이었다.
그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얼굴은 새파랗게 변색되어 있었고 눈동자는 썩어 희뿌옜다. 그들의 주변으로
고블린 몇 마리도 따라왔다. 마치 기사와 종자처럼 보였다.

“저 사람들 죽은 거야?”

“네. 숨소리가 안 들리네요.”

“구울이 된 건가?”

다리를 건널 때만 하더라도 기사들은 살아 있었다. 시냇물에 처박혀서 정신을 못 차리기는 해도 칼튼은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죽어서 자신들 앞에 나타난단 말인가.

구울이 된 기사들은 폐허가 된 마을을 배경으로 저벅, 저벅 걸어 나왔다. 구울은 전투력이 낮다. 그걸 알고
보더라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섬뜩한 광경이었다. 구울답지 않게 절도 있는 걸음걸이 역시 불길함을 자극했다.

구울의 주변으로는 검붉은 연기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구울들과 연결된 끈처럼 골목 너머로 이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붉은 로브를 입은 그를 발견하자, 루이센과 칼튼은 동시에 그가 바로
악마숭배자임을 직감했다.

“나는 아홉 번째 숭배자다.”

숭배자는 손가락을 들어 루이센을 가리켰다.

“네놈이 신성한 제단을 망가뜨린 그 순례자구나.”

루이센은 거대 지네와 그 지하굴 속에 숨겨져 있던 제단을 떠올렸다. 그걸 만든 게 이놈인가 보지?

“어디를 가도 네놈의 이름이 들리더군. 덕분에 쫓아오는 것도 편했어.”

“한밤중에 약속도 없이 들이닥치다니. 그쪽 분들은 예의도 모르나 보지?”

칼튼이 이죽거렸다.

“죄인을 벌하는데 약속을 잡고 움직이나?”

“죄인?”

“신성한 제단을 망가뜨리고, 그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준비하던 제사를 완전히 망쳐 버렸지! 그분께서
노하셨으니, 네놈은 저주받아 죽을 것이다!”

숭배자가 소리치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구울이 된 기사가 우어어어, 소리를 치며 달려들었다. 생전에도 제대로
못 다뤘을 게 분명한 투핸드 소드를 빠르게 휘둘렀다. 투핸드 소드가 허공을 가르는 진동이 피부로 전해졌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칼튼은 루이센을 뒤로 밀며 피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구울 기사의 공격을 검으로 막아 흘려보냈다.


손목이 아릴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 이어졌다.

세 놈이 한 번에 달려들어, 반격은커녕 공격을 막기에도 급급했다. 그나마 조종하는 놈이 기사가 아닌 덕에 연계


공격에 허점이 있어 요령껏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루이센과의 거리는 조금씩 벌어졌다.

‘젠장. 모리슨은 이럴 때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럴 때 힘을 쓰라고 데리고 다녀 줬더니,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이단이라면 눈 까뒤집고 달려드는 심문관
놈들이 이 소란에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을 리도 없을 텐데.

칼튼은 몸을 굴리며 기사에게 한 방 먹였다.

깡!

공격은 제대로 허리를 노리고 들어갔지만 평범한 검으로는 판금 갑옷의 단단함을 뚫지 못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부딪힌 충격으로 고통을 느껴 주춤했겠지만, 구울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잠깐 휘청이는 게 전부였다.

루이센의 곁으로 갈 틈도 없이 공격이 이어졌다.

조종당하고 있는 구울은 몹시 성가신 상대였다. 빠르고 파괴력이 있으며, 시체라 죽이지도 못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조종하는 놈을 노리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칼튼은 루이센을 살폈다. 루이센은 그동안 몬스터를 만나며 배운 게 있어, 자기 한 몸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솥뚜껑과 나무 몽둥이를 들고 여관 건물 벽에 등을 붙인 뒤 주변을 경계했다.
고블린 한 마리가 루이센에게도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칼튼은 급히 루이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한눈을 판 대가로 주먹이 복부에 꽂혔다. 큭, 칼튼이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리자 숭배자가 킬킬하고 웃어 댔다.

***

한편,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장소로 루거가 다가왔다. 그는 아홉 번째 숭배자와 용병, 그리고 순례자를
발견하였다.

루거는 한숨을 쉬었다. 몇 시간 전, 아홉 번째 숭배자는 자기 제단과 거대 지네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면서


혼자 사라져 버렸다. 순례자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와중에,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생각에 참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말렸는데. 루이센을 잡고 칼튼을 죽이기 위해 착실히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사적인 복수 따위에 눈이 돌아
버리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깟 제단, 그놈들이 모시는 악마 같은 건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을 텐데.
몬스터는 또 만들어 내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멋대로 하도록 방치하기에는 무슨 사고를 칠지 몰랐다. 놈들이 사고를 친다면 자신이 뒤처리를 해야 하고,
혹시나 루이센을 잡겠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뒤쫓아왔다.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알아서 할 거 같긴 한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용병이 혼자서 몬스터 셋을 상대하고 있는 것을 어려워하는 게 보였다. 루거는
순례자를 눈으로 찾았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순례자의 통행증은 영롱하게 반짝여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순례자는 혼자 고블린 한 마리를 상대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는 루거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교회 사람을 건드리는 건 찜찜하지만…….’

여기서 순례자를 죽이면 아홉 번째 숭배자도 군소리 없이 자신에게 협조할 것이다. 순례자답게 좋은 일을 하고


다닌 결과가 이런 거라니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필 저딴 미치광이들과 엮인 게 불행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루거는 검을 뽑아 들고 순례자에게 다가갔다. 순례자는 막 고블린을 밀어 버리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등 뒤가


훤히 노출되어 푹, 찌르면 자신이 죽는 것도 모르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한 걸음, 한 걸음, 순례자에게 다가갈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뒷모습이
너무도 낯이 익었다. 검은 그림자 위로 루이센의 모습이 겹쳐졌다.

지난 몇 년간 매일같이, 언제나 한걸음 뒤에서 바라보았던 그 뒷모습이었다. 루거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공작님?”

익숙한 이름을 부르는 게 참을 수 없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반가움인지 긴장감일지 모를 감정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자 순례자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짧아진 금발머리칼이 흔들리면서, 루이센의 곱상한 얼굴이 드러났다.
루거는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몇 년간 매일 같이 봐 온 얼굴인데도 낯선 느낌이었다.

수행이 높고 자비롭다고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 순례자가 루이센이라고? 루이센에게 순례자 행세를 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지금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루이센이었다.

놀라기는 루이센도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나타날 줄이야! 루이센은 본능적으로 솥뚜껑과 나무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호신을 위한 적절한 반응이었지만, 고블린이라는 놈이 얼마나 영악한지는 간과했다.

질 거 같았는지 기절한 척을 하던 고블린이, 루거에게 한눈을 판 틈에 입을 쩍 벌리고 루이센에게 이빨을


들이밀었다. 더럽고 뾰족한 이빨이 루이센의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 모습이 루거의 눈앞에 시간을 늘린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갑작스러운 기습이었고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루거는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루이센을 죽이려고 뽑았던 검이 그를 지나쳐 고블린의 머리가
꽂혔다.

어? 어어?

루이센은 한 박자 느리게 자신이 위험했고, 루거가 구해 줬음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머리 꼭대기까지 분노가
차올랐다.

“뭐 하자는 거야, 너?”

몇 년 동안 자신을 속이고, 납치하려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죽이려고 몬스터들을 끌고 나타나 기습을
했으면서 구해 주기는 왜 구해 주는 건데?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 루거를 노려보았다.

“그건…….”

“똑바로 말해.”
“그건…… 공작님을 살려서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군은 살아 있는 루이센을 원했으니, 몬스터 따위에게 죽는 것은 막아야 했다. 다른 이유는 없어. 자신은
충실하게 주군의 명령에 따른 것뿐이다. 루거는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순순히 따라오시면 다칠 일은 없을 겁니다. 공작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네놈들이 어떤 놈들인지는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뭐?”

“칼튼 같은 천한 용병만 믿고 있다간 큰일 난다는 걸 이제 깨달으셨을 테니까요. 놈들은 훨씬 더 사악하고


강합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제가, 저만이 당신을 제대로 지켜드릴 수 있습니다.”

이 자식,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슨 소린지 알고 말하나? 그 사악한 놈들이랑 한패면서 날 어떻게


지키겠다는 거지?

루이센은 너무도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루거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한마디가 다 너무 말이 안 되어서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도 아득했다.

‘이 자식 원래 이렇게 미친놈이었나?’

황당해하는데 루거가 검을 치켜들었다. 이거 봐. 또 갑자기 눈이 돌아가잖아! 루이센이 기겁을 하고 피하려는데


칼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뒤로!”

루이센은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뒤로 주저앉았다. 그러자 지붕 위에서 모리슨이 튀어나왔다.

모리슨! 어디 갔나 했더니!

모리슨은 너클을 낀 주먹을 내질렀다. 루거가 검으로 막으면서 귀가 아플 정도로 강렬한 충돌 소리가 울렸다.

루이센이 루거와 대치하고 있던 짧은 순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칼튼이 횃불을 이용해 구울 기사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어어어어! 잠깐만. 잠깐! 도망치자고!”

악마숭배자는 고블린을 끌어다 방패막이로 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루거가 어떻게 되든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루거도 동료가 자신을 챙기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지, 냉정한 눈으로 상황을 살폈다.

고블린 같은 하급 몬스터는 칼튼의 상대가 안 되고, 모리슨이라는 예상하지 못한 지원군도 함께 있었다. 역시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루이센을 데려갈 수 없다는 생각만 확고해졌다. 아홉 번째 숭배자도 도망쳤으니 더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또 봅시다.”

루거는 모리슨을 밀어내고 검을 휘두르며 거리를 벌렸다. 검붉은 안개가 그의 발아래서 피어올랐다.
“윽.”

모리슨이 질겁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어둡고 사악한 기운은 모리슨 같은 성직자에게는 독약 같은 것이었다. 그
틈을 타, 루거 역시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꽥.

마지막 고블린이 쓰러지고, 마을에는 다시 세 사람만이 남았다. 밤하늘은 다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금방


고요해졌지만 몬스터의 악취와 진한 피비린내가 허공을 떠돌았다.

89 화

칼튼은 마지막 고블린을 쓰러뜨리자마자 부리나케 루이센에게 달려왔다. 루이센을 앞뒤옆으로 살피면서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칼튼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루이센은 침착하게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여기 손바닥 살짝 까진 게 다라네. 다른 덴 괜찮아. 안 다쳤어.”

손바닥도 고블린을 밀어내며 썼던 나무 막대 표면에 살짝 쓸린 정도였다.

“기껏해야 고블린 한 마리 밀어낸 게 다야. 나보다 자기 몸을 걱정해야지.”

양손검을 종잇장처럼 휘두르는 기사 셋을 혼자 상대했으면서. 루이센도 칼튼을 살펴보았는데 놀랍게도 칼튼은


흔한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칼튼이야말로 몬스터인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칼튼은
루이센 손바닥 생채기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잘하셨어요.”

“어? 뭘?”

“혼자 고블린을 쓰러뜨리셨잖습니까. 뒷마무리가 아쉽긴 했지만. 벽에 등을 붙이며 피한 것도, 긴 나무막대기를


선택해서 침착하게 대응한 것도 다 잘하셨어요.”

“고작 고블린인데…….”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고작 고블린에게 죽을 뻔하셨거든요?”

“아, 그러네?”

칼튼과 처음 만났을 때, 루이센은 고블린이 나타난 걸로 완전 패닉에 빠져서 거의 죽을 뻔했다. 그때를 떠올려
본다면 침착하게 대응해 고블린과 힘겨루기에서 승리한 것도 루이센 기준으로는 엄청난 성과였다. 루거가 부르지
않았으면 제대로 고블린의 숨통도 끊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잘한 거잖아, 나. 루이센 아니에스, 많이 컸다. 루이센은 자화자찬하면서 칼튼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자네에게 배운 걸 또 제대로 써먹었어.”

칼튼은 낮게 웃으면서 루이센의 손을 잡아, 단단하게 깍지를 꼈다.

“손뼉을 치라니까 갑자기 손을 잡고 그래.”

루이센은 툴툴거렸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접촉이 싫지는 않았다. 둘만의 세계로 막 빠져들려는데, 루이센은 옆에서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옆을 돌아보니, 모리슨이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두 분 보기가 좋아서요.”

“……변태야?”

“변태라뇨. 전 사랑 이야기 같은 거 좋아할 뿐입니다.”

“……그래 보이더라.”

어쨌든 모리슨이 보고 있으니 더 할 마음은 싹 사라졌다. 루이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칼튼의 손을 놓고,
손수건을 꺼내어 고블린 피를 닦았다. 칼튼은 짜증스럽게 모리슨을 노려보았다.

“어디서 뭘 하다가 뒤늦게 나타난 겁니까? 이 난리 통에 쿨쿨 자고 있었던 건 아닐 테고.”

“설마요! 저도 나름대로 저기서 싸우고 있었거든요?”

모리슨은 억울해하며 말했다.

“아까 두 분 나가고, 저 혼자 누워 있는데 기분이 영 찜찜하더라고요. 그래서 주변을 좀 살펴봐야겠다


싶더라고요.”

칼튼이 나가고 루이센도 뒤따라 나갔다. 두 사람이 밤마다 밀회를 즐기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으니, 자신이
문밖으로 나갔을 때 무슨 광경을 목격할지는 뻔했다. 그래서 모리슨은 눈치껏 문과 정반대 편에 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뭐야. 다 알았어?”

밀회를 들켰다는 사실에 루이센의 얼굴이 활활 불타올랐다.

“옆에서 움직이는데 당연히 깨죠. 저 별로 신경 안 쓰니까 걱정 마시고. 아무튼 주변을 걷는데 이상한 놈이
보이더군요.”

다이어울프를 데리고,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언덕 위에서 마을 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기운이 불길하고


기이했다. 모리슨은 놈이 악마숭배자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몰래 접근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악마숭배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다이어울프? 그럼 유민들 마을을 습격한 그놈인가?”

“싸우려고 온 건 아닌 거 같았습니다. 구경하러 온 꼴이었죠. 다이어울프도 두어 마리 정도밖에 없었고요. 거의


다 잡았는데…….”

“놓쳤어?”

“네. 심문하려면 생포를 해야 하니까 가볍게 발목만 건드렸는데, 그 와중에 다이어울프를 조종해서 자길 물고
도망치게 하더라고요.”

더 강하게 제압했어야 했다며 모리슨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악마숭배자를 떠올리는 모리슨의 얼굴은 루이센이
항구에서 봤던 무기질적인 모습과 유사했다. 저게 이단심문관으로서 모리슨의 본모습이겠지. 루이센은 자신에
대한 모리슨의 오해가 쉽게 풀려 다행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다이어울프가 빠르긴 빠르더라고요. 맨몸으로는 다이어울프를 쫓아갈 순 없으니 말을 가지러 마을로 돌아왔죠.
근데 여기에도 악마숭배자가 있었네요?”

마을에서는 또 다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모리슨은 자신이 잡을 악마숭배자가 또 있다는 사실에 너무도
기뻤으나, 때마침 루이센이 루거와 대치 중인 상황이라 우선은 루이센을 도왔다.

“공작님을 따라오길 정말 잘했어요. 머리털 하나 못 찾던 놈들을 단숨에 두 명이나 만났으니까요! 그 능력도


실제로 보니 감이 좀 오더군요.”

모리슨은 악마숭배자를 놓쳤음에도 이미 잡은 것처럼 기뻐 보였다.

“그놈들, 또 공작님을 공격하겠죠? 다음에 만나면 어설프게 발목이 아니라 척추를…….”

“공작님 앞에서 험한 소리는 그만하시죠.”

칼튼이 루이센의 귀를 막으며 항의했다. 루이센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잔인한 소리 하지 말란


말이야. 모리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나저나, 아까 그 붉은 머리 남자가 루거란 사람이죠?”

모리슨은 이야기만 들었지 루거를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맞아.”

“그 사람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완전 이상하지.”

루이센은 정색했다.

“이상한 소리를 막 하더라니까. 원래 그렇게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던 놈이 아니었단 말이야.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거 같았어.”

“그래도 그 사람이 고블린한테서 공작님을 구해 줬잖아요?”

모리슨의 말에 칼튼과 루이센이 동시에 이마를 찡그렸다.


“그거야 날 산 채로 데려가야 해서 그런 거라고 자기 입으로 그러던걸. 루거는 왜?”

“아뇨. 별건 아니고 그냥 느낌이 좀 묘해서요.”

뭐가 더 있는 눈치였지만 모리슨은 끝끝내 말해 주지 않았다. 세 사람은 일단 주변을 좀 정리하고 마을을 떠날


준비를 했다. 다른 몬스터나 짐승이 피비린내를 맡고 몰려올 수도 있고, 루거 패거리가 일행을 몰고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세 사람은 보톤 자작의 기사들의 유해를 수습해, 신분패만 챙겼다. 화장을 하면서 간단하게 기도하는 걸로 장례를
대신했다.

***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세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났다. 까만 밤하늘 가득 새벽 별이 반짝여 운치가 있었지만 세 사람


다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세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논의했다.

지금까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한 것은 루이센이 순례자 행세를 함으로써 아니에스 공작의 행적이 묘연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위치가 발각된 데다 정체가 들통났으니, 놈들은 호시탐탐 루이센을 납치할
기회를 노릴 것이었다.

“수도에 입성하기 전에 한 번쯤 만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는데.”

루이센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 성문을 지나기 직전, 미리 기다리고 있던 루거와 마주치는 식을 생각했다. 그쯤에서 어떻게 대응할지도
계획해 두었다. 그런데 설마 악마숭배자가 순례자에게 원한을 품고 쫓아올 줄이야. 예상보다 빨리 정체를 들켜
버리는 바람에 앞으로의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근데 당장은 별수 없지 않나요?”

모리슨의 주장은 그랬다. 다른 신분으로 변장을 해 봐야 한번 써 본 수법이니 금방 들통이 날 것이다. 수도까지


속도를 높여도 사람의 몸인 이상 한계가 있었다. 악마숭배자가 몇 명인지도 모르는 마당에 루이센을 지키면서
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위험했다. 용병은 낯선 사람이라 믿을 수가 없고.

“그냥 신분을 드러내고 움직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건 좀. 오히려 상황을 어렵게 만들걸?”

기사까지 강도로 전락하는 게 현 동부의 사정이었다. 아니에스 공작을 잡아다가 한몫 챙겨 보려는 놈팡이들이
죄다 달라붙을 텐데, 오히려 발걸음을 늦추고 루거 패거리들에게 빈틈만 제공하는 셈이었다.

“그럼 신분을 밝히되 공작님을 지켜 줄 만한 사람을 찾아가는 게 어때요?”

“누구?”

“동부의 대영주요. 저희 쪽에서 온 정보에 따르면, 동부 대영주가 기사단을 끌고 이 일대를 돌아다닌다던데요.”


“윽……. 난 그 양반 좀 별론데…….”

루이센은 미간을 찌푸렸다.

동부 대영주, 아실러스 공작은 육십 대에 접어드는 나이로, 루이센의 할아버지뻘 되었다. 권위주의적이고 특권


의식이 강한 만큼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다. 망나니처럼 사는 루이센을 늘 탐탁지 않아 해서 잔소리를
해 댔기에 루이센에게는 불편하기만 한 존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귀하기 전, 떠돌던 루이센이 찾아갔을 때 한 번 만나 주지도 않고 내쫓았다. 다른 귀족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다른 도움 없이 칼튼과 단둘이 수도로 향하기로 한 것이었다. 누가 배후인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점도 있었지만.

“동부 대영주는 믿을 만해? 그 사람이 악마숭배자의 배후라든가 그럴 수도 있잖아.”

“전에 뵌 적이 있는데, 이단과는 상관없는 아주 신앙이 깊은 분이셨습니다.”

이단심문관인 모리슨이 그렇다니, 믿을 만했다.

“자네들, 그 영감한테 좋은 대접 못 받을 텐데.”

특히 칼튼은.

“대접이야 어쩌든, 상관없습니다. 기사단이 있으면 더 안전할 거고. 루거나 악마숭배자들도 쉽게 덤벼들진
못하겠죠. 다만 위치가 확실하지 않다는 게 문제인데요.”

“멀리 있다면 또 다르겠지만 가까이 있으면 마침 좋지 않나요? 원래 가려던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 같은데.
더 자세한 위치는 제가 금방 알아낼 수 있고요.”

모리슨과 칼튼 모두 긍정적이었다. 끄응, 하고 루이센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회귀 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으니, 동부 대영주가 악마숭배자의 일원만 아니라면야 한번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었다.

그때의 모멸감과 배신감 때문에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하지만. 실제로 싸우는 건 모리슨과 칼튼이니, 그들의
의견을 존중할 필요도 있었다.

“좋아. 그럼 가는 길에 만나면…… 말은 해 보는 걸로 하자고.”

루이센은 떨떠름하게 허락을 내렸다. 새로운 목적지가 정해졌다.

***

한편, 각자 도망친 악마숭배자 둘과 루거가 조금 떨어진 바위 동굴에서 재회했다.

90 화
루거가 도착했을 때, 이미 아홉 번째와 열한 번째 숭배자는 도착해있었다. 루거는 열한 번째 숭배자가 벽에
기대어 끙끙대고 있는 것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발목이 완전히 꺾여 있었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전력이 여기서 더 줄면 곤란한데.’

루거는 인상을 썼다. 아홉 번째 숭배자가 열한 번째에게 착 달라붙어 진통제를 먹이는 것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남의 손목, 발목은 댕강댕강 잘도 잘라 대면서 자기들끼리는 끔찍하기도 하지.

“멍청하게 다쳐 오기는.”

“저 새끼 물어!”

열한 번째 숭배자가 루거를 손가락질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다이어울프가 루거에게 달려들었다.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루거의 발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루거는 짜증을 내며 다이어울프의 주둥이를 걷어찼다.

“뭐 하자는 거야?”

“이게 다 네놈 탓이잖아.”

“뭐?”

“일행이 하나 더 있었어. 그놈이 다짜고짜 공격하더니 너클로 내 발목을 으스러뜨려 놨어!”

아, 그놈인가. 루거는 루이센 앞을 막아서던 낯선 남자를 떠올렸다. 마주한 순간은 짧았지만 머릿속 깊은 곳까지
파헤치는 듯한 시선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은 아닌 듯한데.

“그러게 몸 사리라고 했잖아? 네가 부주의하다 다친 걸로 내 탓을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아니지. 아니에스 공작이 순례자 행세를 하는 것도 몰랐잖아? 내가 의심했을 때도 공작은 그럴 능력이 없다고
확신하지 않았어?”

“……그건.”

“순례자가 아니에스 공작인 줄 알았으면 더 많은 걸 준비해서 공격했지. 공작에 대해서는 뭐든지 다 아는 척해


놓고 아무것도 모르잖아.”

“닥쳐.”

루거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숭배자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을 찌르는 거 같았다. 제일 혼란스러운 것은


루거였다.

여러 사건들을 해결해, 한창 명성을 떨치고 있는 순례자가 바로 루이센이라니. 직접 확인했음에도 루거는 쉽게


믿기 힘들었다. 세상이 자신을 놀리는 거 같았다.
루이센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게 자신이었다. 루이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많은 걸 알았다.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루이센의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곤 했다.

루이센은 절대 순례자 행세 같은 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는 수발들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자기 자신도


못 챙기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익숙해 수동적이고, 안일한 데다 남에게 무관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결점마저도 귀족적인 매력이라고 떠받들려 아무 문제의식도 없고 고칠 마음도 없었다.

‘내가 알던 공작님 같지가 않아.’

루거는 혼란스러웠다. 어느 순간부터 루이센의 머릿속이 흐릿해 보이더니, 이제는 완전히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루이센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뭐가 그 사람을 변하게 한 거지? 그럴 만한 건 없는데.’

내전에서 지고, 2 왕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작성으로 도망쳐 왔을 때도, 루이센은 루이센이었다. 술에
취해서 현실도피나 할 줄 알았지.

‘……칼튼. 그놈 때문인가?’

생각해 보면 루이센이 달라지기 시작한 분기점도 분명, 칼튼에게 항복하던 때쯤이었다. 그쯤부터 루이센이
루거에게 숨기는 게 늘어났다.

“젠장!”

또 칼튼, 그놈이야? 번번이 그놈이었다. 자기 주제도 모르는 천한 놈이 루이센의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루이센
옆에 딱 달라붙어서는 영향을 끼치다니.

“왜 화를 내?”

아홉 번째 숭배자가 짜증을 냈다.

“칼튼…… 그 새끼 때문에 공작님이 자꾸 내 예상에서 벗어나. 명령을 따를 수가 없잖아. 번번이 계획이 틀어져
버리니 화가 안 나게 생겼어?”

지난 몇 년간 첩자짓을 했다. 그 마지막 단계가 바로 루이센을 데려가는 일.

이 일만 제대로 해낸다면 그에 걸맞은 보상을 주겠노라 그의 주군이자 아버지가 약속했다. 어쩌면 한번 포기했던
기사가 될 수도 있고, 아버지의 아들로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후계자가 없으니, 루거에게도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사생아라는 오명을 벗어던지고, 당당히 이름을 알리는 것이야말로 루거가 평생에 바라오던 꿈이었다. 그게
이루어지려는 직전에 자꾸만 일이 틀어지니 화가 날 수밖에 없다고, 루거는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했다.

“다시 기회를 노려야 해. 다음번에는 반드시 공작을 손에 넣는다.”

“형제의 발목 치료가 먼저야. 그전까지는 네게 협조 안 해.”

“뭐? 지금 이 상황에서 뒤로 내빼겠다고? 공작이 코앞에 있는데?”


“아니에스 공작은 너와 네 아비의 표적이지 우리 숭배자들의 목적은 아니야. 형제를 희생하면서 네게 협조할
이유가 없어. 공작이 고블린에게 공격받게 놔두지. 그럼 끌고 오기 편했을 거 아냐.”

“죽을 수도 있잖아. 살려서 데려오라는 명령이었다고.”

아홉 번째 숭배자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목숨만 붙여 놓는 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데도?”

“…….”

“난 또 네가 공작을 지켜 주려고 하나 했지.”

“내가 왜?”

“아까 그랬잖아? ‘저만이 당신을 제대로 지켜 드릴 수 있습니다.’”

아홉 번째 숭배자가 과장되게 목소리를 깔며 루거를 따라 했다. 실실거리는 꼴이 또 루거를 놀려 먹으려는 수작인


게 뻔했다. 루거는 짜증스럽지만 무시하지 못하고 대답했다.

“날 따라왔다가는 너 죽을 거라고 말하면 순순히 따라오겠어?”

“그럼 잡혀 왔을 때 내가 살짝 좀 봐도 되지? 나 고귀한 피 궁금해.”

순간 루거가 죽일 듯이 아홉 번째 숭배자를 노려보았다.

“아, 거 살벌하네. 누가 보면 내가 적인 줄 알겠다.”

아홉 번째 숭배자가 낄낄댔다. 루거는 그를 무시하며 돌아섰다.

자신의 부름에 놀라 돌아보던 루이센의 얼굴을 떠올렸다. 반가운 두근거림과 함께, 짧게 잘려 버린 머리카락에
가슴이 철렁했다.

‘몇 년 동안 시종 노릇을 하다 보니, 너무 심취한 거야. 그래서 그래.’

충실한 시종을 연기하였으니 저도 모르게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주군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른 것으로 잠시 헷갈렸을 뿐.

‘다른 이유는 없어. 없어야 해.’

루거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무척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그를 보면서,
악마숭배자들은 묘한 표정을 주고받았다.

***

루이센 일행은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작은 수도원에 도착했다. 모리슨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다며
수도사와 함께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고, 루이센과 칼튼은 바깥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자기들끼리 소통하는
특별한 연락책이 있는 모양으로, 동부 대영주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막간의 틈을 이용하여, 칼튼은 루이센에게 간단한 호신술을 알려 주었다.

“어젯밤 같은 상황에서, 루거 놈이 억지로 공작님을 끌고 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뿌리치고 도망을 쳐야지…….”

“그렇죠? 놈은 아마 이렇게 공작님을 잡고 끌고 가려고 할 거예요.”

칼튼이 루이센의 팔을 붙잡았다. 칼튼은 적당히 힘을 조절하고 있는 것임에도, 루이센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안간힘을 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뿌리치질 못하겠는데?”

“근력 차이가 있으니까요. 이 상태에서는 좀 요령을 부리는 게 좋아요. 팔꿈치 안쪽을 팔로 누르면서, 머리로,
인중을 들이박아 버려요.”

“인중을?”

“코나, 턱도 괜찮고요. 급소거든요.”

“그렇구나.”

“다른 급소로는 명치나 다리 사이가 있지만……. 루거 놈은 갑옷을 입고 있으니 얼굴을 노리는 게 가장 좋죠.”

루이센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시범 보여 드릴게요.”

칼튼은 루이센에게 자신의 팔을 잡게 했다. 루이센이 온 힘을 다해 꽉 쥐자, 칼튼은 손으로 루이센의 팔꿈치
안쪽을 눌렀다. 원래 접히는 구조이기에 힘을 많이 주지 않아도 쉽게 접히면서 팔에 힘이 약해졌다. 그 상태
그대로 칼튼의 머리가 날아왔다.

“윽.”

루이센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루이센의 입술에 닿은 것은 칼튼의 머리가 아니라 입술이었지만. 가볍게 쪽,
하고 떨어져 나간 입술의 감촉에 루이센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가늘게 눈을 뜨고 칼튼을 노려보았다.

“할 거면 제대로 해.”

“그러기에는 주변에 사람이 좀 많지 않나요?”

“…….”

루이센은 주변을 힐끔 둘러보았다. 지나가던 여행자들이, 이상하게 가던 길을 가지 않고 수도원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왠지 이쪽을 힐끔거리는 거 같기도 하고. 칼튼이 루이센의 옷깃을 살살 흔들었다.

“배우는 거에 집중하셔야죠. 열심히 가르쳐 드리고 있는데.”


“허. 사심만 채우는 게 누군데.”

칼튼은 실실 웃으며 루이센의 황당한 표정을 즐겼다.

“머리로 들이받을 상황이 아니라면, 눈을 노리는 것도 좋아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밀면서, 마구 눈을 찌르거나,
침을 뱉거나, 흙을 뿌린다거나, 뭔가로 머리를 내려치는 식으로요.”

“그건……호신술이 아니지 않아?”

너무 개싸움인데. 루이센은 떨떠름했다.

“제대로 된 기술은 배워도 못 따라 하실 걸요?”

“그거야 그렇지.”

“공작님처럼 느려서야 피하면 그만이라. 그래도 잠깐 동요시킬 수는 있으니까요. 아주 잠깐 사이에 생사가


갈린다니까요. 그리고 뭐라도 알아 두면 좀 더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으실 거고.”

그런 것 말고도 칼튼은 여차할 때 써먹을 수 있는 각종 더럽고 치사한 방법들을 가르쳐 주었다. 시범을 보여
준다면서 허리를 만지는 둥 사심도 채웠다. 빤히 보이는 수작질이었지만 루이센은 모르는 척 은근히 즐겼다.

그러는 사이 모리슨이 수도원에서 나왔다.

91 화

모리슨의 뒤로 한 남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정수리에 머리털이 풍성한 걸 보니 수도사는 아니었고, 제법 잘


차려입은 모양새였다. 루이센은 그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그는 루이센을 보고 반가워했다.

“순례자님. 이렇게 금방 또 뵙네요.”

“아하하, 예. 그렇군요. 그런데 누구신지…….”

루이센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모리슨을 쳐다보았다. 모리슨이 남자에 대해 설명했다.

“저번에 미틸에서 강을 건너던 배에 탑승했던 분이십니다. 원래 여기 수도원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신다네요.”

“배에서 내릴 적에 인사드렸는데 잊으셨나 봅니다. 저희 수도원에 오시면 꼭 보답을 드리고 싶다고요.”

보통 그런 인사치레를 일일이 다 기억하진 않지. 그때 인사를 한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게다가 그날 모리슨에게
납치되었던 일이 충격적이라 누가 인사를 하고 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죄송합니다. 제가 기억이 잘…….”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보다 아실러스 공작님을 뵙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거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부 대영주가 얼마 전에 수도원에 책을 의뢰했다고 한다. 그걸 전달하기 위해 마침 이 사람이 가게 되었는데,


책을 전달하면서 루이센 일행도 같이 데려가 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도 동부 대영주를 만날 수 있는 신분은 아니었다. 다만, 일행이라 말하고 동행하여 대영주 측 막사


안쪽으로 들어가서, 동부 대영주의 시종에게 책을 건네며 슬쩍 루이센의 이야기는 꺼내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래 주신다면 저야 더없이 감사드립니다만, 너무 어려운 부탁을 드리는 건 아닌지…….”

루이센의 걱정에 심부름꾼은 손사래를 쳤다.

“순례자님께는 큰 은혜를 입었으니 그에 비하면 말 몇 마디 더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작님은
신앙이 깊으시다 보니, 요즘 들어 동부에서 이름을 날리고 계신 순례자님께도 관심이 있으신 듯했습니다.”

“저에게요?”

“순례자님이 배에서 활약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실 겁니다. 동부에서 벌어진 일이니 크게 치하해 주실 수도


있고요.”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루이센은 심부름꾼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모리슨이 웃고만 있는 걸 보면
심부름꾼에게 다른 꿍꿍이가 없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모양이었다.

‘유명해지는 게 나쁘지만은 않네.’

이런 식으로 부탁하지 않아도 도와주겠다는 사람도 나오고. 그게 다 자신의 성과라고 생각하니 루이센은 뿌듯했다.

***

동부 대영주는 수도원에서 반나절쯤 떨어진 거리의 평야에 천막을 치고 머무르고 있었다. 아주 느린 속도로
수도를 향해 이동하는 중이라고 한다.

평야에 도착하자, 평야 가득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천막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주변에 목책을 세워 두어


유목민족의 마을처럼 보였다. 중앙에는 동부 대영주를 상징하는 붉은 물결무늬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다른 귀족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들도 서 있는 걸 봐서는, 동부 대영주가 주변 세력을 끌어들여 함께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세상이 어지러우니, 동부의 귀족 연합이 건재함을 내보이며 대영주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목책 바깥으로도 사람이 아주 많았다. 동부 대영주의 일행에는 끼지 못하는 사람들로, 동부 대영주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겠답시고 입구 근처에 진을 치고 모여 있었다. 병사에게 애걸복걸하기도 하고, 뇌물을 주기도 하고,
하여튼 난장판이었다.

‘여기까지 왔어도 그냥은 힘들었겠어.’

일단 위치만 알면, 동부 대영주를 만나는 건 어떻게든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인제 보니 그렇게
왔다가는 입구 근처도 못 갔겠거니 싶었다.

후드를 벗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면 간단히 통과할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루이센은 되도록 몸을 사리고 싶었다.
정체를 드러내는 것도 동부 대영주의 앞이 좋을 것 같았다.

루이센 일행은 심부름꾼의 일행으로 소개된 덕에 쉽게 목책 너머로 통과했다. 사람들의 질투가 섞인 시선이
루이센을 향해 쏟아졌다.

대영주의 시종이 심부름꾼을 맞이하러 나왔다.

“영주님께서 이번 책을 무척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시종은 장갑을 끼고 책 한 장 한 장을 살폈다. 양가죽에 수도사들이 직접 하나하나 그리고 글을 쓴 책은 하나의


예술 작품과도 같았다.

심부름꾼은 시종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루이센 일행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야기는 저도 얼핏 소문으로 들은 적 있군요. 영주님께서도 흥미를 가지실 만한 이야기입니다. 마침 연회가


지루해졌으니 영주님께 소개를 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시종이 흘낏, 루이센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부름꾼은 잘되었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고, 루이센 일행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 화려한 천막으로 안내되었다.
붉은 자수가 수놓아진 크고 화려한 천막이었다.

다른 시종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 동부 대영주에게 순례자가 뵙기를 청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동안 함께 왔던


시종은 루이센에게 지켜야 할 예의범절을 늘어놓았는데, 루이센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번에도 쫓겨나진 않겠지?’

회귀 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걸 알지만 내심 옛 기억이 떠오르면서 불안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칼튼이 슬그머니 손을 잡아 왔다. 그의 손바닥이 루이센의 손등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것만으로도
루이센은 든든해졌다. 그래, 여차하면 칼튼이 날 들고 도망쳐 줄 테니까.

마침 안에 들어갔었던 시종이 루이센을 불렀다.

“들어오시랍니다.”

“안에 들어가서는 내게 맡기도록 해. 두 사람 다, 되도록 말을 삼가도록.”

“알겠습니다.”

“네.”
“후.”

루이센은 심호흡을 내쉬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종과 루이센이 앞서고, 그 뒤를 칼튼과 모리슨이 따라갔다.

천막 안은 연회가 한창이었다.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귀족들은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떠들었다. 시종들이
분주하게 시중을 들었고, 기사들은 곧게 서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공작성의 연회장을 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루이센을 놀라게 한 것은 많은 귀족들이었다. 동부에 영지를 가진


영주들이 다 여기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노느라 바빠 루이센 일행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디를 가도 영주가 도망쳤다는 소리를 하더니, 다 여기로 와 있었나 보네.’

정세가 불안하니, 귀족들이 대영주의 아래로 모여들었다고 볼 수 있었다. 나름대로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영 한심하게만 보였다.

밖에서는 강도와 몬스터가 기승을 부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사람이 나오고 있는데.
영주라는 자들이 술 마시고 노느라 바쁘니. 저 사람이 여기서 편하게 술 한 잔을 마시는 대가로 저 사람의
영지민은 평생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겠지.

그걸 생각하자 얼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루이센은 융단 끝에 이르러, 동부 대영주의 앞에 섰다. 동부 대영주가 보석으로 치장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루이센이 오든 말든 젊은 시녀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루이센이 안 보인다기보다는 일부러
관심을 안 줘서 권위를 과시하려는 가벼운 수작이었다.

동부 대영주, 아실러스 공작은 루이센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여유롭고 인자해 보이는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두 눈동자는 젊은이 못지않게 영민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닳고 닳은 정치가였고, 오랜 세월 자신의 자리를
지켜 온 권력자였다.

‘참 한결같은 양반이야.’

덕분에 약간 남은 긴장마저 싹 날아갔다. 동부 대영주가 자신을 과시하는 걸 보고 있자니, 장단을 맞춰 줄


마음이 싹 달아났다. 도움을 구하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루이센도 그와 같은 대영주였다.

이 루이센 아니에스. 황금들판의 지배자로서 무릎을 꿇는다면 그것은 신과 왕 앞에서, 딱 두 번뿐이어야 했다.

생각해 보면 칼튼 앞에서도 여러 번 꿇기야 했지만 그건 공작가의 운명이 달린 문제였으니까 넘어가도록 하고.


어쨌든 이쪽에서 먼저 수그리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루이센은 멀뚱히 서서 동부 대영주가 자신을 보길 기다렸다.

“크흠. 크흠.”

시종이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줬다. 그럼에도 루이센이 못 알아듣자 목소리를 낮게 깔며 재촉했다.

“이보시오. 영주님께 예의를 갖추지 않고 뭘 하는 게요!”

루이센은 시종이 소리를 치건 말건 무시했다.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봤는데, 모리슨과 칼튼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수틀리면 상대가 귀족이든 말든 머리를 깨 버릴 성격들이라 그런가, 얌전히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
신선해 보였다.

“이 무도한 자를 봤나! 영주님 앞에서 허리를 뻣뻣하게 세우고 인사조차 하지 않다니!”

시종의 노성에 기사들 역시 분노하여 다가왔다. 그쯤 되자, 귀족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멀뚱히 서 있는 루이센을 보며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동부 대영주도 소란이 벌어지고 나서야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루이센은 슬슬 입을 열어야겠다 싶었다. 그때


동부의 대영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잠깐.”

그의 한마디에 시종도, 기사들도 모두 행동을 멈추었다. 귀족들 역시 공작의 눈치를 보느라 숨을 죽였다. 그래도
이쪽은 동부 대영주의 권위가 확실히 살아 있다 보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위계질서가 잡혀 있었다. 시끄럽던
막사 안이 조용해졌다.

92 화

모두 동부 대영주가 루이센의 무례함을 꾸짖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예상은 어긋났다. 동부 대영주는 약간의 웃음을
띤 채로 루이센에게 물었다.

“자네는 누구지?”

루이센은 미간을 찡그렸다. 너는 평범한 순례자가 아닐 거라는 전제가 깔린 질문이었다. 늙고 노련한 권력자의
눈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동부 대영주가 이미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제가 누군지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저 소문 속 순례자가 대영주와 아는 사이라고? 대체 누구지? 귀족들이 수군거리면서 루이센의 정체를 추측했다.


여러 이름이 나왔지만 그중에 아니에스 공작의 이름은 없었다.

루이센의 대답에 동부 대영주는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얼굴을 봐야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체를 밝히고 모습을 드러내라는 의미인가. 남부의 대영주인 루이센이 여기 있다고,
소문이 순식간에 퍼질 텐데.
무슨 의도인가, 의심이 들었지만 지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동부 대영주의 속셈을 알아낼 수야 없다는 걸 알았다.
루이센은 어쩔 수 없이 후드를 벗었다.

천막의 창으로 들어온 정오의 햇살이 루이센의 머리칼에 내려앉았다. 짧은 금발 머리가 후광을 두른 것처럼
찬란하게 반짝였다. 그 화려함에 가리지 않는 섬세한 이목구비의 흰 얼굴이 드러났다.

굳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이 자리의 모두가 루이센 아니에스를 알아보았다. 많은 귀족들이 루이센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귀함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사람이 된 것 같은 외모의 루이센은 그 지위와 더불어
유명했으니까.

“세상에. 저 얼굴! 아니에스 공작 아니야?”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아니에스 공작이 맞아.”

“실종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멀쩡해 보이는데? 꼴이 엉망이기는 하지만…….”

귀족들이 크게 술렁였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물건에 휘감겨 있던 루이센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머리카락도 엉망이고, 얼굴도 거칠어졌다. 그러나 루이센의 눈빛은 전에 없이 안정적이었고
표정에도 자신감이 흘렀다. 고난을 겪고 스스로 극복해 낸 사람 특유의 단단함이 엿보였다. 내면이 달라지자,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 역시 달라 보였다.

루이센을 어릴 때부터 지켜봐 온 동부 대영주는 그 변화를 알아차리고 호오, 하고 감탄을 흘렸다.

“오랜만입니다, 아실러스 공작님.”

루이센은 고개를 까딱였다. 비슷한 신분이기는 하지만, 동부 대영주와 나이 차가 많이 나기에 어른으로 대우하는
편이었다.

“이럴 수가! 아니에스 공작님이 아니신가.”

동부 대영주가 다소 과장되게 감탄을 터트렸다.

“이거 놀랍군. 설마 그 유명한 순례자가 자네일 줄이야. 그럼 자네가 그 많은 업적을 세웠단 말인가!”

“네. 보시다시피.”

“그런가. 그렇군. 자네도 많이 달라졌어.”

동부 대영주는 루이센을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늘 자신을 못마땅하게 보던 사람이 저렇게 보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대놓고 자신을 구경하며 입방아를 찧어 대는 귀족들도 슬슬 감당하기 힘들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나도 자네와 나눌 말이 많아. 잠시 나랑 가지. 연회는 아니에스 공작과 이야기를 나눈 뒤에 이어 가도록


하겠다.”

동부 대영주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루이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친근하고 우호적인 표현인지라,
루이센은 떨떠름하게 그를 따라 막사를 나왔다.
***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동부 대영주는 루이센을 자신만이 사용하는 천막으로 데리고 갔다. 칼튼과
모리슨은 여전히 뒤에 부복한 채로, 루이센만이 동부 대영주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어떻게 알아보신 겁니까? 제가 순례자 행세를 하는 건 모르셨던 거 같은데.”

“내 앞에서 꼿꼿하게 서 있는 젊은이는 자네밖에 없거든. 그래서 알아보았지. 순례자라. 그래. 간단한 식전
기도문조차 제대로 기억 못 하던 자네가 순례자 행세를 할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영리한 방법을 썼구먼. 자네의
외모는 상당히 튀니까 가릴 필요가 있지. 그렇다고 얼굴을 다 가리고 다니면 수상하게 여겨질 거고.”

“예. 제 생각은 아니었고 저 친구가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루이센은 칼튼을 가리켰다. 동부 대영주는 흘낏, 칼튼을 보는 듯싶더니 그냥 무시해 버렸다. 예상했던 반응
그대로라 루이센은 쓴웃음을 삼켰다. 칼튼에 대해 조금이라도 좋은 인상을 남겨 주고 싶었는데 하나 마나 한
짓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자네를 찾겠다고 엄한 사람들만 잡아들이고 있었어.”

“절 찾으셨어요?”

“자네 총관에게 편지를 하나 받았어. 자네가 수도로 향하고 있다기에 찾고 있었지.”

“총관이요? 그 편지, 좀 볼 수 있겠습니까?”

동부 대영주는 흔쾌히 편지를 보여 주었다. 루이센은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동부 대영주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
부담스러웠지만 침착하려 애쓰며 한 글자 한 글자를 눈에 담았다. 편지를 읽자, 동부의 대영주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왕가를 견제하는 데 내가 쓸 만하다는 거군.’

동부 대영주의 영지는 왕의 직할령과 거리가 가까웠다. 그렇다 보니 대영주들 중에서도 유난히 왕가와 관련된
일에 민감했다. 같은 대영주인 루이센을 도움으로써, 1 왕자와 사이가 나쁜 루이센을 포섭하고, 대영주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게 하겠다는 이중의 노림수가 보였다.

회귀 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 역시 납득이 갔다. 가장 큰 이유는 회귀 전과 달리 아니에스 공작가의 모든 것이


건재하다는 점이었다. 공작성을 제외한 영지는 내전에 타격을 입지 않아 농사는 풍년이었고, 영지민과 가신들도
의욕적이었다. 올겨울만 잘 넘긴다면 내전의 피해를 복구하는 것을 넘어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도 있다고
예상되었다.

동부 대영주는 총관의 편지를 받고 이런저런 고민을 했고, 루이센을 돕기 위해 계속 찾아다녔던 것이다.

편지는 논리적이고 차분한 어조로 쓰였지만 필체에 어딘가 필사적인 느낌이 남아 있었다.

‘총관…….’
루이센은 가슴이 찡, 하고 아려 왔다. 실종되고 한 번도 연락하지 못해서, 총관은 루이센의 상황을 모른다.
그럼에도 백방으로 도와줄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루이센이 잘 헤쳐 나가리라 믿고 기다리면서.

‘내가 얼른 공작령으로 돌아갈게!’

루이센은 마음속으로 또 다짐했다.

“그래서 내가 뭐랬나. 우리 같은 영주들은 영지와 가신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어야 힘이 생기는 거라고 했지.”

동부 대영주는 이때다 싶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 예예.”

감동을 방해받아 루이센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옛날부터 동부 대영주는 루이센만 보면 2 왕자와 놀아나는 건
그만두고 영지로 돌아가 영주 노릇이나 하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때는 고깝게 들었지만 맞는 말이었다.

‘어쨌든 회귀 전처럼 내쫓기는 일 없이, 수도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겠어.’

한결 안심한 루이센은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동부 대영주에게 설명했다. 사전에 모리슨이 악마숭배자에


대한 이야기는 비밀로 해 달라고 했기에 그 부분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모리슨은 루이센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함께하는 상인이라고 말해 뒀다.

“그러게 내가 시종은 아무나 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 빨간 머리 놈, 진작에 내치라고 할 때 내쳤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그런 이야기도 하셨습니까?”

워낙 잔소리가 많아서 대부분 한 귀로 흘려들어서 기억 안 난다.

‘어째 루거는 나 말고는 다 싫어했던 거 같네.’

동부 대영주는 혀를 끌끌 차다가, 루이센 너머로 칼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게지. 1 왕자의 개 따위나 옆에 끼고 다니고.”

“사람더러 개라뇨? 말씀이 과하십니다.”

루이센이 정색했다.

“다를 것도 없지.”

“아실러스 공작!”

루이센이 욱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늙은이가 진짜!

“저자도 데려갈 셈인가?”

“예. 두 사람 다 제 일행입니다. 수도까지 무조건 함께 갈 겁니다. 혹시 저들을 떨어뜨리겠다면 저도 공작님과는


못 갑니다.”

“쯧. 그렇게 당하고도 사람 무서운 줄을 모르고. 좀 어른스러워졌나 했더니 아직 멀었어.”


“잔소리는 손자분께나 가서 하시죠. 그 애들이라면 고분고분 다 들어줄 텐데요.”

“알겠네. 알았어. 그게 자네 뜻이라면.”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귀찮다는 듯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루이센이었다. 예상과 달리 강하게 거부반응을


보이자 동부 대영주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괜찮겠지. 자네 일행이 이제 내 일행도 되는 것이니까.”

루이센은 칼튼과 모리슨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 다 괜찮다는 뜻을 보였다. 루이센도 마지못해 허락을 해야 했다.

동부 대영주는 자신의 손녀를 불러서 직접 루이센을 데려가 챙기라고 시켰다. 루이센은 칼튼이 걱정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동부 대영주의 손녀 뒤를 따라 천막을 나섰다.

***

루이센이 나가고 천막 안은 침묵에 잠겼다. 동부 대영주는 말없이 모리슨과 칼튼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먼저 말을


하기 전까지 모리슨과 칼튼은 말을 꺼낼 수 없어, 가만히 기다려야 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시간을 끄나. 그때 주머니가 모리슨과 칼튼 앞에 툭, 하고 떨어졌다. 주머니 안에는


금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니에스 공작을 잘 보필한 대가다.”

“돈을 받고자 한 일은 아닙니다.”

칼튼이 답했다.

“보잘것없는 신분인 네놈들이 공작을 모셨으니 그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영광이지만 그래도 챙겨 가는 게 있어야
보람을 느끼지 않겠나. 특히 네놈은.”

동부 대영주는 칼튼을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칼튼은 기민하게 그 시선을 알아차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네놈을 쫓아내고 싶어. 1 왕자가 주워다 기른 개가 감히 내 앞에 알짱거리다니.”

93 화
감히 천민 출신 용병 따위가 귀족을 우롱하고 신분의 질서를 뒤집어 놓다니. 그 상황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칼튼이 날뛸 수 있는 배경이 1 왕자라는 점도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칼튼 때문에 겁에 질려 고향을 떠나 자신에게 보호를 요청하러 찾아온 귀족들이 벌써 몇 명이던가. 그들의


안쓰러운 처지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 칼튼을 감옥에 가두고, 기사들로 하여금 그를 고문하게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에스 공작이 네게 많이 의지하더군. 그의 체면을 생각해서 네놈을 받아 주는 것이니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야.”

“예. 알겠습니다.”

칼튼은 비교적 덤덤하게 대답했다. 동부 대영주의 말은 날카로웠지만 이 정도는 평소 그가 겪었던 굴욕에 비해


치욕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입만 움직이고 매질을 하는 것도 아니니. 동부 대영주의 말대로, 그가
루이센을 의식해서 참고 있는 게 맞았다.

동부 대영주는 손을 휘휘 저었다. 그걸 본 시종이 말했다.

“이만 나가시죠.”

일방적인 축객령이었음에도 칼튼과 모리슨은 한마디 불만도 내뱉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더이상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는 동부 대영주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돌연 동부 대영주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주 망측한 소문을 하나 들었는데. 네놈과 아니에스 공작에 관하여.”

칼튼은 돌아서서 동부 대영주를 바라보았다.

“그런 소문이 돌고 그가 너를 특별하게 대했다 한들, 착각은 하지 말거라. 공작이 잠깐 흥미를 보였다고, 착각을
품은 어리석은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어. 그는 뭐든 금방 질리는 성미라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지.”

너라고 특별할 거 같으냐, 라고 동부 대영주의 눈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칼튼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새하얗게 질린 손이 가늘게 떨렸다. 돈만 밝히는 취급도, 떠도는 개새끼 취급도 흘려들을 수 있었지만
루이센에 대한 말만큼은 참기 힘들었다.

모리슨이 불안한 얼굴로, 칼튼이 뛰어나가면 온몸으로 막을 준비를 했다. 아까 아침을 먹을 때 루이센이 몰래
다가와 모리슨에게 경고를 했다. 혹시라도 칼튼이 동부 대영주의 언사를 참지 못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라고.
동부 대영주는 자신이 막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서.

하지만 모리슨과 루이센의 예상과 달리, 칼튼은 눈을 내리깔았다. 눈꺼풀 아래로 끓어오르는 분노도, 모멸감도
모두 감추어졌다.

“충고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칼튼은 천막을 나설 때까지 동부 대영주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고 지켰다. 불덩이를 삼킨 듯이 속은 타들어


갔지만, 루이센을 생각하며 참았다.
***

동부 대영주는 저녁에 다시 연회를 열었다. 루이센은 연회를 즐길 마음이 없었지만, 루이센의 합류를 환영하는
의미로 열린 연회였기에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맛있는 음식과 귀한 술을 먹으면서도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같이 다니던 일행인데도 칼튼과 모리슨은
연회에 없었다.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 루이센만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연회는 밤까지 이어졌다. 동부 대영주와 귀족들에게 붙잡혀 있다가 겨우 벗어났다 했더니, 이번에는 시녀들이
와서 루이센을 천막으로 밀어 넣었다. 연약한 시녀들을 뿌리칠 수도 없고, 반강제로 받아먹은 술도 꽤 되기에
얼떨결에 그대로 천막에 들어왔다.

‘칼튼을 보러 가려고 했는데…….’

루이센은 침대에 풀썩 누웠다. 간이로 만든 매트리스지만 양털을 넣어 푹신했다. 맨땅바닥에 망토 하나 깔고 자던


때에 비하면 천국이었지만 혼자 있으려니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시녀들에게 언뜻 물으니, 칼튼과 모리슨은
따로 숙소를 배정받아 쉬고 있다고 했다.

동부 대영주는 신분에 엄격한 사람이니, 그의 일행에 합류하게 된다면 전처럼 딱 붙어서 함께 다닐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곁에 아무도 없자 너무도 쓸쓸했다.

‘내가 안 가도 칼튼이라면 밤에 몰래 찾아올 테니까…… 기다려 봐야지.’

칼튼이 오면 동부 대영주가 한 말 같은 건 잊어버리라고 잘 달래 줘야겠다. 분명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을 테니까.

루이센은 졸린 눈을 비비고, 허벅지를 때려 가며 칼튼을 기다렸다. 하지만 새벽이 깊어져 가도 그는 오지 않아,


결국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다.

***

다음 날.

동부 대영주의 일행은 일찌감치 출발을 준비했다. 루이센은 동부 대영주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루이센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길이었다. 모든 것은 시녀들이 알아서 해 주었고, 언제든 맛있는
음식과 따듯한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동부 대영주의 마차는 흔들림 없이 편안했고 귀족들은 루이센이 지루하지
않도록 농담을 던지며 아양을 떨어 댔다.

루이센이 당연하게 누리곤 하던 호사스러운 여행길이었으나, 어딘가 영 어색하기만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이동하다가 쉬다가, 또다시 저녁이 되어 천막을 치고 밤을 보낼 준비를 했다. 동부 대영주가


오늘도 거창한 저녁 만찬을 여는 바람에 루이센은 밤까지 붙들려 있었다.

연회를 마치고 기진맥진해서 천막으로 들어와, 루이센은 침대 위에 뻗었다. 어젯밤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거 어쩐지…… 일부러 이러는 거 같단 말이지.’


그사이 조금 자라난 눈치라는 게 루이센에게 속닥거렸다. 동부 대영주가 일부러 루이센과 일행을 떨어뜨려 놓고
있는 거 같다고.

루이센은 칼튼이 보고 싶었고, 또 걱정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되는 대로 칼튼을 찾았다. 마차를 타고 가면서는
내내 창밖을 바라보았고 마차가 멈추었을 때는 칼튼을 찾으러 주변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제대로 다니기도 전에 번번이 귀족이나 시종들의 방해를 받아 마차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점심쯤에 멀리서 모리슨이 하인들의 일을 돕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가려고 했다. 그런데 루이센이 가까이
가기도 전에, 기사들이 뭐라고 말하며 그를 데려가 버렸다. 동부 대영주는 시도 때도 없이 루이센을 불러다가
곁에 두고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결국 어제부터 루이센은 칼튼을 보지 못했다.

‘설마 칼튼만 쫓겨난 건…… 아니겠지?’

칼튼이 순순히 혼자 쫓겨날 사람도 아니고, 그런 일이 있었다면 모리슨이 진작 자신에게 알렸을 것이다. 무리
어딘가에 있기는 할 텐데.

‘하루씩이나 칼튼이랑 떨어져 있다니. 말도 안 돼.’

둘이 한 몸처럼 붙어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동부 대영주의 마차는 최고급답게 흔들림이 적고 편안했지만


칼튼의 품에 기대어 가는 것만 못했다.

루이센은 허전함에 몸부림치며, 오늘은 칼튼이 찾아올까 싶어 기다렸다. 하지만 밤이 깊도록 아무도 루이센을
찾아오지 않았다. 칼튼이라면 사람들 눈을 피해 루이센의 침대까지 들어오고도 남을 텐데, 어제도 오늘도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현듯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일이 있나?’

진짜 동부 대영주한테 몹쓸 말을 들은 건가? 그래서 혼자 속으로 삭이고 있는 건 아닌가? 칼튼은 자존심이


강했고 섬세한 면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안 되겠다. 내가 찾아가 봐야지.’

루이센은 벌떡 일어섰다. 철거하기 좋게 간단하게 세워 둔 천막인지라 몰래 빠져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는


기둥이 무너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천막 밑을 기어 나왔다. 모양도 좀 빠지고 옷도 흙투성이가 되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진흙에서 뒹굴다가 달려가도 칼튼은 받아 줄 테니까.

칼튼을 만날 생각에 절로 걸음이 가벼워졌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던가. 루이센이 천막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모리슨이 어디선가 툭 튀어나왔다.

“깜짝이야. 여기서 뭐 해?”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조사하는 중이었죠. 공작님은요?”

“나는 칼튼을 찾으러 나왔지. 마침 잘됐네. 칼튼은 어디 있어?”

“아…….”
모리슨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뭔데? 무슨 일 있어? 혹시 자네도 칼튼이 어디 있는지 몰라?”

“아뇨. 알긴 아는데…….”

“그럼 안내해.”

루이센이 인상을 쓰자, 모리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루이센을 데리고 으슥한 공터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한바탕 난투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갑옷 하나 걸치지 않고 맨주먹으로 싸우는 칼튼과 무장을 한 기사
네 명이 보였다. 누가 봐도 기사들 쪽에서 벌인 정당하지 못한 결투였다.

칼튼이 압도적으로 기사들을 때리고 있긴 했지만 루이센 눈에는 칼튼이 너무도 위험하고 불리해 보였다. 갑옷도
안 입은 상대에게 검을 들다니, 그냥 찔러 죽이겠다는 거 아닌가!

“지금 뭐 하는 짓들인가!”

루이센이 일갈했다. 칼튼이 흠칫, 놀라면서 멱살을 쥔 기사를 놓아주었다. 루이센은 성큼성큼 걸어가, 칼튼을
자신의 뒤로 두며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기사가 된 자가, 떼거리로 한 사람을 공격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렇게 명예도 모르는 기사를 데리고
있는 건 대체 어떤 귀족이지?”

“아니, 저희는…….”

일방적으로 처맞고 있었는데. 기사들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으나 기사가 되어 네 명이 동시에 무장도 하지 않은 한
사람을 공격한 것은 부끄러운 일인지라 뭐라 변명도 하지 못했다.

“네놈들이 모시는 이의 이름을 대라.”

“고, 공작님. 부디 자비를…….”

“그러게요. 그냥 보내 주시죠.”

“그렇지만 이자들이 자네를 공격했어.”

“어차피 제가 다 이겼습니다. 그리고 저도 일이 커지는 건 바라지 않아요.”

당사자인 칼튼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루이센도 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썩 꺼져라. 네놈들 얼굴은 내가 똑똑히 기억해 둘 테니.”

“예, 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기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모리슨은 진작 어디론가 사라진 뒤라, 으슥한 공터에는 루이센과 칼튼만
남았다.
94 화

“저 못된 놈들. 기사란 놈들이 여럿이서 한 사람을 공격해?”

루이센은 화를 내다가 칼튼을 돌아보았다. 일방적으로 칼튼이 두들겨 패고 있었기에 칼튼은 너무도 멀쩡했다.
칼튼이 비인간적으로 강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어디서 감히 내 칼튼에게 칼을 들이대?

“말해 봐. 저런 놈들 많아? 여기 사람들이 혹시 자네를 괴롭히고 그래? 어떤 놈이야? 다 데려와. 내가 혼쭐을


내줄 테니까!”

“그래도 제가 공작님 일행인데 칼 들고 덤비는 멍청이가 그렇게 많겠어요.”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대는 루이센과 달리, 칼튼은 자신의 일임에도 침착했다. 칼튼답지 않은 일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별일 없었어요.”

아닌데. 뭐 있었던 거 같은데.

루이센은 애가 타서 칼튼을 바라보았다. 칼튼은 침착하다 못해 기운이 다 빠진 사람처럼 차분했다.

“혹시 동부 대영주가 자네에게 뭐라고 했어?”

동부 대영주라면 혓바닥 하나로 사람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자존심이 강한 칼튼이,
자신을 사람 취급도 안 할 동부 대영주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을 테니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자네랑 모리슨만 두고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계속 있을걸.”

루이센이 자책하자 칼튼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았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루이센은 칼튼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칼튼은 대답 없이 루이센의 손에 살짝 기댔다. 부드러운 손길이 살살


달래듯 뺨을 어루만지자 칼튼은 오늘 하루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루이센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루이센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말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꺼려 할 것은 예상했지만 막상 닥쳐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귀족들은 자신을 천민이라고 무시하면서, 귀족을 능욕한 대역죄인으로 생각했다. 1 왕자나, 동부 대영주 휘하에
있는 귀족들이나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1 왕자 쪽 귀족들은 칼튼을 혐오할지언정 그의 쓸모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1 왕자가 그를 필요로


하는 걸 알아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선을 지켰다. 칼튼도 1 왕자가 자신을 보호할 걸 알아서 눈치껏 활개를 칠 수
있었고.

하지만 여기서는 동부 대영주가 대놓고 왕자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으니, 1 왕자의 수족이라서 더 미움을 받았다.

칼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히려 몸을 사리고 있는데도 귀족들은 경멸과 무시를 쏟아 냈다. 기사들은 시도
때도 없이 야유하고 시비를 걸었고 하인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며 피했다.

식사는커녕, 천막 하나도 내어 주지 않아서 칼튼은 노숙이나 다를 바 없이 하루를 보냈다. 그나마도 루이센이


자기 일행이라고 말을 해둬서 이 정도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거꾸로 매달려 매질을 당하고 들판에
버려졌을 것이었다.

동부 대영주의 일행에 껴서 하루를 보내면서, 칼튼은 새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실감했다.

자신은 여전히 바람 앞에 등불 신세였다. 무수히 많은 공을 세웠으나 아직 인정받지 못했다. 세상에 이름을


알렸지만 천민 출신 용병이라는 건 그대로였다. 악명도 그만큼 높으니 1 왕자든 루이센이든, 권력자의 비호가
없어진다면 수많은 원한이 그를 집어삼킬 것이 분명했다.

이건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그리고 루이센보다는 1 왕자의 옆에 남는 편이 더 생존에 유리했다. 이미 많은


공로를 세웠고 1 왕자에게 자신은 더 쓰임새가 많으니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니 칼튼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점점 뚜렷해졌다. 어차피 헤어질 거라면 이 감정도 정리하는
게 맞겠지.

칼튼은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칼을 반쯤 뒤로 넘겨 이마를 드러냈는데, 루이센의 갸름한 턱선이 드러나
자꾸 눈길이 갔다. 여전히 비현실적인 외모에 한결 단단해진 눈동자가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루이센이 예뻐서 칼튼은 한결 더 우울해졌다.

“내 천막으로 갈래? 나랑 있으면 아무도 자네에게 뭐라고 못할 거야. 좋은 와인도 있어.”

루이센은 칼튼의 팔을 잡아끌었다. 루이센에게서 살랑살랑 향수 냄새가 풍겨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현실이고
나발이고, 남자의 본능은 그냥 이대로 다 때려치우고 따라가라고 속삭였다. 그를 품에 안고, 향수 냄새에 섞인
살내음을 들이켜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사랑에 빠지면 어리석어진다더니. 칼튼은 그런 사람들을 비웃었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루이센은 어떤 마음으로 나에게 잘해 주는 거지? 이제는 자신이 없어도 될 텐데,
먼저 보러 와 주고, 대신 화를 내주고, 동부 대영주가 싫어하든 말든 자신을 챙겨 주었다. 칼튼이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혹시 루이센도 자신과 비슷한 마음이라면?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해 준다면 또 다른 결정을 해도 좋지 않을까?

이런 것도 다 미련이었다. 사실 루이센이 자길 좋아하면 또 어쩔 건가. 솔직히 싸움만 잘하는 자신이 아니에스


공작가 같은 평화로운 농경 지역에 가서 뭐 얼마나 대단한 걸 할 수 있다고.
그럼에도 칼튼은 기대를 품었고, 조심히 물었다.

“공작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실 정말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 거나, 나와의 미래를 생각해 봤냐 같은. 하지만


너무 직설적이고 낯간지럽기도 하고, 아주 약간은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올까 두려웠다.

이런저런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질문에 비해, 루이센의 대답은 간단했다.

“응? 1 왕자랑 정리할 거 하고, 악마숭배자도 잡고……. 할 일을 하겠지?”

갑자기 왜 이런 걸 물어보지? 루이센은 약간 의아했지만 아무 생각도 없었다. 칼튼은 인상을 쓰며 조금 더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 나면요? 다 정리가 되면.”

“글쎄. 공작령으로 돌아가야지?”

구체적으로 뭘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막장으로 치달은 동부 상황을 보고 총관의 편지를 받으면서 결심한 것은
있었다.

“공작가의 주인이자 대영주로서, 내 책임이 막중하다는 걸 느꼈어. 그러니까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공작령으로 돌아가서 내 역할을 제대로 다 해 보고 싶어.”

루이센은 나름 자신 있게 포부를 밝혔으나, 칼튼의 표정은 미묘했다.

“그럼 저는요?”

“자네?”

루이센은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칼튼은 야망이 있고 그걸 뒷받침해 줄 능력도 있었다. 손속이 잔인하고 욱하는 성질머리가 단점이었지만 최근
들어 많이 부드러워지기도 했다. 칼튼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꼬투리만 잡히지 않고, 자기 기반을 잘 다지면 회귀
전처럼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세상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회귀 전처럼 되는 일은 어떻게든 내가 막아 줘야지.’

칼튼이 그답지 않게 조마조마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별걸 다 묻는구나, 싶었는데
수도로 돌아갈 날이 부쩍 다가오니 칼튼도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떨어져 있던 하루 동안 대체 얼마나
사람들이 괴롭혔길래 안 그런 칼튼이 약한 소리를 할까.

“자네의 공로가 확실하니 1 왕자도 그걸 인정할 거야. 왕성에 제대로 된 관직도 얻고, 작위도 받아 내야지. 너무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있잖아.”

“공작님이요?”

“그럼. 자네가 날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나도 은혜를 아는 사람이야. 자네가 왕성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나도


힘을 써 볼게.”
루이센은 칼튼을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더 밝게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러나 칼튼의 표정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이
차갑게 굳었다.

‘이 사람은 당연하게 헤어질 걸 생각하고 있구나.’

루이센은 공작가로, 칼튼은 1 왕자의 밑으로. 루이센에게는 그게 너무도 당연하여 그 이상의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별이 전제되자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말조차 선을 긋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칼튼은 자신의 팔을 잡았던 루이센의 손을 떼어 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루이센은 반사적으로 따라가려


했으나 칼튼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는 차마 루이센을 볼 수 없다는 듯이 시선을 피하더니 휙 돌아서서 자리를
떠나 버렸다.

“칼튼…….”

루이센이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칼튼이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루이센은 당황했다. 돌아서기 전에 본 칼튼은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파르르 떨리던 눈동자에 루이센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루이센은 뒤늦게 허공에 손을 뻗어 보았다. 그러나 차마 그를 붙잡지 못하고, 다만 하염없이 칼튼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

다음 날.

루이센은 지독한 숙취를 느끼며 깨어났다.

어젯밤 칼튼이랑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혼자 천막으로 돌아왔다. 천막 안에 있어야 할 그가 흙투성이가 되어


나타나니 작은 난리가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이센은 갑갑한 마음에 칼튼이랑 마시려고 빼놓았던 와인을
혼자서 다 마시고 취해서 뻗어 버렸다.

루이센은 빙빙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식당의 용도로 쓰이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동부 대영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잔소리를 해 왔다.

“자네 꼴이 그게 뭔가? 어젯밤에는 흙투성이로 돌아다녔다면서? 늘 대영주의 체면을 신경 쓰라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예, 예.”

루이센은 얼이 빠져서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동부 대영주는 루이센의 반응이 시원찮았는지, 기어코


자신의 손녀를 불러내 혼을 냈다. 루이센을 잘 챙기랬더니 뭘 했냐고 하면서 오늘 하루 종일 루이센 옆에 붙어
직접 시중을 들며 사죄하라고 명했다.

손녀를 루이센 옆에 붙여 놓으려는 수작이 뻔히 보였으나, 루이센은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다. 동부 대영주가
수작을 부리든 말든 루이센 머릿속에는 칼튼만 가득했다.

헤어질 때 보았던, 상처받은 칼튼의 얼굴만이 자꾸 떠올라 괴로웠다.


‘왜 그러지? 진짜 무슨 일이 있나?’

더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통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95 화

루이센은 어젯밤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기분이 안 좋은 거 같았지.’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온 기사들을 그냥 보내 주다니, 칼튼답지 않은 일이었다. 루이센을 찾아오지도 않고 그 큰


덩치로 눈에 안 띄게 다니는 것도 그렇고. 확실히 그는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원흉은…….’

루이센은 동부 대영주를 바라보았다. 동부 대영주는 계란 요리를 먹고 있다가, 뭐 문제 있냐는 듯이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 이 사람이라면 칼튼이 이상할 만도 하다.

“저 없는 자리에서 제 일행에게 뭐라고 하신 겁니까?”

루이센이 직접적으로 묻자 동부 대영주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젯밤에 그놈을 만났다더니, 그치가 자네에게 고자질이라도 했나?”

“그 사람이 고자질을 했다면 제가 지금 공작님께 물어보고 있겠습니까?”

“몸가짐을 신경 쓰라고 말했을 뿐이야. 내 일행으로 받아들였으니 그 정도 이야기는 할 수 있지 않나.”

당신이 그렇게 순한 말만 할 리가 없을 텐데? 루이센이 빤히 바라보자 동부 대영주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자네랑 그자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어.”

“아, 사랑의 도피인지 뭔지 그거 말입니까?”

“알고 있었나?”

“예. 들었습니다.”

모리슨에게 이미 한 번 들은 이야기였다. 길거리에 떠도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


동부 대영주도 알고 있을 정도면 대체 이 소문이 어디까지 났다는 건가.
“그런 소문이 있는 걸 알고도 밤중에 쪼르르 그놈을 찾아갔나?”

“헛소문인 거 알 사람은 다 압니다.”

루이센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소문을 지어낸 사람은 칼튼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칼튼처럼 야심 찬 남자가
사랑의 도피 같은 걸 할 리가 있나. 그는 치열하게 살아왔고 그렇게 얻은 성과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었다.
사랑 하나에 그 모든 것을 내던질 정도로 낭만적이진 않았다.

“대체 왜 매번 자네는 주변에 있는 남자들이랑 소문이 나는 거야?”

“또 뭐가 있었습니까?”

“그 배신자 시종 놈이랑도 말이 있었지 않나!”

“예? 루거랑 제가요?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 건 됐어!”

동부 대영주는 말도 꺼내기 싫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이게 다 아직 자네가 결혼을 안 해서야.”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튀어?

“명문가에서 참하게 자란 아가씨를 부인으로 맞아서, 아이도 많이많이 낳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후손을 많이
남기는 것도 하나의 의무란 말일세. 자네 집안의 대를 이어야지.”

동부 대영주가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 기미를 보이자, 루이센은 언제나처럼 한 귀로 흘려들으려고 했다. 그러나
돌연 동부 대영주가 몹시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내 손녀는 어떤가?”

“예?”

루이센은 당황했다. 좀 전에 혼나고, 오늘 하루 종일 루이센의 시중을 들기로 한 그 손녀분 말인가요? 지금도


그녀는 루이센 옆에서 차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본인의 결혼 이야기가 나와 당황스러울 법도 한데, 그녀는
침착하게 찻잔에 차를 따랐다.

동부 대영주 쪽에서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되었던 모양이다.

“저는 결혼 생각은 아직 해 본 적 없습니다만…….”

회귀 전에는 자기 한 몸 챙기느라 벅찼고, 회귀한 뒤에도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빴다.

“진지하게 생각해 봐. 둘이 나이도 비슷하고 집안도 비슷하니 이만한 혼처가 또 없을 거야. 자네 집안은 손도
귀하고, 직계 자손은 자네뿐이니까 서둘러야지.”

“제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좀 그렇습니다.”

“당장 혼례를 치르자는 건 아니야. 지금 상황을 보니, 겨울이 지나기 전에 국상을 치르게 될 거란 말이지.”
국왕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건 루이센도 알고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왕의 즉위식을 연달아 치르고 나면, 자네도 봄이 오기 전에 공작령으로 돌아갈 게 아닌가. 그 전에 말을


맞춰 두자는 걸세.”

동부 대영주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지만 루이센은 따라가기 벅찼다.

기본적으로 루이센은 당장 지금 순간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습관적으로 깊이 생각을 안 하는 탓에


미래에 대해서는 그냥 머릿속이 백지 상태였다.

그냥 악마숭배자를 때려잡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잘살아 보자, 정도의 두루뭉술한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저는…… 아직은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만…….”

“그래. 한번 생각해 보라고.”

루이센은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결혼이라. 이전처럼 망나니로 살 게 아니라면 한번 생각해 볼 문제긴


하지만 생각해 보겠노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뜬금없이 칼튼의 얼굴이 떠올랐다.

‘음, 갑자기 왜 칼튼이 떠오르지.’

아무튼 칼튼이 동부 대영주의 말에 상심하여 평소랑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거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어제의 그
반응은 분명 자신 때문이라는 건데.

동부 대영주는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잔소리가 새로운 잔소리를 불러오는 그야말로 잔소리 지옥이었다.
시중드는 시녀들까지 안쓰럽게 볼 지경이었으나 루이센은 딴생각에 잠겨 들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냔 말이지.

칼튼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섬세한 면이 있었다. 남들이라면 무던하게 넘길 작은 징후도 놓치지 않았고, 남의
안색을 살피고 맞춰 주는 것도 능숙했다. 평생 외줄 타기를 하듯이 살아온 인생이니 남들보다 배로 예민할 터였다.

이런 성격은 루이센과는 정반대였다. 루이센도 인생의 쓴맛을 보면서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둔한
데다 남을 신경 안 쓰는 버릇이 잘 고쳐지지 않았다.

루이센이 아무리 눈치를 보고 머리를 굴려도, 평생을 쓴맛 속에서 살았을 칼튼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모르겠다!’

하지만 루이센은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성자님께 배웠다. 모르겠으면 괜히 지레짐작할 게 아니라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좋아. 아침 식사를 하고 칼튼을 찾아보자.’

