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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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으로보는유럽문명과기독교】

제6강 십자군 전쟁

1. 십자군(Crusades)이란?
-십자군 구성: 성직자, 기사, 농민이 모두 참여(세 신분의 참여)
-출신 지역: 프랑스 북부 출신이 가장 많았고(현지에서는 십자군을 프랑스인이라 부름), 그 외
에도 프로방스, 시칠리아, 이탈리아, 영국, 독일, 헝가리인들이 참가함
-원정 목적: 이교도 수중에 있는 성묘탈환
-명칭: 복장에 ‘십자가’ 표시를 부착한데서 유래 → 그들을 특별한 하나의 집단으로 구별시킴
-십자군 원정: 십자군 대신 성지순례, 항해, 해외여행 같은 명칭을 같이 쓴다.
-십자군 전쟁: 성직자들이 군대마다 수행하며 영적 지도를 함, 정예기사보다 많은 농민들이
보병과 보조원 역할을 함. cf.1차 십자군 출정 이전에 교회 허가 없이 이뤄진 비공식적 십
자군이었던 민중십자군과 소년십자군(1211)에 농민, 빈민, 부랑자가 대거 참여했다.
-십자군 전쟁의 영향: 십자군 전쟁은 유럽 역사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그
여파가 현재까지 수습되지 않은 상태

2. 십자군 전쟁(1095-1291)과 그 동기
근동(레반트)의 라틴 국가를 수호하고, 튀르크의 이슬람교도로부터 성지를 회복하며,

오리엔트의 기독교도를 구하자는 교황의 호소에 응해 유럽의 기독교도가 11-13세기에

일으킨 원정을 십자군전쟁이라 한다. 주로 1095년부터 1291년에 걸쳐 서유럽의 기독교

군대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싸운 전쟁을 가리킴. 서유럽인들은 종교적

열정으로 성지를 탈환하려는 ‘무장순례’ 길에 오름. 십자군 전쟁을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 양

세계는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고 문화적, 경제적 교류 또한 확대됨. 그러나 전쟁은 양 진영

간의 파괴와 대립을 초래, 기독교 세계 내의 분열 또한 심화시킴 →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 사이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또 이슬람의 유럽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감의 근원이 된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① 종교적 - 셀주크 튀르크가 1070년 이집트의 파티마 칼리프가 지배하던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된다. 1년 후 동로마 황제가 만지케르 전투에서 셀주크 튀르크에게 패해 비잔틴제국

의 소아시아의 영토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그리하여 수많은 기독교 순례자들이 핍박을 당

하고 성직교회들이 신성모독의 피해를 입었다. 이에 비잔틴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의 구

원요청에 로마 교황이 동서교회를 통합을 명목으로, 교황의 최대 적이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


제 하인리히 4세를 곤경에 빠뜨리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 로마교회와 크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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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교 세력의 통합 및 확장에 대한 추구와 그를 뒷받침했던 중세인들의 열렬한 신앙심의 표출.

전쟁에 참여하는 일반인은 십자군 참전으로 얻게 되는 면죄부에 크게 매료됨. 교황 우르바누

스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회의 연설에서 ‘십자군 참전을 고해성사로 간주했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죄의 속죄로 겪어야할 이세상의 형벌이 사면될 것’이라고 연설했다.

② 경제적 - 이슬람교도가 장악하고 있는 동방 무역권을 장악하고자 함. 십자군 원정에 관심

을 보인 나라들은 주로 중상주의의 이익을 노리는 이탈리아의 도시들-피사, 아말피, 제노아,

베니스-등이었다. 이들 도시들은 오리엔트에 발판을 놓아두면 막대한 이득을 거둘 것이라고

기대했다. 서유럽 기사들 또한 외국지역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면, 그들의 용맹과 신앙을 보

여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여김.

③ 정치적 - 민족 대이동의 혼란이 가라앉고 봉건제도가 자리 잡음에 따라 기사들이 영지 부

족과 전투 경험 기회의 부족을 느낌.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대규모 병력을 외부로 방출시킴

으로써 유럽의 대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봄. 이미 10세기 말부터 프랑스 교회는 봉건 기

사들의 전투를 줄이기 위해 ‘평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즉 ‘신의 평화’라 하여 비전투원

에 대한 공격을 금지했고, ‘신의 휴전’이라 하여 특정한 축일에 전투 행위를 금지했던 것이다.

정말로 싸우기를 원한다면 해외로 나가 가톨릭교의 대의를 위해 십자군으로서 정당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 과정

-제1차 원정(1096~1099): 제1차 십자군은 종교적 신앙적 동기가 컸다. 클레르몽 종교회의에
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제안했다(1095). 서유럽 전역에서 몰려온 10만 명의 남성, 여성,

아이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 우르바누스 2세는 두 곳에 원정대를 보냈다. 하나는 피

에르 레르미트가 지휘한 평민 중심의 원정대(=민중 십자군)로 튀르크에게 전멸당했으며,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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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안티오크, 에데사, 예루살렘을 점령당했다(1099). 정예 십자군 부대는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해서 원정길에 올라 성지회복(에루살렘). 이들은 오리엔트에 안티오크의 공작령, 에데사의

백작령, 예루살렘 왕국과 트리폴리 공작령 등 네 개의 라틴왕국을 건설했다.

