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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신

1-12 권 完
-김강현

1권

프롤로그

유적은 텅 비어 있었다. 제론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싹 긁어 갔군.”
알뜰하게도 쓸어 갔다. 유적 안에는 돌멩이 하나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심지어는 벽에 그려진 문양이나 그림까지
몽땅 뜯어가 버렸다.
그래서 유적 곳곳에 뜯어 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독한 놈들.”
유적 내부는 다른 유적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통 유적은 던전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중간 중간 침입자를 처리하기 위한 각종 트랩이 즐비했다. 그것을 모두
뚫고 들어가면 고대의 비밀을 엿볼 수 있었다. 더불어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보물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 유적은 그런 트랩들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그조차 싹 해체해서 통째로 뜯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제론은 황량한 유적 내부를 둘러보며 이를 갈았다.
“슈린 공작……!”
이곳의 유적을 몽땅 뜯어 간 자가 바로 슈린 공작이었다.
유적 발굴에는 많은 돈과 인력이 들어간다. 그래서 보통 여러 가문이 힘을 모아 발굴하고 이득을 나눈다.
이 유적은 슈린 공작가와 제론의 가문인 에어스트 백작가가 힘을 합쳐 발굴했다. 대부분의 일은 슈린 공작가에서
했고, 에어스트 백작가에서는 상당한 자금을 투자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에어스트 백작가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유적으로 들어가는 자금이 지나치게 많아진 탓이었다.
결국 에어스트 백작은 유적 일부가 무너지는 바람에 그 안에서 죽고 말았다.
제론은 그 모든 상황이 다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더 믿을 수 없는 건 계약서였다.
유적은 에어스트 가문이, 그리고 유적 안의 유물은 슈린 가문이 모두 가지기로 한 어이없는 계약이었다.
그 계약에도 뭔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지만 제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유적 근방의 땅이라도 가질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인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없느니만 못한 땅이 바로 이 땅이었다. 너무나 척박해 쓰레기나 다름없는 땅이었는데,
세금은 세금대로 내야만 했으니 말이다.
슈린 공작은 이번 일로 어마어마한 이득을 얻었다.
그의 가문이 유일하게 긴장할 만한 상대인 에어스트 백작가를 무너뜨렸으며, 유적 발굴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보물과 돈을 얻었다.
거기에 쓸모도 없고 세금만 나가는 땅도 남에게 던져 버렸다. 뿐이랴. 유적 발굴에 가문의 병사와 기사,
마법사를 썼기에 그들 역시 한층 성장했다.
그야말로 이득만 가득하고 손해는 전혀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제론은 그것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가문에 남은 핏줄이라고는 이제 자신뿐이었다.
“후우우.”
숨을 길게 내쉰 제론은 고개를 저으며 유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유적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보통은
이렇게까지 유적을 파헤치지 않는다. 유적은 발굴된 이후에는 관광 상품으로 써먹을 수 있다.
그렇기에 안에 있는 문양이나 벽화는 남겨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데 이곳은 그조차 불가능했다.
바닥 곳곳에 깊은 구덩이가 보였고, 벽 군데군데가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듯 무너져 있었다.
제론은 그렇게 유적의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원래대로라면 유물이 잔뜩 쌓여 있는 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텅 빈 것도 모자라 벽면 곳곳이 파헤쳐지고 무너져 있었다.
“폐허도 이런 폐허가 없네.”
제론은 멍하니 내부를 둘러봤다. 거대한 동공이었는데, 천장까지 파헤쳐진 걸 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너무하는군.”
그래도 이제 더 이상 가져갈 게 남지 않았으니 슈린 공작가도 관심을 끊을 것이다.
제론은 동공 한가운데 누웠다. 바닥이 깊게 파헤쳐져 있기에 구덩이 안에 누운 셈이 되었다.
“꼭 무덤에 들어간 것 같구나.”
제론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휘류루루룽.
따스한 바람이 한차례 불어 제론의 몸을 감쌌다. 제론은 그제야 미약하게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제론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바람이 손가락에 머물렀다. 사실 그것은 바람이 아니라 바람의 정령이었다.
“세상에 이런 게 존재한다는 걸 과연 아는 사람이 있을까?”
제론은 손가락을 휘감고 노니는 정령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나마 요즘 자신에게 웃음을 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정령은 제론의 손가락을 빙빙 돌다가 손등을 타고 손목으로 올라갔다. 제론의 손목에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과 함께 전해지는 팔찌였다. 물론 아무도 그 비밀을 알아낸 사람이 없었다.
정령이 팔찌를 몇 바퀴 돌더니 갑자기 팔찌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제론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지?”
팔찌가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악!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그리고 유적지 전체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우르르르릉.
제론은 갑자기 자신이 아래로 쑥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다시 환해졌을 때, 제론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사방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기묘한 문양이 가득 찬 공간이었다. 문양들을 휘돌던 빛이 이내 하나로 모이더니
그대로 제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지잉!
제론은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이마에 그 빛을 그대로 맞고 말았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광선이 제론의 이마에 있다가 양쪽 눈으로 한 번씩 자리를 이동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오 마스터 인식. 홍채 등록. 초기 권한을 설정합니다.
제론은 멍하니 그 모든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문양에서는 더 이상 빛이 나지 않았다. 제론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봤다.
“아……!”
투명한 천장을 통해 보이는 것은 유적지 내부의 광경이었다. 어떻게 온 건지 모르지만 이곳은 유적지의 지하였다.
제론의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숨겨진 유적을 찾은 것이다.

Chapter 1 유적

제론은 신기한 눈으로 유적 내부를 둘러봤다.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니었다. 딱 유적지 내부의 동공 정도였다.
하지만 정말로 신비로웠다.
벽면을 가득 메운 문양이 때때로 번득였는데,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한데 대체 뭐 하는 곳이지?”
벽면에 아름답고 기묘한 문양이 가득했지만 그뿐이었다. 이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튜토리얼 모드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튜토리얼이라는 말은 대충 알아들었다.
“한다!”
늦기 전에 얼른 대답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마치 제론을 놀리기라도 하듯 더 이상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제론은 아무리 기다려도 변화가 없자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뭐지?”
제론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또 여기가 무얼 하는 곳인지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일단 유적지 아래라는 건 명백하고…….”
여전히 투명한 천장을 통해 유적지 내부가 보이고 있었다. 즉, 저 천장이 유적지 바닥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체 왜 갑자기 이렇게 투명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은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느냐는 건데…….”
이곳에 오기 전 상황을 떠올리면 지금 차고 있는 팔찌 때문인 것이 확실했다. 또한 그때 자신과 놀아 주던 바람의
정령도 관계가 있음이 분명했다.
“어떻게 확인한다…….”
바람의 정령과는 친구가 되었지만 아직 확실히 계약한 게 아니기 때문에 맘대로 팔찌에 집어넣거나 할 수는 없었다.
“넣어 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강하게 바람의 정령을 염원했다. 처음 정령을 만나게 되었을 때를 떠올리니 금세
정령이 나타났다.
휘류루루루룽!
정령은 나타나자마자 제론을 한 번 휘돌고는 제론의 손가락에서 놀았다. 일부러 팔찌를 정령에 가까이 가져갔지만,
정령은 그저 놀기만 할 뿐 아까처럼 팔찌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론은 답답했다. 하지만 계약을 하지 못하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계약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가능할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세상에 정령사가 사라진 지 벌써 1,000 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정령사에 대해 알려진 건 고대 유적을 발굴하면서 나온 몇 가지 기록 때문이었다. 즉, 그 외에는 정령에 대해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
제론이 정령을 그렇게 가만히 보고 있을 때, 벽면의 문양이 물결치듯 번쩍였다.
―정령 확인. 계약을 진행합니다.
제론은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 내용에 설렜다.
“설마 유적이 정령 계약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가?”
바닥이 은은히 빛났다. 번쩍번쩍 빛이 날 정도로 매끄러운 바닥이었는데, 그 재질을 알 수 없었다. 한데 그것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빛은 이내 거대한 마법진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 한가운데 제론이 소환한 바람의 정령이 갇혔다.
마법진이 한순간 강렬하게 빛났다. 그리고 빛과 함께 정령도 사라져 버렸다.
―계약 완료. 소환 명령 코드는 아네모스입니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루룽!
제론이 의문을 갖고 중얼거리자마자 사방에서 바람이 몰려들어 뭉치더니 순식간에 바람의 정령이 나타났다.
제론은 깜짝 놀라 나타난 정령을 바라봤다. 정령의 느낌이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한 자리에 맴도는 것이 마치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이 팔찌에 들어가.”
제론은 반신반의하며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정령은 즉시 날아 팔찌로 스며들었다.
정령을 받아들인 팔찌가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제론은 팔찌 찬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리저리 손목을 돌리며 팔찌를 살폈다.
그러자 사방에서 팔찌를 향해 빛줄기가 쏘아졌다.
징! 징! 징!
팔찌가 은은히 진동했다. 그리고 바닥도 진동을 시작했다.
―기본 물품 지급합니다.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고, 벽에 가까운 바닥 한 부분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마치 기둥이 솟아나는 듯했다.
제론은 그곳을 향해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그 옆으로 연달아 기둥들이 불쑥불쑥 솟아났다.
똑같은 모양의 기둥들이었다.
기둥은 제론의 가슴 정도 높이였다. 제론은 일단 기둥으로 다가갔다. 모든 기둥이 같은 구조였다, 한가운데 빈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 안에 몇 가지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첫 번째 기둥 안에는 얇은 카드 한 장과 푸른빛이 감도는 작은 병 하나가 있었다.
“이걸 내게 준다는 뜻인가?”
제론은 일단 옆에서 함께 솟아난 다른 기둥도 확인했다. 두 번째 기둥에는 역시 얇은 카드 한 장과 검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척 보기에도 상당히 좋은 검이었다.
그 옆의 기둥에는 팔찌 하나와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고, 그 옆에는 카드만 달랑 한 장 들어 있었다. 마지막
기둥에는 작은 알약이 잔뜩 들어 있었다.
기둥은 그렇게 5 개였다.
―코르를 마시고 첫 번째 카드에 에너지를 공급하십시오.
기둥을 모두 살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론은 반사적으로 첫 번째 기둥을 쳐다봤다.
“코르?”
낯선 단어였다. 하지만 코르가 무엇인지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작은 병 안에 든 액체가 아마 코르일 것이다.
제론은 코르와 카드를 들었다.
“코르야 그렇다 치고, 에너지를 어떻게 공급하는 거지?”
제론은 잠시 궁리했다. 의외로 답은 쉽게 나왔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룽!
정령이 나타났다. 제론은 정령을 카드에 넣었다. 그러자 카드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역시.”
제론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아직 코르를 마시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병에 든 액체를
꿀꺽꿀꺽 마셨다.
화아아악!
카드에서 나오는 빛이 점점 강해졌다. 이내 카드가 완전히 빛으로 변해 흩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흩어진 빛
가루가 순식간에 제론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어?”
제론은 깜짝 놀랐다. 설마 카드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빛이 몽땅 몸으로 스며들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크윽! 이게 뭐지?”
제론은 자신의 몸속에서 움직이는 뜨거운 기운에 화들짝 놀랐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 기운은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며 일정한 흐름을 갖고 움직였다.
―안정 작업 시작합니다.
제론의 모습이 불안정해 보였는지 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사방에서 초록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일단 제정신을 차리니 몸속을 휘도는 뜨거운 기운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이건…… 마나?’
몸속을 도는 기운은 마나가 분명했다. 제론도 제법 열심히 검을 수련했다. 그렇기에 몸속에 상당한 마나를 품고
있었다.
아직 마나가 자연스럽게 움직여 검에 스며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체력이나 힘, 속도가 꽤 늘었다.
‘마나가 몸속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흐를 수 있다니!’
이건 상식의 파괴였다.
마나를 쓰려면 밖으로 흘러넘칠 정도로 몸에 꽉 채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면 마나를 잘 받아들이는
금속으로 만든 무기에 마나를 흘려 넣을 수 있었다.
한데 이건 대체 뭔가. 몸속에서 마나가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인다면 그걸 유도해 검으로 보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제론은 몸속 마나의 흐름을 한동안 살피다가 눈을 빛냈다.
‘일정한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어쩌면 마나가 움직일 수 있는 특별한 경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론은 열심히 그 경로를 외웠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론은 머릿속에 또렷이 남은 마나의 경로를 그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자동으로 마나가 흐르지 않았다. 이젠 제론이 그 흐름을 일으키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나가
제론의 의지하에 놓였다.
“후우우우우.”
제론은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몸속을 휘돌던 마나는 어느새 아랫배와 심장에 나뉘어 단단히 뭉쳐 있었다.
몸속에 있던 마나가 몽땅 아랫배와 심장으로 모인 듯했다.
제론은 문득 이렇게 마나가 사라져 버리면 마나가 몸에 있을 때보다 힘이나 속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금세 사라졌다. 몸을 움직여 보니 오히려 마나가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가벼웠고, 힘도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럼 몸을 강하게 만든 것이 마나의 힘이 아니었단 말인가?”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답을 쉽게 얻을 수 없었다. 일단 모를 때는 넘어가는 것이 상책이다.
잊어버리지만 않으면 나중에 언젠가는 다 알게 되어 있다. 물론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제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음 기둥에 있는 검과 카드를 들었다. 카드에 정령을 넣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헉!”
제론은 깜짝 놀랐다. 몸속의 마나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 환상이 나타났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내가 유령처럼 나타나 검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휘둘렀다. 제론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몸속의 마나는 여전히 어떤 경로를 따라 일정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 설마?”
제론은 눈앞의 환상을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발을 내디디면 함께 발을 내딛고 검을 휘두르면 같은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곧 놀라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몸속에서 흐르는 마나는 지금 제론이 펼치는 검법과 딱 맞아떨어졌다.
제론이 검을 휘두르거나 발을 움직일 때마다 자연스럽게 마나가 흘러 그 움직임을 더 빠르게, 또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쉭! 쉭! 쉭!
어느 순간부터 환상이 사라졌다. 또한 마나도 더 이상 자동으로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제론은 눈을 감은 채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몸을 움직였다. 또한 몸과 뇌리에 각인된 길을 따라 마나를
움직였다. 제론의 몸과 마나가 온전히 그의 의지 아래 놓였다.
후웅! 후웅! 후우웅!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유적지 가득 울렸다. 제론은 어느 순간 몸과 정신, 그리고 검과 마나가 일체화되는
것을 느꼈다.
휘이잉!
그렇게 일체화한 상태로 검을 휘둘렀다. 마치 모든 것이 갈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론은 그 상태 그대로 멈췄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거센 마나가 회오리치다가 사라졌다. 아니,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우우욱!”
제론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날숨을 통해 몸에 약간 남았던 탁한 기운이 빠져나갔다.
“상쾌하군.”
너무나 상쾌했다. 또 몸이 가벼웠다. 아랫배와 심장에 자리 잡은 묵직하고 단단한 마나의 느낌이 이렇게 기분
좋을 줄은 몰랐다.
제론은 아랫배에 뭉친 마나를 움직여 봤다. 그의 의지에 따라 마나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마나는 거침없이 길을 따라 흘러갔다.
제론은 검을 휘둘렀다.
쉬익!
검에 마나가 담겨 푸른 궤적을 그렸다.
“굉장해.”
검에 마나를 담으려면 일단 검이 뛰어나야만 한다. 테페룸을 섞지 않으면 결코 마나를 담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각고의 수련을 통해 몸에 마나를 꽉 채워야만 한다. 그렇게 마나가 몸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밖으로
흘러넘칠 정도가 되어야 그 여분의 마나가 검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일단 검에 마나를 담을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는 아예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가지게 된다. 각고의 수련을 통해
온몸에 마나를 꽉 채웠으니 육체적 능력이야 너무나 당연했고, 마나가 스며든 검은 무엇이든 자를 수 있었다.
검에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경지를 익스퍼트라고 부른다. 마나가 검에 스며들었다는 자체가 보통 기사를 월등히
뛰어넘는 힘을 가지기에 그리 부르는 것이다.
레늄 왕국에 익스퍼트가 총 7 백 명 정도가 존재한다. 왕국의 인구가 1 천만을 훌쩍 넘어가니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익스퍼트가 되었다는 뜻이니 믿기지 않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제론을 더 놀라게 한 것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제론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이상의
경지가 까마득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러니 내가 무슨 검술의 천재라도 된 것 같네.”
제론은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검술 실력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중상위권에 불과했다. 그보다 강한 자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기간트로 가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제론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기간트 라이더였다. 물론 아직 정식으로
기사 작위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죽은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을 테니 말이다.
제론은 다음 기둥으로 가서 망설임 없이 그곳에 있는 팔찌를 찼다. 그리고 카드에 정령을 넣었다.
이번 카드는 팔찌의 사용법에 대한 설명이었다.
제론을 꼭 닮은 사내가 나타나 팔찌 쓰는 모습을 보여줬다. 너무나 알기 쉽게 내용을 받아들인 제논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팔찌에 아공간 마법을 담을 수 있단 말이야?”
기간트가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함께 발전해 온 것이 바로 아공간 마법이었다.
하지만 최신 아공간 마법이라 하더라도 팔찌에 담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장 잘 만든 것이 검이었다. 그것도
무식하게 큰 양손검과 검집에 안팎으로 빽빽하게 마법진을 새기고 나서야 간신히 만들 수 있었다.
“그나마도 크란 제국에 하나밖에 없지, 아마?”
제론은 손목에 찬 팔찌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중얼거렸다. 크란 제국에 단 하나 존재하는 아공간보다 훨씬 대단한
아공간이 자신의 팔에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팔찌는 보석 하나 박히지 않아 얼핏 보면 밋밋했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련미가 넘쳤다. 그리고
팔찌에서는 그 어떤 마법적인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보면 아티팩트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군. 대단해.”
보통 작은 아티팩트는 그 기능이 약한 법이다. 아공간을 만드는 아티팩트가 고작 이 정도 크기이리라고 누가
예상하겠는가. 이런 아티팩트는 사실 그동안 유적지의 유물들 중에서도 없었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룽!
이 아공간 팔찌는 현재 제론만이 쓸 수 있었다. 팔찌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정령이 필요했으니까.
정령이 아공간 팔찌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눈앞에 아공간 안에 든 물품들이 일목요연하게 나타났다.
정말로 놀라운 마법이었다. 이렇게 안에 든 내용물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도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했다.
안에는 신기한 물건투성이었다. 사실 어떻게 쓰는 건지 아예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알 수 있는
거라고는 단검이나 활, 화살 정도였다. 거기에 동전들이 있었는데, 문양이 지금 쓰는 금화나 은화와는 확연히
달랐다.
물건을 꺼내는 건 아주 간단했다. 눈앞에 환상처럼 나타난 것들을 그저 집으면 그만이었다.
제론은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동전 몇 개를 꺼냈다. 그리고 정말로 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판 하나를 꺼냈다.
동전을 만지는 순간, 제론은 깜짝 놀랐다. 만져 보기 전에는 그저 금인 줄 알았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진득한 마나가 그것에 다량의 테페룸이 섞여 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순수한
테페룸일 수도 있었다.
“테, 테페룸으로 돈을 만든 거야?”
얼마나 테페룸이 남아돌면 그걸로 돈을 만든단 말인가.
“어쩌면 고대에 지나치게 테페룸을 낭비해서 지금 이렇게 모자라는 걸 수도 있겠어.”
아무튼 이건 그냥 쓸 수가 없었다. 처분하는 것도 문제다. 테페룸은 전략물자로 취급되기에 함부로 유통이
불가능했다. 물론 암암리에 거래가 되긴 하지만 지금 제론의 입장에서 그걸 파는 건 문제가 있었다.
“이건 나중에 좀 더 힘이 생기면 처리하기로 하고…….”
제론은 다시 아공간에 동전을 넣었다. 그리고 손바닥 2 개만 한 판을 살폈다.
말 그대로 그냥 판때기였다. 재질은 유리에 가까웠는데, 도저히 뭐에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모를 때는 정령이지. 아네모스.”
정령이 스며들자, 판에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론은 읽을 수도 없는 고대 문자였다.
“일단 고대 문자부터 익혀야겠군.”
문제는 고대 문자에 대해 아주 해박한 사람들조차 이 글을 다 해석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고대 문자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도 기껏 단어 몇 개를 가지고 내용을 유추하는 정도였다.
“그래도 해낸다.”
제론은 주먹을 꽉 쥐었다. 고대 문명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 유적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을 것이다. 제론에게는
유적의 힘이 꼭 필요했다.
힘을 얻어야 슈린 공작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사실 제론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곧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한다. 현재가 마지막인 5 년 차였으니 채 1 년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는 의무적으로 3 년 이상 군대에 가야 한다. 아카데미 졸업자들에게 왕국이 지우는
의무였다.
그러려면 일단 고대어를 익혀야 한다. 제론은 분명히 유적 안에 글을 배울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제론은 다음 기둥에 있는 카드를 들었다. 카드만 달랑 1 장 들어 있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이 카드에 분명히 뭔가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이 담겨 있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카드에 정령을 넣었다. 빛 가루가 되어 흩어진 카드가 제론의 몸에 흡수되었다.
그 순간, 제론은 너무나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뇌리로 흘러들어 오는 수많은 언어의 향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이 카드는 언어를 담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5 개의 언어였다. 그것을 기본적인 어떤 언어로 설명하고 있었는데, 제론은 대번에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나머지 다섯 언어는 고대의 왕국들이 쓰는 언어였다. 그리고 그 언어들을 설명하는 언어가 바로 이곳 유적이 있는
고대 왕국의 언어였다.
제론은 필사적으로 그 언어들을 머리에 새기고 이해하려 애썼다. 만일 제론이 유적을 세운 왕국 사람이었다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언어들을 익힐 수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크윽.”
제론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서 인상을 찡그렸다. 갑자기 막대한 지식이 머리로 주입되니 뇌에 부하가 걸린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론은 빠르게 언어를 익혀 나갔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제론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무려 6 가지 언어를 익혀 버렸다. 물론 완벽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공부하면 언젠가는 완벽히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해도 이제 읽고 쓰는 정도는 얼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큰 행운을 잡았는지 다시 한 번 곱씹었다.
“대체 여기에 얼마나 더 비밀이 숨어 있을까?”
제론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판에 다시 정령을 넣었다. 이번에는 나타나는 글자를 대충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태블릿 가동]

가장 위에 나타난 글이었다.
“이 판의 이름인가?”
일단 언어를 익히고 나니, 태블릿의 사용은 상당히 쉬웠다. 어떤 경우든 설명을 자세히 볼 수 있었기에 모르는
건 언제든 확인이 가능했다.
물론 언어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군데군데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대충 문맥을 유추해서 뜻을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또한 그러는 와중에 점점 언어의 이해도가 높아졌다. 기본 언어의 이해가 높아질수록 나머지 다섯 언어의 이해도
덩달아 높아졌다.
제론은 태블릿의 위력에 흠뻑 젖었다. 이건 혁명이었다.
태블릿으로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또한 태블릿 안에는 어마어마한 지식이 쌓여 있었다. 마치 책 수만 권을 통째로
안에 넣어 둔 것 같았다.
제론은 떨리는 손으로 태블릿을 다시 아공간에 넣었다.
이제 마지막 기둥만 남았다. 제론은 그 기둥 안에 있는 수많은 알약을 확인했다. 하지만 대체 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별다른 설명도 없었다. 즉, 설명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난감하군.”
고대에는 아주 익숙하게 사람들이 이용하던 것이 분명했다. 제론은 잠시 고민하다가 알약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알약 형태로 되어 있으니 먹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먹으면 뭔가 반응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알약은 입에 들어간 순간 그대로 녹아 식도로 흘러갔다. 그리고 제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배가…….”
배고픔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놀랍게도 알약은 밥이었다. 한 알에 한 끼 혹은 그 이상의 영양을 품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이곳은 고대인들이 수련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장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거의 확실할
것이다. 지금까지 제론이 겪은 일을 차근차근 생각하면 분명했다.
마나와 검술을 알려 주고, 언어를 주입시켰다. 그리고 오랫동안 지낼 수 있도록 식사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수련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지 않은가.
제론은 자신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이곳을 찾아 수련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그 아쉬움이 조금 가셨다.
“자, 이제 여기서 나가는 일이 문제인데…….”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대충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 되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유적은 주인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웠다.
제론은 고개를 들어 다시 유적지 쪽을 올려다봤다. 유적지 내부가 투명한 천장을 통해 보였다.
“음?”
제론은 순간, 깜짝 놀랐다. 누군가 유적지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만일 그가 바닥을 본다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지금이야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지만, 누군가 그 권리를 빼앗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이곳으로 들어온 게 확실한가?”
“감시하던 바에 따르면 분명히 유적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젠장. 그럼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여기라면 처리하기가 딱 좋은데…….”
유적지 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대화가 고스란히 들렸다. 내용이 너무나 섬뜩했다. 저들은 제론을 죽이러 온 것이다.
‘슈린 공작이 아주 작정을 했군.’
슈린 공작이 보낸 자들이 확실했다. 그중 하나는 제론도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슈린 공작가의 기사였다.
“어쩔까요?”
“어쩌긴 뭘 어째? 더 뒤져 봐! 그놈 죽이기 전에는 돌아갈 생각도 하지 마! 가서 밖에 있는 놈들에게 주변 감시
확실히 하고 노숙 준비하라고 지시해!”
“예!”
상황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제론은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 위를 올려다봤다. 어차피 숨을 곳도 없었다.
슈린 공작가의 기사가 갑자기 아래를 내려다봤다. 제론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를 악물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음? 뭐지?’
제론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슈린 공작가의 기사는 마치 자신을 못 본 것처럼 행동했다. 아니, 이 유적지
자체를 못 본 것처럼 행동했다.
처음에는 자신을 놀리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제론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들은 이곳을
볼 수 없었다. 또한 이곳의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후우. 깜짝 놀랐네.”
제론은 자리에 주저앉아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아직 나가는 법은 모르지만 이대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냥 나가는 건 날 죽여 달라고 가슴을 내미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여기서 좀 더 버티지 뭐.”
어차피 새로 익힌 검술을 수련해야 한다. 이제 시작이니 더 갈고닦으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를 수도
있었다. 음식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검을 수련하다 보면 시간이야 금방 갈 것이다.
“저놈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지가 관건이군.”
한 달 내에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카데미를 쉴 수 있었지만, 그것도 한없이 기간을 늘릴 수 없었다. 최소한 한 달 안에는
돌아가야 금년을 마지막으로 졸업이 가능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잘리면 곤란하지.”
아카데미에서 잘려도 군대는 가야 한다. 오히려 더 힘들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기간트 라이더로 복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일반 병사로 들어가야 한다. 그건 귀족 가문에게 어마어마한 치욕이었다.
제론은 그 뒤로 새로 익힌 검을 수련하고 고대어를 익혔다. 그리고 태블릿 사용법을 더 자세히 익히고,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지식을 살펴봤다.
그 보름의 시간은 제론에게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중했다. 제론은 그동안 자신이 찾은 유적에
대해 아주 조금씩 알아 갔다.

Chapter 2 복귀

켈리온은 짜증을 내며 검을 휘둘렀다.


퍼억!
돌벽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벌써 열흘째 이러고 있었다. 분명히 이곳으로 향했는데, 찾을 수가 없으니
짜증이 있는 대로 났다.
지난 열흘 동안 유적을 정말 구석구석 살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부분은 검을 찌르고 파내고 별 난리를 다
쳤다. 그런데도 제론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면 공작님께서 노발대발하실 텐데.”
그냥 화만 내면 다행이다. 괜히 징계라도 받으면 정말로 곤란하다. 슈린 공작가의 징계는 돈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봉급이 여기서 더 깎이면 앞으로는 술도 마음껏 못 마실 것이다.
“그건 사양이지.”
켈리온은 눈을 번득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지금까지 찾아도 못 찾았는데 다시 본다고 뭐가 달라질 리
없었다.
“유적 안에는 없는 게 확실해. 하면 대체 어디로 갔을까?”
켈리온은 그렇게 미련을 못 버리고 사흘을 더 그곳에서 지냈다. 유적은 물론이고 그 주변까지 샅샅이 파헤쳤다.
이곳에서 해치워야 명분을 만들기도, 사건을 조작하기도 쉽고 편하다. 만일 제론이 이곳을 빠져나가 아카데미로
돌아간다면 당분간 건드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켈리온이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이다. 여기서 실패하면 슈린 공작으로서도 제론을 해치우기 위해
위험부담을 안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게 애썼음에도 결국 제론을 찾지 못했다.
슈린 공작가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다. 물론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켈리온은 집요하고 끈질겼다. 그는
병사 몇 명을 유적에 남겨 두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연락을 하도록 명령했다.
그렇게 모두가 돌아간 유적에 제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론의 모습은 처음 유적으로 들어설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체격이 훨씬 당당해졌다. 몸이
탄탄해졌으며, 키도 약간 자랐다.
고작 보름만의 변화치고는 상당했다.
하지만 그런 외적인 변화보다는 내적 변화가 훨씬 더 컸다.
몸속의 마나가 대부분 아랫배와 심장에 모여 뭉쳤다. 그리고 제론이 원할 때마다 움직여 힘을 발휘했다.
제론은 이미 익스퍼트의 실력을 넘어섰다. 제론에게 있어서 진짜 시작은 소드 마스터야만 하기에 그 정도로는
아직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진짜 소드 마스터는 그런 게 아니었다.
제론은 태블릿을 통해 고대의 지식을 잔뜩 받아들였다. 놀랍게도 고대에도 소드 마스터라는 것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지금의 소드 마스터와는 하늘과 땅 차이었다.
현재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소드 마스터는 세상을 통틀어 3 명뿐이었다.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소드 마스터를 정하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그들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간접적인 사건을 통해 알려졌다. 소드 마스터는 혼자서 3 백의 익스퍼트를 압도할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지금의 소드 마스터는 고대의 하급 기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즉, 고대에는 익스퍼트 초급이 지금의
소드 마스터와 같은 실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놀랍게도 지금의 기사들은 고대에 가면 견습 기사조차 되지 못할 실력이었다. 검에 마나를 담을 수 있어야 간신히
견습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지금의 내가 바로 견습 기사라는 뜻이지.”
제론은 이를 악물었다. 고대의 지식은 알면 알수록 놀라웠다. 그런 고대의 지식을 가득 담고 있는 태블릿은
제론에게 있어서 최고의 보물이었다.
태블릿에는 제론이 익힌 검술에 대해서도 자세히 나와 있었다. 제론은 그 검술의 이름이 제국 기초 검술이라는 걸
알고 경악했다. 이보다 더 상위의 검술이 존재한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아쉽게도 태블릿에는 더 이상의 검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높은 경지로 좀 더 손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나 다름없는데 그것이 아무렇게나 방치될 리 없었다.
제론은 천천히 유적에서 걸어 나갔다. 마나가 하나로 뭉친 이후로 감각도 예민해졌기에 유적지 근처에 자리를
잡고 감시하는 자들도 확인이 가능했다.
‘5 명.’
그들이 어디쯤 있는지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론은 그들의 처리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굳이 그들을 건드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갑자기 수도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하겠지.’
게다가 여기서 굳이 사람들을 죽이면 슈린 공작이 이곳에 더 신경을 쓸 확률이 높았다. 그냥 수도로 가는 편이
이곳 유적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없애는 가장 좋은 방편이었다.
이곳은 수도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말을 타고 이동을 해도 보름은 족히 걸리는 곳이었다. 물론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면 단숨에 오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제론은 그것을 쓸 생각이 없었다.
‘이동 마법진을 쓰면 행적이 너무 쉽게 노출되지.’
이동 마법진은 도시마다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용하는 사람의 행적을 철저히 기록하기 때문에 은밀히 이동하기
위해선 다른 방법을 써야만 한다.
제론은 굳이 그것을 써서 슈린 공작에게 자신의 행적을 낱낱이 밝힐 생각은 없었다.
잠시 주위 분위기를 살피던 제론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아랫배에 있던 마나가 자연스럽게 다리로 흘러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를 만들어 냈다.
쉬익!
제론은 감시자들의 사각으로 빠르게 이동한 뒤, 하늘로 풀쩍 뛰어올랐다.
“푸르투나.”
제론의 중얼거림에 강력한 바람이 만들어져 제론을 높이 띄웠다. 푸르투나는 새로운 정령의 코드였다.
아네모스보다 수십 배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새로운 바람의 정령이었다. 또한 아네모스의 진화체이기도 했다.
푸르투나는 제론의 몸을 아주 간단히 구름이 있는 곳까지 올렸다. 공기가 희박해졌지만 제론에게 그것은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다만, 푸르투나는 유지시간이 상당히 짧았다.
수도까지 날아갈 생각이 아니었기에 유지시간이 짧아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감시자들의 시선에서만 벗어나면
그만이었다.
제론은 하늘을 크게 날아 유적이 있는 지역을 벗어났다. 풀 한 포기 없는 허허벌판이었지만 곳곳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 몸을 숨기는 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유적지를 벗어난 제론은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나 수도로 향했다. 제론이 이동 마법진을 쓰지 않고 수도까지
달려가기로 한 것은 슈린 공작의 감시를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함도 있었지만 수련의 일환이기도 했다.
제론이 익힌 마나 호흡법은 초기에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너무나 힘들기에 그것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물론 그나마도 고대의 일이었다. 지금은
마나 호흡법 자체를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제론은 전력으로 달렸다. 달리면서 마나 호흡도 함께하려니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했다.
달려서 수도까지 가려면 최소 보름은 걸린다. 그 보름 동안 제론은 스스로를 지옥에 떨어뜨릴 작정이었다.

켄트 아카데미.
레늄 왕국 유일의 아카데미이자,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아카데미이기도 했다.
아카데미 정문에 도착한 제론은 잠시 숨을 골랐다. 수도에 들어서기 직전에 한계를 한 번 더 넘었기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제론은 호흡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뒤, 당당하게 아카데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단 제론은 기숙사로 향했다. 자신의 방으로 가서 샤워부터 한 다음 조금 쉴 생각이었다. 물론 가는 동안에도
마나 호흡법은 잊지 않았다.
기숙사에 도착한 제론은 샤워 후, 침대에 쓰러져 그대로 잠들었다. 보름 동안 어찌나 지독하게 마나 호흡법에
매달렸는지, 잠을 자면서도 마나 호흡법을 멈추지 않았다.
제론은 꼬박 하루 밤낮을 잤다.
☆ ☆ ☆

쾅!
거센 소리와 함께 탁자가 부서질 듯 흔들렸다.
슈린 공작은 잡아먹을 것처럼 켈리온을 노려봤다. 켈리온은 고개를 푹 숙였다. 차마 공작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이렇게 허술해서야 어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
슈린 공작은 이를 갈았다. 가장 쉽고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아마 제론은 다시 유적에 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땅을 넘겨서 손해를 강제로 안겼으니 어쨌든 파산을 면치는 못하겠군.”
아직도 에어스트 가문은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다. 손바닥만 하긴 해도 영지가 남아 있었다. 슈린 공작은 그 작은
영지조차 몽땅 얻기를 원했다.
만일 제론이 죽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그 영지를 얻을 생각이었다. 벌써 그 일을 위해 왕국의 행정 관리들을 다
구워삶았다. 한데 그 모든 일들이 쓸모없어진 것이다.
“그만 나가 봐.”
슈린 공작의 명에 켈리온이 급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며 어금니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꽉
물었다.
‘제대로 감시하라고 했더니, 멍청한 놈들.’
켈리온은 유적을 감시하던 자들에게 모든 과를 돌렸다. 그놈들을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사실 애초에 유적에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켈리온은 그런 것을 고려할 생각이 없었다. 이 분노를 어떻게든 풀어야만 했다.
그날 유적을 감시하던 자들이 몽땅 슈린 공작가로 불려 갔다. 그리고 그 뒤로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했다.
슈린 공작가는 완벽히 유적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쓸모없는 땅에 폐허가 된 유적을 누가 찾겠는가. 슈린
공작가의 모든 사람은 제론이 다시 그곳을 방문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 ☆ ☆

제론은 깔끔한 제복을 입고 기숙사를 나섰다. 아카데미 측에 복귀 신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켄트 아카데미는 레늄


왕국에서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기에 건물도 많았고, 시설도 뛰어났다.
행정 업무만 전담하는 건물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제론이 향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어차피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잠깐 아카데미를 쉰 것이기 때문에 복귀도 간단했다. 신고와 동시에 복귀 절차가
끝났다.
복귀를 마무리한 제론은 건물에서 나왔다. 그러자 어딘가로 우르르 몰려가는 학생들이 보였다.
뭔가 재미있는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보이는 광경이었다. 제론은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모습에 슬쩍 웃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제 세상에 홀로 남았지만 어쨌든 살아야 한다.
‘기회도 얻었으니까.’
유적을 떠올린 제론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비밀 유적을 발견한 건 정말로 행운이었다.
그곳에서 정말로 많은 걸 얻었다. 또 앞으로 훨씬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유적지 주변 땅이 내 소유라서 정말 다행이야.’
슈린 공작의 수작이었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문제는 그 넓은 땅에 대한 세금이었다.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당장 그것을 세상에 내보일 수는 없었다.
‘영지를 정리해야겠군.’
아직 작은 영지가 남아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영지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남은 영지는 에어스트 가문에서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곳이었다.
아마 그곳을 알아서 팔면 슈린 공작가의 견제가 조금 줄어들지도 모른다. 제론은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되었건 에어스트 백작가는 몰락했다. 영지도 없고, 돈도 없었다. 그 모든 재화가 슈린 공작가로 갔다.
제론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젠가는 이 모든 걸 몇 배로 되돌려 주고야 만다.’
제론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잔뜩 모인 곳에 도착한 제론은 무슨 일인지 살폈다. 제론 역시 아카데미에서는 제법
유명했기에 그곳에 있던 일부 학생의 시선을 받았다.
“어? 제론 선배다.”
“정말이네? 언제 오신 거지?”
“아카데미에서 졸업은 해야 하니 서둘렀겠지. 이제 가문도 끝장난 거나 다름없잖아? 군대라도 가야지.”
“하긴, 군대에 기간트 라이더로 3 년이나 있다 보면 뭔가 방법이 생길 수도 있지.”
“아예 군대에 뼈를 묻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군부의 힘이 제법 대단하잖아.”
“그야 그렇지. 그래도 좀 아깝긴 하네.”
“아깝지. 그래도 아카데미 최고의 기간트 라이더잖아. 어쩌면 군부가 더 적성에 맞을 수도 있지.”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공을 세울 기회도 많을 테고.”
제론은 자신을 화제로 열심히 입을 놀리는 후배들을 슬쩍 쳐다봤다. 아마 자신이 못 들었으리라고 여기겠지만,
모든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확실히 마나 호흡법이 대단하긴 해.’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감각이 예민해진다. 이렇게 청각이 예민해진 것도 모두 마나 호흡법 덕분이었다.
그곳에서 제론을 확인한 대부분의 사람은 제론을 찧고 빻기에 바빴다.
예전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제론의 가문이 망했다는 소식이 아카데미를 휩쓴 뒤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뭐, 어차피 상관없지.’
예전에도 그들은 제론의 안중에 없었다. 그런 자들이 지금 자신을 무시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오오, 이게 누구야? 장차 백작이 되실 에어스트 가문의 후계자 아니신가.”
제론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파인트 폰 슈린.’
아카데미에서 제론과 가장 사이가 나쁜 놈이었다. 사사건건 제론을 걸고 넘어가며 언제나 시비를 걸어왔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제론을 이긴 적이 없었다.
파인트는 제론 앞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비웃음 가득한 눈으로 제론을 쳐다봤다.
“아카데미에 낼 학비는 있나? 없으면 내가 좀 빌려 줄까?”
파인트가 느물느물한 태도로 이죽거렸다. 제론은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파인트를 쳐다봤다. 무심한 눈이었다.
파인트는 그 눈빛에 발끈했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둘 사이에 잠깐 대치가 일어났다. 그러자 파인트 뒤에 서 있던 학생 하나가 나섰다.
“파인트 님이 말씀하시는데, 대답도 안 하다니. 정말 버릇없는 놈이로군. 안 그렇습니까? 파인트 님. 이번에
유적으로 큰돈을 버셨으니 저런 놈에게 적선을 좀 하시는 것도 슈린 공작가의 위엄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제론의 눈에서 순간 불똥이 튀었다. 제론은 방금 말한 학생을 노려봤다.
그는 기간트 학부 3 년 차 학생이었는데, 제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꼼짝도 못하고 식은땀만 줄줄 흘렸다.
“이제 이런 유치한 짓도 슬슬 졸업할 때가 되지 않았나? 몸만 졸업한다고 다가 아니야.”
제론은 파인트를 똑바로 노려보며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머리도 졸업을 해야지.”
제론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파인트는 멀어져 가는 제론의 등을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나 분노했는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분노는 고스란히 옆에 있는 놈에게 떨어졌다.
퍼억!
“컥!”
조금 전 파인트를 위해 나섰던 학생이 허리를 구부리며 고통을 토해 냈다. 파인트의 주먹이 그의 복부에 깊이
박혀 있었다.
“네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냐.”
“파, 파인트 님, 죄, 죄송…….”
퍽!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파인트의 발이 그의 허벅지를 때렸기 때문이다.
파인트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학생을 쳐다보며 말했다.
“시작도 네놈이 했으니 마무리도 네놈이 해라.”
바닥을 구르던 학생은 억울했지만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끙끙대며 일어나 멀어져 가는 파인트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를 갈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이곳에는 사람이 많다.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파인트의 귀에
안 들어갈 리 없었다.
그의 분노 역시 풀어낼 곳은 정해져 있었다.

제론은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돈 문제부터 해결해야겠어.”
켄트 아카데미의 학비는 어마어마하다. 에어스트 가문이 건재할 때야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제론은 서둘러 영지를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단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끝내면 바로 백작이 된다. 현재는 작위가 보류된 상태였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것이 왕국의 법이었다.
그리고 군대를 제대한 이후도 생각해야만 한다. 제론에게는 기반이 될 만한 영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럼에도 제론은 지금 가진 영지를 팔아치우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제론에게는 그 영지 말고도
영지로 쓸 만한 땅이 있었다.
“앞으로 그 유적지 근방의 땅이 내 영지가 될 것이다.”
영지민이 1 명도 없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그곳이 에어스트 가문의 영지라는 것이 중요했다. 그곳이 제론의
기반이 된다는 점이 중요했다.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최대한 비싼 가격에 팔 것이다. 비록 작은
영지지만, 그래도 영지였다.
“세수가 좀 적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높은 영지니까.”
그 영지에 눈독을 들이는 귀족들이 제법 많았다. 작위만 있고 영지가 없는 귀족들은 쌔고 쌨다. 그들에게 적당히
말을 흘리면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제론은 그 이후의 일을 계획하며 더욱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영지를 파는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가격을 너무 잘 쳐주는 바람에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슈린 공작가에 판 것이 아니라면 장사 잘한 건데 말이야.”
제론이 판 영지는 슈린 공작가에서 상당히 가까웠다. 그 사이에 자작령 하나가 있었는데, 제론은 직감적으로 슈린
공작이 그 영지를 노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 비싼 가격에 영지를 살 이유가 없었다. 아마 제론이 판 영지는 군사훈련을 위해 쓰일
것이다.
영지가 팔리는 바람에 대부분의 문제가 싹 해결되었다. 일단 졸업할 때까지 학비 걱정을 할 일은 없었다. 또한
군대에 있는 동안 유적이 있는 땅에 대한 세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이제 대충 모든 일이 정리된 건가?”
자잘하게 걸리는 일은 다 해결되었다. 하지만 아직 진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유적은 어떻게 하지?”
아직 유적에서 얻을 것이 많았다. 또한 수련도 필요하다. 이곳에서 하는 수련과 유적에서 하는 수련은 하늘과 땅
차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수련은 시작도 안 했는데…….”
제론이 익힌 것은 기초 중의 기초뿐이었다.
물론 그 기초 중의 기초라는 것들로 고작 보름 동안 이룬 성과가 그동안 제론이 22 년 동안 살면서 얻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아니, 손꼽히는 기사들만큼이나 강해졌다.
어쨌든 제론은 익스퍼트가 되었으니까.
사실 익스퍼트나 소드 마스터는 상징적인 의미가 훨씬 강했다.
익스퍼트가 되려면 가혹할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붙여야 한다. 혹사에 혹사를 거듭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근육과
뼈에 마나가 쌓이고, 그것이 흘러넘쳐 무기에 스며든다.
그것이 바로 익스퍼트였다.
즉, 익스퍼트는 인내와 극기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는 그조차 넘어선 뭔가를 가진 사람이었다.
소드 마스터나 익스퍼트가 그렇게 실제 의미를 잃은 데에는 사실 기간트의 역할이 가장 컸다.
인간이 아무리 강해도 기간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기간트는 크고 무거우며, 또 빠르고 강했다. 그야말로 일인
군단에 걸맞은 위용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기간트였다.
문제는 아무리 소드 마스터가 된다고 해도 기간트를 조종하는 데에는 거의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었다.
기간트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마나만 있으면 된다. 그다음부터는 오로지 운용이었다. 그 최소한의 마나란,
기간트의 심장부에 위치한 마나 코어를 구동시키기 위한 마나였다.
일단 구동이 되면 기간트는 마나 코어에 내장된 마나 스톤에 의해 움직인다. 더 이상 라이더의 마나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 소드 마스터건 그냥 기사이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기간트 운용 기술과 센스가 훨씬 더 중요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간트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선 뛰어난 검술이 필요했다. 또한 체력과 동체 시력,
감각도 중요했다. 그래야 상대 기간트를 상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기간트에는 소드 마스터나 익스퍼트보다는 센스가 뛰어난 라이더가 더 중요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은 바로 센스가 뛰어난 익스퍼트였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익스퍼트를 일컬어 기간틱 나이트라 불렀다. 또한 특별한 소드 마스터를 기간틱 마스터라
불렀다.
제론은 이제 기간틱 나이트가 되었다. 제론은 아카데미 최고의 라이더였다. 기간트 운용에 대한 센스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런데다가 이제 익스퍼트가 되었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태블릿을 통해 진짜 익스퍼트와 소드 마스터에 대해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고대에도 기간트가 있었다. 그건 당연했다. 유적을 통해 얻는 보물 중 최고가 바로 기간트였으니까.
고대에 만들어진 기간트는 그 상징성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엄청난 성능을 자랑했다.
고대 유적에서 발굴된 기간트는 현재 쓰이는 모든 기간트의 원형이었다. 고대 기간트를 분해하고 분석해 얻은
기술로 현재 쓰이는 범용 기간트를 만들어 낸 것이다.
성능은 하늘과 땅 차이었지만,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기간트를 인간이 상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그 어설픈 기간트가 아니라 뛰어난 성능을 가진 고대의
기간트를 상대로 말이다.
‘게다가…… 그 고대는 진짜 고대가 아니란 말이지.’
태블릿이 만들어진 시대는 사람들이 발굴한 고대 유적보다 훨씬 더 오래전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기간트는 고대
유적에서 발굴된 기간트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그런 기간트를 인간이 상대했다니 그 말을 어찌 쉽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진짜 소드 마스터라 이거지?”
제론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제야 간신히 걸음마를 뗐다. 하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서 맨몸으로 검 한 자루
들고 기간트를 상대할 수 있는 힘을 키울 가능성이 생겼다.
“아니, 무조건 한다. 진짜 소드 마스터가 되겠어.”
제론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다. 자신에게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진짜 고대 유적이 있었다. 그 굉장한 곳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었다.
“잡생각은 여기까지만 하고, 당면한 문제를 생각해 보자.”
가장 큰 문제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유적에서 수련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큰 문제가 동반된다.
“일단 유적까지 가는 건 아무 문제가 없어.”
유적에는 놀랍게도 언제 어디에서건 유적에 들어올 수 있는 수단이 존재했다. 제론이 팔에 찬 팔찌가 바로 그
물건이었다. 단번에 유적 입구로 이동시켜 주는 아티팩트였다.
고대의 마법 기술은 정말로 대단했다. 그 작은 팔찌 하나에 대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마법을 모아 뒀단
말인가.
아공간 마법 하나만 해도 놀라운데, 비록 단방향이지만 초장거리 텔레포트 마법까지 새겨져 있었다. 더구나
주인을 인식하기 위한 귀속 마법과 도난 방지 마법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결코 쉽지 않은 마법이었다. 일단 초장거리 텔레포트는 아직도 구현이 불가능했고, 아공간 마법을
새기기 위해선 최소한 흉갑 정도 되는 크기가 필요했다. 그것도 기간트의 마나 코어를 이용하지 않으면 생성이나
유지가 불가능했다.
즉, 아공간 마법을 쓰기 위해선 흉갑 정도 크기의 물건과 기간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일상에서 아공간을
이용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대단한 마법을 고작 팔찌 하나에 다 담았다니 이 말을 마법사들에게 했다간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동안 발견된 수많은 고대의 아티팩트 중에서도 이런 대단한 물건은 없었다.
아무튼 팔찌를 이용하면 유적 입구까지는 단숨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방법이 없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면 며칠이면 올 수 있지만 흔적이 남는다. 자신을 주시하는 슈린 공작에게 혹시라도
이런 사실이 들어가면 상당한 곤란을 겪을 수도 있었다.
유적까지 간 흔적은 없는데 온 흔적만 남으면 그게 뭘 의미하겠는가. 아마 슈린 공작은 그런 점들을 결코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몸을 사리는 수밖에 없는데…….’
제론은 자연스럽게 아공간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아직 태블릿에 있는 그 많은 서적을 티끌만큼도 확인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 안에 답이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지금은 끊임없이 지식을 섭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조급한 마음을 접고 차분히 태블릿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렇게 쉽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건 새로
익힌 마나 호흡법 때문이었다.
마나 호흡법을 시작한 이후로 마음을 냉정하게 유지하는 게 쉬워졌다. 또한 주변의 마나가 마치 친구가 된 것처럼
친숙해졌다.
제론은 무의식중에 마나 호흡법을 하며 정신없이 태블릿을 살폈다.

제론은 기숙사 밖으로 나와 연무장으로 향했다. 졸업반인 5 년 차 학생들은 철저하게 실전 위주로 수업을
진행한다.
제론이 속한 기간트 학부는 당연히 대부분의 수업을 연무장에서 진행했다. 그곳에서 실제 기간트를 조종하며 각종
동작과 전투 기술을 익힌다.
기간트 학부는 아카데미의 꽃이었다. 그리고 그 기간트 학부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제론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가문이 몰락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론 선배님!”
제론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누군지 확인했다.
“수업 들어가시는 건가요?”
기간트 학부 3 년 차인 세나 폰 벨루스였다. 벨루스 백작가의 여식으로, 켄트 아카데미에서 미모로 가장 유명한
여인이었다.
제론은 세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그 무심함에 세나가 입술을 삐죽였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이 켄트 아카데미에서 자신에게 이렇게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제론이 유일했다.
‘아우, 정말 너무해!’
세나는 제론의 걸음에 맞추려고 더 열심히 걸었다. 그녀 역시 연무장으로 가고 있었기에 중간에 따로 갈 일도
없었다.
“선배님, 파인트 선배를 조심하세요.”
세나의 말에 제론은 하마터면 피식 웃을 뻔했다. 파인트가 자신에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운다는 사실은 유명했다.
하지만 제론은 한 번도 그를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파인트가 일방적으로 설정한 라이벌 관계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그들이 보기에는
파인트도 엄청나게 대단했다. 그 유명한 슈린 공작가의 후계자 아닌가.
제론이 너무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세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더 열심히 말했다.
“이번에 개인 기간트를 새로 구입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아카데미에서는 개인 기간트를 쓰는 일이 종종 있었다. 막대한 수리비를 개인이 지불해야
하지만, 그 정도 액수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다.
“아우, 정말. 이번에 바꾼 기간트가 무려 베르급이라고요!”
제론의 눈이 한 차례 번득였다. 그 스산하고 위험한 느낌에 세나가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서, 선배님?”
제론은 그런 세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세나는 당황해서 제론을 쫓아갔다.
“서, 선배님! 같이 가요!”
베르는 고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기간트 중 가장 출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일반적인 양산형 기간트에 비하면 2―3
배나 더 높은 출력을 자랑한다.
제론의 표정이 굳은 이유는 그 베르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바로 유적이다. 이번에 제론의 가문과
함께 발굴한 그 유적 말이다.
그곳에서 얻은 기간트 중 하나가 파인트에게 간 것이다.
‘다 부숴 버리고 싶다.’
상대가 파인트라면 설사 그가 베르가 아닌 그보다 더 대단한 기간트를 타더라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었다.
“선배님! 처, 천천히 좀 가세요! 하악, 하악.”
세나가 거의 달리다시피 해서 제론을 따라잡았다. 그녀는 끈질기게 제론을 따라다녔다.
“파인트 선배가 선배님을 노리고 있어요. 그러니 정말로 조심하셔야 해요.”
그제야 제론이 걸음을 멈추고 세나를 쳐다봤다. 세나는 얼굴을 붉히며 제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제론은 잠시 세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다시 기간트 훈련장으로 향했다.
세나는 아쉬운 눈으로 그런 제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생긋 웃으며 다시 그 뒤를 따라갔다.

Chapter 3 베르급 기간트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9 미터짜리 거인이 검을 든 채로 빠르게 걸어갔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쓰는 범용
기간트 실바였다.
그 앞에 기간트 한 기가 오연하게 서 있었다. 모양부터 아카데미의 범용 기간트와는 완전히 달랐고, 크기도 13
미터에 달했다. 파인트의 새 기체인 베르였다.
후웅!
실바의 검이 베르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하지만 베르는 전혀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 하나를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콰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거검이 베르의 손에 박혔다. 놀랍게도 베르의 손은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고대의 기술이
집약되어 만들어진 기간트다웠다.
베르의 발이 가볍게 움직였다. 무거운 기간트의 다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빨랐다.
꽈앙!
실바의 배가 움푹 들어갔다. 그리고 실바는 뒤로 그대로 날아가더니 바닥에 널브러졌다.
쿠구궁!
베르가 오만한 자세로 주변을 슥 둘러봤다. 라이더와 일체화되었기에 높은 시선으로 구경하는 학생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제론은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저래서야 검을 쓸 줄도 모르는 아이에게 전설의 명검을 쥐어 준 꼴이다.
제론이 보기에는 기체의 힘에 휘둘려 제대로 컨트롤도 못하고 있었다.
“베르는 베르네요. 저렇게 부드러운 움직임이라니.”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세나가 지저귀듯 말을 걸었다. 제론 주변에 있던 남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물론 제론은 그런 상황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아카데미의 다른 학생들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지금의 수업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론은 더 이상 기간트 수업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가르치는 교관들을 넘어서는 실력을
가졌기에 배울 것도 없었다.
사실 제론은 이미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부터 교관을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아카데미에서 4
년을 보내며 더욱 완숙해져 이젠 그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는 교관들조차 없을 정도였다.
제론은 갑자기 시선이 지나치게 많이 쏟아지는 걸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베르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들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오라는 도발이었다.
제론은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이런 바보 같은 도발에 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물론 교관의 지시가 떨어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처럼 말이다.
“제론이 한번 해 보겠느냐?”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교관의 말에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승자에게는 향후 한 달간 모든 수업에서 빠질 수 있는 특권을 주지.”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수업을 빠지면 나중에 시험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 시간에 배우는 내용은 대충 혼자서 공부한다고 쉽게 따라갈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기간트 운용에 관한
실기는 실력이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과목은 그걸 제외하고도 6 개나 된다.
하지만 교관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제론에게 시선을 주며 말을 이었다.
“한 달 동안 마음껏 외출도 가능하게 해 주마.”
그제야 제론은 교관이 모종의 압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다른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재 제론이 상대해야 할 사람은 파인트 폰 슈린, 슈린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그라면 한 달의 난데없는 방학을
정말로 알차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다들 결코 제론이 파인트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제론이 새로운 기체를 꺼내지 않는 한 말이다.
제론은 잠시 고민했다. 만일 자신이 이기더라도 아카데미를 나가서 다른 일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마
아카데미라는 보호막이 없으면 슈린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을 저지를 게 분명했다.
아마 슈린 공작은 그 모든 상황을 다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비중을 둔 것은 파인트가 제론을
무참히 밟아 버리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충분한 가치가 있어.’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교관은 환하게 웃었다. 이로써 슈린 공작가로부터 적지 않은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개인 기간트를 쓸 건가?”
의례적인 질문에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없다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그리고…….”
제론은 슬쩍 고개를 돌려 여전히 오연한 자세로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베르를 쳐다봤다.
“실바로 충분합니다.”
제론의 말은 나직했지만 다들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더구나 베르에 타고 있는 파인트는 누구보다 더 선명히
들었다.
“흥! 내 선더볼트가 방금 싸우는 모습을 보고도 그따위 소리가 나온다 이거지? 아마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다.”
파인트의 목소리는 베르 특유의 음성 전달 시스템에 의해 제론 근방에만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건 제론과 교관,
그리고 세나 정도가 전부였다.
제론은 베르를 똑바로 보며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벌써 이름까지 지었나? 실력에 비해 이름이 너무 거창한 거 아냐?”
파인트는 분통이 터졌다. 당장이라도 제론을 밟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아무리 슈린 공작가의
영향력이 커졌다 해도 아카데미 안에서 살인을 하는 것은, 그것도 이름뿐이긴 하지만 백작을 죽인다는 건
돌이키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고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목격자도 많다. 이런 대결을 통해 실수를 가장하면 얼마든지 상대를 죽일 수도 있었다. 보통은 어렵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실바로 베르를 상대하는데 충분하다고? 아직 매운맛을 못 본 거지. 고작 출력 0.8 짜리로 2.8 의 출력을 가진
베르를 이기겠다고? 미친놈!’
출력이 3 배 차이 난다는 것은 한 번에 낼 수 있는 힘과 속도 모두 그 정도 차이가 난다는 뜻이다.
기체의 무게나 다른 몇 가지 조건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겠지만, 출력의 차이만큼 불리해진다고 보면 딱 맞다.
파인트는 그렇기에 승리를 자신했다. 자신이 무조건 이기는 싸움이었다. 문제는 얼마나 상대를 처참하게
깨부수느냐, 또 얼마나 치욕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느냐, 그리고 어떻게 사고를 위장해 죽이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시작하죠. 저걸 타면 됩니까?”
제론은 한쪽에 서 있는 실바를 향해 걸어갔다. 아카데미의 기간트들은 아공간 마법을 완전히 없앤 기체들이다.
굳이 아공간을 쓸 필요가 없기에 아공간에 소모되는 마나 스톤을 제거한 기체였다.
그로 인해 미세하게 출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의 차이를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론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제론은 실바에 올라탔다. 훌쩍 뛰어 무릎을 디디고, 다시 허리를 밟고 점프해 가슴의 조종석에 탑승했다. 그
날렵한 모습에 다들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우와! 선배님! 대단해요!”
세나가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 줬다. 그녀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제론의 모습을 바라봤다.
보통은 탑승 지지대가 있어 그것을 타고 탑승하게 되어 있다. 당연히 아카데미에서만 가능한 방법이었다.
실제로는 기간트가 주인이 타기 쉽도록 알아서 몸을 낮춰 준다. 다만 그것은 주인이 정해져야만 가능한
방법이었다.
파인트는 해치를 닫으며 자신을 향해 또 피식 웃은 제론을 보며 이를 갈았다.
‘단숨에 뭉개 주마.’
파인트는 교관을 쳐다봤다. 얼른 시작 신호를 보내라는 압박이었다. 제론이 채 준비가 끝나기 전에 달려들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승리가 확정된 거라면 정정당당히 싸워야 한다. 그래야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 더구나 여기서 제론이
죽는다면 더더욱 빈틈이 없어야만 한다.
“준비는 끝났나?”
교관의 질문에 제론이 탄 실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관은 즉시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시작!”
그와 동시에 베르가 달려들었다.
쿵쿵쿵쿵!
기간트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돌진이었다. 물론 아카데미 내에서의 일이었다. 구경하던 학생들 모두가
입을 벌렸다. 그들은 모두 베르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부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베르의 거검이 실바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엄청나게 빨랐다.
꽈앙!
흙먼지가 비산했다. 베르의 거검이 바닥을 친 것이다.
파인트는 당황했다. 설마 그 일격을 이렇게 간단히 피할 줄은 몰랐다.
제론의 실바는 그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몸을 옆으로 빙글 돌린 것뿐이었다. 실바의 눈앞으로 베르의 거검이
닿을 듯 말 듯 지나갔다.
파인트는 당황했지만 그래도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베르는 빠르다.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운이
좋아 피했지만 그 운이 2 번, 3 번 반복될 수는 없을 것이다.
베르가 빠르게 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실바의 손끝이 베르의 옆구리를 찔렀다.
콰직!
“헉!”
파인트는 당황했다. 검을 회수하다가 옆구리를 찔리는 바람에 균형이 흐트러졌다. 고작 0.8 짜리 출력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균형이 흐트러진 순간, 이미 결과는 나온 거나 다름없었다.
실바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 발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 발은 베르의 다리 아래를 단단히 받쳤다. 실바의
손바닥이 균형을 잃은 베르의 가슴을 툭 밀었다.
꽈앙!
베르가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바닥에 쓰러졌다. 무게가 무게인 만큼 그 충격이 상당했다. 물론 라이더는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 베르 특유의 충격 완화 시스템 덕분이었다.
그것을 아는 제론이 바닥에 쓰러진 베르를 가만둘 리 없었다.
실바가 처음으로 검을 휘둘렀다.
꽈드득!
실바의 검이 베르의 목을 찔렀다. 검은 너무나 간단히 목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곳을 파고들었다.
빠지직!
검이 파고든 부위에서 뇌전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대로 베르의 움직임이 멈췄다.
다들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너무나 현실감 없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실바가 베르를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냥 이긴 게 아니었다. 제론의 실바는 파인트의 베르를 완전히 가지고 놀다시피 했다.
다들 놀라거나 말거나 제론은 실바를 움직여 검을 거칠게 뽑았다.
콰창!
검이 뽑히며 목에 난 실금들이 부서져 나갔다.
실바는 몇 발 걸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처음 시작한 자리에서 채 세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베르를 처리한
것이다.
푸쉭!
해치가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제론이 훌쩍 뛰어나왔다.
탁탁탁!
실바의 허리와 무릎을 밟고 올라갈 때의 역순으로 바닥에 착지한 제론은 무심한 표정으로 교관에게 걸어갔다.
“정확한 시간을 정해 주십시오.”
“응? 그, 그래. 알겠다. 내, 내가 행정부를 통해 처리를 하지.”
“오늘 수업은 어떻게 합니까?”
“아, 그…… 돌아가도 좋다.”
교관의 말에 제론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연무장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다들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그들은 목의 마나 로드가 부서지는 바람에
해치가 자동으로 열리지 않아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파인트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다.
파인트는 정신을 잃은 채 조종석에 널브러졌다. 그 충격으로 사흘 동안 꼼짝도 못하고 의무실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파인트의 베르는 목 부위를 지나는 중요한 마나 로드와 마법진이 철저히 파괴되는 바람에 어마어마한
수리비가 들어갔다.

“조금 아쉽군.”
사실 아예 마나 코어를 박살 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기체의 성능이
너무 달랐다. 아마 다른 학생들이었다면 같은 상황에 베르의 목을 그렇게 뚫어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수리가 쉽지 않은 부위를 날려 버렸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지.”
발굴형 기간트는 그렇지 않아도 수리가 쉽지 않다. 고대의 기술이 잔뜩 들어가 있기 때문에 완벽히 이해하고
수리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목은 마나 코어 다음으로 어려운 부위였다.
마나 코어의 경우 부서지면 수리가 아예 불가능했다. 그 정도로 고대와 현대의 기술적, 마법적 격차가 컸다.
그리고 일반 양산형 기간트의 경우와 달리 고대 유적에서 찾아낸 발굴형의 경우, 가장 분석이 안 된 부위가 바로
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뭐든 어려웠다. 하다못해 목의 강판 하나를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워낙 많은 마법진이 뒤엉켜
있기에 그걸 복원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
“일단 한 달의 시간을 벌었으니 정말로 큰 도움이 되겠어.”
한 달의 시간을 어떻게 쓸 건지는 이미 정했다. 한 달 동안 유적에 가 있을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올 때
날아오지 않고 적당한 곳에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최소 3 주는 수련할 수 있겠군.”
제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유적이 제공하는 수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유적에서 뭘 더 받을 수 있을지 모두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오기 전, 딱 하나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유적은 단층이 아니었다. 지하로 훨씬 더 많은 층이 존재하고, 제론은 지하 1 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번에 유적으로 가면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일단 행정부에 가서 확인을 한 다음 곧장 움직여야지.”
사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도 아카데미 교육의 일환이었다. 아주 드물게 뛰어난 학생이나
배경이 훌륭한 학생에게 이런 식으로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를 줘 왔다.
하지만 한 달은 처음이었다. 파인트에게 갈 기회를 제론이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론이 나가도 상관은
없었다. 슈린 공작가 입장에서는 제론을 해치울 두 번째 기회를 만든 셈이었으니까.
제론은 그 모든 것을 대충 꿰고 있었기에 담담했다. 어차피 슈린 공작가는 자신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못한다. 설마 이곳에서 유적까지 단번에 텔레포트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할 테니까.
차분히 머릿속으로 상황을 하나하나 짚으며 기숙사를 나선 제론은 행정부를 향해 걸어갔다.
반쯤 갔을 때, 누군가 제론을 부르며 달려왔다.
“선배님!”
제론은 돌아보지 않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세나였다. 예전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
같아서 조금 귀찮았다.
“선배님! 같이 가요!”
제론은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세나는 달려서 제론 옆에 따라붙었다.
“하악! 하악! 정말 너무해요. 어떻게 제가 그리도 애타게 부르는데 대꾸도 안 하실 수 있어요?”
제론은 그런 세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앞을 보고 걸음을 조금 더 서둘렀다.
세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런 제론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빙긋 웃으며 눈을 빛냈다.
“선배님! 같이 가자니까요?”
사실 세나가 이렇게까지 다가가려 애썼던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또한 이 정도로 그녀를 대수롭지 않게 대한
남자도 없었다.
세나의 미모는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였다. 더구나 세나는 어떻게 하면 남자들이 좋아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선배니임! 같이 가요!”
세나의 목소리에 약간의 애교가 더 담겼다. 하지만 제론에게 그 어떤 반응도 끌어내지 못했다.
세나도 사실 제론의 반응을 끌어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또한 호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지?”
제론의 물음에 세나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제론의 표정이나 말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반응을 해
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좋았다.
“선배님이 절 봐 주실 때까지요.”
제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내겐 그럴 여유가 없다.”
제론의 차가운 말에도 세나는 전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럼 여유가 있으시면 절 봐 주신다는 뜻인가요?”
제론은 세나의 당돌한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고개만 끄덕이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세나는 제론의 옆에 있을 자격이 충분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제론만을 바라봤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더 힘들었다. 자칫 세나의 앞길을 제론이 막아 버릴 수도 있었다.
제론은 말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서둘러 행정부로 향했다.
세나는 그런 제론의 뒷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제론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가능성을
확인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제론의 표정은 굳은 채로 펴지지 않았다. 세나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신경 쓰였다.


“후우.”
제론은 심호흡을 통해 마음을 정리하고 머리를 비웠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오직 졸업과 유적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할 때였다.
아카데미는 그저 거쳐 가는 길목에 불과했다. 이곳을 졸업하지 않으면 순조롭게 백작 위를 받을 수 없기에 참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아도 작위를 물려받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슈린 공작가가 문제였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작은 흠집을 크게 비틀어 벌릴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합법적으로 생겨난 한 달의 휴가는 꿀물처럼 달콤했다. 제론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한창 행정부로 가는 도중, 제론은 의외의 광경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기간트 연습장 한가운데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복장만으로 단숨에 알 수 있었다. 기간트
엔지지어들과 마법사들이었다.
“거기! 조심해! 그렇지! 부서진 강판을 뜯어내다가 다른 마법진을 손상시키면 곤란해!”
“그쪽! 마법진을 준비해!”
기술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고, 마법사들이 저마다 마법을 발휘해 강판에 마법진을 새기고 있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납이 안 되는 것이 마법진이기에 그들은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제론은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조금 커졌군.”
연무장에는 파인트의 기간트인 베르가 누워 있었고, 베르의 부서진 목을 수리하기 위한 인력들이 그곳에 모여
정신없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제론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굳이 저기서 수리를 한다는 건 아공간 마법이 망가졌다는 뜻인데…… 그럼 목에 있는 마법진들 중 하나가 아공간
마법과 연결된 건가?”
“아니죠, 선배님. 오너 각인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죠.”
제론은 힐끗 고개를 돌려 옆에 선 사내를 쳐다봤다. 옷차림을 보니 3 년 차 학생이었다. 그리고 기간트
학부생이었다. 하지만 기간트 라이더가 되기에는 몸이 너무 허약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제론 선배님. 전 바이스 폰 말레피라고 합니다. 기간트 학부 3 년 차 학생입니다. 참고로 전
라이더를 목표로 하지 않고 엔지니어를 목표로 합니다.”
안경 속에서 바이스의 눈이 반짝였다. 제론은 그 눈빛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기간트에게로
돌렸다.
“제 말에 동의하시는 겁니까?”
바이스는 집요하게 물었다. 하지만 제론은 더 이상 그와 대화나 나누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한번 가서 직접 보시겠습니까?”
제론은 다시 행정부로 가려다가 그 말에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이스를 쳐다봤다.
바이스가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래 봬도 배경이 제법 튼튼합니다. 저만 따라오시죠.”
바이스는 당당하게 베르를 향해 걸어갔다. 제론은 잠시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따라갔다.
이런 기회를 굳이 놓칠 필요가 없었다.
‘태블릿을 꺼내야 하나?’
만일 태블릿을 쓸 수 있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마법진을 복사할 수 있을 것이다.
태블릿 안에는 마법 이론에 관한 서적이 상당히 많으니 그것들을 이용하면 분석도 가능하리라. 초고대 문명의
마도 지식은 그 이후 어떤 시대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방대하고 깊었다. 또 상당히 대중적이었다.
‘검술이나 마나 호흡법은 폐쇄적인데 마법은 다 공개했다니 특이하기도 하지.’
하지만 그랬기에 그런 고도의 문명을 이뤘는지도 모른다. 제론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갔다. 태블릿을 꺼내는 건
일단 포기했다. 지금 쓰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태블릿 말고 마법진을 복사해 두는 방법은 없나?’
태블릿이 가장 간편한 방법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루룽.
제론은 일단 바람의 정령을 불렀다. 뭘 하든 아네모스가 필요했다. 이건 마도 물품에 초기 에너지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일종의 스위치였다.
혹시라도 정령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유적의 마법진을 통해 계약을 마쳐 코드를
부여받은 정령은 오로지 계약자의 눈에만 보인다.
아네모스가 팔찌로 스며들었다. 제론은 팔찌의 아공간을 열었다. 투명한 물건들이 허공에 휙휙 떠올랐다.
예전에는 이것들이 진짜 허공에 떠 있는 줄 알았지만 이젠 그저 망막에 비치는 현상이라는 걸 안다. 즉, 이것
역시 누구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제론은 그중에서 은색 카드 뭉치를 꺼냈다. 순수한 마나의 결정으로 만든 카드였다. 당연히 특별한 마법적 처리를
거쳤기에 허무하게 흩어지지는 않는다.
제론은 아공간을 연 채로 걸어갔다. 주변에 있던 엔지니어들과 마법사들이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다시 일에 열중했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이다.
제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이스를 쳐다봤다. 배경이 있다고 하더니 확실히 대단한 배경을 가진 모양이었다.
‘가만, 말레피라고 했지?’
제론은 그제야 말레피가 어떤 가문인지 떠올랐다. 권력을 위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문이 아니었기에 금방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말레피 가문은 레늄 왕국의 마법사들 위에 군림하는 가문이었다.
‘그러니 이런 일이 가능하지.’
말레피 가문에서는 지금 신형 기간트를 연구 중이었다. 그리고 그 연구에 어떻게든 참여해 보고자 하는 마법사와
엔지니어가 줄을 이었다.
이곳에 있는 마법사와 엔지니어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무조건 말레피 가문의 일원인 바이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었다.
덕분에 바이스는 아주 자세히 베르를 살펴볼 수 있었다. 바이스가 보고 싶은 것은 부서진 베르의 목 부위였다.
이런 건 쉽게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호오. 이렇게 강판 속에도 마법진이 숨겨져 있었군. 이러니 제대로 비밀을 밝혀내지 못했지.”
부서진 강판 틈으로 망가진 마법진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번에 여기 온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으리라. 베르가
비록 귀중한 기체이긴 하지만 말레피 가문이 힘을 쓰면 못 구할 것도 없었다.
아마 조만간 베르 한 기가 조각조각 해체될 것이다. 강판까지도 말이다.
제론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말레피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카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카드는 투명해져서 아무도 볼 수 없는 상태로 변해 있었다.
카드의 용도는 원하는 곳을 그대로 그림처럼 복사하는 것이었다. 사실 제론은 이것이 거의 쓸모없다고 여겼다.
태블릿에도 그런 기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카드를 써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금세 깨달았다.
투명한 카드에 마법진이 새겨졌다. 그 큰 마법진이 축소되어 카드 1 장에 담겼다. 제론은 카드에 마법진이
새겨지는 족족 아공간에 넣었다.
아무도 제론이 마법진을 복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제론은 그렇게 카드 한 뭉치를 다 써서 마법진을
복사했다.
놀라운 건 겉으로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마법진들도 완벽하게 복사를 했다는 점이었다. 몰랐던 카드의 효능이었다.
“선배님,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어느새 바이스가 다가와 제론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바이스는 마치 제론에게 지금 뭘 하고 있느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은 호기심으로 강하게 빛났다.
“가자.”
제론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런 제론의 뒷모습을 바이스가 뚫어져라 쳐다봤다. 바이스는 잠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제론의 뒤를 따라갔다.
“선배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 주지 않아도 곧 알게 된다. 행정부에 거의 도착했으니까.
“행정부? 여긴 무슨 일로…… 설마 자퇴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바이스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도 나름 정보력을 갖추고 있기에 제론이 처한 상황을 제법 자세히 알고 있었다.
최근 영지를 팔았다는 것도, 또 돈만 먹는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바로 어제 일로 한
달간의 자유 시간을 받았다는 건 미처 몰랐다.
그렇기에 전혀 다른 쪽으로 생각이 흘러갔다.
‘돈이 그렇게 부담되는 건가? 아카데미 학비가 좀 비싼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영지를 판 돈이라면…….’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바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니 졸업을 하면 군대에 가서 3 년을 복무해야만 한다.
기본적인 급여는 지급되겠지만 그걸로 그 넓은 땅에 매겨지는 세금을 내는 건 불가능했다.
“돈 때문이라면 제가 도와 드릴 수도 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바이스는 즉시 외쳤다. 그 말에 제론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고 돌아서서
바이스를 노려봤다.
바이스는 무시무시한 제론의 눈빛에 압도되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제론은 그렇게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돌아서서 행정부 건물 안으로 훌쩍 들어가 버렸다. 바이스는 차마 그 뒤를
쫓아가지 못했다.
이내 제론이 다시 나와 기숙사로 돌아갔다. 제론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바이스는 그 모습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행정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경악 어린 외침을 토해 냈다.
“자유 시간? 그것도 한 달? 그게 말이 돼?”

제론은 내일부터 정확히 30 일간의 자유를 허락받았다. 어디를 가건 무슨 짓을 하건 상관없었다. 아카데미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만 않으면 된다.
“준비할 건 거의 없군.”
보통 한 달 정도 여행을 하려면 준비할 게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제론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건 유적에
모두 있을 것이다.
“돌아올 시간만 잘 계산하면 되지.”
아마 누구도 제론의 행적을 캐지 못할 것이다. 초장거리 텔레포트가 가능한 이동 마법진은 왕국의 수도에 딱
하나가 존재할 뿐이었다. 게다가 그 마법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도 지금 이곳 아카데미에서 유적까지의
거리보다 짧았다.
제론은 눈을 빛내며 조용히 정령을 불렀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루룽.
지금은 밤이다. 누군가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으니 굳이 아침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말이다.
아네모스가 제론의 팔찌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한순간 제론의 몸이 빛에 휩싸이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Chapter 4 수련의 시작

제론은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유적을 둘러봤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동공 벽에 기묘한
문양이 가득했고, 천장은 투명했다.
“당장 시작하고 싶지만 일단 참아야겠지.”
제론은 휴식부터 취했다. 단숨에 이동했기에 피곤할 건 없었지만 그래도 지하 1 층으로 가기 위해선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야만 했다.
쉬면서 제론은 마나 호흡법을 했다. 이곳에서 하는 마나 호흡법은 그 효율이 최고조에 달한다. 마나가 온몸을
샤워하듯 쓰다듬어 주는 느낌은 그야말로 끝내줬다.
“후우우.”
제론은 숨을 길게 토해 내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검을 꺼냈다. 유적에서 지급한 수련검이었다.
여기서야 수련검이지만 만일 이걸 가지고 밖에 내보이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이런 좋은 검이 고작 수련검이라니.”
테페룸이 50 퍼센트는 함유된 검이었다. 밖에서는 이런 검을 아예 만들지도 못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익스퍼트들이 마나를 담기 위해 쓰는 검에 테페룸이 0.1 퍼센트 들어간다. 만일 이 검의 존재가
대장장이나 마법사에게 알려진다면 세상이 발칵 뒤집힐 것이다.
제론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숨을 골랐다. 이 유적이 몇 층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각 층에서의
수련을 마무리하면 한 가지씩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안다.
과연 그 선물이 무엇일지 너무나 궁금하고 기대됐다.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물품이 이럴진대 선물이라고 칭해지는
것들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자. 시작해 볼까? 내려간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미리 소환한 아네모스를 팔찌에 넣었다.
지잉!
제론의 머리 위에서 강한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제론의 모습이 그대로 사라졌다.
빛도 제론도 사라진 유적 안에 나직한 음성이 맴돌았다.
―제 1 단계 감각 수련 시작합니다.

제론은 텅 빈 공간 안에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손에 든 검을 언제라도 휘두를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새하얀 공간이었다. 끝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저 사방이 지독할 정도로 새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뿐이었다. 온통 하얗기만 해서 벽, 바닥, 천장이 아예 구분 가지 않았다.
퍽!
제론은 뒤통수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고개가 휘청 꺾일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었다.
다급히 몸을 돌려 검을 겨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제론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퍽!
이번에는 옆구리였다.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제론은 이를 악물고 그것을 참아 냈다. 분명히 뭔가가
날아와 자신을 때렸다. 한데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수련인가?’
무슨 수련인지는 명백했다. 어딘가에서 날아오는 보이지 않는 걸 피하거나 막으면 되는 것이다.
“좋아. 해 보자!”
제론은 이를 악물고 사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이마에 화끈한 통증을 받았다.
“크윽!”
그렇게 눈을 크게 뜨고 있었는데 아예 날아오는 게 보이지도 않았다. 순간 어이가 없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막으라는 거지?’
하지만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퍽! 퍽! 퍽!
옆구리, 가슴, 허벅지에 격통이 일었다.
제론은 곧장 한 바퀴 구르며 벌떡 튀어 오르며 사방으로 검을 휘둘렀다. 강력한 마나를 머금은 검이 사방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런 제론의 행동을 비웃기라도 하듯 복부에서 강렬한 충격이 밀려왔다.
“쿨럭!”
호흡하는 와중에 얻어맞아 기침이 일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주저앉은 순간 5 대를 더 맞았다.
제론은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결코 기가 죽지는 않았다. 수련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돌파구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걸 해결하고 나면 능력이 얼마나 상승하겠는가.
제론은 결연한 눈으로 사방을 주시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의 싸움이 점점 길어져 갔다.

“허억! 허억!”
제론은 양팔을 벌리고 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였다. 지하 1 층의 수련은 지독했다. 그리고 어떤 수련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감각 수련이라니.”
아직 수련을 완벽히 끝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추세대로라면 기한 내에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듯했다.
제론은 마나 호흡법을 통해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내려간다!”
순식간에 새하얀 공간에 도착한 제론은 즉시 옆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제론이 서 있던 곳에 무언가가 지나갔다.
이제는 제론도 그 무언가에 대한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새하얀 공이었다. 주변과 완벽히 똑같은 색이라서
움직여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감각 수련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제론은 이제 어느 곳에서 공이 오더라도 그것을 쳐 내거나 피할 수 있었다.
물론 100 퍼센트는 아니었다. 한꺼번에 여러 개의 공이 쏟아지면 그걸 모두 피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
제론의 감각에 5 개의 공이 느껴졌다. 제론은 검을 휘둘러 3 개의 공을 쳐 냈다. 그리고 앞으로 한 걸음 움직여 2
개의 공을 피해 냈다.
퍽!
“큭! 6 개였군.”
5 개인 줄 알았는데 6 개였다. 이렇게 수가 늘어나면 완벽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꼭 놓치는 것이 생겨났다.
그래도 5 개까지는 그럭저럭 파악이 가능했다.
‘좋아. 수련에 흠뻑 빠져 보자.’
제론은 이제 이 감각 수련을 즐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공에 맞으면 고통스럽고 화가 났지만 이젠 그 고통조차
즐거웠다. 하루하루 강해지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마나 호흡법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감각이 예민해졌고, 몸놀림이 민첩해졌으며, 머리도 좋아졌고,
힘도 세졌다.
마나 호흡법이 아니었다면 이 감각 수련에 이렇게 빨리 적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즐기다 보니 집중도 잘됐다. 제론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을 막고 피하며 수련을 즐겼다. 제론의 집중력이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론은 갑자기 날아오는 새하얀 공들이 똑똑히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 색과 똑같아서 알아볼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였다.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뒤통수로 날아오는 공도 보였다. 제론은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감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커다란 희열이 물밀 듯 밀려왔다. 수십 개의 공이 제론을 향해 날아왔다. 제론은 공들이 자신의 감각권 안에
들어오는 것을 명확히 느꼈다.
텅! 텅! 텅! 텅!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검을 휘둘러 그 공을 모조리 쳐 냈다. 공들은 미묘한 속도 차이가 있었기에 완전히 동시에
도착하지는 않았다.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순서가 정해진 것이다.
한데 제론은 그 순서를 아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감각 수련의 목표로구나!’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또다시 공이 날아왔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그것들을 정확히 쳐 낼 수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성취감이 제론의 온몸을 휘감았다.
―제 1 단계 감각 수련을 종료합니다.
갑자기 들려온 말에 제론이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가느다란 반지 하나가 떠 있었다. 푸른색 반지였는데,
워낙 가늘어 마치 실로 만든 것 같았다.
제론은 반지를 쥐었다. 이게 바로 이번 층에서 받을 수 있는 선물인 모양이었다.
실인 줄 알았는데 막상 쥐어 보니 단단했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었다. 반지는 제론의
손가락에 들어간 순간 모습을 감췄다. 마치 살 속으로 스며든 것 같았다.
―로비로 이동합니다.
순식간에 눈앞 광경이 달라졌다. 어느새 제론은 로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진짜 수련이 끝난 것이다.
제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갑자기 수련이 끝나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2 층 수련도 조금 해 볼 수 있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이리저리 살폈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었는데 보이지도 않았다.
반지를 낀 느낌도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반지만 달랑 주면 어쩌자는 거야? 쓰임새를 알려 줘야지.”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태블릿을 꺼냈다.
이번에 유적에 와서 새로 얻은 지식 하나가 바로 검색이었다. 태블릿의 그 수많은 서적을 몽땅 읽을 필요가
없었다. 태블릿에는 검색 기능이 있었다.
뭐든 알고 싶은 키워드를 입력하면 그에 관한 정보를 알아서 뽑아 준다.
제론은 일단 반지에 대해 검색을 해 봤다. 하지만 검색이 쉽지 않았다. 반지만으로 검색을 했더니 결과가 수천
가지나 떠올랐다. 그걸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지 않은가.
몇 가지 방법을 달리해서 알아봤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제론은 포기했다. 어차피 끼고 있으면 결국 알게
될 것이다. 쓸모없는 물건을 선물이랍시고 주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제론은 일단 마나 호흡법을 통해 몸을 한 번 점검했다. 몸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최고였다.
“좋아. 그럼 2 층으로 가 볼까? 다음 단계로!”
아네모스가 나타나 제론의 팔찌로 스며들었고, 제론의 몸이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예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 2 단계 마나 로드 확장 수련 시작합니다.

제론은 한 바퀴 돌며 2 층을 자세히 살폈다. 1 층과는 많이 달랐다. 공간 자체가 훨씬 좁았다.


“그냥 작은 방이네?”
아무것도 없이 사방은 물론 천장과 바닥에도 빽빽하게 마법진이 새겨져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참으로 작은
방이었다.
“여기서 대체 뭘 하라는 걸까?”
제론이 중얼거리기 무섭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앙에 편히 앉으십시오.
제론은 시키는 대로 했다. 어차피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은 시키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유적의 목소리를 완전히
신뢰했다.
―마나 호흡법을 시작하십시오.
제론은 즉시 마나 호흡법을 시작했다. 방에 꽉 들어찬 마나가 제론의 몸으로 급격히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제론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은은히 빛났다.
“크윽!”
제론은 이제야 자신이 선물로 받은 반지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반지는 마나의 보고였다.
어마어마한 마나가 제론의 몸을 중심으로 회오리쳤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제론의 모공을 통해 몸으로 스며들었다.
제론은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입을 꽉 틀어막은 것 같았다.
방 안의 마법진이 모두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마법의 작용이 분명했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제론은 필사적으로 마나 호흡법에 매달렸다.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온몸의 혈관을 갈기갈기 찢는 듯했다. 너무 많은 마나가 유입되는 바람에 마나 로드가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법진의 빛이 꺼졌다. 그리고 제론이 바닥에 털썩 누웠다.
“허억! 허억! 크으으윽!”
힘들었다. 그리고 지독하게 아팠다. 온몸 아프지 않은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정수리 끝에서 발끝까지
아팠다.
화아악!
천장의 마법진이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이 고스란히 제론의 온몸으로 쏟아졌다.
“크윽!”
제론은 마치 온몸에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간지러움에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자 온몸이 편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제론이 눈을 크게 떴다. 통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설마 치료된 건가? 믿을 수가 없군.”
―로비로 이동합니다.
제론은 멍한 표정으로 유적 한가운데 섰다. 그렇게 서서 마나 호흡법을 통해 몸을 점검했다.
“헉!”
제론은 하마터면 마나 폭주에 빠질 뻔했다. 물론 유적에 있는 마스터 보호 시스템이 그렇게 놔두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뭐, 뭐지?”
마나가 너무 거침없이 흘렀다. 게다가 몸에 내재된 마나도 엄청나게 늘었다. 제론은 이번 수련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거 정말 기대되는데?”
제론은 눈을 빛내며 잠잘 준비를 했다. 어느새 로비 한쪽에 침대가 나타났다. 그 푹신함과 아늑함을 아는 제론은
빙긋 웃었다. 하루가 끝났다. 더없이 소중한 하루였다.
그리고 내일도 계속될 하루였다.

☆ ☆ ☆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언제부터 우리 미스트 드래곤이 이렇게 허술해졌지?”


슈린 공작은 눈앞에 엎드린 사내를 노려봤다. 온통 검은 옷과 복면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한 사내였는데, 그
존재감이 워낙 흐릿해 똑바로 보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송구스럽습니다.”
사내는 미스트 드래곤의 수장이었다. 미스트 드래곤은 슈린 공작가가 비밀리에 키운 조직이었다.
요인 암살이나 감시, 그리고 정보 수집을 위해 만든 조직으로 그 어떤 조직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곳이었다.
한데 그런 조직이 고작 아카데미 학생 하나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해 놓쳤다고 하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뭐가 문젠가?”
“아카데미에 숨어 들어가 직접 감시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슈린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건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아카데미는 레늄 왕국의 역대 국왕들이 상당히 신경 쓰는 곳이었다. 당연히 경비도 남달랐고, 곳곳에 깔린 마법도
상당했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교사들이나 경비들의 실력도 뛰어났다. 아무리 미스트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그런 아카데미에
숨어 들어가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희의 존재를 드러내도 좋다고 하시면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만…….”
“그건 안 된다.”
슈린 공작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쥐새끼 하나 잡자고 성을 불태울 수는 없지 않은가. 미스트 드래곤은 그렇게
쉽게 정체를 드러내선 안 되는 조직이었다.
“하면 아카데미 밖에서 그놈을 감시했나?”
“예. 설사 아카데미의 담을 넘어서 빠져나갔더라도 확인할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슈린 공작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한데 대체 왜 그놈이 감쪽같이 사라졌단 말인가. 그놈이 그 정도로 뛰어난 놈인가? 켈리온도 그러더니…….”
켈리온이 실패한 거야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미스트 드래곤이 실패한 건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어쩌면 아카데미 안에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카데미 안에?”
왠지 그럴듯했다. 아카데미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면 밖에서 아무리 감시한다 하더라도 발견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일단 좀 더 지켜보지. 물러가도록.”
사내는 고개를 푹 숙인 후 연기처럼 흩어졌다.
슈린 공작은 그 모습을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트 드래곤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가 그놈에게 너무 집착하는 건가?”
슈린 공작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티끌만 한 빈틈도 남겨선 안 돼. 물론 그놈이 무슨 짓을 하건 다 막아 낼 수 있지만, 그게 빈틈이
되면 곤란하지. 처리하는 게 맞아.”
슈린 공작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한 달의 자유 시간이 이렇게 단호히 손을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아마 제론은 더 이상 아카데미를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군부로 간다. 일단 그곳에 가면
슈린 공작가의 영향력이 급격히 약해진다. 간접적인 방법밖에 쓸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 처리해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슈린 공작은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파인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번에 기간트의 수리비 때문에 용돈이 대폭 삭감된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가문의 후계자 자리에서 내치겠다는
말까지 듣는 치욕을 겪었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제론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베르의 수리가 완벽하게 되지 않았다. 부서진
부위가 너무 치명적이었다.
아직 파인트의 몸이 채 회복되지 않았기에 테스트를 해 보진 않았지만 동화율이 좀 낮아질 거라는 보고를 이미
받았다.
“안 그래도 조종이 힘든데 동화율까지 낮아지면 어쩌란 거야!”
동화율은 당연히 타고나는 센스가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훈련을 통해서도 충분히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기체의
성능이 따르지 않으면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파인트는 센스가 부족했고, 훈련도 등한시하는 편이었다. 당연히 동화율이 낮았다. 그 낮은 동화율을 기체의
성능으로 커버했는데, 이제 그걸 바랄 수 없게 된 것이다.
“젠장. 이게 다 제론 그놈 때문이야.”
베르는 실바에 비해 기체 자체가 가지는 동화율이 뛰어났다. 그런데도 제론의 실바에 패배했으니 얼마나
치욕스러운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놈을 어떻게 하지?”
파인트는 이를 갈며 제론을 떠올렸다. 자신을 이긴 대가로 한 달간의 자유를 얻어 아카데미를 떠났다고 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한 달이 되려면 보름이나 더 남았다. 그동안 열심히 몸을 회복시키고 복수할 방법을 찾으면
된다.
새삼 몸이 엉망인 사실이 떠올라 또 짜증이 났다. 이것도 다 제론 때문이다.
파인트는 그렇게 복수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 ☆ ☆

제론은 2 층의 마나 로드 확장 수련을 돌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결국 시간 안에 그것을 모두 끝마칠 수


없었다.
마나 로드 확장 수련은 재능이 있다고 더 잘 되고 그런 게 아니라 오로지 시간이 답이었다. 제론은 먹고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수련에 시간을 쏟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루빨리 작위를 받고 싶구나.”
비록 황무지였지만 제론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영지보다 소중한 장소였다. 그리고 초고대 문명의 지식을 얻으면
이런 황무지라도 쓸 만하게 만들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제론의 근거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에어스트 가문이 새로이 비상할 바탕이 될 것이다. 그런 소중한 땅을
허무하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아카데미에 복귀해야만 한다.
“오늘 가지 않으면 늦겠지?”
제론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유적에서 나갔다. 그리고 푸르투나를 불러 하늘을 날아 멀리 떨어진 도시로
향했다.
그곳에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아카데미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아마 자신이 어디서 뭘 했는지 누구도 모를
것이다.

☆ ☆ ☆

대로를 당당히 걸어 켄트 아카데미의 정문으로 향하는 제론의 모습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황당한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론이 워낙 연달아 텔레포트를 이용했기에 그 행적이 미처 드러나기도 전에 아카데미에 도착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미스트 드래곤의 수장인 샤텐은 결국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떤 방법으로 우리 눈을 피해 아카데미 밖으로 나간 거지?’
샤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스트 드래곤의 감시망은 철저했다. 설사 소드 마스터라도 감시망을 뚫을 수는
있을지언정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한데 그 불가능한 일을 고작 아카데미의 학생이 해냈다. 아직 익스퍼트조차 되지 못한 애송이가 말이다.
‘익스퍼트는 절대 아니야.’
익스퍼트가 되면 알아볼 수 있다. 온몸에 꽉 찬 마나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익스퍼트
이상이라야 한다.
샤텐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 이 순간 달려들어서 제론을 죽여 버리는 일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결국
포기했다.
‘여기서 죽여 버리면 일이 커져.’
수도의 한복판, 그것도 아카데미 앞에서 백작이 살해당하는 사건이다. 그 파장이 얼마나 크겠는가.
슈린 공작가의 힘으로 무마시키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유적지에서 죽었다면 다양한 방식으로 증거를
조작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영악한 놈.’
제론도 그것을 알기에 이렇게 대로를 활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환한 대낮이었다. 보는 사람도 많았다.
일을 당할 확률이 현저히 낮은 것이다.
아카데미 정문에 도착한 제론은 슬쩍 고개를 돌려 샤텐을 쳐다봤다.
샤텐은 제론과 눈이 마주친 순간 깜짝 놀랐다.
‘설마!’
설마 자신의 정체를 들킨 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아무튼 골치 아픈 놈인 건 확실하군.’
샤텐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제론을 감시하고 또 제거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 ☆ ☆

정문으로 들어서는 제론은 살짝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번 한 달간의 수련으로 얼마나 큰 발전을 했는지 조금 전
확실히 느꼈다.
“아마 꽤 오래전부터 이 근방에서 날 감시하고 있었겠지? 익스퍼트가 할 일 없이 저렇게 숨어 있을 리
없으니까.”
예전에는 아예 있는지조차 몰랐다. 아마 그냥 정문을 통해 나갔다면 분명히 봉변을 당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경지가 어렴풋이 보였다. 감각 수련의 성과이리라. 그들의 몸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마나를 확실히 감지했다.
아마 샤텐이 이 사실을 알면 기겁을 할 것이다.
미스트 드래곤은 외부로 흘러나가는 마나를 차단하는 수련을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대가 익스퍼트를 넘어서는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샤텐이 익스퍼트라는 사실을 결코 알 수 없었다.
한데 제론은 그것을 명확히 감지한 것이다.
“더 조심해야겠어.”
제대로 된 기반을 다지기 전까지, 또 슈린 공작가에 확실한 복수를 하기 전까지는 무조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한다. 지금 제론은 살얼음판에 서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표정이 살짝 굳어진 제론은 서둘러 행정부로 향했다.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야만 한다. 아카데미의
모든 일은 서류로 처리되기에 제대로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 나중에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다.
아카데미를 관통해 걸어가니 수많은 학생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제론을 발견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수군거렸다.
“제론 선배다.”
“실바로 베르를 이겼다며?”
“나, 그거 봤어.”
“정말? 어땠어? 그렇게 굉장했어?”
“글쎄. 잘 모르겠어. 꼭 제론 선배가 잘했다기보다는…….”
“파인트 선배가 너무 엉망이었나 보지?”
“혼자 비틀거리다가 뒤로 자빠졌으니까.”
“하하하. 볼만했겠네.”
“그보다 제론 선배가 진짜 제대로 대련하는 모습을 한 번 봤으면 좋겠어.”
“나도 꼭 보고 싶어.”
“조만간 분명히 기회가 있을 테니까 기다려 봐.”
“그래?”
“당연하지. 요즘 제론 선배 덕분에 기간트 학부에 대결 열풍이 불고 있잖아.”
“대결 열풍?”
“짧게는 하루, 길게는 열흘의 자유 시간을 보상으로 대결을 하는 거지.”
“정말? 그거 굉장한데?”
“그렇지? 그러니 기대하라고. 제론 선배가 그런 보상을 놓칠 리 없으니까. 솔직히 제론 선배는 기간트 조종에
관해서는 더 이상 배울 것도 없잖아?”
“그야 그렇지. 솔직히 교관도 실바로 베르를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뭐, 상대가 파인트 선배라면 얘기가 좀 달라질지도 모르지.”
“큭큭큭큭. 맞아.”
제론은 다른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빛냈다.
‘그렇단 말이지?’
이건 정말로 굉장한 기회였다. 이런 대결 열풍이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지만 할 수 있을 때 어떻게든 자유 시간을
얻어야만 한다.
‘솔직히 아카데미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건 맞지.’
제론에게는 태블릿이 있다. 제론이 보기에는 세상 모든 지식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최소한 아카데미에서 배울 수 있는 양보다는 많을 것이다.
게다가 라이더로서의 실력도 아카데미에서는 더 이상 키우기 어렵다. 이젠 실전을 통해 실력을 쌓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군대에 가게 되면 얼마든지 실전을 경험할 수 있겠지.’
아마 가장 위험한 곳으로 가게 될 확률이 높다. 슈린 공작가가 제법 신경을 쓸 테니 말이다.
제론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의 머릿속에서 앞으로 어떤 식으로 할지 계획이 차곡차곡 세워졌다.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제론은 일단 문을 잠그고 마나 호흡법을 시작했다.


텔레포트를 연달아 이용하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한두 번 이용한 다음 하루를 쉬는
방식으로 여정을 계획한다. 한데 제론은 시간이 모자라 하루 만에 모든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했다.
피로를 푸는 데에는 마나 호흡법이 최고였다. 심지어는 잠을 자는 것보다도 훨씬 효과적이었다.
제론은 마나 호흡법을 하며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가 여전히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유적에 있을 때처럼 마나 로드 확장 수련을 할 수는 없겠지만 아랫배와 심장에 더욱 많은 마나를 모을 수 있으니
예전보다 더 빨리 강해지지 않겠는가.
‘물론 아직 시작도 못했지만.’
유적이 요구하는 진짜 수련의 시작은 일단 제론이 소드 마스터가 되어야만 한다. 초고대 문명의 기준으로 보면
익스퍼트가 되어야 하고 말이다.
태블릿을 통해 알아본 초고대 문명의 기사들은 정말로 강했다. 소드 마스터를 뛰어넘은 강자들까지 있고, 그
강자들마저 넘어선 기사가 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지 솔직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제론은 유적에서 꾸준히 수련하면 자신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지옥
같은 수련을 참아내야 하지만 말이다.
‘난 할 수 있다. 분명히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의지를 다졌다.

Chapter 5 유적 왕복
이튿날부터 제론은 충실히 수업을 들었다. 기간트 학부 졸업반이었기에 대부분이 기간트 실습이었고, 또 유사시를
대비한 엔지니어링 수업과 이론 수업이 있었다.
검술이나 마법의 기초 같은 수업은 4 년 차까지만 있었다. 수업 계획 자체가 오로지 기간트에 맞춰져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군대에 가야 하기에 곧바로 전력에 투입이 가능할 정도로 훈련을 시키는 목적도 분명히 있었다.
이는 마법이나 검술 학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기에서 벗어난 건 유일하게 행정 학부밖에 없었다.
엔니지어링이나 이론 수업에서도 제론은 상당한 실력을 발휘했다. 태블릿의 힘이었다. 또한 마나 로드 확장과
마나 호흡법으로 인해 뇌가 더욱 활성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제론은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 갔다. 그리고 기간트 실습의 대결을 통해 꾸준히 자유 시간을 만들어 갔다.
짧은 자유 시간은 기숙사에서 마나 호흡법과 검술 수련을 통해 보냈고, 조금 긴 자유 시간은 유적에서 2 층의
클리어에 노력을 쏟았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흘러갔다.

☆ ☆ ☆

파인트는 이를 갈며 눈앞에 서서 고개를 푹 숙인 남자 학생 하나를 노려봤다.


“아직도 아무 시도조차 안 하다니, 내 밑에 있기가 싫은 모양이야?”
“그, 그렇지 않습니다! 며, 며칠만, 며칠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번에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래? 뭐 계획하는 일이라도 있나? 내가 좀 도와줄까?”
파인트의 말에 바이넨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파인트 님께서 도와주신다면 무조건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그래, 그 방법이 뭔데?”
“내일 기간트 실습이 있지 않습니까?”
파인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이넨이 눈을 번득이며 말을 이었다.
“그놈이 탈 기간트를 미리 손봐 놓겠습니다.”
파인트가 눈을 크게 뜨고 바이넨을 바라봤다. 만일 그 일이 들키면 그냥 퇴학만으로 끝나기 어렵다. 아카데미의
기간트는 왕국 소유다. 함부로 손대다 걸리면 왕국법에 의거해 처벌받는다.
“들키면 어찌 되는지 알고 있겠지?”
“염려 마십시오. 그저 괜찮은 실력의 엔지니어 2 명만 빌려 주시면 됩니다.”
파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잘해 봐라. 이번 일에 성공하면 향후 널 내 오른팔로 삼겠다.”
“감사합니다!”
바이넨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파인트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드디어 그놈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겠군.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거야.”
파인트가 키득거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내일이 너무나 기다려졌다.

☆ ☆ ☆

제론은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에 낀 반지를 살폈다. 드디어 2 층 수련이 다 끝났다. 그리고 2 층 수련을
마무리하고 선물까지 얻었다.
2 층의 선물은 놀랍게도 새로운 검술이었다. 제국 기사 검술이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드디어 고급 검술을 익히게 된 것이다.
카드를 통해 배웠기에 형이나 마나의 흐름은 모두 외웠다. 기초 검술보다 훨씬 복잡하고 길었다. 수련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무조건 해내야만 했다. 이 검술이 3 층 수련의 열쇠가 될 테니까 말이다.
제론은 손가락에 낀 반지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드는 마나를 느끼며 미소 지었다. 반지는 여전히 마나의 양을
늘리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좋아. 그럼 가 볼까?”
오늘도 기간트 실습이 있는 날이었다. 제론은 지금까지 한 번도 기간트 대결에서 진 적이 없었다. 아카데미
학생의 수준으로 제론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것은 교관들도 인정한 사실이었다. 교관들이 판단하기에 제론은 지금 당장 군대에 가도 베테랑 라이더와 비슷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제론은 항상 불리한 대결을 펼쳐야 했다. 최소 3 기에서 많게는 5 기의 상대와 동시에 대결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론은 언제나 승리했다.
제론은 곧장 기간트 실습장으로 향했다.
실습장에는 수많은 학생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교관도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교관은 제론을
보자마자 눈을 빛냈다.
제론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교관이 저런 눈빛을 할 때는 항상 슈린
공작가가 뒤에서 뭔가 더러운 지시를 내릴 때뿐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 아카데미의 에이스가 돌아왔군. 기념으로 대결 한번 하지?”
“하겠습니다.”
제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제론은 어제 유적에서 돌아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얻은 게 많았다. 그리고
지금 또 자유를 얻어 유적에 가면 3 층을 공략할 수 있었다.
“오늘은 일대일로 한다. 괜찮겠지?”
교관의 말에 제론은 직감적으로 누가 자신과 싸우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돌아갔다.
파인트가 입가에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순간 제론의 뇌리에 비상등이 하나 켜졌다. 파인트의 실력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파인트는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한데도 저런 표정을 지었다는 건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설마?’
제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만일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파인트는 정말로 구제 불능의 쓰레기였다.
“개인 기체가 없으니 저기 있는 실바를 타도록.”
교관이 손가락으로 실바 하나를 가리켰다. 제론이 얼른 움직이지 않자, 불안해진 교관이 다시 재촉했다.
“어서 안 타고 뭐하나?”
“상대가 누굽니까?”
그제야 교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너무 급한 나머지 상대도 제대로 지정하지 않고 기간트에 제론을 밀어 넣은
꼴이 되었다. 멀찍이서 파인트의 얼굴이 구겨지는 모습에 화들짝 놀란 교관이 얼른 말을 이었다.
“오늘 네 상대는 파인트다. 그러니 어서 저 실바에 타거라. 그리고 너, 너, 너.”
교관은 몇몇 학생을 지목한 다음 각자 한 대씩 실바에 탑승시켰다. 다음 대결을 준비한다는 명목이었는데, 그
수작이 너무 눈에 빤히 보여 제론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좋아. 다 뛰어넘어 주지. 얼마든지 덤벼라.’
제론은 자신에게 배당된 실바로 다가가 훌쩍 뛰어올랐다.
탁탁탁!
무릎과 허리를 밟고 조종석에 탑승한 제론은 차분히 앉아 마나를 돌렸다.
‘어떤 식으로 장난을 쳤는지 먼저 알아야 해.’
제론은 해치를 닫지 않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감각의 날을 세웠다. 마나 로드를 통해 힘차게 휘도는 마나가
제론의 감각을 크게 확장시켰다.
솔직히 2 층 수련을 클리어하지 못했다면 이런 시도를 할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확장된 마나 로드의 힘은
엄청났다.
제론이 한 일은 마나 코어를 통해 자신의 마나를 흘려 막힌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기간트 역시 마나
코어에서 마법진을 통해 마나를 온몸에 흘려 작동시키기 때문에 그 방식이 이상한 점을 알아내기가 가장 쉬웠다.
물론 이 방법은 제론이 아니면 아무도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실제로는 엔지니어들이 마나 로드 테스터를 통해
마법을 써야만 알아낼 수 있었다.
‘거기로군.’
제론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어렸다.
해치가 닫히고 제론의 실바가 작동했다.
파인트는 그 모습을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와 자신의 베르를 소환했다.
“내 선더볼트로 네놈을 박살 내 주마.”
베르와 실바가 마주 섰다. 먼저 움직인 건 당연히 베르였다. 파인트는 제론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에 망설임이
없었다.
제론은 움직이지 않고 파인트가 달려오는 모습을 살폈다. 제론이 탄 실바의 발목에 문제가 있었기에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된다. 지금 움직이다가는 혼자 비틀거리다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기회는 단 한 번!’
제론의 감각이 점점 예민해졌다. 그렇게 최고조에 달했을 때, 파인트가 몸통 박치기를 해 왔다. 피하기 어렵게
만들 속셈이었다.
‘한 번만 움직여라.’
파인트는 당황할 제론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후웅!
제론이 파인트의 몸통 박치기를 가볍게 피했다. 워낙 타이밍이 좋아 파인트가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었다.
텅! 꽈앙!
파인트는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세상이 빙글 도는 걸 느꼈다.
‘뭐, 뭐지?’
쿠우우우웅!
파인트의 베르가 바닥에 뻗었다.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바닥에 떨어졌기에 그 충격이 엄청났다. 베르의 탑승자
보호 시스템으로도 그 충격을 모두 해소시키지 못할 정도였다.
파인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거대한 검이 그의 목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안 돼!”
콰득!
파인트의 외침이 무색하게 실바의 검이 그의 목을 파고들었다. 베르가 기동을 멈췄다. 또 패배한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돼! 바이넨 이 멍청한 놈!’
이는 필시 바이넨이 제대로 일 처리를 못 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발목이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실바
따위에게 자신이 이런 꼴을 당했을 리가 없었다.
실바는 베르의 가슴에 거의 주저앉다시피 해서 목을 찌른 검에 의지해 균형을 잡고 있었다.
푸쉭!
그대로 해치가 열리며 안에서 제론이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본 파인트가 당황해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어서 비키지 못해!”
실바가 베르의 해치를 다리로 누르고 있었기에 파인트가 베르에서 내릴 수 없었다.
제론의 말도 안 되는 행동에 구경하던 모든 학생이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리고 교관이 눈살을 한껏
찌푸리며 제론에게 다가갔다.
“이게 무슨 짓이냐! 대결하는 상대를 저런 식으로 대하다니!”
제론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실바가 고장 났습니다. 발목이 움직이지 않아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발목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제론의 말에 교관의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오늘 자신에게 파인트가 요구한 그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파악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이건 문제가 심각하다. 그리고 그 심각한 문제에 자신도 연루가 되었다. 이쯤에서 그냥 덮는 것이 신상에
이로웠다.
“그, 그렇군. 다들 뭐 하나! 어서 저 위에 있는 실바를 치우지 않고!”
교관의 당황한 외침에 미리 실바에 탑승해서 대기하던 학생들이 베르의 해치를 무릎으로 디딘 채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실바를 옆으로 들어 옮겼다.
“그럼 고장 난 실바로 베르를 이긴 거야?”
누군가의 놀란 외침이 그제야 실습장에 울렸다. 다들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교관에게 오늘 대결에 걸린 자유 시간을 확인하고는 실습장을 떠나고 있었다. 오늘
대결로 보름의 자유 시간을 얻었다. 교관이 미리 행정부에 걸어 놓은 자유 시간이었다.
물론 그 자유 시간은 파인트에게 주기 위해 설정한 선물이었다. 이제는 제론의 것이 되었지만 말이다.
학생들은 선망이 가득한 눈으로 제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몇몇 학생이 조용히 실습장을 빠져나갔다.

실습장을 떠나는 제론의 뒤를 다급히 따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이스였다. 바이스는 빠르게 달려 제론을
따라잡았다. 경험상, 제론을 아무리 불러 봐야 대답도 듣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거의 제론이 나가자마자 쫓아갔기에 바이스는 금세 제론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선배님, 저랑 정보를 교환하죠.”
제론이 고개를 돌려 바이스를 쳐다봤다.
바이스는 그제야 자신을 돌아본 제론의 모습에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 함께 발견한 마법진, 거의 분석이 끝났습니다. 그걸 몽땅 알려 드리죠.”
지난번 함께 발견한 마법진이라면 베르의 강판 내부에 새겨진 마법진을 뜻한다. 아마 상당한 비밀일 텐데 그걸
알려 주겠다는 걸 보면 그 이상을 뜯어낼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제론도 그걸 짐작하기에 대꾸하지 않고 그저 바이스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물론 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로
말이다.
“좀 멈춰서 얘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바이스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능글능글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론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요. 전, 아니, 우리 가문은 선배님의 능력을 사고 싶습니다.”
“능력?”
“예. 라이더로서의 능력 말입니다.”
제론이 피식 웃었다. 가당치 않은 말이었다. 고작 아카데미 5 년 차 학생의 능력을 사겠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그것도 레늄 왕국 최고의 마법사들을 보유한 말레피 후작가에서 말이다.
“장난에 장단 맞춰 줄 시간 없다.”
제론은 바이스의 말을 냉정히 자르고는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바이스는 당황하며 제론의 뒤를 따라갔다.
“서, 선배님! 잠시만 멈춰 보시죠! 절대 장난 아닙니다! 제가 왜 선배님께 장난을 하겠습니까!”
바이스의 외침에는 진심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이런 식으로 유희 거리를 찾곤 한다.
제론도 백작이다. 또한 에어스트 가문은 예전에 레늄 왕국에서도 제법 잘 나가는 축에 속했다.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아 해 본 적은 없지만 다들 그런 식으로 논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저 진심조차 거짓으로 만들 수 있는 자들이라는 걸 이젠 너무나 잘 알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정치를 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정치가들은 자신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속일 수 있어야 한다.
“선배님! 너무 스스로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시는 것 아닙니까?”
제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 교관들이 하는 말이나 정보 계통에서 돌아다니는 선배님에 대한 평가를 아직 모르십니까?”
제론은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확실히 그건 궁금했다.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아야 앞으로 어떤
식으로 계획을 세울지 정하기가 편할 테니까 말이다.
“이제야 좀 관심을 보여 주시는군요.”
바이스가 빙긋 웃었다.
“100 년 만에 나타난 천재라고 불립니다.”
바이스는 제론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한데 오늘 보니 그 평가가 아마 수정될 것 같군요. 아마 기간트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바뀔 것 같습니다.”
제론은 무심하게 돌아섰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떤 작용을 할지 맹렬히 생각했다.
‘나쁘지 않을 수도 있어.’
지금 제론은 슈린 공작가의 암수를 피해야 할 입장이었다. 지금이야 아카데미 안에 있으니 비교적 안전하지만
이대로라면 근처에 외출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놈들이 날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아카데미에 들어오면서 본 익스퍼트들이 떠올랐다. 아마 아무런 준비 없이 아카데미를 벗어나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선배님!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바이스가 다급히 따라붙었다. 하지만 제론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거절이다.”
“예?”
바이스는 이렇게 단호한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기에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제론을
따라갔다.
“선배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가문은 그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발굴형 기간트도 내
드리겠습니다! 그저 재능을 나눠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발굴형 기간트라는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제론은 결국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말레피 후작가에 잠시 몸을 의탁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그래선 계속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내가 주도해야 돼.’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유적의 힘을 모두 얻을 수 있다. 극히 일부만 확인했음에도 유적은 정말로 대단했다.
만일 그 유적의 힘을 모두 얻는다면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해. 그 안에 기간트도 있다.’
제론은 기간트의 존재에 대해 확신했다. 아마 일반적인 발굴형 기간트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기체일 것이다.
“선배님! 정말로 거절하시는 겁니까? 정말로요? 이거 흔치 않은 기회라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선배님!”
바이스가 아무리 외쳐도 제론은 걸음을 멈추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기숙사로 쑥 들어가 버렸다.
바이스는 멍하니 서서 제론이 사라진 기숙사 입구를 바라봤다. 설마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바이스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뭐, 어쩔 수 없지.”
이번에 강판 속에 새겨진 마법진을 발견하는 바람에 가문에 큰 공헌을 했다. 제론을 포섭하려던 건 그 보상의
일환이었다.
결과적으로 강판 속의 마법진은 베르의 모든 강판을 뜯어 조사한 결과 목에 하나, 마나 코어를 보호하는 장갑에
하나, 그리고 조종석을 덮는 해치에 하나, 이렇게 총 3 개가 있었다.
그것도 크기가 작아 찾기도 쉽지 않은 마법진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하필이면 딱 마법진이 있는
위치를 가르는 바람에 드러났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로 인해 말레피 후작가에서는 새로운 마법진을 3 개나 얻을 수 있었고, 그 마법진들을 연구하면서
상당한 마법 이론을 재정립하는 중이었다.
바이스는 그 공으로 후계자의 자리에 한 걸음 다가갔다. 물론 아직도 진짜 후계자가 되려면 갈 길이 멀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다른 후보들에 비해 한 계단 위에 올라선 건 확실했다.
‘함께 가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군.’
제론에 대한 평가는 진짜였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100 년 만에 나타난 천재건 역사상 처음 나타난
천재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전쟁은 라이더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천재 마법사나 전략가가 훨씬 더 가치 있지. 아니면 엔지니어라든가.’
하지만 미련이 남았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정말로 쉽지 않다. 바이스는 제론이 들어간 기숙사의 문을
바라보며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것 참 곤란하네.”
바이스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오늘의 일로 제론에게 밉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아직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
또 기회가 올 테니까.

☆ ☆ ☆

“으아아아아!”
콰앙! 와장창!
파인트는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며 방 안의 모든 집기를 닥치는 대로 부쉈다.
“허억! 허억! 이 버러지 같은 놈! 감히, 감히!”
파인트는 치미는 분노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남아 있는 집기가 없어서 더 부수지 못하니 화가 더 치밀었다.
이번에 벌어진 일로 인해 후계자의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냥 실바도 아니고 고장 난 실바에 패배했으니
입이 10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크윽! 젠장!”
다들 얼마나 자신을 우습게 여기겠는가. 파인트가 아카데미에 온 것은 기간트 조종 실력을 키우기 위함도, 또
뭔가를 공부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 왔다. 한데 그 일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제론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론에게 접근하는 바이스와 세나도 눈에 거슬렸다. 둘 모두 함부로 건드리기 껄끄러운 가문의 일원이라
더 짜증이 났다.
“내가 얻어야 할 자들인데!”
세나 폰 벨루스와 바이스 폰 말레피. 향후 파인트가 슈린 공작가를 이어받았을 때 가장 필요한 인물들이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세나를 아내로 맞아 벨루스 백작가를 아우르고, 바이스를 측근으로 받아들여 말레피 후작가의
힘을 얻는 것이었다.
한데 그 원대한 목표가 고작 제론 때문에 흔들리고 있으니 너무나 화가 치밀었다.
“뭔가 수를 내야 해. 뭔가…….”
파인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 ☆ ☆

제론은 자유 시간을 얻는 대련 덕분에 보름의 시간을 더 벌었다. 그리고 이번 보름 동안 어떻게든 최대한 3 층에


대해 파악할 계획이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기숙사 안에서 유적 안으로 이동한 제론은 곧장 유적 3 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새로운 수련을 시작했다.

☆ ☆ ☆

“송구스럽습니다.”
샤텐의 말에 슈린 공작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샤텐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텐은 그저
그런 익스퍼트와는 달랐다.
“또 아카데미에서 사라졌단 말이지?”
샤텐은 고개만 푹 숙인 채 대답하지 못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런 일이 벌어지니 정말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슈린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들어라. 아무래도 뭔가가 좀 이상하다.”
샤텐은 슈린 공작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사실 그 역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미스트 드래곤의 능력은 레늄
왕국의 그 어떤 비밀 조직보다 뛰어났다. 샤텐은 그렇게 자부했다.
한데 그런 미스트 드래곤을 두 번이나 엿 먹였다. 이는 그냥 단순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놈에게 조력자가 붙은 게 틀림없다.”
샤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나름대로 조사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조력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최근 그놈에게 접근한 게 말레피 후작가의 자식이라고 했지? 벨루스 백작가의 여식도 꾸준히 접근했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두 가문은 아닙니다.”
“아니라고?”
“이미 조사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아카데미 쪽에 개입한 정황이 전혀 없습니다.”
슈린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눈을 빛내며 말했다.
“왕궁 쪽을 감시해라.”
샤텐이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 슈린 공작을 바라봤다.
“뭘 그리 놀라느냐. 우리 가문의 힘이 커지는 걸 가장 꺼려하는 곳이 어디겠느냐?”
공작의 말에 샤텐은 수긍했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슈린 공작가의 힘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왕궁 쪽에서도 은밀한 압력과 감시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는
당연한 정치적 행보였다.
그런 왕궁이니 슈린 공작가와 악감정을 가진 제론의 배후가 되어 슈린 공작가를 견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힘은 적게 들이면서 큰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작전 아닌가.
‘실제로 우리 가문에 악감정이 남은 자들을 비밀스러운 세력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정보도 있으니까.’
그 비밀스러운 집단 뒤에 왕궁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쉽게 유추가 가능했다. 슈린 공작은 벌써 그들의 존재를
파악했다. 지금은 열매가 영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어야 돼.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그리고 왕궁이 알아서 그런 놈들을 찾아주면
오히려 일이 수월해져서 좋지.’
슈린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가 봐라. 그리고 그놈의 종적도 계속 추적해 봐라.”
“예. 명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슈린 공작은 샤텐이 사라지자, 자리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들어왔다.
“왔나? 거기 앉게.”
슈린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선 사내는 슈린 공작 일파의 인물인 깁스 남작이었다.
“어떻게 됐나?”
“라쿠스의 설계도를 구했습니다.”
깁스 남작의 말에 슈린 공작이 크게 기뻐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게 정말인가!”
“예. 성공했습니다.”
깁스 남작은 품에서 두꺼운 책 1 권을 꺼냈다. 그것이 바로 크라테르의 발전형, 라쿠스의 설계도였다.
“용케 구했군. 정말 고생 많았네.”
슈린 공작은 책을 받아 한 장 한 장 찬찬히 살펴봤다. 과연 기간트의 설계도답게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출력이 1.9 라니 대단하군.”
“세부적인 부분도 많이 바뀌어서 움직임도 매끄럽고 속도도 개선한 모델입니다.”
“대단하군. 훌륭해!”
사실 설계도를 본다고 슈린 공작이 뭘 알겠는가. 그저 추진한 일이 제대로 성공해 기쁠 따름이었다. 슈린 공작은
설계도를 다시 깁스 남작에게 내밀었다.
“자네가 한번 추진해 보게. 우리도 드디어 기간트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군. 그것도 최신형 기간트를 말이야.”
깁스 남작은 공손히 설계도를 받았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깁스 남작은 설계도를 품에 갈무리한 다음 슈린 공작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공작님,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그렇게 보였나? 요즘 좀 신경 쓰이는 놈이 있어서.”
“공작님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다니 나름대로 대단한 놈이로군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한번 나서
보겠습니다.”
“자네가?”
슈린 공작은 눈을 빛내며 깁스 남작을 바라봤다. 깁스 남작은 확실히 유능했다. 추진력도 대단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과를 만들어 내는 능력도 굉장했다.
‘이 사람이라면 뭔가 다른 수를 만들어 낼지도…….’
슈린 공작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에어스트 가문에 대해서 좀 아나?”
“얼마 전 망한 가문 아닙니까. 예전에 그렇게 잘 나가던 가문이었는데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또한 깁스 남작은 에어스트 가문이 왜 망했는지도 알고 있다. 물론 슈린 공작이 얘기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쯤이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는 딱 거기까지 듣고 슈린 공작의 고민이 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는
척 귀를 기울였다.
“에어스트 백작의 아들이 지금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데, 나한테 가당치 않은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는
모양일세.”
“안타깝군요. 뭔가를 오해한 모양입니다.”
슈린 공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어스트 가문과 합작으로 유적 하나를 발굴했는데, 에어스트 백작이 거기서 죽었네. 그놈은 내가 백작을
죽였다고 믿는 모양이더군.”
“저런. 공작님께서 왜 이렇게 상심이 크신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한데 고작 그런 아이 하나 때문에 근심하시는
건 아닐 듯합니다만…….”
“맞네. 문제는…….”
슈린 공작은 잠시 뜸을 들였다. 지금 이 얘기를 해도 될지 고민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깁스
남작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사람이었다. 하니 감추는 부분이 적을수록 좋다.
“그놈을 처리할 수가 없다는 점일세.”
“아카데미에서 나오게 한 다음 처리하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아카데미에서 일을 벌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깁스 남작도 잘 알고 있다. 레늄 왕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 바로 켄트 아카데미였다.
아카데미가 왕국의 근간이 된다고 국왕이 직접 천명할 정도였다. 그러니 그곳에서 처리했다간 일이 커진다.
쥐새끼 한 마리 잡자고 성을 불태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게 내 고민일세.”
슈린 공작은 제론의 행적을 제대로 추적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깁스 남작의 눈이 번득였다.
“이상한 일이군요. 그 정도로 철저히 행적을 감추려면 최소한 왕궁 정도는 배경으로 두고 있어야 하는데,
왕궁에서는 전혀 그런 기미가 없거든요.”
“없다고? 확신하나?”
“예. 요즘 왕궁은 그런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습니다.”
깁스 남작은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슈린 공작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면 대체 뭐란 말인가?”
깁스 남작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공작님, 아직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못한 애송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왠지 신경이 쓰인다네. 그냥 둘 수가 없어.”
“하면 조금 위험한 지역으로 그냥 보내 버리고 잊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위험한 지역?”
“조만간 전쟁이 조금 확대될 것 같습니다.”
슈린 공작이 눈을 번득였다.
“전쟁이 확대된다고? 한데 내가 왜 그걸 모르고 있지?”
“벨룸 왕국으로부터 나온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슈린 공작의 눈이 커다래졌다.
“벨룸 왕국이 뭔가를 꾸미고 있군?”
“체른산을 노리고 있습니다.”
“체른산?”
“그곳에 유적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다만, 그들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슈린 공작은 깁스 남작의 입가에 매달린 위험한 미소를 발견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설마 자네?”
“아무튼 벨룸 왕국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전에 격전지로 보내 버리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놈은 아직 아카데미에…….”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습니다. 허락만 해 주시면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
깁스 남작의 자신만만한 말과 표정에 슈린 공작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그런 애송이 하나에
집착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했다.
“좋네. 한번 추진해 보게. 이번에도 좋은 결과 기대하겠네.”
“맡겨 주십시오.”
깁스 남작이 공손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슈린 공작은 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으며 등을 기댔다.
생각해 보면 아카데미에서 나오기만 하면 나중에라도 처리할 수 있다. 아카데미는 지금 제론의 가장 큰
울타리였다.
‘그래. 울타리를 먼저 없애야 하는 거였어.’
슈린 공작은 그렇게 미련을 털어 냈다. 군대에 가서 죽으면 잘 된 일이고, 설사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 뒤에는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
“깁스 남작, 눈여겨봐야겠어.”
슈린 공작은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리며 더욱 깊이 의자에 기댔다.

Chapter 6 용병들

제론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로비 한가운데 널브러졌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3 층 수련은 기사 검술을 이용한
실전이었다.
끝도 없이 몰려오는 듣도 보도 못한 괴물들을 물리쳐야만 했다. 과연 그 끝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몰려왔다.
처음에는 괴물 한 마리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괴물들은 그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열흘이 지난 지금은 최소
1 시간은 버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3 층을 완전히 클리어하려면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제론은 정말 죽어라 노력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괴물들을 상대했다. 자연히 제론의 실력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기사 검술은 몸에 완전히 각인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제론은 슈린 공작을 극도로 경계했다. 당연히 돌아가는 길에 거쳐 갈 도시도 매번 바꾸었다.
“지난번에는 샤임이었지? 그럼 이번에는 프렉타로 할까?”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샤임에서 수도 방향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프렉타에서 텔레포트를
이용하기로 했다.
문득 제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확실히 문제는 문제였다. 만일 군대에 가게 되면 유적을 오가는 것이 훨씬 더
힘들 것이다. 뭔가 방도를 만들지 않으면 곤란했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제론은 일단 유적을 나와 프렉타로 향했다. 유적은 드넓은 황무지 한가운데 있었고, 그 황무지를 넘어서더라도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다.
프렉타는 샤임보다 훨씬 더 큰 도시였다. 제론은 여유롭게 프렉타 시를 걸었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이번에는 사흘이나 일찍 유적을 나섰기 때문이다. 제론은 느긋하게 걸으며 유적에 대해서
생각했다. 대체 얼마나 더 내려가야 수련이 끝날지 까마득했다.
하지만 그 모든 수련을 끝내면 확실히 강해질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여관이 하나 나왔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은 시끌벅적했다. 여느 여관이 다 그렇듯 1 층에서는 술과 음식을 판매하고 숙소는 2 층부터 있었다.
여관 1 층에는 용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많았는데,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거침없이 맥주잔을 비워 댔다.
제론은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종업원을 찾았다. 밥 생각은 없었지만 여기저기서 맥주잔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니 술
생각이 좀 났다.
마침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급히 달려와 제론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혼자십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이 능숙하게 질문을 이어 갔다.
“식사는 어쩌시겠습니까? 1 층을 원하시면 자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원치 않으시면 방으로 직접 날라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방부터. 밥은 됐다. 나중에 내려와서 맥주를 마실 테니 미리 준비해 두도록.”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소년에게 동전 하나를 손가락으로 튕겨서 던져 주었다. 소년이 그것을 착 채가듯 잡더니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론은 소년을 따라 2 층의 구석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갔다. 여관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못 지낼
정도는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참을 만했다.
제론은 백작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귀족은 이런 곳에 오지 않는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호텔에 묵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귀족이라고 다 부자인 것은 아니다. 그런 경우에도 이런 싸구려 여관에는 웬만해선 묵지 않는다.
하지만 제론은 일부러 이런 선택을 했다. 이런 큰 도시의 호텔에서 묵으려면 신분이 노출될 확률이 높았다.
괜한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싸구려 여관이라면 슈린 공작가의 눈도 쉽게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방에는 따뜻한 물이 찰랑이는 목욕통이 놓여 있었다. 제론은 굳이 목욕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것을 그냥 지나쳐
침대에 올라가 앉았다.
일단 마나 호흡법을 통해 피로를 풀어야 했다. 목욕을 통해 피로를 푸는 것보다 마나 호흡법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유적 내부에는 놀랍게도 샤워를 할 수 있는 시설도 있었기에 제론은 몸을 깨끗이 유지할 수 있었다. 굳이 이런
여관에서 목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마나 호흡법을 끝낸 제론은 바로 1 층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시끌벅적했지만 그래도 빈자리가 몇 개 있었다.
제론은 그중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았다. 처음 제론을 안내했던 소년이 후다닥 달려왔다.
“맥주. 그리고 안주는 적당히 알아서.”
“즉시 대령하겠습니다.”
소년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갔다.
잠시 후, 제론의 탁자에 맥주와 먹음직스런 안주가 깔렸다. 제론은 맥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시원하고 짜릿한
느낌이 목을 타고 쫘악 내려갔다.
“좋군.”
단숨에 잔을 비운 제론은 다시 한 잔을 주문했다. 맥주가 또 한 잔 탁자에 놓였다.
제론은 맥주를 조금씩 마시며 차분히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다.
최종 목표는 일단 슈린 공작가에 복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난관도 많고, 갈 길이 너무
멀었다.
‘지금은 일단 유적에 관한 것만 생각하자.’
제국 기사 검술을 떠올리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 검술의 위력은 제국 기초 검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단 마나의 효율이 완전히 달랐다. 또한 검술에 포함된 수련 검식을 꾸준히 펼치면 마나 호흡법과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
제론은 기사 검술을 몸에 새기며 한 가지 확신을 가졌다. 기초 검술과 기사 검술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기초 검술은 기사 검술의 토대나 다름없었다. 즉, 이 말은 기사 검술을 토대로 한 새로운 검술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아래로 계속 내려가다 보면, 결국 얻을 수 있어.’
만일 초고대 문명에서 말하는 진짜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다면, 제론이 복수를 하는 데 정말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경지는 정말로 요원했다. 아직 진짜 익스퍼트에도 이르지 못했으니 말이다.
‘기사 검술을 익히면 분명히 익스퍼트가 될 수 있어.’
기초 검술로도 얼마든지 익스퍼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효율 문제였다. 기사
검술은 훨씬 더 빨리 높은 경지로 제론을 데려다 줄 것이다.
제론이 그렇게 검술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관 안이 갑자기 훨씬 소란스러워졌다.
“음?”
제론은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꼼짝 마라!”
어느새 병사들이 20 명이나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병사들의 뒤에 기사 1 명이 서 있었다. 방금 외친 건 기사였다.
“이곳의 용병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체포해라!”
제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자신의 행색은 누가 봐도 용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병사 2 명이 제론에게 다가와
창을 겨눴다.
“일어나라!”
제론은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정체를 밝히면 슈린 공작가에 위치가 노출될 확률이 거의 100 퍼센트였다. 하지만
이대로 잡혀간다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고민은 짧았다.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각! 슈각!
빛이 번득였고, 병사들이 든 창이 싹둑싹둑 잘렸다. 두 병사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제론은 즉시 앞으로 움직여
병사들의 명치를 후려쳤다.
뻐벅!
“커헉!”
두 병사가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뭐야!”
“반항인가! 저놈부터 잡아라!”
기사가 제론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당연히 제론은 그냥 당해 줄 생각이 없었다. 더구나 기사는 익스퍼트도
아니었다.
제론은 자신의 얼굴이 알려지기 전에 돌아섰다. 그리고 벽을 향해 달려갔다.
다들 저게 무슨 짓인가 멍하니 쳐다봤다. 하지만 이어지는 광경에 다들 경악했다.
꽈앙!
한쪽 벽이 사라져 버렸다. 벽돌을 쌓아 만든 벽이었는데 마나가 가득 담긴 제론의 손바닥을 버티지 못하고 넘어진
것이다.
제론은 유유히 사라진 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움직임이 어찌나 표홀한지 제론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잡아라! 저놈이 범인이 분명하다!”
기사의 명령에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갔다. 하지만 제론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고 여관 안에 있던 용병들이 몽땅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여관 주인만 울상을 짓고 사라진 벽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제론은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기사나 병사들의 눈을 피해 도망치는 건 아주 간단했다.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할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점원이 얼굴을 기억할 수도 있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사람 얼굴을 기억하는
데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이 그곳에 있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제론은 즉시 프렉타를 벗어났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모처럼 여유를 가지고 쉬려고 했는데, 다 틀렸군.”
제론은 아쉬워하며 다른 도시로 향하려 했다. 한데 막 떠나려는 순간 프렉타를 도망치듯 나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제론처럼 성벽을 넘어서 나온 자들이었다.
그 높은 성벽을 무리 없이 기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실력들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물론 제론은 단번에 뛰어내려
왔지만 말이다.
“빨리빨리 움직여! 잡히면 끝장이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떠들 힘 있으면 빨리 내려가기나 해!”
“펠젠만 만나면 돼. 그러니 서두르라고!”
제론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살폈다. 보아하니 용병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방금 소동의 원인이 이들인 듯했다.
제론은 강한 흥미를 느꼈다. 펠젠이라는 이름이 묘하게 끌렸다.
용병들은 10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성벽을 넘자마자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렸다.
잠시 후, 성문이 열리고 말을 탄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무조건 찾아!”
“놓치면 다 죽는다!”
제론은 푸르투나를 불러 하늘로 훌쩍 떠올랐다. 그리고 기사들을 뒤쫓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면 기사들을
살피는 것이 더 좋다.
기사들은 해가 지고 밤이 늦을 때까지 돌아다니며 용병들을 찾았다. 하지만 약삭빠른 용병들을 잡을 수는 없었다.
결국 기사들은 노숙을 준비했다. 프렉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말을 근처 나무에 묶은 뒤 대충 식사를 한 다음 모여 앉았다.
“후우. 큰일이군.”
“그러게. 이래서야 어떻게 찾지?”
“영주님, 화 많이 나셨지?”
“화가 난 게 아니라 사색이 되셨네. 당연하지. 슈린 공작가의 심기를 거스른 셈이 되었으니.”
슈린 공작가라는 말에 근처에 숨어서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제론의 눈이 빛났다. 역시 느낌이 맞았다.
‘프렉타 남작가가 슈린 공작가의 라인이었군.’
프렉타 시는 프렉타 남작가의 영지였다. 레늄 왕국에는 영지가 도시 하나인 경우가 많았다. 프렉타도 그런
경우였다.
“하여튼 간도 큰 용병들이야. 감히 슈린 공작가의 병사들을 습격하다니.”
“그놈들이 그걸 알았겠나? 그냥 습격하고 보니 슈린 공작가였겠지.”
“어쨌든 우리만 고달프게 됐어.”
“그러게 말이야. 그걸 어떻게 되찾지?”
제론은 기사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대체 뭘 잃어버렸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걸 자신이 가로챈다면 얼마나
통쾌하겠는가.
더구나 제론에게는 아공간이 있다. 거기에 보관하면 슈린 공작가는 절대 그것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젠장. 대체 그런 중요한 걸 그렇게 허술하게 나른 이유가 뭐야?”
“허술한 게 아니야. 익스퍼트가 둘이나 포함된 일행이었다고.”
“뭐? 그런데 당한 거야?”
“용병들을 우습게 본 거지. 멍청하게 트랩에 당했어.”
“트랩?”
기사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교묘하고 위험한 트랩이라 하더라도 익스퍼트급 기사가 거기에 당했다면
지나치게 방심했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테페룸을 그렇게 많이 잃어버렸으니, 만일 못 찾으면 아무리 슈린 공작가라도 휘정거리겠어.”
“그래도 슈린 공작가야. 그렇게 쉽게 흔들릴 것 같아?”
“하긴.”
“그래도 좀 흔들리긴 할걸? 테페룸이 무려 100 킬로그램이야. 돈으로 환산해도 어마어마하다고.”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손해를 입었는데 슈린 공작가가 프렉타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후우. 일단 다들 자자고. 내일 어떻게든 찾아야지.”
기사들이 하나둘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은 제론이 조용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제론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슈린 공작가에게 피해를 주고, 공작가 라인의 귀족을 하나 떨어뜨릴 기회였다. 그리고 테페룸을 100
킬로그램이나 얻을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당장은 제론에게 아무런 쓸모없는 물건이었지만 말이다.
제론의 모습이 어두운 하늘에 녹아들었다.

10 명이나 되는 용병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커다란 상자 하나를 가운데 놓고 서로를 견제하며 눈을 번득였다.
“10 킬로그램씩 나누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누가 제일 애썼는지 알아야지. 이 무거운 걸 들고 여기까지
뛰어온 건 나야!”
가장 덩치가 큰 용병이 인상을 쓰며 협박하듯 말했다. 하지만 나머지 용병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들도
산전수전 다 겪으며 바닥까지 떨어진 용병들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트랩을 설치한 게 나니까 내가 제일 많이 받아야지. 안 그래? 내 트랩이 아니었으면
익스퍼트들을 해치울 수 있었을 것 같아?”
“아니지. 그 트랩을 만든 내가 제일 중요하지.”
“트랩에 걸린 기사들을 죽인 게 누군데? 트랩만으로 익스퍼트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병사들은 잠자고 있었던 거 같아? 병사들을 죽인 게 누군데?”
다들 한마디씩 거드니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 흐르는 살기가 짙어졌다.
“그러지들 마. 이 보물이 뭔지 몰라서 이러는 거야? 다들 돕지 않으면 처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지금껏 잠자코 있던 용병이 입을 열자 다들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 용병을 바라봤다. 어쨌든 오늘의 일을
계획한 것도, 또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모두 이 펠젠이라는 용병이었다.
“그런데 펠젠, 너 진짜 이 테페룸을 처분할 수 있긴 한 거야?”
“할 수 있으니까 일을 저질렀지. 이걸 처분해서 돈을 받은 다음 벨룸 왕국으로 넘어가 버리면 그만이야.”
펠젠의 자신만만한 말에 모두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이 싹텄다. 또한 욕망이 들끓었다. 무려 100
킬로그램의 테페룸이었다.
“이걸 다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기간트 하나 만드는 데 테페룸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아?”
“그, 글쎄?”
“고작 2 킬로그램이야.”
“겨우? 겨우 그걸로 기간트를 만든다고?”
“물론 성능이 좋은 기간트를 만들려면 조금 더 들겠지. 하지만 대충 그쯤이면 기간트 하나를 만들 수 있어.”
“그, 그럼…….”
펠젠의 말에 모든 용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테페룸 100 킬로그램은 무려 기간트 50 대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기, 기간트 50 대면 돈이 얼마야…….”
“기간트 한 대에 한 2 만 골드 하나?”
“중고 실바가 그쯤 한다고 들었어. 신형 카타락타쯤 되면 아마 4 만 골드가 넘어.”
용병들의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테페룸 100 킬로그램이 얼마나 큰돈이 되는지 그제야 조금씩 감이 왔다.
상상도 못할 거금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누가 더 갖고, 덜 갖고, 이따위 사소한 걸로 싸우지 말라고. 최소한 1 인당 5 만 골드씩은 돌아가게 될
테니까.”
“5, 5 만 골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거액이었다. 평생 흥청망청 써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돈이었다. 용병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펠젠을 바라봤다.
“그, 그럼 이제 어쩌지?”
“어쩌긴. 암시장에 내다 팔아야지.”
“암시장? 거긴 아무나 못 갈 텐데?”
펠젠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나만 믿어. 거기서 조심할 건 뒤통수 맞고 물건을 빼앗기는 것뿐이야. 다들 힘을 모아야 하는 이유, 이제
알겠지?”
용병들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에 독기가 자르르 흘렀다. 누군가 이 물건을 강탈해 간다고
생각하니 살기가 치밀었다.
“어쨌든 서두르자. 우릴 쫓아오는 프렉타의 기사들을 따돌리려면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펠젠의 말에 용병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페룸이 든 상자를 2 명이 함께 들었다.
그렇게 막 이동하려는 찰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쉭!
서걱!
툭!
용병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그리고 방금 전 목이 떨어진 동료를 멍하니 바라봤다. 테페룸을 들던 용병의
목이 잘렸다. 상자를 함께 쥔 동료 용병이 조심하라고 외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쉭!
서걱!
툭!
“으, 으아아!”
용병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도망가지 못했다.
쉬쉬쉬쉭!
칼바람 소리와 함께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용병의 목이 잘렸다. 진득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살아남은 유일한 용병인 펠젠은 의외로 침착했다. 그는 한껏 가라앉은 눈으로 사방을 주시했다. 상대가 너무 빨라
모습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이 정도 위력을 내려면 최소한 익스퍼트는 되어야 했다.
‘아니, 익스퍼트도 이 정도는 불가능해.’
익스퍼트를 몇 번이나 겪어 봤기에 펠젠은 비교적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에 있는
익스퍼트들은 강하긴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날 살렸다는 건 얻을 게 있다는 뜻이겠지. 누군지 모르지만 슬슬 나오는 게 어떻소?”
펠젠이 여유롭게 말하자, 그의 앞에 제론이 유령처럼 솟아났다. 펠젠은 깜짝 놀랐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가슴을 진정시켰다.
“신비로운 분이로군. 그래, 내게 뭘 원하오?”
제론은 펠젠의 강단에 피식 웃고는 테페룸 상자로 다가가 그 위에 걸터앉았다. 후드를 썼기에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다. 펠젠을 죽이지 않게 될 수도 있기에 일부러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암시장에 대해 궁금해서 말이야.”
“암시장이라…….”
펠젠이 말을 최대한 길게 늘였다. 거기에 자신이 살아날 길이 있었다. 그는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을지 말이다.
“수수료로 5 퍼센트만 주시오. 그럼 내가 책임지고 처분해 드리리다.”
펠젠은 돈에 욕심을 내는 게 아니었다. 수수료라는 돈으로 자신의 진짜 의도, 목숨을 구하려는 사실을 감춘
것이다.
제론은 펠젠을 가만히 쳐다봤다. 펠젠은 긴장으로 목이 타들어 갔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이런 일에 표정을
드러내는 건 애송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제론이 암시장에 대해 알려는 이유는 아공간에 보관된 동전들 때문이었다. 순수 테페룸으로 이루어진 동전들이
잔뜩 있는데, 그걸 처분할 길을 마련해 보기 위함이었다.
아공간에 보관된 동전의 수는 엄청났다. 실제로 모두 꺼내 무게를 달아 보면 수십 킬로그램이 넘을 것이다.
테페룸을 정상적으로 구매한다면 1 킬로그램에 8 천에서 9 천 골드 정도 한다. 하지만 암시장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5 천 골드 정도에 팔 수 있을 것이다.
100 킬로그램이면 무려 50 만 골드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론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주시겠소?”
펠젠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제론은 상자에서 일어나며 검을 뽑았다.
스릉.
펠젠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제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를 보면 자신이 살기는 틀린 것 같았다.
‘그래도 그냥 맥없이 죽어 줄 수는 없지.’
펠젠은 나름의 한 수를 준비했다. 치졸한 수였지만 상대가 지저분한 실전을 겪지 않은 경우 잘 통하는 수법이었다.
펠젠의 소매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가 툭 떨어져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암시장에서 처분하면 뒤를 추적당할 염려가 없나?”
펠젠은 지옥 문턱에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내색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그런 걸 걱정하면서 암시장을 쓸 생각하면 안 되지 않겠소? 추적의 위험이야 언제든 있소. 그러니 딴 나라로
도망가려는 것 아니겠소?”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겨눴다. 유적에서 기본 물품으로 지급받은 검이었다.
“죽이려면 대체 그딴 건 왜 물어본 거요?”
펠젠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제론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나직이 정령을 불렀다.
“아네모스.”
바람이 한데 뭉치며 정령이 나타났다. 정령은 제론의 눈에만 보인다. 펠젠은 그저 바람이 한 차례 부는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제론이 정령을 검에 밀어 넣었다. 최근 알아낸 검의 기능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정령을 받아들인 검이 은은히 빛났다. 그리고 빛 덩어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펠젠의 가슴으로 쭉 날아갔다.
퍽!
펠젠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나 당황했다. 자신의 가슴을 파고든 뜨거운 열기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 이게 대체 뭐요?”
제론은 묵묵히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아공간을 열어 동전 10 개를 꺼냈다. 동전 하나에 50 그램 정도의
무게이니, 총 500 그램 정도의 무게였다. 암시장에 팔면 2,500 골드 정도를 벌 수 있는 양이었다.
제론은 그것을 펠젠에게 휙 던졌다. 펠젠의 발치에 테페룸 동전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게 뭐요?”
“테페룸이다.”
펠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반적으로 테페룸은 괴로 만들어 보관한다. 그게 가장 만들기 편하고, 보관도
편하기 때문이다.
“특이한 모양인데, 이게 정말 테페룸이오?”
펠젠은 바닥에 떨어진 동전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주웠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동전에는 상당히 정교한 세공이
들어가 있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얼굴과 숫자가 보였는데, 뭔가 의미가 있어 보이면서도 제법
아름다웠다.
“테, 테페룸으로 이런 세공이 가능하다니!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든 거요!”
“얼마쯤 받을 수 있지?”
“그, 글쎄 잘 모르겠소. 이런 건 차라리 경매를 통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거 혹시 유물이오?”
펠젠도 유적이나 유물에 대해서는 제법 알고 있었다. 암시장에서 활동하려면 그 정도 지식과 정보는 필수였다.
하지만 그런 펠젠도 이 동전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잘됐군. 차라리 그게 추적이 더 어렵겠지? 이 테페룸괴보다는 말이야.”
펠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슈린 공작가에서 테페룸을 그냥 아무렇게나 방치했을 리 없소. 아마
기본적인 추적 마법은 걸려 있을 거요. 그러니 빨리 처분해 버리는 게 좋을 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넌 그거나 처분하면 돼. 수수료는 3 퍼센트다.”
“그건 너무 짜지 않소!”
“싫으면 그만둬도 좋다.”
제론의 스산한 눈빛이 후드 속에서 번득였다. 펠젠은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어쩔 수 없지. 그럼 2 퍼센트는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겠소.”
제론은 펠젠의 속셈을 대충 간파하고는 피식 웃었다. 도와줄 테니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좋아.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어라. 곧 찾아갈 테니까.”
펠젠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렇게 순순히 놓아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 동전들을 들고 그냥 도망치면
어쩌려고 그냥 놔준단 말인가.
“어디에 숨든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죽일 수도 있지. 조금 전 네 심장에 마법 인장을 새겼다. 그게 뭔지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겠지?”
펠젠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표정을 감추고 자시고 할 생각도 안 들었다. 완전히 당한 셈 아닌가. 이제
앞으로 계속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젠장! 대체 저놈은 뭐야?’
펠젠은 잠시 고민했다. 과연 심장에 정말로 마법 인장인지 뭔지가 새겨졌는지 믿어도 되는지 말이다. 그런 마법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안 가고 뭐하는 거지?”
제론의 말에 펠젠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생각해 보니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제론을 따돌리고 암시장이
있는 도시에 도착해서 꽁꽁 숨어 있어 보면 된다. 만일 자신을 정확히 찾아오면 그 말을 믿고, 아니면 이 동전만
들고튀면 된다.
제론은 펠젠이 완전히 사라진 뒤,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상자를 아공간에 넣었다. 아공간에는
여전히 많은 공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테페룸괴에 걸린 추적 마법도 완벽히 차단되었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 조금 전 펠젠의 심장에 새긴 마법 인장을 천천히 쫓아가면 된다.
시간은 아직 충분했다. 펠젠이 너무 멀리 떠나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Chapter 7 암시장

아벤드는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리고 암시장이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암시장에서는 어떤 물건이든 돈만 주면 구할 수 있었다. 노예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기간트까지 살 수 있었다.
제론은 아벤드의 빈민가 깊숙한 곳에 숨은 펠젠을 확인한 뒤 빈민가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여관에 방을
잡았다.
제론은 침대에 앉아 제국 기사 검술을 차분히 떠올렸다.
그동안 유적에서 괴물들을 상대로 실전을 겪으며 정말로 실력이 많이 올라갔다. 하지만 정작 검술 자체를 차분히
들여다보고 수련한 건 오래되었다.
실전에 급급해서 기본을 등한시한 느낌이었다.
제론은 벌떡 일어나 방 한가운데 섰다. 굳이 검을 뽑을 필요는 없었다. 가상의 검을 손에 쥐고 휘두르면 된다.
마나의 흐름만 느껴도 충분히 수련이 된다.
제론은 기사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랫배에서 뜨거운 기운이 불쑥 튀어나와 온몸을 휘돌았다. 제론은 마나의
유장한 흐름을 느끼며 가슴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기사 검술은 기초 검술에 비해 조금 더 복잡하고 길긴 하지만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한 번 펼치는데 5 분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진짜 수련은 그 이후부터였다.
상황에 따른 변화를 염두에 두고 검술을 펼쳐야 한다. 언제 어느 때 검을 휘두르더라도 기사 검술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마나가 흐르는 경로도 일정해야만 한다.
사실 그 과정이 진짜 기사 검술이라 할 수 있었다.
제론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검술을 펼쳤다.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형식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완전히 몸에 각인시켜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론은 점점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끼고는 더욱 힘차게 가상의 검을 휘둘렀다.
후웅!
갑자기 마나가 손을 통해 불쑥 솟아났다.
제론은 깜짝 놀라 검술을 멈췄다. 그러자 마나가 금세 사라져 버렸다. 잠시 조금 전의 감각을 떠올린 제론은
다시 한 번 가상의 검을 휘둘렀다.
후웅!
제론의 손과 팔이 바람을 갈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나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제론은 기사 검술을 펼칠 때
흐르는 마나의 흐름을 떠올리며 다시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였다.
그렇게 수십 수백 번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제론은 조금 전의 그 감각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었다. 뭔가
막힌 것이 확 뚫리는 듯한 시원한 감각이었다.
“후우. 잘 안 되는군.”
제론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뭔가에 막히는 상황이 지속되니 다시 몸이 무거워지고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일단 마나 호흡법을 통해 기력을 다시 회복한 제론은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직감적으로 이 부분이 뚫리면 기사 검술의 다음 단계로 올라가게 된다는 걸 느꼈다.
제론은 손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리고 다시 밤이 찾아올 무렵 손을 통해 빠져나가는 마나를 느꼈다.
후웅!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제론은 연달아 손을 휘둘렀다. 이 감각을 계속 느끼는 게 중요했다. 완전히 몸과
뇌리에 각인시켜야 한다.
후웅! 후웅! 후웅!
손에서 끊임없이 마나가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막혔던 뭔가가 뻥뻥 뚫려 나가는 것 같았다.
후웅! 후웅! 후웅!
제론은 흥에 겨워 계속 손을 휘둘렀다. 그런 식으로 기사 검술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펼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더 이상 뚫리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제론은 서서히 움직임을 멈췄다.
“후우우우.”
길게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본 제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방 안은 엉망이었다. 아무리 맨손으로 했다지만 마나가
튀어 나갔으니 주변이 멀쩡할 리 없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집기와 가구가 잘려 나갔다. 마치 날카로운 검으로 잘라 낸 듯했다.
“크윽. 이게 무슨 냄새지?”
제론은 코를 찌르는 악취에 인상을 찡그렸다. 냄새의 근원을 찾아보니 자신이었다. 입고 있던 옷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확인해 보니 시커먼 땀을 잔뜩 흘렸다. 악취는 그 땀에서 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제론은 일단 창문을 열어 환기를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점원을 찾았다.
마침 빈 방을 정리하고 있던 점원이 제론을 발견했고, 그와 동시에 코를 틀어쥐었다.
“우웁!”
제론은 점원의 행동을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목욕물을 준비해라.”
제론이 다시 방으로 돌아가자, 점원이 슬그머니 코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악취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우욱! 대체 이게 무슨 냄새지? 우우웁!”
조금 전에 먹은 아침밥이 넘어올 것 같았다. 점원은 다급히 손으로 입을 막고 후다닥 달려갔다.

말끔히 목욕을 한 제론은 점원을 시켜 새로 구입해 온 옷을 입고 여관을 나섰다. 집기에 대한 보상과 점원이
고생한 대가는 충분히 치렀다.
이제 슬슬 암시장을 통해 테페룸 동전을 팔아야 한다.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이제 고작 이틀밖에 안
남았다. 오늘 동전을 팔고 내일 중으로 돌아가야 한다.
제론은 후드를 뒤집어쓴 뒤 빈민가로 들어갔다.
펠젠을 찾는 건 간단했다. 빈민가의 골목 구조가 상당히 복잡했지만 제론은 어렵지 않게 길을 찾았다. 막히면
훌쩍 날아 담이나 집을 아예 건너뛰어 이동했다.
검술과 마나 호흡법이 새로운 경지로 들어섰기에 움직임이나 정령을 이용하는 것까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펠젠은 빈집 하나를 용케 찾아 그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펠젠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당당하게 걸었다.
“설마 날 피해서 숨어 있었던 건 아니겠지?”
제론의 말에 펠젠이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로써 얼마 전 제론이 자신에게 한 말이
입증되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살고 싶으면 무조건 제론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준비는 끝났나?”
“끄, 끝났소. 오늘 그냥 가서 경매로 팔아넘기면 되오.”
펠젠은 대답을 하면서 차츰 여유를 되찾았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되었는데 제론이 자신을 괜히 죽일 이유가
없었다. 제론에게는 아직도 팔아야 할 테페룸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가.
‘그나저나 설마 그 테페룸을 그냥 가져온 건 아니겠지?’
그 테페룸에는 슈린 공작가에서 추적 마법을 세심하게 걸어 놨다. 그걸 그냥 가져왔다면 날 잡아가 달라고
애원하는 꼴이었다.
펠젠은 불안했지만 감히 그걸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제론이 너무 무서웠다.
“아, 안내하겠소.”
펠젠이 서둘러 집을 나섰다. 제론은 그런 펠젠의 목덜미를 콱 움켜쥐었다. 펠젠이 깜짝 놀라 제론을 힐끗
돌아봤다. 그리고 경악에 빠졌다.
제론이 펠젠을 쥔 채로 훌쩍 날아오른 것이다. 빈민가 골목을 복잡하게 돌아다니기 싫어서 그냥 날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은 밤이라서 조금 높이 날면 사람들에게 발견될 리도 없었다.
그렇게 날아 이동하니 빈민가를 벗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펠젠은 바닥에 내려서며 질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저 후드를 확 벗겨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모험을 하기에는 제론에 대한 공포가 너무나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서둘러라.”
제론의 말에 펠젠이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암시장은 너무 늦으면 입장이 곤란하다. 더구나 경매에
참여하려면 좀 더 서둘러야만 했다.
펠젠은 아벤드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향했다. 암시장은 그곳에서도 가장 큰 건물에서 열린다.
“이쪽이오.”
펠젠은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는 미로처럼 길이 얽혀 있었다. 그곳을 능숙하게 이리저리 찾아 들어가니 이내
작은 철문 하나가 나왔다.
“여긴가?”
“맞소. 참고로 생각보다 무서운 곳이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요. 남 뒤통수 치고 물건 빼앗아 가는 게
비일비재한 곳이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앞장서라.”
제론은 마나 호흡법과 기사 검술을 통해 예민해진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설사 누군가 몰래 뒤로 다가온다고 해도
얼마든지 알아차릴 자신이 있었다.
끼이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제법 커다란 방이 나왔고, 그 안에 우락부락한 인상의 사내들이 십여 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문을 통해 들어오는 펠젠과 제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펠젠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시선을 넘기고 방을 가로질러 갔다. 이 방은 암시장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였다.
방을 가로지르니 커다란 문이 있었다. 근육질의 사내 2 명이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펠젠이 품에서 검은 광택이
흐르는 펜던트를 보여 주자, 문을 열어 주었다.
그르르르릉!
문은 엄청나게 두꺼웠고, 당연히 무거웠다. 두 사내는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힘을 쓰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린 문 안으로 펠젠과 제론이 들어갔다.

제론은 눈을 빛내며 사방을 둘러봤다. 암시장의 규모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컸다. 건물 지하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안에 또 건물이 있고, 좌판들이 가득하다는 건 더 놀라웠다.
‘1,000 명은 있는 것 같군.’
그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제론은 주위를 구경하면서 펠젠을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펠젠은 뭐가 그리 바쁜지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이곳이오.”
펠젠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고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제론은 건물을 한번 확인하고는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곳곳에서 강렬함이 느껴졌다. 이 건물 안에는 강한 사람들이 많았다.
‘익스퍼트들이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을 줄이야.’
제론은 예민한 감각을 이용해서 익스퍼트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만 한다.
익스퍼트들 중에는 예전 아카데미로 들어갈 때 본 자들처럼 자신의 마나가 최대한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조절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펠젠은 익숙하게 모든 사람을 지나쳐 말끔하게 차려입은 중년인에게로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기름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느끼하게 생긴 사내였다.
“호오. 이게 누구야. 펠젠 아닌가. 프렉타에서 누군가 한탕 했다고 하던데, 자네 맞지?”
펠젠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니까 어디 가서 헛소리하지 마쇼. 오늘은 경매에 좀 참여하려고 왔소.”
“수수료는 10 퍼센트다. 알고 있겠지?”
“아니까 이거나 좀 봐 주쇼.”
펠젠이 주머니 하나를 내밀자, 중년인이 그것을 받아 펼쳤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호오. 이거 굉장한 물건을 가져왔군. 아무래도 여기서 확인하기에는 좀 그러니 이쪽으로 오게.”
그들을 유심히 살피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중년인은 펠젠과 제론을 근처에 있는 밀폐된 방으로 데려갔다.
안전장치가 몇 단계로 되어 있어 이곳의 대화나 행동이 외부로 흘러나갈 일은 없었다.
촤르륵!
중년인은 탁자에 주머니를 쏟았다. 테페룸 동전이 탁자에 펼쳐졌다.
“테페룸으로 만든 동전이라니. 이거 대체 어디서 발견한 유물인가?”
“말해 줄 것 같소?”
중년인이 빙긋 웃었다.
“당연히 아니지. 자, 어디 조금 자세히 살펴볼까?”
중년인은 주머니에서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돋보기를 꺼내 그걸로 동전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살폈다.
“호오. 정말 굉장하군. 테페룸으로 이 정도 세공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역시 고대 유물이야.”
중년인은 크게 흥분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유물이었다. 이 정도라면 이번 경매를 통해 한탕
크게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런 동전이 무려 10 개나 된다.
원래 이 정도 양의 테페룸이라면 2,500 골드쯤 한다. 하지만 유물이니 조금만 포장하면 수백 배로 만들 수
있었다.
“좋아! 나한테 맡겨 봐! 내가 제대로 값을 만들어 보지.”
“직접 한단 말이오? 그럼 나야 좋지만…….”
“50 만 골드쯤 받으면 나한테 5 만 골드가 떨어지는데 이걸 누구에게 맡기겠나? 안 그런가?”
50 만 골드라는 말에 펠젠은 깜짝 놀랐다. 당연히 제론도 놀랐다. 하지만 둘 다 전혀 그것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펠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좋소. 어디 그 실력 오랜만에 한번 봅시다.”
중년인은 즉석에서 경매에 올릴 동전 케이스를 만들었다. 커다란 상자에 고급스러운 천을 깔고, 동전 앞면과
뒷면이 보이도록 나란히 늘어놓았다.
그렇게 한 다음 유리로 된 뚜껑을 덮으니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가자고.”
중년인은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가 경매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펠젠과 제론이 기대감 어린 눈으로 그 뒤를 따랐다.
그날 고대 유물인 테페룸 동전은 암시장 경매의 기록을 갈아 치웠다.

Chapter 8 방학

제론은 아공간 가득 보관된 금화를 생각하며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이번 테페룸 동전 경매는 대성공을 거뒀다.
동전 하나의 무게는 50 그램에 불과했다. 동전 10 개라고 해 봐야 500 그램이니 원래 가치를 생각하면 2,500
골드에 불과하다. 하지만 고대 유물이라는 점과 희소성이 수집가와 고대를 연구하는 마법사들의 욕심에 불을
지폈다.
결국 10 개의 동전은 150 만 골드에 낙찰이 되었다. 발굴형 기간트보다 더 높은 가격에 낙찰된 것이다. 이는
암시장이 생긴 이래 최고의 기록이었다.
경매장 측에 수수료로 15 만 골드를 주고, 펠젠에게 5 만 골드를 주었다. 제론은 130 만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제론은 돈을 받은 즉시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펠젠은 죽이지 않고 놔주었다. 대신 벨룸 왕국으로 넘어간다는 조건을 달았다. 펠젠은 제론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기도 하고, 어차피 그쪽으로 넘어갈 계획이었기에 흔쾌히 조건을 받아들였다.
제론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아카데미에 들어섰다. 곧 방학을 한다. 제론은 방학 동안 본격적으로 수련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돈도 얻었으니 남은 건 힘뿐이었다.

☆ ☆ ☆

퍼억!
카체 알트는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슈린 공작이 던진 촛대에 이마가 찢어졌지만 고통을 느낄 정신이 아니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냥 잃어버렸고, 찾을 수 없다고 보고하면 끝인가? 대책을 내놔야 할 것 아닌가!
그게 어떤 건지나 알고 있느냔 말이야!”
슈린 공작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카체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자신의 기사단이 테페룸 이송 임무를 맡았고, 그걸 고작 용병 나부랭이들에게 빼앗겼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로 치욕적이었다.
“추적 마법도 안 걸었나?”
“걸었습니다. 테페룸괴 하나하나에 강력한 추적 마법을 걸었습니다.”
슈린 공작이 이를 갈았다.
“그럼 추적해서 찾아와! 그놈들이 갈 데라고는 뻔하지 않은가! 암시장을 뒤져!”
“추적이 안 됩니다. 그리고 암시장은 이미 감시 중입니다. 하지만 암시장에도 테페룸괴가 나돌지 않습니다.”
“암시장에 테페룸이 없다고?”
“최근 암시장에서 거래된 테페룸은 유물로 알려진 동전들이 전부입니다.”
카체도 조사를 할 만큼 했다. 하지만 테페룸괴는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감쪽같이 사라진 채로
나타나지 않았다.
“마법사들을 중심으로 조사해. 강력한 추적 마법을 없앨 수 있는 건 마법사들뿐이니까. 안 그런가?”
카체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이번에 건 추적 마법은 설사 괴를 녹여도 사라지지 않는다. 특별한 방식으로 건 마법이었기 때문에 마법 자체를
해체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후우. 뭐 하나? 가지 않고!”
카체가 힘없이 예를 취하고 물러갔다. 슈린 공작은 한참 동안 씩씩대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후우. 정말 짜증 나는군. 그 테페룸을 내가 어떻게 구한 건데!”
테페룸은 전략물자로 취급되기에 아무리 공작이라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 쓸 테페룸은 신형
기간트를 만들기 위한 재료였다.
무려 100 킬로그램이었다. 그걸 구하는 데 들어간 돈만 해도 엄청났다. 한데 그 모든 게 싹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다시 구하기 위해 그 막대한 돈을 또 쓴다면 아무리 슈린 공작가라도 휘정거릴 것이다. 데다가 그걸 다시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슈린 공작이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집사였다.
“깁스 남작이 찾아왔습니다.”
깁스 남작이라는 말에 슈린 공작이 반색했다.
“어서 들라 하게.”
집사가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깁스 남작이 미소를 머금은 채 나타났다.
“어서 오게. 안 그래도 자네를 좀 보고 싶었네.”
“수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요즘 왜 이렇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지 모르겠군. 자네가 라쿠스의 설계도를 가져온 일 빼고는 몽땅
어그러지고 있네.”
슈린 공작은 난감한 표정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슈린 공작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깁스 남작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
“큰일이로군요. 테페룸은 앞으로 진행할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걱정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나.”
깁스 남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그렇게 귀중한 물건을 나르는데 보안이나 호위가 너무 적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작님의 의도는
아니었을 듯한데…….”
깁스 남작의 말에 슈린 공작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카체 알트, 그놈이 방심한 대가라네. 피닉스 기사단에 맡겼는데 이렇게 되고 말았군.”
“피닉스 기사단이 나섰는데도 그런 일이 생겼단 말입니까?”
깁스 남작은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뭔가 음모가 있어.’
슈린 공작은 아직 모르지만 분명히 누군가가 개입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누군가가 이미 테페룸을 가로챘을지도
모른다.
“일단 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조금 더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테페룸을 되찾는 건 힘들 테니, 다른 방도를
마련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슈린 공작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이렇게 어그러지고 나니 기운이 쭉 빠졌다. 깁스 남작조차 테페룸을
되찾기 어렵다고 하니 더 그랬다.
“어쩌면 좋겠나? 그 정도 양의 테페룸을 다시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네. 더구나 왕국에서 허락이 떨어질 리도
없고 말이네. 100 킬로그램도 쉽지 않았는데, 거기에 또 100 킬로그램을 더 구한다고 하면 아마 다른 모든
귀족이 들고일어날지도 모르네.”
“그러니 은밀히 구하셔야지요.”
“은밀히?”
“제가 암시장 쪽에 선을 대 보겠습니다.”
슈린 공작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그 외엔 방법이 없었다. 100 킬로그램이나 되는
테페룸을 고작 용병들에게 강탈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공작가의 명예가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끄응.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하게.”
슈린 공작은 속이 쓰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테페룸을 구해야 하니까.
암시장에서 구하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갈 것이다. 당장 그 돈을 준비하려면 얼마나 골치 아플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차피 대업이 끝나면 몇 배로 돌아올 돈 아닙니까. 너무 심려 마십시오.”
깁스 남작의 말에 슈린 공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다만, 당장 눈앞의 힘겨움이 더 커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분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리라.

☆ ☆ ☆

켄트 아카데미의 방학은 여름에 2 달, 겨울에 3 달이다. 1 년의 거의 절반은 노는 것이다.


방학 동안 대부분은 모자랐던 공부를 한다. 검술이나 마법을 더 가다듬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론에 약한 자들은
가정교사를 초빙하기도 한다.
방학이란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쉴 수 있는 시간임과 동시에 더 높은 곳으로 뛰어오를 발판을 만드는 시기이기도
했다.
아카데미의 성적은 몇몇에게는 아주 중요했다. 조금 어중간한 가문의 자제들은 성적에 거의 목숨을 걸었다.
그것이 자신들이 내보일 수 있는 능력의 잣대가 되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의 성적은 나중에 무슨 일을 하건 그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제론은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유적으로 가려고 했다. 왠지 이번 방학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무려 2 달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수련을 한 적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수련에 푹 빠져 볼
작정이었다.
3 층을 클리어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을 정도로 수련에 매진해 4 층도 클리어할 작정이었다.
각 층에서 얻게 될 힘과 선물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그 모든 것은 향후 슈린 공작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방학식은 아주 간단히 끝났다. 제론은 서둘러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떴다. 방에 틀어박힌 다음 새벽쯤
유적으로 텔레포트를 할 계획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돌아올 때는 그놈들이 안 보이던데, 슈린 공작이 또 무슨 흉계를 꾸미는 거지?’
이번 테페룸 강탈 사건에 모든 미스트 드래곤의 요원들이 투입되었다. 제론은 그 사실을 모르니 의심스러운 게
당연했다.
하지만 제론은 금세 그 생각을 털어 버렸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방학이 되면 유적으로 가서 수련에 매진할
테니까. 그럼 저 지긋지긋한 파인트의 얼굴도 당분간 볼일이 없을 것이다.
제론은 힐끗 시선을 돌려 파인트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파인트의 안색이 상당히 안 좋았다. 평소와
분위기가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제론은 바로 신경을 껐다. 파인트가 저러고 있으면 귀찮을 일이 대폭 줄어드니 오히려 좋은 일 아니겠는가.
제론은 서둘러 건물을 나섰다. 그러자 세나가 다급히 건물에서 뛰어나와 제론을 불렀다.
“선배님!”
제론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세나가 반색하며 더욱 빠르게 달렸다. 제론 앞에 도착한 세나는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헐떡였다.
“하악. 하악. 서, 선배님.”
“안 도망갈 테니 말해라.”
제론의 말에 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왠지
모를 여유가 살짝 흐르는 듯했다. 세나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저…… 방학 때 뭐 하세요?”
세나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물었다. 조금 전의 반응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분명히 승산이 있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이 답을 하지 않자, 세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트, 특별한 일정이 없으시면 저희 영지에 가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벨루스 영지에?”
“네!”
“내가 거길 왜 가야 하지?”
세나는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그저 제론과 함께 영지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게 할 계획만
세웠지, 그 당위성에 대해서는 하나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 그러니까…….”
세나는 잠시 말을 더듬으며 맹렬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퍼뜩 뭔가가 하나 떠올라 다급히 외쳤다.
“기, 기간트가 하나 남아서요!”
제론이 어이없는 눈으로 세나를 쳐다봤다. 세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기간트가 남는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가 어디 있단 말인가.
벨루스 영지에 기간트를 보유하지 못한 기사가 얼마나 많은데 기간트가 남는다는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그, 그러니까…… 서, 선배님이 꼭 타 주셨으면 하는 기간트가 있어서…….”
제론에게 기간트를 하나 선물하고자 마음먹은 건 사실이었다. 벨루스 백작이 세나에게 선물한 기간트가 아직 오너
각인도 이뤄지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세나는 그 기간트를 제론에게 주고 싶었다. 어차피 자신이 갖고 있어 봐야 타지도 않을 텐데 굳이 갖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제론은 세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세나는 그 웃음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해서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나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직전, 제론이 그녀의 머리에 슬쩍 손을 얹었다. 그리고 살짝 머리를
헝클었다.
“됐다. 마음만 받으마.”
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제야 제론의 미소가 달리 보였다. 제론은 자신을 향해 진짜 웃어 주고 있었다.
“방학에는 나도 반드시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 벨루스 영지에 가는 건 곤란해. 그러니 개학 전에 한번 들르도록
하지.”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세나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이
타오르는 촛불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내가 잘못들은 거 아니지?”
세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달아오른 얼굴은 쉽게 식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후훗. 개학 때 들르신다고 했지? 잘됐다. 정말 잘됐어.”
세나는 한동안 안절부절못하고 그 자리를 서성였다. 달아오른 뺨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론은 기숙사 입구에 도착하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곳에서 바이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선배님, 오셨군요.”
“날 기다렸나?”
바이스가 빙긋 웃었다.
“예. 아무래도 기숙사에 들어가신 다음에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제론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요즘 아카데미 내에서 제론은 제법 신비로운 선배가 되어 있었다.
언제 빠져나갔는지 모르게 사라져 버리니 말이다.
누군가가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해 빠져나가는 거라고 추측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마법 학부의 학생들이 대거
동원되어 제론의 기숙사 근방에서 마나 유동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추측은 그 뒤로 사라졌다. 아무런 마나 유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제론은 마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빠져나갔다고 결론이 내려졌다.
“선배님, 혹시 조기 졸업에 대한 얘기 들으신 거 없으십니까?”
바이스의 말에 제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조기 졸업이라니. 갑자기 그런 얘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조기 졸업? 내 얘긴가?”
“예. 아마 이번 방학이 끝나면 논의가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제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번 방학이 끝인가?’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직 유적은 껍데기도 다 벗기지 못했다. 한데 이 상태로 군대에 가게 되면 최소 3 년 동안은
유적을 방치해야만 한다.
유적이 어디 도망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이 쓰였다. 조금 더 시간이 있으면 유적에서 돌아오는 초장거리
텔레포트의 사용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슈린 공작가에서 힘을 쓰는 것 같습니다.”
“슈린 공작가에서?”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슈린 공작가는 군부에 대한 영향력이 크지 않다.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슈린 공작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특정 지역으로 몰아넣으려는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바이스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제론은 멀어지는 바이스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씨익 웃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철저히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아카데미에서 2 명이나 건졌으면 참으로 남는 장사 아닌가.
제론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방학이 벌써 보름이나 지나갔다. 제론은 그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수련을 했다. 그 결과 3 층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아직도 방학은 한 달 반이나 남았다. 그동안 4 층도 클리어할 작정이었다.
제론은 심장이 위치한 가슴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진동만 느끼겠지만 제론은
그 외에 다른 감각을 하나 더 느낄 수 있었다.
제론의 심장에서는 지금 마나가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3 층을 클리어하고 받은 선물이었다.
“마법이라니.”
제론은 아직도 놀람이 다 가시지 않았다. 이 마나링은 마법을 쓰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쓰기 위해 마나 스톤을 가공한 스틱을 이용하는 걸 생각하면 정말로 굉장한 일이었다.
기간트의 발전으로 인해 마법 역시 그쪽을 중시했다. 일반적인 마법보다는 마법진에 의한 마법이 훨씬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마법진을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법사가 필요했다. 기간트 산업에서 마법사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전투에서 보면 마법사는 참으로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오래전에는 마법사들의 대규모 살상 마법이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마법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기간트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는 없다.
자연스럽게 전투에는 마법사가 아닌, 마법사가 만든 마법 물품들이 더 많이 쓰이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전투에서 뒷전으로 밀려난 이후에 훨씬 더 마법사들의 위상이 올라갔다. 어떤 마법진을
새로 개발했느냐에 따라 전투의 향방이 갈리는 경우도 있었다.
한데 제론이 심장에 만든 마나링은 현재의 마법 개념에 아예 없었다. 제론은 심장의 마나를 이용해 스틱 없이
마법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더구나 위력도 훨씬 뛰어났다. 아마 마법사들이 알면 놀라 자빠질 것이다. 스틱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다니.
게다가 마나를 몸에 저장하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마나를 몸에 저장하는 것은 기사들뿐이었다. 마법사는 마나에 대한 감응 능력만 극대화시키고, 그 감응 능력으로
스틱의 마나를 이용해 마법을 구현한다.
하지만 제론은 마나링을 만듦으로써 그 두 가지를 모두 얻었다.
“대체 이곳은 뭘 원하는 곳이지?”
제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검을 수련하는 곳이라고 여겼다. 한데 심장에 마나링을 만들고 그에
대해 알고 나니 혼란스러웠다.
난데없이 마법이라니. 하면 마검사라도 만들려 한단 말인가?
제론은 잠시 유적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고는 4 층으로 내려갔다. 지금은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야 할 시점이었다.
4 층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거대한 방이었다. 아카데미의 건물만 한 크기의 공간이었다. 게다가 사방 벽에 기묘한 문양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문양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제론은 그 방 한가운데 서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마어마한 밀도의 마나가 느껴졌다. 사방에서 빛나는 문양은
마법진이 분명했다. 초고대 문명의 마법진이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의 역할은 이곳에 마나를 모으는 것이었다. 제론은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아챘다. 또한 4 층에서
원하는 것이 무언지도 알 수 있었다.
제론은 가만히 서서 심장의 마나링을 회전시켰다. 심장에 단단히 뭉쳐 있던 마나가 압축되어 만들어진 것이 바로
마나링이었다. 그리고 그 마나링은 완벽하게 제론의 의지하에 놓여 있었다.
마나링이 회전하며 사방의 마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것을 흡수해 자신의 크기를 불려 갔다.
마나링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 두께가 머리카락 정도였다. 한데 이렇게 마나를 흡수하니 아주 조금씩 두께가
커졌다.
제론의 집중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마나가 제론의 몸으로 끊임없이
유입되었다.
그렇게 흡수된 마나의 대부분은 심장의 마나링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일부의 마나는 제론의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가 아주 천천히 심장과 아랫배로 흘러갔다.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제론의 몸을 씻어 내고 불순물을 태워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끊임없이 흘러갔다.

제론은 잘 정비된 도로를 걸으며 내심 감탄했다. 벨루스 백작이 얼마나 영지 관리를 잘하는지 도로와 그 주변
건물들, 그리고 돌아다니는 영지민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서둘러야겠군.”
제론은 이곳 벨루스 백작령에 오기 위해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했다. 슈린 공작이 자신의 이동 경로를
알아차리면 당장이라도 손을 쓸지도 모른다.
사실 슈린 공작은 당분간 제론에 대해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당연히 제론이 가로챈 테페룸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 사실을 모르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제론이 텔레포트 게이트에서 나온 지 채 10 분도 지나지 않아 사두마차 한 대가 맹렬히 달려왔다. 그 마차는 제론
앞에서 급격히 멈췄다.
제론은 걸음을 멈추고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언제든 단전의 마나를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마차에서 한 사람이 내리는 순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선배님!”
세나였다.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제론에게 마치 안기기라도 할 것처럼 달려들었다.
“왜 이제 오신 거예요! 벌써 방학이 다 끝났단 말이에요!”
세나는 살짝 원망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약속을 지켜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세나의 환한 웃음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서 가요. 제가 영지 구경시켜 드릴게요.”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제론의 팔을 슬그머니 안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제론이 혹시라도 팔을 뿌리칠까 봐 마음을
졸였다.
제론은 묵묵히 세나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세나는 너무나 기뻐 또 한 번 환하게 웃었다.

벨루스 백작령은 참으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 땅은 비옥했고, 상업도 발달해 돈이 넘치도록 흘렀다. 당연히 그런
좋은 영지를 기반으로 한 벨루스 가문 역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런 막대한 부를 통해 군사력 또한 단단하게 다졌기에 벨루스 백작가가 가지는 영향력은 상당했다.
하지만 그런 벨루스 백작가도 제론의 가문인 에어스트 백작가에는 미치지 못했다. 에어스트 백작가는 슈린
공작가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대단한 가문이었다.
벨루스 백작령을 돌아보고 있으니 우후죽순처럼 추억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선배님?”
제론의 표정을 보고 오히려 마음을 졸인 것은 세나였다. 세나는 자신이 제론의 심기를 어지럽힌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다.
‘내가 왜 영지를 구경시켜 드리겠다고 한 거지? 아우, 이 바보!’
제론은 영지가 몰락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한데 마치 자랑하듯 자신의 영지를 구경시켜 줬으니 얼마나
상심했겠는가. 그 생각을 하니 세나는 제론에게 미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저…… 저, 배가 고픈데 우리 이제 슬슬 성으로 돌아가서 식사를 할까요?”
세나의 조심스러운 말에 제론은 추억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녀를 쳐다보고는 잠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세나의 태도가 어딘가 좀 이상했다.
‘아, 나 때문이로군.’
세나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도 금방 이해했다. 제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세나를 봤다. 확실히 좋은 여자였다.
‘하지만 내가 지금 여자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는 아니지.’
제론은 문득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는 세나의 표정을 보고 그렇게 약속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약속을 했으니 지키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지. 나도 슬슬 배가 고픈 참이다.”
제론의 말에 세나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미안함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곧장 백작성으로 이동했다.

시간이 조금 일렀기에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여유가 좀 있었다. 세나는 그조차 미안하게 여겼지만 제론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거기까지 예상을 했다.
제론은 저녁 만찬이 시작되기 전까지 조용히 앉아 심장에서 빙글빙글 도는 마나링을 가속시키며 수련에 매진했다.
현재 제론의 심장에는 3 개의 마나링이 겹겹이 회전하고 있었다. 방학 동안의 수련을 통해 마나링을 3 개나 만든
것이다.
마나링이 늘어나며 움직일 수 있는 마나의 양도 급격히 늘어났고, 또한 마나를 훨씬 더 정교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마나링이 늘어난다는 건 마나를 다루는 손이 늘어나는 것과 같다. 3 개의 마나링이 있으면 3 개의 손을 갖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당연히 더 복잡한 마나의 조작이 가능해진다.
제론은 지금 오로지 마나링을 키우고, 새로운 마나링을 만드는 수련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마나링을 이용해
마법을 익혀야 진짜 마법사가 되는 것인데, 아직 익힌 마법이 단 한 개도 없었다.
마법을 익히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또한 시간도 모자랐다.
태블릿에는 각종 마법에 대한 지식이 잔뜩 있었는데, 정작 중요한 마법 발현에 대한 설명은 단 한 줄도 없었다.
태블릿에 있는 마법은 몽땅 마법진에 관한 것뿐이었다.
마법을 익히려면 4 층을 클리어하는 수밖에 없는 듯했다. 제론은 어렴풋이 마나링 5 개를 만드는 것이 4 층의
클리어 조건이 아닐까 짐작했다.
그래서 이렇게 틈날 때마다 마나링 수련을 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언제
어떤 순간에 마법을 이용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지 모른다. 뭐든 익혀 힘을 키워 둬야만 했다.
3 개의 마나링은 두께가 일정했다. 이제 다음 단계에 이르기 직전이라는 뜻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네 번째
마나링이 생겨날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앉아서 마나 수련을 하던 제론은 자신의 방에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마나 수련을 하면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다. 제론은 다가오는 사람에게서 아주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세나로군.’
보통은 시녀를 시켜 손님을 모셔오도록 하는데, 이렇게 세나가 직접 오는 걸 보면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제론의 표정이 조금 씁쓸해졌다.
똑똑!
“저 세나예요. 들어가도 되죠? 선배님?”
제론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놀라 눈이 동그래진 세나의 얼굴이 보였다. 제론은 순간적으로 굳게 먹었던
마음이 살짝 풀려 버리는 걸 느끼고 조금 당황했다.
“저, 저녁 만찬이 준비되어서…….”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준비할 것도 없었기에 제론은 바로 세나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세나와 함께 걸어가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복수가 끝나기 전까지는 칼날 같은 마음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 긴장이 풀리지 않고, 실수를 하지 않는다.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게 끝장날 수도 있어.’
제론은 혼자고, 상대는 왕국 제일의 가문이었다. 최소한의 힘을 만들기 전에는 결코 긴장을 놓아선 안 된다.
설령 그것이 세나 앞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저녁 만찬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사실 제론은 세나의 아버지인 벨루스 백작에게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
그는 아예 제론을 만나 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저녁 만찬에서 제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표정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 차가운 표정이 곧바로 만찬의 분위기로 이어졌다. 때문에 오늘 저녁 만찬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세나였다. 그녀는 만찬이 시작되기 직전 갑자기 변한 아버지의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또한
제론에게 미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만찬장의 적막을 가장 먼저 깬 것은 가주인 벨루스 백작이었다.
“오늘 슈린 공작가에서 사람이 왔다.”
벨루스 백작의 말에 제론의 눈이 번득였다.
그리고 세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갑자기 이 자리에서 슈린 공작가의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슈린
공작가와 제론이 어떤 관계인지 다 알면서 말이다.
“슈린 공작가의 후계자인 파인트 폰 슈린으로부터 청혼이 들어왔다.”
“아버지!”
“조용히 해라. 넌 그저 내 말을 따르면 돼. 그게 제일 행복해지는 길이다.”
“그래서…… 그래서 저보고 그 망나니 자식에게 시집을 가라고요?”
“그래.”
벨루스 백작은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는 제론을 쳐다봤다.
“자네의 처지는 안타깝게 여기지만, 내 딸을 줄 수는 없네. 그러니 혹시라도 마음이 있다면 이만 접게. 조만간
약혼식을 할 텐데, 그전에 괜한 추문이 돌면 곤란하니까. 알아듣겠나?”
제론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벨루스 백작을 쳐다봤다. 제론은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않고 세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세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제론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세나의 눈물을 보니 제론은 순식간에 끓어오르던 화가 식어 버렸다. 생각해 보면 이 자리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세나였다.
“진짜 행복이 뭔지는 잘 모르시는 분이로군요.”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나를 보며 말했다.
“나 때문이라면 울 것 없다. 난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제론의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에 세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제론의 새로운 면모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사정없이
뛰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채 진정시키기도 전에 제론이 벨루스 백작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나가 버렸다.
벨루스 백작은 그런 제론을 보며 화를 냈다.
“저, 저런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
세나는 눈에 고였던 눈물을 싹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정말 너무하세요.”
“넌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르면 돼!”
벨루스 백작의 완고한 태도에 세나는 결국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만찬장에서 나가 버렸다.
“어딜 가느냐! 이리 오지 못해! 뭣들 하고 있는 거냐! 너희들의 동생이 저러고 있는데 다들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이냐! 가서 잡아오지 못해!”
벨루스 백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역정을 냈다. 그러자 만찬장에 함께 있던 세나의 오빠들이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에잉! 쓸모없는 것들.”
벨루스 백작은 털썩 자리에 앉아 나머지 식사를 마무리했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벨루스
백작가의 집사는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럴 때 돌아가신 백작 부인이 계셨더라면…….’
백작 부인이 죽은 뒤로 벨루스 백작의 완고함은 더더욱 굳건해졌다. 이젠 벨루스 백작가에서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영지 경영과는 전혀 관계없는 집안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집안일이 언제 영지일로 발전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집사는 불안한 심정을 감추며 벨루스 백작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피처럼 붉은 와인이 백작의 잔에서 찰랑였다.

“선배님, 정말 죄송해요. 이러려고 초대한 게 아닌데…….”


세나는 제론의 방까지 찾아가서 몇 번이고 사과를 했다. 제론은 그녀의 사과에 빙긋 웃어 주었다.
“됐어. 솔직히 별로 기분이 나쁘지도 않아. 다만…….”
제론은 세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세나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파인트가 너한테 눈독을 들이는 것 같은데 괜찮겠어?”
세나가 코웃음을 쳤다.
“흥. 그 망나니 자식은 걱정 마세요. 제가 그딴 놈한테 넘어갈 것 같아요? 아버지가 청혼을 받아들이시면
가출이라도 할 테니까 염려 마세요.”
제론은 세나의 당찬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출이라니.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꺼내다니, 왠지 세나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에이,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전 이렇게 선배님과 함께 여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기뻐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좋아. 그럼 난 슬슬 가 볼게.”
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가신다고요? 지금요? 지금은 밤이에요!”
제론이 씨익 웃었다.
“괜찮아. 오히려 지금 당장 가는 편이 더 안전할걸?”
세나는 제론의 말에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더없이 슬픈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죄송해요. 이것도 저 때문이네요.”
제론은 세나의 머리를 헝클어 주었다.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니 솔직히 이젠 더 편했다. 또 세나를 대하는
것도 더 여유로워졌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 난 아카데미로 바로 갈 테니까 넌 며칠 쉬다가 천천히 돌아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세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창문을 뛰어넘었다.
“꺄악! 선배님!”
세나가 기겁을 하며 창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어 아래를 쳐다봤다.
제론이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세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세상에……!”
제론이 머물던 방은 성에서도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한다. 창에서 바닥까지의 거리가 30 미터는 된다.
그동안 제론이 기간트에 탑승하는 모습을 보며 상당한 실력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세나는 한동안 제론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지은 뒤, 방으로 돌아갔다.

Chapter 9 입대

방학이 끝나자마자 아카데미 학장이 제론을 호출했다.


제론은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하고서 학장실에 찾아갔다. 학장실은 행정부 최상층에 있었다.
노크를 하고 학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탄탄한 몸을 가진 중년인이 날카로운 안광을 번득이며 제론을 노려봤다.
그가 바로 이곳 켄트 아카데미의 학장인 리히츠 폰 켄트였다.
“왔나? 거기 앉게.”
제론은 학장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학장은 그런 제론을 유심히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 자네에 대한 얘기로 아카데미 전체가 시끄럽더군.”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의도로 자신을 불러 저런 얘기를 하는지 이미 알기에 다음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얼마 전 아카데미의 교관과 교수를 모두 모아 회의를 했네.”
학장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말하더군. 자네에게 더 가르칠 게 없다고. 아카데미에 있어 봐야 의미가 없다고 말일세.”
학장은 제론이 여전히 평정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확실히 특이한 학생이긴 했다.
“아카데미에서 졸업하면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받게.”
학장이 내미는 서류를 받은 제론은 그것을 대충 확인했다. 졸업장이었다.
“보면 알겠지만 졸업장일세. 조만간 군부에서 사람이 나와 자네를 데려갈 걸세. 그전까지 떠날 준비를 끝내
놓게.”
학장은 그 말을 끝으로 턱을 까딱였다. 밖으로 나가라는 뜻이었다.
제론은 학장의 말에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 어떤 의문도 없는 모습에 학장이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쯧. 정말 짜증이 나는군. 아카데미의 학장인 이 리히츠 폰 켄트가 이따위 일이나 처리해야 하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대는 자신의 약점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그 약점을 없애는 대가로 이 정도 일은 아주
싸게 먹힌 거였다.
학장은 이내 모든 걸 잊고 다시 업무에 열중했다. 학장실에 고요가 찾아왔다.

제론은 담담히 기숙사를 향해 걸어갔다. 바이스로부터 미리 언질을 받았기에 전혀 당황스럽지 않았다. 다만 조기


졸업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예전에도 드물게 조기 졸업이 있어 왔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지독할 정도로 특별한 사람의 일이었다. 그들에
비하면 제론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극히 평범했다.
‘고작 기간트에 대한 센스가 있다는 이유로 조기 졸업을 시키는데도 나중에 문제가 안 생기나?’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졸업장을 내민 것으로 보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마 그건 학장 고유의 권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군대가 문제로군.’
제론이 알기로 군부는 슈린 공작의 영향력에서 많이 벗어난 곳이었다. 그렇기에 아카데미보다는 못해도 그냥 밖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기회는 기회인데…….’
하지만 제론은 아직도 유적에서 더 얻을 게 많았다. 군대에 있으면서 그걸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아, 한 가지 더 확인할 것이 있군.”
제론은 일단 행정부로 향했다. 정확한 일정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미리 준비를 할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시간이 많이 남으면 유적에도 한 번 다녀올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착오도 용납이 안 된다. 자칫 일정을 못 맞추면 탈영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일이 커진다.
제론은 일단 행정부에서 향후 일정을 확인했다. 이미 군부로 제론의 졸업에 대한 서류가 넘어간 상태였고,
입대일도 결정이 된 상황이었다.
‘빠르기도 하군.’
그야말로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제론에게 통보하기 전에 이미 처리가 이루어졌다는 뜻이었다. 남은 시간은
보름이었다. 이 정도면 유적에 다녀오는 편이 나았다.
‘4 층을 클리어할 수도 있겠어.’
아마 5 층은 4 층에서 만든 것을 토대로 마법을 익히는 수련이 될 것이다.
‘마법이라…….’
마나링을 이용한 마법을 제대로 익히면 정말로 큰 힘이 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 시대에는 그런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행정부를 나와 조금 걷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세나가 달려왔다.
“선배님!”
제론은 걸음을 멈추고 세나를 쳐다봤다. 세나는 제론 앞에 도착한 뒤 한참 동안이나 호흡을 조절하느라 말을
못했다. 제론은 끈기 있게 그것을 기다려 주었다.
“선배님, 졸업하신다는 게 정말인가요?”
제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대수롭지 않은 표정과 태도였다.
“그, 그럼 바로 군대에 가시겠네요?”
“그렇게 됐다.”
세나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이제야 간신히 제론과 조금 가까워졌는데, 이렇게 제론이 가버리면 2 년이 넘게 애쓴
보람이 없지 않은가.
군대에서 무려 3 년을 있어야 한다. 군부의 특성상, 일단 군대에 가면 외부와의 접촉이 극도로 제한된다.
세나는 2 년이 넘게 자신이 노력해서 간신히 만든 유리성 같은 관계가 3 년이라는 긴 시간과 군대의 특성 때문에
산산이 부서질까 봐 두려웠다.
“어, 언제 가세요?”
“보름 후에 간다. 아, 부탁 하나 들어주겠어?”
제론의 말에 세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자신이 제론의 부탁을 들을 줄은 몰랐다. 세나는 그 사소한
하나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 말씀해 보세요. 얼마든지 도와 드릴게요.”
설사 기간트를 달라고 해도 줄 기세였다. 세나는 제론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군부에 내 입대에 관한 일정을 좀 알아봐 줘.”
“예?”
“아카데미 행정부에 확인하긴 했는데, 왠지 믿을 수가 없어서.”
세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만 믿으세요.”
“그럼 부탁하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대화가 길어져야 서로 좋을 게 없었다. 조만간 군에 가야 한다. 관계가 더
깊어지면 세나는 지금보다 훨씬 힘들어질 것이다.
‘나야 별 상관없지만.’
제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기숙사로 향했다. 그러면서 보름의 시간을 어떻게 이용할지 차분히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세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하염없이 제론을 바라봤다. 가슴이 저려 왔다. 그렇게 한동안 서 있던
세나는 갑자기 주먹을 꼭 쥐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할 거야!’
세나는 제론과 함께할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조기 졸업이라는
지극히 어려운 일일지라도, 또 여자들에게는 피해 갈 수 있는 길이 널려 있는 군 복무의 길일지라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행정부에서 알아본 것과 군부에서 알아본 일정이 닷새나 달랐다. 실제로는 열흘밖에 시간이 없었다.
만일 아카데미의 일정만 믿고 유적에 다녀왔다면 문제가 생각보다 커졌을 것이다.
제론은 슈린 공작가의 치졸함에 짜증이 났다. 대체 왜 자신을 이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란 말인가.
짜증이 커질수록 복수심도 커져 갔다. 가문을 무너뜨리고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 자신까지 이렇게 핍박하니
복수심이 깊어지는 게 당연했다.
제론은 짜증을 꾹 눌러 참고 유적으로 갈 준비를 했다. 열흘의 시간 동안 무조건 4 층을 클리어해야만 한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팔찌에 아네모스를 넣어 유적으로 텔레포트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갔다.

마차 한 대가 켄트 아카데미의 정문을 통과했다. 푸른색 드래곤을 배경으로 붉은 방패 위에 새까만 검 2 자루가


교차된 문양이 그려진 마차였는데, 그 문양을 쓰는 곳은 군부뿐이었다.
마차는 아카데미의 행정부 앞에 멈춰 섰고, 이내 무뚝뚝한 인상의 사내 한 명이 마차에서 내렸다. 새로운
입대자를 인수하기 위해 온 군부의 장교였다.
장교가 내리자마자 행정부 건물 안에서 제론이 나타났다. 장교는 제론의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방금 날 선 기세가 느껴졌는데?’
마치 거짓말처럼 기세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기세는 백전노장이나 소드 마스터의 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익스퍼트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기세였다.
하지만 그런 기세를 풍길 수 있는 사람이 이런 아카데미에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장교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제론을 바라봤다.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외모는 제법 출중했지만 전장에서 필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실력이었다.
‘특이하군.’
보통 입대를 눈앞에 둔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세상과 단절된 전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기분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더해져 약간이라도 주눅이 들어야 정상이었다.
‘묘하게 당당해.’
제론의 눈빛에는 그런 두려움이 일절 없었다. 온몸에서 은은히 풍기는 당당함을 보고 있으니 그가 지금 입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꼭 베테랑 장교 같았다.
“제론 폰 에어스트?”
“예.”
“마차에 타도록.”
장교는 일체의 설명도 없이 명령했다. 제론은 즉시 마차에 탔다. 그 모습을 본 장교의 눈이 또 이채를 발했다.
“이거 물건인데?”
장교가 씨익 웃으며 행정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둘러 서류를 처리한 뒤 마차에 올랐다.
군부의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수많은 시선이 마차로 향했다. 제론을 아는, 또 제론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마차는 들어올 때보다 훨씬
빠르게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아쉬운 눈길로 멀어져 가는 마차를 끝까지 바라봤다.

제론은 마차에 탄 채로 창밖을 내다봤다. 마차는 놀라울 정도로 편안했다. 바퀴나 축에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예전 같으면 아무 관심 없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제론은 심장을 힘차게 휘도는 5 개의 링을 차분히 느끼며
조금씩 의념을 보냈다.
‘당분간 유적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군.’
유적에서 얻는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아직 많이 모자랐다. 더 많은 힘이 필요했다.
‘3 년은 너무 긴데…….’
그래도 그동안 할 일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유적 4 층을 클리어하고 얻은 보상은 예상대로 마법이었다. 이제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마법을 공부하고 익힐 수 있게 되었으며, 아울러 마법진에 대한 공부도 더욱
깊이 있게 할 수 있었다.
3 년 동안 유적에 못 가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그동안 마법을 꾸준히 익히고 검술을 수련하면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아도 될 테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론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힐끗 시선을 돌려 앞자리에 앉은 장교를 쳐다봤다.
장교는 제론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으니 대화나 하지. 기간트에 대한 센스가 그렇게 뛰어나다고?”
장교의 물음에 제론은 의례적인 대답을 했다.
“그저 남들 정도에 불과합니다.”
“아니지. 실바로 베르를 물리치는 걸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상대 라이더가 멍청했을 뿐입니다.”
의외의 대답에 장교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이내 마음에 든다는 듯 씨익 웃었다.
“슈린 공작가의 후계자를 멍청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로군.”
제론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장교는 그것도 마음에 들어 또 한 번 씨익 웃었다.
“상대가 멍청했든 어쨌든 실바로 베르를 이긴 건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이지. 그 실력으로 카타락타를 몰면 어떤
위력을 낼 수 있을지 궁금하군. 기대할 테니 잘해 봐.”
카타락타는 레늄 왕국 군부에서 쓰는 범용 기간트였다. 군부에 소속된 기사들은 대부분 카타락타를 쓴다.
크라테르보다 훨씬 못하지만 그래도 만드는 단가에 비하면 성능이 뛰어난 편이기에 많은 왕국의 주요 기체였다.
물론 실바에 비하면 훨씬 좋은 기체였다.
제론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 지금 제론의 뇌리는 유적에 대한 일로 꽉 차
있었다.
“쯧. 재미없군. 대화라는 게 오가는 맛이 있어야지. 할 말이 그렇게 없나?”
장교의 말에 제론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전쟁 상황은 어떻습니까?”
장교가 눈을 빛냈다.
“왜? 두렵나?”
장교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제론이 전쟁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기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론의 눈에 어린
분명한 기대감을 확인했다.
“큰 싸움이 거의 없네. 아마 이대로 소강상태가 이어지다가 종전으로 이어질 확률이 제일 크지.”
제론은 안도감과 함께 실망감이 동시에 들었다. 사실 아카데미에서 하는 대련만으로는 더 이상 가슴이 떨리지
않았다. 진짜 제대로 된 대결을 해 보고 싶었다.
그건 라이더가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었다. 이제 장난 같은 대결에 흥미가 일지 않는 것이다.
“아쉬운가?”
장교는 그렇게 물으며 제론의 얼굴과 눈빛을 확인하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아쉬운가 보군.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가? 전장은 아카데미의 대결과는 차원이 다르네. 살기와 투기가
넘치지.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죽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전장이네. 그런데도 아쉬운가?”
“잘 모르겠습니다.”
장교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왠지 기대가 되는군.”
정말로 기대 만발이었다. 제론이 전장의 공포에 먹혀 버리는 것도 나름 재미난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또한 그걸
극복하고 진짜 무시무시한 라이더가 된다면 그 또한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전쟁이 끝나가는 게 아쉬울 줄은 몰랐군.’
장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제론의 모습을 살폈다. 제론은 어느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 또한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저놈, 너무 차분해.’
입대를 하면서 이렇게 차분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장교는 묘한 기대감이 들어 부대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제론을 관찰했다.

제론은 자신에게 배정된 기간트를 가만히 쳐다봤다. 10 미터나 되는 몸체는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넘쳤다. 레늄
왕국 범용 기체인 카타락타였다.
마차 안에서 장교가 언급했던 기체이기도 했다. 카타락타를 보는 제론의 표정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카타락타는
에어스트 가문의 기사들이 쓰는 기체이기도 했다.
제론은 카타락타에 한 발 더 다가갔다. 그리고 다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카타락타는 제론의 기체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없다. 가문이 몰락하면서 남아 있던 모든 기간트를 팔아치워야 했고, 기사단은 해체되었다.
카타락타를 쓰다듬으며 감회에 젖어 있던 제론은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손을 떼고 돌아섰다. 최근 마나
호흡법의 성취가 늘어나 주변의 기척이나 흐름이 점점 선명해졌다.
“거기서 뭐 하나? 왜? 타고 싶나?”
다가온 사람은 제론의 선임인 하프트였다.
보통 기간트 한 기에는 2 명의 라이더가 배정된다. 메인 라이더와 서브 라이더의 개념이었다. 하프트는
카타락타의 메인 라이더였다.
“아닙니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카타락타에서 한 발 물러났다. 하프트는 그런 제론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다.
“너는 절대 탈 일 없으니까 일찌감치 포기해.”
하프트는 제론과 달리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아카데미 출신의 기사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자들은
군부에서 뼈를 묻을 작정이 아니라면 군대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본래 군부의 기간트는 라이더의 소유가 아니라 왕국의 소유였다. 그렇기에 메인 라이더와 서브 라이더가 적절히
시간을 나누어 운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군대라는 곳은 원칙대로 돌아가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았다.
하프트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제론은 전역할 때까지 한 번도 기간트를 탈 수 없을 것이다.
제론은 가만히 하프트를 보다가 걸어서 격납고를 나가 버렸다. 하프트는 그런 제론의 뒷모습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봤다.
“흥. 아카데미의 샌님이 감히 내 카타락타에 눈독을 들여? 어림도 없지.”
하프트는 한동안 제론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카타락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라이더의 상징인 흉갑을 입고 방패와 검을 차고 있었다. 일순 그것들에 새겨진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카타락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낮췄다. 하프트는 조종석에 가볍게 올라탄 뒤 해치를 닫았다.
쿵! 쿵! 쿵!
하프트가 조종하는 카타락타가 격납고를 나섰다. 그리고 기간트 연무장으로 향했다. 하프트는 기간트 훈련을 단
하루도 빼먹은 적이 없었다.
‘흥, 3 년 동안 어디 푹 썩어 봐라.’
하프트는 카타락타를 움직이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절대 카타락타를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카데미
출신이었던 지난번 서브 라이더에게 했듯이 말이다.

제론은 숙소로 돌아가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프트의 치졸한 행동에 살짝 짜증이 났다. 물론 카타락타를 그가
내주지 않아도 지금 당장은 상관없었다. 그것 말고도 제론은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았다.
본격적으로 기사 검술을 수련해서 진짜 익스퍼트가 되어야 했다. 또한 심장의 마나를 이용해 마법도 익혀야만
했다. 그밖에 태블릿을 통해 각종 지식을 섭렵할 계획이었다.
문득 제론은 대체 그 유적의 정체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아무리 태블릿을 뒤져도 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유적이 지하에 그런 식으로 다른 유적을 품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기회가 되면 확인을 해 봐야겠군.’
제론이 판단하기에 유적은 주인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마치 아카데미처럼 말이다.
초고대에는 그런 식으로 교육이 이뤄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률은 한없이 낮다.
아무리 초고대 문명이라 하더라도 모든 학생을 그런 식으로 가르쳤을 리가 없다. 유적의 마스터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렇다면 유적을 수천, 수만 개나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일이 상식적으로 가능할 리가 없었다.
‘물론 그렇게 했을 수도 있지만.’
아직 초고대 문명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그저 태블릿을 통해 엄청난 힘과 지식을 가진 문명이었을 거라고
짐작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어쩌면 진짜 모든 학생에게 그런 유적을 하나씩 만들어 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절대 아니야.’
이건 순수하게 제론의 감이었다. 그 유적은 제론이 판단하고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제론은 유적에 갈 때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일단 계속 내려가다 보면 언젠가는 답이 나오겠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유적에 다녀올 시간이 없다는 점이었다. 휴가라도 받으면 다녀올
텐데, 아직 휴가를 받으려면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이곳은 군대였다. 아카데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이고 자유롭지 못한 곳이었다.
제론은 그래도 아카데미 출신 기간트 라이더였다. 즉, 기사라는 뜻이다. 기사는 일반 병사들과는 많이 다른
대우를 받았다. 제론도 장교 대우를 받고 있었다. 권한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슬슬 기간트에 타고 싶은데…….’
기간트 라이더의 경우 일과 시간에 기간트 훈련을 해야 한다. 대부분이 개인적인 훈련이고, 일주일에 한 번
모여서 집단전을 훈련한다.
하지만 제론은 그 어떤 기간트 훈련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사실 그건 제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카데미
출신의 경우 제론과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제법 많았다.
‘일단은 검과 마법을 수련하는 수밖에 없군.’
하지만 상당히 조심해서 수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대는 기본적으로 외부와 단절된 곳이지만, 내부적으로 보면
대부분 오픈된 장소였다.
혼자 몰래 수련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군대의 특성상, 마법사도 상당히 많았다. 괜히 마법 수련을
하다가 마법사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마법사들이 과연 그걸 알아볼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제론은 그렇게 차분히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숙소로 향했다.
‘그래도 기간트에 대한 건 정말 아쉽군.’
기간트에 대한 센스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것을 갈고 닦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제론은 이러다가
자신의 센스가 무뎌지는 것이 걱정이었다. 무려 3 년 동안이나 기간트를 조종할 수 없다면 그렇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대책을 마련해야겠군.’
검과 마법으로 힘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힘은 기간트였다.
그렇게 숙소로 걸어가던 제론은 수십 대의 마차가 서로 연결되어 움직이는 광경을 발견했다. 그 수십 대의 마차가
끌고 있는 짐은 놀랍게도 기간트였다.
“실바인가?”
반쯤 부서진 실바였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눈을 번득였다. 아마 저것은 더 이상 쓰지 못할 것이다. 물론 고칠
수 있는지 확인은 하겠지만 그게 전부였다.
용광로에 들어갈 확률이 99 퍼센트였다. 쓸 만한 것들은 분리해서 재활용하겠지만, 그조차 없을 확률이 높았다.
‘마나 코어는 남아 있을까?’
기간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기간트를 움직일 힘을 주는 부품인 마나 코어였다. 그곳이 부서졌다면
기간트의 수명도 끝났다고 봐야 했다.
제론은 움직이는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조금 더 자세히 살피고자 함이었다.
‘역시 실바였군.’
가까이서 보니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실바였다. 사실 아직도 실바는 군대에서 제법 쓰인다. 또한 용병들이
쓰는 기종은 대부분 실바였다.
실바는 3 대의 마차에 나뉘어 실려 있었다. 당연히 3 대 모두 수십 대의 마차를 연결해서 거대하게 만든
것들이었다.
한 대에는 실바의 머리와 가슴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대에는 팔다리가 실려 있었고, 마지막 한 대에 가장
중요한 마나 코어가 탑재된 하체가 있었다.
실바의 상태는 심각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회생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99 퍼센트였던 확률이
100 퍼센트로 올라갔다. 게다가 마나 코어에도 심각한 손상이 있었다.
제론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걸로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떠올렸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제론은 이것을
얻기로 작정했다.

“그나마 돈이 많아서 다행이군.”


고철이 된 실바의 가격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청난 액수였다. 기간트의 가격 자체가 워낙
높기에 그러했다.
일반적으로 제법 잘 사는 평민 가정이 한 달을 풍족하게 살아가는데 들어가는 돈이 1 골드였다.
그리고 중고가 된 실바의 가격은 무려 2 만 골드였다.
말이 2 만 골드지,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제론에게는 테페룸 동전을 팔고 남은
돈이 있었다.
제론은 고철이나 다름없는 부서진 실바를 3 천 골드에 매입했다. 사실 상당히 바가지를 쓴 셈이었지만, 현재
군대에 있다는 신분상의 불이익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제론은 거대한 창고 한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실바를 보며 눈을 빛냈다. 이제 이걸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향후 3 년간의 일정이 완전히 바뀔 것이다.
“일단 도난을 방지해야 하는데…….”
사실 도난을 방지할 가장 좋은 방법은 팔찌의 아공간에 보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된다. 또한 앞으로 실바를 쓸 수도 없다. 그건 곤란했다.
일단 이 창고는 제론의 숙소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었다. 숙소에 안 들어갈 수는 없기에 이런 고철 상태의
기간트는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잘라서 훔쳐갈 수 있었다.
창고를 지키는 병사가 있긴 하지만 그 병사들조차 믿을 수 없었다. 기간트를 만드는 재료는 양질의 강철이다.
또한 몇 가지 특별한 금속이 섞여 있다. 모든 게 돈이었다. 그러니 이런 고철을 3 천 골드나 주고 산 것
아니겠는가.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마법이지.’
제론은 심장에서 회전하는 5 개의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위이이잉!
이명이 느껴졌다. 마나링이 회전하는 소리였다. 제론은 고철 더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주변의 마나가 거칠게
움직였다. 조금 더 마법에 익숙해지면 이런 현상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슬립 트랩!”
제론의 손바닥 앞에 파랗게 빛나는 마법진이 하나 떠올랐다. 그 마법진은 잠시 존재감을 뿌리다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현재 제론이 쓸 수 있는 마법은 십여 가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나하나가 제법 쓸 만했다.
슬립 트랩은 건드린 사람을 잠에 빠뜨리는 마법이었다. 본래는 1 회성 마법인데, 몇 가지 조치를 취하면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도 있었다.
제론은 마나링을 움직여 트랩에 지속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효과를 조금 더 강화시켰다. 그 모든 것은 마나를
공급함으로써 이뤄진다. 제론은 심장의 마나 대부분을 소진시켜 마법을 완성했다.
이제 이곳에 다가오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질 것이다. 사실 더 위험한 마법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마법의 존재가 들킬 위험이 있었다.
‘뭐, 지금도 위험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 직접 겪어 보지 않아 확신은 할 수 없지만, 만일 마법사가 이곳에 온다면 들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이런 허름한 창고에 왜 오겠는가. 이 고철을 훔칠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 창고는 예비 창고였다. 몇 가지 물품이 쌓여 있긴 하지만 중요한 것들은 아니었다. 물론 그럼에도 지키는
병사는 존재했다.
제론이 대비한 건 그 지키는 병사들에 대한 것이었다. 아마 그런 간 큰 짓을 벌일 병사는 많지 않겠지만, 확실히
대비를 해 둬야만 했다.
제론은 부서진 기간트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연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자신감을 잃지는
않았다.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두렵지는 않았다.
‘어쨌든 큰 경험이 되긴 할 테니까.’
제론은 이제 자신의 것이 된 실바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군대의 일과는 지극히 단조로웠다. 새벽에 기상해 인원 점검을 마치면 체력 훈련을 한다. 그 이후 식사를 마친
뒤, 일과에 들어간다.
일과라는 건 훈련과 임무를 말한다. 또한 진지를 보수하는 일도 모두 일과 시간에 한다.
오전 일과가 끝나면 점심을 먹고 오후 일과가 시작된다. 오후 일과가 끝나면 저녁을 먹고 취침 전까지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 주어진다.
매일 같은 일정이 반복된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아카데미 출신 기사들은 그 중간 일과 시간에
쓸데없는 짓을 하기도 한다.
몰래 부대를 빠져나가 근처 환락가에서 돈을 쓰기도 하고, 사고를 치기도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무료하게 다른
일을 찾는다. 시간을 빨리 보낼 수 있는 자극적인 일들 말이다.
그나마 기간트 학부가 아닌 다른 학부의 졸업생들은 할 일이 있었다. 하지만 기간트 학부의 경우 몇몇을 제외하면
다들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나도 이놈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됐겠지.”
제론은 피식 웃으며 실바의 가장 중요한 부분, 마나 코어를 살펴봤다. 마나 코어에는 기간트의 검이 깊숙이
가르고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군부의 엔지니어들은 왕궁 엔지니어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더구나 실전을 풍부하게
경험하기에 임기응변도 대단하다.
그런 군부의 엔지니어들이 포기할 정도면 어디에 가도 고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마나 코어의 상태를
보면 그들이 왜 포기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일단 마나 코어를 뜯어냈다. 실바의 구조에 대한 것은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훤했다. 그것이
바로 태블릿의 힘이었다. 또한 초고대 마법의 힘이었다.
‘일단 마나 코어를 살리는 게 우선이군.’
마나 코어가 살아나지 않으면 다른 부분을 아무리 고치고 개선해 봐야 소용이 없다.
마나 코어의 크기는 상당했다. 어른 몸통 2, 3 개를 뭉쳐 놓은 정도의 크기였다. 하지만 그 핵심에는 어른
머리통만 한 진짜 코어가 존재했다.
진짜 코어를 각종 마법진으로 감싸 안정화시킨 것이 마나 코어의 정체였다.
당연히 제론은 그것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마나 코어의 외벽을 분해하자, 마법진이 조각조각 갈라졌다.
아마 이것을 제대로 복원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분해와 동시에 사라져 버리는 선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대단하긴 대단하네. 이런 방식으로 마법진을 만들어 핵심 기술을 보호하다니.”
선 몇 개로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 마법진이었다. 당연히 몇 개의 선이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안이
가능했다.
물론 제론은 그런 저급한 마법진들이 전혀 필요 없었다. 제론에게 필요한 것은 핵심 코어뿐이었다. 나머지
마법진들은 얼마든지 새로 그려 넣을 수 있었다.
“핵심 코어도 부서졌군.”
상당히 심각했다. 코어를 가르고 지나간 검이 핵심 코어에도 상처를 만든 것이다.
제론은 조심스럽게 핵심 코어를 분해했다. 어려웠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제론은 태블릿의 도움을 받아
핵심 코어를 완벽하게 분해했다. 물론 그 와중에 십여 개의 마법진이 지워졌다. 당연히 그것도 상관없었다.
“후우.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군.”
정말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핵심 코어를 고치고 다시 조립하면서 성능을 개선할 것이다. 물론 실바의 코어를
쓰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기간트로 탈바꿈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법 많은 출력의 향상을 기대할 수는
있었다.
제론은 아공간에서 테페룸괴를 하나 꺼냈다. 제론이 이 쓸모없는 실바를 3 천 골드나 주고 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테페룸괴에 걸린 추적 마법은 이미 완벽하게 해체시켰다. 제론이 유적에서 마법을 익힌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야 안전하게 테페룸을 이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테페룸이 전략물자로 취급되는 이유는 바로 기간트 때문이었다. 기간트에는 다량의 테페룸이 들어간다. 특히
코어에는 상당한 양의 테페룸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미량의 테페룸이 함유된 무기는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제론은 분해한 코어에 새겨진 마법진을 태블릿에 복사했다. 태블릿의 기능을 이용해 마법진을 분석하기
위함이었다.
마법진을 확실히 분석하면 사라진 마법진이나 불완전한 마법진도 충분히 복원할 수 있었다. 또한 몇 가지
마법진을 더 추가해 성능 향상을 꾀하는 것도 가능했다.
제론은 불안한 심정으로 그 작업을 했다. 사실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만일 이것이 실패하면
그때부터는 고철을 내다 팔아야 했다.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말이다.
그렇기에 제론은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세웠다. 단 하나의 마법진도 놓쳐선 안 된다. 차근차근 마법진을
태블릿에 복사한 제론은 분석을 시작했다.
태블릿의 성능은 놀라웠다. 모든 마법진을 분석하고 그것을 재구성하는 데 1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고작 그
시간에 핵심 코어뿐 아니라 코어의 껍질에 새겨진 마법진까지 몽땅 분석한 것이다.
“어마어마하구나.”
제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태블릿을 보며 그 안에 나열된 마법진을 확인했다. 이제 이 마법진을 이용해 코어를
다시 조립하면 된다. 물론 그전에 사라진 마법진을 복원하고, 테페룸으로 망가진 부분을 고쳐야 하지만 말이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사라진 마법진을 복원하도록 만들어 둔 뒤, 핵심 코어의 망가진 부분을 확인했다.
“역시 테페룸이 문제였군.”
테페룸이 있어야 할 곳에 테페룸이 아닌 진흙 같은 다른 물질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코어에 상처가 나며 그렇게
된 것이다. 이것은 코어에 쓰는 테페룸의 특성이었다.
마나 코어에 들어가 작동할 때는 멀쩡하다가 이렇게 상처가 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으면 완전히 다른 물질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수많은 마법사가 오랜 세월 연구했지만 누구도 그것을 밝혀내지 못했다. 하지만 제론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일단 이걸 싹 긁어낸 다음 새 테페룸을 채워야겠군.”
필요한 테페룸의 양이 상당했다. 그러니 마나 코어를 만드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 아니겠는가. 기간트의
가격이 4 만 골드라면 마나 코어의 가격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또한 마나 코어의 가격 상당 부분을 테페룸이
차지한다.
신형 실바의 가격은 3 만 골드였다. 그중 테페룸이 차지하는 가격이 무려 12,000 골드였다. 실바에는 1.5
킬로그램의 테페룸이 쓰인다.
제론은 1.3 킬로그램의 테페룸을 괴에서 떼어 냈다. 그리고 그것을 코어의 핵심에 채워 넣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제론은 심장의 마나를 가속시켰다.
우우우웅.
마나가 회전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주변의 마나가 거칠게 움직였다. 제론은 차분히 마나를 움직여 마법을
완성시켰다.
“멜팅.”
코어의 핵심부에 담긴 테페룸이 그대로 녹아 버렸다. 테페룸을 녹이는 것은 오로지 마법으로만 가능했다.
자연적인 불로 녹이는 건 아무리 온도가 높아도 불가능했다.
아마 다른 마법사가 지금 제론이 만들어 낸 광경을 봤으면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아무리 마법을 쓴다 하더라도
테페룸을 이렇게 단번에 간단히 녹이는 건 불가능했다.
엄청나게 복잡한 마법진과 마나 스톤을 이용해 오랜 시간을 들여 마법을 퍼부어야 간신히 모양을 조금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테페룸이었다.
그렇기에 코어에 들어가는 테페룸은 모양이 코어에 딱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한데 제론은 그저 주문 한 번으로 그것을 녹였다. 당연히 코어의 모양과 테페룸의 모양이 일치했다.
액체 테페룸을 내부에 채운 제론은 코어를 봉합했다.
“리스토링!”
제론이 펼친 손바닥 앞에 파랗게 빛나는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코어에 흡수되었다. 그러자 코어가 단번에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부서진 부분이 완벽히 메워진 것이다. 물론 복구에 모자라지 않도록 미리 재료를 충분히 준비했다.
일단 모양은 복원되었다. 테페룸도 충분히 채웠다. 이제부터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한순간도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마법진을 새기고 마나 스톤을 장착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사실상 이게 진짜 코어를 만드는 작업이라 할 수 있지.’
마법진을 그냥 새기는 게 아니다. 보안까지 신경을 써야만 한다. 마법진이 새겨지는 장소는 코어의 외벽이 아니라
내벽이었다. 즉, 미리 준비된 마법진을 그곳에 투영시켜서 새겨야 했다.
테페룸이 들어 있는 용기 내부에 마법진을 생기는 것은 엄청난 고급 기술이었다. 기간트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또한 그 때문에 기간트 개발이나 생산이 어려운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나마 실바라서 다행이야.’
실바는 비교적 단순한 마법진을 이용한 코어를 쓴다. 하지만 여전히 코어에 대해서는 보안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 사소한 기술이나 마법진 하나가 유출되면 새로운 생산국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제론은 온 힘을 기울여 마법진을 준비했다. 코어 내벽에 마법진을 새기는 이유는 테페룸의 힘을 직접 받아들여
외부로 발산하기 위함이었다.
외벽에 마법진을 새기면 그 효율이 너무 낮아져 제대로 된 마나 코어로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우우우웅!
마나링이 맹렬히 회전했다. 제론은 미리 준비된 마법진을 허공에 그렸다. 제론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푸른 선이
허공에 빛나는 마법진을 그렸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 작업이 잘못되면 코어가 폭발할 수도
있었다.
“실링!”
제론의 외침과 동시에 새로운 마법진이 손바닥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단숨에 코어로 흡수되었다. 그러자 허공에
손가락으로 그린 마법진이 순식간에 작아지더니 역시 코어로 흡수되었다.
제론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성공이야!”
하지만 이제 첫 번째 단추를 채웠을 뿐이다. 길고 고달픈 여정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제론의 표정은 너무나
밝았다. 시작이 반이다. 이제부터는 길을 따라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된다.
그날, 제론은 마나 코어를 완성했다. 물론 원래 실바의 것과는 조금 다른 구조의 마나 코어였다.

제론이 입대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제론은 매일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똑같은 일과를 보냈다. 하지만 오늘은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사령관님.”
제론은 가슴에 주먹을 대며 인사를 했다.
사령관은 제론의 인사를 대충 받으며 곧장 용건을 꺼냈다.
“부서진 실바를 자네가 개인적으로 구입했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걸 예비 창고에 보관했고?”
“예. 문제가 됩니까?”
사령관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문제가 되지. 군의 창고를 개인적으로 이용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령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거기서 그걸로 뭘 하고 있나?”
“분석하고 있습니다.”
“분석?”
“기간트의 구조에 대해 잘 알아야 잘 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호오.”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제론을 한껏 비웃었다. 라이더가 구조를 파악하려면
직접 탑승해서 움직여 봐야지 그걸 그냥 눈으로 확인하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분석도 좋고, 다 좋은데 여기는 군대야. 일과 시간에는 훈련을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아무리 전쟁이
소강상태라지만 이건 기본적인 기강 문제일세.”
“무슨 훈련을 하란 말입니까.”
제론은 설마 아카데미 출신 라이더와 군부 출신 라이더 사이의 알력을 사령관이 모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라이더의 기동 훈련을 지켜보는 것도 중요한 일 같은데. 안 그런가?”
제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분위기를 보니 사령관도 아카데미 출신 라이더를 좋게 보지 않는 듯했다.
“일단 그렇게라도 참여하겠습니다.”
“일단? 무조건 참여하게. 이건 명령일세.”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론은 즉시 대답했다. 하지만 사령관의 명령을 무조건 수용할 생각은 없었다.
“한데 과연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효과가 있겠습니까?”
사령관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무슨 뜻인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확실히 효과가 있습니까?”
“당연히 효과가 있지. 자신보다 뛰어난 라이더의 훈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실력이 늘어난다네.”
“실력이 뛰어난 경우로군요.”
제론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자 사령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태도는 뭔가? 설마 10 년이 넘게 라이더로 활동한 베테랑들의 실력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내일부터 명령대로 훈련에 참관을 하겠습니다.”
사령관이 불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게. 내 충분히 납득을 시켜 주지.”
사령관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갔다. 그의 표정은 한껏 굳어 있었다. 하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이는 아카데미 출신 길들이기의 일환이었다.
아카데미 출신은 대부분 귀족 자제였기에 그 자부심이나 명예욕, 그리고 자존심과 고집이 엄청나게 높았다.
초반에 그것을 꺾지 못하면 두고두고 말썽의 소지를 만들기에 미리 그것을 한 번 꺾을 필요가 있었다.
제론은 사령관의 내심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기에 묵묵히 그 뒤를 따르며 오만 생각을 다 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지는 대충 예상을 했다.
‘과연 군부의 베테랑들에게도 내 실력이나 센스가 통할까?’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래도 해 보고 싶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투지와 승부욕이 들끓었다.
사령관이 제론을 데려간 곳은 기간트 훈련을 하는 거대 연병장이었다. 연병장에는 수십 기의 기간트가 각자 훈련
중이었다. 움직임을 점검하기도 하고 기간트를 탄 채 검을 휘두르기도 했다.
제론은 연병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살폈다. 다들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기에
정확한 실력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단순한 동작이 얼마나 깔끔하고 자연스러우냐를 보면 실력의 차이는 알 수 있었다.
대부분 카타락타였고, 크라테르가 5 기 있었다. 그리고 실바도 몇 기 있었다. 제론의 시선은 그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걸로 보이는 기간트에게 최종적으로 고정되었다. 크라테르였는데, 다른 기간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 다들 주목!”
사령관이 우렁차게 외쳤다. 그의 외침에는 마나가 담겨 연병장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제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사령관을 쳐다봤다. 사령관이 익스퍼트라는 건 알고 있었다. 온몸이 마나로 꽉 차
자연스럽게 외부로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척 보면 알 수 있었다.
한데 그 마나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목소리에 싣는 걸 보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제론의 시선은 다시 가장 뛰어난 기간트로 향했다. 그와 한 번 붙어 보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들었다.
“우리 신입 라이더가 제군들의 실력에 의문이 든다고 한다. 누가 나서서 우리 군부의 실력을 보여 주겠나!”
사령관의 말에 제론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언제 그런 식으로 말을 했단 말인가.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모든 기간트에서 일제히 투기와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쿵! 쿵! 쿵!
카타락타 한 기가 앞으로 나섰다. 제론은 그 목소리만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메인 라이더 하프트였다.
하프트는 자신의 서브 라이더가 그따위 소리를 지껄였다는 사실에 누구보다 크게 분노했다. 또한 부끄러웠다.
자신이 후임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제론은 유심히 카타락타의 움직임을 살폈다. 하프트는 군부에서 10 년 이상 훈련을 받고 실전을 겪어 왔다.
당연히 그 실력도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결코 호락호락 질 생각이 없었다.
“보시다시피 전 기간트가 없습니다만.”
제론의 말에 사령관이 연병장을 쭉 둘러봤다.
“같은 기종이 좋겠지. 아니, 차라리 크라테르로 해 볼 텐가?”
사령관이 살짝 도발했다. 그리고 제론은 피식 웃으며 그 도발에 넘어가 주었다.
“실바라도 상관없습니다.”
“감히!”
분노를 터트린 것은 하프트였다. 감히 갓 아카데미를 졸업한 애송이가 고작 실바로 자신의 카타락타를
상대하겠다니, 버릇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쿵쿵쿵!
하프트가 제론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거검을 높이 치켜 올리며 그대로 내리쳤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제론은 자신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검을 가만히 노려봤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의 감각이 결코
피해선 안 된다고 알려 주었다.
‘역시!’
카타락타의 거검은 제론의 바로 옆을 노리고 있었다.
콰앙!
제론은 바로 옆 바닥을 푹 파고들어 간 검을 힐끗 쳐다보고는 카타락타의 조종석을 노려봤다.
“호오. 의외로 강단이 있군. 좋아. 일단 공평하게 카타락타로 하지.”
사령관이 그렇게 정리를 했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하프트는 분통을 터트리면서 뒤로 물러났고, 새로운
카타락타 한 기가 준비되었다.
카타락타를 빌려 준 라이더는 조종석에서 내린 뒤 일부러 카타락타를 똑바로 세웠다. 올라타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제론은 군부의 기사들이 벌이는 치졸한 작태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물론 그런 작태에 놀아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탁! 탁! 탁!
재론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발등, 무릎, 허리를 밟고 점프해 자연스럽게 조종석에 앉았다.
다들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기간트 탑승하는 것만 보면 웬만한 베테랑 못지않군.”
사령관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묘한 기대감이 떠올랐다. 어쩌면 정말로 물건 하나가 들어왔을
수도 있었다.
얼마 전 제론을 데려온 장교의 보고가 생각났다. 제론이 아카데미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또 왜 조기 졸업을
했는지에 대한 보고였다.
‘실바로 베르를 물리쳤다고 했지?’
사실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어설픈 아카데미생을 물리치는 정도는 군부의 베테랑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한데 지금 탑승 모습을 보니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실력이 뛰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탑승 멋지게 한다고 기간트를 잘 다루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제론이 탄 카타락타가 천천히 움직였다. 사실 제론은 카타락타를 워낙 많이 타 봤기에 적응 훈련도 필요 없었다.
탑승해서 동화한 순간 이미 자신의 몸처럼 카타락타를 인식했다.
당연히 이 역시 제론의 특별한 센스 덕분이었다. 다른 라이더들은 기종을 바꿀 때마다 최소 1 시간 이상의 적응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평소 실력을 내기 어려웠다.
쿵쿵쿵!
제론은 천천히 걸어 하프트 앞에 섰다.
“치명적인 수는 쓰지 마라! 그리고 마나 코어를 부수지 마라! 이상!”
기간트 간의 대결에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조종석을 파괴해 라이더를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군끼리의
대결이기에 써선 안 되는 수법이었다.
또한 마나 코어를 부수면 기간트 자체를 아예 못쓰게 된다. 그건 왕국의 손실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 두 가지를 제외하면 웬만한 피해는 복구가 가능하니 비교적 자유로운 대결이 이루어진다. 최소한 기간트에
관한 한, 상당한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애송이, 아주 곡소리 나게 해 주마.”
치명적인 수를 쓰지 않더라도 라이더를 괴롭힐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균형을 무너뜨려 충격을 지속적으로 주면
아무리 조종석이 보호되고 있어도 라이더에게 충격이 누적되기 마련이다.
하프트는 그런 방식으로 제론을 가지고 놀 생각이었다.
2 기의 카타락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하프트는 자신의 패배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제론은 아직 카타락타에 제대로 적응할 시간도
없었다. 그런 어설픈 상대에게 진다면 메인 라이더 자리에 앉을 자격도 없지 않겠는가.
먼저 움직인 것은 하프트였다.
쿵! 쿵!
빠르게 두 발 앞으로 다가간 하프트가 제론의 목을 노리고 검을 내질렀다.
제론은 가볍게 목을 까딱이는 것만으로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한 발 걸어 하프트에게
다가갔다.
제론이 몸을 숙이자 하프트가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도 경험적으로 상대가 완벽하게 품으로 파고들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쿵쿵쿵!
빠르게 뒤로 물러났지만 앞으로 돌진하는 것보다는 느렸다. 제론이 웅크렸던 몸을 펴며 그대로 돌진했다.
응축된 힘이 폭발하며 엄청난 속도로 하프트의 가슴에 어깨를 박았다.
꽈앙!
쿵쿵쿵쿵!
하프트가 충격에 균형을 잃고 정신없이 물러났다. 하지만 꼴사납게 자빠지지는 않았다. 그도 경험 많은
베테랑이었다. 힘겹게 균형을 잡고 제론의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제론은 이미 그의 오른쪽을 점했다. 하프트가 균형을 잡느라 잠깐 신경을 못 쓴 사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콰득!
제론은 양팔로 하프트의 오른팔을 감쌌다. 하프트는 제론이 뭘 하려는지 알고 깜짝 놀라 외쳤다.
“아, 안 돼!”
콰지지직!
하지만 제론은 인정사정없었다. 그대로 팔을 뽑아 버렸다. 순간적으로 제론이 낸 괴력에 구경하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 정도 힘을 발휘하려면 웬만한 동화율로는 어림도 없었다.
팔을 뽑은 제론은 하프트가 다시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움직여 그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쪽 팔을 갑자기
뽑혀 순간적으로 균형이 흐트러진 하프트의 등을 두 손으로 강하게 밀며 한쪽 발을 가랑이 사이로 넣어 가볍게
다리를 걸었다.
콰과광!
너무나 간단히 하프트가 앞으로 엎어졌다. 한 팔이 없기에 제대로 바닥을 디디지도 못했다. 그 충격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퍼졌다.
충격 흡수 시스템 덕분에 조종석에 가해진 충격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쿵! 쿵!
제론이 성큼성큼 걸어 하프트 옆으로 가서 등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목을 콱 눌렀다.
하프트는 아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내가…… 졌다.”
하프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고작 아카데미 졸업생에게 이렇게 처참히
당하다니.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제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프트는 확실히 강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진짜 강한 사람은 절대 방심하지
않는다. 이미 처음 검을 내지를 때 방심한 상태였기에 승부가 난 거나 다름없었다.
쿵! 쿵! 쿵!
제론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승부욕과 투지는 여전히 타올랐다. 갈증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처음 연병장에 왔을 때 발견한 크라테르에게로 향했다.
“놀랍군.”
사령관은 정말로 놀랐다. 기간트 센스가 대단하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웬만한 베테랑 이상이었다.
‘이대로 익스퍼트에 오르면 바로 기간틱 나이트가 되겠군.’
익스퍼트에 오른다는 건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기간트 조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니, 약간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기간트는 인간의 육체와는 많이 다르다. 육체가 강하다고 기간트가 강해지는 건 절대 아니었다.
사실 제론은 이미 기간틱 나이트였지만 제론이 익힌 마나 호흡법의 특성 때문에 제론의 경지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령관은 고민에 빠졌다. 오늘 이 자리는 제론을 돋보이기 위해 만든 게 아니었다. 제론을 한 번 꺾어서 앞으로
고분고분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한 자리였다.
‘쯧. 아무래도 좀 귀찮아지겠군.’
더구나 지금 제론이 박살 낸 카타락타는 제론의 기간트이기도 했다. 비록 서브 라이더이긴 했지만 말이다.
메인 라이더인 하프트와의 관계를 고려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와 버렸다. 사령관은 심각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음?”
사령관의 눈이 다시 빛났다. 제론이 누구를 보고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
‘카이트를 알아봐? 보는 눈도 제법이야.’
사령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왜? 관심 있나? 상대는 크라테르인데 괜찮겠나?”
“해 보고 싶습니다.”
제론은 방금 전에 한 번 싸웠지만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전혀 지치지 않았다. 얼마든지 더 싸울 수 있었다.
사실 하프트와의 대결은 너무 싱거워서 힘을 쓰다 만 느낌이었다.
“카이트! 자넨 어떤가?”
“하겠습니다.”
카이트는 즉시 대답했다. 그 역시 제론과 한 번 싸워 보고 싶었다. 온 힘을 다하는 제론과 제대로 붙고 싶었다.
카이트의 눈에 투지가 활활 타올랐다.
카이트가 성큼성큼 제론에게 다가갔다.
쿵! 쿵! 쿵! 쿵!
카이트는 제론 옆에 떨어져 있는 카타락타의 팔을 주워 옆으로 휙 던졌다.
쿠웅!
카타락타의 팔은 정확히 본체 옆에 떨어졌다. 놀라울 정도의 힘 조절이었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짜릿한 소름이 등줄기를 쫙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이 정도 기량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실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령관은 굳이 시작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그가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다.
쿵쿵쿵!
카이트가 먼저 움직였다. 카이트는 달려가며 검을 내질렀다. 조금 전 하프트와 똑같은 공격이었다. 하지만
하프트의 공격보다는 훨씬 빠르고 강했다.
제론은 몸을 옆으로 틀며 검을 피했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강하게 올려 쳤다.
꽈앙!
카이트의 검이 그 충격으로 휙 들렸다. 하지만 카이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며 검을
휘둘렀다. 제론이 공격한 힘을 이용한 것이다.
강한 힘이 더해져 검은 훨씬 빠른 속도로 제론의 허리춤을 향해 날아갔다.
부웅!
어마어마한 풍압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아슬아슬하게 검격을 피한 제론이 헛손질 때문에 균형이 약간 흐트러진
카이트의 어깨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후웅!
제론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카이트가 검을 휘두르던 힘을 이용해 몸을 옆으로 빙글 돌려 피한 것이다.
카이트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검을 피함과 동시에 상체를 숙이며 발을 뒤로 쭉 뻗었다.
꽈앙!
쿵쿵쿵!
제론이 팔뚝으로 카이트의 발을 막았다. 하지만 그 충격으로 인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야만 했다.
물론 그냥 물러나기만 하지 않았다. 물러나며 날카롭게 검을 올려 쳤다.
텅!
카타락타의 발끝이 검에 걸렸다. 카이트는 순간적으로 균형이 앞으로 무너졌지만 자연스럽게 팔을 짚더니
앞구르기를 하며 벌떡 일어났다.
다들 입을 헤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마치 기간트끼리 싸우는 게 아니라 사람 2 명이 싸우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자연스럽고 격렬한 움직임을 끊임없이 해내는 대결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놀라든 말든 제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카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앞으로
달려가 서로의 몸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꽈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격렬한 굉음을 토해 냈다. 출력이 모자란 제론의 기간트가 당연히 조금 밀렸다.
카이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꽝! 꽝! 꽝! 꽝!
제론은 차분하게 카이트의 검격을 막아 냈다. 물론 막을 때마다 밀려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제론이
다시 승기를 잡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제론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카이트의 검을 막기만 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제론은 뒤로 계속 밀리면서도 눈을 빛내며 기회를 기다렸다. 카이트가 빈틈을 보일 리 없으니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 내야만 했다.
카이트의 검이 비스듬하게 떨어졌다. 서로의 거리가 가깝고 검격이 빠르고 강해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검을
들어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다시 검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전과는 달랐다.
스릉!
제론이 카이트의 검을 비스듬하게 흘려 버렸다. 그리고 흘리면서 받은 힘으로 검을 빙글 회전시켜 카이트의
어깨를 내리쳤다.
꽈앙!
카이트는 최대한 몸을 비틀었지만 완벽히 피할 수 없었다.
만일 기간트가 아니라 직접 검을 맞대고 싸우는 거였다면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간트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만큼의 유연성이 없었기에 어깨에 검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트의 어깨가 움푹 들어갔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려 했지만 제론이 그냥 두지 않았다.
제론의 발이 앞으로 쭉 뻗었다. 제론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넓게 다리를 벌렸다. 제론의 발끝이 물러나는
카이트의 다리를 툭 때렸다.
텅!
카이트의 균형이 크게 흔들렸다.
쿠웅!
다른 라이더라면 넘어졌겠지만 카이트는 억지로 발을 디뎌 버텨 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제론이 앞으로 뻗은 발을 디딘 채 나머지 다리를 차올린 것이다.
꽈앙!
카이트의 옆구리에 제론의 다리가 깊이 박혔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카이트는 온몸이 뒤흔들리는 충격을 견디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질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어느새 자세를 바로잡고 카이트의 품에 파고든 뒤였다.
꽈앙!
제론의 팔꿈치가 카이트의 배를 가격했다. 마나 코어와 조종석 사이를 정확히 가격했기에 라이더에게도 마나
코어에도 거의 충격이 가지 않았다.
쿵쿵쿵쿵!
카이트가 정신없이 뒤로 물러갔다. 충격이 워낙 컸기에 마나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흐름이 흐트러졌다.
충격을 받은 부분이 너무 나빴다.
카이트는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멈추는 바람에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그런 카이트의 눈에 순식간에 다가오는
제론의 모습이 보였다.
꽈아아앙!
그걸로 대결은 끝났다.

Chapter 10 제론의 실바

제론이 소속된 곳은 체른산 방어군이었다. 규모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부대였는데, 중요도는 딱 그 규모 정도였다.
체른산 방어군의 수석 라이더인 카이트는 멍하니 자신의 기간트가 수리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애송이에게 자신이 패하다니. 그것도 고작 카타락타에게
말이다.
크라테르는 1.7 의 출력을 가진다. 그리고 카타락타는 고작 1.2 에 불과하다. 속도나 힘에서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나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패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카이트는 멍하니 있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석 엔지니어를 보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떻습니까?”
“마법사를 불러야겠습니다. 아마 일정이 밀려 있어서 이틀쯤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이틀이라는 말에 카이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패배의 아픔과 치욕이 다시 밀려왔다.
“뭐가 문제입니까?”
“어깨는 관절과 장갑을 교체하면 끝나는데, 문제는 조종석과 마나 코어 사이에 있는 마나 로드입니다.”
“마나 로드가 끊어졌군요.”
“예. 웬만해서는 이런 식의 파손은 잘 일어나지 않는데 운이 나빴습니다.”
카이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운이 아니다. 이건 엄연한 실력이었다. 실력이 모자라서 당했고, 그래서 이런 손상을
당한 것이다.
“휴우.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염려 마십시오. 부대 최고의 라이더인 카이트 님의 기간트인데 마법사들도 많이 고려를 할 겁니다.”
카이트는 다시 한 번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착잡했다.
‘뭘 한다…….’
라이더에게 갑자기 기간트가 사라지니 할 일이 없었다. 사실 검술이라도 수련하면 되지만 그런 생각은 아예
들지도 않았다.
멍하니 기계적으로 걷던 카이트의 눈에 어딘가로 향하는 제론의 모습이 보였다.
제론은 그 이후로 일과 시간을 보장받았다. 다른 라이더의 훈련을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걸 실력으로 입증했으니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사령관님의 관심이 생겨서 그런 거겠지.’
카이트는 문득 제론이 어디에서 뭘 하는지 궁금해졌다.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걸 믿지는 않았다.
부서진 실바를 사서 그 구조를 이해하는 중이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마법사도 엔지니어도 아닌 라이더가
대체 그걸 왜 알아야 한단 말인가.
카이트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제론을 따라갔다.
제론은 예비 창고로 들어가 버렸다. 카이트는 서둘러 따라갔다. 그리고 예비 창고의 문을 열었다.
부서진 실바가 카이트의 눈동자를 가득 메웠다.
제론은 카이트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았기에 실바 앞에서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카이트는 대답이 궁색했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 그냥 쫓아왔다고 말하면 완전히 실없는 놈이 될 판이었다.
“그…… 나도 실바의 구조를 보고 싶어서 와 봤네.”
카이트는 즉석에서 생각해 낸 답치고는 썩 괜찮았다고 생각하며 제론의 반응을 살폈다.
제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 실바의 구조를 보는 거지, 사실은 실바를 수리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사실
엔지니어들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빠르고 간단하다.
어차피 중요한 부분은 다 해결했다. 가장 어려운 마나 코어를 완전히 만들었으니 반 이상 만든 거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아공간에 넣어 둬서 다행이군.’
마나 코어는 완성된 즉시 아공간에 넣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마나 코어가 완벽하게 복구된 걸 발견하기라도 하면
참으로 곤란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제론은 일단 카이트를 가까이 불렀다. 거절하면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또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이럴 때는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중요했다.
카이트는 제론에게 다가가 바닥에 널브러진 실바를 쳐다봤다.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그저 제론이 여기서 뭘
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실바를 가지고 기간트의 구조를 파악한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어 주지.’
카이트는 관심 있는 척 실바를 좀 더 살폈다. 한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상태가 너무 좋았다.
“이거 이쪽 관절들은 다 멀쩡하군.”
반쯤은 고철로 분류해 녹이는 것이 맞지만, 절반 정도는 따로 떼어 예비 부품으로 남겨 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고철을 3 천 골드나 주고 샀다고 해서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상태가 이 정도라면 바가지를 쓴 건
아닌 것 같군.”
이 정도라면 마나 코어가 남아 있으면 억지로라도 수리를 해서 쓰는 것이 나았다.
“마나 코어는 상태가 어떻던가?”
카이트가 조금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재론은 솔직히 대답해 주었다.
“코어의 핵심에 진흙 같은 것들이 잔뜩 있더군요.”
카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상대로 마나 코어가 완전히 못쓰게 되어 버렸다. 코어의
핵심부만 남아 있어도 어떻게든 수리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네는 하던 일을 계속하게. 난 조금만 구경하다가 가겠네.”
카이트의 말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실바의 부품 하나를 살폈다.
다른 사람이 보고 있으니 마법을 써서 마법진을 복원하거나 관절을 고치는 일은 못하겠지만, 그것 말고도 할 일은
엄청나게 많았다.
혼자서 거의 기간트 하나를 새로 조립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냥 부품만 가져다 조립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망가진 부품을 고치면서 조립하는 거니 얼마나 어렵고 일이 복잡하겠는가.
제론은 부서진 관절의 부품들을 모았다. 그리고 모양을 차근차근 모양을 맞춰 갔다. 일단 이렇게 맞는 부품을
찾아 둬야 나중에 일하기 편하다.
또 사라진 부품은 새로 만들거나 구입해야 하고 말이다. 제론은 구입해야 할 부품 목록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물론 아무도 없을 때 태블릿에 기록했다.
그렇게 2 시간이 지나갔다.
카이트는 결국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가 보기에 제론은 정말 가당찮은 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대체 그걸로 뭘 얻을 수 있나?”
카이트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든 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서 구경하며 날린 2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할 일은 없었지만.
“기간트 조립해 보셨습니까?”
제론의 말에 카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제론과 바닥에 보기 좋게 늘어선 부품과 실바의 잔해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설마 이걸 조립하고 있었단 말인가!”
“개인 기간트를 소유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지 않습니까.”
카이트는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집념에 존경심마저 일어났다. 이제야 자신이 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아직까지 저 절박함과 독기를 못 알아봤을까.’
제론을 처음 보면 잘생긴 얼굴에 자신도 모르는 선입견을 갖게 된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 세상의 풍파를
겪으면 금방 좌절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카이트는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이 얼마나 제론을 잘못 판단했는지 깨달았다. 제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카이트는 제론을 똑바로 바라봤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 보이니 이미지도 확 바뀌어 버렸다. 그러고 보면 잘생기고
기간트 조종 실력도 뛰어나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추진하는 집중력과 끈기도 대단한 사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괜찮은 놈이잖아?’
카이트는 제론에 대한 호감이 살짝 생겨났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을 던졌다.
“내가 뭐 도와줄 일은 없나? 엔지니어를 소개해 줄 수도 있네.”
제론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갑자기 변한 카이트의 태도를 얼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네. 사실 우리 부대의 에이스를 언제까지 이렇게 방치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제론은 갈등했다. 엔지니어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수월하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의 능력이 필연적으로 알려진다.
“그보다는 부품을 좀 구입하고 싶습니다.”
“그걸로 되겠나? 잘 생각하게. 자네 의지는 알겠지만 기간트 조립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일단 부품 수급만 원활해도 해 볼 만합니다.”
카이트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결국 실패를 하더라도 할 만큼 해 보지 않으면 미련이 남게 된다.
“좋아. 부품 쪽은 내가 선을 대 주지. 대신 나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꼭 나한테 부탁을 하게. 그게
조건이네.”
제론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한 심정이 들어간 인사였다. 카이트는 그 인사 하나만으로도 뭔가 큰 보상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감사할 것 없네. 어차피 부품도 자네 돈으로 사야 하는 거니까. 한데 돈은 있나?”
“영지를 팔고 남은 돈이 좀 있습니다. 기간트를 살 정도는 안 되지만 부품을 구입할 정도는 차고 넘칩니다.”
카이트는 영지를 팔았다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제론도 결코
쉬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좀 이해가 가는군. 저 절박함과 독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카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그럼 난 엔지니어들에게 가 볼 테니까 부품 목록이나 준비해 놓게. 마법사 쪽도 소개해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쪽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서. 마법사들이 워낙 까다로운 족속들 아닌가.”
“부품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카이트는 돌아선 채 손을 한 번 들어 주고는 창고에서 나갔다. 제론은 그런 카이트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좀 이상하군.”
하지만 낯선 기분은 아니었다. 바이스나 세나를 만났을 때와 비슷했으니까.
제론은 눈을 빛내며 다시 시선을 부서진 실바에게로 향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제론의 심장에 자리
잡은 5 개의 마나링이 힘차게 가속했다.

카이트의 도움으로 실바의 조립 속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두 달 동안 진행한 것보다 카이트의 도움을 받은 이후,
일주일 동안 진행한 일이 훨씬 많았다.
물론 처음 두 달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기본기를 다지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제론에게 좋은 소식도 하나 있었다. 제론이 조립한 실바가 만일 완성된다면 개인 기체로 등록이
가능해졌다.
사령관과 카이트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체른산 방어군 내에서 제론의 입지가 조금씩 단단해졌다. 이 역시 카이트의 노력 덕분이었다.
물론 모든 부대원이 제론을 인정하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삐딱한 시선이 있었고, 또 제론을 시기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하프트를 중심으로 제론을 적대시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제론은 부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온통 실바의 조립에만 매달렸다.
실바의 관절 부분에 새겨진 모든 마법진이 복원되었다. 또한 그 효율이 높아졌다.
하지만 기존의 실바와 가장 달라진 점은 바로 마나 로드였다.
제론은 실바의 마나 로드에 특별한 물질을 썼다. 바로 상처 난 마나 코어에 들어 있던 테페룸이었다.
마치 진흙처럼 변한 테페룸은 아무런 쓸모도 없다. 하지만 거기에 특별한 마법적 처리를 해 주면 아주 특별한
물질로 가공된다.
초고대 문명에서는 흔히 쓰던 물질이었다. 테페룸을 가공해 여러 가지 성질을 가진 새로운 물질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마나 코어에서 진흙처럼 변한 것은 그 가공의 중간 단계였다.
제론은 그 진흙을 가공해서 포로스라는 물질을 만들었다. 마나 전달의 효율이 가장 높은 물질이었다. 당연히 마나
로드를 만드는 최고의 재료이기도 했다.
포로스는 제론이 조립한 실바의 곳곳에 쓰였다. 마나 로드뿐 아니라, 마법진에도 일부가 쓰였다. 포로스를
정확한 방법으로 가미하면 마법진의 효율도 극단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
포로스는 무색투명한 액체였기에 누군가 혹시 기간트를 분해해 분석하더라도 그 존재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마나 로드나 마법진에 지극히 미량만 섞기 때문에 그 성분을 분리해 내는 것이 더더욱 어려웠다.
아마 제론의 기간트를 누군가 정밀하게 분해하면 이상한 점을 딱 하나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마나 코어의 핵심에 들어 있는 테페룸이다. 그곳에 있는 테페룸은 액체 상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도 알아내지 못하지. 지금 당장 분해하지 않는 한.’
제론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실바를 가동시켰다.
키이이이잉!
초기 가동 상태가 되며 오너 각인을 기다리는 실바를 보며 제론이 씨익 웃었다.
이제 마나 코어의 테페룸도 걱정할 게 없다. 아마 코어를 분해하면 남는 건 진흙뿐일 테니까.

쿵! 쿵! 쿵! 쿵!
예비 창고의 문이 열리고 9 미터에 달하는 기간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제론의 실바였다.
갑자기 나타난 실바의 모습에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깜짝 놀랐다. 그리고 서둘러 보고를 했다.
라이더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실바를 멍하니 바라봤다.
설마 정말로 저걸 만들어 낼 줄은 몰랐다. 엔지니어도 아니고 라이더가 대체 저걸 어떻게 조립한단 말인가.
아무리 부품을 수급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불가능했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령관까지 달려왔다. 사령관 역시 실바를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카이트가 바보짓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 저놈 정말 괴물이야.”
사령관은 수많은 아카데미 출신 기사와 장교를 겪어 왔다. 하지만 그들에게 뭔가 기대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카데미 출신의 군인들은 3 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견딜 것인지만 고민한다. 일을 하긴 하지만 의욕적으로
덤벼들지는 않는다.
그것이 아카데미 출신 군인들이었다. 군부 출신 라이더들이 아카데미 출신 라이더들에게 기간트를 잘 내주지
않으려 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쿵! 쿵! 쿵! 쿵!
실바는 사령관 앞까지 걸어갔다.
푸쉭!
해치가 열렸고, 그 안에서 제론이 훌쩍 뛰어내렸다. 허리, 무릎, 발등을 밟고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제론은
사령관 앞으로 다가가 가슴에 주먹을 올렸다.
“실바의 정비가 끝났습니다.”
사령관은 멍하니 제론의 모습을 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정비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이는군. 그 고철을 가져다가 뚝딱 기간트를 만들어 내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사령관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한데 마나 코어는 어떻게 한 건가? 분명 쓸 수 없을 지경이었을 텐데.”
“마침 실바의 마나 코어 하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령관의 눈이 커다래졌다.
“실바의 마나 코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그런 걸 본 기억은 없네만…….”
“제 개인 물품 보관함에 넣어 두고 있었습니다.”
사령관의 표정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즉, 그런 물건을 몰래 들여와 감춰 두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당장 문제
삼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3 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나마 군의 전력이 늘어나게 되었으니 대충 넘어가는 게 옳겠지.’
사령관은 입맛을 다시며 제론의 실바를 바라봤다. 이걸 군에 귀속시킬 수 있다면 정말로 좋을 것 같았다. 그
정도 실적이라면 진급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승작도 가능하지.’
군부의 사령관은 최소 남작 위를 가진다. 이곳 체른산 방어군의 사령관도 남작이었다.
하지만 군부의 남작은 영지를 가지지 못한다. 군부 소속 귀족이 영지를 가지려면 최소한 백작 이상은 되어야 한다.
사령관은 자신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고작 실바 한 기로 백작을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지만 말이다.
“좋아. 약속대로 이 실바를 자네의 개인 기간트로 인정하지. 메인 라이더는 자네가 맡게. 서브 라이더를 두는
것이 원칙이긴 하지만, 개인 기간트라는 점을 감안해 강요는 하지 않겠네.”
사령관은 그렇게 말하고는 의아한 눈으로 제론의 몸을 살폈다.
“한데…… 아공간 마법이 각인된 매개체가 안 보이는군.”
“이 실바에는 그런 기능이 아예 없습니다.”
사령관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공간 기능이 없다니. 그럼 전략적으로 가치가 너무 떨어진다. 이 커다란 기간트를
타고 이동하며 임무를 수행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기지를 방어하는 것 외에는 별 쓸모가 없겠군.”
“그렇습니다.”
제론의 수긍에 사령관은 진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긴, 거기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건
제론이 혼자서 조립한 기간트였다. 어떤 문제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서브 라이더는 두지 않는 편이 낫겠군.’
사령관은 물론이고 그곳에 있던 모든 라이더나 장교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들은 조금 불안한 눈으로 제론의
실바를 바라봤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은 조금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상당히 복잡한 시선으로 제론의 실바를 바라봤다.
아무리 실바가 좀 단순한 구조를 가진 기종이라고 하지만 혼자서 그걸 조립했다는 건, 상급 엔지니어도 쉽게 못
하는 일이었다.
물론 제론의 실바가 완벽히 동작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더구나
그들은 처음 이 실바가 어떤 상태였는지 아는 사람들이었다.
“정말 놀랍군요. 부품들을 넘겨주면서도 설마설마했는데, 이렇게 멋지게 완성시켰을 줄은 몰랐습니다.”
수석 엔지니어가 다가와 감탄하며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제론의 말에 수석 엔지니어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운이 좋았다. 사실 저렇게 걷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어야 정상이다.
기간트라는 건 그냥 부품을 조립했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조립 후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아 있었다.
바로 균형 맞추기였다. 제대로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걷는 것도 불가능하다.
한데 제론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걸어왔다. 균형이 어느 정도 맞았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운이지.’
운이 좋아 균형이 맞은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가 직접 맞추는 것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제론의 센스가 정말로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수석 엔지니어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아카데미를 갓 졸업해서 부임한 애송이었다. 한데
부임하자마자 부대를 몇 번이나 발칵 뒤집어 놓는 걸 보면 인물은 인물이었다.
“방금 조립을 끝냈다면 아직 균형이 안 맞을 텐데, 우리가 좀 봐 드리겠습니다.”
제론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만일 마법사가 접근했다면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물론 마법사가 들여다본다고 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다. 그래도 미리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엔지니어의 경우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기본적인 관절이나 강판 등의 구조는 기존의 실바와 완전히
똑같았다.
태블릿의 지식을 이용하면 그걸 더 좋은 성능으로 바꿀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간트는 라이더 혼자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엔지니어의 손길이 필수였다. 마법사는 없어도 괜찮다.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차피 부품을 교체하고 수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마법진이 손상된 부분은 부품 자체를 아예 바꾸면 된다.
처음 실바를 조립할 때는 엔지니어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지만, 균형을 맞춘다거나 간단한 부품을 교체해서
수리를 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괜찮았다.
‘무엇보다 내가 실바를 고집할 이유는 없으니까.’
제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실바에 달려드는 엔지니어들을 쳐다봤다. 균형을 제대로 맞추려면 사흘은 걸릴 것이다.
사흘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기간트를 탈 수 있게 된다.
‘3 년만 버티면 돼.’
3 년 동안 탈 기간트를 얻은 걸로 충분했다. 또한 부수적으로 기간트를 조립하면서 태블릿의 지식 중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다.
이는 향후 제대로 된 기간트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상념에 잠겨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제론의 귓가로 사령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기간트도 생겼으니 앞으로는 훈련에 참여하겠군.”
“물론입니다.”
사령관이 씨익 웃었다.
“기대하겠네. 아마 다른 라이더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거야.”
제론은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데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제론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이트를 쳐다봤다. 아마 앞으로 서로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카이트 정도의 실력을 가진 라이더는 쉽게 찾기 어렵다.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할 아주 좋은 상대였다. 물론
그것은 카이트도 마찬가지이리라.
카이트가 제론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카이트가 먼저 씨익 웃었다.
제론은 그런 카이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렇게 실바를 완성하는 데, 카이트의 도움이 너무나 컸다.
제론은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카이트의 표정이 더욱 환해졌다.

기간트 훈련장 한가운데에서 제론과 카이트가 마주 섰다. 물론 각자의 기간트를 탄 채였다.


카이트는 상대가 실바라고 방심하지 않았다. 기종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라이더가 훨씬 중요하다는 걸 익히
경험했다.
카이트는 조금씩 움직이며 제론을 견제했다. 실바의 출력은 고작 0.8. 게다가 키도 작고 무게도 가볍다. 힘으로
압도하면 승부는 금세 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 힘으로 압도하다 보면 섬세함이 떨어진다. 제론은 힘을 섬세하게
역이용할 수 있는 수준의 라이더였다.
쿵!
카이트가 한 발 내디디며 검을 쭉 내질렀다. 힘이 실리진 않았다. 견제의 의미가 훨씬 강한 찌르기였다.
제론은 기다렸다는 듯 검 면을 손바닥으로 쳐 냈다.
꽝!
카이트의 검이 옆으로 휙 밀려났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검을 치는 힘을 이용해 비스듬하게 앞으로 달려들었다.
워낙 강력한 일격이 검에 들어갔기에 카이트는 순간적으로 팔이 확 벌어져 당황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상대가 품으로 파고들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옆을 내준 것 역시 치명적이었다.
후웅!
실바의 검이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카이트는 서둘러 검을 회수해 그것을 막았다.
꽈앙!
카이트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저 상대의 검을 막으려고 휘둘렀다. 한데 제론은 그조차 흘려 버렸다.
제론은 카이트의 검을 흘림과 동시에 품으로 파고들었다.
“젠장!”
카이트는 제론이 뭘 하려는지 알기에 이를 악물고 몸을 숙였다. 상대의 어깨가 가슴이나 배에 박히기 전에 충격을
줄이려 대처를 한 것이다.
쿠웅!
제론이 온몸으로 카이트를 들이받았다. 카이트가 채 무게중심을 낮추기 직전에 그 아래를 파고들었기에 카이트는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실바의 키가 작았기에 카이트의 기종인 크라테르의 대응이 조금 늦는 건 당연했다.
콰과광!
카이트가 바닥에 쓰러졌다.
힘이 실리지 않은 찌르기가 어떻게 역습의 발판이 되는지 너무나 잘 보여 주는 한 판이었다.
물론 상대가 제론이었기에 당한 것이다. 제론은 실바의 신장까지 적절히 이용했다.
‘센스가 정말 장난 아니로군.’
카이트는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자만심을 싹 청소했다.
“다시 해 보지.”
카이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는 점검을 한 뒤에 훈련을 이어 가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카이트의 투지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제론도 그런 카이트를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카이트는 더욱 거칠게 싸울 것이다. 바라던 바였다.
제론과 카이트는 일과가 끝날 때까지 속이 후련하도록 붙어 싸웠다.
제론도 그 이후로는 처음처럼 카이트를 압도하지는 못했다. 카이트도 기간트 센스가 대단했다.
둘의 얼굴에 더할 나위 없는 즐거운 표정이 떠올랐다.

Chapter 11 기습

암시장에서 테페룸 동전을 구입한 사람은 리오 마탑의 탑주인 가이스트 폰 헤르츠였다.


리오 마탑은 크란 제국 제일의 마탑이었다. 보유한 마법사의 수만 해도 3 백 명이 넘었고, 마탑이 개발한
기간트도 5 가지나 될 정도였다.
또한 가장 먼저 기간트 양산에 성공한 마탑이기도 했다. 즉, 실바를 설계하고 제조한 마탑이 바로 리오
마탑이었다.
가이스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눈앞에 놓인 10 개의 동전을 세심히 살폈다.
“정말로 정교한 세공이로군. 대체 무슨 수로 이런 세공을 했지?”
사실 그저 세공만 정교한 테페룸 동전이었다면 150 만 골드나 써 가면서 이걸 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이스트의 마음을 끈 것은 동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 마법을 쓰기 직전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건 마법사라고 해도 알아차리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가이스트처럼 감각이 예민하고 마나에 대한 감응력이
뛰어난 사람만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가이스트는 경쟁적으로 경매에 참여해 이것을 샀다. 아마 자신과 경쟁하던 몇몇 사람도 분명 그걸
느끼고 경매에 열을 올렸을 것이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가이스트는 그들이 다른 마탑의 주인일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라면 100 만 골드가 넘는
돈을 경매에 제시할 가능성이 없었다. 고작 동전 10 개에 말이다.
“이런 동전이 존재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
고대에 관심이 많았기에 수많은 고대 유물을 모아 왔다. 그리고 고대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이스트는 고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일 거라고 자신했다.
한데 이 동전은 아무리 살펴봐도 그 연원을 알 수가 없었다. 고대의 어떤 나라에서 쓰던 동전인지, 또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동전의 문양은 또 어떠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양식의 그림이었다. 그려진 사람의 정체도 유추가 거의
불가능했다.
“보면 볼수록 신비로워.”
가이스트는 황홀한 눈으로 나란히 놓인 10 개의 동전을 바라봤다. 150 만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이 들었지만,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뭔가 비밀이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아내려면 뭔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이
동전과 함께 발견된 다른 유물 같은 것들 말이다.
가이스트의 눈빛이 음험하게 빛났다.

☆ ☆ ☆

“도색이라…….”
수석 엔지니어는 턱을 쓰다듬으며 제론의 실바를 바라봤다. 도색을 요구한 사람은 제론이 아니라 카이트였다.
그렇기에 제론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군부의 기간트는 도색법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개인 기체에는 그 법이 살짝 느슨했다. 그렇기에 개인 기간트의
경우는 각자 차별화를 두기 위해 색다른 도색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곤란하면 굳이 안 하셔도 됩니다.”
제론의 말에 카이트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섰다.
“되긴 뭐가 돼! 해 주십시오. 검붉은 색으로 부탁드립니다. 전장에 서면 눈에 확 띄게 말이죠.”
수석 엔지니어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이야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니 상관없지만, 갑자기 확전이 되면
어쩌려고 이런단 말인가.
“눈에 띄면 타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상당히 위험합니다.”
카이트가 씨익 웃었다.
“괜찮습니다. 어디에서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더구나 밖에는 못 나가고 기지 방어만 할 건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 말에 수석 엔지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어쩌면 그렇게 튀게 만들어 적을 끌어들인다면 좀 더 다양한 작전의 구사가 가능해진다. 거기까지 생각한 수석
엔지니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당장 해 드리죠. 피처럼 붉은색으로 눈에 아주 확 띄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카이트가 환하게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하.”
제론은 그런 카이트의 모습에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살짝 미안한 눈으로 수석 엔지니어를 쳐다봤다.
“부탁드립니다.”
“염려 마십시오. 아주 멋진 놈으로 만들어 드릴 테니까. 하하하하.”
수석 엔지니어의 밝은 웃음에 제론도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기대감 어린 눈으로 자신의 실바를 쳐다봤다.
지금은 아예 도색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저기 강판을 대고 부품을 끼운 티가 확 났다. 마치 누더기를 입은
것 같았다.
하지만 도색이 끝나고 나면 아마 그 어떤 기간트보다 멋지게 변할 것이다.
제론의 눈에 어린 기대감이 점점 짙어졌다.

☆ ☆ ☆

일단의 무리가 은밀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멋들어진 흉갑을 입고 거대한 검을 등에 메고 있었다.
흉갑과 검에는 기묘한 문양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법진이었다. 마법진 자체가 무늬처럼 흉갑과 검을 장식해
멋을 더해 주었다.
그런 방식의 흉갑과 검은 기간틱 라이더를 상징한다. 아공간에 보관한 기간트의 매개체가 바로 흉갑과 검이었다.
총 15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였는데, 모두 기간트를 소유한 기간틱 라이더였다.
가장 앞에서 달리던 사내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손을 슬쩍 들었다.
그러자 따라가던 사내들도 그와 행동을 같이 했다.
리더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허리에 검을 찬 기사 한 명과 창을 든 병사 다섯이 보였다.
기간트 라이더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실력이 뛰어나야 한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면 기간트를 가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기간트 라이더는 기사인 경우가 많았다.
15 명의 기사가 고작 기사 하나와 병사 다섯으로 이루어진 무리를 두려워할 리 없었다. 다만 그들은 만에 하나
자신들의 침입이 알려지는 것을 경계할 뿐이었다.
그들은 가장 완벽한 기회가 올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지금.”
리더가 나직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열다섯 라이더가 일제히 병사들을 덮쳤다.
푹! 푹! 푹!
병사들은 제대로 된 반항 한번 못해 보고 당했다. 하지만 기사는 그렇지 않았다. 놀라며 검을 뽑아 대항하려고
했다.
챙!
검을 뽑는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그와 동시에 기사의 온몸으로 마나를 머금은 검이 날아갔다.
서걱!
기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절명했다. 놀랍게도 열다섯 모두가 익스퍼트였다.
“서둘러라. 일단 순찰조 하나를 처리했으니 당분간은 안전할 것이다. 체른산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열다섯 라이더는 속도를 높였다.
그들은 벨룸 왕국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이 먼저 체른산에 자리를 잡아 적을 움직이면, 그 틈을 타서 본대가 밀고
내려오는 작전이었다.
무려 15 대의 기간트가 나타나면 체른산 방어군이 얼마나 동요하겠는가. 그 동요가 바로 첫 번째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실력이 두 번째 핵심이었다.
그들은 벨룸 왕국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기간틱 나이트들이었다. 비록 체른산 방어군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가 50
대를 넘어가지만, 얼마든지 버틸 자신이 있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버티면 버틸수록 작전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렇게 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체른산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전선을 조금 변경시켜 체른산을 확보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진짜 목적이었다.
열다섯 라이더는 그 뒤로 두 번이나 순찰조를 만나 처리했다. 그리고 체른산에 들어갈 수 있었다.

부대가 발칵 뒤집혔다. 간밤에 3 개의 순찰조가 사라진 것이다. 체른산 방어군 사령관은 즉시 병력을 투입해
순찰조를 찾게 했다.
하지만 시체는 못 찾고, 피를 흘린 흔적만 찾아냈다. 상황은 자명했다. 누군가 침투해 습격한 것이다.
방어군이 채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기도 전에 체른산이 쿵쿵 울렸다. 그리고 7 기의 기간트가 나타났다. 벨룸
왕국이 자랑하는 기체인 몰레스였다.
몰레스는 크라테르보다 약간 성능이 뛰어난 기체였다. 레늄 왕국에서 라쿠스를 개발한 이유가 바로 몰레스
때문이었다.
그런 몰레스가 7 기나 나타났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사령관은 즉시 전력을 투입했다.
몰레스 7 기를 처리하려면 최소한 맞서는 수가 그 이상이라야 한다. 몰레스를 몬다는 것은 벨룸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10 기의 카타락타, 그리고 3 기의 크라테르가 체른산으로 향했다.

카이트는 크라테르를 탄 채 가장 앞에서 달려갔다. 체른산은 부대 바로 옆에 위치했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정지!”
카이트는 적이 보이자마자 멈췄다. 그의 직감이 더 이상 움직여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적이 몰레스 7 기라고 해서 무려 13 기나 이끌고 왔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 것이다.
“방어진을 구축하고 대기한다!”
카이트의 말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곳의 책임자는 카이트였기에 군소리 없이 명령에 따랐다.
카이트가 산 아래에서 방어선을 짜고 대기하자, 이번에는 산을 점령한 벨룸 왕국의 라이더들이 당황했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자신들을 노리고 달려드는 적을 숨은 8 명의 라이더와 합세해 박살을 내서, 전력을 이쪽으로 집중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데 저렇게 방어 진형으로 대기해 버리면 그 작전을 아예 쓸 수가 없지 않은가.
벨룸 왕국 라이더들의 리더가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에 명령을 내렸다.
“이대로라면 시간에 맞출 수가 없다. 일단 저들을 최대한 빨리 박살 내야 한다.”
리더의 표정은 어두웠다. 저렇게 단단히 방어 진형을 구축하면 짧은 시간 안에 저들을 부수기가 어렵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최소한 저들을 부수고 다음 전력을 이쪽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단시간 안에
전선을 변경시킬 수가 없었다.
“이 체른산을 무조건 확보해야만 한다. 나머지도 탑승해!”
리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은 8 명의 라이더가 기간트를 소환했다. 모두 몰레스였다.
갑자기 몰레스가 15 기로 늘어나자, 카이트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쉽게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카이트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고, 또 동료들의 힘을 믿었다.
“기지에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라이더 중 하나가 외쳤다. 카이트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당연히 통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통신 마법이 완전히
먹통이었다.
카이트는 그제야 체른산 중턱에 높게 솟아 있는 첨탑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철골구조를 가진 첨탑이었는데,
마법 통신망을 무력화시키는 기기였다.
“젠장! 자리를 철통같이 지켜라! 무조건 버틴다!”
일단은 버티면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도 자신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기지에서 뭔가 조치를 취해 줄
것이다.
쿵쿵쿵쿵쿵!
15 기의 몰레스가 일제히 체른산에서 아래로 내달렸다. 경사를 달리며 점점 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얻은 힘으로
방어진을 단번에 부숴 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카이트 역시 다 생각이 있었다. 카이트는 눈을 빛내며 타이밍을 쟀다. 이미 이와 비슷한 상황에 대한
훈련이 충분히 되어 있었다.
쿵쿵쿵쿵쿵!
경사를 내달리니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붙었다. 이대로 충돌을 하면 레늄 왕국측 기간트들이 제대로 버티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일단 성능은 몰레스에 비해 크라테르나 카타락타가 확실히 모자라기 때문이다.
“지금!”
카이트가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방어진 선두에 있던 크라테르 한 기가 옆으로 내달렸다. 카이트는 그와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하압!”
2 기의 크라테르가 두꺼운 쇠사슬 뭉치를 양쪽으로 팽팽하게 당겼다. 워낙 타이밍이 좋아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몰레스 6 기가 꼼짝없이 걸려들었다.
꽈과과과광!
6 기나 되는 몰레스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카이트를 비롯한 크라테르들이 일제히 바닥에 쓰러진 몰레스의 등에
검을 꽂았다.
콰직! 콰직! 콰직!
3 기의 몰레스가 무력화되었다. 그들은 정확히 라이더가 위치한 곳에 검을 찔러 넣었다. 라이더가 죽은 이상 다시
몰레스가 움직일 수는 없었다.
카이트는 서둘러 방어진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크라테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료들이 넘어지는 바람에 주춤한 몰레스들이 다시 달려왔을 때는 이미 방어진이 완성된 후였다.
“좋아! 이제 해 볼 만하다!”
적은 12 기, 아군은 13 기. 충분히 해 볼 만했다. 물론 이기는 건 쉽지 않겠지만, 시간을 끄는 건 가능했다.
카이트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적의 공격을 차분히 막아 냈다. 또한 위험에 처한 동료들까지 살펴 주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어.’
카이트는 자신의 실력이 예전에 비해 월등히 높아졌다는 걸 이번에 여실히 느꼈다. 몰레스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콰과과광!
금속과 금속이 충돌하고 흙먼지가 피어났다. 기간트용 거검이 허공을 갈랐고, 또 다른 검이 그것을 막아 내는
일을 반복했다.
싸움은 점점 치열해져 갔다.

☆ ☆ ☆

제론에게는 특별한 명령이 따로 하달되지 않았다. 사실 제론이 실바를 완성하고 훈련에 참가하기 시작한 지 불과
열흘 정도였다.
아직 제론은 명확한 팀도 정해지지 않았다. 분위기를 봐서 카이트의 팀으로 들어가게 될 확률이 높았지만,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최근 기간트를 혼자 조립하면서 제론은 정말로 많은 것을 얻었다. 마법은 물론이고, 기간트에 대한 지식도 상당히
얻었다.
제론이 얻은 기간트 지식은 현재 통용되는 최신 지식이나 정보를 넘어서는 것들이었다. 바로 초고대 문명의
지식들이었다.
그중 몇 가지는 직접적으로 제론의 실바에 적용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액체 테페룸이었다.
액체이기에 테페룸으로부터 마나 코어에 전해지는 에너지의 효율이 완전히 달랐다.
제론의 실바는 그 출력이 0.8 이다. 출력 자체는 다른 실바와 똑같았지만, 에너지 효율이 훨씬 뛰어나니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완전히 달랐다. 실제로는 1.2 의 출력이나 다름없는 성능을 발휘했다.
아무튼 그렇게 마법 수준이 높아지고, 지식을 얻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마나 호흡법이나 검술이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점이 훨씬 중요했다.
기간트를 혼자 조립하면서 손가락의 세심한 움직임과, 마나 로드를 따라 움직이는 마나의 미세한 조절 능력이
발전했다.
또한 무거운 부품을 연달아 들고 나르다 보니, 순간적으로 마나 로드에 부하가 걸릴 정도로 많은 마나를 다루기도
했다.
그 두 가지가 어느 순간 조화를 이루더니 순식간에 한 단계 수준이 올라가 버렸다. 검술과 마나 호흡법 두 가지
모두 말이다.
제론은 그로 인해 예전보다 감각이 훨씬 예민해졌다. 그 예민한 감각이 끊임없이 제론을 자극했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제론은 안절부절못했다. 계속 서성이며 불안감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썼다.
사실 그 불안감의 정체는 기지로 엄습하는 전쟁의 기운이었다. 벨룸 왕국군이 체른산 방어군을 향해 진군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 기세와 투기가 제론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 작전에 투입된 카이트 때문이었다.
제론은 이 불안감이 카이트 때문에 생긴 거라고 판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그랬으니까.
제론은 고개를 들어 오연히 서 있는 붉은 실바를 쳐다봤다. 어서 타 달라고 소리 지르는 것 같았다. 도색이 끝난
이후로는 아직 한 번도 타 보지 않았다.
붉은 실바를 본 뒤로 제론의 망설임이 사라졌다. 제론은 그대로 땅을 박차고 점프했다.
탁! 탁!
무릎과 허리를 디디고 조종석에 앉은 제론은 눈을 빛냈다. 해치가 닫혔고, 실바가 기동했다.
우우웅!
진동과 불빛. 기간트가 기동 완료되었다는 신호였다. 제론의 붉은 실바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격납고에서 나온 붉은 실바는 체른산을 향해 이동했다.
처음에는 걸었지만 점점 걸음이 빨라지더니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소란에 병사와 장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리고 붉은 실바가 달리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허둥지둥
사령관에게 보고하기 위해 뛰어 들어갔다.

카이트는 점점 버거워졌다. 카이트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카이트의 동료들은 그렇지 않았다.
벨룸 왕국의 몰레스는 출력이 1.8 이다. 크라테르보다도 0.1 이 높다. 한데 레늄 왕국측은 크라테르보다
카타락타가 훨씬 많았다. 카타락트의 출력은 고작 1.2, 차이가 너무 심했다.
게다가 실력도 달랐다. 벨룸 왕국에서 온 라이더들은 다들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벨룸 왕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상급 라이더들만 있었으니 차이가 더 컸다.
처음에는 카이트의 압도적인 실력으로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굳건했던 방어진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카이트의 마음이 알게 모르게 조급해졌다. 그리고 그 조급함이 금세 결과로 나타났다.
콰과광!
“크윽!”
카이트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근처에 있던 몰레스 한 기가 거의 주저앉다시피 해서 다가와 다리를 후려친
것이다.
평소라면 알아차리고 대처를 했을 것이다. 사실 그 행동 자체가 벨룸 왕국 측에서 건 모험이었다. 카이트가
냉정히 판단하고 대처했으면 상황을 약간이나마 반전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벨룸 왕국의 리더가 카이트의 조급함을 아주 정확히 찔렀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은 카이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 때문에 만들어진 빈틈으로 몰레스 2 기가 들어와
카이트 양옆을 지키고 있던 두 크라테르를 덮쳤다.
콰쾅! 쾅!
굉음과 함께 싸움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리고 방어진의 균열이 더욱 커졌다.
‘내 실수다!’
카이트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꽝! 꽝! 꽝!
온 힘을 다했다. 크라테르와 동화된 카이트의 몸에 충격이 누적되었다. 하지만 카이트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크라테르 2 기가 막힌 상황이고, 몰레스 2 기가 카이트를 덮쳤다.
그리고 나머지 10 기의 카타락타를 몰레스 8 기가 상대하는 형국이 되었다. 방어진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간 2 기의
몰레스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10 기의 카타락타는 정신없이 밀렸다. 순식간에 방어진이 와해되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카타락타들이 무너지려
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카타락타가 단 한 기라도 무너지면, 연쇄적으로 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었다.
아무리 카이트라도 몰레스 3 기가 붙으면 거의 버티지 못한다.
사실 지금도 버거웠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아마 이 싸움이 끝나고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한동안 기간트를 타지
못할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온몸에 누적된 충격이 뇌를 흔들었다. 카이트는 점점 멀어져 가는 의식 너머로 문득 제론이
떠올랐다.
‘그놈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제론의 실력은 카이트가 가장 잘 안다. 최근에는 그래도 비교적 대등한 싸움을 이어 갔다고 하지만, 그건 그동안
카이트가 실전에서 쌓은 임기응변 덕분이었다.
제론의 센스는 카이트가 결코 따라갈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또한 동화율이 얼마인지 파악조차 안 된다.
그렇게 제론을 떠올리며 정신을 잃으려는 카이트의 귓가로 거친 소리가 울렸다.
쿵쿵쿵쿵쿵!
누군가 기간트를 타고 달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크윽!”
카이트는 혀끝을 세게 깨물었다. 짜릿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이렇게 무너져선 안 된다. 누군지
모르지만 동료가 왔다. 이대로라면 달려온 동료도 무참히 부서질 것이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카이트는 다시 힘을 내서 검을 휘둘렀다.
꽈광!
그야말로 초인적인 의지와 힘이었다. 순간적으로 동화율이 치솟으며 크라테르를 마치 자신의 몸처럼 움직였다.
몰레스 2 기가 주춤 물러나는 게 보였다. 카이트가 사납게 웃으며 그중 하나에 달려들었다.
어차피 이제는 진형이고 뭐고 의미가 없었다. 하나라도 더 적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꽈앙!
카이트가 모는 크라테르와 몰레스의 검이 부딪혔다. 거친 충격이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카이트는 물러나지
않았다.
카이트의 발이 몰레스의 허벅지를 때렸다.
꽝!
몰레스가 비틀거렸다. 그때, 뒤에 있던 몰레스가 자세를 갖추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카이트의 등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부우웅!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카이트는 아차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억지로 몸을 비틀어 돌아섰다. 몰레스의 거검이 정수리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건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붉은 덩어리 하나가 몰레스 위로 떨어졌다.
꽈아아아앙!
몰레스가 덩어리에 맞아 그대로 쓰러졌다. 휘두르던 검 역시 바닥에 떨어지며 튕겨 나갔다. 자욱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워낙 빠르게 뭔가가 떨어져 내렸기에 순간적으로 붉은 바위가 몰레스를 때린 줄 알았다.
한데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광경은 카이트의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제론?”
붉은색 실바가 몰레스의 등을 밟고 오연히 서 있었다. 그렇다면 방금 허공에서 떨어진 것이 제론의 붉은 실바란
말 아닌가!
싸움터가 정적에 휩싸였다. 마치 누군가 전설의 마법을 부려 시간을 멈춘 것 같았다.
“서, 서, 설마 점프를 했단 말이야? 실바로?”
카이트가 경악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외침이 이 광경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붉은 실바가 천천히 돌아섰다. 바닥에 쓰러진 몰레스의 등에는 검이 박혀 있었다. 정확히 조종석을 꿰뚫었다.
콰칭!
검을 뽑은 붉은 실바가 몰레스들을 슥 둘러봤다.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몰레스의 라이더들을 덮쳤다.
“꿀꺽!”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상대는 고작 실바였다. 하지만 아무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피로
온몸을 칠한 것 같았다.
붉은 실바가 걸음을 옮겼다.
쿵! 쿵!
그리고 그대로 속도를 올리며 달렸다.
쿵쿵쿵!
다섯 걸음을 달려 추진력을 얻은 붉은 실바가 땅을 강하게 박찼다.
꽈앙!
붉은 실바가 허공에 떠올랐다. 정말로 점프를 한 것이다.
꽈과광!
붉은 실바의 발이 거의 무방비로 서 있던 몰레스의 가슴을 때렸다. 점프에서 떨어지며 때렸기에 그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흙먼지가 일었고, 다시 걷혔다. 붉은 검에 조종석을 꿰인 몰레스와 그 옆에 오연히 서 있는 핏빛 실바가 보였다.
휘이잉!
한 줄기 바람이 전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몰레스를 탄 라이더들의 귓가에 스산하게 울렸다. 그리고 카이트를 비롯한 레늄 왕국 라이더들의
가슴에 뜨겁게 스며들었다.

<2 권에서 계속>

2권

Chapter 1 제론의 실력

쿵! 쿵! 쿵! 쿵! 쿵!
기간트들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잠깐 뒤엉켜 있긴 했지만 서로 떨어져 동료들과 진형을 맞춰 자리를 잡고
견제를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피처럼 붉은 실바가 있었다.
붉은 실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몰레스 한 기를 쳐다봤다. 몰레스들의 리더였다.
제론이 그를 다음 타깃으로 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리더인 것처럼 보여서가 아니라 그의 실력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제론의 날카로운 감각은 적군과 아군의 모든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통해 대략적인 실력을
파악했다.
그동안 매번 하던 일이니 어려울 건 없었다. 다만 이런 실전에서도 그 능력을 얼마나 잘 발휘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데, 제론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쿵!
붉은 실바가 발을 구르며 몸을 날렸다, 거의 점프에 가까운 동작이기에 다른 기간트들은 붉은 실바의 움직임에
제대로 대응하지를 못했다.
기간트는 그냥 사람이 움직이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그렇기에 그 대처도 사람과는 달랐다.
갑자기 기간트가 그동안 전혀 하지 않았던 동작을 하니, 그 대응이 간단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훈련도
아니고 실전인데 말이다.
쿵쿵쿵!
제론이 몸을 날려 얻은 추진력을 등에 업고 빠르게 달렸다. 이곳에 있는 그 어떤 기간트보다 빨랐다.
꽈앙!
붉은 기간트가 강하게 땅을 박차고 앞으로 뻗어 나갔다. 점프를 위로 하지 않고 앞으로 한 것이다.
어찌나 빨랐는지 몰레스들의 리더는 그저 손을 들어 올리는 것 외에 어떤 대처도 하지 못했다.
꽈광!
콰직!
양팔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활짝 벌어진 몸에 붉은 검이 꽂혔다. 정확히 조종석이 있는 곳이었다.
끼이익!
쿠웅!
붉은 실바가 발을 들어 몰레스를 밀고 검을 뽑았다. 몰레스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뭐하는 거냐! 놓치지 말고 잡아!”
벌써 셋이나 당했다. 아군이 아홉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대로 붉은 실바를 잡지 못하면 전혀 승산이
없었다. 붉은 실바의 움직임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쿵쿵쿵쿵!
8 기의 몰레스가 붉은 실바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실바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꽈앙!
실바가 바닥을 박차더니 뒤로 훌쩍 뛰었다.
순식간에 포위망을 벗어나 버린 실바를 몰레스들이 멍하니 쳐다봤다. 이건 사람도 아니고 대체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단 말인가.
‘실바가 가벼워서 가능한 건가?’
그렇게 생각한 몰레스 라이더들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실바의 무게는 카타락타와 비슷하다. 하면 같은 무게에
출력이 훨씬 높은 카타락타도 점프가 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가당치도 않다.
몰레스 라이더들은 등줄기를 타고 달리는 소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의 시선은 붉은 실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실바 한 기에 농락당하다가 작전이고 뭐고 다 실패하게 생겼다.
“시간이 없다! 어떻게든 저놈들을 죽여야 돼!”
몰레스 중 하나에서 거친 외침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냉정을 되찾은 카이트는 그걸 듣고 상황을 약간이나마
파악했다.
‘이놈들, 뭔가가 있다!’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이 상황을 빨리 마무리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카이트의 뇌리에 가정 하나가 번갯불처럼 번쩍 지나갔다.
“설마!”
만일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2 조는 본대로 귀환한다!”
카이트의 외침에 다들 멈칫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2 조가 본대로 귀환하면 7 기밖에 남지 않는다. 적은 아직도
아홉이나 남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남은 적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뭐하는 거야! 어서 돌아가라니까!”
카이트의 외침이 재차 터지자, 그제야 2 조가 슬그머니 움직였다. 5 기의 카타락타와 1 기의 크라테르였다.
그 모습에 몰레스들이 크게 당황했다.
“안 돼! 막아라!”
곧 본대를 공략하기 위해 벨룸 왕국군이 진격할 것이다. 하지만 적의 눈을 기본적으로 속여야 하기 때문에
압도적인 화력으로 쓸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런 작전을 짠 것이고 말이다.
한데 이런 와중에 6 기나 되는 기간트가 기지로 돌아간다면 벨룸 왕국의 본대가 임무를 성공할 확률이 훨씬
낮아진다.
쿵쿵쿵쿵쿵!
몰레스들이 일제히 달렸다.
“막아!”
카이트가 외치며 앞으로 몸을 숙였다. 자신이 최소한 2 기는 맡아야 한다. 그렇게 준비하며 옆을 힐끗 바라봤다.
붉은 실바가 눈을 빛내며 굳건히 서 있었다. 덩치는 작지만, 그 누구보다 듬직했다.
쿵쿵! 꽈앙!
붉은 실바가 먼저 내달리며 점프했다. 놀라웠다. 그 무거운 몸체를 훌쩍 띄우는데 자그마치 몰레스의 가슴
어림까지 올라갔다.
가장 앞에서 달려가던 몰레스는 이런 갑작스러운 붉은 실바의 움직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꽈광!
붉은 실바가 허공에서 두 번이나 양다리를 휘저었다. 그리고 그 다리에 몰레스 2 기의 목이 걸렸다.
달려오던 힘이 비틀어지며 사선으로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쿠과과과과광!
2 기의 몰레스가 넘어지며 참상이 벌어졌다. 가장 앞에서 달리던 2 기가 쓰러지는 바람에 뒤에 따라오던 몰레스 중
4 기가 한데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기간트는 거대하고 무겁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바닥을 구르면 다시 균형을 잡고 일어나는 게 쉽지 않다. 최소
카이트 정도 되는 베테랑 라이더는 되어야 구르는 와중에 균형을 잡고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꽝!
붉은 실바는 조금도 균형을 잃지 않고 바닥에 착지했다. 쓰러진 몰레스들 사이에 서서 검을 뽑은 실바는 근처에
있는 몰레스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콰직!
조종석이 꿰뚫리고 피가 튀었다. 붉은 실바는 기계적으로 다음 몰레스로 다가가 같은 일을 반복했다.
콰직!
그제야 남은 몰레스들이 정신을 차리고 실바에게 달려들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붉은
실바도 도망갈 틈이 없었다.
만일 이 자리에 제론 혼자 있었다면 여기서 모든 상황은 끝났을 것이다. 제론은 제법 지쳐 있었고, 또 이렇게
적들이 다수로 몰려드는 상황을 피하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제론은 혼자가 아니었다.
쿵쿵쿵!
꽈앙!
어느새 다가온 카이트와 동료들이 몰레스들의 진로를 몸으로 막았다. 그리고 검을 뽑아 싸움을 시작했다.
꽝! 꽝! 꽝! 꽝!
적도 7 기, 아군도 7 기였다. 하지만 기체의 차이로 인해 조금씩 밀리는 형국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붉은 실바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실바가 움직이는 순간이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시점이 될 것이다.
그 사실을 모두 알기에 몰레스들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또한 카이트도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았다.

제론은 거의 탈진에 가까운 상태였다. 사실 웬만한 라이더들은 여기까지 달려온 것만으로도 완전히 지쳤을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보통 라이더들과는 달랐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오른 기간틱 나이트였다.
그래서 더 무리를 했다. 카이트가 위기에 빠진 걸 보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점프를 했다.
점프를 한 번 할 때마다 몸에 무리가 쌓였다. 하지만 그 힘을 이용하면 적을 효과적으로 분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파탄이 찾아왔다.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그것을 참아 냈다.
아랫배에 뭉쳐 있던 마나가 혈관을 타고 움직였다. 그렇게 온몸으로 흩어진 마나가 몸에 조금씩 기력을 찾아
주었다.
위이잉!
심장의 마나링이 가속했다. 그렇게 온몸에 흩어진 마나를 끌어들이더니 한데 뭉쳤다. 그리고 그것을 폭발시켜
버렸다.
화아아악!
제론은 청량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실바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서 뭔가가 울컥 솟아났다. 제론의 시선이 동료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지나갔다.
금방이라도 다들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도 죽지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제론은 다시 아랫배에 단단히 뭉치는 마나를 느끼며 천천히 몸을, 아니, 기간트를 움직였다.
키이이잉!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붉은 실바가 움직였다.
쿠웅!
붉은 실바가 한 걸음 걸었다. 그 육중한 울림이 전장에 퍼지며 순간적으로 싸움을 소강상태로 만들었다.
경악에 찬 몰레스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신뢰가 묻어나는 카이트의 시선도 느껴졌다.
붉은 실바가 몰레스 중 하나를 노리고 달려갔다.
쿵쿵!
꽈앙!
비스듬하게 점프한 붉은 실바의 발이 몰레스의 가슴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쿠과광!
콰직!
몰레스가 쓰러지며 정확히 조종석에 검이 꽂혔다. 눈앞에서 지켜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이런 움직임을 보이려면 최소한 발굴형 기간트 중에서도 상급 기체라고 인정받는 아우틈이나 히엠스 정도는 되어야
한다.
한데 고작 실바로 어떻게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단 말인가. 아니, 설사 그런 상급 기체를 타고 있다 하더라도
기간트가 점프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이곳에 있는 라이더들 중 기간트가 점프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럴 수도 있더라
하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한데 고작 실바가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쿠오오오오!
붉은 검이 바람을 찢으며 옆에 서 있던 몰레스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후웅!
몰레스는 간신히 그 검을 피했다. 그리고 라이더는 식은땀을 흘렸다. 너무 빨랐다. 대응이 어려울 정도였다.
마치 베테랑 라이더가 모는 발굴형 기간트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꽝! 꽝! 꽝!
붉은 실바와 몰레스 2 기의 검이 연달아 부딪쳤다. 놀랍게도 2 개의 검을 동시에 쳐 내면서도 여유가 넘쳤다.
붉은 실바가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몰레스들보다 훨씬 빨랐다.
붉은 실바가 몰레스 2 기를 맡는 동안 카이트가 동료들을 이끌고 나머지 몰레스들을 몰아붙였다.
안 그래도 수적으로 불리했는데, 붉은 실바가 하나를 부수고 2 기를 동시에 맡으니 그 불리함이 너무 커졌다.
고작 4 기의 몰레스로 5 기의 카타락타와 2 기의 크라테르를 상대하는 건 너무나 버거웠다. 더구나 크라테르 중
하나는 카이트가 몬다.
비록 카이트가 너무 지치고 충격이 누적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다. 원래부터 몰레스 2 기를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는 라이더였다. 당연히 그 실력이 크게 빛을 발했다.
꽈앙! 꽈앙!
콰직!
카이트의 활약으로 몰레스가 하나씩 쓰러졌다. 그리고 조종석이 꿰뚫리며 빛을 잃었다.
모든 몰레스가 바닥에 눕는 데 30 분이 걸렸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때에 제론이 상대하던 몰레스 2 기도 빛을
잃었다.
제론은 이번 실전을 통해 제국 기사 검술을 기간트로 펼치는 게 가능해졌다.
“후욱, 후욱. 제론, 괜찮나?”
“예.”
“그럼 조금 쉬었다가 기지로 복귀하자. 아무래도 네가 먼저 이동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하죠.”
제론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게 격렬하게 움직였는데도 멀쩡했다. 아무래도 조금 전 마나가 폭발적으로
온몸을 훑을 때 뭔가 변화가 생긴 모양이었다.
“어쩌면 지금 기지가 공격받고 있을지도 몰라.”
카이트의 말에 제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제야 제론도 지금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아, 그럼 그게……!’
이곳에 달려오기 전 느꼈던 불안감의 정체가 어쩌면 기지가 공격당할 위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론 근처에 있던 기간트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라이더들을 토해 냈다. 소환을 해제한 것이다. 카이트도
마찬가지였다.
기간트를 타고 있는 자체로 체력을 계속 깎아 먹는다. 쉴 때는 이렇게 기간트에서 내리는 편이 나았다.
그 모습을 본 제론이 카이트에게 말했다.
“전 기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분위기를 보면 큰 위험이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네가 가면 큰 도움이 되겠지. 가 봐라. 대신 조심해라. 기간트도
멀쩡하지 않아 보이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제론은 기간트에 탄 채로 가슴에 주먹을 올려 군례를 취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서둘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쿵쿵쿵쿵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제론의 붉은 실바가 멀어져 갔다.
카이트와 동료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쓰러진 몰레스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전리품들이었다.
군대라는 특성상 이 기간트들을 이용해 큰 이득을 취할 수는 없겠지만, 제대로 공을 세운 셈이니 상금을 받고
진급하는 정도는 충분할 것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몸과 마음을 다스렸다. 일단 후들거리는 다리만 진정되면
바로 기지로 돌아갈 것이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곳에는 그저 숨소리만 가득했다.

기지에 도착한 제론은 표정이 굳었다. 기지 곳곳이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간트들이 싸우는 게 분명했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서둘러 달려가서 도와야 했다.
“후우욱!”
제론은 일단 숨을 길게 쉬어 기력을 회복했다. 호흡과 함께 아랫배의 마나가 불길처럼 일어나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제론은 정말 신기할 정도로 피로가 싹 사라진 걸 느끼고는 다시 달렸다.
쿵쿵쿵쿵쿵!
붉은 실바가 그 어떤 기간트보다 빠른 속도로 기지를 가로질렀다.

양 진영의 싸움은 팽팽했다.


사실 벨룸 왕국의 계획대로만 되었다면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상황이 되었겠지만, 계획이 실패하는 바람에
접전이 되었다.
제론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봤다.
벨룸 왕국도 주력 기체는 카타락타였다. 그리고 간간이 몰레스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레늄 왕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카타락타였고, 벨룸 왕국과 비슷한 수의 크라테르가 있었다.
‘당황했군.’
제론은 냉정하게 전황을 파악했다. 벨룸 왕국 측은 동요하고 있었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동요했다.
그렇기에 전황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전력을 분석하면 벨룸 왕국 측이 약간 더 높았다. 게다가 기습이었을 게 분명하니 레늄 왕국이 밀려야
정상이다.
‘이 동요가 끝나면 돌이킬 수 없다.’
지금이야 동요로 인해 우왕좌왕하고 있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훨씬 조직적으로 밀고 들어올 것이다.
기간트 간의 싸움은 비교적 단순하다. 더구나 이렇게 양측이 제대로 된 진형을 이루고 있을 때는 더 단순해진다.
콰앙! 콰앙! 콰앙!
기간트들이 서로의 검을 마구 휘둘렀다. 검으로 검을 막고 적을 내리치는 행위를 반복했다.
기간트 자체가 워낙 크고 무겁기 때문에 움직임이 크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런 집단전의 경우 기량이 크게 차이
나거나 기체의 차이가 크지 않으면 상대를 압도하기 어려웠다.
벌써 수십 기의 기간트가 부서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기간트의 잔해가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발에
걸리거나 해서 균형을 잃으면 진형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제론은 더 기다리지 않았다. 적의 진형을 크게 한번 흔들어 줘야 한다.
쿵쿵쿵쿵!
붉은 실바가 빠르게 달렸다. 굉음이 퍼져 나갔다. 하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더 큰 소리가
전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꽈앙!
붉은 실바가 높이 뛰어올랐다. 지금까지 중 가장 높은 점프였다. 마치 하늘을 나는 듯했다.
점프를 할 때 터진 굉음이 어찌나 컸는지 몇몇 기간트들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당황했다.
붉은 실바가 하늘을 날아 벨룸 왕국 진영에 떨어지고 있었다.
꽈아아앙!
벨룸 왕국의 몰레스 하나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어깨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실바의 발이 어깨를 부순 것이다.
콰직!
붉은 실바의 검이 유유히 조종석을 꿰뚫었다.
제론은 지금까지 같은 패턴으로 적을 상대했다. 점프해서 발로 내려찍은 뒤, 쓰러진 기간트의 라이더를 죽이는
방식이었다.
이는 제론의 균형 감각이 지나칠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점프를 해서 내려찍으면 제론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균형이 흔들리는 게 당연했다.
한데 제론은 그 와중에 조금도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고 정확히 조종석을 꿰뚫어 버리니 보는 사람들이 질릴
지경이었다.
벨룸 왕국 진영 한가운데에 선 제론이 검을 크게 휘두르며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콰과과과광!
몇몇은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았고, 몇몇은 검을 허용했다. 하지만 검을 허용한 기간트들도 크게 부서지지 않았다.
그저 검을 맞아 장갑이 살짝 찌그러지거나 상처가 난 정도였다.
“잡아!”
누군가가 외쳤다.
제론 근방에 있던 기간트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틈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7 개나 되는 손이 다가오는 걸 보며 그중 하나를
향해 몸을 던졌다.
콰득!
붉은 실바가 카타락타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팔을 확 당기며 몸을 회전시켰다.
카타락타와 붉은 실바의 자리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다들 당황했지만 뻗던 손을 회수하지 못했다.
콰자자자작!
카타락타의 몸체에 6 개의 손이 틀어박혔다. 원래는 잡으려 했지만 카타락타가 빠르게 다가가는 바람에 다들 손을
몸에 박아 넣은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카타락타가 비틀거렸다.
그리고 제론은 그 자리를 빠져나가 옆으로 빠르게 달렸다.
쿵쿵쿵!
물론 멀리 가지 못했다. 적 진영에서 달려 봐야 또 적이 있을 뿐이다. 제론은 금세 다시 포위당했다.
쾅! 쾅!
콰직!
제론은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검격이 쏟아졌기에 그걸 모두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치명적인
것만 쳐 냈다.
벨룸 왕국의 라이더들은 붉은 실바의 위용에 기가 질렸다. 홀로 적진 한복판에 들어와 이 정도로 휘젓고 다니는
것이 고작 실바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붉은 실바가 적진을 한 번 휘저은 덕분에 레늄 왕국 측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꽈과과과광!
레늄 왕국 측 기간트들이 조직적으로 적진에 파고들었다. 벨룸 왕국 측에서는 일단 진형이 흔들린 이상, 단단한
진형을 이뤄 밀고 들어오는 적들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콰앙! 콰앙! 콰앙!
벨룸 왕국의 카타락타들이 속절없이 부서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몰레스는 좀 나았지만 그래도 무사하지 못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장갑이 떨어져 나갔다.
“밀어붙여라! 쉬지 마!”
사령관의 외침에 레늄 왕국 라이더들이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진형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마음은
조급해졌다.
전투의 흐름을 단번에 뒤엎어 버린 붉은 실바가 절체절명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잃을 수는 없었다.
꽈과과과광!
여기저기서 굉음이 울렸고, 기간트의 잔해가 날아다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전쟁에서는 승리하겠지만
더욱 압도적으로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이대로 가면 붉은 실바는, 아니, 붉은 실바의 라이더인 제론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급박한 상황이 되었을 때, 7 기의 기간트가 나타났다.
“가서 제론을 구해라!”
카이트였다. 그리고 카이트와 함께 체른산으로 갔던 기간트들이었다.
무려 크라테르가 2 기였고, 카타락타가 5 기나 되었다. 그들은 그대로 붉은 실바를 향해 돌진했다.
꽈과과과광!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냥 어깨로 상대를 들이받았다. 상대도 충분히 방비를 했지만 그 충격을 모두
해소하지는 못했다.
카이트는 그동안 늘어난 실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곧장 균형을 되찾고 검을 휘둘렀다.
꽝! 꽝! 꽝! 꽝!
카이트와 동료들의 난입은 벨룸 왕국 측 기간트의 진형을 더욱 크게 무너뜨렸다.
그리고 사령관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밀어 버려! 진형을 무시하고 다들 부숴 버려! 돌격!”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크라테르들이 먼저 달려 나갔다.
꽝! 꽝! 꽝! 꽝!
크라테르들의 뒤를 이어 카타락타들도 우르르 몰려갔다.
난전이 되었지만, 기세를 탄 레늄 왕국군이 기가 죽은 벨룸 왕국을 완전히 압도해 버렸다.
꽈과과과광!
벨룸 왕국의 기간트들이 낙엽 떨어지듯 우수수 무너졌다. 결국 벨룸 왕국은 피눈물을 흘리며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쫓아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레늄 왕국의 기간트들이 후퇴하는 벨룸 왕국군을 쫓아가 마구 공격했다.
벨룸 왕국군은 전멸의 위기를 맞았다. 그리고 그 순간 벨룸 왕국 쪽에서 거대한 불덩이 하나가 날아왔다.
휘우우우우우!
꽈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화염이 가장 앞에서 추격하던 레늄 왕국의 기간트들을 덮쳤다.
불바다가 펼쳐졌다. 기간트들은 화염에도 어느 정도 내성이 있고 방어가 되긴 하지만, 워낙 뜨거운 불이라서
곳곳이 망가졌다. 다행히 라이더들에게는 큰 피해가 가지 않았다.
대신 더 이상 추격을 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게 그날의 전투가 끝났다.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날 전투는 긴 전쟁의 신호탄이었다.

Chapter 2 붉은 실바

체른산 전투는 즉각 왕궁으로 보고가 되었다. 레늄 왕국이 발칵 뒤집혔다.