칼튼의 마음이야 칼튼이 제일 잘 알지 않겠나? 그렇게 결심을 했으나, 상황은 루이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아침 식사가 끝나갈 무렵, 시종이 천막으로 들어왔다. 그는 인근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한 귀족이 동부
대영주를 뵙기를 청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자의 신분은 한미한 자작에 불과했지만 동부 대영주와 잘 지내고 있는
귀족의 사촌이어서, 알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루이센도 얼떨결에 동부 대영주와 함께 그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귀족은 온몸에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사치스러운 남자였다.

“안녕하십니까, 두 분 공작님. 이 몸, 로크스 보톤이라고 합니다. 자작이라는 작위를 이어받아 보톤 자작령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럼 보톤 자작인가. 얼마 전 영지에 큰 위험이 닥쳤었다는 이야기는 내가 들었네.”

“예. 다행히 대영주님의 은혜로 무사히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동부에 적을 두고 있는 귀족이라 그런지 동부 대영주는 관대하게 행동했고, 보톤 자작은 혀를 기름에 담근 것처럼


매끄럽게 아부를 했다.

루이센은 그 옆에서 가만히 보톤 자작을 바라보았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보톤 자작……. 보톤……. 어디서 들어봤는데……. 아!’

지난번에 칼튼이 쓰러뜨렸던 세 명의 기사. 악마숭배자들에게 죽어 구울로 이용당했던 그 기사들이 분명 보톤


자작의 기사들이라고 들었다.

‘영지를 버리고 달아났다더니, 멀쩡하잖아?’

안색이 칙칙한 데다, 그걸 가리려고 엄청나게 두꺼운 화장을 하고 있기야 하지만 사지도 멀쩡하고 살도
포동포동하게 올랐다. 보톤 자작을 칼튼이 봤으면 주변을 초토화 내놓고 혼자 팔자 좋은 귀족 나리라고 비웃었을
것이다.

“실은 이렇게 찾아뵌 것은 간곡히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입니다. 바쁘신 분들을 이렇게 찾아와 방해하여
송구스럽습니다만 저의 영지를 지나신다기에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보톤 자작의 본론이 나왔다.

‘영지며 가신들은 내팽개치고 동부 대영주에게 몸을 의탁하려나 보지?’

루이센은 속으로 비꼬았으나, 보톤 자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여기서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제 저택이 있습니다. 나랏일을 위해 험한 여행길에 오르셨는데,


하룻밤만이라도 제 저택으로 모셔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응? 자기 저택으로 초대를 하고 싶다고? 영지를 버리고 도망쳤던 게 아니었나?

가만히 있으려던 루이센도 이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자작의 사정은 나도 들은 게 있는데, 손님을 맞이할 상황이 되나?”

“잠시 영지를 비웠던 적은 있지만 지금은 다 괜찮습니다. 물론 귀한 분들을 만족시켜 드리기는 부족함이 있겠지만
최선을 다해 모시고자 합니다.”
보톤 자작은 동요하기는커녕, 자신감마저 내비쳤다. 동부 대영주는 자작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허허, 하고
웃었다.

“그 마음이 아주 기특하군. 자네의 성의를 봐서 하룻밤, 자네 저택에서 머물도록 하지.”

동부 대영주는 흔쾌히 허락했다. 루이센은 동부 대영주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닥거렸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하루빨리 왕성으로 가야 하는데요.”

“괜찮네. 이 늙은이가 몸이 따라 주지 않는데 설마 그걸로 질책을 하겠는가. 서둘렀다가는 전하가 아니라 내


장례를 먼저 치를 판이야.”

루이센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럴 줄 알았어. 마을 단위로 사람을 끌고 호화로운 여행을 하고


있으면서도 동부 대영주는 자신이 들판에서 천막을 치고 지낸다는 사실에 불만이 아주 많았다.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여행이 힘들기야 하겠지만.

어쨌든 그러던 차에 조금 소박해도 귀족의 저택에서 쉬어갈 수 있으니 동부 대영주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먼저 찾아와 대접해 드리고자 한다고 하는 보톤 자작도 기특해 보였을 것이고.

보톤 자작 입장에서도 동부 대영주와 루이센, 두 명의 공작을 한 번에 모시고 인연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이니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당연했다.

여러모로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으나 루이센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자꾸 다리에서 만난 그 기사들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하필이면 그들이 죽어서도 악마숭배자들에게 이용당하다 죽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악마숭배자들에 대해 비밀로 하고 있는 상황에서, 뭔지 모르겠지만 찜찜하다는 것만으로는 동부 대영주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는지라 루이센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96 화

동부 대영주의 일행은 보톤 자작의 저택이 있다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잘 수 있겠다고 즐거워하며 보톤 자작이 약속한 저녁 만찬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들뜬 분위기 속에서 루이센은 계속 뭔지 모를 찜찜함을 안고 일행을 따라갔다. 동부 대영주에게 몇 번인가


조심해야 하지 않냐고 말을 꺼냈으나 오히려 괜히 까탈스럽게 군다는 타박만 돌아왔다.

동부 대영주는 악마숭배자의 존재와 그들이 루이센을 노리고 있음을 모르기에 위기의식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동부 대영주가 거느린 기사들은 모두 뛰어났고, 그를 따르는 귀족들의 사병 규모도 상당했으니 말이다.

루이센의 걱정과는 상관없이 일행은 보톤 자작의 저택이 있는 장원에 도착했다. 농경지를 지나면 촌락과 대장간,
곡물창고 같은 시설이 보였다. 작게 교회가 하나 있고 그 앞에는 영주관이라고 불리는 보톤 자작의 저택이 있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규모의, 딱 전형적인 장원의 모습이었다. 보톤 자작의 저택 역시 무난하게 생긴 귀족의


저택이었다. 두 대영주의 방문을 위해 여기저기에 꽃을 가져다가 치장해 둔 정성이 돋보였다.

어디를 봐도 평범하였다. 괜한 걱정이었나? 루이센은 긴장을 내려놓았다.

보톤 자작은 저녁에 연회를 열기로 하고, 그전까지는 각자에게 자유롭게 쉴 시간이 주어졌다. 루이센은 방을
빠져나와 칼튼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칼튼아, 어디 있니…….’

루이센이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칼튼은 발견하지 못했고, 쓸데없고 귀찮은 귀족들만 달라붙었다. 그러다가
루이센은 우연히 모리슨을 발견했다.

모리슨은 하인들과 같이 있었다. 동부 대영주의 무리에 합류한 지 고작 삼 일이 지났을 뿐인데, 그는 여기


태생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하인 무리에 녹아들어 있었다. 툭툭 치면서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은 꼭 절친한 친구
같았다.

‘저래 보여도 수상한 거 없나 눈에 불을 켜고 파헤치고 있겠지.’

태연하게 악마숭배자의 발목을 부쉈다고 말하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번갈아 보자면 가볍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모리슨.”

“아, 공작님!”

“물어볼 게 있는데.”

루이센이 다가가자, 다른 하인들은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빠르게 어디론가 피했다.

“칼튼 어디 있는지 알아?”

“칼튼이요…….”

모리슨은 루이센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무성한 나무 뒤쪽으로 번쩍이는 한 쌍의 안광과 눈이 마주쳤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 눈빛. 칼튼이었다.

사실 칼튼은 하루 종일 루이센을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기척을 완전히 죽이자 아무도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동부 대영주의 기사들은 모두 실력자였지만 칼튼만큼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어젯밤, 루이센과 헤어지고 돌아와 칼튼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누군가를 깊게 좋아해 보기는
처음인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너무 대단하고 무심하기 짝이 없는지라 제대로 고백도 못 해 보고 차여 버렸다.

실연의 아픔은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차라리 트롤이랑 이박삼일로 싸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가슴 안쪽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고통은 참는 데 익숙한 칼튼이라도 버티기 어려웠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싸구려 독주를
들이켜는지 처음으로 이해가 갔다.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정확히 어떤 관계라고 정의 내린 적은 없다. 서로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칼튼은 루이센과 자신의
사이에 연인과 비슷한 특별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헤어지는 걸 이야기하지?’

칼튼은 이해가 안 되어서 머리를 싸맸다가, 그럼 왜 키스는 다 받아 줬지? 날 가지고 논 건가? 싶어서 화가 나
벌떡 일어섰다.

‘아니지. 그렇게 못된 사람은 아니야. 그냥…… 나만큼 깊은 마음이 아니었던 거겠지.’

그럼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은 뭐였나. 칼튼은 허탈해져 주저앉았다.

‘내가 별로 매력이 없나.’

칼튼은 우울해져서 축 늘어져서는, 같은 생각과 행동을 반복하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혼자 난리를 쳤다. 그러다
보니 밤을 꼴딱 지새웠다.

해가 떠오를 때쯤이 되자, 아무리 칼튼이라도 지칠 수밖에 없었고 제법 냉정하게 머리가 돌아가게 되었다.

‘이게 무슨 한심한 꼴인지…….’

루이센의 마음이 자신처럼 깊지 않으니, 거기에 인생을 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내
인생을 챙겨야 한다. 더는 루이센에게 휘둘리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런데 각오를 하고 나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제 혼자 돌려보냈는데 천막에 잘 들어갔나?’

당연히 잘 돌아갔을 것이다. 먼 거리도 아니고, 사람도 많았고, 루이센이 잘못되었으면 진작에 난리가 났을
것이다.

냉정하게 판단하면서도 이런 반론이 튀어나왔다.

‘근데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잖아?’

지금까지 루이센이 어땠던가. 밤중에 혼자 숲을 지나다가 고블린에게 죽을 뻔하지 않나, 낙오되어 폭도들에게
둘러싸이지 않나, 루거에게 납치당할 뻔하고, 모리슨에게는 납치당했고.

눈만 떼면 사건 사고가 발생했다. 그렇다고 루이센 본인이 가만히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번번이 칼튼의
예상을 깨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루이센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칼튼은 몹시 불안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동부 대영주의 일행 한가운데서 최고의 보호를 받고 있을 루이센이 위험할 일이 뭐가
있겠냐마는. 본래 불안이란 이성으로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칼튼은 새벽녘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루이센의 천막에 몰래 숨어들어 갔다. 술에 곯아떨어진 루이센은 와인


냄새를 풍기며 쿨쿨 자고 있었다. 잠든 루이센의 얼굴은 평온하고 사랑스러워, 밤새 그를 괴롭혔던 모든 고통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칼튼은 한참 루이센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종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조용히 천막을 빠져나왔다.

‘괜찮은 걸 봤으니 이제 됐어.’

그래야 했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정신이 들어보니 칼튼은 루이센 주변만 맴돌고 있었다.

‘숙취가 심한 거 같은데 저러다가 넘어질 수도 있잖아?’

‘오늘따라 멍한데, 저러다 일행을 놓치면 어떻게 해.’

‘보톤 자작의 저택은 처음 오는 걸 텐데, 낯선 곳에 어떻게 혼자 둬.’

이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 가면서.

루이센은 혼자가 아니었고, 그를 돌보고 챙길 시종과 기사들을 데리고 다녔지만 그럼에도 칼튼은 루이센이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느껴져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하필 오늘따라 예쁘긴 또 얼마나 예쁜지. 평소와 달리 우수에 찬 눈빛이 그윽하여, 괜히 지켜보는 사람을
더 애가 타게 만들었다.

‘수도에 가면 어차피 보기 어려워질 테니까…….’

칼튼은 계속해서 새로운 이유를 대가면서 루이센을 쫓았다. 루이센이 자신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모습이
기뻤다. 아직은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하며,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의미인 거 같아 가슴이 벅차기도 했다.

‘마음 접기로 한 거 아니었나? 지금은 루이센 쫓아다닐 게 아니라 내 살길 마련하려고 이것저것 시도해 봐야 하지
않아?’

냉철한 이성이 이렇게 경고를 하였지만, 몸은 ‘응, 몰라. 알 게 뭐람. 루이센 볼 거야.’라고 말하듯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게 뭐 하는 건가. 칼튼은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작은 강아지가 이러면 모를까, 다 큰 시커먼 남자가 뒤를


쭐레쭐레 따라다니고 있는 꼴은 징그럽지 않은가.

그런데 그 모습을 모리슨에게 딱 들켜 버렸다. 모리슨과 눈이 마주친 순간 칼튼의 자괴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모리슨이 루이센에게 말을 할지 말지 망설이는 것이 보였다.

칼튼은 황급하게 손을 놀렸다. 검지로 모리슨을 가리키고,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말하면 죽여 버릴 거야.’

무시무시한 경고에 모리슨은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걸 느꼈다. 저런 살벌한 걸 등 뒤에 달고 다니면서도 눈치채지


못한 루이센도 대단했다.

모리슨은 어제 두 사람만 남도록 자리를 비켜 준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그는 남의 로맨스를


좋아하는 것이지 관음증이 있는 건 아니라 냉큼 자리를 비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벌어진 이 꼴을 보아하니, 대충 눈치가 가는 게 있었다.


‘전에 칼튼한테 별 생각 없이 한 말이 문제가 됐구나…….’

모리슨은 정말 칼튼과 루이센이 보기 좋아서 한 말이었다. 두 사람의 미래에 난관이 있을 테니, 잘 극복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서! 악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고 자신이 가볍게 던진 말이 갈등으로 번질 거라는 생각도 못
했다. 칼튼이 보기보다 섬세하고, 루이센이 둔해 빠진 성격이라는 것을 간과한 결과였다.

“뭘 보는 거야?”

모리슨이 자꾸 먼 산을 보니까 루이센도 뒤를 돌아봤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성한 나무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아닙니다. 안 그래도 공작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떻게 말씀을 전해야 하나 했는데 먼저
찾아와 주셔서 다행입니다.”

모리슨은 말 돌리기를 선택했다. 루이센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기 전에 얼른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냈다.

다리를 점거하고 강도짓을 하다가, 죽어서는 악마숭배자들에게 조종당하다가 버려진 기사들의 신분패였다. 구울이
된 시체를 처리하면서 유품 삼아 따로 챙겨 둔 것이었다.

“이걸 보톤 자작님께 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일단은 자작님의 기사이고, 유족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저보다는 공작님이 하시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아, 그렇지.”

보톤 자작의 기사들을 죽인 건 루이센 일행이 아니었지만, 평민인 모리슨이 자작에게 직접 말하기는 어려운
사연이었다. 잘못하면 기사들을 죽였다고 누명을 쓸 수도 있고.

루이센이 말을 전하면 보톤 자작도 그런 트집을 잡진 못하고 무던하게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걸 전하면서 보톤 자작의 반응을 좀 봐 주셨으면 합니다.”

“반응을?”

“네. 아무래도 이렇게 멀쩡한 영지를 두고, 기사들이 강도짓을 했다는 게 이상해서요. 하필 그 기사들이
악마숭배자들에게 이용당한 것도 마음에 걸리고요.”

“알겠네. 조금 있으면 연회가 시작되니 이걸 전해 주며 슬쩍 떠보면 되겠어.”

“부탁드리겠습니다.”

루이센은 기사들의 유품을 챙겨 넣었다. 슬슬 자신도 연회 준비를 위해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이만 가 보지. 혹시 칼튼을 보면, 꼭 내게 찾아오라고 전해 줘.”

“아…….”

루이센은 마지막까지 당부하고 돌아갔다. 칼튼도 슥, 루이센을 따라 사라졌다.

‘지금도…… 바로 뒤에…… 칼튼이 있는데요…….’

미처 말하지 못한 진실이 모리슨 입안에 맴돌았다.


97 화

아쉬운 마음에 주변을 더 돌아다녔지만 칼튼은 찾을 수 없었다. 루이센은 허탈한 마음에 터벅터벅 복도를 걸었다.

아니, 이렇게 못 찾을 수가 있나? 일부러 칼튼이 있을 만한, 사람 없는 곳만 골라서 찾아다녔는데도 안 보였다.

‘혹시 날 피하나?’

루이센은 우뚝 멈춰 섰다.

아무리 일행이 많아도 이렇게까지 못 찾는다는 것은 이상했다. 칼튼이 지금까지 한 번도 먼저 찾아오지 않았던
것에까지 생각이 이르자, 칼튼이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의심이 더 확신을 얻었다.

‘으음……. 이걸 어쩐다…….’

칼튼이 자신에게 생각보다 더 크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루이센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루이센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려는데 어디선가 쿵, 쿵 하는 소음이 들려와 집중을
방해했다.

‘뭐야, 어디서 쥐라도 돌아다니나.’

루이센은 짜증스럽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가 선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보톤


자작가의 상징물이 그려진 태피스트리가 벽에 붙어 살랑이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라 어두워지고 있는 탓인가.
텅 빈 복도는 유난히 으스스해 보였다.

뜬금없이 며칠 전 루거 패거리와 마주했던 버려진 마을이 떠올랐다. 갑자기 그게 왜 떠오르는 건지.

‘좀 추운가?’

루이센은 괜스레 팔을 슥슥 쓰다듬었다.

“공작님!”

복도 저 끝에서 시녀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칼튼을 찾는 걸 방해받을까 봐 루이센이 몰래 혼자 나온 탓에


시녀들이 그를 애타게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녀들은 루이센을 둘러싸고 울먹였다.

“말씀도 없이 어디 가셨던 거예요.”

“공작님이 그렇게 혼자 다니시면 저희가 영주님께 혼이 납니다. 제발 필요하신 게 있다면 저희에게 명해


주세요.”

시녀들이 눈물로 호소하니, 루이센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공작님은 찾았습니까?”

루이센의 호위를 맡은 동부 대영주의 기사들과 보톤 자작이 잇따라 나타났다. 시녀들이 루이센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도움을 구한 모양이었다. 그냥 혼자 저택 안을 다녔을 뿐인데 이게 무슨 난리인지.

하지만 보톤 자작과는 볼일이 있었기에 마침 잘되었다.

“잠깐 나 좀 보지.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저를요?”

루이센의 말에 보톤 자작은 눈을 둥글게 뜨며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이신지……. 혹시 저택에 뭐 이상한 거라도 있었습니까?”

“음? 아니. 이걸 전해 주려고 했어.”

루이센은 보톤 자작에게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아까 모리슨에게 받은 그것이었다. 보톤 자작은 긴장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받고 풀어보았다. 안에는 죽은 세 명의 기사들의 신분패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뭡니까?”

보톤 자작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자네 기사들의 신분패잖아. 못 알아보는 건가?”

기사의 신분패는 영지민의 것과는 또 다르게 생겼다. 보톤 자작 가문의 문장이 찍혀 있고 청동으로 기사임을
상징하는 말과 창이 그려져 있다. 이걸 못 알아볼 리가 없을 텐데. 루이센이 의심스럽게 바라보자 보톤 자작이
급히 해명했다.

“아, 아뇨. 알아보죠. 제가 직접 하사한 건데. 그러니까 이걸 왜 공작님이 가지고 계신가, 그런 의미였습니다.
제 기사들과 인연이 있으신 겁니까?”

“며칠 전에 우연히, 자네 기사들을 만났네. 하나뿐인 다리를 점령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통행세를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고 있더군.”

루이센의 말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사가 되어 강도짓이라니. 기사 전체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행동에 절로 불쾌감이 들었다.

“그때는 잘 타일러서 다리를 건넜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버려진 마을에서 죽어서 발견이 되었어.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워서 화장을 치르고 유품 삼아 그것들만 챙겨 뒀네.”

“그러셨군요.”

보톤 자작은 침착하게 주머니를 챙겼다. 루이센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가문의 이름을 달고 있는


기사들이 불명예스러운 짓을 저질렀으니, 그것은 고스란히 보톤 자작과 자작 가문의 치부가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보톤 자작이 영지민을 상대로 강도짓을 했다는 말이 나돌 수도 있었다.

설사 보톤 자작이 관련 없다고 해도 자신의 기사들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도 모르는 아둔함이나, 기사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을 신랄하게 조롱받을 게 분명했다.

여기서는 안절부절못하면서 혹시 이 이야기가 퍼져 나갈까 걱정하고 루이센의 눈치를 봐야 맞았다. 물론 보톤


자작은 루이센의 눈치를 엄청 보고 있기는 하지만 뭔가 달랐다.

“하실 말씀이라는 게 이게 전부신가요?”

“그렇다네.”

보톤 자작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 꼭 안도의 한숨 같아서 루이센의 신경을 거슬렸다.

“자네의 기사들이 죽었다는데, 자네는 덤덤하군?”

“아, 예, 뭐. 원래 그렇게 충성스러운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사고도 많이 쳤고,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저를


따를 수 없다고 거의 버리다시피 했죠. 제 가문의 이름을 달고 강도짓을 한 것은 불쾌한 일이지만 이미 죽었다고
하니 처벌을 할 수도 없고. 더 큰 사고를 쳐도 이상할 게 없는 자들이라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가.”

루이센은 여전히 보톤 자작의 반응이 수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보톤 자작의 해명에 납득하는 눈치였다.

“슬슬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러 가셔야 합니다, 공작님.”

시녀의 말에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기사들의 유족이 유해를 찾고 싶어 한다면 날 찾아오라 전하게.”

“그런 일은 없을 거 같습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그래?”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보톤 자작은 이따가 연회장에서 보자며 정중히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루이센은 시녀들을 따라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어딘지 텅 빈 느낌이 드는 복도 너머로 보톤 자작의 뒷모습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유난히
으스스하여, 찬 바람이 스친 것처럼 서늘한 기분이 들게 했다.

***

저녁 시간이 되자 귀족들은 연회장으로 모였다. 동부와 남부, 두 대영주의 방문을 환영하는 연회였다. 귀족들은
보톤 자작의 연회에 그리 기대를 걸지 않았다. 보톤 자작의 저택은 유지가 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고
시간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보톤 자작의 연회는 아주 훌륭했다. 보톤 자작이 영혼을 끌어모아 준비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연회장의 장식은 아름다웠고, 달콤하고 좋은 향기가 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음식도 훌륭했고, 술은
이런 변두리 자작가에서 보기 힘든 고급품이었다.

기대가 없었던 만큼 기쁨도 컸기에 동부 귀족들은 크게 만족했고, 동부 대영주 역시 루이센의 앞에서 동부 귀족의
위세를 자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금방 흥겹고 들뜬 분위기가 만들어져서 다들 연회를 즐겼다.

그러는 사이 바깥에는 완전히 어둠이 내렸다. 칼튼은 나뭇가지에 앉아, 창문 너머 연회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귀족들이 예쁘게 차려입고, 절도있는 동작으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꼭 인형 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남자고 여자고 할 거 없이 혼신의 힘을 다해 꾸며 화려했지만 칼튼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루이센 한


사람뿐이었다. 빌려 입은 옷에 장신구 하나 달지 않았지만, 보석을 주렁주렁 단 사람들보다도 루이센이 더 빛이
났다. 비단 칼튼만의 콩깍지는 아닌 게, 다른 귀족들도 힐끔힐끔 루이센을 훔쳐보는 것이 잘 보였다.

루이센은 지루한 표정으로 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흘려넘겼다. 그런 무심함이 루이센을 더 고고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칼튼은 알았다.

‘저건 아무 생각도 안 하는 표정이네.’

뭘 저렇게 멍하니 있는 거지? 칼튼은 쿡쿡거리다가, 돌연 인상을 썼다. 루이센과 비슷한 또래의 귀족 한 놈이
루이센에게 음식을 권하면서 치근덕거리는 게 아닌가. 루이센은 또 거절하지 않고 받아먹으면서 놈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 받아먹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루이센이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칼튼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자신은 연회장에 발도 들이지 못하는데 내가 없다고 딴 놈이랑 시시덕거려? 질투에 속이 뒤틀리다 못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귀족 놈의 손이 루이센의 어깨에 닿았다. 칼튼은 바람난 배우자를 보는 것처럼 눈이 홱
돌아갔다.

그는 욕하면서 연회장에 난입하려다가 루이센이 놈을 밀어내는 걸 보고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동안 길러 온


인내심이 이럴 때도 도움이 되었다.

“돌겠네.”

칼튼은 욱해서 저도 모르게 부순 나뭇가지를 대충 던져 버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즐거웠다가 화냈다가, 실컷 휘둘리고 있는 꼴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루이센은 칼튼과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감정이 깊지 않다는 의미겠지. 그래서 칼튼은
사랑보다는 현실을, 불확실한 것보다는 확실한 것을 선택했다. 루이센과 거리를 두고 일찌감치 마음을 정리하기로
정했다. 자신이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니게 행동한단 말인가. 차이고도 단념하지 못하는 남자처럼 미련한 게 없는데,
내가 딱 그 꼴이라니.

칼튼이 자괴감에 파묻혀 훔쳐보기를 그만두려는데, 마침 루이센이 슬그머니 테라스로 나왔다. 칼튼이 올라와 있는
나무와 멀지 않은 거리였다. 정원 쪽이 어두워 루이센은 칼튼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말을 걸면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루이센은 언제나 칼튼의 예상 안에서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루이센은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테라스 난간을 넘었다. 연회장의 창문은 각각 별도로 분리된 테라스가 있었다.
루이센은 옆쪽 테라스로 건너가려고 난간을 넘어선 것이다.

문제는 루이센이 심각한 몸치라는 점이었다. 그는 자기 발을 어떻게 디뎌야 할지 몰라 허둥대다가 결국 난간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연회장은 2 층이었다. 옆 테라스와의 거리는 성인 남자 보폭으로 한걸음
정도였지만 루이센에게는 매우 벅찼다.

‘아니, 옆 테라스로 가고 싶었으면 연회장을 통해서 돌아가면 되잖아?’

또 무슨 환장할 일을 벌이려는 건가. 칼튼은 너무도 황당하여, 결심도 잊고 루이센에게 다가갔다.

98 화

칼튼은 나무에서 테라스로 뛰어내렸다.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오자 루이센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경계심
가득한 고양이처럼 인상을 쓰다가 상대가 칼튼인 것을 확인하자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칼튼은 아차, 했다. 루이센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는데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바로 다가가고 말았다.

‘내가 자길 쫓아다니고 있었다는 거 눈치채진 않았겠지?’

찔리는 게 있는 칼튼은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질문은 나중에 하고,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슬슬 좀 힘들거든. 응?”

루이센은 울상을 지으며 애원했다. 그의 팔은 갓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달달 떨리고 있었다.

‘이러니 내가 불안해서 눈을 뗄 수가 있나.’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 돌아갔으면 어쩔 뻔했나. 칼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루이센 앞에 섰다.

“팔 주세요.”

칼튼은 루이센의 팔을 잡아 자신의 목에 두르고, 난간 위로 올라서면서 루이센을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작은


웅덩이를 건너는 것처럼 간단하게 옆 테라스로 뛰어 넘어갔다.

안정적으로 착지한 칼튼이 루이센을 안전한 테라스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루이센은 팔을 풀지 않고 까치발까지
들면서 온 힘을 다해 칼튼을 끌어안았다.
“이제 놓으셔도 됩니다.”

루이센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랑한 뺨과 부드러운 머리칼이 칼튼의 목덜미에 스쳤다. 난데없는 어리광에
칼튼의 마음도 약해졌다. 눈앞에 두고도 그리워한 사람이었다. 마주 안은 루이센은 내내 밖에 있느라 차가워진
칼튼의 몸에 딱 맞게 따듯했다.

“왜 그러는데요? 응? 안에서 속상한 일이라도 있었어요?”

칼튼이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젯밤부터 내내 마음고생을 시킨 사람이 다정하게 달래 오자 루이센은


울컥했다.

찾아다닐 때는 죽어도 안 나타나 놓고, 포기하고 다른 일에 집중하려니까 나타나? 그것도 위기의 순간에 영웅처럼
멋지게 등장하고, 이런 건 반칙 아닌가?

루이센은 더 꽉 칼튼을 끌어안았다. 테라스로 나온 목적은 따로 있었으나, 간신히 만난 칼튼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반갑고 기쁜 만큼 괜히 서운한 기분도 들었다.

“놔주면 또 어디로 가 버릴 거지?”

“아니요. 제가 왜 그러겠어요.”

“날 피하고 있잖아.”

“그럴 리가요.”

“그럼 대체 하루 종일 어디 갔던 거야? 내가 얼마나 자네를 찾았는지 알아?”

알고 있다. 계속 지켜봤으니까. 칼튼은 다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날 찾았어요? 왜요?”

자신의 질문이 음흉하고 치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루이센의 입으로 확인을 받고 싶었다.

“어제 그렇게 가 버렸잖아. 무슨 일 있었나, 동부 대영주가 뭐라고 한 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그건……. 공작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요.”

“무슨 말을 그렇게 듣는 사람 섭섭하게 해?”

이제 내 뒤치다꺼리하기 싫다 이거야? 루이센은 욱해서 몸을 뒤로 빼고 칼튼을 바라보았다. 멱살이라도 잡을까


했는데 칼튼의 얼굴은 루이센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울적해 보였다.

“공작님은 이제 저 같은 건 필요 없지 않나요? 기사들도 있고 시종도 있고.”

“그럴 리가 없잖아.”

루이센은 양손으로 조심스레 칼튼의 뺨을 감쌌다. 칼튼은 루이센의 손목에 자신의 손을 얹었으나, 루이센의 손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사납고 위세가 넘치던 남자의 힘이 빠진 모습은 루이센의 가슴을 울렸다.

“다른 사람들이랑 왜 비교를 해. 자네는 내게 특별해. 전에도 이런 말을 했잖아.”


“글쎄요.”

부정에 가까운 애매한 대답이었다. 분명 좋은 이야기를 했는데, 왜 칼튼은 어젯밤처럼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것일까. 루이센은 갑갑한 마음으로 칼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칼튼이 천천히 속마음을 꺼냈다.

“……어젯밤에 그러셨잖아요. 공작님은 공작령으로 돌아갈 거라고. 저는 수도에 남고. 당연하게 이별을
말하시는데, 정말 제가 공작님께 특별한 사람일까요?”

“어…… 어?”

루이센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어젯밤에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오해가 무엇이었는지를. 루이센은 칼튼이 수도에
돌아간 이후 자리 잡는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가 회귀 전과 같은 비극을 맞이하지 않게 해
주겠다는 각오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칼튼이 걱정하던 것은 두 사람의 미래였던 것이다. 어젯밤 칼튼의 질문은 그냥 장래희망 같은 걸 묻는 게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루이센의 대답은 최악이었다.

연인 비스무리한 관계에서 한쪽이 ‘우리 계속 만나는 거지?’라고 묻는데 한쪽이 활짝 웃으면서 ‘아니? 당연히
헤어지지!’라고 대답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아닌가! 그래 놓고 같이 술 마시자고 꼬시고. 이거 완전
쓰레기 아니야? 근데 그게 나였네?

“그런 뜻 아니야!”

루이센은 황급히 부정했다.

“난 자네가 잘되었으면 하고, 그렇게 생각해서 대답한 거였어. 그런 의미로 물어본 건 줄 몰랐어. 자네도 알잖아.
내가 자네만큼 생각이 깊지 못한 거. 그렇게 돌려서 말하면 난 못 알아듣는단 말이야…….”

마지막에 가서는 거의 울먹이다시피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서, 칼튼은 순간 자신이


잘못한 거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단순한 편인 루이센에게 어젯밤, 칼튼의 질문은 너무 복잡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신경 써야 했는데.

“그럼 이번에는 확실하게 여쭤볼게요.”

칼튼은 용기를 내었다. 자신이 아무리 눈치가 비상하다고 해도 루이센의 속마음은 루이센 본인만이 제대로 알고
있지 않겠는가.

“공작님이랑 제가 함께하는 미래가 가능하다 생각하나요?”

“그거야…….”

루이센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왕성에 가 봐야 일 년에 한두 번. 칼튼이 그때마다 수도에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잘해도 일 년에 한 번, 자칫 어긋나면 몇 년씩 못 만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칼튼이 자신을 따라온다면? 이미


한 번 공작가를 점령한 전적이 있는 그를 공작가의 기사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루이센은 그에게 작위도 영지도
줄 수 없었다. 그건 왕의 권한이니까. 루이센을 따라와 봤자 칼튼은 정부로나 남을 뿐.

반면에 칼튼이 1 왕자의 수족으로 충실히 남는다면, 계속 공을 세워 승승장구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작위와
영지는 물론이거니와, 칼튼의 재능이라면 왕국군을 통솔하는 대장군의 직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물론 칼튼이 작위를 받고, 아니에스 공작령과 가까운 쪽으로 영지를 하사받는다면 문제가 없어지겠지만.

‘지금 수준으로는 어렵겠지…….’

루이센이 회귀 후 활약한 탓에 남부는 무척 안정적이었고, 영주를 잃고 버려진 영지도 없었다. 더구나 남부는
작물이 잘 자라 모두가 눈독 들이는 땅이니 어떻게 한 자리가 난다고 해도 칼튼에게까지 갈 일은 없었다.

결국 두 사람, 각자에게 최선의 선택을 하다 보면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난 자네랑 헤어지기는 싫어.”

루이센은 칼튼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며 끙끙댔다. 그와 대조적으로 칼튼은 환하게 웃었다.

‘헤어지려는 게 아니었어. 날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루이센도 진심으로 자신과 함께하기를 바란다는 그 사실만으로 칼튼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들은 다
잊었다. 칼튼은 기쁜 마음으로 루이센의 뺨에 쪽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루이센이 이게 미쳤나, 싶어 칼튼을
바라보았다.

“나 지금 심각한데.”

“그게 좋아서요.”

루이센은 무슨 소린가, 싶어 칼튼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다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나 가끔 자네가 너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

“저도 가끔 그래요.”

“그래…….”

대화와 소통. 성자님이 언제나 강조하던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루이센은 다시금 깨달으며 외팔의
순례자의 현명함에 감탄했다.

“아무튼……. 나도 더 고민해 볼게. 수도에 도착해도 한동안은 거기 머물 거고. 악마숭배자며 그 배후며, 아직


해결할 문제들이 있으니까.”

“네.”

“수도에 간다고 자네를 나 몰라라 하지 않을 거야. 거기 가면 다 내 수하들이니 지금처럼 몸 사릴 일도 없을


거고.”

안심하라는 의미에서 루이센은 칼튼에게 입을 맞추었다. 몇 번이고 입술을 겹치면서, 오해를 완전히 털어 버렸다.

칼튼은 루이센을 끌어안고 있다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대체 왜 테라스를 넘어가려고 한 건데요?”

“아! 맞다.”
칼튼이 튀어나와서 잠깐 잊고 있었는데, 본래 루이센이 테라스로 나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

“사람들 몰래 연회장을 빠져나가려고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보톤 자작이 수상해서 좀 알아보려고.”

늘 루이센은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가 연회장을 빠져나가 뭔가를 한다면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그래서 루이센은
혼자 쉬고 싶다고 테라스로 들어왔다. 사람들 모르게 옆 테라스로 넘어가서, 그 옆의 기둥으로 몸을 숨기고
가까이 있는 하인들이 드나드는 통로로 빠져나간다는 계획이었다.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계산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그만큼 이 문제가 중요하다는 의미기도 했다.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보톤 자작을 좀 더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확실히 좀 수상하긴 하죠.”

루이센이 보톤 자작에게 기사들의 유품을 전해주는 장면을 칼튼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칼튼 역시 보톤 자작의
대응이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치? 그것만이 아니라니까.”

루이센은 보톤 자작을 연회 내내 주시했다. 보톤 자작은 대영주를 둘이나 모시는 행운을 거머쥔 하위귀족답게
열성적으로 비위를 맞추었는데, 그냥 봐서는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루이센이 보톤 자작을
눈여겨보는 것을 발견하고 한 귀족이 다가왔다.

“아까 공작님한테 치근덕대던 그놈이요?”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래서요?”

찔리는 게 많았던 칼튼은 잽싸게 말을 돌렸다. 루이센이 둔한 것은 이럴 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루이센은


아무 의심도 없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99 화

“일부러 보톤 자작을 칭찬했지.”

같은 편이 공격을 받으면 감싸지만, 그놈이 높으신 분 눈에 들어 자신보다 더 잘나갈 거 같으면 사정없이


물어뜯는 것이 바로 귀족의 섭리였다. 루이센도 그걸 알고 약간의 재치를 발휘한 것이다.

“그랬더니 예상대로 보톤 자작 험담을 늘어놓더라. 그 사람 말이, 이 저택에 보톤 자작 말고는 아무도 없다고


하는 거야.”

“아무도요?”

“응. 하인도, 병사도, 하다못해 보톤 자작 가족들까지도! 연회장 봐 봐. 시중드는 하인들, 전부 동부 대영주


쪽 사람들이야. 요리사도 그렇대.”

위세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동부 대영주기에, 군소리 없이 보톤 자작에게 일할 사람들을 빌려주고 연회 준비를


도왔다는 것이다.

“정말…… 그건 이상하네요.”

아무리 난리를 겪고 도망쳤다가 돌아왔다지만, 귀족의 저택에 귀족 한 명만 달랑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영지민이라도 데려와서 시중을 들게 시키는 법인데.

“아무튼 수상하니까, 한번 돌아다녀 보려고.”

루이센은 살짝 머뭇거리다가 칼튼의 옷소매를 쥐었다.

“나 혼자 보낼 거 아니지?”

“당연히 같이 가야죠.”

혼자 보냈다가 이번에는 저택 벽에 매달려 있을지 모르는데. 칼튼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루이센과 칼튼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연회장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보톤 자작의 저택은 귀족의 험담대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역사가 깊은 저택은 그나마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텅 비자, 존재만으로 스산한 분위기를 풍겨 왔다.
두꺼운 태피스트리를 뚫고 전해지는 냉기가 싸늘하게 피부에 와 닿았다. 어디가 이상하다고 딱 짚어 지적할 수
없지만 기묘한 분위기였다.

두 사람의 목적지는 아까 루이센이 보톤 자작과 대화를 했던 그 복도였다. 그때 보톤 자작은 할 말이 있다는


루이센에게 ‘저택에 이상한 게 있더냐’고 물어봤다. 맥락을 짐작할 수 없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자신의
저택에 이상한 게 있다는 걸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을까.

복도에 도착한 다음 가만히 소리를 죽이고 서 있자, 다시 통, 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쥐인가 보다, 하고 무심코 지나쳤을 만한 소리였다. 하지만 칼튼의 예민한 감각은 피해갈 수 없었다.

“저쪽에서 들리는데요. 뭐가 계속 반복적으로 부딪히는 소리에요.”

칼튼이 가리킨 소리의 진원지는 보톤 자작의 집무실이었다. 칼튼이 먼저 칼을 꺼내 들고 경계를 하면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루이센은 칼튼의 뒤에 딱 붙어서 따라갔다.

보톤 자작의 집무실은 빚쟁이라도 왔다 간 것처럼 아수라장이었다. 책이나 종이들이 바닥에 흩날려 있고, 그 위로
화분과 장식품들이 쓰러져 있었다.

통, 통, 통.

집무실 안쪽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그 문에서부터 규칙적으로 소리가 들려왔다. 칼튼은 루이센을 기다리게 하고,
문으로 다가갔다. 루이센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서서 집무실 안을 돌아보았다.

‘다른 이상한 게 있지는 않나?’

루이센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벽면에 걸린 초상화들이었다. 역대 보톤 자작들의 초상화로, 가장 오래된 선조부터


최근까지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집무실을 역대 가주들의 초상화로 장식해 두는 것은 흔했다. 아니에스
공작가만 해도 선조부터 루이센의 초상화까지 빼곡하게 걸려 있으니까.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네.’

조상과 후손이라 그런지 역대 보톤 자작들의 얼굴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거기서 루이센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빠르게 초상화를 훑다가 마지막, 현재 보톤 자작의 초상화가 있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이 사람?”

가장 마지막에 자리 잡고 있는, 당대 보톤 자작의 초상화는 루이센이 만난 보톤 자작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초상화라는 게 미화가 들어가다 보니 본래 얼굴과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건 그 정도가 아니었다. 루이센이 만난
보톤 자작의 화장이 워낙 두껍고 진해서 헷갈리긴 했지만, 잘 살펴보면 턱의 모양, 이목구비의 생김새, 눈동자
색, 모든 게 다 달랐다.

내가 뭘 본 거람? 루이센은 너무도 당황하여 칼튼을 불렀다.

“칼튼…… 여기 와서 이거 봐 봐.”

쿵!

그때 집무실 안쪽 방에서 거대하고 두툼한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공작님, 이리로 와서 보셔야겠습니다. 여기 구울이 있어요.”

“뭐?”

구울이 왜 여기서 나와? 루이센은 허둥지둥 달려갔다. 통통통, 소리가 들려오던 문 안쪽에 구울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뒤로 벌러덩 넘어져서 우어, 으어, 하고 구울이 느리게 몸부림쳤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귀족 같은데요.”

“얼굴, 좀 더 자세히 봐야겠어.”

“조심하세요.”

칼튼이 굳은 얼굴로 촛불을 좀 더 가까이 구울의 얼굴에 댔다. 부패가 진행되어 다소 역겹기는 했지만 꾹 참았다.
다행히 얼굴을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저 초상화랑 똑같아.”

구울의 얼굴은 현재 보톤 자작의 초상화 속 얼굴과 같았다.

“초상화요?”

“저쪽에.”

구울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문을 닫아 버리고, 루이센은 집무실에 걸린 초상화를 칼튼에게도 보여 줬다. 칼튼은
눈썰미가 뛰어났기에 저 구울이 초상화의 주인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저 구울이 진짜 보톤 자작이라면…… 연회장에 있는 보톤 자작은 대체 누구죠?”

“그보다 중요한 건 가짜 보톤 자작이 우리를 이 저택으로 초대했다는 거야…….”

귀족을 사칭하고 있는 놈이 그런 대범한 짓을 할 때는 다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구울의 탄생은 언제나 악마숭배자들과 연관이 있었다. 진짜 보톤 자작이 구울이 된 걸 보면, 그의 죽음에
악마숭배자가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짜 보톤 자작은 이 상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가짜는
악마숭배자들과 연관이 있을 것이 거의 확실했다.

루이센과 칼튼은 말을 잊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소름이 내달렸다.

아오오오오오오.

대화의 공백을 뚫고, 저 멀리 어딘가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귓속을 긁어내리는 듯한 오싹한


울음소리였다. 그 안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살기에 칼튼의 감각도 날카롭게 일어섰다.

칼튼은 창문으로 달려갔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저택의 부지와 장원은 불빛이라고는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사람이 살고 있다면 작은 불빛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먼 밤바다를 보는 것처럼
아득한 어둠만이 존재했다.

그 위로 검붉은 연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구름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했다. 다만 그 속도는 바람에
올라탄 것처럼 빨라, 순식간에 장원을 차지하고 저택에 닿았다.

검붉은 안개 사이로 흐릿한 달빛이 비치자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보였다. 무언가 꿈틀거리는 모양새였다.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느리면서 괴상한 움직임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은 언뜻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전부…… 구울인 거지?”

“그런 거…… 같네요.”

구울 떼가 저택을 향해 포위망을 좁히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지적 능력이 없는 구울이 저렇게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 보톤 자작의 기사들이 구울이 되어 루이센 일행을 공격했던 것처럼.

“악마숭배자들……그놈들이야.”

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보톤 자작, 이 저택, 연회. 모든 것이 루이센을 잡아들이기 위한 루거의


함정이었다.

***

동부 대영주의 기사는 야간 순찰을 돌던 중이었다. 귀족들은 연회장에서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는 와중에,


덜떨어진 병사들이랑 경비를 서고 있으려니 영 의욕이 나지 않았다. 별 볼일 없는 시골 영주의 저택에서 뭐 그리
큰일이 일어나겠나 싶어 위기감도 없었다.

저택 근처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들도 상태는 기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놓고 창에 기대어 조는 놈들도
있었다. 그런 병사들의 대가리를 깨며 기사는 관성적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간 좀 빨리 가라…….’

연회가 끝나고 남은 음식을 얻어먹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기대였다. 그렇게 반쯤 넋을 놓고 다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르륵, 그르륵.

“아씨, 뭐야?”

가뜩이나 이 저택은 뭐라고 딱 집어 말하기 어려운 으스스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까지 들려오니
신경이 바짝 곤두서면서 짜증이 났다.

“기, 기사님. 기사님. 큰일 났습니다.”

한 병사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뭔데 소란이야?”

“시체, 시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뭐?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그때 타이밍이 좋게 아악, 하고 멀지 않은 곳에서 병사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는 정신을 번뜩 차렸다.


타성에 젖었다지만 그 역시 험난한 과정을 거쳐 기사가 된 자였다.

그는 비명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아연실색했다. 처음에는 농민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이기에,


영지민이 몰려온 건가 했다. 하지만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눈은 잡은 지 오래된 생선처럼
불투명했고, 몸 여기저기가 부패해 악취가 풍겼다. 병사의 말대로 그것은 걸어 움직이는 시체였다.

“이게 대체 뭐야…….”

아연실색하는 사이, 구울들이 기사와 병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시체라기에도, 평범한
영지민이라기에도 재빨랐다.

“으아악!”
병사는 순식간에 구울들에게 물어뜯겼다. 간발의 차로 살아난 기사는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건 내 선에서 정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빨리, 빨리 영주님께 알려야 한다…….’

기사는 미친 듯이 달렸다. 아직 연회가 한창이라, 귀족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텅 빈 복도를 달리며, 기사는 자꾸 창밖을 바라보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검붉은 연기가 빠르게 저택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연기가 어쩐지 살아 움직이는
시체보다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곳곳에서 시체들이 비척비척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병사들은 대응을 한다고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인 데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에 겁을 먹어
평소의 실력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지도자의 강렬한 힘이 필요했다.

더 빨리.

기사는 온 힘을 다해 연회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영주님, 큰일입니다!”

연회를 즐기던 귀족들이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돌아보았다. 한 귀족은 불쾌한 얼굴로 무슨 소란이냐고


꾸짖었다.

그러나 기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복도를 달릴 때만 해도 저택 근처에 머무르던 검붉은 안개가


어느새 창문 사이로 스며들어 연회장을 채웠기 때문이다. 창문과 가까운 곳에서부터, 사람들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악! 무슨 일이야!”

“이봐, 의사를 불러!”

연회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으나, 그조차 오래 가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검붉은 연기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쓰러졌다.

소식을 전하러 온 기사도, 지시를 내려야 할 동부 대영주도 모두 정신을 잃었다.

100 화

보톤 자작의 장원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자작의 저택이고 그다음은 교회였다.

저택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교회 건물의 지붕 위. 루거와 아홉 번째 악마숭배자가 그 위에 서서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구울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내길 기다려, 쓸데없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저택으로 들어갈 적절한 순간을 기다렸다.

아홉 번째 숭배자의 조종을 받는 구울들은 무차별적으로 동부 대영주의 병사들을 공격했다. 갑작스레 시작된


습격에 병사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구울들은 파죽지세로 저택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검붉은 안개가 살아 있는 것처럼 격동적으로 흔들리며 저택을 향해 움직였다. 어두운 밤하늘에서도 눈에 띄는


핏빛이었다.

보톤 자작의 저택은 처음부터 루거와 악마숭배자들이 만들어 둔 함정이었다. 저택에 있는 보톤 자작 역시 가짜로,


다친 열한 번째 악마숭배자를 대신해 합류한 열두 번째 악마숭배자였다.

루거는 가짜 보톤 자작을 이용해, 동부 대영주의 일행을 저택으로 초대했다. 동부 대영주의 성정을 생각하면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럼 동부 대영주에게 신세 지고 있는 루이센도 마지못해 따라올 것이고.

루이센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동부 대영주의 일행에 합류한 것을 역으로 이용한 셈이었다.

동부 대영주는 기대한 것 이상의 역할을 해 주었다. 가짜 보톤 자작의 말에 의하면, 동부 대영주 덕분에


루이센의 일행에 분열이 일어났다고 했다. 루거에게는 굉장한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공작을 꾸미는 것은 악마숭배자들 입장에서도 상당히 무모한 짓이었다. 모든 이단


종교가 그렇듯이, 악마숭배자들 역시 그림자 뒤에서 은밀하게 숨어 지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거대한 마법을 준비했다. 저택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검붉은 안개가 바로 그것이었다.

저 안개에 닿게 되면 사람들은 정신을 잃는다. 그 상태에서 악마숭배자들은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었다.
과거 아니에스 공작령에 항복을 하러 찾아오던 항복 사절이나, 1 왕자 측 전령의 발을 묶어 착각에 빠뜨린 것과
같은 계열의 마법이었다.

하지만 더 광범위하게 적용되어야 했고, 더 강렬한 악몽을 심어 줘야 하기에 엄청나게 많은 제물을 필요로 했다.
해서 이곳에 머물던 사람, 가축, 작은 새, 하다못해 풀벌레까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죽여 제물로 바쳤다.

그래서인가, 마법의 검붉은 안개는 마치 영지민들에게서 짜낸 피와 같았다. 죽은 영지민들은 구울이 되었다.


악마숭배자들은 이들을 조종하여 자신의 병사처럼 부렸다.

“하하하, 나의 군세를 봐! 지엄한 동부의 군주도 꼼짝을 못 하네!”

아홉 번째 숭배자가 흥에 겨워 소리쳤다. 그는 구둣발로 교회의 지붕을 콱콱 밟으며 폴짝거렸다. 일부러 교회를


모욕하기 위해 신발에 오물을 묻혀 오는 정성 덕분에 순백의 지붕은 금방 더럽혀졌다.

“이봐, 느껴지지 않아? 이 모습에 그분이 기뻐하고 계셔!”

아홉 번째 숭배자는 루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하늘과 땅을 번갈아 보며 황홀경에 젖었다. 루거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홉 번째 숭배자의 손을 쳐 냈다.

‘이놈들은 미쳤어.’

사실 악마를 숭배하건 뭘 하건, 그런 건 루거에게 아무래도 좋았다. 루거 역시 교회에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루거는 사생아였다. 그의 어머니는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루거를 낳았다. 교회는 사제가 인정한 혼인
관계 외에는 모두 부정했기에, 혼외관계에서 태어난 루거는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었다.

교회는 그런 아이를 악마의 씨앗이라 불렀다. 덕분에 평생을 조롱과 혐오 속에 살았으니, 신과 교회에 대한
마음은 언제나 강렬한 증오뿐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이조차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가장 명예로운 기사가 된다면 세상도 자신을
인정하리라 믿었다. 뛰어난 실력, 바른 몸가짐, 호감을 사는 태도.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건만 사생아라는
꼬리표 하나에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이 지긋지긋한 낙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의 친아버지가 직접 그를 자식으로 인정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루거는 기사 수련을 마치고 아버지라는 사람을 찾아내 그에게 찾아가 충성을 맹세하며 주군으로 삼았다.
언젠가는 그가 자신을 인정해 주길 바라며. 그 사람 밑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았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새삼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루거라도, 악마숭배자들의 행태는 점점 보기 괴로웠다. 얼마 전까지 평범하게 웃고 떠들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잠깐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으로 전락했다. 죽은 이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물어뜯고,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또다시 구울이 되어 싸웠다. 그 끝없는 연쇄.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죽음이 농락당하는 모습은
같은 인간으로서 본능적인 혐오감이 들었다.

더 끔찍한 것은 악마숭배자들이 진심으로 이것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현실 세상에 지옥이 펼쳐지기를
무엇보다도 원하고 있었다.

‘아버지, 주군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것들과 함께한단 말인가.’

루거의 마음속에 작은 반발심이 떠올랐다. 인간다움이 남아 있다면 누구나 가질 법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에 따르기에는 너무 많이 와 버렸다. 루거에게는 이제 다른 길이 없었다.

“이제 슬슬 들어가도 되겠어.”

아홉 번째 숭배자가 말했다. 루거가 보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진입이었지만, 지휘권은 아홉 번째 숭배자에게


있었다. 루거는 묵묵히 무구를 점검했다.

저택 주변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그들의 계획대로 된다면 저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끔찍한 세상이 될
것이다.

세상 따위는 망해도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루거는 루이센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지옥이 된 세상을 견딜 수
있을까?

어쩐지 가슴 속이 크게 술렁였다. 불길한 예감인 건가, 괜한 불안감인 건가. 그 자신조차 자신의 마음을 다
파악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루거가 돌아설 곳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직 저 지옥을 향해 전진할 뿐.

그가 맡은 명령을 수행하여, 오랜 꿈이던 양지로 나아가는 것만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루거와 악마숭배자들은 다이어울프에 올라타, 저택으로 향했다.

***
아직은 검붉은 안개가 저택을 집어삼키기 직전.

루이센과 칼튼은 보톤 자작의 집무실에서 뛰어나왔다. 두 사람은 마침 그들을 찾아다니고 있던 모리슨이 합류했다.
그 역시 이상함을 느끼고 저택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상황은 더 심각했다. 저택의 바깥은 난생처음 보는 구울들의 공격에 병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중이었다. 노련한 기사들이 있고, 병사의 숫자가 많더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방어벽이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귀족들은 전부 연회장에 모여 연회를 즐기는 중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세 사람은 급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을 나누었다. 결정은 빨랐다. 그들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계획을 세웠다.

모리슨은 칼튼과 루이센에게 축복을 내려 주었다. 그런 다음 루이센은 칼튼의 도움을 받아 나무를 타고 올라가,
다시 연회장의 테라스로 돌아갔다.

루이센만 혼자 테라스에 서고, 칼튼은 나무에 남았다. 칼튼이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루이센이 그를 달랬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아무 문제 없을 거야.”

“그래도 공작님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아요.”

그의 음성에는 걱정과 괴로움이 모두 묻어났다. 루이센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럼 빨리 돌아와. 난 자네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칼튼은 루이센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 나무 아래에서 모리슨이 시간이 없다고


재촉해 그마저도 오래 끌 수 없었다.

칼튼이 나무 아래로 내려간 뒤, 칼튼과 모리슨은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루이센은 잠시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멀리 시선을 두었다. 저택 바깥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풍겨 왔다.

바람 소리에 비명 소리가 뒤섞이고, 그를 집어삼킬 듯이 검붉은 안개가 밀려왔다.

“잘될 거야. 괜찮아.”

무섭지만 피하지 않기로 했다.

루이센은 돌아서서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연회장의 밝은 불빛이 어쩐지 눈이 부셔, 루이센은 자신이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이 된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나 자신이 연회장을 빠져나갔던 것을 들키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연회는
한창이었으며 위기감이라고는 없었다. 누구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음악은 멈추고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이 검붉은 안개 속에 완전히 파묻혔다.


***

루거와 아홉 번째 숭배자는 그들을 위해 준비된 카펫 위를 걷는 것처럼, 아무 방해도 없이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의 주변을 다이어울프와 고블린 같은 몬스터들이 지켰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에 이어, 사람이 몬스터를 조종하다니.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동부 대영주가 자랑스러워하던 기사들조차 감히 그들의 앞을 막을 수는 없었다.

루거와 아홉 번째 숭배자가 연회장에 들어서자, 그들의 계획대로 연회장은 검붉은 안개가 자욱했고 귀족들은 모두
쓰러져 있었다.

유일하게 멀쩡하게 서 있는 한 사람, 보톤 자작 행세를 하고 있던 열두 번째 숭배자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쪽도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루거는 열두 번째 숭배자의 말을 무시하고 연회장을 훑어보았다. 아무리 사람이 많고 시야가 가려졌어도 루이센을
찾는 걸 방해하진 못했다.

단박에 루이센을 찾아낸 루거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루이센은 잠이 든 것처럼 얌전히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이 평온한 듯 처연하여, 동화 속에 나오는 잠드는 저주에 걸린 공주님을 떠올리게 했다.

루거는 루이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장갑을 벗고, 흐트러진 루이센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리고는 검지로 조심스레 루이센의 뺨을 훑었다.

머리를 정돈하고 정장을 갖추어 입은 루이센을 보자니,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올랐다.

101 화

대단한 기억은 아니었다.

연회가 열릴 때면, 루거는 혼신의 힘을 다해 루이센을 꾸몄다. 루이센이 연회장에 들어선 순간 그를 향해


집중되는 선망의 시선을 보는 것은 루거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렇게 연회가 끝나면, 루이센은 번번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곤 했다. 그런 루이센을 챙기는 것이 루거의
일이었다. 루이센은 까탈스러운 면이 있어서 아무에게나 안기지 않아, 루거는 다른 일을 하다가도 그에게
달려왔다.

잠든 루이센을 품에 안아 들면 달큰한 포도주 냄새가 풍겨 와 취한 듯 기분 좋은 어지러움을 느끼곤 했다. 그게


좋아서 괜히 더 과음을 부추기기도 했었다.

별거 아닌 일상적인 기억이지만 그렇기에 루거의 마음속에 더 강렬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고작 작년만 해도


당연하다 생각했던 일상이 너무나도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상황은 루거가 감상에 젖어 들게 두지 않았다.

“자, 자! 얼른 움직여!”

아홉 번째 숭배자의 닦달에, 열두 번째 숭배자가 구울들을 조종해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죽여야 되는 사람은 왼쪽으로, 살려 둘 사람은 오른쪽으로 옮겼다. 누구를 죽이고 살릴지는 미리 정해 두었다.

살려 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조작된 기억을 심어 오늘 밤 일어난 악마숭배자들의 습격을 ‘동부 귀족들 사이의
내분’으로 기억하도록 할 것이다.

세상은 아직 악마숭배자들에 대해 모르고 있으니,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만으로도 충분히 내분이 일어난 것으로
조작되리라.

악마숭배자들의 존재는 사라지고, 루이센 역시 납치된 것이 아니라 내분에 휩싸여 실종된 것이 된다. 루이센
실종의 책임은 고스란히 동부 대영주에게 향할 것이고, 동부의 귀족들 역시 책임이 있다.

아니에스 공작가는 동부 전체에 선전포고를 한 뒤, 군대를 보내어 루이센을 찾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들을
말리려고 하겠지만, 아니에스 공작가는 유난히 루이센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들은 남부 전체를 동원해서
루이센을 찾고, 복수를 감행할 게 분명했다.

아무리 루이센을 향한 남부 귀족들의 충성심이 떨어진다고 해도, 대영주가 실종된 사건이다. 남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니 남부 귀족들도 대부분 참전할 것이다.

동부 귀족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동부와 남부라는 지역 갈등으로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 자존심이
걸렸으니 어느 한쪽이 완전히 굴복하기 전까지 멈출 수 없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끔찍한 대전쟁이 왕국을 집어삼키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벌어질 극심한 혼란이 바로 악마숭배자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루거의 주군은 그 틈을 타서, 아니에스
공작령과 남부 전체를 집어삼킬 계획이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고통스럽지만 누군가는 원하는 것을 전부 얻는, 끔찍하고 야심 넘치는 음모였다.

이 모든 계획은 루거가 섬기는 주군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루이센이 동부 대영주의 일행에 합류한 것은 예상
밖이었다. 그들에게 불리한 상황조차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가는 사악한 지혜에 루거는 두려움마저
느꼈다.

‘왜 이렇게까지 아니에스 공작에게 집착하는 건지…….’

루거도 그 이유를 몰랐다. 그의 주군은 구구절절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악마숭배자들은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루거는 자존심이 상하여 굳이 묻지 않았다.

‘물어봤어야 했나. 공작님을 살려 둘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악랄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루이센을 살려 둘 거라고 하는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제 와서 믿지 않는다면 어쩌겠는가. 이미 모든 일은 계획대로 실행되고 있었다. 조금 틀어져도,


아버지라면 또 다른 무서운 계획을 세워 결국은 바라는 대로 이루어 낼 것이었다.

루거는 조심스럽게 루이센을 고쳐 안았다.

그런데 아홉 번째 숭배자가 동부 대영주의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것이 루거의 눈에 띄었다. 이전부터 고귀한


피가 맛보고 싶다느니 하는 징그러운 소리를 해 댔던 것이 떠올라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동부 대영주는 건드리지 마. 대영주가 죽으면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동부 대영주는 이런 식으로 죽이기에는 너무 거물이었다.

“약간 피만 낼 거야.”

아홉 번째 숭배자는 루거의 경고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는 약간도 치명적이라는 것 정도는 상식 아닌가? 그만두라면 그만둬.”

루거는 짜증을 냈다. 가뜩이나 싫은 놈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이려고 하니,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아홉 번째 숭배자가 고개를 들어 루거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상황 판단을 똑바로 하라고 경고하는 거다.”

“상황 판단? 누가 너에게 그런 걸 하라고 하든?”

아홉 번째 숭배자가 루거를 비웃었다.

“네 판단 같은 거 필요 없어. 네 주인이 명령했잖아. 내가 시키는 대로 명령이나 잘 따르라고.”

“…….”

루거는 이를 악물었다. 아홉 번째 숭배자에게 화가 났으나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

지난번에 버려진 마을에서 루이센 일행을 공격했을 때. 루거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고블린으로부터 루이센을
구했다. 아홉 번째 숭배자는 그 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쳤다. 그 탓에 루거는 아버지가 있는 수도로 불려가 크게
혼났다. 그리고 아버지는 루거에게 아홉 번째 숭배자의 말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고 따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너는
허튼 생각을 품고 있는 거 같아 못 믿겠다면서.

“내 명령이 곧 네 주인의 명령이다.”

아홉 번째 숭배자는 루거가 안고 있는 루이센을 흘낏 바라보고 씨익 웃었다. 음흉한 미소였다.

“내가 지금 아니에스 공작을 죽이라고 하면 따라야 한다는 뜻이야. 알겠어?”

루거의 얼굴이 이전과 비교도 안 되게 일그러졌다. 반사적으로 루이센을 안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루거의


반응을 보며 아홉 번째 숭배자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묘한 긴장감이 루거와 아홉 번째 숭배자 사이에 흘렀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처음에는 작은 파동이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 연이어 우웅, 하고 긴 파동이


이어졌다.

뭐지?

이상함을 느끼고 악마숭배자들과 루거는 주변을 경계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횃불 같은 푸른 불길이었다.


그 불길은 검붉은 안개로 가득 차 있던 어두운 연회장 안을 밝혔다.

푸른 불길에는 신성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악마숭배자들이 만들어 낸 검붉은 안개를 먹이 삼아 거세게
일렁였다.

하나.

둘.

셋.

불길은 순식간에 늘어나 크게 번지더니 연회장을 빙 둘러쌌다. 그 중심에는 모리슨이 서 있었다. 온몸으로 푸른
불길을 뿜어내는 그는 얼음장처럼 차가우면서도 경멸이 서린 눈으로 악마숭배자들을 바라보았다.

악마숭배자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심문관이다! 가짜 신의 미치광이들이 지금 여기 있어!”

이단 종교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비밀스러움에 있었다. 교회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기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음모를 꾸밀 수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교회에서 작정하고 탄압하려고 한다면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중 이단 척결에 가장 선봉에 서 있는 이단심문관들은 절대 마주치지 말아야 할 적이었다.

“도망쳐! 빨리 피해! 잡히면 끝장이다!”

아홉 번째 숭배자가 소리쳤다.

그러나 악마숭배자들은 연회장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연회장을 빙 둘러싼 푸른 불길은 안에 있는 악마숭배자들을


가두는 결계였다. 밖에서 몬스터를 끌어오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몬스터들 역시 신성한 불길을 감히 넘어서지
못했다.

“빌어먹을, 젠장, 미친! 다 죽여! 여기 있는 놈들을 다 제물로 바치고 도망친다!”

아홉 번째 숭배자가 명령을 내리며 단검을 치켜들었다. 당장 그의 발아래에 있는 동부 대영주부터 처단할


생각이었다. 그가 단검을 내지른 순간, 그의 머리로 술병이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술병을 쳐 내니, 술병이 부서지면서 와인이 아홉 번째 숭배자의 얼굴로 쏟아졌다.

“아악!”

술병을 던진 것은 루이센이었다.
***

사실 루이센은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 모리슨의 축복 덕분에 악마숭배자들의 마법이 듣지 않아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붉은 안개가 성을 덮치기 직전.

루이센과 칼튼, 모리슨은 악마숭배자들이 꾸민 함정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 모리슨이 알려 준 바깥의 상태는
심각했으나 아직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루이센 일행만 몰래 이곳을 빠져나갈 틈은 있었다.

하지만 루이센은 다른 의견을 냈다. 도망칠 게 아니라 여기서 어떻게든 승부를 보지 않겠느냐고.

어차피 악마숭배자들과 루거는 루이센을 노리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도망쳐 봐야, 또 비슷한 함정을 꾸며낼 게
뻔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미리 습격을 알아차릴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더구나 동부 대영주와 귀족들, 그들의 기사와 병사와 하인들, 수많은 사람이 무방비한 상태였다. 루이센이
없다고 악마숭배자들이 그들을 무사히 풀어 줄 리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걸 아는데 혼자서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회귀 전, 몸소 경험하지 않았던가.

물론 당장 루이센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동부 대영주와 귀족들이 가짜 보톤 자작과 함께 연회장에


있었다. 거기 가서 루이센이 진실을 밝혀 봤자 습격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동부 대영주의 기사들은 뛰어났으나, 상대는 구울이었다. 죽여도 죽지 않는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 거기에


악마숭배자들의 기이한 마법이 더해진다면 승률은 몹시 낮았다.

‘성자님은 언제나 선택과 집중을 강조하셨지.’

그래서 루이센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102 화

루이센의 제안은 역으로 함정을 파자는 것이었다.

놈들의 기습에 맥없이 당하는 척하면, 놈들의 주요 전력 대부분이 아무 의심도 없이 루이센을 잡으러 연회장으로
모여들 것이다. 그 방심한 틈을 타서 이번에는 모리슨과 칼튼이 그들의 뒤통수를 갈겨 버리자는 것이었다.
악마숭배자와 루거를 사로잡으면 그 배후와 동기에 대해서도 알아낼 수 있으며, 구울 군단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자신이 직접 놈들을 유인할 미끼가 되어야 해서 위험하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단번에 승기를 빼앗아 올 만한
전략이었다.

루이센의 제안에 모리슨은 감탄했다. 자신과 칼튼의 능력을 고려해 보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또 악마숭배자를
잡을 수 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아니에스 공작의 목숨이 위험해지지.’

모리슨은 칼튼을 바라보았다. 칼튼이라면 루이센을 위험에 내모는 일을 반대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의외로 칼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 의견을 밝혔다.

“저도 그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공작님이 미끼가 되는 건 정말 싫지만.”

칼튼은 냉정하고 뛰어난 전략가였기에 마음으로는 내키지 않아도 고집부릴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세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자 모든 일이 군더더기 없이 진행되었다. 루이센은 테라스로 돌아왔고, 칼튼과 모리슨은
역습을 위해 움직였다.

연회장에 푸른 불길이 전부 치솟은 순간, 칼튼도 공격을 개시했다. 그는 루거를 기습하였다. 루이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루거에게서 벗어났다.

쫓아가려던 루거를 막은 것은 이번에도 칼튼이었다.

“또 네놈이냐!”

루거는 분노에 차 소리쳤다. 매번 루이센을 손에 넣었다 싶으면 칼튼이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 용서할 수 없었다.
루거는 다른 때보다 더 포악하게 날뛰며 칼튼에게 덤벼들었다.

루이센은 공격에 휘말리지 않도록 멀리 피해 있다가, 동부 대영주를 구하기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술병을 던진


것이다. 역습은 성공했다.

‘날 죽이네 어쩌네 했을 때는 큰일 났다 싶었지만…….’

칼튼과 모리슨을 믿고 꾹 참은 보람이 있었다.

늘 쫓기기만 하다가, 놈들의 경악하는 모습을 보니 통쾌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루이센은 어쩐지 질 거
같지가 않았다.

“그런다고 너희가 이길 수 있을 거 같으냐! 단둘이서 뭘 하겠다고!”

아홉 번째 악마숭배자가 주문을 외웠다. 연회장에 있는 몬스터들이 동시에 루이센 일행을 향해 덤벼들었다.


루거도 함께였다.

칼튼과 모리슨이 앞으로 나섰고, 루이센은 안전한 곳을 찾아 피했다. 두 사람은 수적인 열세에 더해 루이센과
쓰러진 사람들까지 신경 써야 했다. 그럼에도 둘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이단심문관인 모리슨은 이단인 악마숭배자들을 때려잡는 데 특화되어 있으며, 칼튼은 마법 같은 기이한 능력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했다. 더구나 두 사람은 강도와 몬스터를 잡으며 손발을 많이 맞추었기 때문에 호흡도 척척
맞았다.

온 힘을 다해도 칼튼과 모리슨의 기세가 밀리지 않자, 악마숭배자들은 연회장에 깔린 검붉은 안개를 이용해
그들을 압박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였다.

모리슨이 피워 낸 푸른 불길이 강해지면서, 연회장을 가득 메웠던 검붉은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악마숭배자들의 마법이 모리슨의 신성력에 정화가 된 것이다.

그러자 마법의 힘으로 정신을 잃었던 사람들도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회장의 풍경을 보며 경악했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에, 무시무시한 다이어울프, 딱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남자들이 루이센 일행과 싸우는


모습은 지독하게도 현실감각이 떨어졌다. 특히 그들이 무시하고 있던 칼튼과 모리슨이 활약하는 모습에는 입이 떡
벌어졌다.

“다들 정신 차려!”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루이센의 외침이었다.

“주변 사람들을 챙겨서 연회장 밖으로 나가게! 저택 밖에도 저런 것들이 있으니, 방 이곳저곳으로 숨어!”

“하, 하지만 불길에 휩싸여 있는데요.”

“자네들이 결백하다면 다치지 않고 통과할 수 있을 거야. 어서들 움직여!”

루이센이 명령하자 서열에 충실한 귀족들은 상황 파악이 덜 된 와중에도 몸을 움직였다. 동부 대영주 역시 주변


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루이센에게 다가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야?”

“나중에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하나 설명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도 급박했다.

“밖이 많이 혼란스러울 겁니다. 공작님이 연회장 밖을 통솔해 주세요.”

루이센은 동부 대영주가 해 줬으면 하는 일들과 몇 가지 당부를 전했다.

“자네는? 자네는 피하지 않을 건가?”

“저는 여길 마저 수습해야죠.”

게다가 수십의 귀족들보다 칼튼 한 사람이 더 나았다. 악마숭배자들은 루이센을 노리고 있으니, 어디를 가도
따라붙을 것이다. 지금도 루거의 시선이 느껴졌다. 루거는 칼튼과 공방을 이어 가면서도 루이센을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어설프게 숨는 것보다는 칼튼의 눈에 띄는 곳에서 그의 보호를 받는 것이 더 안전했다.

그 사정을 모르는 동부 대영주는 크게 감동했다.

“자네가 이렇게…… 희생적인지 몰랐군.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어.”


이 어르신이 뭘 단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루이센은 떨떠름했지만 동부 대영주의 착각을 바로잡아 줄 여유가
없었다. 동부 대영주가 빨리 가서 기사들을 통솔해 줘야, 밖에서 몰려오고 있을 구울들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루이센은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는 동부 대영주를 밖으로 쫓아냈다. 동부 대영주는 신앙이 깊은 덕분에, 푸른


불길을 지나자 오히려 힘을 얻어 그 나이대 노인에게서 보기 힘든 힘찬 발걸음으로 달려갔다.

루이센이 후방에서 사람들을 수습하는 사이, 모리슨과 칼튼은 충실하게 맡은 역할을 다했다. 모리슨과 칼튼 대
악마숭배자 두 명과 루거, 그리고 몬스터의 싸움이었다.

칼튼과 모리슨은 끝까지 뒤로 밀리지 않고 적을 제압했다. 두 사람은 착실히 몬스터의 머리나 다리를 잘라
무력화하면서 승기를 잡아 갔다.

가장 돋보인 것은 칼튼이었다. 그는 오직 능력 하나만으로 지금의 위치에 올라선 것을 증명하듯이 화려하게


날뛰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루이센의 안전을 확인하며, 루이센 쪽으로 다가가는 몬스터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처단하였다.

‘뭐 저런 괴물 같은 놈이…….’

아홉 번째 숭배자는 아드득, 이를 갈았다.

이단심문관의 기세는 이해했다. 교회가 혼신의 힘을 다해 키워 낸 전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칼튼, 그는 제대로


된 교육 한 번 받지 못한 용병 주제에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일부러 힘을 분산해 루이센을 공격하고 있는데도
한번을 놓치지 않다니.

기사 훈련을 받으며 뛰어난 성적을 거뒀던 루거조차 칼튼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어. 이 계획이 어떤 계획인데.’

장원 하나를 통째로 바치면서 만전을 기하여 준비한 일이었다. 이번 일이 계획대로만 풀렸다면,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면 저 지옥 바닥 밑에 있던 그들의 신 또한 현세에 강림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전부 망했다. 열두 번째 숭배자는 반쯤 기절했고, 그가 이용할 수 있는 몬스터도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모리슨이 만들어 낸 불길은 악마숭배자와 싸울수록 고취되는 신앙심으로 인해 점점 더 강해졌다. 그에 따라
자신의 힘이 점점 더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거창한 계획이고 뭐고, 이러다간 이단심문관에게 잡히게 생겼다. 이단심문관에게 잡힌
최후는 분명 비참하리라.

그러나 영리한 악당이라면 비장의 한 수를 숨겨 두는 법. 아홉 번째 숭배자에게도 숨겨 둔 한 수가 있었다.

아홉 번째 숭배자는 루거를 보았다. 루거는 동료인 악마숭배자들보다 루이센에게 더 오래, 자주 시선을 두었다.
한창 싸우는 와중임에도 말이다.

으흐흐흐.

아홉 번째 숭배자는 음침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구울들을 전부 모리슨에게 달려들게 했다.


그리고 열두 번째 숭배자의 곁으로 다가가 단 한 번의 고민 없이 그의 팔을 갈랐다.

그 고통에 반쯤 기절한 상태에서도 열두 번째 숭배자의 몸이 펄떡였다.


“동료의 팔을 제물로 바친다.”

그러자 잘린 팔이 빠르게 부패하여, 짙은 초록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산양의 형태를 갖추어, 칼튼을 향해
돌진했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끔찍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큿.”

칼튼은 피하지 못하고 검을 내질렀다. 산양의 머리를 반으로 가르자, 진녹색 연기가 칼튼을 덮쳤다. 곰팡이에
휩싸인 기분이었다. 모리슨의 축복을 받았기에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시야가 가로막히며 휘청일 수밖에
없었다.

칼튼의 발이 묶이자, 루이센의 앞이 훤히 비었다. 그 틈에 아홉 번째 숭배자가 외쳤다.

“명령이다, 루거! 루이센 아니에스를 죽여 버려!”

아홉 번째 숭배자의 명령은 주군의 명령.

루거는 반사적으로 명령에 따라 루이센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모리슨이 루거에게 향했지만, 열두 번째


숭배자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몸을 날려오는 탓에 모리슨의 발이 묶였다. 어떻게든 동료를 돕겠다는 집념이
이루어 낸 성과였다.

루거는 아무 방해 없이 루이센의 앞에 도달했다. 그는 검을 치켜들었다. 루이센은 무방비했고 루거의 공격을 막을


힘이 없었다. 그를 죽이는 것은 어린 사슴을 죽이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루이센의 새파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루거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전설 속 메두사의
저주처럼 시선 한 번에 온몸이 돌덩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순간 자신의 칼이 루이센의 희고 가느다란 목을 찌르는 상상을 했다. 몸서리가 쳐졌다. 루이센의 죽음을 생각하자
한겨울에 차디찬 바닷물로 몸을 내던진 듯한 끔찍함이 몰려왔다. 절망보다 깊고 슬픔보다 어두운, 말로 설명하기
힘든 고통이 엄습했다.

루거는 생각했다.

‘못 해.’

나는 이 사람을 죽일 수 없어. 아니, 죽이고 싶지 않아.

