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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경쟁을 배제할 수 있는가?

김보일

경쟁을 배제하기 위해 종들은 언제나 서로 원하는 것을 달리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나


간다.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동식물들이 서로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상대방과 똑같
으면 둘 중 하나는 멸종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공존하기 위해 서로 다른 니치를 갖
도록 변화한 것이다

경쟁 배제의 원리
1960년대 가난했던 시절, 밥상에서 소고기를 볼 수 있는 날은 생일이나 명절날과 같이
특별한 날뿐이었다. 그런 날 밥상에 소고기가 올라오면 서로 한 점이라도 더 먹겠다고
동생과 으르렁거렸던 기억이 있다. 내가 육식을 좋아하고 동생이 채식을 좋아했다면 음
식을 놓고 형제끼리 다툴 필요가 없었겠지만 불행히도 우리 형제는 식성이 비슷했다.
자연계에서도 먹잇감이 비슷하면 먹이를 두고 경쟁이 일어난다. 서로 물고 뜯는 처절한
살육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두 種(종)의 먹잇감이 달리 말해서 생태적 요구 조건이
같으면 같은 지역에 공존하기 어렵게 된다. 이때 평화를 원한다면 서로 부딪히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부딪히지 않을까?
방법은 간단하다. 먹잇감을 달리하든지, 거주지를 달리하든지, 활동 시간을 달리하면
된다. 가령 나뭇잎을 먹고 사는 애벌레들 중 어떤 애벌레는 오래된 소나무의 잎만을 먹
고 살고, 또 노루나 고라니는 어린 소나무나 침엽수의 겨울눈이나 풀을 주로 먹고, 사슴
은 나무껍질이나 사초류 등을 먹고 산다. 이처럼 먹잇감을 달리하면 분쟁이 일어나지 않
는다.
이때 일반적으로 힘이 센 녀석들은 좋은 먹잇감을 차지하고, 힘이 약한 녀석들은 그보
다 나쁜 먹잇감을 차지하게 된다. 이때 한 種(종)이 차지하는 먹잇감, 서식 장소, 활동 시
간 등을 생태적 지위, 곧 ‘니치(niche)' 라 한다. 생물은 각각 하나의 생태적 지위를 차
지하고 생활하고 있으며, 생태적 지위를 같이하는 두 종류의 생물은 동일한 환경에서는
공존한지 못한다는 것이 이른바 ’경쟁 배제의 원리‘다.

경쟁을 피해 진화한다.
1930년대 러시아의 생태학자 가우스는 배양액에서 자라는 두 종의 짚신벌레 개체군을
가지고 많은 실험을 했다. 두 종을 따로 키웠을 때, 각 종의 개체군은 예상대로 S모양으
로 생장하다가 시간이 지나자 한 종은 생존하고 다른 종은 소멸했다. 이후 30년 동안 유
사한 실험을 해 보았는데 다른 원생동물, 효모, 히드라, 물벼룩, 초파리, 쌀벌레 그리고
좀개구리밥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났다. 이런 결과들에 기초하여 1960년에 생태학자
가렛하딘은 “제한된 자원을 공동으로 이용하는 두 종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경쟁 배제의
원리를 제안했다.
경쟁을 배제하기 위해 종들은 언제나 서로 원하는 것을 달리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간
다. 달리 말하면 경쟁을 배제하기 위해 서로 다른 ‘니치(niche)'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동식물이 서로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상대방과 똑같으면
둘 중 하나는 멸종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공존하기 위해 서로 다른 니치를 갖도
록 변화한 것이다.
같은 나무에 의존해 사는 생물들도 잎을 먹는 것, 수피를 먹는 것, 수액을 먹는 것들
이 있다. 이들의 니치가 다르니 서로 부딪힐 일이 없다. 캐나다 남동부 침엽수림에는 동
일한 나무에 딱새 5종이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딱새들은 치열하게 먹이 경쟁을 하지 않
았다. 로버트 맥아더라는 학자는 같은 나무 안에서 각각의 딱새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구
역이 구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각 종은 나무의 특정 부위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에 경쟁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나만의 니치를 찾아
수영 선수는 육상 선수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동메달을 딴 수영 선수는 금메달을 딴 수
영 선수를 부러워하기 마련이고, 은메달을 딴 육상 선수는 금메달을 딴 육상 선수를 부
러워하기 마련이다. 금메달 삼관왕의 수영 선수가 금메달 오관왕의 육상 선수를 부러워
하겠는가? 수영 선수는 육상 선수나 권투 선수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아예 영역이 다
르면 시기심이 발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감독은 좋은 영화를 찍기를 바라고, 미술가는 훌륭한 그림을 그리기를 바란다. 영
화 감독이 미술가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만의 영역을 갖게 되면
남의 영역을 넘보지 않고 자기만의 시계에 몰입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
고흐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열정으로 그림을 그렸고, 베토벤은 청력을 잃어버리
는 불운에도 불구하고 작곡에 모든 것을 쏟았다. 고흐의 ‘니치’가 그림이었다면, 베토벤
의 ‘니치’는 음악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나만의‘니치’는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나만의 니치에 몰두할 때 황금만
을 좇는 세상의 경쟁에서 벗어나 나만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미술관에 가 보라. 거기에는 나만의 니치를 좇았던 예술가들의 개성이 피워 낸 꽃이 아
닐까.

-국어교사의 과학으로 세상 읽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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