벨룸 왕국과의 협정은 마지막 조율만 남아 있었다. 한데 그 협정이 채 이뤄지기도 전에 벨룸 왕국이 진격한
것이다. 그것도 기습으로 말이다.
레늄 왕국과 벨룸 왕국 간의 전선에는 다시금 긴장감이 차올랐다. 그리고 서로가 전력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언제
다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 곳은 당연히 체른산 방어군이었다.
비록 첫 번째 전투에서 큰 승리를 취했다 해도, 그래 봐야 국지전이었다.
체른산 방어군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는 100 기도 되지 않는다. 또한 습격한 기간트 역시 그 정도 숫자였다.
벨룸 왕국의 습격 규모가 작았던 이유는 기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쟁이 소강상태고, 마지막 협정을 남겨
두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정보전은 멈추지 않았다.
적군의 기간트가 대대적으로 이동하면 그 경로를 파악하는 게 당연했다. 최대한 정보에 걸리지 않고 공격해
체른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들도 허를 찌르는 작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레늄 왕국은 벨룸 왕국의 병력이 체른산 방면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왕궁은 귀족들을 소집해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체른산 방어군의 병력을 확충하고 대체 벨룸 왕국이 무엇을
노리는지 조사했다.
왕국 전역이 들썩였다. 전쟁이 확대되면 다들 힘들어진다. 또한 새로운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병력과 물자가 이동하니, 상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또한 과도한 긴장감이 사람들을 바짝 조였다.
벨룸 왕국의 습격이 있은 지 열흘째 되던 날, 대대적인 병력이 체른산 방어군 진지에 도착했다.
전쟁의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 ☆ ☆

“여어! 몸은 좀 어때?”
제론은 새하얀 침대에 누운 채 의무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카이트를 비롯한 라이더들이었다.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긴. 온몸에 타박상을 입고, 인대도 늘어나고, 내상도 입었다면서? 그게 나쁘지 않은 거면 나쁜 건
대체 어떤 건데?”
카이트가 타박하듯 말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말투 곳곳에 제론에 대한 고마움과 걱정이 묻어 있었다.
카이트뿐 아니라, 함께 병문안 온 다른 라이더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카이트가 아니었다면 아마 다 죽었을
것이다.
제론은 지난 전투가 끝나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적 기간트들 사이에서 그렇게 심한 공격을 무수히 당하면서도
조종석을 지킨 덕분에 목숨은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 충격으로 붉은 실바는 처참하게 망가졌고, 제론은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적이 물러간 뒤, 카이트가 나서서 해치를 뜯어내지 않았다면 제론은 실바 안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서 정말 다행이야.”
카이트의 말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카이트가 찾아왔기에 치료사들로부터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했다.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습니까?”
“오늘이 딱 열흘째. 어때? 이제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깨닫겠어?”
제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열흘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니, 상태가 심각하긴 정말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마나는?’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마나였다. 만일 이번 일로 마나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면 큰일이었다.
제론은 즉시 마나를 점검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뭐지? 이 어마어마한 마나는?’
아랫배의 마나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전과 비교하면 3 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제론은 마나 호흡의 필요성을 느꼈다. 아랫배의 마나가 많긴 하지만 제대로 정제되지 않아 너무나 거칠었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카이트가 제론의 표정을 보고 딱딱하게 굳어진 안색으로 물었다. 혹시라도 제론이 잘못될까 봐 엄청나게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약간의 변화도 심상치 않게 느껴진 것이다.
제론은 카이트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서둘러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약간 피곤해서요.”
“아, 그래? 그럼 쉬어야지. 나중에 다시 올 테니까 푹 쉬어 두라고.”
카이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동료들을 재촉해서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갔다.
제론은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침대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나 호흡을 시작했다.
터질 것 같았던 아랫배가 점점 진정되었다. 거친 마나가 정제되어 순수하게 변했다. 그리고 아랫배에 차곡차곡
쌓였다.
더불어 남은 마나가 온몸을 휘돌아 심장에 안착했다. 심장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5 개의 마나링이 그 마나를
날름날름 삼켰다.
심장의 마나링도 빵빵해졌다. 아마 이대로 가면 조만간 마나링 하나가 더 만들어질 것 같았다. 물론 6 개째의
마나링은 그저 마나가 많다고 생기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마나 호흡을 완전히 끝낸 제론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에 충만한 힘이 느껴졌다. 근육의 타박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손상을 입은 곳 역시 상당히 호전되었다.
‘마나라는 건 정말 대단해.’
그저 몸속을 한 번 휘돌았을 뿐인데 자잘한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았다. 아마 마나를 이용해 본격적으로 치료하면
훨씬 더 효과가 클 것이다.
‘그리고 이럴 때 마법이 필요하지.’
제론은 심장을 휘도는 빵빵한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5 개의 마나링이 주변의 마나를 세밀히 조작해 마법진 하나를
만들어 냈다.
제론의 손바닥 위로 푸른빛을 발하는 마법진이 떠올랐다.
“힐링!”
마법진이 산산이 흩어지며 제론의 몸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제론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온몸을 휘도는 청량감을
만끽했다.
나머지 상처가 크게 호전되었다. 당장 움직여도 괜찮을 정도로 몸이 나아진 것이다.
제론은 침대에 앉은 채로 심장의 마나를 가속시켰다. 마나의 실이 풀어져 나와 제론의 손끝에 맺혔다. 그것을
다뤄 마법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초고대 문명에서 쓰던 마법은 심장의 마나링을 이용해 마나로 이루어진 마법진을 그려 마법을 발현한다.
현대의 마법처럼 마나 스톤으로 만들어진 스틱을 이용해 미리 그려진 마법진을 활성화시키거나, 주문을 통해
마나를 배열하는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초고대 문명의 마법은 심장의 마나에서 풀려 나온 마나의 실을 얼마나 세밀하게 다룰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틈날 때마다 연습을 해 주어야만 했다.
실바를 만들면서 마나의 실을 다루는 능력이 엄청나게 발전했다. 제론은 이제 슬슬 여섯 번째 링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다.
한동안 마나링을 통해 마나 컨트롤을 연습하던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다.
자신의 기간트인 붉은 실바도 마음에 걸렸고 말이다.
“사람이 늘었군.”
사람만 늘어난 게 아니라 기간트도 늘어났다. 병력이 대대적으로 확충된 것이다. 아직 더 알아봐야겠지만 전쟁이
다시 시작된 게 분명했다.
제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곳 체른산이 앞으로 가장 격전지가 될 것 같았다.
‘대체 왜 여기지?’
제론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이번에 벨룸 왕국이 이곳을 기습한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들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이곳을 집어삼키려고
했다.
어쩌면 더 이상 전쟁을 확대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하는 게 뭐지?’
만일 그렇다면 원하는 게 무엇일까? 제론의 뇌리에 체른산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 크지도 높지도 않아 기지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제론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체른산이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거기 뭔가가 있나?’
제론은 이내 생각을 접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체른산에 뭐가 있는지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제론의
뇌리에 다시금 붉은 실바에 대한 생각이 꽉 차올랐다.

격납고에 들어간 제론은 한가운데에 서 있는 실바를 보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긴
했지만, 멀쩡했다.
“벌써 수리가 끝난 건가?”
“그래도 마나 코어가 멀쩡해서 비교적 수리가 쉬웠습니다.”
제론은 고개를 돌려 다가온 수석 엔지니어를 쳐다봤다. 수석 엔지니어는 빙긋 웃으며 제론 옆에 섰다. 그리고
함께 실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걸 혼자 조립했다니, 난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군요. 수리를 하면서 보니 일반적인 실바와는 약간 다르던데,
일부러 그렇게 한 겁니까?”
“어떤 점이 달랐습니까?”
제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일부러 지은 표정이었다. 자신이 실바를 조립한 것은 최대한
운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어야 했다.
“글쎄,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군요.”
수석 엔지니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보기엔 다른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한데 뭔가 미묘하게 느낌이 다르거든요.”
“다른 엔지니어들도 다 같은 느낌이라고 하던가요?”
그 질문에 수석 엔지니어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제론은 그제야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석 엔지니어만 그렇게 느낀 것이다.
‘날 떠보려고 한 말이었군.’
확신은 못 가지겠고, 뭔가 있긴 한 것 같아서 은근슬쩍 말을 흘려 본 것이다.
수석 엔지니어는 제론과 몇 마디를 더 하다가 더 얻을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돌아갔다.
제론은 실바로 다가가 칠이 벗겨진 부분을 살폈다. 실바 앞에 사다리가 달린 발판이 있기에 높은 곳도 확인이
가능했다.
제론은 발판에 올라 실바를 좀 더 자세히 살폈다. 부서졌다가 다시 고친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폈다.
‘망가진 부품들은 어떻게 처리한 거지?’
그 부품들에 새긴 마법진은 사실 원래의 마법진과 조금 다르다. 물론 겉으로 보면 알 수 없다. 직접 마나를
주입해 마법진을 활성화시켜야 감춰진 선들이 나타난다.
부품이 망가졌다는 것은 마법진도 망가졌다는 뜻이기에 큰 염려는 없지만, 그래도 그 마법진들이 마법사들의 눈에
띈다면 상당한 곤란을 겪을 수도 있었다.
제론은 사다리를 이용해 조종석에 올라탔다. 평소처럼 뛰어서 탈 수도 있었지만, 굳이 무리하지 않았다. 아직
몸이 완전치 않았다.
지이이잉!
해치가 닫히고, 실바의 눈이 번쩍였다.
제론은 실바를 움직여 격납고를 나섰다. 남들이 보기에는 시험 기동을 한다고 여기겠지만, 사실 그게 아니라 새
부품의 마법진을 손보기 위함이었다.
쿵! 쿵! 쿵! 쿵!
제론의 실바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실바에 아공간 기능이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쿵쿵쿵쿵!
실바가 뛰기 시작했다. 일단 달리기 시작하자 금세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론은 실바를 타고 체른산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산에 들어가면 좀 더 은밀한 곳을 찾을 수 있었고, 또 체른산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둘러보고 싶기도
했다.
체른산에 도착한 제론은 제법 많은 사람과 기간트가 돌아다니는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왜 여기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거야?’
이곳에서 있었던 전투의 흔적은 거의 정리되어 있었다. 노획한 적 기간트들은 모두 엔지니어의 공방에 이동되었고,
전투로 인해 망가진 도로도 대충 복구되었다.
벌써 열흘이나 지났으니 당연했다. 기간트를 이용하면 그런 일은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사람이 많다는 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그것이 이번에 벨룸 왕국이
이곳을 공격한 이유라고 판단했다.
‘역시 체른산에 뭔가가 있었군.’
레늄 왕국 측에서도 정보를 입수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저렇게 수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 아니겠는가.
제론은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원래는 한적한 곳에서 차분히 새롭게 간 부품을 손보려 했다. 바꿔야
할 마법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물론 한 번 해 본 일이니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아서야 그것도
불가능했다.
제론이 망설이는 사이 기간트 한 기가 다가왔다. 크라테르였다. 기간트의 어깨에 그려진 문양을 보니 군부 소속이
아니었다.
‘근위 기사단의 문양이로군.’
근위 기사단이 이곳에 왔다는 건, 왕궁에서 이곳에 관심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소속과 이름을 밝혀라.”
근위 기사의 어조에는 권위가 잔뜩 묻어났다.
제론은 어조나 태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근위 기사단에 오래 있다 보면 지극히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었다.
“체른산 방어군 기갑 부대 소속 제론입니다.”
만일 제론이 제대를 해서 작위를 받으면 아무리 근위 기사라 하더라도 이런 태도를 보여선 안 된다. 하지만
제론은 아직 아무런 작위가 없는 일개 라이더일 뿐이었다.
“제론?”
근위 기사는 익숙한 이름에 멈칫하더니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금세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라이더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물론 그에게 그 사실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여기는 무슨 일인가?”
“기간트 점검과 기동 훈련을 겸해 왔습니다.”
“이곳은 출입이 금지되었으니 돌아가도록.”
근위 기사의 태도는 시종일관 고압적이었다. 제론은 가만히 서서 근위 기사가 탄 크라테르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진 광경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았다.
수많은 사람과 기간트가 움직이고 있었다. 제론은 그들이 체른산에서 뭔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적이라도 찾는 건가?’
그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체른산에 고대 유적이 있었던 것이다. 벨룸 왕국은 그 유적을 차지하기 위해 기습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뭔가 석연치가 않아.’
고작 유적 하나를 차지하려고 그런 모험을 감행했다니, 믿기 어려웠다.
유적에서 각종 유물과 고대 마법 아티팩트를 얻을 수 있다지만, 또 고대에 만들어진 발굴형 기간트가 있을 확률도
있지만, 고작 그런 걸로 전쟁을 다시 벌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득보다 실이 훨씬 많았다.
제론은 그들의 모습을 확실히 눈에 담은 뒤 돌아섰다. 어차피 이곳에 이렇게 사람이 많다면 다른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아직 실바의 관절을 비롯해 곳곳의 움직임이 삐걱거렸다. 제대로 조율도 해야 하고, 마법진도 고쳐야 했다.
제론은 날카로운 근위 기사의 기세를 등 뒤로 느끼며 느긋하게 걸어갔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제론이 너무 천천히 움직여 근위 기사도 짜증이 났다. 그는 뭐라고 한마디 소리치려다가 참았다. 괜한 분란을
일으켜선 안 된다.
‘어차피 조만간 이곳 군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
근위 기사는 그렇게 짜증을 삼키며 멀어져 가는 제론의 등을 바라봤다.

결국 제론이 찾아간 곳은 처음 실바를 조립했던 예비 창고였다.


예비 창고를 지키는 병사가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기간트를 손보는 것은 창고 안에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론은 서둘러 창고 문을 닫고 기간트에서 내렸다. 손봐야 할 부품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어쩌면 오늘 중으로
다 끝내지 못할지도 몰랐다.
일단 발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한 제론은 차분히 심장의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제론의 손가락 끝에 새파란 마나가
맺혔다.
그냥 마법을 쓰는 게 아니라 마법진을 손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마나를 직접 몸에서 끌어내야만 했다.
제론은 아공간을 열어 남은 포로스 중 일부를 꺼냈다. 포로스는 예전에 잔뜩 구했다. 망가진 마나 코어로부터
나온 진흙은 그냥 쓰레기였기에 사방에 버려지고 방치된다.
제론은 그것을 샅샅이 뒤져서 모았다. 그 진흙은 테페룸의 가공물이다. 당연히 특별한 마나 파장을 방출했고,
그것만 캐치하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찾아낸 진흙을 가공해 포로스를 잔뜩 만들었다.
제론은 포로스에 마나를 주입했다. 포로스가 젤리처럼 뭉클거렸다. 마나의 흐름에 따라 포로스가 조금씩 떨어져
나가 기간트의 발로 스며들었다.
뇌리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제론은 놀라울 정도로 급성장한 자신의 감각에 살짝
놀랐지만 이내 평정을 찾고 작업에 집중했다.
포로스가 투명하게 변하며 마법진에 보이지 않는 선 몇 개를 그렸다.
제론은 자신의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높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나를 이용해 포로스를 마법진에 입히는 것이
마음먹은 순간 뚝딱 이루어졌다.
마치 눈앞에 그려진 마법진에 펜으로 선을 찍찍 긋는 것처럼 간단했다.
제론은 이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더 많은 마나를 다뤄 보고 싶었다. 서둘러 포로스에 마나를 주입했고, 다음
마법진을 개조했다.
제론은 순식간에 발에 새겨진 마법진을 손봤다. 그리고 차근차근 올라가며 다리의 마법진을 처리했고, 이어 중간
중간의 마나 로드에 포로스를 조금씩 섞는 작업을 했다.
그 모든 일을 마무리하는 데 고작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았다. 제론은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놀라울 정도였다.
‘죽음의 위기가 능력을 한 단계 올린 건가?’
그 외에는 딱히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니 조금 답답하긴 했다.
정확히 원인을 파악해야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텐데 말이다.
어쨌든 제론은 다시 실바를 끌고 격납고로 향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엔지니어들이 균형만 맞춰 주면 끝난다.
기본적인 균형은 맞췄지만, 아직 좀 더 세밀히 손을 봐야 한다. 물론 그 이후에 도색도 새로 할 것이다. 피처럼
붉게 말이다.

Chapter 3 체른산의 유적

기지가 시끌시끌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유입되었기에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사령관이 모든 병력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다뤘다면 아무 문제도 잡음도 없었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체른산에 유입된 병력은 정확히 세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가 체른산 방어군에 곧장 편입될 증원군이었다. 이들은
당연히 사령관 휘하로 들어갔다.
원래 계획된 증원이었고, 딱 여기까지만 이루어졌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체른산을 탐사하는 병력이었다. 가장 다양한 병과를 보유한 병력이기도 했다. 게다가 100 명이나 되는
마법사가 포함되었다.
문제는 그들을 지휘하는 사람이 바로 2 왕자라는 사실이었다. 왕궁에서 체른산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실이었다.
사령관은 남작이었다. 고작 남작이 왕자에게 명령을 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군의 지휘가 흔들렸다.
가장 큰 문제는 세 번째 부류였다.
그들은 2 왕자를 호위하기 위해 온 병력이었다. 근위 기사들과 근위병들이었는데, 워낙 콧대가 높고 목이
뻣뻣해서 모두의 반감을 샀다.
그들은 오직 2 왕자의 명령만 따랐다. 당연히 그들을 사령관이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근위 기사는 남작의 작위를 가진다. 기사단장이 되면 백작이 되고, 부단장만 되어도 자작의 위를 받는다. 당연히
남작인 사령관이 어쩔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으로 인해 기지는 매일이 시끄러웠다. 물론 강력한 전력이 보강되었기에 벨룸 왕국의 도발로부터는 많이
안전해졌지만 말이다.
그런 기지의 상황은 제론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일단 몸은 완벽하게 회복된 것을 넘어서서 다치기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감각도 예민해졌고, 집중력도
향상되었다.
한데 정작 기간트 훈련을 할 수가 없었다. 기간트 훈련장을 근위 기사단이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제론은 마나 호흡과 검술, 그리고 마법 수련에 매달렸다. 덕분에 빠르게 성장한 능력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창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개인 수련에 열중하던 제론은 사령관의 호출을 받고 숙소를 나섰다.
사령관실로 가는 도중, 제론은 수많은 라이더를 만났다. 그들 역시 사령관의 호출을 받고 온 것이다.
‘드디어 기간트를 본격적으로 투입하는 건가?’
2 왕자가 이끌고 온 병력에도 기간트의 수가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체른산을 몽땅 훑는 건 불가능했다.
현재 체른산 방어군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는 무려 200 기에 달한다. 벨룸 왕국이 뭘 노리는지 알기에 전력을 제법
많이 집중시켰다.
그 기간트들이 몽땅 나서면 체른산 하나 갈아엎는 건 일도 아니었다.
“너도 호출받은 모양이군.”
제론은 뒤로 다가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은 카이트를 슬쩍 쳐다봤다.
카이트는 제론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체른산을 본격적으로 뒤집을 모양인데?”
제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근데 이상하단 말이야. 아무리 유적이 있을지도 모른다지만 이렇게까지 나서는 이유가 말이야.
유적이라면 우리 왕국에도 제법 있잖아?”
유적의 가치가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전쟁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뭔가 이유가 있겠죠. 예를 들면 정말 대단한 기간트가 있거나, 아니면…….”
제론은 뒷말을 삼켰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트는 그런 제론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니면, 뭐? 뭐가 또 있는데?”
제론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기간트의 설계도가 있거나 하면 그 정도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카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계도?”
만일 고대 유적에서 그런 게 발견되면 그건 혁명이었다. 설계도가 있다면 발굴형 기간트를 양산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아니, 그 정도까지는 어렵더라도 제작형 기간트의 한계라 일컬어지는 출력 2.3 의 벽을 넘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설마…….”
카이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적에 설계도가 있는지 없는지 아직 파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억측이었다.
“서두르죠. 우리가 제일 늦은 것 같습니다.”
제론의 말에 카이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빨리했다. 두 사람은 다른 라이더들보다 조금 늦게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제론과 카이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사령관실에는 사령관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곳에는 2 왕자가 함께 있었다.
“이제 다 온 건가?”
사령관의 자리에 앉은 2 왕자가 라이더들을 쭉 둘러보며 물었다.
사령관은 그 옆에 서서 즉시 대답했다.
“다 왔습니다.”
2 왕자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한 번 라이더들을 훑어봤다. 그의 눈빛이 번득였다. 위엄이
대단했다.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왕자는 왕자였다.
“대충 짐작을 하겠지만 제군들은 앞으로 체른산에서 발굴을 도와야 한다. 우리가 찾는 건 유적이다.”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다들 짐작하던 바였다. 아니, 오히려 좀 허탈했다. 고작 유적 때문에 전쟁이 다시
일어났으니 말이다.
“이 유적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잠들어 있다. 우리의 목표는 그걸 확보하는 것이다.”
2 왕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 번 좌중을 둘러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적에 설치된 트랩이나 가디언도 보통 수준이 아닌 것 같으니 각별히 조심해라. 유적을 탐사했다고 끝이 아니다.
그걸 지켜 내는 게 훨씬 중요하다.”
2 왕자는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줬다. 그리고 벅찬 마음을 담아 말했다.
“향후 우리 레늄 왕국은 제국으로 발돋움할 것이다.”
그 말에는 다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국이라니. 대체 그 유적에 뭐가 있기에 제국 운운한단 말인가.
라이더들이 당황하자, 2 왕자가 빙긋 웃었다.
“다들 나가서 준비를 하도록. 즉시 체른산으로 간다.”
2 왕자의 명에 라이더들이 일제히 가슴에 주먹을 올려 예를 취했다. 그리고 곧장 뒤돌아 사령관실에서 나갔다.
다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밖으로 나온 카이트는 제론을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는데?”
카이트는 2 왕자의 말을 듣는 내내 정말로 놀랐다. 만일 제론의 예상대로 기간트의 설계도가 유적에 있다면 2
왕자가 한 말이 모두 설명된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런 걸 알았단 말인가. 카이트가 의문을 가득 담은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안 게 아니라 짐작한 겁니다.”
카이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유적을 찾은 사람에게 큰 공이 돌아간다는
것 말이다.
“내가 찾아내고 말겠어.”
제론은 주먹까지 쥐며 의지를 불태우는 카이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솔직히 거기까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딱 남들 하는 만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조심해야 돼.’
제론은 벨룸 왕국이 기습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공을 세우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아무리 공을 세우면 뭐 하는가. 죽으면
모든 게 끝인데.
그때는 너무 흥분했다. 앞으로 절대 흥분해선 안 된다. 항상 냉철함을 유지해야만 한다. 제론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전 격납고로 가서 실바를 끌고 가겠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아, 네 실바에는 아공간 기능이 없지?”
카이트는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탁탁 두드렸다.
“알았어. 그럼 난 먼저 갈 테니까 서둘러서 와. 너야 이미 공이 크지만, 이번에 공을 또 세우면 아마 상당한
포상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예. 금방 가겠습니다.”
카이트는 손을 흔들어 주고는 서둘러 체른산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기간트를 소환해 타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그곳으로 달려가는 라이더가 200 에 가깝다. 그들이 모두 기간트를 꺼낸다면 기지는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다들 그냥 달리는 것이다.
물론 잠시 후, 그들을 실어 나를 말과 마차가 다가왔다. 라이더들은 말과 마차에 적당히 나눠 타고 빠르게
체른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격납고에서 붉은 실바가 나왔다. 붉은 실바는 마치 사람이 달리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체른산으로 뛰어갔다.
제론은 기지의 라이더 중 가장 먼저 체른산에 도착했다.

200 기가 넘는 기간트가 체른산을 한바탕 뒤집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기간트가 움직이는데도 산 하나를 완전히 파헤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제론의 붉은 실바도 그 기간트들 사이에 있었다. 실바는 크기가 좀 작은 편이지만, 붉은색은 정말로 드물었기에
상당히 눈에 띄었다.
제론은 설렁설렁 탐색을 하고 땅을 파헤치면서 실바의 색을 바꿀까 고민했다. 아무래도 너무 눈에 띈다. 예전에는
차라리 적이 달려들면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으니 좋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안전한 게 최고다. 상대가 우르르 몰려들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다.
‘과연 도색을 새로 할 수는 있는 걸까?’
제론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이미 붉은 실바는 체른산 방어군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벨룸 왕국의 기습을 막아 낸 영웅적인 기간트가 바로 붉은 실바 아닌가. 물론 체른산 방어군에만 해당되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이 정도 공을 세우면 영웅 만들기에 들어가 상당한 포상을 받고, 왕국 차원에서 우상화를
시킨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안이 좀 특별했다. 바로 체른산의 존재 때문이었다. 체른산에 유적이 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정보가 통제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벨룸 왕국의 기습 자체가 큰 이슈로 떠오르지 않았다. 왕국 정보부에서 미리 막았기 때문이다.
또한 벨룸 왕국에서도 그 일을 소문낼 이유가 없었다. 너무나 처참한 패배였기 때문에 왕국의 명예에 흠집이 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벨룸 왕국 또한 체른산 유적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걸 원치 않았다. 조만간 그것을 다시 찾아올 거라고
믿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걸 모르는 제론은 마음 편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설렁설렁 바위를 치우고 나무를 뽑았다.
기간트의 힘이 워낙 좋아서 그렇게 대충 일하는 데도 작업 진척 속도가 무척 빨랐다.
무심코 바위 하나를 치우던 제론은 갑자기 온몸을 엄습하는 기이한 느낌에 움직임을 멈췄다.
“뭐지?”
제론은 다시 바위를 내려놨다. 그리고 느낌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쿵! 쿵! 쿵! 쿵!
다른 기간트들이 중간 중간 있었지만 누구도 제론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지금 체른산은 기간트로 넘쳐 났다.
갑자기 기간트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제론은 느낌을 따라 걸으며 의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점점 주변에 기간트가 보이지 않았다. 이곳으로는
기간트들이 오지 않는 것이다.
느낌을 따라 몇 걸음 더 걸어가던 제론은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붉은 실바가 바위를 번쩍 들어 올렸다. 엄청나게 큰 바위였는데도 별 무리 없이 들어서 옆으로 치울 수 있었다.
기간트의 키보다 더 큰 바위를 치우고 나니 커다란 동굴이 보였다. 바위가 동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굴
역시 어찌나 큰지 기간트가 똑바로 서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제론은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쿵! 쿵! 쿵!
동굴 안은 어두웠다. 하지만 기간트가 들어가자 사방에 불이 번쩍번쩍 들어왔다.
제론은 아무런 제지 없이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유적이 분명했다. 곳곳에 유물이 보였다. 각종 예술품과 보물이 보였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공간이 있으니 몽땅 담을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돈은 충분했다. 어차피 이 유적은
보고해야 한다. 그때 이상하게 보여선 안 된다.
제론은 유적 끝에서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이곳에 먼저 들어와 살핀 것은 자신이 예상했던 그것이 과연 정말로
있을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저기 있군.’
제론은 단번에 알아봤다. 모를 수가 없었다. 마치 그것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 같았다. 그것은 유적 끝
통로보다 살짝 넓은 동공 한가운데에 있었다.
예전 초고대 문명의 유적에서 각종 물품을 얻었던 기둥과 비슷한 것이 서 있었고, 그 안에 뭔가가 들어 있었다.
푸쉭!
제론은 해치를 열고 실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동공 한가운데에 있는 기둥으로 다가갔다. 확실히 비밀 유적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안에 물건이 담긴 방식도 똑같았다.
기둥 중간에 공간이 있고, 그 안에 동그란 수정구가 들어 있었다. 어린아이 머리만 했는데,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꺼냈다. 그리고 그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고대 유물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동작한다.
마나를 받아들인 수정구가 은은히 빛났다. 그리고 수정구 내부에 복잡한 문양과 글자가 나타났다. 제론은 그것이
무언가의 설계도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복사해야겠군.”
제론은 아공간에서 카드를 꺼냈다. 카드가 빛나며 수정구 안에 떠오르는 문양과 글자를 몽땅 복사해 냈다. 그렇게
카드에 담긴 설계도는 고스란히 제론의 태블릿에 저장되었다.
제론은 설계도의 복사가 끝난 뒤 수정구를 원래 자리에 놓았다. 수정구는 허공에 둥둥 뜬 채 빛을 잃어 갔다.
마치 아무도 건드린 적 없는 것처럼.
제론은 다시 실바에 올라탔다. 그리고 혹시 또 확인할 것이 있나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탐나는 것이 없었다.
쿵! 쿵! 쿵! 쿵!
제론은 미련 없이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유적 밖은 여전히 적막이 감돌았다. 아무도 이곳으로 오지 않은
것이다. 마치 유적이 사람들을 밀어내는 것 같았다.
제론의 실바에는 통신 장치도 없었기에 일단 사령관을 찾아갔다. 산을 내려가 사령관이 머무는 막사로 향하자,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른 기간트들은 산을 오르락내리락 정신이 없었는데, 실바 한 기가 어슬렁거리며 산을 내려와 사령관 막사로
향하니 눈에 띈 것이다. 더구나 피처럼 붉은 실바라서 더 시선을 끌었다.
사령관 막사 앞에는 크라테르 2 기가 서 있었다. 근위 기사였다. 막사 안에 2 왕자도 함께 있다는 뜻이었다.
크라테르가 팔을 뻗어 길을 막았다.
“멈춰라.”
위압감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근위 기사는 붉은 실바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사령관께 보고할 일이 있습니다.”
제론의 담담한 말에 근위 기사가 눈썹을 한 번 꿈틀하고는 말했다.
“내게 보고해라.”
제론은 어이가 없어 근위 기사가 탄 크라테르를 쳐다봤다. 그리고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실바의 확성관을
최대한 이용하고, 목소리에 마나까지 담았다.
“사령관님께 보고드린다고 말했을 텐데요.”
“이놈이!”
기지 전체를 울릴 듯 쩌렁쩌렁한 소리에 근위 기사가 크게 당황했다. 그래서 다급히 제론을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크라테르의 팔을 옆으로 슬쩍 피하며 손바닥으로 팔뚝을 슥
밀었다.
텅!
크라테르가 살짝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물론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제론은 그렇게 얻은 시간에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설마 사령관님의 공을 가로채려는 것입니까!”
이번에는 그 소리가 더욱 컸다. 근위 기사는 정말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근위 기사가 어느새 다시 균형을 잡고 붉은 실바를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몸을 날려 박살을 내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만!”
근위 기사가 당황한 눈으로 막사 입구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사령관과 2 왕자가 서 있었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들인가! 지금이 어떤 때인데!”
근위 기사는 사령관에게 뭐라고 큰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어차피 작위는 같다. 자신도 남작이었다. 당연히
사령관과 동급이라고 여겼다. 한데 사령관도 아니고 고작 일개 라이더에게 이런 무시를 받았으니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화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 옆에 서 있는 2 왕자 때문이었다.
사령관은 근위 기사의 크라테르와 제론의 실바를 번갈아 노려보다가 2 왕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령관이 죄송할 게 뭐 있겠나? 사람을 다루다 보면 이런 일이야 비일비재한 법 아니겠나? 자, 보고나 들어
보지. 이런 소란을 일으킬 정도면 제법 좋은 소식을 가져왔을 것 같은데 말이야.”
2 왕자는 그렇게 말하며 붉은 실바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기대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또한 약간의 분노도
섞여 있었다. 만일 별것 아닌 보고라면 반드시 이 일을 문제 삼아 불이익을 잔뜩 안겨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론은 2 왕자의 말에도 사령관을 보며 기다렸다. 그 모습에 2 왕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령관은 사령관대로
그런 제론의 모습에 크게 당황하며 다급히 말했다.
“뭘 기다리고 있나! 어서 보고하도록!”
그제야 제론이 입을 열었다.
“유적을 발견했습니다.”
제론의 말에 주변에 흐르던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혔다.
2 왕자는 반색하며 제론에게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어디 있나!”
“체른산 중턱에 있습니다.”
2 왕자는 당장이라도 그곳에 달려가고 싶어 사령관을 쳐다봤다.
“당장 가 봐야겠네. 사령관도 함께 가겠나?”
왕자가 간다는데 사령관이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물론입니다. 저도 즉시 준비를 하겠습니다.”
2 왕자는 자리를 확보한 뒤 기간트를 불러냈다. 발굴형 기간트 중에서도 상당한 출력을 자랑하는 에스타스였다.
사령관도 서둘러 기간트를 소환했다. 사령관의 기체는 크라테르였다.
에스타스에 탑승한 2 왕자는 빨리 안내하라는 듯이 제론을 바라봤다.
“뭐 하느냐! 어서 안내하지 않고!”
2 왕자의 재촉에 제론은 돌아서서 체른산으로 향했다. 제론의 뒤를 에스타스 하나와 크라테르 3 기가 뒤따랐다.

여전히 유적 입구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커다란 동굴이 크게 입을 벌리고 있고, 그 옆에 동굴을
막고 있던 바위가 서 있었다.
2 왕자는 그 모습을 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 들어가 봐야겠어.”
2 왕자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사령관이 급히 말렸다.
“안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릅니다. 인원을 더 보강해서 차근차근 파고들어야 합니다.”
사령관의 말에 2 왕자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적이 흥미롭긴 하지만, 또 이 유적에 있을 거라
예상되는 그것 때문에 욕망이 들끓었지만, 그것도 목숨이 붙어 있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었다.
유적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조사했기에 2 왕자도 고집을 세우지는 않았다.
“뭣들 하느냐! 가서 사람들을 불러오지 않고!”
2 왕자의 외침에 근위 기사들이 제론을 바라봤다. 이런 일에 자신들이 나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표정을 단번에 일그러뜨리는 말이 들려왔다.
“그 실바는 내버려 두고 너희들 중 하나가 다녀와라. 내 할 말이 있으니.”
“명을 따르겠습니다.”
근위 기사 중 하나가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나머지 하나는 2 왕자 근처에 서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2 왕자는 붉은 실바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 유적을 네가 발견했느냐?”
“그렇습니다.”
“안에 들어가 봤느냐?”
“입구 안쪽만 확인했습니다.”
제론은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 안에서 이미 설계도 하나를 얻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향후 큰 곤욕을
치를 것이다.
“하긴, 그 정도는 확인해야 유적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2 왕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유적을 향해 성큼 움직였다.
“하면 입구 안쪽까지는 아무런 장치도 없다는 뜻이겠군.”
2 왕자는 그렇게 말하며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사령관과 근위 기사가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아무리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가끔 들어갈 때마다 트랩이 달라지는 유적도 있었다. 이 유적이 그런 곳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2 왕자가 입구로 들어선 순간, 벼락이 쏟아졌다.
꽈르릉!
빠지지직!
2 왕자는 깜짝 놀라 양팔을 들어 쏟아지는 벼락을 막아 냈다. 그러나 에스타스의 능력으로도 그 벼락을 모두 막아
낼 수가 없었다.
“크으윽!”
2 왕자는 주춤주춤 유적 밖으로 물러났다. 유적 안으로 채 한 걸음도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나온 것이다.
2 왕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이……! 감히 내게 거짓을 고하다니!”
2 왕자가 제론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목을 날려 버리고 싶었다. 에스타스가 허리춤에 매달린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하지만 2 왕자는 굳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근위 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크라테르의 거검을 제론이 탄 붉은 실바의 목에 겨눴다.
“감히 왕자님께 위해를 가하다니!”
다들 난리가 났는데, 정작 제론은 멍했다. 자신이 들어갔을 때는 아무 일 없었는데, 갑자기 벼락이 쏟아지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제론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제가 들어갔을 때는 아무 일 없었습니다.”
제론의 말에 근위 기사가 호통을 쳤다.
“웃기지 마라! 네놈 눈에는 왕자님께서 어떤 일을 당하셨는지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냐! 그래! 그럼 네놈이
들어가 보면 되겠구나!”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벼락이 쏟아지면 당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까와 뭐가 달라졌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제론은 목에 겨눠진 크라테르의 검을 옆으로 치우고는 유적 입구로 향했다.
쿵! 쿵! 쿵! 쿵!
제론의 행동에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지켜봤다. 심지어 2 왕자까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제론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제론이 유적 입구에 들어섰다. 벼락은 더 이상 쏟아지지 않았다. 제론은 확실히 하려는 듯 안으로 세 걸음 더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벼락은 치지 않았다.
제론이 돌아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2 왕자와 근위 기사, 그리고 사령관을 쳐다봤다.
“보시다시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만.”
2 왕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치욕적이었다. 마치 유적이 왕자인 자신을 내팽개치고, 저 붉은 실바만
받아들인 것 같아 화가 치밀었다.
화가 난 왕자 옆에 서 있던 사령관이 말했다.
“아무래도 트랩이 바뀌는 구조의 유적인 듯합니다. 드물긴 하지만 보관하는 물건의 중요도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령관의 말에 2 왕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말인즉슨, 이 유적 안에 정말로 중요한 물건이 보관되어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 그렇군. 그래서…….”
2 왕자는 억지로 납득했다. 어느새 제론은 다시 유적에서 나와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더 이상
유적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잠시 후, 수많은 기간트가 몰려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발굴팀이 달려왔다. 수많은 마법사와 전문가가 유적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제론은 그 광경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봤다. 그런 제론에게 사령관이 크라테르를 탄 채로 다가왔다.
“괜찮은가?”
“예, 괜찮습니다.”
“조심하게. 2 왕자는 생각보다 집요한 구석이 있어.”
사령관의 말에 제론이 살짝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설마 사령관이 이런 말을 해 줄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난 군부에 뼈를 묻은 사람일세. 왕자보다는 우리 부대의 사람이 더 중요하네.”
정말로 의외였다. 어쨌든 군부도 왕국 소속이다. 그렇다면 왕자를 이런 식으로 대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2 왕자는 슈린 공작과 손을 잡았네. 왕위에 욕심이 대단하지. 그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세.”
모든 걸 짐작하게 해 주는 말이었다. 슈린 공작과 군부는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가 군부를 장악하기
위한 압력을 지속적으로 해 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군부에 뿌리를 내린 사령관이 슈린 공작과 손잡은 2 왕자를 곱게 볼 리 없었다. 2 왕자가 정권을 잡으면
군부는 상당한 칼질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어쨌든 유적을 발견한 공은 내가 반드시 챙겨 주도록 하겠네.”
제론은 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유적을 발견한 상은 사실 이미 받았다. 유적에 들어가 설계도를 복사해
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벨룸 놈들이 이대로 그냥 있을 리 없네. 우리가 유적을 발견했다는 것도 아마 다 알 거야. 조만간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될 걸세. 미리 대비하는 게 좋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부분은 제론 역시 생각했다. 아마 벨룸 왕국은 이 유적이 모두 개발되기 전에 이곳 체른산을 차지하려 할
것이다.
‘그 설계도가 정말로 기간트의 설계도라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지.’
베르의 설계도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베르는 무려 2.8 의 출력을 가진다.
현재의 기술로 낼 수 있는 출력의 한계가 2.3 이었다. 한데 만일 베르를 양산할 수 있게 된다면 힘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꿀 수도 있었다.
사령관은 잠시 제론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좋네. 좀 쉬어 두는 편이 좋겠지.”
사령관의 말에 제론은 반색하며 군례를 취하고 산을 내려갔다. 사실 여기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빨리 돌아가서
조용한 곳에서 새로 얻은 설계도를 살펴보고 싶었다.
사령관은 서둘러 산을 내려가는 붉은 실바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경사가 가파른 지점만을 골라 쭉쭉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단언컨대, 저렇게 기간트를
잘 모는 사람은 전 대륙을 다 뒤져도 몇 없을 것이다.
이제 조만간 벨룸 왕국이 다시 도발을 시작할 것이다. 어쩌면 기습할지도 모른다.
‘한데 이런 상태면…….’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다. 모두의 신경이 유적에 몰려 있었다. 절대 방심해선 안 되는 상황인데 다들 방심하는
걸 보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은 모든 기간트가 움직였다. 훈련을 한 것도 아니고 유적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기동했다.
‘만일 이 순간을 노려서 벨룸 놈들이 쳐들어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물론 대비를 어느 정도 하긴 했지만,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건 불을 보듯 훤했다.
꽈르르릉!
빠지지직!
사령관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상당히 익숙한 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유적 입구에 새카맣게 재가 되어 쓰러진 병사들이 보였다.
“젠장! 조심했어야지!”
사령관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물론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령관은 일단 2 왕자의 눈치를 한
번 살핀 후, 인상을 구기며 유적 입구로 다가갔다.
유적에서는 아직도 벼락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빠직거리며 잔벼락이 바닥을 타고 뱀처럼 꿈틀꿈틀 흘러 다녔다.
아무래도 유적 발굴은 쉽지 않을 듯했다.

Chapter 4 유적의 주인

제론은 숙소로 돌아가 침대에 누워 태블릿을 꺼냈다. 일단 라이더의 경우 개인실을 쓰기에 누군가가 볼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기에 언제든 태블릿을 치울 수 있도록 아공간을 열어 놨다.
제론은 복사한 설계도를 살펴봤다. 상당히 복잡한 설계도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대충 확인한 것만으로도
대략적인 모양은 알 수 있었다.
“기간트가 아니로군.”
제론은 살짝 실망했다. 만일 기간트의 설계도라면 실바나 다른 기간트를 개조하거나 할 때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이다.
일단 좀 더 살펴보고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제론은 정확히 이것이 어떤 설계도인지 파악하기 위해 더욱 집중했다.
엄청나게 많은 마법진이 복잡하게 얽힌 물건이었다. 그냥 아티팩트가 아니었다. 이건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무기가 분명했다.
그동안 늘어난 마법 실력과 태블릿의 지식, 그리고 태블릿에 내장된 기능이 합해지니 그 복잡한 설계도가 차츰
베일을 벗었다.
제론은 눈을 빛냈다. 태블릿에 완성된 형태의 무기가 입체적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기간트의 팔에 장착하는
형태의 무기였다.
평소에 마나를 충전했다가 그걸 이용해 강력한 마법을 쏟아 내는 무기였다. 마나를 완전히 충전하는 데
일주일이나 걸리고, 고작 5 발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위력은 엄청났다. 제대로만 맞으면 웬만한 기간트를 반파시킬 수 있을 정도라니,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 기준이 발굴형 기간트 아닌가. 발굴형 기간트는 제작형에 비해 내구성이 어마어마하게 높다. 게다가
마법에 대한 내성이 뛰어나 일단 탑승만 하면 마법 걱정은 거의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발굴형 기간트를 반파시킬 수 있다면, 엄청난 전략무기가 될 수 있었다.
‘만들고 싶어도 재료를 구하는 것부터 문제로군.’
그냥 강철로 만들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아주 특별한 금속과 마나 스톤이 필요했다. 그리고 테페룸도
필요했다.
제론은 일단 이 무기의 설계도를 통해 마법에 대한 공부를 하기로 했다. 지금은 그걸로 만족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든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나저나 이 태블릿,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군.’
사실 제론이 가져온 설계도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미완성 설계도였다. 그걸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태블릿 덕분이었다.
태블릿에 저장된 마법 지식은 방대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무기에 쓰인 마법진의 기본이 되는 원형이 몽땅
있었다. 심지어는 예전 제론이 카드를 이용해 복사했던 베르의 마법진도 원래 있었다.
그 마법진들 덕분에 미완성 무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어쩌면 원래의 무기보다 그 성능이 훨씬 뛰어날지도 모르지.’
제론은 완성되어 분석까지 끝난 무기의 설계도를 차근차근 공부했다. 이것도 수련의 일환이었다. 이 마법진들을
다 이해할 수 있다면 제론이 쓰는 마법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갈 수도 있었다.
아주 작은 깨달음이라도 하나 얻는다면 제론은 여섯 번째 마나링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초고대 문명의 마법사들은 마나링의 개수를 늘리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가장 뛰어난 마법사가 13
개의 마나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일단 마법사라고 불리려면 5 개의 마나링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제법 수준이 뛰어난 마법사의 경우 7 개나 8 개의
마나링을 가지고 있었다.
아홉 번째부터 마나링을 새로 얻는 데 드는 깨달음이나 마법적 지식의 강도가 엄청나게 올라간다. 그래서 9 개의
링을 가진 마법사도 상당히 드물었다.
제론은 이제 고작 5 개의 마나링을 가졌으니 마법사라는 이름을 얻은 셈이었다. 물론 초고대 문명을 기준으로
말이다.
제론은 마법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수많은 마법진이 분해와 조립을 반복하며 제론의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유적 입구에 모인 사람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2 왕자의 눈치를 살폈다. 벌써 유적 발굴을 시작한 지 이틀이 지났다.
그런데도 아무런 성과가 없으니 다들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2 왕자는 짜증 가득한 눈으로 유적 입구를 노려봤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유적은 누구의 발걸음도 허용하지 않았다. 누구든 들어가려고만 하면 벼락을 쏟아 내는데, 어찌나 강렬한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아직 입구도 뚫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 마법사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게냐!”
2 왕자의 호통에 마법사들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마법을 해체하려면 일단 마법진을
확인해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하니 말이다.
그게 아니면 상극이 되는 마법을 통해 와해시켜야 하는데, 그조차 불가능했다. 쏟아지는 벼락이 너무 강력해 그걸
와해시킬 만한 마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2 왕자는 답답한 한숨을 토해 냈다.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유적을 정복하고 이 안에
잠들어 있다는 기간트 설계도를 얻어야만 했다.
‘형님을 이길 유일한 방법인데!’
2 왕자가 이를 갈았다. 일단 왕좌에 오르기만 하면 뭐든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1 왕자보다 못한 게 뭐란
말인가. 나라를 다스리는 건 자신이 훨씬 더 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1 왕자는 고작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왕위를 예약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고작 그
이유 하나로 왕위가 결정되다니!
하지만 발만 동동 굴러 봐야 뾰족한 수가 없었다. 유적은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저 무시무시한 벼락은
기간트도 날려 버린다.
에스타스에 타고서도 벼락을 완전히 견뎌 내지 못했는데, 크라테르나 카타락타가 들어가면 어떤 꼴이 될지 너무나
뻔했다.
‘대체 뭐가 문제지? 그놈은 그냥 들어갔는데……!’
2 왕자는 문득 제론이 떠올랐다. 그놈은 그냥 들어갔다. 입구만 확인하고 나왔다고 했지만, 어쨌든 그 붉은
실바가 들어갈 때는 벼락이 치지 않았다.
“마기어 백작!”
2 왕자의 부름에 왕실 수석 마법사인 마기어 백작이 즉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왕자님.”
2 왕자는 처음 유적을 발견한 제론의 얘기를 꺼냈다. 당시의 상황까지 모두 설명하자 마기어 백작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유적 중에는 상당히 특이한 것들이 존재합니다.”
“특이한 것들?”
“예를 들면 주인을 정하는 유적이 있습니다.”
“주인을 정한다고?”
“예. 조건은 그때그때 다릅니다. 특정한 피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고, 종족을 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 하면 이 유적도 그런 경우일 수도 있나?”
“거의 그럴 것입니다. 무엇보다 트랩이 바뀌지 않고 벼락만 쏟아 내는 걸로 봐서는 더 그렇습니다.”
2 왕자는 그 말을 듣는 즉시 옆에 있는 근위 기사에게 명령했다.
“가서 그 실바의 라이더를 데려오도록!”
근위 기사가 즉시 몸을 날려 산을 내려갔다. 2 왕자는 그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마기어
백작을 바라봤다.
“그 실바의 라이더가 특별한 피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되나?”
“그보다는 이 유적이 어쩌면 처음 들어온 사람을 주인으로 받아들인 것일 확률이 큽니다.”
2 왕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구에서 쏟아지는 마법만 봐도 정말 대단한 유적이 분명했다. 한데 이런 유적의
주인이 고작 실바를 모는 라이더로 정해졌다니. 화가 치밀었다.
“후우우. 하면 그 라이더만 오면 유적 발굴은 아무 문제가 없겠군?”
“예. 아마 그와 함께 들어가면 큰 위험 없이 유적을 발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기어 백작은 기대감을 숨기지 못했다. 입구에 있는 마법 트랩만 분석할 수 있어도 얼마나 대단한 마법을 얻을
수 있겠는가. 기간트를 밀어낼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마법이다.
‘어쩌면 새로운 마법의 지평을 열 수도 있겠어. 내 손으로!’
대마법사는 마법 한 방으로 전황을 뒤바꿔 버렸다고 전해진다. 물론 전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마기어 백작을 비롯한 모든 마법사는 그 전설을 허무맹랑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사실 기간트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마법사들도 충분히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법은 인간을 상대하는 데에나 유용하다. 기간트를 상대로는 아예 소용이 없었다.
기간트에는 기본적으로 대 마법 방어진이 잔뜩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설사 그것이 없다 하더라도 마법에는
엄청난 내성을 가지고 있다. 마나 코어 때문이다.
그로 인해 기간트가 전쟁에 등장한 이후, 마법의 전략적 사용이 상당히 제한되고 말았다.
마법사들은 기간트의 개발 쪽으로 방향을 돌려 훨씬 더 위상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전장을 지배하던 예전의
꿈을 잃지 않았다.
한데 이번에 그 가능성을 지닌 유적이 발견되었다.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기어 백작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근위 기사가 데리러 간 실바의 라이더를 기다렸다.
반면 2 왕자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했다. 그는 내심 억지로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였다. 유적이 실바의 라이더를
인정했다 하더라도 그 라이더의 주인이 자신이니, 자신이 유적의 주인인 거나 다름없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2 왕자는 문득 자신이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유적을
최초로 발견한 공로자인데,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건 사실 좀 문제가 있었다.
‘젠장.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놈이야.’
이곳에는 이제 사령관도 없기에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체른산 방어군의 기간트들은 대부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부터는 이 유적을 지켜야만 한다.
잠시 후, 붉은 실바가 산을 올라왔다. 2 왕자는 못마땅한 심정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다들 흥미로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정말로 실바가 맞나?’
실바가 오히려 근위 기사의 크라테르보다 더 자연스럽고 빠르게 산을 오르고 있었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붉은 실바는 순식간에 산을 타고 올라 2 왕자 앞에 섰다.
푸쉭!
실바의 해치가 열리고 그 안에서 제론이 휙 뛰어내렸다.
탁! 탁! 탁!
제론은 가볍게 실바의 허리와 무릎을 딛고 바닥에 내려섰다. 너무나 깔끔한 동작이었다.
사실 2 왕자가 자신을 왜 찾는지 알지 못했다. 제론은 의아한 눈으로 2 왕자를 향해 가슴에 주먹을 올려 예를
취했다.
2 왕자는 못마땅한 눈으로 제론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마기어 백작에게 눈짓을 보냈다. 직접 상대하기 싫으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마기어 백작은 2 왕자의 의중을 알아차리고는 앞으로 나섰다.
“반갑네. 난 왕실 마법사인 마기어라고 하네. 소개를 부탁해도 되겠나?”
“제론 폰 에어스트입니다.”
제론의 대답에 마기어 백작뿐 아니라 2 왕자도 깜짝 놀랐다. 설마 에어스트 가문의 후계자일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이 즉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에어스트 백작가와 슈린 공작가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 또한 그 일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크흠, 그랬군. 아무튼 잘 왔네. 다름이 아니라 유적 발굴을 좀 도와 달라고 불렀네.”
“유적 발굴을 말입니까?”
마기어 백작은 난감한 표정으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은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신빙성이 떨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처음 유적에 들어간 사람을 주인으로 인식한다는 조건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들어갈지 어떻게
알고 그런 조건을 설정한단 말인가.
“이해가 안 가겠지만, 사실이네. 유적이 오래된 경우 주인 인식 시스템이 리셋되는 경우가 있네. 아마 이번
유적이 그런 것 같네.”
제론은 순간 자신이 초고대 문명의 유적을 처음 발견했을 때가 떠올랐다. 왜 자신이 네오 마스터가 되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리셋된 거였어.’
제론의 표정이 밝아지자, 마기어 백작은 자신의 설명이 먹혔다고 여기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혹시 모르니 기간트를 타고 움직이게. 나머지 인원이 최대한 뒤에서 도와줄 걸세.”
마기어 백작은 그 뒤로 다른 사람들에게 세심한 주의를 당부했다. 결코 제론을 앞서 나가지 말아야 하며, 또
자신의 허락 없이는 어떤 것도 손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했다.
그렇게 새로운 유적 발굴팀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즉시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제론은 붉은 실바를 조종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유적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다들 벼락이 쏟아질 것에 대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제론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가자, 유적
안이 환해졌다.
길을 따라 천장과 벽에서 수많은 불이 켜졌다. 마치 새로운 주인을 환영하듯이.

유적 발굴은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정말 놀랍게도 제론과 함께 있으면 트랩이 발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제론이 있는 곳과 거리가 벌어지면 여지없이 트랩의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처음 그 사실을 몰랐을 때, 뒤늦게 유적에 들어간 자들이 몽땅 벼락에 타 죽어 버렸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최대한 제론 근처에 붙어서 유적을 발굴했다.
일단 입구부터 시작해 트랩을 해체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이 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떤 유적과도
달랐다.
보통은 유적의 트랩을 어떻게든 해체할 수 있다. 물론 상당한 비용과 희생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유적은 트랩 자체에 또 트랩이 걸려 있었다.
결국 트랩을 해체하지 못하고, 그저 제론을 따라가며 유물을 챙기거나 외부로 드러난 마법진을 베끼고 또 그것을
연구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마기어 백작은 눈앞에 드러난 마법진을 보며 희열에 몸을 떨었다. 외부로 드러난 마법진은 대부분 트랩에 연계된
것들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식이었다.
“이 부분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군.”
마기어 백작은 다른 마법사들과 마법진 하나를 놓고 토론과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다들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에도 그저 마법진을 베껴 놓고 나중에 연구를 해야 할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이 부분의 발굴이 끝났는지 2 왕자가 다가왔다.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야 하니 마무리하게.”
“예, 왕자님.”
마기어 백작은 아쉬운 눈으로 마법진을 보다가 마법사들에게 그것을 베끼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제대로 마법진을
베끼는지 옆에서 일일이 확인했다.
마법진은 선 하나만 잘못 그려도 완전히 달라진다. 만일 그 선이 메인 마나 로드에 해당한다면 폭주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마법진을 베끼는 마법사들의 손과 눈은 신중함에 푹 빠져 있었다. 또한 그것을 지켜보는 마기어 백작의
눈도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이내 마법진을 모두 베끼고 몇 번이나 확인한 마기어 백작이 2 왕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습니다.”
“그래? 그럼 가지.”
2 왕자는 지루한 표정으로 기다리다가 끝났다는 말에 반색하며 붉은 실바를 쳐다봤다. 이곳에 있는 유일한
기간트였기에 제론의 역할은 그야말로 막중했다.
다른 기간트는 아예 들어올 수가 없었다. 이 유적은 다른 기간트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어김없이 벼락이
쏟아졌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까지 몽땅 그 벼락에 휘말려야만 했다.
그렇기에 제론의 중요도가 훨씬 더 높아졌다. 처음에는 그저 유적 안내꾼과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지만, 이제는
제대로 된 발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재가 되었다.
쿵! 쿵! 쿵! 쿵!
붉은 실바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자 유적 발굴팀이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실바가 최대한 천천히 걷긴 했지만
보폭이 인간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서둘러야만 했다.
다음 구역으로 이동한 발굴팀이 다시 발굴을 시작했다. 제론은 인간의 힘으로 들기 어려운 것들만 골라서 통로
중앙에 내려놓았다. 이건 나중에 제론이 혼자 유적 밖으로 날라야 했다.
‘생각보다 일이 많군.’
일이 많다기보다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아니, 낭비하는 시간이 많았다.
이렇게 큰 유물들을 옮겨 놓으면 그 뒤로는 멍하니 기다려야 했다. 제론은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기간트 내부에서
마법 공부를 하거나 마나 호흡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벌써 열흘이 지났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유적의 절반밖에 발굴하지 못했다. 트랩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로 느린 속도였다.
‘신기한 유적이야.’
물론 제론이 발견한 초고대 문명의 유적보다는 훨씬 못하다. 그곳은 신비로 점철된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나마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있었다.
제론은 유적을 발굴하면 발굴할수록 점점 더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 유적이 왠지 모르게 낯익었다.
‘닮았어.’
이 유적은 제론이 발견한 초고대 문명의 유적과 유사한 점이 꽤 많았다. 마치 누군가 초고대 문명의 유적 일부를
보고서 흉내라도 낸 것 같았다.
제론의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그리고 미완성이었던 무기의 설계도가 떠올랐다.
‘어쩌면!’
제론은 급히 태블릿을 꺼내 조작했다. 그리고 수십 가지 키워드를 통해 검색을 했다.
“찾았다!”
태블릿을 통해 설계도를 완성시켰던 무기의 정보가 태블릿에 저장되어 있었다. 즉, 원래 있던 무기를 이 유적의
주인이 복원한 것이다.
초고대 문명에서는 흔히 쓰이던 무기였는지, 거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비롯해 설계도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제론은 2 개의 설계도를 비교했다. 그리고 실소를 머금었다. 완전히 달랐다. 이 유적의 주인은 처음부터 잘못
짚었다.
“인간이 쓰기 위해 만든 무기를 기간트용으로 착각하니 이런 일이 벌어지지.”
결과적으로 두 무기는 완전히 달랐다. 그 원인은 무기의 용도를 착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용 무기를 기간트용으로
만들면서 마법진이나 구조가 많이 달라졌다. 물론 위력도 현저히 달라졌다.
제론은 흥미로운 눈으로 두 설계도를 비교하며 차근차근 그 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같은 물건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며 나타난 결과를 보니 불현듯 그동안 잡힐 듯 말 듯 희미했던 몇 가지
깨달음이 뇌리에 푹푹 박혔다.
제론은 그 자리에 눈을 감고 앉아 그 깨달음을 정리했다.
후우우웅.
미약한 마나의 흐름이 제론을 감쌌다.
우우웅!
실바의 마나 코어가 맹렬히 움직이며 마나를 토해 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나 코어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제론의 몸으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선명한 마나링을 심장에 새겼다.
제론은 한동안 그 상태로 깨달음의 바다에 빠져 즐겁게 유영했다.

☆ ☆ ☆
2 왕자는 점점 초조해졌다. 제약이 너무 심해 유적 발굴 속도가 좀처럼 빨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원하는 물건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유적의 끝까지 가 봤지만 눈에 드러난 유물은 없었다. 예전 제론이 복사한 설계도도 지금은 사라진 상태였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론도 의아했다. 자신이 갔을 때는 동공 한가운데에 있던 설계도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제론이 유적의 주인이라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설계도는 유적의 주인만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설계도를 강탈당하지 않기 위해 유적의 진짜 주인이 만들어 놓은 일종의 락(Lock)이었다.
“백작, 유적 발굴 속도를 좀 더 높일 순 없나?”
2 왕자의 어조에 어린 짜증을 읽은 마기어 백작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서둘러 보겠습니다. 하지만 이곳 유적은 고대에 아주 뛰어났던 마도사의 연구실 같습니다. 자칫하면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서두르게. 이러다가 자칫 벨룸 왕국 놈들이 대대적인 공세라도 펼치면 난감한 일 아닌가!”
“그리하겠습니다.”
마기어 백작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정말로 속도를 높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적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졌다.
만일 제론이 없었다면 발굴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기어 백작은 복잡한 시선으로 제론이 타고 있는
붉은 실바를 바라봤다.

☆ ☆ ☆

한편 실바 안에서 태블릿을 통해 유적의 마법진을 하나하나 뜯어 살펴보고 있던 제론은 문득 이 유적 자체를


함정으로 이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타이밍이 맞아야 하는데…….’
발굴을 최대한 서둘러야만 한다. 그렇게 유적을 싹 털어 간 다음 벨룸 왕국의 대대적인 공세를 이용해 체른산을
내주고 다른 지역을 얻으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제론은 이 작전을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떠올려 봤다.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정말로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함께 작전을 펼쳐야 하는 상대가 2 왕자와 마기어 백작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슈린 공작 일파였다.
제론의 공을 얼마든지 가로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공을 돌려야겠어.’
제론은 사령관을 떠올렸다. 아주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군부와 왕국을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리고 나름 의리도 있었다. 아마 제론의 도움으로 공을 세우면 절대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러려면 유적 발굴을 좀 더 빨리 끝내야만 했다. 제론은 방법을 떠올려 봤다. 의외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현재 이 유적의 주인은 나다.’
유적의 주인이라는 것은 유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한 유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유적을 쉽게 발굴할 방법도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겠군.’
사람들이 있으면 마음대로 유적을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제론이 지금 답답한 것은 이렇게 한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덕분에 마나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꾸준히 마나 호흡을 하는데다가, 실바의 마나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마나가 유입되면서 급격히 마나가 불어났다.
제론은 마나 호흡을 하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마나 코어가 조용히 진동하며 마나를 흘렸고, 제론은 차분히 그
마나를 흡수했다.

밤이 되었다. 유적을 탐사하던 사람들은 일단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철수할 때 제론이 실바를 이용해 짐을 모두
나르기 때문에 반드시 잠은 유적 밖에서 잤다.
밤새 작업을 할 수도 있지만, 제론이 계속 남아 있어야 하기에 밤에는 작업을 포기했다. 제론에게도 휴식이
필요했으니까. 어차피 물건을 나르려면 제론이 기간트로 날라야 한다. 이렇게 밤에는 나와서 자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2 왕자를 비롯해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기지로 돌아가 편안한 잠자리에 들었다. 이곳을 지키는 건 나머지
사람들의 몫이었다.
물론 제론도 이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또 벗어날 생각도 없었다. 제론은 이번 기회에 충분히 수련과 공부를 했다.
그리고 오늘은 미래를 위한 특별한 일을 할 계획이었다.
순식간에 잠자리가 정리되었고, 다들 피곤한 몸을 뉘었다. 그리고 2 왕자와 귀족들은 기지로 돌아갔다.
제론은 사위가 고요해지고 다들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조용히 움직였다.
물론 불침번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론을 결코 발견할 수 없었다. 제론의 움직임은 밤 고양이보다 더
은밀하고 조용했다.
제론은 조용히 유적 입구 근처에서 몸을 숨겼다. 유적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제론의 움직임을
잡아낼 수 없었다.
‘불이 켜지면 곤란한데…….’
제론이 유적 안으로 들어갔을 때, 불이 켜지면 혼자 몰래 유적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그래선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유물을 빼돌린다는 누명이라도 쓰면 곤란했다. 어차피 관심도 없는 유물들인데 말이다.
제론은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이 들어가면 불이 켜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진짜 유적의 주인이라면 그조차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유적을 만든 사람이 그런 것도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제론은 입구 근방을 은밀히 살피며 아공간을 열어
태블릿을 꺼냈다.
입구 근처에 쓰인 마법진은 모두 태블릿에 복사했기에 언제든 불러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제론은 입구부터
시작해 발굴이 끝난 지점까지의 마법진 지도를 만들어 뒀다.
제론이 세운 대책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마법진들을 분석해 유적의 시스템을 조작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물론 낮에 기간트 안에서 충분히 들여다보고 연구를 했기에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확인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했다.
제론이 파악한 바로 입구에서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불을 켜고 끄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안의 트랩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려면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순차적인 마법진의 흐름을
보면 그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 야밤에 그것을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그게 된다면 더 이상 제론은 필요치 않다. 또한 더욱 빠르게
유적 발굴을 끝낼 수 있다. 무지막지한 인력을 동원하면 그야말로 순식간에 끝나 버릴 테니까 말이다.
제론은 일단 자신이 파악한 마법진을 이용해 스위치 하나를 껐다. 물론 심장의 마나링을 이용해야만 했다.
딸깍!
미약한 소리와 함께 점등 시스템이 꺼졌다. 제론은 조심스럽게 유적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불은 켜지지 않았다.
일단 불이 켜지지 않은 걸 확인한 제론은 유적 끝까지 단숨에 주파했다. 마나가 충만했기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유적의 끝에 도착한 제론은 태블릿과 복사 카드를 이용해 근방의 마법진을 몽땅 담았다. 입구의 마법진을
분석하는 것보다 이곳의 마법진을 분석하는 게 훨씬 쉬웠다.
입구와 상통하는 부분도 있었고, 또 상대적으로 간단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론은 간단히 유적의 기본 방어 시스템을 껐다.
이제 더 이상 유적의 트랩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유물을 가져가는 것에만 적용된다. 유적의
마법진을 파헤치거나 유적 자체를 손상시키려는 자들이 있다면 즉시 트랩이 발동할 것이다.
만일 제론이 유적의 시스템을 완전히 꺼 버렸다면 누가 유적을 파괴하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유적을 다시 써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작업을 마친 제론은 빠르고 조용하게 유적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다.

“허어. 한순간에 이렇게 바뀔 수도 있나?”


2 왕자의 허탈한 말에 마기어 백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사실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면 유적 발굴을 벌써
끝내고 돌아갔을 것 아닌가.
“아무래도 유적이 오래되어 시스템에 뭔가 이상이 생긴 모양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애먹이던 트랩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졌으니…….”
“그래도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유적 자체를 파괴할 수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2 왕자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았다. 만일 우연한 일로 병사 하나가 안전 범위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면 발굴이
끝날 때까지도 이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물론 아직도 기간트를 안으로 들일 수는 없었다. 제론의 기간트가 아니면 유적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는 전혀 제약이 없었다.
덕분에 발굴 속도가 상당히 빨라졌다. 이대로라면 이틀 안에 모든 발굴이 끝날 것 같았다.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그나저나 아직도 그걸 발견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
2 왕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진짜 원했던 것, 기간트의 설계도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유적
안에 설계도가 없을지도 모른다.
혹은 벌써 누군가가 설계도를 빼돌렸을지도 모른다. 2 왕자는 사실 제론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기어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감시는 제대로 하고 있나?”
“예. 그의 모든 소지품을 다 뒤져 봤지만, 없었습니다.”
“그럼 유적 어딘가에 있긴 있다는 건데…….”
2 왕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적을 바라봤다. 유적 입구를 수많은 사람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유적 앞
공터에 유물이 한가득 쌓여 갔다.
“저는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기어 백작이 2 왕자에게 예를 취하고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최근 유적 안의 마법진을 연구하느라 바빴다.
“그놈은 어제 뭘 하더냐?”
2 왕자의 물음에 근처에 있던 근위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목욕 후 잤습니다.”
“몸은 뒤져 봤느냐?”
“예. 돈주머니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2 왕자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론은 설계도를 빼돌리지 않았다.
“그럼 저 안에 있다는 건데…….”
2 왕자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일꾼들의 감시는 제대로 하고 있느냐?”
“모든 근위 기사와 근위병들을 투입해 감시 중입니다. 안에서 빼돌릴 가능성은 없습니다.”
“좋아. 발굴이 모두 끝나기 전에는 결코 마음을 놓지 말도록.”
“예, 명심하겠습니다.”
2 왕자는 다시 시선을 유적 입구로 돌렸다. 마침 붉은 실바가 유물을 잔뜩 들고 나타났다.
쿵! 쿵! 쿵! 쿵!
붉은 실바는 유물을 공터 한가운데에 쌓아 놓은 뒤 다시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2 왕자도 천천히 유적을 향해 걸어갔다. 어쨌든 책임자는 자신이다. 유물 발굴 현장을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Chapter 5 위험한 작전

유적 발굴은 트랩이 해제된 지 이틀 만에 완벽하게 끝났다. 물론 트랩을 뜯어내거나 유적 자체를 해체하는 건


전혀 하지 못했다.
유적에 충격을 가하면 내부에 감춰진 트랩이 발동했기에 그 부분은 상당히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거기에 대해 아쉬워하는 건 마기어 백작을 비롯한 마법사들뿐이었다.
그리고 기간트 설계도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2 왕자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결국 기간트 설계도를 구하지 못했으니 이번 일에 대한 성과가 대폭
줄어들어 버렸다.
물론 유물을 발굴한 것만으로도 제법 성과를 얻긴 했다. 기간트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작 이 정도
유물을 위해 왕자가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2 왕자의 분위기가 안 좋으니 함께 있는 사람들도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괜한 불똥이 튀면 곤란했다.
그렇게 사령관실에는 계속 침묵이 감돌았다. 2 왕자와 함께 있던 마기어 백작과 사령관은 2 왕자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길고 긴 침묵을 깬 것은 사령관이었다.
“저…….”
“뭔가?”
2 왕자의 말투에는 여전히 짜증이 어려 있었고,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사령관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저 유적을 이용해 함정을 파는 건 어떻습니까?”
“함정?”
2 왕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사령관을 노려봤다. 고작 그 말을 하려고 이렇게 폼을 잡았다니, 너무나 괘씸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령관의 말에 2 왕자는 더 이상 짜증을 낼 수 없었다.
“이곳 체른산을 벨룸 왕국에 넘겨주는 겁니다. 유적에서 가장 중요한 걸 찾지 못했다는 정보와 함께 말입니다.”
2 왕자의 눈에 흥미가 감돌았다.
“그래서?”
“벨룸 왕국이 이쪽으로 전력을 집중할 때, 우리는 미리 이곳을 비우고 벨룸 왕국의 중요한 거점을 치는 겁니다.
예를 들면 골트산 같은 곳을 말입니다. 텅 빈 유적과 그곳을 맞바꾸는 겁니다.”
“호오.”
2 왕자의 안색이 급격히 밝아졌다. 골트산은 아주 중요한 거점이었다. 게다가 그 산에는 막대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금광이 있었다.
쓸모없는 유적과 금광을 바꿀 수 있다면 기간트 설계도를 얻어 내는 만큼은 안 되더라도 충분히 어필할 만한 공을
세우는 셈이 된다.
꼭 그곳이 아니라도 된다. 벨룸 왕국이 이곳에 전력을 집중시키면 반드시 어딘가에 빈틈이 드러나게 된다. 그곳을
제대로 찌르기만 해도 막대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모자라지 않겠나?”
“그래서 제가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함정을 준비하자고 말입니다.”
“어떤 함정을 말하는 건가? 유적을 이용하자는 말인가? 하지만 유적의 트랩을 이용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누군가 미리 안에 들어가 있으면 됩니다.”
“미리 들어간다고?”
2 왕자뿐 아니라 함께 얘기를 듣던 마기어 백작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미리 들어가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최대한 많은 병력이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유적에 큰 충격을 주면 된다.
유적의 모든 트랩이 단번에 발동시킬 수 있도록 미리 준비만 하면 적들을 몰살시킬 수 있었다.
아마 성공만 한다면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유적이 안전하다고 판단하면 수뇌부도 안으로
들어갈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 있던 사람은 어찌 되는가. 함께 트랩의 먹이가 되거나, 아니면 살아남더라도 적진 한가운데
내팽개쳐지게 된다. 대체 누가 그런 일에 나서서 스스로를 희생하겠는가.
2 왕자와 마기어 백작의 마음을 알아차린 사령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원자가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그러니 모든 일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사령관의 말에 2 왕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구경만 하고 달콤한 과실을 따 먹을 수 있는 상황이니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좋아. 자네의 능력을 한번 보겠네. 총사령관 쪽은 내가 알아서 하지.”
“부탁드립니다.”
사령관은 그렇게 말했지만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총사령관에게 자신이 직접 보고하지 않으면 모든 공을
가로채일 수도 있었다.
‘하여간 그놈도 보통이 아니야. 그 공은 절대 잊지 않고 보고하도록 하지.’
사령관은 제론을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이번 작전은 모두 제론의 머리에서 나왔다. 사령관은 그것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누가 생각해도 훌륭한 작전이었다. 정보가 사전에 새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벨룸 왕국은 이곳 체른산 유적을 노리고 있었다. 사전에 정보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즉, 그들은 다시 이곳을
노릴 것이다. 물론 확인은 한 번 하겠지만 말이다.
이제부터는 정보전이다. 정보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이 작전의 성패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이 작전의 핵심은 유적의 트랩을 가동시킬 제론이었지만 말이다.

쿵! 쿵! 쿵! 쿵!
수백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진군했다. 벨룸 왕국이 전력을 집중해 체른산으로 진격한 것이다.
벨룸 왕국은 체른산을 차지하기 위해 피해를 감수했다. 몇몇 요지의 방어를 소홀히 하면서까지 체른산을 차지하기
위해 나섰다.
그 진군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총사령관 카이아스의 눈빛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사령관님, 걱정되십니까?”
카이아스는 눈을 힐끗 돌려 부관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진군하는 기간트들을 바라봤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높게 세워진 이동식 철탑이었다. 탑 꼭대기에 사령관을 비롯한 수뇌부가 있었다. 그곳에서
전황을 살피며 순간순간 작전명령을 하달하는 것이다.
2 기의 기간트가 밀고 당기며 철탑을 움직였기에 전선이 움직여도 얼마든지 따라다닐 수 있었다.
“체른산에 있는 적 병력은 고작 기간트 200 여 기 정도입니다. 아무리 근위 기사들이 있다고 하지만, 500 기에
달하는 기간트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관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카이아스의 표정이 여전히 어두운 걸 보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너무 쉬워.”
“예?”
“적의 동태는 여전한가? 증원군이 올 기미는?”
“증원군은 없는 모양입니다.”
“없다고? 그런데도 이상하지 않단 말인가?”
부관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 점은 이상했다. 체른산을 포기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다.
“100 기를 따로 빼라. 혹시 있을지 모르는 증원군의 기습에 대비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100 기를 빼도 400 기나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적을 압도할 수 있었다. 물론 피해는 좀 더 감수해야 하지만
그래도 증원군에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 100 기는 탈슨 백작에게 맡긴다. 제대로 척후 활동을 한 후, 증원군의 기미가 없으면 적군의 측면을
공격하게 하도록.”
“예, 사령관님.”
부관이 즉시 대답하고 서둘러 물러갔다. 이제 조만간 적과 마주치게 되니 서둘러 명령을 전달해야 한다.
잠시 후, 진격하던 기간트들 중 일부가 옆으로 빠졌다. 그리고 멀리 돌아서 이동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그들은 기간트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내고 은밀히 움직였다.
탈슨 백작은 척후나 정보전에 상당히 강했다. 그가 나선다면 아마 적이 웬만한 수를 쓰지 않는 한, 들통 나지
않게 증원군을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령관 카이아스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풀어졌다.

“쳐라!”
콰과과광!
굉음이 울렸다.
쇠와 쇠가 부딪치며 불꽃이 튀고 기간트가 우그러졌다.
기간트들이 휘두르는 거검이 충돌하고, 또 그 검에 의해 기간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기간트를 보호하는
장갑이 우그러졌다.
전장의 싸움은 치열했다. 하지만 일방적이었다. 벨룸 왕국은 400 기나 되는 기간트로 고작 200 기에 불과한 레늄
왕국의 기간트를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였다.
레늄 왕국 측은 끊임없이 뒤로 밀리고 또 밀렸다. 벨룸 왕국은 승기를 놓치지 않으려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전투는 꼬박 한나절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 결과 벨룸 왕국은 체른산을 비롯한 방어군의 기지를 완벽히 점령할
수 있었다.
미리 따로 뺐던 100 기의 기간트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충분한 척후 활동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레늄 왕국의 증원군은 없었으며, 전투에서 끊임없이 밀리는 바람에 거의 후퇴한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멀리
물러났다.
벨룸 왕국 진영은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하하하하! 경하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사령관님의 탁월한 지휘력 덕분입니다. 하하하하!”


카이아스는 여기저기서 자신을 칭송하는 소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이상해. 너무 쉬워.’
아무리 전력이 압도적이라 하더라도 이번 전투는 너무 쉬웠다. 고작 한나절 만에 체른산을 점령했으니 카이아스
입장에서는 전투 같지도 않아 보였다.
‘게다가 레늄 놈들 피해가 너무 적어.’
카이아스는 높은 철탑에서 전황을 모두 살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번 전투로 레늄 왕국의 기간트를 최소한 100
기는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데 막상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노획한 적 기체가 고작 20 여 기에 불과했다. 이건 너무 적었다. 이 정도면
그저 국지전 한 판 벌여서 승리한 것과 비슷한 전리품이었다.
카이아스가 판단하기에 레늄 왕국은 꼭 일부러 이곳 체른산을 내준 것 같았다.
‘얻을 건 다 얻었다 이건가? 하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건 못 얻었다고 아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하지만 어쨌든 승리는 승리. 지금은 그것을 만끽하고, 나머지는 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어차피 내 책임은 딱 여기까지니까.’
책임져야 할 선 내에서는 충분한 공을 세웠다.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고, 적 기체를 노획했으며, 목표로 했던
지점을 점령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공이 어디 있겠는가. 카이아스는 일단 거기서 만족했다.
그렇기에 잠시 후 도착한 소식에도 크게 마음 쓰지 않을 수 있었다.
레늄 왕국군에 의해 골트산을 점령당했다는 속 쓰린 소식이었는데도 말이다.

☆ ☆ ☆

체른산 유적,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동공에 붉은 기간트 한 기가 서 있었다. 제론의 붉은 실바였다.


그리고 실바 앞에 제론이 앉아 간단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제론은 벌써 이틀째 이곳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제론은 이곳에서 수련을 하며 적들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작전의 핵심은 최대한 많은 적을 이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슬슬 실바를 숨겨야겠군.”
일단 최대한 많은 적을 불러들이려면 처음 적들이 이곳을 정찰할 때 실바가 보여선 안 된다.
제론은 동공 한쪽 벽으로 다가가 능숙하게 벽을 밀었다. 그러자 네모난 모양으로 불이 들어오더니 그 부분의 벽이
안으로 슥 밀려들어 갔다.
그렇게 밀려들어 간 부분을 중심으로 벽이 양옆으로 열렸다. 마치 쌓아둔 벽돌이 하나하나 사라지면서 문이
나타나는 듯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공간이었다. 제론도 이곳에서 이틀간
지내면서 알아낸 곳이었다.
그곳은 유적의 주인을 위한 장소로, 용도는 커다란 창고였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수백 기의
기간트를 보관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제론은 실바를 그곳에 넣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트랩은 모두 해체한 상태였다. 물론 충격을 주면 순간적으로
벼락이 쏟아지긴 한다. 하지만 건드리지만 않으면 아무 일 없다.
제론은 적들을 최대한 끌어들인 다음 일제히 모든 트랩을 작동시킬 계획이었다.
이곳에 머문 이틀 동안 태블릿을 통해 차근차근 유적의 주인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파악했기에 뭐든 할 수 있었다.
유적에 남은 유물은 거의 없었지만, 유적 자체가 유물이나 다름없었다.
쿵! 쿵! 쿵!
제론은 멀리서 들려오는 육중한 소리에 눈을 빛냈다. 기간트가 걸어오는 소리였다. 벨룸 왕국의 기간트들이
들어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드디어 시작되었다. 이제부터는 타이밍 싸움이었다. 제론은 벽에 손바닥을 올렸다.
지이잉.
사람 키만 한 빛나는 문이 나타났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빛을 뚫고 들어갔다.
그곳이 바로 이 유적의 통제실이었다.

쿵! 쿵! 쿵!
5 기의 기간트가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유적 안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라이팅!”
기간트 뒤를 따라가던 마법사들이 저마다 마법을 펼쳤다. 수십 개의 빛 덩어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유적이 워낙 넓어 그 정도 빛으로도 근처밖에 비추지 못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기간트를 움직이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더구나 기간트에도 조명 마법이 장착되어 있었다.
번쩍! 번쩍!
기간트의 눈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졌다. 5 기나 되는 기간트가 빛을 쏟아 내니 근방이 환해졌다.
마법으로 만든 빛과 합해지자, 주변이 제법 밝아졌다.
쿵! 쿵! 쿵! 쿵!
기간트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일단 지금은 내부를 한번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중심에서 이동하는 기간트에는 카이아스가 타고 있었다.
“발굴이 쉽지는 않겠군.”
“벽에 충격을 주면 트랩이 발동한다니까 조심하십시오.”
“알고 있다.”
카이아스는 천천히 걸었다. 뒤를 따라오는 마법사들을 배려한 행동이었다. 마법으로 만든 빛이 없다면 안을
살펴보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유적은 넓고 길었다. 그리고 그 끝에 거대한 동공이 있었다. 그곳을 모두 돌아본 카이아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쉽지 않겠군.”
어렵다는 건 이미 예상했다. 레늄 왕국의 전문가들도 아직 찾지 못했다. 당연히 막대한 인력이 필요할 테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다.
그리고 이 어둠도 문제였다. 유적 내부가 너무 넓어 제대로 작업을 하려면 마법사들을 잔뜩 동원하거나 빛을 내는
마법 물품을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모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이래저래 쉽지 않았다.
“돌아간다!”
카이아스의 명령에 기간트들이 돌아섰다.
쿵! 쿵! 쿵! 쿵!
마법사들이 띄운 빛 덩어리를 따라 기간트들이 유적에서 나갔다.
그리고 제론은 그 모든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수십 기의 기간트가 유적으로 들어갔다. 모든 기간트의 눈에서 밝은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수십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빛을 밝히니, 그나마 유적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동!”
수석 라이더의 명령에 기간트들이 앞으로 이동했다.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유적 내부를 뒤흔들었다.
유적 앞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에는 사령관인 카이아스도 있었고, 또 벨룸 왕국에서 이번
발굴의 총책임자로 온 하트넥 공작도 있었다.
“2 조 소환!”
하트넥 공작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십 기의 기간트가 나타났다.
각각의 기간트에 라이더가 탑승하자, 2 조의 수석 라이더가 명령했다.
“진입!”
쿵! 쿵! 쿵! 쿵!
수십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유적 안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들 역시 눈에서 광채를 내뿜으며 유적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3 조 소환!”
하트넥 공작의 명령이 또 떨어졌고,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카이아스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낭비야.’
하트넥 공작의 계획은 수백 기의 기간트를 이용해 유적 내부를 밝히고, 발굴을 돕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아스가 보기에 그건 완전히 낭비였다. 이 거대한 유적을 기간트로 밝히려면 적어도 200 기 이상의
기간트가 필요하다.
그 정도면 전황을 더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전력이다. 체른산을 중심으로 몇 군데 중요한 거점을 더 점령할 수도
있었다.
한데 그 중요한 전력을 고작 유적 안의 불을 밝히기 위해 쓰겠다니, 이건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적 발굴의 책임자는 카이아스가 아니라 하트넥 공작이었고, 또 그에게는 이곳의 모든
기간트를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니까.
쿵! 쿵! 쿵! 쿵!
카이아스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수십 기의 기간트가 연달아 유적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슬슬 유적이 밝아졌으니 마법사와 유적 발굴 전문가들을 투입하면 되겠군. 자네도 가 볼 텐가?”
하트넥 공작의 말에 카이아스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유적 발굴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언제
도발해 올지 모르는 적을 방어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전 방어 라인을 점검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게.”
하트넥 공작은 그 말을 남기고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굳이 기간트를 소환하지도 않았다. 기간트를 움직이는
데에는 많은 체력이 필요하다.
굳이 그런 힘든 일을 하트넥 공작이 할 이유가 없었다. 공작은 마차를 준비해 그것을 타고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마차에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사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하트넥 공작의 마차가 유적 안으로 들어가자, 그를 따라온 수많은 귀족이 저마다 마차를 끌고 유적에 들어갔다.
수십 명이 넘는 기사가 말을 타고 마차를 호위하며 따라갔다.
카이아스는 그 광경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속없는 것들.”
하트넥 공작이 만일 이번 발굴에 성공한다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될 것이다. 조금 전 들어간 귀족들은 그때
떨어질 금 부스러기를 얻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다.
카이아스는 코웃음을 치며 사령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은 기간트들을 재편성하며 방어 라인을 굳건히 다졌다.
최근 레늄 왕국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언제 이곳으로 들이닥칠지 알 수 없기에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카이아스가 사라진 유적 입구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바글거렸다. 그들이 차근차근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마법사를 비롯한 유적 발굴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각 분야에서 벨룸 왕국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트넥 공작은 물론이고 왕실에서도 이번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발굴형 기간트의 설계도를 얻을 수 있다면, 벨룸 왕국은 10 년 내에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적 내부는 그들이 충분히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 수십 기의 기간트가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엄청난 양의 마법 물품이 동원되었다.
고작 밝은 빛을 내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능도 없는 물건들이었지만 각각 하나에 수십 골드는 하는 고가의
아티팩트였다.
유적의 시작부터 끝까지 기간트들이 쭉 줄을 섰다. 그리고 기간트 주위로 수많은 아티팩트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 ☆ ☆

“굉장하군.”
제론은 유적 내부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상당히 감탄했다. 설마 이 정도 규모로 유적을 발굴할 줄은 몰랐다.
200 기가 넘는 기간트에다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법 아티팩트가 동원되었다. 게다가 마법사와
유적 전문가의 수는 또 어떠한가.
허공에 뜬 반투명한 화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제론의 눈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화면 중 하나에 마차가 움직이는 모습이 비쳤다. 마차 안에 누가 탔는지는 모르지만 마차 주변을 호위하는
기사들을 보면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 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마차가 한두 대도 아니고 십여 대나 되니, 얼마나 중요한 인물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는지 알 수 있었다.
슬슬 때가 되었다. 제론은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은 이 유적 전체의 마법 시스템을 모두 관리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장소였다.
손가락에 마나를 담아 한 번 까딱이는 것만으로 유적 전체를 뒤덮은 마법 트랩을 일제히 작동시킬 수도 있었다.
“몰레스도 제법 있군.”
레늄 왕국과 마찬가지로 벨룸 왕국도 대부분의 기체가 카타락타였다. 그리고 중요한 기사들의 경우 몰레스를 몬다.
몰레스는 출력이 1.8 이나 되는 벨룸 왕국의 상위 기체로, 출력이 1.7 인 크라테르보다 뛰어났다. 당연히
몰레스가 더 나중에 개발된 기간트였다.
유적 안에는 200 기가 넘는 기간트가 들어와 있다. 당연히 대부분 카타락타였지만, 그것만으로 유적을 전부
채우는 건 불가능했기에 상당한 수의 몰레스가 중간 중간 섞여 있었다.
“과연 몇이나 버틸 수 있을까?”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버텨 내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현재 제론의 태블릿에는 유적에 사용된
모든 마법진이 저장된 상태였다.
그 마법진을 차근차근 살펴보고 있었는데, 트랩에 사용된 마법은 그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제론은 차분히 유적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확인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끝에 마나가 모여들었다.
딱!
마나 스파크가 튀었다.

빠지지직!
꽈르르릉!
유적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어마어마한 수의 벼락이 유적 내부를 가득 메웠다.
꽈릉! 꽈릉! 꽈르르릉!
빠지지지직! 파직! 파직!
벼락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치 벼락의 비가 내리듯 끊임없이 쏟아졌다.
유적 안에 있던 사람들은 첫 번째 벼락에서 모조리 새까맣게 타 죽었다. 입고 있던 옷과 함께 말이다. 그들이
남긴 거라고는 쇠붙이밖에 없었다. 무기와 갑옷들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그나마 마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조금 나았다. 하지만 그들도 세 번의 벼락을 견디는 것이 한계였다.
말이 벼락에 맞아 죽은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차 안에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기간트를 타지 않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간트에 탄 사람들이 안전히
유적을 빠져나간 것은 아니었다.
200 여 기의 기간트는 일제히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그 상태로 어떻게든 벼락을 버티려 애썼다.
무작정 유적 밖으로 도망치려는 기간트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더 금방 쓰러졌다. 움직이는 상태에서 벼락을
맞으니 그대로 몸이 튕겨 나가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벽에 충격을 준 순간 훨씬 더 강렬한 벼락이 쏟아졌다. 충돌로 인해 만들어진 충격이 고스란히 에너지로
변환되어 벼락에 담긴 것이다.
그들은 그저 웅크린 채로 벼락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기간트는 기본적으로 마법에 내성을 가진다. 마나 코어 때문이다. 게다가 최신 기간트일수록 대 마법 방어진이 잘
구축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한계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대 마법 방어진도 한계 이상으로 강력한 마법을
맞거나, 혹은 한계 이하의 마법이라도 그것이 무수히 중첩되면 부서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이었다.
꽈르르릉!
콰직! 콰직! 콰직!
파지지직!
대 마법 방어진이 무력화되면서 기간트의 몸체를 타고 벼락이 흘러들어 갔다. 대부분은 마나 코어에 의해 중간에
흩어졌지만 일부는 조종석으로 들어가 라이더를 덮쳤다.
“끄아아아악!”
지극히 일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인간이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다. 대부분의 라이더가 10 분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은 기간트에 타고 있는 익스퍼트들뿐이었다. 물론 그들도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숨이 끊어졌다.
벼락 공격은 무려 한 시간이나 이어졌다. 결국 유적에 들어온 모든 사람이 죽어 버렸다.
파직. 파직. 파직.
벼락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유적 안에는 잔벼락들이 남아 있었다. 기간트나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타고 흐르며
호시탐탐 생명체가 들어오기만을 노렸다.
우르르르.
유적이 한 번 진동했다. 그리고 유적 끝에 있는 벽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론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제론은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묵묵히 지켜봤다. 어차피 안에 있을 때, 화면으로 모두 확인했다.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파직!
스파크가 튀며 작은 벼락 하나가 제론을 향해 튀어 나갔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사 같았다.
하지만 제론은 가볍게 손등으로 그것을 쳐내 버렸다.
퍽!
제론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나를 이용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벼락들을 쳐냈다.
파직! 퍽! 파직! 퍽!
제론은 일단 근처만 확인했다. 그러면서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잠깐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잠시 후, 동공 한 부분이 열리며 안에서 붉은 기간트가 나타났다. 제론은 붉은 실바에 올라탔다. 그리고 유적
안의 잔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유적에 있던 모든 기간트와 무구들, 그리고 아티팩트들은 유적의 창고에 고스란히 담겼다. 창고의 크기는 그 모든
것을 다 담고도 남을 정도로 넓었다.
유적 내부를 깨끗이 정리한 제론은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다.
어쩌면 이미 사망자 처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일단 부대로 복귀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그래야
기반이 사라지지 않는다.
슈린 공작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기반은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백작이라는 작위 말이다.
“밖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남아 있느냐가 관건이로군.”
제론은 미리 유적 안에서 대기했기에 벨룸 왕국에서 얼마나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왔는지 모른다. 대충 짐작은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짐작일 뿐이었다.
“유적 발굴에 200 기나 되는 기간트를 투입한 걸 보면 최소한 남은 병력이 그 2 배는 된다고 봐야 하나?”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일 그렇게 되면 이곳에 투입한 기간트의 수가 무려 600 기가 넘는다는 뜻이다. 그
정도라면 벨룸 왕국은 전선 곳곳에 뚫리는 구멍을 방치할 수밖에 없다.
한두 군데야 포기한다 하더라도 그게 너무 많아지면 자칫 전황이 일방적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전쟁에서 기세를 잃으면 곧장 패망으로 이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벨룸 왕국이 그런 무모한 일을 벌였을 것 같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조력자를 얻었거나.”
제론이 눈을 빛냈다. 대충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봤다. 벨룸 왕국과 레늄 왕국 두 나라와 동시에 국경을 대고
있는 체스터 공국을 이용한다면 일시적으로나마 병력을 빼는 것이 가능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계라는 게 있지. 이곳 병력이 생각처럼 많지 않을 수도 있겠군.”
만일 그렇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진다. 병력이 적으면 적을수록 다시 부대로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 말이다.
제론은 일단 조금 더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붉은 실바가 발소리를 죽이며 유적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Chapter 6 탈출 작전

벨룸 왕국 진영은 발칵 뒤집혔다. 갑자기 유적이 미쳐 날뛰는 바람에 안에 투입된 모든 병력이 사라져 버렸으니
당연하다.
사령부의 분위기도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사령관인 카이아스는 입을 꾹 다문 채 부관들을 쳐다봤다.
이윽고 카이아스가 입을 열었다.
“탐사는 여전히 불가능한가?”
“그렇습니다. 유적에 들어가려고만 하면 벼락이 치는 바람에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기간트로도 안 되는가? 발굴형 기간트라면 그깟 벼락쯤이야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이라면 이런 말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리 기간트라도 진짜 벼락을 맞으면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마법으로 일으킨 벼락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마법으로 만든 벼락은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가 테페룸이 섞인 검을 들고 있으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당연히
수준 높은 마법사도 막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니 마법에 대한 내성이 있는 기간트라면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발굴형 기간트는 일반적인 기간트보다
마법에 대한 내성이 훨씬 뛰어났다.
카이아스도 그걸 염두에 두고 물은 것이다. 하지만 부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이미 해 봤지만 아무리 발굴형 기간트라 하더라도 그 벼락을 쉽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카이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쉽게 견딜 수 없다고? 그렇다는 건 견딜 수는 있다는 뜻 아닌가. 유적 안에 쌓인 기간트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그렇게라도 꺼내야 할 것 아닌가.”
“이미 시도해 봤습니다만, 작업이 불가능했습니다.”
부관은 카이아스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벼락이 너무 강해 서 있으면 균형을 잡기도 어렵습니다. 게다가 대 마법 방어진도 한계가 있는지라…….”
“그럼 어쩌자는 건가? 이대로 포기하자고?”
“그것이…….”
부관은 말을 잇지 못하고 주변 다른 부관들을 도와달라는 듯 바라봤다. 하지만 다들 시선을 돌리며 외면했다.
그들 역시 할 말이 없었다.
“허어. 어이가 없군. 좋다. 어쩔 수 없지. 내일까지 최대한 방법을 찾아봐라.”
그 말을 하는 카이아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까지 성과가 없다면 그냥 이대로 보고를 해야만 한다. 자신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분명히 피해를 받을 것이다.
‘다 끝났군.’
카이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그렇게 불안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레늄 왕국이 교묘하게 만든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뭐 하고 있나! 다들 나가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카이아스의 호통에 부관들이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어찌나 놀랐는지 미처 군례도 취하지 못했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카이아스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

☆ ☆ ☆

제론은 유적 입구에서 외부의 동태를 살폈다. 유적의 통제실에서 외부를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기능은
없었다. 아니,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유적 외부에 설치되었던 마법진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한밤중이었기에 유적 밖은 깜깜했다. 제론은 달빛으로 인해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주위를 유심히 살펴봤다.
‘많기도 하군.’
유적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밤이 늦었는데도 다들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나가면
대번에 들키고 말 것이다.
곳곳에서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유적 입구 가까운 곳에 십여 명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대화
중이었다.
제론은 귀에 마나를 집중해 청력을 높였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뭔가 돌파구가 열리지 않을까 기대했다.
“일단 생명이 없는 물건이 들어가면 괜찮은 것 같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하면 기간트도 괜찮은 것 아니겠소?”
“기간트 내부의 생명을 찾아낸 걸로 보이오.”
그들은 유적 안에 들어갈 방법에 대해 논의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논의를 계속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입구 근처에 있는 것들이라도 수거해야 하지 않겠소?”
“거기까지 들어가는 게 가능하겠소?”
“강철을 이용해 긴 낚싯대를 만들어서 낚는 건 어떻소? 기간트를 쓰면 그걸 다루는 건 문제가 아닐 것 같은데.”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쯤 해 볼 만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어디쯤 기간트가 놓여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유적 내부는 너무 어두웠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정도로 어두워서 유적 외부에서는 내부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유적을 보호하는 마법의 효과 중 하나였지만, 이들이 그걸 알 리 없었다.
제론은 입구에 서서 그 논의를 모두 듣고는 피식 웃었다. 참으로 특이한 발상 아닌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들도
나름대로 절실하기에 저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론은 입구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속 동태만 살폈다. 그렇게 그날은 큰 성과 없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날, 벨룸 왕국군은 기간트까지 동원해서 거대한 강철 낚싯대를 만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꽝꽝대니 그 소리가 유적 안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제론은 깊은 잠에 빠졌다가 그 소리에 깼다.
“정말로 할 모양이네.”
제론은 입맛을 한 번 다신 다음 주위를 둘러봤다. 동공 한가운데에서 잤는데,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왠지 낯이 익어.”
동공의 모양을 보니 뭔가 익숙했다. 이유는 금세 떠올랐다. 지금까지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내 유적과 똑같이 생겼군.”
유적의 모양은 틀렸지만 동공이 똑같았다. 동공의 유무가 아니라, 동공의 형태가 똑같았다. 규모도 비슷한
듯했다.
제론은 문득 팔을 들어 팔찌를 쳐다봤다. 처음 초고대 문명의 유적을 찾아 들어가던 생각이 떠올랐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루룽!
제론의 부름에 바람이 뭉치며 정령이 나타났다. 제론은 즉시 정령을 팔찌에 넣었다.
화아악!
팔찌가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이 제론을 휘감았다.
우르르르릉!
유적 전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제론은 몸이 아래로 쑥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로 빨려가는 듯했다. 아주 익숙했다. 초고대
문명의 유적에 들어갈 때마다 느끼던 것이었으니까.
눈앞이 깜깜해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그리고 화려한 문양이 가득 찬 공간에 도착했다.
“이럴 수가……!”
제론은 정말로 놀랐다. 설마 이 유적 아래에도 이런 식으로 또 다른 유적이 존재할 줄 몰랐다.
“설마 여기도?”
제론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봤다. 투명한 천장을 통해 유적 내부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과 아주 똑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스터 인증 시작합니다.
지잉!
붉은 빛줄기가 제론의 이마를 향해 쏘아졌다. 제론은 이 역시 경험한 일인지라 가만히 있었다.
―확인 완료.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유적의 문양들이 차례차례 점멸했다. 마치 주인을 환영하기라도 하는 듯했다.
제론은 신기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자신의 유적과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상당 부분 유사했다.
“설마 이렇게 모든 유적 지하에 이런 식으로 또 다른 유적이 존재하는 건 아니겠지?”
제론은 과연 이 유적에는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분위기를 보니 자신의 유적과는 좀 다른 듯했다.
“일단 아래층이 존재하나 확인해 볼까?”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로비 한가운데 섰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역시!”
역시 지하층이 존재했다. 제론은 사방을 둘러봤다. 이곳도 수련을 위한 장소일 수도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또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기본 물품이라도 받고 내려왔어야 했는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사방 벽에 문양이 가득했다. 문양들은 빛나고 있었는데, 그 빛을 통해
마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마스터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콜로니의 통제실은 5 층에 있습니다.
제론은 그 말에 눈을 빛냈다. 이곳은 자신의 유적과는 달랐다. 원하면 5 층까지 곧장 내려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다음 일은 일단 통제실로 간 다음에 생각하는 게 낫다. 제론은 곧장 지하 5 층으로
내려갔다.

☆ ☆ ☆

카이아스는 한심한 눈으로 유적 입구에서 몇 기의 기간트가 벌이는 촌극을 쳐다봤다.


갈고리가 달린 긴 강철봉을 유적 안으로 쭉 집어넣은 뒤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기간트가 걸리면
끌어내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휘저어도 갈고리에 걸리는 게 없었다.
“강철봉이 너무 짧은 모양입니다!”
기간트 라이더의 외침에 좀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부관들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게 벌써 세 번째였다. 강철봉을 두 번이나 바꿨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또 이 모양이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멍청한 놈들.”
카이아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대놓고 뭐라고 욕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 말이다.
‘저 안에 대체 얼마나 많은 기간트가 잠들어 있는 건지…….’
일단 불을 밝히고 유적 발굴을 돕기 위해 들어간 기간트만 정확히 206 기였다. 그뿐 아니다. 하트넥 공작을
비롯한 귀족의 호위 기사가 착용하고 있던 기간트가 또 수십 기였다.
귀족의 호위 기사가 착용하는 기간트가 예사로울 리 없다. 최소한이 몰레스였고, 개중에는 베르를 착용한 자들도
있었다.
만일 그 모든 걸 고스란히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면 실로 천문학적인 손실이었다.
누군가가 그 손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일단 하트넥 공작에게 몽땅 뒤집어씌우는 수밖에.’
그게 최선이었다. 부관들이나 나머지 기사들도 하트넥 공작이 하는 행동을 다 지켜봤으니 아마 뒤집어씌우기도
편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레늄 왕국에 당했다는 점이지.’
그 책임은 피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총사령관은 카이아스였다. 그 생각만 하면 지독한 두통이 찾아왔다.
“후우. 더 볼 수가 없군.”
카이아스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굉음이 울렸다.
꽈르르르릉!
빠지지지직!
다급히 고개를 돌린 카이아스는 경악한 눈으로 유적 입구를 바라봤다.
강철봉을 잡고 있던 3 기의 기간트가 봉을 잡은 채로 나가떨어졌다. 기간트의 몸체를 타고 흐르는 뇌전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멍청한! 트랩을 또 건드리다니!”
강철봉을 얼마나 세게 휘저었으면 트랩을 건드린단 말인가. 카이아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당장 봉을 놓고 유적에서 떨어져!”
카이아스의 외침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고작 두어 명만 무작정 달렸고, 나머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이아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꽈르릉!
수십 줄기의 벼락이 유적에서 쏟아져 나왔다. 유적 가까이 있던 기간트들이 가장 먼저 벼락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기간트를 딛고 사방으로 퍼져 나간 벼락이 근방에 있던 사람들을 덮쳤다.
꽈르릉! 꽈르릉!
빠지지지직!
“크아아아악!”
“아아악!”
연달아 비명이 터졌다.
벼락이 워낙 빨라 미처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처음 도망친 사람 중 한 명만 간신히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몽땅 새까맣게 타 죽었다.
파직! 파직! 파지지직!
기간트와 강철봉을 타고 잔벼락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흘러갔다.
카이아스는 그 처참한 광경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짜증 나는군.”
진전은 없는데, 피해만 가중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체른산을 두고 대치 중인 레늄
왕국군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사실 지금 레늄 왕국과 벨룸 왕국의 전쟁은 상당히 미묘한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데 단번에 200 기가 넘는 기간트의 공백이 생겼으니, 레늄 왕국이 이를 눈치채고 전력을 집중하면 정말로 큰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여기가 완전히 밀려 버리면?’
카이아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곳에 남은 기간트는 200 기에 불과하다.
원래는 500 기였지만 200 기는 유적에서 잃었고, 100 기는 다른 전선으로 보내 빈틈을 메웠다.
이런 상황에서 레늄 왕국이 여유 전력을 이쪽으로 집중시켜 밀어 버리면, 순식간에 200 기의 기간트가 더 사라져
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은 끝이다. 끊임없이 밀리다가 결국 패망하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온갖 치욕을 무릅쓰고
협정을 맺거나.
‘절대 들키면 안 돼.’
카이아스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몸을 돌렸다. 당장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이곳의 전력을 들켜선 안
된다. 아니면 서둘러 이곳을 포기하거나.

☆ ☆ ☆

제론은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마나가 그의 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했다. 그의 표정은


경이로 가득했다.
이 경이로운 유적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초고대 문명의 유적은 로비를 제외하면 총 5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통제실인 5 층에 도착한 제론은 이
유적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제론이 처음 얻었던 유적과는 달리 참으로 친절했다. 물론 언어를 완벽하게 익히고 있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이미 초고대 문명의 모든 언어를 익혔기에 아무런 문제없이 유적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제론이 처음 얻었던 유적과 달리 이 유적의 로비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저 아래로 내려가는 기능과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몇 가지 편의 시설만 존재할 뿐이었다.
1 층은 수련실이었고, 2 층과 3 층은 숙식을 해결하기 위한 장소였다. 그리고 4 층은 이 유적의 진짜 기능인 정보
수집을 위한 수많은 아티팩트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현재 제론은 1 층 수련실에 앉아 마나 호흡을 통해 아랫배와 심장의 마나를 더욱 단단히 다지는 중이었다.
이 유적은 초고대 문명의 지배자들을 위한 곳이었다. 많은 인원이 상주하며 근방의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제론은 이미 유적의 주인이 되었기에 임의로 유적을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이 직접 통제하면 훨씬 세밀하고
다양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지만, 유적의 인공지능에 맡겨도 근방의 정보를 얻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4 층에 보관 중이던 수많은 아티팩트는 오랜 잠을 깨고 현재 근방에 퍼져 있었다.
이 유적이 커버할 수 있는 범위는 사방 100 킬로미터였다. 그 정도면 전황을 아는 데에는 충분했다.
제론은 태블릿과 이 유적의 통제실을 연결했다. 그래서 언제든 원하는 때에 이 근방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게 전부라는 사실이었다. 이 유적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정보뿐이었다. 그것도
반경 100 킬로미터의 범위에 국한한 정보 말이다.
제론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이 정보는 제론에게 정말로 큰 무기였다. 탈출에 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현재 유적 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적의 트랩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수많은 벼락이 벨룸 왕국군을 무차별
공격했기 때문이다.
벨룸 왕국군은 일단 유적에서 한 발 물러난 상태였다.
“정말 큰 걸 얻었어.”
제론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로비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얻은 가장 큰 것은 사실 정보가 아니었다.
“설마 그게 가능할 줄이야.”
처음 발견한 유적과 이곳을 연결할 수 있었다. 이곳 로비에서 언제든 원하면 제론의 유적 로비로 이동이 가능했다.
제론이 처음 발견한 유적이 중심이었다. 이곳은 그 유적의 하부 조직으로 편입된 것이다. 세계에는 이런 식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유적이 무수히 많았다. 그 모든 곳을 연결하는 게 가능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셈이지.”
모든 유적을 얻었을 경우에 그렇게 된다. 제론은 충분히 시간을 투자해 대부분의 유적을 얻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은 앞으로 제론이 하려는 일에 정말로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제론은 당장이라도 중앙 유적으로 가고 싶었지만 일단 꾹 참았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갈 수 있었다. 지금은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계획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정리한 제론은 로비로 이동했다.
드디어 탈출할 시간이 되었다.

붉은 실바 한 기가 미끄러지듯 걸어가고 있었다. 제론이 탄 실바였다.


바닥을 미끄러지듯 걷기 때문에 기간트가 걸을 때 나던 특유의 땅울림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
웬만한 라이더는 꿈도 꾸지 못할 조종 실력이었다.
발바닥이 땅에 닿을 듯 말 듯하게 미끄러지듯 걷는 건, 균형감각은 물론이고 울퉁불퉁한 바닥을 순간적으로 보고
높낮이의 변화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뿐이랴, 발을 내딛는 속도가 너무 느리면 균형을 잃어 비틀거리게 된다. 비틀거리다가 내딛는 발에는 더 큰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제론은 지금 걸음으로 자신의 감각이 한 층 더 성장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예전에도 이렇게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자연스럽고 빠르게는 불가능했다. 또한 중간 중간
불안하게 흔들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진짜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너무나 간단하게 해내고 있었다.
붉은 실바는 어느새 유적 입구에 도착했다. 유적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부터가 중요했다.
벨룸 왕국군은 체른산을 중심으로 반경 20 킬로미터를 장악했다. 예전 체른산 방어군이 있던 기지도 당연히
장악한 상태였다.
그곳에서 10 킬로미터를 더 가야 레늄 왕국군의 새로운 기지가 있었다. 거기까지 가야만 한다.
제론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꼭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벨룸 왕국군은 결코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자칫 레늄 왕국이 오해하기라도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현재 벨룸 왕국군은 자신의 전력을 꼭꼭 숨겨야 할 입장이었다. 200 기에 달하는 기간트의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우기 전까지는 말이다.
붉은 실바가 예의 소리 없는 걸음으로 유적을 나섰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조금만 더 걸어가도 특유의
붉은빛은 적의 눈에 고스란히 띄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것도 모두 염두에 뒀다.
“자아, 가 볼까?”
최대한 유적에서 들키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해 봐야 고작 수백 미터 정도였다. 제론은 그렇게 이동한
뒤, 그대로 내달렸다.
쿵쿵쿵쿵쿵!
유적이 있던 위치가 산 중턱이었기에 내리막길을 통해 속도가 점점 붙었다.
그냥 사람이 달리더라도 이런 식이면 금방 균형을 잃고 바닥을 구르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붉은 실바는 용케
균형을 잃지 않았다. 또한 속도를 늦추지도 않았다.
붉은 실바가 뛰며 큰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수많은 사람이 그 모습을 발견했다.
“저거 뭐지?”
“기간트다!”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
벨룸 왕국이 곧장 대응을 했다면 탈출이 조금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제론도 그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계획을
짰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되자, 벨룸 왕국군은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상부에 보고를 하고, 사령부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지켜보며 대기했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성패를 완전히 갈라 버렸다.
“일단 막아라!”
“기간트를 소환해!”
곳곳에서 기간트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붉은 실바가 산 아래로 내려온 뒤였다. 어마어마한 속도를 얻은
상태로 말이다.
쿵쿵쿵쿵쿵쿵쿵!
붉은 실바의 다리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당연히 달리는 속도도 빨랐다.
옆에서 달려오던 기간트는 붉은 실바를 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나마 앞쪽에 있던 십여 기의 기간트가 길을
막고 단단히 버틸 준비를 했다.
아무리 실바라도 달리는 속도를 보면 막는 순간 충격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걸 예상해 다들 몸을 숙여 충돌
순간 균형을 잃지 않도록 대비했다.
쿵쿵쿵쿵쿵!
붉은 실바가 맹렬히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이대로라면 충돌을 면치 못할 것이고, 실바는 크게 뭉그러지고 말
것이다.
어쨌든 실바를 막아선 기간트는 몰레스와 카타락타였다. 실바보다 출력도, 성능도 뛰어난 기체들이었다.
쿵쿵쿵쿵쿵!
붉은 실바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충돌 직전의 순간, 길을 막아선 기간트들이 더욱 자세를 낮췄다. 붉은
실바가 달려드는 기세가 너무 거칠어 자신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꽈앙!
땅이 뒤집히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붉은 실바가 공중에 붕 떴다.
자세를 한껏 낮췄던 기간트들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실바 때문에 크게 당황했다.
꽈앙!
그들은 뒤에서 들린 굉음에 일제히 돌아섰다. 그리고 빠르게 멀어지는 붉은 실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쿵쿵쿵쿵쿵!
속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빨랐다. 누구도 붉은 실바를 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뭣들 하고 있나! 어서 쫓아! 저놈을 놓치면 안 돼!”
카이아스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부랴부랴 수십 기의 기간트가 움직였다.
쿵쿵쿵쿵쿵!
최대한 빠르게 달렸지만 처음 벌어진 거리를 좁히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그들은 붉은 실바가 레늄 왕국의 기지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렇게 제론의 탈출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탈출이 끝난 제론의 붉은 실바는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할
정도로 망가졌다.

Chapter 7 반격

제론의 귀환은 레늄 왕국군을 발칵 뒤집었다. 분명히 죽었을 거라고 여긴 사람이 살아 돌아왔으니, 그것도 적에
대한 중요한 정보까지 가지고 귀환했으니 다들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게 정말인가?”
“예, 확실합니다.”
사령관은 제론의 보고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만일 그 정보가 잘못된 거라면 우리 왕국이 패망할 수도 있는 문제네. 정말로 확신하는가?”
“확신합니다.”
제론의 보고가 정말이라면 시간이 없었다. 제론의 탈출로 인해 이미 적이 철수를 준비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사령관은 그래도 망설였다. 만일 제론이 잘못 안 거라면, 강력한 바위에 계란을 내던지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건 그렇고 용케 살아 돌아왔군.”
사령관은 일단 말을 돌렸다. 이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길게 고민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늦어도 오늘 중으로 결정해 내일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사령관이 날카로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좋아. 어쨌든 고생 많았네. 돌아가서 쉬게.”
제론은 군례를 취한 후, 사령관실에서 나갔다.
사령관은 제론이 나간 뒤에도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고민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부대의 명운을 넘어 왕국의
명운이 걸린 일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성공하기만 하면 정말로 멋진 일이 될 것이다. 현재 사령관이 부릴 수 있는 기간트의 수는 300 기에 달한다.
적이 400 기의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으니 그들의 진격을 막으려면 최소한 그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버티는 사이 주변의 다른 기지에서 원군을 보내는 식으로 막아야 한다.
전선의 다른 부분에서 대부분 우위를 차지하기 위함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한데 적이 고작 200 기의 기간트만을 보유하고 있다면, 정말로 한번 해 볼 만하다.
‘벨룸 왕국에서 원군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 확실한데…….’
만일 원군이 오더라도 충분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적 전력을 상당히 깎아 낼 수 있으니 말이다.
사령관은 밤이 새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왔구나!”
제론은 사령관실에서 나가자마자 카이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당장 달려들어 제론을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
번 안은 뒤 제론을 살짝 밀어내고는 주먹을 휘둘렀다.
제론은 고개를 슬쩍 뒤로 젖혀 카이트의 주먹을 피했다.
부웅!
바람 소리를 들어보건대, 상당한 위력임이 분명했다. 아마 맞으면 한동안 부기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 자식! 좀 맞아 주면 어떻게 돼?”
부웅! 부웅!
카이트는 그렇게 소리치며 연달아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제론은 그 주먹에 맞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결국
제풀에 지친 카이트가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헐떡였다.
“허억! 허억! 지독한 놈!”
카이트는 흥분과 호흡을 가라앉힌 뒤, 제론에게 소리쳤다.
“네놈이 뭐라고 그딴 임무를 맡아! 넌 목숨이 10 개쯤 돼?”
제론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 돌아왔지 않습니까. 공까지 세우고.”
카이트는 질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공을 세우긴 세웠다. 마법 트랩으로 가득한 유적을 이용해 적의 일부를
완전히 박살 냈으니 보통 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는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얻은 공인데. 한 번 그런 식으로 공을 세우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확률이 높았다. 사람이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
“앞으로 다시는 그따위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그러죠.”
제론이 빙긋 웃었다. 카이트가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가슴에 와 닿았다. 문득 아카데미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려 애쓰던 두 사람이 떠올랐다.
“자, 내일부터는 바쁠지도 모르니까 어서 돌아가죠. 오늘 중으로 실바를 수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건
불가능하겠죠?”
“그걸 말이라고 해!”
“하하하! 가죠. 오늘은 제가 거하게 한 잔 사겠습니다.”
제론은 기분 좋게 웃으며 앞장섰다.
그런 제론의 모습을 뒤에서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카이트가 이내 피식 웃더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이렇게 살아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맙다. 앞으로 다시는 널 사지로 내몰지 않는다. 목숨 빚은 목숨으로 갚으마.’
카이트는 주먹을 꽉 쥐며 결심했다. 중간에 군부를 나가는 한이 있어도 제론에게 진 빚을 갚겠다고 말이다.

“전군 대기!”
아직 채 해가 떠오르지도 않은 새벽부터 사령관의 우렁찬 외침이 기지를 쩌렁쩌렁 울렸다.
어스름한 빛이 우뚝우뚝 솟은 기간트의 위용을 비췄다. 무려 300 기의 기간트가 언제라도 진군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쳤다.
사령관은 그 모습에 가슴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진격!”
사령관의 외침과 함께 300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쿵!
기간트 군단이 진격하는 광경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제론은 붉은 실바가 망가졌기 때문에 기간트 라이더가 아닌 기사로 출전했다.
100 명의 병사를 이끌고 기간트가 진군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간트가 잔뜩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간단히 내보일 수 없었다.
“자, 우리도 출발한다.”
제론은 기간트가 충분히 멀어졌을 때 출발 명령을 내렸다. 임무는 기간트 전투가 모두 끝난 뒤의 정리였다.
간단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임무였다. 제론과 같은 임무를 받은 기사가 무려 29 명이나 더 있었다. 즉,
3 천 명의 병사가 뒤처리를 위해 준비 중인 것이다.
만일 도시나 영지를 공격하는 입장이었다면 뒤처리가 전투보다 더 어렵다. 치안까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고작 3 천 명의 병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물론 영지의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지금의 경우 뒤처리 부대가 할 일은 적 기사나 병사를 사로잡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포로는 나중에 전후 협상을
벌일 때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한다.
포로는 일반적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가곤 한다. 물론 병사들은 그냥 노예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기사나 귀족의 경우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서라도 데려간다.
제론은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움직였다. 적 사령관의 선택에 따라 전투가 길어질 수도, 또 짧아질 수도 있었다.
‘확인을 좀 해 봤으면 좋겠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확인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상황에서
태블릿을 꺼낼 수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체른산을 다시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제론의 진짜 목적은 바로 그것이었다. 체른산을 다시 차지해서 언제든 원할 때 유적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다시 중앙 유적에서 수련을 시작할 수 있다. 심장의 마나링이 6 개가 되었으니, 아마 5 층은 금방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다.
5 층의 목적은 마법을 익히고,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과연 5 층을 클리어하면 뭘 받게 될까?’
제론은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분명히 수련에 도움이 될 선물일 것이다.
“후욱.”
제론은 숨을 길게 내쉬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지금은 임무에 집중할 때였다. 전쟁은 어떤 돌발 상황이 나타날지
모른다. 방심하는 순간 가는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자. 저놈들이 그냥 순순히 물러나기만 할 리 없으니까.’
적 사령관을 조금 지켜본 바로는 그리 멍청하지 않았다. 또한 야심도 많았다. 그런 자가 그냥 후퇴만 할 리
없었다. 분명히 뭔가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할 말이 생길 테니까.
제론은 병사들과 함께 이동하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굉장한 위기감이 밀려왔다.
“멈춰!”
제론은 일단 이동을 멈췄다. 제론의 느닷없는 명령에 병사들은 걸음을 멈추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제론은 그 모든 시선을 깡그리 무시하고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제론의 감각은 이번 일을 겪으며 한 층 더 발전한 상태였다. 더욱 날카로워졌고, 훨씬 많은 범위를 커버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집중하기 시작하자, 제론은 감각을 건드리는 뭔가를 분명히 느꼈다.
‘함정!’
적 기간트는 절대 아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기간트 100 기의 차이는 간단히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방어만을 작정하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싸우면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적에게 피해를
강요하기 어렵고, 후퇴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현재 벨룸 왕국의 상황으로는 절대 원군을 기다리는 건 불가능하기에 그들은 후퇴가 용이한 작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뒤따르는 보병을 건드리는 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제론은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뒤로 더 물러나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조금씩 뒤로 이동했다.
제론은 일단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부대를 향해 소리쳤다.
“12 백인대! 멈춰!”
제론은 13 백인대를 이끌고 있었다. 12, 14 백인대가 비교적 가까이 있었다.
“14 백인대! 멈춰!”
제론이 큰 소리로 외쳤지만 12 백인대장이나 14 백인대장은 제론의 말을 그대로 무시했다. 그들이 보기에 제론은
라이더일 뿐이었다. 보병의 일은 보병이 가장 잘 안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지금은 절대 멈춰선 안 된다. 기간트 전투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만에 하나 지나치게 일찍
끝난다면 도착이 늦을수록 포로 확보가 어려워진다.
12 백인대장과 14 백인대장은 제론의 외침을 철없는 애송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여겼다.
제론은 답답했다. 자신의 말을 대체 왜 듣지 않는단 말인가. 이러다가 완전히 당할 수도 있었다.
“멈추라니까!”
제론은 목소리에 마나까지 담아 외쳤다. 그 외침이 12 백인대와 14 백인대를 넘어 훨씬 멀리 위치한 백인대까지
퍼졌다.
하지만 제론의 말을 들은 백인대장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같은 판단을 한 것이다.
제론은 이를 갈았다. 그래도 제론의 외침이 완전히 허무한 결과를 낸 건 아니었다. 그 외침은 레늄 왕국의
병사들만 들은 게 아니라 기습을 위해 숨어 있던 적도 함께 들었다.
콰르르!
“으악!”
“기간트다!”
“피해!”
땅속에 숨어 있던 기간트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더 기다렸다가 나왔다면 타이밍이 딱 맞아 보병들을 거의 몰살에
가깝게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제론의 외침으로 다급해지는 바람에 너무 일찍 튀어나왔다.
제론은 이를 갈았다. 대체 왜 자신의 말을 무시한단 말인가. 땅에서 솟아난 기간트는 모두 12 기였다. 보병들을
몰살시켜 후퇴할 때 최대한 포로를 남기지 않으려는 작전이었다.
만일 타이밍이 딱 맞았으면 아주 훌륭했을 것이다. 보병에 심각한 타격을 준 다음 크게 우회해 도망치면 레늄
왕국의 기간트들도 섣불리 추적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하지만 타이밍이 어긋나는 바람에 작전이 크게 어그러졌다. 보병들은 기간트를 본 순간부터 돌아서서 우르르
도망쳤다. 기간트를 피하는 방법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말이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보병을 보는 벨룸 왕국의 열두 라이더는 이를 갈았다. 그들이 선택한 행동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제론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다들 뭐 하고 있나! 피하지 않고!”
제론은 그렇게 외치며 돌아서서 달렸다. 제론의 병사도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쿵! 쿵! 쿵쿵쿵쿵!
열두 기간트 중 2 기가 제론을 쫓았고, 나머지는 즉시 후퇴했다. 시간을 끌면 곤란했다. 작전 실패보다 기간트를
잃는 것이 훨씬 큰일이었다. 그건 절대로 피해야만 했다.
제론은 다리에 마나를 집중하며 달렸다. 하지만 기간트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었다. 점점 간격이 줄어들었다.
“죽어라!”
몰레스에 탄 기간트 라이더가 그렇게 외치며 검을 던졌다. 그는 이걸로 제론을 죽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꽈앙!
제론이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검이 푹 박혔다. 하지만 제론은 죽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옆으로 몇
걸음 이동해 피한 것이다.
몰레스 라이더는 황당한 눈으로 제론을 노려봤다. 방금 전 제론의 움직임을 똑똑히 지켜봤다.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제론은 마치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옆으로 이동했다.
‘저게 가능해?’
더 놀라운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달려가는 제론의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저게 사람이야?’
한 발 땅을 디딜 때마다 지나칠 정도로 긴 거리를 단번에 이동했다. 땅을 디디는 순간을 못 보면 날아간다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가까워지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몰레스 라이더는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쫓는 것에 심취해서 너무 멀리 온
것이다.
“젠장! 돌아가자!”
몰레스와 카타락타가 달리는 방향을 바꿨다. 이대로 달리면 적진으로 돌진하는 셈이 된다. 그건 곤란했다.
쿵쿵쿵쿵쿵쿵쿵!
2 기의 기간트가 크게 우회해 멀어져 갔다. 제론은 보지 않고도 그걸 알았지만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일단
기지로 돌아가 재정비한 뒤에 다시 나오는 게 나았다.
그리고 3 시간이 지난 뒤, 정비를 마친 보병이 다시 기지를 떠났다. 기간트를 보고 도망친 병사와 기사들이 모두
기지로 돌아온 것이다. 거의 희생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제론의 공이었다. 기지를 떠나는 백인장들의 시선이 연방 제론의 얼굴로 향했다.

대승이었다.
일방적으로 후퇴하는 적을 섬멸하는 식의 전투였는지라 피해는 적고 성과는 많았다.
다만 전쟁의 흐름을 단번에 바꿔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레늄 왕국 쪽으로 넘어온 건
확실했다.
그리고 이번 전투의 가장 큰 공은 제론에게 있었다.
사령관은 제론의 공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예전부터 세웠던 모든 공을 그냥 유야무야 넘길 생각도
없었다.
제론의 모든 공이 차근차근 정리되어 총사령관에게 보고되었고, 총사령관 역시 사령관이 특별히 지목까지 해서
보고한 제론의 공을 최대한 자세히 확인하여 국왕에게 상신했다.
그러자 바로 상이 주어졌다. 국왕이 직접 하사하는 상과 총사령관이 내린 상 두 가지가 제론에게 주어졌다.
국왕이 내린 상은 영지였다.
비록 작은 영지지만 현재 제론의 땅으로 되어 있는 유적지에 인접한 곳이었다. 이제 직할령 자체가 거의 남지
않았기에 상당히 큰 포상이었다.
물론 전쟁에서 승리하면 훨씬 더 많은 영토를 얻을 것이다. 국왕 역시 그걸 염두에 두고 영지를 내렸다.
총사령관은 상당한 돈과 휴가를 상으로 내렸다.
하지만 제론은 그런 것보다 체른산을 다시 되찾았다는 사실이 훨씬 즐거웠다. 게다가 휴가까지 얻었으니 당분간
수련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제론은 휴가를 받자마자 곧장 체른산 유적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적에 들렀다가 근방의 도시로 간다고
말해 뒀다. 물론 다른 곳에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유적에 들어간 제론은 일단 그곳의 상태를 확인했다. 유적의 트랩은 총 3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는 2
단계까지만 설정한 상태였다.
3 단계를 모두 활성화시키면 유적에 들어서는 모든 생명체를 향해 트랩이 발동한다. 2 단계는 유적에 충격을 줄
경우 트랩이 발동한다. 1 단계는 유적의 통제실에 들어가려 할 경우 트랩이 발동한다.
제론은 체른산 공방이 끝나자마자 유적의 트랩을 2 단계로 설정했다. 체른산을 빼앗기기 전의 상태로 돌려놓은
것이다.
유적 끝에 도착한 제론은 곧장 지하 유적 로비로 이동했다. 그리고 즉시 공간 도약을 통해 중앙 유적으로 갔다.
제론의 몸이 눈부신 빛에 휩싸이더니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중앙 유적 로비 한가운데 빛무리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아련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본 제론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드디어 왔구나.”
하던 수련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즐거웠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제론은 즉시 5 층으로 향했다.
심장에 새겨진 6 개의 마나링이 빙글빙글 돌았다.

5 층은 마법을 수련하는 곳이었다. 사방에서 마법이 쏟아지면, 그 마법을 막아 내는 것이 이 방의 수련이었다.


단, 날아오는 마법을 정확히 파악해 그것을 완전히 해체할 수 있어야만 했다.
단순히 마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날아오는 마법이 만들어 내는 마나의 파장과 흐름을 읽고 분석해 해체하는
것이다.
만일 마법사에게 이런 방식의 수련을 하라고 하면 대번에 미친놈 소리가 튀어나올 것이다.
현재의 마법사는 마나 스틱을 이용해 마법을 구현한다. 주로 마법진을 인챈트하는 데 특화되어 있고, 실제 마법을
쓰더라도 마나 스틱을 통해 마나의 흐름을 조절한다.
당연히 마나 스틱을 통해 마나를 다루기에 섬세한 조절이 어렵다. 그런 마법사들에게 날아오는 마법을 즉각적으로
파악해 분해하라는 건 그냥 죽으라는 것과 똑같다.
하지만 제론은 그걸 하고 있었다. 날아오는 마법을 정확히 파악해서 그것을 차근차근 해체시켰다. 물론
능숙하지는 못했다.
그나마 느린 속도로 날아오는 마법은 쉽게 해체가 가능했는데, 빠른 마법, 예를 들어 라이트닝 같은 경우는 거의
해체가 불가능했다.
그때마다 제론은 마법에 맞아 뒤로 나가떨어져야만 했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짜릿한 고통을 느끼면서 말이다.
마법을 해체하는 수련은 제론이 빠르게 마법을 익힐 수 있게 해 주었다. 일단 마법을 해체하려면 그 마법에 대해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어야만 했다.
제론은 죽어라 마법을 익히고, 수련에 매진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마법 실력을 키우고, 또 마법에 대한 내성을
키워 갔다. 마나를 읽는 눈과 감각 또한 급격히 성장했다.
이 모든 것이 6 개의 마나링 덕분이었다. 만일 제론이 그걸 이뤄 내지 못했다면 5 층의 수련은 정말로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화르륵!
커다란 불덩이 하나가 날아왔다.
제론은 순간적으로 불덩이를 이룬 마나의 구조를 읽고 만들어진 역순으로 해체했다.
화륵!
한순간 불이 크게 타오르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제론은 이질적인 마나의 흐름을 느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나의 흐름을 파악해 그것을 그대로 해체해 버렸다.
빠지직!
라이트닝의 전조였다. 나타나려다 사라져 버린 라이트닝이 주변에 잔벼락을 흘렸다.
제론은 식은땀을 흘리며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사방에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마법이었다.
제론의 심장에 위치한 6 개의 마나링이 맹렬히 회전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마나의 흐름부터 차근차근
장악해 나갔다.
무서운 속도로 마법이 해체되었다. 제론의 집중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마법이 발현되는 속도를 파악해 순차적으로
하나하나 마법을 해체했다.
휘우웅!
바람이 한 차례 불었다. 마나의 흐름이 만들어 낸 바람이었다. 그 바람과 함께 모든 마법이 완벽하게 해체되었다.
제론은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다. 드디어 5 층을 클리어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상황에서건 마법을 해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 마법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말이다.
지이잉!
5 층을 클리어하기 무섭게 기둥 하나가 올라왔다. 매 층을 클리어할 때마다 주어지는 선물이었다.
기둥으로 다가간 제론은 카드와 검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당히 훌륭한 검이었다. 검신에 잔뜩 새겨진 문양은 분명히 마법진이었다. 마법이 인챈트 된 검이었다. 게다가
이 검은 통짜 테페룸으로 된 검이었다. 검을 쥔 순간 제론은 그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테페룸에 마법진을 새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또 그 마법진이 제대로 동작한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제론이 검을 쥐자 마법진이 일제히 빛을 발하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검은 겉보기에 지극히
평범하게 변했다. 하지만 내재된 힘은 그대로였다.
제론은 카드를 들어 에너지를 공급했다. 카드가 가루가 되어 부서지며 제론의 몸에 흡수되었다. 이제는 카드의
재료도 테페룸의 가공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초고대에는 이렇게 테페룸을 이용한 물건들이 상당히 많았던 모양이라고 생각한 제론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상념을 지우고 집중했다.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검술이었다. 이제 기사 검술에도 상당히 익숙해져 있기에 새로운 검술을 본 제론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기사 검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검술이었다. 게다가 마나의 운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웠다.
이런 검술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검술의 이름도 엄청났다. 제국 황제 검술. 즉,
황제가 익히는 검술이라는 뜻이었다.
‘황제도 검을 익혀야 하는 건가? 그럼 여긴 황제를 교육하는 곳인가?’
제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지만 왠지 직감적으로 그건 절대 아닐 것
같았다.
체른산 유적을 이 중앙 유적에 등록시키며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알았고 어쩌면 황제를 위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가능성일 뿐이었다.
제론은 이곳의 목적은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예를 들면…… 신이라거나.’
제론은 자신이 생각하고도 너무 허황되고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신을 만들기 위한 교육기관이라니 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생각인가.
지금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제론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황제 검술에 집중했다.
그리고 거기에 푹 빠져들었다.

☆ ☆ ☆

제론이 중앙 유적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을 때, 체른산 방어군은 바쁘게 움직였다.


체른산을 다시 차지하고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줬으니 그 여세를 몰아 더 많은 성과를 위해 새로운 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체른산 방어군은 무려 300 기의 기간트를 보유 중이었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주변의 적 기지들을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
일단 기지 방어용으로 100 기 정도 남겨 두고 200 기의 기간트로 주변을 휩쓸면 상당한 성과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방어군 사령관은 욕심을 냈다. 가능성이 지극히 높은 욕심이었다. 아마 작전을 시작하면 벨룸 왕국은 크게 긴장할
것이다.
그렇게 긴장감을 조성해 병력을 이쪽으로 집중시키는 것만으로도 전쟁을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체른산 방어군은 최대한 서둘러 작전을 이행했다. 그리고 원하던 성과를 얻어 냈다.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Chapter 8 2 왕자

휴가에서 복귀한 제론은 밝은 표정으로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5 층을 클리어하고
새로운 검술을 얻었으니 말이다.
“휴가는 잘 즐겼나?”
“예.”
“2 왕자님께서 또 오셨네.”
사령관의 말에 제론이 눈을 빛냈다. 이 말을 굳이 자신에게 하는 건, 관계가 있다는 뜻이었다.
“자네를 계속 찾고 있네.”
“절 말입니까?”
“유적에 관해서 할 말이 있다더군.”
“어디 계십니까?”
“관사에 계시네. 마기어 백작과 함께 있으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게.”
사령관의 말에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기어 백작까지 대동했다면 대충 무슨 일인지 예상은 된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론은 군례를 취하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제론은 곧장 관사로 향했다.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2 왕자를 만난 뒤, 자신의 실바를 보러
갈 것이다. 과연 다 고쳤을지 너무나 궁금했다.
실바를 떠올리며 걸음을 서두른 제론은 금방 관사에 도착했다. 관사 앞은 근위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제론을 보자마자 즉시 안으로 들어가 2 왕자에게 보고를 했다.
그리고 제론을 관사 안으로 안내했다.
“오, 왔나? 이리로 와서 좀 앉게.”
마기어 백작은 환한 표정으로 제론을 맞이했다. 제론은 먼저 2 왕자에게 군례를 취한 뒤, 마기어 백작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좀 일찍 보고 싶었는데, 마침 휴가를 갔다고 하더군.”
“작은 공을 세워 휴가를 포상으로 받았습니다.”
“그렇군. 시간이 많지 않으니 본론부터 말하겠네.”
마기어 백작은 그렇게 입을 연 뒤, 2 왕자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체른산 유적 말인데…… 그걸 넘겨줄 수 있겠나?”
“예? 그게 가능합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시도할 만한 것들이 있네. 협조해 주겠나?”
제론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오래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체른산은 왕국 직할령이니 국왕 폐하의 허락이 먼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제론이 지적한 건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사항이었다. 마기어 백작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2 왕자는
그렇지 않았다.
“감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2 왕자 전하입니다.”
제론은 2 왕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차피 2 왕자나 마기어 백작은 슈린 공작과 깊은 관계에 있다. 결국은
싸워야 할 상대였다.
“그런데도 그따위 소리를 한단 말이냐!”
제론은 대답하는 대신 마기어 백작을 쳐다봤다. 마기어 백작은 난감한 표정으로 땀을 뻘뻘 흘렸다.
사실 이렇게 강압적으로 나오면 안 된다. 유적을 얻으려면 제론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일단 유적을
얻어야 더 깊은 비밀을 파헤쳐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건 자네가 걱정할 거 없네. 일단 권한만 이양해 주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하지.”
마기어 백작의 말에는 섣불리 이 일을 공론화시키지 말라는 뜻이 함께 담겨 있었다.
제론은 더 버텨 봐야 좋은 꼴을 볼 수 없다고 판단해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너무나
의아했다. 대체 유적의 권한을 어떻게 이양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 끌 거 없으니 당장 가 보는 게 어떤가?”
“그러죠.”
제론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든 준비가 끝났다. 체른산까지 갈 마차가 문 앞에 섰고, 말을 탄 근위
기사들이 호위 대형으로 마차 주변에 포진했다.
2 왕자가 먼저 마차에 오르자, 마기어 백작은 제론을 데리고 함께 마차에 탔다.
세 사람을 실은 마차는 곧장 체른산으로 달려갔다.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제론은 과연 마기어 백작이 어떤 방법으로 유적의 권한을 이양받으려 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일 유적의 주인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면 앞으로 이 유적을 이용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일단 지하 유적에 가려면 이 유적의 끝에 가야만 한다. 한데 유적의 트랩이 작동하면 아예 안으로 들어가는 게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자, 이리로 오게.”
마기어 백작은 제론을 손짓해서 불렀다. 그들은 지금 유적의 중간쯤에 있었다. 마기어 백작은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이게 보이나?”
마기어 백작이 가리킨 곳에 고대 문자로 뭔가가 쓰여 있었다. 문양으로 교묘히 꾸며졌지만 분명히 몇 개의
단어였다.
“고대 문자로군요.”
제론은 그것을 바로 읽을 수 있었다. 제론은 초고대 문명의 모든 문자를 알고 있다. 그것과 고대 문명의 문자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생각보다 금방 익힐 수 있었다.
고대 문자는 초고대 문명의 문자로부터 파생되어 만들어졌다. 어떤 식으로 생성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큰 영향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제론은 생각보다 고대 문자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권한, 교환.’
제론은 마기어 백작이 왜 확신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걸 단어만으로 짐작하면 권한을 교환하거나 전달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건 마기어 백작의 착각이었다. 고대 문자는 단어 하나에 몇 가지 뜻이 동시에 담기기도 한다.
‘실제로는 교환이 아니라 설정인데 말이야.’
권한을 설정해 준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 권한 설정이라는 것이 이 유적의 권한을 설정하는 게 아니었다. 유적을
지키는 가디언의 권한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즉, 여기서 유적의 주인이 권한을 설정하면 그 설정을 받은 자가 이 유적의 가디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제론은 그 사실을 친절히 알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고대 문자에는 조예가 없어서 모르겠군요.”
“권한을 교환한다는 뜻이라네.”
“주인을 바꾼다는 의미로군요.”
“잘 봤네.”
마기어 백작은 그렇게 말한 후, 2 왕자를 바라봤다.
“왕자님 이쪽으로 서시지요.”
“여기에 서면 되나?”
2 왕자는 당당하게 문양 앞에 섰다. 마기어 백작은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했고, 또 공부를 했다. 수많은 유적
전문가의 조언까지 수집해서 이 일을 결정했다.
아직 이 유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지 못했다. 또한 제대로 된 연구를 하지 못했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유적의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걸 발견했다.
사실 제론의 도움을 지속적으로 얻어서 유적을 발굴하고 연구를 계속해도 된다. 하지만 마기어 백작도 또 2
왕자도 제론을 이 일에 끌어들이기가 껄끄러웠다.
어쨌든 그들은 슈린 공작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제론은 슈린 공작에게 원한을 가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권한 이양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확실한 권한 이양법을 알아냈다.
“자네는 2 왕자께 권한을 드리기만 하면 되네. 그 이후의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하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제론은 담담하게 물었다. 그 모습에 마기어 백작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유적을 강탈하는
거나 다름없는데 이렇게 담담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묘했다.
“괜찮겠나?”
“뭘 말입니까?”
“어쨌든 이 유적의 주인은 자네 아닌가.”
제론이 피식 웃었다.
“이미 발굴이 끝난 유적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기어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적에 대해 잘 모르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보통 사람이 유적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좋네. 그럼 시작할 테니 내 말을 따라 하게. 카베르 체디쉬 큠.”
제론은 속으로 내심 감탄했다. 마기어 백작은 권한을 설정하는 정확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분명히 유적
어딘가에서 찾아낸 주문이리라.
“카베르 체디쉬 큠.”
제론은 망설임 없이 그 말을 따라했다. 이건 유적의 주인이 아니라면 전혀 소용이 없는 주문이었다.
벽에 새겨진 문양에서 눈 부신 빛이 일어났다. 그 빛에 마기어 백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다.
2 왕자는 자신의 몸을 휘감는 빛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역시 마기어 백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빛이 몸에
스며들수록 점점 몸과 마음이 편해졌다.
이내 빛이 사라졌다.
“끝났습니다. 자네는 이제 돌아가게.”
제론은 마기어 백작의 말에 곧장 군례를 취하고 유적을 나갔다. 밖으로 나온 제론의 입가에 비웃음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하여튼 슈린 공작과 관계된 놈들은 똑같이 탐욕스럽다니까.’
제론은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갔다.

☆ ☆ ☆

“백작. 이제 어떻게 하면 되나?”


2 왕자는 크게 들떴다. 이 유적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유적을 처음 발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인이 된 제론을 보며 얼마나 짜증이 났던가.
하지만 이젠 그 짜증이 모두 즐거움으로 승화되었다. 이렇게 유적의 주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역시 이런 중요한
것에는 어울리는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었다.
“차근차근 주문을 파악해 나가셔야 합니다.”
“주문?”
“유적을 움직이는 주문입니다. 트랩을 열 수도 있고, 해제할 수도 있으며,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비밀 공간을
여는 주문들이 있습니다.”
비밀 공간이라는 말에 2 왕자가 반색했다.
“어서 그 주문을 알려 주게. 한시라도 빨리 중요한 물건을 찾고 싶군.”
“아직 전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차근차근 유적을 돌아보며 알아내야 하니 마음을 느긋하게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하하. 하긴. 이런 대단한 유적이 그리 쉽게 마음을 열 리 없지. 내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 주문만 알아오게.
하하하하.”
“맡겨 주십시오.”
2 왕자는 고개 숙인 마기어 백작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일단 주문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었다. 2 왕자는 당분간 푹 쉬며 즐기기로 했다. 주문을
알아내고 난 다음 유적을 탈탈 털어 가면 된다.
‘다음 대 국왕은 나다!’
2 왕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유적을 나섰다.

관사로 돌아간 2 왕자는 문득 제론이 떠올랐다.


“가만, 그놈을 그냥 둬도 되나?”
엄밀히 따지면 자신은 왕국 소유의 유적을 강탈했다. 어차피 조만간 국왕이 되어 모든 것의 주인이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국왕이 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몇 개 있는데, 그 산을 넘기도 전에 이런 일로 흔들려선 안 된다. 쓰기에 따라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적 안으로 들어갈 때는 굳이 근위 기사들도 대동하지 않고 마기어 백작과 제론만 데리고 가지 않았던가.
한데 만일 제론으로부터 이 일이 새 나간다면 자칫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불안한 부분은 제거하면 그만이긴 한데…….”
현재 제론은 군부의 관심이 집중된 인물이었다. 전황을 완전히 뒤집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제론이었다.
또한 체른산 방어군의 기간트 라이더들 대부분은 제론에게 목숨을 빚졌다. 적이 유적을 노리고 기습했을 때,
제론이 몸을 던져 막아 내지 않았다면 아마 크게 패배했을 것이다.
그뿐이랴, 유적도 제론이 발견했다. 이번 유적에서 발굴한 유물들은 그 가치가 상당히 뛰어났다. 이번에 발굴한
유적 중에도 당연히 기간트가 있었다. 그것도 발굴형 기간트 중 가장 뛰어나다는 히엠스였다.
여러모로 공이 집중된 상황이라, 함부로 건드리기가 껄끄러웠다. 더구나 군부에서는 아무리 왕자라도 조심해야만
한다.
군부와 귀족이 알력 다툼 중이니, 귀족 편에 서 있는 2 왕자로서는 섣부른 행동을 하다가 대사를 그르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차기 국왕이 되려면 군부의 힘을 얻는 건 필수적인 요소였다.
2 왕자가 현재 이곳에 머무는 이유도 유적 때문이긴 했지만 군부와 좀 더 밀착된 관계를 만들기 위한 목적도 컸다.
“흐음, 어쩐다…….”
사실 이건 기회였다. 슈린 공작이 에어스트 가문을 얼마나 경계하는지 알기에 제론을 처리할 수 있다면 슈린
공작가로부터 좀 더 노골적인 도움을 받는 것이 가능해진다.
슈린 공작가가 제론을 더 어쩌지 못한 건 제론이 군부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왕자라지만 유적 발굴이라는
목적이 없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지는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아까 유적에서 해치워 버릴 걸 그랬나?”
2 왕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었다. 최대한 자신이 했다는 증거를 남겨선 안 된다.
제론을 건드리는 문제는 절대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나?”
2 왕자는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얼굴이 환해졌다.
“여기서 처리하기 힘들면 밖으로 끌어내면 될 것 아닌가!”
제론은 큰 공을 세웠다. 영지까지 하사받을 정도의 공이었다. 그러니 왕실 무도회에 초청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겠는가.
“일단 여기서 왕궁까지 가려면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는 도시까지는 가야 하니까, 그 중간에 기습을 하면
되겠군.”
제론 혼자 움직이지 않게 만들면 동선을 제어하기가 편하다. 2 왕자는 적당한 인물을 떠올렸다. 기습해서
제거하면 좋을 사람과, 자신을 도와 제론을 제거하는 데 힘을 보태 줄 사람까지 하나하나 떠올렸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어렵겠군. 아직 전쟁이 한창이니까.”
최소한 몇 달은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그 정도라면 2 왕자도 충분히 제론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감시하면 되니 말이다.
“좋아. 이제야 진짜로 쉴 수 있겠군.”
2 왕자는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이내 잠들어 버렸다. 밤을 지새우며 화끈하게 놀려면 지금 미리
자 둬야만 했다.

☆ ☆ ☆
2 왕자가 그런 계획을 세우는 동안 제론은 숙소에서 차분히 마나 호흡을 한 뒤, 황제 검술을 수련했다.
황제 검술은 정말로 어려웠다. 그리고 제대로 수련하기 위해서는 기초 검술과 기사 검술이 충분한 경지에 올라
있어야만 했다.
제론이 비록 유적을 클리어하며 기초 검술과 기사 검술을 상당한 수준까지 익히긴 했지만 아직 황제 검술에 도움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래도 황제 검술에 매달렸다. 새로운 검술을 익히고 수련한다는 사실이 너무 즐거웠다.
또한 수련을 하면 할수록 황제 검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껴져 더더욱 빠져들었다.
황제 검술을 익히며 마나 호흡이 훨씬 자연스러워졌고, 효율이 높아졌다. 아마 황제 검술의 수준이 올라가면 마나
호흡도 새로운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론의 숙소는 좁았다. 마나 호흡을 하기에는 넓었지만, 검술을 수련하기에는 공간이 많이 모자랐다. 하지만
검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수련하면 어찌어찌 수련이 가능했다.
지금도 제론은 맨손으로 황제 검술을 수련하는 중이었다. 황제 검술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능숙하게 검술을 펼치기에는 아직 수준이 너무 낮았다.
후웅! 후웅!
그저 손으로 검을 쥔 시늉만 하고 휘두르는데도 거친 바람 소리가 울렸다. 숙소 안의 공기가 요동쳤다.
한 차례 검술을 펼친 제론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너무나 상쾌했다. 마치 몸속을 한 번
씻어 낸 듯했다.
“이게 황제 검술의 힘이로군.”
제론은 호흡을 가다듬은 뒤, 다시 한 번 검술을 펼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펼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많은 신경을 써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 번 펼치고 나면 너무나 상쾌했다. 또한 힘이 넘쳐나는 듯했다.
제론은 끊임없이 검술을 펼치고 또 펼쳤다.
후웅! 후웅!
숙소에는 제론이 내는 바람 소리만 가득했다. 검술 수련은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제론은 잠도 자지 않고
검을 수련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제론은 이 검술에 더욱 깊이 빠져들 거라 예감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취감과 의욕이 용솟음쳤다.

쿵! 쿵! 쿵!
“준비!”
대결을 위해 기간트 2 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한 대는 크라테르였고, 다른 한 대는 실바였다. 보통이라면
말도 안 되는 대결이었다. 하지만 그 실바가 붉은색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작!”
꽈앙!
시작 신호와 함께 크라테르가 강하게 발을 박차고 앞으로 나갔다. 비교적 거리가 가까웠기에 순식간에 붉은 실바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부우웅!
거대한 검이 붉은 실바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졌다. 금방이라도 붉은 실바가 두 동강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붉은 실바는 대각선으로 한 발 걷는 지극히 간단한 움직임으로 검을 피해 냈다. 아울러 그 한 걸음으로
크라테르의 품에 파고들었다.
꽝!
붉은 실바가 어깨로 크라테르의 왼쪽 가슴을 들이받았다. 오른팔로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 왼쪽 가슴에 강한
충격을 받으니 몸이 돌아가며 균형을 잃었다.
꽈앙!
크라테르의 몸체가 빙글 돌더니 그대로 바닥에 뻗었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승부였다.
만일 실제로 사람 2 명이 검을 들고 싸웠다면 결코 이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간트 간의
싸움은 인간의 싸움과는 완전히 달랐다.
대결이 끝나자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겪어 봐도 이 붉은 실바는 정말이지 사기였다. 아니, 붉은
실바를 탄 제론이 사기였다.
어떻게 기간트를 이렇게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제론이 다루는 기간트는 마치 커다란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물론 실바라는 기체의 특성 때문에 관절의 한계가 있었다. 진짜 사람과는 여러모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 인간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기간트에
대한 상당한 센스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크라테르를 타고 덤벼도 제론이 모는 붉은 실바를 이길 수가 없었다. 제론의 실바가 보통 실바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만일 제론의 실바에 대한 자세한 사항이 외부로 알려진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붉은 실바 곳곳에 새겨진 마법진은
기존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마법진 자체를 바꿔 버린 것이다.
마법사들이 안다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일이었다.
푸쉭!
붉은 실바의 해치가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제론이 훌쩍 뛰어내렸다.
탁! 탁! 탁!
제론은 가볍게 붉은 실바의 허리와 무릎을 디디며 바닥에 내려섰다. 마치 깃털처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동료 라이더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몇 번이나 겪었지만 적응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질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정말 대단하군.”
“대체 어떻게 실바로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건가?”
“듣기로 점프까지 했다면서?”
“한 번 보여 줄 수 있나?”
최근 제론은 점프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실바의 내구성 때문에 점프를 할 때마다 심각한 충격이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히지만 붉은 실바가 점프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기간트로 점프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러려면 상당한 기술과 센스가 필요하고, 또 대단히
뛰어난 기체가 필요했다.
최소한 발굴형 기간트 중에서도 상급이라 인정받는 아우틈이나 히엠스는 되어야 시도라도 해 볼 수 있었다.
한데 고작 실바로 그걸 해냈으니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소문만 접한 사람의 경우 그걸 그대로 믿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모여든 라이더 중 한 명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혹시 저 실바가 좀 특별한 거 아닌가?”
그 말에 모여서 구경하던 라이더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런 부탁하기 좀 그렇지만…… 내가 한번 타 보면 안 되겠나?”
그 말에 제론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다들 기대감 어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어려울 것 없죠.”
제론은 너무나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서브 라이더로 등록만 시켜 주면 되는 일이기에 과정이 복잡하지도 않았다.
가장 먼저 나선 라이더가 붉은 실바의 서브 라이더로 등록되었다.
제론은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해 보라고 말했다. 라이더들이 줄을 섰다. 그들은 분명히 붉은 실바에 뭔가 비밀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물론 제론은 이미 그에 대한 조치를 마무리했다. 처음 기간트를 개조할 때부터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그렇기에 기간트의 조종석에 락을 걸어 두었다.
제론의 기간트는 마나 코어부터 다른 기간트와 완전히 달랐다.
보통의 기간트는 마나 코어에 테페룸을 그냥 덩어리째로 넣는다. 하지만 제론은 테페룸을 액체로 만들어 주입했다.
마나 코어의 효율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제론이 실바를 개조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바로 다른 실바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달라진 점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마나 코어의 설계를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액체 테페룸을 쓴 것만으로도 출력이 상당히 높아졌다.
원래의 실바는 출력이 고작 0.8 에 불과하다. 하지만 제론의 붉은 실바는 출력이 1.2 에 달한다. 테페룸을
액체로 바꾼 것만으로 거의 40 퍼센트에 가까운 성능 향상을 가져왔다.
또한 관절도 더 유연했다. 물론 실바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실바의 부품을 그대로 사용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기간트 센스가 뛰어난 사람일수록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차이였다.
마나 로드를 통해 이동하는 마나의 흐름도 완전히 달랐다. 마나 로드에 테페룸 가공 물질인 포로스를 썼으니
당연했다.
붉은 실바에 한 번 타 보면 누구나 뭔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사항을 한꺼번에 겪으면 아무리
센스가 없어도 확실한 차이가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론은 락을 걸었다. 자신이 타지 않으면 자동으로 라이더에게 부담을 주는 락이었다.
지잉!
서브 라이더 등록이 끝나자마자 붉은 실바에 올라탄 라이더는 서둘러 해치를 닫았다. 어서 빨리 붉은 실바를
움직여 보고 싶었다. 그래서 대체 뭐가 다른지 알아보고 싶었다.
쿵! 쿵!
붉은 실바가 두 걸음 걸었다. 그리고 팔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푸쉭!
해치가 열렸다. 그리고 라이더가 훌쩍 뛰어내렸다.
다들 의아한 눈으로 그 광경을 쳐다봤다.
“왜 그러나?”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다들 몰려와 물었지만 라이더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일단 다들 한 번씩 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라이더의 말에 다음 차례가 된 사람이 서브 라이더로 등록했다. 그리고 붉은 실바에 올라탔다.
이번에도 조금 전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두 걸음 걷고 팔과 목을 조금씩 움직이다가 내렸다.
그 뒤로 나머지 라이더가 모두 붉은 실바에 탑승해 어떤지 확인했다.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다들 내리자마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실바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대체 이런 걸 타고 어떻게 점프를 하고 그런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여 줬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모든 라이더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에 이르렀다. 만일 제론이 실바가 아닌 다른 기체를
탄다면 과연 어떤 위력을 보여 줄까?
“오늘은 이쯤 마무리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제론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더 훈련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대체 얼마나 큰 재능의 차이가
존재한단 말인가.
‘저 실바로 그런 움직임을 보여 줬다고? 점프를 해? 그건 불가능해!’
모두의 생각이 하나로 모아졌다. 그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라이더로서의 센스만으로 그게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자, 잠깐 기다리게!”
제론은 훈련장을 떠나려다가 그 말에 돌아섰다. 그리고 자신을 부른 라이더를 쳐다봤다.
“내 카타락타에 한 번 타 보게.”
제론이 눈을 빛내자, 그 라이더가 말을 이었다.
“내 카타락타로 점프를 한 번 해 보게. 성공하면 깔끔하게 물러나겠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제론은 그들을 쭉 둘러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들은 아직도 붉은 실바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직접 몰아 봤으면서도 말이다. 만일 제론이 카타락타에
타고 점프에 성공한다면 모든 의구심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가 남지.’
대부분의 라이더가 모인 자리에서 점프를 하면 이번에는 그 소문이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퍼질 것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차라리 라이더로서의 센스나 재능을 보여 주는 편이 훨씬 나았다. 붉은 실바에 더 파고들면
훨씬 위험한 것들이 드러날 수도 있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습니다.”
제론의 말에 라이더가 움찔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책임은 모두 내가 지지.”
서브 라이더 등록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제론은 아련한 눈으로 해치가 열린 카타락타를 올려봤다. 생일 선물로
받았던 그의 기체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파도가 밀려오듯 추억이 흘러갔다.
“후욱.”
제론은 숨을 내쉬어 상념을 털어 냈다.
탁! 탁! 탁!
실바를 탈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카타락타의 조종석에 올라탄 제론은 곧장 해치를 닫았다.
지잉!
카타락타가 가동을 시작했다.
보통은 생소한 기간트에 타면 적응 시간이 제법 필요하다. 하지만 제론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필요치 않았다.
제론은 바로 발을 뗐다.
쿵쿵쿵!
그대로 달려 나가는 카타락타의 모습에 구경하던 모든 라이더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적응을 위한 아무런
시도도 없이 곧장 저렇게 달릴 줄은 몰랐다.
꽈앙!
다들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카타락타의 육중한 몸이 굉음과 함께 허공에 붕 떴다. 거의 기간트의 머리를
뛰어넘을 정도로 높이 떠오른 카타락타가 다시 바닥에 내려왔다.
꽈앙!
쿵쿵쿵쿵!
바닥에 내려선 카타락타가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멈췄다.
푸쉭!
해치가 열리고 제론이 내려왔다. 제론은 라이더를 향해 걸어갔다.
“서브 라이더 등록을 해지해 주십시오.”
“응? 아, 드, 등록. 알았네.”
허둥지둥 등록을 해지한 라이더가 질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제론의 한마디에 급격히
굳었다.
“점검을 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상당한 충격이 가해졌으니 제법 손상이 클 테니까요.”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훈련장에서 나갔다.
다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한 사람, 카타락타의 주인만 얼굴이 일그러졌을 뿐이었다.

2 왕자는 마기어 백작과 함께 유적에 들어가는 일이 잦았다. 그렇기에 유적 입구는 근위 기사들이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사실 그 때문에 제론은 조금 짜증이 난 상태였다. 유적을 2 왕자가 통제하는 바람에 중앙 유적에 다녀오기가
어려워졌다.
현재 제론은 중앙 유적 6 층에서 수련 중이었다. 예상대로 중앙 유적 6 층은 황제 검술을 위한 곳이었다.
황제 검술의 그 복잡한 흐름을 몸에 새기기 위한 곳이었는데,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마나 폭풍 속에서 버티는 아주
단순한 수련장이었다.
하지만 수련 방식이 단순하다고 해서 그걸 해결하는 것도 단순한 건 아니었다.
마나 폭풍을 견디는 방법은 단 하나, 황제 검술이었다.
황제 검술을 끊임없이 일정한 속도로 펼쳐야만 몸도, 몸속에 흐르는 마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펼치면
펼칠수록 마나의 흐름이 강해졌고, 안정을 찾아갔다.
그렇게 수련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근위 기사가 유적 입구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제론은 조바심이 났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6 층을 클리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길이 막혔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론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그저 홀로 황제 검술을 끊임없이 연마하고 또 연마했다.
언제 다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른다. 벨룸 왕국이 끊임없이 밀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이 이대로 허무하게 무너질
리 없었다. 분명히 뭔가 수를 낼 것이다.
그 전에 최대한 실력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제론은 어떻게든 다음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익스퍼트에 오르고자
했다. 제론의 기준으로 익스퍼트는 현재 세상의 기준으로 소드 마스터이다.
제론은 확신했다. 황제 검술을 익히다 보면, 또 기초 검술과 기사 검술을 꾸준히 다져가다 보면 조만간
익스퍼트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중앙 유적에 가지 못하는 건 너무나 아쉬웠다.
‘유적에 한 번 가 볼까?’
제론은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적의 상황을 본 뒤, 몰래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지, 또 몰래 빠져나오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짧았다. 제론은 은밀한 그림자가 되어 숙소를 빠져나갔다. 제론을 감시하던 자가
있었지만, 그는 전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떤가? 좀 성과가 있나?”


2 왕자의 물음에 마기어 백작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몇 가지 주문을 알아내긴 했지만, 어떤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을 못했습니다.”
“확인이야 내가 하면 그만이지. 어떤 주문인가?”
마기어 백작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문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한데 제가 나갈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마기어 백작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만일 그 주문이 유적의 트랩을 활성화시키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하하. 뭘 그리 걱정하나. 유적의 주인인 내 옆에 있는데. 어서 주문이나 알려 주게.”
마기어 백작은 꺼림칙했지만 어쩔 수 없이 주문 몇 개를 말해 주었다. 주문은 간단했다.
2 왕자는 주문을 듣자마자 바로 시험했다.
“카슘!”
꽈르릉!
천장과 벽에서 일어난 거대한 벼락이 유적 입구를 향해 날아갔다.
꽈과광!
유적 입구 쪽에서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입구에 서 있던 근위 기사의 기간트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물론 2 왕자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벼락을 밖으로 쏟아 내는 주문인 모양이군.”
2 왕자는 흥분한 표정으로 다시 주문을 외웠다.
“카슘! 카슘! 카슘!”
꽈릉! 꽈릉! 꽈르릉!
연달아 3 번의 벼락이 쏟아져 나갔다. 당연히 밖은 난리가 났다.
“으하하하! 이거 정말 멋지군!”
한동안 2 왕자는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기분에 취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음 주문을 읊었다. 지금
중요한 건 벼락을 쏟아 내는 게 아니라, 이곳의 비밀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 2 개의 주문을 더 확인했다. 하지만 뾰족한 성과가 없었다. 주문을 외우고도 무슨 주문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날은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2 왕자는 하늘 끝까지 올라간 기분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서 근위 기사들의 기간트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 확인한 뒤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무려 3 기의 크라테르가 꼴사납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다시 일어날 생각도 못했다.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벼락의 위력이 무시무시하군. 이 정도 마법을 완전히 얻기만 하면 무서울 게 없겠어.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
마기어 백작도 기분 좋게 웃었다. 그의 뇌리도 기대감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2 왕자가 유적의 주인이 되었으니
결국 유적에 쓴 마법진도 얻게 될 거라 확신했다. 그걸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슬슬 배가 고프군. 어서 돌아가지.”
“예, 왕자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마기어 백작은 희희낙락한 얼굴로 공손히 2 왕자를 모시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 뒤를 간신히 깨어난 3 기의
크라테르가 천천히 따라갔다.
그렇게 모두가 사라진 유적 입구에 제론의 모습이 슬쩍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Chapter 9 벨룸 왕국의 반격

제론은 유적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통제실로 향했다. 일단 전체적으로 점검을 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이곳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지금이야 아무도 지키지 않지만, 조만간 또 근위 기사들이 이곳을 장악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드나들기가 참으로
난감해진다.
제론은 2 왕자와 마기어 백작이 하는 말을 다 들었다. 이 근방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부분 확인이 가능했다. 특히
제론이 원하는 부분은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당연히 유적 안에서 벌어지는 일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었다. 태블릿을 통해서 말이다.
“권한 설정을 다시 해야겠어.”
통제실에 도착한 제론은 유적의 권한 설정을 손봤다. 이미 이 유적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파악했다. 그렇기에
가디언의 권한 설정 정도는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했다.
제론은 2 왕자의 가디언 권한을 조절해 유적의 출입만 가능한 걸로 바꿨다.
또한 통제실에 들어온 김에 유적의 기능을 좀 더 세부적으로 확인했다. 입구를 통하지 않고 이곳에 들어올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다.
“찾았다.”
제론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유적 입구를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비밀
통로가 있었던 것이다.
“일단 통제실과 연결되는 동공에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둬야겠군.”
제론이 지하 유적으로 향할 때, 누군가 그곳에 있으면 곤란했다. 그래서 제론은 유적의 기본 기능인 환영 마법을
통해 동공 일부를 감췄다.
적절한 조치를 취한 제론은 오늘 2 왕자가 읊은 주문을 떠올렸다.
마기어 백작이 알아낸 주문은 모두 유적 내부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벼락을 밖으로 쏟아 내는 명령은
가디언이기에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주문은 전혀 성질이 다른 명령이었다. 하위 가디언을 부리는 명령 코드였다. 만일 2 왕자 아래에
귀속된 가디언이 있었다면 그 명령 코드에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유적에 남은 가디언이 하나도 없었기에 명령 코드가 먹히지 않은 것이다.
가디언 명령 코드는 2 왕자에게도 당연히 쓸 수 있었다. 하지만 2 왕자는 만들어진 가디언이 아니라, 인간이
가디언으로 설정된 경우이기 때문에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가디언이 되겠다고 받아들인 이상, 몇 가지 중요한 코드는 작동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가디언
권한 해제라든가 소멸, 동작 제한에 대한 코드가 그러했다.
‘분명 유용하게 쓸 때가 올 거야.’
제론은 그렇게 믿으며 통제실에서의 일을 마무리했다. 이제 당분간 제론은 틈만 나면 중앙 유적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제론은 기념 삼아 곧장 중앙 유적으로 향했다. 그리고 원 없이 수련에 매진했다. 머지않아 6 층을 클리어할 수
있을 듯했다.

☆ ☆ ☆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제론이 입대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전쟁은 여전히 레늄 왕국에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제론이 소속된 체른산 방어군은 큰 전투가 없어 비교적 조용했다.
그 사이 아카데미에서 한 번 졸업식이 있었지만 체른산 방어군 쪽으로는 한 명도 오지 않았다. 굳이 인원을
충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전쟁이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벨룸 왕국은 그냥 무기력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쿵!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기간트의 발소리였다.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인 걸로 미루어 한두
대가 아니라 수백 대 단위일 거라고 여겨졌다.
당연히 기지가 발칵 뒤집혔다.
비상이 걸린 기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우르르 달려갔다. 대부분이 라이더였다.
“적 규모가 얼마나 되나?”
“500 기입니다.”
“500 기?”
사령관이 눈을 부릅떴다. 500 기라니. 대체 벨룸 왕국에서 그 많은 기간트를 어떻게 동원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길 위해 다른 곳을 포기하는 건가? 그동안 피해가 누적되어서 남은 기간트가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사령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체른산은 전력적이나 국가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굳이 여기를 치겠다는 건, 체른산 유적에 미련이 남았거나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서둘러라! 일단 오는 적을 막아야 한다!”
사령관은 그렇게 명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퇴 준비도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체른산 방어군은 300
기의 기간트를 보유 중이었다. 그냥 싸우면 무조건 질 수밖에 없었다.
기간트 전투는 인간의 전투에 비해 변수가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기간트의 움직임 자체가 인간처럼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기간트의 수가 이렇게 많이 차이 나면 결과도 이미 나온 거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질 싸움에 굳이 기간트를 쏟아부을 이유가 없었다. 체른산 유적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모를까.
사령관이 그렇게 결정하고 퇴각 준비를 미리 해 놓으라고 부관에게 명령을 내렸을 때, 2 왕자가 나타났다.
“사령관, 어떻게 된 일이오?”
“적 기간트 500 기가 진군 중입니다.”
2 왕자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그가 데려온 근위 기사를 투입시킨다 하더라도 패배가 확실하다.
“후퇴할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의미 없이 기간트를 잃는 것보다는 후퇴해서 전력을 보존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2 왕자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유적을 다시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간단한 주문 한 방에 유적 입구에 서 있던 기간트를 날려 버리는 힘까지 발견했기에 더 아쉬웠다.
“이번에 후퇴하면 언제 다시 체른산을 수복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글쎄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지원군이 언제 도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쩌면 이곳을 그냥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건 안 되네!”
2 왕자의 외침에 사령관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이런 격렬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기에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2 왕자는 사령관이 당황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직접 지원군을 요청하겠네. 사령관은 이곳을 최대한 빨리 수복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 놓게.”
2 왕자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반대할 수는 없었다. 사령관은 당황스런 표정을 억지로 지우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미리 준비해 두겠습니다.”
“좋아. 믿겠네.”
2 왕자는 그 말을 남기고 서둘러 관사로 돌아갔다. 지원 요청을 하려면 마기어 백작이 필요했다. 통신 마법으로
왕실에 직접 요청할 생각이었다.
사령관은 멀어져 가는 2 왕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왠지 앞으로의
상황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체른산을 다시 벨룸 왕국 측에 빼앗기고 말았다. 피해는 많지 않았다. 미리 상황을 파악해 적절히 대처했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에는 제론의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미리 주변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알게 모르게 아군에게 도움을
주었다.
제론은 자신이 그런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상당히 애썼다.
예를 들면 적이 진군하는 시간에 맞춰 미리 기간트 기동 훈련을 제안해 라이더가 모이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는 식이었다.
그런 식으로 몇 가지 도움을 자연스럽게 주니, 벨룸 왕국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고, 또 퇴각도 큰
피해 없이 성공했다.
문제는 2 왕자였다.
2 왕자는 끊임없이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의 요청은 매번 뒤로 미뤄졌다.
당연히 그때마다 격분했고, 그 히스테리를 주변에 풀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재 전쟁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벨룸 왕국은 어디서 구했는지 막대한 기간트 전력을 동원해 모든 전선에 걸쳐 레늄 왕국군을 공격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그로 인해 레늄 왕국 쪽으로 넘어왔던 승기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이제는 양측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분위기가 벨룸 왕국 쪽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전쟁이 더 치열해졌다. 거의 매일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기간트가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라이더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끔찍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 ☆ ☆

커다란 마차 한 대가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이제 막 아카데미를 졸업한 몇 명이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앞에 자리한 군부의 장교가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였는데, 여자의 경우 아카데미를 졸업해도 전선에서 복무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상당히
특이한 경우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도 좋다.”
장교의 말에 여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우리가 가는 곳이 체른산 방어군 맞나요?”
“그렇다.”
이번에는 남자가 물었다.
“최고의 격전지라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지금까지 체른산의 주인이 스무 번 이상 바뀌었다면 대답이 되겠나?”
“충분합니다.”
긴장감이 더욱 깊어졌다. 최고의 격전지로 간다는데 긴장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장교는 세 사람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 중 둘은 지원이란 말이지.’
복무할 부대를 지원하는 경우가 사실 많았다. 하지만 지원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쪽으로 갈 수는 없었다. 원하는
곳이 다들 편하고 안전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체른산 방어군은 가장 위험한 곳이다. 그렇기에 아카데미 출신들이 지원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한데 둘이나 지원한 것이다.
‘게다가 하나는 여자라니, 정말 특이하군.’
물론 나머지 한 명은 군부에서 선택했다. 라이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본인은 운이 없다고 여기겠지만, 체른산
방어군은 위험한 만큼 공을 세우기도 좋았다.
“특별히 우리 부대를 지원한 이유가 있나?”
장교의 질문에 여자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아는 사람이 있거든요.”
“아는 사람?”
장교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아는 사람 때문에 지원했다니, 이 무슨 어린애 장난 같은 짓인가.
하지만 장교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혹시 부대에 제론이라는 분이 있지 않나요?”
제론이라는 말에 장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생각해 보니 제론 역시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제론을 동경해서 우리 부대로 온 것인가?’
하지만 제론의 활약상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학생이 제론이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설마 없나요?”
여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만일 제론이 부대에 없다면 자신은 완전히 헛짓거리를 한 셈이니 말이다.
“제론이 아카데미 생활을 제법 잘했나 보지?”
“최고였죠.”
여자, 세나가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남자, 바이스도 함께 엄지를 들었다.
“제가 보기에는 천재였습니다.”
장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제론은 천재였으니까.
“그럼 제론과 같은 팀으로 들어가도 상관없겠군.”
두 사람의 눈에서 일순 광채가 일어났다. 그리고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저희가 원하는 거예요. 우리는 아마 좋은 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제론 선배는 라이더로
활약하시는 거겠죠?”
“당연하다. 우리 체른산 방어군 최고의 실바 라이더지.”
“시, 실바요?”
세나와 바이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실바라니. 그건 제론의 재능을 완전히 낭비하는 꼴
아닌가.
최소 카타락타 정도는 몰게 해 줘야 제대로 활약할 거 아닌가. 아니, 제론이라면 발굴형 기간트를 맡겨도 된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엄청난 성과를 올릴 것이다.
두 사람의 뇌리에 남은 제론의 능력은 그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장교는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만 살짝 머금었다.
마차는 쉬지 않고 텔레포트 게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오늘 아카데미에서 신입 라이더가 오는 날이지?”


수석 라이더는 그렇게 말하며 격납고에서 자신의 기간트를 살피는 라이더들을 둘러봤다.
최근 전투가 점점 격렬해지고 있었다. 당연히 죽는 사람도 많이 나왔다. 그리고 주인 잃은 기간트가 우수수
쏟아졌다.
그래서 서브 라이더가 많이 필요했다. 예전에는 메인 라이더 한 명에 서브 라이더 한 명이 보통이었지만, 지금은
서브 라이더를 최소 셋은 둬야만 했다.
“서브 모자라는 사람 있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은 여기저기로 향했다. 서브 라이더가 2 명 이하인 기간트를 본 것이다.
수석 라이더의 눈이 그들의 시선을 따라 정신없이 움직였다. 다들 2 명의 서브 라이더를 가진 라이더였다. 그러던
수석 라이더의 시선이 한 명에게서 멈췄다.
‘가만, 저기는 혼자인데…….’
수석 라이더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서브를 둘 필요가 없는 기간트였다.
서브가 필요한 곳은 많았다.
“오, 카이트! 네가 데려가면 되겠군.”
카이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카데미 출신이건 군부
출신이건 가릴 때가 아니었다.
“좋습니다. 이번엔 제가 받죠.”
카이트는 그렇게 말하며 저 옆에서 자신의 기간트를 보고 있는 제론을 힐끗 쳐다봤다.
붉은 실바 앞에는 엔지니어 한 명이 붙어서 뭔가를 열심히 손보고 있었다. 제론은 옆에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고 말이다.
“언제 온답니까?”
“곧 온다. 여자도 한 명 끼어 있다니까 기대해도 좋을 거야.”
“여자?”
“그게 정말입니까?”
여자의 경우 후방으로 빠지는 게 보통이었다. 한데 이런 최전방 격전지에 여자가 온다니 다들 너무나 놀랐다.
그리고 여자의 생김새를 제멋대로 정해 버렸다.
“제대로 생긴 여자가 이런 데에 올 리 없지. 아마 남자에 더 가까울걸?”
“으하하하!”
다들 왁자하게 웃었다. 수석 라이더는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기만 했다. 그 역시 다른 사람과 똑같은
생각이었으니까.
격납고 내에서 웃지 않는 사람은 제론뿐이었다. 제론은 웃느라 정신없는 엔지니어를 재촉했다.
“아직 멀었습니까?”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엔지니어는 찔끔 놀라 손놀림을 빨리했다. 그가 할 일은 발목의 부품 하나를 갈아 끼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좀
까다로운 위치에 있는 부품이라서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제론은 엔지니어가 일하는 모습을 끈기 있게 지켜봤다. 부품을 갈고 나면 나중에 제론이 한 번 더 손을 봐야 한다.
부품에 들어가는 마법진을 손봐야 하기 때문이다.
‘답답하군.’
최근 제론은 참으로 답답했다. 모든 것이 정체된 상태였다. 늘어나는 것은 전투에서 세우는 공적뿐이었다.
가장 답답한 부분은 바로 중앙 유적에서의 수련이었고, 그다음이 검술이었다. 마법 역시 정체였지만 그래도
검술보다는 나았다. 마법진을 익히면서 공부라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수련에 매진해도 모자란데, 이렇게 기간트 수리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더더욱 답답했다.
유적의 6 층은 클리어했다. 하지만 7 층에서는 아예 진도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7 층의 수련은 기이했다. 6 층에서 받은 선물도 마찬가지였다.
제론은 왼쪽 손등을 힐끗 쳐다봤다. 그곳에 기이한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아주 작은 문신이었기에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얼핏 보면 작은 점이 찍힌 걸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것이 바로 6 층을 클리어하고 받은 선물이었다. 문제는 이게 뭘 하는 건지 아직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7 층 수련과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한데…….’
지금까지 매 층을 클리어하고 받은 선물은 다음 층의 수련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거라 여겼다.
7 층의 수련은 정말로 기이했다. 7 층에 가면 모든 감각이 흔들렸다. 마치 남의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고,
또 시각이나 청각, 후각이 완전히 뒤틀렸다.
감각이 뒤틀리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를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물론 익숙하지 않았고, 또 뭘 하든
속도가 느렸지만 말이다.
문제는 그곳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7 층에서는 감각이 뒤틀린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가 나와서 공격을 하지도 않고, 검술을 익혀야 한다는
말도 없었다.
그래서 제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을 했다. 그곳에서 검술을 수련한 것이다.
황제 검술을 수련하는 건 어림도 없었다. 그렇게 감각이 뒤틀린 곳에서 황제 검술을 제대로 펼치는 건 불가능했다.
황제 검술이 너무나 복잡했기 때문이다.
7 층은 마나의 흐름마저도 뒤틀린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황제 검술을 익히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었다.
제론이 선택한 것은 기초 검술이었다. 가장 안정적이고 단순한 검술이니 그게 최선이었다.
기초 검술을 펼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이 뒤틀린 세상에서는 검을 휘두르는 행동 하나도 간단치 않았다.
그렇게 7 층을 공략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거의 매일 중앙 유적으로 가서 수련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후우. 누가 기간트만이라도 맡아 줬으면 좋겠군.’
기간트 수리만 신경 쓰지 않아도 정말로 큰 여유가 생길 것 같았다. 전투가 워낙 많고, 기간트 훈련도 격렬하게
하니, 수리가 너무 잦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시간을 빼앗겼다.
“신입 라이더가 도착했습니다!”
격납고 입구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상황을 지켜보던 라이더가 신병을 태운 마차가 오는 모습을 보고 달려온
것이다.
다들 씨익 웃으며 하던 일을 마무리했다.
“자, 어디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러 갈까?”
사실 이런 건 1 년 전만 해도 없던 일이었다. 제론이 들어왔을 때는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때보다 훨씬 죽음에 가까웠다. 또한 군부건 아카데미건 상관이
없었다. 다들 똑같이 죽음에 한 발 내디딘 군인이었다.
새로운 동료가 온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기 대신 죽어 줄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말이다.
모두의 얼굴이 기대와 흥분으로 얼룩졌다. 라이더는 물론이고 엔지니어까지 우르르 격납고에서 나갔다.
멀리서 마차 한 대가 기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차가 멈췄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수많은 사람이 마차를 에워싸고 있었다. 마차에서 가장 먼저 내린 사람은
장교였다.
장교를 본 군인들의 눈에 실망이 살짝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다시 기대감이 타오르는 눈으로 마차
문을 바라봤다.
두 번째로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남자였다. 그가 바로 신입 라이더로 이곳에 오게 된 맥컬리였다.
맥컬리의 뒤를 이어 바이스가 내렸고, 그다음으로 세나가 내렸다.
세나의 등장에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다들 충격적인 눈으로 세나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뭐, 뭐야! 예쁘잖아!”
“누가 남자 같다고 했어!”
기대 이상이었다. 아니, 기대를 완전히 초월해 버렸다. 그들이 기대했던 남자에 가까운 여자는 없었다. 그곳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세나는 아카데미 내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받은 여인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 반응은 사실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군대라는 낯선 곳에 와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니 온몸이 경직될 정도로 긴장해 버렸다.
모두가 놀랐지만 그중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제론이었다.
“세나? 바이스?”
제론의 중얼거림에 세나와 바이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선배님!”
세나가 환한 표정으로 달려갔다. 누가 말리고 할 틈도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제론에게 몸을 날렸다.
제론은 당황한 눈으로 세나를 안았다. 설마 보자마자 이렇게 달려와 안길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세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세나는 제론의 품에 안긴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너무나 행복했다. 이렇게 다시 만나 제론을 안고 있으니
세상을 모두 얻은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살며시 눈물이 차올랐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다. 못 본 지 1 년이 넘었다. 하지만 바로 어제처럼 그때의
일들이 기억났다.
“약혼은 어떻게 됐지?”
제론의 물음에 세나가 환하게 웃었다. 첫 질문이 자신의 약혼에 관한 거라면 분명히 크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뜻일 테니까.
“걱정하실 거 없다고 했잖아요. 무사히 마무리했어요.”
제론은 세나의 말에 고개를 돌려 바이스를 쳐다봤다. 바이스가 난감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약혼을 거부하고 입대했습니다.”
제론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지극히 세나다웠다.
“선배님, 그때 약속하신 거 기억하고 계시죠?”
“약속?”
“여유가 생기면 절 받아들이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제론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의 일은 명확히 기억한다. 마나 호흡을 시작한 이후로 기억력이 상당히
좋아졌기에 웬만한 일은 다 기억했다.
당시 제론은 분명히 그저 여유가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봐 줄 거냐고 했던 세나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데 그 대화가 완전히 변신했다. 세나의 머릿속에서 말이다. 제론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에게 여유가
생기려면 최소한 중앙 유적의 모든 층을 클리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난 아직 여유가 없다.”
제론의 말에 세나의 표정이 더욱 환해졌다. 그녀도 자신이 억지를 부렸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한데 그 억지를
제론이 몽땅 받아 주었다. 그건 곧 자신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세나는 제론의 품에서 살짝 떨어졌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 선배님께 여유를 찾아 드릴게요.”
제론이 흥미로운 눈으로 세나를 쳐다봤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궁금했다.
“저 전공 바꿨어요.”
“전공을 바꿔?”
“예. 이제부터 엔지니어 세나라고 불러 주세요.”
“엔지니어?”
제론의 표정이 묘해졌다. 참으로 공교롭긴 했다. 딱 엔지니어가 필요한 시점에 세나가 엔지니어로 앞에
나타나다니 말이다.
“전 마법으로 전공을 바꿨습니다. 세나 때문에요.”
바이스의 말이었다. 제론은 바이스를 보면서도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바이스는 엔지니어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가문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길을 포기했다니, 믿기 어려웠다.
제론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바이스가 또 뒷머리를 긁적였다.
“세나의 재능이 생각보다 뛰어나더군요. 그러니 전공을 바꿨는데도 이렇게 조기 졸업을 하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세나도 그렇고 바이스도 그렇고 남들보다 1 년 반이나 빠른 졸업이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노력과 재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론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 군복무가 2 년 남아 있다. 하지만 저들은 3 년을 복무해야 한다. 자신을
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다.
제론이 1 년 더 복무해서 함께 제대하는 방법도 있었다. 어차피 아카데미 출신에게 주어진 의무는 3 년 이상
군복무를 하는 것이었다. 4 년을 하든 5 년을 하든 아무 상관없었다.
실제로 군대가 체질에 맞아 아예 군부에 눌러앉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제론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군.’
군대에 있는 것이 아예 시간 낭비라면 아무리 세나와 바이스가 있더라도 남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만일 뭔가
더 얻을 것이 있다면 잘 생각해 봐야 한다.
“계속 거기 서 있을 텐가? 사령관님께 보고는 드려야 하지 않을까?”
기다리다 못해 장교가 한마디 하자, 세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제론 때문에 주위를 보지 못하다가 이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수많은 사내가 제론과 세나를 중심으로 빙 둘러 있었다. 그들의 눈은 커다랬고, 입은 헤 벌어진 채였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서 가요!”
세나가 먼저 나서서 후다닥 자리를 떴다. 바이스가 그 모습을 보고는 빙긋 웃으며 제론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장교가 신병을 데리고 사령관실로 가자, 모였던 라이더가 제론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체 누구야!”
“아카데미 후배? 저런 미녀가 대체 여길 왜 온 거야?”
“설마 약혼녀?”
제론은 완전히 포위된 채로 모든 라이더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 주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그리고 그런 제론의 태도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왠지 인간 같지가 않았다.

“말레피 후작가로부터 연락은 잘 받았네. 자네가 바이스인가?”


“예, 맞습니다.”
사령관은 앞에 서 있는 바이스와 세나를 유심히 살폈다. 그들과 함께 온 맥컬리는 이미 카이트에게 보낸 뒤였다.
사실 지금 하는 얘기는 누가 들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최대한 편의를 봐주라는 부탁을 받았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바이스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말레피 후작가는 슈린 공작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령관은 말레피
후작가의 편의를 봐줌으로써 슈린 공작가를 견제하는 효과를 바랐다.
“원하는 게 뭔가?”
“제론 선배와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제론?”
사령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 없었다. 제론의 현재 팀을 해체하고, 거기에
바이스와 세나를 넣으면 된다.
“한데 실력은 있나? 제론은 우리 기지에서 가장 뛰어난 라이더라네. 팀의 실력이 형편없으면 곤란해.”
바이스가 씨익 웃었다.
“다른 엔지니어나 마법사보다는 훨씬 나을 겁니다.”
바이스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사령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 즉시 보직 명령서를 내주지.”
사령관은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명령서를 받은 바이스와 세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부대 내에서 애정 행각이 너무 심하면 곤란하네. 안 보이는 데서 하게.”
세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Chapter 10 새로운 팀
“정말 애썼나 보구나.”
제론의 말에 세나는 그동안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리는 걸 느끼며 미소 지었다.
“이 붉은 실바가 선배님의 기간트인가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실바는 그동안 무수한 공을 세웠다. 사실 레늄 왕국보다 벨룸 왕국 쪽에 훨씬 더
유명했다.
“너무하네요. 선배님이라면 훨씬 좋은 기간트를 타실 자격이 있는데.”
“됐다. 난 이 실바가 좋으니까.”
“하지만…….”
세나가 더 말하려 하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먼저 말했다.
“그보다 엔지니어가 되다니 정말로 의외인데? 마법 쪽으로도 제법 재능이 있었잖아?”
게다가 엔지니어는 여자가 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기간트의 부품을 갈기 위해선 상당한 힘이 필요했으니까.
“어떻게 해야 선배님께 도움이 될지 필사적으로 생각했어요.”
제론은 세나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런 세나와 함께 여기까지 와 준 바이스도 고마웠다.
“너도 이쪽으로 올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마법으로 갈아탔다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세나가 워낙 재능이 출중해서요.”
“그래? 이거 기대되는군.”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세나는 혼자서 기간트를 조립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쌓았으니까요.”
그 말에 제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사실 제론도 혼자서 기간트 하나를 조립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건
태블릿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기 졸업이 그렇게 쉬운 건 아니잖습니까. 세나는 아카데미의 기간트 한 대를 완전히 해체한 다음 다시
조립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너무나 든든했다. 이런 대단한 실력을 가진 엔지니어와 팀이 되었으니 앞으로 훨씬 여유가 생길
것이다.
제론은 대견한 눈으로 세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세나는 그런 제론의 눈길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지만 그 시선을 철저히 즐겼다. 솔직히 죽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이 정도 대가는 받아야만 했다.
바이스는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그 역시 엄청나게 노력했다. 전공을
바꾸고서 조기 졸업을 하는 건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세나가 기간트를 해체하고 조립했듯이 바이스도 그 비슷한 일을 해냈다. 바이스는 현존하는 대부분의 마법진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서 기간트의 부품 몇 개를 개선했다.
웬만한 베테랑 마법사도 잘 못하는 일을 해낸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다시 모였으니 됐어.’
바이스는 제론을 다시 만난 것이 너무나 기뻤다. 솔직히 아카데미에 함께 있는 것보다는 이렇게 군대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 훨씬 나았다.
‘같은 팀이니까.’
바이스는 따뜻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아마 제론은 자신이 왜 이렇게 제론을 따르는지 잘 모를 것이다.
“제가 개선한 부품이 몇 개 있는데, 일단 그걸 적용해 볼까요?”
앞으로 기간트에 관한 모든 것은 세나와 바이스에게 맡기면 된다고 생각하니 제론은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그건 제론이 한 가지 결심을 한 뒤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내 비밀을 전부 말해 줄 수는 없지.’
그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절대로 알려선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파생된 지식 몇 가지와 물건
몇 가지는 얼마든지 전해 줄 수 있었다. 상황을 잘 포장해서 말이다.
“일단 자리를 좀 옮기자. 특별히 할 말도 있고.”
‘특별한 말?’
세나는 눈을 빛냈다. 말만 들어 보면 제론이 자신의 비밀을 알려 줄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한데 선배님의 비밀이 뭐지? 그런 게 있긴 있나?’
세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1 년 전 제론이 벨루스 영지에 놀러 왔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제론은 30 미터
높이의 창문에서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세나는 그 이후, 제론이 익스퍼트의 실력을 가졌다고 짐작했다. 그리고 이번에 밝히려는 비밀도 아마 그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나가 빙긋 웃으며 제론 옆에 붙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론의 팔짱을 꼈다.
“군대에서 이래도 되나?”
제론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하자, 바이스가 따라나서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편의를 봐주기로 했습니다.”
“그거야 너희들 얘기고. 난 좀 달라.”
“다르지 않습니다.”
바이스의 단호한 말에 제론은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밖으로 나갔다.
세나는 제론의 팔에 매달려 희희낙락이었다. 자신에게 이럴 때가 오리라고는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보다가 이렇게 나란히 서게 되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세 사람은 격납고 밖으로 나갔다. 제론은 나가며 교묘하게 팔을 흔들어 세나의 손을 떼어 냈다. 아무래도
군대이기에 그런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제론은 두 사람을 자신의 숙소로 데리고 갔다. 사실 훨씬 조용한 곳이 있긴 했지만, 그곳 역시 아무에게도
공개해선 안 되는 장소였다.
또한 체른산 유적으로 가는 비밀 통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2 왕자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2 왕자는 유적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왕실로 돌아가긴 했지만, 유적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면 언제든 다시 돌아올 것이다.
지금도 유적은 2 왕자가 남겨 놓은 자들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한 제론은 두 사람을 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내가 정말로 이들을 믿고 있나? 이들을 정말로 믿어도 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중에 자신이 어떤 마음을 먹을지도 믿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지금이야
굳은 결심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결심이 어떻게 변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론은 눈앞에 선 세나와 바이스를 믿고 있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내가 유적 하나를 가지고 있는 거 알지?”
두 사람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에어스트 가문이 무리한 유적 발굴로 몰락했다는 건 상당한 이슈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슈린 공작가가 훨씬 높은 곳으로 도약했다는 사실 또한 유명한 일이었다.
“그 유적에서 유물 하나를 찾았어. 이건 비밀이라는 거 말 안 해도 알겠지?”
두 사람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물은 모두 슈린 공작가에서 가지고 유적은 에어스트 백작가에서 가지기로
했다는 말도 안 되는 계약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만일 유물을 찾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슈린 공작가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이건 유적 자체에 새겨진 거라서 슈린 공작가와의 계약에 위배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슈린 공작가가 그런 사정을 봐줄 리 없었다. 그들은
유적의 조각이나 문양까지 몽땅 뜯어 갔다. 그리고 유적 곳곳을 파헤쳐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비밀만 지키면 돼.”
그 말이 옳다. 비밀만 지키면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세나와 바이스는 새삼스럽게 제론을 바라봤다. 그런
비밀까지 얘기해 준다면 정말로 자신들을 신뢰한다는 뜻 아닌가. 기분이 좋았다.
“내가 유적에서 얻은 건 마법과 기간트에 관한 지식이야.”
제론의 말에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과 기간트에 관한 지식이라니. 그것도 고대 문명의 지식이라니.
만일 제론의 말이 사실이라면 너무나 엄청난 보물이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그럼 지금이라도 유적에 사람을 보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아직도 남아 있다면…….”
“내가 남겨 뒀을 것 같아?”
바이스는 입을 다물고 제론을 바라봤다. 당연히 그랬을 리가 없다. 자신이 제론 같은 입장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아까웠다. 자칫 지식을 제대로 얻지도 못하고 지웠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 일단 테페룸에 관한 것부터 시작해 볼까?”
제론이 말을 시작하자, 바이스와 세나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집중했다.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론이 해 준 얘기는 많지 않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포로스에 관한 것이었다. 테페룸의 가공물인
포로스에 대해서 알려 주지 않고는 그 이후의 얘기가 아예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포로스의 비밀에 대해 들은 바이스와 세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건 마법의 근간을 뒤흔들 혁명이었다.
“하면 지금까지 발굴형 기간트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이유가…….”
“그건 나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어쩌면 숨겨진 마법진이 있을 수도 있지. 포로스를 이용하면 마법진이 아예
드러나지 않으니까.”
바이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사실을 가문에 알리면 말레피 후작가는 엄청난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면 포로스는 어떻게 얻습니까?”
“마나 코어가 부서지면 그 안에 있는 테페룸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
“예. 쓸모없는 진흙이 되지 않습니…… 설마!”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진흙을 가공해서 얻는다. 그걸 특별한 방법으로 가공하면 이런 게 만들어지지.”
제론은 미리 준비한 포로스를 내밀었다. 투명한 젤리 같은 물질이었다. 하지만 마법사인 바이스와 한때 마법을
전공했던 세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은은한 마나의 흔적을 말이다.
두 사람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 쓸모없는 진흙이 이렇게 변한단 말인가.
아니,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테페룸이라는 엄청난 물질이 아무리 마나 코어에 있다가 폭주했다고
하지만 아무 쓸모없는 진흙이 된다는 게 오히려 더 말이 안 된다.
“앞으로는 테페룸 진흙을 미리 확보해 놓는 게 좋을 거야.”
제론의 말에 바이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페룸 진흙은 다들 그냥 내다 버린다. 미리 연락만 취해 놓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문의 힘을 빌리기가 좀 그렇긴 한데…….’
바이스는 제론의 눈치를 살폈다. 가문에 말을 해 두면 분명히 이유를 물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포로스 가공법이 제론에게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어쨌든 가문에서도 비밀을 지키긴 하겠지만…….’
솔직히 바이스는 자신의 가문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바이스와 직계로 이어진 가족은 믿어도,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남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3 명이나 되는 그의 배다른 형제가 그러했고, 그들을 낳은 모친 역시 믿을 수 없었다. 다들 바이스를 가주가 되는
데 걸림돌이라고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가공법을 알고 싶으면 말해라. 너희에게라면 얼마든지 알려 줄 수 있으니까.”
제론의 말에 바이스와 세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한동안 멍하니 제론을 바라보던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상태로 한참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건 선배님 혼자 알고 계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제론이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제가 알고 있으면 가문의 압력을 견디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바이스는 제론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저를 통하지 않고는 포로스를 얻을 수 없으니, 가문에서 제 위상이 상당히 올라갈 겁니다.”
바이스가 눈을 빛냈다.
“이참에 후계자 싸움에 뛰어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사실 바이스는 후계자 싸움에서 한 발 물러난 상태였다. 가문의 후계자 싸움에 참여했을 때는 그야말로 진흙탕
안에서 뒹구는 기분이었다.
“후계자가 되려고?”
“아뇨. 영향력만 가지고 있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지금은 군부에 있으니까요.”
바이스는 이곳에 있는 3 년의 시간을 그냥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 가문에 테페룸 진흙을 요구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의 가능성을 발견해 뭔가를 좀 연구해 보고 싶다고 하면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아무리 말레피 후작가가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군부는 군부였다. 후작가가 이곳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쨌든 그건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지.”
제론은 그렇게 말한 뒤, 나머지 내용을 얘기해 주었다. 제론이 두 사람에게 전해 준 것은 붉은 실바에 들어간
기술과 마법이었다.
앞으로 실바의 모든 정비를 두 사람이 도맡게 될 테니 확실히 알고 있는 편이 나았다.
제론은 당분간 자신의 붉은 실바를 버릴 생각이 없었다. 군대를 나가는 순간까지 붉은 실바만 탈 것이다.
지난 1 년 동안 실바를 조금씩 개조해서 지금은 그 성능이 약간 더 좋아졌다. 이제는 두 번 정도 점프를 해도
하체 관절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점프는 거의 쓰지 않지만 말이다.
제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러모로 특별한 날이었다. 다시 보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두 사람을 만났고,
자신이 가진 비밀 중 일부를 털어놨다.
하지만 제론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들로 인해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자신했다. 이들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충분한 대비책을 세워 놨기 때문이다.
‘이제 7 층을 클리어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겠군.’
지금 제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고작
포로스에 대한 비밀과 기간트에 관한 몇 가지 기술을 가지고 그걸 얻어 냈다면 정말로 싸게 먹힌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내 사람으로 품는다.’
제론은 군대를 나간 이후의 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영지도 있다. 그 영지에 슈린 공작가가
분명히 뭔가 수작을 부려 놨겠지만 몽땅 타파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영지와 유적을 기반으로 도약할 토대를 다져야만 한다. 바이스와 세나는 그때를 위한 포석이었다.
“자, 그럼 앞으로 잘해 보자. 우린 분명히 좋은 팀이 될 거야.”
제론의 말에 세나와 바이스가 환하게 웃었다. 그 한 마디와 지금 제론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니 고생해서
여기까지 온 보람이 느껴졌다.

바이스와 세나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자, 제론은 아공간을 열어 그동안 모은 테페룸 진흙을 확인했다.
지난 1 년 동안 가장 치열한 곳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당연히 수많은 기간트가 부서졌고, 그중에는 회생이
불가능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제론은 그런 기간트의 마나 코어를 반드시 확인했다. 그리고 거기서 테페룸 진흙을 싹싹 긁어모았다. 쓸모없는
것이라 여겨졌기에 모으는 데에는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모은 테페룸 진흙이 무려 수백 킬로그램에 달했다. 그 정도라면 붉은 실바를 제대할 때까지 쓰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앞으로 포로스에 대해 연구하고 그걸 이용한 마법진을 써먹으려면 훨씬 많은 양이 필요했다.
수백 톤은 있어야 제대로 포로스를 이용해 뭔가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말레피 가문이 나선다 하더라도 그 정도 양을 구할 수는 없어.’
테페룸 자체가 비싸고 귀하다. 기간트 하나에 들어가는 양이 고작 2 킬로그램 정도이다. 그러니 지금 제론이 모은
테페룸 진흙의 양이 얼마나 많은 건지 알 수 있다.
무려 수백 기의 기간트가 희생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많은 전쟁 자금이 소요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뭔가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야 돼.”
분명히 뭔가 돌파구가 있을 것이다. 제론은 강력한 예감을 받았다. 초고대 문명을 살펴보면 테페룸이 쓰이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또한 테페룸을 가공한 물질이 엄청나게 쓰였다. 오히려 테페룸보다 테페룸 가공물이 수십만 배 더 많이 쓰였다.
그것은 테페룸이 그만큼 많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초고대 문명의 유적을 잘 살피고, 또 그 지식들을 다
살피면 바닥나지 않은 테페룸 광산을 하나쯤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 일단 황제 검술에 집중한다.”
제론은 차분히 계획을 세웠다. 늘어난 시간을 모두 황제 검술에 쏟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최대한 유적에 가는
시간을 늘려 7 층을 클리어하고 말 것이다.
“그나저나 대체 언제 7 층을 클리어할지…….”
7 층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었다. 제론은 손등에 새겨진 작은 문신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일단 지금으로선 그 외엔 방법이 없으니까.’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난 김에 유적에 가 보기로 했다. 문득 휴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마나의 흐름은 과격했다. 제론은 그 한가운데 가만히 서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마나를 차분히 지켜보기만
했다.
스윽.
아공간에서 검을 뽑은 제론은 천천히 기초 검술을 펼쳤다.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똑바로 휘두르려 애쓰지만 검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마나의 흐름이 너무 과격해서 그것이
몸의 움직임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후욱.”
제론은 숨을 훅 내쉬며 검을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사방에 흐르는 마나를 가만히 느껴봤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나의 흐름은 거칠고 불규칙했다. 그 안에서 규칙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이미 몇 달 전에 해 봤다. 하지만
이곳의 마나는 마치 폭풍처럼 휘몰아칠 뿐이었다. 규칙 따위 없었다.
문득 손등에 새겨진 문신이 떠올랐다. 그 문신의 효능이 뭔지 갖은 실험을 했던 일이 하나하나 생각났다.
혹시 특별한 주문이 있는 것이 아닌가 찾아보기도 했고, 마나에 반응하는지 확인도 해 봤다. 하지만 그 어떤
시도도 효과가 없었다.
제론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오늘 세나와 바이스가 오면서 심적으로 상당한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두
사람을 만나면서 반가움과 걱정을 비롯한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 여유와 감정 덕분에 오늘은 제론의 상태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제론은 모든 의념을 손등의 문신에 집중했다.
쉬이익!
뭔가가 문신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제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 느낌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제론은 다시 의념을 집중했다. 그동안의 수련으로 집중력 하나만큼은 엄청나게 높아졌다. 이런 마나 폭풍 속에서
기초 검술을 수련한다는 건 보통 집중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신에 제론의 모든 의식이 하나로 모였다. 그 순간, 다시 뭔가가 문신을 관통했다.
쉬이익!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제론은 계속해서 문신에 집중했다. 그리고 문신을 통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마나!’
끊임없이 문신을 통과하는 것은 마나였다. 문신에 모든 의념을 집중할 때만 문신이 활성화되었고, 그 순간 마나가
문신을 통해 끊임없이 유입되었다.
이 마나는 그동안 제론이 수련을 하면서 접한 마나와는 많이 달랐다.
마나 호흡이나 검술을 통해 몸에 유입되는 마나는 상당히 희박하고 거칠다. 그리고 불순물도 많이 섞여 있었다.
그걸 회전을 통해 체내에서 정제해 아랫배나 심장에 모으는 것이다.
한데 이 마나는 더할 나위 없이 순수했다. 따로 정제를 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그걸 체내에 쌓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문신을 통해 들어온 마나는 온몸을 휘돌고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마나가 온몸을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상쾌함이 함께 흘러갔다.
제론은 그 기분을 놓치기 싫어서 집중을 흩트리지 않았다. 집중을 유지하는 동안 문신은 끊임없이 마나를
빨아들여 정제했고, 그것을 온몸에 흘렸다.
그렇게 한창 마나를 받아들이고 있을 때, 손등의 문신이 기이한 울림을 토해 냈다.
우우우웅!
그리고 문신이 커졌다. 작은 점 같았던 문신이 순식간에 손등을 온통 뒤덮어 버렸다. 마치 스스로 마나를 먹고
자라난 것 같았다.
일단 확장된 문신은 커진 만큼 훨씬 많은 마나를 빨아들였다. 지금까지는 그저 폭풍처럼 지나가는 마나를
받아들였다면 이제는 강제로 마나를 빨아들였다.
쉬이이이이익!
마나의 폭풍이 몸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제론의 집중력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펑! 펑! 펑! 펑!
몸속에서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그리고 그렇게 터질 때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해졌다.
제론은 시원함을 느끼며 하마터면 집중이 흐트러질 뻔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곳에서 버티는 동안 쌓인 집중력은
그 정도로 사라지지 않았다.
우우우웅!
문신이 또 진동했다. 그리고 두 번째 확장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팔 전체가 문신으로 뒤덮였다. 당연히
빨아들이는 마나의 양도 급증했다.
꽝! 꽝! 꽝! 꽝!
연달아 울리는 폭음의 강도가 강해졌다. 이번 폭음은 강한 통증을 유발했다. 하지만 통증은 나타난 것보다 더
빠르게 사라지고, 그 자리를 시원함이 차지했다.
그 뒤로도 문신의 진동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 그때마다 문신이 커졌고, 유입되는 마나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나중에는 온몸을 문신이 뒤덮었고, 휘몰아치는 모든 마나가 제론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제론은 감았던 눈을 떴다.
번쩍!
강렬한 섬광이 눈에서 폭사되었다. 마나 폭풍은 멎은 상태였다. 7 층은 평범한 곳이 되어 버렸다.
제론은 7 층의 마나를 이용해 온몸의 마나 로드를 완벽히 깨끗한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마나 로드를 다 뚫어
버리고 남은 마나를 싹 흡수했다.
그렇게 흡수한 마나가 아랫배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제론은 온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진 걸 느끼며 검을
휘둘렀다.
쉬아악!
검에서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벽을 그 바람이 긁었다.
콰드득!
놀랍게도 벽에 흔적이 남았다. 검으로 아무리 때려도 흠집조차 나지 않던 벽인데 그저 바람이 닿은 것만으로
상처가 난 것이다.
제론은 검에서 나간 바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나였다.
마나를 검에서 뽑아낼 수 있는 경지, 진정한 익스퍼트에 이른 것이다.
제론은 자신의 변한 몸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예전보다 훨씬 빨라지고 강해졌다. 마나가 몸 구석구석을 거침없이
돌아다녔다. 아랫배에 잠든 막대한 마나가 제론의 의지에 따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검을 통해 그 마나를 뽑아낼 수 있었다. 검에 희미하게 어린 기운은 무엇이든 다 잘라 낼 수 있을 것처럼
날카로웠고, 그것을 날려 버리면 제론의 의지에 따라 날카로움을 유지하거나 폭발시킬 수도 있었다.
“엄청나군.”
익스퍼트라는 것이 이렇게 대단한 것일 줄은 몰랐다. 제론은 문득 세상에 3 명 있다는 마스터들을 떠올렸다. 아마
그들의 진정한 경지가 바로 지금 제론과 같은 익스퍼트일 것이다.
그들은 익스퍼트에 이른 기사 300 명을 가볍게 상대할 수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렇게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르고 나니,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어쨌든 7 층을 이제야 클리어한 건가?”
제론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널찍한 방 한가운데에 기둥이 솟아올랐다. 그 안에 7 층 클리어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제론은 기둥으로 다가가다가 문득 떠올라 손을 올려 확인했다. 문신이 온몸으로 퍼진 것이 생각난 것이다. 손은
깨끗했다. 마치 언제 문신이 있었냐는 듯했다.
손뿐 아니라 몸의 다른 부분을 모두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문신은 이 방의 마나를 받아들이는 통로였던 것이다.
6 층 클리어의 진정한 보상은 7 층에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마나였다.
“문신에 의념을 집중하기만 하면 되는데 왜 이리 오래 걸렸는지 모르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둥 앞에 섰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렴풋이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동안 보낸
시간은 인내력과 집중력을 성장시켰다.
그 두 가지가 일정 수준 이상 되지 않으면 아무리 문신에 의념을 집중해도 이번 층을 클리어할 수 없었다. 중간에
집중이 흐트러지면 말짱 헛일이 되고 말 테니 말이다.
“자, 그럼 선물이 뭔지 확인해 볼까?”
기둥 안에 있는 것은 거무튀튀한 고리 4 개였다. 그냥 둥그런 고리였는데, 척 보기에도 팔찌와 발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걸 팔다리에 차라는 건가?”
제론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팔다리에 즉시 고리를 채웠다.
철컹! 철컹!
고리 한쪽이 열리며 팔목과 발목에 착착 채워졌다. 그렇게 채워진 고리는 이음새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마치
팔다리에 쇠를 녹여 붙여 고리로 만든 듯했다.
“상당하군.”
역시 초고대 문명의 물건들은 어느 하나 평범하지 않았다. 이런 투박한 모양의 팔찌와 발찌조차 이 정도 기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한데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
제론은 내심 기대하며 팔다리를 움직여 봤다.
“으윽!”
제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너무나 버거웠다. 마치
진흙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팔다리를 허우적대는 것 같았다.
“이, 이게 뭐지?”
제론은 직감적으로 팔찌와 발찌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일단 팔찌를 벗으려 했다. 하지만
벗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황당했다. 대체 이게 무슨 선물이란 말인가. 지금 이대로라면 걷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제론은 일단 팔찌, 발찌에 적응하기 위해 계속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점성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진흙 속에서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점프도 어려웠다.
“이래서야 기간트 탑승도 어렵겠는데?”
기간트 탑승도 문제지만 기간트를 조종하는 건 더 문제였다. 이렇게 움직이기가 힘든데 어떻게 기간트를 다룬단
말인가.
제론은 잠시 지하로 내려갈까 고민하다가 결국 체른산 유적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익스퍼트가 된 걸 그저 충분히
즐기기로 했다.
물론 온몸을 뭔가가 짓누르는 것 같아 편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Chapter 11 붉은 학살자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바닥이 고르지 않아 쉴 새 없이 덜컹거렸지만, 특별한


처리가 된 마차였기에 안에 탄 사람은 그 흔들림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4 마리의 백마가 끄는 마차는, 모양도 그렇고 마차에 새겨진 문양이나 장식이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마차
주위를 8 명의 기사가 각각 말을 타고 호위하듯 진형을 이뤄 함께 이동하는 중이었다.
“안슈트 경, 아직 멀었나요?”
마차 안에서 들려온 소리에 그 바로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고 가던 안슈트는 즉시 대답했다.
“30 분 정도만 더 가시면 됩니다.”
“다 왔군요. 가슴이 두근거려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저희가 아가씨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후훗. 무슨 일이야 있겠어요? 체른산 방어군은 우리 왕국 최고의 부대잖아요?”
안슈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체른산 방어군이 군부가 자랑하는 부대이고, 가장 강한 것도 맞지만, 체른산이 이번
전쟁 최고의 격전지라는 사실도 잊어선 안 된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 바로 체른산이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대체 체른산에 뭐가 있는 건가요? 왜 벨룸 왕국도 그렇고 우리 왕국도 그렇고 체른산에 집착을 하는 거죠?”
마차에 탄 여인, 클레 폰 디아만트는 체른산에 대해 나름대로 상당한 조사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알 수 있었던
건 체른산에 유적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그 유적은 이미 발굴이 싹 끝났다. 즉, 텅텅 빈 유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두 나라가 그 유적을
차지하기 위해 체른산을 두고 싸운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유적에 뭔가 다른 비밀이라도 있지 않고서는
말이다.
“자존심 싸움입니다.”
“자존심?”
클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존심이라니. 명예가 비록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체른산에서 희생된 기간트의 수가 몇인가.
고작 자존심 때문에 수백 기의 기간트를 날려 버리다니, 그걸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클레의 가문인 디아만트 후작가는 돈으로는 대륙에 손꼽힐 정도로 부자였다. 영지가 비옥한 건 아니었지만 사업적
수완이 뛰어났다. 그렇기에 생각 자체가 돈에 많이 얽매여 있었다.
수백 기의 기간트를 돈으로 환산하면 계산이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다. 그런 엄청난 돈을 고작 자존심 때문에
퍼붓는 것을 클레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 중심에 붉은 학살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러 가는 그 사람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붉은 학살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정보가 차단되어 있었다. 그저 소문만 무성했다.
하지만 디아만트 가문에서는 그 소문 속에서 정보를 뽑아냈다. 또한 군부에 상당한 돈을 써서 정보를 빼내려
애썼다.
그 결과 붉은 학살자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한데 안슈트 경, 정말로 그 붉은 학살자가 우리가 모은 정보대로일까요?”
“상당히 근접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어려워요. 혼자서 그렇게 많은 전공을 세운다는 게 가능한가요?”
붉은 학살자의 전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가 부순 적의 기간트만 해도 100 기가 훨씬 넘을
정도이니, 학살자라는 별명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존재였다.
붉은 학살자의 가장 대표적인 활약은 아군 기간트 부대 구출 작전이었다.
적 기간트 수백 기에 포위된 아군 기간트 부대를 절묘한 작전과 뛰어난 실력으로 구해냈다. 전멸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아군을 절반이나 구해낸 것이다.
그 일로 인해 다시 벨룸 왕국 쪽으로 뒤바뀔 뻔하던 전쟁의 흐름을 지켜 냈다. 여전히 전쟁의 승기는 레늄 왕국이
쥐고 있었다.
“이름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그를 포섭하라니 정말로 쉽지 않은 임무네요.”
클레는 살짝 한탄을 섞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눈빛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붉은 학살자는 이름답게 붉은색 기간트를 몬다고 했다. 일단 붉은 기간트를 찾으면 후보자를 선정할 수 있었다.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일이 더 쉬워질 수도 있었다. 디아만트 가문이 이렇게 나서는 이유는 그가 곧 제대할 거라는 정보
때문이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 정도 실력을 가진 기간트 라이더를 영입할 수 있다면 가문의 힘이 한 층 더 커질 것이다.
상대는 혼자서 전투의 흐름을 바꿔 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기지가 보입니다.”
안슈트의 말에 클레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앞을 바라봤다. 거대한 기지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저런 규모가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며 점점 기지가 커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투가 주로 이쪽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전선에서도 활발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체른산이 가장 중요하다는 건 아직까지
변함이 없었다.
또한 가장 많은 기간트가 대치하고 있다는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 체른산 방어군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는 무려 500 기에 달한다. 벨룸 왕국 역시 그와 비슷한 수준의 기간트를
배치했다.
“이러다가 이번 전쟁이 끝나면 두 왕국이 그냥 파산해 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클레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를 태운 마차가 체른산 방어군 안으로 들어갔다.

클레는 황당한 눈으로 기지 입구 근처에 세워진 마차들을 바라봤다. 수십 대의 마차가 나란히 서 있었다. 마차가
워낙 많았기에 더 들어가지 못하고 클레 역시 근방에 마차를 댈 수밖에 없었다.
말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근처에 있던 병사에게 맡겼다. 병사는 이런 일이 익숙한지
능숙하게 신분을 확인하고 말 보관증을 끊어 주었다.
“역시 다들 모였군요.”
“그를 얻으면 가문의 부흥이 보장된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붉은 학살자의 위명은 이제 레늄 왕국은 물론이고 벨룸 왕국까지 뒤흔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 정보가 철저한
보안 속에서 통제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유명세까지 차단할 수는 없었다.
붉은 학살자는 곧 군부를 떠난다. 그리고 그때 그가 가져가게 될 것들이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지금까지 그는 포상을 받지 않고 모아 두기만 했다. 그가 군부를 떠나는 순간 받기로 예정된 포상금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또한 그가 쓰던 기간트를 군부의 상징으로 남겨 두는 대가로 엄청난 보상을 약속받았다.
그 돈만 해도 영지 하나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었다.
하지만 붉은 학살자가 가져갈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라이더로서의 실력은 어디 가지 않는다. 붉은
학살자 한 명을 영입함으로써 각 가문이 기대할 수 있는 이득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기에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붉은 학살자를 영입하려 애쓰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아직도 누가 붉은 학살자인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클레는 일단 호위 기사를 이끌고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기지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일정 절차가 필요했다.
호위 기사 중 하나가 나서서 대부분의 절차를 처리했다. 이제 남은 건 붉은 학살자를 찾아내는 것뿐이었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곳입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병사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기지 입구에서부터 기간트를 보관하는 격납고
입구까지였다.
또한 기지에 머물 수 있는 기간도 정해져 있었다. 고작 열흘이었다. 하지만 클레는 그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자신감은 격납고에서 훈련을 위해 나오고 있는 기간트 무리를 보고서 깨끗이 사라졌다.
500 기의 기간트 중 절반이 붉었다. 기종도 갖가지였다. 크라테르나 카타락타는 당연했고, 심지어는 적국의
기간트로 유명한 몰레스에 실바까지 끼어 있었다.
“문제가 좀 심각하군요.”
“걱정할 거 없어요. 저들을 일일이 만나서 확인해 보면 될 테니까요.”
훈련을 지켜보면 가장 실력이 출중한 기간트가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가 붉은 학살자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훈련을 지켜볼 수 없으니 확인이 불가능하다. 또한 격납고에 들어가 기간트에서 내리는 모습을 확인해야 하는데
그조차 할 수 없다.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클레는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분명히 하나하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면
후보를 좁힐 수 있을 것이다.
클레는 멀어져 가는 붉은 물결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런 클레를 호위 기사가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기지 안이 바글바글하네요.”
“이렇게 여자가 많았던 적이 처음이지?”
“저 중에 하나만 잡아도 평생 걱정 없을 텐데.”
라이더들이 낄낄거리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만큼 지금의 상황은 그들에게도 생소했다. 갑자기 군부에서 기지에
사람들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물론 일시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대단해. 다 그놈 하나를 보러 온 거잖아?”
“그렇지.”
“대체 정체가 뭘까?”
“알게 뭐야. 우리야 그냥 그놈인 척만 하면 되잖아.”
“그야 그렇지.”
붉은 학살자의 정보가 빠져나갈 가장 큰 구멍은 바로 같은 라이더였다. 하지만 그들로부터 정보를 빼내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체른산 방어군에서 기간트를 타는 사람들은 최소 한 번 이상 그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 목숨 빚을 정보
차단이라는 걸로 갚고 있었다.
물론 라이더라고 해서 모두 그의 정체를 아는 것도 아니었다. 아는 사람은 고작 절반 정도였다. 그나마도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훨씬 적었다.
그렇게 라이더가 모여서 식사를 하며 간단히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그래서 그가 대체 누구죠?”
다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생글생글 웃는 미녀 한 명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그 사람인 척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제가 잘못 들었나요?”
클레였다. 그녀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쭉 둘러앉아 식사를 하던 라이더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리는 할 말이 없소.”
다들 식사도 술도 팽개치고 분분히 일어났다. 그때 테이블 위로 주머니 하나가 떨어졌다.
쩔렁! 촤르륵!
주머니가 떨어진 순간 묵직한 쇳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열린 입구를 통해 내용물 중 일부가 쏟아져 나왔다.
번쩍번쩍하는 금화였다.
“100 골드에요.”
다들 나가다 말고 멈춰서 침을 꿀꺽 삼켰다. 100 골드면 상당한 거금이다. 1 골드면 제법 부유한 평민 가족의 한
달 생활비였다. 지금 있는 라이더끼리 적당히 나눠도 최소 20 골드 이상씩 돌아간다.
모두의 눈에 갈등이 어렸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냉정히 돌아섰다.
그 모습에 클레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들이 이 돈을 마다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이럴 경우 역시
그녀의 계획에 들어 있었다.
쩔렁! 촤르륵!
이번에는 더 큰 주머니였다. 역시 라이더의 발걸음을 잡았다.
“500 골드에요.”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와중에 클레가 또 주머니를 던졌다.
쩔그렁!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큰 주머니였다. 얼마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보기만 해도 대충 알 수 있었다. 500
골드짜리 주머니보다 2 배는 더 컸으니까.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아요. 이 기지에 라이더가 모두 몇 명이나 있을까요? 전 그들 모두를 만나볼
생각이랍니다.”
클레의 말에 다섯 라이더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이렇게 엄청난 돈이 코앞에 떨어지니 탐욕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아는 건 그리 많지 않소.”
라이더 중 하나가 결국 입을 열었다. 클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상관없어요. 어떤 정보든 좋아요. 말씀만 해 주신다면 그 돈은 여러분 거랍니다.”
다섯 라이더는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그들 중 하나가
클레를 바라보며 대표로 말했다.
“실바요.”
“실바?”
“학살자의 기간트는 붉은 실바요. 우리가 아는 건 거기까지요.”
다섯 라이더는 그 말을 마치고 순식간에 달려들어 테이블 위의 돈을 챙겼다. 무려 1,600 골드나 되는 거금이었다.
이 돈이면 다섯이서 나눠도 각각 상당한 규모의 가게 하나는 낼 수 있었다.
모든 라이더가 사라지자, 클레가 고개를 돌려 함께 온 호위 기사 안슈트를 바라봤다.
“어때요? 생각보다 쉽죠?”
안슈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우려가 어려 있었다. 클레는 모든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방식이 언제나 비슷하다. 돈을 던지는 것이다.
디아만트 후작가가 비록 대륙에서 손꼽히는 거부라고 하지만 그래도 돈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막말로 레늄 왕국이 작정하고 후작가를 도려내려 마음먹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것을 막기가 쉽지 않다.
“자, 그럼 이제 실바의 라이더를 만나러 가 볼까요?”
클레는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식당에서 나갔다. 시간이 아직 이른지라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슈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식당 안을 한 번 훑어본 뒤 천천히 클레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서 뭔가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클레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그녀는 지금 당황하고 있었다.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떻게 실바를 50 기나 배치할 수가 있죠?”
실바는 성능이 너무 모자라기에 많으면 많을수록 전력손실이 컸다.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이런
격전지에서 실바의 수를 늘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안슈트는 그렇게 말하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학살자는 레늄 왕국뿐 아니라 벨룸 왕국에서도 유명하다.
그들에게는 아마 악몽 같으리라.
그러니 이쪽에서는 당연히 연막작전을 써야 한다. 그게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겠는가.
물론 작전을 잘 세우지 않으면 오히려 역공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쓰기만 하면 엄청난 효과를 얻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50 기는 너무 심한데?’
10 기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그 정도면 연막을 치고도 남는다. 한데 50 기나 동원했다는 건 뭔가 다른 의도가
있음이 분명했다.
“어쩌시겠습니까?”
“어쩌긴요. 50 명 다 만나 봐야지요.”
생각보다 많긴 하지만 그래도 불가능한 숫자는 아니었다. 어쨌든 실바라는 걸 알아낸 것만 해도 상당한 성과
아니겠는가.
“다른 가문에서는 어쩌고 있죠?”
“기지를 온통 들쑤시고 다니는 중입니다. 이러다가 적이 습격이라도 하면 큰일 날 것 같습니다.”
“설마 그렇게 하겠어요? 여기 얼마나 대단한 전력이 모여 있는데요.”
각 가문에서 데려온 호위 기사는 대부분 기간트 라이더였다. 당연히 기간트도 함께 가져왔다.
수십 가문이 기지를 들쑤시고 있으니, 그들이 가져온 기간트의 숫자만 해도 100 기에 가깝다. 아니, 어쩌면 100
기가 넘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전력이 20 퍼센트나 상승했는데, 그것도 고급 전력이 그 정도 늘어났는데, 굳이 벨룸 왕국에서 습격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도 전력을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안슈트는 뭔가 불안했다. 이런 안 좋은 예감이 들 때는 어김없이 나쁜 일이 벌어졌다. 이럴 때일수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한다.
“혹시 이번에 어떤 가문이 여기에 왔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안슈트는 표정을 굳히며 속으로 결심했다. 자신이 나서서 알아봐야겠다고 말이다. 상당히 더러운 느낌이 들었다.
지저분한 음모가 개입된 것 같은 예감 말이다.

☆ ☆ ☆

다음 날부터 클레는 실바의 라이더를 은밀히 만나고 다녔다. 하지만 좀처럼 진짜 붉은 학살자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실력을 보고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아닌 척하고, 또 진짜인 척해도 실력을 따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일이 안 풀릴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전 군부에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서 정보를 차단했다는 것이 더 놀랍습니다.”
안슈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최근 이곳에 모인 가문을 모두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슈린 공작가와 좋지 않은 관계에 놓인 가문들만 절묘하게도 모았어.’
이쯤 되면 정말로 음모가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군부는 슈린
공작가와 사이가 좋지 않다. 그렇기에 군부가 슈린 공작가의 음모를 도와줄 리 없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인가? 내 예감이 잘못되었나?’
안슈트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직감을 끝까지 믿기로 했다. 그는 잠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어? 저 사람 실바의 라이더네요.”
클레의 말에 안슈트가 고개를 돌려 그녀가 가리키는 사람을 확인했다.
‘음?’
안슈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느낌이 이상한 사람이었다. 클레가 실바의 라이더를 만날 때 안슈트도 함께
있었다. 하지만 저런 느낌을 주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강렬한 예감 한 줄기가 척추를 타고 흘렀다.
“저 사람은 어땠는지 기억나십니까?”
“당연하죠. 저 사람은 허풍 쪽 사람이에요.”
클레는 실바의 라이더를 몇 가지로 분류했다.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 자신이라고 그냥 인정하는 사람, 그리고 인정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되도 않는 허풍을 치는
사람, 그리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애매한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었다.
“허풍이라고요?”
안슈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허풍이나 떨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지. 일부러 그렇게 포장했을 수도 있지.’
안슈트는 의심을 접지 않고 그를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폈다.
“왜 그러세요? 혹시 뭔가 알아내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요? 그럼 가서 말이라도 다시 걸어 볼까요?”
클레는 그렇게 말하고는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사내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이봐요!”
클레의 부름에도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부르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클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봐요! 제론이라고 했죠? 거기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론은 눈에 이채를 띠며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상당히 영특한 여자로군.’
제론이 돌아서서 클레를 보고는 살짝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몇 번이나 연습해서 만들어 낸 완벽한 미소였다.
“오오. 어제 만났던 레이디로군요.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클레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니라 이분께서 좀 뵙고 싶어 하셔서요.”
그렇게 말한 클레가 안슈트를 돌아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안슈트가 갑자기 검을 뽑았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빨랐다. 그저 검을 뽑았다는 것만 봤고, 그 뒤는 아예 볼 수조차 없었다.
안슈트의 검이 그대로 뻗어 제론의 목을 꿰뚫을 듯 쏘아져 나갔다.
검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정말로 죽일 작정으로 찌른 검이었다.
제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하지만 몸이 굳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도 못했다.
피슉!
우드득!
안슈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뻗어 가던 검을 너무 무리해서 멈추는 바람에 팔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뼈가 살짝 비틀렸다.
그렇게 했음에도 검을 완전히 멈추지 못했다. 검 끝이 제론의 목에 살짝 닿았다. 피가 주륵 흘렀다.
“꺄악! 아, 안슈트 경!”
클레가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군부에 와서 검을 휘두르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행동인가. 게다가 군부 소속
라이더의 목에서 피까지 났다.
“괘, 괜찮으세요?”
클레가 당황하며 제론에게 다가갔다. 제론이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나며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제론은 나머지 손으로 목을 한 번 훑었다. 손바닥 가득 피가 묻어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제론의 외침에 안슈트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감이 확실해서 시험한 것이다. 솔직히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의 강자라고 믿었건만.’
일부러 피하지 않은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안슈트는 진짜 살기를 담았다. 조금이라도 느슨했다면 이렇게 제론의
목에 상처를 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이게 죄송하다고 사과로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론의 호통에 클레가 다급히 나섰다.
“제가 최대한 보상해 드리겠어요. 그러니 일단 치료부터 하세요.”
클레가 나서서 몇 번이고 사과를 하자, 제론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를 봐서 한 번 넘어가 드리죠.”
그렇게 말한 제론이 손을 내밀었다. 클레는 제론의 손을 의아한 표정으로 보다가 이내 알았다는 듯 ‘아!’하고
탄성을 흘리며 금괴 몇 개를 품에서 꺼내 제론에게 건넸다.
금괴의 크기를 보니 100 골드짜리가 아니라 1,000 골드짜리였다. 그런 금괴가 무려 3 개나 된다. 3,000 골드를
통 크게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안슈트가 한 짓을 무마하려면 그 정도 대가는 필요했다.
제론은 3 개의 금괴를 받으며 씨익 웃었다.
“오오. 3,000 골드나 주시다니, 통 크신 레이디로군요.”
제론은 능숙하게 금괴를 챙겼다. 그리고 언제 다쳤냐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클레를 쳐다봤다.
“이제 볼일은 다 끝난 겁니까?”
클레는 반사적으로 안슈트를 바라봤다. 안슈트는 자신의 감이 틀린 것 때문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지나치게 감에 의존했나?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확실하게 감이 왔다. 이 정도로 강력한 느낌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틀렸다. 안슈트는
감이 흔들린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안슈트가 그런 상태니 클레가 더 뭘 어쩔 수 있겠는가. 하지만 클레도 안슈트가 이런 행동까지 한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3,000 골드가 아깝기도 하고.’
거기까지 생각한 클레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제론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다만 제 시간은 상당히 비쌉니다.”
클레가 어색하게 웃었다.
“충분히 보상해 드리죠.”
순간적으로 이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돈이 많은 가문답게 식사도 범상치 않았다. 전장에서 쉽게 구하기 어려운 요리들로만 쫙 깔려 있었다. 일단


대접을 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클레는 돈을 아끼지 않고 식사를 준비했다.
“오, 이건 뭡니까? 맛이 특이한데요?”
제론은 특별한 향신료로 구워 향을 낸 소시지를 한입 가득 씹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천박해 보였는지
클레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소시지에요.”
클레의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제론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함께 있는 호위 기사 전원이 제론에게
눈총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그 눈총에 담긴 살기와 투기가 따끔따끔하게 피부를 긁을 정도였다.
제론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는 소시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멋진 식사를 대접해 주셨으니 보답을 해 드려야겠지요. 제가 재미난 얘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제론의 말에 사방에서 조여들던 살기와 투기, 눈총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클레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재미난 얘기요? 혹시 붉은 학살자에 관한 건가요?”
제론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흥미를 가질 만한 게 없잖습니까?”
다들 호기심이 차올랐다. 그걸 느낀 제론이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먼저 포위된 아군을 구한 얘기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군요. 그게 제일 멋지지요.”
제론은 잠깐 뜸을 들이며 포도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후, 좌중을 슥 둘러봤다.
“그러니까 우리 기간트 부대가 정보전에서 속는 바람에 적군의 포위망에 갇혀 버렸을 때의 일입니다.”
“속아요?”
“이곳은 정보전이 정말 심합니다. 거기에 실패하면 그렇게 함정에 빠지는 거죠. 아무튼 전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갔습니다. 아시죠? 붉은 학살자는 아공간이 없다는 거. 그냥 달려서 가야만 하죠.”
클레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이 사람은 붉은 학살자가 아니었다. 한데 또 이런 허풍을 치고 있으니 이젠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도착해서 딱 보니까 정말로 포위망이 촘촘하더군요. 그래서 생각했죠. 저기까지 뚫고 지나가면 다시 나올 길이
생기겠구나! 하고요.”
“아, 그러셨어요?”
클레의 말투에 상당한 비꼼이 섞였지만 제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무작정 달렸죠. 함께 간 동료들에게 뒤를 맡기고요.”
클레가 살짝 지루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물론 제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가 달려가니 적 포위망 일부가 뒤로 돌아서 막을 준비를 하더군요. 그냥 부딪치면 당연히 우리가 밀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뛰었죠.”
“뛰어요?”
“점프요. 붕 뛰어서 막아선 기간트를 뛰어넘어 버렸죠.”
클레가 황당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아무리 허풍이 심하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점프를 했다고요? 기간트를 타고요? 그것도 실바를 타고? 그게 가능한가요? 기간트가 점프해서 상대 기간트를
넘었다고요? 기간트가 몇 미터인지는 알고 계시나요?”
“아, 제가 뛰어넘었다고 말했나요? 뛰어넘은 게 아니라 뛰어서 가슴을 콱 밟아 줬죠.”
“가슴을 밟아요?”
“그렇다니까요. 가슴을 콱 밟으니까 뒤로 벌렁 넘어지더군요. 그 힘을 이용해 또 뛰어서 옆에 선 다른 기간트를
밟고, 또 뛰고. 그렇게 쾅쾅쾅쾅 뛰어서 포위망을 돌파했죠.”
클레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차라리 조금 전 기간트를 뛰어넘었다는 게 더 신빙성 있었다. 이건 더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따라오던 동료들이 나머지 정리를 했죠. 쓰러진 놈들에게 달라붙어서 검으로 쿡쿡쿡쿡. 그냥 찌르기만 하면
끝나잖아요?”
클레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 역시 말이 안 된다. 쓰러졌다고 바로 검으로 찔러 기간트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라이더가 몇이나 되겠는가.
한데 그런 식으로 돌파했으면 수많은 기간트가 쓰러졌을 것이다. 그 모두를 순식간에 달려들어 무력화시켰다고?
그걸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일단 돌파하면 끝인 거죠. 갇혔던 동료를 이끌고 다시 뛰어나왔죠.”
“또 점프를 하면서요?”
“에이, 그렇게 하려면 도움닫기가 제법 필요해서 그건 안 되고요. 달려드는 적들을 이리저리 내던지면서
돌아왔죠.”
“내던져요?”
“모르시나 보구나. 이렇게 손을 뻗을 때, 요렇게 잡아서 확 당겨 버리면 자기 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져
버리거든요. 그렇게 몇 기만 엉켜 놓으면 쉽게 포위망을 닫지 못하니 금방 빠져나왔죠.”
클레가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이렇게 뻔뻔하게 허풍을 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녀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식사나 마저 하시죠. 허풍은 이제 그만 치시고요.”
클레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 버렸다. 웬만해야 들어주지, 이건 심해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어? 허풍 아닌데? 정말로 그렇게 했다니까요? 우와, 이거 진짜 답답하네.”
제론은 억울하다는 듯이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테이블에 차려진 요리를 끊임없이 먹어 치웠다.
“알았으니 일단 식사나 하자고요. 시간이 비싸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저도 돈이 아까워지려고 하니, 우리 시간을
좀 절약하죠.”
그 말에 제론이 입을 꾹 다물고 빙긋 웃었다. 그리고 서둘러 음식을 먹었다.
클레는 한숨을 폭 내쉬고는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식사를 마무리했다.

☆ ☆ ☆

클레는 제론에게 금괴 하나를 더 주고 돌려보냈다. 약속은 약속이니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건 기본적인


신용에 관한 문제였다.
“설마 뻔뻔하게 금괴 하나를 요구할 줄은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괜히 저 때문에…….”
“아뇨. 안슈트 경의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호기심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죠.”
클레는 그렇게 안슈트를 달래 준 후,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나저나 점점 깊은 미궁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네요. 생각해 보면 우리가 식당의 라이더에게 당했을 수도
있어요. 그렇게 엄청난 공을 세운 붉은 학살자가 실바라는 말을 덜컥 믿었으니…….”
안슈트는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가장 먼저 그 말을 의심했어야 한다. 붉은 학살자가
실바라니. 대체 그걸 왜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단 말인가.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하아. 다시 한 번 정보를 모아 봐야죠. 그리고 그때 우리 돈을 받아간 사람, 싹 찾아야겠어요.”
“돈을 돌려받으실 생각이십니까?”
클레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대로 된 정보를 들을 거예요. 어차피 그 돈은 정보비로 쓴 돈이니까요.”
클레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결의를 다졌다. 어떻게든 붉은 학살자를 찾아내서 포섭하겠다고 말이다.

Chapter 12 폭풍전야

“다녀왔어.”
제론의 말에 세나와 바이스가 긴장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때요? 뭔가 알아낸 것 같나요?”
클레의 초대를 받고 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 이곳에 들러서 자초지종을 얘기했기에 세나와 바이스는 상당히
걱정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제론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면 참으로 곤란한 일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제론이 붉은 학살자라는 정보를
제대로 차단하지 않으면 꽤 위험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벨룸 왕국은 아직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붉은 학살자 때문에 그들이 얻은 손해는 엄청났다. 만일
제론이 아니었다면 이번 전쟁의 흐름은 진작 벨룸 왕국 쪽으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자, 일단 이거 받아.”
제론이 금괴 하나를 휙 던져 주었다. 바이스는 얼결에 그것을 받았다.
“이걸 또 받아 오신 겁니까?”
“내 시간은 비싸다고 엄포를 놓고 왔지.”
바이스와 세나는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디아만트 후작가에 돈이 많다고 하지만 이렇게 잠깐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 수천 골드를 뽑아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까도 이런 금괴를 하나씩 나눠 주셨잖습니까.”
“그거야 내 목에 상처를 낸 대가고.”
제론이 뻔뻔하게 씨익 웃었다. 목에 난 상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익스퍼트가 된 다음부터 웬만한 상처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아까 안슈트가 목에 낸 상처는 아주 얕았다. 그 정도 상처는 몇 시간이면 아물었다. 물론 몸속에 흐르는 마나를
활발히 움직였을 때의 얘기다.
제론은 의도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조절해 상처가 빨리 낫지 않게 했다. 그래야 안슈트나 클레가 의심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반응이 어떻던가요?”
제론이 피식 웃었다.
“그냥 사기꾼으로 알던데?”
“잘하셨습니다.”
“잘하긴. 난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믿지를 않더라고.”
바이스가 빙긋 웃었다.
“그걸 누가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까? 더구나 실바로 그랬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죠.”
“어쨌든 조만간 전투가 시작될 것 같으니까 미리 준비해 놓는 게 좋을 거야.”
제론의 예감은 상당히 정확했다. 특히 이런 전투에 관한 예측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이미 정비는 끝냈습니다. 새로 갈아 끼운 부품의 마법진도 다 손봤고, 균형도 제대로 맞췄습니다. 당장 타고
나가셔도 됩니다.”
“좋아. 역시 믿을 만하군. 그럼 난 오늘도 가볍게 산책이나 하고 올 테니까 나머지도 부탁해.”
제론은 두 사람에게 손을 휘휘 흔들어 주고는 밖으로 훌쩍 나가 버렸다.
세나가 그런 제론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 2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날 제대로 안 봐주시네.”
“내가 보기엔 그래도 진전이 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마.”
“정말? 어떤 점이?”
“남자의 직감이야.”
“장난해?”
“하하.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감이 그래. 왠지 느낌이 온다니까?”
세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세나에게 접근하는 남자는 정말로 많았다. 아카데미나 군대나 별 차이가 없었다. 아니, 군대의 특성상
아카데미보다 훨씬 많은 남자들이 세나의 마음을 얻으려 애썼다.
하지만 세나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세나의 마음은 오로지 제론에게 향한 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제론은 세나와 2 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하면서 단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았다. 분명히 친밀했다. 하지만
세나가 느끼기에 그 친밀함은 동료로서의 그것이었다.
‘분명히 아직 연인은 아니야.’
세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했다.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 키스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단 말인가.
자신을 여자로 생각하긴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걱정 말라니까? 아마 제대한 다음에는 관계가 급속도로 좋아질 테니까.”
“과연 그럴까? 제대 후부터 훨씬 바빠지실 텐데?”
지금은 군부의 힘이 울타리가 되어 주고 있지만, 제대 후에는 직접 슈린 공작가를 상대해야 한다. 아마 슈린
공작가도 제론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제론은 언젠가 슈린 공작가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슈린 공작가에서는 그렇게 크기 전에 싹을 잘라 버리는 편이
훨씬 낫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때 제대로 도와 드리면 되지. 어차피 제대는 함께하잖아?”
“하긴. 그야 그렇지만.”
“나도 옆에서 도울 테니까 힘내.”
세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론은 제대를 1 년 연기했다. 세나와 바이스 때문에 군부에 더 남기로 한
것이다.
사실 그 이면에는 아직 중앙 유적의 수련이 마무리되지 않은 이유가 있었지만,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자, 그러니 힘내라고. 나도 그동안 포로스를 이용해서 엄청난 돈을 모았어. 가문에 입지도 잘 닦아 놨고.
어차피 너도 슈린 공작가와 싸워야 하는 입장 아니야?”
바이스는 말레피 후작가에 남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이미 제론과 함께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제론의
가신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누가 들으면 미친 짓이라고 하겠지만 바이스는 자신의 안목과 감각을 믿었다. 그가 보기에 제론은 향후 그
누구보다 높은 곳에 오를 것이 분명했다.
‘이런 게 진짜 투자지.’
본래 투자는 위험할수록 성공했을 때 얻는 것도 많다. 바이스는 제론 아래에서 결국 말레피 후작가보다 훨씬 높은
곳에 오를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려면 미래의 주모에게 잘 보여 두는 게 좋지.’
바이스는 세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확실히 아름다웠다. 또 생명력이 넘치기에 더욱 매력적이었다. 저
정도면 제론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여자다.
‘벨루스 백작가에서 과연 어떻게 나오느냐가 문제이긴 한데…….’
벨루스 백작이 세나를 강제로 슈린 공작가와 엮으려 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세나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아마 또 집을 나가겠지. 이런 격전지로 온 것처럼.’
벨루스 백작은 세나가 조기 졸업을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전공을 엔지니어로 바꾼 건 더더욱 몰랐다.
여자가 엔지니어를 한다니, 펄쩍 뛸 일 아닌가.
벨루스 백작이 모든 사실을 안 것은 세나가 입대한 후였다. 그렇기에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포로스 덕분에 얻는 게 많군.’
포로스를 가문에 공급하면서 돈뿐 아니라, 정보까지 얻고 있었다. 말레피 후작가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었다.
그것이 향후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제론에게 도움이 될 거라 믿었다.
“자, 그럼 연구를 시작해 볼까?”
바이스는 남는 시간에 제론이 지시한 연구를 계속했다. 당연히 마법진에 관한 연구였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바이스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제론이 신경을 써 주는 것이지만, 바이스는 자신이 제론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물론 도움이 되긴 한다. 바이스와 세나 덕분에 제론에게 상당히 많은 시간이 생겼으니까.

“이번에도 답이 보이지 않는구나.”


제론은 중앙 유적 로비에서 잠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현재 제론이 도전하고 있는 것은 유적 10 층이었다.
8 층과 9 층도 쉽지 않았다. 각각 8 층은 육체적, 그리고 9 층은 정신적 한계를 경험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돌파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각각 네 달이 조금 넘는 시간에 클리어할 수 있었다.
그동안 치열한 전투를 끊임없이 했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로 빠른 시간이었다.
현재 제론은 초고대 문명 기준으로 상당히 경험 많은 익스퍼트였다. 또한 심장에는 7 개의 마나링이 맴돌고
있었다.
마나링이 늘어난다고 무조건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훨씬 세밀한 마나의 조절 능력을 갖게
되었다.
7 개의 손으로 동시에 마법진을 그려 낼 수 있으니 훨씬 빠르게 마법을 펼칠 수 있었고, 또 훨씬 복잡한 마법을
쓰는 게 가능해졌다.
하지만 마스터의 경지는 아직도 요원했다. 마스터는 아무리 유적의 힘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또한 여덟 번째 마나링도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역시 마스터에 준할 정도로 높은 벽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지금 문제는 10 층의 클리어였다.
10 층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수련장이었다.
8 층과 9 층에서는 팔찌와 발찌를 달고 평소에도 어렵게 움직이며 고통받았다. 그러면서도 클리어 보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
8 층을 클리어한 보상으로 9 층에서 쓸 정신을 금제하는 목걸이를 받았고, 9 층을 클리어한 보상으로 10 층 수련을
위한 벨트를 받았다.
이 벨트가 참으로 요상한 것이 오로지 10 층에서만 작동을 했다. 몸의 감각을 이상하게 만드는 벨트였다.
“후욱. 좋아. 가 볼까?”
제론은 마나 호흡을 통해 만반의 태세를 갖춘 뒤, 곧장 10 층으로 내려갔다.

“크윽. 대체 이 수련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군.”


제론은 불평하면서도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벨트가 작동하며 몸의 움직임이 극도로 제한되었다. 이 제한을 풀기
위해선 움직일 몸의 부위를 통해 마나를 뿜어내야만 했다.
만일 마나의 형질이 조금 달라진 상태로 뽑아내면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검을 통해
예기를 부여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 수련은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전투와 상관없이 그저 마나를 그저 뿜어내기만 했다.
마나는 아무런 효과 없이 그저 허공에서 흩어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제론은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였다. 이곳에서 수련하는 것은 일종의 체술이었다.
사실 위력은 크게 대단할 게 없었다. 하지만 온몸을 움직여야 하기에 수련 자체가 너무나 까다로웠다.
어쨌든 그 체술을 수련하면서 움직일 때마다 마나를 뿜어내야 하기에 10 층의 수련은 정말로 어려웠다.
체술의 시작에서 끝까지 끊임없이 마나를 뿜어내야 하는데, 아직 채 절반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한바탕 체술을 펼친 제론은 녹초가 되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이거 마나 소모가 너무 극심한데?”
마나 소모가 지나칠 정도로 심했기에 수련이 더 어려웠다. 만일 체술에 맞춰 마나를 제대로 뿜어낼 수 있어도
수련을 마무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에는 마나량이 너무 모자랐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해야만 한다.
제론이 이 수련을 시작한 지 벌써 1 년이 훨씬 넘었다. 그런데도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하다는 건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더구나 요즘에는 시간도 제법 많이 난다. 전투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귀족 가문을 여럿 받아들여 기지 내부를 공개한 것도 그렇기에 추진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10 층 수련은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제론은 조금 방법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제론은 차근차근 문제점을 살폈다. 사실 매일 수련을 마무리할 즈음 하는 일이었다.
마나량이 모자란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10 층 수련 과정을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을 테니까.
마나는 7 층 수련을 통해 잔뜩 늘릴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마나를 받아들였는데도 고작 체술 한 번 수련하는
것도 버겁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결론은 제론이 마나를 효율적으로 다루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한 번에 뿜어내는 마나량이 너무 많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제론은 뿜어내는 마나량을 조절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거기까지 정리한 제론이 자신의 허리에 묶인 벨트를 쳐다봤다.
“그럼 이 벨트는 뭐지?”
벨트를 차고 있으면 움직임이 극도로 제한된다. 그 상태에서 체술을 펼치려니 더 힘들고 막대한 마나가 소모되는
것이다.
이 벨트는 반드시 유적 10 층에서만 작동한다. 그렇기에 밖에서의 수련이 무의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세밀한 마나의 조절은 굳이 밖이건 안이건 상관없지 않겠는가.
“오늘은 여기까지. 일단 마나 수련부터 다시 해야겠어.”
제론은 결정이 나자마자 로비로 향했다. 그리고 유적에서 나갔다.
깜깜한 밤이었지만 제론은 아무런 문제없이 산에서 내려가 숙소로 돌아갔다.
익스퍼트가 된 이후로 눈이 훨씬 밝아졌다. 또한 몸도 월등히 좋아졌다. 여러모로 말이다.

숙소에 돌아온 제론은 태블릿을 꺼내 주변 정보를 확인했다. 유적을 중심으로 반경 100 킬로미터 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안에 체른산 방어군은 물론이고 적의 기지도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제론은 수시로 정보를 확인했다. 언제 어떤 전투가 벌어질지 알아놓는 것만으로 상당한 공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예전 포위된 아군을 구하는 작전을 들 수 있다. 만일 제론이 적의 움직임을 미리 알아내지 못했다면 그
안에 갇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미리 알고 있기에 적당한 일을 만들어 거기서 빠졌다. 그리고 그들의 약점을 미리 공략해 아군을
구해 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상당한 기간트를 잃었지만 제론의 공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전쟁의 흐름이 완전히 넘어갈 뻔한
것을 되돌렸으니 말이다.
“아직은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는군. 하지만 기간트의 수가 너무 많아. 이놈들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해.”
지금은 체른산 방어군에도 기간트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각 귀족 가문에서 데려온 호위 기사가 가진 기간트를
모두 합하면 100 기가 넘을 것이다.
그러니 적이 언제 공격하더라도 무서울 게 없었다. 어쩌면 사령부에서는 지금 적이 몰려오길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그럼 아주 자연스럽게 적 전력을 깎아 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만일 적군이 그 정도 기간트를 확보한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또한 이곳에 어느 정도의 기간트가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고 달려든다면 정말로 어려운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벨룸 왕국에는 그 정도 기간트를 동원하기가 쉽지 않지.’
벨룸 왕국에도 귀족이 있고, 그들의 기사에게 지급한 기간트가 있었다. 그들도 귀족이 움직여서 기사단과 병력을
전쟁에 투입하면 전쟁의 향방이 많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레늄 왕국의 귀족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전쟁 지원금을 내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여겼다.
물론 전쟁이 급박해지면 그냥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겠지만 아직까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벨룸 왕국이 체스터 공국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만일 전쟁이 끝난다 하더라도 두
왕국이 입은 피해는 결코 씻어 내기 어려울 것이다.
제론은 그런 식으로 주변 정세를 파악한 뒤, 이번에는 아군 기지를 살폈다.
적의 정보만 아니라 아군의 정보도 중요하다. 제대로 정보와 작전을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특히 요즘에는 붉은 학살자, 즉, 제론을 영입하러 온 귀족의 동향까지 살펴야 하기에 더 열심히 정보를
확인해야만 했다.
모든 정보를 확인한 제론은 일단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냥 자도 되지만 그럴 수 없었다. 10 층을 최대한 빨리 클리어하려면 자는 시간도 아껴야 한다. 제론은 아랫배에
잠든 마나 덩어리를 건드려 깨웠다.
마나가 실처럼 뽑혀 나왔다. 그렇게 나온 마나가 온몸 구석구석 퍼졌다. 순식간이었다.
10 층 수련은 일단 이 상태가 되어야 시작할 수 있기에 이렇게 온몸으로 마나를 퍼트리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다. 이제는 생각만 해도 온몸에 마나를 균일한 농도로 퍼트릴 수 있었다.
그렇게 퍼트린 마나를 온몸을 통해 일제히 밖으로 내뿜었다. 균일한 농도로 마나가 빠져나갔다. 이 역시 엄청난
노력 끝에 얻어 낸 성과였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제론은 밖으로 뿜어내는 마나의 양을 줄였다.
쉬익!
바람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마나가 빠져나갔다. 성공이었다. 원하는 만큼 줄이는 건 쉬웠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 마나의 질을 높여야 한다.
제론이 마나를 많이 뿜어낸 이유가 있었다. 그 정도가 아니면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나를 뿜어내지
않았다고 체크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마나의 질을 올리는 것이었다. 문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건데, 그건 차츰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무조건 성공해야 돼.’
이게 되지 않으면 소드 마스터가 되기 전에는 이 수련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소드 마스터가
되어도 계속 여기에 매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번 수련은 어려웠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얼마나 많은 마나를 품게 될지 모르지만, 그것으로도 체술을
완벽하게 펼치기에는 모자랄 것만 같았다.
제론은 눈을 감은 채 밤이 새도록 마나 수련에 매달렸다. 마나를 뿜어내다가 고갈되면 마나 호흡을 통해 다시
채우고, 또 뿜다가 고갈되면 채우는 걸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제론은 쫙 깔려 오는 투기를 느끼며 천천히 걸어갔다. 기지 곳곳을 걸으며 어떤 식으로 투기가 흐르는지 확인했다.
적의 동태는 태블릿과 유적의 정보 수집 아티팩트, 마티를 통해 꾸준히 확인하기에 그들의 작전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실제 작전을 통한 예상과는 많이 달라진다. 제론은 그것이 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투기가 짙으면 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그때그때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투기로 변해서 느껴지는 거니
거의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 투기의 흐름을 미리 파악했기에 실제 싸움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투기가 가장 적은 쪽에 자리를 잡는 게 안전하다. 또한 투기가 짙은 곳은 잘 주시해야 한다. 그쪽에서 전투
흐름의 변화를 캐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투기의 흐름을 파악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제론은 멀리서 누군가 티격태격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뭐지?”
거리가 제법 됐지만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클레와 안슈트였다. 그들이 몇 명의 라이더를 앞에 두고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굳이 가 볼 필요는 없었다. 한데 제론은 왠지 가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정하기 전에는 충분히
생각하지만, 일단 결정을 내리면 망설이지 않는 것이 제론의 스타일이었다.
제론은 곧장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걸음을 빨리했기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몇 번을 말해야 알겠소? 우리가 아는 건 그게 전부라니까!”
“그럼 상식적으로 여러분이 한 말이 맞다고 생각하시나요? 실바라고요? 실바로 어떻게 그런 성과를 내죠?”
다섯 라이더는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그들도 그냥 붉은 학살자가 실바라는 것만 알지, 더 자세한 건 알지
못했다. 한데 생각해 보면 실바가 그런 성과를 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소문에는 붉은 학살자가 기간트를 타고 점프까지 했다더군요. 과연 실바로 그게 가능할까요?”
만일 다섯 라이더가 제론보다 일찍 입대했다면 바로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이 붉은 실바를 타고 점프를
통해 적을 박살 내는 광경을 똑똑히 확인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제론보다 늦게 합류했다. 체른산 방어군에 병력이 확충되면서 끼어든 라이더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실바라고 주장하고 싶으신가요?”
클레의 물음에 다섯 라이더는 우물거리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도 동료에게 들은 얘기였다. 그걸
얘기해 준 동료도 아마 학살자의 정체는 모를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들었을 뿐이오.”
“그럼 그 얘기를 해 준 분을 알려 주세요. 제가 직접 가서 물어볼 테니까요.”
“그건…….”
다섯 라이더가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얘기가 더 퍼지면 곤란했다. 붉은 학살자의 정체는 철저한
비밀이었다.
만일 자신들로 인해 그 비밀이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이 사령관의 귀에 들어가면 정말로 큰일 난다. 그냥 벌을
받고 끝날 사안이 아니었다. 심할 경우 죽을 수도 있었다.
“왜요? 안 되나요?”
다섯 라이더는 당장이라도 그냥 돈을 돌려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벌써 상당히 많은
돈을 써 버렸다. 또한 절반 이상 되는 돈을 집으로 보냈다.
클레는 결코 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미 이들이 돈을 돌려줄 능력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기서 돈 얘기를 꺼내선 안 된다.
어차피 돌려받을 생각이 없는 돈이었다. 굳이 돈 얘기를 해서 반감을 살 필요가 없었다. 돈에 대한 생각은
스스로 알아서 하게 두고, 자신은 딱 필요한 정보만 얻어 가면 된다.
클레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들은 자신에게 새로운 정보를 말해 줄 것이다. 불과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이다. 그 정도는 충분히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었다.
“그래서 정보를 넘기겠다고?”
갑자기 들려온 말에 클레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다섯 라이더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 그렇지 않소!”
다섯 라이더는 제론이 누군지 잘 몰랐다. 하지만 낯이 익은 걸로 봐서 같은 라이더일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현재 체른산 방어군에는 기간트 라이더가 1,000 명이 넘었다. 500 기의 기간트가 있는데, 메인 라이더 한 명에
서브 라이더가 한두 명씩 있었다.
그렇게 수가 많다 보니 서로에 대해 잘 알 수는 없었다. 더구나 최근에도 새로운 병력이 유입되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저렇게 낯익은 얼굴이라면 라이더가 분명할 것이다. 체른산 라이더에게는 철칙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붉은 학살자에 대한 정보는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기간트의 수가 많은데다가 같은 기종의 경우 누가 어디에 타고 있는지도 구분이 안
된다.
그렇기에 설사 활약을 지켜봤다 하더라도 그 기간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또한 실제로 붉은
학살자의 활약을 못 본 라이더도 있었다.
이곳에 있는 다섯 라이더가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작전에 나갈 때마다 붉은 학살자와 다른 조에 속했기에 한 번도
그 활약을 볼 기회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무조건 잡아뗄 때였다. 이건 클레가 어떤 협박을 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붉은 학살자의 정보를 유출하는 경우 반역에 준하는 처벌을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즉, 가족까지 몽땅
처형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분명히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아니, 이미 유출을 한 것 같은데?”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클레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클레는 깜짝 놀라 뒤로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그저
허풍선이로 봤는데 이런 면모를 보니 당황스러웠다.
“그렇지 않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그렇지 않소?”
다섯 라이더가 간절한 눈으로 클레를 바라보며 도움을 구했다.
클레는 순간적으로 울컥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여기서 저들을 나락에 빠트릴 필요는 없었다. 그저 빚을
지워 둔다는 느낌으로 넘어가는 편이 나았다. 나중을 위해서는 말이다.
‘혹시 알아? 저들이 나중에 은밀히 내게 알려 줄지?’
거기까지 계산한 클레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못 짚으셨네요. 제가 붉은 학살자의 정보를 원하는 건 맞지만 저분들은 한사코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막대한 보상을 내걸었는데도 말이에요.”
클레는 그렇게 말하고는 제론을 향해 더욱 화사하고 짙은 미소를 날려 주었다.
“혹시 생각 있으신가요? 정말로 비싸게 살 용의가 있는데.”
“돈이 많은 모양이군요. 돈을 준다면 내가 정보를 팔 의향이 있긴 한데…….”
제론의 은근한 말에 지켜보던 다섯 라이더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들이 정말로 엄청난 광경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지나칠 정도로 긴장했다.
“정말인가요?”
“물론. 가격만 맞는다면 아주 괜찮은 정보를 주죠.”
“어떤 정보인데요? 그걸 말씀해 주셔야 가격을 매기지요.”
클레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이 허풍선이가 대체 뭘 내거는지 얘기나 들어볼 생각이었다.
“붉은 학살자가 누군지 말해 주죠.”
클레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정말인가요? 그걸 알고 있긴 해요?”
제론이 씁쓸하게 웃었다.
“내 신용이 고작 이 정도라니, 이거 충격인데? 아무튼 살 건지, 말 건지만 결정하시죠?”
“만일 정말로 그 정보를 주신다면 10,000 골드에 정보를 사겠어요.”
제론이 피식 웃었다.
“고작 10,000 골드? 지금까지 뿌린 돈도 그보다는 많을 것 같은데요?”
클레가 손 하나를 쫙 펼쳤다.
“5 만 골드!”
그 말에 제론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정도면 괜찮군요. 그럼 돈부터 주셔야죠?”
클레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정보부터 듣겠어요. 우리 디아만트 후작가의 신용은 확실하니 먼저 말씀해 주세요.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서 그래요.”
클레가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녀는 제론이 뭐라고 말할지 벌써 짐작했다.
“쩝, 이거 안 통하는군. 붉은 학살자가 나라고 하면 당연히 안 믿을 거요?”
“잘 아시는군요. 설마 정말로 본인이라고 말할 생각이었나요?”
제론이 씨익 웃었다.
“없던 거래로 합시다. 하하하하.”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섯 라이더를 보며 말했다.
“부대 안에 눈과 귀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만 알아둬. 아마 위에선 다 알고 있을걸?”
그들의 표정이 더욱 창백해졌다. 제론은 그중 한 명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들은 화들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클레는 그렇게 멀어져 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또 당했네요. 저 사람한테.”
안슈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에는 꼭 한 방 먹여 줄 거예요.”
그동안 실수도 많이 하고 분한 일도 많이 겪었지만, 지금처럼 짜증이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클레는 분한
눈으로 멀어져 가는 제론의 뒷모습을 끝까지 노려봤다.

제론은 기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촤악 깔려서 다가오는 투기가 수련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문득 영감이 떠올라 마나를 내뿜어 투기를 밀어내 봤다. 한데 그냥 마나로는 그게 불가능했다. 투기와 최대한
비슷한 마나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잘 안 됐지만 차츰 익숙해지더니 결국은 성공했다. 몸에 직접 부딪히는 기운이 있으니 거기에 맞춰
마나의 형질을 만들어 내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온몸으로 마나를 뿜어내 투기를 끊임없이 밀어내던 제론은 곧장 유적으로 향했다. 왠지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체른산 유적은 여전히 2 왕자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체른산을 적에게 빼앗기면 모를까, 다시 되찾기만 하면
어김없이 체른산 유적에 따로 직접 병력을 보내 지키도록 했다.
물론 제론은 항상 비밀 통로를 이용했기에 전혀 상관없었다. 체른산에 채 오르기도 전에 비밀 통로로 들어간
제론은 곧장 유적의 통제실에 도착했다.
통제실에서 바로 나가기만 하면 아래에 있는 초고대 문명의 유적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제론은 최대한 서둘렀다. 곧장 밖으로 나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지하 유적 로비에서 바로 텔레포트해 중앙
유적으로 갔다.
중앙 유적 로비에 도착한 제론은 지체하지 않고 10 층으로 내려갔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느낌을 잊기 전에 하고 싶었다.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마나 호흡을 통해 마나를 다시 모으지도 않았다. 하지만 제론은 그것이 떠올랐음에도 하지
않았다.
마나가 모자랄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냥 하고 싶었다. 이 정도 마나면 충분히 될 것 같았다.
10 층에 도착하니 벨트가 작동했다. 사방에서 뭔가가 조여드는 것 같았다. 움직임이 제한되고, 체술의 투로만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후욱!”
제론은 숨을 한 번 내쉰 뒤, 천천히 체술을 시작했다.
쉭! 쉭! 쉭! 쉭!
움직일 때마가 경쾌하게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움직임에 따라 팔꿈치, 무릎, 팔뚝, 손가락, 이마 등등 온몸
구석구석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마치 뜨겁고 차가운 바람이 훅 부는 것처럼 마나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 양은 지극히
미약했다.
제론은 처음으로 체술을 끝까지 펼칠 수 있었다. 더없이 완벽하게 말이다.
쉬이익!
마지막으로 온몸을 통해 마나를 뿜어낸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고 희열에 몸을 떨었다.
드디어 성공했다. 1 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애쓰던 걸 고작 하루 만에 해낸 것이다.
물론 그 오랜 시간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도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노력해서 체술을 몸에 새겨 놓았기 때문에
오늘처럼 결정적인 순간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체술을 펼칠 수 있었다.
아마 다시 하라면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해냈다.
제론은 감았던 눈을 떴다. 10 층을 완벽히 클리어했다면 보상이 나타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서 천천히 기둥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한데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
제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평소보다 훨씬 큰 기둥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다른 때와 달리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기둥이었다.
그리고 그 기둥 안에 10 층 클리어 선물이 들어 있었다.
“기간트…….”
거대한 유리 기둥 안에 강철로 만들어진 거인이 서 있었다.
10 층 클리어의 보상은 바로 기간트였다.
제론은 그제야 10 층의 수련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아차렸다.
제론은 유리 기둥을 향해 홀린 듯이 다가갔다.

<3 권에서 계속>

3권

Chapter 1 테오스

거대한 유리 기둥 앞에 선 제론은 손바닥으로 기둥을 쓰다듬었다. 그 안에 있는 기간트에 어서 타 보고 싶었다.


“선물이 기간트라니.”
제론은 미칠 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설마 정말로 기간트를 받게 될 줄이야.
새까만 광택이 흐르는 균형 잡힌 몸체에, 곳곳에 희미하게 빛나는 특별한 문양이 눈에 띄었다. 온몸이 마법진으로
도배가 된 듯했다.
초고대 문명의 기간트이다. 대체 그 안에 얼마나 엄청난 것들로 채워져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잠시 후, 유리 기둥이 빛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촤르륵!
무수한 빛 가루가 회오리치듯 휘돌더니 제론의 몸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아!”
제론은 순간적으로 뇌리에 새겨지는 수많은 정보에 탄성을 흘렸다.
유리 기둥 자체가 그동안 제론에게 지식을 전해 주던 카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제론의 뇌리에 기간트에 관한 모든 것이 새겨졌다.
“테오스…….”
기간트의 이름이었다. 제론은 이제야 10 층 수련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허리에 매달린
벨트의 역할도 알아냈다.
“역시 대단해.”
제론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띠의 버클 부분을 쓰다듬었다. 그곳이 바로 기간트를 보관하는 아공간이었다.
고작 어린애 손바닥만 한 버클에 15 미터나 되는 기간트가 들어갈 아공간이 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그뿐 아니었다. 그 버클에는 아공간 외에도 수많은 마법적 기능이 내장되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분실
방지 기능이었다.
만일 누군가 벨트를 훔쳐 간다 하더라도 이미 주인으로 등록이 된 제론이 원할 때면 언제든 텔레포트하여 허리로
되돌아온다.
또한 버클이 아닌 띠에도 마법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띠가 가진 가장 중요하며 강력한 기능은 바로 에너지
공급이었다.
지속적으로 외부의 에너지를 모아 버클의 아공간 내부로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러면 아공간에 머무는 테오스가 그
에너지를 받아 저장하거나 쓰는 것이다.
테오스의 경우 자가 복구 기능이 있기에 에너지만 충분히 공급되면 망가진 부분을 고치거나 부서져 사라진 부분을
수복하는 것도 가능했다.
버클에 새겨진 아공간 마법은 다른 아공간 마법과 많이 달랐다. 테오스의 자가 복구 기능과 연계되어 있기에
아공간 자체에 테오스의 설계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버클이야말로 초고대 문명 마법의 총화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외에도 다양한 기능이 있었다. 의지만으로 발현이 가능한 마법적, 물리적 실드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그 마법에 들어가는 마나는 허리띠에서 지속적으로 흡수해 쌓아 둔 걸 이용한다.
그 모든 기능을 이제부터 제대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시 10 층을 클리어한 보상이었다.
제론은 테오스의 늠름한 모습을 다시 한 번 쭉 훑었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당장 타 보고 싶었다.
“일단 참자.”
시간이 너무 늦었다. 그리고 테오스는 특별한 기간트였다. 당분간은 아공간에 보관해서 에너지를 채워야만 했다.
제론의 의념이 버클에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테오스가 그대로 사라졌다. 버클의 아공간에 들어간 것이다.
다른 기간트가 아공간에서 나오고 들어가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아공간이 어떻게 열리는지도 확인이 불가능했다.
그냥 사라져 버린 것이다. 또한 나타날 때도 그렇게 나타날 것이다.
제론은 다시 한 번 버클을 쓰다듬으며 유적에서 나갔다.

기지로 돌아온 제론은 아침이 되기 전에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고작 한두 시간밖에 못 자겠지만, 마나 호흡을
통해 피로를 깨끗이 풀 수 있으니 전혀 상관없었다.
제론은 이제 자면서도 자연스럽게 마나 호흡을 이어 갈 수 있는 경지였다.
정확히 2 시간을 자고 일어난 제론은 라이더의 기본적인 일과에 따라 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 전투가 더욱 가까웠다는 걸 느꼈다. 당장 느껴지는 투기의 흐름이 정말로 심상치 않았지만 걱정되지
않았다. 그저 평소보다 더 크고 격렬한 전투를 할 뿐이라 생각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투에서 제론은 또 한 번 공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그것
하나만큼은 정말로 자신 있었다.
제론은 일단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테오스에 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근처는 곤란했다. 정말로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장소가 필요했다.
사실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장소는 중앙 유적 근방이었다. 그 근처는 모두 제론의 땅인 데다가 유적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찾는 사람도 없었다.
그곳을 주시할 만한 건 슈린 공작가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제론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군부에 들어간 이후 관심을
끊어 버렸다.
제론은 오늘 그곳으로 가서 테오스를 몰아 볼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접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사방에 들끓는 투기를 보고 있자니, 지금 당장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사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유적 11 층 공략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10 층 선물이 기간트였으므로 11 층
수련은 분명히 기간트를 이용한 것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제론은 당분간 기지를 떠나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일단 주변 정보를 다시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정보를 확인하려면 아무도 없는 장소가 필요했다. 가장 자주 쓰는 곳은 숙소였고, 가끔 유적 안에서 확인하기도
했다.
어디로 갈까 잠깐 고민하던 제론은 유적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렇게 체른산을 향해 걸어가던 제론의 눈에 수많은
귀족과 호위 무사가 보였다.
이제 저들이 남아 있을 시간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아마 3 일이나 4 일 후에는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누구도 붉은 학살자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붉은 학살자라는 건 탐스러운 먹이였다. 군부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일수록 세상 물정에 어두운 면이
많았다. 잘만 요리하면 아주 싼값에 오랫동안 부려 먹을 수 있었다.
더구나 군부 출신은 의리에 목숨을 거는 경우가 많았다. 즉, 한 번 주군을 정하면 끝까지 충성한다는 뜻이다.
그런 귀중한 인재가 눈앞에 있는데 항상 인재에 목말라 있는 귀족이 포기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저들도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겠군.’
제론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최근 살펴본 적 전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분명 평소보다 병력이 늘어나긴 했지만
귀족이 데려온 고급 기사가 무려 100 명이 넘었다. 그들까지 모두 상대하려면 병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벨룸 왕국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들도 상당한 첩보 활동을 벌인다. 레늄이나 벨룸이나 정보력이
엇비슷한 상황에서 이렇게 대대적인 움직임을 파악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도 고작 그 병력으로 전투를 벌이려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분명히 숨겨진 뭔가가 있어!’
제론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일단 유적에 틀어박혀서 적 정보를 상세히 파악해야만 했다.
정보 수집 아티팩트의 수가 너무 모자랐다. 아니, 그걸 운용할 전문 인력이 필요했다. 제론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려니 제대로 된 정보를 모으기가 어려웠다.
“이봐! 거기 라이더!”
제론이 막 걸음을 빨리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큰 소리로 불렀다. 제론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제론은
반응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지 않는 이상, 굳이 대꾸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부르는 귀족이나 호위 기사가 하는 말은 거의 비슷했다. 붉은 학살자에 대한 정보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라이더만 보면 무조건 불러 세워서 말을 걸었다.
절반 정도는 그들의 질문에 제법 성실하게 대답해 준다. 물론 함구령이 내려진 부분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붉은 학살자에 관한 정보를 유출하면 반역에 준하는 처벌을 받기 때문에 다들 조심했다.
군부 최고의 권력자는 당연히 총사령관이었다. 총사령관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사안이었기에 누구도 거기에
반발하지 않았다.
수많은 귀족이 달콤한 대가를 내밀며 정보를 캐내려 애썼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강압적인 방법도
서슴지 않고 동원했다. 군부와 관계가 깊은 가문이 많았기에 압력을 행사할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붉은 학살자에 관한 정보는 그런 압력을 통해 해결할 수 없었다.
총사령관의 태도가 워낙 완고했기 때문이었다. 최근 레늄 왕국 측에서 전쟁에 쓰는 작전의 대부분은 붉은
학살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정보가 넘어가면 향후 전쟁이 상당히 힘겨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보호하는 게 당연했다.
붉은 학살자가 아니었다면, 이번 전쟁은 패색이 짙었을 거라는 게 총사령관의 판단이었다.
“거기 라이더! 내 말이 안 들리나!”
귀족으로 보이는 자의 거만한 외침이 울렸다. 그러자 그의 호위 기사 세 명이 우르르 달려가 제론의 앞을
막아섰다.
제론은 그들을 살짝 피해 빠져나갔다. 자리를 미처 잡기 직전에 틈새로 빠져나갔기에 셋 모두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하지만 움직임 자체는 지극히 평범했고, 속도 역시 빠르지 않았기에
다들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앞을 막아섰던 세 호위 기사만 심각한 위화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잡지 않고!”
귀족의 호통이 이어졌고, 세 호위 기사가 다시 몸을 날려 제론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제론은 이번에도 가볍게 그들 사이를 쑥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호위 기사
중 두 명이 뒤돌아 손을 뻗어 제론의 손목을 잡았다.
제론은 왼팔을 슬쩍 위로 들어 한 명의 손은 피했고, 나머지 한 명의 손은 허용했다. 하지만 오른손을 살짝
비틀어 뽑아 아주 손쉽게 기사의 손을 빠져나갔다.
“이게 무슨 짓이오!”
제론은 결국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멈춰서 호위 기사를 노려봤다.
세 호위 기사는 제론의 눈길에 움찔 놀랐다.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서릿발 같은 기세가 그들의
심령을 한 번 짓누른 것이다.
“슬라인 백작님께서 좀 뵙자고 하십니다.”
호위 기사 중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본능적으로 제론을 위로 인정한
것이다.
당연했다. 제론은 지금 익스퍼트, 즉 현재의 소드 마스터와 같은 수준이었다. 그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기사가
제론의 기세를 받아넘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붉은 학살자에 관한 거라면 할 말이 없다고 전하시오.”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다른 귀족의 호위 기사가 우르르 몰려와 제론을
둘러쌌다.
가장 앞에 나선 사람은 슬라인 백작이었다. 그는 군부에 강력한 끈이 있기에 항상 당당했다. 웬만한 군부의
장교도 슬라인 백작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
그런 사람이 일개 라이더에게 눈 하나 깜짝할 리 없었다. 물론 군부에 아카데미 출신 라이더가 상당하지만, 귀한
집안의 자제는 이런 격전지로 올 확률이 현저히 낮았다.
또한 아무리 귀한 집 자제라 하더라도 슬라인 백작에게 잘못 보여 좋을 게 없기에 다들 대충 넘어갔다. 군 생활
내내 피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슬라인 백작은 최근 짜증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군부와 관계된 일에 자신이 나서서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일이 단 하나도 없었다.
한데 이번 일은 그렇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시간만 흐르고 얻는 건 없으니 짜증이 날 대로 났다.
“고작 일개 라이더가 감히 백작의 말을 무시해? 그러고도 제대로 군부에서 버틸 수 있을 거라 여기느냐?”
슬라인 백작의 말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못 버티면? 그럼 어떻게 될 것 같소?”
제론의 말투에 슬라인 백작의 눈썹이 크게 요동쳤다.
“말이 짧구나?”
“말은 당신이 더 짧은 것 같은데. 안 그렇소?”
제론이 너무나 당당하게 나오자 슬라인 백작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믿는 구석이 너무나 컸다.
“감히!”
슬라인 백작이 호위 기사에게 제론을 제압하라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제론이 입을 열었다.
“나도 백작이오. 게다가 의무 복무 기간은 이미 다 채웠소. 신청만 하면 내일 당장이라도 제대가 가능하다는
뜻이오.”
제론의 말에 슬라인 백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특이한 케이스는 처음이었기에 일순 뭘 어떻게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
물론 아직 제대를 하지 않았으니 엄밀히 따지면 백작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작위를 받을 수 있으니
제론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이냐. 백작이 복무를 연장해?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못 믿겠으면 직접 알아보시든가.”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슬라인 백작의 눈에 노기가 어렸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또한 주변에 포진한 호위 기사
역시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상대가 백작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귀족은 레늄 왕국의 법령에 의해 보호받는다. 게다가 백작 이상의
상위 귀족의 경우는 보호의 범위가 더욱 넓었다.
“이익!”
슬라인 백작이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몸을 돌렸다.
“가자!”
그의 표정은 모욕을 당한 굴욕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사실 일의 발단은 슬라인 백작이 제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치 않았다.
슬라인 백작은 곧장 사령관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당장 그를 만나서 확인할 참이었다. 정말로 백작이면서
복무를 연장한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있는지 말이다.
그가 보기에 제론은 너무 어렸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백작이라면 부모가 일찍 죽어 작위를 물려받았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의무 복무 기간을 얘기하는 걸 보면 군부의 인물도 아니다.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뜻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군대에 오래 머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군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영지가 피폐해진다.
영주가 자리에 있고 없고는 영지 운영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영지가 없는 경우인가?’
슬라인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영지가 없는 귀족의 경우 작위를 온전히 물려받기가 쉽지
않았다.
작위 세습은 영주에 한한다. 즉, 영지가 없다면 작위 세습이 불가능했다.
이래저래 의문투성이였다. 슬라인 백작은 걸음을 서둘렀다. 이 의문을 어서 털어 버리고 싶었다. 만일 자신이
고작 말에 농락당한 거라면,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붉은 학살자를 찾지 못한 초조함과 짜증이 다른 방향으로 표출되어 버렸다.

제론은 슬슬 군대를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1 년쯤 더 있을까도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바이스와 세나


역시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세나는 군부에서 나가면 분명히 가문의 힘이 자신을 옭아맬 것이 분명했기에 최대한 이 안에서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그중 일부는 성공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또한 바이스는 좀 더 이 안에서 숨어 있을 필요가 있었다. 포로스는 말레피 가문을 단숨에 도약하게 만들었다.
그 포로스를 혼자 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가문에서 호시탐탐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바이스에게는 아직도 자신을 보호할 울타리가 필요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기에 군대에 1 년 정도 더 머물면서 전쟁을 통해 경험도 쌓고
기반도 다지고자 했다.
한데 상황을 보아하니 오래 있기가 힘들 듯했다.
수많은 귀족이, 아무리 군부에 선을 댄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기지를 휘젓고 다니는 것이
정상일 리 없었다.
이는 그동안 충실한 울타리 역할을 하던 군부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반증이었다.
즉, 앞으로는 더 이상 바이스나 세나가 원하는 것처럼 군부 뒤에 숨어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또한 제론도 더
이상 슈린 공작가의 마수를 이 안에서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제론이 군에 들어온 지 고작 4 년이었다. 4 년 전만 해도 군부는 귀족의 영향력이
거의 침범하지 못할 정도로 단단했다.
아무리 군부에 선을 댄 귀족이라 하더라도 지금처럼 기지 내에 직접 들어와 뭔가를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인맥을 이용해 약간의 정보를 얻어 내는 정도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한데 지금은 귀족의 힘이 군부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붉은 학살자는 그런 군부가 내세우는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었다. 즉, 상징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이다지도 그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힘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길어야 1 년 안에 붉은 학살자에 관한 정보가 왕국 전체에 퍼질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 정체를 국왕조차 모르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 역시 국왕이 용인한
상태였기에 별문제는 없었다.
국왕조차 자신에게 보고되는 모든 사안이 철저히 보안된다고는 믿지 않았다.
군부는 엄밀히 따지면 국왕의 힘이었다. 그러니 군부에 이 정도 배려를 해 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제론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서둘러 유적으로 들어갔다. 물론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갔다.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통로였다.
기본적으로 공간 이동을 이용하며, 마나 유동이 거의 없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곳에 비밀 통로가 있는지
몰랐다.
사실 중앙 유적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유적 간 텔레포트를 통해 이쪽으로 오면 훨씬 빠르고 간단하다. 하지만
제론은 습관적으로 이렇게 걸어서 이동했다.
8, 9, 10 층 수련을 하는 동안 유적의 힘을 이용하지 않은 텔레포트를 하면 몸에 상당한 무리가 왔기 때문에
유적을 통해서만 이동했다.
그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유적 안으로 들어간 제론은 일단 통제실로 가서 주변 상황을 살폈다.
수많은 아티팩트가 유적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정보가 통제실 공간의
화면을 가득 채웠다.
제론은 의념을 통해 아티팩트, 마티를 조절했다. 통제실의 화면이 일제히 벨룸 왕국 측을 비췄다.
“역시.”
엄청난 수의 기간트 라이더가 보였다. 기간트 라이더는 척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착용한 장비를 보면 다른
기사와 확연히 차이가 났다.
또한 제론은 다른 방법으로도 그들이 기간트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아공간 마법이었다.
기간트를 담은 아공간을 항상 지니고 다니기에 그것을 체크하면 그가 기간트 라이더인지 아닌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 기술은 사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각국의 중요한 장소에는 아공간 식별 마법이 설치되어 있었다.
기간트를 함부로 주요 시설 내부로 들이면 어떤 곤란한 일을 겪을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왕궁에 몰래 들어가
기간트를 소환하기라도 하면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시설에 설치한 거대한 마법진을 통해 이뤄지는 일이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아티팩트에 그 모든 걸 식별할 수 있는 기능을 담는 건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했다.
아니, 사실 고대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초고대 문명에서만 제작이 가능한 아티팩트였다.
라이더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수많은 라이더가 한자리로 모이고 있었다.
“가만, 라이더의 수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은데?”
최근 지속적으로 적진을 관찰했음에도 놓친 부분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예상보다 기간트 라이더의 수가 100 여 명
더 많았다.
한데 그들을 보고 있으니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제론은 마티를 조종해 그들을 더욱 가까이서 살폈다.
정보 수집 아티팩트인 마티는 기본적으로 투명하지만, 마나를 흡수해 작동하기 때문에 예민한 사람 근처에 가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것이 정보 수집 아티팩트라는 사실은 모르겠지만, 이상한 점을 느끼고 근방을 공격하면 자칫 마티가
부서질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 위험을 감수하고 마티를 라이더 근처로 보냈다. 그리고 적진 구석구석에 보냈다.
마티를 조종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 역시 상당한 센스가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것 없어도 조종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세부적인 조종을 하려면 상당한 센스가 필요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제론에게는 그 센스가 살짝 모자랐다. 그래도 완전히 젬병은 아니라서 어느 정도는 조절이
가능했다.
제론은 불길한 예감에 정말로 적진지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결국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새로 지어진 막사가 너무 많았다. 막사 안을 조사하니 모두 텅텅 비어 있었다.
“대체 저게 뭐지? 저걸 왜 만든 걸까?”
막사 내부를 구석구석 뒤지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제론은 진땀을 흘리며 마티를 조종해 막사 하나를 잡고 훑었다.
하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막사 여러 개를 동시에 조사하면 좋겠지만 제론의 능력으로 그건 불가능했다. 제론은 다음 막사로 마티를
들여보내며 식은땀을 흘렸다.
다행히 두 번째 막사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막사 바닥에 미세한 틈새가 있었다. 그곳에 문이 만들어져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걸 보자마자 제론은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미약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거대한 아공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걸 왜 막사 밖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제론은 문 주변을 조사하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공간 마법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교란 마법진이 복잡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일단 미세한 틈으로 마티를 내려 보냈다. 그곳에는 거대한 공간이 있었고, 바닥에 아공간 마법진이 어마어마한
크기로 설치되어 있었다.
“저 정도면 기간트 열 기는 보관할 수 있겠군.”
제론은 그동안 느꼈던 불안감의 정체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새롭게 지어진 막사는 모두 저 아공간 마법진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제론은 그 뒤로 모든 막사를 돌아다니며 아공간 마법진의 존재를 확인했다. 한 번 발견한 것이고, 다들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뒤로는 아주 간단히 찾아낼 수 있었다.
“스무 군데면 모두 몇 기야? 200 기?”
제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현재 벨룸 왕국군 진영에는 총 650 기의 기간트가 있었다. 한데 거기에 200 기의 기간트가 추가된다면 모두 850
기나 된다. 실로 엄청난 숫자였다.
그들이 일제히 밀고 내려온다고 생각하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현재 레늄 왕국 체른산 방어군은 500 기의 기간트를 보유 중이었다. 거기에 귀족의 호위 기사가 가져온
기간트까지 합하면 600 기에 달한다.
600 기와 850 기의 기간트가 싸우면 결과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제론은 벌떡 일어나 서둘러 유적에서 나갔다.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 했다.
제론의 발걸음이 점점 다급해졌다.
☆ ☆ ☆

슬라인 백작은 다른 귀족 몇 명을 대동하고 사령관을 찾아갔다. 그가 사령관실에 들어가자, 사령관이 비교적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하고는 물었다. 슬라인 백작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령관, 혹시 이 부대에 백작 위를 가졌으면서 복무를 연장한 사람이 있소?”
슬라인 백작의 물음에 사령관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를 들출 필요도 없었다. 최근 복무를 연장한
사람은 딱 한 명이었는데, 그가 바로 백작이었으니까.
“있긴 있습니다만…… 그건 왜 물으십니까?”
슬라인 백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놈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물러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대체 백작씩이나 되는 놈이 뭐가 아쉬워 여기 남는단 말인가.
“혹시 그자가 누군지 알 수 있겠소?”
“어렵지 않습니다. 제론 폰 에어스트입니다.”
“에어스트?”
슬라인 백작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환해지는 걸 느꼈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왜 백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굳이 복무를 연장했는지 말이다.
“에어스트 가문이었군.”
그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된다. 에어스트 가문은 영지가 있건 없건 무조건 백작 위가 세습된다. 개국공신
가문이었다. 그것도 개국 시 가장 큰 공을 세운 가문이라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망한 가문이었다. 슈린 공작가에 의해 몰락해 이제는 영지조차 남지 않은 가문이었다.
게다가 슈린 공작가는 집요하다. 아마 에어스트 가문의 생존자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군부에 기대 숨은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까 당분간 군에서 나갈 일이 없는 사람이로군? 안 그렇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아시다시피 전 군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사령관의 대답에 슬라인 백작이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아아, 굳이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오. 그 정도면 됐소. 아주 충분하오.”
슬라인 백작은 그 말을 남기고 사령관실을 나갔다. 그와 함께 왔던 몇 명의 귀족 역시 함께 나갔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이다.
그런 그들을 보는 사령관의 눈빛에 염려가 담겼다.
“설마 일을 크게 만드는 건 아니겠지?”
사령관은 제론에 관해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그 비밀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제론의 성향을 보면 누군가 시비를 걸어도 부딪치지 않고 되도록 피하는 경향이 짙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다만 슬라인 백작이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괴롭히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뭐, 제론이 알아서 잘하겠지. 언제나처럼.”
사령관은 제론을 믿었다. 제론은 인내심이 깊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슬라인 백작이 부대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 사이에 별다른 일이 생기긴 어려울 것이다.
사령관은 그렇게 판단하고 이번 일을 대충 넘겼다. 물론 제론에게 미리 연락을 해서 조심하라는 언질은 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미리 마음의 준비도 하고 대비를 할 테니까 말이다.
사령관은 즉시 부관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밀린 업무를 재개했다.

Chapter 2 슬라인 백작

제론이 기지로 돌아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당연히 바이스와 세나였다. 제론 스스로도 나름대로 계획을 세울 수


있겠지만 두 사람의 머리도 빌려야만 했다.
그만큼 심각한 사태였다.
제론의 얘기를 들은 바이스와 세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제론은 무슨 방법을 썼는지 상당히 정확한 정보를 가져왔고, 그걸
이용해 그들은 막대한 공을 세우고, 또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전력 차가 너무 심한데요? 역시 사령관께 보고하면 안 되겠죠?”
바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웬만한 차이라면 어떻게든 해 보겠는데, 850 기의 적을 600 기로 상대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일단 몰래 함정을 파서 적 전력 일부를 깎아 내는 것뿐이로군요.”
“작전에 일부 개입해서 전투를 효율적으로 이끄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이번에는 어려울 거예요.”
세나의 말에 제론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옳다. 이번에는 다른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지금은 귀족 가문의 호위 기사가 많다.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100 명이 넘는다.
그들까지 작전에 포함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싸울 것이다. 어쩌면 싸우지 않고 도망갈지도
모른다. 물론 도망갈 확률은 지극히 낮다. 어쨌든 군부에 한발 걸친 자들이었으니까.
“아무튼 난 적이 어디로 올지 예측해 볼 테니까 적절한 함정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해 봐.”
제론의 말에 바이스가 손바닥을 비비며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물론 긴장감도 가득했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제대로 이용할 수만 있다면 무수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마어마한 양의 포로스를 만들어 낼 수 있겠군요.”
제론은 그런 바이스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풀이 죽은 것보다야 저런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았다.
“자, 그럼 부탁하지.”
제론은 두 사람에게 그렇게 숙제를 남겨 주고 자리를 떴다. 아직 할 일이 많았다. 둘에게만 모든 걸 맡겨 둘
생각은 없었다.
지속적으로 정보를 확인해서 정확한 공격 시간을 알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전에 그들을 막을 모든 준비를
끝내야만 했다.
‘어떤 함정을 준비해야 할까?’
제론은 함정을 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만일 적이 체른산을 통해서 온다면 쓸 수 있는 방법이 더 많아진다.
하지만 그쪽으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체른산을 통해 진격할 때마다 제대로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엄청난 손실을 입어야 했다. 그러니 그쪽을 또
이용할 리가 없었다.
‘허를 찌른다고 여기면서 그쪽으로 오면 아주 감사할 일이긴 한데…….’
체른산 유적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전투를 훨씬 더 쉽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거기에 바이스와 세나가 계획한
함정까지 곁들이면 훨씬 승산을 높일 수 있었다.
이번 전투는 딱 비기기만 하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승리한 거나 다름없었다.
제론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그게 전부였다.
‘전쟁이 끝날지도 몰라.’
이번 전투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레늄 왕국도, 벨룸 왕국도 더 이상 전쟁을 이어 갈 여력이
없었다.
전쟁이 더 길어지면 설사 완전히 승리해 한쪽을 먹어 치운다 하더라도 주변국에 의해 갈가리 찢겨질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들을 방어할 힘은 남겨 둬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전쟁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각국에 남은 귀족을 병합하고 정리하는 데 또 힘을 소모해야만 한다. 그것 역시
전쟁과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그런 모든 상황을 생각하면 슬슬 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전투가 종전 협상의 중요한 카드가 될
것이다.
제론은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며 서둘러 걸었다. 적이 진군할 확률이 높은 길목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증원군을 요청하는 게 가장 좋다. 하지만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차라리 이번 일을 기회로 적 전력이
약화된 것이 분명한 지역을 공략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한창 걸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 제론의 앞을 막아섰다. 제론은 걸음을 멈추며 자신이 너무 정신없이
생각에 몰두했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길을 막은 자들을 확인하니 상당히 낯이 익었다. 슬라인 백작의 호위 기사였다. 다섯 명이나 되는 호위 기사가
흉흉한 눈빛으로 제론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느물느물한 미소를 지은 슬라인 백작이 호위 기사 틈으로 나타나 제론을 깔아 봤다. 그의 눈빛에는 경멸과 조소가
가득했다.
제론은 그의 눈빛을 보고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없는데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으니 짜증이 살짝 솟았다.
제론은 한심하다는 듯 슬라인 백작을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광경에 슬라인 백작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감히 그따위 눈으로 날 쳐다보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제론이 서늘한 눈으로 슬라인 백작을 노려봤다.
“죽인다고? 군부의 라이더를 죽인다고 했나, 지금?”
순간적으로 슬라인 백작이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노발대발했다.
“이놈이 어디서 그따위 망발이냐!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백작이면 다 같은 백작인 줄 아느냐!”
제론이 눈을 빛냈다.
“호오. 그걸 알고도 나한테 그따위로 말하는 건가?”
“흥! 슈린 공작에게 들킬까 봐 꼬리를 말고 군부에 숨은 놈이 말은 잘하는군. 에어스트 백작가 같은 떨거지를
내가 무서워할 것 같으냐?”
제론의 눈빛이 변했다. 그것을 본 슬라인 백작이 계획대로라는 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 분한가? 분하면 덤벼 보든가. 덤비지 못하겠지? 그러니 떨거지 가문이라는 거다. 가문이 모욕을 당했으니
응당 목숨을 걸고서라도 결투를 신청했어야지. 쯧쯧쯧.”
제론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후우욱. 지금 네가 하는 말로 인한 모든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할 것이다.”
제론의 말에 슬라인 백작이 피식 웃었다.
“난 항상 내 말에 책임을 진다. 넌 그렇게 하고 있나? 내가 보기엔 전혀 안 그런 것 같은데?”
제론은 슬라인 백작이 왜 이러는지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제론을 도발해 결투를 걸게 만들 작정이었다.
자신이 먼저 결투를 걸면 모양새가 우스워진다. 또한 아무리 같은 편이라고 하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다들
능구렁이 수십 마리를 속에 키우는 귀족이다. 나중에 이 일이 어떤 칼날로 되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말 몇 마디로 도발해 상대가 결투를 걸게 만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 결투에 조건을 걸어
제론으로부터 정보를 뽑아낼 생각이었다.
제론이 담담히 말했다.
“결투를 신청한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 해결하지.”
슬라인 백작이 반색했다.
“결투라. 좋지. 한데 공증인으로 내세울 만한 사람이 있느냐? 나야 여기 지인들이 많지만…….”
슬라인 백작은 주위를 둘러보며 함께 여기까지 온 다섯 귀족을 쭉 둘러봤다. 그들은 슬라인 백작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끄덕여 언제든 공증인이 되어 줄 거라는 뜻을 내보였다.
“사령관님을 모셔 오지.”
제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슬라인 백작이 옆에 선 호위 기사를 쳐다봤다. 그러자 호위 기사가 빠르게
사령관실로 달려갔다. 여기서 멀지 않으니 금방 돌아올 것이다.
모든 조치를 취한 슬라인 백작이 제론을 보며 씨익 웃었다.
“정말 멍청한 놈이로구나. 귀족 간의 결투에 관한 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야.”
“너보다는 많이 알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슬라인 백작은 제론의 말투에 발끈했다. 하지만 화를 내려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놈의 뻔한 도발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발해서 내가 직접 나서게 만들 셈인가? 뭐, 제법 쓸 만한 생각이로군. 하지만 내게는 호위 기사가
무려 열 명이나 있는데 굳이 나설 이유를 느끼지 못하겠어. 안 그런가?”
슬라인 백작은 주위 귀족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다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모두 슬라인 백작의
승리를 확신했다.
“자, 그럼 슬슬 결투에 조건을 걸어야지? 물론 진 쪽이 명예를 담아 정중히 사과해야 하는 건 알고 있겠지? 난
거기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는 조건을 추가하고 싶은데 혹시 이의 있나?”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 부가적인 조건 말고 실질적인 조건을 빨리 말하는 게 어때? 시간도 없는데.”
슬라인 백작의 입가가 쭉 올라갔다.
“내 조건은 간단하다. 네놈이 알고 있는 체른산 방어군에 대한 모든 정보를 토해 내라는 것이다. 붉은 학살자에
관한 것까지 몽땅 포함해서.”
그런 조건을 걸 거라고 충분히 예상했기에 제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 없는 조건이로군. 그럼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300 만 골드.”
“뭐?”
“어려운가? 300 만 골드를 달라고.”
“이런 미친!”
“어려운가? 그럼 조건을 조금 조정해 줄까?”
슬라인 백작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300 만 골드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액수란 말인가!
슬라인 백작가가 비록 제법 부유한 가문이긴 했고, 비옥한 영지를 가진 곳이긴 했지만 300 만 골드를 마련하려면
가문의 기둥을 뚝 분질러야만 한다.
그 정도로 거금이었다. 어쩌면 영지를 팔아 치워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막대한 금액이었다.
한데 그런 어마어마한 돈을 고작 결투 한 번에 걸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말이다.
물론 가끔 영지전을 대신해서 결투로 영지를 내거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에 행해지는
일이었다.
“아까는 그렇게 큰소리 펑펑 치더니 이제 보니 형편없군. 말뿐이야.”
승낙을 유도하는 도발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하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다. 하지만 슬라인
백작은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상대가 너무 자신만만했다. 허세일 가능성이 99 퍼센트가 넘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결투의 상례를 너무 벗어난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군부의 정보를 팔아먹으라는 건 괜찮은 조건이고?”
“300 만 골드보다야 훨씬 낫지.”
“그 조건을 총사령관님께 전해 볼까? 정말로 그런지.”
슬라인 백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곤란했다. 군부와의 관계가 깊은 만큼 총사령관의 힘이 슬라인 백작가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했다.
“숨겨둔 기사라도 있는 모양이지? 이렇게 날 도발하는 걸 보면.”
제론이 피식 웃었다.
“그런 게 어딨어? 날 믿을 뿐이지.”
결투에 직접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슬라인 백작의 표정이 조금 편해졌다.
사실 귀족의 결투라는 것이 특별한 조항을 덧붙이지 않으면 지극히 불평등한 방식이었다. 휘하의 기사를 얼마든지
결투에 참여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슬라인 백작은 열 명의 기사를 데려왔다. 자신을 호위하기 위함이었기에 가문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열
명을 뽑아온 것이다.
무려 열 명을 상대해야 한다. 물론 일대일로 차례차례 싸우지만, 결투인 만큼 상대의 목숨을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기에 지극히 흉험한 싸움이 될 것이다.
‘익스퍼트의 기사를 아무런 피해 없이 이기는 건 불가능하지. 설사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말이야.’
슬라인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론을 노려봤다. 나이가 너무 어렸다. 아무리 검술의 천재라 해도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슬라인 백작이 데려온 열 명의 기사는 익스퍼트에 오른 지 꽤 오래된 베테랑이었다. 그들은 같은 익스퍼트라 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아무리 계산을 해도 자신이 질 확률이 없었다. 하지만 300 만 골드라는 액수가 계속 발목을 잡았다.
“부담되면 200 만 골드로 할까?”
그렇게 말하는 제론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가득 맺혀 있었다. 마치 ‘너 따위가 그렇지’ 하고 말하는 듯했다.
슬라인 백작은 또 발끈했다.
아무리 계산해도 질 리가 없으니 걸린 액수가 300 만이든 30 만이든 무슨 상관이랴. 괜히 제론의 말에 놀아났다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좋아. 하지, 300 만.”
제론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300 만에 하겠다고 결정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걸 본
슬라인 백작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스쳤다.
“공증인이 도착하면 즉시 결투를 시작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난 내 기사들을 내보내지.”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직접 싸운다.”
슬라인 백작은 호위 기사를 보며 굳은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열 명의 호위 기사가 자신의 검을 꽉 움켜쥐었다. 제론이 하는 양을 지금까지 지켜보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최소한 팔다리 중 하나는 잘라 놔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제론은 허리춤에 매단 검집을 툭툭 두드리며 슬라인 백작과 그의 호위 기사를 쭉 둘러봤다. 그저 보며 감각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경지가 딱딱 보였다.
‘호오. 저 사람은 상당한데? 익스퍼트에 오른 지 제법 된 모양이야. 나머지는 다 비슷하군.’
눈빛이 남다른 한 명만 경지가 높고 나머지는 고만고만했다. 다른 익스퍼트와 붙으면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고, 그들 사이에서도 높낮이가 분명히 있었지만, 제론이 보기에는 그게 그거였다.
하지만 경지가 높은 한 명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소드 마스터가 되려면 요원하지만, 그래도 상당한 경지임에는
분명했다. 아마 이대로 열심히 노력하면 10 년쯤 후에 소드 마스터로 가는 가능성을 붙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이긴 좀 아깝군.’
하지만 그래도 죽일 것이다. 어차피 슬라인 백작과는 완전히 틀어졌다. 향후 관계가 좋아질 가능성조차 남지
않았다.
300 만 골드라는 거금을 결투의 대가로 빼앗기게 되면 슬라인 백작가도 거의 끝이라고 봐야 했다. 물론 제론이 한
줌 자비를 베풀면 순차적으로 나눠서 돈을 갚게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300 만 골드에 관한 차용증을 받은 뒤, 그걸 다른 상단에 팔아 버릴
작정이었다. 300 만 골드를 즉시 지급해 줄 수 있는 부유한 상단에 말이다.
“저기 오는군.”
누군가의 말에 슬라인 백작과 제론의 시선이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기사 한 명이 사령관과 함께 오고 있었다.
사령관도 사태를 미리 전해 들었는지 상당히 다급한 발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오자마자 제론을 향해 대뜸 소리친 사령관은 정중한 얼굴로 슬라인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결투, 물러 주실 수 없겠습니까?”
슬라인 백작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귀족의 명예가 걸린 결투네. 취소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사령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제론이 나섰기 때문이다.
“물러나십시오. 결투는 제가 먼저 신청했습니다. 가문이 모욕을 당했는데 그냥 넘어가면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담담한 눈으로 사령관을 쳐다봤다. 사령관은 그런 제론의 눈빛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무런 긴장감이나 두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아니, 기본적으로 싸움을 앞둔 사람이 가져야 할 투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사령관님께서는 공증만 서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론의 말에 사령관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후우. 나도 모르겠군. 조건은 어떻게 되나?”
결국 해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제론은 정말로 중요한 사람이었다. 만일 제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당장 총사령관님의 문책을 어찌 견딜지…….’
걱정하는 사령관의 귀로 담담한 말이 들려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제론이 조건을 읊은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사령관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당장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조차 할 수 없었다. 제론이 절묘한 타이밍에 손을 들어 사령관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론의 말은 단호했다. 감히 사령관이 다시 입을 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결투의 절차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그리고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귀족과 기사, 그리고 군부의
라이더가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모두 이 결투에 걸린 조건을 듣고는 아연실색했다. 군부의 정보를 조건에 건 것도 놀랄 만한 일이지만
고작 결투 한 번에 300 만 골드라는 거금이 걸렸다는 사실에 다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놀랐다.
그중 가장 놀란 사람은 단연 클레였다. 누구보다 먼저 정보를 물어 여기로 달려온 사람이 바로 클레였다. 당연히
그녀에게 300 만 골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군부의 정보가 걸렸다는 말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얼마가 되었건 그 정보를 사야 해.’
그녀 역시 제론이 이길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그녀뿐 아니라 이곳에 모인 누구도 제론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
상식이라는 잣대를 대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제론은 혼자였고, 상대는 열 명이나 되는 기사였다.
더구나 슬라인 백작의 호위 기사는 강하기로 소문났다. 웬만한 가문의 기사를 압도할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 그런
기사 열 명을 어떻게 혼자 상대한단 말인가.
그것도 고작 20 대 초반의 젊은이가 말이다.
“자, 대충하고 시작합시다.”
제론이 마치 놀러 가기라도 하듯 가볍게 말했다. 그 말은 결투 준비를 하던 슬라인 백작의 모든 호위 기사에게
기름을 끼얹은 결과를 가져왔다.
살기 담긴 시선이 일제히 제론에게로 향했다.
제론은 그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며 검집을 툭툭 두드렸다. 제론의 눈빛이 한순간 서늘하게 빛났다.
구경꾼이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순식간에 넓은 공터가 생겼다. 그리고 제론이 그 한가운데에 섰다.
제론 앞으로 기사 한 명이 걸어갔다. 그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검을 뽑아라.”
“필요하면.”
제론의 도발에 그대로 넘어간 기사가 거칠게 검을 뽑았다.
챙!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제론을 노려보던 기사가 발을 박찼다. 한순간에 거리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익스퍼트의 실력이었다.
그리고 제론은 그 모든 광경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기사가 지척에 이른 순간 검을 뽑았다.
쉬각!
검을 뽑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검의 궤적만 잔상처럼 남아 구경하던 사람의 뇌리에 자극적으로 박혔다.
툭!
검을 휘두르려던 모습 그대로 굳은 기사의 목이 바닥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웃차.”
제론은 가볍게 뒤로 뛰었다. 그 순간, 목 없이 서 있던 기사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촤아아악!
제론은 핏방울 하나 묻지 않은 모습으로 슬라인 백작을 쳐다봤다.
그 서늘한 눈빛에 슬라인 백작이 몸을 움찔 떨었다.
“다음.”
무감정한 제론의 음성이 울렸다.
슬라인 백작의 호위 기사는 다들 먼저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가장 나중에 나가기로 되어 있는 기사만
타오르는 눈으로 제론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는 슬라인 백작을 바라봤다. 당장 자신이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슬라인 백작은 방금 전의 싸움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다. 그는 자신과 눈이 마주친 기사단장을 보며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예정했던 대로 하게.”
어쨌든 제론의 실력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았으니 오히려 더 작전대로 나가야 했다. 힘을 빼고 부상을
입히지 않으면 이 결투,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기사가 앞으로 나갔다.
결투가 시작된 이후, 제론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한 자루 검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얼굴에 어린 미소도 사라졌고, 온몸에서는 진지함만이 풍겼다.
그 기세를 느낀 기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검을 겨눴다.
제론이 검을 든 채로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대로 몸을 날렸다.
쉬각!
이번에도 검의 궤적만 구경꾼의 뇌리에 박혔다.
툭!
목이 떨어졌고, 제론은 어느새 원래 자리에 서 있었다.
촤아아악!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피 분수 너머로 보이는 제론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충격적이었다. 제론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이런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클레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너무나 복잡했다.
일단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속았다는 것이었다. 제론은 자신의 분위기를 일부러 가볍게 만들어 진면목을 속였다.
클레는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제일 분했다.
“다음! 다음 나가라! 저놈이 쉴 시간을 주지 마!”
슬라인 백작이 살짝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짓이다.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자신의 기사가 연달아 목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있으니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다음 차례인 기사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나머지 기사도 다들 같은 심정으로 검을 꽉 쥐었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최소한 몸에 생채기 하나는 남기고 싶었다. 그래야 마지막에 나올 기사단장이 저놈을
어떻게든 이길 수 있을 테니까.
기사단장의 실력은 확실하다. 조금만 빈틈을 만들어 줘도 분명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 뒤부터 더욱 악착같이 덤볐다. 그렇게 한 명만 남기고 모든 기사가 죽었다. 하나같이 목이 잘려서.
그 와중에 제론은 몸에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표정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과연 결투 전과 같은
사람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꿀꺽!”
누군가 긴장감으로 침을 삼켰다. 이제 슬라인 백작 쪽에는 단 한 명의 기사만 남았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검을
뽑으며 걸어갔다.
기필코 죽이겠다는 필살의 의지를 담아 검을 들었다. 그 순간 그는 검과 하나가 되었다.
극도의 긴장감을 승화시키며 순간적으로 단계 하나를 건너뛴 것이다.
제론은 살짝 커진 눈으로 기사단장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단계가 올라 봐야 제론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사단장과 마찬가지로 검을 세운 제론은 독한 마음을 먹었다. 여기서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 아무리 하수라도
방심하는 순간 당할 수도 있었다.
제론은 그대로 최선을 다해 검을 내리그었다.
촤아악!
기사단장의 몸이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졌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이번에는 제론도 그 피를 피하지 않았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제론의 모습은 모두의 마음에 공포를 심어 주었다. 제론은 무심한 눈으로 슬라인 백작을
쳐다봤다.
“히, 히익!”
제론과 눈이 마주친 슬라인 백작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덤빌 건가?”
슬라인 백작이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나서면 반드시 죽는다. 자신은 아직 할 일이 많았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후욱.”
제론이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공증을 맡은 사령관과 귀족을 한 번씩 쳐다봤다.
“결투 끝났습니다. 집행하시죠.”
사령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론에게 이런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뭔가를 계기로 변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아, 알았네.”
사령관은 공증을 선 귀족과 함께 슬라인 백작에게 다가갔다.
슬라인 백작은 한동안 혼이 나간 듯 멍하니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설마 결투에서 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대체 이를 어쩐단 말인가.
‘300 만 골드!’
갑자기 뇌리를 300 만 골드라는 단어가 거세게 때렸다. 말도 안 되는 액수였다. 완전히 당한 것이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슬라인 백작은 복잡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300 만 골드를 눈 뜨고 빼앗기게
생겼다. 자칫하면 영지가 날아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건 절대 안 돼!’
슬라인 백작이 이를 악물었다. 이건 아니었다. 이의를 제기해서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좋은 방법이 떠오를
때까지 말이다.
슬라인 백작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제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보니 300 만 골드를 내가 받아 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군요. 이 권리를 팔고 싶은데, 혹시 사고
싶은 분 없습니까?”
제론의 말에 슬라인 백작은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절대 안 된다. 이것만은 무조건 막아야 했다.
그 권리가 제론에게 있다면 뭔가 수를 써 볼 여지라도 남지만, 그게 아니라 어느 정도 힘이 있는 가문이 그
권리를 받으면 빼도 박도 못한다.
“얼마에 팔겠다는 거죠? 설마 300 만 골드에 팔겠다는 건 아니겠죠?”
클레였다. 돈으로 대륙에서 손꼽힐 정도라는 디아만트 후작가의 딸답게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이다. 300 만
골드짜리 권리를 300 만 골드에 팔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당연히 더 싸게 팔 것이다. 클레는 진한 돈
냄새를 맡았다.
“200 만 골드.”
제론의 말에 클레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말했다.
“제가 사죠.”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클레가 서둘러 말했다.
“대금을 지금 지불하고 권리를 사겠어요. 당장 위임장을 쓰죠.”
200 만 골드가 결코 작은 금액은 아니지만, 클레는 충분히 지불할 능력이 있었다. 디아만트 후작가에서 운영하는
상단의 채권으로 대금을 지불하면 되니 말이다.
디아만트 후작가의 상단은 대륙 곳곳에 지점이 있었다. 당연히 레늄 왕국에는 지점의 수가 가장 많았다. 레늄
왕국 구석구석 안 들어간 곳이 없었다.
디아만트 후작가의 상단이 레늄 왕국에서 시작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지점으로 가서 채권을 돈으로 바꿀 수 있었다. 물론 200 만 골드를 한꺼번에 지불할 수
있는 지점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말이다.
제론과 클레는 누가 끼어들세라 순식간에 모든 일을 처리해 버렸다. 제론에게는 200 만 골드 상당의 채권이
쥐어졌고, 클레에게는 제론이 써 준 권리에 대한 인수증이 들어갔다.
슬라인 백작은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막을 수도 없었다. 너무나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클레의 호위 기사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슬라인 백작을 주시했기에 아예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그럼 전 이만.”
제론은 혹시 누군가가 또 발목을 잡을까 봐 서둘러 자리를 떴다.
클레 역시 슬라인 백작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그녀의 머릿속은 맹렬히 회전 중이었다. 클레의 뇌리를 가장 많이 채우고 있는 것은 300 만 골드짜리 인수증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에게 안겨 준 제론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구경거리가 마무리되자, 지켜보던 사람 역시 하나둘 자리를 떴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슬라인 백작이었다. 그는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쓰러진 호위 기사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그들이 몸에 걸치고 있던 장비를 벗겨 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챙겨 가야 했다. 기간트가 담긴 아공간이었으니까.
“크윽. 이걸 대체 어쩌지?”
기사단장이 차고 있던 장비가 정확히 두 동강 났다. 그 안에 있던 아공간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슬라인 백작은 그것도 일단 챙겼다.
사령관이 병사와 마차를 지원해 주었다.
그날, 슬라인 백작은 쓸쓸히 체른산 방어군을 떠났다. 사령관이 지원해 준 병사의 보호를 받으면서.