***

103 화
언제부터였지?

순간 루거의 머릿속에 루이센과 함께 했던 수많은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계기는 생각나지 않았다. 첩자라니. 기사답지 못한 일을 떠맡게 되어 자괴감이 들었던 것만은 분명하게 기억이
났다. 이 일을 잘 해내서 아버지에게 쓸모를 인정받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루이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충실한 시종을 연기했다. 루이센은 루거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연기하던 그대로 충실한 시종으로 믿고 의지했다. 아무 계산도 의심도 없었다.

그런 점 때문에, 루거는 점점 진심이 되어 갔다. 살면서 그렇게까지 순수하게 자신을 믿어준 사람은 없었다.
상대에게 헌신하고 그것을 인정받는 것. 루거가 평생토록 원했던 것을 루이센이 주었다. 애정은 나날이 깊어져
갔고 특별해졌다.

그러나 루거는 첩자였다. 그를 루이센 곁에 심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공작가의 가신들과
루이센을 이간질하고, 루이센을 더 타락하는 길로 이끌었다. 매 순간이 배신이고 기만이었으니 사랑을 깨달아
봐야 자신만 괴로울 뿐이었다.

그래서 루거는 계속, 계속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도망쳤다. 모든 것은 목적을 위해서, 주군의 명령을 위해, 라고
자신을 속여 왔다. 그러면 한결 편안해졌다. 그러나 루이센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된 시점에까지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루거는 루이센을 사랑하고 있었다.

비록 상대가 불행하기를, 그래서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기를 바라는 비틀린 사랑이었지만. 그럼에도 사랑이라
차마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살리자. 살려서 보내야 한다.’

루거는 마음먹었다. 결심을 내리기까지 루거에게는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으나, 사실은 아주 찰나였다.
아무도 루거가 멈췄던 것도, 오래 묵은 사랑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루이센만이 루거의 망설임을 봤지만, 거대한 칼날이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상황에서 타인의 모든
생각을 파악하기란 어려웠다. 루이센은 아주 작은 빈틈만을 발견했고 자신이 살아날 기회라고 여겼다.

루이센은 칼튼이 가르쳐 준 호신술을 떠올렸다. 그는 혹시 몰라 남몰래 근처 화분에서 꺼내 왼손에 쥐고 있던


흙을 루거의 얼굴에 뿌렸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루거를 걷어차고 거의 쓰러져 구르다시피 하며 루거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사실 이런 건 아주 잠깐 시간을 버는 정도에 불과했다. 루이센이 혼자였다면 금방 다시 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센에게는 칼튼이 있었다. 루이센이 루거의 칼날에서 벗어난 순간, 칼튼은 망설임 없이 루거의 목을
향해 검을 횡으로 그었다.

그 솜씨가 빠르고 깔끔하여 루거조차 자신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루이센을 바라보다가 숨을 거두었다. 잔인한 장면임에도 루이센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루거가
죽고 쓰러지는 모든 것을 바라보며, 그와 함께했던 몇 년의 시간을 떠올렸다.

한때는 신뢰했고, 지독한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으며,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했다. 그럼에도 두 번째로 보는
루거의 죽음은 루이센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였다. 이전 생에도 지금도, 왜 매번 자신 때문에 칼튼에게 죽는 건지,
루거의 행동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칼튼은 달려와 넘어진 루이센을 부축했다. 루이센은 그제야 안심하며 루거에게서 시선을 떼어 칼튼의 팔에 안기듯
의지했다.

“거의 다 끝났어요.”

루거는 죽었고, 몬스터들은 전부 쓰러졌다. 열두 번째 숭배자도 완전히 기절했고. 아홉 번째 숭배자는 비교적


상태가 나았지만 힘겨워 보였다. 모리슨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홉 번째 숭배자는 이상할 만치 당당했다.

“아하하하하하.”

아홉 번째 숭배자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언어로 소리쳤다. 주문을 외우는 거 같기도


하면서도 비명을 지르며 갈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 음성은 소름 끼치도록
오싹했다.

곧 그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죽은 루거의 목에서 아지랑이처럼 검은 연기가 일었다. 검은 연기는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에 닿자 투명한
물에 검은 물감을 퍼뜨린 것처럼 루거의 몸이 새까맣게 변했다.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루이센을 사로잡았다.

이윽고 루거의 몸이 완전히 까맣게 물들었을 때, 루거가 다시 일어섰다.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온몸이 새까맣게 물든 채로.

루거였던 그것은 바닥에 떨어진 투구를 주워서 목 위에 올렸다. 마치 연기가 된 머리에 투구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머리를 돌려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그것의 투구 안쪽은 깊은 우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끝없이 검고 또 검었다.

‘저건…….’

루이센은 잘 아는 존재였다.

‘죽음의 기사.’

루이센은 한때 그것을 전설 속의 저주받은 기사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칼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외팔의 순례자를 만나 깨달음을 얻으면서, 그것이 자신의 죄책감과 두려움이 만들어 낸 환상임을 깨달았다.
그러자 삼 년 동안 어디를 가나 자신을 따라왔던 검은 기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전부 루이센의 망상이었으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루이센의 앞에 다시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루거의 시체에서 탄생하여서.

‘마, 말도 안 되는 일이……. 왜, 왜 저게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 거지? 루거는 그때도 죽었던 건가? 죽은 척


한 게 아니었나?’

루이센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호흡이 가빠졌다. 충격적인 모습에 칼튼도 알아볼 정도로 손을 덜덜 떨었다.
다시 그 옛날 고통스러웠던 떠돌이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외팔의 순례자 덕분에 극복했다고 생각한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죽은 루거가 부활했고, 죽음의 기사가 되었고, 근데 그것이 나를 줄곧 괴롭혀 오던 내 환상이었고…….

이쯤 되자 의심이 들었다.

“내가, 내가 지금 제정신이 맞나?”

내 눈이, 내 머리가, 지금 정상인 건가? 또다시 그때처럼 망상에 빠져 있는 건 아닌가? 나는 과거로 돌아왔는데.
전부 다시 바로잡았는데.

그럼, 어쩌면, 사실은 회귀한 것도 다 내 착각이었다면…….

공황 상태에 빠진 루이센을 구한 것은 칼튼의 한마디였다.

“제정신 맞습니다. 좀 미친 거 같지만…… 전부 사실이에요.”

“자네도 저자가 보여?”

“네.”

루이센은 후욱, 긴 숨을 내쉬며 칼튼에게 기대었다. 칼튼은 루이센의 몸을 받쳐 주며, 그의 어깨를 감싼 손으로
달래듯 토닥였다. 그 사소한 행동에 루이센은 크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사이 죽음의 기사는 검을 들었다. 그의 손에 잡히자 은빛 검신 역시 새까맣게 물들었다. 평범한 존재는


아니었다.

“하하하하, 역시!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어! 미리미리 손을 써 두기를 잘했지! 그분을 위한 기사가 하나쯤
있었으면 했는데!”

아홉 번째 숭배자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가 노리던 비장의 한 수가 바로 죽음의 기사의 탄생이었다.

한 저주받은 기사의 이야기가 있다. 주군을 배신한 죄로 목이 잘리고 저주를 받아, 평생을 자신의 머리를 찾아
떠돌게 되었다는 기사. 목이 잘린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자신을 본 사람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하여 죽음의
기사로 불렸다.

한때는 누구보다 명예로운 기사였으나, 저주받은 존재.

사람들은 이야기 속 허구라 믿었으나 아홉 번째 숭배자는 오랜 연구 끝에 죽음의 기사 역시 구울과 같은


몬스터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죽음의 기사를 만들어 내고 싶었는데 그에 걸맞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죽음의 기사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충성과 배신 그리고 죽음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처음 루거를 만났을 때 눈이 번쩍 뜨였다. 루거는 기사다운 마음가짐으로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되 루이센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아홉 번째 숭배자는 언젠가는 루거가 루이센 때문에 주인을 배신할 거라 여겼고, 그때가
되면 그를 죽음의 기사로 만들 수 있도록 미리부터 손을 써 두었다.

오늘, 그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아홉 번째 숭배자는 루거에게 루이센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물론 루거가 루이센을
죽이지 못할 것은 예상했다. 죽여도 괜찮긴 하지만, 그보다는 루거가 명령을 배신하는 것이 더 좋았다.

아홉 번째 숭배자의 기대대로, 루거는 마지막 순간 주인을 배신하고 루이센을 살리겠다고 마음먹었다. 딱 필요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칼튼이 루거를 죽여 주었다.

완벽한 죽음이었다.

아홉 번째 숭배자는 루거를 부활시켜, 죽음의 기사로 탄생시켰다. 죽음의 기사는 어느 정도 생전의 기억이나
감정이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몬스터였기에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또한 루거가 살아 있을 때보다 몇 배나
더 강했다.

“가라! 가서 다 죽여 버려! 가장 먼저 저 광신도부터 처죽여!”

아홉 번째 숭배자는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죽음의 기사는 루이센과 칼튼에게서 몸을 돌려, 모리슨에게 달려들었다. 모리슨은 건틀릿으로 검은 칼을 막아


냈다. 모리슨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힘도 힘이지만 죽음의 기사로부터 흘러나오는 사악한 기운이 너무도 강렬해 모리슨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상성이
정반대라는 의미는 역으로 모리슨도 그들의 힘에 약하다는 의미였다. 모리슨의 불길이 크게 약해졌다.

‘큿, 결계를 유지해야…….’

죽음의 기사는 동요하지 않고, 또 한 번 검을 내리쳤다. 이번엔 칼튼이 단검을 던지며 보도해 간발의 차로
모리슨이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계를 유지하진 못했다. 악마숭배자를 가둬 두던 푸른 불길이 사라졌다.

“좋아! 됐어! 이제 돌아와!”

아홉 번째 숭배자는 죽음의 기사를 불러들였다. 그는 냉큼 죽음의 기사의 등에 올라타더니, 창문을 가리켰다.

루거였다면 자신의 몸에 올라타는 행위 따위를 받아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기사는 묵묵히 아홉 번째
숭배자를 업고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커다란 창문이 열리며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와 동시에 바람에 연기가 밀려나듯, 죽음의 기사도 악마숭배자도
사라졌다.
모리슨이 재빨리 뒤쫓아갔지만 그들의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 도망쳤습니다. 그래도 바깥은…… 안정이 된 거 같아요.”

악마숭배자가 떠나자, 구울은 전투력을 잃고 본래의 느리고 무해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루이센의 조언대로 방어에
치중하던 동부 대영주의 군사들은 기세를 몰아 구울들을 멀리 밀어냈다.

간밤에 일어났던 전투가 끝이 났음을 알려 주듯, 먼 곳에서부터 동이 트며 사위가 밝아 오고 있었다.

104 화

악마숭배자들이 떠났을 때, 저택 외부에서 벌어지던 전투도 끝이 났다. 구울들은 좀 전까지의 맹렬한 공격을
멈추고 느릿하게 움직이며 목적 없이 서성이기 시작했다. 마치 끈이 떨어진 꼭두각시 인형 같았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병사들이 당황하다가 곧 동부 대영주의 지시에 따라 구울들을 한쪽으로 밀어 넣었다.
구울들은 밀면 밀리는 대로 끌려갔다.

동부 대영주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뜻 침착한 얼굴이었으나 속으로는 몹시 놀라고 있었다.

‘아니에스 공작의 말이 맞았군.’

연회장을 빠져나올 때, 루이센이 동부 대영주에게 신신당부했다. 공격을 해 봤자 구울 군단에게는 먹히지 않을


것이니, 방어에 집중하면서 적이 알아서 물러갈 때를 기다리라고.

막상 저택 밖으로 나왔을 때는 구울 군단의 기세가 너무도 매서워 반신반의했지만, 루이센의 조언에 따랐다.
그랬더니 정말 루이센의 말대로 되었다. 덕분에 죽지 않는 적들의 습격에도 피해가 적었다.

‘내가 살면서 아니에스 공작의 말을 듣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더니 정말 그러했다.

해가 떠오르면서 간밤의 참상이 점점 더 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막연히 상상한 것 이상의 끔찍한
풍경이었다. 자칫 잘못했다면 여기서 몰살당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도처에 사악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동부 대영주는 자신들을 습격한 존재가 무엇인지를 금방 짐작해 냈다. 루이센이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아도 노인의
지혜는 진실을 간파해 냈다.

‘왕국에 이단 놈들이 이다지도 강성했던가. 아니에스 공작과는 꽤 악연인 듯해.’


언뜻 듣기로 놈들을 악마숭배자라고 불렀다. 악마숭배자라니. 그 이름만으로도 불경하며 신을 모욕하겠다는
의도가 느껴지는 악랄한 놈들이었다.

악마숭배자들이 자신과 루이센, 그리고 귀족들까지 엮어서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것 또한 짐작이 갔다.
놈들은 치밀했고 귀족의 생태에 정통했다.

모두 조금씩 보톤 자작에게서 이상함을 느끼긴 했으나, 다양한 이유로 모르는 척했던 것이다. 동부 대영주는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어서, 귀족들은 동부 대영주의 눈치를 보느라 등등. 때문에 연회장에 검붉은 안개가
들어차기 전까지, 아무도 함정에 빠졌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귀족들을 두 부류로 나누고 있었지. 한쪽은 살리고, 한쪽은 죽일 거 같았어.’

악마숭배자들이 죽음을 조작하여 더 큰 혼란을 불러오려고 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놈들이 성공했다면
동부 대영주조차 감당할 수 없는 위기가 닥쳐왔을 것이다.

동부 대영주는 아찔한 기분에 습관적으로 성호를 그었다.

‘아니에스 공작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루이센이 순례자 행세를 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해결해 명성을 떨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악마숭배자들과 계속 부딪히면서 어둠의 손길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있던 것이다.

동부 대영주는 연회장에 남아 뒷수습을 하던 루이센을 떠올리며 큰 감동에 젖었다.

사실 남들보다 먼저 습격을 알았으니, 루이센 혼자 도망치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저택에
남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얼마나 숭고하고 희생적인 태도란 말인가.

더구나 짧은 순간 상대의 역량과 자신들의 역량을 파악해서, 역으로 함정을 판다는 계략을 짜냈다. 너무나
영리하면서도 대범하고 냉철하여,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동부 대영주는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센은 자신이 알던 나약한 청년이 아니었다. 자신이 가르치고 끌고
가야 할 어린아이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어른이었으며, 사람들을 능히
이끌 수 있는 어엿한 한 명의 군주였다.

‘이제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어야겠군. 그리고…… 칼튼, 그자에게도 역시.’

지금까지 동부 대영주는 칼튼을 칼솜씨와 1 왕자의 비호만 믿고 날뛰는 몹쓸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악마숭배자들과 숭고한 싸움을 계속해 온 용사였던 것이다. 루이센을 도와 이 비밀스러운 성전의
선봉에 선 용맹한 전사였다.

칼튼에 대해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들리는 풍문만 믿고 신의 뜻을 따르는 자를 무시하다니.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던 동부 대영주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유난히도 강렬한 햇살이 어리석은 자신을 질책하는 것 같아,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제라도 극진히 대접하라고 하인에게 일러두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왠지 부족해 보였다. 동부 대영주는 다시금
하인을 불러, 칼튼에게 줄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게 일렀다.

‘신의 뜻을 행하는 자이니, 그만한 대접을 해 줘야지.’


그리고 신의 충실한 종답게, 악마숭배자들을 처단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지원하겠다고 저 뜨거운 태양을
바라보며 맹세했다.

당사자인 루이센과 칼튼도 모르는 사이에 동부 대영주라는, 아주 든든한 지원군이 생겨났다.

***

저택의 손님 방.

루이센은 창가를 서성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동부 대영주의 병사들이 저택 주변을 정리해 나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도울까.

밤새 고생했으니 쉬라는 말을 듣고, 씻고 침대에 눕기는 했지만 영 잠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 의미 없이 방을


서성이는 것보다는 나가서 잡일이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누우면, 자꾸 루거의 죽음이 떠올랐다. 쓰러졌던 몸이 새까맣게 물들면서 다시 일어나 움직이는
모습은 몇 번을 생각해도 오싹했다.

검은 갑옷, 검은 투구, 그 안에 형형히 빛나는 안광, 주변에 드리운 죽음의 기운까지. 회귀 전에 봤던 죽음의
기사랑 똑같았다.

‘난 전부 내 망상인 줄 알았는데.’

외팔의 순례자도 다 가짜라고 말했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환각을 보기도 한다고. 딱 외팔의 순례자를 만난
시점에 죽음의 기사 역시 사라졌기에 마음의 안식을 얻은 덕분이라고만 믿었다.

하지만 이제 죽음의 기사가 실존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 기억을 돌아보자 의심이 생겨났다. 외팔의


순례자로부터 안식을 얻어 죽음의 기사가 사라진 게 아니라, 외팔의 순례자가 죽음의 기사를 없애 주었기에
안식을 찾은 건 아닐까.

내가 안식을 얻은 게 먼저였던가, 죽음의 기사가 사라진 것이 먼저였던가.

만약 후자라면 외팔의 순례자는 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거지? 그도 악마숭배자에 대해 알았을까?

루이센은 두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어느 쪽이든 내가 그분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설령 다른 목적으로 내민 손이었다 하더라도, 그때의 죽어 가던 루이센에게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그것마저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죽음의 기사가 보이기 시작한 건, 더블레스 백작가에서 쫓겨난 뒤, 남부를 벗어나기 전이었어.’

회귀 전 루거는 그사이에 죽었고, 죽음의 기사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악마숭배자가 했던 말을 보면 죽음의 기사가
탄생하려면 뭔가 조건 같은 걸 달성해야 하는 거 같던데. 그때도 어젯밤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건가?
불현듯 루이센은 회귀 전 더블레스 백작가에서 쫓겨났던 때를 떠올렸다.

루이센은 숲을 가로질러 혼자서 간신히 백작가의 저택에 도착했다. 더블레스 백작을 만난 뒤 창고 같은 곳에 잠시


갇혀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 때 한 기사가 루이센을 꺼냈다. 그는 루이센을 억지로 끌고 가, 멀리 쫓아냈다.
푼돈을 던져 주면서 또다시 남부 땅을 밟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도 했다.

루이센은 겁에 질려 허겁지겁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백작의 기사가 자신을 쫓아냈으니, 당연히 더블레스
백작에게 쫓겨났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더블레스 백작령으로 야반도주한 게 루거와 악마숭배자들의 계략이었을 텐데, 그렇게
쉽게 놓아준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게 설마 루거였고 루거가 날 도망치게 해 준 거라던가…….’

상상하다가 루이센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 날 죽이려고 한 놈이 날 왜 구해 주겠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루거가 그럴 이유도 없고.

어쨌든 회귀 전 보았던 죽음의 기사가 루거라면, 루거도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은 셈이었다. 미련한 놈. 남


배신하고 살 거면 잘살기라도 하든가. 루이센은 혀를 찼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접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칼튼이었다.

전투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 낸 그는 어딘가 더 멋있었다. 루이센은 금방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는 평소 입던


옷이 아니라, 루이센이 입은 것 같은 질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부드러운 옷감이 그의 탄탄한 몸매에 감겨
떨어지면서 더욱 근사하게 보인 것이다. 루이센 같은 귀공자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성공한 남자에게서 풍겨 오는
매력이 느껴졌다.

“동부 대영주의 하인이 주더라고요. 갑자기 어찌나 극진하게 대하는지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가 바뀌네요.”

칼튼은 어깨를 으쓱했다. 툴툴거리기는 하지만 대접받는 것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의 손에는 유리잔 두 개와


술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못 쉬고 계실 거 같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심란할 때는 이게 최고죠.”

칼튼은 술병을 흔들었다. 루이센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술은 핑계고 칼튼이 자신을 위로해 주러 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105 화

루이센과 칼튼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이번에는 포도주였다. 잔을 채우고 작게나마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유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청량하게 울리고 보라색 액체가 흔들렸다.

“모리슨은? 아직도 심문 중인가?”

연회장에서 다 죽어 가는 악마숭배자를 하나 발견했다. 보톤 자작 행세를 했던 그놈이었다. 다들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 숨이 붙어 있었는지 그대로 모리슨이 데려갔다. 눈도 못 뜨는 사람을 어떻게 심문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모리슨은 피곤해하면서도 역시 공작님을 따라다니기로 한 게 정답이었다면서 무척 기뻐했다.

“좀 전에 잠깐 들렀는데 지금 한창 심문 중이더군요. 모리슨이 몇 가지 알아낸 걸 말해 줬습니다.”

악마숭배자들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숭배자라고 불리는 사제 계급에 해당하는 이들은 총 열두 명.


자기들끼리는 열두 사도에 맞춘다는 의도인 모양이다. 숫자를 붙여서 부르는데 그중 한 사람이 왕국에서 꽤나
고위직의 인물인 모양으로, 그 사람이 바로 루거의 아버지라는 모양이었다.

“아버지?”

“친아들은 아니고, 사생아라더군요. 그놈들끼리는 비밀도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아…….”

어느 귀족가 삼남이라는 신분은 역시 가짜였구나. 그럴 줄 알아서 별로 놀랍진 않았다.

“어느 귀족인지는?”

“거기까지는 아직이요.”

“쉽게 말 안 하겠지. 그래도 짧은 시간에 많이도 알아냈네.”

“예, 뭐……. 숨만 겨우 붙은 놈이 비명 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칼튼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단심문관의 악명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심문 장면이었다.

“하여튼 그 근처에 가지 마세요.”

칼튼마저도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단기간에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데리고 이만큼 알아낸 거면 분명 보기 좋은 꼴은


아니겠지. 루이센은 절대 한동안 모리슨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수도에도 놈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수도에?”

“네. 루거가 수도로, 왕궁에 다녀오기도 했다더군요.”

“왕궁이라…….”

루이센은 반사적으로 왕이나 1 왕자를 떠올렸다가 이내 지웠다. 왕궁에는 많은 사람이 살았다. 하인이나 기사,
행정관료 등. 귀족 중에는 수도에 있을 때 아예 왕궁에서 거주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놈일까……. 왕궁에서 마주치기 전에 알아 두고 싶은데.”

루이센이 미간을 찡그렸다.

“더 알아내는 대로 공유해 주기로 했습니다. 지금 하는 대로면 금방 알아내겠네요.”

그래도 루이센의 얼굴이 펴질 줄을 모르니, 칼튼이 엄지손가락으로 루이센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루이센은 잠깐
칼튼을 째려보았다가 그가 즐거워 보여서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

장난으로 시작된 손길이 점점 묘해졌다. 민감한 귀 뒤쪽을 진득하게 쓸어내렸다. 칼튼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칼튼의 시선이 어찌나 열렬한지 루이센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숨을 내쉬는 것마저 긴장되어, 루이센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가 칼튼이 턱을 쥐자 아예 눈을 감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칼튼의 입술이 루이센의 입술을 덮었다. 살짝 입을 벌리자 그 안으로 뜨거운 혀가 밀려들어 왔다.
칼튼에게서는 진한 포도맛이 났다. 칼튼도 자신과 같은 맛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끌어당기고, 더 깊이 탐닉했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상대의 열기와 촉감에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러다 보니 루이센은 어느새 소파에 누워 있었고, 칼튼은 자연히 루이센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칼튼의 한쪽 무릎이 아슬아슬하게 루이센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루이센 위로 칼튼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루이센은 마른 침을 삼켰다. 긴장이 되면서도 은근히 기대감이 들었다.

그런데 칼튼이 손으로 루이센의 이마를 짚었다.

“왜?”

“공작님, 지금 열이 있어요.”

칼튼은 심각한 얼굴로 루이센의 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같은 손길인데 이번에는 아주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상당히 높은데. 못 느끼겠어요?”

“어…….”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근육이 쑤시긴 했다. 머리도 띵하니 어지러우면서 눈도 뻑뻑했다. 밤새 그 고생을 했으니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몸살이었나 보다.

“그 체력으로 쭉 무리를 하셨으니, 아플 만도 하죠.”

칼튼이 보기에 루이센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까지 버틴 게 신기했다. 아슬아슬하게 정신력으로
버티다가 어젯밤 일로 한계를 넘어선 모양이었다.

“이제 진짜 쉬셔야겠습니다.”

칼튼은 루이센의 뺨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다음 루이센을 번쩍 들어 올려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고 푹 잘 수 있게 침대 커튼까지 꼼꼼하게 쳐 주었다.

“자요.”

“아니, 이렇게는 못 자지.”

그런 키스를 해 놓고 어떻게 잠을 자?

루이센은 상체를 일으키며 자신의 의지를 보였지만, 칼튼은 루이센의 건강에 있어서는 절대 타협이 없었다.

“지금 더 하면 진짜 쓰러지실 겁니다.”

칼튼은 루이센을 도로 눕히고 자신도 루이센 옆에 팔을 괴고 누웠다. 루이센이 일어나려고 하면 막으려고


루이센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못 잔다니까.”

루이센은 투덜거리면서 눈을 부릅떴다. 절대 안 잔다.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

칼튼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루이센의 가슴을 토닥토닥 규칙적으로 두드리면서 어디선가 들어 본 듯


익숙한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처음 불러 봐서 어색함이 있지만, 목소리가 좋아 귓가에서 노래가 녹아내리는 거
같았다. 포근한 침구에 몸이 감싸여서, 달래는 듯한 자장가를 듣고 있으니 저절로 몸에 힘이 빠졌다.

루이센은 안간힘을 써 봤지만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졌다. 루이센이 버티는 걸 보고 칼튼이 살살 루이센을 달랬다.

“걱정 말고 자요. 하던 건 언제든 이어서 하면 되니까.”

“여기 있을 거야?”

“그럼요. 전 계속 공작님 옆에 있을 겁니다.”

“그럼…… 좋아…….”

긴장을 놓자마자 루이센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피로와 몸살기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칼튼은 옆에 가만히 누워서 잠든 루이센 얼굴을 구경했다.

‘자고 일어나면 잠들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하기는 하려나.’

그냥 잠자는 동안 같이 있겠다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칼튼 나름의 각오가 담겨 있는 대답이기도 했다.

어젯밤에 루이센이 죽을 뻔한 건, 칼튼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너무 놀라서 루거가 루이센을 앞에 두고 짧은


순간이나마 망설였다는 걸 눈치챘음에도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내지 못하고 검을 휘둘렀다. 루거의 생각 따위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모리슨과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그가 왜 망설였는지 눈치채고 말았다.

죽음의 기사가 탄생하기 위한 필수 요소는 충성과 배신이라고 한다. 칼튼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루거가 마지막
순간 루이센을 살리려 했던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 동기가 사랑이라는 것도.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더 잘 보이는 게 있는 법이다. 루거가 하는 꼴이 딱 칼튼이랑 비슷했다. 감히 넘보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잊어 보려고 발버둥 치면서도 미련이 넘쳐흘러 루이센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꼴 말이다.

사랑 때문에 저주받은 기사가 되다니 비극이 따로 없었다.

루거의 최후가 비극이든 말든, 칼튼의 알 바가 아니지만, 경각심은 확실히 들었다. 계속 루거처럼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사랑도 성공도 얻지 못할 것이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죽다니 최악이다.

칼튼은 실감했다. 차라리 자신이 죽으면 죽지, 루이센을 잃기 싫었다. 계속 오래도록 그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뭐든 할 것이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자신답지 않게 너무 약한 소리를 해 왔다. 루이센이 자신을 깊게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그를 유혹해서 깊게 만들면 된다. 자신의 신분으로는 루이센 곁에 서기 어렵다면, 지금까지 쌓아 둔 것을 발판
삼아 그와 비슷한 위치로 올라가면 된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장애물이 있겠지만 부수고 나아가면 될 일이었다.

물론 말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고난은 익숙했다. 칼튼의 인생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손에 넣기 위한 투쟁이었다.
가시밭길을 맨몸으로 돌파해야 한다고 해도,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싸움이 기다리고 있어도, 그 보상이 루이센
아니에스라고 한다면 기꺼이 감수할 만했다.

루이센은 잠결에 칼튼의 품을 파고들었다. 칼튼은 생각에서 벗어나 루이센이 편하도록 자세를 고쳤다.

‘이러는 걸 보면, 나를 믿고 의지하기는 한다는 건데.’

칼튼이 있어야 안심하고 잠드는 것이며, 열이 나면서도 계속하겠다고 우기는 거며. 루이센도 칼튼에게 갖는
마음이 그렇게 가벼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루이센 본인은 그다지 자각이 없는 것 같지만.

칼튼은 루이센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조심히 쓰다듬었다.

‘어떻게 해야 자각을 좀 해 줄까. 하루 종일 나만 생각할까.’

선배 용병들이 떠들던 대로, 약간의 밀고 당기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칼튼은 평온한 루이센의 얼굴이 얄미워, 살짝 뺨을 꼬집었다. 그러자 눈썹이 찡그려지는 게 사랑스러워 작은
미움은 금방 녹아내렸다.

지금은 잘 자게 놔두자. 나중에는 제발 잠 좀 재워 달라고 애원해도 안 재울 테니까.

칼튼은 루이센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그도 편안히 잠이 들었다.

***

푹 자고, 배불리 먹어 완전히 회복한 루이센은 동부 대영주 일행과 수도로 출발했다. 일행은 처음보다 훨씬
조촐해졌다. 동부 대영주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잔뜩 끌고 가던 귀족들을 돌려보내고 가신들을 일부 남겨 보톤
자작의 영지를 정리하도록 했다.
모리슨과는 보톤 자작의 저택에서 헤어졌다. 그는 바로 수도로 가지 않고 악마숭배자의 심문을 더 진행한 뒤 따로
행동하겠다고 했다. 이별이 아쉬웠지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어 계속 정보를 교환하기로 했다.

보톤 자작의 저택을 떠난 뒤에는 별일 없이 빠르게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후.

루이센과 칼튼은 수도에 도착했다.

‘드디어!’

루이센은 일부러 마차에서 내려, 수도 땅에 발을 디뎠다.

정말 길고 험한 여정이었으나 그래서 더 수도가 반가웠다. 루이센과 칼튼은 손을 마주 잡고 이 기쁨을 함께


누렸다.

106 화

9 장.

수도에 도착해서 동부 대영주 일행과도 헤어졌다. 루이센과 칼튼은 단둘이 아니에스 공작가 소유의 저택으로
향하게 되었다.

초겨울의 하늘은 맑고 높았고, 서늘한 공기가 흥분을 살짝 식혀 주어 기분이 더 좋았다.

공작가의 저택은 왕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금방 도착했다. 저택의 문을 지나쳐 정원수가 심어진 아름다운 길을
쭉 걸어가니, 저택의 본 건물이 보였다. 저택 앞에는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전부 루이센을 마중 나와 있었다.
하인부터 수도 저택에서 일하는 공작가의 가신들도 보였다.

공작성도 그리운 고향이지만 수도 저택은 루이센이 가장 화려하고 윤택한 시절을 보냈던 곳이었다. 그런 장소로
다시 돌아와, 생사도 모르던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되자 울컥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반가움과 그리움이 뒤범벅되어, 루이센은 급히 말에서 내렸다. 칼튼이 말을 잡아 주어 제법 멋진 모습이 나왔다.


그는 성큼성큼 수도 저택의 가솔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의 중간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수도 저택을 총괄하는 일을 하며, 부총관이라는 직위를 맡고 있었다.
피로감이 덕지덕지 붙어 삼십 대임에도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회귀 전에는 루이센이 도망친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유일하게 소식을 아는 사람이었다. 끝까지 저택을 지키다가,
이후 칼튼에게 노예로 하사되었다가, 나중에 칼튼마저 몰락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마지막까지 저택을 지킨 사람이라서인가, 루이센의 마음은 각별했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부총관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부총관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바람에 무색해졌다.

“공작님, 긴 여정을 마치고 무사히 귀환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부총관의 말을 이어받으며, 저택 앞에 나온 사람들도 허리 숙여 인사했다. 루이센은 머쓱하게 팔을 내리며 인사를


받았다.

“그래. 다들 이렇게 나와 줘서 고맙네.”

기세가 한풀 꺾이고 보니, 포옹하고 반가워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수도 저택의 사람들 사이에는 축 가라앉은,
초상집 같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하나 같이 차가운 무표정을 하고 눈을 내리깔고 있는데, 한없이
우중충하고 벽이 느껴졌다. 행동거지는 매우 정중했지만, 진심으로 환영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원래…… 저택이 이런 분위기였던가? 무슨 일 있었어?”

루이센이 부총관에게 물었다. 부총관은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 아주 많았지요. 공작님도 잘 아시겠지만.”

부총관은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지친 표정을 지었다. 그간의 마음고생, 몸 고생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

루이센이 공작령으로 도망쳐 버린 뒤 지난 몇 달간. 수도 저택의 사람들은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으로 매일


매일을 살았다. 수도가 1 왕자의 손에 떨어진 마당이니, 2 왕자를 밀던 아니에스 공작가 입장에서는 적진
한복판에 홀로 남은 격이었다.

그 원흉이 루이센이었다. 가신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2 왕자랑 붙어 다니더니 이 사달이 난 게 아닌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무책임하게 수도 저택을 두고 공작령으로 도망쳐 버린 루이센에게 수도 저택 사람들이 원망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루이센이 잘못되길 바란 건 절대 아니었다. 루이센이 실종되는 말을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고,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환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막상 다시 루이센을 눈앞에 두자
껄끄러움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루이센의 귀환을 진심으로 환영할 수 없었다. 부총관과 수도 저택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구구절절
루이센에게 티 낼 수는 없으니 무표정 아래 감추었다.

루이센은 어색하게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간 눈치가 좀 늘어 버린 바람에 사람들이 자신을 불편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 버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어떤 어린 하녀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루이센의 얼굴을 보고 놀라 미처 눈을 내리깔지 못한 시녀였다.


루이센이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님.”

“뭐, 뭐가? 왜 그래?”


루이센이 더 당황했다. 갑자기 뭔데? 무슨 일인데? 그가 하녀에게 다가가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하는데,
부총관이 슬그머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공작님. 아직 어린 하녀라 예의범절이 부족합니다. 제가 잘 교육하겠습니다. 부디 노하지 마시길.”

부총관의 말을 듣자 루이센은 알아차렸다. 지금 하녀와 눈이 마주친 것 하나 때문에 이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아, 맞다. 나 망나니였지…….’

그사이에 일이 너무 많아 잠시 잊고 있었지만, 회귀 전 자신은 손쓸 수가 없는 망나니였다.

여러 일을 겪으면서 개과천선했고, 회귀 후 열심히 노력하여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 주며 공작성 사람들의 인정도


받았다. 그러나 수도 저택의 사람들은 달라진 루이센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기억 속 루이센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망나니인 것이다.

오랜만에 마주한 망나니 시절의 업보에 루이센은 잠시 멍해졌다.

그때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던가? 당연하지만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맨정신으로 있었던 때가 더 적었으니까.


대게 주변에 무심했으나 가끔은 이유 없이 화가 나고 짜증이 치밀어 주변을 괴롭혔던 것도 같다.

‘그래도 하인들을 직접 나서서 벌주고 괴롭힌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그런 건 루거가 잘했다. 루이센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하인들을 자주 혼내곤 했다.

‘루거가 또…… 아니, 방치도 잘못이긴 하지.’

그때 루이센도 루거가 다소 과하다는 걸 알긴 했지만 귀찮아서 내버려 뒀다. 다른 사람 눈에는 루이센이나 루거나
같은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은 자업자득이었다. 루이센은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졌지만 애써 숨기며 부총관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눈 좀 마주친 걸로 화내지 않아. 이제 전처럼 별거 아닌 일로 하인들을 벌하는 일은 없을


거야.”

“예?”

“예전의 나랑은 다를 거라는 말일세.”

부총관은 못 믿는 눈치였다. 그러나 루이센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에는 크게 당황했다. 그가 기억하는


루이센은 가신들에게 굳이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부총관의 눈이 파르르 흔들렸다. 그가 뭔가 말을 하려는데 칼튼이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오랜 여정에 공작님도 많이 지치셨을 겁니다.”

칼튼의 묵직한 목소리에서 나오는 존재감에 부총관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쪽은…….”

“칼튼입니다.”
칼튼이 자신을 소개하자 부총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눈에서 불이 튈 거 같았다.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려는데
볼이 파르르 떨렸다.

루이센은 아차, 했다. 칼튼과 너무 친해져서 잊고 있었는데 칼튼이 내전 동안 2 왕자 편을 신나게 깨부수고


다녔다는 소식을 들으며 좌절한 지 일 년도 안 지났다. 수도 저택 사람들에게 칼튼은 아직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처음 루이센이 칼튼을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부총관이 칼튼의 면전에 대고 욕이라도 할세라 얼른 끼어들었다.

“칼튼 경은 내 손님이네.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고 내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야. 극진히 대하게.”

칼튼의 팔을 붙잡아 당기면서 얼른 착한 척하라고 눈치를 줬다. 칼튼은 시키는 대로 웃었다. 그다지 착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부총관은 더 뭐라고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를 지나 방까지 향하는 길은 아주 고난이었다. 하인들의 시선에 뒤통수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괜히


쳐다봤다가 누군가 또 눈이 마주치면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이 무릎을 꿇겠지 싶어서 꿋꿋하게 앞만 바라보는 게
고역이 따로 없었다.

부총관은 옆에서 또 왜 이렇게 뚫어져라 사람을 쳐다보는지.

사람들의 시선, 반응 하나하나가 전부 루이센의 흑역사였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루이센은 칼튼과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부총관이나 하인들을 다 내보냈다.
칼튼만 남고 나서야 루이센은 비로소 푹, 한숨을 내쉬었다. 힘이 쭉 빠져서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무슨 복도가 이렇게 긴지.”

루이센은 괜히 복도 탓을 하며 투덜거렸다. 칼튼은 루이센의 바로 앞에 소파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두 사람의


무릎이 겹쳐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으나, 어느새 이 정도 거리감이 서로에게 더 익숙했다.

“사람들이 너무하군요. 그래도 공작님이 고생해서 돌아오셨는데 어째 반응들이 영…….”

칼튼은 루이센을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가 불만이었다. 루이센도 느낀 것을 칼튼이 못 느꼈을 리 없었다. 루이센은
민망함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거…… 다 내 자업자득이야…….”

“공작님이 그 정도는 아니죠. 공작님은 많은 일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공작님이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아줄


만도 할 텐데요.”

“……자네는 모르겠지만……. 수도에서 망나니란 소리 듣는 거 생각보다 어렵다?”

수도에 널린 게 집안 좋고 돈 많은데 생각은 없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수도의 밤을 즐기며 집안의 권력을


휘두르고 돈을 흩날려 댔다. 그런 분위기이니 자기 고향에서는 망나니로 이름 날렸다는 젊은이들도 수도에 오면
그냥 좀 혈기왕성하다는 소리나 들을 뿐.

전국에서 몰려든 망나니들 사이에서도 망나니로 인정을 받을라치면, 친구들이랑 몰려다니며 술 마시고 소란을
일으키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사고를 거하게 쳐야 했고, 그런 사고를 치고도 처벌받지 않을 권력과 돈도 필요했다.
그러면서도 주변으로부터 절연당하지 않고 계속 놀아 줄 인맥도 가져야 했다.
수도에서는 망나니로 이름 날리는 것도 아무나 못 한다. 그리고 그걸 해낸 것이 루이센이었다. 그다지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였다.

“수도 저택 사람들은 그 꼴을 다 지켜봤는데, 소문 같은 걸 믿겠어? 인제 와서 날 보는 시선이 달라질 리가


없는데.”

루이센은 으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칼튼의 품에 안겼다.

“멋지게 내 저택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자네에게는 한심한 꼴만 보이고 있어.”

그동안 칼튼에게 못난 모습을 많이 보였으니, 수도에서는 멋진 모습을 많이 보여 주리라 다짐했는데 시작부터


망했다. 망나니 시절의 업보는 죽었다 살아나도 따라오는구나. 루이센은 진심으로 침울해하는데 칼튼은 웃음을
터트렸다.

107 화

“전 한심한 꼴이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잘 생각해 봐?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나 고블린한테 깔려 있었거든?”

루이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칼튼은 그때를 떠올리는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아, 그때. 굉장히 얼빠진 얼굴이셨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귀여웠는데요.”

“!”

훅 들어온 칭찬에 루이센은 칼튼의 가슴팍을 가볍게 손으로 퉁, 하고 쳤다.

“그때도 고군분투하고 계셨죠. 공작님은 늘 최선을 다하고 계시니, 그걸 안다면 누구도 한심하게 보지 못할
겁니다. 망나니라는 인식을 뒤집은 거, 공작성에서도 이미 해 본 일 아닙니까. 이미 한 번 성공한 일이니
이번에도 잘될 겁니다.”

“그러려나……?”

“저도 공작님을 싫어했는걸요. 그런데 지금은…….”

칼튼은 루이센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기고 관자놀이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깃털처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
입술의 감촉은 루이센의 가슴속까지 간질였다.

‘하긴. 저 칼튼도 나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수도 저택 사람들이 아무리 루이센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어도, 처음 만났을 무렵 칼튼의 살기등등함에는 미치지
못했다. 칼튼에 비하면 수도 저택 사람들의 망나니 취급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래. 할 일을 하다 보면 망나니 취급이야 자연히 바뀌게 되겠지.’

지금까지도 쭉 그렇게 해 오지 않았나. 칼튼의 말대로 공작성에 있을 때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었다. 회귀한 뒤


여러 일을 겪었다. 공작령에서 전쟁을 막으며 최악의 상황도 견뎌 냈고, 악마숭배자들에게 쫓기면서도 잘 버텨
냈다. 그러니 이번에도 잘할 수 있다.

칼튼의 위로에 힘입어, 루이센은 자신감을 가득 충전했다.

“뭐 그렇지만 눈만 마주쳐도 무릎을 꿇는 건 좀 과한 감이 있긴 하죠.”

“그치? 당장 할 일도 많은데 다들 날 경계하니,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니깐.”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왕성에 있다는 악마숭배자들의 배후도 알아내야 하며, 공작가의 권위도
일으켜 세워야 했다. 지금처럼 가신들이고 하인들이고 비협조적이어서는 조금 곤란했다.

“똑똑한 자네가 말해 봐. 뭐 좋은 아이디어 없나?”

“식사 초대라도 하죠?”

“식사?”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찬에 초대해서 노고를 위로하고 같이 식사를 하는 거죠. 친밀감을 높이는데 같이 밥
먹는 것만 한 게 없죠. 공작님이 그들을 특별하게 신경 써 준다는 느낌이 들 테니 원망도 누그러들 테고요.”

칼튼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솔들을 한데 모아 치하하고 식사를 대접하는 건
회귀 전의 루이센이 절대 할 리 없는 일이었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자신이 달라진 면모를 자연스럽게 보이기
좋을 듯했다.

그리고 공작령에서 영지민들과 식사를 함께하면서 생각한 건데, 같이 밥을 먹으면 친밀감도 빨리 늘었다.

“좋아. 자네 말대로 해야겠어.”

부총관에게 가서 말을 꺼내 봐야겠다. 어차피 음식이야 루이센을 환영한다고 넘치게 준비하고 있을 테니, 갑자기
제안해도 어렵지 않을 거고. 그러다가 루이센은 불현듯 생각나 덧붙였다.

“저녁 식사는 기대할 만할 거야. 공작가의 만찬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올라와, 가문의 위상을 느낄 수 있을
정도지. 자네가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음식도 있을 거야.”

이거라면 칼튼에게 자랑할 만하겠지. 군침이 돌면서도 기대감이 들었다.

“자네는 내전 이후의 모습밖에 못 봐서 잘 와 닿지 않겠지만 원래 공작가는 더 대단해. 더 부유하고 일하는


사람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사람들도 너그러운 편이지.”

“네.”

“왕가와 비교해서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거 알아둬. 왕자가 자네를 뭘로 꼬시든 나도 그만큼 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아하하.”

칼튼이 웃음을 터트렸다. 루이센이 왜 자꾸 가문 자랑을 하나 했더니 내심 왕자랑 경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가 1 왕자 만나러 가서 안 돌아올까 봐 걱정되기라도 했어요?”

칼튼은 내일쯤 1 왕자를 만나러 가기로 되어 있었다. 루이센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 1 왕자의 명령이었기에, 그에
대한 보고를 해야 했다. 왕성에 들어가는 김에 1 왕자의 의중이나 왕성 분위기도 파악하는 게 좋겠다고, 루이센과
이야기를 맞춰 둔 상태였다.

보고를 마친 뒤에는 꼭 루이센 곁으로 돌아오기로 약속을 했는데도 루이센은 칼튼이 1 왕자에게 넘어가 버릴까 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아니……. 그냥 자네에게 정보를 주는 거지. 내가 이렇게 잘났다, 하고.”

속마음을 간파당하자 루이센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칼튼은 피한다고 순순히 놓아줄 만큼 착하진
않았다. 그는 루이센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는 하늘 높이 치솟은 입꼬리가
주체가 되지 않는 듯 실실 웃어 댔다.

“아, 그래서 나한테 멋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했던 거구나. 대답해 봐요, 응?”

“그걸 꼭 들어야겠어? 날 놀리려는 거지?”

다 알면서 묻는 건 무슨 심술이란 말인가. 루이센은 칼튼의 빠른 눈치가 얄미워 대답을 안 하고 버텼다. 하지만
칼튼의 까만 눈동자가 기쁨으로 반짝이는 것이 너무도 예뻐, 절로 입이 열렸다.

“……맞아. 자네에게 잘 보이고 싶었어.”

“그렇구나. 그렇게 나한테 잘 보이고 싶었구나. 내가 그렇게 좋아요?”

“…….”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칼튼은 루이센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기쁨이 주체가 안 되는 사람처럼 루이센의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흐트러트렸다. 밝은 금발 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귀가 빼꼼하고 드러났다.

루이센은 피부가 흰 편이라 금방 붉어지곤 했다. 칼튼의 시선이 귀에서 목덜미까지 진득하게 훑어 내려갔다.
루이센의 목덜미도 귀만큼 붉었고 긴장감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두려움이 아닌 기분 좋은 기대감으로 인한 것임을
알았다. 그 위로 입을 가져다 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목덜미에서부터 귓등까지. 칼튼은 시선으로 집요하게 훑은 그 선을 따라, 입을 맞추었다. 칼튼의 손이 묘한


느낌으로 루이센의 등허리를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분위기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루이센도 칼튼의 뺨을 감싸면서 열렬히 응했다. 부총관이 저녁 식사에 대해 물어보러 올
때까지 방 안에는 들뜬 숨소리만이 오래 감돌았다.

***
그날 저녁은 칼튼의 제안대로 만찬이 열렸다. 수도 저택에 일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식당으로 모였다. 부총관과
기사 같은 공작가에 충성을 맹세한 가신들부터, 고용관계인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까지.

만찬이 시작되고 처음에는 식사 자체가 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침울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보듯이 루이센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루이센이 잔을 들고 일어나, 수도 저택 사람들의 고생을
위로하고 저택을 잘 지킨 상으로 작은 주머니에 금화를 담아 선물하자 분위기는 슬슬 달라졌다.

‘저 망나니가 집 밖에서 고생을 오래 하더니, 사람 귀한 줄은 제대로 배웠나 보구나!’

‘벌주려는 게 아니라 진짜 우리를 위해 만찬을 열어 준 거야? 아니에스 공작, 그 망나니가?’

금화가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냥 재미 삼아 뿌리기에는 금화는 너무 묵직했다.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만찬을 즐기기 시작했고, 그동안 마음을 졸이며 버텼던 만큼 만찬 분위기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역시 금화만 한 게 없지.’

이번 한 번으로 망나니라는 이미지가 변하지는 않았다. 식사를 하다가도 루이센과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눈을
내리까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지는 않게 되었다.

저녁 만찬으로 루이센이 이전처럼 패악을 부리지는 않을 거라는 암시는 충분히 되었으며, 헌신에 확실히 보상을
내릴 줄 안다는 것도 인식시켰으니 성과가 있었다.

만찬 내내, 부총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떠나갈 줄을 몰랐지만 어쨌든 별다른 문제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

다음 날 오전.

루이센은 전날 저녁의 만찬 성공에 용기를 얻어 집무실로 향했다. 하인에게 일러 부총관을 불렀다.

집무실은 루이센이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부총관도 설마 루이센이 저택에
돌아와 가장 먼저 집무실을 사용할 줄은 몰라, 청소를 제대로 안 해 둔 참이라 무척 당황했다. 루이센이 술을
즐기고 카드게임을 하던 놀이용 방은 번쩍번쩍하도록 청소해 뒀는데, 정작 루이센은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루이센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그동안 총관이 저택으로 보냈던 편지들을 읽는 중이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정보가 담겼을까 하여 확인하는 것이지만 별 내용은 없었다.

부총관이 도착한 것은 그때였다. 그는 허둥지둥 집무실로 들어오다가 루이센을 발견하고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인이 와서 루이센이 집무실로 부른다는 말을 전하긴 했지만, 설마 진짜 루이센이 집무실에 있을 줄은 몰랐다.

루이센이 이른 아침에 잠든 것도, 취한 것도 아닌 맨정신으로 집무실에 앉아 있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루이센은 열 살 이후로 제 발로 집무실에 들어온 적이 없었으며, 요 근래 몇 년간은 밤새 술을 마시다
아침이 되어서야 취해서 기어들어 왔던 것이다.
더구나 루이센이 직접 편지를 읽고 있었다. 루이센은 간단한 편지글도 겨우 읽는 수준이라, 늘 옆에서 누군가가
편지를 읽어 줬던 것은 공작가의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부총관이 기억하기로 총관이 보낸 편지는
금융과 세금에 대한 것으로 그렇게 간단한 내용도 아니었다.

“아, 다들 들어와. 이른 아침부터 불러서 미안하네. 한시라도 빨리 수도의 상황을 파악해야겠다 싶어서
불렀다네.”

루이센이 먼저 아는 척하고서야 비로소 부총관은 정신을 차렸다.

108 화

“죄송합니다. 어떤 용건이시라고 하셨죠?”

“수도 정세 말이야. 왕성의 상황이나 귀족들 동향 같은 걸 알고 싶은데 조사해 둔 게 있겠지?”

“예, 총관님의 지시로 알아 두고 있습니다만……. 그런 게 왜…… 궁금하신지…….”

“왕자나 귀족들을 만나는 게 내 일인데, 알아 둬야 실수를 하지 않지.”

너무도 정상적인 답변이었다. 그래서 부총관은 더 현실감각이 없었다. 이 망나니가 그런 상식적인 말을 할 리가


없는데?

부총관의 당황은 그의 얼굴에 깔린 짙은 피로감에 덮혀 거의 드러나지 않았기에, 루이센은 대수롭지 않게 질문을


던졌다.

“왕성부터 말해 보게. 전하는 어떻지? 위급하다는 소식만 겨우 들었어.”

“아직 공작가로 온 연락이 없는 걸로 보아 살아 계신 거 같습니다.”

“‘같다’라. 왕성 안의 상황을 자세히 모르나?”

“네. 1 왕자님이 왕성을 장악하면서 내부 인사가 많이 바뀌어 저희 쪽에서 심어 둔 정보원도 처리가 된


듯합니다.”

“그런가……. 1 왕자와 그를 지지하던 귀족들이 득세할 건 예상한 바이지. 우리 쪽에 불이익이 있겠지?”

“아무래도 그렇지만……. 그래도 남부를 적으로 돌릴 게 아니라면 우리 공작가를 대놓고 핍박하지는 못할


겁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듯했지만, 부총관은 루이센이 입을 열 때마다 놀랐다. 이 정도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할 법한 이야기였으나, 문제는 대화하는 상대가 루이센이라는 점이다.

‘내가 지금 공작님이랑 평범하게 정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이게 현실이라고?’

루이센은 가신들이 다 알아서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서, 그동안 자기 바로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도 남


일처럼 나 몰라라 해 왔다. 수동적이기 짝이 없어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뒀지, 질문하고 알아내려고 한 적은
없었다.

‘이 사람이…… 내가 알던 공작님이 맞나?’

부총관은 루이센의 얼굴을 잘 살펴보았다. 그는 집안 대대로 공작가의 가신이었고, 원래는 공작령에서 일하다가
루이센이 수도로 오면서 따라온 사람이었다. 루이센의 평생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남들은 헉, 하고 넋을 놓고
보는 루이센의 얼굴도 그럭저럭 무심하게 볼 정도로 익숙하다는 의미였다.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섬세한 외모는
몇 달 전에 본 것과 똑같았다.

그런데 루이센의 얼굴이 낯설게 보였다. 어제, 루이센이 말을 타고 나타나 다가오던 그때부터 계속 이 이상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부총관은 곧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루이센이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이전의 루이센은 삶에 아무 기대가 없는 것처럼 무기력하고 나른했다. 그런 모습에서 풍기는 비현실적인 느낌을
귀족적이라 추앙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가신 된 입장에서는 못 미덥고 좋지 않았다.

무릇 황금들판의 주인이라면, 대지에 우뚝 선 나무처럼 세상의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굳건함과 뜨거운 태양


빛을 가려 주는 나무 그늘 같은 자비로움을 가져야 하거늘. 저런 루이센의 무엇을 믿고 아니에스 공작가의
가신들이 노력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지금 루이센의 모습은 부총관이 기억하던 루이센과 정확히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루이센의 두 눈동자는
열정으로 또렷하게 반짝였고 표정은 생기발랄했다. 시선은 올곧았고 말에도 힘이 실려 있어, 루이센의 안에
확고한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전해졌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근심이 서려 있기는 했지만 두려움은
없었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아는 것처럼 당당했다.

사람이 고작 몇 개월 사이에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공작님이 아닌 다른 사람인 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순간 든 의문을 부총관은 빠르게 부정했다. 루이센 같은 얼굴이 세상에 두 명이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루이센의
망나니짓에 학을 뗀 부총관도 그의 얼굴만큼은 인정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면 정말 변했다는 건데…….’

부총관도 공작령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었다. 총관이 편지를 보내어 루이센이 달라졌다고, 손주 자랑하는
어르신처럼 호들갑을 떨었더랬다. 루이센이 순례자 행세를 하면서 사람들을 도왔다는 소문도 들었다.

부총관은 어느 것 하나 믿지 않았다. 총관은 냉철하고 유능하여 그가 존경하는 분이지만 루이센에 한해서는


평가가 후하다고 할까, 어떻게든 장점을 찾아내 그걸 극대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못난 자식을 둔 부모가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소문이야 원래 믿을 게 못 되었고 공작가에서 선전을 위해 과장을 했을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남의 말을


믿기에는 부총관이 몸소 보고 겪은 루이센의 망나니 시절이 너무도 파란만장했다.

하지만 루이센이 돌아와 보인 행동을 지켜보자면, 루이센이 예전의 그 망나니와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택의 가솔들을 모아 만찬을 대접하며 그동안의 고생을 위로하는 일은, 예전의 루이센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집무실에 나오는 것도, 궁금한 것을 알아내는 것도 그렇다. 루이센이 스스로 생각하고 노력하는
모습은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으음……. 그래. 달라진 건 달라진 거니 말이야.’

부총관은 루이센이 그 많은 업적을 스스로 해냈다고는 여전히 믿지 않았지만 어쨌든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망나니가 정신을 차릴 때가 다 오는군. 앞으로 사고는 안 칠 테니, 다행이야.’

루이센의 변화에 대한 부총관의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고 결심은 금방 흐려진다. 루이센도 당장은 집에 돌아온 감동에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만 도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또 루이센이 정말 마음속 깊이 지난 삶을 반성했더라도, 그래 봤자 루이센이었다. 망나니가 개과천선한다고


그동안 쌓아 온 업보가 없던 일이 되지 않으며, 불리한 상황이 뿅 하고 좋아지지도 않는 법이었다. 무능력하던
사람이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없던 능력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런 이유들로 부총관은 루이센의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기대를 갖지 않았다.

***

부총관과의 긴 대화가 끝나고, 루이센은 칼튼을 만나러 갔다. 칼튼은 저택 뒤편의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며 몸을
풀고 있었다. 싸늘한 날씨임에도 땀이 흥건했는데, 덕분에 튜닉이 젖어 몸에 달라붙으며 그의 울룩불룩한 상체
근육이 밝은 햇살 아래 드러났다. 지나가던 하녀들도, 루이센도 잠시 넋을 놓고 그를 구경했다.

“공작님!”

칼튼이 루이센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어디선가 와, 하고 감탄이 터져 나왔다. 워낙 체력이 좋아 얼굴로
시선이 갈 일이 적고, 항상 험악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칼튼도 길을 가다가 한 번쯤
뒤돌아볼 미남이었다. 특히 웃을 때면 눈매가 부드럽게 풀려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야기는 다 끝나셨습니까?”

칼튼이 다른 데 한눈팔지 않고 물소처럼 자신에게 달려오자 루이센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일단은. 부총관의 말대로라면 공작가의 전령이 저녁쯤 도착할 거 같다고 하네. 총관이 무언가 준비했을
테니 그걸 보고 마저 이야기하기로 했어.”

“그럼 이제 저랑 놀아 줄 시간이 있겠네요?”


칼튼이 살살 눈웃음을 치며 루이센의 손을 잡았다.

시간? 없으면 어디서 훔쳐 오기라도 해서 만들어야지. 루이센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칼튼은 얼른 방으로 가서 땀을 씻어 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점심 식사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루이센은


칼튼의 손을 잡고 저택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의 숫자가 적어진 덕분에, 복도가 텅 비어
있어 두 사람은 어디를 가도 방해받지 않았다.

루이센은 중간중간 귀한 것들을 따로 보관해 두는 방을 발견할 때마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은 걸로 골라 칼튼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요정이 축복했다는 물약, 어느 전설적인 대장장이의 유작이라는 단검, 무기로 쓸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보석 반지 등등.

수도 저택의 창고에는 귀한 물건들이 넘쳐났고, 칼튼에게 좋은 걸 주고 싶다는 마음에 폭주한 루이센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칼튼은 적당히 어울려 주었지만, 주머니를 꽉 채우고도 모자라 목과 팔에 주렁주렁 보석이
걸리자 그만을 외쳤다.

“그만. 이제 됐습니다. 이보다 더 주시면 자루에 담아서 다녀야겠네요.”

“아, 그럼 하인을 부를까?”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에이. 아직 창고는 더 남았어.”

“정말 됐으니까 좀 쉬어요.”

칼튼은 복도에 있는 소파에 앉으면서 루이센을 끌어다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루이센은 저항 없이 칼튼의 품에 폭
안겼다.

“이런 거 다 돈 주고도 못 살 물건인 거 같은데, 이렇게 막 주셔도 됩니까?”

“내 거 내가 주는 건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새로 사는 것도 아니고, 창고에서 놀고 있는 거니까 괜찮아. 다


자네 거 해.”

지금 칼튼에게 안긴 것만 해도 저택 하나는 살 수 있을 텐데도 루이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공작가가 대단하긴 하네요. 솔직히…… 지금까지 다른 귀족가랑 뭐가 다른가 싶기도 했는데.”

“말했잖아. 지금 정말 가세가 많이 기운 거라고. 앞으로 금방 회복할 거야. 좀 전에 부총관이랑 이야기했는데,


전망이 밝아.”

말이 나온 김에 루이센은 부총관과 나눈 이야기 일부를 칼튼에게도 들려주었다. 수도의 상황이 어떤지는 칼튼도
아는 편이 좋을 테니 말이다.

“1 왕자는 몰라도 그 휘하의 귀족들은 한때 적이었던 아니에스 공작가를 좋게 보지 않을 텐데요.”

칼튼은 날카롭게 지적했다.

“견제야 있겠지만 그래도 대영주 집안을 대놓고 건드리지는 못할 거야. 그럼 다른 대영주들이 가만있지 않겠지.
대영주라는 권위를 지켜야 할 테니.”

“그렇긴 하겠네요.”

“근데 거슬리는 건 있어. 더블레스 백작 말이야. 지금 수도에서 제일 잘나간다더군.”

루이센의 기억으로 더블레스 백작 자체는 특별히 인상에 남는 것이 없었다만, 그냥 넘어가기는 찜찜한 자였다.
컬린이 악마숭배자를 만난 곳도 그곳이고, 회귀 전 루거가 루이센을 야반도주시켜 데려갔던 곳도 그곳이었으니까.

“1 왕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많은 일을 맡게 되었고 오른팔이나 다름이 없다고 해. 원래도 그랬나?”

“아뇨. 제가 수도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정도 위치는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충실하다는 평이긴
했습니다만, 남부 출신이다 보니 중요한 위치에는 끼기 어려웠죠.”

남부 대영주인 루이센이 대놓고 2 왕자의 편에 섰다 보니, 남부 출신 귀족들은 아무리 열렬히 충성을 다해도
핵심에서 배제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칼튼은 회상했다.

“덕분에 남부 출신인 귀족들은 대체로 더블레스 백작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다니, 그가 남부의 맹주 자리를 노리는
게 아니냐는 걱정을 하더라고.”

“그러고 보니 공작령을 떠나기 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부 귀족들 사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요.”

하필이면 악마숭배자로 의심하는 인물이 득세하고 있다니, 어딘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109 화

생각해 보면 더블레스 백작은 아니에스 공작가가 몰락한 이후에 새로운 남부의 맹주로 떠올랐다. 만약 정말
더블레스 백작이 악마숭배자들과 한편이라면, 그를 가까이 하고 있는 1 왕자는 과연 아무 관련도 없을까?

1 왕자를 향한 루이센의 감정은 그럭저럭 호감이었다. 왕자 시절에는 거북해하기도 했지만, 왕이 된 이후 무너져


가는 왕국을 건사하겠다고 노력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악마숭배자들이랑 관계가 있다면 그렇게까지 고생하면서 왕국을 유지하지는 않았겠지.’

그렇다고 완전히 방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리슨의 일로 마냥 과거의 기억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1 왕자가 직접적으로 악마숭배자와 관련이 없더라도, 심복인 더블레스 백작이
루이센을 적대시한다면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수도까지 오는 여정에서 루이센과 칼튼은 많은 대화를 했다. 그중에 1 왕자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두 사람은 1
왕자가 굉장히 정치적인 계산에 능숙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면모도 강한 사람이라는 데 동의했다.

결국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백 퍼센트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칼튼이 왕성으로 가 직접 그를 만나


봐야 하는 이유기도 했다.

“음, 그래. 사실 엄청 그렇게 막 희망찬 건 아니야. 넘어야 할 산들이 아직 남아 있지. 내가 허세를 좀 부려


봤어. 그래도 선물은 다 받도록 해. 자네에게 뭐라도 주고 싶단 말이야.”

루이센은 일부러 시무룩한 척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칼튼의 마음도 약해졌다.

“그럼 적어도 담아 갈 포댓자루라도 하나 주시죠. 제 꼴, 공작님이 보시기에도 웃기지 않아요?”

“음.”

바지고 상의고 주머니는 터질 듯 불룩했고, 허리에는 검이랑 단검이 매달려 있고, 목에는 큼직한 보석 알이 박힌
목걸이가 주렁주렁 걸려 있으니 우연히 보물창고를 털게 된 좀도둑 같았다.

“내가 과했네.”

루이센은 웃음을 참지 않았다. 언제 칼튼의 이런 웃긴 모습을 또 보겠는가. 그러자 칼튼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왜?”

너무 놀렸나? 루이센이 쭈그러들기 전에 칼튼이 말했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응?”

전혀 모르겠는데. 하지만 칼튼의 말을 허투루 들을 것은 아니라, 두 사람은 급히 창가로 다가갔다. 높은 층에


있던 덕분에 저택의 부지가 어느 정도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서, 아마도 저택의 입구쯤으로 추정되는 부근에, 깃발 하나가 나부꼈다. 옅은 파란색 배경에 암사자
문양이 수놓아진 깃발이었다.

“저거 왕실 기사단의 깃발 아닌가요?”

“맞아…….”

왕실 기사단은 국왕의 직속 기사단으로 오로지 국왕의 명령만 따르는 친위부대였다. 그들이 지금 루이센의 허락도
없이 아니에스 공작가의 저택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평범한 방문이라면 당연히 문 앞에서 기다리며 저택 방문에 대해 루이센의 허락을 받았을 테니, 그냥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피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칼튼이 당장 루이센을 안아 들고 도망칠 기세로 물었다. 루이센은 잠깐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 도망칠 곳도 없어. 일단 무슨 일인지 알아보자고.”

또 수도 저택의 사람들을 두고 도망치는 건 못 할 짓인 데다, 남부 대영주이자 공작인 자신을 함부로 해칠 리는


없다는 계산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싸움을 준비하겠습니다.”

칼튼은 급히 목걸이니, 뭐니 하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다 벗어 던지고, 날이 잘 선 단검 하나만 손에 쥐었다. 1


왕자가 보냈을 기사단과 싸우겠다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결정하는 칼튼을 보자니 루이센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루이센은 충동적으로 칼튼의 팔을 잡아당겼다. 까치발을 들고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두
사람의 입술은 짧게 떨어졌지만, 시선은 오래도록 서로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별일 아니길 빌어 보자고.”

루이센은 가볍게 대꾸했지만 이런 일은 언제나 가장 아니었으면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라는 걸 잘 알았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서둘러 저택의 앞마당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루이센이 1 층으로 내려와 저택 건물을 막 나섰을 때, 왕실 기사단도 저택 앞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기사들은


십여 명쯤 되었는데 하나같이 완전무장 상태였다.

그들은 일렬로 나란히 서서 저택의 앞마당을 포위한 형세였고, 그 모습이 제법 위압감을 조성했다. 그들의 뒤로
경비를 서던 기사와 병사들이 무장이 해제된 상태로 붙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루이센은 매우 불쾌했으나 침묵을 유지했다.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저택의 앞마당에 가득 찼다.

왕실 기사단의 단장인 보로스 경이 말에서 내렸다. 그는 정중하게 루이센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공작님.”

루이센이 왕성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시절 자주 보았고, 그의 집안과도 인연이 있었다. 가깝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닌 사이였다.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발을 들이는 것도 모자라, 내 사람들에게 칼을 겨누다니. 이 무슨 행패인가? 언제부터


왕실 기사단이 기사 된 도리도, 귀족의 예절도 모르는 무뢰배 집단이었지?”

루이센은 당당히 보로스 경과 기사들을 나무랐다. 무장한 기사들 앞에 맨몸으로 나가는 것이 무섭기는 했지만,
여기서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여 주면 저택의 사람들이 더 두려워할 것을 알아 힘을 냈다. 등 뒤에 버티고 선
칼튼도 든든했다.

“행패라뇨. 오해십니다. 불필요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무장을 해제한 것뿐입니다. 저희는 왕명에 따라,
공작님을 보호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보호라고?”

대체 무슨 보호를 하려고 멀쩡한 기사들을 무력화시키고, 저택을 포위한단 말이지? 어이가 없었으나 루이센은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공작님이 수도로 오시는 동안 무뢰배들에게 위협을 받으셨다는 말을 듣고 왕자님께서 크게 걱정하셨습니다.
다행히 공작님은 무사하셨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범인이 또 루이센을 노릴 수도 있다. 그런데 수도 저택에는 루이센을 지킬 인력이 없었다. 그러니 왕실 기사단을
파견하여, 루이센의 신변을 보호해 준다는 말이었다.

“이제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가 저택에 상주하며, 한시도 빠짐없이 공작님을 지킬 겁니다.”

보로스 경은 이제부터 저택에 출입은 제한될 것이며, 저택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기사들의 확인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명분은 그럴듯했으나, 보로스 경의 말을 그대로 믿기에는 루이센도 세상 쓴맛을 제법 봤다.

‘……보호가 아니라 감시하겠다는 거잖아. 겸사겸사 기사들로 겁도 주고, 내 기도 꺾어 두시겠다?’

루이센은 눈살을 찌푸렸다.

“보호는 필요 없으니, 돌아가도록.”

“그건 곤란합니다.”

“당사자인 내가 필요 없다는데?”

“네. 공작님은 거부권이 없으십니다.”

“…….”

말 몇 마디로 물러날 거 같지는 않았다. 보로스 경이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걸 보면, 저쪽도 작정하고
찾아온 것 같았다. 그 말인즉, 루이센을 제압하겠다는 1 왕자의 의지가 그만큼 강력하다는 뜻일 거고.

루이센은 무심코 칼튼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은 그도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한 눈치였다. 칼튼은 1 왕자가 돌지
않는 한, 루이센을 불편해하기는 해도 대놓고 배제하지는 않을 거라는 예측을 내놓은 바가 있었다.

‘나도 1 왕자가 이렇게 빨리, 대놓고 적대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자연히 더블레스 백작과 악마숭배자들이 떠올랐다. 칼튼이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왕실 기사단이 저택에 상주한다면, 가뜩이나 부족한 정보를 얻을 기회가 줄어든다. 칼튼이라도 왕성으로 가서
외부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일단은 계획대로 하자고.’

‘괜찮겠어요?’

‘해칠 마음은 없어 보이니 어떻게든 해 봐야지.’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해 둔 덕분에 긴 논의 없이도 금방 결정이 났다.


“그럼 저는 이만 왕자님께 가 보겠습니다.”

“아. 컬른이라고 했나? 그래. 네놈도 왕자님이 찾으시더군. 가 봐. 내 이름을 대면 왕성에 들여보내 줄 거다.”

보로스 경은 칼튼이 안중에도 없었다. 칼튼은 깔끔하게 뒤로 물러서서 깊이 인사했다.

“그동안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공작님.”

“자네도 고생했네.”

어쩌다 잠시 동행했을 뿐인,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 나눌 법한 담백한 인사였다. 당분간 보기 어렵다고 생각하면
강하게 끌어안고, 깊이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지나치게 친밀하다는 것을 들켜서 좋을 게 없다는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칼튼은 아무 미련도 없이,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듯이 자리를 떠났다. 사실은 머리채를 붙잡힌 것처럼 내내
고통스러웠지만, 이편이 루이센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 필사적으로 연기했다.

루이센은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

왕실 기사단은 완전히 저택을 장악했다. 저택 안을 돌아다니며 괜히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며, 사람들을


압박했다. 가뜩이나 내내 마음 졸이며 지냈던 저택의 사람들은 금방 움츠러들었다. 두려움과 불안이 커져 갈수록,
루이센을 향한 원망 어린 시선도 점점 커져 갔다.

루이센에게도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밀착 감시였다.

‘이거 원, 옛날 생각나는데.’

불신과 원망의 시선, 밀착 감시, 감금.

칼튼에게 공작성이 점령당했던 때가 절로 떠올랐다.

‘보로스 경은 칼튼처럼 루이센을 좌우로 굴려 대진 않을 테니, 그나마 사정이 낫다고 봐야 하나.’

루이센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고 부총관이 속 터져 죽겠다는 듯이 소리쳤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이런 무례라뇨! 남부의 대영주이자 황금 들판의 지배자를 뭘로 보고 감히 왕위도 못


오른 사자 새끼가!”

“진정하게. 말조심해야지.”

참고로 이 대화도 왕실 기사가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부총관은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속닥였다.

“공작님. 저들을 절대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분명 우리가 하려는 모든 일에 딴지를 걸어올 겁니다.”

“나도 그럴 거 같긴 한데…… 안 받아들이면 어쩌겠나.”


싸워서 쫓아낼 힘이 없다. 안 될 거 괜히 실랑이하느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나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수도 저택에 가신은 자네와 기사 둘뿐이야. 두 명의 기사는 제대로 운신도 못 할 거라고.
실질적으로 자네랑 나, 둘이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데 자네가 흥분하면 어쩌나.”

루이센은 담담히 부총관을 달랬다.

“일단은 자네는 저택 내의 혼란부터 수습해. 기사단 쪽은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제일 날뛰어야 할 루이센이 시종일관 침착함을 유지하니, 부총관의 눈에 의심이 스몄다. 오늘만 해도 몇 번째인지
모를 ‘우리 집 망나니가 맞아?’라는 눈빛이었다.

110 화

부총관은 주군에게 대놓고 ‘너 누구냐?’라고 물을 만큼 채신머리가 없진 않았다.

“생각해 두신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협박과 회유……. 좀 이따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보로스 경을 여기로 데리고 오도록.”

얼토당토않은 대답을 들으면서, 부총관은 순간적으로 총관의 주책이 가득 담긴 편지 내용을 떠올렸다. 루이센이
뭔가 이상한 소리를 해도 다 큰 생각이 있으시니 따라 주라고 했던가.

“……알겠습니다.”

부총관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루이센에 대한 믿음보다는, 존경스러운 총관이 그렇게까지 당부할 때는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달리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저택 사람들을 달래고 나서, 상황을 봐서 적당한 때에 보로스 경을 데려오겠습니다.”

부총관은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왕실 기사들이 제집처럼 저택을 휘젓고 있는 것에 표정을 구기면서도,


루이센이 시킨 일들을 해 나갔다.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루이센의 지시에 따르고 있는 셈이니, 묘한 기분이었다.

***

부총관이 보로스 경을 데려오길 기다리며, 루이센은 긴장감으로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나는 루이센 아니에스다. 나는 아니에스 공작이다. 나는 잘났다. 우리 가문은 망하지 않았고 믿는 구석이
짱짱하다. 수도 제일의 망나니, 그게 나다!’
루이센은 옛날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얼굴이 화끈해질 정도로 오만방자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이 필요했다.
동시에 칼튼이 능수능란하게 협상하던 모습도 떠올렸다. 외팔의 순례자가 보였던 현명함도. 총관의 침착함도.

그가 떠올릴 수 있는 만만치 않은 사람들은 전부 다 떠오르면서, 보로스 경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그 노력에 힘입어 루이센이 제법 강렬한 눈빛과 거만한 자세를 갖추었을 때쯤 보로스 경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루이센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보로스 경을 가까이 오도록 하고, 부총관은 나가 보도록 했다. 방문이 닫히자
루이센과 보로스 경뿐이었다.

상대는 잘 훈련받은 기사. 당연하지만 루이센은 한주먹감도 안 된다. 루이센은 한껏 허세를 부리며 보로스 경을
내려보았다. 서 있는 사람을 상대로 깔아보는 시선을 보내는 것은 쉽지 않았으나, 망나니 시절의 경험을 떠올려
성공했다.

보로스 경은 아주 미세하게 움찔하고 말았다. 오만하고 귀족적인 모습은 예전과 비슷했으나 그 안에 느껴지는
것이 달랐다. 예전에는 열등감에 절어서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꽤 단단한 자신감이 엿보인 것이다.

‘그때랑은 비교가 안 되게 안 좋은 상황인데도 자신에 차 있다니. 허세인가? 아니면 다른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루이센의 태도는 보로스 경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자네, 영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뒷일은 생각 안 해?”

이 모든 일이 다 지나간 뒤, 아니에스 공작가가 다시 예전의 위세를 되찾는다면 오늘의 원한을 되갚을 텐데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냐는 의미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보로스 경은 모르쇠로 대답을 회피했으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은 숨기지 못했다. 루이센이 보기에 보로스 경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머리를 팽팽 돌리는 유형이었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왕성에서, 기사단장씩이나 해 먹는 게
어디 보통 처세술과 눈칫밥으로 되겠는가.

루이센은 이 협박이 먹힐 것을 직감했다.

“자네 눈에 내가 그저 그런 귀족으로 보이나?”

“…….”

“나 루이센 아니에스야. 아니에스 공작가의 유일한 주인. 황금들판의 수호자이자, 이 나라에 넷밖에 없는 대영주.
아래로는 영주들을 통솔하고, 위로는 왕의 죽음과 신왕의 즉위라는 성스러운 임무를 짊어진 대영주라고.”