예루살렘에 라틴왕국을 건설한 후 최대 문제는 동방에 머물고자 한 십자군이 극히 드물

었기 때문이다. 십자군은 서약한 바를 완수한 뒤 대다수 고향으로 돌아갔다. 십자군은 장기간


의 여행에서 목숨의 위험, 엄청난 여행비용(2년치 수입이 필요)을 마련위해 기사들은 땅을 저

당 잡히고, 가족, 친구, 수도원, 상인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렸고, 부채상환의 압박감에 시달

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도의 영혼에 위안을 주고 면죄부를 위해 십자군에 참여했

다.

-제2차 원정(1147~1149): 1144년 튀르크족에게 뺏긴 에데사를 탈환하기 위해 결성됨. 성 베

르나르가 설파하고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 황제 콘라드 3세가 합동 지휘하여 다마스쿠스

를 포위했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에데사의 백작령이 점령됨(1144), 튀르크족은 하틴 전투

에서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1187).

-제3차 원정(1189~1192): 이슬람의 술탄인 살라딘이 재장악한 예루살렘의 해방을 목표로 삼

았다.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바바로사(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영국의 사자심

왕 리처드 1세가 지휘했다. 원정군 지도자들의 불화와 행군으로 쌓인 피로, 기아, 질병 등으로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 바바로사는 도중에 익사를 당하고, 필리프는 일찍이 돌아가 버리자, 혼

자 남은 리차드는 남아서 1년간 지휘, 1191년 살라딘을 격파한 뒤 3년간 휴전협정을 맺음.

리차드는 교묘한 기사도적 예의와 격렬한 공격의 양면 작전으로 살라딘과 협상, 결국 리차

드는 약간의 해안지대를 회복하고, 살라딘은 무슬림의 무역활동을 보장받는 대신 예루살렘에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기로 함, 그러나 휴전 협정을 맺고 귀국 도중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되어

거액의 몸값을 내고 1194년에 석방되어 귀국함. 제3차 십자군은 양쪽에 반반의 승리를 가져

다 준 전쟁이었음.

-제4차 원정(1202~1204):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수행, 플랑드르의 보두앵 9세와 몽페라의 보

니파키우스 2세가 지휘한 원정군은 비잔틴의 정치와 상업에 대한 후원자였던 베네치아 상인들

의 요구에 못 이겨 원래의 목적지(이집트→예루살렘으로 진군 계획)에서 벗어나 경로를 바꿨

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1204) 라틴제국을 건설했다. 플랑드르 귀족이 황제로, 그

리고 베니스의 사제가 총대주교로 앉았다. 이러한 방법으로 서방과 동방의 잠정적인 정치적,

종교적 재통일이 성취되었다. 이것은 1261년까지 지속됨.( 그후 동방 그리스인들은 다시금 수


세기 동안 서방과 쟁투를 재개하게 됨). 이 원정에서 베네치아인들은 지리적 상업적 큰 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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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입었다. 소년십자군의 활약과 실패.

① 그리스 본토에 유럽식 봉건국가가 세워짐

② 베네치아의 상업적 해양제국이 확장됨 (베네치아 흑해 무역 독점권을 얻음)

③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의 분리가 명확해졌고, 오리엔트 지역에서 프랑크족의 입지가

더욱 커짐
* 제4차 십자군은 종교적 신앙적 동기보다 세속적 경제적 동기가 컸다.

-제5차 원정(1217~1221): 성지탈환의 꿈을 접지 못한 교황 이노센트 3세에 의해 다시 출정

됨. 예루살렘 왕이 지휘했으며, 이집트를 통해 성지에 갈 수 있다고 확신한 나머지 이집트의

다미에타를 일시적으로 점령하는데 그쳤다. 신성로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가 약속한 증원부대

가 도착하지 않아 진군할 수 없었음.

-제6차 원정(1228~1229):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지휘했으며, 이슬람 진영과 협상하여 예루

살렘, 베들레헴, 나사렛을 일시적으로 획득하는 외교적 승리를 거둠. 피보다 대화로 실리 추구

함. 싸움보다 조약으로 성과를 거둠, 즉 술탄에게 10년 동안 예루살렘 성지관할권을 인정받

음.

-제7차 원정(1248~1254): 프랑스의 루이 9세(성왕)가 지휘해 이집트로 향했다. 다미에타 정복

이후 그는 만수라에서 포로로 잡혀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그러나 그와 그의 귀

족들은 목숨을 유지했지만, 그의 일반군인 300여명은 관리상의 어려움으로 죽임을 당함.

-제8차 원정(1270): 루이 9세와 앙주의 샤를 1세가 조직했다. 튀니지에 상륙한 뒤 루이 9세는

병사했다.

※ 최종적으로 거룩한 도시는 영원한 기독교 국가에서 사라지고 이슬람 수중에 점령당하고 말

았다. 몇 번의 재탈환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왜냐하면 1250년 막강한 새로


운 무슬림 맘루크족의 왕조가 이집트에서 일어나 침략군을 봉쇄시켰기 때문이다,

4. 결과

① 유럽에서 교황권 실추, 크리스트교에 대한 열정이 위축됨

② 십자군 실패 이후 각 지역의 왕권은 교회에 대한 반격을 본격화, 군주뿐만 아니라 십자


군 전쟁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던 봉건귀족들은 노골적으로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을 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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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봉건귀족세력의 약화로 왕권이 강화되면서 중세 봉건사회의 붕괴가 촉진되고 중앙집권화

가 이루어짐

④ 동방세계와의 접촉이 문화적 자극과 원거리 무역의 확대를 낳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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