Chapter 3 적습

슬라인 백작과의 결투로 제론은 확실히 자신의 존재를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붉은 학살자를 찾기 위해 모인 여러 귀족이 제론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건만 맞으면 자신의 가문으로 영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기지 내의 동료 역시 제론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제론은 평소와 똑같았다. 마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무덤덤하게 지냈다.
물론 제론은 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을 하는 중이었다. 다가오는 전투를 위해 치밀한 함정을 준비했다.
차라리 사령관에게 보고를 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정보망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다. 물론 드러난다고 해서 그 정체를 알아차릴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그리고 사기 진작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와서 붉은 학살자를 찾던 귀족들이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 ☆ ☆

“이제 하루 남았네요.”
클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붉은 학살자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성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사람은 뭘 하고 있던가요?”
“제대로 감시가 되지 않습니다. 워낙 감이 뛰어나서 근처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은데다가, 멀리서 지켜보다 보면
언제 이동했는지 유령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당연히 쉽지는 않겠죠.”
“한데 왜 그리 그에게 신경을 쓰십니까? 검술이 뛰어나긴 해도 그게 전부인 듯합니다만…….”
“슬라인 백작을 옭아매는 거 보셨잖아요?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안슈트는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정도야 디아만트 후작가에도 널렸다. 검술 실력을
빼면 굳이 클레가 신경을 써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검술이 상당히 뛰어나니 호위로 쓰신다면 찬성입니다.”
만일 그렇게 결정되면 뒷조사를 철저히 해서 만에 하나라도 클레가 잘못될 가능성을 완벽하게 잘라 내면 그만이다.
“글쎄요. 과연 그 사람을 호위로 쓸 수 있을까요?”
안슈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늘 200 만 골드를 번 사람이다. 돈이 아쉽지 않을 텐데 백작이라는 작위까지 가진
귀족이 굳이 후작가 여식의 호위를 설 이유가 없었다.
클레가 눈을 반짝였다.
“전 아무래도 그 사람이 붉은 학살자 같아요.”
“으음, 그건…….”
얼마 전이라면 절대 아닐 거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안슈트도 내심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붉은 학살자일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만일 그렇다면 사령관이 그 대결을 그냥 내버려 뒀을 리가
없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사령관도 제론의 실력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데 그런 대결을 그냥 내버려 뒀다는 건 제론이
붉은 학살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붉은 학살자가 자칫 다치기라도 하면 향후 전쟁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테니까 말이다.
“어렵네요. 그래도 그 사람 분명히 뭔가 있어요. 그러니 절대 감시를 게을리하지 마세요.”
“예.”
안슈트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고작 하루 남았다. 그동안 뭘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시간만 보내다 갈 뿐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100 만 골드나 얻었으니 아주 시간을 낭비한 건 아니라 다행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클레의 말에 안슈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아니다. 디아만트 후작가 입장에서 100 만 골드는 그저 그런
돈이다. 그 정도 돈은 클레가 마음먹고 하루만 일에 열중하면 벌 수 있는 돈이었다.
한데 무려 열흘이 넘는 시간을 낭비했으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2 천만 골드를 갖다 버린 셈이었다.
“아무튼 그 사람은……!”
꽈앙!
우르르르!
클레는 갑작스러운 굉음과 진동에 말을 하다가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소리죠?”
안슈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적습인 것 같습니다.”
“적습? 벨룸 왕국이 공격하는 거라고요?”
“예. 마법으로 인한 폭발 소리가 분명합니다.”
“마법이라고요?”
클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현대 전투는 기간트가 주축이 된다. 기간트가 밀고 들어오면 웬만한 마법은 거의
쓸모가 없다.
한데 마법이라니,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마법으로 절벽을 무너뜨린 모양입니다.”
“아아.”
클레는 그제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쪽에서 만든 함정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전투가 벌어졌으면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죠. 우리도 가 보도록 해요.”
물론 상황을 봐서 도망쳐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조건 달아나선 안 된다. 만일 그냥 달아났는데, 전투에서
승리하기라도 한다면 귀족의 명예에 큰 흠집이 난다.
클레와 안슈트가 밖으로 나가자, 함께 온 호위 기사가 모두 따라 나갔다. 클레 역시 열 명의 호위 기사를
데려왔다.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을 가졌고, 좋은 기간트를 소유한 자들이었다.
밖으로 나간 클레는 곳곳에서 등장하는 귀족과 그 귀족을 호위하는 기사를 볼 수 있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이 와중에 벨룸 왕국이 공격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이다.
“우리 정보망이 느슨해진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벨룸 왕국이 신경을 좀 쓴 모양입니다.”
“정보망을 교란시키면서 기간트를 추가로 이동시켰군요. 아무래도 이번 전투 쉽지 않겠는데요?”
클레의 정확한 분석에 안슈트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죽어 나갈 수 있었다.
쿵쿵쿵쿵쿵!
기간트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축이 흔들렸다. 수십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달려갔고, 그 뒤를 이어 또
수십 기의 기간트가 달려갔다.
“일단 귀족을 한데 모아야 할 것 같지 않나요?”
클레가 눈을 빛내며 안슈트를 바라봤다. 안슈트는 맡겨 달라는 듯 자신만만한 눈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달려갔다.
“호락호락 당해 줄 수는 없잖아요?”
클레의 입에서 묘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벨룸 왕국 사령관은 발을 쾅 구르며 소리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진격로가 갑자기 푹 꺼지면서
진군하던 기간트 부대의 선두가 처박힌 것이다.
물론 많지는 않았다. 고작 30 기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진군이 멎었다. 전격적인 기습전이었는데
기습 효과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뭣들 하는가! 어서 기간트를 끌어내고 바닥을 메우지 않고!”
기간트는 점프를 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 효과적인 함정이었다. 기간트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한데, 함정을
대충이라도 메우지 않고는 진격이 불가능했다.
함정은 깊지 않았다. 하지만 기간트가 혼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다른 기간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기간트가 워낙 무거웠기에 두 기의 기간트가 각각 한쪽 팔을 잡고 당기는 식으로 기간트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라! 빨리 이곳을 지나가야 해!”
사령관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곳은 양쪽으로 절벽이 늘어선 곳이었다. 적진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이었기에
기습의 묘를 살리기에는 제일 좋은 길이었다.
하지만 만일 적이 기습을 미리 알고 있다면 방어가 가장 용이한 지형이기도 했다.
양쪽으로 절벽이 늘어서 있으니 길목이 좁았고, 또 절벽을 일시에 무너뜨리기라도 하면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물론 그렇게 절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그리 쉬울 리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함정까지 준비했으니 절벽에 아무 짓 안 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사령관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절벽 중간 부분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꽈앙!
함정이 있는 위치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쫙 터져 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자신이 거기에 관련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꽈과과과과광!
꽈르르르릉!
엄청난 돌무더기가 벨룸 왕국 기간트 부대를 덮쳤다. 피할 틈도 없었다. 그들은 그대로 무너진 절벽에 깔려
버렸다.
자욱한 흙먼지가 절벽을 꽉 메웠다.

☆ ☆ ☆

“일단 첫 번째 작전은 성공했군.”


허공에 띄운 마티를 통해 상황을 확인한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벨룸 왕국군은 총 세 방향에서 진격했다. 그중 절벽 길을 통해 오는 부대가 바로 기습을 위한 전력이었다.
그들로 기습을 해서 정신을 빼놓은 뒤, 대부대가 차근차근 진격해 완전히 쓸어버린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기습 부대는 일단 막았다.
제론은 절벽 중간에 수없이 많은 마법진을 새겼고, 또 마법을 이용해 중간에 함정을 팠다.
기간트를 이용할 수는 없었다. 아무에게도 들켜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며칠 밤을 샜지만, 충분히 보람이 있었다. 제론은 마티를 조종해 두 번째 함정이 설치된 지역을 확인했다. 아직
적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만간 적이 그 지역을 통과할 것이다.
정보가 전쟁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절벽에 파묻힌 기간트의 수는 총 150 기에 달한다. 이렇게 처리하고도 남은 적이 700 기나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완전히 처리된 게 아니다. 기간트는 고작 절벽이 무너진 정도로 부서지지 않는다. 맨몸으로
있던 사람은 모두 죽었겠지만, 기간트는 아마 단 한 기도 완벽히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면 그저 기습을 막은 것 외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그렇기에 제론은 다른 것을 준비했다.
우우웅!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제론이 절벽에 설치한 마법진과 함께 틈틈이 준비한 마법이었다.
촤악!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지며 물기둥이 쭉 솟아났다. 물을 만들어 내는 마법진이었다.
마법 자체가 간단했기에 마법진의 규모를 키우는 것만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쏴아아아!
무너진 절벽이 촉촉이 젖어들어 갔다. 그리고 그 순간 제론이 손가락을 튀겼다.
딱!
우우웅!
조금 전보다 몇 배나 더 거대한 마법진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것 역시 미리 준비한 마법진이었다.
샤아아아아!
쩌저저저적!
강렬한 냉기가 휘몰아쳤다. 어찌나 차가웠는지 땅을 촉촉이 적신 물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샤아아아아!
마법진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허공에 떠 있는 동안 끊임없이 냉기의 바람을 절벽에 불어
넣었다. 바닥은 점점 더 꽝꽝 얼었다.
“이걸로 시간은 제대로 벌었고.”
제론은 확신 어린 눈으로 무너지고 얼어붙은 절벽을 쳐다봤다. 그리고 돌아섰다.
최소한 2 시간 정도는 시간을 벌었다. 아마 저 냉기는 아무리 기간트라도 쉽게 움직이게 하지 못할 것이다. 돌과
흙만 얼어붙은 게 아니다. 기간트의 관절도 얼어붙었다.
아마 그걸 제대로 녹여 움직이려면 기간틱 나이트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센스를 가진
라이더가 마나 코어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열기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쉽게 녹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얼음이 녹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제법 오랜 시간 기다려야 기간트의 힘으로 얼음을
부수고 절벽을 밀어 올릴 수 있었다.
어쨌든 그 시간이면 충분했다. 전황을 다시 제자리로 돌리기에는 말이다.
제론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물론 그러면서도 두 번째 함정을 살피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 ☆ ☆

절벽 무너지는 소리가 워낙 컸기에 체른산 방어군에는 즉시 비상이 발동되었다. 수많은 병사가 정신없이 움직였고,
기간트를 보관한 격납고가 열렸다.
아공간이 없는 기간트가 격납고에서 나왔다. 다들 붉은색을 칠한 실바였다.
50 기의 실바가 지축을 울리며 움직이자, 사방에서 하나둘 기간트를 소환했다. 물론 미리 정해진 자리에서
소환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간트에 깔려 죽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다.
체른산 방어군의 훈련 태세는 현재로서는 왕국 제일이었다. 가장 험한 격전지였기에 훈련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사령관은 기간트가 도열하는 광경을 보며 다급히 물었다.
“적이 어디쯤 오고 있나?”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굉음이 울린 곳은 절벽 길 쪽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사령관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절벽 길이 무너지는 소리일 수도 있겠군.”
“일단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만, 정확한 것은 확인을 해 봐야 합니다.”
부관의 대답에 사령관이 굳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척후병은 사방에 깔아 두었다. 그들에게는 마법 통신구를
지급했기에 조만간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당할 경우에 대비해 새로운 척후병을 보냈으니 어떻게든 확인이 가능했다.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부관의 외침에 사령관이 다급히 통신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세 가지 소식을 동시에 들을 수 있었다.
―절벽이 무너졌습니다! 그쪽으로 진격하던 적군이 몽땅 깔린 것 같습니다!
“몽땅 깔려?”
―이동 흔적만 남았습니다. 정황으로 보면 확실합니다! 한데…….
“뭔가? 정확히 말해! 얼버무리지 말고!”
―무너진 절벽이 꽁꽁 얼어붙어 있습니다!
“뭐야? 얼어? 지금 날씨가 어떤 줄이나 알고 말하는 건가? 그리고 얼려면 거기 물이 있어야 하는데, 절벽 길
근처에는 시냇물도 없다는 거 모르고 말하는 건가!”
―그, 그래서 이상합니다! 정말로 얼어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설사 기간트가 깔려 있어도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령관과 부관이 서로를 바라봤다. 대체 이 공교로운 일은 뭐란 말인가. 마치 누군가가 레늄 왕국을 도와주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좋아! 다음!”
일단 다음 보고를 위해 통신 채널을 돌렸다. 그러자 다급한 척후병의 보고가 쏟아졌다.
―적입니다! 북동쪽 평원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추정 병력 350 기의 기간트입니다!
“350 기? 고작 그걸로 우리를 어찌 해 보겠다는 건가?”
사령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벨룸 왕국이 이렇게 어설픈 공격을 할 리 없었다.
설사 절벽 길을 이용해 기습을 시도한다 해도 말이다.
“다음!”
부관이 채널을 돌리자, 이번에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동쪽 평원으로 적이 진격 중입니다! 기간트 350 기입니다!
그 보고에 사령관이 경악했다.
“말도 안 돼! 그럼 총 700 기나 되는 기간트가 출격했단 말 아닌가!”
정보망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들의 병력은 500 기에서 600 기 사이였다. 아무리 잘해도 600 기가 전부였다.
한데 난데없이 700 기라니! 게다가 절벽 길의 기간트를 생각하면 그보다 훨씬 많다는 뜻 아닌가.
사령관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만일 절벽 길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체른산 방어군이 무너지는 건 물론이고, 현재 이곳에 있는 귀족까지 몽땅 당했을 것이다. 벨룸 왕국은 마치
그들을 노리기라도 하듯 공격했다.
이쯤 되면 뭔가 흑막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사령관은 강한 음모의 냄새를 맡았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적은 700 기 아군은 500 기였다. 사령관이 고개를 돌려 귀족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각자의 호위 기사와 함께
있었다. 그들이 도와주기만 하면 100 기의 전력이 충원된다.
‘하지만 과연 도움이 될까?’
총 600 기라면 어찌어찌 해 볼 만하다. 붉은 학살자가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귀족들이 어떻게 나올지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사령관의 고민은 클레가 해결해 주었다.
“이곳에 모인 귀족들이 모두 돕기로 했어요. 다만 우리는 함께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에 군부의 라이더와 섞이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테니 따로 움직이죠.”
클레의 말에 사령관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만 해 줘도 충분하다. 일단 병력을 한군데로 집중할 수가
있을 테니 말이다.
“남동쪽 평원을 막아 주시겠소? 적의 발만 묶으면 되오.”
“군부에서 몇 기나 보내실 생각이시죠?”
“150 기를 보내겠소.”
“150 기요? 그럼 우리와 합해 봐야 250 기인데, 너무 불리하지 않나요?”
“그러니 버티기만 하라는 거요. 시간만 끌면 반드시 이길 수 있소.”
사령관의 단호한 말에 클레는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령관의 말에
따르면 귀족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가 확 줄어들 것이다.
그건 향후 공작파의 귀족을 상대할 때 치명적인 빈틈으로 작용할 것이다. 무조건 피해가 적은 쪽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승리는 반드시 필요했다. 군부가 단단히 버텨 주지 않으면 공작파에 완전히 밀려 버릴 테니까.
“우리 쪽에 붉은 학살자를 넣어 주세요. 그럼 받아들이죠.”
클레의 말에 사령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붉은 학살자는 방어보다는 공격에 특화되어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귀족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번 전쟁은 수행이 불가능했다.
“좋소. 하면 북동쪽 평원을 맡아 주시오. 최대한 빨리 그들을 물리치고 남동쪽 평원으로 이동해야 하오. 늦으면
이번 전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걸 부디 명심해 주시오.”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이루어지자, 기분이 좋아진 클레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염려 마세요. 우리는 생각보다 단합이 잘 되어 있답니다. 아마 상당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테니 기대하세요.”
클레는 그 말을 남기고 서둘러 귀족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러자, 호위 기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 호위 기사가 한 명씩 기간트를 소환했다.
순식간에 100 여 기의 기간트가 나타났다.
그들을 통솔하는 것은 안슈트였다. 클레는 돈을 미끼로 모든 귀족으로부터 호위 기사의 통솔권을 얻어 냈다.
안슈트의 능력이라면 그들을 데리고 상당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령관은 그 모습을 보며 굳은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각자 예정된 지역으로 출발!”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간트가 일제히 기동했다.
우우우웅!
쿵! 쿵! 쿵! 쿵!
각각 250 기의 기간트가 북동쪽 평원과 남동쪽 평원으로 움직였다. 250 기로 350 기의 적을 막아야 하는 남동쪽
평원의 경우 모든 기간트 라이더가 비장한 표정이었다.
남동쪽 평원은 그래도 방어가 용이한 편이었다. 완전히 허허벌판인 북동쪽 평원에 비해 군데군데 거대한 바위도
있고, 늪도 있어서 나름 지형을 이용한 작전을 짤 수도 있었다.
사령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두 기간트 부대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최종적으로 붉은 실바에게로
향했다.
50 기나 되는 붉은 실바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든든해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붉은 실바는 체른산 방어군에 있어서는 양날의 검이었다. 실바는 확실히 성능이 떨어진다. 일대일로 다른
기간트와 싸우면 필패였다.
하지만 그중 붉은 학살자가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붉은 학살자는 비록 실바지만, 상대편 기간트 세 기를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실력이었다.
“대체 왜 다른 기간트에 타지 않으려는지 모르겠지만…….”
사령관은 몇 번이나 제안을 했다. 기간트를 바꿔 주겠다고 말이다. 만일 그 정도 실력을 가진 라이더가
카타락타나 크라테르를 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한데 그는 한사코 그것을 거부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실바 외에 다른 기간트를 탄 적이 없었다. 그 기간트에
무슨 비밀이 있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었다.
“그걸 못 밝히고 끝나는군.”
어제 사령관은 제대 신청서를 받았다. 바로 처리가 되지는 않겠지만, 조만간 붉은 학살자는 군부에서 사라진다.
물론 몇 번은 그 사실을 이용해 작전을 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너무나 아쉬웠지만, 그래도 사령관은 충분히 수긍했다. 그는 할 만큼 했다. 또한 이번
전투가 마무리되면 아마 전쟁은 끝날 것이다.
이곳 체른산 방어군이 밀리든 아니면 벨룸 왕국군이 공격에 실패하든,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여유가 사라진다.
“이럴 때가 아니로군. 어서 통신을 해야지.”
이곳에 잔뜩 몰려왔으니 어딘가는 분명히 구멍이 생겼을 것이다. 거길 공략하면 적에게 이중으로 피해를 강요할
수 있다.
그것은 종전 협상에서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남동쪽 평원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높다란 망루가 세워져 있었다. 사실 평원보다는 기지에 훨씬 더 가까운
장소였다.
예전에는 망루가 제법 쓸모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쓰지 않은 채 방치된 상태였다.
그 망루 위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세나와 바이스였다.
“함정은 확실히 설치되었겠지?”
“당연하지. 날 뭐로 아는 거야?”
“뭐긴, 어설픈 바이스지.”
“허어. 어설프다니.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지금은 완벽한 바이스라고 불러야지.”
“훗, 그냥 막 갖다 붙이면 말이 되는 줄 아는 모양이네.”
세나의 말에 바이스가 피식 웃었다.
“너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제론 선배도 알아?”
세나가 바이스의 눈앞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연히 모르지. 알면 네가 여기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었겠어?”
“허어. 제론 선배가 이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이렇게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걸 봐야 여자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지실 텐데 말이야.”
“닥치고 마법이나 걸어.”
“멋진 어휘 선택이야.”
바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고는 마나 스틱을 꺼냈다.
아주 특별한 마나 스틱이었다.
보통 마법사가 쓰는 마나 스틱은 마나가 잘 흐르는 재질의 막대기에 마나 스톤을 박아서 만든다. 그걸 잘
가공하고 거기에 마법을 곁들이면 마나 스틱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이스의 마나 스틱은 그 재질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아무도 몰랐지만, 심지어 바이스조차 모르는
일이었지만 이 마나 스틱의 기본 재질은 테페룸이다.
테페룸에 포로스를 발라 만든 마나 스틱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이것이 사실은 테페룸이라는 걸 몰랐다.
테페룸을 이 정도로 정교하게 가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제론뿐이었기에 설사 이게 테페룸이라고 말해 줘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테페룸으로 막대기를 만들고, 거기에 특수한 방법으로 가공한 마나 스톤을 촘촘히 박았다.
바이스는 마나 스틱을 들어 올려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당연히 마나 스틱의 마나를 활성화시켰다.
샤아아!
바람을 긁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푸른 선이 그려졌다. 그 선은 이내 간단한 마법진을 이뤘다.
커다란 원 안에 다섯 개의 직선이 이리저리 교차된 마법진이었다.
우우웅!
마법진이 은은히 진동했다. 바이스는 마법진에 마나 스틱을 갖다 댔다.
쩡!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지며 가루로 변했다. 마법이 발동한 것이다.
이 마법진은 일종의 스위치였다. 미리 준비한 마법진을 일제히 발동시키는 역할이었다.
후웅!
가벼운 바람이 일었다. 그리고 두 사람 앞에 흐릿한 창문이 떠올랐다. 그 창문은 놀랍게도 먼 곳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두 사람의 앞에 떠오른 창에 수백 기의 기간트가 빠르게 진군하는 모습이 보였다.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맞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이스에게는 확실히 보였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마법진의 모습이.
이 광범위한 마법을 까느라고 얼마나 오랫동안 애썼는지 모른다. 더구나 이번 일을 위해 그동안 모은 포로스를
거의 다 써 버렸다.
포로스를 이용하지 않으면 원하는 정도의 파괴력이 결코 나오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할 거야.’
바이스는 자신했다. 이번 마법은 그동안 연구한 마법의 정수라 할 수 있었다. 자신이 군에서 3 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 이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징징징징!
마법진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바이스가 발동시킨 마법이 이제야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애초에 이
타이밍을 다 재고 스위치를 넣었다.
번쩍!
어마어마한 빛이 터졌다.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지며 그 모든 것이 태양처럼 밝은 빛으로 변했다.
희미한 창을 통해 그곳을 보던 바이스와 세나는 눈을 감거나 피할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에게는 전혀 그 빛이
밝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마법의 창이 강한 빛을 대부분 차단해 버린 것이다.
“됐어!”
바이스가 기쁨에 찬 외침을 토해 냈다. 마법이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럼 빨리 우리 제론 선배님이 계시는 곳으로 방향을 바꿔!”
“나도 그러려고 했어.”
바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마나 스틱을 움직였다. 마법진이 떠올랐고, 창의 방향이 휙 하고 바뀌었다.
그곳에는 수백 기에 달하는 기간트 대군이 양측으로 나뉘어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은 기세로 대치 중이었다.
진짜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250 기의 기간트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한 카이트는 멍한 눈으로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카이트는 3 년 동안 제론의 도움으로 진급을 거듭했다. 그래서 지금은 기간트 부대를 이끄는 대장의 직위에
올랐다.
지금도 남동쪽 평원의 방어 책임자로 오게 되었는데, 그만큼 사령관이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카이트라면
어떻게든 필요한 만큼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카이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게 없었다.
그의 눈앞에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호수 너머 수백의 기간트 부대가 보였다. 그간의 경험으로
어림잡아 보면 200 기는 되는 듯했다.
‘350 기쯤 된다고 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 가장 먼저 떠올랐어야 마땅한 생각이었지만 눈앞의 광경에 너무 놀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생각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다. 나머지 150 기는 저 호수에 잠긴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 건지는
모르지만 그게 확실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어쨌든 시간을 끄는 일은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호수에 빠진 기간트가 다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기간트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가 바로 무게였다. 그 말은 깊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기간트의 조종석이 외부와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숨을 쉬려면 공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저런 물속에서는 안정적으로 공기를 공급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물속에서 빨리 나와 공기를 공급받아야 하는데 기간트의 무게 때문에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긴장을 풀지 마라! 언제 상황이 바뀔지 알 수 없다!”
카이트는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는 호수 너머에 있는 적을 살폈다. 우왕좌왕 정신이 없었다. 그들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이건 어쩌면 기회 아닌가?’
카이트는 갈등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의 임무는 시간을 끄는 것이다. 여기서 더 힘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전력을 최대한 보존한 상태로 시간을 끌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최선의 선택이었다.

안슈트는 100 여 기의 기간트를 이끌고 북동쪽 평원에 도착했다. 군부의 250 기간트가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그
뒤를 따랐다. 물론 둘은 따로 움직였다.
적 기간트 350 기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은 압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군도 그 못지않다.
‘문제는 실바인데…….’
아군과 적군의 병력은 같지만 질에서는 엄연히 차이가 난다. 아군에는 실바가 50 기나 섞여 있는 것이다.
안슈트는 과연 실바와 함께 저 강대한 적을 상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일단 지금은 적을 물리칠 생각만 하자. 서두르지 않으면 안 돼.’
적은 여기 말고도 또 있다. 이쪽에서 최대한 빨리 승리를 쟁취한 뒤, 남동쪽 평원으로 달려가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다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이곳에 붉은 학살자가 함께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승산을 찾는다면 그게 유일했다.
“우리는 상황을 봐서 적의 측면을 치겠소.”
안슈트가 군부의 기간트를 향해 말했다. 어차피 함께 돌격할 거라고는 예상치 않았기 때문에 군부의 대장도
수긍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측면이 아니라 배후를 치시오. 아군과 섞일 우려가 있소.”
안슈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군부는 군부의 방식이 있을 테니까.
‘그래도 되도록 빨리 치는 게 나을 텐데…….’
배후를 치려면 멀리 돌아가야 한다. 더구나 그동안 적이 충분히 대비를 할 테니 효과가 훨씬 떨어진다. 차라리
측면을 노리는 편이 더욱 빨리 대처할 수 있으니 기습의 효과도 있을 것 아닌가.
안슈트는 그 주장을 하려다가 말았다. 지금은 이런 일로 왈가왈부할 시간이 없었다. 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가자!”
안슈트가 100 여 기의 기간트를 이끌고 이동을 시작했다. 배후를 치려면 충분히 멀리 돌아야 한다. 그때까지
아군이 버티고 있기만을 바랐다.
함께 돌격하면 손발이 안 맞아서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안슈트는 기간트 부대를 이끌고 달리면서도 시선을 놓지 않았다. 적군과 아군이 부딪치는 광경은 반드시 지켜봐야
했다. 또한 전황도 살펴야만 했다.
그저 배후로 돌아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공격할 계획은 없었다. 상황에 맞게 행동해야만 한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었다.
열심히 달리던 안슈트는 긴장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아군이 돌격을 시작한 것이다.
크라테르 수십 기가 선두에서 달렸다. 당연했다. 일단 성능이 뛰어나니 달리는 속도도 빠르고 돌격 효과도 뛰어날
테니까.
꽈앙!
선두와 선두가 부딪쳤다. 전형적인 기간트 전투였다. 서로 힘으로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면서 검을 내리치고
방패로 그것을 막았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또한 이대로라면 수가 많은 쪽이 당연히 승리하게 된다.
상황을 지켜보던 안슈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갑자기 적군의 진형이 흐트러졌다.
“뭐지?”
안슈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붉은 실바 한 기가 정신없이 적진을 유린하는 광경을 말이다.
붉은 실바가 한바탕 적진을 휘저으면 어김없이 수십 기의 기간트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면 붉은 실바를 바짝
따르던 다른 실바가 쓰러진 기간트를 검으로 찍었다.
그들은 오직 그것만 훈련한 것처럼 힘차게 기간트를 찍었다. 게다가 검에 체중을 완전히 실었기 때문에 위력이
엄청났다. 다만 속도가 조금 느린 것이 흠이었다.
“붉은 학살자!”
안슈트는 저 붉은 실바가 바로 붉은 학살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소문이 날 만했다. 또한 이렇게 수많은
귀족이 애가 타도록 찾을 만했다.
붉은 실바의 움직임은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한 번 휘젓고 나니 아군의 돌격 효과가 배가되었다. 엄청난 속도로
적진을 파고들어 진형을 무너뜨렸다.
안슈트는 이제야 아군 기간트 부대장이 자신에게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이 상태에서 측면으로
돌격했다면 완전히 바보가 될 뻔했다.
어차피 진형이 무너졌는데, 거길 쳐서 뭐 하겠는가. 아직 진형이 흐트러지지 않은 배후를 쳐서 완전히 적을
무너뜨려야 하지 않겠는가.
“서둘러라!”
안슈트는 더욱 힘차게 달렸다. 더 늦으면 곤란했다. 배후를 제대로 쳐 줘야 이번 전투를 완벽한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된다! 양쪽 적을 모두 막을 수 있어!’
피해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이대로라면 절반도 잃지 않고 적을 궤멸시킬 수 있을
듯했다.
안슈트는 상념을 접었다. 어느새 적의 배후였다.
꽈아앙!
굉음과 함께 적진 깊숙한 곳으로 들어왔다. 적은 제대로 배후를 방어할 겨를도 없어 보였다.
안슈트의 눈에 높이 뛰어오른 붉은 실바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치 붉은 새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상황 종료! 역시 제론 선배님이야.”


바이스의 말에 세나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너무 멋져. 어떻게 실바를 저 정도로 다루실 수 있는 걸까? 역시 내가 정비를 잘한 덕분이겠지?”
“제론 선배님이 이 모습을 꼭 보셔야 하는데.”
세나가 말없이 꽉 쥔 주먹을 위로 올렸다. 바이스는 ‘이크’ 하며 뒤로 물러났다.
“어쨌든 이제 한쪽 전투가 끝났으니 이쪽도 슬슬 준비해야지.”
바이스는 마법을 펼쳐 창의 방향을 바꾸었다. 드넓은 호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두 무리의 기간트 부대가 보였다.
“저게 다 환상이라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호수에 잠긴 사람들은 알지 않아?”
“알 수도 있겠지. 어쨌든 숨을 계속 쉴 수 있다는 걸 의심할 테니까. 그래도 다시 나오지는 못할 거야. 저
환상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언제쯤 사라지는데?”
“그냥 내버려 두면 반나절 정도? 하지만 내가 원하면 언제든 없앨 수 있지.”
“제론 선배님은 알고 있지?”
“물론이지. 그게 이 함정의 핵심인데.”
무려 150 기나 되는 기간트가 호수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만일 환상이 사라져 버린다 하더라도 그들이 바로
정신을 차려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해.”
바이스가 마나 스틱을 움직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 결과 훨씬 복잡한 마법진이 허공에
나타났다.
쩡!
마나 스틱에 의해 마법진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뿌연 창이 하나 더 떠올랐다. 그 창에 전투가 끝나 다시 달리고 있는 기간트 부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바이스는 긴장감 넘치는 표정으로 두 창을 번갈아 확인했다. 마법을 취소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정확한 타이밍을 잡아내야만 했다.
“지금!”
세나가 외쳤다. 바이스는 망설임 없이 마나 스틱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쩌엉!
마나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안슈트는 당황했다. 앞서 달리는 붉은 실바를 쫓아가기가 버거웠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가 타는 기간트는 무려 크라테르였다. 크라테르는 출력 1.7 에 13 톤의 무게를 가졌다. 반면 실바는 고작 0.8
의 출력에 무게는 12 톤이나 된다.
절대 실바보다 크라테르가 늦게 달리는 상황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데 지금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안슈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더욱 힘차게 땅을 박찼다. 하지만 실바와의 거리가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말도 안 돼!’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심장이 터져라 달렸다. 온몸이 삐걱거렸다. 하지만 그래도 꾹 참고 달렸다. 이건 기간트
라이더로서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을 자존심 문제였다.
안슈트뿐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기간트가 그렇게 붉은 실바의 뒤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현재 달리는 기간트의 수는 200 기에 불과했다. 조금 전 싸움에서 150 기가 부서졌다.
물론 완파된 것은 50 기 정도였다. 대부분이 실바였다. 나머지는 전투에만 참여가 어려울 뿐 움직임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들은 지금 북동쪽 평원에 남아 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곳에 널브러진 기간트는 모두 전리품이었다. 향후
공적에 따라 포상으로 주어질 것이다.
현재 달리는 200 기의 기간트는 비교적 멀쩡했다. 하지만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니었다.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 절반도 채 안 됐다.
그들의 눈앞에 수백 기의 기간트가 늘어서 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 자리한 거대한 호수가 보였다.
“어?”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이 저기 왜 호수가 있단 말인가. 여기는 남동쪽 평원이었다. 늪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저런 호수는 없었다. 또한 저런 호수가 생길 만한 지형도 아니었다.
붉은 실바가 망설임 없이 호수에 뛰어들었다.
첨벙!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붉은 실바를 가장 가까이서 따라가던 사람은 안슈트였다. 그는 상당히 당황했다. 기간트와 깊은 호수는
상극이었다. 하지만 붉은 실바는 호수에 뛰어들었다.
안슈트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에서까지 질 수는 없었다.
첨벙!
안슈트가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 뒤를 따르던 기간트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수많은 기간트가 호수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호수가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멍하니 서 있는 150 기의 벨룸 왕국 기간트뿐이었다.
꽈앙!
붉은 실바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
꽈과광!
하늘에서 떨어지며 순식간에 세 기의 기간트를 무너뜨린 붉은 실바가 그림처럼 움직여 적을 베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안슈트를 비롯한 아군 기간트가 일제히 들이쳤다.
꽈과광!
그걸로 전투의 결과가 결정되었다.

Chapter 4 전후 처리

대승이었다. 그냥 대승이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였다. 또한 어마어마한 전리품까지 얻은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역시 붉은 학살자였다. 또한 그와 함께 함정을 파서 미리 전쟁을 준비한
바이스와 세나였다.
바이스는 예전과 달리 그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이 새로운 마법진을 개발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리고
공적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당당히 나섰다.
적 기간트 700 기를 박살 냈으며, 150 기를 상처 하나 없이 포획했다.
적은 이번 작전에 무려 850 기의 기간트를 출격시켰다. 한데 그걸 모두 잃었으니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다.
바이스의 공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바이스는 미리 가문의 힘을 움직여 다른 전선의 정보를 확인토록 했다. 그래서
적의 빈틈을 찾아 공략했다.
그 전투에서의 성과도 엄청났다.
결과적으로 벨룸 왕국은 패배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그 모든 것이 이번 전투로 인해서였다.
결국 종전 협상을 위한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상당히 불평등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벨룸 왕국은 체스터 공국의 힘까지 빌렸다. 체스터 공국은 결국 한발 뒤로 빠지긴 했지만 벨룸 왕국이 무릎을
꿇은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레늄 왕국도 체스터 공국을 심하게 압박하지는 않았다. 긴 전쟁으로 인해 레늄 왕국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제부터는 내실을 다져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왕국 자체의 존망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전쟁을 하는 동안 슈린 공작을 비롯한 공작파 귀족들은 착실히 힘을 키워 왔다.
전쟁에 소홀했기에 전리품을 얻기는 어려웠지만, 충실히 다진 내실로 인해 오히려 힘이 훨씬 커졌다.
아무튼 그렇게 전쟁은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 ☆ ☆

“정말 놀랍군요.”
“전 더 놀랐습니다. 직접 눈앞에서 그 광경을 봤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안슈트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생각만 해도 황홀한 광경이었다. 붉은 실바가 하늘을 나는 광경을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른다.
클레는 그런 안슈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안슈트 경의 말씀을 듣다 보니 묘하게 익숙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습니까?”
“예. 꼭 언젠가 한 번 들었던 말 같아요.”
거기까지 말한 클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 떠오른 탓이었다.
“꼭 예전 제론이라는 사람이 저녁을 먹으며 떨었던 허풍과 같네요.”
“저도 그가 떠올랐습니다.”
“그럼 그가 붉은 학살자일까요?”
“반반입니다.”
안슈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 역시 전투에 함께 참여했다면 그런 광경을 수도 없이 보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그랬던 것처럼.”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클레는 안슈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 안슈트 경의 감을 믿어요. 경의 감은 어떤가요?”
안슈트는 머뭇거렸다. 최근 자신의 감을 믿지 못하게 되어서 함부로 단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자신의 감이 맞을 것 같았다.
“전 제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하면 그를 영입하겠어요.”
안슈트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찌 고작 자신의 감만 믿고 그런 일을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확실치 않습니다! 만일 그러다가 진짜 붉은 학살자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클레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요. 제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제론이라는 사람, 꼭 붉은 학살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충분히 영입 가치가
있어요.”
“하지만 그는…….”
제론에 대해 나름 충실히 조사를 했다. 하지만 제론을 끌어안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심했다. 군부에 들어오기
전까지 슈린 공작가가 노리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디아만트 후작가의 정보망을 통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군부에 들어간 이후에도 음모에 개입시켜 제론을
없애려 했다. 물론 그 음모가 어떤 건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 제론을 영입한다면 슈린 공작가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 그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어쨌든 전 그렇게 결정을 내렸어요. 그러니 그에게 영입 의사를 전해 주세요.”
안슈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제론은 느긋하게 기지를 거닐었다. 제대 신청도 했으니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사실 제론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을 것이다.
사령관은 최대한 제론의 편의를 봐주었다. 붉은 학살자에 관한 정보는 제론이 제대한 다음에도 일정 기간 보호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일단 제론이 제대하고 나면 어떻게든 정보가 샐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 혼자의 힘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제론은 그 모든 걸 예상하면서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일단 체른산 유적부터 해결해야지.’
지금 제론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체른산 유적이었다.
그곳에는 제론이 그동안 쌓아 둔 전리품이 잔뜩 있었다. 처음 유적을 이용한 함정으로 전멸시킨 200 기의
기간트가 고스란히 유적 창고에 남아 있었다.
워낙 강렬한 충격을 받았는지라 기간트와 연결된 아공간이 다 끊어져 버려 그 부피가 어마어마했다.
제론은 그걸 그냥 내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개중에는 쓸모없어진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조금만 손보면
멀쩡하게 쓸 수 있는 것들이었다.
또한 그동안 전투를 벌이며 몰래 수거할 수 있는 전리품을 최대한 모아 뒀다. 그 모든 것이 다 창고에 들어
있었다. 창고는 그걸 다 넣고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거대했다.
지금 당장 체른산 유적에 락을 걸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락은 제대한 뒤 천천히 시기를 봐서 거는 편이
낫다.
어쩌면 마법사가 떼거리로 몰려와 연구를 한답시고 덤빌 수도 있었다. 그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으니 제대로 락을
걸어야만 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유적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제론과 2 왕자가 유일할 것이다.
2 왕자는 유적의 가디언이 되었으니 출입이 자유로운 게 당연했다. 하지만 2 왕자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가려
한다면 그는 유적으로부터 출입을 거절당할 것이다.
제론은 유적의 방어 시스템을 확실히 통제해 그런 식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그게 가장 안전한 방식이었다.
제론에게나 유적에 접근하려는 다른 사람에게나.
현재 체른산 방어군은 지난 대승으로 인해 여기저기서 흥청망청 난리였다. 낮부터 곳곳에서 술판이 벌어졌고,
이번 전쟁의 최고 공로자 중 하나로 떠오른 바이스에 관한 얘기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가장 많은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단연 붉은 학살자였다.
그 분위기를 통해 정보 차단이 더 이상 쉽지 않다는 걸 제론도 슬슬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제론이 기지를 돌아보며 유적에 있는 기간트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안슈트가 다가왔다.
제론은 안슈트가 어느 정도 다가왔을 때부터 기척을 느꼈기에 걸음을 멈추고 그를 기다려 주었다.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안슈트는 뜸 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영입 제안을 드리러 왔습니다.”
“영입?”
“그렇습니다. 우리 디아만트 후작가의 라이더로 와 주시겠습니까?”
제론이 아무런 대답 없이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자, 안슈트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일단 매월 10,000 골드를 지급하겠습니다. 또한 발굴형 기간트도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발굴형 기간트? 그건 좀 끌리는군요.”
제론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돈이야 지금도 얼마든지 있다. 물론 영지를 개발하다
보면 모자랄 수도 있지만, 그걸 충분히 보충할 방법이 있었다.
아직 팔찌의 아공간에 처리하지 못한 테페룸이 잔뜩 남아 있었다. 또한 테페룸 동전도 있다. 그걸 경매로
내놓으면 예전만큼은 못해도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방법이 있었다. 초고대 문명의 지식을 이용해 돈을 버는 것도 가능했다. 초고대 문명의 기술이
들어간 물건을 만들 수만 있다면 떼돈을 버는 것도 문제가 아니리라.
그리고 기간트는 더더욱 흥미가 떨어졌다. 제론에게는 테오스가 있다. 아직 제대로 움직여 보지는 못했지만 그에
관한 지식은 충분히 섭렵했다.
테오스는 현존하는 그 어떤 기간트보다 뛰어난 기간트였다. 또한 라이더의 실력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훨씬 더
강해지는 궁극의 기간트이기도 했다.
“그럼 와 주시겠습니까?”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절합니다.”
“예? 하지만 방금 끌린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영입하려는 분들도 계시는데 굳이 응할 이유를 못 느끼겠군요.”
제론의 말에 안슈트가 당황했다. 대체 또 누가 제론에게 손을 뻗었단 말인가. 더구나 매월 10,000 골드라는
거금을 지급한다는 조건은 아무나 내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0,000 골드면 보통 사람은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할 정도로 큰돈이었다. 그걸 매월 지급하는 건 아무리 부유한
가문이라 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일 제론이 붉은 학살자라는 확신이 있다면 그 정도 투자쯤이야 과감히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보다 더한 투자를 할 만한 가문을 아무리 떠올려도 찾을 수 없었다.
“정말 다른 가문에서 영입 제안을 했습니까?”
안슈트의 물음에 대한 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사실이라네, 안슈트 경.”
뒤돌아본 안슈트는 침음을 삼켰다.
“위버 백작님…….”
“오랜만일세. 3 년 전 결투 이후 처음인가? 같은 곳에 머물면서도 이렇게 만나기 어려울 줄은 몰랐군.”
위버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디아만트 후작가에 진 빚을 이런 식으로라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리는군.”
안슈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위버 백작가와 디아만트 후작가는 같은 국왕파이긴 했지만 서로 앙금이
많았다.
3 년 전 광산 채굴권 하나를 놓고 결투까지 벌인 사건으로 인해 그 앙금은 더더욱 깊어졌다.
디아만트 후작가에 비하면 상당히 모자랐지만 위버 백작가도 돈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당연히 방금 안슈트가
제안한 것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내걸 수 있었다.
위버 백작은 제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건을 수정하겠네. 매월 3 만 골드를 지급하지. 또한 발굴형 기간트 중 제법 성능이 뛰어난 아우틈을 주겠네.
거기에 광산을 두 개나 가진 영지도 함께 주지. 어떤가? 이 정도면 더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너무나 파격적인 대우에 안슈트의 입이 벌어졌다. 지금 위버 백작이 말한 조건은 아무리 디아만트 후작가라
하더라도 섣불리 내밀 수 없을 정도로 과했다.
‘뭔가 확신이 있는 건가?’
안슈트의 눈이 강하게 빛났다. 그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선을 이미 넘었다. 하지만 그의 감이 맹렬히
외치고 있었다. 여기서 질러야 한다고.
“우리 디아만트 후작가에서도 같은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영지 지원금 50 만 골드를 일시에
지급하겠습니다.”
안슈트의 말에 위버 백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슈트가 이런 식으로 지를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했다.
안슈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그 정도 일을 결정할 자격이 있을 리도 없었다.
“농담이 과하군. 정말로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제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할 것 같습니까?”
위버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 말했다.
“거기에 영지 지원금 50 만 골드를 더 얹지. 총 100 만 골드를 지원해 주겠네.”
위버 백작은 그렇게 말하고 제론을 바라봤다. 어서 결정을 내리라는 압박이었다.
제론은 두 사람이 벌이는 신경전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하지만 대층 이쯤에서 결론이 난 듯했다. 안슈트는 더
지를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었다.
“절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제안은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제론의 말에 위버 백작이 어금니가 부서져라 이를 갈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자네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닌가? 이런 후한 조건으로 자넬 영입할
곳이 또 있을 것 같은가?”
제론이 빙긋 웃었다.
“전 어디에도 갈 생각 없습니다. 제 영지를 두고 어딜 가겠습니까? 그리고 저도 백작입니다. 백작이 백작 아래로
들어간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위버 백작은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영지가 있다면 할 말이 없다. 더구나 제론의 말대로 백작이
백작을 휘하에 두는 건 모양새가 너무나 이상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뭔가 억울했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자네에게는 영지 따위가 없을 텐데? 아, 설마 그 황무지를 말하는 건가? 영지민이 단
한 명도 없고 폐허가 된 유적만 덩그러니 있는 곳 말일세.”
제론의 웃음이 차가워졌다.
“조사를 아직 제대로 다 안 하셨군요. 제 영지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도 백작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말투에 좀 더 신경 써 주시죠. 아니면 명예를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결투를 신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제론의 말에 위버 백작은 흠칫 놀랐다. 심장을 옥죄는 살기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고, 공포가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얼마 전 있었던 제론의 결투를 떠올린 위버 백작은 굳은 표정으로 한발 물러났다.
그때 제론은 혼자서 열 명의 기사를 처참하게 죽여 버렸다. 위버 백작도 호위 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슬라인
백작이 데려온 호위 기사와는 많이 차이가 났다.
슬라인 백작의 호위 기사는 강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기사 열을 혼자서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이겼으니
제론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절대 결투로 이길 수 없었다. 슬라인 백작처럼 결투에 부당한 사항을 내걸지 않으면 괜찮지만 그래도
호위 기사를 잃을 게 뻔한 일을 벌이기 싫었다.
“내가 실수를 했군. 미안하게 되었소.”
위버 백작은 바로 사과를 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냥 깔끔히 상황을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분풀이를 할 생각이었다.
그조차 못 한다면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되리라.
“재고하실 수는 없습니까?”
위버 백작이 물러나자, 안슈트가 나섰다. 제론이 그런 안슈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보다 훨씬 좋은 조건도 거절했는데, 굳이 그쪽의 조건을 고려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안슈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클레에게 실망을 안겨 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제론은 그런 안슈트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 ☆ ☆

디아만트 후작가와 위버 백작가가 제론을 영입하려 했다는 소문이 기지 내에 파다하게 돌았다.


당시 두 사람이 제론에게 접근하던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만으로 소문이 이렇게 퍼졌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이 상황은 제론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바이스와 세나까지 동원해서 소문을 퍼트렸다.
소문이 퍼지자 당장 다른 귀족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제론을 찾으려 했다.
사실 기지에 들어온 귀족 모두가 돌아갔어야 하지만, 예상 밖의 전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전리품의 분배 때문에 전투에 가문의 기사를 내보낸 귀족의 경우 정당한 몫을 얻을 때까지 남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그 기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제론은 그들이 쫓아다니는 걸 대충 피하면서 조금씩 접근을 허용했다. 한 번이라도 제론과 접한 귀족은 상당히
혼란스러워했다.
제론은 적당히 자신의 능력을 자랑해 몸값을 올렸다. 그러고 상당히 거들먹거렸다. 마치 자신이 붉은 학살자이니
알아서 대접하라는 듯한 태도를 아낌없이 내보였다.
그러면서도 기간트에 타 보라거나 하는 얘기만 나오면 교묘하게 말을 돌렸다.
당연히 그것은 제론의 기만책이었다. 제론의 그런 태도를 본 사람은 대부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론의
사정과 상황을 알지만 붉은 학살자라는 이미지와 너무 맞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제론이 붉은 학살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붉은 학살자가 아닌, 그저 검술이 뛰어날
뿐인 귀족은 그들 입장에서 영입하기가 상당히 껄끄러운 사람일 뿐이었다.
제론을 찾는 귀족의 수가 차츰차츰 줄어들었다.

“왔군. 거기 앉게.”
제론은 사령관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이제 내일이면 군부를 떠난다. 그전에 반드시 마무리할 것이 있었다.
“부서진 기간트는 5 천 골드, 멀쩡한 기간트는 10,000 골드로 책정했네. 이의 있나?”
“없습니다.”
사실 지나칠 정도로 헐값이었지만 대부분 받아들였다. 이걸로 조금이라도 이득을 남겨야 군부가 전비를 보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동안 많이도 잡았군. 자네의 공에 대한 포상금은 모두 265 만 골드일세.”
“그럭저럭 괜찮군요.”
사령관은 제론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265 만 골드나 되는 돈을 받게 되었는데도 저렇게 담담한 걸 보면 새삼
얼마나 대단한지 되새길 수 있었다.
그러니 붉은 학살자라는 별명을 달고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국왕 폐하로부터 내려온 임명장일세. 이것이 명령서고.”
제론은 두 장의 서류를 받았다.
하나는 젤레 영지의 영주로 제론을 임명한다는 문서였고, 다른 하나는 제론이 젤레 영지에 부임한 해를 포함해
10 년 동안 세금을 면제한다는 명령서였다.
둘 모두 제론이 혁혁한 공을 세웠을 때, 받은 포상이었다. 사실 조금 더 힘을 썼으면 승작도 가능했다. 제론은
그 정도로 이번 전쟁에 굉장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제론이 포기했다. 승작 대신 본래 5 년이던 세금 면제 기간을 10 년으로 늘렸다.
이는 젤레 영지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향후 제론이 영지전으로 주변 영지를 병합하거나 혹은 돈으로 다른 영지를
산 경우, 그 영지에 관한 세금은 반드시 내야만 했다.
“알다시피 이제 전쟁이 끝난 거나 다름없네.”
사령관은 그렇게 말하고는 제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론의 표정이나 눈빛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물처럼 고요했다.
그 고요한 수면에 돌이라도 던지고 싶은 것인지 사령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자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을 정리해서 국왕 폐하께 올리기로 결정됐네.”
아주 중요한 말이었지만 제론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결정한 게 아니라 됐다고 하시는 걸 보면 상부의 압력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군요.”
폐부를 찌르듯 정확한 말에 사령관이 씁쓸하게 웃었다. 압력이 너무 심했다. 그동안이야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정보를 차단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게 불가능했다.
“폐하께 계속 감추는 건 반역의 의도가 숨은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는 마당이니 우리도 어쩔 수가 없었네.”
“괜찮습니다. 익히 예상했던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편의를 좀 봐주십시오.”
“편의? 뭔가? 뭐든 말만 하게. 다 들어주지.”
“제대일을 앞당겨 주십시오. 오늘로.”
“오늘?”
사령관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자신이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더구나 제론의 제대 신청서는 이미 총사령부로 들어갔다.
인가가 떨어지면 그때부터는 오로지 사령관의 재량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쯤 처리됐겠지?’
아직 모르니 일단 확인하고, 처리가 안 되었으면 서두르라고 재촉하면 그만이다. 얼른 처리하면 누가 태클을 걸
수 있겠는가.
“좋네. 자네는 지금부로 제대했네. 물품을 챙겨 나가도 좋네.”
제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군례를 취했다. 아마 사령관에게 취하는 마지막 군례가 될 것이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사령관도 일어나 최대한 정중하게 마주 군례를 취하며 대답했다.
“오히려 내가 고마웠네. 아, 이제 제대를 했으니 백작님이 되신 건가? 하하하.”
두 사람의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함께 죽음을 넘나든 전우만이 공유할 수 있는 눈빛이었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가슴에 주먹을 얹은 채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인사가 너무 길었군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사령관실에서 나갔다.
사령관은 제론이 밖으로 나갔는데도 한참이나 가슴에 얹은 주먹을 내리지 못했다. 아마 저런 라이더를 휘하에
두고 지휘할 일은 다신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쉬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뿌듯했다.

“예? 지금 가신다고요?”
세나와 바이스는 느닷없는 제론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요?”
“내 정보가 새기 시작했거든. 하루라도 빨리 피신해야 돼.”
“하지만 정보가 새기 시작했다면 여길 빨리 나가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내 영지에 있는 편이 무슨 일이 있든 대처하기가 훨씬 편해.”
세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반박할 말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반박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젤레 영지로 가는 겁니까?”
바이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군에 있는 3 년 동안 누구보다 많은 성장을 이뤘다. 일신의 마법 실력도 엄청나게
키웠고, 또 재물도 어마어마하게 모았다.
모든 것이 제론 덕이었다. 이제부터 그 보답을 할 차례가 되었다.
“저도 곧 제대하니 그리로 찾아가겠습니다.”
“저도요!”
제론이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전 제대하면 바로 가문으로 끌려가서 강제로 결혼하게 될 거예요. 그 재수 없는 놈 하고요! 선배님은 정말 절
그렇게 되게 내버려 두실 거예요?”
“3 년이나 지났는데, 그놈도 결혼하지 않았을까?”
“그놈도 아카데미 출신이라고요! 졸업 후에 군부에서 3 년 동안 굴러야 해요!”
“그렇군. 그럼 그놈은 이미 군부에서 나갔겠군.”
“제대하자마자 또 매파를 보낸 모양입니다.”
“그놈도 정말 어지간하네.”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바이스가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제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뭔가 딴 꿍꿍이가 있겠지.”
“예? 딴 꿍꿍이요?”
“벨루스 백작가와 손을 잡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잖아.”
“에휴. 선배님,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바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제론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슈린 공작가가 벨루스 백작가와 손을
잡으려는 이유는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을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바이스는 슬그머니 세나의 눈치를 살폈다. 한데 의외로 세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어쨌든 제대한 다음 바로 젤레 영지로 갈게요. 괜찮죠?”
제론은 특별히 거절할 명분도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저 세나가 조금 걱정될 뿐이었다.
제론의 눈빛을 느꼈는지 세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실 거 없어요. 저도 나름대로 충분히 준비를 하고 갈 테니까요. 다만…….”
세나가 걱정하는 건 벨루스 백작이 진짜 막무가내로 나올 경우였다. 여차하면 제론에게 영지전을 걸 수도 있었다.
딸이 걸려 있으니 명분도 훌륭하지 않은가.
제론이 세나의 머리를 헝클며 빙긋 웃었다.
“너야말로 걱정하지 마라. 영지전쯤이야 얼마든지 버틸 수 있으니까. 내 저력을 아직도 모르나?”
“아뇨. 알죠. 너무나 잘 알죠.”
세나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 어린 걱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제론도 더 이상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스스로 극복할 일이다. 괜히 참견해 봐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튼 난 이제 가 볼 테니, 너희도 슬슬 준비를 해 둬라.”
“예. 걱정 마십시오. 돈 잔뜩 들고 갈 테니까 환영 준비나 해 두시죠. 하하하하.”
바이스의 자신만만한 말에 제론이 빙긋 웃어 주었다.
제론은 두 사람에게 손을 한 번 가볍게 흔들어 준 뒤 밖으로 나갔다. 이별은 길어 봐야 좋을 게 없다. 어차피
조만간 다시 만날 테니까.
제론은 은밀히 움직여 인적이 없는 장소로 향했다. 젤레 영지는 중앙 유적을 둘러싼 황무지 바로 옆에 위치한다.
곧장 유적으로 이동하면 아주 빠르고 쉽게 이동이 가능했다.
만일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한다면 자신의 행적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제론은 인적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즉시 중앙 유적으로 이동했다.
사실 제론은 수도로 가서 승전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승전 파티에도 참석해 자리를 빛내야 한다. 하지만 제론은 그
모든 걸 거절했다.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제론은 중앙 유적 로비를 한 번 둘러봤다. 앞으로 이곳에서 주로 생활할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련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을 무한정 쏟기는 어렵겠지만.”
영지를 다스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리해야 할 서류도 엄청나게 많다. 그 모든 걸 하면서 유적의
수련까지 병행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희망에 불탔다. 아무리 그래도 아카데미에 있거나 군대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말이다.
로비에서 위로 슉 올라간 제론은 훨씬 더 심하게 파헤쳐진 유적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명했다.
“포로스의 비밀이 엄청나게 탐났던 모양이군.”
포로스에 대해서는 바이스 외에는 말한 적이 없지만 바이스도 가문의 힘을 빌리기 위해 그 비밀을 조금이나마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바이스가 알아온 정보에 따르면 슈린 공작가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유적의 유물을 다 모아 봐야 포로스의 비밀
하나보다 못하다. 포로스의 존재는 마법진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들 정도로 대단하니까 말이다.
제론은 각오를 다졌다. 아마 조만간 슈린 공작가가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포로스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놈들이었으니까.
“일단 힘을 키운다.”
당분간은 말레피 후작가가 막아 줄 것이다. 그들로서도 포로스의 제조법이 슈린 공작가로 넘어가는 상황이 달가울
리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슈린 공작가의 압박이 한계를 넘어서면 어찌 될지 모른다. 또 말레피 후작가도 완전히 믿어선 안 된다.
바이스는 믿어도 말레피 후작가는 믿지 않는다.
제론은 그렇게 마음을 다지며 유적에서 나갔다. 유적에는 남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미 파헤칠 대로
파헤치고 더 이상 나올 게 없다는 판단을 열 번이 넘게 한 뒤에 모두 철수한 것이다.
“여길 제대로 꾸며야겠군.”
이 유적을 개조해 영주성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큰 공사가 되겠지만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제론은 위풍당당하게 젤레 영지를 향해 걸어갔다. 가는 내내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가 더 이상 황무지로 보이지
않았다. 조만간 이곳은 황금빛 물결로 가득 찰 것이다.
그렇게 제론은 변방의 작은 영지, 젤레로 들어섰다.

Chapter 5 젤레 영지

젤레는 변방의 작은 영지였다. 처음에는 백작령이었는데, 갖은 풍파와 영지전을 거치면서 영지가 쪼그라들었다.
지금은 남작령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영지였다.
그렇게 쪼그라든 영지가 결국 왕국에 귀속되며 직할령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것이 벌써 100 년이 넘었다.
지금까지는 몇 명의 관리가 알아서 영지를 다스렸다. 어차피 중요한 영지도 아니었기에 관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영지가 굴러갔다. 당연히 비리도 많았다.
한데 영주가 부임한다고 하니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영주를 맞을 준비만 해도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한데 거기에 더불어 비리도 철저히 감춰야 한다.
“젠장, 통보를 이제야 해 주면 어쩌자는 거야!”
젤레 영지의 영주가 확정된 건 벌써 몇 년 전이라고 했다. 한데 그동안은 일언반구도 없다가 갑자기 새 영주
부임을 통보하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행정적 일 처리란 말인가.
젤레 영지의 모든 관리를 통솔하는 관리장 파울펠츠 준남작은 눈앞에 놓인 서류를 분류하면서 연신 투덜거렸다.
새 영주가 부임하니 인수인계를 준비하라는 통보를 오늘 아침에 받았다. 날벼락이었다.
확인해 보니 새 영주는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 귀족이었다. 또한 곧 전역할 예정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그나마 며칠이라도 시간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젤레 영지는 작았기에 텔레포트 게이트가 없었다. 가장 가까운
게이트도 꼬박 하루 거리였다.
파울펠츠는 텔레포트 게이트에 끄나풀 하나를 심어 영주가 도착하면 자신에게 곧장 연락하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다.
그래야 나중에 정 시간이 모자라면 손해를 좀 감수하고라도 비리를 감출 테니까 말이다.
“하여튼 속물들이야. 어차피 나중에는 다 쥐어짤 거면서 처음에 민심 좀 얻겠다고 비리 조사부터 시작하니, 원.”
보통 새로 영주가 부임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비리 척결이었다.
이는 향후 영지를 다스리는 데 걸림돌이 될 만한 것들을 치우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동안 관리에게 수탈당한
영지민에게 보여 주기 위한 쇼의 성격이 훨씬 짙었다.
또한 그렇게 한 번 분위기를 잡아야 관리를 손아귀에 넣어서 다루기가 편해진다는 점도 중요했다.
파울펠츠는 몇 번이나 새 영주를 맞이했기에 그들의 속성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번 영주는 좀 일찍 나가떨어졌으면 좋겠군.”
이곳 젤레 영지는 돈이 될 만한 것이 많지 않고 신경 쓸 일은 많았다. 그렇기에 부임한 영주마다 골머리를 앓다가
이내 포기해 버리곤 했다.
영지를 왕국에 반납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만일 어떻게든 끝까지 버티려고 하면
뭔가 사고가 터져서 목숨을 잃곤 했다.
파울펠츠는 이번 영주도 분명히 그렇게 될 거라 믿었다. 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스쳤다. 지독히도 잔혹한
미소였다.
이곳은 관리들에게 있어선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워낙 변방이었기에 감사도 거의 없었다.
가장 큰 문제이자 위기는 이렇게 영주가 새로 부임할 때뿐이었는데, 지금 비리로 끌려 들어가더라도 사실 큰
문제는 없었다. 사형당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어쨌든 안 걸리는 게 중요하지.”
파울펠츠는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분류한 서류를 한쪽으로 치웠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 서류 뭉치를 덥석 집어 들었다.
“누, 누구냐!”
파울펠츠는 너무 놀라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자신의 집무실이었다. 물론 조만간 영주의
집무실이 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자신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을 때는 누구도 안에 들이지 않도록 미리 명령을 내려 뒀다. 한데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아주 흥미로운 서류로군. 이런 걸 당당하게 서류로 만들어 보관을 하고 있었다니, 이거 담이 크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그, 그것을 이리 내라! 당장!”
파울펠츠는 그렇게 외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은 물론이고 동료 모든 관리의 비리까지 싹 정리된 거나
다름없는 서류를 낚아채려고 몸을 날렸다.
서류 뭉치가 위로 휙 올라갔다. 파울펠츠는 헛손질을 하며 허우적거리다가 꼴사납게 나뒹굴었다.
우당탕!
“크어억!”
파울펠츠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다가 독기 어린 눈으로 서류를 든 사내, 제론을 노려봤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이곳은 곧 백작님의 집무실이 될 곳이다! 너 같은
놈이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니란 말이다!”
제론은 파울펠츠의 말에 피식 웃어 주고는 계속해서 서류를 찬찬히 확인했다.
파울펠츠가 발악하며 외쳤다.
“밖에 뭣들 하는 거냐! 경비병! 경비병!”
잠시 후,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영주성을 지키는 병사 일곱 명이 우르르 들어와 창을 겨눴다.
“멈춰라!”
경비조장은 일단 그렇게 외친 뒤 상황을 살폈다.
제론은 가만히 서서 서류만 읽고 있을 뿐, 특별히 파울펠츠를 핍박하지 않았다. 그저 파울펠츠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뭔가 일이 있었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저놈을 당장 잡아라!”
경비조장이 파울펠츠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서류만 팔락팔락
넘기고 있었다.
“감히 이곳에 무단 침입한 놈이다! 어서 잡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
그제야 경비조장이 표정을 굳히며 제론을 향해 창을 겨눴다. 나머지 병사도 경비조장을 따라 일제히 창을 겨눴다.
파울펠츠는 그것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끄응.”
가만히 앉아서 오랫동안 서류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움직인 데다 바닥에 넘어지기까지 해서 그런지 욱신욱신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뭣들 하느냐. 그놈을 당장 꿇리지 않고!”
파울펠츠의 외침에 병사가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병사보다 제론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펄럭!
제론이 품에서 꺼낸 서류 한 장이 허공에 휘날렸다. 한쪽 끝을 잡고 있기에 날아다니진 않았지만, 활짝
펼쳐졌기에 누구나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타이밍이 워낙 절묘해 병사들은 미처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멍하니 서류를 쳐다봤다.
글을 아는 병사가 많을 리 없다. 이 방 안에서 글을 아는 사람은 제론을 제외하면 파울펠츠뿐이었다. 파울펠츠는
제론의 손에서 펄럭이는 서류를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파울펠츠의 몸이 사정없이 덜덜덜 떨렸다.
“여, 여, 여, 여, 영주님!”
제론이 씨익 웃었다.
“그래, 잘 아네. 이 서류는 고마워. 영지 운영에 아주 큰 참고가 되겠어.”
제론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다 물러가도록. 방 안에 있는 서류는 단 한 장도 건드리지 말고.”
파울펠츠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제론은 폭풍처럼 움직였다. 파울펠츠를 비롯한 모든 관리를 한방에 가둬 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서류를 몽땅
압수했다.
상식적으로 한 명이 그 모든 서류를 다 확인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제론에게는 태블릿이라는 사기에 가까운 아이템이 있었으니까.
모든 서류를 태블릿에 입력하는 데 걸린 시간이 제일 길었다. 서류가 워낙 많아서 그걸 한데 모으고 거기에
태블릿의 빛을 투영해 내용을 복사했다.
제론은 군대에 있는 4 년 동안 태블릿의 방대한 기능을 제법 능숙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서류를 몽땅 입력한 뒤에 그것을 분류하고 문제가 있는 걸 뽑아내는 건 제론이 거의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작업을 모두 끝내고 모든 관리의 비리를 샅샅이 정리한 제론은 여유롭게 집무실에서 나갔다.
영주성 내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새 영주가 도착한 뒤로 모두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지냈다.
모든 관리가 한데 갇혀 있다는 소문은 이미 전 영지를 뒤흔들고 있었다. 언제 자신도 같은 신세가 될지 몰라 다들
전전긍긍했다.
죄를 지었건 안 지었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영주가 벌을 주려고 마음먹으면 어떤 죄든 갖다 붙이기 나름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도 영주가 원하면 죄목을 붙일 수 있었다.
그래도 레늄 왕국은 그나마 다른 왕국에 비해서는 평민에 대한 처우가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변방 영지의 경우는 중앙 영지와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나가자마자 일단 병사부터 찾았다. 직할령의 경우에는 기사가 없었다. 기사는 부임하는 영주가 데려오는
것이 관례였다. 아니면 부임 후 차츰 영입하거나.
“그래도 병사는 제법 많군.”
영지의 인구에 비해 병사의 수가 많은 편이었다. 그 모든 것이 관리가 수탈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었지만,
제론은 병사의 수를 줄일 생각이 없었다.
향후 젤레 영지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그러면 인구도 급격히 증가할 확률이 높았다. 그때를 대비하면 병사를
더 늘리면 늘렸지 줄여선 안 된다.
제론은 영지를 크게 키울 자신이 있었다.
돈도 넘쳐났고, 기간트도 잔뜩 보유했다. 게다가 초고대 문명의 지식까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지를 키우지
못하면 그건 멍청이였다.
게다가 이제 며칠 더 있으면 아주 유능한 인재가 이곳에 온다. 그 둘이 도우면 훨씬 더 빨리 영지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일단 50 명의 병사를 차출해 끌고 영주성에서 나갔다. 제론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파울펠츠의
저택이었다.
“내가 보기엔 영주성보다 더 큰 것 같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
제론이 씨익 웃으며 함께 온 병사들에게 물었다. 다들 머뭇거리며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이라도
했다가 나중에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경험을 보면 관리에게 저항하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일이었다. 관리는 언제나 끝까지 살아남았다.
“자, 일단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다 압수한다.”
“예?”
제론의 명령에 놀라 병사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하지만 이내 그 병사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감히 영주의 명령에 한 글자이긴 해도 토를 달았으니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었다.
제론이 그 병사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뭘 그렇게 떨어? 안으로 들어가서 싹 압수하라고. 오늘부로 더 이상 파울펠츠 준남작의 재산은 없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검을 뽑아 문을 향해 가볍게 슥슥 두 번을 그었다.
쩌정!
그 거대한 문이 정확히 네 토막으로 잘라졌다.
꽈과광!
바닥에 쓰러지며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하지만 제론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흙먼지가 싹 날아갔다. 제론은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갔다.
병사들이 머뭇거리며 제론을 따라 들어갔다.
“무슨 일이냐!”
저택 안에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건 또 뭐야? 설마 사병을 키우는 건가?”
병사의 복장이 영지병과는 많이 달랐다. 훨씬 고급스러웠고, 또 들고 있는 무기도 좋았다.
“저놈들이 입은 옷과 무기도 싹 수거하도록.”
제론은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는 앞으로 성큼 한 발 내디뎠다. 그 순간 제론의 모습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쉬이익!
쩌저저저정!
어느새 제론은 파울펠츠의 사병들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리고 강렬한 기파가 사방으로 몰아치더니 모든 사병을
바닥에 눕혔다.
한 번 쓰러진 파울펠츠의 사병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통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뭐해? 무기 뺏고 옷 벗기지 않고!”
제론의 호통에 병사들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우르르 달려들어 사병의 무기를 빼앗고 옷을 벗겼다.
순식간에 발가벗겨진 파울펠츠의 사병은 사이좋게 정원 한구석에 밧줄로 꽁꽁 묶여 눕혀졌다.
제론은 그들에게 빼앗은 무구와 옷이 쌓인 모습을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느긋하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50 명의 병사는 그때부터 조금 더 당당해졌다. 영주의 힘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조금 더
용감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묘한 기대감이 싹텄다.
어쩌면 이번 영주는 이 영지의 썩어 빠진 관리를 몽땅 없애 버릴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 ☆ ☆

제론의 폭풍 같은 행보는 영지를 몇 번이나 들썩이게 만들었다.


일단 모든 관리의 재산을 압류했다. 관리들이 그동안 쌓아 둔 재산은 어마어마했다.
제론은 관리와 결탁해 비리를 돕거나 함께 가담한 자들의 재산도 압류했다. 다만 이때는 철저히 계산을 해서
그들이 비리로 해 먹은 금액만큼만 압류했다.
물론 그 금액도 엄청났다. 대부분 그렇게 한 번 털리고 나면 거의 거지꼴에 가깝게 변했다.
당연히 반발이 일어났다. 비리에 많이 가담해 해 먹은 게 많은 사람일수록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제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제론의 무력은 막대했다. 혼자 나선 제론을 아무리 떼로 몰려가도
어쩌지 못했다.
그렇게 비리를 저지른 자들의 재산을 한 차례 털어먹은 제론은 영지민을 달래기 시작했다.
영주성의 창고를 열어 일단 식량부터 잔뜩 풀었다. 한 끼라도 배불리 먹으라는 배려였다.
당연히 폭발적인 호응을 끌어냈다. 항상 배를 곯았기에 한 끼라도 푸짐히 먹으니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제론의 행보는 거기서 끊어지지 않았다. 비리 때문에 압류된 재산을 영지민에게 거의 무상에 가깝게 풀어 버린
것이다.
워낙 막대한 재산이긴 했지만 영지민의 수도 제법 많았기에 한 가구당 돌아가는 돈의 액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영지민은 모두 환호했다. 제론이 내려 준 돈은 가뭄의 단비 같았다.
그렇게 제론은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한 차례 어루만져 준 뒤, 영지민이 지속적으로 굶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바이스와 세나가 젤레 영지에 들어서면서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어떤 영지인지 알아야 향후 어떻게 제론을
도울지 계획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사람들 표정이 생각보다 밝은데? 좋은 영지인가 봐.”
“표정은 밝지만, 행색은 안 그런데? 나쁜 영지에 좋은 영주가 막 부임한 거지.”
세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네. 역시 제론 선배님이셔.”
“사람들 행색을 보니 정말 지독하게 당한 것 같은데 저런 표정으로 만들어 놓다니, 그것도 고작 며칠 만에.
확실히 대단하신 분이긴 해.”
“뭘 어떻게 하신 건지 궁금한데?”
“관리를 족쳤겠지. 그게 제일 쉽고 확실한 방법이니까.”
“한데 고작 그것만으로 사람들 표정이 저렇게 좋아졌을까?”
“글쎄. 자세한 건 선배님을 만나면 다 알게 되겠지.”
두 사람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사실 의문이 많았다. 비리 척결은 영주가 부임하면서 흔히 하는 민심 다스리기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민심을 되돌리는 건 쉽지 않았다. 특히 젤레 영지처럼 직할령이었던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다.
직할령의 관리는 모두 직접 국왕의 인가를 받고 등용된다. 즉, 국왕이 임명한 관리라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함부로 처벌하기가 까다로웠다.
물론 처벌을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결코 과한 처벌을 할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직위 해제와 감옥에 가두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영지민도 대부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몸으로 겪어서 안다. 그렇기에 더욱 절실하게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민심
수습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제론을 만나고 싶었다.
영주성에 도착한 두 사람은 정문 바로 옆에 붙은 공고를 볼 수 있었다.
“벌써 뭔가를 시작할 모양이네.”
공고를 발견한 바이스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어가 공고를 찬찬히 읽었다. 하지만 읽는 내내 바이스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이게 뭐지?”
“뭔데 그래?”
세나가 얼른 바이스 옆에 붙어서 빠르게 공고를 읽었다. 그녀의 표정 역시 읽으면 읽을수록 바이스와 비슷해졌다.
“이걸 정말 선배님이 쓰셨다고? 믿기 어려운데?”
“이 시국에 영지성 건설이라니.”
“그것도 황무지 한가운데 있는 유적을 개조해서 말이야.”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낭비하면 얼마 버티지 못해.”
바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제론이 무슨 생각으로 이 일을 진행하는지는 추측이 가능했다. 공사를 시작해서 영지에
돈을 풀겠다는 뜻이리라.
젤레 영지에는 딱히 돈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농사도 그저 그렇고 특산물도 없었다. 제법 큰 산맥이 옆에 붙어
있었고, 그래서 중요한 광산도 몇 개 있었지만, 이미 광맥이 말라 버린 지 오래였다.
게다가 산맥에 서식하는 몬스터 때문에 주기적으로 토벌해 주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 공사를 하려면 차라리 산맥으로 통하는 길에 방벽을 세우는 게 훨씬 낫다. 아니면 영지의 도로를
정비하거나, 수로를 만들어도 되고 말이다.
그런 다른 모든 일을 제쳐 두고 성부터 짓는다는 건 그 유적에 미련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선배님부터 만나는 게 낫겠어.”
“아, 그전에.”
세나가 서둘러 성으로 들어가려 하자, 바이스가 세나의 팔을 잡았다. 세나가 의아한 눈으로 바이스를 바라보자,
바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호칭을 달리할 필요가 있어.”
“호칭? 그게 무슨 상관이야? 군대에서도 그냥 선배님이라고 했는데.”
“그때야 상황이 특수했으니까. 우린 생각보다 많은 특혜를 받으면서 군부 생활을 했어.”
세나도 그 말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바이스의 보직 자체가 특수했고, 또 두 사람의 뒤를 받쳐 주는
가문, 특히 바이스의 가문인 말레피 후작가의 후광이 큰 영향을 미쳤다.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그렇게 편안한 군 생활을 하는 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유력 귀족의 자제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쩌자고?”
“앞으로 깍듯이 영주님이라고 불러.”
“영주님?”
세나의 표정에 불만이 잔뜩 어렸다. 선배님에서 영주님이라니, 너무나 극심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니면 백작님이라고 하거나. 에어스트 백작님.”
“뭐? 그건 안 돼!”
“그럼 영주님이라고 할 거야?”
“그, 그냥 제론 님은 안 될까?”
“당연히 안 되지. 우리가 그렇게 부르면 다른 사람이 영주님을 뭐라고 생각하겠어? 가장 가까운 우리가 먼저
권위를 세워 드리지 않으면 안 돼.”
“아아…….”
세나는 고뇌 어린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말 너무 싫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결정했으면 가자.”
바이스가 세나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오, 어서 와!”
제론은 두 사람을 정말 반갑게 맞아 주었다. 슬슬 혼자 일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던 시점이라서 그 반가움이 배가
되었다.
“왠지 반가운 느낌이 좀 다른 것 같지만 일단 그냥 넘어가죠.”
바이스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세나가 앞으로 나서서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전 언제든 팔 걷어붙이고 도와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요. 얼마든지 부려 먹어 주세요.”
제론은 그렇게 말하는 두 사람이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을 천천히 나누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었다.
“오, 이게 여기 지도인가요?”
바이스가 눈을 빛내며 집무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커다란 지도를 향해 다가갔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바이스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이내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이걸 누가 그린 겁니까? 이렇게 정교한 지도라니!”
바이스의 외침에 세나도 지도로 달려가 확인했다. 그리고 바이스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정도로 놀라운 지도였다.
마치 하늘에 떠서 그림을 그린 듯했다. 그것도 말도 못하게 정교한 그림을 말이다. 머리카락 한 가닥으로 그린
듯 어떤 부분은 눈을 크게 뜨고 봐야 선이 보일 정도였다.
젤레 영지를 비롯해 옆에 위치한 산맥과 황무지, 그리고 황무지 한가운데 있는 유적까지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주변 영지까지 자세히 나온 정말 굉장한 지도였다.
“이런 지도를 판매할 리는 없고, 젤레 영지에서 보유하고 있었을 리는 더더욱 없고…… 설마 선배님, 아니,
영주님께서 직접 그리신 건가요?”
세나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론은 두 사람의 너무나 격렬한 반응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원래 있던 지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교했다.
사실은 태블릿과 정보 수집 아티팩트인 마티를 이용해서 그린 지도였지만,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초고대 문명에 관한 것들은 혼자만 가지고 가야 할 비밀이었다.
“제법 정교하지?”
“그냥 정교한 정도가 아니에요! 전 이런 지도 처음 봐요!”
세나는 그저 호들갑을 떨 뿐이었지만 바이스는 깊은 눈빛으로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그는 제론이 말을 돌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굳이 부담스러운 얘기를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감추고 싶은 부분이 있는 법이니까. 아무리
제론과 친하다고 해도 그의 모든 걸 속속들이 알 필요는 없었다.
고작 그런 걸로 서로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건 확신했다.
“아무튼 그렇지 않아도 이걸 보면서 향후 영지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 마침 잘됐네. 너희도
한번 생각해 봐.”
제론의 말에 그제야 성문 옆에 붙어 있던 공고가 떠오른 바이스와 세나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선배님! 아니, 영주님!”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제론은 대체 무슨 일로 이러는지 궁금해졌다.
“왜?”
“굳이 지금 영주성을 다시 지어야 합니까?”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아, 그것 때문에 그랬군?”
제론이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자, 바이스와 세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쩌면 제론은 생각보다 훨씬 더
영지 경영에 재능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일단 영지에 돈을 좀 풀려고.”
“영지에 돈을 푸는 건 길을 닦아서 상단을 이쪽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해도 됩니다.”
“다른 상단을 끌어들이는 것보다는 상단을 새로 하나 만드는 게 더 빨라.”
“하지만 그러려면 상단을 통해 팔 만한 물건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영지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있다.”
“예? 있다고요? 그게 뭡니까?”
바이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상당히 많은 조사를 했다. 앞으로 제론이 몸담게 될
젤레 영지가 어떤 곳이며 어떻게 다스려야 키울 수 있을지 고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젤레 영지에서 딱히 뭔가를 내다 팔 만한 것은 없었다.
아니, 젤레 영지는 사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영지를 유지하며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지만, 뭔가 다른 일을 도모할 힘을 키울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이스가 생각한 방법이 바로 영지전을 통한 주변 영지의 통합이었다.
영지전을 거는 것 자체가 복잡한 일이긴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몇 가지 계략을 쓰면 주변 영지가
알아서 덤비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한데 제론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자신의 생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상단을 만들어 장사를 하겠다니. 그래서
언제 발전하고 언제 슈린 공작가의 마수에서 벗어나 복수까지 마무리하겠는가.
바이스가 답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제론이 빙긋 웃었다. 그의 마음이 아주 절절히 와 닿았다. 자신을 얼마나
생각해 주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식량.”
“예?”
“식량이요?”
바이스와 세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식량이라니. 젤레 영지에서 무슨 수로 식량을 내다 판단 말인가. 내부의
소비를 채우기에도 빠듯한 실정인데 말이다.
“아, 세금 중 일부를 내다 파실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상단을 만든다는 건 낭비입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역대 영주 중 아무도 그걸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차라리 상단 하나를 끌어들여 그들에게 파는 것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영주성을 완성하면 그 근방의 황무지를 기름진 땅으로 바꿀 방법이 있다.”
제론의 말에 바이스와 세나는 대꾸도 못하고 눈만 크게 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 황무지는 벌써
수백 년 동안 개간에 실패한 곳이다.
그곳의 개간이 가능했다면 대체 지금까지의 모든 영주가 왜 그 시도를 하지 않았겠는가. 물론 그 땅의 소유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 황무지는 젤레 영지를 비롯한 주변 영지에 일부씩 지분이 있었다. 그러던 것을 슈린 공작과 에어스트 백작이
유적 개발을 위해 싹 구입했다. 황무지였으니 당연히 헐값이었다.
한데 제론은 그 황무지를 옥토로 바꿀 방법이 있다고 한다. 그것도 영주성을 지으면 말이다. 이 말을 누가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선배님. 제 생각에 그건 절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영주님이라고 부르라고 한 게 자기면서. 아무튼 제 생각도 그래요. 그 땅은 개간이 불가능해요.”
제론은 두 사람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개간이 왜 불가능한지 알아?”
“그야 무슨 짓을 해도 작물이 자라지 않으니까요. 그곳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사막이나 다름없는
땅입니다.”
“왜 아무 작물도 안 자라는 걸까?”
“지력이 없으면 작물이 자라지 않습니다.”
너무 기본적인 것을 물으니 바이스는 점점 더 답답해졌다. 하지만 제론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반대로 지력이 너무 많으면 어떻게 될까?”
“예? 그, 그야…….”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지력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지력이 높은 땅에서 자라는 작물이 훨씬 풍성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한데 내 말은 지력이 그저 높은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경우를 말하는 거야.”
“글쎄요…….”
제론이 손가락 하나를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래도 작물은 자라지 않아.”
“정말입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렇게 작물이 안 자랄 정도로 지력이 높은 땅을 찾기가 쉽지 않아.”
“그렇군요. 한데 그 말씀은…….”
바이스는 등줄기에 소름이 오싹 돋는 느낌에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그 땅이 바로 그런 곳이야. 지력이 너무 높아서 작물이 아예 자라지도 않는 땅 말이야.”
“그게 정말입니까?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곳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가 더 중요하지.”
“하면 영주성을 세우신다는 건…….”
“그래. 영주성을 이용해 주변 지력을 흡수하는 거지.”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해. 그 덕분에 우리 영주성은 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될 거야.”
제론이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었다.
바이스는 그저 멍하니 제론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은 세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왠지 자신이 찾아오지 않았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건 아닌가 하는 자괴감까지 살짝 들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나타났던 것보다 훨씬 빨리 사라져 버렸다.
그런 게 어디 있는가.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자신의 힘이 아무리 미약해도 돕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영주성의 설계도를 볼 수 있겠습니까?”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 때문에 널 기다리는 중이었어. 영주성을 네가 책임지고 만들어 봐. 아마 큰 도움이 될 거야.”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진 종이 수십 장을 집어 바이스에게 내밀었다.
바이스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 한 장 한 장 소중히 살폈다. 그의 눈에 강렬한 빛이 맴돌았다. 설계도를
넘기는 손길이 점점 빨라졌다.
사락! 사락!
바이스는 설계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건 그냥 성의 설계도가 아니었다. 그저 그런 건축도면이 아니라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아니, 마법진의 향연이었다.
“이건…… 이건 아마 모든 마법사의 꿈일 겁니다.”
모르는 마법도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은 바이스도 익히 아는 마법이었다. 또한 몇 번쯤 구상하고 상상해 본 적이
있던 것이었다.
구조 자체가 거대한 마법진이 되고, 또 그 안에 작은 마법진을 무수히 깔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많은 편의를
제공하는 성이었다.
만일 바이스가 이걸 완성시킬 수 있다면 마법 실력이 최소한 지금의 두 배 이상 늘어날 것이다.
“정말…… 정말 제가 이걸 맡아도 되겠습니까?”
“그러려고 기다렸다니까? 그러니 부탁하지.”
바이스가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부탁이야 제가 드려야죠. 솔직히 저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선배님, 아니, 영주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아마 직접 지휘하시면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이스가 강렬하게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제게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론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아니야. 정말로 네가 적임자라고 판단했을 뿐이야. 난 나대로 또 할 일이 있고.”
바이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런 일로 대화를 이어 갈 필요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최선을 다해서 정말 멋진 영주성을 만들고 말겠습니다. 그런데…….”
바이스는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로 황무지에 지력이 넘치는 게 맞습니까?”
이 성은 설계대로 만들면 마력을 어마어마하게 먹는다. 그것도 꾸준히 공급해 줘야만 한다. 즉 그런 마력을
공급할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만일 황무지에서 그 마력을 모두 공급하지 못하면 큰 차질을 빚게 된다.
“그건 내가 장담하지. 걱정하지 마.”
제론이 이렇게 확신하는 건 모든 확인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유적 근방의 땅이 황무지로 변한 건 중앙 유적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고대 유적의 지하에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있을 확률이 높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고대 유적은 초고대 문명의 유적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해 움직였다. 하지만 고대 문명에서도 초고대
문명의 위치를 잡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어딘가에서 에너지가 흘러나온다는 것만 알아냈을 뿐이었다.
그 결과 생긴 것이 고대 유적이었다. 마법사든 아니면 귀족가의 가문이든 특별한 것은 반드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자리 위에서 만들었다.
하지만 중앙 유적의 경우는 그 에너지가 너무 강해서 문제가 되었다. 원래는 이곳의 유적도 훨씬 더 중요한
기능이 있었지만 그게 망가져 버리면서 에너지를 소모하지 못하고 방출하게 된 것이다.
제론이 설계한 성은 고대 문명에서 흔히 쓰던 방식 중 하나였다. 거대한 마법진으로 에너지를 흡수해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또 모아 뒀다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쓰는 방식이었다.
그런 설계도를 봤으니 마법사인 바이스가 느끼는 감정이 어떻겠는가.
‘무조건 지켜야 돼.’
제론에게 큰 비밀이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설계도를 뚝딱 만들어 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건 누가 봐도 황무지 중심에 있는 유적을 염두에 둔 맞춤 도면이었다.
직접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뿐인가. 포로스라는 신비의 물질 역시 제론이 만들었다. 그걸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있는가.
그런 걸 보면 분명히 제론에게 뭔가 비밀이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이스는 일단 모른 척했다.
또한 그 비밀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영주님, 저는요? 저는 뭐 할 일이 없을까요?”
세나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그런 세나를 보는 제론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제론이 씨익 웃었다.
마치 토끼를 눈앞에 둔 맹수 같은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세나는 긴장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원하던 순간이 오는 것인가 하는 기대감이 조금씩 피어났다.
“세나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지.”
세나는 몸을 파르르 떨며 제론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따라와.”
세나가 그 표정 그대로 제론을 따라갔다. 바이스는 그런 세나를 향해 힘내라는 듯 주먹을 꽉 쥐며 파이팅 포즈를
취해 주었다.
세나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이, 이게 뭔가요?”
“뭐긴. 보는 대로지.”
세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제론이 세나를 데려간 곳은 영주성 내에서 가장 큰 창고였다. 원래는 다른 목적으로 지은 곳이었지만 결국은 식량
창고로 쓰였고, 최근에는 아예 쓴 적이 없어 거의 텅텅 비다시피 한 곳이었다.
영지의 관리가 얼마나 안 되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제론 입장에서는 그래서 더 좋았지만
말이다.
“설마 이 기간트 다 선배, 아니, 영주님 건가요?”
“그래. 내가 뭘 부탁하려는지도 이제 잘 알겠지?”
세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흠칫 놀라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서, 설마 이 기간트를 몽땅 고치라는 건가요? 저 혼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 혼자서도 이 정도는 충분히 하잖아. 안 그래?”
제론은 붉은 실바를 군부에 남겨 두고 왔다. 그렇기에 세나가 할 일은 사실 없었다. 세나도 그걸 알기에 뭔가
다른 부분에서 도움을 주고자 나름 궁리를 해 왔다.
한데 지금 보니 그런 궁리를 할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냥 얼핏 보기에도 열다섯 기나 되는 거 같은데, 맞죠?”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교적 상태가 안 좋은 걸로 골랐으니 아마 세나가 놀랄 만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는 해 줘야 했다.
“다행히 기종은 전부 실바네요.”
세나는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돕겠다고 여기까지 왔다. 방금 전 기대했던 육체의 향연이 아니라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렇게 선배님을 도울 수 있으니까.’
세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좋아요! 맡겨 주세요! 제가 아주 새것처럼 만들어 놓을 테니까요!”
세나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서는 널브러진 기간트를 쭉 둘러봤다. 그리고 제론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가진 모든 실력을 다 발휘해서 고치면 되는 거죠?”
제론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돼. 이건 그저 보통 실바와 비슷하게 만들어야 돼.”
“마나 코어는 멀쩡한 거겠죠?”
“물론이지.”
마나 코어가 망가지면 아무리 세나라도 수리가 불가능했다. 그걸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제론이 유일했다. 그런
경우 차라리 내부의 진흙을 긁어내 포로스를 만드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알았어요. 맡겨 주세요.”
세나는 의욕을 불태우며 기간트에 달라붙었다. 장비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제론이 다 준비해 뒀으니까.
제론은 의욕에 불타는 세나를 보며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수리해야 할 기간트가 200 기 넘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떠올리니 미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도 할 일이 있지.’
제론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이곳을 지키려면, 그리고 자신을 믿고 온몸을 내던진 세나와 바이스를 지키려면
이대로 머물러선 안 된다. 훨씬 더 강해져야만 한다.
‘최대한 빨리 소드 마스터가 된다.’
현시대의 기준으로 하면 제론은 이미 소드 마스터였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마스터였다.
아마 대륙에 세 명 있다는 마스터와 비교해도 결코 꿀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압도할지도 모른다. 제론은 그
경지에 오른 뒤에도 몇 번이나 벽을 넘었으니까.
벽을 넘을 때마다 만일 황제 검술이나 마나 호흡을 몰랐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거라고 느꼈다.
다른 소드 마스터가 어떤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결코 그 벽을 간단히 넘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제론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그 벽은 너무나 높고 두터워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을 다 합해도 넘기 어려울 거라는 점을 말이다.
‘일단 테오스부터.’
제론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드러났다. 그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하지만 당장 유적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일단 지금은 영지 정비가 먼저였다. 관리부터 채우고 영지가 어느
정도는 돌아가게 만들어 놓아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관리들도 처리해야 하는군.’
재산을 압류하고 감옥에 가둔 관리를 처리해야 한다. 사실 원래는 그런 식으로 해선 안 된다. 엄연히 국왕이
임명한 관리이기 때문이었다.
제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은 어둡고 축축했다. 썩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런 곳에서 오래 지내는 건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제론은 일단 간수를 내보내고 혼자서 내려갔다. 감옥에 갇힌 죄인은 딱 열한 명뿐이었다. 다른 죄수는 몽땅
놔주고 관리만 잡아넣은 것이다.
물론 아무 죄수나 다 풀어 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제론은 나름대로 철저히 조사했다. 그리고 그 죄수가 모두
관리의 모함으로 인해 갇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연히 그 일에 가담한 관계자를 모두 처벌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처벌로 억울하게 갇힌 죄인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 줬다.
그리고 영주의 명으로 보상을 해서 마음을 달랬다.
그런 일이 있으니 영지민의 표정이 밝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해 준 영주는 처음이었다.
제론은 감옥 깊은 곳으로 들어가 철창 안에 옹기종기 앉은 관리들을 슥 훑어봤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딱히 체벌을 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버렸다. 이미 재산이 몽땅 압류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힘이 날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자신은 국왕이 직접 임명한 관리였다. 영주가 사사로이 처벌을
할 수 없었다.
재산도 분명히 다시 돌려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랬기에 버틸 수 있었다. 이 지독한 지하
감옥 생활을 말이다.
“제법 살 만한가 보군.”
제론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관리들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에 광기가 맴돌았다.
하지만 발작을 하지는 않았다.
“영주님. 이건 법을 무시하시는 처사입니다.”
“법을 무시해? 내가?”
“그렇습니다. 저희는 국왕 폐하께서 직접…….”
“아아,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는 나도 다 알아. 너희가 그런대로 버티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생각을 했지.
그래. 확실히 희망 하나로 버틸 만해.”
제론은 거기까지 말하고 관리들을 다시 한 번 슥 둘러봤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관리 입장에서는 어찌나 불길해 보였는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론이 천천히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철창 앞에 쫙 펼쳤다. 가까이 다가오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말이다.
“다들 글은 읽을 줄 알지?”
제론의 말에 불길함을 느낀 관리들이 앞다퉈 앞으로 기어 나왔다. 그리고 철창 앞에 펼쳐진 서류를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이, 이럴 수가……!”
“마, 말도 안 돼……!”
“어, 어찌 폐하께서……!”
그것은 허가서였다. 젤레 영지의 관리에 관한 모든 처벌 권한을 영주인 제론 폰 에어스트에게 허락한다는
문서였다.
제론은 이 허가서 한 장을 위해 포상을 두 개나 포기했다. 물론 전혀 아깝지 않았다.
“폐하 입장에서 너희는 그저 수천 명이나 되는 관리 중 한 명일뿐이야. 누가 가져가든 아쉬울 것 없는. 능력이
특별한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말한 제론은 허가서를 다시 품에 넣고 돌아섰다.
“이제 좀 더 절망하며 살아 봐. 지은 죄에 걸맞지 않게 희망을 품으며 살지 말고.”
제론은 냉정하게 감옥에서 나가 버렸다. 그 뒤로 절망에 빠진 열한 명의 죄인이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
소리를 귀담아 들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론은 관리에 관한 처리 사실을 확실히 공표했다. 영지민 사이에 남은 불안감을 완전히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그 뒤에 바로 새 관리를 모집했다. 물론 뛰어난 인재가 나타날 확률은 적었다. 하지만 인재가 없으면 숫자로
메우면 된다.
제론이 현재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아직 돈이 많이 남았다는 것과 그 돈을 아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젤레 영지가 차츰 자리를 잡아 갔다. 무지막지한 자금을 먹어 치우면서.

Chapter 6 유적 11 층

영지가 안정을 찾자마자 제론은 곧장 유적으로 향했다. 지금 그곳은 공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막대한 자재가 쌓였고, 인부들이 꾸역꾸역 모였다. 영지의 유휴 인력뿐 아니라, 인근 영지에서까지 사람이
모여들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서민의 생활이 조금씩 어려워졌다. 그 여파가 지금 나타나는 중이었다. 다들 배를 곯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밥 먹여 주고 돈까지 주는 일거리가 있다는데 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모든 일을 지휘하는 사람은 바이스였다. 또한 바이스는 임시로 젤레 영지의 재무관까지 맡았다. 제론은
바이스에게 200 만 골드를 맡겼다. 일단 그 정도면 당분간은 충분할 거라 판단했다.
또한 바이스가 가지고 있는 제론의 돈도 있었다. 당연히 포로스 판매를 통한 이익금이었다.
제론은 어느 정도 시간을 벌었다고 판단했다. 드디어 유적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이제부터 진짜 실질적인 힘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기간트였다. 조금 전 세나가 수리하고 있는 열다섯 기의 실바 옆에 부서진 카타락타 다섯 기를 새로
놓고 왔다. 세나의 한숨이 아직까지 들려오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정도는 있어야 최소한의 자구책을 마련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마 조만간 이 영지는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 영지의 적은 너무나
많았다.
일단 슈린 공작가가 있다. 그들이 그냥 손을 놓고 있을 리 없었다. 또한 세나의 아버지인 벨루스 백작이 있다.
그쪽도 분명히 뭔가 손을 쓸 것이다.
게다가 젤레의 주변 영지 역시 크게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전부 잠재적인 적이었다.
조만간 황무지가 옥토로 바뀌고 그 위에 황금빛 밀밭이 펼쳐지면 그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그 땅을 차지하려 할 것이다.
그 모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힘이었다. 힘을 가지고 있어야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이 유적 지하에 있었다.
제론은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유적 내부는 한산했다. 아직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사람이 들어올 일이 없었다.
하지만 조만간 이곳은 사람으로 꽉 찰 것이다. 유적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거대한 건물이 세워질 것이다. 또한
바닥 깊은 곳까지 파헤쳐져 지하로도 구조물이 착착 들어설 것이다.
예상 공사 기간만 무려 1 년이 넘게 걸리는 대공사였다. 하지만 무조건 해내야만 했다. 이 영지성은 앞으로
에어스트 백작가의 상징이 될 것이다.
제론은 팔뚝에 채워진 팔찌를 쓰다듬었다. 그것은 에어스트 백작가의 가보이자, 인장이었다. 또한 중앙 유적으로
들어갈 열쇠이기도 했다.
새삼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아네모스.”
휘류류류륭!
바람이 모여들어 정령이 되었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팔찌로 들어갔다.
제론은 그대로 순간이동해 중앙 유적 로비에 도착했다.
“후욱.”
심호흡을 한 제론은 눈을 빛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허리띠에 매달린 버클을 쓰다듬었다. 이 안에
테오스가 잠들어 있다. 주인이 자신을 불러 주기만 기다리면서.
오늘 드디어 테오스를 탈 시간이 되었다.
제론은 즉시 11 층으로 이동했다.

11 층은 거대한 공간이었다. 얼마나 거대하냐 하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천장도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거대한 바위가 있었고, 어딘가에서 물소리도 들려왔다.
“이건 마치…… 지하 유적이 아니라 어디 딴 장소에 와 있는 것 같군.”
놀랍게도 하늘에 태양이 떠 있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달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제론은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서 뭘 하라는 건지 파악하려고 애썼다.
쿵! 쿵! 쿵! 쿵!
어딘가에서 땅이 울렸다. 이건 명백히 거대한 물체가 다가오는 소리였다. 예를 들면 기간트 같은.
제론은 다급히 테오스를 소환했다. 이제야 이곳에서 뭘 할지 알 수 있었다.
“테오스!”
후아앙!
생각해 보면 테오스를 소환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론은 크게 당황했다. 그동안 겪은 다른 기간트와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소환과 동시에 탑승했다. 테오스는 마치 제론의 몸을 감싸듯 나타나 쭉 자라났다.
새까만 광택이 흐르는 몸체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테오스는 자신의 존재감을 사방으로 뿌리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테오스를 조종했다. 테오스의 조종 방식은 오로지 마나였다.
테오스의 마나 코어는 바로 라이더였다. 아니, 라이더와 조종석 자체가 마나 코어였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기반으로 몸체를 움직였다.
물론 테오스의 몸 곳곳에는 에너지 코어라 불리는 것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실질적인 에너지는 그곳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 에너지 코어를 활성화시키지 않으면 테오스를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이 바로 마나였다.
제론은 10 층에서 수련한 대로 마나를 뿜어냈다. 목을 움직이려면 목에서 마나를 뿜어내야 했고, 손을 움직이려면
손으로 마나를 뿜어내야 했다.
테오스를 제대로 타려면 마나를 얼마나 능숙하게 잘 뽑아내 다루느냐가 중요했다. 물론 기간트 센스는 필수였다.
몸의 움직임과 기간트의 움직임은 다르다. 테오스는 그것이 최소로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달랐다.
제론은 자신의 센스를 최대한 발휘해 테오스를 움직였다.
쿠웅!
첫발을 내디뎠다. 발을 타고 육중한 충격이 몸으로 스며들었다. 물론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땅을 밟았다는
감각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 감각이 온몸에 퍼진 제론의 감각을 짜릿하게 깨웠다.
달랐다! 다른 기간트와는 완전히 달랐다.
훨씬 섬세했고, 복잡했다. 움직임에 들어가는 집중력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예전에는 아예 불가능했던 동작이 가능해졌다. 관절도 훨씬 유연했고, 발상에 따라서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동작을 해낼 수도 있었다.
제론은 일단 테오스에 적응하려 애썼다. 점점 커지는 울림을 통해 짐작하건대,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후웅!
팔을 휘둘렀다. 팔뚝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옆의 거대한 나무를 후려쳤다.
꽈앙!
나무가 박살 났다. 그저 부러진 것이 아니라 팔뚝에 부딪힌 곳을 중심으로 거의 가루가 되다시피 했다.
나무를 부수는 감촉이 생생히 느껴졌다. 마나를 끊임없이 불어 넣어서 그런지 감각 하나는 정말 최고였다.
제론은 그 뒤로 몇 가지 동작을 더 했다. 기간트를 몰기 전에 기본적으로 하는 준비운동이었다.
그쯤에 땅울림의 정체가 드러났다. 거대한 오우거였다.
“크워어어어!”
양손을 크게 펼치며 포효하는 오우거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보통 오우거와는 완전히 달랐다.
보통 오우거는 신장이 5 미터 정도 된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오우거는 신장이 무려 10 미터가 훨씬 넘었다. 변종
오우거였다.
덩치도 크고 눈에 흐르는 흉광이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가끔 입에서 불길이 훅훅 나왔다.
“저놈이랑 싸우라는 거로군.”
제론은 긴장을 풀며 무기를 찾았다. 테오스에는 각종 아공간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제론은 능숙하게 허리춤의
아공간을 열어 검을 꺼냈다.
아공간을 여는 건 간단했다. 의념을 보내 정확한 위치에 마나를 흘려보내면 된다.
테오스가 오우거를 향해 검을 겨누자, 오우거가 본능적으로 먼저 덤벼들었다.
쿠웅!
오우거가 높이 점프했다. 거의 테오스의 두 배 높이였다. 육중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에 제론은 깜짝
놀랐다.
오우거가 깍지를 끼고 테오스의 머리를 후려쳤다.
꽈앙!
테오스가 간신히 팔을 들어 오우거의 공격을 막았다. 그 충격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제론은 본능적으로 그 충격을 싹 받아들여 몸을 한 바퀴 휘돌아 오우거에게 돌려주었다.
쩌엉!
“크어엉!”
오우거가 날아왔던 것보다 세 배나 빠른 속도로 나가떨어졌다.
콰과광!
바닥에 나뒹굴며 나무건 바위건 닥치는 대로 다 쓸어버린 오우거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달려갔다.
쿵쿵쿵쿵!
오우거의 두 주먹이 정신없이 몰아쳤다.
제론은 차분히 검을 들어 그 주먹을 막고 후려쳤다. 그리고 차근차근 오우거의 팔다리를 잘라 내고 목을 쳐 냈다.
그러자 오우거가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뭐야? 설마 환상?”
그럴 리가 없었다. 이렇게 생생한 환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쨌든 제론은 테오스의 상태를 세심히 살폈다. 확인은 간단했다. 온몸으로 마나를 흘려 보면 된다. 마나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은 곳에 이상이 있는 것이다.
고작 오우거 한 마리와 싸웠는데 이상이 있을 리 없었다. 제론은 상태를 확인한 뒤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을
점검했다.
테오스의 성능이 과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파괴력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엄청난 수준이 아니었다. 마나를 뿜어내 조종하는 제론의
실력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대에는 훨씬 못 미쳤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해도 테오스가 가진 기능은 정말로 엄청났다. 단적으로 오우거의 일격을 받아 그 충격을
증폭시켜 되돌린 그 기술은 정말로 엄청났다.
물론 제론이 기술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면 아예 사용이 불가능한 기능이긴 했다. 하지만 제론은 감각적으로 그
기능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갈고닦으면 실전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나저나 벌써 힘들군.”
가장 걱정했던 문제가 터졌다. 마나가 모자라는 것이다. 테오스를 움직이기 위해선 끊임없이 마나를 뿜어내야만
했다. 한데 그렇게 하기에는 마나가 너무 모자랐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익스퍼트인데도 그러했으니, 테오스를 제대로 쓰기 위해선 적어도 마스터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일단 마스터가 되면 몸에 쌓는 마나의 양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나지만, 마나를 다시 흡수해 보충하는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진다.
그때가 되면 다른 기간트를 타는 것처럼 테오스를 몰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무적이지.”
그때는 아무리 많은 적이 몰려와도 전혀 두렵지 않을 것이다. 테오스는 다른 기간트와 완전히 달랐다. 시야도
사방이 열려 있었다.
게다가 감각 자체가 달라서 누가 근처에 다가오면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파괴력인데, 왠지 거기에도 뭔가 답이 있을 것 같았다.
유적 11 층을 꾸준히 수련하다 보면 그 답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과 함께 마나가 바닥났다.
후웅!
테오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제론은 어느새 바닥에 서 있었다.
진한 아쉬움이 제론의 온몸을 휘감았다.

☆ ☆ ☆

벨루스 백작가는 폭풍 전야의 긴장감이 가득했다. 가주인 백작의 분노가 어디에 있건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이곳
가주의 집무실은 그 분노의 농도가 더더욱 짙었다.
“뭐라고? 어디?”
“젤레 영지에 계시다고 합니다.”
“젤레 영지? 그게 어디지?”
“전선과는 정반대 쪽에…….”
“그러니까 그 중간에 있는 우리 영지에는 아예 발도 안 들이고 바로 그리로 갔다 이건가?”
“그, 그렇습니다.”
보고를 하는 마틴 준남작도 죽을 맛이었다. 자기라고 이런 말을 하고 싶었겠는가. 언제나 좋은 소식만 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슈린 공작가에서는 어쩌고 있나?”
“그 정보도 슈린 공작가에서 보내 준 것입니다. 일단 지켜본다고 했습니다. 다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쾅!
“웃기는 소리! 도움? 누가 그따위 말을 듣고 오라고 했느냐!”
벨루스 백작 앞에 놓은 탁자에 쩍 금이 갔다. 백작은 익스퍼트에 이른 기사이기도 했다. 그의 주먹질이 평범할
리 없었다. 더구나 분노에 가득 찬 주먹질 아닌가.
“젤레 영지가 어디 붙어 있고, 어떤 놈이 영주인지 싹 알아와! 어서!”
“여, 여기 준비했습니다.”
마틴 준남작은 서둘러 품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최대한 싹싹 그곳의 정보를 모았다.
오래된 정보부터 최신 정보까지 전부 말이다.
서류를 한 장 한 장 읽던 벨루스 백작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 하나가 거기 적혀 있었다.
“제론 폰 에어스트?”
“현 영주가 그자라 합니다.”
“나도 읽어서 알고 있다. 한데 넌 이놈의 이름을 봤으면서도 내게 아무 말 안 한 것이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세나가 아카데미에 다니는 내내 쫓아다니던 놈이 바로 이놈이라는 사실, 정말 몰랐다고 하는 것이냐!”
마틴 준남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걸 자신이 어찌 안단 말인가. 하면 세나가 사랑을 좇아 젤레 영지로
갔다는 말 아닌가.
‘이런 상황인데도 슈린 공작가에서는 손을 놓는다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마틴 준남작은 일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금세 수긍했다. 어차피 이쯤 되는 고위 귀족 간에는 결혼도
정치의 연장에 있을 뿐이었다. 상대의 순결 같은 건 어차피 중요치 않았다.
그러니 그렇게 많이 바람을 피우고 결투를 하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면 이제 어찌할까요?”
“어쩌긴, 빼앗아 와야지.”
“직접 군대를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벨루스 백작가에서 작정하고 기사단을 보내면 젤레 영지 따위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 명분도 나쁘지
않다. 딸을 되찾기 위함이니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철사자 기사단이면 충분하겠지?”
“차고 넘칩니다.”
“네가 직접 그놈들을 데리고 다녀와. 정식으로 영지전 선포하는 것 잊지 말고.”
“염려 마십시오. 좋은 결과를 들고 오겠습니다.”
마틴 준남작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이런 일을 맡으면 떨어지는 부수입이 짭짤하다. 자그마치 영지전 아닌가.
‘잘하면 영지 하나를 꿀꺽할 수도 있겠어.’
마틴 준남작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영지전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절망해야 했다. 젤레 영지는 국왕의 칙령으로 3 년간 영지전 선포가 금지된 영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제론이 받은 포상 중 하나였다.
제론은 군대에 있는 4 년 동안 그야말로 무수한 공을 세웠고, 어마어마한 포상을 받았다.
사실 제론처럼 큰 적을 가진 사람이 변방의 작은 영지를 키우려면 걸리는 점이 너무 많았다. 제론은 포상을
이용해 그런 것들을 대충이나마 걸러 냈다.
결국 마틴 준남작은 다른 방식을 택해야만 했다. 물론 벨루스 백작에게 보고는 했다. 또 새로운 작전에 대한
허가도 받아 냈다.
그 뒤, 몇 가지 준비를 추가로 마친 마틴 준남작은 철사자 기사단을 이끌고 텔레포트 게이트를 탔다.

뤼그너 남작은 느닷없는 손님의 방문에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반갑습니다. 전 벨루스 백작님을 모시고 있는 마틴이라 합니다.”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이런 궁벽한 곳을 찾아 주시다니…….”
뤼그너 남작은 조심스럽게 마틴 준남작의 눈치를 살폈다. 대체 벨루스 백작가 같은 대영주가 자신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단 말인가. 그것도 기사단까지 대동하고 말이다.
“하하하. 그렇게 긴장할 것 없습니다. 그저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을 뿐이니까요.”
“작은…… 도움이요?”
“예. 아주 작은 도움입니다. 옆에 있는 작은 영지를 한 번 쓸어 오는 작은 일인데, 어떠십니까? 관심이
생기시는지요.”
“쓰, 쓸어 온단 말입니까?”
뤼그너 남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것을 본 마틴 준남작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어렸다.

☆ ☆ ☆

유적 11 층 역시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오우거 한 마리로 시작했지만 결국 두 마리, 세 마리로 늘어나더니 나중에는 수십,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게다가 처음 나왔던 오우거는 가장 약한 놈이었다. 나중에 나온 오우거는 설사 웬만한 기간트와 싸워도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
가끔 입에서 뿜어내는 불길은 아찔할 정도의 고열이었기에 자칫하면 크게 당할 수도 있었다.
물론 아무리 부서져도 테오스는 아공간에서 착실히 스스로를 고쳤다. 테오스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에너지뿐이었다. 그리고 에너지는 제론의 허리띠가 무한정으로 공급해 주었다.
제론은 다른 모든 것에 신경을 끊고 유적 11 층을 클리어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왠지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수백 마리 오우거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아무리 제론이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파괴력이 문제였다.
사실 제론은 테오스를 얻을 때만 해도 한 방에 수십 마리 오우거 정도는 날려 버릴 수 있을 줄 알았다. 한데 막상
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파괴력이 약한 건 아니지만 이대로는 좀 문제가 있었다. 그냥 보통 기간트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이건 초고대
문명의 기간트 아닌가.
게다가 보아하니 초고대 문명에서도 아주 특별한 기간트였다. 흔히 볼 수 있던 그런 기간트가 아니었다. 이건
초고대 문명을 통틀어 단 한 대만 존재하는 희귀품이었다.
그럼 뭔가 특별함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제론은 분명히 그런 것이 있다고 믿었다. 아직 자신이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것뿐이고 말이다.
어쨌든 11 층 공략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다만 공략을 하면 할수록 점점 마나량이 늘어나고, 또 테오스 컨트롤에
능숙해지면서 가동 시간이 훨씬 늘어났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오늘도 제론은 유적 공략에 실패하고 테오스의 가동 시간을 몽땅 쓴 뒤 로비로 올라왔다.
“후우. 이거 정말 힘드네.”
오늘 무려 100 마리가 넘는 오우거를 죽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어쩌면 수백 마리의
오우거를 다 죽여도 11 층이 끝날지 안 끝날지 알 수 없으니 아직도 까마득했다.
그래도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홀로 변종 오우거 수백 마리와 싸워서 그중 100 마리를 물리친 것이다.
변종 오우거 한 마리의 힘이 웬만한 기간트를 뛰어넘을 정도였으니 만일 테오스를 동원할 수만 있다면 어떤 전쟁에
나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테오스를 당장 꺼내서 쓰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테오스의 존재는 최대한 감춰야만 했다. 어쩌면 평생 감출지도 모른다. 그 존재를 감추고도 얼마든지 테오스의
힘을 이용할 방법이 많았다.
일단 테오스는 초고대 문명의 마법과 기술이 집약된 작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기간트가 가지는 한계나
약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예를 들면 아공간이 그렇다.
기간트를 아공간에 보관할 수 있다는 건 전술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가진다. 기동력이나 은밀함이 갖춰지는 것이다.
아공간에 담긴 기간트를 적 수도 한복판에서 꺼낸다고 가정해 보자. 단번에 적 중추를 아수라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전쟁의 승패가 갈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사실 가장 먼저 아공간 기술을 개발한 크란 제국의 경우
그것을 이용해 전쟁에서 승승장구했다.
당시 소왕국에 불과했던 작은 나라가 결국 제국이 된 것의 바탕에는 아공간 기술이 있었다.
그 이후 아공간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 결과 지금은 기사의 장비에 아공간을 담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크란 제국에서는 거대한 검에 아공간을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 한계는 좀처럼 부서지지 않았다.
아공간 기술이 발전하면서 함께 발전한 것이 바로 아공간 감지 기술이었다.
현재 각국의 주요 시설에는 아공간을 감지할 수 있는 마법진이 깔려 있다. 어떤 곳은 아예 아공간 자체가 출입을
할 수 없도록 결계를 쳐 버리기도 했다.
왕궁이 그러하다.
각 왕국의 왕궁은 아공간 마법이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아공간 자체를 일그러뜨리는 힘이 감싸고 있기
때문에, 아공간을 지닌 채로 들어가면 그 아공간이 사라져 버리거나 아니면 비틀려 아공간에 보관한 물건이
완전히 부서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론이 가진 아공간은 그 모든 법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초고대 문명의 아공간 기술은 현재 사용하는 아공간 기술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했다. 근본적인 법칙에서부터
달랐기에 그 어떤 기술로도 감지가 불가능했다.
그것은 고대 문명의 아공간 기술도 마찬가지였는데, 현재의 아공간 기술 자체가 고대 문명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엄청난 힘과 가능성을 가진 기간트가 바로 테오스였다. 그렇기에 테오스에 관한 비밀은 무조건 지켜야만
했다.
제론은 로비 바닥에 누운 채로 마나 호흡을 통해 체력을 보충했다.
엄청난 마나가 온몸으로 유입되었다. 최근 테오스를 조종하면서 마나에 관한 능력이 훨씬 높아졌다.
마나를 흡수하는 양이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또한 마나를 조절하는 능력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게 안
되면 테오스를 세밀하게 조종할 수 없으니 당연했다.
체력을 채운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적을 한 바퀴 둘러봤다.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또 이곳에서 각종 아티팩트를 얻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떨렸던가. 그 뒤로 이 유적은
제론에게 끊임없이 힘을 주었다.
“그리고 기간트까지.”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고 허리띠의 버클을 쓰다듬었다. 이 안에 잠들어 있는 테오스를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좋아. 그럼 가 볼까?”
제론은 주먹을 불끈 쥐고 유적에서 나갔다. 이제 또 현실과 부딪쳐야 할 시간이었다.

Chapter 7 주변 영지

제론이 젤레 영지에 부임한 지도 3 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젤레 영지는 정말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영지민의 생활이 급격히 나아졌다.
3 개월 동안 영지민은 끊임없이 공사 현장에 노동을 제공하러 나갔다.
별다른 일이 없었기에 농사를 짓는 인력과 상업에 종사하는 몇 명을 빼고는 다들 새로운 성채 공사에 동원되었다.
물론 자발적인 참여를 기본으로 했다.
하지만 웬만한 사람은 다 공사에 참여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일만 하면 밥도 주고 돈도 주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인근 영지에서도 일꾼이 몰려들었는데, 바이스는 그들도 결코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우해 주었다.
그렇게 사람이 모이니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벌써 기초공사가 끝나고 기둥을 올리는 중이었다. 이 성채는 일단 거대한 마법진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면이랑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선 안 된다.
그 때문에 바이스는 매일매일 머리를 쥐어뜯으며 마법진과 도면, 그리고 실제로 벌어지는 공사 현장을 확인하며
무진 애를 썼다.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지만, 이 공사가 끝나고 나면 자신의 마법 실력이 어마어마하게 높아질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 뒤로는 정말로 쉴 수가 없었다.
오늘도 유적 여기저기에 구멍을 뚫고 지반을 확인하고 땅을 파헤치고 하다 보니 하루가 다 가 버렸다.
“저걸 꼭 이용해야 하나?”
바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유적을 바라봤다. 멀리서 보면 마치 높은 언덕 같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커다란
입구가 보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미로 같은 통로가 쭉 이어져 있었다.
사실 바이스는 유적 옆에 성채를 세우고 싶었다. 어차피 성채를 이용해 마법진을 만들 텐데 굳이 유적을
이용하면서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한데 제론이 한사코 이렇게 하자고 우기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큰 공사가 될 것이다. 유적 위에 성을 쌓거나 아니면 성채를 어마어마하게 크게 만들어 유적
자체를 완전히 포함해 버려야 한다.
바이스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어차피 이 근방의 황무지가 몽땅 옥토로 변한다면 그야말로 왕국 최대의 곡창지대가 될 텐데, 아예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도시까지 설계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바이스가 한창 골머리를 싸매고 도면과 마법진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 옆으로 제론이 다가왔다.
“고생하는군.”
“아, 영주님.”
바이스의 입에서는 이제 너무나 자연스럽게 영주님이라는 말이 나왔다. 지난 3 개월간 노력한 덕분이었다. 물론
그것은 세나도 마찬가지였다.
“보아하니 기초공사가 끝난 모양이군.”
“네. 하지만 저 유적 때문에 문제가 상당합니다.”
“유적을 성채에 포함시키려는 모양이지?”
“딱 저 위치에 성을 세우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문제가 좀 있겠군.”
“예. 유적 일부를 무너뜨리고 내부에서부터 돌을 쌓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습니다.”
“기간트를 이용해도 쉽지 않을까?”
“기간트를 쓸 수만 있다면야 공사 기간을 대폭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이스가 의아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과연 기간트를 쓸 수 있느냐는 의문이었다. 기간트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탈 사람이 없다.
아직 젤레 영지에는 라이더가 없었다. 이제 차츰 라이더도 영입을 해야만 한다. 기사단 말이다.
“어떻게 할지 계획을 얘기하면 밤에 내가 처리해 놓지.”
“예? 영주님이 말입니까?”
아무리 기간트를 동원한다 해도 한 대로는 어림없었다. 이 유적은 그 규모가 상당했다. 최소한 기간트 열 대는
동원해야 원활히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데 그걸 혼자서 다 해내겠다니, 아무리 제론이라도 그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바이스는 일단 제론의 말대로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애초에 처음 성의 설계도를 만든 것이 제론이었기에
바이스가 하는 설명의 요지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이스는 유적의 중심을 도려내고 외곽을 잘 꾸며 성의 방벽으로 쓸 생각이었다. 겉의 흙을 걷어 내면 모양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가운데를 도려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었는데, 제론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내가 해결해 주지. 그럼 공사 기간을 얼마나 단축시킬 수 있겠나?”
“앞으로 6 개월이면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6 개월?”
기초공사에만 3 개월이 걸렸는데 남은 공사가 6 개월이라니 너무 짧게 잡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이스는 제론의 시선에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6 개월이면 충분합니다. 그 이후에도 힘쓸 일이 있으면 영주님께서 도와주실 것 아닙니까?”
제론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앞으로 최대한 도와주지. 그나저나 주변 영지 반응은 제대로 살피고 있나?”
“예.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변 영지는 계속 젤레 영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영지전 허가가 나지 않기에 트집을 잡아 공격할 수도
없어서 그저 지켜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물론 이곳이 왕국 최대의 곡창지대가 된다면 얘기가 많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은 자기의 영지민이 젤레 영지로 넘어가 일을 하고 오는 상황이지만 다들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젤레 영지에서 벌어오는 돈의 일부를 세금으로 받아먹고 있으니 솔직히 그들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거리의 부랑아들을 그쪽으로 은근슬쩍 내몰기까지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일석이조였다.
“이쪽으로 온 부랑아들이 안 돌아가는 경우도 많은가?”
“대부분 안 돌아가고 있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 이대로라면 영지에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바이스는 잠시 숨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공사장 주변에 천막을 치고 임시 거주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당분간은 문제가 없겠지만 날이 추워지면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하긴 이곳의 겨울은 제법 혹독하지.”
이곳은 왕국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겨울이 길지는 않았지만 강렬한 추위를 동반했다. 그 추위를 허술한 천막으로
막는 건 불가능했다.
“겨울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이제 두 달이 남았습니다.”
사실 벌써부터 기온이 살짝 내려가 쌀쌀해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버틸 만했지만 조금 더 지나면 견디기
어려워질 것이다.
“일단 알았다. 저들을 다 얼려 죽일 수야 없지. 어쨌든 소중한 우리의 영지민이 될 사람들인데.”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강렬한 눈빛으로 바이스를 쳐다봤다.
“일단 나중에 뒷말 나오지 않게 저 부랑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놔야 돼. 인근 영지에서 딴소리가 나오면
곤란하니까.”
“물론입니다. 조만간 서면으로 확답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바이스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 문제는 애매한 구석이 많았다.
돌아가지 않는 부랑아를 받아들이겠다는 건데, 타 영지에서 그들이 부랑아가 아니라고 우기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 문제까지 완전히 정해 놔야 하는데,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이 생겨 먹고 살 만해진 영지민을
가만히 앉아서 빼앗길 영주가 어디 있겠는가. 다 자신의 재산이나 다름없는데 말이다.
아무튼 제론은 그건 바이스에게 맡기기로 하고 오늘 밤 해야 할 작업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 혼자서 한다고 했으니 바이스가 기함하는 것도 이상할 것 없었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제론은 살짝
올라가는 입가를 억지로 제자리에 놓으며 버클을 쓰다듬었다.

그날 밤, 제론은 홀로 유적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까지 공사 현장을 지키는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만간 병력을 투입해 지켜야 할지도 모른다. 이곳이야 워낙 황무지 한가운데에 있어서 뭔가를 훔쳐
달아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부랑아를 위한 천막을 멀리 친 게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군.”
천막을 칠 때, 철저히 도시 계획에 맞게 위치를 잡았다. 성채를 위한 터나 수로 시설을 위한 길 위를 피해,
되도록이면 집터에 천막을 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공사 현장에서는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천막을 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문에 사실
부랑아나 그곳을 이용하는 일꾼의 불만이 제법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이스나 제론은 그 방식을 끝까지 고수했다. 사실 지금 천막을 친 곳에는 먼저 집을 지어 줄
것이다.
당연히 지금 천막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그 집을 내줄 계획이었다. 공짜는 아니었다. 하지만 꾸준히
일을 한다면 비록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어렵지 않게 갚을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이었다.
제론은 천막이 있는 쪽을 한 번 쳐다봤다. 거리는 상당했다.
성에서 가장 가까운 쪽의 터는 귀족을 위한 저택을 지을 것이고, 그 뒤에 바로 이어서 상점가를 만들 계획이었다.
영지민을 위한 집은 그 뒤부터 있었기에 거리가 꽤 멀었다. 그러니 멀다고 불만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제론은 일단 버클에 마나를 불어 넣으며 테오스를 불렀다.
“테오스.”
테오스가 소환되었다. 어느새 제론은 테오스에 탑승한 채였고, 훨씬 높아진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테오스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유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난 유적의 높이는 테오스의
다섯 배가 넘었다. 물론 가장 높은 곳이 그러했다.
이런 곳을 파내고 성을 세우고자 했으니 바이스가 난감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제론은 테오스를 몰고 유적 가장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곳에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검을 뽑았다. 아공간에서 거대한 검이 쑥 나타났다.
지잉!
검에 마나가 흘렀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마나의 날이 검신을 타고 흘렀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검을 바닥에 쭉 그었다.
서걱! 서걱!
바닥이 썩둑썩둑 잘려져 나갔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제론이 검을 몇 번 움직이기 무섭게 벌써 유적의
상층부는 사라지고 없었다.
제론은 그렇게 잘라 낸 잔해를 커다란 아공간을 열어 그 안에 담았다. 이건 나중에 또 유용하게 쓸 일이 있을
것이다.
제론에게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아공간이 있었는데, 모두 허리띠에 줄줄이 달린 아공간이었다.
하나하나의 아공간이 거대한 기간트를 넣고도 한참이나 남을 정도로 넓었는데, 그런 아공간이 허리띠에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제론은 그 모든 아공간에 유적의 잔해를 꽉꽉 눌러 채웠다. 거의 언덕 하나를 통째로 아공간에 담은 셈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제론은 유적 내부를 파냈다. 유적 내부의 기초공사도 필요했다. 아니, 가장 중요했다. 이곳이
바로 성의 지하가 될 것이고, 영주의 개인 연공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연공실을 만드는 것이 바로 목표였다. 제론이 굳이 유적 옆에 성을 만들지 않고 유적 자체를 성으로 만들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 이 성이 완성되면 언제든 원하는 때에 중앙 유적 로비로 갈 수 있게 된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론은 더욱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바닥이 잘려 나갔고, 땅이 깊이 파였다.

다음 날, 바이스는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어때? 이 정도면 됐나?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어느새 다가온 제론의 말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빠져 버렸다. 어떻게 하룻밤 만에 이런 거대한
공사를 끝낼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기간트를 움직인 것도 아니고…….’
만일 기간트를 움직였다면 들키지 않았을 리 없었다. 기간트는 그 크기만큼이나 소음이 엄청나다. 고작
발소리만으로도 한밤중의 적막을 깨는 데에는 충분했다.
“영주님, 이건 대체 무슨 마법입니까?”
제론이 씨익 웃었다. 더 이상의 대답은 필요치 않았다.
놀람을 뒤로한 채 다시 일을 독려하기 시작한 바이스를 두고 제론은 영지로 돌아갔다. 이렇게 시간이 났을 때
반드시 만나 줘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영지에는 활기가 넘쳤다. 돈이 풀리니 그 돈을 빨아먹기 위해 제법 많은 상단이 영지에 들어왔다.
상단이 많아지면 상거래가 활발해지고, 사람이 늘어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활기가 생겨났다.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가 어렸고, 또 조금씩 영지민의 생활이 윤택해졌다.
제론은 그 한가운데를 걸으며 씁쓸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전쟁 한 방이면 이 모든 활기가 싹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일단 전쟁을 피할 수는 없다. 슈린 공작이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다. 또한 벨루스 백작도 뭔가 수를 쓸
것이다. 그것이 전쟁으로 흐를 확률은 상당히 높았다.
어쩌면 이들은 이 터전을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 제론은 그 생각을 하며 그들을 지나쳐 성으로 향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성의 창고로 향했다.

창고 안에는 열다섯 기의 실바가 위풍당당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실바 옆으로 기사가 차는 장비 일체가
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제론이 창고에 들어서자, 세나가 깜짝 놀라며 달려왔다.
“영주님! 설마 또 일거리를 가져오신 거 아니죠? 이제 기간트는 끝났죠? 제발 그렇다고 말씀해 주세요!”
세나는 그야말로 기간트 다루는 솜씨가 일취월장했다. 연달아 몇 기의 기간트를 손봤는지 모른다.
실바 열다섯 기를 고치기 무섭게 카타락타 다섯 기를 넘겨주었고, 또 그것을 다 고치기 무섭게 몰레스 일곱 기를
놓고 나왔다.
세나는 지금도 몰레스를 다 마무리 짓지 못하고 이렇게 애쓰고 있었다.
“영주님, 한데 이 몰레스는 어떻게 하실 거죠? 아무래도 그냥 쓰기에는 좀 꺼림칙한데…….”
몰레스는 벨룸 왕국의 기간트이다. 비록 지금이야 전쟁이 끝났다지만 그걸 공공연하게 쓰는 건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걸 가져왔어.”
제론은 창고 한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세나는 설마설마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불안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지난번 몰레스를 내놓을 때도 딱 이 패턴이었다. 제론이 창고 한구석으로 가서 뭔가를 확 당기니 천 하나가
사라지면서 그곳에 부서진 기간트가 나타났다.
대체 언제 그곳에 그런 천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 창고 구석구석을 뒤졌다. 또 천에 감춰진
기간트가 있는지 몰라서 말이다.
하지만 찾아봐도 덮인 천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제론은 세나의 불안감을 채워 주려는 듯 창고 구석으로 가서 뭔가를 확 당겼다.
펄럭!
천 하나가 걷히며 그 안에서 부서진 크라테르 다섯 기가 나타났다.
세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간신히 끝이 보이고 있었는데…….”
세나는 절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하겠다고 했으니 끝까지 해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엔지니어로서 자신의 실력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벗어날 마음을 먹지도
못했다. 그것은 엄청난 중독성을 가져왔다.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성장하다 보면 그 성장 자체에 중독된다. 지금 세나와 바이스가 딱 그 상태였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벽을 만날 것이다. 그때부터는 극심한 슬럼프에 빠질 것이다. 그 슬럼프를 극복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쉬운 것이 근성이었다.
이렇게 성장에 중독되어서 애쓰다 보면 결국 근성까지 생긴다. 제론이 세나에게 원하는 건 이보다 훨씬 높은
경지였다. 세나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부탁해.”
제론이 세나를 슬쩍 끌어안아 주었다. 순간 세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금까지 제론이 자신에게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없어서 더더욱 그랬다.
제론은 세나를 한 번 그렇게 꼭 안아 주고는 떨어졌다.
세나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만 주세요! 제가 싹 고쳐 놓을 테니까! 얼마든지 더 가져오세요!”
의욕에 넘치는 세나를 보며 제론이 빙긋 웃어 주었다, 그리고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고는 창고에서 나갔다.

☆ ☆ ☆

“돈이 썩어 나는군.”
뤼그너 남작은 나직이 투덜거렸다. 바로 옆에 있는 젤레 영지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퍼붓고 있는지 알기에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어차피 다 남작님의 돈이 되지 않겠습니까?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마틴 준남작의 말에 뤼그너 남작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 썩어 날 정도로 많은 돈이 몽땅 자신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배가 불러왔다.
그 돈이면 더 이상 이런 궁벽한 곳에서 살 이유가 없었다. 당장 수도로 달려갈 것이다. 그곳에 그럴듯한 저택을
구입해서 떵떵거리고 살 생각이었다.
“계획은 얼마나 진행되었습니까?”
“일단 부랑아로 위장한 병사를 70 명쯤 보냈습니다. 조만간 100 명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훌륭하군요. 확실히 경험이 없는 영주라서 그런지 너무 어수룩합니다. 한 명도 잡아내지 못한 걸 보면 말입니다.
하하하하.”
마틴 준남작이 호쾌하게 웃었다. 계획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사실 마틴 준남작이 손을 뻗은 건 뤼그너 남작뿐만이 아니었다. 근방의 모든 영지에 손을 뻗었다.
제론이 가진 막대한 돈은 그들의 욕망을 건드릴 미끼로는 차고 넘쳤다.
슈린 공작가에서 파악한 제론의 재산만 해도 수백만 골드에 달하니 그걸 욕심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이런 변방의 작은 영지에서 말이다.
뤼그너 남작이 다스리는 이 영지의 1 년 세수가 고작 20 만 골드에 불과하다. 그러니 제론의 재산이 얼마나
대단한가. 뤼그너 남작이 탐을 낼만 했다.
젤레 영지와 맞닿은 영지는 모두 세 곳이었다. 마틴 준남작은 그 세 군데 모두와 접촉해 그들 모두를 움직였다.
물론 그중 가장 주가 되는 곳이 바로 이곳 뤼그너 남작령이었다.
“이제 슬슬 철사자 기사단의 힘을 보여 주셔야 할 때가 아닙니까?”
뤼그너 남작의 말에 마틴 준남작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닙니다. 철사자 기사단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합니다.”
“만일의 사태라 하심은…….”
“혹시라도 젤레 영지에서 폭동 진압에 기간트를 이용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 기간트요? 설마 젤레 영지에 기간트가 있겠습니까?”
기간트라는 말에 뤼그너 남작은 화들짝 놀랐다. 기간트라니 그게 갑자기 왜 튀어나온단 말인가. 이런 변방
영지에서 말이다.
1 년 세수가 고작 20 만 골드에 불과하다. 그중 절반 정도를 왕국에 세금으로 납부하고 나면 나머지는 고작 10 만
골드, 그걸로 1 년을 꾸려 가려면 그나마도 빠듯했다.
그러니 기간트를 보유한다는 건 사실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뤼그너 남작령에도 기간트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실전에서 과연 써먹을 수 있을지 확신도 서지 않는
낡은 실바 세 기에 불과했다.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제가 데려온 철사자 기사단이 어떤 존재인지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아아, 철사자 기사단이 있었군. 기억하다마다요. 정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뤼그너 남작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마친 준남작은 그런 뤼그너 남작의 인사를 당연하다는 듯 받았다.
철사자 기사단은 스무 명 전원이 기간트 라이더였다. 비록 카타락타이긴 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웬만한 영지의
전력으로는 결코 막아 낼 수 없었다.
“한데 과연 그들이 정말로 폭동을 못 막아 내겠습니까? 만일 막아 내면…….”
“폭동은 한 번만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부랑아들이 배고파서 일으킨 폭동입니다. 아마 모든 걸 파괴할 겁니다.”
뤼그너 남작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마틴 준남작은 그의 표정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그들은 무조건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폭동을 진압할 병력이 없으니까요.”
“하하하하! 아주 명쾌하군요. 한데 병력이 없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폭동이 일어날 때쯤, 젤레 영지에는 남은 병력이 없을 것입니다. 산맥에 몬스터 토벌을
하러 가야 하거든요.”
“아하!”
뤼그너 남작이 감탄한 얼굴로 무릎을 탁 쳤다.
곧 겨울이 온다. 몬스터는 겨울이 오기 직전 식량 문제로 한 번 준동을 한다. 그에 대한 대비로 가을쯤 몬스터
토벌을 한 번 해야만 한다.
산맥의 몬스터에 가장 피해를 많이 입는 곳이 바로 젤레 영지였다. 산맥이 닿는 영지는 젤레뿐이었다. 타 영지는
그렇게 젤레 영지를 한 번 거쳐서 오는 몬스터뿐이었기에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
보통 이 시기가 되면 몬스터 토벌을 위해 주변 영지에 도움을 청한다. 주변 영지도 몬스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일정한 도움을 줘 왔다.
한데 금년에는 영주가 바뀌고 관리를 싹 갈아 치우는 바람에 그 과정이 빠져 버렸다.
“용병을 잔뜩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돈이 많이 깨지겠군요.”
“돈이야 많지 않겠습니까? 어떤 용병을 구하느냐가 더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 시기에는 실력 있는 용병들이 이 근방에 많이 옵니다. 그들도 돈 벌 시기를 잘 알고 있는 것이지요.”
마틴 준남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이번에 젤레에서 구한 용병이 그냥 용병이겠습니까?”
뤼그너 남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면……!”
“이미 손을 써 놨습니다. 철사자 기사단 중 절반이 용병으로 변해 섞였고, 충분히 돈을 먹인 용병들이 젤레
영지에 잔뜩 모여 있습니다.”
짝! 짝! 짝!
뤼그너 남작은 크게 박수를 쳤다. 그의 표정에 어린 감탄이 사라질 줄을 몰랐다.
“정말 완벽합니다. 마틴 준남작님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아마 꿈도 못 꿀 것입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마틴 준남작은 자신을 찬양하는 뤼그너 남작의 말을 기분 좋은 표정으로 즐겼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한없이
음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다. 몇 달이나 기다리고 준비해 온 일을 말이다.

☆ ☆ ☆
제론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오늘 처음 느낀 게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조짐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그리
큰 느낌이 아니었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느낌이 강해졌다.
이건 예전 제론이 군대에 있을 때, 전투 직전에 느끼던 감각과 비슷했다.
“이곳에서도 마티를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좀 아깝군.”
정보 수집 아티팩트 마티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도 몇 개 쓰고 있긴 하지만,
그건 원래 것이 아니라 조금 개조해서 만든 전혀 다른 것이었다.
태블릿으로 조종하고, 정보 수집 범위가 그리 크지 않아서 제대로 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꼭 필요할 때
쓰기에는 아주 좋았다.
어쨌든 제론은 투기의 흐름을 느꼈기 때문에 영지전에 관해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변방의 영지라고 해도 3
년간 영지전이 금지된 젤레 영지에 전쟁을 걸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뭔가 다른 게 있다는 뜻인데…….’
제론은 그 기묘한 느낌 때문에 유적에 수련하러 가지도 못하고 영지 내를 서성였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니고 투기의 흐름을 쫓아가 봐도 별다른 점이라고는 영지에 용병이 많아졌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용병이 늘어나서 그런가?’
용병은 기본적으로 전투와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직업이었다. 당연히 가만히 있어도 끊임없이 투기가 흘러나왔다.
그렇기에 서로 싸우는 일이 잦은 것이다.
일단 투기의 흐름에 항상 끼어 있는 존재가 바로 용병이었기에 그 흐름을 완전히 파악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하도 복잡하게 얽혀서 그걸 일일이 풀어내려면 밤을 새도 모자랐다.
제론은 일단 용병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다시 영주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관리를 찾아갔다.
“여, 영주님!”
관리는 제론을 보자마자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그가 전임 관리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잘 알기에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는 압박을 받은 것이다.
“영지에 용병이 많이 늘었는데, 알고 있나?”
“무, 물론입니다!”
관리는 크게 대답했다. 그리고 즉시 설명을 덧붙였다.
“조만간 로트 산맥에 몬스터 토벌을 하는데, 그 때문에 모인 자들입니다.”
“로트 산맥?”
로트 산맥을 제론이 모를 리 없다. 영지에 붙은 산맥 아닌가. 광맥이고 뭐고 다 말라붙어서 거의 쓸모가 없는
산맥이었기에 더 잘 알고 있었다.
“난 몬스터 토벌 계획을 세운 적이 없는데?”
“매년 그렇게 해 왔기에 다들 또 하나 보다 생각하고 온 모양입니다. 사실 저도 아직 영주님께서 명령을 안
내리셔서 계획을 유보 중이었습니다.”
“계획서는 만들었나?”
“예. 여기 있습니다.”
관리는 즉시 미리 준비한 계획서를 꺼내 내밀었다. 어차피 매년 하는 일이었기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미리
보고서를 작성해 두었다.
“돈이 제법 많이 들어가는군.”
“1 년 예산에서 가장 많이 들어가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토벌하지 않으면 겨울부터 봄까지의 피해가 너무
극심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법 잘 정리된 보고서였다. 제론은 차근차근 보고서를 읽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제론이 막 부임한 영주라는
것을 감안해 최근 5 년 동안 어떤 식으로 토벌을 했는지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그걸 보고 나니 왜 몬스터 토벌을 하고, 얼마나 돈이 들고, 또 금년에는 어떤 식으로 하는 게 좋은지
일목요연하게 착착 정리되었다.
“토벌을 하긴 해야겠군.”
제론은 보고서를 다 읽은 후, 그것을 들고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일단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묘한 예감이 들었다. 자신을 노리는 자들이 이번 로트 산맥 토벌을 그냥 지나 보낼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최근 느끼던 투기의 흐름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또 대처법을 마련해야만 했다.
바이스와 세나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지금 맡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 상황이었다.
이 일은 온전히 제론 혼자서 해결해야만 했다. 물론 자신 있었다.
제론이 밖으로 나가자, 그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던 관리가 허물어지듯 주저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아! 죽는 줄 알았네.”
그렇게 잠시 앉아서 한숨 돌린 관리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신입 관리로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제론
영지는 서류상으로 손볼 곳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비리로 얼룩진 영지였으니 너무나 당연했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만들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보람이 느껴졌다. 일에 열중하는 관리의 표정에 어느새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론은 집무실에 앉아 보고서를 다시 읽으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기본적으로 제론은 감이 뛰어났다. 지금까지 그 감이 아니었다면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다. 한데 그
감이 맹렬히 경고를 내보내고 있었다.
제론은 그동안 주변 영지에 대해, 또 자신을 노리는 자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입장을 바꿔서 자신이 적이 된다면 이 영지를 어떻게 노릴까 고민해 보니 답이 금방 나왔다. 빈틈이 너무 많았다.
그 모든 빈틈을 짧은 시간 동안 전부 메울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적이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빈틈을 선택해서
대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처리하는 수밖에.’
지금으로선 방법이 그뿐이었다.
제론은 버클을 쓰다듬었다. 금세 마음이 든든해졌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져도 테오스가 있으니 웬만한 일은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테오스를 쓴 이후의 파장도 충분히 고려를 해야 하지만 급하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제론은 주변 영지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놔둬 봐야 계속 해악만 끼칠 것이다. 성채가 완공되어
황무지가 옥토로 바뀌고 나면 훨씬 지저분하게 나올 공산이 컸다.
그전에 모든 상황을 마무리하는 것이 속 편했다. 문제는 어떻게 정리하느냐였다.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론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Chapter 8 로트 산맥 토벌

드디어 젤레 영지에 용병 모집 공고가 붙었다. 성문 옆에 붙은 공고를 읽고자 수많은 용병이 모여 몸싸움까지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공고를 모두 읽은 용병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예상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보수가 좀 짠데?”
“그러게. 이 정도 돈을 받고 목숨을 걸기에는 좀…….”
“이번에 새로 부임한 영주가 돈이 많다는 소문에 기대했는데, 이건 뭐, 너무한데?”
“돈 많은 놈이 더 아끼는 법이지. 특히 우리 같은 용병 나부랭이의 목숨을 누가 생각해 주겠어?”
“그래서 어쩔 건데?”
“포기해야지. 이 돈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못해.”
“로트 산맥 몬스터는 질기기로 소문난 놈들이야. 나도 이 정도 돈으로는 안 돼.”
공고를 읽은 대부분의 용병은 비슷한 말을 했다. 이 정도 보수를 받고 일하느니 차라리 옆 영지로 가서 운송
일이나 거드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러고 보니 이 영지 옆에 있는 황무지에 새로 성채를 짓는다고 하던데, 거긴 사람이 필요 없으려나?”
“왜? 막노동이라도 하게?”
“아니, 자재를 지킬 사람도 필요할 거 아냐? 혹시 알아? 용병으로 그 자리를 채울지?”
“너 같으면 용병한테 그런 걸 맡기겠냐?”
“안 맡기지.”
“크하하하핫!”
그렇게 한동안 떠들던 용병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일부는 옆 영지로 넘어갔고, 또 일부는 다른 일을 찾아보겠다고
수도 쪽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렇게 젤레 영지에 모였던 용병이 조금씩 흩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떠나지 않은 용병이 제법 많았다.
그리고 제론은 그들을 주시했다.

“정보가 너무 모자라.”
제론은 최근 정보의 부족을 실감했다. 군에 있을 때는 체른산 유적에 있는 정보 수집 능력을 잘 이용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걸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정보 수집에 문제가 컸다.
“마티가 필요해.”
정보 수집 아티팩트인 마티가 절실히 필요했다.
체른산 유적에 있는 마티는 지금도 꾸준히 정보를 보내고 있었다. 어디든 제론이 원하는 곳에서 체른산 근방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그 한계가 너무나 뚜렷했다. 사방 100 킬로미터 안의 일은 마음만 먹으면 뭐든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마티는 100 킬로미터 밖을 넘어갈 수 없었다.
통제실에서 마티를 제어할 수 있는 거리적 한계가 딱 100 킬로미터였다.
제론은 문득 왜 중앙 유적에는 마티 같은 아티팩트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른산 유적에 갔을 때를 생각하면 중앙 유적의 주인인 자신을 즉시 마스터로 받아들였다. 즉, 중앙 유적이 모든
유적의 중심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중앙 유적에도 마티와 같은 아티팩트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대단한
아티팩트가 있을 수도 있었다.
제론이 용병의 보수를 낮게 책정한 것은 그럼에도 남는 용병을 감시하고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는데, 막상 일을 벌이고 나니
그들을 감시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하긴, 마티가 있었다면 굳이 이런 방법을 쓸 필요도 없었겠지.”
마티를 이용하면 영지 내부의 정보는 물론이고 인근 영지의 정보까지 싹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이 벌이는 음모
따위, 샅샅이 파헤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티가 없었다. 제론은 정보가 막힌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절감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신했다. 용병에게 누군가 수작을 걸었다. 그 박한 보수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수의 용병이
이번 로트 산맥 토벌에 참가 신청을 했다.
제론은 이번 로트 산맥 토벌과 동시에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그게 무엇이든 젤레 영지에는 치명적인 일이
될 것이다.
영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막아야만 했다. 그러려면 적이 무슨 일을 꾸몄는지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래저래 또 정보로 귀결되는군.”
결국은 정보였다. 뭔지 알아야 대처를 할 것 아닌가. 제론은 일단 최대한 머리를 굴려 보았다. 예상한 것 중
하나는 부랑아를 이용한 폭동이었다.
로트 산맥 토벌과 맞물리면 그 일은 상당한 파괴력을 낳는다.
산맥의 몬스터를 토벌하기 위해서는 병사를 잔뜩 내보내야만 했다. 현재 젤레 영지에는 기사가 없다. 기사도 없는
마당에 병사를 아끼면 몬스터 토벌은 불가능했다.
기사를 모으는 게 시급했다. 또한 라이더도 양성해야만 했다. 기간트는 있지만 라이더가 없는 상황이었다.
충성을 바칠 라이더를 먼저 양성하지 않으면 곤란했다.
“급한 대로 한 명만 있어도 좋을 텐데…….”
제론이 나직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똑똑!
제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문을 열었다. 보통 영주는 시종을 두는 법이지만, 제론은 시종을 두지 않고 대부분
직접 일을 처리했다.
문을 여니 집사가 서 있었다.
“영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예. 일단 응접실에 모셔 뒀습니다.”
집사의 차분한 말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로 가도록 하지.”
딱히 할 일도 없이 머리만 복잡했는데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한 제론은 즉시 응접실로 향했다.
만일 주변 영지에서 찾아온 사람이라면 그들의 속이라도 떠볼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내심 기대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응접실에 들어간 제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트!”
“하하! 제론!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니지?”
카이트는 그렇게 말하며 다가가 제론을 힘껏 끌어안았다.
잠깐 해후의 기쁨을 나눈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제론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여긴 웬일이야? 이렇게 갑자기.”
“자리 하나 있으면 얻으려고 왔지.”
제론이 어이없는 눈으로 카이트를 쳐다봤다. 카이트는 진급에 진급을 거듭해서 이대로 조금만 더 버티면 사령관
자리에 앉을 가능성도 있었다.
한데 그 모든 걸 내던지고 이런 궁벽한 시골 영지로 오다니 제정신이라면 뭔가 사고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솔직히 말해. 무슨 일이야?”
카이트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어. 그저 너와 함께하고 싶었을 뿐이야.”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안 믿으면?”
“앞으로 1, 2 년 더 버티면 부사령관은 문제없어! 그리고 거기서 5 년 정도만 자리를 지키면 사령관도 할 수
있다고! 한데 그 모든 걸 버리고 나왔다고?”
“어차피 내 힘으로 얻은 자리도 아니잖아?”
카이트의 말에 제론이 입을 꾹 다물고 카이트를 노려봤다. 카이트는 그런 제론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넘기며 말을
이었다.
“네 공에 힘입어 올라간 자리야. 거기 안주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네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어.”
“물론 노력이 중요하지. 하지만 나만 노력했나? 다른 라이더는 노력 안 한 것 같아?”
“그래서 그게 불만이라는 거야?”
카이트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오히려 고마운 일이지. 덕분에 돈도 제법 벌었거든. 이번 전쟁 포상금으로 얼마나 받았는지
모르지?”
카이트는 얼굴에 어린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제 슬슬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때? 무슨 때?”
“은혜를 갚을 때.”
“은혜?”
“내 목숨을 구해 줬잖아. 그거 갚아야지. 안 갚으면 아마 평생 잠자리가 불편할 것 같아서 못 견디겠더라고.”
제론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카이트를 쳐다봤다. 전장에서의 목숨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제론도
카이트로부터 목숨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쨌든 자리 있지? 설마 없는 건 아니겠지? 말석 기사라도 좋으니까 자리 하나 줘.”
제론이 피식 웃었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는가. 마침 라이더가 필요했다. 마침 기사가 필요했다. 한데 마치
연극 대본이라도 쓰는 것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이 등장했다.
“자리야 많지.”
카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정중히 군례를 취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영주님.”
너무나 정중한 말과 태도에 제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카이트는 카이트였다.
그런 제론을 보며 카이트가 씨익 웃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설마 정말로 말석 기사 자리는 아니겠죠? 하하하하.”
결국 제론도 피식 웃고 말았다.

제론은 일단 카이트를 창고로 데려갔다. 당연히 세나가 기간트를 수리하는 창고였다.


창고에 들어선 카이트는 상상 이상의 광경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게 대체 몇 기야?”
일단 보이는 건 열다섯 기의 실바가 전부였지만, 그 옆에 놓인 기사의 장비를 카이트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쓰던 종류의 장비도 있으니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당연했다.
“저건 크라테르로 보이는데, 아닙니까?”
카이트는 제론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일단 제론의 기사가 되기로 한 이후, 카이트는 항상 제론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언제나 정중히 말했고, 자신이 아랫사람이라는 걸 항시 강조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제론은 그것이 카이트답다고 여기면서 한편으로는 예전의 그 살가운 관계가 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말투가 달라졌을 뿐, 사람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카이트는 여전히 제론의 가장 중요한 전우 중 한
사람이었다.
“어? 카이트 님?”
카이트는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그제야 고개를 돌려 세나를 확인했다.
“누가 이렇게 정비를 확실하게 해 놨나 궁금했는데, 역시 그랬군.”
카이트가 이제야 수긍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는 군부에서도 상당히 주목받는 엔지니어였다. 그녀가 일단 한 번 손대면 헌 기간트도 새 걸로 변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여긴 웬일이세요?”
“여기서 기간트 좀 타려고.”
“예? 정말요?”
“왜? 안 돼?”
“그럴 리가요! 카이트 님이라면 아마 우리 영지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나저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사령관,
되고 싶어 하셨잖아요.”
카이트가 씨익 웃었다.
“그보다 좀 더 괜찮은 꿈을 발견했거든.”
말을 잇지 못하는 세나를 향해 한 번 더 웃어 준 카이트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쓸 만한 기간트도 있나?”
“물론이죠!”
세나는 막 수리가 끝난 기간트 장비를 내밀었다. 그러다가 아차 하고는 제론을 바라봤다.
여기 있는 모든 건 엄연히 제론의 것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카이트에게 기간트를 내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나가 움찔해서 눈치를 살피자,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솔직히 그 정도는 알아서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세나에게는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받으세요!”
세나가 힘차게 말했다. 카이트는 그 장비를 받으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세나의 정성이 장비 곳곳에서 느껴졌다.
아마 이 안에 잠들어 있는 기간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거 정말 내가 받아도 되나?”
크라테르가 들어 있는 아공간이었다. 장비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크라테르는 상당히 비싼 기간트였다.
“물론이죠! 카이트 님이 아니라면 누가 이 기간트를 몰겠어요?”
“그 말이 맞아. 일단 그걸 쓰도록 해. 나중에 내가 훨씬 좋은 기간트를 구해 줄 테니까.”
크라테르보다 훨씬 좋은 기간트라는 말을 들으려면 최소한 발굴형 기간트는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발굴형
기간트는 크라테르 같은 양산형 기간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기간트도 생겼으니 기동 훈련이라도 좀 하고 싶은데, 마땅한
장소가 있습니까?”
카이트의 말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기동 훈련 겸해서 몬스터 좀 잡아 보지 않겠어?”
“몬스터 말입니까?”
카이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몬스터를 잡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갑자기 제론이 이렇게
부탁을 하는 건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고. 기간트도 받았으니까.”
제론은 카이트를 데리고 창고에서 나갔다. 물론 나가기 전에 세나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나는 한동안 광분해서 일을 해 줄 것이다.
제론은 창고를 나서며 좀 더 체계적으로 기간트를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이야 세나가 알아서 다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뭘 하든 사람이 필요하군.’
인재가 너무나 모자랐다. 하지만 구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다. 문제는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앞으로 젤레 영지는 엄청난 발전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발전의 기반에는 초고대 문명의 기술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걸 외부로 반출시키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어야 다른 사람과 함께 일을 진행할 수 있다.
제론은 창고에서 나와 집무실로 향했다. 일단 가장 믿을 만한 장소가 거기였다. 몇 가지 마법을 이용해 소리를
차단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 영지가 처한 상황을 말해 주지.”
제론은 차분히 젤레 영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는 내내 카이트의 눈이 반짝였다.
모든 설명을 들은 카이트가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맡겨만 주십시오. 용병 쪽에서는 그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게 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야. 일단 당분간 넌 용병 행세를 했으면 좋겠어.”
카이트의 눈이 커다래졌다. 하지만 이내 그 의미를 파악하고는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이 장비가 너무 튀지 않을까요? 누가 봐도 기간트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조금 바꿔야지. 아마 웬만한 눈썰미로는 알아보기 어렵게 될 거야.”
제론의 말에 카이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쟁이 끝나며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또한 제론을
찾아오면 이 감정을 다시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기도 했다.
바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카이트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의 분위기에서 벌써 피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 ☆ ☆

로트 산맥 토벌의 날이 밝았다. 수많은 용병이 영주성 앞에 모였다. 이번 토벌에 참가 신청을 한 용병의 수는


모두 200 명이나 되었다.
“뭐야? 아직 아무도 없는 거야? 모이라고 해 놓고 이거 뭐 하자는 거야?”
용병 중 하나가 불만을 토해 냈다. 영주성 앞에는 용병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용병 사이를 웅성임이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성문이 천천히 열렸다.
열린 성문으로 열 명의 병사가 나왔다. 그게 끝이었다.
용병들은 어이없는 눈으로 열 명의 병사를 바라봤다. 이게 뭐 하자는 건가. 그들이 알기로 젤레 영지의 병사는
500 명이나 된다. 한데 그 모든 병사를 두고 고작 열 명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책임자는 어디 있는 거요!”
용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그러자 병사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선임 병사였다.
“내가 책임자요.”
용병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런 애송이 병사를 책임자로 두고 몬스터 토벌을 보내려 하다니,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란 말인가.
“기사님이 나서야 하는 것 아니오?”
최소한 기사는 되어야 책임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선임 병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소. 그리고 우리 영지에는 기사가 없소.”
“뭐? 기사가 없다고? 기사 없는 영지가 어디 있소!”
선임 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상황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영지의 상황이 이런
것을.
“아무튼 지금 출발하겠소.”
선임 병사의 말에 용병들이 인상을 썼다.
“설마 젤레 영지에서는 병사를 전혀 지원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렇소.”
용병 사이에서 웅성임이 커졌다. 설마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의뢰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반드시 토벌에 나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이런 상황은 전해 듣지 못했는데…….’
용병들의 뇌리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원래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젤레 영지의 병사를 이리저리 휘둘러서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이었다. 최대한 오랫동안 토벌을 하며 병사의 진을
쏙 빼놓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한데 그렇게 할 병사가 없으니 어쩌란 말인가.
용병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열 명의 병사가 절도 있는 걸음으로 나아갔다.
결국 용병들도 병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원치 않는 로트 산맥 토벌을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틈에서 카이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적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게 두는 것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역시 제론이야.’
카이트는 발걸음도 가볍게 용병의 걸음에 흐름을 맡겼다. 그리고 몸에 걸친 장비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참으로 놀라웠다. 기간트 장비를 이렇게 고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본래 흉갑과 방패, 양손검으로 이루어진 세트가 기간트 장비였다. 각각에 빼곡하게 새겨진 마법진이 바로
기간트를 보관하는 아공간 마법이었다.
한데 지금 카이트가 착용한 장비에는 전혀 마법진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또한 모양도 많이 달라졌다.
흉갑은 가죽을 덧대 마치 가죽 갑옷을 입은 것 같았고, 방패도 크기가 작고 날렵해져서 용병이 흔히 몬스터
토벌을 할 때 쓰는 것과 거의 비슷했다.
또한 거대한 양손검은 어떻게 했는지 그 크기가 대폭 줄어들어 롱소드가 되어 있었다.
카이트는 마법진을 축약했다는 제론의 말을 아직도 믿지 않았다. 그게 말이나 되는가. 그게 그렇게 쉽게 가능하면
다른 기간트 장비는 왜 다들 그렇게 만들겠는가.
아무튼 카이트는 살짝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급히 장비를 받아 챙기느라 아직 테스트를 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급박한 상황에 기간트 소환이 되지 않으면 그냥 죽은 목숨이었다.
‘그래도 좋군.’
너무나 좋았다. 이 피부를 얇게 저미는 것 같은 날카로운 긴장감이 말이다. 카이트는 차갑게 웃으며 용병들과
함께 병사의 뒤를 따라 서둘러 걸어갔다.

젤레 영지의 상황을 거의 매시간 보고받던 뤼그너 남작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뭐라고? 토벌에 병사 열 명?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뤼그너 남작은 역정을 냈다. 하지만 보고하는 병사는 죄가 없다. 그저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을 뿐이었다.
병사가 덜덜 떨며 고개를 깊이 조아리자, 뤼그너 남작이 손을 내저었다.
“물러가라. 앞으로 보고 시간은 30 분 단위로 자르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병사가 물러가자, 뤼그너 남작은 난감한 표정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옆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심각하게 앉아
있는 마틴 준남작의 모습이 보였다.
“좋지 않군요.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지다니.”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병사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 폭동을 일으켜도 원하는 성과를 얻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마틴 준남작은 인상을 쓰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뭔가 싸한 느낌이 심장을 스쳐 지나갔다.
“일단 용병 쪽에 새로운 지령을 내려야겠습니다.”
“어떻게 내릴까요?”
“산맥에 도착하면 일제히 계약을 해지해 버리라고 하십시오.”
뤼그너 남작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예? 그렇게 하면 위약금을 내야 합니다!”
“어차피 보수가 작지 않습니까. 위약금이라고 해 봐야 얼마 안 할 겁니다. 그 정도 돈이야 제가 지불하지요.”
“가, 감사합니다!”
자그마치 200 명이나 되는 용병의 위약금이다. 통상적으로 위약금은 보수의 세 배를 지불하게 되어 있으니, 그
액수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영세한 영주인 뤼그너 남작 입장에서는 그 정도 돈도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걸 마틴 준남작이
내주겠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용병에게 지불하기로 했던 보수는 꼭 챙겨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돈만 해도 뤼그너 남작 입장에서는 엄청났다. 하지만 투자가 없으면 얻는 것도 없는 법이다. 그 돈을
투자해서 만일 젤레 영지를 한 번 쓸어 올 수 있다면, 수백 배 남는 장사가 될 것이다.
“한데 젤레 영지의 영주가 그렇게 돈이 많습니까?”
마틴 준남작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일단 전쟁에서 세운 공의 포상으로 받은 돈이 200 만 골드를 넘었습니다. 또한 군부에 있을 당시 슬라인
백작과의 내기로 200 만 골드를 얻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뤼그너 남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것만 해도 무려 400 만 골드 아닌가. 그 돈을 싹싹 긁어 올 생각을 하니
갑자기 배가 불러왔다.
“아무튼 용병 쪽은 그렇게 정리를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마 젤레 영지에 난리가 날 겁니다. 하하하하.”
“정말 기대됩니다. 하하하하!”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 역시 그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일방적으로 지금에 와서?”


선임 병사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이대로라면 젤레 영지는 몬스터 토벌을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겨울과 봄에 영지민이 극심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솔직히 우리 입장도 생각해 주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않소?”
선임 병사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용병의 입장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계약서를 썼으니 그만두려면 위약금을 내시오.”
선임 병사가 한발 물러났다. 사실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위약금만 내면 도의적인 문제만 남을 뿐 용병들에게는
그 어떤 문제도 없었다.
선임 병사의 말에 계약을 해지하고 싶은 모든 용병이 앞다퉈 나섰다. 솔직히 이 상태로 몬스터 토벌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런 지령이 내려온 건 말이다.
용병 틈에 있던 철사자 기사단은 한동안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들도 용병 계약을 해지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용병으로 위장하느라 기간트 장비를 전혀 챙겨 오지 못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따로 장비를 가진 동료가 합류하기로 했는데, 이런 상황이면 굳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용병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들은 위약금을 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선임 병사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남은 용병을 향해 말했다.
“당신도 해지하려면 위약금을 내시오. 우리 빨리빨리 끝냅시다.”
카이트는 빙긋 웃었다.
“걱정할 것 없다. 난 계약 따위 하지도 않았으니까.”
선임 병사가 멍하니 카이트의 얼굴을 바라봤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개하지. 난 이번에 젤레 영지에 새로 부임한 기사 카이트다. 참고로 난 라이더이기도 하지.”
라이더라는 말에 그제야 선임 병사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라, 라이더라면……!”
“기간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가자. 그깟 몬스터들 나 혼자 싹 쓸어 줄 테니.”
“저, 정말입니까? 하지만 기간트가 있어야…….”
“넌 딴 걱정 말고 길이나 안내해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선임 병사는 서둘러 앞장서서 빠르게 걸어갔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얼떨떨했다. 그의 뒤를 정신없이 따라가는
동료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직 카이트만이 여유가 넘쳤다. 물론 이유 있는 여유였다. 카이트는 어서 빨리 새 기간트를 테스트해 보고 싶어
몸이 달아올랐다.

☆ ☆ ☆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제론은 집무실에 앉아 느긋한 표정으로 집사를 쳐다봤다. 집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요, 요, 용병들이!”
“용병들이 뭐?”
“용병들이 계약을 해지했습니다!”
“전부?”
“예! 몽땅 계약을 해지했습니다!”
제론이 피식 웃었다.
“위약금으로 제법 수입이 짭짤하겠군.”
“지, 지금 위약금이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뭐가 문제지?”
“로트 산맥 토벌이 문제 아닙니까! 용병이 없으면 토벌이 불가능합니다!”
“토벌이 불가능하다고 누가 그래?”
“예?”
집사의 표정과 몸이 얼어붙었다. 대체 이 애송이 영주가 뭐라고 하는 것인가. 용병도 없이 토벌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고작 200 명의 용병만 토벌에 보낼 때부터 알아봤다. 일이 이렇게 틀어질 거라고 말이다.
이제 금년 영지 운영은 완전히 끝장이었다.
몬스터 토벌을 제대로 못하면 산맥 인근 마을의 피해가 극심해질 것이고,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을 것이다.
마을의 피해를 줄이고자 병사를 파견하면 또 병사까지 잃게 된다. 그렇게 중첩되는 피해에 영지 경영이 어려워질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몬스터 토벌에 나간 병사도 돌아왔나?”
“그, 그건 아닙니다만…… 용병들이 돌아왔습니다!”
“어차피 할 마음도 없는 놈들이었어. 그런 놈들이 돌아왔다고 달라질 게 있나?”
“……어, 없습니다.”
집사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그리고 왠지 눈앞에 있는 영주가 무서워졌다. 시종일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사람 같지가 않았다.
‘역시, 관리를 그렇게 단호하게 처리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돼.’
관리로부터 압수한 재산을 풀어 영지민을 배불리 먹인 걸 보고 참으로 괜찮은 영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 영주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더 할 말이 있나?”
“없습니다.”
제론이 손을 한 번 내저었다. 집사는 공손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제론이 씨익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제부터 그들이 어찌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오늘은 유적에 가 봐야겠어.”
11 층을 클리어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있을 게 분명한 마티의 존재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제론은 중앙
유적에 정보 수집 아티팩트, 마티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Chapter 9 폭동

철사자 기사단의 부단장인 펠은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단장님,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명령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저 마틴이라는 놈의 머리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마틴의 명령이지 주군이신 백작님의
명령이 아닙니다!”
“그래도 해야 한다. 백작님께서 시키신 일이나 다름없다. 그분이 원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너도 잘 알 텐데?”
펠은 대답하지 못했다. 단장의 말이 옳았으니까.
‘나중에 마틴 그 개자식은 꼭 한 번 손봐 주고야 만다.’
어쨌든 지금은 시킨 대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펠은 한숨을 내쉬며 공사가 벌어지는 현장을 멀리서
지켜봤다.
젤레 영지의 새로운 성이었다. 워낙 큰 규모의 공사인지라 아직 제대로 성채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몇 달 안에 분명히 공사가 끝날 것이다.
수백 명이나 되는 인부가 달라붙어 자재를 나르고 벽돌을 쌓고 있었다. 인부의 수는 매일 늘어났다. 인근
영지에서 몰려든 부랑아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어디서 소문이라도 듣고 왔는지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사람이 왔다.
밥은 물론이고 천막까지 제공하니 근처에서 숙식 해결이 가능했기에 다들 좋아했다.
펠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의 시선이 이 모든 공사를 지휘하는 바이스에게 닿았다.
펠을 비롯한 철사자 기사단이 있는 곳은 공사 현장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바이스나 다른 인부에게는
들키지 않았다.
하지만 철사자 기사단은 공사 현장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시야는 보통 사람에 비해 훨씬 넓고
멀었다.
“대체 말레피 후작의 아들이 왜 여기서 저따위 일을 하고 있는 거지?”
펠의 중얼거림에 단장이 고개를 돌렸다.
“말레피 후작가? 그 말이 정말이냐?”
“예. 한 번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기서 공사를 지휘하는 자가 바로 말레피 후작의 아들입니다.”
단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문제가 조금 생겼다. 물론 계획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다. 다만 이대로라면
후환이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마틴에게 알려야겠다.”
기사 중 하나가 득달같이 달려갔다. 뤼그너 남작령도 이 황무지에 경계를 맞대고 있었기에 그리 멀지는 않았다.
2 시간 정도 지나자 기사가 돌아왔다. 어찌나 빨리 뛰어갔다 왔는지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허억! 허억! 그, 그냥 진행하랍니다. 허억! 허억!”
단장의 표정이 굳었다. 펠은 분통을 터트렸다.
“생존자를 남길 수 없는 상황인데 그냥 진행하라니! 그놈 생각이 있는 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단장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폭동이 시작되고 병사가 몰려오면 모두 죽이고 성을 무너뜨린다. 생존자는 한 명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 명령의 무거움을 아는지라 다들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명령이 떨어진 이상,
무조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철사자 기사단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 갔다.

“계획이 제대로 굴러가겠습니까?”


뤼그너 남작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마틴 준남작의 표정에는 한 치의 불안감도 나타나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처음 계획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어차피 결과는 같을 테니까요.”
“그럴까요?”
뤼그너 남작의 걱정이 전혀 사라지지 않는 걸 보고는 마틴 준남작이 변경된 계획에 대해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일단 예정대로 폭동이 벌어질 겁니다.”
“하지만 젤레 영지에는 500 명이나 되는 병사가 있습니다. 폭동이 일어난다 해도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막긴 하겠죠. 하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폭동을 막기 위해 모인 병사가 몽땅 죽을 거라는 뜻입니다.”
“예?”
뤼그너 남작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아무리 500 명이나 되는 병사라 하더라도 기간트의 힘을 이겨낼 수는 없을 테니까요. 20 기나 되는 기간트가
모든 걸 짓밟을 겁니다.”
뤼그너 남작의 얼굴에 어린 불안감이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철사자 기사단이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는 보는 눈이 많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보는 눈이 있을 리가 없지요.”
마틴 준남작은 그렇게 말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뤼그너 남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기에는 우리 병사도 있습니다! 설마 그들까지 몽땅 죽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대의를 생각하십시오. 그깟 병사 100 명, 얼마든지 다시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뤼그너 남작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설마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반발을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지금 와서 내리다간 온몸의 뼈가 부러져 죽거나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테니까.
“자, 그렇게 병사가 싹 사라진 젤레 영지에 두 번째 폭동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폭동을 벌인 자들이 전부 죽었는데 두 번째 폭동이 일어난다고요?”
마틴 준남작이 씨익 웃었다.
“용병이 있지 않습니까. 영주의 부당한 계약에 희생당한 용병 말입니다.”
뤼그너 남작은 마틴 준남작의 미소가 이제는 무서워졌다. 이 사람과 계속 엮이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완전히 손을 끊어야겠어.’
그렇게 속으로 결심을 굳힌 뤼그너 남작을, 마틴 준남작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놔줄 수야 없지. 한 번 낚은 고기를 다시 물에 놔주는 멍청한 짓을 내가 할 리 없잖아? 큭큭큭.’
의미를 알 수 없는 마틴 준남작의 미소에 뤼그너 남작이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불길했다.

☆ ☆ ☆

제론은 유적 로비를 찬찬히 살폈다. 몇 번 유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11 층 공략을 시작하겠냐는
물음뿐이었다.
지금 제론이 원하는 건 11 층 공략이 아니었다. 이곳 중앙 유적에 내재된 기능을 알고 싶었다.
그저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며 수련만 하는 곳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만들어진 의도가 있을 것이고, 체른산
유적에서 겪은 바에 따르면 분명히 이곳, 중앙 유적에는 뭔가 의미가 있었다.
제론은 그동안 유적에서 지내면서 로비의 기능 몇 가지를 알아낸 상태였다.
처음 로비에 왔을 때, 불쑥불쑥 올라왔던 기둥의 사용법도 알고 있었다. 그 기둥은 유적이 보관하는 물품을
주인에게 전해 줄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기본 물품을 지급했지만, 그 뒤로 식사를 대신할 수 있는 에너지 캡슐이나 한 번 쓰면 사라져 버리는
복사 카드 같은 것들을 계속해서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제론은 더더욱 정보 수집 아티팩트, 마티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받아 내느냐였다.
체른산 유적에는 한 층 전체가 마티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 정도 양이 있어야 사방 100 킬로미터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젤레 영지를 중심으로 인근 영지까지 다 살피려면 고작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젤레 영지만 해도 반경 30 킬로미터가 넘는다. 한데 그와 비슷한 수준의 영지가 인근에 세 개나 있었다. 거기에
로트 산맥까지 확인해야 한다.
체른산 유적에 있는 마티 정도로도 솔직히 모자랐다.
로비 곳곳을 돌아다니며 뭔가 새로운 것이 없나 찾아보던 제론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천장을 통해 밖이 보였다. 유적을 이미 파냈기 때문에 새파란 하늘만 보였다. 하지만 제론은 그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위를 본 건 그저 반사적인 행동이었고, 실제로는 강렬하게 흐르는 투기를 느끼는 중이었다.
투기는 천장을 통해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적의 천장은 확실히
특별했다. 시야나 소리뿐 아니라 기운의 흐름까지 전달해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쨌든 이제 슬슬 시작하나 보군. 역시 폭동 쪽인가?”
제론은 즉시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유적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다들 성채의 벽돌을 올리는 공사에
매달려 있었다.
이곳은 지하실을 만드는 작업을 할 때에나 사람이 드나들게 될 것이다.
유적에서 밖으로 나간 제론은 심장의 마나링을 맹렬히 회전시켰다. 제론 주변의 마나가 착착 움직이더니 이내
제론의 모습을 감춰 버렸다.
마나링이 여섯 개가 된 이후부터 쓸 수 있는 마법이었다. 모습과 기척을 차단시켜 주기 때문에 이렇게 숨어서
뭔가를 지켜볼 때 아주 유용한 마법이었다.
아직 일이 벌어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투기가 엄청나게 올라간 걸로 봐서 곧 시작될 것이 분명했다.
제론은 차분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오늘은 인부의 행동이 평소와 조금씩 달랐다. 뭔가 평소와 달리 묘하게 날이 선 듯했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바이스는 그걸 보며 표정을 굳혔다. 직감적으로 지금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눈으로 일을 시작하는 인부를 하나하나 확인한 바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상한데,
하나하나 따로 떨어뜨려 놓고 보면 이상한 점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오전은 그렇게 바이스가 인부를 살펴보는 걸로 끝났다. 문제는 점심 식사가 끝나자마자 터졌다.
“에이! 젠장! 이따위 걸 먹고는 도저히 일 못하겠다!”
누군가의 외침이 터졌다. 바이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노려봤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씨익 웃었다.
바이스는 순간 저놈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바이스의 생각보다 다른 인부의 행동이 더 빨랐다.
“맞아! 도저히 못 참겠어!”
“그리고 이렇게 부려 먹으면서 돈은 고작 그게 다라니 말이 돼?”
“최소한 두 배는 더 줘야지!”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 돈이 모자란다는 것과 음식이 형편없다는 불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는 인부도 분명히 있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뭔가 분위기가 묘했기 때문이다. 선동하는 사람 몇 명이 떠드는 소리가
기대심을 자극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안 그래도 300 명이나 되는 주변 영지의 병사가 부랑아로 변해 섞여 있었다.
실제 부랑아의 수는 500 명에 달하니 모두 800 명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였다.
선동한 것은 몇 명이었지만 300 명이나 거기에 동조를 해 버리니 나머지 500 명이 휩쓸리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들은 분위기에 취해 버렸다. 다수가 하나로 움직일 때는 개인의 성향이 사라져 버린다. 단체의 흐름에 뒤섞여
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다.
“악덕 영주를 몰아내자!”
“우와아아아아! 몰아내자!”
800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외치는 소리는 천둥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그들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취해 주먹을 하늘로 치켜들며 외쳤다.
“악덕 영주를 몰아내자!”
그 모든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바이스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거 대체 뭐가 어찌 된 건지 모르겠군.”
분명히 처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부랑아들에게 세 끼
꼬박꼬박 먹이고 돈까지 줬다.
영지의 공사를 할 때 이 정도 대우를 해 주는 영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도 이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처우를 개선하라면서 말이다.
바이스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거 뒤에 누가 있군!’
누군가가 이번 폭동 자체를 조작했다.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오늘
아침부터 느꼈던 그 이상한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두 이 일 때문이었다.
“병사를 데려와! 어서!”
바이스는 마나 스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허공에 정신없이 마법진을 그렸다. 일단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병사가 올 시간을 말이다.
우우우웅!
푸르게 빛나는 마법진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투명한 반구가 바이스를 감쌌다.
상당히 수준 높은 실드였다. 이로써 당분간 저들은 바이스를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바이스는 심각한 눈으로 폭동을 일으킨 인부들을 쳐다봤다.
처음에는 그저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소리치더니 이제는 진정한 폭도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성채를 향해 벽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지어진 성채가 조금씩 부서지고 무너져 갔다. 그것을 보는 바이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의
표정도 함께 무너졌다.
“저걸 짓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바이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 성채는 그냥 짓는다고 끝이 아니었다. 도면대로 정확하게 지어야만
했다. 또한 마나의 흐름을 파악해 도면을 조금씩 고치는 작업도 병행해야만 했다.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바이스는 최근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한데 그런 노력을 퍼부은 성채가 무너지고 있으니 가슴이 아픈 게 당연했다.
이곳에서 병사들이 머무는 영주성까지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아마 짧은 시간에 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저놈도 죽여!”
누군가의 외침이 울렸다. 그러자 폭도들이 우르르 몰려와 바이스를 공격했다. 하지만 아무도 바이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팅! 팅! 팅!
몽둥이를 아무리 휘두르고 벽돌을 던져 봐야 바이스가 쳐 놓은 실드에 막혀 다 튕겨 나가 버렸다.
“마, 마법사?”
폭도들이 당황했다. 마법사가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자신을 지휘해 성채 공사를 맡은 책임자가 설마 마법사일
줄은 몰랐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거야! 계속 공격해!”
누군가의 외침이 울렸다. 마법사가 펼친 마법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외친
것이다.
바이스는 방금 전 소리친 사람을 확인했다. 그는 결코 그냥 부랑아가 아니었다. 마나 스틱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다른 마법사와 바이스는 큰 차이가 있었다. 바로 마나 스틱의 차이였다. 바이스의 마나 스틱은 끊임없이 마력을
뿜어낼 수 있었다.
무려 통짜 테페룸으로 만든 마나 스틱이었다. 기간트의 마나 코어와 비슷했다. 다만 기간트는 동력원으로 마나를
뽑아내고, 바이스는 마법을 쓰기 위해 마나를 뽑아낼 뿐이었다.
게다가 마나 스틱에 들어간 테페룸의 양은 실제 기간트와 비교해서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물론 실바의
경우였지만 말이다.
허공에 푸른 선이 죽죽 그려졌다. 마법진이었다. 완성된 마법진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샤아아아아!
푸른색 빛 가루가 실드로 스며들었다. 실드가 잠깐 동안 은은하게 빛났다.
“말도 안 돼! 실드를 강화했다고?”
또 그 사람이 소리쳤다. 마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저 사람이 가장 먼저 나서서 선동을
한 것 같기도 했다.
마나 스틱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마법진의 크기도 작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번쩍!
“크악!”
지금까지 소리치던 사람이 가슴을 움켜쥐며 뒤로 벌렁 자빠졌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푸른빛이 번쩍하더니 사내가 쓰러졌다. 확인해 보니 죽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굳이 여기서 위험하게 마법사를 상대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일단 성부터 부숴!”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우르르 성채를 향해 달려갔다.
“와아아아!”
“다 박살 내!”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성채에 달라붙었다. 성채가 또 부서지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이스는 이를 갈며 마나 스틱을 움직였다. 마나는 얼마든지 있었다. 반드시 주동자를 다 색출해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푸른 마법진이 나타났다가 빛과 함께 사라졌다.
번쩍!
“크악!”
조금 전 선동했던 사내가 펄쩍 뛰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또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차올랐다. 상대는 마법사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하지만 그건 500 명의 부랑자에게 해당하는 생각이었다. 300 명의 병사는 그들과는 달랐다. 무조건 폭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건 명령이었고, 임무였다.
“다 부숴!”
열 명쯤 되는 병사가 서로 눈을 맞춰 동시에 외쳤다. 그러자 다시 우르르 성채에 달라붙었다. 이번에는 설사
누군가 죽더라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300 명 병사의 눈에는 결연함이 감돌았다.
그쯤 되니 바이스도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빨리 병사가 와서 폭동을 진압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 수백 명의 병사가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몹시 지쳐 있었는데,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훈련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아서 도착하자마자 오와 열을 맞춰 섰다. 진형을 이루는 것이 폭도를 진압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병사들은 방패를 들어 앞을 막은 채 한 발씩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움직이니, 발 구름 소리가 쿵쿵 울렸다.
쿵! 쿵! 쿵!
그제야 성채를 부수던 폭도들이 다가오는 병사 무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일부는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고, 또
일부는 눈에 독기를 담았다.
“모두 멈춰라! 그리고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라!”
커다란 외침이 울렸다. 실드로 몸을 가린 바이스가 마법을 통해 소리를 증폭시킨 것이다.
“웃기지 마라! 그럼 다 죽일 거잖아!”
누군가가 외쳤다. 그러자 폭도가 다시 웅성거렸다. 그들은 덜덜 떨면서도 손에 든 몽둥이와 벽돌을 놓지 않았다.
“어차피 수는 우리가 더 많아! 이길 수 있다!”
“게다가 저놈들 지쳐 있어! 지금 치면 이긴다!”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자들이 섞여 있었다. 분명히 주변 영지나 아니면 다른 곳에서 몰래 심은 자들이었다.
바이스는 마나 스틱을 움직였다. 푸른 마법진이 나타났다. 엄청나게 큰 마법진이었다.
“수가 많으면 이길 수 있다고? 이쪽에는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하지.”
바이스의 음성은 여전히 증폭되어 크게 퍼져 나갔다. 모두의 시선이 바이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다들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바이스의 머리 위로 집채만 한 불덩어리 하나가 떠 있었다. 닿기만 해도 온몸이 타 버릴 것 같은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뜨, 뜨거워!”
누군가가 외쳤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음에도 뜨거움이 느껴졌다. 다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대로라면
다 죽고 말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 저길 봐!”
키이잉! 쿵!
굉음이 울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그리고 또 경악에 찬 눈으로 그곳을 바라봤다.
거대한 기간트가 서 있었다. 카타락타였다. 어깨에 맹수의 송곳니를 형상화한 그림 안에 검이 가로로 놓인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벨루스 백작가의 문양이었다.
그 뒤로 다시 기간트가 나타났다. 전부 카타락타였다. 또한 벨루스 백작가의 문양을 어깨에 새기고 있었다.
그렇게 나타난 기간트의 수는 모두 스무 기나 되었다.
가장 먼저 나타난 기간트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키이이이잉!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나머지 열아홉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울음을 토해 냈다.
“우와악! 뭐야!”
“우릴 다 죽이겠다고?”
“사, 살려 줘!”
병사와 기간트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일단 기간트가 다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다들 공포에 질려 버렸다.
특히 타 영지에서 숨어든 병사의 경우는 배신감까지 더해져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렇게 버려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열아홉 기의 카타락타가 빠르게 움직이며 포위망부터 넓게 만들었다. 아무도 놓쳐선 안 되기에 미리 도망갈 길을
차단한 것이다.
일단 포위망을 만들었으니 이제 이 안에 있는 자들은 독 안에 든 쥐였다. 아무도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고작 1300 명 정도였다. 열아홉 기나 되는 기간트가 동원되었는데 놓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만 몇 번
휘둘러도 싹 죽어 버릴 것이다.
열아홉 기의 기간트가 병사와 부랑아를 포위한 사이 철사자 기사단의 단장이 탄 카타락타가 바이스를 향해
다가갔다.
쿵! 쿵! 쿵!
워낙 몸체가 큰지라 단숨에 거리가 좁혀졌다.
카타락타는 그대로 팔을 휘둘렀다.
후웅!
퍽!
바이스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불덩어리가 그대로 꺼져 버렸다. 마나 코어에서 나와 기간트의 몸체에 흐르는 마나가
마법의 힘을 강제로 없앤 것이다.
카타락타는 불덩이를 없앤 뒤, 발을 들었다. 단숨에 바이스를 깔아뭉개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 카타락타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거대한 바위가 그의 몸체를 직격했다.
꽈앙!
놀랍게도 카타락타는 바위에 맞아 뒤로 붕 날아갔다.
꽈과과과광!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카타락타는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맞은 바위는 그냥 바위가 아니었다. 안에 마나가 담긴 바위였다. 바위에 맞는 순간 내부에 있던 마나가
기간트 안으로 스며들어 충격을 가했다.
그로 인해 마나 코어에서 흘러나가는 마나 로드 몇 군데가 끊어졌다. 그걸 고치지 않는 한, 끝까지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키릭! 쾅!
억지로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쓰러진 단장의 카타락타는 계속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는 몸에 적응이 되어 일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 이상 싸움에 나설
수는 없었다.
“누구냐!”
단장이 움직이지 못하니 다음으로 부단장인 펠이 나섰다. 펠은 바위가 날아온 방향을 노려봤다. 그곳에 거대한
기간트 한 대가 서 있었다.
‘저건 뭐지?’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기간트였다. 아무래도 발굴형인 것 같은데, 처음 발견된 기간트인 모양이었다.
펠은 한편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욕심이 생겼다. 발굴형 기간트는 모든 라이더의 꿈이었다.
한데 생전 처음 보는 발굴형 기간트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발굴형 기간트의 종류는 모두 네 가지였다. 펠은 그
네 가지 기간트를 모두 본 적이 있었다.
한데 바위를 던진 저 기간트는 그 네 가지 중 어느 것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발굴형 기간트는 개조가 불가능하다.
아직 그것을 다룰 기술력도 마법도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저건 분명히 새로 등장한 기간트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늦게 발견된 발굴형 기간트가 더 강했다. 그러니 저 기간트는 발굴형 기간트 중 최강이라고
일컬어지는 히엠스보다 더 강할 것이다.
“이 영지의 기간트인가? 보물을 가지고 있었구나.”
펠은 그렇게 말하며 바이스의 표정을 살폈다. 한데 바이스의 표정이 묘했다. 나타난 기간트를 보고 놀라고 있었다.
익숙함이 아닌 생소함이 담긴 표정이었다.
‘뭐지? 그럼 이 영지의 기간트가 아닌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닌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 영지의 주인이 바로 제론 폰 에어스트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아리송해졌다.
‘체른산 유적에서 얻은 걸 수도 있겠군.’
펠은 나름대로 그렇게 판단하고는 몸을 돌렸다. 혼자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굴형 기간트라고
해도 카타락타 다섯 기 정도가 한꺼번에 덤비면 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철사자 기사단은 혹독한 훈련 끝에 라이더로서의 능력을 엄청나게 끌어 올렸다. 카타락타로도 얼마든지
상위 기체를 이길 수 있었다.
실제로 가장 실력이 뛰어난 단장의 경우 발굴형 중 가장 성능이 떨어지는 베르를 이길 정도였으니까.
지금이야 단장이 저 꼴로 뒹굴고 있지만, 그거야 불시의 기습이었기에 그렇고, 실제로 싸우면 아마 저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펠은 잠깐 계산을 했다. 그리고 일곱 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쉬운 대로 열두 기면 병사와 부랑아를 몽땅 죽이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명령을 한 펠은 새로 나타난 검은색 기간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쿵! 쿵! 쿵! 쿵!
펠의 뒤를 따라 여섯 기의 기간트가 포위를 풀고 움직였다. 남은 기간트가 자리를 조금씩 움직여 포위망을 다시
굳혔다.
열아홉 기에는 모자랐지만 열두 기만으로도 충분히 위압감을 줄 수 있었다. 누구도 그 사이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바위를 던졌던 기간트, 테오스가 다시 움직였다. 미리 준비한 바위를 다시 하나 들었다.
바위의 크기는 기간트의 머리통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하지만 기간트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설사
실바라 할지라도 그 정도 바위는 공깃돌 들 듯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런 바위에 맞는다 하더라도 거의 충격을 입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다가가던 펠은 순간적으로 움찔 놀랐다. 그 바위에 맞은 단장이 아직도 저렇게 헤매고 있으니 조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펠뿐 아니라 다른 기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렇게 걸음을 잠깐 멈췄다. 그리고 그 잠깐의 틈은 제론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었다.
후웅!
바위가 바람을 찢으며 날아갔다.
펠은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는 바위를 보며 피하려 했다. 하지만 한 발 옆으로 움직였을 때, 그대로 바위가
옆구리에 꽂혔다.
꽈직!
펠은 기간트가 기우뚱 쓰러지는 걸 느꼈다. 균형 감각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꽈앙!
바닥에 쓰러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피했다. 한데 바위가 갑자기 빨라졌다. 그래서 미처 다 피할 수가
없었다.
“끄응!”
펠은 흔들리는 머리를 안정시키려 애쓰며 몸을 일으켰다.
키리릭!
꽝!
다리를 분명 받친 줄 알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넘어지고 말았다. 어이가 없었다.
‘왼쪽 다리 마나 로드가 끊겼어!’
마나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다리가 움직이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왼쪽 다리로 몸을 지탱하려고 하는데 몸체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고작 바위에 맞았다고 이렇게 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펠은 고개를 들고 테오스를 바라봤다.
마침 테오스가 또 바위를 던지고 있었다. 너무나 가벼운 동작이었다. 하지만 날아가는 바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후웅!
콰직!
또 한 기의 기간트가 바위에 맞아 쓰러졌다. 그 뒤로 다섯 개의 바위가 더 날아왔고, 따로 나선 기간트 다섯
기가 모두 쓰러졌다.
그리고 그제야 테오스가 앞으로 나섰다.
쿵! 쿵! 쿵!
테오스는 천천히 걸어 가장 앞에 있는 단장의 카타락타 앞에 멈춰 섰다. 단장은 여전히 일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이제는 처음과 달리 제법 많이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테오스의 손이 카타락타의 배를 쿡 찔렀다.
콰득! 꽈지직!
테오스의 손에 마나 코어가 딸려 나왔다. 테오스는 놀랍게도 배를 뚫고 마나 코어를 직접 뜯어낸 것이다.
단장의 카타락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테오스는 마나 코어를 배가 뚫린 카타락타 옆에 툭 던지고 다음 기간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여덟 기의 기간트가 차례로 무너졌다. 모두 같은 꼴이었다. 마나 코어가 뜯어져 나가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펠은 시야가 완전히 사라지자 절망감에 빠졌다. 마나 코어가 뜯어졌으니 기간트의 생명이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가 평생 벌어도 살 수 없을 정도로 비싼 것이 기간트였다.
그런 기간트를 잃었으니 이제 라이더로서의 삶은 거의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펠은 일단 해치를 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주어 밀어도 해치는 열리지 않았다.
마나 코어가 떨어져 나갔으니 강제로 힘으로 열어야 하는데, 해치의 무게는 수백 킬로그램이나 나간다. 물론 그
정도 무게라도 그래도 기사인 펠이 그것을 못 들어 올릴 리 없었다. 하지만 해치는 열리지 않았다.
그제야 펠은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기간트가 엎어져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절대 해치가 열리지 않는다.
기간트를 완전히 혼자 들어 올릴 정도의 힘이 없다면 말이다.
펠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당황하지 않았다면 몸이 아래로 쏠리고 있는데 기간트가 엎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한데 너무 당황해서 그런 기본적인 생각도 못한 것이다.
허탈한 표정을 지은 펠은 힘없이 조종석에 늘어졌다.
그리고 펠과 똑같은 입장에 처한 사람이 일곱 명 더 있었다. 그들 역시 허탈한 표정으로 조종석에 늘어져 있었다.

남은 열두 명의 철사자 기사단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잠깐 어어 하는 사이에 단장과 부단장을 비롯한 동료 여덟 명이 마나 코어가 뜯어진 처참한 몰골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이대로 처음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저 불길한 기간트를 공격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이대로 저 기간트가 난입하면 사람도 죽이기 어렵고 괜한 피해가 생길 우려가 컸다.
차라리 저 기간트를 먼저 제압하고 다음 일을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단, 한꺼번에 덤벼야 한다.
열두 기의 기간트가 천천히 움직여 진형을 갖췄다. 당연히 근처에 있는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갑자기 기간트가 움직이니 병사와 부랑아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으악!”
“밟힌다!”
“피해!”
사람들이 사방으로 개미 떼처럼 흩어졌다. 그 와중에 넘어져 서로가 서로를 밟아 다치고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그리고 기간트에 밟히는 사람도 무수히 나왔다.
쿵! 쿵!
열두 기의 기간트가 진형을 갖췄다.
그와 동시에 테오스가 달렸다.
쿵쿵쿵쿵쿵!
열두 기의 기간트가 달려오는 테오스를 보며 자세를 낮췄다. 일단 움직임만 봉쇄하면 끝난다.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성능을 가졌다 해도 말이다.
테오스를 조종하는 제론은 그것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테오스를 다른 기간트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쿵쿵쿵쿵!
테오스가 더욱 빨리 달렸다. 양측의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이윽고 양측의 거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서로
부딪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순간 굉음이 울렸다.
꽈앙!
테오스가 땅을 박차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테오스의 속도가 몇 배나 빨라졌다.
서로 부딪치기 직전에 속도가 빨라지는 바람에 열두 기의 기간트는 아무도 거기에 반응하지 못했다.
테오스가 기간트의 진형 사이로 파고들었다.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뭔가가 가볍게 부서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테오스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검을 찔러 대는 소리였다. 검을 한
번 찌를 때마다 기간트 한 기의 마나 코어가 부서졌다.
테오스의 검을 은은한 마나가 감싸고 있었다. 말도 못하게 날카로워진 검이 기간트의 몸체를 쑥쑥 파고들었다.
마치 손가락으로 두부를 푹푹 찌르는 듯했다.
사실 조종석을 찔렀으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라이더를 죽임과 동시에 기간트를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노획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상대가 벨루스 백작가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일을
방해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세나의 가문이었다.
그래서 일단 라이더를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간트까지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마나 코어가 부서진
기간트는 폐기 처분된다.
지금 테오스의 검에 마나 코어를 잃은 기간트는 다시 쓸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이 정도로 끝내고자 마음먹었다. 벨루스 백작가에 한해서 말이다. 나머지는 그냥 둘 생각이 없었다.
제론은 속으로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면서 검을 거뒀다. 워낙 빨랐기에 테오스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테오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무려 열두 기의 기간트를 해치워 버렸다. 마나 코어만 박살 내서 말이다.
‘변종 오우거를 상대하는 거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로군.’
이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변종 오우거 열두 마리를 상대하는 게 훨씬 어려웠다. 변종 오우거는 이들보다 더욱
빠르고 강했다. 게다가 전투에 관한 한 너무나 영악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움직임의 자연스러움이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제론의 눈으로 보면 마치 움직임
자체가 딱딱 끊어지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누구라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변종 오우거의 움직임은 이들과 완전히 달랐다.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변칙적인 움직임이 많았다. 더구나 점프까지 가능했다. 열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려면
얼마나 정신력 소모가 심한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제론은 가만히 서서 주위를 슥 둘러봤다. 총 스무 기의 기간트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다들 엎어진 채였다.
당연히 제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제론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검을 찔러 적을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균형을 흔들어 앞으로 넘어지게 만들었다.
‘이제 확신이 드는군.’
철사자 기사단은 상당히 뛰어난 기사단이었다. 특히 라이더로서의 실력은 왕국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그런 철사자 기사단의 기간트 스무 기를 혼자 제압했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테오스의 성능은
최고였다.
딱 한 가지 문제가 바로 기동 시간이었다. 제론의 마나를 기본으로 움직이기에 기동 시간의 한계가 너무나
뚜렷했다.
지금의 제론은 테오스를 풀로 움직이면 1 시간 30 분이 한계였다. 그 정도 움직이면 온몸의 마나가 고갈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고갈될 정도로 움직여선 안 된다. 자칫 마나 역류로 몸이 상할 수도 있었다.
마나 역류가 일어나면 영영 마나를 못 쓰는 몸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초고대 문명의 기술은 그런 경우에도 몸을
되살릴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놨지만, 그때까지 쌓은 마나는 모두 사라진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을 하고 마나를 쌓으려 애쓰는 것이었다.
제론은 어렴풋하게 진정한 마스터가 되면 기동 시간의 한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남은 기동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도 충분했다. 싸운 시간 자체가 얼마 안 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기동 시간만
충분하다면 홀로 전장에 서서 적 기간트를 유린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제론은 테오스를 움직여 바닥에 쓰러진 기간트를 한데 모았다. 나중에 작업하기 편하게 만들어 둔 것이다.
거기까지 마무리한 뒤, 몸을 돌린 테오스가 천천히 멀어져 갔다. 테오스가 향하는 방향은 젤레 영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공사 현장에서 멀어지는 제론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테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소문이 주위에 퍼져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시선이 젤레
영지로 향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진짜 정보가 중요해진다. 어떻게든 새로운 마티를 찾아야 돼.’
제론은 굳은 표정으로 결심을 굳혔다.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또한 너무 늦으면 소용이
없었다. 젤레 영지가 가루가 되어 사라진 뒤에 발견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음이 급해진 제론은 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테오스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냈다.
제론은 그렇게 한 뒤 곧장 유적으로 향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도 아까웠다. 한시라도 빨리 정보 수집 아티팩트,
마티를 찾아내야만 했다.

Chapter 10 뒤처리

젤레 영지의 폭동은 생각보다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되었다. 죽은 사람은 많았지만 대부분 움직임이 비교적 굼뜬


부랑아였고, 병사의 피해는 많지 않았다.
그래도 피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는데, 바이스는 죽은 병사의 가족에게 충분한 보상을 지급해 주었다.
예산은 충분했다. 아직 돈은 넘쳐날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성채가 완공되고 나면 어마어마한 곡물을 길러 낼 수
있으니 쏟아부은 모든 돈을 복구하고도 남았다.
황무지의 넓이는 엄청났다. 네 개의 영지에 걸쳐서 있던 곳이다. 그 모든 황무지를 에어스트 백작이 사들인
것이다.
만일 이 모든 땅에서 밀을 재배할 수 있게 된다면 여기서 나는 밀만으로 레늄 왕국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정도로 넓은 땅이었다.
물론 땅을 개간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지만 바이스는 그것도 다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그걸 위해서는 지금 짓는 성채를 제대로 만들어야만 했다. 성은 물론이고 성을 중심으로 만들어질 도시 자체를
처음부터 계획해서 지어야만 했다.
일단 성을 다 짓고 나면 도시도 차츰 지을 계획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부지만 확보하고 정해 놓은 게 전부였다.
일단 바이스의 목표는 100 만이었다.
100 만의 인구가 충분히 살 수 있을 정도의 도시를 만드는 것이 1 차 목표였다. 나머지는 그 이후에 생각하면
된다.
인구가 더 늘어나면 주변에 위성도시를 만들면 그만이다. 바이스는 그 문제에 관해서도 착착 계획을 세웠다. 물론
제론과 충분히 상의를 한 후 결정한 내용이었다.
폭동으로 인해 부서졌던 성채는 빠르게 복구되었다. 애초에 워낙 튼튼하게 지었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서 벽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내리쳤지만 심하게많이 부서지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피해는 피해였다. 그걸 복구하는 데에만 무려 나흘이 걸렸다. 폭동 이후로 일꾼의 수가 상당히
줄었기에 복구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오히려 공사 진행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일꾼이 훨씬 많이 모였기 때문이었다.
이젠 인근 영지뿐 아니라, 더 먼 곳의 영지에 있던 부랑아까지 모여들었다.
사실 이는 전쟁의 여파 중 하나였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난민이 많아졌는데, 그 난민이 젤레 영지의 소문을
듣고 모여든 것이었다.
바이스는 그 모든 사람을 받아들였다. 일꾼의 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나중에 성이 완성된 이후에도 계속
필요했다. 성만 지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을 완성하면 저택을 지을 것이고, 저택이 완성되면 상점가를 만들 것이다. 또한 상점가를 만든 이후에는
영지민이 살아갈 집을 지을 것이다.
도시 하나를 새로 만드는 일이다. 당연히 일꾼이 잔뜩 필요했다. 물론 그렇게 갑자기 모든 일을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이뤄 나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성을 다 지은 뒤 창고만은 반드시 지어야 했다. 이 엄청난 영토에서 나는 곡물을 보관할 창고는 반드시
필요했다.
또한 그렇게 생산한 곡물을 내다 팔 상단도 꼭 필요했다. 이제 슬슬 그에 관한 일을 처리할 시간이 되었다.
물론 그것은 바이스가 아닌 제론이 해결할 문제였다.

☆ ☆ ☆

“크, 큰일 났습니다!”
쿠당탕!
허락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기사의 외침에 뤼그너 남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저런 무례를 저지른단 말인가.
“잠시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뤼그너 남작은 최대한 품위 있게 마틴 준남작에게 말한 뒤, 기사에게 다가갔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냐! 경망스럽게!”
뤼그너 남작이 나직이 꾸짖었지만 기사는 그런 말을 머리에 새길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자, 작전이 실패했습니다!”
뤼그너 남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실패라고?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고해라!”
“철사자 기사단이 몽땅 사로잡혔습니다. 폭동은 실패로 끝났고, 폭동을 주도한 병사가 몽땅 감옥에 갇혔습니다!”
“뭐라고?”
마틴 준남작의 외침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철사자 기사단이 사로잡혔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무려 스무
기의 기간트로 이루어진 기사단이었다. 한데 그들이 사로잡힌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 부분! 더 정확히 설명해 봐라!”
마틴 준남작의 서슬에 기사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러니까…… 폭동을 일으킨 병사 300 명 전원이 죽거나 사로잡혔습니다. 젤레 영지의 병사들이…….”
“그만! 그거 말고! 철사자 기사단 말이야!”
“기간트가 다 부서진 채로 영주성으로 이송되는 걸 분명히 확인했다고 합니다.”
“웃기지 마라! 어디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냐! 네가 똑똑히 확인한 일이냐?”
“그, 그건 아닙니다만…… 세작이 분명히 확인했다고…….”
“가서 직접 확인하란 말이다! 철사자 기사단이 당했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그들이 당하려면 젤레 영지에 그보다
훨씬 강하고 숫자도 많은 기간트 기사단이 있다는 뜻인데! 그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예! 아, 알겠습니다!”
기사가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어찌나 당황하고 놀랐는지, 명령을 내린 사람이 뤼그너 남작이 아니라 마틴
준남작이라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했다.
마틴 준남작은 씩씩거리면서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 그렇게 조금 마음이 안정되자, 그제야 냉정하게 상황을
따져 볼 수 있었다.
“남작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해서 못난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요.”
“아, 아닙니다. 당연히 화가 나실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보다는 일단 상황을 다시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함께 가서 좀 더 면밀히 상황을 파악해 보시죠.”
두 사람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자칫하면 그동안 쏟은 돈과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둘 모두 기사의 보고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철사자 기사단이 당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아무리 젤레
영지의 영주인 제론에게 돈이 많아도 기간트를 단시간에 많이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기간트는 전략물자다. 아무나 함부로 구입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방에서 나간 두 사람은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성의 집사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 영주님!”
집사의 경망스러운 말과 행동에 뤼그너 남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딱히 그걸 나무라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불안해졌다.
“무슨 일인가?”
“제, 젤레 영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사람?”
“예. 일단은 정식 절차를 따르고 있습니다. 영주의 공문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공문?”
불안감이 더 커졌다. 뤼그너 남작은 마틴 준남작을 바라봤다. 마틴 준남작도 마침 뤼그너 남작을 보고 있었다.
“일단 함께 가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마틴 준남작의 말에 뤼그너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금은 마틴 준남작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집사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절제된 분위기를 풍기는 기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카이트였다. 군부에서 오래 생활을 했기에 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카이트는 뤼그너 남작이 들어오자 빙긋 웃으며 예를 취했다. 군례와는 조금 다르지만 기사가 영주에게 취하는
예와 비슷했다.
적당히 무례하지 않게만 인사를 한 카이트는 품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영주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반드시 답을 받아 오라고 하셨습니다.”
뤼그너 남작과 마틴 준남작은 카이트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기사라기보다는 군인 같은 분위기가 훨씬 강했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제법 강해 보였다.
‘젤레 영지에서 벌써 기사를 구했던가?’
뤼그너 남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알기로 젤레 영지에는 기사가 한 명도 없었다.
물론 급하게 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척 보기에도 상당한 실력을 가진 것 같은 기사가 덜컥 젤레 영지에 몸을
의탁했다는 점이 의심스러웠다.
뤼그너 남작은 일단 문서를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쭉 읽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뤼그너 남작의
심기를 충분히 불편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마틴 준남작은 뤼그너 남작이 문서를 넘기자 단숨에 그것을 읽었다. 그의 표정 역시 일그러졌다.
“병사의 몸값을 지불하고 사과를 하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뤼그너 남작이 카이트에게 물었다. 그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연기였다.
카이트는 뤼그너 남작의 태도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귀 영지에서 보낸 병사 100 명이 폭동을 주동하다가 잡혔습니다.”
“허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리 영지의 부랑아들이 그곳에 일거리가 있다고 이동한 건 알고 있지만
병사라니!”
“하면 그 병사들은 이곳 뤼그너 남작령의 병사가 아니라는 뜻입니까?”
“당연하지! 내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감히 날 능멸하려는 것인가! 내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네!
단단히 따질 걸세!”
“공문으로 답을 주십시오.”
카이트의 당당한 말에 뤼그너 남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이놈은 뭘 믿고 이리 뻣뻣하고 당당하단 말인가.
이따위 문서를 들고 왔으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할 텐데 말이다.
뤼그너 남작뿐 아니라 마틴 준남작도 눈을 가늘게 뜨고 카이트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레더아머에 방패를 등에 메고, 옆구리에는 롱소드를 찼다. 사실 기사의 복장과는 살짝 거리가 있었다. 또한
기간트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기간트 라이더가 들고 다니는 검은 저런 롱소드가 아니라 커다란 양손검이었다. 기간트를 보관하기 위한 아공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고 다니는 검이었다.
“용기가 대단하군. 담이 커.”
뤼그너 남작이 슬쩍 떠봤다. 대체 뭘 감추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굳이 두려움에 떨 이유가 있습니까?”
카이트는 역시나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당장 자네를 가둬 버릴 수도 있네. 또 목을 날려 버릴 수도 있고. 전령의 목을 자르는 일은 전장에서는
비일비재하다네. 혹시 알고 있나?”
카이트가 피식 웃었다. 지금 누가 누구 앞에서 전장 얘기를 하는 것인가. 전장에서 보낸 세월만 해도 10 년이
훨씬 넘는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가끔 파렴치한 사령관이 그런 짓을 하지요.”
뤼그너 남작이 카이트를 노려봤다. 자신을 파렴치한이라고 돌려서 말하는데 굳이 화를 참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뤼그너 남작은 당장 기사단을 부르려 했다.
혹시 실력이 있을지 모르니 수로 상대하게 할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기간트를 가지고 있는 이상, 절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영주님뿐입니다.”
“기, 기간트?”
뤼그너 남작이 흠칫 놀랐다. 설마 기간트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는 자신이 혹시 뭔가를 잘못 본 게 아닌가
해서 다시 한 번 카이트의 몸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기간트 장비라 여겨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뤼그너 남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틴 준남작을 바라봤다. 그 역시 카이트의 몸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날 얼마나 무식하고 우습게 여겼으면 그따위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뤼그너 남작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는 즉시 밖을 향해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다들 들어와 이놈을 잡지 않고!”
뤼그너 남작의 명에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이 우르르 몰려왔다. 무려 스무
명이나 되는 기사가 안으로 들어와 카이트를 포위했다.
카이트는 그들을 슥 둘러보고는 씨익 웃었다. 그 표정에는 일말의 불안감조차 없었다.
“여기서 기간트를 소환하면 성이 망가질 수도 있는데, 남작님이 먼저 이렇게 나오셨으니 제 책임은 아닙니다.”
카이트는 그 말과 동시에 기간트를 소환했다.
후우우우웅!
강렬한 마나의 폭풍이 몰아쳤다. 그리고 거대한 기간트가 즉시 소환되었다. 크라테르였다.
꽈과광!
거대한 기간트가 소환되는 바람에 응접실이 완전히 망가졌다. 그뿐 아니라 성 자체가 흔들렸다.
우르르르르르.
카이트는 가볍게 기간트에 올라탔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꽈르르릉!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응접실이 성 가장자리에 위치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기둥이 부서져 성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카이트는 크라테르를 움직여 일단 응접실에서 나갔다.
꽈과광! 쿵! 쿵!
성 일부가 허물어졌다. 카이트가 움직이기 위해 부숴 버린 것이다. 카이트는 성 밖으로 나와 자신 때문에 뚫린
구멍을 통해 응접실을 확인했다.
뤼그너 남작과 마틴 준남작은 무사했다. 하지만 기사는 그렇지 않았다. 스무 명의 기사 중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고작 열 명뿐이었다.
기간트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깔리고 부딪쳐 죽고 다친 것이었다.
뤼그너 남작은 물론이고 마틴 준남작도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멍하니 크라테르를 바라봤다.
“어, 어찌 기간트가…….”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기간트용 장비가 없었다. 한데 어디서 기간트가 나왔단 말인가.
“계속하시겠습니까?”
카이트의 말에 뤼그너 남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라면 성이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더구나 살아남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카이트는 즉시 기간트에서 내렸다. 그리고 소환을 해제했다. 그는 당당했다.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뚫린 벽을 통해 다시 응접실로 들어간 카이트는 당당하게 다시 요구했다.
“답을 공문으로 주십시오.”
뤼그너 남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카이트를 노려봤다.
“기간트까지 소환해 날 협박한 건가? 이건 절대로 그냥 묻어 두지 않겠네.”
“먼저 시작한 것은 남작님입니다. 전 미리 경고해 드렸습니다.”
카이트의 말에 뤼그너 남작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지금 더 신경을 자극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일단
자신에게는 기간트가 없었다. 이대로 싸우면 시작도 하기 전에 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뤼그너 남작은 종이를 준비해 즉시 서류를 작성했다. 화가 치밀어 생각했던 것을 모두 문서에 쏟아부었다. 욕만
안 했을 뿐이지 어찌 보면 그보다 더 심했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마틴 준남작이 서류 위에 손을 슬그머니 올렸다. 뤼그너 남작이 마틴 준남작을
올려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좋지 않소. 일단 시간을 더 벌어야 하오.”
그제야 뤼그너 남작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공문을 전달해서 젤레 영지를 도발하면 자칫
영지전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기간트가 없는 상황에서 당장 영지전이 시작되면 뤼그너 남작령은 끝장이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가문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는 즉시 서류를 박박 찢었다. 그리고 정성을 들여 새로운 서류를 작성했다. 완전히 발뺌하는 내용으로 꼼꼼하게
쓴 것이다.
카이트는 그런 뤼그너 남작과 마틴 준남작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확인하고는 서류를 받아 인사 후, 응접실에서
나갔다.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멀어져 가는 카이트의 모습이 너무나 잘 보였다.
“끄응.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뤼그너 남작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파악이
불가능했다.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뤼그너 남작의 물음에 마틴 준남작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그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일단…… 다른 영지의 상황도 좀 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뤼그너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일단 주변에 있는 두 영지에 사람을 보내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분위기를 보면 그들도 같은 문서를 받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같이 손을 잡고 대응하면 된다.’
뤼그너 남작이 마틴 준남작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그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어쩌면 젤레 영지가 알아서 영지전을 걸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아무리 기간트를
보유했다고 하지만, 벨루스 백작가에 비할 수는 없었다.
세 영지가 힘을 모으고, 벨루스 백작가에서 도와준다면 영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젤레 영지를 편입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제론의 재산을 모두 빼앗고 말이다.
그것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었다. 물론 젤레 영지만 제외하고 말이다.

사실을 확인하면 할수록 입만 벌어졌다. 기사의 보고는 모두 진실이었다. 정말로 철사자 기사단 전원이 사로잡혀
감옥에 갇혀 있었다.
마틴 준남작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을 찾아보면 되니 말이다.
부랑아의 경우 한 번 공사장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오히려 더 만나기 어려웠다. 하지만 뤼그너 남작령이나
다른 영지의 영지민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영지로 돌아와 가족을 만났다.
매일 왕복하는 건 거리가 너무 멀어 힘들기에 한 번 오면 최대한 오래 버티다가 돌아갔다. 그래도 어쨌든 공사를
하며 번 돈을 집에 전해 줘야 하기에 주기적으로 반드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만나 당시의 일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철사자 기사단이 단 한 기의 기간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어찌 혼자서 스무 기의 기간트를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뛰어난 성능을
가진 발굴형 기간트라 해도 말이다.
한데 묘한 말을 들었다. 기간트의 생김새를 듣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모습이 너무나 생소했다.
‘새로운 기간트!’
갑자기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새로운 기간트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젤레 영지에!
마틴 준남작은 이를 바탕으로 뭔가를 꾸밀 수 있지 않을까 궁리했다.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냥
돌아가면 아마 자신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마틴 준남작은 젤레 영지에 나타난 기간트에 대해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 ☆ ☆

“어때? 내 예상대로지?”
“예.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카이트는 그렇게 대답하며 제론을 바라봤다. 사실 적지 않게 감탄했다.
세 영지를 돌아다니며 제론이 작성한 문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각 영지의 반응을 확인하고 답을 받아 왔다. 한데
그 반응이 제론이 처음 말했던 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한데 정말로 병사 모두를 사형시키실 겁니까?”
“그럴 리가. 이 문서를 보여 줘야지.”
“문서를 말입니까?”
“그들은 더 이상 영지에 충성하지 않을 거야.”
제론의 말에 카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와 비슷한 방법은 전쟁에서도 흔히 쓰인다. 포로로 잡힌 적병을
세뇌한 뒤 돌려보내면 적에게 혼란을 줄 여지가 생긴다.
약간의 빈틈이 승패를 결정할 수도 있기에 몇 번 써먹었던 방법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빈틈을 만들었을 때, 그 빈틈을 파고든 것이 붉은 학살자였으니까.
“한데 저들을 정말로 그냥 내버려 둬도 되겠습니까?”
“그럼?”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쓸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마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입니다.”
제론은 카이트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렇게 되겠지.”
“아마 지금쯤 서로 힘을 모아 대적하자고 모의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하니 지금 당장 쓸어버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들에게는 기간트도 없습니다. 저 혼자 나서도 다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제론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저들의 뒤에는 벨루스 백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
그 말을 들은 카이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두렵지는 않았다. 자신과 제론이 나선다면 아무리 벨루스 백작가가 기간트를 잔뜩 몰고 와도 다 박살 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그로 인해 영지가 피폐해지고, 또 누가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전쟁에서 이겨도 이긴 게 아니게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영지를 운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전쟁에서 이긴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럼 이제 어쩌실 겁니까?”
“일단 라이더를 양성해야지.”
“라이더 말입니까?”
카이트는 라이더라는 말에 눈을 빛냈다. 젤레 영지의 전력을 단시간에 끌어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카이트는 창고 안에 서 있던 열다섯 기의 실바를 떠올렸다.
‘그걸 탈 놈만 있어도 아무도 쉽게 못 건드리겠지?’
아무리 실바라도 기간트는 기간트였다. 열다섯 기나 되는 기간트가 있는 영지에 덤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전력이 훨씬 뛰어나다 하더라도 말이다.
열다섯 기의 기간트를 상대하려면 그만한 손실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기더라도 막대한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기에
누구도 쉽게 싸움을 걸지 않는다.
“라이더에 관한 문제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카이트의 말에 제론이 빙긋 웃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단발로 그치면 안 된다는 것 알겠지?”
“물론입니다.”
카이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즉시 밖으로 나갔다. 여기서 말로 떠드느니 한 발이라도 직접 뛰는 게 나았다.
카이트는 그런 사람이었다.
카이트가 나가자, 제론은 잠시 의자에 기대 휴식을 취했다. 최근 너무 열심히 움직이느라 몸에 쌓인 피로가 장난
아니었다.
제론은 일단 마나 호흡을 통해 피로를 조금 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도발은 잘 넘겼지만 아직 마무리가 덜 되었다. 다독여야 할 사람이 남아 있었다.
제론은 집무실에서 나가 영주성 근처에 서 있는 커다란 창고로 향했다.

“죄송해요.”
세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신 때문에 젤레 영지에 위험이 왔다고 생각하니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인 벨루스 백작이 원망스러웠다.
제론은 그런 세나의 머리를 헝클어 주었다. 세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제론을 바라봤다.
“왜 네가 죄송해.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세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제론은 담담한 눈으로 세나를 보면서 말했다.
“내가 널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세나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뇨. 선배님이 끌어들인 게 아니에요. 제가 스스로 여기까지 온 거죠.”
제론은 그런 세나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세나는 갑작스러운 제론의 행동에 정말로 깜짝 놀랐다.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갈 정도로 말이다.
“내가 끌어들인 거야. 너희와 함께하고 싶은 욕심에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세나는 그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제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녀의 손이
슬며시 올라가 제론의 등을 감싸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끝을 보지 못했다. 어느새 제론이 그녀를 놓고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세나는 아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당분간 좀 쉬도록 해. 마음 추스르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세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일이 다 끝날 때까지는 안 쉴 거예요. 이렇게라도 해야 제가 도움이 될 테니까요.”
세나의 당찬 말에 제론은 빙긋 웃었다. 역시 이래야 세나다웠다.
‘어쨌든 마음이 많이 안 다친 것 같아 다행이군.’
제론은 세나가 강한 여인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은 이런 상황이 되면 마음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가문의 기사들이 자신이 머무는 영지를 부수러 기간트까지 몰고 왔으니 말이다. 물론 실제는 좀 달랐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제론은 사로잡은 철사자 기사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쉽게 나왔다.
제론은 세나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창고에서 나왔다. 그리고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철사자 기사단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단장은 기간트 전투로 인한 충격이 생각보다 커서 아직 거동을
못했기에 부단장인 펠이 나서서 탈출 계획을 세웠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뭔가를 해도 할 것 아니겠는가.
“누군가 옵니다!”
망을 보던 기사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탈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한데 모여 있지만, 뿔뿔이 흩어지기라도 하면 탈출의 길은 요원해진다.
저벅! 저벅!
지하 감옥을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감옥에 들어온 누군가가 자신들을 향해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펠은 긴장을 풀고 휘하 기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다들 감옥 곳곳에 흩어졌다.
나타난 사람을 본 펠이 눈을 빛냈다. 영주가 온 것이다.
“좀 지낼 만한가?”
제론이 감옥의 창살 앞에 서서 말했다.
펠은 앉은 채로 그런 제론을 올려봤다. 무수한 갈등이 일어났다. 그들의 몸에는 그 어떤 금제도 없었다.
하다못해 족쇄라도 채워져 있다면 움직이기가 힘들겠지만 그런 것조차 없었다.
펠은 마음속으로 계산을 했다. 만일 창살을 단번에 잘라 버리고 달려들면 영주를 제압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만일 영주를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많은 일이 해결된다. 영주를 인질로 탈출하는 건 물론이고,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다. 이곳 영주를 죽이면 세나 폰 벨루스가 다시 가문으로 돌아갈 확률이 높았다.
“왜? 덤비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제론의 물음에 펠이 흠칫 놀랐다. 마치 마음속에 들어왔다 나간 것 같지 않은가. 잠깐 놀랐던 펠은 이내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표정에 모든 게 나타나는데 그걸 못 알아차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굳이 그렇게 애쓸 필요 없다. 어차피 풀어 줄 생각이었으니까.”
펠이 고개를 번쩍 들고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방금 한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 애썼다. 설마 아무 조건도 없이
그냥 놔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아무 조건 없이 놔줄 테니까.”
“그게 정말이오?”
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론은 그런 펠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말투가 마음에 안 드는군. 난 백작이다. 너희들의 주군과 같은 작위를 가지고 있지.”
하지만 백작이라고 다 같은 백작이 아니었다. 힘을 가진 백작은 대우를 받지만 그렇지 않은 백작은 오히려 웬만한
기사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그것을 잘 아는 펠은 속으로 비웃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것을 내색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몸을
낮춰서라도 원하는 걸 얻어 내야만 했다.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없다. 그냥 몸만 돌아가면 된다.”
“정말입니까?”
“그래.”
제론은 더 말을 끌기 싫다는 듯 열쇠를 꺼내 철창의 문을 열었다.
철컹! 끼이이익!
철문이 열렸다. 제론은 한 발 뒤로 물러나 턱짓을 했다. 어서 나가라는 뜻이었다.
펠은 또 고민했다. 이대로 나가느냐 아니면 제론을 잡아가느냐를 가지고 말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런 기회를 놓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그들은 받은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의무가
있었다. 기회가 왔는데 버리는 건 명령을 거부하는 거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펠은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 손을 슬쩍 가렸다. 그리고 손가락 몇 개를 움직여 수신호를 보냈다.
적을 기습하라는 뜻의 신호였다. 그걸 본 기사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물론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펠을 선두로 기사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거동이 불편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단장은 기사 한 명이
업었다.
공격이 가능한 기사의 수는 모두 열여덟 명.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제론이 제법 강하다는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 다만 일대일 대결은 승산이 없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대일 대결이 아니다. 무려 열여덟 명이 한 명을 공격하는 것이다. 충분히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더구나 펠을 비롯한 일곱 명은 익스퍼트였다. 그것도 익스퍼트에 오른 지 제법 오래된 능숙한 익스퍼트였다.
‘승산은 100 프로다.’
펠은 확신했다. 그가 달려드는 걸 신호로 일제히 기습하기로 했다.
‘이런 곳에 혼자 와서 문을 열어 주다니. 멍청한 건지,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지…….’
펠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제론을 향해 날아갔다.
쉬익!
펠의 손끝이 제론의 명치를 노리고 쏘아져 나갔다. 손끝이 거의 명치에 닿는 순간까지 제론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펠은 성공을 확신했다. 역시 기습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턱!
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손끝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제론의 명치에 딱 닿은 채로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목이 꽉 잡혀 있었다.
제론이 씨익 웃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데 기회를 놓치려 할 리가 있겠는가.
제론이 손을 휘둘렀다.
부웅!
펠이 허공을 날았다.
제론은 달려드는 기사들을 향해 펠을 휘둘렀다.
퍼버버벅!
펠의 몸이 허공에서 절묘하게 흔들리더니 달려드는 기사의 손을 피해 몸통을 가격했다. 펠의 다리가 기사의
어깨를 때려 날려 버렸고, 허벅지가 몸통을 때려 피를 토하게 만들었다.
콰콰콰콰!
마치 폭풍이 일어나는 듯했다. 그 좁은 지하 감옥의 복도에서 펠을 들고 휘두르니 피할 곳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달려든 기사는 몽땅 바닥에 쓰러져 신음했다. 본의 아니게 무기가 되었던 펠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제론은 펠을 휙 던졌다.
털썩!
펠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건 아니었지만 기력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다른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온몸의 뼈가 부러지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도 못하고 끙끙댔다.
“엄살 대충 부리고 알아서 나가도록. 어디로 가든 잡지 않을 테니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지하 감옥에서 나가 버렸다.
남은 스무 명의 기사는 바닥에 누워 계속 끙끙 앓았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는 나가야만 했다. 기회가 왔는데도 나가지 못하면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리라.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펠이었다. 가장 많이 다쳐 제일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그가 먼저 움직였다. 부단장이라는
책임감의 무게가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펠은 일어나서 동료를 하나하나 일으켜 주었다. 펠의 노력에 다들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하지만 그저 움직일 수
있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 철사자 기사단의 단장이 있었다.
결국 단장은 펠이 업었다. 펠은 이에서 피가 날 정도로 어금니를 악물고 움직였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철사자 기사단이 지하 감옥에서 나갔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무사히 젤레 영지를 떠날 수 있었다.

Chapter 11 완공

젤레 영지를 중심으로 긴장감이 높아졌다. 다른 영지는 3 년간 젤레 영지에 영지전을 신청할 수 없지만 젤레


영지가 타 영지에 전쟁을 거는 건 가능했다.
주변의 세 영지는 언제 젤레 영지가 움직일지 몰라 노심초사했다. 그들은 은밀히 벨루스 백작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벨루스 백작가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만일 영지전이 벌어지면 그들에게 기간트를 지원해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벨루스 백작은 마틴의 보고를 받고 젤레 영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젤레 영지가 아니라
젤레 영지에서 나타났다는 새로운 기간트에 관심을 가졌다.
새로운 기간트에 관한 정보는 철사자 기사단이 모두 무사히 빠져나오면서 확실하게 알려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
기간트가 과연 정말로 젤레 영지의 것인지였다.
벨루스 백작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은밀히 애쓰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물밑 움직임은 활발했지만, 정작 젤레 영지 자체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왔다.

☆ ☆ ☆

“눈이라…… 바이스가 많이 힘들겠군.”


제론은 고개를 든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투명한 유적 천장을 통해 밖이 그대로 보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직 파낸 유적의 위를 덮을 정도로 공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성채의 모양은 제법 많이 완성되었다.
이대로라면 겨울이 끝나기 전에 완공이 가능했다.
제론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 내고는 다시 한 번 유적 로비를 살폈다.
요즘은 매일 이렇게 하는 것이 일과였다. 로비를 한 번 살펴본 다음, 하루 종일 유적 11 층을 공략했다.
이젠 아무리 많은 오우거가 덤벼들어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문제는 테오스의 기동 시간이었다.
기동 시간이 모자라서 오우거 웨이브의 끝을 볼 수가 없었다. 제론의 느낌에 30 분만 더 버티면 될 것 같은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건 오로지 마나의 양으로만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기동 시간이 꼭 마나의 양에만 비례하는 건
아니었다. 마나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는가도 상당히 중요했다.
하지만 제론의 생각에 마나의 효율은 거의 한계에 달한 듯했다. 이제는 마나량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매일 11 층 공략에 열을 올리는 것이기도 했다. 11 층을 공략하다 보면 마나가 바닥나는데, 그러면
자동으로 로비까지 튕겨난다.
마나가 딱 바닥난 상태에서 마나 호흡을 하면 마나가 더 많이 쌓이곤 했다. 마나가 바닥난 상태에서 더 무리를
하면 마나 역류가 일어나겠지만 그렇지 않고 이렇게 딱 멈추면 상당히 득이 된다.
제론은 오늘도 심호흡을 하고는 11 층 공략을 위해 몸을 던졌다.

시간이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겨울도 슬슬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즈음 성이 완공되었다.
바이스는 완공된 성을 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기본 틀이야 제론이 제공했지만, 세부적인
설계는 모두 자신이 했다.
직접 설계하고 직접 감독해 지은 성이 완성되었으니 얼마나 감회가 남다르겠는가.
바이스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이렇게 심장이 뛰는 이유는 비단 성이 완공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봐 더 걱정이었다. 만일 그게 안 된다면 여섯 달이 넘는 시간을 완전히 낭비한
거나 다름없었다.
시간만 낭비한 게 아니라 돈까지 낭비한 것이다. 성을 짓는 데 들어간 돈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그 돈을 다시 뽑아내려면 성이 제대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이 주변 땅을 옥토로 바꿔 놔야만 했다.
바이스가 그렇게 성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제론과 세나, 그리고 카이트가 그곳에 도착했다. 아직 젤레 영지의
핵심 인물이라고 할 사람은 그들 넷뿐이었다.
제론은 인재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특히 행정에 뛰어난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다. 앞으로 영지 규모가 커지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전에 사람을 구해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해야만 했다.
“잘 지었군.”
제론의 중얼거림에 바이스는 갑자기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제론이 인정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은 남아 있었다.
“과연 제대로 작동할지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바이스의 말에 제론이 씨익 웃었다.
“괜찮아. 제대로 작동할 거다. 만일 안 되면 되도록 방법을 강구하면 돼.”
제론은 만일 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성을 손볼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자, 그럼 역사적인 완공식을 시작해 볼까?”
참여 인원은 단 네 명뿐이었지만 정말로 역사적인 완공식이었다. 이런 형태나 방식의 성은 지금까지 없었으니까.
이 성이 최초가 된다.
제론은 성을 쳐다보다가 심장을 빙글빙글 맴도는 일곱 개의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제론의 발밑에 마법진이 하나 나타났다가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론은 성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1 차 활성화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방금 펼친 마법이 바로 성의 마법진을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성의 마법진이 모두 사용할 준비가 되었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이 지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론이 바이스를 쳐다보자, 바이스가 긴장한 눈으로 마나 스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최대한 진지하게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샤아아아아아!
푸르게 빛나는 커다란 마법진이 허공에 나타났다. 바이스는 모든 의념을 집중해 그 마법진의 중앙을 마나
스틱으로 강하게 때렸다.
쩡!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지며 푸른 빛 가루가 성채로 쏟아져 나갔다.
성이 순간적으로 푸르게 빛났다. 그 빛은 한 번 번쩍이고는 사라졌다.
바이스의 얼굴에 희열이 떠올랐다.
“으하하하하! 됐다! 성공이야!”
바이스는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 모습을 다들 흐뭇한 미소로 지켜봤다. 6 개월이 넘는 고생이 드디어 빛을 발한 것이다.
“한데 정말로 이제부터 이 황무지가 달라질까?”
“그건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야.”
그 말에 다들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봄이잖아. 이제부터 씨를 뿌려야지. 금년 가을은 아마 볼만할 거야.”
확신 어린 제론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의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젤레 영지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 ☆

봄이 오자, 젤레 영지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단 영주성 이전 작업이 시작되었다. 거리가 제법 멀었기에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동안 공사를 했던 인부들 중, 돌아갈 필요가 없는 부랑아나 난민들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던져 주었다.
바로 농사였다.
황무지를 갈아엎는 건 며칠 만에 끝냈다. 제론이 나서서 밤마다 테오스를 움직인 것이다.
일꾼이 할 일은 그렇게 갈아엎어 만들어진 땅에 씨를 파종하고 그것을 길러 내는 것이었다.
다들 기뻐하며 그 일을 받아들였다. 거의 농노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그동안 젤레 영지에서 그들을
핍박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상당한 기대감을 갖고 일을 시작했다.
일꾼 중 일부는 따로 빼서 건물을 짓는 일에 동원되었다. 성만 달랑 있었으니 다른 건물이 필요했다. 집도
필요했고, 시장도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또 모자랐다. 하지만 제론은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은 차츰 늘어날 것이다. 아직도 레늄
왕국의 난민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들을 받아들여 써먹으면 된다.
그렇게 영지가 바쁘게 돌아가는 와중에 제론은 바이스와 세나, 그리고 카이트를 불렀다.
영주의 집무실에 들어서는 세 사람의 표정은 상당히 밝았다. 새로 지은 성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편의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깨끗하고 편리했다.
“다들 거기 앉지.”
제론의 말에 세 사람이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제론은 그들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요즘 하는 일은 어때?”
제론의 물음에 가장 먼저 세나가 손을 들고 대답했다.
“어제부로 작업이 다 끝났어요!”
제론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 많았다. 당분간은 일이 없으니 쉬어도 좋아.”
제론의 말에 세나가 정말로 기뻐했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할 일은 다 끝나지 않았다. 제론이 가진 유적 창고에
아직도 200 기에 가까운 기간트가 쌓여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얼굴의 웃음기가 싹 사라질 것이다.
제론이 이번에는 바이스를 쳐다봤다. 바이스는 본격적으로 도시를 완성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예전에 대충 지었던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다시 집을 짓고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람도 많이 필요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성의 공사를 하던 사람들을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간단하게 집을 지어 주었는데, 그것은
임시로 지은 것이라 결국 허물어야만 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으로 지은 집이었다. 바이스는 그걸 모두 허물고 새로 지었다. 거기서부터 도시 건설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모자랐다. 농사를 짓는 데 대부분의 인원이 빠져나갔기에 공사를 할 사람이 턱없이 모자랐다.
“차츰 나아질 것이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카이트를 쳐다봤다. 사실 카이트의 보고를 가장 기대하고 있었다.
“라이더가 될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뽑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군.”
당장 써먹을 전력이 필요했다. 제론은 그런 기대를 안고 카이트를 쳐다봤다.
카이트는 그런 제론의 기대에 부응했다. 씨익 웃고는 보고를 이어 갔다.
“새로운 라이더 열 명을 영입하기로 했습니다.”
“열 명이나?”
제론의 눈이 커졌다. 두세 명 구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열 명이라니 대체 어디서 그런 인재를 구했단
말인가.
“다들 영주님도 아는 사람입니다.”
제론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군부 출신 라이더가 온다는 뜻이었다.
와 주면 고맙긴 하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군부에서 꿈이 있었을 텐데 그걸 다 팽개치고 여기까지 달려온다니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목숨을 여벌로 열 개가 넘게 받은 놈들이라서 그런지 아주 좋아하더군요.”
카이트의 말에 제론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물론 미안한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보고를 다 들은 제론은 잠시 뜸을 들였다. 세 사람은 대체 제론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론은 세 사람을 슥 둘러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쟁이다.”
세 사람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설마 전쟁 얘기가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우리를 건드렸던 세 영지를 친다.”
싸한 긴장감이 영주의 집무실을 거세게 휘감았다.

<4 권에서 계속>


4권

Chapter 1 응징

젤레 영지의 새로운 영주성 중심에는 높은 첨탑이 하나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첨탑이었지만, 사실


고도의 마법적 기법이 들어간 일종의 아티팩트였다.
성 자체가 거대한 마법진을 이루는데, 그 중심이 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제론은 첨탑 꼭대기 층에 서서 사방으로 뚫린 창을 통해 영지 전체를 쭉 둘러봤다.
사방으로 끝없이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사실 중간 중간 거대한 바위가 있었지만, 몽땅 내다 버리거나 성을
건축할 때 재료로 써 버렸다.
“이제 물 문제만 남았군.”
농사를 지으려면 물이 필요하다. 유적을 중심으로 하는 황무지는 어마어마한 넓이였다. 그 모든 곳에 작물을
심으려면 충분한 물이 필요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수로를 파는 것이었다. 거미줄 같은 수로를 깔아 곳곳에 물을 대서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좋았다.
다만 그렇게 하려면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물론 제론은 그 문제에 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테오스가 나서면 한 달 안에 모든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어디서 물을 끌어오느냐였다.
일단 파종을 시작했다. 황무지 전체에 한 건 아니지만 웬만한 영지에서는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땅에
파종을 했다.
그리고 제대로 작물이 자라게 하려면 물을 공급해야만 한다.
제론이 떠올린 방법은 정령이었다.
현재 제론은 바람의 정령인 아네모스와 푸르투나를 다룰 수 있다. 한데 꼭 바람의 정령만 존재하란 법은 없었다.
물의 정령도 있고 불의 정령도 있었다.
그중 물의 정령을 이용하면 급한 대로 물을 공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일단 바람의 정령을 다루는 건 문제가 없었는데, 과연 제론이 물의 정령까지 다룰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론은 최근 태블릿을 들고 다니며 정령에 대해 열심히 조사 중이었다.
‘일단 물의 정령을 불러낼 수 있어야 돼.’
제론은 결론을 내렸다. 물의 정령을 불러낸 뒤, 유적에 가져가면 된다. 그러면 아네모스를 얻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의 정령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할 일이 너무 많군.”
아직 정보 수집 아티팩트 마티도 못 찾았다. 한데 이제는 물의 정령까지 불러내야 한다. 그러려면 물가에서
한동안 애를 써야 한다.
그뿐 아니라 주변 세 영지에 응징을 준비하는 것도 살펴봐야 한다. 주된 계획을 제론이 세워야 했기에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인재도 찾아야만 한다. 라이더도 필요했고, 행정가도 필요했다. 마법사도 있으면 좋고, 병사도 많으면
좋다.
또한 상단을 운영하려면 상업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했다. 제대로 된 상단을 만들어야 이 광활한 영토에서
곡물을 키운 뒤 제값을 받고 팔 수 있다.
“차근차근하자. 차근차근.”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게으름 피우지 않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다 보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것이다.
제론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봤다. 제국 황제 검술과 마나 호흡을 수련하며 향상된 그의 시력으로도 황무지의
끝을 볼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넓은 땅이었다.
제론이 한창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영지를 둘러보고 있을 때, 첨탑에 오르는 세 사람이 있었다. 바이스와 세나,
그리고 카이트였다.
“영주님, 역시 여기 계셨군요.”
바이스의 말에 제론이 고개를 돌려 세 사람을 보고는 빙긋 웃어 주었다.
“생각할 게 많을 때는 여기보다 좋은 장소가 없거든.”
그 말이 맞다는 듯 세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가끔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생각의 흐름이 막혔을
때 이곳을 찾곤 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묶인 매듭이 술술 풀렸다.
사실 그건 첨탑에 깃든 마법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이곳에서는 제론뿐이었다. 첨탑의 마법진은
오로지 제론의 힘으로 새겼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제론의 물음에 세 사람이 긴장했다. 그리고 바이스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제론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준비가 끝났다고?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지?”
“내일이라도 당장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제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 많았어. 그럼 적당한 시기를 한번 잡아 보자고. 확실한 타이밍을 잡아야 돼.”
“알겠습니다.”
네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논의를 계속했다. 그 논의는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다.

☆ ☆ ☆

뤼그너 남작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서성였다. 예전 젤레 영지에 수작을 걸다가 실패한 이후,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물론 그 뒤로 다른 영지와 손을 잡고 공동 대응하기로 밀약을 맺었다. 그렇게 해서 기간트까지 구입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벨루스 백작가가 뒤를 봐주기로 했는데, 그때 일 이후로 연락 한 번 없었기 때문이었다.
뤼그너 남작은 손에 들린 보고서를 다시 한 번 읽었다.
“달라진 건 공사를 하던 일꾼이 몽땅 농사로 돌아섰다는 것뿐인가?”
한 달에 한 번씩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젤레 영지는 한결같았다.
오로지 공사뿐이었다. 성을 세우는 데 목숨이라도 건 것처럼 사람을 모아 몽땅 공사에 투입했다.
겨울이 되면서는 더 심해졌다. 영지민까지 싹 동원한 것이다. 물론 젤레의 영지민은 다들 그 상황을 좋아했다.
겨울이 되어 농사도 지을 수 없는데 일거리가 생긴다는 건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봄이 오기 직전에 성이 완공되었다. 솔직히 놀랐다. 그렇게 거대한 규모의 성을 고작 몇 달
만에 완성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젤레 영지가 보여 준 그 이후의 행보는 뤼그너 남작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젤레 영지에 새로 지은 성은 광활한 황무지 한가운데 위치했다. 그 황무지는 씨를 뿌려도 싹조차 나지 않는 죽은
땅이었다.
한데 성을 완공하자마자 거기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런 일을 계속 진행하려면 전쟁을 벌일 여유는 없겠군.”
세 영지가 함께 돈을 모아 기간트를 두 기나 구입했다. 한 기는 실바였지만, 다른 한 기는 크라테르였다.
기간트 구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가의 도움으로 제법 수월하게 기간트를 구할
수 있었다.
막대한 돈이 지출되었지만 덕분에 어느 정도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당시 크라테르 한 기가 보여 준 위용은 어마어마했다. 기간트를 왜 일인 군단이라고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때 영지전으로 번졌다면 분명히 뤼그너 남작령을 비롯한 세 영지는 무너졌을 것이다.
그 이후 부랴부랴 기간트를 구입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현재 크라테르는 뤼그너 남작령에서 보관 중이었고, 실바는 나머지 두 영지에서 번갈아 쓰고 있었다.
“농사라, 농사…….”
뤼그너 남작은 문득 그 황무지에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지 떠올렸다.
황무지의 넓이는 어마어마하다. 거기서 곡물이 난다면 양이 엄청날 것이다.
뤼그너 남작령에서 키우는 곡물 정도로만 자라 준다고 해도 왕국의 식량 값을 크게 바꿀 수 있을 만한 양이 나올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뤼그너 남작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 황무지가 쓸모없는 땅이라는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증명이 되었다. 또한 자주 다시 증명되어 왔다.
멀쩡한 땅을 놀릴 이유가 없으니 농사가 가능한 땅을 찾아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 땅은 정말로 죽은 땅이었다.
“그나저나 벨루스 백작가는 완전히 손을 뗀 것인가?”
뤼그너 남작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만일 벨루스 백작가가 조금만 힘을 보태 준다면 얼마든지 젤레 영지를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철사자 기사단이 당했다는 사실은 뤼그너 남작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저 외부의 힘이 작용했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벨루스 백작가가 발 벗고 나서서 정보를 차단한 결과였다.
그렇기에 더 아쉬웠고, 서운했다. 필요할 때는 와서 모든 걸 다 해 줄 듯하더니, 이제 와서 입을 싹 씻고 모른
척하니 말이다.
뤼그너 남작이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영주님! 큰일입니다!”
뤼그너 남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묻고 나니 불안해졌다. 지금 이렇게 큰일이라고 할 만한 일은 딱 하나뿐 아닌가. 다급한 기사의 표정을 보니
더욱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뤼그너 남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폭동이라니.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자세히 고해라!”
“파종을 하던 놈들이 갑자기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제압을 위해 출동한 병사까지 폭동에 합류해 일이 커지고
있습니다!”
“뭐라고?”
뤼그너 남작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감히 폭동이라니.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으면 이따위 일을 벌인단
말인가.
“몇 놈이나 폭동에 가담했느냐?”
“대략 이백 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흥, 병사를 풀어 싹 잡아들여라. 그놈들을 몽땅 노예로 팔아 버리겠다.”
안 그래도 영지 재정이 휘청거리는 상황이었다. 이백 명이나 되는 노예를 판매한다면 당분간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노, 노예로 말입니까?”
뤼그너 남작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내가 명령을 다시 내려야 하느냐?”
“아, 아닙니다!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뤼그너 남작령에는 오백 명의 병사가 있었다. 또한 기사단까지 있었다. 고작 이백 명의 폭도 따위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뤼그너 남작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많이 달랐다.

“부대 정렬!”
기사단장의 외침에 병사가 줄을 맞춰 섰다. 그리고 창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언제든 달려들 수 있는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리고 말을 탄 기사 열 명이 폭도를 꿰뚫어 버리겠다는 듯 기세를 내뿜었다.
반면 이백 명에 달하는 폭도는 흉흉한 눈을 빛내며 손에 든 몽둥이를 꽉 쥐었다. 그 사이사이에 병사가 섞여
있었는데, 다들 검을 뽑아 들고 눈앞에 보이는 병사와 기사를 노려봤다.
병사의 수는 사백 명이었다. 폭도 안에 백 명이나 되는 병사가 섞여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예전 젤레
영지에 포로로 잡혔던 자들이었다.
“전진!”
기사단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병사가 일제히 걸음을 내디뎠다.
척! 척! 척!
발을 맞춰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사백 병사의 위압감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그들과 맞서는 폭도의 눈빛은 여전히 흉흉하기만 했다. 전혀 겁먹거나, 기세에 눌리지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충실히 훈련을 받아 온 병사들은 창을 앞으로 겨눈 채 발 맞춰 걸어갔다.
병사와 폭도의 간격이 점점 줄어들었다. 폭도는 창을 앞세운 병사가 밀려오는데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이내 양측의 간격이 스무 걸음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폭도 중 하나가 소리쳤다.
“지금이야! 던져!”
그와 동시에 폭도 사이에서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슬이 휙휙 날아갔다. 새까만 구슬이었는데, 정확히 다섯 개였고,
모두 병사들 앞에 떨어졌다.
퍽! 퍽! 퍽! 퍽! 퍽!
번쩍!
강렬한 섬광이 일어났다. 그 섬광은 병사와 기사를 완전히 삼켜 버렸다.
“크아악!”
“아악! 눈이!”
섬광이 사라졌다. 섬광에 노출된 병사와 기사가 두 눈을 감싸고 괴로워했다. 문제는 말이었다. 말조차 섬광
때문에 난동을 피웠다.
“지금이다!”
폭도가 일제히 뛰어나갔다. 몽둥이를 든 그들의 기세는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퍽! 퍽! 퍽!
“컥!”
“끄악!”
폭도의 몽둥이질에 병사들이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아무리 빛 때문에 시력을 잃었다지만 지나치게 쉬웠다. 게다가
기사들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백 명의 폭도가 사백 명의 병사와 열 명의 기사를 몽둥이로 제압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병사와 기사가 순식간에 쓰러졌다.
“우리가 이겼다! 다들 묶어!”
폭도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마치 잘 훈련받은 사람 같았다. 순식간에 병사와 기사에게 달려들어 무기를
압수하고 손발을 묶었다.
팔다리가 꽁꽁 묶인 병사와 기사는 멍하니 폭도들을 바라봤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기사는 병사와
차원이 다른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그런 기사조차 힘 한 번 못 쓰고 당해 버렸다. 고작 폭도에게 말이다.
“기간트가 올 수도 있으니 준비해라!”
누군가의 외침에 폭도들이 우르르 움직여 꽁꽁 묶인 병사와 기사를 어딘가로 옮겼다.
폭도에 의해 팔다리를 붙들린 병사와 기사는 결국 기겁을 했다. 그들의 눈에 구덩이가 보였다. 사람 하나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서, 설마…….”
다들 믿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죽이지도 않고 산 채로 땅에 파묻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툭! 툭!
곳곳에서 사람을 구덩이에 던져 넣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하는 병사와 기사는 그 순간 온몸이 경직되었다. 하지만
이내 조금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뭐지? 구덩이가 너무 얕아.’
구덩이에 누워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밖이 살짝 보일 정도였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흙을 채워도 얼굴이나 가슴,
배 정도는 드러날 것 같았다.
잠시 후, 몇몇 사람이 와서 구덩이를 흙으로 채웠다. 예상했던 대로 얼굴이 밖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고개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귀까지 흙에 덮여 고개를 움직이면 바로 흙이 코와 입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상황이 영주성으로 보고되었다.

뤼그너 남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려 사백 명이나 되는 병사와 열 명의 기사가 사로잡혔다. 이는 뤼그너
남작령의 모든 병력이었다.
만일 그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갑작스런 병력의 공백에 남작령을 다스리는 일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남작령이 무너져 버릴 것이다.
물론 결국은 왕국 차원에서 나서서 해결해 주긴 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다. 영지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질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폭동에 의해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다.
뤼그너 남작은 위기감을 느끼며 말했다.
“기간트를 써야겠군.”
기간트를 쓴다면 이 모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기간트는 그 정도로 대단한 힘을 가졌다.
고작 이백 명의 폭도 따위 기간트가 나서기만 하면 금방 쓸어버릴 수 있었다.
설사 이백 명의 기사가 달려들어도 기간트 한 대를 어쩌지 못할 텐데 고작 폭도 이백 명이 뭘 어쩔 수 있겠는가.
“가자! 내가 직접 그놈들이 짓밟히는 모습을 봐야겠다.”
뤼그너 남작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러자 그 뒤를 남은 기사 두 명이 황급히 따라갔다. 물론 그 두 기사는
정식 기사가 아니라 견습이었다.
정식 기사는 이번 폭동을 수습하러 갔다가 몽땅 사로잡힌 것이다.
그나마 라이더는 따로 분리해 둬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칫 기간트까지 폭도에게 빼앗길 뻔했다.
뤼그너 남작령에 배당된 크라테르의 라이더는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라이더의 경험을 가진 기사가 그뿐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른 영지에서 라이더로 내세운 자들보다는 기간트 센스가 뛰어났기에 크라테르를 받을 수 있었다.
소식을 들은 듯 그는 이미 크라테르에 탑승해 폭도에게 달려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뤼그너 남작은 즉시 마차에 탔다. 마차가 출발하자, 크라테르가 마차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어갔다.
쿵! 쿵! 쿵! 쿵!
이내 마차가 폭동이 벌어진 곳에 도착했다. 뤼그너 남작은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경작지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가 파헤쳐졌고, 수백 명이나 되는 병사가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파종을
하려면 다시 땅을 한 번 갈아엎어야만 했다.
그 상황을 확인한 뤼그너 남작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서두르지 않으면 금년 농사가 잘못될 수도 있었다.
그건 곤란했다. 기간트를 사느라 얼마나 무리했는데 농사까지 망치면 뤼그너 남작령은 빚의 수렁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서둘러라!”
뤼그너 남작의 외침에 크라테르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쿵! 쿵! 쿵!
그렇게 몇 발 걸어간 크라테르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뤼그너 남작이 그것을 보고 소리쳤다.
“서두르지 않고 뭘 하는 것이냐!”
“영주님! 앞에 사람이 있습니다!”
뤼그너 남작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사람이 있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그냥 밟고 지나가!”
뤼그너 남작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 외침을 들은 자들, 즉, 바닥에 얼굴만 내놓고 파묻힌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들은 기간트가 다가오는 소리만 들었지 정작 기간트를 볼 수 없었다. 시야에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만일 기간트가 자신을 밟고 지나가기라도 하면 완전히 눌려 터져 버릴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영주님! 저들은 분명히 우리 병사들이 분명합니다. 앗! 단장님!”
크라테르에 탄 부단장이 바닥에 묻힌 자들 중 기사단장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뤼그너 남작도 부단장과 마찬가지로 깜짝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폭도가 병사와
기사를 사로잡아 땅에 파묻었다는 말 아닌가.
“이놈들! 설마 기간트의 진격을 막으려고 이따위 짓을 했단 말인가!”
뤼그너 남작은 다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일단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을 만한 장소가
필요했다. 예를 들면 높은 탑 같은 것 말이다.
장소는 쉽게 발견했다. 뤼그너 남작은 열심히 달려 근처에서 비교적 지대가 높은 언덕으로 향했다.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분명히 상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체통도 잊고 나무에 기어올라 간 뤼그너 남작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저런 나쁜 놈들!”
사백 명의 병사와 열 명의 기사가 바닥에 얼굴만 내놓고 묻혀 있었다.
병사를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도록 교묘하게 사람을 깔아 두었다. 뤼그너 남작은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선
그냥 밟고 지나가라고 명령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영주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다고 하지만 민심을 완전히 잃으면 곤란했다.
자신을 죽이려는 영주를 위해 어떤 병사가 창을 들어주겠는가.
물론 기간트로 협박해 공포로 다스리면 되긴 한다. 하지만 그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그 방법은 가장 나중에
써먹어야만 했다.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인상을 쓰던 뤼그너 남작의 눈에 빈 공간이 들어왔다. 마치 그리로 들어오라는 듯 사람이
전혀 깔리지 않은 공간이었다.
함정이 분명했다. 하지만 기간트를 상대로 인간이 무슨 함정을 팔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땅을 파는 건데…….’
뤼그너 남작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인간들이 구덩이를 파 봐야 얼마나 깊게 팔 수 있겠는가. 크라테르의
키는 무려 11 미터에 달한다. 팔을 위로 올리면 그보다 훨씬 길다.
그런 크라테르를 완벽히 함정에 빠트리려면 기어오르기 어렵게 절벽처럼 땅을 파 내려가야만 한다. 게다가 최소
20 미터는 파 줘야 크라테가 빠져나오기 어려워진다.
아무리 인원이 많다고 하지만 그 정도 깊이의 구덩이를 파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폭동이 일어난 건
오늘이었다.
미리 준비를 했다면 누군가의 눈에 띄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은 없었다.
뤼그너 남작은 속으로 모든 계산을 끝낸 뒤 크라테르에게 명령했다.
“저쪽에 빈 공간이 있다! 그쪽으로 들어가!”
부단장은 생각도 하지 않고 남작의 말을 따랐다.
쿵쿵쿵쿵!
폭도가 모여서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남작의 말대로 사람이 깔리지 않은 곳도 보였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땅을 파내서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그 정도로 섬세한 조종은 불가능했다.
그건 경력이 10 년쯤 되는 라이더나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단장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쿵쿵쿵쿵!
뚫린 길을 통해 달려가는 크라테르의 기세가 흉흉했다. 당장이라도 폭도를 박살 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
기세는 기세일 뿐이었다.
꽈앙!
예상대로 구덩이 함정이 있었고, 크라테르가 거기에 빠졌다. 예상과 다른 건 딱 하나 깊이였다.
뤼그너 남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땅이 푹 꺼지며 크라테르가 빠졌는데, 모습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대체
저런 구덩이를 언제 팠단 말인가.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언덕 나무 위에서도 크라테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였다. 정말로 20 미터가 넘는 깊이인 모양이었다.
꽈릉! 꽈르릉!
크라테르가 구덩이 안에서 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쉽진 않겠지만 결국은 나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폭도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으니까.
크라테르가 구덩이에 빠지기 무섭게 폭도들이 우르르 달려갔다. 일부는 마차로 향했고, 일부는 뤼그너 남작이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뤼그너 남작은 크게 당황했다. 설마 폭도가 자신을 노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당연히 기간트가 쓸어버릴
거라고 생각했으니 당연했다.
“어어…….”
뤼그너 남작이 나무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당황할 때, 사백 명이나 되는 폭도가 나무 아래에 도착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도끼를 들고 나왔다.
도끼를 든 사내가 나무 위를 올려봤다. 뤼그너 남작과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어 주고는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었다.
그리고 도끼를 불끈 쥐고 나무를 패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나무가 파이면 파일수록 뤼그너 남작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마차를 박살 낸 나머지 폭도가 언덕으로 올라왔다. 그들의 눈빛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뤼그너 남작의 목젖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일이 다른 두 영지에서도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 ☆ ☆

제론은 느긋하게 응접실로 향했다. 동시에 세 명의 손님이 왔다고 하나,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리던 세 사람이 일제히 벌떡벌떡 일어났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세 사람이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제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 주고는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댔다.
제론이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세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 없으니
어떻게든 말을 해야만 했다.
“저…… 도와주십시오, 영주님.”
한 사람이 먼저 용기를 내서 말하자, 나머지 두 사람도 저마다 말했다.
“도와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론이 씨익 웃으며 그들을 쳐다봤다.
“뭘 어떻게 돕길 바라나?”
그들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현재 저희 영지에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는 들은 것 같군. 그래서? 설마 폭동을 제압하지 못해서 병력을 빌려 달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세 사람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들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저…… 그…… 영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폭동을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제론이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고작 영지민의 폭동 하나 제압하지 못해 도움을
요청했으니 비웃음을 당해도 쌌다.
“그래. 어떻게 도우면 되겠나? 가서 폭도를 싹 죽여 주면 되나?”
세 사람이 반색했다.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데…….”
“뭔데? 말해 봐라.”
“저희 영주님이 폭도들에게 잡혀 계십니다.”
제론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세 사람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얼굴도 시뻘게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영주까지 구해 달라?”
“제발 부탁드립니다!”
세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세 영지의 후계자였다. 이번에 도움을 청하면서 젤레 영지의 영주인
제론과 안면도 익힐 겸 온 것이었다.
또한 그들 정도가 움직이지 않으면 제론을 설득하기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다.
“좋아. 도움을 주지. 한데 그럼 내게 뭘 줄 텐가?”
“예?”
세 사람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냥 이웃을 도와주신다고 생각하시면…….”
제론이 피식 웃었다.
“훗. 웃기지도 않는군. 얼마 전에 우리 영지에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다 아는데 그따위 말을 하다니 말이야.”
세 사람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제론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제론이 손가락 하나를 들고 말했다.
“일단 포로로 잡은 폭도와 그의 가족을 몽땅 내가 가지겠다.”
세 사람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어차피 폭도를 몽땅 죽여 버리려고 했다. 한데 그런 자들을 대가로 가져가겠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제론이 손가락 하나를 더 들었다.
“보상금으로 향후 5 년 동안 매년 1 만 골드를 바쳐라.”
“예? 그, 그건…….”
“왜, 어렵나?”
세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닙니다. 대신 최대한 빨리 처리해 주십시오.”
“물론 오늘 당장 처리해 주겠다.”
세 사람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제론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영주가 사로잡히는 바람에 기간트까지 폭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만일 폭도 중에 라이더라도 있다면 영지는 완전히 풍비박산이 날 것이다.
폭동이니 왕국 자체에서 해결해 줄 수도 있지만,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동안 영지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제론에게 매달린 것이다. 너무나 다행이었다. 빠르게 해결할 수 있게 되어서 말이다.
적어도 세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제론은 그런 세 사람을 보며 또 한 번 씨익 웃었다. 모든 건 계획대로였다.

Chapter 2 발전
폭동은 아주 간단히 끝났다.
폭도 중에는 기간트를 몰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기간트가 없으니 진압도 아주 간단했다.
제론은 폭도를 몽땅 사로잡아 젤레 영지로 데려왔다. 그 수가 무려 육백 명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가족까지 싹 끌고 왔다. 미리 약속한 대로였다. 폭도 한 명당 세 명에서 다섯 명까지의 가족을
데리고 있었다. 많은 경우는 일곱 명의 가족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가족까지 다 하니 그 수가 엄청났다. 삼천 명이 넘는 대인원이 일제히 젤레 영지로 몰려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뤼그너 남작령을 비롯한 세 영지에는 많은 영지민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젤레 영지로 넘어간
사람들의 질이 문제였다.

뤼그너 남작은 주먹을 꽉 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영지에 대장장이가 고작 두 명 남았단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그래서 무기를 못 만들고 있단 말이냐?”
“만들고는 있습니다만…… 속도가…….”
“끄응!”
뤼그너 남작은 짜증이 확 솟았다. 이번에 폭동이 일어나면서 병사와 기사의 무구가 싹 사라져 버렸다. 폭동을
제압하면서 젤레 영지의 병사가 싹 쓸어가 버린 것이다.
강하게 항의했지만 젤레 영지 측에서는 딱 잡아뗐다. 그런 식으로 부정하는 이상 뤼그너 남작이 뭘 더 해 볼
여지가 없었다.
지금 뤼그너 남작령은 철저한 약자의 입장이었다. 그나마 기간트를 되찾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래서 병사와 기사의 무구를 새로 제작하기로 했는데, 이런 문제가 터진 것이다.
“주변 다른 영지에 도움을 청해 봐!”
“이미 해 봤습니다만, 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뭐?”
뤼그너 남작의 표정이 싸악 굳었다. 다른 영지도 마찬가지라니. 이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하면 다른 영지에서도 대장장이들이 폭도에 끼어 있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뭐?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봐.”
“대장장이뿐 아니라 다른 직종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다른 직종?”
“다양한 방면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대부분 폭도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뤼그너 남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이만 물러가라.”
보고를 하던 행정관이 물러가자, 뤼그너 남작은 집무실 안을 서성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일은 젤레 영지에서 계획적으로 벌인 게 틀림없었다. 사실 자신이 하려고 세웠던 계획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하는 입장이었고 지금은 받는 입장이었다.
“이놈을 대체 어떻게 응징하지?”
너무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젤레 영지로 쳐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젤레 영지는 3 년간
영지전이 금지된 곳이었다. 또한 실제 영지전이 벌어지더라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어쨌든 이번 폭동으로 인해 뤼그너 남작령은 수십 년이나 퇴보해 버렸다. 영지의 숙련자들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은 뤼그너 남작령뿐 아니라 다른 두 영지도 마찬가지였다.

☆ ☆ ☆
“어때? 새로운 사람들은 잘 적응하고 있나?”
제론의 물음에 바이스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마치 원래 우리 영지 사람인 것처럼 적응하고 있습니다.”
“잘됐군. 인력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
“예. 지속적으로 난민을 받아들이는 중입니다만, 이제 그것도 슬슬 한계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이제 난민의 수도 확 줄어들었다. 전쟁의 피해를 한창 복구하는 중이기에
곳곳에서 사람이 많이 쓰였다.
또한 각 영지에서 영지민 관리를 더욱 철저히 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당분간은 난민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단 이번에 경험 많은 자들을 받아들였으니, 그들을 이용해서 필요한 조직을 구성해 봐.”
“그렇게 하겠습니다.”
바이스가 대답하자 제론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세나가 서서 제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수리는 다 끝났나?”
“네.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근데…… 설마 더 있으신 건 아니죠?”
세나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수리한 기간트만 해도 벌써 수십 대였다. 조금만 더 하면 과장 좀
보태서 백 대는 될 것이다.
대체 그 많은 기간트를 어디서 가져오는지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
제론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슬슬 좀 더 좋은 기간트에 도전해 보고 싶지 않아?”
“예? 좀 더 좋은 기간트요?”
“예를 들면 베르라거나…….”
“베, 베르요?”
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베르라니! 발굴형 기간트 중에서는 최하위 기체라고 하지만 그래도 다른 양산형
기체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성능을 자랑하는 기간트였다.
“저, 정말 베르가 있나요?”
“일단 시험 삼아 두 기만 수리해 보지.”
“조, 좋아요!”
세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대답했다. 너무 힘들다는 생각은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자그마치
베르였다.
그동안 크라테르나 몰레스까지 수리해 봤다. 하지만 그 이상의 기체는 한 번도 수리한 적이 없었다.
크라테르나 몰레스 위에도 몇 가지 기체가 더 있었다. 주로 크란 제국에서 생산하는 기체였는데, 출력이 2.0 을
넘어서는 기체였기에 수리조차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다.
그동안 수많은 기간트를 수리하면서, 내심 그런 기체를 보기만 해도 뭔가 배울 점이 많고 좋은 경험이 되겠다고
생각해 왔다.
한데 느닷없이 베르라니. 기뻐서 펄쩍 뛰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럼 오후에 갖다 놓을 테니까 며칠 쉬고 시작해.”
세나가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당장 시작할게요!”
기세가 워낙 대단했기에 제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회의 끝나면 같이 작업실로 가지. 내려 줄 테니까.”
성을 옮기면서 세나의 작업실도 새로 지었다. 예전처럼 어두침침한 창고에서 지낼 필요가 없었다.
세나의 작업실은 거대했으며, 상당한 장비가 갖춰져 있었다. 실력과 부품만 제대로 공급되면 당장 기간트 한 대
뚝딱 만드는 것도 문제없을 정도였다.
그 작업실에 초고대 문명의 기술이 일부 적용되었다는 건 제론만 아는 비밀이었다.
“자, 그럼 다음.”
제론의 시선이 카이트에게 닿았다. 카이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무려 스무 명이나 구했습니다.”
“스무 명?”
“한 달 후에 도착 예정입니다. 군부에 정리할 것들이 좀 남아서 당장 오기는 어렵습니다.”
제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 많았다. 드디어 제대로 된 기사단을 만들 수 있겠군.”
카이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기사단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그들은 군부의 라이더일 뿐입니다. 아무리 기사 작위를 내려도
진짜 기사와는 여러 가지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은 제론도 익히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카이트가 섭외한 스무 명의 라이더는 제론이 처음 군에 입대했을
때부터 겪은 자들이었다.
그들에 대해서는 어쩌면 카이트보다 더 빠삭하게 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항상 그들과 기간트 대결을 하고 그들의
실력을 키워 왔다.
그렇기에 그들의 장단점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군부의 라이더는 일반적인 기사 출신 라이더보다 기간트 운용이 조금 더 뛰어났다. 그리고 집단전에서는 훨씬
뛰어나다.
반면 실제 몸으로 하는 검술은 기사에 비해 현저히 모자랐다. 검에 쏟는 시간을 오로지 기간트에 쏟아부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냥 군부에 뼈를 묻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기사가 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기사는 반드시 기간트 라이더일 필요는 없었다. 물론 기간트 라이더라면 더 좋겠지만 세상 모든 기사가 라이더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기본적인 기사로서의 소양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주군에 대한 충성이었고, 두
번째가 검술이었다.
기간트 소환 자체가 금지된 곳이 존재하는데, 거기서 무력을 쓸 일이 있으면 오로지 본신의 실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기간틱 나이트가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이다.
“검술이야 익히면 그만이지. 너도 슬슬 검을 익히는 게 좋지 않을까?”
카이트 역시 다른 군부의 라이더와 마찬가지로 기간트 조종 실력에 비해 검술이 약했다. 그 점을 지적하니
카이트로서는 그저 뒷머리를 긁적이는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그런 카이트를 향해 책자 하나를 휙 던져 주었다.
“이게 뭡니까?”
책자를 받아 든 카이트는 그렇게 물으며 책을 펼쳤다. 그 안에는 검을 든 사람의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매 페이지 가장 아래에 작은 글씨로 ‘라이트닝 소드’라고 적혀 있었다.
“라이트닝 소드라는 검술이다. 가장 첫 페이지에 있는 것이 검술과 가장 잘 맞는 마나 호흡법이다. 그걸
익히도록.”
카이트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제론과 책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라이트닝
소드라는 검술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또한 마나 호흡법이라니. 그게 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고대 유적에서 얻은 게 있다고 말 안 했던가? 고대의 검술과 몸에 마나를 쌓는 법이다.”
제론의 설명에 카이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몸에 마나를 쌓는 법이라니. 그럼 익스퍼트가 되는 방법이라는 뜻
아닌가.
“장담하는데, 검술의 자질이 바닥을 기지 않는 한, 세 달 안에 익스퍼트가 될 것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제론의 말은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그 말을 들은 바이스와 세나까지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정도였다.
세 달 만에 익스퍼트로 만들어 주는 검술이라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그렇다면 이 검술을 제대로 익히면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 아닌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만, 이 일은 무조건 비밀이다. 외부에 새 나가는 순간 우리는 끝이야. 알고 있겠지?”
세 사람이 동시에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보물을 가진 건 죄가 되지 않지만, 보물을 가진 자가
힘이 없는 건 죄가 된다.
젤레 영지는 아직 작다. 아마 라이트닝 소드에 관한 내용이 외부로 조금만 흘러 나가도 흔적도 없이 쓸려 나가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영지 근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예전 영지를 구해 준 의문의 기간트 때문이었다.
거기에 라이트닝 소드까지 더해지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하면 이 라이트닝 소드를 기사 전원이 익히는 것입니까?”
카이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제론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미리 익히고 있는 게 나을 거야. 기사단장이 다른 기사보다 약하면 좀 그렇지 않겠어?”
제론의 말에 카이트의 몸이 순간 굳었다. 그는 이내 이를 악물었다. 생각해 보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남은
시간은 고작 한 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 책은 서둘러 외우고 태워 버리도록.”
“예? 하면 다른 기사는…….”
“네가 익히고 가르쳐야지.”
그제야 카이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다급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을 가르치려면 자신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카이트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아마 지금부터 연무장에 틀어박혀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리라. 물론 그 와중에
기간트 센스를 잃지 않기 위한 노력도 틈틈이 하고 말이다.
“자, 이제 대충 회의를 마무리하지. 아마 조만간 내가 수도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수도에요?”
세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바이스 역시 놀란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표정에 약간의 불안감이 담겼다.
“인재를 찾아야지. 기사만으로는 영지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거 잘 알잖아.”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바이스는 정말 말레피 후작가의 후계자 자리에는 관심이 없는 건가?”
바이스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전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그렇게 말한 바이스는 제론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나중에는 말레피 후작가의 가주가 되는 것보다 영주님 아래에 있는 게 훨씬 영광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바이스의 말에는 포부와 야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제론은 그런 바이스의 태도가 싫지 않았다. 제론 역시
사내였다. 포부와 야망이 없을 리 없었다.
다만 지금은 그 앞에 생존과 복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바이스는 원래 마법사라는 걸 잊지 마.”
“알고 있습니다.”
“성 중앙에 있는 탑. 어떤 용도인지 혹시 알고 있어?”
“마법진의 축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그건 우리 영지의 마탑이기도 해.”
“예?”
바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탑을 영주성 중앙에 세웠다니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마탑은 일반적으로 마법사의 연구실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최근의 마탑은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기간트를 연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바이스가 마탑주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바이스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기대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좋아. 기대해 보지.”
제론은 씨익 웃었다. 바이스는 오늘 자신이 한 선택으로 인해 초고대 문명의 마법 지류 중 한 자락을 잡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마 절대 모를 것이다.
“자. 이젠 정말로 여기까지 하자고. 난 조만간 수도로 갈 테니까 내가 사라지면 그런가 보다 하고.”
바이스와 세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두 사람은 깍듯하게 대답하고는 물러갔다.
제론은 집무실에 혼자 남자, 마나 호흡을 통해 체력을 한 번 보충했다.
이제부터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을 하러 갈 시간이 되었다.
바로 유적 방문이었다. 아직도 끝내지 못한 11 층을 오늘 끝내고야 말 것이다.
이젠 정말로 끝이 보였다.

기존 유적은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했다. 물론 유적의 가장자리 부분은 성의 외벽이 되어 방어를 단단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유적의 중앙 부분에는 마탑이 세워졌고, 유적의 끝 부분, 즉, 제론이 지하 유적으로 들어가던 장소에는 영주의
집무실과 침실을 비롯해 영주에 관한 모든 것이 위치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곳은 침실과 집무실이었다. 물론 그건 제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보는 관점이었다. 제론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는 제일 아래층에 위치한 지하 연무장이었다.
유적 바닥을 최대한 파고들어 단단한 청석을 촘촘히 깔아 웬만한 충격에도 끄떡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게다가
벽과 바닥 곳곳에 충격 흡수 마법진까지 새겨져 있었다.
지하 연무장도 제론이 마지막에 직접 손을 봤다. 이곳은 제론이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에도 계속 써야 하기에
최대한 튼튼하게 만들었다.
제론은 연무장 한가운데에 섰다. 영주 전용 연무장이었기에 제론이 들어온 이후에는 누구도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이는 마법적으로 처리되기에 설사 바이스나 세나라 하더라도 이곳에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
오직 영주인 제론만이 출입 가능한 공간이었다.
제론은 연무장 한가운데에 서서 아네모스를 불렀다. 제론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쑥 내려갔다.
로비 한가운데 선 제론은 망설임 없이 11 층으로 향했다. 마티를 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지금은 막바지에 이른 11
층 수련을 마무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제론은 즉시 테오스를 불러냈다. 순식간에 테오스가 나타났고, 제론은 어느새 테오스에 탄 상태가 되었다.
테오스는 나타남과 동시에 아공간에서 검을 뽑아 내리그었다.
슈각!
변종 오우거 한 마리가 두 동강 났다. 너무나도 깔끔한 일격이었다.
그 뒤로 수많은 오우거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테오스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깔끔하게
오우거를 베어 버렸다.
이내 수십 마리의 오우거가 달려들었다.
테오스는 여전히 깔끔한 동작으로 오우거의 목을 날려 버렸다.
오우거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결국 수백 마리의 오우거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테오스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슈각! 슈각! 슈각! 슈각! 슈가각!
검을 한 번 휘두르면 오우거의 머리 하나가 어김없이 떨어졌다. 때로는 두 개가 동시에 떨어질 때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때쯤 검에서 마나로 이루어진 날이 쭉 뿜어져 나왔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마나가 전혀 서리지 않은 검으로 싸우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마나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서 딱 검날에 스며들 정도로만 조절을 한 것이다.
테오스는 마치 검을 휘두르며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움직였다. 갑자기 검이 수십 개로 늘어난 것 같은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수십 개의 목이 동시에 치솟았다.
촤촤촤촤!
사방이 피로 얼룩졌다. 수백 마리 오우거가 피를 뒤집어쓴 채 달려들었다.
하지만 테오스는 여전히 검을 휘두르며 춤을 추었다. 수십 개로 불어난 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사방을
난자했다.
촤악! 촤악! 촤악!
수십 개의 목이 떨어지자마자 또 수십 개의 목이 떨어졌다. 그렇게 연달아 목이 떨어지니 수백 마리나 되는
오우거가 순식간에 죽어 버렸다.
그런 광경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리고 제론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순간이 찾아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넘지
못했던 벽이었다.
천 마리의 변종 오우거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수백 마리와 천 마리는 차원이 달랐다. 검으로 베고 베도 끝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테오스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촤악! 촤악! 촤악!
테오스의 검은 여전히 수십 개였고, 검을 들고 추는 춤도 그대로였다.
백 마리든 천 마리든 똑같았다. 아마 수천 마리가 동시에 덤벼도 똑같았을 것이다.
천 마리 오우거가 바닥에 눕는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제론은 테오스를 멈추고 가만히 서서 아랫배에서 출렁이는
마나를 점검했다.
아직 얼마든지 더 싸울 수 있었다. 마나를 채 반도 쓰지 않았다. 제론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어렸다. 얼마 전
얻은 깨달음이 아니었다면 이런 성과를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사방에 펼쳐진 모든 자연경관이 싹 사라져 버렸다. 테오스는 새하얀 방 안에 홀로 서 있었다.
제론은 11 층을 클리어했다는 걸 깨닫고는 테오스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냈다.
이제는 그 새하얀 공간에 제론 혼자 서 있었다.
지잉!
방 한가운데에서 기둥 하나가 솟았다. 11 층 클리어 보상이었다. 제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기둥으로
다가갔다.
기둥 안에는 작은 보석이 하나 놓여있었다. 새까만 보석이었는데, 크기가 작은 콩알만 했다. 이걸 어디에
쓰는지도 알 수 없었다.
“뭐지? 설명 카드도 없고.”
생각해 보면 검술이나 마법의 경우가 아니면 요즘은 클리어 보상에서 설명 카드가 함께 나오지 않았다. 알아서
스스로 파악하라는 뜻이리라.
“음?”
제론은 문득 보석의 모양이 조금 낯익다는 걸 깨달았다. 보석은 정밀하게 세공되어 있었는데, 모양이 마치 태양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이렇게 작은 보석을 이런 모양으로 세공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아!”
제론은 왜 모양이 익숙한지 알아냈다. 벨트의 버클에 있던 문양과 똑같았다.
일단 벨트를 푼 제론은 버클을 살폈다. 버클 한가운데에 보석과 똑같은 문양이 있었다.
문양을 보니 보석을 어떻게 쓰는지 딱 알 수 있었다. 이 문양은 애초에 보석을 위한 자리였다. 문양의 모양에
맞춰 홈이 파여 있었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보석을 홈에 끼웠다.
철컥!
화아악!
뭔가가 딱 맞물리는 소리가 났고, 그와 동시에 강렬한 섬광이 일었다. 버클에서, 아니, 보석에서 나는
섬광이었다.
제론은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섬광 속에서 보석이 버클에 녹아들며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광경을 확인했다.
참으로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이내 섬광이 사라졌다. 이제 버클 한가운데에는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 같은 검은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어떤 선물인지가 중요하지.”
제론은 일단 테오스를 소환했다. 그리고 조종석에서 과연 뭐가 달라졌는지 살펴봤다.
일단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시야였다. 평소보다 왠지 시야가 훨씬 넓어진 듯했다. 하지만 선물이 고작 그거
하나라면 너무 모자라지 않은가.
제론이 그렇게 뭐가 달라졌는지 살피고 있을 때, 갑자기 새하얀 방 안 곳곳에서 시커먼 구멍이 나타났다. 수백만
개는 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 검은 연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마치 폭포 소리 같았다. 연기가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 앞으로 쏘아지듯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앞으로
나오면 연기가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제론은 그 광경을 보다가 문득 뭔가가 달라진 것 같아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경악했다.
“뭐, 뭐야! 이게!”
사방이 열려 있었다. 테오스의 조종석만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분명히 테오스 안에
있었다.
제론의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사방에 화면이 확확 떠올랐다. 작은 화면이긴 했지만 비치는 광경은 너무나
선명했다.
모든 화면이 비슷한 영상을 내보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이 방의 상황이었다.
검은 구멍에서 까만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테오스가 서 있었다. 그것을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각도에서 비췄다.
제론은 이게 무엇인지 대번에 알았다.
“마티…….”
11 층 클리어 보상은 놀랍게도 정보 수집 아티팩트, 마티였다. 그동안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더니 여기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내 방 안이 마티로 꽉 찼다. 그럼에도 구멍에서는 계속 마티가 쏟아져 나왔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제론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체른산 유적에 있는 마티의 수보다 이곳에 있는 마티의 수가 최소한 수십 배는 많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제론은 즉시 로비로 이동했다. 그 와중에도 사방에 뜬 화면을 통해서 마티가 계속 쏟아져 나오는 광경을 지켜봤다.
마티는 정말 끝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결국 그 방을 가득 채워 버렸다.
물론 조만간 그 방은 텅 빌 것이다. 이 마티는 젤레 영지 주변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밖으로 나갈 테니 말이다.
제론은 테오스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내고 로비 한가운데 서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제 마티를 얻었으니 이걸 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정보를 확인할 때마다 테오스를 불러낼 수는 없지 않은가.
또한 자동으로 정보를 정리하는 기능도 필요했다. 사실 그 모든 걸 감안하면 태블릿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문제는 과연 태블릿으로 이곳의 마티를 다룰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모를 때는 해 보면 된다. 제론은 즉시 태블릿을 꺼냈다. 그리고 몇 가지 조작을 통해 이것으로 마티를 관리할 수
있다는 걸 알아냈다.
제론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한 번에 두 가지가 해결되었다. 이제 수로를 파고 물의 정령과 계약하면 정말 홀가분하게 수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한 달 안에 그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다.

“영주님!”
제론은 자신을 부르며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바이스를 힐끗 쳐다봤다. 왜 왔는지 알기에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바이스는 그런 제론의 태도를 보고 확신했다.
“영주님이 하셨습니까?”
“뭘?”
“영주님의 기간트였습니까?”
“뭐가?”
바이스는 제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제론의 태도만 살폈다. 점점 확신이 짙어졌다. 바이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영주님. 그 기간트가 영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파장이 정말로 만만치 않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바이스가 뭘 걱정하는지 알기에 제론은 싱긋 웃어 주었다.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영주님…….”
바이스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믿는
사람이라도, 또 측근이라도 그런 일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그것이 영지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중대한 비밀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바이스는 일단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영주님. 평원에 수로가 완성되었습니다. 아마 그 수로에 물이 채워진다면 내년부터는 식량이 너무 많아 걱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론이 바이스를 보며 씨익 웃었다.
“곧 채워질 거야.”
그제야 바이스가 미소를 지었다. 제론은 방금 그 한 마디로 여러 가지 의미를 동시에 전해 주었다. 조금 굳어
있던 바이스의 마음이 눈 녹듯 풀려 나갔다.

Chapter 3 네로

제론은 수로를 파는 한 달 내내 물의 정령에 관한 고민을 내려놓지 않았다.


수로는 최대한 평원 외곽에서부터 팠기 때문에 바이스조차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론의 실력이 점점 늘어나면서 또 땅을 파는 일이 능숙해지면서 작업 속도가 날이 갈수록 빨라졌기에 막판에는
어마어마한 길이의 수로를 단번에 완성해 버릴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바이스도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이스가 보기에는 기적이었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평원이었는데, 거기에 하루아침에 수로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물론 수로는 전체적으로 정비가 필요하긴 했다. 아무래도 기간트가 만들었기 때문에 섬세함이 조금 모자랐다.
물론 약간만 더 다듬는 수준이었기에 나중에 물이 채워진 다음에 작업을 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지금은 그 많은 평원에 농사를 지을 인력도 모자랐다. 일단 영주성을 중심으로 최대한 많이 농사를 짓고 그 뒤로
차츰 인원 수급 상황에 따라 농지를 더 넓혀 갈 계획이었다.
평원 곳곳에는 저수지가 있었다. 제론은 상당히 신경을 써서 수로를 팠다. 물이 부족하면 농사를 짓기 힘들다.
어떤 곡물을 심건 말이다.
혹시 가뭄이라도 들면 곤란하기에 그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해 둬야만 했다.
이렇게 해 놓으면 당장은 필요 없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쓰게 되어 있었다.
그 많은 저수지에 물을 꽉 채우고 수로에 물이 흐르게 하려면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근방에는 수원이 없었다.
물론 영주성에는 우물이 있었다. 지하수가 솟아나는 우물이었다. 하지만 그건 영주성을 유지하기에도 빠듯했다.
농사까지 짓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렇기에 제론은 끊임없이 물의 정령에 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네모스.”
휘류류류류룽!
바람의 정령인 아네모스가 나타나 제론 주위를 맴돌았다. 제론은 감각을 날카롭게 갈며 아네모스를 손으로
불러들였다.
제론이 처음 바람의 정령을 느낀 건 그냥 우연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상황이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만일 그때의
기억이나 감각이 좀 생생했다면 물의 정령을 찾는 것도 좀 수월했을지 모른다.
아네모스는 제론의 손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고 아네모스로부터 전해지는 기운을
느끼려 애썼다.
지금까지 아네모스 자체를 느끼려는 노력은 거의 해 본 적이 없었다.
바람의 정령은 그냥 왔고, 유적의 도움을 받아 계약을 했다. 그래서 물의 정령을 찾을 때도 물을 떠 놓고 그
안에서 뭔가를 느끼려 애쓰거나, 아니면 물이 풍부한 곳으로 가서 특별한 느낌을 찾으려 했다.
제론은 좀 더 집중해 아네모스를 살폈다. 날카로운 감각이 아네모스를 낱낱이 해체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바람을 느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감각이 허공을 배회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이 방법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동안 했던
수련의 결과로 집중력을 오래 유지하는 건 문제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그렇게 3 시간이 지났을 때, 제론은 어렴풋이 뭔가를 느꼈다. 바람 속에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머물러 있었다.
그 느낌이 너무나 가볍고 허허로웠기에 느낌이 지속되지 않았지만 분명했다.
제론은 확신을 가지고 그 느낌을 찾아 헤맸다.
또 시간이 흘렀다.
제대로 느낌을 잡아낸 건 3 시간이 더 지났을 때였다. 제론은 그것이 바람의 정령이라고 확신했다. 아니, 바람의
정수였다. 그것이 바로 바람이었다.
제론은 곧장 우물가로 달려갔다. 이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물의 정령을 찾아내야만 했다. 직감적으로 지금이
아니면 다시 물의 정령을 잡아낼 수 없다는 걸 느꼈다.
밤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제론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젤레 영지성은 거대한 에너지를 받아들여 이용한다. 밤이 되어도 마법을 이용한 빛이 곳곳에 존재했다. 우물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론은 우물가를 비추는 빛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날려 우물에 뛰어들었다.
첨벙!
차가운 물이 온몸을 감쌌다. 이 우물은 식수로 사용된다. 원래는 이렇게 뛰어들어선 안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일부러 그렇게 했다. 다급하기도 했고, 또 온몸으로 물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네모스의 정수를 파악한 감각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 상황에 물에 뛰어들자 온몸으로 물의 감각이 느껴졌다.
바람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분명한 뭔가를 잡아냈다.
제론은 눈을 지그시 감고 손바닥을 오묵하게 만들어 물을 담았다. 그 안에 담긴 물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게
바로 물의 정령이었다. 아니, 물의 본질이었다.
제론의 몸이 순식간에 솟구쳐 우물 밖으로 나갔다. 제론은 손에 든 물이 쏟아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빠르게
이동했다.
마음 같아선 아네모스를 불러 공간이동을 통해 유적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간신히 잡은 물의 정령이
사라질까 봐 그렇게 하지 못했다.
최대한 빨리 달려 지하 연무장에 도착한 제론은 즉시 유적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반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령 확인. 계약을 진행합니다.
성공이었다.
바닥이 은은히 빛나며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 마법진 한가운데 제론이 손에 들고 온 정령이 갇혔다.
그리고 마법진이 강렬하게 빛나며 정령이 사라져 버렸다.
―계약 완료. 소환 명령 코드는 네로입니다.
제론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이런 충실한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네로.”
쏴아아아!
제론의 눈앞에 물줄기가 쭉 솟아나며 한데 뭉쳤다. 그것이 바로 물의 정령, 네로였다.
일단 정령 계약에는 성공했다. 다음 문제는 과연 이 정령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이었다.
바람의 정령은 아네모스 외에 푸르투나까지 계약했다. 아네모스와 푸르투나의 격차는 엄청났다. 푸르투나의 힘을
이용하면 하늘을 날아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면 네로의 능력도 어쩌면 보잘것없을지도 모른다. 초고대 문명의 경우 정령을 그저 스위치 정도로 이용했으니
말이다.
제론은 일단 네로를 돌려보낸 뒤 유적에서 나갔다. 그리고 영주성에서 가장 가까운 저수지로 향했다. 저수지는
다른 수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저수지에 물을 가득 채울 수 있다면 급한 불을 끄는 게 가능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물이 많이 필요한
시기가 온다.
그전에 농지 근처의 저수지에 물을 가득 채워 둬야만 했다. 아니면 지속적으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수원을
개발하거나 말이다.
제론은 저수지 한가운데에 서서 중얼거렸다.
“네로.”
쏴아아아!
물의 정령, 네로가 나타났다. 제론은 즉시 명령했다.
“이곳에 물을 채워.”
쏴아아아아!
네로의 몸체에서 물줄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보는 제론의 눈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물의 양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이 정도라면 아마 저수지를 꽉 채우는 데 며칠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물의 정령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하지만 제론은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초고대
문명의 유적을 발견한 뒤로, 제론은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어떤 상황에 처하건 말이다.
제론의 머릿속이 맹렬히 돌아갔다.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떠올려 봤다.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법 하나가 떠올랐다.
게다가 이 방법이 성공한다면 수로의 물을 가득 채우는 것도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
제론은 네로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이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네로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네로를 자유자재로 다뤄 보았다. 그리고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제론의 의념을 받은 네로가 땅으로 푹 스며들었다.
제론은 눈을 지그시 감고 네로와 의념의 끈을 이었다. 감각을 날카롭게 벼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제론의 의념을 실은 네로가 땅속으로 넓게 스며들었다. 덩어리로 다니는 게 아니라 비가 땅에 스미듯 쫙 퍼지며
내려갔다.
제론의 감각에 차가운 느낌이 확 닿았다.
‘찾았다!’
제론은 드디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네로를 이용하면 지하수를 찾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걸 땅 위로
끌어 올리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지하수에 섞여 들어간 네로는 지하의 물줄기를 따라서 빠르게 이동했다. 그와 동시에 제론의 뇌리에 지하 수로의
지도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일단 물에 섞여 들어간 네로의 힘은 굉장했다. 점점 주변으로 영향력을 넓혀 가더니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커졌다.
‘역시 물이 있어야 힘이 커지는구나.’
제론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물의 정령은 네로 이상의 정령을 찾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물만 많으면 힘이 커질 테니 말이다.
네로의 힘이 커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한계는 바로 제론이 만들었다. 제론이 가지는 정신력과
마나, 그리고 가진 바 힘이 네로의 한계였다.
제론의 머릿속에 지하수가 다니는 대부분의 길이 새겨졌다. 제론은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지 생각을 해 봤다. 일단
수원을 만들어야만 했다.
굳이 물을 땅에서 밖으로 빼낼 필요는 없었다. 수원을 만들 만한 장소만 찾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 장소는
날이 밝을 무렵 찾아낼 수 있었다.
제론의 시선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 산맥으로 향했다. 지금은 거의 쓸모없이 버려진 곳, 로트 산맥이었다.
그곳에 제법 괜찮은 수원이 있었다. 물론 상당한 공사가 필요했지만 제론에게는 전혀 상관없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으니까.

그날 밤, 로트 산맥 아래에 거대한 저수지 하나가 생겨났다. 당연히 젤레 영지의 영토에 속한 곳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로트 산맥 아래의 저수지에서 이젠 평원이 된 젤레 영지의 황무지까지 이어지는 수로가 생겨났다.
그 수로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시냇물이나 다름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물줄기가 커질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젤래 영지의
모든 저수지와 수로를 가득 채워 줄 것이다.

☆ ☆ ☆

벨루스 백작령의 분위기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영지의 주인인 벨루스 백작의 심기가 좋지 않으니 그 영향이
영지 전반에 미치는 것이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금 그는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요도는 벨루스 백작만의 기준이었다.
“요즘 분위기가 어떤가?”
벨루스 백작의 물음에 마틴 준남작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영지성이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돈을 낭비하는군.”
“아직 영지 경영이 뭔지 모르는 애송이의 한계 아니겠습니까?”
“흥. 그런 애송이에게 뭐 볼 게 있다고 거기 있는 건지, 원…….”
벨루스 백작은 불만 어린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지 왜 몰라준단 말인가.
사랑만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딸의 선택을 용납할 수 없었다.
“슈린 공작가의 분위기는 어떤가?”
“파인트 공자의 고집에 대해서야 유명하지 않습니까. 아마 최소한 2 년은 더 기다려 줄 것 같습니다.”
“그나마 그건 다행이로군.”
아마 조만간 슈린 공작가가 직접 나설지도 모른다. 슈린 공작은 위험한 부분에 대해서는 일말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전에 최대한 빨리 세나를 그곳에서 빼내야만 했다. 또한 그전에 의문의 기간트에 관한 정보를 얻어 내고 말이다.
“그래, 뭔가 얻어 낸 정보가 있나?”
“아직 명확한 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정황 증거가 제법 많습니다.”
“정황 증거?”
“예. 기간트를 이용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한 공사를 뚝딱뚝딱해낸 흔적이 무수합니다.”
마틴 준남작은 엄청난 돈을 들여 다량의 정보원을 젤레 영지 곳곳에 심어 두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받고 있었다.
그 정보를 분석한 결과 분명히 그 기간트는 젤레 영지에 직,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었다.
벨루스 백작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틴 준남작의 보고는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목숨이
걸렸으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철사자 기사단의 기간트를 몽땅 잃어버리고 온 마틴 준남작을 지금까지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철사자 기사단은 아직도 기간트 없이 그저 맨몸으로 훈련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기간트를 지급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가 직접 가 봐야겠군.”
“예?”
마틴 준남작이 깜짝 놀라 벨루스 백작을 바라봤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의 고집스런 표정을 보고 나니, 더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기간트를 감춰 두려면 아공간이 필요할 것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만…….”
“아공간을 확인하면 그만 아닌가.”
“하면…….”
“아공간 감지 아티팩트를 가져가겠네. 범위가 가장 넓은 걸로 준비하게.”
마틴 준남작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준비하겠습니다.”
벨루스 백작은 마틴 준남작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마틴 준남작은 정중히 예를 취하고 물러갔다.
“골치 아프군.”
벨루스 백작은 이마를 짚었다.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뭔가가 껄끄러웠다.
고민이 계속되었다. 자신은 확신하지만 끊임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 작은 의문이 일어났다. 과연 지금 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딸의 행복이었다. 볼 때마다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
아내를 딸에게 투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어쨌든 세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파인트의 인간 됨됨이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세나에게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 역시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벨루스 백작령은 충분히 그럴 역량을 갖춘 영지였다. 또한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백작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휘었다.

☆ ☆ ☆

“정말 얼마나 더 놀랄 일이 남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바이스는 혀를 내둘렀다.
현재 젤레 영지를 관통하는 수로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수로의 수원은 하루아침에 나타난 로트 산맥 아래의
거대 저수지였다.
호수의 물은 산맥 곳곳에서 흘러내린 물이었고 말이다.
로트 산맥에는 당연히 수원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제론은 상당한 수의 수원을 산맥 아래에 조성한 저수지로
흘려보냈다.
말이 저수지지 사실상 호수나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시작되어 젤레 영지를 관통해 영주성이 있는 평원으로 흘러가는 물의 양은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직 호수가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만간 호수가 꽉 채워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의 양도 상당히 많아질 것이다.
젤레 영지에서 가장 중요하고 부족한 한 가지를 완벽하게 해결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제론 혼자서 말이다.
그러니 바이스가 감탄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가 보기에 제론은 사람 같지도 않았다.
‘그 비밀 기간트를 이용한 것이 분명하군.’
당시 철사자 기사단을 단번에 무너뜨린 그 기간트의 위용은 어마어마했다.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 기간트를 이용했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바이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정도로
당시에 받은 충격은 굉장했다.
“이제 큰 문제는 다 해결된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한데 주변 영지는 어떻게 할까요?”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일단 그냥 내버려 둬.”
바이스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뒤통수가 간질거릴 것 같습니다.”
“괜찮아. 적절히 지켜보기만 해. 명분을 만들어야지. 알아서 달려들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제론의 말에 바이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확실히 당장 무리하게 영지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걸어온 싸움으로 적을 무너뜨리는 편이 훨씬 모양새가 좋긴 했다.
‘그래서 굳이 이번에도 일을 복잡하게 만드신 거였군.’
이번에 일어난 폭동으로 인해 인근 세 영지의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 또한 다시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게 되었다.
매년 젤레 영지에 피해 보상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그들 입장에서는 피 같은 돈이었다.
인근 세 영지는 사실상 레늄 왕국의 끝에 위치했다. 세 영지의 동쪽은 거대한 암석 지대였다.
그곳에는 상당한 수준의 채석장이 있었지만, 위치가 좋지 않아 운반이 어려웠기에 영지 재정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암석 지대에 있는 바위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해서 기간트를 동원해도 처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바위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으니 그곳이야말로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그 암석 지대를 지나면 바로 바다가 나온다. 세 영지는 넓게 분포된 암석 지대 때문에 바다를 이용하는 것조차
못하고 있었다.
만일 바다에 인접해 있고, 제대로 된 항구도시가 있었다면 세 영지의 사정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암석 지대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암석 지대는 바다까지 이어져 있기에 설사
바다까지 길을 뚫는다 해도 그곳에 항구를 건설하려면 어마어마한 노동력과 자금이 필요했다.
그것은 세 영지가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아니, 설사 돈이 많은 대영지가 나선다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 영지를 복속시키고 나면 암석 지대를 정리한 다음 항구를 만들 테니까 미리 준비해 둬.”
“예? 그 암석 지대를 정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정리해야지. 넓잖아.”
사실 암석 지대는 쓸모없는 땅이어서 그렇지 상당히 넓었다. 레늄 왕국에는 이렇게 영지보다 넓은 땅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다만 그런 땅의 경우 쓸모가 없기에 사실상 영토 취급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영토에 관한 세금은 반드시
납부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제론이 거대한 황무지를 얻었을 때, 그 세금 문제로 남은 영지까지 팔아 버리지 않았는가.
물론 그 경우는 슈린 공작가의 입김이 작용해 세금이 다소 과하게 책정된 경우였다. 뤼그너 남작령을 비롯한 세
영지의 경우 암석 지대에 부과되는 세금은 지극히 낮았다.
“쉽지 않으실 겁니다.”
“기간트를 동원하면 돼.”
“아무리 기간트를 동원해도 어렵습니다. 바위가 너무 많습니다. 그걸 다 정리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전부 정리할 필요는 없어. 한쪽에 쌓아 놓을 테니까.”
잠시 말문이 막혔던 바이스가 질린다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설마 그곳의 바위를 내다 파실 생각이십니까?”
“남으면.”
제론의 말에 바이스의 머리로 몇 가지 계획이 슥슥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암석 지대의 바위를 그냥 내다
버리는 건 바보짓이었다.
젤레 영지만 해도 돌을 가져다 쓸 곳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아예 영지를 새로 건설하다시피 할 테니 말이다.
영주성 외에는 제대로 지어진 곳이 하나도 없었다. 차츰차츰 저택도 지어야 하고, 상가도 지어야 한다. 또 집도
잔뜩 지어야 한다.
광장도 만들어야 하고, 영지성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의 길은 돌로 쫙 깔아 버릴 생각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돌이 필요했다. 그 돌을 암석 지대에서 가져다 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비용이 절감될
것이다.
또한 만일 정말로 항구도시를 짓는다면 거기에 들어가는 돌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암석 지대의 바위는 엄청나게 많았다. 아마 잘 개발해 놓으면 향후
영지의 상당한 수입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항구를 만든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바다를 이용해 운송하지 않으면 운송비를 감당할 수 없다. 석재는 무겁기
때문에 나르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그건 바이스만 알고 있도록 해. 아직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물론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수로와 저수지에 대한 방비를 좀 더 철저히 할 필요가 있어.”
제론의 말에 바이스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누군가 악감정을 가지고 일을 벌이면 수로에
공작을 할 가능성이 컸다. 또한 효과도 클 것이다.
수로에 독이라도 풀어 버리면 당장 난리가 날 것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할 놈은 없겠지만 사람이란 모르는 것이다.
막판에 몰리면 어떻게 될지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 마법진을 좀 연구해 봐.”
제론은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내밀었다. 바이스가 눈을 빛내며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이럴 때 제론이 주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보물일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기대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바이스는 받자마자 책을 펼쳤다. 표지는 그저 백지였기에 내용을 보기 전에는 무슨 책인지 알 수가 없었다.
책을 펼친 바이스가 눈을 부릅떴다. 첫 장부터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에 대한 설명이 보였다.
책장을 정신없이 넘겼다. 바이스는 마법진 옆에 쓰여 있는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크게 흥분했다. 이 책에 있는
마법진을 모두 익혀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변형시킬 수 있다면 정말로 큰 힘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대체 어디서 구하신 것입니까?”
“어쩌다 보니.”
바이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왠지 알 것 같았다. 이 정도의 마법책이라면 소재지야 명확하다. 고대 유적이
분명했다.
바이스가 알기로 제론이 겪은 고대 유적은 딱 두 군데였다. 하나가 바로 이곳 성이 있는 유적, 그리고 또 하나가
체른산 유적이었다.
아마 이 책은 체른산 유적에서 얻었을 것이다. 바이스는 그렇게 짐작하고는 다시 관심을 책으로 돌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바이스가 책을 탁 덮으며 제론을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이걸 연구하면 수로에 관한 문제를 대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나도 홀가분하게 수도에 다녀와도 되겠군.”
제론의 말에 바이스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수도에 가실 겁니까?”
“가야지. 인재가 더 필요해. 그리고 분위기도 살펴야 하고.”
제론이 수도에 가려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직 주인을 만나지 못한 인재를 찾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최근 개방된 수도 근방의 유적에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10 년 동안이나 철저하게 통제되던 유적이었는데, 봄이 되면서 개방되었다.
제론은 내심 기대했다. 만일 그 유적 아래에도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있다면, 그리고 그 유적에 마티가 있다면
수도 근방의 정보까지 얻을 수 있게 된다.
수도 근방의 정보를 얻는다는 건 슈린 공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싸움을 유리하게 끌어갈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슈린 공작의 마수가 뻗어 올 것
같아 조금씩 나름의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부디 조심하십시오. 수도에는 슈린 공작의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걱정이 절절히 묻어나는 바이스의 말에 제론이 빙긋 웃었다. 가슴이 따스해졌다.
“걱정하지 마. 내 실력 잘 알잖아.”
“실력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알았어. 조심하지.”
“꼭입니다.”
“그래. 꼭.”
제론은 그 뒤로 바이스와 몇 가지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 ☆ ☆

슈린 공작은 집무실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었다.


“후우. 이게 마지막인가.”
오랫동안 서류와 씨름하느라 침침해진 눈을 주무른 슈린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제야 좀 여유가 생기는군.”
슈린 공작은 이를 부득 갈았다. 아직도 잡지 못한 놈들 때문에 몇 년을 고생했는지 모른다.
자그마치 100 킬로그램의 테페룸을 잃어버렸다. 거기에 그걸 다시 구할 때는 암시장을 통했기 때문에 훨씬 비싼
값에 살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슈린 공작가의 방대한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그냥 테페룸만 구입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슈린 공작가는 새로운 기간트
제조를 시작했다.
기간트 제조라는 것이 설계도만 있다고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수십 수백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지는 것이 새로운 기간트였다.
그리고 슈린 공작가는 이번에 그 일을 성공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슈린 공작은 반사적으로 창밖을 쳐다봤다. 아직 깜깜한 밤이었다. 이 시간에 찾아올 만한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깁스 남작이었다. 슈린 공작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었고, 이젠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사람이었다.
“오, 남작, 어서 오게.”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깁스 남작은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다가갔다.
“어떻게 되었나?”
“원하시는 부지를 얻었습니다.”
“오오! 잘했네.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 해냈군.”
깁스 남작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약점이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 역시 자네에게 맡기길 잘했군. 제대로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자네뿐이야.”
“과찬이십니다.”
새로운 기간트 공장은 수도 인근에 세워졌다. 수도 인근에 기간트 제조 공장을 짓는 건 사실 왕궁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깁스 남작은 그 모든 난관을 뚫고 공장 설립 허가를 받아 냈다. 실로 대단한 성과였다.
“공장을 다 짓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최대한 서두르라고 지시를 내려 뒀으니 두 달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기간을 더 줄여 보게. 하루라도 빨리 라쿠스를 보고 싶군.”
“최대한 애써 보겠습니다.”
“기대하지.”
슈린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탁자를 가리켰다.
“서 있지 말고 거기 앉게.”
“예.”
깁스 남작이 테이블 앞에 앉자, 슈린 공작도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시녀를 호출해 테이블 위에 술과 가벼운
안주를 세팅했다.
“이런 기쁜 날 술 한 잔이 없으면 안 되지.”
슈린 공작은 기분 좋게 술잔을 채웠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몇 잔의 술을 마셨다.
제법 독한 술이었기에 슈린 공작의 얼굴이 불콰해졌다. 하지만 깁스 남작의 얼굴은 처음 그대로였다.
“그나저나 요즘 조금 불쾌한 소식이 들려오더군.”
“어떤 소식이 공작님의 심기를 어지럽혔는지요.”
“에어스트 백작가의 떨거지가 아직도 살아서 펄펄 날뛰고 있다더군.”
슈린 공작은 지나가듯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이는 그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남아 있는지 말해 주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전쟁 중에 사라질 줄 알았는데, 그렇게 운이 좋은 놈이었는지 몰랐습니다.”
슈린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지. 자네는 최선을 다했네. 그저 그놈이 거머리처럼 끈질긴 것뿐이지.”
슈린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으로 가 서류 한 장을 찾아서 가져왔다.
“읽어 보게.”
깁스 남작은 서류를 받아 쭉 읽었다. 그 안에는 제론에 관한 정보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대단하군요.”
“대단하지. 대단해. 군부에서 제대로 기반을 닦아서 나왔으니 대단한 놈이야.”
슈린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깁스 남작을 바라봤다. 어느새 그의 눈빛이 더없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이네. 그놈이 날 잊었을 리 없으니까!”
깁스 남작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다시 방법을 좀 찾아보겠습니다.”
그제야 슈린 공작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부탁하네. 자, 이럴 게 아니라 술이나 마시지. 어서 한 잔 더 받게.”
슈린 공작은 깁스 남작에게 온갖 호의를 보이며 함께 술을 마셨다.
술자리는 날이 새도록 이어졌다. 그리고 슈린 공작은 다시 한 번 깁스 남작으로부터 확답을 받았다. 제론을
파멸시킬 방법을 찾겠다고 말이다.

Chapter 4 벨루스 백작의 방문

세나는 제론으로부터 베르를 받은 이후로 그야말로 충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베르를 분석하고 수리하는 동안
무수히 많은 것을 얻어 냈다.
고대 문명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으며, 또 그들의 마법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제론이 오래전 그녀에게 전해 준 기간트에 관한 지식은 그보다 더 대단하다는 점이었다.
세나는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한 번 켰다. 그리고 이리저리 관절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몸을 푼 세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 세나의 공방은 기간트 수리나 제작에 있어서는 최고의
시설을 자랑했다.
기간트를 양산하는 공장처럼 기간트를 빠르게 쏟아 낼 수는 없지만, 정성을 들여 제대로 된 기간트를 제작하는
데에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공방은 상당히 넓었다. 또한 기간트가 꼿꼿이 서도 한참이나 남을 만큼 높았다.
세나는 공방의 한쪽 벽으로 걸어갔다. 공방의 벽은 각종 기이한 문양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하얀 바탕에 검은
선으로 이루어진 문양이었다.
세나는 익숙하게 그 문양 중 하나를 찾아 손바닥을 갖다 댔다.
후웅.
벽이 좌우로 열렸다. 열린 벽 안에는 칸칸이 나뉜 공간이 있었다. 수백 개가 넘는 칸이 있었는데, 일부는 비어
있었고, 일부는 뭔가가 놓여 있었다. 기간트 무구였다.
세나는 수리가 끝난 기간트를 아공간에 담아 이곳에 보관했다. 물론 처음 수리한 열다섯 대의 실바는 아공간이
따로 없었기에 이곳에 놓을 수 없었다.
그 실바는 제론이 몽땅 가져가 버렸다.
“정말 대단해…….”
세나 역시 바이스와 마찬가지로 이곳 젤레 영지에 온 이후 놀라는 일이 잦았다.
제론이 한 번씩 찾아와 수리할 기간트를 쏟아 낼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기간트 중 몰레스가 섞여
있어서 또 놀라야 했다.
이렇게 멋진 공방을 만들어 준 것에 다시 놀랐고, 이번에는 베르를 수리할 기회를 주어서 놀랐다.
그것도 한 대가 아니었다. 무려 다섯 대의 베르를 놓고 갔다.
이제는 은근히 기대 중이었다. 과연 이 베르를 다 고친 다음에는 어떤 걸 내려놓을지 말이다.
세나는 차분히 자신이 수리해 놓은 기간트 무구를 쭉 둘러본 뒤, 다시 문을 닫았다. 문을 닫는 것 역시 여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양에 손바닥을 갖다 대면 된다.
후웅!
문이 닫히자, 어디에 그런 공간이 있었냐는 듯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대체 이 많은 기간트는 어디서 난 걸까?”
예전부터 갖고 있던 의문이었다. 제론은 대체 어디서 이런 기간트를 가져온단 말인가. 몇 기 정도야 어찌어찌
구할 수 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 많았다.
어쨌든 이 정도 기간트가 있다면 젤레 영지는 이미 영지 수준을 넘어선 무력을 보유한 거나 다름없었다.
벨루스 백작령에도 기간트 라이더로 이루어진 기사단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보통 백작령이 보유한 기간트는 삼십 기 정도였다. 벨루스 백작령의 경우 좀 더 많아 약 육십 기의 기간트를
보유했다. 그 정도면 웬만한 후작가나 공작가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다.
그러니 백 기가 넘는 기간트를 보유했다는 건 그들을 월등히 넘어선다는 뜻이었다.
세나는 잠시 자신이 작업하던 곳을 바라봤다. 거대한 기간트가 조각조각 해체된 체 허공에 떠 있었다. 마법으로
부품과 강판을 허공에 띄운 것이다.
“정말 대단해.”
세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허공에 뜬 부품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렇게 허공에 떠
있으면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아도 부품을 구석구석 살필 수 있었다.
이곳은 기간트 엔지니어에게는 꿈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후우. 아무래도 오늘은 집중이 안 되네.”
세나는 오늘 작업은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왠지 계속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이대로는
더 작업을 해 봐야 의미가 없었다.
세나는 공방을 나섰다. 공방은 영주성 지하에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원하면 햇빛을 직접 공방으로 들이는 것도
가능했다.
이런 성을 설계한 제론도 대단했고, 또 이렇게 멋지게 완성시킨 바이스도 정말로 대단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자신만 뒤처지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열심히 해야지.”
세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기간트 공방은 사실 비밀스러운 장소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정확한 위치는 극비 사항에 속했다.
그곳을 정확히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제론과 세나뿐이었다.
계단 끝에는 막다른 장소가 있었다. 바닥에 마법진이 새겨진 곳이었는데, 두세 명이 서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세나는 마법진 위에 섰다. 그리고 손가락을 튀겼다.
딱!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세나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세나가 나타난 장소는 그녀의 방 한가운데였다.
세나의 공방은 그녀의 방과 공간이동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방에 도착한 그녀는 일단 샤워부터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좀 다른 기분으로 편히 쉬고 싶었다. 그동안
채 구경하지 못했던 영주성 곳곳을 가 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밖으로 나간 세나는 묘하게 분위기가 들뜬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의 분위기가 평소와 많이 달랐다.
‘영주님은 어디 계시지?’
제론을 떠올리니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요즘 들어 제론에 대한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세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저 기분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제론이 보고 싶었다.