자기 자랑을 내 입으로 하려니 민망하지만 루이센은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그의 가문과 직위가 뒷받침되는 한
이런 태도 또한 자신을 우러러보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루이센은 자신의 타고난 신분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지를, 다 잃고 나서야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자네도 왕성에 오래 있었으니 잘 알지 않겠나. 왕자가 지금은 나를 적대시해도, 앞으로 계속 그럴 것 같나?


나도 남부의 맹주를 바꾸네 어쩌네 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건 알아. 더블레스 백작이 제법 득세를 한다지?”

“…….”

“하지만 왕국의 역사보다 오래된 이 가문이 그렇게 쉽게 몰락할 거 같아? 결국 왕자와 나는 화해하게 될 거야.
남부의 드넓은 평야, 그곳에서 나는 밀 없이 국정 운영이 불가능할 테니.”

물론 왕자가 악마숭배자들과 한패라든가, 루이센을 없애 버리고 남부에 새로운 맹주를 세우고 싶어 한다든가, 안
좋게 흘러가자면 끝도 없지만 그런 것들을 굳이 구구절절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보로스 경은 어차피 그런 걸
모를 테니. 대신 보로스 경의 가슴에 강하게 쐐기를 박아넣었다.

“왕자와 내가 화해를 하면 자네는 어떻게 될 거 같아? 난 오늘의 수모를 잊지 않을 거야. 내 저택을 짓밟은
대가를 확실히 치르려면 자네 목으로는 부족하지. 자네 가문까지 그냥 두지 않을 걸세.”

“그건……. 저는 전하의 대리인인 왕자님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그래. 그렇지만 왕자에게 화풀이를 할 수도 없지 않나. 왕자도 그래. 자네와 자네 가문을 바쳐서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지.”

대영주의 가문과 기사단장을 선택하자면 당연히 전자일 거라고, 보로스 경은 생각했다.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아니에스 공작가가 이 시기를 견뎌 내 재기하는 데 성공하고 왕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다. 공작가가 마음을 먹는다면, 왕자가 침묵을 한다면, 자신과 자신의 가문
정도는 손쉽게 휩쓸려 나가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들려.’

루이센은 느긋하게 보로스 경을 바라보았다. 사실 마음속은 무척 초조해 뭐라도 더 말해야 하지 않나 싶었지만,


칼튼이라면 지금 이 순간에 제일 여유를 부릴 거 같아 꾹 참았다. 잃을 게 많은 사람은 쉽게 약해지는 법이었다.
보로스 경도 마찬가지였기에 결국 먼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저라고 이렇게까지 하고 싶었겠습니까, 공작님.”

“자네는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처음 쳐들어왔을 때의 기세가 제법 건방지던데.”

“그거야 보는 눈이 많았으니까요. 저랑 공작님이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무례를 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왕자님이 너무 강경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보로스 경은 고압적인 태도를 던져 버리고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왕자가 왜 그러는데?”

“저도 모릅니다. 원래 그러던 분이 아니셨는데……. 요즘 좀 이상해지셨……. 아, 이건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왕자가 이상해졌다, 라. 루이센은 이 중요한 정보를 머릿속 한구석에 새기면서, 보로스 경을 살살 달래기에
들어갔다. 채찍질을 했으니 당근도 줘야지. 너무 몰아붙이기만 해도 안 된다고 칼튼이 그랬다.

“그래, 위에서 내려온 명령인데 어쩌겠나. 기사 된 도리를 다할 뿐인데 자네도 난감하겠지.”

“예, 정말 그렇습니다.”
“자네 체면도 있고 하니까 내가 며칠 정도는 가만히 있어 줄게.”

“감사합니다, 공작님.”

“대신 자네도 좀 양보하게. 기사들, 저택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 줘.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다고.”

루이센이 이렇게까지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자, 보로스 경도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아니에스 공작가가 몰락한
것도 아닌데, 원한을 사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저택을 침범한 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최소한 부탁 정도는
들어줘야 앞으로도 사이좋게 잘 지내지 않겠는가.

“……그럼 저택 내부에서 기사들을 물리겠습니다. 다만, 공작님의 행적이나 오가는 사람들에 대한 것은 다


왕자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감시와 통제를 우선하라고 명령받았기에……. 이 점 양해 바랍니다.”

“그래. 그것까진 어쩔 수 없지. 우리가 하루 이틀 볼 사이가 아닌데,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자고.”

역시 감시랑 통제가 본 목적이었구나? 1 왕자,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음흉한 데가 있어.

살짝 열이 받았지만 루이센은 너그러운 척 웃었다.

그 뒤로, 루이센은 보로스 경을 좀 더 어르고 달래다가 내보냈다. 아버지는 잘 지내시냐, 아들은 많이 컸냐,
같은 지극히 사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친밀감을 높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아닌 척하긴 했지만 굉장히 긴장하고 있던지라, 루이센은 보로스 경이 물러난 뒤에 완전히 탈진해
버렸다. 하지만 그 노력의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그날 밤, 보로스 경은 기사들은 모두 저택 밖으로 내보냈다. 형식적으로 저택의 각 층마다 기사 한 명씩을 남겨


두긴 했지만, 보로스 경의 언질을 들은 것인지 그들은 동상처럼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설 뿐 아무 간섭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 부총관이 적당히 잘 수습을 해 둔 덕분에, 저택의 사람들도 한결 안정되었고, 기사들을 물러나게 한 게
루이센이라는 것을 알고는 원망도 누그러들었다. 대신 그만큼,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받아 루이센의 낯이 뜨겁긴
했지만.

그리고 그날 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마음을 고쳐먹은 보로스 경과 기사들 덕분에 한층 허술해진 감시에 힘입어,
아주 중요한 손님 한 명을 식료품 수레 안에 숨겨서 저택 안으로 몰래 데리고 들어올 수 있었다.

손님은 원래 저녁에 도착하기로 한 총관이 보낸 전령이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공작님. 저 기억하세요? 저 대장님 부관입니다. 칼튼 용병대 부대장이고요.”

칼튼의 용병대 부대장이자, 칼튼의 부관이 반갑게 루이센에게 인사를 했다.

“기억하지, 물론!”

루이센도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험상궂은 인상은 여전했으나 칼튼의 부하라서 그런지 괜히 친근하고 정감이 갔다.

“어떻게 된 거야? 쭉 공작성에 있었나?”


사정을 들어보니 이랬다. 칼튼이 한창 납치범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을 때 칼튼의 부하 몇 명이 콘포세에서 칼튼과
합류를 기다리다가 체포당했다. 그들은 공작가로 이송되었고, 오해를 풀고 공작가의 일을 도우며 동료들을 찾아
모으고 있었다는 것이다. 루이센이 동부 대영주 일행에 합류하면서 공작가로 소식을 보냈고, 칼튼의 부하는
칼튼을 다시 만날 생각에 전령을 자처하여 수도로 왔다고 했다.

“이야, 밖에 기사들 쫙 깔렸던데. 공작님은 감금도 잘 당하십니다. 그나저나 우리 대장은 어디 있습니까? 대장


보겠다고 한달음에 쉬지 않고 여기까지 왔는데요!”

칼튼의 부하는 너무도 밝게 물었다. 칼튼이 이곳에 없으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의심하지 않는 듯, 그는 재회의
기쁨으로 확신에 차 있었다.

그 기쁨에 찬물을 끼얹어야 하는 루이센을 착잡하게만 했다.

‘칼튼…… 여기 없는데……. 반나절만 빨리 오지…….’

루이센은 칼튼의 부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111 화

루이센은 어떻게 하면 덜 실망할까 고민하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칼튼 여기 없어. 아까 왕성으로 갔어.”

“예에에?”

칼튼의 부관은 괴성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의 좌절하는 모습에 루이센은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대장이 사라졌다가 납치범으로 몰렸으니, 칼튼의 부하들 입장에서는 날벼락이 여러 번 내려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칼튼을 만나러 한달음에 달려왔을 텐데 간발의 차로 어긋나다니.

루이센은 둥글게 말린 부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칼튼은 안전할 거라고, 서툰 위로라도 건네려는데 칼튼의
부관이 울부짖었다.

“에니스…… 에니스가 날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음?”

칼튼이 아니라? 그런데 그 에니스라는 이름,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았다. 칼튼과 부하들이 남몰래 여관
게시판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때, 연애편지를 가장한 메시지에 적혀 있던 여자 이름이었다.

“……에니스는 제 여자친구 이름입니다. 1 왕자님의 하녀로 일하고 있고요.”

“전에 들은 적 있어.”
“가뜩이나 꾸준히 오던 소식도 끊겨서 걱정돼서 죽을 거 같거든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닐지. 저 혼자서는
왕성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여기서 대장이 왕성에 갈 때 무조건 따라가려고 했는데!”

그러니까 칼튼이 왕성에 데려가 줄 때를 노려 여자친구를 만나려고 했는데, 그 계획이 틀어져서 이렇게 요란하게
좌절한다는 말이었다.

“칼튼을 걱정한 게 아니었어?”

“그 사람을 왜 걱정하죠?”

칼튼의 부관은 정색했다. 루이센은 위로하려던 손을 머쓱하게 거둬들였다.

“아니었구나…….”

“혼자서 지옥에서도 기어 올라올 사람인걸요. 자기 몸 하나 챙기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니 공작님도 행여나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요. 하아, 제가 문제죠. 에니스가 걱정돼서 잠을 못 자요. 공작님 저 왕성에 갈 때 데려가
주시면 안 되나요?”

“나도 지금 어디 갈 상황이 아니라.”

밖의 왕실 기사단도 루이센을 저택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예전에는 왕이 허락해 줘서


내 집처럼 드나들던 왕성이었는데, 이제는 1 왕자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보다, 자네는 총관의 전령으로 온 거잖아? 얼른 공작성 상황 좀 말해 봐.”

“음, 일단 이단심문관이 공작성에 찾아왔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해 주더군요. 악마숭배자라니, 정말 믿기지


않는 이야기 아닙니까?”

모리슨의 동료인 이단심문관과 성기사들은 아니에스 공작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더블레스 백작령과 남부를
조사하고 있다고 한다.

“뭐 알아낸 건 있고?”

“아직 없습니다. 교회에서 움직였다는 걸 알고 저들도 나름 몸을 사리는 모양이라던데요. 나오는 대로 연락을


주기로 했습니다.”

“그런가…….”

회귀 전에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놈들이었다. 그만큼 치밀하고 조심스러울 테니 쉽게 꼬리가 잡힐 거라는 기대는
안 했다.

“그리고? 다른 건?”

“올해 공작령은 풍년이라더군요. 저는 살면서 그렇게 많은 밀 포대는 처음 봤습니다요.”

여러 일이 있었지만 올해 작황은 풍년이며, 가을 추수에 대한 세금도 잘 걷혔다고 한다. 내전의 영향으로 곡물


가격이 많이 올라서, 다른 지역으로 곡물을 판매해 큰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루이센이 수도에서 1 왕자와의 앙금을 잘 풀고, 악마숭배자들에게 당하지 않으며, 포로로 잡혀 있는 공작가의
사람들만 무사히 돌려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졌다.

***

칼튼의 부관은 이야기를 더 듣다가 내보냈다. 그가 왕실 기사단에게 들키지 않게 숨겨야 했기에 부총관도 따라
나갔다. 악마숭배자니, 이단 심문관이니. 부총관은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지만 눈치껏 묻지 않았다.

‘조만간 설명해 줘야겠어.’

내일을 기약하며 루이센은 총관이 보낸 서류뭉치를 꺼냈다. 기름을 먹인 가죽으로 정성 들여 포장된 것으로,
루이센이 미처 다 배우지 못한 것들이 담겨 있었다.

공작가 사람들이 어디에 포로로 잡혀 있는지, 협상 금액은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 루이센이 누구와 만나야 더
일이 수월하게 돌아갈지 등. 구체적인 내용이 루이센의 서툶을 배려해, 큼직한 글자로 적혀 있었다. 곳곳에
총관이 세심하게 주석을 달아 신경 쓴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간단한 편지도 있었다.

편지에는 루이센의 활약이 자랑스러우며, 비록 한달음에 달려오지는 못하더라도 항상 공작가와 자신들이 공작님의
뒤에서 든든히 지켜 주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루이센은 눈가가 시큰해졌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공작가의 가신들이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알고
있기에, 왕실 기사단이 위협하는 와중에도 힘내서 보로스 경을 협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집안, 충성스러운
가신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방패가 되어 줄 것을 믿기에. 회귀 전 루이센은 그 모든 것을 잃고서야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루이센은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소매로 꾹꾹 눌러 닦았다.

‘빌어먹을 루거 자식.’

공작성에도 루거에 대한 자료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루거가 첩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도 저택에서도 대대적인 조사가 벌어졌다. 부총관이 눈에 불을 켜고 누가


루거를 심은 것인지 찾았으나 루거의 이력서, 추천장에서부터 자잘한 소지품까지 전부 사라졌다. 루거가 수도
저택을 떠날 때 첩자라는 사실이 들통날 것을 대비하여 미리 손을 써 둔 것이었다.

루이센은 그 이야기를 어젯밤에 부총관에게 전해 들었다. 수도 저택을 떠나 공작령으로 향할 때부터, 루거의


배신은 준비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자신이 회귀 전에 야반도주했던 일도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루거는 자신이 야반도주한 이후에, 공작가의 사람들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줄 예상했을까. 사이가 좋진
않았다지만 몇 년이나 함께해 온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다니. 루거의 배후라는 그 작자는 대체 뭐 하는 놈이란
말인가.

‘그런 자식들 때문에 내 사람들을 처참하게 떠나보냈다니.’

루이센은 가만히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으나 홀로 남은 방 안은 죽은


듯이 조용해, 오래 묶은 고통을 끄집어내기 충분했다. 루이센은 아직도 그날의 광경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불타는 황금들판과 목놓아 울던 농부들. 까마귀 떼가 공작성의 상공을 빙빙 돌았고, 익숙한 얼굴들이 끔찍한
몰골로 루이센을 맞이했다. 그 뒤로 매일, 매 순간 그 모습을 떠올렸다. 외팔의 순례자를 만나고 나서 한결
편해졌지만 잊을 수는 없었다. 받아들였을 뿐이지.

‘그래도 이젠 다 없었던 일이야. 내가 바로 잡았으니까.’

루이센은 몸을 웅크리고, 가늘게 떨리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칼튼의 얼굴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칼튼의 단단한
품에 안겨 있으면, 그 녹아내릴 듯한 시선에 잠겨 있자면 과거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음이 실감이 났다. 그까짓
과거, 이제는 없어져 버린 일 따위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칼튼…….’

오늘 밤은 어쩐지 케케묵은 악몽을 꿀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한편, 칼튼은 왕성에 무사히 들어왔다. 기다리던 하녀의 안내를 받아 그가 머물 방으로 들어와, 1 왕자가 부를
때까지 대기했다.

‘방까지 주는 걸 보면, 금방 왕성을 나가긴 어렵겠는데.’

오면서 살펴보니 왕성 내부의 경계가 더 강화되었다. 아무리 칼튼이라도 안 들키고 왕성을 빠져나가기가 좀
버거운 수준이었다.

‘이 정도까지 경계할 필요가 있나?’

1 왕자의 적은 죽거나, 처절하게 굴복하였다. 왕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하니 제 세상이어야 하는데 왕성


안에는 이상하게 불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자신이 없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 질문에 해답을 줄 사람이 곧 등장했다.

“갈아입으실 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옷을 가지고 온 하녀는 무척 낯이 익었다.

“에니스.”

칼튼은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에니스가 도끼눈을 뜨고 칼튼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빠르게 칼튼에게 다가와
속사포로 원망을 쏟아 냈다.

“한가하게 인사가 나와요? 내가 아니에스 공작이랑 엮이지 말고 빨리 남부를 뜨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내
경고가 우스워요? 당신이 머뭇거린 것 때문에 난 지금 내 애인 생사도 몰라요!”

“아, 부관. 그 친구 지금 공작령에 있어. 멀쩡해. 그리고 정말 어쩔 수 없었어.”

결과적으로 보면 에니스의 경고를 따랐어야 했다. 하지만 그랬으면 루이센이 루거에게 납치되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에니스의 경고를 받았을 때쯤부터 이미 자신은 루이센에게 마음이 가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러니 1
왕자의 전령이 루이센을 호위해 오라는 말을 전하자마자, 말머리를 돌려 미친 듯이 그에게 달려갔겠지 않은가.
덕분에 루이센도 구했고 그와 특별한 관계도 되었으니 후회는 없었다.

칼튼은 실실 웃음을 흘렸다. 에니스는 눈치가 빨랐다.

“뭐에요? 설마…… 아니에스 공작이랑 뭔가 있었어요?”

“역시 에니스야. 눈치가 빠르네.”

“아서라, 마음 접어요. 아니에스 공작이 울린 사람 눈물을 모으면 분수도 만들 수 있을걸요.”

“난 그 사람들이랑은 다르거든?”

칼튼이 발끈했다. 그 안에 질투가 담겨 있는 것을 눈치채고, 에니스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니에스 공작이라니?’

루이센 아니에스는 칼튼이 혐오하는 전형적인 스타일의 귀족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무능하고 안일함에도
평생을 윤택하게 살아온 부류 말이다. 그런 귀족을 향해 끝도 없이 타오르던 증오와 열등감이 더 이상 칼튼의
안에서 보이지 않았다.

“혹시 지금 제정신 아니에요? 머리 다쳤어요?”

“멀쩡해.”

“아니, 너무 사람이 달라진 거 같아서…….”

달라졌다는 말에 칼튼이 은근히 자랑스럽게 웃는 걸 보고, 에니스는 정색했다.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니라면 정신 차려요. 왕성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어리바리하다간 목이 날아갈


거에요.”

그녀의 살벌한 경고는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112 화

칼튼이 남부로 떠나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원래 1 왕자를 추종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북부의 귀족 가문들이었다. 1 왕자의 어머니가 북부 귀족 가문의 출신이었던 영향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1 왕자가 더블레스 백작을 가까이 두기 시작했다. 1 왕자는 더블레스 백작을 항상 데리고
다니면서 중요한 결정을 함께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더블레스 백작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에게 힘이 쏠리기
시작하면서, 이 신세력과 구세력이 된 북부 귀족 사이의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놓고 칼부림을 하진 않지만, 꽤 살벌한 분위기에요. 당신은 양쪽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더 몸을 사려야
한다고요.”

에니스의 경고에 칼튼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전 같았으면 크게 위기감을 느끼고 발버둥 쳤겠지만, 지금은
그에게도 믿는 구석이라는 게 있었다. 악마숭배자를 잡을 때까지 교회는 자신을 도와줄 것이고, 동부 대영주도
힘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루이센도 있고.

“그나저나 왕자님, 의외인데.”

더블레스 백작이 득세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 힘이 1 왕자의 외가가 속한, 1 왕자가 가장 비참했을
때부터 그를 지지해 온 북부 귀족 가문들을 위협할 정도일 줄이야. 1 왕자는 자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지지세력을
아무 명분도 없이 홀대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그만큼 중요한 무언가가 더블레스 백작에게 있다는 이야기였다.

“왕자님이 왜 갑자기 더블레스 백작을 가까이하게 되었는지 알아?”

“몰라요.”

에니스는 누구도 그 이유를 모를 거라고 덧붙였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어 버렸다.

“저는 더블레스 백작, 꺼림칙해요.”

에니스는 소름 끼친다는 듯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 사람이랑 가까워지고부터 왕자님이 딴사람이 된 거 같아요. 왕성에는 갑자기 낯선 사람들이 드나들고,


이상한 소문도 돌고요.”

“소문이라면?”

“소문 자체는 그냥…… 별거 아닌 괴담이에요. 어느 복도에서 여자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느니, 숲속에서 유령을
봤다느니 하는.”

에니스는 불안한 듯 양손을 맞잡았다. 유령이니, 살인이니. 그런 으스스한 이야기를 믿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런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질 정도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칼튼도 동의했다. 왕성의 분위기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좋지 않았다.

‘더블레스 백작이 수상한 거야, 놀랄 일도 아니지만…….’

문제는 그를 곁에 두고 있는 1 왕자의 의중이 무엇이냐였다.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1 왕자가 아무것도


모를 수도 있었다. 더블레스 백작을 가까이 둔 건 우연일 뿐이고. 하지만 반대로 부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수준을 넘어 악마숭배자의 일원일 수도 있었다.

‘음, 그렇지만 그런 힘이 있었다면 왕이 쓰러지자마자 목숨을 위협받지 않았겠지.’

내전 초기. 칼튼과 그의 용병단이 합류하기 전까지만 해도 1 왕자는 별 볼 일 없었다. 1 왕자의 세력은 2 왕자의
세력에 밀린 지 오래였기에 내전 자체도 1 왕자의 목숨을 건 발악 정도로 치부되었던 때도 있었다.
악마숭배자들이 보인 것 같은 힘이 있었다면 그렇게 비참한 꼴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칼튼이 1 왕자의
밑에서 종군하는 동안 악마숭배자 비스무리한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칼튼이 보았던 1 왕자는 온화한 미소 뒤에 차가운 칼날을 품고 있는 야심가였지만, 왕국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왕이 되어서 왕국을 이끌겠다는 꿈이 있었다.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다행히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에니스와 대화를 다 나누어 갈 때쯤, 1 왕자의 시종이 칼튼을 찾아왔다.

“1 왕자님께서 부르십니다.”

좋아. 루이센을 혼자 두고 왕성에 들어온 값을 할 때다. 칼튼은 각오를 다지며 시종을 따라나섰다. 에니스가
진심을 담아 칼튼의 무사를 빌었다.

***

1 왕자는 알현실에 있었다. 칼튼이 시종을 따라 막 알현실 앞에 도착했을 때, 알현실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문
앞에 모여 있던 시종들이 극진히 그에게 인사를 했다.

“왕자님께서 들어와도 된다더군.”

“알겠습니다, 더블레스 백작님.”

저 사람이 더블레스 백작이구나.

같은 편이었지만 칼튼과 더블레스 백작이 제대로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칼튼은 전장의 선봉에 섰고 더블레스
백작은 늘 후방에 있었다. 첫눈에 칼튼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도 그 탓이었다.

칼튼은 경계심을 애써 숨기며 그를 살펴보였다.

그는 검은 머리와 흰머리가 절묘하게 뒤섞여, 근사한 느낌을 주는 귀족이었다. 특별히 악랄해 보이지도 않지만
선량해 보이지도 않는 딱 평범한 사람 같은 인상이었다. 좋게 말하면 무난하고, 나쁘게 말하면 인상이 흐릿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에는 자존심 상할 일이 많을 것 같았다.

더블레스 백작이 시종과 대화를 마치고 칼튼을 바라보았다. 칼튼도 눈에 힘을 실어 상대의 시선을 받아쳤다.
흐릿한 첫인상과는 달리 정면에서 마주 보자 아주 노련한 느낌을 풍겼다.

괜히 목덜미가 서늘한 것이, 긴장감이 들었다. 여기가 전쟁터였다면 칼부터 뽑아 들었겠지만, 여기는 왕성
한복판이었다. 자신이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은 감추는 편이 좋았다.

계산이 끝나자 칼튼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짧은 대치상황이 끝나자, 시종들이 슬며시 안도했다.

“그쪽인가? 공작님을 수도까지 모셔왔다는 자가?”

더블레스 백작이 물었다.


“맞습니다.”

“아니에스 공작 같은 사람을 모시려니 고생 꽤나 했겠군그래.”

“아뇨.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공작님은 좋은 분이시죠.”

“그쪽에게는 그래 보였나 보지?”

평범한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칼튼은 확신했다. 이 남자는 나를 죽이고 싶어 한다.

‘내가 싫다기보단, 공작님을 도와서 싫은 느낌이 더 강한데.’

특히 마지막 대답을 한 순간, 그의 두 눈동자 안에서 타오를 듯한 증오가 스쳐 지나갔다. 눈앞의 칼튼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하는 듯했다. 무슨 방해 공작을 펼치려나. 긴장했는데 더블레스 백작은 의외의 행동을 보였다.

“그럼 들어가 보시게. 왕자님이 기다리시겠어.”

더블레스 백작은 칼튼이 알현실로 들어갈 수 있게, 살짝 몸을 옆으로 틀어 길을 내주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비켜 주니 괜히 찜찜하다.

‘지금이라도 달아나야 하나.’

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루이센이 떠올랐다. 왕성의 상황을 알아내 루이센에게 전할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그
책임이 막중한 것을 알아, 루이센을 두고 왕성으로 온 것이 아닌가.

지금쯤 루이센은 왕실 기사단의 핍박을 받으며 쓸모없은 하인들을 데리고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었다. 무서워서
울지는 않을지, 혼자 해결하겠다고 무리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루이센을 두고 돌아선
이후로 내내 불안했다.

한시라도 빨리 루이센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칼튼의 등을 떠밀었다. 칼튼은 알현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알현실은 직사각형 모양의 홀이었다. 일자로 푸른 융단이 깔려 있고, 벽면에는 왕실의 상징인 푸른 사자가
수놓아진 깃발이 걸려 있으며, 건국신화를 그린 태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있었다.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듯 화려한
공간이었지만 불을 켜 두지 않아 어두웠다.

푸른 융단의 끝에 1 왕자가 있었다. 칼튼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그는 왕좌의 옆에
서서 물끄러미 왕좌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지는 시간이라 붉은 노을빛이 홀 안으로 스며들듯 들어왔는데, 그
탓에 물감으로 칠한 것처럼 명암이 분명했다. 1 왕자의 모습도 빛과 그림자로 인해 둘로 나누어져 한 몸이지만
각각 별개처럼 보였다.

칼튼은 왕좌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명령을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왕자님.”

“아, 칼튼.”

1 왕자는 조금 멍한 듯, 반 박자 느릿하게 대답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왕자님께서 시키신 일이니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래. 그래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예?”

칼튼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왕자가 칼튼을 내려다보고 있던 탓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칼튼은 왕자의
진심을 읽으려고 했으나,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의 눈은 흐리멍덩했다.

“무슨 말씀을 하신 건지 제가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면…….”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칼튼의 말꼬리를 집어삼켰다. 알현실로 더블레스 백작이 들어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1 왕자는
하고 싶은 대로 말을 이어 갔다.

“칼튼, 더블레스 백작은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해 주었어. 하지만 아니에스 공작은 그러지 못했지. 너는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줄 수 있지?”

“……왜 그런 걸 질문하시는지…… 궁금하군요. 왕자님답지 않은 걸 물으십니다.”

“최근에 좀 생각이 많아져서 말이지.”

1 왕자가 반걸음 칼튼에게 다가왔다.

“아니에스 공작. 죽일 수 있겠나?”

“!”

왕자는 칼튼의 당황한 얼굴을 무심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처음부터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라는 듯이. 더블레스
백작의 뒤로 붉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따라 들어왔다. 루거가 입고 있던 것과 비슷한 갑옷이었다.

더블레스 백작이 기사를 자랑하려고 데려온 건 아닐 테니, 그 의도는 명확했다.

‘젠장.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나 보군.’

어쩐지 알현실로 순순히 들여보내 준다 했어. 자신을 왕성으로 불러들인 것부터가 함정이었나.

그때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탁 트인 황야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듯한 맹렬한 소리 같으면서도 바로 귓가를 달리는 것처럼 가까웠다. 감각에
착란을 일으키는 소리에 칼튼이 강한 어지러움을 느끼고 휘청일 무렵.

왕자의 등 뒤로 펼쳐진 짙은 그림자 속에서 죽음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투구 위로 루거의 경멸과
증오가 섞인 눈동자가 겹쳐졌다. 기억 속의 그것은 조금 전에 본, 더블레스 백작의 눈빛과 똑같이 닮아 있었다.

루거가 악마숭배자의 사생아라고 했던가? 확실히, 더블레스 백작과 루거는 그 눈빛만큼은 부자 관계라고 할 만큼
닮아 있었다.
113 화

죽음의 기사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불길했다. 칼튼의 본능은 얼른 저 사악하고 더러운 것으로부터 피하라고,
달아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살아 있을 때도 재수 없더니 죽어서는 더 짜증이 나네.’

칼튼은 죽음의 기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1 왕자가 무심히 죽음의 기사에게 명령했다.

“저자는 방해만 되는구나. 죽여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죽음의 기사가 말을 타고 달려들었다. 죽음의 기사가 들고 있던 검은 창이 칼튼을 향해


날아왔다. 칼튼은 옆으로 몸을 구르면서 피했으나, 더 높은 위치에서 내리꽂듯 날아오는 창을 완전히 다 피하기란
어려웠다.

“윽.”

창은 칼튼의 왼쪽 팔을 스치며 큰 상처를 냈다. 칼튼은 상처를 오른손으로 꾹 눌렀다. 피가 손을 흥건하게


적셨다. 운이 좋아 이 정도지, 잘못하면 팔 하나가 날아갈 뻔했다.

‘이렇게 해서는 끝이 없겠어.’

칼튼은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다. 상황은 칼튼에게 너무도 불리했다.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입은 정장과 구두는
칼튼의 동작을 방해했고, 날카로운 공격으로부터 그의 몸을 지켜 주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럴듯한 무기도 없었다. 1 왕자를 만나면서 무기를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어 평소에 쓰던 검은 방에


두고 왔다. 혹시 몰라 챙겨 온 단검은 알현실 앞에 도착하기 전에 몸수색을 받다가 빼앗겼다.

반면 상대는 한 명도 빠짐없이 완전무장한 상태였다. 죽음의 기사는 말할 것도 없고 더블레스 백작의 기사들은


방패에 칼까지 갖추었다. 죽음의 기사가 칼튼에게 직접적으로 공격을 쏟아 냈다. 그 뒤에서 백작의 기사들이
대열을 유지하며 둥글게 칼튼을 에워쌌다. 철로 만든 방패를 앞세웠기에 그들은 마치 조금씩 좁혀져 오는 벽처럼
보였다.

칼튼이 아무리 놀라운 체력을 가지고 있어도 한계가 있었다. 기껏 차려입은 옷과 정리한 머리가 엉망진창이 된 지
오래였다. 받아칠 무기도 없이 모든 공격을 피하기는 무리라, 상처가 점점 늘어났다. 특히 처음에 죽음의
기사에게 베인 왼팔은 상처가 깊어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피가 흘렀다.

그럼에도 칼튼은 씨익, 웃었다.

‘고작 이딴 걸로 날 죽일 수 있을 거 같아?’
생의 대부분을 이런 아수라장에서 보낸 칼튼이었다. 정말 죽겠다 싶은 순간에도 그는 포기해 본 적이 없었다.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야말로 칼튼을 숱한 전투를 거치면서도 이 나이까지 살아남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그의
눈에는 이 압도적인 열세를 헤쳐 나갈 길이 보였다.

더블레스 백작의 기사들. 그들은 충직한 기사였지만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죽음의 기사를 불쾌해했고, 멀리 피하고
싶어 했다. 같은 편인 걸 알면서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같은 사람인 칼튼보다 죽음의 기사를 더 의식하고 있었다.

휘웅.

긴 창대가 허공을 가르며 칼튼을 향해 날아왔다. 칼튼은 공격을 피하면서 일부러 백작의 기사들 쪽으로 굴렀다.
죽음의 기사는 재빠르게 칼튼의 뒤를 쫓아오며 창을 내질렀다.

갑작스레 죽음의 기사가 가까이 오며 창을 휘두르자 일정한 속도로 포위망을 좁혀 오던 백작의 기사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움찔하면서 한 발을 뒤쪽으로 빼는 기사도 있었다. 그들은 죽음의 기사와 한편이기는 했지만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고, 칼튼을 향한 창날이 운 나쁘게 자신들을 향할까 봐 겁을 먹고 있었다.

훈련을 잘 받은 기사들이기에 아무도 대열에서 이탈하지는 않았지만 틈이 생겼다. 칼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기사의 방패에 몸을 들이받았다. 완전무장한 기사는 그 자체로 움직이는 쇳덩어리였으며 방패가 더해지면
철벽이나 마찬가지였다. 칼튼의 행동은 철벽에 몸을 내던지는, 자해에 가까운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칼튼의 시도는 성공했다.

쾅!

칼튼과 부딪친 백작의 기사와 덩달아 그 옆에 있던 기사까지 뒤로 밀려 넘어졌다. 백작의 기사들이 죽음의 기사
때문에 주춤하는 찰나, 한 발을 뒤로 뺐던 기사를 놓치지 않고 들이받은 것이다. 그 기사는 본능과 명령 사이의
내적갈등으로 판단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몸의 무게중심이 뒤로 쏠리던 중이었기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넘어뜨릴
수 있었다. 물론 쇳덩이랑 부딪치고도 멍도 안 드는 칼튼의 괴물 같은 튼튼함도 한몫했다.

기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가리는 갑옷의 단점은 무겁다는 점이었다. 한번 넘어지면 양옆에서 부축해
주지 않는 한은 혼자 일어서지 못했다.

칼튼은 버둥대는 기사를 밟고 달렸다. 그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알현실은 난방을 하며 생기는 연기를 빼내느라 창문을 열어 두곤 했다. 덕분에 칼튼은 그냥 뛰어내리기만 해도
됐다.

백작의 기사들이 급히 창가로 달려갔다. 알현실은 3 층 높이라 떨어졌을 때 운이 나쁘면 사망이고, 좋아도 어디
한 군데 부러지게 되어 있었다. 칼튼도 그렇게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칼튼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면에 착지하더니, 멀쩡하게 달렸다. 심지어 꽤 빠른 속도로 알현실이 있는
건물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뭐 저런 말도 안 되는!”

“사람 맞아?”

백작의 기사들이 놀라움과 분노로 소리쳤다. 그들은 눈으로만 칼튼을 쫓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뛰어내려
칼튼처럼 멀쩡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죽음의 기사만이 칼튼을 따라 뛰어내리려고 했다.
“그만.”

더블레스 백작이 명령하자 죽음의 기사는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왕성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아직 완벽하게
이곳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의 기사를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더블레스 백작은 살아 있는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저자를 찾아라. 제까짓 게 도망쳐 봐야 왕성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

“잡으면 어떻게 할까요?”

“살려 봐야 방해만 될 뿐이지.”

“예!”

더블레스 백작의 기사들은 좀 전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서둘러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곧 알현실에는 더블레스 백작과 1 왕자, 그리고 죽음의 기사만이 남았다. 더블레스 백작은 칼튼이 뛰어내린 창문
너머를 잠시 보다가 1 왕자에게 다가갔다.

“왕자님.”

더블레스 백작이 1 왕자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시길. 부상을 입고 도망쳤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왕성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왕성 출입을 더 강화하겠습니다.”

“그래.”

1 왕자는 무심히 대답했다. 한때는 오른팔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던 심복을 죽이라 명령을 내리고, 그것이
실패했음에도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알현실에서 벌어진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차갑고 냉정하다기보다는 현실감각을 잃은 사람처럼 멍해 보였다.

더블레스 백작은 1 왕자의 상태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슬슬 아니에스 공작 쪽도 움직이겠습니다. 칼튼을 이 자리에서 죽이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을 떼어 내는


데는 성공했으니 말입니다.”

“아니에스 공작…….”

1 왕자는 루이센을 생각하는듯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1 왕자의 반문에 더블레스 백작의 얼굴이 굳었다. 1 왕자는 조금 전과는 달리, 짜증스럽지만 생기가 있는 표정을
되찾았다.

“대영주를 죽이는 건 너무 위험이 커. 왕실 기사단이 공작을 보호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공작이 죽는다면 다들


나를 의심하겠지. 앞으로의 통치를 생각한다면…….”
“왕자님.”

더블레스 백작은 1 왕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남부는 제게 맡겨 주시겠다고요.”

“그러긴 했지만 그건…….”

“다른 대영주들도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왕자님은 부디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시길.”

더블레스 백작은 1 왕자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백작의 손아귀에서부터 검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1 왕자의 팔을 타고 기어 올라가 왕자의 눈과 귀로 스며들었다.

“아…… 아…….”

1 왕자는 우는 건지 비명인지 모를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의 눈빛은 다시 처음처럼 흐려졌고, 얼굴도 생기가


사라진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래. 자네를 믿기로 했지. 뜻대로 하게. 아니에스 공작을 죽이든, 살리든.”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왕자님.”

더블레스 백작은 일어나 1 왕자를 바라보았다. 언뜻 보아서는 평범해 보였지만 이 상태라면 더블레스 백작이
얼굴에 침을 뱉어도 화조차 내지 않으리라.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1 왕자를 방심하게 만들고, 마음에 틈을 만들어,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세뇌당한 사람처럼 1 왕자는 이제
오로지 백작의 말에만 따르고 반응했다. 1 왕자의 정신력이 강해 종종 아까처럼 세뇌가 풀리려고 하기도 해서,
적당히 왕세자를 모시는 시늉을 해야 하긴 했지만.

‘순조롭군.’

악마숭배자들에게 배운 마법을 1 왕자에게 쓰는 것은 그로서도 모험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교회에 제대로 걸릴


테니까. 하지만 루이센 아니에스가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아니에스 공작을 이렇게까지 몰아넣었고, 이제 곧 수십 년을 묵혀 온 원한을 갚게


될 테니까.

더블레스 백작은 알현실을 나섰다. 죽음의 기사는 백작의 뒤를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모습을 감추었다.

텅 빈 알현실에는 전투의 흔적과 1 왕자만이 남았다. 어느덧 해가 지면서, 1 왕자의 모습은 완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에게는 마치 깊은 늪에 빠져 버린 것처럼 어떤 희망도 즐거움도 남아 있지 않았다.

114 화
왕실 기사단이 아니에스 공작가의 수도저택을 장악하고 며칠이 흘렀다. 상황은 처음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왕실 기사단은 루이센과 저택 사람들 생활에는 간섭하지 않았지만, 저택의 주변을 꾸준히 감시하였고 외부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특히 루이센은 저택에 감금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이센이 외출을 하려고 하면, 왕실 기사들은 오만 핑계를 다
대며 루이센을 저택 안으로 돌려보냈다. 몇 번인가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왕실 기사들은
하인들은 적당히 봐줬어도 루이센은 봐주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루이센은 퀭한 얼굴로 침실 안을 서성였다. 며칠 내리 잠을 설쳤더니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저택에서 밀어내는 걸로는 부족했어. 완전히 치워 버려야 하는데…….’

왕실 기사단이 저택을 장악한 명분은 ‘보호’였다. 그러니 온건히 그들을 치워 버리려면 루이센이 스스로를 지킬
힘이 생겨야 했다.

가장 좋은 것은 수도 근교에 포로로 잡혀 있는 아니에스 공작가의 기사들을 수도 저택으로 되찾아 오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포로 협상이 필수적인데, 왕실 기사단이 방해해서 아무것도 진행을 할 수가 없었다.

총관의 자료에는 누구와 어떤 식으로 협상할지, 몸값은 어떻게 지불할지 같은 가르침이 담겨 있었지만 루이센은
아무것도 실행할 수가 없었다.

저택에서 나가질 못하니까!

대리인을 보내려고도 해 봤지만 왕실 기사단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부총관이나 기사들 같은, 루이센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도 저택에서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루이센은 몇 번이고 보로스 경을 불러다 회유를 하려고 했지만, 보로스 경은 저택 안을 감시하지 않는 것 이상의
도움은 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보로스 경과 왕실 기사단은 루이센의 미움을 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1 왕자에게 질책당하지 않을 수준으로


명령을 준수했다.

노련한 처세술이긴 했지만 루이센으로서는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저택의 담벼락을 뛰어넘을 수도 없고.’

왕실 기사단 감시를 피해 담을 뛰어넘는다? 루이센의 신체 능력으로는 무리였다. 기사들에게 시켜 보기는 했는데,


왕실 기사에게 딱 걸려 실패했다.

‘이럴 때 칼튼이 있었으면…….’

칼튼이라면 아무도 모르게 왕실 기사단의 감시를 지나 루이센을 밖으로 나가게 해 줬을 것이다.

루이센은 한숨을 내쉬며 침실에 걸어 둔 칼튼의 옷을 바라보았다. 매일, 매시간, 새롭게 칼튼이 그리워졌다.

‘칼튼…….’
왕성으로 간 이후, 칼튼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칼튼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루이센 쪽에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금방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고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칼튼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별히 바쁜 것도 아닌데 루이센의 안색이 나날이 안 좋아지는 것은 칼튼이 없는 탓도 컸다.

‘왜, 왜 칼튼은 1 왕자 부하였던 거지?’

그게 아니면 지금 내 옆에 있을 텐데. 자신이 이렇게 그리워할 동안 1 왕자가 칼튼을 옆에 끼고 있다고 생각하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심지어 1 왕자는 회귀 전에는 칼튼의 충성을 배신하지 않았던가!

‘칼튼은 내 옆에 있는 게 더 나아. 여기 있어야 한다고.’

지금 칼튼을 데리고 있을 1 왕자를 생각하자 손수건이라도 물어뜯고 싶을 정도로 질투심이 들었다.

열 받은 루이센이 괜히 카펫을 발로 퍽퍽 걷어차고 있을 때, 부총관이 방으로 들어왔다. 루이센은 시치미를 떼며


부총관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인가?”

“칼튼의 부관이라는 자가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루이센은 눈을 크게 떴다.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다.

보로스 경과 왕실 기사단은 수도 저택에 있는 사람들을 다 알고 있었다. 유일하게 그들이 모르는 존재가 바로


칼튼의 부관이었다. 왕실 기사들이 저택 밖으로 물러난 뒤 몰래 저택 안으로 들였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루이센은 칼튼의 부관에게 몇 가지 일을 맡기고 저택에서 몰래 내보냈다. 계속 들락거리면 들킬 가능성이


있으니, 부총관에게 소식을 전해 온 것이다.

“동부 대영주님에게 공작님이 시키신 대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동부 대영주와는 동부 귀족들에게 잡힌 아니에스 공작가 출신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일에 대해, 함께 수도로 오는


동안 어느 정도 이야기를 맞추어 놓았다. 그게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 오라는 것이 첫 번째 임무였다.

다른 지역 귀족들과 전혀 이야기가 안 되고 있는 지금, 믿을 건 동부 대영주뿐이었다. 동부 대영주가 약속대로


포로를 풀어주어, 그들이 수도 저택에 합류한다면 왕실 기사단의 손아귀에서 좀 더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부총관의 표정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왜? 동부 대영주가 말을 바꾸던가?”

“아뇨. 약속대로 포로들을 풀어주어 수도로 오게 했답니다. 수도 근처까지는 온 듯합니다만…….”

“뭔데?”

루이센이 급히 닦달했다.

“1 왕자가 수도에 못 들어오게 막아 버렸답니다. 신원이 불확실한 자를 수도에 들일 수 없다면서요.”


“신원이 불확실하다니! 이 아니에스 공작가의 사람들인데 그보다 더 확실한 신원이 어디 있다는 거야?”

“핑계를 대는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루이센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1 왕자가 나랑 척지기로 각오했나 봐. 아주 말려 죽이려고 하는군.”

이러려고 수도로 오게 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다.

‘1 왕자가 아무리 대단해도 아직 왕자인데…….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오면 자신에게도 불리할 수 있다는 걸
모르나?’

왕이 죽으면 좋든 싫든 대영주인 루이센을 계속 감금해 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루이센에게는 장례식과 즉위식을


준비할 의무가 있으니. 이를 수행하는 것을 지금처럼 막는다면 루이센이 아닌 다른 대영주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었다. 대영주들의 반발을 받으며 즉위하고 싶은 왕은 없을 텐데.

특히 1 왕자처럼 왕자들 간의 내전으로 왕위를 거머쥔 사람이라면 더더욱.

“내가 모르는 무슨 내막이 있는 건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래서 칼튼이 돌아와야 하는데.

“그래도 동부 대영주가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지역에 있을 포로들을 데려오는 방법도요.”

“그 양반이 왜? 맨입으로 도와줄 사람은 아닐 텐데.”

“글쎄요. 이 또한 신의 뜻이라고 했다던데…….”

“음…….”

동부 대영주의 신앙심은 루이센이 알던 것보다 더 광적인 면모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회귀하고 처음 알았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동부 대영주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계산이 확실한 분이니, 나중에 이 건으로
공작님께 뭔가를 요구할 겁니다.”

“그렇겠지.”

“왕실 기사단을 치워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자들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있으니까요.”

부총관의 지적에 루이센도 동의했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기는 한데…….”

밤에 잠을 못 자니,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아 별별 생각을 다 했다. 덕분에 왕실 기사단을 치워 버릴 방법을


하나 떠올렸다.

다만 루이센에게 돌아올 위험도 상당했다.

루이센은 부총관에게 자신이 떠올린 비책을 설명했다. 예상대로 부총관은 펄쩍 뛰며 반대했다.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잘못하면 아니에스 공작가의 위신을 크게 깎아 먹는 일이 될 겁니다. 지금보다
더 명예가 땅에 떨어질 수 있어요.”

“그렇긴 하지.”

“그건 일단 보류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알았어.”

루이센 자신도 망설이던 방법이라, 부총관이 말리자 금방 수긍했다.

***

그러나 그날 밤, 은밀히 찾아온 손님에 루이센은 결심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주 깊은 새벽. 루이센은 잠이 오지 않아 깨어 있었다. 그는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달빛과 작은 촛불에


의지해 글을 읽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를 비추던 달빛이 크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구름이 꼈나? 하고 생각했다. 짧게 여러 번 같은 일이 반복되자, 루이센은 무심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으아아악!’

루이센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너무 놀라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창문 너머와 연결된, 긴 테라스의 끝에
죽음의 기사가 서 있었다.

‘저, 저게 왜 여기 있어!’

루이센은 펄쩍 뛰듯이 의자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식은땀이 흐르면서 악몽 같은 과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니야,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죽음의 기사를 보자 떠오르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내기 위해, 루이센은 열심히 칼튼과 외팔의 순례자를
떠올렸다. 덕분에 방금까지 앉아 있던 의자를 무기 삼아 들 정도로 진정이 되었다.

‘정신 차리자. 저거, 그냥 루거야.’

죽음의 기사는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으나, 원래는 루거였다고 생각하니 아주 조금 나아졌다.

온몸을 긴장시키고, 칼튼이 가르쳐 준 호신술을 떠올리며 죽음의 기사를 노려보았다. 루이센은 그가 자신을
죽이러 왔다고 생각했다. 놈은 악마숭배자들의 명령을 들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죽음의 기사는 루이센을 공격하지 않았다. 놈은 그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뭐지? 뭐 하자는 거야? 미치겠네.’

무슨 꿍꿍인지 몰라 초조했다. 하지만 뭐 하는 거냐고 묻기는 더 무서웠다. 자신과 죽음의 기사 사이에 흐르는
침묵을 깨서는 안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쯤 서로를 지켜보고 있었을까. 뜬금없이 불어온 바람이 루이센의 머리칼을 휘저었다. 머리카락이 얼굴로
내려오는 바람에 루이센은 잠깐 눈을 깜박였다.

‘어?’

죽음의 기사가 그 잠깐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루이센은 혹시 몰라 조금 더 지켜봤지만, 그가 서 있던 자리는


여전히 텅 비어 바람만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뭐야…… 그냥 간 거야?’

귀신에 홀린 것 같다. 루이센은 테라스로 나갔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저택의 밤은 고요하기만 했다.

회귀 전에도 비슷한 일이 종종 있었다. 죽음의 기사는 항상 조금 떨어진 어둠 속에서 루이센을 지켜보곤 했다.
생각해 보면 항상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루이센이 그를 환각이라고 철석같이 믿은 데는 그런 이유도
한몫했다.

‘루거 자식.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왜 사람 구경하다 가는 거야?’

루이센은 툴툴거리면서 돌아섰다. 그런데 그의 눈에 뭔가 평소와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115 화

왕실 기사단은 저택 내부에 침범하지 않았지만 저택 주변은 철저하게 감시했다. 밤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아,
조직적으로 공작가를 포위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왕실 기사들이 제대로 감시를 하지 않고 자신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은 꽤나 심각한 분위기를 풍겼다.

‘무슨 일이지?’

루이센은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보로스 경이 왕실 시종의 옷차림을 한 남자와 싸우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루이센에게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보로스 경은 무언가 종이를 꾹 쥐고 팔을 저어 가며
격렬하게 흥분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그에 반해 왕실 시종은 차분하고 완고하게 서 있었다. 그들의 몸짓만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왕실 시종이 무언가 명령을 전했고 보로스 경이 그것에 반발하는 것 같았다.

‘기사들까지 동요하는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어서 귀를 쫑긋 세웠지만, 왕실 시종이 떠나는 것으로 상황은 금방 마무리가 되었다. 별
소득 없이 루이센은 방으로 돌아왔다.
***

다음 날 아침.

루이센은 산책을 하겠다며 정원으로 나왔다. 신선한 공기와 자연을 만끽하는 척하면서 왕실 기사들을 훔쳐보았다.

어젯밤에 목격한 장면이 계속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왕실 시종이 오밤중에 남몰래 보로스 경을 찾아와 무언가 명령을 전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한데, 보로스
경이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다. 그의 반응은 그 명령이 그저 그런 시시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듯했다.

새로 전달된 명령이 자신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왕실 기사들이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관찰하고, 새로운 명령에 대한 단서를 잡고자 했다.

그러나 왕실 기사단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재수 없을 만큼 엄격하고 조직적인 모습에서는 어젯밤 보였던
동요와 불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한결같이 저택을 감시하고 출입을 통제했다. 루이센이
근처로 오자 창을 바짝 쥐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상하다. 별일 아니었나?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더구나 죽음의 기사가 나타난 것에서부터, 자신이 보로스 경과 왕실 시종의 다툼을 목격한 그 흐름이 너무도
절묘했다. 회귀 전이야 죽음의 기사가 자신을 멀리서 지켜보던 일이 흔했지만 회귀한 뒤에는 처음 있는 일었다.

루이센이 의심을 못 버리고 얼쩡거리고 있는데, 보로스 경이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산책을 하고 있었네.”

“한 시간째 저택의 정문 근처에서요? 여긴 산책로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 집 안에서 어디를 산책하든, 내 자유 아닌가. 설마 왕자님께서 내 산책 경로까지 정해 주시던가?”

루이센은 찔렸기 때문에 일부러 더 세게 나왔다. 보로스 경은 입씨름을 하기 싫은지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불쾌하셨다면 부디 용서하시길.”

“그래. 받아 주지.”

루이센은 관대한 척 거드름을 피우면서 보로스 경을 관찰했다. 그는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기왕 만난 김에 한번


찔러나 볼까?

“어제 공작가에 손님이 한 명 찾아온 거 같던데.”

“손님이요? 저택의 방문은 모두 거절하고 있습니다.”

“보통 손님이 아니지 않나. 왕실의 사람을 문전박대했다고 소문이라도 날까 봐 걱정이 돼서 말이야.”
“별거 아니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던데. 내가 언뜻 들었는데 말이야.”

“……명령은 서면으로 받았습니다. 또 대화를 들을 수 있는 범위에는 사람을 두지 않았고요.”

“왕자님께서 새로운 명령을 내린 거 맞네. 그게 자네를 아주 곤란하게 하고 있고.”

보로스 경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실 시종이 왕자의 명령을 가지고 방문했고, 그 명령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본인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공작님이 유도신문도 하실 줄 아는 분인지, 미처 몰랐군요.”

루이센 본인도 성공할 줄 몰랐기에 속으로 환호성을 질러 대는 중이었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아 침착해


보였기에 보로스 경은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명령이 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보로스 경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왕실 기사단의 기사로 오랫동안 살아남으면서 그가 느낀 것은 누구와도 척지지


말고,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뿌려 두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점이었다.

‘더블레스 백작의 기세가 어마어마하다고는 하지만…… 아니에스 공작은 예전같이 천지 분간 못 하는 얼간이가


아니야. 어떻게 된 일인지 꽤 영리하기까지 해. 그렇다면 아니에스 공작가지.’

그는 미래의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싶지도, 남부의 대영주에게 원한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왕자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루이센에게 살짝 언질을 주는 걸로 은혜를 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보로스 경은 빠른 계산을 마치고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이 왜?”

“오늘은 달이 뜨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척 고요한 밤이 되겠군요. 기사들의 갑옷 소리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요.”

우리 지금 진지한 이야기 하는 중 아니었나? 루이센은 미간을 찡그리고 잔소리를 하려다가, 문득 보로스 경의


표정만큼은 더없이 진지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뜬금없는 소리가 아니라 뭔가 암시하는 말인 거 같았다.

‘기사들 갑옷 소리가 안 들릴 거라고? 오늘 밤에?’

그 말은 마치, 왕실 기사들이 오늘 밤 모두 비밀스럽게 자리를 비울 것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왜 그런 명령을 내렸지?’

왕실 기사단이 사라지면, 루이센과 저택은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 그나마 남은 전력은 왕실 기사단에 의해
무장해제 되었으니 말이다. 만약 누군가 그때를 노려 공격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노리는 건가?’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쭉 끼쳤다. 내가 짐작한 게 맞는 거야? 루이센이 더없이 심각하게 보로스 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긍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자가 날? 나를 왜?’

물론 1 왕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미울 것이다. 하지만 죽일 거였으면 수도까지 끌고 올 게 아니라, 칼튼이


공작성을 공격할 때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죽이려는 건 아닌가? 그럼 겁만 줄 생각이라거나……? 아니면 납치……?’

루이센은 문득 최근에 1 왕자가 더블레스 백작을 가까이 두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더블레스 백작은
악마숭배자로 가장 의심되는 인물이었다. 그의 영향이라도 받은 건가. 아니면 1 왕자 또한 악마숭배자라거나.

‘어? 그럼 왕성에 있는 칼튼은 어떻게 된 거지?’

왕성에 들어간 칼튼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그의 무소식이 갑자기 너무도 불길한 징조로 느껴졌다.

‘괜찮아. 칼튼이잖아. 분명 괜찮을 거야.’

칼튼은 루이센이 살면서 본 사람 중에 가장 강하고 똑똑했다. 루이센의 안에서 외팔의 순례자와 비등비등한
수준으로 뛰어났다. 그러니 괜찮을 거라고, 애써 불안을 억눌렀다.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해 스스로를 지켜야, 칼튼을 돕든 뭘 어쩌든 할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


저택에는 오직 루이센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수십 명에 이르렀다. 루이센은 그 사람들을 지킬 책임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 방법을 써야겠어.’

미리 생각해 둔 비책을 써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부총관도 반대하고 루이센 자신도 후폭풍이 염려되어 되도록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보로스 경의 경고가 사실이라면 오늘 밤 루이센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어쩌면 저택에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말이다.

더 따질 때가 아니었다. 루이센은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밤이 되었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

수상한 차림새를 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아니에스 공작가의 저택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그들은 얼굴과 몸을 가려
암살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본래 그들은 더블레스 백작의 기사들이었다. 아니에스 공작을 죽이고 저택의
사람들까지 말끔히 처리하라는 명령을 들었기에, 그들에게서는 비장감이 흘렀다. 수도 한복판에서 대영주를
암살하는 것은 그만큼 큰일이었다.

긴장한 기사들과 달리, 검붉은 로브를 입은 남자는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즐거운 걸음이었다. 죽음의 기사를
만들어 낸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구한 아홉 번째 숭배자였다.

“공작은 내가 죽일 거야. 알겠어?”

아홉번째 숭배자는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루이센과 칼튼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이후, 그들에게 큰


원한을 품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날의 치욕을 갚아 주리라 벼르고 있었기에 루이센을 죽이려 한다는 백작의 말에
자원해서 나섰다.

‘교주님에게 교회가 주시하고 있으니, 되도록 몸 사리라는 경고를 들었지만……. 더블레스 백작은 왕성에서
멋대로 행동하고 있는데, 나라고 복수를 포기해야겠어?’

고작 교회 눈치를 본다고 원한을 갚을 기회를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능력이야 안 쓰면 그만이지. 칼튼도
없는 지금이라면, 굳이 능력을 쓰지 않고도 루이센을 해칠 자신이 있었다. 기껏 만들어 낸 죽음의 기사를 두고,
직접 나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미리 손을 써 둔 덕분에 아홉 번째 숭배자와 백작의 기사들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당당하게 공작가 저택에


들어왔다.

모두가 잠든 저택은 고요했다. 저택 내부에는 순찰을 도는 병사조차 없었다. 아홉 번째 숭배자와 백작의 기사들은
막힘없이 루이센의 침실로 들어왔다. 얼마나 무방비한지 루이센의 침실은 잠금장치조차 걸려 있지 않았다.

방 안에는 루이센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루이센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드디어 지난번의 치욕을 갚아 줄 때가 왔구나.’

아홉번째 숭배자는 백작의 기사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들뜬 걸음으로 루이센에게 다가갔다. 감히 올려보지도
못할 귀한 신분의 남자를 죽인다는 사실이 몹시도 짜릿했다.

동시에 칼튼을 찾아서 루이센의 죽음을 알릴 것이 기대되어 참을 수 없었다. 칼튼의 거만한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지는 꼴을 떠올리자 손끝이 저리도록 짜릿했다.

푹, 푹.

아홉 번째 숭배자는 몹시 흥분하여, 무아지경으로 검을 내려찍었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게, 손맛이 이게 아닌데?’

116 화

아홉 번째 숭배자는 이불을 걷었다. 이불이 펄럭이며 일으킨 바람에 의해 오리 깃털이 흩날렸다. 루이센인 줄
알았던 것은 베개 더미였다. 아홉 번째 숭배자가 당황해 굳은 사이, 백작의 기사 하나가 침대 옆 촛불에 녹은
촛농이 고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공작은 좀 전까지 방에 있었어. 아직 저택에 있을 테니, 흩어져 찾아라!”


백작의 기사들은 루이센을 찾아 저택 곳곳으로 흩어졌다. 아홉 번째 숭배자는 방에 남았다. 그는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분이 풀리지 않아 베개 더미를 걷어찼다. 그러자 한겨울에 내리는 눈처럼 깃털들이 팔랑팔랑 그의 주변을
휘감았다.

‘루이센 아니에스. 가만 안 둬. 이딴 걸로 날 속이려고 해?’

어떻게 습격을 미리 알고 도망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루이센이 도망칠 길은 요원했다. 수도는 완전히 1 왕자의
지배하에 있었다. 1 왕자는 더블레스 백작의 손아귀 안에서 굴려지는 장기 말이니, 루이센이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긴다 해도 목숨을 조금 연장하는 것이 고작이리라.

‘정 안 되면 죽음의 기사를 부르면 되니까.’

그냥 지금 부르면 안 되나? 교주의 명령과 복수심 사이에서 고민하는데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아홉 번째
숭배자는 이런 종류의 예감을 무시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는 창가로 가까이 다가갔다. 밖은 어두웠지만 그렇기에
저택을 둘러싼 횃불이 더욱 잘 보였다.

‘누구지?’

열십자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횃불을, 다른 한 손에는 검을 든 자. 교회의 성기사들이었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아홉 번째 숭배자는 벽에 딱 달라붙었다.

‘뭐야? 성기사들이 왜 여기 있어?’

성기사들이 저택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택 주변의 담벼락을 따라 한 번, 저택의 본 건물을 따라 또 한 번,


이중으로 포위망을 갖추었다.

그야말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엄격했다.

‘나, 날 잡으러 온 건 아니겠지…….’

성기사들의 일부가 우르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윽, 악, 하고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방을 나와


계단의 그림자 사이에 서서 지켜보니, 백작의 기사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아홉 번째 숭배자는 교회가 루이센을 도우러 온 것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뒤, 성기사들이 어디선가 루이센을
찾아 끌고 오고 있었다. 그들은 루이센의 양옆에서 팔을 잡아 죄인을 연행하는 듯 거칠고 무례하게 루이센을
다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누군 줄 알고! 이거 놔. 안 놔?”

루이센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고함을 질러 댔으나, 성기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택의 사람들이 잠옷 바람으로
튀어나와 웅성댔다. 저택 사람들 누구도, 심지어 루이센마저 성기사들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듯한 모습에 아홉
번째 숭배자는 혼란스러웠다.

성기사들은 루이센을 한 사제 앞에 무릎 꿇렸다. 루이센의 부총관이 튀어나와, 루이센을 보호하듯 앞에 섰다.

“이게 무슨 짓이요! 이분은 남부의 대영주이자, 아니에스 공작이요! 교회가 어찌 세속의 일에 관여하여 이런
무례를 범하는가!”

“아니에스 공작은 종교법을 어겼소!”


사제가 호통을 쳤다.

“루이센 아니에스. 당신이 순례자를 사칭하여, 교회와 신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고발이 들어왔소!”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여기 증거가 있소!”

사제는 루이센이 입던 옷과 순례자의 증표까지 내놓았다. 옷에서는 루이센의 머리카락까지 나왔다.

“아니, 그게, 왜 거기에!”

루이센이 하얗게 질려 말을 더듬었다.

“죄를 인정하는 거요? 죄인의 손에 수갑을 채워라! 그는 교회로 가 조사 후, 종교재판에 처해질 것이다!”

사제의 말에 따라 성기사들이 루이센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루이센을 보호하려던 부총관도 더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교회는 사제나 순례자를 사칭하는 것에 굉장히 엄격했다. 순례자의 통행증은 교회에서 보증한 신분이었기에,
순례자를 사칭한 자가 부도덕한 짓을 하면 그대로 교회의 오점이 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것이 죽은 순례자의
통행증이라면, 순례자를 죽이고 통행증을 빼앗았다는 혐의까지 받게 된다.

처벌의 수위는 경우에 따라 다른데 심한 경우 파면을 당할 수도 있었다. 파면을 받게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신의


자녀가 아니라는 의미이며, 이는 사회적인 사형을 의미했다. 공작의 작위를 빼앗기고 평생을 떠돌아다니게 될
수도 있었다.

“그, 그럼 저희는 어떻게 됩니까?”

부총관이 사제에게 물었다.

“이 저택도, 저택의 사람들도 조사를 받게 된다. 죄가 없어 떳떳하다면 걱정할 것도 없겠지. 공작을 데려가!”

성기사들이 루이센을 끌고 갔다. 루이센은 이미 자신의 입으로 죄를 자백하였기에 터벅, 터벅 그들을 따라갔다.

아홉 번째 숭배자는 당황했다. 상황이 대체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건지 그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대로 쫓아가서 죽여? 하지만 이렇게 성기사들이 많은데? 잘못하면 내가 잡혀. 나 혼자서는 무리야. 가뜩이나
교주가 몸 사리라고 경고했는데…….’

죽음의 기사를 불러내도 싸움이 벌어지면 승산이 없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아홉 번째 숭배자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젠장. 하필이면 오늘 교회가 움직이다니…….’

사실 루이센이 순례자 행세를 하며 수도까지 여행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교회 역시 그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루이센을 처벌해야 한다고 나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소문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루이센 아니에스가 누구인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망나니들을 다 굴복시키고 최강의 망나니라는 타이틀을 손에
쥔 남자였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수도의 사람들은 직접 보고 겪었다. 특히 사제들은 국가적 행사 때마다
늘 술에 취해 나타나 기도문 한 줄도 제대로 못 외우던 루이센의 한심한 꼴을 기억했다.

그런 한심한 작자가 어떻게 순례자 행세를 하겠는가.

심지어 루이센이라던 그 순례자는 많은 선행을 베풀어 유명해진 사람이었다. 소문을 들은 대다수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공작령 일대에서는 루이센의 평판이 크게 바뀌었으나, 수도에서는 여전히 최악이었다.

루이센 아니에스가 그 순례자님이라고?

그 망나니가?

선행을 베풀었다고?

선행?

선행이 아니라 폭행이겠지!

사람들은 루이센이 선행을 했을 리 없다고 확신했고, 덩달아 순례자 행세를 했다는 소문도 거짓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고발이 들어오고, 증거가 나타났다. 명백한 증거에 교회가 움직였다.

‘운 좋은 놈 같으니라고. 그 운이 언제까지 따라 주나 보자.’

아홉 번째 숭배자는 멀어지는 루이센을 바라보며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언뜻 상심해 고개를 푹 떨군 루이센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던 것도 같았다.

‘잘못 본 거겠지. 공작이 이 상황을 의도한 게 아니라면…….’

아홉 번째 숭배자는 자신이 루이센에게 당했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애써 본 것을 외면했다.

그러나 사실 아홉 번째 숭배자가 본 것이 정확했다. 루이센은 웃고 있었다.

‘아하하, 성공이다, 성공이야.’

표정 관리가 안 되어서 고개를 푹 숙여야 할 정도로 신이 났다. 손목에 족쇄를 차고, 양팔을 성기사에게 잡혀
끌려가고 있는 와중에도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딱 좋은 때 성기사들이 와 줬어.’

누가 봐도 루이센을 암살하러 온 수상한 무리가 덩달아 성기사들에게 붙잡혔다. 성기사들이 그들을 추궁하면서
누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는지도 단서가 잡힐 것이다.

오늘 밤, 갑작스러운 해프닝은 다 루이센이 생각해 낸 비책이었다.

처음에는 왕실 기사단을 물러나게 할 요량으로 떠올린 것이다. 1 왕자가 왕실 기사단으로 루이센을 통제한 명분은
‘보호’였다. 명분이 사라진다면 1 왕자도 기사단을 물릴 수밖에 없다. 루이센은 포로로 잡혀 있던 공작가의
기사와 병사를 데려오는 것으로 1 왕자의 명분을 깨부수려고 했으나, 그들이 수도로 들어오지 못해 실패했다.

다른 귀족들은 1 왕자의 눈치만 보고 있어 루이센을 외면했다. 그나마 동부 대영주가 루이센에게 우호적이긴


했지만, 자칫 대영주 둘이 손을 잡고 왕실에 적대감을 보이는 그림이 나올 수 있어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동부 대영주에게 도움을 받아 버리면 그 구실로 손녀랑 결혼시킬 거 같단 말이지.’

루이센은 칼튼을 떠올렸다. 칼튼과의 관계도 아직 명확히 정리가 되지 않았는데 결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여러 가능성을 고민한 결과, 떠올린 것이 바로 교회였다. 교회는 왕실과는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왕실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진 세력이었다. 왕실 기사단을 치워 버릴 생각으로 교회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루이센은 칼튼의 부관을 몰래 빠져나가게 시켜, 교회에 보호를 원한다는 요청을 넣었다. 물론 단칼에 거절당했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나 어쩐다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1 왕자의 입김이 들어갔을 게 분명하단 말이지.’

루이센에게는 이단 종교라는 강력한 카드가 있긴 했지만, 쉽게 꺼낼 수 없었다. 명확한 증거도 없는 지금, 1


왕자와 더블레스 백작을 이단이라고 말했다가는 이쪽이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루이센 자신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증거가 명확한 고발이 들어오면 교회는 사제와
성기사들을 보내어 자신과 저택을 조사할 것이다. 종교법을 어긴 죄인은 교회의 소관이니, 1 왕자에게 반발하는
그림이 되지 않고도 왕실 기사단을 치워 버릴 수 있는 것이다!

확실한 방법이지만 그에 따른 위험도 컸기에 부총관의 반대도 있고 해서 그만뒀는데, 보로스 경의 경고를 듣고


나자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루이센은 이번엔 칼튼의 부관에게 교회로 가서 자신을 고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칼튼의 부관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일을 수행했다. 그는 한창 예배를 진행하고 있는 예배당으로 뛰어 들어가 그 한복판에서 모두가 알 수
있게 루이센을 고발하였다.

교회가 모른 척하고 싶어도 모른 척할 수 없도록.

루이센의 계획대로 성기사들이 저택을 포위했고 루이센을 죄인으로 붙잡았다. 루이센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성기사들이 저택을 지킬 것이니, 저택 사람들은 안전할 것이다.

루이센도 교회의 보호를 받을 것이고. 비록 죄인의 신분이라 감옥에 갇히고 재판도 받아야겠지만 죽는 것보다야
백번 나았다.

‘빠져나올 방법도 생각해 뒀고.’

이제 웃음이 안 나온다. 좋아. 루이센은 고개를 들어 부총관을 바라보았다. 부총관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총관과는 미리 이야기를 맞춰 놨다. 이제 뒷일은 부총관이 잘 진행할 것이니 안심이었다.

루이센은 짧은 시선을 나누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죽음의 기사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놈은 그저 가만히 있다가 사라졌다.

‘저놈은 무슨 생각이야?’

결과적으로 죽음의 기사는 루이센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왜? 살아서나 죽어서나, 루거는 한결같이 속을 모를
놈이었다.
117 화

[루이센 아니에스, 순례자를 사칭해 감옥에 갇히다!]

[소문 속의 순례자가 수도 제일의 망나니였다?]

다음 날 아침, 루이센의 이름은 모든 신문의 1 면을 장악했다. 수도 사람들은 하루 종일 누구를 만나건 간에


루이센의 이야기를 했다.

“아니에스 공작이 결국 체포되었다지? 내 그 인간, 언제 한 번쯤은 감옥 갈 줄 알았어.”

“공작가도 예전만 못하네. 공작이 수갑을 다 차게 되고.”

이렇게 공작가의 위세가 떨어지고 루이센이 막장에 치달았다고 비웃는 여론도 있었지만, 이는 극히 소수였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놀라워했다.

“그 소문 속에 순례자님이 아니에스 공작이었다니!”

“그럼 아니에스 공작이 강도도 무찌르고, 전염병도 해결하고, 몬스터로부터 마을도 구했다는 말이야?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괜찮은 사람이었네.”

“그러게. 믿기지가 않는구만. 아니에스 공작 왜, 멍청하기로 유명해서 기도문 하나도 제대로 못 외운다고
그러던데……. 사실이 아니었나 봐.”

이렇듯, 수도의 제일가는 망나니가 소문 속의 존경받는 순례자였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루이센이 공작령에서 활약한 일들도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칼튼에게 항복하여 공작령이
전란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은 것이며, 새로운 작물을 발견하고, 메뚜기떼의 습격을 예상한 것 등. 남부를
오가는 상인과 용병들의 입을 통해 왕국 곳곳으로 소문이 퍼진지는 오래였으나, 아무도 제대로 믿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땅에 떨어진 루이센의 명예를 어떻게든 살려 보려는, 공작가의 피나는 선전쯤으로 치부해 왔다. 그런데
루이센이 순례자로 활약한 것이 사실이라면 공작령에서 했다는 일도 사실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퍼졌다.

물론 루이센, 소문 속 순례자가 했다는 일들이 다 조작이 아니냐는 의심도 있었다. 그러나 루이센 덕분에 배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나, 보톤 자작의 장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이 쏟아졌기에 대세가 되지는 못했다.

이렇듯 뜨거운 관심과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루이센이 교회에 갇힌 채로 삼 일이 지났다.


루이센은 감옥 한구석, 지푸라기로 만든 간이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한바탕 취조를 받고 나서라 그런지 몹시도
피곤했다.

‘부총관은 잘하고 있겠지?’

잘하고 있겠지. 누구 가신인데.

오래 잡혀 있을 것은 예상한 일이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신중하고 느리다. 조사에만 한 달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 도주 우려가 있다고 재판 때까지 감옥에 가둬 두려 할 것 같아서 미리 해야 할 일들은 지시를 내리고 왔다.

물론 진짜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감옥에 얌전히 갇혀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지금 같은 중요한 시기를 감옥에


갇혀 있느라 그냥 날릴 수야 없지. 순례자를 사칭한 죄는 무거웠지만 가볍게 지나갈 방법도 생각해 두었다. 갇힐
만큼 갇혀 있고 처벌받을 만큼 받을 거였다면 이 방법을 쓰지도 않았으리라.

‘내일쯤은 나갈 수 있으려나?’

멍하니 있는데 누군가 루이센을 향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밥이야? 오늘은 좀 제대로 된 걸 줬으면 하는데.”

루이센은 간수라고 생각해서 고개도 들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떨떠름한 대답이 돌아왔다.

“공작님은 지금 이 상황에서…… 밥 생각이 나요?”

이 목소리는? 루이센은 벌떡 일어났다.

“모리슨!”

창살 너머로 모리슨이 복잡미묘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왔네? 가까이 있었나 보지?”

“공작님 연락을 받았을 때는 이미 수도 부근이었습니다. 칼튼이 먼저 연락을 줘서, 수도로 오고 있었거든요.”

모리슨의 말은 뜻밖이었다. 왕성에 있을 칼튼이 모리슨을 불렀다? 루이센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뭐야? 칼튼이 왜? 무슨 일인데?”

“일단 나오시죠.”

모리슨은 열쇠로 감옥 문을 열었다.

“나가도 되는 거야?”

“네. 주교님께 허락받아 뒀습니다. 공작님의 사칭죄는…… 재판은 받겠지만 별일 없이 지나갈 겁니다.”

모리슨은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루이센을 꺼내기 위해 애를 쓴 것 같았다. 루이센은
냉큼 감옥에서 나왔다.

“그래서, 칼튼이 왜?”


“저도 칼튼에게 직접 연락을 받은 건 아닙니다. 전해 들은 거죠. 저택에 가면 그 사람이 다 설명해 줄 겁니다.”

“그 사람이 누군데?”

“에니스요. 1 왕자의 하녀라던.”

“그 사람이 지금 저택에 와 있다고? 혼자? 칼튼은 어쩌고?”

“얼른 가시죠.”

모리슨이 눈에 띄게 말을 돌리자 더 혼란스러웠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루이센은 서둘러 저택으로 향했다.

***

삼 일 만에 돌아온 저택은 놀랍도록 달라져 있었다.

루이센이 잡혀 가고 성기사들이 저택을 장악했다. 그 덕분에 왕실 기사단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성기사들은
엄격하긴 했지만 수도 저택 사람들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아, 왕실 기사단에 비해 자유롭게 저택 사람들을
풀어 두었다. 덕분에 부총관은 수도가 혼란스러운 틈을 노려, 열정적으로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 덕에 수도 성문을 통과하지 못했던 공작가의 사람들이 저택에 돌아왔다. 서부와 북부 대영주들이 마침 수도로
돌아온 덕분에 다른 포로 협상도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루이센이 예측한 대로 막혔던 일이 술술 풀렸고, 루이센의
활약들이 인정받으면서 예전의 망나니라는 이미지가 빠르게 흐릿해졌다.

그쯤에서 루이센이 수도 저택으로 돌아오게 되니, 저택은 축제나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루이센은 반겨 주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이 찡했다. 살짝 눈물이 나올 뻔도 했으나, 부총관이 먼저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
민망하려다가 말았다.

루이센은 한바탕 사람들을 상대한 뒤, 좀 쉬라는 부총관의 제안도 만류한 채로 바로 에니스를 찾았다. 그녀는
응접실에서 루이센을 기다리고 있었다. 칼튼의 부관도 함께였는데, 인사를 나누고 뭘 할 정신도 없이 루이센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녀의 입에서 전해진 소식은 루이센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칼튼이 왕성에서 실종되었습니다.”

루이센은 머리가 띵해졌다. 칼튼이 모리슨을 불렀다고 들었을 때부터 뭔가 있겠거니 싶었지만 실종이라니?

“자세히 이야기해 봐.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고, 일단 공작님 여기 앉으시고요.”

칼튼의 부관이 끼어들어 루이센을 억지로 소파에 앉혔다. 에니스는 침착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왕성에 도착한 날, 칼튼은 에니스와 대화 이후 1 왕자를 만나러 알현실로 갔다. 그런데 그날, 칼튼이 1 왕자를
해치려다가 실패하고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에니스는 놀라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였다.

“제가 알아 보니, 알현실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라더군요. 칼튼이 피를 흘리면서 도망치는 걸 본 사람도
있고요.”

“피를 흘렸다고…….”

루이센은 아찔해져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는 칼튼이 얼마나 대단하고 강한지 잘 알았다. 혼자서 수명의 강도를
상대하고도 생채기 하나 안 나는 사람이, 피까지 흘리며 도망쳐야 했다면 보통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이후 아무도 칼튼을 본 사람이 없어요.”