“흥. 손님 대접이 형편없군. 대체 여기 주인은 얼마나 기다려야 나오는 건가?”


벨루스 백작이 비꼬며 말했다. 그를 시중드는 시녀와 시종, 그리고 집사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렇게 높은 사람을
손님으로 맞아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지만 기다린다고 성에 없는 영주가 금방 올 수 있을 리 없었다. 집사는 일단 바이스에게 연락을 넣었다.
영주인 제론은 오늘 수도로 떠났다. 그래서 더 난감했다.
“영주가 있긴 있는 건가?”
집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실 영주가 없을 수도 있다. 먼저 무례를 저지른 건, 기별도 없이 다짜고짜 찾아온
벨루스 백작이었다.
하지만 집사는 전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왕국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벨루스
백작의 심기를 어지럽혀선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집사는 서둘러 문가로 걸어가 그곳에 대기하던 시종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총관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젤레 영지의 총관은 바이스였다. 물론 적당한 인재가 들어오면 내줘야 할 자리였다. 그리고 바이스는 마탑주가 될
것이다.
집사는 소식을 듣고도 문가를 정신없이 서성였다. 그래선 안 되지만 지금은 그런 것조차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사실 이는 벨루스 백작이 의도적으로 만든 분위기였다. 끊임없이 기세를 내뿜으면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압박했다.
일단 이렇게 흔들어서 차근차근 빈틈을 만들어 가야 나중에 원하는 걸 얻기가 더 쉬워질 테니 말이다.
‘영주라는 놈도 이렇게 간단했으면 좋겠는데…….’
물론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절대 이렇게 간단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은 당당했다.
자신 있었다. 자신에게는 힘이 있으니 말이다.
잠시 후, 응접실 문이 열리고 바이스가 나타났다.
바이스는 벨루스 백작을 향해 정중히 예를 취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이스 폰 말레피입니다.”
벨루스 백작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말레피 후작가의 후계자 중 하나가 여기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한데
지금 보니 영지 일에 꽤 깊이 관여하는 듯하지 않은가.
벨루스 백작은 바이스의 인사를 대충 받아 주었다. 물론 자기소개도 잊지 않았다. 그건 기본적인 예법이었다.
“혹시 이 영지, 말레피 후작가에서 뒤를 봐주고 있나?”
의심 한 자락이 일어나 벨루스 백작의 머릿속을 마구 휘저었다. 어쩌면 그 새로운 기간트도 말레피 후작가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우리 가문은 이곳 영지와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저 제가 우리 영주님께 충성을 맹세했을 뿐입니다.”
벨루스 백작의 눈가에 어린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말레피 가문의 후계자 중 하나가 굳이 이런 궁벽한
곳에 와서 바닥을 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반드시 후계자가 될 필요도 없다. 이런 곳에 올 바에야 차라리 후계자 구도에서 한발 물러나 이득만 취하면 된다.
그래도 지금 이것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말레피 후작가는 레늄 왕국 최고의 마법 가문이었다. 그 후광만으로도 웬만한 영지는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내 딸을 만나러 왔네.”
벨루스 백작은 당당하게 말했다. 이보다 더 좋은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바이스도 그 말에는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보냈으니 곧 이리로 올 것입니다.”
하지만 세나는 지금 공방에 있었다. 공방에 있는 세나를 부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세나의 방 앞에 미리
시녀를 대기시키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벨루스 백작은 바이스를 유심히 살폈다. 그가 판단하기에 이 영지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이스였다. 그 의문의
기간트에 관해서 알아내는 데에도 가장 걸림돌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
바이스는 벨루스 백작이 왜 여기에 왔고, 또 자신을 이렇게 열심히 살피는 이유도 대충 짐작했다.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묘한 대치를 하고 있을 때,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둘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세나가 서 있었다.
“아버지…….”
세나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벨루스 백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정중히 예를 취했다.
평소와 전혀 다른 태도에 벨루스 백작은 큰 거리감을 느꼈다. 이는 백작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고얀 녀석. 이 애비가 보고 싶지도 않더냐?”
벨루스 백작의 말에 세나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절 데려가려고 오신 건가요?”
벨루스 백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말할 필요 없다. 가자.”
세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가겠어요.”
벨루스 백작이 눈을 부라렸다. 안 그래도 몰래 체른산 방어군으로 지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뒷목을 잡았었다. 한데
또 이런 식으로 나오니 화가 치밀었다.
“너 때문에 우리 가문이 얼마나 곤란한 상황인지 아느냐!”
“가문이 곤란한 게 아니라 아버지가 곤란하신 거겠죠. 왜요? 슈린 공작가에서 왜 빨리 딸을 안 주냐고
압력이라도 넣고 있나요?”
“끄응.”
막상 그 말을 듣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냉정하게 따지면 그 말이 옳다. 슈린 공작가의 압력은 별것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존심이 문제였다.
고작 딸 하나 마음대로 못하는 못난 부모라는 말이 돌아다니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넌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다른 생각은 할 필요 없다.”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세나의 단호한 말에 벨루스 백작이 사나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너 하나 때문에 이 영지가 어떻게 되어도 좋단 말이냐?”
세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철사자 기사단이 여기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고
있기에 불안했다. 자신 때문에 이 영지에 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일제히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열린 문으로 제론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제론은 천천히 걸어 벨루스 백작 앞에 섰다.
벨루스 백작은 순간적으로 기세를 확 끌어 올렸다. 그 역시 익스퍼트에 이른 기사였다. 또한 지금까지 하루도
수련을 거른 적이 없었다. 애송이 하나 압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당연히 그 압박이 제론에게 통할 리 없었다. 제론은 이 시대의 기준으로 소드 마스터였다.
“지난번 보내 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제론의 말에 벨루스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전혀 타격이 없다는 뜻 아닌가.
“선물이라니?”
벨루스 백작이 전혀 모른다는 듯 말하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기간트 말입니다. 스무 기나 보내 주셨더군요. 덕분에 재정이 튼튼해졌습니다.”
벨루스 백작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갑자기 속이 쓰렸다. 하지만 그 미지의 기간트를 얻으면 그 정도 손해쯤이야
몽땅 벌충하고도 남는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벨루스 백작은 화를 가라앉히며 생각을 정리했다.
“내 딸을 데려가겠네.”
“안 됩니다.”
벨루스 백작이 눈을 부릅뜨고 제론을 노려봤다. 감히 누구 앞에서 안 된다는 말을 한단 말인가.
“우리 영지의 소중한 수석 엔지니어입니다. 절대 보낼 수 없습니다.”
“내 딸을 구금하고 있다는 뜻인가?”
“오해하셨군요. 본인의 의사를 철저히 지켜 주겠다는 뜻입니다.”
벨루스 백작은 코웃음을 쳤다. 그 싸움이라면 이미 조금 전에 끝나다시피 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딸인
세나에게로 향했다.
“이제 네 말을 들어 보자. 정말로 여기 남겠느냐?”
세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남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젤레 영지에 해코지를 하는 것도 싫었다. 젤레
영지는 이제야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세나가 머뭇거리자 벨루스 백작이 호통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 호흡 빠르게 제론이 말했다.
“영지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우리가 지난 시간 동안 뭘 했는지 벌써 잊은 거야?”
제론의 말에 세나의 머릿속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렇다. 생각해 보면 이런 고민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지금 젤레
영지에는 무려 백 기가 넘는 기간트가 있다.
라이더가 없는 게 문제지만, 라이더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단지 벨루스 백작령과 젤레 영지가 싸운다는
사실이 껄끄러웠지만, 지리적 문제를 생각해 보면 단순히 전쟁을 하는 건 어려웠다.
“남겠어요.”
세나의 대답에 제론이 환하게 웃었다. 세나는 그 웃음을 보며 가슴이 뿌듯해졌다. 저 미소를 볼 수 있다면 뭘
못하겠는가.
“그 결정, 절대 후회하지 않겠느냐?”
벨루스 백작이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세나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지 않아요. 그럴 자신도 있고요. 아버지, 젤레 영지는 생각보다 강하답니다.”
“훙. 고작 변방의 영지 따위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느냐? 그리고 슈린 공작가에서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슈린 공작가가 본격적으로 나서면 이따위 영지쯤 입김 한 방에 흩어져 버릴 게다.”
“쉽지 않을 겁니다.”
제론이 나서서 말했다. 그러자 벨루스 백작이 기회가 왔다는 듯 불쑥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특별한 기간트를 너무 믿고 있는 것 아닌가?”
바이스와 세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벨루스 백작이 갑자기 그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제론은 이미
예상하던 상황이었기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특별한 기간트라니요?”
“흥! 그렇게 모른 척해도 소용없네. 우리 철사자 기사단을 무너뜨린 그 기간트가 정말 없단 말인가?”
제론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모르겠군요. 하긴, 저도 그 기간트에 관한 보고를 받긴 했습니다만…… 너무 허황된 보고라서 믿지
않았는데, 백작님께서는 그걸 믿고 오신 모양이군요.”
벨루스 백작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하면 내가 이 영지를 좀 조사해 봐도 되겠나?”
“어떻게 조사하겠단 말씀이십니까?”
벨루스 백작이 품에서 커다란 금속판 하나를 꺼냈다. 마법진이 가득 새겨진 금속판이었는데, 곳곳에 마나 스톤이
박혀서 빛을 내고 있었다.
“아공간 감지 아티팩트일세. 이걸로 알아보면 되지 않겠나?”
제론이 빙긋 웃었다.
“그 정도라면 좋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요.”
제론이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나오자 벨루스 백작은 순간 의심이 들었다.
‘혹시 다른 곳에 숨겨 놓은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아공간 감지 아티팩트를 보고서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쨌든 벨루스 백작은 제론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지체하지 않고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우우웅!
기이한 파장이 방 안을 쫙 훑고 지나갔다. 아티팩트가 작동하며 범위 안을 스캔한 것이다.
“흐음. 이 근처에는 없군.”
벨루스 백작은 내심 실망을 감추며 말했다. 사실 그는 제론이 그걸 소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아티팩트에
아무것도 감지되는 게 없었다.
“음? 이쪽에 아공간 하나가 있군.”
벨루스 백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금속판 위의 한 공간을 짚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백작이 가진 아티팩트가 아공간을 감지할 수 있는 범위는 반경 500 미터였다. 한데 그 끝자락에 아공간 하나가
감지된 것이다.
벨루스 백작이 이동하자, 제론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도 그 뒤를 따랐다.
결국 벨루스 백작이 도착한 곳은 성의 연무장이었다. 그곳에는 열심히 검을 수련하는 카이트가 있었다.
벨루스 백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공간 반응은 카이트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간트 라이더가 있었군.”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조만간 몇 명 더 생길 겁니다.”
벨루스 백작은 대꾸하지 않고 카이트에게 다가갔다. 사실 예의에서 벗어난 일이었지만 제론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은 카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간트를 소환해 볼 수 있겠나?”
카이트가 수련을 멈추고 잠시 벨루스 백작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씨익 웃더니 바로 기간트를 소환했다.
후아앙!
크라테르가 나타났다. 가슴의 해치를 열고 당당히 서 있는 모습에서 위압감이 넘쳤다.
카이트는 훌쩍 뛰어 크라테르의 무릎과 허리를 디디고 조종석에 올라탔다.
생각해 보면 최근 검술 수련에 매진하느라 기간트 훈련을 너무 등한시했다. 마침 이렇게 되었으니 간단히 움직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쿵! 쿵! 쿵!
크라테르가 자유롭게 움직이며 연무장 곳곳을 돌아다녔다. 검을 휘두르고 발을 차올리는 동작이 엄청나게
부드러웠다.
벨루스 백작은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아티팩트에 눈을 돌렸다.
아무래도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제론은 그런 벨루스 백작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반면 세나와 바이스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제론을
바라봤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분명히 성 안에는 기간트가 존재했다. 세나의 공방에 보관 중인 기간트가 대체 몇 기인가.
한데 그 모든 기간트가 단 한 기도 아티팩트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 모든 의문의 답을 가진 제론은 그저 담담히 벨루스 백작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세나와 바이스도 결국 제론이 답을 줄 때까지 그렇게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이 갑자기 나타나셔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바이스가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옆에 앉은 세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영주님이 어디 가셨었나요?”
“어제 수도로 가신다고 영지를 떠나셨거든.”
“예? 수도에요? 거긴 왜요?”
“왜긴, 인재가 필요하니까 둘러보러 갔지.”
제론의 대답에 이번에는 바이스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오신 겁니까?”
“텔레포트 게이트로 돌아왔지.”
“그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바이스가 강렬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의문이 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이 맞지 않았다.
제론은 벨루스 백작이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연락은 바로 했다. 연락 수단이 없었다면 바이스도
그렇게 흔쾌히 제론을 수도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제론은 바이스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그저 웃기만 했다. 이 성에 있는 초장거리 텔레포트를 이용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벨루스 백작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시지?”
제론이 말을 돌리며 세나를 쳐다봤다. 세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고 계세요.”
“영지민이 조금 놀랄 수도 있겠군.”
“아마도요. 하지만 별일은 없을 거예요. 생각보다 영지민을 아끼는 분이시거든요.”
세나의 말에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미 느꼈다. 예전 벨루스 백작령을 방문했을 때 말이다.
“어쩌면 로트 산맥까지 헤집어 놓으실 수도 있어요. 집념과 고집이 상당하신 분인지라…….”
제론이 빙긋 웃었다.
“뭐, 상관없어. 그나저나 로트 산맥에는 몬스터가 제법 많은데, 호위는 제대로 하고 있나?”
“기사단 하나를 끌고 오셨으니 아마 몬스터 정도는 문제가 안 될 거예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군.”
벨루스 백작과는 좋지 않은 관계로 시작했지만 사실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건 세나의 아버지
아닌가.
또한 제론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그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 예전 벨루스
백작령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당시 백작령을 보며 느낀 점이 많았다. 벨루스 백작은 분명히 지금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제론은 세나를 슬쩍 쳐다봤다. 세나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녀의 얼굴에 어린 걱정을 보고 있으니 왠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제론은 세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세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고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세나와 눈을 마주치며 씨익 웃어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을 테니까. 아마 백작님도 세나의 마음을 분명히 알아주실 거야.”
세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마음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고마워요.”
방 안의 분위기는 더없이 훈훈했다. 세 사람은 제법 오랫동안 방에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다졌다.

☆ ☆ ☆

벨루스 백작은 아티팩트를 손에 들고 영지 곳곳을 돌아다녔다.


사실 처음 성에 도착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성의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게다가 모양은 또
어떤가. 그냥 보통 성과는 완전히 달랐다.
두 번째로 놀란 건 성 내부의 시설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성을 방문해 봤지만 이곳의 성처럼 편의 시설이 잘된 곳은 처음이었다.
성 곳곳에 설치된 마법진을 통해 별의별 일이 다 가능했다. 방마다 설치된 샤워 시설과 깨끗하기 그지없는
화장실을 보고는 입이 쩍 벌어져서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군부에서 번 돈을 성에 몽땅 쏟아부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로 놀랐다.
사실 제론을 보며 조금 놀라긴 했다. 자신의 기세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기는 걸 보면 제법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약간이었다. 성을 보면서 놀랐던 감정이나,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제법이군.”
벨루스 백작의 말에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던 금사자 기사단의 단장이 말을 받았다.
“다들 표정이 밝긴 하지만 생활 자체는 많이 낙후되어 있습니다.”
“그야 그렇지.”
“영지가 이런 상황인데 그런 거대한 성을 지었다니 제대로 된 영주는 아닙니다.”
성을 떠올리니 괜히 탐이 났다. 자신의 성도 그렇게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영지 상태에 비해 영지민 표정이 좋다는 건 최근 뭔가 일이 있었다는 뜻이네.”
“예. 아무래도 성을 지으려면 사람이 많이 필요하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보통 영주는 영지민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하지만 저들의 표정을 보니 이곳은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야.”
기사단장은 그제야 조금 다른 시선으로 영지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심 벨루스 백작에게 감탄했다. 이런
경우 사감을 담는 게 보통이다. 한데 영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조금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영주가 부임하기 전에는 어땠는지 말이야.”
“바로 알아오겠습니다.”
기사단장이 즉시 대답하고 휘하 기사 중 한 명을 어딘가로 보냈다. 어디든 정보를 취급하는 곳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곳에 의뢰를 하면 영지의 상황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정보를 확인하는 사이 벨루스 백작은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공간의 유무를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아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발견한 아공간은 카이트의 것, 하나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했다
벨루스 백작이 알기로 이곳 영주인 제론은 뛰어난 기간트 라이더였다. 군부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한데 그의 기간트가 보이지 않는다.
“그나저나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건가?”
“알아보겠습니다.”
기사 하나가 열심히 달려갔다.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이 어딘가로 우르르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도 더없이 밝았다. 벨루스 백작은 그들의 표정에서 희망을 읽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미소가
아름다운 법이었다. 지금 저 사람들처럼.
잠시 후 그들에게 갔던 기사가 돌아왔다.
“무슨 일이던가?”
“농사를 지으러 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농사? 시간이 좀 애매하지 않은가?”
“농지에 숙소를 마련하고 거기서 머물 생각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이동만 하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그래?”
벨루스 백작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또한 그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마치 뭔가가 떠오른 것처럼.
“뒤따라라.”
벨루스 백작은 그 말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금사자 기사단은 불평 한 마디 없이 벨루스 백작의 뒤를 따랐다.
농사를 짓겠다고 모인 사람들은 어느 순간 마차에 올라탔다. 벨루스 백작도 미리 준비한 말을 타고 그 마차를
뒤따랐다.
마차의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그들이 이동한 곳은 영주성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영주성 뒤편이었다.
그리고 벨루스 백작은 또 놀랐다.
“이곳, 황무지라고 하지 않았나?”
젤레 영지에 오기 전에 그 근방에 대한 정보를 웬만큼 모아서 숙지했다. 또한 제론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사를
했다.
그때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제론이 얻은 유적과 그 근방의 땅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였다. 농사가 아예
불가능한 땅이라고 했다.
한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렇게 거대한 농지가 있다니 말이다.
농지는 영주성 뒤에 펼쳐져 있었기에 처음에는 아예 발견하지도 못했다. 아니,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확인하고 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새파란 싹이 돋아난 농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대충 넓이가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끝이 보이지 않으니 넓이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벨루스 백작은 제론이 유적과 함께 얻은 황무지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그 가공할 넓이를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보아하니 아직 황무지의 일부에서만 농사를 짓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만간 황무지 전체를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왕국의 식량 사정이 완전히 달라져 버릴 것이다. 황무지는 그 정도로 광활했다.
‘왕국, 아니, 대륙의 곡물 값이 요동칠 수도 있겠군.’
이곳에서 난 곡물의 양은 대충 추정만 해도 레늄 왕국에서 다 소화시킬 수 없을 정도로 막대했다. 그러니 당연히
외국으로 수출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륙의 곡물 값이 흔들릴 것이다.
“일단 성으로 돌아가자.”
벨루스 백작은 더 이상 아공간을 찾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고 판단했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제론에 대해 좀 더 알아야만 했다.
잠시 후, 조사차 나갔던 기사가 돌아왔다. 벨루스 백작은 예전 영지민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날 한
번 더 놀랐다.
예전 젤레 영지에서 영지민의 삶은 가축과 다를 바가 없었다. 관리의 횡포로 삶이 엄청나게 팍팍했다.
한데 제론이 등장하면서 그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일 처리도 과감한 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특히
관리를 처벌하고 재산을 싹 몰수해 영지민에게 베푼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 영지, 미래가 기대되는 곳이로군.’
벨루스 백작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처음 이곳에 와서 하려고 했던 계획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좀 더 알아봐야겠어.”
벨루스 백작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 모습을 본 금사자 기사단의 표정이 묘해졌다. 주군의 이런 모습을 본
것이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백작 부인이 죽은 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사실 그동안 백작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생기가 모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데 지금은 마치 사라졌던 생기가 돌아온 듯했다.
벨루스 백작과 금사자 기사단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Chapter 5 백작의 검

세나는 긴장한 눈으로 아버지인 벨루스 백작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은 다 밖으로 나갔고, 지금은 둘만 있었다.
벨루스 백작은 잠시 세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좋은 방이로구나.”
이곳은 벨루스 백작령에 있는 세나의 방보다 훨씬 넓고 좋았다. 아마 레늄 왕국에 있는 그 어떤 귀족도 세나의
방보다 좋은 방에서 지내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왕궁의 공주조차도 말이다.
벨루스 백작은 여유롭게 방을 둘러봤다. 하지만 세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곳이다.”
세나는 깜짝 놀라 백작을 바라봤다. 백작의 어투에 깃든 호의가 당황스러웠다.
“당황할 것 없다. 이곳 영지를 둘러보면서 옛날 생각이 좀 났을 뿐이니까.”
세나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하는 말에 담긴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말에 호의가 담겨
있었다. 진의를 파악하지 않으면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다.
“넌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 영지도 예전에는 그리 잘 사는 곳이 아니었다.”
차분히 가라앉았던 세나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우리 영지가 이 정도로 발전하게 된 건 내 대에 이르러서였지. 수십 년의 세월을 녹여 만든 영지다.”
벨루스 백작은 놀란 눈을 한 세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참으로 따스했다.
세나는 그 미소를 보고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때는 저런 미소를 매일 볼 수 있었다. 예전의 일이
머릿속에 우후죽순처럼 불쑥불쑥 떠올랐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가 영주일 때의 모습이 떠오르더구나.”
벨루스 백작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딱 이 영지 같았지. 땅은 척박하고, 영지민의 생활은 낙후되었는데, 표정은 밝았다.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지.”
세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런 얘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왜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람은 말이다, 희망이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웃을 수 있단다.”
벨루스 백작은 그 말을 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릴 때의 일이었지만,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그는 그것
하나만은 확실히 기억했다.
당시 그가 보았던 영지민의 웃음은 그의 마음에 화인처럼 각인되었다. 그저 잔잔한 웃음뿐이었지만,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하고 자극적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영지를 위해 달려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데 한동안 그걸 잊고 있었다.
이곳 젤레 영지는 그때의 벨루스 백작령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영지 개간 사업이 막 끝나서 거대한 농지를 갖게 되었다. 척박한 황무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데 들어간 노력과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해냈다. 그랬기에 희망이 담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당시 어린 벨루스 백작이 본 것은 농사를 짓기 위해 일터로 향하던 영지민의 모습이었다. 일을 할 수 있다는
즐거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앞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행복이 응축된 미소였다.
오늘 백작은 농지로 향하던 젤레 영지의 영지민을 통해 추억을 보았다.
벨루스 백작이 표정에 어렸던 미소를 싹 지우고 세나를 바라봤다. 세나는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다시 긴장했다.
“미안하구나.”
세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어떻든 벨루스 백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세나의 손을 꽉 잡았다.
“더 이상 강요하지 않으마.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예?”
세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얼떨떨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도 있는 건가?
“슈린 공작가에서 온 혼담은 일단 거절하마. 당분간 시간을 갖자고 하면 이해해 주겠지.”
세나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전혀 생각도 못한 전개였다. 그녀의 시선이 아버지의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벨루스 백작의 눈에 따스함이 깃들었다.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딸을 바라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떠나기 전에는 종종 있었던 것 같은데…….’
아련함과 함께 씁쓸함이 밀려왔다. 아내가 죽은 뒤로 미친 듯이 영지 일에만 전념했다.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에 몰두하면서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아내의 모습에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아내가 생각날 때마다 더욱 일에 집중했다. 그래도 참기 어려우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오로지 일과 수련으로 점철된 생활이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자신이 올바로 서야 모든 것이
잘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틀렸다.
중요한 것은 아내만이 아니었다. 아내 외에도 가족이 있었다. 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했다.
벨루스 백작은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자신의 딸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얼굴 곳곳에 아내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었다.
‘닮았구나.’
그냥 얼굴만 닮은 것이 아니었다. 한 번 옳다고 믿으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의지를 꺾지 않는 모습까지도
닮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은 아직도 그걸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벨루스 백작은 딸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많은 생각을 했다. 수많은 깨달음이 물결처럼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삶과 인생에 대한 고찰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최근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 아무리
수련해도 성과가 없는 검술에까지 이어졌다.
백작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마나의 파동이 흘러나왔다.
세나는 깜짝 놀랐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아버지가 갑자기 눈을 감더니 무방비 상태로 마나를 흘려 내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직감적으로 지금 아버지에게 너무나 중요한 순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도
말이다.
세나는 조용히 앉아 아버지를 바라봤다. 지금 여기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위험으로부터 아버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세나가 바라보고 있는 사이 벨루스 백작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파동은 점점 강렬해졌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 ☆ ☆

금사자 기사단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문을 지켰다. 백작이 다시 나오거나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열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금사자 기사단은 벨루스 백작령 최강 기사단이자, 기간트 부대였다.
모두 크라테르를 가졌으며, 기사단장의 경우 크란 제국에서 특별히 수입한 임베르를 보유하고 있었다.
임베르는 크란제국의 범용 기간트였다. 출력이 무려 2.0 이나 되는 강력한 기체였다.
그저 출력만 높은 게 아니었다. 기간트에 사용된 기술은 그 어떤 왕국이나 마탑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들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금사자 기사단은 전원이 익스퍼트로 이루어져 있었고, 또한 라이더로서의
능력도 뛰어났다. 즉, 기간틱 나이트였다.
그들은 복도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다. 젤레 영지성의 복도는 상당히 넓었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누구도 지나갈
수 없었다.
꼭 이 복도를 쓸 필요는 없었기에 시종이나 시녀는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고 다른 복도를 이용했다.
그렇게 위압감을 뿌려 대며 기다렸지만 백작은 쉽게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갔다.
사실 백작은 지금 방 안에서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변 마나가 사정없이 요동쳤다. 하지만
그 요동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았다.
젤레 영지성의 모든 벽은 마나의 흐름을 감춘다. 차단하는 게 아니라 흐름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킨다. 특별한
마법진을 벽마다 설치한 게 아니라, 영지성 자체가 거대한 마법진이었기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금사자 기사단은 대체 안에서 무슨 얘기가 이렇게 길어지나 궁금했다. 하지만 함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금씩 짜증이 났다. 아무리 충성심이 높다지만 그들도 사람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 짜증은 문이 열리고 백작이 등장하면 말끔히 사라질 것이다.
또한 그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어쨌든 벨루스 백작은 이 영지에 호의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것은 이 영지의 영주 또한 백작에게 호의를 가지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금사자 기사단은 언제든 기간트를 불러낼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성의 복도가 제법 넓고 높긴 했지만
아마 기간트를 불러내면 상당히 많이 부서질 것이다.
또한 성 자체가 많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무려 열다섯 기의 기간트가 나타나 휘젓는다고 생각하면 성이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기간트 하나의 무게는 족히 10 톤이 넘는다. 조금만 움직여도 벽이 부서지고 바닥이 무너지는 게 당연했다.
그들은 이 아름다운 성이 무너지면 조금 안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필요한 상황이
오면 망설임 없이 기간트를 꺼낼 것이다.
그들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기간트를 소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성 자체가 마법진이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은 벽 너머로 마나의 흐름이 안정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성 내부에서는 결코 기간트를 꺼낼 수 없었다. 아공간이 봉인되는 것이다. 아니, 아공간뿐 아니라 웬만한 마법은
대부분 봉인된다고 보면 된다.
물론 초고대 문명의 마법은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렇기에 현재 성에서 기간트를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제론뿐이었다.
어쨌든 금사자 기사단은 백작이 나오기만을 끝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날이 새 버렸다.
그쯤 되자 그들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일 백작이 방에서 잠을 자려고 한다면 자신들에게 알렸어야 한다.
한데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는 건 분명히 안에서 뭔가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단장님,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사 하나가 나서서 물었다. 단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사실 끝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렸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게 아니고서야 어찌
지금까지 말 한 마디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기사단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간다.”
아마 문을 부숴야 할 것이다. 성에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다웠다. 문도 아름다웠다. 심지어는 문고리마저도 예술품
같았다.
그런 아름다운 문을 부순다는 것이 조금 아깝긴 했지만 어쨌든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단장의 말에 기사 하나가 나섰다. 익스퍼트의 실력자이니 그저 주먹질 한 번만 해도 문이 부서질 것이다. 물론
혹시라도 문이 잠기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확인이 먼저였다.
철컥!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혹시라도 방해받지 않기 위해 세나가 문을 잠근 것이다.
“잠겼습니다.”
“부숴라.”
기사단장의 명령에 기사가 주먹에 힘을 꾹 주었다. 이대로 마나를 흘려 문을 후려치면 문이 박살 날 것이다.
기사가 막 문을 후려치려는 순간, 제론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론의 목소리에는 마나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익스퍼트라도 목소리에 마나를 담을 수는 없었다. 아니, 설사
소드 마스터라 해도 방법을 모르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도 제론의 목소리에 마나가 담겼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다만 마치 귓가에 대고 소리친 것처럼
고막이 터질 듯한 느낌에 깜짝 놀랐을 뿐이었다.
당연히 문을 후려치려던 기사는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목소리에 놀라 주먹에 모은 마나가 흩어져 버렸다.
금사자 기사단 전원이 긴장한 눈으로 제론을 노려봤다. 어쨌든 그들 입장에서 제론은 방해꾼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주군의 안위를 확인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그걸 방해한다면 절대 물러날 수 없었다.
제론은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저벅저벅 걸어 문을 가로막고 섰다. 누구도 제론을 제지하지 않았다. 왠지 알
수는 없었지만 금사자 기사단은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기사단장이 분노를 담아 외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에 대한 제론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말을 가려 하라!”
제론의 호통에 기사단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이번에는 과했다. 아무리 못마땅해도 한 영지의 영주였다.
게다가 백작 위를 가진 귀족이었다.
자칫 이를 문제 삼고 나오면 벨루스 백작의 이름에 누가 될 수도 있었다.
기사단장은 즉시 한발 물러나 정중히 사과했다.
“내가 실언을 했소. 용서해 주시오.”
금사자 기사단의 단장은 자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기사와는 많이 달랐다. 그렇기에 제론도 문제를
더 키우지 않았다.
“받아들이겠소.”
제론이 사과를 받아 문제가 일단락되었지만 진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금사자 기사단은 제론을 향해
압박감을 쏟아 냈다.
제론은 그 막대한 압력 속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만일 문을 막고 선 사람이 제론이 아닌 보통
기사였다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켜 주시오.”
기사단장이 단호히 말했다. 비키지 않으면 베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기사단장 역시 익스퍼트였다. 하지만 그는
다른 기사와 달랐다. 익스퍼트가 된 지 20 년이 넘었다. 익스퍼트의 끝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든 벨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상대가 소드 마스터만 아니라면 누구든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제론은 그저 문을 막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이들에게 구구절절이 설명해 봐야 아무 소용없었다.
방 안에 있는 벨루스 백작이 지금 중요한 순간이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면 방해가 되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해
봐야 누가 믿겠는가.
“당장 비키시오!”
기사단장이 소리치며 검을 뽑았다.
챙!
보통 기간트를 보유한 기사는 두 자루의 검을 가지고 다닌다. 하나는 아공간 마법이 새겨진 거대한 검이고, 다른
하나는 진짜 자신의 검이었다.
기사단장은 제론에게 롱소드를 겨눴다.
제론은 담담한 눈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슬쩍 쥐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어떤 공격이 오더라도 발검과 동시에
막을 수 있었다.
“비키라고 했소!”
기사단장이 검을 푹 찔렀다. 위협이었다. 목 바로 앞에서 멈출 요량으로 내지른 것이다.
쉭!
내지른다 싶은 순간 검 끝이 제론의 목에 딱 닿았다. 피부에는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지켜보던 기사 전원이 깜짝 놀랐다. 기사단장의 검이 아예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최근 기사단장과 함께 수련을 하거나 대련을 한 적이 없어서 얼마나 강해졌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비키시오.”
기사단장이 나직하지만 위협을 가득 담아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제론의 표정은 평안하기 그지없었다.
조금 전에도 굳이 막을 필요를 느끼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그 어떤 살기나 투기가 없는데 어찌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겠는가. 실력이 없는 자도 아니고 말이다.
“날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아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요.”
제론의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기사단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눈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기사단장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즉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목을 찌르는 것이 가장 빠르지만
아무리 그래도 백작을 죽일 수는 없었다. 검을 틀어 일단 어깨를 찔렀다.
쉭!
기사단장의 눈이 경악으로 커다래졌다. 분명히 어깨를 노리고 찔렀다. 한데 빗나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검은 제론의 어깨를 살짝 빗겨난 채로 문에 닿아 있었다.
이를 악문 기사단장이 검을 회수하며 다시 휘둘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니 이제는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쉬이익!
기사단장의 검이 이번에 노린 곳은 허벅지였다.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호선을 그리며 움직인 검이 제론의
허벅지를 베어 갔다. 이번에는 실수를 할 여지가 없었다.
후웅!
기사단장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또 실패였다. 분명히 허벅지를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검이 그냥 지나쳐
버렸다. 마치 유령을 벤 것처럼.
“후욱!”
기사단장은 숨을 내뱉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흥분은 금물이었다.
다시 검을 겨눈 기사단장은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연격을 염두에 두었다. 상대의 실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쉬쉬쉬쉭!
챙챙챙챙!
기사단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숨을 참고 죽어라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제론은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언제 뽑았는지 모를 검을 가볍게 흔들며 모든 공격을 차단했다.
마치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계속 공격해도 상대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아 아득해졌다.
쩡!
검과 검이 강하게 충돌했다. 그 틈을 이용해 기사단장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의 표정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일부러 물러날 틈을 만들어 줬다.’
기사단장은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알기로 제론의 나이는 이제 고작 27 세였다. 한데 이 믿을 수 없는 강력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분명히 어떤 계기만 있으면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소드 마스터 바로 아래라는 뜻이다. 한데
그런 자신이 제론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다.
‘그럼 저자가 소드 마스터라도 된단 말인가?’
그건 더 믿을 수 없었다. 고작 27 세에 소드 마스터라니. 그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대륙을 통틀어 소드 마스터는 단 세 명뿐이었다. 한데 그중 가장 어린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된 사람도 50 살이
넘어서야 간신히 그 자리에 올랐다.
삼 인의 소드 마스터는 다들 입이라도 맞춘 듯 말했다. 소드 마스터가 되려면 최소한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그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니 제론이 소드 마스터일 리 없었다. 기사단장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믿음을 강요했다.
기사단장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리고 다시 달려들었다. 어쨌든 이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우선 방 안에 있는
주군의 모습을 확인해야만 했다.
스릉!
기사단장의 눈에 지금까지보다 더 큰 경악이 담겼다. 제론은 온 힘을 다한 기사단장의 일격을 그냥 흘려 버렸다.
아니, 그저 흘리기만 한 게 아니라 공격 방향을 크게 바꿔 버렸다. 기사단장은 다급히 발을 뒤로 치웠다.
쩡!
기사단장의 검이 방금 전 발이 있던 자리를 찔렀다. 더 놀라운 건 마나가 가득 담긴 검으로 바닥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기사단장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혼자서 당해 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기사단장의 시선이 근처에서 멍하니 서 있는 단원들에게로 향했다.
“뭣들 하고 있나!”
기사단장의 호통에 금사자 기사단은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지금 뭘 해야 하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무수히 훈련한
상황 중 하나이기도 했다.
척척척척!
열네 명의 기사가 기사단장을 중심으로 쫙 퍼졌다. 그들은 제론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크게 포위망을 형성했다.
제론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금사자 기사단이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살피며 빈틈을 찾았다. 제론의 눈에 확연히
보이는 빈틈만 해도 세 군데나 있었다.
“계속할 거요?”
제론이 무심한 눈으로 물었다. 기사단장은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검을 겨눴다.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쳐라!”
기사단장의 외침과 동시에 열네 명의 기사가 일제히 검을 찔렀다. 상대가 피할 방향까지 미리 선점해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기사단장은 혹시라도 나타날 빈틈에 대비해 제론을 노려봤다.
제론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그저 손목을 가볍게 몇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 모든
공격을 차단해 버렸다.
채채채채채챙!
금사자 기사단은 쉴 틈을 주지 않으려 숨까지 참고 검을 찔러 댔다. 하지만 아무리 공격해도 제론의 옷깃 하나
건드릴 수가 없었다.
동시에 열네 군데를 노리는데도 제론은 그 모든 공격이 채 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차단해 버렸다.
결국 기사단장까지 가세했지만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공격하던 금사자 기사단은 제풀에 지쳐
뒤로 물러났다.
다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경악이 가득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이런
실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열다섯 명의 기사와 싸워 그들을 이기는 건 정말로 실력이 뛰어나다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을
한자리에 서서 모조리 막아 내는 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론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마치 전혀 움직이지도 않은 것처럼 고요했다.
금사자 기사단은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제론이 많이 봐주고 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 지쳐서 당장 달려들 수도 없었다.
그렇게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금사자 기사단은 숨을 고른 뒤 다시 기회를 노려 달려들 계획이었다. 물론 제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기사단장은 호흡을 완전히 가다듬은 뒤 제론을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다시 달려들 것처럼 검을 꽉 쥐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공방은 없었다. 언제까지라도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힌 문이 열린 것이다.
딸깍.
문이 천천히 열렸다. 금사자 기사단 열다섯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향했다.
문이 활짝 열렸고, 벨루스 백작이 나타났다.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벨루스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이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자리에 제론이 있는 것도 의심스러웠고,
또 금사자 기사단이 검을 뽑은 사실도 기분 나빴다.
“괜찮으십니까?”
기사단장의 물음에 벨루스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느 때보다 좋다.”
벨루스 백작의 시선이 이번에는 제론에게로 향했다.
“설명이 필요한 것 같네만.”
제론은 돌아서서 벨루스 백작을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정중히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그러자 벨루스 백작이 흠칫 놀랐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세나를 쳐다봤다. 세나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선망의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벨루스 백작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의 시선이 세나와 제론을 번갈아 오갔다. 백작의 시선이 최종적으로 향한 곳은
금사자 기사단장이었다.
“아직도 그러고 서 있는 건가?”
기사단장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납검했다. 그리고 난감한 표정으로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설명하는 내내 제론의 실력에 대한 순수한 감탄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벨루스 백작의 표정이 더욱 묘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제론을 바라봤다.
“고맙네.”
짧은 말이었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만일 제론이 아니었다면 금사자 기사단이 문을 부수고 방 안으로 난입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요한 순간에 방해를 받아 마나가 역류해 몸이 크게 상하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새로운 경지에 들지 못하고 좌절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벨루스 백작의 말에 금사자 기사단이 동요했다. 뭔가 상황이 이상했다. 하지만 일단은 그냥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금사자 기사단이 한발 물러나자, 벨루스 백작은 몸을 돌려 세나를 바라봤다. 백작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잘 자거라. 내일 다시 얘기하자꾸나.”
금사자 기사단의 입이 일제히 쩍 벌어졌다. 너무나도 생소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주 오래전에는 가끔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어서 이젠 기억마저 가물거렸다.
한데 그걸 지금 본 것이다.
“크흠!”
벨루스 백작은 자신이 하고도 쑥스러운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서둘러 움직였다.
금사자 기사단이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제론과 세나는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영주님.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세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제론이 채 뭐라고 반응을 하기도 전에 질문을 이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제 방을 훔쳐보신 건 아니시죠?”
세나가 생긋 웃었다. 제론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마나 유동을 느끼고 짐작한 것뿐이야.”
세나의 표정이 금세 실망으로 물들었다. 농담으로라도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이만 쉬도록 해. 피곤할 텐데.”
제론이 그 말만 남기고 돌아가자, 세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아. 진도 나가기 정말 어렵네.”
세나의 한숨이 복도를 따라 흘렀다.

☆ ☆ ☆

벨루스 백작은 숙소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금사자 기사단은 바로 옆방에 머물렀다.
의자에 앉아 주위를 슬쩍 둘러봤다. 새삼스럽게 방 안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왔다. 상당히 좋은 방이었다. 벨루스
백작령에 있는 자신의 침실보다 훨씬 좋았다.
이런 방이 성 곳곳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루스 백작은 슬쩍 손을 들어 손바닥을 쳐다봤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 검술에 대한 뭔가 중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한데 그게 정확히 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벨루스 백작은 이미 익스퍼트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익스퍼트에서
벗어난 건 절대 아니었다.
“뭔가 변한 건 분명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그저 검을 휘둘러 보면 훨씬 간단히 알 수 있었다. 벨루스
백작은 벌떡 일어나 방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제법 공간이 넓었기에 가볍게 검을 수련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스릉.
백작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천천히 휘두르기 시작했다.
쉭! 쉭! 쉭! 쉭!
집중하니 검을 타고 마나가 흘렀다. 그것은 익스퍼트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전혀 없었다. 마나는 분명히 그러했다.
달라진 것은 검술 자체였다. 검을 휘두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졌고, 검이 지나는 길이 예전보다 훨씬 명확하게
보이고 느껴졌다.
한바탕 검을 휘두른 벨루스 백작은 기분 좋게 흐르는 땀을 닦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을 다시
한 번 쳐다봤다.
한동안 그렇게 손바닥을 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야 어렴풋이 뭘 얻은 건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 않았다.
벨루스 백작은 앞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수없이 노력해야 이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스릉.
다시 검을 뽑았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쉭! 쉭! 쉭! 쉭! 쉭!
백작은 그렇게 밤이 되고 다시 날이 밝아올 때까지 쉬지 않고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똑똑.
노크 소리에 벨루스 백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동쪽에 난 창을 통해 햇빛이 쫙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이 된 것이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느라 밤이 지나가고 다시 아침이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잠을 전혀 못 잤지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족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직 멀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은 지금 분명히 보통 익스퍼트의 한계를 넘어섰다. 물론 그렇다고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검의 길을 하나 깨달았다는 것이 맞았다.
벨루스 백작은 뚜벅뚜벅 걸어가 문을 열어 주었다. 열린 문 사이로 세나의 모습이 보였다.
“왔구나. 어서 들어오너라.”
벨루스 백작이 따뜻하게 그녀를 맞아 주었다. 세나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지 약간 얼떨떨했다.
안으로 들어간 세나는 잠시 아버지의 모습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벨루스 백작이 환하게 웃었다.
“아주 좋다. 네가 날 그렇게 열심히 지켜 줬는데, 괜찮지 않을 리 있겠느냐?”
“다행이네요.”
세나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제 꿈은 여기에 있어요.”
벨루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를 한 번 걸어 볼 만한 영지이긴 하더구나.”
세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아버지가 영지를 이 정도로 칭찬할 줄은 몰랐다.
“황무지를 어떻게 개간한 건지는 몰라도 향후 레늄 왕국의 곡물 시장을 완전히 뒤집어 버릴 수도 있겠더구나.”
벨루스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긴장한 표정의 세나를 바라봤다.
“아마 눈독을 들이는 자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영지 성장의 분수령이 되겠지.”
세나는 아버지의 판단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에 관해서는 최근에도 제론, 바이스와 함께 몇 차례 논의를
거쳤다.
그리고 힘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카이트가 데려온 라이더가 여러 명 있고, 또 따로 키우기 시작한
라이더까지 있으니 만일의 사태에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기간트야 엄청나게 많이 있으니까.’
세나가 수리한 것만 해도 백 기가 넘는다. 라이더가 모자라서 그 모든 기간트를 쓸 수는 없겠지만, 꾸준히
애쓰면 수십 기의 기간트 정도는 어떻게 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세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것을 본 벨루스 백작이 빙긋 웃었다. 마음을 바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그냥 밀어붙였다면 세나에게 저런 표정이나 눈빛을 기대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 영주와는 무슨 사이더냐?”
“예?”
세나가 크게 당황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 대답을 못 하느냐? 예전 우리 영지에 방문하기도 했으니 보통 사이는 아닐 것 같은데, 그렇지 않느냐?
군부에서도 함께 지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그, 그러니까…… 아직…….”
“아직? 설마 너 혼자 일방적인 감정을 주고 있는 건 아니겠지?”
벨루스 백작이 깜짝 놀라 물었다. 세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막상 이런 질문에 부딪히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까지 제론은 자신에게 그 어떤 확신도 주지 않았다. 관계는 지지부진했고, 진도가 더 나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서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한데 그런 말을 어떻게 아버지에게 한단 말인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허어. 이거 안 되겠구나. 내가 직접 영주를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
벨루스 백작의 말에 세나가 화들짝 놀랐다.
물론 백작은 세나와 제론의 관계를 이어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미지근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나를
이용하려고 하는지 확인하고, 그게 아니라면 마음가짐을 조금 달리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세나가 받아들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다급히 아버지를 말렸다.
“그, 그러지 마세요!”
벨루스 백작이 살짝 커진 눈으로 세나를 바라봤다. 세나는 아버지의 소매를 꽉 잡고 있었다.
“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
잠시 세나의 붉어진 얼굴을 들여다보던 벨루스 백작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러니 이만 이걸 놓고 앉아라.”
세나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백작은 일단 화제를 돌렸다. 그냥 뒀다간 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오늘 오후에 떠날 생각이다.”
“예? 벌써요?”
“그래.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영지로 돌아가야지.”
세나의 표정에 아쉬움이 어렸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간신히 좋아졌는데, 이렇게 금방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벨루스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를 안아 주었다.
“언제든 힘들면 돌아오도록 해라.”
세나는 처음에는 눈이 동그래질 정도로 놀랐지만 이내 살며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할게요.”
벨루스 백작이 세나에게서 떨어지며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다음에 좋아하는 남자와 함께 방문하면 좋겠구나.”
세나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그녀는 터질 것 같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꼭 그렇게 할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Chapter 6 수도로

벨루스 백작이 돌아갔다. 백작이 있으나 없으나 영지는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다만 세나가 조금 달라졌을
뿐이었다.
세나는 그 뒤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제론에게 다가갔다. 물론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꿈은
새로운 기간트를 설계하고 만드는 것이었다.
사실 젤레 영지로 오면서 그 꿈에 한발 다가간 거나 다름없었다. 백 기가 넘는 기간트를 오로지 혼자서 수리하는
경험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기종을 총망라했으니 더더욱 하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그런 경험이 모이고 모여 실력이 되고, 또 그 실력을 갈고 닦아 새로운 기간트를 설계할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기간트의 설계에는 반드시 마법사가 필요했다. 그것도 능력이 지극히 뛰어난 마법사가 말이다.
세나는 일반적인 엔지니어와 다르게 마법에도 제법 조예가 깊었다. 원래 마법사 지망생이었다가 엔지니어로
바꿨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기간트를 수리하고 분해 조립을 반복하면서 그녀의 실력은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더구나 최근에는 발굴형 기간트인 베르를 수리하고 있었다. 그것을 계기로 그녀는 또 한 번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세나가 성장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끊임없이 발전했다. 그리고 영지 역시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다.

☆ ☆ ☆

제론은 벨루스 백작이 돌아간 뒤 약간의 시간을 들여 영지의 전반적인 행정을 체크했다. 그리고 다시 수도로
향했다.
수도로 가기 위해서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두 번 이용해야만 한다. 제론은 일단 가장 가까운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는 영지로 향했다.
이번에 수도로 가는 목적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인재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젤레 영지에는 인재가 너무 모자랐다. 인구는 늘릴 수 있어도 인재를 늘리는
건 쉽지 않았다.
일단 제대로 교육받은 행정가만 몇 명 구해도 영지 일이 훨씬 편해질 것이다.
무력에 관한 것은 카이트에게 모든 걸 일임했다. 그가 알아서 할 것이다. 지금도 카이트는 라이더를 영입하거나
교육시키는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두 번째 목표는 영지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젤레 영지는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엄밀히 따지면 젤레 영지가 아니라
에어스트 백작령이 되어야만 한다.
영지 명을 바꾸는 건 그냥 영주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수도에 있는 왕궁으로 가서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이번에 수도로 인재를 구하러 가면서 제론은 그 일까지 마무리하기로 했다.
마지막 목적은 수도 인근에 있는 유적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 유적에도 과연 초고대 문명 유적이 숨겨져 있는지 확인하고 그렇다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등록시킬
계획이었다.
수도 인근에 정보 수집 아티팩트를 깔아 놓을 수 있다면 정말로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수도로 출발한 제론은 최대한 빠르게 이동했기에, 떠난 당일 도착할 수 있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한 번 이용하면 그날은 쉬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제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연달아 두 번의 텔레포트를 통해 수도에 도착한 제론은 바로 근처 호텔로 향했다.
수도에는 아카데미 때문에 제법 오랫동안 머물렀기에 익숙했다.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달라진 점이 약간
있긴 했지만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제론은 수도 안을 걸으며 허리띠의 버클을 쓰다듬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수도에는 중요한 곳에 아공간 금지 아티팩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수도로 들어가는 성문과 성벽, 그리고 텔레포트 게이트를 둘러싼 담장과 문에 설치된 아티팩트가 가장 강력하고
확실했다.
어떤 이유로든 기간트가 수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만일 아공간을 가지고 성문을 통과하려 하거나, 텔레포트 게이트에 나타나면 당장 경계 신호가 울리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론의 아공간 아티팩트는 전혀 걸리지 않았다. 현재 제론이 가진 아공간은 두 개였다. 하나는 팔찌에
새겨진 아공간이었고, 다른 하나는 버클에 새겨진 아공간이었다.
한데 그 두 아공간 모두 수도의 아공간 방어 시스템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마치 아공간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수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호텔은 텔레포트 게이트 바로 옆에 있었다. 텔레포트를 이용하는 부유한 고객을
확보하려면 성문 근처보다는 텔레포트 게이트 근처가 훨씬 유리했다.
보통 어느 정도 제대로 된 영지를 가진 귀족이 수도에 오는 경우 호위기사만 해도 열 명 이상을 데려온다. 한데
제론은 혼자서 호텔로 들어갔으니,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호텔에는 수많은 직원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쪼르르 제론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베니뉴스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종업원의 정중한 인사에 제론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고는 말했다.
“제일 좋은 방으로.”
“예?”
종업원은 예상치 못한 말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는 사색이 되어 연신 허리를 꾸벅꾸벅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됐다. 안내나 하도록.”
제론의 말에 종업원은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인 뒤, 즉시 제론을 안내했다.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은 모두 최상층에 모여 있었다. 호텔의 최상층에는 단 세 개의 방밖에 없었다. 다른 층에
각각 삼십 개의 방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공간을 할애한 것이다.
제론은 그중 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보통은 호위 기사와 시종을 잔뜩 데려온 고위 귀족이 머무는 방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혼자서 그 큰 방을 차지했다.
은화 하나를 팁으로 던져 준 제론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종업원의 인사를 받으며 문을 닫았다.
제론은 수도에 있는 동안 번잡스러운 상황이 벌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야 있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호텔 최상층의 방을 얻었다. 최상층은 각각 따로 관리되기 때문에 다른 손님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대신
웬만한 귀족은 하룻밤을 지낼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제론은 일단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수도에서의 볼일을 볼 계획이었다.
가만히 누워 마나 호흡을 통해 흐트러진 몸을 추스르던 제론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요즘은 자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마나 호흡을 통해 마나를 받아들였다. 규칙적인 숨소리와 함께 천천히 마나가
흘러갔다.

☆ ☆ ☆

깁스 남작은 거대한 저택의 은밀한 곳에 앉아 보고서 몇 장을 느긋하게 읽고 있었다.


거의 웬만한 영지 기사단의 연무장 정도 되는 넓이의 방이었는데, 방 안 가득히 책과 서류가 쌓여 있었다.
이곳은 깁스 남작이 뭔가 일을 구상할 때 쓰는 장소였다. 또한 정보를 보관하는 곳이기도 했다.
“흐음. 이거 그냥 내버려 두면 곤란하겠는데?”
깁스 남작이 읽는 보고서는 젤레 영지에 관한 최신 정보였다. 자신이 운영하는 정보길드 그림자의 눈이 최대한
자세히 조사한 내용이었다.
깁스 남작은 일단 젤레 영지의 지도를 다시 확인했다. 거대한 성이 한가운데 있고, 그 주위로 드넓은 땅이
펼쳐져 있었다.
“이 땅이 몽땅 개간되었다 이거지?”
이곳에 대해서는 깁스 남작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에어스트 백작가를
함정에 빠트리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깁스 남작이었다.
슈린 공작은 깁스 남작이 은밀히 개입해서 모든 일을 주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깁스 남작에게는 슈린 공작조차도 그저 야망을 위해 이용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
당시 유적 근방의 땅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조사했다. 혹시라도 농지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면 나중에 골치 아플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그 땅은 황무지였다. 사막이 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 어떤 작물도 자라날 수
없는 땅이었다.
한데 그 땅을 개간해 농작물을 심었고, 그 싹이 돋아나 자라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깁스 남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단호히 관심을 끊었다. 사실 좀 더
지켜봤어야만 했다.
제론이 포상으로 얻은 영지에 대한 조사는 완벽히 했다. 그랬기에 신경을 안 써도 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만일 그 모든 황무지를 농토로 바꿨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야.”
깁스 남작의 눈이 번득였다.
대륙 전체를 뒤져 봐도 그 정도 넓이의 농지는 찾기 어려웠다. 만일 그 모든 황무지를 이용해 곡물을 재배한다면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자고로 식량은 최고의 무기 아닌가.
“탐나는 영지로군.”
아직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 보고서대로라면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성을 짓거나 수로와 저수지를 만든 공사를 보면 기간트를 동원한 게 확실한데…….”
깁스 남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기간트를 동원한다 하더라도 이건 좀 심했다. 믿기 어려웠지만 사실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림자의 눈은 깁스 남작이 가장 신임하는 조직 중 하나였다.
깁스 남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기간트를 이용해서 수로를 만들어? 그런데 땅을 개간했다고?”
기간트는 그 무게 때문에 농지 작업에 쓰기가 어렵다. 기간트가 한 번 밟고 지나가기만 해도 땅이 꾹꾹 다져져서
농사가 어려워진다.
한데 정황을 보면 기간트를 동원한 게 분명했다. 깁스 남작은 제론이 대체 어떤 마법을 부렸는지 궁금했다.
총 7 장으로 이루어진 보고서를 모두 읽은 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은 깁스 남작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 순간, 천장이 은은하게 빛났다. 천장에 새겨진 마법진이 작동한 것이다. 깁스 남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을 튀겼다.
딱!
그러자 마법진이 더욱 환하게 빛났다.
화악!
빛이 사라지자, 깁스 남작 앞에 서류가 쌓여 있었다. 새로운 정보가 도착한 것이다. 남작은 서둘러 서류를
확인했다.
서류의 가장 앞에 명확하고 복잡한 기준으로 분류 코드를 삽입해 놓았기에 정리는 아주 간단했다. 코드와 날짜를
기준으로 자리에 꽂아 놓기만 하면 된다.
원래는 이 방을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당연히 깁스 남작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렇게 깁스 남작이 방에 있는 경우는 직접 정리를 하곤 했다. 정보를 정리하면서 영감을 얻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깁스 남작은 가장 위에 놓인 보고서를 보고는 눈을 빛냈다. 이래서 직접 정리하는 걸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수도에 도착했다고?”
보고서에는 제론의 최근 행적이 정리되어 있었다. 벨루스 백작이 젤레 영지를 방문했으며 그 이후 제론이 수도로
왔다는 내용이었다.
보고서에는 제론이 수도의 베니뉴스 호텔 최상층에 머문다는 것까지 적혀 있었다.
“베니뉴스 호텔이라…….”
깁스 남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베니뉴스 호텔은 수도 최고의 호텔이었다. 그리고 깁스 남작의 숨겨진
재산 중 하나이기도 했다.
깁스 남작은 베니뉴스 호텔을 통해 얻는 것이 많았다. 예를 들어 고위 귀족의 정보를 얻기가 용이했다.
베니뉴스 호텔은 구조적으로 각 방의 소리가 한 군데로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 처음 호텔을 만들 때부터 그렇게
설계했다.
그것을 통해 그 안에서 귀족 간에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혹은 안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대부분 파악하는 게
가능했다.
또한 깁스 남작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을 효과적으로 죽일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냥 확 죽여 버려?”
깁스 남작이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눈을 빛냈다.
“아니지. 그냥 죽이면 재미가 없지. 이런 일은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해야 돼.”
젤레 영지를 좀 더 효과적으로 공략하려면 다양한 방법을 이용해야 한다.
깁스 남작은 보고서를 처음부터 다시 확인했다. 하나라도 놓친 게 없는지 찬찬히 훑었다.
“가만, 이거 봐라?”
깁스 남작은 제론의 가족 관계를 확인했다. 직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또한 대외적으로 알려진 가족은 전무했다.
하지만 그림자의 눈이 가진 정보력은 엄청났다.
“친척이 있었군?”
깁스 남작의 입가가 길게 늘어났다. 회심의 미소였다.
아마 본인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누구의 친척이고 누구와 관계가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절대 그냥 내칠 수는
없을 것이다.
“좋아. 일단 이걸로 결정해야겠군. 서둘러야겠어. 언제까지 수도에 머물지 모르니까.”
깁스 남작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흩날리던 몇 장의 보고서가 바닥에 떨어졌다.

☆ ☆ ☆

제론이 일정 중 가장 먼저 한 것은 영지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행정적인 절차였기에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그걸 알기에 우선적으로 처리했다.
일단 신청을 했고, 그것이 마무리될 때까지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수도에 머물러야
했다.
제론은 행정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나머지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유적 방문이었다.

“곤란하군.”
수도 근방의 유적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크지는 않은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즉, 뛰어난 관광지라는 뜻이었다.
아침부터 사람이 바글거렸다. 방문객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경비병의 수도 엄청났다.
유적 내의 장식이나 그림이 훼손되는 걸 막기 위해 배치한 병력이었다.
당연히 유적을 공개하지 않는 시간의 경계도 철저했다.
그렇다 보니 제론이 유적 아래에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있는지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정령을 불러 팔찌에 넣을 수는 없었다.
그때 흘러나오는 빛 때문에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초고대 문명의 유적은 제론에게 있어서 결코 남에게 공개할 수 없는 최고의 비밀이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 일을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일단 아래로 내려갈 수만 있으면 된다. 그 뒤로는 굳이 고대 유적을 통하지 않고도 텔레포트를 이용해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함부로 왔다 갔다 할 수 없지 않은가.
수도의 유적은 아무래도 정보 수집 외의 용도로는 쓸 수 없을 듯했다. 물론 그래도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수도는 텔레포트 게이트가 잘되어 있기에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오갈 수 있었으니까.
제론은 매일 유적에 방문했다. 아침에 유적 문을 열 때 가서 기회를 보고, 또 문을 닫기 전에 한 번 더 방문해서
기회를 살폈다.
밤에 와 보기도 했다. 하지만 제론의 실력으로도 몰래 유적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만일 마법적 트랩을 설치해 유적을 보호했다면 얼마든지 들락거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적의 보호는
철저히 인력으로만 이루어졌다.
제론은 그렇게 유적에서 빈틈을 살피는 한편 낮에는 인재를 찾기 위해 아카데미 근처의 술집과 찻집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은밀히 정보길드를 찾아다녔다.
레늄 왕국의 수도에는 수많은 정보길드가 운집해 있었다. 규모가 큰 곳도 있었고 작은 곳도 존재했는데, 제론은
일단 작은 곳을 위주로 방문했다.
큰 길드의 경우 특정 세력에 속한 경우가 많았다. 작은 길드 역시 그런 곳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큰 곳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제론은 최대한 큰 세력과 얽히지 않으려 애썼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작은 부분
하나라도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열흘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제론은 살짝 굳은 얼굴로 천천히 식사를 했다. 열흘이나 시간을 낭비했다. 아니, 낮에는 다른 일을 했으니
시간을 버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효율이 떨어진다. 정보 수집 아티팩트인 마티를 쓸 수 있으면 훨씬 빠르게 인재를 선별하고 조건을 맞출
수 있다.
만일 초기에 유적을 찾았다면 지금쯤 제대로 된 인재를 최소 다섯 명쯤 구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강행 돌파하기로.
제론은 상관없는 사람을 굳이 상하게 하면서까지 일을 처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은밀히 처리하기에는 유적이 너무 작았다. 사람이 열 명만 있어도 아무것도 못할 지경인데, 유적 어느 자리에서건
최소 열 명의 경비병이 보였다.
그래서 밤에 강행 돌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복면을 쓰고 최대한 알아보지 못하게 옷차림도 신경 써서 바꾼 다음,
은밀히 유적에 접근해 병사들을 몽땅 쓰러뜨리고 유적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사실 아직 유적 아래에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감춰져 있는지 확인을 못했다. 만일 그렇게 들어갔는데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없다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난입해서 병사를 쓰러뜨리는 순간 비상이 걸릴 것이고 왕궁에서 파견한 기사와 병사가 잔뜩 몰려올 텐데, 만일
유적이 없으면 그들과 싸우며 다시 나와 도망가야만 한다.
그래서 결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제 결정을 내렸으니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제론은 천천히 식사를 마무리한 뒤 방에서 나갔다.
낮에는 평소에 하던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 동선이 달라지면 나중에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밖으로 나온 제론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정보길드에 들러서 정보 몇 가지를 확인한 뒤, 찻집으로 향했다.
가볍게 차를 마시며 주변에 흘러 다니는 대화를 들으며 정보를 모으는 것이 낮에 주로 제론이 하는 일이었다.
수도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찻집에 자리를 잡은 제론은 귀를 크게 열고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그때, 제론을 향해 누군가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제론은 갑자기 다가와 인사를 하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운글릭 폰 슈돌츠입니다.”
상대가 이름을 밝히면 자신도 소개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다가와 느닷없이 인사를 하는
경우는 예외였다.
제론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자, 운글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님 아니십니까?”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각심이 크게 일어났다. 제론은 날카로운 눈으로 운글릭을 자세히
살폈다.
“경계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작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먼 친척입니다.”
“친척?”
제론은 운글릭을 다시 한 번 살폈다.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제론보다도 어린 게 분명했다. 기껏해야 20 대
초반이었다.
“돌아가신 백작님께 사촌이 한 명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당시 남작이었던 그의 장례식에 제론도 참석했으니까.
“그분께는 자식이 없었던 걸로 아는데?”
그래서 당시 그 재산이 대부분 에어스트 가문으로 돌아왔다. 물론 대단치는 않았다. 그 의미는 그저 더 이상
친척이 없다는 것에 불과했다.
“남작님이 아니라 남작 부인께 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제론이 무심하게 운글릭을 쳐다봤다. 그런 식으로 따져 나가면 세상에 관계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대체 어디까지 가나 싶어서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그분의 아들이 접니다.”
운글릭은 제론의 허락을 얻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처음 운글릭이 말했던 것처럼 멀긴 멀었지만 그래도 친척은
친척이었다.
물론 그냥 무시해 버릴 수도 있었지만, 제론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귀족이다. 당연히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인재에 목마른 시점이었으니 이런 친척의 손을 빌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날 알고 찾아왔느냐 하는 거지.’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솔직히 의심스러웠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운글릭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부끄러움이 반쯤 섞여 있었다.
“우연히 에어스트 백작령이 생긴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제론은 그 말로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수도에서 적당히 식객으로 머물 만한 귀족 가문을 찾다가 에어스트
백작령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이다.
당시 이름 변경에 대한 정보가 자잘한 정보 조직으로 몽땅 흘러간 것을 확인하고는 꽤 놀랐었다. 그러니 운글릭이
그 정보를 얻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운글릭 폰 슈돌츠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 슈돌츠 가문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아버지의 사촌은 몰라도, 그 사촌의, 그것도 부인의 방계까지 신경을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난 왜 찾았지?”
제론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운글릭은 당황한 얼굴로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얼굴이 뻔뻔해도 에어스트 백작령이 다시 살아났으니
한 자리 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잠시 당황하던 운글릭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지.’
벌써 빚이 수백 골드나 쌓여 있었다. 가문이 몰락한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탕하게 살았으니 빚이
늘어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운글릭은 얼마 전 사채업자로부터 한 달 내로 빚을 갚으라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빚을 갚지 못하면 암시장에 팔아
버리겠다는 협박과 함께 말이다.
“아, 아무 자리나 괜찮으니 좀 도와주십시오!”
운글릭이 얼굴이 붉어진 채로 소리치듯 말했다. 자리를 달라고 말하지 않고 도와 달라고 한 이유는 빚을 갚으려면
거금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건넨 말이었다.
“뭘 잘하지?”
제론이 날카로운 눈으로 물었다. 아무리 친척이라지만 쓸모가 없는 사람을 영지로 들여서 돈을 퍼부을 수는
없었다.
운글릭은 긴장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켄트 아카데미 행정학부를 졸업했습니다.”
제론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켄트 아카데미를 졸업했다면 어느 정도 능력은 확인한 셈이었다. 켄트 아카데미는
제대로 실력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졸업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검술도 조금 합니다.”
켄트 아카데미를 나왔으면 당연하다. 기본 과목에 검술과 마법 이론, 기간트 이론이 있으니까.
“좋아. 당분간 수도에 일이 있어서 기다려야 하는데, 지낼 곳은 있나?”
운글릭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호텔에 묵었지만 빌린 돈이 똑 떨어져서 어젯밤 나왔다.
“그럼 베니뉴스 호텔에 묵도록.”
제론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운글릭을 호텔로 데려가 방을 하나 마련해 주고 나머지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유적을 강행 돌파하는데 운글릭을 데려갈 수는 없지 않은가.
운글릭은 제론이 갑자기 일어나자 다급히 그를 불렀다.
“배, 백작님!”
제론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러자 운글릭이 살짝 비굴한 표정으로 몸을 낮추며 말했다.
“저…… 도, 돈을 조금만 가불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불이라니. 그 단어 하나만으로 운글릭의 상황이 훤히 보였다.
“빚이 있나?”
“예. 생활비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지?”
운글릭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분위기를 보니 당장 돈을 줄 것만 같았다.
“1 천 골드입니다!”
제론의 표정이 대번에 싸늘해졌다. 1 천 골드라니. 그냥 생활비로 썼다고 하기에는 액수가 너무 컸다.
물론 제론에게는 막대한 돈이 있다. 1 천 골드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줄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운글릭의 행태가 마음에 안 들었다.
“일단 호텔에 가 있어라.”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운글릭의 표정이 순간 크게 일그러졌다.
‘젠장. 일이 잘 풀리나 했더니.’
그래도 한 달 안에만 돈을 받으면 된다. 사실 빚은 500 골드 정도였다. 나머지 500 골드는 혹시나 필요할지 몰라
붙인 금액이었다.
‘혹시 완전히 개털인 영지 아냐?’
그건 아닐 것이다. 자신에게 제론의 정보를 알려 준 사람이 분명히 제법 부유한 영지라고 했다. 게다가 향후
발전 가능성이 어마어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그런 영지의 영주가 될 수도 있다 이거지?’
운글릭의 얼굴에 탐욕의 빛이 가득 퍼져 나갔다. 그는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제론을 놓치면 안 된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영지보다 돈이 더 급했다.

밤이 되자, 제론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운글릭에게는 2 층에 방을 따로 잡아 주었다. 하지만 아직 그를 영지로


데려가겠다고 결정한 건 아니었다.
제론은 운글릭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뭔가가 꺼림칙했다.
‘정보길드에 의뢰하기가 좀 그렇군.’
정보길드를 이용해 정보를 얻는 것도 좋지만, 의뢰 자체가 정보로 변해 길드 사이를 돌아다닌다. 나중에 그것이
운글릭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 그건 제외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방법은 딱 하나가 남는다. 무조건 마티를 찾아내야만 한다.
제론은 부디 수도 옆에 있는 유적에 감춰진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있기를 기원하며 빠르게 이동했다.
일단 제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정보길드 몇 군데가 모인 곳이었다. 수도의 빈민굴 중 하나였는데, 밤에 자주
이용했기에 길을 헤매지는 않았다.
제론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인적이 없는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행적이 어떤 식으로든 노출되어선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빈민굴만큼 적당한 장소가 없었다.
빈민굴은 다닥다닥 붙은 허름한 집에서부터 그저 기둥에 거적만 덮은 집 같지도 않은 집이 잔뜩 있었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가 비어 있었다. 물론 비어 있다고 해서 아무나 그곳에 자리를 잡을 수는 없었다. 빈민굴에도
패거리가 나뉘어 있었고, 그들끼리 세력 다툼을 했다.
하지만 그건 빈민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었고, 제론은 그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제론은 빈민굴에 들어가자마자 빠르게 이동했다. 청각을 활성화하니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누군가 자신을 미행한 것이다. 감각이 예민하기에 어느 정도 범위 안에서 따라오면 금방 알아차렸겠지만, 이들은
조심성이 상당했다.
제론은 슈린 공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항상 준비를 해 왔다. 한데 역시 미행이 있었다.
“푸르투나.”
제론은 정령을 소환했다. 푸르투나는 제론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달리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빈민굴의 골목은 마치 미로와 같다. 이곳에서 오래 살던 사람이 아니면 길을 제대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제론은
골목을 이리저리 휘돌며 미행을 따돌렸다.
아무리 미행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푸르투나의 힘까지 이용해 달리는 제론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제론은 아주 손쉽게 미행에서 벗어났고, 그와 동시에 빈민굴 깊은 곳, 인적이 전혀 없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이 깊었고, 달도 없었다. 사위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작은 불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제론은 재빨리 아공간 안에서 옷을 꺼냈다. 새까만 옷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복면까지 쓰니 어둠과 거의 동화되어
버렸다.
제론은 하늘로 훌쩍 날아올랐다. 검은 옷을 입고 밤하늘을 타고 움직이니 아예 눈에 띄지도 않았다.
만일 마법을 이용했다면 수도의 마탑에 들켰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마법을 이용한 게 아니라 정령을 썼다.
당연히 들킬 리가 없었다.
제론은 빠르게 유적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제론을 미행하던 자들은 빈민굴 곳곳으로 흩어져 제론을 찾았다. 물론 날이 샐 때까지 그들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뛰어다니기만 했다.

유적에 도착한 제론은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였다. 경비병이 워낙 많고, 기사까지 있어서 끝까지 모습을 들키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효과는 있었다.
제론은 유적 안으로 스며들었다. 밖은 어두웠지만 유적 내부는 밝았다. 유적 곳곳에 빛을 내는 아티팩트가 박혀
있었다. 고대 유물이었다.
밝은 곳에서 제론의 검은 모습은 너무 눈에 띄었다. 당연히 경비병의 눈에 확 들어왔다. 제론이 몸을 날려 가장
먼저 발견한 경비병을 제압했지만, 경비병의 수는 열 명이 넘었다.
삐이이이익!
경비병 중 하나가 입에 물고 있던 비상용 피리를 힘껏 불었다.
사방에서 경비병과 기사가 몰려왔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을 몽땅 제압하고
기절시킬 작정이었다.
쉬이익!
제론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어찌나 빨랐는지 경비병의 눈에는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다시 나타난
제론은 경비병이 가장 많이 모인 곳에 서 있었다.
퍼버버버벅!
순식간에 다섯 명의 경비병이 급소를 맞고 기절했다. 제론의 주먹에는 마나가 맺혀 있었는데, 급소를 타고 몸으로
흘러들어 가 상대를 기절시켰다.
이것은 황제 검술을 응용한 비법 중 하나였다.
제론의 움직임은 마치 바람 같았다. 푸르투나를 타고 움직이니 당연했다.
제론이 사라졌다가 나타날 때마다 경비병이 몇 명씩 쓰러졌다. 기사도 예외는 없었다. 기사나 병사나 똑같았다.
제론이 근처에 나타나기만 하면 예외 없이 기절했다.
유적 안에 있는 모든 병사와 기사가 쓰러지는 데에는 불과 5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제론은 더 늦기 전에 유적 끝에 섰다. 유적이 워낙 작았기에 그렇게 서도 입구가 훤히 보였다. 아직 지원군은
도착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올린 제론의 의지에 따라 주변에서 맴돌고 있던 푸르투나가 팔찌에 스며들었다. 어쨌든 정령은 스위치
역할을 한다. 푸르투나이건 아네모스이건 상관이 없었다.
화아악!
강렬한 빛이 일어났다. 그리고 제론은 아래로 쑥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도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존재하는 것이다.
‘역시 예상대로야.’
제론은 유적 로비 한가운데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체른산 유적과 비슷했다. 이곳 역시 생각한 대로 정보 수집을
위한 장소임이 분명했다.
―마스터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콜로니의 통제실은 7 층에 있습니다.
제론은 눈을 빛냈다. 체른산 유적은 로비를 제외하고 5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데 이곳은 7 층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역시 이번에도 제론은 유적의 마스터로 인정받았다. 예상대로 중앙 유적의 주인이 되면 자동으로 모든
유적을 소유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렇게 활성화를 시켜야 하지만 말이다.
제론은 일단 통제실로 향했다.
통제실은 체른산 유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체른산 유적과 다른 점은 정보 수집 아티팩트인 마티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아티팩트도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제론은 서둘러 태블릿을 꺼냈다. 이곳의 정보와 아티팩트를 이용하려면 일단 태블릿에 등록을 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언제 어디에서건 이곳의 정보는 물론이고 아티팩트까지 다룰 수 있었다.
“폴타?”
새로운 아티팩트의 이름이었다. 폴타는 딱 두 개가 있었고, 다른 유적에 없는 두 개의 층에 각각 하나씩
위치했다.
폴타의 크기가 거대한 게 아니었다. 각 층에는 폴타를 구동하기 위한 장치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즉, 방 자체가
온통 입체 마법진으로 채워져 있었다.
제론은 일단 폴타로 검색을 했다. 그리고 이내 경악했다.
“게이트를 만들 수 있다니!”
두 개의 폴타는 각각 서로 통하는 게이트를 만드는 아티팩트였다. 물론 범위가 정해져 있었다. 이곳 유적이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게이트를 만드는 게 가능했다.
마티를 이용해 주변 정보를 확인하고, 그 장소에 폴타를 보내 게이트를 만드는 것이다.
폴타 역시 마티와 마찬가지로 작고 투명했다.
제론은 머릿속이 환해지는 걸 느꼈다. 다시 밖으로 나가는 걸 걱정했는데,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폴타를
이용하면 언제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제론은 차근차근 통제실에서 유적을 살폈다. 이곳 역시 체른산 유적과 마찬가지로 수련할 수 있는 장소와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럼 정보 수집을 시작해 볼까?”
제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유적 내의 마티를 활성화시켰다. 수만 개의 마티가 유적 밖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Chapter 7 운글릭

운글릭은 제론이 잡아 준 방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성였다. 제론이 당장이라도 돈을 줄 거라고 믿었는데, 돈은 안


주고 거처만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베니뉴스 호텔은 그냥 방이라도 하루 숙박비가 1 골드가 넘었다. 운글릭이 머무는 방은 제법 좋은 방이었기에
최소 3 골드는 줘야 묵을 수 있는 방이었다.
“젠장. 이렇게 비싼 방에 재울 정도로 부자면서 고작 1 천 골드를 못 줘?”
운글릭은 500 골드만 달라고 다시 말해 볼까 고민했다. 최소한 그거라도 받아야 빚을 갚을 거 아닌가.
솔직히 짜증이 났다. 현재 제론은 베니뉴스 호텔 최상층에서 지낸다. 하룻밤 숙박료가 무려 30 골드에 달하는
곳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곳에는 돈을 쏟아부으면서, 비록 멀긴 하지만 친척인 자신에게 고작 1 천 골드도 못 쓴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운글릭은 이를 갈았다. 눈빛이 점점 음침해졌다. 어차피 제론을 만난 것 자체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였다. 달리
생각하면 이런 대단한 부자의 영지를 자신이 꿀꺽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모든 고생이 끝이었다.
“일단 기한을 늘려 달라고 하는 수밖에.”
운글릭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가만 생각하면 그 독사 같은 놈들이 더 많은
돈을 뜯어낼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릴 리가 없었다.
상당한 이득을 보장해 주면 기한을 얼마든지 연장해 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때 일을 딱딱 처리하는 것이 깔끔한 법이었다. 마음이야 편해졌지만, 일말의 꺼림칙함이
남아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노크했다.
똑똑.
운글릭은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이 시간에 자신을 찾을 사람이 없었기에 정말로 깜짝
놀랐다.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갑자기 겪으면 당연히 놀란다. 운글릭은 그 정도가 조금 심할 뿐이었다.
“후우.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네.”
운글릭은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이번에는 처음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뛸 정도로 놀랐다. 운글릭은 일단 누군지
확인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어보려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으허헉!”
막 문으로 다가가려던 순간이었기에 엄청나게 놀랐다. 처음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보다 훨씬 혼비백산했다.
털썩.
운글릭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정신이 반쯤 날아가 멍한 표정으로 입가에 침을 주르륵 흘렸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온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이런 사람은
이용해 먹기가 정말로 좋다.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일어나라.”
기이한 힘이 담긴 사내의 말에 운글릭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누, 누, 누, 누, 누구요!”
사내는 일단 문을 닫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운글릭의 외침이 제법 컸는데도 방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운글릭은 두려움에 떨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앉은 채로 물러나려니 엉덩이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그리고
이내 균형을 잃고 바닥에 꼴사납게 쓰러졌다.
사내는 느긋하게 걸어 자빠진 운글릭의 얼굴 앞에서 멈췄다.
“일어나라고 했는데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보군.”
운글릭은 그 말에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고는 억지로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제대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제법 시간을 들여 간신히 일어난 운글릭은 사내가 갑자기 가슴을 미는 바람에 뒤로 정신없이 물러나다가 소파에 턱
걸려 그대로 앉았다.
소파가 출렁거렸다.
사내는 그런 운글릭 앞으로 의자 하나를 끌고 와 털썩 앉았다. 어찌나 여유가 넘치는지 그것을 보는 운글릭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내, 내게 원하는 게 대체 뭐, 뭡니까?”
“돈이 필요할 것 같아서.”
“예?”
운글릭은 사내의 말에 마치 한 줄기 서광이 하늘에서 자신을 향해 비추는 것 같았다.
사내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휙 던졌다.
쩔렁!
제법 묵직한 쇳소리가 울렸다. 그것을 본 운글릭의 목울대가 꿀꺽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500 골드다.”
운글릭은 긴장한 눈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그걸로 일단 빚을 갚아라. 그리고 에어스트 백작에게 더 이상 손을 벌리지 마라. 싸 보인다.”
운글릭은 주머니를 챙기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 손을 벌리고 싶어서 벌렸겠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그랬을 뿐이었다.
이제는 그렇게 하라고 해도 안 할 것이다.
“영주가 되기 위한 최소 요건을 알고 있나?”
운글릭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영주가 되는 데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사내가 나직이 혀를 찼다.
“쯧쯧. 정말 생각이 아예 없는 놈이로군.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유산을 상속할 거라 생각하나?”
“유, 유산이야 자동으로…….”
“흥. 자동으로? 자동으로 왕국에 귀속되겠지.”
운글릭이 크게 당황했다. 자신은 그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만일 정말로 왕국에 귀속되어
버린다면 자신은 뭐가 되는가.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당한 유산 상속자로 등록을 해야지.”
“등록을 어떻게 합니까?”
“행정청에 에어스트 백작과 함께 방문해서 허락을 받으면 된다.”
“예?”
운글릭이 더 당황했다. 그런 짓을 제론이 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을 뭘 믿고 해 주겠는가. 고작 1 천
골드도 안 주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명망 있는 귀족의 보증을 받으면 되지.”
“명망 있는 귀족? 예를 들면 어떤 분 말입니까?”
“왕족이나 공작?”
운글릭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세상에 어떤 미친 왕족이나 공작이 자신 같은 놈을 위해 보증을 서 주겠는가.
자칫하면 해가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운글릭에게 내밀었다.
운글릭은 얼결에 그것을 받아 대충 읽었다. 계약서였다.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운글릭의 표정이 창백해져 갔다.
이건 말이 계약서지 실제로는 노예 문서나 다름없었다.
“왜? 불만이라도 있나?”
“이, 이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이대로라면 제가 영지를 얻어도 가져갈 게 없을 것 같은데…….”
“가져갈 게 왜 없나? 영지 수익의 3 퍼센트나 가져가는데 말이야.”
운글릭은 멍하니 사내를 바라봤다. 정말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다. 영지 수익금의 3 퍼센트라니. 그걸로 대체
뭘 하란 말인가.
“아아, 뭔가를 좀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이군. 젤레 영지, 아니, 에어스트 백작령을 우습게보면 안 돼. 아마 3
퍼센트라고 해도 족히 몇 만 골드가 넘을 테니까.”
“예에?”
운글릭은 어안이 벙벙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3 퍼센트인데 그것이 수만 골드나 된다니, 그럼 대체 1 년에
젤레 영지가 벌어들이는 수익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잠시 멍하게 있던 운글릭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대단한 영지가 어떻게 에어스트 가문에 떨어진 겁니까? 전쟁에서 그렇게 큰 공을 세웠습니까?”
“공이야 제법 세웠지. 하지만 그 영지를 받을 때만 해도 그다지 대단치 않은 곳이었다.”
“하면…….”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아니면 운이 좋았거나.”
하지만 사내는 그것이 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제론의 능력이었다. 그런 정황이 정보를 통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운글릭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런 대단한 영지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명하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이다.”
운글릭은 거침없이 계약서에 사인했다. 이제 그는 합법적으로 영지의 상속권을 갖게 되었다. 만일 제론이 죽으면
젤레 영지, 아니, 에어스트 백작령은 운글릭의 것이 된다.
에어스트 백작가에 내려진 공신 가문의 특혜인 세습 백작 위는 사라지겠지만, 그래도 영지에 내려진 포상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당분간 세금도 면제라는 뜻이었다.
사내는 계약서를 다시 품에 넣었다. 이제는 제론을 죽일 시간이 되었다.
운글릭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가는 사내를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의 눈동자에 탐욕이 뚝뚝
흘러넘쳤다.

☆ ☆ ☆

제론이 다시 호텔로 들어간 것은 새벽이었다. 날이 새기 전이었기에 여전히 깜깜했다.


귀족 중에는 새벽의 유흥을 즐기는 사람이 제법 많았기에 누구도 호텔 로비로 들어선 제론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았다.
제론은 곧장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유적을 찾은 덕분에 그곳의 시설을 이용해 몸도 깨끗이 씻었고, 오랜만에 수련도 충실히 했다.
그리고 마티를 이용해 주변 정보도 확인했다.
침대에 누운 제론의 표정은 심각했다. 제론이 유적을 찾아 마티를 얻은 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이 바로
운글릭이었다.
그리고 운글릭이 정체불명의 사내를 만나는 모습을 똑똑히 확인했다. 당연히 그들의 대화도 몽땅 들었다.
운글릭이 계약한 서류까지 몽땅 읽었다.
‘정말 다행이로군.’
만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운글릭을 영지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운글릭은 제론의 먼
친척이라는 걸 제외하면 결코 영지에 들여선 안 되는 인물이었다.
어쨌든 적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다 알아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운글릭을 만난
사내에게 마티를 붙여 두었다.
향후 사내가 만나는 사람을 조사하다 보면 배후가 확실히 드러날 것이다. 물론 누군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수도 유적의 정보 수집 범위는 체른산 유적보다 더욱 넓었다. 체른산 유적은 100 킬로미터 범위를 커버한다.
한데 이곳 수도 유적은 무려 150 킬로미터 범위를 커버한다.
그 정도 넓이라면 수도 전체는 물론이고 그 근방까지 싹 파악할 수 있었다.
유적이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사실 모든 범위를 관장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범위가 넓어서
다행이었다.
유적의 정보 커버 범위가 넓으니 당연히 폴타를 이용할 수 있는 범위도 그만큼 방대했다.
이번에 유적을 무사히 빠져나온 것도 폴타 덕분이었다.
제론은 유적과 빈민굴 깊숙한 곳을 게이트로 연결했다. 너무나 손쉽게 유적을 빠져나왔다. 당연히 빈민굴을
헤매지도 않았다.
마티를 가지고 있으니 길을 찾는 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제론은 새삼 초고대 문명의 위력을 실감했다. 두 지역을 잇는 게이트를 만들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냥 일반적인 텔레포트 게이트와는 차원이 다른 기술이었다. 말 그대로 양쪽에 입구와 출구를 만들어 연결시킨
것이다.
어떤 물건이든 사람이든 제한 없이 통과시킬 수 있으니 이용하기에 따라서 정말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공성전을 할 때, 게이트를 열어 성 내부로 기간트를 이동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거리에 제약이 없다면 물건을 운송해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도 있었다. 해산물을 내륙 깊은 곳으로 이동시켜
판매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 외에도 머리만 굴리면 쓸 일이 무궁무진했다.
폴타의 가장 큰 단점은 거리에 제약이 있다는 점이었다. 고작 150 킬로미터 영역 안에서만 쓸 수 있으니 실용성이
살짝 떨어지긴 한다.
하지만 제론은 실망하지 않았다. 폴타를 쓰면서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중앙 유적을 계속 클리어하다 보면 새로운
폴타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내일부터는 조금 바빠지겠군.’
제론은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부터는 마티를 이용해 정보를 수집할 것이다. 인재를 모으는
건 생각보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제론은 마지막으로 운글릭과 그를 만난 사내를 어떻게 할지 찬찬히 계획을 세우며 잠들었다.

☆ ☆ ☆

운글릭은 멍하니 호텔 방에 앉아 있었다. 제론은 자신을 이 방에 넣은 이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벌써 5 일이 지났다. 그동안 운글릭이 한 일이라고는 먹고 자는 것이 전부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날 영지로 데려가긴 할 건가?”
운글릭은 제론이 뭘 하고 다니는지, 아니, 호텔에 머물기는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호텔 측에서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돈을 계속 지불하고 있다는 뜻이니 그걸로 미루어 아직
영지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내가 직접 찾아가 봐야 하나?”
일단 운글릭의 가장 큰 목표는 영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영지에 입성해 어떻게 운영되는지도 파악하고, 또
일하는 사람들도 장악해야만 한다.
그래야 향후 영지를 물려받았을 때, 잡음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한데 아예 제론을 만나지도 못하고 있으니 점점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아예 영지로 따라가지도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운글릭이 방 안을 서성이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으헉!”
열린 문으로 사내가 들어왔다. 얼마 전 찾아와 계약을 하고 간 자였다.
“노, 노크라도 좀 하십시오!”
운글릭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러자 사내의 입가에 냉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닥쳐라.”
운글릭은 깜짝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속에서 딸꾹질이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사내는 운글릭에게 작은 병 하나를 휙 던졌다.
운글릭은 병과 사내를 번갈아 바라봤다. 투명한 병 안에서 푸른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독이다.”
“예?”
우글릭은 화들짝 놀라 병을 손에서 놓쳤다.
탱그랑!
병이 바닥에 떨어져 또르르 굴러갔다. 사내가 그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네 몸값보다 비싼 독이다. 다시 구하기도 어려우니까 잘 간수해라.”
“예. 아, 알겠습니다.”
운글릭은 다시 병을 들어 조심스럽게 품었다. 그리고 두려운 눈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뭘 해야 할지는 알겠지?”
운글릭이 대답도 안 하고 멍하니 있자, 사내가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그 독으로 에어스트 백작을 죽여라. 할 수 있겠지?”
“예? 제, 제, 제가 말입니까?”
사내가 차갑게 웃었다.
“그럼 누가 죽인단 말이냐?”
“그, 그건 그쪽에서 해 주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
“지, 지난번에…….”
사내가 운글릭을 노려봤다. 그리고 한껏 위압감을 담아 천천히 말했다.
“잘 알아 둬라. 에어스트 백작은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익스퍼트의 끝자락에 이른 기사를 단숨에 죽일
정도야.”
“헉!”
운글릭은 깜짝 놀랐다. 설마 제론이 그렇게 강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그저 운 좋게 공을 세워 영지를 물려받은
애송이라고만 여겼다.
“그러니 암습이 제대로 먹힐 리가 있겠느냐?”
“그, 그럼…….”
“그래. 제일 좋은 방법이 방심했을 때 찌르는 거지.”
“이, 이 독으로 말입니까?”
“독을 쓰는 법은 아주 간단해. 그저 깨뜨리면 된다.”
사내가 그렇게 말하고는 붉은색 액체가 찰랑이는 병을 던졌다.
“해독제다. 미리 그것을 먹으면 중독될 일은 없을 것이다.”
운글릭은 정신이 없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제론 앞에서 병을 깨뜨리면 제론이 그걸 그냥
구경만 하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 운글릭의 마음을 알았는지 사내가 피식 웃었다.
“머리를 써라. 꼭 목표 앞에서 병을 깨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 미리 깨서 액체를 몸에 묻힌 채 백작을 만나면 다
해결되는데 뭘 그리 망설이는 것이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는 운글릭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단, 병을 깨고 독이 공기에 닿는 30 분 이내에 목표와 마주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성분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니까.”
운글릭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런 신비한 독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이거야말로 증거를 일체
남기지 않는 독살 아닌가.
“몸에 흡수된 독도 사라지는 겁니까?”
“목표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죽으면 30 분 내에 사라져 버리지.”
운글릭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 독이 왜 그리 비싼지, 또 어째서 자신에게 이걸 가져왔는지 말이다.
이 독을 쓰기 위해선 타이밍이 생명이었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가장 잘 맞출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운글릭이었다.
운글릭은 생각을 정리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런데 제게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통 만나 주지를 않아서…….”
“끝까지 널 외면하지는 않을 것 아니냐?”
그건 그렇다. 어쨌든 한 번은 만나 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기회가 많을 수도 있었다. 운글릭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죽이겠습니다.”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허튼짓은 하지 마라. 그저 독만 쓰면 돼. 독이 제대로 작동하면 심장이 멈춰서 죽게 되니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절대 시체를 만지지 마라. 그게 증거로 남을지도 모르니까.”
운글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어쨌든 친척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앞두고
기분이 상쾌할 리 없지 않은가.
“아, 그보다 제가 영지로 내려가기 전에 죽어도 괜찮은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러니까…… 영지 업무를 좀 알아보고 사람도 장악하고 한 뒤에…….”
사내가 피식 웃었다.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네게 일을 맡긴 줄 아느냐? 그깟 지방 영지 하나 장악하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넌 그저 새로운 영주로 취임만 하면 돼.”
“아, 알겠습니다.”
운글릭은 사내의 말을 들으며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기사단을 보내실 겁니까?”
운글릭이 조심스럽게 묻자, 사내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를 제대로 장악하려면 최소한 라이더가 열 명은 포함된 기사단이 있어야 한다.”
운글릭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라이더가 열 명이나 포함된 기사단이라니. 그럼 기간트를 보내 주겠다는 뜻
아닌가.
“그 영지에도 기간트가 있는 겁니까?”
변방의 영지라 했다. 한데 기간트라니. 운글릭은 그제야 3 퍼센트만으로도 수만 골드를 챙길 수 있다던 사내의
말이 조금씩 실감 나기 시작했다.
“몇 대가 있는지 모르지만 확실히 있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아무리 그래도 영주를 함부로 해할 수는
없으니까.”
그건 그렇다. 또한 영지의 기사가 가진 기간트는 엄밀히 따지면 영주의 것이었다. 조력자를 충분히 모아 가면
갖은 핑계를 통해 기간트를 압수해 버릴 수도 있었다.
“어쨌든 넌 제론 폰 에어스트를 죽이는 일만 생각해라. 그러면 모든 게 끝난다.”
운글릭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내의 말을 듣다 보니 친척을 죽인다는 죄책감이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탐욕이 고스란히 들어찼다.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사내는 운글릭을 믿는다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운글릭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어떻게 제론에게 접근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 ☆ ☆

이틀 후, 운글릭은 최상층에 위치한 제론의 숙소로 찾아오라는 전갈을 들고 온 종업원의 방문을 받았다.
뛸 듯이 기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서 종업원의 뒤를 따라 최상층으로 이동했는데, 가는 내내 품에 넣은
유리병을 만지작거렸다.
이건 타이밍이 중요하다. 또한 해독약을 미리 복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데 지금은 종업원의 뒤를 따라가야 하니 그것이 불가능했다. 일단 종업원에게 의심을 받아선 안 된다. 누구라도
갑자기 뭔가를 마시고 병을 깨면 이상한 눈으로 볼 것 아닌가.
‘젠장. 병을 이따위로 만들면 어떻게 해?’
독이 든 병은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깨뜨리지 않고서는 안에 든 독을 꺼낼 방법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공기와 닿으면 일정 시간 후에 독성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치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짜증이 났다.
그렇게 고민하며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최상층에 도착했다. 종업원이 더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종업원은
운글릭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운글릭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 그 사람이……!’
본래 종업원은 기별을 넣어 주고 운글릭이 방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한데 이렇게 그냥
도망치듯 가 버렸다는 건 뭔가 조치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운글릭은 자신을 여기로 보낸 의문의 조직이 가진 치밀함에 감탄했다.
“좋아. 그럼 준비를 해 볼까?”
운글릭은 일단 해독제를 꺼내 마셨다. 온몸으로 해독제가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상쾌했다.
그리고 푸른색 액체가 출렁이는 병을 꺼냈다. 지금 깨면 자칫 타이밍이 안 맞을 수도 있었다. 운글릭은 노크부터
했다.
똑똑!
“들어와!”
제론의 목소리였다. 운글릭은 망설이지 않고 병을 깼다.
쨍그랑!
푸른 액체가 촤악 튀었다. 운글릭은 바닥에 쏟아진 액체를 손으로 닦아 옷 여기저기에 묻혔다.
그리고 깨진 병의 잔해를 한쪽으로 치운 뒤,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열었다.
과연 최상층의 방이었다. 어마어마하게 넓고 화려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도 제론이 보이지 않았다.
운글릭은 다급히 움직였다. 서둘러 제론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공기 중으로 퍼진 독 기운이 제론의 몸을 잠식할
테니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제론을 금방 만날 수 있었다. 응접실 한가운데 있는 소파에 느긋하게 앉은 제론을 본 운글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독 기운이 소리 없이 스멀스멀 퍼졌다.
“부르셨습니까?”
운글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은 최대한 정중함을 잃어선 안 된다. 그동안 깎아 먹은
이미지를 다시 세우는 척 노력할 생각이었다.
“내일 영지로 내려갈 생각이다.”
“내, 내일입니까?”
“그래. 그러니 대충 준비를 하도록. 아침에 떠날 테니까 오늘 짐을 싸 두는 게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운글릭은 긴장한 눈으로 대답하며 제론을 바라봤다. 대체 언제 독에 당해 쓰러질지 궁금했다. 이대로 결과를
확인하지도 못하고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시간을 끌지?’
운글릭은 그렇게 고민하며 제론을 빤히 바라봤다. 제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운글릭이 대답할 말을 못 찾아 당황하는 순간, 제론이 갑자기 인상을 썼다.
“윽!”
제론은 가슴을 꽉 움켜쥐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눈으로 운글릭을 노려봤다.
운글릭은 덜덜 떨며 제론을 바라봤다. 이윽고 제론이 바닥에 툭 쓰러졌다.
운글릭은 뭘 어째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백작님!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쾅쾅쾅쾅!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와 제론을 부르는 소리가 뒤엉켜 운글릭의 뇌리를 복잡하게 휘저었다.
운글릭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소파 아래에 있는 공간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곳에 숨었다.
꽈앙!
부서질 듯 문이 열렸고, 두 기사가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쓰러진 제론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
“백작님!”
두 기사는 일단 제론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서둘러 제론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운글릭은 소파 아래에 숨어서 그 광경을 고스란히 확인했다. 하지만 기사가 나간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무려 1 시간이 지난 뒤에야 덜덜 떨면서 소파 밖으로 나온 운글릭은 황급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하루가 지나갔다. 그날 밤, 운글릭은 꿈에 영주가 되어 영지를 호령했다. 잠든 운글릭의
입가에 황홀한 미소가 떠올랐다.

Chapter 8 두 기사

“성공했나?”
사내의 물음에 운글릭이 두려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서 심장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걸 똑똑히 봤습니다.”
사내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잘했다.”
“하면 전 이제 어찌하면 됩니까?”
“어쩌긴, 이걸 들고 영지로 가야지.”
운글릭은 사내의 손에 들린 서류를 바라봤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화, 확인서?”
그것은 에어스트 백작령의 상속권에 대한 확인서였다. 정당한 상속권을 증명하는 서류였다. 물론 행정청에서
발급한 진짜 서류였다.
“그걸 가지고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라.”
만일 영주가 멀쩡하다면 이건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상속에 대한 사항은 영주 고유의 권한이었다.
영주가 휘하 기사에게 모든 걸 물려주겠다고 공식 서류를 남기면 그 기사가 물려받는다.
하지만 영주가 상속에 관한 아무 문건도 남기지 않고 죽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왕국법에
의거해서 상속이 결정된다.
상속인이 몇 명인가, 또 영주와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 적합한 비율이 정해진다.
하지만 지금처럼 상속인이 유일한 경우는 한 명이 모든 걸 갖게 된다.
운글릭은 서류를 보물처럼 소중히 감싸 품에 넣었다. 이것만 있으면 에어스트 백작령을 얻을 수 있다.
‘불리한 계약이 있지만 언제까지 끌려다니지는 않을 테니 상관없지.’
처음에는 도움을 받아야 하니 끌려다니겠지만 결국은 에어스트 백작령을 혼자 독식할 수 있을 것이다.
운글릭은 꿈에 부풀었다.
“지금 당장 내려가겠습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를 했다. 호텔 밖에 기사단과 병사를 세워 놨으니 데리고 가도록.”
“병사까지 지원해 주시는 겁니까?”
사내가 씨익 웃었다.
“제법 큰 영지인데 완벽히 장악하려면 최소한 병사가 천 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천 명의 병사라는 말에 운글릭의 눈에 경악이 담겼다.
‘대체 이자의 정체가 뭐지? 천 명이나 병사를 동원할 수 있다니!’
천 명의 병사를 보유하려면 영지의 규모가 상당해야만 한다. 한데 이자는 천 명의 병사를 지원해 주었다. 즉,
원래 보유한 규모는 그보다 훨씬 크다는 뜻이다.
‘최소한 후작!’
후작령은 되어야 그 정도 지원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공작일지도 모른다.
운글릭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해낼 수 있어!’
운글릭은 사내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사내는 그런 운글릭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건방진 놈. 벌써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구는군.”

운글릭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걸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스무 명의 기사가 마치 호위하듯 따라갔고, 천 명의 병사가 질서 정연하게 행군했다.
그 위세가 어찌나 대단했는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봤다.
운글릭은 그 시선을 한껏 즐겼다.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마치 왕이라도 된 것 같았다.
‘고작 천 명의 병사를 이끄는 것만으로 이럴진대, 진짜 왕은 어떤 기분일까?’
물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이 정도면 충분했다. 가슴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텔레포트 게이트에 도착했습니다.”
운글릭 옆에서 따라가던 수행원이 보고했다. 운글릭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수행원이
알아서 병사를 나눴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한 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인원에 제한이 있었다. 그리고 비용도 상당히 비쌌다.
그렇기에 병사가 천 명쯤 되면 직접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운글릭은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라 모두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이동하기로 했다.
당연히 그 비용은 운글릭에게 모든 걸 준비해 준 사내로부터 나왔다.
그렇게 기사와 병사를 이끄는 운글릭이 젤레 영지, 아니,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향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텔레포트 게이트가 없었다. 사실 돈만 있으면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왕국 소속 마탑에 신청을 하면 된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지불하면 원하는 장소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해
주고, 왕국의 각 게이트에 위치와 명칭을 등록해 준다.
사실 실제로 마탑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것은 크란 제국 마탑이었다. 그들이 텔레포트 게이트에 관한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제론은 당분간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게이트를 설치하는 건 영지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이후여야만 했다.
슈린 공작가와 정면으로 싸워 이길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면 최대한 외부에 영지를 드러내지 않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운글릭은 병사와 기사를 이끌고 직접 걸어서 이동을 했다. 마차라도 구했으면 좋았겠지만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위세를 떨치며 물려받을 것이 확실한 영지로 간다는 생각에 들떠 아무것도 고려치 못했다.
수행원은 마차에 대해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그는 운글릭의 수행원이지만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 최대한
돈을 아끼는 쪽으로 선택하는 게 당연했다.
더구나 이번 일로 상당한 지출을 했기에 앞으로는 되도록 돈을 아끼는 편이 좋았다.
“얼마나 더 가야 영지가 나오는 거지? 이거 변방은 변방이로구나.”
운글릭은 슬며시 의심이 들었다. 매년 수백만 골드를 벌어들일 수 있는 영지에 텔레포트 게이트도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운글릭에게는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그것을 입 밖으로 낼 권리가 없었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한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한참을 이동하니 드문드문 집이 보였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낙후된 곳이었다.
수많은 병사와 기사가 지나가니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불안한 눈으로 쳐다봤다. 운글릭은 그 시선에 기분이 한껏
달아올랐다.
“서둘러라. 어서 내 성을 보고 싶구나.”
운글릭의 말에 행군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최대한 서둘렀지만 결국 성에 도착하지 못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성이 너무 먼 곳에 있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면 그날 도착했겠지만, 걸어서 성까지 하루 만에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하루를 노숙한 뒤에야 영주성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운글릭은 멀리 우뚝 서 있는 성을 보며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성이었다. 규모나 화려함이
그동안 봐 왔던 그 어떤 성보다 대단했다.
운글릭의 발이 점점 빨라졌다. 저 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쭉쭉 솟아났다.
한참 걸어가던 운글릭의 눈에 성 뒤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물결이 들어왔다. 운글릭은 눈을 비볐다. 뭔가
잘못 본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정말로 초록빛 물결이 성 뒤쪽으로 쫙 펼쳐져 있었다.
성이 워낙 크고 화려해 처음에는 눈에 안 들어왔지만 차츰 주변으로 시선이 확장되자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적당히 자란 곡물이었다. 아직 익지 않아 푸르렀지만 나중에는 누렇게 익어서 새로운 빛깔의 물결을 만들
것이다.
운글릭은 곡물을 키우는 영토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높은 곳에서 봐야 한다.
“더 서둘러라!”
그 말을 남기고 운글릭은 거의 뛰다시피 해서 성으로 향했다. 성의 한가운데 높이 솟은 첨탑에 올라가면 아마
드넓은 영토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문으로 가는 길 중간에 곳곳에서 공사를 벌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로와 건물을 건설하는 중이었는데,
수많은 사람이 달라붙어서 구슬땀을 흘렸다.
저 모든 건물이 완성되었을 때를 떠올리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진짜 멋진 영지가 될 것 같았다.
성문 앞에 도착하자, 수행원이 서둘러 병사에게 다가갔다.
“운글릭 폰 슈돌츠 경입니다. 현 에어스트 백작님의 먼 친척 되십니다.”
“예?”
병사가 당황했다. 하지만 영주의 친척이라는데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안에 기별을
넣었다.
‘그나저나 먼 친척이라니, 대체 얼마나 먼 거야?’
병사가 후다닥 움직이자, 운글릭은 거만한 자세로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 마음에 들었다. 아마 성 안으로 들어가면 훨씬 멋질 것 같았다.
‘이게 내 성이란 말이지. 훌륭해.’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던 운글릭은 다시 돌아온 병사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내부는 더 대단했다. 운글릭은 이 성이 정말로 마음에 쏙 들었다.
“당분간 이 방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함께 데려온 병사와 기사는 근처에 다른 방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운글릭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이 성에는 총관이 없나? 이만한 영지를 운영하려면 꼭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야.”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지금은 바이스님께서 총관 일도 함께하고 계십니다.”
“바이스?”
“예. 우리 영지의 마법사님이십니다.”
“마법사?”
운글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사는 보통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머리는 좋을지 몰라도 행정 쪽으로는 완전히
꽝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나중에 영지를 물려받으면 모든 체재를 개편하고, 사람도 싹 바꿔
버릴 테니까 말이다.
‘과연 얼마나 걸릴까?’
영지를 물려받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영지 운영에 차질이 생기지 않아야 하기에 행정 절차가 비교적
간단하고 빨랐다.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해 볼까?”
할 일이 많았다. 일단 영지 전반에 대해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영지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영지민과 병사, 기사에게 얼굴을 알리는 것도 중요했다.
그걸 다 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운글릭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할 자신이 있었다.
‘돈이 많은 영지라야 할 텐데…….’
운글릭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은 밥이고 뭐고 다 귀찮았다. 그저 쉬고 싶었다.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을 하니 그나마 남아 있던 긴장감이 풀어져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다음 날, 운글릭은 자기 마음대로 성을 활보하고 다녔다. 그가 움직이면 항상 기사 세 명과 수행원이 따라붙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성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복잡하기도 하군.”
운글릭은 성을 돌아다니는 내내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대단한 성이었다.
마법을 이용한 편의 시설은 이곳에서 처음 봤다. 이런 게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한데 그런 것이 성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이런 대단한 성을 갖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한참 돌아다니던 운글릭의 눈에 아름다운 여인 한 명이 보였다. 드레스가 아닌 간편한 옷을 입은 여인이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운글릭은 자신이 걸음을 멈춘 것조차 모르고 멍하니 바라봤다.
“저, 저 여자를 불러와라. 어서!”
여인이 멀어지자, 운글릭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옆에 선 수행원에게 명령을 내렸다.
수행원은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서둘러 여인을 쫓아갔다. 이상적인 진행이었다. 운글릭이
주색잡기에 빠져 영지를 돌보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았다.
어차피 영지를 차지하면, 중요한 자리에는 몽땅 그들의 사람을 앉힐 것이다. 영주가 무능해야 비리를 저지르기가
편하지 않겠는가.
수행원은 단숨에 여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잠깐 멈춰 주십시오.”
수행원은 순간적으로 반말을 하려다가 말을 바꿨다. 여인이 손에 낀 반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웬만한
재력으로는 구경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 보였다.
여인, 세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무슨 일이죠?”
그녀는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공방으로 가는 중이었다. 아직도 수리가 필요한 기간트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얼마 전 제론이 웃으며 잔뜩 안겨 준 기간트였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작업을 해야 하니 마음이 조금 급했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 아가씨를 잠시 뵙고자 하십니다. 시간을 좀 내주시겠습니까?”
수행원은 정중히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눈짓과 손짓을 통해 자연스럽게 소개했다.
세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운글릭과 세 명의 기사를 쳐다봤다.
“관심 없어요.”
세나는 한마디로 거절한 다음 다시 돌아섰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다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향후 이 영지의 주인이 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가씨께 결코
손해가 가는 일은 아닐 텐데요,”
“영지의 주인이라고요?”
세나는 어이가 없는 눈으로 운글릭과 수행원을 번갈아 쳐다봤다. 제론의 나이가 몇인데 영지를 물려준단 말인가.
그리고 저 사람이 대체 누구인데 영지의 주인이 되네 마네 한단 말인가.
“어쩌시겠습니까? 한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세나는 뭔가가 꺼림칙했다. 하지만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한번 얘기나 나눠 보죠.”
수행원이 즉시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쩌면 영주 부인이 될 수도 있는 여자였다. 그러니 미리 잘 보여 둬서 나쁠 건 없었다. 아무리 허수아비 영주라
할지라도 말이다.
수행원은 세나를 정중히 운글릭에게로 모셔 갔다.
운글릭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나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수도에서 제법 오래 생활을 했기에 아름다운 여인을 볼 기회도 많았다. 왕국에서 가장 미인이 많은 곳이 바로
수도 아니겠는가.
하지만 수도의 그 어떤 여인도 세나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달빛 아래 반딧불이었다. 심지어 먼발치에서 본
공주조차 세나보다 못했다.
“운글릭 폰 슈돌츠요.”
운글릭은 나름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어필하기 위해 소개를 덧붙였다.
“이곳 영주이신 에어스트 백작님의 친척이기도 하오.”
제론의 친척이라는 말에 세나가 눈을 반짝였다. 만일 그렇다면 친하게 지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나는
수행원이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세나 폰 벨루스에요.”
순간 운글릭이 멈칫했다.
“베, 벨루스? 혹시…….”
세나가 환하게 웃었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벨루스 백작님이 제 아버지랍니다.”
벨루스 백작가는 상당히 유명한 가문이었다. 레늄 왕국에는 천여 개의 가문이 있었다. 그렇기에 들어도 모를
가문이 부지기수였다.
벨루스 백작가는 그런 가문 중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대단하고 유명했다. 그런 백작가의 여식이 왜 이 영지에
있단 말인가.
운글릭은 한편으로는 불안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지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다.
벨루스 백작가에서 딸을 보낼 정도면 이 영지에 뭔가 대단한 구석이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세나를 갖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바, 반갑소. 혹시 시간이 괜찮다면 가볍게 티타임이라도 갖는 게 어떻겠소?”
운글릭의 제안에 세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시간이 없네요. 그보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뭐든 물어보시오.”
운글릭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강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어쩌면 이곳 영주님이 되실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운글릭이 빙긋 웃었다. 드디어 제대로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얻었다.
“에어스트 백작님의 유일한 친척이 바로 나요.”
“그래서요?”
“이곳 영지의 유일한 계승권자가 바로 나라는 뜻이오.”
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영주님과 나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은데요?”
운글릭은 당장이라도 영주가 죽어서 어차피 이 영지는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함부로 그런 말을 해선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한데 아직도 영주님을 뵙지 못했소. 혹시 영주님께서 어디 가셨소?”
운글릭은 세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글쎄요. 곧 오시겠죠? 수도에 다녀오신다고 하셨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운글릭은 내심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 기회를 노려 슬며시 접근하면 세나를 차지하는 일도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하면 아쉽지만 이만 가 보겠소. 조만간 꼭 시간을 내주시오.”
운글릭의 말에 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세나는 그 뒤로 미련 없이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론이 영지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 일 후였다. 놀랍게도 혼수상태로 돌아왔다.


목숨은 붙어 있는데, 의식은 없었다. 숨을 쉬고 심장은 뛰지만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일어나지도 못했다.
영지의 모든 사람들이 당황했다.
제론을 데려온 것은 두 명의 기사였다. 또한 제론이 영입한 수많은 인재들이 함께 영지에 도착했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운글릭이었다. 그는 설마 제론이 죽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자신이 영지를 물려받고 싶어도 일단 영주가 죽어야 가능하다. 아니면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운글릭은 일단 도움을 요청했다. 수행원을 통해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사내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다.
자신의 방에서 모든 문을 잠그고 통신 수정구를 작동시켰다. 놀랍게도 수행원이 마법사였다. 그가 통신 수정구를
작동시켜 주었다.
물론 수행원의 마법 실력은 바닥이었다. 그저 아티팩트를 작동시키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운글릭은 수정구에 사내의 모습이 떠오르자 다급히 현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사내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운글릭의 물음에 사내가 차갑게 웃었다.
“어쩌긴. 영지를 장악해야지.”
“예? 하지만…….”
“어차피 그 영지의 차기 영주는 너다. 말이 좀 나오긴 하겠지만 큰 무리는 없을 거다.”
“그, 그럴까요?”
“당연하지. 게다가 내가 보내 준 기사와 병사는 장식품이 아니야. 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알겠습니다.”
운글릭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수정구를 치웠다. 그의 표정은 한껏 굳어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손으로 다시 영주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병사와 기사를 집합시킬까요?”
수행원의 물음에 운글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가 없었다.

☆ ☆ ☆

“영주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바이스가 외쳤다. 지금 이 자리에는 바이스 외에도 몇 명이 더 있었는데, 그중 두 명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바로 제론을 데리고 온 기사였다.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아도 들려.”
누워서 눈을 감은 제론의 말에 바이스가 깜짝 놀라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바이스뿐 아니라 함께 있던 세나와
카이트도 크게 놀랐다.
평온함을 유지하는 사람은 새로운 기사 두 명뿐이었다.
제론은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몸통을 못 찾았어.”
제론의 말에 바이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그럼…… 적을 찾기 위해 일부러 이러신 겁니까?”
제론이 피식 웃었다.
“얼마 전에 내 친척이라면서 온 놈 없었어?”
“있었습니다. 더럽게 먼 친척인 것 같은데, 수도 행정청에 확인해 봤더니 맞더군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어쨌든 그놈이 나한테 독을 풀었어.”
“예?”
다들 깜짝 놀랐다. 독을 풀었다니. 그럼 제론을 죽이려 했다는 말 아닌가.
제론의 말에 세나는 그제야 얼마 전 운글릭과 그의 수행원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영지를 물려받기 위해
제론을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일부러 당하는 척했지. 저기 있는 베샤이덴 경과 슈빅 경이 도와줘서 아주 간단히 속여 넘길 수 있었어.”
제론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두 기사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다들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데 영주님.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후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더라고. 그래서 좀 크게 흔들어 보려고.”
“크게 흔든다고 하심은…….”
“병사 천 명이랑 기사단까지 하나 끌고 왔잖아. 그놈들을 제압해서 배후를 좀 캐 보려고.”
“하지만 그냥 막무가내로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론이 빙긋 웃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어차피 저놈들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우리가 걱정할 건, 저놈들을 제압하는
일이야. 할 수 있겠어?”
제론이 카이트를 보며 물었다. 카이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기사단도 대충 정비를 했으니 누가 덤벼도 이길 수 있습니다.”
카이트의 자신감에 제론이 눈을 크게 떴다.
“호오. 제법 많이 모았나 보지?”
“저까지 스물다섯 명입니다.”
“그새 그렇게나 모았어? 기간트는?”
제론의 물음에 세나가 나서서 대답했다.
“제가 알아서 지급했어요. 다들 크라테르로 맞췄어요.”
제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제론은 슬슬 뭔가가 이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기간트 라이더로 이루어진 기사단도 만들었다. 남은 건
주변 영지를 병합하는 것뿐이었다.
‘아니지. 그 이후에 더 일이 많지.’
암석 지대를 정리해야 하고, 항구도 만들어야 한다. 그 일만 해도 어마어마한 돈과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기만 하면 그 효용성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제론은 손뼉을 짝 쳐서 시선을 모았다.
“자, 이제 슬슬 준비를 해 보자고.”
제론의 말에 다들 밝은 얼굴로 물러갔다. 그들의 뒤통수에 제론의 외침이 꽂혔다.
“표정 관리 좀 해! 누가 보면 영주가 펄펄 날아다니는 줄 알겠다!”
제론의 말에 다들 움찔하고는 억지로 표정을 굳혔다. 그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웠지만 아무도 웃지 못했다.
이제부터는 긴장해야만 했다.

☆ ☆ ☆

베샤이덴과 슈빅은 카이트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카이트에게 상당히 신경을 썼다. 척 보기에도 굉장한
강자였다. 특히 기간트 쪽이 강할 거라는 느낌이 확 왔다.
“자, 일단 인사부터 하지. 난 라이트닝 기사단의 단장인 카이트일세.”
“베샤이덴입니다.”
“슈빅입니다.”
베샤이덴과 슈빅의 나이는 28 살로 똑같았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실력이 상당했다. 이미 익스퍼트였다. 이런
인재가 왜 지금껏 주인을 못 만났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익스퍼트로군?”
카이트의 말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같은 익스퍼트라면 알아보는 게 당연했지만 그들이 보기에 카이트는
익스퍼트가 아니었다. 만일 익스퍼트라면 자연스럽게 마나가 흘러나와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설마 익스퍼트이십니까?”
슈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이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못 믿겠나?”
“아닙니다.”
슈빅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익스퍼트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면 상대도 익스퍼트일 확률이 높았다.
드물긴 하지만 익스퍼트 중에서는 자신의 마나를 감출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카이트는 베샤이덴과 슈빅의 표정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너희들도 조만간 이렇게 될 거다.”
두 사람은 카이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카이트는 두 사람을 훈련장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 일단 실력을 봐야 앞으로
어떤 식으로 훈련을 할지, 또 어떤 임무를 맡길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반쯤 갔을 때, 카이트가 지나가듯 물었다.
“실력도 있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떠돌아다니기만 했나?”
카이트의 질문에 베샤이덴과 슈빅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금세 평정을 찾았다. 어차피
제론도 자신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걸 다 알고도 거뒀으니 두 사람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신의 과거가 절대 부끄럽지 않았다. 그래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한 번 모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
카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기사는 주군을 한 번 정하면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는다. 주군을 바꾸는
기사는 다른 가문에 가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어쩌다가 나왔나?”
“쫓겨났습니다.”
카이트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다른 주군에게서 쫓겨났다면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음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
슈빅이 앞으로 나섰다.
“영지민을 학살하는 주군을 말렸더니 우리에게로 검을 돌리더군요.”
카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카이트도 엄밀히 따지면 기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른 기사에 비해 훨씬 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일단 최대한 두
사람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주군을 바른길로 이끄는 것도 기사의 덕목이라고 믿었습니다.”
카이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기사가 거기까지 해야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 곧은
마음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목에 상처를 내더군요. 그리고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아니, 명령이었군요.”
“나가라고?”
“예. 대신 영지민을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카이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충분한 명분이 된다. 하지만 이어지는 두 사람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한 사람당 100 골드라고 하셨습니다.”
카이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돈을 받고 너희를 놔주었단 말인가? 한 사람에 100 골드였으면 총 200 골드였겠군.”
200 골드면 엄청나게 큰돈이다. 하지만 실력 있는 기사가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벌 수 있는 금액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슈빅이 설명을 해 주었다.
“영지민 한 사람당 100 골드였습니다. 당시 그곳에 있던 영지민의 수가 삼천 명이 넘었습니다.”
100 골드씩 삼천 명이면 무려 30 만 골드나 되는 거금이었다. 그건 아무리 대단한 기사라도 버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용병이 되어 갚겠다고 한 뒤에 쫓겨났습니다.”
카이트는 그제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무려 30 만 골드나 되는 거금을 들여 이 두
기사를 영입한 것이었다.
말이 30 만 골드지 그 정도 돈이면 허름한 영지 하나는 거뜬히 살 수 있었다. 그런 돈을 투자했으니 두 기사가
느끼는 감정은 아마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당시의 감정이 울컥 올라오는지 감회에 젖어 버렸다.
마음이 강한 사람이 오히려 정에 약한 법이다. 또한 감동도 훨씬 잘한다. 베샤이덴과 슈빅이 딱 그랬다.
카이트는 그런 두 사람이 마음을 다스리도록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이 마음을 추스르고 강렬한 눈빛을 되찾자, 카이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한 가지는 확실해. 너희들, 주군 하나는 제대로 만났어.”
베샤이덴과 슈빅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정말 훌륭한 주군을 만났다고 믿었다.
카이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쿡 찔렀다.
“그리고 기사단장도.”
그 말을 끝으로 카이트가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두 기사는 점점 멀어져 가는 카이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왠지 이곳에서 지내는 게 정말로
즐거울 것 같았다. 설사 무슨 일이 벌어져서 목숨을 잃어버리더라도 말이다.
두 기사가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새로운 영지에서 진짜 주군을 모시고 시작하는 첫걸음이었다.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나!”


카이트의 호통에 바닥에 널브러진 두 기간트가 삐걱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고작 걷는
것뿐인데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두 기의 크라테르에 탄 것은 당연히 베샤이덴과 슈빅이었다. 두 사람은 훈련장에 도착하자마자 기간트를
지급받고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이내 감격으로 물들었다.
설마 기간트까지 지급받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 감격과 환희가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간트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저 걷는 것뿐인데도 심각한 괴리감으로 인해 넘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인정해 주고 알아봐 준 주군을 위해서라도 죽을 각오로 모든 걸 해낼
작정이었다.
“좋아! 일어났으면 걸어!”
쿵! 쿵! 쿵!
두 기의 크라테르가 발을 맞춰 걸어갔다. 상당히 넓은 훈련장이었는데, 오늘의 목표는 그 훈련장을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기간트 초보에게는 불가능한 목표였다. 처음 기간트를 움직이면 걷는 것도 어렵다.
‘대단하군. 정말 초보가 맞나?’
카이트는 내심 감탄했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기간트에 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검술만으로 기사가 된 경우였다.
두 사람이 머물던 영지도 작았기에 기간트를 보유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최소 사흘에서 나흘은 기간트 적응 훈련이 필요했다. 한데 두 사람에게는 기간트 적응 훈련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
쿵! 쿵! 쿵! 쿵!
처음에는 수없이 넘어지더니 이제는 제법 균형을 맞추면서 걷는다. 이대로라면 오늘 내로 빠르게 걷기도 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달리기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타고났어.’
카이트는 정말로 신기했다. 대체 저런 인재를 어디서 구해 왔단 말인가. 새삼 제론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다.
‘좋아. 잘하면 물건 하나 나오겠어. 아니, 둘.’
정말 이 정도 속도로 꾸준히 발전할 수만 있다면 1 년 안에 기간틱 나이트를 만드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익스퍼트이니 기간트 센스만 키우면 되는데, 저렇게 빠르게 숙달된다면 문제없을 것 같았다.
쿵쿵쿵쿵!
카이트가 잠시 방심한 사이 두 기의 크라테르가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카이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리고 이내
그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쿵쿵쿵쿵쿵쿵!
두 기의 크라테르가 발맞춰 달려가고 있었다. 100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재능이었다. 그런 사람이 무려
두 명이나 있었다.
기간트가 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카이트는 그것을 보며 멈출까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지금이 중요한 순간일 수도 있었다.
기간트 라이더에게 평생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하는 비상의 순간일지도 몰랐다. 물론 기간트를 처음 탄 사람에게
그런 게 가능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카이트는 꾹 참고 기다렸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달려가 사고를 막을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그날, 두 기의 크라테르는 밤이 되서 사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훈련장을 달리고 또 달렸다.
Chapter 9 도발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바이스의 외침에 운글릭이 빙긋 웃었다.
“제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영주님께서는 아직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의식이 없으시죠.”
운글릭은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도 바이스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 바이스가 말레피 가문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가문의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건, 이 영지의 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뜻이 분명했기에 오히려
즐거웠다.
“저도 엄연히 영주님께서 데려온 사람입니다. 왜 데려오셨을지는 명백하지 않습니까?”
바이스가 대답하지 않자, 운글릭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영주님의 유일한 친척입니다. 뭔가 영지의 중요한 일을 맡기려고 부르신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요?”
“당연히 총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이스 님은 이제 슬슬 본연의 자리에 앉아야 하고 말입니다.”
바이스는 명목상 영지의 수석 마법사였다. 또한 마탑주이기도 했다. 총관은 대체할 인재가 오면 즉시 인수인계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코 운글릭에게 그 자리를 넘길 수는 없었다. 그 순간 모든 게 끝장일 테니까.
“영주님의 인가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알고 돌아가십시오.”
운글릭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입니다. 그러니 생각과 처신에 신경을 좀 쓰시는 게 어떻습니까?”
바이스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운글릭은 차갑게 웃으며 돌아섰다.
“이후 벌어지는 모든 일은 바이스 님의 책임입니다.”
운글릭이 밖으로 나가자, 바이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진짜 재수 없는 놈이로군.”
앞으로 운글릭이 무슨 짓을 할지는 너무나 뻔했다. 바이스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스무 명의 기사와 천 명의 병사라…… 과연 몸값으로 얼마나 받아야 할까?”
그들은 운글릭을 움직인 사내가 제공한 병력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누가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저 그 뒤에
있는 누군가의 자금으로 만들어진 병력이라는 것만 확실했다.
“카이트 경이라면 잘하겠지.”
바이스는 카이트의 실력을 믿었다. 카이트는 체른산 방어군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가진 라이더였다. 그런데다가
익스퍼트이기까지 했다.
최근 제론으로부터 라이트닝 소드를 배운 뒤 어마어마하게 강해졌고, 기간트 실력도 한발 더 나아갔다.
어쩌면 운글릭의 기사 스무 명이 몽땅 덤벼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이트의 기간트는 아우틈이었다. 발굴형
기간트 중 최강이라는 히엠스 다음가는 기체였다.
무려 3.3 의 출력을 자랑하는 기간트를 카이트가 모는 것이다. 그 어떤 기간트가 덤벼도 처참히 밟힐 게 분명했다.
“자, 그럼 난 슬슬 다음 준비를 해 볼까?”
아직 할 일이 많았다. 언제까지 운글릭에 대한 일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발전은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다.
바이스의 눈이 빛났다. 조만간 마탑에 틀어박혀 진짜 마법사가 되겠지만, 그전까지는 총관 일에 충실해야만 한다.
또 그 일에 대단한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다가 마탑을 포기하고 총관이 되는 건 아닌지 몰라.’
바이스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물론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가 봐야 안다.

“일단 기사단부터 정리를 해야겠어.”


운글릭의 말에 수행원이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만일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쪽으로 살살 유도할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그렇게 해 주니 일이 줄었다.
“그다음 행정을 장악하시면 아주 완벽합니다.”
군사와 행정을 장악하면 영지를 장악한 것과 다름없었다. 만일 그 일이 성공하면 당장이라도 영주인 제론을
죽여도 된다.
아무도 반발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어차피 이 영지를 크게 키우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이곳은 그저 식량 창고였다. 광활하게 펼쳐진 토지로부터
나오는 막대한 농작물은 거대한 힘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일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영지의 노동력을 쥐어짜서 농사에 투입시키기만 하면
끝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이 영주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이용할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어떻게 시비를 걸지 생각해 봐.”
“어려울 거 없습니다. 그저 트집만 잡으시면 됩니다. 어차피 이 영지의 차기 영주가 되실 분 아니십니까. 정당한
지적을 하신다고 여기시면 됩니다.”
“그거 편하군.”
운글릭의 입가가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갔다. 기사단에게 호령하는 것은 꼭 한 번쯤 해 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당장 시작하지. 뜸 들여서 뭐해?”
“화통하시군요.”
수행원은 끊임없이 운글릭을 치켜세웠다. 운글릭은 콧대를 세우고는 당당하게 기사단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훈련장은 두 군데가 있었는데, 하나는 기간트 훈련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검술 훈련장이었다. 하지만 두 군데
모두 기간트를 풀어서 자유롭게 훈련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운글릭이 도착한 곳은 검술 훈련장이었다.
최근 카이트는 베샤이덴과 슈빅을 훈련시키는 데 푹 빠져 있었다. 그들은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가르침을 몸에 새겼다.
처음 카이트가 예상했던 시간이 1 년이었다. 하지만 요즘 실력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면 6 개월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니 카이트가 푹 빠져 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머지 기사도 카이트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들은 그것보다 새로 익힌 검술을 몸에 새기는 게
훨씬 즐거웠다.
라이트닝 소드는 정말로 엄청난 검술이었다. 그들은 수련을 할 때마다 이런 고급 검술을 아낌없이 전수해 준
제론과 카이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고스란히 충성심으로 전환되어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게 다들 구슬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 운글릭이 스무 명의 기사를 몽땅 이끌고 훈련장에 도착했다.
“호오. 다들 열심이로군.”
“없는 실력을 키우려면 먹고 자는 시간도 아깝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 말이 옳다!”
운글릭과 수행원의 대화가 워낙 컸는지라 수련하는 라이트닝 기사단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일부 기사가 수련을 멈추고 운글릭이 있는 쪽을 노려봤다. 하지만 도발에 말려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두
카이트의 인맥을 통해서 왔다. 즉, 기사라기보다는 군인에 더 가까웠다.
레늄 왕국은 상당히 오랫동안 전쟁을 했다. 그렇기에 군부에서 잔뼈가 굵은 라이트닝 기사단은 다양한 경험을
많이 쌓았다.
이런 어설픈 도발에 넘어갈 리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도발이라는 걸 알아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걸 모르는군. 오늘부터 내가 데려온 기사와 합동 훈련을 할 테니
그리 알도록.”
운글릭이 앞으로 몇 발 다가오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말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라이트닝 기사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기사가 나서서 말했다.
“거절하겠소.”
“뭣이? 지금 내 명령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당신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영주님뿐이오.”
운글릭이 피식 웃었다.
“영주님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몰라서 그러나? 그럼 영주님이 다시 일어나시기 전까지는 그저 이렇게 시간만
죽이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작정인가?”
운글릭은 비웃음을 담아 라이트닝 기사단을 쭉 둘러봤다. 몸에 걸친 장비를 보니 기간트도 없어 보였다. 훈련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기간트 장비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훈련장은 넓은데 쓸 일이 없겠군. 이 정도 훈련장이라면 기간트 훈련도 너끈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운글릭이 아쉬운 듯 말했다. 하지만 표정에 드러난 것은 아쉬움이 아니라 비웃음이었다.
“어떤가? 내 기사들이 곧 기간트 훈련을 할 텐데 지켜보겠나?”
앞으로 나선 기사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도 거절하오. 이곳 훈련장을 쓰고 싶으면 사용 허가서를 받아 오시오. 그전에는 어떤 공간도 내줄 수
없소.”
기사의 강경한 태도에도 운글릭은 오히려 기쁜 듯이 웃었다. 싸울 명분이 차근차근 만들어지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누군지 못 들었나? 엄밀히 따지면 나에게도 이 성에 대한 권리가 있어.”
“그건 영주님께서 결정하실 일이오.”
“영주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왕국법이 결정하는 거지. 내게도 영지의 상속권이 있다네. 법에 명시되어 있지.”
기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왕국법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데 뭐라고 한단 말인가.
만일 조금만 그에 대한 상식이 있었다면 상속권은 영주가 죽은 이후에 적용되는 거라고 맞섰겠지만, 군부 출신
기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사가 한발 물러났다. 더 이상 운글릭을 막을 명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운글릭은 그것을 보며 득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일제히 기간트를 꺼내 기사들을 압박하면 된다. 그리고 더 도발하고 더 명령할 것이다. 그렇게 기사의
반감을 끌어내 덤벼들도록 만드는 것이 운글릭이 노리는 바였다.
하지만 운글릭의 계획은 채 시작되기도 전에 삐끗했다. 기사가 물러나자마자 나선 어린 소년 때문이었다.
“상속권이 있다고 성에 대한 권리가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운글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봤다. 어리 티가 확 나는 소년이 서 있었다. 장비와
검을 보니 수련 기사나 종자쯤 되는 모양이었다.
“애들이 낄 자리가 아니다.”
“왕국법을 얘기하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죠? 왕국법에 의하면 허락 없이 기사단의 훈련장에 들어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요.”
“이미 허락을 받았다.”
운글릭은 짜증이 났다. 일이 갑자기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영주님께서는 의식이 없으신데 어떻게 허락을 받았다는 거죠?”
소년의 당찬 말에 운글릭은 말문이 턱 막혔다. 소년의 말에는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운글릭이
잘못하고 있었으니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진 자가 나서면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운글릭은 자신이 저런 꼬맹이에게 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애들이 낄 자리가 아니라고 했다!”
운글릭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소년은 시종일관 당당했다. 그리고 그런 소년의 앞을 처음 나섰던
기사가 막아섰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태를 막기 위함이었다. 기사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이제 대충 알았으니 돌아가시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침입으로 간주하겠소.”
“침입?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운글릭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슬쩍 수행원을 돌아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묻는 것이다.
수행원은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고작 저런 꼬맹이에게
말로 밀려서 뭘 어쩌잔 말인가.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어쨌든 이 사태를 마무리해야만 한다. 감정이 격해진 상황이니 무력으로
해결해도 큰 문제가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이럴 때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잘못이 되도록 만들면 안 된다. 조금이라도 쌍방의 실수가 인정되어야만
한다. 그게 아니라면 몽땅 죽여 버리거나 말이다.
‘차라리 그게 편할지도 모르겠군.’
당장 기간트를 소환해 밀어 버리면 이곳의 기사를 싹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수행원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그는 운글릭에게 다가가 나직이 귓속말을 했다.
“다 죽여 버리십시오.”
운글릭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그것을 본 기사들이 낌새를 느끼고는 서둘러 훈련장 구석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그들의 기간트 장비가 있었다.
라이트닝 기사단의 기간트는 제론과 바이스에 의해 특별히 개조된 상태였다. 다른 기간트 장비와 달리 거대한
양손검이 아니라 비교적 가벼운 롱소드였다. 또한 다른 장비 역시 일반 기간트 장비에 비해 가볍고 작았다.
그래서 운글릭이나 그와 함께 온 기사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제압해!”
운글릭의 명령을 받은 즉시 그의 기사들이 기간트를 소환했다.
무릎을 굽힌 채 소환된 기간트의 조종석에 기사들이 올라탔다. 그리고 즉시 라이트닝 기사단을 쓸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뭐, 뭐야!”
무려 스물다섯 기의 기간트가 서 있었다. 그것도 전부 크라테르였다.
카타락타라면 모를까 크라테르는 비싼데다가 구하기도 어려웠다. 또한 무려 스물다섯 기나 되는 크라테르를
구입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정보가 흘러 다니기 마련이었다.
한데 그들은 그 어떤 정보도 받은 적이 없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분명히 자신들이 기간트를 먼저 소환했다. 한데 전투 준비는 라이트닝 기사단 쪽이 먼저
끝났다.
운글릭은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러나오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스물다섯 기의 크라테르를 바라봤다.
크라테르의 가슴에 팔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에어스트 가문의 문장이었다.
“마, 마, 말도 안 돼!”
운글릭 옆에 선 수행원이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에어스트 가문에서 크라테르를
스물다섯 기나 구입했다면 자신이 모를 수가 없었다.
에어스트 백작에게 돈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크라테르 스물다섯 기를 구입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글릭과 수행원이 침을 꿀꺽 삼키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들이 데려온 기사는 절반이 카타락타였고,
절반이 크라테르였다.
질과 양 모두 밀리니 이길 확룰이 급격히 떨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그들이 데려온
기사는 전부 뛰어난 실력을 가진 라이더였으니까.
라이트닝 기사단 측으로부터 크라테르 한 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쿵! 쿵! 쿵!
“당장 기간트를 돌려보내고 이곳에서 나가시오! 조용히 영지를 떠나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소!”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운글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끌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저들을 다 죽이는 건 무리였다.
“어쩔 수 없습니다. 양동작전을 펼치셔야 합니다.”
수행원이 옆에서 운글릭에게 말했다.
“양동작전?”
“훈련장 밖에 천 명의 병사가 대기 중입니다. 그들이 성을 점령하면 모든 상황이 끝납니다.”
운글릭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상황이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성을 점령하면 그
뒤로 뭘 어쩐단 말인가.
“최악의 상황이 오면 영주만 죽여도 됩니다. 어쨌든 운글릭 경은 합법적인 영주의 주인이 될 유일한 분
아닙니까.”
수행원은 그렇게 만드는 데 슈린 공작가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 가문이 힘을 보탤 거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영주만 죽여도 어찌어찌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 계획보다는 이권이 많이
줄어들겠지만 말이다.
‘그 광활한 농지가 없다면 모를까 일단 그 정도 식량을 확보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힘을 끌어낼 수 있지.’
수행원의 생각은 단순했다. 일단 운글릭을 영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을 꾸민 다음, 위에서 힘으로 눌러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과연 라이트닝 기사단을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니, 버텨서 시간을 벌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공격!”
운글릭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스무 기의 기간트가 굉음을 내며 달려갔다.
키이이이이잉!
쿵쿵쿵쿵쿵!
라이트닝 기사단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군부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온 사이였다. 게다가 실전
경험도 엄청나게 풍부했다.
쿵쿵쿵쿵!
꽈앙!
양측이 충돌했다. 당연히 라이트닝 기사단이 우위를 점했다. 질과 양이 모두 뛰어나니 밀릴 이유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운글릭과 수행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시간이 없습니다!”
“병사에게 연락을 넣어!”
“이미 넣었습니다. 일단 자리를 피하시죠.”
수행원은 마법 통신을 이용해 병사를 지휘하는 천인장에게 미리 연락을 넣었다. 성을 점령하라고 말이다.
그는 점령에 성공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병사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그나마 있는
병사도 영지의 치안을 위해 대부분 나가 있었다.
성에 머무는 병사의 수는 백 명도 채 안 되었다. 당연히 천 명의 병사를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수행원도
운글릭도 그렇게 믿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카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라이트닝 소드를 익힌 이후로 감각이 훨씬 예민해졌다. 그의 청각에 뭔가가 울리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무슨 소리가 들리십니까?”
베샤이덴과 슈빅은 의아한 눈으로 카이트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껏 굳은 카이트의 표정을 보고는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카이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소리로 판단하건대 기간트 간의 전투가 벌어진 게 분명했다.
제론에게 들은 말이 있으니 어떤 상황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운글릭이 데려온 기사와 라이트닝
기사단이 붙은 것이다.
갑자기 걱정이 좀 사라졌다.
“그럼 난 다른 쪽을 걱정해야겠군.”
운글릭이 데려온 건 기사뿐이 아니었다. 천 명이나 되는 병사도 데려왔다. 그리고 지금 이 성안에서 그 병사를
막을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가자.”
카이트의 갑작스런 말에도 베샤이덴과 슈빅은 전혀 의문을 표하지 않고 즉시 따라나섰다.
세 사람은 빠르게 내성 입구로 달려갔다. 가는 도중 천 명의 병사가 질서 정연하게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카이트는 다리에 마나를 흘리며 속도를 높였다.
쉬이익!
카이트는 바람처럼 빠르게 병사를 앞질러 내성 입구를 막고 섰다.
베샤이덴과 슈빅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대체 뭘 어쨌기에 저렇게 빠르단 말인가.
‘라이트닝 소드의 힘인가!’
두 사람은 눈을 빛내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들의 속도도 더욱 빨라졌다. 하지만 병사를 쫓아갈 수는 없었다.
카이트가 두 사람을 향해 손짓을 했다. 멈추라는 뜻이었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대번에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둘은 그 자리에 멈춰서 병사의 뒤를 점했다.
어느새 천 명의 병사가 내성 입구에 도착했다. 그들은 카이트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아무리 기사라 하더라도
천 명의 병사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에 천 명의 발이 일제히 멈췄다.
키이이이잉!
쿵!
내성 입구에 기간트 한 기가 나타났다. 그리고 카이트가 순식간에 조종석에 올라탔다.
기간트가 나타나 가동 준비까지 눈 몇 번 깜박일 시간 만에 이루어졌다. 엄청난 실력을 가진 라이더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아우틈이었다. 일반 기간트가 막아도 작전이 불가능한데 발굴형 기간트가 막았으니 목적을 이루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병사들이 상황을 포기하고 도주를 결심했을 때, 뒤에서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키이이이이잉!
쿵!
두 기의 기간트가 나타나 병사의 뒤를 막았다. 모든 병사의 얼굴에 일제히 절망이 어렸다.
세 기의 기간트를 상대로는 싸우는 것도 도망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잠시 후, 천 명의 병사가 일제히 무기를 버리고 손을 들었다.

☆ ☆ ☆

제론은 자신의 방에서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태블릿에 떠오른 화면에 훈련장의 전투와 내성 입구의 상황이 동시에 떠올랐다.
태블릿은 수십 개의 화면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렇게 작은 화면인데도 세세한 상황이 다 보였다. 너무나
선명하게 말이다.
“일단 병사와 기사 쪽은 문제가 없고…….”
사실 그쪽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제론은 그들이 이렇게 어설프게 일을 처리할 리 없다고
판단했다.
마티로부터 영지 곳곳의 영상이 전달되었다. 제론은 점점 그 범위를 넓히며 영지를 살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을 빛냈다.
“찾았다.”
예전 운글릭과 사내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에어스트 영지에 대해 상당한 조사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데
그렇게 조사를 한 것치고는 보낸 병력이 적어 분명히 숨겨둔 뭔가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끊임없이 주위를 살폈다. 마티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기에 영지 내의 정보를 얻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제론은 외부적으로 의식을 잃은 걸로 되어 있기에 정보 수집에 충분한 시간을 쓸 수 있었다.
열 명이나 되는 기사가 영지에 들어와 있었다. 확실히 마티로 혼자서 정보를 다루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들락거리는 모든 사람을 확인할 수도 없고, 또 영지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마티를 붙여 놓을 수도 없지 않은가.
특히 요즘처럼 상단이 활발히 영지를 들락거리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상단을 주시하긴 하지만 상단을
통해 들고 나는 모든 사람을 일일이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뭔가 방법을 강구하긴 해야 하는데…….”
제론은 정보 조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역시 혼자서 정보를 주무르는 것보다는 여럿이 일을 나누는 것이
효과적이다.
“움직이는군. 그럼 내가 나서야 하나?”
이들은 분명히 에어스트 백작령의 숨겨진 전력을 상대하기 위해 온 자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쓰는 기간트도 좋은
것일 확률이 높았다.
아마 최소한 임베르 급 기간트를 쓸 것이다. 임베르는 크란 제국의 범용 기간트였다. 또한 다른 왕국에 수출하는
유일한 기체이기도 했다.
2.0 이나 되는 출력을 자랑하는 기간트였기에 가격도 상당히 비쌌다.
물론 발굴형 기간트에 비하면 많이 떨어지지만, 가격대 성능비를 생각하면 그보다는 나았다.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테오스가 출격할 시간이 되었다. 일단 테오스를 드러내는 이상, 저들을 그냥
살려 보낼 수는 없었다.
이를 꽉 다물고 굳은 표정을 지은 제론은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푸르투나.”
휘이이이잉!
푸르투나의 바람을 타고 하늘로 쭉 솟구친 제론은 그대로 목표가 있는 쪽을 향해 날아갔다.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 그들이 최대한 인적 없는 곳에 도착했을 때 순식간에 제압하는 것이 좋다.
‘운이 좋으면 기간트를 꺼내기 전에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만일 상대가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면 고작 열 명의 기사 정도는 기간트를 채 소환할 틈도 없이 없애 버릴 수도
있었다.
제론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속도를 높였다.

푸른 매 기사단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기사단이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것에 비하면 굉장한 실력과 장비를


가진 기사단이었다.
수도 상당히 많았지만 주로 열 명이 조를 이뤄 작전을 수행했다.
열 명의 푸른 매 기사단이 빠르게 이동 중이었다. 그들은 조금 전 작전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원래 작전은 운글릭이 에어스트 백작령에 분탕질을 치면 숨어 있다가 에어스트 백작의 숨은 힘이 등장하는 순간
그것을 박살 내는 것이었다.
한데 작전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힘이 예상보다 강했다. 그래서 운글릭 쪽으로 지원을
나가야만 했다.
기회를 봐서 운글릭을 구할 생각이긴 했지만 여차하면 운글릭의 목숨쯤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다.
만일 에어스트 백작의 숨은 힘이 없다면 이대로 싸움을 종결시켜 운글릭을 이용해 영지를 집어삼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기간트를 꺼내라!”
가장 앞에 달려가던 기사가 외쳤다. 그가 바로 조장이었다. 미리 기간트를 꺼내야 속도를 더 내서 빠르게 성에
도착할 수 있다.
키이이이잉!
기간트가 가동되는 소리가 벌판을 가득 메웠다. 인가가 멀리 있긴 했지만 아마 앞으로 달리기 시작하면 다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될 것이다.
순식간에 열 기의 임베르가 나타났다. 제론이 예상한 대로였다. 이들은 크란 제국 밖에서는 하나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임베르를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출발!”
모두 기간트에 탑승하는 데 걸린 시간은 눈 몇 번 깜빡일 정도에 불과했다. 다들 베테랑 중 베테랑이었다.
쿵쿵쿵쿵쿵!
열 기의 임베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금세 성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달리지 않아 멈췄다.
새까만 기간트 한 대가 앞을 막고 서 있었다. 처음 보는 형태의 기간트였다.
푸른 매 기사단의 조장은 직감적으로 이 기간트가 에어스트 백작령이 숨겨 둔 힘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새로운 기간트라니!’
분위기나 느낌을 보면 발굴형 기간트임이 분명했다. 즉,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기간트를 발굴해
낸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이 말이다.
조장은 레늄 왕국과 벨룸 왕국의 전쟁이 유적 때문에 커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에어스트 백작이 그
유적에서 이 기간트를 얻은 모양이었다.
그는 거의 확신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상부로 지금 자신이 얻은 정보를 보내기로
작정했다.
푸른 매 기사단의 조장은 특별한 아티팩트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그것은 유사시에 순간이동을 통해 정보를
상부로 보내는 아티팩트였다.
하나 만드는 데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는 고가의 물품이었지만 푸른 매 기사단은 돈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부유했다.
조장은 품에서 꺼낸 아티팩트에 핵심 정보를 적은 쪽지를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꽉 쥐었다.
콰직!
아티팩트가 부서지며 환한 빛무리에 휩싸였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자, 부서진 아티팩트의 잔해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조장은 무거운 표정으로 그것을 확인했다. 그 순간 그의 안색이 변했다. 정보로 보내야 할 쪽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티팩트가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이 아티팩트는 가격이 비싼 만큼 그 효과는 확실했다.
한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조장은 이를 악물고 앞을 바라봤다. 어쨌든 임무에 성공하면 다 필요 없는 일이긴 했다. 검은 기간트는 왠지
불길해 보였다. 하지만 자신감이 흩어지지는 않았다.
‘무조건 이긴다.’
완벽하게 제압해 저 검은 기간트의 정체를 밝히고 말 것이다. 또한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도 확인해야만 했다.
“사자 사냥을 시작한다! 절대 방심하지 마라!”
조장의 외침에 아홉 기의 임베르가 조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진형을 펼쳤다.
쿵쿵쿵쿵!
진형을 만든 푸른 매 기사단은 일단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강한 적인 경우 포위를
해야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테오스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상대를 살피기만 했다. 솔직히 크란 제국의 기간트는 처음 보기 때문에 제론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관절의 움직임이 좋군.’
임베르는 크라테르나 몰레스와 비교하면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대단했다. 관절의 움직임이나 다른 세세한 부분이
최적화되어 있었다.
제론은 새삼 크란 제국의 힘에 감탄했다. 임베르는 크란 제국이 제한적이나마 수출을 하는 기간트였다. 그들은
이보다 더 대단한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아마 알려진 것보다 몇 배는 더 강할 것이다.
‘그래도 테오스의 상대는 안 돼.’
제론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테오스를 슬쩍 움직였다.
테오스가 한 발 옆으로 이동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몸을 날리며 검을 뽑았다.
아공간에서 뽑았기에 그 어떤 기척도 소리도 없었다. 그저 어느새 손에 검이 들려 있었다.
콰직!
테오스의 검이 좌측에 있던 임베르의 조종석을 꿰뚫었다.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
좌중이 경악에 휩싸였다. 물론 테오스를 조종하는 제론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쿠웅!
조종석이 꿰뚫린 임베르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테오스가 사라져 버렸다. 아니, 푸른 매 기사단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들 당황했다. 특히 조장은 어찌나 눈을 크게 떴는지 눈가가 살짝 찢어져 피가 비칠 정도였다.
콰직!
그 소리와 함께 조장의 생각이 끊어졌다. 뒤에서부터 찌른 검에 조종석이 꿰어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쿠웅!
이번에는 좌중을 공포가 휩쓸었다. 다들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상대는 괴물이었다. 이건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들의 뇌리에 도망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테오스가 또 사라졌다.
콰직!
쿠웅!
또 한 기의 임베르가 쓰러졌다. 그것을 신호로 나머지 임베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단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푸른 매 기사단은 보통 기사단과는 많이 달랐다. 그들은 명예보다 생존을 우선했다. 그들에게는 일단 살아남아 이
상황을 알리는 게 당당하게 싸우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테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론은 사방으로 도망치는 임베르를 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남은 임베르는 일곱 기. 자칫하면 놓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론이 타고 있는 건 보통 기간트가 아니라 테오스였다.
꽝!
테오스가 땅을 박찼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쭉 나아갔다. 순식간에 100 미터가 넘는 거리를 낮게 점프하여
날아간 것이다.
그리고 도망치는 임베르의 등에 검을 그대로 꽂았다.
콰직!
꽈광!
조종석이 꿰인 임베르에 테오스가 부딪혔다. 테오스는 임베르를 그대로 밀치며 나아가는 힘을 죽였다. 그리고
방향을 틀어 다시 땅을 박찼다.
꽈앙!
테오스가 또 100 미터쯤 날아갔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임베르가 채 멀리 흩어지지도 못한 채로 또 당했다.
콰직!
조종석을 검이 꿰뚫었다.
테오스는 그대로 임베르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임베르를 축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콰드득!
임베르의 팔이 육포가 비틀리듯 볼품없이 배배 꼬였다.
꽈앙!
테오스가 또 멀리 날아갔다. 이번에는 한 번에 거리를 없애지 못했다. 벌써 제법 멀리 달아난 것이다. 물론 두
번 점프할 필요도 없었다.
쿵쿵쿵!
콰직!
테오스는 몇 발 달리며 조종석을 검으로 꿰뚫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속도를 죽이고 멈춰 섰다.
순식간에 세 기를 처리해 이제 남은 건 네 기뿐이었다. 그들은 동쪽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물론 서로
거리가 점점 멀어지도록 흩어졌다.
푸른 매 기사단은 도망치는 것 역시 철저히 훈련한다. 지금 도망치는 것은 강력한 적이 나타났을 때의 대응 상황
중 하나였다.
제론은 당황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쿵쿵쿵쿵!
일단 달렸다. 테오스가 달리는 속도는 임베르보다 훨씬 빨랐다. 숨 몇 번 쉴 정도의 시간에 임베르 하나의 뒤를
잡았다.
테오스는 임베르의 옆으로 방향을 잡아 달렸다. 그러면서 검을 푹 찌르고 스쳐 지나갔다.
콰득!
콰광!
달려가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임베르가 꼴사납게 나뒹굴었다.
그리고 테오스는 자연스럽게 크게 돌며 다음 임베르를 향해 달려갔다.
나머지 세 기의 임베르를 처리하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테오스는 빠르고 강했다. 게다가
임베르는 도망가기만 했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는 임베르를 처리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열 기의 임베르를 모두 처리한 제론은 그들을 번쩍 들어 한군데로 모았다.
“세나가 좋아하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임베르를 들고 중앙 유적으로 이동했다.
벨트에는 테오스를 보관하는 아공간 외에도 남는 아공간이 많았기에 거기에 임베르를 모두 넣어 나를 수 있었다.
순식간에 유적에 임베르가 쌓였다.
일단 이렇게 보관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세나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제론은 모든 일을 마무리한 뒤, 테블릿을 꺼내 일단 현재 상황을 확인했다.
“대충 끝났군.”
병사를 모두 포박해 감옥에 가뒀고, 기사의 기간트는 몽땅 압수했고, 기사 역시 포박해 감옥에 가뒀다. 운글릭과
그의 수행원 역시 마찬가지로 감옥에 가둬 버렸다.
이제 저들의 배후를 캐면 된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다른 마티가 보여 주는 화면을 띄웠다.
운글릭을 통해 음모를 꾸민 사내가 나타났다. 제론은 그가 그동안 뭘 했는지 슥슥 살펴봤다. 그동안의 행동은
모두 저장되어 있기에 조금도 남김없이 다 확인할 수 있었다.
수상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수상하고 이상했다.
모든 정보가 딱 저 사내에게서 막힌 것이다. 저 사내가 움직여 줘야 배후에 누가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저렇게 가만히 있으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론은 화면을 조작해 이번에는 슈린 공작가를 살폈다. 그곳도 별다른 게 없었다.
일단 슈린 공작가 사람의 경우 일인당 한 개의 마티를 붙여 두었는데, 아직까지는 에어스트 백작가와 관계된
정보는 얻지 못했다. 또한 운글릭의 배후가 슈린 공작가라는 증거도 못 잡았다.
다만 제법 쓸 만한 정보는 많이 얻었다. 슈린 공작가가 벌이는 사업에 관한 것이었는데, 잘 이용하기만 하면
막대한 이득을 얻으면서 슈린 공작가에는 타격을 줄 수 있는 정보도 여럿 챙겨 뒀다.
시간과 여건이 되기만 하면 즉시 슈린 공작가 공략에 나설 것이다. 물론 그전에 에어스트 백작가의 힘을 충분히
쌓아 두고 말이다.
“어쨌든 성과가 있을지도 모르니 심문은 해 봐야지.”
제론은 아무리 고문을 하더라도 이들이 입을 열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마음 같아서는 마티를 하나씩 붙여서 풀어 주고 싶지만, 마티의 활동 범위가 제한되어 있어서 그게 불가능했다.
제론은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유적에서 나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당분간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가지며 정보를 모아 더 먼 미래를 준비할 계획이었다.
“그나저나 유적에서 수련을 한 지도 제법 오래되었구나.”
제론은 반성했다. 자신의 근간은 유적이었다. 만일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적에 관한 것은 소홀히 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아직도 12 층에 한 번도 안 가 봤다니. 정말 정신 제대로 차려야겠군.”
유적은 제론에게 끊임없이 힘과 선물을 주는 공간이었다. 제론은 한 번 더 반성하며 다시 유적으로 향했다.
지금은 방으로 돌아가 성공할지 확신할 수도 없는 배후 캐기를 하는 것보다는 유적에 가서 12 층 공략을 시작하는
게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다.
Chapter 10 배후 캐기

제론은 유적에 도착한 즉시 12 층으로 향했다. 일단 11 층에서의 수련 덕분에 테오스에 확실히 적응할 수 있었다.
또한 마티를 얻었다.
그렇기에 제론은 12 층에서의 수련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했다.
―테오스를 소환하십시오.
제론은 안내에 따라 테오스를 소환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테오스에 탑승한 제론은 일단 마티를 불러들였다.
몽땅 부르는 건 불가능했고, 이 공간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을 정도의 수를 불러들였다.
마티는 바늘구멍만 한 통로를 타고 이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수많은 화면이 허공에 떠올랐다.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엄청난 수의 구슬이 테오스를 향해
쏘아졌다.
콰과과과광!
제론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족히 수백 발은 되는 검은 구슬이 테오스의 몸에 작렬했다. 테오스는
멀쩡했다. 하지만 제론은 멀쩡하지 않았다.
“크으윽!”
바늘로 살을 푹푹 파고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물론 몸이 상한 건 아니었다. 그저 아프기만 했다.
제론은 그 속에서도 정신을 바짝 차렸다.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또 날아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수백 개의 검은 구슬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제론은 일단 테오스를 움직여 손으로 구슬을 쳐 냈다.
“크으윽!”
정말로 아팠다. 다 쳐 내지도 못했을뿐더러 손으로 쳐 내니 손에 집중적으로 많은 구슬이 부딪혔다. 마치 손이
마비되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거지?’
남은 건 검이었다. 제론은 재빨리 검을 뽑았다. 구슬이 또 쏟아졌다.
“젠장!”
검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검이 사방을 장악했다. 하지만 검은 구슬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게다가 사각을 파고드는 것이 워낙 많아 거의 막아 내지 못했다.
“크윽!”
몇 번이나 반복해 같은 고통을 느끼는데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구슬을 맞으면 맞을수록 더 통증이
심해졌다.
제론은 그 뒤로 2 시간을 더 버텼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검은 구슬은 심지어 직선으로 날아오지도
않았다. 구슬의 궤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검으로 막아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제론은 온몸을 바늘로 푹푹 찌르는 고통을 얻은 채 유적에서 나왔다.
그 고통은 유적에서 나온 이후 2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사라졌다.

“알 수가 없군.”
제론은 고개를 저었다. 어느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유적은 유적대로 고생이었고, 배후를 캐는 것도 진척이
거의 없었다.
사실 이쯤 되었으면 운글릭의 배후인 사내가 뭔가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한데 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심지어는
아직 그의 이름조차 알 수 없었다.
“혹시 아직 실패한 걸 모르는 거 아냐?”
제론은 그런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서 계획을 세운
사람이 그런 정보 하나 얻지 못했을 리 없었다.
어쩌면 그도 당황하고 있을지 모른다.
제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운글릭을 직접 만나 볼 생각이었다. 그 수행원도 함께 말이다.
나머지 병사와 기사는 사실 만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제론이 알아낸 것은 병사와 기사의 주인이 바로 그 사내라는 점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조차 사내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제론은 내성에서 나가 성벽에 바로 붙어서 지어진 커다란 탑으로 향했다. 그 탑은 평소에 병사와 기사가 머무는
막사였다. 또한 지하에 감옥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항상 병사와 기사가 있으니 따로 병력을 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감옥을 지키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제론은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다. 만나는 병사와 기사마다 인사를 했지만 그것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곧장
운글릭이 갇힌 곳으로 갔다.
운글릭은 초췌한 얼굴로 감옥에 앉아 있었다. 또한 그의 수행원은 바로 옆방에 있었다.
나머지 병사와 기사는 더 아래층에 가둬 두었다. 기사는 바로 아래층에 그리고 병사는 그 아래층에 가뒀다. 물론
이 감옥에도 각종 마법이 사용되었기에 그들이 빠져나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운글릭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감옥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었다.
“대, 대체 어떻게……!”
운글릭만 놀란 게 아니었다. 그의 수행원은 그보다 더 놀랐다. 그는 운글릭이 쓴 독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 독에 당하고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왜? 내가 살아 있어서 놀랐나?”
두 사람은 너무 놀라서 대답도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독에 당하지도 않았지. 누가 내 뒤통수를 치려는지 알고 싶어서 당한 척했을 뿐이야.”
제론의 담담한 말에 운글릭이 처참한 얼굴로 고개를 푹 떨궜다. 하지만 이내 독 오른 눈으로 고개를 쳐들고
제론을 노려봤다.
“고작 그것 때문에 날 농락했단 말이냐!”
“고작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 않나? 날 죽이려 했잖아? 내 영지를 꿀꺽하려고 말이야.”
제론의 말에 운글릭이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앞에 서류 몇 장이 휘날렸다. 제론이 품에서 꺼내 던진 것이다. 그것은 운글릭이 수도 행정청에
신청한 서류들이었다.
“서류까지 치밀하게 준비했더군. 덕분에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어. 그 부분, 고맙게 생각한다. 앞으로 좀 더
조심하려고.”
제론의 담담한 말에 수행원이 이를 부득 갈았다. 이번 일로 인해 에어스트 영지를 공략할 방법 하나가 완전히
사라지게 생겼다.
“슬슬 배후를 부는 게 어때? 슈린 공작가가 배후에 있는 건 확실한데, 그 연결 고리를 아직 못 찾았거든.”
확신에 찬 제론의 말에 수행원이 깜짝 놀랐다. 설마 거기까지 조사를 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중간 연결책이
드러나지 않았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제론은 수행원의 반응에서 확신을 얻었다. 이 일의 배후에는 슈린 공작가가 있었다. 즉, 슈린 공작가를
처단하면 다시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 그냥 죽여라.”
수행원의 단호한 말에 운글릭이 깜짝 놀랐다. 그는 이렇게 죽을 생각이 없었다.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주, 죽이지 마십시오! 그 중간은 제가 압니다!”
“그래?”
제론이 눈을 빛내며 운글릭을 쳐다봤다. 하지만 운글릭을 보는 척하면서 대부분의 신경은 수행원 쪽에 두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나 눈빛이 어떻게 변하는지 확인해 운글릭이 제대로 된 정보를 토해 내는지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수행원은 마치 말할 테면 말해 보라는 듯 담담했다.
그것을 본 제론은 운글릭에게 쓸 만한 정보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수행원뿐이었다.
하지만 수행원으로부터 정보를 뽑아내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또한 운글릭의 배후에 있던 사내 외에는 모를
확률이 높았다.
‘어찌 그렇게 철저할 수가 있는 건지…….’
그 사내는 정말로 철저했다. 모르는 사람이 계속 주변에서 살폈다면 사내의 뒤에 누구도 없었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제론도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 대체 어떻게 지령을 받는단 말인가.
‘시간이 더 필요해.’
어쩌면 아직 제론이 감시한 이후로 한 번도 지령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한 가지 임무가 끝나기 전에는 결코
지령을 주지 않는 방침을 고수하는 것이다.
제론은 냉정히 돌아섰다. 얻을 것도 없고 해악만 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은 비참한
죽음이었다.
운글릭은 제론의 태도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창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살려 줘! 살려 달라고! 뭐든 다 말한다니까! 살려 줘!”
제론은 운글릭의 외침을 뒤로하고 지하 감옥에서 나갔다. 앞으로 저들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 ☆ ☆

화려한 방에 한 명의 사내가 커다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나른한 표정으로 비스듬히 앉아서 문을 바라봤는데,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여인 세 명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막대한 돈을 받고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을 무조건 함구하기로 하고 온 여인들이었다.
사내는 손가락을 까딱여 여인들을 불렀다. 표정은 여전히 나른했지만 눈에 욕망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여인들은 받은 돈이 있기에 사내의 욕망에 충실히 반응해 주었다. 어차피 몸을 팔아 살아가고 있었다. 그저 입을
다무는 조건이 하나 붙었을 뿐이었다.
옷자락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갔고, 이내 사내의 품에 안겼다.
사내는 세 여인을 마음껏 농락했다. 2 시간이 넘게 방 안이 열락과 교성으로 가득 찼다.
세 여인이 결국 소파에 축 늘어졌다. 사내는 그러고도 힘이 남았는지 세 여인의 온몸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괴롭혔다.
잠시 후, 또 한 번 뜨거운 바람이 몰아쳤다.
세 여인은 결국 비틀거리며 나갔다. 세 시간 동안이나 괴롭힘을 당해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사내 역시 힘을 다 써 버렸는지 침대에 누워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잠들어 버렸다.

사내의 방에서 나온 세 여인은 다시 거처로 돌아갔다. 그녀들에게 남은 것은 여전히 같은 삶이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내가 찾아왔고, 그때마다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녀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또 그녀들의 몸을 거쳐 간 사내 중에 결코 평범치 않은 사람이 섞여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깁스 남작은 눈살을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주로 하는


행동이었다.
“꼬이는군.”
일의 진행 상황을 봤을 때, 분명히 어딘가에서 정보가 샜다. 그게 아니라면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이 그런
식으로 행동할 리가 없었다.
일단 새로운 명령을 내리긴 했다. 깁스 남작이 수하에게 지령을 내리는 방식은 결코 들킬 리가 없었다. 그러니
지령 이후에 정보가 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깁스 남작의 지령은 몇 단계에 걸쳐서 전달된다. 그중 가장 마지막 단계가 바로 창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수하에게 지령과 함께 쾌락을 내리는 방식이었기에 다들 그것을 기대하곤 했다.
깁스 남작의 지령을 몸에 새기고 수하를 찾아가는 여인은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깁스 남작이 가진
능력이기도 했다. 상대에게 최상의 쾌락을 온몸으로 제공한다.
그 맛을 한 번 보면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그 여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온갖 방법으로 사내를
만족시킨다. 사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불합리한 명령이라도 말이다.
어쨌든 이번에도 그런 방식으로 지령을 전달했다. 이번에는 몇 군데를 동시에 움직였다. 어떤 식으로 정보가 새
나갔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이번에도 정보가 새 나갔는데, 그것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한동안 수하를 움직이는 일은 중지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깁스 남작은 미련 없이 에어스트 백작에게서 손을 떼기로 작정했다.
“이래서야 보고할 말이 없는데…….”
슈린 공작을 달래는 일이 가장 문제였다. 지금까지 깁스 남작은 슈린 공작의 총애를 받아 왔다. 단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제론에 관한 일을 실패하긴 했지만, 그건 깁스 남작이 잘못했다기보다는 제론의 악운이 강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한데 이번에 또 제론에 관한 일을 실패한다면 슈린 공작의 신임이 한 걸음 멀어지게 될 건 자명했다.
안 그래도 최근 슈린 공작 주변에 능력 있는 귀족이 대거 등장해서 어필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어쨌든 차분히 지켜보는 수밖에.”
깁스 남작은 계속해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가 내린 지령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래도 추궁하지는 않으셔서 다행이군. 뭐, 이번 지령을 수행하다 보면 어차피 죽으니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끼셨나?”
사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어차피 이름도 가지지 못한 삶이었다. 그런 그를 여기까지 키워 주고
행세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깁스 남작이었다.
그러니 이제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었다.
“그나저나 타격이 정말로 크군.”
사내에게 주어진 병력 대부분을 소진했다. 거기에 기간트까지 하면 그 손해가 얼마인지 계산하기도 벅찰 정도였다.
“푸른 매 기사단을 잃어버린 게 제일 문제야.”
푸른 매 기사단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그에게 허락된 힘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푸른 매 기사단이었다.
비록 한 개 조에 불과했지만 모두 임베르를 타기에 그 힘이 어마어마했다.
푸른 매 기사단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뭔가를 만나서 싸웠다는 정황만 어렴풋이
파악했다. 그나마도 에어스트 백작령에 있던 정보원이 기간트 소리를 들었기에 짐작할 뿐이지, 어쩌면 사실과
다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답답했다. 어떻게 당했는지 알면 대비를 할 것이고, 또 깁스 남작에게 보고할 정보가 생기는데, 그걸 할
수 없으니 짜증이 났다.
깁스 남작은 그동안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썼다. 그래서 죄송스런 마음이 컸다. 물론 그동안 자신이 해 왔던
일로 인해 깁스 남작이 얻은 이익은 이번의 실패보다 훨씬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이번 지령은 성공하고 말 것이다. 어차피
이번에 깁스 남작과의 관계가 끊어질 것이다. 도마뱀 꼬리를 싹둑 잘라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정보원을 움직여 볼까?”
사내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 ☆ ☆

태블릿을 통해 사내를 지켜보던 제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게 뭐지? 대체 언제 어떻게 지령을 받은 거야?”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과거를 되짚었다. 의심 가는 상황이 거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모든 상황이 다
의심스러웠다.
일단 사내가 만난 모든 사람에게 마티를 붙이긴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살펴봐도 지령을 주고받은 상황은 찾을
수 없었다.
제론은 감탄했다. 이렇게 옆에서 지켜봐도 모를 만한 방법으로 지령을 내렸으니 이 사내에서 정보가 꽉 막힌 것도
이해가 갈 법했다.
“일단 이 여자들이 제일 의심스럽긴 한데…….”
사내와 몸을 섞었던 세 여자가 가장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들 역시 마티를 붙이고 있었고, 별다른 특이한
일은 벌이지 않았다. 즉,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여자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지령을 주고받았단 말인가.
제론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역시 정보를 다루는 조직이 필요했다. 절실하게.
“어쨌든 이놈이 뭔가 일을 벌이려는 모양이긴 하군. 그럼 사전에 막아 줘야지.”
어차피 사내는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 일단 이 윗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결국은 슈린 공작가로 이어질 것이다.
“슈린 공작가만 무너뜨리면 모든 게 다 끝나.”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는 정보원을 움직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에어스트 백작령 내에
있는 정보원이 움직여 혼란을 조장할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그걸 막으려면 사내가 정보원을 움직이기 전에 막으면 된다. 그리고 제론은 그렇게 할 자신이 있었다.
제론은 곧장 유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수도 유적으로 단숨에 이동했다. 그곳에서는 폴타를 이용해 사내가 홀로
머무는 저택 한구석에 게이트를 연결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환한 대낮이었기에 게이트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게이트를 만든 자리 자체가 인적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제론이 게이트를 통해 나오자, 게이트가 즉시 사라졌다.
빠르게 그림자로 숨어든 제론은 주위를 둘러본 뒤 다른 그림자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런 식으로 그림자를
이용해 저택에 접근한 다음, 사내가 있는 방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훌쩍 뛰어올랐다.
저택에는 경비병이 잔뜩 있었지만 누구도 제론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곳은 예전 유적처럼 무지막지하게 인원을
배치하지 않았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곳에 시야를 두기에는 저택이 너무 컸다.
창에 착 달라붙은 제론은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잠겨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를 까딱하는 것만으로 간단히 잠긴
걸 풀었다. 마법의 힘이었다.
창으로 스며든 제론은 다시 창문을 닫고 몸을 낮췄다. 제론의 움직임은 지극히 빠르고 은밀했다. 그리고 감각이
활성화되어 근처에서 움직이는 모든 사람을 체크하고 있었다.
제론이 있는 곳은 집무실이었다. 아직 아무도 없었지만 곧 그 사내가 이리로 올 것이다. 정보원에게 지령을
내리려면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방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제론은 일단 몸을 숨겼다.
철컥.
문의 잠금장치가 풀렸다. 그리고 벌컥 열렸다. 사내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문을 다시 닫는 건 잊지
않았다. 잠그지는 않았지만.
제론은 빠르게 움직여 일단 문을 잠갔다.
철컥!
잠금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사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제론을
발견하고는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어, 어떻게……!”
“그게 정보원에게 보내는 암호인가?”
제론은 사내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고는 말했다. 사내는 어떤 대응도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머리만 팽팽
돌아갔다.
사내의 무력은 그리 대단치 않았다. 하지만 알려진 제론의 힘은 엄청났다.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차피 죽을 각오를 했으니까.’
어차피 모든 정보원과 함께 죽으려 했다. 깁스 남작으로 이어진 꼬리를 자르고, 에어스트 백작령에 피해를
강요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지금 곧장 정보원에게 지령을 보내면 모든 상황이 종료된다. 문제는 그럴 시간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내는 정보원에게 정보를 보내는 아티팩트를 들키지 않으려고 그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작은 항아리였는데, 그 안에 지령을 적은 쪽지를 넣고 작동시키면 곧장 정보원이 그 쪽지를 받아 볼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고가의 아티팩트였다.
넣고 작동하는 건 하도 많이 했던 거라 자신 있었다. 문제는 항아리까지 가려면 일단 한 발을 걸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항아리 쪽으로 움직이려 했다.
제론이 그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설프군.”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제론의 몸이 사내 옆에 나타났다. 거의 순간이동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빨랐다. 사내는
제론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헉!”
사내가 놀라는 틈에 제론이 항아리를 들었다.
“이게 지정된 장소에 지령을 보내는 아티팩트지? 한 쌍으로 이루어진 건가?”
제론이 아티팩트를 바로 알아본 건 항아리 표면을 타고 흐르는 마나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안 것은 마티를 이용해 영지 내를 살피다가 똑같이 생긴 항아리를 봤기 때문이었다.
“자, 여기까지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항아리를 들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올렸다. 거기에는 방금 전 지령이 담긴 쪽지가 있었다.
사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쪽지를 들고 있던 자신의 손과 제론의 손에 들린 쪽지를
번갈아 바라봤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할 것 같아?”
사내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만일 제론이 저 항아리를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들고 간 다음 지령이 담긴 쪽지를 넣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보원이 지령대로 움직일 것이다. 제론은 그 정보원을 뒤따르는 것만으로 영지 내의 모든 정보원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
“자, 이제 남은 건 네 뒤에 누가 있느냐인데…….”
제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내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리고 눈을 까뒤집었다.
쿠웅!
사내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제론은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뭔가 특별히
목숨을 끊는 방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독하군.”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이들의 뒤에 슈린 공작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얼마나 대단한 자를
향해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제론은 사내가 진짜 죽었는지 확인한 다음 항아리와 쪽지를 들고 조용히 창을 열었다. 그리고 심장의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화르륵!
방 안 구석구석에 불이 붙었다. 불길은 이내 점점 커지며 방 안의 모든 걸 날름날름 삼키기 시작했다.
제론은 그 불길을 뒤로하고 창에서 뛰어내렸다.
이내 저택이 불길에 휩싸였다. 사방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물통을 들고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사이 한 명이 물건 하나를 들고 저택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론의 집무실, 오랜만에 주요 인물이 모였다. 다들 표정이 심각했는데, 제론만 담담했다.


“영지에 그렇게 많은 세작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바이스가 자책하듯 말했다. 사실 이번에 제론이 가져온 항아리를 이용해 정보원을 색출하지 않았다면, 그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아니야. 그놈들 정말 대단한 놈들이야. 그래서 말인데 우리도 슬슬 정보 조직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좋은 생각입니다.”
바이스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영지에서 활동하는 세작을 파악하고 감시하고
제거하는 일에 한계를 느낀 지 오래였다.
이젠 그 일에서 슬슬 벗어나고 싶었다. 그거 말고도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현재 영지는 비교적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제론이 얼마 전 수도에서 데려온 인재는 하나같이 뛰어났다.
제론이 마티를 이용해 믿을 수 있고, 실력 있는 사람을 엄선해서 영입했으니 당연했다.
이것이 바로 정보의 힘이었다.
바이스는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총관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마탑에 틀어박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자꾸 미뤄지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영지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총관이라는 자리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좋아. 그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라이트닝 기사단은 요즘 어때?”
“사기충천입니다. 지난 전투가 자극이 되어 다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카이트는 두 사람의 이름을 듣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청납니다. 영주님, 대체 그런 자들을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재능이 제법이지?”
“제법인 정도가 아닙니다. 100 년에 한 명 날까 말까 한 천재입니다.”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고 데려왔다. 또한 충성심도 깊은 자들이었다. 충분히 30 만
골드를 투자할 가치가 있는 인재였다.
“잘 키워 봐. 새로 만들 기사단의 단장이 될 사람들이니까.”
제론의 말에 카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감탄했다. 정말 스케일이 엄청난 주군 아닌가.
“다음, 세나. 새로 준 기간트는 어때?”
세나의 눈에는 다크서클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 거의 쉬지 못하고 일만 했기에 피로가 너무 많이 쌓였다.
“훌륭해요. 크란 제국의 기간트를 살펴볼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
세나의 말에 제론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 얼굴이 많이 안 좋네. 오늘은 다른 생각 말고 푹 쉬어.”
“예? 하지만 아직…….”
“명령이야.”
세나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예.”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바이스와 카이트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저희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보 조직을 만들려면 준비할 것이 많아서…….”
“저도 훈련이 남아서…….”
두 사람이 후다닥 물러가자, 제론은 한 번 피식 웃고는 세나에게 다가갔다. 세나가 흠칫 놀랐지만 제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세나는 제론의 품에 안겨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살며시 눈을 감았다. 말도 못하게 편안하고 행복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제론이 마법을 이용해 재운 것이다.
제론은 세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초췌한 모습으로 잠든 세나의 모습이 제론에게는 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한 번 씨익 미소를 지은 제론은 그녀를 데리고 집무실 옆에 딸린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침대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제론은 침대에 걸터앉아 잠든 세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시간이 끊임없이 흘러갔다.
Chapter 11 마틴 준남작의 선택

벨루스 백작은 에어스트 백작령을 방문한 뒤로 완전히 달라졌다.


일단 얼굴에 웃음을 띠는 경우가 많아졌다. 분위기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예전처럼 주변 사람을 윽박지르거나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다들 적응을 하지 못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 아닌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차츰 그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백작의 변화를 너무나 기뻐했다.
백작이 변하니 영지 분위기도 변해 갔다.
벨루스 백작령은 다시 오래전의 그 밝고 진취적인 분위기를 서서히 되찾아 갔다.
백작의 가족부터 시작해 심지어는 휘하 기사들조차 백작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데, 딱 한 사람 그렇지
못한 자가 있었다.
바로 마틴 준남작이었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백작을 찾아갔다. 하지만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오늘도 벨루스 백작과 만나
애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작님, 이대로 기간트만 잔뜩 잃고 물러나선 안 됩니다. 또한 아가씨를 그냥 그곳에 두실 생각이십니까? 슈린
공작가는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마틴 준남작이 열을 올렸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은 그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에 가서 제론과 영지의 모습을 보며 초심을 되찾았다. 그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신과 영지를 이끌고 있었다.
굳이 이런 상황에서 또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또한 제론과 그 영지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딸의 모습도 그 어느 때보다 빛나는 걸 분명히 확인했다. 역시
딸을 슈린 공작가의 망나니에게 보내선 안 된다는 걸 확신하고 돌아왔다.
그러니 마틴 준남작의 말에 반응을 할 리 없었다.
“그쪽은 이제 됐네. 자네도 영지 일에 신경을 쓰게나.”
마틴 준남작은 입을 쩍 벌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 새로운 기간트를 찾는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백작님, 새로운 기간트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습니다. 자그마치 철사자 기사단을 홀로 물리친 기간트란
말입니다!”
그런 기간트이니 당연히 발굴형일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나왔던 그 어떤 발굴형 기간트보다 뛰어날 것이다.
그걸 얻게 된다면 벨루스 백작령은 단숨에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 기간트가 거기 있다고 확신하나?”
“그럼 아니겠습니까? 대대적으로 수색을 하면 반드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벨루스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게. 그리고 잊게. 다른 사람의 귀에 이 일이 흘러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하란 뜻일세.”
“백작님!”
“내가 허투루 조사를 했을 것 같나? 영지를 샅샅이 뒤졌네. 그래도 찾지 못한 기간트일세. 어쩌면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만났을 수도 있네. 아니면 다른 영지의 조력자이거나.”
“하지만 백작님의 동선을 파악해 계속 숨겼을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아공간 탐지 아티팩트는 범위가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건 아닐 걸세.”
벨루스 백작이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난 그 영지가 괜한 일로 들쑤셔지는 걸 원치 않네. 그러니 이쯤에서 잊게나. 우선 철사자 기사단이
잃어버린 기간트부터 차근차근 구입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나?”
마틴 준남작은 더 이상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못했다. 벨루스 백작의 말과 태도에 어린 단호함을 읽은 것이다.
이래서는 아무리 말을 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정말 실망스럽군.’
위로 올라갈 방법이 눈에 확연히 보이는데도 그걸 그냥 놔 버리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최소한
영주라면 결코 그래선 안 된다. 그것이 마틴 준남작의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백작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벨루스 백작이 환하게 웃으며 마틴 준남작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잘 생각했네.”
마틴 준남작이 밖으로 나가자, 벨루스 백작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마틴 준남작의 집요함은 유명했다. 그의
고집을 꺾었으니 이제 당분간 그는 영지 일에 몰두할 것이다.
그 집요함은 영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상당한 두각을 나타냈다. 벨루스 백작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눈앞에 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백작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마틴 준남작은 곧장 성을 나섰다. 그리고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벨루스 백작을 주군으로 모신 지 벌써 15 년이 넘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 영지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재산도 언제든 처분이 가능한 방식으로 축적했다. 그의 저택에는 비밀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 최대한
값어치가 많이 나가는 물품을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마틴 준남작은 비밀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커다란 가죽 배낭이 있었다. 배낭 안에는 적당한 크기의 금속
상자가 차곡차곡 채워져 있었다.
놀랍게도 상자는 모두 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황금을 녹여 상자로 만든 것이다. 당연히 그 무게가 상당했다.
상자 안에는 각종 보석이 가득했다. 어떤 상자에는 테페룸괴가 채워져 있기도 했다.
이 배낭에 마틴 준남작이 가진 대부분의 재산이 들어 있는 것이다. 다만 저택은 좀 아까웠다. 시간을 들여서
처분하면 상당한 가격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뭐, 미리 포기할 필요는 없지. 보아하니 날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니까.”
하긴 믿지 않는다면 그런 임무를 맡겼을 리가 없었다. 마틴 준남작은 15 년 동안 상당한 신뢰를 쌓았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신뢰를 배신하는 날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높은 곳을 향해 날아오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틴 준남작은 일단 배낭을 멨다. 물론 그전에 그동안 모은 돈으로 준비한 기간트 장비를 착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은 발굴형 기간트인 베르의 아공간 장비였다. 아무리 발굴형 중에서 가장 떨어지는 성능을 가지고 있다지만,
적어도 수십만 골드는 줘야 살 수 있는 것이 베르였다.
마틴 준남작은 15 년 동안 벨루스 백작령에서 아무도 모르게 수많은 비리를 저질렀고, 그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럼 가 볼까?”
아마 벨루스 백작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는다. 슈린 공작가에 자리를 잡은 자신을
어쩔 것인가.
마틴 준남작은 자신의 판단만으로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슈린 공작가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은밀히 말이다.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간 마틴 준남작은 서두르지 않고 텔레포트 게이트로 향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게이트를 탄 마틴 준남작은 곧장 슈린 공작령에 도착했다. 모든 기록이 게이트
관리소에 남겠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슈린 공작령에 도착한 마틴 준남작은 바로 성으로 향했다. 현재 슈린 공작령을 다스리고 있는 사람은 공작가의
후계자인 파인트 폰 슈린이었다.

☆ ☆ ☆
“어서 오시오. 하하하하.”
파인트는 군에 다녀오는 동안 한층 성장을 했다. 또한 마음 깊은 곳에 품은 음험함도 한층 더 깊어졌다.
마틴 준남작이 정중히 예를 취했다.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오히려 내가 감사할 일 아니겠소? 마틴 경 같은 인재를 품게 되었으니 말이오. 하하하하.”
마틴 준남작은 송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살짝 조아렸다.
“제게 특별히 부탁까지 하셨는데, 그걸 제대로 이루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순간 파인트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하지만 마틴 준남작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것을 보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이만 고개를 드시오.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겠소? 또한 벨루스
백작가보다는 우리가 훨씬 강력한 힘을 쓸 수 있으니 아마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요.”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대신 제가 아주 좋은 정보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정보?”
파인트가 눈을 빛냈다. 자신이 부탁했던 일은 세나를 부인으로 맞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한데 그걸
실패했으니 웬만한 정보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당연히 마틴 준남작도 그걸 알고 있을 테니 파인트는 은근히 기대되었다.
또한 정보력은 슈린 공작가가 벨루스 백작가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러니 그저 그럴듯한 정보일 뿐이라면 마틴
준남작이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건 극비 정보입니다. 아마 아는 사람이 벨루스 백작과 저, 그리고 그 일을 겪었던 철사자 기사단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호오. 극비 정보치고는 아는 사람이 좀 많은 것 같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일을 직접 겪은 자들이 워낙 많아서…….”
마틴 준남작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정보에 대한 자신감이 워낙 대단했기에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당당해졌다.
그 변화를 옆에서 지켜본 파인트의 눈에 기대감이 어렸다. 왠지 정말로 대단한 정보일 것 같았다.
“제 정보는 새로운 발굴형 기간트에 관한 것입니다.”
“새로운 기간트?”
파인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직 판단할 수는 없지만 상황에 따라 정말 엄청난 정보가 될 수도 있었다.
마틴 준남작은 자신과 철사자 기사단이 젤레 영지, 즉,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겪은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 설명을 들은 파인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무려 스무 기의 기간트를 장난감
가지고 놀듯 박살 냈다니 말이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그게 정말이오?”
“확실합니다. 제가 직접 겪은 일입니다.”
“한데 왜 벨루스 백작이 포기했소? 그 정도라면 영지를 완전히 뒤집어서라도 그걸 찾아내 가졌을 것 같은데.”
마틴 준남작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그 영지에 벨루스 백작의 딸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습니다.”
“그럼 찾긴 찾아봤단 말이로군?”
“아공간 아티팩트 하나를 가지고 영지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걸로는…….”
파인트가 눈을 빛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 정도로 대단한 기간트를 감추고 있다면 고작 그 정도로
찾아낸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얼마나 철저히 감추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숨겼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어설프게 수색하다니.
‘나 같으면 영지를 완전히 뒤집어 놨을 텐데.’
파인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예전처럼 그냥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이야 아카데미에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다. 이곳은 아카데미의 갇힌 세상이 아니라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지는 밖의 세상이다.
“아주 괜찮은 정보로군. 충분히 만족했소.”
“감사합니다.”
파인트의 눈이 번득이며 마틴 준남작에게로 향했다.
“하면, 이 일을 한번 마무리해 보시겠소?”
“마무리라 하심은…….”
“영지전을 통해 그 영지를 흔드는 일이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곳은 3 년간 영지전을 선포할 수 없는 곳입니다.”
“3 년? 언제부터 3 년이오?”
“그러니까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이 부임한 뒤로 3 년입니다.”
파인트가 피식 웃었다.
“아직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은 모양이군. 얼마 전에 그 영지가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바뀐 것은 알고 있소?”
“물론입니다.”
“그놈이 멍청한 짓을 한 거지. 국왕령으로 영지전이 금지된 서류에는 분명하게 젤레 영지라고 명시가 되어
있소.”
마틴 준남작의 눈이 번득 빛났다. 만일 그렇다면 파고들 여지가 너무나 충분했다.
“하면 다른 모든 특혜가 사라진단 말입니까? 무려 4 년 동안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얻은 특혜가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다니 믿기가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파인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그저 파고들 여지가 있다는 뜻이오. 아마 다른 가문이라면 그런 힘을 발휘하기 어렵겠지만,
우리 슈린 공작가는 다른 가문과는 좀 다르지 않겠소?”
마틴 준남작의 얼굴이 희열로 물들었다. 그리고 즉시 고개를 숙였다.
“맡겨 주십시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최신 정보에 따르면 그 영지의 전력이 결코 만만치 않다고 하니 각별히 주의하는 것이 좋을 거요.”
“물론입니다. 최대한 자세히 조사한 뒤에 일을 벌이겠습니다.”
“굳이 영지를 차지할 필요는 없소. 그저 흔들기만 하시오.”
마틴 준남작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러자 파인트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영지전에서 최종적으로 에어스트 백작령이 승리를 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오. 주변에 영지가 세 개나 있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 영지를 에어스트 백작령이 몽땅 병합한다고 생각해 보시오. 어떻게 되겠소?”
마틴 준남작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만일 그렇게 되면 에어스트 백작령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것이다. 병합한 영지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말이다.
더구나 미리 영지를 피폐하게 만들어 놓으면 훨씬 더 힘들어질 것이다.
전쟁으로 힘을 소진시키고, 또 무거운 짐을 안겨서 내정을 힘들게 만들면 반드시 혼란이 일어난다.
그 순간을 절묘하게 노리면 얼마든지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틴 준남작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파인트를 바라봤다.
‘어수룩한 귀족가의 망나니라고만 여겼는데, 이거 좀 더 지켜봐야겠어. 만만치 않아.’
파인트는 그런 마틴 준남작을 보며 씨익 웃었다. 마치 그의 혼란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Chapter 12 세 영지

제론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2 시간을 할애해 마티가 수집한 정보를 훑었다.


최근 유적 12 층 공략을 시작한 이후 두뇌가 활성화되어 동시에 여러 정보를 수집해 처리하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2 시간은 너무 짧았다.
제론이 원하는 정보는 슈린 공작가의 약점과, 수도나 혹은 체른산 근방에 있을지도 모르는 인재였다. 물론 포섭이
가능한 인재를 선별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 세 영지를 살폈다. 그들이 혹시라도 딴마음을 먹거나, 아니면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그들에게 접근할지도 모르기에 잠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그 모든 걸 혼자 하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오늘 아침에도 제론은 태블릿에 열여섯 개의 화면을 동시에 띄우고 눈이 팽팽 돌아갈 정도로 힘겹게 정보를
확인하고 있었다.
“후우. 쉽지 않군.”
제론이 눈을 빛내며 태블릿을 아공간에 넣었다.
오늘도 인재 쪽은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리고 슈린 공작가의 약점도 좀 더 세밀히 살피지 않으면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세 영지 쪽은 변화가 있었다.
“그놈들 대체 뭐지?”
오늘따라 정보 조직의 필요성이 심각하게 다가왔다.

“우리 전력은 좀 어때?”


카이트는 갑자기 자신을 불러서 묻는 제론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불과 며칠 전에 그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한데 굳이 이렇게 따로 불러서 또 물어보니 당황스러웠다.
“며칠 전에 보고드린 대로입니다.”
제론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영지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예?”
카이트가 황당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난데없이 영지전이라니. 그럼 주변 영지를 지금 병합하겠다는 뜻
아닌가.
“영주님, 아무래도 조금 생각하셔야 할 문제 같습니다.”
제론이 아무 말 하지 않고 보기만 하자, 카이트가 말을 이었다.
“굳이 지금 영지전을 벌여서 영지를 키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론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전쟁은 내가 거는 게 아니야.”
“예? 하지만 이 영지는…….”
3 년 동안 전쟁을 걸지 못하는 영지였다. 만일 영지전을 선포한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권력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정면에서 국왕령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어.”
“간과하다니요?”
“영지 이름을 바꿨지.”
“예? 고작 이름을 바꿨다고 그게 가능해진단 말입니까? 국왕령을 너무 우습게 여기는 처사입니다.”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관련 서류를 충분히 확인해 봤지.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가능성만으로 전쟁 준비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쟁 준비는 그저 마음가짐만으로는 안 된다. 진짜 제대로 하려면 충분히 사전에 준비를 해야만 한다.
기간트만 나선다면 모르겠지만 보통 전쟁에는 병사의 역할도 상당했다.
물자도 준비해야 하고, 훈련 방식도 바꿔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돈이 들어간다.
“주변 세 영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제론의 말에 카이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주변 영지가 아무리 힘을 모아도 에어스트 백작령의 상대가 안
된다. 보유한 기간트의 수와 질이 너무 달랐다.
“누군가 뒤에서 지원을 하는 모양이야. 기간트의 수가 제법 많아.”
“얼마나 됩니까?”
“오십 기쯤 되는 것 같아. 하지만 문제는 병사의 수야. 원래의 영지병까지 합하면 오천 명은 되는 것 같아.”
카이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렇게나 많습니까? 대체 어떻게…….”
“돈 좀 쏟아부은 모양이야. 확실하게 이기고 싶은 거겠지. 어때? 가능하겠어?”
카이트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있습니다. 하지만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기간트야 어떻게든 막아 낸다고 해도 병사를 제대로 막지 못하면 영지가 피폐해진다. 그래서야 전쟁에서 이겨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제론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설마 슈린 공작가가 그런 빈틈을 발견해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명백한 실책이었다.
‘그래도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지.’
당장 슈린 공작가와 붙지 않는 한, 분명히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얼마나 피해를 줄이느냐였다.
사실 피해를 완전히 없앨 방책은 있었다. 상대가 기간트 오십 기를 준비했다고 하지만 오십 기를 전부 베르 같은
발굴형 기간트로 맞추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 전부 크라테르로 맞추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마 대부분이 실바일 것이다. 개중 일부는 카타락타고, 고작 몇 기의 크라테르를 내세울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전력이었다. 백작령이나 후작령의 전쟁도 아니고 고작 변방의 남작령이 일으킨
병력치고는 지나칠 정도였다.
어쨌든 그 정도라면 테오스가 나서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피해가 전혀 없이 말이다.
전쟁이 에어스트 백작령 한가운데서 벌어진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오십 기의 기간트쯤은 그것도 수준이 낮은
하급 기간트 정도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다.
기간트가 하급이면 보통 라이더도 베테랑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그것까지 감안하면 어렵지 않게 승리를 차지할
수 있다.
그리고 제론이 혼자 기간트를 막는 동안 라이트닝 기사단이 병사를 막으면 된다.
아무리 오천 명이나 되는 병력이라도 무려 스물여덟 기의 기간트가 나선다면 아무런 피해 없이 물리치는 게
가능했다. 더구나 에어스트 백작령에도 병사가 있었다. 물론 지금이야 치안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긴다 하더라도 테오스가 드러나 버린다. 벨루스 백작이 끼어들었을 때, 테오스를
노출시키는 바람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아마 이번에는 그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영지가 완전히 파헤쳐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테오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이겨야 한다. 어쩌면 적의 목적은 영지전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피해 없이 막아 내야 한다. 기간트는 라이트닝 기사단에 맡기지. 세나와 상의해서 좀 더 성능이 좋은
기체로 교환하도록 해. 남는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카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그가 쓰는 기간트는 무려 아우틈이었다. 아우틈을 쓰는 기사단장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기사는 모두 크라테르를 쓴다.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난 일인데 더 좋은 기체로 바꾸라니 대체 어디에서 그 많은 기간트가 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이트가 놀라건 말건 제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손을 내저어 그를 내보내고는 바이스를 불렀다.
카이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영주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바이스가 들어왔다.
이미 소식을 들었는지 바이스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영주님, 쉽지 않은 전쟁입니다.”
“나도 알아.”
“영주님께서 숨겨 두신 그 기간트, 이번에 쓰시면 안 되겠습니까?”
바이스나 세나는 제론이 특별한 기간트를 쓰고 있다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또한 그 기간트가 엄청난
도움을 준다는 사실도 말이다.
제론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전쟁은 촉이 좋지 않았다. 테오스를 쓰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간트는 카이트 경이 어떻게든 할 거야. 훈련시키는 견습까지 동원하면 압도할 수도 있어.”
“그건 그렇습니다만, 병사가 문제입니다. 오천 명이나 된다면서요?”
제론이 눈을 빛내며 바이스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이번 전쟁에 마법을 한번 제대로 써 보는 게 어때?”
“예? 마법 말입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다수의 적을 막는 가장 훌륭한 전술은 마법에 있는 것 같지 않아?”
“그야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적의 규모가 어지간할 때의 일입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병사가 넓게 포진하면
아무리 마법이라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이스는 심각해졌다. 이곳에서 마법사는 자신 혼자뿐이다. 혼자서 그들을 몽땅 상대하라는 말인데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게다가 범위가 넓은 공격 마법은 한 번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엄청나게 복잡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공격 마법을 거의 난사해야 할 텐데 그런 건 아예 불가능했다.
“마법으로 공격하자는 게 아니야. 함정을 만들자는 거지. 어때? 생각 있어?”
바이스는 제론의 마지막 한 마디에 이번 일이 어쩌면 자신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제론이 씨익 웃었다.
“탁월한 선택이야. 아마 후회하지 않을 거야.”
바이스도 따라 웃었다.
“영주님을 따르면 자다가도 빵이 떨어진다는 사실, 평생 명심하고 살 겁니다.”
두 사람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5 권에서 계속>

5권

Chapter 1 세 영지 (2)

뤼그너 남작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설마 이런 제안이 또 들어올 줄은
몰랐다.
예전에 욕심 때문에 덜컥 제안을 받아들였다가 어찌나 호되게 대가를 치렀는지 아직도 치가 떨렸다. 한데 같은
제안이 또 들어왔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놈이야.”
뤼그너 남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당해 놓고 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에어스트 백작령과의 일 때문에 지금 뤼그너 남작령을 비롯한 세 영지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단 당시 죽은 기사와 빼앗긴 병사 때문에 치안에 공백이 왔다. 또한 상납금을 준비하다 보니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그러던 차에 달콤한 제안이 왔으니 그걸 덜컥 받아들인 건 꼭 자신이 멍청해서만은 아니리라.
“그래도 이번에는 기간트가 무려 오십 기야. 게다가 정당하게 영지전을 선포할 수가 있어.”
지난번처럼 전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우회하려면 또 같은 일을 겪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당하게
전쟁을 걸 수 있으니 성공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뤼그너 남작은 당장이라도 쳐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참아야 했다. 진짜 이기려면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만 한다.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뭐가 또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지난번에도 난데없이 기간트가 튀어나와 얼마나 놀랐던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거세게 쿵쿵 뛰었다.
“그래도 이번엔 괜찮아. 이번에는…….”
무려 오십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진군하는 상상만으로도 희열이 밀려왔다. 가슴 떨리는 광경 아니겠는가.
뤼그너 남작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직 준비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조금의 빈틈도 남기지 않기
위해 이번에 거금을 들여서 준비한 게 있었다.
세 영지의 영주가 돈을 모아서 준비한 것이었다. 가진 돈만으로는 모자라서 영지를 담보로 돈을 빌려 자금을
마련했다.
“지면 끝이야.”
조력자의 힘만으로 이기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준비한 패였다. 아마 그것이 도착하면 나중에 웃을 수 있으리라.
그래서 꾹 참고 기다렸다. 조력자의 재촉이 이제는 거의 협박 수준에 이르렀는데도 말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조금만 더…….”
뤼그너 남작의 눈에 독기가 차올랐다.

마틴 준남작은 뤼그너 남작령과 에어스트 백작령의 경계 근방에서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택해 높은 망루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호위할 기사 두 명과 그곳에서 두 영지의 상황을 지켜봤다.
“왜 이렇게 뜸을 들이나 했더니 저런 걸 준비했을 줄이야.”
마틴 준남작은 사실 뤼그너 남작을 무시했다. 하지만 얼마 전 도착한 그것을 보고 나니 무시하던 마음이 대부분
사라졌다.
어쨌든 뤼그너 남작은 영지전을 신청했다. 명분은 있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흉계로 뤼그너 남작령을 비롯한 세
영지가 파탄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영지전 허가가 떨어진 것이다. 당연히 그 이면에 슈린 공작가의 압력이 있었다.
멀리서 뤼그너 남작령의 병사가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당연히 세 영지의 합동 병력이었다. 같은 날 영지전을
신청했는데, 다 받아들여진 것이다.
무려 오천 의 병사가 오와 열을 맞춰서 진군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는 오십 명의 기사가 역시
줄을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기간트 라이더였다.
반면 반대쪽에서 나오는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력은 그에 비해 보잘것없었다.
기사 복장을 한 자들은 고작 스물일곱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병사는 백 명뿐이었다. 누가 봐도 뤼그너 남작령의
압승을 예상할 것이다.
그것은 마틴 준남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는 무조건 뤼그너 남작령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마틴 준남작은 그렇게 단정하지 않았다.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숨겨진 기간트가 있었다. 그것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발굴형 기간트가 말이다.
“무려 철사자 기사단을 혼자서 압도할 정도의 기간트란 말이지.”
이번 전쟁에서 그 기간트를 제압하겠다거나 박살 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한 번 확인만 하면 그걸로
족했다.
어차피 그 기간트는 다른 방식으로 얻을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을 압박해 알아서 기간트를 토해 내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그에 대한 준비는 파인트가 착실히 진행 중이었다. 마틴 준남작은 파인트가 일을 진행시키는 동안 이렇게
에어스트 백작령을 흔들고 힘을 줄이면 된다.
그는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는 추호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를 호위하는 두 기사는 기간틱 나이트였다. 익스퍼트의
실력에 엄청난 기간트 센스를 가졌다.
게다가 마틴 준남작도 기간트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 무려 베르였다.
어떤 상황이 오건 도망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자아, 어쨌든 나야 오랜만에 싸움 구경이나 즐겁게 해 볼까?”
마틴 준남작은 느긋한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었기에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오! 이제 기간트를 소환하려는 모양이군!”
뤼그너 남작령 측 기사들이 약간씩 흩어지며 공간을 확보했다. 그러자 에어스트 백작령 측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로 움직였다.
기사의 움직임은 같았지만 병사는 완전히 달랐다.
일단 뤼그너 남작령 측 병사들은 둘로 나뉘어 기사를 중심으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전투가 시작되면 기간트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진군하기 위함이었다.
반면 에어스트 백작령 측 병사들은 뒤로 쭉쭉 물러났다. 아무리 잘 봐줘도 도망치려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쯧쯧, 병사 싸움은 완전히 포기한 건가? 이러다가 성이라도 점령당하면 아주 곤란할 텐데?”
성을 점령하는 와중에 중간에 보이는 영지민은 혹독한 취급을 받는다. 더구나 병사가 오천 명이나 된다. 그것도
이쪽 영지 사람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여온 병사였다.
그 병사들이 피와 광기에 취하면 어떤 짓을 할지는 너무나 자명했다. 무수한 영지민이 죽어 나갈 것이다. 또한
여자들은 더 험한 꼴을 당할 것이다.
마틴 준남작은 그것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예상했던 그대로야. 영지민이 당하는 건 지켜봐도 성이 무너지는 꼴은 못 보겠지?”
마틴 준남작은 오천의 병력이 에어스트 백작성에 도착하면 비밀 기간트가 등장할 거라고 예상했다. 병사들에게는
미리 은밀히 지령을 내려 두었다.
기간트가 나타나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라고 말이다. 굳이 이런 곳에서 목숨을 잃을 필요는 없었다.
키이이이이잉!
일제히 기간트가 나타났다. 뤼그너 남작령 측의 기간트는 대부분 카타락타였다. 그리고 몇 기의 크라테르가
있었다. 그렇게 오십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나타나는 광경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틴 준남작의 시선은 그쪽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다. 그는 부릅뜬 눈으로 에어스트 백작령 측 기간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해!”
마틴 준남작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 중 무려 여섯 기나 되는
발굴형 기간트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무려 아우틈이었다. 그리고 베르가 다섯 기나 있었다.
나머지도 보통이 아니었다.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열 기나 되는 임베르가 있었다. 크란 제국의 기간트인
임베르는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데 대체 어디서 저걸 구했단 말인가.
그 외 나머지 열한 기의 기간트는 전부 크라테르였다. 실로 어마어마한 전력이었다. 이건 단순히 수의 우위로
승부를 점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마틴 준남작은 불안한 눈으로 뤼그너 남작령 쪽을 바라봤다. 그쪽에 서 있는 카타락타와 크라테르가 참으로
초라해 보였다.
“이래서야 준비한 게 전혀 쓸모가 없지 않은가!”
뤼그너 남작령의 기간트 가장 뒤에 서 있는 베르가 참으로 외로워 보였다. 만일 에어스트 백작령 측 기간트가
전부 크라테르로 이루어져 있다면 베르가 정말로 큰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압도하는 상황에서 날카로운 칼 한 자루가 가지는 의미는 크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의미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기간트라는 것이 사고 싶다고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기간트를 사려면 왕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건 오래전 이야기였다. 요즘은 많이 느슨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국에 보고하지 않고 기간트를
보유하는 영지가 너무 많았다.
그걸 일일이 찾아내 처벌하다 보면 대부분 영지의 공분을 사게 될 것이다. 그건 왕국 분열의 지름길로 이어진다.
더구나 지금처럼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각 영지가 보유한 기간트의 수가 급격히 변하기 마련이었다. 그걸 일일이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기간트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면 모를까 고작 삼십 기 정도라면 공론화시켜 봐야 먹히지도 않는다.
지나칠 정도로 좋은 기간트가 많다는 걸 걸고넘어질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안 하는 편이 나았다.
기간트에 관한 한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영지라면 아무도 자유롭지 않았다. 괜히 들쑤셔 봐야 오히려 뭇매만 맞을
공산이 컸다.
“종잡을 수가 없군.”
마틴 준남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쨌든 전쟁의 승패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성과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양측의 기간트가 일제히 달려갔다. 그리고 그 순간 마틴 준남작은 이마에 손을 짚으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끄응!”
달려가는 모양새가 완전히 달랐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는 일정한 진형을 이루면서 정확히 발을 맞춰서
이동했다. 달리는 속도가 느리지 않은데도 진형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반면 뤼그너 남작령 측은 질서가 별로 없었다. 처음에는 그나마 진형을 유지했지만 달려가는 동안 완전히
흐트러져 버렸다.
집단전을 벌인 경험의 차이였다. 또한 훈련의 차이이기도 했다.
꽈앙!
굉음이 울렸다. 양측의 기간트가 부딪친 것이다. 당연히 진형을 제대로 이루지도 못한 뤼그너 남작령 측의
기간트가 월등히 불리하게 전투를 시작했다.
마틴 준남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간트 전투는 아예 승산이 없었다. 이제 믿을 건 병사들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병사 쪽으로 옮겨졌다.
오천 명의 병사가 일제히 진군을 시작했다. 병사는 그래도 기간트에 비해 진형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간트는 사람처럼 정교하게 움직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진형을 맞추려 애써도 흐트러지기 일쑤였다.
정말로 많은 훈련이 필요했다.
뤼그너 남작령의 오천 병사 중 상당수는 슈린 공작가가 지원했다. 그들은 원체 훈련 상태가 좋았기에 진군 도중
진형이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다.
오천 명의 병사가 둘로 나뉘어 진군했다. 그들은 기간트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크게 우회하며 나아갔다. 자칫
말려들면 병력이 아무리 많아 봐야 소용없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력은 고작 백 명이었다. 그걸로 오천 병사에게 돌진하면 계란을 바위에 던진 것과 똑같은
꼴이 된다.
백 명의 익스퍼트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그저 병사일 뿐이니 결과는 명약관화했다.
당연히 그들은 계속 후퇴했다. 질서 정연하게 뒤로 물러났는데, 양측의 거리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
병사 간의 전투도 쉽게 벌어질 것 같지 않자, 마틴 준남작은 다시 시선을 기간트로 돌렸다. 그의 표정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기간트 전투는 수의 우위가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다른 조건 역시 상당히 중요했다.
뤼그너 남작령은 기간트의 숫자만 앞섰지 나머지 조건은 완전히 압도당했다.
일단 기간트의 성능이 월등히 모자랐다. 다음으로 집단전에 관한 경험과 훈련이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개개인의
기량도 너무 큰 차이가 났다.
그로 인해 수적 우위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병사가 진군할 시간을
벌어 준다는 것이었다.
무너지고 있긴 하지만 그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수의 차이가 워낙 심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나이긴 하지만
베르의 존재가 상당한 힘을 실어 주었다.
“후우. 이래서야 제대로 타격을 줄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마틴 준남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병사들을 바라봤다. 아직도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슬슬 긴장감이
떨어지고 있었다.

☆ ☆ ☆
제론은 마티를 통해 마틴 준남작이 뤼그너 남작령에 도착한 순간부터 감시했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벨루스 백작가로 은밀히 연락을 넣었다.
벨루스 백작가도 마틴 준남작 때문에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배신하고 도망친 마틴 준남작 때문에 영지의 행정이
반쯤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마틴 준남작은 혹시 모를 추적을 방지하기 위해 그런 일을 벌였다.
또한 행정을 정상화하는 도중 마틴 준남작이 그동안 저지른 비리가 하나둘 발견되기 시작했다. 실로 막대한
금액을 꿀꺽 삼킨 정황이 계속해서 발견되었다.
그 일로 벨루스 백작가는 난리가 났다. 그리고 마틴 준남작이 슈린 공작령으로 도주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현재 벨루스 백작가는 슈린 공작가에 정식으로 항의를 한 상태였다. 양 가문 사이에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물론 전쟁으로 번지지는 않을 것이다. 두 영지는 너무 멀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긴장 상태가 제법 오랫동안 유지될 거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 모든 상황을 전해 들은 제론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번에 파악했다. 마틴 준남작이 슈린 공작가에
붙어서 에어스트 백작령을 노리는 것이다.
당연히 목적은 테오스였다. 물론 제론은 그것을 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압박을 하든 능히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제론은 마틴 준남작이 만든 망루를 그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소환한 테오스에
탑승한 채로 말이다.
“좀 아슬아슬하게 만들어 볼까?”
제론은 일단 전투에 깊이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수적 우위를 앞세운 적을 상대하는 것도 라이트닝 기사단에게는
훌륭한 경험이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시간을 오래 끌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오천 명이나 되는 병사도 손을 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병사를 상대할 방법을 준비하긴 했다. 하지만 그걸로 완벽히 병사를 막아 낼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기에
기간트 전투가 늘어지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자아, 어디 이 정도면 되려나?”
테오스가 주변에 널린 둥그런 바위 하나를 들었다.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지름이 약 50
센티미터쯤 되는 바위였다.
이 바위는 제론이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이렇게 쓰려고 말이다.
후우웅!
테오스가 팔을 크게 휘두르며 바위를 던졌다.
콰우우우!
공기를 찢으며 바위가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실로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테오스의 힘과 제론의 기간트 센스가
만들어 낸 광경이었다.
텅!
돌은 정확히 뤼그너 남작령의 기간트에 명중했다. 물론 거리가 워낙 멀어 파괴력이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돌에 맞은 기간트는 순간적으로 균형이 흔들렸다. 그리고 라이트닝 기사단은 그런 큰 빈틈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콰직!
카타락타의 조종석을 검이 뚫고 지나갔다.
쿠웅!
기간트가 쓰러지며 진형이 잠깐 흐트러졌다. 그리고 라이트닝 기사단의 베테랑들은 그 빈틈조차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꽈과광!
기간트와 기간트가 부딪치며 굉음이 울렸다. 자욱하게 피어나는 흙먼지 사이로 검광이 번득였다.
꽝! 꽝! 꽝!
다시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렇게 균형을 되찾으려는 순간 또 돌 하나가 날아왔다.
콰우우우!
텅!
콰직!
마치 약속 대련이라도 하는 듯했다. 미리 짜 맞춘 것처럼 돌에 맞고, 흔들리고 조종석이 꿰뚫리는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연결되었다.
사실 라이트닝 기사단은 이에 대한 훈련도 충분히 했다. 제론이 생각해 낸 훈련이었고, 영지전이 시작되기 사흘
전부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훈련을 했다.
그렇기에 훨씬 큰 효과를 내는 게 가능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돌이 날아왔고, 그때마다 균형이 무너지며
뤼그너 남작령 측 기간트가 우수수 쓰러졌다.
이내 기간트 수가 같아졌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완전히 일방적으로 라이트닝 기사단이 적을 몰아붙였다.
기간트 전투는 그렇게 끝을 향해 치달았다.

오천 명의 병사는 뤼그너 남작의 아들이 직접 이끌었다. 그는 이번에 큰 공을 세울 작정이었다. 이들을


효과적으로 지휘해 에어스트 백작령의 성을 점령하면 그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둘로 나뉘어 진군하던 병사가 하나로 모였다. 그리고 뤼그너 남작의 아들은 병사의 가장 뒤에서 큰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진격! 걸리는 건 다 쓸어버려라!”
그는 오천 명의 병사라면 성 하나 점령하는 건 지극히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자신 있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는 계속 후퇴하다가 멈춘 상태였다. 그 뒤로는 더 이상 후퇴하지 않고 전의를 불태웠다.
다들 창을 겨누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달려 나올 것만 같았다.
뤼그너 남작의 아들은 그것을 보고는 비웃었다. 고작 백 명이 달려들어 봐야 뭘 어쩌겠는가. 오천 명의 병사가
그냥 달려가기만 해도 깔려서 죽을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 백 명은 눈에서 독기를 뿜어냈다. 정말로 독한 마음을 먹었다. 포로는 필요 없었다. 다
죽여야만 했다.
불과 얼마 전에 잡은 포로도 아직 처리를 하지 못했다. 여기서 더 포로를 잡아 봐야 가둘 공간도 없었다.
또, 이들은 언제든 다시 위협이 될 존재였다. 이 병사는 뤼그너 남작령 소속이 아니었다. 더 큰 적이었다.
그렇기에 기회가 되면 싹 죽여 버리는 게 나중을 위해 좋았다.
그걸 다들 인식하고 있기에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아무리 철저하게 훈련이 되었고,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수천 명의 적을 몰살시키겠다는 마음을 먹는 건 쉽지 않았다.
양측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뤼그너 남작령 측 병사들은 처음에는 진형도 갖추고 무리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이동했지만, 점점 빨라지면서 나중에는 진형이 많이 흐트러졌다.
하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50 대 1 의 싸움이었다. 오십 명이 무슨 헛짓을 해도 한 명에게 질 리가 없지
않은가. 설사 실력이 아무리 차이가 난다 해도 말이다.
양측의 거리가 100 미터도 남지 않았을 때,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이 일었다.
번쩍!
“으악!”
“안 보여!”
빛이 어찌나 강했는지, 다들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에어스트 백작령의 백인장이 외쳤다.
“공격!”
백 명의 병사가 일제히 앞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달리면서 몸을 뒤로 크게 젖혔다. 뒤로 쭉 뻗은 손에는 창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힘을 하나로 응축시켜 창에 모아 던졌다.
슈슈슈슉!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창이 오천 명이나 되는 병사를 향해 비스듬하게 떨어졌다.
퍼버버버벅!
“크악!”
“으아악!”
“막아!”
“죽여!”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안 보이는 오천 명의 병사는 적이 돌격한 걸로 착각을 했다. 그들은 반 공황 상태에 빠져
검을 휘두르고 창을 내질렀다.
퍽! 퍽! 퍽! 퍽!
갑자기 시력이 상실된 공포는 엄청나다. 그런데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 그 일을 겪었으니 상상을 초월하는
두려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정신없이 검과 창을 휘둘렀다. 좀처럼 시력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희미하게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군끼리 창검을 휘두르며 죽고 죽였던
것이다.
사실 이럴 때는 지휘관의 역량이 중요했다. 지휘관이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해 적절한 명령을 내려야만 한다.
하지만 지휘관인 뤼그너 백작의 아들은 한마디도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병사들과 함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근처에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검에 죽은 병사가 무려 삼십 명에 이를 정도였다.
“크윽! 다들 정신 차려! 일단 저놈들부터 죽여라!”
뤼그너 남작의 아들이 외쳤다. 자신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서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여야 한다.
병사들은 반사적으로 달렸다. 그들도 동료를 죽인 죄책감을 덜기 위해 적에게 모든 원망과 분노를 돌렸다.
“으아아아!”
거대한 함성과 함께 남은 병사들이 달려갔다. 오천 명이었던 병사는 이제 고작 사천 명 정도가 남았을 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무려 천 명이 죽은 것이다.
그들의 돌격은 길지 않았다. 고작 20 미터를 달려갔는데, 고막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린 것이다.
꽈아아아아앙!
병사들이 밟은 대지가 폭발했다. 수많은 병사가 온몸에 돌조각을 박고 죽어 갔다.
땅 아래에 있던 수백 개의 바위가 일제히 폭발한 것이다. 그 피해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요행히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도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바위 조각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퍼버버버버벅!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폭발의 범위는 어마어마했고, 뤼그너 남작령의 병사들은 대부분 그 영역 안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폭발로 인해 그들의 지휘자인 뤼그너 남작의 아들은 즉사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백인장이 외쳤다.
“투창!”
아직 창은 많이 남아 있었다. 백 개의 창이 하늘을 날았다.
슈슈슈슈슉!
퍼버버버버벅!
“아악!”
“크아악!”
아직도 많은 병사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연달아 창이 쏟아졌다.
슈슈슈슈슉!
퍼버버버벅!
병사 한 명당 열 개가 넘는 창을 준비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들은 창을 하나만 남기고 몽땅 던져 버렸다.
그렇게 처참하게 당했는데도 뤼그너 남작령의 병사는 아직도 천 명 가까이 남아 있었다. 물론 절반 이상이 상당한
상처를 입긴 했지만 백 명이 상대하기에는 버거웠다.
하지만 백 명의 병사는 망설임 없이 창을 꼬나 쥐고 달려갔다. 그들의 눈빛에는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다.
자신감만 가득했다.
오히려 그들을 맞이하는 뤼그너 남작령의 병사들이 더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은 억지로 검을 들고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에 맞섰다.
억지로 용기를 짜냈다.
“수는 우리가 더 많다! 아직 이길 수 있어!”
누군가가 처절하게 소리쳤다. 그 말에 몇몇이 호응했다.
“이길 수 있어!”
“죽여라!”
뤼그너 남작령의 병사들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그대로 양측이 충돌했다.
채채채챙!
퍼버벅!
“크아악!”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는 마치 익스퍼트라도 되는 것처럼 힘차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뤼그너 남작령의 병사를 압도했다.
아무리 부상자가 많이 섞였다지만 거의 혼자서 열 명을 상대해야 하는데,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는 그것을
해냈다.
고작 백 명의 병사가 천 명의 병사를 말 그대로 쓸어버렸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는 한 명도 죽지 않았다.
물론 부상은 입었다. 하지만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
전투가 끝나자, 병사들은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서 기간트 전투가 어찌 되었는지 확인했다.
그곳도 이미 전투가 끝나 있었다.
압승이었다.

☆ ☆ ☆

마틴 준남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영지전이 끝날 줄은 몰랐다. 기간트고 병사고 에어스트
백작령이 뤼그너 남작령을 박살 낸 것이다.
“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마틴 준남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 저렇게 대단한 기간트가 잔뜩 있는 것도 이해 불가였고,
병사의 실력이 저렇게 대단한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대체 그 섬광과 폭발은 뭐야?”
상황을 보아하니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함정을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한데 대체 어떤 식으로 만든 함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마법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마틴 준남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전쟁이 끝났으니 이걸 슈린 공작가에 알려야 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저력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어야 향후 대처가 편해진다.
“그나저나 그 비밀 기간트는 아예 등장도 안 했군. 그건 좀 아쉬운데?”
마틴 준남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망루에서 내려가려 했다. 그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쉬울 필요 없다. 이렇게 왔으니까.”
마틴 준남작은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새까만 기간트 한 대가 망루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어, 어, 어,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소리조차 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단 말인가. 마틴 준남작은 너무 놀라 자신의 기간트를
소환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호위하는 두 기사는 달랐다. 그들은 재빨리 기간트를 소환했다. 아니, 소환하려고 했다.
퍼벅!
두 기사의 머리가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테오스가 손가락을 한 번 튀긴 결과였다.
주르륵.
마틴 준남작은 그대로 오줌을 지렸다.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지 않은가.
퍽!
마틴 준남작의 머리가 날아가 버렸다.
콰직!
테오스가 단숨에 망루를 부쉈다.
제론은 테오스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낸 뒤, 시체가 입고 있는 기간트 장비를 벗겼다.
아주 간단하게 세 기의 기간트가 생겼다.
“전리품까지 하면 제법 짭짤하겠군.”
짭짤한 정도가 아니었다. 사실 기간트의 수가 너무 많았다. 앞으로 라이더를 더 양성해야만 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그래도 남는 기간트가 있으면 내다 팔면 된다.
제론의 뇌리에 암시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용병 펠젠의 모습이 함께 생각났다.

Chapter 2 빈민굴의 바인

영지전이 끝난 뒤, 제론은 최대한 서둘러 영지를 병합했다. 전쟁이 마무리되었다고 위험이 사라진 건 아니었기에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마틴 준남작과 호위 기사를 죽였기에 시간을 조금 더 벌 수 있었다.
세 영지의 영주는 마음 같아서는 다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가족, 그리고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과 함께 영지에서 추방했다.
제론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행정의 통합이었다. 각 영지에서 일하던 인재를 파악해 적재적소에 밀어 넣었다. 물론
그 와중에 세작을 철저히 가려냈다.
영지전에서 상당히 많은 병사가 죽었기에 치안에 공백이 생겼다. 영지전에 나선 병사의 대부분은 슈린 공작가에서
지원한 자들이었지만, 세 영지의 병사도 제법 많았다.
세 영지에 남은 병사는 다 합해서 오백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제론은 병사를 더 뽑고 치안대를 조직하여 치안의
공백을 메웠다.
나머지는 차츰 해결해 나가면 된다. 일단 돈을 많이 들이면 웬만한 문제는 다 해결이 가능했다.
행정과 치안을 해결하자 다음 문제가 닥쳐왔다. 전임 영주들이 영지를 담보로 빌린 돈에 관한 것이었다.
제론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영지에 대한 담보 가치를 어느 정도로 책정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만일 담보 가치
이상의 돈을 빌렸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갚을 의무가 없었다.
예전에는 영지를 담보로 돈을 빌리고 영지전을 통해 덤터기를 씌우는 식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제법 많았다.
그래서 결국 그 부분에 관한 법이 만들어졌다.
제론이 파악한 바로 가치를 제대로 책정했고, 빌린 돈도 크지 않았기에 그냥 갚기로 했다. 사실 고작 베르를
사려고 빌린 돈이었기 때문에 제론에게는 거의 신경 쓰이지도 않는 금액이었다.
영지의 일은 그런 식으로 천천히 마무리되어 갔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영토는 기존에 비해 두 배나 늘어났다. 아니, 암석 지대까지 합하면 세 배는 더 늘어났다.
기존 에어스트 백작령의 영토가 워낙 넓었기에 세 개의 영지를 병합했는데도 늘어난 비율은 그 정도였다.
“일이 또 생겼군.”
영지전에서 승리하면서 영지를 병합했지만, 늘어난 부분에 대해 수도 행정청에 신고를 해야만 한다. 관리를
보내도 상관없지만, 이런 경우 영주가 직접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제론이 가는 것이 가장 빨랐다. 유적을 통해 수도로 단번에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제론은 당분간 내치에 힘쓸 생각이었다. 돈을 잔뜩 쏟아부어서 영지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무력을 키울
계획이었다.
이제 더 이상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
제론은 집무실에서 마지막 남은 서류를 처리한 다음 기지개를 켰다. 거의 열흘 동안이나 서류 처리를 했다.
확실히 영지가 늘어나니 처리해야 할 일이 몇 배로 늘었다.
잠시 쉬고 있으니 바이스와 세나, 그리고 카이트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왔나?”
“부르셨습니까?”
세 사람의 안색도 과히 좋지 않았다. 지난 열흘 동안 제론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더 힘들었다.
일단 바이스는 총관 역할을 병행하고 있기에 영지를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무려 네 개의 영지가 하나로 변하는 상황이었다. 그게 쉬울 리가 없었다. 바이스는 그 일을 하며 벌어지는 모든
일을 조율했다.
거기에 이번 영지전에서 썼던 마법을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연구와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 모든 일을 하려니 잠잘 시간도 없었다. 몸을 두 개로 만드는 마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틈날 때마다 할
정도였다.
그리고 세나는 새로 생긴 기간트를 수리했다. 무려 쉰세 기의 기간트가 새로 생겼고, 그것도 모자라 아군
기간트도 수리할 일이 잔뜩 쌓였다.
그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열흘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아직 절반도 못한 상황이었다. 세나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카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이트는 기사단장임과 동시에 모든 병력을 관리하는 총병관의 역할도 병행하고
있었기에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치안까지 카이트의 관할에 있었다. 병사를 재편하고 훈련시키며 치안까지 책임져야 하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제론이 회의를 소집했다. 힘들었지만 올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 힘든
상황을 타개하려면 말이다.
“힘들어 보이는군. 거기들 앉지.”
세 사람이 각자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제론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지금은 머리가 멍할 지경이라 할
말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수도에 다녀와야 돼.”
제론의 말에 다들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놀랐다. 이 와중에 영주가 자리를 비운다면 얼마나 일이 많이 늘어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을 향해 빙긋 웃어 준 제론은 말을 이었다.
“이번에 수도에 가서 제대로 된 인재도 함께 데려올 테니까 조금만 더 참아.”
그제야 세 사람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두웠다.
“한데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인재 포섭만으로 가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영지가 늘어났으니 신고를 해야지. 병합한 영지와 그 뒤의 암석 지대까지 한꺼번에 다 신고할 생각이다.”
제론의 말에 바이스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세금이 엄청나게 늘어날 겁니다.”
애초에 제론은 10 년간 세금을 면제받았다. 하지만 그건 처음 받은 영지에 한한다. 나머지 영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세금을 내야만 했다.
늘어난 세 영지는 그렇다 치고, 그 뒤의 암석 지대까지 몽땅 영지로 받아들인다면 그 넓이가 어마어마했다.
암석 지대의 넓이는 에어스트 평원, 즉, 예전에 황무지였고, 중앙 유적이 있는 평원 정도의 넓이였다. 그러니
세금도 엄청날 것이다.
왕국에서 영지에 매기는 세금은 영토의 넓이에 따라서 달라진다. 또한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영토가 넓으면 식량이 많이 난다. 그걸 기반으로 세금을 책정했기에, 쓸모없는 땅이 많을수록 세금 부담이 점점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제론은 바이스의 걱정이 뭔지 다 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곳도 싹 개간해야 돼. 그럼 세금 정도야 우습잖아.”
“정말로 거길 개간하실 생각이십니까?”
바이스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예전에 그 계획을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이제 총관 일을 하고, 영지의 경영에 점점 깊이 들어가니 그 일이 얼마나 무모한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걱정이 됐다.
“당연하지. 그게 아니라면 굳이 거길 영토로 삼을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거길 개간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제론이 빙긋 웃었다.
“에어스트 평원에 수로와 저수지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
바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영주성이 위치한 에어스트 평원은 황무지에서 그 어느 곳보다 뛰어난 옥토로 변하였다.
그곳의 땅은 훌륭했지만 물을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제론은 그걸 아주 짧은 시간에 해결해 버렸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아마 숨겨 두신 기간트를 썼겠지.’
그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더 깊이 파고들기에는
정신적 여유가 너무 모자랐다.
“내일부터 병사를 더 모집해. 최소한 이천 명은 더 필요해.”
“이천 명이나 말입니까?”
카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이내 암담함으로 물들었다.
이천 명이나 되는 병사를 모집하려면 또 얼마나 힘들겠는가. 게다가 모집한다고 바로 병사가 되는 게 아니었다.
훈련도 시켜야 한다.
다행히 카이트를 비롯한 라이트닝 기사단은 대부분 군부 출신이었다. 비록 기간트 라이더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군 생활을 하면서 얻은 경험이 상당했다.
그 경험을 살리면 충분히 병사를 훈련시킬 수 있었다. 카이트는 일단 그들을 이용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마
기간트 훈련을 못 한다고 난리를 피우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살고 봐야지.’
바이스와 카이트는 또 무슨 말이 나올까 불안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수도에 다녀온 다음에 기간트를 좀 팔아야겠어.”
“예? 팔아요?”
세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지금 그녀가 수리한 기간트를 그냥 팔면 절대 안 된다. 그 기간트에는 세나만의
특별한 기술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만일 그냥 팔면 자칫 그 기술이 유출될 수도 있었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걱정할 거 없어. 팔 기간트는 따로 줄 테니까.”
세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다가 이내 창백하게 질렸다.
“서, 설마…….”
“수리가 필요한 기간트를 공방에 가져다 놓을게. 아마 양이 좀 많긴 하겠지만 세나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제론의 말에 세나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말 안 해도 잘 알겠지만, 그 기간트는 세나의 기술이 들어가면 안 돼. 다른 기간트와 똑같아야 팔기 좋다는 거
알고 있지?”
세나는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그런 세 사람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괜히 시간 끌 것 없이 지금 다녀올 테니, 그동안 영지 잘 부탁해.”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휑하니 나가 버렸다.
“여, 영주님!”
세 사람이 당황하며 제론을 불렀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찌나 빨리 움직였는지 문이 아직 열린
채였고, 한 줄기 바람이 세 사람을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바이스와 세나, 그리고 카이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서 열린 문만 바라봤다. 하염없이.
☆ ☆ ☆

깁스 남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5 장의 보고서를 찬찬히 훑었다.


얼마 전 그림자 1 호가 죽었다. 깁스 남작에게는 제법 많은 그림자가 있었고, 그들의 심장에 특별한 방법으로
마법을 걸어 삶과 죽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게 가능했다.
또한 그들이 죽으면 그 사실을 바로 알 수도 있었다.
그림자 1 호의 죽음은 너무나 의외였다. 깁스 남작이 내린 지령을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보고서를 보면 에어스트 백작령에 있던 그림자 1 호의 모든 정보원이 싹 잡혔다. 아마 고문을 받다가
죽었을 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군.”
이건 내부 배신자가 있을 경우의 결과였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그래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부
배신자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던 건 오로지 그림자 1 호뿐이었다. 즉, 그림자 1 호가 내부 배신자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깁스 남작의 등을 소름 한 줄기가 쫙 훑고 지나갔다. 방금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상상 하나가 떠올랐다. 만일 그
상상이 진짜라면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깁스 남작은 보고서를 치우고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그림자 1 호에게 내가 내린 지령을 알아낸 거야.”
일단 그걸 진실로 가정하면 내부 배신자 없이 그런 상황이 벌어진 걸 설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두 가지 가정을 할 수 있지. 하나는 명령 체계의 중간에 구멍이 뚫린 거. 다른 하나는 그림자 1 호가
지령을 정보원에게 전달하는 순간 들킨 것.”
깁스 남작은 후자에 더 무게를 두었다. 즉, 그림자 1 호가 감시당했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대체 어떻게 감시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림자 1 호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 파악했는가도 중요했다.
그림자 1 호는 깁스 남작이 직접 키웠다. 그렇기에 그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림자 1 호를 미행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림자 1 호는 수도 내의 모든 지리와 하수구를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또한 상당히 민첩하기에 그를 그냥 뒤쫓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데 어떻게 그림자 1 호를 쫓아가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직접 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부려서 했다는 게 더 문제야.”
수도 내의 정보 조직은 깁스 남작이 모두 꿰고 있었다. 각 귀족가 소속의 정보 조직이 아니라면 대부분 깁스
남작의 입김이 닿았다.
그렇기에 만일 정말로 그랬다면 제론이 비밀스러운 정보 조직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말이 안
된다.
“내 눈을 피해서 수도에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고? 말도 안 되지.”
깁스 남작은 불안해졌다. 어쩌면 제론의 비밀 정보 조직의 감시망에 자신도 들어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주로 수도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인가?”
상식적으로 그 짧은 시간 동안 왕국 전역을 커버하는 정보 조직을 만들 수 있을 리 없었다. 기껏해야 수도와
에어스트 백작령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그렇다면 안심이었다. 깁스 남작의 저택은 수도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자그마치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이동해야 하니 말이다.
깁스 남작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이번 일은 실패했다. 제론에 대해 좀 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결국 보고를 해야겠군. 짜증 나지만 말이야.”
깁스 남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보고가 너무 늦었다. 슈린 공작도 이미 에어스트 백작령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을 공산이 컸다.
“질책을 피할 수 없겠군.”
깁스 남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에서 나갔다.

☆ ☆ ☆

수도에 도착한 제론은 천천히 빈민굴을 거닐었다. 이번 일정은 최대한 짧게 잡았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크기가
갑자기 커지는 바람에 할 일이 산더미였다.
하지만 행정적인 절차부터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좋았다.
수도 행정청의 일이 다 그러하듯 간단히 신청한다고 끝나지 않는다. 몇 번은 반복해서 방문하고 서류를
작성해야만 한다.
특히 이렇게 영지에 관한 부분은 나중에 왕국에 내는 세금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훨씬 더 빡빡하게 처리한다.
제론은 수도에 도착함과 동시에 행정청에 서류를 넣었고, 내일 다시 방문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사실 백작쯤 되면
행정청에서 상당한 편의를 봐주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제론은 그런 편의를 전혀 받지 못했다. 행정청의 요직 몇 개를 슈린 공작가에 줄을 댄 귀족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슈린 공작가가 행정청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면 제론에게 엄청난 행정적 불이익을 안겼을 것이다. 하지만
행정청은 슈린 공작이 영향력을 미치는 데 상당한 제약이 따랐다.
지금은 그저 최대한 일 처리를 늦추고, 제론이 밟는 행정절차에 관한 정보를 넘기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제법 제론을 귀찮게 만들 수 있었다.
그저 귀찮음을 좀 감수하고 늘어지는 시간이 아깝긴 했지만 그래도 일은 제대로 처리되었다. 그조차 하지 않으면
행정청에 간신히 만든 끈이 사라질 수도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하루를 기다려야 하기에 제론은 이곳으로 왔다. 그동안 마티를 통해 꾸준히 인재를 찾고 있었는데, 그중
몇 명이 이곳에 있었다.
사실 제론이 찾는 대부분의 인재는 최소한의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다. 행정 일을 할 사람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행정 쪽으로 공부를 한 인재가 필요했다.
그게 아니라면 라이더로 쓸 기사를 들여야 하는데, 어느 쪽이건 빈민굴에서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제론이 이곳, 빈민굴에 온 이유는 꼭 필요한 다른 방향의 인재를 영입하기 위함이었다.
빈민굴은 좁은 골목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렇기에 처음 가는 사람은 아예 길을 찾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제론은 마치 이곳에 사는 사람처럼 능숙하게 길을 찾아갔다.
미리 마티를 통해 충분히 길을 파악해 뒀다. 예전 수도 유적을 얻으러 갈 때도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이곳 빈민굴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제론은 이곳 지리에 익숙했다.
제론이 찾아간 곳은 빈민굴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었다. 빈민굴 내의 공터였는데, 그곳에는 삼십 명 정도의 사내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건드리면 다 죽여 버리겠다는 눈빛으로 제론을 힐끗힐끗 훔쳐봤다.
제론은 그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이미 마티를 통해 여러 번 확인한 자들이었다. 어떤 성격이고,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세세히 파악했다.
공터에 누워 있던 사내 중 하나가 일어나 건들거리며 제론에게 다가갔다.
“보아하니 귀족 나리 같은데, 이런 더러운 시궁창에는 왜 오셨나?”
명백히 도발하는 말투였다. 보통 귀족은 이런 곳에 오지 않는다. 혹여 온다 하더라도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온다.
하지만 여기 있는 빈민들은 그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사라도 칼에 맞으면 죽는 건 똑같다.
빈민은 항상 죽음을 마주하고 살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작은 빈틈 하나 만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쯤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빈민 중에서도 가진 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 이렇게 시궁창에서 뒹구는 자들 중에도 남을 부리는
사람이 있고, 또 부림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
이곳에 있는 사내들은 몽땅 후자였다. 그렇기에 죽음에 대한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이곳은 빈민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설사 귀족이 여기서 죽어도 그 사실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
다만 왕국에서 군대를 보내면 일이 커지고 복잡해지기 때문에 조금 조심할 뿐이었다.
아무리 복잡한 골목을 가지고 있어도 기간트가 나서면 끝이었다. 한 대만 나서도 이런 빈민굴은 완전히 끝이었다.
하지만 빈민들을 다스리는 몇몇은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빈민은 거지가 아니었다. 그저 지독히 가난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이들이 없으면 수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수도에서 가장 비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 모인 곳이 바로 빈민굴이었다.
물론 거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수는 극소수였다. 오히려 거지는 빈민굴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웠다.
그렇기에 이렇게 혼자서 여기까지 온 귀족은 이들의 먹잇감이었다. 입고 있는 옷만 팔아도 한동안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제론은 다가온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이었다.
사내는 순간 움찔 놀랐다. 눈빛에 주눅이 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무서워한다는 걸 들키기 싫어 오히려 더
강하게 나갔다.
“귀족 모독이니 하는 어설픈 얘기를 할 생각이라면 관두쇼.”
제론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사내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냥 보기만 하는 건데도 그 위압감이 엄청났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주머니에서 칼을 슬그머니 꺼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돌려보내면 오히려 더
일이 복잡해진다.
귀족이 돌아가 병사와 기사를 잔뜩 끌고 오면 결국 죽는 건 자기뿐이었다. 다른 빈민들이 의리를 지킬 리
없으니까. 일을 저지른 사람만 죽으면 깔끔하게 끝나지 않겠는가.
“그걸 꺼내면 넌 죽는다.”
제론의 무심한 목소리에 사내는 몸이 굳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쥐고 있던 칼을 놓았다. 본능이 어서
도망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가서 바인을 데려와라.”
제론의 말에 사내가 인상을 팍 썼다. 하지만 말을 거역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믿을 수 없지만 상대는 자신을
눈빛 한 방에 제압해 버렸다.
제론이 손가락을 튀겨 동전 하나를 던졌다.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던 동전을 사내가 휙 낚아챘다.
동전을 확인한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그마치 금화였다.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내의 말투가 바뀌었다. 사실 예전 같으면 이런 돈을 봤으면 당장 달려들어 칼부터 휘두르고 봤을 것이다.
금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줄 정도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하지만 사내는 그런 생각을 아예 떠올리지도 못했다.
사내가 골목으로 사라지자, 제론은 나머지 사내들을 둘러봤다. 여전히 눈빛은 무심했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사내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도 조금 전의 광경을 다 지켜봤다. 뒷일 따위는
원래 생각지도 않는다. 그저 눈앞의 돈을 취할 뿐이었다.
사내들 중 둘이 조금 전 금화를 들고 골목으로 달려간 자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내들이 제론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들의 눈에서는 하나같이 살기가 넘실거렸다.
제론이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심장에서 맴도는 일곱 개의 마나링이 주변 마나를 장악했다. 제론은
다가오는 사내들은 그냥 내버려 뒀다. 대신 골목으로 막 들어가려던 두 명의 사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덜컥!
뭔가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막 골목으로 접어들려던 두 사내가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당황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조차 할 수 없었다. 몸이 완전히 굳어 버린 것이다.
그러고 있는 사이 나머지 사내들이 제론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손에 칼을 쥐고 있었다.
슉슉슉슉!
일제히 칼을 내질렀다. 그대로 죽여 버리겠다는 듯 살기 넘치는 공격이었다.
물론 제론의 몸은 고사하고 옷자락 하나 찌르지 못했다. 허망하게 허공을 가른 칼이 잠깐 멈춘 사이 강렬한
타격음이 연달아 울렸다.
퍼버버버버벅!
“크억!”
“카악!”
달려들어 칼을 찌른 사내 전부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놀랍게도 그렇게 쓰러진 자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죽은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생활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타격을 입었다.
제론은 나가떨어진 사내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움직이지 못하는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꿀꺽!”
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발소리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는 너무나 뻔했다.
조금 전까지 동료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렸다. 당연히 동료를 그렇게 만들고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자가
다가오는 것 아니겠는가.
제론은 두 사람의 목덜미를 콱 움켜쥐었다.
“으악!”
“크악!”
상상을 초월한 격통에 두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여전히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제론의 손에 목을
붙잡힌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서 공터 한가운데로 올 수밖에 없었다.
쿠당탕!
바닥을 꼴사납게 나뒹군 두 사람은 갑자기 몸이 움직이는 걸 깨닫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잘못 굴렀는지 온몸이
쑤셨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항의도 불만도 표할 수 없었다.
“거기 앉아서 기다려라. 도망가고 싶으면 가도 좋다.”
하지만 도망치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데 도망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얌전히 앉아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잠시 후, 제론의 심부름을 떠났던 사내가 헐레벌떡 돌아왔다. 그의 뒤에는 만신창이가 된 청년 하나가 비틀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데, 데려왔습니다!”
사내가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마치 잘했으니 상을 달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주변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 이게……!”
제론이 무심하게 발을 들어 올렸다.
뻐억!
“크악!”
사내가 뒤로 쭉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쿵!
“쿨럭!”
사내가 피를 토했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아직 멀쩡한 두 사람은 그 광경을 보고는 벌벌 떨었다.
정말로 무서웠다.
제론은 가만히 눈을 돌려 만신창이가 되어 따라온 청년, 바인을 쳐다봤다.
바인의 눈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 깊은 곳에서 넘실대는 독기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처럼
일렁였다.
제론은 바인을 보고는 다짜고짜 말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봐라.”
바인의 눈에 순간 의문이 담겼다. 하지만 이내 눈빛이 다시 원래대로 변했다. 스스로를 감추는 데 능한 자였다.
“저, 저같이 비천한 놈에게 그런 건 없습니다.”
제론이 피식 웃었다.
“정말 없나? 이 지긋지긋한 빈민굴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도, 막대한 돈을 벌고 싶은 욕심도 없나? 귀족이 되고
싶다거나 하는 바람도 없다고?”
바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감추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은 이상 다시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제론은 그의
진면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헤헤헤. 언감생심 그런 마음을 품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요. 헤헤헤헤.”
바인이 비굴한 표정과 자세로 멍청하게 웃었다.
제론은 그 웃음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섬뜩해 보여 바인은 하마터면 얼굴에 떠오른 웃음기를 지워
버릴 뻔했다.
“빈민굴의 왕이 되고 싶었잖아. 아닌가?”
바인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마치 얼굴에 균열이라도 가는 듯했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는 있나?”
바인이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더듬더듬 대답했다. 너무 정곡을 찔려서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앞으로 더 이상 이런 실수를 해선 안 된다.
“제, 제게 그, 그런 능력이 있을 리 어, 없지 않습니까. 헤헤헤.”
제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스퍼트 열 명만 수하로 부릴 수 있으면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바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다시는 놀라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제론이 피식 웃었다.
“고작 그 정도 꿈이 전부인가? 좀 더 큰 꿈은 없나?”
“크, 큰 꿈 말입니까?”
바인은 어느새 제론의 분위기와 대화에 말려들었다. 얼떨떨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대륙의 밤을 지배하겠다거나, 아니면 대륙의 정보를 한 손에 쥐고 흔들겠다거나 하는 것 말이야.”
“대, 대륙?”
바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륙이라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떠올려보지 못했다. 아니, 꿈도 꿀 수 없는
단어였다. 빈민굴도 아니고, 수도도 아니고, 왕국도 아닌 대륙이라니 말이다.
“어때? 생각이 좀 있나?”
바인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지금 들떴다가는 그대로 먹혀서 죽는다. 방심하는 순간 그렇게
된다는 걸 지금까지 너무나 많이 봐 왔다.
“제, 제가 그런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벌써 같이 일할 사람을 열 명이나 모았잖아? 아닌가?”
“저까지 고작 열한 명입니다. 대체 무슨 수로 대륙의 밤을 지배한단 말입니까.”
제론이 씨익 웃었다.
“할 마음은 있다는 뜻이로군?”
“하, 할 수만 있다면야 누가 그걸 거부하겠습니까.”
“빈민굴에 대한 모든 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면 장악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바인은 순간 이것이 바로 시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걸 넘지 못하면 자신은 끝까지 빈민굴의 쥐새끼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넘으면 정말로 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밤을 지배하는 어둠의 왕이.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렇게 맹렬히 머리를 굴려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바인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수많은
작전이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작전에 걸리는 시간을 계산했다.
“보름이면 끝낼 수 있습니다.”
“보름?”
의외였다. 제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인을 쳐다봤다. 제론이 마티를 통해 바인을 발견한 건 제법 오래되었다.
사실 수도의 유적을 장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견했다.
그동안 바인의 능력을 차근차근 확인해 왔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제론이 만들 정보 조직에 바인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다고 말이다.
“빈민굴의 모든 정보를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나온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예상보다 더 깊고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다면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
바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자신이 예상한 정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도 아직
듣지 않고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론이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따라와라. 재미난 걸 보여 주지.”
바인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제론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광경을 모두 듣고 본 두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이건
정말로 일대 사건이었다. 빈민굴은 물론이고 수도 전체가 발칵 뒤집힐 수도 있을 만한 사건 말이다.
“이, 이걸 어떻게 하지?”
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 사실을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빈민굴에서 어깨에 힘주고 사람들 괴롭히는 것만 할 줄 알았지, 실제로 뭔가를 꾸미거나 생각하는 일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일단 자리를 뜨자.”
두 사람은 황급히 자리를 뜨려다가 주위에 널브러진 동료들을 쳐다봤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눈빛에 지독한 살기가 흘렀다.
잠시 후, 두 사내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공터에는 피비린내만이 가득했다. 그곳에는 단 한 점의
생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바인은 할 말이 없었다. 대체 이 장소는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곳은 바인이
비밀리에 만든 공간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땅을 파내서 만들었기 때문에 누구도 알지 못할 거라 자신했다. 한데 제론이 너무나 당연하게
그곳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혼자서 만든 것치고는 제법 잘 만들었군.”
제론은 바인이 이미 이곳을 만든 다음 수도 유적을 연결시켰다. 그렇기에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더 놀랐다.
이곳은 바인이 자신의 집 바닥을 파내서 만든 공간이었다. 상당히 교묘하게 만들었기에 미리 알고 있지 않는 한,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대체 어떻게 안 겁니까?”
바인이 기가 막혀 물었다. 물론 제론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석판을 꺼냈다.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한쪽 벽을 꽉 채울 정도로 커다란 석판이 나타나자, 바인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두려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감히 딴 마음을 품어선 안 된다는 경각심이 뇌리를 계속 때렸다. 또한 일단 이렇게 엮였으니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한다.’
바인은 무조건 이번 시험을 멋지게 통과하고 말 거라고 다짐했다.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면 가능할 것이다.
벌써 빈민굴을 장악할 계획은 네 가지나 세워 놨다.
그중 무엇을 쓸지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정보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거기서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이리 와라.”
제론의 말에 바인이 서둘러 제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쪽 벽에 세워진 석판을 볼 수 있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판이었다.
“이게 뭡니까?”
“네게 정보를 줄 물건이지.”
“예?”
바인이 어이없는 눈으로 제론과 석판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 돌덩이에서 어떻게 정보를 뽑아낸단 말인가.
혹시 뭔가 자신이 모르는 마법이라도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인은 석판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만져
봤다. 하지만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사용법을 알려 줄 테니 똑똑히 기억하도록.”
제론이 석판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심장의 마나링이 맹렬히 가속했다.
위이잉!
제론은 석판에 손을 갖다 댔다.
번쩍!
바인은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침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빛나는 석판을 바라봤다. 맹세코 이렇게 놀란
적은 평생 처음이었다.
석판에 수십 개의 작은 화면이 떠올랐다. 각각의 화면은 빈민굴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이, 이, 이게 뭡니까? 대체 뭘 어떻게 한 겁니까?”
제론이 바인을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말했잖아? 빈민굴을 속속들이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주겠다고.”
바인은 홀린 듯이 석판을 바라봤다. 만일 이 화면이 비추는 장소를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혹은 사람을
임의로 지정해서 계속 따라다닐 수 있다면 보름이 아니라 열흘 안에 빈민굴을 장악할 자신이 있었다.
바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리고 눈앞에 선 제론이 신으로 보였다. 그에게 있어서 제론은 신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또한 꿈을 이뤄 줄 사람이기도 했다.

Chapter 3 테오스의 능력

제론은 느긋하게 호텔로 향했다. 이번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베니뉴스 호텔에 묵었다.
사실 제론은 이곳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 호텔에서 일하는 자들은 일반적인 종업원과는 많이 달랐다. 태도도
달랐고, 실력도 달랐다.
일반적으로 호텔에서 무력을 갖춘 종업원을 쓰지는 않는다. 호텔에서 무력이 필요할 때는 자체적으로 키운
경비병을 쓴다. 아니면 용병과 계약을 해서 쓰거나 말이다.
베니뉴스 호텔에도 그런 경비병이 존재했다. 그러니 호텔 종업원의 무력은 전혀 다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더 이곳에 방을 잡았다. 이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또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지만, 그래도 직접 몸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마티로는 어떤
마법을 썼는지 알아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직접적으로 마법진이 그려져 있지 않다면 말이다.
제론은 베니뉴스 호텔을 세세히 살피고 싶었다. 그랬기에 최상층 객실에 머물지 않았다. 최상층에는 정보 수집에
관한 마법진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난번에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머지 부분을 확인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마법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쪽으로 느낌이 흘러갔다.
베니뉴스 호텔에 사용된 마법은 지극히 일반적인 것들뿐이었다, 호텔을 보호하기 위한 몇 가지 장치와 편의를
위한 마법뿐이었다.
‘그렇다는 건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정보를 수집한다는 뜻인데, 그게 가능한가?’
정보 수집을 위해 곳곳에 사람이 숨어 있는 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마법을 쓰지 않고 정보를 모으려면 각
객실에 은밀히 사람이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베니뉴스 호텔에는 전혀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저 종업원이 언제나 귀를 열고 다닌다는 점이 유일하게
제론이 알아낸 것이었다.
그래서 제론은 더 알고 싶었다. 대체 마법적 장치 없이 어떻게 정보를 모으는지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잘못 짚었을 확률도 있었다.
어쨌든 확인해 보고 싶었다.
마법이 아니라면 마티를 이용해 충분히 찾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아직도 그걸 못 찾았다는
점이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만일 정말로 베니뉴스 호텔에 마법을 완전히 배제한 정보 수집 장치가 있다면 그걸 만든
자는 천재의 범주에 드는 사람일 것이다.
제론은 방 한가운데 앉아서 심장의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맹렬히 회전하는 마나링이 주변 마나를 장악했다.
일단 호텔에 걸린 마법부터 확인할 생각이었다.
샤아아아아!
제론의 몸에서 부드럽게 마나가 흘러나왔다. 마치 안개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마나가 인위적 마나의 흐름을
차근차근 장악했다.
호텔에 새겨진 모든 마법이 제론의 뇌리에서 철저하게 해체되었다. 제론은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혹시라도
건물의 구조를 통해 만든 마법진이 있을지도 몰라 더욱 세심히 살폈다.
물론 그런 고도의 마법진을 구현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제론의 감각을 피해 갈 마법진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역시 없군.”
몇 번이나 확인했다. 하지만 정보 수집에 관한 마법진은 전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즉,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모았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그걸 확인해야만 한다. 물론 마티를 최대한 잘 이용할 생각이었다.
제론은 함부로 태블릿을 꺼내지 않았다. 이 방은 감시당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겉으로 알 수 있는
일은 피해야만 했다.
‘일단 나가야겠군.’
이 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마법진을 확인한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젠 감시당할 필요가 없는
장소에서 마티를 이용해 차근차근 살필 생각이었다.
방에서 나간 제론은 곧장 호텔을 나섰다. 그리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모든 감각을 끌어 올려 혹시라도
미행하거나 감시하는 자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론의 발걸음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빈민굴로 향했다.
빈민굴에 들어선 제론은 바인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바인에게 준 석판은 제론이 직접 만든 아티팩트였다.
제론은 마티와 태블릿의 기능을 적절히 이용해 석판을 만들었다. 그것에는 초고대의 마법 지식이 아낌없이
들어갔다.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바로 제한이었다.
석판을 제대로 다루면 마티를 마음껏 조종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몇 가지는 철저히 차단시켰다.
당연히 제론에 관한 정보는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마티는 제론 근처에도 올 수 없었다. 당연히 마티를 통해
제론을 살피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제론은 마음 놓고 빈민굴에 들어왔다. 그리고 가장 인적이 없는 곳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중앙 유적으로
이동했다.
태블릿을 가장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곳은 역시 유적뿐이었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수천 개의 마티를 베니뉴스 호텔로 이동시켰다.
“화면 하나로는 힘든데?”
제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적 로비 곳곳에 수많은 화면이 나타났다. 허공에 떠 있는 화면도 있었고, 벽에
붙은 화면도 있었다. 하나같이 커다랬다.
화면의 수는 백 개가 훨씬 넘었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로비에 가득한 화면에 각각 하나씩 영상을 보냈다.
하나의 화면이 육십사 개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분할된 각각의 화면 하나에 마티 하나가 할당되었다.
한꺼번에 수많은 화면을 동시에 확인하는 건 사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했다. 당연히 제론도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각각의 마티를 일정한 공간을 할당해 규칙적으로 이동하게 하면 모든 화면을 돌아가면서 확인하는 게
가능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몇 개의 마티는 제론이 직접 조종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비밀 공간을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마티가 호텔 곳곳을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화면으로 보냈다.
제론은 로비 한가운데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이상한 점을 찾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태블릿을 조작해 몇 개의
마티를 직접 움직였다. 당연히 그 화면은 태블릿에 떴다.
“음?”
한참 조사를 하던 제론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호텔 유리창 옆에 작은 실 하나가 보인 것이다.
물론 모든 유리창에 실이 달린 건 아니었다. 딱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살짝 삐져나온 것에 불과했다.
제론은 마티를 움직여 실 근처를 세심히 살폈다. 화면을 크게 확대해서 하나라도 놓치는 것이 없도록 했다.
“실이 유리창에 붙어 있어?”
실이 삐져나온 곳은 정작 유리창에서 살짝 떨어진 곳이었다. 만일 그것만 보고 넘어갔다면 절대 몰랐을 것이다.
유리창에 실 한 가닥이 붙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은밀히. 만일 제론도 신경을 써서 살피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것이다. 그 정도로 티가 나지 않았다.
제론은 내친김에 나머지 모든 유리창도 조사했다. 마티가 있고, 확신이 있으니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모든
유리창에 실이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창에 쓰인 유리의 재질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유리창에 마법을 걸어 놓은 건 아니었지만, 유리
자체를 마법적 처리를 통해 만들었다. 아주 특별한 효능을 가지고 말이다.
제론은 그것이 어떤 효능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베니뉴스 호텔의 유리창은 소리를 모은다. 그리고 실을 통해
소리를 어딘가로 보낸다.
“일단 호텔 안에 있는 건 절대 아니야.”
누군지 정말로 치밀하게 만들어 놨다. 호텔에 의심스러운 공간을 만들지 않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감시나
조사에 대비했다.
제론은 마티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분명히 소리가 모이는 곳은 호텔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 추측은 사실로 드러났다.
베니뉴스 호텔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이 바로 그곳이었다. 호텔에 거의 붙어 있는 3 층 건물이었는데, 1 층은 고급
액세서리나 보석을 파는 상점이었고, 2 층과 3 층은 생활공간이 있는 전형적인 상점주택이었다.
제론이 찾는 장소는 그 건물 지하에 있었다. 잘 감춰진 방이 지하에 있었고, 호텔의 유리창에서 나온 모든 실은
그 방과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방에서는 열 명이나 되는 사람이 실 끝에 달려 있는 원통에 귀를 기울이며 정신없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을 적고 있었다.
그걸 발견한 제론은 손가락을 튀겼다.
딱!
로비에 쫙 펼쳐져 있던 모든 화면이 싹 사라졌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열 개의 마티를 그곳에 남겼다.
앞으로 그들이 적는 모든 내용은 고스란히 마티를 통해 태블릿에 저장될 것이다.
“그나저나 저 유리와 실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제론은 일단 태블릿을 통해 검색부터 했다. 웬만한 질문의 답은 태블릿이 가지고 있었다. 가끔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다 들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검색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제대로 된 키워드로 찾아야 하는데, 유리나 실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조작하던 제론의 눈이 반짝 빛났다. 드디어 찾은 것이다.
“이름부터가 완전히 다르니 찾을 수가 없지.”
제론은 수많은 검색을 시도한 끝에 네라와 레브마라는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찾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거의 쓰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법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데, 굳이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쓸 일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상황에 따라 유용한 물건이었다. 지금처럼 은밀히 정보를 수집하거나 할 때 너무나 효과적이지 않은가.
초고대에는 소리를 통해 정보를 모으는 일 자체가 어려웠다. 소리가 밖으로 새 나가지 않게 만드는 능력을 대부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론은 네라와 레브마에 대해 더 자세히 살폈다. 그것을 만드는 방법과 쓰임새에 관한 수많은 설명이 있었다.
역시 태블릿은 대단했다.
제론은 문득 베니뉴스 호텔의 주인은 어떻게 네라와 레브마의 존재를 알고 만들어 냈는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지.’
전혀 다른 물질로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사실 그럴 확률이 높았다. 네라나 레브마를 만들기
위해서는 초고대 문명을 모르면 절대 알 수 없는 물질이 필요했다.
포로스와 마찬가지로 테페룸을 가공해 만드는 물질이었기에 호텔 전체를 그런 물질로 뒤덮으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니 뭔가 새로운 물질을 개발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호텔의 주인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좀 알아봐야겠어.’
호텔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내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모은 정보가 어디로 가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마티를 이용하면 아주 간단히 알아낼 수 있다.
“좋아. 여기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
제론은 왠지 뿌듯했다. 새로운 걸 알아냈다는 즐거움이 말도 못할 충족감을 주었다.
태블릿을 아공간에 넣은 제론은 주위를 둘러봤다. 이왕 이렇게 중앙 유적에 온 김에 수련을 할 생각이었다.
12 층의 수련은 아직도 지지부진했다. 마티를 이용해 사방에서 쏟아지는 검은 구슬을 잡아내는 건 어찌어찌할 수
있었는데, 그걸 막거나 피할 방법이 없었다.
검술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거나 아니면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검술을 극한까지 끌어
올려서 소드 마스터가 된다 하더라도 과연 그걸 모두 막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쨌든 가자.”
제론은 곧장 12 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테오스를 소환했다.
수련은 바로 시작되었다. 수백 개의 검은 구슬이 테오스로 쏟아졌다.
제론은 사방에 뜬 화면을 통해 그것들을 잡아냈다. 화면 하나에 수백 개의 구슬이 보였다. 심지어는 낮은 궤도로
날아 다리를 노리는 구슬도 있었는데, 그조차 몽땅 보였다.
후웅! 후웅! 후웅!
테오스가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모든 구슬을 막아낼 수 없었다.
터더더더더더덩!
“크윽!”
바늘에 찔리는 듯한 통증이 온몸에 느껴졌다. 대체 어떻게 통증을 느끼게 만드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테오스가
아무리 뛰어나도 통각까지 연결할 리가 없는데 말이다.
‘이래서는 답이 없어.’
제론은 내심 하루라도 빨리 소드 마스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이 정도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상념에 젖은 사이 또 한 차례 구슬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더 막기 어려웠다. 딴생각을 한 대가는 아주 컸다.
터더더더더덩!
“크으윽!”
제론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문득 마법에 생각이 미쳤다.
만일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이따위 구슬쯤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바람 마법만 펼쳐도 구슬을 싹
날려 버릴 수 있을 테니까.
구슬이 또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려던 제론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심장의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당연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마법을 쓰지도 못했다. 테오스의 조종석에서 마법을 쓴다는 건
불가능했다. 조종석에 마법이 떨어지면 라이더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에 막아 놓은 것이다.
터더더더덩!
“크윽!”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구슬을 맞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맞으니 통증이 좀 덜했다. 무리하게 검을 휘두르다
맞으면 자세가 안정적이지 않아 더 아픈 모양이었다.
제론은 그렇게 대충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는 다시 마나링을 돌렸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오기가 생겼다. 이번에는 그냥 마법을 쓰지 않고 테오스가 쓴다는 생각으로 동화율에
신경을 썼다.
위이잉!
순간 기묘한 감각이 제론의 온몸을 덮쳤다.
“헉!”
마치 온몸을 마나가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제론은 깜짝 놀라 집중이 흐트러졌다. 그러자 마나도 사라졌다.
터더더더덩!
“크윽!”
통증이 훨씬 덜했다. 제론의 눈이 번득였다. 답은 검이 아니었다. 통증이 줄어든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안정감이
아니었다. 답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제론은 다시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이번에는 조금 전 감각을 확실히 느끼려 애썼다.
위이잉!
심장의 마나링이 가속되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마나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니, 계속해서 마나가
쏟아졌다. 제론은 그것이 마나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테오스의 조종석을 중심으로, 즉, 제론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나링이 회전했다.
제론은 쏟아지는 검은 구슬을 화면으로 확인하며 손을 뻗었다.
제론과 동화된 테오스도 손을 뻗었다.
화아악!
빛나는 마법진이 테오스의 손바닥 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지며 마법이 발현되었다.
콰우우!
거대한 불꽃이 쏟아져 나갔다. 불꽃에 닿은 구슬은 여지없이 녹아 버렸다.
터더더덩!
앞의 구슬은 싹 녹였지만 등은 방어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론은 거의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통증을 느낄
정신도 겨를도 없었다.
“마법을 쓸 수 있다니!”
제론은 멍하니 손을 들여다봤다. 기간트로 마법을 쓰다니.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솔직히 가능성을 느끼고 시도하면서도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한데 이렇게 어마어마할 줄은 몰랐다.
제론은 마나링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건 테오스가 가진 마나링이었다. 물론 몇 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마법을 펼쳐 낸 걸 보면 다섯 개 이상인 건 분명했다.
그러는 사이 다시 구슬이 쏟아졌다. 유적의 수련 시스템은 현재 제론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든 신경을 써 주지
않는다.
제론은 자연스럽게 테오스의 손을 들어 올렸다. 테오스의 마나링이 회전했다. 이번에는 집중해서 분명히 느꼈다.
제론과 마찬가지로 일곱 개의 마나링을 가졌다.
위이잉!
테오스는 양손을 옆으로 뻗었다. 두 개의 마법진이 각각의 손바닥 앞에 떠올랐다.
샤아아!
마법진이 부서지며 마법이 발현되었다.
콰우우!
두 개의 불꽃이 구슬을 휩쓸며 타올랐다. 하지만 모든 구슬을 완벽하게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터더덩!
제론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건 그저 연습일 뿐이었다. 제론이 펼칠 수 있는 마법은 그 종류가 엄청나게 많았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구슬쯤이야 얼마든지 막아 낼 수 있었다.
다시 구슬이 쏟아졌다. 제론은 이번에는 조금 전과 방법을 달리했다.
테오스의 발밑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이 부서지며 투명한 막이 테오스를 완벽하게 가뒀다. 실드였다.
터더더더더더덩!
제론의 예상대로 검은 구슬은 테오스의 실드를 전혀 뚫지 못했다. 모든 구슬을 완벽하게 막아 낸 것이다.
“끝인가?”
12 층 수련의 목표가 끝났다고 여긴 순간, 다시 구슬이 쏟아졌다. 제론은 반사적으로 실드를 펼쳐 그것을 막아
냈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이번에는 다른 층과 달리 빠르게 끝낼 수 있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실망은 실망일 뿐,
투지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제론은 사방에 떠 있는 화면을 통해 다시 쏟아지는 구슬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 뒤로 수많은 마법이 펼쳐졌다. 제론은 질리지도 않고 마법을 쏟아 냈고, 그때마다 모든 구슬을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구슬을 부숴도 12 층의 수련은 끝나지 않았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거지?”
구슬이 지금보다 훨씬 많이 쏟아져도 몽땅 막아 낼 자신이 있었다. 한데 그러면 뭐 하는가. 수련이 끝날 생각을
않는데.
제론이 생각에 잠긴 사이 다시 구슬이 쏟아졌다. 테오스의 조종석에 앉아 사방에 펼쳐진 화면을 둘러보던 제론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이렇게 화면이 많을까?’
마치 모든 사각을 없애기 위한 화면 같았다. 정확히 조종석에 앉은 라이더가 한눈에 모든 걸 확인할 수 있도록
화면이 떠 있었다.
제론은 반사적으로 마법을 펼쳤다.
마법진이 떠오르며 수많은 푸른 색 구슬이 생겨났다. 테오스의 마나를 통해 만들어진 마력탄이었다.
슈슈슈슈슉!
마력탄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마력탄을 제어하는 것은 엄연히 제론이었다. 제론은 테오스의 마나를 이용해
마력탄을 조종했다.
마력탄이 각각 방향을 잡아 날아갔다. 그리고 절반 정도가 까만 구슬에 명중했다.
퍼버버버버벅!
마력탄과 충돌한 구슬은 그대로 소멸되었다.
“이거였군.”
무려 12 층 공략이 그렇게 쉬울 리 없었다. 고작 테오스로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수련이 끝났다고
생각했다니.
12 층의 진짜 수련 목표는 테오스를 이용해 마법의 컨트롤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일단 목표를 알아냈으니 그 뒤로는 별거 없다. 될 때까지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가기만 하면 된다. 그건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사방에서 구슬이 쏟아졌고, 제론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테오스가 만들어 낸 마법진이 수백 개의 마력탄을 날렸다.
검은 구슬과의 싸움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제론은 행정청에서 모든 처리가 끝난 것을 확인한 뒤, 빈민굴로 향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행정청의 일 처리가
더뎠다. 열흘이나 걸린 것이다.
그 열흘의 시간 동안 에어스트 백작령에 대한 정보가 레늄 왕국 유력 가문으로 흘러들어 갔다. 제론은 그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레늄 왕국의 유력 가문은 대부분 수도에 저택을 구입해 지내고 있었다. 정계 활동을 하려면 수도에 있는 편이
훨씬 편했다.
덕분에 제론도 편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모든 정보가 그저 태블릿 안에 잠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정보를 써먹으려면 그것을 확인해 필요한
부분을 추려 내야 하는데, 제론에게는 그것을 할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바로 바인이었다. 제론은 상당히 오랫동안 바인을 관찰했다. 바인에게 관심을 가진 이후로
항상 마티를 붙여 뒀다.
그렇게 해서 결론을 내렸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느냐가 더 중요했다. 제론은 일단 바인을
믿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빈민굴에 들어선 제론은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예전에 왔을 때와는 분명히 달랐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계속 걸었다.
제론은 바인에게로 향하는 내내 위화감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알아냈다.
곳곳에 서 있는 사람이 문제였다. 그들은 뭔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챈 제론이 속으로 상당히 감탄했다.
‘날 감시하는 건가?’
그냥 감시만 하는 게 아니었다. 어딘가로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제론은 당장 이들이 뭘 하는지 마티를
통해 확인해 보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았다.
감시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 상당히 뛰어났다. 아마 제론의 감각이 특별히 예민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
부자연스러움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가 되기 직전이었다. 물론 그 앞에 놓인 벽이 워낙 높고 두꺼워 깨뜨릴 엄두도 못 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초고대 문명에서야 아직 익스퍼트지만 현실에서는 이미 소드 마스터였다. 아직 다른 소드 마스터를 본 적은
없지만 그들보다 월등히 강하면 강했지, 결코 떨어지지 않을 거라 자신했다.
그러니 실제로 바인이 구축해 놓은 빈민굴의 정보망은 거의 들킬 염려가 없었다. 고작 열흘 만에 이 정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제론은 과연 바인이 어디까지 했을지 궁금했다. 보름 안에 빈민굴을 장악할 수 있다고 장담했는데, 지금 이
모습만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바인의 거처로 가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테오스의 새로운 능력을 알아낸 것도 좋았고, 12 층 공략의 열쇠를
발견했으니 금상첨화였다.
거기에 바인의 능력도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것 같으니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감시의 눈길은 바인의 거처로 가는 내내 끊임없이 이어졌다. 곳곳에 빈민들이 있었고, 그들의 눈에 제론의
일거수일투족이 담겼다.
제론은 바인의 거처에 도착했다. 한데 예전과 달리 거처를 지키는 자가 둘이나 있었다. 둘 다 힘깨나 쓸 것처럼
덩치가 있었고, 인상도 우락부락했다.
제론이 다가가자 두 사람이 앞을 막아섰다. 제론은 굳이 힘을 쓸 이유가 없기에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안에서
바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한 분이시다. 안으로 모셔라.”
두 덩치가 그 말에 흠칫 놀라더니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몰라 뵈었습니다. 안으로 드십시오.”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제론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 덩치를 한 번씩 쳐다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바인이 어디서 구했는지 낡은 탁자를 앞에 놓고 서 있었다. 그리고 제론이 들어서자마자 즉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일은 잘 돼 가나?”
“아직 기한이 남은 걸로 압니다.”
아직 5 일이나 남았다. 하지만 오면서 분위기를 보니 거의 끝난 모양새였다.
“다 끝난 것 같던데?”
“아직 한 군데 남았습니다. 그들을 피해 없이 처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게 5 일인가?”
“그렇습니다.”
제론이 흥미로운 눈으로 바인을 쳐다봤다. 바인은 긴장감 어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는 제론이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다는 걸 안다.
무력은 어떤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자신에게 신비로운 아티팩트를 보여 준 것만으로도 그 힘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허튼수작이라도 부리면 이따위 빈민굴쯤 단번에 날아가 버릴 것이다.
“단번에 끝낼 수 있는 방법은?”
“두목들만 모아서 처리하면 됩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하지만 무력이 필요합니다. 비록 빈민이지만 두목들의 힘은 상당합니다.”
“어느 정도면 되나? 익스퍼트 기사를 기준으로 얘기해 봐.”
익스퍼트라는 말에 바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익스퍼트 기사 한 명만 와도 빈민굴을 완전히 뒤집어 버릴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를 해치우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빈민은 대부분 독한 구석이 있었다. 마음 독하게 먹고
갖은 비열한 수를 다 동원해 싸우면 기사를 죽이는 것도 가능했다.
바인은 잠깐 머릿속으로 계산한 뒤 말했다.
“세 명이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빈민굴 조직의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내가 하지.”
“그럼 오늘 저녁에 그들을 모으겠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바인을 보며 제론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들을 꼭두각시 인형처럼 취급하는
듯하지 않은가.
“언제든 원하는 때에 그들을 모을 수 있는 건가?”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그런 상황을 만드는 것 자체는 간단합니다.”
제론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상대편 조직의 두목은 총 열 명입니다. 그리고 전 그들 각자의 취향과 욕망을 알고 있습니다.”
“그걸 이용해 모은다고?”
“슬쩍슬쩍 정보를 흘려주면 됩니다. 아마 절대 거부할 수 없을 겁니다.”
“대단하군.”
제론은 감탄했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일 정말로 바인이 그걸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능력자였다.
바인이 그런 제론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 저를 만난 뒤에 빈민굴에 들르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제론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건 바인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바인에게 준 마티에는 제한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제가 가진 아티팩트로는 확인이 불가능한 영역이지만, 역으로 그것이 존재 자체를 말해 주기도 합니다.”
제론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기에 한편으로는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감탄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까지 알아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사실 단편적인 정보를 모으면 그것을 아우르는 큰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전 빈민굴을 샅샅이 살피면서 빈민굴
밖의 일도 조금씩 알아 가고 있습니다.”
바인은 그렇게 말하며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커다란 상자 하나가 있었다. 그 안에는 서류가 가득
들어 있었다.
제론은 바인이 그 안에서 꺼낸 수십 장의 서류를 받아 확인했다. 그리고 혀를 내둘렀다.
모두 수도 곳곳의 정보를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그중 절반 정도는 아직 제론도 모르는 것들이었다. 물론 알고자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하려면 제법 애를 써야만 한다.
“훌륭하군.”
제론은 그것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심혈을 기울여 찾은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다. 이 정도로
뛰어날 줄은 몰랐다. 제론의 시선이 바인에게로 향했다.
바인은 제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에 그저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처분을 기다렸다. 일단 던질 수 있는
건 다 던졌다.
사실 이렇게까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렇게 했다. 자신의 모든 걸 드러내서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함이었다.
제론은 한참 동안이나 바인을 쳐다보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바인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기에 그가 만일 딴
맘을 먹었을 때, 얼마나 엄청난 사태가 벌어질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위험을 안고서라도 바인을 놓치기 싫었다. 그만큼 바인은 뛰어난 구석이 있었다.
‘일단 정보 하나만큼은 앞으로 절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
어쩌면 굳이 제론이 요청하지 않아도 바인이 알아서 필요한 정보를 보내 줄지도 모른다.
“좋아. 일단 오늘 저녁에 그놈들이나 모아라. 일단 빈민굴부터 장악하자.”
바인이 환하게 웃으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 모험이었다. 제론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누가 후환을 살려 두겠는가.
“감사합니다!”
제론은 그런 바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쨌든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빈민굴을 장악한 열 개의 조직이 공중분해 되었다. 열 명의 두목은 목이 잘린 채, 각자의
조직으로 돌아갔다.
바인은 레늄 왕국의 수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빈민굴의 유일한 주인이 되었다.

Chapter 4 문두스

제론은 바인을 위해 빈민굴에 제대로 된 거처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마티로부터 받은 화면을 보여 주는 아티팩트도 훨씬 크게 여러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기 편하게 배치해
주었다.
아무리 빈민굴의 주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모든 빈민을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빈민도 엄연히 왕국의
백성이었다.
하지만 빈민들 위에 군림하는 건 분명했다. 게다가 바인은 이전의 다른 두목들과 달리 그들을 힘으로 다스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빈민은 바인의 말에 충실히 따랐다. 노예처럼 부리지는 않지만, 그들은 바인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제론은 바인에게 일단 수도의 정보를 맡겼다. 수도의 정보를 통해 레늄 왕국 전반에 걸친 모든 일을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실로 정확했다.
제론은 수도 유적에 있는 마티를 바인이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물론 제한을 걸어서 제론을 직접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빈민굴의 일도 있고 해서, 제론은 자신을 중심으로 반경 10 미터 안은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물론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바인은 모든 걸 알 수 있을 테지만, 그래도 직접 보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판단했다.
“주인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바인은 제론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가
보기에 제론은 아직도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게 모두 나오면 대체 어떤 힘을 발휘하실지…….’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다. 그리고 또 짜릿했다. 제론이 가진 바 힘을 마음껏 발휘해서 세상을 휘젓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받아라.”
제론은 바인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주머니 하나를 툭 던졌다.
바인은 발치에 떨어진 주머니를 보고는 대번에 그것이 무언지 알아챘다. 돈이었다. 정보 조직을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주머니를 들어 안을 확인한 바인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주머니를 떨어뜨릴 뻔했다.
“허억! 주, 주인님!”
“왜? 너무 적나?”
“아닙니다! 많습니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돈의 액수는 무려 100 만 골드였다. 이 정도면 빈민굴 전체를 정보 조직으로 만들고도 남을
정도의 액수였다.
물론 제론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고, 바인도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모자라면 바로 말해라. 또 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바인은 그렇게 대답을 했지만 모자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돈으로 정보 조직을 만들고 나면 향후의
운영비는 모조리 정보 조직을 통해 조달할 수 있었다.
바인은 이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을 가진 주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갑자기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수도의 정보 조직을 장악하는 것만이 아니다.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제론의 말에 바인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바인도 고작 레늄 왕국의 수도를 장악하는 걸로 끝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여길 시작으로 왕국 전체, 더 나아가
대륙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작정이었다.
최소한 정보 쪽에서는 최고의 조직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주인님께서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이름?”
제론은 바인을 쳐다봤다. 바인의 눈빛이 열망과 야망으로 일렁였다. 그 눈빛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제론이 입을 열었다.
“문두스. 세상이라는 뜻이다.”
“문두스…….”
바인은 몇 번이고 문두스라는 말을 되뇌었다. 이름 그대로 세상을 모조리 장악해 버리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빈민굴의 인구는 어느 정도지?”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는 않았지만 오십만 명이 넘습니다.”
“호오. 제법 많군.”
“수도 전체의 인구가 삼백만 명입니다. 사실 많은 수는 아닙니다.”
빈민굴에는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만 모여서 산다. 그런 사람이 무려 오십만 명이 넘게 있다는 뜻이다.
수도에 삼백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이 살고 있다지만 그중에서 그래도 비교적 사람답게 사는 사람은 삼십만
명도 안 될 것이다.
또 그 삼십만 명 중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채 일만 명도 안 될 것이다.
나머지는 매일매일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게 수도의 현실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이었다.
어쨌든 빈민이 오십만 명이나 된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었다. 오랜 전쟁이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빈민들 중에서 품성이 괜찮은 사람을 골라 봐라.”
“품성 말입니까?”
“되도록 사고를 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 만한 사람을 모아서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보내라.”
제론의 말에 바인이 난색을 표했다.
“사람을 모으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함부로 수도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건 문제가 완전히 다릅니다.”
“지금 당장 하라는 말이 아니다. 조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다음에 해도 된다. 그들을 인솔할 사람도 필요할
테니까.”
바인은 난감한 눈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빈민이라도 성문을 마음대로 나가는 건 곤란합니다.”
“수도에서 나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제론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이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제론에게는 폴타가 있었다.
마티가 활동하는 범위 안에서 두 군데를 잇는 게이트를 생성할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폴타를 이용해 만든 게이트의 존재를 타인이 알게 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거야 바인과 잘 상의하면 얼마든지
방법을 만들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텔레포트 게이트로 위장한 건물을 만든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제론의 영지인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엄청난 인구가 필요했다. 그곳은 아직 개발할 곳도 많으며, 그렇게 개발한
곳을 이용해 농사를 지을 노동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아직 영주성 근방의 평원도 다 못 쓰고 있었다. 금년이야 이렇게 넘어간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그 모든 땅을
이용해 농사를 지을 것이다.
그러려면 막대한 인력은 필수였다.
그뿐인가. 슬슬 개발을 시작할 예정인 암석 지대에도 막대한 인원을 투입해야만 한다. 개발이야 기간트를
이용한다 하지만 농사에는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암석 지대를 개간하면 그 뒤로 이어지는 바닷가에 항구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거기에도 막대한 인력이 필요했다.
항구도시를 만드는 것도 문제지만, 그곳을 채울 사람도 필요했다.
도시만 만들면 뭐 하는가. 거기에서 살아갈 사람이 있어야 한다.
제론은 그렇게 필요한 사람을 빈민굴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당장은 어려워도 정보 조직인 문두스가 자리를
잡으면 지속적으로 꾸준히 빈민을 조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은 인구를 얻어서 좋고, 빈민은 가난을 벗어던지고 사람답게 살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걸 익혀라.”
제론은 양피지 한 장을 건넸다. 바인은 그것을 받아들고 찬찬히 읽었다.
놀랍게도 바인은 글을 알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바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충 뭔가를 훈련하는 방법을 써 놓은 것 같은데,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정보원이 익히면 좋은 거다. 너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익힐 수 있을 테니, 다 익히고 확실히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가르쳐라.”
제론이 준 것은 고대의 수련법 중 하나였다. 은밀한 움직임에 도움이 되는 수련법이었다. 또한 단검을 이용하는
전투법도 함께 있었다. 물론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바인은 이 양피지 한 장이 그야말로 엄청난 보물이라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어쩌면 이것은 이 방 안을 가득 채운
저 아티팩트 만큼이나 대단할지도 모른다. 그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자신에게 많은 걸 해 준단 말인가.
“그럼 이곳의 일은 네게 모두 맡기마.”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바인은 밖으로 나가는 제론의 등을 존경과 경탄이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차례였다.
저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저 사람의 길을 밝혀 주고 싶었다. 나중에 저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섰을 때, 그 거친 길을 닦아 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 되고 싶었다.
바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묵묵히 돌아서서 방 안을 가득 채운 화면을 바라봤다.
일단 문두스를 최고의 정보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 먼저였다.

☆ ☆ ☆

수도의 일을 모두 끝낸 제론은 곧장 영지로 돌아갔다. 영지로 돌아가는 건 제론에게 있어서 가장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더구나 빈민굴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바인이 이미 제론이 아니면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장소를 만들어 둔
것이다. 또한 누구도 그곳을 감시하지 않았기에 제론이 언제 그곳에 들어가는지 또 나오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영주성 지하에 있는 중앙 유적의 로비에 도착한 제론은 곧장 위로 올라가려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는 몸 상태를
점검했다.
수도에서의 일정은 보름에서 한 달 정도로 계획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침식을 잊고 수련에 몰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물론 늦으면 늦을수록 다른 사람들이 고생하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12 층을 공략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우선
제론이 강해져서 유적의 힘을 제대로 받아야 뭐든 편해질 테니 말이다.
제론은 마티와 마찬가지로 폴타도 이곳 중앙 유적에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아니, 만일 다른 유적에 새로운
아티팩트가 존재한다면 그 모든 것이 이 중앙 유적에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중앙 유적은 말 그대로 모든 유적의 중심이었다. 또한 모든 유적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걸 얻기 위해서는 각 층을 클리어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적 로비에서 새로운 걸 찾으려 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이번에 절실히 느꼈다. 뭔가가 있다면 유적이
알아서 내줄 것이다.
마음을 정한 제론은 곧장 12 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수련에 푹 빠져들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구슬을 테오스 내에 떠 있는 화면을 통해 단숨에 파악한
다음, 마력탄을 만들어 구슬을 맞추는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이건 깨달음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련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슈슈슈슈슉!
쩌저저저저정!
새까맣게 쏟아지던 구슬이 일제히 박살 났다. 연달아 열 번이나 반복된 일이었다.
그 한가운데 테오스가 있었다.
12 층 역시 다른 층과 마찬가지로 클리어 조건이 지독했다.
처음에는 구슬을 한 번만 부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구슬을
마력탄으로 부쉈는데도, 또 구슬이 쏟아진 것이다.
구슬을 일제히 모두 부수는 건 굉장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또한 모든 화면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시야도
중요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맞아떨어져야만 간신히 이뤄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연달아 구슬이 쏟아지면 그걸 몽땅 막아 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실제로 제론은 다시 12 층 공략을 시작한 지 고작 이틀 만에 모든 구슬 부수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이 안에 들어온 지 정확히 한 달 하고도 이틀이 지난 것이다.
제론은 이제 언제 어떻게 구슬이 쏟아진다고 해도 몽땅 부숴 버릴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열 번이나 반복해서
구슬을 부쉈다.
구슬은 매번 나올 때마다 속도나 위력이 달랐다. 게다가 어느 때는 흔들리며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제론은 그 어떤 구슬도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위이이이잉!
나직한 소음과 함께 기둥 하나가 솟았다. 그것을 본 제론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테오스를 돌려보냈다.
“후우. 하여튼 쉬운 수련이 없군.”
확실히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수련을 통해 제론은 정말로 큰 것을 얻었다. 많은 화면을 통해 전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은 것이다.
이는 혼자서 여러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했다.
제론은 상념을 접고는 기둥을 향해 걸어갔다. 테오스를 얻을 때를 제외하고, 기둥의 모습은 언제나 같았다. 물론
마티가 나왔을 때는 기둥이 없었다.
이번에도 기둥은 똑같았다. 제론의 허리에 오는 높이, 그리고 가운데에 물건이 놓일 공간이 있었다.
“이게 뭐지?”
그 안에는 인형이 들어 있었다. 은색 금속으로 만들어진 인형이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기괴했다. 인간
모양이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얼굴에 눈코입도 없었고, 옷도 없었다. 그저 은을 녹여 인간 모양의 틀에 넣어 만든 인형 같았다.
한데 문제는 그 인형을 어디에 쓰는 건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인형의 사용법이 담긴 카드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론은 일단 인형을 집었다. 크기는 사람 팔뚝만 했다. 작은 크기는 아니었다.
인형을 집자, 기둥이 사라졌다. 제론은 인형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펴봤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인형이었다.
제론은 잠깐 고민하다가 인형을 든 채, 13 층으로 내려갔다. 이동은 즉시 이뤄졌다.
화아악!
강렬한 빛이 제론을 감쌌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광경은 참으로 단출했다.
13 층은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었다. 천장이 제법 높았고, 사방 100 미터쯤 되는 넓이의 방이었다.
제론은 이곳은 뭘 하는 공간인가 궁금해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높이를 생각하면 테오스를 소환하는 곳은 아니었다. 몸으로 수련하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손에 든 인형에서 갑자기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인형이 갑자기 요동치며 손아귀를 빠져나가려 했다. 제론은 순순히 인형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기에 힘을 꽉 줬다.
하지만 결국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인형이 갑자기 커진 것이다.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제론만큼이나 커져 버린 은빛 인형이 보였다.
“뭐지?”
위이잉!
인형의 손이 쭉 늘어나며 검처럼 변했다. 아니, 그렇게 늘어난 검을 인형이 꽉 쥐고 있었다. 인형은 제론에게
검을 겨눴다.
제론은 즉시 아공간에 있던 검을 꺼냈다. 황제 검술을 수련하던 테페룸 검이었다.
역시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12 층을 클리어하고 얻은 인형은 13 층 수련에 필요한 것이었다.
제론이 검을 겨누자 인형이 달려들었다.
쩡!
어마어마한 파장이 사방을 휩쓸었다. 인형의 검격은 엄청나게 강력했다. 제론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며 여력을
해소했다.
그 뒤로 인형의 파상 공세가 시작되었다. 제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를 악물고 그것을 막고 피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끝없이 수련이 이어졌다.
수련은 제론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온몸의 마나를 바닥까지 긁어서 써 버렸다. 마법은 일부러 쓰지
않았다. 왠지 마법을 쓰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후우. 이거 힘들군.”
제론은 가만히 서서 검을 겨누고 있는 인형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검술
수련을 이곳에서만 할 수 있다면 굳이 가지고 갈 필요가 없었다.
제론은 곧장 로비로 올라갔다. 그리고 몸을 깨끗이 씻고 영주성 지하 수련장으로 이동했다.
한 달이 훨씬 넘게 자리를 비웠던 영주의 복귀였다.

☆ ☆ ☆

“영주님!”
바이스가 소리쳤다. 제론은 살짝 미안한 표정으로 바이스를 못 본 척 집무실로 슥 들어가 버렸다.
“영주님!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바이스가 후다닥 제론의 뒤를 따라 영주의 집무실에 들어갔다.
“좀 늦었지?”
“한 달 하고도 보름이나 지났습니다! 어떻게 그게 조금입니까!”
“하하. 별일은 없었지?”
제론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바이스는 집요했다. 제론이 없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던가.
“대체 그동안 뭘 하신 겁니까? 영주님이라면 그저 헛된 시간을 보내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정보 조직 하나 만들었어.”
바이스가 흠칫 놀랐다. 고작 한 달 좀 넘는 시간이었다. 그런 짧은 시간 동안 대체 어떻게 정보 조직을 만든단
말인가.
하지만 제론은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즉, 진짜로 그걸 해냈다는 뜻이었다.
바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그 정도라면 한 달이 아니라 두 달, 세 달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걸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지는 차치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면 수도에 만드신 것입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우리의 적이 슈린 공작가니, 수도에 본거지를 두고 차츰 슈린 공작령 쪽도 손을 댈 예정이다.”
“알겠습니다.”
바이스는 일단 그렇게 넘어갔다. 확실히 슈린 공작가에 대한 일은 미리 준비해야만 한다. 또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얼마 전 있었던 영지전도 슈린 공작가의 작품이었다. 그때야 간신이 넘어갈 수 있었지만, 만일 다시 훨씬 큰
힘으로 일을 벌이면 막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영주님, 며칠 전에 왕궁으로부터 초대장이 왔습니다.”
“초대장?”
제론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바이스가 품에서 화려하게 꾸며진 초대장을 꺼냈다.
이번에 왕궁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파티가 열리는데, 거기에 초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풍년 기원 파티?”
“매년 이맘때 열리는 전통 있는 파티입니다.”
제론은 기억을 더듬어 봤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몇 번 참석했던 것 같기도 했다.
“보잘것없는 가문의 경우 초대장을 받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풍년 기원 파티는 큰 농지를 가진 가문과 그걸 유통하는 상단을 보유한 가문 간의 친목을 다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날 초대한 걸 보니, 우리 영지의 상황이 좀 퍼지긴 했나 보군.”
“예. 언제까지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쓸모없는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로 만들었다고 사방에서 쏟는 관심이
상당합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쯤은 처음 황무지를 개간하고 수로를 만들 때부터 예상했다.
더구나 이제 봄도 거의 다 지났다. 슬슬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평원에 심은 작물이 이제 제법 자라서
푸른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역시 지력이 상당한 곳이라서 그런지 작물이 자라는 속도가 엄청났다. 이대로라면 다른 지역의 작물에 비해 훨씬
많은 수확이 가능할 것이다.
“금년에 인력을 더 확보하면 내년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곡식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이스의 말에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다. 새로 개척한 평원은 엄청나게 넓었다. 사실 웬만한
백작령보다 훨씬 넓었다.
그렇게 넓은 땅이 몽땅 농사가 가능한 평원이었다. 그것도 지력이 엄청난 옥토였다.
내년부터는 레늄 왕국 귀족 간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농사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말이다.
“감시가 중요하겠군. 농지에 불이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말이야.”
“그래도 수로가 곳곳에 있어서 불이 크게 번지기는 어려울 겁니다.”
“작정하고 불을 지르면 아무리 수로로 나뉘어 있어도 소용없어.”
“명심하겠습니다.”
바이스는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지가 갑자기 넓어지는 바람에 병력이 너무 모자랐다.
지속적으로 새로운 병사를 뽑고는 있지만 모이는 속도가 더뎠다. 이대로라면 필요한 병력을 모으는 데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인구도 문제였다. 아직까지는 꾸준히 난민을 흡수하고 있어서 괜찮지만, 나중에 왕국이 안정되면 대번에 인구
증가가 느려질 것이다.
“어쨌든 초대를 했으니 가 보긴 가 봐야 하는데…….”
제론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파티에 참석해 봐야 슈린 공작가의 견제만 받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무력이야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였다. 레늄 왕국의 모든 기사가 달려들어도 두렵지
않았다. 얼마든지 상대하다가 몸을 빼서 도망칠 수 있었다.
수도에서는 기간트를 쓸 수도 없으니 제론을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봐도 된다.
하지만 꼭 무력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다른 비열한 방법을 동원하면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당할 수 있었다.
“참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왕실의 심기가 불편해지겠지요.”
그건 곤란했다. 나중에 영지를 제대로 발전시켜 큰 힘을 가지게 된 이후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몸을 사려야
한다. 아직 에어스트 백작령은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왕실에서 내가 참석했는지 아닌지 알 수나 있을까? 엄청난 수의 귀족이 참석할 텐데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걸?”
“잊으셨습니까? 영주님은 붉은 학살자입니다.”
제론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자신에 대한 정보가 그대로 왕실로 들어갔을 것이다. 군부에서 보고를 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는 얘기는 다른 귀족들 역시 제론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웬만한 유력 가문에서는 다 안다고 보면
틀림이 없으리라.
“이번 파티를 기다리고 있었군.”
“아마 그럴 겁니다.”
제론은 파티에서 벌어질 상황을 대충 예상해 봤다. 아마 수많은 귀족들이 접근할 것이다. 또한 왕실에서도 접근할
것이다.
“곤란하게 됐군.”
“곤란하실 건 없습니다. 그저 다 거절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되나?”
“어차피 백작령의 영주님을 옭아맬 수는 없습니다.”
확실히 그건 그렇다. 게다가 제론은 아직 영지를 제대로 정비하지도 못했다. 그걸 핑계로 빠져나가면 명분도
충분했다.
“아, 그건 그렇고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바이스가 의아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론의 말에 그 의아함이 두 배로 커졌다.
“유적에 대해서 좀 조사해 줘.”
“유적 말입니까?”
“그래, 유적. 일단 우리 레늄 왕국에 존재하는 유적부터 조사한 다음, 다른 왕국의 유적도 차근차근 알아봐.
위치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상황까지 전부.”
바이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세상에 유적이 한두 군데인가. 더구나 아직도 유적 개발은 전 대륙에서 활발하게
진행 중이었다.
한데 그 모든 정보를 조사하라니, 대체 자신의 몸이 몇 개라고 생각하는 건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여, 영주님…….”
“급하게 하란 말은 아니야. 일단 우리 왕국에 있는 유적은 금방 끝낼 수 있잖아. 그다음에 나머지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해.”
바이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제론이 이렇게까지 부탁을 하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시작해 보겠습니다.”
돌아서서 나가는 바이스의 어깨가 축 처졌다. 막대한 업무량에 지친 것이다.
제론은 더 많은 인재의 영입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바인에게 연락해 봐야겠어.”
바인이라면 에어스트 백작령에 도움이 되면서도 배신하지 않을 든든한 인재를 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일단 소파에 앉아 쿠션에 몸을 묻었다.
사실 유적을 알아보는 것은 너무 늦었다. 더 일찍 유적을 찾아 돌아다녔어야 했다. 하지만 여건이 허락치 않았다.
영지 일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서 일단 이쪽에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여유가 생겼다. 바인이 인재를 더 찾아오면 훨씬 많은 시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다른 유적을 돌아다니며 모든 유적의 지하에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얻을 계획이었다.
제론은 각 유적에 모두 마티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거대한 정보망을 만들 수 있었다.
그 모든 정보망을 바인이 아우를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만일 대륙을 하나의 정보망으로 이을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각 유적 간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이었다. 유적만 연결할 수 있다면 제론은 대륙 곳곳을
순식간에 옮겨 다니는 게 가능해진다.
하지만 제론이 이렇게 새 유적을 찾아내려는 이유는 그곳에 지금까지 없었던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수도 유적에 있던 게이트 생성기, 폴타 같은 것들 말이다.
새로운 폴타를 얻어도 좋고, 또 전혀 다른 뭔가를 얻어도 좋다. 그것이 무엇이건 정말로 유용한 아티팩트일
것이다.
“그나저나 유적이 모두 몇 개나 되는 걸까?”
이미 발견한 유적의 수도 상당하다. 제론이 아는 것만 해도 다섯 개나 된다. 그중 세 개는 이미 연결을 완료했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개는 가 보지도 못했다. 그저 이름만 들었을 뿐이었다.
워낙 막대한 유물이 나와 그것을 발견한 가문이 훨훨 날아오르고 있기에 레늄 왕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유적들이었다.
‘기회가 되면 거기도 가 봐야겠군.’
발굴이 끝난 유적은 대부분 관광지로 활용한다. 물론 삼엄한 경계를 한다. 혹시라도 유적을 훼손하거나, 아니면
미처 발굴하지 못한 숨겨진 아티팩트를 누군가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론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일단 유적에 들어가기만 하면 빠져나오는 건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까.
물론 그곳에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제론의 생각이 유적에서 파티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풍년 기원 파티라…….”
제론은 왠지 파티랑은 어울리지 않는 이름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파티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편안한 소파 쿠션의 감촉에 제론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Chapter 5 파티

“그냥 그렇게 혼자서 가신단 말씀입니까?”


바이스가 어이없는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대체 무슨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혼자서 가시면 대체 누가 영주님의 시중을 들겠습니까? 최소한 시종은 몇 명 데리고 가셔야지요. 또한 호위
기사도 최소한 셋은 데리고 가셔야 합니다.”
“내게 호위가 필요할 것 같은가?”
사실 제론도 바이스가 왜 이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제론의 가문도 예전에는 슈린 공작가가 견제할 정도로 잘
나갔다. 그렇기에 외부에 보이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고작 파티에 참석하는 것 때문에 몇 안 되는 기사를 영지에서 빼낼
수는 없었다.
만일 그 소식이 슈린 공작가의 귀에 들어간다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가뜩이나 영지가 아직도 어수선한데, 여기서 또 수작이 들어온다면 혼란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영지전에 대한 대비는 되어 있나?”
“일단 병사를 지속적으로 모집하고 있습니다. 라이더 양성도 순조롭습니다.”
“그래? 잘 됐군.”
“일단 기본을 갖춘 수련 기사의 경우 실바를 지급해서 심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딱 제론이 원하던 바였다. 실바로 실력을 키운 뒤, 제대로 된 라이더가 되면 크라테르나 카타락타를 지급해서
감을 키우는 게 효과적이었다.
상대적으로 수리도 실바가 훨씬 쉬우니 말이다.
“그보다 세나가 문제입니다.”
“세나가 왜?”
제론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불과 얼마 전에 세나를 만났다. 그때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세나는
여전히 열의에 불타고 있었고, 제론을 뜨거운 눈으로 바라봤다.
“기간트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보조 엔지니어가 필요한 시기가 훨씬 지났습니다.”
“적당한 사람이 없나?”
“영지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영입을 하거나 직접 키워야 할 것 같습니다.”
엔지니어만 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마법사도 있어야 한다. 세나처럼 뛰어난 엔지니어면서 동시에
마법도 가능한 사람은 대륙을 통틀어도 몇 명 없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아카데미 졸업생을 영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은 유력 귀족 가문이 싹
쓸어갈 것이다.
큰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일수록 엔지니어가 많이 필요했다. 그만큼 많은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에어스트 백작령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는 엄청나다. 그걸 세나 혼자서 몽땅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일단 용병 쪽이라도 선을 대서 알아봐.”
“알겠습니다.”
“당장 급한 불부터 끄자고. 그리고 슬슬 우리도 아카데미 졸업생을 끌어들이는 게 좋겠어.”
“성적이 뛰어난 사람은 이리로 오지 않을 겁니다.”
제론이 씨익 웃었다.
“당연한 소리를. 우리가 원하는 건 그런 사람이 아니야. 가능성을 보고 투자를 해야지.”
바이스는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 뒤에 가능성이 열리겠습니까?”
“그걸 선별하는 게 핵심이야. 걱정 마.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예? 그걸 어떻게…… 아! 그 새로 만드신 정보 조직을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바이스는 그것을 보다가 아차 싶어서 서둘러 따라 나갔다.
“영주님! 그냥 가시면 안 됩니……!”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따라 나갔는데도 제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문을 통과하면서 그냥 사라진 것
같았다.
바이스는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었다. 또 이런 게 제론의 매력 아니겠는가. 과연 혼자
파티에 가서 뭘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휴우. 옷이나 제대로 갖추실 수 있으시려나…….”

파티까지는 아직 시간이 열흘 정도 남았다. 보통은 그동안 파티에 대한 준비를 하겠지만, 제론은 그러는 시간
자체가 아까웠다.
제론의 선택은 유적 13 층 공략이었다.
검술이 정체된 지 제법 오래되었기에 13 층 수련에 상당한 기대를 가졌다. 어쩌면 정체된 검술이 한 단계 나아가
진정한 소드 마스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3 층의 수련실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사람 모양의 인형이 검을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제론이 그 앞에 서자,
갑자기 온몸이 빛나더니 곧장 달려들었다.
검을 뽑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었다. 제론은 수련 시작 전에 잠깐 방심했다가 낭패를 당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은빛 기사는 언제나 제론의 빈틈을 노렸다. 그것은 대련 중에도 수시로 나타났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그와 싸우면서 점차 빈틈을 줄여 나갔다. 또한 방심이라는 단어를 뇌리에서 천천히 삭제해
나갔다.
은빛 기사의 공격은 지극히 단순했다. 화려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직선적인 움직임이 전부였다. 하지만 거기에
속도와 힘이 붙으니, 위력이 장난 아니었다.
또한 한 번 검을 찌르거나 휘둘러도 상상을 초월하는 궤적을 그렸다. 언제나 제론이 가장 막기 어려운 곳이나
빈틈을 정확히 공격했다.
제론은 은빛 기사를 상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기초 검술만 쓰는구나!’
은빛 기사가 쓰는 검술은 놀랍게도 기초 검술이었다. 제론도 모두 아는 단순한 검술이었다. 기초 검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검격과 마나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완벽하게 일치되었을 때, 가장 큰 속도를 낼 수 있고, 또 가장 큰 파괴력을 가진다.
제론은 6 일 동안 은빛 기사와 대결을 펼쳤다. 그리고 숙제 하나를 얻었다.
앞으로 기초 검술을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뜯어서 확인하기로 했다.

유적 간 통로를 통해 단숨에 수도로 이동한 제론은 느긋하게 걸어갔다.


일단 마차를 구해야 한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음에도 이렇게 파티 일정을 일찍 알려주는 이유는 준비할 것이
제법 많기 때문이었다.
수도에서 먼 곳에 위치한 영지의 경우, 텔레포트 게이트로 이동하는 시간에서부터, 또 게이트를 몇 번이나
이용해야 수도에 도착이 가능했기에 여유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더구나 텔레포트 게이트로 마차를 함께 이동시키는 사람은 없었다.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어마어마한 비용이
필요했다.
수행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텔레포트를 이용할 때마다 들어가는 돈이 엄청났다. 그래서 아예 마차로 여행하듯
이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보통 1 개월 전에 일정을 잡아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보통 유력 가문의 경우 수도에도 저택이 있었다. 그렇기에 상당히 여유로웠다. 하지만 제론 같은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전혀 걱정할 건 없었다. 마차야 얼마든지 구입이 가능했고, 수행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론은 수도의 용병길드로 향했다. 수도에서 인력을 구하기 가장 쉬운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물론 정말로 쓸
만한 사람을 구하려면 비용이 상당했다.
용병길드에서 적당한 마부를 구한 제론은 마차까지 구입한 후, 그것을 타고 왕궁으로 향했다.
파티 일정이 잡히면 그때부터 초대장을 가진 가문의 경우 왕궁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수행원까지 하면 한
가문에서 오는 인원이 상당했다.
하지만 왕궁은 크고 넓었다. 그쯤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제론을 실은 마차가 힘차게 왕궁으로 달렸다. 용병길드에서 파견 나온 마부는 목적지가 왕궁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긴장으로 덜덜 떨었다.
그리고 왕궁에 초대될 정도의 귀족이 대체 왜 마부 따위를 구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제론을 태운 마차는 무사히 왕궁으로 들어갔다. 물론 수문 기사의 비웃음 어린 눈빛을 좀 받긴 했지만
말이다.

왕궁의 제 4 시종장은 살짝 의심스러운 눈으로 눈앞에 선 사내를 바라봤다. 하지만 말로 그 의심을 끄집어낼 수는
없었다.
보통 시종장은 귀족이었다. 하지만 작위를 가진 귀족에 비할 수는 없었다. 왕궁에는 총 일곱 명의 시종장이
있었고, 그중 제 1 시종장이 나머지 시종장을 거느렸다.
각각의 시종장은 수백 명의 시종을 손끝으로 부리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왕궁에 들락거리는 귀족을 만나
그들에게 시종과 거처를 분배하는 역할도 했다.
4 시종장은 비교적 관심도가 높은 귀족을 주로 맡았다. 한데 눈앞에 선 사내는 아무리 잘 봐줘도 몰락귀족에
가까웠다.
하지만 몰락귀족을 왕궁의 파티에 초대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둘 중 하나였다.
상부의 실수로 초대장을 보낼 사람을 잘못 선정했거나, 몰락귀족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
물론 4 시종장은 그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 두었다. 어떤 상황이건 냉정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정중히 요청했다.
“초대장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만일 유력 가문의 가주나 자식들에게 같은 행동을 했다면 상당한 결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4 시종장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닐 거라고 판단했다.
제론은 대수롭지 않게 초대장을 건넸다. 사실 이런 상황이 결례가 된다는 것쯤 제론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래도 상대의 사정을 이해할 만한 아량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정작 제론은 그런 것이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여기기도 했고 말이다.
이는 가문이 몰락하고 유적을 발견했으며 전쟁을 겪고, 영지를 경영하는 모든 일을 거치며 서서히 확립된
가치관이었다.
4 시종장은 초대장에 적힌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이라는 이름에 속으로 헉 소리를 삼켰다.
에어스트 백작은 최근 가장 뜨겁게 떠오르는 이슈였다.
그가 이번 전쟁의 영웅이나 다름없는 붉은 학살자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최대 이슈였는데,
최근 영지전을 통해 주변 영지를 병합하면서 레늄 왕국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영지전 후 제론이 주변의 산맥이나 암석 지대와 해변까지 영지로 신청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매년
납부해야 할 세금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지만, 어쨌든 왕국 최대의 영지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자잘한 소문이 그를 잔뜩 따라다녔다. 당연히 왕궁에서 초대할 만한 사람이었다.
4 시종장은 더없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초대장을 돌려주었다. 우아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행동이었다.
“환영합니다, 에어스트 백작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시종장은 그렇게 말하며 제론의 수행원이 혹시 있나 살폈다. 처음 제론을 만나면서 다 확인했지만 어쩌면 자신이
잘못 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제론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수행원은 없으니 나 혼자 적당히 지낼 수 있는 방이면 되오.”
제론의 말에 시종장은 속으로 뜨끔했다. 사실 처음 제론을 보자마자 그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정에
그걸 드러낼 수는 없는 일.
“제가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수행원이 없으면 불편하실 테니 제가 최대한 시종을 많이
보내드리겠습니다.”
시종장은 물 흐르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제론을 거처로 안내했다.
제론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상당히 감탄했다. 역시 왕궁의 시종장은 달랐다. 속마음이 전혀 얼굴에 드러나지
않으니 말이다.
만일 제론에게 왕궁 파티의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 보이는 시종장의 모습이 진심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시종장은 제론을 제법 그럴듯한 거처로 안내했다. 그리고 지내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열 명이나 되는
시종을 붙여 주었다.
그들은 제론이 왕궁에서 지내는 동안 수족이 되어 움직일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낼 수도 있었다.
열 명의 시종은 알아서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제론은 그저 침실에 있는 끈 하나만 당기면 끝이었다. 그러면
언제든 시종 하나가 달려왔다.
제론은 거처에서 한 발도 나가지 않았다. 그저 침실에서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아직 파티가 시작되려면 며칠 더 있어야 한다. 만일 제론이 은빛 기사와의 싸움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유적에서 수련해야겠지만, 지금은 딱히 장소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침실을 나가지 않았다.
밥은 때가 되면 알아서 갖다 줬다. 또한 밤이 되면 시종들이 알아서 목욕물도 준비를 했다. 제론은 딱히 그들을
제약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열 명의 시종은 제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역할도 함께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제론은 딱히 감출 게 없었기에 그냥 내버려 뒀다.
제론은 그렇게 파티 전날까지 기초 검술을 연마했다.
처음에는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다시 걸음마를 연습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초 검술을 마스터한다는 것은 검의 흐름과 마나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제론은 분명히 그렇게 했다고
믿었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검과 마나가 일치되었다고 느낀 건 제론의 착각이었다. 아니, 그때의 수준으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경지가 높아지지 않으면 그걸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니까.
그래서 다시 기초 검술을 연마하는데도 모든 것이 새로웠다. 검과 마나가 미묘하게 흐트러지는 걸 알아차리는
것도 쉽지 않았고, 알아차리더라도 그걸 일치시키는 건 더 힘들었다.
요는 마나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컨트롤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제론에게는 아직 그 정도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제론은 실망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이걸 이뤄야 검술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파악했기에
오히려 의욕에 불탔다.
기초 검술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가장 정직한 검격으로 이루어진 검술이었다. 물론 그건 겉모습뿐이었다. 기초
검술에서 검술의 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나의 흐름이었다.
그렇기에 식사나 목욕물을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가끔 제론이 수련하는 모습을 훔쳐본 시종들도 그저 열심히 검을
휘두른다고만 생각했다.

☆ ☆ ☆

“그러니까 아직도 침실에서 검만 휘두르고 있단 말이냐?”


“예. 가끔은 밥도 거를 때가 있습니다.”
시종의 보고에 4 시종장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도 그렇게까지 열심히 검을
수련하지 않는다.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도 결코 기간트를 이길 수 없다. 그렇기에 검술 수련을 하는 것보다는 그 시간에 기간트를
훈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데 하루 종일 검술 수련이라니, 기도 차지 않았다.
“사교라는 단어를 알고 있긴 한 건가?”
파티 시작 전에 미리 다른 귀족을 만나서 인사도 나누고 대화를 통해 친목도 다져야 향후 영지를 경영하거나
가문을 이끌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
“애송이는 애송이로군.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티가 팍팍 나.”
시종은 시종장의 말에 그저 고개만 살짝 조아린 채 서 있었다. 시종장은 그런 시종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다시 계속 지켜봐라. 혹시라도 누굴 만나는지, 또 가능하다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봐. 어쩌면 알아서
그쪽으로 찾아가는 귀족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시종이 물러가자 시종장은 즉시 어딘가로 향했다. 그에게 언제나 활동비를 두둑이 챙겨 주는 슈린 공작가의 영식,
파인트 폰 슈린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몇 명 더 만나야 한다. 다들 그에게 활동비를 챙겨 주는 귀족이었다.
그렇게 제론에 관한 소문이 또 여기저기로 흘러들어 갔다.

☆ ☆ ☆

파티가 열리기 전날, 제론은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백작님,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못 올 곳에 온 건가?”
“당연히 아닙니다.”
찾아온 사람은 벨루스 백작이었다.
“거기 앉아도 되겠지?”
벨루스 백작은 수행원도 없이 혼자서 제론을 찾아왔다. 제론은 그 점이 좀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리에 앉은 벨루스 백작이 제론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세나는 잘 지내고 있나?”
일단 딸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 벨루스 백작은 소소한 대화를 계속 이어 갔다.
제론은 벨루스 백작이 그저 인사나 하자고 찾아온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말을 빙빙 돌리고
있는 이유를 찾아봤다.
‘아, 저놈들 때문이로군.’
이 방을 주시하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일단 열 명의 시종이 일을 하는 내내 귀를 크게 열어 두고 있었다. 아마
이 방 근처에도 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천장에 숨어 소리를 모으는 마법진까지 이용해서 도청을 하는 자도 있었다. 이 방에서 무슨
말을 하건 다 누군가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답답하군요. 정원 산책이라도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제론의 제안에 벨루스 백작이 제법이라는 듯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지.”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간다고 하자, 시종은 물론이고 천장에 숨어 있던 자도 크게 당황했다. 일단 정원으로 나가면
그들이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벨루스 백작은 정원을 한 바퀴 돌며 유심히 주변을 살폈다. 제론과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 호위 기사까지
두고 왔다.
“일단 당장은 정원에 아무도 없는 것 같군요. 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벨루스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조심성이 지나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네. 사실 나보다 더 조심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도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네.”
그렇게 말하는 벨루스 백작도 영지에 있지 수도에서 지내지 않는다. 물론 수도에 저택은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내가 수도에 오지 않고 영지 경영만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세. 난 답답해서 그런 건 싫더군.”
그래서 수도의 귀족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그들은 눈 감으면 코를 싹둑
베어 갈 정도로 잔인하고 냉정했으며, 음흉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마틴 준남작이 도망쳤네.”
제론은 놀라지 않았다. 마틴 준남작을 죽인 것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그자가 슈린 공작가에 붙은 것 같네. 얼마 전 자네 영지에서 벌어진 영지전도 그자가 슈린 공작가에 붙어서 부린
농간일세.”
“알고 있습니다.”
벨루스 백작은 깜짝 놀라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벨루스 백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틴 준남작을 죽인 게 접니다.”
“그게 정말인가?”
“전 그보다 슈린 공작가에 그 정도 여력이 남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습니다.”
무려 오십 기의 기간트를 지원했다. 그런데도 슈린 공작가는 전혀 무리 없이 돌아가고 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저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슈린 공작가의 손발이 되고 싶어 안달 난 귀족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
제론이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벨루스 백작을 쳐다봤다.
“슈린 공작가의 저력은 그들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가 아니라는 뜻일세. 슈린 공작을 따르는 귀족들이 알아서
조금씩 기간트를 내놓기만 해도 오십 기 정도는 금방 모을 수 있네.”
제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역시 슈린 공작가였다. 그 정도니 레늄 왕국을 집어삼킬 생각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현재 제론은 마티를 이용해 슈린 공작가의 저택 곳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정보도 상당했다. 그중 가장 대단한 것은 슈린 공작가가 새로운 기간트의 설계도를 얻어서
그것의 양산화에 들어갈 준비가 거의 끝나 간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설계도를 어디 보관하고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지만, 시간문제였다. 의심스러운 장소 몇 군데를 선정해서
집중적으로 살피는 중이었다.
“아무튼 마틴 준남작이 죽었다니, 더 이상 할 말이 없군.”
벨루스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틴 준남작이 분탕질을 치고 도망친 바람에 영지가 흔들린 걸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침묵의 시간이 잠깐 지나갔다. 제론은 그러고 있는 내내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벼려서 주변에 혹시 누가
다가오지 않는지 확인했다.
물론 마법도 병행했다. 제론은 심장에 맴도는 일곱 개의 마나링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마법을 즉시 펼칠 수
있었다. 탐지 마법 정도야 숨 쉬는 것처럼 간단했다.
아마 조만간 이곳에도 귀를 연 사람이 등장할 것이다. 할 말이 있으면 그전에 모두 끝내야만 했다.
“그나저나 내 딸은 대체 어쩔 셈인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제론은 벨루스 백작의 갑작스러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이 세나 얘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확실히 해 달라는 말일세. 풍년 기원 파티는 상당히 전통이 깊은 행사일세. 사교계에 등장하기 적당한
파티이기도 하고.”
제론은 그제야 벨루스 백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
“세나가 이 파티에 참석을 안 했다고 뭐라 하는 게 아닐세. 만일 자네가 그 아이를 책임지겠다면 아무런 상관없는
일 아니겠나. 하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그 아이의 기회를 빼앗지는 말아 주게.”
제론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렸다. 아무리 목표를
위해서라지만 사람은 앞만 보고 달리면 결국은 넘어질 수밖에 없다.
가끔은 발밑도 확인해야 하고 양옆도 살펴야 한다. 지금까지는 그 일에 너무 소홀했다.
세나도 세나지만 바이스도 에어스트 백작령에 갇혀서 썩어 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둘 다 나이가 적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세나도 슬슬 결혼할 나이가 되어 가는구나.’
레늄 왕국은 타 왕국에 비해 비교적 결혼을 늦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무래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군대에
가는 것이 의무로 정해져 있기에 일찍 결혼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나와 바이스는 그래도 조기 졸업을 해서 다른 사람에 비해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건 관심을 가지고
배우자를 찾았을 때의 얘기였다.
지금처럼 영지에 매여 있다면 언제 결혼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자, 생각할 게 많은 모양이니 난 이만 가 보겠네.”
벨루스 백작은 제론을 향해 빙긋 웃어 주고는 거처로 돌아갔다. 정원을 나가자마자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다니던
호위 기사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하하. 이럴 필요 없다니까, 괜한 짓들을 하는구나.”
벨루스 백작은 그렇게 말했지만 기분 좋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론은 정원에 서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생각할 것이 더 많아졌다.

파티는 상당히 화려했다. 왕궁의 체면이 걸린 일인지라 풍년 기원 파티에는 상당한 예산이 배정된다.
제론은 한쪽에 서서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왕궁에서 여는 파티는 엄청난 인맥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왕궁에서 여는 파티이기에 당연히 국왕이 얼굴을 비춘다. 하지만 국왕은 파티에 남아 있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감만 잔뜩 뿌리고 돌아간다. 왕자와 공주만 남겨 놓고 말이다.
국왕이 젊었다면 귀족들과 함께 파티를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국왕은 노년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이제부터는 다음 세대를 밀어줘야만 했다.
그렇기에 왕자와 공주만 남기고 돌아간 것이다.
현 국왕에게는 두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딸은 권력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으니 비교적 사이가
괜찮았지만 아들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저울추는 1 왕자 쪽으로 많이 기울어졌다. 하지만 2 왕자에게도 아직 기회가 있었다. 2 왕자의 뒤에는 일단
슈린 공작가가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승산이 있었다.
제론은 그런 역학 구도를 알고 있기에 더 흥미롭게 파티를 살폈다. 아마 이렇게 있으면 조만간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많기도 하군.’
파티가 열리는 홀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모인 귀족의 수도 엄청났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을 다 살핀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귀족만 온 게 아니라 호위 기사까지 대동하고 왔기에 더 복잡했다. 물론 홀이 워낙 넓어 서로 부대끼는 경우는
없었지만 말이다.
멀리 벨루스 백작의 모습도 보였다. 몇 명의 귀족에게 둘러싸여 입가에 미소를 짓고 대화를 주도해 나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대화는 나중에 싹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이곳에는 사람과 똑같은 수의 마티가 들어와
모두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든 대화와 행동은 고스란히 제론의 태블릿에 담길 것이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갑자기 누군가 제론을 향해 다가왔다. 제론은 다가오는 사람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이게 누구야. 그 유명한 에어스트 백작님 아니신가.”
다가온 사람은 파인트였다. 제론과는 상당한 악연으로 이어진 사이였다. 물론 둘 사이에 벌어졌던 모든 일은
파인트의 패배로 끝났다.
파인트는 아직도 그때의 패배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제론은 파인트를 딱 보자마자 그것을
알아차렸다.
“오랜만이군.”
제론의 말에 파인트가 이를 부득 갈았다.
“그래. 오랜만이지. 아주 오랜만이야. 그나저나 내가 준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파인트의 말에 제론이 빙긋 웃었다. 이 말 하나로 뒤에서 이번 영지전을 일으킨 자가 파인트라는 걸 알아냈다.
“글쎄. 그럭저럭 괜찮았지. 덕분에 기간트가 오십 기나 생겼고, 영지도 몇 배나 커졌으니까.”
파인트의 눈에서 불똥이 파바박 튀었다.
“갑자기 영지가 늘어나면 잡음이 많이 생기기 마련이지. 아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제론이 피식 웃었다.
“충고 고맙군. 더 할 말 있나?”
파인트는 본전도 못 찾고 돌아섰다. 제론 앞에만 서면 흥분해서 원하는 대로 대화를 끌어가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돌아선 채로 몇 번 심호흡을 한 다음 표정을 풀고는 다른 곳으로 갔다.
제론은 그런 파인트를 보며 머리가 복잡해졌다.
‘저놈이 뒤에서 그런 짓을 했단 말이지?’
슈린 공작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파인트를 상대하는 것이 훨씬 쉽다. 물론 상대적일 뿐이지 실제로 파인트와
맞붙는다면 어려운 점이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파인트를 먼저 건드리는 편이 나았다. 그것이 더 편하게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테니까.
‘슈린 공작가와 자멸해선 안 돼. 압도적으로 이겨야 돼. 지금의 나라면 할 수 있다.’
제론은 자신 있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검술을 가다듬고, 테오스의 힘을 개발하고, 또 영지를
발전시킬 시간 말이다.
잠시 그곳에 서 있자,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각자 큰 상단을 가진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제론과 인사를 하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가끔 에어스트 백작령의 새로운 농지에 대한 얘기도 오갔다.
그들은 소문과 정보를 다루는 데 능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상당한 곡물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미리 거래를 해서 가격을 후려치려는 자들이었다. 당연히 제론은 그들을 적당히 상대했다.
제론이 생각보다 쉽게 넘어오지 않자, 그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멀어졌다. 당연히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이 제론에게 접근했다. 현재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사람다웠다.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제론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그들을 적당히 상대했다. 영양가는 거의 없었다.
몇 차례에 걸쳐 사람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떠나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 때, 상당히 낯익으면서도
반가운 얼굴이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한 사람은 클레 폰 디아만트였다. 제론에게 300 만 골드의 채권을 200 만 골드에 사 간
사람이기도 했다.
디아만트 후작가는 대륙을 진동시키는 대상단을 보유했다. 당연히 에어스트 백작령에 대해서 소상히 조사했다.
또한 제론이 붉은 학살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좀 늦긴 했지만 말이다.
“그때는 잘도 절 속이셨더군요.”
제론이 빙긋 웃었다.
“난 속인 적 없소이다만.”
너무나 뻔뻔한 태도에 클레가 입을 벌렸다. 어떻게 이리도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붉은 학살자라는 사실을 숨기셨잖아요.”
“난 분명히 내가 그라고 말하지 않았소? 어떤 공을 어떻게 세웠는지도 자세히 설명해 준 걸로 기억하는데, 내
기억이 틀렸소?”
클레는 할 말이 없었다. 기억을 더듬으면 확실히 그랬다. 제론은 당당하게 자신이 붉은 학살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과장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설명을 해 주었다.
문제는 듣는 사람이 모두 그걸 믿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제론은 진실을 거짓처럼 위장했다.
그걸 알기에 클레는 너무나 억울했다. 진실을 말했지만, 그건 엄밀한 의미로는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따질 수도 없으니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
“후우. 알았어요. 그 얘긴 이제 그만하죠.”
클레는 일단 한발 물러났다. 괜히 얘기를 더 해 봐야 자기만 손해였다. 진실만 가지고 물고 늘어지면 불리한 건
클레였으니까.
“요즘 영지가 꽤 잘 나가신다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별말씀을. 디아만트 후작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키우는 곡물의 양이 엄청나다고 하던데요?”
“그래 봐야 디아만트 후작가에서 취급하는 곡물에 비하면 100 분지 1 도 안 될 거요.”
“정말 그럴까요?”
클레의 말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조금 과장을 했다. 사실 이번에 기대하는 소출이 상당했다. 어쩌면 디아만트
후작가에서 취급하는 곡물의 양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지력이 대단한 땅에서 자란 곡물이라 성장하는 모양새가 엄청났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요?”
클레가 제론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물론 제론에게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지만.
“원하는 걸 말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들어 보고 결정하겠소.”
“피. 재미없어.”
클레는 입을 한 번 삐죽이고는 다시 표정을 바꾸고서 말을 이었다.
“그 곡물의 유통, 우리 디아만트 상단에 맡겨 주시면 안 될까요?”
“생각해 보겠소.”
제론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클레는 그것을 보며 일단 지금은 물러날 때라고 판단했다.
앞으로도 시간은 많고 기회도 많다. 제론의 분위기를 보면 단번에 그걸 결정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에어스트 백작가에서 당장 상단을 만들지 않는 한, 당분간은 다른 상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
클레는 이번 거래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식량은 때로는 무기보다 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먹지 않으면 죽는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곡물을 장악할 수 있다면 대륙 최고의 상단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이제 그런 딱딱한 얘기는 접죠. 그보다 백작님도 슬슬 결혼할 때가 되지 않으셨나요?”
“안타깝지만 아직 그럴 여유가 없소.”
“마음만 먹으면 여유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혹시 마음에 둔 분이라도 있으신가요?”
클레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런 가십은 대부분의 여자들이 좋아한다. 제론은 현재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제론에 관한 것 중 뭐 하나만 알아내도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제론의 연인에 관한 것이라면
얼마나 짜릿하겠는가.
클레의 눈에서 일어나는 광채에 제론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전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소. 나머지 얘기는 다음에 합시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클레는 그런 제론의 모습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빙긋 웃었다.
“호기심을 일게 만드는 사람이네.”
클레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아직 시간은 많다. 풍년 기원 파티는 무려 7 일 동안이나 계속된다.

Chapter 6 파티의 끝에서

풍년 기원 파티도 6 일째에 접어들었다. 사실 파티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사람들도 이젠 얼굴도 익히고 했으니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그중 가장 활발한 사람은 단연 2
왕자였다.
2 왕자는 필사적이었다. 아직 후계자가 완벽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조만간 결정될 것이다.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에 지지자를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지난 5 일 동안 안면을 익히고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면 오늘은 본격적으로 목적을 이룰 때였다.
‘음?’
2 왕자는 사람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곳을 발견하고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저 많은 사람을 자신이 끌어들일 수
있다면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호기심과 기대감이 충만해진 2 왕자는 즉시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주인공이 따로 있었다.
‘저놈은!’
2 왕자는 그들의 중심에 서 있는 사내를 보고는 발을 멈췄다. 그는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이었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체른산 유적에서 몇 번이나 봤는데 말이다.
체른산 유적을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쓰렸다. 또한 갈망에 목이 말랐다.
아직도 유적의 숨겨진 유물을 찾지 못했다. 2 왕자는 반드시 유물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그곳에 가서 유적을 살피고 또 살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이제는 거의 포기 단계였다. 유적에는 자신 외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다. 2 왕자가 아닌 사람을 함께 데려가면
어김없이 벼락이 떨어졌다.
결국 2 왕자는 그곳을 혼자서 뒤져야 했다. 그 넓은 유적을 혼자 살핀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2 왕자는 미련이 남아 유적을 찾고 또 찾았다.
‘그것만 찾으면 다 끝날 텐데.’
2 왕자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더 이상 거기에 미련을 둘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1 왕자를 이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잠깐 회한에 잠겼던 2 왕자의 시선이 다시 제론에게로 향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제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론은 그저 눈빛 하나만으로 그들을 압도했다.
2 왕자는 이를 악물었다. 저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제론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좋아. 내가 얻어 주지. 굳이 저들을 얻을 필요가 없지. 저놈 하나만 얻으면 다 얻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2 왕자는 성큼성큼 걸어 제론에게 다가갔다.
제론 근처에 모인 귀족들이 2 왕자를 발견하고는 저마다 인사를 건넸다. 몇몇은 담담했고, 또 몇 명은 표정이
굳었으며, 일부는 반가워했다.
“오랜만입니다, 2 왕자 전하.”
제론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정중함은 있었지만 너무나 당당했다. 주변 사람들이 묘한 눈으로 제론과 2 왕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둘 사이에 미리 교분이 있었다는 사실에 다들 깜짝 놀랐다.
“유적은 잘 있는지 모르겠군요.”
유적 얘기가 나오자 2 왕자의 표정이 대번에 무너졌다. 아무리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잘 있으니 걱정할 거 없네.”
2 왕자는 그렇게 대답하며 제론을 바라봤다. 말을 하면서 생각해 보니 제론은 자신에게 유적을 빼앗겼다. 오히려
더 마음이 상한 건 제론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유적을 내게 바친 공은 아직 잊지 않고 있네.”
“별말씀을.”
제론은 빙긋 웃었다.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고작 유적의 가디언이 된 것에 불과한데, 마치 유적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이 행동하니 말이다. 물론 2 왕자는 그걸 모르니 저러고 있는 거겠지만.
제론의 여유로운 미소에 2 왕자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조금이라도 당황시키고 싶어서 던진 말이었는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니 또 짜증이 확 났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짜증을 내면 안 된다. 아직 목표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 공을 치하할 겸, 제안을 하려고 왔네.”
제론은 2 왕자의 속이 빤히 보였지만 전혀 모른다는 듯 물었다.
“무슨 제안 말입니까?”
“내가 앞으로 자네 뒤를 봐주겠네.”
노골적으로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는 소리였다. 아니, 그걸 확정했다고 통보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제론은 2 왕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2 왕자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띤 채 제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어쩔
것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감사합니다.”
제론의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변했다. 제론이 2 왕자 쪽 줄을 잡는 모습을
지켜봤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2 왕자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럼 그렇지. 내가 손을 내밀었는데 잡지 않을 리가 없잖아?’
크게 소리 내서 웃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2 왕자는 입가가 길게 늘어나려고 하는 걸 억지로 참으며
제론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론이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이제 확정이 되었다. 2 왕자는 그 순간, 이 사실을 과시하고 싶어졌다.
“그럼 내 사람이 된 기념으로 자네 영지의 곡물 유통권을 슈린 상단에 넘기게.”
2 왕자는 당연히 제론이 허락할 거라 여겼다. 자신의 사람이 되었으면 자신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슈린 상단은 슈린 공작가에서 운영하는 상단 중 가장 큰 상단이었다. 물론 최근에는 디아만트 상단에 밀려서 날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곡물 유통권을 쥐어 준다면 슈린 상단이 다시 한 번 디아만트 상단과 레늄 왕국 내의 이권을
걸고 싸워 볼 만한 여지가 생긴다.
슈린 공작가가 커지면 2 왕자가 왕권을 잡을 확률이 높아진다. 2 왕자는 기대감이 휘몰아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제론의 답을 기다렸다.
“그건 곤란합니다.”
제론의 거절에 2 왕자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2 왕자뿐 아니라 주변에 서 있던 다른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경악한 눈으로 제론과 2 왕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제론은 시종일관 물처럼 담담한 얼굴로 조용히 서 있었다. 하지만 2 왕자는 그렇지 않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군. 지금이 그런 장난이나 칠 때라고 생각하나? 감히 내 앞에서?”
“전 농담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정말로 유통권을 못 넘기겠다는 말인가?”
“제가 왜 그들에게 유통권을 넘겨야 합니까? 어떤 조건도 내밀지 않은 상단에게 신경을 쓸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지 않습니다.”
제론의 당당한 말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2 왕자 쪽에 줄을 댄 몇몇을 제외하고는 다들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했다.
“방금 내가 뒤를 봐준다고 했을 때, 고마워하지 않았나!”
“그 점은 지금도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전하의 조건 없는 호의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2 왕자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리고 얼굴이 시뻘게지다 못해 창백해졌다.
“네, 네, 네놈이 지금 날 놀리는 것이냐!”
결국 2 왕자는 호통을 쳤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전 그저 전하께서 뒤를 봐주시겠다는 말씀에 감사를 표한 것뿐입니다.”
말은 맞다. 실제로 대화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안에 포함된 의미가 있지 않은가. 제론은 지금 그
보편적인 상식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이러니 놀리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제론의 말이 옳다. 그래서 2 왕자는 함부로 날뛰지 못했다. 만일 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어설픈 애송이 귀족이라면, 또 그가 멍청하다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모로 봐도 제론은 그런 귀족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2 왕자를 향해 제론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호의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결국 2 왕자는 폭발해 버렸다. 그 역시 검을 수련한 기사, 또한 기간트를 소유한 라이더이기도 했다. 2 왕자가
그대로 몸을 날려 제론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몸이 잘 움직이지가 않았다. 2 왕자는
당황했다.
하지만 더 당황스럽고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2 왕자의 마음에서 일어나던 불같은 적개심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내가 너무 흥분했군.’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문제였다. 여기서 날뛰면 모양새가 더 우스워진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왠지 지금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후우. 내가 너무 흥분했군.”
2 왕자는 심호흡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거 분위기가 말이 아니로군. 다들 미안하게 되었소.”
2 왕자의 사과에 다들 얼굴이 경직되었다. 왠지 2 왕자가 완전히 달라 보였다.
귀족들이 멍하니 있자, 2 왕자는 다시 제론을 바라봤다.
“명색이 왕자인데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지. 자네 뒤는 내가 확실히 봐주겠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날
찾아오게.”
2 왕자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런 2 왕자의 모습을 다들 이채롭게 바라봤다. 다만 제론의 눈빛만은
의미심장했다.
‘가디언이 된 것이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군.’
2 왕자는 체른산 유적에서 제론의 가디언이 되었다. 그것도 그 스스로의 의지로 말이다. 오늘 일은 그 결과였다.
2 왕자는 제론에게 적대감을 가질 수 없었다. 고대 마법의 정수가 이뤄 낸 작용이었다.
모두의 눈빛을 뒤로하고 뚜벅뚜벅 걸어가던 2 왕자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뭐지? 내가 미친 거 아닌가?’
자신이 왜 그딴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니. 그러다가 정말로 찾아오면
어쩌란 말인가.
절대로 제론의 뒤를 봐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수많은 귀족 앞에서 그렇게 공표해 버렸다. 만일 제론이 이
일을 알고 있는 귀족과 한 명이라도 함께 있는 상황에서 어떤 부탁을 해 오면 그걸 거절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건 너무나 위험했다. 2 왕자는 슈린 공작가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슈린 공작가가 에어스트 백작가에 어떤 짓을
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젠장. 슈린 공작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군.’
2 왕자는 갑자기 짜증이 왈칵 치밀었다. 대체 왕자인 자신이 왜 공작의 눈치를 봐야 한단 말인가. 생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제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맹렬한 적개심이 들었다.
하지만 적개심은 일어나자마자 기세가 풀썩 꺾였다. 생각해 보니 제론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이게 왜 제론
때문이란 말인가. 애초에 에어스트 백작가에 그따위 짓을 한 슈린 공작가의 잘못이었다.
2 왕자는 그 뒤로 제대로 파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떤 생각을 하건 제론과 연결되었고, 화가 났다가
가라앉았다가를 반복했다.
하지만 어쨌든 결론은 지었다. 제론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또한 슈린 공작가를 앞으로 유심히
살펴보기로 했다.
2 왕자는 그걸 결정지은 뒤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왠지 더 이상 파티에 의미가 없어
보였다.
제론은 귀족들에 둘러싸여 2 왕자가 나가는 모습을 힐끗 쳐다봤다. 나중에 2 왕자의 표정이나 혼잣말을 반드시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는 가디언이 된 2 왕자를 이용할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다. 지금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오늘 일을
보니 잘하면 2 왕자를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제론 입장에서는 2 왕자도 슈린 공작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다. 슈린 공작가가 오로지 그들의
힘으로만 에어스트 백작가를 무너뜨릴 수 있었을 리 없다.
슈린 공작가를 도와준 자들이 분명히 있었다. 2 왕자는 그중 하나였다. 또한 2 왕자에게 항상 붙어 있는 마기어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제론은 그 둘을 결코 용서해 줄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님, 아직도 곡물 유통권에 대해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제론이 시선을 돌렸다. 2 왕자는 나중에 살펴보면 된다. 지금은 이곳의 일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아직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 군데로 한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귀족들이 눈을 빛냈다.
“하면 여러 상단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많은 상단에 기회를 드릴 생각입니다. 다만 비율은 좀 달라지겠지요.”
몇몇 귀족이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과연 그렇게 비율을 나눌 정도의 양이 될까요?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상단이 둘만 붙어도 남아나는 곡물이
없을 것 같은데…….”
“금년만 하고 끝낸다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조금만 더 멀리 보십시오. 우리 영지의 평원은 아직 모두 개발된 게
아닙니다. 고작 10 퍼센트 정도 개발했을 뿐입니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이미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자라는 곡물을 확인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양이었다. 한데 그것이 10 배로 늘어난다니. 그 정도라면 가히 왕국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의 양 아닌가.
제론은 놀란 얼굴의 귀족들을 쭉 둘러봤다. 사실 농지는 그보다 더 많이 있었다. 이제 곧 암석 지대를 개간할
것이다.
그곳을 제대로 개발할 수만 있다면 농지가 50 퍼센트는 더 늘어난다. 하지만 지력이 많이 모자랄 것이다. 그래서
소출이 50 퍼센트 늘어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도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은 곡물로 우뚝 서는 영지가 될 것이다.
‘그러면 힘이 필요하겠지.’
식량은 큰 무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 힘을 가져야만 한다. 제론은 인재에 목이 말랐다. 더
많은 인재가 필요했다. 또한 더 많은 병사가 필요했다.
‘빈민 이전 작전을 서둘러야겠어.’
제론은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며 귀족들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파티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7 일간의 긴 파티가 끝을 맺었다.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자가 훨씬 많았다.


제론은 성과를 얻은 사람 중 하나였다. 아니, 누구보다 큰 성과를 얻어 냈다. 총 열두 개의 상단과 계약을
맺었다. 일곱 개는 중립을 표방하는 상단이었고, 나머지 다섯 개는 슈린 공작가와 반대쪽에 줄을 댄 상단이었다.
가장 높은 비율을 얻어 낸 상단은 당연히 디아만트 상단이었다. 디아만트 상단을 책임지는 클레는 이를 이용해
대륙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디아만트 상단은 무려 40 퍼센트의 비율을 얻어 냈다. 나머지 60 퍼센트를 열한 개의 상단이 또 적절히 나눴으니,
그 차이가 정말 엄청났다.
이 계약은 향후 5 년간 유효했다. 제론은 그 5 년 동안 모든 곡물을 유통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상단을 만들
계획이었다.
파티는 끝났지만 왕궁에는 여전히 떠나지 않은 귀족이 많았다. 파티가 끝나도 며칠 정도 남아서 여흥을 즐기거나
파티의 피로를 충분히 풀고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당연히 제론은 그럴 시간이 없는 사람이었다. 제론의 뇌리에는 새로 만들 상단과 검술 수련으로 인해 다른 것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둘 중 검술 쪽이 조금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제론은 조금만 더 하면 벽을 깰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잠시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파티가 열리는 7 일 동안 밤을 제외한 아침과 낮에는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기초 검술을 수련하며
마나의 흐름과 검의 흐름을 일치시키려 애썼다.
제론은 지금 당장이라도 유적에 가고 싶었다. 가서 그곳의 충만한 마나를 받아들이며 검을 휘두르면 금방이라도
벽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일단 왕궁에서 그냥 사라지는 건 문제가 있었다. 타고 온 마차를 타고 나가서
용병길드와의 계약을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제론이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제론의 방을 방문한 사람이 있었다.
“벌써 가시는 거예요?”
클레였다. 클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제론이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다.
“바빠서.”
바쁘다는데 뭘 어쩌랴. 클레는 제론을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제론은 그런 클레를 지나쳐 방을 나섰다.
“한 달 후에 영지로 찾아갈게요!”
클레가 외쳤다. 제론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대체 클레가 왜 영지에 찾아온단 말인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제론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준 클레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영지의 농지를 한번 확인해 보려고요. 일단 계약을 했으니 최대한 이익이 많이 남을 방법을 강구하는 게
순서거든요.”
제론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시오.”
그 말을 남긴 제론은 서둘러 왕궁을 떠나갔다. 클레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멀어지는 제론의 뒷모습과
왕궁을 나가는 그의 마차를 끝까지 바라봤다.

☆ ☆ ☆

파인트는 왕궁에 남은 귀족들을 한 번씩 쭉 만난 뒤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후우. 이거 지치는군.”
“고생 많으셨습니다, 소영주님.”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돌아가는 걸로 하지. 아무래도 여긴 좀이 쑤셔서 오래 있기 힘들어.”
파인트가 인상을 쓰며 그렇게 말하자, 그의 수행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다들 분주히 움직였다.
파인트는 그 모습을 보며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파묻었다. 부드럽고 푹신하게 등을 받쳐 주는 느낌에 절로 눈이
감겼다.
그렇게 잠깐 눈을 감고 쉬던 파인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수행원 하나를 불렀다.
“제론이 지금 뭐 하는지 알아와.”
파인트의 말에 수행원은 즉시 대답했다. 파인트가 가진 제론에 대한 관심을 잘 알기에 미리 조사를 해 뒀던
것이다.
“영지로 돌아갔습니다.”
“뭐? 돌아가? 언제?”
“파티가 끝나자마자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일찍? 그럼 다른 귀족은 아예 안 만나고 간 거야?”
“그렇습니다. 떠나기 전에 디아만트 후작가의 여식이 그쪽 방으로 잠깐 찾아갔다고 들었습니다.”
“클레 폰 디아만트 말인가?”
파인트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사실 클레의 모습은 이번에 처음 봤다. 클레는 디아만트 상단의 일에 매달려 다른 사교 모임이나 파티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데 이번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왕궁 파티에 나온 것이다. 예전의 클레를 생각하면 상당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처음 본 클레의 외모는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저 정도라면 자신이 지속적으로 매파를 보내고 있는 세나 폰
벨루스에 비해서도 크게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클레는 세나가 가지지 못한 중요한 것을 소유했다. 바로 돈이었다. 벨루스 백작가도 상당한 재력가였지만,
디아만트 후작가에 비하면 달빛 아래 반딧불이었다.
디아만트 후작가는 레늄 왕국의 귀족이라기보다는 대륙의 귀족이었다. 디아만트 상단의 영향력은 대륙 곳곳에
퍼져 있었다. 심지어는 크란 제국에도 수많은 지부가 깔려 있어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
파인트는 대번에 욕심이 일었다. 아름다운 세나도 좋지만 돈이 많은 클레가 훨씬 유용할 것이다. 향후 레늄
왕국을 꿀꺽 집어삼키기 위해서는 말이다.
“다다익선이긴 한데…….”
둘 모두를 차지할 수 있다면 최고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파인트는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시도는 해 볼 만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제론부터 족치고 싶었다. 목을 잘라
버리고, 영지를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
“일단 그놈의 저력을 완전히 파악해야 돼.”
붉은 학살자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서는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 대비를 하지 않으면 지난번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질 뿐이었다.
“거기 있나?”
파인트가 난데없이 천장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천장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뚝 떨어졌다. 그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였는데, 어느새 파인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미스트 드래곤에서 좀 나서 줘야겠다.”
“어느 정도 선까지 원하십니까?”
“그놈에 대한 모든 것을 원한다. 그놈을 파멸시킬 방법을 찾아야겠어.”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그림자가 위로 휙 솟구쳤다. 그리고 천장으로 스며들었다.
파인트는 그제야 기분이 좀 나아졌다. 미스트 드래곤은 이쪽 방면으로는 최고의 실력을 자랑한다. 슈린 공작가를
지탱해 온 기둥 중 하나였다.
그들이 나섰으니 이제 제론에 대한 모든 걸 샅샅이 조사해서 가져올 것이다. 남은 건 그저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자, 그럼 돈 많은 계집을 낚을 준비를 해 볼까?”
클레는 대상단의 책임자였다. 그러니 그녀를 낚으려면 상단을 이용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적어도 파인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설픈 방법으로 엮으려 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클레는 디아만트 상단을 몇 년이나
성공적으로 이끌어 왔다. 나이는 어려도 경험이 많고 능력이 뛰어났다.
파인트는 일단 디아만트 상단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다. 그들이 뭘 주로 취급하는지, 또 어떤 상품에 주력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뭘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세심히 확인했다.
파인트도 슈린 공작가에 속한 제법 큰 상단 하나를 소유하고 있으니 계획만 잘 세우면 얼마든지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가만, 철광석 쪽에 손을 대려고 하는군?”
파인트의 입가가 쭉 늘어났다. 철광석이라면 현재 그가 소유한 루바인 상단의 주력 품목이었다. 즉, 경험이나
능력 면에서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파인트는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라! 오늘 돌아간다!”
파인트의 외침에 수행원들이 다들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원래 계획은 하루를 푹 쉬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묵을 준비가 거의 끝나 가는데, 난데없이 돌아가자고 하니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슨 힘이 있으랴. 수행원들은 부랴부랴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파인트는 그들을 배려할 생각이 전혀 없기에 즉시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지금은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베어크 영지로 가야만 했다.

☆ ☆ ☆

베어크 영지는 거의 망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일거에 뒤집어 버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무려
다섯 개의 철광석 광산이 동시에 발견된 것이다.
근처에 산과 언덕이 많기로 유명한 영지이긴 했지만 그동안은 광산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점차 악화되는
재정에 허덕였는데, 갑자기 광산이 다섯 개나 발견되었으니 영지가 단번에 살아나 버렸다.
물론 광산 개발 자체를 베어크 영지에서 한 것이 아니었기에 떨어지는 건 적당한 지분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재정에 뚫린 구멍을 꽉 메우고도 남아서 철철 넘쳐흘렀다.
철광석은 광물 가운데 최고 인기 품목 중 하나였다. 기간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막대한 양의 강철이
필요했다. 그러니 철광석은 항상 공급이 수요를 훨씬 웃돌았다.
베어크 영지는 각 광산으로부터 각각 5 퍼센트씩의 지분을 받았다. 그저 영지에 속한 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해 주는 대가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광산에서 캔 철광석의 5 퍼센트는 베어크 영지의 것이었다.
당연히 베어크의 영주는 그 지분을 철통같이 지킬 것이다. 또한 모든 힘을 다해 광산을 지키고 감시할 것이다.
만일 다른 상단이 여기 끼어든다면 그 외의 나머지 지분을 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클레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고, 파인트가 파고들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하지만 베어크 영지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그 두 사람이 아닌 제론이었다.
‘확실히 정보를 누군가에게 맡기고 나니 편하긴 편하군.’
바인으로부터 긴급하게 정보를 받았기 때문에 즉시 이곳으로 왔다. 물론 특별히 대책을 세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뭐든 빈틈이 있다면 파고들어 볼 생각이었다.
어쨌든 아무 시도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사실 최근 슈린 공작가에서 보유한 상단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제론의 명령을 받은 바인이 적절히 견제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여기서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슈린 공작가를 한 번 크게 흔들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그 생각을 하며 베어크 영지 곳곳을 돌아다녔다. 베어크 영지에 대한 정보는 바인이 전해 준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조금 답답하긴 했다.
‘근방에 유적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베어크 영지 근방에는 발견된 유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눈에 불을 켜고 유적을 찾아다니는지 잘
알기에 제론은 이곳에는 당연히 유적이 없을 거라고 믿었다.
베어크 영지는 주변에 다섯 개의 산이 있었는데, 그 다섯 개의 산에서 각각 하나씩의 철광석 광산이 발견되었다.
그 외의 나머지는 평지였다.
그리 넓은 영지가 아니었기에 산이 아니라면 유적이 있을 만한 곳도 없었다.
제론은 일단 영지 곳곳을 둘러봤다. 딱히 상업이 발달한 곳도 아니었다.
“광산이 아니었으면 조만간 망했겠군.”
이런 영지는 운영이 정말로 어렵다. 농지가 많은 것도 아니고,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변에 산이
있으니 몬스터의 피해가 적지 않을 것이고, 그러려면 최소한의 병력이 필요하다.
그런 식으로 나가는 돈은 많은데 들어오는 돈이 없으면 적자가 쌓인다. 적자란 곧 빚이다. 그리고 빚이 한계를
넘어가면 영지를 파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베어크 영지의 영주와 가신들은 지금 죽다가 살아난 기분일 것이다.
영지가 그런 상황이니 제론도 별달리 할 만한 것이 없었다. 파인트가 루바인 상단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기 전에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아마 그의 일을 방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제론은 영지 곳곳을 확인하고 다섯 개의 광산을 차례차례 방문했다. 최근 광산에 관심을 갖고 접근하는 상단이
제법 많았기에 제론의 방문 역시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았다.
다섯 개의 광산은 모두 훌륭했다. 예상 매장량도 엄청났고, 채굴량도 보통 광산보다 훨씬 많았다. 이런 광산을
구입하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갈 것이다.
제론은 마지막 광산까지 확인한 다음 턱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광산의 가격을 대충 확인했는데, 워낙 경쟁이 치열해서 1 천만 골드 이상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인건비와
시설비를 계산해야 하지만, 매장량과 채굴량을 따져 보면 거의 5 천만 골드에 가까운 가치가 있었기에 그렇게
구입을 해도 손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만일 예상 매장량이 기대에 훨씬 못 미치면 완전히 끝장이었다.
물론 이렇게 상단이 모여드는 걸 보면 이곳의 매장량은 알려진 것과 거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 정도 확인도
안 하고 유수의 상단이 우르르 몰려올 리 없었다.
‘매장량을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제론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철광석의 매장량을 조절하다니. 신도 아니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생각에 잠긴 제론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갔다. 그렇게 1 시간쯤 걸으니 어느새 영지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도착했다.
비교적 높은 건물이 길 양옆에 쭉 늘어서 있었고, 그 뒤로도 높고 낮은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골목이
보였고, 좌우로 지나가는 제법 널찍한 길도 눈에 들어왔다.
제론은 거기서 걸음을 멈춘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길 한가운데였다. 걷다가 갑자기 서 버린 제론을 향해 몇몇
사람이 불만을 토해 냈지만 제론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게 뭐지?’
제론은 지금 상당히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기묘한 느낌은 점점 선명해졌다. 그리고 확신으로 변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영지의 번화가 한가운데였다.
그런데 제론이 선 자리에 유적이 있었다.
마치 유적이 제론을 끌어당긴 것 같았다. 발 닿는 대로 움직였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제론을 부른 유적은 고대 유적이 아니라, 그 아래에 잠든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었다.
잠든 유적이 설핏 깨서, 근처에 온 주인을 부른 것이다.
제론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주변을 확인하고는 길가로 가서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사람도 많이 다니고 마차도
많이 다니는 길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유적을 찾아갈지 고민이 좀 필요했다.
일단 팔찌를 이용해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만 했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몇 가지 시도해 볼 수
있을 만한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초고대 문명의 유적을 통해 고대 유적을 발굴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제론은 문득 떠오른 게 있어 주위를 둘러봤다. 유적의 위치는 정확히 광산이 발견된 다섯 산의 중심에 위치했다.
어쩌면 철광산 자체가 초고대 문명 유적의 영향을 받은 걸 수도 있었다. 물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뭐든 시도해 보려면 인적이 없어야 한다. 제론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람과 건물을 살피는 한편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번화가라서 불편한 점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밤이 늦어도 사람이 사라지지 않아서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밤이 깊어 갔다. 그리고 새벽이 되었다. 점점 거리가 한산해지다가 결국 인적이 완전히 끊겼다.
제론은 그래도 주위를 충분히 살폈다.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창을 통해 밖을 확인하면 곤란했다. 물론 지나가다가
보는 건 상관없었다. 그 정도면 잘못 봤다고 여길 테니까.
제론은 거리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리고 팔찌에 아네모스를 넣었다.
화아악!
빛이 일었다. 그리고 그대로 유적으로 이동했다. 성공이었다.
제론이 사라지자, 몇몇 건물에서 창문이 열렸다. 방금 전 일어났던 빛 때문에 호기심이 일어 확인하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가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사라진 거리에 적막이 감돌았다.

Chapter 7 파인트 폰 슈린

제론은 유적 로비 한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은 다른 유적과 조금 달랐다. 로비가 무척 좁았다.


다른 유적의 로비는 과장 조금 보태서 기간트를 소환해 움직여도 넉넉할 정도로 넓었는데, 이곳은 그냥 혼자 검술
수련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특이하군.”
제론은 일단 로비를 잠깐 살피다가 지하로 이동했다. 유적의 진정한 힘을 보려면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다른
유적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가장 아래층에 통제실이 있을 것이다.
이 유적의 통제실은 지하 4 층에 있었다.
다른 곳과 달리 생활공간이나 수련실은 따로 없었다. 3 층은 텅 비어 있었는데, 그곳의 용도는 창고였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겉으로 보이는 용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물건을 보관할 수 있었다. 웬만한
아공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지하 2 층을 가득 채운 마티는 참으로 반가웠다. 이제부터 이 근방의 정보를 싹싹 긁어 올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 유적의 경우 정보 수집 반경이 다른 유적에 비해 현저히 짧았다.
고작 베어크 영지와 근방의 산을 간신히 커버하는 정도였다. 당연히 마티의 수도 적었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이 유적의 지하 1 층에 있는 아티팩트 때문이었다.
이곳의 아티팩트 역시 수도 유적의 폴타와 마찬가지로 층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정도로 복잡하고 거대하며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아티팩트였다.
이곳의 아티팩트는 놀랍게도 물질 변환 장치였다. 당연히 상당히 큰 제약이 있었고,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아티팩트는 유적이 잠든 동안에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작동했다. 물론 정상적으로 작동한 게 아니라,
상당히 느리고 정교함도 떨어졌지만 말이다.
제론은 이 지역에 왜 철광산이 다섯 개나 있는지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유적이 철광석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리고 왜 거리에서 곧장 유적 로비로 이동했는지도 알아냈다. 이곳에는 고대 유적이 없었다. 다른 초고대 문명의
유적과 달리 이 유적에서는 에너지가 외부로 분출되지 않았다. 아티팩트가 지속적으로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아티팩트였다. 주변의 지력까지 일부 끌어다 쓸 정도였다. 그로 인해 베어크
영지의 농사가 신통치 않았다. 지력이 모자라니 작물이 제대로 자랄 리가 없었다.
어쨌든 제론은 이 유적의 주인이 되었다. 중앙 유적과의 통로는 당연히 개통되었다. 앞으로 제론은 원하면 언제든
이곳에 올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유적에서 밖으로 나갈 때 사람들의 시선을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마티가 있으니 그 문제는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이 가능했다.
게이트를 열어 주는 아티팩트인 폴타라도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철광석 생성 아티팩트가 있는데 그것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대로 한가운데라서 건물을 지어 감추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예 영지 자체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그저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제 아티팩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
아티팩트가 움직이고 있긴 했지만 완전하지는 않았다. 사실 발생시키는 철광석의 양도 좀 더 많아야 했고,
지금처럼 사방으로 철광석이 뻗어 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철광산이 발견된 곳은 다섯 군데지만, 사실 더 많은 광맥이 존재했다. 그중 대부분이 지하로 이어져 있었고,
일부만 위로 뻗어 나가 산을 파고들었다.
아무리 대단한 아티팩트라 하더라도 그냥 돌을 철광석으로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베어크 영지는 그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영지였다.
그리고 그 조건 때문에 영지 한가운데가 아닌 주변 산으로 광맥이 뻗어 나간 것이었다.
제론은 아티팩트 조작법을 아주 간단히 익혔다. 통제실과 태블릿을 연결하면 외부에서도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다. 물론 물질을 변환하는 것이었기에 아티팩트를 통해 그것을 이루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다.
이 유적에 대해 모두 파악한 제론은 씨익 웃었다. 드디어 파인트를 무너뜨릴 방법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정답은 유적 3 층 창고에 있었다. 이 창고의 용도는 너무나 간단했다. 바로 철을 보관하기 위한 곳이었다. 3 층
창고는 놀랍게도 그냥 보관만 하는 게 아니라 자동으로 제련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지하 곳곳으로 뻗어 나간 광맥을 통해 철광석을 채굴한 다음, 곧장 제련해서 철괴를 만들어 창고에 차곡차곡 쌓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이 자동으로 이뤄진다.
채굴 방향은 통제실에서 마음대로 조절이 가능했다. 채굴한다고 그냥 구멍이 뻥 뚫리는 게 아니라 제련하고 남은
찌꺼기와 다른 곳에서 끌어온 흙과 돌을 채우기 때문에 그저 철광석만 사라지는 시스템이었다.
제론은 다섯 산 쪽으로 동시에 채굴을 시작했다. 채굴 속도는 마음대로 조절이 가능했다. 처음에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철광석을 채굴하고 그것을 녹여 철괴를 뽑아냈다.
하지만 이곳의 모든 철광석을 뽑아 먹으면 곤란했기에 제론은 속도를 낮췄다. 아직 어느 광산을 파인트가
구입할지 모르기에 다섯 광산을 동시에 채굴했다.
나중에 파인트에게 더 큰 손해를 안기려면 미리 작업을 시작해 두는 것이 나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제론은 마티를 베어크 영지에 모두 풀었다. 그리고 틈을 봐서 아무 시선도 없을 때, 유적에서
나갔다.
당분간은 이 유적을 이용해 베어크 영지에 오는 일은 자제할 생각이었다. 너무 신경이 많이 쓰였다. 확실히
대로에 유적 입구가 있으니 상당히 불편했다.
제론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급할 이유가 없었다. 며칠 기다리며 파인트가 광산을 구매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 ☆ ☆

파인트가 루바인 상단을 이끌고 베어크 영지에 들어섰다. 제론이 유적을 얻은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디아만트 상단은 어떻게 되었느냐?”
파인트의 다급한 질문에 미리 베어크 영지에 와서 사전조사를 하고 있던 상단의 직원이 즉시 대답했다.
“열 명의 직원이 조사 중입니다.”
“클레는?”
“아직입니다.”
파인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한발 빨리 왔다. 그러니 광산을 얻을 확률도 높았다.
“조사한 내용을 읊어 봐.”
파인트의 명에 직원이 즉시 서류 한 장을 공손히 내밀었다. 파인트가 그것을 받아 들여다보자, 직원이 보고를
시작했다.
“다섯 광산 중 구입 가능성이 있는 것은 세 개입니다.”
“세 개? 나머지는?”
“나머지는 직접 운영하기로 정해졌습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광산을 개발하기만 하면 그때까지 들어간 자금을 모조리 회수하고도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굳이 광산을
유지하느라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직접 운영하면 그것을 파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물론 한꺼번에 벌지는 못한다. 대신
꾸준히 돈을 벌 수 있다.
둘 중 어떤 걸 선택하든 자유였다. 보통 광산 개발에 뛰어드는 자들은 전자를 선호했다. 영지 내의 광산을
개발해 영주에게 파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베어크 영지에서는 드물게도 다섯 개의 광산이 동시에 개발되었다. 그것도 매장량이 거의 비슷한 광산이었다.
지리적인 조건도 똑같으니 광산의 가격도 비슷하게 형성되었다.
“모르긴 해도 광산이 바닥날 때까지 채굴하면 1 억 골드까지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살 떨리는 금액이로군.”
역시 광산이었다. 벌어들이는 액수가 어마어마했다. 순간 광산을 사서 직접 운영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파인트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가져갔다. 그것을 확인한 직원이 보고를 이어 갔다.
“각 상단에서는 아직도 광산의 매장량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한두 푼도 아니고 확실하지 않으면 쉽게 들어갈 수 없겠지. 몇 개나 되는 상단이 참여할 것 같나?”
“돈 좀 있는 상단은 모두 모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정도 매장량을 가진 광산은 사실 드물기 때문에 다들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도 직접 철광산을 하나 운영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철광산을 직접 운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존에 해 왔던 대로 철광석이나 철을 유통하는 것이
낫습니다.”
직원의 말에 파인트가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본 직원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가 광산을 확보한 뒤, 그것을 디아만트 상단과 계약을 맺고 넘기는 방식을 쓰면 훨씬 안전하게
이익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디아만트 상단과 계약을 맺는다는 말에 파인트의 안색이 환하게 펴졌다.
“그 부분 자세히 얘기해 봐라.”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디아만트 상단과 엮이려 했다. 클레와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려면 이런 부드러운 방법이
좋았다.
“우리가 광산을 먼저 확보한 뒤, 구입한 가격으로 디아만트 상단에 넘기는 것입니다. 단, 철광석의 유통을 우리
루바인 상단이 맡는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파인트가 눈을 번득였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계획 아닌가. 안정적으로 철광석을 받을 수 있으니 좋고, 또
광산을 클레에게 넘기면서 살짝 빚을 지운 느낌을 줄 수도 있었다.
거기에 만일 광산의 매장량이 예상보다 훨씬 낮더라도 손해를 볼 일이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훌륭해. 그렇게 진행하도록.”
파인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계획을 허락했다. 직원은 사기가 충천한 표정으로 물러갔다. 크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직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 파인트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었다.
“잘하면 완벽하게 엮을 수도 있겠어. 그나저나 광산의 예상 낙찰 가격이 1,200 만 골드라니, 정말 엄청나군.”
베어크 영지의 현 상황을 핵심만 짚어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저 서류를 한 번 읽어 보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다.
파인트는 서류를 몇 번이고 읽으며 클레를 엮어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어떻게 유린할지 머릿속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클레는 베어크 영지에 들어서며 수행원의 보고를 받았다. 그녀의 뒤에는 안슈트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상단이 많이 모였네요. 경쟁이 만만치 않겠어요.”
“하지만 누구도 우리보다 많은 액수를 제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전조사는 어떻게 되었나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매장량을 측정하고 있습니다. 다 같은 결과가 나오는 걸로 봐서 거의
확실합니다.”
“현재 가격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나요?”
“일단 1,200 만 골드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에 따라 300 만 골드 정도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매장량이 어마어마한 만큼 그 정도 가격이 될 거라 생각했다.
“일단 두 군데는 사전에 담합이 이루어져서 구입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클레가 인상을 찡그렸다.
“담합? 무슨 말인지 자세히 말하세요.”
“광산 하나에 여러 상단이 붙었습니다.”
“그러니까 상단 여럿이 자금을 모아 광산을 사서 지분을 나눈다는 말인가요?”
“예. 두 곳은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그들을 압도할 수 있지 않나요?”
“굳이 과도한 자금을 투자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나머지 한 곳만 확보해도 충분합니다.”
매장량이 엄청나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아마 당분간은 레늄 왕국 내의 철광석 가격이 상당히 떨어질
가능성이 컸다. 막대한 철광석이 쏟아져 나올 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디아만트 상단은 훨씬 유리했다. 대륙 각지에 지부가 있으니 이곳의 철광석을 다른 왕국에 내다
팔아도 되고, 또 자금이 풍부하니 쌓아 놨다가 나중에 가격이 안정되면 내다 팔아도 된다.
“이 서류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수행원이 내민 서류를 받은 클레는 그것을 단숨에 읽었다. 워낙 정리가 잘 되어 있었기에 상황을 파악하는 건
간단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의 말 대로였다. 역시 유능한 직원을 많이 보내 놨더니 확실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추진하는 걸로 하죠.”
클레는 일이 잘 풀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감히 누가 디아만트 상단과 돈으로 겨룰 수 있겠는가. 고작 레늄
왕국 안에서 말이다.

☆ ☆ ☆

제론은 화려한 호텔방에 앉아 태블릿을 통해 루바인 상단이 무슨 짓을 하는지, 또 다른 상단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인했다.
“드디어 디아만트 상단이 등장했군.”
제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현재 진행 상황으로 보면 디아만트 상단과 루바인 상단이 광산 하나를 놓고
싸우게 되어 있었다.
상식적으로 보면 루바인 상단은 결코 디아만트 상단을 이길 수 없었다. 동원 가능한 자금을 봐도 그렇고,
정보력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루바인 상단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곳이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비열하고 잔인한 수법도
서슴지 않고 써먹는 곳이었다.
“이번에는 아주 재미있을 거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태블릿을 조작해 철광석 채굴 방향을 바꿨다. 다른 곳은 중지시키고, 루바인 상단이
구입하려는 광산에 이어진 광맥의 채굴 속도를 높였다.
철광석 매장량이 차근차근 줄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유적의 창고에 철괴가 차곡차곡 쌓였다.
제론은 태블릿으로 몇 가지 정보를 더 확인한 뒤, 그것을 아공간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가 되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성공했습니다.”
“잘했다. 으하하하핫!”
파인트는 통쾌하게 웃었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다. 사실 이 방법이 안 되면 더 심한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건 위험부담이 컸다. 상대가 디아만트 상단이니 말이다.
“지금 다들 매장량을 다시 측정한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렇겠지. 결과가 들쭉날쭉하면 아마 혼란스럽겠지. 큭큭큭큭.”
파인트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매장량을 측정하는 자들을 매수한 것이다. 매수된 자들 중에는 디아만트
상단에 속한 사람도 몇 명 있었다.
모두를 매수한 건 아니었지만 최소 절반 이상을 매수해 광산의 매장량이 실제로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돌게 만들었다.
지금 베어크 영지는 그에 관한 소문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사실 파인트가 의도한 것보다 소문이 훨씬 빠르고 격렬하게 퍼져서 좀 놀랍긴 했다. 잠깐 손을 썼을 뿐인데
소문이 들불처럼 번졌다.
어쨌든 원하던 대로 되었다. 이제 남은 건 디아만트 후작가가 투자의 상한선을 낮추도록 부추기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건 클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그중 한 명을 매수했으니 시작은 그가 하겠지만
말이다.
세상 어디나 빈틈은 있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디아만트 상단처럼 큰 곳은 더더욱 그런 법이다.
“자, 그럼 슬슬 분위기를 보러 갈까?”
파인트는 느긋하게 광산으로 향했다. 다른 네 곳의 광산에 비해서 그가 찍은 곳은 한산했다. 소문이 너무 심하게
퍼지고 거기에 신빙성까지 얹히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손을 떼는 상단이 많아졌다.
광산을 개발한 사람은 울상이었다. 그도 나름대로 매장량을 조사했다. 하지만 지금 퍼지고 있는 소문은 완전히
틀렸다. 아무리 다시 조사를 해도 매장량은 어마어마했다.
난감한 기색을 떨쳐 내지 못한 광산주에게 파인트가 다가갔다.
“이제 슬슬 결정을 내리실 때가 된 것 같소.”
광산주는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500 만 골드는 너무 적습니다. 이 광산을 개발하느라 들어간 돈과 시간을 생각하면…….”
“그래도 매장량에 비하면 제법 높은 금액 아니오?”
광산주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억울했다. 만일 매장량이 소문처럼 정말로 그렇다면 500 만 골드는 후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나치게 후려친 가격이었다.
“좋아. 그럼 내가 600 만 골드까지 생각해 보겠소.”
광산주는 갈등했다. 600 만 골드라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사실 많이 남는 장사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1,200 만 골드짜리 광산이었는데, 고작 하루 만에 반 토막이 났으니 속이
쓰렸다.
한참을 갈등하던 광산주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그 순간 옆에서 치고 들어온 목소리만 아니라면 말이다.
“700 만 골드.”
광산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파인트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네놈이 대체 여긴 무슨 일로 온 것이냐!”
파인트는 너무 화가 나서 아카데미 시절에 하던 대로 소리쳐 버렸다.
“말이 너무 심하군.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되나?”
파인트는 이를 갈며 제론을 노려봤다. 확실히 실수하긴 했다. 하지만 사과를 하기는 싫었다.
제론은 파인트가 사과를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재차 광산주에게 말했다.
“700 만 골드에 파시겠소?”
광산주의 안색이 밝아졌다. 무려 100 만 골드를 더 벌 수 있는데 왜 마다하겠는가.
“팔겠습…….”
“800 만 골드!”
파인트가 외쳤다.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작 700 만 골드에 이 광산을 빼앗기면 앞으로 10 년 동안은
잠을 설칠 것이다.
광산주의 표정이 변했다. 왠지 분위기가 묘했다. 두 사람의 기세 싸움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거 잘하면…….’
광산주의 눈동자에 욕심이 어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가격이 알아서 올라갈 것 같았다. 잘하면 훨씬 더
비싸게 파는 것도 가능했다.
“900 만 골드.”
제론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던졌다. 파인트는 그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한 번만 더 부르면 자신이
이길 것이다.
“1,000 만 골드.”
어차피 1,200 만 골드에 사려고 했던 광산이었다. 거기에 몇백만 골드 정도는 추가로 지불할 의향이 있었다. 이
광산의 가치는 상당히 높았다.
그러니 1,000 만 골드에 사도 충분히 이익이었다.
파인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제론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돈이 없으면 이만 꺼져라.”
그 말에 제론이 눈을 부라렸다.
“1,100 만 골드!”
제론이 크게 외쳤다. 오기로 만용을 부리는 모습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파인트는 피식 웃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금액을 또 올렸다.
“1,200 만 골드.”
그렇게 말하는 파인트의 표정에는 우월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오만한 눈으로 제론을 노려봤다. 네깟 것이 감히
이제 어쩌겠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흐음.”
제론은 뒤로 한발 물러났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파인트도 광산주도 이제 경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론에게 1,200 만 골드가 넘는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사실 말이 1,200 만 골드지, 정말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루바인 상단도 1,200 만 골드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렇게 쓰고서 바로 광산을 팔아 돈을 회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었다.
실제로 100 만 골드면 웬만한 작은 영지 정도는 너끈히 사고도 남는다.
예전 슈린 공작가가 테페룸 100 킬로그램을 잃어버리고 그걸 다시 암시장에서 사느라 재정 상태가 잠깐 흔들린
적이 있었다.
테페룸 100 킬로그램을 정상적으로 사기 위해선 100 만 골드 정도 한다. 암시장에서 사려면 150 만 골드에서
200 만 골드 정도 한다.
즉, 300 만 골드 때문에 재정 압박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그때는 신형 기간트를
개발하느라 돈이 말랐을 때였다. 어쨌든 그 일을 생각하면 1,200 만 골드가 얼마나 막대한 액수인지 알 수 있다.
파인트는 상단 운영자금의 대부분을 가져왔다. 만일 이대로 이 돈을 잃으면 루바인 상단은 그대로 망한다. 물론
그럴 일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자, 이제 됐으니 계약합시다.”
파인트가 광산주를 보며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광산주도 그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제론이 한마디를
던졌다.
“1,300 만 골드.”
파인트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이놈은 뭔가를 아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1,300 만 골드나 되는 돈을
이런 광산에 투자할 리가 없었다.
“지금 장난하나? 과연 그 돈을 지불할 능력이 되는지 증명하는 게 먼저일 거 같은데?”
제론이 머뭇거리자, 파인트가 으르렁거리며 다가갔다.
“이놈 봐라? 그럼 지금까지 가격을 올리기 위한 수작을 부렸단 말이냐? 만일 정말로 그렇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겠다.”
파인트는 그렇게 말하며 뒤에 손짓을 했다. 그를 따라온 호위 기사들이 제론을 크게 에워쌌다. 도망가지 못하게
길을 막은 것이다.
제론은 그 모습을 보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종이 뭉치였다. 그것을 파인트가 보기 좋게 앞에서 쫙 펼쳤다.
“채, 채권?”
무려 100 만 골드짜리 채권이었다. 그것도 신용이 가장 확실한 디아만트 상단의 것이 뭉치로 있었다. 제론은 한
장 한 장 세며 일일이 확인시켜 주었다. 정확히 13 장이었다.
파인트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이대로는 저 광산을 빼앗기고 만다. 어쩌면 제론의 뒤에 디아만트 상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저 채권을 돈 대신 들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 이제 1,300 만 골드보다 더 많은 돈을 제시할 수 없다면 물러가는 게 어때? 꼬리를 말 수 있는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게 아닌데 말이야.”
제론의 유치한 도발에 파인트는 그대로 넘어갔다.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면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지만,
제론은 파인트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1,500 만 골드!”
파인트가 부를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을 불렀다. 상단의 운영자금 1,200 만 골드에 빚으로 만든 300 만 골드를
합한 금액이었다. 그것은 혹시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몰라 준비한 돈이었다.
제론은 채권을 다시 품에 넣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쉬운 표정으로 한발
물러났다.
파인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계약을 해도 될 것 같군.”
계약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파인트는 계약을 해냈다는 기쁨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제론은 파인트가 계약하는 걸 확인한 뒤에야 조용히 자리를 떴다.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로.

☆ ☆ ☆

클레는 눈살을 찌푸리며 광산이 파인트에게 팔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1,500 만 골드? 예상하고 너무 다른데?”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따지지 않고 또 광산 매입에 나서지 않은 건, 루바인 상단이 결국 자신에게
광산을 팔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루바인 상단은 결코 광산을 직접 운영하지 않는다. 그건 상단의 구조만 파악해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즉,
사서 되팔겠다는 뜻이었다.
루바인 상단이 가격을 후려쳐서 광산을 샀으니 처음 예상보다 더 저렴한 가격에 광산을 구입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다린 거였다.
한데 1,500 만 골드라니. 대체 루바인 상단은 뭘 한 거란 말인가. 지저분한 짓을 하느라 루바인 상단이 뇌물로
뿌린 돈이 무려 수십만 골드에 달한다.
한데 그렇게 하고도 1,500 만 골드에 광산을 사다니. 이건 거의 맥시멈에 가까운 금액 아닌가. 클레가 생각했던
최대한의 금액이 바로 1,500 만 골드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 봐요.”
클레의 물음에 수행원이 차근차근 당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황당했다. 클레는 모든
얘기를 다 듣고도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클레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그 사람 때문에 정말 곤란하게 되었네요. 1,500 만 골드나 주고 샀으니 더 비싸게 팔 게 분명한데…
….”
“어쩌면 원가에 넘길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좀 다르니까요.”
“그야 그렇겠죠. 하지만 그래도 너무 비싸요.”
1,500 만 골드까지 생각하긴 했지만 1,200 만이나 1,300 만 골드에서 해결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
물 건너가 버렸다.
“대체 그 사람은 왜 우리 일에 훼방을 놓은 걸까요?”
클레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안슈트가 말했다.
“우연히 끼어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쪽에 얼굴도 안 내밀었잖습니까.”
클레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분명히 모든 걸 다 꿰고 있었을 거예요.”
클레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루바인 상단에 부담을 가중시키려는 의도 같긴 한데…….’
광산을 비싸게 샀으니 의도는 성공했다. 하지만 광산에서 나오는 철광석을 통해 얼마든지 손해를 상쇄할 수
있었다. 또 소문을 잠재우거나 유리하게 바꾼 뒤, 조금만 이윤을 남기고 광산을 팔아도 충분히 팔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루바인 상단으로서는 손해 볼 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 클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제론이라는 사람은 그런 의미 없는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자, 클레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을 포기했다. 이제는 시간을 두고
파인트에게 접근해 광산을 구입하는 문제를 고민해야만 한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크하하하핫! 그놈이 물러날 때의 표정 봤느냐? 어찌나 통쾌하던지. 크하하하핫!”


온 방 안이 떠나가라고 웃는 파인트를 보며 상단 직원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1,500 만 골드나 들여서 광산을 사
놓고는 뭐가 저리 즐겁단 말인가.
그리고 이제 하루라도 빨리 광산을 되팔아야 상단을 운영할 텐데 저러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디아만트 상단은 어쩌고 있느냐?”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연락이 없으면 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 아니냐!”
“그, 그것이…….”
“왜? 못하겠느냐?”
“아, 아닙니다. 해 보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직원이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파인트는 그것을 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 나머지 직원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디아만트 상단은 시간을 끌면 우리가 곤란해진다는 걸 알고 있다. 결국 가격을 낮추겠다는 속셈이란 말이다.”
직원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만일 정말로 그렇게 되면 큰일이었다. 얼마나 가격이 낮아지냐에 따라 루바인
상단이 크게 위축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렇게 말했는데도 못 알아들은 것이냐! 어서 다들 나가서 방법을 강구하란 말이다! 클레 폰 디아만트가 직접
날 찾아오게 만들라고!”
직원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파인트는 그것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한심해서 원. 내가 없으면 아예 상단이 돌아가질 않는다니까.”
파인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빙긋 웃었다. 어쨌든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일이 계속 잘 풀려 클레를 단숨에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원대한 꿈에 한발 다가가게 된다. 파인트는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 눈을 감았다. 잠깐 눈을 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후, 파인트가 소파에 편안하게 기대 잠들었다.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Chapter 8 루바인 상단

클레는 슬슬 파인트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시간이 많지 않았다. 빨리 이곳의 일을 마무리해야
다른 일을 할 것 아닌가.
사실 조금 더 시간을 끌려고 했다. 하지만 몇몇 상단이 파인트에게 접근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더 시간을
끌기가 곤란해진 것이다.
상단의 움직임 뒤에 파인트의 수작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루바인 상단과 자리를 만들어 봐야겠어요.”
클레의 말에 옆에 붙어 있던 수행원이 대답했다.
“연락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광산의 매장량은 다시 확인해 봤나요?”
“예.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전에 딴소리를 하던 자들도 말을 바꿨습니다.”
클레가 차갑게 웃었다. 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뒷돈을 받는 걸 막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상단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면 그걸 다 토해 내게 만들어야만 한다.
“아무리 뒤에서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다른 상단이 움직인다는 건 분명히 이유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들도
매장량을 다시 확인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루바인 상단이 이번에 아주 작정을 하고 우리 상단에 물을 먹였네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미 벌어진 일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클레도 그것을 알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알았어요. 일단 그쪽에 연락을 넣어서 약속을 잡아 줘요.”
“알겠습니다.”
수행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나려고 할 때, 다른 수행원이 다급히 들어왔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제론이 왔다는 말에 클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파인트를 만나기 위해 나가려는 수행원을 불렀다.
“기다려요!”
수행원이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클레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젓는 클레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일단 에어스트 백작님을 만난 다음에 다시 결정을 내리겠어요.”
수행원은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그래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한쪽으로 물러나 조용히 섰다.
잠시 후, 제론이 시종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최근 디아만트 상단에서 만든 지부였기에 건물을
관리하는 시종이 따로 있었다.
제론은 방에 들어서며 주위를 슥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훌륭한 건물이었다. 디아만트 상단에서
새로 지은 건물이니 당연했다.
건물의 외형이나 내부, 그리고 건물을 관리하는 시종과 시녀를 보면 디아만트 상단에서 이곳 베어크 영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여기까지 오면서 그것을 확인한 것이다.
“설마 여기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에어스트 백작님.”
클레의 의미심장한 말에 제론이 빙긋 웃었다.
“이 영지에 재미난 일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왔소.”
“그 재미있는 일이 우리 디아만트 상단을 골탕 먹이는 것인가요?”
“그럴 리가 있겠소?”
“하면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은 뭐죠? 백작님 덕분에 광산주가 아주 신 난 것 같던데요.”
“어차피 루바인 상단의 돈이 나간 건데 디아만트 상단이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소?”
클레가 어이없는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정말로 몰라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루바인 상단이 그 광산을 운영할 것 같나요? 우리에게 그걸 팔 거라는
사실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알 거예요!”
“그걸 왜 디아만트 상단이 산다는 거요?”
“안 살 거면 대체 제가 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세요?”
클레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저런 말을 할 거면 대체 왜 찾아왔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굳이 그 광산을 살 필요가 있소? 매장량도 확실치 않은 광산을 말이오.”
클레가 입을 쩍 벌렸다.
“그럼 대체 백작님은 왜 그걸 사려고 하셨나요?”
제론이 씨익 웃었다.
“그때야 괜찮은 광산인 줄 알았으니까.”
“예?”
클레는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제론을 바라봤다. 지금은 괜히 열을 낼 때가 아니었다.
“왠지 설명이 더 필요한 것 같네요.”
제론은 그녀의 변화를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큰 상단을 이끄는 사람다웠다.
“난 다른 사람들과 매장량을 확인하는 방법이 약간 다르오.”
클레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한데 내 방법으로 그 광산의 매장량을 확인해 보니 별로 대단치 않더란 말이오.”
“그걸 제게 알려 주시는 이유가 뭐죠?”
제론이 씨익 웃었다.
“혹시 괜찮은 광산 하나 살 생각 없소?”
클레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광산이라니. 그럼 제론이 광산을 개발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정보는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아, 정확히는 광산이 아니라 광맥이라고 해야 하나?”
“과, 광맥이요?”
“괜찮은 철광맥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걸 개발하자니 시간과 인력이 만만치 않아서 말이오.”
클레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광맥을 발견하는 게 그렇게 쉬우면 누가 광산 개발에 큰돈을
들이겠는가.
광산 개발이 힘든 이유는 광맥을 찾기 어렵기에 엉뚱한 곳을 파헤치기 일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번 땅을
파헤칠 때마다 돈이 무더기로 나간다.
그래서 광산 개발에 돈이 많이 드는 것이다. 한데 광맥을 발견했다면 그냥 개발만 하면 된다. 엄청난 돈이
절약된다.
아니, 광맥만 정확히 짚을 수 있다면 차라리 광산을 살 필요 없이 직접 개발하면 된다. 수만 골드 선에서 해결이
가능하니 말이다.
그럼 대체 얼마나 많이 남는 장사인가.
“정말인가요?”
“물론이오. 매장량은 장담컨대, 이곳에서 발견된 그 어떤 광산보다 많을 거요. 거의 2 배에 가깝소.”
클레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제론은 그녀가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얼마에 사겠소?”
클레는 즉시 가격을 책정해 주었다. 물론 사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광맥을 정확하게 짚어 줄 수 있고, 매장량이 확실하다면 2,000 만 골드는 되겠죠.”
“2,000 만 골드라. 엄청나군.”
매장량이 이곳에서 발견한 광산의 2 배라면 수십 년에 걸쳐서 캐야 하긴 하지만 수억 골드는 될 것이다. 그걸
2,000 만 골드에 사는 것이니 비싼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해야만 한다.
“아직 사겠다고 결정한 건 아니에요.”
제론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결정되면 알려 주시오. 3 일 내로 결정을 내렸으면 좋겠소. 안 사면 다른 상단에 팔아야 하니까.”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일어났다. 클레는 그를 배웅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이 점점
헝클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아무 생각도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은 제론의 얘기를 함께 들은 클레의 수행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제론은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피로가 몰려왔다. 최근 너무 신경을 많이 썼다. 몸은 힘들지 않은데
정신적으로 지쳤다.
“아, 이것부터 처리해야지.”
제론은 품에서 디아만트 상단의 채권을 꺼냈다. 그리고 심장의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화르륵!
채권이 몽땅 불에 타 버렸다.
불꽃과 함께 재가 되어 흩날리는 채권을 가만히 쳐다보던 제론은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이 채권은 제론이 만든 가짜였다. 제론에게 1,200 만 골드나 되는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이것은 그저 파인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소품에 불과했다. 이젠 필요 없었다.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서 자세히 살펴도 가짜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채지 못하지만 사용할 수는 없었다. 디아만트
상단의 채권은 마법적 처리와 일련번호를 통해 진위 여부를 반드시 확인한다.
어쨌든 채권을 처리한 제론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잠든 제론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 ☆ ☆

파인트는 점점 초조해졌다. 당장이라도 연락이 올 것 같던 디아만트 상단이 너무 조용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곤란했다. 빌린 돈 300 만 골드에 대한 이자도 문제였고, 상단 운영자금도 문제였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광산은 지금 채굴도 안 하고 있었다. 원래의 광산주가 인부와 장비까지 싹 수거해 갔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연한
관례였다. 자신이 직접 구한 사람과 장비를 써야 믿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1,500 만 골드나 되는 돈을 넣은 상태로 이자만 나가고 있었으니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손해는 디아만트 상단이 나서는 순간 싹 메워진다.
철광석을 독점으로 공급받으면 그로 인한 이득은 엄청나다. 루바인 상단은 이번 일을 계기로 쭉쭉 성장할 것이다.
한데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디아만트 상단이 너무나 잠잠했다. 베어크 영지에 지부까지 만들었는데 움직이지
않는단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디아만트 상단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나간 놈들은 아직도 안 들어왔느냐?”
파인트의 호통에 직원 하나가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그들이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불똥이 자신에게 튄다. 벌써
몇 번이나 불벼락을 맞았는지 모른다.
방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파인트는 씩씩거리며 방 안에 서 있는 3 명의 직원을 둘러봤다. 파인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움찔 목을 움츠렸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시선을 돌리면 더 곤욕을 치른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파인트가 막 폭발하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꽝!
“큰일 났습니다!”
부서져라 문을 열고 들어온 직원이 그렇게 외치며 파인트를 바라봤다.
파인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덜렁거리는 문과 직원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이를 갈았다.
문짝까지 부순 놈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만일 별것 아닌 일이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직원을
향해 턱짓을 했다.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디아만트 상단이 다른 광산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뭐?”
파인트는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쫙 흘러내렸다. 이건 아니다. 만일
정말로 디아만트 상단이 다른 광산으로 눈을 돌리면 난리가 난다.
광산을 파는 거야 문제 될 게 없다. 어차피 가치에 맞는 가격을 주고 샀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게 문제였다.
루바인 상단에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임박했다. 300 만 골드나 되는 빚을 계속 끌고 갈 수는
없었다. 또한 상단을 돌릴 시기도 살짝 늦었다.
만일 여기서 더 지체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똑바로 보고해! 디아만트 상단이 다른 광산으로 눈을 돌렸다는 게 무슨 말이야!”
“주변 인물을 이용해 우리 상단이 보유한 광산을 처분할 거라는 소문을 흘렸습니다. 한데도 꿈쩍 않는 것이
이상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디아만트 상단에 접근했습니다.”
파인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랬더니 내부적으로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 뭡니까. 무슨 일로 그리 바쁜지 알아보니…….”
“다른 광산을 매입할 준비를 한다 이거냐?”
“그, 그렇습니다.”
파인트는 지체하지 않고 즉시 움직였다.
“디아만트 상단으로 가자!”
최대한 서둘러 걸었다. 함께 있던 직원 전원이 그 뒤를 따랐다.
디아만트 상단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멀게 느껴졌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그래도 달리지는 않았다. 괜히 급한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후욱.”
디아만트 상단 지부에 도착한 파인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마침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클레와 눈이 마주쳤다.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클레가 놀란 눈으로 묻자, 파인트는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광산 문제로 상의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소.”
클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한 번쯤 그 문제로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지요.”
클레는 파인트를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파인트에게 적당한 자리를 권한 후, 자신도 그 앞에 앉았다.
그녀의 뒤에는 안슈트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자, 이제 얘기를 해 보세요. 광산 문제라고요?”
“그렇소. 우리 루바인 상단이 구입한 광산에 관심을 가진 걸로 알고 있소.”
클레가 빙긋 웃었다. 파인트는 그 미소를 보니 더 그녀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관심을 가졌던 건 맞아요. 하지만 지금은 관심이 사라졌어요.”
“관심이 사라졌다고? 왜 그렇게 된 거요?”
“일단 값이 너무 비싸요. 최소한 1,500 만 골드를 줘야 매입이 가능한데, 그 정도 돈을 투자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어요.”
파인트의 얼굴이 굳었다. 우려했던 사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매장량을 생각하면 1,500
만 골드에 사도 충분히 이득이었다. 한데 가치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알려진 매장량의 절반만 해도 손해는 아닌 듯하오만.”
“지속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아요.”
파인트는 클레를 노려봤다. 누가 봐도 값을 깎겠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지금 칼자루를 쥔 사람은 클레였다.
파인트가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500 만 골드에 합시다. 한 푼도 안 남기고 넘겨 드리겠소.”
클레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이네요. 그 광산은 구입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아. 알겠소. 그럼 1,400 만 골드로 합시다.”
지금은 손해를 보고서라도 팔아야 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만일 파인트가 더 능숙했다면 결코 이렇게 나서서 값을
깎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약자라는 것을 말해 주는 꼴이었으니까.
“관심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1,300 만 골드! 더 이상은 곤란하오.”
클레는 파인트의 모습에서 다급함을 읽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설사 500 만 골드를 부른다 하더라도 응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공짜로 준다고 해도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우리 상단에서는 이미 그 광산을 포기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대체 왜 그런 결정을 했단 말이오! 그럼 1,200 만 골드로 합시다! 어차피 디아만트 상단도 그 정도 가격에
사려고 하지 않았소!”
파인트는 클레의 태도에 다급해졌다. 그가 보기에는 정말로 광산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리한 액수를
불렀다.
하지만 클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파인트에게 자신이 가진 정보 하나를 알려 주었다.
“그 광산의 매장량을 정밀하게 조사해 보는 건 어떤가요?”
파인트의 표정이 변했다. 광산의 매장량 문제가 나온다는 건 자신이 몇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전 작업
때문이었다.
“매장량에 대한 소문은 다 헛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광산의 매장량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클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말을 듣고 말고는 파인트의 문제였다.
“그럼 저도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 광산은 매입하지 않겠습니다.”
클레의 말이 워낙 단호했는지라 파인트가 크게 당황했다.
“1,000 만 골드!”
파인트는 그렇게 외치고 클레의 표정을 살폈다. 1,000 만 골드까지 깎았는데도 전혀 표정 변화가 없었다.
파인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거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오? 상도의라는 것이 있는데.”
“상도의라뇨?”
“가격을 너무 후려치는 것 아니냔 말이오. 이쯤 했으면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오?”
“여전히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전 정말로 광산을 매입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도 더 이상 팔고 싶지 않소.”
파인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 클레가 잡아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클레는 오히려
반색했다.
“가겠소.”
파인트가 돌아서자, 클레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살펴 가세요. 바쁜 관계로 멀리 나가지 못합니다.”
클레의 말과 행동에 파인트는 이를 갈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상념이 휘몰아쳤다. 일이
완전히 꼬여 버렸으니 큰일이었다.

열흘이 지났다. 파인트는 볼이 홀쭉해졌다. 거기에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웠다. 맘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가격을 낮춰 다른 상단과 접촉했는데, 그 어떤 상단도 광산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별의별 방법을 다 써
봤는데도 통하지 않았다.
베어크 영지에는 이미 루바인 상단의 광산은 매장량이 거의 없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결국 파인트는 매장량을 다시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정말로 놀라웠다. 매장량이 거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철광석에서 철만 쏙 빼 간 것 같았다.
파인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매장량을 다시 조사했다. 한데 조사를 할 때마다 매장량이 줄어들었다.
매장량이라는 것이 정확히 측정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몇 가지 방법으로 대략적인 양을 추측하는 방식이었다.
한데 방법을 바꿀 때마다 매장량이 달라졌다. 파인트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지난 열흘 동안 계속 광산에 매달렸다. 하지만 결론은 매장량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광산 개발자를 족치고자 했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낌새를 눈치채고 도망친 것이다. 사실 그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광산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니 말이다.
애초에 매장량을 제대로 측정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뭔가 이상했다.
고민에 잠겨 있는 파인트에게 직원 한 명이 머뭇머뭇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저…… 슈린 상단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슈린 상단은 슈린 공작가가 거느린 상단의 중심이 된다. 루바인 상단과 비슷한 규모의 상단을 여럿 거느리는
구조였다.
그리고 슈린 상단의 책임자는 당연히 파인트의 아버지인 슈린 공작이었다. 가문의 재력을 한 손에 움켜쥐기 위한
방식이었다.
“뭐라고 하더냐?”
“광산 전문가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파인트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결국 슈린 공작의 귀에 이번 일이 들어간 것이다. 사실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젠장. 미스트 드래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놈을 정리했으면 이런 곤욕을 치를 필요도 없었을 것을!’
만일 제론이 당시 나서지 않았다면 광산을 헐값에 살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손해를 크게 보긴 했어도 상단이
망할 지경은 아니었을 것이다.
“언제 온다더냐?”
“오늘 중으로 도착한다고 합니다.”
파인트는 소파에 기대 눈을 감았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여기서 고용한 사람들도 전문가였다.
가문에서 사람이 오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루바인 상단은 끝났다. 문제는 그냥 루바인 상단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상단 운영자금이라는 것은 미리 받은 물품에 대해 지급할 대금도 포함된 것이다. 1,200 만 골드 중, 300 만
골드는 조만간 지급해야 할 돈이었다.
‘빚이 300 만 골드에 지불 대금이 300 만 골드라…….’
그나마도 빚은 고리의 사채를 썼다. 매일 나가는 이자가 엄청났다. 결국 파인트에게 남은 길은 딱 하나였다.
“슈린 상단으로 가자.”
파인트는 힘없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치욕으로 물든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이번 일로 인해서 후계자 자리가 흔들릴지도 모른다. 그건 루바인 상단을 날려 먹은 일보다, 또 광산이
텅텅 빈 것보다 훨씬 더 짜증 나는 일이었다.

☆ ☆ ☆

제론은 태블릿을 통해 그 모든 상황을 지켜봤다. 또한 한편으로 유적에서 채굴과 제련을 통해 창고에 철괴가
쌓이는 것도 확인했다.
공간이 확장된 창고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한데 그 창고의 절반이 철괴로 꽉 차 버렸다.
나머지 광맥은 유적에서 가까운 부분만 싹 정리하고 산으로 뻗은 것들은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그래야
그들도 광산에서 철광석을 캘 테니까.
제론은 유적 아래로 뻗어 나간 광맥의 채굴을 시작했다. 루바인 상단의 광산을 말려 버린 것처럼 빠르게 하지는
않았다. 속도를 느리게 조정했다.
철광맥을 만드는 데에는 막대한 시간이 필요했다. 유적이 지독히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기에 광맥이 이 정도로
만들어졌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광맥을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나마 제대로 광맥 제조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광맥이 이 정도였지 만일 제대로 돌아갔다면
이 근방은 모조리 철광석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유적은 그 정도로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자, 그럼 새 광산은 어떻게 돼 가는지 볼까?”
제론은 태블릿을 조종해 디아만트 상단이 새로 개발하는 광산을 확인했다.
수많은 인부와 장비가 동원되어 광산을 만들고 있었다. 광맥을 너무나 정확히 짚어 주었기 때문에 광산을 만드는
건 상당히 순조로웠다. 매장량도 굉장했기에 디아만트 상단은 2,000 만 골드에 광산을 산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결단력이 대단해. 감도 좋고.”
제론은 클레를 그렇게 판단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광맥을 정확히 짚어
준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하지만 클레는 제론을 믿었고,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다.
더구나 새로 개발한 광산은 베어크 영지 밖에 위치했다. 베어크 영지를 벗어난 곳에 위치한 큰 산이었는데,
그곳은 왕국 직영지였다.
클레는 발 빠르게 그 산을 매입했고, 광산을 개발했다. 덕분에 베어크 영지에 지분을 빼앗길 일도 없었다.
그 지분만으로도 제론에게 준 2,000 만 골드 이상의 값어치를 했다.
제론은 마티를 움직여 클레에 초점을 맞췄다. 마침 클레는 안슈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지 않아?”
“맞습니다, 아가씨.”
“이렇게 정확히 광맥을 찾아내다니. 대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지?”
“운일 겁니다.”
클레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운일 리가 없어요. 그동안 그 사람이 했던 일을 생각하면 뭔가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클레의 말에 제론이 감탄을 했다.
“대단하군. 의심이 많으니 당분간 조심해야겠어.”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클레와 안슈트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곳의 일은 언제쯤 마무리됩니까?”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기간트를 동원해서라도 빨리 끝내야죠. 다른 광산보다 늦었으니 서두를 필요가
있어요.”
안슈트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클레는 이런 일에는 아주 정확하고 냉정했다. 그리고
안슈트는 그런 클레를 지켜 주기만 하면 된다.
“이 일이 대충 마무리되면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갈 거예요.”
“에어스트 백작령 말입니까?”
“안 그래도 일정에 있었는데, 좀 당겨야겠어요. 어차피 일정상으로 얼마 안 남기도 했고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 뒤로는 소소한 얘기가 이어졌다.
제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의심을 품은 클레가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오는 상황이 좀 꺼림칙했다. 하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디아만트 상단과 계약을 한 상황이니까.
“상단 설립을 서둘러야겠어.”
지금이야 다른 상단을 이용해 곡물을 유통할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는 결국 그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대로 된 상단을 만들어 레늄 왕국은 물론이고 대륙
전역으로 곡물을 유통할 생각이었다.
생산량은 충분했다. 일단 영주성 근방의 평지만 해도 엄청난 넓이였다. 거기에 암석 지대를 개간해서 나오는
땅까지 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생산량이 될 것이다.
또한 차츰 초고대 문명의 농법을 도입하면 생산량이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할 일이 많군.”
할 일이 많다는 것은 돈 들어갈 구석이 많다는 뜻과도 같다. 이제 항구도 짓고 어업까지 손대려면 웬만한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번에 광산을 팔아 만든 2,000 만 골드는 정말로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자, 그럼 바인한테 연락을 해 볼까?”
제론은 이번 일을 여기서 그냥 끝낼 생각은 없었다. 루바인 상단을 무너뜨린 건 슈린 공작가를 흔들기 위함이었다.
바인에게 말해 놓으면 분명히 빈틈을 잔뜩 찾아낼 것이다.
루바인 상단은 결국 슈린 공작가의 것이다. 그들이 진 빚도 슈린 공작가의 다른 상단을 통해 자금을 조달해
막아야 하고, 물품 대금도 마찬가지로 처리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다른 상단에 빈틈이 생긴다. 제론은 그것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아마 슈린 공작가는
루바인 상단으로 인해 크게 휘청거리게 될 것이다.
제론은 눈을 빛냈다. 슈린 공작가에 대한 복수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Chapter 9 흔들기

제론은 곧장 영지로 복귀했다. 당분간은 베어크 영지에 갈 일이 없었다. 물론 유적은 얘기가 다르다. 유적
창고에 보관한 철괴가 필요하면 언제든 가 볼 것이다.
유적을 통해 영지에 도착한 제론은 일단 지하 수련장에서 나갔다. 한데 생각보다 성에 활기가 가득 차 있어서
놀랐다.
사실 과도한 업무량에 밀려서 다들 허덕이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예상과 전혀 달랐다.
제론은 일단 바이스부터 찾아갔다. 영지의 총관이니 그것이 순서였다.
“영주님! 드디어 오셨습니까!”
바이스는 예상대로 제론을 크게 반겨 주었다. 한데 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업무량에 짓눌리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랐다.
“좋아 보이는군?”
제론이 의아한 눈으로 묻자, 오히려 바이스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영주님께서 일할 사람을 잔뜩 보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덕분에 요즘 다들 한시름 놨습니다.”
“일할 사람?”
제론은 더 의문이 들었다. 일할 사람을 보내다니. 자신이 언제 그랬단 말인가. 게다가 바이스를 도울 정도면
상당한 고급 인력이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을 잔뜩 보낼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뭔가 이상해 알아보려던 제론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바인이?’
제론은 바이스와 대화를 나누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바인에게 연락을 취해 확인했다.
역시 바인이 추진한 일이었다.
“대단하군. 사람 하나는 제대로 얻었어.”
제론은 혀를 내둘렀다. 바인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나 더 뛰어났다. 알아서 인재까지 찾아 보내 주니
말이다. 바인이 보낸 사람들이니 뒷조사도 확실히 끝냈을 것이다.
게다가 업무 처리량이 엄청났다. 정보에 관한 한 따라올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인재를 찾으면서 영지로 영입할
빈민을 고르고, 그러면서 슈린 공작가의 빈틈까지 찾고 있으니 말이다.
마음이 좀 편해졌다. 이젠 좀 더 자주 영지를 비워도 괜찮을 테니까.
제론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당분간은 영지 일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이것만
다 처리한 다음 다시 수도로 올라갈 것이다.
제론은 서류에 집중했다. 이내 집무실에는 사락사락 서류 넘기는 소리만 남았다.

제론은 급한 서류를 모두 처리한 후, 영지를 한 바퀴 둘러봤다. 영지가 워낙 넓어져 다 돌아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제론이 혼자서 빠르게 다녔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한 달이 넘게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제론이 한창 영지를 돌아보고 있을 때, 에어스트 백작령에 손님이 들이닥쳤다.
제론은 한창 채석장을 둘러보다가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성으로 돌아갔다. 그를 기다리던 손님은 클레였다. 제론은
그녀가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기에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얼마 전의 일은 정말로 고마워요. 덕분에 일이 아주 잘 풀렸어요.”
클레는 진심으로 제론에게 고마워했다. 제론이 아니었다면 텅텅 빈 광산을 막대한 돈을 주고 샀을 것이다.
디아만트 상단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1,500 만 골드는 상당히 부담이 되는 액수였다.
그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매장량을 가진 광산을 구입할 수 있었다. 비록 2,000 만 골드라는 돈이 나갔지만,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하고도 남았다.
“덕분에 우리 영지 사업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서로 좋은 일이오.”
“영지 사업이요? 또 뭔가 하시는 일이 있나요?”
클레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녀의 과도한 관심에 제론은 한발 물러나며 대답했다.
“항구를 건설 중이오.”
“항구요?”
클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항구 건설을 마치 어린애가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제론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항구를 건설하려면 들어가는 자재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제론은 굳이 그 말에 대해서 답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재야 당연히 많이 들어간다. 자재뿐 아니라
인력도 엄청나게 필요했다.
하지만 다 해결할 수 있었다.
일단 석재야 암석 지대에서 조달하면 된다. 그곳의 돌을 모두 합하면 항구를 백 개는 지을 수 있었다. 또 목재는
주변 산맥에서 베어 오면 된다. 기간트를 이용하면 된다.
게다가 강철도 잔뜩 있었다. 유적의 창고에 얼마나 많은 철괴가 쌓였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걸 다 쓰는
것도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굳이 클레에게 시시콜콜 얘기해 줄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항구를 보러 여기까지 온 거요?”
제론의 물음에 클레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살짝 눈을 흘겼다. 자신을 앞에 두고도 이렇게 빈틈 하나
내보이지 않는 걸 보니 왠지 얄미웠다.
“아뇨. 농지를 보러 왔어요.”
“갑시다.”
제론은 더 말을 섞지 않고 돌아섰다. 여기서 굳이 쓸데없는 얘기를 하며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이거
말고도 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제론이 성큼성큼 걸어가자, 클레가 어이없는 눈으로 제론의 등을 바라봤다.
“하아.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요?”
그녀의 질문에 안슈트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적응이 안 됩니다. 워낙 가벼운 모습만 봐서…….”
사실 가벼운 모습만 본 건 아니었다. 체른산 방어군에서 대결을 하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봤으니까. 그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기사 열 명의 목숨을 날려 버리는 광경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이해했다. 거기는 전쟁터였으니까. 또한 상황이 그랬으니까. 그래서 더 제론의 가벼운 모습만
기억에 남았는지 모른다.
물론 그 역시 붉은 학살자라는 정체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아가씨. 출발하셔야 합니다.”
안슈트의 말에 클레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가, 가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클레를 보며 안슈트가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두 사람은 빠르게 멀어져가는 제론을 열심히 쫓아갔다.

클레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푸른 물결이 촤르륵 지나갔다.
굉장했다. 다른 곳에 비해 작물의 키가 달랐다. 너무나 풍성했다. 아직 알곡이 맺히지는 않았지만 이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냥 풍년이 아니었다.
“엄청나군요.”
끝이 없었다. 푸른 지평선이 보일 지경이었다. 높은 탑에서 보고 있으니 시작이 영주성 뒤쪽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끝이 어딘지, 또 양옆으로 얼마나 넓게 펼쳐졌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제법 넓죠?”
“제법이라고요? 이 정도로 넓은 농지는 아마 우리 왕국 안에 몇 개 안 될 걸요? 아니, 어쩌면 제일 넓을지도
모르겠네요.”
살짝 흥분한 클레의 말투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직 다 개간한 게 아니오. 내년에는 저것의 10 배를 생각하면 될 거요.”
클레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10 배라니!
저것만 해도 왕국 제일의 곡창지대가 될 수 있는데, 그 10 배라니. 대체 그럼 얼마나 많은 곡물이 나온단 말인가.
“그 절반을 디아만트 상단에 주시겠다는 건가요?”
“힘들면 줄여도 되오.”
클레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뇨. 다 할 수 있어요.”
확실히 말로 정보를 듣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코앞에서 푸른 물결을
보고 있으니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클레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대체 감추고 있는 게 얼마나
많은지 볼 때마다 새로웠다.
“관리를 정말로 잘 하셔야겠어요.”
“그럴 생각이오.”
제론이 대충 대답한 티가 확 나자, 클레는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앞으로 이곳 에어스트 백작령은 레늄 왕국의 중심이 될 거예요. 이 정도 곡물이라면 왕국을 들었다가 놓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곳을 노리는 사람이 많아질 거라는 뜻이에요.”
클레는 그렇게 말하며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의 무심한 표정에 울컥했지만 그래도 이 말은 꼭 해 줘야만 했다.
“곡물 자체를 노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 영지를 노리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조심하셔야 해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소.”
또 건성이다. 클레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진지하게 들어줘요! 전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데, 호의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건가요?”
“누가 무시했다고 그러는 거지? 난 진지하게 들었고, 신중하게 대답한 거요.”
“하아. 알았어요.”
클레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건 클레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이와 비슷한 광경을 너무나 많이 봐 왔기에 더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 결과에 취해 나중을
대비하지 않으면 백이면 백 크게 무너졌다.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가겠어요.”
클레는 토라진 표정으로 돌아섰다. 어차피 볼 건 다 봤다. 향후 몇 년간은 함께 일할 수 있겠지만, 그 이후는
무너질 공산이 컸다. 그 준비를 지금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제론은 돌아선 클레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갑시다.”
이곳은 성 한가운데 세워진 탑이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마탑이기도 했다. 백작령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넓게 펼쳐진 농지를 확인하는 데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었다.
한 가지 문제는 너무 높아서 오르내릴 때 힘들다는 점이었다. 올라올 때 워낙 힘들었기에 내려갈 일이 막막했다.
클레는 아래로 쭉 펼쳐진 계단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클레가 계단을 내려가자 제론이 얼른 그 옆에 붙었다. 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구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물론
그래도 사고는 생기지 않는다. 마탑을 설계할 때 그런 대비도 충분히 해 두었다.
하지만 그런 광경을 외부인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에어스트 백작령에 대한 정보를 모두 외부로 내보여선
안 된다.
올라오는 것만큼이나 내려가는 것도 힘들었다.
클레는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한 번도 제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멀쩡한 척
연기까지 했다.
제론도 그걸 다 알지만 모른 척해 주었다. 그리고 탑을 절반쯤 내려왔을 때, 대화를 시도했다.
“혹시 아츠나 남작령에 대해 좀 아는 게 있소?”
“아츠나 남작령이요? 당연히 알죠. 약초로 유명한 곳이니까요.”
클레가 고개를 돌려 제론을 바라봤다. 의아한 표정이 가득했다.
“그건 왜 물으시죠?”
“아, 재미난 얘기를 하나 들어서 말이오.”
“재미난 얘기요?”
“그곳에 약초가 남아돈다는 거 혹시 알고 있소?”
“예? 그럴 리가요. 그곳의 약초는 대부분 하일렌 상단이 쓸어가다시피 하는데.”
“뭐, 그럼 일시적인 현상인 모양이오. 아무튼 그런 얘기를 들었소.”
클레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제게 그런 말씀을 해 주시는 이유가 뭐죠? 설마 그 말만 듣고 우리 상단이 그곳의 약초를 구입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제론은 빙긋 웃었다. 분명히 그런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안 해도 상관은 없었다. 제론이 가서 사면 되니까.
약초의 경우 보관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제론은 얼마든지 보관할 수 있었다. 말릴 필요도 없었다. 아공간에
쓸어 담으면 된다. 제론의 벨트에는 무려 30 개나 되는 빈 아공간이 있었다.
지금 제론이 클레에게 말한 것은 오늘 보여 준 호의에 대한 보답이었다. 또한 디아만트 상단을 살짝 끌어들여
자신의 싸움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려는 목적도 섞여 있었다.
어찌 되었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보아하니 클레는 움직이지 않을 모양이니까.
“약초가 남아돌면 순간적으로 가격이 좀 떨어지긴 하겠네요.”
클레는 그렇게 말하고는 묵묵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탑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클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에어스트 백작령을 떠났다.

☆ ☆ ☆

“아가씨. 정말로 아츠나 남작령으로 가실 겁니까?”


“약초가 남아돈다는데 가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굳이 거기까지 가서 살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 상단과 거래하는 곳도 제법 많습니다.”
클레는 수행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다. 굳이 그곳에 가서 약초를 살 필요는 없었다. 한데 감이
참으로 묘했다.
“그리고 어차피 그곳에 가 봐야 사기 어려울 겁니다. 하일렌 상단이 아츠나 남작령의 약초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일렌 상단은 슈린 공작가의 것입니다.”
슈린 공작가라는 말에 클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일시에 머릿속에 꽉 찼던 안개가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야.”
아무리 다른 데 정신이 팔렸다고 하지만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그럴 리 없다고 판단했다는 게 맞다.
사실 루바인 상단이 어떤 꼴인지 알면 슈린 공작가 산하의 상단이 어떤 사정인지 대충 답이 나온다. 아마
일시적으로 자금 흐름이 나빠졌을 것이다.
루바인 상단을 죽인다 하더라도 그걸 이끄는 사람이 파인트였다. 가문의 후계자를 내다 버릴 리 없다면 그가
저지른 일은 다 처리를 해야만 한다. 설혹 나중에 후계자 자리에서 내친다 하더라도 말이다.
“당장 가겠어요!”
“예?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린 바보에요.”
“예에?”
수행원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더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클레가 거의 뛰다시피 멀어져 갔다.
“아, 아가씨!”
수행원이 다급히 클레를 뒤따랐다. 그렇게 그들은 아츠나 남작령으로 갔다.

“뭣이? 약초를 선점당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슈린 공작의 호통에 하일렌 상단을 책임지는 몰트 폰 슈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억울했다. 이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슈린 공작이 노려보자 몰트가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디아만트 상단이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디아만트 상단? 그놈들이 아츠나 남작령에는 왜 나타났단 말이냐? 설마 내부 정보가 새 나간 건 아니겠지?”
슈린 공작이 불같이 노해 소리쳤다.
디아만트 상단이 그곳에 갔다는 것은 아츠나 남작령을 책임지는 하일렌 상단의 자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하일렌 상단과 장기 계약을 맺은 곳에 가서 약초를 쓸어 갈 이유가 없었다.
슈린 공작의 표정이 굳었다. 생각하기 싫은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똑바로 얘기해라. 약초만 선점당한 게 확실한 것이냐?”
“예?”
“멍청한 것! 아츠나 남작이 딴 맘을 먹은 건 아니냐는 뜻이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언제까지 계약되어 있느냐?”
“내년까지 계약이 되어 있습니다.”
“내년? 하면 그 이후에는?”
“그건 금년 거래를 마친 다음에 하기로…….”
말을 하던 몰트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걸 보는 슈린 공작의 눈빛이 더없이 차가워졌다.
“아츠나 남작과 미리 얘기가 된 것이냐?”
“그, 그건 아닙니다.”
“제대로 머리가 달려 있긴 한 것이냐? 이번에 계약을 어기면서까지 무리를 했는데, 계약도 확인을 안 했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몰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게 모두 파인트 때문이었다. 루바인 상단이 운영자금을 몽땅 날려 버리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이유도 없었다.
아츠나 남작령은 비교적 다루기가 쉬운 곳이었다. 그래서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 일방적으로 계약을
어기며 대금 지급일을 한 달이나 뒤로 미루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 일은 철저히 비밀로 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슈린 공작과 몰트 자신, 그리고 몰트의 최측근 하나가
전부였다.
그러니 비밀이 새 나갈 일은 없었다. 이건 그저 운이 나빴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몰트가 생각하기에는
그러했다.
하지만 슈린 공작의 생각은 달랐다. 이건 아무리 우연이라고 해도 너무 심하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몇 가지나
연달아 벌어졌다.
아츠나 남작령은 10 년이 넘게 하일렌 상단과 거래를 해 왔다. 이젠 웬만한 상단에서는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약초 상단은 좀처럼 그곳을 찾지 않는다.
한데 디아만트 상단이 그곳에 찾아갔다. 그것도 일부러.
하일렌 상단이 워낙 오랫동안 거래했기에 장기 계약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려져 있고, 또 다들 초장기
계약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한데 디아만트 상단은 마치 그것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물론 그 부분은 확인을 해 봐야 하지만 말이다.
만일 디아만트 상단이 아츠나 남작령과 계약이라도 맺었다면 하일렌 상단은 그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하일렌 상단의 자금이 빠져나갔다는 걸 모르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그, 그렇습니다.”
몰트는 그저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반대 의견이라도 냈다가는 큰일 날 분위기였다.
“가서 아츠나 남작이 계약을 했는지부터 확인해라.”
슈린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꼴 보기 싫다는 뜻이었다.
몰트는 주눅이 잔뜩 든 얼굴로 조용히 물러갔다.

결과적으로 슈린 공작의 예상이 맞았다. 아츠나 남작령은 오랜 거래 상대를 바꿔 버렸다. 사실 그동안 하일렌
상단으로부터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기에 그들로서도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로 인해 당장 하일렌 상단에 문제가 생겨 버렸다.
하일렌 상단은 아츠나 남작령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약초를 받아 팔았다. 아츠나 남작령의 약초가 워낙 특별했고
양도 많았기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그게 문제가 되었다. 하일렌 상단은 거래 규모에 비해 인원이 적었다. 상단 자체가 약초의 운송과 처리에 맞춰져
있었다.
게다가 중간상 역할이었기 때문에 판매는 다른 상단에서 전담했다. 그래서 이번 일로 붕 떠 버렸다.
이대로는 상단을 유지하는 의미가 없었다. 새로운 공급처를 찾아내 계약하지 않는 한 말이다.
게다가 하일렌 상단이 약초를 공급한 판매처가 바로 슈린 상단이었다. 당장 슈린 상단의 매출이 하락하게 생겼다.
그것도 큰 폭으로 말이다.
고작 약초 하나였다. 하지만 그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디아만트 상단은 새로운 약초 공급처와 계약을 하면서
약초 시장의 절대 강자로 거듭났다.
지금까지는 슈린 공작가와 경쟁 관계였는데, 그 균형이 단번에 무너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레늄 왕국 내에서의 일이었다.

☆ ☆ ☆
“카프만입니다.”
제론은 이마가 땅에 닿을 듯 인사하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바인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었다.
바인은 제론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해결해 주었다. 상단을 하나 만들 생각이라니 대번에 사람을 찾아 보내 준
것이다.
카프만은 평민이었다. 하지만 상재가 제법 뛰어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부터
제론은 그렇게 요구했다. 뛰어난 사람보다는 사람됨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제론은 바인을 믿었다. 하지만 안전장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혹시라도 바인이 뒤통수를 치면 상당히
곤란했다. 바인을 통해 유입한 사람이 제법 많았다. 또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그를 통해 인재를 구할 것이다.
카프만은 생각보다 젊었다. 고작해야 30 살쯤으로 보였다. 고생을 많이 한 걸로 보이니 어쩌면 그보다 더 어릴
수도 있었다.
“27 살입니다.”
카프만은 제론이 뭘 궁금해하는지 안다는 듯 먼저 나이를 밝혔다. 역시 겉으로 보는 것보다 더 어렸다. 경험은
적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경험이야 지금부터 쌓으면 되니까. 또, 능력이나 경험이 좀 모자라도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정보를 틀어쥐고 있으니까.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들은 얘기는 있나?”
“장사를 하게 될 거라 했습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들었다. 경험은 좀 있나?”
“어릴 때 슈린 상단의 심부름꾼으로 일을 하다가 향후 독립해서 작은 점포 하나를 운영했습니다.”
“슈린 상단?”
제론은 바인이 왜 슈린 상단 사람을 추천했는지 얼른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카프만의 말에 금방 그
뜻을 이해했다.
“그 점포가 슈린 상단의 방해로 망해 버렸습니다. 제가 상단에서 독립한 게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 말을 하는 카프만의 눈에 독기가 절절 흘렀다. 다른 건 몰라도 슈린 상단에 대한 원한은 대단했다.
“그 뒤로 열 개가 넘는 상단을 전전했습니다. 경험이야 많이 쌓았습니다만, 그게 과연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론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만족스러웠다. 나중은 몰라도 슈린 공작가와 싸우는 동안은 확실히 믿을 만했다. 물론 바인이 뒷일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은 상단을 하나 만들려고 한다.”
“상단 말입니까?”
카프만이 눈을 빛냈다. 과연 그 상단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처음으로
상단의 중심에서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늘부터 네가 상단의 책임자다.”
“예에?”
카프만의 눈가가 하마터면 찢어질 뻔했다. 너무 놀라서 자신이 얼마나 눈을 크게 떴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다짜고짜 만나자마자 상단을 책임지라니.
“제, 제, 제가 말입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기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초기 자본금으로 일단 10 만 골드를 주겠다.”
“10 만 골드!”
카프만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10 만 골드라니. 사실 상단을 책임지라는 말에 자본금으로 생각한 돈이 1 천
골드 정도였다. 한데 그의 예상을 무려 100 배나 넘어 버렸다.
꿀꺽.
카프만은 침을 삼켰다. 뺨이라도 꼬집어 보고 싶었다. 만일 이게 생생한 꿈이라면. 그래서 깨기라도 한다면 아마
지독한 상실감에 자살할지도 모른다.
두근두근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제론을 바라본 카프만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론의 표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에게 10 만 골드를 건네주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 일로 들뜨고 정신을 못 차린 것은 자기 혼자였다. 카프만은 이를 악물고 들떠 하늘로 날아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제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본금이다. 그걸로 알아서 상단을 꾸려 봐라. 도움이 필요하면 어디로 연락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바인은 카프만과의 연락책을 만들어 두었다. 물론 뒤를 잡힐 일이 없도록 신경을 써서 만든 연락책이었다.
“그리고 이걸로 쿠라티오 뿌리를 싹 구매하도록.”
카프만은 제론이 건네는 돈을 받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이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대, 대체 얼마나 많이 사라는 말씀이십니까?”
“닥치는 대로 싹.”
“다, 닥치는 대로 말입니까?”
카프만은 멍한 눈으로 제론과 손에 든 돈을 번갈아 바라봤다. 무려 300 만 골드였다. 자신에게 상단을 만들라고
준 돈의 30 배나 되는 거금이었다.
이 정도 돈이면 수도 인근의 쿠라티오 뿌리는 몽땅 사고도 남았다. 쿠라티오 뿌리가 비교적 흔하긴 하지만 그만큼
가격이 낮았다.
‘무섭도록 가격이 치솟겠군.’
만일 그걸 사재기한다면 가격이 엄청나게 오를 것이다.
쿠라티오 뿌리는 포션을 만들 때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다. 포션의 주재료는 아니었지만 주재료인 거대 몬스터들의
독성을 제거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가졌다.
신성의 힘이 약화된 지금 시대에 포션 제조는 어마어마한 부가가치를 가졌다. 그렇기에 그 제조법도 엄격히
관리되었다.
슈린 상단의 주력 품목이 바로 포션 제조와 유통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매년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다만 거대 몬스터의 피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기에 수량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카프만이 슈린 상단에서 처음 맡은 일이 바로 포션 병을 나르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더 성장해 포션 병을
책임지는 열 명의 담당자 중 한 명의 신임을 받으며 병 조달을 맡았다.
그렇기에 슈린 상단에서 포션이 차지하는 비중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슴이 떨렸다. 이제 제론이 뭘 하려는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슈, 슈린 상단과 싸우시려는 겁니까?”
카프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론은 그런 카프만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두렵나?”
카프만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제론에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두려움만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에 못지않은 기대감도 함께 있었다.
“싸우려는 게 아니다.”
순간 카프만의 눈에 살짝 실망이 어렸다. 이율배반적으로 안도감도 함께 찾아왔다.
“그들을 완전히 무너뜨릴 생각이다.”
카프만은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제론의 눈빛을 바라봤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뭔가가
불쑥 솟구쳤다.
“가, 가능하겠습니까?”
“당연히.”
제론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카프만이 보기에는 마치 주머니에 든 동전을 꺼내는 것처럼 간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습니다.”
카프만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제론은 지금 슈린 상단의 포션 사업을 방해하려 한다. 물론 그렇다고 슈린
상단이 잘못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격은 분명히 입는다.
“백작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에는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문제?”
“슈린 상단의 정보력입니다.”
“우리가 쿠라티오 뿌리를 사재기한다는 걸 금방 알아차릴 거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쿠라티오 뿌리는 제법 흔합니다. 정보를 들으면 어떻게든 조달을 할 것입니다. 아니면 같이
사재기를 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쿠라티오 뿌리는 포션 제조 외에는 아예 쓸모가 없다. 그러니 만일 사재기에 실패하면 그냥 돈만 날리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슈린 상단처럼 대규모로 포션을 만드는 상단은 거의 없다. 슈린 상단이 작정하고 그걸 사지 않으면 고스란히
손해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쿠라티오 뿌리는 오랫동안 보관하는 게 어렵다. 조건이 조금이라도 안 맞으면 금방 썩어 버리기 때문에 사실
사재기를 할 만한 물품은 아니었다.
카프만의 지적은 아주 당연했다. 하지만 제론은 그 말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슈린 상단에서는 그걸 사재기할 여력이 없을 거다.”
“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슈린 상단인데 돈 정도야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봐라. 네가 슈린 상단이라면 과연 어떻게 할까?”
카프만은 제론의 말대로 입장을 바꿔 봤다.
만일 누군가 쿠라티오 뿌리를 사재기한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할까? 당연히 화부터 낼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판단하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보관이 어려우니까.
“아……! 어차피 금방 팔 거라고 생각하겠군요.”
쿠라티오 뿌리는 잘 보관해 봐야 닷새를 넘기기 힘들다. 즉, 그 안에 팔아야 한다는 뜻이다. 돈을 갖다 버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카프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면 쿠라티오 뿌리를 그냥 버리실 생각이십니까?”
슈린 상단에 피해를 안기기 위해 그걸 버린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된다. 카프만은 제론이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야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버릴 이유가 없지. 난 그걸 오랫동안 보관할 방법이 있다. 그러니 넌 최대한 사 모으기만 하면 된다. 어느
정도로 모아야 하는지는 알겠지?”
카프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정말로 특별한 보관법이 있다면 이 일은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일단 마차로 닷새 거리 안에 있는 쿠라티오 뿌리를 싹 쓸어 오면 된다. 쿠라티오 뿌리의 유통기한은 이쪽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저쪽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럼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상단부터 만들어라. 적당한 창고도 하나 사고.”
“예. 맡겨만 주십시오.”
카프만이 터질 것 같이 거세게 뛰는 심장을 움켜쥐며 밖으로 나갔다.
제론은 그런 카프만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 ☆ ☆
슈린 상단의 최고 책임자는 당연히 슈린 공작이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일은 하쓰 남작이 처리한다.
하쓰 남작은 쿠라티오 뿌리를 사재기하는 무리가 있다는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뭐 하는 멍청이들이지?”
쿠라티오 뿌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놈들이 천지 분간 못 하고 저지르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요?”
직원의 물음에 하쓰 남작이 같잖다는 듯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한다……. 그냥 내버려 둬서 썩은 뿌리로 연명하게 할까…… 아니면 당장 추적해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릴까?”
어느 것을 선택해도 즐거운 일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짚을 건 확실히 짚어야 한다.
“그놈들이 얼마나 사들였느냐?”
“두 개의 상점을 탈탈 털어 갔습니다.”
“그래?”
수도에 쿠라티오를 취급하는 상점은 백 개가 넘는다. 당연히 각 상점마다 구비한 양이 많지 않다. 유통기한이
고작 닷새에 불과하기 때문에 딱딱 필요한 양만 갖다 놓을 뿐이었다.
물론 슈린 상단은 그런 점포의 쿠라티오를 이용하지 않는다. 계약한 상단의 것을 이용한다. 사흘에 한 번씩
필요한 만큼 상단에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당연히 수도에서 가까운 곳의 쿠라티오를 들인다. 바로 캐서 가져오는 것이다. 말리면 효과가 없기에 마르지 않은
뿌리를 흙도 털지 않고 운반했다.
하쓰 남작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수도의 상점을 이용할 일도 없을 뿐더러 사재기를 해 봐야 쿠라티오 뿌리는
오래 보관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
“그놈들이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군. 사재기를 해도 하필이면 쿠라티오 뿌리라니.
큭큭큭큭.”
하쓰 남작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직원도 그걸 당연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닷새가 흘렀다.

하쓰 남작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갑자기 차질이 빚어졌다. 쿠라티오 뿌리의 씨가 말라 버렸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구할 수가 없다니! 분명히 계약을 하지 않았느냐!”
하쓰 남작의 호통에 직원이 땀을 뻘뻘 흘렸다.
“하지만 쿠라티오 뿌리가 아예 없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나 되느냐! 이놈들이 계약을 대체 뭐로 아는 게야!”
“일단 위약금을 받았습니다.”
“지금 위약금이 문제냐! 어서 다른 곳에 알아봐! 포션을 제때 공급하지 못하면 우리가 물어야 하는 위약금이
대체 얼마인 줄이나 아느냐! 그깟 쿠라티오 뿌리에 비할 바가 아니란 말이다!”
하쓰 남작은 씩씩거리며 직원을 노려봤다.
“뭐 하고 있느냐! 가서 알아보지 않고!”
직원이 화들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노려보던 하쓰 남작이 남은 직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직원이
흠칫 놀랐다.
“넌 거기서 뭘 하는 거야! 저놈 혼자 일을 다 하게 만들 셈이냐!”
하쓰 남작은 그렇게 소리치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등골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 그놈들! 그놈들 어떻게 되었느냐!”
하쓰 남작의 말에 막 나가려던 직원이 슬그머니 돌아서서 물었다.
“누구 말씀이십니까?”
“쿠라티오 뿌리를 사재기하던 놈들 말이다!”
직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 지금 알아보겠습니다!”
직원이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하쓰 남작은 이를 갈았다.
“이놈들이 감히!”
방심하다가 완전히 당했다. 설마 정말로 그 무식한 짓을 할 줄이야. 이건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슈린 상단을 엿
먹이기 위해 벌인 짓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닷새면 썩어 없어질 쿠라티오 뿌리를 사재기했을 리가 없었다. 아마 그놈이 누군지 모르지만
돈깨나 날렸을 것이다.
잠시 후, 내보냈던 직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어, 없습니다!”
“뭐가 없단 말이냐!”
“근방의 모든 쿠라티오 뿌리를 싹쓸이해 갔습니다! 더 이상 그걸 구할 수 없습니다.”
하쓰 남작이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허이구. 이러다가 쓰러지겠구나. 장사하는 놈들이 그따위로 팔아?”
“이제 내년까지 기다려야 한답니다. 씨를 뿌렸으니 자라려면 1 년은 걸린다고…….”
“닥치고 꺼져라! 가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와!”
직원이 후다닥 뛰쳐나갔다.
하쓰 남작이 남은 직원을 노려봤다.
“보고해.”
“도, 도시의 상점을 싹 쓸어 갔답니다. 수도에는 이제 더 이상 쿠라티오 뿌리가 없습니다.”
“그걸 누가 몰라? 쓸어 간 놈들을 잡아 오란 말이야!”
“하, 하지만…….”
물건을 사재기한다고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특히 레늄 왕국은 상업에 대한 규제가 별로 없었다. 사재기건 뭐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은 뭐가 하지만이야! 가서 잡아 와! 그게 안 되면 알아 오기라도 해! 그놈들이 사재기를 했으면 아직
썩지 않고 남은 뿌리가 있을 거 아니냐고!”
그제야 말을 알아들은 직원이 창백한 얼굴로 달려 나갔다. 하쓰 남작은 털썩 주저앉았다.
“후욱! 후욱! 이놈들 내가 가만히 두나 봐라! 으드득!”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놈들 때문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분노로 인해 살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 슈린 상단은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루바인 상단이 운영자금을 싹 날려 먹은 것도 모자라
빚까지 지는 바람에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다른 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 버렸다.
하일렌 상단이 대표적이다. 그 구멍 때문에 아츠나 남작령이라는 좋은 거래처를 디아만트 상단에 빼앗겨 버렸다.
실로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슈린 상단에도 밀어닥쳤다. 일시적으로 자금이 말라 버린 것이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만일 빨리 포션을 제조해 거래처에 넘기지 못하면 당장 위약금이 문제가 된다. 그걸 치를
돈이 없었다.
잠시 후, 부서질 듯 문이 열리며 직원이 뛰어 들어왔다.
“찾았습니다!”
하쓰 남작이 벌떡 일어났다.
“어디냐!”
“페쿠니아 상단입니다.”
“페쿠니아? 처음 듣는데?”
“생긴 지 이제 닷새 됐답니다.”
“닷새?”
하쓰 남작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럼 상단을 만들자마자 한 일이 쿠라티오 뿌리 사재기란 말 아닌가.
갑자기 짜증이 확 올라왔다.
“어쨌든 가자. 그놈들이 사재기한 쿠라티오 뿌리, 다시 사 와야지.”
하쓰 남작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몇몇 직원과, 슈린 공작가에서 파견 나온 기사 몇 명이 그 뒤를 따라갔다.
페쿠니아 상단은 제법 큰 건물에 있었다. 하쓰 남작은 바쁘게 건물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인상을 썼다.
저놈들이 사재기를 했다고 생각하니 다들 목을 쳐 버리고 싶었다.
하쓰 남작은 살짝 거만함을 몸에 걸치고 페쿠니아 상단 안으로 들어갔다. 이럴 때 저자세로 나가는 건 하책이었다.
힘을 과시해야 최소한의 손실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만일 그게 안 되면 정말로 무력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하쓰 남작은 거기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절박하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페쿠니아 상단의 말단 직원 하나가 다가와 공손히 물었다. 상단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상단 관계자가 아니면
들락거리는 사람이 없었기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쓰 남작은 인상을 팍 썼다. 지금까지 슈린 상단에 그따위 짓을 해 놓고 자신의 얼굴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당연히 호통이 쏟아져 나갔다.
“감히 날 조롱하는 것이냐! 가서 상단주를 불러와라!”
“예?”
말단 직원의 몸이 바짝 굳었다. 저렇게 당당하고 오만하게 말하는 사람은 귀족뿐이었다. 또한 최근 페쿠니아
상단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에 상대가 누군지도 금방 눈치챘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단 직원이 서둘러 카프만을 부르러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하쓰 남작의 호통이 그의 발을 묶었다.
“어딜 가느냐! 날 이렇게 세워 놓을 작정이냐!”
“헉! 죄, 죄송합니다!”
말단 직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크게 당황했다. 그때 다른 직원 하나가 다가왔다.
“넌 가서 상단주님께 손님이 왔다고 알려라.”
그는 그렇게 지시를 내린 후, 고개를 돌려 하쓰 남작을 바라봤다.
“제가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하쓰 남작은 자신을 안내하는 페쿠니아 상단의 직원을 눈여겨보았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나 또 직원을 부리는
솜씨를 보면 상단에서 제법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게 분명했다.
기사와 직원을 데리고 응접실에 도착한 하쓰 남작은 방 안을 한 번 쭉 둘러봤다. 갑자기 생긴 신생 상단치고는
상당히 기품이 있었다.
“이거 어쩌면 그냥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닐 수도 있겠군.”
하쓰 남작은 눈을 빛내며 상단주를 기다렸다. 보통 이런 경우 기 싸움을 한답시고 시간을 끄는 경우가 많았기에
일단 조급한 마음을 싹 버렸다.
잠시 후, 카프만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카프만의 얼굴을 본 하쓰 남작의 표정이 묘해졌다. 상당히 낯익었다.
‘저놈을 어디서 봤더라?’
슈린 상단에서 일하는 직원은 수백 명에 달한다.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슈린
상단은 오랫동안 일하는 직원이 많지 않았다. 일하다 그만둔 사람까지 다하면 천 명도 넘을 것이다.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쓰 남작은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카프만을 노려봤다.
“내가 누군지 알겠지?”
“슈린 상단의 하쓰 남작님 아니십니까?”
“흥. 역시 알고 있었군. 그럼 얘기도 빠를 테지. 쿠라티오 뿌리를 넘겨라.”
“없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카프만의 태도에 하쓰 남작의 얼굴이 그대로 구겨졌다.
“지금 장난하자는 것이냐? 네놈들이 쿠라티오 뿌리를 사재기했다는 걸 모를 줄 아느냐?”
카프만은 여전히 당당했다.
“쿠라티오 뿌리를 사긴 했지만 저희도 의뢰를 받았을 뿐입니다.”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말이냐?”
“믿지 않으셔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상단의 자본금은 고작 10 만 골드에 불과합니다. 그 많은 쿠라티오
뿌리를 다 샀다간 파산을 열 번도 넘게 했을 겁니다. 저희는 그저 의뢰와 돈을 함께 받아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하쓰 남작이 카프만을 노려봤다. 페쿠니아 상단의 자본금이 고작 10 만 골드라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적어도 수백만 골드 이상일 것이다. 그래야 쿠라티오 뿌리를 사재기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의뢰라니. 그런 거금을 전혀 모르는 사이에 턱 맡긴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내게 믿음을 줘야 할 것이다. 아니면 이 상단은 오늘부로 문을 닫을 테니까.”
“그건 횡포입니다.”
하쓰 남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했다. 맞다. 횡포다. 그러니 네 속을 다 까발려라. 내 횡포를 감내하기 싫다면 말이다.”
카프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슈린 상단은. 이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절망을 맛봤던가.
하지만 이제는 그걸 돌려줄 시간이었다.
“좋습니다. 뭘 원하십니까?”
“쿠라티오 뿌리.”
“그건 없습니다.”
하쓰 남작의 눈에서 살기가 번득였다.
“그럼 내가 찾아낸 건 그냥 가져가도 되겠느냐?”
조금 전까지는 그래도 정당한 거래를 할 생각이 있었다. 물론 싱싱하지 않다는 이유로 가격을 상당히
후려쳤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기가 싫어졌다. 너무 건방졌다. 감히 누구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대꾸한단 말인가.
“뒤져라.”
하쓰 남작은 카프만이 허락하기도 전에 명령을 내렸다. 슈린 상단의 직원과 기사들이 쏜살같이 움직였다. 그들은
각각 작은 아티팩트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포션 반응을 체크하는 아티팩트였다.
포션은 과다 복용하면 오히려 몸에 해롭다. 그래서 함부로 포션을 먹여선 안 된다. 그걸 파악하기 위해 만든
아티팩트였다.
포션에 끝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쿠라티오 뿌리 추출액이었다. 이 아티팩트는 그걸 체크하는 기능을
가졌다.
‘내가 생각해도 기발해.’
하쓰 남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티팩트를 들고 흩어진 직원과 기사를 바라봤다. 저것이 쿠라티오 뿌리를 찾는
데 쓰이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페쿠니아 상단의 창고에도 사람을 보냈으니 딴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카프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마 저들은 사람을 잔뜩 풀어 수도 전역을 뒤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뒤져 봐라. 그게 나오나.’
이미 쿠라티오 뿌리는 제론이 싹 수거해 갔다. 카프만은 제론이 나중에 쿠라티오 뿌리의 가격이 폭등했을 때
천천히 물량을 풀어 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론의 말을 듣고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론은 그걸 이용해 새로운 포션을 만들겠다고 했다. 슈린
상단과 정면으로 부딪치겠다는 뜻이었다.
카프만은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맴돌았다.
하쓰 남작은 카프만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리고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보아하니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은데.”
하쓰 남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프만은 여유롭게 차와 쿠키를 준비했다.
그 여유가 너무 마음에 걸렸다. 하쓰 남작은 차를 마시면서 계속 카프만의 표정과 행동을 살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쓰 남작은 왠지 점점 초조해졌다. 반면 카프만은 처음보다 훨씬 여유 넘쳤다.
카프만의 여유가 하쓰 남작에게 초조함을 넘기는 듯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다. 카프만은 그동안 몇 가지 소소한 업무를 처리했다. 그러면서 하쓰 남작과 가벼운
대화까지 나누었다.
하쓰 남작은 그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카프만의 능력이 딱 눈에 보였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밑에 두고 싶은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은 한 번 마음을 주면 좀처럼 배신하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은 눈과 감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자네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하쓰 남작의 난데없는 제안에 카프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예전에 슈린 상단에서 일할 때는 내쫓는 것도 모자라
독립해서 연 점포까지 무너뜨리더니. 이제 와서 영입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물론 하쓰 남작은 자신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 전 지금이 좋습니다.”
“드래곤 꼬리보다는 뱀 머리인가? 내가 뱀 머리보다는 더 크게 키워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거듭 죄송합니다. 전 지금의 상단을 혼자서 더 키워 보고 싶습니다.”
하쓰 남작은 딱 거기까지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만 먹으면 끌어들일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일단
뒤에서 조금 손을 써 페쿠니아 상단을 무너뜨리고 난 다음 손을 내밀어도 된다.
“뭐, 좋을 대로 하게. 혹시 나중에라도 생각이 변하면 얼마든지 날 찾아와도 좋네.”
“잘 새겨 두겠습니다.”
하쓰 남작은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딱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되었을 때, 슈린 상단의 직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왔느냐? 어찌 되었느냐?”
영입은 영입이고 일은 일이다. 하쓰 남작은 쿠라티오 뿌리에 대한 일을 빌미로 카프만을 영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못 찾았습니다.”
하쓰 남작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뭐라고?”
“일단 상단 건물에는 없습니다. 감출 공간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창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재와 곡물만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아티팩트 반응은?”
“없었습니다.”
하쓰 남작의 표정이 더 무너졌다. 그때 기사들도 들어왔다. 그들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병사들까지 동원해서 뒤졌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점포 두어 군데에서 반응이 왔는데, 그건 판매하는
뿌리였습니다.”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거라도 일단 구입할까요?”
“닥쳐! 지금 그게 문제더냐!”
직원이 찔끔 놀라 뒤로 다급히 물러났다. 하쓰 남작은 카프만을 노려봤다. 이젠 카프만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누가 시켰지?”
하쓰 남작의 물음에 카프만이 고개를 저었다.
“돈과 의뢰만 받았을 뿐이라 나도 모릅니다. 철저히 자신의 비밀을 지키는 사람이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을 믿으라고?”
“제가 지금까지 하나라도 속인 것이 있었습니까?”
하쓰 남작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카프만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가 말했던 대로였다.
“후우. 알았다. 그러니 일단 네가 알고 있거나 짐작하는 것만이라도 말해라. 안 그러면 폭발할 것 같으니까.”
하쓰 남작은 핏발 선 눈으로 카프만을 노려봤다. 카프만은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살짝 위축되었지만, 꿀릴 게
없었기에 담담하려 애썼다.
“일단 찾아온 사람은 누가 봐도 의심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아마 그가 선금을 내놓지 않았다면 저도 이번 일을
맡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쓰 남작이 카프만을 노려봤다. 의뢰를 받았던 어쨌건 그가 나서서 이 일을 만들어 낸 것은 분명했다.
“사실 제가 받은 의뢰는 수도에 있는 쿠라티오의 뿌리를 돈 되는 대로 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수도에 있는 것만 사라고 했다고? 그런데 왜 수도 인근의 것까지 싹 매입했나?”
카프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쓰 남작을 바라봤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그저 수도의 물건만 사들였을 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100 만 골드가 훨씬
넘는 돈이 들었습니다. 그 일을 해 주고 저희 상단이 받은 수수료가 무려 2 만 골드였습니다.”
하쓰 남작은 누군가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는 것만 같았다. 멍하니 카프만을 바라봤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수, 수도의 물건을 다 샀다고?”
“솔직히 돈이 모자라서 다 살 수 없었습니다. 반 정도 사니까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가격을 올려 받더군요.
아마 뒤져 보면 남은 게 제법 있을 것입니다.”
‘당했다!’
상대는 페쿠니아 상단을 눈가림으로 이용했다. 그것도 100 만 골드나 되는 거금을 던져 주고서 말이다.
하쓰 남작이 벌떡 일어났다. 카프만은 그 모습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남작님?”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이만 가 보겠네. 오해한 건 미안하네. 하지만 앞으로 다시 그따위 일을 벌이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 각오하게.”
“아…… 예. 저, 저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내가 한 제안은 아직도 유효하니 잘 생각해 보게.”
“알겠습니다.”
하쓰 남작은 바람 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그리고 거의 뛰다시피 페쿠니아 상단을 떠나갔다. 그와 함께 왔던 자들
모두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갔다.
카프만은 한동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망할 상단에 내가 왜 들어가? 제 앞길도 모르고 설쳐 대는군.”
카프만은 손을 탁탁 털고는 돌아섰다.
“자, 그럼 열심히 일을 해 볼까?”
이제부터 진짜 바빠질 것이다. 슈린 상단은 크게 흔들릴 것이다. 어쩌면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기회를 놓치는 건 직무 유기였다.
카프만의 눈동자에 자신감이 가득 차올랐다.

Chapter 10 미스트 드래곤

슈린 상단이 발칵 뒤집혔다. 그뿐 아니었다. 슈린 공작가도 뒤집혔다. 순간적으로 자금에 큰 공백이 생겨 버렸다.


루바인 상단이 정리되었고, 그 와중에 입은 막대한 손해가 나머지 상단에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그뿐 아니라
하일렌 상단도 정리되었다.
그 두 상단이 정리되면서 슈린 상단이 크게 위축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포션 제조에 차질을 빚었다.
다른 때 같으면 자연스럽게 처리했겠지만, 이번에는 시기가 너무 안 좋았다. 슈린 상단은 당장 휘청거렸다.
하지만 망할 정도는 아니었다.
슈린 상단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손실을 최소로 잘라 냈고, 상단 내부를 정리했다. 그러면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방어적으로 운영하며 내실을 다졌다.
슈린 상단이 기다리는 것은 딱 하나였다.
새로 설계해 한창 제조 중인 기간트, 라쿠스. 출력이 1.9 에 이르며, 새로운 기법이 잔뜩 들어간 차세대
기간트였다.
물론 크란 제국의 기간트보다야 못하다. 하지만 벨룸 왕국의 기간트인 몰레스보다 뛰어나다는 점이 중요했다.
아마 만든 다음 제대로 테스트를 통과해 인정만 받으면 슈린 공작가의 위상은 단숨에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입은 모든 손실을 단번에 메우고도 남았다. 그때부터 새로운 슈린 공작가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참을 수 있었다. 슈린 상단을 책임지는 하쓰 남작도, 또 슈린 공작도. 그리고 파인트도.
일단 라쿠스만 제대로 나오면 슈린 공작가의 오랜 꿈, 왕위 찬탈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공국 선포라도 말이다. 그들에게는 그 정도 힘이 있었다. 라쿠스만 성공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다면.
카프만은 슈린 공작가가 위축된 틈을 잘 파고들었다. 모든 것은 바인의 정보가 있기 때문이었다. 카프만의
페쿠니아 상단은 그 힘을 업고 급격히 성장했다.

☆ ☆ ☆

“일단은 여기까지가 한계로군.”


제론은 살짝 아쉬웠지만, 그래도 충분한 성과를 얻었기에 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이번 일로 상단도 만들었고, 돈도 벌었다. 그리고 그 돈을 이용해 영지도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쯤에서 만족하는 것이 안전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은 급격히 발전하는 중이었다. 레늄 왕국은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상당히 많이 치유되었기에
난민도 점차 줄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남은 난민은 알음알음 소문을 듣고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몰려들었다.
그로 인해 모자란 인구를 조금이나마 보충할 수 있었다.
현재 에어스트 백작령은 심각한 인구난을 겪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부족했다. 농사를 지을 땅은 넘쳐나는데, 그
땅을 쓸 사람이 없었다.
일단 금년 목표가 모든 농지를 다 이용할 정도로 사람을 모으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이뤄질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바이스는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하지만 제론은 오히려 느긋했다.
광산을 팔면서 디아만트 상단과 은밀히 거래를 했다. 사실 거래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그들의 도움을 받는
일이었다.
물론 제론은 할 만큼 했다. 제론이 아니었다면 디아만트 상단은 어마어마한 손해를 봤을 것이다. 물론 그 모든
일을 제론이 만들어 낸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디아만트 상단은 수도나 다른 영지에 있는 빈민을 이동시켜 주기로 했다. 물론 수도나 영지에서 외부로 나가는 건
제론이 알아서 처리하기로 했다.
그렇게 외부로 빠져나간 빈민을 상단에 합류시켜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날라 주기로 한 것이다.
사실 제론이 마음대로 빼낼 수 있는 건 수도의 빈민뿐이었다. 수도의 빈민은 폴타를 이용해 얼마든지 외부로
빼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식으로 계약을 한 것은 나중에 또 폴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제 영지 일도 제론이 손댈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나아갈 방향을 정했으니 그대로 하면 된다. 이제부터는
실무의 영역이었다.
제론이 할 일은 바이스가 은밀히 부탁하면 테오스를 움직여 원하는 것을 이뤄 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여유를 얻은 제론은 대부분의 시간을 검술에 쏟았다.
오늘도 유적 13 층에서 은빛 기사와 대련을 했다. 물론 어려웠다. 은빛 기사를 완벽히 제압하려면 기초 검술을
완벽히 지배해야만 했다.
하루의 절반은 은빛 기사와 대련하고, 나머지는 지하 수련장에서 검을 휘둘렀다. 제론은 그렇게 검에 푹
빠져들었다.
영지의 업무는 중요한 것만 확인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지하 수련장에서 보내는 셈이었다.
하지만 가끔 영지를 순찰했다. 그것도 아무도 대동하지 않은 무방비 상태로 말이다.
제론이 그러는데도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워낙 강한 사람이기에 걱정 자체가 의미 없었다. 바이스나
세나, 그리고 카이트는 이미 제론이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제론이 일부러 알려 준 것이다. 물론 알려 주지 않아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론이 얼마나 강한지 오랫동안 겪어 왔으니까.
어쨌든 제론은 가끔 홀로 영지 순찰을 하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오늘은 암석 지대를 둘러보기로 했다. 이제 슬슬 암석 지대를 정리하고 길을 닦은 다음 한창 공사 중인 항구와
연결시켜야 한다.
항구 쪽에는 이미 사람들이 잔뜩 파견되어 있었다. 당연히 기간트도 함께 파견되었다. 기간트를 이용해 암석
지대의 돌을 날라 항구를 건설하는 것이다.
제론이 오늘 코스를 암석 지대로 잡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부터 상당히 신경 쓰이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은밀한 시선이었는데, 사람이 많은 곳을 다닐 때는 확인하기가 어려웠기에 일부러 인적이 없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보통 영주는 마차나 말을 타고 이동한다. 하지만 제론은 두 발로 걷고 뛰어서 이동했다. 그게 훨씬 간편하고
빨랐다.
암석 지대까지는 사실 쉬지 않고 마차를 달려 며칠을 가야만 할 정도로 멀었다. 하지만 제론은 고작 몇 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암석 지대로 이동하면서 제론은 문득 기간트를 이용하면 훨씬 이동이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기간트가 훨씬 빠르다. 오히려 마차보다 더 빠르다. 기간트는 달릴 수도 있었다.
“기간트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따로 만들어서 운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어차피 실바는 남아돌았다. 워낙 많이 쓸어 담았기에 다 수리하면 오십 기도 넘을 것이다.
그 실바를 이용해 곳곳에 배치해 놓고 기간트가 끌 수 있는 거대한 수레를 만들면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실바를 이용해 달리는 것은 수습 라이더에게 기간트 기초 수련의 한 방편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이거 제법 괜찮은 생각인데? 한번 추진해 봐야겠어.”
만일 그게 가능해진다면, 영지 내에서는 사람이나 물자를 이동하는 것이 엄청나게 빠르고 편해진다. 폴타를
이용해 게이트를 만드는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일단 지금은 폴타도 없는 상황이고, 그것은 외부인에게 함부로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쉽게 가져다 쓸 수 없었다,
기간트 로드에 대한 계획을 머릿속으로 조금씩 구체화하며 걸음을 빨리한 제론은 어느새 암석 지대에 도착했다.
웬만한 기간트보다 훨씬 큰 바위가 곳곳에 보였다. 너무나 거대해 지켜보는 사람을 압도할 지경이었다.
암석 지대는 어마어마하게 넓다. 그곳의 돌을 석재로 다듬어서 팔면 상당한 돈이 될 것이다. 물론 제론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이제 없었다.
돈을 벌 다른 수단이 많이 생겼다. 사실 암석 지대라면 그럴듯한 광산이라도 하나 있어야 정상 아닌가. 하지만
이곳은 거대한 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암석 지대에만 서식하는 몬스터인 스톤에그가 있었다.
스톤에그는 평소에는 바위 모양으로 위장해 있다가 움직이는 물체가 다가오면 돌거인으로 변해 달려드는
몬스터였다.
온전히 돌로 이루어져 있는 몬스터였는데, 특이하게도 돌을 먹고 사는 몬스터였다. 그렇기에 암석 지대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그들로부터 피해를 받을 일이 없었다.
스톤에그 때문에 암석 지대를 지날 때는 반드시 기간트를 동원해야만 한다. 현재 항구 건설에 한창인 사람들도
기간트와 함께 암석 지대를 통과했다.
물론 그 와중에 열 마리가 넘는 스톤에그를 만났다. 당연히 기간트가 박살 냈고 말이다. 스톤에그는 인간에게는
무서운 괴물이지만, 기간트 입장에서는 떼로 몰려들지만 않으면 별것 아니었다.
그러니 이렇게 제론처럼 혼자 암석 지대에 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그냥 자살하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암석 지대에 들어선 제론은 여전히 시선이 따라붙는 걸 느끼고는 걸음을 멈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론은
스톤에그를 구분할 방법이 있었다.
제론이 익힌 마나 호흡법을 이용하면 간단했다. 스톤에그가 가진 마나는 보통 바위와는 완전히 달랐다. 제론은
그걸 구분할 수 있었다.
암석 지대 입구에도 스톤에그가 하나 있었다.
제론은 스톤에그의 감지 범위를 명확히 인지했기에 딱 그 경계에 서 있었다. 거길 넘어가면 당장 스톤에그가
돌거인으로 변해 달려들 것이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지?”
제론이 돌아서서 말했다. 제론의 시선이 향한 곳이 살짝 일렁이더니 검은 그림자 하나가 뚝 떨어졌다.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된 사람이었다. 검은 옷에 검은 복면까지 쓰고 있었는데, 눈빛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혼자서 다 뒤집어쓰려고? 나머지도 싹 나오지?”
사내 주변의 공간이 일렁이더니 검은 그림자가 뚝뚝 떨어졌다. 같은 복장의 사내가 열 명이나 늘어섰다.
“날 왜 자꾸 쫓아오는 거지?”
제론은 그들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마나를 통해 열 명 모두가 익스퍼트임을 확인했다.
“그것도 익스퍼트나 되는 자들이 말이야.”
열 명의 사내는 미스트 드래곤 소속이었다. 파인트의 명령을 받아 제론의 뒤를 캐고 있었다. 또, 기회를 봐서
암살을 시도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한데 그동안은 빈틈이 없었다. 제론이 너무나 단조로운 생활을 했기에 약점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
이렇게 기회가 온 것이다.
암석 지대 근처에는 인적이 없었다. 암석 지대의 몬스터 스톤에그 때문이었다.
여기서 제론을 죽이면 뒤처리도 간단하다. 암석 지대로 들어가 스톤에그 한 마리만 깨우면 된다. 그러면 그가
알아서 시체를 짓이겨 줄 것이다.
“익스퍼트 열 명이라…….”
제론이 씨익 웃었다. 최근 수련하는 기초 검술의 실전 상대로 좀 손색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스톤에그까지 더하면
그럭저럭 연습이 될 것 같았다.
어떤 수련이든 가끔 이렇게 실전을 경험해 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 발전이 빠르다.
“자, 슬슬 덤비지?”
제론이 검을 뽑았다. 허리춤에 항상 롱소드 한 자루를 매달고 다니는데 썩 좋은 검은 아니었다. 제론의 진짜
검은 팔찌의 아공간에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건 좀 더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을 때나 쓸 것이다.
미스트 드래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제론이 온몸으로 강하게 기운을 내뿜으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콰드드드드득!
거대한 돌거인이 깨어났다. 제론이 원하던 대로 된 것이다. 열 명의 암살자는 갑자기 깨어난 돌거인에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움직임을 멈추지는 않았다.
슈슈슈슉!
암살자들이 던진 비수가 제론을 향해 날아갔다. 제론은 롱소드를 휘둘러 그것을 쳐 냈다.
채채채채챙!
그사이 돌거인이 성큼 걸어 제론에게 다가가 그대로 주먹을 내리꽂았다.
꽈앙!
돌가루가 비산했다. 제론은 옆으로 두 걸음 움직여 돌거인의 주먹을 피해 냈다. 그리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카각!
돌거인의 팔목이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돌거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손을 만들어 냈다.
꽈드득!
제론은 그대로 암살자 중 한 명에게 몸을 날렸다. 암살자들이 다시 비수를 던졌다.
쉭쉭쉭쉭!
쿵! 쿵!
돌거인이 쫓아왔다. 제론은 교묘한 움직임으로 돌거인의 주먹을 피하면서 암살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사악!
그동안 수련으로 몸에 새긴 완벽한 일격이었다. 암살자의 목이 소리 없이 허공에 떠올랐다.
나머지 암살자가 일제히 비수를 던지고 달려들었다.
쉭쉭쉭쉭쉭!
제론은 롱소드를 휘둘러 비수를 쳐 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기초 검술에 입각해 검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다.
슈캉! 슈캉! 슈캉!
롱소드에 닿은 비수가 그대로 잘라졌다. 수십 개의 비수가 그렇게 조각나서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그렇게 비수를 막아 내는 사이 돌거인이 제론의 뒤로 다가갔다. 이렇게 돌거인이 제론만 공격하는 것은 제론의
몸에서 뿜어내는 기운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돌거인은 지금 미스트 드래곤의 암살자는 아예 인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물론 암살자가 돌거인에게 다가가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돌거인은 제론을 그대로 차 버리려 했다.
후웅!
거대한 발이 제론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제론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카각!
돌거인의 다리가 종아리 부분에서 싹둑 잘려 나갔다.
쿠궁!
잘린 다리가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자리에 있던 암살자들이 다급히 몸을 날려 그것을 피해 냈다.
쿠웅!
돌거인이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사이 제론이 흩어지는 암살자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꽈득!
제론이 발을 디디자, 바닥이 움푹 들어갔다. 그리고 흙이 비산하며 제론의 몸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기초 검술을
달리기에 응용한 것이다.
사악! 사악! 사악!
마침 뭉쳐 있던 세 암살자의 목이 그대로 날아갔다.
제론의 움직임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대로 방향을 바꿔 또 몸을 날렸다.
꽈득!
바닥이 움푹 들어갔고, 제론의 몸이 어느새 암살자 둘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사악! 사악!
피 분수가 솟구쳤다. 제론은 몸에 피를 한 방울도 안 묻힌 채 또 몸을 날렸다.
꽈득! 사악!
제론의 몸이 번쩍할 때마다 목 하나가 날아갔다. 그렇게 숨 몇 번 쉴 정도의 시간에 열 명의 암살자를 모두
처리했다.
마지막으로 제론은 어느새 다리를 다시 만들어 달려오고 있는 돌거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카각! 카각! 카각!
암살자와 함께 덤비면 모를까 돌거인 하나로는 결코 제론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돌거인이 수십 조각으로 갈라졌다.
제론은 마지막으로 돌거인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꽈앙!
머리가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돌거인을 구성하던 마나가 흩어졌다.
후두두둑!
돌거인이 그대로 무너졌다. 사실 스톤에그는 마나 이상 현상 중 하나였다. 마나가 특이하게 뭉치면서 만들어 낸
몬스터였다.
마나가 흩어지니 당연히 돌거인도 보통 바위로 돌아갔다.
제론은 눈살을 찌푸리며 죽은 암살자들을 쳐다봤다. 왠지 느낌이 낯익었다. 이놈들을 누가 보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뻔하지.”
당연히 파인트일 것이다. 광산 일로 제론 때문에 입지가 바닥까지 무너졌으니 말이다. 아마 지금쯤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암살자를 보내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 실력을 가진 암살자라면 제법 비쌀 텐데 말이야.”
그 점이 좀 이상했다. 파인트는 지금 엄청난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데 무려 익스퍼트에 이른 암살자를
열 명이나 보냈다.
말이 익스퍼트지 암살자가 익스퍼트인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익스퍼트에 오르려면 고급 검술을 오랫동안
갈고닦아야만 한다. 한데 암살자가 그런 수련을 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제론은 생각의 방향을 조금 달리했다. 이들이 슈린 공작가가 전략적으로 키운 암살자라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오래전 일이라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예전 아카데미에 있을 때, 자신을 감시하던 자들이었다.
‘왜 낯익은가 했더니 그자들과 분위기가 비슷해.’
어쨌든 제론은 이들 덕분에 제대로 된 실전 훈련을 했다. 이 정도 긴박감 넘치는 실전을 겪으려면 전쟁터에나
나가 봐야 할 것이다.
제론은 암석 지대 앞에서 검을 휘둘렀다. 조금 전 싸움에서 느꼈던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쉬익! 쉬익!
기초 검술이 제론의 롱소드에서 강렬한 기운을 담고 뻗어 나왔다. 제론은 돌거인의 다리를 잘라 내던 감각을
되살리려 애썼다.
제론의 기억에 딱 그때의 검격만 모든 것이 일치했다. 그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아른거렸다.
쉬익! 쉬익!
제론은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며 세상 모든 일을 잊고 점점 검에 깊이 빠져들었다.

Chapter 11 네이드 후작령

에어스트 백작령의 약진은 상당히 많은 곳에 긴장감을 조성했다. 그중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건 당연히 네이드
후작가였다.
네이드 후작령은 에어스트 백작령과 인접했다. 사실 그동안은 아예 신경도 안 썼다. 하지만 최근 제론이 활발히
움직이면서 위상이 달라지고 나니,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네이드 후작령도 사실은 변방의 영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전 젤레 영지를 비롯한 네 영지와는 달리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했기에 상업이 상당히 발달한 곳이었다.
일단 지금의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려면 반드시 네이드 후작령을 지나야만 했다.
네이드 후작령은 이런 식으로 영지와 영지를 이동할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네이드 후작령에는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었기에 그걸 이용하는 사람의 수도 엄청났다.
네이드 후작령은 그를 이용해 막대한 돈을 갈퀴로 쓸어 담았다. 그저 통행세만 조금 받아도 돈이 우수수
쏟아졌으니 영지가 부유해질 수밖에 없었다.
네이드 후작은 심각한 얼굴로 집무실에 앉아 가신들을 둘러봤다.
“어떻게 생각하나? 에어스트 백작령이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그래도 세 개나 되는 영지를 병합했으니 그걸 안정시키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안전하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에어스트 백작은 결코 호전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의 영지를
지키기만 할 공산이 큽니다.”
“맞습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농지가 어찌나 거대한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왕국의 식량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한데 굳이 전쟁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가신들의 설득에도 네이드 후작의 표정에 어린 근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걸 본 가신들은 누군가 후작에게
불안감을 조성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에어스트 백작령에 기간트가 몇 기나 있는 줄 아는가?”
다들 대답하지 못했다.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네이드 후작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려 백 기 가까이 있다고 하네.”
“예? 백 기란 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다들 믿을 수가 없었다. 일개 백작령에 기간트가 백 기나 있다니 그걸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백 기의
기간트라면 작은 공국 수준의 무력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이래도 위험하지 않단 말인가?”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에어스트 백작이 전쟁을 일으킬 리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저런
무력을 갖추고 있다면 위험했다.
“자, 이제 대책을 말해 보게.”
“백 기라면 심각한 수준입니다. 왕궁 쪽에 먼저 보고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반역과 잘 엮으면 뭔가 그림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놈들은 가만히 있을 것 같나?”
“예?”
“기간트를 미리 빼돌리지 않겠냐는 말일세. 나라면 그렇게 할 것 같은데?”
의견을 꺼냈던 가신은 본전도 못 찾고 입을 다물었다.
“기간트의 수에 대한 건 우리도 자유롭지 않네. 우리도 그런 식의 대비책을 만들어 놨는데, 기간트를 백 기나
가진 영지가 그 정도 대비도 안 해 놨을 것 같은가?”
네이드 후작의 말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다가 가신 한 명이 다른 의견을 냈다.
“에어스트 백작령으로부터 기간트를 구입하는 건 어떻습니까?”
네이드 후작이 어이없는 눈으로 그 말을 꺼낸 가신을 노려봤다.
“자네라면 기간트를 팔겠는가?”
“제가 팔도록 만들어 보겠습니다. 에어스트 백작은 분명히 호전적 인물이 아닙니다. 불필요한 분쟁의 가능성을
어필한다면 틀림없이 수긍할 것입니다.”
네이드 후작이 그제야 솔깃한 눈으로 가신을 바라봤다. 나머지 가신도 관심을 갖고 주목했다.
“어느 정도 수준으로 구입하면 되겠나?”
“일단 우리는 돈이 많습니다. 다다익선 아니겠습니까? 최대한 많이 구입해 오겠습니다. 최소 삽십 기 이상
구입해야 안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네이드 후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네이드 후작령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가 육십 기였다. 거기에 삽십 기를 추가하면 무려 구십 기가 된다.
“하지만 에어스트 백작이 바로 그 전장의 붉은 학살자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누군가 나서서 그렇게 말하자, 네이드 후작의 표정에 또 불안감이 깃들었다.
“하면 오십 기로 하지. 가능하겠나?”
네이드 후작의 물음에 처음 말을 꺼냈던 가신은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통행을 금지시키는 건 어떻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네이드 후작이 또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협상하러 가기로 한 가신이 다급히 말렸다.
“그건 안 됩니다! 그건 오히려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됩니다.”
듣고 보니 그렇다. 네이드 후작은 일단 여기서 회의를 마무리했다.
“좋아.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자네는 당장이라도 에어스트 백작령에 가 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가신이 물러가자 네이드 후작은 피곤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서서히 잠들었다.

“하여튼 꼭 저런 놈이 있단 말이야.”
깁스 남작은 피식 웃으며 사절단을 꾸려 막 떠나는 마차를 쳐다봤다.
“준비됐나?”
“예.”
깁스 남작은 손짓을 하고는 돌아섰다. 여기 더 있어선 안 된다. 이제부터 이 근방은 전쟁터가 될 테니까.
“레늄 왕국에서 너무 오래 있었어. 이렇게 끈질길 줄이야. 쯧쯧.”
깁스 남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텔레포트 게이트로 향했다. 여기서 볼일은 다 끝났다. 아마 에어스트 백작령과
네이드 후작령은 격렬하게 싸울 것이다.
그리고 뒤에서 조금만 정보와 소문을 조작하면 내전으로 크게 확장시키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가만 있자…… 그럼 네이드 후작령 쪽에 2 왕자를 붙이면 되나?”
각각 왕자가 하나씩 붙으면 내전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질 것이다.
깁스 남작이 기분 좋게 웃으며 텔레포트 게이트에 몸을 실었다.

“영주님은 대체 어디로 가셨지?”


바이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제론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아. 하필이면 이럴 때…….”
갑자기 네이드 후작령에서 격렬한 항의가 들어왔다.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보낸 사절단이 박살 났다는 것이다.
바이스의 입장에서는 그걸 왜 에어스트 백작령에 따지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상식적인 선에서
대응을 했다.
한데 난데없이 네이드 후작령에서 영지전을 선포하겠다고 협박을 해 왔다. 전쟁이 싫다면 보상을 하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보상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네이드 후작령에서는 에어스트 백작가가 소유한 기간트 중 칠십 기를 팔라고 했다. 차라리 제대로 돈을
지불하겠다고 했으면 고려라도 했을 것이다. 한데 가격을 후려쳐도 너무 후려쳤다.
반값에도 훨씬 못 미치는 가격에 그걸 가져가겠다고 하니, 이건 생떼를 쓰는 거나 다름없었다.
바이스는 한편으로는 이번 일에 대해 조사를 명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지전을 준비했다.
솔직히 네이드 후작령과 전쟁을 벌이면 압도적으로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영지의 라이더 육성 계획이 궤도에 오르면서 당장이라도 기간트를 몰고 전력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수습
라이더가 대거 늘어났다.
물론 진짜 라이더처럼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또한 기간트 기동 시간도 다른 라이더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다른 베테랑 라이더의 지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그 어느 영지보다 뛰어난
라이더를 보유하고 있었다. 군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라서 집단전에 특히 강했다.
그런 라이더에게 훈련을 받았으니 아무리 수습 라이더라고 하지만 기본적인 기간트 전술에 밝았다.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단숨에 동원 가능한 기간트의 수가 무려 백삼십 기였다.
그러니 네이드 후작령이 아무리 전력을 몽땅 이끌고 온다 하더라고 얼마든지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낙관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네이드 후작령에 다른 세력이 붙은 것이다. 바로 슈린 공작가였다.
슈린 공작가는 이번 일을 기회로 여겼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만을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현재 자금
사정이 안 좋으니 그걸 단번에 만회할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여러모로 슈린 공작가에는 이번 사태가 호기로 작용했다.
만일 슈린 공작가가 네이드 후작령을 전적으로 지원한다면 아무리 에어스트 백작령에 기간트가 많아도 절대 이길
수 없었다.
슈린 공작가를 따르는 수많은 가문이 있었다. 그들 역시 어떻게든 한손 거들고자 할 것이다. 그러면 네이드
후작령에 모이는 기간트의 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사태는 절대 바이스 혼자서 막아 낼 수 없었다. 제론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영주인 제론을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속이 타들어 가다 못해 새까맣게 재가 되어 버렸다.
바이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떼, 성의 행정 요원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총관님! 큰일입니다!”
바이스가 긴장한 눈으로 행정 요원을 쳐다봤다.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워낙 큰일이 연달아 터지니
저런 말만 들어도 절로 긴장되었다.
“무슨 일이냐?”
“2 왕자 전하께서 네이드 후작령에 도착하셨다 합니다!”
“2, 2 왕자 전하께서?”
바이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2 왕자가 직접 후작령에 도착했다는 건 이번 영지전을 지원하겠다는 뜻이다. 사실
이는 정치적으로 워낙 민감한 사항이라서 잘 하지 않는 짓이다.
한데 2 왕자는 그렇게 했다.
“하아. 정말 물불 안 가리는군.”
바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보기에 2 왕자는 생각이 깊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예전 체른산 유적을 발굴하는 문제도 그렇다. 솔직히 왕자나 되는 사람이 전쟁터에 와서 직접 유적을 발굴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골치 아프게 됐군. 몸만 온 건 아니겠지?”
“호위로 근위 기사와 근위병이 함께 왔습니다.”
“그들까지 영지전에 참여시키면 일이 정말로 커지겠군. 설마 끼어들지는 않겠지?”
“그저 구경만 할 셈인 것 같습니다. 대신 제법 많은 물자를 챙겨 왔습니다.”
“일단 무조건 경계에서 막아야 돼. 우리 영지로 전투가 넘어오면 곤란해.”
경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은 낮은 언덕이 몇 개 있는 황무지였다. 그곳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와야 비로소
에어스트 백작령이 있었다.
예전 젤레 영지를 비롯한 뤼그너 남작령 등이 맞닿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거기를 지나야 비로소 새로 조성된
곡창지대가 나온다.
한데 그 거리가 매우 짧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만일 적이 안으로 밀고 들어오면 농지가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었다.
“영주님은 아직이십니까?”
바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이럴 때 제론이 있었다면 전쟁에도 큰 도움이 될 텐데 정말 아쉬웠다.
붉은 학살자가 전쟁에 참여한다면 적이 아무리 많아도 해볼 만했다.
‘게다가 그 신형 기간트…….’
그걸 꺼낼 수 있다면 아마 훨씬 더 전쟁이 유리해질 것이다. 물론 제론이 그렇게까지 할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일단 난 영주님의 행적을 좀 수소문해 볼 테니까 적의 동태에 각별히 신경을 써라.”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묘한 소문이 있습니다.”
“소문?”
“1 왕자 전하께서 이쪽으로 오고 계시다는 소문입니다.”
“1 왕자 전하?”
바이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만일 그 소문이 진짜라면 이건 일이 생각 이상으로 커지게 된다.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끼어든 꼴이 된다.
‘만일 내전으로 이어지면…….’
상상도 못할 결과가 만들어진다. 전쟁의 상처를 간신히 보듬은 레늄 왕국에 지울 수 없는 흉터가 질 것이다.
어쩌면 국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바이스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슈린 공작가를 떠올렸다. 어쩌면 이번 일도 그들이 깊게 개입했을지 모른다.
아니, 그럴 확률이 컸다.
왕권이 약화되어 영향력이 떨어지면 슈린 공작가는 대번에 공국을 선포할 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주변 영지를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면서 말이다.
“후우. 이러다가 왕국이 갈기갈기 찢어질 수도 있겠군.”
솔직히 그런 상황이 되면 가장 유리한 곳이 바로 여기 에어스트 백작령이었다.
영토는 다른 어떤 영지보다 컸다. 새로 조성된 곡창지대만 해도 보통 후작령보다 넓었다. 거기에 암석 지대는
어떤가. 거기가 정리되면 그것 역시 백작령 정도의 크기였다.
거기에 작긴 했지만 기존 남작령 세 곳이 병합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일반적인 백작령에 육박하는 넓이였다.
거기에 바닷가까지 있었다. 잘 개발만 하면 근방의 섬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갖게 될 것이다. 그냥
독립한다면 공국이 아니라 작은 왕국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규모였다.
“어쨌든 영주님부터 찾아야지. 이거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됐군.”
영주도 찾아야 하고, 또 전쟁 준비도 해야 한다. 바이스는 이런 대규모 전쟁에서 그 흐름을 한 방에 바꿀 능력을
갖고 있었다.
다만 그 능력을 쓰기 위해선 미리 시간을 충분히 들여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것까지 하려면 시간이 너무
빠듯했다.
바이스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제론이 있을 만한 장소로 향했다.

☆ ☆ ☆

영지의 상황이 그렇게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아니, 세상 모든 걸 잊은 채 제론은 하염없이


검만 휘두르고 있었다.
어느새 제론은 암석 지대 중간에 있었다. 검을 휘두르면서 조금씩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사악! 사악! 사악!
검의 궤적을 따라 푸른 초승달이 연달아 그려졌다.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근처의 암석이 두부 갈라지듯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그냥 잘리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제론의 움직임이 많아질수록 더 잘게 잘려져 바위가 아니라 돌멩이처럼 변해
버렸다.
그렇게 제론은 암석 지대 한가운데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검을 휘두르며 근방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제론은 이곳에서 무려 열흘 동안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버텼다. 보통
사람이라면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할 상태였다.
하지만 정작 검을 휘두르는 제론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또한 은은한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정말로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했다.
사악! 사악! 사악!
검을 통해 막대한 기운이 쏟아져 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나간 만큼 다시 온몸의 모공을 통해 흡수되었다. 그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제론이 휘두르는 검의 흐름이 달라졌다.
스아악!
검의 궤적에 걸린 바위가 그대로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나갔다. 그동안 보였던 푸른 초승달도 없었다. 그저 검이
움직였고, 그 흐름에 따라 바위가 흩어졌다.
스아악!
검이 긴 궤적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거기에 걸린 바위가 또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콰드드득!
바닥에 있던 돌멩이들이 검격에 휘말려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것 역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콰득! 콰득! 콰우우우!
제론의 주변에 일어나는 바람이 점점 강렬해졌다. 그냥 바람이 아니었다. 마나의 바람이었다.
검을 통해, 또 각종 움직임을 통해 쏟아져 나가는 막대한 양의 마나와 그를 보충하기 위해 온몸으로 유입되는
마나로 인해 일어난 폭풍이었다.
제론은 폭풍을 이끌고 검을 휘두르며 사방으로 격렬하게 움직였다. 암석 지대 한가운데에 있다가 옆으로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제론이 뿜어내는 마나의 폭풍에 근방에 있던 스톤에그들이 우수수 깨어났다.
콰드드득!
콰드드득!
거대한 돌거인이 불쑥불쑥 일어났다. 수십 마리나 되는 돌거인이 제론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움직이는 것을 공격하는 본능만 있었기에 마나 폭풍에도 두려움 없이 달려들었다.
쿠오오오오오!
제론의 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나의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회오리에 달려오던 돌거인이 모조리
휘말렸다.
콰득! 콰득! 콰드드득!
돌거인 역시 다른 바위와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러면서 뭉친 마나가 자연스럽게 풀려
마나의 회오리에 흡수되었다.
회오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흐르자, 백 마리가 넘는 돌거인이 제론의 권역에 휘말려 마나만 남기고 사라졌다.
고오오오오!
제론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회오리치는 마나를 가만히 느끼며 서
있기만 했다.
막대한 마나가 제론의 몸을 들락거렸다. 제론은 그저 가만히 서서 그것을 관조했다.
우드득! 우드드득!
제론의 뼈와 근육이 뒤틀렸다. 마나의 압력이 너무 강해서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몰아쳤다.
코에서 피가 터졌다.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속에서 울컥울컥 피가 올라와 입으로 쏟아져 나갔다.
입고 있던 옷이 모조리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제론의 몸에 남은 것은 초고대 문명의 유적에서 얻은
물품들뿐이었다.
지이이잉!
팔찌와 허리띠, 그리고 반지가 제론의 몸이 폭발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었다.
우득! 우득! 우드드득!
하지만 여전히 온몸의 근육과 뼈가 뒤틀렸다. 핏줄이 터질 것같이 부풀었고, 장기가 곤죽이 되어 물처럼
출렁거렸다.
놀라운 건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살아 있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정신은 말도 못하게 명료했다. 그 어느
때보다 머릿속이 맑았다.
제론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우연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검을 휘둘렀고, 그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마나의 회오리는 결국 자신의 마나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모든 걸 명확히 인식한 순간, 의념이 강하게 섰다. 마치 정수리에서 발끝을 관통하는 기둥이 선 느낌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
회오리가 더욱 빨라졌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휘도는 마나가 그대로 제론의 온몸을 찢어 버릴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제론도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은 지극히 짧았다. 제론은 자신이 세운 의념의
기둥에 모든 걸 집중했다.
마나의 회오리가 조금씩 제론의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릿느릿 들어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쿠오오오오!
회오리를 이루고 있던 그 막대한 마나가 모조리 제론의 몸에 스며들었다. 제론은 터질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직감적으로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알아차렸다.
쩌적! 쩌저저적!
제론의 피부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갈라졌다.
우득! 우득! 우드드득!
뼈와 근육이 뒤틀리며 모양을 잡아갔다.
제론의 피부가 몇 번이나 벗겨지고 새로 나기를 반복했다. 그동안에도 뼈와 근육은 마치 물처럼 출렁출렁
움직였다.
이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적막이 찾아왔다.
제론은 똑바로 선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물론 벌거벗은 채였다.
아기처럼 뽀얀 피부에 키도 자랐고, 몸에는 적당한 근육이 자리 잡았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는 듯했다.
번쩍!
제론이 눈을 뜨자 마치 번갯불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가는 듯했다. 광채가 주위를 한차례 휘감았다가 사라졌다.
“후우우욱!”
제론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맑은 기운이 호흡을 통해 들락거렸다.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익숙했다.
모든 걸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양팔을 벌렸다. 세상을 꽉 채운 마나가 달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그러고 있었다. 온몸을 휘도는
거대한 기운이 명확히 느껴졌다.
단전을 꽉 채운 기운은 분명히 마나였다. 예전보다 몇 배나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그건 그저 단편적인 변화일
뿐이었다.
마나의 질이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보다 훨씬 적은 양의 마나로 수십 배의 위력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제론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소드 마스터로구나.”
드디어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벽이 높고 단단했는지. 또 어떻게 소드
마스터로 오르는 그 높은 계단을 오를 수 있었는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이건 오롯이 깨달음의 문제였다. 다만 암석 지대에서 암살자의 습격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건 분명했다.
장소가 달랐으면 이렇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암석 지대의 스톤에그가 작지만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마나가 더해지면서 벽을 넘어설 수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제론은 훨씬 더 오랜 시간을 검에 매달려야 했을 것이다. 적어도 수십 년 이상을 말이다.
제론은 영지 쪽을 바라봤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영지 쪽에서 스멀스멀 흘러오는 전쟁의 기운이 느껴졌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의 투기를 느끼다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소드 마스터였다.
제론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천천히 영지를 향해 걸어갔다.
걷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러다가 이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그렇게 제론이 다시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돌아갔다.
진정한 소드 마스터가 되어서.

<6 권에서 계속>

6권

Chapter 1 영지전

에어스트 백작령이 발칵 뒤집혔다. 1 왕자가 방문한 것이다.


사실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오려면 반드시 네이드 후작령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지금 네이드 후작령은 에어스트
백작령 쪽으로 가는 길을 완전히 봉쇄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네이드 후작이라도 1 왕자가 직접 움직이는데 그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1 왕자는 물자를
잔뜩 실은 마차 10 대와 함께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들어왔다.
전쟁을 하려면 물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에어스트 백작령은 네이드 후작령에서 길을 꽉 막은 상태라 물자를
들일 수가 없었다.
그 문제를 1 왕자가 어느 정도 해결해 준 것이다. 물론 그건 1 왕자의 생각일 뿐이었다.
사실 에어스트 백작령은 외부의 도움이 별로 필요치 않았다. 제론이 있다면 말이다. 유적을 통해 물자를 얼마든지
이동시킬 수가 있었다.
현재 에어스트 백작령에 쌓인 물자의 양도 엄청났다. 몇 달 정도는 새로운 물자 유입 없이 충분히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달이면 네이드 후작령 하나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외부의 세력이 개입하지 않고, 제론이
건재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제론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에어스트 백작령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바이스가 정중히 예를 취했다. 1 왕자는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주위를 둘러봤다.
“에어스트 백작이 안 보이는군?”
1 왕자의 시선이 살짝 불쾌해졌다. 감히 왕자가 방문했는데 영주가 코빼기도 비치지 않다니, 이런 불충이 어디
있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바이스는 그 말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왕자에게 영주가 실종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1 왕자쯤 되면 독자적인 정보망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아마 며칠 안으로
에어스트 백작령의 상황을 파악할 것이다.
‘황당하겠지.’
어찌 안 그렇겠는가. 영주가 실종되었는데. 바이스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아는 제론은 결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도 없이 사라졌다면 분명히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그런
상황이 뭐가 있겠는가.
“영지전 준비는 잘되고 있나?”
“일단 되도록이면 전쟁을 막아 보려 애쓰고 있습니다.”
바이스의 소극적인 대답에 1 왕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은 이런 걸 원하고 오지 않았다. 이번 영지전을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생각이었다.
“기간트가 100 기나 있다고 하는데, 그 정도면 충분히 해 볼 만하지 않나?”
“100 기라니. 당치 않습니다. 영지전을 통해 포획한 50 기의 기간트가 전부입니다. 이미 왕궁에 보고 드린 대로
말입니다.”
1 왕자가 피식 웃었다.
“기간트를 단 1 기도 보유하지 않은 영지에서 50 기를 포획했다니 대단하군.”
바이스는 비꼬는 말에도 침착하게 대응했다. 어차피 증거로 남지 않은 이상 얼마든지 발뺌이 가능했다.
“당시 기간트를 대여하고 용병의 힘을 빌렸습니다.”
당연히 1 왕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더 추궁해 봐야 얻을 게 없기 때문에 그쯤에서 마무리했다.
“알겠네. 아무튼 기간트를 좀 더 모으더라도 제대로 영지전을 하는 게 낫지 않겠나? 내가 보기에는 네이드
후작령쯤이야 얼마든지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1 왕자의 말에 바이스가 대답을 아꼈다. 어떤 대답을 하든 얘기가 길어질 것이고 그러다 빈틈이라도 보이면
곤란했다. 보아하니 그런 걸 노리고 찾아오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게 없었다.
“일단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바이스의 말에 1 왕자가 빙긋 웃었다. 마치 다 이해한다는 듯했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짜증이 났다.
대체 영주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래서야 일이든 대화든 진행이 제대로 되겠는가.
“후우, 피곤하군. 쉴 곳으로 좀 안내해 주겠나?”
바이스가 정중하게 1 왕자를 안내했다. 그 뒤로 1 왕자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근위 기사들이 우르르 따라갔다.
1 왕자는 바이스의 뒤를 따라가는 내내 감탄했다. 그동안은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따라가며 보니 상당히
잘 만든 성이었다.
“호오. 저건 마법등인가?”
마법을 이용해 밝히는 등이 복도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그 모양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생각해 보니 응접실도
상당했던 것 같았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말이다.
방에 도착한 1 왕자는 또 감탄했다. 이 방은 왕궁에 있는 자신의 침실보다 훨씬 대단했다.
바이스를 따라온 시종으로부터 방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은 1 왕자는 완전히 홀딱 반해 버렸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 성은 모든 것을 마법으로 해결했다. 등도 마법이었고, 물을 긷는 것도 마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또한
화장실도 마법을 통해 처리된다.
창으로 다가간 1 왕자는 성 한가운데에 높이 솟아 있는 탑을 보고는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호오, 굉장하군.”
뭘 하는 탑인지 모르지만 높이를 보니 저 위에 서 있으면 영지가 한눈에 다 들어올 것 같았다.
인간의 편의를 극대화시켜 만든 성이었다. 또한 너무나 아름다운 성이기도 했다. 1 왕자는 갑자기 욕심이 났다.
자신도 이런 성을 갖고 싶었다.
“이 성을 누가 설계해서 만들었는지 알아봐야겠군.”
1 왕자가 중얼거린 순간, 그를 항상 따라다니던 수행원 한 명이 조용히 움직였다. 그는 1 왕자가 원하는 것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뛰어다녀 어떻게든 얻어 내는 사람이었다.
일단 그가 움직였으니 곧 성의 설계도가 손에 들어올 것이다. 1 왕자는 물론이고 근위 기사들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일이 착착 풀리지 않아 짜증이 좀 나는구나.”
1 왕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알아서 움직일 것이다. 그가 데려온 수행원과 근위
기사들이라면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
원래 목표는 에어스트 백작을 충동질하고 자신이 조금 힘을 보태서 영지전을 크게 확대시킬 생각이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 관한 소문은 다양했다. 거의 확실한 소문도 있었고, 신빙성이 떨어지는 소문도 많았다.
1 왕자가 진위를 비교적 자세히 확인한 소문은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가 100 기에 육박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에어스트 백작령행을 결정했다.
현재 네이드 후작령에는 2 왕자가 가 있다. 또한 슈린 공작가에서 상당한 힘을 실어 주었다.
만일 이 영지전을 크게 확대시킨다면 슈린 공작가의 힘을 조금이라도 깎아 내는 게 가능해진다. 또한 2 왕자의
힘도 갉아먹을 수 있었다.
자신은 많이 움직이지 않고 힘도 소진하지 않으면서 적을 약화시킬 수 있는 훌륭한 계획이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이 무너져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전쟁의 포화 속에서 폐허가 될 영지 따위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또 이기면 좋다. 이렇게 미리 선심을 써 놨으니 나중에 힘이 되어 줄 테니까.

☆ ☆ ☆

“아아. 정말 미치겠구나.”
바이스는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모든 열쇠는 제론이 쥐고 있었다. 제론이 와야 뭐든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제론의 안위가 가장 걱정이었다.
“제발 무사하셔야 할 텐데.”
“누굴 말하는 거야?”
“그야 우리 영주님이지 누군 누구…….”
바이스는 무의식중에 질문에 대한 답을 하다가 흠칫 놀랐다. 이곳은 자신의 집무실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누구도 허락 없이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누, 누구냐!”
바이스가 몸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품에 감췄던 마나 스틱을 겨눴다.
언제든 마법을 통해 상대를 공격할 수 있도록 마나 스틱을 가동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오. 그 바쁜 와중에도 마법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은 모양이로군.”
바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눈앞에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사람이 서 있었다.
“영주님!”
“하하하. 좀 늦었지?”
“좀 늦은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영지가 발칵 뒤집혔단 말입니다!”
“미안, 일이 좀 있었어.”
그렇게 말하는 제론의 눈빛이 너무나 당당하고 힘이 넘쳐서 바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으로 느낌이 기묘했다.
“영주님?”
“왜? 내가 좀 달라 보여?”
바이스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었다.
“감이 좋은데? 아무튼 영지가 뒤집혔다니 무슨 말이야?”
오기 전에 태블릿으로 상황을 살폈으면 다 파악했겠지만 제론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된 것을 알기에 최대한
서둘렀다.
곧장 성 지하에 있는 중앙 유적으로 이동한 다음 바로 올라왔다.
“네이드 후작령에서 영지전을 선포했습니다.”
“영지전? 거기서 왜 영지전을 걸어?”
“네이드 후작령의 협상단을 우리가 몰살시켰다고 주장하더군요.”
제론이 바이스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게 했나?”
“절대 아닙니다.”
“그럼 네이드 후작이 억지를 쓰고 있다는 말이네. 우리 영지가 좀 탐났나?”
바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나름대로 조사를 해 봤습니다. 저쪽에서 협상단이 출발한 건 사실입니다. 또 그들이 습격을 받은 것도
맞습니다.”
제론이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이건 누군가 개입했거나 네이드 후작가에서 희생양을 내세워 쇼를 하는 것, 둘 중 하나이겠군.”
“예, 전 누군가의 개입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이드 후작에 대해서는 대충 조사를 해 뒀다. 네이드 후작령은 중앙 유적의 마티가
커버하는 범위에 살짝 걸쳐 있었다.
후작을 직접 조사하지는 못했지만 영지를 보며 간접적으로 그의 성향을 파악했다. 네이드 후작은 그런 일을 벌일
위인이 되지 못한다.
“누굴까? 슈린 공작?”
“그일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일단 가장 가능성이 큰 사람이었다. 최근 슈린 공작가의 재정이 크게 어려워졌다. 그걸 타개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겸사겸사 눈엣가시 같은 제론도 제거하고 말이다.
“영지전을 막을 방법은 없나?”
바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법을 찾고는 있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쪽에 붙은 세력이 너무 많습니다.”
“세력이 붙어?”
“2 왕자가 붙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슈린 공작가도 붙었고요. 그로 인해 그쪽 파벌의 귀족이 제법 많이
끼어들었습니다.”
제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차하면 테오스를 공개하는 한이 있어도 이길
것이다.
어떻게 기반을 다진 영지인데 여길 빼앗긴단 말인가.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물론 테오스를 공개하지 않고 이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했다. 제론은 나름대로 그 방법에 대해 고민을 해 둔
것이 있었다.
혹시 전쟁이 벌어졌을 때, 테오스의 특징을 살려 적을 유린하는 방법이 있었다. 테오스는 아공간이 다른 기간트와
완전히 다르다. 그걸 이용하면 적의 중심부를 테오스로 직격하는 것이 가능했다.
‘네이드 후작령을 직격한다고 해서 전쟁이 끝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전쟁은 산비탈을 구르는 눈덩이 같아서 일단 한번 구르기 시작하면 막기가 어렵다. 점점 불어나서 종국에는 모든
걸 삼켜 버리고 만다.
이렇게 수많은 세력이 끼어들었는데, 고작 네이드 후작성을 박살 낸다고 전쟁이 끝날 리 없었다. 그들은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쟁을 이어 갈 것이다.
“오랜만에 붉은 실바를 타야겠군.”
붉은 실바라는 말에 바이스가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세나가 특별히 준비한 실바가 있었다. 색칠까지 붉게 마쳐
놓은 실바였다.
“나중에 세나를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아마 재미난 걸 드릴 겁니다.”
바이스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하자, 제론은 대충 알겠다는 듯 빙긋 웃었다.
“자, 그럼 슬슬 영지전을 준비해 볼까?”
“아! 영주님.”
바이스는 제론이 나가려 하자 막 떠올랐다는 듯 제론을 잡았다. 제론이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급히
말을 이었다.
“1 왕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제론은 그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결국 이렇게 되는군. 이거 자칫하면 내전으로 발전할지도 모르겠어.”
바이스도 그걸 염려하고 있었는지라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우리 왕국의 왕자이자 유력한 후계자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이스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그 표정이 워낙 묘했는지라 바이스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벌이시는 건 아니겠지?”
바이스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괜한 고민을 한 것
같아 머쓱한 표정을 지은 바이스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일에 몰두했다.

제론은 1 왕자가 머무는 거처로 곧장 가지 않고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태블릿을 통해 전체적인
상황을 살폈다. 또한 1 왕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확인했다.
때로는 사소한 것 하나가 전체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 뭐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전쟁이라는 큰일을
앞두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하나하나 세심히 확인한 다음 제론은 1 왕자를 방문했다.
긴 복도를 따라 걸어가니 방문을 지키는 2 명의 기사가 보였다. 그들은 제론이 앞에 서자 용건을 물었다.
“이곳은 왕자 전하께서 머무시는 곳이오. 용건을 말하시오.”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제론은 이와 비슷한 일을 예전에도 겪어 봤다. 근위 기사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에어스트 백작이 찾아왔다고 알려라.”
제론의 말에 근위 기사가 흠칫 놀랐다. 그리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나와 문을 연 채
조용히 옆으로 비켜섰다.
제론은 굳은 얼굴로 들어갔다. 여기에 와서까지 이따위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배알이 뒤틀렸다.
“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제론은 일단 정중히 예를 취했다. 상대는 왕자였다. 더구나 자신의 가디언으로 설정된 2 왕자가 아니라 1
왕자였다.
만일 2 왕자가 이리로 왔다면 분명히 뭔가를 더 시험해 봤을 것이다. 가디언을 과연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상대는 1 왕자였다. 긴장을 풀어선 안 된다. 그는 에어스트 백작령을 이용해 먹기 위해 왔다. 또 여기를
있는 대로 뜯어먹으려는 하이에나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좀 늦었군.”
“일이 있어서 외부에 나가 있었습니다.”
“영지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던가?”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게.”
제론은 1 왕자를 쳐다봤다. 완전히 명령조였다. 대답을 강요하는 그의 표정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그저
그게 당연하다는 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모습이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감히!”
1 왕자는 가만히 있었는데, 뒤에 서 있던 근위 기사가 앞으로 성큼 나서며 소리쳤다.
“왕자 전하께서 묻는 말에 어찌 싫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제론이 서늘한 눈으로 근위 기사를 쳐다봤다. 소드 마스터가 가지는 자연스러운 기세가 근위 기사를 단숨에
압박했다.
“자네는 누군가?”
제론의 물음에 근위 기사는 창백해진 얼굴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근위 기사단장인 몰트요.”
“근위 기사단장이면 백작인 내게 함부로 해도 되는 건가?”
“그, 그건 아니오. 하지만…….”
제론이 손을 올려 그의 말을 막았다.
“됐다. 더 이상 끼어들지 마라.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몰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1 왕자는 몰트와 제론의 대치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솔직히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론이 자신의 말을 거절한 것도 이해 불가였고, 그것 때문에 나선 몰트가 저렇게 얌전히 물러난 것도 그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자네는 내가 왕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한데도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겠단 말인가?”
“전하의 말씀을 제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럼 그러지 않을 생각인가?”
1 왕자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제대로 생각이 박힌 사람이라면 여기서 척을 져선 안 된다는 걸 알 것이다.
그렇기에 1 왕자는 느긋하게 제론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제가 알기로 전하께서는 아직 왕위에 앉은 게 아닌데 꼭 그런 것처럼 행동하시니
말입니다.”
제론의 말에 방 안이 한차례 술렁였다. 1 왕자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고, 그에 응답이라도 하듯 방 안
곳곳에 서 있던 근위 기사들이 강렬한 기세를 내뿜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했다.
하지만 제론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근위 기사 100 명이 덤벼 봐야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기간트를 소환해 달려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선을 넘었군.”
근위 기사단장 몰트가 이를 악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얼굴이 창백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하지만
제론을 이기지 못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차하면 기간트를 불러내면 된다. 현재 근위 기사는 전원 기간트 장비를 착용한 상태였다. 근위 기사
전용 기간트인 크라테르를 말이다.
현재 1 왕자의 호위로 따라온 근위 기사는 무려 30 명이나 된다. 그들이 일제히 기간트를 소환하면 아무리
에어스트 백작령에 기간트가 많아도 절대 쉽게 막아 낼 수 없다. 장소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성안에서 기간트를 소환해 닥치는 대로 부수며 제론을 인질로 잡으면 절대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다. 몰트는 자신
있었다.
1 왕자의 생각도 몰트와 비슷했다. 대체 제론이 뭘 믿고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제론이 강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 개인의 강함이라는 건 한계가 있는 법이다.
설사 제론이 소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기간트에는 안 된다.
“기간트 소환 방어 마법진이라도 깔아 놨나?”
1 왕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몰트를 바라봤다. 몰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보통 왕궁이나 공작가의 저택,
혹은 공, 후작령의 영지성에는 기간트 소환 방어 마법진을 설치해 놓는다.
그걸 깔아 놓는다 하더라도 기간트 소환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소환 마법에 노이즈를 섞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하위 기간트는 소환이 불가능했다. 크라테르나 몰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상위 기체의 경우 소환이 어려워진다. 그 경우에는 소환하는 라이더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아공간에서
꺼낼 때 라이더의 마나를 이용하기 때문에 거기에 들어가는 의지력이 중요했다.
어쨌든 그게 깔려 있으면 현재로서는 기간트 소환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몰트는 그걸 감지하는 아티팩트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소환 방어 마법진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했다. 또한 마법진의 규모가 워낙 크기에 유지
보수에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
만일 전장에서 그걸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곳 에어스트 백작성에는 소환 방어 마법진이 깔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기간트를 꺼낼 리 없다고 자신하는 건 아니겠지?’
1 왕자는 그 생각을 하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왠지 정말로 그것이 답인 것 같았다. 만일 그렇다면 에어스트
백작은 상대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제론은 가만히 서서 주위를 슥 둘러봤다. 위압감이 시선을 따라 부챗살처럼 쫙 퍼져 나갔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설마 나랑 싸우겠다는 뜻인가?”
1 왕자가 나서서 말했다. 1 왕자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에어스트 백작의
그릇이 너무 작았다. 보아하니 무력과 기간트 센스만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에 불과했다.
‘뛰어난 사람을 가신으로 들였군.’
1 왕자의 뇌리에 처음 봤던 총관이 떠올랐다. 그가 누군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능력에 대해서는 별생각
없었다.
‘역시 말레피 후작가야. 이름이 바이스라고 했던가?’
1 왕자는 생각을 정리했다. 보아하니 에어스트 백작령의 미래는 없었다. 이곳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여기에
있느니 차라리 다른 곳으로 가서 적들의 뒤를 치는 게 훨씬 나았다.
‘나중에 끌어들여야겠어.’
바이스에게 언질이라도 하고 에어스트 백작령을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보잘것없던 영지를 이렇게 크게 키운
걸 보면 능력이 정말로 대단한 모양이었다.
그런 인재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닌가 보군. 이만 나가 보게.”
1 왕자의 축객령에 제론은 당황한 척하며 머뭇거리다가 예를 취하고 물러갔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제론의
의도였다. 제론은 1 왕자가 영지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진짜 힘을 1 왕자 앞에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또한 괜한 생색으로 나중에 귀찮아지는 건
딱 질색이었다.
제론이 밖으로 나가자 1 왕자가 코웃음을 쳤다.
“흥, 떠날 준비를 해라.”
1 왕자의 명령에 몰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몰트 경은 여기 더 있고 싶나? 그따위 취급을 받았는데?”
“그, 그건 아닙니다만…….”
“됐네, 이 영지에는 미래가 없네. 성은 좀 탐나지만 그뿐이지. 이 성 역시 그가 지었다고 했으니 딱 한 사람만
데리고 갈 생각이야.”
“그게 누구입니까?”
몰트는 대충 예상했지만 그렇게 물었다. 1 왕자의 의중을 확실히 파악해 둬야 나중에 실수로 후회하지 않는다.
“알면서 뭘 묻나? 여기 총관인 바이스 폰 말레피를 데려가야겠다. 지금 당장 데려가면 좋겠지만 거절할 게
뻔하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채 가야겠지.”
“알겠습니다. 하면 즉시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 왕궁으로 돌아가시는 것입니까?”
1 왕자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 가서 뭐 하겠느냐? 둘째가 저렇게 설치는데. 난 문터 후작령으로 가야겠다.”
문터 후작령이라는 말에 몰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준비시키겠습니다.”
몰트가 물러가자 1 왕자가 빙긋 웃었다.
“여기가 아니라도 써먹을 놈은 많으니까. 문터 후작이라면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지.”
문터 후작가는 슈린 공작가에 살짝 거리를 둔 가문이었다. 그리고 최근 슈린 상단이 흔들리면서 입지를 더 탄탄히
다진 가문이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를 중심으로 힘 있는 귀족 가문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1 왕자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사실 문터 후작가의 힘으로는 절대 슈린 공작가를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잘 이용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게 가능해진다.
“그나마 에어스트 백작령이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야.”
분위기를 보니 기간트가 최소 100 기는 있는 듯했다. 그 정도라면 슈린 공작가 연합군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타격을 입은 슈린 공작가를 문터 후작가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물론 사전 공작이 약간
필요하지만 말이다.
“정말 속 썩이는 녀석이라니까. 이번에는 아주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겠어. 섬 같은 곳에 유배라도 보내 둬야겠어.
해적이 득실거리는 곳에 보내면 정신 번쩍 차리겠지.”
1 왕자의 중얼거림을 들은 몰트는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저 말은 2 왕자를 섬으로 유배 보내 해적의 손으로
처단하겠다는 뜻 아닌가.
형식적으로 해적 소탕이나 한 번 하면 실리는 실리대로 챙기고 생색은 생색대로 낼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1 왕자는 왕위에 앉았을 때 자신의 인기를 관리하고 여론을 움켜쥘 계획을 벌써부터 짜고 있었다.
몰트는 조용히 할 일에 열중했다. 끝까지 붙어 있기만 하면 결코 뒤통수를 칠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나저나 이 아름다운 성이 부서진다고 생각하니 좀 안타깝군.”
1 왕자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맴돌았다.

“대체 뭘 어쨌기에 1 왕자 전하가 하루도 머물지 않고 떠나시는 겁니까?”


바이스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약간의 불안감도 겹쳐 있었다.
안 그래도 영지전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1 왕자가 해코지라도 하면 정말 곤란했다.
“시키는 대로 안 한다고 토라져서 가 버리네.”
“예에?”
바이스는 제론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제론의 배포에는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이거 받아.”
바이스는 의아한 눈으로 제론이 내민 팔찌를 쳐다봤다. 고풍스러운 문양이 음각된 팔찌였다.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금으로 만든 건 분명히 아니었다.
“이게 뭡니까?”
“통신 장비.”
“예?”
통신 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는 에어스트 백작령에도 몇 개나 있었다. 그걸 이용해 왕국 어디든 소식을 주고받는
게 가능했다.
한데 이런 팔찌 형태의 통신 아티팩트는 존재치 않았다. 통신 아티팩트는 기본적으로 상당히 크다. 복잡한
마법진을 많이 새겨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한데 이 팔찌는 어떠한가. 마법진을 새길 공간도 없어 보이지 않은가. 이런 형태에 고난도 마법을 담았다면 고대
유물밖에 답이 없었다.
“유물입니까?”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만든 것이었지만 굳이 그걸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시간이 더 지나고
영지가 완전히 안정되면 바이스에게 그에 관한 지식을 알려 줄 생각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아니었다.
“그건 한 사람과 직통으로 연결돼.”
“영주님과 통신할 때 쓰는 거로군요.”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바인이라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아티팩트야.”
“바인? 그게 누굽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가진 정보 조직의 수장. 문두스라는 조직인데 제법 쓸 만하지.”
“지난번 수도에 가셨을 때 만드셨다던…….”
바이스의 말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보를 주무르는 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니까 잘 얘기해 봐.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
제론은 바인의 능력을 믿긴 하지만, 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나도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또한 천재도 빈틈은 있기 마련이었다.
바이스라면 훌륭히 그 빈틈을 메워 줄 것이다. 또한 바인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받아서 어떻게 움직일지 계속
생각하다 보면 새로운 능력을 얻을 수도 있었다.
“정보망은 지속적으로 확대 중이긴 한데, 아직 많이 모자라니까 감안해.”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바이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 문두스와 연결시켜 준
것은 1 왕자가 이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1 왕자는 에어스트 백작령을 떠나기 전에 문터 후작가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것만으로도 향후 이
영지전이 어떤 식으로 번져 나갈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
영지전은 이제 피할 수 없었다. 기왕 싸울 거면 이기는 게 좋다. 제론은 이번에 압도적인 힘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물론 아직 테오스를 공개하는 건 곤란했지만 말이다.
바이스의 집무실에서 나온 제론은 세나를 찾아갔다. 세나는 1 왕자가 왔다 간 사실도 모르고 공방에 틀어박혀서
기간트만 만지고 있었다.
제론이 팔아먹겠다고 안겨 준 100 기의 기간트 때문에 공방에서 나올 틈도 없었다.
사실 이번에 바인이 구해 준 인재 중에는 엔지니어도 제법 있었다. 다만 어떤 이유로든 한 번 바닥까지 무너졌던
자들이라서 다시 제 실력을 찾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서 절망하지 않고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게 가능했다. 복잡하지 않은 일을 모두 그들에게 맡긴
것만으로도 일이 대폭 줄어들었다.
제론은 세나를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어느새 세나의 공방 바로 앞에 도착했다. 세나의 공방은 오로지 세나만
드나들 수 있었다. 유일한 예외는 제론뿐이었다.
나머지 엔지니어는 따로 지은 기간트 공방에서 일을 했다. 성 밖에 거대한 창고를 만든 다음 그곳을 기간트
공방으로 꾸몄다.
지금도 그곳에서는 뚱땅거리는 소리가 밤새 울린다. 그들 역시 잠을 줄여 가며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제론이
쌓아 둔 기간트가 워낙 많기에 아무리 일을 해도 끝이 없었다.
‘이번에 또 100 기가 넘게 생기겠군.’
영지전에서 승리하면 네이드 후작령의 기간트는 물론이고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선 가문의 기간트까지 싹 흡수할 수
있었다.
“엔지니어를 더 구해야겠어. 공방도 몇 개 더 짓고.”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세나의 공방으로 들어갔다. 세나의 공방에는 따로 문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출입했다.
공방에 도착하자마자 제론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세나가 아니었다. 평소에는 피로에 절어 기간트를 손보고 있는
세나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피처럼 붉은 기간트 한 기가 제론의 정면에 서 있었다. 세나가 일부러 그곳에 기간트를 놔뒀음이 분명했다.
제론이 도착하면 바로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이건…….”
“어때요? 멋지죠? 제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붉은 기간트를 보고 있으니 아련한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실바로군.”
“상징 같은 거잖아요.”
제론은 붉은 실바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리를 쓰다듬었다. 겉모습은 실바였는데, 실제로는 실바가 아니었다.
제론은 그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니 이런 것도 가능해지는군.’
실바의 마나 코어가 확실히 느껴졌다. 가동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냥 실바랑은 좀 다른 거 같은데?”
제론의 말에 세나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겉모습은 실바와 똑같다. 한데 그저 만져 본 것만으로 달라졌다는 걸 알아채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맞아요. 그냥 실바가 아니에요. 완전히 새로 만든 거나 다름없어요.”
“새로 만들었다고?”
“고생 좀 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이걸 만들면서 새로운 기간트를 설계했어요.”
제론이 놀란 눈으로 세나를 쳐다봤다. 새로 설계하는 기간트라니. 대체 언제 그런 일까지 했단 말인가. 또 언제
그렇게 실력이 늘었단 말인가.
“근데 솔직히 저 혼자서는 못하겠어요. 일단 마나 코어는 완전히 손들었고요.”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세나가 만든 새 기간트의 설계도였다.
“아직 디자인도 완성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관절이나 부품에 대한 설계는 대부분 끝났어요. 마나 코어나 마나
로드도 어느 정도는 했는데 미진한 부분이 너무 많아요.”
제론이 눈을 빛내며 설계도를 찬찬히 훑어봤다. 세나는 그 모습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도와주세요.”
제론이 고개를 들어 세나를 바라봤다. 별처럼 반짝이는 세나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의 눈은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니, 온몸에서 열정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좋아, 도와주지. 하지만 이걸 완성시키는 건 어디까지나 세나가 되어야 해. 할 수 있겠지?”
세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바로 그것을 원했다.
“아, 그보다 붉은 실바에 대해 설명해 드릴게요. 이건 말이죠, 베르의 마나 코어를 뜯어다가 썼어요.”
“베르?”
재론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베르의 마나 코어를 실바의 몸체에 갖다 붙이다니, 정말 대단했다. 아니, 그게 가능한 일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그래도 베르를 계속 뜯어서 살피다 보니 결국은 방법이 생기더라고요.”
마나 코어는 딱 그 한 부분만으로 끝나는 부품이 아니었다. 온몸에 퍼진 마나 로드부터 코어 주변의 부품들,
그리고 각종 마법진까지 다 어우러진 그야말로 작품이었다.
실바는 그래도 좀 단순한 편이었다. 하지만 베르는 그 복잡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베르의 마나 코어를 실바에 적용시켰다는 건 실바의 구조 자체를 완전히 새로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아직 세부 조정은 못 했어요. 한번 타 보세요.”
제론은 고개를 들어 붉은 실바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단번에 뛰어 조종석에 앉았다.
세나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실바의 조종석까지는 5 미터가 훨씬 넘는다. 그걸 제자리에서 단숨에
뛰어올랐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텅!
해치가 닫혔다.
키이이이이잉!
실바가 가동을 시작했다. 마나 코어가 굉음을 울리며 온몸에 마나를 공급했다.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고 실바로부터 전해지는 진동과 마나의 흐름을 받아들였다. 단숨에 동조가 이뤄졌다.
쿵!
실바가 한 걸음 걸었다.
제론은 그 단순한 한 동작으로 실바에 응축된 거대한 힘을 느꼈다. 어마어마했다. 이 실바라면 테오스만큼은 안
되겠지만 그에 버금갈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힘과 함께 자신감이 맹렬히 솟아났다. 이걸 타고 전장을 휘저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쿵! 쿵! 쿵!
제론은 단순한 동작을 통해 실바의 움직임을 점검했다. 조율이 제법 잘되어 있었다. 무려 3 년 동안이나 제론의
실바를 담당했던 세나가 만든 기간트이니 어련하겠는가.
시험 기동을 끝낸 제론이 해치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세나를 향해 엄지를 세워 줬다.
이건 정말 물건이었다. 그리고 새로 설계한 기간트에 대한 기대치가 최고조로 치솟았다. 또 어떤 굉장한 물건이
나올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부 조율을 해 드릴게요. 내일 다시 오세요. 참, 이건 아공간이 있는 거 아시죠? 장비는 여기 있어요.”
세나가 내민 장비는 일반적인 것보다 상당히 간소했다. 겉보기에는 상체를 가리는 가죽 갑옷과 롱소드가 전부였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마법진이 촘촘히 새겨진 팔찌와 발찌를 착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었다.
“더 간단히 만들고 싶은데 어렵더라고요. 새로 설계하는 기간트 장비는 꼭 크기를 줄이고 싶어요. 궁극적으로는
팔찌나 버클에 담는 게 꿈이에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기간트 엔지니어와 마법사라면 누구나 갖는 꿈이었다. 그리고 제론에게는 그 꿈을
실현시켜 줄 방법이 있었다.
“아, 그리고 강철이 부족해요. 기간트 부품 수급이 어려워서 하나하나 다 만들고 있거든요.”
“해결해 주지. 얼마나 있으면 되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제론은 그 말에 세나의 공방을 슥 둘러봤다.
“이 안을 꽉 채워 주지.”
세나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과장이 많이 섞인 말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나의 공방을 꽉
채울 정도의 강철을 구하는 것만 해도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기간트로 인해 강철 역시 수요가 많은 품목이었다. 그러니 갑자기 다량으로 구매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고 말이다.
“기대할게요.”
세나가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었다. 공방에서 일만 하느라고 꾸밀 시간이 없었는데도 세나의 외모는 빛이 났다.
검댕이가 얼굴 곳곳에 묻어 있었지만 제론은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보였다.
가만히 세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제론은 묵묵히 돌아서며 한 손을 슬쩍 들어 주었다. 그리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세나는 제론이 사라진 자리를 아쉬운 눈으로 한동안 바라봤다. 그러다가 이내 주먹을 불끈 쥐고는 붉은 실바를
바라봤다.
“그럼 어디 해 볼까?”
심혈을 기울여서 조율할 것이다. 이 기간트라면 제론은 군대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아마 어떤 적이 오더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으리라.
세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붉은 실바를 향해 다가갔다. 이 기간트가 전장을 휘젓는 장면이 훤히
그려졌다.
심장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Chapter 2 테오스의 비밀

세나의 공방에서 나온 제론은 곧장 유적으로 이동했다. 개조한 실바를 타고나니 테오스가 떠올랐다. 테오스를
타고 한바탕 움직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 진짜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아마 유적 13 층을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다. 13 층 클리어
선물이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유적에 들어간 제론은 바로 테오스를 소환했다. 소환과 동시에 탑승이 되는 테오스의 시스템은 역시 훌륭했다.
곧장 테오스와 동화해 어마어마한 힘의 물결을 온몸으로 느꼈다.
테오스가 아공간에 담긴 검을 소환했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휘둘렀다.
후웅! 후웅! 후웅!
테오스의 검이 연달아 바람을 갈랐다. 그리고 제론은 깜짝 놀랐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테오스의 가동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날 거라고만 생각했지, 테오스의 능력 자체가 달라질
거라고는 아예 생각도 못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알 수 있었다. 테오스의 힘이 월등히 늘어났다는 것을 말이다.
‘설마 소드 마스터가 되어야 진짜 능력을 끌어낼 수 있었던 건가?’
그럴 수도 있었다. 마치 테오스 자체가 익스퍼트에서 소드 마스터로 레벨이 올라간 느낌이었다.
제론은 갑자기 흥이 크게 올랐다. 테오스로 흘러가는 마나가 급격히 늘어났다.
우우우웅!
테오스의 검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마나가 검에 집중된 것이다.
꽈르릉!
검의 궤적을 따라 마나가 뿜어져 나갔다. 고도로 응축된 마나가 유적의 벽을 거세게 때렸다.
제론은 깜짝 놀라 검을 멈췄다. 처음 든 생각은 혹시 유적이 무너지는 건 아닌가였고, 다음으로 검에서 튀어
나간 마나가 떠올랐다.
“기간트로 이게 가능하다고?”
기간트는 어차피 마나 코어로 움직인다. 모든 움직임에 마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익스퍼트나
마스터가 검에 마나를 불어 넣는 것처럼 기간트에 그걸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만일 기간트의 검에 마나를 불어 넣을 수 있다면 누구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상대의 검을 모조리 갈라 버릴
텐데 그걸 어찌 막겠는가.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가 일반 기사를 상대하는 느낌일 것이다.
제론은 테오스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테오스의 검기가 때린 유적 벽을 확인했다.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뭘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정말로 대단한 유적이었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실망해야 하는 건지…….”
엄청나게 늘어난 테오스의 힘으로도 유적에 흔적조차 낼 수 없었다. 유적이 단단한 걸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테오스가 좀 더 강력하지 못하다는 것에 실망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테오스가 훨씬 강해졌다는 점이었다. 검에 마나를 담을 수 있다는 건, 또 그
마나를 외부로 날려 버릴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능력이었다.
사실 테오스의 능력은 가공할 정도였다. 보통 기간트와는 완전히 달랐다. 기간트가 마법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어쨌든 테오스를 타고 한바탕 검을 휘둘렀더니 기분이 좀 풀렸다. 이제는 유적 13 층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
단숨에 끝낼 거라고 자신했다.
곧장 유적 13 층에 도착한 제론은 가만히 서서 검을 들고 있는 은빛 기사를 보며 눈을 빛냈다. 오늘에야 결판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제론은 아공간에서 자신의 검을 꺼냈다. 평소에는 평범한 롱소드를 들고 다니지만, 제론의 진짜 검은 유적에서
선물로 받은 특별한 검이었다.
검의 재질은 아직 제론도 알아내지 못했다. 태블릿을 잘 뒤지면 찾을 수 있겠지만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반드시 알아내야 할 게 아니라면 차라리 모른 채 있는 게 속 편했다.
제론은 은빛 기사를 향해 검을 겨눴다.
그 순간 은빛 기사가 달려들었다. 검을 겨누는 것이 13 층 수련의 시작 신호였다.
쩌엉!
검과 검이 부딪치며 강렬한 기파를 만들어 냈다. 제론은 쩌릿쩌릿 저려 오는 팔에 힘을 꽉 주며 몸을 빙글 돌렸다.
자연스럽게 은빛 기사의 검을 옆으로 흘리며 회전력까지 가미한 검으로 목을 내리쳤다.
쉬잉!
은빛 기사가 그대로 몸을 굴리며 제론의 검을 피해 냈다. 그러면서 그 불안정한 자세로 검을 휘둘렀다. 너무나도
깨끗한 일격이 제론의 발목을 향해 날아갔다.
후웅!
제론은 살짝 점프해 그것을 피했다. 그러면서 점프한 상태로 바닥에 거의 눕다시피 한 은빛 기사의 가슴을 푹
찔렀다.
콰득!
애꿎은 바닥에 구멍이 뻥 뚫렸다. 은빛 기사가 몸을 한 바퀴 굴려 피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손으로 바닥을 밀어
뒤로 쭉 물러난 은빛 기사가 서둘러 자세를 잡았다.
제론은 즉시 달려들었다. 은빛 기사가 자세를 잡을 시간을 주기 싫었다. 하지만 은빛 기사는 안정감을 되찾으며
바로 검을 마주 휘둘렀다.
쩌저저저정!
검과 검이 부딪쳤다. 놀랍게도 소드 마스터가 된 제론의 검을 은빛 기사가 별 무리 없이 받아 냈다. 은빛 기사는
소드 마스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론의 검격도 은빛 기사의 검격도 제국 기초 검술의 단순한 초식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만큼 그 안에 담긴
위력은 엄청났다.
제론의 아랫배에 담긴 마나가 출렁거렸다. 그리고 일제히 사지백해로 퍼져 나갔다.
꽈아앙!
검과 검이 부딪쳤는데, 폭음이 울렸다. 마나와 마나가 충돌해 폭발한 것이다.
제론과 은빛 기사는 폭발의 충격을 해소하며 뒤로 쭉 물러났다. 하지만 물러나자마자 다시 부딪쳤다.
꽈아아아앙!
이번에는 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 뒤로도 연달아 검이 부딪쳤고, 그때마다 폭발이 일어났다.
꽝! 꽝! 꽝! 꽝! 꽈아아앙!
바닥이 파이고 벽에 금이 쩍쩍 갔다. 물론 유적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파손되어도
로비에 갔다 오면 바로 원상태로 복구된다.
제론은 이를 악물었다. 은빛 기사의 실력은 가공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단숨에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그동안 제론의 실력에 맞춰서 상대해 준 것이다.
우우우웅!
제론의 검이 울음을 토해 냈다. 그리고 새하얀 빛이 검 끝에서 쭉 솟아났다.
은빛 기사의 검에서도 은색 빛무리가 솟아났다.
제론은 온몸의 마나를 다 쏟아붓는 느낌으로 검을 휘둘렀다. 마나의 흐름과 검에서 휘도는 마나의 흐름이 정확히
일치되었다.
온몸이 검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깜짝 놀랐다. 하지만 정신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물처럼
고요하게 평정을 유지하며 검에 집중했다.
부드럽게 호를 그린 검이 은빛 기사의 검을 때렸다.
꽈르릉!
굉음과 함께 은빛 기사의 검이 산산이 흩어졌다.
제론의 검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휘돌며 은빛 기사의 목을 쳤다.
서걱!
은빛 기사의 목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움직임이 멈췄다.
제론은 가만히 서서 들끓는 마나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조금 전 그 느낌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마치 검으로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던 그 감각이 생생히 온몸에 새겨졌다.
샤아아아.
허공에 떠오른 은빛 기사의 머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휙 불어왔다. 흩날리던 은가루가 그대로
제론을 덮쳤다.
머리를 잃은 채 서 있던 은빛 기사의 몸체가 환하게 빛났다.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제론은 그 빛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빛이 서서히 다가왔다. 빛무리가 점점 강해지면서 작아졌다. 그리고
제론의 손 앞에 다가왔을 때는 크기가 롱소드 정도로 줄어들었다.
제론은 강하게 그것을 움켜쥐었다.
쩡!
제론의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검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그 가루가 허공을 한 바퀴 배회하고는 제론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빛무리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제론의 손에는 잘 벼려진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검으로부터 끊임없이 뭔가가 흘러들어 왔다. 그것은 분명히 잘 정제된 마나였다. 그 마나와 제론이 몸으로 흡수한
은가루가 만나 격렬히 반응했다.
“크윽!”
제론은 내장을 쥐어뜯는 듯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그것을 참아 냈다.
제론이 흡수한 은가루는 마나의 결정이었다. 몸에 들어온 은가루가 녹으며 거대한 마나로 변해 해일처럼 제론을
집어삼켰다.
마나의 격랑에 빠진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몸속을 휘돌던 마나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대부분
아랫배로 이동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일부는 심장으로 향했다.
위이이잉!
거대한 마나가 심장의 마나링을 씻어 냈다. 그러면서 그곳에 안착을 했다.
제론은 마나링 하나가 더 생긴 걸 확인했다. 이제 마나링은 모두 8 개가 되었다.
초고대 문명을 기준으로 해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가 된 것이다. 물론 아직 깨달음이 제대로
따라오지 않아 적응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만 말이다.
“후우우.”
제론은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번쩍!
강렬한 안광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제론은 몸이 말할 수 없이 가뿐해진 걸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제야
진짜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암석 지대에서 오른 것은 소드 마스터이되 소드 마스터가 아닌 경지였다. 마나의 흐름을 하나로 만들긴 했지만
정작 검과는 괴리감이 남은 상태였다.
지금 은빛 기사와 싸우면서 그 괴리감을 없앤 것이다.
제론은 손에 들린 은빛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세심히 그것을 살폈다.
정말로 마음에 쏙 드는 검이었다. 그리고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검 자체에 항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수준 이하의 마법은 그저 검에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해체되어 버릴 것이다.
검에 특별히 마법진이 새겨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순수한 검의 능력이었다. 역시 재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테페룸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보다 훨씬 대단한 무언가였다.
제론은 손바닥을 펼쳐 봤다. 손바닥 한가운데에 작은 점이 있었다. 제론의 안력으로도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이 검을 얻으며 생겨난 아공간 마법진이었다. 검을 수납하는 공간인 것이다.
제론은 손바닥에 마나를 밀어 넣으며 검을 찔렀다.
슈욱!
아무런 느낌도 없이 검이 손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손바닥에서 아공간이 열리며 검을 받아들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입이 쩍 벌어지도록 놀랄 만한 광경이었다.
12 층 클리어 선물은 바로 이 검과 아공간이었다. 그것을 이제야 받은 것이다. 이제 13 층 선물을 받을 차례가
되었다.
제론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바닥을 뚫고 올라온 낮은 기둥이 보였다. 항상 제론에게 선물을 전해 주는
기둥이었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이게 뭐지?”
기둥 안에는 은빛 열쇠가 들어 있었다. 난데없이 열쇠라니. 대체 이걸 어디다 쓰는 걸까?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단 열쇠를 꺼냈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마치 열쇠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만든 것 같은 전형적인 열쇠였다.
이 열쇠 역시 조금 전 제론이 받은 검과 마찬가지로 어떤 기이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마법진 같은 건 전혀
없었는데, 열쇠로부터 특별한 느낌이 지속적으로 전해졌다.
제론은 한동안 열쇠를 살펴보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는 아공간에 넣었다. 어쨌든 클리어 선물이었다. 결국은
쓰임새를 알게 될 테니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제론은 바로 14 층으로 내려갈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만일 14 층으로 갔다가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층이라면
곤란했다.
“일단 영지전을 승리로 이끌어야겠지.”
이번 영지전은 에어스트 백작령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에어스트 백작령은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만일 영지전에서 큰 피해를 입기라도 하면 승리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반드시 압도적으로 승리한 다음 영지를 안정시켜야 한다. 그렇게 되면 흐름을 가져올 수 있다.
아마 향후 에어스트 백작령을 건드리려는 영지는 없을 것이다. 슈린 공작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슈린 공작가를 떠올린 제론이 강렬하게 눈을 빛냈다. 그들은 조만간 대가를 치를 것이다. 예전 에어스트 백작령에
한 짓과, 제론의 아버지에게 한 짓, 그리고 제론에게 한 짓에 대한 모든 대가를 말이다.
제론은 마음을 굳게 다지며 로비로 올라갔다.
로비에 도착한 제론은 유적을 빠져나가지 않고 테오스를 소환했다. 꼭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테오스에 탄 제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천천히 테오스를 움직이며 검을 뽑았다.
후우웅!
검을 휘두를 때마다 테오스의 힘이 짜릿짜릿하게 느껴졌다. 검에 담긴 마나가 세상 모든 걸 가를 듯 유적 로비를
가득 채웠다.
꽈과과과광!
유적의 모든 벽이 일제히 폭음을 토해 냈다. 테오스가 흘린 마나가 폭발하며 만들어 낸 광경이었다.
제론은 테오스를 멈춘 채 가만히 서서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테오스는 아주 특별한
기간트였다.
제론은 조금 전 진정한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그러면서 실력이 한 단계 상승했다.
그리고 테오스도 똑같이 위력이 상승했다. 제론이 강해지면 테오스도 함께 강해지는 것이다. 제론의 상태에 따라
테오스의 상태도 변한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비로소 예전 테오스를 처음 얻었을 때, 왠지 모르게 파워가 떨어지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제론의 실력이 아직 테오스를 몰기에 많이 모자랐던 것이다.
테오스는 정말로 큰 힘이었다. 테오스만 있다면 레늄 왕국에서 누가 덤벼도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100 기의 기간트를 동시에 상대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것도 전혀 피해 없이 말이다. 테오스는 그 정도로
강해졌다.
제론은 주위를 둘러봤다. 유적 벽은 여전히 깨끗했다. 지난번보다 더 강해졌는데도 마찬가지로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쿵! 쿵! 쿵!
테오스가 천천히 걸어 유적 벽 앞에 섰다. 그리고 검을 들어 올렸다.
쩌엉!
테오스의 검이 벽을 후려쳤다. 멀쩡했다.
우우우웅!
검이 마나를 가득 머금었다.
꽈아아앙!
폭음이 일었다. 하지만 여전히 벽은 멀쩡했다. 돌가루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견고했다.
제론은 테오스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특이한 재질이었다. 분명히 뭔가 특별한 힘으로
보호되고 있을 것이다.
“강해지겠다.”
강해지고 또 강해질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벽에 자신의 흔적을 뚜렷이 남기고 말 것이다.
제론은 그렇게 결심하며 돌아섰다.

Chapter 3 개전

제론은 유적에서 나오자마자 준비를 해서 네이드 후작령으로 향했다. 바이스나 카이트가 알면 당장 뜯어말릴 것이
분명하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단출하게 혼자서 말을 타고 이동한 제론은 네이드 후작령과 에어스트 백작령의 경계에 도착했다.
그곳은 삼엄한 감시망이 펼쳐져 있었다. 당연히 네이드 후작령 측에서 만든 감시망이었다. 에어스트 백작령 쪽은
그다지 경계가 심하지 않았다.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제론은 일단 에어스트 영지의 경계병에게 다가갔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인 만큼 제론의 얼굴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제론을 보자마자 큰 소리로 예를 취했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제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다가가 물었다.
“동태는 좀 어떤가?”
“아직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다만 조금 전부터 병사의 움직임이 약간 달라졌습니다.”
“움직임이 달라져?”
“병력이 이동하는 걸로 보입니다.”
제론은 병력 이동이라는 말에 네이드 후작령 쪽을 쳐다봤다. 과연 병사들이 바삐 움직이는 게 보였다.
슬슬 전쟁이 시작될 조짐이 보였다. 허가가 떨어지는 즉시 진격할 속셈인 듯했다.
허가가 떨어지면 곧장 에어스트 백작령으로도 통보가 가니 따로 선전포고를 할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관례는 형식적이나마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었다.
“깨끗하게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거로군.”
아직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럴 공산이 컸다. 그렇다면 제론도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전에 네이드 후작을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뒤에 슈린 공작가가 있는지, 혹시 그들이 뒤를 찔러서 영지전으로 내몰린 건 아닌지 확인하고자 했다.
“네이드 후작령에 다녀올 테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걸어갔다. 병사가 당황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에서든 자기 몸 하나는 뺄
자신이 있었다. 설사 수백 기의 기간트 사이에 떨어지더라도 말이다.
그 당당함에 멍하니 제론의 등을 바라보던 병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우왕좌왕하며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영주성에 소식을 보냈다.
제론은 그렇게 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예상했다. 아마 영지가 발칵 뒤집힐 것이다.
그리고 전쟁 준비를 조금 더 서두를 것이다.
어느새 제론이 네이드 후작령 진영으로 들어섰다. 경계병이 긴장한 눈으로 제론을 향해 창을 겨눴다.
“난 에어스트 백작이다. 네이드 후작님을 뵈러 왔으니 안내해라.”
제론의 말에 병사는 물론이고 후다닥 달려온 기사들마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 영지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적 영지의 영주가 찾아온다고 말하면 대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제론의 당당함이 마음에 걸린 기사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수석 기사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에어스트 백작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
제론이 팔을 들어 올려 팔찌를 보여 줬다. 에어스트 백작가의 상징이자 인장이었다. 물론 기사에게 그걸 알아볼
안목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물건이기도 했다.
그것을 본 기사들이 눈짓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상대는 혼자였다. 혼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따라오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기사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머지 기사 중 하나가 황급히 막사로 달려갔다. 후작성에 연락을 해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제론은 느긋하게 기사의 뒤를 따랐다.
여기서 후작성까지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네이드 후작령 자체가 영지에서 나는 곡물이나 특산물보다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돈을 버는 영지였기에 넓이가 그리 넓지 않았다.
기사는 마차로 제론을 안내했다. 제론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 담대한 배포에 기사는 혀를
내둘렀다.
만일 딴 맘을 먹었다면 마차를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서 해코지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적 영주라면 더더욱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도 제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할 테면 해 보라는 듯 당당했다. 그러니 오히려 쓸데없는 짓을 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제론을 태운 마차가 빠르게 달렸다. 소식을 받은 네이드 후작성이 한바탕 뒤집어진 상태였다. 네이드 후작을
비롯한 가신들이 최대한 서두르라고 압박까지 했다.
제론은 마차에 앉아 창을 통해 네이드 후작령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역시 유동 인구가 많은 영지답군.’
네이드 후작성으로 가는 길은 잘 닦여 있었다.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사람이 다니는
길은 따로 있었다.
수많은 마차와 사람이 정신없이 다니는 모습을 보니 에어스트 백작령과 참으로 비교가 되었다.
하지만 제론은 실망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았다. 결국은 에어스트 백작령은 이보다 훨씬 발전할 것이다. 아직은
기반을 다지는 단계일 뿐이었다.
‘조만간 영지의 인구가 이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다.’
네이드 후작령과의 영지전이 마무리되면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는 길이 더 크게 열릴 것이다. 네이드 후작령을
차지하면 그쯤이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었다.
일단 바인이 추진하는 빈민 이동 사업이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네이드 후작령을 통과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 말이다.
네이드 후작령은 통행세를 통해 부를 축적한다. 어마어마한 수의 빈민을 이동시켜야 하는 에어스트 백작령의
입장에서 보면 통행세만 해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네이드 후작령을 제론이 차지하게 되면 통행세 걱정 없이 빈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또한 정책적으로 에어스트 백작령 쪽으로 가는 길의 통행세를 낮추거나 없앤다면 수많은 상인의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유동 인구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착 인구 역시 차츰 늘어나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제론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마차는 네이드 후작성 안으로 들어갔다. 후작성 역시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물론 에어스트 백작성보다야 훨씬 못했지만 말이다.
이윽고 마차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제론이 마차 밖으로 나갔다.
기사단 하나가 마차를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제론은 그들을 슥 훑어봤다. 자연스럽게 몸으로 마나를 흘리는
자가 30 명의 기사 중 10 명이나 있었다.
물론 제론은 아무런 감흥도 의미도 없었다. 사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사는 이들보다 훨씬 강하다.
군부 출신이라서 검술이 살짝 떨어졌는데, 제론이 전해 준 라이트닝 소드를 익히면서 빠르게 실력이 늘어 지금은
대부분 익스퍼트가 되었다. 물론 현실을 기준으로 한다면 말이다.
만일 에어스트 백작령이 안정을 찾아 시간을 두고 치열하게 훈련을 하면 결국 다들 소드 마스터가 될 것이다. 그
어떤 영지나 왕국에서도 기사단 전원이 소드 마스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사단은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내게 볼일이 있나?”
제론이 기사단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모두 복장이 똑같았기에 단번에 기사단장을 찍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론은 단번에 그렇게 했다. 그가 가장 강했다.
“후작님께 안내해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기사단장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성안에 있는 응접실로 데려가야 했다. 응접실은 성의 중심에
위치한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상대를 억류하기 가장 좋은 위치였다.
“그럼 안내하도록.”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이 우르르 움직여 호위하는 척 포위망을 구성해 따라갔다. 그리고
기사단장은 가장 앞에서 그들을 이끌었다.
“호오.”
기사단에 포위된 채로 걸어가던 제론은 눈을 빛냈다. 포위망을 이룬 형태가 참으로 특이했다. 아니, 형태가
특이한 게 아니라 포위망으로부터 특별한 힘이 느껴졌다.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를 중심으로 이뤄진 진형이었다. 그들은 특수한 방법으로 마나를 계속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나온 마나가 뒤섞이며 묘한 작용을 일으켰다.
이건 기사의 마나를 이용해 마법진을 만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의 중심에 제론이 있었다.
기사들은 제론의 상대적 위치가 변하지 않도록 최대한 애썼다.
‘마나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군.’
이 진형에 갇히면 마나의 유동이 극도로 느려진다. 물론 그건 제론이 보통 기사였을 때 해당하는 얘기였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였다. 그것도 초고대 문명을 기준으로 하는 소드 마스터였다.
초고대 문명에서는 소드 마스터쯤 되면 기간트와 싸우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한데 고작 이런 진형 하나 못
깨겠는가.
실제로 이 진형은 제론의 마나를 거의 억압하지 못했다. 제론의 마나에는 소드 마스터의 의념이 녹아들어 있었다.
함부로 외부의 힘이 다룰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제론이 순순히 따라가니 기사들의 긴장이 살짝 풀렸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후작에게 데려갈 수 있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성의 응접실에 도착한 제론은 기사단장의 안내에 따라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모습에 기사단 전원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담대하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제론은 기사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등을 기댄 채 눈까지 감고 편안히 휴식을 취했다. 제대로 쉬어 둬야
나중에 급히 움직일 때 힘을 낼 수 있을 테니까.
기사단장의 눈짓에 기사들이 조용히 움직여 이동할 때와 똑같은 진형을 갖췄다. 마나의 묘한 흐름이 제론의 몸에
있는 마나에 간섭을 시작했다. 물론 아무 소용없었다.
“후작님은 언제 오시나?”
“이제 곧 오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사단장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후작이 언제 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마 후작은 에어스트 백작을 초조하게
만들고 흥분시키기 위해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올 것이다.
사실 그건 제론도 익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눈을 감은 채 마법 수련에 빠져들었다.
현재 제론의 심장에는 8 개의 마나링이 맴돌고 있었다. 그중 8 번째 마나링은 기연을 통해 얻은 것이었기에 확실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8 번째 마나링까지 완벽하게 쓰기 위해 지속적으로 수련을 할 필요가 있었다. 깨달음 없이 얻은 걸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을 가장 좋은 방법은 꾸준히 노력을 해서 8 번째 마나링을 효과적으로 쓰도록
훈련하는 것이었다.
훈련량을 통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깨달음이 따라오게 되어 있었다.
어차피 깨달음을 통해 마나링을 만들었어도 그걸 쓰려면 충분한 연습이 필요했다. 그때 할 노력을 미리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제론은 8 개의 마나링을 동시에 가속시켰다. 그리고 주변 마나를 움직여 마나를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마법을 쓰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마나를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고정시킬 수 있기만 하면 된다. 물론
쉽지 않았다.
제론의 심장에서 8 가닥의 마나가 실처럼 뽑혀 나왔다. 그 마나는 제론을 맴돌며 주변 마나를 끌어들이고 마음껏
조작했다.
제론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법 수련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8 개의 마나링을 한꺼번에 조작하는 게 너무나
어려웠지만 하면 할수록 조금씩 감각이 생기면서 익숙해졌다.
일단 조금 익숙해지고 나니 너무나 재미있었다. 그동안 할 수 없었던 게 하나씩 가능해지니 새로운 것을 익힌다는
즐거움에 가슴이 뛰었다.
제론이 마법 수련을 하는 동안 그 옆에서 지켜보던 기사들은 질린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앉은 자세를 보면 자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한데 그들이 보기에 제론은 그냥 눈만 감았을 뿐이지 결코 잠들지
않았다.
벌써 몇 시간째 기다리는지 모른다. 한데 그 긴 시간 동안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아니,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아마 내가 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벌써 10 번은 뛰쳐나갔을 것이다.’
모든 기사가 같은 생각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긴장이 더 풀려 이제는 마나를 압박하는 진형도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응접실 문이 열렸다. 그때는 이미 대부분의 긴장감이 사라진 상태였다. 진형도 제법 많이
흐트러져서 더 이상 마나를 압박하지도 못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제론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릴 생각이 아예 없을 정도로 마법 수련에 푹 빠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네이드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네이드 후작은 제론을 계속 지켜봤다. 응접실 위층에 아래를 확실히 살필 수 있도록 몇 가지 장치를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 나갈 타이밍을 계속 재고 있었다. 제론이 흥분했을 때 나가서 정신을 쏙 빼 놓을 생각이었다.
한데 실패했다. 설마 제론이 이렇게 오랫동안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제는 네이드
후작이 더 기다릴 수 없었다.
상대를 흥분하게 하려다가 자신이 흥분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흥분한 상태로 들어왔는데, 제론이 자신을 본 척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으니 더 화가 났다.
“크흠!”
네이드 후작은 헛기침을 해서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일제히 후작에게 예를 취했다. 그래도 제론은 눈을 뜨지 않았다. 마법 수련이 한창
절정에 달해 있었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네이드 후작의 눈썹이 세차게 꿈틀거렸다.
보다 못한 기사단장이 나섰다. 그는 제론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도 몰랐다. 왠지
조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제론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더 짙어졌다.
“저…….”
기사단장은 극도로 조심스럽게 제론을 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머지 기사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동안 봐
왔던 기사단장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얼굴만 같은 다른 사람인 듯했다.
기사단장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도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좀 답답했다.
“백작님, 일어나십시오.”
기사단장이 조금 더 강하게 말했다. 하지만 제론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백작님!”
기사단장이 큰 용기를 내서 소리쳤다. 그러자 제론이 눈을 번쩍 떴다.
“헉!”
기사단장은 제론이 눈을 뜬 순간 갑자기 뭔가가 온몸을 옭아매는 듯한 느낌에 깜짝 놀랐다.
제론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수련이 절정일 때, 기사단장이 일깨우는 바람에 마나링으로 뽑아낸 마나가
일제히 기사단장을 옭아맸다.
8 가닥의 마나가 실처럼 뻗어나가, 기사단장의 몸에서 가장 마나가 충만한 곳을 정확히 짚어 마나 자체를 꽁꽁
감싸 버렸다.
그 한 번의 움직임으로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덕분에 제론은 8 개의 마나링을 다루는 게 훨씬 능숙해졌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후작님이 온 것도 몰랐군요.”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후작을 쳐다봤다.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지만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네이드 후작은 제론을 노려봤다.
“버릇이 없군.”
후작의 말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후작님이야말로 예의가 없군요.”
“뭐라고?”
네이드 후작은 인상을 팍 썼다. 하지만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호흡을 통해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후우우. 좋아, 그 얘긴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하지. 그래, 여긴 왜 왔나?”
“얘기를 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대체 왜 전쟁을 하려는지 궁금해서 말이죠.”
네이드 후작이 코웃음을 쳤다.
“흥. 뻔한 걸 왜 묻나? 자네의 영지에서 우리 측 사절단을 몰살시켰는데도 책임을 지지 않으니 별수 있나?”
“우리는 그런 일이 없으니 그렇지요. 혹시 그쪽에서 저질러 놓고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는 건 아닙니까?”
꽝!
“자네 말 다 했나?”
네이드 후작이 발을 구르자 대리석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네이드 후작 역시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였다.
제론은 미끼를 던진 다음 네이드 후작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후작의 반응을 보니 거짓된 행동으로 기만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일 자체에 뭔가 음모가 끼어 있다는 뜻이었다.
이미 마티를 통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확인했다. 일단의 무리가 사절단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문제는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만일 그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 제론이 확인하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뒤를 쫓았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그저 녹화된 영상만 남았다.
“우리가 그랬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안 했다는 증거도 없지.”
네이드 후작의 강경한 태도에 제론은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걸 확인했다. 네이드 후작은 처음부터 전쟁을 원했던
것이 분명했다.
“슈린 공작가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슈린 공작가라는 말을 꺼내며 제론은 네이드 후작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소드
마스터에 오른 뒤부터 감각이 상당히 예민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따위 도움 없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네.”
네이드 후작의 말과 변화로 판단하면 뒤에서 슈린 공작가가 네이드 후작을 밀어낸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네이드
후작은 슈린 공작가의 아래에 들어간 느낌이 아니었다.
‘아쉽군. 파인트가 왔다면 더 떠보기 쉬웠을 텐데.’
슈린 공작가에서 파인트를 이곳으로 파견했다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었다. 바인의 첩보망에 걸린 정보 중
하나였다.
파인트라면 네이드 후작보다는 다루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게다가 파인트는 제론을 보면 흥분해서 금세 냉정을
잃곤 한다.
게다가 슈린 공작가에서 뭔가 수작을 부렸다면 네이드 후작에게 그걸 알릴 리 없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정보를
얻으려면 사실 파인트를 파고들어야 한다.
제론이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네이드 후작이 냉소를 띤 채 기사단장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고 제론을 보며
말했다.
“한데 혼자서 여기까지 왔다는 건 나름 각오를 했다는 뜻인가?”
제론은 상념을 접고 네이드 후작을 쳐다봤다. 그리고 주변 기사들을 슥 둘러봤다.
“후작님의 인품을 믿습니다.”
네이드 후작이 피식 웃었다.
“나도 내 인품이야 믿네. 하지만 난 내 인품보다는 영지가 더 소중하다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기사들이 움직였다. 흐트러졌던 진형을 바로잡음과 동시에 기사단장이 제론을 향해 성큼
다가갔다.
“이거 실망이군요. 날 억류할 생각이라니.”
“굳이 피와 돈을 흘리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효율적인가.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이번에는 제론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그렇긴 하군요. 하면 내가 여기서 후작님을 인질로 잡아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하하하하,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하고 싶으면 한번 해 보게. 과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론은 후작의 말을 들으며 다가온 기사단장을 슬쩍 노려봤다. 제론의 가슴에서 회전하는 8 개의 마나링에서
일제히 마나가 뽑혀 나왔다.
기사단장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온몸을 뭔가가 옥죄고 있었다. 섣불리 움직이면 큰일 날 것 같은 기분이
등줄기를 살살 간질였다.
“침고로 날 잡아가면 내 아들이, 내 아들까지 잡아가면 가신 중 하나가 영지전을 이어 가기로 했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지.”
네이드 후작의 말을 들은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자신을 억류하려고 해서 같은 방법을 써 주려고 했는데,
그게 소용없다면 굳이 애쓸 필요가 없었다.
‘하긴, 파인트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
네이드 후작을 잡아가면 오히려 전쟁이 더 격렬해질 수도 있었다. 파인트가 지휘권을 잡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굳이 후작님을 잡아갈 필요는 없겠군요. 그럼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네이드 후작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뭐 하고 있나? 어서 잡지 않고.”
후작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챙!
30 명의 기사가 동시에 검을 겨누니 그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물론 제론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었지만.
기사들 중 유일하게 검을 뽑지 않은 사람, 기사단장이 천천히 제론의 앞으로 걸어갔다. 동료의 위압감을 빌린
덕분인지 몸을 얽매던 뭔가도 사라진 상태인지라 기분이 제법 괜찮았다.
“굳이 피를 볼 필요 있겠습니까? 순순히 따라 주시지요.”
제론은 기사단장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스윽 돌려 자신을 포위한 기사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죽이는 것보다는 다치는 게 낫겠지.”
일단 마음을 먹고 결정을 내린 제론은 즉시 검을 뽑았다. 허리춤에 매달린 롱소드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쉭! 푹!
기사단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제론의 얼굴과 자신의 배를 꿰뚫은 검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예
보지도 못했다. 그저 검을 뽑는 모습만 어렴풋이 봤을 뿐이었다.
한데 이렇게 배를 꿰뚫렸다. 격렬한 통증이 배 한가운데에서 시작해 온몸을 헤집었다.
“크으으으! 쿨럭!”
결국 피를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제론은 기사단장의 배에 꽂은 검을 가볍게 뽑고는 옆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제론의 몸이 기사 한 명 앞에 나타났다.
쉭! 푹!
“크으으으! 쿨럭!”
기사단장과 똑같은 모습으로 무릎을 꿇은 기사가 불신 가득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미 제론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쉭! 푹! 쉭! 푹!
검을 찌르는 소리와 배를 꿰뚫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리고 그렇게 소리가 날 때마다 어김없이 기사가 피
흘리는 배를 움켜쥐며 무릎을 꿇었다.
30 명의 기사가 모두 쓰러지는 데에는 불과 1 분도 걸리지 않았다.
네이드 후작은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응접실에 서 있는 사람은 제론과 그가 유일했다.
“치료를 잘 하면 죽지는 않을 겁니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네이드 후작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네이드 후작은 그 시선에 움찔 놀랐다.
“나, 날 어쩔 셈이냐? 아까도 말했듯이 날 죽이거나 사로잡아도 소용이 없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었다.
“이들이나 잘 치료하십시오. 무리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굳이 네이드 후작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기사들은 부상이 심각해서 치료하는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릴 것이다. 마나를 안에 심어 헤집었기에 포션도 소용이 없었다.
네이드 후작은 공포에 질려서 제론이 유유히 응접실을 나가는데도 붙잡거나 하지 못했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성 전체에 비상을 걸 생각도 못 했다. 만일 성 전체의 병력을 움직였다면 제론도 이렇게 쉽게 성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제론은 응접실 문을 열고 슬쩍 고개를 돌려 네이드 후작을 노려봤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기사단의 상태를 다시
확인하고는 미련 없이 나가 버렸다.
텅!
응접실 문이 닫혔다. 그걸 신호로 네이드 후작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이 무슨……!”
당해 놓고도 믿을 수 없었다. 네이드 후작도 익스퍼트에 오른 지 제법 오래된 기사였다. 한데도 공포에 옥죄어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제론과 시선을 마주친 것 하나만으로 말이다.
네이드 후작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기사들에게로 향했다. 하나같이 무릎을 꿇은 채 정신을 잃었다. 배에서
꾸역꾸역 피를 흘리면서 말이다.
“누, 누구 없느냐!”
네이드 후작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이끌고 응접실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일단의 병사가 우르르 들어와
기사들을 하나하나 밖으로 옮겼다.
네이드 후작성에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다.

제론이 네이드 후작령의 경계에 도착할 즈음, 후작성이 발칵 뒤집혔고 비상이 걸렸다.
즉시 명령이 전달되었고 감시가 더욱 강화되었다.
경계에 도착한 제론은 마치 벽을 친 듯 쭉 늘어서서 길을 막고 있는 병사와 기사를 볼 수 있었다.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저 저들을 어떻게 요리해야 최대한 피해를 가중시킬지를 고민했다.
후작성에서 기사단을 죽이지 않고 굳이 부상만 입힌 이유도 그들을 이용해 전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일단 그들을 살리려면 포션을 들이부어야 한다. 또한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야 하기에 죽인 것보다 더 많은 인력을
소모시킨 셈이 되었다.
포션 장사를 하는 슈린 상단에서 최근 포션 제조를 못 하고 있기에 포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중이었다.
그러니 포션을 쓰면 쓸수록 재정적 부담이 가중될 것이다.
‘병사에게까지 포션을 쓰지는 않겠지.’
병사보다 포션이 더 비쌌다. 당연히 병사를 위해 포션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제론은 병사들
틈새에 끼어 있는 기사를 확인했다.
제론은 가장 기사가 많이 모인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휘이익!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는 제론의 모습에 다들 깜짝 놀랐다. 그리고 긴장하며 무기를 꽉 쥐었다.
쉭!
제론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서 있던 기사 앞에 나타났다.
푹!
기사의 배를 꿰뚫은 제론은 조금 속도를 줄이며 근처의 다른 기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창을 꼬나 쥔 채 제론을 향해 달려가 팔을 쭉 뻗었다.
제론은 가볍게 몇 걸음 걸어 모든 창을 피해 내고는 검을 내질렀다.
푹!
기사 하나가 또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제론은 그런 식으로 병사를 잔뜩 끌고 다니며 기사를 하나하나 쓰러뜨렸다.
워낙 많은 병사가 모여 있었기에 처음에는 그렇게 휘저어도 포위망이 견고했는데, 기사를 20 명 정도 쓰러뜨리고
나니 포위망에 구멍 몇 개가 숭숭 뚫렸다.
제론은 미련 없이 그 구멍을 향해 달려갔다. 순식간에 구멍이 메워졌다. 하지만 제론은 구멍이 사라지기 전에
그곳으로 몸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제론은 마지막으로 뒤를 향해 검을 한 번 뿌리고 그대로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넘어갔다.
쉭쉭쉭쉭쉭!
날카로운 마나의 검 수십 개가 쏟아져 나갔다. 그리고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 기사들을 향해 하나하나 쏘아졌다.
쩡! 쩡! 쩡!
“크악!”
“으악!”
일부는 그것을 막아 냈지만 내장이 진탕되었고, 일부는 채 막아 내지 못하고 몸에 맞아야 했다.
아수라장이 되었다. 중간에 있던 기사들이 우르르 쓰러지며 피를 토하니 제대로 제론을 뒤쫓지도 못했다.
병사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쓰러진 기사를 나르고 진형을 재정비했다.
그러는 사이 제론은 느긋하게 아군 경계병 사이로 스며들었다.

“영주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득달같이 달려온 바이스의 잔소리에 제론은 빙긋 웃었다. 말투를 들어 보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마음이 느껴져 괜히 웃음이 나왔다.
“네이드 후작을 한번 봐야 할 것 같아서. 진짜 전쟁을 할 마음이 있는지 확인도 해 보고 싶었고.”
바이스가 입을 쩍 벌렸다. 이 무슨 어이없는 말인가. 영지전을 벌여야 하는 영주가 적진에 사실 확인을 위해
들어가다니.
“그런 표정 짓지 마. 어쨌든 무사히 돌아왔잖아. 내 실력 몰라?”
바이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물론 영주님의 실력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적 모두를 상대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쨌든 당장 준비해야 할 것 같아.”
“당장 말입니까?”
바이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이내 눈을 빛냈다. 영지전은 위기이기도 하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만일 네이드 후작령을 얻을 수 있다면, 혹은 그에 준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에어스트 백작령의 발전에
가속도가 제대로 붙을 것이다.
“완전히 뒤집어 놨거든. 아마 선전포고도 없이 달려들지 몰라.”
“영주님께서도 참전하십니까?”
바이스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제론의 모습을 보며 희열에 차 살짝 몸을 떨었다.
오랜만에 붉은 학살자의 활약을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대감이 충만히 차올랐다.
“당장 카이트 경에게 알리겠습니다.”
“그래, 나도 기간트를 미리 준비해야겠군.”
“보셨습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하더군. 아마 기대해도 좋을 거야.”
제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실바보다는 테오스를 타고 싶었다. 만일 테오스를
움직일 수만 있다면 단숨에 승패를 결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아직은 테오스를 공개할 때가 아니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일단 이번 영지전을 승리로 장식해야 한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이겨야 한다. 자신 있었다. 성능이 월등히 향상된
실바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군대에 있을 때는 실바로도 그런 성과를 만들어 냈다. 물론 개조가 되어 일반적인 실바와는 달랐지만 출력을
비롯한 대부분은 보통 실바와 비슷했다.
한데 이번에는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능력을 가진 실바였다.
‘혼자서 적진을 휘저으면서 빈틈을 만드는 방식이 괜찮겠군.’
시험 기동을 해 본 결과 충분히 그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원래 뛰어난 기간트 센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유적의 수련을 통해 그 능력이 몇 단계나 위로 올라갔다.
예전에도 홀로 적진을 휘저었는데, 이젠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상대는 영지군이다. 전장에서 맞서 싸운 벨룸 왕국의 군대는 수많은 실전으로 다져진 정예였다.
영지군도 나름대로 지독한 훈련을 하겠지만, 그래도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지는 전장을 한 번 경험한 것만 못하다.
그런 지독한 놈들과 싸우던 제론이 고작 영지군을 상대한다면 훨씬 더 큰 활약이 가능했다. 그것은 제론뿐만
아니라 에어스트 백작령의 주력인 라이트닝 기사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이트닝 기사단은 대부분 전쟁을 경험한 군부 출신이었다. 군부 출신 라이더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약점인
검술을 제론 덕분에 완전히 메워 버린 그들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게다가 그들은 실전에서 제론과 손발을 맞춰 봤다. 제론이 어떻게 날뛰건 충분히 뒤를 받쳐 줄 수 있는
실력자였다.
제론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어서 빨리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나도 천상 싸움꾼이야.’
4 년이라는 전장의 시간이 제론의 성향을 그렇게 바꿔 버렸다. 또, 유적의 수련도 대부분 싸움의 연속이었다.
투기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튼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영지를 향해 달려갔다. 물론 중간에 인적이 사라지자마자 유적으로 텔레포트했다.
지금은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이었다.

네이드 후작령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수많은 병력이 후작성 앞에 도열했다.


네이드 후작이 나와 짧은 연설을 했고, 개전을 선포했다. 후작은 최대한 시간을 아꼈다. 이미 왕궁으로부터
영지전 허가가 떨어진 상황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선전포고도 하고 그랬겠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에어스트 백작령을
박살 내고 그 주인인 제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제론으로부터 시작되어 뇌리에 새겨진 공포를 잊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소환!”
총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곳곳에서 기간트가 솟아났다. 네이드 후작령은 그리 넓지 않았다. 에어스트
백작령까지는 미리 기간트를 소환해서 이동해도 힘들지 않을 정도로 짧은 거리였다.
기간트의 수는 200 기가 넘었다. 슈린 공작가에서 지원한 기간트에다가 2 왕자가 은밀히 손을 써서 지원한 기간트,
그리고 슈린 공작가에 선을 대고 있는 귀족가의 지원까지 받으니 그 정도 숫자가 만들어졌다.
네이드 후작은 뿌듯해졌다. 200 기의 기간트라면 에어스트 백작령 정도는 돌멩이 하나 남기지 않고 몽땅 가루로
만들 수도 있으리라.
“가서 싹 부숴 버려라!”
네이드 후작의 말에 총사령관이 크게 외쳤다.
“진격!”
200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쿵!
기간트가 발을 맞춰 진군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 뒤를 경탄에 잠긴 표정을 지은 병사들이 뒤쫓았다. 물론
대열을 잘 맞춘 채로 질서정연하게 행군했다.
싸움은 기간트가 하겠지만 실질적인 처리는 사람이 해야 한다. 이 병사들은 그를 위해 필요한 인력이었다. 무려
5000 이나 되는 병력이었다.
전쟁에 승리하면 이들이 에어스트 백작령을 장악하고 약탈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에어스트 백작령을 속령으로
편입하거나 후작령으로 만드는 행정적 절차까지 진행이 가능한 인재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5000 의 병력은 기간트 라이더가 아닌 슈린 공작가의 기사들이 맡았다. 원래는 네이드 후작령의 기사가 할
일이었지만, 제론 때문에 수많은 기사가 다치는 바람에 부득이 슈린 공작가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슈린 공작가에서 파견된 파인트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에어스트 백작령을 슈린 공작가가
꿀꺽 삼킬 생각이었다.
충분히 가능했다. 슈린 공작가가 여기에 투입한 힘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200 기의 기간트와 5000 의 병력이 두 영지의 경계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Chapter 4 왕국의 분열

“그래도 우리 병력도 제법 대단하지 않아?”


제론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카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는 고작 50 기에 불과하고 저쪽은 200 기인데 너무 여유 넘치시는 거 아닙니까?”
제론이 힐끗 카이트를 쳐다봤다.
“그래서 두려워?”
카이트가 씨익 웃었다.
“그럴 리가요. 200 기 아니라 300 기가 몰려와 봐야 저런 오합지졸로는 우리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제론도 씨익 웃었다.
카이트의 말대로 적은 오합지졸이었다. 여러 가문에서 보낸 기간트가 뒤섞여 있어서 유기적인 작전 수행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붉은 학살자를 볼 수 있겠군요. 다들 기대 중입니다.”
카이트의 말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사실 제론도 기대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함께 싸우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그나저나 기간트 장비가 아주 간단하군요.”
“세나가 애 좀 쓴 거 같아.”
“우리도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새 기간트를 설계 중이니까 좀 기다려 봐. 아마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새 기간트라는 말에 카이트가 눈을 빛냈다.
사실 카이트는 거의 기간트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그가 모는 기간트는 발굴형 기간트 중에서도 상위 기종인
아우틈이었다.
발굴형 중 최상위 기체인 히엠스를 주겠다면 당연히 사양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히엠스를 간절히 원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로 기간트를 설계한다는 말에는 눈을 빛내지 않을 수 없었다.
“성능은 어느 정도가 될 것 같습니까?”
“글쎄. 최소한 베르보다는 낫지 않겠어?”
카이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베르보다 낫다니. 베르는 무려 출력이 2.8 이나 된다. 발굴형이 아닌 기간트의 경우
출력 2.3 이 벽으로 알려져 있었다.
크란 제국 최강의 기체인 켈룸이 2.3 의 출력을 가진다. 켈룸은 양산형이긴 하지만, 출력 2.3 의 마나 코어를
만드는 것이 워낙 까다로워서 확실히 양산이라고 말하기가 힘든 기종이었다.
한데 2.8 이라니. 아니, 베르보다 낫다고 했으니 어쩌면 그 위일지도 모른다. 대체 그런 기간트를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세나가 만든 겁니까?”
카이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런 셈이지. 나도 곧 시간을 내서 도울 거야. 바이스도 아마 좀 도와야 할 것 같고.”
카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세나의 나이를 생각하면 새 기간트를 설계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뛰어난 천재라 하더라도 말이다.
카이트가 묘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세나의 능력만으로 될 리 없다. 또, 바이스가 힘을 보탠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제론 덕분이었다.
제론이 나섰기에 가능한 일이고, 제론이기에 이 영지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참으로 신비로웠다. 체른산 방어군에서 함께할 때부터 지금까지 가만 생각하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불가능한 일을 연달아 이루면서 달려왔다.
“자,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이젠 눈앞의 싸움에 집중해야지.”
“알겠습니다.”
카이트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200 기에 달하는 기간트가 지축을 울리며 다가오는 광경은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다.
하지만 카이트 입장에서는 큰 감흥이 없었다.
체른산 방어군에 있을 때는 훨씬 많은 적을 상대로 싸운 적도 있었다. 물론 승리했다. 카이트는 이번 싸움도
반드시 승리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예비 기간트 부대는 얼마나 준비되어 있지?”
“일단 1 차로 100 기를 준비했습니다.”
“그럼 2 차도 있나?”
“예. 50 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카이트는 그렇게 대답하고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1 차로 준비한 예비 부대는 어느 정도 전투가 가능합니다. 3 기가 모여 합공하면 본대의 기간트 1 기를 상대할 수
있습니다.”
제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정말로 훌륭한 실력이었다. 본대의 라이더는 최소 10 년이 넘게
군부에서 구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그런 베테랑을 고작 3 기로 막을 수 있다면 엄청난 훈련을 쌓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2 차 예비 부대는 말 그대로 기초 과정을 마친 라이더 중 실력이 뛰어난 순으로 뽑았습니다.”
그 정도라면 전쟁에 나가면 박살이 나겠지만, 승리가 확정된 전투에 후발로 투입해 경험을 쌓게 하면 훨씬 빨리
발전할 가능성이 생긴다.
“본대로 한바탕 휘저은 다음 1 차 예비 부대를 투입하면 되겠군.”
“일단 작전은 그렇게 짰습니다. 한데 그렇게 하면 부서지는 기간트가 많아질 겁니다.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한
놈들이 많으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안전하게 경험 쌓기 좋은 기회는 드물잖아. 진행하자고. 나중에 2 차 예비 부대도 투입해.”
카이트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간트의 수리에는 인력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수많은 부품도 함께 필요했다. 그리고 기간트 부품은 일반적으로
상당히 비쌌다.
“돈 걱정은 딴 사람에게 맡겨라. 우리 영지 생각보다 부자니까 신경 쓸 것 없다.”
“알겠습니다.”
카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표정에 너무 많이 드러난 모양이었다.
“자, 그럼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지? 바이스 쪽은 어떤지 확인해 봐.”
“예.”
카이트가 대답하고는 즉시 통신을 열었다. 그리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제론에게 말했다.
“준비 끝났답니다.”
“타이밍 좋군. 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론의 말에 카이트가 시선을 돌렸다. 멈춰서 위압감을 뿌려대던 200 기의 기간트가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과연 바이스의 마법이 기간트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카이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법은 통상적으로 기간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카이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군 시절 직접 겪은 게 있기 때문이었다.
바이스의 마법은 전황을 단숨에 바꿔 버릴 정도로 대단했다.
“돌격 준비.”
“벌써 말입니까?”
아직 마법도 펼쳐지지 않았다.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당장 돌격하는 건 타이밍상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자칫 아군도 마법에 휘말릴 수 있으니 말이다.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카이트는 즉시 명령을 하달했다. 제론이 쓸데없는 지시를 내릴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돌격 준비!”
카이트의 외침에 50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달릴 준비를 했다. 적과의 거리는 아직 제법 됐다. 그리고 적은 열심히
진군 중이었다.
이대로 돌격하면 적에게 틀어박혀 고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망설이지 않았다.
“돌격!”
제론의 명령이 곧장 카이트를 통해 기간트 부대에 전달되었다.
쿵쿵쿵쿵쿵!
기간트 부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일단 명령하면 따른다. 군대에서는 항상 그래 왔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수행할 수 없으니까.
두 부대의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간격이 적당해졌을 때, 바이스의 마법이 펼쳐졌다.
화아아아악!
강렬한 빛이 선을 그리며 대지를 치달렸다. 순식간에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 위치는 정확히
진군하는 적 기간트 200 기에 맞춰졌다.
쩌저저적!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그리고 갈라진 바닥에서 거대한 바위가 불쑥 불쑥 튀어 나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이트가 눈을 부릅떴다.
“설마 스톤에그?”
나타난 바위는 몽땅 스톤에그였다. 그리고 스톤에그는 본능에 따라 돌거인으로 변해 달려들었다.
꽝! 꽝! 꽝! 꽈앙!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는 전부 당황했다. 갑자기 나타난 돌거인이 그들의 발을 붙잡았다.
사실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돌거인이 비록 힘이 세고 파괴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기간트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기간트 1 기가 돌거인 10 마리를 상대하는 것도 가능했다. 게다가 지금 나타난 돌거인의 수는 고작 100 마리
정도였다.
200 기의 기간트가 100 마리 돌거인을 상대하면서 피해를 입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대는 돌거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돌격하던 라이트닝 기사단이 정확히 그 순간 파고들었다.
꽈과과과과광!
그대로 돌격해 적 진형을 관통하고 지나가 버렸다.
50 기의 기간트가 돌격한 흔적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베테랑 중의 베테랑으로 구성된 기간트 부대였다.
돌격하면서 정확히 적 기간트의 조종석을 꿰뚫어 버린 기간트도 있었다.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 부대는 완전히 진형이 와해되었다. 이쯤 되면 아주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제론이 기간트를 소환했다.
“슬슬 우리도 가야지?”
제론은 단숨에 기간트에 탑승해 앞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돌격이 성공했다지만 적은 여전히 180 기 정도가 남아 있었다. 비록 진형이 와해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50 기로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게다가 돌거인은 몽땅 부서져 버렸다. 이럴 때일수록 적에게 시간을 줘선 안 된다. 시간을 주면 진형을 정비할
것이고, 그럼 더 싸우기 힘들어진다.
쿵쿵쿵쿵쿵쿵!
붉은 실바가 빠르게 달려갔다. 어찌나 빠른지 발 구름 소리가 마치 북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테오스를 타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움직임이 제법 훌륭했다.
붉은 실바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렸다. 그리고 강하게 발을 굴렀다.
꽈앙!
붉은 실바가 높이 떠올랐다. 그 광경을 적 기간트가 멍하니 고개를 든 채 바라봤다.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고
있으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놀란 것은 아군도 마찬가지였다. 라이트닝 기사단은 군부 출신이었다. 당연히 붉은 실바가 점프하는 모습은
헤아릴 수도 없이 봐 왔다. 하지만 이렇게 높이 점프한 것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마치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
같지 않은가.
꽈드득!
붉은 실바는 정확히 적 기간트의 머리를 발로 디뎠다. 머리가 찌그러지며 푹 가라앉았다.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가슴도 볼품없이 움푹 파였다.
그런 충격을 라이더가 버텨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기간트에 탄 라이더는 피를 토하며 절명했다.
붉은 실바는 기간트를 디딘 힘으로 다시 점프했다.
후웅!
바람이 붉은 실바를 따라갔다. 그렇게 높이 올라간 붉은 실바가 다시 떨어졌다.
꽈드득!
또 한 기의 머리가 어깨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처음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기간트를 디디고 점프했기에
땅을 디딘 것보다는 높이 뛸 수 없었다.
다시 떨어진 실바가 이번에는 적 기간트의 가슴을 발로 콱 찼다.
꽈광!
기간트가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붉은 실바는 가볍게 떠올랐다가 바닥에 내려섰다. 균형을 조금도 잃지
않은 멋진 동작이었다.
붉은 실바는 쉬지 않았다. 다시 몸을 날렸다.
쿵쿵쿵! 꽈앙!
붉은 실바의 어깨가 적 기간트의 조종석을 파고들었다. 조종석이 일그러지며 라이더가 눌려 죽었다.
붉은 실바는 빠르고 효과적인 공격으로 적을 차근차근 해치웠다. 어찌나 재빠른지 정신을 차린 후작령 측
기간트가 우르르 몰려들었지만 아무도 잡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붉은 실바에게 농락당하고 있을 때, 50 기의 라이트닝 기사단이 다시 돌격했다.
꽈과과과과광!
라이트닝 기사단은 빠르게 돌격하면서도 결코 진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돌파가 목적이 아니라 적당히
파고든 다음 적을 섬멸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돌격 속도를 적당히 조절했다.
결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200 기나 되지만 제대로 된 진형을 짜지 못한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쓰러지는 수가 늘어났다.
반면 라이트닝 기사단의 기간트는 움직임에 큰 지장이 없는 파손 외에는 피해가 전무했다.
“산개!”
카이트가 외치자 라이트닝 기사단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직도 적이 많은 상태라서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또한 카이트의 판단을 신뢰했다.
꽝! 꽝! 꽝! 꽝!
사방으로 흩어진 라이트닝 기사단의 기간트는 싸움을 난전으로 유도하며 점점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이대로 가면 수적 우위에 밀려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잠시지만 싸움을 멀리서 지켜보던 네이드 후작령의
수뇌부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나타난 것과 거의 동시에 사라졌다.
쿵! 쿵! 쿵! 쿵!
갑자기 에어스트 백작령 쪽에서 거대한 발 구름 소리가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연했다.
무려 100 기의 기간트가 대열을 맞춘 채 진군하고 있었다. 제법 훈련을 잘 받았는지 행군 속도도 상당히 빨랐다.
그들은 그대로 난전이 벌어진 싸움터를 뒤덮어 버렸다.
꽝! 꽝! 꽝! 꽝! 꽝!
단단한 진형을 갖춘 채 차근차근 전진해 적을 공격하는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 부대는 그야말로 엄청난
위압감을 보여 줬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를 무너뜨리는 붉은 실바의 존재는
그들에게는 악몽 그 자체였다.
100 기의 기간트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전장에 남은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네이드 후작령에서 동원한 200
기의 기간트 중 제대로 서 있는 건 고작 30 기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여기저기 뜯어지고 부서져 제대로 서 있는 게 용해 보이는 기간트가 절반 이상이었다.
그 와중에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50 기의 기간트가 추가로 등장했다.
경험을 쌓기 위해 출격한 2 차 예비 부대였다.
쿵! 쿵! 쿵! 쿵!
진형을 갖추려 애쓰긴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무려 50 기나 되는 기간트였다. 질 리 없었다.
그들은 남은 적을 향해 빠르게 이동해 검을 휘둘렀다.
꽈과과광!
그렇게 전투가 막바지로 흘러갔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카이트가 담담하게 말하자, 제론이 피식 웃었다. 축하 받기에는 너무 싱거운 전투였다. 물론 영지전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전투를 몇 번이나 겪어야 하리라.
“그나저나 우리 전력을 너무 많이 드러낸 거 아닙니까? 적도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할 텐데 조금 걱정입니다.”
카이트의 걱정은 당연했다. 이번이야 작전이 제대로 맞아떨어졌고 적이 아군의 병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속절없이 무너졌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 새로운 전력을 준비해야지.”
“예? 그게 가능합니까?”
“시간이 많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네이드 후작령은 이번 전투에서 200 기의 기간트를 고스란히 잃어버렸다. 당연히 다시 싸우려면 또 기간트를
모아야 한다.
200 기의 기간트를 물리친 에어스트 백작령을 압도할 만한 전력을 모아야 하니 골치가 아플 것이다.
“아예 당장 네이드 후작령을 밀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럼 정비가 끝나면 바로 진격할까요?”
카이트는 차라리 그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굳이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현재 네이드
후작령에 남은 기간트는 고작해야 수십 기에 불과했다.
그쯤이야 라이트닝 기사단만 가도 충분히 압도할 수 있었다.
“기다려. 아직 때가 아니야.”
제론의 말에 카이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때가 아니라니. 대체 이보다 더 좋은 타이밍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카이트를 보며 제론이 씨익 웃었다.
“기다리면 정말로 괜찮은 기회가 올 거야.”
카이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론이 저렇게 자신감을 보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제론은 카이트가 혼자 생각하게 두고는 자리를 떴다.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집무실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인내를 갖고 기다려야 한다.

☆ ☆ ☆

네이드 후작은 반쪽이 된 얼굴로 힘없이 앉아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200 기나…….”
200 기나 무너진 것보다 에어스트 백작령에 200 기나 되는 기간트가 있다는 사실이 더 믿기 어려웠다. 대체
어디서 그 많은 기간트를 구했단 말인가.
“반역으로 몰아붙여?”
네이드 후작은 이제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보다 더 많은 병력을 모아야 하는데,
그런 대병력을 언제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에어스트 백작이 병력을 끌고 진군하면 후작령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막을 병력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걱정에 걱정을 거듭하는 네이드 후작의 집무실에 두 사람이 방문했다.
2 왕자와 파인트였다.
“어서 오십시오.”
네이드 후작은 일단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이내 힘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실 지금은 대화를 할 기분도
아니었다.
“후작님, 상황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파인트의 말에 네이드 후작이 자포자기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지금 이 상황보다 더 곤란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문터 후작이 움직였습니다.”
“문터 후작? 그게 뭐 어쨌단 말이오?”
“문터 후작이 우리의 뒤를 치려고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그 말에 네이드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문터 후작이 왜 자신의 뒤를 친단 말인가.
“그가 왜 우리 뒤를 친단 말이오?”
파인트가 난감한 표정으로 2 왕자를 바라봤다. 2 왕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슈린 공작가를 노리고 있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을 하려던 네이드 후작은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다시 꿀꺽 삼켰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슈린 공작가에서는 네이드 후작령을 위해 수많은 기간트를 지원해
주었다.
“그래서 제게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네이드 후작이 2 왕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문터 후작의 뒤에 형님이 계시다는 걸 확인했네.”
“헉!”
네이드 후작은 헛숨을 삼켰다. 정말로 놀랐다. 설마 이 일에 1 왕자가 개입했을 줄은 몰랐다. 1 왕자가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별다른 행동도 하지 않고 돌아왔기에 별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한데
뒤에서 문터 후작을 움직였다니.
‘이러다가 내전으로 발전할 수도 있겠어.’
네이드 후작은 지금 자신이 인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대번에 깨달았다. 그의 머리가 고속으로 회전했다.
‘2 왕자, 그리고 슈린 공작가!’
네이드 후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 볼 만하지 않은가. 여기에 자신의 재력이 더해진다면
문터 후작가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면 제가 어쩌면 좋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아직 영지전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네이드 후작의 말에 2 왕자가 파인트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던 파인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영지전을 마무리하면 어떻겠습니까?”
“뭣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우리 측 기간트가 얼마나 저쪽으로 넘어갔는지 모르시오?”
“그러니 협상을 하자는 것 아닙니까. 협상단을 보내 저쪽에서 수거한 기간트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영지전을
끝내자고 말입니다.”
네이드 후작이 어이없는 눈으로 파인트를 바라봤다. 이 애송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단 말인가.
에어스트 백작령이 이 상황에서 그따위 협상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전력을 다시 채우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전력을 영지전에 쏟는 건 효율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저들의 힘도 예상보다 대단하고 말입니다.”
파인트와 2 왕자는 에어스트 백작령이 부담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힘이 예상보다 훨씬 대단했다. 이대로라면
양쪽으로 압박을 받아 지리멸렬할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어쩌시겠습니까? 결정은 후작님께서 하십시오.”
네이드 후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과연 저들이 협상에 응하겠소? 지난 전투는 완벽한 우리의 패배였소. 반대로 말하면 저들의 대승이었지. 한데
그런 승리 후에 수거한 기간트를 몽땅 돌려주는 것도 모자라 이길 것 같은 영지전을 포기한다고? 정말로 저들이
그 협상에 응할 것 같소?”
“물론 그냥은 안 넘어가겠지요. 그러니 당근을 제시하는 겁니다.”
“당근?”
“우리 측으로 끌어들여 1 왕자 전하와의 싸움에 한 팔 거들게 하는 것이지요.”
파인트의 말에 네이드 후작이 입을 쩍 벌렸다.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대체 지금 뭘 하자는 건가. 저들이
그런 협상에 응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승리를 통해 얻는 영지의 절반을 넘겨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제야 네이드 후작도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그 정도 조건이라면 충분히 협상에 응할 만하다. 또 힘도
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라면 그런 조건으로 내민 손을 덥석 잡을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결정을 내리시지요.”
“하겠소.”
네이드 후작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자신은 2 왕자 측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것은
향후 이 왕국을 2 왕자가 차지했을 때, 거대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때가 되면 이깟 영지 아무것도 아니지. 그냥 버릴 수도 있어.’
네이드 후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에어스트 백작령의 선택은 확고히 정해졌다. 누구라도
그런 조건을 거절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일단 난 최대한 세력을 모아 보겠소.”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2 왕자와 파인트가 그렇게 말하고 나가자, 네이드 후작은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었다. 내전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벨룸 왕국과의 전쟁도 승리로
마무리되었으니 당분간은 외침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벨룸 왕국의 상황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들도 거의 내전에 준하는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이 가장 좋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생각을 정리한 네이드 후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쨌든 달리는 말에 올라탔다. 이젠 자신도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일단 에어스트 백작령에 사람을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2 왕자와 파인트가 그 일을 처리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부드럽게 처리해야만 한다.
네이드 후작이 서둘러 집무실에서 나갔다. 이제부터는 정말 바빠질 것이다.

제론의 집무실에 영지 주요 인물이 모두 모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해?”
아무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설마 네이드 후작이 그런 제안을 해 올 줄은 몰랐기에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일단 내전에 참여하는 건 반대입니다. 괜히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바이스의 말에 제론은 물론이고 세나와 카이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전은 이쯤에서 멈추는 게 낫겠지?”
제론의 물음에 다들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싸워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제론이 씨익 웃었다.
“지금 우리 왕국의 상황을 보면 그리 간단치가 않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바인이랑 연락 안 해 봤어?”
“주기적으로 하고는 있습니다만…….”
“우리 영지에 관계된 정보만 얻지 말고 더 큰 그림을 그려 봐. 바인은 충분히 그 정도 능력은 되는 사람이니까.”
제론의 말에 바이스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카이트와 세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영지에 자신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조직이 있는 듯하지 않은가.
하지만 굳이 거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제론이 가르쳐 줄 거라고 믿었다.
“지금 왕국 세력 구도가 셋으로 나뉘고 있어.”
제론의 말에 다들 눈을 빛내며 집중했다.
“1 왕자와 2 왕자가 각각 세력을 모으고 있고, 그 둘에 속하지 않은 자들은 중립이라는 명목하에 슈돌츠 후작을
중심으로 뭉치는 중이야.”
“자칫 왕국이 셋으로 분열될 수도 있겠군요.”
“이대로라면 그렇지.”
“하지만 그 셋 중 누구도 그걸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셋 모두 왕권을 노리고 있으니 조각난 왕국을 다스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바이스의 말에 제론이 관심을 가지고 그를 쳐다봤다. 바이스는 자신에게 모이는 시선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일단 1 왕자는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습니다.”
그 말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그런 취급을 받았는데도 문제 삼지 않고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했다.
1 왕자가 그럴 사람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리고 2 왕자는 말이 2 왕자지 사실은 슈린 공작가의 세력에 가깝습니다.”
슈린 공작가는 제론의 원수였다. 당연히 2 왕자가 어떤 상황이든 그쪽에 가는 건 말이 안 된다.
“마지막 남은 것이 슈돌츠 후작인데, 그와 손을 잡기에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슈돌츠 후작령은 에어스트 백작령의 정반대쪽에 있었다. 레늄 왕국을 길게 가로질러야 도착하니, 거리상 손을
잡기가 힘들었다.
물론 그래도 셋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슈돌츠 후작이었다. 그나마 제대로 된 생각이 박힌 귀족 중
하나였으니까.
바이스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좌중을 한 번 둘러봤다.
“그럼 마지막으로 남는 건 딱 하나입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자 이거로군.”
바이스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것 역시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은 네이드 후작령을 얻지 못하면 나중에 고립될 수도 있었다. 백작령으로 오려면 네이드 후작령을
반드시 지나쳐야 했다.
“일단 네이드 후작령을 얻어야겠어. 아니면 인구를 늘리기가 너무 힘들어. 안 그런가?”
제론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에어스트 백작령은 한창 성장 중이었다. 그리고 그 성장을 지속시키려면
식물에 꾸준히 물을 주듯 인구를 꾸준히 유입시켜야만 했다.
한데 네이드 후작령이 틀어 막히면 인구 유입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중립을 유지하는 게 좋겠어.”
“포획한 기간트 200 기는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돌려주면 안 되지.”
제론의 말에 싸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쩌면 2 왕자 측은 그걸 빌미로 또 공격을 시작할지 모른다. 물론 안 그럴
확률이 훨씬 높았지만 말이다.
“괜찮겠습니까?”
“지금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나 있겠어? 그거 싹 고쳐서 우리가 쓰면 전력이 두 배로 늘어날 텐데 뭐가
걱정이야?”
세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결국 새로 포획한 200 기의 기간트를 몽땅 수리해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그 일을
생각하니 앞이 깜깜해졌다.
“그리고 내전이 끝나기 전에 새로운 기간트 생산에 들어가면 아무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새로운 기간트?”
바이스가 놀란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세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입니까? 새로운 기간트를 만든다는 것이?”
“아마 성능이 제법 뛰어날 테니 기대해도 좋을 거야.”
제론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안으로 쏙 들어가서 착실하게 내실을 다지자고.”
다들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만일 제론의 말대로 새로운 기간트를 생산하고 내실을 다진다면 외부의
위협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사이 항구를 완성해서 바다를 통한 교역을 하면 다른 자잘한 문제까지 싹 해결할 수 있다.
“하면 네이드 후작에게는 어떤 답을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제론이 씨익 웃었다.
“그냥 넘어가긴 좀 그렇지 않아? 적절한 보상을 받고 끝내자고.”
세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상대는 포획한 기간트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영지전을 끝내자고 했다. 한데 오히려
영지전을 끝내려면 보상을 하라고 하다니!
“100 만 골드 정도로 끝내려고 하는데 어때? 너무 적은가?”
“예?”
“배, 백만 골드요?”
100 만 골드라니. 네이드 후작령이 아무리 부자라도 100 만 골드는 결코 쉽게 만들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영주님, 나중에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당장은 줄지도 모른다. 1 왕자가 언제 뒤를 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에어스트 백작령을 뒤에 두고 싸울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내전이 끝나고 나면 당장 조치를 취할 것이다. 가장 먼저 목표가 될 영지로 확정되는 셈이었다.
다들 걱정했지만 제론은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전이 끝나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제재가 들어오게 되어 있어. 안 그럴 것 같아? 우리가 가진
식량을 어떻게든 얻어 내려고 할 걸?”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세 사람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당장 네이드 후작령부터 봉쇄를 할 거야. 우리를 여기 가둬 두고 차근차근 요리하겠지.”
물론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쯤 되면 에어스트 백작령의 힘이 얼마나 커졌을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그러니 미리 실리를 취하자고. 100 만 골드면 제법 도움이 되지 않겠어?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수두룩할
텐데.”
그거야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뭐 하는가. 외부에서 뭔가를 구입해 안으로 들여오려면 네이드
후작령을 거쳐야 하는데 말이다.
그들도 생각이 있다면 네이드 후작령을 쉽게 통과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뭘 걱정하는지 다 아는데, 걱정할 필요 없다. 물류에 대한 건 일단 내가 싹 해결할 테니까.”
바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내가 언제 없는 말 하는 거 봤어?”
“그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장담을 하니 얼른 와 닿지가 않았다. 대체 무슨 수로 물류를 해결한단 말인가.
에어스트 백작령에 식량은 많지만 나머지 물품은 현저히 모자랐다. 상단이 이곳으로 오지 않으면 그걸 해결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이참에 우리도 상단 하나 만들지. 적당한 사람을 구해 봐야겠어.”
바이스는 모든 일을 저렇게 간단히 생각하고 말하는 제론의 모습에 또 한 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만큼 믿음직스러웠다. 지금까지 제론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아마 이번에도 분명히
해결해 줄 것이다. 누구보다도 멋지게.

꽝!
네이드 후작이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에 금이 쩍쩍 갔다. 하지만 후작은 그 한 번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꽝! 꽝! 꽝!
콰직!
결국 탁자가 산산조각 났다.
네이드 후작은 분을 못 참고 씩씩거렸다.
“뭐라고? 100 만 골드?”
너무 화가 치밀어서 당장이라도 병력을 끌고 쳐들어가고 싶었다. 한데 그럴 수가 없으니 더 울화가 치밀었다.
네이드 후작은 몇 시간이나 분통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바탕하고 나니 조금 속이 풀렸다. 그렇게 화가 조금
가라앉았을 때, 2 왕자와 파인트가 들어왔다.
“소식 들었습니다. 그놈들이 100 만 골드를 요구했다면서요?”
“그렇소.”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고민 중이오. 마음 같아서야 확 쓸어버리고 싶지만…….”
네이드 후작의 말에 2 왕자가 나섰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끕시다. 그쪽에 신경을 쓰느니 돈으로 막은 다음 더 중요한 것에 힘을 쓰는 게 낫지 않겠소?”
네이드 후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지만 터져 나갈 것 같은 속은 어쩌란 말인가.
“시간은 얼마든지 있소. 우리가 대업을 마무리한 다음에는 그깟 백작령 따위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지 않겠소?”
그 말에 네이드 후작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여전히 화는 남아 있었다.
“화를 풀라는 말은 하지 않겠소. 그 화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시오. 결국 에어스트 백작령에 몽땅 쏟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주겠소.”
그제야 네이드 후작이 한숨을 내쉬며 2 왕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왕자 전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단, 나중에 에어스트 백작령의 처분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놈들은 제가
하나하나 직접 처리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여부가 있겠소.”
2 왕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일이 잘 풀렸으니 이제 남은 건 대업을 이루는 일뿐이었다. 그러니 어쩌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슈린 공작가에서 새로 만들고 있다는 기간트는 어찌 되었소?”
“이제 양산에 들어갔습니다. 이번 전쟁에 큰 힘이 될 것이라 자신합니다.”
2 왕자의 질문과 파인트의 답에 네이드 후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새로 만드는 기간트라니요?”
“하하. 별것 아닙니다. 출력 1.9 의 기간트의 양산을 시작했습니다. 이름은 라쿠스입니다.”
“라쿠스…….”
네이드 후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출력 1.9 의 기간트를 양산할 수 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대업은 이룬 거나
다름없었다.
줄을 잘 섰다는 생각에 네이드 후작의 기분이 크게 나아졌다. 에어스트 백작령에 대한 생각은 이제 더 이상 할
필요도 없었다.
‘철저히 짓밟아 주겠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치욕을 다 안겨 주지.’
네이드 후작의 입가가 잔혹하게 비틀렸다.
2 왕자 진영은 에어스트 백작령에 대한 입장을 그런 식으로 정리했다.
덕분에 에어스트 백작령은 100 만 골드라는 돈을 받고, 내정에 힘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네이드 후작령을 경유해서 들어오는 상단은 하나도 없었다. 네이드 후작이 통행세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외부로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
그렇게 에어스트 백작령이 고립되었다.

☆ ☆ ☆

내전이 발발했다. 1 왕자와 2 왕자 사이의 골은 상당히 깊었다. 그걸 알기에 국왕도 내전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이미 국왕이 손을 댈 수 있는 상황을 넘어가 버렸다.
수많은 유력 가문이 두 진영에 연달아 붙었고, 점점 양측의 세력이 커져 갔다.
그리고 중립을 지키는 슈돌츠 후작의 세력은 단단히 문을 걸어 잠갔다. 그들은 대부분 왕국 북서부 지역에 모여
있었는데, 자신들끼리 교역을 하며 내전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수도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수도에는 여전히 국왕이 있었다. 수도를 차지하겠다고 흑심을 드러낸 순간,
명분에서 밀릴 공산이 컸다.
레늄 왕국의 내전 상황을 느긋하게 앉아 구경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커다란 벽에 정교한 상황판을 만들어
놓고는 손으로 턱을 괸 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주 팽팽한데?”
“남작님께서 미리 공작을 해 두셨지 않습니까.”
수하의 말에 깁스 남작은 살짝 웃었다.
“그야 그렇지. 그래도 이렇게 정확히 둘로 갈릴 줄은 몰랐어. 이거 내전이 제법 길어지겠는데?”
“저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럼 당분간 레늄 왕국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건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내전이 길어지면 국력도 현저히 낮아질 테니까요.”
깁스 남작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찜찜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그나저나 에어스트 영지가 마음에 걸리는군. 영지전도 관두고 확 움츠렸단 말이지.”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수긍이야 가지만…….”
에어스트 백작령은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면 2 왕자와 손을 잡는 게 가장 쉬웠다. 그런데 2 왕자 진영에는 슈린
공작가가 있었다.
“원수의 손을 잡기가 쉽지 않겠지. 하지만 이건 그놈에게도 분명히 기회일 텐데 왜 가만히 있는 거지? 그 대단한
전력을 가지고서 말이야.”
무려 200 기의 기간트가 확인되었다. 그 정도면 웬만한 후작령이나 공작령도 꼼짝 못 하고 당할 정도로 대단한
전력이었다.
한데 그런 힘을 가지고도 몸을 움츠리고 있다는 건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두렵거나.
“어쨌든 신경 쓰실 필요 있겠습니까? 그래봐야 일개 백작령에 불과합니다. 왕국의 일에 휩쓸리면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질 규모입니다.”
깁스 남작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레늄 왕국 말고도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좋아, 그럼 여길 정리해라. 이제 벨룸 왕국으로 가서 공작을 마무리한 다음 체스터 공국으로 간다.”
“체스터 공국 말입니까?”
“슬쩍 힘을 실어 줘야지. 그래야 내전에 빠진 두 왕국을 보며 욕심이라도 한번 부려 볼 것 아니겠느냐.”
깁스 남작의 말에 사내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수하가 밖으로 나가자 깁스 남작은 다시 벽의 상황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내내 레늄 왕국의 동남쪽
끝에 위치한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에어스트 백작에 붉은 학살자라…… 뭐, 변수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봐야 일개 왕국의 백작에 불과하지.”
깁스 남작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에어스트 백작령을 보고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마치 미련을 털어
버리려는 듯이.
“자, 그럼 다음 일을 진행하러 가 볼까?”
깁스 남작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걸어서 밖으로 나갔다.
방에 남은 상황판에 불이 확 붙었다. 그 불길은 이내 방을 몽땅 태운 것도 모자라 건물까지 꿀꺽 삼켜 버렸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잿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Chapter 5 페쿠니아 상단의 도약

레늄 왕국이 내전에 휩싸인 것과 달리 에어스트 백작령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기간트 병력을 네이드 후작령과의 경계에 깔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바이스는 아예 그곳을 기간트 훈련장으로 이용했다. 간단한 편의 시설을 만들어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한 다음,
그곳에 기간트를 몰아넣었다.
네이드 후작령과 에어스트 백작령의 경계에는 항상 100 기가 넘는 기간트가 훈련을 했다. 이것은 사실 네이드
후작령 입장에서는 상당한 압박이었다.
하지만 네이드 후작은 그 압박을 무시하려 애썼다. 어쨌든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단연 세나였다.
세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지난 전투로 포획한 200 기의 기간트를 수리하는 것과 제론이 새로 내놓은 기간트의 수리,
그리고 기간트 설계도를 손보는 것까지 있었다.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충실감도 대단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늘어나는
기간트의 수와 점점 발전하는 설계도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카이트는 기간트 훈련을 맡아서 매일 신입 라이더를 굴렸다. 지난번 전투에 참여했던 경험이 예비 라이더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다.
그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면서 새로운 신입 라이더를 모집했고, 그들에게도 차근차근 기간트를 지급했다.
바이스는 영지를 전반적으로 정비하면서 농지 확장 준비를 했다. 아직 일부분밖에 쓰지 못하는 거대한 평원을
내년부터는 제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
그리고 훈련하지 않는 기간트를 돌려 암석 지대의 암석을 옮겼다. 암석 지대를 정리해 그곳을 개간할 준비를 함과
동시에 그 암석을 이용해 항구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아직 영지에 건물이 제대로 들어서지 않았기에 그 공사도 함께 진행했다.
덕분에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연일 일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공사가 끊임없이 있으니 인력을 아무리 수급해도
모자라기만 했다.
문제는 인력만이 아니었다. 물품도 모자랐다. 일단 상단이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오지 않으니 물품 반입이 뚝 끊겨
버렸다.
이대로 한 달 정도만 지나도 영지민의 생활이 참담해질 것이다.
바이스는 그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겠다면서 사라진 제론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 ☆ ☆

제론은 수도에 도착해 거리를 거닐었다. 내전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수도는 더욱 활황이 되었다.
누구도 수도를 건드리지 않기에 대부분의 물자가 수도로 모였다. 그리고 그것을 사고팔기 위해 사람도 함께
모였다.
“역시 여기가 답이었어.”
물자를 사서 나르는 건 문제없었다. 제론에게는 아공간이 있었으니까.
벨트에 빈 아공간이 무려 30 개나 있었다. 하나하나가 기간트를 넣고도 남을 정도로 큰 아공간이었다. 거기에
물품을 가득 채워서 돌아가면 아마 당분간은 물자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흥정 따윈 필요 없었다. 그냥 사서 가면 된다. 상단이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물품을 운송하는 비용이 오히려 더
든다.
수도에서 사면 상단이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판매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살 수 있었다.
만일 나중에 에어스트 백작령이 더 발전해서 수많은 상단이 드나들고 인구가 훨씬 더 늘어나면 얘기가 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랬다.
제론은 상점가는 물론이고 사방에서 몰려와 좌판을 펼친 상인들까지 싹 돌면서 닥치는 대로 물건을 사들였다.
물건은 몽땅 수도에 있는 커다란 창고로 보내졌다. 제론이 직접 나르는 게 아니라 계약만 하고 그쪽으로 물건을
가져오라고 지시해 쌓아 두는 방식이었다.
창고는 수도 외곽에 있었는데 제법 규모가 컸다. 제론이 거리를 한 번 지나갈 때마다 창고에 쌓일 물건이
산더미처럼 늘어났다.
물품의 종류를 가릴 필요도 없었다. 그저 몽땅 사 두면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있을 테니까. 영지민에게 공짜로
푸는 것도 아니고 판매를 할 테니 지출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오늘도 제론은 대충 거리를 다 훑은 뒤, 좌판으로 향했다. 좌판을 펼친 상인도 제법 많은 물품을 가진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상인과 제대로 계약하면 값싸게 많은 물건을 확보할 수 있었다.
좌판을 슥 둘러보며 걸어가던 제론은 갑자기 눈에 이채를 띠었다. 사람이 우글거리는 좌판을 발견한 것이다.
저렇게 사람이 많은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을 만하군.’
좌판을 펼친 상인이 굉장한 미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좌판을 둘러싼 사람들은 몽땅 남자였다. 그들은 저마다
어떻게든 미녀의 환심을 사 보고자 애쓰고 있었다.
당연히 물건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가져온 양이 상당한데도 눈에 띌 정도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제론은 가만히 서서 물건을 확인했다. 품질도 나쁘지 않았다. 괜찮은 품질에 미모를 이용한 상술이 결합되어 이런
결과를 내는 것이다.
“자, 오늘 치는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내일 다시 와 주세요!”
여인의 외침에 대부분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건을 다 팔면 칼같이 사라지는 여인이었다. 오늘은 더
이상 미녀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까웠다.
서둘러 좌판을 정리하는 여인의 모습에 입맛만 다시던 사내 몇 명이 갑자기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제론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과연 저 여인이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해졌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자주 있었을 게 분명했다. 저런 미녀가 좌판을 여는데 날파리가 꼬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좌판을 다 정리한 여인이 서둘러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몇몇 사내들이 조용히 뒤쫓았다.
제론은 살짝 거리를 두고 그들을 따라갔다. 못 봤다면 모를까, 어쨌든 이런 일을 목격했으니 나중에라도 구해 줄
생각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여인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그러자 저 멀리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 광경에 뒤쫓던 사내들이 걸음을 멈추고 망설였다. 고작 4 명이 쫓아왔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10 명이 넘었다.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여인이 발걸음을 빨리했다. 뒤쫓던 사내들은 입맛을 다시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저런 동료들이 있으니 이렇게 당당히 장사를 한 것이었다.
한데 그 순간, 모두를 황당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갑자기 방향을 옆으로 꺾어 골목으로 쏙 들어가
버린 것이다.
뒤쫓다가 걸음을 멈춘 사내들이 사태를 얼른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그리고 골목을 확인했다. 이미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골목은 말도 못하게 복잡했다. 아마 몇 번만 꺾어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내들은 포기하고 돌아갔다.
제론은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던 사내들은 대체 누군지 궁금해졌다.
제론은 그들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도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파악했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어서 물었다.
“조금 전 그 여자, 누군가?”
사내들은 제론을 바라봤다. 척 보기에도 높은 귀족이 분명했기에 바로 눈을 깔았다.
“저희도 모릅니다.”
“한데 왜 손을 흔들었나?”
사내들이 당황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자칫 그 여자와 이 귀족 사이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다면 자신들이 몽땅
딸려 들어가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 그게 그냥 예쁜 여자가 손을 흔들어 주니 그만…….”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대단한 임기응변이로군. 아니면 미리 파악했던 건가?’
그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들었다. 제론은 여자가 들어간 골목으로 걸어갔다. 다른 사람이라면 못 찾겠지만
제론은 찾을 수 있었다. 마티는 이럴 때 정말로 유용했다.
즉시 태블릿을 꺼낸 제론은 마티를 조종해 근방의 골목을 몽땅 뒤졌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여기로군.”
제론은 마티 하나를 그녀 옆에 붙였다. 그리고 느긋하게 걸어갔다. 찾았으니 이제 남은 건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람은 바인 이후로 처음이었다.

제니는 골목을 돌고 돌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그녀가 구입한 창고였다. 아니, 창고로 쓰기 위해 마련한
집이었다.
원래는 가정집으로 쓰이던 건물이었는데, 제니가 구입해 창고로 개조했다.
창고로 들어간 제니는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오늘도 무사히 잘 끝났네.”
제니는 뿌듯한 얼굴로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폭리를 취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비싸게 받는 편이었다.
그걸 몽땅 팔았으니 이익이 얼마나 났겠는가.
쫘르륵!
돈주머니를 거꾸로 들어 안에 든 돈을 단번에 쏟아 버린 제니는 환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져 쌓이는 돈을 바라봤다.
하루 중 이때가 가장 즐거웠다.
“오늘은 얼마나 벌었으려나…….”
얼마 벌었는지는 사실 명확했다. 돈을 셀 필요도 없었다. 제니는 어떤 물건을 얼마나 가져갔고, 그것을 얼마에
팔았는지 모두 기억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합이 계산되었고, 그러면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하지만 그래도 매일 돈을 세고 또 셌다. 돈을 세는 자체가 정말로 즐거웠다.
돈을 모두 센 다음 그것을 구석에 있는 궤짝에 넣은 제니는 내일 장사할 준비를 시작했다.
물건은 잔뜩 있었다. 모두 좌판에서 팔기 적당한 물건들이었다.
장사 준비를 끝낸 제니는 일단 몸을 씻었다. 집 뒤에 우물이 있었는데, 거기서 물을 길어다 통에 담아 목욕을
했다. 물을 긷는 게 쉽지 않았지만 하루도 목욕을 거른 적이 없었다.
목욕 역시 그녀가 즐기는 소소한 행복 중 하나였다.
목욕을 마친 그녀는 궤짝 옆에 놓인 탁자에 앉았다. 그리고 커다란 종이를 펼쳤다.
그 안에는 앞으로의 계획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제니는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일부를 수정했다.
어찌나 세세하게 작성되어 있는지, 그 큰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써 있었는데도 향후 10 년 치 계획이 전부였다.
계획을 모두 점검한 제니는 탁자 밑에 쌓인 책 중 하나를 꺼냈다. 하루도 독서를 거른 적이 없었다. 자기 전에
꼭 한 페이지라도 읽고 잤다.
독서와 공부는 그녀를 지탱하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책을 읽은 그녀는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려면 너무 늦게 자면 안 된다.
순식간에 잠들었고 아침이 되자 바로 깨어났다. 언제나 그 시간에 일어나기에 이제는 저절로 눈이 떠졌다.
제니는 미리 준비한 물건을 들고 집을 나섰다. 이렇게 아침 일찍 움직이는 이유는 누구도 자신이 그곳에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나저나 슬슬 그 자리도 위험해졌네. 내일이나 모레쯤 옮겨야겠어.”
자리를 옮기는 건 쉽지 않았다. 사전에 철저한 조사가 필요했다. 장사가 잘될지, 또 숙소 겸 창고와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지형은 어떤지.
그 모든 걸 파악하고 움직이는 동선까지 계산해야만 했다. 그래야 장사하면서 벌어지는 불상사에서 잘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걸어가 자신이 항상 장사하던 자리에 도착한 제니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제니는 주위를 둘러봤다. 워낙 이른 시간이었기에 아무도 없었다. 아마 조금 더 있으면 하나둘 모여 순식간에
바글바글해질 것이다.
지금 자리를 잡지 않으면 저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곳은 제니가 계속 장사를 해 온 곳이었다. 즉, 제니를
보고 싶은 사람은 일단 그곳부터 찾아온다는 뜻이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은 장사에서 매우 중요했다. 제니는 그것을 알기에 자신의 미모를 이용했고, 또, 한 자리를
고수했다.
한데 그 자리에 자신보다 먼저 나온 사람이 서 있는 것이다. 게다가 분위기를 보니 장사를 할 사람 같지가 않았다.
‘저런 복장은 보통 귀족인데…….’
허리춤의 검을 보면 기사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상대하기가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제니는 조심스럽게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저…….”
제니의 자리에 서 있던 사람, 제론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제니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그 자리에 좌판을 깔지 않으실 거면 양보해 주실 수 있나요?”
제니의 물음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조건이 있는데, 들어 볼 텐가?”
제론의 말에 제니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 다짜고짜 조건이라니. 제니는 슬그머니 한 발 물러났다. 왠지 잘못
엮이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사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상황과 방법이 달라진 걸 고려하면 무수히 많은 경험이
있었다.
제니의 미모는 상당했다. 그 미모를 탐해 어떻게든 수작을 부려 보려던 귀족이나 기사가 꽤 많았다.
지금까지는 슬기롭게 대처해 왔지만 왠지 오늘은 힘들 것 같았다. 일단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만일 사람이 많았다면 이런 식으로 다가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건이나 들어 보고 도망쳐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제론의 말에 제니의 발이 순간 멈췄다. 머릿속에서는 도망치라고 말하는데, 제론의 말에 담긴 진한 돈 냄새가
그녀의 이성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뭐, 뭐죠?”
“팔고 싶은 물건이 좀 있는데, 그걸 대신 팔아 줬으면 해서. 이익금의 3 퍼센트를 수수료로 챙겨 주지.”
제니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어떤 물건인데요?”
“별거 아냐. 이런 것들이지.”
제론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팔뚝만 한 스틱 끝에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슬이 달린 물건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에 관심이 생긴 제니가 한 걸음 다가갔다. 마음속에 단단히 걸어 잠갔던 의심의 빗장 하나가
딸깍 풀렸다.
“그게 뭔가요?”
“이런 거지.”
제론은 스틱의 아랫부분을 잡고 빙글 회전시켰다.
딸깍.
뭔가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순간 구슬이 환하게 빛났다.
제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아, 아티팩트!”
이건 마법 아티팩트였다. 그것도 일반적인 마법등보다 훨씬 작고 가벼운 마법등이었다. 제니가 보기에 이건
마법등의 혁명이었다.
“휴대용 마법등이라니!”
이런 마법등은 여행 중에 정말로 편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공급만 확실하다면 수요는 무조건 따라붙게 되어
있었다.
“이, 이걸 얼마에 판매하실 건가요?”
“3 골드쯤?”
“예에? 그렇게 싸게 판단 말인가요?”
일반적인 마법등의 가격은 최소 100 골드였다. 아티팩트 중 가장 싸고 보편적인 것이 마법등이었는데도 그랬다.
한데 고작 3 골드라니. 이 정도면 거저나 다름없었다. 이 가격이라면 귀족이나 돈 많은 부자가 아니라도 어떻게든
구입이 가능했다.
‘만일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면……!’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이걸 전 대륙에 걸쳐 판매할 수만 있다면 떼돈을 벌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대륙
제일의 부자가 될 수도 있었다.
제니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걸 어떻게 팔지에 대해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제론이 말을 걸어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
“싫은가 보군. 그럼 어쩔 수 없지.”
그 말에 퍼뜩 상념에서 벗어난 제니가 다급히 소리쳤다.
“아뇨! 싫지 않아요! 무조건 할게요! 제가 꼭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제론이 빙긋 웃었다. 그가 파악한 제니라면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이걸 팔아 보도록.”
제론은 품에서 마법등 10 개를 꺼내 내밀었다. 제니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리고 기대감 어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뇨. 그런데…… 이게 전부인가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 다 팔아도 30 골드야.”
확실히 30 골드면 적은 돈이 아니었다. 제니가 지금 가져온 물품을 모두 팔아도 30 골드를 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면 뭔가가 아쉬웠다.
“그래도 더 있으면 좋을 텐데…….”
제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좌판을 깔았다. 어쨌든 이거라도 팔 수 있는 게 어딘가. 제론은 3 골드에 팔라고
했지만 그렇게 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건 최소 10 골드는 받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100 골드!’
10 골드에 10 개를 팔면 100 골드다. 그중 30 골드를 넘긴다 하더라도 무려 70 골드가 남는다. 제니는 환한
표정으로 서둘러 좌판을 깔았다.
자신이 가져온 물품도 당연히 진열했고, 마법등은 하나만 꺼내서 손에 들고 나머지는 잘 감춰 두었다.
한창 준비를 하는 그녀를 지켜보던 제론이 한 마디를 던졌다.
“딱 3 골드만 받아라.”
제니의 행동과 표정이 딱 굳었다.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제론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죠? 전 더 비싸게 팔 수 있어요! 좋아요! 그럼 제가 개당 4 골드 드릴게요! 아니, 5 골드
드릴게요!”
제론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가락 3 개를 폈다.
“3 골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안 돼.”
그렇게 말한 제론은 단호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제니는 멍하니 제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그럼 그렇지. 그렇게 쉬울 리가 있나.”
제니는 한숨과 함께 좌판을 마저 펼쳤다. 이내 장사 준비가 끝났다. 이제부터는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문득 제니는 주위를 둘러봤다. 슬슬 사람이 모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좌판이 깔렸고 좌판 위에 물건이 진열되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제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돌아간 것이 분명했다.
제니는 갈등하고 고민했다.
어차피 보지 않으니 그냥 10 골드에 팔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신용 문제였다.
의뢰인은 반드시 3 골드에 팔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본적인 신용을 저버리는 꼴이 된다.
장사하면서 신용을 모두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이번 일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우, 몰라!”
제니는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 때 한 사람이 다가왔다. 손님이었다.
“그 손에 든 건 뭔가?”
제니가 정신을 차리고 손님을 바라봤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라 물건을 사기 위해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눈앞에 선 손님은 나이가 살짝 있어 보이는 남자였다.
일단 손님의 얼굴이 낯익었다. 몇 번 이곳에 찾아온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제니는 즉시 얼굴에 생글생글 미소를
지었다.
“이거요? 아마 보시면 깜짝 놀라실 만한 물건이지요.”
제니는 그렇게 말하며 스틱 하단을 빙글 돌렸다. 직접 쓰면서 느끼는 거지만 간단하고 실용적이었다.
딸깍.
구슬에 빛이 들어왔다. 손님으로 온 노인은 깜짝 놀랐다. 설마 마법등일 줄은 몰랐다. 이런 좌판에서
아티팩트라니!
“대, 대체 그거 얼마인가?”
노인이 아는 마법등의 가격은 최하가 100 골드였다. 100 골드짜리 물건을 시장의 좌판에서 보게 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놀라셨죠? 하지만 아직 놀랄 일이 더 남아있답니다. 이 놀라운 아티팩트의 가격이 단돈 3 골드! 어때요? 믿기
어려우시죠?”
노인의 입이 쩍 벌어졌다. 3 골드라니. 그 가격에 이걸 살 수 있다면 거저나 다름없었다. 3 골드에 사서 더
비싸게 팔아도 팔린다.
“그거 내가 사겠네.”
제니가 빙긋 웃었다.
“탁월한 선택이에요.”
노인은 마법등을 받아 들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평소 같았으면 흥정도 하면서 제니를 더 오랫동안
훔쳐봤을 텐데, 오늘은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기다리다가 가격을 잘못 알았다고 제니가 돌려 달라고 할까 봐 최대한 서둘러 사라졌다.
손님이 오자마자 반사적으로 마법등을 3 골드에 판 제니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이왕 3 골드에 팔기 시작했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다 같은 손님인데 누구한테는 3 골드에 팔고
누구한테는 10 골드에 팔 수는 없지 않은가.
제니는 다른 마법등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켜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각도를 잘 맞춰서 가장 예쁘게
보일 수 있도록 얼굴의 음영을 조절했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것도 장사 기법 중 하나라고 철석같이 믿었기에 이런 일은 아주 능숙했다.
별다른 말을 외치지도 않았는데, 수많은 사람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물론 대부분 남자였다.

제론은 숙소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여자였다.


적어도 장사에 관한 수완은 정말로 대단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도덕성도 있었다.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능력을 보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안할 수 있을 정도였다.
“슬슬 상단의 규모를 키울 때가 되었는데, 적당하군.”
페쿠니아 상단을 이끄는 카프만의 능력은 제법 뛰어났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사실 믿을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중책을 맡겼다.
아직까지는 페쿠니아 상단이 그저 그렇지만 앞으로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이제부터 슬슬 상단을 통해 경제적
영향력을 만들어 갈 때가 되었다.
결국 제니는 마법등뿐 아니라 가지고 온 모든 물건을 싹 팔아 치웠다.
물건이 다 떨어졌는데도 사람들에 둘러싸여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그걸 본 제론의 표정이 굳었다.
모인 사람 중 절반 정도가 마법등 때문에 온 것이다. 그들은 아마 마법등의 출처를 밝히거나, 제니가 마법등을
더 내놓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제니를 영입할 시간이 되었다.
숙소에서 나간 제론은 즉시 제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소드 마스터가 된 제론의 속도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빨랐다. 게다가 어찌나 은밀하고 교묘하게 움직이는지 누구도 제론이 달리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제니를 찾는 건 아주 간단했다. 원래 위치도 알고 있을 뿐더러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었으니 그냥 척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제론은 그들 틈으로 스며 들어갔다. 지나갈 틈도 없이 빽빽했지만, 제론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몸에서 마나를 흘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벌렸다. 그리고 그 안으로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제론이 제니 옆에 서는 건 순식간이었다. 제론이 그곳에 설 때까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
제니는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론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직 사람들이 달려들지는 않았지만 곧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데 제론을
발견하니 왠지 마음이 턱 놓였다.
“여, 여기 있으면 위험해요.”
제니의 말에 제론이 빙긋 웃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보여 주면 그만이니까.
제론은 제니의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제니가 깜짝 놀라 코앞으로 다가온 제론의 얼굴을 바라봤다. 제론의 잘생긴
얼굴이 커다랗게 뜬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고 숨이 가빠졌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제론은 제니의 허리를 안은 채 위로 휙 뛰어올랐다. 아니, 그냥 뛰어오른 게 아니었다. 숫제 날았다.
그렇게 날아오른 제론은 제법 멀리 떨어진 건물의 지붕에 가볍게 내려섰다. 그리고 즉시 한 번 더 뛰었다.
건물이 촘촘히 세워진 곳으로 뛰었기에 아무도 제론이 어디까지 뛰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제론과 제니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남은 사람들은 망연한 얼굴로 두 사람이 사라진 건물 지붕만
바라봤다.