왕실 기사들이 왕성 내부를 구석구석 뒤지고, 왕성의 하인들이 밤낮으로 순찰을 돌았으나 그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에니스는 혹시나 칼튼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까 기다렸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죽었으면 시체가 발견됐을 테니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겠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어요.”

칼튼 혼자 왕성을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으니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에니스는 칼튼을 도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칼튼이 해 준 말을 떠올렸다. 칼튼은 1 왕자를 보러 가기 전,


모리슨에게 연락할 방법을 알려 주었다. 혹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루이센을 지켜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면서.

그녀는 남몰래 왕성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1 왕자의 하녀이고, 왕성에서 오래 일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모리슨에게 연락을 한 뒤, 루이센을 찾아 저택에 왔다. 하지만 왕실 기사단 때문에 저택에 발도 들이지 못한
채로 돌아서야 했다고 한다. 며칠 동안 숨어 지내다가 성기사들이 왕실 기사단을 쫓아내고, 모리슨과 합류한 오늘
새벽에야 겨우 저택에 들어올 수 있었다.

“혹시나 칼튼이 왕성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여기로 오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왕성에 있는 거


같아요.”

에니스가 침울하게 말을 마쳤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루이센은 입을 열지 못했다.

‘칼튼이, 왕성에 들어간 날 그렇게 됐다고. 그럼 벌써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생각해 보면, 왕실 기사단이 수도 저택을 장악한 것부터 악마숭배자들의 계략이었다. 칼튼이 제 발로 왕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게 해서,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혼자 왕성에 들어간 칼튼은 그를 지켜 줄 뒷배가 없어
아무렇게나 죽여도 되는 존재였다. 혼자 남은 루이센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으니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상대였고.

그런 줄도 모르고 자신은 태평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감옥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던 것이
떠오르면서 자괴감이 밀려왔다.

미리 알았다면. 아니,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칼튼이 위험에 빠졌는데도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도와줄 사람도 없이 혼자서……. 그것도 모르고 나는…….’


사실 루이센은 칼튼이 자신의 곁을 떠나 1 왕자에게 가는 게 싫었다. 그래도 필요할 거 같아 괜찮다고, 가라고
했다.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다고,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으나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많이 다쳤을까? 그래서 어딘가에 꼼짝도 못 하고 있는 거 아니야?’

루이센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아 어린아이처럼 허둥댔다.

“공작님.”

에니스가 루이센의 손을 잡았다.

“칼튼은 괜찮을 겁니다. 지옥에서도 살아남을 남자예요, 그 사람은. 하지만 그가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니,
공작님이 정신을 바짝 차리셔야죠.”

그녀는 루이센과 눈을 맞추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붙잡고, 이성을 날카롭게 가다듬어야 했다. 칼튼은 몇 번이고
몸을 내던져 루이센을 구해 주었다. 이제는 루이센이 칼튼을 구할 차례였다.

118 화

칼튼을 구하는 계획은 단순했다.

‘왕성에 들어간다. 칼튼을 찾는다. 몰래 숨겨서 왕성에서 데리고 나온다!’

언뜻 쉬워 보이는 계획이지만 여기에는 장애물이 많았다. 먼저 왕성에 들어가지 못했다. 지금 왕성에는 1 왕자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루이센뿐만 아니라 다른 대영주나 귀족들도, 갖은 핑계로 왕성을
방문하겠다 요청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원래는 따로 요청이 없어도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곳이라 반발이
거셌지만 1 왕자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1 왕자는 무척 폐쇄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두 번째 장애물은 칼튼을 찾는 것이었다. 왕실 기사단이 몇 날 며칠을 뒤지고 다녀도 칼튼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작정하고 숨어 있는 그를 어디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도 문제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것이 왕성을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에니스의 말에 따르면 왕성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가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다. 하다못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통까지 전부 휘저어 확인한다고 하니,
칼튼을 찾아도 숨겨서 데리고 나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밖에도 루이센이 왕성에 들어갔을 때 악마숭배자들이 공격한다거나 하는 위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칼튼을 구할 것이라는 루이센의 마음이 확고했으니, 하나하나 차례대로 해결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먼저 첫 번째 난관. 왕성에 들어가기 위해 루이센은 사람을 풀어 은밀하게 소문을 뿌렸다.

‘왕이 정말 살아 있을까? 이미 죽었는데 1 왕자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

이런 소문은 대개 그러하듯 의심에서 시작해 의심으로 끝났다. 증거는 필요 없었다. 그저 왕이 쓰러진 지 한참이
지났고, 대영주들이 수도에 모여들었는데, 1 왕자는 이상하게 폐쇄적으로 굴고 있다는 점들이 소문을 강화시켰다.

물론 워낙 조심스러운 이야기고, 잘못하면 왕실모독죄로 잡혀갈 수 있어 금방 넓게 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영주들 귀에 들어가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은 왕성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기에 사소한 소문에도
빠르게 반응한 것이다.

대영주들은 먼저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사람을 보내도 왕실은 묵묵부답이었다. 왕성에
심어 둔 정보원들도 어떻게 된 건지 죄다 연락이 끊긴 상태라, 왕성 내부의 상황을 알아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마침 동부 대영주가 다른 대영주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

동부 대영주의 수도 저택, 응접실.

왕국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대표하는 지배자들이 한데 모였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은 루이센이었다.

“다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중에서는 루이센이 가장 어려서, 같은 직급이지만 존대를 했다. 동부 대영주가 할아버지뻘이라면 나머지


서부와 북부 대영주는 부모뻘이었다.

“아, 아니에스 공작. 자네 이번에 종교재판까지 받게 되었다며? 그러게 적당히 사고를 치라니까. 먼저 하늘에
가신 선친께서 보시면 얼마나 애통해하겠나?”

“자네 부친께서는 정말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나고 완벽한 분이셨지. 자네 모친도 훌륭한 레이디이셨고. 부모님의
반만이라도 닮았다면 이렇게 난리가 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부 대영주와 북부 대영주가 루이센의 속을 긁어 댔다. 만날 때마다 이런 식이니 루이센은


다른 대영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쏟아지는 공격을 참지 못하고 의자를 걷어차고 방을 나가
버렸겠지만 이번에는 참았다.

보통은 여기에 동부 대영주가 끼어들어 막타를 쳐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끼어들지 않으니 분위기가 시들해지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소문 다들 들으셨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그냥 길거리에 떠도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만큼 한가한 때가 아닐 텐데, 아니에스


공작은.”
“자자, 그래도 다들 신경 쓰이는 것이 있으니 내 부름에 응한 것이겠지.”

동부 대영주가 은근히 루이센의 편을 들어주었다.

“맞소. 근거도 없는 소문이지만 그냥 흘려듣기에는 지금 좀 상황이 그렇지.”

북부 대영주가 몹시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믿었던 1 왕자가 그를 전심전력으로 지지하던 북부 출신 가문들을


홀대하니, 그 역시 심기가 불편하던 차였다.

루이센은 대영주들을 훑어보았다. 대놓고 불만을 티 내는 북부 대영주,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표정이 좋지 않은
서부 대영주, 원래 왕가를 싫어하는 동부 대영주. 보아하니 다들 마음속에 현 상황에 대한 불만과 불안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루이센은 적당히 운을 띄웠다.

“전하의 안위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

“그걸 누가 모르나.”

“그런데 문제는 그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 사실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다들 전하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로 왔는데, 지금 누구 하나 전하를 제대로 알현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상황이니 다들 답답한
마음이라, 이곳에 모인 게 아닙니까.”

루이센의 지적에 서부 대영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동부 대영주의 부름에 응한 것도 루이센의 말


그대로였으니.

“지금 우리 상황이, 전하의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러야 하는 의무를 가진 우리가 전하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는 우리 대영주의 권한을 침범하고, 우리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너무 과도한 해석 아닌가? 자네가 1 왕자와 트러블이 있는 건 아네만.”

“네, 제게만 그런 거라면 개인적인 원한으로 이해할 수 있죠. 하지만 북부 대영주님과 북부 가문들까지 홀대하는
것을 보면……. 솔직히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됩니다.”

“다른 의도라면?”

북부 대영주가 몹시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이참에 우리 대영주들의 기를 죽여서, 평범한 다른 귀족이나 다름없이 부리겠다는 속셈이지! 그런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 나라보다 오래 남부를 지켜 온 아니에스 공작가를 버리고 한낱 백작가를 남부의 대영주로 만든다고
하나.”

동부 대영주가 분노하듯 소리쳤다.

“백작가라면, 더블레스 백작가요? 백작가라면 한때는 아니에스 공작가의 가신 집안 아니었습니까?”

서부와 북부의 대영주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설마 하고 넘어갔던 이야기가 다시금 동부


대영주의 입을 빌려 나오자 가슴에 크게 와 박혔다.
“대영주 가문을 마음대로 바꿔 버리다뇨. 왕국이 건립된 이래, 왕가는 몇 번이고 바뀌었지만 대영주 가문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1 왕자가 정말 우리 대영주들을 핍박하려고 하는 거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입니다.”

적당히 분위기가 달아오른 것 같아 루이센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러니 우리 힘을 보여 줘야 합니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나?”

“대영주의 의무를 다하러 갑시다. 전하를 뵙고, 전하의 임종을 지키는 겁니다.”

루이센이 말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그냥 왕성에 막무가내로 쳐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루이센 혼자라면 어렵겠지만 대영주들이


다 몰려가면 1 왕자도 막을 길이 없으리라는 계산하에. 이 능구렁이 같은 인간들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일단
왕성에 들어간 기회를 살리기 위해 여러모로 활개를 치고 다닐 것이다. 그들이 시선을 끌어 주는 동안 루이센은
칼튼을 찾으러 가겠다는 심산이었다.

“괜찮은 의견 아닌가. 우리 네 명이 모두 함께 의무를 다하겠다 주장한다면 아무리 1 왕자라 해도 무시할 수 없을


거네. 여론도 우리의 편일 것이고.”

동부 대영주가 적당히 끼어들어 루이센의 의견을 지지해 주었다. 동부 대영주는 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고,
노련한 정치가이기도 했기에 그가 지지하자 그의 권위에 힘입어 좀 더 그럴듯한 주장으로 들렸다.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왕성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이는 상당한 이득이었다. 짧은 고심 끝에 서부와 북부 대영주도
결론을 내렸다.

“좋습니다. 갑시다.”

***

왕성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라 볼 수 있는 가장 큰 문은 굳게 닫힌 채였다. 수문장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왕성의 문이 굳게 닫힌 지도 벌써 수일째. 처음에는 왕성에 들어가겠다고 찾아오는 귀족들로 크고 작은 소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어차피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서 이제는 다들 얼씬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수문장들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교대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느슨하게 쥔 창과 비딱한 자세에서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갑자기 저 멀리서, 맹렬하게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또 시골 귀족들인가?’

시골에서 막 올라온 귀족들은 왕성 문을 닫아 걸은 것을 몰라, 가끔 1 왕자를 만나고 싶다며 찾아와 억지를 부려


대곤 했다. 무시하고 있으면 제풀에 나가떨어지곤 하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점점 가까워지는 것은 시골 귀족의 낡은 마차가 아니었다. 마차는 네 마리의 말이 끌어야 할 정도로
거대했고, 외관은 사치스러울 정도로 화려했다. 네 대의 마차에는 각각 깃발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깃발을 보고 수문장은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대, 대영주. 대영주들의 마차다!”

네 명의 대영주가 성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119 화

“뭐야? 왜 대영주들이 왕성으로 몰려오는데?”

대영주는 왕국의 네 지역을 대표하는 지배자였다. 수도에 머물던 루이센이 극히 특이한 경우로, 대게는 자신의
영지에 머물렀다. 신년이나 국가의 큰 행사가 아니고서는 네 명의 대영주가 함께 모이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지금 미리 연락도 없이, 네 명의 대영주가 함께, 몹시도 다급히 왕성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뭐지? 뭐 큰일이라도 난 거 아냐?”

그런 의심이 들 만큼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대영주들이 급히 왕성을 찾아야만 할 시급하고 중대한 일.

수문장들은 자연스럽게,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늙은 왕을 떠올렸다. 수문장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대영주들의
마차는 이미 그들의 코앞에 도착했다.

“무, 무슨 일입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문장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를 뵈러 가는 중이다. 성문을 열어라.”

“전하? 전하요? 하지만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이…”

“대영주님들의 의무를 방해할 셈이냐!”

북부 대영주의 기사가 고압적으로 호통을 쳤다.

‘왕이 죽었나 보다!’

설마가 확신으로 변했다. 왕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 상황에 대영주들이 다급하게 수행할 의무라면
아무래도 그 일밖에 없지 않겠는가!

상식적으로 왕이 죽었으면 왕성 밖에 머무는 대영주들보다 왕성을 지키는 수문장에게 먼저 소식이 전해졌을 것임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영주가 한 번에 몰려왔다는 이례적인 상황에 대한 당혹스러움
그리고 대영주와 그를 따라온 한 무리의 기사들이 자신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다는 압박감은 정상적인 생각을
어렵게 했다.

“문, 문 열겠습니다.”

수문장들은 허둥대며 문을 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면서, 대영주들을 태운 마차와 그들의 일행은


막힘없이 쭉쭉 왕성의 안으로 달려갔다.

대영주들을 모두 데리고 급박하게 들이닥친다는 루이센의 전략이 제대로 통했다.

***

왕성은 하늘을 향해 솟은 첨탑이 인상적인 건물이었다. 다섯 개 층으로 이 시대에 보기 드문 고층 건물에,


창문이 작아 어딘가 위압적인 느낌을 풍겼다.

왕성의 본 건물 앞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대영주들이 성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실 기사단장과


왕실 시종장, 시종, 그리고 왕성에 머무르고 있던 귀족들까지 부랴부랴 나온 것이다.

“다짜고짜 왕성으로 쳐들어오다니, 대영주님들은 대체 무슨 생각들이신 건가요?”

“그분들도 답답할 만하지. 1 왕자님 행동은 우리도 답답할 지경이니…….”

“쉿. 온다.”

대영주들이 차례로 마차가 도착해 대영주들이 내렸다. 네 명의 대영주 모두 각 지역의 대표이자 지배자라는
위명에 걸맞은 위엄 있고 화려한 차림이었으나, 사람들의 시선은 루이센 한 사람에게 쏠렸다.

혼자만 성기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것도 특이하긴 했지만,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루이센은 무릎까지 오는 케이프 코트를 입고 있었다. 부드러운 크림색 원단에는 부드러운 윤기가 흘렀고, 금사로
넝쿨 같은 문양의 자수가 놓여 화려했다. 둥근 모자도 썼는데, 루이센의 고개가 움직일 때마다 얼굴 옆으로 타고
내린 보석 장식이 흔들리며 반짝임을 더했다.

자칫하면 우스워 보일 수도 있을 정도로 화려했으나, 루이센의 화려한 외모가 받쳐 주자 전혀 과해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의상은 루이센의 청순한 이목구비를 더 돋보이게 해 주었으며, 그의 달라진 표정, 심지가 굳건해진 것이
드러나는 침착한 분위기와 근사하게 어우러졌다.

그런 차림으로 흰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니 꼭 하늘에서 내린 성자라도 되는 것 같았다.

순간 루이센을 둘러싼 이런저런 논쟁은 싹 잊히고 그 비현실적인 외모만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채웠다. 루이센이
제멋대로인 행실을 가지고도 욕보다 사랑을 더 많이 들은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길을 막으려고 나온 건가, 안내하려고 나온 건가?”


서부 대영주의 퉁명스러운 지적에 잠시 루이센에게 쏠렸던 시선이 흩어졌다.

“전하께 안내하겠습니다.”

왕실 시종장이 앞서자 대영주들이 그를 따랐고 시종들과 구경 나온 귀족들이 우르르 대영주들과 일정 거리를 두고


쫓아갔다. 루이센은 보로스 경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요즘 우리 자주 보지?”

“……죄송합니다.”

보로스 경은 자기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얼굴로 말했다. 루이센이 가볍게 웃었다.

“내가 뭐라고 했어? 그보다, 정말 따라가도 괜찮나?”

“예. 1 왕자님도 허락하셨습니다.”

“1 왕자가?”

방해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1 왕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의도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 없었다.

***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우선 왕을 만나야 했다. 시종장은 대영주들을 왕의 침실로 안내했다. 왕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늙은 왕은 바짝 마른 고목 나무 같았다. 이따금 쇳소리가 섞인 긴 숨을 내뱉었는데, 그의
생명이 빠져나가는 소리 같았다. 침실의 분위기는 어둡지도 않은데 침울했고 어찌할 수 없는 우울감이 감돌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이, 왕은 죽어 가고 있었다. 대영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왕의 모습에 반응했다. 씁쓸해하기도
했고, 왕의 손을 잡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 시대를 함께한 군주의 죽음은 가슴을 울리는
일이었다.

루이센은 침대가에 조금 떨어져 서서 왕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태일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왕은 곧 죽을 테니 말이다. 자신의 회귀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으니 달라질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변은 없었다.

이미 자신의 안에서 죽은 사람이라서일까. 다른 대영주들처럼 격렬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다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죽어 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끔찍하다. 뼈에
시리도록 무서워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다.
‘그래도 내게는 성자님이 함께해 주었지.’

외팔의 순례자는 루이센의 마지막까지 곁을 지켜 주었다. 그가 건넨 와인으로 입술을 적셨고, 그의 상처 많은


오른손을 잡으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가 있어 준 덕분에 무서웠어도 외롭지 않았다. 유언도 남길 수 있었다.

‘전하께도 온 마음을 다해 마지막을 지켜 줄 사람이 있기를.’

루이센은 진심을 다해 빌었다.

***

짧은 인사를 마치고 대영주들은 침실에서 나왔다. 슬픔은 슬픔이고, 왕의 상태를 파악했으니 각자 머릿속에
계산이 선 것이다. 왕의 죽음과 신왕의 즉위 사이, 그 시기를 허비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움직여야 했다.

왕 하나 보겠다는 이유로 왕성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으니 각자 마음이 바빴다. 대영주들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니 왕실 시종과 기사들이 급히 따라붙었다.

루이센도 본래 목적으로 눈을 돌렸다.

‘왕성에는 들어왔다. 이제 칼튼을 찾아야 해.’

두 번째 계획에 진입해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연기력이 필요했다.

“아…….”

루이센은 잘 걷다가, 휘청댔다. 넘어질 뻔한 것을 따라오던 왕실 시종이 부축해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고맙네.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말이야. 잠시 이러고 있어도 되겠나?”

“물론, 물론입니다.”

루이센은 왕실 시종에게 살짝 기대었다. 가까이서 보자, 더 흠결 없이 완벽한 얼굴에 왕실 시종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좀 놀란 모양이야. 전하께서 저렇게 심각한 상태이실 줄은…….”

루이센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팔랑이듯 움직이자, 왕실 시종의 마음도 술렁거렸다.


루이센은 지그시 왕실 시종의 눈을 마주했다.

“부디 내가 연약하다고 욕하지 말아 주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 갑작스럽게 다들 떠나니…… 견딜 수가


없어.”

루이센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왕비와 2 왕자를 친가족처럼 의지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스스로


자초한 거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루이센에게 닥친 비극이 순수하게 불쌍해 보였다.

“내가 자네들에게 부탁 하나만 하겠네. 아주 잠깐이라도 좋아. 이모님의 방을 둘러보고 싶어.”


“왕비님의 처소요? 그분이 쓰시던 그대로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제발 부탁하겠네. 내 어머니와 다름없던 분이셔. 그저 애도만 할 수 있게 해 주게.”

“그…… 음…….”

“문제가 생기면 내가 억지를 부렸다고 꼭 말해 주겠네.”

루이센의 푸른 눈동자에 슬며시 눈물이 고였다. 화려한 외모의 미인이 연약함을 드러내자, 왕실 시종의 마음에는
애잔함과 함께 강한 동정심이 일었다. 저 눈물이 그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용기도 샘솟았다.

“……잠깐 기도하는 정도라면 알겠습니다.”

왕실 시종의 허락이 떨어졌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루이센의 애처로운 모습에 동정심을 가졌기에 반대는 없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던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반대하자니 인정머리 없는 냉혈한이 되는 거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왕비의 처소로 향했다. 루이센은 한 번 더 양해를 구하고 성기사들만 데리고 왕비의 처소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와, 그게 먹히네요?”

성기사로 분장하고 있던 모리슨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당연하지. 먹히니까 이렇게 작정하고 꾸미고 온 거 아니겠어.”

루이센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자신을 가리켰다. 그 모습이 너무 그럴싸해서 모리슨은 할 말을 잃었다.

“빨리 찾기나 하시죠. 칼튼을 찾아야죠.”

“그렇지.”

루이센은 방 한구석에 놓인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무거워 보였지만 슥 미니 쉽게 밀렸다. 그 뒤로 숨겨져 있던


통로가 드러났다.

과거, 2 왕자와 숨바꼭질을 하고 놀다가 발견한 비밀통로였다.

칼튼이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람이 가라앉고 나니 루이센은 이 통로가 떠올랐다. 왕성의
여러 곳과 연결이 되어 있기에 만약 칼튼이 이 통로를 발견했다면 몇 날 며칠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먹고
마시며 숨어 지낼 수 있었다.

120 화
이 비밀통로 어딘가에 칼튼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루이센은 비밀 통로를 바라보았다. 창문도 없고, 불을
피우지도 않았기에 통로의 너머는 어두컴컴했다.

‘……어두워.’

루이센이 주춤하자 모리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냥 제가 들어갈까요?”

“……아니. 내가 가는 게 나아.”

루이센은 모리슨보다 신체 능력은 떨어졌지만 왕성 구조에 익숙하고, 어릴 때 잠깐이지만 통로 안쪽을 탐험해 본


적도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통로 안쪽이 복잡하여 길을 잘 아는 사람이 혼자 가는 게 더 나았다.

물론 비밀통로가 너무 어두워 겁이 나긴 했지만 루이센은 마음을 다잡았다.

‘괜찮아.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모자와 겉옷을 벗어서 모리슨에게 건넸다.

“걱정 말고 기다려. 사람들 못 들어오게 잘하고. 억지로 들어오려고 하면 자네들이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

“네.”

루이센은 홀로 비밀통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통로 안쪽은 루이센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까다로웠다. 한 사람이 간신히 걸을 정도로 폭이 좁았고, 길은


구불구불하여 복잡했다. 발에 걸리는 것은 없지만 작은 촛불 하나에 의지하여 걷기에는 쉽지 않았다. 공기의
흐름에 촛불이 가늘게 떨렸다.

‘촛불이 꺼지기라도 하면…… 아니야.’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더 눈을 부릅뜨고 앞을 살폈다.

“칼튼? 나야. 여기 있으면 대답해.”

조심스럽게 칼튼을 불러 보기도 했다. 귀를 쫑긋 세웠으나 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사라질 뿐,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잘못 짚었나?’

확신에 의심이 들기 시작할 때쯤, 무언가 앞에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너무 비밀스러워 왕성 사람들도 모르는
비밀통로였다. 단서가 되리라 생각해 다가가 촛불을 비추었다.

그것은 옷이었다. 제복과 비슷한 느낌의 자켓으로, 여기저기 찢어지고 피가 묻어 넝마나 다름없었다.

‘핏자국이 그렇게 오래된 거 같지 않아.’

에니스가 말해 준, 칼튼의 마지막 인상착의와 비슷했고 옷의 크기 또한 칼튼의 체격과 비슷했다.


‘칼튼이 입고 있던 옷이야.’

루이센은 확신했다. 옷을 챙기고 주변을 조금 더 살펴보았다. 땅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진 자국이 드문드문 길게
이어져 있었다. 칼튼이 불편한 자켓을 벗어 던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루이센은 흔적을 따라갔다. 핏방울은 좁고 가파른 계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 예전의
루이센이 가 본 적 없는 또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 끝에, 아치 형태의 문이 있었다.

‘저긴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뭔가가 문을 가리고 있었다. 커튼 같은 것을 걷어 내고 보니 책장이 나왔다.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왕의 서고로 연결되는구나.’

어디쯤인지 대충 예상이 갔다.

‘칼튼이 여기 있을 거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확인을 위해 루이센은 책을 한두 권 뽑아냈다. 빈틈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루이센은 눈이 부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밝은 빛에 적응이 되면서, 서서히 방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위엄이 느껴지는 방의 풍경 속에, 1 왕자가 서


있었다. 창문을 등지고 선 탓에 역광이 드리워, 루이센 쪽에서는 1 왕자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서고 안에는 1 왕자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었다. 루이센도 아는 얼굴들이었다. 더블레스 백작과 붉은 로브를 입은


아홉 번째 숭배자였다.

더블레스 백작이 악마숭배자와 함께 있는 것은 너무 예상대로라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1 왕자는 달랐다.

‘1 왕자…… 한패는 아닐 거라고 믿었는데.’

물론 1 왕자도 한패일 수 있겠다고 의심하긴 했다. 하지만 루이센은 부디 그것만큼은 아니길 바랐기에, 다른
무언가가 있었을 거라는 기대를 놓지 않았다.

회귀 전, 1 왕자는 왕이 되어 엉망진창인 나라를 살려 보겠다고 애를 썼다. 왕국민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루이센은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기에 내심 존경하는 마음도
품고 있었다. 루이센 개인의 원한은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1 왕자는 좋은 왕이었다.

밀려오는 배신감에 루이센은 주먹을 꽉 쥐었다.

더블레스 백작이 입을 열었다.

“대영주들이 왕성을 헤집고 다니고 있습니다, 전하.”

“…….”

“대영주들을 왜 왕성에 들이셨습니까?”

“…….”
“제가 분명 아무도 성안에 들이지 마시라고 했을 텐데요. 왜 제 충언을 따르지 않으신 겁니까?”

“…….”

1 왕자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그들을 막을 명분이 없었어.”

“그깟 명분이 제 말보다 중요합니까?”

“아니. 자네 말을 따르려고 했는데…….”

1 왕자는 말꼬리를 흐리더니, 갑자기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세차게 휘저었다. 1 왕자의 몸이 휘청였다가 다시
바로 섰다. 그가 선 방향이 달라지면서,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1 왕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알록달록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진 빛은 1 왕자의 말간 얼굴을 어지럽혔다.

“내가 왜 자네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지…….”

1 왕자가 느끼는 혼란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대영주들과 척지는 건 위험한 행동이야. 자네 한 사람 때문에 그럴 수는 없어. 아니에스 공작도…… 공작을……


왜 죽이려고 했더라…….”

1 왕자는 중얼거렸다.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의문이 가득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몰래 훔쳐보던 루이센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1 왕자가 날 죽이려고 했는데, 왜 죽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1 왕자가 진짜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했나?

“하하. 왕자님. 이상한 소리를 하십니다.”

더블레스 백작은 웃었다. 전혀 웃음이 나올 상황이 아닌데도 활짝 웃는 모습에 루이센은 소름이 끼쳤다.

“우리가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약속?”

“저는 왕자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지금은 그 대가를 치르시는 것이지요.”

“……내 소원? 그건…… 별게 아니었는데.”

더블레스 백작은 1 왕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힘주어 눌렀다. 1 왕자가 백작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백작, 이게 무슨…….”

“본래 악마와의 약속은 불공평한 법입니다, 왕자님.”

백작의 손에서 검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1 왕자의 눈과 코와 입으로 스며 들어갔다.

1 왕자의 코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1 왕자가 황급히 손으로 피를 훔쳤지만 피는 계속, 계속 멈추지 않고
흘러 셔츠 앞섶까지 새빨갛게 젖어 들어갔다.

더블레스 백작이 손을 뗄 때쯤, 1 왕자의 얼굴에는 더 이상 혼란이 남아 있지 않았다. 1 왕자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일어섰다.

1 왕자의 모습 위로 다시금 역광이 드리웠지만, 루이센은 1 왕자의 얼굴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너무 잘 만든


인형을 보는 듯 소름이 끼쳤다.

“이거 괜찮은 겁니까? 세뇌가 자꾸 풀리는데.”

악마숭배자가 말했다.

‘세뇌?’

루이센은 너무 놀라 입으로 소리 내 외칠 뻔했다. 마침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루이센을 끌어안으며 입을 막지


않았다면, 소리가 튀어 나갔을 것이다.

루이센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뒤에서 폭 감싸 안아 오는 그 품이 너무도 익숙하고 편안했다. 갑자기 루이센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루이센은 입을 막고 있는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칼튼!’

칼튼이 거기 서 있었다. 루이센은 눈물이 핑 돌아, 칼튼을 마주 안았다. 그의 품으로 파고들자 칼튼의 커다란
손이 느리게 루이센의 등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지낸 거야? 왜 뒤에서 튀어나오는데?’

묻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칼튼은 검지를 입술에 대고 시선으로는 서고 쪽을 가리켰다. 말소리를 냈다가는 여기


숨어 있는 것을 들킬 수 있다는 의미였다.

루이센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에는 부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칼튼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얼른 루이센의 콧등에 입을 맞췄다.

‘이러는 건 반칙이지.’

루이센은 칼튼에게 똑같이 돌려주려다가, 더블레스 백작의 목소리가 들려와 참을 수밖에 없었다. 두고 봐라.

“애초에 시원찮은 마법이었어. 아니에스 공작만 처리하고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왕성 한복판에서, 1 왕자를 상대로 악마숭배로 얻은 힘을 썼다. 그런 위험까지 감수해 가며 루이센을


몰아넣었는데, 이번에야말로 그에게 복수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루이센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유유하게
빠져나갔다.

‘그럴 능력이 없는 머저리였어. 내 계획은 완벽했는데 어째서…….’

순례자를 사칭했다고 고발해 교회를 끌어들이는 방법은, 백작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기발한 한 수였다.

‘망나니처럼 살았어도 아니에스 공작이라 이건가? 위대하신 황금들판의 지배자 혈통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더블레스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턱이 튀어나오고 손이 파들파들 떨릴 정도로 그는 분노했다. 대체 왜 늘
아니에스 공작이라는 작자들은 나의 계획을 망치고, 막다른 길로 자신을 몰아붙이느냔 말이다.

“그…… 슬슬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교주님도 좀 우려를 표하시던데.”

아홉 번째 숭배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루이센의 암살이 실패한 후, 아홉 번째 숭배자는 교주에게 크게


혼이 났다.

더블레스 백작은 교주와 같은 항렬이며, 악마숭배자들이 이만큼 힘을 키운 것은 백작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그래서 백작을 돕고 있기는 했지만 슬슬 부담스러워졌다. 이단 종교의 힘은 비밀스러움에서 나오는 데 반해,
더블레스 백작을 돕느라 너무 많이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백작님도 사사로운 복수보다는 신앙에 더 집중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지……. 원래 복수하려던 그 사람,


전염병으로 수십 년 전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더블레스 백작은 아홉 번째 숭배자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의식은?”

“시키신 대로 준비하고는 있습니다만…… 왕성에서 정말 이래도 될까요?”

“잘되기만 하면, 이제까지 벌인 자잘한 의식과는 비교도 안 될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분께서도 크게


기뻐하시겠지.”

“그럼 열심히 해야겠네요.”

자신들이 모시는 악마가 기뻐한다. 그것보다 보람찬 일이 또 어딨을까. 아홉 번째 숭배자는 뺨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진행되는 대로 알리고, 그때까지 1 왕자를 잘 지켜보도록. 푸른사자의 핏줄은 유용하게 쓰일 테니.”

“백작님은 어디 가시게요?”

“아니에스 공작이 왕성에 있지 않나. 오랜만에 그 얼굴도 한 번 봐야지. 무슨 꿍꿍이로 왕비의 침실에 처박혀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더블레스 백작이 몸을 움직였다.

‘헉. 백작이 온다.’

그들이 들은 이야기를 곱씹을 새가 없었다. 왕비의 침실에 백작보다 먼저 도착해야 한다! 루이센이 칼튼에게
고갯짓을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121 화
왕비의 침실 바깥.

사람들은 가만히 루이센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방 나올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저기, 공작님. 아직이십니까?”

“아직 공작님이 감정을 다 추스르지 못하셔서 아주 잠깐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안쪽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은 방에 들어가기 전 보인 루이센의 처연한 모습을 떠오르게 만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 더 너그럽게 만들었다.

더블레스 백작이 왕비의 침실 앞에 도착한 건 그때였다. 붉은 갑옷을 입은, 백작가의 기사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왕실 시종과 기사들은 그들을 발견하고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더블레스 백작이 권력을 잡음에 따라 그는


자신의 기사들을 이용해 활개를 치고 다녔기에 다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에스 공작님은 이 안에 계신가?”

“예. 그렇습니다.”

“계속?”

“네. 전하를 뵙고 계속 이 방에 계셨습니다.”

더블레스 백작은 화려한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훗, 하고 웃음을 보였다. 어딘가 찜찜한 미소였다.

“문을 열어라.”

“지금요?”

“지금 당장.”

시종들은 루이센을 더 기다려 주고 싶었지만, 실세인 더블레스 백작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가지고
있던 열쇠로 잠긴 방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백작의 기사들이 문을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렸을 때, 루이센은 방의 한구석에 있었다. 기도를 위한 테이블에 두 팔을 얹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이 루이센의 흰 실루엣 위로 내려앉았다. 밝은 금발이 반짝이며 루이센의 주변에 빛무리가
감싸고 도는 것 같았다. 루이센이 교리 따위는 개나 줘 버린 망나니라는 걸 모두 아는 사람도 순간 혹할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루이센은 기도에 심취한 척,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이제 마지막 단계야. 칼튼을 무사히 숨겨서 왕성을 빠져나가면 다 끝난다.’


어떻게 보면 제일 어려운 일이지만 루이센의 계획은 순조로웠다. 약간의 시간과 배짱이 더 필요할 뿐.

루이센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더블레스 백작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더블레스 백작, 오랜만이군.”

“오랜만입니다. 공작님.”

예법에 어긋남이 없는 정중한 인사가 오갔다. 더블레스 백작의 공손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루이센은 속이 안
좋아졌다.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백작의 모습은 루이센이 기억하던 것과 같았다. 딱히 모난 곳은 없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지도 않는 이웃 영지의 귀족, 딱 그 정도의 인상 그대로였다.

조금 전, 왕의 서고에서 본 그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모습. 그래서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백작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서 피하면 ‘나 뭔가 알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에 꾹 참았다.

백작은 먼저 루이센이 말을 꺼내길 기다리듯 가만히 있었다. 기사들을 끌고 문을 열고 들어온 만큼 용건이 있을


텐데,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근데 무슨 일이야?”

“사실은 조금 전에 제보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제보?”

“공작님이 도주 중인 죄인을 숨겨 두고 있다는 내용이었죠.”

제보는 그냥 갖다 붙인 구실일 게 뻔했다. 더블레스 백작은 이미 루이센이 칼튼을 구하러 왕성에 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과감하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이겠지. 루이센을 압박해 떠보려는 심산이 훤히 보였다.

루이센은 일단 모르는 척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죄인이라니?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단 말인가?”

“죄인의 이름은 칼튼. 1 왕자님을 시해하려다 실패하고 도주 중입니다. 공작님도 익히 잘 아시는 이름일 테죠.
공작님이 각별히 그를 아낀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죄인을 빼돌렸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야.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나? 나, 아니에스


공작이야. 우리 가문은 오래도록 왕국을 위해 헌신했고 왕가에 충성했다! 그런데 날 의심한다고?”

루이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를 냈다.

“그럼 왜 공작님만 내내 왕비의 침실에 계셨던 걸까요? 여기에 뭘 숨겨 두었길래?”

“……그분을 애도하러 온 것이네. 내 어머니나 다름없던 분이셨으니까.”

“대영주들을 선동해 왕성에 들이닥치셨는데, 고작 애도를 하려고 그렇게까지 하셨다고요?”

“…….”
“애도는 구실이고, 왕비의 침실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닙니까. 가령…… 도망친 죄인이라든가.”

“백작!”

“라고, 1 왕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의심하시니 저는 따를 수밖에요.”

더블레스 백작은 자비를 구하듯 깊이 허리를 숙였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백작의 지적이
그럴듯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부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 수색에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

더블레스 백작이 명령하자, 백작의 기사들이 방 안을 수색했다.

백작의 기사들은 이곳에 칼튼이 숨어 있을 것을 확신하듯이 왕비의 침실을 거칠게 뒤졌다. 옷장을 열어 안의
옷들을 바깥으로 다 끄집어내고,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궤짝은 다 걷어차 확인했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빠르게 어질러지는 침실의 풍경은, 루이센을 압박하기 위해 더 일부러 더 과장된 것 같았다. 때때로 더블레스
백작이 루이센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이나 표정을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루이센은 팔짱을 끼고 서 있었으나,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가 백작의 기사 몇 명이 루이센의 몸을
수색했고, 성기사들에게 다가갔다.

“투구를 벗어 주시죠.”

“……잠깐!”

루이센은 깜짝 놀라 백작의 기사와 성기사들 사이를 막아섰다.

“성기사까지 수색하겠다는 말인가?”

“네. 투구를 쓰고 계시니 얼굴을 모르지 않습니까.”

“조심도 과하면 독이 된다는 걸 모르나. 내가 죄인을 숨겼다고 쳐도 설마 성기사를 사칭했을까?”

“공작님은 순례자를 사칭한 탓에 보호 감시를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건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야! 절대 반대다.”

“이렇게 반대를 하시니, 더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남의, 그것도 성기사의 투구를 멋대로 벗기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교회가 알면 모욕이라면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백작과 백작의 기사들은 루이센의 필사적인 반대를 보고 더 확신에 찼다.

저기에 분명 칼튼이 있다.

처음부터 방 안에 칼튼을 숨겨 둘 것 같지는 않았다. 루이센이 칼튼을 찾았다면 비슷한 체격에 온몸을 갑옷으로
가릴 수 있는 성기사로 분장시켰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떳떳하시면 직접 투구를 벗어 얼굴을 내보이면 될 일 아닙니까.”

“그건…….”
더블레스 백작이 눈짓을 했다. 백작의 기사들은 루이센을 밀치고 성기사들의 앞에 섰다.

“네놈들은 교회의 분노가 무섭지도 않은가!”

루이센이 엄포를 놓자 더블레스 백작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백작의 기사들은 이미 자신과 완전한
한편으로, 교회 따위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존재들이었다.

백작의 기사들은 성기사들을 에워쌌다. 몇 명은 방패와 칼을 들고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저항을 경계했다.

“그만두라니까.”

루이센이 좀 더 적극적으로 기사들을 막으려고 했다. 그때 내내 침묵하던 성기사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됐습니다, 공작님. 투구를 벗으면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닙니까. 나의 신을 우러러 떳떳하지 못한 적이 없으니.”

그가 투구를 벗었다. 잇따라 다른 성기사들도 그를 따라 투구를 벗었다.

하나둘 성기사들의 민얼굴이 드러났다. 곧 모든 성기사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전부 모르는 얼굴입니다.”

칼튼은 거기에 없었다.

그와 비슷한 타이밍에 방 안의 수색도 마쳤다.

“방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숨어 지낸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좀 더 제대로 찾아봐!”

더블레스 백작은 확신에 찼던 만큼 동요했다.

“그것 보게. 괜한 사람을 의심하고 말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작이 그러면 안 되지. 우리 공작가가 자네
집안을 대대로 얼마나 잘 돌봐줬는데.”

루이센은 언제 불안했냐는 듯이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걸 보고 더블레스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부터…… 칼튼은 여기 없었군요.”

“그렇다니까? 내가 아니라고 한 건 어디로 들었어?”

루이센은 기분 좋게 웃었다.

이 소모전은 처음부터 시간 끌기였다. 수상해 보이도록 행동하면서 루이센 쪽으로 시선이 쏠리게 만든 다음,
적당한 타이밍에 성기사인 척하고 있던 모리슨이 끼어들며 상황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처음부터 칼튼은 여기 없었다.

루이센은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침 왕성을 빠져나가는 동부 대영주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동부 대영주를


수행하는 수많은 기사 중, 루이센은 한 사람을 찾아냈다.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른 기사들과 구분하지 못할 테지만, 루이센은 그가 말을 타는


폼만 봐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기사는 칼튼이었다.

칼튼과 루이센은 비밀통로에서 헤어졌다. 루이센은 왕비의 침실로 돌아왔고, 칼튼은 루이센이 알려 준 길을
따라가 동부 대영주의 기사로 위장해 그 일행에 합류한 것이다.

루이센은 자신이 칼튼을 구하러 왔음을, 1 왕자와 더블레스 백작이 일찌감치 눈치챌 거라고 생각했다. 왕성에
도착한 순간부터 루이센과 루이센의 마차, 사람들은 집중적으로 감시를 받았다. 왕비의 침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은 다른 의미로 수상해 보였으리라.

그러니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루이센이 직접 칼튼을 숨겨서 데리고 나갈 수는 없었다.

해답은 동부 대영주에게서 나왔다. 동부 대영주 쪽에서 먼저, 칼튼을 구할 생각이라면 협조하겠노라고 제안을 한
것이다. 동부 대영주가 이유 없이 도움을 줄 사람은 아니라 좀 찜찜했지만, 적어도 그의 한결같은 신앙심을
생각해 보면 다른 수작을 부릴 것 같지 않아 칼튼을 부탁했다.

‘성기사로 분장하는 것도 생각은 해 봤지…….’

성기사 얼굴도 확인하지 않을까 싶어서 버린 작전이지만. 그래서 백작이 성기사의 얼굴을 확인하겠다고 했을 때는
좀 더 실감 나게 놀란 척을 할 수 있었다.

‘시간은 충분히 끈 거 같네.’

저 멀리, 칼튼이 동부 대영주 일행과 함께 왕성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칼튼 구출 계획의 3 단계도 성공적이었다.

‘나도 슬슬 돌아가도록 할까.’

이제 루이센만 왕성을 나서면 칼튼 구출 계획은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된다. 집에 가면 칼튼이 기다리고 있겠지.
기대감에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두근했다.

122 화

루이센은 다시 더블레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미미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있어 어떤 의미로는 대단해 보였다. 꽤 동요했을 텐데도 여전히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역시 내 능력으로 백작을 상대하는 건 어렵겠어.’

더블레스 백작에게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체 자신에게 왜 그러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또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왕성에서 더블레스 백작을 만날 수도 있겠다 싶어 그 속내를 떠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막상 백작을 눈앞에 두니 안 될 것 같았다.

더블레스 백작같이 복잡한 사람을 상대하기에 루이센은 너무 단순했다. 머리가 좋고 나쁨을 떠나서 사고방식이
너무도 달랐다. 괜히 백작을 떠보려다가 자신이 당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냥 집에나 가자. 저기 모리슨도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고 고개를 젓고 있지 않은가.

“내 결백은 이만하면 충분히 증명한 거 같은데 어떤가, 백작?”

“……네. 아무래도 거짓 제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 근거도 없는 말에 경거망동해서는 안 될 일이지. 자네를 봐서 오늘의 무례는 그냥 넘어가겠다만 앞으로는


조심하게.”

“공작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더블레스 백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백작의 기사들도 주인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진심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겉모습만큼은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 기사나 주인이나,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태도가 징그러울 지경이었다.

“됐네. 그럼 난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

루이센이 돌아서려는데, 더블레스 백작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들으셨습니까? 남부의 대영주 가문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니냐는 여론이 거셉니다. 아니에스가
아니라 더블레스가 대영주 가문이 되어야 한다고요.”

루이센은 당황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 이야기를 꺼내지? 도발인가, 아니면 자존심을 세워 보겠다는 건가.

도발이었다면 완전히 실패였다. 루이센은 백작이 꺼낸 화제에 별생각이 없었다. 1 왕자가 더블레스 백작과 한패가
아니라, 그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도 조금 전 서고에서 훔쳐본 장면으로 알게 되었다. 더블레스 백작과
악마숭배자를 처단하고, 1 왕자를 구하면 자연히 없어질 논의였다. 아니에스 공작가는 루이센의 노력으로
건재했고 더블레스 백작가는 악마 숭배로 몰락할 테니 말이다.

“아, 그래?”

루이센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게 답니까? 공작가의 권위가 위협받고 있는 건데 말입니다.”

“위협……인가?”

“백작가 따위는 무슨 수를 써도 공작가에는 위협도 안 된다, 그런 겁니까?”

더블레스 백작의 얼굴은 분노로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예의 바른 귀족이던 평소의 얼굴이나 악마숭배자를
대하는 얼굴과도 달랐다. 그보다는 더 내밀하고 본성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야말로 가면을 내던지고 맨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낸 것 같았다. 적대감으로 이글거리는 눈빛, 그 안에 든 것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를 깊은
원한이었다.

급변한 모습에 모리슨과 성기사들이 본능적으로 검에 손을 올렸다. 루이센은 마른 침을 삼켰다. 회귀 전의 삶까지


합쳐 삼십여 년쯤 살았다. 짧은 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뻘의 남자에게 깊은 원한을 살 만큼 오래 살지도
않았다.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 정도로 백작이 뿜어내는 악의는 생생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루이센을 비껴가는 듯한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어쨌든 이 상황은 위험했다. 아무리 성기사들이 함께라지만 이곳은 왕성, 적진의 한복판이었다. 더블레스 백작이
갑자기 욱해서 공격이라도 하면 속수무책이었다.

루이센은 의연해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 난 자네와 백작가의 충성심을 믿을 뿐이야.”

적당한 대답이 되었을까. 더블레스 백작은 하, 하고 웃음인지 한탄인지 모를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강렬한
시선으로 루이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선대 공작님과 같은 말을 하시는군요.”

“내 아버지를 말하는 건가?”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가.”

“칭찬…… 고맙네?”

“칭찬 같습니까?”

“어?”

루이센은 슬슬 머리가 아파 왔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갑자기 아버지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고?
더는 못 해 먹겠다 싶어진 루이센은 모리슨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살려 줘!’

간절함이 통했는지 모리슨이 다가왔다.

“공작님, 조사받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셔야 할 거 같습니다.”

“아, 아. 맞아. 그래. 사제랑 약속이 되어 있거든. 조사받으려고. 내가 지금 죄인 신분이라 말이지. 그럼 이만.
대화 즐거웠네!”

루이센은 재빨리 돌아섰다. 등 뒤에서 백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히 돌아가시고, 조만간 또 뵙게 될 겁니다.”

아니, 무슨 그런 저주를.

백작은 이번에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돌아보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에 고집스럽게 정면만을
바라보며 앞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그 뒤를 성기사들이 따르자, 더 이상 루이센의 앞을
가로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
마차에 오르고 나서야 맥이 탁, 풀리듯 숨을 몰아쉬었다. 한바탕 수색을 한 탓에 마차 내부가 어지러웠다.
루이센은 눈을 지그시 누르며 백작의 행동들을 떠올렸다.

자신의 아들을 첩자로 심어 수작을 부리고, 루이센이 제 발로 도망치도록 유도하거나, 납치하려고 한 것들. 왜
이렇게 복잡한 일을 꾸몄을까? 권력을 향한 욕심으로도, 광적인 신앙으로도 완전히 설명되지 않았던 그 실마리가
잡힐 듯 말 듯 루이센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칼튼이랑 이야기를 하면 좀 더 명쾌해질 텐데. 가슴 속이 답답했다.

“얼른 저택으로 가자.”

루이센은 마부들을 재촉했다. 너무나 칼튼이 보고 싶었다.

***

더블레스 백작에게서 느낀 섬뜩함이 좀 진정될 때쯤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루이센은 마차가 열리기 무섭게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현관문을 열어젖혔을 때, 칼튼은 1 층 로비에 있었다.

저택에 도착한 지는 한참 됐으나,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루이센이 돌아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루이센은 울컥하여 그대로 칼튼의 품에 뛰어들었다. 칼튼은 루이센을 마주 안았다. 만나자마자 떨어져야 했기에
애틋함은 더 컸다. 벅차오르는 마음은 끌어안는 것만으로 부족해 칼튼은 루이센을 안고 빙빙 돌았다.

뒤늦게 로비에 들어선 모리슨이 감동적인 재회에 박수를 쳤다. 루이센과 칼튼의 찐한 포옹을 바라보며 어색한
표정을 짓던 부총관은 모리슨을 보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모리슨의 박수 소리에 루이센이 정신을 차렸다.

“칼튼! 내려 줘. 자네 팔도 다쳤는데!”

루이센은 칼튼의 등을 탁탁 쳤다. 그제야 칼튼은 아쉽다는 듯이 루이센을 땅에 내려놓았다. 루이센은 놀라서
칼튼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왼쪽 팔에 희미하게 핏자국이 배어났다.

“피 나잖아! 얼마나 다친 거야? 치료부터 받고 있었어야지!”

“공작님만 거기 두고 왔는데 어떻게 그래요.”

“그래도! 일단 치료부터 받자. 다른 데는? 더 다친 데 없어? 옷이 아주 넝마 쪼가리더구만!”

루이센은 칼튼의 오른팔을 잡아끌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칼튼의 부관과 에니스도 따라왔다.

칼튼은 소파에 앉아 상의를 벗었다. 몸 여기저기에는 오래된 상처와 함께 새롭게 생긴 상처들로 가득했다. 특히
심한 곳은 왼쪽 팔이었다.

모리슨이 칼튼의 상처를 봐 주었다. 그동안 루이센은 칼튼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치료를 지켜보았다.
칼튼은 알현실에서 1 왕자를 만난 것부터 실종된 이후의 일들을 말했다.

알현실의 창문을 깨고 도망친 이후, 칼튼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부상은 심각했고, 온 왕성이 자신을 찾고 있는
와중에 칼튼은 왕성의 지리에도 어두웠다. 이 몸 상태로는 삼엄한 감시를 뚫고 왕성을 빠져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대로 잡히는 건가. 그렇게 궁지에 몰린 찰나, 천운이 따랐다.

추격을 피해 들어간 빈방에서 더는 못 견뎌 잠시 쓰러졌는데, 그 덕에 가구 뒤에 숨겨져 있던 비밀통로를 발견한


것이다.

칼튼은 비밀통로 덕분에 사람들 눈을 피해 약초를 훔쳐다 상처를 지혈하고, 물과 음식을 훔쳐먹으며 버텼다.

“절 찾아왔어야죠. 왕성에서 당신을 도울 사람은 저 하나인데.”

에니스가 항의했다.

“그러니까. 날 돕다가 걸리면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길이 사라지잖아.”

칼튼은 어깨를 으쓱했다.

은신처도 마련했고, 언젠가 구조가 올 거라는 것도 알았으니, 남은 시간 동안 칼튼은 여유롭게 비밀통로를


탐험했다. 왕성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훗날 도움이 될 만한 게 없나 조사했다.

“그 와중에…… 그런 걸 찾아다녔습니까?”

“할 일도 없고, 다리는 멀쩡하니까.”

“와, 거봐요. 저 사람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까. 괜히 걱정했어. 멀쩡하잖아. 손해 봤어.”

칼튼의 대답에 그의 부관이 열을 올렸다. 에니스가 다 이해한다는 듯이 칼튼의 부관을 안아 주었다.

“아니, 멀쩡하다니! 이렇게 크게 다쳤는데!”

루이센이 칼튼의 왼팔을 가리켰다.

“그러게요. 이거 잘못했으면 팔 한쪽 버릴 뻔했는데요. 이렇게 베이고도 용케도 멀쩡하네요.”

“공작님이 선물을 많이 주셨거든.”

“?”

루이센은 칼튼이 떠나기 전에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좋은 건 다 떠안겨 주었다. 대부분은 내려놓았지만 칼튼의
옷주머니에 남아 있던 것도 있었다. 1 왕자를 보러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루이센이 준 물건 하나는
부적 삼아 챙겼다. 그게 마침 요정의 눈물이 담겼다는 치료제라, 부상이 악화되는 것을 막아 준 것이다.

“그게 없었으면 모리슨 말대로 왼팔을 버려야 할 뻔했죠.”

“오, 사랑의 힘이네요.”

모리슨의 말에 칼튼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팔 하나 없어지는 이야기를 하는데 웃음이 나와?”


루이센만 울상을 지었다. 목숨을 건졌는데 팔 한쪽이 대수냐 싶은 마음인 거 같았지만, 루이센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쓰라렸다.

외팔의 순례자도 팔 한쪽이 없었다. 그분은 한 팔로도 다른 사람들의 몇 배는 뛰어났지만, 그럼에도 많은


불편함이 있었다. 대체로 괜찮아 보였으나 가끔은 다친 팔 때문에 무척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성자님도 왼쪽 팔이었지.’

다친 부위도 절묘하게 비슷한 위치였다. 칼튼의 위로 외팔의 순례자의 모습이 겹쳐졌다. 칼튼과 외팔의 순례자가
겹쳐 보이는 일은 전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좀 더 유난히 신경 쓰였다.

123 화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번번이 겹쳐 보일 수가 있나?’

우연의 일치라고 넘기기에는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루이센은 칼튼을 빤히 바라보았다. 외팔의 순례자의
얼굴을 모르니 본다고 새롭게 깨닫는 것은 없었지만. 그런데 어딘가 칼튼이 평소랑 달랐다. 시선의 움직임이나
표정의 변화가 미세하게 느렸고 때때로 눈썹을 찡그리기도 했다.

루이센과 눈이 마주치면 살짝 눈웃음을 지었으나, 묘하게 기세가 꺾인 느낌이었다. 조금 더 당장 집어삼킬 것처럼


이글이글한 게 평소의 칼튼이니 말이다.

‘칼튼, 지금 지친 거 같은데?’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았다. 칼튼이 지금 지쳐서 쓰러질 것 같은 상태인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사람이니 허세를 부리는 것도 이해가 갔다. 어쩐지 말이 많더라니.

‘쉬게 해야 하지 않나?’

루이센은 다른 사람들을 돌아봤으나, 미묘한 차이는 자신만 느끼는 것 같았다. 칼튼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더블레스 백작은 그 이상한 힘으로 1 왕자를 조종하여 왕성을 장악했어. 악마숭배자들도 몇 명인가 눈에
보이더군. 뭔가를 꾸미고 있는 눈치였는데…….”

“뭘 보았습니까?”

“염소 같은 산 짐승. 딱 보기에도 수상해 보이는 칼로 생피를 내던데……. 내가 본 건 그 정도였어.”

“……아마 의식을 준비하는 걸 겁니다. 감히 이단 따위가 청사자의 후손에게 손을 대는 것도 모자라 왕성에서


사악한 짓을 꾸미다니.”
모리슨은 눈을 질끈 감으며 성호를 그었다. 충격 그 자체였다. 왕성에 상주하는 사제들도 모두 경험이 풍부한
엘리트였다. 그런데 아무도 왕성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치채지 못했다니. 하지만 그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모리슨 역시 왕성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은 더블레스 백작을 지척에서 보았음에도
말이다.

“나름대로 비책이 있는 거겠지.”

“그렇겠군요…….”

모리슨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알면 알수록 간악한 놈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준비하는 일이라면 필시 위험하겠죠. 지금부터 철저히 대비를 해
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래야지.”

“이 일은 위에 보고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교회 측의 태도도 바뀔 것입니다.”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단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그래서 이단심문관을 통해 은밀히 처리하고 싶어 하지만,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되었다면 교회도 태세를 달리해야 한다고 모리슨은 말했다.

“전력을 보강하자면…….”

“이단은 한 번에 박멸하는 것이 좋으니…….”

모리슨과 칼튼의 이야기가 끝없이 길어질 기미가 보였다. 칼튼의 팔은 이미 치료가 끝난 상태. 루이센은 적당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좀 쉬었다 이야기하면 안 될까? 내가 좀 많이 피곤한데.”

루이센의 말에 모리슨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가장 바빴던 사람이 루이센이었다. 적당히 배려해야
했는데, 이단의 경악할 만한 행태에 눈이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오늘은 이만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의식에 대해 조금 더 조사해


보고 있겠습니다.”

모리슨은 치료 도구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따라 에니스와 칼튼의 부관도 방을 나갔다. 따로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칼튼을 두고 가는 두 사람의 빠른 눈치에 루이센은 살짝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주변 사람이 너무 눈치가 빨라도 좀 그렇네.’

루이센은 칼튼의 손을 잡아끌었다. 순순히 따라온 칼튼은 루이센이 그를 침대에 앉히자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루이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까부터 열렬하게 쳐다보시더니…… 응큼하시긴. 그래도 공작님이 바라신다면야…….”

“장난치지 말고. 솔직히 지금 쓰러질 거 같지?”

“……티 나요?”
칼튼이 인상을 썼다. 루이센은 칼튼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한테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거 같더라. 내가 말 안 잘랐으면 밤새 상의했을 거야.”

“모리슨은 그러고도 남죠.”

“힘들면 그냥 말하지. 허세 부리기는.”

말은 타박처럼 했지만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컸다. 힘든 걸 숨기고, 약한 모습을 감추고,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루이센은 상체를 구부리며 칼튼의 커다란 몸을 가득 감싸 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언젠가 칼튼이 자신에게 해 준 것처럼 편안해지기를 바라면서.

그런 마음이 통했는지, 칼튼도 더는 장난치지 않고 얌전히 루이센에게 머리를 기대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길게 내쉬는 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칼튼이 루이센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비볐다. 다 자라서도 제 덩치는
생각도 못 하고 어리광 부리는 강아지 같았다.

루이센은 살살 그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다가 물었다.

“많이 힘들었어?”

칼튼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한참 말이 없다가 본심을 털어놓았다.

“……사람이 불안해서 미친다는 게 뭔지 알겠더라고요.”

아까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혀 힘들지 않았던 것처럼 말했으나 사실 그렇지 않았다.

적진 한복판에서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칼튼을 찾았다. 운 좋게 비밀통로를 발견해 몸을 숨겼지만, 거기서


버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비밀통로는 몸을 숨겨 줄 뿐, 먹을 걸 구하고 상처를 치료하려면 그가 직접 움직여야
했다.

낮에는 좁고 어두운 통로에 기대어 선잠을 자고, 밤에는 쥐새끼처럼 비밀통로를 돌아다니는 생활을 이어 갔다.
언제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지, 누가 도와주러 올지도 알 수 없는 데다, 누군가 비밀통로를 발견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매 순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더 괴로운 것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블레스 백작의 원한이


루이센을 향해 있었다. 그는 분명 칼튼이 없을 때 루이센을 해치려고 할 것이다. 1 왕자의 권력을 등에 업었으니
누가 그를 막을 수 있겠는가.

루이센에게는 자신이 필요했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 진실을 알리고 대비할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의 몸 하나 챙기는 것조차 버거웠다. 당장 이 통로를 벗어날 수도 없었다. 어떤 위기에 처해도
겁먹지 않았던 칼튼이었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 속에서는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러고 있는 사이에 루이센이 위험에 처하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미로 같은 비밀통로 안을 헤매고 있자면 불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도저히 떨쳐 낼 수 없었다. 매 순간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강철 같은 정신이 흔들리자, 몸 상태도 빠르게 나빠져 갔다.

“왕성을 돌아다니면서 조사한 건 진짜예요.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을 뿐이지.”

자신의 안전만 생각한다면 돌아다니지 않고 한곳에 숨어 있는 게 제일 나았다. 하지만 불안을 못 견뎌서, 가만히
있다가 돌겠어서 조사를 한다고 돌아다녔다. 그렇게라도 쓸모있는 일을 해야 버틸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루이센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쳐서 쓰러지듯 잠들었기에, 처음에는 환청을 듣는 건가 했다.
몸을 일으켜 소리를 따라갔다. 설령 환청이라도 루이센의 목소리인데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끝에 루이센이 서 있었다. 루이센의 모습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밝게 보였다.

“처음에는 꿈꾸나 싶어서 말도 못 걸었다니까요.”

하지만 진짜였다. 가뜩이나 겁이 많은 사람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 한복판에 뛰어들어,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나온 것이다. 오직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 순간의 감정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마음속 깊숙한 곳부터 열렬한 환희가 넘치고, 모든 불안이
녹아내리면서 갑자기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솟구쳤다.

“버티길 잘했어. 공작님이 직접 구하러 와 줘서 기뻤어요.”

이 기억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자신의 안에 남아 있을 거라고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 순간의 환희와 감동은
칼튼이라는 사람을 지탱할 양분이 되어, 살아가며 또다시 힘겨운 일이 닥쳐도 한결 여유롭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칼튼은 고개를 들고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졌다. 살짝 올려다보이는 루이센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면서 자연히 끌려가듯 두 입술이 맞닿았다.

입을 맞추고, 몸을 가까이 부딪치며 서로의 심장박동을 느꼈다. 칼튼은 루이센의 냄새를 맡으면서 그의 날씬한
등허리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온몸으로 이번에는 천천히, 그러면서도 깊게 루이센의 존재를 느꼈다. 칼튼의 손이
루이센의 바지를 건드렸다.

“아, 이러려던 게 아니라고.”

루이센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도 모르게 휩쓸릴 뻔했는데, 칼튼은 지금 쉬어야 할 환자였다. 이 이상 하면


기껏 치료한 팔이 덧날 수도 있었다.

“뭐 어때요.”

칼튼이 웃으며 다시 루이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응? 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유혹해 오니 루이센은 본능에 모든
것을 맡기고 싶어졌으나, 그보다는 칼튼의 팔이 소중했다.

“안 돼.”

“왜요?”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거 아냐. 그럴 힘이 남아 있어?”

“공작님 침대에 누웠는데 없는 힘도 쥐어짜야지?”

한다면 할 기세였다. 루이센은 뜨거워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다가 한 가지 내기를 걸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루이센은 칼튼의 몸을 밀어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자신도 옆으로 누우면서 칼튼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이러고도 오 분 동안 깨어 있으면 마저 하는 거고, 아니면 자는 거야. 어때?”

“좋습니다. 오 분쯤이야.”

칼튼은 코웃음 치며 내기에 응했다. 설마 오 분 안에 잠이 들까. 평소에도 잠 정도는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이건 내기도 안 된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칼튼이었으나, 오 분은커녕 일 분만에 곯아떨어졌다.

‘이러면서 고집부리긴.’

루이센은 그대로 옆에 누워 칼튼의 잠든 얼굴을 구경했다. 늘 칼튼이 먼저 일어나고 늦게 자니, 그의 잠든


얼굴은 자주 보기 힘들었다. 자면서도 뭐가 그렇게 심각한지 미간을 구기고 있는 것이 웃겼다.

조용한 침실에 칼튼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퍼져 나갔다. 자신의 방에 칼튼이 있는 모습을 보며, 루이센은 이제야
모든 게 제 자리를 찾은 듯한 안정감을 느꼈다. 칼튼이 있어야 할 곳이 자신의 옆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있으니 잠이 몰려왔다. 부득불 안 자고 깨어 있을 이유도 없어, 루이센은 칼튼 옆에 더 찰싹 붙으며 눈을


감았다.

이따 칼튼이 깨어나거든 말해 줘야겠다. 칼튼이 없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그를 그리워했는지.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잠이 들었다.

124 화

그 시각, 모리슨은 저택을 빠르게 걸어 나왔다.

칼튼이 말한 그 ‘의식’의 정체를 알아내려면 한시가 시급했다. 아직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왕성을


점거하고 비밀스럽게 준비하는 의식이 하찮은 것일 리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직 보톤 자작에서 생포한 악마숭배자가 살아 있었다. 모리슨이 수도로 오면서 살려서 데려와, 지금은 수도
외곽의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겨 두었다. 의식에 대한 것은 놈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확실하리라.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문득 쏴아아아, 하고 바람이 불어왔다. 모리슨은 발걸음을 멈추고 바람이 불어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택의 정원 한구석에는 숲이라고 하기엔 작지만 그래도 제법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란 곳이 있었다. 모리슨은
돌연 방향을 바꾸어 그곳으로 향했다.
한낮임에도 그곳은 나무 그늘이 짙어 어두웠고 서늘한 느낌이 풍겼다.

‘아니, 이건 나무 때문이 아니야.’

모리슨은 이곳을 한층 더 어둡고 춥게 만드는 한 존재를 발견했다.

죽음의 기사.

온통 새까만 형상의 기사가 그곳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검은 말을 타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그림자로 빚어 둔


것과 같았다.

어떻게 할까. 모리슨은 철퇴에 손을 얹고 죽음의 기사에게 다가갔다.

빡!

모리슨의 발에 작은 나뭇가지가 밟혀 부서졌다. 아차. 죽음의 기사가 모리슨을 바라보았다. 본래 머리가 있어야
할 투구 속은 텅 비어 있었다. 표정이 어떤지, 어디를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모리슨은 바짝 긴장하며
철퇴를 들었다.

“늘 공작님 주변에서 뵙는 거 같은데, 우연입니까?”

시간을 끌 수 있을까 싶어 한 말이지 대답이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뭐든 반응을 보인다면 더


좋고.

죽음의 기사는 칼튼 정도는 되어야 대등하게 상대가 가능한 존재였다. 모리슨 혼자만으로는 힘겨운 상대였다.
사람을 불러야 하나. 승리할 방법을 고민하는데 죽음의 기사가 보인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

죽음의 기사는 물끄러미 모리슨을 보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바람이 불어오면 연기가 흩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도망쳤어?’

모리슨은 혹시 기습을 하려는 게 아닐까 싶어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경계를 했으나 죽음의 기사가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잠깐이나마 죽을 각오를 했던 것이 허망해지는 결과였다.

죽음의 기사가 사라지자, 검은 먹구름이 개인 것처럼 주변이 조금 더 환해졌다. 여전히 쌀쌀하긴 하지만
으슬으슬하게 시리는 느낌도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모리슨은 죽음의 기사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섰다.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죽음의 기사가 바라봤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향을 보자 유리창 하나가 눈에 띄었다. 노란 커튼이 쳐져 있어 내부는
보이지 않았으나, 위치상 저곳이 루이센의 침실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죽음의 기사는 이곳에서 남몰래 루이센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공작님이 왕성에 가기 전에 이상한 말을 했지.’

어느 날 밤에 죽음의 기사가 홀연히 나타나 자신을 지켜보다가 사라졌는데, 이상하게 자신을 도와준 게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든다고.

죽음의 기사는 몬스터였다. 사람에 대한 적개심과 폭력성이 그들을 구분 짓는 특성이었다. 더구나 죽음의 기사는
악마숭배자들에 의해 탄생하여, 그들에게 조종을 받고 있는 상황. 놈이 루이센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는 것도,
도움을 주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작님이 본 게 착각이 아니었던 건가?’

그렇다면 죽음의 기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만한 행동을 할 지능이 있으며 행동도 자유롭다는 의미였다.
악마숭배자들은 그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걸까.

모리슨은 죽음의 기사에 대해 알아본 것을 상기했다. 죽음의 기사는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몬스터였다. 참고할
만한 문헌도 당연히 전설뿐.

전설 속의 죽음의 기사는 비록 몬스터로 전락하였으나, 생전에 가졌던 기사다운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으로
묘사된다. 몬스터다운 폭력성이 있지만 어느 정도 이성과 자아를 가졌고 대화도 통했다.

‘저자 역시 살아생전의 기억과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모리슨은 루거라는 사람을 모른다. 몇 번 마주친 적이 없고, 그조차도 짧은 전투가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루거의
마음이 루이센에게 향해 있다는 것은 알았다. 짧은 만남으로도 알아차릴 정도로 강렬한 열망이 그의 안에
존재했다.

죽음의 기사가 계속해서 루이센의 주변을 맴도는 이유가 그 사랑 때문이라면, 그에게 아직도 사람의 영혼이 남아
있는 것일까.

죽음의 기사를 처단해야 할 몬스터로 다룰 것인가, 아니면 죄지은 사람으로 대할 것인가. 이는 성직자인
모리슨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그의 영혼이 아직 존재한다면, 신의 발밑에 엎드려 참회할 기회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기사는
악마숭배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그것을 무력화시킨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조금 더 말을 시켜 볼 걸 그랬어.’

그냥 보내어 아쉽긴 하지만, 그와는 또다시 마주할 기회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언제나 찬란한
빛이 가득했다. 그것은 곧 신의 존재를 의미했다. 그의 신은 자신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리라.

모리슨은 오늘 보았던 죽음의 기사의 모습을 가슴에 담아 두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았다.

***

다음 날 오전. 루이센은 집무실로 부총관을 비롯한 공작가의 가신들을 따로 불러 모았다. 부총관부터 기사들,
포로였다가 풀려나 저택으로 돌아온 행정관들까지 제법 많은 이들이 한데 모였다.

“저희를 다 불러 모으시다니, 무슨 큰일이 난 겁니까?”


부총관이 물었다.

“큰일이라면 큰일이지. 자네들이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어 불렀네.”

“그럼 저놈은 왜 여기 있습니까?”

기사 중 한 명이 칼튼을 가리켰다. 칼튼은 루이센의 오른쪽 옆에 호위기사처럼 바짝 붙어 서 있던 중이었다.


말을 꺼낸 기사 외에도 몇 명인가가 동의한다는 의미로 인상을 찡그렸다. 내전에 참가했던 이들 중에서는
적진에서 활약했던 칼튼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다.

“칼튼 경도 이 일에 꼭 필요한 사람이야. 그리고 내 은인이기도 하니 말을 조심하도록.”

루이센은 기사에게 엄하게 경고하는 한편, 책상 아래로 보이지 않게 짧게 칼튼의 손등을 쓸어 주었다.
가신들에게는 칼튼과의 관계를 숨겨야 했기에 제대로 위로해 줄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겠지만, 전부 내가 직접 보고 겪은 사실이니 끝까지 들어 줬으면 좋겠어.”

지금까지는 비밀을 유지하고 혼란을 줄이기 위해 악마숭배자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부총관 같은
사람은 어느 정도 짐작했을 것이지만,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있어 제대로 설명이 필요했다.

루이센은 차분히 악마숭배자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루거에 의해 습격받았던 때부터, 최근 왕성에서 그 배후가 더블레스 백작임을 알게 된 것까지. 긴


이야기였지만 아무도 루이센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했다. 루이센은 긴 이야기를 마치고,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마셨다. 숨을 돌리며, 살짝 고개를 틀어 칼튼을 바라보았다. 칼튼은 웃음으로 칭찬을 대신했다.

“어쩐지, 1 왕자님의 행동이 상식 밖이라 했어.”

“이단 종교라니.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의 반응은 다 제각각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어딘가 수긍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공작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요. 공작님의 행보나, 최근 주변의 상황들이 말입니다.”

부총관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더블레스 백작이 왜 공작님을 노리는 겁니까?”

“맞습니다. 더블레스 백작이라면…… 본래 우리 공작가와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루이센 역시 그 점이 의문이었다.

“백작이 나에게 원한 같은 게 있는 모양이야.”

딱히 생각나는 점은 없지만 워낙 엉망으로 살아왔으니, 기억하지 못하는 원한이 있을 수도 있었다.

“공작님이 여기저기 원한을 많이 사시긴 했지만…… 으음…….”

부총관도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잠겼다. 다른 사람들도 루이센이 저질러 왔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내내 가만히 있던 칼튼이 툭, 한마디 던졌다.

“왜 다들 문제가 공작님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기억 안 나세요? 그때 서고에 같이 있던 악마숭배자가 그랬죠. 백작이 원래 복수하려던 상대는 수십 년 전에


전염병으로 죽었다고요.”

“아……. 그런 말을 했었지. 그러고 보니…….”

칼튼의 지적을 듣고 보니, 왕비의 침실에서 더블레스 백작과 나눴던 대화가 갑자기 떠올랐다. 루이센의
입장에서는 별거 아닌 대화였는데, 백작이 갑자기 분노를 표출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칭찬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던데.”

그 흐름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원한을 산 건 공작님 아버지가 확실하네요. 화를 내다가 선대를 들먹이며 빈정거리는 걸 보면.”

“그런가?”

“하지만 선대 공작님은 그런 원한을 사실 분이 아니십니다. 전염병으로 돌아가신 건 맞지만.”

부총관의 말에 루이센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모두가 아버지를 좋아했다고 들었어.”

“제가 보기엔 공작님도, 더블레스 백작만큼 악랄한 자에게 원한을 살 사람이 아닙니다.”

칼튼은 딱 잘라 말했다.

공작가의 가신들은 늘 아버지가 얼마나 이상적인 영주였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선망과 애정을 받았는지
이야기하곤 했다. 그 일화 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완벽한 사람이라, 루이센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그를 따라잡을
수 없으리라 여겼다. 자신은 언제나 아버지보다 못한, 모자라기만 한 존재였다.

수도에 와서도 많은 사람이 루이센만 보면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뒤에서 아버지의 발끝도 못
따라간다며 비웃었던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칼튼의 한마디는 깊게 루이센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125 화
루이센은 울컥했다. 사람들만 아니었으면 달려들어 마구 쓰다듬고 예뻐해 줬을 텐데. 그러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고 그럴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다들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더블레스 백작이 루이센이든, 선대 아니에스 공작이든,
원한을 품을 만한 일이 있었는가.

“부총관은 뭔가 알 거 같았는데.”

루이센이 물었다. 부총관은 집안이 대대로 아니에스 공작가를 위해 일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공작성을 드나들었다. 그 이후 쭉 하인으로 일했기에 선대 공작의 행적을 잘 아는 편이었다.

“더블레스 백작과 아버지가 어떤 관계였는지 기억하나?”

“예전에는 공작가의 주도하에 남부 영주들 사이에 제법 교류가 있었습니다. 사냥 행사나 무투 대회 같은 것도


열렸고요. 선대 공작님과 더블레스 백작은 연배가 비슷하니 자주 함께했는데…….”

부총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사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더블레스 백작이 일방적으로 과하게 경쟁심을 불태웠다고 할까요.”

어린 더블레스 백작은 루이센의 아버지를 라이벌로 삼았던 모양이었다. 또래 남자애들 사이에서 있을 법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가 다소 과격했고, 편법을 쓰다가 루이센의 아버지가 곤경에 처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한 번은 백작 때문에 선대 공작님이 다치셔서 선대 백작이 사람들 앞에서 백작의 뺨을 때리며 혼낸


적도 있었죠.”

“으음.”

“아시다시피 선대 공작님은 느긋한 성품이라, 백작이 뭘 하든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셨죠. 그리고 그것도 어린


시절의 이야기고요.”

나이가 들어서는 더블레스 백작도 대영주 휘하의 다른 영주들처럼 적당한 존중과 예의를 갖추었다고 한다.
경쟁심은 자신의 영지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잘 해소했다고.

“선대 공작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 백작도 왔습니다. 어찌나 비통하게 울던지……. 저는 그래서 백작도
선대 공작님을 많이 좋아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원한이라니…….”

부총관은 기억과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거 한 번도 못 이긴 상대가 죽은 게 분해서 운 거 아닙니까?”

칼튼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칼튼의 말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별로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부총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백작의 원한에 대해서는 비슷한 반응이었다. 길을 잘 가고 있다가 누가


뒤통수를 때린 상황처럼, 황당하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들이었다. 아니에스 공작가의 가신들도 루이센이
그랬던 것처럼 더블레스 백작이나 백작령에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무시에 가까운 무관심이었다.

‘어쩐지 백작은 이런 점을 싫어했을지도.’


백작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닌 이상, 백작의 원한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듯했다.

백작의 사연을 알게 되면 조금 일이 수월하게 풀리지 않을까 싶었기에 아쉬운 일이었지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공작가는 지금부터 악마숭배자 소탕에 적극 개입하고자 하네. 기사들은 전투태세를 갖추고,
가신들은 이를 지원하여 언제든 싸울 수 있게 준비해 두도록.”

루이센의 선언에 가신들이 술렁였다.

“저희가요? 하지만 이단 종교는 교회의 소관이 아닙니까? 괜히 우리까지 나설 필요가 있을까요?”

“맞네. 평범한 상황이었으면 우리가 전면에 나설 일은 없었겠지.”

이 정도 반발은 루이센도 예상하였다. 뭐라고 답할지도 생각해 두었기에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나왔다.

“하지만 백작의 원한은 크고 깊어. 지금까지 백작이 내게 집착해 온 것을 보자면, 그자가 의식을 통해 더 큰
힘을 얻게 된다면 다시 나와 공작가를 노릴 거야.”

“이단 놈들이 그걸 따를까요?”

“백작이 악마숭배자의 실세라더군. 표면적으로는 신도 중 한 사람으로 교주의 밑에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교주와


비등하거나 그 이상의 권위를 갖는다고 하니 무조건 그의 뜻대로 될 거다.”

“…….”

“악마숭배자 처단에 우리 공작가가 나서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네. 필연이지.”

“……공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단의 수괴가 아니에스 공작가를 노리는 이상, 이는 더 이상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가만히 앉아
교회가 다 해결해 주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악마숭배자의 싹을 말려 버리는 것이 아니에스
공작가를 지키는 길이었다.

반대하던 가신들까지도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납득하는 것과는 별개로 너무도 막연하였다. 기이한 힘을
가진 이단 종교라니. 그 자체로 미지의 존재였다. 앞으로의 상황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막막함이 불안으로 이어져, 집무실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후 더 이야기할 분위기가 아니었고, 가신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하여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

가신들이 떠나고 집무실에는 루이센과 칼튼만이 남았다. 루이센은 그제야 참았던 긴 숨을 내쉬면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내내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더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잘했어요.”
칼튼이 커다란 손으로 루이센의 목덜미를 주물러 주었다. 루이센은 칼튼의 거친 손바닥 감촉을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수도 저택에 모인 가신들의 대부분이 루이센의 명령에 따라 내전에 참전하여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고, 그 뒤로도
포로 생활을 하다가 갓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또 한 번 자신을 따라 달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이 긴장했고 조마조마했다.

악마숭배자 이야기를 못 믿겠다고 무시해 버린다거나, 처신을 잘못해 공작가를 다시 위험에 끌어들였다고 욕먹는
다거나. 할 수 있는 나쁜 상상은 다 한 거 같다.

“이만하면 이야기를 잘 마무리한 거겠지. 마지막에 분위기가 심각해지긴 했지만.”

“그럼요. 분위기가 심각해진 건, 그만큼 공작님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이니까요.”

“칼튼…….”

루이센은 칼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에게 머리를 기대자, 칼튼은 웃으며 루이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칼튼이
곁에 있어 주니 훨씬 안심이 되었다. 아까도 칼튼이 루이센의 탓이 아닐 거라고 지적해 준 덕분에, 싸움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 대목에서 가신들의 반발도 적었던 것이다.

“아까도 내 편을 들어줬지. 그렇게 말해 준 거 진짜 기뻤어.”

“편들어 준 게 아니라 진심인데요.”

루이센은 고개를 들어 칼튼을 보았다. 사람들 눈 때문에 참아야 했던 열정이 끓어올랐다. 마구, 마구 쓰다듬고
예뻐해 주겠어! 칼튼은 눈치 빠르게 루이센을 번쩍 들어 안아 테이블에 앉혔다. 루이센은 칼튼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쪽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집무실에는 두 사람뿐이었고, 그들을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난스러운 키스가 깊고 진해지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칼튼은 루이센의 허벅지와 무릎을 어루만지며 입을 맞추었다. 루이센은 단단하고 거친 손바닥이
얇은 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자신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짧게 헐떡이는 숨소리가 집무실에 퍼져 나가며, 막 루이센이 테이블 위로 넘어지려고 할 때였다.

“공작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억……?”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부총관이었다. 그는 루이센과 칼튼을 발견하고는 너무 놀라 문을 막


열어젖히는 역동적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의 눈동자는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며, 루이센과 칼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놀라기는 루이센도 마찬가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부총관을 바라보았다.

여유작작한 건 칼튼뿐이었다. 그는 루이센 위로 기울이고 있던 상체를 세우며 부총관에게 물었다.

“부총관님 무슨 일이십니까?”

“뭐야, 부총관이 오는 걸 알았어?”

루이센이 도끼눈을 뜨고 칼튼에게 따졌다. 칼튼은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누군가 집무실로 오고 있다는 기척을
느끼고도 모르는 척한 게 분명했다.
“와, 이거, 진짜, 와…….”

루이센이 배신감을 느낄 때, 부총관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소리쳤다.

“저, 저, 파렴치한 놈……! 우리 순진한 공작님에게 무슨 짓을……. 얼른 떨어지지 못할까!”

부총관은 달려와 칼튼과 루이센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민망함을 누르면서, 루이센은 책상에서 내려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부총관은 칼튼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물론 부총관의 위협은 칼튼에게 새끼고양이의 솜방망이 수준도 안 되어, 칼튼은 웃고 있을 뿐이지만.

‘이제 보니, 일부러 부총관한테 보이려고 한 거 아냐……?’

합리적인 의심이 떠올랐으나 칼튼 성격에 물어봐 봤자 시치미를 떼겠지. 루이센은 의심은 뒤로 미뤄 두고


부총관을 먼저 진정시켰다.

“진정하게, 부총관.”

“아니, 하지만, 공작님, 이놈이, 공작님한테.”

“내가 좋아서 그러고 있던 거니까 그 이야기는 이만 됐어. 내가 애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내가 만난 사람이 몇 명이고, 이 저택에서 밤을 보낸 사람이 몇인데 순진하단 소리를 하는 거야. 공작가의 오랜


가신들은 이게 문제였다. 루이센이 몇 살을 먹고 무슨 짓을 해도, 마음속 한구석에 여섯 살 난 루이센이 남아
있어서 뜬금없이 과보호가 튀어나오곤 했다.

“그건…… 그렇긴 하네요. 공작님이 순진하지도 않고…….”

부총관은 루이센의 말에 수긍하면서 빠르게 진정했다. 워낙 외적으로 칼튼이 사납게 생겼고 루이센이 청순해서
그렇지, 루이센이 일방적으로 농락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농락하면 모를까.

이성이 돌아온 부총관은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 가신의 위치인 책상 맞은편에 제대로 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침착하게 두 주종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실은 공작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부총관이 따로 할 말이라니, 왠지 무서운데.”

루이센은 엄살을 부렸으나, 부총관은 매우 진지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루이센은 조마조마함을 숨기며
부총관의 말을 기다렸다.

126 화
“저는 공작님을 믿습니다.”

부총관은 어딘가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 고마워?”

뜬금없었지만 일단 좋은 말 같으니 고맙다고 대답했다. 노크할 정신도 없이 급히 뛰어 들어와서 하는 말치고는


싱거운 소리였다. 그런데 칼튼의 생각은 달랐다.

“난데없이 부총관님께서 그런 말을 한다는 건…… 누가 공작님을 못 믿겠다는 말을 했나 봅니다.”

루이센은 눈을 크게 뜨며 칼튼과 부총관을 번갈아 보았다. 부총관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칼튼의
말을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딱히 누구라고 할 거 없이 대체로 그런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그럴 만하긴 하지.’

수도 저택에 모인 가신들 대부분이 루이센의 명령으로 내전에 참가해서 포로로 잡혀 있다가 공작가로 돌아왔다.
루이센의 잘못된 판단으로 갖은 고생을 겪은 사람들이니, 그를 향한 불신으로 가득 찬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루이센의 면전에서 악마숭배자고 뭐고 알게 뭐냐면서, 공작가를 버리고 떠나지 않은 것만도 공작가의 가신으로서
의리를 지킨 셈이었다.

‘예상한 일이지만 남의 입으로 들으니…… 생각보다 더 속이 쓰리네.’

이건 뭐, 자업자득이라 누굴 욕할 수도 없고. 루이센은 끄응, 하고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루이센이 말을 못


하자 칼튼이 나섰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공작님의 말에 따를 수 없다고 하던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상황의 심각함은 다들 인정하고 있고, 모두 공작님의 가신이니 명령에 따를 겁니다. 다만…
….”

“공작님의 지시만 믿고 따르기는 불안하니 다른 방법도 생각해 보자는 이야기가 오갔겠군요.”

“정확히 맞습니다.”

루이센은 칼튼과 부총관의 대화를 가만히 들었다.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자, 부총관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당장 공작님을 못 미더워하는 가신들도 직접 곁에서 공작님을 본다면 마음이 바뀔


테니까요.”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나.”

“바뀝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부총관은 단언했다.
루이센이 수도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부총관은 어느 누구보다도 루이센을 못 믿었다. 루이센이 활약한 이야기며,
루이센이 변했다는 총관의 말을 들었음에도 말이다. 그 망나니가 달라져 봤자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 생각이 차츰 바뀌었다. 루이센은 더 이상 나약하지도, 무능하지도 않았다.


망나니도 아니었다. 그는 목숨이 오가는 위기 속에서도 강인했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역전을 꾀할 능력이
있었다.

왕실 기사단에 포위되어 모두가 자포자기하는 상황에서도, 루이센은 좌절하지 않았다. 공작가의 권위를 이용해
왕실 기사단장을 압박하여 틈을 만들고, 교회를 끌어들여 왕실 기사단을 몰아내는 대담함은 부총관을 감탄하게
했다.

부총관은 대영주들을 이끌고 왕성으로 향하던 루이센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루이센보다 한참 나이도, 경험도 많은
대영주들이 루이센의 말 몇 마디에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루이센의 말에 따랐다.

그때 부총관은 확신했다. 루이센은 무능한 망나니가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 그 재능을 피워 낼 환경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뜻하지 않은 모험과 역경이 그를 이만큼 성장시킨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문득 루이센에게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능력이 있는데, 한다면 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동안 자신을 비롯한 가신들이 루이센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그에게 성장할 기회를 빼앗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번에야말로 공작님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지해 드려야겠다.’

아직도 루이센을 망나니라고 믿고 있는 가신들을 보니 그 다짐은 더 굳건해졌다. 혹여라도 루이센이 가신들의


냉담함에 주눅 들지 않도록, 자신이 이렇게 믿고 지지하고 있음을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집무실로 달려오게
된 것이다. 그 탓에 칼튼과 루이센의 관계를 알게 되어,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이 이상하게 튀어나오게 되었지만.

그래도 칼튼이 누구인가. 1 왕자가 발굴해 키워 낸, 1 왕자의 검이 아닌가. 그만큼 뛰어난 인재였지만
오만방자함과 귀족에 대한 증오는 1 왕자도 어쩌지 못했다. 그런데 루이센은 그를 길들여, 충실히 자신을 따르게
만들었다. 1 왕자도 못 해낸 것을 루이센이 해낸 것이다!

칼튼을 보면 감히 공작님을, 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루이센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도 생겨났다.

“그러니 공작님은 다른 걱정하지 마시고, 원하시는 일을 마음껏 추진해 나가세요. 뒷일은 제가 전력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부총관…….”

“공작님이 향하시는 길에, 공작가의 영광이 함께할 거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부총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언했다. 루이센의 망나니 생활을 가장 가까운 곁에서 지켜봐 왔던 사람이기에,
그의 인정은 루이센에게 더 크게 다가왔다. 루이센은 코끝이 찡해 오는 바람에 괜히 콧잔등을 찡그렸다. 총관에게
인정받았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해 줄 줄은 몰랐어.”

루이센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총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 마음에 답하였다.

“고맙네. 그 기대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그거면 충분합니다.”

부총관도 루이센의 손을 맞잡았다. 마음이 통한 주종은 감동을 나누었다. 칼튼은 가만히 서 있다가, 손을 너무
오래 잡고 있다 싶어 적당한 선에서 끼어들었다.

“부총관님 할 일 많지 않으십니까?”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부총관은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그는 무심코 문을 닫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아주 노골적으로


루이센과 칼튼을 바라보며, 닫으려던 문을 도로 활짝 열었다. 열 마디의 말보다, 그 행동 하나가 더 강렬했다.

“와, 아니, 굳이 문을…….”

루이센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칼튼은 옆에서 웃으면서 손부채질을 해 주었다. 루이센이
진정되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

아니에스 공작가의 수도 저택은 오전 내내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기다가, 오후쯤 되자 눈에 띄게 안정되기


시작했다. 모두 현실을 받아들이고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전과 다른 점은 술 마시고
놀고 있을 루이센이 앞장서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공작가의 가신들은 무척 어색해했지만, 루이센은 부총관의 말대로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참견하고 다녔다.


그러는 동안 칼튼은 루이센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남다른 눈치와 감각을 활용해 루이센을 도왔다. 공작가의
가신들이 루이센에게 대놓고 불만을 말하지 못하는 것에는 부총관의 통솔력과 칼튼의 적절한 조력이 크게 한몫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되었을 무렵. 수도 저택에 예상지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동부 대영주였다.

‘약속도 없이 찾아오다니.’

한가하게 손님 접대를 하고 있을 때는 아니지만, 동부 대영주에게는 칼튼을 구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기에


돌려보낼 수 없었다. 루이센은 하던 일을 놓고, 동부 대영주가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오, 아니에스 공작. 그리고 칼튼 경.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놓이는군. 두 사람 다 자리에


앉지.”

동부 대영주는 뜻밖에 환대를 보였다. 루이센은 어이가 없어 칼튼을 바라보았다. 칼튼 경? 용병 나부랭이라고


무시할 때는 언제고? 칼튼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제는 정말 큰일이었지. 계획대로 잘 풀려서 다행이야.”

“여러모로 도와주신 것,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닐세.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걸.”

동부 대영주는 손사래를 쳤다. 이 계산적인 양반이 어쩐 일로 공치사를 마다하는가. 뭘 얼마나 뜯어먹으려고?


루이센이 의심스럽게 동부 대영주를 바라보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도 제법 영주다워졌어. 듣기 좋은 말에 의심부터 하고 보다니.”

“……공작님이 아무 대가도 없이 남을 도울 분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동부 대영주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대영주이기 이전에 하찮은 신의 피조물에 불과하네. 그분을 모욕하는 더러운 이단 놈들을 처단하는 일에,
어찌 세속적인 계산을 끼우겠나? 성전을 도울 수 있다면 오히려 영광이지.”

동부 대영주는 진지한 얼굴로 성호를 긋고,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칼튼은 루이센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동부 대영주는 신앙심이 깊다더니, 정말인가 봐요.”

“좀…… 유난스러운 부분이 있긴 하지.”

그러고 보니 이 양반, 종교 관련 행사에는 절대 빠지는 법이 없는 데다, 매년 막대한 헌금을 하기로도 유명했다.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습니다.”

“난 신앙을 걸고 두말하지 않는다네.”

“예에.”

“선물도 가지고 왔는데 너무하는군.”

동부 대영주는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긴 나무상자를 가리켰다. 응접실에 들어올 때부터 내심 눈에 밟히던


것이었다.

“칼튼 경, 자네에게 주는 걸세.”

칼튼은 놀라며 나무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은 검 한 자루였다. 특이하게도 손잡이부터


검집까지 모두 검은색이었고, 짙은 남색으로 반질반질 빛났다.

“이걸 제게 주신다고요?”

“그럼 이런 명검을 제 팔도 주체 못 하는 아니에스 공작에게 주리.”

“……이제 팔 정도는 제대로 휘두를 줄 압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그게 자랑인가? 아무튼 신성력이 깃든 검이야. 언젠가 성전을 치르는 용사에게 주려고 고이
간직해 둔 검이지. 그걸로 이단 놈들 박살 내 주게.”

칼튼은 홀린 듯이 검을 바라보았다. 루이센도 옆에서 검을 구경했다. 특이한 생김새인데도 이상하도록 눈에


익었다.

“한번 휘둘러 보지 그러나?”


동부 대영주가 제안했다. 마침 칼튼도 손이 근질근질했기에 기꺼이 검을 꺼내 들었다. 보통 양손으로 검을 쥐지만
왼팔을 다쳤기 때문에 오른손으로만 검을 잡았다. 그럼에도 가볍고 날렵하여 팔에 부담이 가지 않았다. 칼튼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쾅!

응접실에 장식용으로 세워 둔 갑옷이 박살 났다.

“이 검이라면 놈들의 기분 나쁜 안개도 갈라 버릴 수 있을 거 같네요.”

칼튼은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루이센은 작게 경악했다.

“……성자님?”

127 화

루이센은 눈을 끔벅였다.

‘깜짝이야.’

순간 칼튼이 아니라 외팔의 순례자가 앞에 서 있는 줄 알았다. 칼튼을 보고 외팔의 순례자를 떠올렸던 것은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이번처럼 완전히 그 사람이라고 착각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이유는 오른손으로만 검을 쥔 자세가 결정적이었다. 외팔의 순례자는 검을 쓸 때 왼쪽 팔을 뒷짐 지고 몸을


비스듬히 틀어 서는 버릇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약한 왼쪽 측면을 보호하기 위한 자세였다. 그로 인해
휘두른 검을 수거하는 모습에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특유의 자세가 만들어졌다.

칼튼이 그 자세와 똑같이 움직인 것이다. 지금 칼튼도 왼쪽 팔을 다쳤으니 비슷하게 움직인 걸 수도 있겠지만
루이센의 머릿속에 지난번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계속 겹쳐 보일 수 있나?’

보기 드문 건장한 체격, 냉정하고 계산적인 사고방식, 요령이 좋은 모습, 여러모로 외팔의 순례자와 칼튼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 외에도 말로 할 수 없는 사소한 부분에서 두 사람이 자꾸 겹쳐졌다.

‘이 정도면 그냥, 같은 사람 아니야?’

루이센의 양팔에 소름이 쭉 끼쳤다. 스스로 생각해 놓고도 믿기지가 않아 머릿속으로 되물었다.

‘성자님이 칼튼이라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루이센은 강하게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 회귀 전의 칼튼을 떠올렸다.

칼튼은 1 왕자가 즉위한 뒤, 사형을 앞두고 도망쳤다. 그의 행방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과 추측이 난무했으나,
확실한 건 루이센이 죽는 날까지 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었지만, 지금은 그가 어떻게 그렇게 모습을 숨겼는지 이해가 갔다.

‘칼튼은 순례자의 증표를 가지고 있었을 테니, 순례자 행세를 하고 도망쳤겠지.’

그렇다면 외팔의 순례자는 어떠한가? 그의 과거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 없다. 얼굴, 이름, 나이, 출신지,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 흘러가듯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했을 때 과거 용병 생활을 했다는 것만 간신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일 년을 함께 했음에도 루이센은 그의 얼굴도 한번 보지 못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철저히 감추었다.

‘칼튼이 왕성에서 도망치면서 팔을 잃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칼튼이 순례자 행세를 하면서 외팔의 순례자로
불리게 된 거라면……?’

칼튼이 외팔의 순례자라고 가정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다.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칼튼과 갑자기 튀어나온 외팔의 순례자의 존재가 매끄럽게 연결이 되었으며, 두 사람의 기묘할 정도로 닮은
점이 많은 것도 설명이 되었다.

‘아니아니, 그건 아니지.’

말이 되긴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거부감이 들었다. 작은 가능성도 없애 버리려는 듯, 루이센은 또 한 번


강하게 부정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성자님이 칼튼이라니. 절대, 안 된다고. 그래! 증거, 증거도 없잖아.’

회귀 전 외팔의 순례자가 칼튼이라고 확신할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알아봤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외팔의 순례자가 칼튼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했다.

루이센은 외팔의 순례자가 칼튼일 수 없는 이유를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목소리가 다르다거나, 칼튼이 외팔의
순례자만큼 종교적 지식이 뛰어날 리 없다거나, 그런 사소한 것들 말이다.

“공작님, 안색이 안 좋습니다. 괜찮아요?”

루이센의 동요가 겉으로도 티나 나자, 보다 못한 칼튼이 다가왔다.

“어, 어…….”

“얼굴 제대로 봐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아니, 그냥 좀 피곤해져서…….”

루이센은 마른세수를 하는 척하며, 칼튼의 시선을 피했다.

‘괜한 생각을 해서…… 칼튼 보기가 불편하잖아.’


너무 당황해서 그렇다. 조금 진정이 된다면 그때는 괜찮아질 것이다. 동부 대영주가 루이센의 안색을 보고는 혀를
찼다.

“젊은 사람이 뭐가 힘들다고 비실비실하는지. 피곤한 거 같은데 이만 가 보겠네.”

“아, 죄송합니다.”

동부 대영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센은 동부 대영주를 배웅하러 따라 일어났다. 그러다가 문득 아직 칼튼의


손에 들려 있는 검에 시선을 주었다. 칼날까지 새까만 것이 참으로 특이하게 생긴 검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루이센이 배웅하러 따라오다 말고 물끄러미 검을 보고 있자, 동부 대영주가 물었다.

“왜? 자네도 검이 갖고 싶나?”

“아뇨. 제가 검은 무슨. 큰일 나려고요. 그냥 신기해서 봤습니다. 저런 검은…… 어디 가면 또 구할 수


있습니까?”

“검은 철. 내 평생 단 한 번 본 귀한 재료로 만들어졌지. 저런 검은 저것 하나야. 신의 사도에게 내가 흔한


검을 주겠나. 대영주의 체면이 있지.”

동부 대영주는 고개를 저으며 거들먹거렸다.

‘그래. 저렇게 특이하게 생긴 검을 어디서 본 적이 있을 리가 없…….’

……기는 본 적이 있다.

이 타이밍에 그게 기억이 나다니.

루이센은 머리를 탁탁 치려다가, 그런다고 떠오른 기억이 도로 들어갈 거 같지 않아 힘없이 팔을 내렸다.

저것과 똑같은 검을 외팔의 순례자가 가지고 있었다. 처음부터는 아니고, 루이센이 죽기 대략 한 달 전쯤이었던
것 같다. 외팔의 순례자가 어디선가 받았다면서 보여 줬었다. 당시 루이센은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바람에
침대 신세를 지는 일이 대부분이어서, 전후 사정은 모른다. 거의 죽어 가고 있던 와중이니, 검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검이라고 하니…….’

거짓으로 허세를 부릴 일이 아니었으니, 사실이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회귀 전에는 동부 대영주가 외팔의 순례자에게 저 검을 주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지금은 칼튼에게로
와 있고.

같은 검이 이전 생에는 외팔의 순례자에게, 이번 생에는 칼튼에게 주어졌다. 루이센은 막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건 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도 절묘하지 않은가.


***

검을 기억해 내고, 루이센의 정신은 반쯤 나가 버렸다. 무슨 정신으로 동부 대영주를 배웅하고 방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동부 대영주가 건강을 챙기라면서 잔소리를 쏟아부었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루이센은 홀로 방 안을 서성였다. 마침 칼튼의 부관이 칼튼을 찾길래 도망치듯이 둘이 이야기해 보라고 말하고는
방에 틀어박혔다.

‘회귀 전에, 그러니까 나랑 원수나 다름없었을 칼튼을 생각해 보자고.’

당시 칼튼은 1 왕자에게 버려져, 분노와 배신감으로 가득 찼을 때였다. 그에게 루이센은 그가 증오하던 귀족인
데다, 몰락의 시발점이었다. 루이센만 똑바로 처신했더라도, 하는 원망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루이센을 도와줄 리 없었다.

물론 칼튼이 루이센을 못 알아봤을 가능성도 있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칼튼은 이유도 없이 남에게 호의를
베푸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루이센에게는 다정하지만,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냉정했으니까.

’칼튼이라면 모르는 부랑자를 도와줬다는 것보다 내가 아니에스 공작인 걸 알아보고 접근했다는 게 더


그럴듯하지.’

너무 말이 되어서 속이 울렁거렸다.

외팔의 순례자는 죽어 가는 루이센을 구해,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돌봐 주었다. 그의 무조건적인 자비로움.


그로 인해 루이센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참회했다. 그에게 받았던 가르침과 보살핌이 마음의 지지대가 되어
주었기에 회귀 후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외팔의 순례자가 내밀었던 손길은 루이센에게 구원이고, 희망이었다.

그런데 외팔의 순례자가 칼튼이었고 의도적인 접근이었다면?

외팔의 순례자는 루이센이 생각하던 성자가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그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함께한 일 년의
시간 동안 루이센은 그에게 속고 있었던 것이다. 루이센이 지금까지 신앙처럼 따르던 그의 가르침, 그의 행동,
그라는 사람의 존재. 그건 전부 거짓이 되어 버린다.

‘그치만 그 검도 애매한 게 있어.’

동부 대영주가 준 검이 외팔의 순례자가 칼튼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동부 대영주는 그 검을 ‘이단과 싸우는


신의 사도’에게 주려고 준비해 둔 것이니까. 당시 외팔의 순례자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해결하며 한창 명성을
올리고 있었으니 동부 대영주가 검을 선물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것만으로 외팔의 순례자가 칼튼이었다고 단정 짓긴 일렀다.

결국 도돌이표였다.

외팔의 순례자가 칼튼이어도, 아니어도, 둘 다 말이 됐다. 둘 다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리고 루이센이 더
알아볼 길도 없었다.

‘회귀 전의 성자님을 기억하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어디다 물어볼 수도 없잖아.’


갑자기 힘이 쭉 빠져서, 루이센은 소파에 풀썩 드러누웠다. 타이밍 좋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칼튼입니다.”

칼튼이 부관과 이야기를 마치고 루이센을 찾은 모양이었다.

‘지금은 보기 좀 그런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지쳐서 진이 쭉 빠져 버린 데다, 칼튼을 보는 게 부담스러웠다. 칼튼은 눈치가 빠르니,
자신이 이상하게 구는 것도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저녁 식사도 거르셨다고 해서, 간단히 먹을 것을 챙겨 왔습니다.”

문 너머에서 칼튼이 말했다. 루이센은 양심이 매우 아파 왔다. 내가 걱정되어서 밥까지 챙겨 온 사람을 그냥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돌려보내려고 하다니. 여기서 거절을 하면 칼튼이 더 이상하게 볼 것 같다.

“들어와.”

루이센의 허락이 떨어지자 칼튼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128 화

칼튼은 방 안으로 들어와 루이센이 널브러져 있던 소파 앞,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 두었다.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쟁반에 담긴 음식은 우유를 넣어 부드러우면서도 건더기를 푹 익힌 스프였다. 위에 부담이 가지 않을 만한
음식이라 칼튼이 세심하게 신경 쓴 것이 느껴졌다.

“맛있겠다.”

루이센이 중얼거리자 칼튼이 피식 웃었다. 막 소파에 누워 있다가 일어난 루이센의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졸았어요?”

칼튼은 루이센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커다란 손이 조심조심 머리카락을 만져 오는 느낌에 가슴까지
간질간질해졌다. 근심 걱정도 다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칼튼은 루이센의 옆에 앉았다.

“식사도 걸렀다고 하길래 놀랐잖아요.”


“어쩌다 보니까 잊어버렸어.”

루이센의 대답에 칼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루거한테 뒤통수를 맞고도 야무지게 챙겨 드시던 공작님인데…… 밥 먹는 걸 잊다니……. 아픈 거 아니에요?”

“나도 가끔 그럴 때가 있거든?”

루이센은 농담이라고 생각해 가볍게 받아쳤다. 하지만 칼튼은 진심이었다. 그는 손으로 루이센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아까 동부 대영주와 만났을 때도 안색도 안 좋았죠. 의사를 불러올까요?”

“아냐. 그냥 피곤했던 거야.”

“가신들 때문에 그래요?”

칼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신들? 아, 그렇지. 오늘 많이 바빴고.”

루이센은 적당히 대답했다. 칼튼이 여전히 루이센의 어린 시절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좀
더 성의 있는 대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루이센에게는 그런 고난도의 오해를 알아차릴 눈치가
없었다.

“누가 괴롭히거든 말해요. 참지 말고. 제가 있잖아요.”

“응.”

루이센은 매우 양심이 아파 왔다. 조금 전까지 칼튼은 외팔의 순례자라기엔 성질머리가 더럽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이라 더욱 죄책감이 밀려왔다.

“힘들어도 식사는 잘 챙기고.”

칼튼은 숟가락을 들어 스프를 떴다. 그리고 조심스레 루이센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내가 먹을 수 있는데.”

“피곤하다면서요.”

그렇다고 숟가락을 들 힘도 없는 건 아니라고 반박하려는데, 칼튼이 너무 즐거워 보였다. 이 정도 장단은 맞춰


주자.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루이센은 얌전히 입을 벌려 스프를 받아먹었다.

스프는 따듯하고 고소한 맛으로 헛헛한 속을 달래기에 제격이었다. 오래 끓여 물렁물렁해진 야채도 부드럽게
넘어갔다.

‘맛있긴 한데…….’

상황도 살짝 낯간지러우면서도 알콩달콩하니 아주 좋은데, 문제는 루이센이 그걸 즐길 마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또다시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력이 좋지도 않으면서 이런 건 왜 이렇게 잘 떠오르는지.

외팔의 순례자를 처음 만났을 때. 루이센은 거의 죽어 가고 있었기에 회복이 되었음에도 한동안은 침대 신세를


져야 했다. 팔을 들 힘도 없었기에 외팔의 순례자가 직접 음식을 먹여 주었다.

그는 병간호를 해 줬을 뿐이고, 이런 달콤 말랑한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지만. 루이센은 물끄러미 코앞에서


내려다보이는 칼튼의 손을 바라보았다. 살아온 세월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 주는 거친 손이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그를 떠올리게 했다.

아찔한 기분에 루이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되겠다.’

의식을 하고 있어서인지, 칼튼과 외팔의 순례자를 떼어 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별거 아닌 사소한 것도 어쩐지


유별나게 특별해 보여서, 이러다가는 정말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될 거 같았다.

“공작님? 괜찮아요?”

계속 이러면 칼튼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칼튼을 보기가 불편했다.

“칼튼, 가서 의사…… 불러와 줄래?”

루이센은 꾀병을 부리는 것으로 이 상황을 회피하기로 결정했다.

“얼른 불러올게요. 어쩐지 깨작거린다 했어.”

칼튼은 루이센을 소파에 눕혀 놓고, 의사를 데리러 황급히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의사가 왔다. 칼튼의 압박에 뛰어온 의사는 숨돌릴 새도 없이 루이센을 진찰했다. 루이센의 몸은 아주
건강했으나 평소 워낙 먹성이 좋았던 탓에 입맛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꾀병을 들키지 않았다. 의사는 피곤해서
그런 거 같으니 푹 쉬라면서, 잠이 잘 오게 해 준다는 허브로 만든 약을 놓고 돌아갔다.

칼튼은 내내 걱정스럽게 루이센의 곁을 지키다가, 의사가 떠난 뒤에 루이센을 안아 침대로 옮겨 주었다.

‘두 다리 멀쩡한데 애도 아니고 안아서 침대로…….’

매우 민망한 상황이지만 꾀병을 부린 자업자득이려니, 하고 침대에 누웠다.

“자네도 가서 쉬어.”

“옆에 있겠습니다.”

“아니야.”

그럼 꾀병을 부린 의미가 없잖아.

“혼자 쉬고 싶어. 약 먹고 잘 거니까 괜찮아.”

이렇게까지 말하자 칼튼도 수긍했다. 그는 루이센이 약을 먹고 침대에 눕는 걸 보고 방에서 나갔다. 루이센이


바라던 대로 오늘은 더 이상 그와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미안. 칼튼. 내일은 괜찮아질 거야.’

오늘은 너무 놀라서 그런 거다, 라고 믿으며 루이센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약효인지, 정신적 피곤함 때문인지 금방 잠이 들었다.

***

다음날 오후, 루이센은 마차를 타고 칼튼과 함께 교회로 향했다. 오전에 모리슨이 사제를 통해 교회로 와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루이센은 순례자사칭죄로 조사를 받고 있기에 그의 외출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달리는 마차 안은 조용했다. 루이센은 흘깃 칼튼 쪽을 봤다. 칼튼은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일단은 1 왕자를


죽이려다 실패했다는 죄가 걸려 있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턱선으로 저절로 시선이 가면서 외팔의 순례자님은 어땠는가, 기억을 더듬어 보게 되었다.

루이센은 한숨을 내쉬며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못 생각했어.’

어제는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해서 계속 외팔의 순례자가 생각이 나는 줄 알았다. 한숨 자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의심에서 벗어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 깃든 의심은 머릿속을 떠날 줄을 몰랐다. 칼튼을 볼 때마다 자꾸만 외팔의 순례자와 비교하게 되었다.
비슷한 모습을 보면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다 보니, 칼튼과 마주 보는 것이 어색해졌다.

루이센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하루 종일 칼튼을 피해 버렸다. 공작가 내부의 일로 가신들과 이야기할 게


있었으니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회피는 아니었지만 칼튼은 눈치가 빠르니까 계속 이러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릴 것이다.

‘아, 차라리 확 맞는지 아닌지 밝혀졌으면 좋겠어.’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끙끙대고 있자니 속이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찰싹 붙어 있어도 모자를 마당에
이 어색함을 어쩌면 좋냐고.

루이센이 먼저 선수를 쳐서 멀미가 날 거 같다고 말한 탓에 칼튼은 말을 걸지 않았다. 일부러 피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어서인가, 루이센은 이 침묵이 참을 수 없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교회에 도착했다. 지난번 루이센이 성기사들에게 잡혀 왔을 때 갇혀 있던 그 교회였다.


수도에서 가장 크고, 예배당을 제외하고도 여러 시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방문한 사람들도 많아
루이센의 마차가 도착하자 지켜보는 사람도 많았다.

칼튼이 먼저 내리고, 루이센이 뒤따랐다. 루이센이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루이센에게로 쏠렸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자, 루이센은 당황하여 발이 꼬였다. 칼튼이 적절하게 잡아 주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뒹구는 일은
없었다.
‘아찔하다.’

여기서 넘어졌으면, 루이센 아니에스가 조사받는 게 너무 무서워서 마차에서 굴러떨어졌다고 신문에 났을 것이다.

“조심하세요.”

칼튼이 작게 속삭였다. 루이센이 멈칫한 사이 한 사제가 가까이 다가왔다. 루이센을 안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사제였다. 그는 루이센과 칼튼을 어디론가 안내했다.

‘나 지금 너무 한심한 거 같아.’

자신이 피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칼튼은 한결같이 루이센을 챙겨 주고 있었다. 자괴감에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러다 문득 사제가 처음 보는 장소로 자신들을 안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거의 다 왔습니다.”

사제는 루이센과 칼튼을 데리고 건물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점점 마주치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외진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칼튼도 그것을 느끼고 좀 더 루이센에게 바짝 붙어 걸었다.

이윽고 어떤 복도 앞에 도착했다. 복도 끝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저는 여기까지 안내를 명령받았습니다.”

“저기 가면 날 부른 사람이 있나?”

“예.”

모리슨이 저기 있단 말이지. 그냥 저택으로 찾아오면 될 것이지 뭘 이렇게 번거롭게 하는지.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나쁠 거 없었다.

칼튼이 루이센의 앞에 서서 복도를 건너갔다. 그리고 몸으로 루이센을 가리며 문을 열어젖혔다.

“이건…….”

칼튼이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자 루이센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문의 너머는 햇빛이 쨍하게 내리비치고 있는 온실이었다. 안에는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부터, 잎이 뾰족한


북부의 식물도 보였다. 겨울을 사는 식물과 여름을 사는 식물이 한데 놓여 있으니 기묘했다.

그 사이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흰 사제복을 입고 있고, 나이는 스무 살 언저리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모리슨이 아닙니다.”

칼튼은 검에 손을 올리며 그를 경계했다. 주변에 민감한 칼튼은 이곳에 풍기는 기운이 바깥과는 이질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잠깐만. 저 사람은 괜찮아.”

루이센은 칼튼의 팔에 손을 얹으며 그를 만류했다. 그리고는 한발 앞으로 나아가 칼튼과 나란히 섰다.

루이센도 아는 얼굴이었다. 루이센이 막 성인이 되어, 교회에서 성인식을 할 때였다. 회귀 전의 시간까지 합치면
마지막으로 본 게 십여 년 전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앳된 외모와 그에 어울리지 않게 노인처럼 깊고,
불길을 품고 있는 듯한 붉은 눈동자.

“드디어 뵙습니다, 성하.”

루이센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교황이었다.

129 화

루이센이 정중히 인사를 하자 칼튼도 후드를 벗고 따라 했다. 교회의 수장이자,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자라고
불리는 교황이다. 평범한 사람은 평생에 한 번 먼발치에서도 보기 힘든 존재가 뜬금없이 눈앞에 나타나니,
칼튼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니에스 공작. 못 본 사이에 많이 컸네요.”

교황은 친척 어른 같은 소리를 하며 다가왔다.

“모리슨이 불렀다고 해서 왔습니다만…….”

정작 모리슨은 보이지 않았다.

“아, 내가 공작을 뵙고 싶어 그에게 불러 달라 부탁했습니다. 그도 곧 이곳으로 올 겁니다.”

“아…….”

그런 거면 미리 말해 줬어야지. 조만간 교황을 만나게 될 거 같긴 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데.

“그 전에 잠깐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예?”

교황이 루이센의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교황의 얼굴이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놀란 루이센은 교황을
밀어내려 했다. 그런데 그때 교황의 눈동자 속에서 푸른 불길이 보였다. 그것은 순식간에 타올라 루이센을
집어삼켰다.

이게 무슨…….

온실도 이색적인 풍경도 온데간데없어지고 낡은 예배당이 나타났다. 예배당의 허공을 거대한 빛이 가득 채웠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아 감히 바라보기도 어려운 빛이었다. 루이센은 팔로 눈을 가리며 찡그렸다.

그 빛으로부터 낯선듯하면서도 친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소원, 이루어지리라.]

소원?

되물으려는 그 순간, 칼튼이 루이센 어깨를 잡으며 교황과 떨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루이센은 현실로 돌아왔다.

“허억, 헉.”

루이센은 크게 헐떡였다. 가득 들이마신 공기가 차디차서 정신이 좀 돌아왔다. 여전히 그는 온실에 서 있었다.
칼튼이 루이센은 안다시피 하며 지키고 있고, 교황은 루이센의 앞에 서 있었다.

“이거 뭐야? 내가 지금 뭘 본 건지……. 칼튼, 자네도 봤어?”

“무엇을 말입니까?”

칼튼이 본 것은 루이센과 교황이 눈을 맞추고 있던 장면뿐이었다. 그마저도 칼튼이 떼어 내기까지, 아주


잠깐이었다고 한다. 루이센이 본 장면은 당연히 못 보았고.

“교황님. 이게 뭔지 설명을…….”

루이센이 따지는데도 교황은 웃고만 있었다. 그는 눈을 빛내며, 또 불쑥 루이센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또
이상한 게 보일까 봐 루이센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교황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그대는 기적을 경험했군요!”

루이센은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다행히 이번에는 교황의 눈을 본다고, 이상한 장면이 보이지는 않았다.

“기적이라니…….”

자신의 회귀를 말하는 거라고, 루이센은 직감했다. 교황은 회귀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었다.

“그 이야기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그래요.”

교황은 칼튼을 바라보았다. 칼튼이 비켜 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칼튼, 잠깐 저쪽에서 기다려 줘.”

그러나 칼튼은 루이센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물끄러미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자신을 떼어 놓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 같았다. 칼튼이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회귀에 대한 단서를 얻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미안.”

루이센은 칼튼을 달래 준 뒤, 교황을 데리고 온실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온실은 생각보다 더 넓었다.
적당히, 칼튼의 예민한 청각을 고려해서도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졌다.

“기적이라니. 무슨 소리입니까? 좀 전에 제가 본 건 뭐고요? 그건…….”

“신의 목소리를 들었죠?”

“……신의 목소리라니.”

“그대가 본 것은 신이 기적을 일으킨 순간이에요. 아니에스 공작과 아주 관련이 깊죠.”

루이센의 영혼에는 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교황은 루이센에게서 그 흔적을 발견하였고,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흔적을 살폈다. 그 흔적을 더듬어 가는 도중에 신이 기적을 일으킨 순간을 보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교황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들어도 영 모르겠는 소리네.’

영혼에 남은 흔적이라니. 교황쯤 되면 그런 것도 보인다는 말인가? 얼떨떨하기는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루이센은 처음부터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것이 신의 힘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어느 성자가 신께
소원을 빌어 과거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교황님 말씀대로입니다. 제가…… 죽어서 정신을 차려 보니 과거로 돌아와 있더군요.”

“그게 가을쯤이었던가요?”

“네.”

“그 무렵에 그분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살펴보니 남쪽을 향해 있는 데다, 그 이후 공작의 소문이
들려와 혹시나 했는데. 정말 기적이 일어나다니.”

교황은 경건한 얼굴로 성호를 그었다.

“그걸 확인하려고 부르신 겁니까? 저는 악마숭배자들 때문인 줄 알았는데요.”

“겸사 겸사였죠.”

교황의 대답이 태평하게 들렸기에 루이센은 위화감을 느꼈다.

“이단이 왕성을 점거하고 있는데 너무 느긋하신 거 아닙니까? 교회에는 큰 위험 요소일 텐데요.”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이번에 나타난 이들은, 이전까지 본 이단과는 다르더군요. 훨씬 교활하고 음흉하여,
공작이 아니었다면 천천히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잠식될 뻔했습니다. 공작께는 감사드리고 있어요.”

“아직 놈들이 밖에서 활개 치고 있습니다. 감사는 좀 이르지 않나요?”

“아뇨. 저는 오늘 공작을 보고 크게 안심했습니다.”


“?”

“악마숭배자들에 대한 것은 모두 공작께 맡기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 말씀하세요. 교회가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듣다 보니 교황의 말이 매우 이상했다. 루이센은 바로 반격했다.

“잠깐요. 이단에 대한 건 원래 교회의 소관 아닙니까? 왜 제가 맡습니까?”

너무 예쁘고 정중하게 말해서 혹할 뻔했지만 이단 종교에 대한 것은 본래 교회가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루이센은 더블레스 백작 때문에 엮인 것뿐이고.

“공작, 이런 위태로운 시대에 신의 기적이 그대에게 내렸어요. 이게 우연일까요? 아니요. 신께서 그대를 귀중히
쓰기 위해 기적을 내리신 겁니다. 우리에게 내린 이 시련을 극복하는데, 반드시 공작이 주축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교회가 제 역할을 다 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민간인입니다?”

“하지만 그대는 기적을 입지 않았나요? 그대가 받은 은혜에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요?”

루이센은 말문이 막혔다. 일단 먹여 놓고, 돈을 내놓으라고 강매당하는 기분이다. 왠지 사기당한 거 같아


떨떠름했다.

“저는 공작을 만나 확신하였답니다. 그대가 있는 한, 이 싸움은 우리가 승리하게 될 거예요.”

교황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 뒤에는 뭐라고 말해도 흔들리지 않을 강한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대의 헌신에는 또 다른 보답이 따를 겁니다.”

교황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없는 소리를 하는 거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가 악마숭배자와의 싸움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해 보면, 더블레스 백작이 루이센을 노리는 이상 루이센은 싫어도 이 싸움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다.
백작은 어떤 식으로든 루이센을 끌어들일 테니. 루이센 역시 백작에게 복수하고 싶기도 했다. 회귀로 인해 사라진
미래라 해도, 회귀 전의 고통은 진짜였으니 말이다.

기왕 싸울 바에는 교회에 빚을 좀 지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교황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헌신에 대한 보답, 반드시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신이 안 주면 교회에라도 뜯어내겠다는 말이었다. 교황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제가 본 공작은 신앙심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는데, 신께서 소원을 들어주다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아, 제 소원을 들어주신 건 아닙니다. 저는 도망치기만 했으니까요. 제 짐작에는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신 게
아닌가 싶은데…….”

루이센의 말에 교황이 뭔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아아, 그 사람인가. 왼팔이 없는 노인?”


“노인이요? 그 사람이 왼쪽 팔이 없는 건 맞습니다만…… 어떻게 알았죠?”

루이센이 놀라 물었다.

“조금 전에 신이 기적을 일으키는 장면 그대도 봤잖아요. 제단 앞에 왼쪽 팔이 없는 노인이 있었어요.”

“전 못 봤는데요…….”

허공이 번쩍번쩍한데 딴 데를 볼 새가 어딨어. 잘도 봤다 싶었다. 잠깐, 그럼 교황은 외팔의 순례자를 보았다는


말이었다.

“그럼 혹시 그 사람 얼굴도 봤습니까?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어요?”

“예. 얼굴도 봤으니까요.”

“그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얼굴 설명을, 아니 당장 초상화가를 불러서…….”

루이센이 허둥댔다. 교황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사람을 왜 찾아요?”

“왜 찾다뇨. 그야 그 사람을 찾아야…….”

“공작이랑 같이 왔잖아요? 알고서 같이 다닌 거 아니에요?”

“예?”

“같이 온 그 남자. 칼튼이었나요. 그 사람의 얼굴이었어요. 좀 많이 나이가 들었지만.”

루이센은 멍해졌다. 교황의 말에 거세게 머리를 후드려 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아니요. 제대로 본 거 맞습니까? 저 사람은 칼튼이고, 그 사람은 성자님이란 말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일 리 없잖아요? 그때의 칼튼은 날 싫어했어요. 신의 기적? 그런 행운을 왜 나를 위해 쓰겠어요. 왜 죽어
가는 나를 도와주겠어요. 예?”

“공작……. 미안하지만 난 정확히 봤어요.”

“아…….”

루이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교황이 이런 걸로 거짓말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의 성자님이, 다른 사람도 아닌 칼튼이었다니…….’

루이센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최악이다. 악몽을 꾸는 게 아닐까.

그 모습을 발견하고, 칼튼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130 화

외팔의 순례자는 일면식도 없는 부랑자인 루이센을 구해 주었다. 곁에 두며 돌봐 주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정체를 밝혔음에도 루이센을 비난하지 않고 감싸 주었다. 루이센은 그 사람으로 인해 무지를 깨닫고, 자신의 죄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외팔의 순례자는 루이센의 목숨을 구했고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랬기에 루이센은 믿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신이 세상에 보내신 진정한 성자시구나!’

루이센은 외팔의 순례자의 모든 것을 믿었다. 순례자치고는 조금 과격한 언행이나 냉정하고 타산적인 모습까지도
존경했다. 숭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공작님. 괜찮아요?”

루이센은 칼튼을 바라보았다. 그답지 않게 날이 선 표정에 칼튼은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칼튼, 우리 처음 만나기 전에 내 얼굴을 알고 있었어?”

“예?”

칼튼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대답해 봐.”

뜬금없는 질문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지금 꼭 그 대답을 들어야겠다. 루이센이 단호하게 다그치자, 칼튼은
의아해하면서도 솔직히 대답했다.

“알고 있었죠. 공작님 얼굴이야 초상화도 많으니.”

“…….”

확인사살이었다.

외팔의 순례자는 루이센이 생각하는 성자가 아니었다. 그는 순례자조차 아니었다. 그는 그냥 칼튼이었다.


루이센이 아니에스 공작이라는 걸 알아보고, 정체를 숨기고 접근해 순례자인 척한 사기꾼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속아 넘어가서 그를 성자라 부르는 루이센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가 루이센을 대하던 것에 조금이라도


진심이 담겨 있기는 했을까.

회귀한 직후, 루이센을 지탱해 오던 것은 외팔의 순례자를 향한 믿음이었다. 그의 가르침으로 힘든 순간들을 이겨


냈다. 그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자, 지지대를 뽑아 버린 것처럼 루이센 자신도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와 루이센이 함께하던 시간 동안, 그 후드 아래로 싸늘한 비웃음을 짓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자 아찔한
현기증이 몰려와, 루이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공작님!”

칼튼이 루이센의 몸으로 손을 뻗었다.

탁.

루이센이 칼튼의 손을 쳐 냈다.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라 당황하여 칼튼의 얼굴을 살폈다. 칼튼은 놀라다가 곧
눈썹을 찡그리며 루이센을 쏘아보았다.

루이센은 시선을 피했다.

“뭡니까? 아까부터 계속…….”

“칼튼 경. 저쪽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하지 않았나? 아직 교황님과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만.”

완전히 밀어내기였다. 칼튼은 루이센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하,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알면 안 될 이야기라는 거죠.”

칼튼은 휙, 돌아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루이센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아, 나 뭐 하는 거야.’

걱정되어서 달려온 사람에게 성질이나 부리고. 내가 이래서 칼튼도 화가 났겠지. 루이센은 가슴이 철렁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지금 눈앞에 있는 칼튼은 잘못이 없었다. 회귀 전의 칼튼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관련이 없다. 자신이 칼튼에게 모질게 구는 건 그냥 화풀이밖에 안 된다.

‘그건 알지만…….’

칼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과 별개로 그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밀려오는 자괴감에 루이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교황이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봅니다.”

“아뇨. 아닙니다. 제가 여쭤본걸요.”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찾길 바라요. 그 시간을 기억하는 건 그대뿐이니.”

“……네.”

“도움이 필요하다면 뭐든 말하고.”

“저랑 잠시만 더 이야기 나눠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럼 진정이 좀 될 거 같아서 말입니다.”

“좋아요.”
교황은 기꺼이 루이센에게 어울려 주었다. 마침 루이센은 교황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기에 대화는
매끄럽게 이어졌다.

덕분에 다음 일정 때문에 사제가 교황을 데리러 왔을 즈음에는 루이센도 많이 안정되었다.

교황이 먼저 떠나고, 모리슨이 일행에 합류했다. 세 사람은 함께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루이센은 칼튼의 열렬한 시선을 느꼈다. 그 상황에서 모리슨은 구세주였다. 그가


악마숭배자들에 대해 새롭게 알아낸 것들을 이야기하느라 칼튼이 루이센에게 말을 걸 틈이 없었다. 루이센은
모리슨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의견을 내기도 하면서 열심히 칼튼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리고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루이센은 가신들을 한데 모았다. 교황과 모리슨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서이다.

루이센은 습관적으로 칼튼을 찾았다. 칼튼은 늘 자리하던 루이센 옆이 아니라 회의실 구석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가 회의실에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그가 여기 있음에 안심하면서도 그와 눈이 마주칠까 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외팔의 순례자의 정체를 알았다고 칼튼이 싫어진 건 아니다. 하지만 외팔의 순례자와 칼튼을 떼어 놓고 볼 수도
없어서 생각도, 마음도 뒤죽박죽이었다.

‘모르겠다. 일단 할 일이나 해야지…….’

약간 현실도피 하는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루이센은 책상을 두드렸다. 가신들의 시선이 루이센에게 집중되었다.

“다들 모였으니, 시작하지. 우선…… 내가 교황님을 만나고 왔다는 것부터 이야기해야겠군.”

루이센은 악마숭배자들을 처단하는 일을 전적으로 아니에스 공작가에게 맡긴다는 내용을 위주로 교황의 의사를
전달했다. 기적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러 뺐다.

“아니, 그걸 왜 우리한테 맡긴다는 겁니까?”

당연한 반발이 튀어나왔다.

“교황께서 나에게서 승리를 봤다더군.”

“교황님께서 뭔가 예견하신 겁니까?”

“그런 비슷한 거지. 내가 앞장서 주길 바라고 계셔. 그렇다고 교회가 손 놓고 있는 건 아니고, 충분한 지원과
보상을 약속하셨다.”

“그렇다면야…….”

교황의 말이 가지는 권위는 대단했다. 교황이 루이센을 통해 승리를 확신했다는 말에 공작가가 앞장서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였다.
“이 친구가 악마숭배자들에 대해 설명해 줄 거야.”

루이센은 옆에 선 모리슨을 가리켰다.

“교회 측에서 파견한 이단심문관이네.”

“지금은 모리슨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모리슨이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했다. 무척 붙임성 있는 태도였으나 이단심문관의 악명을 극복하기엔 부족했다.


가신들은 몹시 불편하고 어려운 표정으로 엉거주춤 인사를 받았다.

이런 반응이 익숙한지 모리슨은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악마숭배자들은 현재 두 장소에 두 개의 무리로 나누어져 있다. 교주를 중심으로


더블레스 백작 저택에 하나, 더블레스 백작을 중심으로 왕성에 하나.

두 무리는 꾸준히 연락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보니 소통이 원활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악마숭배자들의 교주는 교회를 겁내고 있어 눈에 띄지 않길 원한다. 그렇기에 더블레스 백작이 1 왕자를 세뇌하고
왕성을 점거한 것은 그의 독단이라고 짐작되었다.

“교주의 말을 거스를 정도로, 공작님에게 집착하고 있다고 봐야겠군요.”

“그렇습니다.”

더블레스 백작이 악마숭배자들 무리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단순한 신도 이상이었다. 어쩌면 교주도 좌지우지할
정도라고 모리슨은 추측했다.

“왕성에서 준비 중인 의식은 아마도 악마소환 의식으로 추정됩니다.”

“맙소사. 악마소환 의식이라니.”

“그게 가능하긴 한 겁니까? 교회에서는 악마 같은 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없습니다.”

모리슨은 단언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은 악마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겁니다. 의식을 위해 엄청난 산제물을 바치려고 하겠죠.”

“아…….”

“반드시 의식을 저지해야 합니다.”

“악마숭배자들은 고귀한 피에 집착하니까, 1 왕자를 제물로 쓰려고 할 수도 있어.”

루이센이 끼어들어 의견을 보태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1 왕자는 구출해야 해.”


1 왕자는 유일한 왕위계승자였다. 그가 잘못되어 버리면 악마숭배자들을 처단하여도 왕국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왕국은 더 이상 왕위쟁탈전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내전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그대로 멸망이다.

루이센은 1 왕자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회귀 전 그가 보인 통치력은 지금의 왕국에도 꼭 필요했다.

‘개인적으로도…… 신세를 졌고.’

땅속의 노파 같은, 1 왕자의 업적을 자신의 것으로 써먹은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다.

대의를 위해서도, 개인적으로도,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더라고 1 왕자를 무사히 구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병력을 나누어 백작령과 왕성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이 어떤가?”

공작령에 모인 병력이 백작 저택을 치고, 수도 저택에 모인 병력이 왕성을 공략한다는 것이다.

“저항이 있지 않겠습니까? 듣자 하니 몬스터를 부린다던데요.”

“왕성 쪽은 걱정 없다네. 수도 한복판이니, 끌어들일 몬스터가 없으니까. 그리고 공작령 쪽은 성기사와


이단심문관, 그리고 칼튼의 용병단이 도울 거고.”

“그럼 해볼 만하긴 하겠습니다.”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기습하는 쪽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악마숭배자들이 미리 눈치채고 도망쳐 버리면
곤란하기도 하니까.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으나 당연히 반대도 있었다.

“저는 공작령보다는 왕성이 더 문제라고 봅니다. 놈들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안에서 버티고 있어요. 우리
병력으로는 왕성을 못 넘어섭니다. 다른 귀족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고요.”

“그렇지.”

교황은 되도록 조용히 일을 처리하길 바랐다. 악마숭배자들의 힘이 널리 알려질수록 그들의 편에 서는 이들이


늘어날 거라면서.

루이센도 그 말에 동의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수도 정치판에 이단 종교까지 끼어들면 난장판이 될 게 분명했다.


동부 대영주까지, 그 이상의 귀족이 끼어들면 루이센이 통제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다.

“확실히 우리 힘만으로 왕성의 견고한 성문을 넘어서는 건 어렵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왕성에 들어가는 방법이 꼭 전투만 있는 건 아니야.”

“생각해 두신 비책이 있습니까?”

“백작 스스로 문을 열어 나를 불러들이도록 할 생각이네.”

더블레스 백작은 지금 같은 악마숭배자들의 대세도 따르지 않고, 교회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있다. 그만큼 백작은
루이센에게 집착하고, 복수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끝장을 볼 생각인 거다.
“백작에게 자극을 좀 주려고 해. 나를 잡아 죽이지 못해 안달 나도록.”

루이센은 일부러 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모리슨에게는 이미 그럴싸하다고 인정받은 계획이었다. 칼튼도 듣고


아무 말 안 했으니 반대하지 않는 거겠지.

“연회를 열겠다. 남부 출신의 귀족들을 모두 불러. 대영주의 권위를 보여 주지.”

131 화

루이센이 한창 가신들과 자신의 계획에 대해 문답을 주고받고 있을 때. 칼튼은 구석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몹시 불쾌해 보였기에 칼튼의 부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작님하고 싸우셨습니까?”

“아니.”

칼튼은 정색했다. 문제 있는 거 맞네. 부관은 확신했다.

“제 기분 탓인가. 공작님은 대장을 피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아까부터 루이센은 한 번도 칼튼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

칼튼은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제부터 루이센이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칼튼이 아니었다. 루이센은 아닌 척하고 있지만 다 티가 났다.

칼튼은 일단 기다렸다. 굳이 눈치챈 티를 냈다가 루이센의 상태가 더 악화될까 봐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이유를
모르는 만큼 신중하게 접근하려고 했다.

그런데 교황과 이야기하고 나더니, 루이센은 더욱 칼튼을 밀어냈다.

‘그건…… 확실히 거부였어.’

루이센이 쳐 낸 손이 아직까지도 얼얼한 기분이었다. 루이센의 손짓이야 파리 날개를 휘적이는 것과 같으니, 이는


필시 마음의 상처였다.

기분이 무척 더럽고 짜증이 솟구쳤다. 확 다 뒤엎어 버리고 싶지만 그럼 못나 보일 거 같아서 꾹꾹 참는 중이었다.


뭐가 루이센을 돌변하게 한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갑갑한 노릇이었다.
그나마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루이센이 계속 칼튼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닌 척 칼튼을 살피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만이 칼튼을 안심시켰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런 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딴 놈 같으면 일단 멱살을 잡고 머리를 깨 주면 줄줄 부는데, 저


예쁜 머리에 손을 댈 수도 없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정말 루이센이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조심스러웠다.

“이럴 땐 무조건 대화입니다, 대장.”

“대화?”

“예. 왜 피하는지 직접 물어봐요. 무조건 경청하고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는 것. 그만한 게 없어요.”

대화라니. 확실히 칼튼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부관이 답답한지 말을 보탰다.

“대장은 공작님을 좋아하잖아요? 앞으로 미래를 함께할 계획도 짜두셨고. 근데…… 제가 생각해 보니 말이죠.”

“뭔데?”

“공작님도 대장이랑 같은 마음일까요?”

부관은 에니스에게 루이센의 화려한 연애사를 들었다. 그 안에서 루이센은 전형적으로 나쁜 남자였기에 칼튼이
걱정되었다.

“관계라든가, 약속 같은 걸 확실히 해 두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대장 혼자 안달하는 거면 어쩌려고요?”

“…….”

이 대화, 왠지 짜증 난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칼튼은 확신이 없었다. 루이센이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 같기는 한데 자신과 같은 마음일지는 모르겠다.
그는 여러모로 가벼운 구석이 있으니까.

그래서 루이센과의 관계가 애매한 걸 알면서도 그냥 두었다. 괜히 관계를 정립하려다가, 루이센이 자신과 연인이
되기 싫다고 할까 봐 두려웠다. 바보 같긴 하지만 칼튼은 누군가를 특별하게 여긴 것이 처음이고,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당장은 악마숭배자라는 문제가 눈앞에 닥쳐 있기도 하니 그것부터 처리하자는 마음도 있었고.

‘그래서였나?’

몇 번이고 기회는 있었지만, 키스하고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는 것에 그쳤다. 결정적인 어떤 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유를 이제 알 거 같았다.

‘대화라…….’

확실히 이런 애매모호하게 질질 끄는 건 칼튼의 성미에도 맞지 않았다.

해결 방법이 진솔한 대화라는 건 칼튼에게는 어렵고 낯설었지만 원만하게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면야 도전해 볼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칼튼의 결심은 실행하기 힘들었다.

루이센이 온 힘을 다해, 가신들을 방패로 써 가면서 칼튼을 피하는 것이 문제였다. 루이센의 가신들은 칼튼을
불편해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칼튼을 차단했다.

이쯤 되자 칼튼도 슬슬 열이 받았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유를 듣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솟구쳤다.

***

어느새 밤이 되었다.

루이센은 잠옷 차림으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하루 종일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르게 바빴다. 연회 준비도,


전투 준비도 모두 루이센이 주축이 되어 진행해야 했기에 몸이 둘이라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덕분에 칼튼을 피하는 건 쉬웠지만…….’

칼튼은 계속 루이센을 찾아왔다.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노렸는데, 루이센이 피했다. 처음에는 외팔의 순례자가
떠올라 피했던 건데, 거듭할수록 칼튼의 표정이 무서워져서 결국 하루 종일 피해 다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도 칼튼이 쫓아와 주어서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내가 밀어내고도 밀려나지 않는다고 안심하다니.

‘내가 이렇게 찌질한 인간이었나.’

루이센은 침대 위에서 자신의 한심함에 몸부림쳤다. 그러다가 힘을 쭉 뺐다.

‘하아, 계속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인데.’

루이센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내일 생각할까. 뭐 꼭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그냥 놔두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간신히 극복한 회피하는 버릇이 다시 도지려고 하고 있었다.

덜그럭.

아주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루이센은 몹시 귀찮고 무기력했기에 꿈쩍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 침대


매트리스가 기울어지더니, 누군가 루이센의 위로 올라탔다.

“칼튼!”

익숙한 무게감이다 했더니 칼튼이었다. 루이센은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칼튼은 손으로 루이센의 가슴팍을 꾹
눌렀다. 루이센은 얇은 잠옷용 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손바닥의 열기가 고스란히 살갗으로 느껴졌다.
그는 능숙하게 루이센의 손목을 잡아 결박했다.

루이센인 버둥거리며 저항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옷이 흐트러지면서 맨 허벅지가 드러날 듯 말 듯했다. 칼튼의
무릎이 루이센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며 꾹 눌렀다. 움직이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었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두
다리가 맞부딪히는 것이 야릇한 느낌을 풍겼다.

칼튼의 시선이 쭉 루이센의 몸을 훑었다. 루이센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자 루이센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래 봤자 칼튼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칼튼은
오밤중에 남의 침실로 쳐들어온 사람치고는 꽤 침착한 표정이었다.

“이제 도망치지 못하실 테니, 말씀 좀 해 보시죠.”

“뭘?”

“교황하고 무슨 이야기를 한 겁니까? 왜 저를 피하죠?”

“그건…….”

회귀에 대해서는 말 못 한다. 그렇다고 칼튼이 납득하도록 둘러댈 자신도 없다. 무슨 말을 하든 결국 탈탈


털리게 될 것 같다. 칼튼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도망치자.’

외팔의 순례자는 도망치기만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거짓말쟁이의 가르침 따위 알게 뭐란 말인가.

루이센의 양손이 칼튼에게 잡힌 상태였다. 어쩔 수 없었다. 루이센은 칼튼의 턱에 이마를 들이받았다. 칼튼은
어렵지 않게 공격을 피했지만 루이센의 손은 놓쳤다. 루이센이 그 틈에 도망치려 했다.

“내가 가르쳐 준 걸, 지금 나한테 써먹는 겁니까?”

칼튼도 열이 받았다. 좋게 대화로 해 보자고 찾아왔더니, 여기서도 도망을 쳐? 칼튼은 루이센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침대에 내던지고 이불로 둘둘 루이센을 말아 버렸다. 순식간에 루이센 이불말이가 완성되었다.

루이센은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팔다리가 다 이불에 말려서 혼자서는 일어날 수도 없었다.

“이래서는 도망을 못 치잖아.”

“도망 안 치면 되잖습니까.”

칼튼이 까칠하게 답하며, 루이센을 일으켜 앉혔다. 루이센도 슬슬 머리에 열이 올라 거칠 게 없어졌다. 속은 건


루이센이고 속인 건 외팔의 순례자, 즉 칼튼이었다. 그런데 왜 칼튼에게 추궁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누구는 도망치고 싶어서 치는 줄 알아?”

“그러니까 이야기를 해 보라고요. 아니면, 내가 꼴 보기 싫어요?”

“아니, 말이 왜 그렇게 되나? 누가 자네가 싫대?”

루이센은 정색했다. 그러자 칼튼이 눈에 띄게 안심했다.

“그럼 왜 그러는 건데요?”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울고 싶다, 정말. 이젠 도망칠 수도 없고,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성자님한테 속았어.”

“예? 그 외팔의 순례자라는 사람이요?”


칼튼은 황당했다. 갑자기 그 사람 이야기가 왜 나와?

“그분이 나를 정말 그냥 호의로 도와준 줄 알았거든. 근데 아니었어. 내가 아니에스 공작이라는 걸 알고 접근한


거야. 심지어 순례자도 아니었어.”

“아…….”

칼튼이 루이센에게 들은 이야기만 봐도, 분명 루이센의 시점에서 미화가 된 이야기일 텐데도, 외팔의 순례자라는
사람은 순례자 같지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동족의 냄새가 났다.

그러니 루이센의 말이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외팔의 순례자가 거짓말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상처받은
듯한 루이센의 순진함이 더 놀라웠다. 이 사람 이래서 어떻게 험한 세상을 살려고.

“근데 그게 절 피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그건 미안해. 자네랑 그분이 너무 닮아서 자네 보기가 어려웠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이 정도로 얼버무릴 수밖에.

칼튼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런 사기꾼 때문에 날 피한 거라고?

뭐라고 하려다가 동시에 부관의 말을 떠올렸다. 경청과 적극적인 호응. 그게 중요하다고 했다. 일단 울상인
루이센을 안아 주었다. 이불에 말린 루이센은 푹신했다.

“그랬구나. 그래서 속이 상하셨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았다. 루이센이 외팔의 순례자를 신봉하는 것이 질투 나고 마음에 안 들었다.
이참에 루이센의 마음속에서 외팔의 순례자를 없애 버리고, 자신이 확고부동한 1 위로 자리 잡을 기회였다.

“그거 완전 사기꾼 새끼네요. 어쩐지 말도 거칠고, 행동도 단순무식하고. 욱하는 성질머리가 보통 아니다
했어요.”

“으응…….”

칼튼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신나서 외팔의 순례자를 욕했다. 루이센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132 화

칼튼의 말 속에서 외팔의 순례자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이 되어 있었다. 듣고 있다 보니 루이센은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칼튼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 외팔의 순례자를 욕하는 걸 듣고 있자니 ‘그거
아닌데, 그 정도는 아닌데.’라고 반발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체를 집요하게 숨길 거 보면 수배 중인 흉악범일 수도 있겠네요. 몹쓸 자식. 험한 일 당한 건 아니죠?”

“아니…… 그러진 않았어. 오히려 잘해 줬는데…….”

“사기 치는 놈들이 원래 그래요. 사람 정신 못 차리게 잘해 주죠. 그렇게 사람 농락하다가 단물 다 빠지면 팽,


하고 버리고요.”

“…….”

루이센은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켜 칼튼의 품을 빠져나왔다. 칼튼은 루이센이 낙심했다 생각하여 그를 달랬다.
하지만 핀트가 어긋났다.

“괜찮아요, 공작님. 속은 사람이 나쁜가요, 속인 놈이 개자식인 거지. 그 인간은 평생 그렇게 사람 등쳐


먹으면서 살았을 겁니다.”

“그렇게 비겁한 사람은 아니야.”

루이센은 소심하게 반박했다.

“적어도 나한테는 정말 잘해 주셨어.”

외팔의 순례자와 여행하면서, 자주 노숙을 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늘 루이센을 불가에 먼저 재웠다.


루이센은 한 번도 불침번을 서 본 적이 없었다. 음식이 생기면 항상 루이센의 입에 먼저 넣어 주었고, 없는
형편에도 루이센이 아플 때면 의사를 불러다 주었다.

“사기 치려면 뭔들 못 해요.”

루이센은 울컥했다. 칼튼이 위로해 주려고 하는 말인 건 알지만. 루이센은 삼 년간 방황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중에는 사기꾼도 많았고, 몇 번이고 사기를 당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사기꾼들이 어떻게
안면몰수하는지 잘 알았다.

“그분은 그런 사기꾼이랑은 달랐어.”

루이센은 일 년 동안 곁에서 지켜본 외팔의 순례자를 떠올렸다. 차츰 이성이 돌아오면서 회귀 전의 그를 차분히


바라볼 수 있게 해 줬다.

“……말은 얼마든지 꾸며내. 그치만 행동은 아니야.”

처음 만나서 죽을 때까지, 외팔의 순례자의 행동은 변함없이 한결같았다. 외팔의 순례자도 어느 순간부터는
루이센에게 얻어 낼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루이센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존경심이 더욱 깊어졌다. 맥락도 없이 잘해 준다고 쏠랑 성자님, 성자님 한 건 아니다.

루이센은 불현듯 깨달았다.

‘그래. 처음 의도가 어쨌든, 그분에게 받은 건 진짜였어.’

그는 루이센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로 인해 루이센은 희망과 안식을 얻었다. 설령 그 의도가 온전히 선의가


아니었다고 한들, 루이센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분은 나한테 두 번째 기회를 주었어.’

외팔의 순례자는 신에게 무엇이든 부탁할 수 있었다. 그가 한때 간절히 바랐을 부와 명예, 신분, 혹은 다시
시작할 기회까지도. 그런데 그는 루이센을 과거로 돌려보냈다. 루이센에게 새로운 삶을 양보한 것이다.

‘노인이 될 때까지 나를 잊지 않았던 거야.’

함께한 시간에 거짓말이 끼어 있다고 한들 어떤가.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외팔의 순례자는 루이센을 진심으로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는데.

“그분이 누구든 내 은인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같은 말을 배 위에서 칼튼에게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내뱉었던 말이 바로 정답이었다. 이걸


왜 고민했을까 싶을 정도로, 머릿속이 명쾌해졌다. 진리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 이런 거구나.

“그분이 어떤 사람이든, 나만의 성자님이셔.”

그리고 그 성자님은 내내 루이센의 곁에 있었다. 칼튼이 자신의 성자님이었던 것이다.

“이것 좀 풀어 줘. 이제 도망 안 쳐.”

“…….”

칼튼은 이불을 풀어 주었다. 팔다리가 자유로워진 루이센은 그대로 칼튼에게 뛰어들었다. 양팔 가득, 조금
버겁지만 할 수 있는 한 크게 칼튼을 품에 안았다. 얼떨떨한 칼튼을 보며 루이센이 속삭였다.

“그거 알아? 자네랑 나는 운명이야.”

외팔의 순례자는 루이센을 구했다. 그 결과 루이센은 칼튼이 외팔의 순례자가 될 미래를 없애 버렸다. 서로가
서로를 몰락에서부터 구해 낸 것이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담아, 루이센은 칼튼에게 입을 맞추었다. 칼튼은 그저 어리둥절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솔직히 칼튼은 루이센의 생각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루이센은 제정신으로 보이고, 나름대로 머릿속에 논리가
있는 거 같은데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뭐가 있는 건데.’

캐내려면 얼마든지 캐낼 자신은 있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꺼낸 순간, 이 분위기는 깨지겠지. 루이센의
머릿속이 너무도 궁금하긴 했지만,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칼튼이 아니었다.

“우리가 운명이에요?”

“응!”

“그런데 전 왜 이렇게 불안하죠?”

“어?”
“공작님은 너무 대단한 분이고, 저는 쫓아가기도 벅차니까요. 이번처럼 피하려고 하시면 저는 지켜보는 것밖에
못 하죠.”

“그건 정말 미안해. 앞으로 이럴 일 절대 없을 거야.”

칼튼이 힘없이 말하자 루이센은 죄책감에 가슴이 아려 왔다.

“그럼…… 저한테도 확신을 주세요.”

“확신?”

칼튼이 루이센을 뒤로 넘어뜨렸다. 루이센의 등이 푹신한 침대에 닿았다. 그의 몸 위로 칼튼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칼튼은 위에서 아래로 루이센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뜨거운 열정이 엿보였다. 그는
루이센의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살짝 피부 위를 스치는 손끝이 간지러워, 루이센은 조금 소름이 돋았다. 그 손은
그대로 루이센의 몸 위를 미끄러지며 엉덩이를 쥐었다.

“읏, 잠깐만!”

칼튼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쉽게 상상이
되어 저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어쩌지? 싫은 건 아니고 이런 일에 조심스러워하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남자의 몸에 깔려


욕망을 받아 내는 것은 좀 망설여졌다.

칼튼이 루이센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긴장한 것과 달리 아주 가볍게 맞닿았다가 떨어져, 입술 위에서 속삭였다.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의 고백은 숨결을 타고 전해져 루이센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렇게까지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온 고백은
처음이었다. 살면서 정말 많은 사랑 고백을 들었다. 그때마다 늘 쉽게 대답을 했다. 고맙다던가, 유감이라던가.
그냥 좀 처치가 곤란한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머릿속에 새하얗게 되어 버렸다. 뭐라고 답해야 하지? 능숙하게 대답하던 말들은 전부 정답이 아닌
거 같았다.

칼튼은 소중했다. 그가 무조건 원하는 것을 이루어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칼튼이 없는 자신의 미래는
상상할 수가 없어, 그의 꿈을 꺾게 하더라도 곁에 두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강렬하게 한 사람을 욕망한 적이 있던가.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다면 대답은…….’

루이센은 칼튼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그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어, 칼튼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벅차서
그런 건데. 루이센은 칼튼이 오해할까 봐 급히 말을 덧붙였다.

“나도.”

갑자기 목이 멨다. 처음하는 고백은 상상보다 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걸 하고


사는 거지? 루이센은 자신에게 고백해 온 수많은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좀 더 성의있게 받아 줄걸.
“나도 자네를 사랑해.”

칼튼이 활짝 웃었다. 눈꼬리를 접어 행복에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루이센에게 입을 맞추었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깊게 파고드는 키스였다.

루이센은 금방 숨을 헐떡이게 되었다. 조심스러운 고백은 어디로 가고, 칼튼의 손은 종횡무진 거침없이 루이센의
몸을 어루만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루이센은 이미 칼튼보다 먼저 옷이 벗겨져 있었다.

‘어라?’

사랑 고백을 한 거지, 엉덩이까지 허락한다는 건 아니었는데. 루이센은 칼튼의 개수작에 속아 넘어갔음을


깨달았다. 그때, 칼튼도 옷을 벗었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그의 몸은 굉장히 탐이 났다.

루이센은 저도 모르게 칼튼의 복근으로 손을 가져갔다. 칼튼이 씨익 웃었다. 이제 와 이성을 되찾기에는 칼튼은
너무 야했다.

“……천천히, 부탁해. 이쪽은 나도 처음이라.”

놀 만큼 놀아 놓고 이런 순진한 소릴 하자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뒤쪽은 왠지 거부감이


들어서 아무도 건드리지도 못하게 했단 말이다.

칼튼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그 뜻을 알아듣고는 더 거칠게 달려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루이센은 욕망에 몸을 내맡겼다.

***

동이 터 오를 무렵.

새벽 내내 시끄럽던 루이센의 침실에도 침묵이 내려앉았다. 칼튼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품 안에 곤히 잠든


루이센이 보였다.

그는 루이센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툭 튀어나온 뒷덜미 뼈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입을 맞추었다.

“으음.”

루이센이 잠에서 깨어났다. 칼튼은 웃으며 슬그머니 침대를 빠져나와 옷을 입었다. 루이센은 반쯤 밤에 취해,
칼튼을 구경했다. 멋진 몸이었다. 단단해 보이는 피부에 자신이 남긴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좀 민망했지만.
이쪽도 비슷하겠지.

“벌써 가? 그냥 더 있지.”

“오늘 부관이 남부로 떠나거든요. 가기 전에 해 둘 이야기가 있어서요.”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대신 루이센은 팔을 벌렸다. 칼튼이 쪼르르 와서 루이센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공작님은 더 주무세요.”

“이따 아침 식사는 같이해.”

“네. 최대한 빠르게 돌아올게요.”