제니는 흥분이 가시지 않아 상기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지금 제니의 집에 있었다. 제니는
제론이 자신의 집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게 뭘 원하시는 거죠?”
한껏 긴장한 제니는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리니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사실 조금 전 거의 하늘을 날다시피 여기까지 와서 아직 정신이 없었다.
“목표가 어디까지지?”
“목표요?”
제니는 난데없는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목표에 대해
생각하니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100 만 골드요.”
“100 만 골드?”
“네. 100 만 골드를 버는 게 제 목표에요.”
제론은 내심 당황했다. 생각보다 목표가 너무 낮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100 만 골드는
일반인이 결코 함부로 손에 쥘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제니가 지금 하는 것처럼 돈을 벌면 평생 일해도 수만 골드를 손에 쥐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냉정하게 따져서 100 만 골드를 벌 수 있을 것 같나?”
제니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는 실망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눈을 빛내며 말했다.
“힘들겠죠. 하지만 어떻게든 해내고 말 거예요.”
제론은 그 자신감과 열정이 좋았다. 장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뒤로 제론은 소소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제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긴장이 풀어져 제법 많은 얘기를
했다.
제론은 제니와 대화하면서 그녀의 품성을 조금 더 알아봤다.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끌어들여도 괜찮다고
판단했다.
대화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다. 얘깃거리가 떨어진 건 아니었다, 그저 대화와 대화 사이에 가끔 찾아오는
간극이었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제론이 화제를 바꿨다.
“혹시 페쿠니아 상단이라고 들어 봤나?”
“아! 페쿠니아 상단! 당연히 알죠. 최근 두각을 나타내는 상단이니까요. 아마 그 상단 때문에 슈린 상단이 제법
애를 먹었을 걸요?”
제니도 대충 상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리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한다지만 상계의 동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돈을 벌기 어려워진다.
“알고 있으니 잘됐군. 거기서 일해 볼 생각 없나?”
“예?”
제니는 멍하니 제론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페쿠니아 상단에서 나오신 건가요?”
페쿠니아 상단의 주인인 카프만은 제니도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었다. 잠깐의 대화였지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제니의 눈빛에 도는 호의를 확인한 제론은 내심 감탄했다. 그녀의 반응을 토대로 카프만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카프만과 만나 봤나?”
“네. 그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게 전부지만요.”
“어떻게 생각하지?”
“뭘요?”
“카프만이 과연 페쿠니아 상단을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나?”
그 말에 제니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글쎄요. 쉬운 질문은 아니네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페쿠니아 상단은 절대 대륙 제일이
될 수는 없어요.”
“이유가 뭐지?”
“그야 상단주님이 너무 좋은 분이니까요.”
“그게 이유가 되나?”
“그럼요. 대륙 제일이 되려면 피를 밟고 서야 해요. 다들 그렇게 하거든요. 혼자만 안 하고 있으면 뒤쳐질
수밖에 없죠.”
제니가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눈을 빛냈다.
“이유는 또 있어요.”
제론은 흥미로운 눈으로 제니의 말을 들었다. 제니도 누군가 자신의 말을 열심히 들어 주니 더 흥이 났다.
“냉정히 판단하면 카프만 님의 능력이 대륙을 아우를 정도가 되지 않아요.”
“그럼 어떤 사람이 대륙을 아우를 수 있지?”
제니가 생긋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저쯤은 되어야겠죠?”
“고작 미모를 이용해 남자들의 주머니는 터는 상재로 말인가?”
제론의 말이 폐부를 찔렀을 텐데도 제니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살짝 미소까지 지으면서
손가락 하나를 흔들었다.
“에이, 그건 아니죠. 그건 훌륭한 장사 기법 중 하나일 뿐이에요. 좀 더 굴리는 돈 규모가 커지면 훨씬 대단한
일도 얼마든지 할 자신이 있다니까요?”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정말로 그럴 것 같았다. 사실 자신의 미모를 장사에 이용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때도 외모를 잘 이용하면 훨씬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고요.”
그 말에도 제론은 동의했다. 이미지라는 것은 정말로 중요했다. 초고대 문명의 지식을 많이 쌓았기에 당시의
생활상도 잘 알고 있었는데, 이미지에 대한 학문이 있을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했다.
“그나저나 페쿠니아 상단과는 무슨 관계죠? 상단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걸로 봐서 상단 직원은 아닌 것
같은데…….”
“실질적인 주인이지.”
제론은 숨김없이 대답해 주었다. 어차피 데리고 갈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말해 줘도 상관없었다. 만일 거절하면
그때 가서 얼마든지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테니까.
제니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비밀인 것 같은데 제게 말씀하신 걸 보니 거절해선 안 되는 내용이로군요.”
제론은 이번에도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영지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물론 그렇다고 제니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죽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안전장치를 만들 수 있었다.
“좋아요. 하겠어요.”
제니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즐기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페쿠니아 상단이라면 충분히
미래를 맡길 만했다.
“그래서 제가 할 일이 뭐죠? 상단을 통째로 주실 것 같지는 않고…….”
“상단을 주면 맡아 키울 자신은 있나?”
제니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제론은 의외라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항상 자신만만한 제니라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다.
“전 상단 주인 자리에는 안 맞아요. 그건 카프만 님이 훨씬 잘하실 거예요.”
제니는 제론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상단이 작을 때는 상관없는데, 커지면 사람을 한데 모으는 힘이 정말로 중요하거든요. 전 사람들을 맘껏 부려
먹는 건 잘 하지만 마음을 다독이는 건 자신 없어요. 미모로 홀리라면 모를까.”
너무나 당당하고 거침없이 자신의 미모를 자랑하는 제니의 말에 제론은 피식 웃었다. 역시 사람을 잘 골랐다. 이
정도라면 카프만을 도와 페쿠니아 상단을 크게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오늘부터 당장 시작하지. 이곳의 물건은 페쿠니아 상단이 인수하는 걸로 정리하고.”
제니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일단 맡은 이상 대충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조건 대륙 제일을 목표로 달릴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대륙 제일이 될지도 모르겠어.’
제론은 내심 기대가 되었다. 어쨌든 결정한 이상 여기서 시간을 끌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가지.”
“아, 잠깐만요!”
제론이 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제니를 쳐다봤다. 제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법등이요. 앞으로 페쿠니아 상단이 취급하는 건가요?”
“왜? 하고 싶나?”
“물론이죠! 그것만 꾸준히 팔 수 있다면 단숨에 왕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이 될 수 있을 텐데요.”
“그 아티팩트에는 약점이 있다.”
“약점이요?”
제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약점이 있는 걸 모르고 팔았다. 만일 약점이 있다면 팔기 전에 그 점을
손님에게 알렸어야만 했다. 한데 그러지 못했으니 고스란히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래서 3 골드에 팔라고 한 거다.”
“100 골드짜리를 3 골드에 팔아야 할 정도로 큰 약점인가요?”
“물론. 그건 사용 시간에 제한이 있거든.”
제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본래의 마법등도 사용 시간에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다시 충전이 가능했다.
아티팩트에 쓴 마나 스톤에 마나가 채워지면 다시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마나 스톤의 마나는 자동으로 채워진다. 오직 시간이 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마법등은 반영구적이었다. 충격에 의해 깨지거나 마나 스톤의 수명이 다한 경우가
아니면 계속 쓸 수 있었다.
물론 아티팩트에 들어간 마법진이 손상되어도 안 된다. 하지만 마법진은 대부분 복구가 가능했다.
“수명이 얼마나 되나요?”
“수명은 제법 길다. 다만 사용 시간에 제한이 있을 뿐이지.”
제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그거 아닌가.
“마법등의 사용 시간은 1200 시간이다. 그걸 어떻게 나눠 쓰든 상관없다.”
“1200 시간이면…… 50 일이군요.”
“24 시간 내내 등을 쓴다면 그렇겠지.”
그제야 제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등을 아껴 쓰기만 하면 훨씬 오래 쓸 수 있었다. 보통 밤에만 등을 켜고 잠을
잘 때는 끄니, 실제로는 하루에 평균 6 시간 정도를 쓸 것이다.
그 정도면 200 일을 쓸 수 있으니 그래도 3 골드 가격은 하는 셈이었다.
100 골드짜리 마법등을 구입한다 하더라도 파손되기 쉬운 마법등의 특성상 그리 오래 쓰지는 못한다. 그러니 대충
가격이 맞을 것이다.
“대신 우리 마법등은 충전이 가능하다. 충전가격은 50 실버지.”
머릿속으로 정신없이 계산을 하던 제니의 귓가로 제론의 말이 들려왔다. 제니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50 실버라고요?”
즉, 3 골드짜리 마법등을 50 실버에 살 수 있다는 것과 같다. 만일 그렇다면 굳이 100 골드짜리 마법등을 살
필요가 없어진다.
“그게 정말인가요?”
제론은 말없이 품에서 둥근 홈이 파인 상자를 꺼냈다. 홈의 모양과 크기가 마법등의 구슬과 딱 맞아떨어졌다.
“충전기다. 당연히 마나 스톤이 들어가 있지.”
제니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그럼 마법등에는 마나 스톤이 안 들어간 건가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건 마법의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마나 스톤 없이 아티팩트를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자, 이제 이걸로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을 것 같으냐?”
제니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왕국 제일 상단은 우리 거예요. 물론 디아만트 상단은 예외로 치고요.”
디아만트 상단은 레늄 왕국의 상단이지만, 사실 대륙의 상단이라고 봐야 옳다. 그들은 대륙 전역에서 폭넓게
활동을 하니까.
실제로 래늄 왕국의 상단 본부가 사라져 버려도 비록 손해는 입을지언정 상단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크고 튼튼한 상단이었다.
“좋아. 거기에 포션까지 더하면?”
“예? 포션도 팔게요? 하지만 그건…….”
제니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포션은 슈린 상단의 주력 품목이었다. 그들은 포션 제조에 관한 수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슈린 상단의 뒤에는 슈린 공작가가 있었다. 현 레늄 왕국 최고의 실세 가문인 슈린 공작가 말이다.
그들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었다.
“그들은 굳이 걱정할 필요 없잖아? 지금 당장은.”
“지금 당장이야 그렇죠.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제론이 워낙 단호히 말했는지라 제니도 결국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포션까지 우리가 장악할 수 있다면 대륙 10 대 상단이 되는 것도 가능해요.”
“거기에 식량까지 더하면?”
제니는 결국 질려 버렸다. 대체 뭐가 이리도 많단 말인가. 어차피 말할 거 한꺼번에 해 주면 좀 좋은가.
“알았어요! 대륙 제일이 될게요! 이제 됐나요?”
그제야 제론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제론은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페쿠니아 상단은 나중에
에어스트 백작령이 도약했을 때, 하늘로 날아오르게 해 줄 날개가 될 것이다.
“좋아. 이제 됐으니 가자.”
제론의 말에 제니가 먼저 일어나 성큼성큼 집에서 나갔다. 그리고 제론은 주위를 슥 둘러보고, 안에 있던 모든
물건을 아공간에 싹 쓸어 담았다.
“나중에 놀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은 제론은 집에서 나갔다. 이제부터 페쿠니아 상단은 진짜 도약을 시작할 것이다. 대륙
제일을 향해서.

제니가 페쿠니아 상단에 합류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사실 제니는 카프만도 영입하려고 눈여겨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딱 어울리는 자리까지 준비해 둔 상태였다.
카프만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최고였다. 또한 사람을 끌어들여 포용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제니가 단숨에 상단에 녹아드는 것을 확인한 제론은 카프만의 능력에 크게 만족했다. 또, 그런 카프만을 순식간에
발굴해 낸 바인에 대해서도 감탄했다.
어쨌든 제니는 성공적으로 페쿠니아 상단에 합류했고, 그 즉시 제론이 내놓은 마법등 판매를 시작했다.
기존의 마법등과 달리 스틱형 마법등은 그야말로 수도를 강타했다. 그리고 수도를 넘어 왕국 전역을 강타했다.
휴대가 간편하다는 점과 싼 가격이 주효했다. 게다가 기존 마법등에 비해 상당히 튼튼했다.
사실 마법등은 아티팩트의 판매보다는 충전으로 돈을 버는 구조였다. 마법등을 제조하는 데에는 돈이 들지만,
충전하는 데에는 돈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물론 충전기를 만드는 데에야 돈이 필요하지만 충전기는 말 그대로 무한히 쓸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스틱형 마법등의 쓰임새는 상당히 다양했다. 일단 휴대가 간편하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우선적으로 지급이 되었다.
야간 순찰 시 정말로 유용했다.
그렇게 마법등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마법등 충전소가 곳곳에 생겨났다. 당연히 페쿠니아
상단에서 직영하는 곳이었다.
페쿠니아 상단은 그것 하나만으로 왕국에서 손꼽히는 상단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진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진짜 시작은 페쿠니아 상단이 포션을 판매하면서부터였다. 지금까지의
포션보다 훨씬 성능이 뛰어났기에 나오기만 하면 경쟁이 불가능할 것이다.
거기에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남아도는 식량까지 판매하게 되면 페쿠니아 상단은 감히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대상단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그 모든 계획을 카프만과 상의한 후, 조용히 영지로 돌아갔다. 물론 그때까지 구입한 물품을 모두
아공간에 담고서.

Chapter 6 유적의 기간트

물자 부족이라는 영지의 문제를 단숨에 해결한 제론은 곧장 유적으로 향했다. 당분간은 영지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사람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건 항구가 완성되면 금방 해결이 가능했다.
이젠 내전이 어떻게 되나 지켜보면서 내실을 다지는 시간이 되었다.
유적 로비에 서서 잠깐 과거를 회상하던 제론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스쳤다.
13 층을 클리어하는 동안 단 하나도 만만한 곳이 없었다. 매 층이 새롭고 어려웠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은 힘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얻은 힘 중 가장 굉장한 것은 역시 테오스였다. 그리고 다음이 검술이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 다음에야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손바닥의 아공간에서 새로 얻은 은빛 검을 뽑았다.
슈아악!
은가루가 흩날리며 검이 나타났다. 검과 함께 나타난 은가루는 마나의 결정이었다. 그것들은 제론의 몸으로
순식간에 흡수되었다.
제론의 몸이 단숨에 최상의 상태로 변했다. 은가루의 효용이었다. 마치 포션으로 샤워라도 한 것 같았다. 아니,
포션의 바다에 몸을 푹 담갔다가 꺼낸 듯했다.
“굉장하군.”
어떻게 이런 검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검을 뽑을 때 흩어진 은가루는 검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것도 아공간
안에서 말이다.
검을 아공간에 보관하는 동안 마나의 결정을 생성하고, 검을 뽑을 때마다 그것을 흩날려 주인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검을 들 때마다 마나 샤워를 하는 셈이었다.
이는 소드 마스터에 이른 제론에게도 충분히 대단한 효과를 준다. 다음 경지로 나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역시 유적의 선물은 대단했다. 그 성능이나 효과가 상상을 초월하지 않는가.
제론은 검을 몇 번 휘둘러 본 뒤, 유적 14 층으로 이동했다. 드디어 새로운 층에 도전하는 것이다.
14 층에 내려온 제론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환경을 보면 대충이나마 어떤 식으로 훈련이 진행될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공간이었다. 마치 검투장 같았다.
“상대와 싸우는 건가?”
제론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렬한 섬광과 함께 상대가 나타났다.
빛이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적을 보면서 제론은 눈을 크게 떴다.
“기간트?”
이번 상태는 기간트였다. 물론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였다. 새하얀 색의 기간트였는데, 상당히
덩치가 컸다. 마치 우락부락한 근육이 덕지덕지 붙은 것 같았다. 물론 기간트이니 실제로 근육일 리는 없지만
말이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테오스를 소환했다. 테오스의 장점이자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소환 시간이 찰나에
불과하고 소환과 동시에 탑승한다는 점이었다.
테오스를 소환한 제론은 즉시 검을 뽑았다.
슈우우욱!
검을 뽑은 제론은 깜짝 놀랐다. 테오스의 검이 바뀐 것이다. 테오스는 은빛 검을 들고 있었다. 제론이 13 층을
클리어하고 얻은 검과 똑같이 생긴 검이었다.
제론은 확신할 수 있었다. 검의 재질도 능력도 똑같다는 것을 말이다. 이 검은 제론의 검을 그대로 크기만 키워
놓은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몰랐지만 잘된 일이었다. 강력한 무기를 얻었으니 말이다.
테오스가 곧장 하얀 기간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꽈앙!
하얀 기간트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동작이 상당히 민첩했다. 테오스의 일격을 간단히 피한 뒤 어느새 꺼낸 거대한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후우우웅!
꽈앙!
테오스의 검이 그 도끼를 막아 냈다. 힘이 어찌나 강한지 테오스가 뒤로 쭉 밀려났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힘이 강할 거라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했다. 한번 그 힘을 가늠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또한 테오스의 힘도 점검하고 말이다.
“예상보다 훨씬 힘이 강하군. 역시 초고대 문명의 기간트야.”
힘뿐 아니라 속도도 상당했다. 물론 테오스에 비하면 느렸다. 문제는 대체 누가 저 기간트를 조종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남아 있을 리는 없다. 초고대 문명은 수천 년 전의 시설이니까. 그렇다면 뭔가 다른 존재라는 건데, 대체
그게 무엇일지 짐작이 안 갔다.
어쨌든 지금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제론은 즉시 몸을 날렸다.
테오스가 눈부신 속도로 화려하게 움직였다. 마치 검이 수십 개로 늘어난 것처럼 쏟아져 나갔다.
쩌저저저정!
꽝! 꽝! 꽝!
하얀 기간트의 도끼가 절반 정도는 막아 냈지만 나머지는 속절없이 몸에 얻어맞았다.
테오스의 검이 몸에 꽂힐 때마다 장갑이 푹푹 찌그러졌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테오스는 더욱 빠르게 움직였고, 검속도 훨씬 빨라졌다.
꽈과과과과광!
하얀 기간트가 볼품없이 찌그러졌다. 그리고 기동이 중지되었다. 테오스가 이긴 것이다.
솔직히 제론은 의아했다. 이렇게 간단할 리가 없었다. 각 층에서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건 너무 쉬웠다.
기본적으로 테오스의 성능이 월등했다. 하얀 기간트가 10 기는 동시에 덤벼야 뭘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거로도 모자랐다.
테오스와 하얀 기간트의 격차는 그 정도로 심했다.
슈아아악!
강렬한 빛과 함께 하얀 기간트가 사라졌다. 보아하니 아공간에 수납된 것 같았다.
제론은 테오스에 탄 채로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유적은 그때까지 정적에 휩싸였다.
제론은 테오스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상황을 보면 클리어 조건은 명백했다. 그 하얀 기간트를 이기면 되는 것이다. 한데 이겼는데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즉, 클리어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더 이상 여기서 기다려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로비로
올라가는 게 나았다.
로비로 올라온 제론은 한가운데에 앉아 조용히 마나 호흡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마나 호흡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어떤 자세에서도 가능했고, 심지어는 잠자면서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마나 호흡을 하며 딴생각을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론은 하얀 기간트를 떠올렸다. 대체 그걸 어떻게 이겨야 14 층을 클리어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테오스가 너무 강력해서 일대일로는 상대가 안 된다.
“가만, 테오스로는 안 돼?”
제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제야 14 층 수련의 클리어 조건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왜 13 층 수련이 그런 식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은 14 층 수련을 위한 것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검을 뽑았다.
슈우우욱!
검이 나오며 은가루 몇 개가 흩날렸다. 검을 수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은가루가 몇 개 안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제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피로가 말끔히 사라졌고, 몸에 활력이 샘솟았다.
“정말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이 걸려 있을까? 아니, 그게 가능하긴 한 거야?”
제론은 그러면서도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자신은 소드 마스터였다. 그것도 초고대 문명이 인정한 진짜 소드
마스터 말이다.
“후욱.”
제론은 숨을 훅 내쉬고는 다시 14 층으로 이동했다. 일단 시도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14 층에 도착한 제론은 눈을 빛내며 검을 앞으로 겨눴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눈부신 빛이 솟아났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거대한 기간트가 나타났다. 불과 조금 전 싸웠던 그
하얀 기간트였다.
“이름이라도 알았으면 좋겠군.”
근육이 잔뜩 붙은 것 같은 새하얀 몸체는 상당히 멋졌다. 뚱뚱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강력하다는 느낌만
전해지는 모습이었다.
―이스히스.
제론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유적 시스템이 이렇게 이름을 알려 줄 줄은 몰랐다.
“이스히스라…….”
제법 괜찮은 이름 아닌가. 그리고 딱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했다.
제론은 검을 겨누며 눈을 빛냈다. 상대는 강하고 빨랐다. 기다리는 건 바보짓이었다. 그 생각과 함께 즉시 몸을
날렸다.
쉬익!
바람을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던 제론이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까앙!
손이 저릿저릿했다. 역시 그냥 검만 휘둘러서는 그 어떤 타격도 입힐 수 없었다.
막 검을 회수하며 다시 공격을 하려는데, 순간 눈앞이 어두컴컴해졌다. 거대한 발이 자신을 짓밟기 직전이라는 걸
알아냄과 동시에 몸을 날리며 굴렀다.
쿵!
제론은 균형을 잡으며 빠르게 움직였다. 역시 예상대로 이스히스의 발이 또 내리꽂혔다.
쿠웅!
제론은 더욱 빠르게 이스히스에게서 멀어졌다. 이스히스는 그런 제론을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슈와악!
공기를 찢으며 떨어지는 도끼의 날이 섬뜩하게 빛났다. 저걸 맞았다간 살점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꽝!
도끼가 바닥을 찍었다. 제론이 옆으로 이동하며 피한 것이다. 하지만 이스히스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스히스가 앞으로 걸으며 도끼를 뽑았다. 그의 발이 제론을 향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갔다. 몸의 중심을
이동시키며 발로 바닥을 쓰는 어려운 동작이었다.
기간트를 타고 저런 동작을 할 수 있는 라이더는 손에 꼽을 것이다. 하지만 이스히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해냈다.
후웅!
제론이 몸을 옆으로 구르며 발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도끼가 또 떨어졌다.
꽝!
정신이 없었다. 도끼와 발이 번갈아 날아오는데, 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끔 손이 올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힘겹게 움직여야만 했다.
일단 놓친 승기는 다시 찾기가 어려웠다. 제론은 그렇게 기력이 바닥날 때까지 피하고 또 피했다.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방법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쩡!
결국 바닥을 쓸 듯 휘두른 도끼에 맞고 말았다. 제론은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쿵! 쿵! 쿵쿵! 쿵쿵쿵!
바닥에 통통 튀기며 날아간 제론은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젠장, 저걸 어떻게 이겨?’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그냥 보통 기간트라면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제론이 다시 깨어난 곳은 로비였다. 정신을 잃으면 로비로 이동하게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일어난 제론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검을 한 번
뽑으면 다시 최상의 상태로 회복될 테니까.
“그래도 그 무식한 도끼에 맞았는데 죽지 않고 정신만 잃은 게 어디야.”
제론은 어렴풋이 유적의 힘이 개입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끼에 맞은 순간 무언가가 그 힘을 사방으로
분산시켰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론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제론은 검을 뽑았다.
슈우우욱!
검은 어느새 아공간에 들어가 있었다. 수많은 은가루가 흩날리다가 제론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순식간에 통증이
사라졌다.
“정말 굉장하군.”
정말로 신기했다. 통증까지 사라진 걸 보면 내상도 나았다는 뜻이었다. 이는 생명을 하나 더 얻은 거나
다름없었다.
몸이 가뿐해지니 투기가 용솟음쳤다. 제론은 즉시 14 층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이스히스와 싸우고 또 싸웠다.

☆ ☆ ☆

내전은 점점 심해졌다. 수많은 영지가 피폐해졌다. 또 어마어마한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난민이 발생했다.
난민이 향하는 곳은 뻔했다. 수도로 가거나 중립 세력이 모인 영지로 갔다.
하지만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는 난민은 아무도 없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려면 전쟁이 한창인 지역을 몇
곳이나 거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에어스트 백작령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까운 일이었다. 그 정도 난민이라면 고질적인 인구 부족을 단숨에
해결하고도 남을 것이다.
현재 에어스트 백작령은 특이한 상황이었다. 돈은 남아돌고 공사도 잔뜩 벌이고 있는데, 그걸 진행할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다.
농지는 어마어마하게 넓은데 농사를 지을 사람이 모자라 땅을 놀리고 있었다.
기간트까지 동원해 암석 지대를 정리하는 중인데, 그렇게 해서 땅을 확보해 봐야 그곳에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었다.
어떤 문제든 척척 해결하는 제론도 인구 문제는 단번에 해결하지 못했다.
수도의 빈민을 이주시키는 일도 당장 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내전이 끝나야 뭘 해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항구를 만들고 배를 제작해서 바다를 통해 사람을 실어 나르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인구 빼고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다들 열심히 하는지라 영지가 제법 잘 굴러갔다.
제론은 영지 일에는 거의 신경을 끊고 유적에서의 수련에 매달렸다.
당연히 영지의 모든 일은 바이스의 손에서 이뤄졌다.

바이스는 오늘도 산처럼 쌓인 서류를 처리했다. 워낙 벌인 일이 많았기에 결정이 필요한 사안이 매일매일 새로
생겨났다.
바이스는 그 모든 사안을 알아서 처리했다. 영주에게까지 올라가야 할 서류는 거의 없었다. 덕분에 제론은 하루에
몇 장만 처리하면 끝이었다.
서류 결재를 끝내고 잠시 쉬고 있을 때, 시종이 다급히 바이스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바이스는 책상 구석에
있는 보석을 길게 쓰다듬었다.
덜컹.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책상 구석에 박힌 보석들은 마법의 시동 장치였다. 방금 건드린 보석은 문을 열고
닫는 것이었고, 그 옆은 창문을 여닫는 것이었다.
조명을 켜고 끄는 것도 있었고, 시종을 호출하는 것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마법에 의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
마력은 성 지하 어딘가에 있는 에너지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에어스트 백작성은 그런 식으로 편의를 생각해 만든 시스템이 곳곳에 깔려 있었다.
어쨌든 바이스는 집무실로 들어서는 시종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통신?”
바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 통신 시스템은 자신의 집무실에도 깔려 있었다. 한데 왜 굳이 시종을 보냈단
말인가.
“통신이야 나한테도…….”
막 뭐라고 하려던 바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서류를 처리할 때 방해받지 않으려고 통신 시스템을 강제로 끊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바이스는 머쓱한 표정으로 통신 시스템을 다시 켰다. 그러자 통신을 연결하는 보석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바이스는 시종에게 손을 내저었다.
“알았으니 이만 돌아가 봐라.”
시종이 공손히 허리를 숙인 다음 밖으로 나갔다.
바이스는 보석을 쓰다듬어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는 통신을 열었다.
그러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레피 후작가로부터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벨루스 백작가로부터도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바이스는 깜짝 놀랐다. 두 가문이 대체 왜 이렇게 갑자기 연락을 한단 말인가.
“연결해라.”
―말레피 후작가부터 연결하겠습니다.
잠깐 시간이 지나자 보석이 느리게 점멸했다. 통신이 먼 곳과 연결되었다는 신호였다.
―말레피 후작가입니다. 연결된 분은 누구십니까?
“바이스 폰 말레피다.”
―아, 공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후작님께서 옆에 계십니다.
바이스는 후작님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설마 아버지가 직접 연락을 한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조금 전
말한 사람은 통신 연결을 위해 상주하는 마법사가 분명했다.
―나다. 잘 지냈느냐?
바이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당황스럽기도 했고, 아버지가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걸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기에 놀랍기도 했다.
“아, 저, 전 잘 지냈습니다. 아버님께서도 별고 없으신지요.”
―그래. 네가 고생이 많구나. 그곳에서 뼈를 묻겠다던 결심은 여전히 변함없느냐?
바이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어린 진한 아쉬움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금세 다잡았다. 말레피
후작가보다 에어스트 백작령이 훨씬 발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이미 제론에게 충성하기로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맹세했다. 그 마음이 변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시기에 굳이 가문으로 돌아가 후계자 싸움에 뛰어드느니 여기서 영지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는 게 훨씬
좋았다.
“예. 전 여기를 떠나지 않을 겁니다.”
확고한 어조가 담긴 말이었다.
―알겠다. 네 결정을 존중하마.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길지 않았다. 말레피 후작이 용건을 꺼냈다.
―포로스가 더 필요하다.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직은 포로스에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조만간 떨어질 것이다. 이제 슬슬 부서진 마나 코어에서 나오는 진흙이
바닥나고 있었다.
하지만 내전이 한창이니 다시 많은 양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내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더구나.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잘했다.
말레피 후작가도 중립 세력에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벨루스 백작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일로 상의할 것이 좀 있다.
“말씀하십시오.”
―우리 영지에 난민이 너무 많이 모여들었다. 이들을 처리할 방법이 없겠느냐?
바이스의 눈에 고민이 어렸다.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말레피 후작령의 모든 난민을 다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가.
“난민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여긴 사람이 너무 모자랍니다. 한데 현실적인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야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한번 같이 고민해 보자꾸나.
사실 독하게 마음먹으면 난민을 추방할 수도 있었다. 명분이야 충분했다. 영지에 난민이 쌓이면 이런저런 문제가
불거지게 된다. 치안도 나빠진다.
그걸 빌미로 다 내쫓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난민은 중립 세력으로 들어온 난민이었다. 이들을 내쫓으면 다른 중립
세력의 영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이었다.
결국 그들은 산적이 될 것이다. 그러면 중립 세력 영지의 치안이 극도로 약화될 수밖에 없다.
중립 세력은 나중을 위해 힘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난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야만 한다.
말레피 후작은 그걸 해결하는 사람이 자신이길 원했다. 향후 정국을 주도할 수 있도록 말이다.
“고민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부탁한다.
통신이 끊어졌다. 바이스는 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부탁한다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아버지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싶었다.
바이스가 생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또 보석이 점멸했다. 확인하지 않아도 어디서 온 통신인지 알 수 있었다.
벨루스 백작가였다.
그리고 무슨 내용인지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아마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통신을 연결한 바이스는 벨루스 백작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예상은 완벽히 적중했다. 벨루스 백작도 난민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고자 연락을 했다.
바이스는 이번에도 고민해 보겠다고 말한 다음 통신을 끊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딱 하나였다.
“영주님이 필요해.”
이 모든 일을 해결할 만한 사람은 제론뿐이었다. 과연 해결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제론은 피로가 쌓일 대로 쌓여 축 늘어진 채로 지하 수련장에서 나왔다. 오늘도 이스히스를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비교적 오랫동안 접전을 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애쓰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련장에서 나와 곧장 침실로 이동한 제론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눈을 감으면 바로 잠들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막 눈을 감으려는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누군가 문을 격하게 두드렸다.
쾅쾅쾅쾅쾅!
“영주님! 안에 계십니까! 영주님!”
바이스의 목소리였다. 제론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 근처에 있던 보석을 손가락으로 톡 두드렸다.
덜컹.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바이스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영주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론은 그런 바이스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쳐다봤다. 침실까지 찾아와 보고를 하겠다는 걸 보면 급한 일인
모양이었다. 한데 지금까지의 바이스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묘했다.
“무슨 일인데?”
“조금 전 말레피 후작가와 벨루스 백작가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론은 눈을 빛냈다. 바이스와 세나의 가문 아닌가. 그들이 괜한 일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이스는 그들과 연락했던 내용을 그대로 보고했다. 보고를 모두 들은 제론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건 기회였다. 하지만 현실적인 방법이 없었다. 그 많은 난민을 어떻게 여기까지 데려온단 말인가.
가만히 생각하던 제론은 대체 그 두 사람이 왜 그 얘기를 여기에 했는지 알아차렸다.
‘결국 돈을 달라는 얘기였군.’
난민을 해결하려면 돈이 무한정 들어간다. 하지만 그렇게 돈을 쏟아서 버텨 낼 수만 있다면 그 많은 사람을
인구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많은 인구는 곧 힘이 된다. 경제력은 물론이고 군사력을 키우려고 해도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돈을 지원하면 에어스트 백작령이 얻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공짜로 돈을 달라고 하는 건 아니었다. 막대한 돈을 빌리는 셈이 될 것이다. 당연히 이자도 낼 것이다.
하지만 높은 이자를 받아 낼 수는 없었다. 어쨌든 난민을 위하는 일이었다, 거기에 이득을 결부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무조건 그들을 데려와야만 한다. 제론은 과연 어떤 방법이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잘 이용하면
단숨에 도약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난민이 몇 명이나 되지?”
“일단 우리가 데려올 수 있는 수는 각각 1 만 명 정도입니다.”
“그럼 총 2 만 명이로군.”
제론은 턱을 쓰다듬었다. 2 만 명은 어마어마한 수였다. 그들을 먹여 살리는 일만으로도 막대한 돈이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일단 데려오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노동력으로 변한다. 아직 에어스트 백작령은 건물도 제대로 다 짓지
못했다.
그들을 건설에만 투입해도 엄청난 속도로 건물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중립 지역에서 에어스트 백작령까지 이동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동 속도는
느려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이동 시간만 1 년이 넘을 수도 있었다.
배를 이용하면 좋겠지만, 중립 지역에는 바다에 닿은 곳이 없었다.
이래저래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제론은 포기하지 않았다. 무려 2 만 명이나 된다. 그리고 방법을 하나만
만들어 놓으면 다른 영지의 난민까지 쓸어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직접 이동 외에는 방법이 없군.”
아무리 생각해도 기발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남는 건 직접 이동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난민은 보통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법이다. 그러니 그들이 직접 걸어서 이동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구나 전장을 지나가야 한다.
“가능하겠습니까?”
바이스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제론은 의외로 자신만만했다.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제론은 바이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서 줄 테니까 일단 돌아가 있어. 혹시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얘기하고.”
“알겠습니다.”
“누가 좋은 생각을 해낼지도 모르니까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아이디어를 구해 보는 것도 좋겠군.”
“그것도 처리하겠습니다.”
바이스는 그렇게 대답하고 물러갔다.
제론은 침대에 누워 일단 잠을 청했다. 피곤할 때는 생각도 잘 안 나는 법이다. 이럴 때는 일단 푹 잔 다음 맑은
정신으로 다시 고민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빠른 방법이었다.
제론은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Chapter 7 난민 수송 작전

“예? 영주님께서 직접 지휘하시겠다고요?”


바이스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위험한 일에 어찌 영주가 나선단 말인가. 영주는 영지에 가만히 있어 주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웠다.
“당분간 영지전이 벌어질 일도 없잖아.”
“그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뭐가 문젠데?”
“너무 위험합니다!”
난민을 여기까지 대체 어떻게 끌고 오겠다는 말인가. 설마 그 많은 난민을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서 데려오는 건
아닐 테고 말이다.
“너무 오래 영지를 비우시게 됩니다. 영지 운영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다들 잘하잖아. 솔직히 내가 영지 운영에 대해 지금까지 신경 쓴 게 있었나?”
“그래도 영주님께서 계시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바이스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성공할지 실패할지조차 알 수 없는 계획이었다. 그런 일에 영주를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중간에 내전 중인 병력이라도 만나면 교전할 가능성도 있었다. 너무 위험했다.
“내가 가야 성공할 수 있어.”
바이스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제론을 바라봤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한 다음 말을 해도 늦지 않는다.
“기간트를 이용해서 거대한 마차를 끌고 이동할 생각이야.”
바이스가 헛숨을 들이켰다. 확실히 기간트를 이용해 마차를 끌게 하면 시간을 대폭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기간트는 보폭도 넓다. 또한 지치지도 않는다.
제대로 이용할 수만 있다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난민을 나를 수 있을 것이다.
“교대조를 만들어서 24 시간 쉬지 않고 이동만 할 계획이야. 목표는 한 달. 한 달 안에 거기서 여기까지 난민을
옮긴다.”
“그렇게 빨리 이동이 가능하겠습니까?”
“어차피 힘은 기간트가 쓰는데 당연히 가능하지.”
제론은 자신만만했다. 아마 기간트 라이더도 계속 걷다 보면 실력이 늘어날 것이다.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거지만, 그걸 통해 움직임의 군더더기를 없앨 수 있다.
“2 만 명의 난민을 날라야 하니, 기간트 몇 기를 동원해야 할지부터 계산해야겠군.”
“마차의 크기가 먼저 결정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차는 강철로 만든다. 영지의 대장장이를 몽땅 동원해서 만들어. 기간트를 동원하면 좀 더 빠르게 제작이
가능할 거다.”
제론은 바이스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마차 한 대에 난민 400 명을 태운다. 굉장히 커야 할 거야.”
400 명을 태우려면 어마어마하게 커야 한다. 그런 마차를 만들려면 강철도 많이 필요했다.
“철은 내가 준비해 주지. 보관해 둔 게 있으니까. 아마 모자랄 일은 없을 거야.”
제론은 계획을 점검하며 하나하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갔다.
일단 쉬지 않고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음식을 조리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마른 음식을 잔뜩 준비하기로 했다.
주로 육포였다.
화장실은 마차 구석에 구멍을 뚫어 따로 만들면 된다. 씻는 게 문제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달만 버티면 된다.
사실 한 달을 끊임없이 이동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적당한 기간을 정해서 몇 시간 쉬어 주지 않으면 버티지
못한다.
하지만 그걸 최소화하면 된다. 일단 하루라도 빨리 에어스트 백작령에 도착하는 게 좋다. 위생은 그 뒤에 챙기면
된다. 혹시 병에 걸렸어도 그때 고쳐 주면 된다.
한 달은 길어 보이지만 상당히 짧은 시간이었다.
계획이 정리되자, 바이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준비에 들어갔다. 제론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제론이 유적의 창고에서 가져다 준 철괴를 이용해 마차가 제작되었다. 처음 계획대로 4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마차였는데, 워낙 크기가 크다보니 바퀴를 좌우 각각 30 개씩 달았다.
바퀴의 크기를 작게 해서 안정성을 높였고, 안전을 위해 이중 구조로 겹쳐 벽을 만들었다.
바이스는 철 마차 제작을 감독하면서도 찜찜했다. 일단 마차를 끌고 중립 지역까지 가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해결할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영지의 모든 대장장이가 나서고, 기간트까지 동원하니 철 마차 제작은 순조롭고 빠르게 이뤄졌다.
2 만 명을 실어 나르려면 400 명을 태울 수 있는 마차 50 대가 필요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마차는
모두 60 대를 만들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이걸 제대로 옮길 수만 있다면 말이다.
바이스가 그렇게 마차를 제작하는 동안 카이트는 라이더를 선발했다.
계속 교대하면서 마차를 끌려면 최소한 150 명의 라이더가 필요했다.
마차를 60 대 제작했으니 그것까지 고려하면 180 명이 필요했다. 라이더야 얼마든지 있었다. 한데 어떤 수준의
라이더를 뽑느냐가 문제였다.
분쟁 지역을 통과해야 하니 실력이 뛰어난 라이더를 보내야 하나, 아니면 훈련을 겸해서 그보다 좀 급이 낮은
라이더를 보낼지도 결정해야 한다.
카이트는 사실 라이트닝 기사단 전원을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제론이 대번에 결정을 뒤집었다.
영지를 지키려면 라이트닝 기사단이 필요했다. 그들이 떠나면 네이드 후작령이 혹시라도 다시 영지전을 벌이려 할
때 큰 곤욕을 치를 수 있었다.
물론 제론이 당장 달려오면 되지만 말이다.
어쨌든 제론은 카이트에게 실력이 좀 처지는, 즉, 경험이 부족한 라이더를 뽑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카이트도 찜찜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영주의 명령이니 지켜야만 했다.
그렇게 200 명의 라이더를 뽑았다. 견습 라이더에 더 가까웠다. 아마 그들은 이번 여정이 끝나면 제법 괜찮은
실력을 갖게 될 것이다.
중간에 혹시 전투라도 겪으면 훨씬 높은 실력을 갖게 될 것이다. 실전보다 훌륭한 연습은 없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준비가 차곡차곡 진행되었다.
말레피 후작가와 벨루스 백작가에는 미리 연락을 해서 난민을 인도받을 날짜를 정했다. 그들은 그 시기에 맞춰
준비를 할 것이다.
어쩌면 소문을 듣고 주변의 다른 영지에서도 난민을 보낼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미리 협의가 되어 있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점에 대해서도 두 가문에 확실하게 얘기를 해 뒀다.

☆ ☆ ☆

달빛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깜깜한 밤이었다. 제론은 조용히 거처를 빠져나갔다.


60 대의 철 마차가 오늘 완성되었다. 낮에 마차의 상태를 확인했는데, 고작 며칠 만에 만든 마차 치고는 상당히
잘 나왔다.
400 명을 실어 나를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인지라 기간트가 아니면 아예 나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제론은 조용히 어둠을 타고 마차가 늘어서 있는 벌판으로 향했다. 마차를 놓을 마땅한 공간이 없어서 아직 건물이
올라가지 않은 땅에 세워 놓았다.
60 대의 거대한 마차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제론은 그것을 다시 한 번 일일이 확인했다. 잘
만들어진 마차였다, 강행군에도 아마 끄떡없을 것이다.
제론은 첫 번째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것을 허리띠의 아공간에 넣었다. 아공간은 상당히 넓었기에 마차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계획에 제론이 꼭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공간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제론이 유일했다. 아마 전 대륙을 뒤져 봐도 제론보다 큰
아공간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허리띠의 아공간은 30 개나 된다. 제론은 일단 아공간 하나에 마차 하나를 실었다. 아공간이 워낙 넓어 마차를
넣고도 공간이 상당히 많이 남았다.
제론은 마차 하나를 더 아공간에 넣어 보았다. 너끈히 들어갔다. 하지만 3 개는 넣을 수 없었다.
30 개의 아공간이 마차로 꽉 찼다. 무려 60 대의 마차를 제론이 혼자 든 것이다.
이동이야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면 되니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중립 지대로 가서 난민을 마차에
실어 데리고 오는 것뿐이었다.
제론은 2 만의 인구를 한꺼번에 얻을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내친김에 수도의 빈민도 함께 데려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인에게 연락을 해 봐야겠군.”
수도의 난민은 폴타를 이용하면 언제든 외부로 빼돌릴 수 있었다.
마차가 10 대나 남으니 4 천 명은 더 데려올 수 있었다. 그걸 수도의 빈민으로 채우면 된다.
빈민의 경우 바인이 선별을 했을 테니 오히려 난민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나거나 성실할 것이다. 쓸모가 많다는
뜻이다.
제론은 중립 지대에서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오는 경로를 조금 수정했다. 수도 근방을 지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
근처에서 잠깐 쉬면 된다.
그동안 폴타를 이용해 빈민을 데려오면 된다. 마차를 그때 꺼내면 되니 아무 문제도 없었다.
제론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 날,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기껏 만들어 놓은 철 마차가 몽땅 사라져서 난리가 났다.


하지만 그 소동은 제론이 직접 나서서 잠재웠다. 영주가 다른 곳으로 치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물론 몇몇이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그동안 제론이 벌인 일이 어디 하나 평범한 게 있었는가.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바이스와 카이트도 원래는 안 그랬는데, 이젠 그렇게 되어 버렸다. 최소한 제론을 상식과 연결해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카이트는 미리 준비한 200 명의 라이더를 제론 앞에 대령했다. 라이더 200 명의 눈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중요하고 위험한 임무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들을 흥분시켰다.
“좋아. 이 정도면 쓸 만하군.”
“영주님과 함께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카이트는 걱정 어린 눈으로 제론과 200 명의 라이더를 번갈아 바라봤다.
훈련을 받긴 했지만 붉은 학살자와 함께 싸우는 건 그동안 했던 훈련과 상당히 다르다. 만일 뒤에서 제대로
제론을 받쳐 주지 못하면 자칫 제론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카이트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200 기나 되는데 시비를 걸 생각이나 들겠어?”
그건 확실히 그렇다. 더구나 나르는 것이 귀중품이 아니라 난민이다. 괜히 싸워 이겨 봐야 얻을 게 없었다.
그렇다고 난민을 싹 죽이지도 못할 테니 괜히 짐을 떠안는 셈이 된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꼭 상식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걱정이 되었다.
“식량은?”
제론은 바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카이트의 걱정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쪽에 준비해 뒀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양이 좀 됩니다.”
무려 2 만 명이 한 달 동안 먹을 식량이었다. 양이 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대부분 육포였고, 그냥 씹어 삼킬 수 있는 곡물도 좀 있었다. 상황이 되면 곡물을 넣고 죽이라도 끓일 수 있으니
준비를 해 둔 것이었다.
양이 어찌나 많은지 이곳에 있는 200 명의 라이더가 나눠서 옮길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걸 다 나르려면 최소한
인원이 지금의 3 배는 되어야 할 듯했다.
“좋아. 이건 내가 나르지.”
제론의 말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무슨 수로 혼자 저 많은 짐을 나른단 말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제론의 행동에 다들 눈이 찢어질 정도로 커졌다. 제론은 쌓인 식량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그 모든 짐이 깨끗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이게 뭡니까?”
“뭐긴, 아공간이지.”
“아, 아공간이 얼마나 크기에 이 많은 짐이…….”
바이스는 눈을 빛내며 제론의 손을 바라봤다. 분명히 손을 뻗었다. 즉, 아공간 아티팩트가 손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눈에 제론의 팔찌가 보였다.
“그 팔찌, 에어스트 가문의 인장이 아니로군요?”
에어스트 가문의 인장도 팔찌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팔찌는 반대쪽 손에 채워져 있었다.
제론이 피식 웃으며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유적에서 얻은 아티팩트야.”
유물이라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능력을 가진 아티팩트는 확실히 유물뿐이었다. 하지만 아공간의
크기를 생각하면 유물 중에서도 상당히 희귀한 아티팩트가 분명했다.
“굉장하군요.”
제론은 끝없이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 이번 아공간 아티팩트도 그렇다. 거기까지 생각한 바이스가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럼 철 마차도……!”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커다란 철 마차 60 대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아공간이라면 대체 얼마나 거대하단 말인가.
사실 오해였지만 제론은 굳이 그 오해를 풀지 않았다. 어쨌든 아공간에 보관한 것이 맞으니 말이다.
“그럼 다녀오지.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주기적으로 연락을 할 테니까.”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200 명의 라이더가 그 뒤를 따랐다. 상당한 인원이었다.
바이스와 카이트는 심각한 눈으로 멀어져 가는 그들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세나는 아예 안 나왔군.”
“요즘 바쁘니까요.”
“바빠?”
“새 기간트를 설계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새 기간트?”
카이트가 눈을 빛냈다. 새 기간트를 만들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진척이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했다.
“일단 시제품을 만들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호오, 빠르군.”
바이스가 씨익 웃었다.
“빨리 만들어야 영주님이 좋아하실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카이트도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두 사람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어느새 제론 일행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부디 무사하셔야 할 텐데…….”
“무사할 거다. 알잖아. 얼마나 대단한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카이트의 표정에도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제론은 200 명의 라이더를 이끌고 네이드 후작령으로 넘어갔다.


아직도 경계가 심했지만 특별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다른 상단이라면 모를까 직접 에어스트 백작이 나섰는데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선이 집중되었다. 일단 200 명의 라이더는 비록 견습이긴 하지만 어쨌든 기사였다. 200 명이나 되는
기사가 거리를 지나가니 시선을 끄는 게 당연했다.
제론이 텔레포트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 그 앞을 막아서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제론은 그들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봤다.
“오랜만입니다. 후작님.”
제론이 먼저 나서서 인사를 건넸다. 승자의 아량 비슷한 거였다.
네이드 후작도 그걸 느꼈기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고 주위에 가볍게 눈짓을 했다.
후작과 함께 온 기사들이 일제히 제론을 노려보며 살기를 뿜어냈다.
물론 제론 입장에서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설마 시비를 걸기 위해 나오신 건 아니죠?”
제론의 말에 네이드 후작의 입매가 비틀렸다.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화를 내는 것보다는 목적을 이루는 게 훨씬
중요했다.
“그럴 리가 있나. 난 그저 부탁을 하러 나왔을 뿐이네.”
“부탁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까운 것 같지만 일단 넘어가죠. 부탁이 뭡니까?”
네이드 후작은 제론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기간트를 돌려주게.”
“무슨 기간트 말입니까?”
네이드 후작이 뿌득 이를 갈았다.
“영지전에서 포획한 우리 기간트 말일세.”
“그걸 제가 왜 돌려줘야 합니까?”
“그게 도의적으로 옳지 않겠나? 전쟁은 이미 끝났네.”
“그건 명백히 정당히 취득한 전리품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도의적으로 옳은지 모르겠군요.”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슥 둘러봤다.
“사람이 참 많군요.”
네이드 후작은 제론이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니 이게 뭔가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전이 한창인데도 여전히 여긴 오가는 상단이 많은가 봅니다.”
제론의 의미심장한 말에 네이드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의도적으로 통행세를 올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느슨한 대처였다. 적어도 네이드 후작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줄었네.”
네이드 후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제론의 선택을 다시 한 번 강요했다.
“200 기 전부를 돌려 달라고 하지는 않겠네. 그저 우리 후작령의 기간트만이라도 돌려주게.”
제론이 빙긋 웃었다.
“후작령의 기간트는 너무 심하게 부서져서 그저 고철에 불과합니다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네이드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철에 불과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당시 네이드 후작도 전투를 지켜봤다.
대부분의 기간트가 마나 코어의 손상 없이 쓰러졌다.
수리를 거치면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데 고철이라니. 완전히 억지였다.
“공짜로 돌려달라는 게 아닐세. 적당한 값을 지불하겠네.”
벌써 전쟁 배상금으로 100 만 골드라는 거액을 지불했다. 속이 쓰리긴 했지만 2 왕자와 슈린 공작가가 일부
지원을 해 줬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었다.
한데 이렇게 에어스트 백작이 직접 여기까지 왔다. 이런 좋은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얼마나 주실 생각입니까?”
“100 기의 기간트를 돌려주면 100 만 골드를 주겠네.”
제론이 피식 웃었다.
“기간트를 고작 1 만 골드에 구입하시려고요? 더구나 요즘 같은 전시에? 다른 데 가서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도둑놈이라고 오해받습니다.”
“뭐라? 도둑놈?”
네이드 후작이 발끈하자 제론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후작님께 하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야 이해하죠. 하지만 남들은 이해 못 할 거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100 만 골드에 팔 건가, 말 건가!”
“한데 정말로 그 고철을 100 만 골드에 사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네이드 후작이 멈칫했다. 어쩌면 정말로 고철로 변한 기간트를 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문의
문장을 지워 버리면 그게 어디서 난 기간트인지 알게 뭔가.
더구나 요즘 같은 시기라면 고철이 된 기간트를 구하는 건 비교적 쉬웠다. 내전이 한창이었으니 말이다. 하루에도
몇 기나 되는 기간트가 고철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이드 후작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에어스트 백작령은 고립되어 있다. 그러니 고철로 변한
기간트를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즉,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내줄 수 있는 기간트는 지난 영지전에서 포획한 것들이 전부였다. 당시의 전투는 워낙
목격자가 많아서 상황을 비교적 명확히 파악했다.
‘마치 전리품으로 제대로 된 기간트를 얻으려는 것처럼 신경을 썼다고 했지.’
하지만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자그마치 100 만 골드나 투자하려는 입장이었다. 만일 정말로 고철이 된
기간트라면 가격이 수천 골드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쓸 만한 부품을 따로 빼서 팔 수 있다는 가정 하에 그렇다.
100 만 골드를 주고 고철 100 개를 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완전히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하겠군. 나중에 다시 얘기하세.”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저야 고철을 비싼 값에 처리할 수 있으니 환영이지요. 그럼 이제 길을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네이드 후작은 지금 당장이라도 제론을 인질로 잡을까 말까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고민되십니까? 절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제론이 서늘한 눈으로 네이드 후작을 쳐다봤다. 후작은 그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내 이를
악물었다.
여기는 네이드 후작령이다. 자신이 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후작이 막 화를 내려고 할
때, 전령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그는 제론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후작의 귀에 뭔가를 말했다.
네이드 후작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리고 심각한 눈으로 제론 뒤에 선 200 명의 라이더를 바라봤다.
‘설마 저게 전부 기간트 장비였단 말인가?’
네이드 후작령쯤 되면 기간트 장비의 아공간을 파악하는 아티팩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보통은 성문을 통과하면서
기간트 장비의 유무를 파악하게 되어 있는데, 그 보고가 지금 온 것이었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일 여기서 200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날뛴다면 네이드 후작령은 끝장이었다.
‘젠장. 무슨 놈의 기간트가 저렇게 많아!’
행색을 보아하니 견습 기사쯤 되어 보인다. 한데 견습 기사까지 몽땅 기간트를 지급받았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단 말인가.
네이드 후작은 그 기간트 중 일부가 자신의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길을 내 드려라.”
네이드 후작의 명령에 그의 기사들이 천천히 길을 열었다. 하지만 언제든 기습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후작님, 기사 교육을 다시 시키셔야겠습니다. 주군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무슨 명령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후작의 기사들이 내뿜는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제론은 그걸 온몸으로 받으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실력도 모자라는군요.”
그 말과 함께 제론의 모습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언제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퍼버버버버벅!
수십 번의 격타음이 들렸다. 그리고 언제 사라졌었냐는 듯 제론이 원래 자리에 나타났다.
네이드 후작은 깜짝 놀라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경악했다. 그렇게 믿음직스럽던 기사들이 모두 바닥에 누워 있었다.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들어서 기절한 채로
말이다.
제론은 멋들어지게 후작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올 때도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마친 제론은 빙긋 웃으며 후작을 지나쳐 텔레포트 게이트로 걸어갔다.
200 명의 라이더가 그 뒤를 질서정연하게 따랐다. 아무리 견습 기사라지만 혹독한 훈련을 거친 자들이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절도가 넘쳤다.
네이드 후작은 멍한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과 바닥에 널브러진 기사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나서는 제론의 표정은 밝았다. 아니, 밝다기보다는 즐거워 보였다. 네이드 후작령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재미있었다.
아마 후작은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서 에어스트 백작령의 상황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제론은 미리 바이스에게 연락했다. 다 보여 주라고.
영지전에서 포획한 200 기의 기간트는 사실 대부분 멀쩡했다. 게다가 수리도 거의 끝났다. 세나의 괴물 같은
실력이 그걸 가능케 했다.
네이드 후작은 멀쩡한 기간트 100 기를 100 만 골드에 구입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제론이 없을 때 기간트 구입을 진행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바이스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다. 고철이 된
기간트는 제론이 보내 주기로 했다.
지금은 내전 중이었다. 고철이 된 기간트쯤이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물론 100 기를 구하려면 좀 힘들겠지만, 바인에게 말해 놓고, 말레피 후작가와 벨루스 백작가에도 부탁을 해
놓으면 얼마든지 수를 맞출 수 있었다.
계약서만 똑바로 쓰고 특별한 사람에게 공증을 맡기기만 하면 네이드 후작은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사실 네이드 후작이 상단의 통행을 틀어막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또 텔레포트 게이트 앞을
막고 협박하지만 않았어도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네이드 후작은 너무 심했다. 제론은 머릿속으로 계획 하나를 더 추가했다.
네이드 후작령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곳은 물류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얻어 놓으면 굳이 발전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쓸모가 무궁무진했다.
제론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나와 주위를 둘러봤다. 상당히 번화한 거리였다. 역시 말레피 후작령이었다. 하지만
부럽지는 않았다. 오래지 않아 에어스트 백작령은 이보다 훨씬 발전할 거라고 확신했다.
200 명의 라이더와 함께 서 있는 제론의 모습은 눈에 확 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깐 서 있으니 누군가가
다가왔다.
“에어스트 백작님이십니까?”
중년의 사내였는데, 복장을 보니 집사 같았다. 그는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쪽 팔을 배에 대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말레피 후작가의 집사, 퓌러입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퓌러는 정중하게 제론을 후작가로 안내했다. 가는 내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예를 다해 제론이 불편하지 않게
신경을 써 주었다.
후작가에 도착한 제론은 바로 말레피 후작을 만날 수 있었다. 후작뿐 아니라 가족들이 모두 나와서 레늄 왕국의
신성이라고 할 수 있는 제론을 보고자 했다.
사실 그들은 이렇게 제론이 직접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바이스가 와서 일을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론이 직접 와서 조금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반갑네. 안면이 좀 있지 않나?”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역시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군.”
말레피 후작은 빙긋 웃었다. 예전의 제론은 참으로 당차고 자신만만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상대는 백작가의 가주였다. 또한 커다란 영지의 영주이기도 했다.
“환영하네. 있는 동안 편히 쉬었다 가게.”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제론은 정중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 말레피 후작은 또 한 번 흐뭇하게 웃었다.
아들의 주군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 정도면 미래가 밝았다. 내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내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바이스는 상당히 뛰어난 녀석일세.”
“알고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제게 능력을 보여 주기도 했고요.”
“부탁하네.”
“오히려 제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말레피 후작은 또 흐뭇하게 웃었다. 아들이 괄시받지는 않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 후작은 가족을 일일이 소개해 주었다. 그중에는 예전 바이스와 후계자를 자리를 놓고 다투던 형제도
있었고, 딸도 있었다.
딸을 소개하면서 후작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좋은 인연이 되면 서로에게 득이 될 테니
말이다.
“일단 난민부터 확인하고 싶습니다.”
인사를 모두 마치고 제론이 꺼낸 말에 말레피 후작은 의외라는 듯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이럴 때 숙소부터 찾는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몸에 무리가 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 쉰 다음 천천히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데 제론은 난민부터 보려고 한다. 그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물론 말레피 후작만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좋네. 당연히 그래야지.”
말레피 후작은 흔쾌히 대답하고는 자신의 딸인 밀레나를 보며 말했다.
“네가 안내해 드리도록 해라.”
밀레나는 순간 표정이 굳었지만 이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밀레나는 바이스의 배다른 여동생이었다. 말레피 후작의 후처가 낳은 딸이었는데, 상당히 아름답고 싹싹해서
후작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말레피 후작은 내심 밀레나와 제론이 잘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는 기대감과 흐뭇함이 뒤섞인 눈으로 멀어져가는
제론과 밀레나의 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나머지 가족은 후작과는 많이 다른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밀레나는 살짝 기분이 상했다. 사실 이럴 때는 남자 쪽에서 먼저 살갑게 대화를 시도하는 게 보통 아닌가. 한데


이 남자는 아예 그런 게 없었다. 심지어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이건 자신을 정말로 안내꾼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기분 나빴다.
대체 어떻게 자신을 고작 길 안내나 하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남자는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데 제론은 그렇지 않았다. 아예 관심이 없었다.
‘흥, 관심 없는 척하겠다 이건가?’
예전에 그런 식으로 접근했던 남자도 있었다. 만일 그 남자가 조금만 배경이 좋았다면 밀레나도 넘어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밀레나의 기준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남자였다.
밀레나는 이번에도 그런 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확실했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된다. 자신을
이렇게 지척에서 보고도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게 어떻게 말이 된단 말인가.
“저 문으로 나가면 난민촌이 나와요.”
난민이라는 말을 꺼낸 밀레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불쾌함이었다.
그들은 지저분하고 영지에 피해만 주는 족속이었다. 솔직히 보기도 싫었다. 사실 안내만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론에 대한 호감이 조금 높은 채로 시작했다. 이 난민을 모두 해결해 주기 위해 온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제론은 성문으로 걸어갔다. 성안은 깨끗하고 보기 좋았는데, 성문으로 다가갈수록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난민이
어떤 상태로 지내는지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밀레나는 성문 앞에서 코를 막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성문을 나선 제론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모여 있는 지저분한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이 난민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해 앙상하고 더러웠다. 하지만 그들은 에어스트 백작령의 백성이 될 사람들이었다.
“일단 저들을 씻기고 먹여야겠군. 준비해라.”
제론의 명령에 그를 따라온 200 명의 라이더가 즉시 움직였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견습 라이더는 전원 평민
출신이었다. 개중에는 난민 출신도 있었다.
누구보다 저들의 상태와 기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일부는 성으로 들어가 물을 구하러 갔고, 일부는 성 내의
시장으로 먹을거리를 사러 갔다.
라이더들이 어찌나 빨리 움직였는지 순식간에 준비되었다. 큰 천막을 두 개나 만들었고, 그 안에 커다란 통을
넣고 물을 채웠다.
견습 라이더들은 난민을 다루는 것도 잘했다. 그들은 먹을 것을 미끼로 두 천막에 남녀를 구분해서 넣었다.
일단 목욕을 하지 않으면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는 말에 그들은 대충이라도 씻어야만 했다.
분위기가 시끌벅적해졌다. 목욕을 하랴 어느새 준비된 커다란 솥에 각종 재료를 넣고 스프를 끓이랴 다들 바빴다.
이곳의 난민은 무려 1 만 명이나 된다. 수도에서는 벨루스 백작령이 더 가깝기 때문에 여기서 1 차로 난민을 싣고
벨루스 백작령으로 가서 나머지 1 만 명의 난민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 1 만 명의 난민을 모두 먹이려면 엄청난 양의 음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라이더들은 차질 없이 충분한 음식을
구해 모두를 배불리 먹였다.
씻고 먹은 사람들은 주변을 청소했다. 어쨌든 먹으니 힘이 나서 뭐든 할 수 있었다.
씻고 청소까지 하고 나니 그제야 좀 사람다워졌다. 배까지 부르니 곳곳에서 쓰러져 자는 사람이 늘어났다.
지금이야 날이 따뜻하니 괜찮지만 아마 몇 달 더 지나 추워지면 난리가 날 것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얼어
죽으리라.
제론은 그 모든 일을 지켜봤다. 그리고 밀레나는 그 옆을 지켰다.
솔직히 밀레나는 제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굳이 이런 데 돈을 쓴단 말인가. 오늘 제론이 쓴 돈만 해도 100
골드가 넘었다.
하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계속 이런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는 사람이라면 곤란한데…….’
이들을 위해 돈을 쓴다고 들었다. 아마 한두 푼으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한 번 먹이고 씻기는데 100
골드나 든다.
그럼 이들을 몇 달 동안 지원하려면 수만 골드는 들어갈 것이다. 어쩌면 10 만 골드가 넘어갈 수도 있었다.
물론 밀레나가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다. 이들이 겨울을 나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머물
장소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장소를 만들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고작 10 만 골드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쩌면 수백만 골드가 들어갈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렇기에 말레피 후작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들어가는 돈이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서 난민에게 해 주는 대우가 소문났을 경우 정말로 큰 문제가 생긴다.
천지사방의 빈민이 몽땅 몰려올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각 영주들은 섣불리 빈민 구제 사업을 펼치지
못했다. 이렇게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밀레나는 제론이 수시로 이런 데에 돈을 쓰는 사람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런
식이면 금세 거지가 되고 말 것이다.
‘아이 참, 아버지는 왜 이런 사람이랑…….’
어쨌든 귀족가의 여식인 만큼 그녀도 정략결혼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좀 번듯한 사람에게
시집을 가고 싶었다.
에어스트 백작에 대해서 밀레나가 아는 것이라고는 예전에 망한 가문이라는 것과 최근 성세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성세가 높아져 봐야 신흥 귀족일 뿐인데.’
그것이 밀레나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밀레나는 조금씩 제론에 대한 관심이 식어 갔다.
“이제 다들 괜찮아진 것 같으니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밀레나는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하고 이 불결한 분위기가 싫어서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자 제론이 그녀를
돌아보며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밀레나는 그 표정을 보며 내심 기대를 했다.
“전 여기 좀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진작 모셔다 드려야 했는데 미처 신경을 못 써 드렸군요.”
제론의 말에 밀레나의 표정에 쩍쩍 금이 갔다. 이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제론은 그녀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이더 한 명을 불렀다.
“네가 에스코트를 해 드리도록.”
“알겠습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견습 라이더가 언제 이런 귀족가의 영양을 에스코트해 봤겠는가.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밀레나는 이 상황이 너무나 황당했다. 세상에 자신보다 이 난민이 더 소중하단 말인가?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시길.”
제론은 그렇게 인사하고는 다시 난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난민을 보는 제론의 표정이 심각했다.
밀레나는 멍하니 제론을 보다가 이를 갈고는 휙 돌아서서 화난 표정으로 걸어갔다.
라이더가 다급히 쫓아갔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물론 라이더는 끝까지 그녀를 보호하려 애쓰며 따라갔다.
그리고 제론은 그대로 밀레나에 대한 일을 잊어버렸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이들을 무사히 영지까지 데려가는
것이지 귀족가 꼬맹이의 사랑 놀음이 아니었다.
“시간이 좀 필요하겠군.”
이대로라면 이들은 강행군을 버티지 못한다. 영양 상태나 체력이 너무 바닥이었다. 그걸 좀 끌어 올릴 필요가
있었다. 또한 위생 상태도 점검하고 병이 있는지도 확인해야만 한다.
400 명이 같은 마차를 타고 간다. 만일 전염병이라도 걸리면 완전히 끝장이었다.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
“벨루스 백작령 쪽도 마찬가지겠지.”
다를 리가 없었다. 벨루스 백작가보다 말레피 후작가가 훨씬 부자다. 그런데도 손을 못 쓰고 있는데 벨루스
백작령은 오죽하겠는가.
일을 모두 처리한 라이더들이 제론에게 다가왔다. 피곤해 보였지만 그래도 표정은 다들 밝았다. 난민들을 보며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잘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흘을 머문다. 그동안 이들의 체력을 끌어 올려. 한 달의 강행군을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라이더들의 표정이 굳었다. 과연 고작 나흘로 그게 가능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들도 이대로 떠나면 다들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일부는 남아서 난민을 지속적으로 관리해라. 앞으로는 많은 인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들이 스스로 나서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라.”
“알겠습니다.”
제론은 라이더를 쭉 둘러보며 말했다.
“나머지는 나와 함께 벨루스 백작령으로 간다. 그곳에서 난민의 상태를 호전시킨 뒤 이곳의 난민과 합류해서
떠난다.”
아주 간단한 계획이었다. 라이더들은 즉시 흩어졌다.
제론이 따로 인원을 나누고 명령을 내리고 할 필요가 없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사는 모두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도록 충분한 훈련을 받았다.
모든 일을 마무리한 제론은 견습 기사의 임시 단장 한 명을 불러 10 만 골드라는 엄청난 돈을 넘겼다. 일단
그걸로 난민을 먹이고 관리하라는 뜻이었다.
엄청난 액수의 돈을 받은 견습 기사단장은 잠깐 동안 손을 떨었지만 이내 굳은 표정으로 돈을 품에 넣었다.
그리고 존경 어린 시선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10 만 골드라는 돈을 받으면서 신뢰를 느꼈다. 이건 돈 이상의 문제였다. 제론에게 있어서 10 만 골드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걸 한 사람에게 믿고 맡기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제론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기사단장의 인사를 받고는 돌아서서 성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저녁은 어쨌든 말레피 후작과 함께해야만 한다. 그리고 내일 일찍 떠나겠다는 말도 미리 해 둬야 했다.
‘아무래도 껄끄러운 시간이 되겠군.’
제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성으로 향했다.

Chapter 8 준비

저녁 만찬은 제론의 예상대로 그리 편한 시간이 되지 못했다. 끊임없이 견제하는 후작가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말레피 후작에게는 5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바이스가 빠지면서 4 명만 남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바이스가 후계자 자리를 포기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바이스가 에어스트 백작가의
힘을 등에 업고 후작가의 가주가 되려 한다고 여겼다.
날 선 말을 몇 번이나 던졌지만 제론은 담담하게 응대했다. 사실 별로 신경을 쓸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제론이 한 번도 발끈하지 않자 다들 짜증이 났다. 뭔가 넘어오는 기색이라도 보여야 할 맛이 나는데 그게 안 되니
짜증만 쌓였다.
반면 밀레나는 그것을 보며 또 마음이 식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담대한 게 아니라 속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말레피 후작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당장 나서서 정리할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네 아들의
자신감을 꺾을 수도 있었고, 또 말을 잘못하면 제론과의 관계도 나빠질 수 있었다.
말레피 후작은 아들들에게 따로 언질을 주지 못한 걸 후회했다. 사실 훨씬 좋은 분위기로 저녁 만찬을 마쳐야
향후 말레피 후작가의 행보도 유리해진다.
말레피 후작은 에어스트 백작령이 폭풍의 핵이라고 판단했다.
바이스가 가문에 보내는 포로스의 주인이 바로 제론이라는 걸 이미 파악했다. 어쩌면 제론에게는 더 대단한
지식이나 유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생각하면, 또 현재 에어스트 백작령의 상황을 생각하면 무조건 제론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바이스 덕분에
상당히 좋은 관계였는데, 그래서 너무 방심했다.
‘나중에 따로 언질을 줘야겠군. 그나저나 좀 달래 줘야 할 텐데…….’
말레피 후작은 살짝 걱정스런 표정으로 제론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밀레나를 바라봤다.
‘쯧쯧.’
밀레나의 표정을 보니 벌써 글렀다는 걸 깨달았다. 밀레나에게 눈치를 줘서 제론을 위로하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이래서야 아무 소용없었다.
결국 말레피 후작은 제론의 눈치를 살피며 식사를 서둘렀다. 이 자리는 빨리 끝내는 게 서로를 위해 좋았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제론이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말레피 후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일 오늘 만찬에서의 일 때문에 제론이 앙금을 가지고 이런 결정을 내린
거라면 향후 어떤 걸림돌로 작용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미리 벨루스 백작령으로 가서 난민의 상태를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허어.”
말레피 후작은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난민의 상태를 확인한다는데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정말로 저 난민을 다 데려갈 생각인가?”
“물론입니다.”
다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제론을 바라봤다. 제정신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많은 난민을 데리고 언제
에어스트 백작령까지 간단 말인가.
“설마 그들을 모두 텔레포트 게이트로 이동시키실 생각은 아니시죠?”
텔레포트 게이트는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 1 만 명이나 되는 인원을 보내는
것도 문제였고, 금액도 문제였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데에는 돈이 든다. 그것도 상당히 비싸다.
“당연히 아니죠.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게 쓸 생각은 없습니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 텔레포트 게이트에 대한 생각을 했다.
‘우리 영지에도 슬슬 텔레포트 게이트가 필요하겠군.’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하려면 마탑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그것도 크란 제국 마탑의 협조를 말이다.
텔레포트 게이트에 대한 마법적 기술은 크란 제국 마탑이 독점했다. 그들은 그 마법에 관한 지식을 결코 유출하지
않았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크란 제국 마탑에 막대한 부를 안겨 주는 고부가가치 사업이었다.
일단 게이트 설치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 무려 30 만 골드라는 설치 비용이 든다.
그게 끝이 아니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크란 제국 마탑이 직접 운영한다. 즉, 게이트에 내는 비용은 마탑으로
흘러간다는 뜻이었다. 물론 영지에 세금은 낸다.
세금만 해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하지만 마탑으로 가는 돈은 세금의 몇 배나 된다.
그러니 얼마나 막대한 돈을 벌겠는가.
각 영지는 게이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보기에 그런 식으로라도 게이트를 설치했다. 게이트를
통해 들어오는 세금도 짭짤했고 말이다.
제론은 마탑에 게이트 설치를 의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크란 제국 마탑은 게이트를 설치해 운영하면서 돈뿐 아니라 정보까지 얻어 간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대륙 전체를 암중에 휘어잡고 있는 셈이었다.
제론은 최근 태블릿을 이용해 텔레포트 게이트에 대한 지식을 조금씩 얻고 있었다.
만일 잘되기만 하면 대륙에 나왔던 그 어떤 텔레포트 게이트보다 훌륭한 게이트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럼 저들을 다 데리고 전장을 관통할 생각인가? 아니면 산맥을 탈 생각인가?”
“전장을 관통할 생각입니다.”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레피 후작마저도 그 일은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저 난민은 싹 죽겠군.’
모두 그렇게 판단했다. 말레피 후작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저 많은 난민을 다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내게 적당한 돈을 지원하는 건 어떤가?”
제론이 말레피 후작을 쳐다봤다. 후작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 난민을 다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도 적당히 돈을 투자해 저들을 받아들이겠네.”
난민이 수백 명이었다면 이런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1 만 명은 너무 많았다.
제론이 빙긋 웃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론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말레피 후작도 더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던 밀레나는 결국 한 마디 툭 던지고 말았다.
“흥, 조언을 하면 들을 줄도 알아야 진짜 훌륭한 남자 아닐까요?”
말레피 후작은 엄한 눈으로 밀레나를 쳐다봤다. 밀레나는 그 눈길에 움찔 놀랐다. 하지만 후작이 나무라거나 하지
않자 말을 덧붙였다.
“1 만 명을 데리고 전장을 관통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제론은 밀레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말했다.
“1 만 명이 아니라 2 만 명입니다. 벨루스 백작가에서도 1 만 명을 인도받기로 했죠.”
밀레나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1 만 명이든 2 만 명이든 무슨 상관인가. 그들을 데리고 전장을
관통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내기 좋아합니까?”
제론이 밀레나를 보며 물었다. 밀레나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어쩌면 이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좋아하죠.”
“그럼 내기 할까요? 내가 난민을 데리고 무사히 영지로 돌아가는지 아닌지.”
밀레나가 말레피 후작을 바라봤다. 허락해 달라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말레피 후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더 쉽게 제론을 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난민 몇 명을 살릴 수 있는지부터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 난민을 모두 살려서 데려갈 수는 없지 않나요?”
그 부분은 제론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2 만 명이나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아무리 통제를 제대로 한다고 해도 싸우다 죽을 수도 있고, 또
병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불의의 사고가 날 수도 있다.
제론은 그런 모든 상황을 다 고려해도 거의 모든 난민을 살려서 데려갈 계획이었다. 자신도 있었다.
“1000 명으로 하죠.”
제론의 말에 밀레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장난 하시나요? 2 만 명을 데려가면서 고작 1000 명만 살리겠다고요?”
다들 어이없는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하지만 제론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오해를 하셨군요. 1000 명을 살리겠다는 게 아니라, 희생자가 1000 명을 넘지 않을 거란 뜻입니다.”
이번에는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누가 들어도 불가능했다. 어떻게 1000 명의 희생으로 2 만 명이 전장을 통과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세상 누가 와도 불가능했다.
“정말 그 조건으로 하시겠어요? 난민은 그 먼 길을 걸어가면 체력이 모자라서 죽을 수도 있어요.”
이동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밀레나는 제론이 그조차 고려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얘기해
주었다. 하지만 제론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그럼 뭘 거시겠습니까?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말레피 후작을 쳐다봤다. 사실 뭔가 큰 것을 걸 생각은 없었다. 그저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말을 꺼냈을 뿐이었다.
아마 결과를 보고 나면 이들 모두가 에어스트 백작령을 결코 함부로 판단하거나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글쎄…… 뭐가 좋을까.”
말레피 후작은 얼른 떠오르는 게 없어서 잠시 고민했다. 제론은 그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 주었다.
“제가 지정하는 상단의 세금을 면제해 주십시오.”
“상단의 세금 면제? 상단도 가지고 있었나?”
“관계를 가진 상단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의 편의를 좀 봐주고 싶습니다.”
말레피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어려울 게 없었다.
제론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졌을 때는 강철 3 만 톤을 드리겠습니다.”
다들 헉 소리와 함께 눈이 커졌다. 강철 3 만 톤이라니. 실로 어마어마한 양 아닌가. 그걸 내걸었다는 것은 그걸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니 제론이 새삼 다시 보였다.
“그게 정말인가?”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제가 이길 내기입니다. 뭘 걸든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말레나가 냉큼 나섰다.
“그럼 강철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내기로 걸었다는 뜻인가요? 그건 도의에 어긋나는 일 아닌가요?”
제론이 피식 웃었다.
“강철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내기에서 지면 드리면 되는 거 아닐까요? 돈으로 사서라도 드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제론의 말에 밀레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새치름한 눈으로 제론을 째려봤다. 정말 얄미웠다.
“알았어요. 기대하죠.”
“그럼 내기 성립이로군요.”
말레피 후작이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짝짝!
“자, 이제 슬슬 만찬을 끝내도록 하지. 내일 일찍 떠나려면 자네도 준비할 게 있을 것 아닌가.”
말레피 후작의 말에 금세 자리가 끝났다. 다들 일어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제론도 배정된 숙소로 돌아갔다. 딱히 준비할 건 없었다. 하지만 휴식은 꼭 필요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텔레포트 게이트로 간 제론은 미리 나와서 준비하고 있는 견습 라이더들을 확인했다. 모두 150


명이었다.
벨루스 백작령의 난민이 1 만 명이니, 6 교대로 강행군이 가능한 숫자였다.
말레피 후작령과 벨루스 백작령은 그래도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난민이 걸어서
이동하려면 보름은 잡아야 할 거리였다.
하지만 제론은 이틀 만에 주파할 생각이었다. 충분히 가능했다. 6 교대로 달리면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로 끊임없이 달릴 수 있다.
아직 단체로 달리는 일이 제대로 적응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세운 계획이었다.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도 벨루스 백작은 알아서 사람을 게이트 근방에 상주시키며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당연히 제론 일행이 게이트에서 나오니 눈에 띄었고, 그들도 알아봤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다들 긴장한 상태로
기다리는 중이었다.
게이트에서 기다리던 사람은 철사자 기사단이었다. 가장 먼저 제론을 발견한 사람은 부단장인 펠이었다. 펠은
아직도 예전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론을 보니 당시의 감정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펠은 마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벽 앞에 선
기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영합니다. 에어스트 백작님.”
펠이 먼저 정중히 인사하자, 기사단장이 그제야 제론을 알아보고 황급히 예를 취했다. 예전이야 어쨌든 이제는
백작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사람이었다.
제론을 본 기억이 있는 철사자 기사단 전원이 일제히 예를 취했다. 마치 벨루스 백작이 게이트에서 나온 걸로
착각할 정도의 태도였다.
사실 제론도 이런 대접을 해 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라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곳은 세나의 가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정도 대우는 받아도 된다. 제론은 그렇게 편히 생각했다.
“아직 영주님께서는 기침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쉬실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기사단장이 나서서 말하자,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 시간에 백작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난민이 있는 곳으로 갑시다.”
“예?”
기사단장이 놀란 눈으로 반문하자. 옆에 서 있던 펠이 나서서 대답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고 펠을 따라갔다. 기사단장은 그 뒤를 따라가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난민의 상황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펠의 말에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좋소. 벨루스 백작님께서 신경을 많이 쓰신 모양이오,”
벨루스 백작령의 난민은 그래도 말레피 후작령의 난민보다 훨씬 상태가 좋았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잠을 자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배가 고프니 잠도 잘 못 자는 것이다.
“일단 좀 먹이고 씻겨야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펠을 쳐다봤다. 펠이 움찔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음식을 좀 준비해야겠소. 도와주시겠소?”
“무, 물론입니다.”
펠이 대답하자, 제론은 견습 기사단의 임시 단장을 불러 펠에게 붙여 주었다. 견습 기사단의 임시 단장은 모두 4
명이었다. 말레피 후작령에 남은 사람을 제외하고 3 명이 이곳에 있었는데, 그중 가장 선임이었다.
견습 라이더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 철사자 기사단도 함께 다녔다.
제론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한 번 경험이 있어서인지 순식간에 준비가 끝났다. 난민들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난민들은 씻고 청소하고 먹었다. 자던 사람도 깨서 우르르 모여들었다.
1 만 명이 그렇게 움직이니 엄청나게 부산스럽고 시끄러웠다. 하지만 제론은 묵묵히 그 광경을 모두 지켜봤다.
제론이 파악하려는 것은 이들의 건강 상태였다. 체력이나 건강이 어느 정도는 되어야 이동이 가능할 테니 말이다.
벨루스 백작령에 미리 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말레피 후작령의 난민을 나흘 내에 이동 가능한 상태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리고 왔다. 그때는 대충 한 말이었는데,
지금 보니 일정이 맞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곳의 난민은 상태가 제법 괜찮았다. 이틀 정도 철저히 관리를 해 주면 강행군에 버틸 체력을 조금이나마
만들 수 있을 듯했다.
‘아이와 노인이 문제로군.’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제론에게는 남들은 모르는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초고대 문명의 마법이나
지식에는 이런 경우에 쓸 수 있는 것도 제법 많았다.
“그럼 식수를 준비해 볼까?”
배불리 먹고 씻고 청소까지 마친 난민들은 나른한 표정으로 각자 자리에 누웠다. 잠을 통해 쌓인 피로를 풀려는
것이다.
이때는 그냥 두면 된다. 앞으로 제대로 먹이고 푹 쉬기만 해도 체력이 회복될 것이다.
남은 건 한 달의 강행군을 버틸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뿐이었다. 제론은 그 방법을 식수에서 찾았다.
그냥 물을 식수로 쓰는 게 아니라 특별한 물을 식수로 써서 체력과 건강을 유지시킬 계획이었다.
제론이 머릿속으로 계획을 점검하고 있을 때, 철사자 기사단이 다가왔다. 가장 앞에는 기사단장과 펠이 있었다.
“지시하신 일을 마무리 했습니다.”
기사단장의 보고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백작님을 뵈러 갑시다.”
제론은 철사자 기사단과 함께 벨루스 백작을 찾아갔다. 견습 라이더들은 모두 남아 난민을 통제했다.
배불리 먹여 준 그들에게 난민들은 상당히 고마워했다. 그래서 통제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다들 지극히
협조적이었다.

난민을 모두 끌고 가겠다는 제론의 발언은 벨루스 백작가에서도 큰 반응을 이끌어 냈다. 다들 미친 짓이라고
판단했다.
누구든 제론의 말을 들으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려 2 만 명이나 되는 난민을 데리고 분쟁
지역을 돌파하겠다니,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여기서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말레피 후작가와는 달리 내기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우려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제론은 어떤 말을 듣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제론은 식수를 준비하는 데 온 신경을 다 쏟고 있었다.
무려 2 만 명이 한 달간 마셔야 할 물이었다.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사실 물이야 어딜 가든 있다. 하지만 아무 물이나 마시면 건강을 지킬 수가 없었다. 더구나 요즘처럼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혹시 시체가 담겨 있던 물을 식수로 쓰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재앙이 벌어진다.
그러니 물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 문제는 고인 채로 오랜 시간이 지난 물은 신선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 문제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제론이 가진 아공간에 물을 담아 두면 오랫동안 신선함을 잃지 않고서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벨루스 백작가에서 제론은 이틀 동안 바쁜 시간을 보냈다. 다른 사람에게 거의 신경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뭘 하고 있다고? 아르보 잎과 가지를 모은다고? 대체 그걸 왜?”


아르보는 벨루스 백작령에서 가장 흔한 나무였다. 하지만 딱히 쓸모가 있는 나무는 아니었다. 열매가 열리는 것도
아니고, 약재로 쓸 수도 없었다.
그 나무의 잎과 가지를 대량으로 모으고 있다면 그걸로 뭔가를 한다는 뜻인데 대체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뭔가를 하는 건 분명합니다.”
집사의 말에 벨루스 백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하는지 파악도 못했다는 점이 거슬렸다.
“그것 말고 하는 일은 없고?”
“물을 잔뜩 모으고 있습니다.”
“물을 모아? 대체 왜?”
지천에 널린 게 물이었다. 한데 그걸 또 왜 모은단 말인가. 아르보 잎과 가지를 물에 우릴 수도 있지만 그건
아무 쓸모없는 짓이었다. 그거야 벨루스 백작령에서 벌써 오래전에 다 시도해 본 것들이었다.
아르보 나무에는 아무런 효능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싹 뽑아 버리고 다른 유용한 나무를 심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많았다.
또한 굳이 나무가 아니라도 벨루스 백작령에는 돈이 될 만한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신경을 끄고 있었다.
한데 제론이 그걸 모으고 있다니 괜히 관심이 갔다. 벨루스 백작이 판단하는 제론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감히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에어스트 백작령에 두고도 걱정하지 않았다. 향후 제론의 짝이 될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벨루스 백작은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상태로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보다 고철 기간트를 모으는 일은 어떻게 되었나?”
“아무래도 요즘은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아서 제법 많이 모았습니다. 30 기가 좀 넘습니다.”
벨루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체면치레는 했군.”
“얼마에 팔면 되겠습니까?”
집사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벨루스 백작이 피식 웃었다.
“무슨 돈을 받아? 그냥 주도록. 어차피 성 밖에 있는 1 만 명의 난민을 해결하려면 그 수백 배의 돈이 들어갈
텐데.”
“그야 그렇습니다만…….”
아무리 고철이 되었다고 하지만 기간트의 값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것이 무려 30 기가 넘었다. 거기에 들어간
돈은 상당했다.
하지만 백작의 말대로 난민을 해결해 준다면 그 정도 돈이야 얼마든지 투자가 가능했다. 문제는 집사가 보기에
제론이 난민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영주님. 외람되지만 이번 일 재고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재고? 왜? 불안한가?”
“그렇습니다. 만일 난민을 데리고 분쟁 지역을 지나가다가 그들이 다 죽기라도 하면 에어스트 백작가만 타격을
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날아올 화살도 만만치 않습니다.”
집사의 말대로 만일 난민이 다 죽으면 그들을 제론에게 떠넘긴 벨루스 백작가나 말레피 후작가도 비난을 면키
어렵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난민이야. 난민이 되었다는 건 그걸 다 각오했다는 뜻이지. 그리고 에어스트 백작을 좀 믿어 봐. 그
사람, 생각보다 대단하니까.”
“하지만…….”
벨루스 백작이 손을 내저었다.
“아아, 됐어. 이미 결정한 일이니 번복이 더 어렵다는 거 알잖은가. 그리고 말레피 후작가는 그런 것 하나도
생각 안 했겠나?”
집사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말레피 후작가가 이 일을 그냥 진행한다는 점이 좀 이상하긴 했다. 그들도 생각이
있을 텐데 말이다.
“난민에 대한 인식은 딱 그 정도야. 아마 그 사정을 봐주고 비난할 사람은 같은 난민밖에 없을 거고.”
벨루스 백작의 말은 냉정하고 잔인했지만 집사도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여론만
제대로 조성하면 일반 영지민이 동요할 일도 없다.
아니, 영지민은 오히려 좋아할 것이다. 지금도 난민을 다 죽여야 한다고 떠드는 과격한 자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니 난민이 떠나가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물론 그걸 빌미로 다른 영지에서 수작을 부릴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가나 말레피 후작가는 그런
수작을 얼마든지 타파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러니 그냥 지켜보기만 하게. 그리고 뭘 하고 있는지 꼭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집사는 결국 그렇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아니, 그 말을 하는 벨루스 백작의 얼굴에 떠오른 씁쓸함 때문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벨루스 백작은 집사가 물러가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체 제론이 왜 물과 아르보 나무를 구하는지 아무리해도 알
수 없었다.
“그냥 가서 물어볼까?”
벨루스 백작은 한참을 더 고민하다가 결국 제론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럴 때는 직선적으로 승부하는 것이
벨루스 백작의 방식이었다.

“33 기면 적당하군. 말레피 후작도 한창 모으고 있다니 양은 충분하겠군.”


바인도 수도에서 열심히 선을 대서 모은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마 모자라는 양은 바인이 몽땅 해결할 수 있을
듯했다.
베론은 산처럼 쌓인 고철 기간트를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걸 받을 네이드 후작의 표정만 생각해도 절로
웃음이 났다.
이제 이걸 담아 갈 공간만 만들면 된다. 그건 난민을 실어 나를 강철 마차를 꺼내면 모두 해결된다.
25 대의 마차를 꺼낼 예정인데, 그 공간이면 이 정도 고철은 싹 담을 수 있었다.
또한 말레피 후작령에서도 마차를 꺼낼 테니 남은 공간에 또 그곳의 기간트를 넣으면 된다.
수도에서 바인으로부터 남은 고철을 받아 합친 다음, 유적을 통해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이동시키면 모든 일이
아주 간단히 해결된다.
처음 그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이 계획을 세웠다. 네이드 후작은 아마 계약서를 찢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공증으로 세울 디아만트 상단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또 이용하게 됐군.”
디아만트 상단의 클레에게는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조만간 그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식량을 판매할 수 있게 되면 아마 디아만트 상단은 단숨에 위로 치고 올라갈 테니 말이다.
제론은 고철 더미를 뒤로 하고 성을 나섰다. 이제 식수를 만들 시간이었다.
그동안 물은 충분히 확보했다. 물이야 어디에 가든 잔뜩 구할 수 있었다. 우물에서 퍼도 되고 흐르는 시냇물을
떠도 된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물을 담을 거대한 통을 몇 개나 준비했고, 그 안에 물을 꽉 채웠다. 이제 그 물을 아드보 잎과 가지를 이용해
변화시킬 시간이었다.
아드보 잎과 가지의 효용은 현재 전혀 알려진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초고대 문명에는 상당히 유용하게 쓰이던
약재였다.
중요한 건 숙성이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긴 숙성이 필요했다. 최소 50 년은 숙성해야 필요한 성분이 조금씩
생겨난다.
그러니 아무리 연구를 해도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현재는 그렇다. 하지만 초고대 문명에는 엄청난 마법
지식이 있었다.
특별한 마법을 이용해 긴 시간 숙성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제론이 쓰려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여기 아드보 나무가 굉장히 많군?”
초고대 문명에서는 아드보 나무를 계획적으로 육성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냥 맹물을 마시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아드보가 섞인 물을 마셨다.
아드보는 그저 흔한 나무가 아니었다. 비록 요즘에는 흔히 볼 수 있지만 그건 초고대 문명이 남긴 흔적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 아드보 나무가 이렇게 많이 자라는 곳은 사실 왕국 전체를 놓고 봐도 거의 벨루스 백작령이 유일했다.
이곳은 유난히 아드보 나무가 많았다.
제론은 한 가지 가능성을 점쳤다. 어쩌면 이곳이 초고대에 아드보 나무를 육성하던 곳이 아니었을까?
“이걸 어떻게 확인하지?”
베어크 영지의 유적은 길을 지나가다가 기이한 느낌을 받아서 찾아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즉, 존재하더라도 아주 먼 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만일 이곳에 거점을 하나 만들 수 있다면 정말로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벨루스 백작령은 향후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할 곳이었다.
“일단 이것부터 하고 꼭 찾아봐야겠군.”
제론은 아드보 나뭇잎과 가지를 커다란 통에 넣었다. 물과 섞을 때는 적당한 비율이 매우 중요했다. 2 만 명이 한
달 동안 마실 물이니 나뭇잎과 가지도 엄청나게 많이 필요했다.
통에 그것을 모두 담은 뒤 물을 가득 채웠다. 깨끗한 물이 중요했고, 또 숙성시킬 때, 반드시 섞여야 하는 몇
가지 재료도 중요했다. 그것 역시 정확한 비율에 맞춰야 한다.
초고대 문명에서는 이 모든 것을 자동으로 진행시키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아드보 나무를 키우고, 번식시키고, 거기서 잎과 가지를 채취하는 것에서부터 그걸 정확한 비율로 섞어
숙성시키고 또 물에 넣는 과정까지 인간의 손이 전혀 닿을 필요가 없었다.
제론은 그 시스템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물만큼은 꼭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통을 밀봉한 제론은 가볍게 손을 대고 마나를 흘려 넣었다. 제론의 심장에서 맴돌던 마나링이 급격히 가속했다.
우우우웅!
손바닥에서 튀어나온 마법진이 통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은은한 빛이 통을 한 번 휘감고 사라졌다.
이제 숙성 마법이 시작되었다. 이미 마법진은 통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지금 제론이 한 것은 마법진을
활성화시키고, 자신의 마력을 이용한 숙성의 가속이었다.
이제 이대로 내버려 두기만 하면 된다. 정확히 7 시간 후에 아드보 수액이 완성된다. 물론 더 지나도 된다.
시간이 지나면 마법진이 자동으로 사라지게 세팅해 뒀다.
이제 남는 시간에 유적을 찾아보면 된다. 그 전에 이걸 지킬 사람이 필요했다. 아공간에 넣을 수는 없었다.
아공간에 넣으면 숙성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제론이 견습 라이더 몇 명을 데려올까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곳으로 다가왔다. 일단의 무리가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기사인 것 같은데?”
강한 마나가 느껴졌다. 익스퍼트였다. 제론은 누가 오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벨루스 백작이었다. 제론의
시선이 통으로 향했다.
“이것 때문에 온 모양이로군.”
제론은 순간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 통을 숨기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제론은 바닥을 향해 손을 펼쳤다.
우우우웅!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 마법진은 바닥에 스며들었다.
꽈득! 꽈득! 꽈드드득!
제론의 마나링이 끌어들인 마나가 순식간에 바닥을 파헤쳤다. 커다란 구덩이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드보가 든 통을 충분히 넣을 수 있을 정도의 깊이였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통을 그 안에 넣었다.
어차피 밀봉했고, 마법을 이용해 충격을 방지했다. 또 빈틈도 마법적 처리를 통해 메웠다. 땅에 묻는다고 해서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퍽! 퍽! 퍽!
제론은 밖으로 나온 흙을 발로 차서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구덩이가 메워졌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다. 그 정도 일은 눈 몇 번 깜짝할 시간이면 끝낼 수 있었다.
땅이 평평해졌다. 누가 봐도 이곳에 그렇게 큰 통이 묻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잠시 후, 벨루스 백작이 기사 몇 명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여기에 있었군. 대체 뭘 하기에 이렇게 보기가 힘든가? 하하하하.”
벨루스 백작은 제론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다른 감정을 싹 배제하고 보니 썩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제론은 벨루스 백작을 정중히 대했다. 세나의 부모였다. 허투루 대할 수 없었다. 말레피 후작을 대할 때와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내 말 빙빙 돌리지 않고 묻겠네. 대체 아드보 잎은 왜 구한 건가?”
“물에 섞어 마시려고 구했습니다.”
“그게 효과가 있나?”
“가능성이 있는 건 다 시도할 생각입니다.”
제론은 자신이 아는 걸 다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아드보 잎을 섞은 물은 향후 에어스트 백작령의 중요한
특산물이 될 것이다.
“흐음.”
벨루스 백작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가능성이 있는 건 다 시도한다는 말이 확 와 닿지가 않았다.
“아드보 잎에 대한 건 우리 영지에서도 꽤 오랫동안 연구했네. 알고 있나?”
“그렇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만 입증했네. 만일 그냥 해 보는 거라면 굳이 시간 낭비하지 말게나.”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론은 반박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다. 어차피 준비는 다 끝났다. 이젠 기다렸다가 물에 섞기만 하면 된다.
물은 아공간에 보관할 테니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 난민은 대체 어떻게 데려갈 생각인가? 아무리 고민해도 자네 생각을 알 수 없군. 설마 남들이 다
생각하는 방법으로 데려가는 건 아닐 테고 말이야.”
“마차를 이용할 생각입니다.”
“마차?”
벨루스 백작은 제론이 가지고 있던 비밀을 풀자 반색했다. 하지만 마차라는 말에 금세 실망했다. 대체 난민이 몇
명인데 마차로 그걸 해결한단 말인가.
“마차는 보이지 않던데…….”
“곧 준비될 겁니다.”
벨루스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에는 방법을 좀 바꾸는 게 나을 것 같네. 아무래도 마차로 이동하는 건 문제가 많아. 마차 몇 대로
해결이 될 만한 상황이 아닐세. 설마 마차 수천 대를 동원할 생각인가?”
제론이 빙긋 웃었다.
“물론 그건 아닙니다. 아마 내일이면 다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내일? 마차가 내일 오기로 되어 있나?”
“그런 셈입니다.”
제론은 딱 거기까지만 대답했다. 벨루스 백작도 더 묻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늘은 시간이 어떤가? 어제는 워낙 바빠 보여서 말도 못 꺼냈군. 간단하게 술이라도 마시고 싶은데
말일세.”
“좋습니다. 오늘은 저도 일이 다 마무리되었습니다.”
나머지 일은 견습 라이더가 알아서 하고 있으니 제론이 할 일은 딱히 없었다. 물도 준비가 끝났고 말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는 동안 쓸 식량은 말레피 후작령에 남은 임시 단장이 준비하기로 했으니 오늘은 그저 쉬면
된다.
“하하하하. 그거 잘됐군. 그럼 함께 가지.”
벨루스 백작은 호탕하게 웃으며 제론을 데리고 성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만찬은 길게 이어졌다. 벨루스 백작은 제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사실 대화를 하면서 교묘하게
제론이 요즘 뭘 하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난민을 나를지 알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제론은 결코 벨루스 백작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 원치 않으면 결코 술에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 날, 제론은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일단 아드보 수액을 묻은 곳으로 가서 통을 땅에서 꺼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제론이 아드보 수액이 든 통을 묻은 장소는 원래 인적이 없는 곳이었다.
아공간에 미리 넣어둔 물통을 꺼내 그 안에 정량을 넣었다. 되도록 양을 정확히 맞추려 애썼다. 만일 양이
틀리면 약효가 많이 떨어진다.
물론 떨어진 약효로도 충분히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아드보 수액을 섞은 물은 일단 기본적인 체력 향상에 큰 효과가 있었다. 또한 신진대사를 도와 몸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음으로 사실 가장 중요한 능력인데, 수련 시 마나를 잘 받아들이도록 해 준다. 그렇기에 초고대 문명의 기사나
마법사의 경우 거의 필수적으로 아드보 수액이 섞인 물을 꾸준히 마셨다.
그 외 피부 미용에 효과가 좋고, 정력에 큰 보탬이 된다. 사실 이 효과가 현재로서는 다른 효과보다 훨씬 중요할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찾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니 말이다.
제론은 모든 통에 아드보 수액을 섞은 다음 주위를 둘러봤다. 아드보 나무가 지천에 깔려 있었다.
아드보 나무는 본줄기가 자라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잎이나 가지는 잘 자라는 편이다. 그래서 가지를
뚝뚝 잘라내도 다시 자라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벨루스 백작령에 와서 매번 아드보 잎과 가지를 채취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유적도 찾아야 하는군.”
오늘 떠날 계획이니 사실 시간도 많지 않았다. 제론은 아드보 나무가 가장 많은 지역을 우선 찾았다.
마법을 쓸 수 있으면 이럴 때 편하다. 제론은 하늘로 쭉 날아올랐다. 소드 마스터의 시력으로 하늘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쯤이야 아주 간단히 찾을 수 있었다.
“저기가 제일 의심스럽군.”
벨루스 백작령은 상당히 넓었다. 그중에서 남쪽에 아드보 나무로 완전히 뒤덮이다시피 한 큰 산이 하나 있었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그 산으로 날아갔다. 거기 말고도 아드보 나무가 많은 곳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그 산을
보니 느낌이 확 왔다.
산꼭대기에 내려선 제론은 베어크 영지에서의 느낌을 살리려 애썼다.
아래에 유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 산에 고대 유적이 있고, 그 아래에 초고대 유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제론은 눈을 지그시 감고 감각을 집중했다.
예상은 맞았다. 예전 그 느낌이 찾아왔다. 한데 감이 너무 멀었다. 방향은 확실히 잡을 수 있었다. 바로
발아래였다.
즉, 산 때문에 감이 멀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사실 초고대 문명의 유적은 일종의 아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실제로는 유적을 코앞에 두고도 거기에 유적이
있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 거리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멀게 느껴진다는 건 이 산에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일단 유적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산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알아볼 방법을 만들 수
있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룽!
바람이 뭉치며 아네모스가 나타났다. 제론은 그것을 팔찌에 넣었다.
화아악!
빛이 일었다. 제론은 유적에 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나타난 결과는 완전히 의외였다.
“그대로라고?”
분명히 아네모스와 팔찌가 반응을 했다. 그런데 유적에 갈 수 없었다. 제론은 여전히 산꼭대기에 서 있었다.
이 산에 유적에 가는 것을 방해하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과연 그게 무엇일까?
제론은 일단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조사할 방법은 태블릿뿐이었다. 태블릿에서 검색을 하다 보면 분명히
뭔가 정보가 나올 것이다.
어쨌든 일단은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난민을 나르는 한 달 동안 꾸준히 검색을 해서 알아내기로 했다. 이것을
알아내면 뭔가 큰 변화가 올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제론은 오늘 느꼈던 그 감각을 음미하며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이제 벨루스 백작령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Chapter 9 강행군

다들 입을 쩍 벌렸다. 너무 놀라면 말문이 콱 막힌다. 지금이 딱 그랬다.


엄청난 크기의 강철 마차 25 대가 나란히 늘어선 광경은 그야말로 굉장했다.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난민은 물론이고 미리 알고 있던 견습 라이더들 조차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특히 연락을 받고 달려온 벨루스 백작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경악한 표정이었다.
“대체 저걸 어디서 가져온 건가!”
벨루스 백작의 물음에 제론은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저걸 모두 아공간에 담아 왔다고 하면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아공간 아티팩트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것이 설사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유물 중에서도 아공간 아티팩트는 상당히 귀했다. 그렇기에 값을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쌌다.
현재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아공간이 바로 기간트 장비였다. 10 미터가 훌쩍 넘는 기간트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아공간이니 엄청난 크기였다.
하지만 그 아공간에는 기간트 외에 다른 물건을 거의 담을 수 없었다. 기간트 하나만 담아도 공간이 꽉 차기
때문이었다.
기간트의 마나 코어를 이용해 아공간을 만드는 건데, 그 한계를 적당히 정해야지 안 그러면 마나 코어가 자칫
망가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출력이 낮은 실바의 경우 아공간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실바는 아공간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실바도 잘 만들기만 하면 또 뭔가 편법을 동원하면 아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어쨌든 아공간은 그만큼 희귀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아공간에 대한 얘기를 해 봐야 믿기도 어렵고, 또 득
될 것도 없었다.
아공간의 존재를 믿으면 그걸 욕심내는 사람이 반드시 나올 것이다. 그건 정말로 귀찮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저 크고 무거운 마차를 대체 어떻게 끌고 갈 생각인가? 설마 말을 구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론은 그렇게만 말하고 견습 라이더들을 쳐다봤다.
그 눈길에 견습 라이더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일단 난민을 가까이 모았고, 적당히 인원을 나눠 마차에 태웠다.
강철 마차는 넓었지만 쾌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안전과 속도에 맞춰서 제작한 마차였다.
불편함은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아드보 수액이 담긴 물, 아드보 워터로 해결해야만 한다.
“대체 뭘 어쩔 생각인지……!”
벨루스 백작은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난민을 통솔하는 견습 라이더들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설마 하는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설마 저기 저 기사들이 몽땅 라이더는 아니겠지?”
견습 라이더의 복장은 일반적인 라이더와는 많이 달랐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라이더가 타는 기간트는 장비부터
달랐다.
일단 상체는 가죽 갑옷이었고, 허리춤에 찬 롱소드와 양팔에 찬 팔찌, 그리고 손가락에 낀 반지 하나가 전부였다.
기존의 기간트 장비가 철로 이루어진 흉갑과 방패를 기본으로 하는 걸 생각하면 정말로 파격적인 변화였다.
게다가 검도 롱소드인 경우가 거의 없었다. 상당히 컸다. 보통은 양손검이었고, 좀 괜찮은 기간트의 경우
양손검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롱소드보다는 훨씬 큰 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니 누구도 제론이 데려온 견습 라이더가 기간트를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간트 라이더는 자신의 장비를 정말로 아낀다. 한데 제론의 견습 라이더는 그러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 상당히 튼튼하게 제작이 되었고, 파손 방지 마법진이 추가되어 있기에 아무리 험하게 다뤄도 목숨
걸고 싸우지 않는 한, 망가질 확률이 제로에 가까웠다.
벨루스 백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이 난민이 모두 강철 마차에 올라탔다.
강철 마차는 성인 400 명을 기준으로 제작되었기에 실제로는 공간이 살짝 넉넉했다. 아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마차 안에는 생리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구석에 있었고, 마차 앞부분 위쪽에 라이더가 쉴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교대한 라이더는 최대한 편안히 쉬어야 한다. 그래야 강행군이 가능할 테니까. 마차를 제작할 때 그 부분도
상당히 신경을 썼다.
“준비해라.”
제론의 명령이 떨어졌다.
견습 라이더는 임시 단장을 중심으로 알아서 모든 일을 상의했다. 그들은 각각 조를 나눠서 교대할 타이밍을
정했다. 제론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선발된 견습 라이더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즉시 마차에 올라탔다. 라이더를 위한 자리는 휴식
공간이기도 했지만, 마차 안을 감시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마차의 윗부분에 매달리듯 붙은 자리였기에 앉아서 고개만 돌려도 아래가 쫙 내려다보였다. 위에서 아래를 보면
대부분의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현재 라이더의 수는 총 150 명이었다. 6 인 1 조를 이뤘고, 5 명이 마차에 타고 남은 한 명은 마차 앞에 서서
기간트를 소환했다.
25 대의 기간트가 불쑥불쑥 나타났다. 기종은 카타락타였다.
벨루스 백작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설마 정말로 기간트가 나올 줄은 몰랐다.
“기간트로 마차를 끌 생각을 하다니, 누구나 떠올릴 수 있지만 실행할 마음을 먹기 어려운 일이로군.”
벨루스 백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제론이 아니라면 쉽게 떠올리거나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자신이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저 방법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벨루스 백작이 감탄 어린 시선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정말 대단해. 이번 일 성공할지도 모르겠어. 그나저나 함께 데려온 기사가 전부 기간트를 가지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말레피 후작령에 50 명이 남아 있으니 총 200 명의 라이더를 데려온 셈이군요.”
다들 혀를 내둘렀다. 200 명의 라이더라니. 그 정도 라이더를 언제 키웠단 말인가. 게다가 다들 기간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기간트가 200 기나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기간트가 총 몇 기나 있는 건가?”
제론은 빙긋 웃었다.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물론 벨루스 백작도 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놀람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뿐이었다.
“이번 일, 성공하겠군.”
“그럴 생각입니다.”
“다만 난민이 버틸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네.”
“그 부분도 이미 대책을 마련해 뒀습니다.”
“설마 그 대책이 아드보 나무는 아니겠지?”
벨루스 백작의 말에 제론은 또 빙긋 웃었다. 그는 아드보 나무에 대해 제론이 해 준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런 질문을 이 타이밍에 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레피 후작령의 난민도 실어 날라야 해서.”
벨루스 백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아, 참. 그건 그렇고 고철 기간트는 실었나?”
“예. 그건 미리 조치를 취했습니다.”
언제 조치를 취했는지 모르겠지만, 벨루스 백작은 왠지 더 고민하기가 싫었다. 그는 손을 한 번 내저었다.
“그럼 됐으니 이만 가 보게. 시간도 없을 텐데.”
“보여 주신 호의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훌쩍 몸을 띄워 가장 앞에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라이더의 자리였는데, 제론은 그 위에
위태롭게 섰다. 물론 보기에만 위태로울 뿐이었지 실제로 제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출발!”
제론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25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쿵!
25 개의 강철 마차가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것이 바로 기간트의 힘이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걷던 기간트들이 점점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달리지는 않았다. 아직 달리기에는 숙련이 모자랐다. 달리라고 제론이 명령하면 그래도 달릴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정확히 줄을 맞춰 이동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제론의 목표는 한 달 안에 이들이 빠른 속도로 줄을 맞춰 달릴 수 있을 정도의 실력과 감각을 갖추는 것이었다.
충분히 가능한 목표였다.
쿵쿵쿵쿵!
강철 마차를 뒤에 매단 25 기의 기간트가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그들이 가는 방향에는 말레피 후작령이 있었다.

☆ ☆ ☆

대륙에 알려진 소드 마스터의 수는 총 3 명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비밀리에 계획적으로 육성된
소드 마스터도 존재했고, 소드 마스터가 되어 은둔의 삶을 사는 경우도 있었다.
알려진 세 명의 소드 마스터 중 2 명은 크란 제국에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란체 왕국에 있었다.
란체 왕국은 전통적으로 검을 숭상하는 왕국이었다. 그렇기에 환경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소드 마스터가 나오기
적당한 곳이었다.
기간트가 전장을 지배하는 현실 앞에서 소드 마스터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다.
하지만 반드시 상징만 남은 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라이더의 검술 실력은 기간트를 타는 데 큰 도움이 안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소드 마스터는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기간트 실력이 월등히 높아진다. 물론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소드 마스터
본인이거나 아니면 그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만 알고 있었다.
기간트 실력이 어느 정도로 늘어나느냐 하면, 예민한 감각과 마나에 대한 감응력으로 인해 보통 라이더는
불가능한 일까지 해낼 수 있었다.
즉, 소드 마스터가 되면 자동으로 기간틱 마스터가 된다.
제론이 전쟁에서 실바를 타고 엄청난 전공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사실 그 영향이 컸다. 제론은 이미 그때 현재
말하는 소드 마스터가 된 상황이었으니까.
사실 소드 마스터가 되려면 제대로 된 마나 호흡법과 마나 운용법을 익혀야 한다.
한데 현재의 소드 마스터는 그런 것 없이 마스터가 되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익스퍼트였지만, 현재 누구도
그게 원래는 익스퍼트라는 것을 몰랐다.
그냥 무조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러서 나름의 깨달음을 얻고 마나에 대한 감응력을 키워 벽을 부순 것이 현재의
소드 마스터였다.
그게 가능하려면 엄청난 재능이 필요했다. 검에 대한 재능도, 또 마나에 대한 재능도.
그리고 검에 미칠 정도로 몰두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눈곱만큼의 가능성이 열린다.
현재의 소드 마스터는 바늘구멍만 한 가능성을 통과해 경지를 이뤄낸 자들이었다.
당연히 성격도 범상치 않았다.
란체 왕국의 소드 마스터는 공작이었고, 크란 제국의 소드 마스터는 후작이었다.
그리고 크란 제국의 소드 마스터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관철시키는 걸로 유명했다.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크란 제국의 황제와 크란 제국 마탑의 주인밖에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의 귀에 변방의 여러 나라 중 하나인 레늄 왕국과 벨룸 왕국의 전쟁에 관한 얘기가 들어갔다.

크란 제국의 소드 마스터 중 하나인 슐란 후작은 흥미로운 눈으로 보고서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재미있군. 이놈 소드 마스터일 확률이 높아.”
슐란 후작은 그렇게 말하며 불같은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제론이라는 놈은 아직 30 살도 되지
않았다.
“내가 소드 마스터가 된 게 몇 살 때였지? 52 였나?”
현재 슐란 후작의 나이는 무려 65 세였다. 그런데도 아직 정정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결코 그 나이로는 보지
않는다. 고작해야 40 대 중반 정도로 볼 뿐이었다.
그는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성격이 상당히 급해졌다. 그리고 가끔 피를 갈구하기도 한다.
신분을 속이고 다른 왕국의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하기도 하는 건 다 그런 이유였다.
슐란 후작은 질투심과 함께 살의가 치밀어 올랐다.
“이번에는 몰래 가면 문제가 생기려나?”
신분을 숨기고 용병일하는 거야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그저 깽판이나 한 번 치고 마는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록 변방의 왕국이라 하지만 백작과의 일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제법 전통 있는 가문이었다.
슐란 후작은 일단 나서면 피를 안 보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럼 외교적 문제가 생긴다.
물론 크란 제국이 그깟 외교 문제에 눈 하나 꿈쩍할 리 없지만, 문제는 슐란 후작이었다.
그 일을 빌미로 입지가 줄어들 수도 있었다. 이제야 권력의 맛을 조금씩 알아 가는 중인데 그걸 잃어버리기는
싫었다.
이럴 때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그 일을 잘 처리할 사람을 하나 대동하면 된다. 슐란 후작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적당한 인물을 물색했다.
“뤼게 백작이 좋겠군.”
슐린 후작은 곧장 저택을 나섰다. 뤼게 백작은 아마 황궁에 있을 것이다. 수도에 자리를 잡은 고위 귀족은 할
일이 있건 없건 황궁에서 시간을 보낸다. 사실 이 시간에 저택에 있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황궁으로 향하는 슐린 후작의 눈에서 위험한 빛이 번득였다.

☆ ☆ ☆

집무실에서 몇 가지 사안을 확인하던 말레피 후작은 갑작스런 기사단장의 방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가?”
“기간트 부대가 영지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말레피 후작의 안색이 굳었다. 지금의 레늄 왕국은 전쟁으로 미쳐 돌아가고 있다. 아무리 중립
세력이라지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공격할 가능성도 있었다.
“몇 기나 되나?”
“25 기 정도인 것 같습니다.”
“25 기?”
“예. 한데…….”
“뭔데 망설이나? 말해 보게.”
“기간트들이 뭔가 커다란 것을 끌고 있습니다.”
“커다란 것?”
“마차를 크게 키워 놓은 모양입니다. 아직 멀어서 제대로 확인은 못했습니다.”
말레피 후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뭔가 심상치가 않았다. 그 커다란 마차 같은 것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일단 전령을 보내긴 했습니다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전령이 그들의 목적이나 소속을 물어보러 갔지만 만일 그들이 적이라면 전령의 목을 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곧장 전투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하게. 일단 기사단을 준비시키게. 나는 주변 영지에 이 사실을 알리겠네.”
어쩌면 이건 중립 지역의 영지를 다시 묶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적 앞에서는 하나로 뭉치기가 훨씬 쉬운
법이니까.
그렇게 결정하고 막 움직이려는 찰나, 기사 하나가 다급히 들어왔다.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뭐라던가?”
말레피 후작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전령이 도착했다면 막무가내로 전투를 벌이지는 않을 거란 뜻이다. 즉,
준비할 시간이 늘어났다고 보면 된다.
“그게…… 에어스트 백작님이었습니다.”
“뭐라고?”
말레피 후작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에어스트 백작이라니, 그가 왜 기간트를 끌고 온단 말인가.
“기간트가 끄는 마차에 난민을 잔뜩 태우고 왔습니다. 벨루스 백작령의 난민이라고 합니다.”
순간 말레피 후작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기간트로 거대한 마차를 끌고 갈 생각을 하다니!
“허어. 이거 한 방 먹었군. 생각해 보니 그렇게 하면 분쟁 지역을 지나가도 거의 문제가 없겠어.”
기간트 수십 기가 동시에 이동하는데 누가 괜히 건드리겠는가. 이동 경로에 있는 영지들은 혹시라도 공격할까 봐
전전긍긍할 것이다.
가끔 길을 열어 주지 않는 영지도 있을 수 있지만, 그거야 미리 경로를 잘 짜면 된다. 강력한 힘을 가진 영지
외에는 결코 길을 막지 않을 테니까.
“25 기라고 했나?”
“예. 일단 25 기인데, 우리 영지의 난민까지 다 데려가기 위해 총 50 개의 강철 마차를 준비했다고 들었습니다.”
“50 개의 강철 마차라…….”
그럼 기간트로 50 기가 있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웬만한 영지는 그냥 납작 엎드려야 한다.
설사 전력이 그보다 월등하더라도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다. 50 기의 기간트와 싸우려면 피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내전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력을 깎아 먹는 바보짓을 누가 하겠는가.
“후우. 일단 나가 봐야겠군.”
말레피 후작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제론과 한 내기가 떠올랐다.
물론 후작이 한 게 아니라 딸인 밀레나가 한 내기지만, 후작이 한 거나 다름없는 내기였다. 문득 제론이 과하지
않은 조건을 걸었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어차피 이길 내기라 이건가?”
말레피 후작은 헛웃음이 나왔다. 절반도 안 되는 나이를 먹은 청년에게 정말 호되게 당했다. 그리고 바이스의
선택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그 녀석도 보통이 아닌데 누군가를 섬길 생각을 했으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밖으로 나간 말레피 후작은 어느새 도착한 제론 일행을 볼 수 있었다. 역시 기간트는 기간트였다. 그 짧은 시간
만에 여기까지 오다니 말이다.
“솔직히 감탄했네. 이런 방법을 쓸 줄이야. 그나저나 기간트를 너무 많이 차출한 거 아닌가? 자칫 영지 방어에
구멍이 뚫릴 수도 있을 텐데.”
“바이스가 알아서 잘하고 있을 겁니다.”
말레피 후작은 머쓱하게 웃었다. 아들 칭찬을 하는데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언제 떠날 생각인가?”
“전 바로 떠나고 싶습니다. 벌써 시간을 많이 지체해서 좀 걱정이 되는군요.”
“그렇게 하게. 필요한 게 있으면 준비해 줄 테니 미리 말해 두게.”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말레피 후작은 아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밀레나와 잘되길 정말로 바랐는데, 보아하니 쉽지 않을 듯했다.
“내기도 아예 지금 마무리하는 게 어떤가? 어차피 자네가 이긴 거나 다름없어 보이는데.”
제론이 빙긋 웃었다.
“그래도 아직 끝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생각 외로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고요.”
말레피 후작은 졌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제론의 말을 방심하지 않고 긴장감을 유지하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럼 전 난민을 보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제론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난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강철 마차를 꺼내야 하기에 서둘러야 했다. 일단 좀
떨어진 곳에 마차를 꺼내 놓고 기간트를 이용해 끌고 올 계획이었다.
말레피 후작은 멀어지는 제론을 보며 입맛을 한 번 다셨다. 정말로 아까웠다.
“밀레나를 다시 한 번 설득해 봐야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말레피 후작은 나란히 늘어선 강철 마차를 보며 그 위압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확실히 이
정도 준비를 했으면 자신만만할 만했다.
“대단해…….”
말레피 후작의 입에서 나직한 찬탄이 흘러나왔다.

제론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말레피 후작령을 떠났다. 난민의 상태는 상당히 좋아져 있었다. 후작령에 남아 있던
견습 라이더들이 제법 애를 써서 관리했기에 예상보다 훨씬 건강해졌다.
어차피 남은 한 달은 아드보 워터가 그들의 건강을 지켜줄 테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었다.
게다가 고철 기간트도 상당히 많은 양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무려 42 기의 고철 기간트를 말레피 후작이 확보해
주었다. 후작도 나름대로 애를 쓴 것이다.
이제 20 기 정도만 더 구하면 네이드 후작이 얘기한 숫자를 맞출 수 있었다. 바인에게 미리 연락을 취해 뒀으니
알아서 준비할 것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본격적인 강행군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난민의 수는 2 만 명이 넘었다. 그러니 별의별 사람이 다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부분 밑바닥을 전전하며
생활하던 사람들이었지만, 개중에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은 물론이고 제법 교육을 받은 사람도 섞여 있었다.
그중 엔트는 몰락 귀족의 후손이었다. 상당한 지식을 쌓았고, 또 원래는 영지를 다스릴 예정이었는지라 후계자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었다.
엔트는 은연중 난민 중 일부를 이끄는 입장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원하지 않았지만 조금씩 떠밀려서 하다 보니
어느새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 버렸다.
몰락하긴 했어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후계자 교육을 받으면서 상당한
검술 수련을 쌓은 것도 도움이 되었다.
사실 엔트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난민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예상했기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또, 만일 정말로 그런 상황이 오면 사람들을 선동해 한번 확 뒤집는 시도라도 해 볼까 계획하기도 했다.
그래도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벨루스 백작령에 갔다. 그나마 난민을 학대하지 않는 영주라는
나름대로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엔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벨루스 백작령은 난민에 대한 대우가 다른 영지에 비해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일단 난민의 수가 너무 많았다. 벨루스 백작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가 버렸다. 또한 언제 또 난민이 더
몰려올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버틸 만했다. 엔트는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내전이 끝날 것이고, 그러면 어떻게든 살 방도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한데 그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벌어졌다. 벨루스 백작이 난민의 처리를 에어스트 백작에게 맡겨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엔트도 나름 기대를 했다. 에어스트 백작에 대해서는 전쟁 영웅이라는 것밖에 모르지만 그래도 난민을
맡기로 한 이상, 다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에어스트 백작은 그 모든 예상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다.
전쟁이 한창인 곳을 가로질러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간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절대 말이 안 되는
계획이었다. 난민을 다 죽이려는 게 아니라면 어찌 그런 일을 시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엔트는 기회를 봐서 들고 일어나려고 준비를 했다. 어차피 목숨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 그저 난민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귀족들에게 경각심이라도 일으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일이 잘되어서 에어스트 백작을 사로잡거나 무기라도 얻을 수 있다면 더 좋고 말이다.
무기를 든 난민은 더 이상 그냥 난민이 아니다. 강력한 무력 집단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엔트의 계획은 시작부터 산산조각 났다. 에어스트 백작이 무려 25 대나 되는 기간트를 끌고 온 것이다.
게다가 난민을 거대한 강철 마차에 실어 버렸다.
엔트는 묘한 기분이 되어 강철 마차 안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벨루스 백작령을 떠난 난민이 말레피
후작령에 들렀다가 수도로 출발하는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한참 생각에 열중하고 있을 때, 엔트를 가장 잘 따르는 사내가 다가왔다.
“엔트 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별거 아니다. 그저 에어스트 백작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을 뿐이다.”
“뭐, 별거 있겠습니까? 어쨌건 귀족이고 영주이니 다 똑같은 놈이겠지요.”
“그래. 아무래도 그렇겠지.”
엔트는 그렇게 대꾸해 주고는 또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번에도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나저나 거사는 언제 치르실 생각이십니까? 다들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크게 한바탕하고 싶어서
다들 근질근질 한가 봅니다. 흐흐흐.”
그 말에 엔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한바탕하긴 뭘 한단 말이냐. 기간트가 몇 기나 있는지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엔트는 사실 정말로 놀랐다. 기간트가 교대로 마차를 끄는데, 마차의 수가 무려 50 개였다. 즉, 50 기의
기간트를 동시에 운용하는 것이다.
한데 기간트의 수는 50 기가 아니었다. 서로 기간트에 탄 채로 이동 중에 교대를 한다. 교대한 라이더는 기간트를
아공간에 돌려보낸 후, 달려서 마차를 쫓아와 올라탄다.
즉, 최소 기간트의 수가 100 기는 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라이더의 실력도 굉장했다. 어떻게 달려서 기간트가
끄는 마차를 쫓아와 올라탈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부리면 다들 죽은 목숨일 것이다. 엔트는 그래서 그 계획을 그냥 접었다. 한데
계획을 함께하기로 한 사내들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에이, 기간트에 타야 강한 거지. 기간트에 타지만 않으면 다들 똑같은 사람 아닙니까. 게다가 우리 숫자가
몇인데 그러십니까? 설마 겁먹으신 거 아니죠?”
엔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저 라이더들은 전부 기사다. 그것도 상당한 실력이다. 아마 100 명이 달려들어도 혼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럼 우리가 먼저 저 영주를 잡으면 되죠. 대장이 잡혔는데, 설마 우릴 다 죽일 수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압니까? 영주를 잡고 협박하면 기간트라도 내줄지.”
엔트는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쉽게 생각하는구나.”
“쉽죠. 들어 보니 저 영주가 말레피 후작이랑 내기를 한 모양입니다.”
“내기?”
“예. 우리를 에어스트 백작령까지 데려가는 동안 1000 명이 넘게 죽으면 지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1000 명?”
엔트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희생자를 1000 명 이하로 줄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강행군을 계속하면 난민의
체력으로는 결코 버틸 수가 없었다.
엔트가 판단하기에 아무리 잘 해도 5000 명은 죽어야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후하게 잡은 숫자였다. 어쩌면 절반 이상이 죽을 수도 있었다.
한데 고작 1000 명 이하라니. 엔트는 직감적으로 제론의 목표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하긴, 이런 일을 태연히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대책도 세웠겠지.’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한없이 초라해졌다. 자신은 왜 고작 이것밖에 안된단 말인가.
“즉, 에어스트 백작은 우리를 쉽게 죽이지 못한다 이겁니다. 이번에 거사에 동참하기로 한 인원이 무려 800
명입니다. 그걸 다 죽이면 내기에 이길 수 있겠습니까?”
사내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내기에 걸린 게 무려 강철 3 만 톤이랍니다. 그러니 쉽게 내기를 포기할 리도 없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렇다. 엔트는 사내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일을 치르려고 나서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그가 보기에는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하지만 엔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에어스트 백작은 결코 만만하거나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튼 엔트 님은 반대라 이겁니까?”
“그래. 난 생각 없다. 그리고 너희들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에어스트 백작은 네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다. 이런 일도 예상 못 했을 리가 없어. 아마 시작도 하기 전에 당할 거다.”
사내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거야 겁먹은 엔트 님 생각이고요. 제 생각은 많이 다릅니다. 아마 우리는 기간트까지 보유한 산적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사내는 위험한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혹시 압니까?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힘을 조금만 가져도 우리만의 나라를 세울 수 있을지.”
엔트는 사내의 눈에 감도는 욕망과 야망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더 얘기해 봐야 소용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함께 하지 않을 겁니까?”
엔트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사내가 왜 자신을 끌어들이려 하는지 충분히 알기에 더 동참하기 싫었다.
이용당하는 건 여기까지였다.
“겁쟁이.”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 엔트를 떠나갔다. 그리고 조용히 돌아다니며 거사에 동참하기로 한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계획을 맞췄다.
함께 일을 벌일 사람은 무려 800 명이었다. 하지만 그중 300 명만 이 마차에 탔고, 나머지는 다른 마차에 섞여
있었다.
그러니 일단 틈을 만들어야만 했다. 기회가 와야 일을 벌여도 벌일 테니까 말이다.
엔트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버렸다. 더 생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는 사람도 마음에 걸렸고, 혹시라도 에어스트 백작에게 무슨 일이 생겨 이 일 자체가 무산될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
더욱 깊은 자괴감이 들었다. 엔트는 뻥 뚫린 천장을 통해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다가 질끈 눈을 감았다. 왠지 저
맑은 하늘을 보기 싫었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다.

Chapter 10 소드 마스터

네이드 후작은 제론이 떠나간 뒤에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제론이 영지에 없을 때 일을 처리해 버리면 훨씬
간단했다. 어쨌든 제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밀어붙일 수 있으니 말이다.
100 만 골드를 준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전 때문에 예전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네이드 후작령은 교통의
요지라는 이점을 이용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으니까.
“에어스트 백작령에 연락하라는 일은 어찌 되었느냐! 왜 소식이 없어!”
네이드 후작의 호통에 행정관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결과를 가져왔다.
“연락되었습니다! 언제든 후작님께서 원하실 때 만날 수 있게 조치를 취해 뒀습니다.”
“잘했다. 그럼 지금 당장 가자.”
“예? 지금 당장 말입니까?”
네이드 후작이 씨익 웃었다.
“원래 이런 일은 틈을 주면 안 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밀어붙여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네이드 후작은 곧장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향했다. 수행원과 기사를 잔뜩 이끌고 말이다.
200 명이나 되는 라이더가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이럴 때 기간트를 보유한 기사를 잔뜩 데려가 압박을 주면 더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네이드 후작은 상당히 서둘렀다. 에어스트 백작령이 뭔가 다른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정말로 고철 100 개를 내놓으면 큰일이니 말이다.
후작은 엔지니어를 비롯한 기간트 전문가를 10 명이 넘게 데려갔다. 혹시라도 에어스트 백작령이 꼼수를 써서
고철 기간트를 급조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서두른 덕분에 네이드 후작은 엄청나게 빠르게 에어스트 백작령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백작성으로 향했다.
절반쯤 갔을 때, 백작성에서 네이드 후작을 맞이하기 위해 보낸 사람을 만났다. 그들의 당황한 얼굴을 보는
네이드 후작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완전히 적중했군.’
네이드 후작은 성공을 예감하며 에어스트 백작령의 관리와 기사들을 재촉해 길을 서둘렀다. 거의 순식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백작성에 도착했다.
성문 앞에 바이스가 나와 있었다. 네이드 후작은 기분 좋게 웃으며 바이스에게 다가갔다.
“어서오십시오. 후작님.”
바이스가 최대한 정중히 인사를 했다. 네이드 후작은 살짝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 반갑네.”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많이 당황했습니다.”
“하하하하. 당황스러울 건 또 뭔가. 어차피 할 일이니 미루고 싶지 않아서 왔을 뿐이라네.”
“한데 정말로 고철을 사실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바이스의 표정에 드러난 감정을 정확히 캐치한 네이드 후작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이미 에어스트 백작과는 얘기가 다 끝났네.”
“언제 물건을 받으시겠습니까?”
“지금 물건을 받아 가겠네. 그러려고 이렇게 서둘러서 많이 데려온 것 아닌가.”
네이드 후작이 그렇게 말하며 뒤에 도열해 있는 기사들을 슥 둘러봤다. 네이드 후작이 데려온 기사는 무려 50
명이나 되었다. 전부 라이더였다.
“자, 이제 자네 차례네. 망가진 기간트를 가져오게. 정확히 100 기면 되네. 그걸 주고 이 돈을 가져가면
되네.”
네이드 후작이 워낙 강하게 나오는지라 바이스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니
바이스의 얼굴이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면 계약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증인을 세워도 되겠습니까? 마침 디아만트 상단에서 파견된 분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쪽에 뭔가가 있다는 걸 강하게 어필하는 말이었다. 네이드 후작은 그 말에 속으로 크게 웃었다. 디아만트
상단의 사람이 에어스트 백작령에 있다는 건 미리 조사를 통해 알아봤다.
그리고 그렇게 조사할 때 몇 번이나 기간트 상황에 대해서 조사했다.
네이드 후작이 심은 끄나풀은 영지전에서 수거한 기간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했다. 부서진 것도 많지 않았고
전부 고쳤다는 것이 일관된 보고였다.
게다가 에어스트 백작령의 엔지니어들은 기간트 수리 능력이 엄청나다고 한다. 아마 완벽하게 수리되었을 거라는
보고를 불과 어제 받았다.
네이드 후작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바이스를 바라봤다. 어서 기간트를 가져오라는 압박이었다.
“좋네. 그럼 그렇게 하지. 하지만 난 지금 당장 물건을 받아야겠네. 그러니 즉시 준비해 주게.”
“공증을 끝내면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고철이 없으면 제대로 된 기간트라도 내와야 하네. 알고 있겠지?”
“그것이 계약이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철이야 얼마든지 준비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네이드 후작이 서늘한 눈으로 바이스를 노려봤다.
“만일 날 속이려 하면 가만두지 않겠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일단 공증인부터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바로 공증인이 도착했다. 놀랍게도 디아만트 상단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남작의 작위까지 가졌다.
막상 거기까지 가니 네이드 후작은 겁이 덜컥 났다. 만일 자신이 바이스 입장이라면 이쯤해서 계약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위약금으로 상황을 끝내려 했을 것이다.
한데 이건 너무 많이 왔다. 더구나 이렇게 되고 보니 공증인도 바이스가 미리 준비한 것 같았다.
‘이거 내가 된통 당하는 거 아냐?’
그렇게 겁이 나니 섣불리 계약서에 서명을 할 수가 없었다. 아직 계약을 정식으로 한 게 아니다. 우기면 위약금
따위 없이 그냥 계약을 없던 일로 돌릴 수도 있었다.
그 순간 바이스의 다리가 보였다. 우연이었다. 한데 바이스가 아주 약하긴 하지만 다리를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극도로 긴장했다는 뜻이었다.
네이드 후작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바이스가 대동한 기사들이 어딘가 주눅이 들어 보이는 점, 그리고 공증인으로 따라온 사람의 눈빛이 어두운 점,
마지막으로 아직 표정을 숨기기에는 경력이 부족한 젊은 행정관들의 얼굴이었다.
“좋아. 서명하지.”
네이드 후작은 멋지게 사인을 마쳤다. 그리고 바이스에게 계약서를 슥 밀었다. 그리고 어서 서명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네이드 후작 뒤에 선 기사들이 강렬한 눈빛으로 압박을 보낸 건 덤이었다.
결국 바이스는 서명을 했다. 공증인이 계약서를 확인하고는 자신의 서명까지 거기에 넣었다.
“이로써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양측은 계약을 이행하십시오.”
공증인의 말에 네이드 후작은 즉시 품에서 100 만 골드를 꺼내 계약서가 놓인 탁자에 내려놓았다.
바이스는 그것을 챙기며 뒤에 늘어선 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가져와라!”
기사 몇 명이 기간트를 소환했다. 사실 그들은 아직 정식 기사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지독한 훈련을 받다가
바이스의 호출로 여기까지 온 견습 기사였다.
그들은 이번 일이 실패하면 지금까지의 훈련은 애들 장난처럼 여겨지는 지옥 같은 훈련을 시키겠다는 카이트의
협박을 받고 왔다.
그러니 어딘가 주눅이 들고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건 당연했다. 만일 이들이 좀 더 경험이 많은 견습 기사였다면
조금 태도가 달랐을 것이다.
네이드 후작은 뭔가 낌새가 이상해 당황한 눈으로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시선이 행정관들에게로
향했다. 다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깜짝 놀랐네.’
행정관의 표정을 보니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들었다. 네이드 후작은 느긋한 마음으로 바이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서둘러 어딘가로 향하는 기사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라이더를 50 명 데려왔으니까…… 1 인당 2 기씩 들고 가면 되겠군.’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에어스트 백작령의 견습 기사들이 각각 고철을 몇 개씩 들고 왔다.
쿵! 쿵!
기간트 모양의 고철이 바닥에 놓였다. 네이드 후작은 당황해서 자신이 데려온 전문가들을 쳐다봤다. 네이드
후작령의 엔지니어들이 즉시 투입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연이어 고철 기간트가 바닥에 놓였다. 그리고 엔지니어들이 그것을 일일이 확인했다.
모두 진짜 고철 기간트였다. 격렬한 전투로 인해 부서진 기간트였다. 마나 코어가 부서져 회생이 불가능한
것들뿐이었다.
처음에는 네이드 후작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몇 기 있던 고철일 거라고 여겼다. 한데 그 수가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심장이 덜컥 덜컥 내려앉았다.
이내 100 기의 기간트 고철이 쌓였다.
바이스는 네이드 후작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네이드 후작은 급히 고개를 돌려 행정관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철 기간트 더미와
바이스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당했구나!’
당해도 된통 당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왜 이따위 무모한 일을 벌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철을 100 만
골드에 사겠다고 먼저 나서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었다.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디아만트 상단의 공증까지 받았으니 계약을 무를 수도 없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단단히 걸린 기분이었다.
더 이상한 건 대체 저 고철 기간트들을 언제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분명히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고철 기간트가 없었다. 이곳에 심어 놓은 무수한 세작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보고했다.
한데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좀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바이스가 걱정 어린 눈으로 그렇게 말하자, 네이드 후작은 고개를 저으려다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피곤하군. 오늘 하루 쉬었다가 내일 돌아가겠네.”
“며칠 편히 쉬었다가 가십시오.”
바이스의 말에 네이드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이를 갈았다. 10 만 골드도 안 나가는 물건을
100 만 골드에 팔았으니 이 정도 호의야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그날 네이드 후작은 휘하 기사들을 은밀히 파견했다. 실력이 뛰어난 자들만 파견해 에어스트 백작령에 심어 둔
세작의 동태를 살피도록 지시했다.
그는 자신이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계기가 바로 그들이라고 여겼다. 지속적으로 세작이 보내온 정보가 계속해서
떠밀었다고 생각했다.
일부분은 맞는 얘기였다. 하지만 결국 선택은 본인이 했다. 사실 처음 제론을 만나 대화를 나눈 순간부터 일이
꼬인 것이다.
당시 제론은 은밀하게 암시 마법을 걸었다. 만일 네이드 후작이 당시 흔들리지 않았다면 마법에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암시가 결국 네이드 후작을 여기까지 몰고 온 것이다. 물론 그 동안 세작이 보낸 정보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네이드 후작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너무나 억울했다. 눈 뜨고 100 만 골드를 빼앗겼는데 속이 안 쓰리고
배기겠는가.
“젠장. 그 고철 더미를 어디다 써먹지?”
남은 건 부품을 하나하나 분해해 팔아먹는 건데, 네이드 후작은 그건 지독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냥 고철로 다른 데 넘기는 게 훨씬 나았다.
하지만 지금은 고철 값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연이은 전쟁으로 기간트가 계속 부서져 나가니 쌓이는 게
고철이었다.
그런 고철을 무려 100 만 골드나 주고 샀으니 속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을 때, 밖으로 나갔던 기사가 돌아왔다.
“어떻게 됐나?”
“돈을 주고받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돈을 주고받아?”
“정보원들에게 나눠 주라며 돈주머니를 건네더군요.”
네이드 후작은 이를 갈았다. 결국 세작들이 배신을 한 것이다. 세작을 키우느라 얼마나 돈과 시간을 들였는데,
그놈들이 배신한 것도 모자라 100 만 골드나 되는 손해를 안긴 것이다.
“싹 잡아들여.”
“그냥 나서서 잡는 건 에어스트 백작령과 마찰이 생길 소지가 있습니다.”
“협조를 구해!”
“예? 혀, 협조 말입니까?”
네이드 후작령의 세작을 잡으려 하니 도와 달라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기사가 당황하자, 네이드 후작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우리 영지에서 도망친 범죄자라고 하면 되잖아! 알아도 눈감아 줄 거야! 세작이 사라지는데 당연히 협조하겠지!
어서 움직여! 도망가기 전에!”
“아,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서둘러 방에서 나갔다. 한밤중이었는데도 그들은 막무가내로 바이스를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 물론
바이스는 흔쾌히 허락했다.
어차피 거기까지 모두 바이스가 꾸민 일이었다. 바인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그렇게 에어스트 백작령은 네이드 후작령의 세작을 싹 정리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일로 인해 다른 곳에서 투입한
세작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킬 수 있었다.

☆ ☆ ☆

슐린 후작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몇 번이나 타고 이동하느라 짜증이 잔뜩 난 상태였다. 물론 그건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그건 그거고 짜증은 짜증이었다.
뤼게 백작은 그런 슐린 후작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용히 따라가기만 했다. 이럴 때 잘못 걸리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아무리 후작이고 소드 마스터라지만 귀족의 목을 함부로 칠 수는 없다. 하지만 슐린 후작은 그런 걸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 눈이 돌아가면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그럼 그저 결과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항의라든가 하는 나머지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고 말이다.
물론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기에 뤼게 백작은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걸어갔다.
그것은 비단 뤼게 백작만 그런 게 아니었다. 호위 명목으로 함께 따라온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슐린 후작은 모두 20 명의 기사를 이끌고 왔다. 당연히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뤼게 백작을 지키기 위해
데려온 자들이었다.
모두 슐린 후작이 직접 훈련시켜 키운 기사들이었다. 당연히 기간틱 나이트였다. 그렇기에 슐린 후작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많이 겪어 왔고 말이다.
“여기가 레늄 왕국의 수도인가? 그럭저럭 봐 줄 만하군.”
크란 제국의 수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일국의 수도답게 슐린 후작 입장에서도 볼 만했다.
문제는 아직도 다 도착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인 슐린 후작이라도 더 이동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함께 따라온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다들 녹초가 되어 슐린 후작의 눈치만 슬슬 살피고 있었다.
“저기서 자고 가면 되겠군.”
슐린 후작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베니뉴스 호텔이었다. 수도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었으니 슐린 후작의 눈에
드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호텔에 도착한 후작은 당연히 가장 좋은 방을 요구했다. 문제는 방이 비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물론 슐린
후작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최상층에 머물던 귀족 중 하나가 슐린 후작의 신분을 알고는 알아서 물러난 것이다. 사색이 된 얼굴로 말이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까지 일으킨 슐린 후작은 푹 쉬면서 텔레포트로 인한 피로를 말끔히 날려 버렸다.
하룻밤 자는 걸로 풀기에는 쉽지 않은 피로였지만 슐린 후작은 소드 마스터였다. 전혀 상관없었다. 문제는 함께
가는 일행이었다. 당연히 슐린 후작은 그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슐린 후작은 하루 만에 생생히 살아났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짙은 다크서클을 눈에 매달고 비틀거렸다.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가장 힘든 사람은 당연히 뤼게 백작이었다.
뤼게 백작도 나름대로 검술을 수련했기에 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보통 사람과 비교할 때나 그렇고 슐린
후작이나 그의 기사들과 비교하면 당연히 크게 뒤떨어졌다.
뤼게 백작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슐린 후작을 찾아갔다.
슐린 후작은 뤼게 백작을 보자마자 재촉했다.
“뭐 하고 있나? 이제 떠날 건데 준비하지 않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말? 해 봐.”
“에어스트 백작령에 대한 정보를 좀 모았으면 합니다.”
슐린 후작이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하는데?”
“좀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흥. 내 실력으로는 안 될 거라 이건가?”
슐린 후작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뤼게 백작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게 아닙니다! 기간트에 관한 정보가 있어서 좀 더 알아보고자 할 뿐입니다!”
“기간트?”
슐린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화는 상당히 가라앉았다. 슐린 후작도 라이더였다. 당연히 기간트에
관심이 많았다.
다만 슐린 후작의 기간트는 히엠스였다. 발굴형 기간트 중에서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기간트였기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조금 덜하긴 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기간트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입수했습니다.”
“전혀 새로운 기간트? 새로 만들었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정황상으로 보면 발굴형 기간트임이 분명합니다.”
“발굴형이라고?”
그제야 슐린 후작이 크게 관심을 가졌다. 새로운 발굴형 기간트가 기존의 것보다 뛰어나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어쨌든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봐. 어떤 기간트가 나타났다는 거지?”
“지금까지 나왔던 그 어떤 기간트보다 뛰어난 것 같습니다.”
슐린 후작이 크게 흥분했다.
“그럼 지금 당장 가야지! 그런 기간트를 그냥 내버려 두는 건 죄악이야!”
슐린 후작은 마치 그 기간트가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그의 표정에 다급함이 어렸다.
“그래서 정보를 확인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예전에 그 기간트를 찾기 위해 레늄 왕국의 귀족 하나가 에어스트 백작령을 들쑤신 적이 있습니다.”
“뭐라고? 그래서? 그걸 찾은 거야?”
뤼게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못 찾았습니다.”
“그럼 얼른 가야지! 가서 내가 찾아야지!”
“당시 그 귀족은 아공간 감지 아티팩트를 들고 온 영지를 뒤졌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못 찾았다고?”
“그렇습니다. 그러니 좀 더 확인이 필요합니다.”
슐린 후작의 표정이 그제야 좀 가라앉았다.
“좋아. 여기서 며칠 더 쉬지. 대신 확실히 해야 할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뤼게 백작은 한숨 돌리며 방에서 나왔다. 이제야 좀 쉴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뒷감당이었다. 이제는 더 확실히 정보를 얻어야만 했다. 사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 새로운 기간트가 있는 건 확실했다.
크란 제국의 정보망은 대륙 전체에 촘촘히 퍼져 있었다. 그 정보망으로부터 확인한 정보였다.
“일단 한숨 자고 시작하자. 너무 피곤해서 돌아 버릴 것 같군.”
뤼게 남작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꼬박 하루 밤낮을 자고 일어났다.
그 뒤로 열심히 정보를 모았다. 물론 그가 한 일은 많지 않았다. 그저 크란 제국의 정보망을 이용해 정보를
들여다본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슐린 후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텔레포트 게이트를 탔다. 뤼게 백작으로부터 딱 성격에 맞는 답을 들었다. 그냥


윽박지르고 우기면 된다고 하니 얼마나 쉬운가.
뤼게 백작은 새로운 발굴형 기간트가 에어스트 백작령에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그 기간트는 영주인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이 따로 관리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에어스트 백작을 만나 무작정 기간트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가장 편한 방법이었다.
사실 그 방법은 슐린 후작이 아니라면 결코 쓸 수 없었다. 슐린 후작의 성격과 실력이 딱 맞아떨어지기에 성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어쨌든 게이트를 두 번이나 타고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가장 가까운 네이드 후작령에 도착한 슐린 후작 일행은 더
기다릴 것도 없이 곧장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향했다.
아직 에어스트 백작이 영지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영지의 귀족들에게 슐린 후작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알려줄 시간이 필요했기에 그냥 왔다.
슐린 후작에게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제론이 영지에 없다는 사실도, 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가장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방법이었다.
슐린 후작 일행이 에어스트 백작령에 들어섰다. 당연히 발칵 뒤집혔다.
슐린 후작이 누구인가. 대륙에 3 명밖에 없다는 소드 마스터이자, 크란 제국의 후작이었다.
그런 거물이 에어스트 백작령에 들어섰는데 영지가 조용할 리 없었다.
당연히 그중 가장 바쁘게 움직인 사람은 바이스였다. 그리고 잔뜩 기대감을 안고 있는 사람은 카이트였다.
카이트는 과연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궁금했다. 제론이 준 라이트닝 소드는 정말로 열심히 익혔다.
가끔 기간트 훈련에 소홀할 정도로 검술에 빠져들었다.
그 덕분에 지금은 오히려 라이더로서의 능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검술이 기간트 조종에 도움을 준 것이다.
어쨌든 영지가 발칵 뒤집힌 채로 슐린 후작 일행을 맞이할 준비를 서둘렀다.

“호오. 이거 기대 이상인데?”
슐린 후작은 에어스트 백작성을 보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대단한 성은 크란 제국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이걸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내 성도 짓게 해야겠어.”
슐린 후작은 너무나 간단히 결정을 내렸다. 뤼게 백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결정을 내린 이상, 그것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
슐린 후작 일행을 정중히 맞이한 바이스는 일단 쉴 공간을 제공했다. 당연히 슐린 후작은 크게 만족했다.
에어스트 백작성은 외관보다 내부가 훨씬 훌륭했다.
바이스가 한창 연회를 준비하고 있을 때, 슐린 후작은 자기 멋대로 방에서 나와 성을 돌아다녔다.
이런 성을 지을 생각이니 내부를 잘 돌아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성의 정원 근처에 있는 훈련장에 아주 자연스럽게 도착했다.
슐린 후작은 소드 마스터이다. 검술을 수련하는 자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또
거기에 끌리는 게 당연했다.
“호오. 기사들도 제법이잖아?”
슐린 후작이 눈을 빛냈다. 기사들이 수련하는 검술이 상당히 특이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검술이었다.
“그만!”
슐린 후작이 검술에 관심을 가지고 막 집중을 하려는 찰나 커다란 외침과 함께 기사들의 수련이 멈췄다. 슐린
후작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화가 치민 슐린 후작에게 누군가가 다가갔다. 카이트였다.
“수련을 계속해라.”
슐린 후작이 명령했다. 하지만 카이트는 그 명령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수련은 끝났습니다.”
슐린 후작이 카이트를 노려봤다. 카이트는 그 눈빛을 담담히 받아 냈다.
한참을 노려보던 슐린 후작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는 경악 어린 눈으로 외쳤다.
“너 뭐야!”
“뭐가 말씀입니까?”
카이트의 담담한 대응에 슐린 후작이 살기를 담아 외쳤다.
“소드 마스터가 왜 이따위 영지에서 검이나 휘두르고 있단 말이냐!”
슐린 후작의 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나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카이트의 몸에서도 마나가 불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슐린 후작의 마나와 만나 함께 소멸했다.
슐린 후작의 살기 어린 눈빛과 카이트의 담담한 눈빛이 중간에서 만나 불꽃을 튀겼다.

<7 권에서 계속>

7권

Chapter 1 슐린 후작과 카이트

슐린 후작은 마나를 확 풀었다. 거대한 마나의 해일이 훈련장을 덮쳤다.


훈련을 중지한 라이트닝 기사단의 기사들을 향해 막대한 마나가 쏟아졌다.
슐린 후작은 그들이 전부 쓰러질 거라 믿었다. 한데 멀쩡했다. 너무나 의연히 그 막대한 압력을 버텨 냈다.
슐린 후작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놈들 봐라?”
자신이 마음먹고 마나를 뿜어내면 웬만해서는 결코 버티지 못한다. 설사 버틴다 하더라도 괴로워하기 마련이다.
마나가 온몸을 짓누르면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
슐린 후작이 직접 가르친 기사들조차 그걸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한데 이들은 너무나 쉽게 거기서 벗어났다.
“마나를 흘려?”
슐린 후작은 흥미로운 눈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일단 손을 섞어 봐야 저들의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카이트가 그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슐린 후작은 카이트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소드 마스터가 이런 궁벽한 시골에서 기사를 키우고 있었나? 구질구질하게 말이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허! 이젠 시치미까지? 가관이군.”
슐린 후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카이트는 의심할 여지없는 소드 마스터였다. 한데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발뺌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같은 소드 마스터인 자신 앞에서.
“그럼 네가 익스퍼트라고 주장할 셈이냐? 그 몸에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마나는 무엇으로 설명할 생각이냐?”
세간에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소드 마스터가 되면 익스퍼트와 뭐가 다른지 스스로 명확히 알게 된다.
그중 하나가 정체되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마나였다. 몸에 마나의 통로가 있고, 그 안을 마나가 거침없이 흘러
다니는 것이다.
그것은 몸에 활력을 주고, 힘을 준다. 익스퍼트가 마나의 힘을 이용해 더 강해지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마나에 대한 감응력이 높아진다. 그러니 상대의 몸에 자리한 마나가 흐르는지 아닌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슐린 후작이 보기에 카이트의 몸에서는 마나가 흘러 다녔다. 그것은 그에게 커다란 힘을 주고 있을 것이다. 또한
기간트를 탈 때도 큰 도움이 되고 말이다.
“흥, 이건 멍청해도 정도가 있지…….”
슐린 후작은 그렇게 비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카이트가 몸으로 막고 있는 라이트닝 기사단을 바라보던 슐린
후작의 표정이 조금씩 묘해졌다.
“저놈들은 또 뭐야?”
워낙 마나의 양이나 흐름이 미약해서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자세히 관심을 가지고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집중했더니 너무 놀라서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설마 너희들도 전부 소드 마스터인가?”
슐린 후작은 자신이 말을 하고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단 마나의 양이 형편없이 적었고, 흐름도 약했다.
소드 마스터와 비슷했지만 소드 마스터에 비하면 너무 약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슐린 후작은 카이트를 노려봤다. 집중을 유지한 상태로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이것 봐라?”
자세히 살피니 확실히 이상했다. 크란 제국에는 소드 마스터가 둘이나 있다. 당연히 서로 교류를 한다. 검을
섞는 일은 드물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즉, 소드 마스터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몸에 꽉 차 있던 마나가 자연스럽게 온몸을 휘돌며 흐른다. 그러니 그 양이 얼마나 많겠는가.
한데 카이트의 몸에 흐르는 마나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흐르긴 흐르되 그 양이 턱없이 적었다. 보통 소드
마스터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고작 그 양으로 저런 흐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카이트가 아닌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렇게 적은 마나를 가지고 어떻게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마나 호흡법의 중급 단계에 나오는 마나 운용에 대해 모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어쨌든 슐린 후작은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들이 가진 마나의 흐름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정했다.
슐린 후작은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이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설사 타인의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말이다.
“너, 따라와라.”
슐린 후작은 카이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가장 마나의 양이 많은 사람을 확인하는 것이 뭔가를 알아내는
데에 가장 편할 거라 판단했다.
카이트로서는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었다. 크란 제국의 후작이 말하는데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따라가면
분명히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다.
“내가 계속 기다려야 하나?”
슐린 후작이 살기를 담아 말했다. 당장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뜻을 확고히 한 것이다. 그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결국 카이트는 자신이 따라가서 일을 마무리 짓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잘하면 자기 선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럴 때 영주님이 안 계신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만일 제론이 있었다면 결코 이런 상황을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제국의 후작과
척을 져야만 한다.
그건 에어스트 백작령으로서는 상당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카이트가 막 대답하려고 할 때, 그의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단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카이트는 목소리를 듣고 반색했다. 그들은 현재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가장 강한 두 기사, 베샤이덴과 슈빅이었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단숨에 몸을 날려 카이트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두 사람을 보는 슐린 후작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영지인지 모르겠군.”
베샤이덴과 슈빅은 슐린 후작이 보기에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소드 마스터였다. 마나의 양도 다른 소드
마스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약간 많은 듯했다.
게다가 마나의 흐름은 자신보다도 더 빠른 것 같았다. 소드 마스터 사이에도 실력과 힘의 격차가 있다. 슐린
후작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나보다 강한 놈들이야.’
충격을 받았다. 자신보다 강한 소드 마스터가 이런 궁벽한 영지에 둘이나 있을 줄은 몰랐다. 이건 절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 둘을 놓고 판단하니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진다. 나이가 어려 보이긴 하지만 소드 마스터는
겉모습만으로 나이를 판단할 수 없다.
슐린 후작은 베샤이덴과 슈빅을 가만히 살폈다. 그들의 기세가 은은히 느껴졌다. 가슴이 떨릴 정도로 강한
자들이었다.
“자네들이 이들을 키웠나 보군.”
베샤이덴과 슈빅은 갑작스런 슐린 후작의 말에 잠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들을 왜 자신이 키운단
말인가. 이들은 카이트가 키웠다. 주군이 내려 준 검술과 마나 호흡법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카이트의 눈짓에 표정을 지웠다. 눈짓의 의미는 상대가 오해를 하는 것이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정말 궁금하군. 어떤 방법으로 이들을 키웠는지 말이야. 내가 보기에 충분히 시간만 들이면 이들 모두 소드
마스터가 될 것 같은데. 아닌가?”
슐린 후작의 말에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처음 검술과 마나 호흡법을
배우면서 들은 정보였다.
카이트는 기사들을 모아 놓고 3 개월 안에 익스퍼트가 된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카이트의 말대로 되었다.
검술에 별다른 재질도 없었는데 다들 2 개월 만에 익스퍼트가 되었다. 정말로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검술과 마나 호흡법을 꾸준히 수련하면 언젠가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최근에도 기간트 훈련에 매진했기에 영지 돌아가는 사정에 어두웠다. 지금도 갑작스러운 마나
유동 때문에 온 것이지 아니었다면 계속 기간트를 타고 있었을 것이다.
“단장님이 소드 마스터가 되신 줄 알고 달려왔는데, 이거 참 묘한 상황이로군요.”
베샤이덴이 그렇게 말하며 슐린 후작을 노려봤다. 베샤이덴의 몸에서 불같이 일어난 마나가 슐린 후작을 덮쳤다.
슐린 후작의 몸에서도 마나가 뿜어져 나와 베샤이덴의 마나를 중화시켰다.
“크란 제국에서 오신 손님이다. 무례하지 마라.”
카이트의 말에 베샤이덴과 슈빅이 흠칫 놀랐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카이트에게로 향했다.
“슐린 후작님이시다.”
슐린이라는 이름은 검을 든 기사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이었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설마 하긴 했지만 정말로 슐린
후작일 줄은 몰랐기에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지웠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슐린 후작도 이들의 언행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다른 문제로 머리가 꽉 차 버렸다.
“자네들 내게로 오지 않겠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일세. 우리 크란 제국으로 오라는 말일세. 이런 궁벽한 영지보다 훨씬 제대로 대우해 주겠네. 아마
작위도 받을 수 있을 걸세. 내가 최소한 백작 이상이 되도록 힘을 써 주지.”
무려 소드 마스터가 둘이나 된다. 이들을 자신이 영입할 수 있다면 제국에서의 위상이 얼마나 올라가겠는가.
그걸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슐린 후작은 당연히 허락할 거라 생각하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우리는 이미 영주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슐린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 기사가 된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게 뭐? 무슨 문제라도 되나?”
“그럼 우리 보고 지금 주군을 배신하란 말입니까?”
베샤이덴과 슈빅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슐린 후작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말했다.
“내가 언제 배신하라고 했나? 배신하지 않고도 우리 제국인으로 살 수 있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지.”
“주군을 협박하겠다는 뜻입니까?”
둘의 분노는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하지만 슐린 후작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협박을 왜 하나? 난 그런 사람 아닐세. 그저 설득할 뿐이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을 제시할 테니
자네들은 걱정할 게 하나도 없네.”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반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슐린 후작은 그 점까지 모두 염두에 두었다.
“내 장담하는데 아마 자네들의 주군은 명령을 내려서라도 자네들을 우리 제국으로 보내려 할 걸세.”
“그럴 리 없습니다!”
슈빅이 외쳤다. 베샤이덴도 소리만 치지 않았지 슈빅과 똑같은 심정이었다. 절대 주군이 자신들을 버릴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이미 한 번 주군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것을 제론이 거둬 준 것이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상당히
민감했다.
“그거야 두고 보면 되는 일이지. 만일 주군이 자네들을 포기한다면 날 따라가겠나?”
두 사람은 볼 것도 없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들은 철벽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충성심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만일 제론이 그들을 포기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국으로 가서 이 영지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론이 버리지 않는다면 무조건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할 것이다.
“좋아. 그럼 내가 좀 기다리지.”
슐린 후작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평소의 그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로
참고 기다리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즐겁게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그마치 소드 마스터가 두 명이나 된다.
“재미있겠어. 크하하하하하.”
슐린 후작의 웃음이 훈련장을 가득 메웠다.
카이트를 비롯한 라이트닝 기사단은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한껏 표정을 굳혔다.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괜찮나?”
카이트의 물음에 베샤이덴과 슈빅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별일 없을 겁니다.”
둘은 그렇게 말했지만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카이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성 한가운데에
높이 솟은 마탑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바이스를 만나 상의해 봐야 할 듯했다.
☆ ☆ ☆

쿵쿵쿵쿵쿵!
수십 기의 기간트가 강철로 된 거대한 마차를 끌며 달리고 있었다.
말레피 후작령에서 남은 난민을 싣고 출발한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처음에는 줄을 맞춰 걷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오와 열을 딱 맞춰 제법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번 난민 수송은 여러모로 득이 많았다. 일단 견습 라이더의 실력이 급격히 올라갔다.
그저 달리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여러 가지 능력이 상승한다. 줄을 맞춰서 달리는 건 오랫동안 집중력을 잃지
않아야 가능했다.
그것 하나만 얻어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얻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단 오랫동안 기간트를 타고 달리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기간트를 오래 타면 몸에 무리가 간다. 당연히
체력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금세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걸 견뎌 내면 강철 같은 체력과 정신력을 얻게 된다. 이는 기간트를 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또한 강철 마차를 끄는 일도 결코 쉽지 않았다. 양쪽으로 균일하게 힘을 주지 않으면 마차가 크게 흔들린다.
많이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난민이 힘들어진다. 그리고 쉬는 동료도 제대로 피로를 풀지 못한다.
당연히 서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균형감과 힘 조절 능력이 급격히 늘어났다. 고작 마차를 끌고 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론이 수시로 공급하는 물이었다.
아드보 워터는 견습 라이더들의 마나량을 꾸준히 늘려 주었다. 또한 체력과 집중력을 유지시켜 주었다.
그렇게 견습 라이더들은 차근차근 진짜 라이더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숫자가 무려 200 명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에어스트 백작령은 한 단계 도약이 가능할 것이다.

제론은 가장 앞에서 달리는 마차에 있었다. 그 마차는 따로 특별히 제작된 마차였는데, 제론만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제론은 그 안에서 마음껏 태블릿을 확인했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군.”
수도에 도착했을 때, 제론은 마티를 이용해 난민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그리고 불온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긴 시간 있을 수 없었기에 바인의 도움까지 받아야 했다. 그래서 불온한 무리를 싹 골라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엔트라는 인물도 찾아냈다. 몰락 귀족의 후예였는데, 잘만 키우면 제법 밥값을 할 것 같았다.
제론은 분류한 인물들을 태블릿에 기록한 다음 이동을 멈추고 쉴 때마다 난민의 배치를 조금씩 바꿨다.
그래서 불순한 무리를 두 마차에 싹 몰아넣을 수 있었다. 괜히 선동 때문에 다른 난민이 다치거나 휩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수도를 떠난 뒤로는 마티가 없어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제론은 몇 가지 아티팩트를 이용해 간단히 그걸
해결했다.
태블릿과 연결해서 쓸 수 있는 초고대의 아티팩트 중에 소리를 전해 주는 물건이 있었다. 얇은 종이에 마법진을
그린 것인데, 그저 벽에 붙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아티팩트였다.
일단 벽에 붙으면 겉으로 모습이 드러나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근처의 소리를 전달해 주는 물건이었다.
제론은 반항을 꿈꾸는 자들을 모아 놓은 마차에 각각 아티팩트를 설치했고, 그 모든 소리를 태블릿에 저장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그걸 들었다.
그들의 계획을 알아내는 건 아주 간단했다. 제론의 신체 능력은 어마어마하다. 태블릿을 통해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다 캐치해 냈다.
만일 바인이 아니었다면 거의 손도 못 썼을 것이다. 그저 정황만 파악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며 기다리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인 덕분에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었다.
“오늘 밤에 시작하는 건가? 준비를 해야겠군.”
오늘 밤은 하루 쉬기로 되어 있었다. 밤에 마차를 멈추고 조용히 잠을 자기로 계획했다. 마차로 이동하느라
힘들어하는 난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미리 고지했다.
사실 저들이 들고 일어날 기회를 주려는 의도도 섞여 있었다. 여기서 문제를 일으킬 놈들은 영지에 가 봐야 쉽게
섞이지 못한다. 계속 분란의 중심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아예 처음부터 쳐내는 것이 나았다. 제론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쿵쿵쿵쿵쿵!
기간트가 발맞춰 달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마 이 난민들은 나중에는 기간트 발소리만 들려도 경기를
일으킬 것이다. 얼마나 지겹고 시끄럽겠는가.
하지만 제론에게는 그저 자장가 같았다. 제론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밤에 일을 치르려면 지금 미리 잠을 자
두는 편이 좋았다.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자장가 삼아 제론이 스르륵 잠들었다.

그날 저녁 드디어 기간트가 멈춰 섰다. 견습 라이더들은 일제히 기간트를 아공간으로 보냈고, 난민은 오랜만에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다들 살았다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라이더들이 나눠 주는 아드보 워터를 마셨다.
일단 그렇게 기력을 조금 회복한 다음 서둘러 잘 준비를 했다. 마차에서 자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도 다들 밖에서 찬 이슬을 맞으며 자고자 했다.
마차에 타는 것 자체가 너무 지겹고 힘들었기에 잠시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다들 어딘가에서 천막을 꺼내 쳤다. 되도록이면 짐을 몽땅 버리라고 했는데도 조금씩 감춰 뒀다. 천막이 그중
하나였다.
제론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걸 다 알고 있었지만 눈감아 주었다. 마차의 용량을 넘어설 정도로 많은 짐이
아니라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통솔에 도움을 줄 거라 판단한 것이다.
다들 잠자리를 준비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제론은 그 와중에 조금 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들을 유심히 살폈다.
사실 이미 임시 단장들에게는 언질을 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다들 물러나라고 말이다.
괜한 희생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보통사람 800 명 정도는 제론 혼자서도 단숨에 해치울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란 그런 존재였다.
혼자서 기간트와도 싸울 수 있는데 고작 사람이, 게다가 기사도 아닌 자들을 왜 두려워하겠는가. 지킬 사람만
없다면 그 수가 몇이든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문득 제론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놈들도 생각이라는 걸 할 텐데, 상식적으로 기간트를 상대로 싸울 수 있다고 믿는 걸까?’
그럴 리가 없었다. 예전 엔트라는 자와 반란을 일으키려는 놈들의 수장이 대화하는 걸 들었을 때는 그렇게 믿고
있다고 판단했다.
한데 지금 생각하면 그건 말이 안 된다.
‘분명히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
저들에게는 변변한 무기도 없었다. 그런데도 반란을 생각한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그런 일을 추진한단 말인가.
갑자기 위기감이 든 제론의 감각이 더없이 날카로워졌다. 감각의 파동이 제론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넓게
퍼져 나갔다.
극도로 집중한 소드 마스터의 능력은 굉장했다. 제론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이질적인 존재를 감지해 냈다.
‘기간트!’
분명히 기간트였다. 수십 기의 기간트가 멀리 대기 중이었다. 이런 인적 없는 곳에 기간트가 있다면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날 노리는 놈들이로군.’
제론은 감각을 더욱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좀 더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일단…… 32 기로군.’
기간트의 종류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실바는 아니었다. 실바라면 제론이 대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가장 익숙한
기체였으니까.
또한 기간트에서 느껴지는 힘이 범상치 않았다. 즉, 카타락타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최소한 크라테르, 아니면 그
이상의 기체일 수도 있었다.
기간트 옆에는 라이더가 긴장한 상태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자로부터 대단한 기세가 느껴졌다.
나머지는 별거 아니었다. 따로 병사는 없었다. 아마 반란을 일으키려는 800 명의 난민이 병사 역할을 할
모양이었다.
‘곤란하군.’
기간트야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굳이 테오스를 꺼내지 않아도 처리가 가능했다. 라이더를 보면 역량도 느낄
수 있다. 제론은 저들 정도면 혼자서도 처리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만큼 제론의 실력은 뛰어났다. 이번에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기간트 조종 능력도 월등히 높아졌다.
문제는 난민이었다. 저들이 군중심리를 이용해 일을 크게 벌이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제론은 절대
그건 원치 않았다.
제론은 결단을 내렸다.
“모두 마차에 타라!”
제론의 명령이 떨어지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머뭇거렸다. 그것이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일부는 크게 당황했다.
지금 마차에 타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일이 틀어질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외부에서 대응하기로 한 기간트들이 도착했을 때, 난민이 전부 마차에 타고 있으면 거사는 무조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기간트의 수에서 상대가 되지 않으니 말이다. 결국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론은 그를 보며 하마터면 회심의 미소를 지을 뻔했다. 상대가 너무나 손쉽게 낚여 주었다. 타이밍을 비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르십니까!”
덩치가 큰 사내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그의 뒤로 수백 명의 사내들이 운집했다. 제론은 그들의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기간트 부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자칫 싸움이 날 수도 있으니
마차 안에 들어가 있도록.”
제론의 말에 곳곳에서 웅성임이 일었다. 그리고 다들 마차로 들어가려 했다. 기간트가 온다는데 여기 있다가는
밟혀 죽을 수도 있었다.
사내는 크게 당황했다. 대체 어떻게 이 일이 새 나갔단 말인가. 척후라니, 언제 그런 걸 보냈단 말인가.
“다들 움직이지 마! 거짓말이야! 우릴 농락하려는 거라고!”
사내가 발악하듯 외쳤다. 그 말에 난민 중 일부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사내와 제론을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왜 그딴 거짓말을 해야 하지? 그래서 무슨 이득이 있는데?”
“우리가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면서 혼자 즐길 생각이겠지! 귀족들이 다 그렇듯이!”
사내의 말에 또 좌중이 술렁였다. 분명히 그런 귀족이 있었다. 아니, 많았다. 하지만 제론이 그런 귀족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사내가 워낙 강하게 얘기하니 다들 흔들렸다. 이 말에 이렇게 흔들리고 저 말에 저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한숨이 나왔지만 사람은 원래 그런 존재 아닌가.
제론은 단호히 말했다.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아니라면 마차에 타라. 너희 중에서도 빠질 사람이 있으면 미리 빠져라. 이번만은 용서해
줄 테니까.”
제론의 말에 사내가 깜짝 놀랐다. 거사를 일으킨다는 걸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순간 사내의 뇌리에 엔트가
떠올랐다.
“그 겁쟁이 자식이 배신했나!”
사내가 그렇게 외치며 동료를 다독였다.
“경거망동하지 마! 절대 우리를 어쩌지 못한다. 우리가 죽으면 내기에서 질 수밖에 없어! 무려 철괴가 3 만
톤이야! 그게 얼마인지나 알아? 영지 하나가 왔다 갔다 할 정도로 많은 돈이라고!”
그 말에 사내 뒤에 선 자들이 이를 악물었다. 사내의 말이 옳았다. 자신들을 다 죽이면 결코 내기에서 이길 수
없다.
이제 고작 열흘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도 힘들어 죽을 것만 같았다. 아마 보름이 지나면 하나둘 희생자가 나오기
시작해 20 일을 전후도 우수수 죽어 나갈 것이다.
특히 아이와 노인은 누구보다 먼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약하니 말이다.
사내가 당당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우리 서로 협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슨 협조?”
제론은 과연 이들이 뭘 어떻게 할지 조금 더 기다렸다. 아직 기간트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기간트가 달리기 시작하면 30 분 안에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에게 마차와 기간트, 그리고 식량을 나눠 주십시오. 그럼 조용히 물러가겠습니다.”
제론이 피식 웃었다. 내기 걱정을 하던 놈들이 이젠 빠져나가겠다고 한다. 이들이 죽으나 사라지나 달라지는 게
없지 않은가.
제론의 생각을 안 사내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물론 에어스트 백작령까지는 가겠습니다. 다만 뒤에서 따로 쫓아가겠습니다. 이해해 주시겠지요?”
“그러니까 내기에는 최대한 방해되지 않게 하겠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그냥 풀어 주십시오. 돈을 좀 지원해 주시면 향후 에어스트 백작령을 위한 활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이건 완전히 날강도였다.
“싫다면?”
“그럼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 벌어지겠지요.”
사내 뒤에 서 있던 자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제론을 에워쌌다. 일단 영주를 인질로 잡으면
저들도 자신의 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서로에게 불행하다고? 불행한 건 너희들뿐이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당장 마차에 타라! 딱 1 분 기다려 주겠다.”
제론의 외침에 견습 라이더들이 나섰다. 그들은 남은 난민을 재촉해 마차에 태웠다.
사내는 그걸 보고는 다급히 소리쳤다.
“안 돼! 들어가지 마! 들어가면 다 죽일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영주는 내 손에 있어! 거기 기사들
멈춰!”
하지만 견습 라이더들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미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제론의 안위를 절대 걱정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다.
“뭣들 하는 거야! 가서 막지 않고!”
사내의 외침에 제론을 에워싸지 않고 서 있던 자들이 우르르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제론이 훌쩍 몸을 띄워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꽈앙!
제론이 발을 구르며 기세를 내뿜었다.
순간적으로 사내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마치 투명한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했다.
스릉!
제론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쫙 뿌렸다.
촤악!
사내들 앞에 길게 선이 그어졌다.
“그 선을 넘는 놈은 죽는다.”
제론의 말에 덩치 사내가 소리쳤다.
“절대 못 죽여! 그러니 가! 가서 막아! 아니, 죽여! 수를 줄여야 돼! 그래야 우리가 이겨!”
사내의 말을 들은 자들이 용기를 내서 선을 넘었다. 제론은 검을 휘둘렀다.
스아악!
선을 넘은 자들의 목에 동시에 붉은 선이 생겼다. 그리고 그대로 떨어지며 피분수가 솟았다.
촤아아악!
다들 얼어붙었다.
제론은 슬쩍 뒤를 확인했다. 난민은 모두 마차에 탔고, 남은 건 견습 라이더들뿐이었다.
그제야 다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다들 당황해 이 일을 주동한 사내를 쳐다봤다.
그 사내는 품에서 원통 하나를 꺼내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푸슉!
원통에서 불꽃이 솟아났다. 그 불꽃은 어둠이 다가오고 있는 하늘을 가르며 높이 날아갔다.
기간트를 부르는 신호였다.
제론은 더 기다리지 않았다. 어차피 다 죽이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이들은 영지에 데려가 봐야 분란만 일으킬
것이다.
스아악!
제론이 검을 길게 휘둘렀다. 검끝에서 채찍처럼 솟아난 빛줄기가 선 앞에 선 사내들을 쭉 훑고 지나갔다.
촤촤촤촤촤촤촥!
동시에 100 개가 넘는 목이 떠올랐다.
다들 그 광경에 경악했다. 어찌 인간이 이런 힘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반란을 일으킨 사내들뿐 아니라 견습 라이더들도 커다래진 눈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왠지 현실감이
없었다.
제론이 발에 힘을 꾹 주었다.
꽈득!
발을 한 번 구르니 어느새 반란자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제론의 검에는 여전히 빛줄기가 채찍처럼
매달린 채였다.
촤아아아아악!
수백 명이 동시에 죽어 나가는 모습은 지독히도 비현실적이었다. 피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 속에 가만히 서 있는
제론의 모습은 홀로 고고했다.
반란을 주도했던 사내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럴 수는 없다. 대체 왜 죽인단 말인가. 철괴 3 만 톤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뜻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에 사내는 당황을 넘어서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어…… 아으아…….”
제대로 말이 만들어져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제론이 사내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반란에 가담한 자들은 몽땅 죽었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바닥은 피로 흥건했다. 그리고 그 피의 호수 한가운데에 자신이 서 있었다.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으면 그게 더
대단한 일이리라.
제론이 사내 앞에 서서 검을 목에 갖다 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사내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이,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리도 사람입니다! 이렇게 죽여도 되는 겁니까!”
사내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물론 제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람이지. 800 명이서 80 만 명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
“우, 웃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왜 사람을 죽입니까!”
“그럼 여기서 기간트를 얻어 얌전히 지낼 생각이었나? 기간트를 가진 산적이라, 잘도 사람을 안 죽이겠군.”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반박할 말은 분명히 있었다. 자신이 산적질을 할지, 사람을 죽일지 어떻게
알고 판단한단 말인가.
그렇게 막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 제론이 먼저 뭔가를 내밀었다. 둥그런 팬던트였는데,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기간트를 10 기만 얻으면 돼. 그럼 우리 앞날은 탄탄대로라고!
팬던트에서 나오는 소리에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주변이 쩌렁쩌렁 울렸다. 아마
마차에 탄 난민들도 모두 그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 안 돼!”
―그리고 분위기를 봐서 여기 난민을 탈취하는 거야. 이놈들을 잘 구슬려서 노예처럼 부리는 거지. 잠잘 곳과
먹을 것만 주면 얼마든지 시키는 대로 할걸?
사내가 다급히 팬던트를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인 제론이 그것을 빼앗길 리 없었다.
퍽!
제론의 발이 사내의 배에 가볍게 틀어박혔다. 사내는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팬던트에서는
커다란 목소리가 우렁우렁 쏟아져 나왔다.
―우리도 왕처럼 살 수 있어! 마음껏 즐기면서 돈을 쌓아 두고 당장이라도 여자를 매일 갈아치우면서 살 수 있다고!
여자가 어디 있냐고? 잘 살펴봐. 여기에도 조금만 꾸미면 제법 쓸 만한 것들이 많으니까.
사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론이 손에 든 팬던트를 바라봤다. 고통 때문에 무릎을 꿇은 채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저 바라보며 점점 절망에 빠져 갔다.
―어때? 이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가장 좋은 방법은 영주를 인질로 잡는 거야. 기간트가 무섭지 않냐고?
그런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까? 나만 믿어.
사내는 이제 절망에 휩싸여 고개를 툭 떨궜다.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설마 저런 물건을 준비해 뒀을 줄
몰랐다.
제론은 사내의 목덜미를 꽉 쥐고 걸어갔다. 일단 이 피바다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차들이 늘어선 곳으로 온
제론은 사내를 휙 던졌다.
털썩!
사내가 마차들이 늘어선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바닥에 온몸을 부딪친 고통 때문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제론이 누구에게 한 말인지는 명확했다. 잠시 후, 마차 안에서 성난 눈을 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사내를 자근자근 밟았다.
제론은 그들을 뒤로하고 계속 걸어갔다. 제론의 뒤로 55 명의 견습 라이더가 따라왔다.
“기간트를 소환해라.”
키이이이이잉!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기간트가 일제히 나타났다. 견습 라이더들은 기간트에 탑승해 긴장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너희가 나서서 싸울 필요는 없다. 너희는 뒤로 빠지는 적을 막아라. 내가 혼자서 다 막을 수는 없으니까.”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기간트를 소환했다.
붉은 실바가 나타났다. 제론은 실바의 다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후, 훌쩍 몸을 띄워 조종석에 들어갔다.
키이이이이잉!
강렬한 굉음을 토해 내며 붉은 실바를 중심으로 마나가 휘몰아쳤다.
조종석에 탄 제론은 실바의 힘을 고스란히 느꼈다. 세나가 얼마나 신경을 써서 만들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쿵쿵쿵쿵쿵!
굉음에 가까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숨어 있던 기간트가 달려오는 것이다.
붉은 실바도 달리기 시작했다. 55 기의 기간트가 나란히 서서 강철 마차를 보호했다. 아마 웬만해서는 이
기간트의 벽을 뚫지 못할 것이다.
쿵쿵쿵!
붉은 실바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양측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제론은 상대 기간트를 순식간에 쫙 훑어봤다. 몽땅 전혀 새로운 기체였다. 하지만
제론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라쿠스!’
슈린 공작가에서 양산을 시작한 신형 기간트 라쿠스였다. 즉, 이번 일의 배후에 슈린 공작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잘됐군.”
제론은 더욱 힘이 났다. 이번 기회에 라쿠스를 세나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아마 새 기간트를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꽈앙!
강렬한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붉은 실바의 특기가 펼쳐졌다. 붉은 실바는 밤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검붉은
기체의 특성 때문에 일단 깜깜한 허공에 떠오르니 마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듯한 착각을 불러왔다.
꽈과광!
허공에서 내리꽂는 발차기는 거의 피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밤이라서 잘 보이지도 않으니 그냥 맞는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3 기의 라쿠스가 나동그라졌다.
붉은 실바의 움직임은 너무나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어느새 뽑은 검을 바닥에 쓰러진 라쿠스의 조종석을 쿡쿡
찔렀다.
능력이 향상된 붉은 실바의 힘은 엄청났다. 게다가 제론은 다른 라이더와 차원이 달랐다. 자신의 힘을 기간트에
약간이나마 전이시킬 수 있었다.
붉은 실바의 검이 조종석을 찌르는 순간 미약한 빛이 번득였다. 마나가 검을 타고 흐른 것이다.
마치 칼로 두부를 찌르듯 간단하게 조종석이 꿰뚫렸고, 그렇게 3 기의 라쿠스가 빛을 잃었다.
붉은 실바의 움직임은 연속 동작처럼 이어졌다. 아래로 검을 푹푹 찌르며 앞으로 나아가 가장 먼저 마주친
라쿠스의 다리를 후려 찼다.
꽈앙!
라쿠스의 거대한 몸체가 순간 허공에 붕 뜨며 균형을 잃었다.
푹!
마나를 머금은 검이 허공에 뜬 라쿠스의 조종석을 가볍게 찌르고 나왔다.
빛을 잃은 라쿠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붉은 실바는 쓰러지는 라쿠스의 목을 꽉 쥐고 옆으로 잡아챘다.
꽈과광!
옆에 있던 라쿠스들이 동료와 부딪히며 잠깐 흔들렸다. 그리고 붉은 실바는 라쿠스를 던진 힘을 이용해 방향을
바꿨다,
푹푹푹!
3 기의 라쿠스가 또 빛을 잃었다. 붉은 실바는 굉장히 빨랐다. 그리고 얄미울 정도로 잽싸고 정확하게 조종석을
찔렀다.
“흩어져!”
리더의 외침이 울렸다. 그 명령에 따라 남은 라쿠스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쨌든 그들의 목표는 난민을 무차별 학살하면 그 틈을 이용해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를 공격하고, 기회를
봐서 제론을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제론을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면 난민이라도 학살해야만 했다.
쿵쿵쿵쿵쿵!
일부 라쿠스가 난민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일부는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제론은 그 가운데에 서서 눈을 빛냈다.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제론은 난민을 향해
달려갔다.
쿵쿵쿵! 꽈앙!
붉은 실바가 빠르게 달려가더니 점프를 했다. 낮은 점프였다. 이 역시 붉은 실바의 특기였다.
꽈과광!
난민을 향해 달려가던 기간트 하나가 등에 발차기를 맞고 꼴사납게 엎어졌다. 그리고 그 등에 가볍게 착지한 붉은
실바가 검을 등에 꽂았다.
푹!
깔끔하게 조종석을 꿰뚫은 붉은 실바가 다시 몸을 날렸다.
꽈앙! 꽈앙!
연달아 점프를 한 붉은 실바가 두 번째 라쿠스의 뒤를 잡았다.
푹! 꽈과광!
등을 꿰뚫린 라쿠스가 균형을 잃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렇게 구른 라쿠스가 동료의 다리에 충돌했다.
꽈광!
붉은 실바는 굉음과 함께 쓰러진 라쿠스에 빠르게 다가가 검을 푹 찔렀다.
그렇게 열심히 라쿠스를 처리했는데도 난민을 향해 달려가는 라쿠스가 무려 10 기나 되었다.
그 짧은 시간에 붉은 실바가 처리한 라쿠스의 수는 무려 10 기였다. 즉, 아직도 처리하지 못한 라쿠스가 22 기나
있다는 뜻이었다.
10 기의 라쿠스가 일제히 돌진했다. 그리고 좌우로 길게 늘어선 카타락타와 충돌했다.
꽈과과광!
카타락타는 당연히 라쿠스에 비해 많은 것이 모자란다. 하지만 그 모자람을 숫자로 메웠다. 또한 카타락타를 탄
견습 라이더의 정신력은 실력을 크게 웃돌았다.
“막아!”
라쿠스 하나에 카타락타 셋이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쿠스는 카타락타와 대등하게 싸웠다.
꽝! 꽝! 꽈광! 꽈과광!
연달아 굉음이 울렸다. 카타락타와 라쿠스가 싸우는 소리였다. 만일 싸움이 길어지면 결과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싸움은 금세 끝났다.
붉은 실바가 라쿠스의 뒤를 치면서 싸움이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푹! 푹! 푹!
붉은 실바의 능력은 가공했다. 빠르게 라쿠스의 뒤에 붙어 검을 푹 찌르고 이동했다. 워낙 정확해서 더 찌를
필요가 없었다.
10 기의 라쿠스가 순식간에 바닥에 누웠다.
제론은 상황을 단숨에 정리한 다음 돌아서서 달렸다. 단 한 기의 적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아마 제법 멀리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제론에게는 그들을 잡을 방법이 있었다.
쿵쿵쿵쿵쿵!
붉은 실바가 빠르게 달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남은 사람들은 붉은 실바가 멀어져 간 곳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이내 적막이 찾아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견습 라이더들이 카타락타를 몰아 근처를 정리했다.
쓰러진 라쿠스를 한데 모았고, 조종석을 뜯어내 안에 든 시체를 꺼내 한곳에 모았다.
사실 땅에 묻고 싶었지만 제론이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55 기의 카타락타가 움직이니 전장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그 뒤로는 기다림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너무 갑작스럽고 격렬한 일이 있었기에 다들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흥분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밤이 더욱 깊어 갔다.

Chapter 2 새로운 난민

쿵쿵쿵쿵쿵!
붉은 실바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제론은 이대로 적을 모두 잡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법이 있었다.
제론은 즉시 붉은 실바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냈다. 조종석을 열고 뛰어내리면서 아공간에 넣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동작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그와 동시에 테오스를 불러냈다.
제론은 채 땅에 착지하기도 전에 테오스에 탑승했다. 불러냄과 동시에 탑승하는 방식이었기에 땅에 내려설 필요도
없었다.
쉬아악!
테오스가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달리는 게 아니라 거의 날아가다시피 했다.
이동하는 테오스의 주위에 각종 마법진이 희미한 빛을 뿌리며 떠올랐다.
마법진이 하나씩 떠올랐다가 사라질 때마다 테오스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테오스가 펼친 마법은 바람을 불렀고,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또한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앞에 있는
공기를 좌우로 갈라 버렸다.
잠깐 달렸을 뿐인데 벌써 라쿠스 하나를 따라잡았다. 게다가 그는 이번에 온 라쿠스 부대의 리더였다.
테오스에 탑승한 제론의 기감은 소드 마스터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테오스의 진짜 힘
중 일부를 쓸 수 있게 되었는데, 기감의 영역이 확장된 것이 바로 그중 하나였다.
제론은 정확히 적의 리더를 파악하고 뒤쫓았다. 그가 가장 빨랐기에 먼저 잡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라쿠스 부대의 리더는 우연히 뒤를 힐끗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커먼 뭔가가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지 어어 하는 사이 다가와 등에 손을 대는 게 아닌가.
꽝!
굉음과 함께 온몸이 뒤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정신을 잃어버렸다.
꽈득!
테오스의 손이 라쿠스의 조종석을 뜯어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리더는 살려 둘 생각이었다. 그에게서 뭔가 얻어
낼 게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제론은 통째로 뜯어낸 조종석을 그대로 땅에 박아 버렸다.
퍽!
리더를 태운 채 땅에 깊이 들어간 조종석은 테오스가 다시 오지 않으면 꺼내기 힘들어 보였다.
제론은 라쿠스의 잔해를 벨트의 아공간에 담은 뒤, 다시 몸을 날렸다.
테오스가 두 번째 라쿠스를 잡은 것은 리더를 땅에 묻은 지 채 1 분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때부터는 자비가 없었다. 아주 간단하게 조종석을 검으로 꿰뚫고 지나갔다. 사방으로 흩어진 라쿠스를 모두
잡기 위해 최적화된 경로를 잡았고, 테오스는 전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모든 라쿠스를 격멸했다.
라쿠스들이 워낙 멀리 도망쳤기에 그들을 쓰러뜨리기만 하고 수거는 안 했다. 결국 제론은 나중에 다시 경로를
되짚어 돌아가면서 하나하나 수거해야만 했다.
벨트의 아공간은 상당히 커서 쓰러진 라쿠스를 모두 담아도 충분히 공간이 남았다.
제론은 마지막으로 땅에 박아 놓은 리더의 조종석을 뽑아냈다. 리더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였다.
일단 테오스를 돌려보낸 제론은 검으로 조종석을 썩썩 그었다.
철컹! 철컹!
빛나는 마나를 두른 검은 특수한 공법에 의해 만들어진 금속을 마치 종이를 잘라 내듯 갈라 버렸다.
털썩.
제론은 리더를 끌어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제야 리더가 정신을 차리고 신음을 흘렸다.
“끄으응.”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리더는 간신히 눈을 뜨고 앞을 확인했다. 그리고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제론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에, 에어스트 백작?”
제론은 리더를 향해 한 발 다가갔다. 리더가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뒤로 물러났다.
“이, 이러지 마시오!”
“내가 뭘 할 줄 알고?”
“날 죽이면 에어스트 백작령이 무사할 것 같소? 이러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리더의 말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그럼 살려 주면 내 영지를 건드리지 않겠다 이건가?”
리더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절대 에어스트 백작령은 건드리지 않겠소.”
“그걸 결정할 능력은 되고? 네가 싫다고 해 봐야 위에서 명령하면 따라야 할 것 아닌가. 예를 들어 슈린 공작의
명령도 듣지 않을 생각인가?”
제론의 말에 리더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대체 자신이 슈린 공작가에서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라쿠스는 아직 슈린 공작가 내부에서도 공개되지 않은 기간트였다.
제대로 공개하기 전에 이런 비밀스러운 임무를 처리할 때 쓰기로 계획하고 다방면에서 큰 활약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오늘 임자를 제대로 만났고 말이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소?”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이자를 살려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본
사람이다. 아마 이대로 돌아가면 큰 해악을 끼치리라.
“이제부터 생각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이런 고통을 당하기 싫으면.”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손가락으로 리더의 가슴을 쿡 찍었다.
그 순간 리더가 눈을 까뒤집었다. 그리고 온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제론은 무심한 눈으로 그것을 지켜봤다.
3 분이 지났을 때, 제론은 다시 리더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크허허헉! 허억! 허억! 허억! 허억!”
리더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맹세코 태어나서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다시 이
고통을 겪으라면 차라리 죽을 것이다.
“아직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는 모양이군.”
제론의 말에 리더가 화들짝 놀랐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말문이 막히는 법이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리고 제론의 손가락이 리더의 가슴에 닿았다.
다시 지옥과도 같은 3 분의 시간이 지나갔다. 리더는 완전히 널브러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고, 입을 놀렸다. 놀랍게도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고통의
끝이라고 여겼는데, 그보다 더한 고통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세 번째는 그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그 공포가 리더의 마음과 정신을 완전히 짓눌러 버렸다.
“전 슈린 공작가의 비밀 기사단입니다!”
제론이 막 손가락을 들었을 때, 리더가 처음 외친 말이었다. 물론 여전히 손가락은 든 채였다. 리더는 다급히
새로운 말을 떠올렸다.
“에어스트 백작이 이끄는 난민을 죽이고 기간트를 탈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리더는 그 뒤로 생각나는 말을 마구 떠들었다. 제론은 그것을 가만히 서서 듣기만 했다. 물론 그냥 들은 건
아니었다. 태블릿을 이용해 리더가 하는 말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한창 그의 말을 듣던 제론은 문득 의아해졌다. 대체 이들의 기습을 왜 미리 파악하지 못한 걸까?
슈린 공작가의 저택은 수도에 있다. 즉, 바인이 슈린 공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들의 기습을 몰랐다.
이는 바인이 실수를 했거나, 아니면 실제로 이들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이 슈린 공작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제론은 즉시 바인에게 연락을 했다.
―주군, 어쩐 일이십니까?
바인은 항상 제론과 연락할 때면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에게 진짜 날개를 달아 준 사람이 제론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좀 알아봐야 할 것이 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바인의 자신만만한 말에 제론은 일단 오늘 있었던 습격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습격을 당했단 말입니까? 그것도 슈린 공작가의 비밀 기사단에게?
바인은 크게 당황했다. 슈린 공작가에서 벌어진 이런 중요한 일을 자신이 놓쳤다고 생각하니 등줄기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얼른 알아보고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확실히 알아봐라.”
―예, 알겠습니다.
바인이 통신을 끊자, 제론은 여전히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 비밀 기사단의 리더를 쳐다봤다. 두 번의 고통을
겪으며 정신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이대로는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으리라.
제론은 깔끔히 검을 휘둘러 리더의 목을 쳤다. 그리고 마법을 이용해 땅을 파고 그의 시신을 깊이 묻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남은 건 천천히 이동하면서 바인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뭔가 이상해.’
예전에는 그렇게 거대해 보이던 슈린 공작가가 이제는 마치 누군가의 꼭두각시처럼 느껴졌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그쪽으로 크게 기우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슈린 공작가 뒤에 버티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만일 그렇다면 정말로 거대한 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떠올린 제론의 입가에 미소가 매달렸다.
강한 적을 떠올리니 오히려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지의 적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떨렸다.
그게 누구든 박살을 내 버릴 것이다. 제론은 주먹을 꽉 쥐며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밤은 더욱 깊어 갔고, 어둠 또한 점점 짙어졌다.

☆ ☆ ☆

그날 밤, 제론이 도착함과 동시에 강철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에서 굳이 쉴 이유가 없었다.


휴식은 하루를 더 이동한 뒤에 취하기로 했다.
꼬박 하루를 이동한 뒤, 넓은 황무지에 자리를 잡은 일행은 분주히 움직였다. 천막도 치고 모닥불도 피웠다.
그리고 불 위에 솥도 걸었다.
오랜만에 뜨거운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제론은 강철 마차 위에 앉아, 삼삼오오 모여 뜨거운 스프가 든 그릇을 후후 불어 가며 마시는 난민의 모습을
구경했다.
조만간 에어스트 영지의 백성이 될 사람들이었다. 철저히 관리를 해서 한 명도 죽지 않은 상태로 영지에 데려갈
작정이었다.
‘그나저나 벌써 800 명이 죽었군.’
앞으로 200 명이 더 죽으면 내기에서도 진다. 제론은 그걸 알면서도 그들을 단호히 죽였다.
앞으로는 더 철저한 관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라이더들에게 각별히 지시를 내려 뒀다.
사실 분위기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동료인지도 모를 800 명이 순식간에 죽어 버렸다. 그 일을 겪은 지
고작 하루 지났는데 분위기가 좋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제론은 벨트를 쓰다듬었다. 그 안에 32 기의 기간트가 들어 있다. 물론 테오스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들이 타던 기간트를 몽땅 벨트의 아공간에 담았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처리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긴
했지만 그래도 성공했다.
“그나저나 슬슬 바인한테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
바인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연락이 와도 벌써 왔어야 한다. 그런데도 아직 연락이 없다는 건, 그만큼 상대가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그런 적이 있었지.”
예전에도 중간의 연결 고리를 전혀 찾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그때도 슈린 공작가와 관계된 일이었다.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그러고 있을 때, 마침 연락이 왔다. 바인이었다. 제론은 즉시 통신을 연결했다.
“어떻게 됐지?”
―죄송합니다. 못 찾았습니다.
제론은 깜짝 놀랐다. 바인이 이렇게 긴 시간을 들이고도 못 찾았다니!
“못 찾았다고? 네가?”
―누군지 모르지만 대단한 놈입니다. 연결 고리를 남기지 않고 제삼자를 동원해서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슈린
공작가에서는 비밀 기사단이 동원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제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제론이 짐작한 것이 다 맞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슈린
공작가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었다.
“시간을 더 들여서 확실히 알아내. 배후에 누가 있는지. 또 그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무조건 찾아내겠습니다.
바인은 그렇게 보고한 뒤 통신을 끊었다. 아마 이제부터는 상당히 바빠질 것이다.
제론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마티가 더 필요해. 아무래도 유적 발굴을 서둘러야겠어.’
바인에게 더 폭넓은 정보를 안겨 주면 아마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벨루스 백작령에도 은밀히 가 봐야 한다. 그곳에 있는 것이 분명한 유적을 찾아야 하니 말이다.
‘당분간 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군.’
이렇게 바쁘니 유적 14 층을 클리어하는 것도 미뤄야만 했다. 물론 미루지 않는다 하더라도 쉽게 클리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초고대문명의 기간트는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대등한 싸움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좀처럼 그 벽이
깨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럴 때일수록 차분히 시간을 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제론은 긍정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새로운 유적을 발굴하는
일이었다.
이번 기회에 레늄 왕국의 모든 유적을 확인해 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숨겨진 유적까지 몽땅 찾고
싶었다.
‘베어크 영지에서처럼 광맥을 만들어 내는 유적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게 아니라면 테페룸에 관계된 유적이라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했다.
초고대문명에 대해 알아 갈수록 테페룸이 얼마나 대단한 금속인지 깨닫게 된다. 초고대문명은 테페룸으로
시작해서 테페룸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테페룸에 대한 특별한 비밀이 있다는 뜻이다. 철 광맥을 만들어 낸 것처럼 테페룸 광맥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테페룸이 넘쳐 나지 않으면 그런 문명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테페룸이 넘쳐 나려면 그것을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제론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것이 그동안 초고대문명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한 결과였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갔다.

다음 날부터 제론은 더욱 이동 속도를 높였다. 상당히 무리가 가는 일이었지만 차라리 시간을 단축시키는 게
나았다.
더 일찍 영지에 도착하면 이들에게 훨씬 양질의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게 오히려 살아남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난민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아무리 충분히 먹이고 아드보 워터를 이용해 체력을 보전한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오랫동안 난민 생활을 하며 나빠진 건강이 문제였다.
더구나 아이나 노인의 경우는 더 심각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제론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그나마 수도에서 보충한 인원은 상태가 상당히 괜찮았다. 바인이 고르고 고른 빈민이었고, 미리 준비를 했기에
건강 상태도 제법 양호했다.
수도에서 바인이 준비한 빈민의 수는 무려 2000 명이었다. 그들은 각각 5 대의 마차에 나눠 타고 있었다.
가끔 마차가 멈춰 휴식을 취할 때마다 그들이 나서서 난민들을 도와줬다. 덕분에 난민의 상태가 완전히 최악으로
빠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제론은 마차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앞을 바라봤다. 항상 감각을 최대한 열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5 일째 되는 날, 제론의 시야에 뭔가가 들어왔다. 제론은 경각심을 가지고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갈았다.
그리고 멀리 퍼트렸다.
제론의 시야는 엄청났다. 기간트가 30 분은 달려야 도착할 거리를 눈으로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난민?’
그들의 앞을 가린 자들의 정체는 난민이었다. 어쩌면 소문을 듣고 미리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제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어떻게 자신들이 가는 길을 정확히 알고 거기서 기다린단 말인가. 저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누군가가 있었다.
제론은 혹시 있을지 모를 기습에 대비했다. 일단 감각에 더욱 집중해 기간트가 숨어 있지 않은지 확인했다. 굳이
기간트를 소환하지 않아도 기간트를 가졌는지 아닌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현재의 아공간 기술은 워낙 뒤떨어지고 비효율적이라서 거기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엄청나다. 그 에너지를
감지하기만 하면 기간트의 유무를 알 수 있었다.
‘일단 기간트는 없고…….’
기간트가 없다고 위험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일단 기간트만 없으면 어떤 상황이든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이쪽에는 기간트가 무려 200 기나 되니까.
게다가 난민의 상태를 보니, 무슨 짓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하루
이틀은 절대 아니었다.
먹을 것이 있을 리 없으니 오랫동안 굶주렸을 것이다.
“일단 먹이긴 해야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생각해 보니 강행군을 시작한 이후로 제대로 오랫동안 쉰 적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잠깐 쉬었다가 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이는 것도 괜찮겠군.’
몇 번의 특식을 먹이기 위해 요리 재료를 충분히 준비했다. 그걸 이번에 풀면 될 듯했다. 아마 그걸로 힘과
희망을 얻어 버틸 만한 여력을 만들 수 있으리라.
“앞에 누군가 있습니다!”
임시 기사단장이 외쳤다. 그도 나름대로 검술과 마나 호흡법을 통해 수련을 쌓은 자였다. 게다가 기간트에 타고
있으니 제법 멀리까지 확인이 가능했다.
“난민이다. 그러니 속도를 천천히 늦춰라. 저들 앞에서 멈춘다.”
마나를 담은 제론의 음성이 각 기간트 라이더의 귀에 스며들었다. 마치 옆에서 말하고 있는 듯 또렷한 음성에
다들 놀랐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주인 제론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만일 이 상태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작업을 하면 제론을
신격화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쿵쿵쿵쿵쿵!
강철 마차를 끄는 기간트의 수는 총 53 기였다. 원래 50 기였는데, 수도에서 5 기가 추가되었고, 다시 반란으로
인해 2 기가 사라져 53 기만 남은 것이다.
53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속도를 줄였다. 아주 조금씩 속도를 줄이고 다들 거기에 딱 맞추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들 무리 없이 그걸 해냈다. 그동안 꾸준히 달리면서 조종 실력이 월등히 향상된 결과였다.
앞으로 집단전 훈련을 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군부의 기간트 라이더와 비슷한 실력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쿵쿵쿵! 쿵쿵! 쿵! 쿵! 쿵!
기간트 부대와 난민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기간트의 속도가 조금 더 빨리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내 멈췄다.
그들과 난민 사이의 거리는 고작 30 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다시 움직이면 몇 초 안에 몽땅 밟아 버릴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니 그들을 보는 난민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다들 벌벌 떨었다.
제론은 두려움에 떠는 난민을 차분히 훑어봤다. 2 천 명쯤 되는 수였는데, 다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후우. 이거 정말로 난감하군.”
저들을 실어 나르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아공간에는 마차가 7 대나 남아 있었다. 산술적으로 2800 명은 더
데리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저들은 강철 마차를 탈 상태가 아니었다. 아마 마차에 태워 기간트로 끌고 가면 며칠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갈 것이다.
난민 대부분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는데, 그중 한 명이 비척비척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분위기를 보니
그가 난민을 이끄는 자였다.
제론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가볍게 내려선 다음 난민에게 다가갔는데, 앞으로 나온
사내의 눈빛이 보였다. 비록 몸은 다 죽어 가고 있지만 눈빛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절대 죽어 가는 사람이 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는 희망을 갖고 있었고, 의지력을 갖고 있었다.
제론은 나머지 난민도 확인했다. 반반이었다. 눈빛마저 죽은 자들이 반, 그렇지 않은 자들이 반. 살아갈 의지가
있다면 인간은 어떻게든 살기 마련이다.
‘저들은 데려갈 수 있을까?’
사실 많이 데려가면 데려갈수록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이득이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가장 모자란 것이
사람이었으니까.
돈은 넘쳐 나는데 사람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인구를 늘리려고 하는 것 아닌가.
2 천 명의 사람 중 절반이라면 1 천 명이다. 그 정도만 해도 상당한 숫자였다. 건강해지면 애도 낳을 것이고,
그럼 영지의 미래를 짊어질 인구가 늘어나는 셈이었다.
제론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앞으로 나온 사내 앞에 도착했다.
사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는데, 제론이 앞으로 다가오자 더없이 정중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프로인트라고 합니다. 에어스트 백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론의 눈빛이 깊어졌다. 역시 이들은 제론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가진 채로 기다렸다.
“누구지?”
제론의 맡도 끝도 없는 질문에도 프로인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미리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제겐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 친구들이 조금씩 알려 주었습니다.”
“친구들?”
제론은 프로인트를 유심히 살폈다. 제법 나이가 있어 보였다. 쉰은 넘은 듯했다. 하지만 고생을 많이 하면
나이가 들어 보이니 더 젊을 수도 있었다.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친구들입니다.”
그 말에 제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령?”
이번에는 프로인트가 놀랄 차례였다. 그 설명만으로 단번에 정령이라는 걸 집어내다니, 생각보다 에어스트 백작의
식견이 대단하다고 여겼다.
제론이 의아한 눈으로 프로인트를 보며 감각을 가다듬었다. 제론이 알기로 정령으로 정보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정령과 친해져서 놀 수는 있지만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감각을 집중해도 정령의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제론은 바람과 물의 정령사이기도 했다. 또한 물의 정령과
계약할 때 정령에 대한 감각을 새로이 가다듬었다.
만일 누군가 정령을 불러내면 단번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한데 프로인트에게는 정령의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정령을 부를 수 있나?”
제론의 물음에 프로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자신은 이 귀족에게 잘 보여야만 한다. 그래야 뒤에 있는 2
천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 테니까.
“스키아.”
프로인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그림자가 불쑥 솟아났다. 그림자 속에서 그림자가 형체를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그림자?”
“그림자의 정령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이 정령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 그저 그런 것 같아서
그렇게 믿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론은 묘한 눈으로 스키아를 쳐다봤다. 분명히 정령이었다. 정령의 느낌이 들었다.
한데 상식적으로 그림자에 정령이 있다는 게 말이 될까? 그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림자라는 것은 빛이 가려지면서 생겨나는 현상이었다. 특정한 에센스가 깃든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림자에
정령이 생긴다? 뭔가 좀 이상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정령이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보면 볼수록 정령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말로 정령이로군.”
제론의 말에 프로인트가 깜짝 놀랐다.
“설마 저게 보이십니까?”
제론은 그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궁금한 걸 물었다.
“하지만 저것만으로 내 일에 대해 알아냈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데?”
프로인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스키아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사라진
것이다.
“후우. 사실 정령을 소환하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전 3 분을 넘기면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건강이 좋지 않을 때는 1 분도 버겁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제론은 이해가 안 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의 정령이 가진 특성일 수도 있었고, 또 제론의 정령이 다를
수도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근차근 알아 가면 된다.
프로인트는 차분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제 정령인 스키아는 그림자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저와 멀리 떨어진 곳을 보지는 못합니다. 제게
강하게 귀속된 상황이라서 그렇습니다.”
제론의 눈이 빛났다. 사람이 존재하면 항상 그림자도 함께 있다. 만일 그걸 엿볼 수 있다면 굉장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거리가 지나치게 짧다는 점입니다. 1 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습니다.”
프로인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래도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영주성 근처에 있으면 그들에 대한
모든 것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짧은 소환 시간은 정말로 큰 약점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정보 하나를 얻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얻어걸리는 것들은 제법 많습니다. 중요한 곳을 들여다보면 그렇습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어떻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는지도 대충
알아차렸다. 몇몇 영주성 근처를 배회하며 알아낸 정보일 것이다.
프로인트의 표정은 담담했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 이 정도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훨씬 더 풍요롭게 살기 마련이다. 한데 이렇게 난민을 이끌며 고생을
자처하다니.
정보 몇 개 주워서 장사를 해도 이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아갈 텐데 말이다.
‘게다가 자신이 정령사라는 걸 당당히 밝혔어.’
제론은 프로인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늘어져 있는 난민들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을 불러내고 그에 관한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거리가 제법 있고, 프로인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기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나름대로 주의를 한 것이다. 즉, 자신이 정령사라는 사실을 제론에게만 말했다는 뜻이었다.
“왜 나지?”
“제가 들은 정보는 두 가지였습니다.”
제론이 눈을 빛내자 프로인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하나는 기간트를 이용해 난민을 데리고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말레피
후작가와 한 내기였습니다.”
정확히는 말레피 후작가와 한 내기가 아니라 말레피 후작의 딸인 밀레나와의 내기였지만 큰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필요한 정보는 정확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백작님이라면 제 모든 걸 맡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받아 줄 거라고 확신하고 온 건가?”
프로인트가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제 능력이 제법 쓸 만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 쓸모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저 운명을
던졌을 뿐입니다. 그러니 절 쓸모없다고 죽이셔도, 또 험한 일에 이용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왔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내심 이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능력도 그렇고 말이다.
‘어쩌면 저 그림자의 정령을 내가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제론이 부리는 정령인 아네모스나 네로는 거의 시간제한 없이 다룰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더욱 부담이
가벼워져서 이제는 정령을 소환하나 그렇지 않으나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만일 스키아를 제론이 얻을 수 있다면 그 효용 가치는 엄청날 것이다. 물론 마티가 있긴 하지만, 마티를 쓸 수
없는 장소도 많으니 그때마다 정말로 유용하지 않겠는가.
“일단 먹고 시작하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다 죽을 것 같으니까.”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던 견습 라이더들을 불렀다.
일제히 기간트가 아공간으로 돌아갔고, 라이더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제론은 그들에게 지시를 내려 죽어 가는
난민을 보살피게 했다.
견습 라이더들은 능숙하게 일처리를 했다. 일단 달려가 수도에서 온 빈민을 몽땅 마차에서 나오게 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난민들을 보살폈다.
제론은 아무도 모르게 마차 뒤쪽에 식재료를 잔뜩 꺼내 놓았다. 아공간을 쓰는 모습을 괜히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벌써 아는 사람이 많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번에 보여 준 제론의 행보를 유심히 살핀 사람이라면 이상한 점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아공간 하나만 끼워 넣으면 다 맞아떨어진다.
아마 생각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제론에게 특별한 아공간 아이템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물론 알아봐야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순식간에 잔치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제론이 꺼내 놓은 식재료는 신선하고 풍부했다.
고기에서부터 야채까지 없는 게 없었다. 조미료와 향신료까지 있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물론 지금까지 굶은 난민들에게 갑자기 음식을 먹이면 죽을 수도 있기에 빈민들이
한 사람씩 붙어서 조절을 시켰다.
음식은 충분했기에 강제로 조절해도 발작이 일어나거나 유혈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제론은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번 기회에 충분히 쉬면서 체력을 보충하기로 한 것이다.
시간을 오래 지체하는 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간트를 200 기나
보유하고 있다지만 1 왕자나 2 왕자 진영이 마음먹고 나서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릴 것이다.
또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면 그 와중에 난민이 휩쓸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렇게 되면 몇이나 살아남겠는가.
난민 수송의 의미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이동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고민에 잠긴 제론의 곁에 프로인트가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 또한 눈빛에는
언제나 존경을 담았다.
“그쪽에 앉지.”
제론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 넓적한 바위가 있었다. 프로이트는 고개를 숙인 뒤 그곳에 가서 앉았다. 이제 대화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일단 내가 저들을 받아들일지 아닐지가 제일 궁금하겠지?”
프로이트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도 백작님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제론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일부만 받아들일 생각이다.”
프로인트의 표정에 실망감이 감돌았다. 일부만 받아들이겠다는 건 몸 상태가 비교적 괜찮은 사람들만
데려가겠다는 뜻 아닌가. 미리 죽을 사람을 골라내겠다는 건데, 기껍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기준은 건강 상태입니까?”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의지다.”
“예?”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프로인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의지라니. 그걸 대체 어떻게 구분한단 말인가.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오전에 그걸 가려낼 생각이다.”
“대체 어떻게 말입니까?”
“합리적인 방법으로.”
프로인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난민을 모두 끌고 가는 건
솔직히 바보짓이었다. 아니, 자살행위였다.
죽는 사람이 나오느냐 마느냐는 이런 강행군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하면 남은 사람들은 어찌 됩니까? 모두 저 하나만 보고 따라왔습니다. 그냥 버릴 수는 없습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걸 이용할 생각이다. 과연 정말로 너 하나만을 보고 여기까지 왔는지. 아니면 그냥 따라왔는지.”
프로인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은 자들에게는 충분한 물과 식량을 나눠 줄 것이다. 이번 일로 뭔가를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끝까지
살아남겠지.”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말이었다. 하지만 프로인트는 제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라면 저보다
더한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2 천 명에 달하는 난민을, 그것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난민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난다는
건 그냥 모험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 대답으로 결정이 끝났다.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의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프로인트는 바쁘게 걸어가는 제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정은 제대로 내렸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몇 명이 될지도 모를 난민을 내버려 두고 떠날 수 있을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난 여기 남을지도 모르겠군.’
벌써 몇 달을 함께 해 왔다. 그동안 정이 듬뿍 들어 버렸다. 어려운 시간을 함께 보내서 더 돈독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관계를 유지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나름 마음의 결정을 내린 프로인트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잔뜩 먹고 푹 쉴
생각이었다.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음식이 끓는 솥으로 걸어가는 프로인트의 표정이 더없이 밝았다.

Chapter 3 도착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워낙 잘 먹고 푹 쉬었는지라 다들 표정이 밝았다.


특히 새로 합류할 난민의 경우는 상태가 제법 좋아졌다. 고작 하루 먹고 쉬었을 뿐인데 그래도 사람다운 표정이
생겨났다. 다 죽어 가던 자들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아직 멀었다. 몸은 부실했고, 의욕도 크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희망이 생겨난 것뿐이었다.
제론은 그들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때가 되었다.
“모아라.”
제론의 명령에 간만에 푹 쉬고 체력을 보충한 견습 라이더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200 명이나 되는 기사가 나서니 2 천 명의 난민을 통제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새로운 난민을 한데 모았다.
다들 불안한 눈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기존의 난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과 얼마 전에 동료가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처참히 죽는 걸 목격했다.
한데 또 이상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니 두려움이 왈칵 솟았다.
“이쪽으로 서라.”
“거기서 움직이지 마!”
견습 라이더들은 미리 명령을 받은 대로 살짝 거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들은 가볍게 하는 말과 행동이었지만
받아들이는 난민의 입장에서는 두렵기 그지없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라이더들은 그들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주변에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했다.
난민들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라이더들과 제론의 눈치를 살폈다.
제론은 불안에 떠는 난민을 보며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계속 눈치를 살피고 있던 난민의 시선이 일제히 제론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곳에는 높은 기둥 위에 묶인 프로인트가 있었다. 어찌나 높은지 만일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즉사할 것만
같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다들 웅성거렸다. 제론은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
“나눠 줘라.”
제론의 명령에 난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라이더들은 굳은 표정으로 커다란 강철 상자를 들고 움직였다.
강철 상자는 모든 난민에게 주어졌다. 상당히 무거웠다.
나이를 고려해서 무게에 차등을 주긴 했지만 다들 가만히 들고 있는 것만도 힘들었다. 그만큼 무거운 상자였다.
“그걸 들고 저 기둥으로 가라.”
제론의 말에 다들 아연실색했다. 이 무거운 걸 들고 어떻게 저기까지 간단 말인가. 이건 몸이 건강했을 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데 지금은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프로인트가 묶인 기둥까지는 수백 미터가 넘었다.
“상자를 떨어뜨려선 안 된다.”
다들 입을 벌렸다. 더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상자는 지금 당장 떨어뜨릴 것 같았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중간에 포기해도 된다. 포기하면 휴식과 음식이 주어질 것이다.”
이번에는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거면 이런 일은 대체 왜 시킨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갑자기
제론이 이러는 것도 이상했다. 밑도 끝도 없이 이런 걸 왜 시키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론의 말에 다들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한 명이라도 포기하면 프로인트는 죽는다. 그걸 명심하도록.”
난민들의 팔에 저절로 힘이 꽉 들어갔다. 이걸 놓치면 프로인트가 죽는다니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손과 팔에
힘을 준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곧 떠나야 하니 서둘러라. 그 상자를 놓고 프로인트를 꺼내 오든 아니면 중간에 포기하고
그를 죽이든 선택은 너희들의 몫이다.”
제론은 그 말을 끝으로 손을 내저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난민들을 한 차례 휘감고 사라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난민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에 대해 자세히 생각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저 지금은 움직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몇 발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상자는 엄청나게 무거웠다. 당장 놓쳐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난민들은 아무도 상자를 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그들의 표정에 절박함이 어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희망의 눈빛을 보여 주지 않은 자들조차 그랬다. 그들도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걷고 또
걸었다.
뛰지는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뛰다가 자칫 상자를 놓치기라도 하면 프로인트가 죽을 것 아닌가.
제론은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저들이 다 도착하지 않으면 프로인트를 죽이겠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동기부여의 일환이었다.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어 준 프로인트의 목숨마저 가벼이 여긴다면 그는 굳이 데려갈 필요가 없었다. 최소한의
의욕이나 의지조차 없는 사람은 분위기만 흐린다. 오히려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사실 제론은 저들이 한 명도 기둥에 도착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의욕을 보이고 독기를 품는지는 볼 수 있었다. 그것만 확인해도 데려갈 사람과 남겨 둘 사람을
가려낼 수 있었다.
제론은 눈을 번득이며 상자를 들고 열심히 걸어가는 난민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제론도 방심할 수 없었다. 2 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모두 확인해야 한다. 그건 제론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난민들은 이유도 모른 채 그저 걸었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아무도 포기하지 않았다.
제론은 그 모습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이들 중 최소한 절반은 데려가
봐야 살 의욕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한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았다.
제론은 좀 더 지켜봤다. 아직은 아니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아마 판가름이 날 것이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야 사람의 진가가 나타나는 법이다.
점점 속도가 줄어들었다. 다들 괴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절반쯤 갔을 때, 한 명이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상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려고 애썼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이미 한계를 훌쩍 넘어 버린 몸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사람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높은 기둥에 묶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프로인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괴성을 지르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으아아아아!”
놀랍게도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힘겹게 다시 걸음을 옮겼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프로인트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 뒤로도 계속 주저앉는 사람들이 나왔다. 하지만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제론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이미 마음은 정했다. 하지만 끝을 보고 싶었다. 저들이 저 일을 끝냈을 때
얻을 성취감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할 거라 여겼는데, 이제는 누구도 실패할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전히
저들의 상태는 좋지 않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가 느려졌다. 그리고 중간에 주저앉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때 구경하던 난민 중 하나가 외쳤다.
“힘내!”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응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저앉지 마!”
“이제 얼마 안 남았어!”
“할 수 있어! 힘을 내라고!”
2 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동시에 하는 응원은 정말로 대단했다. 벌판이 온통 응원 소리로 가득 찼다. 그 응원
안에는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하던 200 명의 라이더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씨익 웃었다.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프로인트를 쳐다봤다. 프로인트의 표정이 분명히 보였다. 웃고 있을
거라고 여겼지만 그는 울고 있었다.
이윽고 처음으로 기둥에 도착한 사람이 나왔다. 그는 상자를 기둥 아래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 그대로 누워 버렸다. 다른 사람이 상자를 쌓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 뒤로 연이어 사람들이 도착했다. 그들 역시 처음 도착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상자를 놓고 멀리 떨어진 곳에
누웠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이었다. 그것도 2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힘을 발휘했다. 어느새 2 천 개의
상자가 차곡차곡 쌓였다.
상자는 계단을 이뤘다. 체력이 없어 상자를 높이 쌓는 게 문제가 되자, 라이더 중 하나가 나서서 상자 쌓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순간 다들 흠칫 놀라 제론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제론이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다른 라이더들도 우르르
달려들어 상자 쌓는 것을 도왔다.
결국 2 천 명이 모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걸 지켜보던 사람들이 전부 눈시울을 붉히며 만세를 외쳤다.
어마어마한 함성이 벌판을 가득 메웠다.
제론은 그들이 쌓은 상자로 천천히 걸어갔다. 제론이 움직이자 함성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다들 침을 꿀꺽
삼키며 제론을 바라봤다.
강철 상자로 만들어진 계단은 제법 견고했다. 제론은 그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기둥에 묶인
프로인트를 손수 풀어 주었다.
“고생 많았다.”
프로인트가 고개를 저었다.
“제게도 보람되고 충실한 시간이었습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제론은 프로인트와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며칠 더 쉰다. 제대로 몸을 만들어 두도록.”
제론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일제히 환호성이 울렸다. 다들 만세를 외치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다시 축제가 이어졌다.
제론은 한 발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봤다. 오늘의 일은 아마 남은 여정에 거대한 추진력을 만들어 줄 것이다.
짐 덩이가 될 뻔한 이들이 이젠 연료가 되었다.
“재미있군.”
이래서 세상이 재미있는 것 아니겠는가. 제론은 강철 마차 위에 올라가 앉았다. 그곳에서 축제를 벌이느라 난리가
난 난민들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무려 사흘이었다. 제론은 사흘 동안 이동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일정이 늘어나겠지만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새로운 난민 2 천 명은 곳곳에 섞이며 전체적인 단합을 유도해 냈다. 수도의 빈민들이 거기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겉돌던 사람들도 모두 하나가 되었다. 이제 한 영지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제론은 남은 식재료를 몽땅 풀어서 그들의 축제를 도왔다. 지난 사흘 동안 정말 제대로 쉬었고, 체력을 상당히
비축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이동 속도가 더 빨라졌지만 다들 무리 없이 버텨 냈다.
물론 아드보 워터의 힘이 가장 컸다. 아무도 죽지 않았고, 라이더들의 몸에 쌓이는 마나의 양도 점점 늘어났다.
이동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나중에는 모두의 한계를 넘나들 정도로 강행군을 이어 갔다.
그로 인해 10 일이 더 지났을 때에는 쉬었던 사흘의 시간을 보충해 냈다.
제론이 말레피 후작가를 떠난 지 정확히 한 달이 되는 날, 난민을 태운 강철 마차가 에어스트 백작령에 들어섰다.

☆ ☆ ☆

미리 연락을 받은 바이스는 난민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했다. 병사와 영지민을 잔뜩 동원해 난민을 씻기고
먹이고 쉴 장소를 제공했다.
워낙 준비를 철저히 했는지라 약간의 빈틈도 없었다. 바이스의 일처리는 날이 갈수록 발전했다. 그래서 지금은
웬만한 영지의 총관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의 관록을 보여 줬다.
바이스는 어쩌면 자신이 마법사가 아니라 총관 체질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마법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새로운 총관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총관 후보가 나왔지만 다들 바이스 선에서 잘라
버렸다. 그들은 지금 행정 업무를 보고 있다.
좋은 총관이 되려면 전체를 보는 눈이 필수였다. 영지 전체를 머릿속으로 조망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일을
처리했을 때 어디로 어떤 여파가 미치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총관 후보들은 결정적으로 그 두 가지 능력이 전혀 없었다.
“하여튼 대단하군.”
바이스는 난민을 확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분쟁 지역을 관통해 그 많은 난민을 데려왔다고 말하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것을 해냈다.
물론 기간트를 잔뜩 동원하긴 했지만 말이다.
현재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엄청난 수의 기간트 라이더를 육성 중이었다. 게다가 기간트 라이더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 사람은 처음에 실바를 이용해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이는 거의 아카데미 수준이었다. 아카데미보다 더 많은 연습용 기간트를 보유한 셈이었다. 이 모든 것이 제론
덕분이었다.
현재 난민은 모두 성 근처에 새로 건설 중인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처음 성을 지을 때부터 계획했던 도시라서
이젠 제법 모양새가 나왔다.
그중 완성된 건물 몇 개를 난민에게 나눠 줬다. 물론 임시였다. 나중에 그들은 자신이 살 집을 직접 짓게 될
것이다. 도시 안에 말이다.
지금은 몸부터 만들어야 했다. 난민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하게도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강행군을 했는데도 말이다.
비결이 뭐냐고 묻는 바이스에게 제론은 물통 하나를 내밀었다. 물이 찰랑찰랑 담긴 물통이었는데, 처음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 물을 마셔 보고는 이유를 차츰 이해했다. 대번에 알 수는 없었다. 물의 효과가 천천히 나타났으니
말이다.
“아드보 워터라…….”
아드보 나무의 잎과 가지를 이용해 만든 물이라고 했다. 아드보 나무는 벨루스 백작령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구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걸 이용해 이런 놀라운 성능의 물을 만들 수 있다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아마 앞으로 에어스트 백작령의 영지민은 건강을 좀처럼 잃지 않을 것이다. 아드보 워터를 수시로 마실 테니까
말이다.
“애도 잘 낳겠군.”
아드보 워터의 효능 중 하나가 정력 증진과 피부 미용이었다. 물을 장복하면 여자는 아름다워지고 남자는 활기가
넘칠 테니 자연스럽게 아이가 늘어날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려나…….”
가장 걱정되는 것이 그것이었다. 최소한 여름이 지나기 전에는 써먹을 수 있어야 건설에 투입할 수 있었다. 또한
추수에도 동원하고 말이다.
2 만 명이 넘기에 아이와 노인을 빼고도 상당히 수가 많았다. 바이스는 아드보 워터를 잘 이용하기로 했다.
영지민 전체가 먹을 정도로 양이 많지 않으니 일단 난민에게 먼저 쓰기로 했다.
“나중에 만드는 법을 배워야겠어. 아주 유용하니 말이야.”
바이스는 이 아드보 워터가 에어스트 백작령의 특산물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효능을 가졌다면
누구든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바이스는 물통에 든 아드보 워터를 한 모금 꿀꺽 마셨다. 그리고 심각한 눈으로 난민이 머무는 곳을 내려다봤다.
지금 바이스가 있는 곳은 마탑의 최상층이었다. 워낙 높아서 성 주변이 모두 보였다. 당연히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담겼다.
난민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났다. 솔직히 놀랐다.
저들은 다른 난민과 완전히 달랐다. 훨씬 의욕적이었고, 단합도 훌륭했다. 더구나 영지에 대한 애착이 벌써
형성되었다.
저런 자들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성공한다. 아마 영지에서 자리 잡는 것도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제론에게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냐고 물었지만 제론은 대답해 주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가만, 그때 소개한 사람이나 한번 만나 볼까? 이름이 프로인트라고 했지?”
바이스는 어렴풋이 이번 난민이 다른 이유가 바로 프로인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난민들이 그를 얼마나 따르는지 말이다.
“어쩌면…….”
바이스는 한 가닥 기대감을 갖고 마탑을 나섰다. 어쩌면 좋은 총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급해진 바이스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바이스가 프로인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엔트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확실히 우리 영주님은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프로인트의 말에 엔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보통 분이 아니시죠.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드신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솔직히 전 믿지 않았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가긴 했지만, 정말로 그 일을 성공할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한 명도 안 죽고 도착했지 않습니까.”
그게 더 놀라웠다. 물론 한 명도 안 죽은 건 아니다. 무려 800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성인
남자로만. 하지만 그건 불가항력이었다.
지금은 엔트도 인정했다. 만일 그때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이 여정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제 우린 뭘 하게 될까요?”
“글쎄요.”
두 사람의 말에 대답해 준 것은 마침 나타난 바이스였다.
“조만간 각자가 살 집을 짓게 될 겁니다. 이 건물은 사실 상단을 위해 만든 거라서 이대로 이용이
불가능하거든요.”
프로인트와 엔트의 시선이 돌아갔다. 두 사람은 바이스를 발견하고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다. 이
영지의 총관이자, 말레피 후작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없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아!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앉아 계십시오.”
바이스가 빙긋 웃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엔트에 대해서도 미리 제론에게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며 더욱 관심이 생겼다.
“제가 여기 온 것은 두 분께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이스의 말에 프로인트와 엔트가 긴장했다. 이런 고위직의 관심을 받아서 좋을 게 없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평소보다는 긴장감이 살짝 덜했다. 바이스가 시종일관 웃으며 얘기했고, 정중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이러기가 쉽지 않다. 바이스는 후작가의 자식인 데다가 에어스트 백작령의 총관이었다. 또 듣기로
백작령의 수석 마법사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니 당연히 호감이 생겨났다. 그 호감이 긴장감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킨
것이다.
바이스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빙긋 웃었다. 원하는 대로 분위기가 나오기 시작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두 분이 상당한 능력을 가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영지 전반에 대한 의견을 듣고자 찾아왔습니다.”
둘은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당치 않습니다. 능력이라니요. 저희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도 지식도 없습니다.”
“하하. 아무튼 얘기를 좀 나눠 보고 싶습니다.”
바이스가 그렇게까지 나오니 두 사람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할 말이 별로 많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얘기를 굳이 많이 할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일단 대화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바이스에게는 열정이 있었고, 그것이 두 사람을 서서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바이스는 열정을 가지고 대화에 임했지만 마법사의 특기를 발휘해 머리는 항상 냉정함을 유지했다. 그리고 차분히
객관적으로 두 사람을 분석했다.
처음에는 프로인트에게 관심이 갔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엔트에게로 관심이 옮겨 갔다.
엔트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시야도 넓었다. 게다가 직관력도 뛰어났다. 그야말로 바이스가 딱 원하던
총관상이었다.
‘문제는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건데…….’
바이스는 내심 차기 총관 적임자로서 엔트를 찍었다. 이제 자신은 저 높은 마탑의 주인으로 살아갈 때가 되었다.
반면 프로인트는 참으로 묘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고, 정도 깊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에게는 총관
자리를 맡길 수 없었다.
정이 너무 깊으면 맺고 끊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다. 프로인트는 딱 그럴 사람이었다.
바이스는 고민이 되었다. 대체 이 사람을 어디에 써야 할지 찾기가 어려웠다. 분명히 능력은 뛰어난데, 그
능력이 필요로 하는 곳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세 사람은 참으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의 지식과 능력, 열정에 깊이 감탄했다.
나이도 모두 제각각이었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깊은 친분을 나누었다. 아마 서로 마음을
터놓기만 한다면 나이와 지위를 떠나 정말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Chapter 4 소드 마스터를 만드는 검술

“황당하군.”
슐린 후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어이가 없었다. 난민이라니.
“어떻게 생각하나?”
슐린 후작의 물음에 뤼게 백작이 공손히 대답했다.
“영지 사정이 얼마나 나쁜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영지 사정이 나빠? 이런 멋진 성을 가졌는데? 보아하니 돈도 제법 있는 것 같고.”
“하지만 인구가 모자라지 않습니까. 영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입니다. 영지민이 없는 영지의 한계는 명확한
법이지요.”
“그래? 그럼 사람으로 거래를 하면 되겠군. 얼마나 동원이 가능하지?”
“후작님께서 제대로 힘을 한번 써 주시면 단번에 20 만 명은 데려올 수 있습니다.”
물론 그 20 만 명 안에 뤼게 백작이 키운 정보원이 최소 200 명은 섞이겠지만 굳이 그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20 만 명이라…… 그 정도면 여기 영주가 제법 반응을 보이겠지?”
“아마 결코 거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 아주 기대되는군.”
20 만 명을 동원하는 건 사실 슐린 후작이나 뤼게 백작의 입장에서 지극히 간단한 문제였다.
레늄 왕국에 압력을 넣으면 된다. 난민이 얼마나 많겠는가. 분쟁 지역의 난민을 대충 모아도 20 만은 훌쩍 넘어갈
것이다.
그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방도를 마련해 주면 다들 이곳으로 모여들 것이다. 난민에 대한 정책이 다른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니까.
슐린 후작은 충분히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능력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협상을 자신했다.
“한데 생각해 보면 말이야, 자그마치 소드 마스터야. 게다가 보통 기사를 소드 마스터로 키워 내는 검술을 알고
있는 자야. 그런 자를 쉽게 포기할까?”
“글쎄요.”
“내가 여기 영주라면 결코 포기하지 못할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여기 영주도 소드 마스터일 가능성이 있었지?”
“예, 아마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베샤이덴 경과 슈빅 경의 도움을 받았다면 누구보다 먼저 소드 마스터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슐린 후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확실히 그래. 이것 참, 정말로 기대되는군.”
슐린 후작은 자신이 그 검술을 익히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봤다. 짜릿했다. 어쩌면 자신이 대륙의 모든 소드
마스터 위에 군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에어스트 백작인지 뭔지는 왜 코빼기도 안 보여? 이거 너무 예의가 없는 거 아냐?”
뤼게 백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슐린 후작의 급한 성격을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참은 것만 해도 대단했다. 이제
슬슬 억눌렀던 뭔가가 터질 시점이 되긴 했다.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아마 난민들 때문일 것입니다. 난민에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할 정도로
절박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뤼게 백작이 은근히 달래자, 슐린 후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협상이 더 쉬워질 거라는 뜻이기도 하니 참아야지. 젠장, 지겹군.”
뤼게 백작은 속으로 어서 빨리 에어스트 백작이 오기만을 빌었다. 자칫하면 불똥이 자신에게 떨어질 수도 있었다.
지금 상태를 보니 길어야 몇 시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폭발할지 모르지.’
뤼게 백작이 두려움이 떨고 있을 때, 함께 온 기사 하나다 안으로 들어왔다.
“에어스트 백작이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뤼게 백작이 반색했다.
“오! 어서 안으로 모시게. 아니, 우리가 나가지. 아무래도 사람을 만나려면 응접실이 나을 테니까.”
그들이 묵는 숙소에는 방이 따로 몇 개나 딸려 있고, 응접실과 샤워실, 화장실도 있었다. 초일류 호텔에 가도
이보다는 덜 편하고 덜 화려할 것이다.
뤼게 백작은 슐린 후작을 바라봤다. 슐린 후작도 어서 에어스트 백작을 만나 협상을 마무리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었다.
“뭐 하나, 어서 나가지 않고.”
슐린 후작이 성큼성큼 앞장섰다. 그 뒤를 쓴웃음을 지은 뤼게 백작과 기사가 따라갔다.
응접실에는 슐린 후작의 기사단이 눈을 부라리며 험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제론이 서 있었다.
솔직히 제론은 이들이 너무나 가소로웠다. 진짜 소드 마스터가 된 자신의 힘을 손톱만큼도 파악하지 못하니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정작 제론이 손만 한 번 휘둘러도 모조리 목이 잘려 쓰러질 자들이 말이다.
“오오, 어서 오게. 정말 오래 기다렸다네.”
슐린 후작이 반가운 마음을 담아 말했다. 어서 빨리 베샤이덴과 슈빅을 내놓으라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그
얘기를 제론이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제론은 가볍게 인사했다. 살짝 예의가 모자라 보일 수도 있지만, 또 그걸 걸고넘어지기에는 좀 애매했다.
한마디로 아슬아슬한 선을 타는 느낌이었다.
“일단 이쪽으로 앉지.”
슐린 후작은 자연스럽게 제론에게 하대하며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뭐라 하기에도 애매했다.
슐린 후작은 나이가 제론보다 훨씬 많았으니까.
세 사람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제론은 이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알기에 얘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슐린 후작과 뤼게 백작은 나름대로 머릿속을 정리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슐린 후작이었다. 체질적으로 뭔가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빙빙 돌리는 건 나랑 안 맞으니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슐린 후작은 제론을 향해 강하게 기세를 쏘며 말했다.
“베샤이덴 경과 슈빅 경을 넘기게.”
만일 슐린 후작이 이런 요구를 할 거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상당히 놀라고 화가 났겠지만, 예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제론은 오히려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베샤이덴 경과 슈빅 경은 기사이지 물건이 아닙니다.”
순간 슐린 후작은 말문이 막혔다. 결국 참았던 성질이 확 치솟았다.
“내가 한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모르나?”
“근간에 그런 생각이 깔려 있으니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슐린 후작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진득한 살기가 물안개 깔리듯 촥 퍼졌다.
뤼게 백작만 중간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금방이라도 슐린 후작이 검을 뽑을 것만 같았다. 만일 그렇게 되면 일이
좀 커진다.
솔직히 이런 변방 왕국의 보잘것없는 백작 하나 죽인다고 슐린 후작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문제는
자신이었다.
뤼게 백작이 함께 있었으면서 그런 사태를 막지 못했다면 모든 불똥이 뤼게 백작에게로 튈 것이다. 그런 상황은
결코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후작님,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시는 것이…… 지금 중요한 건 베샤이덴 경과 슈빅 경 아니겠습니까?”
살기등등한 슐린 후작의 시선이 뤼게 백작에게로 향했다. 뤼게 백작은 다리가 후들거리고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지만 애써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럴 때는 그렇게 하는 편이 슐린 후작을 달래기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랜 경험과 사람을 다루는 능력,
그리고 직감이 아우러져 만들어 낸 결과였다.
“좋아. 일단 백작의 얼굴을 봐서 내가 잠깐 참지.”
슐린 후작은 살기를 살짝 가라앉혔다. 그리고 제론을 노려봤다.
“이제부터는 어휘 선택이 아주 중요할 거야. 내 다시 한 번 말하지. 베샤이덴 경과 슈빅 경을 넘겨.”
이젠 숫제 말을 놓고 있었다. 상당히 무례한 일이었지만 슐린 후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제론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만 그 사이에 있는 뤼게 백작만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 그는 속으로 연신 욕을 해댔다.
‘이런 미친놈 같으니라고. 소드 마스터면 다야? 뭐 이리 안하무인이야! 그리고 저 머저리 백작 놈은 또 왜이래?
그냥 죽여 달라는 거야, 뭐야?’
뤼게 백작이 속으로 갖은 욕을 하는 줄도 모르고 슐린 후작은 여전히 살기를 완전히 지우지 않은 채 제론을
노려봤다.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한 기세였다.
“그 두 사람은 왜 원하는 겁니까?”
제론이 담담하게 물었다. 슐린 후작은 그 담담함이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이 흘리는 살기와 기세 속에서
태연하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억지로 참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마음에 안 들었다 힘든 티라도 좀 내면 마음이 풀릴 것 같은데, 전혀 그럴
기미가 안 보였다.
“몰라서 묻나?”
“고작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입니까?”
“고작? 지금 소드 마스터를 고작이라고 했나? 그것도 내 앞에서?”
뤼게 백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슐린 후작의 자긍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 모든 자긍심이
그가 소드 마스터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즉, 그는 자긍심의 근본을 무시당한 것이다.
이보다 수위가 약했어도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이제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치달았다.
“이제 사람이 검을 든 시대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기간트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오히려 힘이 빠졌다. 당연히 옳은 얘기다. 아무리 슐린 후작이라도 기간트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었다.
상대가 기간트 중 가장 약하다는 실바를 상대로 해도 마찬가지였다. 절대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의 힘은 검술과 육체 능력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기간트 운용에 있어서도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갖는다.
“소드 마스터가 기간트를 타면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지 너라면 알 텐데? 소드 마스터를 둘이나 휘하에 두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나?”
제론이 피식 웃었다. 순간 슐린 후작은 하마터면 검을 뽑아 목을 날릴 뻔했다. 그만큼 그 웃음이 거슬렸다.
너무나 명백한 비웃음이었으니까.
“후작님이 보기에 전 소드 마스터입니까?”
슐린 후작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익스퍼트다.”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슐린 후작이 보기에 제론은 마나로 온몸이 꽉 차 있었다. 이는 익스퍼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만일 소드 마스터가 된다면 저 마나가 일정한 흐름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또한 흐름을 가진 마나는 점점 압축되어 가느다랗게 변한다. 이것이 소드 마스터와 익스퍼트의 차이였다.
그리고 처음 슐린 후작이 카이트를 비롯한 라이트닝 기사단을 봤을 때, 얼핏 소드 마스터로 착각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몸 안에 가느다란 마나의 흐름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너무 가늘어서 소드 마스터의 힘을 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슐린 후작이 보기에 제론의 몸은 마나로 꽉 차 있었다. 그것도 밀도가 옅은 마나였다.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검술을 배우지 않은 모양이군. 아니면 관심이 없었거나.”
제론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굳이 그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이 제국의 소드 마스터를 돌려보내야 한다. 마찰을 최소로 해서 말이다. 그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제론은 슐린 후작의 자존심에 승부를 걸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라이더로서의 능력이 얼마나 향상됩니까?”
“극도로.”
슐린 후작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라이더로 오를 수 있는 정점에 도달한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가 그러하다고 믿었다. 기간트를 타고 싸웠을 때,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건 같은
소드 마스터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그럼 제가 그들을 가르친다고 하면 못 믿으시겠군요?”
“가르쳐? 뭘? 설마 기간트를?”
“그렇습니다.”
슐린 후작은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하하핫!”
한참이나 배를 잡고 웃던 슐린 후작이 싸늘한 표정으로 제론을 노려봤다.
“장난은 사절이다.”
“장난이 아닙니다.”
슐린 후작이 으르렁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용납할 수 없었다. 제론은 계속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짜증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하면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시험? 어떻게 말이냐? 기간트로 싸워 보자고? 그런 의미 없는 짓을 내가 왜 해야 하지?”
제론이 빙긋 웃었다.
“왜 의미가 없습니까? 합법적으로 짜증 나는 상대를 박살 낼 수 있을 텐데요.”
그 말에 슐린 후작이 혹했다.
그리고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뤼게 백작의 가슴이 싸늘히 식었다.
‘이놈 처음부터 이걸 계획했군!’
확실하다. 기간트 승부로 몰아갈 작정을 하고 온 것이다. 하지만 뤼게 백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냥 화풀이나 하라고?’
만일 정말로 그걸 원했다면 상대를 잘못 파악했다. 슐린 후작은 지금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아마 기간트
승부를 보는 중에 기회를 만들어 제론을 죽일 것이다.
두 눈에 감도는 살기를 보면 확실했다.
‘좋은 기간트를 가지고 있나? 설마 그 새로운 발굴형 기간트를 쓰겠다는 건가? 그건 끝까지 감추고 싶을 텐데?’
만일 소드 마스터인 슐린 후작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면 대체 얼마나 뛰어난 기간트란 말인가. 슐린 후작이
히엠스를 보유했다는 건 이젠 얘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데 히엠스를 탄 슐린 후작을 소드 마스터도 아닌 사람이 이기려면 대체 얼마나 성능이 뛰어난 기간트를 타야
한단 말인가.
그걸 생각하니 뤼게 백작의 입매가 가늘어졌다. 만일 그 기간트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압력을 넣어서
빼앗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말이다.
물론 그 기간트는 슐린 후작의 소유가 되겠지만 뤼게 백작은 충분히 실리를 얻을 자신이 있었다.
뤼게 백작이 한창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제론의 말이 이어졌다.
“그냥 싸우는 건 재미가 없으니 내기라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내기? 말해 봐라.”
“후작님이 이기시면 그 검술을 내 드리죠.”
“검술?”
“베샤이덴 경과 슈빅 경이 익힌 검술 말입니다. 라이트닝 소드라고 부르는 검술입니다.”
슐린 후작의 얼굴에 놀람이 어렸다. 베샤이덴과 슈빅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그들이 익힌 검술을 얻어 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만일 두 기사를 얻을 수 없다면 검술만이라도 가져가야만 한다. 그래야 수지 타산이 맞는다. 그 검술을 이용해
수많은 소드 마스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슐린 후작가의 위상이 수직으로 상승할 것이다.
“그거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군. 거기에 그 두 기사도 함께 주는 건 어떤가? 그저 자유기사로 풀어 주기만 하면
되네.”
어느새 슐린 후작의 말투가 달라졌다. 조금 전 화가 났을 때는 반말을 찍찍 하더니 이젠 말끝을 살짝 높였다.
마음이 제법 풀어졌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하죠. 한데 후작님이 지셨을 때는 어쩌시겠습니까?”
슐린 후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원하는 걸 말해 보게. 뭐든 해 주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듯한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지금 상황을 보면 그럴 만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만큼 소드 마스터인 슐린 후작의 힘은 대단했다.
비단 검뿐 아니라 기간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자동으로 기간틱 마스터가 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말이다.
“그냥 돌아가 주십시오. 그리고 향후 10 년 동안 우리 에어스트 백작령에 대한 어떤 행동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슐린 후작이 피식 웃었다.
“뒤를 좀 봐 달라 이건가?”
“관심을 끊어 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건 슐린 후작님뿐 아니라 함께 오신 뤼게 백작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기사들도 그렇게 했으면 합니다.”
슐린 후작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지.”
제론이 뤼게 백작을 쳐다봤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망설였다. 그러자 슐린 후작의 호통이 날아갔다.
“날 못 믿겠다는 뜻인가!”
뤼게 백작이 ‘아, 뜨거’ 하면서 얼른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물론 속마음은 좀 달랐다. 만일 정말로 제론이 이긴다면 계속해서 이 영지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무조건 그렇게 할 것이다.
‘새로운 발굴형 기간트를 그렇게 쉽게 놓칠 수야 없지.’
뤼게 백작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안 제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나가실까요? 괜히 시간을 끌어 봐야 좋을 게 없잖습니까.”
“화통하군. 좋네.”
제론이 서둔 이유는 간단했다. 시간이 아까웠다. 이런 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게 싫었다.
세 사람은 곧장 기간트 훈련장으로 향했다. 에어스트 백작성에는 기간트 훈련장이 무려 7 곳이나 있었다. 그중 4
곳 정도는 항상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종종 비어 있었는데, 그중 한 곳으로 갔다.
“훌륭하군.”
슐린 후작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에어스트 백작성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기간트 훈련장까지 이렇게 훌륭하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성 나한테 팔 생각 없나? 내 아주 후하게 값을 쳐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얘길 꺼낼 정도로 성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감탄이었다.
“기간트를 꺼내시죠.”
제론의 말에 슐린 후작이 입매를 비틀며 자신의 기간트인 히엠스를 소환했다.
13 미터에 달하는 새하얀 기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슐린 후작은 소드 마스터답게 제자리에서 훌쩍 뛰어
조종석에 안착했다.
제론은 슐린 후작이 기간트에 탄 것을 확인한 다음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실바 한 기가 훈련장에 들어왔다.
쿵! 쿵! 쿵!
실바는 제론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조종석이 열렸다. 안에서 내린 사람은 카이트였다.
카이트는 걱정스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제론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슐린 후작의 방을 나서며 바로 카이트에게 연락을 했다. 실바 하나를
가져 오라고 말이다.
비록 세나가 손을 봤다고는 하지만 그래 봐야 실바였다. 이걸로 히엠스를 상대하는 건 아무리 제론이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카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제론의 저 자신감을 조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소드 마스터인 슐린 후작이었다.
그냥 라이더가 히엠스를 타도 쉽지 않은데, 소드 마스터가 탔다. 소드 마스터는 즉 기간틱 마스터이기도 했다.
그걸 알기에 더더욱 제론의 결정이 무모해 보였다. 막말로 영지에 기간트가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최소한
베르라도 갖다 써야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걱정 말고 돌아가. 아, 보고 가도 상관없고.”
카이트는 지켜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 또 혹시라도 정말 제론이 이긴다면 그 대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제론은 그렇게 정리한 다음 뤼게 백작에게 다가갔다.
“이 대결의 공증을 맡아 주십시오.”
“그걸 제가 맡아도 되겠습니까?”
뤼게 백작의 말에 제론이 빙긋 웃었다.
“믿습니다.”
뤼게 백작은 제론이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은 슐린 후작과 같은 편이었다. 한데
공증을 제대로 맡을 리가 있겠는가.
제론은 뤼게 백작에게 그 말을 남기고 실바로 다가가 조종석에 천천히 탑승했다.
뤼게 백작은 그것을 멍하니 지켜봤다.
‘이건 뭐지?’
어쨌든 공증을 맡기로는 했는데, 뭔가가 찜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증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는 걸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뤼게 백작의 눈에 카이트의 모습이 보였다. 카이트는 커다란 수정구를 들고 있었다.
그걸 본 뤼게 백작의 눈이 번득였다.
‘영상 저장구?’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 중 하나로 쓰는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거의 쓰이지 않는다. 가격에 비해 쓸모가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저장할 수 있는 영상의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이었다. 저런 커다란 수정구에 고작 30 초 정도 저장이
가능했다.
처음 개발될 때만 해도 마법의 혁명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사장되기 직전의 아티팩트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이건 뭐지?’
뤼게 백작은 더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훈련장을 뒤흔들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는 슐린 후작의 호통
때문이었다.
“지금 날 우롱하는 것이냐!”
히엠스가 강하게 발을 굴렀다.
꽈앙!
훈련장 바닥이 우르르 흔들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조금도 부서지거나 금이 가지 않았다.
물론 그걸 발견하거나 신경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그들이 신경을 써야 할 것은 훈련장 바닥이 아니라
슐린 후작의 분노였다.
“고작 실바로 날 상대하겠다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패배해 핑계를 만들 셈인가?”
슐린 후작은 진정으로 분노했다. 하지만 제론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전 실바가 제일 편합니다. 색이 붉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점이 좀 아쉽군요.”
히엠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슐린 후작의 분노가 가득 담긴 주먹이었다. 그는 제론이 자신을 놀린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지금까지 가만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꽈앙!
히엠스가 바닥을 차고 달려 나갔다.
쿵쿵쿵쿵쿵!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과연 발굴형 기간트 중 최고인 히엠스다웠다. 또한 소드 마스터가 모는 히엠스다웠다.
실바는 히엠스가 달려오는데도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마치 그냥 서 있다가 얻어맞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당연히 그런 건 아니었다.
제론은 냉정한 눈으로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자신의 마나로 실바를 모두 장악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실바는 그냥
실바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성능을 갖게 되었다.
부우웅!
히엠스는 거의 몸을 날리다시피 주먹질을 했다.
실바가 고개를 까딱이며 옆으로 상체를 살짝 휘었다.
콰우우!
실바의 상체가 있던 곳을 히엠스의 주먹이 거칠게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주먹이 적당히 속도가 줄어든 순간, 실바의 두 팔이 움직였다.
콰드득!
실바는 두팔로 히엠스의 팔을 감쌌다. 주먹질이 채 끝나지 않은 상황이기에 히엠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물론 그건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실바가 히엠스의 팔을 확 당겼다. 주먹질을 하던 방향으로 당기는 바람에 힘이 더해져 순간적으로 히엠스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 역시 찰나의 순간이었다.
너무나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그 타이밍이 아니었다면 아마 히엠스는 순식간에 반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타이밍이 절묘했기에 히엠스는 채 어떤 행동을 취하지도 못했다.
균형이 무너진 히엠스의 옆구리에 실바의 허리 부분이 닿았다.
쩡!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실바가 다리를 위로 힘껏 차올리며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꽈앙!
꽈드득!
균형을 잃은 히엠스의 발목에 정확히 실바의 발끝이 닿았고, 그 순간 히엠스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히엠스의 팔을 휘감은 실바의 양손에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갔다.
부우웅!
일단 허공에 떠 버린 히엠스는 속수무책이었다. 만일 제론이었다면, 아니, 사람이었다면 뭔가 다른 수가 생겼을
것이다. 어쨌든 히엠스의 라이더는 소드 마스터인 슐린 후작이었으니까.
하지만 허공에 떠오른 것은 히엠스였다. 히엠스는 그렇게 허공을 한 바퀴 빙글 돌아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꽈아아아아앙!
그냥 쓰러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 히엠스를 덮쳤다. 더구나 실바는 마지막 순간 내던지듯 손을 놓아 버렸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과부하가 걸리긴 했지만 기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히엠스는 바닥에 대자로 누운 채 일어나지 못했다. 라이더의 몸에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다. 사실 히엠스는
라이더를 워낙 철저히 보호하는지라 충격이 거의 가지 않았다.
문제는 정신적인 충격이었다. 슐린 후작은 자신이 모는 히엠스가 고작 실바에게 내동댕이쳐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말도 안 되는 기술은 또 뭔가. 생전 처음 봤고, 처음 당해 봤다. 만일 히엠스가 아니라 베르
정도였다면 그 거대한 충격을 완전히 흩어 내지 못하고 라이더가 다쳤을 것이다.
기간트는 엄청나게 무거운 만큼 이런 경우 받는 충격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었다.
히엠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실바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마치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이윽고 히엠스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널 너무 얕봤다. 네 실력을 인정하마. 하지만 이젠 다를 것이다.”
히엠스가 검을 뽑았다. 조금 전과 달리 삼엄한 기세가 느껴졌다.
“검을 뽑아라. 이번에도 날 이긴다면 군소리하지 않고 돌아가지.”
슐린 후작의 결의가 느껴졌다. 절대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검에 담겨 번득였다.
제론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담담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전혀 흥분하지도 않았다. 그저 물처럼
고요히 다음 싸움을 준비할 뿐이었다.
실바가 검을 뽑았다.
그러자 히엠스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실바의 주위를 맴돌았다. 상대를 자신보다 강하다고 인정하고 빈틈을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평소의 슐린 후작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슐린 후작이 제론을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히엠스가 실바의 좌측으로 돌았다. 검을 든 오른손에서 멀어지는 것이 더 유리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한데
실바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상대가 측면으로 돌면 방향을 바꿔 정면이 향하게 해야 한다. 저렇게 가만히 있는 건 공격해 달라고 애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완전히 왼쪽을 점했다. 오른손에 있는 검을 휘둘러 방어하기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히엠스는 즉시 몸을 날렸다.
꽈앙!
거의 점프에 가까운 돌진이었다. 살짝 발이 허공에 뜬 채, 앞으로 쭉 나아갔다.
콰우우!
히엠스의 검이 그대로 실바의 허리를 갈라 갔다.
그 순간, 실바가 한 걸음 옆으로 걸었다. 한데 히엠스에게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히엠스 쪽으로 다가갔다.
그것이 히엠스가 휘두른 검의 타점을 완전히 어긋나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달려든 히엠스를 자신의 사정거리 안에 둘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타이밍의 승리였다.
워낙 절묘한 타이밍을 찔렀는지라 슐린 후작은 이번에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실바가 히엠스의 팔을 휘감았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던 방향으로 힘껏 히엠스를 당겼다.
히엠스의 균형이 어긋난 순간 슬쩍 발을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꽈과광!
히엠스가 꼴사납게 나동그라졌다. 균형을 잃은 상태에서 발까지 걸리니 허공에 떠올랐고, 그 순간 실바가 힘주던
방향을 약간 아래로 틀어 버렸기에 제대로 착지를 할 수 없었다.
바닥을 구르던 히엠스가 억지로 균형을 잡으며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실바를 놓쳐 버렸다. 찾을 수가 없었다. 슐린 후작은 갑자기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실바의 커다란 발바닥을 보았다.
꽈광!
실바가 높이 점프해서 발로 히엠스를 내리찍었다. 히엠스는 채 균형을 되찾기도 전에 또 나동그라져야 했다.
콰득!
바닥에 쓰러짐과 동시에 실바의 검이 히엠스의 목에 박혔다. 히엠스의 목을 감싼 철갑이 종잇장처럼 찢어져
버렸다.
실바는 검을 그대로 꽂은 채 뒤로 훌쩍 물러났다.
히엠스는 양팔을 벌리고 바닥에 누운 채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망가진 건 아니었다. 목의 철갑이 뜯겨 나가긴
했지만 마법진이 망가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제론이 제법 신경을 써서 찌른 덕분이었다.
슐린 후작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또 덤벼 봐야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라는 걸 알았다. 방금 목에서 빗겨 맞는
것도 사실 제론이 봐준 거라는 사실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지독한 패배감이 엄습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패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고작 실바에게 압도적으로
졌다. 패배감이 짙어져 절망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끼이익.
히엠스가 일어났다. 그리고 목옆에 꽂혔던 검을 뽑았다. 검을 든 히엠스가 천천히 실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내밀었다.
실바가 당연하다는 듯 검을 받았다.
“아주 깨끗이 졌군.”
“좋은 승부였습니다.”
제론의 말에 슐린 후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굳이 위로해 줄 필요 없네. 진 건 진 거니까. 이런 압도적인 패배는 태어나서 처음이군. 아주 좋은 약이
되었네.”
슐린 후작은 벌써 패배감과 절망감을 벗어 버렸다. 그 정도 정신력이 없었다면 결코 소드 마스터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히엠스의 해치가 열렸다. 슐린 후작은 훌쩍 뛰어내린 다음 히엠스를 돌려보냈다.
그러자 제론도 해치를 열고 실바에서 내렸다.
슐린 후작의 표정은 상당히 개운했다. 조금 의외였다. 그동안 지켜본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면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람 같지가 않았었다.
“약속은 꼭 지키겠네.”
“후작님을 믿겠습니다.”
슐린 후작이 빙긋 웃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말을 들어도 버럭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럼 자신을 뭐라고
생각했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화가 나지 않았다.
“이거, 어쩌면 내가 자네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머리가 맑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제론도 빙긋 웃었다. 진짜 소드 마스터가 되었기에 지금 슐린 후작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슐린 후작은 사실 그동안 약간의 마나 불균형 상태였다. 이는 육체적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 문제를 야기한다.
근본적으로 정신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번에 지독한 패배 후, 상실감과 절망감을 느끼고 그것을 이겨 내면서 정신이 한층 강해졌다. 덕분에
불균형 상태에서 살짝 벗어났다.
아마 앞으로는 슐린 후작의 노력 여하에 따라 완전히 그 문제를 해결하고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대단하군. 솔직히 붉은 학살자라는 정보를 봤을 때는 코웃음을 쳤는데, 내가 완전히 사람 잘못 봤어.”
“과찬이십니다.”
슐린 후작은 그 뒤로도 한동안 제론에게 호의 어린 말을 해 주었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뤼게 백작은 자신의 입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렇게 크란 제국 소드 마스터의 방문이 일단락되었다.

슐린 후작은 다음 날 바로 돌아갔다. 더 남아 있자고 은근히 권유하던 뤼게 백작을 향해 단호히 고개를 젓고 그를


강제로 데리고 돌아가 버렸다.
슐린 후작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마스터를 만드는 검술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젠 그보다 지금의 자신을 좀 더 갈고닦는 게
중요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어렴풋이 더 위로 올라갈 단초를 발견한 것이다. 그걸 찾아내는 것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를
검술을 새로 익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아닌가.
어쨌든 슐린 후작 일행이 돌아감으로 인해 에어스트 백작령은 평소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난민도 빠르게 정착되어 갔고, 진행 중인 사업도 다들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제론은 간만에 영지를 둘러보며 몇 가지 일을 처리했다. 내버려 둬도 상관없었지만 자신이 나서면 훨씬 빨리
처리가 가능한 것들이었다.
다른 때라면 그냥 내버려 뒀겠지만 지금은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 할 때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 ☆ ☆

제론은 영지의 일을 대충 마무리한 다음 바이스를 불렀다. 세나는 제론이 새로 내려 준 라쿠스 때문에 다시


공방에 틀어박혔고, 카이트는 실력이 대폭 늘어난 견습 라이더를 본격적으로 교육시키느라 바빴다.
“어때?”
제론의 물음에 바이스는 즉시 대답했다.
“총관 후임은 엔트가 적당합니다.”
“엔트? 의외로군. 프로인트도 상당한 능력자인데 말이야.”
“그림자의 정령 말입니까?”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엔트를 선택한 거야?”
“프로인트에게 들었습니다. 제법 친해졌거든요.”
바이스는 신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 판단에는 엔트가 적격입니다. 프로인트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합니다.”
“왜? 쓸모가 없나?”
바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그 능력을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그렇습니다.”
“감이 왜 안 잡혀? 딱 적당한 곳 있잖아.”
“정보 말씀입니까? 하지만 그는 거기에도 별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프로인트도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정보 쪽에서 써먹으려면 정보에 관한 재능이 따로 필요하다. 감각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프로인트에게는 그게 모자랐다.
“그래서 어쩌려고?”
“모르겠습니다. 일단 고민해 봐야죠.”
바이스는 한참을 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엔트를 총관으로 만드는 건 프로인트의 자리가 결정됐을 때 하겠습니다.”
“좋도록 해.”
제론은 바이스가 새 총관을 결정하는 일에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는 전적으로 바이스가 원하는 대로
처리되어야 하는 사항이었다.
대충 얘기가 끝나자 제론이 폭탄 발언을 했다.
“영지를 당분간 떠나 있을 거야.”
“예에에?”
바이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영지에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밖으로 나간단 말인가.
영지에 영주가 없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이런 식이면 영지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어.”
바이스의 표정이 굳자, 제론은 말을 이었다.
“일단 아드보 나무에 관한 일을 해결하고, 암시장에 다녀올 생각이야.”
“암시장 말입니까?”
바이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팔려고 준비한 기간트야 이제 우리가 다시 쓴다고 해도 팔아야 할 물건들이 좀 있어.”
“하지만 그런 일은…….”
굳이 그 일을 제론이 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에어스트 백작령에도 제법 사람이 많았다. 암시장에 기간트를 내다
파는 일 정도는 충분히 알아서 할 수 있었다.
“아무에게나 맡기기 좀 그런 물건이야. 적지 않은 돈도 오갈 거고. 내가 직접 가는 게 나아.”
제론이 적지 않은 돈이라고 표현했다면 그건 정말로 많은 돈이리라.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맡기긴 좀 그렇다.
일례로 얼마 전 제론이 2 천만 골드를 들고 온 적이 있는데, 그때는 정말로 경악했다. 만일 이번에도 그 정도
금액이 오간다면 제론이 직접 하는 게 맞다.
“그럼 이번에는 대체 언제 돌아오실 생각이십니까?”
제론이 씨익 웃었다.
“왜 그래? 나 없어도 잘 하면서. 내가 없을 때 오히려 발전 속도가 팍팍 붙는 것 같은데? 아니야?”
바이스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제론이 있으면 얼마나 유용한데. 실제로 농지에 거미줄처럼 나 있는 수로도 제론이 혼자서
판 것이고, 거기에 물을 댄 것도 제론이 한 일이었다.
“어쨌든 잘하고 있으니 이대로만 가. 우리 당분간만 내실을 다지자고.”
그 말을 하는 제론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이 시기가 지나면 크게 날아오를 거라고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슈린 공작가는 더 이상 세상에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요즘 포로스는 좀 어때?”
바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좀 어렵습니다. 가문에서 요구하는 양은 많은데, 막상 재료가 모자라서 제대로 물량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써야 하니까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도 확실히 해결해야만 한다. 이번 여정에서 어떻게든 알아볼 생각이었다.
해결법은 단순하다. 테페룸을 잔뜩 구하면 된다.
“시간이 없군. 서둘러야겠어. 아마 내가 다시 돌아오면 웬만한 문제는 다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
제론의 자신만만한 말에 바이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 강한 믿음이 떠올랐다. 제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반드시 기발한 뭔가를 들고 돌아올 것이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세나에게는 제가 잘 말해 두겠습니다.”
세나라는 말에 제론이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그녀에게는 상당히 미안했다. 영지의 상황이 좀 더 나아지면 더
깊은 관계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아직은 아니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현재 레늄 왕국의 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제론이 예상하기에 조만간 왕국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어쩌면 이
상황 자체를 누군가가 유도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황을 따져 보면 확실했다. 바인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물론 아직 정확히 확인한 것은 아니기에 확신을
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되도록 빨리 돌아오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걸음을 옮기는 제론의 표정은 더없이 결연했다.

Chapter 5 유적탐사

제론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벨루스 백작령이었다. 그곳에 있는 유적은 분명히 아드보 나무와 관계가 있었다.
그걸 확신했기에 가장 먼저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벨루스 백작가에는 알리지 않았다. 혼자 몰래 와서 유적만 확인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확실히 아드보 나무가 지천에 널려 있긴 하군.”
이곳에 있는 아드보 나무라면 상당히 많은 아드보 워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드보 워터는 꾸준히
마셔야 효과가 좋다.
그러려면 이 정도 나무로는 고작 몇 개의 영지를 커버하는 게 전부였다. 레늄 왕국 전체, 더 나아가 전 대륙에
아드보 워터를 퍼트리려면 이것의 수만 배는 필요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아드보 워터를 마시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제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효능을 나눠 주고 싶었다.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마시면 분명히 효과를 볼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라도 아드보 워터를 판매할 때, 비싼 가격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또한 에어스트 백작령에 오면
아드보 워터를 공짜로 마음껏 마실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실현되기 어려운 꿈같은 얘기였지만 말이다.
제론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했다. 하지만 바로 벨루스 백작령의 게이트로 가지 않았다. 옆 영지의 게이트로
나와 벨루스 백작령까지 이동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크란 제국 마탑에서 관리하긴 하지만, 거기에 오가는 사람은 반드시 기록하게 되어 있었다. 그
기록은 영주라면 누구나 열람이 가능했다. 아니, 매일 같은 시간에 게이트를 이용한 사람의 명단과 시간이 기록된
보고서를 영주에게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제론은 자신이 벨루스 백작령에 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또한 앞으로도 자신의 행적이 되도록
노출되지 않게 조치할 작정이었다.
일단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서 푸르투나를 불러내 날아가면 된다. 또한 소드 마스터의 탁월한 육체와 마나의
힘으로 달려도 된다.
텔레포트 게이트보다야 훨씬 느리겠지만 그래도 말이나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보다는 빨랐다.
그런 식으로 이동한 제론은 생각보다 금방 벨루스 백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론의 목적지는 벨루스
백작령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한 산이었기에 눈에 띌 염려는 없었다.
“이거 변장이라도 해야 하나?”
사실 제론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니 미리 준비를 하는 게 좋았다.
대단한 변장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후드가 달린 로브를 준비해서 입고 옷차림을 조금 평범하게 바꾸는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첫인상이 귀족처럼 보이지 않으면 제론을 알아봐선 안 되는 자들은 대부분 주목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제론이 영지를 나와 여행 중이라는 정보는 돌아다닐 것이다.
정보조직의 예리한 눈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제론이 원하는 건 최대한 방해받지 않고 유적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일단 첫 목표는 레늄 왕국을 완전히 문두스의 영향력 아래에 놓는 것이었다. 모든 유적을 다 발굴하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았다.
바인이 이끄는 문두스는 이미 수도의 정보 조직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제 수도의 모든 정보는 문두스의 손을 거쳐
가게 되어 있었다.
바인은 문두스를 맡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정말로 많은 성과를 얻어 냈다.
이제 그런 바인과 문두스에 더 큰 날개를 달아 줄 때가 되었다.
제론은 빠르게 산에 올랐다. 사방이 아드보 나무 천지였다. 아드보 나무는 목재로 쓰기에도 적합하지 않았기에
그저 그대로 방치하는 것 외에는 정말로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아드보 나무가 나는 곳도 드물었다. 레늄 왕국에서는 벨루스 백작령이 유일했고, 어떤 왕국에는 아예
아드보 나무가 나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특이한 나무였다. 서식지에 규칙이 없었다. 아무나 갖다 심는다고 자라는 나무도 아니었다. 그 서식지
외에는 자라지도 않는다. 물론 그런 시도를 할 사람도 없겠지만 말이다.
제론은 아드보 나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순식간에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이거 설마 초고대문명의 마법 공학으로 만들어 낸 건 아니겠지?”
제론은 아드보 나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를 알게 될지도 몰랐다.
태블릿으로 검색을 하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숨겨진 유적을 찾아야만 했다. 예전에는 시간이 모자라서 못 찾았지만 지금은
자신 있었다.
제론은 정상에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잊고 유적을
찾을 때의 그 느낌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잘 잡히지 않았다. 한데 오랫동안 집중력을 잃지 않으니 살금살금 느낌이 다가왔다. 제론은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그 느낌을 조금씩 잡아냈다.
‘됐어!’
제론은 잡아낸 느낌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느낌이 오는 곳으로 의념을 보냈다. 한데 너무 깊었다. 그 유적은
땅속 깊은 곳에 있었다.
아무래도 초고대문명이 끝난 뒤 이 산이 새로 생긴 모양이었다. 이렇게 깊은데 과연 유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혹시 땅을 파내야 하는 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한 제론이 일단 정령을 불러냈다.
“아네모스.”
밑져야 본전이다. 시도해 보고 안 되면 땅을 파든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든 하면 되지 않겠는가.
휘류루루루룽!
아네모스가 나타나 제론의 의념에 따라 팔찌에 스며들었다.
번쩍!
제론은 그대로 빛에 휩싸여 아래로 쑥 내려갔다.
성공이었다.
하지만 과연 다음에도 그냥 아네모스만 부른다고 유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한다. 어쩌면 여기에
들어올 때마다 감각을 총동원해야 할지도 모른다.
제론은 감았던 눈을 떴다.
익숙한 광경이 보였다. 역시 초고대유적이었다.
―마스터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콜로니의 통제실은 10 층에 있습니다.
여기서는 바로 가장 아래층으로 가는 것이 최고다, 거기에 가면 어떤 아티팩트가 있고, 무슨 능력을 가진
유적인지 즉시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최하층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무려 10 층짜리 유적이었다. 당연히 기대감이 커졌다. 제론은 태블릿을
꺼내 차근차근 유적을 확인했다.
이곳도 다른 유적과 마찬가지로 수련실과 생활공간이 있었다. 9 층과 8 층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7 층부터 5
층까지가 마티를 보관하는 공간이었다.
마티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마티가 커버하는 범위도 엄청났다. 벨루스 백작령을 넘어서 그 주변 영지까지
싹 파악이 가능했다.
이건 상당한 성과였다. 아마 이를 이용하면 문두스의 힘이 두 배는 늘어나리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4 층부터 1 층까지는 아드보 나무를 키우는 온실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을 가공하고 특별한 처리까지 해서 아드보 수액을 만들고, 정확한 비율로 물을 섞어 아드보
워터를 만들어 내는 공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이렇게 아드보 워터를 만들었군.”
대충 계산해 보니 여기서 만들어 내는 아드보 워터의 양이 상상을 초월했다. 또한 그 효능도 제론이 만든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뛰어났다.
제론은 기분이 좋아졌다. 시작이 산뜻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유적을 찾게 될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나머지도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여기는 유적 간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와야겠군.”
유적 위에 너무 높은 산이 있어서 오기가 쉽지 않았다. 또 그냥 팔찌에 아네모스를 넣는다고 바로 올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럴 때는 확실한 방법으로 오는 것이 최고였다.
“자, 그럼 다음 유적을 찾아가 볼까?”
제론의 목표는 레늄 왕국에 알려진 모든 고대유적을 찾아가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마 그 모든 유적의 아래에
초고대문명의 유적이 있을 것이다.
또한 할 수만 있다면 고대유적과 이어지지 않은 초고대문명의 유적도 싹 찾아내고 싶었다.
어쩌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더 확실한 것부터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제론은 태블릿에 레늄
왕국의 지도를 띄우고, 바인으로부터 얻은 유적에 관한 정보를 그 옆에 함께 띄웠다.
그리고 다음 타겟을 신중하게 골랐다. 순서도 중요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거의 이용할 생각이 없었기에 최단
경로를 찾아 움직여야만 했다.
물론 유적 간 텔레포트는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사실 유적 간 텔레포트가 있어서 이렇게 마음 놓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혹시라도 영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건 제론의 마음을 크게 안정시켜 주었다. 그래서 더 냉정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곳은 이쪽인데…… 과연 여기서 그냥 나갈 수 있을까?”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장을 쳐다봤다. 꽉 막혀 전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론은 자칫 유적을
나가려다가 저 흙더미 안에 갇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불안감을 안고 굳이 나갈 이유가 없었다.
“그럼 일단 유적 간 텔레포트로 이동해서 가야겠군.”
수도로 가는 것이 제일 나았다. 어쨌든 왕국의 중심에 위치해서 어디로든 편히 갈 수 있었다. 게다가 수도에
가면 폴타를 이용해 이동 게이트를 열 수 있었다.
수도에서 100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는 이동이 가능하니 그걸 이용해서 다음 유적에 최대한 가까이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대폭 절약될 것이다.
“그럼 수도에 거점을 두고 계속 폴타를 이용하면 되겠군.”
제론은 그런 식으로 계획을 세우고는 바로 수도 유적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레늄 왕국의 유적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 ☆ ☆

생각보다 유적탐사에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대체 왜 지금까지 이걸 하지 않고 미뤄 뒀는지 후회가 될


정도였다.
레늄 왕국에는 에어스트 백작령의 중앙유적까지 합해서 총 24 개의 고대유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유적 모두
아래에 초고대문명의 유적이 존재했다.
제론은 그 모든 유적을 싹 등록했다. 이제 레늄 왕국 곳곳을 유적 간 텔레포트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마티를 이용해 유적 근방의 정보를 싹 확인하는 게 가능해졌다.
물론 고작 24 개라서 왕국 전역을 커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지역은 대부분 확인이 가능했다.
이제 남은 건 고대유적과 연결되지 않은 초고대문명의 유적을 얻는 일이었다.
제론은 중앙유적의 로비에 앉아 레늄 왕국의 지도를 태블릿에 띄워 놓고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현재 제론이 소유한 유적은 총 26 개였다. 고대유적 아래에 있던 유적이 24 개였고, 그와 상관없는 유적이 베어크
영지와 벨루스 백작령에 각각 하나씩 2 개가 있었다.
새로 얻은 유적은 대부분 마티만 보유한 정보 수집용 시설이었다. 베어크 영지의 유적처럼 광맥을 만든다거나
벨루스 백작령의 유적처럼 아드보 워터를 만드는 식의 유용한 생산형 유적은 없었다.
다만 폴타를 보유한 곳은 몇 군데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한계가 너무나 명확해 당장 유용하게 쓰기가 어려웠다.
제론은 태블릿에 뜬 지도를 손으로 살짝 움켜쥐듯 해서 허공에 휙 뿌렸다. 그러자 허공에 거대한 입체 지도가
나타났다. 태블릿이 구현한 레늄 왕국의 정밀 지도였다.
그 안에 산맥은 물론이고 건물까지 모두 있었다. 물론 마티로 확인이 가능한 영역만 정교했고, 그 외의 부분은
대충 선만 이은 정도였다.
그 지도는 제론의 손짓에 따라 이리저리 회전하고 움직였다. 제론은 지도를 조작하면서 유적의 위치를 유심히
살폈다.
그곳에는 마티의 정보 수집 범위까지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
“딱 이 지점에 하나쯤 있으면 좋겠군.”
그 어느 유적의 정보 수집 범위에도 멀리 떨어진 공간이었다. 그곳에 유적이 하나 있다면 아마 상당한 부분을
커버 가능하리라.
“그리고…… 이쯤인가?”
제론은 7 군데를 찍었다. 유적이 숨어 있을 확률이 높은 장소였다. 때로는 영지의 한가운데인 경우도 있었고, 또
산맥 중앙인 경우도 있었다. 어느 곳은 호수 한가운데였다.
“어쩌면 새로운 고대유적도 발굴 가능할지 모르겠군.”
산맥이나 호수에는 아직 현재의 문명이 발굴하지 못한 고대유적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만일 그걸 발굴하면 또 그건 그것대로 상당한 돈이 될 것이다. 발굴형 기간트가 우수수 쏟아질 테니 말이다.
“암시장에도 가야 하고, 정말 바쁘구나.”
다른 건 몰라도 암시장은 꼭 가야만 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조심해서 일을 진행해야만 한다. 이번에 팔 것은
엄청난 위험을 수반하는 물건이었다.
“과연 이걸 누가 사게 될까?”
제론이 품에서 두꺼운 책자 하나를 꺼냈다. 완전히 빳빳한 새 종이로 만들어진 책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책이었지만 펼치면 기절초풍할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라쿠스의 설계도였다.
마티를 이용해 바인이 은밀히 복사한 설계도였다. 설계 도면은 제론과 바이스, 세나가 함께 이미 확인했다.
제론이 얻으려 했을 때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바인은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그걸 얻어 냈다. 확실히 정보에 관한
한 누구보다 믿을 만했다.
기간트 설계도의 가격은 책정이 불가능하다.
고작 실바 한 기의 가격이 무려 4 만 골드였다. 상위 기체로 가면 갈수록 가격은 급격히 높아진다.
발굴형은 최소 100 만 골드가 넘는 가격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히엠스 같은 것은 가격이 비싼 것도 문제지만
구하기가 워낙 어려워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고작 기간트의 가격이 그러할진대 기간트 설계도는 얼마나 비싸겠는가.
이 설계도만 있으면 기간트를 양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라쿠스는 수많은 마탑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기간트였다.
출력이 1.9 나 되고 그 외에도 관절이나 세세한 부품이 다른 기간트와 완전히 달랐다.
어쨌든 이 설계도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게다가 수많은 세력이 이 설계도에 얽혀 있을 것이다.
뒤가 밟히면 그 모든 세력과 싸워야 한다. 그러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제론이 원하는 그림은 이 설계도를 다른 자들에게 파는 게 아니라 슈린 공작가 측에 파는 것이었다.
라쿠스의 설계도가 암시장의 경매에 나온다는 정보를 들으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든 그것을 낙찰받으려
할 것이다.
미리 정보를 입수한 것이 슈린 공작가뿐이라면 슈린 공작가에서 가장 많은 준비를 할 것이고 결국 그들이 낙찰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슈린 공작가의 자금을 제론이 흡수하게 되는 셈이었다.
“우리 가문에서 가져간 돈의 절반도 채 안 되겠지만 일단은 그 정도로 참아 주지.”
게다가 제론이 준비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설계도를 통해 라쿠스의 치명적인 약점 몇 가지를 찾아냈다.
라쿠스가 양산되어 판매를 시작하기 직전에 그 약점을 은밀히 퍼트리면 판매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다.
또한 이후에도 라쿠스를 쓰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슈린 공작가를 무너뜨리는 건 그 이후였다. 예전에는 힘이 없어서 참고 기다렸지만, 이젠 차근차근 무너뜨려
그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힘이 생겼다.
“결코 쉽게 끝내지 않는다.”
제론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지도로 돌렸다.
레늄 왕국의 지도가 허공에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제론의 시선이 그중 한 곳에 화살처럼 꽂혔다.
바알 호수였다.

☆ ☆ ☆

바알 호수.
레늄 왕국의 북쪽 국경을 이루는 호수였다. 게다가 주변에 영지가 5 개나 붙어 있었다. 그들 모두 바알 호수의
풍부한 어족 자원을 통해 살아갔다.
당연히 잘사는 영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걱정도 없었다. 바알 호수는 엄청나게 넓었다. 그뿐 아니라 호수
너머에는 광활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을 넘어 침략을 하려면 엄청난 부담을 안고 시작해야 한다.
당연히 아무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덕분에 바알 호수에 인접한 영지는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갔다.
제론은 한밤중에 하늘을 훌쩍 날아 호수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심호흡을 했다.
호수에서 올라오는 물 냄새가 코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삽질을 시작해야 한다. 될지 안
될지 모르면서 무작정 부딪쳐서 결과를 만들어 낼 시간이 되었다.
가능성이 높은 곳을 찍긴 했지만, 그곳에 반드시 유적이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만일 유적이 없다면 상당한
시간을 날리게 될 것이다.
오히려 유직이 있으면 더 쉽다. 제론이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감이라고 여겼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건 유적에서 흘러나오는 특별한 파장의 에너지였다. 그 에너지에 워낙 오랫동안 접해서 이제 몸이 거기에
익숙해진 것이다.
같은 파장의 에너지를 만나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데, 제론은 그 특별한 느낌으로 유적을 찾아냈다.
이번에는 아마 더 힘들 것이다. 물속이기에 유적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의 파장이 바뀔 가능성이 높았다. 만일
그렇다면 정말로 오랫동안 이 호수 안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이 호수 아래에 있는 유적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 일단…… 네로.”
쏴아아아아!
호수에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제론이 부른 물의 정령 네로였다.
제론이 손을 내밀자 물줄기가 빙글 휘어져 제론의 손바닥에 올라섰다. 제론은 그 상태로 눈을 감았다. 제론은
네로를 통해 호수와 연결되었다.
물론 지금부터는 온 정신을 집중해 네로와 함께 호수 전체를 훑고 다녀야 할 것이다.
제론의 의념을 등에 짊어진 네로가 바알 호수로 스며들었다. 네로는 물의 정령, 즉, 호수 전체를 자신의 의지
하에 둘 수도 있었다. 의지력이 그 정도로 강대하다면 말이다.
네로는 호수 바닥을 쭉 훑으며 지나갔다. 일단 유적의 흔적부터 찾아보고자 했다. 만일 고대유적이 호수에
존재한다면 바닥에 조금이라도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대유적이 없다면 정말로 심한 고생을 각오해야만 한다. 호수 밑바닥에 들어가서 감각만으로 유적을
찾아내는 방법이 유일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능했지만 제론은 가능했다. 소드 마스터였으니까.
어쨌든 제론은 네로를 통해 호수 바닥을 샅샅이 살폈다. 바알 호수는 엄청나게 넓었기에 아무리 네로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쉽지 않았다.
제론은 최대한 빨리 호수 중앙을 향해 네로를 이동시켰다. 물론 샅샅이 훑으면서 갔다. 조금 대충 보긴 했지만
말이다.
유적은 호수 중앙에 있을 거라는 감이 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뭔가 느낌이 확 왔다.
중앙으로 갈수록 제론의 표정이 묘해졌다. 제론은 마티를 이용해 레늄 왕국의 입체 지도를 구성하면서 바닥의
고저를 뇌리에 새기며 모양을 유추하는 능력을 얻었다.
‘이건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데?’
호수의 모양이 그랬다. 거대한 운석이 떨어져서 생겨난 모양 같았다.
제론은 네로를 더 빨리 이동시켰다. 바닥을 훑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찾아냈다.
‘유적의 흔적만 남았군.’
유적 위에 거대한 뭔가가 떨어져 유적 자체가 박살 난 듯했다. 곳곳에 유적의 잔해가 있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제론은 곧장 호수로 뛰어들었다.
촤악!
제론의 몸을 네로가 감쌌다. 그러자 마치 물고기가 된 것처럼 빠르게 물속을 유영할 수 있었다. 제론은 엄청난
속도로 호수 중앙 바닥으로 향했다.
네로를 통해 확인한 것과 실제 눈으로 확인하는 건 또 달랐다. 제론의 손목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주변의 어둠을 부드럽게 밀어 냈다.
한밤중의 호수는 어둡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제론은 소드 마스터, 약간의 빛만으로도 마치 대낮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처럼 훤히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유적의 잔해를 통해 어디가 중심인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그곳에 똑바로 섰다.
그리고 네로를 팔찌에 밀어 넣었다.
화아악!
네로든 아네모스든 어차피 스위치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같았다. 제론은 빛에 휩싸여 아래로 쭉 내려갔다.

유적은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천장을 통해 보이는 호수의 모습이 참으로 신비로웠다. 해초가 흔들리며
물고기가 유영하는 광경이 천장 가득 펼쳐져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곳은 충분히 특별한 유적이었다.
제론은 다른 유적에서와 달리 곧장 통제실로 가지 않고, 한참 동안이나 천장을 바라봤다.
한밤중이라 깜깜한데도 유적에서 보니 너무나 환하게 잘 보였다. 유적의 마법이 특별한 작용을 하는 모양이었다.
“여긴 가끔 머리 식힐 때 와서 쉬다 가도 괜찮겠군.”
로비를 조금 꾸미면 충분히 좋은 장소가 될 것 같았다. 느긋하게 쉬면서 호수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리라.
충분히 호수를 구경한 제론은 살짝 아쉬움이 남았을 때 고개를 내리고 통제실로 이동했다. 호수는 나중에 신물이
나도록 볼 수 있으니 지금은 할 일부터 하는 게 우선이었다.
통제실로 내려온 제론은 일단 태블릿부터 꺼내서 총 몇 층인지 확인했다.
“15 층?”
태블릿에 뜬 층수에 정말로 깜짝 놀랐다. 15 층이라니. 지금까지 가장 깊은 곳은 벨루스 백작령에 있는 아드보
워터를 만드는 유적으로 10 층이었다.
한데 15 층이라니. 대체 뭐가 있기에 이렇게 깊단 말인가.
이곳도 다른 유적과 마찬가지로 15 층에 통제실이 있었고, 그 위 14 층과 13 층이 각각 생활공간과
수련공간이었다.
그리고 12 층부터 9 층까지가 마티 보관소였다. 이곳의 마티는 다른 곳에 비해 상당히 많았다. 당연히 정보 수집
범위도 훨씬 넓었다.
바알 호수를 모두 커버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고, 그 주변 영지와 숲을 넘어 훨씬 먼 곳까지 정보 수집이 가능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넓이였다.
8 층과 7 층은 폴타를 구성하기 위한 아티팩트 보관소였다. 이 유적에는 폴타까지 있었다. 이제 이 근방은 어디든
게이트를 열어 이동할 수 있었다.
“다른 유적도 다 이러면 좋겠군.”
어쨌든 이곳에서 폴타를 잘만 이용하면 호수 너머로 무역을 다니는 것도 가능했다. 호수에서 숲을 넘으면 바로
체스터 공국이 나온다.
체스터 공국은 바다에 접한 것도 아니고 물이 풍부한 나라도 아니었기에 호수의 물고기를 잡아 판매하면 아마 그
반응이 폭발적일 것이다.
제론은 빙긋 웃으며 6 층에는 뭐가 있는지 확인했다. 이제부터가 새로운 것이다. 당연히 기대감이 높아졌다.
6 층부터 1 층까지는 딱 한 가지를 위한 시설이었다. 복잡한 입체 마법진으로 이루어진 아티팩트가 층층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국소 날씨 변환 마법 시스템이었다.
적게는 반경 1 킬로미터에서 많게는 반경 2 킬로미터까지 범위의 날씨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데, 당연히 주변
날씨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경계 지역의 날씨는 애매해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했다.
날씨 조절 아티팩트는 지금도 작동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바알 호수 한가운데에 비를 내렸다. 반경 1
킬로미터의 지역에 한동안 폭우를 쏟아 냈다.
그 비가 호수를 만든 모양이었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날씨 조절 아티팩트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지 먼저 확인했다.
가능했다. 제론이 가진 태블릿은 정말로 대단했다.
태블릿으로 날씨를 조절할 수 있게 된 제론은 작동 범위를 살폈다. 이 근방의 날씨만 조절할 수 있다면 거의
쓸모없는 물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만일 그 범위가 최소 레늄 왕국 정도만 된다 하더라도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필요한 곳에 비를 내릴 수도,
또 내리는 비를 거둘 수도 있으니 그보다 더한 무기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국소적인 날씨만 조절이 가능했으니 파괴력은 좀 떨어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호오. 이건 범위가 제법 넓네?”
범위가 딱 마티 허용 범위 안이 아니었다. 원하는 위치에 씨앗 형태의 코어를 발사해서 날씨를 조절하는
형식이었다.
즉, 제론이 태블릿을 통해 마티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걸 날릴 수 있었다.
다만 날씨 조절 코어를 만들어 내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원할 때마다 계속 코어를 날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코어를 만들어 쌓아 둘 수 있기에 제법 쓸모가 있었다. 10 개의 코어 보관소에 각각 하나씩 만들어 넣어
두면 되는데, 미리 명령 코드를 입력해 놓으면 거기에 관련된 날씨를 보관소가 빌 때마다 만들어 채울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 모든 보관소에 비를 내리는 코어만 만들어 쌓았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되면 호수 중앙에 코어를
쏴 올렸다.
그래서 아무리 가물어도 바알 호수는 결코 마르는 법이 없었다. 또한 가끔 비가 많이 올 때는 호수가 넘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걸 잘만 이용하면 전장의 흐름도 바꿀 수 있겠군.”
전투에 날씨는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비가 오면 길이 질척질척해져 이동이 힘들어진다. 또한 추위가 몰아치면
상당한 어려움이 생겨난다.
추위만 힘든 게 아니다. 지독할 정도의 더위도 전쟁을 힘들게 만든다. 뿐만 아니다. 적 진영에 우박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현재의 전쟁은 기간트로 한다. 하지만 결국 전쟁의 주체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버티지 못하면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제론은 날씨 조절 아티팩트의 사용법을 자세히 살폈다. 마티로 정확히 계산을 해서 코어를 날리는 방법도 있지만,
마티가 없어도 쓸 수 있었다. 대충 제론이 계산을 해서 날리는 방법이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 비교적 정확히 날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범위는 제한이 없었다. 이곳에서
대륙 끝에 코어를 날릴 수도 있었다.
정말 대단한 아티팩트였다.
“국소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게 좀 아쉽긴 하군.”
만일 대규모로 날씨를 바꿀 수 있다면 엄청난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코어를 수천 개 동시에 쓰면 그런 일도 할
수 있겠지만, 보관 가능한 코어의 수가 10 개뿐이기에 불가능했다.
게다가 코어를 다시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보름이었다.
10 개의 코어를 한꺼번에 쓰고 다시 만들기 위해서는 5 개월이 걸린다는 뜻이었다.
만능처럼 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큰 무기를 얻었다. 제론은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과연 하이쓰 산맥에는 어떤 유적이 있을까?”
하이쓰 산맥은 레늄 왕국과 벨룸 왕국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이었다. 또한 헥서 왕국과의 경계도 이루었다. 그만큼
길고 험한 산맥이었다.
그리고 바알 호수 다음으로 높은 가능성을 가진 장소였다.
제론은 로비로 올라가 바닥에 누웠다. 흔들리는 해초 사이로 유영하는 물고기 떼가 보였다.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조금만 쉬자, 조금만…….”
제론은 그렇게 누워 호수를 바라보다가 이내 스르르 잠이 들었다.

Chapter 6 하이쓰 산맥에서 생긴 일

하이쓰 산맥은 엄청나게 높은 산들로 이루어진 산맥이었다. 게다가 험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몬스터도 상당히 많아서 산맥 주변에는 마을도 없었다. 수시로 험악한 몬스터가 산맥에서 내려오는데 어떤 마을이
버틸 수 있겠는가.
기간트라도 보유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산골 마을이 기간트를 소유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제론은 하이쓰 산맥을 오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막막하구나.”
살펴야 할 범위가 너무 넓었다. 대충 위치는 찍었는데, 그게 너무 대충이라서 산맥을 완전히 뒤집어엎어야 할
판이었다.
몬스터는 두렵지 않았다. 굳이 기간트를 소환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검을 휘두르기만 해도 웬만한 몬스터는 두
동강이 나서 쓰러졌다.
하이쓰 산맥이 무서운 이유는 이곳이 오우거의 서식지이기 때문이었다.
산 하나에 오우거가 수십 마리는 살았다. 그러니 그곳에 잘못 발을 들이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기간트라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말이다.
설사 기간트를 타고 있더라도 오우거는 상대하기 쉬운 몬스터가 아니었다. 자칫 혼자서 포위되면 아무리
기간트라도 크게 당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오우거도 두렵지 않았다. 예전 유적을 클리어하기 위해 싸웠던 변종 오우거라면 모를까, 일반
오우거는 제론의 식후 운동 거리도 되지 않았다.
아니, 그 변종 오우거라 하더라도 제론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제론은 강했다.
벨루스 백작령에서는 산에서 감각만으로 유적을 찾아냈지만, 그건 산이 비교적 낮았고, 위치가 한정되었기에 쓸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또한 운도 많이 따랐다. 아마 다시 하라고 하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하이쓰 산맥에서 유적을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막막한 곳이 하이쓰 산맥을 제외하고도 5 군데가 남는다. 물론 제론은 그 모든 장소에 유적이 있을
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유적을 찾았을 때 분명히 뭔가 새로운 성과를 얻을 거라는 예감은 어렴풋이 들었다.
제론은 산맥을 그냥 오르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샅샅이 훑으면서 다녔다. 일단 체력이 받쳐 주니 엄청난 속도로
산을 타는 것이 가능했다.
제론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산을 하나하나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뭔가 기묘한 느낌이 없나 정신을 집중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상당한 밤낮이 후딱 지나갔다.
제론은 이대로라면 유적을 찾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한참 걷던 제론이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 한쪽을 쳐다봤다.
“여기도 사람이 들어오긴 하나?”
만일 유적의 흔적을 발견해 영지나 국가 차원에서 노리고 오는 거라면 대규모 인력이나 기간트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수가 적었다. 고작해야 15 명 정도였다. 용병의 거친 느낌을 가진 자들이 11 명이었고, 조금
다른 느낌을 가진 사람이 4 명이었다.
제론은 발걸음을 그쪽으로 돌렸다. 뭔가 느낌이 왔다. 저 정도 인원으로 여기에 들어온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설마 오우거 사냥을 온 건 아닐 것이다. 오우거의 부산물이 비싸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 하이쓰 산맥에서 그걸
찾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하이쓰 산맥의 오우거는 다른 지역의 오우거에 비해 너무 개체 수가 많았다. 자칫 두 마리를 동시에 만나기라도
하면 봉변당하기 딱 좋았다.
제론은 서둘러 이동했다. 일단 저들을 조금 살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쩌면 유적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 ☆ ☆

루이네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조금 전 오우거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이네뿐 아니라 나머지
일행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너무 긴장할 거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기간트가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예거의 말에 루이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확실히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고마워요. 예거 경.”
“별말씀을.”
예거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대답하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용병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용병들은 아무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오우거의 울음소리가 너무 가까이서 들렸다. 아마 십중팔구는 이리로 올
것이다.
예거는 용병들이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과 함께 온 두 기사를 쳐다봤다. 그들 역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긴장하지 않은 사람은 루이네뿐이었다. 예거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다.
오우거가 나타나면 용병들이 루이네를 지키는 동안 예거와 두 기사가 기간트를 타고 물리쳐야 한다.
오우거가 한 마리만 오면 별것 아니지만 만일 두 마리나 세 마리가 오면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진다. 그때는
정말로 희생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우거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민첩했다. 아무리 기간트가 3 기나 있더라도 빠른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뛰다가 사람들만 기습해서 낚아채 갈 수도 있었다.
용병들은 그때를 대비해 데려왔다. 물론 용병들도 자신이 그런 역할이라는 것을 알고 따라왔다. 의뢰비가
엄청나게 비쌌으니까.
“크워어어!”
괴성과 함께 오우거가 불쑥 나타났다.
루이네는 기겁을 했다. 하지만 두 손으로 입을 꽉 막고 비명을 참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되도록 방해가 되기
싫었다.
“아가씨. 이쪽으로 오십시오.”
용병대장이 루이네를 불렀다. 루이네가 서둘러 용병들에게 다가갔다. 곧 10 명의 용병이 그녀를 빙 둘러쌌다.
그리고 용병대장이 눈을 번득이며 검을 뽑고 주위를 둘러봤다.
나타난 오우거는 두 마리였다. 그 정도는 예거와 기사들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키이이이이잉!
순식간에 기간트 3 기가 나타났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대응도 상당히 빨랐다.
예거는 살짝 안심했다. 만일 오우거가 더 많이 나타났다면 정말로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마리 정도는
문제없었다. 기간트 하나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나머지 둘이 오우거를 해치우면 된다.
그렇게 마음을 놓은 순간 어딘가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일행을 확 덮쳤다.
“막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루이네 근처에 있던 기간트가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며 방패를 확 들이밀었다.
꽈앙!
오우거 한 마리가 방패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물론 큰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기에 벌떡 일어났다.
예거의 눈에 순간 절망이 어렸다. 새로 나타난 오우거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몸을 날려 덮치던 오우거 외에 두
마리가 더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모두 다섯 마리의 오우거였다. 이들과 싸워 이기는 건 문제 없지만 그 사이 루이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루이네의 안전이 중요했다.
그래서 예거는 순간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때, 어딘가에서 돌멩이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쐐애애액!
마치 바람을 찢어발기기라도 하듯 엄청난 소리를 동반하며 날아온 돌멩이는 정확히 오우거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빠악!
“크워어억!”
오우거가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내 흉성이 폭발해 두 손으로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쾅쾅쾅쾅!
“크워어어어어어어!”
오우거가 난리를 피우고 있을 때 돌멩이가 또 날아왔다.
쐐애애애액!
빠아아악!
이번에는 또 다른 오우거의 이마를 때렸다.
“크워어어억!”
당연히 그 오우거도 분노를 폭발시켰다. 흉성이 폭발해 방방 뛰고 난리도 아니었다.
예거는 흉성이 폭발한 오우거가 그냥 앞뒤 재지 않고 한꺼번에 달려들까 봐 적지 않게 긴장했다. 그리고 누군지
모르지만 이런 장난은 이제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외침이 오우거를 자극할 수도 있었다. 그건 곤란했다.
그 뒤로도 돌멩이는 계속 날아왔다.
쐐애애액!
빠악!
“크워억!”
돌멩이는 하나같이 오우거의 이마나 관자놀이를 때렸다. 다섯 오우거가 모두 방방 뛰고 난리가 났다.
그리고 돌멩이를 던진 자가 나타났다. 한 손으로 돌멩이를 던졌다 받으면서 말이다. 자기가 돌멩이를 던졌다고
광고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를 발견한 오우거들의 눈빛이 붉게 물들었다.
“크워어어어어!”
다섯 오우거가 동시에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엄청난 반사 신경이었고 점프력이었다.
단숨에 거리를 없앤 오우거들이 일제히 팔을 휘둘렀다.
부우우우웅!
공기를 찢으며 오우거의 주먹과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돌멩이를 든 사내는 어느새 오우거의 사정거리 밖에 서
있었다. 여유를 잃지 않은 채로 여전히 돌멩이를 던졌다 받으면서 말이다.
“크워어어어어!”
오우거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사내도 견디기 어려웠는지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굉장히 빨랐다.
오우거들은 우르르 사내를 쫓아갔다.
장내에는 순식간에 루이네 일행만 남았다. 다들 얼빠진 눈으로 멀어져 가는 오우거를 바라봤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루이네의 질문에 비교적 냉정함을 잃지 않은 예거가 대답했다.
“아마 오우거들을 유인해 간 모양입니다.”
“그럼 저분이 위험하잖아요?”
루이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하자, 예거는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괜찮을 겁니다. 아까 돌 던지는 실력 보셨지 않습니까. 웬만해서는 그런 돌멩이로 오우거에게 고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럼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일부러 오우거를 끌고 가신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다만 예거는 과연 오우거를 따돌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오우거는 집요한 몬스터였다. 저런 경우 지쳐
쓰러질 때까지 쫓아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들의 걱정스런 시선이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이내 평소의 표정을 되찾은 예거가 박수를 쳐 주위를
환기시켰다.
짝짝!
“자, 다들 정신을 차리시기 바랍니다. 여기 그냥 있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일단 이동이 먼저입니다.”
예거의 말에 용병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루이네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안 돼요! 어떻게 우리를 위해 오우거를 유인해 간 사람을 두고 떠날 수 있나요? 최소한…….”
“최소한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씀입니까?”
“맞아요! 혹시 다치기라도 했으면…….”
예거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이번에는 아가씨의 말씀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째서요?”
루이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예거를 바라봤다. 하지만 예거는 여전히 단호했다.
“그가 다시 이리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또한 다른 오우거가 또 우리를 노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단
안전한 장소를 찾아가야 합니다.”
루이네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바보가 아니었다. 결국 예거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알았어요, 가죠.”
루이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들 이동을 시작했다. 이미 준비는 마쳤는지라 떠나기만 하면 된다.
멀리서 오우거 울부짖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그들은 그 소리가 부디 슬프고 잔인한 일로 인한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걸음을 서둘렀다.

“이쯤이면 어느 정도는 안전할 것 같습니다.”


예거의 말에 루이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들을 위해 오우거를 유인해 간 사내의
모습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나이도 많지 않아 보였다. 기껏해야 이십 대 초중반?
그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리고 이 험한 하이쓰 산맥에는 왜 온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렇게 루이네가 생각에 잠긴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잠자리를 준비했다.
이곳은 산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넓은 평지였다. 야영을 하기에는 딱 좋은 위치였다. 기습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트랩을 준비하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하이쓰 산맥에서는 마음을 놓는 순간 죽는다. 이곳은 언제 오우거가 들이닥쳐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장소였다.
혹시 몰라 모닥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모닥불의 불빛을 보고 오우거나 다른 몬스터가 오면 안 된다.
“그래도 이 물건이 있어서 정말 다행 아닙니까?”
용병대장이 품에서 휴대용 마법등을 하나 꺼냈다. 그는 빛이 멀리 퍼질 것을 우려해 천으로 등을 잘 감싼 다음
스틱을 빙글 돌려 등을 켰다.
딸깍.
천으로 가려져 희미해진 빛이 주위를 밝혔다. 아예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마음도 편해졌다.
이 정도 빛이라면 멀리까지 퍼지지도 않으리라. 또 연기도 없으니 냄새가 퍼질 염려도 없었다.
그들은 대충 끼니를 때우고 각자 자리에 앉아 쉬었다. 잠을 자고 싶었지만 아직 흥분이 다 가시지 않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저벅!
적막한 산속에 울리는 거침없는 발소리는 그들의 귀에 천둥처럼 들려왔다.
용병들이 먼저 후다닥 일어나 싸울 준비를 했다. 예거를 비롯한 기사들은 만일의 사태에 루이네를 지키기 위해
예기를 가다듬었다.
용병대장이 발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불빛을 비췄다. 빛이 약해 멀리까지 닿지 않았지만 공터에 누군가 들어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내의 모습을 가장 먼저 확인한 건 당연히 예거였다. 예거가 가장 수준 높은 익스퍼트였기에 누구보다 눈이
밝았다.
“아! 아까 그분이시군요.”
예거의 말에 루이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속으로 몇 번이고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만일 만나지 못했으면
굉장한 죄책감에 시달렸으리라.
저벅, 저벅.
사내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자 다들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낮에 경황이 너무 없어서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네는 확실히 기억했다.
“아! 맞네요. 그분이에요.”
루이네의 얼굴이 조금 더 밝아졌다. 이제 정말로 안심할 수 있었다.
“불도 안 피웠소?”
사내는 제론이었다. 제론은 다들 깜깜한 곳에서 땀에 전 옷을 말릴 생각도 못하고 모여 앉은 걸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냄새가 확 풍겼다.
“일단 불부터 피우고 씻는 게 어떻소?”
제론의 제안에 다들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누군 그렇게 하기 싫은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건이 안
되지 않는가.
일단 최대한 몬스터의 시선을 끌지 말아야 했다. 또한 씻고 싶어도 근처에 물이 없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제론은 일단 공터 한가운데에 뭔가를 우수수 쌓았다. 놀랍게도 바짝 마른 장작이었다.
제론은 능숙하게 장작을 쌓고는 거기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단번에 장작에 불이 붙어 타올랐다. 마법을 이용한 점화였다. 하지만 누구도 제론이 마법을 쓴 것을 보지 못했다.
제론의 실력이 워낙 많이 늘어서 이젠 허공에 떠오르는 빛나는 마법진을 감출 수 있었다.
갑자기 불이 타오르자, 다들 경악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용병대장이 소리쳤다. 용병들은 생존에 대해 가장 민감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불을 안 피우면 과연 몬스터가 오지 않을까?”
제론의 말에 용병대장이 입을 다물었다. 불을 안 피운다고 몬스터가 안 오지는 않을 것이다.
“확률은 줄어들겠지.”
제론이 피식 웃었다.
“몬스터는 시각보다는 다른 감각이 훨씬 발달했지. 특히 후각이.”
제론은 일행을 슥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몬스터에게는 이런 불빛 보다는 오히려 다른 걸 조심해야 돼. 예를 들면…… 땀 냄새 같은 것 말이야.”
다들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대체 누가 저딴 소리를 했단 말인가. 하지만 왠지
그럴듯해 보였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란 거요?”
용병대장이 으르렁거리며 나직하게 물었다. 말투에는 상당한 위협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사흘이오.”
제론이 씨익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엄지로 가리켰다.
“열흘.”
용병대장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열흘? 설마 열흘 동안 하이쓰 산맥에 있었다는 거요?”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이제 누구 말이 맞을 확률이 높을까?”
용병대장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이런 방식으로 열흘이나 살아남았다면 정말로 그렇다는 뜻 아닌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용병대장 대신 루이네가 나섰다.
“정말로 불을 피웠는데 한 번도 몬스터의 습격이 없었나요?”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번도 없었으니 걱정할 거 없소.”
제론은 모닥불에 약초 가루를 뿌렸다. 그러자 청량한 향이 확 퍼졌다.
“그게 뭔가요?”
“냄새를 없애는 약초요. 이 근방에는 땀 냄새가 너무 많아서 몬스터가 올 위험이 있거든.”
제론의 말에 루이네의 뺨이 새빨개졌다.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씻지를
못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물을 준비할 테니 다들 좀 씻는 게 어떻겠소?”
“물이 있나요?”
루이네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물이 있더라도 어떻게 여기서 씻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씻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냄새나고 더러운 옷을 입으면 몸도 함께 물들어 버릴 테니까 말이다.
“갈아입을 옷은 있소?”
루이네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이쓰 산맥에 들어오면서 갈아입을 옷까지 가져오겠다고 하면 아마 다들 배를
잡고 웃을 것이다.
“그럼 옷도 빨아야겠군.”
제론은 일단 도와주는 김에 확실히 도와주기로 했다. 자기 전에 목욕을 하고 옷만 갈아입어도 위험이 대폭 줄어들
것이다.
제론은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모닥불의 불빛이 잘 미치지 않는 곳이었기에 어두웠다. 다들 뭘
하려고 저러나 하며 제론을 바라봤다.
펄럭!
어둠 속에서 뭔가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론이 뭘 하는지 확실히 볼 수 있는 사람은 예거뿐이었다.
예거는 그 광경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제론은 지금 천막을 치고 있었다. 한데 대체 어디서 천막이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천막은 상당히 컸다. 제론은 천막을 다 치자 일단 루이네부터 손짓으로 불렀다.
“저, 저요?”
루이네는 주춤주춤 제론에게 다가갔다. 예거가 혹시모를 위험에 대비해 뒤를 따랐다.
“이 안에 준비했으니 들어가시오.”
“저…… 혼자서요?”
“그럼 같이 목욕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제론의 말에 루이네의 얼굴이 불에 탈 것처럼 달아올랐다.
“아, 아뇨!”
루이네가 황급히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즉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어머!”
루이네는 눈을 의심했다. 천막 안은 너무나 밝았다. 천막 위에 마법등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천막 한가운데에 커다란 목욕통이 놓여 있었다. 깨끗한 물이 찰랑거렸다.
루이네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옷을 벗었다. 그리고 준비된 탁자 위에 옷을 올려놓고는 목욕통 안에 몸을 담갔다.
놀랍게도 물은 따뜻했다.
피로가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이대로 마음을 놓으면 그냥 잠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일단
씻어야만 했다.
루이네가 천막 안에서 씻는 동안 천막 밖에서도 안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 보고 여기서 씻으란 겁니까?”
예거가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제론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끼리 뭐 문제라도 있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뭘 어떻게 씻으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쩔 셈이란 말인가.
“이쪽으로.”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어딘가로 향했다. 다들 눈치를 살피다가 제론의 뒤를 따랐다. 예거만 빼고 말이다.
예거는 루이네를 혼자 두고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루이네를 지키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멀리 갈 거 아니니까 따라오시오.”
제론의 말에 예거는 머뭇거렸다. 제론도 더 권하지 않았다. 나중에 따로 씻으면 되니 말이다.
사람들은 제론을 따라 공터에서 나가자마자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그곳에 제법 큰 샘이 있었다. 대체 아까는
이걸 왜 발견하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큰 샘이었다.
더 이상은 제론이 말하고 안내할 필요도 없었다. 다들 훌렁훌렁 옷을 벗고는 샘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들도
한동안 씻지 못하고 땀과 먼지도 뒤덮여서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제론은 그들을 뒤로하고 천막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예거를 그곳으로 보냈다. 처음에는 고개를 젓던 예거도 자신
때문에 몬스터가 올 수도 있다는 말에는 어쩔 수 없었다.
예거가 씻으러 가자, 제론은 천막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천막 안에서 루이네의 옷이 쑥 빠져나왔다. 한창
목욕 중인 루이네는 당연히 그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몰랐다.
“크으, 지독하군.”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의 옷이지만 냄새가 너무 지독했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정령을 불렀다.
“네로.”
쏴아아아!
물줄기가 솟아났다. 그리고 한데 뭉쳤다. 네로는 제론의 명령에 따라 루이네의 옷을 말끔히 세탁했다. 그저 물로
휘감아 옷에 달라붙은 땀과 먼지를 씻어 내는 것만으로도 깨끗해졌다.
물기를 완전히 뺐기 때문에 뽀송뽀송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세탁을 막 끝냈을 때, 천막 안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내 옷!”
루이네가 목욕을 끝낸 것이다. 그녀는 당황해서 밖을 향해 물었다.
“혹시 밖에 누가 있나요?”
“옷은 내가 빨았으니 걱정할 거 없소.”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천막 안으로 옷을 휙 던졌다. 놀랍게고 루이네의 옷 뭉치는 처음 그 탁자 위에 턱 놓였다.
놀라운 힘 조절이었다. 천막 안이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다.
한동안 천막 안이 부산스러워졌다. 그리고 잠시 후, 옷을 입은 루이네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고,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제론은 모닥불 쪽을 가리켰다.
“난 이걸 좀 정리하고 가겠소.”
루이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닥불 쪽으로 걸어갔다. 제론은 즉시 천막을 정리해 아공간에 넣어 버렸다.
천막은 제론이 태블릿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방법을 통해 만든 것이었다. 물론 제론의 아이디어도 많이
들어갔다.
이 천막은 설치와 정리가 아주 간단했다.
순식간에 정리를 끝낸 제론은 모닥불로 반쯤 이동한 루이네를 향해 걸어갔다.
루이네는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봤다. 그리고 천막이 있던 곳을 확인하고는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걸 벌써 정리하신 건가요?”
깜짝 놀라는 루이네의 반응에 제론은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루이네는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사실 제론이 그
안에서 몸을 씻고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막 안 씻을 거냐고 물으려던 루이네는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제론의 몸에서 은은한 향기가
느껴졌다. 마치 조금 전에 꽃잎을 띄운 물로 목욕을 마친 사람 같았다.
“식사는 했소?”
루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밥은 먹었다. 너무 간단해서 허기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제론은 분위기를 확인했다.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도 될 듯했다.
“한데 이 험한 하이쓰 산맥에는 무슨 일로 왔소?”
루이네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답할 수 없다는 생각과 제론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는 생각이 뒤섞여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아무래도 쉽게 얘기해 줄 것 같지 않자, 제론이 먼저 나섰다.
“난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유적을 찾아왔소.”
루이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제론을 바라봤다. 그 반응을 확인한 제론은 확신을 가졌다.
이들은 유적 탐험대였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루이네가 급히 제론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같이 가자고 할 생각 없으니 걱정할 거 없소. 내일 아침이 되면 난 따로 떠나겠소.”
제론의 말에 루이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치 자신이 제론을 내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루이네는 문득 아직 소개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전 루이네 폰 아베티스라고 해요.”
“아베티스?”
생소했다.
제론이 왕국의 모든 가문 이름을 외우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에어스트 백작가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후계자 교육의 일환으로 다른 가문의 이름과 문장을 익혔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도 너무 낯설었다.
제론의 의문이 눈에 보였는지 루이네가 이채를 띠며 물었다.
“레늄 왕국 분이시로군요? 아니면 벨룸 왕국인가요?”
“그럼 헥서 왕국?”
루이네가 빙긋 웃었다.
“맞아요. 전 헥서 왕국에서 왔답니다.”
헥서 왕국은 하이쓰 산맥을 경계로 레늄 왕국과 맞닿은 왕국 중 하나였다. 전통적으로 마법을 중시하는
왕국이었기에 마법 문화가 상당히 발달했다.
페쿠니아 상단에서 휴대용 마법등 판매를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곳이 헥서 왕국이었고, 그걸 가장
많이 구입한 곳도 헥서 왕국이었다.
“레늄 왕국에서 왔소.”
제론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모닥불에 약초 가루를 확 뿌렸다.
치이이익!
약초 가루가 단숨에 불꽃이 되어 흩어지며 청량한 향기를 남겼다.
그 향을 맡으며 가만히 서 있던 루이네가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말씀하시오.”
“아까 얼른 대답하지 못해 죄송해요. 저희도 유적을 찾아왔어요.”
제론이 빙긋 웃었다. 왠지 느낌이 좋은 여자였다. 물론 그렇다고 이성으로서의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다. 그저
그게 전부였다.
“유적을 찾아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제론의 물음에 루이네의 눈이 커다래졌다. 보통 그런 질문은 함부로 하지 못한다. 한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얘기를
들으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걸 가릴 이유가 없었다.
“가문을 일으켜 세우려고요.”
제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아련함이 떠올랐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루이네의 처지가 마음에
확 와 닿았다.
“이 유적탐사로 인해 가문에서 진 빚이 상당해요. 아마 이번 탐사에 실패하면 우리 가문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저도 어딘가로 팔려 가겠죠.”
귀족가의 여식이 다른 가문에 혼인을 빙자해 팔려 가는 건 흔한 일이었다. 더구나 몰락한 가문의 여식이라면 그
처지가 오죽하겠는가.
일단 말문이 터지자, 루이네는 조금 더 편하게 얘기를 했다. 속으로만 꽁꽁 싸매고 있었기에 그동안 너무
답답했다.
“사실 전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굳이 유적 따위 안 찾아도 우리 가문은 제법 살 만했거든요. 왕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가문이었으니까요.”
루이네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솔직히 아직도 좀 의심스러워요. 나베 공작가가 함께 유적을
찾자고 말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어요. 그들이 뭐가 아쉽다고…….”
얘기를 듣던 제론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스토리 아닌가. 이건 에어스트 백작가와 슈린
공작가 사이에 벌어진 일과 상당히 흡사했다.
“아버지는 무사하오?”
제론의 물음에 루이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깜짝 놀랐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고작 그 얘기를 듣고서 말이다.
“아뇨. 심각한 부상을 당하셨어요. 사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유적을 찾아 나설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나베
공작가의 압박이 계속 들어와서 피하기가 어려웠어요.”
“유적을 못 찾으면 곤란한 상황이오?”
“빚이 많아요. 유적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나간 돈이 상당하거든요. 자체적으로 조사도 했고요.”
“나베 공작가인가 하는 곳은 손 놓고 있었소?”
“유적을 찾으면 발굴은 그쪽이 맡기로 했어요.”
제론이 피식 웃었다.
“손도 안 대고 코를 풀겠다는 의도로군.”
“처음 정보를 그쪽에서 댔거든요.”
“처음 정보? 어떤 거?”
“하이쓰 산맥에 유적이 있다는 정보요. 고대 문헌을 뒤져 찾아낸 확실한 정보죠.”
루이네는 의아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당신은 여기에 유적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냈죠?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제론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유적을 찾아다닌다는 건 아직 알려져선 안 되는 비밀이었다. 그리고 소개를
거짓으로 하기도 싫었다.
잠시 고민하던 제론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떠랴. 일단 비밀로 하고, 비밀이 퍼지면 나중에 대책을
세우면 된다.
아니, 그때쯤이면 대책을 세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정도의 아성을 구축했을 테니까
말이다.
“제론 폰 에어스트요.”
“에어스트?”
루이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에어스트 백작가의 그 제론 님이신가요?”
루이네의 과한 반응에 제론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이네의 눈이 반짝거렸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설마 당신께서 그 유명한 붉은 학살자일 줄은 몰랐어요.”
“그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소?”
“우리 왕국에서 기간트에 가지는 관심은 상상을 초월해요. 전쟁에 대한 소문도 빠르게 퍼지는 편이죠. 아마 제가
붉은 학살자를 만났다는 걸 알면 다들 난리가 날 거예요.”
루이네는 선망 가득한 시선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기간트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선 신화적인
존재였다. 고작 실바로 그런 대단한 성과를 얻어 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기간트를 타고 점프를 하셨나요?”
질문과 대화의 방향이 단숨에 기간트로 바뀌어 버렸다. 하지만 제론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뭔가 냄새가 났다.
아주 지독한 음모의 냄새가.
“그보다 나베 공작가에 대한 애기를 좀 더 해 보죠.”
루이네는 살짝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나베 공작가에서는 계속해서 자금을 지원해 줬어요. 물론 공짜는 아니었죠. 이자가 비싸지는 않았지만 기한이
정해진 빚이었어요.”
루이네의 표정에 다시 근심이 어렸다.
“기한이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기한까지 돈을 갚지 못하면 담보가 넘어갈 거예요.”
“설마 영지를 담보로 잡았소?”
루이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유적을 찾아야만 했다.
“한데 유적을 찾으면 다 끝나는 거요? 유적 개발은 나베 공작가가 맡지 않았소? 그들이 개발을 차일피일 미루면
곤란해지는 건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루이네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다 해결했어요.”
“어떻게?”
“처음 제공한 정보에 대한 값을 치르고 계약을 파기해 버렸어요.”
제론이 눈을 크게 떴다. 모르긴 해도 아마 그 정보의 값으로 상당한 돈을 요구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다 빚으로 남았지만요. 이제 유적을 찾지 못하면 전 끝장이에요.”
“유적을 찾기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발굴까지 마쳐야 끝나는 거 아니오?”
루이네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런데 정말 시간이 잘 가네요. 이제 제게 남은 시간은 고작 한 달이에요.”
“한 달이면 충분하지.”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나베 공작가인지 뭔지의 뒤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슈린 공작가를 뒤에서 쥐고 흔든 자와 동일인, 혹은 동일 단체일 확률이 높았다.
‘그놈들 뜻대로 이루어지게 놔둘 수야 없지.’
제론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루이네를 보며 말했다.
“대충 어디쯤에 유적이 있는지는 알고 있소?”
루이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벌써 찾았겠죠. 제가 아는 건…….”
루이네가 말을 흐렸다. 이 정보는 어마어마한 돈을 통해 만든 것이었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지만 그걸 그냥
말해 주는 건 마음에 걸렸다.
“유물은 다 가져도 되니까 말해 봐요. 내가 찾는 걸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예에?”
루이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 말을 어찌 믿겠는가. 게다가 제론도 유적 때문에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루이네의 반응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몇 살이오?”
“예? 스, 스물셋이요.”
“내가 한참 위군. 말을 놔도 되겠지?”
“그, 그러세요.”
루이네는 제론의 박력에 밀려 버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 안 해도 유적은 내가 먼저 찾을 수 있어. 다만 시간을 절약하자는 차원이지.”
그건 사실이었다. 제론은 루이네 일행이 이동한 흔적을 확인했다. 그들의 이동 경로를 확인하면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이동할지 파악이 가능했다.
그걸 토대로 유추하면 대충 저들의 목표가 어디쯤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이 넓고 긴 하이쓰
산맥에서 더 이상 삽질할 필요가 없었다.
그 정도로 범위를 좁혀 놓으면 제론이 가진 특별한 감각을 통해 초고대문명의 유적을 찾아내는 게 가능했다.
그러면 아주 자연스럽게 고대유적도 발견할 수 있고 말이다.
“믿을 수 없어요!”
“믿든 말든 그건 네 자유지. 일단 생각할 시간을 주지. 내일 아침에 난 떠날 테니까 그때까지 결정을 해.”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모닥불에서 멀어졌다. 루이네는 복잡한 심정을 담은 눈으로 제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잠시 후, 샘으로 씻으러 갔던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들은 옷까지 빨아서 온통 젖어 있었다. 옷을 입은
채로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모닥불 주위에 옹기종기 모인 사내들이 불을 쬐며 물기를 말렸다.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아침이 될 때까지 루이네는 한잠도 자지 못했다.