“응.”

칼튼은 어젯밤 들어온 것처럼 창문으로 나갔다. 방에 홀로 남은 루이센은 이불을 둘러 감으며 눈을 감았다.
허리가 얼얼하긴 했지만 지난 밤은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최고였다. 뭐든 잘하는 칼튼다웠다.

좋아 죽겠네.

루이센은 작게 중얼거렸다. 왠지 뭘 하든 잘 풀릴 거 같은, 무적이 된 기분이었다.

133 화

행복한 기분으로 하루를 맞이한 루이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엄청난 일거리였다. 악마숭배자들과의 전면전을
준비하는 동시에, 어제 선언한 대로 연회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루이센인 집무실에 콕 틀어박혀 샌드위치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부총관이 날라 온 일들을 해 나가야 했다.
끊임없이 가신들이 보고하고 결재를 받으러 찾아왔기에 쉴 틈이 없었다.

칼튼은 기사들과 합을 맞춰 보겠다고 연무장에 가 버렸고, 덕분에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들떴던 기분도 한결


차분해졌다.

‘더블레스 백작, 악마숭배자. 그래, 이제 이놈들만 정리하면 끝난다.’

가신들의 인정도 받았고 외팔의 순례자도 찾았으니, 이제 백작과 악마숭배자만 처단하면 루이센이 회귀한
순간부터 간절히 바라던 평화로운 영주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고, 당장은 칼튼이랑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서 억울했다. 루이센은 책상 위로 엎어졌다.
피곤하고 지쳤다.

“연회는 왜 열자고 해서는.”

입으로는 투덜거렸지만 루이센 나름대로 치밀한 계산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더블레스 백작은 왕성에 콕 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대로 의식이 거행될 때까지 숨어 있을 작정인
듯했다.

‘그렇다면 의식을 저지하려는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왕성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여기서 루이센은 회귀 전 백작의 모습에 주목했다. 백작의 계획대로 진행되었을 때의 상황을 떠올리자 백작이
진짜 바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회귀 전만 하더라도 악마숭배자의 존재는 지금처럼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단 종교의 큰 무기인


비밀스러움을 유지하며 활동했다. 더블레스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범한 귀족 행세를 하며 차근차근 자신의
영역을 넓혔고, 결국 몰락한 아니에스 공작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는 거기서 만족했다.

이를 보아, 백작의 목표는 애당초 아니에스 공작가를 몰락시키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굳이 루이센을 살려 두어 그 모습을 지켜보게 만들었다.

백작이 아니에스 공작가와 선대 공작, 그리고 루이센에게 품고 있는 집착과 열등감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루이센의 회귀 후, 백작은 줄줄이 실패를 거듭해 왔고, 비밀스러움이라는 오랜 기조를 버리고 왕성을
점령하는 과감한 행보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이센이 남부 대영주로서 연회를 열어서 남부 출신 귀족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고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한다면? 공작가와 루이센의 몰락만을 바라는 백작은 분명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백작을 무시하는 말을 한다면, 제대로 열이 받겠지.’

무시 받고 가만있을 백작이 아니니, 그는 루이센을 왕성으로 불러들여 해치울 음모를 꾸밀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우월함을 루이센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을까.

루이센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왕성의 문을 열고 병력을 왕성으로 들여 악마숭배자들을 처단할 생각이었다.

적진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교황이 말한 대로 최대한 혼란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백작을 처단한 이후의 상황 수습도 생각해야 했다.
루이센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물론 회귀 전의 상황과 백작의 목적을 되짚어 봤을 때, 루이센을 쉽게 죽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악마숭배자만 해결되면, 진짜, 한 일주일은 침대 밖으로 안 나간다.”

루이센은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초대장에 서명을 해 나갔다. 그때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계획 좋아 보이는데, 저도 끼워 주실래요?”

칼튼이 문가에 서 있었다. 아하하, 루이센은 멋쩍게 웃었다.

“훈련은 끝났어?”

“그냥 잠깐 나왔어요.”

“바쁘게 일하는 내 앞에서 농땡이를 피운다고 당당히 말하시겠다?”

“열심히 일하는 루이센한테 필요한 게 있을 거 같아서요.”


침대에서 공작님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그랬더니 칼튼은 계속 은근슬쩍 이름으로
루이센을 불렀다. 뻔뻔하고 앙큼한 것이 참 칼튼스러웠다. 귀엽기는. 루이센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뭔데?”

루이센의 물음에 칼튼이 양팔을 벌렸다. 루이센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 뻔뻔한 데가 있어.”

“뭘 새삼요.”

칼튼이 손을 팔락이며 재촉했다.

“하긴.”

부끄러워하는 칼튼이라니 말이 안 되지. 루이센은 못 이기는 척 일어나 칼튼에게 다가갔다. 칼튼은 양팔로 꽉
루이센을 끌어안았다. 루이센도 그를 마주 안으며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었다. 서늘한 겨울바람의 냄새가 났다.
잠깐 칼튼을 안고 있는 것으로 피로가 싹 날아갔다.

‘이대로 집무실 문을 잠궈 버려?’

루이센은 유혹에 휩싸였다.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한 시간쯤만?

그런데 아쉽게도 루이센이 실행에 옮기기 전에 방문객이 찾아왔다. 칼튼을 찾으러 온 기사들이었다. 칼튼은
기사들에게 잡혀가 버렸다.

루이센은 칼튼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다가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집무실을 나가기 전에 칼튼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정에 방의 창문을 열어 두라고.

‘자정까지 반드시 다 끝낸다.’

루이센은 열정적으로 다시 일에 몰두했다.

***

순조로운 나날이 흘러갔다.

루이센은 낮에는 연회 준비와 악마숭배자들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열렬히 일에 몰두하는 루이센을 보면서,
처음에는 불퉁한 태도를 보이던 가신들도 점점 변화를 인정하고 협조적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잠깐씩 시간을 내어 칼튼을 만났다. 길게 시간을 낼 수 없어 감질나긴 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간질거리는 맛이 있어서 좋았다.

일도 연애도 아무 문제 없이 술술 풀리니 루이센의 자신감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이대로라면 뭐든 해도 될 거 같아!’
이 기세를 그대로 몰아 루이센이 여는 연회도 성황리에 잘 치러 냈다.

연회는 처음 계획한 대로 남부 출신의 귀족들을 불렀다. 루이센이 손수 서명한 초대장을 받고 귀족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치열한 눈치 게임이 벌어졌다.

더블레스 백작이 1 왕자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들은 남부의 대영주가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루이센이 수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나 몰라라 해 왔다.

그런데 루이센이 생각보다 1 왕자의 견제에 잘 버티고 있었고, 주시하고 있던 종교 재판 쪽도 루이센에게


호의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탈의 조짐이 보이던 남부의 영주들도 다시 아니에스 공작가를 지지할 낌새를
보이기 시작하며 은근히 루이센과 우호적인 관계를 다질 것을 권했다.

더블레스 백작의 눈치가 보이더라도 남부 출신 귀족들도 더 이상 루이센을 무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서라도, 순수하게 궁금하기도 했다.

‘정말 그 망나니가 변했을까?’

그런저런 여러 이유로 갑작스럽게 연 연회임에도 불구하고 당일, 초대장을 받은 대다수 귀족들이 연회에 참석했다.

루이센은 능숙하게 그들을 맞이했고, 여러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며 소문의 진상을 명확하게 밝혀 주었다.
루이센의 태도는 자신감에 차서 당당했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살가웠다. 원래도 아름다웠던 외모가 더 물이 올라,
금방 귀족들의 환심을 샀다.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루이센 아니에스가 전과 같은 망나니가 아님을 받아들였고, 아니에스 공작가가 과거의
위세를 되찾을 가능성이 큼을 인정했다.

루이센이 바라던 대로, 남부 대영주로서 아니에스 공작가와 본인이 건재함을 제대로 각인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식은 더블레스 백작에게까지 전해졌다. 백작에게도 연회 초대장이 도착하긴 했다. 하지만 1 왕자의
세뇌가 풀릴 가능성 때문에 왕성을 비울 수가 없는 데다, 루이센에게 머리를 숙이고 싶지 않아 불참했다.

대신 자신의 심복을 연회에 보내 두었다. 백작령 출신의 하위 귀족이었다. 그는 연회가 끝나자마자 백작에게
달려와, 상세히 연회의 상황을 고했다.

“연회가 잘 치러졌다라.”

백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귀족들에게 의리가 없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박쥐처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것은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초대장을 받은 대다수가 연회에 참가하다니. 심지어 연회의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하고 좋았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초대장을 받고도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자신의 꼴이 우스워진다. 모두가 모여 즐기는 잔치에 백작만
혼자 따돌려진 셈이 아닌가. 아니, 그보다 나빴다. 어떻게 보면 백작이 루이센을 상대로 기 싸움을 벌이려다
실패한 걸로 보일 테니까.

으득.

백작은 이를 악물고 밀려오는 분노를 참았다. 그래도 괜찮다. 이 정도 망신은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공작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았나?”

“하기는 했는데, 그게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

“역시 내 이야기를 했군.”

백작의 살벌한 표정에 소식을 전하던 귀족이 흠칫, 놀랐다. 그는 겁먹은 표정으로 망설였다.

“정확하게 말해 봐.”

백작의 압박에 귀족은 들은 그대로를 실토했다.

“백작님이 아무리 애를 써도, 고작 더블레스 백작가. 아니에스 공작가에는 감히 대적할 주제도 못되니 신경 쓸
가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애송이가 감히…….”

더블레스 백작은 마지막으로 왕성에서 마주했던 루이센을 떠올렸다. 평생을 망나니로 세월을 허비하며 살아온
놈팡이가 잘났다는 듯이 고개를 치켜들며 자신을 깔아보았다.

그 눈빛은 선대 공작이 자신을 보던 것과 정확히 똑같았다. 언제나 선대 공작의 눈빛은 무심하게 백작을 스쳐
지나갔다. 단 한 번을 제대로 자신을 봐 준 적이 없었다.

수십 년이 지나도 선대 공작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무심하기 짝이 없는 시선.

그리고 그 앞에서 작고 하찮아지던 젊은 날의 자신.

그 기억은 트라우마처럼 백작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백작은 분노에 못 견뎌 책상을 내리쳤다.

쾅! 쾅쾅!

그리고도 성이 안 풀려, 일어서 책상 위의 물건들을 쓸어 던져 버렸다. 우당탕탕 하고 물건 깨지는 소리 사이로


백작이 분노에 가득 차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아니에스들! 애비나 자식이나! 이 나를 무시했겠다! 내 말 한마디면 죽을 목숨이! 감히!”

죽음의 기사를 불러, 공작의 목숨을 취해 오라고 명령해야겠다.

‘아니, 죽이는 건 너무 쉽지.’

죽는 건 너무 쉽고 간단하다. 그냥 죽이려는 거였으면 진작에 했다.

자신의 원한은 그렇게 간단히 풀리지 않는다. 공작가의 몰락, 그리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걸 공작이 보길
바랐다.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선사해 주고자 했다.

백작은 귀족을 쫓아내고 죽음의 기사와 악마숭배자들을 불러들였다.


134 화

백작은 귀족을 쫓아내고 악마숭배자들을 불러들였다.

“의식 직전에 아니에스 공작을 왕성으로 불러들인다.”

악마숭배자들은 크게 놀랐다. 그중 발언권이 가장 강한 아홉 번째 숭배자는 펄쩍 뛰며 반대했다.

“예에? 공작을요? 굳이 그렇게 해야 합니까? 의식의 제물은 이미 충분합니다. 공작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결정한 일이다.”

백작은 완고했다.

“그냥 뒀다가는 기어코 우리 발목을 걸고넘어질 놈이야. 그럴 바에는 확실하게 처리하는 게 좋겠지.”

“……공작이 연회를 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러시는 거 아닙니까? 뻔한 도발입니다. 이런 거에


넘어가면…….”

훗, 하하하하!

백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눈은 여전히 분노로 시뻘게져 있었다.

“그러면 나더러 공작의 도발에 꼬리 말고 도망치라고?”

“……그런 뜻은 아니옵고…….”

“나는 공작에게 더 큰 비극을 선사해 줄 것이다. 감히 나를 무시하고, 내게 도발을 건 것을 후회하도록 해


줘야지.”

“……하지만…… 교주님도 몸을 사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의식을 포기할 건가? 아니면 내 말을 거부할 건가?”

백작의 반문에 악마숭배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표면적으로는 당연히 교주가 백작보다 우위에 있다. 백작은 일개
신도니까. 하지만 실세는 백작이었다. 백작은 쫓겨 다니던 악마숭배자들에게 돈과 땅과 재물을 제공해 주었다.
그들이 이만큼 교세를 불릴 수 있었던 것도 백작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이제 와서 그것을 버리고 황야로
다시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악마소환 의식이다. 그분을 부르는 큰 의식을 언제 또 벌일 수 있을지 몰라.’


성물만 도착하면 의식을 바로 치러도 될 정도로 준비가 되었다. 악마숭배자들은 또 한 번 타협했다.

“알겠습니다.”

“좋다. 그럼 시키는 대로 하도록.”

백작은 루이센을 왕성에 끌어들일 계획을 설명했다. 백작이 복수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복수도 좋지만, 그분을 숭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잊지 말아 주시길…….”

고작 한마디를 애원하듯 덧붙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백작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

***

동이 터 오르기 전, 가장 깊은 밤 시간.

마차 한 대가 조용히 수도의 북쪽 성문을 통과했다. 마차 자체는 검은 칠이 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 주변으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철통같이 주변을 경계했다. 용병 차림새를 하고 있었으나, 말을 모는 솜씨가
능숙하고 절도 있어 어딘가 위화감을 자아냈다.

그들은 더블레스 백작의 기사였다. 마차에는 악마숭배자가 그들의 성물을 가지고 타고 있었다. 이들을 무사히
왕성까지 운반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마차와 기사들은 텅 빈 거리를 빠르게 내달렸다. 사람도 불빛도 하나 없어 어둠 속을 걷는 것 같았으나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마차를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

히이잉!

놀란 말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은빛 갑옷을 입은 교회의 성기사들이었다.

“멈춰 서십시오.”

갑작스러운 성기사들의 등장에 마차를 둘러싼 사람들이 당황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백작의
기사들 중 일부는 마차에 바짝 붙었고, 나머지 일부는 검을 뽑아 들어 성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쾅!

강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마차는 속도를 올려 빠르게 달려나갔다. 미리
훈련받은 것처럼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대처였다. 성기사들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지원을 부르겠다. 나머지는 쫓아가!”

성기사도 두 무리로 나누어져, 하나는 백작의 기사들을 막았고 나머지는 마차를 쫓아갔다.
탁! 탁! 탁!

쫓는 자, 쫓기는 자. 막는 자, 뚫는 자. 여러 갈래로 흩어진 말발굽 소리가 뒤엉키며 지축을 흔들었다. 무기가


부딪치며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속도는 마차보다 성기사들의 쪽이 더 빨랐다. 성기사들이 마차를 거의 따라잡은 순간, 마차의 문이 열렸다. 안에
있던 악마숭배자가 성기사들의 향해 팔을 뻗었다. 그의 소매에서 뻗어 나온 검은 뱀 같은 것이 성기사들에게
덤벼들었다.

몬스터의 공격은 예상했던 바고, 성기사들 모두 무장한 상태였기에 이번 공격에 다치진 않았다. 다만 놀란 말의
속도가 늦추어지면서 다시 마차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성기사들은 마차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단심문관이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그들은 의식에 쓰일 성물을 옮기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야 했다.

그러나 성기사들은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들의 앞에 새까만 말에 올라탄, 죽음의 기사가 나타난 것이다.

“크으. 말로만 들었을 때는 믿기지 않았는데, 정말 저런 괴물이 있었군.”

성기사 한 부대가 밤마다 순찰을 돌며, 악마숭배자들이 의식을 준비하고 수도로 몬스터를 끌어들이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런데 번번이 죽음의 기사가 나타나 방해했다. 놈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각오하고 있었기에 성기사들은
놀라지 않고 무기를 들었다.

“놈은 하나다. 우리가 뚫을 수 있다!”

죽음의 기사는 압도적이었다. 그는 혼자서 다수의 성기사들의 공격을 막아 내고 반격하여 한 명을 전투


불능상태로 만들기까지 했다. 성기사들은 이곳에서 죽음을 각오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해 한 사람이 대여섯 명의
성기사들을 끌고 급히 다가왔다.

이단심문관이자, 이번 악마숭배자 사건의 책임자인 모리슨이었다. 인근에 성기사들과 순찰을 하던 중 소란을 듣고


급히 달려온 것이다.

“성물은 어떻게 됐습니까?”

“놓쳤습니다.”

“저놈은 제가 붙잡고 있겠습니다.”

“예.”

모리슨은 메이슨을 휘두르며 죽음의 기사를 향해 덤벼들었다. 성기사들이 동시에 튀어 나갔다. 죽음의 기사는
모리슨의 공격을 튕겨 내며 성기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때, 모리슨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채캉!

무기끼리 강하게 부딪쳤다. 모리슨은 여기서 팔 하나쯤은 부러질 각오를 했다. 그런데 죽음의 기사가 순간 힘을
뺀 탓에 생각보다 쉽게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사한 성기사들이 마차를 쫓아 달려갔다.

길 위에는 기절한 성기사를 제외하고, 죽음의 기사와 모리슨만이 남았다. 죽음의 기사는 금방 어둠에 녹아내릴
것처럼 새까맣기에 모리슨은 마치 홀로 서 있는 것같이 보였다.
“지금 날 봐준 겁니까?”

모리슨이 물었다.

“그쪽은 역시 평범한 몬스터는 아닌 거 같군요. 생전의 일을 기억합니까? 우리, 공작님과 함께 마주쳤었죠.”

[…….]

“이름이 루거였던가요?”

[……날 붙잡으려 해도 소용없다, 이단심문관. 이미 성물은 왕성에 도착했을 테니.]

“……그렇군요.”

모리슨이 도착했을 때 이미 마차의 뒤꽁무니도 보이지 않아 그럴 것 같았다. 왕성에 들어가 버리면 성기사들이라
해도 더 쫓아갈 수 없을 테니.

하지만 모리슨의 용건은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전부터 다시 죽음의 기사를 만난다면 말을 걸어 보겠다고
생각해 뒀다. 어딘가 평범한 몬스터와는 다른 면이 있었으니 말이다.

“대화가 통하는 게 신기하군요. 전설과 똑같아. 이성도 있고, 기억도 있으니……. 당신에게는 아직도 인간의
영혼이 존재하는 셈이겠네요.”

[…….]

“그런데 왜 신의 뜻을 거스르고, 이단을 따르는 겁니까?”

[나는 기사다. 나의 주인을 따르는 것뿐이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요?”

[…….]

죽음의 기사는 말 대신 행동으로 답을 보였다. 그는 검을 휘둘렀다. 모리슨의 앞으로 길게 땅이 패어 나갔다.


분노의 의미였다.

[나는 이미 저주받았다.]

“죽어서도 쉬지 못하는 저주, 끝내려는 마음은 없습니까?”

[……내가 저주를 받은 것은 기사의 맹세를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니요. 세상에 배신자는 많지만 다 당신처럼 되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그 저주받은 것은 신을 외면하고 이단과
타협했기 때문이죠.”

[…….]

이번에는 죽음의 기사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시라기보다는 정곡에 찔린 것에 가까웠다.

“회개하시죠. 죄를 뉘우치고, 그 영혼이 부서지도록 그분께 속죄하세요.”


[또, 또다시 배신을 할 수는…… 없다.]

“인간의 맹세는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것은 오직 신의 뜻뿐이니.”

푸르릉. 검은 말이 투레질을 하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죽음의 기사의 손발처럼 움직이는 그림자 말이다. 그의
흔들림이 엿보였다.

“그 뜻을 따르다 보면 언젠가 그 저주도 사라질 겁니다. 그분의 햇살이 당신을 비추게 될 테니까요. 우리의 신은
자비롭고 다정한 분이시니…….”

[……나는…….]

죽음의 기사가 모리슨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돌연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향한 쪽은 왕성


방향이었다.

[아, 주인이 나를 부르는구나.]

“무시하시죠. 제가 지금 신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가야 한다.]

죽음의 기사의 모습이 안개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거부할 수 없구나.]

완전히 악마숭배자들의 명령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건가? 모리슨은 어쩌면 지금이 그를 온건히 회유할 마지막
순간임을 감지했다. 이번에 말이 안 먹힌다면 다음에 만났을 때는 여지없이 불태우게 되겠지.

“거부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의 죽음을 떠올려 보세요. 기사의 맹세를 깰 정도로 간절했던 그 마음이라면 분명
…….”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죽음의 기사는 홀연히 사라졌다. 모리슨은 텅 빈 길 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죽음의 기사가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언뜻 눈이 마주쳤다. 텅 빈 투구 속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루거의
얼굴이 보였던 것도 같았다.

‘역시 공작에게 마음이 남아 있었나.’

다음에 마주할 때면 죽음의 기사가 어떤 선택을 내렸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끝끝내 악마숭배자의 부름에 응해
사라진 것을 보면 낙관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순간 그의 영혼을 볼 수 있었다.

사랑이야말로, 진실로 숭고하다.

성서의 말은 다시 한번 옳음을 증명했다. 모리슨은 성호를 그었다.

***

연회가 있고 며칠 뒤.
아니에스 공작가의 수도 저택에 손님이 찾아왔다.

왕성에서 보내온 전령이었다.

135 화

루이센은 집무실에서 전령을 맞이했다.

전령은 긴 인삿말과 미사여구 없이 바로 본론을 전했다.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전하께서 위급하십니다. 대영주들은 모두 왕성으로 모여, 의무를 다하시오.”

왕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대영주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루이센 역시 대영주로서 왕성에 가야만 했다. 거부할 수
없는 부름이었다. 집무실에 함께 있던 하인들이 크게 술렁였다.

루이센은 침통한 듯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왕과 가까이 지냈던 것을 알기에 갑작스러운 소식에
얼마나 놀랐을까 싶어, 전령은 조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공작님.”

“……그래.”

낮게 목소리를 내리깔며 루이센이 대답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됐다! 됐어! 와, 진짜!’

루이센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전령이 오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모른다.

교황과의 대화를 통해, 루이센은 왕이 회귀 전과 비슷한 시기에 죽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회귀 전 루이센은


정신을 반쯤 놓고 다녔기에 정확히 언제 왕이 죽는지 몰랐다. 그래도 떠오르는 기억을 모두 끌어모아 보니, 어제,
오늘, 내일, 삼 일 중에 왕이 죽는다고 추려낼 수 있었다.

만약 더블레스 백작이 루이센을 왕성에 불러들여 음모를 꾸민다고 한다면, 왕의 죽음이라는 그럴싸한 구실을
이용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에 맞추어 루이센도 악마숭배자를 토벌할 준비를 해 왔다. 이미 이틀 전부터 공작령과 수도 저택 모든 토벌


준비를 마쳐 두었다.

무조건 회귀 전의 기억대로 될 거라고 낙관하는 건 아니었다. 회귀 전과 많은 게 달라졌으니까 왕의 죽음이 더


늦어질 수도 있고, 또 백작이 루이센의 도발에 걸리지 않아 왕성을 봉쇄하고 의식에만 집중하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백작이 부르든 말든 삼 일 차인 내일에는 무조건 공격을 개시하기로 정해 두었다. 루이센이 왕성에
들어갈 수 없을 경우, 왕성 문을 넘어설 또 다른 계획도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차선책으로, 더 많은 피를 흘리면서도 승률이 낮기 때문에 루이센이 왕성에 들어가 왕성


문을 여는 것이 가장 최선책이었다.

‘백작이 도발에 걸려 줘서 다행이야.’

날짜도 딱 좋았다. 오늘 루이센이 왕성에 들어가게 되어 자정쯤에 왕성 문을 여는 데 성공한다면, 공작령에서


공격을 개시하는 시점과 비슷하게 왕성에서도 공격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시작이 아주 괜찮다. 루이센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알겠네. 지금 바로 입궁할 준비를 할 테니, 잠시 기다리게.”

“예, 공작님.”

급히 감정을 추스르고 대영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에 전령은 작게 감탄했다.

루이센은 전령을 내보내고 침실로 이동해 왕성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철판을 덧댄 조끼를 입고 그 위로
검은 셔츠를 걸쳤다. 검은 외투를 입고 목 부근의 장식을 정리했다. 외투는 품이 넉넉한 스타일로 안쪽에는
주머니가 여러 개 달려 있었다. 주머니에는 치료약이나, 해독제, 성수 같은 것들을 담았다. 그 무게가
상당했으나 그사이 근력이 좀 늘어난 덕분에 움직이는 데 크게 힘들진 않았다. 머리카락은 적당히 뒤로 넘겨
정리했다.

왕의 임종을 지키러 가는 것이다. 화려하게 꾸밀 필요가 없으니 의복을 갖추는 것은 금방이었다.

준비를 마친 루이센은 저택을 나섰다. 그 뒤를 가신들이 졸졸 따라 나왔다.

저택의 앞에는 칼튼이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니에스 공작가의 기사단 제복을 입고 있었다.
흰색과 밀색이 뒤섞인 제복은 기사들이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색 조합이었으나, 칼튼에게 근사하게 잘 어울렸다.
오늘 그는 기사로 위장하고 루이센을 호위할 예정이었다.

“마차에 오르시죠, 공작님.”

칼튼은 기사다움을 의식했는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흉내 내는 것이 꽤 그럴듯해서 작게 웃음이 나왔다.


루이센은 칼튼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 사이에 짧게 시선이 오갔다.

루이센은 가신들 쭉 둘러보았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했다. 걱정과 긴장으로 굳어 있는 얼굴들을 보며


루이센은 어쩐지 미소가 지어졌다.

가신들이 걱정하는 것도, 그러면서도 결정을 존중해 주는 것도 루이센에게 작은 기쁨이었다. 망나니처럼 살던


시절에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것들이니까.

“내가 없는 동안 부총관이 나의 대리를 맡는다. 미리 계획해 둔 대로, 잘 따라 주길 바란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일 새벽 일출과 함께 승리를 맞이할 수 있을 테니.”

“예!”
“물론입니다!”

마지막 당부를 마친 뒤, 루이센을 태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튼도 제피스의 등에 올라 그 옆을 호위하듯


바짝 따라갔다. 뒤를 이어 공작가의 기사들과 하인들이 뒤따랐다.

이전에 왕성에 갔을 때 급조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대영주의 위엄이 느껴지는 행차였다. 공작가의 가신들은
일행이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주군의 무사와 승리를 빌었다.

***

루이센뿐만 아니라 다른 세 명의 대영주도 같은 부름을 받았다. 그들도 이미 왕성으로 출발했음을 확인했다.

‘아직까지도 백작은 멀쩡한 귀족 행세를 하고 싶은가 보군.’

자신이 악마숭배자라는 것이 루이센에게 들켰음을 모를 테니, 겉으로는 멀쩡한 척을 할 만도 했다. 회귀 전의


행보를 보아도 뒤에서 은밀히 조종하는 것이 취향인듯하고.

‘다른 꿍꿍이가 있을 법도 한데…… 어쨌든 왕성에 들어가자마자 칼 맞을 일은 없겠어.’

루이센이 다른 대영주들과 함께 있는 때 루이센을 노리진 않을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충분해.’

왕성에 들어간 이후, 루이센이 세운 계획은 다음과 같다.

왕성에 들어가면 대영주들과 왕자는 왕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모두 한 방에서 대기하게 된다. 그때를 노려 1
왕자의 세뇌를 푼다. 그다음에는 1 왕자의 명령으로 왕성을 열어,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리슨과 성기사들을
왕성 안으로 들이면 된다.

물론 이 계획은 얼마든지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더블레스 백작도 1 왕자를 방치해 두지 않을 테니까. 그럴
경우를 대비해, 루이센을 수행하는 기사들 일부가 은밀히 비밀통로로 흩어지기로 했다. 비밀통로를 통해 북쪽
성문으로 이동하여, 성문을 강제로 열게 하자는 계획이다. 왕실 기사단과 무력 충돌이 예상되지만 어쩔 수 없다.

계획은 완벽하다. 혹시라도 무언가 하나가 틀어질 때를 대비해 차선도, 차차선도 세워 두었다. 루이센이 직접
지시를 내리지 못하더라도, 그의 가신들과 모리슨은 준비한 대로 치밀하게 움직일 것이다.

남은 건 부딪쳐 보는 것뿐이다. 루이센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점에서 다소 위험하지만.

‘성자님은 말씀하셨지. 위험을 무서워하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루이센은 외팔의 순례자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새겼다. 그리고 말을 타고 마차를 따라오고 있는 칼튼을 바라보았다.

‘나한테는 칼튼이 있어.’

작은 두려움도 그를 보자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

루이센은 다른 세 명의 대영주들과 함께 왕성으로 들어갔다. 1 왕자와 더블레스 백작이 그들을 맞이했다.

루이센의 짐작대로, 더블레스 백작은 1 왕자의 한 발자국 뒤에 서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수상한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대영주들은 1 왕자를 위로하며 왕의 침실로 들어갔다. 더블레스 백작은 안중에도 없었다. 사정을 다 알고 있는
동부 대영주만 백작을 힐끔 바라본 게 전부였다.

루이센도 다른 대영주들처럼 무심한 척을 했다. 그것이 더블레스 백작을 자극했는지, 뒤통수가 오싹할 정도로
시선이 느껴졌다.

왕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지난번에 보고 시간이 많이 지난 것도 아닌데 확연히 상태가 나빠졌다.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 보였다.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대영주들과 왕자, 그리고 더블레스 백작은 왕의 심장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대화도 해서는 안 되기에 우울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흘렀다.

물론 그건 상황을 모르는 두 대영주들의 이야기고, 루이센은 초침이 시계 한 바퀴를 돌아 분침이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덜컹덜컹했다.

‘1 왕자의 세뇌를 풀어야 하는데.’

세뇌를 푸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했다. 이단의 힘은 신성력과 상극이다. 신성력은 이단의 힘을 불태운다. 그와
반대로 이단의 힘은 신성력을 억제한다.

따라서 세뇌를 풀려면 1 왕자의 몸을 강한 신성력에 노출시켜, 이단의 힘을 제거하면 된다.

루이센은 교황이 직접 축성한 성수를 가지고 왔다. 순도 높은 신성력이 듬뿍 담긴 성수를 1 왕자에게 먹인다면
세뇌에서 풀려날 거라고 한다.

그는 일단 잔에 성수를 부었다. 루이센이 가진 성수는 딱 이 한 잔 분량. 더블레스 백작이 눈치채고 컵을 쏟아


버리면 더는 수가 없다.

‘교황이 한 말이니까 맞겠지.’

다만 성수를 먹이는 것이 만만치 않다. 더블레스 백작이 1 왕자 옆에 붙어 있어서 루이센이 1 왕자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기회는 곧 다가왔다.

왕의 심장이 멈춘 것이다.

“전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주치의가 선언했다. 왕은 오래도록 병환을 앓았기에, 다들 담담히 그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침통한
분위기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예법에 따라 왕위계승자와 대영주 넷을 제외하고는 하인들까지 모두 방을 나갔다. 대영주들이 보는 앞에서 1
왕자가 왕의 죽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고, 다 함께 왕의 평안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루이센도 잔을 내려놓고, 함께 기도했다. 이미 회귀 전에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인가 생각보다 담담한 기분이었다.


루이센은 실눈을 뜨고 1 왕자를 바라보았다.

1 왕자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 정상이었으면 내내 왕의 죽음에 가장 오열했을 텐데. 아버지의 죽음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니. 왕에게도, 1 왕자 본인에게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세뇌를 풀자.’

그럼 적어도 장례식에서는 제대로 울 수 있겠지.

루이센은 잠시 내려 둔 잔을 집어 들고 1 왕자에게 향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이걸로 목이라도 축이세요.”

더블레스 백작이 붙어 있지 않은 1 왕자는 굉장히 무방비했다. 평소라면 루이센이 수작 부리는 것을 간파했을 1


왕자는 아무 의심 없이 잔을 받아 들었다. 1 왕자가 꿀꺽, 꿀꺽 성수를 마셨다.

‘……마셨다!’

루이센은 긴장하며 1 왕자의 변화를 기다렸다. 1 왕자는 잠깐 휘청이더니 고개를 깊이 숙였다. 세뇌를 걸 때와
같은 요란한 모습은 없었으나, 내내 침묵하던 1 왕자가 입을 열었다.

“아니에스 공작. 내게 뭘 먹인 거지?”

1 왕자의 목소리는 더 명료했고 눈빛도 힘이 되살아나 선명했다. 된 건가? 된 거 같지? 루이센은 신중히 1 왕자를
살폈다.

“몸에 좋은 겁니다.”

성수인데 몸에 좋겠지. 루이센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1 왕자는 잠시 인상을 쓰고 침묵하더니 말했다.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는 거 같군.”

풀렸나 보다! 루이센은 속으로 환호했다. 그리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루이센은 1 왕자와 함께 왕의 침실을 나섰다. 두 사람이 방을 나오자 하인들이 따라오려 했으나 1 왕자가 거절했다.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 왕의 침실에서 점점 멀어졌다.

“가까이 있는 아무 방이나 들어가면 안 됩니까?”

“다 왔네.”

1 왕자는 어느 문 앞에 섰다.
“들어가시게, 공작.”

“예…….”

1 왕자는 이제 왕이 될 몸이니, 문은 루이센이 여는 게 맞긴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루이센은 문을


밀어 열었다.

문 너머는 캄캄했다. 계단이 있긴 했지만 몹시 가팔라 까마득한 낭떠러지처럼 보였다.

“!”

그 순간, 루이센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1 왕자가 한발 빨랐다. 1 왕자가 루이센의 등을 밀어 버린


것이다. 루이센은 중심을 잃고 문 너머로 끝없이 굴러떨어졌다.

136 화

우당탕!

한참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금방 바닥에 떨어졌다.

으윽, 여기저기 부딪히는 바람에 온몸이 욱신거렸다. 루이센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공기가 싸늘하고, 곰팡이
냄새 같은 것이 풍겨 왔다.

‘지하 감옥인가. 1 왕자는?’

루이센은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문가에 1 왕자가 서 있었는데 역광이 비추어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1
왕자의 뒤에서 더블레스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블레스 백작은 루이센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치 이렇게 될 것을 알았다는 듯이 말이다.

‘…………함정이었구나.’

루이센은 직감했다. 1 왕자는 루이센을 유인할 미끼였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 왕자의 세뇌는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백작이 어떻게 내 계획을 안 거야?’

루이센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더블레스 백작은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루이센의 앞에 서서 여상히 안부를
전했다.

“또 뵙기로 했죠, 공작님.”


정중함을 갖춘 인사가 루이센을 기만하는 것 같았다. 그런 백작의 장난질에 놀아 줄 여유가 없었다. 루이센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하 감옥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밀통로와도 연결되지 않은 거 같았다.

루이센은 자신과 함께 온 일행들을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무사히 흩어졌겠지?’

1 왕자의 세뇌를 푸는 데 실패했으니, 남은 희망은 다른 사람들뿐이다. 그리고 칼튼.

“아니에스 공작. 아직 주제 파악이 덜 되신 모양입니다.”

“뭐?”

더블레스 백작이 루이센의 몸을 걷어찼다. 루이센은 뒤로 또 한 번 쓰러졌다. 백작은 루이센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내가 지금 인사를 하잖아. 이 지경이 되고도 나를 무시하다니. 아니에스 공작, 애비나 아들이나 거만하기 짝이
없구나!”

백작이 격렬히 분노하는 바람에, 루이센의 머리가 마구 흔들렸다. 두피의 통증과 함께 어지럼증이 일어 루이센은
정신이 없었다.

“너희 아니에스들은 항상 그런 식이지! 항상 사람을 무시해! 오만하고 건방져! 일어나, 일어나서 똑바로 나를
봐!”

백작은 루이센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루이센의 눈동자 가득 자신의 모습이 비치자, 그제야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백작은 크큿, 하고 웃으면서 루이센의 머리채를 손에서 놓았다.

루이센이 자신의 발밑에서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것을 보며, 언제 분노했냐는 듯이 돌연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런, 공작님. 얕은 속셈으로 제게 덤비시니 이런 꼴이 되는 게 아닙니까.”

“얕은 속셈이라? 꼭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는군?”

“그럼요.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죠.”

백작의 자신만만함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가령…… 비밀통로로 흩어진 공작님의 기사들이라든가?”

젠장. 루이센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시치미를 떼 보았지만 백작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루이센의 그 모습이 가소롭다는 듯이 백작은 피식, 웃었다.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왕비의 침실과 연결된 비밀통로와 그곳에서 공작님이 저희를 엿본 것도.”

“…….”
“엿보기라니, 참 고상한 취미시군요. 물론 들키지 않을 거라 믿으셨겠지만 제가 그리 허술하지는 않아서.”

더블레스 백작은 며칠 전, 기어코 비밀통로를 발견하였다. 그 안에 남은 흔적을 통해 루이센이 자신과 1 왕자에


대해 봤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니에스가 모든 진실을 알았다. 자신의 정체도, 1 왕자가 조종당한다는 사실도.’

그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자, 남은 루이센의 속셈이 전부 파악되었다. 백작은 루이센이 1 왕자의 세뇌를 풀고,
악마숭배자와 자신을 처단하려 할 것임을 예상했다.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겠지만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1 왕자를 미끼로 삼아 루이센을 유인해, 혼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1 왕자는 분명 성수를 마셨을 텐데?”

“바꿔치기했습니다. 1 왕자님이 직접이요.”

루이센이 잔을 들고 서성이는 것을 보고 그것이 성수임을 알았다. 비슷한 잔과 물은 어디에나 있으니 백작은 몰래


같은 것을 준비했다. 루이센이 방심하도록 방을 나섰고, 그가 기도하는 사이에 1 왕자에게 잔을 바꿔치기하도록
한 것이다.

‘1 왕자도 백작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대했어야 했는데…….’

루이센은 기도하는 동안 성수가 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던 것을 떠올렸다. 기도가 꽤 길었으니, 바꿔치기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방에는 대영주들과 1 왕자뿐이라 견제 필요성을 못 느꼈다.

‘……이건, 확실히 내가 방심했어.’

뼈아픈 실수였다. 루이센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모습을 백작은 즐겁게 관람하였다.

“그래서 어쩔 건가? 이제 날 죽일 건가?”

“아니요. 공작님은 살려 드릴 생각입니다.”

“무슨 꿍꿍이지?”

루이센은 백작을 노려보았다. 백작은 그 시선을 즐기며 기꺼이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공작님을 여기 가둬 둔 다음, 의식을 치를 겁니다.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 의식의 제물로 바쳐지겠지요. 개중에
몇 명은 살려 둘 거예요. 증인이 필요하니까요.”

“증인?”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할 겁니다.”

“…….”

“이 모든 일은 다 루이센 아니에스가 벌인 짓이다, 라고요.”

“뭐?”
예상 밖의 대답에 루이센은 크게 당황했다.

“의식으로 얻게 되는 힘이 꽤나 강하거든요. 가짜 기억을 심으려고 합니다.”

“내게 자네가 한 짓을 뒤집어씌우겠다, 그게 지금 계획이라는 건가? 그게 가능할 거 같아?”

이미 교황까지 만나고 온 루이센이다.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고 생각했으나 백작은 당당했다.

“애당초 이상하지 않습니까. 망나니에 멍청하기 짝이 없던 공작님이 어떻게 알고 악마숭배자들의 음모를


저지했을까? 사실 다 자작극이었던 겁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

“사실이 될 겁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증언을 할 거고. 아, 증거도 만들어 뒀거든요.”

“…….”

“무엇보다…… 공작님 본인이 모든 잘못을 인정할 테니까요.”

“내가? 무슨 수로……. 설마, 내 기억도 조작할 셈인가…….”

“공작님은 죄인이 되어, 정체가 발각될까 영원히 두려워하며 떠돌게 될 겁니다.”

백작은 씨익 웃었다 긍정의 의미였다. 루이센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영원히 떠돈다고……. 역시 회귀 전의 몰락은 백작이 의도한 것이었던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백작의 입에서 확인하게 되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회귀 전의 자신은 대체


얼마나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건가.

문제는 백작이 또 같은 짓을 충분히 저지르고도 남는다는 것이었다.

루이센에게 누명을 씌우겠다는 계획, 그건 허무맹랑하다고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이미 몇 번인가 루이센은


악마숭배자들의 힘으로 기억이 조작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아직 칼튼이 공작령을 점거하고 있던 때, 비너드 가문에서 보낸 항복 사절은 열흘 넘게 황야를 헤매고도 기억하지


못했다. 보톤 자작의 저택에서도 기억 조작을 시도하려 했다. 루이센들이 막아 수포가 되었지만.

그 짓을 왕성에서, 의식을 통해 더 강력해진 힘으로 또다시 반복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백작이 저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면, 루이센에게 말하지 않은 사전작업도 전부 완벽하게 해 두었을 것이다.

‘어쩐지 왕성에 처박혀서 가만히 있는다 했어.’

방심을 노리고 루이센의 뒤통수를 후려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이센은 백작이 파놓은 함정에 완벽하게
걸려들어 버린 것이고.

“내가…… 당한 거군. 빠져나갈 길이 없어. 대단하군, 백작. 대단해.”

하, 루이센은 크게 탄식했다. 그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백작은 희열에 가득 찼다. 패배를 인정하고
좌절하는 루이센의 모습을 보자 전율이 흘렀다.
아아아, 백작은 황홀한 표정으로 긴 신음을 흘렸다. 백작의 손이 루이센의 턱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그는 몽롱한
눈으로 루이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 얼굴이야. 이 얼굴이, 이렇게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 이날만을 기다렸지.”

루이센은 인상을 썼다.

“네가 중요시하던 아니에스 공작의 명예는 시궁창에 처박힐 거야. 공작가는 처절하게 몰락할 거고. 이 내가,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는 거야. 항상 올려다보던 너는 이제 내 발만 쳐다보게 되겠지.”

루이센의 표정이 점점 더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럴수록 백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지껄여 댔다.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공작가를 향한 악의가 묻어났다.

‘좀…… 이상한데.’

백작의 시선이 어딘가 끈적하게 느껴지는 건 자신의 착각이라 쳐도,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백작이 루이센
위로 다른 어떤 사람을 투영해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아버지인가?’

대체 왜 그렇게 아버지에게 집착하는지 궁금했다. 루이센은 백작의 상태를 살폈다. 오랜 시간 집착해 온 만큼,
그것이 달성되자 기쁨에 머리가 돌아 버렸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적당히 찌르면 다 말해 줄 것
같았다.

“나는 내 아버지가 아니야.”

“……그래. 그렇지.”

백작은 루이센의 얼굴을 밀치며 손을 뗐다. 역시 내 얼굴에서 아버지를 본 거군. 루이센은 확신했다.

“……왜 그렇게 나와 공작가에 집착하지? 내 아버지 때문인가?”

“그래. 맞아. 로버트 아니에스. 그자 때문이지.”

백작은 순순히 대답했다. 완벽하게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더 숨기고 말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상하네. 내 가신들 말로는 자네가 장례식에서 오열할 정도로 내 아버지를 흠모했다고 들었는데.”

“누가, 그딴 위선자를!”

백작은 정곡을 찔린 듯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럼 진실은 뭐지?”

루이센은 이때다 싶어 물음을 던졌다.

137 화
더블레스 백작은 선대 공작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던 때부터 한결같이 그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집안은 명예롭고
부유했으며, 존경스러운 부모를 가졌고, 외모 또한 아름다웠다. 또 영특하고 뛰어나 뭐든 능숙하게 해냈다.
온화하고 따듯한 빛이 항상 그를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그를 사랑하긴 했지. 그를 칭송했어. 하지만 나만은 달랐다. 나만은 그의 본성을 알았으니까!”

“본성?”

“그래. 그 오만하고 건방진 위선을 나만이 간파해 냈다고!”

백작은 갑자기 흥분해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겉으로는 사람 좋은 척 웃고 있지만 네놈도 그렇고, 네 아비도 그렇고, 하나 같이 무관심하기 짝이 없지. 너희


아니에스들 눈에는 모든 사람이 다 우스워 보이겠지! 잘난 황금들판의 지배자이시니 말이야!”

“……아버지가 자네에게 뭐라도 한 건가…….”

“그러면 차라리 나았겠지. 선대 공작과 내가 만난 게 열 살 때야. 수십 년을 보아 오면서, 잘 지내려고 애를


썼지만 그 사람의 안중에 나는 없었어. 만나면 성의 없이 고개나 까딱이고, 눈이 마주쳐도 말 한마디 먼저 거는
법이 없었다고! 모든 사람에게 그랬지!”

백작은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선대 공작과 마주친 것이 엊그제 일이라도 되는 양 분노했다.


루이센은 어색한 느낌이었다. 아들인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타인인 백작이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재수 없는 인간 같으니. 나라고 좋아서 다가간 줄 알아? 아니. 나는 그 사람이 싫었어.”

백작의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남부의 영주들끼리 우호를 다지는 행사가 많았다. 그런 모임이 있을 때면 어른들은
선대 공작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역시 공작가의 피는 다르다느니, 위대한 가문에 뛰어난 자손이라느니.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선대 공작은 당당히 자신의 뛰어남을 자랑했다.

그에 반해 백작은 주목받지 못했다. 집안도, 능력도, 외모도, 어느 것 하나도 선대 공작보다 뛰어난 게 없었다.
백작만 두고 보았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던 능력들도 선대 공작의 옆에서는 빛이 바랬다. 사람이 이토록
초라하고 비참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백작은 선대 공작을 통해 배웠다.

고작 백작가 후계자, 존재감 없고, 능력도 어정쩡하다. 그냥저냥 하게 살다 죽을 인생인 자신에 반해 그는


너무도 찬란하지 않은가.

열등감이 차곡차곡 백작의 안에 쌓였다.

“차라리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그 사람은 어디서든 눈에 띄었지.”

싫어도 자꾸 시선이 선대 공작을 향해 갔다. 그가 보이지 않으면 애타게 찾게 되었고, 그가 없는 자리는 금방


흥미를 잃었다.
수십 년이 지난 젊은 시절을, 백작은 선명하게 기억을 했다.

수도의 어느 연회에서 자신은 기둥 뒤에 숨어 선대 공작을 찾았다. 선대 공작은 언제나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가장 화려한 장소의 중심에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불이 일었다. 그러다 선대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백작은 왠지 모를 기대감을 품었으나, 그의 시선은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을 뿐.

그때의 비참함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세상은 부조리해. 왜 누군가는 모든 것을 갖고, 왜 누군가는 아무것도 갖지 못하지?”

백작은 비극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는 당신도 귀족으로 태어난 덕에, 평생 부족함 없이 살았잖아?’

루이센은 목구멍까지 튀어 오른 말을 간신히 삼켰다.

“그래서 나는 악마숭배에 빠져들었지.”

세상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했을 때, 악마숭배자들의 교주를 만났다. 당시에는 다른 신도도 없어 교주라고 하기도
어렵긴 했지만. 백작은 그를 만나 악마숭배에 심취하게 되었다.

“악마숭배는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줬어.”

백작은 악마숭배를 통해 상상도 못 할 힘을 얻었다. 그 힘으로 몬스터를 부리고, 사람을 조종할 수 있었다.

“교주의 말은 모두의 가슴을 울렸어. 이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어도 자업자득이야.”

백작은 교주를 백작령으로 데려와 후원해 주며, 세상을 불태우자는 결의를 함께했다. 악마숭배자들의 세력이
커지고 세상이 어지러워질 때, 반드시 선대 공작을 자신의 앞에 무릎 꿇리겠다고, 그로 인해 그에게 자신 역시
특별한 사람임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그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그전에 선대 공작이 죽는 건 생각도 못 했던 사고였어. 나는 너무 분해


참을 수가 없었다.”

남부에 전염병이 퍼지자 선대 공작은 몸을 사리지 않고 전염병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덕에 전염병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가 병으로 죽었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웠고 너무도 숭고했다.

백작은 장례식에 참석했다. 선대 공작의 무덤 앞에서 오열했다. 드디어 이길 수 있었는데! 이제야 겨우 내


원한을 갚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나이에, 한순간에 세상을 떠나 버리다니!

허망하다! 모든 것이 허망해!

이제는 무슨 짓을 해도, 나는 그를 넘어서지 못하겠구나.

모든 것을 가졌던 선대 공작은 그 죽음마저도 완벽했으니까.


그 뒤, 백작은 한동안 폐인처럼 지냈다. 깊은 무력감에 빠져 허우적댔다. 그때 교주는 또 한 번 백작을 구했다.

“교주가 그러더군. 아직 아니에스 공작가가 남아 있지 않으냐고.”

백작은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다, 선대 공작은 죽었지만 그가 목숨처럼 아끼던 공작가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니에스 공작가를 무너뜨리고 대영주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게 되면 어떨까? 그 자리를 물려받은 선대 공작과
달리 자신은 스스로 힘으로 쟁취해 낸 것이니, 자신이 선대 공작보다 더 뛰어나다는 증명이 될 것이다!

“결심했지. 선대 공작이 있던 그 자리를, 내가 갖자고.”

왕은 노쇠하였고 젊은 왕자 둘은 치열하게 경쟁하였으니, 왕위쟁탈전이 벌어질 것은 모두가 예상한 일이었다.


백작은 이때를 노렸다. 왕국이 몹시도 혼란스러울 때를 이용해, 아니에스 공작가를 몰락시키려는 계획을 짰다.

루이센이 선대 공작을 닮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루이센은 제 아비의 반도 닮지 못한 머저리였다.

“모든 게 순조로웠지. 네가 갑자기 칼튼에게 항복하더니 망나니짓을 때려치우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그래 봤자라고 무시했다. 하지만 루이센은 백작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며 백작이 계획한 모든 것을 망쳐
놨다. 너무도 화가 나, 더 틀어지기 전에 그냥 루이센을 죽여 버릴까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루이센을 만나고 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다시 만난 루이센은 어느새 그의 아버지와 쏙 닮아 있었다.
어느새 죽일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 얼굴을 보자 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깊은 원한이 되살아났다.

루이센을 자신의 앞에 무릎 꿇리자, 그를 살려 두자.

최초의 계획대로, 루이센의 명예를 땅에 처박아 아니에스 공작가를 역사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결심이 섰다.

백작의 긴 이야기를 듣고, 루이센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뭐야? 결국 나나 아버지가 잘못한 건 없다는 거잖아?’

하도 원한, 원한 하길래 혹시라도 선대 공작이 백작에게 나쁜 짓을 한 건가 걱정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냥


백작 혼자 열등감에 찌들어 북 치고 나팔 불고 난리를 친 것에 불과했다.

‘회귀 전 내 인생은…… 고작 이딴 이유로 농락당했던 건가…….’

억울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지난 삼 년간의 비참했던 삶이 떠올랐다. 분하고 화가 나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진실을 알고 난 소감이 어떤가?”

“……미친놈.”

“하하하하!”

백작이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아니에스공작을 완벽히 굴복시켰다는 쾌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백작님.”
백작의 기사가 지하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아, 곧 의식이 시작되려나 보군. 대화가 생각보다 길어졌어. 슬슬 작별 인사를 하자고.”

백작이 신호를 주자, 백작의 기사가 루이센의 어깨를 꾹 짓눌렀다. 루이센은 버둥거렸지만 단련된 기사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백작은 루이센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잠시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많은 게 달라져 있을 거야.”

백작의 손이 루이센의 이마에 닿았다.

삐이이이.

귀를 찢어 버릴 듯 날카로운 이명이 들려오면서, 루이센의 시야가 급격하게 뒤흔들렸다. 강렬한 어지러움이


몰려오며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

루이센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이 꼭 끈이 잘린 나무 인형 같았다. 백작은 루이센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쓸어넘겼다. 루이센의 얼굴 너머로 평생 잊지 못할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네는 평생 떠돌면서, 내 승리를 지켜보도록 해.”

백작은 중얼거렸다. 그는 기사를 시켜 루이센을 철창 안에 가둔 뒤 지하 감옥을 떠났다. 곧 의식이 시작된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이제는 선대 공작을 잊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

백작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 감옥을 떠났다. 이제 루이센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차피 그를 구하러 올 사람은
없을 것이고, 계획은 순조로우니까. 그래도 방치해 두긴 그러니 기사를 두 명만 남겨 지하 감옥 앞을 지키게
했다.

백작이 사라지고, 복도는 침묵에 휩싸였다.

하나.

둘.

셋.

……열.

갑자기 오른쪽에 서 있던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의 기사를 순식간에 제압하여 쓰러뜨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난 일이라 비명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오른쪽 기사가 투구를 벗어 던졌다.

그는 백작의 기사로 위장하고 있던, 칼튼이었다.


138 화

루이센이 왕성에 들어왔을 때, 당연하지만 칼튼도 따라왔다. 다만 일부러 눈에 띄지 않도록 루이센의 주변이 아닌,
다른 수행원들의 틈에 섞여 있었다.

어차피 루이센의 옆에서 밀착 호위는 불가능하다. 정체가 들키면 루이센이 곤란해지기도 하거니와, 왕의 침실에
기사나 하인이 따라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뒤에 숨어서 루이센을 지키는 것이 낫다.’

루이센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더블레스 백작이 언제 또 무슨 꿍꿍이를 꾸밀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루이센이 왕의 침실로 들어간 뒤, 공작가의 기사들은 미리 부여받은 임무대로 성문을 열기 위해 비밀통로로


흩어졌다. 하지만 칼튼은 남아서 적당한 장소에 몸을 숨기고 이후 벌어지는 일들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한참 기다리자 왕의 죽음이 방 밖으로 전해졌다. 백작이 방에서 나와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루이센이 1 왕자와 나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튼은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급히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에 충분한 거리를 두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1 왕자가 루이센을 방 안으로 밀어 버리는 모습과 뒤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더블레스 백작이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함정이었구나!’

1 왕자를 미끼로 루이센을 유인했음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루이센이 곤경에 처했다! 칼튼은 당장 달려가 루이센을
구하고 싶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런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자신이 뒤에 남은 것이니 말이다.

‘굳이 함정을 파서 유인한 걸 보면, 백작은 루이센을 해칠 마음이 없어. 다른 계획이 있는 거 같은 낌새인데……
일단 가둬 두려나?’

상황 파악을 마친 칼튼은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더블레스 백작은 계속해서 방심해 주는 게 루이센을 구하기
좋았다.

그는 좀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어슬렁거리는 백작의 기사를 하나 잡았다. 기사의 갑옷과 투구를 빼앗아 위장을 한
뒤, 태연하게 지하 감옥 쪽으로 향하는 백작의 기사와 합류했다.

그리고 백작이 충분히 멀리 떠나자, 백작의 기사를 제압한 것이다.

칼튼은 서둘러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다. 눈에 띄지 않도록 제압한 기사를 지하 감옥 안에 밀어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하 감옥 안은 어두컴컴했으나 칼튼은 루이센을 금방 찾았다. 루이센은 철창 안에 쓰러져 있었다. 겉옷을 벗겨


갔기에 무척 춥고 불편해 보였다.

칼튼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제일 좋은 방에 곱게 모셔도 마땅치 않은데 저렇게 막 방치해 두다니! 어떻게
저런 극악무도한 짓을 할 수 있지?

캉!

쇠사슬과 자물쇠는 간단하게 부숴 버리고, 칼튼은 루이센을 안아 들었다. 호흡이 안정적인 걸 보아 잠이 든 상태


같았다.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고 무슨 악몽을 꾸는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여 가슴이 아려 왔다.

‘그 이상한 힘을 쓴 거 같군.’

칼튼은 따로 챙겨 둔 성수를 꺼내어 루이센의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루이센이 제대로 삼키지 못하자 자신의 입에
성수를 머금고 루이센의 입으로 전달했다. 그런 뒤 초조한 눈길로 루이센을 살폈다.

다행히 루이센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루이센은 아주 끔찍한 악몽을 꿨다. 너무 실감 나서 정신을 차리고도 어느 것이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꿈속에서 느낀 온갖 두려움과 불안감이 루이센을 따라붙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루이센?”

루이센을 이끈 것은 칼튼의 목소리였다. 그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눈을 떴다. 시야 한가득 칼튼의 얼굴이 보였다.

‘칼튼…….’

그 순간 생생했던 악몽도 연기처럼 사라지고 질기게 따라붙던 부정적인 감정이 싹 잊혔다. 칼튼의 얼굴과 그를
다시 만난 반가움만이 가슴 속을 가득 채우며,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역시 나의 칼튼이야.”

루이센은 그대로 칼튼의 멱살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칼튼이 드물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쓰러지면서 눈을 뜨면 자네가 보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기대대로 돼서 기뻐.”

루이센은 몇 번 더 칼튼의 뺨에 기쁨의 키스를 남겼다.

칼튼이라면 어떤 역경이 있어도 자신을 구하러 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함정에 빠졌음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백작 앞에서 더 대범하게 굴 수 있었다.

덕분에 백작의 사연도 알 수 있었다. 정작 듣고 보니 몰라도 그만인 시답잖은 이야기였지만.

“아픈 데는 없고? 괜찮아요?”

“아, 머리가 아파. 백작이 내 머리채를 잡아당겼어.”

루이센은 힝, 하고 불쌍한 척을 하며 칼튼의 품에 기댔다.


“머리를? 어디서 감히! 그 자식 다음에 만나면 머리카락을 다 뽑아 버릴게요.”

칼튼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조심스럽게 루이센 머리에 입 맞추고 손으로 쓰다듬었다. 한껏 어리광을 부리고
기운을 되찾은 루이센은 칼튼에게 계획이 틀어졌다는 사실과 백작의 계략을 말했다.

“잡힌 기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 아마 우리가 직접 가서 성문을 열어야 할 거 같아.”

“일단 여기서 나가죠.”

루이센은 칼튼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지하 감옥의 계단을 올라가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땅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쿠웅, 하는 굉음도 들려왔다. 자칫 했으면 넘어질 수도


있을 진동이었으나 칼튼이 적절히 부축해 준 덕분에 두 사람은 무사히 지하 감옥을 벗어났다.

밖으로 다 나왔을 때쯤에는 진동이 멈췄다. 아주 짧은 지진이었으나, 칼튼과 루이센은 이 지진이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란 걸 알았다.

“백작이 의식을 시작했나 봅니다.”

어느새 시간도 훌쩍 지나 밖은 석양이 지고 있었다.

“서두르자.”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

왕성이 공작성만큼 넓지는 않지만, 그래도 본관에서 부대시설을 둘러싼 성벽까지의 거리는 상당했다.

두 사람은 마구간으로 향해 제피스를 찾았다. 제피스는 익숙하게 루이센과 칼튼을 태우고 북쪽 성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왕성의 내부는 아직 평화로운 편이었다. 땅이 흔들린 것은 우연이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
왕의 죽음을 전해 들었기에 정신이 다른데 팔려 있었다. 왕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태여 도망치라고 말해도 듣지 않을 게 뻔했기에 루이센과 칼튼은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다.

북쪽 성문까지는 막힘없이 달려갔다. 악마숭배자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의식을 치르는 쪽으로 몰려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루이센과 칼튼이 북쪽 성문에 이르렀다. 성문 근처에는 왕실 기사들과 근위병들이 모여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평소보다 수비가 과했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다.

“루이센 아니에스 공작! 대영주가 되어 충성 맹세를 어기고 왕가에 반역의 칼을 겨누다니요!”

왕실 기사단장이 소리쳤다.
“누구도 성문을 열 수 없습니다. 밖에 반역자 무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다 알고 있습니다. 저와 기사단은
푸른 수사자의 명예를 걸고 여기서 당신을 막을 것입니다!”

그 말과 함께 왕실 기사단이 칼을 뽑아 들었다. 성벽 위에 있던 근위병들 역시 루이센과 칼튼에게 활을 겨누었다.

루이센은 머리가 띵해졌다. 반역이라니. 혹시 자기 계획이 틀어져서, 루이센 일행이 무사히 성문에 도착할까 봐
더블레스 백작이 왕실 기사단 쪽에 미리 손을 써 둔 것일 게 뻔했다.

‘치밀한 인간 같으니!’

그 머리를 건전한데 썼으면 모든 사람이 행복했을 텐데!

루이센은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꾹꾹 누르며 일단 말에서 내렸다. 그러면서 칼튼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칼튼이
막는 사이, 루이센이 달려가 성문을 연다.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하며 계획을 맞추었다.

그리고 칼튼이 막 검을 뽑아 든 그때, 갑자기 다시 한번 큰 지진이 일었다. 이번에는 더 강하고 길게 진동이


이어졌다.

아악!

왕성 쪽에서 비명 소리가 퍼졌다. 모두 왕성을 바라보았다. 왕성 쪽에서부터 흐릿하게 검붉은 안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석양으로 붉게 물든 하늘이었으나, 그 안개는 확연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것은 땅을 기는 뱀처럼,
바람을 거스르며 구름 위를 기어갔다.

“저게 뭐야?”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부는데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정확히는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기사들과 근위병들이 정신을 빼앗긴 그 틈을 루이센은 놓치지 않았다.

칼튼을 방어막으로 남겨 두고 성문으로 달려가, 지체 없이 문을 열어 버렸다.

쾅!

문을 여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그제야 왕실 기사단이 정신을 차렸으나 칼튼에 의해 진로가 막혔다.

그리고 곧, 모리슨이 성기사들을 이끌고 왕성 안으로 진입했다. 성기사들의 위로 거의 저물어 가는 석양빛이


비치며 경건함이 감돌았다. 빛이 그들의 등 뒤로 수호하는 것만 같았다. 그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모두 은빛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또한 그들은 마치 한 몸이기라도 한 것처럼 대열을 맞추어
움직였는데 그 모습이 사람이 아닌, 신이 직접 부리는 병정 인형을 보는 것 같아 위화감과 함께 큰 압박감을
주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신의 뜻을 막는 것만 같아, 왕실 기사들은 놀라면서도 주춤했다. 일부는 칼을 내리며


전의를 상식하기도 했다.

모리슨이 루이센을 발견하고 놀라 물었다.

“공작님이 왜 여기 계십니까?

“일이 틀어졌어. 의식은 이미 시작되었고.”


대충 설명해도 모리슨은 잘 알아들었다.

“얼른 의식이 시작되는 곳으로 가죠.”

“그래야지.”

“왜 여기에 성기사들이 있는 겁니까?”

왕실 기사단장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왕성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며, 성기사들은 왜 왕성으로 쳐들어오고, 그걸 왜 아니에스
공작이 함께한단 말인가? 반란군은 어디에 있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말 좀 해 보십시오!”

왕실 기사단장이 소리쳤다. 다른 기사들도 상황 파악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보다시피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지. 자네는 속은 거고. 물러나게. 쫓아오지도 마.”

“하지만…… 우리에게는 왕가를 수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네들은 당할 수 없는 일이야. 이렇게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도 1 왕자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어진다!”

루이센의 호통에 왕실 기사단장이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검붉은 안개가 퍼진다면, 이 사람들은 쓰러지니 필요
없다. 성수를 먹이면 버티기야 하겠지만 그만큼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데려가서 걸리적거리느니 여기 두는 게
낫다.

루이센은 적당히 타협안을 내밀었다.

“정 뭐라도 해야겠다면…… 계속 성벽을 지켜라. 검붉은 로브를 입은 놈들이 도망치려고 하거든 무슨 수를 써서든
사살해. 할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공작님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타협 성공이다. 왕실 기사단은 양옆으로 비켜섰다. 루이센은 다시 칼튼과 말에 올랐다.

“가자고.”

제피스는 힘차게 달려나갔다. 그 뒤를 모리슨과 성기사들이 따랐다.

의식이 치러지고 있는 본건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검붉은 안개는 점점 짙어져 갔다. 길 위에서 동물들이
쓰러지고 벌레가 몸을 까뒤집고 덜덜 떨었다.

그렇게 일행이 왕성의 본건물에 도착했을때, 텅 비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꽤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으으.”

루이센은 신음했다. 대부분이 방금 전까지 살아 있었을 왕실 사람들의 시체였다. 구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두 명의 악마숭배자와 다수의 백작가 기사들이 있었다.

키이이이익!
허공 위로는 박쥐를 닮은 몬스터가 날아들었다. 성문이 열린 것을 깨닫고, 성기사들을 막기 위해 백작이 보낸
병력이었다.

139 화

입구를 지키고 선 악마숭배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평생 도망치기만 하던 자신이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준이


되었다는 사실이 몹시 흥분되었다.

“하하하! 제 발로 무덤에 걸어 들어오다니 멍청한 것들. 너희를 도와줄 빛은 어디에도 없다!”

악마숭배자의 말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구울과 백작의 기사들이 전방에서 성기사들을 압박했다.

“가랏!”

악마숭배자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을 맴돌던 사람 머리통만 한 박쥐 몬스터가 일제히 하늘에서부터


성기사들을 공격했다. 날카로운 발톱을 이용하여 치고 빠지고, 시야를 어지럽혔다.

“저놈들도 성안에서 놀고만 있던 건 아닌 모양입니다.”

칼튼이 평가했다. 루이센도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센 일행이 밖에서 준비하는 동안 백작도 왕성 내에서 싸움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신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

성기사들이 구호를 외쳤다. 그들의 주변으로 성스러운 푸른 불길이 일어났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갖추었다. 순식간에 일자(-) 모양으로 대형을 갖추며 앞뒤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침착하게 막아 내었다.

개개인의 무력과 조직력을 놓고 봤을 때, 성기사들 쪽이 우세했다. 적의 공격은 제법 날카로웠으나 치명타를 줄


정도는 아니었다.

“계속 이런 식이면 우리가 질 겁니다.”

칼튼의 표정은 어두웠다.

“왜?”

루이센이 물었다. 칼튼은 박쥐 몬스터를 날려 버리며 대답했다.

“시간이요.”
악마숭배자들은 성기사들의 진입을 막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치고 빠지는 식으로 공격을 하며, 성기사들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시시각각 건물을 휘감은 검붉은 안개는 짙어지고 있었다.

검붉은 안개는 악마숭배자들에게 힘을 준다. 의식이 진행될수록 악마숭배자들의 힘은 강해졌다. 악마숭배자들에게


성기사의 힘이 치명적이라면, 그 반대도 적용되었다. 푸른 불빛이 조금씩 약해지는 것이 보였다. 적당한 바람은
불길을 강하게 만들지만 너무 강한 바람은 불을 꺼뜨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더 시간을 끌면 안 되겠습니다.”

모리슨은 결단을 내렸다. 그도 칼튼과 같은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조금 피해를 입더라도 돌격하겠습니다.”

“그래도 이 인원이 전부 건물 안으로 진입하긴 어려울 거야.”

건물 입구는 상대적으로 좁았다. 성기사들이 모두 안으로 진입하려면 자연히 병목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저와 두 분만 우선 진입합니다. 성기사들은 길을 뚫고 후방을 지키겠습니다.”

“그래.”

모리슨은 성기사들에게 바로 지시를 내렸다.

“돌격한다!”

성기사들은 화살표 모양으로 대형을 바꾸며 창을 앞으로 내세웠다. 빠르게 속력을 올리며 문을 향해 돌격했다. 그
모습이 하나의 거대한 창과 같았다.

“막아! 중앙으로 모여!”

악마숭배자가 급히 대응했다. 더 많은 구울이 몸을 내던지며 성기사들의 진로를 방해했다. 사방에서 몬스터와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만만치 않은 저항이었다. 성기사들은 오직 길을 뚫기 위해 그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아 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성기사들이 타격을 입었으나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속도는 줄지 않았고 성기사들이 지나간 사이로 틈이
생겨났다.

성기사들이 부상을 감수하며 만들어 낸 기회였다. 칼튼은 능숙하게 제피스를 몰았고, 루이센은 방해가 되지 않게
몸을 수그렸다. 그 뒤로 모리슨이 따랐다. 세 사람은 바람같이 건물의 안으로 진입했다.

“젠장! 막아! 문을 막으라고! 뭘 하고 있어? 후방이 비었다! 신의 졸개들을 포위해!”

악마숭배자가 소리쳤다. 비록 틈을 허용하긴 했으나 그에게는 죽여도 죽지 않는 구울이 산더미처럼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구울들은 문 앞으로 몸을 던졌고, 성기사들의 추가 진입을 차단했다.

그러면서 적의 병력이 성기사들을 에워쌌다. 무리한 돌격으로 후방이 비었기에, 성기사들은 이전보다 더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성기사들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기도문을 외웠다. 그들을 둘러싼 빛이 조금 더 강하게 일렁였다.
건물 입구의 전투는 순식간에 난전으로 변했다.

가까스로 건물 안쪽으로 진입하였으나, 세 사람의 상황도 순탄치는 않았다. 문 너머에는 좀 더 많은 기사들이


있었고, 그들이 세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그대로 돌파한다!”

칼튼이 앞장서서 대검을 휘두르며 앞을 뚫었다. 뒤이어 모리슨이 바짝 따르며 메이슨으로 잔당을 처리했다.
칼튼은 루이센을 태우고도 어렵지 않게 기사들을 벗어났다. 칼튼에게 이런 식의 대인 전투는 오히려 쉬웠고
제피스 역시 경험이 풍부했다. 문제는 모리슨의 말이었다.

평범한 교회의 말은 이런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백작의 기사들을 뚫고 지나가던 중, 모리슨의 말이


멈칫하고 말았다. 모리슨이 급히 말을 재촉하였으나 속도가 늦춰져 버렸고, 그 틈에 백작의 기사가 말에게 단검을
던졌다.

히이잉!

“윽!”

말이 무너지면서 모리슨이 낙마했다. 저만치 앞서가 있던 루이센과 칼튼이 돌아보았다. 구하러 오려는 것이었다.
함께 싸우면 이기겠지만 시간이 소모되고, 또 칼튼이라는 병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어진다. 위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치명적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모리슨은 얼른 일어서며 소리쳤다.

“먼저 가세요!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자네가 없으면 의식의 장소를 찾을 수가 없어!”

“교황님께서는 공작님이 승리로 이끌 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더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칼튼은 말머리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루이센은 고개를 돌려 모리슨을 바라보았다.

모리슨은 메이슨을 들고 백작의 기사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모리슨은 괜찮을 겁니다. 그에 비하면 백작의 기사는 어중이떠중이예요.”

칼튼이 루이센을 안심시켰다. 사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돌이킬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제피스를 타고 복도 너머로 멀리 사라졌다.

***

비슷한 시각의 남부.

겨울에 접어들면서 해가 부쩍 빨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농가의 겨울은 특히 더 밤이 빨랐기에,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며칠째 고요한 밤이 계속되었기에 누구도 더블레스 백작령과 아니에스 공작령을 잇는 숲에 수많은 병력이 대기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에스 공작가의 총관은 병력을 돌아보았다. 아니에스 공작가의 병력과 칼튼의 용병단, 그리고 성기사들이 각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자정이 되면…….’

약속된 공격 개시 시점을 기다리며, 모든 준비를 마쳐 두었다. 몇 번이고 검토한 작전 역시 완벽했다.

그들의 목적은 악마숭배자의 토벌.

악마숭배자들의 본거지는 백작가의 저택 지하에 위치한다. 대부분의 악마숭배자들이 그곳에 모여 있다고 했다.
이단심문관이 저택 내부에 잠입하여 알아낸 사실이었다.

자정이 되면, 이단심문관이 외성의 문을 열기로 되어 있었다. 병력은 빠르게 열린 성문을 통해 저택으로 이동해,
악마숭배자들을 기습한다. 그와 동시에 백작가의 가신들을 모두 제압해야 했다.

백작가의 병력이 얼마나 저항할 것인가, 또 악마숭배자들이 어느 정도의 몬스터를 끌어들이며 저항할 것인가가
승패의 관건이었다.

‘미리 숲속의 몬스터들은 토벌해 두었지만…….’

후방은 정리해 두었다. 인근 영주들에게도 무슨 소란이 나도 모르는 척하라고 미리 경고했기에 변수가 일어날
확률은 적었다.

‘준비는 완벽하다. 하지만…….’

총관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적은 미지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단심문관을 통해 정보를 얻긴 했지만, 알면
알수록 그들의 잔악무도함에 놀라고, 또 두려움이 일었다.

‘지금쯤 수도에서도 일이 한창 진행되고 있겠지…… 영주님은 어찌 이런 자들과 맞설 수 있었단 말인가.’

수많은 병력의 뒤에 숨은 이 늙은이조차 이렇게 두려운데, 루이센은 스스로 앞장서 적진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했다. 어리기만 했던 루이센은 부쩍 성장하여, 이제는 어느새 그들 모두를 이끌고 있었다. 그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애틋하여 총관은 남몰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곤 했다.

‘무사하여야 할 텐데.’

그간의 모습을 보면 어떤 일이 닥쳐도 충분히 이겨 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칼튼도 함께였고. 그자는
루이센에게 껄떡대는 게 탐탁지 않아도, 그 실력만큼은 확실하니 말이다.

‘그 부하들도 꽤나 믿을 만한 자들이고. 용병치고는 정중하고…….’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칼튼의 부관이 갑자기 소리쳤다.


“형제들이여! 돌격! 돌격! 지금 당장 성문까지 달려간다!”

그와 동시에 칼튼의 용병단이 우르르 성문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뭣들 하는 건가!”

총관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아직 공격 개시 시점까지는 세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지금 달려나가 봤자 성문은


닫혀 있고, 적에게 기습만 들킬 뿐이었다. 신중히 세운 계획이 무너지려고 했다.

그때 병사 하나가 총관에게 달려왔다.

“성문이 열렸습니다.”

“벌써?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안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문을 연 자가 성문을 열자마자 쓰러졌습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자세한 정황은 몰라도 확실한 것은 적이 기습을
알아차렸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적은 아둔하지 않다. 불안감이 세게 올라왔지만 총관은 냉정을 유지했다.

“우리도 움직이세.”

기사단장이 총관의 말을 듣고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기사들도 움직인다. 이미 칼튼의 부하들은 성문에 도착해,
문을 막으려는 백작 측 병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계획한 대로 공작가의 병력과 성기사들도 움직였다.

후방에 남은 총관은 초조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제 그가 할 일은 소식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긴 밤이 될 것이다.

부디 왕성에서도, 이곳에서도 좋은 소식이 오기를.

총관은 흐릿한 달빛에 기대어 기도하였다.

***

본성에 들어선 칼튼과 루이센은 말에서 내렸다. 칼튼은 제피스를 풀어 주었다. 넓은 입구가 아니면 말을 타고
움직이기 곤란했다. 제피스는 알아서 안전한 곳을 찾아 사라졌다.

두 사람은 계단에서 멈추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어디로 가야 하지?”
아무도 의식이 벌어지는 장소를 모른다. 악마숭배자의 기운을 쫓아 의식의 장소를 찾아내야 할 모리슨은 낙오되어
버렸다. 산 넘어 산이었다.

140 화

두 사람은 계단을 바라보았다. 계단은 위로도, 아래로도 이동할 수 있었다.

“일단 어느 쪽으로 갈지부터 정하죠.”

당장 의식의 장소를 모르니 방향부터 정하자는 게 칼튼의 제안이었다. 루이센도 동의했다.

“일단 1 층은 아니에요.”

만약 의식 장소가 1 층에 있었다면 건물 입구에서부터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도 많이 다녀서 은밀히


의식을 준비하기 적절하지 않았다.

“지하도 아닐 거야.”

루이센이 추측했다. 지하에는 식료품 창고나 와인 저장고 같은 게 많아서 사람이 자주 오간다.

“그럼 일단 올라가죠.”

“그래.”

두 사람은 빠르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계단은 2 층에서 끊겨 있었다.