Chapter 7 루이네의 선택

나베 공작가는 헥서 왕국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가문이었다. 금전적 부유함은 물론이고 권력도 엄청났다. 꼭
레늄 왕국의 슈린 공작가 같은 곳이었다.
또한 그 성향도 비슷했다.
나베 공작은 수하들의 보고를 쭉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유적을 찾을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반반? 가능성이 그렇게 높아? 하이쓰 산맥이 그리 만만치는 않을 텐데?”
“하지만 기간트를 동원할 수 있으니 가능성이 제법 높습니다.”
“그건 곤란해. 추적은 하고 있나?”
“산맥에 들어간 지점을 확인했습니다.”
“인원을 넉넉하게 준비해서 바로 추격해. 유적을 찾으면 우리가 가로챈다.”
“알겠습니다.”
나베 공작은 물러가는 수하들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아베티스 가문을 지워 버릴 수 있겠군. 속이 다 후련해. 흐흐흐흐.”
나베 공작은 아베티스 영지를 꿀꺽 삼킬 생각을 하니 마음이 꽉 차는 것 같았다. 아마 당분간은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리라.
또한 유적을 발굴하면 거기에서 나올 유물도 엄청날 것이다. 거기서 어떤 기간트가 얼마나 나오느냐가
중요하겠지만 고대 문헌을 통해 얻은 정보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최상급 기간트가 다수 있을 확률이 높았다.
만일 그걸 얻게 되면 나베 공작가는 날개를 달 것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나베 공작은 가슴이 떨려 왔다. 만일 자신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왕이 될 수도 있었다. 설사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왕국에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을 다질 수 있었다.
나베 공작은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 상당한 전력을 투입할 계획이었다. 이제부터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나베 후작의 입가에 지극히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다음날 아침, 제론은 일행 중 가장 먼저 일어났다. 제일 훌륭한 잠자리에서 편안하게 잤기에 피로를 싹 풀 수


있었고, 또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로 잠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온몸을 휘도는 마나 덕분에 피로가 잘 쌓이지 않았고, 체력이 잘 소진되지 않았다.
잠자리를 깨끗이 정리한 제론은 가볍게 검을 수련한 다음 네로를 이용해 몸을 씻었다.
더없이 상쾌한 기분이 되어 루이네 일행이 잠든 곳으로 향하려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소드 마스터의 감각을 건드리는 뭔가가 있었다. 근처에 누군가 숨어 있는 건 아니었다. 암살자는 암살자 특유의
음습한 살기를 갖고 있었기에 근처에 다가오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설사 암살자가 아니더라도 소드 마스터인 제론의 감각을 속이고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제론의 감각을 건드린 것은 아주 멀리 있었다. 제론은 그걸 확인하고 잠깐 당황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능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건지 알아차렸다. 기간트였다.
“확실히 기간트 쪽으로 능력이 특화된 기분이야.”
다른 건 몰라도 기간트가 얽히면 제론은 가진 능력 이상을 발휘한다. 지난번 소드 마스터인 슐린 후작과의 대결도
비슷했다.
제론은 당시 실바로 소드 마스터가 모는 히엠스를 이겼다.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말이다.
사실 그건 제론의 능력이 대단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제론의 감각이 평소 이상으로 날카로웠기 때문이었다.
그 대결을 통해 제론의 능력이 살짝 올라갔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기간트가 여긴 웬일이지?”
누군가 기간트를 가동해 산맥을 들쑤시고 있었다. 아마도 산맥의 오우거와 싸우는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슈린 공작 같은 놈이 순순히 유적을 찾게 놔둘 리가 없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아마 슈린 공작이었다면 훨씬 빨리 손을 썼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잔혹하게.
제론은 잠시 고민했다. 저들을 과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서둘러서
먼저 유적을 찾으면 된다.
유적만 찾으면 저들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국소 날씨 조절 아티팩트를
이용하면 저들에게 재앙을 내릴 수 있었다.
산맥에서 혹독한 날씨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확인할 기회이기도 했다.
제론은 걸음을 서둘렀다.
모닥불은 불씨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루이네 일행이 옹기종기 붙어서 잠들어 있었다.
그나마 루이네는 유일한 여자이기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예거와 호위 기사들이 준비한 잠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래 봐야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제론은 진득한 마나를 강하게 흘려보냈다.
화아악!
마나가 파도처럼 루이네 일행에게 쏟아졌다.
가장 먼저 잠에서 깬 것은 예거였다. 예거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주위를 경계했다. 제론이 흘린 마나는
차가운 성질을 가졌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일어났다.
루이네는 가장 나중에 일어났다. 고민하느라 밤을 새우고 조금 전에 깊이 잠들었기에 반응이 가장 늦었다. 하지만
그녀도 일어난 즉시 정신을 번쩍 차렸다.
제론은 루이네에게 다가갔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적이 여기까지 들이닥치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야만 했다.
물론 당장 오지는 못할 것이다. 차근차근 추적해 오면 최소한 이틀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유적을
찾으려면 서둘러야만 했다.
“선택은?”
제론의 물음에 루이네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도와주세요.”
루이네는 자심의 감을 믿기로 했다. 제론은 결코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다행히 제론은 그녀가 충분히 믿어도 되는 사람이었다.
“좋아. 그럼 빨리 정리하고 출발하지. 다들 정리하는 동안 넌 정보를 말해.”
루이네가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빛냈다.
“다들 들었죠? 서둘러 주세요.”
용병들은 루이네의 말에 서둘러 주변을 정리했다. 하지만 예거와 호위 기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가씨,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예거가 제론을 노려봤다. 이건 명백히 저자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우리 아가씨께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결코 용납지 않겠소. 이건 아가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아베티스 가문의 문제요.”
제론이 눈살을 찌푸리며 루이네를 쳐다봤다.
“그 정도 권한도 없었어?”
“말을 가려 하시오!”
예거가 불같이 화를 내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몸에서 투기가 넘실댔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제론은 예거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예거 같은 사람 100 명이 달려들어도 제론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예거는 이제 갓 익스퍼트가 된 기사였다. 제론의 입장에서는 익스퍼트도 아니었다. 그저 견습 기사 정도에
불과했다.
견습 기사 수백 명이 달려들어 봐야 소드 마스터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이쯤에서 확실히 하지. 솔직히 도와주고 싶긴 한데, 시간이 많지 않아.”
루이네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든 결정 권한은 제게 있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예거 경?”
루이네의 말에 예거가 흠칫 놀라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의 투기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예거는 당황한
표정으로 루이네를 바라봤다.
“아가씨…….”
“예거 경, 이번에는 절 믿어 주세요. 그러실 수 있으시죠?”
루이네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쩌겠는가. 예거는 정중한 자세로 가슴에 주먹을 대고 살짝 허리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전 아가씨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고마워요.”
루이네가 생긋 웃었다. 그리고 제론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넘겼다. 사실 별건 없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걸 듣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범위를 좁힐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유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감각에 의지해 초고대유적으로
텔레포트하지 않고 그저 에너지의 흐름만 파악해서 고대유적을 찾는 것도 가능했다.
“서두르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산맥에 들어선 기간트의 움직임이 점점 활발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제론은 엄청난 강행군을 했다. 솔직히 혼자서 움직였으면 도착해도 벌써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10 명이 넘는
일행이 따라붙으니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따라가는 자들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꼴딱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제론이
멈추질 않으니 기절 일보 직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안 쉬었으니
얼마나 지독한 강행군을 했는지 알 수 있다.
해가 완전히 졌다. 깜깜해서 코앞도 분간이 안 됐다. 사람들은 이제야 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뇌리에 휴식이라는 두 글자가 스쳐 지나간 순간 밝은 빛이 확 터져 나왔다.
“마, 마법등…….”
제론이 휴대용 마법등을 켰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무려 5 개나 켰다. 주변이 환해졌다. 제론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예거는 가는 내내 루이네를 신경 썼다. 사실 일행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루이네였다. 다들 건장한 사내들이었지만
루이네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루이네는 예거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그녀는 누구보다 강단이 있었고, 인내력이 뛰어났다. 루이네는
묵묵히 이를 악문 채, 걷고 또 걸었다.
사내들도 나가떨어질 상황에 루이네는 멀쩡해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결국 걷다가 밤이 지나가 버렸다. 환하게 날이 밝아 왔다. 그리고 드디어 제론이 걸음을 멈췄다.
“다들 수고했다. 지금부터 푹 쉰다.”
제론의 말에 다들 일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20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루이네는 물론이고 예거까지 잠들어 버렸다. 그만큼 힘든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온 덕분에 적과의
거리를 상당히 벌릴 수 있었다.
“그럼 슬슬 찾아볼까?”
여기까지는 딱 루이네의 정보를 토대로 찾아온 길이었다. 이제부터는 제론의 감각으로 유적을 찾아내야만 한다.
제론은 감각을 예리하게 가다듬었다.
그간 수도 없이 연습과 실전을 거쳐서 그런지 순식간에 초감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제론의 입가에 길다란 미소가 걸렸다. 정말로 제대로 찾아왔다. 루이네가 가진 정보는 진짜였다. 그것도 상당히
정확했다.
초감각의 영역에 들어가자마자 희미한 에너지의 흐름이 느껴졌다. 익히 경험한 적이 있는 패턴의 에너지였다.
이것이 바로 초고대유적의 에너지 흐름이었다.
제론은 조심스럽게 에너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며 걸음을 옮겼다. 에너지가 흘러나오고 있는 장소를 찾아내면
바로 거기가 고대유적일 것이다.
어렵지 않았다. 워낙 첫 위치를 잘 잡았기에 유적을 찾아내는 데 2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나마 유적 입구를
찾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했다. 만일 유적 입구를 바로 찾았다면 30 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간단히 찾을 수 있는데 말이야.”
제론은 새삼 유적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인에게 말하면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다. 문득
바인에게 과부하가 걸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뭐 힘들면 얘기하려나? 아니, 알아서 해결하려나?”
바인은 충분히 알아서 그런 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제론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정보에 대한 또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로 흘러갔다. 바로 프로인트였다.
프로인트는 그림자의 정령 스키아를 가지고 정보 수집을 했다. 또한 그렇게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원하는 것을
정확히 집어냈다. 그것은 분명히 재능이었다.
‘프로인트를 바인한테 보내 볼까?’
어쩌면 둘이 조화만 잘 이루면 훨씬 큰 힘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제론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유적 입구를 가리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옆으로 치워 버렸다.
쿠구구구궁!
바위는 기간트를 동원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무거웠지만, 제론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제론은 조금 힘겹긴 했지만 크게 어렵지 않게 바위를 치워 버렸다. 유적 입구는 거대한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루이네와 함께 들어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괜한 오해를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어차피 유적 안에 있는 유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제론에게는 유적 아래에 있는 초고대유적이 중요했다. 그 안에
어떤 선물이 있을지가 훨씬 더 궁금했다.
제론은 위치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일행이 잠든 곳으로 돌아갔다.

“예? 차, 찾았다고요? 벌써요?”


루이네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 정보만으로 유적을 찾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적어도 몇 달은 탐색을 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루이네는 각오를 다지고 왔다. 어떻게든 1 개월 안에 승부를 보겠다고 말이다.
한데 잠깐 자고 일어나니 벌써 유적을 찾아 놨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었다.
“시간 없으니 빨리 움직이지.”
제론의 말에 다들 멍한 얼굴로 자리를 정리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도 가지
않았다.
다들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예거가 제론에게 다가갔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론을 보며 물었다.
“정말로 유적을 발견했소?”
제론은 그를 힐끗 쳐다봤다.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사람들을 유적까지 데리고 가면 그만이었다.
제론의 머릿속은 뒤에서 슈린 공작가와 나베 공작가를 움직인 자들을 어떻게 찾아서 응징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예거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일단 자신들을
오우거로부터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고, 또 루이네의 말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제론은 예거가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건 무슨 생각을 하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떠날
준비가 다 끝난 것이다.

제론은 천천히 걸었다.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느긋하게 걸어도 1 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다들 제론의 뒤를 따르면서도 반신반의했다. 뭔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제론을 만난 이후 겪은 일은 대부분 말이 안 되는 것들이었다.
일단 제론은 오우거들을 혼자 유인해 떼어 내 버렸다. 그건 아무리 강하고 빠른 사람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데도 제론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해냈다.
또 제론은 일행에게 따뜻한 불과 씻을 물을 제공했다. 마치 없었던 샘이 나타난 것 같았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몬스터에 대해 정말로 무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행군을 통해 인간에게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몬스터를 만나지 않았다. 하이쓰 산맥에서 이렇게 빠르고 거칠게
이동하는데 몬스터를 만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해 보면 어느 하나 간단한 것이 없었다. 아니, 모두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데 거기에 하나 더 추가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유적이었다. 유적은 아무리 드러난 곳에 위치해도 찾기가 어려웠다. 또 찾은 뒤 개발도 만만치
않았다.
한데 그걸 잠깐 자고 일어난 사이 찾아 놨다고 하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유적 개발 역시 제론의 도움을 받으면 예상과 달리 아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감이 생겨났다.
1 시간쯤 이동하자,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다들 멍하니 그걸 바라봤다. 무슨 유적이
이렇게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단 말인가
이런데도 지금까지 발견되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하이쓰 산맥이 비록 험하고 몬스터가 무서워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지만, 아예 인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노련한 약초꾼이나, 탐험가들은 종종 산맥을 헤집고 다닌다. 한데 이런 거대한 철문이 그들의 눈을 피해 갔다?
그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제론에게로 향했다. 다들 같은 의문을 담고 있었다.
제론은 시선을 돌려 철문 옆에 놓인 거대한 바위를 쳐다봤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바위로 향했다. 그렇게
잠시 바라보다가 다들 입을 쩍 벌렸다.
“설마 저 바위가 이 문을 막고 있었던 건가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이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론을 바라봤다.
“기간트를 가지고 계신 건가요?”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기간트를 가지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아직 대외적으로 대놓고 드러낼 수 없는
기간트였다. 테오스였으니까.
제론의 붉은 실바는 영지에 놓고 왔다. 붉은 실바를 타는 모습도 웬만해선 보이기 싫었다. 기간트 때문에 자신의
행적이 외부에 크게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저 문을 여는 것 아닌가?”
제론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철문으로 향했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척 보기에도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보죠.”
여기서부터는 자신의 힘으로 하고 싶었다. 그래서 루이네는 예거와 상의를 했다.
“기간트의 힘으로 열면 안 될까요?”
“보통 이런 식으로 닫힌 유적은 특별한 암호 체계를 따라 열지 않으면 트랩이 발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유적에 대해 상당한 조사를 했기에 예거는 자신이 아는 내용을 줄줄 읊었다.
“대신 문만 제대로 열 수 있다면 발굴이 훨씬 쉽습니다. 문을 여는 것 자체가 주인으로 인정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도둑이 문을 열면 어쩌려고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자신감이죠. 보통 이런 경우 유적의 원래 주인이 상당한 위치에 있던 인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최소한 후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사람이 만든 유적일 겁니다.”
“안에 보관된 유물도 엄청나겠군요.”
“보통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문을 여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고대에는 지금보다 마법이 훨씬 발달해 있었다. 그런 곳에서 뚫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이니 얼마나 열기가
어렵겠는가.
그래서 보통 이런 경우는 문을 부수고 안의 트랩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제거하면서 유적을 발굴해 나간다.
하지만 그 와중에 상당히 많은 유물이 유실되곤 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얻는 유물이 엄청났지만 말이다.
“문을 부수고 차근차근 트랩을 해체하는 것이 정공법입니다.”
루이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선 안 돼요. 우리는 그렇게 할 시간도 능력도 없어요.”
사실 유적을 발굴해도 문제였다. 여기서 유물을 안전하게 아베티스 영지까지 가져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중간에
나베 공작가에서 보낸 놈들이라도 만난다면 자칫 유물을 빼앗길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럼 일단 다 문에 붙어서 문을 열 방법을 찾아보죠.”
루이네는 그렇게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만일 나베 공작가
사람들이 이곳에 들이닥치면 강제로 문을 열어 트랩을 발동시키고 말이다.
다들 문에 바짝 붙어서 이것저것 만져 보고 살펴보고 난리가 났다. 하지만 제론은 조금 떨어진 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루이네나 예거는 오히려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 문을 여는 방법까지 제론이 찾아내면 자신들은 정말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제론은 철문 전체를 쭉 훑어보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시력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마치 코앞에 철문을 들이대고 보는 것처럼 자세히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흐음.”
제론은 눈을 빛내며 턱을 쓰다듬었다. 이 유적의 주인이 누구이고, 왜 이런 철문을 만들었는지 알아냈다.
그 이유는 아주 당당하게 철문에 한가득 써 놓았다. 그것도 직접. 유적의 주인은 검을 이용해 고대어로 그
내용을 잔뜩 휘갈겨 놓았다.
철문의 재질은 그냥 강철이 아니었다. 특수한 금속을 섞어 만든 합금이었다. 고대에도 쉽게 구하기 어려운
금속이었다.
한데 그런 금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검으로 글을 새겨 넣었다는 것은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글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나를 이기는 자, 모든 걸 가지리라.

이보다 더 간단한 방법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누구도 성공시키기 어려웠다. 이 유적을 만든 사람은 고대에도
거의 없었던 진짜 소드 마스터였다.
‘아마 기간트를 동원해도 문을 여는 게 쉽지 않겠어.’
문과 유적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 곳을 기간트로 간단히 부수고 들어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네요. 문에 쓰여 있는 글이 힌트가 될 것 같긴 한데…….”
다들 어렴풋이 그런 걸 느끼긴 했다. 하지만 문에 그려진 글이 그저 단순히 문양일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루이네가 반사적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이 그녀의 시선을 받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유적의 시험을 통과하면 문을 열 수 있다고 써 있군.”
루이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설마 고대어도 읽을 수 있나요?”
“공부 좀 했지.”
말도 안 된다. 공부 좀 한다고 누구나 고대어를 읽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고대어를 자유자재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고대어는 어렵고 난해했다. 학식이 뛰어난 유명한 학자들도 버거워하고 고개를 내젓는 것이 바로
고대어였다.
고대어는 문자 하나하나가 마치 암호처럼 되어 있어서 그저 단순한 문장 하나를 해석하는 것도 어려웠다.
똑같은 문장이라 해도 몇 가지 미묘한 차이에 의해 완전히 다른 뜻이 되어 버리곤 했다.
그러니 루이네가 놀라는 건 당연했다. 아니, 루이네뿐 아니라 모두가 놀랐다. 그리고 일부는 제론이 거짓을
말했다고 생각했다. 상식에 비추어 보자면 당연히 제론의 말은 거짓이어야 한다.
“그 해석, 확실합니까?”
예거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론은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서는 말했다.
“누가 먼저 시험에 도전할 건가? 방법은 내가 알려 주지.”
제론의 말에 예거가 나섰다. 제론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철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철문의 이음새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길 검으로 찌르면 시험이 시작된다. 시험이 어떤 건지는 나도 몰라.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다. 각오는 되어
있나?”
제론의 말에 예거가 가슴을 쫙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가씨를 위해 죽을 각오는 언제든 되어 있습니다.”
예거는 어느새 자신이 제론에게 공손한 말투를 쓰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너무 긴장한 것이다.
“후우욱.”
예거는 심호흡을 한 뒤, 제론이 말한 이음새에 검을 힘껏 찔러 넣었다.
슈아악!
예거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주위 환경이 확 바뀌어 버렸다. 바닥에는 푸른빛을 띤 돌판이 촘촘히 깔려 있었고,
나머지는 새하얀 공간이었다.
돌판 한가운데에서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예거는 긴장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분위기를 보니 누군가와 대결을 해야 할 듯했다.
화아아악!
강렬한 빛기둥이 솟구쳤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며 멋진 복장으로 서 있는 중년인 한 명이 나타났다. 그 역시
검을 들고 있었는데 너무나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음. 오랜만의 시험이라 잔뜩 기대를 했는데, 이거 아주 실망이로군. 견습 기사만도 못한 놈이 오다니
말이야.”
사내의 말에 예거가 발끈했다. 자신은 당당한 기사였다. 그것도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였다. 한데 그런 자신이
견습 기사만도 못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날 모욕하지 마시오!”
예거가 사내를 향해 검을 겨눴다.
사내는 담담히 예거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난 아르뭄이라고 하네. 자네를 모욕할 생각은 없었네. 하지만 스스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돌아볼 줄 알아야
진정한 기사 아니겠나?”
“크윽.”
할 말이 없었다. 예거는 이를 악물었다. 이럴 때는 실력으로 보여 주면 된다. 말이 필요 없었다.
“하압!”
예거가 몸을 날렸다. 그리고 단번에 아르뭄을 두 동강 내 버릴 듯이 검을 내리쳤다.
그것이 예거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의식이 사라져 버렸다.

“끄으응.”
“예거 경! 괜찮으신가요? 정신이 들어요?”
예거는 루이네의 목소리에 억지로 눈을 떴다. 눈이 뿌옇게 흐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야가 점차 돌아왔다.
“아가씨?”
루이네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다행이에요. 무사하셔서. 흐윽.”
루이네는 울음을 참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예거는 온몸이 부서질 듯한 통증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방에 펼쳐진 참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루이네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 정신을 잃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죽은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숨을 쉬고 있었다.
“다들 시험에 실패했어요.”
예거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르뭄이 뭘 어떻게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그럴진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는가.
억지로 몸을 일으킨 예거의 눈에 아직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제론이었다.
“아직 시험을 시도하지 않은 사람도 있군요.”
“예, 제가 하지 말라면 안 하겠대요.”
예거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마치 시험에 도전하면 성공할 자신이 있다는 듯한 말 아닌가.
“자신만만한 사람이로군요.”
루이네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감이라기보다는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아요. 말씀해 주세요. 시험이 어떤 건가요?”
“아주 강한 사람을 상대로 이겨야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강한가요?”
예거가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움직임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환상 속에서 싸우는 모양이군요. 어쩌면 아예 시험 자체가 눈속임 아닐까요?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그러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저 사람도 시험에 도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이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마지막까지 제론의 도움을 바라게 되었다.
잠시 후, 기쁜 표정의 제론이 문의 이음새에 검을 푹 꽂았다.
그리고 제론의 주위로 강렬한 빛기둥이 솟구쳤다.

Chapter 8 소드 마스터 아르뭄

제론은 감각을 사방으로 퍼뜨리며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바닥에서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새하얀 공간에 스며들어 말도 못하게 신비로웠다.
화악!
10 미터쯤 떨어진 곳에 빛기둥이 솟아났다. 그리고 중년인, 아르뭄이 나타났다.
“호오. 이번에는 상당하군. 드디어 여길 만든 보람을 느끼게 됐어.”
아르뭄은 제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르뭄이라고 하네.”
“제론입니다.”
제론은 아르뭄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세에 상당히 감탄했다. 아르뭄은 제론이 처음으로 만나는 진짜
소드 마스터였다.
“어디 어울려 볼까?”
아르뭄이 먼저 검을 뽑았다. 그러자 제론도 아르뭄을 향해 검을 겨눴다.
제론의 검끝에서 뻗어 나간 날카로운 기세가 아르뭄을 덮쳤다. 그저 기세일 뿐이지만 아무 대응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살을 갈라 버릴 것 같았다.
아르뭄의 몸에서 마나가 불처럼 타올랐다.
화아악!
제론의 기세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아르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쩡!
제론은 순식간에 이뤄진 아르뭄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아르뭄의 눈에 희열이 감돌았다. 지금까지 이 공간에 머물면서 만난 사람들 중 이렇게 자신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
낸 건 제론이 처음이었다.
“이거 너무 흥분돼서 미칠 것 같군.”
아르뭄의 검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제론의 검도 환하게 빛났다.
꽈앙!
빛과 빛이 부딪치며 폭발이 일어나 서로를 밀쳐 냈다.
제로은 온몸이 찌릿찌릿해졌다. 방금 전 폭발로 인한 충격의 여파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실로 가공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과연 소드 마스터!”
진짜 소드 마스터와는 처음 검을 맞대 봤다. 제론은 이 한 번으로 상대의 기량이 자신보다 위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투지가 샘솟았다.
이번에는 제론이 먼저 달려들었다. 기량이 위라는 걸 확인했으니 틈을 안 주려면 끊임없이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쩡! 쩡! 쩡! 쩡!
제론의 검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잠깐의 빈틈도 없이 검격을 몰아쳤다.
아르뭄은 감탄하며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제론의 검을 막아 내는 건 결코 간단치 않았다. 모든 공격이 절묘하게
빈틈을 파고들었다.
만일 둘의 기량이 비슷했다면 지금쯤 결론이 났을 것이다. 제론의 승리로 말이다.
아르뭄은 끊임없이 빈틈을 공략당했지만 용케 그것을 모두 막아 냈다. 그가 제론보다 더 빠르고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감각도 더 예민했다.
그 셋 중 하나만 모자랐어도 제론의 검을 당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쩌저저저저저정!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점점 높아졌다. 그러더니 결국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제론의 눈에도 아르뭄의 눈에도 검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검은 정확히 부딪쳤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극도의 감각 싸움이었다.
제론은 검을 휘두르며 환하게 웃었다. 아르뭄도 제론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거의 희열에 젖은 채 검을 나눴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는 두 사람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마나가 되어 주변을 서서히
장악해 나갔다. 그리고 정확히 두 사람 사이에서 치열한 세력 다툼을 했다.
마나는 확실히 아르뭄이 우위에 있었다. 마나의 양 자체가 달랐다. 또한 마나 장악력도 제론보다 한 단계 위에
있었다.
퍼버버버벅!
결국 제론의 몸을 아르뭄의 마나가 뒤덮었다. 마나에 몸이 닿을 때마다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몸을 마나로
감싸서 피해를 최소화하긴 했지만 몸이 계속 흔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빈틈으로 이어졌다.
촤악!
아르뭄의 검끝이 제론의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칼은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지만, 칼에 서린 마나가 어깨
내부를 완전히 헤집어 버렸다.
제론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지만 꾹 참았다. 지금 빈틈을 키웠다간
목이 달아난다는 것을 알기에 억지로 평정을 유지하며 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저정!
죽음의 위기가 엄습했다. 그건 엄청나게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 두려움을 모두 끌어내 검에 담았다.
머릿속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했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호수 같았다.
한쪽 어깨를 쓰지 못해 검을 휘두르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인데도 제론의 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제론의 검이 점점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쉬아아악!
제론의 검이 둘로 나뉘었다. 아니, 마치 둘로 나뉜 것처럼 보였다. 그 두 개의 검은 각자가 살아 있는 것처럼
펄떡이며 움직였다.
그리고 동시에 두 군데의 빈틈을 노리고 날아갔다.
아르뭄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 떠올랐다.
쩡! 촤악!
빈틈 하나는 완벽히 막았지만 나머지 하나는 허용하고 말았다. 옆구리가 길게 갈라졌다. 상처가 제법 깊었다.
피가 뭉클뭉클 쏟아졌다.
하지만 아르뭄 역시 제론과 마찬가지로 상처 하나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검은 올곧았으며 굉장한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다.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제론의 검이 또 늘어났다.
쉬아악!
이번에는 두 개가 각각 갈라져 네 개의 검이 되었다.
촤촤촤촥!
네 개의 검이 아르뭄의 몸을 마구 헤집었다. 아르뭄은 피투성이가 된 채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정!
놀랍게도 네 개의 검 대부분을 막아 냈다. 하지만 모든 공격을 막아 내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제론은 마치 네
명으로 불어난 것처럼 광범위하게 아르뭄을 압박했다.
쉬아악!
검이 여덟 개로 늘어났다.
아르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푹푹푹푹푹푹!
수십 번이나 검에 찔리며 아르뭄의 몸이 뒤로 휙 날아갔다.
쿠당탕탕!
아르뭄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가 부딪힌 자리마다 피가 흥건하게 고였다.
제론은 조용히 서서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아르뭄을 쳐다봤다. 제론의 눈빛은 지독히도 고요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 아르뭄의 몸이 푸른빛에 휩싸였다. 그 푸른빛의 출처는 바닥이었다. 바닥의 빛이
몽땅 아르뭄에게로 모였다.
제론은 긴장하며 그것을 쳐다봤다. 모인 빛 속에 엄청난 마나가 응집되는 것이 느껴졌다. 만일 저것이 아르뭄의
것이라면 싸움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화아아악!
빛 덩이 하나가 푸른빛 무리 속에서 솟구쳐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빛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는 푸른색 구슬 하나만 달랑 남아 있었다. 구슬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는데, 마치
제론에게 어서 잡아 달라는 듯 유혹의 빛을 내뿜었다.
제론은 피식 웃으며 다가가 그 구슬을 움켜쥐었다. 엄청난 마나가 손에서 꿈틀거렸다. 이 구슬은 마나의
응집체였다.
제론은 이 구슬의 마나가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아르뭄의 마나였다. 아르뭄은 자신의 마나를
이런 식으로 남겨 둔 것이다. 훗날 자신의 유적을 찾아올 사람을 위해서 말이다.
망설임은 없었다. 제론은 구슬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쉬아아아아아악!
거대한 마나 폭풍이 제론을 휘감았다. 제론은 푸른 구슬에 담긴 마나가 몸속에서 올올이 풀려나는 것을 느끼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제론이 익힌 마나 호흡법은 초고대문명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일컬어지는 호흡법이었다. 제론은 그 호흡법을
이용해 몸속에 들어온 아르뭄의 마나를 차근차근 받아들였다.
마나 폭풍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제론은 천천히 눈을 떴다.


구슬의 마나는 몽땅 몸으로 흡수해 버렸다. 이제 그 마나는 제론의 것이었다. 이질적인 마나였지만 흡수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르뭄이 마나의 성향을 그런 식으로 조절해서 만든 것이다.
사방이 새하얀 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제론은 주위를 둘러봤다. 이 빛의 정체는 아주 간단했다. 마법이었다.
철문에 새겨진 마법진을 통해 만들어진 빛이었다.
제론은 마나를 갈무리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빛이 점점 사그라졌다.
빛기둥이 완전히 사라지자, 주변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신을 잃었던 사람들이 모두 깨어나서 제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너무 놀라서 눈이 커다래진 상태였다.
“무, 무사하셨군요.”
루이네의 말에 제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무사한 것뿐 아니라, 이번 대결을 통해 새로운 경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나량도 늘어났고, 검술도 깊어졌다. 지금이라면 유적 14 층을 지키는 기간트, 이스히스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 어떻게 되셨나요?”
다들 침만 꼴깍 삼키며 제론의 입을 바라봤다. 그들은 설마 제론이 이렇게 멀쩡히 걸어 나올 줄은 몰랐다.
안에서 똑같은 일을 겪었기에 제론도 별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론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돌아섰다. 그리고 철문을 쳐다봤다. 순간 제론의 눈이 빛났다.
‘달라졌군.’
철문이 아까와 달라졌다. 모양이나 문양이 변한 게 아니었다. 철문을 감싼 마나의 흐름이 달라졌다.
아까는 철문에 이렇다 할 마나의 흐름 자체가 없었다. 그저 단단한 철문이었다. 안쪽에 마법의 기운이 느껴지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문 전체를 감싸는 흐름이 생겨났다. 당연히 제론이 시험에 통과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철문에 끼워져 있던 마나의 구슬을 제론이 흡수하면서, 마치 물꼬를 트듯 막혔던 마나가 뻥 뚫려 버린 것이다.
제론은 철문 한가운데에서 마나가 전혀 흐르지 않는 부분을 발견했다. 꼭 손바닥 하나 크기였다.
그곳에 손바닥을 댄 제론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손바닥을 통해 마나를 뿜어내 철문 전체를
마나로 감싸면 되는 것이다.
물론 마나의 성향은 다른 마나와 맞춰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무지막지한 마나를 뿜어내 철문 전체를 자신의
마나로 물들이거나.
쉬운 길을 두고 굳이 어렵게 갈 이유가 없었다. 제론은 손바닥을 통해 마나를 뿜어냈다. 철문에 흐르는 마나와
성향을 똑같이 맞추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건 보통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소드 마스터에게는 숨 쉬듯 간단한 일이었다.
철문에 빛의 선이 이리저리 그려졌다. 그것은 거대한 마법진을 이루었다. 그리고 강렬하게 빛났다.
그그그긍!
마법진이 작동하면서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그들의 표정에 기대감이 한껏 피어올랐다. 철문이 열리면
열릴수록 눈이 빛났다. 그리고 점차 그 눈빛에 욕심이 깃들었다.
그그그그! 쿵!
철문이 활짝 열렸다. 마치 얼마든지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듯했다. 열린 문을 통해 내부가 보였는데,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어서 들어가 봐요!”
루이네가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예거와 호위 기사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용병들도 우르르 달려갔다. 다들 눈이 번들거렸다. 하지만 일이 터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거와 호위 기사에게는
기간트가 있으니까.
막 문을 통과하려던 루이네가 눈을 크게 떴다. 안에서 뭔가가 몸을 쭉 밀어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계속 제자리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루이네뿐 아니라 예거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용병들도 안으로 들어가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단 한 걸음도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제론은 그 광경을 가만히 살펴보며 눈을 빛냈다. 저들을 무엇이 밀어내는지 보였다. 저들을 밀어내는 것은
마나였다. 그것도 자신의 마나에 의해 이뤄지는 일이었다.
시험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저 마나의 장벽을 넘어서야만 진짜 유적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제론은 느긋하게 걸어갔다. 애초에 마나를 장악해 입구에 설치된 마나 장벽에게 빼앗기지만 않으면 된다. 사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소드 마스터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멈칫거리지도 않고 문을 통과한 제론은 유적 내부를 확인했다. 유적 안에는 수많은 마법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초고대유적으로부터 끊임없이 에너지를 받아들이니 마법등이 꺼질 일은 없었다.
유적 안은 아름다운 유물로 가득했다. 예술적 가치가 무궁무진한 것들이었다. 당연히 아티팩트도 잔뜩 섞여
있었다. 제론은 예술품의 숲을 지나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예술품 다음은 기간트였다. 기간트가 양옆으로 쭉 늘어서 있었다. 모두 20 기였는데, 기종은 모두 에스타스였다.
제론은 기간트 역시 그냥 지나쳤다. 제론이 아무것도 안 건드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직 이 유적의
진정한 주인이 되지 못했다.
이 유적은 체른산 유적과 비슷했다. 체른산 유적이 대마법사의 유적이라면 이곳은 소드 마스터의 유적이 되는
셈이었다.
제론은 결국 유적 끝으로 가서 통제실을 장악할 수 있었다. 체른산 유적을 만든 사람이 이 유적도 같이 만들거나
설계했을 확률이 높았다. 두 유적은 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일단 통제실을 장악한 제론은 유적의 진짜 창고를 확인했다. 체른산 유적은 창고가 텅텅 비어 있었는데, 여긴
그렇지 않았다.
창고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실제 유적보다 창고가 훨씬 더 컸다. 그렇게 넓은 창고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금괴와 은괴, 그리고 테페룸괴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보석이 가득 담긴 상자도 잔뜩 쌓여 있었다.
예술품과 아티팩트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수의 유물이 창고의 절반을 꽉 채웠다.
기간트도 50 기나 있었는데, 밖에 있는 것과 달리 아우틈 40 기와 히엠스 10 기가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유적이었다.
이 정도로 많은 유물이 있는 유적은 아주 드물었다. 아마 제국에서 발견된 유적 두어 개를 제외하면 가장 큰
유적일 것이다.
제론은 창고를 공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밖에 있는 물건만으로도 아베티스 가문의 위기를 해소하고 재정과
세력을 공고히 하는 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제론은 통제실을 조작해 다른 사람들도 들어올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곳에서 나와 일행 쪽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루이네를 비롯한 용병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안에 있는 유물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정도만으로도 흔치 않은 유적이라 할 수 있었다. 유물의 양이 정말로 엄청났다.
그들은 유물에 취해 어떻게 갑자기 여기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루이네는 정신이 없었다. 유적을 너무나 간단히 발굴해 버렸다. 이제는 이 막대한 유물을 가지고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다.
반사적으로 루이네의 시선이 제론에게 돌아갔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제론이 다 해결했다.
사실 제론이라고 해도 그 문제만큼은 해결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묘한 기대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목록부터 작성하는 게 순서일 거 같군.”
제론의 말에 루이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탐욕스러운 눈으로 유물들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 알았어요.”
루이네는 서둘러 예거에게 달려갔다. 그 뒤로 루이네와 예거는 열심히 유물 목록을 작성했다. 용병들도 그들이
그렇게 하는 걸 당연히 여겼다. 그리고 용병대장도 루이네를 따라다니며 함께 목록을 작성했다.
처음부터 용병 계약을 할 때, 발견한 유물의 5 퍼센트를 의뢰비로 지불하기로 했다. 목록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조금이라도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유적 내부가 바쁘게 돌아갈 때, 제론은 혼자 유적에서 나갔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진짜
움직일 시간이 되려면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금세 밤이 찾아왔다. 유적에 들어갔던 사람들도 모두 나와 유적 앞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바닥을


평평하게 다듬었다.
제론은 모닥불에 약초 가루를 뿌렸다. 근처의 냄새를 싹 없애주는 약초 가루였는데, 하이쓰 산맥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흔한 약초였다.
사실 하이쓰 산맥에서 이렇게 함부로 불을 피우면 위험했다. 불빛은 엄청나게 먼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오우거처럼 눈이나 감각이 뛰어난 몬스터가 그것을 보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피운 모닥불은 다른 모닥불과는 달랐다. 제론의 마법이 가미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반경 20
미터를 넘어가면 빛이 급격히 흐려진다.
그 정도 넓이면 16 명의 잠자리로는 충분했다.
불침번 몇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잠자리에 들었다. 유적을 발견한 흥분에 쉽게 잠들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하나둘 잠들기 시작했다.
불침번은 용병들의 몫이었다. 그들끼리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제론은 가만히 누워서 눈만 감고 있었다. 잠을 잘 생각은 없었다. 오늘 밤 유적 안에 들어가 진짜 유적을 찾을
생각이었다.
누워서 쉬는 동안 오늘 있었던 아르뭄과의 대결을 다시 한 번 차분히 복기했다. 새로운 경지로 올라가긴 했지만
그걸 완전히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실력이 쑥쑥 늘어나는 시기였다. 막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경지를 높였기
때문이다. 그 경지가 안정될 때까지는 많은 사색과 노력이 필요했다.
제론은 그 과정이 미치도록 즐거웠다.
한창 머릿속으로 아르뭄과의 대결을 즐기고 있을 때, 주변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변했다. 제론은 즉시 상념을 접고
감각을 확장했다.
용병 하나가 제론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뭔가를 확인하더니 새하얀 가루를 꺼내 주변에 솔솔 뿌렸다.
제론은 그 가루를 마시지 않도록 마나를 움직여 호흡기 주변을 막았다. 아니, 가루가 아예 몸에 스치지도 않게
조절했다.
용병이 돌아가자, 제론은 가루를 한데 모아 모닥불로 날려 버렸다. 가루는 불에 닿자마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예전보다 훨씬 민감해진 감각에 용병들의 움직임이 잡혔다. 또,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슬슬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다들 깊이 잠들었습니다.”
“수면 가루는 확실히 뿌렸지?”
“네. 아마 아침까지는 절대 깨지 못할 겁니다.”
“한데 그냥 지금 죽여 버리는 것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저 유물을 우리가 다 차지한다면 평생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을 텐데요.”
“돈이 있으면 뭐해? 돈을 버는 것보다 그걸 지키는 게 훨씬 어려운 법이다.”
“예? 그럼…… 이중 의뢰를 받으신 겁니까?”
“그런 셈이지. 하지만 그건 딱 우리만 알고 있어야 돼. 의뢰인에게 들켜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이중 의뢰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기에 다들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너무 걱정할 거 없다. 이번에는 아주 안전할 테니까.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이곳의 상황과 위치를 알려 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들과도 싸워야 하지 않습니까?”
“워낙 전력차가 압도적이라서 싸울 필요도 없을 거다. 아마 기간트가 30 기는 올 테니까.”
“30 기라고요?”
다들 깜짝 놀랐다. 기간트를 30 기나 동원하다니. 확실히 그 정도라면 굳이 싸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연락은 어떻게 합니까?”
“이걸로 하면 된다.”
용병대장이 품에서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슬을 꺼냈다.
“그게 뭡니까? 마법 통신 장비 같지는 않은데…….”
수하의 말에 용병대장이 피식 웃었다. 마법 통신 장비가 얼마나 비싼데 그걸 일개 용병에게 내주겠는가. 게다가
마법 통신 장비는 부피가 너무 커서 몰래 숨겨서 들고 오지도 못한다.
“이건 말이지, 이렇게 쓰는 거야.”
용병대장은 그렇게 말하며 구슬을 바닥에 휙 던졌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용병대장이 검으로 구슬을 힘껏 찌르자 구슬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래서 다들 재워야 헸군요.”
구슬의 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뿜어져 나가던 빛이 모이더니 위로 쭉
솟아올랐다.
강렬한 빛기둥이 밤하늘을 꿰뚫었다.
“저걸 보고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아마 기간트를 타고 미친 듯이 달려올 거다. 늦어도 아침이면 도착하겠지.”
“그럼 상황이 끝나겠군요.”
“그래. 유물의 5 퍼센트를 받는 건 변함없으니 우리야 마찬가지지.”
“고작 5 퍼센트입니까?”
“저 안에 기간트가 몇 기나 있는지 못 봤어? 에스타스가 20 기야. 그걸 다 팔면 얼마나 될 것 같아? 거기의 5
퍼센트만 해도 수십만 골드는 될 텐데, 거기에 유물까지 하면 과연 얼마나 될까?”
용병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왜 돈을 버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만일 여기서 100 만 골드만 벌어도 한 사람당 수만 골드가 떨어진다.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여기서 번 돈을 무사히 가지고 돌아갔을 때의 일이었다.
“확실히 기간트 30 기가 있다면 하이쓰 산맥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겠군요.”
“그래. 무엇보다 이 유적의 유물을 온전히 나를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발굴만 하면 뭐해? 갖다 팔아야 진짜
돈이 되는데 말이야.”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그제야 모든 용병이 용병대장의 행동을 이해했다.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제론은 가만히 누워서 그 모든 얘기를 듣고는 피식 웃었다. 만일 여기에 자신이 없었다면 저 얘기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변수가 있다는 걸 계산 못 했다.
아니, 저들은 정말 기본적인 것 하나를 고려하지 못했다. 저렇게 밝은 빛이 밤하늘을 수놓았는데, 과연 그걸
그들의 의뢰인만 볼 수 있을까?
하이쓰 산맥의 오우거들은 결코 장님이 아니었다.
‘멍청한 놈들.’
제론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움직였다. 워낙 빨랐기에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아예 인식
자체를 못했다.
제론이 한 일은 별것 아니었다. 쓰러져 잠든 네 사람을 옮기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루이네와 예거를 양팔에
하나씩 끼웠다.
그리고 빠르게 유적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머지 두 기사를 데려오는 것도 아주 간단히 끝났다. 용병들은 그때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제론이 워낙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또 그들이 깊게 잠들었다는 생각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막상 잠들었던 5 명이 사라져 버리니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뭐야? 다 어디 갔어?”
용병 하나가 그렇게 외치자, 다들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당황했다.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이 사라져 버렸다.
“찾아!”
용병대장은 다급했다. 뭔가 일이 요상하게 꼬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소리친 다음 반사적으로 유적을
쳐다봤다. 그리고 머리끝까지 소름이 쭈뼛 솟았다.
유적 입구에는 제론이 서서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제론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가 어찌나 차갑고
섬뜩했는지 순간 말문이 콱 막혔다.
“저, 저기 있다! 일단 잡아!”
분명히 수면 가루를 마셨을 텐데 어떻게 멀쩡히 움직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안 보이는
걸 확인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제론에게만 수면 가루가 듣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다 자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승산이 있었다. 어쨌든 기간트가 없으니 말이다.
순간 용병대장은 유적 안에 기간트 20 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그걸 제론이 차지하면 끝장이었다.
자신이 더 먼저 그걸 차지해야만 했다.
“서둘러! 일단 기간트부터 확보해!”
용병대장의 외침에 나머지 용병들도 상황을 깨닫고 우르르 유적을 향해 달려갔다.
제론은 유적 입구에 가만히 서서 그들이 다가오는 걸 보다가 씨익 웃으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용병들이 유적 입구를 향해 일제히 몸을 던졌다. 제론이 도망가는 것처럼 보여 다급해진 것이다.
“허억!”
“이게 뭐야!”
다들 너무 당황해서 패닉에 빠져 버렸다. 입구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마치 처음 철문이 열렸을 때 못 들어가던
것과 똑같았다.
용병대장의 등줄기를 소름이 관통하고 지나갔다.
“뭐, 뭐야!”
그의 눈에 몇 발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서 있는 제론의 모습이 보였다. 제론은 용병들이 유적에 들어오려고
발버둥 치는 것을 무심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우릴 밀어내는 건데!”
용병대장이 악을 쓰며 제론을 노려봤다. 그제야 제론의 얼굴에 표정이 살짝 드러났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제론은 손가락을 들어 용병대장의 뒤를 가리켰다. 용병대장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하지만
밝은 빛기둥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제론에게 뭐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제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주 밝은 빛이야.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었겠지?”
제론의 말에 용병대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치부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
“그래서 뭐! 나도 살아야 할 것 아냐!”
제론이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살겠다면서 저랬다고? 너 바보야?”
“뭐라고?”
“저 빛을 과연 네가 보여 주고 싶은 사람들만 볼까? 이 산맥에 그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닐 텐데?”
순간 용병대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건 생각도 못 했다. 수많은 생각이 뇌리에서 복잡하게 뒤섞였다.
‘그놈들! 설마 이걸 예상하고!’
완전히 당했다. 그걸 아예 생각도 못 했다니 이런 멍청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크르르르르!”
용병대장은 뒤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에 온몸이 경직되었다. 딱딱하게 굳은 목을 억지로 움직여 뒤를 돌아보고
나니,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용병대장뿐 아니라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몇몇은 다리에서 힘이 풀려 그냥 주저앉았고, 어떤 자는 미친
듯이 유적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썼다.
열 마리가 넘는 오우거가 등장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용병대장이 미친 듯이 몸을 허우적거리며 소리쳤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여기서 살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확실한 건지는 모른다. 저 오우거의 괴력을 유적이
감당할 수 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한 번만! 한 번만 살려 주시면 무슨 짓이든 하겠습니다!”
제론은 냉정하게 돌아섰다. 한 번 뒤통수를 친 사람은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법이다. 아마 틈이 생기면 언제
이렇게 애원했냐는 듯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갈길 것이다.
“으아악! 살려 줘! 살려 달라고! 그냥 가면 어떻게 해!”
용병대장은 그렇게 소리치다가 결국 저주에 가득 찬 말을 쏟아 냈다.
“네놈이라고 별수 있을 것 같아! 오우거가 이따위 마법 트랩을 못 뚫을 것 같으냐! 네놈도 나랑 똑같이 잡아먹힐
거다!”
그 말에 제론이 돌아섰다. 그리고 용병대장을 향해 걸어갔다. 마나의 장막 바로 앞에 선 제론은 피식 웃으며
장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론은 마나의 장막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해는 풀어 줘야지.”
용병대장은 제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뭘 어떻게 오해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오우거가 이 장막을 뚫고 들어와도 난 죽지 않아.”
그렇게 말한 제론이 오우거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발을 강하게 굴렀다.
꽝!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땅이 은은히 진동했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오우거들이 달려들었다.
“크워어어어어!”
열 마리가 넘는 오우거가 일제히 달려오는 광경은 엄청났다.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물론 그건
용병대장과 용병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였다.
제론은 가볍게 앞으로 걸어갔다.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오우거가 주먹을 휘둘렀다.
부아아악!
오우거의 주먹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왔다.
제론은 앞으로 한 발 걸으며 가볍게 손을 올렸다.
턱!
놀랍게도 오우거의 주먹이 제론의 손바닥을 전혀 밀어내지 못하고 막혀 버렸다.
“크아아아앙!”
오우거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자리에서 몸부림만 치고 벗어나질
못했다. 제론에게 주먹을 잡혔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오우거의 주먹은 제론의 머리보다 컸다. 한데 그것이 제론의 손에 잡혀
힘을 못 쓰고 있었다.
제론은 가볍게 손을 잡아당겼다.
“크웍!”
오우거의 거체가 그대로 끌려왔다. 제론의 주먹이 오우거의 가슴에 푹 박혔다.
“크워억!”
그게 끝이었다. 오우거의 몸이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맨손으로 오우거를 죽인 것이다.
용병대장을 위시한 나머지 용병들이 입을 쩍 벌린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다른 오우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제론을 살피며 주위를 맴돌았다. 함부로 용병들에게 덤벼들지도 못했다. 겁을 먹은
것이다.
제론은 주위를 슥 둘러봤다. 그리고 피식 웃은 뒤 천천히 걸어 유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용병대장이 다급히 불렀지만 제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유적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용병대장은 당혹과
절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크르르르르.”
남은 오우거들이 서서히 흉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론이 사라짐으로 인해 두려움이 가신 것이다.
모두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크와앙!”
오우거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오우거들은 용병들을 몽땅 해치운 다음 유적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몇 번 하다가 돌아갔다.
유적의 마나 장벽은 오우거조차 뚫지 못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렇게 그날 밤이 지나갔다.

Chapter 9 추격대

“끄으응.”
예거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며 몸을 일으켰다.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그냥 두통만 있는 게 아니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을 떠도 시야가 열리지 않았다. 눈물이라도 찬 것처럼 눈앞이 흐렸다. 뿌연 시야를 되찾으려 몇 번이나 눈을
비볐지만 여전히 그대로였다.
“너무 애쓰지 마. 수면 가루의 부작용 중 하나니까.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오히려 회복에 도움이 돼.”
예거는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제론의 목소리라는 걸 기억해 내고는 시키는 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나저나 왜 말을 놓는 거지?’
하지만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뭐가 어떠냐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론은 그래도 된다.
그는 예거의 은인이자 루이네의 은인이었고, 또 아베티스 가문의 은인이기도 했다.
예거는 가만히 앉아서 멍한 머리를 추스른 다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론이 한 말 중 하나가 갑자기 마음에 턱
걸렸다.
“수면 가루?”
“호흡을 통해 받아들이면 최소 8 시간은 절대 깨지 않고 자게 해 주는 약이지. 아니, 독이라고 하는 게 더
나으려나?”
“대체 그걸 왜 내가 마셨습니까?”
“왜긴, 잠자는 동안 용병들이 가루를 뿌렸으니까 마셨지.”
순간 예거의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예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야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균형감이 흐트러져 잠깐 비틀거렸지만 이내
똑바로 서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용병들이 배신했습니까?”
제론은 대답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살펴봤다. 나머지 두 기사도 슬슬 일어날 기미가 보였다. 하지만 루이네는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수면 가루를 너무 많이 마신 것이다. 수면 가루라는 것이 잠을 재우는 약초이긴 하지만, 부작용이 심각해서 많이
흡입하면 결코 좋지 않았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제론은 마나를 흘려 루이네를 한 번 씻어 주었다. 사실 이들을 지켜보면서 몇 번이나 마나로 몸을 씻어 주었다.
용병들이 수면 가루를 너무 많이 썼다.
만일 제론이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면 예거도 아직 못 일어났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루이네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잠시 후, 나머지 사람들도 다 깨어났다. 그리고 예거는 완전히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유적 안이로군요.”
예거의 말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내버려 두면 죽을 것 같더라고.”
예거는 유적 입구로 걸어갔다. 그리고 유적 밖에 펼쳐진 참상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밖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용병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죽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우거로군.”
오우거가 습격한 것이다. 하지만 대체 왜 습격을 한단 말인가. 모닥불로는 몬스터의 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거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제론이 다가왔다.
“저쪽에 있는 구슬 혹시 보이나?”
제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예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큰 구슬이라서 예거의 눈으로도 확인이
가능했다.
“빛을 하늘로 쏴 주는 아티팩트야. 이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겠지?”
예거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모든 일이 구슬에 실을 꿰듯 짜 맞춰졌다. 이 모든 일의 뒤에는 분명히 나베
공작가가 있을 것이다.
“큰일이로군요.”
예거의 얼굴에 걱정과 실망이 드리워졌다. 자신이 자는 동안 나베 공작가의 추격대가 얼마나 열심히 이쪽으로
이동했겠는가. 이젠 그나마 남았던 시간마저 다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잠시 후, 루이네와 두 기사가 다가왔다. 그들 역시 심한 두통 때문에 얼굴을 펴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제론은 대답대신 예거를 한 번 쳐다봤다. 예거가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설명을 해 주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루이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제 다 끝났다고 여긴 것이다. 이 많은 유물을 눈앞에서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이제 어쩌죠?”
루이네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딱히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 그저 한탄과 푸념에 가까운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 푸념에 답을 해 주었다.
“여기서 기다리면 돼.”
“예?”
“여기서 기다렸다가 싹 해치워 버리면 된다는 뜻이야.”
루이네가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그게 말이 되나요?”
제론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지?”
“유적이죠.”
“그래. 유적이지. 그리고 우리는?”
루이네가 답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대체 제론이 뭘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유적의 주인이지.”
“예?”
“유적의 주인을 유적이 어떻게 지키는지 한번 확인해 봐.”
제론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더 이상 설명해 주지 않고 그저 유적 입구를 통해 밖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니 루이네도 제론을 따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몰라 불안에 떨면서 말이다.

☆ ☆ ☆

나베 공작가에는 굳은 일을 처리하는 비밀 기사단이 존재했다. 이름조차 없는 기사단이었는데, 그라우는 그 비밀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무려 30 명의 기간트 라이더로 이루어진 기사단이었는데, 모두 출력 1.8 의 기간트인 몰레스를 가진 강력한
기사단이었다.
현재 그라우가 이끄는 비밀 기사단은 기간트를 타고 열심히 하이쓰 산맥을 달리는 중이었다.
어젯밤에 본 새하얀 빛줄기가 있던 곳을 향해 이동 중이었는데, 밤새 달리느라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후욱, 다들 멈춰!”
그라우는 명령을 내린 뒤, 기간트를 돌려보냈다. 그러자 나머지 기사들도 기간트를 돌려보내고 그라우를 중심으로
모였다.
“일단 거의 다 왔으니 여기서 충분히 쉬고 이동한다.”
제대로 쉬고 몸 상태를 끌어 올리지 않으면 작전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었다.
현재 후속군이 따라오고 있었다. 300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었다. 기간트를 보유한 라이더도 10 명 정도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굳이 기간트를 소환하지 않고 도보로 속도를 맞춰 오는 중이었다.
하이쓰 산맥의 몬스터를 상대하려면 그 정도 기간트는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라우는 수하들이 잠드는 것을 확인하고 누워 눈을 감았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몬스터에 대비해 기간트를
소환한 라이더 몇 명이 불침번을 섰다.

그렇게 내리 8 시간을 자 버렸다. 그래도 시간은 충분했다.


잠과 식사를 통해 체력을 회복한 그라우는 다시 기간트를 소환해 이동했다. 거의 근처에 도착한 채로 쉬었기
때문에 빛기둥이 있던 곳까지 가는 데 1 시간이면 충분했다.
쿵쿵쿵쿵쿵!
그라우는 공터가 나오자 속도를 높였다. 바로 유적 입구가 보였다. 너무나 훤히 드러난 유적이었다.
“난장판이로군.”
유적 주위의 참상을 본 그라우의 감상은 간단했다. 물론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30 기나 되는 기간트가
날뛰면 이곳의 지형 자체가 달라질 텐데, 핏자국이나 시체 조각 정도는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유적 안쪽에 사람이 보입니다!”
수하의 보고에 그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적 입구는 기간트가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랬다.
“일단 유적 안으로 들어간다. 유적 내부의 유물이 부서지지 않게 조심해라!”
그라우의 명령에 수하들은 일제히 대답하고 천천히 움직였다. 갑자기 달려가면 안 된다. 유적으로 들어갈 때도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지 않으면 유물이 부서질 위험이 있었다.
그들은 최대한 부드럽게 움직여 유적 입구에 도착했다.
그라우는 자신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루이네 일행이 안에서 혹시라도 기간트를 소환한 채 있다가
기습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니 가장 실력이 뛰어난 그라우가 앞장서는 것이 나았다.
“음?”
그라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에 막힌 듯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그그그그긍!
기간트의 관절 부분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마치 강력한 바람이 불어
몸을 밀어내는 것 같았다.
그라우는 더욱 기간트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힘을 주었다. 그라우뿐 아니라 다른 기사의 기간트 역시 마찬가지로
유적 입구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체 이게 뭐지?”
너무나 황당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30 기의 기간트가 4 기씩 번갈아 유적 입구로 몸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유적
입구가 제법 크긴 했지만 기간트 4 기가 나란히 서서 걸으면 꽉 찰 정도였다.
그라우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코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보였다. 목표인 루이네였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걸 못 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다들 비켜 봐라.”
그라우는 달려가는 힘을 이용해 유적 입구를 막고 있는 무언가를 단번에 부수거나 돌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기간트들이 뒤로 그리고 좌우로 비켜섰다. 그라우는 뒤로 한참을 물러난 뒤 눈을 빛내고는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쿵쿵쿵쿵쿵!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그라우가 탄 기간트가 빠르게 달려갔다. 그라우는 입구에 도착하기 직전에 자세를 살짝
낮추며 어깨를 앞으로 했다. 숄더차지였다.
콰우우!
그라우의 기간트가 입구를 파고들었다. 물론 완전히 들어가지는 못했다. 3 미터 정도 밀고 들어갔지만 그게
한계였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기간트의 마나 코어가 비명을 질렀다. 코어가 마나를 마구 발산했다. 그리고 그렇게 발산한 마나가 고스란히
입구를 막고 있는 마나 장막으로 흡수되었다.
퉁!
그라우의 기간트가 입구에서 뒤로 휙 날아갔다. 마치 새총으로 돌멩이를 날린 것 같았다.
꽈과과광!
그라우의 기간트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뒤에 늘어서 있던 동료 기간트들을 덮쳤다. 어찌나 강력하게 덮쳤는지
관절이고 몸통이고 찌그러지고 부서지고 난리가 났다.
다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라우의 기간트는 물론이고
바닥에 쓰러진 기간트들 모두 다시 일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다들 질린 눈으로 유적 입구를 바라봤다. 들어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부서진 기간트 속에서 간신히 나온 그라우가 명령을 내렸다.
“굳이 입구로 들어갈 필요 없다! 일단 유적 주변을 부수고 파헤쳐라!”
그라우의 명령에 남은 기간트가 일제히 움직였다.
일부는 입구로 가서 조심스럽게 힘을 썼고, 나머지는 입구 주변을 주먹으로 치고 땅을 파헤치는 일을 했다.
땅을 얼마 파헤치지도 않아 유적의 표면이 조금씩 드러났다. 유적은 특이한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왠지 그걸
부수면 입구로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가장 먼저 금속 표면을 발견한 기간트가 주먹을 꽉 쥐고 높이 치켜들었다.
꽈앙! 꽈광!
강렬한 폭음과 함께 기간트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뜯어진 팔이 허공을 날아 다른 기간트의 가슴을 때렸다.
꽝!
쿵쿵쿵!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리고 팔이 날아간 기간트를 바라봤다. 모두의 작업이 일제히
멈췄다.
그라우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유적을 공략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라우는 남은 기간트를 모두 동원해 유적 바닥을 파헤쳤다. 혹시라도 바닥을 통해서 들어가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실패했다. 유적의 바닥도 특이한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결국 그라우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후속 지원 부대가 도착하기를 말이다. 거기에는 마법사들이
끼어 있었다. 그들이라면 뭔가 방법을 만들어 줄 것이다.

유적 안에 있던 루이네와 예거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유적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설마 기간트까지 막아 낼 줄은 몰랐다.
그냥 막아 낸 게 아니라 무려 4 기의 기간트가 부서졌다.
“정말 대단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유적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비슷한 유적이 또 있겠죠?”
예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있을 겁니다. 하지만 비밀로 하겠지요.”
이 정도 힘을 가진 유적이라면 그 비밀을 파헤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지식과 기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걸 공개할 리 없었다. 두고두고 연구하면서 끊임없이 힘을 얻을 것이다. 물론 연구하고 파헤치는 것이 결코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루이네는 슬쩍 시선을 돌려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어디서 구했는지 의자를 가져와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사실 그 상태로 마나 호흡을 하고 있었지만
루이네가 보기에는 졸다가 깨다가 하는 것 같았다.
“저분이 과연 이 유적을 우리가 연구하도록 허락을 해 줄까요?”
루이네의 말에 예거가 살짝 발끈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유적의 주인은 엄연히 아가씨입니다. 아니, 아베티스 가문입니다. 당연히 뭐든
하실 수 있습니다.”
예거의 말에 루이네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우리 것이 아니에요. 안의 유물이야 약속에 따라 우리가 가져가겠지만…… 이 유적은 저기 앉은 제론
님의 것이에요.”
“아가씨!”
루이네는 단호히 고개를 저어 예거의 말을 막았다.
“이 유적을 찾은 것도, 또 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제론 님 덕분이에요.”
루이네가 똑바로 예거를 바라봤다. 예거는 루이네의 눈빛에 흠칫 놀랐다.
“제론 님이 아니었다면 우린 수면 가루에 당해 저들에게 잡혔겠죠. 그럼 무슨 꼴을 당했을까요?”
루이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마 결코 곱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운명을 제론이 바꿔 주었다. 한데 이제 와서 유적의 주인임을 주장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가 이 유적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우리가 나베 공작가와 다른 게 뭐죠? 전 그건 싫어요.”
“아가씨…….”
예거는 안쓰러운 눈으로 루이네를 바라봤다. 가슴이 아팠다. 그 대단하던 아베티스 가문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이 유적 안의 유물도 사실 우리 거라고 할 수 없어요. 아닌가요?”
예거는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도 자신이 한 말이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아베티스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 못 하겠는가.
“하지만 이 유물만큼은 저도 어쩔 수 없네요. 가문을 살려야 하니까요. 다 죽을 수는 없잖아요?”
예거는 고개를 숙였다. 사실 유적을 연구하는 건 나중의 일이었다. 아직 어떻게 될지도 모를 상황을 미리
고민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우선 여기서 살아남고, 유물을 잘 챙겨 아베티스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 먼저였다.
그게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하아.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유물이 이렇게 많은데 이걸 다 어떻게 가져가죠?”
유물을 가져가는 것도 문제였지만 유적 앞에 진치고 있는 기간트들을 헤치고 무사히 돌아가는 건 더 큰 문제였다.
아무리 고민해도 방법이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기다려.”
제론의 말에 루이네가 반사적으로 다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유적
안쪽으로 걸어갔다.
루이네와 예거는 서둘러 제론을 따라갔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예거가 소리쳤다. 제론은 에스타스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이 기간트를 타려고 그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게 어떤 기간트인데 그걸 제론에게 넘긴단 말인가.
제론이 슬쩍 고개를 돌려 예거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어찌나 무심했는지 예거는 흠칫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밖에서 기다리는 것들, 네가 치울 건가?”
“그, 그게 무슨……!”
예거가 당황하다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럼 설마 지금 밖에 있는 자들과 싸우려는 겁니까?”
제론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모합니다! 아무리 4 기가 부서졌다고 하지만 무려 26 기나 되는 기간트를 어찌 상대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고작 4 명입니다!”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싸우는 건 나 혼자다. 넌 그냥 구경이나 하고 있어.”
“그 무슨……!”
“대충 실력은 파악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제론이 기다린 것은 적의 실력을 대충이나마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라이더라도 상대해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만일 그런 라이더가 떼로 모인 기사단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일례로 얼마 전 싸웠던 소드 마스터 슐린 후작 같은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이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확인했고, 만족했다.
“실력이 딱 너 정도야.”
예거가 발끈했다. 하지만 대꾸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밖에 있는 기간트 하나하나가 쉬운 상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반감이 생겼다.
“나 정도 실력이 되는 사람이 26 명이나 있습니다. 그걸 정말로 혼자서 상대하겠단 말입니까? 아가씨! 아가씨도
좀…….”
예거는 루이네에게 좀 말려 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루이네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아, 아가씨?”
루이네는 언제 고민했었냐는 듯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두 손을 맞잡았다.
“그, 그럼 제가 정말로 붉은 학살자의 실력을 볼 수 있는 건가요?”
예거는 멍한 눈으로 루이네를 바라봤다. 그리고 퍼뜩 뭔가를 깨닫고는 고개를 돌려 제론을 바라봤다.
“부, 붉은 학살자?”
예거의 머리가 놀라운 속도로 팽팽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제론이라는 이름이…….”
제론의 성을 들은 사람이 루이네뿐이라서 그렇지, 만일 풀네임을 들었다면 예거도 당장 붉은 학살자를 떠올렸을
것이다.
“저, 정말 붉은 학살자입니까?”
붉은 학살자는 헥서 왕국에서 기간트를 타는 라이더라면 누구나 만나기를 꿈꾸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예거를
비롯한 기사들의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그리고 제론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론은 그들에게 답을 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실력으로 보여 주게 될 테니까.
예거는 제론이 에스타스에게 다가가자 기대감 어린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자그마치 붉은 학살자가 싸우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붉은 학살자는 혼자서 적진을 휩쓸고 다녔다던 전설적인 라이더였다. 그런 라이더가 기간트를 몰고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예거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고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피식 웃고는 훌쩍 뛰어 에스타스의 조종석에 바로 앉았다. 대단한 몸놀림이었다.
“역시!”
루이네와 예거는 동시에 외쳤다. 역시 붉은 학살자였다. 기간트에 탑승하는 모습부터 달랐다. 저렇게 멋지게
조종석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키이이이이잉!
에스타스가 기동을 시작했다. 눈이 빛났고 가슴의 마나 코어가 돌아가면서 온몸에 마나를 공급했다.
쿠웅!
에스타스가 한 발 걸었다. 제론은 그 한 번의 움직임으로 에스타스를 완벽히 자신의 감각 아래 두었다. 확실히
실바보다 훨씬 뛰어난 기체였다.
물론 세나가 새로 만들어 준 실바보다는 못했지만 말이다.
쿵! 쿵! 쿵!
에스타스가 천천히 걸어갔다. 루이네와 예거의 시선을 뒤로한 채.
그라우를 비롯한 기사들은 기간트를 돌려보내고 입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쉬고 있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입구를 지키는 것이다.
“음?”
그라우가 벌떡 일어났다. 뭔가 미세한 진동을 느낀 것 같았다. 이건 아주 익숙한 진동이었다.
“기간트?”
그로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또 진동이 왔다.
쿵! 쿵! 쿵!
규칙적인 진동과 함께 작은 발 구름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확인할 것도 없이 기간트가 걷는 소리였다.
“기간트가 온다! 준비해!”
그라우의 명령에 기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간트를 소환했다. 26 기의 몰레스가 일제히 나타났다.
그들은 긴장한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그라우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가 주위를
둘러봤다. 소리와 진동은 느껴지는데 대체 어디서 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쿵! 쿵! 쿵!
소리와 진동이 점점 커졌다. 그라우는 이제야 기간트가 어디서 오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유적
입구로 향했다.
쿠웅!
유적 입구에서 에스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스타스!”
그라우가 외쳤다. 이 유적에 있던 기간트가 분명했다. 발굴형 기간트인 에스타스의 출력은 무려 3.0 이었다.
게다가 각종 부품이나 관절의 움직임 등, 전투에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잘 갖춰져 있었다.
에스타스를 일반 기간트로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렇게 수가 차이 나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뭐야? 고작 하나? 그걸로 감히 우리와 싸우겠다고?”
그라우는 에스타스에 탄 라이더가 예거라고 생각했다. 루이네를 지키는 기사 중 가장 충직한 자가 바로 예거였다.
또한 강하기도 했다.
기간트 실력은 대단치 않지만 그렇다고 어설프지도 않았다. 딱 적당한 수준이었다. 그라우가 거느린 기사단의
말단 기사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런 실력을 가진 예거가 아무리 에스타스를 탔다고 해도 26 기나 되는 몰레스를 상대로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몰레스의 출력도 무려 1.8 이나 된다. 몰레스 3 기가 덤비면 에스타스라 하더라도 쉽게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한데 여기는 3 기가 아니라 26 기나 있다.
이건 싸우나 마나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 적어도 그라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상대가 에스타스건 히엠스건 상관없다! 우리는 수가 많아! 뭣들 하나! 어서 가서 부숴 버려!”
유적의 유물 중 하나인 에스타스가 부서지는 건 상당히 아까웠지만 그래도 기사단이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몰레스도 결코 값싼 기간트가 아니었다.
쿵쿵쿵쿵쿵!
26 기의 몰레스가 진형을 만들며 빠르게 이동했다. 서서히 포위망을 만들며 에스타스가 움직일 길목을 하나씩
가로막았다.
제론은 에스타스에 탑승한 채로 주위를 둘러봤다. 몰레스의 움직임을 보면 집단전 훈련을 상당히 많이 한
자들이었다. 강력한 기간트 하나를 상대로 싸워 본 경험이 많은 듯했다.
물론 제론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감과 투지가 활활 타올랐다.
이번에는 에스타스의 강력한 출력을 확실히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출력 차가 무려 1.2 나 난다. 에스타스는
굉장한 힘으로 몰레스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에스타스가 움직였다. 옆으로 한 발 이동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앞으로 뛰어나갔다.
꽈앙!
에스타스가 허공에 붕 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나면 잠깐 동안 판단력을 상실한다.
물론 찰나의 순간이기에 그걸 이용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기간트에 탄 제론은 그런 걸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꽈과광!
가장 앞에 있던 몰레스 3 기가 바닥을 뒹굴었다. 에스타스는 가볍게 착지해 균형을 잡으며 옆에 있던 몰레스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꽈득!
몰레스가 당황하며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에스타스의 악력은 그 정도로 해결할 수 없었다.
에스타스는 몰레스가 좌우로 몸을 흔들자, 그 힘을 이용해 몰레스를 휙 들어 돌렸다.
콰우우!
꽈아아아앙!
옆에서 달려들던 몰레스와 에스타스가 휘두른 몰레스가 충돌했다. 어찌나 오지게 부딪쳤는지 두 기체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건 기본이었고, 조종석도 완전히 뭉개져 버렸다.
몰레스의 목을 손에서 놓은 에스타스가 옆으로 두 걸음 빠르게 이동했다.
쿵쿵! 후웅!
에스타스가 있던 곳을 몰레스의 검이 훑고 지나갔다.
그 순간 에스타스의 검이 쭉 뽑히며 몰레스의 목을 쳤다.
철컹!
몰레스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그 일격으로 몰레스가 기동을 멈췄다.
일단 검을 뽑은 에스타스는 무시무시했다.
몰레스 2 기가 에스타스를 향해 각각 다른 방향에서 검을 휘둘렀다.
에스타스는 그것을 보며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철컹! 철컹!
몰레스의 검이 잘려 버렸다. 에스타스의 높은 출력과 제론이 가진 소드 마스터의 능력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만들어 낸 결과였다.
에스타스가 다시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꽝! 꽝!
몰레스 두 기의 머리가 완전히 으깨져 날아갔다. 당연히 기동은 정지되었다.
다들 에스타스의 강력한 힘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이런 상대와 싸우려면 힘을 흘리거나 이용해야 하는데, 그
정도 기량을 가진 라이더가 아무도 없었다.
에스타스는 그 뒤로도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었다. 달려들어 발로 가슴을 차고 검으로 머리를 찍어 반으로 갈라
버리거나, 엄청난 힘으로 상대를 밀어붙여 벽에 붙여 놓고는 정확히 조종석을 꿰뚫어 버렸다.
그라우는 멍하니 에스타스와 수하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너무나 압도적이라 오히려 후련했다. 물론 그건 잠시였고,
결국 두려움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꽝! 꽝! 꽝!
기간트가 부서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때마다 처참한 몰골이 된 몰레스가 바닥에 푹푹 쓰러졌다.
결국 26 기의 몰레스가 다 쓰러졌다. 에스타스는 몸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실바로 싸웠어도 이겼을 텐데
몰레스를 썼으니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에스타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라우를 향해 걸어갔다.
쿵! 쿵! 쿵!
그라우는 에스타스의 발이 바닥을 울릴 때마다 심장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에스타스가 손을 뻗어 그라우를 가볍게 쥐었다. 그라우는 옴짝달싹 못하고 에스타스의 손아귀에 잡혀 발버둥 쳤다.
“이거 놔라!”
그라우의 외침에도 에스타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들은 슈린
공작가의 배후에 있던 놈들과 한패였다. 당연히 응징이 필요했다.
에스타스가 옆에 쓰러진 몰레스로 다가갔다. 그리고 발끝으로 조종석이 있는 곳을 강하게 내질렀다.
쩡!
그 일격에 라이더가 즉사했다.
에스타스는 그 뒤로도 몰레스를 하나하나 찾아가 발로 조종석을 차서 라이더를 죽였다.
쩡! 쩡! 쩡! 쩡!
그라우는 그 광경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이렇게 단호히 손을 써서 라이더를 죽일
줄은 몰랐다.
에스타스가 마지막으로 자기 주먹만 한 바위를 들었다. 그리고 한쪽을 향해 강하게 던졌다.
콰우우우우!
꽈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바위가 널려 있던 곳이 완전히 박살 났다. 수많은 바위가 부서졌고, 또 바닥이 움푹움푹
파였다.
그라우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곳은 기간트를 잃어버린 기사들이 숨어 있던 곳이었다. 한데 바위 하나에
몽땅 죽어 버렸다.
이제 남은 건 그라우 하나였다.
에스타스는 그라우를 손에 쥔 채 느릿느릿 돌아다니며 바닥에 널브러진 몰레스를 주웠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하나
유적 안으로 날랐다.
아무리 부서진 기간트였지만 이런 걸 쉽게 버릴 이유가 없었다. 세나에게 가져가면 완전히 새것처럼 고쳐줄
테니까 말이다.
잠시 후, 유적 앞 공터가 깨끗해졌다. 기간트의 잔해도 없었고, 싸움의 흔적도 모두 사라졌다. 에스타스가
돌아다니며 한 일이었다.

유적 가장 깊은 곳에 몰레스의 잔해가 쌓였다. 그리고 유적 입구에는 온몸이 꽁꽁 묶인 그라우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몸이 묶여 제대로 자세도 잡지 못했다.
“저 사람은 왜 잡아 온 건가요?”
루이네가 물었다.
제론은 루이네 옆에서 충격을 받은 얼굴로 멍하니 자신만 바라보는 예거를 향해 피식 웃어 주고는 대답했다.
“혹시 아는 게 있을지 몰라서.”
“아는 거라뇨?”
“이 정도 유적을 발굴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예? 그, 글쎄요. 그야…….”
루이네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런 건 하나도 조사하거나 준비하지 않았다. 그저 무작정 유적을 찾아서
발굴하겠다는 마음 하나만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
이 무슨 대책 없는 멍청한 짓이란 말인가.
“마법사도 있어야 하고, 발굴 장비도 있어야 돼. 그리고 전문가가 필요하지.”
루이네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그리고 많은 인력이 필요하겠군요!”
“그렇지.”
“그럼…….”
“그래. 저놈들 뒤를 쫓아오던 후속 부대가 분명히 있어. 그 정보를 좀 캐 봐.”
“예? 제, 제가요?”
“그래. 난 좀 쉬었다가 할 일이 있어. 그러니 확실히 정보를 알아내.”
제론은 그 말을 뒤로하고 유적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야 제대로 시간이 생겼다. 진짜 유적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원래는 훨씬 일찍 끝냈어야 할 일인데, 계속 일이 생겨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별로 급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슬슬 궁금증을 풀 때가 되었다. 과연 이 깊은 산맥에 있는 유적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말이다.
루이네와 예거를 비롯한 두 호위 기사는 그라우로부터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제론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유적 깊은 곳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자신이 초고대유적으로 가는 모습을 저들에게
보여선 안 된다. 그건 자신만의 비밀이어야만 했다.
Chapter 10 하이쓰 산맥의 유적

제론은 익숙한 광경에 미소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유적의 로비는 이제 너무 익숙해서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대부분 같은 디자인에 비슷한 규모였고, 또 시설도 대동소이했다.
“자, 일단 여긴 몇 층짜리인지부터 확인해 볼까?”
제론은 곧장 가장 아래층에 있는 통제실로 향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이 유적은 무려 29 층짜리였다.
“대체 뭘 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깊은 거지?”
제론은 통제실을 태블릿에 연결한 다음 곧장 각층을 살폈다. 통제실 위는 생활공간이자 수련공간인 것은 다른
유적과 같았다.
하지만 그 위는 완전히 달랐다. 27 개 층이 몽땅 뭔가 특별한 입체 마법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각층의
마법진은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작동했다.
제론은 27 개 층을 꽉 채울 정도로 대규모 마법진으로 과연 무엇을 하는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이건 큰 태블릿이잖아?”
기능은 태블릿과 똑같았다. 다만 크기가 다를 뿐이었다. 크기가 다르니 당연히 성능도 달랐다.
제론은 일단 태블릿에 등록을 했다. 제론이 가진 태블릿으로 이 마법진을 이용할 수 있었다.
대체 이런 거대한 마법진을 어디에 쓸까 고민했는데, 그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태블릿에 바로 쓰임새 몇 가지가 나왔다.
이 마법진을 이용해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어려운 마법을 분석하거나 구성하는 것이 가능했다.
아무리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도 몇 년이 걸려야 간신히 한 번 계산할 수 있을까 말까 한 마법을 고작 몇
분 만에 분석하고 재조립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아티팩트였다.
“그나저나 마티는 없네?”
마티가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하지만 태블릿을 통해 유적의 아티팩트를 더 살펴보던 제론은 이곳에 왜
마티가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것도 가능한 거야?”
제론은 망설임 없이 유적 1 층에 있는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그것은 유적의 모든 마법진과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아티팩트였다.
후우웅!
가벼운 마나의 바람이 불었다. 아티팩트가 제대로 작동했다는 뜻이었다. 아티팩트를 유적 밖으로 공간을 열고
날려 보낸 것이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아티팩트의 위치를 확인했다. 아티팩트는 순식간에 구름보다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제자리에 멈췄다.
제론은 능숙하게 태블릿을 조작해 아티팩트의 시야를 공유했다. 그러자 지상의 모습이 쫙 펼쳐졌다. 태블릿을
간단히 조작하는 것만으로 지상의 모습을 크게 확대해서 확인하는 것도 가능했다.
마티보다야 못하지만 엄청난 아티팩트였다. 유적을 중심으로 상당히 넓은 공간을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제론은 산맥을 한 번 쭉 훑었다. 일단의 무리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라우의 뒤를 쫓아 움직이는 후속 지원
부대였다.
“한 300 명은 되겠는데?”
이 아티팩트의 단점은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점에서 마티보다 상당히 불편했다. 하지만 이
아티팩트가 갖는 장점이 분명히 있었다.
“저 정도 속도로 이동하면 대충 이틀이 걸린다 이거지?”
유적의 거대 아티팩트와 연계되어 있기에 이런 식으로 원하는 계산을 단번에 해 버린다. 이동 속도도 측정이
가능했고, 그걸 토대로 언제 여기 도착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한 복잡한 계산도 가능했다. 만일 이 아티팩트를 국소 날씨 조절 아티팩트와
함께 사용하면 재미있는 일을 할 수도 있었다.
제론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감돌았다.

☆ ☆ ☆

나베 공작가에서 보낸 유적탐사대는 하이쓰 산맥을 거침없이 행군했다. 기간트를 무려 10 기나 보유하고 있기에


어떤 몬스터도 두렵지 않았다.
또한 인원이 인원인지라 웬만한 몬스터나 맹수는 아예 다가올 생각도 못했다.
유적탐사대의 책임자인 크릭은 속도를 조금씩 높였다. 아무래도 빨리 유적을 보고 싶었다. 이번 탐사와 발굴을
제대로 해내면 자신의 입지가 어떻게 변할지 알기에 기대가 컸다.
“음?”
크릭은 갑자기 주위가 어둑어둑해져서 하늘을 바라봤다. 시커먼 먹구름이 보였다.
“젠장, 낭패로군.”
우르르릉!
천둥까지 쳤다. 그리고 바로 비가 쏟아졌다.
쏴아아아!
“일단 비를 피할 곳부터 찾아라! 조금 쉬었다가 간다!”
300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한꺼번에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산에 있을 리 없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각자
알아서 비를 피했다.
쏴아아아!
비가 점점 더 많이 내렸다.
크릭은 걱정스런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한데 계속 하늘을 살피던 크릭은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응? 구름이 왜 여기만 있는 거지?”
먹구름이 잔뜩 끼긴 했는데, 왠지 머리 위에만 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거리를 가늠해 보니 오히려 빨리
이동하면 비가 내리지 않는 곳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다 보니 이런 경우도 다 있군.”
크릭은 주위로 명령을 전달했다. 빠르게 비가 오는 지역을 벗어나라는 지시였다. 물론 목적지 방향으로 가야만
했다.
다만 지금까지처럼 제대로 줄줄이 늘어서서 이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각자 최대한 빨리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크릭이었다. 일단 방향을 잡아 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크릭이 빠르게 산을 타고
이동했다. 그러자 그 뒤를 기사들이 따랐다.
크릭과 기사가 가장 강한 전력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우르르 뒤를 따라 달렸다.
사실 크릭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조금만 더 이동하면 비가 내리는 지역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건 몇 시간을 이동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래 이동했는데도 비가 내리는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괜히 비를 맞으며 이동하는 바람에 체온이 떨어져 다들 덜덜 떨기만 했다. 결국 크릭은 이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쏴아아아아!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마치 세상 모든 걸 다 씻어 내겠다는 듯이.
크릭은 이왕 젖은 김에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비를 피하기 좋은 크고 깊은 동굴이었다. 300 명이나 되는 인원을
다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랬다.
다들 우르르 동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둘러 불을 피웠다. 일단 젖은 몸부터 말려야 했다. 그래야 몸이 많이
상하지 않는다.
여기저기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그래도 비가 오는 와중에 미리 준비한 마른 장작이 젖지 않도록 지켰기에 불을
잔뜩 피울 수 있었다.
타오르는 모닥불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그리고 일부는 부산스럽게 식사를 준비했다. 일단 비가 오는 동안
먹고 자면서 푹 쉬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들 식사까지 끝나고 마무리를 하자,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그동안의 강행군으로 쌓인 피로를 한시라도 빨리
풀고 싶었다.
그렇게 하나둘 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릭은 잠이 오지 않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자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비가 오는 범위가 상당히 좁았다. 그래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한데 아무리 이동해도 거기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마치 먹구름이 자신을 쫓아오는 것 같았다. 당연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상했다.
“젠장. 비가 그칠 생각을 않는군.”
쏴아아아아아!
비는 오히려 더 많이 내리는 것 같았다. 크릭은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 산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만일 산사태라도 일어나면 완전히 끝장이었다.
“설마…….”
그런 일이 그리 쉽게 일어날 리 없었다. 더구나 산사태가 꼭 이 동굴을 덮칠 확률도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슬며시 차오르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아무리 산사태가 일어나 동굴이 막힌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빠져나가는 게 가능했다.
탐사대에는 기간트가 있었다. 그것도 무려 10 기나. 사실 어떤 상황이 와도 상관없었다.
쏴아아아아아!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크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비가 그쳤다. 크릭이 걱정했던 것처럼 산사태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비가 워낙 오랫동안 내려서 길이


엉망이었다.
“다들 조심해라!”
바닥이 젖어 있어서 발을 디딜 때마다 미끄럽기 그지없었다. 조심해서 걷지 않으면 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갈
판이었다.
당연히 속도가 날 리 없었다. 또한 땅이 굳었을 때에 비해 몇 배나 더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서둘러야만 했다. 비 때문에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크릭은 앞장서서 걸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면 성과가 퇴색된다.
“쯧. 이제는 유적을 정말로 잘 발굴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군. 부디 그라우 경이 유적을 많이 부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라우의 기사단이 아베티스 가문의 기사와 싸우면서 유적이 손상될 확률이 높았다. 양측 모두 기간트를 동원할
것이니 말이다.
유적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싸우면 괜찮겠지만, 가까이서 싸우면 유적 곳곳이 부서질 것이다.
부서진 유적을 조심스럽게 발굴하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크릭은 벌써부터 골치가
지끈거렸다.
“이상한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크릭은 뒤에서 따라오다가 갑자기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 기사를 힐끗 쳐다봤다.
“소리? 무슨 소리 말인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리가 커진다고?”
크릭의 눈이 번득였다. 소리가 점점 커진다는 건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젠 크릭의
귀에도 소리가 들려왔다.
우르르르르르.
크릭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반사적으로 산의 위쪽을 바라봤다.
“헉!”
나무들 틈새로 누런 토사가 달려드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모두 피해!”
“기간트를 소환해!”
크릭과 기사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산사태였다. 어째 비가 오랫동안 온다 싶더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차라리 동굴에 있을 때였다면 안전하게
기다렸다가 빠져나가면 되는데, 이렇게 훤히 드러난 곳에 있으니 피할 길이 막막했다.
꽈르르르르릉!
쏟아지는 토사물이 점점 힘을 얻어 이젠 나무까지 싹 뽑으며 쏟아지고 있었다.
키이이이잉!
기간트가 일제히 소환되었다. 일부는 탑승에 성공했고, 일부는 채 탑승하기 전에 산사태가 일행을 덮쳤다.
꽈르르르르르릉!
대부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토사물에 휩쓸렸다. 산사태가 워낙 광범위하게 일어나서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숨을 곳도 없었다.
그나마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기간트뿐이었다. 탑승에 성공해 움직이는 기간트는 고작 4 기에 불과했다.
나머지 6 기는 토사물과 함께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버텨!”
기간트 하나가 크릭을 낚아채서 손에 들고는 소리쳤다. 나머지 기간트는 그럴 틈도 없었다. 그나마 크릭을 구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가 이번 유적탐사대에 참여한 기사단의 책임자였다. 기사단장은 아니었고, 선임 기사였다.
어쨌든 크릭은 살았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은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토사물에 뒤덮여 아래로 쓸려 내려갔는데,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크릭은 기간트의 손에 잡힌 채 이를 악물고 산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바라봤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산사태라니! 그것도 하필이면 지금.
산사태가 완전히 지나갔다. 물론 토사물은 아직도 아래로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주변을 완전히 초토화시키면서
말이다.
“재앙이 따로 없군.”
재앙이었다. 더구나 크릭 입장에서는 대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막막했다. 대체 이제 뭘 어쩌면 좋단 말인가. 만일
이대로 돌아가면 목숨을 부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천재지변이라지만 실패는 실패였다.
“어떻게 할까요?”
크릭이 멍하니 산사태가 쓸어가 폐허가 된 자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크릭을 구한 기사가 물었다.
“후우우.”
크릭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뭘 어쩌겠는가. 어쨌든 시작을 했으니 끝을 봐야지.
“유적으로 가야지. 일단 우리라도 가 보세. 공작님께는 나중에 연락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먼저 유적 상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세워 보겠네.”
크릭의 말에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산사태에 휩쓸린 기간트를 먼저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릭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
기간트를 다시 아공간으로 돌려보내면 아공간 장비만 남게 된다. 그럼 충분히 다 수거해서 나를 수 있었다. 만일
기간트를 통째로 움직여야 했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포기했을 것이다.
쿵! 쿵! 쿵!
4 기의 기간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함께 온 사람도 없으니 속도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일단 산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 ☆ ☆

제론은 유적의 통제실에 앉아 태블릿을 통해 산사태가 크릭 일행을 휩쓸고 지나가는 장면을 확인하면서 감탄을
거듭했다.
“정말 대단하군.”
하이쓰 산맥의 날씨를 바꾼 건 제론이었다. 국소 날씨 조절 아티팩트를 이용해 크릭 일행이 비를 맞도록 조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산의 땅을 무르게 만들었다. 유적의 아티팩트를 이용해 산사태를 일으킬 방법을 계산했고,
특별한 포인트에 정확히 벼락을 떨어뜨려 지반을 흔들었다.
놀랍게도 산사태의 방향과 시간까지 조절이 가능했다. 또한 이동하는 일행의 속도까지 감안해 정확한 타이밍까지
잡아냈다.
쓰면 쓸수록 유적 아티팩트의 성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국소 날씨 변환 아티팩트의 경우 유적 아티팩트의 계산 능력이 더해지면서 훨씬 정교한 조절이 가능해졌다. 또한
다른 마법과 연계해서 이용하는 것까지 할 수 있었다.
이 유적의 유일한 단점은 마티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그조차 하늘로 쏘아 올린 아티팩트를 통해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했다.
“좋아. 그럼 다 처리했으니 슬슬 나가 볼까?”
유적도 등록했고, 태블릿과 유적 아티팩트도 연결했으니 더 이상 이곳에서의 볼일은 없었다. 제론은 통제실에서
로비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을 때 올라가야 한다. 제론은 천장을 쳐다봤다. 투명한 천장을 통해 유적 내부가 보였다. 쌓인
기간트의 잔해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것도 가져와야 했다.
유적 간 텔레포트를 이용하면 순식간에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세나가 참으로 기뻐하겠군.”
당사자인 세나가 들으면 경기를 일으킬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린 제론은 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올라갔다.
그리고 아공간을 이용해 쌓인 몰레스의 잔해를 유적으로 옮겼다. 아주 간단한 작업이었기에 거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제론은 천천히 유적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가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동안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유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나의 흐름이 완벽하게 보이니, 유물 중 어떤 것이 아트팩트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법 아티팩트는 마나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재미있군.”
제론은 마나의 흐름을 통해 어떤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인지 혹시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아티팩트 하나를 정해서 마나의 흐름을 좀 더 세세히 살폈다.
아주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효능을 파악할 수 없으니 상당한 꼼꼼함이 필요했다.
마나의 흐름이 가닥가닥 분해되었다.
사실 지금 제론이 하는 것은 보통 마법사가 보면 배를 잡고 웃을 일이었다.
마법을 파악하려면 일단 발현시켜야 한다. 그렇게 해야 주변 마나가 움직이고, 처음 세팅한 길대로 마나가
흐르면서 아티팩트가 작동하는 것이다.
한데 제론은 그런 과정 없이 단번에 마법진을 분석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마법 상식에 비추면 완전히 불가능한
짓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었다. 또한 제론이 가진 마법의 기반은 현재도 고대도 아닌, 초고대의
것이었다. 당연히 보통 마법사와는 달랐고, 일반적인 마법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었다.
제론은 분해된 마나를 통해 실제 발현되었을 때의 길을 유추했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어떤 마법이 어느 정도
위력으로 세팅되어 있는지 파악해 냈다.
“기초적인 방어 마법이 자동 발현되도록 세팅이 되어 있군,”
설정된 범위 안에 충격이 들어오면 자동으로 방어 마법이 펼쳐지면서 그 충격을 밀어내도록 만들어진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상당히 복잡한 마법진이었고 규모가 조금 큰 편이었기에 갑옷에 새겨져 있었다. 갑옷 안쪽에 마법진을 새기고 그
위에 얇은 철판을 덧대 교묘히 감췄다.
만일 제론이 아니었다면 이 갑옷에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고대 유물 중에는 이런 식으로 마법진을 애써 감추는 것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나마 이 갑옷은 마법이 자동으로 펼쳐지지만, 그렇지 않고 다른 조건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것이 아티팩트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넘어갈 때도 많았다.
“가만있자…… 이거 생각해 보니까 괜찮은데?”
그 가치를 모르는 유물이나 아티팩트가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 헐값에 사들인 다음 가치를 확인해
다시 팔면 어마어마한 이득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다음 코스가 암시장이었으니 거기서 한번 테스트를 해 봐야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른 아티팩트로 눈을 돌렸다. 조금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날 제론은 유적에 전시된 유물 대부분을 샅샅이 파헤쳤다. 물론 단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 모든 마나의 흐름은
제론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렇게 마나를 파악하면서 제론은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마법의 다음 단계로 반걸음 들어섰다.

☆ ☆ ☆

유적 입구에는 루이네와 예거가 지친 채로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라우를 심문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을 들이니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300 명이나 오고 있다니 조금 걱정이 되는군요.”
“우리에겐 붉은 학살자가 있잖아요.”
루이네는 그 말을 하며 눈빛이 몽롱해졌다. 며칠 전의 싸움은 아직도 그녀의 뇌리에 맺혀 사라지지 않았다.
수시로 눈앞에 그 광경이 떠오르곤 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싸울 수 있을까요?”
“저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점프하는 거 보셨죠?”
“봤습니다. 부럽더군요.”
지난번 싸움 이후로 제론을 보는 예거의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감시를 위해 제론을 쳐다봤지만
이제는 선망이 잔뜩 담겨 있었다.
꼭 그렇게 되고 싶었다. 아마 모든 기간트 라이더가 꿈꾸는 장면일 것이다.
“그래도 에스타스의 압도적인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거였겠죠? 물론 그 힘을 그렇게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 것도
굉장한 능력이지만요.”
루이네의 말에 예거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보기에 에어스트 백작님은 진짜 실력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 싸움은 마치 뭔가를 연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일정 이상의 수준에 오른 라이더였기에 예거는 제론의 의도를 약간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놀랐고,
선망하게 되었다.
만일 저 사람이 진짜 실력을 드러내면 과연 어떤 놀라운 힘을 낼 수 있을 것인가. 그걸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 거지?”
두 사람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셨습니까.”
예거가 벌떡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다. 그리고 제론은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심문은?”
“다 끝났습니다.”
예거는 심문을 통해 알아낸 사실을 자세히 보고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예거와 루이네를 다시 봤다. 상당히
정확히 알아냈다. 제대로 심문했다는 뜻이었다.
물론 시간은 좀 걸렸지만 말이다.
“후발대는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 이제 슬슬 이 유물을 어떻게 나를지 계획해야지.”
제론의 말에 루이네의 표정이 대번에 안 좋아졌다. 대체 이 많은 유물을 어떻게 가져간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었다. 제론이 이렇게 말을 꺼냈다는 건 대비책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아베티스 영지라고 했나?”
“맞아요.”
“대충 위치가 어떻게 되지? 이 하이쓰 산맥에서 좀 먼가?”
루이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네, 상당히 먼 편이에요. 헥서 왕국의 중심부에 위치한 영지니까요.”
헥서 왕국도 그리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하이쓰 산맥에서 그 중심부까지 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더구나
이런 막대한 양의 유물까지 가지고 가려면 몇 배가 더 걸릴지 몰랐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제론의 말에 루이네와 예거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제론이 대비책을 가져온 것이다.
“내가 알아서 그 영지로 옮겨 준다.”
“예?”
루이네가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답이었다.
“책임도 내가 지지. 의뢰비만 확실히 지불하면 모든 걸 내가 알아서 해 준다는 뜻이다.”
“그, 그럼…….”
제론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계약서였다. 루이네와 예거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대체 언제 이런
것까지 준비했단 말인가.
“나도 신용은 확실한 사람이니 계약에는 문제가 없겠지? 손실분이 있으면 확실히 청구하도록.”
제론이 그렇게 말하며 계약서를 내밀었다. 루이네와 예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확인했다. 아주
간단한 계약이었고, 조건도 단순했다. 또한 의뢰비도 하는 일에 비하면 턱없이 적었다.
“정말 고작 이걸로 되겠어요?”
“고작이라니. 무려 에스타스인데.”
제론이 책정한 의뢰비는 제론이 받아들여 사용한 에스타스였다. 만일 여기 있는 모든 유물을 손실 없이 나를 수
있다면 그 정도 의뢰비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안 할 건가?”
“해, 해요! 하겠어요!”
루이네는 그렇게 외치고는 역시 제론이 내민 펜을 받아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계약이 성립되었다.
“목록은 작성했지?”
“예. 여기 있습니다.”
예거가 미리 작성해 둔 유물 목록을 내밀었다. 제론은 그것을 스윽 훑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야 한
번 읽기만 해도 외울 수 있었다.
그 다음 목록과 실제 유물을 맞춰 봐야 했다. 어쨌든 이건 계약을 통해 하는 일이었으니 확실한 게 좋았다.
확인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목록은 정확했다.
“자, 그럼 이제 돌아가는 일만 남았군.”
“예? 돌아가다니요? 이 유물은 어떻게 하고요?”
제론이 피식 웃었다.
“지금 들고 가자고? 유적 발굴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또 산맥에 있는 유물을 가지고 내려가는데 아무 준비도
없이 가능할 것 같아?”
루이네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 말이 옳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지금 당장 가지고 가지 않으면 자칫
영지가 넘어갈 수도 있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걱정할 거 없어. 나중에 정 시간이 안 되면 내가 돈을 융통해 주지.”
그 말에 루이네는 적잖게 안심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돈이 필요했다. 유적 발굴을 위해 쓴 돈이 상상을
초월했다.
이 유물만 제대로 옮기면 그 정도 돈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당장은 목에 닿아 있는 칼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한데 제론이 돈을 융통해 준다면 급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인가요?”
“물론. 내가 생각보다 부자거든.”
제론은 손뼉을 짝짝 쳤다.
“자, 그럼 이제 가 보자고. 다른 놈들이 유적에 눈독을 들이기 전에 빨리 준비해야지.”
제론의 말에 루이네와 예거가 서둘러 떠날 준비를 했다. 딱히 할 건 없었다. 그저 마음가짐을 달리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아! 그라우는 어떻게 하죠?”
루이네의 물음에 제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죽이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제론의 시선이
예거에게로 향했다. 예거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루이네 모르게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아베티스
가문의 일이었다. 그라우가 죽건 말건 제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혹시 영지 근처에 유적이 있나?”
“예? 유적이요? 그, 글쎄요…….”
루이네가 머뭇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자 예거가 나서서 얼른 대답했다.
“우리 영지에는 없지만 이웃 영지에 작은 유적이 하나 있습니다.”
그 영지는 규모가 너무 작아서 다른 유적에 비해 발굴 후의 소득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래서 당시
시끌시끌했었다. 유적을 발굴하느라 쓴 돈을 갚느라 영주의 허리가 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예거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상당히 인상 깊은 경험이었다.
“그래? 그거 잘됐군.”
“별로 볼 건 없습니다. 유물도 별로 없던 유적입니다.”
“괜찮아. 내가 보고 싶은 건 유물이 아니라 유적이거든.”
“유적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아주 많지. 대륙의 모든 유적에 방문하는 것이 내 꿈이야.”
루이네와 예거는 그런 말을 하는 제론을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소박하다면 소박하고, 또 힘들다면 힘든 꿈이었다.
하지만 왠지 제론에게 어울리지 않는 꿈 아닌가.
‘붉은 학살자의 꿈이 유적 여행이라니…….’
왠지 대륙 정복을 해야 어울릴 것 같은데 유적 정복이라니 이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러니 이렇게 하이쓰
산맥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나한테는 다행인 건가?’
루이네는 실망감과 안도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루이네와 예거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제론이 유적을 모두 정복하면 대륙 정복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8 권에서 계속>

8권
Chapter 1 아베티스 영지

하이쓰 산맥을 내려가는 여정은 상당히 빨랐다. 함께 이동하는 인원이 적으니 당연했다. 루이네를 예거가 등에
업고 이동해서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산맥에 서식하는 그 어떤 몬스터도 그들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제론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 사방으로
퍼트린 강력한 마나에 접한 몬스터는 다들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다.
워낙 넓은 범위에 마나를 깔아 놨기에 그들은 몬스터를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하이쓰 산맥에서 중간에 제론을 만나 유적까지 가는 건 너무 힘들고 고되어서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신기했다. 어떻게 하이쓰 산맥에서 몬스터를 단 한 마리도 만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식이면 오늘 중으로 산맥을 벗어날 수 있겠네요.”
루이네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예거의 등에 업혀 가기만 하면 되니 크게 힘들지도 않았다. 이대로라면 산맥을
벗어나도 쌩쌩할 것 같았다.
“산맥을 벗어나 봐야 마을도 없잖아. 어차피 똑같아. 거기라고 몬스터가 안 나타날 것 같아?”
제론의 말에 루이네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 말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면박을 줄 건 또
뭐란 말인가. 루이네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산맥을 벗어났다. 아침 일찍 유적에서 출발해서 해가 지기 전에 산에서 완전히 내려와 노숙이
가능한 곳에 도착했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아침 일찍 다시 출발하지. 영지가 여기서 먼가?”
루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멀었어요.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게 빨라요.”
“당연히 그게 빠르겠지. 내일 중으로 아베티스 영지에 도착하는 걸로 정하자고.”
제론의 말에 루이네와 예거가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두 호위 기사도 입을 쩍 벌렸다. 그런 무지막지한
일정을 어떻게 소화한단 말인가. 여기서 가장 가까운 영지로 가려 해도 며칠이 걸릴 것이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는 영지까지 가려면 더 오래 걸린다. 한데 대체 무슨 수로 하루 만에 아베티스 영지에
도착한단 말인가.
제론은 네 사람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한 채, 노숙 준비를 했다. 일단 준비를 시작하자, 두 호위 기사와 예거가
서둘러 제론을 도왔다.
순식간에 잠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모닥불이 타올랐다. 모닥불 위에서 커다란 솥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제론이 만든 특제 스프였다.
루이네를 비롯한 네 사람은 걸신들린 듯 스프를 먹어 치웠다. 이렇게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은 유적탐사를 위해
길을 떠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전혀 먹지 못했다.
그러니 얼마나 맛있겠는가. 제론이 스프를 넉넉히 끓였기 때문에 그들은 끝도 없이 스프를 먹고 또 먹었다.
제론은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 스프 한 그릇을 비운 후, 조용히 마나 호흡법을 수련하며 명상에 잠겼다.
이번 유적을 얻으며 소드 마스터 아르뭄과 싸운 건 제론에게 큰 행운이었다.
소드 마스터는 검술의 끝이 아니었다. 진짜 검술의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그걸 알기에, 또 그 위로 오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제론은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르뭄과의 대결은 제론에게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탄탄한 발판을 제공했다. 이제 그 발판을 제대로 딛고
오르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제론이 명상을 하는 사이 나머지 일행이 스프를 모두 먹고 뒤처리까지 깨끗이 마무리했다. 이제 잘 시간이 되었다.
예거가 대표로 제론에게 다가갔다.
“불침번은 어떻게 할까요?”
고작 5 명밖에 안 되는 일행이었다. 게다가 하나는 여자다. 즉, 4 명이 번갈아 불침번을 서야 한다. 그 시간을
아무렇게나 정할 수는 없었다.
예거를 비롯한 두 호위 기사는 제론에게 모든 선택권을 맡겼다. 제론이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이었다. 설사 제론이
자신은 안 할 테니 알아서 하라고 해도 수긍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제론의 대답은 그들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불침번은 필요 없다.”
“예? 하지만 이곳은 아직 위험합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자라. 내일 어떤 강행군이 기다리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예상이 된다면 내
말에 토를 달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텐데?”
“아, 알겠습니다.”
예거는 진저리를 치며 물러났다. 상상만으로도 토할 것 같았다. 유적을 찾아갈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떠올랐다.
하지만 내일은 그보다 몇 배는 더 힘들 것이다.
‘게다가 난 아가씨까지 업고 가야 하니…….’
벌써부터 걱정이 시작되었다. 아마 내일은 거의 죽음을 눈앞에서 마주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예거의 말을 전해 들은 나머지 일행은 군소리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잡담을 할 시간도 아까웠다. 얼른 자고
빨리 쉬어서 체력을 만들어야만 했다.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네 사람은 채 어둠이 찾아오기도 전에 잠들어 버렸다.
제론은 바위에 걸터앉은 채로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샤아아아.
손가락 끝에서 작은 마법진 하나가 떠올랐다. 그 마법진은 은은한 빛을 뿌리다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렇게
부서진 은빛 가루가 주변에 스며들었다.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알람 마법이었다.
순간 바닥이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이 커다란 동심원을 그리며 넓게 퍼져 나갔다.
제론은 빛의 동심원이 얼마나 넓게 퍼지는지 확인했다. 아마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어디까지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빛의 원이 어디까지 갔는지 정확히 파악했다. 사실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마법을 구성할 때,
거기까지 다 계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알람 마법의 범위는 반경 1 킬로미터에 달한다. 1 킬로미터 안으로 뭔가가 들어오면 알려 주는 방식이었다.
물론 아무거나 다 알려 주는 건 아니었다. 제론은 딱 오우거에 한정했다.
오우거가 들어오면 제론이 잠에서 깰 정도의 소음이 울린다. 아마 다른 사람은 소리가 들렸는지도 모르고 잘
것이다.
이곳에서 제론이 조심해야 할 몬스터는 오우거가 유일했다. 물론 혼자였다면 이런 알람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루이네 일행을 지키려면 이 정도 조치는 해 줘야 안심할 수 있었다.
알람 마법을 설치한 제론은 바위 위에 누웠다. 잠을 오래 잘 필요도 없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 잠깐만
눈을 붙여도 몸의 피로가 싹 사라졌다.
제론의 몸은 항상 마나가 흐른다. 외부의 마나가 몸에 자유롭게 들락거린다. 마치 마나의 통로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몸의 피로를 날려 버리고 활력을 불어 넣는 역할을 했다.
“한 시간만 잘까?”
제론은 말과 동시에 눈을 감았고 바로 잠들었다. 이 역시 자신의 몸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소드 마스터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론은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점점 밤이 깊어 갔다.

☆ ☆ ☆

4 기의 기간트가 밤의 적막을 깨뜨리며 걷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그중 하나의 손에 크릭이 있었다. 크릭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결국 산사태에 휩쓸려
떠내려간 기간트조차 찾지 못했다.
산사태가 너무 심했고, 기간트들이 몽땅 토사물에 깊이 파묻혀서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잡지 못했다. 토사물을
몽땅 걷어 낼 수는 없지 않은가.
일단 지금은 유적에 먼저 가 봐야만 했다.
“오늘은 이만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기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크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보게. 잠깐 눈을 붙이도록 하지.”
오늘, 내일만 고생하면 유적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빛기둥이 올라왔던 곳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충 거리를 가늠해 보면 내일 밤에는 도착이 가능했다.
“크르르르르.”
막 잠자리를 준비하려는 순간 어딘가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릭의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다들 전투 준비! 오우거다.”
오우거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이곳 하이쓰 산맥에서는 말이다. 이곳의 오우거는 무리를 지어
다닌다. 아무리 기간트에 타고 있어도 무리 지은 오우거를 상대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의 오우거는 다른 곳에 사는 오우거보다 조금 더 흉포하고 강했다.
기간트 한 기가 크릭을 가볍게 쥐고 한가운데에 섰다. 그리고 나머지 세 기간트가 주위를 둘러쌌다.
“크르르르르.”
오우거 한 마리가 으르렁대며 나타났다. 그것을 본 크릭은 안심했다. 고작 한 마리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이어 나타난 오우거를 보며 안색이 변했다. 사방에서 십여 마리의 오우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완전히 포위당했다.
“젠장.”
절로 욕이 나왔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방을 둘러싼 오우거들 사이로 다른 오우거가 나타나 자리를
채웠다. 무려 삼십 마리가 넘었다.
크릭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오우거 하나가 손에 든 뭔가를 휙 던졌다.
퍽!
기간트 하나의 가슴에 그것이 부딪쳤다. 놀랍게도 그건 사람이었다.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인해 완전히 피떡이
되어 버렸다.
크릭은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몸은 부서졌는데 얼굴은 멀쩡했다. 우연이었지만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우연이었다.
“그라우?”
그 얼굴의 주인은 그라우였다. 지금쯤 유적에 있어야 할 그라우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설마 오우거가……!”
대체 오우거가 얼마나 많이 나왔기에 30 기에 달하는 기간트 부대가 전멸한단 말인가. 크릭은 믿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삼십여 마리의 오우거가 일제히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앙!”
“크워어어어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오우거의 날랜 몸놀림은 고작 4 기의 기간트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이쓰 산맥은 정말로 무서운 곳이었다.
연이어 철판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오우거의 괴성이 뒤섞였다. 일부는 상처 입거나 죽으며 내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흉성을 드러내며 상대를 공포에 질리게 하는 울부짖음이었다.
그렇게 4 기의 기간트가 서서히 무너져 갔다.

☆ ☆ ☆
제론은 잠깐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 태블릿을 통해 하이쓰 산맥의 상황을 확인했다.
유적의 아티팩트를 통해 저장된 영상을 확인한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유적탐사대가 모두 무너진 것을 확인했다.
이제 남은 건 유물을 챙겨 오는 것뿐이었다.
제론은 하늘을 보고 시간을 가늠했다. 그리고 잠든 일행을 확인했다.
고민이 됐다. 지금 유적으로 가서 유물을 아공간에 담아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솔직히 얼마 안
걸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그동안 이들을 위험에 노출시킨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몇 가지 방비를 해 놓고 가면 되나?”
제론은 유적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가늠해 봤다. 솔직히 푸르투나의 힘을 이용해 날아오면
거의 순식간이었다.
그게 아니라 소드 마스터의 능력만 발휘해도 금방 다녀올 수 있었다. 더구나 유적까지 가는 건 순간 이동으로 갈
수 있었다.
오는 시간만 계산하면 된다. 반경 1 킬로미터 안에는 오우거가 없으니 위협이 될 것도 사실 없었다.
“좋아. 다녀오자.”
제론은 그렇게 결심하고는 심장의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샤아아아아!
허공에 수많은 마법진이 떠올라 빛났다.
마법진이 부서지며 만들어진 빛가루가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때마다 빛의 동심원이 퍼져 나갔다.
제론은 알람 마법을 좀 더 강화했다. 예거를 단숨에 깨울 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고, 보호 마법을 추가했다. 만일
오우거가 달려들더라도 한 번은 확실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몇 개의 트랩을 깔았다. 아무리 오우거라도 걸리면 곤란할 만한 트랩이었다. 시간을 좀 더 들였다면 훨씬
그럴듯하고 강력하게 만들 수 있었겠지만, 일행이 깨기 전에 다녀오려면 시간이 많지 않았다.
제론은 마법을 통해 조치를 취하자마자 순간 이동을 통해 유적에 도착했다. 이젠 유적 간 공간 이동을 이용하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제론은 일단 아공간에 모든 유물을 차곡차곡 담았다. 잘 정리해서 넣지 않으면 나중에 복잡해질 수도 있기에
처음부터 정리를 잘해 두었다.
모든 유물을 아공간에 수납한 제론은 서둘러 유적에서 나왔다.
“푸르투나.”
휘류류류룽!
거대한 바람이 일어나 제론을 허공으로 붕 띄웠다. 이곳은 아무런 인적이 없는 하이쓰 산맥이었다. 게다가 밤이니
누군가의 시선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제론은 하늘 높이 훌쩍 날아올랐다. 일행의 위치는 이미 정확히 찍었다. 유적의 아티팩트를 통해 정확한 방향과
속도를 기반으로 가는 데 걸릴 시간까지 계산했다.
쉬이이이익!
제론이 날아가며 돌개바람이 일어났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이 정도 속도라면 몇 분 지나지 않아 일행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의 신형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제론이 다녀온 그 짧은 시간 동안 별일이 있을 리 없었다. 한데 아예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루이네가 깨 있었다.
“어? 깼네?”
루이네는 제론의 말에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제론을 발견하고는
그 불안감이 눈 녹듯 녹았다. 그리고 그렇게 녹은 불안감은 눈물이 되어 흘렀다.
“그냥 가신 줄 알았어요.”
루이네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쉽게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겪은 일이 마음에 꽁꽁 맺혀 있다가
이번 일을 계기로 다 터져 나왔다.
제론은 굳이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가만히 있어 주었다. 오해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그동안 너무 오래
참았다. 슬슬 이런 식으로 터트려 주지 않으면 속으로 곪을 수도 있었다.
날이 완전히 밝아 올 무렵 루이네는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퉁퉁 부은 눈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헤헤. 제가 좀 추태를 부렸네요. 죄송해요.”
그제야 좀 그 또래의 나이다워 보였다. 그리고 왠지 밝은 느낌이 들었다.
“훨씬 보기 좋군. 이제 마음도 다 추스른 거 같으니 저 잠꾸러기들이나 깨워라.”
제론의 말에 루이네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둘러 예거와 호위 기사를 깨웠다.
제론은 그사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꺼지지 않은 모닥불을 이용해 간단히 육포를 넣은
죽을 끓였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다.
루이네 일행은 또 한 번 정신없이 음식을 흡입했다.

☆ ☆ ☆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어요.”


루이네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안쓰러운 눈으로 예거를 바라봤다. 그저 업히기만 한 자신도 이렇게 힘이 든데,
자신을 업고 온 예거가 얼마나 힘들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예거는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설마 이 정도로 강행군을 할 줄은 몰랐다. 이틀 만에 도착했는데,
그동안 단 한 번도 쉬지 못했다.
예거는 비틀거리며 루이네를 내려놓고는 그대로 뻗어 버렸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예, 예거 경!”
루이네가 깜짝 놀라 예거를 불렀다. 하지만 예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죽은 것 같았다.
“사람을 부르는 게 빠르지 않겠어?”
제론의 말에 루이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후다닥 영주성 쪽으로 뛰어갔다.
제론은 그런 루이네의 뒤를 느긋이 따라가며 주위를 둘러봤다.
“제법 발달한 곳이로군.”
길이 잘 닦여 있었고, 길 양쪽에 늘어선 건물은 크고 높았다. 또한 사람들의 옷차림도 고급스러웠다. 영지에
돈이 제법 돌아다닌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정작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기 그지없었다. 영지가 어떤 상황인지 다들 알고 있기에 표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영지가 넘어갈 상황이니 당연했다. 영지전으로 넘어가나 빚으로 넘어가나 영지민의 처지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비참한 꼴을 면치 못한다.
현재 아베티스 영지의 상황은 심각했다. 아마 향후 영지민 전체가 노예 같은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영지를 감시하는 병력이 대폭 늘어났다. 아베티스 영지에 돈을 빌려
준 자들이 보낸 감시병이었다.
“자아, 그럼 난 빈 창고나 좀 알아볼까?”
물론 다른 데로 가지는 않았다. 계속 루이네의 뒤를 따라갔다. 빈 창고를 얻는 일도 루이네를 통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할 테니까 말이다.
성에 도착한 루이네는 서둘러 병사들을 움직였다. 10 여 명의 병사가 예거가 쓰러진 장소로 달려갔다.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다. 예거와 두 호위 기사는 무사히 영주성으로 옮겨져 푹신한 침대에 눕혀졌다.
제론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 제법 괜찮은 방에 머물 수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낼 생각은 없었다.
빨리 유물을 넘겨주고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결과는 확인을 해야만 한다. 아무리 아베티스 가문에 돈이 생겼다고 해도 나베 공작가가 모든 걸
수긍하고 넘어갈 리 없었다.
그 음모까지 몽땅 부숴 놔야 그들의 배후를 조금이라도 흔들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방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제론은 루이네를 찾아 나섰다. 루이네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영주의 집무실에서
밀린 일처리를 하고 있었다.
현재 아베티스 영지에는 영주 대행으로 일을 처리할 만한 사람이 루이네뿐이었다.
“바쁜가 보군.”
“아, 오셨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것만 마저 처리할게요.”
루이네는 손에 든 서류를 빠르게 읽고 인장을 찍었다. 그다음 한숨 돌리며 제론을 바라봤다.
“그쪽에 앉으세요. 일이 너무 밀려서 신경을 못 써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말하지. 창고가 필요해.”
“창고요?”
“미리 창고를 준비해야 유물을 가져다 채울 것 아닌가?”
루이네의 표정이 굳었다. 유물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과연 제론이 정말로 그 유물을 모두 가져올 수
있을지도 믿기 어려웠다.
“대체 어떻게 그 많은 유물을 나르시려고 하는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나머지는 내가 모두 알아서 할 테니 넌 우선 창고부터 준비해라. 그걸 확인한 다음 움직이겠다. 시간이 별로
없는 걸로 아는데 아니었나?”
“없죠, 시간이 너무 없어서 문제죠.”
이제 대금 변제일이 1 개월도 남지 않았다. 지금 당장 유물이 도착해도 그것을 팔아 돈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모자랐다.
“보름 안에 가져올 수 있나요? 그게 마지막 허용선이에요.”
“유물을 내다 팔 루트는 마련해 놨고?”
루이네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일단 유물이 도착하면 그걸 서둘러 팔아 봐야죠. 근처 영지나 우리 영지에 오는 상단을 통해서요.”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선 이미 늦지. 그들이 과연 도와줄까? 나베 공작가가 고작 그 정도 생각도 못 했을까?”
루이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생각은 자신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판매까지 책임지지. 단, 전부는 곤란하고 일부만.”
“예?”
루이네는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만일 정말로 제론이 그렇게 해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빚이 얼마인지만 얘기해. 그쯤에 맞춰서 팔아 줄 테니까.”
“대, 대체 어디서 어떻게요?”
“암시장에서.”
“암시장이요?”
루이네는 당황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암시장이라니. 멋모르고 가면 뒤통수를 맞는 곳이 바로 암시장이었다.
그런 위험한 곳에 유물을 가져갔다간 싹 날릴 수도 있었다.
“허락할 수 없어요!”
“그럼 눈 빤히 뜨고 영지를 빼앗길 셈인가?”
루이네가 입술을 깨물었다.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지금 자신은 제론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제론이 여기서 손을 떼면 정말로 곤란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그 유물의 가치로 생각하는 액수가 얼마인지 목록을 보고서 정해라. 액수가 적당하면 내가
사는 걸로 하지.”
“예? 그, 그래도 되나요?”
“단, 값을 잘 쳐줄 수는 없다. 분명히 네 예상보다 낮을 거야. 그걸 감안하겠다면 그렇게 해라.”
“그거야 당연하지요. 저도 그렇게까지 염치가 없지 않아요.”
루이네는 제론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사실 그게 훨씬 안전했다. 일단 영지의 위기부터 넘기는 것이 먼저였다.
나머지는 그다음에 생각할 문제였다.
“그럼 지금 정할까?”
“이렇게 갑자기요?”
“그럼 빨리 정해라. 전문가를 부르고 싶으면 부르고. 시간이 없다는 걸 명심해.”
“아, 알았어요. 오늘 저녁에 정하도록 하죠.”
제론은 루이네의 대답을 듣고는 돌아서서 나갔다.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창고를 얻을 필요가 없어졌으니
남은 시간 동안 유적에 다녀오거나 아니면 검술을 수련하는 것이 나았다.
자금은 충분했다. 아무리 유물의 가치가 대단하다 하더라도 제론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돈을 지불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돈을 지급하는 날짜를 조금 조정하면 암시장에 물건을 판 뒤에 그 돈으로 대금을 지불하는 것도 가능했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제론은 엄청난 이득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뭐, 어차피 그 유물을 발견한 게 나니까 꼭 그런 것도 아닌가?”
제론은 피식 웃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저녁까지 검술을 수련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유적에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좀 애매했다.

그날 저녁 루이네는 부랴부랴 섭외한 전문가를 대동하고 제론과 만났다.


그리고 목록에 비추어 유물의 가치를 책정했다. 물론 전문가는 루이네의 편이었지만 제론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에 루이네는 제론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해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펼치지 못했다. 결국 유물의 가격이
상당히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운송의 문제가 남았다고는 해도 이 정도면 가격이 턱없이 낮습니다. 이래서야 유물 발굴의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충분해요. 지금 당장 돈을 받을 수 있다면요. 어차피 우리 힘으로 개발한 유적도
아니잖아요.”
전문가로 나선 가신의 말에 루이네는 그렇게 답하고는 제론을 바라봤다.
“그렇죠?”
“맞다. 탁월한 선택이다. 돈은 언제 지불하는 것이 좋을까?”
“지금 당장 주세요.”
루이네의 선택에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잘 생각해라. 영지가 처한 상황과,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 변제일이 언제라고
했지?”
“아직 1 개월쯤 남았어요.”
“그때까지 미루는 게 좋을 거다. 돈을 가진 사람도, 또 유물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진 사람도 나라는 사실을 잘
이용해라.”
제론의 말에 루이네가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럴 수는 없어요! 지금까지 받은 도움만 해도 갚을 길이 없는데……!”
“그만큼 위험성도 가지고 있는 셈이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겠어?”
제론은 그 말을 하면서 루이네를 따라온 가신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눈이 번득이는 걸 놓치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 변제일에는 꼭 나와 동행하고. 돈도 내가 가져갈 테니까.”
루이네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범벅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너무 염치가 없었다. 하지만 제론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현재 아베티스 영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번 위기를 넘기는 데 모든 심혈을 기울여야만 했다.
“염치없지만 부탁드릴게요.”
루이네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론은 씨익 웃어 주고는 돌아서서 나갔다.
“아가씨. 저자에게 너무 저자세로 나가시는 것 아닙니까? 무엇보다 정체도 확실치 않은 자에게 너무 많은 걸
주셨습니다.”
루이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분은 능력 하나는 확실한 분이에요. 믿을 수 있어요. 아마 잘될 거예요.”
가신도 고개를 저었다.
“전 저자에게 돈이 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습니다. 그 많은 돈을 대체 어디에 들고 다닌다는 겁니까?”
“굳이 돈을 들고 다닐 이유가 있나요? 디아만트 상단의 채권으로 들고 다닐 수도 있잖아요?”
“디아만트 상단의 채권 말입니까?”
가신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건 생각도 못 해 봤다. 물론 그런 식으로 액수가 크면 믿을 만한 상단의 채권을 돈
대신 쓸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미쳤다고 들고 다니겠는가. 특별한 일도 없는데 말이다.
“확실히 그런 걸 가지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요. 한데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루이네가 빙긋 웃었다.
“제가 생각해 낸 게 아니라 들은 거예요. 돈 대신 그걸 들고 다니신다고 하더라고요.”
“저자가 말입니까?”
루이네는 가신이 계속 저자라고 하는 말이 거슬렸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제론이 자신의 신분을 비밀에
부쳐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제론과 한 약속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그게 루이네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루이네는 제론에 대한 고마움을 떠올리느라 가신의 눈빛이 점점 섬뜩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아베티스 영지에 은밀한 움직임이 일었다. 그 움직임의 시작은 루이네와 함께 제론을 만난 가신이었다. 그가 몇몇
사람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전달했고, 그렇게 정보가 어딘가로 흘러갔다.
그 정보를 최종적으로 받은 사람은 나베 공작가의 사주를 받고 이곳에 감시병을 파견한 가이츠 남작이었다.
“이건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군.”
가이츠 남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일 루이네가 돈을 받았다면 그녀의 신변이 위험했을 것이다.
지금 아베티스 영지는 상당히 위태로웠다. 이 영지를 집어 삼키기 위해 나베 공작가는 엄청난 투자를 했다. 그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려면 이 영지를 삼킨 다음에도 몇 년 동안은 착취를 통해 돈을 만들어야만 했다.
모든 초점이 아베티스 영지가 빚을 갚지 못하게 하는 데에 맞춰져 있었다. 만일 빚을 갚지 못하면 이 영지는
가이츠 남작의 것이 된다.
가이츠 남작의 임무는 그렇게 영지를 얻은 뒤, 이 영지를 잘 관리해 돈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또한 향후 나베
공작가에 영지를 상납하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영지를 상납하더라도 영지는 가이츠 남작이 계속 관리하게 될 것이다. 가이츠 남작은 그걸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돈을 가지고 있다던 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
“영지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영지를 떠나? 하긴, 유물을 갖다가 암시장에 팔아야 할 테니…….”
가이츠 남작은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그는 제론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유적에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유물을 조금씩 처분할 생각인 모양인데…….”
확실히 그런 식으로 하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루이네로부터 워낙 싼 값에 유물을 구입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오랜 시간에 걸쳐 팔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거야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그 정도 이득이라면
말이다.
“일단 사람을 붙여. 유적에 대해서도 알아낸 다음 죽이고 돈을 빼앗아 와.”
가이츠 남작은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는 빙긋 웃었다.
이제야 끝이 보였다. 이번 일만 제대로 끝내면 더 이상 루이네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처절하게 무너져 절망을 할 때, 실낱같은 희망 하나를 던져서 낚는 것도 나쁘지 않지.”
가이츠 남작은 루이네의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조만간 루이네가 자신의 여자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든 상황이 순조로웠다. 그의 눈에서
음탕한 욕망이 번득였다.

Chapter 2 추격

제론은 아베티스 영지를 떠났다. 목표는 아벤드였다. 사실 푸르투나를 이용해 날아가면 훨씬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단 미행하는 놈들은 처리해야지.”
제론은 그들에게 조금도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적이었다. 가문을 무너뜨리고 아버지를 죽인 적
말이다.
속도를 일부러 늦췄는데도 미행하는 자들은 나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론은 그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냈다.
그들은 유적을 원하는 것이었다.
“뭐, 굳이 나설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지.”
솔직히 조금 아쉽긴 했다. 이럴 때 마티가 있다면 그들에게 하나씩 붙여서 배후를 캐낼 수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제론은 조만간 아베티스 영지 근방에 있다던 유적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멈췄다.
감각 안에 들어온 사람의 수는 총 30 명이었다. 지척에서 따라오던 사람이 5 명이었고, 나머지는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앞선 자들이 의도적으로 남긴 흔적을 확인하고 따라오는 자들이었다.
당연히 뒤에 쫓아오는 놈들은 조심성이 아예 없었다. 아마 제론의 감각이 얼마나 예민한지 알았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조심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겠지만 말이다.
제론은 천천히 돌아섰다. 근처에는 몸을 숨길만한 장소가 많지 않았다. 20 미터쯤 떨어진 곳에 나무 세 그루가
있었는데, 미행자는 거기 숨어 있었다.
제론이 나무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만 나오는 게 어때?”
제론의 말에도 그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들켰다고 믿지 않은 것이다. 가끔 신중하고 조심성이
지나친 사람의 경우 전혀 확신을 가지지 않은 상황에서 저런 말과 행동을 하곤 한다.
그 심리전에 말려들면 바로 모습을 드러내거나 도망치게 되어 있었다. 제론을 미행하는 자들은 그쯤에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미숙하지 않았다.
또한, 제론이 정말로 알아차렸다는 것을 단숨에 파악할 정도로 능숙하지도 않았다.
제론이 피식 웃으며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안 나오면 후회할 거다.”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움직이지 않자, 제론은 나무를 향해 돌멩이를 휙 던졌다.
아무리 가볍게 던졌다지만 소드 마스터의 힘이 깃든 돌멩이였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간 돌멩이는
그대로 나무에 틀어박혔다.
꽝!
쩌저적!
나무에 돌멩이가 콱 틀어박혔다.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나무가 쩍쩍 갈라졌다. 그렇게 갈라진 틈으로 숨어 있던
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놀라서 경직된 표정으로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이 그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돌멩이 5 개를 던졌다 받으면서 말이다. 말을 안
들으면 당장이라도 돌멩이를 던지겠다는 협박이었다.
5 인의 사내가 쭈뼛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나무가 갈라졌을 때 모습이 드러난 건 2 명뿐이었지만 나머지도
기세에 눌리고 공포에 질려 알아서 기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제론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맹렬히 생각했다.
여기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왠지 그냥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만일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벌써 죽였을 것 아닌가. 분명히 원하는 게 있으니 살려 뒀을 것이다. 그것만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거기 앉아 봐.”
제론의 말에 다섯 사내가 즉시 쪼그려 앉았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을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건
최선을 다해 대처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했다.
“뒤로 돌아.”
다섯 사내가 쪼그려 앉은 채 뒤뚱뒤뚱 뒤로 돌았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이들을 죽일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 이들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생각해 보면 제론은 굳이 마티가 없더라도 이들을
얼마든지 감시할 수 있었다.
제론에게는 마법과 태블릿이 있었다.
심장의 마나링이 가속되었다.
위이이잉!
제론은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바닥 앞에 마법진 5 개가 동시에 떠올랐다.
5 명의 사내는 뒤돌아 앉은 채로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견디기가 어려웠다.
샤아악!
5 개의 마법진이 각각 5 명의 등에 스며들었다. 당연히 사내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제론은 8 개의 마나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제법 능숙하게 다뤘다. 간단한 마법이라면 동시에 5
개를 펼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나링은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능력이 몇 배로 늘어난다. 8 개의 마나링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마어마했다.
제론이 지금 만든 5 개의 마법진은 간단한 추적 마법이었다. 태블릿과 연결시키기 위한 고리를 만드는 것이 좀
복잡했지만 제론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런 연결 고리를 동시에 5 개나 만드는 것이 좀 복잡하고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조차 수련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면 즐거웠다.
제론의 손바닥 앞에 새로운 마법진 5 개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그것도 다섯 사내의 등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도청 마법이었다. 마법 자체가 상당히 복잡했기에 5 개를 동시에 만드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태블릿과
연결시키는 건 당연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태블릿과 연결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첫 번째 마법에서 태블릿과 이어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들
주변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가 태블릿에 저장될 것이다.
위이이잉!
심장의 마나링이 더욱 빠르게 가속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큰 마법진 5 개가 나타났다. 뒤이어 또
다른 마법진 5 개가 처음 나타난 마법진 뒤에 떠올랐다.
제론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번 마법은 그만큼 어려웠다. 조금만 실수해도 틀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론은 모든 신경을 마법진에 집중했다.
샤아아악!
2 개의 마법진이 거의 겹치다시피 해서 사내의 등에 스며들었다.
이 마법은 시신경과 연결해 영상을 만들어 내는 마법이었다. 일단 시신경을 장악하는 마법진에 영상을 만드는
마법진을 덮어씌워야 했기에 그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제론은 그것도 멋지게 성공했다. 제론의 얼굴에 뿌듯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좋아. 다시 뒤로 돌아.”
제론의 명령에 다섯 사내가 뒤뚱뒤뚱 돌아섰다. 그들의 표정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들은 자신의 몸에 마법이
깃들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이제부터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한다. 알겠나?”
“예!”
다섯 사내가 동시에 크게 대답했다. 그들은 이것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했다.
“누가 시켰지?”
“가이츠 남작입니다!”
이번에도 다섯 사내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들은 미행을 하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잘 했지만 굳이 의뢰인과의
의리를 지키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위기의 순간에는 망설임 없이 의뢰인을 팔아먹은 대가로 살아남곤 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진짜 배후에 있는 사람이 미리 그런 식으로 명령을 했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정확히 어떤 의뢰를 받았지?”
“목표를 미행하고 흔적을 남기라는 의뢰입니다!”
이번에도 다섯이 동시에 대답했다. 마치 미리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제론은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들이 뭔가를 숨긴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몇 명이 쫓아오고 있지?”
“모릅니다!”
제론은 이들에게 얻을 게 더 이상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에게는 뭔가를 캐내려면 앞으로 시간을 더 두고
살펴보는 수밖에 없었다.
촉이 왔다. 이들의 뒤에 뭔가가 있다고 말이다.
“좋아. 너희들의 말을 믿겠다.”
다섯 사내의 눈이 살짝 빛났다.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일인당 한 개의 정보를 내놓으면 보내 주겠다. 대신 내가 혹할 정도로 쓸 만한 정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거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
다섯 사내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목숨과 비견될 만한 정보를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대체 뭘
내놔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맹렬히 고민했다.
제론은 이들이 과연 무슨 정보를 줄지 기대했다. 대단한 정보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배후에 대한 실낱같은
가능성이 이들의 정보에서 나왔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저…….”
한가운데에 있던 사내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제론이 그를 바라보자 그가 어색한 표정으로 양옆을 돌아봤다.
제론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좋아. 너만 따라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나머지 네 사람의 목 뒤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헉!”
네 사람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온몸의 감각이 사라져 버렸다. 놀라서 움직이려 했지만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불안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잠깐 전신불수로 만들었어. 혹시라도 도망가면 곤란하잖아. 금방 원래대로 만들어 줄 테니까 기다려.”
제론의 말에 네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절대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제발 풀어 주십시오!”
그들은 이러다가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까 봐 두려웠다. 죽음을 눈앞에 둔 것보다 더한 공포가 엄습했다. 몸을
덜덜 떨고 싶었다. 하지만 그조차 불가능했다. 정말 목 아래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제론은 그것을 보면서 또 한 번 씨익 웃었다. 네 사람의 눈에는 그 웃음이 악마의 미소 같았다.

제론은 처음 손을 든 사내를 데리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그 뒤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제론은 사내 모르게 마법을 펼쳤다.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이었다.
“자, 이제 말해 봐.”
사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전쟁? 어디에서?”
“벨룸 왕국입니다.”
“벨룸 왕국?”
“예. 체스터 공국이 벨룸 왕국을 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론은 사내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보아하니 그건 체스터 공국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사내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잠깐 체스터 공국의 수뇌부 사이에서 벌어졌던 정보전에 참여를 했었습니다.”
“저들도 같이?”
“그랬다면 제가 굳이 이렇게 따로 뵐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헤헤헤.”
사내가 비굴하게 웃었다. 마치 이제 좀 봐 달라고 아부라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제론은 그 사내의 눈빛 깊숙한
곳에서 번득이는 감정들을 명확히 짚어 냈다.
‘이놈 봐라?’
이 정보를 일부러 알려 줬다. 어쩌면 그 전쟁에 어떤 변수를 만들려는 수작일 수도 있었다. 제론은 순간적으로
이들이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넌 살려 주지. 따라와라.”
제론은 다시 사내를 원래 자리로 데려가 앉혔다. 그리고 목뒤를 찔러 전신불수로 만들었다. 사내가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한꺼번에 풀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다음 사내를 데리고 바위 뒤로 갔다. 그 사내도 자신이 아는 정보 하나를 내놓았다. 또한
그 역시 눈빛 깊은 곳에 음흉함을 감추고 있었다.
그렇게 다섯 사내로부터 모두 정보를 들은 제론은 그들의 몸이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제론이 이들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막은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마나를 이용해 목의 신경을 잠깐 막아 놓은
것이었다. 초고대에 범죄자를 잡아 가둘 때 종종 쓰는 방법이라서 제론도 어떤 식으로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돌아가라. 가서 실패했다고 보고하는 것 잊지 말고.”
제론의 말에 다섯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근처에 있다가 또 잡히면 이번에는 정말로 비참한 꼴을
당할 거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몸에 새겼다.
“자아, 그럼 남은 건 날 죽이려고 쫓아오는 놈들인가?”
제론은 5 명의 미행자를 쫓아온 25 명의 사내들이 거의 근처에 도착하자 씨익 웃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제론의
감각 안에 있었다. 그들이 도망칠 기회는 더 이상 없었다.
제론은 그들을 한 명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가이츠 남작의 수하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움직이는 내내 살기를 풀풀 풍겼다. 제론을 무조건 죽일 생각으로 온 자들이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제론은 그 정도로 마음이 비단결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만일 저들의 배후에 가이츠 남작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면 조금 고려할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그저 살육과 고문, 심문을 위해 키워진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날 고문해서 정보를 싹 빼먹은 다음 난도질해서 죽이겠다 이거지?”
제론은 피식 웃으며 검을 뽑았다.
샤라라라랑!
은빛 검신에서 빛가루가 뿌려졌다. 제론은 그것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순수한 마나를 받아들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게 당연했다. 몸에 힘도 나고,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던 체력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또한 약간 들었던 피로감도 싹 사라졌다.
제론은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천천히 걸어갔다. 제론이 향한 방향에는 25 명의 사내들이 킬킬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지금 자신들을 향해 제론이 걸어오는 중이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물론 알았다 하더라도 도망가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실력은 제법 대단했다. 상대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결코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아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기간트 라이더도 있었다. 비록 3 명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가이츠 남작이 미리 준비해 준 것이었다. 그러니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들의 눈에 제론의 모습이 보였다. 검을 늘어뜨리고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에서 왠지 압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뭐지? 지금 우리랑 해보겠다는 건가?”
“큭큭큭큭. 조심해. 한가락 하는 놈일지도 몰라. 우리가 몇 명인지 딱 보고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잖아.”
“허이구 무서워라. 이거 기간트라도 꺼내야 하는 거 아냐? 흐흐흐흐흐.”
“일단 반응이나 좀 보자고. 누구 활 가진 사람 없어?”
그 말에 몇몇 사내가 등에서 장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쌔액! 쌔액! 쌔액!
3 발의 화살이 제론을 향해 날아갔다. 제론은 전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슬쩍슬쩍 몸을 비틀고 고개를 흔들어서
화살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마치 처음부터 겨냥을 실수해서 빗나간 것처럼 보였다.
“뭐 하는 거야? 장난해? 똑바로 안 맞춰?”
사내의 입에서 짜증이 튀어나오자, 활을 든 자들이 다시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쌔액! 쌔액! 쌔액!
조금 전보다 목표가 훨씬 가까웠기에 이번에는 절대 빗나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제론은 여전히 걸었고,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대부분 화살을 똑바로 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리더의
표정이 굳었다. 제론이 화살을 슬쩍슬쩍 피한 걸 알아차린 것이다.
“보통 놈이 아니다! 제대로 싸울 준비를 해!”
저 정도 실력을 가졌다면 최소한 베테랑 익스퍼트였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 물론 이곳에
온 동료들 중에도 익스퍼트가 있긴 했지만 그들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1 조, 가서 죽여. 어설프게 살리려고 하지 마. 그냥 죽여. 알겠어?”
리더의 말에 10 명의 사내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 10 명이 동시에 덤비면 누구든 죽일 자신이 있었다.
“사로잡지 않아도 되는 거요?”
“필요 없어. 죽여.”
“남작님이 싫어하실 텐데?”
“내가 책임진다. 죽여.”
그제야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각자의 무기를 뽑았다. 몇몇은 롱소드였고, 몇몇은 거대한 양손검이었다. 또
도끼를 든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우르르 달려가는데도 리더의 표정은 한껏 굳어 있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리더의 시선이 옆의 사내에게 돌아갔다.
“기간트 준비해. 언제든 소환해서 움직일 수 있도록.”
리더의 말에 사내가 깜짝 놀랐다. 그는 이 일행의 기간트 라이더 중 한 명이었다. 리더의 말을 듣고 시선을 돌려
제론을 다시 확인했다.
“저놈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최소한 내가 보기엔 그렇다. 웬만한 익스퍼트들보다 훨씬 무서운 놈이야.”
“그럼 기간트를 준비해야죠. 소드 마스터쯤 되면 좋을 텐데. 아무리 기간트로 죽이는 거지만 소드 마스터를
죽이는 영광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닌데. 안 그렇습니까?”
리더는 어느새 사내의 눈에 나타난 광기를 보고는 혀를 찼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든든했다. 일단 이렇게
조금이라도 돌아 버리면 이놈을 상대할 만한 자는 거의 없었다.
리더는 전방의 싸움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입을 쩍 벌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10 명의 조원이 그대로 몰살당했다. 무기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 것이다.
“기간트를 꺼내!”
리더의 외침에 바로 옆에 있던 사내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당장 기간트를 소환했다.
카타락타가 나타났다. 사내가 거기에 타자, 그제야 2 기의 기간트가 더 나타났다. 둘 모두 카타락타였다.
하지만 그 둘은 기간트에 탑승하지 못했다. 어느새 제론이 지척에 다가온 것이다.
서걱! 서걱!
목 2 개가 핏줄기를 뿌리며 허공에 떠올랐다. 기간트 라이더가 죽은 것이다. 기간트는 라이더를 잃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제론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촤촤촤촤촤촤악!
근처에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도륙당했다. 남은 건 기간트에 탄 라이더와 리더뿐이었다.
제론은 리더를 보고 씨익 웃었다. 몸에 피 한 방울 튀지 않아 깨끗했다. 사방이 피바다인데 홀로 고고한 모습은
그 자체로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리더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느새 제론은 리더의 뒤에 나타나 그의
목을 쿡 찔렀다.
리더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전신불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뭐, 뭐야!”
리더는 당황했다. 제론은 그런 리더를 번쩍 들어 한쪽으로 휙 던졌다.
털썩!
수십 미터나 날아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리더는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아 두려움에 떨었다. 마치 몸이 사라진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바닥에 누운 채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볼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리더가 그렇게 누워 있는 동안 제론은 카타락타 앞에 섰다. 제론의 눈에서 광채가 일어났다. 실전에서 기간트와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어디 얼마나 하나 볼까?”
무조건 이길 자신이 있었다. 제론은 유적의 기간트인 이스히스와도 거의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이스히스는
출력이 최소 4.0 이 넘는 엄청난 기간트였다.
그런 기간트와도 싸우는데 고작 카타락타쯤이야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다.
문제는 이스히스와 달리 카타락타에는 라이더가 타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라이더가 없다고 해서 이스히스가
싸움에 대한 센스나 지능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입견이라는 것은 무섭다. 제론은 아무리 그래도 라이더가 탄 카타락타가 좀 더 싸우기 까다로울 거라고
여겼다.
제론과 카타락타가 마주섰다.
먼저 움직인 것은 카타락타였다. 일단 광기에 빠져든 라이더가 분위기 파악 같은 걸 할 리 없었다.
카타락타의 거대한 검이 제론이 있던 자리에 휙 떨어졌다.
콰직!
제론은 피하지 않고 그것을 맞받았다. 원래는 가볍게 흘리려고 했는데, 막상 막아 보니 예상보다 훨씬 충격이
약해 정면으로 부딪쳐 버렸다.
“이거 괜찮은데?”
온몸으로 충격이 왔다. 하지만 몸속 마나를 마구 회전시켜 충격을 뒤로 흘려 버렸다.
이런 경험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순수히 마나의 힘만으로 충격을 분산시키려면 몸으로도 그걸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스히스와 싸울 때는 그게 불가능했다. 워낙 출력이 높고 강해 마나로 분산시키는 충격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괜찮았다. 카타락타가 주는 충격 정도는 마나의 힘으로 충분히 분산이 가능했다.
“자, 와라!”
제론이 호기롭게 외쳤다.
이건 수련의 기회였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는가. 실전으로 카타락타와 싸울 수 있는 기회가 말이다.
제론이야 신났지만 정작 카타락타의 라이더는 놀라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기간트의 검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일격이었다.
하지만 놀랐던 것도 잠시 라이더의 광기가 폭발해 버렸다.
“감히 막아? 어디 이것도 막아 봐라! 크아아아!”
카타락타가 마구 검을 휘둘렀다. 그 거대한 몸을 움직이며 검을 휘두르는데, 상당한 균형감을 갖고 있었다.
“호오!”
제론은 나직이 감탄하며 검을 들었다.
라이더의 실력이 제법이었다. 하지만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저 정도 실력을 가진 라이더는 에어스트 백작령에
가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
꽝! 꽝! 꽝! 꽝!
연달아 휘두르는 검을 제론이 침착하게 막아 냈다. 당연히 몸속 마나를 회전시키면서 충격을 분산시키고 뒤로
흘려 버렸다.
제론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검만으로 카타락타의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기간트의 공격을 막아 낸다는 건 일반 기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익스퍼트에 이른 사람이라도 말이다.
아니, 소드 마스터라도 불가능했다. 이는 오로지 제론이 진짜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정작 제론을 상대하는 카타락타의 라이더는 얼마나 속이 타겠는가. 그는 점점 더 미쳐 날뛰었다.
“크아악! 죽어!”
카타락타가 발을 들어서 그대로 찍었다.
쩌어어어엉!
제론은 발바닥을 검으로 찔렀다. 강력한 일격이 카타락타의 발바닥에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발이 들린 카타락타가 균형을 잃었다.
끼이익! 쿠웅!
카타락타가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잠시 기다려 주었다. 조금 전
일격을 머릿속으로 다시 그리면서 말이다.
조금 전의 일격에는 마나가 실렸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만이 낼 수 있는 그런 일격이 아니었다. 익스퍼트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낼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순수하게 마나에 관한 점만 그랬다. 실제 그 안에 들어간 검의 흐름이나 마나의 흐름은 웬만한 사람은
흉내도 낼 수 없을 정도로 고도의 기술이었다.
“뭐 하나? 일어나서 날 좀 더 즐겁게 해 줘야지?”
제론의 말에 카타락타가 억지로 일어났다. 하지만 전의는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두려움에 빠지자 그때까지
날뛰던 광기가 죽은 것이다.
“다, 당신은 누굽니까? 서, 설마 드, 드래곤?”
드래곤은 전설에나 나오는 존재였다. 실제 초고대에도 전설로 남은 존재가 바로 드래곤이었다. 그래서 제론은
그건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가상의 존재라고 판단했다.
당연히 지금도 다들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라이더 입장에서는 이런 비상식을 겪었으니 어쩌면 그쪽으로
가능성을 여는 게 당연했다.
“안 덤빌 건가?”
제론이 투기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카타락타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후우, 끝났군.”
제론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즐거운 수련이 될 수 있었는데 너무 싱겁게 끝나 버렸다. 투지를 잃은 상대를 통해 뭔가를 얻어 낸다는 건
바보짓이었다.
“그럼 이제 정말로 끝을 내야겠군.”
제론은 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제론의 검이 밝게 빛났다. 그 빛이 검끝에서 쭉 밀려 나왔을 때, 제론의 몸이
위로 훌쩍 떠올랐다.
너무나 홀연했고 빨랐다. 제론의 몸이 카타락타의 조종석 앞에 도달했다.
푸욱!
밝게 빛나는 검이 마치 두부를 파고들듯 카타락타의 가슴으로 들어갔다.
제론은 잠깐 거기 매달려 있다가 이내 검을 뽑아 아래로 내려왔다. 가볍게 착지한 제론이 카타락타를 쳐다봤다.
카타락타가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제론이 검을 뽑으며 뒤로 살짝 민 것이 이제야 반응을 보였다.
쿠우웅!
카타락타가 쓰러졌다. 라이더만 깔끔히 죽인 일격이었다. 이 기간트는 거의 망가지지 않은 셈이었다. 조종석의
구조를 명확히 꿰뚫고 있었기에 마법진이나 다른 중요한 부품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라이더만 깔끔하게 죽였다.
아마 이대로 암시장에 갖다 팔아도 몇 만 골드는 너끈히 받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카타락타를 아공간에 담았다. 라이더가 채 타지 못한 카타락타까지 총 3 기나 된다. 이번에 암시장이
열리는 아벤드에 가서 팔아 치울 생각이었다.
“그럼 저놈을 깨워 볼까?”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이놈들의 리더가 남아 있었다. 제론은 전신불수가 되어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리더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번쩍 들어 목뒤를 꾹 눌렀다. 순식간에 활력과 감각이 온몸에 돌았다.
제론이 다시 바닥에 리더를 내던졌다.
털썩!
“크으윽!”
아직 완벽히 몸의 통제권을 자신이 가져오지 못한 상황에서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니 극심한 통증이 엄습했다.
“배후.”
제론은 길게 물을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다 아는 걸 다시 확인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리더는 열심히 자신이
아는 내용을 설명했다.
조금 전의 그 무기력함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 공포가 남아 제론이 묻는 말에는 뭐든 대답해 주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제론의 예상대로 배후에는 가이츠 남작이 있었고, 가이츠 남작은 나베 공작의 심복이었다.
리더는 제법 소상하게 나베 공작의 계획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제론에게 얘기해 주었다.
심지어는 나베 공작이 저지른 인간 같지 않는 짓들까지 몽땅 얘기했다. 제론이 딱히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물론 그 모든 상황에 이 조직이 발을 걸치고 있었다. 이들은 나베 공작이 지저분한 일을 할 때마다 쓰는 더러운
손 같은 존재였다.
모든 설명을 들은 제론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리더의 목이 피를 흩뿌리며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제론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아벤드를 향해 걸어갔다.
오늘은 뭔가 성과가 많은 날이었다. 왠지 재미있는 일이 계속 벌어질 것만 같았다.
잠깐 걸으며 생각을 정리한 제론은 곧장 푸르투나를 불렀다.
휘류류류륭!
거대한 돌개바람이 제론을 허공으로 훌쩍 띄웠다.
제론은 그대로 아벤드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아벤드에 들어갔다.

Chapter 3 아벤드

아벤드의 밤은 화려했다. 암시장이 열린다는 사실은 너무 유명해서 이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사실 암시장의 꽃은 경매였다. 하지만 경매를 이용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제론은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과연 암시장의 경매를 이용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제론의 뇌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펠젠이었나?”
펠젠은 예전 제론이 테페룸 동전을 경매로 팔아 치울 때 함께했던 용병이었다.
솔직히 암시장에 대해서 제론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예전에 펠젠과 함께 왔던 경험이 전부였다.
“지금 옆에 있으면 상당한 도움이 될 텐데.”
제론은 문득 펠젠에게 마법을 걸어 두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당시 펠젠에게 추적 마법을 걸었는데, 그것을 굳이
없애지 않고 남겨 두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든 제론은 마나링을 가속시켜 추적 대상을 확인하는 마법을 펼쳤다. 제론 고유의 마나를 심어
두었기에 언제든 확인 마법을 펼치면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음?”
제론이 눈을 빛냈다.
완전히 예상 외였다. 펠젠은 지금 이곳 아벤드 안에 있었다. 멀리 도망가지 않고 아벤드에 자리를 잡았거나,
아니면 볼일이 있어서 아벤드에 들른 모양이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펠젠이 이곳 아벤드에 있고, 또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론은 마법의 흐름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있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주변을 더
잘 살피는 것이 중요했다.
아벤드는 상당히 번화한 도시였다. 또한 환락가도 많았다. 대로변에 늘어선 건물 중 술집이 절반 이상이었다.
암시장 덕분에 성장한 도시다웠다.
번화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우범 지대가 나온다. 아벤드는 암시장 덕분에 돈이 많이 흘러 다녔고, 그 돈을 쫓아
움직이는 범죄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아벤드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되도록 대로를 통해 다녔다. 대로에 대한 치안은 확실했다. 최소한 그
정도는 관리해 줘야 암시장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아벤드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당연히 빈민가였다. 대로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우범 지대가 나오고 거기를 지나 더
변두리로 가면 빈민가가 나온다.
빈민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죽어 나갈 정도로 위험하고 거칠었다.
제론이 가려는 곳은 바로 그 위험한 빈민굴이었다.
대로에서 안으로 접어든 순간 주변 기운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제론은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여럿 느꼈다.
당연히 신경 쓰지 않았다.
제론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슬그머니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길목을 막아 퇴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단검을 던졌다 받으며 위협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여기만 빠져나가면 펠젠이 있는 곳이었다. 펠젠은 우범 지대와 빈민가의 경계에
있었다.
이미 펠젠은 제론의 감각 안에 있었다. 이젠 추적 마법이 필요가 없었다. 제론은 마법을 해제한 다음 주위를 슥
둘러봤다.
고작 13 명이었다. 이 정도 인원으로 길을 막았다는 건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미리 만들어 뒀던가.
“아이고, 나리. 이거 어쩝니까? 길을 좀 잘못 든 모양인뎁쇼?”
사내 하나가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그의 눈빛과 표정에는 앞으로 벌어질 살육과 약탈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떠올라 있었다.
“그래서?”
제론의 시큰둥한 말에 사내들이 긴장했다. 경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은 상당히 강하다는 걸
알기에 조심해야만 했다.
“서로서로 돕고 살자, 뭐, 그런 말입니다요. 더도 덜도 말고 딱 가지신 것만 내놓으시면 아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모셔 드릴 텐데, 생각이 좀 있으십니까?”
“거의 다 왔으니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나도 사람 만나러 와서 굳이 피를 볼 생각이 없으니 그냥 돌아들
가라.”
“허어, 이 손님이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되시는 모양이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좋은 말로 할 거라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요.”
제론이 피식 웃었다.
“나야말로 언제까지 말만 할 생각은 없다.”
그 말이 끝난 순간 제론의 몸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퍼버버벅!
순식간에 4 명이 쓰러졌다.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저 데굴데굴 구르며
표정으로 고통을 호소할 뿐이었다.
다들 크게 긴장했다. 제론이 움직이는 모습을 아예 보지도 못했다. 진짜 실력자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사내 중 하나가 작은 주머니 하나를 휙 던졌다. 제론을 향해 천 주머니가 날아갔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씨익
웃었다. 무슨 생각이고 어떤 작전인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제론의 손이 휙 움직였다.
화악!
강렬한 바람이 불며 주머니가 왔던 궤적을 고대로 되짚어 돌아갔다.
“으헉! 피해!”
주머니를 던진 사내가 외쳤다. 하지만 주머니가 날아가는 속도는 그들의 반사 신경을 월등히 앞설 정도로 빨랐다.
퍽!
주머니가 정확히 사내의 가슴에 맞았다, 그러면서 확 터졌다. 뿌연 가루가 자욱이 주변을 감쌌다.
“으아아아악!”
사내가 처절하게 소리쳤다. 이 가루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그것도 당한 사람을 지독하게 괴롭히는 극악한
독이었다.
독을 온몸에 뒤집어쓴 사내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독 기운은 사내의 몸을 조금씩 녹여
갔다.
빠르게 녹이면 차라리 나을 텐데 워낙 느리게 녹여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제론이 손을 휙 내저었다. 그러자 바람이 한 번 더 일어 사내 근처에 있던 독 가루를 하늘로 높이 올려 버렸다.
제론이 그쪽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지이잉!
마법진 하나가 떠올랐다.
화르륵!
마법진이 사라지며 불길이 뿜어져 나가 독 가루를 몽땅 태워 버렸다.
제론은 빙긋 웃으며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사내들이 몽땅 얼어붙은 채 딱딱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준비한 게 있으면 써먹어 봐. 제법 재미는 있군.”
다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물러났다. 하지만 제론이 그들이 도망가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먼저 도망치는 놈부터 잡을 거다.”
그 말과 동시에 제론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막 뒷걸음질 치던 사내 앞에 나타났다.
퍼억!
“꾸웨에에엑!”
사내가 배 속의 모든 걸 토해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 역시 다른 동료와 마찬가지로 데굴데굴 구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표정만 봐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어느새 원래 자리에 서 있었다. 언제 이동했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아예 대응이
불가능했다. 손을 쓸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이었다.
제론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멀쩡한 사내들이 일제히 달려와 제론 앞에 섰다.
퍼버버벅!
제론의 주먹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였다. 제론 앞에 선 사내들이 일제히 바닥을 뒹굴었다. 다들
고통에 몸부림쳤다.
제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시간이 약간 지체되긴 했지만 펠젠은 그대로 있었다.
빈민가로 접어든 제론은 망설임 없이 그 경계에 있던 건물로 들어갔다. 빈민가에 있는 다른 건물과 달리 비교적
크고 깨끗했다.
5 층짜리 건물이었는데, 들어가니 우락부락한 사람들이 잔뜩 보였다.
제론은 그들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들의 몸에서 제법 상당한 마나가 느껴졌다. 익스퍼트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나에 관계된 수련을 한 자들이었다.
“뭡니까? 여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덩치가 가장 큰 사내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펠젠을 찾아왔다.”
“마스터는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사내들은 펠젠이라는 이름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펠젠을 만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수십
명이었다. 그들은 제론도 그런 자들과 마찬가지로 여겼다.
“도움을 좀 받으려고.”
도움이라는 말에 사내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마스터는 바쁘십니다. 거래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면 돌아가 주십시오.”
사내의 태도가 워낙 정중했기에 돌아가라고 말하는데도 크게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펠젠한테 가서 전해. 테페룸 동전이라고. 그래도 안 만나 주겠다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제론의 말에 사내가 인상을 썼다. 하지만 왠지 테페룸 동전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테페룸 동전이라니.
테페룸은 가공이 극도로 어려운 금속이었다.
그걸 동전 모양으로 가공하려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노력이 들어가야 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런 굉장한
물건을 언급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일단 사내는 그렇게 판단했다.
“전해 드리겠습니다.”
사내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돌아서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펠젠은 이 건물 5 층에 있었다, 그곳에서 펠젠의 기척이 느껴졌다. 추적 마법이 걸려서 그런지 기운이 참으로
친숙했다.
제론은 근처에 보이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내부를 슥 둘러봤다. 우락부락한 덩치들이 계속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든 일이 틀어지면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론은 그들의 마나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뿜어지는
투기를 느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사람은 잘 구했군.’
물론 그래 봐야 싸움꾼들이었다. 전문적으로 검을 수련한 기사와 비교하면 어른과 아이 정도의 차이었다. 다만
마나를 수련했으니 더 시간이 지나면 기사와 비슷한 힘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위로 올라갔던 사내가 내려왔다. 그는 참으로 난감한 표정으로 제론에게 다가갔다.
사실 오늘 그는 신선한 경험을 했다. 지금까지 함께하면서 펠젠이 그렇게 놀라는 모습은 처음 봤다. 한동안
펠젠은 안절부절못했다.
펠젠은 언제나 당당했고, 강했다. 한데 그런 약한 모습을 보니 눈앞의 사내에 대한 궁금증이 불같이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현재 마스터께서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제론이 빙긋 웃었다. 참는 건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그럼 이제부터는 내 방식대로 해도 되겠군.”
제론의 말에 사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건물 곳곳에서 마법진이 빛을 뿜어냈다.
“호오, 상당하군.”
제론은 단번에 그것들이 어떤 마법을 담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최근 마나의 흐름을 통해 마법진을 분석하는
수련을 계속하고 있었기에 이런 건물에 있는 간단한 마법진 정도는 단숨에 파악이 가능했다.
“자, 그럼 이런 건 어떨까?”
제론은 가볍게 발을 굴었다.
퉁.
하지만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제론의 발을 중심으로 마나의 동심원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동심원에
닿는 마법진이 하나하나 무력화되었다.
마법진이 담고 있는 마나의 흐름을 중간에서 딱딱 끊어 버렸기에 다시 마법진이 제 기능을 하려면 제론이 마법진의
흐름을 끊을 때 쓴 마나를 회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 할 건가?”
제론의 말에 사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가
안 것은 건물의 모든 마법진이 박살 났다는 것뿐이었다.
‘저걸 새기느라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는데…….’
사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제론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펠젠에게 안내하면 마법진은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어때? 이제 좀 생각이 바뀌었나?”
사내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사내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런 제론의 뒷모습을 실내에 있던 모든 사내들이 멍하니 바라봤다. 물론 그들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들의 대장이 왜 저렇게 극진한 태도를 취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뿐이었다.

5 층은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론은 5 층에 오르자마자 펠젠을 볼 수 있었다.


제론이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자 펠젠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했다.
“오, 오셨습니까? 사, 상당히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렇게 찾아올 생각은 없었는데, 도움이 좀 필요해서 말이야.”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제가 뭐든 발 벗고 나서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뭐, 별건 아니야. 암시장을 좀 이용하고 싶어서.”
“아, 암시장 말입니까?”
펠젠은 어이가 없었다. 고작 암시장을 이용하려고 자신을 찾았단 말인가. 그쯤이야 대로에 나가 지나가는 누구를
붙들고 물어도 알 수 있었다.
“물건이 좀 커. 그런 것도 팔 수 있나?”
펠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건의 크기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 설마 기간트를 가져오셨습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펠젠은 물론이고 이곳까지 제론을 안내한 사내도 경악어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기, 기간트라니. 확실히 절 찾아오시길 잘하셨습니다.”
펠젠의 눈이 번득였다. 기간트를 판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남겠는가, 아마 수수료만으로도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돈이 될 만한 얘기가 나오자 펠젠의 기질이 변했다. 펠젠은 돈 때문에 슈린 공작가의 테페룸을 털었던
사람이다. 그런 기질이 세월이 지났다고 변했을 리 없었다.
“몇 기나 있으십니까?”
“일단 카타락타 3 기를 팔아 봐. 나머지는 그다음에 다시 얘기하지.”
제론의 말에 펠젠의 눈이 욕망으로 번득였다. 시작이 카타락타 3 기라면 나중에는 대체 어떤 기간트를 내준단
말인가.
“으하하하하! 정말 잘 찾아오셨습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뵈니 정말 좋군요! 으하하핫!”
펠젠이 기분 좋게 웃었다. 언제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한 웃음이었다.
“한데 기간트는 어디 있습니까? 일단 그것부터 확인을 해야…….”
“아벤드에서는 기간트 소환이 불가능하지 않나?”
“불가능하죠. 그러니 아벤드를 벗어나서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론이 피식 웃었다.
“내가 널 속이기라도 하는 것 같나?”
“예? 그,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가서 팔기나 해.”
“하지만 그러려면 물건이 있어야…….”
“물건은 내가 가져갈 테니 넌 팔기나 해.”
펠젠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물건을 보지도 않고 어떻게 판단 말인가. 아무리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안목까지 믿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경매장까지 이용할 테니까 알아서 잘 준비해 두도록.”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순식간에 건물에서 나가 버렸다.
펠젠은 제론이 남긴 말 때문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경매장까지 쓴다고? 이거 아무래도 정말로 큰 건인 모양인데?”
펠젠의 뇌리에 황금빛 미래가 스쳤다. 어쩌면 이번에 제대로 팔자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펠젠은 욕망이
잔뜩 스며든 눈으로 씨익 웃었다.
“자아, 그럼 열심히 일을 해 볼까?”
한동안 바쁠 것이다. 그리고 바쁜 시간을 보낸 만큼 돈이 들어올 것이다. 펠젠은 진심으로 기분 좋게 일을 찾아
나섰다.

☆ ☆ ☆

제론은 펠젠과 함께 암시장을 둘러봤다. 기간트는 벌써 팔았고, 이제부터는 진짜 목적을 하나씩 해결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아직 예정된 날짜가 되려면 보름이 넘게 남았다. 그동안 암시장을 충분히 겪으면서 다음부터는 굳이 펠젠이
없더라도 이용이 가능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분명히 나중에 또 암시장을 이용할 일이 생길 것이다. 그때에도 또 펠젠을 들들 볶아 데리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제법 규모가 크군.”
암시장은 지하에 마련되어 있었다. 상당히 넓은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래를 했다. 방식도 각양각색이었다.
좌판을 깐 사람도 있었고, 그럴듯한 부스를 마련해서 유리관 안에 물건을 진열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물건이
없이 목록과 그림만을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제론이 노리는 건 좌판에 깔린 물건과 진열된 물건이었다. 완전히 쓰레기나 다름없는 물건이 절반 이상이었다.
하지만 이곳이 아니라면 구하기 어려운 물건도 상당히 많았다.
제론은 그중에서 유물에 관심을 뒀다. 이곳에 오는 유물은 그 경로가 뻔하다. 장물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면
유적 발굴을 공개적으로 알리지 못해서 그걸 처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제론처럼 유물을 빨리 처리해야 할 때에도 암시장을 찾았다.
“보아하니 오늘 여기는 별로인 거 같으니 대충 보시고 다음으로 가시죠.”
펠젠의 말에 제론이 눈을 빛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정도 규모의 암시장이 또 있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벤드는 암시장으로 이름이 높다. 대륙에서 아벤드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이름이 높아지려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니 이 정도 규모의 암시장이 여러 개
있다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제론은 남은 기간 동안 다른 암시장도 싹 돌아보기로 했다. 나와 있는 유물 중 쓰임새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위주로 구입해 확실한 사용법을 알아내 되팔면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암시장에 돌아다니는 유물의 규모가 엄청나군.’
흔하게 좌판을 깐 사람들도 상당한 유물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상인들은 다들 부자인 셈이었다. 물론
대부분이 상인보다는 범죄자에 더 가깝겠지만 말이다.
유물만 있는 게 아니었다. 보석에서부터 테페룸까지 없는 게 없었다. 심지어는 사람과 몬스터도 있었다.
제론은 찬찬히 둘러보다가 어느 좌판 앞에 섰다. 유물이 잔뜩 있었다.
“개당 100 골드. 가격 협상은 없소.”
그리 비싸 보이지 않는 물건이었는데도 개당 100 골드라면 상당한 폭리였다. 아무리 유물이라고 해도 마법이
깃들지 않은 물건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하지만 제론이 원하는 게 바로 이런 유물이었다. 파는 사람이 전혀 가치를 모르는 유물 말이다.
집중해서 살피니 각 유물에 깃든 마나의 흐름이 보였다. 놀랍게도 이곳에 있는 모든 유물이 마법 아티팩트였다.
문제는 어떤 마법이 새겨졌느냐에 따라 그 값어치가 현저히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제론의 눈이 빛났다. 아주 특별한 아티팩트를 발견했다. 마나의 흐름으로 보건대 아공간 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였다.
작은 상자였는데, 겉에 새겨진 세공도 상당히 훌륭했다. 그저 유물의 고고학적 가치만으로도 수십 골드는 호가할
만한 명품이었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집었다.
“안목이 있으시군. 다른 것도 골라 보쇼.”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제론은 이 좌판에서만 무려 10 개의 물건을 샀다. 1000 골드나
지출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마 여기서 산 물건은 경매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당 수천 골드는 받아 낼 수 있었다.
좌판을 떠나며 제론이 중얼거렸다.
“돈 버는 거 아주 간단하군.”
제론은 그 뒤로도 펠젠을 끌고 다니며 암시장 곳곳에서 물건을 사들였다. 다들 특별한 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였다.
그렇게 암시장을 샅샅이 훑은 제론은 다음 암시장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암시장을 둘러보는 속도가 빨라서 이대로라면 오늘 중에 모든 암시장을 다 돌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기능이 알려지지 않은 아티팩트도 챙기고 말이다.
모든 암시장을 돌면서 제론이 구입한 물건의 수는 100 개가 훨씬 넘었다. 이제부터는 좀 더 자세히 분석해서
정확한 사용법을 알아내야만 했다. 그래야 경매에 넘길 수 있을 테니까.
‘이번 기회에 동전도 몇 개 더 팔아볼까?’
지난번에 10 개의 동전을 무려 150 만 골드에 팔았다. 그 돈은 제론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일단 돈 걱정
없이 어떤 일이건 진행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직 제론의 아공간에는 테페룸 동전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었다. 그중에 10 개쯤 더 팔아도 티조차 안 날
정도였다.
“이제 암시장은 다 돌아봤습니다. 슬슬 돌아가시는 게…….”
펠젠의 말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유물의 진짜 가치를 파악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일쯤
그 유물을 다시 팔아 치울 것이다. 경매를 통해서.
“가자.”
제론은 펠젠을 데리고 아벤드 대로변에 위치한 호텔로 향했다. 제론은 그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을 잡고 안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펠젠은, 내일 기간트 10 기를 더 팔 수 있게 해 준다는 제론의 말에 희희낙락하면서 거처로 돌아갔다.
제론은 이곳에서 70 기쯤 되는 기간트를 팔 계획이었다. 세나가 수리한 기간트 중 세나식 개조를 거치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제 제론의 창고에도 슬슬 남은 기간트가 떨어져 가고 있었다. 앞으로는 그 기간트만으로 버티면서 새로 설계한
기간트를 생산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테페룸이 필요했다.
제론은 이런 식으로 암시장에서 테페룸을 구입해서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테페룸 광산을 찾아가 봐야겠어.”
왠지 테페룸 광산을 찾아가면 그 근처에서 뭔가 특별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테페룸이 자연스럽게 생긴 광물이 아니라, 초고대문명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면, 테페룸 광산
근처에 그것에 관계된 유적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초고대에도 테페룸을 만들어 내는 장치 따위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때는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을
정도로 테페룸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론은 왠지 자신의 예상이 맞을 것 같았다. 만일 정말로 그것을 발견한다면 그때부터 정말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초고대문명에는 테페룸을 가공해서 만들어 낸 물질이 아주 다양했다. 포로스도 그중 하나였다. 초고대에는 그보다
훨씬 대단한 물질이 많았다.
그것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면 에어스트 백작령은 전혀 다른 위치로 올라서게 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제론은 방에 앉아 오늘 산 유물들을 쭉 늘어놨다. 일단 오늘은 이게 먼저였다.
제론이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아공간이 새겨진 상자였다. 사실 고대에도 아공간 마법은 굉장히 어려운
마법이었다.
방식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제한도 많았고, 효율도 많이 떨어졌다.
이 상자는 고대 마법의 정점을 찍을 정도로 대단했다. 어쩌면 초고대의 마법이 약간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뛰어났다.
그렇기에 아무도 이 상자에 아공간 마법이 새겨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아벤드는 기간트 소환이 금지되어 있었다. 당연히 도시 곳곳에 아공간 탐지 마법진이 깔려 있었고, 아공간 물품을
가지면 누구든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걸 고작 100 골드에 팔았다는 건 아공간 마법을 탐지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상자의 아공간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복잡했지만 제론 특유의 능력을 동원해 마나의 흐름을 가닥가닥 분해할 수 있었다.
아공간 마법이 깃들어 있으니 아공간을 열 수 있는 열쇠가 필요했다. 보통 그것은 시동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 상자는 조금 특이했다.
“진짜 열쇠가 필요한 거였어?”
상자에 맞게 제작된 열쇠가 따로 존재하는 형식이었다. 그 열쇠를 꽂고 돌리면 아공간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상당히 정교한 방식이었다. 열쇠에도 따로 마법진이 새겨져 있고, 마법진과 마법진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진짜
마법진이 완성되어 펼쳐지게 된다.
“음? 열쇠?”
제론은 문득 얼마 전 유적을 클리어하고 받은 선물이 떠올랐다. 그 선물이 바로 열쇠였다.
어쩌면 그 열쇠도 이 아공간 상자와 같은 방식일지도 모른다. 제론은 열쇠를 꺼냈다.
아공간 상자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살짝 대 보았다. 구멍보다 열쇠가 조금 더 큰 듯했다. 이래선 아예
들어가지도 않는다.
한데 제론은 갑자기 묘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열쇠가 들어갈 것 같았다. 그래서 열쇠를 구멍에 대고 슥 밀었다.
그러자 마치 원래 이 상자의 열쇠인 것처럼 쑥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제론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열쇠를 빙글 돌렸다.
철컥.
열쇠가 돌아가며 뭔가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상자가 열렸다. 열쇠를 통해 연 상자의 안은 그냥
열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상자 안에 아공간으로 이어진 통로가 있었다.
상당히 세심하게 만들어진 아공간이었다. 안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목록을 띄워 보여 주었다.
제론은 반사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파악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진 아공간인지 확인했다.
복잡했지만 파악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제론은 마법을 완전히 분해한 후, 차근차근 분석했다.
이 아공간은 목록의 이름이나 그림을 손가락으로 끄집어내면 물건이 나오게 만들어져 있었다.
아공간 안에는 상당히 많은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걸 하나하나 확인하고 꺼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일단 금괴가 잔뜩 들어 있었다. 또한 마나 스톤도 수백 개나 있었다. 각종 보석도 수십 개나 있었다.
보아하니 고대의 금고였던 모양이다. 안에는 금과 보석 외에도 당시에 유통되었던 채권이 잔뜩 들어 있었다. 또한
마법 서적도 들어 있었다.
제론은 마법 서적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시 아공간에 넣고 열쇠를 돌려 뺐다. 다시 평범한 상자가 되자, 그것을
자신의 아공간에 넣어 버렸다.
상자에 새겨진 아공간과 제론이 가진 아공간은 만들어진 방식 자체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서로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안에 아공간 아티팩트를 담는 것도 가능했다.
제론은 그런 식으로 다른 아티팩트도 모두 하나하나 살피고 마법을 분해해 분석했다.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제론은 이대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새로운 마나링을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분석할 만한 아티팩트가 너무 적었다. 또한 실력을 키울 정도로 복잡한 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도 없었다.
제론은 모든 정리가 끝나자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어쩔
수 없었다.
마법에 대한 공부를 계속 하다 보면 정신력이 상당히 소모된다. 제론은 그것을 다시 채우기 위해 잠을 청했다.
물론 아티팩트들은 다시 아공간에 보관한 뒤였다.
잠시 후, 제론이 잠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창문이 조금 열리며 안으로 대롱 하나가 들어왔다.
대롱을 통해 새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흘러나왔다. 그 연기는 이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시간이 지나니 연기가 점점 사라졌다. 연기가 완전히 사라지자 창문이 활짝 열렸다. 물론 조용하고 은밀했다.
열린 창을 통해 날렵한 체형을 가진 사람이 스며들어 왔다. 온몸에 짝 달라붙는 새까만 옷을 입고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움직임이 어찌나 은밀한지 소리는 물론이고 공기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움직여 제론에게 다가갔다. 제론이 어떤 실력을 가졌는지 미리 들었기에 극도로 조심했다. 조금 전
방 안으로 흘려보낸 연기는 그냥 연기가 아니라 독연이었다.
오우거도 즉사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독이었다. 당연히 엄청나게 비쌌다. 하지만 상대가 굉장한 실력을
가졌다고 하니 그걸 쓸 수밖에 없었다.
독이 비싸긴 하지만 목숨보다 비싸지는 않았다.
독연을 마셨으면 당연히 죽었겠지만 그래도 확실해야만 한다. 사내는 미리 준비한 단검을 들었다. 이걸로 심장을
단숨에 찌르고 돌아가면 된다.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제론에게 다가간 사내는 제론이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죽은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단검을 높이 들었다가 그대로 내리찍었다.
턱!
사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죽은 줄 알았던 제론이 어느새 자신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단검은 제론의
가슴에 딱 닿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는 심장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놀랐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반사적으로 미리 대비한 행동을 할 정도로 잘
훈련되어 있었다.
사내는 단검의 손잡이를 부서져라 꽉 쥐었다. 그러자 정말로 손잡이가 살짝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단검이 손잡이에서 떨어져 나가며 강력하게 쏘아져 나갔다.
콰직!
단검이 침대를 꿰뚫었다. 사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대체 제론이 어떻게 단검을 피했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제론은 여전히 누워 있었고, 단검은 침대를 관통해 바닥에 박혔다. 마치 제론을 그냥 통과한 것 같았다.
사내가 손을 빼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마치 바위에 손이 콱 틀어박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웅!
사내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꽈앙!
온몸이 부서지는 듯했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아 냈다. 그리고 눈을 번득이며 기회를 노렸다. 대체
어떻게 그 독연에서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결코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기회를 봐서 빈틈을 찌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설사 상대가 엄청나게 강하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건 생각뿐이었다. 바닥에 어떻게 떨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아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가 보낸 건지 대충 짐작은 하겠는데, 이거 예상보다 빠른데?”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어떤 정보도 가져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상당한 훈련을
쌓았다. 무슨 고문이 펼쳐지더라도 능히 견딜 자신이 있었다.
“설마 날 쫓아왔을 리는 없고, 여기에 따로 정보망을 마련해 둔 건가? 가이츠 남작인지 뭔지 생각보다
대단하잖아?”
사내는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속으로는 상당히 놀랐지만 그걸 겉으로 내색할 정도로 훈련이 얕지 않았다.
“아니, 가이츠 남작이 아니라 나베 공작가의 정보망인가?”
하지만 제론은 그조차도 믿기 어려웠다. 나베 공작가의 힘을 냉정히 파악하면 레늄 왕국의 슈린 공작가보다
못하다. 적어도 몇 등급은 떨어진다.
한데 슈린 공작가도 갖지 못한 정보망을 나베 공작가가 가졌다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게다가 이곳 아벤드는 정보 조직을 정착시키기 상당히 어려운 곳이었다. 아벤드 자체에서 운영하는 정보 조직이
워낙 튼튼했고, 이곳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극복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아벤드의 범죄자들은 잔혹했고, 돈을 밝혔다. 또한 빈민가는 더 위험했다. 진짜 정보를 얻기 위해선 그들을 다
포섭해야 하는데, 그걸 위해 필요한 돈과 인력이 지나치게 많았다.
그걸 극복하려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자금력이 필요했다. 한데 굳이 그런 자금력을 투자할 정도로 이곳
아벤드가 매력적인 장소는 아니었다.
차라리 아벤드가 자체적으로 키운 정보 조직에 돈을 주고 정보를 받는 편이 훨씬 편하고 저렴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장일단이 있었다. 지금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특정 인물을 추적하는 일은 참으로 곤란했다. 못
하는 게 아니라, 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이렇게 정확히 제론의 행적을 추적해 낼 수 있다면 이곳에 자체적인 정보망을 깔았다는 뜻이 된다. 그것도
아벤드가 운영하는 정보 조직과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조직을 말이다.
그런 조직을 나베 공작가에서 만들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자금도 능력도 모자랐다. 더구나 그들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가 별로 없었다. 안 그래도 국내에 벌인 일이 버거울 정도로 많았다.
제론은 직감적으로 나베 공작가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조직이 개입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사내 역시 그
조직의 일원이리라.
“너 정확한 소속이 어디지?”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론은 사내가 대답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베 공작가는 아닐 거고, 그 뒤에서 국면을 쥐고 흔드는 놈들이 분명한데…….”
사내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여전히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론은 그 반응을 정확히 잡아냈다. 제론은 사내의
마나가 어떻게 흔들리는지 끊임없이 살펴봤다.
조금 전 그 흔들림이 살짝 커졌다. 동요했다는 뜻이었다.
“슈린 공작가를 흔든 것도 모자라 나베 공작가까지 흔든 걸 보면 보통 놈들은 아닌데 말이지.”
사내의 마나가 거세게 흔들렸다. 설마 이렇게까지 잘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사실 사내가 아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조직의 손길이 닿은 귀족가는 그보다 훨씬 많다는 걸 알지만 사내에게
허락된 정보는 딱 거기까지였다.
또한 사내가 나서서 처리해야 하는 일도 딱 그 두 공작가에 한해서였다.
이번에 나베 공작가에 제대로 힘을 실어 주기 위해 한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서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선
적은 거의 없었다.
또한 일단 나섰다면 무조건 성공했다. 이번이 첫 실패였다.
“그 일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생각보다 거물일 수도 있겠는데? 대체 그런 거물이 왜 직접 나선 거지? 수하도
많을 텐데.”
사내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면서 직접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수하가 왔다면 본거지까지 탈탈 털렸을
것이다.
“혼자 죽고 수하들은 다 살리겠다, 뭐, 그런 생각인가?”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런 식으로 꼬리를 잘라 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들과 관계된 것은
철저히 박살 낼 것이다.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론이 사내의 목을 꽉 잡아 들어 올렸다. 사내의 몸이 힘없이 끌려 올라갔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복면부터
벗겼다.
“크윽!”
사내가 몸부림 쳤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미동도 할 수 없었다. 복면이
벗겨진 사내의 얼굴은 상당히 준수했다.
제론은 다시 사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복면을 벗긴 것은 단지 사내를 감추고 있던 껍질 하나를 벗기는
의미였다.
사람은 보통 얇은 꺼풀로 모습을 가리면 더욱 거침이 없어진다. 또 용기를 넘어선 객기를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에 익숙해진 사람은 꺼풀이 사라지면 한없이 작아진다.
“자, 이제 다시 얘기를 해 볼까? 내가 묻는 질문에 딱 하나만 제대로 대답해 주면 깔끔하게 보내 주지. 어때?
이제 좀 구미가 당기나?”
사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제론을 노려봤다. 이제 조금씩 몸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래 봐야 억지로 기는
수준이었다. 제대로 기습을 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날 감시한 정보 조직의 말단 조직원 하나만 알려 줘. 어때? 별로 어렵지 않지?”
순간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말로 어렵지 않다. 정보 조직의 말단 조직원은 조직에 접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그 하나 없어진다고 해도, 또 은밀히 감시한다고 해도 별다른 성과를 얻기 어려웠다.
‘기껏해야 정보 조직의 한 귀퉁이가 날아가는 정도?’
그것도 엄청난 노력을 동반해서 차근차근 정보를 모으고 파고들어야 가능했다. 그래서 조직원 하나 알려 주는 건
정말로 어렵지 않았다.
“근데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정보만 듣고 날 보내 주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그럼 난 네가 제대로 된 정보원을 알려 줬는지 어떻게 믿지?”
“그건…….”
“다 그런 거야. 일단은 그냥 서로 믿는 수밖에 없는 거지. 또 알아서 상대의 거짓을 눈치채야 하는 거고.”
사내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확실히 그렇다. 사내가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그 정도면 조직의 입장에서는 타격도
아니었다. 여기에 모험을 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좋아. 한 명만 얘기해 줄 테니 잘 들어라.”
사내가 신상 명세 하나를 읊었다. 제론은 그것을 잘 들으며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미끼 하나를 던져 월척을
줄줄이 낚으려면 준비가 철저해야만 한다.
제론이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거침없이 발길질을 날렸다.
퍽!
“끄윽!”
사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휙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 순간 제론의 손에서 3 개의 마법진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져 사내의 등으로 스며들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사내가 소리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제 됐지? 가 봐. 다음번에 다시 잡히면 더 이상의 목숨 연장은 없다.”
사내는 복잡한 눈으로 제론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훌쩍 날려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호텔
최상층이었기에 상당히 높은 곳이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론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내 침대로 가서 앉았다.
“여기도 적당한 유적 하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아벤드에 유적이 있다면 정말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곳에서야말로 정보가 곧 돈이고 힘이었다.
제론은 일단 감각의 날을 세웠다. 그리고 주변으로 감각을 넓게 퍼트렸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는 게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호텔이었다. 그것도 정체불명의 조직이 정보를 장악한 도시의 가장 좋은 호텔이었다. 뭔가 정보
수집에 관한 조치가 취해져 있을 게 분명했다.
제론은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기에 손바닥을 댔다. 제론의 손바닥을 통해 마나가 꾸역꾸역 밀려 나왔다.
“호오.”
제론이 눈을 빛냈다. 이곳에도 있었다. 소리를 모아 어딘가로 보내는 장치가 말이다. 어딘지 모르지만 정말로
대단한 조직이었다.
미리 확인했다면 조금 전 사내와의 대화도 유출되지 않게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늦어 버렸다.
“뭐, 상관없지.”
제론은 마나를 더욱 많이 흘렸다. 그리고 조금 더 섬세하게 조종했다. 가느다란 실을 따라 제론의 마나가
흘러갔다.
마나의 흐름에 따라 제론은 정확히 이곳에서 나간 소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냈다. 일단 알아낸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조심은 해야지.”
정보 수집 장치의 특성상, 아직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 상부로 보고되었을 리는 없었다. 아마 며칠, 혹은 몇 시간
더 기다려야 제대로 된 보고가 올라갈 것이다.
그 전에 그곳을 싹 정리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감시하는 자의 눈도 속여야 한다. 제론은 그 부분에서
사실 조금 놀랐다.
누가 감시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떤 특별한 방식의 정보망을 이용해 감시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지나다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정보원일 수도 있었다.
예전 빈민가에서 바인이 제론을 파악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일 가능성도 있었다.
어쨌든 제론은 그들의 눈을 피해야만 했다.
제론은 일단 방의 커튼을 모두 쳤다. 하지만 밖에서 안을 감시하지 못하게 하려면 커튼만으로는 안 된다. 이
커튼 역시 특별한 소재로 만들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제론의 마나링이 맹렬히 회전했다. 그리고 마법진이 나타나 산산이 부서지며 커튼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커튼에
어떤 특별한 조치가 취해졌든 안을 살펴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제론은 아공간에서 병을 하나 꺼냈다. 은빛 액체가 가득 채워진 병이었다. 그것은 특별한 마법진을 그릴 때 쓰는
시약이었다.
제론은 그 시약을 이용해 바닥에 마법진 하나를 정성껏 그렸다. 온 신경을 집중해 그려야 할 정도로 복잡한
마법진이었다.
바닥에 마법진을 그린 제론은 시약에 마나를 담아 허공에 선을 그었다.
스윽.
놀랍게도 허공에 그림이 그려졌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기반으로 입체 마법진이 구현되었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제론은 시약을 다시 아공간에 담았다.
방 한가운데에 그려진 마법진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은빛
선으로 이루어진 입체 마법진에는 안으로 들어가는 문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제론은 그 문을 통해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법진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이 마법진 자체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한순간 강렬해진 빛이
사라지자,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빛도, 제론도, 그리고 은빛 선으로 이루어진 마법진도.

Chapter 4 낚시

제론이 나타난 곳은 빈민가 깊은 곳이었다. 인적이 전혀 없었지만 제론은 이동과 동시에 몸을 날려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혹시 어떤 눈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조심하는 게 상책이었다.
소드 마스터에 이른 제론의 움직임을 이렇게 어두운 밤에, 그것도 빛 한 점 없는 빈민가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론은 빠른 속도로 빈민가를 벗어났다. 그러면서 마법을 준비했다.
8 개의 마나링을 이용해서 쓸 수 있는 마법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중에는 당연히 모습을 감추는 마법도 있었다. 제론은 마나링을 가속시켜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샤아아아!
마법진이 부서지며 제론의 몸에 흡수되었다. 그러자 제론의 몸이 마치 허공에서 녹아내리는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제론은 모습을 감춘 뒤에도 빠르게 움직였다. 당연히 기척을 완전히 감췄다. 게다가 이동하면서 공기의 흐름까지
신경을 썼다. 아마 누군가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목적지는 호텔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곳이었다. 빈민가를 벗어난 제론은 우범 지대를 단숨에 관통했다. 그리고
호텔 근처의 건물로 스며들었다.
어찌나 빠르고 은밀한지 굳이 모습을 감추지 않았더라도 전혀 발견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건물로 스며든 제론은 미리 파악한 대로 지하로 내려갔다. 3 층 건물이었는데, 예전 레늄 왕국의 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상점과 주택이 결합된 곳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지하가 없는 건물이었다. 워낙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제론은 즉시 입구를 찾아냈다. 제론은 지하실 입구에 특별한 장치가 설치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누군가
문을 열거나 드나들면 내부와 외부로 그 사실을 알려 주는 장치였다.
만일 마법적 처리가 된 거라면 단숨에 무력화시켰겠지만, 이것은 마법이 완전히 배제된 순수한 기술력으로만
만들어진 장치였다.
제론은 문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론의 손에서 흘러 나간 마나가 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콰득! 콰득! 콰드드득!
내부의 기계가 완전히 뭉개졌다. 워낙 단숨에 모든 장치가 부서졌기 때문에 신호 알림 체계가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부 신호가 지하로 전달되었고, 또 일부는 외부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일단 충분했다.
제론은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제론의 눈에 긴 복도가 보였다. 이 복도 끝에 진짜 목적지가 있었다. 또한 이 복도 자체가 침입자를 위해 준비된
함정이기도 했다.
제론은 최대한의 속도로 복도를 주파했다.
콰과과과광!
충격파가 발생하며 복도의 모든 함정을 박살 내 버렸다. 제론이 워낙 빨리 움직였기에 함정 발동 시간이 제론을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함정이 발동되었을 때는 이미 충격파가 그 뒤를 이어 함정 자체를 부숴 버렸다.
복도를 완전히 지난 제론의 눈에 널찍한 방이 나타났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10 명의 사내가
보였다. 물론 제론의 몸은 마법으로 가려져 있었기에 그들이 본 것은 정확히 제론이 오며 박살 난 함정의
잔해였지만 말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지금까지 정리한 정보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제론은 그 정보가 다른 곳으로 가는 걸 원치
않았다.
스아악!
어느새 나타난 제론의 검이 가로로 길게 그어졌다.
촤촤촤촤악!
10 개의 목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피분수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제론의 몸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시 움직였다. 제론은 그들이 손에 들고 있던 정보 뭉치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어느새 뒤로 빠진 제론의 손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샤아아아!
화르륵!
불길이 쭉 쏟아져 나갔다. 엄청나게 뜨거운 불이었다. 그 불은 방 안의 모든 것을 날름날름 삼켜 버렸다.
불길이 퍼지는 속도가 가히 엄청났다. 제론은 그 뜨거운 불길 속에서도 털끝 하나 타지 않은 상태로 여유롭게 서
있었다.
주위를 슥 둘러본 제론은 나름 감탄했다. 사내들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 보고를 하는 모양이군. 아님 그보다 더 짧거나.”
정보를 남겨 둘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주 모든 정보를 수거해 간다는 뜻이었다. 정보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조직임을 알 수 있었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외부로 빠져나간 신호가 동료를 불러온 모양이었다.
제론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생각해 보니 굳이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저들이 자신을 어쩌겠는가.
기간트를 쓸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진짜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말이다.
제론은 손에 든 서류를 아공간에 넣은 후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새하얀 광채가 주변에 휙휙 날아갔다.
퍼버버벅!
천장 일부가 날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몸에 구멍이 뻥뻥 뚫린 사람들이 쏟아졌다.
몰래 다가와 천장의 비밀 통로를 통해 제론을 덮치려던 자들이었다. 제론이 그걸 미리 알아차리고 먼저 공격한
것이다.
천장에 통로가 생겼다. 그곳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놀란 눈으로 제론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으로 몸을 감춘 제론의 모습이 보일 리 없었다.
그리고 제론은 당연하게도 그들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제론이 천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사아아악!
길쭉한 마나의 실이 천장을 통해 바깥을 한바탕 휩쓸었다.
촤촤촤촤촤악!
그곳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동강 나며 피를 뿌렸다.
치이이익!
방 안으로 쏟아진 피가 즉시 증발했다. 그 정도로 열기가 엄청났다.
제론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복도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복도의 장치는 몽땅 부서졌기 때문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물론 부서지지 않았더라도 위험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복도를 통해 밖으로 나가자, 제론을 기다리던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건물 자체가 대로와 우범 지대에 걸쳐서
있었기 때문에 양쪽에서 온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제론은 그들을 가만히 확인하다가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적만 오지 않았다. 소란이 너무 크게 일어서 구경만
하려고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까지 몽땅 죽일 수는 없었다. 제론은 확실한 적만 죽이고 싶었다.
‘일단 찾아온 놈들은 하나도 안 놓친다.’
제론의 손에서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그걸 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에게는 허공에 갑자기 마법진이
떠오른 걸로 보였다.
파아아앙!
마법진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빛의 파편을 뿌려 댔다.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의 몸에 파편이 하나씩 박혔다. 워낙
빨랐기에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다들 기겁을 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제론은 피식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끝까지 남은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적일 확률이 높은데,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그들을 처리할 시간이야 넘친다. 어차피 이곳에는 다시 오면 그만이었다.
“유적 하나 있으면 좋겠군.”
또 유적이 아쉬워졌다. 유적이 있다면 언제든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제론은 문득 근처 유적에 대한 정보를 좀 확인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혹시 아는가. 허름한 유적이라도 하나
있을지 말이다.
원하던 목표를 달성한 제론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모르게 방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았다.
제론에게는 공간 이동 마법진이 있었다.
다만 마법진 설치 장면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는데, 제론은 그것을 아주 간단히
해결했다.
호텔 근처에 있는 빈집을 이용했다. 집이 비었는지 아닌지는 기감을 통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다.
제론은 은밀하게 호텔 근처의 집으로 스며들었다. 그 집에 오랫동안 비었는지, 아니면 잠깐 비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 집에는 지하실이 있었고, 제론은 곧장 지하실로 갔다. 그곳이라면 혹시 중간에 누군가 집에 오더라도 바로
들킬 위험이 없었다.
제론은 시약을 꺼내 정교하게 마법진을 그렸다. 그래도 몇 번 해 봤다고 익숙해져서 처음 그렸던 것보다는 좀 더
빨리 그릴 수 있었다.
마법진을 완성할 때까지도 집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마법진으로 들어갔다.
이내 마법진이 온통 빛으로 휩싸였다. 그리고 빛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제론은 호텔 방에 도착해서 커튼에 걸린 마법을 다시 확인했다. 마법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또한 그 마법을
간섭하는 어떤 것도 없었다.
어쩌면 제론을 감시하는 쪽은 지금 크게 당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커튼은 특수한 처리가 되어 있었다. 안에서 보면 그냥 보통 커튼이지만, 멀리서 특별한 도구를 통하면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제론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조용히 감각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이 보이지 않으니 분주하게 움직일 줄 알았는데, 막상
그러지 않으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신경을 덜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아니면 아까 그놈을 너무 믿었거나.’
나베 공작가는 확실히 제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나베 공작가의 뒤에 도사린 세력도 제론을 주시할
것이다.
오늘 온 놈은 그들이 보냈다. 보아하니 지금까지 실패를 모르던 자였다. 그러니 믿는 게 당연하다. 만일 제론이
오늘 죽는다고 확신했다면 굳이 괜한 감시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이거 너무 안일한데? 지금까지 보여 준 것들에 비해서 지나칠 정도로 허술해.’
제론은 경각심을 가졌다. 어쩌면 저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닐 가능성도 있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그쪽으로 보고가 들어갔을 것이다. 제론은 슬슬 자신이 미끼로 심어 둔 자들의 동태를 살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걸 하려면 태블릿을 꺼내서 확인해야 하는데, 왠지 이곳에서 하기에는 꺼림칙했다. 제론은 적당한 장소를
찾아봤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마음 놓고 태블릿을 통해 미끼를 확인할 수 있는 곳 말이다.
그걸 확인하면 저들이 진짜 안일한 상태인지, 아니면 뭔가 제론이 생각지 못한 다른 것이 있는지도 알아볼 수
있었다.
제론은 호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몰래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미행이 따라붙겠지만 차라리 대놓고
쫓아오면 얼마든지 대처가 가능했다.
‘싹 처리해도 그만이고.’
저들과는 양립할 생각이 없으니 최대한 강하게 나갈 생각이었다. 어쩌면 암중 세력은 자신이 제론 폰
에어스트라는 것까지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약간의 변장을 통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게 바꾸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호텔을 나선 제론은 느긋하게 걸어갔다. 물론 감각은 최대한 활성화시켰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마법의 힘까지
동원했다.
특별한 감지 마법을 통해 감각의 범위를 극대화했다. 제론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몽땅 확인하면서
걸어갔다. 그래서 속도를 제대로 낼 수 없었다.
‘호오, 이것 봐라?’
사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느껴졌다. 그들의 행동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당황이었다. 다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나타날 줄 몰랐다는 뜻인가?’
이로써 하나는 확실해졌다. 저들이 호텔방 안을 다른 방법을 통해 감시한 건 아니었다. 오늘 일을 벌인 그
사내에 대한 신뢰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중 제론이 아까 박아 놓은 마법의 기운을 가진 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굳이 찾아다니며
분류해 처리하는 번거로움을 없앨 수 있게 되었다.
제론은 빈민가 쪽으로 향했다. 누군가를 처리하는 데 그보다 좋은 장소는 거의 없었다. 그곳이 아니라면 다들
도시 밖으로 유인해서 해치워야 하는데, 그건 더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50 명도 넘는군. 상당한데?’
이들은 아마 정보원이라기보다는 누군가를 처리하기 위한 암살자나 타격대에 더 가까울 것이다. 물론 감시를 위한
정보원 역할도 동시에 할 수 있는 자들임이 분명했다.
즉, 상당히 뛰어난 재원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자들을 50 명이나 동원했다는 건 그 조직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지 단적으로 말해 주는 일면이었다.
그들에게는 제론 말고도 감시해야 할 대상이 잔뜩 있을 것이고, 또 처리해야 할 일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한데 제론 하나를 위해 50 명이 넘는 인원을 동원했다는 건, 그들을 제외하고도 충분히 여력이 남는다는 의미
아닌가.
제론이 빈민가로 접어들었다. 그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제론을 감시했다. 슬슬 감시 자체가 일정한 패턴을
띠게 되었다. 순간적인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다.
제론이 노리던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마법의 힘을 제거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다. 제론은 즉시 마법을 풀어 버렸다. 순식간에 정신적
여유가 찾아왔다. 이제 저들을 감시하면서도 지극히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제론이 갑자기 속도를 높이며 골목으로 쑥 들어가 버리자 뒤쫓던 자들이 당황했다. 딱 마음을 놓은 그 순간에
당해 버린 것이다.
다들 다급히 움직였다. 워낙 다급해 움직임이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몇 명이 유기적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길을 잘못 들었다.
그리고 제론은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
제론은 순식간에 담장 몇 개를 넘었다. 제론의 목표는 약간 동떨어진 자들이었다.
쫓아가던 자들이 골목에 들어섰지만 그들은 제론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그 순간 3 명의 사내가 힘없이 쓰러졌다. 제론의 일격에 내장이 박살 나며 즉사한 것이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론은 다시 은밀히 움직였다. 적의 기척은 하나도 남김없이 체크한 상태였다. 가장
멀리 떨어진 자가 다음 목표였다.
콰득!
제론의 손이 사내의 목을 비틀었다. 이번에도 즉사였다. 그렇게 또 하나를 처리한 제론이 이번에는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골목을 지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 같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렇게 훤히 보이는 곳에 나타났는데 제론을 발견하지 못할 리 없었다. 다들 섬뜩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이대로 포기해선 안 된다.
다들 다급히 제론을 쫓아 움직였다. 워낙 당황스러웠고, 또 갑작스러웠기에 이번에도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건 쉽지 않았다.
몇 명이 전체적인 움직임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제론이 사라졌다.
제론은 그들을 농락하듯 시간을 끌며 하나하나 처리했다. 결코 무리하지 않았다. 또한 결코 서두르지도 않았다.
제론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쫓는 사람들만 고려하지 않았다. 분명히 먼 곳에서 여기를 지켜보는 감시의 눈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모두 보여 주지 않았다. 그저 조금 빠르고 강하다는 인식만 심어 주었다.
제론이 자신을 쫓아온 자들을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움직임이 서로
어긋나는 바람에 습격할 기회가 많아졌다.
제론은 그들을 모두 처리한 다음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확실히 빈민가라서 그런지 빈집이 많았다. 그중 적당한
장소 몇 군데를 본 다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리를 차지하면 된다.
모습을 감추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쓸 생각이었다. 제론은 아무도 없는 집으로 일단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지하실이 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사방이 꽉 막힌 방은 있었다. 제론은 일단 그곳으로 가서 손을 펼쳤다.
지이잉!
손바닥 앞에서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지며 제론의 몸에 흡수되었다. 제론의 모습이 서서히
엷어졌다. 그리고 이내 사라져 버렸다.
모습을 감추는 투명화 마법을 쓴 것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마법이었고, 유지하는 건 더 힘들었지만, 현재
제론의 능력으로는 얼마든지 펼치는 게 가능했다.
최근 제론은 9 번째 마나링에 대한 단초를 얻은 상태였다. 이번에 암시장에 와서 각종 유물과 아티팩트를 살펴본
성과였다.
몸을 투명하게 만든 제론이 방에서 나갔다. 일부러 집에 들어올 때 문을 활짝 열어 놨기 때문에 그곳으로 그냥
빠져나가도 전혀 의심 살 일이 없었다. 아마 제론을 감시하던 자들은 아직도 제론이 이 집에 있다고 믿을 것이다.
제론은 몸을 감춘 채로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면서 신경을 집중했다. 혹시 이 근처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멀리서 감시하던 자가 의문을 가지고 다가올 수도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그를 처리해야만 했다.
그리고 멀리서 자신을 감시한 방법도 알아내고 말이다.
아무튼 제론이 그곳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제론은 유유히 빠져나와 처음부터 봐
뒀던 집으로 들어갔다.
제법 오랫동안 비어 있던 집이 분명했다. 집안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또한 밀폐된 방도 있었다.
그야말로 제론이 딱 원하던 장소였다.
제론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해서 움직였고, 문도 아주 살짝만 열고
들어갔다.
그렇게 자리를 잡은 제론은 본격적으로 태블릿을 꺼내 미끼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흥미로운 낚시가 말이다.

☆ ☆ ☆

제론에게 풀려난 다섯 사내는 곧장 가이츠 남작에게로 갔다.


그리고 실패에 대한 보고를 했다. 당연히 가이츠 남작은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더 중요한 만남이 남아 있었다.
아베티스 영지의 외곽에 허름한 선술집이 그들의 목표였다. 선술집에 들어간 다섯 사내는 긴장한 얼굴로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술집 가장 깊숙한 곳에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지키는 덩치 큰 사내가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을 미리 알고 있는 듯 제지하지 않고 들여보내 주었다.
안으로 들어간 사내들은 긴장한 눈으로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복도 끝에는 또 작은 문이 있었는데, 그 문 앞에
선 다섯 사내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끼이익.
이내 문을 열고 들어간 다섯 사내는 순간 강렬한 안광을 마주하고는 숨이 멎을 것처럼 놀랐다.
“헙!”
“거기 앉아라.”
안에는 단단한 체구의 중년인이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안광이 다섯 사람을 쫙 훑고 지나갔다. 그들은 그
눈빛만으로도 벌벌 떨었다.
“실패했다면서?”
중년인의 말에 사내들이 그대로 굳었다.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멍청하게 실패만 하고 그냥 온 건 아니겠지?”
다섯 사내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입도 뻥끗 못 했다. 그저 덜덜 떨기만 했다.
중년인의 안색이 변했다.
“정말 실패만 하고 달랑 목숨만 건져서 왔나?”
다섯 사내가 머뭇거리다가 억지로 입을 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중년인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죄송할 거 없다. 그냥 죽으면 되니까.”
다섯 사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중년인의 눈빛이 강렬해지면 강렬해질수록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공포에 온몸이 잠식당했다.
“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다섯이 동시에 외쳤다.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기회? 무슨 기회?”
“다시 가서 싹싹 털어 오겠습니다.”
“싹싹 털어 와? 그놈이 어디 있는 줄 알고?”
“아벤드로 간 게 확실합니다.”
중년인이 피식 웃었다. 그도 이미 정보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제대로 짐작하나 슬쩍 떠본 것뿐이었다.
“아벤드에 가면 그놈을 찾을 수는 있나?”
“찾을 수 있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다섯 사내가 과도한 자신감을 보였다. 당연했다. 그들은 아벤드에 독자적인 정보망을 구축해 뒀다. 물론 대단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사람 정도는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확신했다. 제론이 허름한 여관에 묵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다. 화려한 호텔을 위주로 조사하면 금방 답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그놈을 찾으면 뭘 털어 올 셈인데?”
“모든 걸 싹 털어 오겠습니다. 그놈이 뭘 하려는 건지, 뭘 하는지. 또 뭘 했는지. 몽땅 털어 오겠습니다.”
중년인이 눈을 빛냈다. 그러자 다섯 사내가 입을 꾹 다물고 덜덜 떨었다.
“그놈이 누군지 먼저 알아내라. 정체를 알면 다루기가 쉬워지거든.”
루이네와 함께 온 사람이 에어스트 백작이라는 사실은 철저한 비밀에 부쳐졌다. 제론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하이쓰 산맥에서 만났던 루이네와 기사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중년인은 자신했다. 만일 상대의 정체만 확실히 파악하면 그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말이다.
“시간은 열흘이면 충분하겠지?”
“마, 맡겨 주십시오.”
그렇게 대답하며 물러나는 다섯 사내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고작 열흘이라니. 아벤드에는 텔레포트
게이트가 없었다. 그렇기에 여기서 아벤드까지 가는 데에만 해도 사흘이 넘게 걸린다.
한데 그 안에 정체를 알아내라니. 시간이 빠듯해도 너무 빠듯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중년인은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보다 더 두려운 존재였다.
다섯 사내가 밖으로 나가자 강렬하게 빛나던 중년인의 안광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몇 번이나 쓸었다.
“부하 하나 만날 때마다 이 짓을 하려니 피곤해 죽겠군.”
중년인이 쓰는 것은 고대의 비술 중 하나였다. 중년인이 속한 조직에서 상위 계층에 오르면 익힐 수 있는
비술이기도 했다.
물론 그 비술을 쓰기 위해선 사전 준비가 상당히 많이 필요했다. 그 준비의 대부분이 비술에 당하는 사람에게
들어간다. 특별한 시술을 통해 공포심을 마음대로 자극할 수 있게 만드는 비술이었다.
중년인의 부하들은 모두 비술에 관련된 시술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조직의 상급자에게 절대복종한다. 안
그러면 죽음보다 두려운 공포가 온몸을 잠식하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그놈의 정체가 뭐지?”
중년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턱을 쓰다듬었다. 난데없이 이상한 놈이 하나 등장해서 일을 망치고
있었다. 이 영지는 최대한 빨리 나베 공작가에 넘어가야 한다.
그래야 조직의 일이 수월해진다. 만일 그게 안 되면 조직의 요직에 앉는 건 포기해야만 한다. 그가 속한
조직에는 인재가 너무 많아서 위로 올라가는 경쟁이 치열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아벤드에 있는 조직의 정보망이 벌써 그를 처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보여 준 능력을 고려해 보면
그리 쉽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직접 얼굴을 보면 인상착의로 대충 누군지 찍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중년인은 사람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래서 전 대륙의 유력자는 몽땅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만일 실제로 그 사람을 한 번 보기만 하면 단번에 누군지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그가 이곳
아베티스 영지에 나타났을 때 확인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말이다.
“그때 자리를 비우는 것이 아니었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이 그렇게 급박하게 진행될 줄은 몰랐다. 가이츠 남작을 너무 믿었던 대가이기도 했다.
중년인은 고민에 잠긴 얼굴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작은 마법진 하나가 바닥을 타고 흘러와 그의 몸에 스며드는 광경을 말이다.
마법진은 은은하게 빛났다가 산산이 부서지며 중년인의 몸 곳곳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중년인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 ☆ ☆

제론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정말로 어려운 마법 하나를 성공시켰다.
가까이 있었다면 아무것도 아닌 마법이었지만 이렇게 원거리에서 그걸 성공시키려면 보통 능력과 집중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솔직히 제론도 단번에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한데 성공해 버렸다.
이번 마법의 성공으로 9 번째 마나링에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다섯 사내 중 하나를 선택해 그의 몸에 설치된 모든 마법을 싹 옮기는 마법이었는데, 그걸 원격으로 해낸 것이다.
사실 8 개의 마나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마법이었는데, 다섯 사내의 몸에 설치한 마법에 나름대로의 준비를 해
뒀기에 가능했다.
어쨌든 마법이 성공한 덕분에 앞으로 아베티스 영지에 있는 적의 상당히 중요한 인물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또 뭘 보는지, 누굴 만나는지 전부 말이다.
제론은 잠시 쉬면서 마나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체력을 회복했다. 다음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게 좋았다.
잠깐 시간을 가진 제론은 다시 태블릿을 통해 다음 정보를 확인했다. 오늘 자신을 죽이려고 왔다가 돌아간 사내를
살펴볼 차례였다.

☆ ☆ ☆

“실패? 네가?”
아벤드의 정보를 총괄하는 지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섀도우소드가 실패할 줄은 몰랐다.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만해도 가볍게 생각했다. 한데 일이 참으로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목표가 펠젠과 접촉했다. 둘은 마치 서로 잘 아는 사이 같았다. 그래서 좀 더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 한데
목표가 기간트를 팔아 돈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칫 그 돈이 아베티스 영지로 흘러가면 상황이 악화되기에 결단을 내렸다. 섀도우소드를 동원해 단숨에 일을
정리해 버리기로 한 것이다.
한데 실패라니, 섀도우소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 어떤 어려운 임무도 척척 해냈다.
한데 실패한 것이다.
새삼 상대에게 경각심이 들었다.
대체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더니 허락도 구하지 않고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쾅!
부서질 듯 문이 흔들리며 열렸다. 그리고 사내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지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들어온 사내를 노려봤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이런 식이면 곤란했다.
하지만 수하의 이어지는 말에 그의 안색도 창백해지고 말았다.
“지하 정보 수집처가 무너졌습니다!”
“뭣이!”
지부장이 벌떡 일어났다. 지하 정보 수집처는 각 도시의 유명 호텔 근처에 만들어 정보를 모으는 곳이었다.
그곳을 만드는 데 들어간 돈을 생각하면 이렇게 무너져선 결코 안 되는 장소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누군가 침입해서 정보원을 싹 죽였습니다!”
“경비병은! 경비병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이냐!”
“그들까지 모두 당했습니다!”
지부장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만일 그렇다면 이건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습격을 했다는 뜻이다. 조직의
정체를 아는 누군가가 말이다.
‘설마 조직 내의 경쟁자들은 아니겠지?’
조직 내에선 각 도시의 정보를 총괄하는 지부장들의 위로 올라가기 위한 권력 다툼이 엄청났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는 경우는 없었다.
조직이 건재해야 위로 올라간 자리에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들 그걸 알기에 서로 알력 다툼은 해도 무력을
쓰지는 않았다.
한데 누군가 그 균형을 깨 버렸다면,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선 안 된다. 균형을 깬 사람을 내버려 두면 그 사람만
계속 승승장구할 테니까 말이다.
“끄응.”
지부장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골치가 지끈거렸다.
“감시하던 놈은 어쩌고 있느냐?”
“방금 호텔을 나섰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쫓아. 보통 놈이 아니니까 조심하고 인원을 잔뜩 보강해.”
“알겠습니다.”
“명심해. 그냥 감시만 해. 제대로 싸울 놈들은 따로 보내 줄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지부장이 섀도우소드를 바라봤다.
“명예 회복의 기회를 주지. 해 보겠느냐?”
“맡겨 주십시오.”
섀도우소드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고 말 것이다. 혼자 나서는 게 아니니 자신
있었다.
동료들이 다 죽어 나가도 상관없었다. 그들이 난리를 치면 반드시 빈틈 하나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빈틈
하나면 된다.
‘무조건 죽인다.’
섀도우소드가 주먹을 꽉 쥐며 밖으로 나갔다.
지부장은 그 뒷모습을 보면서 수하에게 내리던 명령을 마무리했다.
“타격대를 모아. 전부 섀도우소드를 지원하라고 전해. 타격대가 목표에 접근하면 적당히 정보원은 뒤로 빼.
잘못하다간 구멍이 커진다.”
“예.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수하가 밖으로 나가자, 지부장이 자리에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지부장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로 철저히 당한 건
의문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조직 내에 있는 놈이 날 물 먹이는 것 같은데…… 대체 어떤 놈이지?”
자신을 견제하는 건 용서해도 정보 수집처를 무너뜨린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걸 다시 구축하려면 엄청난 돈과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 식으로 무너졌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호텔 쪽도 정비가
필요할지 모른다.
만일 호텔까지 손봐야 한다면 훨씬 많은 돈이 필요하다.
그 많은 돈과 시간, 그리고 인력을 써야 하니 얼마나 많은 질책을 받겠는가. 어쩌면 지부장 자리에서 밀려날
수도 있었다.
“누군지 잡히기만 해라. 아주 갈아 마셔 줄 테니까. 으드득.”
지부장은 이를 갈고 눈을 감았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아무래도 조금 눈을 붙여 둬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지부장이 눈을 감고 피로를 풀고 있을 때, 마법진 하나가 바닥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그리고 그대로
지부장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진 마법진이 지부장의 몸 곳곳에 스며들었다.

☆ ☆ ☆

제론은 태블릿을 끄고 아공간에 넣었다. 이제 볼 건 다 봤다. 제대로 마법진을 심었다. 이대로 몇 번만 더 하면


적의 심층부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미있군.”
이번에는 훨씬 수월하게 마법진을 심을 수 있었다.
마나 컨트롤이 늘어난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거리가 가까워서 힘이 좀 덜 들었다.
어쨌든 이번에 확인한 덕분에 자신을 노리고 적 조직의 타격대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섀도우소드가 그들과 함께 틈을 노린다는 것도 알아냈다.
몰랐어도 당하지 않겠지만 이렇게 알았으니 더 당할 일이 없었다.
“그럼 슬슬 모습을 드러내 볼까? 아무래도 여기서 다 처리하는 게 낫겠지?”
그 정도로 하면 아벤드에 적이 구축한 정보망이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티만 있으면 아벤드도 장악할 수 있었을 텐데 좀 아쉽긴 하군.”
제론은 몸을 일으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정말로 유적이 없는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생각한 건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게 낫다. 제론은 곧장 바인에게 연락해 아벤드 근처에 유적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현재 바인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게 커진 상태였다.
제론은 레늄 왕국 내에서 얻은 유적을 토대로 엄청난 정보망을 구축했다. 마티를 이용한 정보망이었기에 정확하고
안전했다.
그걸 몽땅 바인에게 넘겼다. 당연히 제약은 걸었지만 그쯤이야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거대한 정보망을 한꺼번에 얻은 덕분에 바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거기에 익숙해지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인은 제론의 명령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얻은 능력을 토대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제론은 바인에게 연락한 뒤, 빈집을 나섰다.
빈민가는 지금 온통 들썩이고 있었다. 적 조직에서 나온 자들이 빈민가를 들쑤시며 제론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러니 제론이 나오니 대번에 그들에게 보고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제론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제론은 느긋하게 걸었다. 이제 급할 것이 전혀 없었다. 오는 족족 쳐 죽이고 빈틈을 봐서 빠져나가면 된다.
사실 완전히 무너뜨려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명목이라도 유지해야 이곳 지부장이 더 상위의 조직원을 만나기라도 할 것 아닌가.
‘마법진을 좀 손봐야겠군. 그냥 옮기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새끼를 낳는 것처럼 새로운 마법진을 만들어 붙이는
방식으로 가는 게 낫겠어.’
제론은 머릿속으로 새로운 마법과 마법진을 구상하며 걸음을 옮겼다.
“저기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고, 수많은 사내들이 달려왔다. 하나같이 손에 흉험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제론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달려드는 사내들을 맞이했다. 일단 손을 뻗어 가장 가까이 있는 자의 검을 단숨에
빼앗았다.
검을 빼앗긴 자도 어떻게 뺏겼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절묘하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제론은 적의 검을 빼앗아 가볍게 휘둘렀다.
촤아아악!
다가오던 자들이 일제히 두 동강 나서 쓰러졌다. 바닥에 피가 흥건하게 고였다.
제론은 거의 기계적으로 검을 휘둘렀고, 그런 검에 적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러면서도 제론은 머릿속으로 새로운 마법진을 구상했다. 실로 놀라운 능력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유적에서
수련을 해 온 제론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몇 번 검을 휘두르니 남은 사람이 몇 없었다. 제론은 구멍이 뻥 뚫린 포위망을 통해 쑥 몸을 뺐다.
굳이 도망가려 애쓸 필요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검 몇 번 휘두르고 나면 포위망에 구멍이 뚫리고, 거길 통해
빠져나가면 웬만해선 제론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적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그렇게 마법진을 구상하며 몇 번의 포위망을 빠져나갔을 때, 제론의 뇌리에 경고등이 깜빡였다. 미리 있을 거라
예상했기에 일부러 펼쳐 놓은 감각의 범위 안에 섀도우소드가 들어온 것이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검을 던졌다.
슉! 퍽!
섀도우소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심장에 틀어박힌 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경악에 찬
시선으로 제론을 바라보다가 절명했다.
섀도우소드는 몸에 새겨진 마법진을 지부장에게 전해 준 걸로 모든 소임을 다했다. 제론은 더 이상 그를 살려 둘
필요가 없었다.
섀도우소드까지 처리한 제론은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 어차피 호텔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이제부터는 드러내
놓고 움직일 것이다.
제론은 빈민가와 우범 지대의 경계에 있는 펠젠의 건물로 향했다.
향후 싸움은 정체불명의 조직과 펠젠이 알아서 할 것이다. 제론은 펠젠에게 약간 힘을 실어 주기로 했다. 아마
아벤드의 밤이 상당히 시끄러워질 것이다.
‘여기서 딱 바인이 나서면 끝내주는 결과가 나올 텐데.’
아쉽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굳이 아벤드를 장악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아직 남은 유적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걸 하나하나 장악할 때마다 정보망이 늘어난다.
바인은 그걸 관리하고 다루는 것만으로도 아마 죽어날 것이다.
어느새 펠젠의 건물에 도착한 제론은 건물 안으로 훌쩍 들어가 버렸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적의 타격대를 반 이상 없애 버렸다. 아마 그걸 다시 키우려면 상당한 돈과 시간이 들어갈
것이다.
모든 것은 제론의 의도대로 되었다.

Chapter 5 경매

“예? 경매를 100 건이나 내놓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왜? 어렵나?”
“그, 그건 아니지만…… 기간트는 경매에 올리지 않고 그냥 파는 것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만…….”
“걱정하지 마라. 기간트는 그냥 팔 테니까. 내가 경매에 올리려는 것들은 좀 특별해. 예를 들면 이런 거
말이야.”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목걸이 하나를 탁자에 올렸다. 펠젠은 그 목걸이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대체 이게 뭡니까? 고대 유물쯤 될 것 같기는 한데…….”
“맞혀 봐.”
“예?”
펠젠이 황당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대체 이게 어떤 물건인지 어떻게 맞힌단 말인가. 설명도 안 듣고 말이다.
사실 고대 유물 중에는 그래서 가치가 제대로 책정되지 않은 물건도 상당히 많았다. 우연히 사용법이 발견되는
바람에 가치가 수백, 수천 배나 상승한 유물도 있었다.
“그걸 할 수 있으면 제가 여기 있겠습니까? 유물 장사를 해서 떼돈을 벌죠.”
제론이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집어서 들어 올렸다.
“이 목걸이, 내가 100 골드에 산 거야.”
“100 골드? 어디서…… 아! 설마 그때?”
펠젠도 제론이 이걸 어디서 샀는지 기억이 났다. 암시장 좌판을 돌아다니면서 유물을 잔뜩 사더니 이게 바로
그거인 모양이었다.
“한데 고작 100 골드짜리를 경매에 내놓으신단 말씀이십니까?”
“이게 100 골드짜리로 보여?”
“예? 분명히 100 골드라고…….”
“내가 산 게 100 골드지, 이 유물의 가치가 100 골드일 리가 없잖아.”
“예? 그게 무슨…….”
제론은 씨익 웃으며 목걸이를 움켜쥐고 한마디 중얼거렸다.
“밸로스.”
쉬아아악! 꽝!
“으허헉!”
펠젠은 화들짝 놀라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갑자기 빛나는 화살 하나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빛으로 이루어진 화살은 펠젠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머리 옆을 지나가 벽에 부딪쳤다. 펠젠이 물러난 건
두려움으로 인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펠젠은 억지로 고개를 돌려 빛의 화살이 부딪친 벽을 쳐다봤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허억!”
벽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복도를 지나 있는 벽에도 금이 쫙쫙 갔다. 굉장한 위력이었다.
“그, 그게 대체 뭡니까?”
“뭐긴, 고대에 만들어진 아티팩트지. 하루에 빛의 화살 10 발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목걸이야.”
“하, 하루에 10 발입니까?”
“그래.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하나씩 충전되고.”
펠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정도면 경매로 팔면 수천 골드는 받을 수 있었다. 아니, 잘만 받으면 1 만 골드를
넘기는 것도 가능했다.
고대 유물 중에서 이렇게 공격에 관계된 물건은 흔치 않았다.
“어때? 경매에 올릴 만해?”
“무, 물론입니다! 이런 게 경매에 가는 거죠!”
“좋아. 그와 비슷하거나 더 좋은 물건이 100 개 있으니 그거 싹 올려.”
펠젠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모습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일 할은 수수료로 떼어 가.”
“예? 정말입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야 제대로 일할 거 아냐.”
펠젠이 벌떡 일어나 제론에게 허리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간트도 계속 팔아야지? 일단 10 기 더 줄 테니까 팔아 봐. 그거 파는 거 봐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펠젠은 허리를 더 아래로 굽혔다. 머리가 거의 땅에 닿을 듯했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가치가 좀 덜 나가는 유물도 내줄 테니까 잘 팔아 봐. 수수료는 일 할인 거 알지?”
쿵!
펠젠의 이마가 땅에 닿았다.
“잘하겠습니다!”
제론은 그런 펠젠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었다.
“그럼 일단 경매부터 시작해 봐.”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펠젠이 미리 마련해 준 건물 내의 거처로 갔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생활할 계획이었다. 적 조직이 계속 도발할 것이다. 그걸 막아 내다 보면 적의 힘을
약화시키고 펠젠을 키울 수 있었다.
펠젠을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통제가 가능했기에 차라리 어설프게 믿을 만한 사람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곳 아벤드는 펠젠에게 맡기기로 결정을 내렸다.

☆ ☆ ☆

거처에 도착한 제론은 침대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명상을 시작했다.


유물은 펠젠이 처리할 테니, 제론은 그것을 기다리면서 9 번째 마나링을 만드는 데 모든 심혈을 기울일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바인이 유적에 대한 정보를 주면, 유적을 찾아 나서고 말이다.
제론이 이렇게 9 번째 마나링을 서두르는 이유는 텔레포트 게이트 때문이었다.
최근 텔레포트 게이트를 영지에 설치하기 위한 준비를 조금씩 하고 있었는데, 그걸 정확히 설치하기 위해선 9
개의 마나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지 않아도 설치는 가능하지만, 그런 경우 실패율이 존재했다.
그걸 없애기 위해선 마법진의 구성이 정교해야 하는데, 그 정도로 정확하려면 9 개의 마나링이 필요했다.
초고대에는 정교함을 높이기 위한 아티팩트가 따로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구할 수 없었다. 그
아티팩트를 만들기 위해선 11 개의 마나링이 필요했다.
제론은 명상을 하다가 눈을 떴다. 마법 실력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방법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직접 아티팩트를 만들어 볼까?”
마법등 같은 저급한 아티팩트가 아니라, 고대 유물 급의 고급 아티팩트를 만들어 본다면 분명히 마법 실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아티팩트를 만드는 것은 그냥 마법진을 그려 마법을 펼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안 그래도 아티팩트를 만들어 상단을 통해 판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판매할 아티팩트는
기존의 상단이 취급하던 것과 비슷한 것들이었다.
물론 초고대문명의 지식이 포함된 아티팩트였기에 제작 단가가 훨씬 낮고, 성능이 뛰어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마탑을 통해 제작이 가능한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유적에서 발굴한 아티팩트는 완전히 달랐다.
사실 현재의 마법이 그렇게 수준 낮은 것은 아니었다. 일단 기간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준의 마법 공학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마법진은 대부분 규모가 크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을 작은 물품에 담으려면 엄청난 압축률이
필요한데,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고대 유물이 큰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현재의 마법 공학으로 구현이 아직까지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것이 가능했다. 아니, 초고대문명의 지식과 마법을 이용하면 고대 유물보다 훨씬 대단한 마법
아티팩트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위해 마법에 대한 더 깊은 공부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초고대나 고대에는 아티팩트 마법 공학이 따로 존재했다. 그것을 기초부터 차근차근 공부해야만 하는 것이다.
일석이조였다. 마법 경지도 올리고, 아티팩트를 만들어 돈도 벌고 말이다. 또한 쓸 만한 아티팩트의 경우 영지의
가신에게 나눠 주면 전력 상승도 꾀할 수 있었다.
마나링이 11 개로 늘어나면 아티팩트를 대량생산할 방도가 열린다. 어쩌면 그 전에 유적을 통해 그 방법을
얻을지도 모른다.
‘그럼 걱정이 몽땅 사라질 텐데.’
돈과 무력을 갖췄는데 뭐가 무섭겠는가. 천천히 인구를 늘이며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 와중에 슈린
공작가는 부숴야겠지만 말이다.
제론은 곧장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일단 아티팩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법진을 물건에 정교하게 새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일단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만들어 갖춰 나가야겠군.”
본격적으로 아티팩트를 제작하려면 그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제론은 일단 시작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하기로 한 것은 기초 장비 제작이었다.

☆ ☆ ☆

아벤드가 술렁였다. 아벤드의 밤을 지배하는 세력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세력이 흔들리면서 그 아래 숨죽이고 있던 세력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펠젠도 거기에 슬그머니 발을 걸쳤다.
처음 펠젠의 세력은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막대한 자금이 유입되면서 단숨에 성장했다.
펠젠의 성장은 다른 세력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벤드를 원래 장악하고 있던 세력이 워낙 강대하고 돈과 정보를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지라, 그들과 상대하려면
급성장한 펠젠이 꼭 필요했다.
펠젠은 암시장에서의 영향력도 점점 키워 갔다. 그가 경매에 내놓은 물건들은 하나같이 대단했다. 고대 유물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것들이었다.
또한 꾸준히 내다 파는 기간트 역시 뛰어난 품질을 자랑했다.
펠젠이 갈퀴로 돈을 긁어모은다는 소문과 펠젠의 뒤에 큰손이 도사리고 있다는 소문이 동시에 돌았다.
그 모든 소문과 관심의 중심에 선 펠젠은 오늘도 느긋하게 경매장으로 향했다.
매일 경매장에 들러 경매 현황을 살펴보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경매장에 도착한 펠젠은 특별 대우를 받으며 호위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펠젠에게 제공되는 자리는 물품이 가장 잘 보이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거의 띄지 않은 곳이었다. 경매장 측에서
특별히 제작한 자리이기도 했다.
경매장 안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최근 경매장이 이렇게 호황을 누리는 것도 다 펠젠 덕분이었다. 아니,
펠젠의 뒤에서 물건을 공급한 제론 덕분이었다.
‘으흐흐흐, 기분 좋구나.’
펠젠은 이 기분과 분위기를 만끽했다. 자신이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 보겠는가. 하지만 앞으로는 매일 이런
대접을 받으며 살 것이다. 제론의 손만 놓치지 않으면 말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펠젠은 제론을 깍듯이 모셨다. 제론이 원하는 건 최대한 들어주려 애썼고, 또 제론을
속이는 일은 전혀 없었다.
제론이 일을 맡겨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펠젠도 자신이 수수료를 상당히 많이 챙기는 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제론이 신경을 써 준 것이다.
경매가 진행되었다. 펠젠이 내놓은 물건은 중간중간에 섞여 있었다. 다들 특별한 마법이 인챈트된 고대
아티팩트였다.
“오, 드디어 나왔군.”
펠젠이 눈을 빛냈다. 마법 화살을 하루에 10 번 날릴 수 있는 특별한 목걸이가 나왔다. 저 다음에 나올 것은
마법 방패로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반지였다.
최소 수천 골드에서 수만 골드까지 받을 수도 있는 굉장한 아티팩트였다.
목걸이나 반지에 마법을 각인시키는 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고대 유물이 아니면 그런 물건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목걸이가 등장하자 사방이 술렁였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저건 내가 판 목걸이 같은데?”
사내의 말에 주변에 있던 몇몇이 그를 쳐다봤다. 물론 경매장이 워낙 넓고 사람이 많아 목소리가 멀리 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서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에 약간의 관심을 가졌다.
“당신이 판 목걸이란 말이오?”
중년인 하나가 묻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 내가 판 목걸이가 분명하오.”
“저런 목걸이가 최근 경매에 나온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당연하지. 경매에 판 물건이 아니오. 저건…… 내가 좌판에서 100 골드에 판 목걸이요.”
그 말에 중년인이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저런 대단한 목걸이를 대체 왜 100 골드에 판단 말인가.
경매에 넘기지 않아도 2 천 골드는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물건을 말이다.
“잘못 본 거 아니오? 고대 유물 중에는 비슷한 모양의 장신구가 상당히 많소.”
사내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기억하오. 저 목걸이에는 흠집이 하나 있는데, 그 위치가 똑같소.”
그렇게까지 말하니 중년인도 흥미가 커졌다. 그리고 목걸이를 자세히 살폈다.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마나를
수련했기에 목걸이에 난 흠집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호오, 정말로 흠집이 있군.”
“내가 미쳤지. 저걸 고작 100 골드에 팔다니…….”
사내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중년인이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이거 펠젠이라는 자의 능력이 예상 이상인 모양이야.’
만일 저 목걸이가 마법을 담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구입했다면 굉장한 능력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아니라 우연이라면 상당한 운을 가졌다는 뜻이고 말이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작은 편은 아니었기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대화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씩 대화
내용이 옆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경매는 계속 진행이 되었다. 결국 마법 목걸이는 7 천 골드에 낙찰이 되었다.
100 골드에 산 목걸이가 7 천 골드에 팔렸으니 경매 수수료를 제하고도 앉은 자리에서 6 천 골드 이상을 번
셈이었다.
다음 경매는 마법 방패를 하루에 5 번 쓸 수 있는 반지였다. 이것은 조금 전 목걸이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 형성될
것이다.
더 작고 아름다웠으며, 위기 상황에서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받는 물품이었다.
반지가 경매장에 등장했을 때, 누군가가 놀라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내가 판 반지?”
대번에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얼빠진 표정으로 반지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 역시 좌판으로 고대 유물을 파는 상인이었는데, 얼마 전에 100 골드를 받고 저 반지를 팔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만일 중년인과 사내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저
반지가 혹시 그 반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펠젠이 있었어!”
그 반지를 분명히 펠젠과 함께 있던 자에게 팔았다. 아니, 펠젠에게 팔았다. 즉, 저건 분명히 자신이 100
골드에 판 반지였다.
청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매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했다.
경매가가 계속 치솟았다. 결국 반지는 2 만 2 천 골드에 낙찰되었다.
청년이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억울해 미칠 것만 같았다. 저걸 고작 100 골드에 팔았다니, 이런 멍청한 짓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날 경매에 나온 물품 중, 펠젠이 내놓은 것은 총 7 개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7 개 물품의 원래 주인들이
경매장 안에 있었다.
그것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펠젠이 고대 유물의 가치를 정확히 알아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아벤드에 해일처럼 퍼져 나갔다.

☆ ☆ ☆

펠젠은 있는 대로 인상을 쓴 채 창밖을 슬쩍 내다봤다. 엄어마한 인파가 건물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물건을 판 사람들이 온 게 아니었다. 그거야 예전부터 드물게 있었던 일이었다. 우연히 헐값에 산 유물이 사실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더라 하는 얘기야 얼마든지 있었다.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유물의 기능을 알아내지 못했다면 끝까지 장식품에 더
가까운 물건으로 남았을 테니 말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든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자신이 가진 유물의 가치를 알아봐 달라고 온 것이다.
당연히 펠젠이 그걸 파악해 줄 이유가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럴 능력이 없었다.
“젠장, 일을 이렇게 만들고서 그분은 대체 어디 가신 거야?”
펠젠의 소문이 돈 이후 암시장에 고대 유물을 파는 사람들이 자취를 감췄다.
아니, 정확한 능력이 파악되어 정당한 가치를 형성한 유물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판매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유물은 아무도 내다 팔지 않았다.
암시장에서 그렇게 흔히 볼 수 있었던 유물 좌판이 몽땅 사라진 것이다.
당연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내다 판 유물이 혹시 수만 골드의 값어치를 갖는 아티팩트이면 어쩌란 말인가.
만일 지금 상황에서 그 일을 겪으면 그 사람은 바보 멍청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많은 유물을 다 끌어안고 갈 수는 없었다. 그걸 팔아야 돈을 만들 것 아닌가.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유물을 펠젠에게 들고 가는 것이었다.
“저걸 다 어떻게 처리하지? 젠장!”
펠젠은 난감했다. 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저들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다.
물론 좋은 점도 있었다. 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직 세력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조만간 적
조직이 습격을 할 거라 예상했는데, 저들 때문에 그게 불가능해졌다.
아벤드의 암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물건을 판다는 것은 반쯤 범죄자라는 뜻이었다. 결코 얌전한 자들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거친 자들이었고, 나름대로 실력도 뛰어났다.
그게 아니라면 암시장에 들락거릴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언제 죽어 나갈지 모르는 곳이 바로 이곳 아벤드의
암시장이었다.
그런 자들이 건물을 빙빙 둘러치고 있으니 적 조직이 섣불리 달려들 리 없었다.
그것 하나 빼고는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펠젠은 저들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뾰족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펠젠은 짜증 나는 얼굴로 문을 바라봤다. 노크도 없이
들어오다니, 가만두면 기강이 해이해질 것이다.
당장 주먹부터 날리려던 펠젠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당연히 표정도 굳었다. 물론 순간적인 일이었다.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무서우면서도 반가운 사람이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제론이었다. 제론은 혼자서 암시장을 둘러보러 갔다가 고대 유물 좌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야?”
“제발 도와주십시오.”
펠젠이 울상을 지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설명을 모두 들은 제론의 표정이 묘해졌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제론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이런 건 이용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제법 잘 써먹을
수 있는 자들 아닌가.
“해 준다고 해.”
“예? 하지만 그렇게 되면 소득이 급감하지 않겠습니까?”
“수량을 한정하면 돼.”
“예?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다들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이걸 쓰면 돼.”
제론이 유리 상자 하나를 꺼냈다. 제법 큰 상자였다. 마치 유물 같은 것을 안에 넣어 두는 보관함 같이 생겼다.
“이게 뭡니까?”
“유물의 가치를 측정하는 아티팩트야.”
펠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게 가능합니까?”
“이것도 고대 유물이야. 당연히 가능하지 않겠어?”
펠젠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보물이었다.
“그걸로 유물의 가치를 측정하면 되겠군요. 어떻게 쓰는 겁니까?”
“안에 유물을 넣으면 어떤 마법이 각인되어 있는지 확인이 가능해. 잘 봐.”
제론은 유리 상자의 뚜껑을 연 다음 미리 준비한 반지 하나를 안에 넣었다.
뚜껑을 닫자 유리 상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그 빛이 가운데로 모여 유물을 한 차례 감쌌다가 떨어져 나와 뚜껑에
달라붙었다.
이내 그 빛은 글자가 되었다.
“자, 보이지? 이게 바로 안에 각인된 마법에 대한 설명이야. 이게 마법의 종류. 이게 충전 횟수. 이게 충전까지
걸리는 시간, 그리고 이게 시동어.”
펠젠이 멍하니 뚜껑에 나타난 글자를 바라봤다.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읽을 수 있는 게 있긴 했다. 숫자였다.
뚜껑에 나타난 글은 모두 고대어였다. 즉, 고대어를 모르면 이용할 수 없는 상자였다.
“고, 고대어를 모르면 쓸모가 없는 물건 아닙니까?”
“배우면 되지. 여기 쓰인 고대어 자체가 많지 않아서 금방 외울 수 있을 거야.”
“그, 그렇습니까?”
“마법의 종류랑 시동어만 알면 되잖아? 다 간단해. 다만 이 아티팩트로도 알아낼 수 없는 물건들이 존재해.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유리 상자의 옆에 길게 그어진 검은 선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선 보이지?”
“예. 이게 뭡니까?”
“이 아티팩트의 수명.”
수명이라는 말에 펠젠이 화들짝 놀랐다. 검은 선은 면의 절반을 조금 넘는 길이었다.
“쓸 때마다 이 선이 조금씩 줄어들어. 완전히 사라지면 수명도 끝이지.”
“이, 이 정도면 얼마나 쓸 수 있습니까?”
“글쎄? 그건 해 봐야 알겠지?”
“그, 그런 무책임한…….”
펠젠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가 다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슬그머니 제론의 눈치를 살폈다.
“다 오픈해.”
“예?”
“능력을 다 오픈하라고. 한계까지. 그럼 저들도 더 이상 뭐라고 못 할 거 아냐.”
“그,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아티팩트의 수명 문제가 있으니 수수료를 받아.”
그제야 펠젠의 표정이 밝아졌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번에도 상당한 돈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돈으로 받을 생각하지 말고 다른 걸로 받아.”
“예? 다, 다른 거라니요? 차라리 돈을 받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들은 돈 빼고는 볼 게 하나도 없는
놈들입니다.”
“그래도 적을 방치하는 것보다는 낫지.”
펠젠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 보면 수수료라고 해 봐야 고작 푼돈에 불과하다.
돈이야 좀 벌겠지만 제론이 주는 물건을 경매로 파는 것보다 훨씬 못할 것이다.
“정보나 타격으로 수수료를 대신하면 되겠군요?”
제론이 씨익 웃었다. 거기까지 생각해 냈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맡길 수 있었다. 펠젠은 결코 멍청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똑똑한 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이렇게 자리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암시장에서 좌판이나 깐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정보가 있고, 힘과 인맥이 있었다. 그게
없으면 이곳 아벤드에서 오랫동안 살아남는 건 불가능했다,
그걸 이용해 적을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아마 제대로 먹히기만 하면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생각에 잠긴 펠젠을 두고 방에서 나갔다.
“드디어 할 일이 또 생겼군.”
펠젠이 활약을 시작하면 적 조직이 크게 흔들릴 것이다. 흔들림은 곧 빈틈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제론은 그
빈틈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곳 지부장에게 마법진을 심어 두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지부에 위기가 닥치면 외부에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때를 노려서 외부 인물에게도 마법진을 심는 것이 제론의
목표였다.
또한 외부에서 오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줘서 그들이 이곳 아벤드를 포기하게 만들 셈이었다. 과연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제론은 자신의 방으로 가서 태블릿을 꺼냈다.
이제부터는 지부장을 잘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을 잘 살펴야 한다. 자칫 여유를 부리다가 아베티스 영지의
변제일을 잊으면 곤란하니 말이다.
아벤드를 흔들고 아베티스 영지를 흔든다. 그리고 레늄 왕국의 내전이 마무리되면 슈린 공작가를 흔들 것이다.
제론은 그것을 통해 적의 실체를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알아내고 말 것이다. 가문을
몰락시킨 진짜 원흉을.

☆ ☆ ☆

아벤드의 정보를 총괄하는 지부장은 골치 아픈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짜증이 확 일어났다. 최근 조직이 받은 피해는 이만저만 심각한 게 아니었다.
정보망의 절반이 무너졌다. 그 틈을 다른 조직이 파고들어 망 자체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게다가 타격대는 대부분
거동이 불가능했다.
지부장은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는 펠젠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펠젠이 아니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사태를 반전시켜 조직을
더 크게 키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그 정도 역량은 있다고 믿었다. 한데 펠젠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펠젠이 가진 힘은 엄청났다. 고대 유물의 가치를 측정하는 아티팩트라니. 대체 그게 어디서 났단 말인가.
사용 한계가 명확한 아티팩트였기에 그걸 이용하려는 암시장 상인들의 움직임은 지나칠 정도로 격렬했다. 그리고
그 격렬한 움직임에 조직이 조금씩 무너져 갔다.
그렇게 무너진 조직의 빈틈을 펠젠이 야금야금 파고들었다. 아마 이대로 두면 펠젠의 조직이 아벤드를 장악할
것이다. 그리고 예전 지부장이 누렸던 모든 것이 펠젠에게로 갈 것이다.
“그렇게 둘 수야 없지.”
결국 지부장은 결단을 내렸다. 자신의 입지가 한없이 좁아지겠지만, 그래도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아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돌이킬 수 있을 때가 가장 빠른 것이지.”
지부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금고를 열었다. 그 안에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수정 구슬이 몇 개 들어 있었다.
지부장은 그중 하나를 꺼낸 뒤 금고를 닫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다음, 수정 구슬을 바닥에 세차게 던졌다.
퍼석!
수정 구슬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반짝이는 빛이 안에서 튀어나왔다. 빛은 주위를 몇 번 휘감더니 위로 휙
올라갔다.
지부장은 멀어져 가는 빛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점점 착잡해져 갔다.

Chapter 6 배후 캐기

일단의 무리가 아벤드로 들어섰다. 30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였는데, 하나같이 존재감이 희미했다.
그들을 이끄는 사람만이 뚜렷한 존재감을 뿌려 댔는데, 표정이 싱글벙글이었다.
“내게 이런 좋은 기회가 올 줄이야.”
아벤드 지부장은 그의 경쟁자 중 하나였다. 한데 그로부터 도움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타격대가 무너진 거야?”
아벤드 지부장은 타격대가 절반 이상 무너지는 바람에 지원을 요청했다.
출발하기 전에 기본적은 정보는 조사를 했다. 현재 아벤드는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 이유가
펠젠 때문이라는 것 외에는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사내는 이번 일을 금방 끝낼 수 있다고 여겼다. 사내가 데려온 자들은 암살에 관해서는 최고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애초에 펠젠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그만 사라지면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지 않겠는가.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지.”
사내는 곧장 펠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타지로 원정 와서 동료와 합류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아무 생각 없이 합류했다가 몰살이라도 당하면 완전히 끝장 아닌가.
이럴 때는 상황을 좀 더 냉철하고 넓게 살피며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이렇게 곧장 목표를 정해서 달려드는 것도 마찬가지로 바보짓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펠젠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히 분석했다. 그간의 자료와 최근의 세력
판도에 관한 정보까지 싹 훑었다.
그걸 토대로 계산한 바에 따르면 실패할 리가 없었다. 사실 정보를 통해 파악한 펠젠의 실력이나 세력을 고려하면
너무 많은 인원을 데려왔다.
지금 사내가 데려온 30 명의 암살자는 그가 가진 최고의 패였다. 사내에게 부족한 것은 직접 정보망을 관리하는
자들보다 정보력이 약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만일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면 그 부족함을 단번에 메울 수 있게 된다.
정보망을 관리하는 지부장은 그 지역의 정보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좀 더 폭넓은 정보를 위해 대륙 곳곳에
자신만의 세력과 정보원을 심어 놓는다.
잘하면 그 모든 걸 단번에 꿀꺽 삼킬 수 있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과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펠젠의 건물에 도착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펠젠의 건물은 다가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많은 암시장의 상인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암시장의 상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펠젠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사내는 품에서 수정이 달린 스틱 하나를 꺼내 건물을 가리키며 빙글빙글 돌렸다.
수정에 붉은빛이 점멸했다.
“완전히 거저먹기로군.”
수정에서 점멸하는 붉은빛은 목표로 한 지점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가리킨다.
붉은빛이 점멸한다는 것은 마나를 품은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푸른빛이 점멸하면 마나가 밖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는 뜻이다. 즉, 익스퍼트가 있다고 보면 된다.
건물 안에는 20 명쯤 되는 실력자가 있었고, 2 명의 익스퍼트가 존재했다.
그 정도라면 그냥 정면으로 들어가 싸워도 30 분 안에 몰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더 조심스러운 선택을
했다.
“일단 안에 펠젠이 있는지부터 확인한 다음 움직인다. 알아서 근처에 은신해.”
사내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30 명의 암살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근처에 은신한 것이다.
사내도 조용히 움직이며 근방에 몸을 숨겼다. 펠젠의 동태를 파악하고, 허점을 파고들어 죽이는 데까지 길어야 3
일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 3 일 동안 사내를 비롯한 암살자들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게 가능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만들어 주는 비약이 있었다.
물론 비약을 쓸 일은 없을 것이다. 펠젠을 처리하는 데 비약까지 쓸 일이 있겠는가. 그저 지나가다가 칼만 한 번
휘둘러도 모든 게 끝난다.
그렇게 몸을 숨기고 펠젠의 건물을 유심히 살피던 사내는 갑자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깜짝 놀랐다.
하지만 행동은 반사적으로 나왔다. 그동안의 충실한 훈련에 따라 허리춤의 단검을 뽑음과 동시에 내질렀다.
슉!
단검이 복면을 쓴 사람의 목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복면을 본 사내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자신이 여기에
오기를 노린 것이 분명했다.
공격에 실패해서 다음을 대비하려는 찰나, 복면인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미처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빠악!
“크윽!”
엄청난 격통이 일었다. 마치 얼굴이 온통 뜯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어딜 맞았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얼굴 어딘가를 맞았고, 워낙 아파서 얼굴 전체가 아프다는 게 그의 뇌리에 떠오른 전부였다.
희미한 시야에 또 날아오는 주먹이 보였다. 순간 극심한 공포로 인해 정신줄이 훅 날아가 버렸다.
빠악!
격통과 함께 의식이 사라졌다. 그리고 희미하게 깜빡이는 의식을 통해 수하 암살자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웃을 수 있었다.

복면을 쓰고 사내를 제압한 사람은 당연히 제론이었다. 제론은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것을 미리 예상했다.
이젠 자연스럽게 이놈을 살려 보내는 일만 남았다. 물론 그 전에 몸에 마법진을 심어야겠지만 말이다.
제론은 다가오는 기척을 낱낱이 파악했다. 빠르게 다가오는 사람은 총 10 명이었다. 암살자가 30 명이었는데,
그중 10 명만 오는 것이다.
‘신호는 보냈겠지.’
제론은 자신의 감각 안에 30 명의 암살자를 모두 가뒀다. 그렇기에 그들이 어디 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20 명은 각자의 자리에서 건물을 감시하고 펠젠의 동태를 살피는 중이었다. 나머지 10 명만 다가왔는데, 사내를
시야에 두고 있던 자들이었다.
제론은 일단 그들을 처리하기로 했다. 마법을 몸에 심는 광경이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었다.
일단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내의 손에 쥐어진 단검을 빼앗는 일이었다. 단검을 쥔 채로 기절했기에 손가락이
굳어서 잘 빠지지 않았지만, 제론에게는 마치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었다.
단검을 손에 쥔 제론은 그것을 몇 번 휘둘러 봤다. 그것만으로 단검이 손에 익어 버렸다.
제론은 단순하게 단검을 좌우로 한 번 그었다.
사아악!
긴 마나의 끈이 채찍처럼 튀어나와 세상을 둘로 갈라 버렸다.
촤아아악!
단번에 10 명의 암살자가 피를 뿌리며 죽었다. 겉으로 모습을 드러낸 채 달려오던 자뿐 아니라, 몸을 숨긴 채
은밀히 이동하던 자들까지 몽땅 당했다.
제론은 빠르게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푸르게 빛나는 마법진이 겹겹이 떠올랐다. 몇 번의 실전을 통해 이젠 아주 능숙해졌다. 이번에 펼친 마법은
예전에 쓴 것보다 더 발전시킨 것이었기에 마법진의 수도 많았고 마법진 자체도 훨씬 복잡했다.
사내의 몸에 마법진이 스며들었다. 마법이 마무리될 즈음, 남은 20 명의 암살자가 이동을 시작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은 느낌에 각자 알아서 움직인 것이다.
그들은 피바다 속에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보고는 지체 없이 움직였다. 물론 신중함을 기했다. 저렇게 동료들이
허무하게 당했다면 상대가 얼마나 강할지 능히 짐작이 가능했다.
제론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였다. 자연스럽게 마법진을 흡수한 사내를 살려서 돌려보내야
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그냥 도망치지만은 않았다. 어쨌든 돌아가게 만들어야 하니 최대한 피해를 가중시켜야만 했다.
암살자 5 명이 무리를 이룬 곳을 향해 달려간 제론은 단검을 휘두르며 그들을 뚫고 지나갔다.
퍽퍽퍽퍽퍽!
단검은 정확히 암살자들의 급소를 살짝 빗겨 파고들었다. 당장 죽지는 않겠지만, 즉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출혈
과다로 결국 죽을 것이다.
제론은 빠르게 몸을 뺐다. 암살자들은 더욱 속도를 높여 쫓아갔지만, 결국은 놓칠 수밖에 없었다.
남은 15 명의 암살자는 아직 죽지 않은 동료를 수습하고, 얼굴이 퉁퉁 부은 채 기절한 그들의 수장을 데리고
빈민가를 빠져나갔다.

☆ ☆ ☆

아벤드 지부장은 황당한 눈으로 수하를 바라봤다. 수하 역시 황당한 눈치였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들을 돕기
위해 왔던 자들이 연이어 큰 피해를 입고 돌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놈들 대체 뭐하자는 거지? 아벤드에 왔으면 일단 나부터 봐야 할 거 아냐?”
“아무래도 각자 처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끄응.”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의 생각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도움을 요청했다면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만 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이었다. 혼자 해결할 수 있었다면 어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알아서 했을 것이다.
“몇이나 당했나?”
“열다섯입니다.”
지부장이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도움을 요청한 놈들이 몽땅 당해서 돌아갔다. 이래서야 자신이
조직을 뒤흔든 거나 다름없었다.
“그놈들 어디 있지?”
“일부는 돌아갔고, 일부는 근처 호텔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잘했다. 일단 그놈들만이라도 불러라. 힘을 모아서 대항해야겠다.”
“알겠습니다.”
수하가 물러가자 지부장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일이 계속 꼬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이렇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정보망이 망가지지 않았다면 무슨 일인지 좀 더 확실히 알아낼 수 있을 텐데, 그게 불가능하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지금도 정보망 곳곳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제대로 보고를 못 받아서 그렇지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을 수
있다면 아마 오래지 않아 뒷목 잡고 쓰러질 것이다.
펠젠의 저력은 무서웠다. 아니, 암시장 상인들이 대단했다. 그들 하나하나는 별것 아니었는데, 일단 모이니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암시장 상인 하나가 정보원 하나만 알고 있어도 그 수를 다 합하면 대체 몇 명인가.
게다가 암시장 상인들은 정보원 하나 발견했다고 끝내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새로운
정보원을 찾아냈다.
“암시장 상인들을 몽땅 죽여 버릴 수도 없고…….”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암시장이 유지되어야 아벤드가 유지된다. 그리고 그래야
아벤드 지부장이라는 자리에 의미가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지?”
지부장은 펠젠이 이 모든 일을 주도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펠젠에게는 그 정도 역량이 없었다. 누군가의
하수인이라면 모를까, 이런 상황을 이끌어 나가는 건 그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아무튼 이대로는 안 된다.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이쪽에서도 뭔가 수를 내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모든
걸 내려놓고 상부에 보고를 하거나 말이다.
“아마 파장이 만만치 않겠지.”
지부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혼자 당하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 도움 요청을 받아들인 모두에게
파장이 미칠 것이다.
조직 자체가 워낙 크고 단단해서 근간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직의 하부가 흔들리다 보면 결국 그런
식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지부장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번 일이 앞으로의 거대한 해일을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을 때, 사람들을 부르러 간 수하가 돌아왔다. 지부장은 그의 표정을 보고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들 그냥 돌아갔나?”
수하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더 이상 피해를 입으면 곤란하다고…….”
“멍청한 것들이로군.”
지부장은 살짝 무거웠던 마음을 털어 버렸다. 이제 좀 더 홀가분하게 상부에 보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마지막 발악을 한번 해 볼 것이다.
“남은 타격대를 모아라. 그리고 운영 자금을 돌려서 용병과 암살자를 고용해.”
수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예? 하지만 그렇게 하면…….”
지부장은 단호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넌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아, 알겠습니다.”
지부장의 박력에 수하는 별다른 이의도 제기하지 못했다.
“남은 정보원에게 명령을 하달해라. 아벤드를 한번 크게 흔들어야겠다.”
“아, 아벤드를 흔든단 말입니까?”
“그래야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펠젠이 모습을 드러낼 거 아니냐. 최소한 그놈은 죽여야겠다.”
배후가 있는 것 같지만 일단 지부장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걸 하다 보면
배후가 살짝이라도 드러날 거라 믿었다.
지금 지부장이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는 그것뿐이었다.

☆ ☆ ☆

제론은 7 명에게 심어 둔 마법진을 통해 그들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태블릿에 저장할 수 있었다.


요즘은 그걸 확인하느라 상당히 바빴다. 사실 이건 그냥 바인에게 넘겨 버리는 게 제일 빠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태블릿의 정보를 바인에게 넘기려면 태블릿을 보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태블릿은
제론의 가장 큰 무기이자, 비밀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바인한테 준 아티팩트도 좀 손을 보긴 해야 하는데…….”
바인에게 준 정보 수집 도구는 제론이 직접 만들어 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과는 달리 아티팩트 제작에 대한
능력이 모자랐기에 성능이 떨어졌다.
들어가는 재료는 엄청나게 값비쌌는데, 들인 재료에 비해 나온 결과가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아티팩트였다. 지금 보면 조잡하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여기 일을 대충 마무리한 다음 바인의 아티팩투부터 손을 봐 줘야겠군.”
제론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마법진이 점멸하듯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벌써부터 마법진 구상을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는 마법진을 구상할 때, 뇌의 일부분을 분리하듯 이용해서 따로 계산하고 마법진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마음을 둘로 나눈 것처럼 말이다.
사실 그것은 마나링을 9 개 만들고 그것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능력이었다.
8 개의 마나링과, 9 번째부터의 마나링은 마치 서로 분리된 것처럼 성질이 전혀 달랐다. 그것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려면 뇌를 분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이후는 다 마찬가지였다. 10 번째 마나링을 만들어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뇌를 총 3 개로 나눌
수 있었다.
마나링 자체가 완전히 달랐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9 번째의 마나링은 앞의 8 개 마나링을 합한 것과 똑같은
능력을 발휘한다. 즉, 마나로 이루어진 손이 8 개나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9 개의 마나링을 만들면 얼마나 대단한 마법을 쓸 수 있겠는가.
어쨌든 제론은 9 개의 마나링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좀 특별하게 뇌를 분리하는 능력을 얻어 냈다. 그리고 지금
그걸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배후를 캐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군.”
어쨌든 그들이 상위 조직과 접촉하거나 상급자와 접촉해야 마법진을 분리시켜 보내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당분간은 그럴 일이 없었다. 제론은 일단 아벤드부터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부장의 상급자가 올 수도 있으니
지부장은 내버려 둔 채 조직만 싹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의 중심에는 펠젠이 있었다. 제론은 펠젠을 문두스의 하부 조직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아마 바인
아래로 들어가면 펠젠은 결코 배신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바인은 슬슬 그런 식으로 하부 조직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론이 거기에 도움을 주는 셈이었다.
어쨌든 마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그렇게 조직을 만들어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돈과 인력이 많이
들어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문어발식으로 수많은 하부 조직을 만들어 두면 결국 대륙의 모든 정보를 손아귀에 쥘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제론은 바인만 손에 쥐면 끝난다. 그 부분은 자신 있었다. 이미 몇 가지 조치를 취해 두기도 했고, 또
바인의 마음이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마음은 두려움이기도 했다. 바인은 자신의 힘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힘의 원천인 제론을 거의 신처럼 모셨다.
“그나저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
이제 슬슬 아베티스로 돌아가 나베 공작가의 일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그쪽을 통해서도 배후 세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진행하던 일이 실패하면 배후가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제론이 대충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방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꽈앙!
“크, 큰일 났습니다!”
들어온 사람은 펠젠이었다. 제론은 무심한 눈으로 펠젠을 쳐다봤다. 펠젠은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자 다급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약간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펠젠은 제론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폭동?”
“예. 광범위하게 아벤드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나 지금 난리입니다.”
“전역에서?”
제론은 조금 전 확인한 지부장의 영상에서 그가 남은 정보원들에게 뭔가를 지시했다는 걸 떠올렸다. 정확히 뭔지
그가 말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는데, 아마 이 폭동이 그 결과인 모양이었다.
노리는 걸 알고 있으니 대처도 편할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펠젠은 머뭇거리며 제론에게 다가갔다.
“이 폭동이 왜 일어난 것 같아?”
“그, 글쎄요. 혹시 적 조직이 마지막 발악으로 아벤드를 전복시키려는 것 아닐까요?”
“마지막 발악인 건 맞는데, 아벤드 전복은 불가능해. 너도 알잖아? 아벤드가 어떤 곳인지.”
“그, 그야…….”
아벤드는 범죄 조직이 판을 치는 곳이었다. 당연히 도시에서 강력한 병력을 육성했다. 그들을 막으려면 필수적인
선택이었다.
그 병력이 출동하면 폭동은 금세 잠재울 수 있었다. 적이 노리는 건 혼란 속에서 펠젠의 빈틈을 만들어 찌르는
것이었다.
“목표는 너야.”
“예?”
펠젠이 화들짝 놀랐다. 목표가 자신이라니. 대체 왜 그런 결론이 나온단 말인가. 적 조직이 얼마나 대단한
저력을 갖고 있는지 알기에 갑자기 불안해졌다.
“아마 이번 폭동이 가라앉으면 적 조직은 회생이 거의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거야. 아벤드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펠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너무나 당연했다. 이런 폭동의 배후를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나중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아벤드 측에서는 최대한 단호하고 빠르게 폭동과 주동자를 정리할 것이다.
“넌 지금부터 여기서 나와 함께 지내.”
“예? 하지만…….”
펠젠은 꺼림칙함과 아쉬움이 뒤엉킨 표정을 지었다. 왠지 제론이 두려웠기에 함께 있기가 무서웠다. 그리고
제론과 함께 있으면 그동안 즐기던 걸 하나도 못 하게 될 것 아닌가.
펠젠은 최근 부와 권력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한데 제론과 함께 지내면서 어찌 그런 걸 누리겠는가. 그저 납작
엎드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싫으면 할 수 없지. 나가도 돼.”
“예?”
펠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같이 지내자고 하더니 이젠 또 그냥 가라니. 하지만 그냥 나가고 싶은 쪽으로
마음이 슬그머니 기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신할 사람을 빨리 찾아야겠군.”
제론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혼잣말이었지만 밖으로 나가려는 펠젠은 그 말을 분명히 들었다.
‘대신할 사람?’
펠젠의 두뇌가 평생을 통틀어 가장 빠르고 맹렬하게 회전했다.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 벌어질 일, 그리고 제론이
한 말을 토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야말로 눈 한 번 깜빡할 시간에 이뤄 낸 계산이었다.
펠젠은 다시 몸을 돌려 제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헤헤 웃으며 말했다.
“잠은 어디서 잘까요?”
제론은 피식 웃으며 시선을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작은 야전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서, 설마 저 작은 침대에서 자라는 말씀이십니까?”
펠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렇게 작은 침대에서 자려면 온몸을 웅크리고 자야 한다.
갑자기 그냥 나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강력하게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타이밍 좋게도 건물 밖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저 건물이야!”
“펠젠을 끌어내! 그놈이 원흉이라고!”
건물 벽을 통해서 들어오는 소리였기에 작았지만 펠젠의 귀에는 아주 똑똑히 들렸다. 당연히 깜짝 놀랐다.
“워, 원흉? 내, 내가 뭘?”
펠젠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다급히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구름처럼 사람이 모여 건물을 포위하고 있었다. 예전 암시장 상인들 정도가 아니었다. 그때의 10 배가 넘는
인원이 모여들었다.
“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펠젠이 제론에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분명히 제론이
개입했기 때문이리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예? 하지만 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요?”
“난 한 것 같아?”
“그, 그야…….”
제론은 계속 자신의 방을 떠나지 않았다. 뭔가를 했을 리가 없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나오는 답이었다.
“목표가 너라는 뜻이지. 저 폭도들 사이에 적 조직원이 숨어 있을 거야. 선동도 그들이 했을 거고.”
펠젠의 입이 쩍 벌어졌다. 대체 왜 자신이 앞에 나서서 그 모진 매를 맞아야 한단 말인가. 왠지 억울했다.
“그러니 상황이 끝날 때까지 잠이나 자.”
“하지만 이대로라면 저들이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보아하니 벽을 타고 올라올 기세던데…….”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번 일은 이제 끝났어. 버티기만 하면 돼. 적이 새로운 힘을 투입하지 않는
한.”
제론의 호언장담에도 펠젠은 불안했다. 그래서 창가로 다가가 밖을 슬쩍 내다봤다.
그 순간,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날아왔다.
쐐애애액!
“헉!”
펠젠은 반사적으로 주저앉으려 했다. 하지만 날아오는 것의 속도가 너무 빨라 그의 반사 신경을 무력화시켰다.
턱!
펠젠은 미간에 닿을락 말락 멈춘 단검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닿지도 않았는데 미간을 꿰뚫리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가, 감사합니다.”
단검을 멈춘 것은 제론이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날아온 단검을 가볍게 손으로 잡은 것이다. 펠젠이 죽기
일보 직전에 말이다.
펠젠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다.
“그러니까 가서 자라고 했잖아. 괜히 저 자리에 저만한 침대를 놓은 줄 알아?”
펠젠은 그제야 침대를 다시 바라봤다. 위치와 크기를 보니 제론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완벽한
사각이었다. 창을 열어도 저 침대가 있는 곳을 단번에 공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펠젠이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위에 웅크리고 모로 누워 눈동자만 굴렸다.
제론은 그것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갔다.
밖을 내다보니 성난 군중이 보였다. 하지만 전혀 걱정하지는 않았다. 저들은 절대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
벌써 마법진을 잘 깔아 뒀다.
이 건물에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몸에 마나를 지닌 사람뿐이었다.
모든 사람을 막는 건 훨씬 높은 수준의 마법이 필요했다. 어쨌든 아무도 들락거릴 수 없게 만들어선 안 되고,
일처리를 위해 건물을 나가는 사람이 분명히 생긴다. 그들까지 선별하려면 굉장히 특별하고 복잡한 마법진이
필요했다.
하지만 단순하게 마나의 유무로 인원을 걸러내면 훨씬 간단히 마법진을 구성할 수 있었다.
마법진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마나 스톤의 가루가 필요했다. 이 건물에 마법진을 새기기 위해 쓴 마나 스톤의
가루는 상당한 양이었다.
아마 더 복잡하게 마법진을 구성했다면 10 배가 넘는 마나 스톤이 필요했을 것이다.
“꾸역꾸역 잘도 몰려오는군.”
사람들이 건물에 들어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다가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건물의 마법진이 발하는 특유의
역장이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또한 가까이 다가오다 보면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곤 했다.
건물에 당당히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은 수련을 통해 마나를 품게 된 자들뿐이었다.
제론은 그렇게 건물에 다가오는 자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런 식으로 선별하면 이런 점이 편했다. 다가온 자들
대부분이 적의 조직원이었다.
“그럼 마무리를 해 볼까?”
슬슬 시간이 다 되어 간다. 빨리 이곳의 일을 마무리하고 아베티스 영지로 돌아가야만 했다. 아마 지금쯤
루이네는 잠도 못 자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제론의 손가락 끝에 작은 마나의 구슬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뭉쳐진 마나의 구슬이 다가오는 적 조직원을 향해 날아갔다.
소리도 없고 기척도 없었다. 마나의 구슬은 날아가면서 투명해졌다. 주변 마나와 동화하면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마나에 담긴 힘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목표의 머리를 그대로 꿰뚫었다.
피슉!
당한 사람조차 자신이 뭘 어떻게 당했는지 몰랐다. 피가 튀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움직이다가 서서히 힘을
잃어 갔다. 그리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외상도 거의 없어서 대체 왜 이러는지도 알지 못했다. 동요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작았지만 그런 식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니 점점 커졌다.
그리고 그 동요는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공포로 바뀌어 갔다.
모든 것은 제론이 원하던 대로 이루어졌다.

☆ ☆ ☆

폭동이 완벽하게 제압되었다. 아벤드의 영주는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해 폭동을 제압하고, 배후를 박살
냈다.
이번 폭동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사람은 당연히 펠젠이었다. 이제 펠젠의 조직은 아벤드에서 가장 큰 조직이
되었다. 아벤드의 정보를 한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이는 굉장한 힘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힘을 가진 펠젠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괴, 굉장히 뛰어난 거울이군요.”
펠젠은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의 집무실 벽에 걸린 거울이 시커멓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를 계속해서 자극했다.
“선물이야.”
“구,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만…….”
“잘 보관해야 할 거야. 거울이 깨지면 너도 죽을 테니까.”
제론의 말에 펠젠이 화들짝 놀랐다. 그 무슨 무시무시한 말인가. 대체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저, 정말입니까?”
“시험해 볼까?”
펠젠이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야 무조건 믿으니까요. 헤헤헤.”
펠젠이 비굴하게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왠지 여생이 꼬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네가 할 일은 별거 없어. 가끔 거울이 하는 명령을 듣고, 주기적으로 정보를 모아서 보내면 돼.”
“예? 보내다니요? 어디로 말입니까? 그리고 거울의 명령이라니…….”
펠젠이 의문을 표함과 동시에 거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인의 목소리였다. 물론 펠젠은 그가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 명령을 들으란 말이다. 정보는 보고서 형식으로 만들어서 거울에 붙이면 된다. 내가 알아서 읽을 테니까.”
펠젠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거울과 제론을 번갈아 바라봤다.
불길함의 정체를 드디어 알아냈다. 다시는 엮이기 싫은 제론과 엮인 것이다.
“나머지는 하고 싶은 대로 해. 굳이 널 통제할 생각은 없으니까. 보아하니 더 위로 올라가고 싶은 것 같지도
않고.”
펠젠의 표정이 대번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눈을 빛냈다. 위로 올라간다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저 이래 봬도 야망 있는 놈입니다. 위로 올라간다니, 여기서 더 올라갈 수도 있는 겁니까? 귀족도 아닌데?”
제론이 피식 웃었다.
“원하는 수준이 어디까지야?”
“그, 그야…… 아, 암시장 정도?”
펠젠은 속으로는 아벤드의 영주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걸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엄연히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니 말이다.
지금이야 아벤드의 정보를 장악했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이걸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또 영주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위태로운 조직에 불과했다.
그것을 이번에 절실히 느꼈다. 적 조직이 영주의 결정 한 마디에 완전히 박살 나지 않았던가.
물론 그 이면에는 제론의 개입이 있었지만 말이다.
“아벤드의 지배자가 되고 싶나?”
“그, 그렇게까지는…….”
“왜? 안 될 것 같아? 아니면 영주를 원하는 거야?”
펠젠은 입을 다물었다. 왠지 두려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대되었다. 어쩌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벤드의 영주가 되는 것이, 아니면 아벤드의 지배자가 되거나.
‘솔직히 여기서 조금만 더 애쓰면 아벤드의 밤은 충분히 지배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펠젠의 표정과 눈빛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제론은 단호하고 무겁게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 치장된 말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웠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펠젠의 물음에 제론은 턱 끝으로 거울을 가리켰다. 펠젠이 검은 기운으로 일렁이는 거울을 바라봤다.
“명령에 잘 따라.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어느새 그 자리에 앉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펠젠은 한동안 멍하니 제론이 한 말을 생각하며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거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거울에서 일렁이는 시커먼 기운이 마치 누군가가 웃는 모습처럼 보였다.

Chapter 7 나베 공작가

제론은 아벤드의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아베티스 영지로 향했다.


조만간 또 아벤드에 와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들 예정이었다. 마티를 풀어 놓는 건 실패했으니, 차선책이라도
만들어 둬야만 했다.
일단 정보는 펠젠을 통해 얻으면 되니,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들어 원할 때마다 왕복할 수 있게 만들어 두기로
했다.
물론 아직은 아니었다. 9 번째 마나링을 만든 다음의 일이었다.
아베티스 영지까지 가는 건 금방이었다. 처음 아벤드로 갈 때야 적을 유인하기 위해 며칠을 걸었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제론은 한시라도 빨리 나베 공작가를 정리하고 슬슬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어제 바인이 전한 얘기를 듣고 나니 돌아갈 생각이 들었다. 슬슬 내전이 마무리 단계로 들어갔다고 한다.
분위기를 보면 레늄 왕국은 3 개로 토막 날 듯했다. 1 왕자와 2 왕자의 세력 구도가 참으로 비슷해서 어느 한쪽이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거기에 중립 세력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이 딱 적기였다. 왕국이 3 개로 갈라지는 마당에 에어스트 백작령이 독립을 해 버리면 그들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령까지 신경을 쓸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제론은 일단 네이드 후작령을 집어삼키고, 거기까지 한데 뭉뚱그려 왕국으로 선포해 버릴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아베티스 영지의 일을 빨리 마무리해야만 했다. 나베 공작가를 무너뜨릴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아베티스 영지를 키워 나베 공작가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드는 건 가능했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나베 공작가를 무너뜨리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나베 공작가는
아베티스 영지의 루이네에게 맡겨 두기로 했다.
아마 루이네는 잘해 나갈 것이다. 적당한 힘만 실어 준다면 말이다.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던 제론은 어느새 아베티스 영지에 도착했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영주성으로 향했다.
채무 변제일이 이제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루이네를 만나 그녀를 안심시키고,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할 생각이었다.
제론은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성으로 들어가 루이네를 찾아갔다. 워낙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였기에 제론이 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제론이 이렇게 은밀히 움직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베티스 영지의 정보를 총괄하던 중년인을 의식한 것이다.
그를 떠올리니 갑자기 아벤드로 찾아온 다섯 사내가 떠올랐다. 그들은 아직도 제론의 뒤를 캐겠다고 아벤드를
구석구석 뒤지고 있었다.
제론은 딱히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각자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정보망은 완전히 뭉개졌다. 이번
폭동에 휩쓸리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굳이 제론이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사라져 줄 것이다. 그들은 제론이 아벤드를 떠났다는 사실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제론은 성에 들어서자마자 루이네를 찾아다녔다. 일단 집무실로 갔는데 없어서 성 곳곳을 둘러보며 감각을
활성화시켰다.
소드 마스터의 위력이 여실히 발휘되었다. 제론은 단번에 루이네의 위치를 찾아냈다.
‘대충 저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되겠군.’
벽을 뚫고 갈 수는 없으니 길을 잘 찾아야 했다. 제론은 복도와 계단을 몇 번 이동하며 루이네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자고 있군.’
방문 앞에 선 제론은 루이네의 상태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고른 숨소리와 몸 상태를 토대로 유추하면 지금
한창 단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물론 제론은 그런 상황을 전혀 고려해 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한시가 바쁜 상황이었다. 자신에게도, 또
아베티스 영지에도 말이다.
제론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잠겨 있었지만 마나를 이용해 아주 간단히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는 물론이고 문을 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제론은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루이네를 지키는 기사들이 옆방에 있었지만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방문이나 창문이 열리면 마법적 장치를 통해 옆방에 바로 신호가 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장치는
제론에게 무용지물이었다.
제론은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얌전히 누워 자고 있는 루이네를 향해 차가운 기운을 흘려보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루이네는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그리고 누군가 앞에 서
있는 걸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지르려 했다.
“흡!”
루이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누군가 입을 콱 막은 것처럼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쉿! 소리 지를 필요 없어. 나 기억 안 나?”
루이네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그제야 눈앞의 상대가 누군지 알아본 것이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입이 움직여졌다.
“어, 언제 오셨어요?”
“지금. 변제일 얼마 안 남지 않았어?”
“그, 그야…….”
루이네는 그동안의 맘고생이 갑자기 떠올라 왠지 억울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늦지 않게 돌아와 줘서
정말로 고마웠다.
“영지에 믿을 만한 라이더는 좀 있나?”
“예? 라이더요? 당연히 있죠. 왜 그러시죠?”
“영지 전력을 높여 두려고. 나베 공작가랑 싸우려면 그래야 하지 않아?”
나베 공작가라는 말에 루이네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그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만일 제론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계략에 휘말려 영지를 고스란히 빼앗겼을 것이다.
“좋아. 채무 변제에 특별한 조건이나 금기가 있나? 예를 들어 상단의 채권으로 갚을 수 없다거나.”
“잠깐만 기다리세요.”
루이네는 침대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림을 치우자 금고가 나타났다.
금고를 연 루이네는 그 안에서 계약서 하나를 꺼냈다. 금고 안에는 계약서 외에 몇 개의 서류가 있었는데, 다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게 계약서예요.”
제론은 그것을 받아 찬찬히 읽었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대금 상환은 금이나 테페룸으로 하게 되어 있는데?”
“그럴 리가요.”
솔직히 루이네는 이 계약서를 자세히 살펴본 적이 없었다. 빚이 얼마인가 하는 부분만 살펴봤지 내용을 하나하나
뜯어보지는 않았다.
루이네는 제론으로부터 계약서를 돌려받아 확인했다.
분명히 그런 문구가 있었다. 다른 문구보다 훨씬 작은 글자로 되어 있는 데다가 중간에 살짝 끼어 있어 잘 확인이
어려웠다.
“어떻게 이런…….”
루이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채무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금으로 낸단 말인가. 테페룸은 더 말이 안 된다. 금보다야 부피가 훨씬 줄어들겠지만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어쩌죠? 혹시 금을 준비하실 수 있나요?”
“테페룸으로 하지. 훨씬 부피가 적잖아.”
제론은 그게 훨씬 나았다. 다시 가져오기도 편하지 않은가. 테페룸이라면 특별한 마법을 이용할 방법이 여러 가지
있었다. 굳이 몰래 숨어 들어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시 가져올 수 있었다.
제론은 계약서를 더 살펴봤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계약이 너무 엉망이었다.
“채무 변제는 가이츠 남작에게 네가 직접 하게 되어 있군? 가이츠 남작이 지금 어디 있는지 확인은 했나?”
“네. 아직 우리 영지를 떠나지 않았어요.”
“확실해? 이놈이 숨어 버리면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루이네의 안색이 더 창백해졌다. 하지만 분명히 확인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직접 확인한 거야? 감시는 하고 있었고?”
루이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제론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다려. 확인해 보고 오지.”
제론이 창을 통해 밖으로 훌쩍 뛰어나갔다. 가이츠 남작이 어디 있는지 알기에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또,
혹시 사라졌어도 측근들을 족치면 어떤 식으로든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확인은 금방 끝났다. 없었다. 문제는 가이츠 남작이 사라진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는 점이었다.
제론은 모든 걸 확인하고 다시 루이네의 방으로 돌아왔다. 고작 2 시간 만의 일이었다.
루이네는 불안한 얼굴로 제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라졌다.”
순간 루이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라졌다니. 분명히 어제도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한데 갑자기 왜
사라진단 말인가.
“사라진 지 닷새는 지난 것 같던데? 가이츠 남작에 대한 보고는 누가 했지?”
가신 중 하나가 가이츠 남작을 전담했다. 루이네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어떻게 피땀 흘려 가꾼 영지를
팔아먹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하아, 제가 가신들을 너무 믿었네요.”
“가신을 정리하는 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하지. 여길 봐라.”
제론이 손가락으로 계약서의 한 부분을 짚었다.
그 부분을 읽은 루이네의 표정이 굳었다.
“가이츠 남작이 없으면 나베 공작가에 주기로 되어 있네요.”
대체 계약서가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계약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루이네에게 분명히 문제가 있었지만,
계약서를 작성할 때 함께 있었던 가신에게도 큰 문제가 있었다.
아니, 가신을 너무 믿었다. 이젠 더 이상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일단 난 테페룸부터 준비해서 내일 아침에 돌아오지. 나베 공작가까지 강행군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제론의 말에 루이네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제론이 말하는 강행군이 어느 정도인지 한 번 겪어 봤다.
하지만 그 강행군조차 제론이 많이 사정을 봐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정 안 봐주고 강행군을 하면 대체…….’
루이네는 결심했다. 이번에는 예거를 떼어 놓고 가야겠다고 말이다.

제론은 성의 빈방에 들어갔다. 아무도 오지 않을 법한 방이었기에 선택한 곳이었다. 이제부터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나베 공작령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2 번이나 이용해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루이네의 몸에 부담이 가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오는 건데 그랬군.”
하루만 일찍 왔어도 조금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을 해 봐야 뭐 하겠는가. 제론은 서둘러
아공간에서 테페룸을 꺼냈다.
계약서에 명시된 테페룸의 무게를 정확히 재서 꺼냈다. 테페룸은 상당히 많았다. 예전에 슈린 공작가가 이송
중이던 것을 빼앗은 것도 있었고, 유적을 발굴하면서 얻은 것도 있었다.
제론은 방 한가운데에 쌓아 둔 테페룸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위이이이이잉!
8 개의 마나링이 일제히 가속했다. 그리고 제론의 손바닥 앞에 상당히 복잡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샤아아아아.
마법진이 흩어지며 바닥에 놓인 테페룸 덩어리들을 향해 빛가루가 쏟아져 나갔다.
빛가루를 흡수한 테페룸 덩어리들이 흐물흐물해지더니 금세 녹아 버렸다.
제론의 손앞에 새로운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리고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샤아아아아.
흐물흐물하게 녹은 테페룸이 한데 뭉쳐졌다. 그리고 커다란 육면체로 변했다. 테페룸 덩어리들이 하나의 괴로
바뀐 것이다.
다른 마법사들이 봤으면 경악을 금치 못할 광경이었다. 테페룸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건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했다.
테페룸의 정형이 가장 중요한 분야는 당연히 마나 코어였다. 마나 코어에 들어가는 테페룸의 모양을 얼마나 잘
만드느냐에 따라 마나 코어의 효율이 정해진다.
하지만 제대로 정형할 기술이 없기에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마나 코어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한데 제론은 간단한 마법으로 테페룸을 물처럼 녹여 버렸다. 또한 모양을 만들어 굳혔다.
제론은 완성된 테페룸괴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표면이 매끄러운 것이 상당히 잘 만들어졌다. 아마 이 테페룸괴를
이 상태로 보면 다들 기절할지도 모른다.
제론은 거대한 테페룸괴에 손바닥을 올렸다.
위이이이잉!
마나링이 거세게 회전했다. 그리고 마법진이 떠올라 테페룸괴 안으로 스며들었다.
촤르르륵!
테페룸괴가 반듯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그리고 일반적인 테페룸괴 모양으로 나뉘었다. 물론 단면은 다른
테페룸괴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럽고 모양도 훌륭했다.
하지만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제론은 테페룸괴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그것을 꽉 쥐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면서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8 개의 마나링이 일제히 기음을 토해 냈다.
위이이이이이이잉!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테페룸괴 내부가 살짝 물러졌다. 그 부분을 날카로운 마나가 파고들었다.
사각! 사각! 사각!
테페룸괴 내부에 정교한 마법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테페룸의 특성을 이용한 마법진이었다. 입체적인 모양의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졌고, 그 안에 제론의 마나가 겹겹이 압축되어 채워졌다.
“후우, 생각했던 것보다 쉽지 않은데?”
제론은 테페룸괴를 옆에 내려놓고 다른 테페룸괴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 전과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수많은 테페룸괴에 몽땅 마법진이 새겨졌다. 제론은 그 일을 하면서 땀을 뻘뻘 흘렸다. 정신력과 체력 소모가
엄청났다.
모든 일을 마무리한 제론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마나 컨트롤 능력이 훨씬 늘어났다. 그걸 스스로 느낄
정도로 성장을 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9 번째 마나링을 만드는 것도 그리 먼 일이 아니었다.
제론은 완성된 테페룸괴를 아공간에 넣고는 침대에 누웠다. 일단 오늘은 피곤하니 얼른 쉬고 내일 일찍
움직여야만 했다.
강행군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 ☆ ☆

루이네는 늘어져 바닥에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가누며 비틀거렸다.


그저 많이 걸은 것도 아니고,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아니었는데도 너무나 힘들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연달아
2 번 이용한 것이 컸다.
텔레포트는 게이트는 이용할 때마다 몸에 막대한 부하를 건다. 그렇기에 이동한 다음 하루 정도 푹 쉬어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심지어 몸을 극도로 단련한 익스퍼트라 할지라도 몸에 무리가 가는데, 루이네는 그저 일반인이었다. 한데 2 번을
연달아 사용했으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이러고 있을 시간 없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루이네의 등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순간 제론의 심장에 있던 마나링 하나가 가속하며
손바닥에서 미약한 빛이 일어났다.
샤아악.
루이네의 등에 생겨난 마법진이 흩어지며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루이네는 거짓말처럼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왠지 힘이 나네요.”
루이네는 설마 제론이 마법을 이용해 자신을 도와줬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나베 공작가의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힘이 났다고 여겼다.
“나베 공작을 직접 만나야 하니까 서두르는 게 좋아. 쉽게 만나 줄지 확신할 수 없잖아?”
루이네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죠.”
“앞장서라.”
그 말에 루이네가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그 걸음에는 결연함이 잔뜩 담겨 있었다.
제론은 루이네의 뒤를 따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벌써 사방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베 공작을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저놈들이 과연 나베 공작의 힘일까, 아니면 배후의 힘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나베 공작의 힘을 줄이는 것이 그 배후의 힘을 줄이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제론의 걸음에 조금씩 살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살기는 끈적끈적하게 주위를 휘감으며 사방으로 촤악
깔려 퍼져 나갔다.

☆ ☆ ☆

나베 공작은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도착했다고? 지금? 그럴 시간이 없었을 텐데?”
“텔레포트 게이트를 2 번 연달아 써서 왔다고 합니다.”
“무리했군. 뭐, 그래 봐야 거기까지일 테지만. 가이츠 남작은 어쩌고 있나?”
“성에서 쉬고 있습니다.”
“공증인은 데려왔던가?”
“공증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 하나를 달고 왔습니다.”
“남자?”
“예. 젊은 남자였는데, 정확한 정체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나베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못마땅할 때 내보이는 버릇이었다.
“변제일이 정확히 언제지?”
“내일입니다.”
“오늘 밤까지 그 남자의 정체를 알아 와.”
“알겠습니다.”
수하는 죄송스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는 명백히 자신의 잘못이었다. 조금의 변수도 만들어선 안 되는데,
벌써 변수가 몇 개나 생겼는지 모른다.
“가이츠 남작 관리 잘 하고. 공증인 수배를 막는 것도 잊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수하가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가자, 나베 공작은 눈살을 찌푸린 채 와인 잔을 기울였다.
피처럼 붉은 와인이 찰랑거렸다.
“채무는 금이나 테페룸으로 하게 되어 있을 텐데…… 부피로 봐서는 금을 가져온 건 아닐 테고, 테페룸인가?”
사실 테페룸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테페룸은 그만큼 구하기 어려운 귀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비쌌다.
테페룸 광산 하나만 얻으면 수십 대가 부를 누리며 살 수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만일 정말로 테페룸을 준비했다면, 그걸 미리 강탈하는 방법이 가장 쉬웠다. 은밀히 숙소에 사람을 보내 훔쳐
오는 수도 있고 말이다.
어쨌든 나베 공작에게 한없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루이네가 아무리 돈을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루이네는 제대로 된 공증인을 준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테페룸을 받은 뒤 입을 씻어 버리는 방법도 치사하지만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루이네 고것이 이제 제법 물이 올랐지?”
나베 공작은 가이츠 남작이 루이네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쨌든 루이네에게 남자의 흔적을 가장 먼저 남기는 건 자신이어야만 했다.
나베 공작의 추잡한 욕망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 ☆ ☆

“공증인은 구했나?”
루이네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백작님이 해 주시면 안 되나요? 붉은 학살자라면 공증인의 자격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이곳 헥서 왕국에서는 붉은 학살자의 인기가 기이할 정도로 높았다. 그걸 이용하면 공증인의 자격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보다 더 확실한 걸 원했다. 또한 아직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따라와라.”
제론은 나베 공작성으로 가다가 방향을 틀었다.
역시 사람 인연은 중요하다. 이럴 때 써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제론이 향한 곳은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였다.
나베 공작령에도 당연히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가 있었다. 디아만트 상단은 대륙 전역에 걸쳐 활동하는 거대한
상단이었다.
달리 대륙 제일의 부를 두고 다툰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를 발견한 제론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가던 루이네가 당황할 정도였다. 갑자기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에는 왜 왔단 말인가.
“여긴 왜 오신 건가요?”
루이네가 걱정스런 눈으로 제론에게 따라붙으며 물었다. 제론은 그녀를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앞을 보며 대답해
주었다.
“공증인을 구하러 왔다.”
“여기서요?”
루이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공증인을 왜 상단에서 구한단 말인가. 공증인의 자격을 갖추려면 일단
귀족이어야 했다. 또한 상당한 인맥과 영향력이 필요했다.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장쯤 되려면 귀족이어야 해. 몰랐나?”
루이네의 눈이 커다래졌다. 만일 그렇다면 공증인으로서는 딱이였다.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장쯤 되면 그 영향력이
공작령 내에서는 아주 확실할 테니까 말이다.
루이네는 걱정스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사실 이곳에서 공증을 거절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공증을
거절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이곳은 나베 공작령이었다. 나베 공작령에 지부를 두고 장사하면서 나베 공작가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닥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제론을 따라갔다. 제론이 워낙 자신만만해서 조금이나마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상단의 직원이 제론에게 다가가 물었다. 제론은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루이네의 불안한 시선이
보였다.
“지부장을 만나고 싶은데.”
“미리 약속을 하셨습니까?”
제론이 고개를 젓자 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장은 아무나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단의 업무에 관한 일은 직원 선에서 대부분 해결한다. 지부장은 지부장이 나설 만한 일에만 나서기에 미리
약속을 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은 결코 만나 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찾아온 상대의 분위기를 보니 귀족이 분명했다. 귀족을 홀대하면 문제가 생길 소지가 컸다. 물론 디아만트
상단이 꿀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분란을 나서서 일으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죄송합니다만 지금 지부장님께서 자리에 안 계십니다. 나중에 약속을 잡으시고 다시 방문하시는 것이 훨씬
편하실 것입니다.”
직원의 말에 루이네가 대번에 실망했다.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본 제론이 재미있다는 듯 빙긋 웃었다.
“괜히 말 둘러대느라 식은땀 흘릴 필요 없다. 지부장에게 이것만 보여 주면 돼. 최대한 서두르도록.”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반짝이는 금속판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금과 특별한 금속을 섞어 만든 듯한
빛깔이었다.
그 위에는 복잡한 문양과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직원은 그것을 제대로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직원은 제론에게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한 뒤 급히 어딘가로 달려갔다.
왠지 금속판의 재질이나 모습이 심상치 않아서 허투루 반응할 수가 없었다.
직원이 안으로 후다닥 들어가자, 루이네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괜찮을까요?”
제론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씨익 웃어 주었다. 어차피 결과가 말해 줄 테니까.
직원이 후다닥 달려간 지 채 1 분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두 사람이 우당탕 달려왔다. 하나는 조금 전 달려간
직원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후함이 느껴지는 중년인이었다.
그가 바로 이곳 디아만트 상단 나베 공작령 지부의 지부장이었다.
지부장은 제론 앞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중한 자세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차 바쁠 텐데 용건만 간단히 합시다.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뭐든 성심껏 도와 드리겠습니다.”
지부장의 태도에 루이네는 입이 벌어지는지도 모를 정도로 놀랐다. 그리고 새삼 제론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했다.
역시 붉은 학살자였다.
“공증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공증 말씀입니까? 그 정도야 전혀 어려울 것 없지요. 언제 가면 됩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내일 갈 생각이니 미리 준비를 부탁합니다.”
“절대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한데…… 어떤 공증인지 미리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 준비가
용이한지라…….”
제론은 빙긋 웃으며 아베티스 영지의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는 내내 지부장의 표정이 이리저리
변했다.
“대단하시군요. 그 나베 공작가의 행사를 이렇게 완벽히 막아 내시다니.”
지부장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그는 귀족이지만 상인이기도 했다. 이번 일이 나베 공작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아베티스 영지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단숨에 계산해 냈다.
아마도 이것은 향후 디아만트 상단에 상당한 이득을 안겨 줄 것이다. 정보는 곧 힘이고, 돈이었다.
“그럼 내일 약속한 시간에 성으로 가겠습니다.”
지부장이 공손히 인사하자, 제론은 그 인사를 대충 받고는 상단 지부를 나섰다.
아직 숙소를 정하지 않았으니 적당한 자리를 잡아야만 했다. 제론은 그조차 신중하게 골랐다. 아마 나베 공작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나설 것이다.
‘주변에 있는 저 날파리들도 싹 정리해 버려야겠어.’
제론은 아주 적당한 숙소 하나를 발견했다. 습격하기 좋은 곳이었다. 또한 도둑이 설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저기로 하지.”
루이네가 의아한 표정으로 숙소와 제론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녀가 보기에도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정말로 저기에서 묵을 건가요?”
“왜? 마음에 안 들어?”
루이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걸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모든 주도권은 제론이 꽉
틀어쥐고 있었다.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그곳에 묵었다. 문과 창문이 많고, 각 층의 높이가 낮은 여관에 말이다.

“하, 한방에서 자자고요?”


루이네가 당황하며 물었다. 제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제안을 했는데, 그녀 입장에선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난 잠을 안 잘 테니까 침대는 네가 써.”
제론의 말에 루이네가 입을 벌렸다. 이건 제안이 아니라 통보였다.
“하, 하지만…….”
“안전을 위해서다. 지금 우리를 노리는 자들이 제법 많아.”
제론의 말에 루이네는 더 이상 반론을 제시할 수 없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 엄청나게 두려웠다. 나베 공작이
이번 일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이렇게 일이 끝나는 걸 보고만 있겠는가.
“딱 하루 남았어. 과연 나베 공작이 어떻게 나올까?”
루이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돌아서서 침대로 갔다. 침대에 가만히 누운 루이네는 잠을 청하려 애썼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제론과 한방에 있는데 어떻게 쉽게 잠들 수 있겠는가.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제론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제론은 방 한가운데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사방으로 감각을 퍼트리고 있었다.
숙소를 이곳으로 정한 이유가 적의 대규모 습격을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계획은 머릿속으로 다
세워 놓은 상태였다.
위이이이잉!
심장의 마나링이 맹렬히 회전했다. 그러자 제론이 앉은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최근 이런저런 마법을 자주 쓰다 보니 실력이 쑥쑥 늘어났다. 게다가 쓰는 마법이 하나같이 어려운 것뿐이었다.
이는 제론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실전에서 펼치기 때문에 더 큰 효과를 봤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론은 이 건물 전체에 특별한 마법을 걸 생각이었다. 세밀하고 복잡한 마법을
광범위하게 설치해야 하기에 지금까지 펼쳤던 그 어떤 마법보다도 어렵고 까다로웠다.
유지 시간이 비교적 짧았기에 효과가 반감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적이 금방 몰려오기만 하면 정말로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마법은 오로지 루이네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공격 마법은 필요 없었다. 제론 혼자서 어떤 놈들이 몰려오더라도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었다. 설사 기간트를
끌고 와도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빨리 유적을 클리어해야 하는데…….’
요즘 다른 일에 바빠 유적을 소홀히 했다. 사실 자신이 가진 힘의 근본은 유적에서 왔다. 그러니 유적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게 맞다.
하지만 일이 너무 많았다. 이번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도 내전이 끝나 가니 거기에 또 신경을 써야 한다.
이번에야말로 슈린 공작가를 완전히 끝장낼 때가 되었다. 그들은 아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완벽하게
몰락할 테니까 말이다.
수많은 기척이 건물을 향해 다가왔다.
제론은 천천히 일어나 검을 뽑았다. 얼마 전 싸우다가 빼앗은 아주 평범한 롱소드였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의
손에 들린 이상, 그 어떤 명검보다 더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성큼성큼 걸어서 방을 나서는 제론에게서 진득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오늘 이곳을 습격하는 자는 누구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리라.

“으음.”
루이네는 몸을 뒤척이다가 문득 잠에서 깼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자, 삐그덕거리며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헉!”
루이네는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일단 제론부터 찾아야 했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론은 방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앉은 채로 자는 듯했다.
“하아.”
루이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푹 잘 수 있었다.
피로가 싹 풀려서 정말로 개운했다.
일단 기지개를 켜서 몸을 일깨운 루이네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차피 제론과 한방에 있어서 옷을 다
입고 잤기 때문에 따로 옷을 갈아입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루이네는 조용히 제론에게 다가가 앉아 있는 모습을 살펴봤다.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전혀 눈을 뜨거나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중요한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제론을 방해할 수 없었다. 루이네는 일단 가볍게 씻기로 하고
살금살금 움직였다.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제론이 느끼기에는 엄청나게 부산스러웠다. 결국 제론은 눈을 떴다. 어차피
루이네가 일어나면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
“준비가 끝났으면 가지.”
“벌써요?”
“시간 끌어서 좋을 게 없잖아. 디아만트 상단 지부에 들렀다가 바로 가는 걸로 하지.”
루이네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움직였다. 어쨌든 씻기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제론은 루이네가 씻느라고 부산을 떠는 동안 물의 정령 네로를 불렀다.
네로는 이럴 때 참 유용하게 쓰인다.
촤아악!
네로가 제론의 몸을 깨끗이 씻어 냈다. 그리고 물기까지 뽀송뽀송 말려 주었다.
제론은 피로가 조금 가시는 걸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사이 루이네도 대충 준비를 끝냈다.
두 사람은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오늘부로 아베티스 영지의 암운은 끝난다. 루이네는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점점 힘이 샘솟았다.

☆ ☆ ☆

나베 공작은 이를 갈았다. 결국 실패한 것이다. 나베 공작의 시선은 시종일관 제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
일이 실패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으니 분노가 그쪽으로 흐르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간밤에 보내 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제론의 말에 나베 공작이 자신도 모르게 이를 뿌득 갈았다. 지난밤에 얼마나 많은 손실을 입었는가. 그동안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 키운 중요한 전력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나베 공작은 일단 잡아떼고는 루이네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아쉬움과 욕정, 그리고 분노가
뒤섞여서 눈빛이 수시로 변했다.
“계약서를 확인하겠습니다.”
공증인으로 따라온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장이 말을 꺼냈다. 나베 공작은 그를 노려봤다. 감히 자신의 영지에서
장사를 하면서 이따위로 나오다니, 참기가 어려웠다.
나베 공작은 지부장을 노려보면서 계약서를 건넸다. 지부장은 그것을 받아 루이네의 계약서와 꼼꼼히 비교했다.
보통 공증인은 그 정도까지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부장은 제론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임무가 있는지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맞군요. 자, 이제 채무를 이행하시면 됩니다.”
지부장의 말에 제론이 미리 준비한 가방을 앞으로 내밀었다. 상당히 커다란 가방이었다. 제론은 그 가방을 확
뒤집었다.
촤르륵!
잘 다듬어진 테페룸괴가 와르르 쏟아졌다.
모두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테페룸을 한자리에서 보는 건 다들 처음이었다.
“확인해 보시죠.”
제론의 말에 나베 공작이 떨리는 손으로 테페룸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물론 그래 봐야 전문가가 아니니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자신이 봤던 다른 테페룸과 다르지 않으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물론 나베 공작은 그냥 이대로 대충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즉시 옆의 수하에게 명령해 전문가를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그 방면의 전문가 몇 명이 들어왔다. 공작령에서 가장 뛰어난 대장장이와 엔지니어, 그리고 마법사였다.
그들이 함께 알아보면 금방 가짜를 판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나베 공작의 명령에 따라 모든 테페룸괴를 하나씩 확인했다.
그들 역시 이렇게 많은 테페룸은 처음이었는지라 다들 손을 덜덜 떨면서 확인했다. 워낙 양이 많았기에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모두 진품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적지 않게 놀라고 감탄했다. 이렇게 정교하게 다듬어진 테페룸괴는 처음 봤다. 이런 식으로
테페룸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대체 이걸 누가 제련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대장장이의 물음에 엔지니어와 마법사가 눈을 반짝이며 루이네를 바라봤다. 그들도 궁금했다. 대체 누가 이렇게
테페룸을 다룰 수 있는지 말이다.
루이네는 그들의 반짝이는 시선에 난감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론에게 돌아갔다.
그런 모습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은 나베 공작이었다.
“왜들 그러나? 설마 저 테페룸에 문제라고 있나?”
세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고?”
대장장이가 테페룸괴 하나를 들어서 나베 공작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테페룸괴는 이렇게 매끈하지 않습니다. 테페룸이 워낙 다루기 어려운 금속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가?”
나베 공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테페룸괴를 살폈다. 확실히 단면이 매끄러웠다. 마치 잘 제련된
금괴나 철괴를 보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다른 테페룸괴는 이 정도로 매끄럽지 않았던 것 같았다. 울퉁불퉁하다기보다는 좀 듬성듬성한
느낌이었다. 작은 조각들을 억지로 뭉쳐 놓은 것 같았다.
“호오, 그러고 보니 그렇군.”
테페룸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하게 뜨거운 불이 필요했다. 그런 불을 만들려면 반드시 마법을 써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법을 이용해도 테페룸을 제대로 녹이거나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약간의 변형이 가능하게 만드는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테페룸괴의 형태가 그런 식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미리 준비한 틀에 테페룸을 넣고 마법의 불로 이어
붙이는 식이었다.
한데 이 테페룸괴는 완전히 달랐다.
만일 이런 식으로 테페룸을 제련할 수 있다면 기간트의 마나 코어가 완전히 달라진다. 기간트의 마나 코어에는
제대로 녹이지 못해 억지로 둥글게 만든 테페룸 덩어리가 들어간다.
그들은 제론이 준 테페룸괴를 보고 분명히 특별한 방법이 쓰였다고 판단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모양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면 향후 테페룸에 관계된 모든 일을 주도하는 게 가능했다.
세 사람의 시선을 받은 제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그걸 알려 줘야 하지?”
제론의 말에 세 사람이 당황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했다. 이런 대단한 기술이 있다면 그걸 왜
공개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기술에 대한 열망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일제히 나베 공작을 바라봤다.
나베 공작도 대번에 상황을 이해했다. 그 정도 머리도 없으면서 공작령을 다스리고 다른 영지에 암수를 뻗치는
일이 가능할 리 있겠는가.
“소개비를 내지. 아니면 따로 원하는 게 있나?”
제론은 그 말에 빙긋 웃었다. 그리고 대꾸도 하지 않고 지부장을 쳐다봤다.
“마저 진행하시죠.”
그 말에 지부장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확인이 끝나셨습니까?”
나베 공작이 이를 갈며 제론을 노려봤다. 감히 자신의 말을 무시하다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일은
일이었다.
“그래, 끝났다. 한데 내 말에는 대답을 안 해 줄 건가?”
제론은 지부장을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나베 공작을 쳐다봤다.
“저건 원래 처음 구할 때부터 저 상태였습니다.”
나베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제론을 노려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제론이 빙긋 웃었다.
“이번에 유적을 발견했다는 얘기 못 들었습니까? 하이쓰 산맥에서 발견한 유적, 모르십니까?”
나베 공작이 이를 으득 갈았다.
“그래서 그 유적에서 발견한 테페룸이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나베 공작이 고개를 돌려 세 전문가를 쳐다봤다. 그들의 표정에 진한 아쉬움과 허탈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고대 유물 중에 테페룸을 정교하게 다듬은 물건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것 역시 그런 물건인 모양입니다.”
마법사가 나서서 말했다. 그는 현재 크란 제국의 마탑주가 고대의 테페룸 동전을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고대에는 테페룸을 다루는 특별한 기술이 있고, 고대의 테페룸괴는 분명히 이런 형태일 거라고 추측했다.
뭔가 찜찜했지만 더 따지기가 애매했다. 물론 나베 공작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설사 이런 테페룸을 만들
기술이 없다 하더라도, 이런 것이 나온 유적에는 또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있겠는가.
‘그런데 좀 이상하긴 하군.’
이번에 아베티스 영지의 가신 중 하나가 발굴한 유적 목록을 확인했다고 전해 왔다. 그 목록은 이미 나베 공작도
확인했다.
한데 목록 어디에도 테페룸괴 같은 물건은 없었다. 거기서 쓸모 있는 물건이라고는 기간트가 전부였다.
하면 아직 유적 발굴이 제대로 끝나지 않았거나, 아니면 목록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베 공작은 두 가지 모두라고 판단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유적 발굴이 모두 끝났을 리 없었다.
유적을 부술 각오로, 또 발굴에 목숨을 걸 각오로 했다면 끝났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유물을 건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베 공작은 그 유적에 욕심이 생겼다. 아직 목록으로 작성하지 못한 물건 중에 지금 루이네가 가져온
테페룸괴보다 훨씬 대단한 유물이 잔뜩 있을 것만 같았다.
‘이번 일로 손실이 상당하긴 하지만, 유적을 제대로 발굴하면 몽땅 메우고도 남지.’
유적 발굴이 모두 끝났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고 단순한 유적을 발굴하더라도 걸리는
시간이 상당했다.
게다가 루이네가 발견한 유적은 하이쓰 산맥 깊은 곳에 위치한다. 그곳에서 유물을 발굴해 가져오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아니, 이렇게 빚을 탕감할 정도로 많은 유물을 가져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곳에 보낸 추격대와의 연락이 끊겼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살아 있다면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 유적을
빼앗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전력이 너무 모자랐던 것이 분명해.’
나베 공작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어쩌면 루이네 일행이 나베 공작가가 보낸 추격대를 이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 험한 하이쓰 산맥에서 유적까지 발굴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베 공작은 이번 일을 여기서 마무리 짓고, 유적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아베티스 영지가 다시 살아나 나머지 유적을 발굴할 힘을 만들기 전에 말이다.
“좋아. 그럼 서로 바쁜 것 같으니 이쯤에서 끝내지.”
나베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계약서를 쫙쫙 찢었다. 그러자 루이네가 감회 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든 계약서를
찢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찢는 바람에 계약서는 몽땅 작은 종잇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에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고작 이 종이쪼가리 하나 때문에 가문이 풍비박산 나고
그런 모진 고생을 했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루이네가 나베 공작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했다. 그리고 빛났다.
나베 공작은 그런 루이네의 얼굴을 보며 입맛만 다셨다. 입에 다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걸 보고 있자니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다들 돌아갔다.
나베 공작은 자리에 앉아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즉시 가신을 소집했다.
며칠 후, 나베 공작가에서 상당한 전력이 빠져나갔다. 그들의 목표는 하이쓰 산맥이었다.
그렇게 전격적으로 결정된 데에는 은밀한 비선을 통해 얻은 정보가 주효했다. 하이쓰 산맥에 있는 유적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그 정보는 아베티스 영지의 가신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그 가신에게 정보를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루이네였다.
마치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준 정보였다.
물론 시간이 지나며 그 가신은 서서히 몰락했다. 그 뒤에 루이네가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루이네는 아베티스 영지를 쇄신했다. 워낙 단호하고 강력한 쇄신이었기에 어마어마한 태풍이 되어 영지를
강타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쇄신의 폭풍은 아베티스 영지에게 발전의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아베티스 영지는 헥서 왕국에서 나베 공작가를 견제할 정도로 성장해 갔다.
또한 나베 공작가는 아베티스 영지의 채무 변제를 기점으로 서서히 몰락해 갔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서 있던 제론은 유유히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 전에 아베티스 영지 근처에
있다던 유적을 등록하는 건 잊지 않았다.