“3 층으로 가는 계단은 다른 데 있어.”

왕성의 외관은 꼭짓점이 뾰족하게 치솟은 오각형 모양으로, 첨탑이 촛대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부가 단순할 거 같지만 보안을 위해 공간을 잘게 쪼개 어지럽게 배치하여 매우 복잡했다. 어디가
어디인지, 길을 외우는 데만도 한참이 걸려 매년 신입으로 들어온 시종이 길을 잃고 울면서 구출되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다행히 루이센은 2 왕자에게 끌려다니며 왕성을 누볐기에 구조에 익숙한 편이었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은 헤매는
일 없이 2 층 복도를 내달렸다.

루이센이 방향을 지시하고, 칼튼은 조금 더 앞에 뛰었다.

2 층의 상황은 1 층과 비슷하게 처참했다. 복도 가득 검붉은 안개가 옅게 깔려서,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일단 한두 명을 확인해 보니, 의식을 잃긴 했지만 숨은 붙어 있었다.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 루이센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을 방치해 두고 있지?’

백작은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재물로 바친다고 했는데, 이렇게 방치해 두는 이유가 뭐지? 전부 다 죽일 생각은
없다는 건가?

의문이 들었지만 오래 생각하지는 못했다. 백작의 기사 서너 명이 시야가 제한된 것을 이용해 사각지대에서


루이센과 칼튼을 공격해 왔다. 루이센은 움찔하며 몸을 사렸다. 그사이 칼튼이 순식간에 백작의 기사들을
제압했다.

3 층에 도달하기까지, 백작의 기사들이 수시로 기습을 해 왔다. 병력이 2 층에 집중된 것 같았다.

‘그럼 3 층이 의식의 장소인가?’

3 층에는 왕의 침실 및 왕족을 위한 공간이 있으니, 그럴듯한 짐작이었다. 기대를 품고 두 사람은 3 층에


올라섰다.

칼튼은 더한 공격이 쏟아질 거라 예상하며 감각을 날카롭게 세웠다. 3 층은 2 층에 비해 훨씬 더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성수를 마신 루이센과 칼튼조차 부담스러운 정도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3 층의 복도를 걷는 동안, 어떤 기습도 없었다.

그어어.

구울만 느릿하게 복도를 배회하고 있었다. 행동을 봤을 때 조종을 받는 거 같진 않았다.

“3 층에서 지나친 구울들이요. 전하의 침실 앞을 지키던 시종이었어요.”

칼튼이 말했다.

“1, 2 층과는 다르게 3 층의 사람들은 다 죽어, 구울이 되어 버린 건가? 그럼 대영주들은?”

루이센과 칼튼은 급히 왕의 침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왕의 시체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칼튼이
카펫에서 사람을 끌고 간 흔적을 찾아냈다.

“다른 장소로 옮긴 모양입니다. 여긴 의식의 장소는 아니고요.”

“……그런가.”

루이센은 보톤 자작의 저택에서 악마숭배자들이 살려 둘 사람과 죽일 사람을 선별하던 것을 떠올렸다. 이번에도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오면서 본 사람들은 다 죽을 사람이란 말이군. 방치해 둔 이유를 알겠어. 의식이 진행되면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는 건가.”

여기까지 오면서 본 사람들을 떠올리자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 순간에도 그들은 죽어 가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도 의식의 장소에 점점 가까워지는 거 같습니다.”

칼튼의 말에 루이센도 동의했다.


1 층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검붉은 안개가 짙어졌다. 1 층 사람들은 기절 정도였지만 3 층의 사람들은 죽었다.
의식의 영향력이 위로 갈수록 더 강해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단순히 시간의 흐름 때문이라기에는 그 격차가 심했다.

“의식의 장소는 위에 있는 거야.”

이 위라면 4 층, 5 층이 있다.

“짐작이 가는 곳이 있습니까?”

“……한 곳 있어. 5 층의 대연회장.”

건물의 구조상 5 층은 상대적으로 면적이 좁았고, 층고가 높았다. 그래서 공간을 쪼개지 않고 하나로 두어,
즉위식이나, 장례식, 결혼식 같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에만 사용되었다.

십 년에 한 번 사용할까 말까 한 탓에, 평소에는 거의 방치되었다. 공간의 크기도 충분하며, 비밀스럽게 의식을


준비하기에도 적절했다. 무엇보다 백작의 허영을 충족시키기에도 좋았고.

칼튼이 손을 내밀었다. 루이센이 맞잡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4 층 계단을 올라갔다.

‘4 층은…… 차원이 다르네.’

루이센은 입술을 깨물었다. 검붉은 안개가 몹시 짙었다. 한 발자국의 앞도 보이지가 않았기에, 지진의 여파로
부서진 잔해에 자꾸 발이 걸렸다. 귀는 높은 산에 올라간 것처럼 먹먹해져서 칼튼의 발소리조차 아득히 멀게
들려왔다.

성수의 효과도 이만큼 짙은 이단의 힘 앞에서 완벽하진 못했다. 방심하면 바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정신 차려야 해.’

5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하나. 루이센은 그곳까지 칼튼을 안내해야 했다. 그는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용기를 내어 나아갔지만, 그럴수록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길이 맞는 건가? 맞게 가고 있는 거겠지?’

시각과 청각에 이어, 이제는 방향감각마저 어지러웠다. 불안과 초조함에 가슴이 꾹 조여 왔다. 분명 이 복도는
넓디넓은데, 한 걸음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추락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이센은 칼튼의 손을 꽉 쥐었다. 그러자 칼튼의 손이 호응하듯 힘을 주었다. 칼튼의 얼굴도 안개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서로가 옆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맞잡은 손뿐. 그럼에도 장님의 지팡이처럼, 외줄타기의 손에
들린 장대처럼, 루이센은 그것에 기대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던 그의 시야에 무언가 검은 존재가 들어왔다. 자신의 발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서, 그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죽음의 기사였다.

[이 앞은 누구도 지나갈 수 없다.]


빈 통 속을 긁는 듯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귓속에 꽂혔다. 그 순간 싸한 한기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달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4 층에 아무것도 없는 이유가 있었네요.”

죽음의 기사에게 5 층으로 가는 길목을 막게 한 모양이었다. 죽음의 기사는 감당하기 힘든 적이었으나,


희소식이었다. 5 층에서 의식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거니까.

칼튼이 죽음의 기사를 견제하며 검을 들고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왕성에 들어오기 전 모리슨은 죽음의 기사와 마주쳤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다음에 만나거든 죽음의
기사에게 말을 걸어 보라고 제안했다. 그에게서 회개의 가능성을 보았으니, 루이센이 나선다면 죽음의 기사라는
적의 강력한 전력을 제외할 수도 있을 거라고.

‘모리슨이 허튼소리를 하지는 않을 테니 일단 해 보기로 했지만…….’

죽음의 기사랑 대화라니. 회귀 전의 자신에게 말했다면 거품 물고 졸도했을 거다.

그때는 죽음의 기사가 자신을 벌하기 위해 쫓아온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붙잡힌다면 저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가,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되리라. 그것이 너무도 두려워 그를 피해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사실 지금도 좀 숨 막혔다.

‘내가 말을 한다고 듣기나 할까?’

루이센은 자신의 말솜씨가 시원찮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쭈뼛거리다가 칼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더 화나게 하면 어쩌지?”

“그냥 저걸 루거라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해요. 잘 안 되어도 제가 처리하면 되니까 마음 편하게.”

칼튼의 조언에 루이센은 루거에게 하고 싶은 말을 떠올렸다. 루거에게라면 물어보고 싶은 것도, 따지고 싶은 것도


많기는 했다. 그는 죽음의 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투구 속이 텅 비어 있긴 하지만, 체격은 비슷해서
루거를 연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저게 루거라면…….’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역시 하나였다.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루거, 이 개자식아.”

옆에서 놀란 칼튼이 “그렇다고 시비 걸라는 건 아니었는데요.”라고 작게 말렸으다.

그제야 루이센도 아차, 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작게 말했으니 들리지 않기를 바라였지만,


죽음의 기사는 반응을 보였다. 그가 수족처럼 움직이는 말이 제자리걸음을 하며 약간의 동요를 보였다.

‘망했네.’

루이센은 아찔해졌다. 왠지 칼튼에게 항복하러 갔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첫 마디부터 망했었지. 그래도


어떻게든 잘 수습하여 칼튼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긴 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잘 풀릴 거 같진 않지만…….’

어차피 망했다고 생각하니 한결 부담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회유는 포기하고 속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 끝내자 싶어졌다. 운이 좋으면 지난번처럼 잘 풀릴 수도 있고, 안 풀려서 더 망해도 칼튼이
어떻게든 해 주겠지.

루이센은 좀 더 과감하게 죽음의 기사에게 다가갔다. 칼튼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을 알기에 도전할 수 있었다.

[다가오지 마라, 침입자여. 이 이상 다가온다면…….]

죽음의 기사가 커다란 대검을 들어 보이며 위협했다. 섬뜩한 칼날은 루이센을 단숨에 두 동강 내고도 남을 것처럼
보였다. 가슴이 무척 떨렸지만 루이센은 태연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

141 화

“내가 정말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왜 날 쫓아다녀?”

회귀 전, 죽음의 기사는 시도 때도 없이 루이센을 쫓아다녔다. 외팔의 순례자가 그건 너의 망상이라고 말해도


납득이 안 갈 정도로 항상!

회귀한 뒤에도 자신의 주변을 맴돈다는 걸 보면, 분명 백작의 명령 같은 게 아니라 죽음의 기사의 자의적인
행동이라는 말인데. 그 이유가 루이센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는 백작의 편이잖아. 지난번에는 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야? 날 도와준 거야?”

말하다 보니 그동안의 답답함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울컥했다.

[침입자여, 돌아가라. 누구도 이 너머로 지나갈 수 없다.]

죽음의 기사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루이센은 인상을 썼다.

‘말이 통하는 거 맞아?’

모리슨은 대화가 된다고 했는데, 그냥 바위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네가 무슨 명령을 들었는지는 알았으니까 대답을 해 보라고. 내 말 알아듣는 건 맞지?”

갑갑함에 루이센이 더 앞으로 나아갔다.

쾅!
죽음의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칼튼이 루이센을 뒤로 잡아당겼다. 아슬아슬하게 커다란 검이 눈앞을 스쳤다. 그
여파로 선을 그은 것처럼 가로로 길게 바닥이 파였다.

[침입자는 죽인다. 그것이 내가 받은 명령. 돌아가라. 그 선을 넘는다면 나도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

죽음의 기사가 엄중히 경고했다.

“이상하네요.”

칼튼이 루이센의 귓가에 속닥였다. 루이센도 고개를 끄덕였다. 위협적으로 경고를 하긴 하지만, 결정적인 공격은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살려 보내지 않을 것처럼 굴면서 정작 하는 말은 돌아가라는 것뿐이다.

루이센은 왠지 그 이유를 알 거 같았다.

“너, 나 죽이기 싫은 거지?”

[…….]

죽음의 기사는 침묵했다. 루거와는 오래도록 함께했다. 죽음의 기사의 본질이 루거라면 이 침묵은 긍정의
의미였다.

“이제야 이해가 좀 되네.”

루이센은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아마 루거는 예전부터 자신을 살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회귀
전에 백작의 저택에서 자신을 쫓아낸 기사는 루거가 맞을 것이다. 저택에 있으면 루이센이 죽을 거 같아서
내보냈겠지. 아마 그 대가로 죽음의 기사가 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회귀한 뒤에도 루거는 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보톤 자작의 저택에서 악마숭배자는 루거에게 루이센을
죽이라고 했지만, 루거는 거부했다.

“그래서 네가 죽음의 기사가 된 거였어.”

죽음의 기사의 탄생 핵심은 ‘배신’이었다. 루거는 죽음 직전에 루이센을 선택했다. 이는 아버지이자 주군인
더블레스 백작을 배신한 것이다.

“너는 예전에도, 지금도 백작을 배신하고 날 선택한 거였어.”

[…….]

“지금은 어때? 지금도 내 편에 서고 싶은 거지?”

[…….]

죽음의 기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루이센은 좀 안타까워졌다. 그런 꼴이 되면서까지 나를 따르고


싶었다니.

“그럼 그냥 내 편 하자. 지금부터라도.”

루이센은 진심을 다해 말했다. 그러자 죽음의 기사가 동요를 보였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나?]


처음으로 명령과 상관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질문이라기에는 루이센이 자신을 원망할 거라고 확신하는 어투였다.

루이센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루거가 원망스럽나? 물론 처음에는 화가 났고 배신감도 들었다. 그에게
농락당한 것만 생각하면 속에 불이 붙은 것처럼 괴로웠다. 이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 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더블레스 백작에 대해 알게 되고, 루거의 진심까지 알게 되니 속을 태우던 불길은 가라앉고 머리는
차분해졌다. 분노가 사그라든 자리에 남은 것은 그저 안쓰러움이었다.

루이센을 속이고 농락하여 루거에게 무엇이 남았나.

원하는 사람을 따르지 못하고, 살아서 평생을 이용만 당하다가, 죽어서조차 노예처럼 부려지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그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아버지였다. 저주받아, 죽어서도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그럼에도 미련은 남아 루이센의 주변만 맴도는 것이 그의 처지였다.

“아니, 원망하지 않아. 지금은 그냥…… 네가 안쓰러워.”

루거는 많은 잘못을 했고 신분지상주의에 거만한 놈이었지만, 그 죄는 죽음으로 이미 다 치렀다.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필이면 더블레스 백작 같은 아버지를 만난 것이 그의 비극이었다. 타고난 신분과 혈통이 전부이다. 루이센만


하더라도 그가 2 왕자를 따랐던 것은 어머니 동생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시대였다.
타고난 운명을 거부하고 뛰쳐나와 살고 있는 칼튼이 유별나고 특이한 거지. 그러니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것을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너는 나를 도와줬는데, 잘잘못을 따져서 뭐 하겠어.”

루이센은 한 발 더 다가갔다.

그 모습에 죽음의 기사가 움찔했다. 아직 선을 넘진 않았다. 하지만 선을 넘는다면…….

‘침입자를 죽여.’

머릿속 깊이 심어진 명령이 그를 움직인다. 죽음의 기사는 언제든 휘두를 수 있도록 검을 고쳐 쥐었다.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침입자는 루이센이었다. 그가 자꾸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발이 죽음의 기사가 그어 둔 선을


넘어 죽음의 기사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죽음의 기사의 눈이 붉게 빛났다. 명령대로, 선을 넘어선 침입자는 죽인다. 그러나 이어지는 루이센의 말은
죽음의 기사를 뒤흔들었다.

“루거, 네가 나에게 한 모든 것을 용서한다. 그러니 이번에는 네 마음이 가는 선택을 해.”

루이센은 죽음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안에는 두려움도 원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여름 하늘처럼


청량하고 맑았다. 고난을 겪고 더 단단해진 루이센의 영혼이 살짝 엿보였다.

죽음의 기사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명령도 이 순간을 간섭하진 못했다. 눈앞의 루이센이 생전에 그가
너무도 사랑했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영혼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그 감정을 다시 떠올렸다. 오래도록 정성을 들여 루이센만을
생각했다. 이 사람과 함께한 시간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밝고 아름다웠었다.

이 사람을 사랑했다. 모든 것을 버려도 좋을 만큼.

[나는…….]

이 사람을 죽일 수 없다.

[……하지만……명령이, 아아…….]

머릿속에 깊이 입력된 명령은 지금 당장 침입자를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루이센이 살아가길 바랐다.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꼴이 되어서도 나는…… 그를 죽일 수가 없었다.

[아아아아!]

죽음의 기사가 머리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허공을 찢어 버릴 것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텅 비어
있던 투구 속에 언뜻, 루거의 얼굴이 스쳐 가듯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러다 돌연, 죽음의 기사가 검을 들었다.

‘틀렸나.’

칼튼은 루이센을 자신의 뒤로 숨기며 반격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검 끝이 향한 것은 칼튼도 루이센도 아닌,
죽음의 기사 자신이었다.

쾅!

굉음과 함께 커다란 검이 죽음의 기사의 몸통을 관통했다.

“!”

루이센과 칼튼 모두 놀라서 죽음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즉사했을 상처였지만 죽음의 기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돌렸다. 그의 뒤로 관통한 칼날이 튀어나와 있어 더욱 기괴했다.

죽음의 기사는 살짝 고갯짓을 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따라오라는 거 같은데요.”

“괜찮을 거 같지?”

죽음의 기사가 무슨 생각인지 전부 다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 그가 자신들의 편에 섰다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알 수 있었다. 스스로를 공격한 행동이 상징적이기도 했고.

루이센과 칼튼은 손을 꼭 잡고 죽음의 기사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쫓아오는 게 확실하자, 죽음의 기사는
점차 속력을 내어 달렸다.

루이센이 따라가기 조금 벅찬 속도였다. 루이센은 온 힘을 짜내었다. 안개 속은 이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마치 허공 속을 걷는 것 같았다. 무심코 발아래를 보기라도 하면 추락하는 것처럼 아찔해져, 다른 곳은 보지
않고 죽음의 기사의 뒤만 보고 달렸다.

앞은 컴컴했고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본능적인 두려움이 들기도 했으나 칼튼이 계속 손을 잡아 줬기에


머뭇거리지 않았다. 루이센이 힘에 부쳐 발걸음이 느려질 때면, 어김없이 칼튼이 그의 등을 밀며 격려해 주었다.

외팔의 순례자를 만나기 전까지 루이센은 계속해서 죽음의 기사를 피해 도망쳤다. 그에게 잡힐 것이 무서워
한시도 편히 쉴 수 없었고, 어디에서도 머무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죽음의 기사는 나아갈 길을 알려 주었고, 칼튼은 따라갈 힘을 주었다. 루이센이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두
존재가 이제는 그를 달릴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다.

모르는 것은 두렵다. 하지만 알게 되면 더이상 두렵지 않았다. 피하지 않고 마주하다 보면 결국 어떻게든 된다.
인생은 어찌 될지 모른다는, 성자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았다.

***

한참을 달린 끝에는 5 층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왔다. 죽음의 기사를 믿었던 건지 아무도 문 앞을 지키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여기까지다.]

죽음의 기사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미련을 잘라 내듯 일부러 더 단호했다. 루이센은 뒤늦게 묻고 싶은
게 떠올랐으나, 한발 늦었다.

“가 버렸네.”

“현명한 판단이네요. 악마숭배자에게 도로 조종당하면 도움이 안 되니까요.”

살아 있을 때의 루거보다 상황판단력이 좋다고 칼튼이 심술궂게 덧붙였다.

“일단 위치부터 알리자.”

칼튼과 루이센은 미리 받아 온 것을 설치했다. 나중에 뒤따라올 성기사들이 길을 헤매지 않고 이곳으로 바로


오도록 표시해 두는 것이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문을 바라보았다.

거대하고 화려한 푸른색 문.

이 너머가 이 싸움의 마지막 장소가 될 것이다.


142 화

두 사람은 정면의 커다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옆쪽으로 난 작은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시종들이 드나드는
통로라서 눈에 띄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루이센과 칼튼은 적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

연회홀은 깜깜하였지만, 악마숭배자들이 있는 부근은 초를 많이 밝혀 두어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

연회홀의 가장 상석인, 왕의 의자가 놓인 자리에 재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재단은 지네굴에서 봤던 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재단의 주변에는 죽은 짐승들이 거꾸로 매달려,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 재단의 앞에는 뿔이 네 개에 눈이 세 개인 산양 조각상이 서 있었다. 석상은 은은하게 빛을 내어 아주 잘


보였다. 석상의 표면에 붉은 줄이 죽죽 그어져 있는데, 그것이 마치 핏줄 같아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피부만
벗겨 놓은 것처럼 보였다.

‘끔찍하군.’

루이센은 생각했다.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대단히 불길해 보였다.

악마숭배자들은 재단의 앞에 반원 모양으로 늘어서 있었다. 대략 십여 명쯤 되어 보였다. 더블레스 백작은 재단과


가장 가까이에 서서 의식을 치르는 악마숭배자들을 이끌었다.

백작이 먼저 뭐라고 말하자, 악마숭배자들은 입을 모아 웅얼거렸다. 그 소리가 주문을 외우는 것 같기도 했고


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어떻게 보면 정신없이 기도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심취했는지 앞뒤로 몸을
흔들었다. 이따금 한 번씩 공기가 부르르 떨려 왔다.

그럴 때면 사방에 낮게 깔려 있던 검붉은 안개들이 회오리치듯이 악마숭배자들을 휘감고 한데 모여 뱀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것은 꿈틀거리며 석상으로 빨려 들어가 석상의 핏줄이 되었다.

석상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변해 갔다. 그 모습이 마치 온 성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보았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그냥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정말 악마라도 소환할 거 같아.’

기괴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루이센과 칼튼은 잠시 압도되었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너무 기괴해서 그렇지 루이센과 칼튼에게 유리했다. 악마숭배자들은 방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자신들의
계획대로 돌아간다고 믿은 나머지, 주변에 호위도 세워 두지 않고 의식에만 몰입하고 있었다. 어쩌면 죽음의
기사를 너무 믿은 것일지도.

두 사람이 움직였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아홉 번째 숭배자는 의식에 몰입했다. 점차 살아날 듯이 생생해지는 석상. 저기에
그들의 신이 깃들 것이다. 그는 너무도 기뻐 머리가 막 아찔했다.

조금 위험했지만 백작이 시키는 대로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게 백작의 뜻대로 되었기에 이제는 누구도
그들을 방해할 수 없다.

숨어만 다니다가 왕성 한복판에서 이런 난리를 벌이다니. 이전이라면 그가 쳐다도 못 보던 귀하신 분들이 전부


재물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도 짜릿하기 짝이 없다.

모든 게 완벽하다.

아하하하, 나는 더 큰 힘을 얻을 거다.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겠지. 그분을 더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어!

그때, 무언가가 그의 앞을 날아갔다.

쨍강!

작은 병이었다. 그것은 석상에 부딪히며 깨졌고, 안에 있는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석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악마숭배자들은 침입자를 알아차리고 병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았다.

“여기다, 또라이들아!”

칼튼이 튀어나오면서 검을 휘둘렀다. 악, 미처 대비하지 못한 악마숭배자의 목이 날아갔다.

“막아! 젠장. 침입자라니! 죽음의 기사는 뭘 하고!”

아홉 번째 숭배자가 칼튼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창문을 깨고 박쥐 몬스터가 막 칼튼에게 달려들었다.


악마숭배자들이 모두 칼튼을 견제하였다. 칼튼은 강했지만 혼자였다.

“혼자서 뭘 하겠다고!”

악마숭배자들이 그를 비웃었다. 그러면서 칼튼을 몰아붙이느라 정신이 없는 그때, 갑자기 재단에서 새파란 불길이
솟구쳤다.

“불이다!”

재단 주변에서 부싯돌을 들고 얼쩡거리는 루이센이 발견되었다.

처음부터 양동작전이었나! 당했다!

“안 돼!”

아홉 번째 숭배자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재단에 붙은 불은 평범한 불길이 아니었다. 빛의 신의 가호가 깃든 푸른 불길이었다. 그것은 검붉은 안개를


양분으로 삼아 맹렬히 불타올랐다.

푸른 불길은 빠르게 재단을 집어삼켰다. 불길이 크고 강해질수록 왕성을 감싸 안고 있던 검붉은 안개가 흐려지고,
그에 따라 재단으로 모여들던 생명력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검붉은 안개가 옅어짐에 따라 악마숭배자의 힘도
약해지고 있었다. 통제할 수 있는 몬스터가 줄어들며, 몬스터의 힘도 확연히 약해졌다.
이대로라면 전세가 역전당한다! 의식이 중단된다!

“재단에 붙은 불부터 꺼! 그게 먼저야!”

아홉 번째 숭배자가 소리쳤다. 악마숭배자들에게 명령을 내린 아홉 번째 숭배자는 죽음의 기사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어디서 뭘 하는 건지 놈은 응답하지 않았다.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어떻게 할
수 없어 다른 몬스터를 끌어들였다.

깨진 창문으로 박쥐 몬스터 네다섯 마리가 날아들었다. 몬스터들은 악마숭배자 몇 명과 함께 재단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칼튼에게 막혀 재단의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었다. 칼튼은 기가 막힌 기동력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악마숭배자들이 재단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젠장!”

아홉 번째 숭배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애타게 재단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덤벼도 칼튼에게 막혀 버린다.

유일하게 재단에 가까운 것은 처음부터 재단 앞에 있던 더블레스 백작이었다. 그는 불타는 재단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루이센이었다.

원래 루이센은 칼튼이 시선을 끄는 사이 불만 피우고 도망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불을 붙이고 보니,


기름의 양이 적어 불이 옮겨붙는 게 느렸고 백작이 재단과 너무 가까이 있었다.

백작이 불을 꺼 버리면 곤란하다. 순간 판단을 마친 루이센은 일부러 재단 근처를 얼쩡거렸다. 백작은 바로


루이센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네놈!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루이센은 턱을 들어 올리며 피식, 웃어 보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거만한 표정으로 백작을 무시하고
돌아섰다. 백작을 자극하는 데는 열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효과적이었다.

루이센의 모습 위로 선대 공작의 모습이 겹쳐지듯 떠올랐다. 백작은 끔찍했던 옛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제처럼 생생한 치욕과 분노가 떠올랐다. 이제는 예전의 한심한 자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감히, 아니에스 공작! 감히 네가! 나를 또다시!”

백작이 포효하듯 소리쳤다. 눈앞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잡아 죽인다! 죽여 버릴 것이다! 또다시 내 모든 것을 망치려고 하다니! 이제 거의 다 되었는데, 또 이렇게


나를 농락하고 무시하다니!

백작은 루이센의 뒤를 쫓아갔다. 아니에스 공작에 대한 살의만이 그를 사로잡았다.

“백작님!”

아홉 번째 숭배자가 백작의 이탈을 보고 소리쳤다. 그러나 백작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젠장!”

아홉 번째 숭배자가 몸을 날렸다. 그의 앞을 칼튼이 막아섰다. 온 힘을 다해 칼튼을 퉁겨 버렸으나, 동시에 그의


팔도 잘려 나갔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빨리, 불을 꺼야, 재단을 지켜, 의식은 계속되어야 해. 의식을 망칠 수 없어.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는 중얼중얼하며 로브를 벗어 그걸로 정신없이 불길을 내려쳤다.

“꺼져라, 꺼져, 꺼지라…… 억!”

칼튼이 아홉 번째 숭배자의 등을 베었다. 아홉 번째 숭배자는 그대로 재단 위로 엎어졌다. 성스러운 푸른 불길은


부정한 자를 재물 삼아 더 크게 번져 올랐다.

“아악! 저거 어떻게 좀 해 봐! 몬스터를 전부 여기로 모아!”

“남아 있는 몬스터가 없어! 다 틀렸어! 도망쳐!”

통솔자였던 아홉 번째 숭배자가 죽자, 다른 악마숭배자들은 우왕좌왕했다. 재단을 수호하려는 자와 도망치려는


자들이 어지럽게 섞이면서 난장판이 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성기사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백작이라도 그들을 규합해야 했지만, 그는 온 신경을 루이센에게 썼다. 그가 팔을 휘두르자, 그림자 속에서
새하얀 손이 튀어나와 루이센의 다리를 붙잡았다.

우당탕!

루이센이 크게 넘어졌다.

“읏.”

루이센은 일어서려 했으나 백작이 한발 빨랐다. 백작은 루이센의 몸을 돌리고, 그 위로 올라탔다.

짝!

백작이 루이센의 뺨을 후려쳤다. 루이센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번번이, 번번이 네놈이구나! 아니에스 공작. 대체 네놈은 내가 얼마나 미우면…… 내 평생을 망쳐 놓느냔
말이다! 말해 봐, 로버트 아니에스!”

백작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괴물같이 일그러졌다. 훼까닥 돌아 버린 눈이었다. 눈앞에 있는 게 루이센인지
그의 아버지인지도 구분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누구라도 좋았다. 이제 다 끝나 버렸으니까. 전부 망했다.
그렇다면 아니에스라도 확실히 죽여 버리자.

백작은 루이센의 목을 졸랐다. 중년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힘이었다. 루이센은 온 힘을 다해


버둥거렸으나 백작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크읏!”

목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혔다. 루이센이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벗어, 나야, 해…….’

루이센은 칼튼에게 배운 호신술을 떠올렸다. 오래 연습한 덕분에 자연스럽게 동작이 따라왔다. 그는 팔을 앞으로
모으며 팔꿈치로 백작의 팔을 내려쳤다. 단단한 팔꿈치 뼈가 정확하게 백작의 팔이 접히는 관절 부위를
가격하면서, 자연스레 백작의 팔이 꺾였다.

그러자 자연히 목을 조르던 손이 풀렸다. 팔에 온 체중을 싣고 있었기에 팔이 접히자 백작도 휘청했다. 루이센은
그 틈을 노려 멈추지 않고 다시 팔을 들어 온 힘을 다해 백작의 관자놀이를 후려갈겼다.

빠악!

백작의 머리가 휙 돌아갔다. 목이 졸린 여파로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백작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머리는 어지럽고 팔은 부러질 것만 같다. 목이 너무나도 아팠다. 그대로 뻗어 버리고 싶었으나,
루이센은 남은 힘을 짜내어 백작의 몸을 밀어냈다.

그걸로 충분했다. 루이센이 혼자였다면 백작이 정신을 차리고 반격했을 테지만, 루이센에게는 칼튼이 있었다.
백작이 뒤로 밀려나 정신을 차리려던 순간 칼튼의 검이 백작의 목을 관통했다.

“끄헉!”

백작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루이센과 튀어나온 칼날을 번갈아 보았다. 루이센은 굳은 채로 백작을 보았다. 또
무언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살아나는 거 아냐?

그러나 그게 백작의 마지막이었다. 칼튼이 검을 뽑아 버리자, 백작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칼튼은 백작의 몸을 옆으로 걷어차 치워 버리고 루이센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루이센. 괜찮아요?”

“어, 어…….”

루이센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칼튼이 옷소매로 루이센의 얼굴에 튄 피를 닦아 주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을
받고 있자니 점차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루이센이 백작과 싸우는 사이, 성기사들이 의식의 장소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즉시 악마숭배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 틈에 자유로워진 칼튼이 루이센을 구한 것이다.

악마숭배자들 쪽은 굳이 루이센과 칼튼이 나설 필요가 없어 보였다. 루이센은 주변을 쭉 둘러보다가 석상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의식이 멈추자 석상은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악마를 본떴다는 석상이 뭐가 되는 양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무척 거슬렸다.

“……칼튼. 검 좀 빌려줘.”

“네, 루이센.”

루이센은 칼튼의 검을 받아 들고 석상으로 다가갔다. 칼튼이 뒤따라왔다. 칼튼은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두르는
검이지만, 루이센에게는 양손으로 들어도 무거웠다. 루이센은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무게를 실어
그대로 석상의 허리를 내려쳤다.

쿵!
루이센의 힘이 대단치는 않았음에도 석상은 쉽게 부서졌다. 불 때문일 수도 있고 급조한 탓에 허술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루이센이 내려진 곳을 중심으로 쩌억, 하고 갈라지며 사방으로 금이 갔다.

쿠우웅.

석상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잔해만이 아무것도 아닌 돌덩이가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루이센은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의식은 실패했다. 악마숭배자들은 모두 죽거나 제압당했으며, 더블레스 백작도 죽었다. 그들의 재단은 루이센이
놓은 불에 불타 재만 남게 되었다. 온 성을 집어삼켰던 검붉은 안개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성기사들과 함께 합류한 모리슨이 남부의 소식도 전해 주었다. 예상보다 빨리 전투가 시작되어, 그쪽에서는 이미
토벌이 끝났다고 한다.

‘정말…… 길었다.’

회귀 전의 일들이 하나둘 루이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회귀한 직후의 당황스러움과 각오가 떠올랐다. 전투
중인 영지를 두고 야반도주했다. 그 잘못 하나만 바로잡아 대영주로 떵떵거리고 살려던 것뿐인데, 어느새
여기까지 와 버렸다. 상상 이상으로 고생했지만, 덕분에 많은 것이 변하였다.

루이센은 칼튼을 바라보았다. 칼튼이 웃으며 루이센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도, 자신도 이제 과거처럼
몰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벅차오르며 뿌듯함이 몰려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어느덧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깜깜한 어둠이 밀려나며 사방이 환하게 밝아 왔다. 이내 새벽녘 특유의 새파란
빛이 연회장에도 밀려 들어와, 루이센과 칼튼을 비추었다.

143 화

아침 해가 밝아 오면서 기절한 사람들이 깨어났다. 잠깐 불편한 잠을 잔 기분으로 깨어난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간밤의 참사였다.

왕성의 건물은 일부가 무너져 있고, 사람과 몬스터 사체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당연히 큰 혼란이 일어났으나,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상황을 정리했다. 왕실 기사단도 루이센의 말을 듣고 휘말리지 않도록 성벽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금방 정신을 차리고 사태 수습에 손을 거들었다.

그들에게 뒷수습을 맡기고 루이센과 칼튼은 아니에스 공작가의 수도 저택으로 돌아갔다. 악마숭배자를 토벌하는
데 가장 큰 일을 한 두 사람을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루이센은 저택에 도착하여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체력을 모조리 다 써 버렸다. 칼튼은 루이센의 몸을 돌봐 준
뒤, 곁에서 함께 잠이 들었다.
***

반나절 정도 잠을 자고 일어나니 부총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왔다. 루이센은 잠옷 차림으로 칼튼에게


기대다시피 소파에 앉아 부총관을 맞이했다. 알게 모르게 칼튼에게 적응이 되어 버린 부총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공작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간밤의 활약, 눈부셨다고 들었습니다.”

부총관은 루이센이 잠든 사이 모여든 소식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

대영주와 1 왕자는 지하실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신을 차렸으며 다치지 않았고, 현재는 달리 문제가
없는지 사제들에게 검사를 받는 중이라고 한다.

비밀통로에 진입했다가 백작에게 당한 아니에스 공작가의 기사들 또한 무사히 발견되었다. 그들은 루이센이 갇힌
장소에서 멀지 않은 다른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기는 했으나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그들은 몸을 추스르는 대로 저택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다들 수고가 많았어. 제대로 포상을 하고 쉴 수 있게 해 주게.”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주무시는 사이에 공작성에서 좀 더 자세한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뭐라던가?”

루이센은 눈을 번쩍 떴다. 승리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자세한 내막은 듣지 못한 것이다. 계획보다 빨리 승전보가
도착해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악마숭배자의 본거지 토벌은 굉장히 급박했던 모양입니다.”

예상과 달리 악마숭배자 교주가 위기감이 좋았다. 그는 불온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도망치려고 했다. 이에 백작령
안에 이미 잠입하고 있던 이단심문관이 급히 성문을 열었다. 예정된 시각보다 몇 시간이나 빨랐고, 백작령을
지키던 병사들의 대응도 빨랐다.

여기서 칼튼의 용병단 능력이 빛을 냈다. 기습과 대인 전투에 이골이 난 이들은 순식간에 백작가의 병력을
무력화시켰고, 악마숭배자들의 도주 루트를 파악해, 그들이 미처 도망치기 전에 성기사들이 따라잡을 수 있게
했다.

이후 전투가 벌어졌고, 악마숭배자들은 근처에서 몬스터를 끌어들이며 치열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성기사단과
아니에스 공작가의 군사, 그리고 칼튼의 용병단 세 세력의 연합이 압도적이었기에 전투는 금방 끝났다.

“다행이야. 본거지인 만큼 저항이 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처음 계획과는 많이 어긋났지만, 그 덕에 민간의 피해와 병력의 손실도 적었다고 한다. 악마숭배자들이 본거지를
장악하고 결사항전했다면 피해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교주는 본거지를 버리고 도망치고 있었기에 오히려 저항이
약했다고 한다. 악마숭배자들의 대부분 사망하였고, 교주는 끝까지 홀로 도망치다가 성기사들에게 사로잡혔다.

“이미 교주는 이단심문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더군요.”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잡히기 전에 죽는 게 나았을 만큼 고통받겠지.

“백작가의 저택은 어떻게 되었지?”

“일단 백작가의 병력과 가신들을 무력화시키고, 칼튼의 용병단이 지휘하고 있다고 합니다.”

칼튼이 공작성을 장악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일 거라고 예상이 갔다.

“이단 심문관과 성기사들이 이단의 본거지를 살피고, 관련자가 더 있나 색출 중이랍니다.”

아니에스 공작가의 병력과 총관은 아침 무렵에 공작성으로 복귀했다고 한다. 칼튼의 용병단과 성기사들이 있으니
굳이 끼어들어서 힘을 소모할 이유가 없으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더 걱정할 거 없겠어.”

이제 느긋하게 쉴 수 있겠군. 이제 칼튼이랑 놀아야지. 드디어 쉰다! 루이센이 기쁨을 만끽하려는데 부총관이
산통을 깼다.

“공작님은 이제 대영주의 의무에만 집중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아…….”

왕의 장례식과 즉위식이 남아 있었다.

“공작님 깨어나시는 대로 왕성으로 오라고 하십니다. 다들 기다리고 있겠다고요.”

“…….”

“빨리 오시랍니다.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으니 각오를 하라고도 하셨고요.”

한바탕 거하게 시달리게 생겼네. 루이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칼튼이 안쓰럽다는 듯이 루이센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

왕성에서 벌어진 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알음알음 민간에도 퍼져 나갔다. 늦은 밤이었으나 왕성이 기묘한
검붉은 안개에 휩싸이고 사람의 비명 소리와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많았다.
대영주들이 모두 왕성에 들어간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알아내기 위해 왕성을 주시하는 눈이 많았고, 왕성을
중심으로 지진이 일어나기까지 해서 많은 사람들이 깨어 있던 탓이었다.

조용히 묻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며칠 뒤에 교회에서는 왕성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정식으로 발표를 하였다.

이단이 왕성에서 삿된 마술을 벌이려다가, 이를 미리 눈치챈 아니에스 공작과 이단심문관에 의해 처단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악마숭배자들을 사악하고 멍청하게 묘사하면서 교회의 승리를 강조하였다.

교회의 발표는 왕국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왕국의 귀족이 이단이었고, 그들이 1 왕자를 조종하여 왕성을
장악해 사악한 의식을 벌이다니! 그것만으로도 뒤집힐 일인데, 이를 막은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이센
아니에스란다!
“아니에스 공작이 이단을 처단했다고? 본인이 이단인 게 아니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요즘 부쩍 평판이 좋아졌다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머릿속 루이센은 망나니 공작님이라는
인식이 더 강했다. 차라리 루이센이 이단이었다고 하면 덜 놀라웠을 정도로, 루이센의 활약에 대한 반응은 충격
그 자체였다.

더구나 함께한 사람이 칼튼이란다. 1 왕자의 검이자 귀족도살자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세간의 인식으로는 칼튼
역시 이러한 영웅적인 일을 해내는 데 어울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귀족의
전형이며 적이었던 루이센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칼튼이 공작성을 짓밟고 공작에게 수모를 줬다며? 근데 둘이 손을 잡았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야?”

너무도 믿기 어려운 사실들이었기에 당연히 크게 논란이 일어났다. 교회는 이 사태에 ‘루이센과 칼튼을 교회의
성인으로 인정할까’ 고심 중에 있다는 소문을 흘려 더욱 군중을 자극했다.

덕분에 이단의 존재는 뒷전이 되었고, 사람들은 눈에 잘 안 보이는 피해보다는 망나니가 개과천선해 세상을
구했다는 영웅 소설 같은 실화에 더 집중하고 열광했다.

루이센의 인기는 극에 달했고, 수도의 아니에스 저택 앞에는 매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했다. 루이센에게
보내는 꽃과 편지들이 정문에 쌓여만 갔고, 문 앞에 서서 루이센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루이센은 이런 열기를 온몸으로 실감했다. 그의 마차가 저택을 나서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손을 흔들고 꽃을
던지며 환호했다. 그렇게 꽃길을 달리며 왕성에 도착하자 왕실 시종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실 시종들은 루이센을 생명의 은인이라며 극진하게 대접했다. 뭐라도 하나 더 주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을


적당히 거절하는 것이 좀 힘들긴 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게 회의실에 도착하면, 세 명의 대영주들이 반갑게 루이센을 맞이했다.

“아니에스 공작 왔는가?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천천히 와도 되는데 말이야.”

옛날 같았으면 새파랗게 어린 것이 제일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지 뭐 하는 거냐고 뚱하게 앉아 있었을 대영주들이


루이센을 반갑게 맞이했다.

대영주들은 뒤늦게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알게 되었다. 평생 이런 위협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기에 그


충격이 너무도 컸다. 그만큼 자신을 구해 준 루이센에 대한 고마움도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 유난히 관대하고
살갑게 굴게 된 것이다.

‘어차피 잠깐 이러다 말겠지.’

루이센은 거품이 꺼질 동안 이 인기를 즐기기로 했다. 그래서 일부러 요즘 늦장 부리면서 다니고 있었다.

“다들 자리에 앉읍시다. 공작,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1 왕자가 말했다. 루이센은 자리를 찾으러 가며 1 왕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1 왕자는 세뇌에서 풀려나서인지,
루이센이 기억하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영민함이 느껴지는 맑은 눈동자와 부드럽고 상쾌한 인상의
호감형이었다.
1 왕자는 더블레스 백작에게 오래 붙잡혀 있었기에, 정신이 든 뒤 모리슨과 단둘이 면담을 진행했다고 들었다.
백작에게 사로잡힌 경위도, 그동안 있었던 일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 역시 피해자로 이단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다행이지. 즉위도 안 한 왕위 계승자에게 이단 혐의라니. 또 한 번 내전 감이야.’

빠르게 결론이 났기에 아무도 1 왕자의 정통성을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1 왕자를 보호하겠답시고 교회 측에
압력을 넣어 둔 보람이 있었다. 루이센이 멍하니 1 왕자를 지켜보고 있는데, 1 왕자가 시선을 느끼고 루이센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뜨끔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흐음.’

금방 평소 표정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루이센은 확실히 느꼈다. 1 왕자가 지금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유는 아마 어제 있던 일 때문이겠지?’

루이센은 어제 있던 일을 떠올렸다.

어제 회의를 마치고 다 함께 식사를 하기로 해서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루이센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문득 기척을
느끼고 뒤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1 왕자가 서 있었다. 1 왕자는 흠칫하고 지레 놀라더니 슬그머니 뒷짐을 지는
게 아닌가. 마치 무심코 자신의 무해함을 주장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 순간 루이센은 1 왕자가 자신과 같은 것을 떠올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1 왕자가 지하 감옥으로 루이센을 밀어


버린 그때 말이다.

‘기억 못 한다며? 잘만 기억하는 거 같은데?’

1 왕자가 이단심문관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루이센이 놀라는 사이 당황한 1 왕자는 튀어 나가듯 후다닥
루이센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뒤로 이렇게 은근슬쩍 루이센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면 좀 난감한데…….’

사실 루이센은 계속 1 왕자와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칼튼의 거취 문제 때문이었다.

144 화

회귀 전과 달리 칼튼은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확실한 공을 세웠다. 이단을 물리쳤고, 그들의 손아귀에서 1


왕자를 구출했다. 회귀 전과 같은 실책도 없었다.
‘무조건 작위를 받는다!’

작위와 함께 영지와 그럴듯한 직책도 하사받게 될 거라고 루이센은 예상했다. 문제는 어떤 지역의 영지를 받고,
어떤 직책을 지게 되느냐였다.

‘영주가 없는 빈 땅은 서북부에 많지. 칼튼이 그쪽으로 영지를 받게 되면 나랑 너무 멀어져.’

직책도 그렇다. 왕실 기사단이나, 수도 방위군 쪽에 임명이 되어 버리면 루이센과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칼튼에게 이런 고민을 말하니, 칼튼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차피 공작님을 따라갈 것이니 상관없다고.
실제로 그는 한창 물밑에서 벌어지는 논공행상을 중심에 둔 치열한 눈치싸움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1
왕자에게 따로 인사를 하긴 했지만 정말 그냥 인사만 하고 나왔고.

그런 행동과 말은 1 왕자가 뭘 주든 루이센과 함께 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버리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칼튼의 마음에는 감동했다. 그렇게까지 나를 생각해 주다니. 하지만 루이센의 마음은 또 그게 아니었다.

‘칼튼이 뭐가 부족해서! 포기를 해!’

성공을 향한 칼튼의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루이센은 잘 알았다. 그러니 기왕이면 다 이루게 해 주고 싶었다.
잘난 연인의 등에 날개를 달아 훨훨 날아오르게 해 줘도 모자랄 판에 자신 때문에 주저앉힐 수야 없지!

루이센이야 이미 가진 게 많아서 더 받을 게 없지만, 칼튼은 다르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루이센은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히면서 1 왕자가 칼튼에게 아니에스 공작령과 가까운 쪽으로 칼튼이
올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1 왕자가 칼튼의 중매를 설 가능성도 원천차단하고!

그런데 본격적으로 외조를 해 보기도 전에 1 왕자가 자신을 피하니 난감한 일이었다.

‘회의가 끝나면 오늘은 정말 자리를 마련해 봐야지.’

루이센은 의욕적으로 1 왕자를 바라보았다. 1 왕자는 루이센의 시선을 회피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회의는 계속되었고, 장례식과 즉위식 준비도 척척 진행되어 갔다.

***

회의를 마치고 루이센은 허탈한 걸음으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루이센이 먼저 1 왕자에게 말을 걸기 전에, 1
왕자가 선수를 쳐서 약속이 있다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굳이 도망칠 것까진 없지 않은가.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나. 루이센은 투덜거리며 마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들어갔다.

“루이센!”

칼튼이 환하게 웃으며 마중을 나왔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루이센을 품에 안으며, 따듯한 손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

“밖에 춥죠? 잘 다녀왔어요?”


루이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길을 만끽했다.

“들어가요.”

칼튼은 루이센의 외투를 벗는 걸 도와주고, 자연스럽게 방까지 에스코트했다. 방은 이미 루이센이 올 시간에


맞추어 따듯하게 만들어두었고, 루이센이 소파에 앉자마자 따끈한 차와 과자가 준비되어 나왔다. 차 한 모금으로
속을 녹이고, 달달한 과자로 입가심을 하고, 한쪽에는 사랑스러운 연인이 달라붙어 손을 주물러 주었다.

절로 나른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너무 좋다.’

이런 호사야 평생 누리고 살았으니 특별히 감동스러울 게 없음에도, 칼튼이 끼어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해졌다.
힘들게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자신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랑스러운 연인이라니.

이래서 사람들이 토끼 같은 배우자가 기다린다고 집으로 튀어가는구나 싶기도 하고. 칼튼은 물론 토끼보다는
야수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사랑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루이센은 폭삭, 칼튼의 품에 기대었다. 그러자 칼튼이 낮게 웃었다.

“1 왕자가 저녁에 자기 파벌의 귀족들을 만나는 거 같은데…… 자네는 안 가 봐도 괜찮아?”

루이센은 혹시 사람들이 칼튼만 따돌리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그거요. 부르긴 했는데 안 가기로 했어요.”

칼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공작님이랑 오랜만에 같이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아깝잖아요. 요즘 바쁘셔서 내내 왕성에만 계시는데.”

“그거야 그렇지만.”

칼튼이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 기쁘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루이센은 잠시 멍하니, 칼튼의
얼굴을 감상했다.

대영주의 의무를 다하느라 바쁜 루이센에 비해, 칼튼은 딱히 맡은 일이 없었다. 가끔 루이센을 따라 왕성에 갈


때 외에는 대부분 저택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보면 루이센이 바라던 휴가를 칼튼이 신나게 누리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인지 칼튼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빛이 나며 나날이 멋있어졌다. 거친 피부가 매끄러워지며 전에 없던


여유로움이 생겨 눈길을 끌었다. 가끔 루이센도 넋을 놓고 감상할 정도였다.

칼튼이 자신만을 위해 있어 준다는 것이 매우 만족스럽기는 했다. 그러나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 나중에
칼튼이 이 일을 아쉬워하지는 않을까 싶은 걱정도 들었다.

“……답답하네.”

“뭐가 잘 안 되나요?”

“1 왕자가 날 피하는 거 같아.”


“그 일 때문에?”

“응.”

거의 하루 종일 1 왕자와 같이 있는데 한 번도 단둘이 있을 기회를 잡지 못했다는 점에서, 1 왕자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루이센을 피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알 만하네요. 루이센이 그렇게 안달하니까 부담스러워서 더 피하는 거 아닐까요?”

“그렇지만 즉위식 전에 자네에 대해 1 왕자와 담판을 짓고 싶단 말이지.”

“저 때문이면 그럴 필요 없다니까요.”

칼튼은 여유롭게 웃었다. 야망에 불타오르던 성마른 장작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본인이 이렇게 태평하니
루이센만 더 애가 탔다.

“아니야. 그래도!”

“다른 귀족들은 연회 같은 거 열고, 로비도 하고 한다던데. 자네 이름으로 연회를 열어 줄까? 금화는 필요하지
않고?”

“글쎄, 그런 거 없어도 괜찮다니까요? 어떻게 되든 저는 무조건 루이센을 따라갈 테니까요. 이 여유를 즐길


거예요.”

“으음…….”

“우리가 헤어질 일이 없으면 된 거 아닌가? 설마 절 꼬셔 놓고 책임지기 싫어진 건 아니죠?”

칼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다는 듯이 루이센을 흘겨보았다. 루이센은 기겁을 하며 절대 그런 거 아니라고


말했다. 과장된 반응에 칼튼은 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루이센이 귀여워 못 참겠다는 듯이 루이센의 얼굴에
마구 입을 맞추었다.

“자네가 나중에 아쉬워할까 봐 그렇지.”

“루이센이 있는데 그럴 리가요.”

칼튼은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태연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게 또 너무 좋은 게 문제라, 루이센은 입가를


씰룩거리며 칼튼에게 입을 맞추었다. 칼튼이 자신의 쪽으로 기우는 루이센의 몸을 번쩍 들어 그의 무릎에 앉혔다.

더 깊게 입을 맞추자, 칼튼의 손이 은근하게 뒷덜미를 어루만져 왔다. 뱃속에서 열기가 치솟으면서 현실적인
문제는 빠르게 지워졌다.

“씻고 싶은데, 너무 피곤해서 욕실까지 갈 수가 없네?”

루이센이 칼튼의 귓가에 속삭였다.

“도와줄 거지?”

“물론이죠.”
칼튼이 루이센을 가볍게 안아 들고 일어섰다. 남은 저녁 시간은 아주아주 길 것 같았다.

***

시간이 흘러, 선왕의 장례식과 즉위식이 치러지는 날이 되었다. 왕의 시신이 검은 관에 담겨, 왕성에서 교회까지
옮겨졌다. 그 뒤로 1 왕자를 비롯해 귀족들의 행렬이 잇따랐고, 왕국민들은 검은 천으로 머리를 감싸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선왕의 장례식은 엄숙하고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악마숭배자들에게 희생된 이들의 추모도 함께였기에 그 어느
때보다 참석한 인원이 많았다. 행사를 주최하는 입장에서 루이센은 아침부터 신경이 날카로웠으나, 다행히 별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고 선왕의 시신은 화장을 하여, 작은 유골함에 담겼다. 유골은 따로 마련된 왕들의 무덤에
모셔지게 될 것이다.

장례가 끝나자 모였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어서 바로 새로운 왕의 즉위식이 열리기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간 것이다.

보통은 장례식 이후, 하루 정도 여유를 두고 즉위식을 개최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왕의 장례에 추모식을 겸하기도
하였고, 안 좋은 일들이 많았기에, 슬픔은 기쁨으로 잊는다는 취지에서 바로 연달아 즉위식을 열기로 했다.

덕분에 준비하느라 죽어나고, 행사를 치르느라 또 죽어나고 있었다. 루이센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옷을


갈아입었다. 인형처럼 가만히 있으니, 시녀들이 준비된 옷을 입히고 머리도 만져 주었다. 장식 없이 수수한 검은
정장과 달리 공작가의 상징인 밀 모양 순금이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의복이었다.

“칼튼은…….”

루이센이 물었다. 공을 세운 덕에 칼튼은 평민임에도 장례와 즉위식 모두 참석할 수 있었다. 다만 루이센은


행사를 진행하는 입장이라 모든 일의 중심에 있었기에 아침부터 칼튼을 보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옆에 끼고
다니고 싶지만 칼튼의 신분이 거기까지는 안 되어 아쉬웠다.

“그쪽으로는 따로 사람을 보내 두었으니 걱정 마세요.”

“그래…….”

즉위식이 끝나면 왕성까지 돌아가는 길에 행진을 하며 새로운 왕의 탄생을 알린다. 그런 다음에는 축하 연회를
크게 연다. 아마 칼튼은 그쯤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칼튼도 자기는 신경 쓰지 말고 행사를 마무리하는 데 집중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의기양양한 게,
어딘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뭔지 물어봤어야 했나.’

너무 바빠 추궁할 틈이 없었다는 게 이제 와서 좀 걸렸다. 그래도 장례식을 끝냈으니 한숨 돌릴 만해졌다는


거겠지.

‘시간이 여유가 좀 있지?’


즉위식 전까지 약간 여유가 있었다. 식사를 하고 쉬어야 할 시간이지만, 문득 루이센은 1 왕자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지금이라면 도망치지 못하겠지.’

칼튼을 위해 한 끼 정도는 포기할 수 있었다. 루이센은 예정보다 조금 이르게 방에서 나와 1 왕자가 대기하며
즉위식을 준비하고 있을 방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방 앞에 시종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서성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루이센이 다가가 묻자, 시종들이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반겼다.

“준비를 해야 하는데, 왕자님이 아무도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어찌해야 할지…….”

이건 또 무슨 일이래? 억지로 정략결혼 당하는 신부도 아니고, 1 왕자가 즉위식을 코앞에 두고 이상한 시위를
하는 모양이었다.

145 화

1 왕자가 들어오지 말라고 명령을 하니 다들 쩔쩔매고 있는 타이밍에 루이센이 등장한 것이다. 그에게는 즉위식을
무사히 진행할 의무가 있으니, 총대를 메고 방 안에 들어갈 적임자였다.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아요.”

모두의 기대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루이센은 열쇠로 잠긴 문을 따고 들어갔다. 방 안은 커튼을 쳐서


어두컴컴했다.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탈의를 위해 간이로 칸막이를 쳐 두었는데, 그 너머에서 1 왕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예민하게 날이 선


목소리였다. 시종들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 납득이 갔다. 미래의 왕에게 즉위 전부터 찍히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루이센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왕이 불만을 가지면 뭐 어쩔 거란 말인가. 내가


하나뿐인 남부의 대영주고, 이제 곧 성인으로 추대될 텐데.

“곧 즉위식이 시작될 겁니다. 주인공이 방에 처박혀 계시면 되겠습니까?”

루이센은 목소리가 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인정사정없이 칸막이를 치워 버렸다.


“……공작.”

1 왕자가 놀라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1 왕자는 장례 복장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로, 울고 있었다. 눈은 붉었고


뺨이 온통 축축했다.

1 왕자는 감정이 정리되지 않는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혼자서 얼마나 서럽게 울고 있었던 거야? 다 큰
남자, 그것도 루이센 마음속에서 완벽한 형님이자 왕이었던 사람이 즉위식을 앞두고 혼자 울고 있었을 줄이야.

루이센은 의자를 끌어다가 1 왕자의 앞에 두고 앉아 손수건을 건넸다. 금방 정리가 될 거 같지 않았다. 1 왕자가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좀 더 훌쩍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추태를 보였습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1 왕자였다. 나름 위엄 있는 목소리였지만 코맹맹이 소리가 나서 그다지 멋있진 않았다.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사람들 앞에서 울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그걸 물어본 건 아니지만. 루이센은 뭐라고 물어야 할지 몰라 가만히 1 왕자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1 왕자가 알아서 입을 열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장례식을 치르고 나니……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가 떠올라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

“아…….”

루이센은 그때 왕의 죽음을 인형처럼 받아들이던 1 왕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고 나니 내게 과연 자격이 있는 것인가…… 다 자신이 없어져서……. 이미 눈치챘겠지만 백작에게 조종되던


당시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물어보지 않았지만 1 왕자가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루이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심문관은 내가 이단과 연관이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잘못이 있습니다.”

그건 또 새로운 이야기인데? 1 왕자는 고백을 이어 갔다.

루이센이 수도에 도착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어느 날 더블레스 백작이 1 왕자를 찾아와 제안을 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있던 왕이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도와드릴 수 있다고 말이다.

“아버지를 건강하게 해 준다거나, 그런 말이었다면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백작이 제시한 건 아주 잠깐
……분 정도였어요. 그 정도라면…….”

백작이 왕을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거나 하는 제안을 했다면 의심해 봤겠지만, 고작 오 분의 대화에 그리 큰


대가를 치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1 왕자는 더블레스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더블레스 백작이 요구하는 사람들을 왕성에 들어오게
허락하고, 짐승 같은 것을 준비해 주었다. 그가 요구하는 것들은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아니, 사실 좀 이상하다는 느낌은 있었습니다. 그냥 무시했죠. 그만큼 아버지와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왕자님이 전하를 각별하게 생각하셨으니까요, 이해합니다.”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그냥…….”

1 왕자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손수건을 꽉 쥐었다.

“……아버지의 인정이 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분이 선택한 후계자가 내가 맞다고요. 승리하기를 기대한 자식이
동생이 아니라 나라고!”

괴로운 듯 짜내는 음성에서 1 왕자의 고통이 느껴졌다. 루이센은 그가 어린 동생과 평생을 경쟁해 왔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그 경쟁을 부추긴 것은 아버지인 왕, 본인이었다. 온화해 보이는 모습 뒤로 그 나름대로의
열등감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더블레스 백작은 그 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었고.

“정작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늦은 밤, 1 왕자는 사람들 눈을 피해 더블레스 백작을 데리고 왕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백작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 한번 틈을 내주자, 그다음은 아무리 저항을 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1 왕자는 진심으로 그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내 이기심과 나약함이, 모두를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백작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이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이런 내가 왕이 되어도 괜찮을까요? 또다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면 어찌할지…… 모르겠습니다.
항상 자신에 차 있었는데 이제는…….”

1 왕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줄줄 흐를 것 같았다. 루이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버지의
죽음에, 백작의 배신에, 줄줄이 충격을 받고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괜찮은 척하며 버텼는데
막상 장례식을 치르고 나니 못 견디게 되어 버린 것이고.

때마침 사정을 들킨 루이센이 나타나니, 물꼬가 터지듯이 털어놓는 것 같았다. 고해성사를 하듯이 말이다.

‘놔두면 알아서 잘 극복할 거 같긴 한데…….’

정신이 무너져 내려 감정에 휘둘리는 와중에, 즉위식 전에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된다고 숨어 우는 판단력을


보아하니 놔둬도 될 거 같긴 했다. 그래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긴 했다.

“더블레스 백작은 자기 아들도 팔아먹는 개새끼입니다.”

“…….”

“그런 놈에게 속은 건 어쩔 수 없죠. 그런 개새끼가 또 나타날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아니…… 공작…….”

1 왕자는 황당하다는 듯이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죠. 문제는 그 뒷수습인데, 저는 왕자님이 아주 현명하셨다고 봅니다.”

“…….”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갓 즉위한 군주에게 흠집부터 나서 되겠습니까? 잘 숨기셨습니다.”

왕국은 이미 아슬아슬한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사람들은 평화와 안정을 원한다. 1 왕자와 백작의 거래는 알려져
봐야 혼란만 불러온다. 이 나라는 더 이상 그런 혼란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실제로 그렇게 하신 덕분에, 국민들은 왕자님을 동정하고 왕자님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하나로 뭉쳐지고 있고요.”

공통의 적이 등장하였고 그걸 알기도 전에 처리되었다. 모든 공은 루이센에게로, 실은 백작에게로. 그러면서


자연히 다들 하나로 뭉쳐 욕을 하면서 내실을 다지게 되었다. 1 왕자는 그 중심에 있었다. 영리한 행보였다.

“이렇듯 영리하고 대범한 분이 왕이 되실 테니, 나라의 홍복입니다.”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해 주는군.”

1 왕자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에게 루이센은 동생의 절친한 친구이자 적이었다. 내심 루이센이 자신에게
반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왕자님은 좋은 왕이 되실 겁니다. 많은 업적을 쌓으며 존경을 받게 될 거예요.”

“아부하는 건가?”

“아니요, 진심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나의 뭘 보고?”

1 왕자가 진지하게 되물었다. 눈물 바람이어서인지 그 모습이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내몰리고 절박하다는 뜻이겠지만 루이센은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이 기세라면 왜 자기가 좋은 왕이 될
자질이 있는지 백 개쯤 대답할 때까지 안 놔줄 것 같아, 그냥 막 되는 대로 지껄였다.

“제가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왜?”

“미래를 보고 와서 압니다.”

“뭐?”

“미래의 왕자님은 정말 성군이 되시더군요. 제가 보니 의욕적이고 국민을 생각하며 능력도 따라 주는, 역사에
오래 남을 명군이셨습니다.”

1 왕자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얼굴로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이센은 떠들어 댔다.

“허…….”

1 왕자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루이센을 보았다. 논리적으로 대답을 했으면 못 미더웠을 텐데,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도리어 반박이 떠오르지 않았다. 루이센은 무척 진지했다. 그래서 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숨 같은 헛웃음은 이내 큰 웃음으로 변했다.

“하하하, 누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농담을 합니까? 공작도 사람 위로할 줄 정말 모르는군요.”


미래를 보고 왔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덕분에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루이센이 얼마나 무심한 사람인지
알기에 그의 서툰 위로가 더 크게 와닿았던 것이다.

‘진짠데.’

루이센은 떨떠름하게 1 왕자가 폭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설령 농담이었다고 해도 저렇게 웃을 일은 아니지


않나. 1 왕자의 정신건강이 살짝 염려스러워질 타이밍에 1 왕자가 웃음을 그쳤다.

“공작도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전 같았으면 절 위로하겠다고 다가오지 않으셨을 텐데요.”

“뭐, 그렇죠.”

1 왕자는 돌연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공작. 이 미숙한 사람을 잘 보필해 주세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피차 지금까지 있던 악연은 잊죠.”

“좋습니다.”

루이센도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어찌어찌 1 왕자와의 화해도 잘 마무리된 것 같았다.

***

잠시 후, 계획대로 즉위식이 진행되었다. 모든 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1 왕자는 당당히 걸어 나와 교황의 앞에


무릎 꿇었다.

루이센을 비롯한 대영주들이 1 왕자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였다. 그러자 교황과 1 왕자가 형식적인 문답을 주고받은
뒤, 왕관을 받았다. 그는 왕관을 쓰고 모든 귀족과 신의 앞에서 왕의 의무를 맹세했다. 그의 목소리는 선명했고
흔들림이라곤 없어, 젊은 왕에게 어울리는 패기가 엿보였다.

즉위식도 무사히 마치고, 이제는 1 왕자가 아니라 왕이 된 그는 교회에서 왕성까지 행진했다. 지붕이 없는 마차에
올라서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구경 나온 왕국민들이 그를 보며 환호했다. 젊은 왕의 자신만만한 모습은
연이은 사태에 대해 불안을 가지고 있던 마음을 잠재워 주기 충분했다.

그 모습을 보며 루이센은 크게 안도했다. 아무래도 오지랖을 부려 달래길 잘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연회장에


도착했을 때 깨달았다.

‘……정작 하려던 말은 못 했잖아?’

아아, 찾아간 보람이 없어. 외조 하나 제대로 못 하다니. 루이센은 힘없이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연회장은 왕성 5 층에 위치한 문제의 그 장소였다. 의식이 벌어졌던 잔해는 싹 다 치우고, 지금은 꽃과 푸른 식물,
그리고 청사자의 깃발로 장식되어 있었다. 제단이 있던 자리에는 황금으로 된 의자가 놓였고, 새로운 왕은
당당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루이센은 그 바로 아래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유난히 기운이 없는 그의 모습에, 동부 대영주가
잔소리를 속닥였다. 늘 하던 나 때는 말이야, 같은 소리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칼튼이나 찾아봐야지…….’

연회장에서 자신의 옆에 끼고 데리고 다니면서 인맥을 넓혀 주자! 그거라도 해야겠다며 루이센은 눈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칼튼을 찾았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칼튼을 찾을 수가 없었다.

‘뭐야? 어디 간 거야?’

루이센이 당황하는 사이, 왕이 정해진 인사말을 마치고 선언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큰 공을 세운 이에게 상을 주고자 한다.”

귀족들이 술렁였다. 루이센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새로운 왕이 즉위했으니 도움을 준 이들을 치하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즉위한 첫 연회에서 바로 상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만큼 그 사람이 왕에게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루이센은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칼튼.”

왕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146 화

연회장에 술렁임이 더 커져 갔다. 칼튼이 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검은색과 흰색이 절묘하게 섞여, 금술로
장식된 제복을 입은 그는 그 자체로 강한 힘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초조하고 날카로운 기색이 누그러들어 한결
바라보기 편하면서도 안정적으로 보였다. 지금의 칼튼은 이 화려한 연회홀 한가운데 홀로 서 있어도 조금도
흠잡을 것이 없이 완벽해 보였다.

칼튼이 다가오며 루이센과 눈이 마주쳤다. 칼튼이 보란 듯이 미소를 지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루이센은 칼튼에게 튀어 나가 묻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지금이 칼튼의 인생에 손꼽히게 빛나는 때가 되리라는 걸
직감했다.

칼튼은 왕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왕은 그를 웃으며 맞이했다.

“그는 나를 도와 이 자리에 이르게 하였고, 아니에스 공작을 도와 이단의 흉수에 빠진 나를 구해 주었다. 이


공을 인정하여 그에게 상을 내리고자 하니…… 칼튼.”
“예, 전하.”

“그대를 기사로 임명하고자 한다. 또한 그대에게 성자 안토스의 이름을 딴 아니토스라는 성을 하사하며 백작의
작위와 함께, 구 더블레스 백작령을 영지로 하사한다.”

백작이라고?

더블레스 백작령이라니!

귀족들 사이에 제법 거세게 소란이 일었다.

“남작도 아니고 순식간에 백작이라니 대단하군. 더블레스 백작령도 꽤 노리는 이들이 많았던 걸로 아는데.
자네도 몰랐나?”

동부 대영주가 속삭였다. 루이센은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고 왕과 칼튼을 바라보았다.

왕은 칼튼에게 영주로서의 조세권과 사법권이 있음을 말해 주고는 물었다.

“그대는 귀족으로서 내게, 왕국에 충성하겠는가?”

칼튼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가 왕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언뜻 루이센을 스쳐 지나간 것도 같았다.

“충성합니다.”

그 말에 왕은 검으로 칼튼의 양어깨를 한 번씩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시종을 시켜 그에게 증서를 건네주었다.

“새로운 백작의 탄생을 다들 축하해 주게.”

왕은 손수 칼튼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칼튼이 일어나 귀족들을 한번 쓱 돌아보았다. 다들 얼떨떨하여 반응이


없었는데, 동부 대영주가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그는 신이 선택한 용사이니, 분명 왕국을 위해서도 귀하게 쓰일 것입니다.”

동부 대영주가 나서자, 귀족들도 덩달아 박수를 쳤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칼튼이 세운 공은 누구도 비교할 수
없었고, 그에 대한 상도 이미 내려진 일이었다. 누구도 1 왕자에게 불만을 표현할 수 없었다.

칼튼은 귀족들의 질시 어린 시선과 박수를 받으며 루이센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칼튼이 비로소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자신만만하고 거만한 미소였으며 아주 칼튼다웠다.

1 왕자가 연회를 즐기라고 선언하였고, 칼튼은 루이센에게 곧장 다가왔다. 루이센은 뚱하게 자리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나한테는 신경 쓸 거 없다더니?”

“그렇다니까요? 제가 다 손을 써 놨거든요.”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루이센이 도끼눈을 하고 묻자, 칼튼은 그제야 그동안 여유만만했던 이유를 털어놓았다.


사실 칼튼은 수도에 도착하여 흑막이 정체를 드러낼 때쯤부터 더블레스 백작령을 차지할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 싸움이 끝나면 더블레스 백작은 죽을 것이다. 그는 이단에 손댔기 때문에 그의 사후 영지와 재산은 국가로
귀속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국가는 지금 백작령을 관리할 역량이 안 되니, 적당한 사람에게 떠넘기려고 할
것이다.

칼튼의 용병단이 백작령을 점령하고 치안을 유지하고 있다면, 왕국은 괜히 일이 복잡해지는 걸 피하기 위해 일단
그대로 둘 것이다. 그사이 1 왕자가 왕위를 잇고 나면, 칼튼은 1 왕자를 도운 공에 악마숭배자까지 처단한 공을
인정받아 작위를 받게 될 것이다.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백작령을 영지로 줄 수밖에 없게 되는 거다.

더블레스 백작령은 남부치고는 농산물 생산량이 적지만 강을 끼고 있어 잘만 하면 무역을 발전시키기 좋아, 많은


귀족들이 탐낼 만한 영지였다. 평소 같으면 언감생심, 칼튼에게 돌아올 리 없는 영지였다.

백작가의 가신들은 이단과 결탁한 죄로 모조리 사형당할 테니, 칼튼 휘하의 용병들에게 한 자리씩 나누어 주며
정착시키기도 좋았다.

무엇보다 공작령과 가까웠다. 숲을 하나 사이에 두고 백작 저택과 공작성이 붙어 있으니, 루이센과 멀리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루이센도, 성공하겠다는 꿈도,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도,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욕심을 실현시켜 줄
계획이었다.

이렇듯 칼튼은 착실히 루이센과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오늘만 해도 1 왕자에게 청탁을 넣으러 가려다가 괜히 위로만 해 주고 돌아왔는데! 루이센이 억울해서 칼튼에게
따졌다.

“미리 말해 줄 수 있었잖아?”

“설레발 치기도 싫고, 놀라게 해 주고 싶기도 했고. 그리고 이편이 훨씬 멋있잖아요?”

“그, 멋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래서 싫어요?”

칼튼은 자신이 연회장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루이센이 자신에게서 눈을 못 떼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뻔한 것을


되물었다. 그리고 루이센은 칼튼의 그런 수작질에 그대로 넘어갔다.

“싫을 리가!”

루이센은 열렬히 고개를 저었다. 발그레해진 뺨을 하고, 떨리는 눈동자로 칼튼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표정이었다.

“……다시 반했어. 자네는 항상 놀라워.”

그 정신이 없이 돌아가던 와중에도 자기 밥그릇은 확실히 챙기는 수완과 치밀함은 루이센의 가슴을 뛰게 했다.
자신의 인생에 이렇게 생존력이 뛰어난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럼 저랑 같이 춤을 춰 주실 거예요?”

“당연하지!”

칼튼이 내미는 손을 루이센은 냉큼 잡아 일어났다. 칼튼은 하하, 하고 크게 웃으며 충동적으로 루이센에게 입을


맞추었다. 루이센도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

또 한 번 연회장이 충격에 휩싸였고, 흐르던 음악도 멈추었으나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왕성의 가장 높은 곳. 내로라하는 귀족들만 모인 이 자리에서, 손을 잡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되는 대로 춤을 추었다. 춤이라곤 춰 본 적 없는 칼튼의 스텝은 엉망이었고, 루이센은 마구 칼튼의


발을 밟았지만 상관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연인이 되어,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

즉위식이 끝나고 며칠 뒤.

루이센과 칼튼은 새벽에 사람들 모르게 몰래 단둘이 여행길에 올랐다. 둘만 몰래 떠난 것을 알면 가신들이 기겁을
하겠지만, 이번에는 주머니가 넉넉한 호화로운 여행을 단둘이 즐기고 싶었다.

두 사람이 제피스에 올라 수도를 빠져나갈 때쯤, 의외의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리슨이었다. 모리슨의 옆에는 짐마차가 한 대 함께 있었다.

“여기서 뭘 하나?”

“떠나시기 전에 작별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저도 이제 수도를 떠날 생각이거든요.”

“벌써?”

루이센이 놀랐다.

“네. 뒷일은 사제들이 처리할 겁니다.”

모리슨은 다시 이단심문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을 떠돌며 이단의 징후를 찾아내고
징벌하는 일 말이다.

“그럼 이제 자네와 만날 일이 없으려나?”

“네. 없겠죠.”

단호한 대답에 루이센은 좀 섭섭했다. 그래도 그동안 정이 쌓였는데.

“저 같은 사람을 만날 일이 없는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모리슨이 웃으며 루이센을 달랬다. 그는 이런 종류의 이별에 무척 익숙해 보였다.

“아마 다음에 다시 만나도 못 알아보실 겁니다. 저는 이제 이 얼굴과 이름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그렇겠군.”

“사실 작별인사도 안 하려고 했습니다만…… 저 친구는 만나게 해드리고 싶어서 말이죠.”

모리슨이 성벽의 그늘진 곳을 가리켰다. 그러자 슬그머니 죽음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어딘가
쭈뼛거리는 느낌으로 루이센을 바라보았다.

“루거! 어디로 갔나 했더니, 모리슨과 함께 있었어?”

루이센은 반갑게 그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둘이 같이 있는 겁니까?”

칼튼이 물었다.

“저와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원래 대로라면 암굴에 갇혀 평생 잘못을 참회해야겠지만. 그는 쓸모가 있으니까요.”

“영원히 부려먹겠다는 거잖아? 자비로운 건지, 악랄한 건지.”

칼튼은 혀를 차고는 가만히 루이센과 죽음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모리슨을 따라가면 자네도 다시 만날 수 없겠지?”

[…….]

죽음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

죽음의 기사는 눈에 새겨 넣으려는 것처럼 루이센을 빤히 바라보았다. 머쓱해진 루이센이 말했다.

“그래도 마지막인데 무슨 말이라도 해 봐?”

[…….]

죽음의 기사는 망설이듯, 그의 말이 몇 번이고 제자리걸음을 했다. 그러다가 어렵사리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실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것인데…….]

“뭔데?”

죽음의 기사는 또 한참을 망설였다. 루이센은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게 마지막 만남이 될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미안합니다.]

“아……뭘 또 사과를 하고 그래. 괜찮아, 괜찮아. 이미 용서했잖아.”

루이센은 코끝을 찡긋거렸다. 막상 그에게 사과를 들으니 가슴이 찡한 것이 있었다.

“모리슨 잘 따라 다니고…… 꼭 성불해라.”

칼튼은 인상을 찌푸렸다.

끝까지 루거가 자기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다는 것을, 연적인 칼튼만이 알아챘다는 사실이 몹시도 찜찜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루이센에게 대신 말해 줄 생각도 없지만. 자신 말고 다른 남자 마음 따위는 루이센이 알
필요 없었다.

죽음의 기사와 루이센의 대화가 끝나자, 모리슨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이 짐마차에 올라탔다.

“그럼 두 분 앞길이 빛으로 충만하길 바라겠습니다.”

“자네도, 무사를 빌지.”

“네. 그럼 이만.”

모리슨은 한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말을 움직였다. 그의 모습이 빠르게 멀어졌다. 죽음의 기사가 루이센에게
묵례를 하고 모리슨의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너무도 깔끔한 이별이라 지켜보는 사람이 다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왠지 그들의 뒷모습을 보자, 정말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 허전함은 그


탓인지도 모르겠다.

루이센은 칼튼을 끌어안으며 헛헛한 기분을 달래었다. 그리고 잠시 뒤, 두 사람은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언제
울적했냐는 듯이 두 사람의 발걸음에는 앞으로의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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