Chapter 8 내전의 끝자락

레늄 왕국의 내전은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확률이 가장 높았다.


각 세력의 힘이 너무 팽팽했다. 사실 뒤에서 내전이 일어나도록 부추긴 자들도 그걸 염두에 두었기에 세력을 그런
식으로 맞췄다.
그렇기에 그들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만일 이대로 계속 가면 내전은 끝없이 이어질 뿐이었다. 각자 가진
힘이 끊임없이 소진되다 보니 불안함이 커졌다.
결국 이쯤에서 끝날 수밖에 없는 내전이었다.
사실 중립파 입장에서는 내전이 조금 더 길어져야만 했다. 중립파는 상대적으로 1 왕자파나 2 왕자파에 비해 가진
바 힘이 모자랐다.
만일 두 파가 손을 잡고 중립 세력을 핍박하면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전이 끝날 기미가 보이니 중립파에 긴장감이 돌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언제든 적의 침공을 막아 낼
수 있는 준비를 하는 한편, 힘을 한데로 모을 만한 제도적 장치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물론 그 논의는 1 왕자파나 2 왕자파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 그들도 힘을 모아 미래를 대비하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 논의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 ☆ ☆

“다들 개국을 선포하기로 한 모양이야.”


제론의 말에 바이스와 카이트, 그리고 세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1 왕자와 2 왕자는 그렇다 치고 중립 지역의 왕은 문제가 좀 있겠는데요?”
카이트의 말에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들 문제가 심각해. 아마 내전보다 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지도 몰라.”
“예? 그게 정말입니까?”
카이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바이스가 설명을 해 주었다.
“어차피 왕국을 찢어서 나라를 세우는 건데, 권력이라는 건 사람의 마음을 잡아먹는 괴물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충성을 바치던 주군을 배신한다고?”
“배신이 아니지요. 처음부터 딴맘을 먹고 있었다면요.”
“처음부터? 설마…….”
“일단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슈린 공작가가 있습니다. 그들이 순순히 왕권을 2 왕자에게 넘길 리가 없습니다.”
카이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슈린 공작가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그들이 가진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 힘을 두고 2 왕자에게 충성을 바칠 리가 없었다.
“아마 2 왕자는 숙청될 확률이 높아.”
제론의 말에 다들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 정보는 바인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즉,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다는 뜻이었다.
“1 왕자는 자리를 지킬 확률이 높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격변기였다. 이럴 때 잘못하면 휩쓸려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에어스트 백작령은 힘이 있었다. 거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지금까지
내실을 다지고 힘을 쌓아온 것 아니겠는가.
세 사람은 제론에게 주목했다. 제론이 뭔가 중요한 말을 꺼낼 것 같아서였다. 분위기가 그랬다. 뭔가
무거우면서도 긴박한 느낌이 좌중을 사로잡았다.
“우리도 독립한다.”
제론의 말에 세 사람은 올 것이 왔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던 말이기도 했다. 건국하기에는 지금이
최적의 시기였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가장 큰 문제인 인구도 내전 때문에 난민이 잔뜩 발생했으니 그들을 흡수하면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했다.
돈이야 넘칠 정도로 있으니 다른 문제가 생겨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네이드 후작령을 친다.”
“드디어 치는 겁니까?”
네이드 후작령은 기간트 문제 때문에 에어스트 백작령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만일 슈린 공작의 주도하에
개국을 하면 힘을 모아 에어스트 백작령에 쳐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굳이 그것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먼저 치면 훨씬 안전하게 네이드 후작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또한 네이드
후작령을 통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길을 마련할 수 있고 말이다.
“이번 기회에 우리 힘을 크게 공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네이드 후작령의 전력이 어떻게 되지?”
“현재 기간트 70 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보병이 3 천 명이고, 기병이 3 백 명입니다.”
보병 3 천에 기병 3 백이면 웬만한 후작령의 병력치고는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기간트가 70 기나 있으니 모자라는
병력을 채우고도 남았다.
물론 에어스트 백작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병력이었지만 말이다.
“우리쪽 전력을 전부 동원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제론의 말에 카이트가 나서서 대답했다.
“맞습니다. 현재 우리가 보유한 기간트의 수가 조만간 350 기를 넘어갑니다. 그걸 다 동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 부대는 총 5 개 조로 나뉘어 있었다.
1 조가 베테랑들로만 구성된 50 기의 기간트였고, 2 조부터 4 조까지가 각각 100 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숫자가
적을수록 더 뛰어난 라이더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그리고 마지막 5 조는 아직 채 기간트를 지급받지 못한 예비 라이더로만 구성된 부대였다. 그 수는 무려 150 명에
달했다.
그들은 50 기에 달하는 실바를 이용해 끊임없이 기간트 훈련을 했다.
“좋은 기회이니 실전 훈련을 겸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3 조와 4 조를 동시에 동원하고자 합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압도적으로 적을 밀어붙이면서 약간의 실전 훈련도 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출전한다.”
“예? 영주님도 말입니까?”
카이트가 놀란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이 함께 출전하면 아군의 피해는 엄청나게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래선 훈련이 안 될 수도 있었다.
“걱정하지 마. 앞으로 나설 생각은 없으니까. 분위기 봐서 특별한 변화가 생기면 나설 거야.”
“특별한 변화 말입니까?”
“슈린 공작가의 개입 같은 것들.”
카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일이 있으면 제론이 나서야 한다. 물론 아무리 슈린 공작가라 하더라도
200 기의 기간트 부대를 쉽게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저력을 무시해선 안 된다.
카이트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영주님께서 나서 주시면 한결 마음이 놓이지요.”
물론 카이트도 놀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들을 전체적으로 지휘해야만 한다. 이번 전쟁은 기간트 부대의 실전
훈련일 뿐 아니라, 카이트의 지휘 경험을 늘이는 기회이기도 했다.
카이트의 결연한 표정을 본 제론은 씨익 웃으며 시선을 돌려 세나를 쳐다봤다.
“어때? 진척은 좀 있어?”
“몇 가지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어요.”
“그 부분에 대해 오늘밤에 나랑 의논을 좀 해 보는 걸로 하지.”
“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하는 세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밤에 대화를 나눈다는 말에 발칙한 상상을 해 버린
것이다.
물론 세나가 바라는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대가 되었다.
“보조 엔지니어는 좀 구했나?”
제론의 물음에 세나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지금 수리 공방은 저 없이도 충분히 돌아갈 정도예요.”
“그 정도야?”
세나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아무리 많은 기간트를 갖다주셔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어요.”
“그럼 세나는 설계에만 전념하고 있는 건가?”
“아뇨. 수리에도 일부 개입하고 있어요. 엔지니어들에게 공개할 수 없는 부분은 제가 처리해야 하거든요.”
“하긴, 전부 공개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세나가 가진 기술 중에는 외부로 알려져선 안 되는 것들이 상당히 많았다. 현존하는 기간트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기술이었다.
세나는 그중 가장 중요한 것들 몇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에어스트 백작령 소속 엔지니어에게 몽땅 공개해 버렸다.
물론 제론의 허락을 얻고서 한 일이었다. 단, 기술을 배우려면 최소 30 년 이상의 장기 계약을 해야만 한다.
엔지니어 역시 신기술에 목마른 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30 년 계약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엔지니어는 중요하지 않은 파트로 이동되었다. 물론 몇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설계는 막바지라 이거군.”
제론은 대견스런 눈으로 세나를 쳐다봤다. 별로 도와준 것도 없는데 혼자서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간트 설계가 어디 보통 일인가. 한데 현존하는 그 어떤 기간트보다 뛰어난 새로운 기간트를 설계했다니, 아무리
대단하다고 칭찬해 줘도 모자랐다.
“좋아. 추수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차질 없습니다. 그리고 내년 파종도 차근차근 준비 중입니다. 내년에는 놀리는 영토 없이 모든 지역에 작물을
재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한 성과였다. 앞으로 식량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판로도 개척되어 있으니
판매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향후 페쿠니아 상단을 통해 곡물 유통을 시작하면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항구는?”
“진척이 그리 빠르지는 않습니다만, 내년이면 어떻게든 배를 띄우는 정도는 충분할 듯합니다.”
“그럼 남은 건 암석 지대를 개간하는 것뿐인가?”
“도시 건설도 남았습니다.”
“그렇지, 그것도 해야지.”
꾸준히 노동력을 투입하고는 있지만 영주성을 중심으로 하는 계획도시 건설은 더디기만 했다. 아무리 기간트를
동원해도 마찬가지였다.
반드시 인간의 손이 필요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기간트로 할 수 있는 부분은 벌써 다 끝난 셈이었다.
이렇게 많은 일을 진행하는 와중에 전쟁까지 치러야 한다. 그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방에 있는
누구도 그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질 수가 없는 전쟁이었다. 다만 이 전쟁을 통해 슈린 공작가를 끌어낼 수 있느냐, 또 그들을 몰락시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선전포고는 내일 당장 하도록.”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바이스가 나섰다. 바이스는 내심 이번 일이 총관으로서의 마지막 일이라 여겼다. 그는 이제 진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적임자도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날의 회의가 끝났다. 향후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키게 될 내용을 담고서 말이다.

☆ ☆ ☆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제론은 태블릿을 꺼냈다. 확인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자, 그럼 진행하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볼까?”
제론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경매 진행 상황이었다. 확인은 아주 간단했다. 펠젠은 매일 경매 진행 상황을
마법의 거울을 통해 바인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보고 내용은 고스란히 제론의 태블릿에도 저장된다. 제론은 그것만 확인하면 끝이었다.
제론이 확인하고 싶은 물건은 바로 라쿠스의 설계도였다. 워낙 대단한 물건인지라, 경매가 하루에 끝나지 않았다.
경매를 시작한 지 벌써 5 일이 지났는데도 결판이 안 났다.
“슬슬 마무리될 때가 되었는데…….”
아무리 기간트의 설계도라 하더라도 그 가치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경매 시작 전에 이번
경매에 대한 정보를 슈린 공작가에 흘렸다.
결국 슈린 공작가도 경매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경매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버렸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경매에 대한 보고서를 찾았다. 그리고 눈을 빛냈다.
“2300 만 골드라…….”
정말 엄청난 액수에 팔렸다. 아무리 새로운 기간트의 설계도라지만 상당히 높은 액수였다. 어차피 설계도만으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설비를 갖춰야 생산을 할 수 있다.
기간트 생산에 들어가는 원가도 만만치 않기에 이 설계도를 사서 이익을 얻으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한데
그렇게 오래되면 기간트도 결국 구형으로 밀려날 공산이 컸다.
물론 실바의 경우를 생각하면 아무리 구형으로 밀려나더라도 값어치가 많이 떨어지지는 않지만 말이다.
제론은 다시 태블릿을 조작했다. 그리고 바인에게 연결해 과연 누가 설계도를 낙찰받았는지 확인했다.
“역시!”
제론의 얼굴이 환해졌다. 설계도는 슈린 공작가에서 낙찰받았다. 완벽하게 계획대로 된 것이다.
슈린 공작가에서는 설계도를 구입하며 그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짜라는 걸 확인하고는 치를 떨었다. 그리고
배신자를 찾느라 온 영지를 들쑤시는 중이었다.
슬슬 라쿠스가 생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판로를 준비 중이었다. 슈린 공작가의 도약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그러니 개국을 생각하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제대로 고춧가루를 팍팍 뿌려 주지.”
이제 미리 준비한 라쿠스의 약점을 공개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대놓고 할 생각은 없었다. 아주 은밀히
정보 조직을 통해 퍼뜨릴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라쿠스를 사려는 자들은 그런 정보 조직의 정보를 싹 훑을 수 있을 정도로 힘과 능력이 클
테니까.
제론이 준비한 라쿠스의 약점은 아주 치명적인 것들이었다. 구조적인 결함에서 발생한 약점이었고, 마법진의
설계가 잘못되어 생겨난 약점이었다.
“이 약점을 극복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제론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 ☆ ☆

“뭣이!”
네이드 후작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전포고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에어스트 백작령이 왜 난데없이 선전포고를 한단 말인가. 예전에 앙금이 좀 있긴 했지만
어차피 그건 다 해결되지 않았던가.
“허가는! 왕실의 허가는 어떻게 되었느냐!”
“아예 영지전 신청도 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네이드 후작은 어이가 없었다. 아예 영지전 신청도 하지 않고 선전포고를 하다니. 이건 엄연히 왕국법 위반이었다.
이대로 수도 행정청에 보고를 하고 이의를 제기하면 에어스트 백작령은 징계를 피할 수 없었다.
“당장! 당장 수도 행정청에 연락을 해라! 어서!”
에어스트 백작령의 힘은 예전에 뼈저리게 느꼈다. 그 때문에 기간트의 수를 70 기까지 억지로 늘렸다. 하지만
이대로는 결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가신들이 후다닥 움직였다. 그들도 일단 왕국의 개입을 최대한 빨리 이끌어 내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쟁 준비도 해라! 만일의 사태에 시간을 최대한 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네이드 후작의 명령은 당연했다. 하지만 에어스트 백작령이 독립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렇게
미온적인 대처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네이드 후작의 첫 번째 패착이었다.
“슈린 공작가! 슈린 공작가에 도움을 청해라!”
네이드 후작은 슈린 공작가가 절대 외면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이곳 네이드 후작령은 에어스트 백작령을 견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영지였다.
네이드 후작령이 에어스트 백작령에 넘어가면 에어스트 백작령은 사방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길을 얻게 된다.
물론 사방에서 쳐들어올 수 있는 길을 막아 내기도 해야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에어스트 백작가가 외부로 뻗어 나가는 것은 슈린 공작가로서는 절대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에어스트 백작가는 끝까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가 결국 처참히 짓밟혀야만 할 곳이었다.

☆ ☆ ☆

쿵! 쿵! 쿵! 쿵!
선전포고를 한 지 정확히 사흘째, 200 기의 기간트가 진군을 시작했다. 에어스트 백작령 기간트 부대의 3 조와 4
조였다.
경험이 좀 부족하긴 했지만, 엄청난 훈련을 받았다. 긴장해서 제 실력을 못 내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 훈련은 어마어마하게 빡세다. 또한 군부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 거의 일대일로
훈련을 봐 준다.
그러니 실력이 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쿵! 쿵! 쿵! 쿵!
네이드 후작령의 기간트 70 기가 쫙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깊은 해자를 파 놓고 기다렸다.
에어스트 백작령 측 기간트 부대가 일제히 진군을 멈췄다. 이대로 가면 해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해자는
흙탕물로 꽉 채워져 있어서 깊이를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제론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기간트도 소환하지 않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마법진을 통해 모습을
감추고 몸을 위로 띄웠기에 전장을 넓게 확인할 수 있었다.
200 기의 기간트 뒤로 발굴형의 정점에 있는 기간트, 히엠스가 서 있었다. 당연히 그것은 얼마 전에 교체한
카이트의 기간트였다.
카이트는 길게 파인 해자를 보고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4 조는 뒤로 물러나서 바위를 준비해라. 3 조는 적을 견제하며 천천히 전진!”
쿵! 쿵! 쿵! 쿵!
200 기에 달하는 기간트가 카이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앞에 선 3 조는 천천히 전진했고, 뒤에
있던 4 조는 사방으로 흩어져 바위를 모으기 시작했다.
작전은 단순했다. 바위를 던져 공격을 하는 것이다. 적에게 피해를 주면서 동시에 해자를 어느 정도 메울 수
있는 방법이었다.
바위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너무 큰 바위는 던질 수가 없기에 적당한 크기의 바위를 구해야만 했다.
그 점이 살짝 까다로웠다.
하지만 근처에 있던 나무까지 뽑아서 모으자, 금방 던질 만한 양이 모였다.
카이트는 지체하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3 조는 바위와 나무를 던진다!”
3 조의 기간트 100 기가 일제히 바위를 들었다.
그러자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 준비했는지 커다란 강철 방패를 들고 전면을
막았다.
그들의 목표는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준비는 비교적 철저히 했다. 이렇게 해자를 파고 기다릴 경우
할 수 있는 공격이 바위나 나무를 던지는 것 외에는 없다고 판단해서 준비한 방패였다.
카이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자를 메울 목적도 있었다.
“던져!”
휘잉! 휘잉!
커다란 바위가 허공을 휙휙 날아갔다.
꽈과광!
바위가 강철 방패를 사정없이 두드렸다. 어찌나 강한지 방패를 든 기간트가 뒤로 주춤 물러날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튄 바위 중 일부가 해자로 떨어졌다.
첨벙! 첨벙!
카이트는 뒤에서 바위가 해자에 떨어지는 광경을 유심히 관찰했다. 해자의 깊이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3 조는 계속 던져! 4 조는 바위를 찾아! 그리고 흙을 준비해!”
적이 방패로 몸을 가리고 있으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가까이 접근해 해자에 흙을 부어 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4 조의 기간트 중 절반이 흙을 파기 시작했다. 흙을 담을 도구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커다란 강철 방패가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이거 어려워지겠는데? 슈린 공작가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나?”


네이드 후작령의 기간트 부대를 지휘하는 기사단장이 소리쳤다. 200 기나 되는 적의 위용을 보니 싸울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다.
게다가 적의 대장은 무려 히엠스를 가지고 나왔다.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네이드 후작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시간을 끌면서 슈린 공작가의 지원군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기사단장은 어두운 얼굴로 점점 메워지는 해자를 바라봤다. 착잡했다. 저걸 파느라 얼마나 애썼는데 저렇게 쉽게
채워진단 말인가.
“설마 저런 방패를 준비했을 줄이야.”
강철 방패를 마치 삽처럼 이용해 땅을 쑥쑥 파는데, 한 번 방패가 움직일 때마다 흙이 산처럼 쌓였다. 그걸
방패에 담아 해자에 들이부으니 얼마나 금방 메워지겠는가.
이대로 두면 곤란했다. 슬슬 이쪽에서도 대응하지 않으면 금방 해자를 넘어 달려들 것이다.
“준비해라!”
기사단장의 명령에 후작령 측 기간트들이 강철 방패 안쪽에 붙어 있는 랜스를 꽉 쥐었다. 잘 숨겨 뒀다가 적이
가까이 다가오면 냅다 던질 계획이었다.
이 작전을 위해 비록 몇 시간이지만 엄청나게 빡센 훈련까지 했다.
방패에 흙을 담은 기간트들이 해자로 다가왔다.
쿵! 쿵! 쿵! 쿵!
기사단장은 긴장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이것은 타이밍이 중요했다. 창을 막거나 피하기 어려운 자세나
상황에서 던져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기간트들이 해자에 흙을 일제히 부었다.
촤아악!
기사단장의 눈이 번득였다. 바로 지금이었다.
“던져!”
기사단장의 명령에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들이 일제히 방패에서 창을 뽑아 던졌다.
쐐액! 쐐액! 쐐애애액!
무려 70 개의 철창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비록 넓긴 하지만 고작 해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던진 창이었다.
그 위력이 얼마나 엄청나겠는가.
한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방패에 담긴 흙을 쏟던 기간트들이 일제히 방패를 위로 쑥 들어 올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철창이 방패를 꿰뚫었다. 하지만 방패를 든 기간트에 닿지는 않았다. 뚫은 채로 방패에 박힌 것이다.
50 기의 기간트에게 철창이 생겼다. 그리고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 라이더는 평소에 창 다루는 훈련을 지독할
정도로 심하게 한다.
50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방패에 박힌 창을 뽑았다. 철창이 아주 간단히 쑥쑥 뽑혀 나왔다.
기간트들이 투창 자세를 취했다. 목표는 당연히 해자 건너편의 기간트들이었다.
네이드 후작령의 기간트들이 당황하며 방패로 앞을 막았다. 워낙 큰 방패였는지라 온몸을 다 막을 수 있었다.
끼기기긱!
50 기의 기간트가 몸을 크게 뒤로 젖혔다. 기간트로 할 수 있는 거의 한계의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탄력을 만든
기간트가 그대로 몸을 앞으로 꺾으며 창을 던졌다.
쿠오오오오!
어마어마한 위력의 창이 앞으로 쭉 날아갔다. 바람을 찢으며 날아간 창이 정확히 방패에 꽂혔다.
놀라운 점은 50 개의 창이 꽂힌 방패의 위치가 각각 모두 같다는 사실이었다.
꽈드드득!
창은 맹렬히 회전까지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투창 실력이었다.
쿵쿵쿵쿵!
어찌나 위력이 대단했는지 창을 방패로 받아낸 기간트들이 일제히 뒤로 몇 발 물러났다. 힘에 밀린 건 아니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간트를 조종하는 라이더가 당황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창은 방패를 쥔 기간트의 팔에 정확히
꽂혀 버렸다.
그 바람에 팔이 망가져 버렸다. 투창이 회전하면서 팔 관절에 새겨진 마법진을 손상시킨 것이다. 물론 축이 되는
부속들도 망가졌고 말이다.
50 기의 기간트가 그렇게 팔을 잃었다. 그리고 방패와 손이 창에 꿰어 다시 방패를 떼어 내기가 어려워졌다.
당연히 카이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렸던 기회인데 그걸 놓친단 말인가.
적이 창을 준비했다는 걸 미리 알고 준비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위해 투창 연습을 며칠이나 했다.
“진격!”
카이트의 외침에 기간트들이 일제히 앞으로 움직였다.
쿵! 쿵! 쿵! 쿵!
해자 앞에 도착한 기간트들이 미리 들고 간 바위를 해자 안으로 던졌다.
첨벙! 첨벙!
그렇게 해도 해자를 완전히 메울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이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이를 대비한 작전까지 미리
준비해 뒀다.
기간트들이 일제히 방패를 해자에 비스듬히 박았다.
콰직!
해자를 어느 정도 메워 놓았기에 방패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고 물 위에 끝 부분이 드러났다.
무려 100 개의 방패가 그렇게 해자 곳곳에 꽂혔다.
방패가 꽂히자, 기간트들이 거침없이 앞으로 진격했다. 넹드 후작령의 기간트는 방패가 앞을 가리고 있어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쿵! 쿵! 쿵!
방패 2 개를 연달아 밟으면 해자를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방패가 깊이 박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총 50 기의 기간트가 해자를 넘어갔다.
콰과과광!
50 기의 기간트가 그대로 앞으로 돌격해 적의 방패를 두드리며 밀었다.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의 진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리고 진형이 무너진 기간트 부대는 더 이상 큰 힘을
내지 못했다.
그렇게 50 기의 기간트가 적을 상대하는 사이 나머지 기간트들이 급히 해자를 메우고 건너갔다.
200 대 70 의 싸움은 금방 끝났다. 더구나 한쪽은 팔 한 짝이 망가진 상태였다. 싸움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 부대가 네이드 후작령의 기간트 부대를 일방적으로 박살 냈다.
싸움은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사실상 영지전이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슈린 공작가의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전력은?”
“기간트 100 기입니다.”
수하의 보고에 카이트는 씨익 웃었다. 이쪽은 거의 피해 없이 200 기의 기간트를 고스란히 남겼다. 그러니 200
대 100 의 싸움이 된 것이다.
“가자!”
카이트의 명령에 200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굉음을 토해 내며 앞으로 이동했다.
쿵! 쿵! 쿵! 쿵! 쿵!
네이드 후작령을 거의 가로지르듯 지나친 기간트 부대는 적이 보이는 곳에서 멈췄다.
슈린 공작가 측 기간트가 잔뜩 보였다. 그들은 카이트가 이끌고 온 200 기의 기간트를 보고는 크게 당황했다.
설마 이런 상황이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사실 지금 온 100 기가 1 차 지원군이고 2 차와 3 차 지원군을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이곳에
있는 기간트의 수가 100 기라는 점이었다.
“자비를 버려라. 돌격!”
카이트는 다짜고짜 명령했다. 적은 아직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 부대와
합류해 시간을 끌며 적을 상대하려 했는데, 이렇게 적과 맞닥뜨렸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에어스트 백작령 측 기간트 부대의 가장 앞에서 카이트의 히엠스가 달려갔다. 지금은 적을 한바탕 휘저어 주는
것이 중요했다.
꽈과과광!
카이트가 적 안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상당히 무리를 했다. 카이트는 제론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카이트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적은 아직 고작 하나다! 일단 이놈부터 부숴!”
슈린 공작가 측 기간트 부대의 대장이 외쳤다. 그는 분명히 히엠스를 박살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쿵쿵쿵쿵!
어느새 나타난 붉은 실바 하나가 슈린 공작가 측 기간트 진형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꽈과과과광!
붉은 실바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순식간에 진형이 무너졌다. 그로 인해 처음 파고든 카이트의 히엠스도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진형이 무너진 기간트 부대를 200 기의 기간트가 그대로 덮쳤다.
꽈과과과과광!
싸움은 싱거울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슈린 공작가에서 보낸 100 기의 기간트는 허무하게 스러져 갔다.
그걸로 영지전이 완전히 끝났다.

슈린 공작가에서 준비한 2 차, 3 차 지원군은 중간에 돌아갔다. 더 전쟁을 이어가 봐야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은 깔끔하게 네이드 후작령을 포기했다.
하지만 잠시 손을 떼는 것일 뿐이었다. 슈린 공작가는 에어스트 백작령의 그 어마어마한 곡창 지대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더 확실히 준비해서 단번에 몰아치기로 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슈린 공작가는
에어스트 백작령 말고도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또한 에어스트 백작령과 싸우느라 전력을 더 소비하는 건 개국에 지장을 줄 수도 있었다.
일단은 그게 먼저였다.

Chapter 9 독립

네이드 후작령을 병합하는 작업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이제 에어스트 백작령에도 제법 인재가 많았다. 또한 차기
총관 후보인 엔트의 일처리 능력이 상당했다.
바이스는 네이드 후작령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엔트에게 인수인계를 했다.
그렇게 엔트는 에어스트 백작령의 총관이 되었다. 사실 말이 총관이지 이제 독립을 해서 에어스트 왕국이 되면
왕국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대신이 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바이스는 그런 자리를 엔트에게 넘긴 것이다. 오로지 마법에 대한 열망 하나로 말이다.
사실상 제론이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제론은 그저 결정만 내리면 끝이었다. 세부적인 일은 행정관들이 알아서
진행했다.
바이스와 카이트, 세나는 각각 마법, 병력, 기간트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았다.
에어스트 백작령이 왕국으로 독립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니 그 정도 대가는 당연했다.
제론은 그렇게 모든 일을 가신과 관리들에게 맡겨 놓고 프로인트를 찾아갔다.
프로인트는 갑작스런 제론의 방문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잘 맞아 주었다.
솔직히 자신은 아직도 제대로 할 일을 찾지 못해서 상당히 불편한 상황이었다.
프로인트는 처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자신에게도 뭔가 일을 준다면 성심껏 노력할 자신이
있었다.
“스키아를 좀 빌려 줄 수 있나?”
“예?”
프로인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스키아를 빌려 달라니. 정령을 무슨 수로 빌려 준단 말인가.
“그,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소환을 부탁하지.”
프로인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림자의 정령을 불렀다.
“스키아.”
프로인트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덩어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사실 이 그림자의 정령은 아무나 함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인트는 제론이 스키아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금 놀라운 일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들 말고도 정령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물론 상당히 드물긴 하지만 말이다.
제론은 프로인트의 그림자로 다가갔다.
“요즘은 얼마나 오랫동안 정령을 소환한 채 유지할 수 있나?”
“5 분입니다.”
몸 상태가 좋아졌고 지속적으로 노력한 덕분에 상당히 시간이 늘어났다. 아마 목숨을 걸고 애쓰면 10 분까지도
소환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정신을 잃음과 동시에 죽을 수도 있겠지만.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숙였다. 프로인트의 그림자 위에 툭 튀어나와 있는 검은 덩어리가 요동쳤다.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느낌은 고스란히 프로인트에게 전해졌다. 프로인트는 놀란 눈으로 제론과 스키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스키아에게 이런 감정을 뽑아낸 사람은 제론이 처음이었다.
제론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스키아를 두 손으로 가볍게 감쌌다.
스키아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느리고 조심스러운 제론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 제론은 마치 스키아가 그쪽으로 피할
걸 예상한 것처럼 미리 손을 갖다 대 스키아의 움직임을 막았다.
스키아가 제론의 손아귀에 갇혀 버렸다. 그 순간 프로인트는 갑자기 스키아와의 링크가 끊어진 것을 느꼈다.
“이, 이런……!”
프로인트가 당황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왜? 뭔가 이상한 느낌이라도 받았나?”
“스, 스키아와의 링크가 끊어졌습니다.”
“링크가 끊어져?”
“스키아가 보고 듣는 걸 저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데, 그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
제론이 씨익 웃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스키아를 얻기 위해 제론은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가장 큰
문제는 스키아와 계약하려면 유적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하면 유적의 존재를 프로인트에게 들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제론의 마나로 강하게 스키아를 감싸 외부와 차단시키면 프로인트와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을까 하고 추측했다. 그리고 그 추측은 사실로 판명이 났다.
“그럼 이건 잠깐 빌리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프로인트의 방을 나왔다. 프로인트는 당황해서 제론을 쫓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었다.
하지만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물론 그 어디에도 제론은 없었다. 공간 이동을 통해
유적으로 갔으니 당연했다.
프로인트는 마치 눈을 감고 귀를 막은 것처럼 답답했다. 스키아와의 링크가 끊어지면서 스키아의 시선으로 보던
것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뇌리 한구석에 항상 떠 있던 영상과 음성이 사라지니 마치 뭔가를 잃은 것처럼 허전했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불안해졌다.
프로인트는 제론을 찾기 위해 서둘러 어딘가로 걸어갔다. 일단 성안을 샅샅이 뒤져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제론을 찾아 스키아를 돌려받고 싶었다.

제론은 유적 로비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스키아는 분명히 손 안에 있었다. 공간 이동을 하면서 손에 잡힌


정령이 사라져 버릴까 봐 살짝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 그대로 손아귀에 있었다.
“이런 줄 알았으면 예전에 네로를 잡았을 때도 공간 이동을 쓸걸 그랬어.”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정령을 가져왔으니 계약을 시작해야 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설마 내가 차단하고 있어서 그런 건가?”
유적의 능력이 워낙 대단하니 이렇게 차단해도 얼마든지 계약이 이행될 거라 생각했다. 한데 정령 계약에 관한
부분은 제론이 생각했던 것보다 유적의 능력이 모자라는 모양이었다.
사실 제론의 힘이 늘어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제론은 아직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
제론은 조심스럽게 손을 열었다. 아주 작은 틈이 생겨난 순간 스키아가 위로 휙 튀어나갔다. 그리고 유적의
벽에서 빛줄기가 쏘아져 스키아를 가둬 버렸다.
스키아는 맹렬히 몸부림쳤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유적의 힘은 스키아의 몸부림 따위는 아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정령 확인. 계약을 진행합니다.
유적의 벽이 물결치듯 빛났다. 그리고 바닥에서 은은한 빛이 올라왔다.
그 빛은 이내 거대한 마법진을 이뤘다. 그리고 그 마법진 한가운데에 스키아가 갇혔다.
―이미 계약된 정령입니다. 분화를 시도합니다.
제론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는 계약에 눈을 빛내며 상황을 지켜봤다.
마법진의 빛에 갇힌 스키아가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2 개로 늘어나 버렸다. 그리고 원래의 스키아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정령계로 돌아간 것이다.
마법진이 한순간 강렬하게 빛났다. 그리고 빛과 함께 정령도 사라져 버렸다.
―계약 완료. 소환 명령 코드는 스키아입니다.
정령 계약이 완료되었다. 이제 제론은 그림자의 정령 스키아를 보유한 두 번째 사람이 되었다.
“스키아.”
제론의 부름에 스키아가 나타났다. 제론의 그림자에서 불쑥 솟구쳤는데 색이 프로인트의 것보다 훨씬 진했다.
“이런 식으로 보는 거였군.”
제론은 스키아를 소환하자마자 프로인트가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얻었는지 알 수 있었다. 뇌리 한구석에 스키아의
시야가 그려졌다. 또한 소리도 들렸다.
그것이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오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직접 그려졌다. 참으로 특이한 방식이었는데, 제론은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테오스에서 마티를 통해 사방을 주시하던 훈련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같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제론은 스키아를 사방으로 움직여 봤다. 스키아의 움직임도 머릿속의 그 부분을 통해 제어가 가능했다. 제론의
제어는 프로인트가 하는 것보다 훨씬 능숙하고 빨랐다.
스키아의 제어는 그동안 정령을 다뤄 본 경험에서 도움을 얻었다.
“유적 밖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하군.”
스키아는 마치 벽에라도 막힌 듯 유적 내부만 맴돌았다. 아니, 유적 전체를 다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로비만 계속 맴돌았다. 로비를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럼 슬슬 돌아가 봐야지. 확인할 것도 있고.”
계약하는 순간 제론의 손을 빠져나갔으니, 순간적으로 프로인트와의 링크가 이어졌을 수도 있었다. 물론 유적의
특성을 생각하면 불가능했지만, 확인하는 게 나았다.
제론은 유적에서 나가 프로인트를 찾아갔다.

프로인트는 갑자기 돌아온 스키아 때문에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처음에는 스키아를 잃어버린 줄 알았다. 계약이
취소된 줄 알았다.
어떤 방법으로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프로인트는 스키아와 확실히 계약을 했다. 예전 제론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스키아는 이제 프로인트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그 상실감은 엄청났다.
그래서 성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안 그래도 독립 문제로 상당히 분주하고 바쁜 상황이었기에 프로인트는
여기거지 민폐를 끼치면서 다녔다.
당연히 눈총도 따라왔다. 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스키아를
찾아야만 했으니까.
그렇게 돌아다니던 중, 갑자기 스키아가 돌아왔다. 아니, 정령계로 돌아갔다. 프로인트는 스키아와의 링크가
연결된 걸 느끼고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대체 제론은 스키아를 데려다가 뭘 한 것인가. 스키아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프로인트는 일단 스키아를 달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다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제론이 올 것이라 믿었다.
이 일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제론뿐이었다. 프로인트는 방에서 1 초를 1 시간처럼 느끼며 제론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문이 열렸다. 프로인트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안도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제론이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프로인트는 반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영주님!”
너무나 격한 반응에 제론은 씨익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많이 놀란 모양이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제 정령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불안하다고?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일시적이지만 자유를 빼앗겼으니.”
프로인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단순히 자유를 빼앗긴 걸로 이렇게 불안에 떨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 제론이
스키아를 손에 가뒀을 때 분명히 느꼈다.
스키아가 지금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함은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분명히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 것이다.
“잘 다독여 줘. 가능하지?”
“그야 그렇습니다만…….”
제론이 또 씨익 웃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게는 보여 줘야 할 것 같아서.”
제론의 말에 프로인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이내 경악으로 바뀌었다. 제론의 한마디에
의해서.
“스키아.”
제론의 그림자에서 스키아가 불쑥 튀어나왔다. 프로인트는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제론의 그림자에서 나온 스키아는 자신의 스키아와는 달랐다. 프로인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스키아.”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로 저것이 다른 정령인지. 말을 꺼냄과 동시에 확인이 되었다. 프로인트의 그림자에서도
스키아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 그림자의 정령과 계약하신 겁니까? 제 스키아를 이용해서?”
“그래. 아무튼 빌려 줘서 고마워. 정령은 조만간 안정을 찾을 거야. 내가 좀 도와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제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론의 스키아가 프로인트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두 스키아가 그 안에서 서로 뒤엉키며 놀기 시작했다.
프로인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스키아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동안 엄청나게
외로웠다는 사실도.
즐거움은 대번에 안정을 가져왔다. 자신이 다독이는 것보다 다른 정령과 노는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정령계에서 다른 정령과 어울릴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령계로 돌아가면 링크만
확인되지 시야가 공유되지 않으니 그런 건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자책하지 말고, 허탈해 하지도 마. 정령은 원래 그런 존재야.”
“하지만…….”
“앞으로 최대한 자주 불러 줘. 그게 도움이 될 테니까.”
프로인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정령과 제론이 계약한 정령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가끔 찾아와 도와주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론은 빙긋 웃어 준 뒤 스키아를 돌려보내고 방에서 나갔다.
프로인트는 허탈한 표정으로 자신의 스키아를 바라봤다. 한참 보다 보니 점점 안쓰러워졌다. 자신의 무지 때문에
대체 얼마나 외로웠을까?
“미안하구나.”
프로인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스키아가 바닥을 타고 빠르게 움직여 프로인트의 몸을 타고 손으로
올라갔다.
프로인트는 그 순간 스키아와 자신의 링크가 더욱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프로인트는 그 뒤로 기절할 때까지 스키아와 함께 놀았다.
놀랍게도 스키아를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더 늘어나 있었다. 이제는 30 분이 지나도 끄떡없었다.
기절한 프로인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그리고 스키아가 그 미소에 드리워졌다. 물론 바로 정령계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 ☆ ☆

제론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와 당장 스키아를 불렀다. 프로인트와 스키아에 대한 대화를 많이 했기에 그 한계에
대해 들었다.
그러니 이젠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아야만 했다.
그림자를 타고 이동하는 스키아의 능력은 엄청났다. 세상에는 그림자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지가 계속
이어져도 하다못해 땅속에는 그림자가 진다.
흙 알갱이 아래에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그림자가 존재한다.
스키아는 그런 그림자를 타고 고속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거의 순간 이동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제론의 의념을 받은 스키아가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빠르게 성을 벗어나 멀리까지 이동했다.
처음 예상한 한계 거리는 성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였다. 프로인트의 경우는 범위가 그보다 훨씬 좁았다. 하지만
제론은 프로인트와는 좀 다르니 범위가 넓어질 거라 예상했다.
한데 막상 해 보니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도시를 벗어나 거의 영지 전체를 범위에 둘 수 있었다.
제론은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봤다. 스키아가 과연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또, 있다면 어느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게 가능한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시험했다.
프로인트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스키아는 그림자를 통해 이동한 다음 근처의 일을 보고 듣는 것 외에는 아무
능력이 없었다.
프로인트 역시 많은 시도를 해 봤지만 그것 외에는 어떤 능력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론은 자신과 프로인트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였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는 보통 사람에 비해 의지력과 집중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다.
그 의지력을 이용해 스키아에게 강렬한 의념을 보냈다. 스키아는 제론과 연결되어 있기에 어떤 의념이든 곧장
전달이 가능했다.
현재 스키아는 영지 끝에 있는 농지에 있었다. 제론은 스키아의 몸을 날카롭게 변형시킨 뒤, 자라는 밀의 밑동을
잘라 냈다.
당연히 처음에는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안되는 게 아니라 뭔가 가능성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래서 더
시도하고 애를 쓸 수 있었다.
싹둑!
20 여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비록 밀 몇 가닥에 불과했지만 밑동을 잘라 낼 수 있었다.
이 정도 물리력을 이용할 수 있다면 상당히 유용할 것이다. 막말로 몰래 어딘가에 숨어 들어갈 때도 이용할 수
있었다.
스키아는 모양 변형이 자유로웠다. 열쇠에 딱 맞는 모양을 형성해서 잠긴 문을 따는 것도 가능했다.
제론은 한동안 스키아를 다루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3 일을 푹 빠져서 산 끝에 스키아를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제론이 스키아에 매달리는 동안 에어스트 백작령의 독립 준비도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 ☆ ☆

워낙 에어스트 백작령의 행정 체계가 잘되어 있었기에 네이드 후작령을 흡수하는 일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애초에 처음 행정 체계를 세울 때,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또한 이번에 병합하면서 드러난 문제점을 파악하고, 향후 드러날 가능성이 높은 문제점까지 예측해 행정 체계를
보강했다.
이는 네이드 후작령을 통해 주변 영지를 언제든 병합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
의지는 영지의 수뇌부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네이드 후작령을 얻음으로 해서,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난민을 엄청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구는 언제나 에어스트 백작령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한데 그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그렇게 에어스트 백작령이 네이드 후작령을 병합하며 독립을 준비하고 있을 때, 1 왕자가 기습적으로 수도를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 국왕의 인장을 차지해 버렸다. 1 왕자는 스스로 레늄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거의 왕위 찬탈에 가까운
행위였다.
1 왕자의 행동은 나머지 두 세력에 기폭제를 던져 넣은 셈이 되었다.
슈린 공작가는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2 왕자를 숙청하고 새로운 왕국을 건국해 버렸다.
그렇게 되니 그때까지 분위기만 살피던 중립 세력도 발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적당한 합의점을
찾은 뒤 결국 건국했다.
하나의 강국이 3 개의 소국으로 갈라져 버렸다. 아니, 4 개의 소국으로 갈라졌다.
그 직후, 에어스트 백작령이 건국한 것이다.

☆ ☆ ☆

제론의 대관식은 성대했다. 사실 제론은 그런 형식적인 건 필요 없다고 주장했지만, 가신들이 끝까지 우겨서
그렇게 했다.
사실 제론은 독립이 중요했지, 자신이 왕이 되는 건 중요치 않았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어디든 이동하고
활동하면서 활발히 움직일 생각이었다.
재정적으로 풍족했기에 에어스트 왕국의 대관식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성대하고 화려했다.
그리고 건국 파티가 길게 이어졌다.
제론은 파티에 참석한 수많은 손님을 일일이 만나 인사를 나눠야만 했다.
그중에는 잘 아는 반가운 얼굴도 제법 많았다. 예를 들면 디아만트 후작가의 클레가 그러했다.
하지만 꼭 반가운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에 건국한 슈린 왕국에서 파인트가 왔다. 1 왕자의
심복인 근위기사단장 몰트도 왔다.
그들은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밀약이라도 맺은 듯했다.
사실 슈린 왕국과 에어스트 왕국이 인접해 있으니 가장 먼저 손을 뻗을 수 있는 건 슈린 왕국이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 에어스트 왕국을 치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손을 잡은 것이다. 에어스트 왕국의 그 막대한 식량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수많은 귀족과 왕족이 참석했다. 에에스트 왕국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들을 모두 똑같이 대해 주었다. 누굴 더 반가워하지도 더 꺼려하지도 않았다.
사실 제론의 마음은 이미 대관식이나 파티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제론의 마음은 유적에 가 있었다.
이제 드디어 유적 14 층 클리어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이스히스와 어떻게 싸울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그러니 파티에 집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설렁설렁 넘어가서도 안 된다. 이 파티는 향후를
생각하면 아주 중요했다.
그렇게 열흘이나 이어지는 파티가 끝났다.
하지만 파티가 끝났다고 모든 손님이 돌아간 건 아니었다. 아니,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에어스트 왕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또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눈에 불을 켰다.
제론은 그 모든 일에 관심을 끊었다. 그리고 설레는 가슴을 안고 유적으로 향했다.

Chapter 10 이스히스

유적 14 층은 변함이 없었다. 오랜만이었지만 바로 어제 왔던 것처럼 친근하기까지 했다.


이내 이스히스가 나타났다.
제론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검을 뽑았다.
단단한 근육을 뭉쳐 놓은 듯한 모습의 이스히스를 보고 있자니, 이젠 든든한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좀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초고대문명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한데 그런 굉장한 문명이 만들어 낸 기간트가 고작 이스히스 정도라면 참으로 실망스러운 문제였다.
물론 이스히스와 맨몸으로 대적해야 하니, 어느 정도 납득은 했다. 애초에 기간트를 상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사람을 상대로 만든 기간트라면 굳이 저런 형태로 만들 이유가 없었다. 이스히스는
누가 봐도 기간트를 상대하기에 더 유리한 모습이었다.
제론은 상념을 털어 내고 눈앞에 서 있는 이스히스를 쳐다봤다. 그리고 집중했다.
지금은 딴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스히스는 온전히 집중해도 이기기 어려운 상대였다.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지 않으면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설사 하이쓰 산맥 유적에서 고대의 소드 마스터를 만나 대결하며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다 하더라도 말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집중하자마자 이스히스가 움직였다. 덩치에 맞지 않게 빠른 속도는 이번에도 역시 제론에게
괴리감을 안겨 주었다.
꽈앙!
이스히스의 도끼가 바닥을 찍었다. 제론은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해 냈다.
제론의 검이 이스히스의 도끼자루에 꽂혔다.
쩡!
이스히스의 도끼가 크게 휘었다. 아무리 강력한 일격을 먹여도 부러뜨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몰랐을 때라면
당황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일부러 노리고 쳤다.
크게 휘었던 도끼자루가 원래대로 돌아오며 세차게 흔들렸다. 탄성이 워낙 좋았기에 그 요동의 폭이 상당했다.
그리고 그것을 억누르느라 이스히스의 균형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제론이 노린 것은 바로 그 빈틈이었다.
검이 도끼자루를 때렸을 때의 반탄력을 이용해 허공에 떠오른 제론은 곧장 이스히스의 목을 향해 검을 찔렀다.
우우웅!
제론의 검이 새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이 쭉 늘어났다. 빛의 검을 덧씌운 듯한 모습이었다.
빛의 검이 이스히스의 목을 찔렀다.
쩌엉!
이스히스의 몸이 크게 뒤로 젖혀졌다. 제론이 내지른 일격은 그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그 후에 이어지는 이스히스의 대처는 놀라울 정도였다.
이스히스는 젖혀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누워 버렸다. 그러면서 발을 차올렸다. 기간트가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후웅!
제론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발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앞을 향해 검을 크게 휘둘렀다.
쉬아악!
검에서 폭풍 같은 바람이 일어났다. 제론은 그 바람의 힘을 이용해 옆으로 슥 이동했다. 허공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인 제론의 코앞을 거대한 발이 스치고 지나갔다.
후우웅!
하마터면 저 거대한 발에 휩쓸릴 뻔했다. 제론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쉬익! 쉬익! 쉬익!
제론의 검에서 새하얀 빛 덩어리가 초승달 모양으로 날아갔다.
꽝! 꽝! 꽝!
어느새 자세를 잡은 이스히스가 도끼로 그것을 막아 냈다. 이스히스의 도끼는 그 정도 타격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제론도 그걸로 이스히스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하기 위한 행동일
뿐이었다.
제론이 착지하자마자 이스히스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어찌나 빠른지 대응이 어려울 정도였다.
제론은 검을 비스듬하게 세워 이스히스의 도끼를 흘리며 옆으로 이동했다.
쩡!
검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엄청난 충격이 손을 타고 전달되었다. 하지만 제론의 몸에 흐르고 있는 마나가 그
충격을 흩어 버렸다.
제론은 더 빠르게 이동해 이스히스의 뒤를 잡았다. 그리고 날아오르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쭉 그었다.
콰가각!
새하얗게 빛나는 제론의 검이 이스히스의 등을 쭉 그었다. 등판에 깊은 흔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거로는
이스히스의 움직임에 조금도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적어도 같은 자리에 같은 일격을 몇 번 더 먹여야 표가 날 것이다.
이스히스가 돌아서며 도끼를 휘둘렀다.
콰우우!
거대한 도끼가 바람을 찢으며 제론을 향해 날아갔다.
제론은 뒤로 쭉 물러났다. 도끼의 사정권에서 벗어난 다음 도끼가 지나가자마자 다시 달려들어 공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금방 깨졌다.
이스히스가 중간에 도끼를 놔 버렸다. 도끼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제론을 향해 날아갔다. 피할 틈조차 없었다.
허를 찔린 데다가 속도도 너무 빨랐다.
제론은 검을 들어 도끼를 막아 냈다. 아니, 위로 비스듬히 튕겨 냈다. 이스히스의 힘이 너무 강해서 정면으로
부딪치면 대적이 불가능했다. 아무리 제론이 소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말이다.
꽈아아아앙!
힘을 다 흘려 냈는데도 엄청난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다. 물론 도끼는 위로 튕겨 냈다. 하지만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거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스히스가 달려들었다. 제론이 경악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제론은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정!
이스히스의 주먹과 제론의 검이 부딪치며 수많은 불꽃을 만들어 냈다.
제론은 당황했다. 이스히스의 실력이 예전보다 훨씬 늘어난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올라간 실력으로 좀
더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데 지금은 예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이스히스는 여전히 대처가 어려울 정도로 빨랐고, 강력했다.
‘이건 다 그 위화감 때문인 것 같은데…….’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느릴 것 같은 덩치가 빠르다고 감각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위화감을 느낀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것도 소드 마스터가 말이다.
제론은 이를 악물며 옆으로 뛰었다. 이스히스가 지나치길 바라면서. 하지만 이스히스는 제론의 생각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한 기간트였다.
화아악!
폭풍 같은 바람이 일어나며 이스히스가 제론 앞에서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팔을 크게 휘둘렀다. 어느새
이스히스의 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다.
부우우웅!
제론은 다급히 검을 들었다. 도끼가 날아오는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허공에 뜬 채로는 절대 반응할 수 없었다.
제론의 검을 이스히스의 도끼가 강렬하게 후려쳤다.
꽈아아앙!
제론은 뒤로 훌훌 날아갔다. 이번 건 충격이 제법 컸다. 향후 싸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미치겠군.’
싸움이 좀 쉬워질 거라고 여긴 것이 실수였다. 그것이 마음을 좀 느슨하게 만든 것이다.
똑같이 어려운 싸움이었다. 한데 마음가짐이 느슨하니 예전보다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또한 쌓인 충격 때문에 움직임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질 수는 없었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눈을 빛냈다.
바닥에 착지한 제론의 눈에 어느새 앞에 다가온 이스히스의 도끼가 보였다. 워낙 타이밍이 훌륭해 이번에도 그저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꽈앙!
검의 각도를 절묘하게 조절해서 이번에는 날아가지 않고 바닥을 쭉 미끄러지며 멈추고 자세를 잡을 수 있도록 했다.
말도 안 되는 시도였지만 제론은 멋지게 성공했다.
제론은 이스히스를 똑바로 노려봤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냉정히 따지면 속도는
제론이 훨씬 위였다.
이스히스가 빠르게 다가왔다. 제론은 그 움직임을 똑바로 보고 있다가 오히려 안으로 파고들었다.
제론이 가슴으로 다가오자 이스히스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렇게 빨리 이동하는 와중에 이런 식으로 멈출 수
있다는 건 거의 반칙에 가까웠다.
후우웅!
이스히스의 도끼가 제론의 정수리를 쪼개 왔다.
제론은 한 발 더 안으로 파고들었다. 등 뒤로 도끼가 지나가고 도끼자루가 머리로 떨어졌다. 하지만 제론에게
닿지는 않았다. 제론이 비스듬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꽈앙!
도끼가 바닥을 찍었다. 제론은 진동하는 도끼자루를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강하게 당겼다.
쉬익!
바람을 가르며 제론이 위로 올라갔다. 정말 오랜만에 잡은 기회였다.
제론의 검이 새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이 이스히스의 가슴을 찔렀다.
쩌어어어엉!
제론은 짧은 시간에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냈다. 당연히 그 파괴력은 엄청났다.
이스히스의 가슴에 거미줄 같은 금이 쩍쩍 갔다.
제론은 충격의 반탄력을 이용해 뒤로 휙 날아서 물러났다. 이스히스는 그 충격으로 뒤로 거의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결국은 균형을 잡아서 섰다.
외형적인 타격은 많이 받았지만 내부적인 타격은 거의 없었기에 이스히스는 처음과 마찬가지 속도와 움직임으로
제론에게 달려들었다.
제론은 그 뒤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조금씩 이스히스와의 싸움이 대등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예전의 감을 다시 되찾은 제론은 그때부터 예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히스가 가진 위화감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지금까지 이스히스의 생김새 때문에 빠른 속도에 위화감을 느꼈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스히스는 순간적으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것은 상대가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미묘하게 변했고,
정면에서만 속도에 변화를 줬기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크기도 변했다.
온몸이 근육질로 뒤덮인 것처럼 거대한 것도 모두 그를 위한 것이었다. 그 근육이 마치 생체 기관처럼 숨을
들이마시면 부풀어 오르고, 내뱉으면 쪼그라드는 듯했다.
워낙 자연스럽고 미세하게 변해서 그 차이를 못 느낄 뿐이었다.
제론도 이제야 그 차이를 인식했다. 만일 새로운 경지에 들지 못했다면 여전히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비단 이스히스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의 도끼도 마찬가지였다. 그 미묘한 차이가 계속 타이밍을 어긋나게 만든
것이다.
제론은 더 신중하게 이스히스를 살폈다. 공격할 때마다 팔다리가 부풀고 줄어드는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처음에는 너무 미세해서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는데, 계속 신경을 쓰다 보니 이젠 익숙해져서 그 차이가 엄청나게
느껴졌다.
사실 차이가 엄청난 건 맞다. 그로 인해 속도에 차이가 생겨나니 말이다. 크기가 변한다는 건 원근감에 문제를
만든다는 뜻이었다.
그 미세한 변화가 순간적으로 일어나면 제대로 타이밍을 잡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일단 익숙해지고 나니, 훨씬 상대하기가 편해졌다. 타이밍을 맞추는 건 물론이고,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때부터 제론은 압도적인 싸움을 이어 나갔다.
파괴력이나 힘은 이스히스가 확실히 위였지만, 나머지는 제론이 위였다. 일단 속도가 훨씬 빨랐다.
제론은 이스히스의 가슴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일단 제대로 일격을 먹여 거미줄 같은 금이 쩍쩍 간 상태였기에,
같은 곳을 여러 번 찌르니 금세 가슴 부분이 부서져 나갔다.
제론은 바람처럼 움직여 이스히스를 농락했다. 신기하게도 모든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이스히스와 싸우는 와중에 새로운 경지에 발을 들인 것이다. 물론 아주 살짝이었지만 말이다.
제론의 검이 이스히스의 가슴을 다시 한 번 때렸다. 이번에는 찌르지 않고 검에 막대한 마나를 담아 그대로
후려쳤다.
꽈아아아앙!
가슴이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그러자 내부가 드러났다. 복잡한 마법진이 잔뜩 그려져 있었고, 하나하나 밝게
빛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마나 코어가 있었다.
제론이 눈을 빛냈다. 그리고 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휘잉!
검에서 폭풍이 일어나며 제론의 몸을 위로 띄웠다.
그사이 이스히스의 손이 제론을 잡으려고 빠르게 다가왔다. 제론은 공중에서 몸을 몇 번 비트는 걸로 이스히스의
손아귀를 살짝 피했다. 그리고 타이밍을 맞춰 손을 발로 찼다.
꽝!
제론의 몸이 마나 코어를 향해 그대로 날아갔다. 그리고 제론의 검이 새하얗게 빛났다.
콰직!
온몸의 힘을 실은 검이 마나 코어를 찔렀다. 하지만 마나 코어는 가슴을 감쌌던 강판보다 훨씬 단단했다. 그저
살짝 실금이 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나 코어에 도착했으니 승부는 끝났다. 제론은 검에 마나를 가득 불어 넣었다.
우우우웅!
검이 새하얗게 빛나는 걸 넘어서 마치 하얀 불길이 일어나는 것처럼 타올랐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마나 코어에 찔렀다. 방금 전에 찔러 실금이 간 바로 그 부분이었다.
꽈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마나 코어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리고 코어로 파고 들어간 제론의 검이 내뿜는 마나가 안을
휘저어 버렸다.
코어 안의 마나와 제론의 마나가 만나면서 폭주해 버렸다.
제론은 온몸을 마나로 감싸며 훌쩍 뛰어내렸다.
이스히스는 마나 코어에 그렇게 큰 상처를 입고서도 도끼를 휘둘렀다. 아래로 떨어지는 제론을 그대로 올려친
것이다.
제론은 완전히 방심한 상태로 도끼를 맞이해야만 했다.
“젠장!”
제론의 검이 이스히스의 도끼를 내려찍었다.
쩡!
충격이 파도처럼 제론의 몸을 흔들었다. 제론은 온몸의 체액이 물결치는 것을 느끼며 허공으로 쭉 날아가 버렸다.
이스히스는 그 일격을 마지막으로 움직임이 멈춰 버렸다. 하지만 마나 코어의 폭주는 계속 이어졌다.
우우우우웅!
마나 코어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 모두가 짙은 마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붉고 푸른빛이 마나 코어에서 뿜어져 나와 이스히스의 몸을 그대로 집어삼켜 버렸다.
그리고 대폭발이 일어났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제론은 허공에 뜬 채로 주변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폭발을 지켜봤다.
제론에게도 폭발의 여파가 밀려왔다. 하지만 제대로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몸이 말을 안 들었다. 마나도 잘
움직이지 않았다.
“쿨럭!”
제론이 피를 토했다. 앞섶이 온통 검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나니 속이 좀 편해졌다. 마나가 살짝
움직인 것이다.
마나가 움직이니 몸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제론이 바닥에 떨어졌다.
쿠당탕탕탕!
움직일 수 있으니 간신히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 아마 그게 아니었으면 엄청나게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의 충격을 말이다.
제론은 다시 한 번 울컥 피를 토했다. 그리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완전히 폐허가 되어 황량했다.
제론은 천천히 이스히스가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이제 재대로 이겼으니 14 층도 클리어한 셈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가 있으니 조금 떨렸다.
만일 이것도 아니라면 당분간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위이이잉!
제론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이스히스가 폭발한 자리에서 솟아나는 기둥을 쳐다봤다.
저 기둥을 보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이스히스와 싸웠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제론은 천천히 걸어 기둥에 다가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지 확인해 봤다.
작은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새하얀 상자였는데, 특이한 재질이었다.
제론은 상자를 꺼냈다.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의 상자였다. 대체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지만 아주
가벼웠다. 속이 비어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이리저리 돌려 보니 열쇠 구멍이 하나 있었다. 구멍 모양이 워낙 특이해 맞는 열쇠가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을 본
순간 13 층을 클리어하면서 받은 열쇠가 떠올랐는데, 그 열쇠와는 모양이 완전히 달랐다.
“이상한데?”
그냥 아무 기능도 없는 상자를 선물로 줬을 리가 없다. 분명히 뭔가 유용한 물건일 것이다.
제론은 상자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특이한 상자였다. 열쇠 구멍은 있는데 이음새가 없었다. 즉, 뚜껑이 없는
상자였다. 그럼 열쇠 구멍은 왜 있단 말인가.
“아, 그럼 그 아공간 상자처럼 마법진이 연결되는 방식인가?”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열쇠를 떠올리니 그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 제론이 13 층을 클리어하고 받은 열쇠가
바로 그런 방식의 상자를 여는 만능열쇠 같은 것이었다.
제론은 아공간에서 열쇠를 꺼냈다. 열쇠 모양이 구멍과 너무 달라서 끝 부분조차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긴가민가했지만 일단 열쇠를 구멍에 갖다 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열쇠가 구멍 안으로 쑥 들어갔다. 마치 구멍이
열쇠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제론은 반사적으로 열쇠를 빙글 돌렸다.
딸깍.
열쇠가 돌아가며 상자 내부에 있던 마법진이 정확히 맞물렸다.
화악!
상자 표면에 복잡한 문양이 나타나 빛났다. 그 문양은 분명히 마법진이었다.
철컥! 철컥! 철컥!
상자가 각 마법진의 문양에 따라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분리된 상자가 다시 조립되었다. 상자의 모양
자체가 마법진을 이루었다.
마법진이 촘촘히 새겨진 금속선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이었다. 상당히 특이했다. 또 만들기도 어려울 듯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제론은 그제야 그 금속이 테페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테페룸이 아니었다. 테페룸을 가공해서 만든 특수한 물질이었다.
화아아악!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이 점점 커졌다. 빛무리가 점점 거대해지더니 이내 기간트만 하게
성장했다.
그리고 서서히 빛이 잦아들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거대한 기간트가 서 있었다. 새하얗고 근육이 덕지덕지 붙은 듯 덩치가 큰 기간트,
이스히스였다.
제론은 이스히스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니
또 반갑고 무작정 좋았다.
이스히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제론을 향해 섰다.
쿠웅!
이스히스는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제론에게 뭔가를 갈구하는 듯했다.
제론은 이스히스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왠지 그 머리에 손을 얹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손이 닿을 리
없었다.
“푸르투나.”
휘류루루루루루룽!
돌개바람이 일어났다. 그 바람이 제론의 다리를 단단히 받쳤다. 그리고 위로 들어 올렸다.
가볍게 하늘에 날아오른 제론은 이스히스의 머리 부분에 도착했다.
제론이 손을 뻗어 이스히스의 머리에 살며시 갖다 댔다.
푸화학!
제론의 손바닥이 닿은 부분에서 강렬한 섬광이 터졌다. 그 빛은 제론을 한바탕 휘감았다. 그리고 제론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는 마나와 뒤섞였다.
쉬이이익!
그렇게 섞인 마나가 이스히스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완벽하게 흡수되었다.
번쩍!
이스히스의 눈에서 번갯불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감고 있던 눈을 뜬 것 같았다.
눈을 뜬 이스히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어느새 푸르투나를 돌려보내고 땅에 내려선 채,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허리띠의
중앙에 있는 아공간에서 쉬고 있는 테오스가 떠올랐다.
테오스가 떠오르자 너무나 자연스럽게 허리띠에 있는 다른 아공간도 함께 생각났다. 제론의 허리띠에는 빈
아공간이 무려 30 개나 있었다. 그것도 기간트가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아공간이 말이다.
제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떠올랐다.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갑자기 이스히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스히스는 제론을 향해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쿠웅!
그 모습은 마치 기사가 주군을 맞이하는 듯했다. 제론의 가슴이 격동으로 온통 뒤흔들렸다.

<9 권에서 계속>

9권

Chapter 1 유적 15 층 (1)

제론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침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더 이상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다.
‘이스히스를 얻다니! 그것도 기사로!’
솔직히 냉정하게 따지면 이스히스는 그리 대단치 않다. 물론 현재 나온 수많은 양산형 기간트에 비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겠지만, 그게 전부였다.
초고대문명의 기간트라는 점을 생각하면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하지만 이스히스에는 묘한 기대감과 매력이 있었다. 그것은 제론이 직접 싸워 봤기에 알 수 있는 점이었다.
어쨌든 제론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만큼 이스히스를 얻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스히스는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인다. 제론의 명령을 얼마나 잘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였는데, 그건 일단 시험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내일은 이스히스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어.’
이스히스에 대한 정보는 태블릿에도 없었다. 그 정보를 얻으려면 유적 안에서 찾아야 할 듯했다.
아예 정보가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마 유적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제론은 그것을 찾으면서
이스히스와 함께 전투하는 훈련을 할 계획이었다.
제론은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럴 때 굳이 잘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태블릿을 꺼냈다.
태블릿을 이리저리 조작하던 제론은 마법진을 심어 놓은 놈들을 추적했다.
“정말 특이한 놈들이야.”
이들의 정보 조직은 거의 점조직에 가까웠다. 상부와 거의 접촉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령을 받는 방식이
특이해서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다들 정보 전달 방식이 달라서 제론도 계속 살펴보다가 딱 하나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특별한 장소에 지령을 가져다 놓으면 그걸 찾아서 이행하는데, 아무리 제론이라도 그걸 가지고 위치를 추적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렇게 열심히 마법진을 심었는데, 목표를 이루는 데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저들이 어떤 정보를 주고받는지, 또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많은 사실을 알아냈다.
제론은 그렇게 알아낸 사실을 모두 바인에게 전달해 주었다. 아무리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이라도 일단 바인의
손에 들어가면 상당히 괜찮은 정보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 부분을 그렇게 정리한 제론은 바인이 보고한 유적에 관한 정보를 확인했다.
사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유적을 찾아, 그것들을 중앙 유적에
연결시키면 굉장한 힘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상태에서 더 이상 세력을 확장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이 안에 갇혀서 살 생각이 아니라면
사방으로 길을 열어 두어야만 했다.
“일단 레늄 왕국 안에 있는 건 몽땅 끝났군.”
레늄 왕국에는 더 이상 남은 유적이 없었다. 어쩌면 아직 찾지 못한 유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유적을 먼저 찾고, 그 다음에 시간이 많아지면 차근차근 찾는 편이 나았다.
“그럼 다음은…… 헥서 왕국을 훑어볼까?”
헥서 왕국에서 찾은 유적도 있고 하니, 그곳을 본격적으로 훑은 다음, 다른 왕국으로 넘어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바인이 준 정보에 의하면 헥서 왕국에 존재하는 유적의 수는 모두 17 개였다. 또한 유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도는 장소가 4 군데 있었다.
확실히 바인은 대단했다. 헥서 왕국뿐 아니라, 다른 왕국의 유적까지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보내 주었다.
“좋아. 그럼 큰 그림을 그려 볼까?”
제론은 하이쓰 산맥의 유적에 있는 아티팩트를 이용하기로 했다.
태블릿을 통해 그 아티팩트를 제어할 수 있었다. 현재 아티팩트가 떠 있는 높이를 조절하면 훨씬 넓은 지역을
비출 수 있었다.
다만 그렇게 되면 세밀함을 버려야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큰 그림을 그릴 생각이었으니까.
제론은 아티팩트를 조작해 더 위로 보냈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하지만 대륙 전체를 조망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순식간에 대륙 전도가 태블릿에 그려졌다.
제론은 또 태블릿을 조작해서 유적의 위치를 콕콕 찍었다. 대륙 전도에 유적 위치가 쫙 등록되었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외에 새로운 유적을 찾을 수도 있을 듯했다.
유적의 위치는 확실히 뭔가 규칙성이 있었다. 만일 다른 왕국의 유적까지 몽땅 찾아내고 나면 그 특별한 규칙을
알아내 미처 찾아내지 못한 유적을 발견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테페룸 광산이 어디쯤 있지?”
제론은 테페룸 광산 근처에 초고대문명의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 예상이 맞는다면,
테페룸을 얻을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테페룸 광산의 위치는 어디나 극비로 취급한다. 그렇기에 테페룸이 나는 나라는 알아도 광산의 위치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일단 크란 제국과 란체 왕국에는 확실히 테페룸 광산이 있었다. 그 외에는 또 어느 왕국에 광산이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또 있었다. 크란 제국이나 란체 왕국을 통하지 않고 나도는 테페룸의 양이 상당했다.
아마 한두 나라가 아닐 것이다.
그곳들을 알아내서 다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더 많은 유적을 연결시켜야 한다. 그래서 더 많은
마티를 확보하고, 바인에게 훨씬 많은 정보를 전해 주어야 한다.
아마 바인은 그렇게 해 주면 테페룸 광산의 위치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대륙의 테페룸을 내가 장악할 수도 있어.’
제론은 왠지 모를 묘한 확신이 들었다. 만일 대륙의 테페룸을 혼자서 장악할 수 있게 된다면 대륙을 들었다 놓을
수도 있었다.
대충 유적과 테페룸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 정리를 마친 제론은 이제 본격적으로 레늄 왕국의 정보를 살폈다.
이제 레늄 왕국은 4 개로 나뉘었다. 제론이 독립하며 에어스트 왕국이 생기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레늄 왕국에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가져왔다. 딴생각을 하는 영주들이 생겨난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령도 하는데 자신이 못 할 게 뭐냐는 식으로 생각하는 영주들이 나타났다.
물론 대놓고 그것을 표현하거나 움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물밑으로는 무수한 말과 행동이 오갔다. 혼자가
힘들면 손을 잡아서라도 하고자 했다.
그러니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그 모든 상황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있었다.
“그럼 슬슬 풀어 놓을까?”
슈린 공작가에서 양산을 시작한 기간트 라쿠스는 지난 내전에서 상당한 힘을 발휘했다.
또한 이제 내전이 끝났으니 슬슬 외부로 판매를 모색하고 있었다.
딱 이 시기에 라쿠스의 약점을 풀어 놓으면 치명적인 일격이 될 것이다.
본격적으로 판매를 시작하기 전에 풀어야 한다. 그래야 훨씬 피해를 가중시킬 수 있었다. 슈린 가문은 지금
내전을 치른 이후라 자금이 바짝 말라 있었다.
그걸 회복시키기 위해 라쿠스를 이용할 건 자명했다. 그걸 막아 버려야만 했다.
“그럼 당장 시작해야겠군.”
제론이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그저 바인에게 지시만 내리면 끝이다. 아마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 이행할 것이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바인에게 지시를 내렸다. 연락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태블릿을 통해 지시 사항을
전달하면 바인이 가진 아티팩트에 그것이 고스란히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바인은 그것을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처리할 것이다.
제론은 이제 슈린 가문과의 악연을 끝낼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복수에 미쳐서 모든 걸 내던지지 않으려 그동안
엄청나게 애써 왔다.
그래서 힘을 얻었음에도 참았다. 미래를 향한 발판이 제대로 마련되었을 때 복수를 마무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발판이 마련되었으니 모든 걸 끝낼 때가 되었다.
제론은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난 유적에 더 집중해야겠군.’
전쟁 준비 역시 지시만 내리면 된다. 모든 일을 처리해 줄 뛰어난 가신들이 있으니 그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제론은 그동안 자신의 힘과 능력을 더 키우는 편이 나았다.
제론은 다시 잠을 청했다. 이번에는 순식간에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스히스를 얻은 흥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날 꿈에서 이스히스를 다시 만났다. 물론 치열하게 싸웠다. 죽을 때까지. 하지만 그래도 꿈꾸는 내내
행복하고 즐거웠다,

☆ ☆ ☆

제론의 명령은 에어스트 왕국을 강타했다. 난데없이 전쟁 준비라니.


하지만 수뇌부는 다들 그것을 그냥 수긍했다. 슈린 가문과 에어스트 가문의 악연을 알고 있기에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안 벌어지더라도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
그렇게 왕국 전체를 한 번 흔들어 놓은 제론은 유적으로 향했다.
이제 15 층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전쟁이 나기 전에 유적에서 최대한 많은 힘을 얻어야만 했다.
유적 15 층은 14 층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다만 몸을 숨길 만한 곳이 많다는 점이 달랐다. 거대한 구조물이나
나무가 곳곳에 있었다. 기간트도 그곳에 몸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차분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면서 전투가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그렸다.
순간,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제론은 고개를 돌려 존재감이 생겨난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 어느새 거대한
기간트 하나가 서 있었다.
이스히스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이스히스는 하얀색이었는데, 지금 나타난 기간트는 새까맸다.
날렵한 체형을 가진 기간트였는데, 한 손에는 거대한 활을 들고 있었다.
“저건 이름이 뭐지?”
―타히티.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타히티를 쳐다봤다. 이름에 딱 어울리는 기간트였다. 또한 이번 층의 클리어 조건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맨몸으로 이기면 된다. 단순한 조건이지만 너무나 어려운 조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론은 자신감에 넘쳤다. 어쨌든 이스히스도 이겼다. 한데 형태가 다르다고 이기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제론이 잠시 살펴보는 사이 타히티가 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시위를 당겼다.
쉬이이이이이!
새하얀 빛이 길게 늘어나며 시위에 걸렸다. 순수한 에너지로 이루어진 화살이었다. 화살에 담긴 힘은 엄청났다.
그걸 느낄 수 있기에 제론은 깜짝 놀라 몸을 날렸다.
쌔애애액!
빛의 화살이 빠르게 날아갔다. 어찌나 빠른지 제론이 막 자리를 뜬 순간 그 자리에 그대로 꽂혔다.
꽈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화살이 떨어진 자리를 중심으로 마나의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제론은 살짝 당황했다. 설마 이렇게 위력이 강할 줄은 몰랐다. 막대한 힘이 느껴지긴 했는데, 거기에 폭발력이
가해지니 상상을 초월했다.
제론은 빠르게 움직이며 검을 뽑았다. 방금 전의 폭발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그걸 해소하려면 검을
뽑아야만 했다.
검과 함께 쏟아진 마나의 결정이 몸을 순식간에 회복시켰다. 제론은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타히티에게 다가갔다.

Chapter 1 유적 15 층 (2)

타히티는 제론을 향해 또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쉬이이이이이!
새하얀 빛의 화살이 막대한 에너지를 머금었다. 그리고 제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쌔애애액!
제론은 화살이 날아오는 걸 똑바로 보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화살과 마주친 순간 몸을 낮게 깔듯이
숙였다.
꽈아아앙!
화살이 제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바닥에 꽂혔다.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지만 제론은 오히려 더 속도를 높여
돌진했기에 폭발에 휘말리지 않고 타히티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론이 눈을 빛내며 검을 휘둘렀다.
쉬익!
검이 허공을 갈랐다.
제론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앞에 있던 타히티가 사라져 버렸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20 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서 또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빨라?”
타히티는 이스히스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빨랐다.
제론은 순간적으로 타히티의 움직임을 놓쳤다. 물론 그렇게 빠를 줄 몰랐기에 그랬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소드 마스터인 제론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쉬이이이이이!
빛의 화살이 만들어졌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발에 힘을 꽉 주었다. 이대로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콰득!
바닥이 움푹 파였다. 그리고 제론의 몸이 빛살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쌔애액!
화살이 시위를 떠나 정확히 제론을 향해 쏘아졌다.
제론이 검을 휘둘렀다. 어느새 검에는 마나가 잔뜩 뒤덮여 있었다.
꽈아아아앙!
화살을 빗겨 냈는데도 충돌과 함께 폭발해 버렸다. 제론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쉬이이이이이이!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화살 만들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제론은 억지로 의식을 붙잡았다. 그리고 몸을 굴렸다.
쌔애액!
꽈앙!
바로 옆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제론은 그 폭발에 휘말려 휙 날아갔다.
쉬이이이이!
허공에 뜬 제론을 향해 타히티가 활을 겨눴다.

“끄응.”
제론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며 눈을 떴다.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유적 로비였다.
“완패로군.”
손도 못 써 보고 당했다. 타히티가 그렇게 빠를 줄 몰랐고, 또 화살의 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아니, 자신감이 지나쳤다. 어쩌면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타히티에 대해 알아낸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빠르다는 것과 활을 쏜다는 것이 알아낸 전부였다.
그래도 이스히스와 싸울 때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 할 만했는데, 타히티는 아예 그런 것도 없었다. 확실히 원거리
공격은 까다로웠다.
타히티가 쏘는 빛의 화살은 에너지 덩어리였다. 그래서 관통력뿐 아니라 폭발력까지 지니기에 그저 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데…….’
일단 다가가야 타격을 입힐 수가 있다. 한데 타히티는 엄청나게 빨랐다. 그걸 따라잡지 못하면 이기는 게
불가능했다.
방법은 딱 하나다. 타히티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다. 당연히 싸움을 할 때는 예측을 통해 몇 수 앞을 내다보면서 움직인다.
하지만 타히티를 상대할 때의 예측은 결코 쉽지 않았다. 타히티에는 이동에 대한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예비
동작이 필요 없었고, 이동할 때의 움직임도 크지 않아서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속도가 너무 빨라서 미리 예측하지 않으면 따라잡는 게 불가능하니, 어떻게든 예측할 방법을 만들어야만
했다.
제론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몸으로 부딪치는 게
최선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제론은 마나호흡을 통해 몸 상태를 최고조로 끌어 올린 후, 15 층으로 이동했다.
길고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제론이 유적에 목을 매는 동안 레늄 왕국, 즉, 4 국의 정세는 빠르게 변해 갔다.


일단 물밑으로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이 손을 잡았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였다. 에어스트 왕국을 쳐서 그곳의
광활한 농지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추수였다. 그 막대한 식량을 그냥 불태워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이 생각한 전쟁의 시기는 추수가 끝난 직후, 추위가 찾아오기 직전이었다.
막대한 전력을 모아 단숨에 밀어붙여 에어스트 왕국을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광활하고 기름진 농지는
물론이고 막 추수가 끝난 곡물을 잔뜩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쟁을 위해서는 선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중립 세력은 이합집산을 계속하다가 결국 처음 중립 세력의 중심이 되었던 슈돌츠 후작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말레피 후작과 벨루스 백작을 각각 공작에 임명하고 왕국의 실권을 나눠 주었다.
그렇게 미테 왕국이 건국되었다.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이 에어스트 왕국을 치려면, 반드시 미테 왕국과도 손을 잡아야만 했다. 아니, 최소한
도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도 받아야만 했다.
그게 선결되지 않으면 전쟁이 어려워진다. 전력을 투입해 에어스트 왕국을 쓸어버리려고 하는데 자칫 미테 왕국이
뒤를 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지금은 아직 건국 초기라서 내정에 힘써야 한다. 그리고 다독일 일도 많았다. 아직 혼란이 완전히 가라앉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뒤통수를 맞으면 그야말로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막아야 전쟁을 할 수 있었다.
한데 문제는 미테 왕국의 실권자 중 둘이 에어스트 왕국에 호의를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그들이 에어스트
왕국이 망하도록 내버려 둘 리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국왕인 슈돌츠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슈돌츠 국왕은 은밀하게 감춰 둔 응접실에 앉아, 자신을 찾아온 레늄 왕국과 슈린 왕국의 사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참으로 곤란한 부탁이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힘을 한 번만 실어 주시면, 향후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지속적인 지원이라…….”
“언제까지 힘을 셋으로 나눌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신의 말은 달콤했다. 확실히 권력이 셋으로 분리된 건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미테 왕국은 발전이 힘들어진다.
추진력을 얻으려면 나머지 두 권력을 찍어 눌러야만 한다.
항상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슈돌츠 국왕은 그들의 제안이 솔깃했다. 하지만 함부로 걸음을 내디딜 수는
없었다. 이런 일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결국은 문제가 생기는 법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지원을 해 줄 수 있소?”
사신이 빙긋 웃었다.
“당연히 이 부분을 확실히 해야겠지요.”
두 사신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몇 번의 눈짓을 통해 의견을 맞췄다. 그리고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이 각각 하나씩 맡아서 상단 흔들기를 하겠습니다.”
“상단 흔들기라?”
“금전적 압박을 받으면 가문의 기반에 금이 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두 가문에 정보원을 파견해 지속적으로 정보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거기에는 축출 명분을 만드는
작업도 포함됩니다.”
그제야 슈돌츠 국왕이 눈을 빛냈다. 확실히 그 정도라면 구미가 당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이번
전쟁의 개입을 막으려면 자신이 희생해야 할 부분이 상당했다.
그걸 몽땅 만회하려면 최소한 두 가문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나중에 결정적인 순간, 기간트를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슈돌츠 국왕의 표정에 만족감이 깃들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움직일 만했다. 아무리 권력이 분산되어 있다지만
그래도 국왕이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발언권이 셀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내치에 힘쓸 때니, 명분도 괜찮았다. 오히려 도발을 주장하면 혈연에 의해 왕국을 말아먹으려
한다고 공격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나중에 더 크게 돌아올 확률이 높았다. 정치라는 것이 원래 그러하다.
하지만 그것도 두 가문이 온전히 남아 있을 때의 얘기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말레피 가문과 벨루스 가문은 더
이상 권력에 집착할 겨를이 없어질 것이다.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이 그렇게 만들 테니까.
“좋네. 우리 한번 해 보지.”
슈돌츠 국왕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두 사신이 기쁜 표정으로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탁월하십니다. 약간의 차질도 없을 거라 약속드리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하면 서면으로 증거를 남겨야지?”
슈돌츠 국왕의 말에 두 사신이 즉시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일이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고 미리 준비한 것이다.
“읽어 보시고 인장을 찍어 주십시오.”
슈돌츠 국왕은 두 장의 서류를 찬찬히 읽었다. 조금 전 협의한 내용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또한 가장 아래에
두 국왕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슈돌츠 국왕은 즉시 그 옆에 인장을 쾅 찍었다.

☆ ☆ ☆

한창 유적 공략에 열을 올리던 제론을 엔트가 찾아왔다. 마침 집무실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 짧은 틈에 방문한


것이다.
이는 성의 특별한 마법 시스템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방의 주인이 설정해 놓으면 자신이 부재중인지 아닌지
특정한 몇몇이 자동으로 알 수 있었다.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엔트가 서류 한 장을 내밀고 공손히 말을 이었다.
“그것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재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 목표는 당연히 우리겠군.”
“그렇습니다. 한데, 전력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습니다. 아무래도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입니다.”
제론은 설명을 들으며 서류를 슥 훑었다. 적의 움직임이 어떤지, 또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리되어 있었다.
“호오. 기간트를 700 기나 동원할 여력이 남았단 말이야? 대단한데?”
전쟁에 700 기의 기간트를 쓴다는 건, 방어에 쓰는 기간트까지 합하면 1000 기가 넘는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이 손을 잡았다고 해도 너무 많았다. 그들이 내전에서 잃은 기간트를 생각하면
말이다.
“라쿠스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걸로 어떻게든 전력을 만들 작정인 듯합니다.”
“돈도 많군. 아, 다 빚이려나?”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조사를 해 보겠습니다.”
“그래. 파고들 여지가 있으면 다 파고들어야지. 어차피 이길 싸움이지만 피해를 최소로 줄이는 게 중요해.
우리는 여기서 끝이 아니야.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엔트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보다 슈린 공작가가 라쿠스를 통해 재정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일단 생산해서 전쟁에서 쓰고,
그걸 내다 파는 식으로 계약을 하고 있습니다.”
“계약을 많이 했나?”
“아직 시작 단계이긴 합니다만, 이대로라면 어마어마한 수가 팔려 나갈 것 같습니다.”
제론이 씨익 웃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아마 더 이상 계약이 곤란해질 테니까. 어쩌면 이미 계약한 자들도 계약을
파기할지도 모르지.”
“예?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지켜봐. 재미있어질 테니까.”
제론의 의미심장한 웃음에 엔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가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해 왔는지를
떠올리고는 금방 수긍해 버렸다.
굳이 의문을 깊이 가질 필요가 없었다. 포기하면 편하니까.

Chapter 1 유적 15 층 (3)

꽈앙!
탁자 하나가 박살이 나 버렸다. 그 탁자를 부순 장본인은 슈린 왕국의 왕세자인 파인트 폰 슈린이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평소에 잘 쓰지 않던 말을 내뱉을 정도로 흥분한 파인트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수하를 노려봤다.
보고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파인트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게 된 사내는 그저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약점이라니! 우리 라쿠스에 약점이 있다는 게 말이 돼?”
파인트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렇게 탁자며 집기를 잔뜩 부수고 나니 조금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제야 다시
보고서를 훑어본 파인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화를 낸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라쿠스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고, 이 결함은 전쟁 중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했다. 아니,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해결책을 찾아야 돼! 엔지니어와 마법사를 몽땅 데려와라!”
파인트의 명령에 수하가 흠칫 놀랐다.
“라쿠스의 설계도를 공개하실 생각이십니까?”
“큭!”
파인트는 미처 그 부분을 고려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낼 생각만 했다. 한데 그런 큰 문제가 있었다.
라쿠스의 설계도를 공개할 수는 없었다.
“젠장! 애초에 이걸 개발한 놈들을 족치는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라쿠스의 설계도를 구해 온 것은 깁스 남작이었다. 한데 이제 더 이상 깁스
남작을 만날 수가 없었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깁스 남작에 관한 일은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슈린 가문에 속해 있는 동안 충분히
신뢰를 받았으며, 엄청난 공을 세웠다.
어쨌든 지금은 깁스 남작을 찾을 수 없으니, 그가 관여했던 이 라쿠스의 설계도에 대해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수소문을 하면 구할 수야 있겠지만, 그래선 너무 늦는다.
“소문을 막아.”
“소문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소문이 안 났다고?”
“예. 더 안 좋습니다. 정보가 되어서 정보 조직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파인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차라리 소문이 나는 것보다 훨씬 안 좋다.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이고,
헛소리로 몰아붙이기도 쉽다.
하지만 정보는 그렇지 않다. 정보 조직을 통해 움직인다는 건 약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보로 가공되어
돌아다닌다는 뜻이었다.
정보 조직을 이용할 만한 자들은 라쿠스의 약점을 모두 안다는 뜻이니 정말로 심각했다.
파인트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파인트는 올 것이 왔다는 심정으로 들어온 수하를 바라봤다.
“계약 파기인가?”
“그, 그렇습니다. 라쿠스 인도 계약을 맺은 가문들이 일제히 계약을 파기했습니다.”
“위약금을 받으면 되니 그 문제는 됐다.”
파인트는 최대한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이번 일이 파인트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만일 이걸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면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라쿠스에 약점이 있는 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후우. 어쩔 수 없군.”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라쿠스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선 특별한 자들에게 설계도를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를 뵙고 오겠다.”
파인트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버렸다.
밖으로 나가는 파인트의 등이 한없이 작아졌다.

Chapter 2 신형 기간트 (1)

제론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예상보다 효과가 훨씬 컸다. 슈린 왕국은 과감하게 라쿠스의 설계도를 공개했다.
하지만 그 약점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결국 해결을 하긴 하겠지. 한…… 3 년쯤 걸리려나?”
설계의 근본적인 부분에 실수가 연달아 몇 번이나 들어갔고, 중간에도 이상하게 꼬여 있기에 그걸 다 바로잡고
약점을 제거하려면 3 년도 잘 쳐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3 년이라는 시간을 벌지 못할 테니까.
“일단 슈린 쪽부터 차근차근 정리하자.”
슈린 왕국은 전쟁을 서두를 것이다. 라쿠스 문제가 제대로 터지기 전에 전쟁을 끝내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으니까.
그리고 제론도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아직 에어스트 왕국은 약소국이었다. 이제 막 개국한 작은 나라일 뿐이었다.
그런 왕국이 침략 전쟁을 벌이는 건 자칫 외부의 수많은 시선과 관심을 끌어올 수 있었다. 수많은 견제를 겪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방어전을 통해 적을 섬멸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에어스트 왕국은 그저 지키기 위해 발악한다는 이미지가
심어진다.
물론 그 이미지를 제대로 심기 위해선 바인이 상당히 애써야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번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만 한다. 그래야 향후 하려는 모든 일에 탄력이 붙는다.
제론은 문득 유적 15 층에 있는 기간트 타히티가 떠올랐다. 만일 타히티를 이길 수 있다면 새로운 기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타히티가 한편이 된다면 엄청나게 든든할 것이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고 민첩한 기간트는 굉장한 장점을
발휘한다.
“그런 녀석들로 군단을 이룰 수 있다면 아마 더 이상 두려울 게 없겠지.”
뭐가 두렵겠는가. 빛의 화살을 수십 발씩 쏴 대고, 싸움으로 적을 압도할 텐데 말이다.
현 시대의 기간트로는 그들을 결코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수천 대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해도 말이다.
대충 몇 기의 기사를 얻을 수 있을지는 예상이 가능했다. 제론의 허리띠에 남은 아공간의 수를 보면 된다.
제론의 허리띠에는 테오스를 넣는 공간 외에 총 30 개의 빈 아공간이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이스히스가 들어가 있으니 이제 남은 건 29 개뿐이었다. 아마 유적을 클리어하다 보면 그 모든
아공간을 기간트로 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왠지 다시 유적에 몰두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 기간트를 모두 얻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기간트가 약하다는 게 좀 문제이긴 한데…….”
소드 마스터가 되어도 상대가 어려울 정도이니 강한 건 맞다. 하지만 초고대에는 제론 정도의 소드 마스터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았다.
그들이 여럿이서 달려들면 이스히스 같은 기간트는 금세 해체되고 말 것이다. 이스히스는 일대일 대결에 좀 더
특화된 느낌이었다. 소드 마스터가 둘만 달려들어도 당장 상대가 어려워질 게 확실했다.
그건 제론에게 상당한 위화감을 안겨 주었다.
테오스는 엄청나게 강력했다. 제론이 생각하기에 소드 마스터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은 초고대문명의 기간트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했다.
한데 이스히스는 대체 왜 그렇게 약하게 만들었을까? 더구나 이곳 중앙 유적의 기간트 아닌가. 그렇다면 보통의
기간트보다 훨씬 강력해야 하지 않을까?
대체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제론은 문득 초고대문명의 일반적인 기간트는 어떨까 궁금해졌다. 꼭 한번 겪어 보고 싶었다.
일단 세나가 지금 한창 설계하는 기간트에 초고대문명의 기술이 상당 부분 들어가긴 하지만, 초고대문명의
기간트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뭐, 결국 기회가 있겠지.”
중앙 유적을 클리어하다 보면 분명히 초고대문명의 기간트를 구경할 날이 올 것이다. 그것도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말이다.
제론은 그렇게 확신했다.
“자, 그럼 슬슬 전쟁을 부추겨 볼까?”
전쟁이 빨리 터질수록 좋았다. 적이 준비할 시간은 모자랄 테니까. 반면 에어스트 왕국은 충분히 준비가 돼
있었다.
베테랑 라이더로만 구성된 기간트 부대가 있었고, 그 뒤를 받쳐 줄 기간트 300 기가 언제든 달려 나갈 수 있게
대기 중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훈련을 마치고 실전만 눈앞에 둔 기간트도 200 기나 있었다.
또한 그 뒤를 받쳐 줄 라이더도 차근차근 양성 중이었다. 조만간 1000 기의 기간트를 가지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세나가 설계하는 기간트였다. 현재 양산형 기간트 중 가장 강하다는 켈룸보다 훨씬 강력한
기간트가 될 것이다.
에어스트 왕국의 모든 기간트를 그걸로 대체하면 근방에서는 누구도 도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수천 기의
발굴형 기간트를 가져오지 않는 한 말이다.
“생각난 김에 세나나 보러 가야겠군.”
물론 지금은 아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바로 가 볼 생각이었다. 일단 당장 할 일은 바인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전쟁을 부추겨야 하니 말이다.

“여, 영주님…….”
세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이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 몰랐기에 기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아침부터 찾아와서 좀 놀랐나?”
“아, 아뇨! 그렇지 않아요! 이, 이쪽으로 앉으세요!”
세나는 제론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녀는 제론을 만나는 장소가 이런 공방이 아닌, 좀 더 분위기 있는 곳이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제론은 허둥지둥하는 세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상당히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슬슬 결혼을 생각해야 하나?’
그동안 결혼 생각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워낙 바쁘고 치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슬슬 결혼을
고려할 시기가 되었다.
독립해서 왕이 되었으니 안정감을 위해서라도 결혼이 반드시 필요했다. 외부에 보이는 부분도 무시할 수 없고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 속에서 세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오늘은 뭔가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그래서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제론이 생각을 정리하고 정신을 차리면서부터였다.
“참, 새 기간트의 설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예? 기, 기간트요?”
세나의 표정에 진한 아쉬움이 깃들었다. 하지만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그 아쉬움을 걷어 내 버리고는 공방 한쪽으로 걸어갔다.
세나의 공방 곳곳에는 아공간으로 이루어진 수납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당연히 세나 외에는 아무도 열지 못했다.
그 안에 든 물건을 꺼낼 수 있는 건 오로지 세나뿐이었다.
세나는 아공간 수납장에서 설계도 뭉치를 꺼냈다. 책으로 엮으면 족히 몇 권은 나올 듯했다. 예전 제론에게 보여
준 이후로 얼마나 연구를 하고 개량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설계도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저 설계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걸 여기서 하기에는 좀 난감했다.
“가서 확인해 보고 금방 돌아올게.”
제론의 말에 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자마자 볼일만 보고 간다니 아쉽기 그지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모두에게 중요한 시기였다.
세나는 제론이 사라지자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래도 되나 몰라…….”
왠지 야속했다.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이해와 감정은 항상 같이 움직이지만은 않는다.
지금이 그랬다.
아무래도 이 기분으로는 일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세나는 공방에서 나가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동안 취하지 못했던 휴식을 몰아서 할 생각이었다.
세나는 침대에 누워 한동안 뒤척이다가 이내 잠들어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쭉쭉 지나갔다.

Chapter 2 신형 기간트 (2)

“으음.”
세나는 서서히 잠이 깨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는 모르지만 몸은 개운했다. 더 이상
피곤하지 않았다.
눈을 뜬 세나는 희미하게 돌아오는 시야에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들어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침대 머리맡에 제론이 가만히 앉아서 세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나는 제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여, 영주님!”
설마 이렇게 침실에 들어와 자신이 자는 모습을 지켜볼 줄은 몰랐다. 당황스러웠지만, 역시 기뻤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제론의 모습에 마치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급하게 일어날 필요 없어.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 좀 더 자도 돼.”
“아, 아뇨. 잠 다 깼어요. 이제 안 피곤해요.”
세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침대에 앉은 채 제론을 바라봤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아예 생각도 못 해 봤다.
‘그러고 보면 정말 그동안 일 빼고는 아무것도 안 했구나.’
세나는 제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 시간을 좀 더 즐기고 싶었다.
“요즘 많이 힘들지?”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영주님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뻐요.”
그 뒤로도 제론은 굳이 일 얘기를 꺼내지 않고 소소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세나에게 있어서 더없이 소중하고
벅찬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점심 먹을 무렵이 되어서야 방을 나섰다. 그리고 성의 식당에 가서 간단하지만 충실한 식사를 했다.
그렇게 함께 식사까지 마친 다음에서야 세나의 공방으로 향했다.
세나의 공방 한쪽에 마련된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은 제론은 품에서 종이 뭉치를 잔뜩 꺼내 놓았다. 세나에게
받은 새 기간트의 설계도였다.
“대충 확인해 봤는데…….”
제론이 꺼낸 말에 세나가 깜짝 놀랐다.
“벌써 다 확인했다고요? 고작 하루 만에요?”
제론에게 태블릿이라는 희대의 아티팩트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제론은 세나의 설계도를 모두 태블릿에 저장한 다음, 하나하나 분석했다. 문제점을 찾는 건 아주 간단했다.
그리고 개선 방향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단 여길 봐.”
제론은 설계도면 한 장을 뽑아 세나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마법진 몇 개를 짚으며 문제점을 얘기해
주었다.
“마법진 구조가 조금 비틀려 있어. 이걸 이런 식으로 바로잡으면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지.”
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접근법이었다. 그 뒤로도 놀랄 일이 계속되었다.
제론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세나는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대체 끝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제론 혼자서 설계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정말 대단해요…….”
“대단하긴.”
제론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고는 마지막으로 한곳에 모아 둔 설계도 뭉치를 탁자 한가운데로 옮겼다. 나머지
도면은 세나가 따로 챙긴 뒤였다.
“자, 이제 마나코어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자고.”
마나코어의 설계도는 다른 부분의 설계도를 다 합한 것만큼 많았다. 그 정도로 복잡하고 만들기 어려운
부품이었다.
세나가 설계하다 막힌 것도 다 마나코어 때문이었다.
제론은 세나와 함께 차근차근 마나코어의 설계도를 분석했다. 세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제론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가끔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이미 태블릿을 통해 마나코어를 샅샅이 분석했기에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해 완벽한 마나코어로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정말 대단한 마나코어가 나오겠군.”
제론의 말에 세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문제네요. 포로스가 너무 많이 들어가요.”
이번 기간트의 설계에는 포로스가 쓰인다. 포로스에 대한 연구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바이스와
세나였다.
말레피 가문의 마법사들이 포로스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지만 그들의 연구는 핵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포로스에 대해 정확히 모르니 당연했다.
하지만 바이스와 세나는 포로스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연구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기간트 설계의 기반에는 폭넓은 포로스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 그걸 바탕으로 설계했기에 기간트에 상당한
포로스가 쓰였다.
“포로스가 많이 필요할 텐데, 그걸 조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 부분은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예? 어떻게요?”
제론이 씨익 웃었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돼.”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었지만, 세나는 그 말을 듣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제론은 정말로 믿음직스러웠다.
“그럼 저도 힘내서 설계를 할게요. 이 설계도를 보고 있으니 한 달 안에 시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네요.”
세나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설계가 거의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실제로 만들어 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세나의 특기였다. 혼자서 기간트를 뚝딱 만들어 내는 것 말이다.
“그래? 그럼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시제품만 만든다고 끝이 아니다. 그걸 양산하려면 제대로 된 공장이 있어야 한다. 양산 공장을 만드는 것도
기간트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한없이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부탁해.”
제론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나가 따라 일어났다. 그녀의 표정에는 당황과 아쉬움이 진하게 깔려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갈 줄 몰랐기에 당황스러웠고, 또 제론을 그냥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쉬웠다.
제론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제 슬슬 혼인을 생각할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 전에 최소한의 감정을
나누는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준비도 필요했다.
세나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천천히 세나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가까이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제론이 세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세나는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이내 살포시 눈을 감고 제론의 손길을 즐겼다. 제론의 넓고 포근한
품에 뺨을 기대고 손을 들어 허리를 휘감았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세나를 끌어안고 있던 제론이 천천히 손을 떼고 물러났다.
세나는 아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제론의 말에 세나는 이를 앙다물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확신만 있다면 말이다. 그 확신을 오늘 얻었다.
제론은 세나에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공방을 나섰다.
제론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세나는 조금 전까지 제론이 서 있던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격렬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 감정은 이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결국 잔잔한 호수가 되었다.
세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설계도를 들고 작업대로 향했다. 이제 설계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새 기간트를 만들
시간이 되었다.
‘아모르.’
세나가 붙인 새 양산형 기간트의 이름이었다. 세나는 그것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정말 할 일이 많구나.”
제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것도 당장 닥친 일들이 그랬다.
일단 전쟁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전쟁에서 지면 모든 게 끝이니까.
하지만 거기에만 모든 걸 쏟아부을 수는 없었다. 그것 말고도 중요한 일이 많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테페룸
광산에 가 보는 일이었다.
테페룸 광산 근방에 있는 유적을 찾아 테페룸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은 가장 시급한 일 중 하나였다. 그것을
염두에 뒀기에 세나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슈린 공작가나 나베 공작가의 배후를 밝혀내는 일도 추진해야 한다. 물론 그건 조금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도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급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최대한 서두르는 편이
좋았다.
거기에 유적도 클리어해야 한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져 보니 할 일이 정말로 많았다. 그것도 하나같이 쉽지 않은 것뿐이었다.
“일단…… 전쟁에 집중해야겠지?”
테페룸 광산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움직이려면 제론이 너무 외부에 드러나게 된다. 일단 크란 제국까지 가야 하니,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게이트를 이용할 때마다 제론의 행적이 기록으로 남는다. 만일 그런 식으로 이동했다가 테페룸 광산에 문제가
생기면 결국 제론이 의심을 받게 된다.
물론 지나친 비약이 될 수도 있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러니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움직여야만 한다. 일단 헥서 왕국에 있는 유적으로 이동한 다음, 거기서부터는
푸르투나를 이용해 날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테페룸 광산 근방에 도착해도 시간이 필요했다. 정확한 위치를 알아낸 게 아니라, 바인이 각종 정보를 통해
유추한 장소이기 때문에 근방을 다 뒤져야만 했다.
그렇게 해도 못 찾을 가능성이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일단 전쟁부터 마무리하는 것이 나았다. 그 전에는 유적 클리어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제론은 그렇게 차근차근 계획을 정리했다.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할 건지도 정했다.
그렇게 제론이 미래의 일을 계획하는 사이 전쟁의 기운이 슬금슬금 에어스트 왕국에 스며들고 있었다.

☆ ☆ ☆

레늄 왕국과 슈린 왕국의 수뇌가 머리를 맞대고 전쟁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사실 아직 두 왕국은 진짜 왕국이라고 하기에는 살짝 모자란 감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전쟁을 통해 제대로 된
왕국으로 발돋움할 계획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막대한 식량 자원은 그것을 가능케 할 것이다.
“추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정보에 따르면 며칠 안에 추수가 완전히 끝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식량이 넘쳐 나겠군요.”
“그 넘쳐 나는 식량이 목적 아니겠습니까?”
회의는 시종일관 밝은 분위기였다. 이번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쟁의 주도권을 쥐려는
싸움이 치열했다.
“그나저나 라쿠스의 약점은 개선하셨습니까?”
레늄 왕국 측 귀족의 말에 슈린 왕국의 대표로 참석한 파인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
예상하고 왔지만 그래도 들으니 기분이 나빴다.
“아직 못 하셨나보군요. 하면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슈린 왕국이 보유한 기간트의 절반 이상이 라쿠스인 걸로
아는데…….”
“다른 방식으로 운용하면 됩니다. 작전의 문제지요.”
파인트의 대꾸에 다들 눈을 번득였다.
“다른 방식이라면…….”
“별동대로 운용하면 됩니다.”
“별동대?”
“아시다시피 라쿠스의 약점이 드러나려면 어느 정도 전투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기동성을 살려서 빠르게
치고 빠지는 작전을 펼치면 얼마든지 운용이 가능합니다.”
파인트의 차분한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냥 수긍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작전의 폭이 상당히 좁아집니다. 그건 인정하시겠지요?”
파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뒤집을 카드를 가져왔으니 전혀
상관없었다.
“아무튼 그러하니 총사령관은 우리 레늄 왕국에서…….”
레늄 왕국 측 귀족이 마무리하려 하자, 파인트가 손을 번쩍 들어 말을 끊었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레늄 왕국 측 귀족이 파인트를 바라봤다. 사실 대부분의 정보는 다 쥐고 있었다.
슈린 왕국에서 뭘 준비했는지도 다 알기에 이쯤이면 마무리가 될 거라 여겼다.
한데 이제 와서 또 무슨 할 말이 남았단 말인가.
“우리 슈린 왕국에서는 기간트 500 기를 더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레늄 왕국 측 귀족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500 기의 기간트라니. 대체 그게 어디서 났단 말인가.
슈린 왕국의 전력은 누구보다 레늄 왕국이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함께 전쟁을 한 사이이니 당연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웠는데 적의 전력을 잘못 알고 있을 리 없었다.
한데 500 기의 기간트가 더 있다고 한다. 놀라는 게 당연했다.
“그, 그렇게나 많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번에 무리를 좀 했습니다.”
기가 질렸다. 대체 뭘 어떻게 무리했기에 기간트를 500 기나 충원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라쿠스 500 기를 추가하신 건…….”
파인트가 피식 웃었다.
“라쿠스 공장을 풀가동해도 500 기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그야 그렇습니다만…….”
“절반은 크라테르고, 나머지 절반은 몰레스입니다.”
레늄 왕국 측 귀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만일 그렇다면 이건 정말 대단한 전력이었다.
“그, 그럼…….”
“총사령관은 우리 슈린 왕국에서 맡아야 할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레늄 왕국 측 귀족은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예상이 완전히 틀어져 버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파인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아, 그리고 우리 슈린 왕국에서 500 만 골드 상당의 군수품을 추가로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레늄 왕국 측 귀족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자신의 권한으로 더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그, 그런…….”
파인트가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결정이 난 것 같군요.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만 하죠.”
파인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늄 왕국 측 귀족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일으켰다. 파인트는 그를 힐끗
일별하고는 휙 돌아서서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크윽.”
레늄 왕국 측 귀족이 굴욕적인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후우, 이걸 어떻게 보고할지 벌써 걱정이군.”
레늄 왕국 측 귀족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회의장을 나섰다.
어쨌든 그렇게 전쟁이 결정되었다.
Chapter 3 전쟁 (1)

쿵! 쿵! 쿵! 쿵!
1 천 기의 기간트가 질서 정연하게 진군했다. 대부분이 크라테르나 몰레스였고, 카타락타가 일부 있었다.
파인트는 가장 뒤에서 아우틈을 타고 이동했다. 그 주위를 베르를 탄 호위 기사들이 에워싸듯 진형을 짜서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완전히 밀어 버릴 수 있겠지.”
파인트는 시선을 돌려 멀찍이 떨어진 곳을 이동하는 150 명의 기사를 바라봤다.
그들이 바로 라쿠스의 라이더였다.
150 기나 되는 라쿠스를 별동대로 운용하는데, 어떻게 전쟁에서 지겠는가. 아무리 약점이 있는 기간트라
하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50 기는 따로 뺐다. 또 다른 별동대인 것이다. 그들은 특별한 임무를 띠고 은밀히 에어스트 왕국으로
잠입하고 있었다.
1 천 기의 기간트라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상대를 밀어 버리는 동시에, 150 기의 별동대가 특별한 순간 적을
요격하고, 50 기의 기간트가 에어스트 왕국의 중심을 습격하며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이 이번 전쟁에서 파인트가
그린 큰 그림이었다.
그 외의 다른 부분은 각각의 사령관들이 상황에 맞춰서 유기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이번 전쟁은 파인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실패하고 날려 먹어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하긴, 여기서 지면 더 이상 가문도 없지.’
이렇게 잔뜩 물량을 쏟아부었는데 진다면 더 이상 왕국을 유지할 여력이 사라진다.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미테 왕국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전력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밀고 내려오면
속절없이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전쟁을 마무리하고 왕국을 안정시켜야만 했다.
레늄 왕국과 슈린 왕국은 내전이 끝난 지도 얼마 안 됐다. 그런 상황에서 연이어 전쟁을 하는 것이니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반면 미테 왕국은 계속 중립의 위치에서 내실만 다져 왔으니 그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미테 왕국은
슈린 왕국이나 레늄 왕국에 비하면 애초에 규모가 작았기에 두 왕국에 비해 손색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그 손색은 이제 거의 의미가 없게 되었다. 두 왕국의 내전이 워낙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번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뒷일이야 불을 보듯 훤했다.
그나마 이번 전쟁에서 승리해 에어스트 왕국의 식량을 흡수할 수 있다면 그 차이가 사라져 향후 경쟁의 발판이
마련되겠지만 말이다.
그런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 때문에 파인트가 느끼는 압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스트레스로 변해 매순간 파인트의 심장을 조여 왔다.
“얼마나 남았느냐?”
파인트의 질문에 바로 옆에서 파인트와 보조를 맞추며 걷고 있던 호위 기사가 즉시 대답했다.
“30 분 정도만 더 가면 예전 네이드 후작령 인근에 도착합니다. 정찰에 따르면 에어스트 왕국 측 기간트도 그곳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몇 기나 있다고 하더냐?”
“일단 보이는 건 500 기라고 합니다.”
“500 기라…… 많이도 끌어모았구나.”
에어스트 왕국의 규모를 생각하면 500 기의 기간트를 보유했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솔직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개 백작령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 정도면 생각보다 금방 끝낼 수 있겠군.”
파인트가 안심하며 말하자 호위 기사가 즉시 반박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붉은 학살자가 있지 않습니까. 방심하면 안 됩니다.”
파인트의 인상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지금 누가 누굴 가르치려 한단 말인가.
“내가 그따위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다만 노파심에…….”
“접어라. 그따위 싸구려 노파심은. 우린 최소한의 피해로 크게 승리할 것이다.”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호위 기사가 얼른 한 발 물러났다. 하지만 걱정이 되었다. 파인트가 이번 전쟁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러다가 피해가 크면 곤란한데…….’
이기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솔직히 호위 기사가 생각하기에도 전력 차이가 너무 커서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중요한 건 얼마나 피해를 줄이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전쟁에서 승리해 봐야 피해가 크면 아무 소용 없었다.
쿵! 쿵! 쿵! 쿵!
규칙적인 기간트의 발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30 분쯤 지나자 파인트의 눈에도 에어스트 왕국의 기간트가 진형을 갖추고 늘어선 모습이 보였다. 정찰한 대로
500 기쯤이었다.
“별다를 것도 없군.”
파인트는 코웃음을 쳤다. 상대를 얕봐선 안 되지만, 적당한 자신감은 중요했다.
“기종이 생각보다 뛰어나군요.”
호위 기사의 말에 파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특이했다. 발굴형 기간트가 상당히 많이 보였고, 크란
제국에서 수출하는 임베르도 제법 있었다.
나머지는 대부분이 몰레스와 크라테르였다. 카타락타는 아예 없었다.
이 정도면 굉장한 전력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규모를 생각하면 정말로 놀라웠다. 하지만 그래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다만 짜증이 좀 났다.
“생각보다 기종이 좋아서 피해가 좀 있을 수도 있겠어.”
파인트가 짜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데 그렇게 에어스트 쪽의 기간트를 살펴보던 파인트의 눈빛이
번득였다.
“음? 저건 뭐지?”
에어스트 왕국 진영에 서 있는 기간트 옆에 하나씩 바위가 놓여 있었다.
“설마 저걸 던져서 공격하겠다는 건가? 푸하하하핫!”
파인트는 크게 웃으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진군하던 기간트 군단이 일제히 멈췄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쿵! 쿵! 쿵!
기간트의 발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땅이 흔들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것 같았다.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행동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위협에도 에어스트 왕국 측 기간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전혀 동요가 없었다. 두 배가 넘는 전력
차를 보고도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다.
그들에게는 승리에 대한 열망과 확신이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몇 번의 영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얻은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서 있는 자신들의 왕 제론에 대한 믿음이었다.
제론은 그동안 고민을 많이 했다. 테오스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말이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쓰기로.
피해를 최소로 줄여야 하는 건 비단 슈린 왕국이나 레늄 왕국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에어스트 왕국에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제론은 테오스를 탄 채 가장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테오스의 우측 뒤편에 이스히스가 있었다. 새하얀
몸을 가진 이스히스는 다른 기간트 사이에 있으니 확연히 튀었다.
당연히 그 모습을 파인트가 놓칠 리 없었다.
“음? 못 보던 기간트가 있는데? 저게 뭐지?”
“저도 처음 보는 기간트입니다. 발굴형 기간트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뭐지? 신형 기간트인가? 크란 제국에서 새로운 기간트를 수출한 적이 있었나?”
크란 제국의 기간트 중에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당연히 제국 내에서도 꽁꽁 감싸 정보를 감추는
입장이었기에 그것을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파인트나 그의 호위 기사가 그걸 봤을 리 없으니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것도 완전히 생뚱맞은 일은 아니었다.
“저렇게 새까만 기간트에 대한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새하얀 기간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크란 제국의 기간트인 누베스가 하얀색이라고 들은 것 같긴 해.”
“하면 저 하얀 기간트가 누베스일까요?”
“글쎄…….”
뭐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설마 에어스트 왕국에서 새로 만든 신형 기간트는 아니겠지?”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왕국의 라쿠스도 수십 년을 투자해서 만들어 낸 기체 아닙니까.”
파인트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새 기간트를 만드는 게 호락호락한 건 아니지. 어쨌든 뭐 상관없잖아? 고작 2 기로 뭘 하겠어?”
“맞습니다. 그것으로는 대세에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설사 저 기간트를 모는 사람이 기간틱 마스터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맞아. 아무리 붉은 학살자라도 숫자 앞에선 티끌에 불과하지.”
파인트는 그렇게 확신했다. 붉은 학살자에 관한 소문은 많았지만 그 소문을 모두 진짜라고 확신한다 하더라도 두
배의 전력을 뒤집는 건 불가능했다.
‘뭐, 피해야 좀 있겠지만…….’
피해를 생각하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파인트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래도 이기면 된다. 이기기만 하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파인트가 막 공격을 명령하려는 순간, 에어스트 왕국의 기간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무려 500 기에 달하는 기간트가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렸다. 바위의 크기는 기간트의 머리보다 살짝 컸다.
상당한 크기와 무게였다.
거기에 직격당하면 아무리 기간트라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기동이 불가능해지거나
움직임이 불편할 정도로 고장 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달려가다가 정면으로 바위를 맞으면 타격이 훨씬 클 것이다. 그래서 파인트는 돌격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저들이 바위를 던진 다음에 돌격하거나 아니면 그 바위를 다시 들어 던지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던져!”
테오스에 탄 제론의 명령이 쩌렁쩌렁 울렸다. 전장이 뒤흔들릴 정도로 웅혼하고 거대한 외침이었다.
그 명령과 동시에 500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바위를 던졌다.
후웅! 후웅! 후웅! 후웅! 후웅!
무려 500 개나 되는 바위가 허공을 날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충격에 대비해!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흘릴 수 있으면 흘려!”
하지만 과도하게 움직여선 안 된다. 자기가 움직이는 바람에 동료가 균형을 잃은 채 바위에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균형을 잃어 쓰러지면 안 된다. 그건 진형의 붕괴로 이어지고, 진형이
붕괴되면 수적 우위가 급격히 힘을 잃는다.
바위가 일제히 쏟아졌다. 직선으로 날아온 바위는 거의 없었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대부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는데, 연합군의 기간트는 유효적절하게 대처해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꽝! 꽝! 꽝! 꽝!
바위가 바닥에 떨어지고, 기간트의 팔에 맞고 몸에 맞았다. 몸에 바위를 맞은 기간트도 뒤로 한 발 물러나는
정도 외에는 거의 타격이 없었다.
만일 그 상태에서 바위가 또 날아왔다면 조금 위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속 바위 공격은 없었다.
파인트는 그것을 보며 입가에 비웃음을 그렸다. 이런 쓸모없는 공격을 하다니. 만일 거리가 가까웠다면 타격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기간트가 던지는 바위의 위력은 엄청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리가 너무 멀었다. 게다가 직선으로 던지지도 않고 포물선을 그리며 던졌으니 거기에 맞거나
타격을 입을 리 없었다.
“자, 이제 우리 차례다! 모두 주변에 있는 바위를 집어!”
연합군 측 기간트들이 근처에 떨어진 바위를 집으려 했다. 한데 그 순간 바위가 밝게 빛났다.
화아아아아아악!
“뭐, 뭐야!”
파인트는 화들짝 놀랐다. 그냥 바위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지만 저렇게 밝은 빛을 내는 걸
보니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모두 피해!”
파인트가 외쳤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바위들이 일제히 폭발해 버렸다. 바위가 부서지며 그 파편이 사방을 휩쓸었다. 어찌나 폭발력이 강했는지 근처에
서 있던 기간트의 몸체 여기저기가 형편없이 찌그러져 버렸다.
그뿐 아니라 폭발의 범위에 휘말린 기간트는 뒤로 휙 날아가 자빠져 버렸다.
강렬한 섬광은 덤이었다. 어찌나 섬광이 강했는지, 그걸 정면으로 본 라이더의 눈이 순간적으로 멀어 버렸다.
“으아아아악!”
파인트는 비명을 질렀다. 파인트의 기간트는 전혀 피해 받은 게 없었다. 하지만 섬광 때문에 눈이 멀어 버렸다.
시간이 지나면 시력이 다시 돌아오겠지만, 전투 중에 시력이 사라졌는데 그 영향이 얼마나 엄청나겠는가.
눈이 안 보여 허우적거리는 파인트의 귀에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돌격!”
잊을 수도 없는 제론의 음성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뒤집어 버릴 것 같은 굉음이 쏟아졌다.
쿵쿵쿵쿵쿵쿵쿵쿵!
기간트가 달려오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파인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꽈아아아아앙!
양측의 기간트 부대가 충돌하는 순간, 굉음이 울렸다. 마치 거대한 폭발이라도 일어나는 듯했다.
“으아아아악!”
파인트는 공포에 질려 버렸다. 시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적이 돌진하니 심장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두려웠다.
꽈광! 쾅! 쾅!
파인트는 몸부림을 치며 돌아섰다. 방향감각도 희미했지만 굉음이 울리는 쪽과 반대로 뛰면 된다는 생각에 무작정
달렸다.
하지만 그게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아무리 후미에 위치했다지만 근처에 파인트를 호위하기 위해 기간트가
둘러싸고 있었으니 그들과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꽈과광!
기간트끼리 얽혀 꼴사납게 바닥에 쓰러졌다. 파인트가 워낙 당황해 움직임이 컸기 때문에 혼자서 2 기의 기간트를
동시에 쓰러뜨렸다.
쓰러진 호위 기사들도 시력이 사라진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 파인트가 달려드니 제대로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얽힌 채로 허우적거리는 동안 전투는 급격히 진행 중이었다.
Chapter 3 전쟁 (2)

바위 폭발의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연합군 측 기간트의 진형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그렇게 진형이 무너지고 나니 에어스트 왕국의 돌격에 조금도 대비할 수가 없었다.
1000 기 대 500 기였지만 거의 일방적으로 전투가 진행되었다. 진형도 못 잡고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데다가
시야도 사라진 연합군 측 기간트는 제대로 힘도 쓰지 못했다.
반면 에어스트 왕국 측 기간트는 그동안의 훈련 상황을 반영하듯 착실히 적을 척살해 나갔다.
그리고 가장 앞에서 적을 휘저어 주는 테오스와 이스히스의 존재는 연합군에겐 재앙이었다.
꽈과과과광!
테오스의 검이 사방을 휩쓸었다. 결코 그냥 휘두르지 않았다. 수십 번의 찌르기가 사방을 점령했다.
콰직! 콰직! 콰직!
테오스의 검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확했다. 솔직히 제론은 1000 기나 되는 적이 우스워 보였다. 저들 모두가
달려들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로 테오스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테오스의 굉장한 힘보다는 이스히스의 힘에 더 놀랐다.
제론이 주변의 적을 모두 정리한 다음 고개를 돌려 이스히스를 쳐다봤다.
이스히스는 거대한 도끼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적을 박살 내고 있었다.
부웅! 콰직!
딱 적당한 힘을 이용해 적 기간트의 조종석만 부숴 버렸다. 그 한 방에 적은 그대로 무너졌다. 처음에 받은
제론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제론은 이번 전쟁을 통해 기간트의 수를 최소 500 기 이상 늘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에 가장 충실히
부응하는 것이 바로 이스히스였다.
이스히스의 위력은 유적 14 층에서 상대했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보다 훨씬 빨랐고, 강했다. 만일 그때 이스히스가 이 정도로 강했다면 결코 제론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제야 제론은 깨달았다.
‘소드 마스터가 상대할 수 있도록 수준이 맞춰진 거였구나!’
제론은 아직 시력을 회복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적 기간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슈슈슈슈슈슉!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수십 번의 찌르기가 펼쳐졌고, 또 수십 기의 기간트가 쓰러졌다. 아직 적은 많이 남아 있었지만 다들 제대로
반응조차 못 하고 있었다.
꽈앙! 꽈앙! 꽈앙!
사방에서 기간트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베테랑들은 기간트가 최대한 부서지지 않게 조심해서
처리하는데, 그렇지 않은 라이더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다들 흥분에 빠져 정신없이 적을 공격하고 있었다. 물론 훈련을 받은 대로 진형이나 작전 대형은 철저히 지켰다.
그것이 아군의 피해를 현저히 줄여 주었다.
아무리 시야가 사라졌다지만 적의 반항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들도 나름의 발악을 하며 공격을 했다. 그런
눈먼 공격이라도 맞으면 부서진다.
하지만 철저히 훈련받은 대로 싸우는 에어스트 왕국 측 기간트는 경미한 피해만으로 그들을 제압해 나갔다.
제론은 쓰러진 수십 기의 기간트를 뒤로하고 또 한 번 몸을 날렸다.
슈슈슈슈슈슉!
콰직! 콰직! 콰직!
적 기간트를 쓰러뜨린 제론은 다시 시선을 돌려 이스히스를 쳐다봤다. 이스히스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적을
섬멸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스히스 혼자서도 이들 전부를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주위를 슥 둘러보며 전황을 살폈다.
압도적으로 적을 몰아붙인 결과 절반이 훨씬 넘는 적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 슬슬 적의 시력이 돌아올 때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결과는 지금까지와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
제론은 괜히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일단 전체적으로 전장을 조망해 보기로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제론의 시야에 전장이 한가득 들어왔다. 마치 하늘에 떠서 전장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전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새로운 적의 움직임이 보였다.
“저놈들은 뭐지?”
제론이 눈에 150 기에 달하는 기간트가 나타나는 광경이 보였다. 라쿠스로 이루어진 적의 별동대였다. 만일
저들이 측면을 치고 들어오면 아군의 피해가 제법 될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둘 수야 없지.”
저들 외에도 은밀히 영지 쪽으로 잠입한 적의 기습 부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미리 대비를 해 두었으니까.
제론은 다시 시야를 전장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몸을 날렸다.
쿵쿵쿵쿵!
급히 전장을 빠져나가는 제론의 모습에 아군 지휘관들이 잠깐 당황했지만 이어지는 카이트의 외침에 다들 정신을
차렸다.
“우린 작전대로 간다! 딴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적이 시력을 회복하기 전에 한 놈이라도 더 쳐라!”
카이트의 말대로였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적을 처리할 때였다. 그들의 영주가 어디 괜한 일을 벌인 적이
있었던가.
아마 어딘가에서 적의 술책을 박살 내고 있을 것이다.
키이이이이이잉!
굳건한 믿음은 에어스트 왕국의 힘이었다. 500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굉음을 터트리며 적을 몰아붙였다.

쿵쿵쿵쿵쿵!
150 기의 라쿠스가 급히 달리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설마 에어스트 왕국이 이런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처음 세웠던 작전이고 계획이고 몽땅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최대한 빨리 적의 측면을 쳐서 아군의 숨통을 틔워 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야 더 싸울 희망이라도
생긴다. 만일 늦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모든 라쿠스가 정신없이 달렸다. 진형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달리는 라쿠스 라이더의 눈에 새까만 뭔가가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게 뭐지?”
의아한 표정은 길지 않았다. 그것은 기간트였다. 밤처럼 새까만.
꽈아아앙! 콰지지직!
새까만 기간트, 테오스는 다짜고짜 몸을 날려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라쿠스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라쿠스가 빙글빙글 돌며 뒤로 날아갔다. 당연히 뒤에서 달려오던 동료와 엉켰다.
콰과과과과광!
선두가 무너지니 후위는 당연히 달리는 걸 멈출 수밖에 없었다. 멈추지 못한 라쿠스는 여지없이 다리가 걸려
넘어졌다.
콰과과과광!
흙먼지가 자욱했다. 하지만 라쿠스의 수는 150 기나 된다. 모든 라쿠스가 넘어진 건 아니었다. 중간에서 달리는
라쿠스만 넘어지고 멈췄을 뿐이었다.
좌우의 라쿠스들은 그대로 달렸다. 그들도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에 여기서 지체할 틈이 없다는
것쯤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오스의 능력은 모두의 상상을 초월했다.
테오스가 뒤로 훌쩍 뛰었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거리를 쭉 물러났다. 어느새 테오스는 다시 라쿠스들의 앞에
위치했다.
후우웅!
거대한 검이 좌에서 우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궤적을 따라 검광이 번득였다.
철컹! 철컹!
콰과과광!
좌우의 앞에서 달려오던 라쿠스가 거의 동시에 둘로 잘리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뒤에 달려오던 다른
라쿠스들이 뒤엉켜 쓰러졌다.
결국 모든 라쿠스가 테오스의 검 아래 멈췄다.
테오스의 눈에서 광망이 번득였다.
라쿠스는 다시 고쳐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마나코어를 부숴서 포로스를 빼먹는 편이 훨씬 나았다.
쿠웅!
테오스가 강하게 발을 굴렀다. 땅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콰과과과광!
테오스 앞에 서 있던 라쿠스들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리고 테오스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콱!
테오스의 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움직였다. 마치 테오스를 중심으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그 검에 걸린 라쿠스는 속절없이 잘려 나갔다.
테오스는 사방으로 정신없이 이동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 궤적에 말려드는 라쿠스는 어김없이 수십 조각으로 잘려
나갔다.
무려 150 기의 라쿠스를 상대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라쿠스가 일방적으로 당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나름
조직적으로 테오스를 압박해 갔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었다. 라쿠스가 어떤 공격을 하든 테오스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라쿠스가 아무리
검을 휘두르고 달려들어도 테오스를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그것이 테오스와 일반 기간트의 차이었다. 또한 보통 사람과 소드 마스터의 차이었다.
콰우우우우우!
테오스의 마지막 일격이 사방을 휩쓸었다. 검에서 일어난 바람이 회오리치며 남은 라쿠스를 휘감았다.
테오스는 그걸 마지막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기간트의 잔해만 잔뜩 쌓여 있었다.
“후우.”
제론은 숨을 훅 몰아쉰 다음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라쿠스에는 약점이 있지만 이번에는 그걸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싸웠다. 하지만 무려 150 기의 라쿠스를 압도할 수
있었다.
약점이 없는 라쿠스는 1.9 의 출력을 자랑하는 최신형 기간트였다. 그런 기간트 150 기를 혼자서 생채기 하나
없이 박살 냈다는 건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제론은 시선을 돌려 전장을 확인했다. 여전히 압도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중 압권은 단연 이스히스였다.
“굉장하군.”
이스히스는 처음보다 더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도끼가 마치 수십 개로 불어난 것처럼 빠르고 정신없이
움직여 적의 가슴을 내려찍었다.
이스히스의 활약을 보고 있으니 지금 공략 중인 타히티가 떠올랐다.
“타히티까지 있었으면 완전히 끝장날 뻔했군.”
타히티는 고속 이동이 가능한 기간트였다. 게다가 파괴력과 관통력이 엄청난 화살을 무한정 날릴 수 있었다.
그러니 타히티가 있었다면 수많은 적의 가슴을 빛의 화살이 꿰뚫었을 것이다. 그것도 위력을 조절해 조정석만 딱
파괴하는 정도로 말이다.
제론은 새삼 유적 15 층 공략 의지를 불태웠다. 타히티는 물론이고 그 뒤에 나올 모든 기간트를 싹 얻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두려울 게 없을 것이다.
“슬슬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연합군 측 기간트들이 조금씩 진형을 갖춰 가고 있었다. 하지만 에어스트 왕국 측의 기간트가 그것을 철저히
방해했다.
피해도 크지 않았다. 제론은 일단 그쪽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남은 건 수뇌부였다. 그리고 그들을 구분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허, 도망치고 있어?”
파인트는 시력이 돌아오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정신없이 도망쳤다. 그리고 그의 호위 기사들이 그 뒤를 받쳐 줬다.
에어스트 왕국의 베테랑 라이더들이 파인트를 뒤쫓으려 했지만 호위 기사에 막혀 추격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한심하군.”
적어도 총사령관이 취해야 할 태도는 아니었다. 물론 제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얘기다. 어쨌든 저 총사령관이
누구든 오늘 죽을 테니까.
꽈앙!
테오스가 바닥을 박찼다. 그러자 쭉 앞으로 나아갔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그 뒤로도 테오스는 계속 바닥을 강하게 차며 앞으로 나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파인트의 호위 기사와 에어스트
왕국의 베테랑들이 싸우는 장소에 도착했다.
테오스가 갑자기 다가오자 다들 당황했다. 특히 호위 기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렇게 빠른 속도를 내는
기간트는 본 적이 없었다.
테오스의 몸이 빙글 회전했다. 그와 동시에 검이 쭉 뻗었다.
콰우우우우우!
테오스의 검이 전방을 쓸고 지나갔다. 그 일격에 호위 기사의 기간트 7 기가 두 동강 났다.
테오스는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을 뚫고 지나갔다.
꽈앙!
강하게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쭉 나아가는 테오스의 지척에 파인트의 기간트가 등을 보인 채 달려가고 있었다.
쿵쿵쿵쿵!
테오스가 몇 발 달리니 파인트가 탄 아우틈에게 바짝 다가갈 수 있었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콰득!
테오스의 주먹이 아우틈의 등에 작렬했다.
콰과과광!
아우틈의 등판이 움푹 찌그러지며 바닥을 꼴사납게 굴렀다. 충격이 어찌나 컸는지 그렇게 쓰러진 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테오스는 달리던 걸 멈추고 아우틈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전투를 확인했다.
파인트의 호위 기사는 몽땅 쓰러졌다. 그 싸움을 마무리한 베테랑들이 다시 큰 전투에 끼어드니 일방적으로
연합군이 쓰러지고 있었다.
“끝났군.”
더 볼 것도 없었다. 제론은 실컷 날뛰고 새로운 적을 찾는 이스히스를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적은 전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아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대승이었다. 제론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나저나 성 쪽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마티를 통해 적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파악하고 있었기에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그저 적의 습격 부대를 어떻게
제압했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쓸 만한 기간트 50 기가 더 생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으니 말이다.

Chapter 3 전쟁 (3)
50 기의 기간트로 이루어진 습격 부대는 최대한 은밀히 에어스트 왕국에 숨어 들어갔다. 들키지 않고 몰래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의외로 에어스트 왕국의 경계는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습격 부대의 리더는 임무에 크게 성공할 거라 자신했다. 이렇게 경계에 구멍이 숭숭 뚫렸는데 고작 성 하나
어쩌지 못할 리 없었다.
에어스트 왕국이 이번 전쟁에 거의 모든 기간트를 동원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에 습격 부대도 그리 좋은 기간트를
가져오지 않았다. 다들 카타락타를 보유한 라이더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려 50 기나 되는 카타락타였다. 고작 성 하나쯤은 순식간에 뭉개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임무는 성을 적당히 공격해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니 완전히 박살 낼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성을 부숴 그 사실이 전장에 알려지게 만들어 적의 전력 일부를 뒤로 빼게 만드는 것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물론 그렇게 만든 다음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것이다. 전장으로.
50 기의 카타락타가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 기습하면 얼마나 당황하겠는가. 그걸 노리는 것까지가 이 작전의
마무리였다.
리더는 속으로 작전을 다시 한 번 점검한 다음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멈춰. 성이 보인다.”
리더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 명령을 내렸다.
“소환.”
키이이이이이잉!
50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나타났다. 그들은 그 기간트에 탑승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쏴라!”
슈슈슈슈슈슈슉!
어마어마한 수의 화살이 갑자기 날아왔다. 기간트가 나타난 직후였고, 채 탑승하기 전이었기에 라이더들은
당황하며 화살을 막아 냈다.
어쨌든 다들 제법 검술을 익힌 기사였다. 화살 정도는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화살이 너무 많이 날아왔다. 결국
몇몇 라이더가 가슴이나 팔에 화살을 맞고 말았다.
푹푹푹푹!
화살이 어찌나 많이 날아오는지 채 몸을 뺄 틈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하나둘 바닥에 쓰러지는 라이더가 늘어났다.
이대로는 절대 승산이 없었다.
“다들 피해를 감수하고 일단 기간트에 타!”
한 대만 움직여도 이 상황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리더는 그렇게 판단하고 검을 크게 휘두르며 몸을 위로
띄웠다. 다른 라이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슈슈슈슈슉!
푹푹푹푹!
그 와중에 몇 명의 라이더가 화살을 맞고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라이더가 남아 있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화살비가 멈췄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라이더들은 자신이 카타락타에 탑승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어느새 위에서 떨어지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사라져 버렸다.
서걱! 서걱! 서걱!
엄청나게 강력하고 빠른 검격이었다. 단 한 명도 그 공격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습격 부대가 소환한 카타락타 뒤로 접근해 등을 타고 올라가 머리 위에서 기다렸다가 점프해서 올라오는
라이더를 노리고 뛰어내렸다.
다들 베샤이덴과 슈빅이 특별히 훈련시킨 기사들이었기에 조금도 실수가 없었다. 뛰어오른 라이더는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목이 잘려 죽었다.
“상황 끝!”
바닥에 내려선 기사 중 하나가 외치자, 숨어서 활을 날리던 궁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50 기의 카타락타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쓰러진 적 라이더가 완전히 죽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로써 레늄 왕국과 슈린 왕국의 연합군이 모두 전멸했다. 수많은 기간트를 전리품으로 남겨 두고 말이다.

Chapter 4 전후 처리 (1)

전쟁이 끝났다. 그것도 모두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결과로 말이다.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이 손을 잡고 쳐들어갔는데 에어스트 왕국이 그걸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연합군이 거의 전멸해 버렸다. 게다가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파인트는 물론이고 주요 귀족들이 사로잡히거나 죽어
버렸다.
기간트 전투가 워낙 압도적으로 끝나 버려 뒤따라오던 보병들은 별다른 힘도 못 써 보고 몽땅 포로로 잡혀 버렸다.
그 수가 무려 3 만이었다.
당연히 레늄 왕국과 슈린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웅크리던 미테 왕국이
술렁거렸다.
이번 기회에 두 왕국을 공격하면 상당한 영토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건 향후 미테 왕국의 거대한
힘이 될 것이다.
미테 왕국의 세 실세 중 두 사람이 은밀한 곳에서 회동 중이었다. 벨루스 공작과 말레피 공작이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감추지 못한 두 사람은 은밀히 만난 뒤에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소.”
“나도 그렇소. 아들놈의 연락을 받고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긴 했는데,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르오.”
“허허, 나도 마찬가지였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거기 있으니 밤에 잠도 오지 않더이다.”
“허허허허.”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웃었다.
사실 슈돌츠 국왕이 강력하게 압박을 했지만 두 공작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군사를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리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지 정해야 하지 않겠소? 난 지금 당장이라도 밀고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하오만…….”
“나도 밀고 내려가는 데에는 이의가 없소. 다만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준 에어스트 왕국과 상의를 좀 해야 하지
않겠소?”
말페피 공작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내려갈지 한계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오. 일단 광산 몇 개는 얻어야 하지 않겠소?”
“내 생각에는 최소 필츠 평원까지는 얻어야 할 듯하오. 아무래도 우리 왕국은 식량 사정이 좋지 못하니 말이오.”
중립 지역의 영지 중에서 식량이 풍부한 곳은 기껏해야 벨루스 영지 정도였다. 나머지 영지에서도 곡물을 안
키우는 건 아니었지만 자급자족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예전 레늄 왕국 최고의 곡창 지대인 필츠 평원을 손에 넣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합시다.”
일단 두 사람은 논의를 마무리했다. 아무리 그런 계획을 세워도 에어스트 왕국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노선을
달리해야만 했다.
아직 완전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지만 겉으로 도는 소문만으로도 에어스트 왕국이 가진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 전쟁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그저 한 번의 전투가 끝났을 뿐이었다. 물론 그 전투로 전쟁 자체가 끝난
거나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에는 아직 나름의 힘이 남아 있었고, 에어스트 왕국도 그들을 징치하려면 진군을
해야만 한다.
두 공작은 에어스트 왕국과 적절히 합의해서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많은 영토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왕국이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식량을 생산할 정도면 충분했다.
두 공작은 각자의 가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각자의 통신망을 통해 에어스트 왕국과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 ☆ ☆

슈린 국왕은 난감한 표정으로 앞에 앉은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의 표정이나 자세는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한마디도 뭐라 하지 못했다.
“500 기의 기간트를 그냥 지원한 게 아니라는 사실, 알고 계시지요?”
“그렇소.”
애초에 500 기의 기간트를 지원받으면서 전쟁이 끝난 뒤 그것을 깨끗이 수리해서 돌려주기로 했다. 거기에
모자라는 라이더까지 지원해 주었는데, 그 라이더에게 지급하는 돈까지 슈린 왕국이 책임지기로 되어 있었다.
한데 500 기의 기간트를 몽땅 날린 것뿐 아니라, 라이더까지 그 지경에 처했으니 슈린 국왕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슈린 국왕은 속으로 이를 박박 갈았다. 대상은 이번 전쟁을 혼자 망쳐 버린 파인트였다.
제대로 된 보고를 듣지는 못했다. 전쟁에 참여한 대부분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다시 돌아온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이니 전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길이 없었다.
그가 들은 건 적이 기습을 했을 때, 파인트가 혼자 도망가려다가 호위 기사와 얽히는 바람에 피해가 가중되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정보가 차단된 것 역시 모두 바인의 작품이었다. 바인은 의도적으로 정보를 차단하고 헛소문을 흘렸다.
그리고 정보를 비틀어 퍼뜨렸다.
제론은 이번 전쟁에 테오스를 사용했다. 그 사실을 일단 최대한 감추기로 한 것이다.
물론 결국은 알려질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 유리했다. 어쨌든 주목을 받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어쩌실 겁니까? 돈으로라도 물어 주시겠습니까?”
슈린 공작이 식은땀을 흘렸다. 무려 500 기의 기간트에 대한 돈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실바의 가격이 4 만
골드이니 그걸로 계산해도 2 천만 골드나 된다.
한데 이들이 지원해 준 기간트는 무려 크라테르와 몰레스였다. 그 두 기간트의 가격은 실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전쟁 때문에 재정이 말라붙은 상황인데, 거기서 수천만 골드를 지출하게 된다면 얼마나 휘청거릴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더구나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다.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수천만 골드나 되는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휙 던질 수는 없었다. 전쟁에는 무슨 일이 어떻게 생겨날지 모르니 말이다.
“기다려 주시오.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소.”
사내의 입가가 길게 늘어났다. 그리고 한쪽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제가 보기엔 이미 끝난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소. 우리에게는 아직 여력이 있소. 게다가 에어스트 왕국은 진군할 처지가 못 되오. 여전히 승산은
우리에게 있소.”
“글쎄요. 에어스트 왕국은 그렇다 치고 미테 왕국은 어쩌실 겁니까?”
“미테 왕국은 걱정할 것 없소. 그들과는 밀약을 맺었으니까.”
“밀약이라…….”
사내의 비웃음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과연 그 밀약이 지켜지리라 생각하십니까?”
슈린 국왕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솔직히 지켜지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슈돌츠 국왕과의 밀약은 그에게 이득이
있기에 정해진 것이다. 한데 이대로 전쟁에 패배해 버리면 밀약 자체가 소용없어진다.
“미테 왕국의 군사 흐름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 못 들어 보셨습니까?”
사내는 이제 슈린 왕국의 정보력에 딴지를 걸고 나섰다. 더 이상 이 왕국에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이오?”
그제야 사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조금 더 지원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야말로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또 지원을 해 준다니, 그렇게만 해 주면 지금 닥친 위기를 어떻게든 넘길
수 있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진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위험한 움직임을 보이는 미테 왕국만 견제하면 된다. 그거면
충분했다.
일단 시간만 벌면 뭐든 할 수 있을 테니까.
“뭘 원하시오?”
“보다 적극적인 협조를 원합니다.”
“적극적인 협조?”
“저희로서도 상당히 무리한 투자를 하는 셈입니다. 그러니 성공했을 때 그만한 보답을 바라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슈린 국왕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점점 지쳐 갔다. 건국을
할 때는 좋았는데 계속 문제가 터지니 이젠 너무 버거웠다.
“향후 저희가 하는 일에 전폭적인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하겠네.”
사내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지금 나온 대화의 내용을 정확히 계약서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슈린 국왕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그 계약서에 인장을 찍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사내가 계약의 대가로 내민 것은 200 기의 몰레스였다. 그 정도면 급한 대로 미테 왕국의 도발을 견제하기에는
충분했다.

Chapter 4 전후 처리 (2)

그렇게 다른 곳은 치열하게 물밑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정작 그 모든 일의 중심에 있는 에어스트 왕국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에어스트 왕국에서 현재 가장 바쁜 곳은 단연 기간트 공방이었다. 그곳은 1 천 기에 가까운 기간트를 수리하느라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 기간트를 모두 전력화하면 누구도 에어스트 왕국을 쉽게 넘보지 못할 것이다.
이젠 왕궁이 된 에어스트 영지의 성은 축제 분위기였다.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에 왕국 전체가 들썩거렸다. 그리고
제론도 술과 고기를 잔뜩 풀었다.
그렇지 않아도 풍족한 왕국이었는데, 왕이 나서서 음식을 풀어 버리니 금세 흥청거렸다.
당연히 왕궁이 가장 흥청망청이었다. 물론 제론은 이 분위기를 깰 생각도 없었지만 계속 유지할 생각도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이런 식으로 다들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에어스트 왕국에 꼭 필요한 분위기이기도 했다.
밖은 흥겨움이 넘쳐 났지만 안은 그렇지 않았다. 제론은 왕궁의 회의실에 앉아 함께 모인 주요 인사들을 쭉
둘러봤다.
“현재 우리 전력 상황은?”
“원래의 전력은 모두 수리가 끝났습니다. 포획한 기간트의 경우 당장 쓸 수 있는 것들도 상당히 많습니다만,
일단 라이더가 부족합니다.”
역시 고질적인 문제가 또 나왔다. 에어스트 왕국은 여전히 인구가 모자랐다. 당연히 인재도 모자랐다.
“예비 라이더의 훈련은 어떻게 되고 있지?”
“일단 기존의 예비 라이더를 견습으로 올려서 새로 얻은 기간트를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300 명의 신입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1 천 기의 기간트를 모두 소화하려면 아직 멀었다. 더 많은 라이더가 필요했다.
게다가 한창 준비 중인 기간트 공장이 완성되어 신형 기간트를 생산하게 되면 훨씬 많은 라이더가 필요해진다.
물론 기간트 생산 속도도 고려해야겠지만 말이다.
“디아만트 상단이 보내 주기로 한 난민이나 빈민은 어떻게 되었지?”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습니다만 아직 턱없이 부족합니다.”
에어스트 왕국은 아직 손댈 곳이 너무 많았다. 왕궁이 있는 수도도 완성되지 않았다. 또한 추수가 끝났으니
금년에는 쓰지 않았던 나머지 땅에도 파종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일이 산적해 있었다. 한데 그 모든 것에 사람이 필요했다.
“포로는 어떻지?”
“일단 귀족과 평민으로 나누어서 수감을 했습니다. 평민 쪽은 나중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작업 중입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구가 모자라니 그런 식으로라도 사람을 계속 받아들여야만 했다.
에어스트 왕국에서 노리는 것은 3 만 명이나 되는 병사였다. 그들을 고스란히 잡았으니 고스란히 써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어차피 인구가 늘어나면 병사를 더 뽑아야 한다. 그걸 좀 미리 뽑았다고 여기면 된다. 또한 병사를 통해 그들의
가족까지 받아들일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좋아. 그건 계속 그런 식으로 진행하는 걸로 하지. 그럼 이제 진짜 중요한 문제를 얘기해 볼까?”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좌중을 슥 둘러봤다. 갑자기 회의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일단 슈린 왕국부터 처리한다.”
“레늄 왕국은 그냥 두는 겁니까?”
“그쪽은 미테 왕국에 맡기는 걸로 하지.”
좌중이 살짝 술렁거렸다. 하지만 금세 잠잠해졌다. 굳이 일부러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미테 왕국은 움직였을
것이다. 그들과 손을 잡고 각자 나눠서 공략하면 훨씬 좋은 성과를 얻지 않겠는가.
“미테 왕국 쪽과 협의하는 건 바이스가 맡도록.”
“맡겨 주십시오.”
어차피 그동안 바이스는 말레피 가문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해 왔다. 이번에 그들에게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연락한 것도 바이스였다.
아마 미테 왕국은 이번 일로 크게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주도한 벨루스 가문과 말레피 가문은 훨씬 큰
실권을 쥐게 될 것이고 말이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슈린 왕국을 어떻게 공략할지 논의해 볼까?”
슈린 왕국은 21 개의 영지가 모여서 건국한 나라였다. 당연히 엄청나게 넓었다. 그걸 모두 점령하다는 건 현재의
에어스트 왕국 실정으로는 불가능했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정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인근 영지부터 차근차근 병합하는 방식이 가장
안정적입니다.”
가장 먼저 나온 의견이었고, 또 그만큼 현실성 있는 의견이었다. 그렇게 하면 안정적으로 영토를 늘려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실정에는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쟁이 너무 길어질 것 같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다른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승리가 예견된 전쟁이니, 길어져도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사실 그런 식으로 하면 시간은 오래 걸릴지 몰라도 부담은 전혀 없었다. 현재 슈린 왕국은 에어스트 왕국의
공격을 방어할 여력이 전무했다.
거기에 미테 왕국을 견제해야 하니, 에어스트 왕국의 공격을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에어스트 왕국은 그저
차근차근 영지를 병합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 물자는 병합한 영지에서 차출하고 말이다.
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인가. 하지만 제론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당장 슈린 가문을 박살 내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 생각에 잠겼다. 제론이 생각에 잠긴 사이 회의는 잠정적으로 차근차근 점령하는 방안을 선택한 채
진행되었다.
주변 어느 영지를 먼저 공략할 것인지, 또 얼마나 병력을 투입해야 할지, 영지를 하나씩 공략할지 한꺼번에 여러
영지를 동시에 공략할지, 그리고 기간을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할지까지 정해 나갔다.
그렇게 대충 윤곽이 그려질 무렵, 제론이 상념에서 벗어났다.
“일단 슈린 가문부터 없애고 시작하는 건 어떨까?”
“예?”
다들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일단 슈린 가문을 먼저 없애고 시작하자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그리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직접 슈린 영지를 치려면 거기까지 이동을 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습니다만…….”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슈린 영지 근방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그 정보가 슈린 왕국에
알려지지 않을 리 없었다.
미리 병력을 대기시켜 준비하면 게이트에서 나오는 에어스트 왕국의 라이더를 그물로 고기 잡듯 싹 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거기까지 강행군을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차라리 그러려면 슈린 영지까지 직선상에 있는 모든
영지를 부수면서 가는 것이 훨씬 나았다.
“이의는?”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불가능합니다.”
“차라리 빠르게 부수기만 하면서 전격전으로 나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불가능한 이유는?”
제론의 물음에 다들 각자의 생각을 꺼냈다. 그것을 모두 듣고서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제론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슈린 영지를 치는 건 나 혼자서 한다.”
“말도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슈린 영지가 어떤 곳인데 거길 혼자서 간단 말인가. 그냥 죽으러 가는 거나 다름없었다.
회의장이 대번에 소란스러워졌다.
제론은 가만히 그걸 지켜보다가 소란이 조금 잦아들 무렵 입을 열었다.
“혹시 이번 전쟁에서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본 사람 있나?”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슬며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결국 그들의 시선은 카이트와 바이스에게로 향했다.
왕국으로 독립하면서 새로운 인재를 잔뜩 영입해 주요 인사로 만들었기에 카이트나 바이스에 비해 제론에 대해
너무 몰랐다.
“봤습니다.”
입을 연 것은 카이트였다. 카이트의 표정은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었다. 그날 있었던 제론의 무위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 뭘 봤지?”
“적의 별동대와 싸우는 걸 봤습니다.”
제론이 빙긋 웃었다. 딱 좋은 광경을 봤다.
“그걸 봤으니 알겠군. 나 혼자서 슈린 영지를 치는 게 과연 불가능한가?”
“가능합니다.”
카이트의 대답에 다들 경악했다, 모두의 시선이 카이트에게로 모였다. 그리고 설명을 기다리는 눈으로 카이트를
바라봤다.
카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페하께선 혼자서 150 기의 라쿠스를 쓰러뜨리셨습니다. 아마 저도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겁니다.”
회의장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아무도 카이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대체
그게 어떻게 말이 된단 말인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자, 제론이 말했다.
“그리고 그때 함께 싸웠던 하얀 기간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군.”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론이 말한 하얀 기간트는 이스히스였다. 워낙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는지라 이스히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그 기간트도 함께할 테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의 불안감을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세상에 어떤 왕국에서 이런 위험한 작전에
국왕이 직접 나선단 말인가.
“속전속결이 최고야. 그래야 왕국에 부담이 없을 테니까.”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좌중을 쓸어 봤다. 제론의 형형한 눈빛이 회의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압박했다. 다들
마음이 짓눌려 기가 확 죽었다.
“슈린 영지를 정리한 다음 일단 주변 영지를 병합하는 걸로 하지. 아마 훨씬 쉬울 거야.”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슈린 영지가 사라진다면, 그래서 슈린 가문이 완전히 지워진다면 슈린 왕국의
구심점이 사라지게 된다.
구심점이 사라진 왕국은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었다. 아마 싸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슈린 왕국에 속한 영지들은
에어스트 왕국이 기침 한 번만 해도 알아서 고개를 숙일 것이 분명했다.
전혀 피를 흘릴 필요 없이 왕국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미테 왕국이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럼 그렇게 결정된 걸로 하고,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지. 내가 언제 슈린 영지를 칠지는 나중에 결정되면
알려 주도록 할 테니 기다리도록.”
제론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의 통보나 다름없었다. 이 일에 관한 한, 절대로 결정을 번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제론이 밖으로 나간 뒤에도 회의장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듯했다.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다들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바이스와 카이트, 엔트를 바라봤다. 그들이 믿을 건 세 사람뿐이었다.
만일 세나가 있었다면 세나도 거기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이 에어스트 왕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다.
“그냥…….”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다들 마른침을 삼키며 집중했다.
“기다립시다.”
“기, 기다리자고요?”
“일단 폐하께서 당장 떠나신 건 아니니 기다리면서 방법을 더 찾아봅시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직 일이 벌어진 건 아니었다.
“홀로 슈린 영지를 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떠나기 전에 그걸 생각해 내야
합니다.”
“일단 그 수 외에는 답이 없군요.”
다들 수긍했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좋은 생각을 해낼 거라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제론이 언제 떠날 것인지는 제론만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Chapter 5 습격 (1)

제론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중앙 유적으로 이동했다. 괜히 시간을 끌 이유도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레늄 왕국은 수많은 유적을 통해 어디든 쉽게 갈 수 있었다. 슈린 영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슈린 영지에 유적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인근에 적당한 유적이 있었다. 그 유적의 마티를 통해 슈린 영지의
상황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했다.
제론의 목적지도 바로 그곳이었다.
유적 간 텔레포트를 통해 곧장 슈린 영지 인근의 유적에 도착한 제론은 태블릿을 통해 상황을 점검했다.
슈린 영지는 비교적 조용했다. 사실 슈린 왕국이 되면서 영주성이 있는 도시는 그대로 수도가 되었다.
왕국의 수도는 상당히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왕국이 된 지는 얼마 안 됐기에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기대
심리는 엄청났다.
그런데도 이렇게 조용한 걸 보면 전쟁에서 패배한 사실이 잘 알려진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바인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바인이 보내 준 보고서 어딘가에 그런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영지 분위기는 침체되어 있었다. 제론은 마티를 통해 분위기를 대충 살피고는 원하던 걸 찾기 시작했다. 제론이
원하는 건 도시에 설치된 마법진이었다.
보통 슈린 영지의 성이 있는 큰 도시쯤 되면 아공간에서 기간트를 소환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마법진을 다
깔아 놓기 마련이었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길 원했다. 그것이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제론은 테오스를 이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테오스와 이스히스가 나서면 훨씬 빠르고 편하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바인이 애써 정보와 소문을 조작한 의미가 퇴색된다.
제론은 혼자서도 충분히 강했다. 소드 마스터였으니까.
하지만 그러려면 제대로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제론이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만일 기간트가 앞을 막으면 이번 작전은 그냥 실패였다. 어떤 기간트가 앞을 막아도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그건
기간트의 수가 적당할 때의 얘기였다.
만일 수십 기의 기간트가 달려들고, 제론의 무위에 겁을 먹은 왕족들이 몰래 도망가 버리면 정말로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확인해야만 했다. 이 도시에서는 기간트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론은 마티를 조종해 도시 곳곳을 확인했다. 그렇게 찾기 시작한 지 30 분쯤 되었을 때, 제론의 눈이 번득였다.
“찾았다.”
마법진의 흔적을 찾아냈다. 문양을 보니 아공간 간섭 마법진의 일부로 보였다. 제론은 좀 더 마법진의 주변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도시 안에서는 기간트 소환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마법진 가동 범위도 확인해야만 했다. 마법진이 도시에만 적용되고 성 내부에는 적용이 안 된다면 곤란해진다.
“그냥 기간트로 돌진해?”
그렇게 중얼거리던 제론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충동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수십 기의 적 기간트가 한꺼번에 달려들면 아무리 붉은 실바를 타고 있다 하더라도 막아 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제론이 소드 마스터인 것과는 아무 상관 없는 얘기였다. 소드 마스터가 기간트를 조종한다고 많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기간트가 가지는 고유의 파워는 마나코어에 의해 결정되니까.
오히려 이럴 때는 기간트를 타지 않는 편이 은밀히 움직일 수도 있어서 좋았다. 물론 마법진으로 떡칠이 된
성안을 은밀히 움직이려면 처리할 일이 상당히 많아지겠지만 말이다.
“일단 범위는…… 정확히 도시를 감싸는 정도로군.”
마법진을 분석하는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제론은 고대 유물의 마법진을 분석하고 만들면서 그에 관한
능력을 상당히 키운 상태였다.
“내부가 중요한데…….”
마법진을 분석하니 내부적인 범위도 금방 계산이 가능했다. 계산을 마친 제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성은 포함이 안 되는데?”
즉, 성에는 기간트가 득실거린다는 뜻이었다. 제론 혼자서 뭔가를 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제론의 목표는 그저 왕족 전원을 척살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슈린 공작과 파인트는 끝까지 살려 둘 생각이었다. 가문이 몰락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멀리 돌아온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소드 마스터가 된 순간 몰래 숨어들어 암살하면
그만이었다. 제론에게는 충분히 그 정도 능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론은 그렇게 간단히 끝낼 생각이 없었다. 훨씬 더 큰 고통을 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일이 중요했다. 슈린 왕국을 완전히 분열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일단 성을 확인해야겠군.”
성은 아공간 간섭에서 제외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공간 감지 마법진까지 설치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일단 그것도 확인을 해 봐야 한다.
“마티가 거기까지 닿으면 좋았을 텐데.”
만일 슈린 영지 인근에 유적이 있었다면 영지 전체를 마티로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적은 슈린
영지가 아니라 그 옆 영지에 있었다.
마티의 정보 수집 범위에 닿아 있긴 하지만 영지 전체를 뒤덮지는 못했다. 그래서 성을 확인하려면 직접
움직여야만 했다.
제론은 유적에서 나가 조용하고 빠르게 이동했다. 아직 날이 훤했지만 조만간 어두워질 것이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제론에게 유리했다. 제론은 아무리 어두워도 시야에 거의 지장이 없었다.
슈린 영지로 스며드는 건 간단했다. 경계는 삼엄했지만 병사로 벽을 만들지 않는 한, 제론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일단 영지로 스며들고 나니,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 슈린 영지의 인구는 에어스트 왕국보다 많았다.
도시에 들어가니 사람이 바글거렸다.
그 사이에 스며든 제론을 무슨 수로 구별해 내겠는가.
하지만 성으로 다가갈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성에 다가가니 돌아다니는 사람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여기도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군.’
에어스트 왕국도 수도를 이런 식으로 구성했다. 거대한 저택들이 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높은 귀족들이 사는
저택이었다. 돈이 많다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당연히 경계는 다른 어떤 곳보다 삼엄했다. 곳곳에서 경비병이 눈을 번득이며 돌아다녔다. 함부로 그 거리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괜한 모험을 할 필요는 없지.’
솔직히 제론은 직접 숨어 들어가는 것도 가능했다. 제론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여차하면 테오스를
부르면 된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괜히 불안함을 남길 필요는 없었다. 자칫 들키기라도 하면 일이 조금 더 복잡해지지 않겠는가. 제론에게는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내부를 둘러볼 방법이 또 있었다.
“스키아.”
제론의 그림자에서 스키아가 불쑥 솟아났다. 이 그림자의 정령은 제론에게 새로운 시각과 청각을 제공한다.
그리고 약간의 물리력도 행사할 수 있게 해 준다.
‘약간 거리가 있긴 한데…… 일단 해 봐야지.’
제론은 스키아를 성 쪽으로 보냈다. 현 시대에 스키아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스키아는 제론의
의념을 받아 슈린성으로 거의 순간 이동을 하듯 스며들었다.

“마법진으로 아예 도배를 했군. 돈이 많긴 많았나 봐.”


슈린 가문이 운영하는 슈린 상단은 상당히 큰 상단이었다. 그들이 판매하는 포션은 거의 독점이나 다름없으니
계속해서 막대한 이득을 안겨 주었다.
그 슈린 상단이 제론 때문에 거의 몰락 직전이었다. 약초를 선점해 포션 제작에 차질을 빚게 만든 다음, 새로운
포션을 제작해 판매했다.
그 결과 슈린 상단은 계속해서 무너져 갔다. 슈린 상단이 무너지니 거기에 연계된 상단들이 다 연쇄적으로
흔들렸다. 그렇게 재정 상황이 악화되었기에 사실 슈린 상단의 마지막 희망이 라쿠스였다.
한데 그런 라쿠스에도 문제가 생겼으니 슈린 가문의 돈이 말라비틀어져 버렸다.
그 결과가 이 슈린성이었다.
마법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긴 한데, 제대로 유지 보수를 하지 않아 몇몇 기능이 정지해 버렸다. 그리고 어떤
기능은 주기적으로 작동을 멈추기도 했다.
제론은 스키아를 이용해 성 구석구석을 살피며 그 모든 마법진을 다 파악했다.
사실 현재의 마법은 제론이 보기에 수준이 너무 낮았다. 그나마 이렇게 큰 규모로 설치하는 마법진의 경우는 좀
나았지만 작은 규모의 마법진은 걸음마 수준이었다.
제론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정도로 분석이 힘든 마법진은 최소한 고대 유물은 되어야만 했다. 초고대문명의
유물은 아예 파악 자체가 불가능했고 말이다.
어쨌든 상황을 다 파악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가 되었다.
성의 상태는 정확히 아공간 감지 마법은 제대로 돌아가고, 나머지 방어에 관한 마법은 절반 정도 마비된 상태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했다.
제론은 성안에 기간트가 몇 기나 있는지도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기종이 뛰어나긴 했지만 고작 30 기
정도였다.
사실 슈린 성은 왕궁이었다. 왕궁을 보호하는 기간트의 수가 30 기라면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슈린
왕국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슈린 왕국이 전쟁에 동원한 기간트의 수는 700 기가 넘는다. 그 모든 기간트를 잃었으니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국경에 배치할 기간트도 모자랄 것이다.
제론은 밤거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일단 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먼저였다. 성에 들어가자마자 기간트를 소환할
것이다. 제론은 아공간에 붉은 실바를 넣어 왔다.
그걸 이용해 목표를 이룰 것이다. 이번 작전의 생명은 속도였다. 잠입한 다음 얼마나 빨리 목표를 척살하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일단 왕족의 위치부터 파악해야 한다. 국왕을 제외한 모두를 척살할 생각이었다.
제론이 원하는 것은 분열이었다. 슈린 가문의 인물을 비롯해 슈린 가문에 지나칠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자들을 싹 정리한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권력 다툼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
더구나 슈린 가문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공산이 컸다.
기간트를 꺼내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였다. 왕궁에서 에어스트 왕국의 기간트가 날뛰면 슈린 가문의 무능함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권력 다툼을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게 가능했다.
스키아를 회수한 제론은 성벽을 타고 넘었다. 깜깜한 밤이었기에 마법진의 빈틈을 파고들어 잠입하는 제론을
발견하는 건 불가능했다.
성벽에는 방어 마법진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몇 군데 빈틈이 있었다. 제대로 유지보수를 하지 않아
만들어진 틈이었다.
제론은 그 빈틈을 정확히 찾아 성벽을 타고 넘었다. 경계병도 많지 않았다. 재정 압박이 가져온 효과 중
하나였다.
스키아를 통해 얻은 정보와 바인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종합한 제론은 반드시 죽여야 할 사람의 이름과 위치를
정리할 수 있었다.
제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성문 근처에 세워진 화려한 숙소였다.
성문 옆에는 두 군데의 숙소가 있었는데, 하나는 화려하면서 규모가 조금 작았고, 다른 하나는 평범하면서 규모가
상당히 컸다.
성문과 성벽의 경계를 맡은 경비대의 숙소였다.
성의 경비대는 생각보다 힘이 컸다. 경비병의 수가 제법 많았기에 그것을 모두 총괄하는 경비대장의 경우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비대장의 자리에 아무나 앉힐 리 없었다. 현재의 경비대장은 슈린 가문 출신이었다. 즉,
왕족이었다.
경비대에는 병사뿐 아니라 기사도 제법 소속되어 있기에 왕족이 그들을 총괄하는 건 슈린 왕국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했다.
제론은 화려한 숙소로 스며들었다. 그 숙소가 경비대장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오로지 경비대장 혼자만을 위한
숙소였다.
숙소를 지키는 기사가 제법 많았지만 제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제론은 숙소 최상층에 있는 방에서
한창 잠에 빠져 있는 경비대장에게 손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차라리 인원으로 메웠으면 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를 동원하는 바람에 인원이 줄어 오히려 숨어들기가
더 쉬웠다.
제론은 경비대장 앞에 다가가 손을 펼쳤다. 제론의 손바닥 앞에 마법진이 나타나 빛을 뿌렸다.
샤아아아.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지며 경비대장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마법은 일정 시간이 지나야 발현되는 고난이도 마법이었다. 마법이 펼쳐지면 경비대장은 이성을 잃고 날뛸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제론이 성을 한바탕 휘젓고 나간 뒤였다.
혼란에 빠진 왕궁에서 경비대장이 날뛰면 더 큰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경비대장의 이미지가 완전히 박살
나게 된다.
제론이 노리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경비대장에게 마법을 건 제론은 곧장 자리를 떴다. 다음 목표는 무력을 갖춘 왕족이었다.
제론은 차근차근 움직였다. 소드 마스터에 이른 그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제론은
마법까지 함께 썼다. 제론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기척도 없었다.
그런 상태로 움직이며 무력을 갖춘 왕족을 찾아다니며 경비대장에게 건 것과 똑같은 마법을 걸었다.
그렇게 마법을 건 다음 행정의 요직에 앉은 왕족과 귀족을 찾아다녔다. 이제부터는 죽음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제론은 왕족과 슈린 가문에 충성하는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하나하나 척살했다. 죽이는 방법은 딱 한 가지였다.
마나를 이용해 호흡기 주변의 공기를 없애 버렸다.
그들은 호흡 곤란으로 죽어 버렸다. 마지막에 비명을 질렀지만 공기가 없으면 소리가 퍼지지도 않는다. 아무리
발악해 봐야 그 어떤 소리도 새나 가지 않았다.

Chapter 5 습격 (2)

그렇게 죽일 사람을 다 죽인 제론은 당당하게 왕궁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곧장 붉은 실바를


꺼냈다.
왕궁 한복판에 갑자기 나타난 기간트는 거대한 혼란을 몰고 왔다. 물론 워낙 어두운 밤이었기에 붉은 실바가
나타나자마자 발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론이 거기에 탄 다음 움직이기 시작하니, 바로 눈에 띄었다.
꽈앙!
붉은 실바의 주먹이 왕궁의 첨탑을 후려쳤다. 물리적 방어력을 높여 주는 마법진이 새겨진 벽이었는데도 사방으로
금이 쩍쩍 갔다.
그렇게 금이 가면서 마법진이 깨져 버렸다.
붉은 실바의 주먹이 같은 자리에 한 번 더 꽂혔다.
꽈앙!
꽈르릉!
첨탑 하나가 그대로 무너졌다. 첨탑의 중심이 되는 축을 부숴 버렸기 때문에 말 그대로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왕궁에 비상이 걸리고 난리가 났다.
“기간트다!”
“붉은 실바!”
붉은 실바는 엄청나게 유명했다. 예전에는 레늄 왕국의 귀족들이 앞다퉈 나서서 정보와 소문을 차단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 여력이 없어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소문이 퍼져 나갔다.
더구나 현재 전쟁을 벌이는 적국의 국왕이 타는 기간트가 붉은 실바이고, 별명이 붉은 학살자이니, 그걸 모를 수
없었다.
사방으로 병사들이 흩어졌다. 병사나 기사는 아무리 많아 봐야 기간트 싸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간트를
보유한 기사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밤중이었다. 아무리 소란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기간트를 소환해 싸울 수는 없었다. 나름대로 잠에서 깨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붉은 실바는 그러는 동안에도 착실히 주변의 건물을 부숴 나갔다.
꽈앙! 꽈앙! 꽈앙!
꽈르르릉!
“장미궁이 무너진다!”
“피해!”
곳곳의 건물이 무너졌다. 붉은 실바는 정확히 어딜 타격하면 건물이 무너지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주먹질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건물이고 탑이고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기간트는 뭐 하고 있는 거야!”
“폐하는! 페하는 안전하신가!”
“대체 아공간 감지 마법진은 왜 작동을 안 한 거야! 적 기간트가 어떻게 왕궁까지 들어올 수 있어!”
엄청난 혼란이 왕궁을 강타했다. 그들의 느끼는 당혹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슈린 영지는 기간트 공격에 대한 대비가 상당히 잘된 영지였다. 또한 성의 방어도 만만치 않았다.
한데 그 모든 방어망을 뚫고 왕궁에 기간트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혼란스럽겠는가.
붉은 실바가 첨탑을 비롯한 작은 궁을 각각 3 개씩 부쉈을 때, 멀찍이서 기간트가 불쑥불쑥 나타났다. 이제야
왕궁에 거주하는 기간트 라이더가 준비를 끝내고 나타난 것이다.
제론은 기간트가 불쑥 나타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10 기가 넘는 기간트가 곳곳에서 나타났는데, 비교적 가까이 뭉쳐 있었기에 갑자기 붉은 실바가 달려가니 다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쿵쿵쿵쿵쿵!
붉은 실바의 속도는 경악할 정도로 빨랐다. 순식간에 거리를 없애 버린 붉은 실바가 바닥을 박찼다.
꽈앙!
허공에 높이 떠오른 붉은 실바가 미처 라이더를 받아들이지 못한 기간트 3 기를 동시에 발로 차며 내려섰다.
꽈과광!
기간트 3 기가 바닥을 뒹굴었다. 당연히 라이더는 그 옆에 서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붉은 실바가 착지하며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콰드득!
라이더 3 명이 붉은 실바의 등과 다리에 깔려 그대로 절명했다.
그렇게 기간트 3 기를 순식간에 무력화시킨 붉은 실바는 몸을 일으키며 바로 앞에 서 있는 기간트를 어깨로 받아
버렸다.
꽈앙!
기간트의 해치가 뜯어졌다. 그리고 기간트는 뒤로 쭉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꽈르릉!
벽 일부가 무너지며 기간트를 덮어 버렸다. 그 기간트에는 라이더가 막 조종석에 들어간 상태였는데, 어깨로
받히는 바람에 짓눌려 터져 버렸다.
그렇게 4 기의 기간트를 없애는 사이 나머지 라이더가 죽을 각오를 하고서 기간트에 탑승해 무사히 해치를 닫았다.
키이이이이잉!
6 기의 기간트가 눈을 빛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20 기의 기간트가 불쑥불쑥
나타났다. 나머지 라이더가 준비를 끝내고 나온 것이다.
아무리 제론이라도 이번에는 그쪽으로 달려갈 수 없었다. 6 기의 기간트가 포위를 한 상태였다. 그들을 제치고
달려가려면 못 할 건 없었지만 그렇게 해 봐야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다.
아차 하는 순간 26 기나 되는 기간트에 둘러싸일 수 있기에 차라리 지금 눈앞에 있는 6 기의 기간트부터 제압하는
것이 나았다.
붉은 실바가 검을 뽑았다. 제론은 기묘한 일체감을 느끼며 검을 한 차례 휘둘렀다.
부우웅!
검이 일으킨 바람이 바닥을 확 긁으며 깊은 고랑을 만들었다. 엄청난 광경이었지만 그걸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붉은 실바가 땅을 박차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검을 내리그었다.
꽈앙!
검격이 어찌나 빠르고 갑작스러웠는지 앞에 서 있던 기간트는 그것을 미처 막지 못하고 그대로 어깨를 허용했다.
콰드드득!
어깨를 내리친 검이 그대로 몸통을 가르며 비스듬하게 아래로 몸을 갈라 버렸다.
완전히 잘라 내지는 못했지만 조종석과 마나코어는 그 일격에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다.
그 어마어마한 광경에 다들 경악해서 몸이 굳어 버렸다. 세상에 어떻게 단 일격에 기간트를 갈라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붉은 실바가 발을 들어 기간트를 휙 밀었다. 기간트가 쓰러지며 검이 뽑혔다. 그와 동시에 붉은 실바가 몸을
돌리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철컹!
옆에 있던 기간트의 목이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붉은 실바가 빙글 회전함과 동시에 목 잘린 기간트에게 한 발
다가갔다. 그리고 발차기를 했다.
꽈앙!
가슴이 움푹 파이며 기간트가 휙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쿠당탕!
순식간에 2 기의 기간트를 처리한 붉은 실바가 다음 먹잇감을 향해 달려들었다.
남은 기간트의 수는 4 기. 하지만 6 기가 포위했어도 어쩌지 못한 붉은 실바를 그들이 당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쩡! 쩡! 쩡! 꽈앙!
붉은 실바의 검이 4 기의 기간트를 몰아쳤다. 슈린 성에 남은 기간트는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크라테르였다.
크라테르가 아닌 하나는 베르였다.
당연히 붉은 실바를 상대하는 4 기의 기간트도 크라테르였다. 붉은 실바는 베르의 마나코어를 가져다 개조한
기간트였다. 세나가 아니었다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베르의 마나코어를 가져온 것도 모자라, 그 마나코어의 테페룸을 특별한 방법을 통해 가공해 출력은
물론이고 성능을 크게 개선한 기간트였다.
베르의 출력이 2.8 이었고, 붉은 실바의 출력은 3.0 에 가까웠다. 더구나 모든 부분이 개선되어 실제로 비교하면
에스타스보다도 뛰어났다.
그런 기간트를 탄 제론을 어떻게 크라테르 4 기로 막을 수 있겠는가. 그냥 실바를 탄 제론이라 하더라도 막기
어려울 텐데 말이다.
꽈과광!
몇 번 검을 휘두르는가 싶더니 금세 4 기의 크라테르가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사이 남은 20 기의 기간트가 몰려들었다.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베르였다. 물론 붉은 실바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콰우우!
베르의 검이 붉은 실바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돌진하는 힘을 이용해 검을 내지른 것이다. 기간트의 무게를
이용해 흔히 쓰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진짜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빈틈이 많아지지 때문이다.
붉은 실바가 가볍게 옆으로 몸을 비틀며 허리를 살짝 뒤로 꺾었다. 인간이나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붉은
실바의 몸이 있던 자리에 베르의 검이 거칠게 지나갔다.
꽈득!
붉은 실바의 손이 베르의 팔뚝을 꽉 쥐었다. 그리고 검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팔을 휙 당겼다. 그러면서 뒤로
한 걸음 움직여 균형을 잡았다.
꽈과과광!
베르가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손에 쥐었던 검은 놓쳐서 멀리 떨어져 버렸다. 균형을 잃으며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해 나동그라진 것이다.
크라테르와 베르의 차이만큼 다른 기간트와 베르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덕분에 붉은 실바는 다른 기간트를
신경 쓰지 않고 벽에 처박힌 베르에게 달려갔다.
쿵쿵쿵쿵! 꽈앙!
빠르게 달려가다가 바닥을 박찬 붉은 실바가 높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온 체중을 담아 쓰러진 베르의 가슴을
두 발로 찍어 뭉갰다.
베르가 한 차례 몸을 덜컥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가슴에 받은 충격 중 상당 부분이 라이더에게 전달되어
조종석에서 정신을 잃은 것이다.
베르의 훌륭한 충격 흡수 시스템 덕분에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당분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물론 붉은 실바는 후환을 남겨 두지 않았다.
콰득!
붉은 실바의 검이 순식간에 베르의 가슴을 꿰뚫었다.
베르를 처리한 붉은 실바가 몸을 돌렸다. 19 기의 크라테르는 아직도 달려오고 있었다. 붉은 실바는 그들을
가만히 서서 기다리지 않고 마주 달려갔다.
쿵쿵쿵쿵쿵!
이렇게 서로 마주 달리는 상황은 제론이 무수히 많이 겪은 일 중 하나였다. 항상 선봉에서 달렸으니 매 전투마다
겪어 왔다.
그리고 이런 경우 점프가 가능한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더구나 제론은 점프를 한 상황에서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했기에 웬만해선 막기가 어려웠다.
달리며 허공에 떠올라 발차기로 가슴을 때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가만히 서서 검을 올려치는 방식으로 대응을
해도 보통 허공에서 검을 옆으로 쳐 내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균형을 잃어 오히려 피해가 커졌다.
하지만 그나마도 제론을 여러 번 겪어 대응책을 세운 뒤 엄청난 훈련을 쌓아야 가능한 방법이었다. 보통 처음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 누구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쿵쿵쿵쿵! 꽈앙!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코앞에서 키보다 높게 점프를 해 버리니, 크라테르의 라이더 입장에서는 붉은
실바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기간트의 한계와 맞물려 훨씬 더 큰 효과를 만들어 냈다.
붉은 실바는 달리는 속도까지 감안해 마주 달려오는 크라테르들의 중간쯤에 착지가 가능하도록 점프를 했다.
꽈과과과광!
5 기의 크라테르가 나동그라졌다. 그러면서 주변 동료와 부딪쳐 서로 뒤엉켰다.
발로 상대를 찬 힘을 이용해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붉은 실바는 아주 차분하게 쓰러진 크라테르들의 가슴을 검으로
푹푹 찍었다.
콰득! 콰득! 콰득! 콰득!
순식간에 4 기의 기간트가 늘어졌다. 그러는 사이 다른 기간트들이 허우적거리며 황급히 일어났다. 물론 붉은
실바는 그걸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쿵쿵쿵!
콰득! 콰득! 콰득!
제대로 몸을 가누기 전에 달려들어서 검으로 찌르니 속절없이 또 당했다.
그렇게 3 기의 기간트가 추가로 무너졌다.
붉은 실바는 간신히 균형을 잡아 막 자세를 갖춘 5 기의 기간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쿵쿵쿵쿵!
붉은 실바가 달려들자 다들 당황했는데, 그중 4 기가 간신히 반응했다. 물론 붉은 실바는 반응하지 못한 나머지
기간트의 가슴을 검으로 꿰뚫어 버렸다.
콰득!
그렇게 총 8 기의 기간트가 쓰러졌다. 이제 남은 기간트는 고작 11 기에 불과했다. 처음 30 기였던 걸 생각하면
너무나 처참한 결과였다.
쿵쿵쿵.
11 기의 기간트는 달리던 속도를 급격히 줄이려 애썼지만 바로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간신히 멈춰 방향을 바꿨다.
붉은 실바는 그들을 가만히 보다가 유유히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쿵쿵쿵쿵쿵!
다들 당황했다. 이렇게 분탕질을 친 적을 못 잡으면 대체 그게 무슨 망신인가. 그것도 적은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실바 아닌가.
“잡아라!”
쿵쿵쿵쿵쿵!
11 기의 크라테르가 서둘러 붉은 실바를 뒤쫓았다. 하지마 붉은 실바는 크라테르보다 훨씬 빨랐다.
꽈아앙!
붉은 실바가 바닥을 박차고 점프를 했다. 어마어마한 점프력이었다. 그렇게 단숨에 성벽을 넘었다.
성벽은 기간트의 키보다 높았다. 그걸 단숨에 넘은 것이다. 당연히 쫓아가던 크라테르들은 그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조건 붉은 실바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일단 성벽을 부숴!”

Chapter 5 습격 (3)

가장 앞에서 달린 크라테르가 먼저 어깨로 성벽을 박았다.


꽈아아아앙!
성벽에 금이 쩍쩍 갔다. 어깨로 들이받은 크라테르가 옆으로 피하자 가장 뒤에서 달려온 크라테르가 재차 어깨로
부딪쳤다.
꽈아앙! 꽈르르릉!
성벽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마법진까지 깔아서 방어력을 높인 성벽이었지만 기간트가 마음먹고 달려들었으니
무너지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무너진 성벽을 통해 크라테르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성벽을 부수고 쫓아가는 데 급급해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무너진 성벽 뒤에 붉은 실바가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너진 성벽은 크라테르 한 기가 몸을 옆으로 돌려야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처음 빠져나간 크라테르는 붉은 실바를 등지고 있었다. 당연히 붉은 실바를 보지 못했다. 붉은 실바는 크라테르의
등이 보이자마자 검으로 푹 찍었다.
콰득!
조종석이 꿰뚫리며 라이더가 절명했다. 붉은 실바는 팔을 잡아당겨 크라테르를 빼냈다. 크라테르가 완전히 나오자
잡아당겨 다른 크라테르가 보지 못하게 했다.
쿠궁!
붉은 실바 뒤로 크라테르 한 기가 널브러졌다. 소음이 제법 났지만 다른 크라테르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가려져
별다른 티가 나지 않았다.
두 번째 크라테르도 등을 보이며 빠져나왔다. 이번에도 아주 손쉽게 크라테르를 처리할 수 있었다.
세 번째가 되어서야 앞이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보이자마자 조종석이 꿰뚫리니 동료에게
뭔가를 전할 틈도 없었다.
그렇게 3 기의 크라테르를 처리하고 나니, 그제야 성벽 안쪽에 있던 자들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3 기나
빠져나갔는데 틈을 통해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들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벽을 더 부숴!”
크라테르 중 하나가 외치자 나머지 8 기의 크라테르가 달려들어 벽을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꽝! 꽝! 꽝! 꽝! 꽝!
벽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무너졌다. 8 기의 기간트가 나란히 서서 벽을 부수니 무너진 부분이 상당히
넓었다.
그렇게 무너진 벽 너머로 바닥에 널브러진 3 기의 크라테르가 보였다. 그리고 벽이 무너지며 일어난 자욱한
흙먼지를 검이 쑤시고 들어왔다.
콰득!
가장 오른쪽에 있던 크라테르의 조종석이 꿰뚫렸다.
쿠웅!
쓰러지는 크라테르 뒤로 돌아서서 달려가는 붉은 실바의 모습이 보였다.
“쫓아!”
이제 남은 크라테르는 고작 7 기에 불과했다. 사실 제론이 마음먹으면 그들을 이기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제론의 목표는 슈린 성을 완전히 박살 내는 게 아니라 슈린 왕국을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아마 이대로 사라져
버리면 상당한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쿵쿵쿵쿵쿵!
붉은 실바는 엄청나게 빨랐다. 정비가 잘된 도시의 길을 따라 달려가니 더 빨랐다. 그렇게 실바가 바닥을 발로
찍을 때마다 도로에 깔아 둔 돌이 부서지며 튀었다. 군데군데 금이 가기도 했다.
그 길을 따라 7 기의 크라테르가 줄을 서서 달려갔다. 당연히 도로가 엉망으로 부서졌다.
그나마 길을 따라 달리니 건물이 부서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물론 일부 건물이 기간트가 휘두르는 팔꿈치에
걸려 조금씩 부서지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극히 드물었다.
부서지는 건 대부분 도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쫓는 크라테르와 도망치는 붉은 실바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이를 악물고 쫓았지만 그들의 실력과 크라테르의 성능으로는 도저히 붉은 실바를 쫓을 수 없었다.
이내 붉은 실바가 도시를 가르는 성벽에 도착했다. 크라테르들은 더 열심히 달렸다. 도시의 성벽은 슈린 성의
성벽보다 훨씬 높고 두꺼웠다. 이걸 뛰어넘는 건 불가능하니, 부술 수밖에 없었다.
성벽을 부수는 동안 따라잡아야만 했다. 그들은 진짜 심장이 터지도록 무리해서 달렸다. 어떻게든 따라잡아야만
했다.
다들 죽을힘을 다하면 붉은 실바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붉은 실바는 그들의 행동을 비웃기라도
하듯 손발을 성벽에 찍으며 기어 올라갔다.
다들 입을 쩍 벌렸다. 대체 기간트로 뭘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기간트로 성벽을
기어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손을 벽에 찍으며 무게를 지탱하긴 한다. 하지만 직각으로 서 있는 성벽을 타고 오르는 건 어떤 기간트
라이더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사람이 맨몸으로 오르는 것도 어려운데 그걸 기간트로 해내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한가.
크라테르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붉은 실바가 성벽 위에 올라간 뒤였다. 다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붉은 실바를
올려다봤다.
붉은 실바는 뒤돌아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뛰어내렸다.
쿠우우웅!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지축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기간트가 성벽에서 뛰어내려서 낸 소리이니 오죽 크겠는가.
크라테르의 라이더들은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의 심장을 바닥에 내팽개치는 소리 같아서 표정이 썩어 들어 갔다.
쿵쿵쿵쿵쿵!
기간트 달리는 소리가 성벽을 넘어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이내 아예 소리가 사라졌다.
크라테르들이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돌아섰다. 그리고 슈린 성에 벌어진 참상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로 뼈아팠다.
쿵! 쿵! 쿵!
7 기의 크라테르가 힘없이 걸어서 성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성에 도착하자마자 또 한 번 굳어 버렸다.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검을 든 왕족들이 마구 날뛰고 있었다. 사방이 피로 낭자했다. 병사와 기사들이
달려들었지만 상대가 왕족이다 보니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미쳐 날뛰며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힌 왕족들이 결국 하나둘 사로잡혔다. 그렇게 사로잡힌 왕족들은 하나같이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기사의 검을 빼앗아 자결해 버렸다.
그야말로 황당한 사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밝혀진 사실은 더더욱 그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성에 있던 주요 귀족들이 무더기로 죽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슈린 왕국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Chapter 6 슈린 가문의 몰락 (1)

“이 사태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심각한 표정을 지은 귀족의 말에 슈린 국왕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금은 짜증이나 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무너진 성부터 복구하는 게 순서 같군.”
“무너진 성을 복구하잔 말씀입니까? 그보다는 포로를 돌려받는 게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단 인재가 너무 없습니다. 무너진 성을 복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귀족 확보가
되어야 모든 일이 원활하게 돌아갈 것입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다른 귀족들조차 모두 반대 의견을 냈다. 슈린 국왕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사실 슈린 왕국은 아직 제대로 왕족에 대한 기강이 서 있지 않았다. 그나마 슈린 가문의 힘이 막강할 때는 다들
고개를 숙였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번 학살 사태에 대한 책임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귀족들의 말투에 슈린 국왕의 어금니가 부서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이보다 훨씬 극존칭을
사용했다. 한데 이젠 보통 귀족이 공작을 대하듯 하고 있지 않은가.
“뭘 명확히 하자는 건가?”
“피해를 입은 가문에 제대로 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왕궁에 대한 불신이
팽배할 것입니다.”
“끄응.”
슈린 국왕은 지금 말을 꺼낸 귀족의 입을 뜯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런 식으로
분노를 표출할 때도 아니고, 그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왕국의 재정이 거기까지 감당하기엔 아직 힘드니 조금 시간을 두는 것이 좋겠네.”
“왕국의 재정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 일은 한 가문의 일인데 말입니다.”
말인즉슨, 슈린 가문의 개인 재산으로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슈린 국왕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하지만 그 말도
틀리지 않기에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말을 꺼낸 귀족을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후우, 그건 조금 더 시간을 두자고 말하지 않았나. 슈린 가문에서 알아서 처리할 테니 더 이상 말하지 말게.”
그제야 말을 꺼낸 귀족이 한 발 물러났다. 슈린 가문에서 처리한다면 굳이 말을 길게 꺼낼 이유는 없었다. 사실
어차피 왕과 귀족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
‘어쩌면 슈린 왕국은 이쯤에서 끝일지도 모르지.’
모두가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다. 슈린 왕국이 끝까지 살아남아 강국이 된다면 그들에게 떨어지는 권력과 금력이
어마어마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 결코 쉽지 않을 듯했다. 대부분의 귀족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슈린 가문은 이번 일로 인해서 어마어마한 타격을 받았다. 사실 말이 왕궁이지 이 성도 슈린 영지의 성 아닌가.
성을 증축하려는 계획까지 짜 놨는데, 이대로라면 부수고 새로 지어야만 했다.
슈린 국왕은 침침해진 눈을 주무르며 손을 내저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너무 피곤하군. 내일 다시 얘기를 마무리하도록.”
슈린 국왕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안 됩니다! 사안이 급합니다!”
모든 귀족들이 일어나 외쳤지만 슈린 국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정말로 짜증이 났다.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 귀족이 어찌 하나도 없단 말인가.
슈린 국왕은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 조금 전까지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는데, 생각해 보니 살아남은 귀족 중에
친국왕파는 한 명도 없었다.
즉, 슈린 가문에 충성하던 귀족이 모조리 죽은 것이다.
‘어쩐지 이상하게 고립된 느낌이 들더니……!’
친국왕파가 모조리 사라졌으니, 남은 건 반국왕파와 중립파뿐이었다. 하지만 중립을 지키던 귀족들도 슈린 가문의
힘이 약화되면 반국왕파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설마 노린 건가?”
만일 노리고 한 짓이라면 정말로 무시무시했다. 이런 상황을 일부러 만들었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대체 왜?’
그냥 다 죽여 버렸으면 끝 아닌가. 슈린 왕국의 주요 귀족이 몽땅 사라지면 왕국 자체가 분열하면서 사라져 버릴
텐데 말이다.
슈린 국왕은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때까지 계속 그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대체 그
붉은 실바는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가만, 붉은 실바라면 그놈인데…….”
슈린 국왕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붉은 실바하면 딱 떠오르는 사람이 제론이었다. 한데 제론은 에어스트
왕국의 국왕 아닌가.
대체 어떤 국왕이 이런 위험한 습격에 직접 몸을 던진단 말인가.
그렇게 슈린 국왕이 고민에 잠겨 있을 때, 집무실 바닥이 시커멓게 물들더니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불쑥
솟아났다. 오랫동안 슈린 가문을 위해 일하는 미스트 드래곤의 수장이었다.
“왔느냐? 알아보라고 한 것은 어찌 되었느냐?”
“무사하십니다.”
슈린 국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왕궁 습격으로 인해 왕족이 싹 죽어 버렸다. 이제 남은 왕족은
에어스트 왕국에 사로잡힌 파인트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스트 드래곤에게 명령을 내렸다. 파인트의 생사를 정확히 알아 오라고 말이다.
“살아남은 귀족도 많습니다. 분위기를 보니 조만간 몸값을 요구할 것 같습니다.”
슈린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줘야지. 어쩔 수 없지. 자기 자식을 구하겠다는데 돈을 아끼지는 않을 테니까.”
슈린 국왕은 다른 귀족들로부터 돈을 내게 만들 생각이었다. 일단 그 많은 귀족의 몸값을 왕궁에서 부담할 수는
없었다.
“조만간 에어스트 왕국에서 연락이 오겠군. 다른 소식은 없느냐?”
“없습니다.”
사실 그 정도 정보만 해도 얻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에어스트 왕국에서의 활동은 어려운 점이
많았다. 정보를 수집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그 외의 다른 활동은 아예 시도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사실 그동안 상당히 많은 명령을 받았다. 소문 유포나 암살 같은 명령이었는데, 어느 하나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알았다. 가 봐라. 에어스트 왕국 쪽 상황을 잘 주시하도록.”
“알겠습니다.”
미스트 드래곤의 수장이 바닥으로 스며들듯 사라지자, 슈린 국왕은 몰려오는 피로를 떨치기 위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Chapter 6 슈린 가문의 몰락 (2)

그렇게 잠시 눈을 감고 피로를 풀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폐하. 체크 남작이 찾아왔습니다.”
문밖에서 시종장이 보고하자, 슈린 국왕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들라 하라.”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체크 남작이 들어왔다. 실무를 담당하는 귀족이었는데, 표정을 보니 뭔가 다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가?”
“에어스트 왕국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슈린 국왕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체크 남작을 똑바로 쳐다봤다.
“정말인가?”
“예.”
“어떻게 됐나?”
“병사 3 만 명에 대한 제안을 해 왔습니다.”
슈린 국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병사라니. 지금 왜 병사 얘기가 나온단 말인가.
물론 병사도 중요하다. 그들은 왕국의 중요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귀족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병사였다.
“병사?”
“예. 병사 한 명당 100 골드의 몸값을 요구해 왔습니다.”
“허! 어이가 없군.”
무려 3 만 명이나 된다. 한데 몸값으로 100 골드를 요구한다면 300 만 골드나 달라는 뜻 아닌가.
“지금 우리보고 300 만 골드를 달라는 뜻인가?”
솔직히 웬만한 왕국이라면 300 만 골드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슈린 왕국은 재정이 말라비틀어진
상황이었다.
“귀족에 대한 얘기는 없었나?”
“일단 병사 문제부터 마무리한 다음에 얘기하자고 우기고 있습니다.”
“허어, 이것 참…….”
난감했다. 마음 같아서는 병사를 싹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마음 내키는 대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후우, 또 귀족 회의를 소집해야겠군.”
슈린 국왕의 혼잣말에 체크 남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뭔가?”
“귀족들의 의견도 미리 듣고 왔습니다.”
슈린 국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귀족의 의견을 미리 들었다니, 이 무슨 소리인가.
“그게 무슨 말이지? 설마 귀족들에게 먼저 보고를 했다는 뜻인가?”
“회의실로 갔는데, 귀족들만 모여 있었습니다.”
그제야 슈린 국왕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은 좋지 않았다. 자신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점점
피부로 느껴졌다.
“그래서 뭐라고들 하던가?”
“다들 병사를 포기하자는 쪽이었습니다.”
슈린 국왕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그런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귀족 포로에 대한 협상을 서두르려는 모양입니다.”
“하긴.”
자칫 병사에 돈을 너무 써서 귀족 포로에 대한 몸값이 모자랄까 봐 걱정을 한 것이다. 그만큼 현재 슈린 왕국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좋아. 그럼 병사는 포기하는 걸로 하지.”
“포기하시는 것입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귀족에 대한 협상을 서둘러야겠어.”
“알겠습니다.”
체크 남작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포로가 된 병사들도 왕국의 중요한 재원이었다. 한데 그걸 모두 포기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앞으로 3 만 명의 병사를 다시 키우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들어가겠는가.
‘이 왕국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체크 남작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슈린 국왕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어쨌든 실무를 처리하는
것은 체크 남작이었다. 병사를 포기한다고 에어스트 왕국에 알리고 귀족에 대한 협상을 시작해야만 했다.

☆ ☆ ☆

에어스트 왕국에 포로로 잡힌 슈린 왕국의 3 만 병사는 드넓은 공터에 모여 있었다. 아직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이었기에 조금 쌀쌀하긴 해도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공터에 질서정연하게 세워진 천막에서 지내야 했고, 밥도 알아서 지어 먹어야 했다. 물론 식재료는 충분히
공급되었다.
솔직히 그들은 자국에서도 이 정도로 밥을 잘 챙겨 먹지 못했다. 마음만 편하다면 계속 이렇게 포로 생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은 전쟁 중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당장 에어스트 왕국의 병사나 기사가 와서 죽여도 대꾸조차 못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물론 에어스트 왕국의
병사나 기사가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무려 3 만 명이나 되다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그만큼 불안했던 것이다.
그렇게 포로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을 때, 기간트 몇 기가 공터로 다가왔다.
쿵! 쿵! 쿵! 쿵!
포로들의 눈이 금세 불안감으로 물들었다. 고작 4 기의 기간트였지만 그것이 마음먹고 움직이면 3 만 명쯤은
순식간에 곤죽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대부분 몸이 굳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기간트를 대동하고 나타난 사람은 에어스트 왕국의 관리였다. 상당히 젊은 관리였는데, 보통의 포로를 대하는
관리와는 표정이나 눈초리부터가 달랐다.
“천인장 이상만 모여 주십시오.”
관리의 말투는 정중했다. 일반적으로 포로를 다룰 때는 반말을 하고 폭언을 퍼붓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데 이
관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대우를 받으니 더 불안해졌다.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측할 수가 없으니 당연했다.
30 명의 천인장이 주춤주춤 앞으로 나섰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존심도
있었고, 또 도망가 봐야 결국 밝혀지고 잡힐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병사 1 천 명을 호령하던 천인장이었다.
“이제부터 슈린 왕국과의 협상 결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관리의 말에 천인장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협상이 잘못되면 다 죽을 수도 있었다. 더 심한 경우는 3 만
병사가 몽땅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아니,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전쟁이라는 건 원래 그렇게 참혹한 법이었다.
“슈린 왕국에서는 여러분에 대한 협상을 포기했습니다.”
관리의 말에 천인장들이 일제히 눈을 부릅떴다.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평민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쓰레기 버리듯 내팽개치다니.
“그, 그게 정말입니까? 우리 영주님이라도 어떻게 해 주셨을 것 같은데, 다른 소식은 없습니까?”
천인장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충격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귀족이 동의했다고 합니다.”
“대, 대체 저희 몸값을 얼마나 책정했기에 몽땅 포기한단 말입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몸값 책정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협상 자체를 포기했으니 솔직히 의미도
없습니다.”
관리의 냉정한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분노로 몸을 떨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자신들이 처할 운명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30 명이나 되는 천인장이 몸을 덜덜 떨고 있으니 그 여파가 뒤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다른 병사들에게
고스란히 미쳤다.
3 만이나 되는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폭동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관리를 슬쩍 뒤를 쳐다봤다. 이래서 기간트를 4 기나 대동한 것이었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4 기의 기간트가 차례대로 한 번씩 발을 굴렀다. 어찌나 강하게 굴렀는지 땅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제야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병사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침묵이 감돌자 관리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 그리고 최대한 정중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저희 페하께서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관리의 말에 천인장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그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조금이라도 잘못 들을까 봐 귀를
쫑긋 세웠다. 직감적으로 지금 관리가 하는 말에 자신들이 살아날 길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에어스트 왕국에는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우리 왕국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말을 들으니 대체 왜 관리가 이렇게 정중했는지도 이해가 갔다. 어차피 자국민이
될 사람이니 함부로 대해서 좋을 게 없지 않겠는가.
“저,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관리가 씨익 웃었다.
“그걸 이제부터 저와 잘 논의해 나가면 됩니다. 참고로 여러분의 가족들도 모두 받아들일 것입니다.”
“가족까지 말입니까? 하지만 우리 가족은…….”
병사가 3 만 명이나 있었다. 가족이 없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딸린 식구가 많았다. 아마 그들까지 다
합하면 20 만 명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을 대체 무슨 수로 여기까지 데려온단 말인가. 슈린 왕국이 그 요청을 제대로 들어줄 리 만무했다.
아마 그걸 빌미로 엄청난 돈을 뜯어내려고 할 것이다.
“귀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문득 천인장 하나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 질문에 다들 촉각을 곤두세웠다. 솔직히 어떤 답이 돌아올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꼭 확인하고 싶었다.
“한창 협상이 진행 중입니다. 일단 슈린 왕국에서는 남작의 경우 한 명당 1 만 5 천 골드를 제안했습니다.”
다들 이를 부득 갈았다. 고작 한 명을 구하는 데 1 만 5 천 골드를 제시하면서 자신들에게는 단 한 푼도 쓰지
않는 모습을 보니 역겹기 그지없었다.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천인장 중 하나가 말했다. 관리는 당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부디 좋은 결정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다른 분들의 설득도 함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관리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물러갔다.
쿵! 쿵! 쿵! 쿵!
관리와 함께 왔던 기간트가 멀어져 갔다. 남은 병사들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길지 않았다. 이내 각 천인장들이 자신이 이끄는 병사들을 한데 모았다.
30 명의 천인장은 다들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각자 병사를 설득했다.
사실 설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가족을 다 데려와 준다고 했다. 또한 에어스트 왕국의 백성이 되지 않으면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선택의 여지가 있겠는가. 병사들도 모두 그것을 이해했기에 다들 천인장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사실 가족 문제가 가장 큰 결정 요인이 되었다.
전쟁터에 나서면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바로 가족이었다. 한데 자신이 항복해서 다른 왕국에 망명해 버리면
가족과 생이별하게 되지 않겠는가.
한데 에어스트 왕국은 그런 가족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그러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에어스트 왕국이나 슈린 왕국이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나라였다. 그러니 솔직히 왕국에 대한
애착도 별로 없었다. 그냥 같은 나라에서 다른 영지로 이주하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결정은 빨랐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관리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기간트조차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 왔다.
천인장들의 눈빛이 살짝 깊어졌다. 이건 일종의 시험일 수도, 혹은 신뢰를 보여 주려는 행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결코 관리에게 해코지할 생각이 없었다. 관리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
앞으로 이곳에서 정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슬슬 결정을 내리신 것 같아서 왔습니다.”
관리의 말에 천인장 하나가 대표로 나섰다.
“에어스트 왕국에 남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관리의 표정이 환해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제가 수속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관리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동료 관리들을 부르러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관리의 발걸음을 천인장 하나가
막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관리가 다시 돌아서서 천인장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천인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가족은…….”
“아! 그 문제라면 염려 마십시오. 벌써 우리 왕국의 비밀 요원들이 움직였으니까요. 아마 지금쯤 무사히
구출해서 이곳으로 이동 중일 것입니다.”
천인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동 중이라고요? 지금 말입니까?”
“가까운 곳에 있는 분들도 상당수 있더군요. 그런 분들의 경우 벌써 우리 왕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조만간
명단을 드릴 테니 확인해 보십시오. 아마 수속만 끝나면 바로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천인장이 입을 떡 벌렸다.
“그, 그럼 벌써…….”
“그 부분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들 허락하실 거라고 확신하고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이렇게 되니 오히려 더 좋았다. 이미 작전을 성공해 이동 중이라니, 부디 이동
중에 별일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슈린 왕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분들을 모아야 하는지라 먼 곳에 있는 분들은 생각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 점, 다른 분들께 잘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종일관 정중한 관리의 말투와 태도에 천인장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제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지도 않았다. 아직 완전히 에어스트 왕국을
믿을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수십 명의 관리가 몰려왔다. 그들은 병사들을 하나하나 만나 서류를 작성했다. 에어스트 왕국의 백성이
되기 위해선 본인에 대한 아주 정확한 기록이 필요했다.
그렇게 3 만 명의 병사가 차츰차츰 에어스트 왕국 소속으로 변해 갔다.

Chapter 6 슈린 가문의 몰락 (3)

“병사의 포섭이 끝났다고?”


“그렇습니다.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수고했군. 프로인트는 뭘 하고 있지?”
“집에서 소일하면서 무기력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쪽으로 보내. 병사를 완전히 우리 왕국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시켜.”
“프로인트를 말입니까?”
엔트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 끌어들이는 데에는 프로인트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었다.
프로인트는 분명히 그들을 에어스트 왕국의 진정한 백성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도 짧은 시간 안에 말이다.
“앞으로 그런 문제는 전부 프로인트에게 맡겨. 적당한 자리를 하나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제론의 말에 엔트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적당한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마 에어스트 왕국은 향후 늘어나는 영토를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인트로
인해서 말이다.
“인원 지원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해 줘. 투자한 이상으로 돌려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론의 분위기가 살짝 바뀌었다. 엔트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긴장감을 조금 끌어 올렸다.
“귀족에 대한 협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일단 그쪽에서 남작에 대한 몸값을 1 만 5 천 골드로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3 만 골드를 질러 놓은 상황입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3 만 골드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절충되어 2 만 골드 정도만 받아도
충분했다.
물론 배상금은 따로 받아 낼 작정이었다. 아마 이번 협상이 끝나고 나면 슈린 왕국은 탈탈 털려서 당분간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살아남은 기간트 라이더는 몇이나 있나?”
“일단 157 명이 살아남았는데, 그중 64 명이 남작 이상의 귀족입니다.”
“그럼 93 명이 기사로군. 그들의 몸값은 어떻게 책정되었나?”
“슈린 왕국 쪽에서 언급이 없기에 일괄 5 천 골드로 불렀습니다. 그쪽에서 수락했습니다.”
“잘됐군. 책정이 끝나면 시간 끌지 말고 바로 보내 버리도록.”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어차피 기사의 경우는 에어스트 왕국으로 회유하기도 쉽지 않았다. 굳이 회유할 필요 없이 현재 보유한 사람들
중에서 라이더를 모집해 훈련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지금도 상당히 많은 수의 예비 라이더가 피나는 훈련을 받고 있었다. 아마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라이더의
숫자로는 그 어떤 왕국에도 뒤지지 않게 될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귀족을 사로잡았기에 몸값만 해도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포로 중에는 파인트가 있었다.
“파인트는 어쩌고 있지?”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있습니다.”
“몸값은 얼마로 책정했나?”
“일단 100 만 골드로 책정했습니다. 하지만 다 받을 수 있을지는…….”
“적당히 조절해서 넘겨.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파인트는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가문이 어떻게 몰락하는지 똑똑히 지켜봐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제론은 모든 보고가 끝나자 손을 내저었다. 엔트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제론은 홀로 집무실에 남아
생각에 잠겼다.
이제 슈린 가문에 대한 복수가 끝나 간다.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은 건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아마 슈린 왕국은
알아서 분열할 것이다.

☆ ☆ ☆

슈린 국왕은 힘없이 앉아 있었다. 솔직히 만사가 다 귀찮았다.


“폐하. 귀족들이 돌아왔습니다.”
체크 남작의 말에 슈린 국왕이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그렇군. 가 봐야겠지?”
“그, 그야…….”
체크 남작은 당황했다. 당연히 가 봐야 한다. 전쟁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어 고생하다가 돌아온 귀족들을 맞이하지
않으면 대체 어쩌잔 말인가.
“그래. 그래야겠지. 가 보지.”
슈린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
돌아온 귀족들은 각자의 가문 사람들과 반가이 해후하고 있었다. 일부 귀족은 레늄 왕국 출신이었기에 레늄
왕국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그들의 몸값은 그쪽에서 냈다.
슈린 국왕은 거의 파티 분위기나 다름없는 광경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전쟁에 지고
돌아와서 저리 당당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가 났다.
게다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아직도 전쟁 배상금 문제가 남아 있었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슈린 국왕 앞으로 파인트가 다가왔다. 죽을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걸
보니 화가 더 치밀었다.
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무사하니 됐다. 들어가라.”
“예.”
파인트는 간신히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할 말이 없었다.
축 처진 어깨로 걸어가는 파인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슈린 국왕이 나직이 혀를 찼다.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은 핏줄이 파인트뿐이었으니까.
“체크 남작.”
“예. 폐하.”
“전쟁 배상금이 얼마라고?”
“아직 협의 중입니다. 일단 에어스트 왕국에서는 3 억 골드를 요구했습니다.”
슈린 국왕이 헛웃음을 지었다.
“허, 어이가 없군. 3 억 골드?”
“물론 반대했습니다. 계속 협의 중이니 결국 합리적인 선에서 배상금이 결정될 것입니다.”
“레늄 왕국은 어쩌고 있나?”
“적극적으로 협상에 응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어차피 배상금은 절반씩 부담해야 한다.
그리고 레늄 왕국은 슈린 왕국에 절대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슈린 왕국이 지원해 준 200 기의 기간트 때문이었다.
물론 슈린 왕국이 지원했다기보다는 슈린 국왕이 개인적으로 지원한 거나 다름없지만 말이다.
“4 천만 골드 선에서 해결해 보게.”
“예?”
체크 남작의 눈이 커다래졌다. 4 천만 골드라니. 그건 배상금을 너무 후려친 가격이었다. 상대가 3 억 골드를
요구했다면 최소한 1 억 골드까지는 생각을 해야만 한다.
솔직히 체크 남작이 생각하기에도 에어스트 왕국은 충분히 3 억 골드를 요구할 만했다. 막말로 에어스트 왕국이
그냥 힘으로 밀고 들어와도 슈린 왕국은 변변한 대항을 할 수도 없었다.
“1 억 골드까지 가격이 올라가면 10 년에 걸쳐 나눠 내는 방향으로 결정하게.”
“알겠습니다.”
그 정도면 어떻게든 해 볼 만했다. 체크 남작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해후의 기쁨을 나누는 귀족들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다.

☆ ☆ ☆

“네이드 후작령에 인접한 5 개 영지가 에어스트 왕국에 넘어갔습니다.”


회의실에 침통함이 감돌았다. 전쟁은 끝났다. 배상금도 물기로 했다. 한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네이드 후작령에 인접한 영지가 비록 큰 영지는 아니었지만 이건 상징적인 문제였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에어스트
왕국에 투항했다.
“영주의 압송을 요청해야합니다.”
“과연 그 요청을 에어스트 왕국이 받아들일 것 같나?”
“일단 요청은 해야 합니다.”
귀족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슈린 국왕의 말에 조금이라도 편들어 주거나 찬성을 하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슈린 국왕은 점점 지쳐 갔다.
“다른 영주들도 동요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귀족이 말했다. 슈린 국왕은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의 눈에 슈린 왕국이 무너지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한 발 떨어져서 보니 각 귀족들 간에도 알력 다툼이 장난 아니었다. 마구 분열 중이었다.
슈린 국왕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그 옆에서 회의를 지켜보던 파인트도 고개를 푹 숙인 채 차마 들지
못했다.

☆ ☆ ☆

슈린 왕국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레늄 왕국도 상당한 위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슈린 왕국에 도움을 요청한 일은 어찌 되었느냐?”
레늄 국왕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슈린 왕국이 여기서 더 뭘 도와줄 수 있겠는가.
“적은, 적은 어디까지 내려왔느냐!”
“국경을 넘어 곧장 수도로 진격 중이라고 합니다.”
레늄 국왕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고작 200 기의 기간트로 미테 왕국의 진격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미테 왕국은 무려 500 기의 기간트를 동원해 레늄 왕국을 도모했다.
국경에서 미테 왕국을 견제하던 200 기의 기간트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후퇴해 버렸다. 아니, 도망쳐 버렸다.
원래 이런 상황이 오면 바로 도망치도록 미리 훈련을 받아 왔다.
그들은 슈린 왕국에서 지원해 준 기간트였지만, 실제로는 슈린 왕국의 배후에서 건네준 기간트였다. 당연히 슈린
왕국이나 레늄 왕국의 안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슈린 왕국와 레늄 왕국이 끝났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 이곳에서 공작을 벌이는 의미가 없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충분했다. 당분간 이곳은 분열로 인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걸로 그들의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그러니 레늄 왕국은 완전히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미테 왕국의 기간트들이 마치 자신의 왕국을 활보하는
것처럼 당당하게 밀고 내려왔다.
“결국 에어스트 왕국 때문에 무너지는구나.”
만일 에어스트 왕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속이
쓰리다 못해 아팠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결과적으로 레늄 왕국은 끝까지 버텨 냈다. 남아 있는 여력을 박박 긁어서 악착같이 대항한 것이다.
미테 왕국도 굳이 무리를 할 생각까진 없었기에 처음 목표로 한 것들을 얻고는 한 발 물러났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레늄 왕국은 거의 무너진 거나 다름없었다. 일단 전쟁이 끝나자마자 내정에 온 힘을 기울이긴
했지만 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슈린 왕국은 안에서부터 스스로 무너져 갔다.

Chapter 7 타히티 (1)

“슈린 국왕이 자결했습니다.”


제론은 엔트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될 줄 알았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나니 너무나 허무했다.
“파인트는?”
“마찬가지로 자결했습니다.”
“그렇게 되었군.”
이 역시 허무했다. 어쨌든 이로써 복수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이제 남은 건 슈린 왕국을 삼키는 것뿐이로군.”
“10 년 동안 평화 협정을 체결했습니다만…….”
제론이 씨익 웃었다.
“그거야 배상금을 제때 잘 줬을 때의 얘기고. 일단 1 차 배상금을 언제 지불하기로 했지?”
현재 슈린 왕국의 귀족을 넘겨주면서 몸값은 다 받은 상태였다. 몸값과 포로를 교환했으니 당연했다. 그 돈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보름 후에 5 천만 골드를 받기로 했습니다.”
“과연 저들에게 5 천만 골드를 낼 여력이 남았을까?”
배상금은 최종적으로 1 억 5 천만 골드에 합의가 끝났다. 먼저 5 천만 골드를 지급하고, 향후 매년 1 천만 골드씩
지급하기로 했다.
“일단 슈린 가문을 탈탈 털어서 돈을 만들고 있는 모양이긴 합니다만…….”
슈린 가문은 완전히 망해 버렸다. 가문에 남은 자가 슈린 국왕와 파인트뿐이었는데, 그 두 사람이 자결했으니
가문이 텅텅 빈 상황이었다.
당연히 슈린 가문의 재산이 붕 뜰 수밖에 없었다. 슈린 왕국에 남은 귀족들은 그 재산을 처분해 배상금을 만들
생각이었다.
“지금쯤 당황하고 있겠군.”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엔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현재 슈린 가문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 결과도 불을 보듯 훤히 알 수
있었다.

Chapter 7 타히티 (2)

슈린 가문은 빚더미에 앉아 있었다. 슈린 상단은 빚을 빼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었고, 나머지 자잘한 상단


역시 빚이 상단의 값어치보다 더 높았다.
남은 건 영지와 성을 비롯한 저택뿐이었는데, 그것으로는 슈린 가문이 진 빚을 채 절반도 갚지 못한다.
그러니 그걸 처분해서 5 천만 골드를 만들어 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각 가문이 갹출해서 5 천만 골드를
모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로 몸값을 내야 했고, 전쟁에 패하는 바람에 무수한 돈이
들어갔다. 또 당장 돈이 나올 구석도 없었다.
아마 기한 내에 5 천만 골드를 마련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빌리는
것뿐이었는데, 과연 누가 그들을 믿고 5 천만 골드라는 거금을 빌려 주겠는가.
“빌려 줄 만한 데는 디아만트 상단 정도로군. 지금 뭐 하고 있지?”
“슈린 왕국 내의 지부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제론이 빙긋 웃었다. 역시 클레였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다 예측하고 있는 것이다.
“슈린 왕국의 영토를 흡수하게 되면 가장 시급한 건 안정이야. 미리 준비해.”
“알겠습니다.”
사실 엔트는 이미 그에 대한 준비를 시작한 지 오래였다. 엔트도 상황이 이렇게 될 거라고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그래서 미리 그에 관한 준비를 했다.
다만 확신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도 피해가 없이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대비했다. 이제
확정이 되었으니 더 적극적인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아마 슈린 왕국이 넘어올 때쯤이면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어 순식간에 슈린 왕국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네이드 후작령에 인접한 5 개 영지는 벌써 흡수 작업이 끝났다.
기존의 귀족을 인정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들의 비리를 캐고 그걸 빌미로 싹 쳐내 버렸다. 결국 그
영지들은 자연스럽게 여타의 다른 에어스트 왕국과 마찬가지 상태가 되었다.
앞으로 병합하게 될 슈린 왕국의 모든 영토 역시 마찬가지 상태가 될 것이다.
“수도 건설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건물과 도로를 워낙 철저하게 짓고 있는지라 시간이 만만치 않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돈도 예상보다 훨씬 많이
들어갔습니다.”
“기간트를 동원하는데도 잘 안 되는 건가?”
“아시다시피 기간트가 필요한 일은 끝났습니다. 남은 일은 전적으로 인간의 노동력으로만 해결해야 합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저 한번 확인해 봤을 뿐이었다.
“이번에 받아들인 병사 3 만 명을 투입해.”
“예? 하지만 그들은 병사로 쓰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체력 훈련의 일환이야. 수도 건설도 빨라지고 체력 훈련도 되고 일석이조지.”
“일단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병사의 가족들도 모두 적당히 노동에 참여시켜.”
그 말에는 엔트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려 20 만 명이나 된다. 그들을 마구 부리면 건설 속도야 빨라지겠지만
자칫 원성이 생길 수도 있었다. 거기에는 노인과 아이가 섞여 있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혹사시키라는 뜻이 아니야. 어쨌든 일거리가 있어야 하잖아. 그리고 화합할 시간도 필요하고. 프로인트랑 잘
상의해 봐. 강도 높은 노동이 아니라 적당히 간단하면서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서 맡겨.”
엔트는 그제야 제론의 의도를 이해했다. 수도를 건설하는 데 자신이 일조했다는 일종의 성취감을 위한 일이었다.
그것은 결국 강력한 소속감을 안겨 줄 것이다.
“더 참여시킬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다 참여시켜. 최대한 노동력을 집중시켜서 확 끝내 버려.”
엔트가 난감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국왕의 명령이다.
무조건 실행해야만 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내는 건 불가능하겠지?”
“원래 계획이 3 년 뒤였습니다.”
“1 년 반으로 줄여.”
“해 보겠습니다.”
제론은 엔트의 대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슬슬 왕국의 기반이 닦이는 느낌이었다.
사실 수도 건설은 제론이 생각하는 왕국 건설에서 가장 중요했다. 수도 설계는 제론이 직접 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몇 번이나 수정했다.
그 때문에 건설 속도가 상당히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론의 설계에는 수도의 방어
시스템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 수도의 도로와 주요 관공서의 건물, 그리고 성벽을 이용해 거대한 마법진을 구축할 계획이었다. 수도 방어
시스템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초고대문명에서 뽑아낸 에너지를 성에 쓰고 남는 여유분을 이용할 것이다.
사실 뽑아내야 할 에너지의 양은 정해져 있었다. 한데 고작 성 하나만으로 그 모든 에너지를 쓰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남는 에너지는 허공으로 그냥 방출해 왔다.
한데 수도 방어 시스템으로 그 에너지를 돌린다면 굳이 아깝게 허공으로 방출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수도 전체에 깔려 있는 마법적 편의 장치에 들어가는 에너지까지는 공급이 불가능했다. 그저 방어 시스템의
에너지만 해결하는 정도였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수도 방어 시스템은 말이 수도 방어지 사실 왕국의 방어 시스템이기도 했다.
제대로 쓸 수만 있다면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을 마법으로 공격하는 것도 가능했다. 마티와 연결하면 왕국 내의
주요 시설을 수도에서 쏘는 마법으로 보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다 보니 수도 건설에 시간이 잔뜩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처음 영주성을
건설하면서 함께 시작한 수도 건설이 아직 채 반도 안 끝난 게 아니겠는가.
엔트가 예를 취하고 나가자, 제론은 바로 바인에게 보고를 받았다.
바인의 정보력은 이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레늄 왕국뿐 아니라 주변 다른 왕국의 정보도 차츰 모이는
중인지라 더 폭넓은 시야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슬슬 주변 왕국의 유적도 개척해야겠군.’
유적을 개척하면 개척할수록 정보력이 늘어나고, 또 힘이 강해진다. 그러니 그 부분에서 게으름을 피울 이유가
없었다.
다만 유적을 섭렵하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선뜻 나서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제법 많은 유적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발굴이 완료되어 관광지가 된 유적부터 싹 돌아야겠군.’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정보망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만 이제는 일국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관광을
명목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기가 조금 껄끄럽기는 했다.
하지만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지만 않으면 큰 문제가 없었다. 제론은 유적을 추가하는 일에는 되도록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지 않으려 애썼다.
제론은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한 다음 바인으로부터 도착한 보고서를 읽었다.
미리 지시를 내린 것이 있기에 그에 관한 정보가 절반 이상이었다. 제론은 에어스트 왕국에 대한 전 대륙의
시선을 알고 싶었다.
물론 바인의 정보망이 가진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아주 정확히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동향을 파악할 수는 있었다.
대륙의 시선에 대해 쭉 읽은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다들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군.”
레늄 왕국이 분열되어 혼란에 빠진 상황 자체를 다들 즐거운 눈으로 바라봤다. 딱 호기심 정도의 수준이었다.
레늄 왕국의 혼란을 이용해 뭔가 이득을 얻으려면 인접한 것이 유리했다. 직접적으로 무력을 써서 영토를
얻으려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레늄 왕국에 인접한 벨룸 왕국이나 헥서 왕국에 오히려 더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들이 이익을
얻어 힘이 생기면 그 힘을 외부로 발산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에어스트 왕국은 레늄 왕국의 분열을 이용해 독립한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다. 왕국 규모에 비해 제법 강력한
전력을 가지긴 했지만 그래 봐야 약소국이라는 이미지였다.
딱 제론이 원하던 바였다. 아직은 주목받을 필요가 없었다. 진짜 주목은 에어스트 왕국의 기간트 공장에서
아모르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하면 받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마 치열한 정보전이 시작될 것이다. 물론 걱정하지 않는다. 이쪽에는 마티와 바인이 있으니까.
에어스트 왕국에 대한 보고를 모두 읽은 제론은 나머지 자잘한 보고를 확인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대부분이
미테 왕국에 대한 건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텔레포트 게이트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그들이 어떤 정보를 얻었고, 또 크란 제국 마탑으로
어떤 정보를 보냈는지에 대한 보고였다.
“확실히 문제가 있긴 해.”
사실 누가 어디로 갔는지만 알아도 상당한 정보가 된다. 그걸 통해 유추해 낼 수 있는 것들이 제법 많았다. 어떤
상황에 누가 어디에 간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들의 의도를 짐작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도 텔레포트 게이트는 상당한 정보를 주변으로부터 수집할 수 있었다. 일단 텔레포트 게이트 자체에
들어간 마법진을 통해 집음이 가능했다. 물론 그 기능에 대해서는 크란 제국 관계자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각 영지의 가장 번화한 곳에 세워진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 근방이 번화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곳의 소리를 몽땅 모아서 보내면 얼마나 많은 정보가 안에 들어 있겠는가. 물론 버려야 하는 쓰레기가
더 많겠지만, 그거야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에는 2 개의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었다.
하나는 네이드 후작령에 있던 게이트였고, 나머지는 최근 병합한 5 개 영지 중 하나에 있던 게이트였다.
솔직히 제론은 그 두 게이트를 폐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만드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가지만, 일단 만들고 나면 지속적으로 이익을 안겨 준다.
유지보수조차 크란 제국 마탑에서 알아서 하기 때문에 영지에서는 아예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저 그곳에서
벌어들이는 돈의 일부를 세금으로 받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텔레포트 게이트가 가져오는 부가적인 이득도 상당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수많은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로 인해 근방의 경제가 크게 활성화된다.
그러니 별다른 이유 없이 게이트를 폐쇄한다고 하면 대번에 의심의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도 대륙 최강국인
크란 제국의 시선을 말이다.
“일단 크란 제국에 한번 가 볼 필요가 있어.”
크란 제국은 제론이 있는 에어스트 왕국과는 대륙 정반대쪽에 위치했다. 거기까지 가려면 텔레포트 게이트를 최소
10 번은 이용해야만 했다.
그쪽의 유적도 다 섭렵하려면 어쨌든 한번 제국 전역을 돌아봐야만 했다. 제국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면 대륙
전체의 정보를 쥔 것과 비슷한 효과가 생긴다.
그만큼 크란 제국이 대륙 전역에 떨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어쨌든 당분간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그냥 유지하는 수밖에 없군.”
제론은 언제 시간을 내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제대로 분석해 보겠다고 작정했다. 사실 텔레포트 게이트라는 것은
이 시대의 마법 기술로 만들어 내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사실 다른 왕국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텔레포트 게이트에 대한 연구를 시도해 보지 않은 왕국이 없을 정도로
상당한 투자를 해 왔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냥 실패만 한 게 아니었다. 아예 텔레포트 마법에 대한 감조차 잡지 못했다. 즉, 걸음마도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다들 그저 크란 제국 마탑에 의뢰해 게이트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텔레포트 게이트에 대한 기술은 오로지 크란 제국 마탑에만 있었다.
그러니 크란 제국 마탑에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할 때, 어떤 수작을 부려 놓았는지 어찌 알겠는가. 제론이
발견한 집음 마법진처럼 말이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돈은 어마어마하다. 당연히 들어가는 재료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수만 개의 마법진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을 해서 발현되는 것이 바로 텔레포트였다.
그러니 그 마법진 안에 뭐가 더 들어가는지 파악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한해서였다.
초고대문명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아티팩트를 가진 제론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었다. 한데 정말 대단한 것이
그런 제론조차도 아직 텔레포트 게이트를 정확히 분석해 내지 못했다.
집음 마법진이 섞여 있다는 걸 알아낸 것도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때, 근방의 마나유동이 이상해서 확인해
보다가 간신히 알아낸 것이었다.
이제 거기에 무슨 마법진이 중첩되어 있는지 확실히 알아봐야만 했다. 향후 크란 제국과 어떤 사이가 될지 모르니
미리 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만일 다른 왕국과 분쟁이 났을 때, 크란 제국이 개입해 제론이 모르는 사이 텔레포트 게이트의 어떤 마법으로
뭔가 이상한 짓을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유사시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못 쓰게 만들 수도 있어야 하고 말이야.’
텔레포트 게이트라는 건 전쟁이 터졌을 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만일 게이트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만 있다면 그걸 통해서 병력을 이동시킬 수도 있었다.
게이트를 통해 기간트라도 나온다면 소름끼치는 결과가 벌어질 것이다. 물론 그런 큰 물건이 이동할 수 있는지
확인이 안 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게이트의 마법진이 혹시라도 아공간 간섭 마법을 차단할 수 있다면 라이더만 실어 날라도 충분했다.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기간트를 소환해 돌진하면 끝 아닌가.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를 해야만 한다. 제론은 그 문제에 관한 생각도 깊이 있게 정리했다.

Chapter 7 타히티 (3)

거기까지 하고 나니 이제 시간이 좀 생겼다. 슈린 왕국을 병합하는 문제는 더 이상 제론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 모든 일은 자동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럼 남은 건 타히티뿐인가?”
타히티를 떠올리니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타히티를 얻어 기사로 부릴 생각을 하니 기대감으로 인한 희열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스히스도 실제 싸웠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힘과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러니 타히티는 오죽하겠는가.
제론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유적 로비로 이동했다.
유적 로비에 도착한 제론은 곧장 15 층으로 향했다.
이내 타히티가 나타났다. 타히티는 등장과 동시에 빛의 화살을 날렸다.
제론은 그것을 피하며 검을 뽑았다.
타히티와의 치열한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 싸움은 타히티를 무릎 꿇릴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 ☆ ☆

세 발의 화살이 동시에 날아왔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눈을 빛냈다. 고작 이런 걸로는 쉽게 당하지 않는다. 제론의 검이 좌에서 우로 푸른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다.
콰아아!
길쭉한 초승달 모양의 빛이 날아오는 화살을 향해 쏘아졌다.
콰과과광!
초승달이 화살 세 개를 동시에 휩쓸며 터트려 버렸다. 순수한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기에 이렇게 중간에서
요격하는 게 가능했다.
제론은 빠르게 자리를 떴다. 타히티와 대결하면서 한자리를 고수하는 건 바보짓이었다. 그게 아니면 미친
짓이거나.
벌써 유적 15 층에 다시 내려온 지 한 달이 지났다. 밖은 이제 겨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런 계절의
변화에 신경조차 못 쓰고 있었다. 타히티와의 싸움은 그런 여유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치열했다.
그 치열함 덕분에 제론의 실력은 큰 폭으로 향상되었다. 특히 원거리의 화살을 요격하기 위해 마나를 날려 보내는
기술이 엄청나게 늘었다.
이제 제론은 아주 적은 양의 마나로 훨씬 강력한 위력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런 마나를 외부로 발출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마나를 압축하고 또 압축해서 강력한 에너지를 밀집시킨 다음, 그걸 날리는 방식이었다. 모양도 다양하게 만들 수
있어서 타히티가 하는 모든 방식의 화살 공격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지금은 그걸 넘어서 원거리로 타히티를 공격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우우우웅!
제론의 검에 막대한 마나가 몰렸다. 보통 검이라면 완전히 박살이 났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양의 마나였다. 하지만
지금 제론이 쓰는 검은 그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검이 새하얗게 빛났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타히티를 향해 검을 쭉 뻗었다. 그러자 새하얀 빛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타히티가 쏘는 빛의 화살과 똑같았다.
콰우우우!
빛의 화살이 주변 공기를 일그러뜨리며 날아갔다. 그 화살이 타히티의 것과 다른 점이 있었다. 제론이 쏜 빛의
검은 날아가면서 주변의 마나를 탐욕스럽게 잡아먹었다.
그렇게 마나를 잡아먹으며 점점 덩치를 불려 갔고, 또 훨씬 강력해졌다. 당연히 빛도 점점 더 밝아졌다.
타히티는 그것을 보며 몸을 움직였다. 제론이 쏘아 보낸 빛의 검도 빨랐지만 타히티의 속도는 그보다 더 대단했다.
콰웅!
빛의 검이 타히티를 꿰뚫었다. 아니, 꿰뚫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빛의 검이 뚫고 지나간 건 타히티의 잔상일
뿐이었다.
타히티는 그곳에서 30 미터쯤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언제 준비를 했는지 활을 당긴 채였고, 거기에는 빛의
화살이 강렬한 존재감을 뿌리며 재워져 있었다.
순간, 그런 타히티의 앞으로 빛의 검 하나가 그대로 날아갔다. 이것은 타히티도 미처 피할 여유가 없었다.
타히티가 느끼기에는 마치 빛의 검이 그냥 코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타히티가 다급히 활을 들어 올려 빛의 검을 막았다.
꽈아아아아앙!
타히티가 휘청거렸다. 폭발이 워낙 강해서 활로 막은 것만으로는 그 충격을 모두 해소할 수가 없었다. 뜨거운
마나 덩어리가 타히티의 몸에 쏟아졌다.
타히티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다른 곳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 순간 타히티가 방금 전까지 있던 자리를 빛의
검이 지나갔다. 만일 이동하지 않았다면 직격당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동한 것만으로는 모든 위기를 해소할 수 없었다. 어느새 제론이 몸을 날려 타히티에게 달려든 것이다.
타히티는 또 이동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제론의 공격 타이밍이 너무 빨라서 이동하기 전에 활을 들어
막을 수밖에 없었다.
쩌어어엉!
제론의 일격은 엄청나게 강력했다. 그 정도 일격이 아니면 타히티에게 충격을 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모든
공격에 일일이 신경을 썼다.
타히티의 균형이 흔들렸다. 제론의 일격이 타히티에게 큰 충격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미묘하게 균형을 흔들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균형을 흔들어 준 것만으로도 타히티는 고속 이동을 쓰지 못했다.
쩌엉! 쩌엉! 쩌엉!
제론이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타히티는 그것을 막아 냈다. 제론은 허공에 붕 뜬 채로 검을 휘둘렀다.
마법이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디지 않으면 검격에 힘을 실을 수가 없기에 이중으로 마법을 썼다. 그래서 마치 허공에
다리를 콱 박아 놓고 검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타히티의 무기는 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근접 전투가 벌어질 상황도 얼마든지 있기에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무기가 있었다.
키이이이이잉!
타히티의 가슴에서 굉음이 울리며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본 제론은 긴장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벌써 몇
번이나 겪어 봤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저걸 겪었을 때는 그 한 방에 죽을 뻔했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대결이 끝났다. 하지만 이제는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콰웅! 콰웅! 콰웅! 콰웅!
가슴에서 새하얀 빛줄기 수십 발이 연달아 뿜어져 나왔다. 하나하나에 담긴 힘이 엄청났다. 처음 제론은 그 빛을
정면으로 맞고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제론의 몸이 상하좌우로 조금씩 움직였다. 그렇게 움직일 때마다 제론의 발밑이나 좌우로 새하얀 빛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제론은 검격을 멈추지 않았다.
쩌엉! 쩌엉! 쩌엉!
타히티가 정신없이 활을 움직여 제론의 공격을 막았다. 가슴에서는 여전히 새하얀 빛줄기가 쏟아져 나가고
있었지만, 그건 제론에게 아무런 위협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타히티가 그걸 발사하느라 제대로 제론의 검격에 대응하지 못했다.
꽈아앙!
처음으로 타히티의 활이 제론의 검격을 막지 못했다. 제론의 검이 타히티의 어깨를 때렸다. 어느새 제론의 검도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타히티는 어깨가 움푹 들어간 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굽혔다. 제론은 그 틈을 놓치지 않으려고 다시
검격을 날렸다.
콰우우!
제론의 검이 허무하게 바닥을 긁고 지나갔다. 타히티가 몸을 옆으로 굴린 것이다.
쉬아악!
어느새 타히티의 몸이 100 미터나 멀어져 버렸다. 몸을 구르면서 다시 균형을 잡아 고속 이동을 쓴 것이다.
거리가 멀어진 이상 타히티는 다시 화살 공격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콰우우우!
타히티의 활에서 세 발의 화살이 또 날아갔다. 타히티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연달아 화살을 계속해서 날렸다.
콰웅! 콰웅! 콰웅!
한 번에 세 발씩 수십 번에 걸쳐 화살을 날렸다. 마치 새하얀 폭발이라도 일어나는 듯했다. 타히티는 방향을
가리지 않고 마구 활을 쏴 댔다.
꽈앙! 꽈앙! 꽈아아아앙!
푸른 초승달이 무수히 쏟아져 나갔다. 제론이 날린 검격이었다. 그 초승달들이 타히티의 화살을 모조리 휩쓸며
폭발시켜 버렸다.
제론은 능숙하게 몸을 움직여 다시 타히티에게 접근했다. 이제 더 이상 타히티의 화살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또한 고속 이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히티가 빠르게 움직이면 제론도 같은 속도로 움직이면 된다. 그렇게 한 번만 검격을 성공시키면 그때부터는
균형을 무너뜨리며 연속 공격을 할 수 있었다.
타히티는 그때마다 임기응변을 발휘해 미꾸라지처럼 도망쳤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 없이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제론은 차근차근 타히티를 무너뜨렸다. 제론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서두르다가 타히티에게 당한 적이
너무 많았다.
제론은 끝까지 평상심을 잃지 않고 타히티를 공략해 나갔다.
쩌엉! 쩌엉!
꽈과광! 꽈과과광!
타히티의 어깨가 움푹움푹 들어갔다. 더불어 가슴 부분의 강판도 완전히 찢어져 있었다. 내부 부품들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용케 부품이 망가지지는 않았다.
타히티의 내부는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물론 그건 강판도 마찬가지였지만, 단번에 강판을 부수고
내부까지 뭉개려면 제론의 힘만으로는 어려웠다.
제론은 그 상태가 되어서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검을 휘둘렀다.
꽈앙! 꽈앙! 꽈아아앙!
타히티의 배를 비롯해 허벅지와 팔뚝이 움푹움푹 들어갔다. 이제 타히티는 온몸에 성한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구석구석이 찌그러진 상태였다.
그렇게 되니 타히티의 움직임이 점차 둔해졌다. 구겨진 강판이 관절의 움직임을 방해해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고속 이동에 문제를 만들었다. 그로 인해 타히티는 더 이상 고속 이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고속 이동이 없는 타히티는 오히려 이스히스보다 훨씬 상대하기가 쉬웠다. 한데 이스히스를 상대할 때보다 제론의
실력이 훨씬 늘었으니 타히티가 제론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쩌저저저정!
타히티가 허물어지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제론은 그 틈을 이용해 타히티의 찢어진 가슴속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꽈과과과과광!
타히티의 몸 내부가 연이어 폭발했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타히티의 움직임이 멎었다.
제론은 바닥에 내려서서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후우우우욱! 드디어……!”
한 달이 넘는 시간을 투자한 끝에 드디어 타히티를 쓰러뜨렸다.
제론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타히티를 쳐다봤다. 타히티의 몸 곳곳에서 새하얀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빛이 타히티의 몸을 부수며 뚫고 나오는 듯했다.
그리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제론은 다급히 마나를 끌어 올려 몸을 보호했다. 그리고 마법을 펼쳐 앞에 방어막을 겹겹이 쌓았다.
하지만 워낙 어마어마한 폭발이었는지라 모든 충격을 막을 수 없었다.
제론의 몸이 폭풍 속 가랑잎처럼 허공을 유영했다. 그리고 바닥에 처박혔다.
꽈앙!
바닥을 깊이 파고들었지만 제론의 정신은 멀쩡했다. 그 정도 충격으로는 이제 기절도 할 수 없었다.
제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구멍에서 나왔다. 그리고 타히티가 폭발한 자리로 걸어갔다.
이스히스도 이런 식이었다. 아마 거기서 기둥이 솟아 나오리라.
위이이잉!
기둥이 솟아났다. 기둥 안에는 이스히스 때와 마찬가지로 작은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제론은 아공간에서
열쇠를 꺼내 상자의 열쇠 구멍에 넣고 돌렸다.
딸깍.
열쇠가 돌아가며 상자 내부에 있던 마법진이 정확히 맞물렸다.
화악!
상자 표면에 복잡한 문양이 나타나 빛났다. 마법진이었다.
철컥! 철컥! 철컥!
상자가 각 마법진의 문양에 따라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분리된 상자가 다시 조립되며 입체적인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화아아악!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이 점점 커졌다. 그 빛을 보며 제론은 이스히스를 얻던 때가 떠올랐다.
이번에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빛이 자라 거대한 기간트가 되었다.
날렵한 몸에 거대한 활을 들고 있는 새까만 기간트, 타히티였다.
제론은 서둘러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타히티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푸화학!
빛이 뿜어져 나오며 제론의 마나와 섞였다. 제론은 그 느낌을 잊지 않으려 애쓰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나와 마나가 섞이는 특별한 느낌이 제론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 느낌 속에서 제론은 잡힐 듯 말 듯 한
뭔가를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 사라져 버렸다.
제론이 다시 땅에 내려서서 타히티를 바라봤다. 제론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타히티가 제론을 향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쿠웅!
기사의 예를 취하는 타히티를 보며 제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타히티를 얻었다.

Chapter 8 유적 순회 (1)

타히티를 얻은 제론은 잠시 로비로 돌아와 몸과 마음을 추스른 다음 곧장 16 층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지금은
유적에서 나가 봐야 특별히 제론이 할 일도 없었다.
16 층에 도착한 제론은 새로운 기간트가 나타날 거라 기대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잠시 후, 환한 빛과 함께 기간트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회색 기간트였다. 몸은 딱 이스히스와 타히티의
중간이었다. 그리고 긴 창을 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름이 뭐지?”
―마크리아.
“마크리아라…… 창을 쓰는 기간트인가? 조금 색다른데?”
제론은 긴장을 풀고 마크리아를 유심히 살폈다. 어차피 스타일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으니 처음에는 당할 확률이
높았다.
타히티보다 아래층에서 나왔으니 그보다 더 까다로울 확률이 높았다.
쿵! 쿵! 쿵!
마크리아가 천천히 제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창을 들었다.
큐우우웅!
창이 맹렬히 회전하며 제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창이 회전하며 주변 공기와 마나를 잔뜩 휘감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대로 창을 타고 제론에게 쏟아졌다.
제론은 당황했다. 갑자기 주변 마나가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몸속 마나가 비틀렸다. 지극히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콰우우우!
거대한 창이 제론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제론의 시야가 깜깜해졌다.

제론이 다시 눈을 뜬 것은 유적 로비에서였다. 몸은 모두 회복되어 있었다.


“무시무시하군.”
불의의 일격에 당해 버렸다. 사실 조금만 더 긴장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창을
조금만 더 미리 피했으면 이렇게 한 방에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예상 외였다. 마크리아가 내지르는 창의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랐고, 또 거기에 담긴 위력도
대단했다. 무엇보다 창보다 먼저 쏟아진 마나의 유동이 가장 큰 문제였다.
순간적이나마 제론의 마나를 묶었으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로 인해 아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방심의 대가가 크군.”
솔직히 방심했다. 어차피 당할 거라고 생각한 자체가 문제였다. 평소보다 반응이 찰나지간이지만 느렸다. 그래서
당했다.
물론 앞으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도전할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일단은 말이다.

☆ ☆ ☆

“예?”
엔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인가. 지금 이 시국에 유적
순회라니.
“왜? 내가 꼭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나?”
“그, 그건…….”
엔트는 맹렬히 생각했다. 현재 남은 일과 국왕이 반드시 필요한 일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당분간은 왕국 안정에 최대한 힘쓰도록.”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유적 순회는…….”
“공식적으로 가는 순회가 아니야. 철저히 비공식적인 일이다. 외부로는 내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조차 알려져선
안 돼.”
“그건 불가능합니다.”
제론이 씨익 웃었다.
“왜?”
“외국의 사신들은 어찌합니까? 현재도 지속적으로 대륙 곳곳의 왕국으로부터 방문 예약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다 거절해. 핑계야 많잖아.”
“일단은 그러고 있습니다만, 핑계가 통하지 않는 상대가 요청하면 곤란합니다. 또한 핑계로 미루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
제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유적 순회라고 해서 에어스트 왕국을 무한정 비울 필요가 없었다.
유적을 하나 찾을 때마다 이곳에 와서 얼굴을 비출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럼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하나씩 받아.”
엔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건 또 뭐야?”
“하지만 그들은 폐하를 뵙고자 할 텐데…….”
“만나면 되지. 혹시라도 내가 없으면 적당한 핑계를 대서 시간을 끌어. 닷새 정도 시간 끄는 건 일도 아니잖아.”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정도 시간을 끌면 내가 알아서 올게. 나도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엔트는 정신이 붕괴될 것 같았다. 혼란에 휩싸여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공식적으로 유적 순회를 다닌다는 건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돌아다니겠다는 뜻이다. 그 말인즉슨,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한데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닷새 안에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언제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 슈린 왕국은 어쩌고 있지?”
“붕괴되기 일보직전입니다.”
결국 슈린 왕국은 5 천만 골드를 지급하지 못했다. 동분서주해서 모은 돈이 고작 3 천만 골드였다.
사실 귀족들이 개인 재산을 탈탈 털었으면 어떻게든 5 천만 골드는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슈린 왕국이 끝났다고 판단했다. 앞으로는 어디로 어떻게 선을 대고 살아남느냐가 관건인 시대였다.
그러니 최대한 돈을 잘 쟁여 놔야만 했다.
물론 제론과 에어스트 왕국의 수뇌부는 그들이 그렇게 움직일 거라고 모두 판단했다.
“유예 기간을 준 건 아니겠지?”
“달라고 하는 걸 칼같이 잘랐습니다.”
“잘했어. 그럼 슬슬 움직여도 되겠군.”
엔트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슈린 왕국을 접수해. 귀족들의 재산은 싹 몰수해 버리고. 반항하면 가차 없이 처단해. 일말의 여지도 주지 마.
제대로 밟아 놔야 나중에 안정시키기도 편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제론이 턱을 쓰다듬으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슈린 왕국 귀족들 재산을 싹 압수하면 제법 돈이 크겠군.”
“물론입니다. 당분간 예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아, 한데 디아만트 후작가는 어떻게 할까요?”
디아만트 후작가는 중립이었지만 영지 자체가 슈린 왕국 내에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들이 가진 힘이 워낙
대단해서 슈린 왕국에서도 결코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배상금 정도는 디아만트 후작가에서 뜯어냈을 것이다.
“차별할 필요 없어. 알아서 먼저 피하거나 손을 내밀어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엔트는 제론의 말에 그렇게 대답하며 눈을 빛냈다. 디아만트 후작가가 과연 어떻게 나올지 참으로 궁금해졌다.
분명히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짝짝!
제론이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전환했다. 엔트가 긴장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자, 이제 다 끝났지? 혹시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바이스한테 도움 요청하고.”
바이스는 엔트를 총관으로 임명한 순간부터 마탑에 들어가 마법 연구에 몸을 담갔다. 그 뒤로 마탑에서 한 번도
안 나왔으니 얼마나 지독하게 연구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문두스라면 이미 인수인계를 받았습니다.”
“그래? 하긴 그걸 인수인계하지 않으면 마법 연구에 매진하기 힘들지.”
제론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걸 보는 엔트의 시선이 살짝 묘해졌다.
“그런 중요한 일을 폐하께 상의도 드리지 않고 처리했는데 괜찮으십니까?”
“중요하니까 처리한 건데 뭐가 어때서? 문두스와 연결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는데 잘됐군. 앞으로는
문두스와 긴밀히 연계해서 일을 처리해. 겪어 보면 알겠지만 그쪽도 상당하거든.”
“이미 겪어 봤습니다. 솔직히 제가 이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엔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스스로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자신만만했다.
에어스트 백작가의 총관 정도야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에어스트 왕국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에어스트 왕국은 규모가 크지 않으니 처리할 일도, 또 신경 쓸 일도 많지 않았다.
한데 이제는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슈린 왕국과의 전쟁에서 이겼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전력이 강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 일처리를 보며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두스와 연결되면서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문두스의 수장인 바인의 능력은 경악할 정도였다. 그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엄청난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그런 대단한 인물이 수장으로 있는 정보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현재 엔트는 그런 왕국의
총리였다. 왕국의 대소사를 모두 관장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자신감이 생길 리가 없었다. 바인을 떠올린 엔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제론은 그런 엔트를 보며 피식 웃었다. 확실히 누구라도 바인과 대화를 나눠보면 그런 느낌을 받기 마련이었다.
만일 자신이 초고대유적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마찬가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질투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제론은 바인이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보통 그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면 딴맘을 품기 마련이다.
하지만 바인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론이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몇 가지 만들어 놓긴 했지만 솔직히 그런 장치에 의존할 생각은 없었다. 바인은
제론을 쉽게 저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솔직히 바인도 그걸 느끼고 있었다. 만일 자신이 제론 말고 다른 사람의 아래로 들어가면 무조건 견제를 당하고
나중에는 처단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쨌든 그런 바인을 겪었으니 엔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뭘 그 정도로 의기소침하고 그래? 너도 충분히 대단하니까 걱정할 거 없어.”
“예? 저, 저는 걱정한 적이 없습니다만…….”
제론이 엔트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바인은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생각해 봐. 아마 너랑은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제론의 진심 어린 말에 엔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워낙 진심을 다해 말했기에 가슴에 확 와 닿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엔트와 바인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만일 바인에게 당장 에어스트 왕국의 총리 자리를 맡겨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엔트만큼은 아니었다.
엔트는 그쪽으로 상당히 특별했다. 엔트 역시 바인만큼은 아니지만 천재적인 능력을 타고났다.
제론은 그걸 알고 있기에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사라져 버린 엔트의 자신감을
아주 약간이나마 되찾아 주었다.
그 약간의 자신감은 조만간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자신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컸다.
그렇게 자신감을 찾아 일의 성과가 커지면 더 자신감이 커질 것이고 능력도 크게 부각될 것이다.
에어스트 왕국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결과적으로 엔트는 그런 에어스트 왕국의 총리에
걸맞은 능력을 차차 갖춰 갈 것이 분명했다.
제론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엔트를 보며 집무실에서 나갔다. 엔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없어져 주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더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말이다.

Chapter 8 유적 순회 (2)

제론은 완전히 작정을 하고 움직였다. 일단 주변국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전 대륙의 유적을 등록할 계획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드러나지 않은 유적을 발견하게 되면 더 좋았다.
사실 상당히 많은 유적이 발견되긴 했지만 모든 유적이 다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에도 고대유적과
연결되지 않은 초고대문명의 유적뿐만 아니라, 새로운 고대유적까지 발견하지 않았던가.
제론은 태블릿을 꺼냈다. 그리고 유적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띄웠다.
손가락을 슥슥 놀려 제론이 소유한 유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유적을 먼저 찾았다. 그다음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가장 빠를지 동선을 그려 봤다.
어차피 이동은 날아서 갈 것이다. 푸르투나를 부르고 마법까지 쓰면 빠르게 날아가는 건 아주 간단했다.
날아다니는 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달려가면 된다. 제론은 그 어떤 말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동선을 짜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저 직선으로 쭉쭉 긋기만 하면 끝이었다. 다만 겹치지 않게 가장
짧은 거리를 만드는 것이 조금 복잡할 뿐이었다.
바인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토대로 지도에 표시한 유적의 수는 모두 324 개나 되었다. 엄청나게 많은 수였다.
하지만 대륙에 있는 왕국의 수를 생각하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다.
다른 왕국도 레늄 왕국만큼이나 많은 유적을 개발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가 유적을 관광지로 만들었다.
관광지가 된 유적의 경우는 방문이 간단했다. 다만 사람이 없는 틈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그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밤에 방문하면 되니까. 모든 유적이 레늄 왕국의 수도에 있던 유적처럼
밤의 경비가 촘촘하진 않을 것 아닌가.
“그나저나 크란 제국 쪽은 거의 없군.”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크란 제국은 다른 왕국 10 개를 합한 넓이였다.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한데 그
넓은 영토에 공개된 유적이 딱 세 군데뿐이었다. 그나마도 관광지가 아니었다.
어쩌면 방문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도 초창기에 발견된 유적들이네. 즉, 처음이라서 정보 차단이 안 되었다는 뜻인가?”
크란 제국이 유적 발굴을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아마 그 어느 왕국보다 더 많은 유적을 찾아냈을 것이다.
한데도 그것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는 건 유적에 대한 모든 정보를 차단했다는 뜻이었다.
“대체 왜?”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유적이라는 건 보통 유물을 발굴하고 나면 끝이었다. 남은
건 관광지로 개발해서 유동 인구를 늘리고 돈을 버는 정도였다.
한데 크란 제국은 그런 것조차 하지 않았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확실히 알아봐야겠군.”
제론은 왠지 크란 제국이 계속 껄끄러웠다. 이유를 딱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크란 제국만 떠올리면 뭔가 가슴에
턱 걸려 내려가지 않는 것 같았다.
이번에 유적 순회를 하면서 크란 제국에 있는 테페룸 광산도 알아봐야 했으니 어차피 크란 제국에 가 보긴 할
것이다.
물론 그건 나머지 왕국의 유적을 싹 훑어서 모든 마티를 장악한 다음의 일이었다.
제론은 태블릿을 슥슥 만지며 동선 그리기를 마무리했다. 첫 번째 장소를 정한 제론은 곧장 날아갔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이 일은 최대한 빨리 끝낼수록 유리했다.
사실 지금까지는 다른 왕국의 유적을 몽땅 개발할 필요나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랐다.
‘앞으로는 전 대륙의 동향을 잘 살펴야 돼.’
제론의 가슴에 자리한 웅심이 점차 크게 자라났다. 지금까지는 복수를 생각하면서 달려왔지만 이제부터는 새로운
목표를 세워야 할 때가 되었다.
물론 아직 복수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슈린 가문의 뒤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에어스트 가문을 무너뜨린
배후를 찾아 응징해야 진짜 복수가 끝난다.
하지만 그건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할 일이었다. 그걸 위해서는 더 힘을 크게 키워야만 했다. 제론은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를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아니면 대륙을 완전히 통일해 버리거나.

☆ ☆ ☆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겠군.”


제론은 유적에 마련된 숙박 시설을 이용하기로 했다. 벌써 100 개가 넘는 유적을 연결시켰다. 당연히 시간도
오래 걸렸고, 얻은 것도 많았다.
현재 제론은 란체 왕국에 있었다. 란체 왕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발굴된 유적의 수가 적은 편이었다. 땅은 제법
넓은데 유적의 수는 레늄 왕국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란체 왕국은 유적 발굴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병사나 기사의 훈련이나, 라이더의 훈련에
훨씬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란체 왕국의 라이더는 실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란체 왕국을 강국으로
이끌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유적 발굴 같은 일에 전력을 기울이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동안 발견된 유적들도 상당히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에 발견된 유적이 하나 있었는데, 그나마도 디아만트 상단이 나서서 발굴을 진행했다. 왕국에서는 아예
지원을 하지 않았다. 물론 발굴에 따른 세금은 부과했다.
그런 식이니 란체 왕국에서 유적을 발굴하려는 사람이 많을 리 없었다. 실제로 디아만트 상단의 경우 유적을
발굴해서 왕국에 세금을 내고, 또 유적이 위치한 영지에도 세금을 내야만 했다.
당연히 지원은 하나도 못 받았고 말이다. 웬만한 유적이었다면 아마 큰 손해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디아만트 상단이 발굴한 유적은 상당히 규모가 커서 제법 이득을 많이 봤다.
결과적으로는 이득을 보고, 유적의 소유권도 일정 부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 처음 시작할 때는 도박에
가까운 투자라고 상단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디아만트 상단이 그럴 정도인데, 다른 상단이나 투자자는 오죽하겠는가. 그러니 란체 왕국에 발굴된 유적이 많을
리 없었다.
“이제 란체 왕국에 남은 유적이 4 개인가?”
제론은 태블릿을 꺼내 란체 왕국의 유적 부분을 다시 확인했다. 그동안 유적을 찾으면서도 바인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유적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새 유적을 등록할 때마다 마티의 수와 범위가 늘어나면서 바인이 확인하고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점점
많아졌기 때문에 훨씬 깊이 있는 보고가 가능해졌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유적에 대한 정보가 들어와 있는 경우도 있었다.
가끔 제론은 과연 바인이 잠은 제대로 자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었다. 바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보를
모으고 정리해 제론에게 보내 주었다.
이제 대륙 최고의 정보 조직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 물론 그 안에서 크란 제국은 빠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크란 제국의 유적을 등록시키지 않더라도 제국의 정보를 전혀 얻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른 왕국의
정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많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란체 왕국 유적에 대한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것도 그런 것 때문이었다. 다른 지역의 정보를 토대로 새로운
지역의 유적을 찾아낼 가능성이 높았다.
꼭 크고 유물이 많은 유적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이 유적만 달랑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규모도
아주 작고 말이다.
그런 경우 관광지로 활용하기에도 애매할 때가 많아서 버려지고 방치될 수도 있었다. 그런 유적에 대한 정보는 그
지역에 정통하지 않으면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바인은 주변 정보를 이용해 귀신같이 그런 유적을 찾아냈다. 그래서 처음 태블릿의 지도에 표시했던 유적의
수보다 지금이 훨씬 많았다.
오늘 란체 왕국에서 찾은 유적도 사실은 그런 유적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이 동굴에 기묘한 문양만 잔뜩 있는
유적이었는데, 그 문양이 고대에 쓰던 암호문의 일종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제론은 여러 가지 정보와 초고대문명의 지식을 토대로 그걸 알아낼 수 있었다. 이곳은 고대에 암살자들의
본거지 같은 장소였다.
그런 장소에 에너지가 많이 필요할 리 없었다. 그러니 이 유적에 연결된 초고대유적도 그리 크지 않았다. 마티의
수도 적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정보 수집 범위가 제법 넓은 편이었고, 근처에 영지들이 걸쳐 있어서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쓸모가 많은 유적을 찾은 셈이었다.
초고대유적의 숙박 시설은 상당히 훌륭했다. 잠자리도 편했고, 먹고 씻고 하는 것도 거의 자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별로 몸을 움직일 일이 없었다.
게다가 수련장도 붙어 있어서 몸을 풀기도 좋았다. 이래저래 웬만한 호텔보다 훨씬 좋았다.
다만 음식 자체가 영양만 생각하는 간단한 것이었기에 맛을 느끼거나 즐기는 부분은 많이 모자랐다. 술도 없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제론도 사람이 그리워지면 인근 도시로 가서 하루쯤 자곤 했다. 오늘은 유적에서 잤지만 내일이나
모레쯤은 란체 왕국의 수도에 가서 사람 구경이라도 좀 할 계획이었다.
더불어 수도 근처에 있는 유적도 방문하고 말이다.
제론은 간단하게 내일의 계획을 세운 뒤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는 수면을 돕고 피로회복을 돕는 마법이 새겨져
있었기에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란체 왕국의 수도는 다른 왕국에 비해 화려함이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건물의 모양이나 사람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상당히 강인했다.
제론은 수도에 들어서면서 뭔가 단단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 제론이 아니면 그런 느낌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제론은 도시 전체에 흐르는 기운을 읽을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유적 순회를 하면서 틈틈이 16 층 공략도 병행했다. 솔직히 마크리아는 타히티를 얻을 때보다 조금 더 쉬웠다.
마크리아의 능력은 창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이었는데, 그 창에 깃든 능력이 좀 까다로워서 그렇지 아예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제론의 능력이 월등히 올라간 상태라서 그런지 이스히스나 타히티를 얻을 때보다 훨씬 빨리 승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제론은 유적 17 층을 공략 중이었다.
“유적 순회를 빨리 끝내고 유적부터 싹 클리어하든가 해야지.”
유적 17 층을 떠올리니 암담했다. 17 층은 16 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당연했다. 17 층은
조합이었으니까.
16 층을 클리어하고 마크리아를 얻은 제론은 곧장 17 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큰 절망을 맛봤다.
17 층에는 이스히스와 타히티가 함께 등장했다. 그 두 조합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근접은 이스히스가 맡고, 타히티가 원거리에서 저격을 하니 아무리 제론이라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매번 싸우면서 조금씩 경험도 더 쌓았고, 힘도 키울 수 있었다. 지금 제론은 처음 소드 마스터가
되었을 때와 비교해도 몇 배나 더 강해졌다.
아무튼 당분간은 유적 17 층을 클리어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물론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유적 순회를 하면서
틈나는 대로 17 층 클리어를 위해 노력할 계획이었다.
란체 왕국의 수도를 천천히 걸어가며 제론은 주위를 충분히 살피고 분위기를 느꼈다. 그리고 감각의 날을
예리하게 세웠다.
이런 것 역시 모두 수련의 일환이었다. 눈과 감각의 수련은 평소에 생활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수도라서 그런지 사람은 정말로 많았다. 제론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기억하려 애쓰며 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한 시간쯤 걸어가자, 상당한 번화가에 들어설 수 있었다. 수도 중심가는 아니었고, 평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거리인 듯했다.
제법 큰 호텔도 보였고, 그 주위로 술집도 잔뜩 늘어서 있었다. 제론은 오랜만에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서 그중 하나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꽤 넓은 술집이었는데, 대부분의 테이블이 꽉 차 있었다. 제론은 들어가자마자 안을 슥 둘러보고 곧장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제론은 간단히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는 주변에서 사내들이 떠드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대부분이 음담패설이었고, 나머지는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겪었는지 자랑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제론은 이런 질펀한 분위기가 좋았다. 요즘 너무 사람이 없는 곳으로만 다녀서 그런지 이렇게 사람 냄새가 짙게
나야 뭔가 사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술집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콰앙!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집중되었다. 거기에는 얼굴이 상기된 채 숨을 헐떡이는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겨, 결투다!”
사내의 외침에 술집 안이 온통 환호성으로 가득 차 버렸다.
“우와아!”
“가자!”
제론은 놀란 눈으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술집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심지어는 술을 나르던 점원과 술집 주인까지 사라졌다.
“이게 뭐지?”
제론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피식 웃고는 손에 든 잔을 단번에 쭉 비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대체 왜들 이렇게 열광하는지 구경은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밖으로 나가니 굳이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어디서 대결이 벌어지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건 정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제론도 천천히 그쪽으로 향했다. 굳이 빨리 뛰어갈 필요는 없었다. 어디서건 대결을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Chapter 8 유적 순회 (3)

조금 걸어가니 커다란 광장이 있었다. 그 광장 안에 사람이 꽉 차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다들 얼굴이 흥분으로 상기된 채 발을 구르며 환호성을 내질러댔다.
제론은 그들의 가장 뒤에서 주변을 살폈다. 광장을 둘러싼 모든 건물에서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광장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일을 구경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굉장한 열기였다. 고작 대결에 이렇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니 살짝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이들
특유의 문화일 테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일단 어떤 사람들이 대결을 하는지 한번 볼까?”
제론은 광장 한가운데를 확인하기 위해 발 디딜 곳을 찾아봤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바닥을
잘 다지지 못해서 튀어나온 약간 높은 돌 하나가 보였다.
“저거면 되겠군.”
그 돌 위에 올라간 제론은 시야가 살짝 높아졌고, 그것만으로도 광장 한가운데를 볼 수 있었다. 워낙 시력이
뛰어났기에 대결을 위해 대치한 두 사내의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다 확인이 가능했다.
두 사람의 대치는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하고서는 계속 기다렸다.
제론은 그 점이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저마다 손에 종이 쪼가리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오자마자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는데, 누구도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짜증 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환한
표정을 지으며 반겼다.
“도박인가?”
제론이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의 가슴에는 7 개의 창이 방패에 얽힌
황금빛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란체 왕실 소속이라는 뜻이었다.
“왕실이 직접 나서서 도박판을 벌이는 건가?”
제론에게도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왔다. 제론은 도박에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모두 하는데 혼자 안 하면
이상하게 보일 테니 어쩔 수 없이 돈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통 얼마의 돈을 거는지 확인했기에 딱 적당한 수준의 돈을 걸 수 있었다. 물론 승패는 전혀
상관없었으니 아무 데나 걸었다.
검은 옷의 사내가 멀어지자, 제론은 다시 광장 한가운데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무슨 일인지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그냥 느닷없이 결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내면의 이유까지 다 알아야 결투에 흥미가 생기지 않겠는가.
두 사내는 허리춤의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쪽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느라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고, 다른 한쪽은 빙글빙글 웃음이 감도는 표정이었다.
“감히…… 감히 내 아내를 욕보여? 네놈이 그러고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욕보이긴 누가 욕보였다는 거지? 우린 서로 즐긴 거라고. 라비네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더 얘기해 줘야 돼?”
“닥쳐라!”
얼굴이 일그러진 사내가 검을 꽉 쥐었다. 이제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왕국법 때문에 신호가 떨어지기
전까지 참아야만 했다.
“두 분, 준비는 되셨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검은 옷의 사내가 다가와 물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죠. 동의에 의한 결투이기 때문에 반드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두 사람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인상을 쓰거나 미소를 짓고 있던 표정이 대번에 가라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시작!”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외침이 떨어짐과 동시에 두 사람이 몸을 날리며 검을 뽑았다.
쩡!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두 개의 검이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였다.
채채채채채채챙!
화려한 검술이 펼쳐졌다. 마치 쇼를 보는 듯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론은 나직이 감탄했다.
“호오.”
검술 자체가 달랐다. 역시 란체 왕국이었다. 기사와 검을 숭상하는 나라다웠다.
마나를 쓰는 법은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지만, 검술 자체가 워낙 뛰어나서 웬만한 사람은 아무리 경지에 차이가
있어도 상대가 어려울 듯했다.
물론 소드 마스터가 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마나로 인해 신체 능력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고, 마나를 쓰는
능력도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기서 소드 마스터는 현재 기준의 소드 마스터, 즉, 제론 기준의 익스퍼트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 단계라면 웬만해서는 저 둘을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와아아아아!”
사방에서 열광적인 함성이 울렸다. 둘의 싸움이 격렬해질수록 함성은 더 커졌다. 사람들이 흥분했다. 여기서
피를 보면 아마 더 흥분할 것이다.
제론은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이길지 대충 감이 왔다. 빙글빙글 웃던 사내가 한 수 위였다.
게다가 인상을 쓴 사내는 흥분해서 계속 미묘하게 타이밍이 어긋나고 있었다.
아마 당장 본인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이런 경우 파탄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왠지 처음 인상을 쓰던 사내가 마음에 걸렸다. 딱 드러난 대화를 통한 정황만으로는 빙글빙글 웃던 사내가
남의 아내를 탐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그 이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뭔가 더 복잡한 사정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제론은 당장이라도 개입해서 승패를 뒤집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었다.
‘더구나 남의 일이잖아. 내가 나서서 상황을 바꿀 자격이 있을까?’
제론이 망설이는 사이 인상을 쓴 사내 쪽이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둘 다 익스퍼트였기에 온몸이 마나로 꽉 차
있었다. 그 마나가 자연스럽게 흘러 검에 맺힌 상태였는데, 그로 인해 푸른 섬광이 연신 번득였다.
잠시 고민하던 제론은 이내 피식 웃었다. 자신이 언제부터 남을 그렇게 생각했단 말인가. 지금까지 마음 내키는
대로 해 오지 않았던가.
지금도 그랬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설사 그 때문에 저 재수 없게 웃던 사내가 목숨을
잃더라도 말이다.
‘아, 그 때문이었나?’
제론은 문득 자신이 저 웃는 얼굴의 사내에게 불쾌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웃음이 너무 재수가
없었다.
왜 그런지는 명확했다. 저 웃음은 예전 제론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직전 파인트가 보여 준 웃음과
똑같았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고, 상대적으로 인상을 쓴 사내에게 더 마음이 갔던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확고히 정해진 걸 깨달은 제론은 가차 없이 손을 썼다. 마음에 앙금이 남으면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는 데 방해가 된다.
신중하되, 마음이 자유롭게 해 줘야 한다. 움직이려는 마음을 억지로 잡아선 안 된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어려웠다.
제론의 손에서 마나 덩어리가 나왔다.
슉!
어린아이 주먹만 한 마나 덩어리였는데,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마나를 수련한 사람이라도 그걸
느끼지는 못했다. 제론이 그렇게 만들었다.
소드 마스터인 제론에게 그 정도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마나 덩어리가 너울너울 날아서 결투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재수 없는 미소를 지은 사내의 발밑에
자리를 잡았다.
“헉!”
웃는 얼굴의 사내가 헛숨을 들이켰다. 순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깨끗이 사라졌다. 대신 당황함이 그 자리에
들어찼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모든 것이 한순간의 일이었다.
인상을 쓴 사내의 얼굴이 더욱 크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의 검이 그대로 앞으로 뻗어 나갔다.
푸욱!
검이 오른쪽 가슴을 그대로 꿰뚫었다.
푸슉!
다시 검이 뽑혀 나왔다. 인상을 쓴 사내가 뒤로 툭툭 스텝을 밟으며 물러났다.
재수 없는 미소의 사내에게 더 이상의 웃음은 없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한 손으로는 가슴에 뚫린 구멍을
막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억지로 검을 들어 겨눴다.
하지만 그의 검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떨리고 있었다. 검을 든 손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그제야 인상을 쓴 사내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가 시선을 돌려 한쪽에 서 있는 검은 옷의 사내를 바라봤다.
검은 옷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피를 볼 거면 확실히 봐야만 한다. 그것이 이런
대결을 왕국 차원에서 진행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인상을 쓴 사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승패가 났다. 상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이거면 충분했다. 상대는 천벌을 받았다.
“더 움직이지 않으면 무승부로 처리됩니다.”
“상관없소.”
무승부든 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갑자기 이런 대결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큭큭큭큭, 운 좋은 놈.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고작 너 따위의 실력으로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웃기지 마!”
피투성이가 된 사내가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검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신에 새까만 문양이 나타났다.
그 문양을 본 제론의 안색이 변했다.
“저 미친놈!”
제론은 그 즉시 몸을 날렸다. 더 볼 것도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마법을 펼쳤다.
샤아아아아.
제론을 중심으로 짙은 안개가 퍼져 나갔다. 안개는 주로 제론 근처에 몰려 있어서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지
않으면 식별이 잘 되지 않았다.
제론이 대결을 위해 만들어진 공터에 뛰어 들었을 때, 붉은 검에 그려진 문양이 핏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이었다. 만일 그 폭발에 기간트가 휘말리면 제법 대단한 타격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거대한 불꽃의 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구경꾼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멀쩡히 대결을 구경하며 도박을
하다가 불꽃을 뒤집어쓴 것이다.
그와 대결을 하던 사내, 포어트는 갑자기 자신을 덮치는 불꽃의 파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허망하고 삶의 의욕이 사라졌었는데, 저 불꽃을 보니
살고 싶은 생존의 욕구가 온몸을 지배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걸 어떻게 피한단 말인가. 포어트의 눈에 불꽃에 휩싸이는 검은 옷의 사내들이 보였다.
그렇게 불꽃에 뒤덮이는 순간, 포어트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어?”
포어트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나타난 사내가 검을 한 번 옆으로 쭉 긋는 순간 불꽃의 파도가 둘로
갈라져 버린 것이다.
대체 어떻게 저런 검격이 가능하단 말인가. 만일 자신이 저런 검격을 날릴 수 있게 된다면 영혼이라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포어트는 더 길게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불꽃을 가른 사내, 제론이 순식간에 그에게 다가와 허리를 낚아채며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불꽃의 권역에서 벗어났다.
포어트는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발 아래로 지나가는 거대한 불꽃의 해일을 바라봤다.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근처 건물의 옥상에 가볍게 내려섰다.
“대,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포어트는 눈앞의 사내에게 결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작 20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뭔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만드는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제론은 포어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재수 없게 웃는 사내가 싫어서 상대적으로 포어트에게 마음이 쓰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보니 그게 아니었다.
포어트에게서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이 풍기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유적!’
포어트에게서 풍기는 느낌은 아주 약하긴 하지만 초고대유적에서 흘러나오는 것과 동일한 느낌이었다. 저 느낌을
감지해서 초고대유적을 찾은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인간에게서 저런 느낌이 나는 거지?’
제론은 조금 더 유심히 포어트를 살폈다. 그리고 그가 풍기는 느낌이 어디에서 오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았다.
‘그냥 온몸으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 같은데?’
몸속에 에너지의 원천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대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포어트는 그저 온몸이 에너지의
표출구일 뿐이었다. 몸에 에너지가 배어 있었다. 그렇게밖에 설명이 불가능했다.
“누구십니까?”
포어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제론이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으니 너무나 답답했다. 대체 자신을 왜 구했는지, 또
그 어마어마한 검격은 어떻게 하는 건지, 전부 궁금했다.
“일단은 널 구해 준 사람이라고 해야겠지.”
제론의 말에 포어트의 표정이 굳었다.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았다. 어찌 되었건 제론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 엄청난 불꽃의 폭풍 속에서 말이다.
“감사합니다.”
포어트는 일단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번득이는 눈으로 다시 제론을 바라봤다.
Chapter 8 유적 순회 (4)

“일단 집으로 가는 게 어때? 마침 나도 마땅히 묵을 곳이 없는데.”


제론은 아직 호텔도 잡지 않았다. 술을 마시던 중에 나와서 싸움 구경을 하고 폭발에 휘말린 포어트를 구했으니
그럴 틈도 없었다.
포어트는 잠시 제론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누추하지만 머무실 곳이 마땅치 않으시면 얼마든지 계시다 가십시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포어트는 일단 제론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제론은 눈을 빛내며 그 뒤를 따랐다.
제론이 생각하기에 포어트가 저렇게 된 것은 집의 영향이 컸다. 분명히 포어트의 집에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포어트는 제론을 수도 외곽으로 데려갔다. 제론은 이러다가 수도를 벗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포어트는 수도를 벗어났다.
수도를 벗어나 30 분쯤 이동하자, 그럴듯한 저택 몇 채가 나타났다. 수도에 저택을 마련하기에는 재정적으로 조금
무리가 있어서 이런 식으로 수도를 벗어난 곳에 저택을 짓는 귀족들이 가끔 있었다.
그리고 이곳 란체 왕국에서 그런 귀족은 그리 드물지 않았다. 잦은 도박으로 인해 재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흔했는데, 그런 경우 저택을 처분하고 이런 식으로 수도 밖에 집을 짓곤 했다.
포어트도 그와 비슷한 경우였는데, 문제는 재산을 날린 사람이 포어트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라는 점이었다.
포어트는 상당히 성실한 사람이었기에 도박 한 번 하지 않았다.
오늘처럼 도박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몇 번 있었지만 말이다.
“이곳입니다.”
포어트는 10 여 개의 저택 중 한가운데에 있는 저택으로 제론을 안내했다.
제론은 저택 앞에서 감각을 한껏 가다듬었다.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저택 근처에 초고대유적이 있었다.
“여기 있는 저택들에 사는 사람 모두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하는 기사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포어트의 안색이 조금 어두웠다. 노력은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데, 여기 사는 사람들은
노력에 비해 실력이 조금 모자랐다.
그건 포어트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싸워서 죽인 놈은 포어트와 사실 몇 년 동안이나 경쟁하던 기사였다. 한데
결국 포어트를 넘어서고 말았다. 물론 죽은 건 그놈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환영합니다. 얼마든지 머무르셔도 좋습니다. 머무시는 동안 최선의 대접을 해 드리겠습니다.”
포어트는 정중하게 말했다. 어쨌든 생명의 은인이었다. 최대한 은혜를 갚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한 번 제론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론은 포어트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저택 안을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담장이 낮아서 안이 훤히 보였다. 별다른 특별한 점은 없었다. 그저 초고대유적에서 흘러나온 에너지가 가득할
뿐이었다.
제론은 포어트가 열어 준 문을 통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유적의 에너지가 훨씬 강하게 몸을 휘감았다.

Chapter 9 포어트의 저택 (1)

포어트의 저택은 제법 넓은 편이었다. 아무래도 수도 바깥에 지었으니 규모가 조금 커지는 게 당연했다.


제론은 저택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방에 머물렀다. 포어트는 성심을 다해 제론을 대접했다. 또한 포어트의 말을
들은 그의 아내도 정말로 고마워하며 정성을 다했다.
덕분에 제론은 편안하게 일을 볼 수 있었다.
제론이 란체 왕국 수도에 온 것은 수도 근방에 있는 유적을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그 유적은 란체 왕국이 보유한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큰 유적이었고, 유적에 새겨진 마법진이 워낙 많아서 수많은
마법사들이 방문하는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했다.
일단 그 유적에 방문해 초고대유적으로 가서 등록하는 것이 처음 이곳에 온 목적의 끝이었다. 한데 이제 목표가
하나 더 늘어나 버렸다.
이 저택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신기하단 말이야.”
저택이 신기한 게 아니라, 저택이 위치한 지역이 신기했다. 사실 처음에는 이 저택 지하에 초고대유적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아무리 감각을 날카롭게 갈고 느낌을 찾아가려 해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저택 한가운데에서
아네모스를 꺼내 팔찌에 넣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즉, 여기서 유적으로 갈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대체 이곳은 뭐란 말인가. 이곳은 웬만한 초고대유적 근방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흘렀다. 아마 근방 10 여
채의 저택에 사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 좀 다를 것이다.
과도한 에너지가 몸에 오랫동안 깃들기 때문에 그걸 제대로 된 마나호흡법을 통해 풀어 주지 않으면 움직임이
미묘하게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제론은 그렇다고 해서 포어트에게 마나호흡법을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저걸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온전히 포어트의 몫이었다. 아마 포어트가 저걸 극복하면 단숨에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제론은 당장 비밀을 알아내기가 어려우니 일단 수도의 유적부터 접수한 다음 차근차근 확인하기로 했다.
오늘이 바로 수도 유적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제론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라면 제법 괜찮은 성을 지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이곳에 흐르는 에너지를 이용하면 에어스트 왕국에 있는 성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큰 규모의 성을 짓는 것이
가능할 듯했다.
그만큼 많은 에너지가 흐른다는 뜻이었다. 물론 중앙 유적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다른 웬만한 유적에 비하면 굉장했다.
“여기에 비할 수 있는 유적이라면…… 하이쓰 산맥에 있는 유적 정도로군.”
하이쓰 산맥의 유적은 어마어마한 아티팩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도 복잡한 계산은 하이쓰 산맥의 아티팩트를
이용하고 있었다.
하이쓰 산맥의 아티팩트는 비단 하늘 높은 곳에 떠서 아래를 관찰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굉장히 복잡한 계산이
가능한 거대한 태블릿 같은 존재였다.
그걸 얻은 뒤로 태블릿의 성능이 월등히 높아졌다. 예전보다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뭐, 공장을 하나 만들어도 나쁘지 않겠군.”
기간트 공장을 세워도 충분히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대규모의 공장도 얼마든지 소화가
가능할 듯했다.
제론의 머릿속에 몇 가지 계획이 차곡차곡 쌓였다. 물론 그걸 실행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제론은 오후 내내 저택을 살폈다. 저택에 사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정도였다. 그들이 보기에는 마치
염탐꾼 같았을 것이다.
그렇게 의심을 눈초리를 모른 척하며 저택을 살피고 있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두워졌다. 밤이 되자 제론은
아무도 모르게 저택을 빠져나갔다.
제론이 하려는 일은 유적을 밤에 몰래 방문하는 것이었다. 굳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저택을 나온 제론은 곧장 유적으로 향했다. 유적은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기에 근방에도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다만 위치가 포어트의 저택의 정반대쪽인지라 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물론 제론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제론은 인적이 없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훌쩍 날아서 유적 근처에 내려섰다.
“이 유적은 좀 그러네.”
제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밤인데도 곳곳이 환했다. 술집마다 떠들썩한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사람이 미어터졌다.
유적이 어딘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입구가 환한 빛으로 둘러싸여서 어디서건 잘 보였다.
이 시간에도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아하니 다들 학자거나 마법사인 듯했다. 개중에는 엔지니어로 보이는
사람도 몇 끼어 있었다.
이렇게 유동인구가 많은 유적은 처음이었다. 제론은 일단 유적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관광지였기에 돈만 내면
누구든 들어갈 수 있었다.
통행료는 싸지도 비싸지도 않았다. 제론은 일단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지 안에 들어와 보니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입구부터 모든 벽과 바닥에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어찌나 빼곡한지 빈틈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곳은 제론에게도 상당히 유용한 곳이었다. 제론은 마법진을 찬찬히 살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곳곳에서 마법진을 베끼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워낙 복잡해서 그냥 베끼기만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온
신경을 집중해 베끼는 사람들이 입구부터 시작해 안쪽 깊은 곳까지 잔뜩 있었다.
“한밤중인데도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대단하군.”
사람이 많긴 했지만 규모가 워낙 크니 안으로 들어갈수록 사람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입구에서 100 미터쯤 들어가니 거미줄처럼 길이 많아지고 복잡해졌다. 군데군데 병사와 기사가 지키고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경계가 심하지 않았다.
유적에서 가져갈 만한 것이라고는 마법진뿐이었는데, 유적의 벽이 워낙 튼튼해서 마법진 자체를 뜯어 가는 건
불가능했다.
제론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벽을 만져 보았다. 돌벽이었는데 느낌이 왠지 묘했다. 그냥 보통 돌로 만들어진 벽은
아닌 듯했다.
‘하긴 그러니 이걸 파손시키는 게 불가능하지.’
기간트를 이용하면 부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기간트 소환이 금지된 곳이었다. 유적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에 아공간 간섭 마법진이 깔려 있었다.
란체 왕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적이었기에 취해진 조치였다. 이곳 마을도 거의 도시에 가까운 규모였기에
아공간 간섭 마법진을 설치할 만한 재정은 충분히 마련이 가능했다.
제론은 더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사람이 없는 이유는 아직 그 전에 있는 다른 마법진을 다
베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건, 그저 유적을 구경하는 목적인 사람과 유적에 새겨진 마법진을 베껴 가고 연구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구경을 목적으로 오는 사람은 밤이 되면 다 돌아간다. 마법진에 욕심이 있는 사람만 밤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물론 마법진을 베끼는 사람도 일찍 돌아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 경우 그들은 새벽같이 나온다.
그래서 이곳 유적은 밤이건 낮이건, 혹은 새벽이건 관계없이 언제나 사람이 많았다.
제론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인적이 점점 없어지더니 이내 사람이 아예 안 보였다.
경계병도 없었다. 유적이 워낙 크고 복잡해서 모든 곳에 병사를 배치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 경우 유적에서 무슨
짓을 하는 것보다는 길을 잃지 않게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게 훨씬 중요했다. 유적은 그 정도로 크고 복잡했다.
“굉장한 유적이군.”
사실 유적보다는 이곳을 싹싹 털어먹은 란체 왕국이 더 대단해 보였다. 아마 이 유적의 지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도를 절대 공개하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유적은 유물 수집가나 유적 사냥꾼들에게는 좋은 표적 중 하나였다.
유적이 워낙 크고 복잡했기에 혹시라도 란체 왕국에서 미처 못 보고 지나간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졌다. 란체 왕국이 얼마나 철저히 쓸어 갔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몇 년을
뒤지고 다녔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지도까지 만들 정도였는데, 란체 왕국은 그 덕분에 유적 근방에 엄청난 유동인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제론은 그런 제반 사항을 떠올리며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 유적의 중앙으로 가야 하는데,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유적의 중앙으로부터 끊임없이 초고대유적에서 흘러나온 에너지가 느껴졌다.
유적 중앙에 도착한 제론은 주위를 둘러봤다. 인적이 아예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도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새벽이 되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온 것이다. 물론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루룽!
바람이 뭉치며 아네모스가 나타났다. 제론은 팔을 들어 아네모스를 팔찌에 넣었다.
화아악!
강렬한 빛과 함께 제론의 몸이 유적 아래로 사라졌다.

Chapter 9 포어트의 저택 (2)

여느 유적과 마찬가지로 제론은 일단 로비를 한 번 둘러보고는 곧장 가장 아래층으로 이동했다.


“어마어마한데?”
지금까지 겪은 유적 중 가장 깊은 곳은 체른산 유적으로, 총 29 층에 달했다. 한데 이곳은 그보다 더 깊었다.
여기는 무려 101 층짜리 유적이었다.
“대체 뭘 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깊은 거지?”
그냥 층수만 많은 게 아니었다. 각 층의 높이도 엄청나게 높았다. 마지막 101 층만 콜로니의 통제실이 있기에
조금 낮을 뿐, 나머지는 각 층이 웬만한 다른 유적의 3 배가 넘을 정도로 높았다.
“이게 다 마티라고?”
제론은 깜짝 놀랐다. 100 층부터 31 층까지가 마티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30 층부터 21 층까지가 폴타를
구동하는 아티팩트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20 층의 유적은 상당히 특별했다. 그곳은 에너지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그 저택의 비밀이 이거였군.”
포어트의 저택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근처에 그와 비슷한 장소가 더 있었다. 그곳은 포어트의 저택까지 합해서
모두 20 군데나 되었다.
그곳은 특별한 장소였다.
태양에서 오는 빛과 열, 그리고 땅속에서 올라오는 지열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사방의 마나가 빨려 들어오는
구멍 같은 장소이기도 했다.
1 층부터 20 층까지는 그런 곳에서 에너지를 모아 유적으로 전송시키는 장치와 전송된 에너지를 저장하는
아티팩트로 이루어졌다.
그런 장치가 필요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 유적에 있는 모든 마티와 폴타를 구동시키려면 그 정도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마티의 수가 많은 만큼 당연히 정보 수집 범위도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이 정도면 란체 왕국 전역을 마티로 뒤덮고도 남겠군.”
실제로 정보 수집 범위가 란체 왕국보다 훨씬 넓었다. 당연히 그 범위 안에 폴타를 이용해 이동 게이트를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제론은 그제야 란체 왕국의 다른 유적이 마티를 많이 보관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 새로운 유적을 또
찾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란체 왕국은 마치 수도의 거대한 유적을 중심으로 군데군데 거점만 박아 놓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 테페룸 광산을 찾아내는 일이 아주 간단해지겠군.”
원래는 크란 제국의 테페룸 광산에 먼저 가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란체 왕국에 있는 테페룸 광산을
찾아가는 편이 빨랐다.
왕국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으니 테페룸 광산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비밀도 몽땅 캐낼 수 있었다.
뭔가 일이 확 풀려 버린 느낌이었다. 아마 마티를 이용하면 숨겨진 유적까지 몽땅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걸 하기에는 너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기에 굳이 애써서 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란체 왕국의 경우는 모든 장소에 마티를 보낼 수 있고, 어떤 곳이든 폴타를 이용해 이동할 수 있으니,
만일 유적에 특별한 기능이 없다면 굳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이런 유적이 다른 왕국에도 있었으면 좋겠군.”
만일 그렇게만 되어 준다면 정보에 관해서는 더 이상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유적을 찾음으로 인해서 문두스의 정보력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어쩌면 고대유적 정도는
바인이 알아서 찾아 줄지도 모른다. 물론 고대유적과 연결되지 않은 초고대유적은 찾을 방도가 없겠지만 말이다.
“그럼 테페룸 광산을 찾는 건 바인한테 맡겨 두고 난 슬슬 돌아가 볼까?”
제론은 태블릿을 통해 바인에게 새로운 명령을 전달했다. 아마 하루가 지나기 전에 란체 왕국 테페룸 광산의
위치가 제론에게 보고될 것이다.
일단 마티를 얻었으니 고대유적 내부의 상황을 확인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제론은 유적 중앙에 아무도 없는 순간을 노려 위로 올라갔다. 밝은 빛무리와 함께 제론이 유적 중앙으로
이동되었다.
유적 중앙에 도착한 제론은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복잡한 마법진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빛을
내뿜는 마법진이 섞여 있어서 마법진을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음? 여기가 중심이자 시작인 건가?’
이 유적의 마법진 자체가 여기서 시작된 걸로 보였다. 제론은 일단 마법진을 차근차근 분석해 보았다. 제론의
마법 실력이 엄청난 성장을 계속해 왔기에 그 정도 분석은 어렵지 않았다.
초고대문명의 마법은 고대문명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런 초고대문명의 마법 지식을 가진 제론이니 고대의 마법을
분석하는 게 어려울 리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수준 차이가 난다고 해도 분석하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했다. 또 머리도 많이 써야만 했다.
제론의 두뇌가 팽팽 돌았다. 이 유적에 있는 마법진은 그동안 제론이 봐 왔던 고대문명의 마법진과는 많이 달랐다.
‘거의 고대문명의 끝에 만들어진 마법진인 것 같군.’
제론은 온 신경을 집중해서 마법진을 차근차근 분석해 나갔다. 마법진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나를
잘못 분석하면 다음 마법진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래서 순서도 딱 맞춰서 분석해야만 했다. 군데군데 있는 발광 마법진만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그 마법진의
위치조차 처음부터 계산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제론은 마법진을 분석하며 점점 크게 놀랐다. 이 거대한 마법진이 통째로 하나였다. 제론은 태블릿을 꺼내 저장할
생각도 못 하고 마법진의 분석을 이어 나갔다.
모든 마법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이걸 완벽하게 분석한다면 모든 유적을 샅샅이 돌아다니게 되는
셈이었다.
물론 같은 장소를 수십 번 왕복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진이 이리저리 얽히고 꼬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론은 거의 홀린 듯이 마법진을 분석해 나갔다. 그 마법진에 대한 지식이 제론의 머릿속에 새겨지고 또
재구성되었다.
제론의 머리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자연스럽게 제론의 심장에서 마나가 흘러나와 머리로 스며들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제론의 머리가 식으며 김이
뿜어져 나왔다.
머리에서 펄펄 김이 나는 상태로 제론이 유적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 모든 마법진이 제론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채워졌다. 그리고 자동으로 초고대문명의 마법 지식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유적의 마법진은 조금 더 멋지고 세련되게 변해 갔다. 물론 제론의 머릿속에서 말이다.
제론은 밥도 먹지 않고서 유적을 끊임없이 배회했다. 입구에도 한 번 다녀왔다. 입구의 마법진은 대부분이 주
마법진과 관계없는 마법진 몇 개가 뒤섞여 있었기에 그저 한 번 스쳐 지나간 것만으로 끝이었다.
대신 유적의 중앙에는 수십 번을 들락거려야 했다. 정말 엄청나게 복잡하게 얽힌 마법진이었다.
제론은 무아지경에 빠져 마법진을 끝까지 파헤쳤다. 이런 식으로 마법진을 분석한 것은 제론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이곳의 마법진을 확인한 자들의 경우에는 제론만큼 마법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마법진을 분석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얼추 유적의 마법진을 거의 다 분석할 수 있었다.
제론은 천장을 보면서 마법진을 계속 분석해 나갔다. 그렇게 고개를 든 채 거미줄처럼 복잡한 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꿨다.
그대로 걸어가면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제론이 벽을 뚫고 그냥
지나간 것이다.
마치 벽으로 스며들어 간 것 같았다. 그 순간 유적 전체의 마법진이 미약하게 빛났는데, 그걸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적 곳곳에 밝혀진 발광 마법에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벽을 뚫고 들어간 제론은 여전히 마법진 분석에 여념이 없었다. 벽 안쪽에도 길이 나 있었고, 그 길 전체가
마법진으로 뒤덮여 있었다.
제론의 머릿속에 들어간 마법진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착착 맞춰져 갔다. 제론의 눈에서 강렬한 섬광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길의 끝에 도착했다. 벽으로 막혀 있었고, 그 벽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이 이 모든 마법진의
마지막 한 조각이었다.
제론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유적의 마법진을 재구성해서 다시 입체적으로 만든 마법진이었다.
만일 그걸 현실에서 그리려면 웬만한 작은 성 정도의 크기가 될 것이다.
제론의 머릿속에서 마법진이 완성된 순간, 유적 전체의 마법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유적에서 마법진을 베끼거나 연구하던, 혹은 구경을 하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이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이곳의 마법진은 분석 자체가 거의 되지 않았다. 어떤 기능을 가진 마법진인지도 모르고, 또 무엇으로 마법진을
그렸는지도 몰랐다.
한데 그 마법진이 빛나고 있으니 다들 놀라는 게 당연했다.
제론은 벽의 끝에 서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는 연달아 폭죽이 치는 것처럼 수많은 마법 지식과
마법진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반복했다.
그리고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점점 더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빛나는 광경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이 한순간 눈을 가렸다.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너무 강해서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빛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빛이 사라지자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손을 치웠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빛나던 마법진을 다시 바라봤다.
“헉!”
모두의 입에서 비슷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적 전체를 휘감고 있던 그 많은 마법진이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그럼 조금 전 그 빛이…….”
그 강렬한 섬광은 마법진이 사라지면서 나타난 빛이었다. 어쩌면 마법진 자체가 빛으로 변할 것일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그 어디에도 마법진은 없었다. 아니, 유적 내부가 마치 사포로 갈아
낸 것처럼 매끈해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벽의 끝에 서 있는 제론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크윽.”
제론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원했다.
조금 전 유적의 벽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마법진이 사라지면서 나온 게 맞았다. 그리고 그 정확한 정체는 바로
마나였다.
이 유적의 마법진은 마나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마나는 지금 제론이 서 있는 통로에 꽉 채워져
있었다.
바닥이 벗겨지며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 마법진은 이곳으로 마나를 모으고, 통로에 서 있는
사람에게 그 마나를 집중시키는 마법진이었다.
그것은 이 유적을 온전히 얻은 사람을 위한 선물이었다.
제론은 자신의 심장으로 모여드는 막대한 양의 마나를 느끼며 정신을 집중했다. 제론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거대한 마법진이 남아 있었다.
심장에 모여든 마나를 이용해 그 거대한 마법진을 차근차근 만들어 갔다. 제론 앞 허공에 빛나는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마법진은 벽과 천장을 뚫고 계속해서 그려졌다. 비록 시간은 좀 걸렸지만 결국 작은 성 정도 크기의 입체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그 순간 제론이 눈을 번쩍 떴다.
꽈르르르릉!
마법진이 빛나며 마법이 발현되었다. 거대한 마법의 정체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강렬한 섬광이었다. 제론은
섬광의 방향을 억지로 틀었다.
콰우우우우우!
작은 성 정도의 두께를 가진 섬광이 하늘로 쭉 올라갔다. 만일 이것이 수도를 직격했다면 수도가 최소한 절반은
날아갔을 것이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섬광이었다.
비록 섬광을 하늘로 올려 보냈지만 그 여파는 만만치 않았다.
우르르르르릉!
유적이 뒤흔들렸다. 유적 윗부분은 이미 섬광에 녹아서 형체도 없었다. 그리고 유적의 근간이 부서지며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가 되었다.
“도, 도망쳐!”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유적은 크고 복잡했지만 어쨌든 다들 무사히 유적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꽈르르르릉!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내지 않고 유적이 무너졌다. 유적 안에 갇힌 사람은 오직 한 명 제론뿐이었다.

Chapter 9 포어트의 저택 (3)

제론은 유적 전체가 무너졌는데도 끄떡없는 통로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통로 바닥에 나타났던 마법진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그 마법진 역시 1 회용이었던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군.”
정말 믿을 수 없었다. 고대마법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몰랐다. 그동안 겪었던 고대마법은 오늘 이 섬광에
비하면 몽땅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마법을 얻으면서 제론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마나링을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아마 새로운
마법을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드디어 9 개의 마나링을 완벽하게 얻었군.”
9 번째 마나링을 만드는 비밀은 뇌의 혹사였다. 뇌의 기능 자체를 높이지 않으면 9 번째 마나링을 만드는 게
불가능했다.
제론은 이번에 9 번째 마나링을 만들면서 그걸 확실히 깨달았다.
위이이이이잉!
제론의 심장에서 9 개의 마나링이 가속했다. 제론은 어떤 마법진이든 다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온몸이
충만해졌다.
제론의 몸 주위로 수십 개의 마법진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리고 일제히 빛과 함께 터져 나갔다.
퍼버버버버벙!
사방이 붉고 푸른빛으로 가득해졌다. 동시에 수십 개의 서로 다른 마법을 펼친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것이 가능해져셔 제론도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어쨌든 9 개의 마나링을 만들었으니 이제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내 편의 위주로 쓰는 수밖에 없나?”
어쨌든 대륙 곳곳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하면 엄청나게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게다가 제론이 설치하려는
텔레포트 게이트는 크란 제국 마탑의 게이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일단 설치비용이 월등히 적었다. 또한 설치도 간단했다. 그리고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사람이나 물자의 양이
엄청나게 많았다.
게다가 크란 제국 마탑의 게이트는 이동 가능 거리가 너무 짧았다. 왕국을 횡단하려면 최소 3 번은 게이트를
이용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새로운 게이트는 그렇지 않았다. 한 번에 왕국 간을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이동 거리가 길었다.
대룩 곳곳에 거점을 정해 설치해 이용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공개하면 아마 크란 제국 마탑의 게이트는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훨씬 안전하고 빠르며 이동할 때의 부작용도 거의 없는 데다가, 멀리까지 갈 수 있으니 누구라도 제론의 게이트를
이용할 것이다.
더구나 값을 아주 싸게 받을 생각이었다. 아마 물류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제론은 그 사이에서 떼돈을 벌 것이고 말이다.
거기까지 구상을 마친 제론은 씨익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일단 이곳을 나가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유적으로 가서 나가면 되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빠져나가기 전에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만 했다.
이곳은 란체 왕국 수도 유적에서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일한 부분이었다. 아마 이곳에는 아직 남은 유물이 있을
것이다.
일단 제론이 서 있는 곳은 사방이 막힌 통로였다. 제론은 통로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음? 한가운데?”
제론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분명히 통로 끝에 서 있었다. 한데 어느새 한가운데로 이동한 것이다.
뒤를 돌아본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가운데로 이동한 게 아니라 벽이 사라졌군.”
커다란 마법진, 마지막 마법진이 그려져 있던 벽이 사라지고 새로운 통로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통로 한가운데 서게 되었다.
제론은 다시 걸음을 옮겨 통로 끝으로 향했다.
통로 끝에는 작은 문이 있었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특이한 문이었다. 어쩌면 진짜 그림일지도 모른다.
제론은 문으로 다가가 힘껏 밀었다.
화아악!
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제론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사실 제론은 버틸 수 있었다. 빛에는 마나가 잔뜩 섞여 있었고, 그 마나가 제론을 휘감았다. 제론이 마음만
먹었다면 그 모든 마나를 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을 덮치는 마나의 흐름을 통해 이것이 벽 안쪽 모종의 공간으로 자신을
이동시키는 마법이라는 걸 알아챘다.
벽에 그려진 문이 유적의 진짜 유물이 보관된 곳으로 이동시켜 주는 마법의 문이었다.
환한 빛이 사라지자 제론은 주위를 둘러봤다. 보물이 산처럼 쌓인 방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물건이
보관된 방임은 확실했다.
일단 방의 크기는 사방 50 미터쯤 됐다. 제법 넓긴 했지만 유적에서 흔히 발견되는 유물 보관실과 비교하면
상당히 좁은 편이었다.
벽 하나에 궤짝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제론은 일단 그 궤짝들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어떤 궤짝에는 금괴가
가득 들어 있었고, 또 어떤 궤짝에는 보석이 잔뜩 들어 있었다.
궤짝의 수가 수십 개였는데 모든 궤짝이 그런 식이었다. 엄청난 돈이 생긴 셈이었다. 물론 제론에게는 큰 감흥이
없었다.
이 정도 보물이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공짜로 얻었으니 기분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제론은 일단 궤짝들을 아공간에 싹 담았다. 그다음 나머지 유물을 살폈다.
궤짝이 쌓인 벽과 닿아 있는 벽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무구 10 개가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제론은 그것이
히엠스를 담은 무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봤다.
“히엠스 10 기라…… 이건 좀 괜찮군.”
히엠스는 돈을 준다고 살 수 있는 기간트가 아니었다. 발굴형 기간트 중 최강의 기간트였다. 그걸 10 기나 얻을
수 있는 유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제론은 그것도 아공간에 챙긴 후, 다음 벽을 살폈다.
거기 있는 것이 진짜 유물이었다. 그곳에 거대한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제론은 천천히 그 책에 다가가 그것을 집었다. 낡아 보이는 책이었는데, 실제 만져 보니 재질이 상당히 특이했다.
이것은 금속으로 만든 책이었다.
제론은 순간 태블릿이 떠올랐다. 당연했다. 이 책은 고대의 마법 기술로 만든 태블릿과 비슷한 아티팩트였으니까.
제론은 책을 펼쳤다. 그러자 태블릿과 비슷한 모양이 나타났다. 그 위에 복잡한 글자가 새겨졌는데,
고대어였기에 제론이 읽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한쪽 면에는 그런 식으로 태블릿과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다른 한쪽 면은 조금 달랐다. 그곳에는 작은 버튼이 잔뜩
붙어 있었다. 버튼에는 문자가 하나씩 새겨져 있었는데, 그 문자가 고대어라는 걸 제론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버튼으로 조작하는 모양이군.”
사용법을 대강 익히는 건 아주 간단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지식을 몽땅 가져오는 것도 쉬웠다. 제론은
기념으로 그것을 아공간에 챙겼다.
물론 그 전에 그 내부에 들어 있는 모든 지식을 태블릿으로 이전시키는 걸 잊지 않았다.
이 아티팩트는 유적을 만든 사람이 자신의 모든 마법 지식을 담아 둔 유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만든 필생의
역작이기도 했다.
물론 제론에게 필요한 건 알맹이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제론은 란체 왕국 수도 유적의 정수까지 얻었다.

Chapter 10 포어트 (1)

제론은 유적의 모든 것을 얻은 뒤, 바로 유적 로비를 통해 유적 밖으로 나왔다.


유적은 폐허가 되었지만 그 주변에 형성된 마을은 다행히 전혀 피해가 없었다. 물론 유적이 무너진 자체가 마을에
큰 타격을 주겠지만 말이다.
무너진 유적을 한 번 둘러본 제론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유적의 잔해를 살펴봤다. 그저 매끈한 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나를 머금어서 상태가 변했나 보군.’
그 비슷한 방식의 돌 제조법이 초고대문명에도 있었다. 물론 훨씬 뛰어났다. 하지만 고대문명에도 그런 방식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제론은 어쩌면 고대문명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돌 하나를 집어 그것을 찬찬히 살펴보니 더 확실해졌다. 미약하게나마 돌이 머금고 있는 마나를 확실히 감지할 수
있었다.
아마 시간이 좀 지나면 이 마나는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도 아주 조금씩 돌 안에서 마나가 흩어지는
중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제론은 손에 든 돌을 휙 던지고는 주위를 슥 둘러봤다. 워낙 거대한 유적이었기에 무너진 잔해도 엄청나게 많았다.
지속적으로 돌에서 마나가 빠져나갔는데, 그래도 최소 사나흘 정도는 마나를 머금고 있을 듯했다.
이건 유적의 마법진을 유지하고 있던 마나였다. 그리고 유적의 마법진은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릴 정도로 강력한
공격 마법을 담고 있었다.
당연히 그런 마법진이 품고 있던 마나가 고요할 리 없었다. 상당히 우악스러웠고, 폭력성이 다분했다. 아마 이
안에서 사람들이 지내면 당장 싸움이 날 것이다.
제론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유적의 잔해로 일단의 무리가 들어섰다. 제론은 고개를 돌려 그들이 누군지
확인했다.
검은 옷을 입고 가슴에 7 개의 창이 방패에 얽힌 황금빛 문양을 새긴 자들이 우르르 들어서고 있었다.
란체 왕실에서 조사단을 파견한 모양이었다.
제론은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훌쩍 몸을 날렸다. 굳이 여기 있다가 얼굴 붉힐 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지금
이곳은 난폭한 마나로 꽉 찬 곳이었으니까.
제론이 사라지는 모습을 조사단도 발견했다. 유적이 워낙 넓긴 했지만 그래도 유적 한가운데에 사람이 서 있는
광경을 못 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거리가 멀었고, 제론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쫓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조사단 전원이 우르르 달려갔다. 그렇게 그들이 유적 한가운데쯤을 지날
때, 일부가 달리는 것을 멈췄다.
“그만!”
한 사람의 외침에 다들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그리고 소리친 사람을 바라봤다. 그가 조장이긴 했지만 직급이
위에 있는 건 아니었다. 수하의 의견을 묵살하지 못하도록 란체 왕실에서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이들 조사단은 란체 왕실 직속 기사단이나 다름없는 블랙스피어 기사단이었다. 그들은 온갖 궂은일을 다 도맡아
했다.
별의별 상황을 다 겪기에 많은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하지만 긴급 상황에서는 무조건 조장의
명령을 들어야만 했다.
지금은 긴급 상황이 아니었기에 일부 조원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저놈이 유적을 이렇게 만든 범인일 수도 있는데 왜 추적을 멈추라고 한 거요?”
조원 중 하나가 짜증을 내며 묻자, 조장이 인상을 썼다.
“어차피 쫓아가 봐야 잡지도 못한다. 차라리 유적을 더 면밀히 조사하는 편이 나아.”
“그거야 조장 생각이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조원의 말에 조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지금 상황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걸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돌에 남은 마나가 흘러나와 이런 상황을 유도해 냈다는 걸 그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Chapter 10 포어트 (2)

“말 함부로 하지 마라. 난 조장이다.”


“긴급 상황도 아닌데 조원의 말을 묵살하는 게 제대로 된 조장인가?”
“닥쳐라!”
“지금 이 상황을 상부에 그대로 보고하겠소.”
조원이 끝까지 반발하자 조장이 성큼 조원에게 다가갔다. 조장이 되려면 다른 조원에 비해 뛰어난 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무력이든 판단력이든, 아니면 배경이든 말이다.
지금 이들을 이끄는 조장의 경우는 배경이 뛰어났다. 그래서 조원들의 불만이 조금 쌓인 상태였다. 실력이 뛰어난
자신이 조장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 사람이 셋이나 있었다.
그 세 명이 모두 나서서 조장 앞을 가로막았다.
“힘으로 나오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소.”
그들의 형형한 눈빛에 조장이 움찔 놀랐다. 만일 평소라면 이런 상황까지 가지도 않았겠지만, 설사 간다 하더라도
이렇게 되면 조장이 한 발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와 상황이 많이 달랐다.
“지금 날 힘으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건가?”
조장의 말에서 억눌린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자 조장 라인에 선 조원들이 우르르 조장 뒤로 이동했다.
순식간에 조사단이 두 패로 갈려 버렸다.
“정중하게 사과해라.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맹세해라.”
조장의 말에 세 조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을 따르는 조원도 제법 있었다. 패가 거의 정확히 둘로 갈린 건
지금의 조장이 뒤로 손을 많이 썼기 때문이었다.
“말이 너무 심하군. 우리가 뭘 잘못했지? 조장에게 의견을 내는 건 자유로운 것 아닌가? 긴급 상황도 아닌데
말이야.”
“긴급 상황이다. 내가 긴급이라도 판단하면 긴급 상황이다. 내 말이 틀렸나?”
말은 맞다. 하지만 그건 누가 봐도 긴급이라고 인정할 만한 상황이라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조장의 역량이 워낙
뛰어나 조원들보다 훨씬 대단한 판단력을 가졌거나.
하지만 지금은 그 두 가지 모두 아니었다. 당연히 조원들이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틀렸소. 조장의 역량이 모자라니 우리의 의견을 더 잘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조원의 말이 조장의 역린을 건드렸다. 조장은 머리로 피가 쫘아악 몰리는 걸 느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검을 뽑아 휘두르고 있었다.
약간 당황했지만 이내 내친걸음이라 여기니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다. 검에 실린 힘이 더욱 강해졌다.
째앵!
조원이 당황하며 황급히 검을 뽑아 조장의 공격을 막았다.
“미쳤군!”
“그래! 미쳤다! 네놈이 어설픈 훈계 때문에 미쳤다! 네놈이 한 행동은 하극상이야!”
조장이 더욱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조원도 더 이상 당황하지 않았기에 당하지도 않았다.
원래부터 검술 실력은 앞으로 나선 세 조원이 훨씬 뛰어났다.
“뭣들 해! 다 족쳐!”
조장이 외치자, 조장 뒤에서 당황하며 서 있던 조원들이 우르르 검을 뽑아 달려들었다. 당연히 상대편에 서 있던
조원들이 그냥 당하고 있을 리 없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검광이 난무했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제론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혀를 찼다.


“쯧, 마나의 영향이 정말 상당하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마 저기에 사람이 더 들어가면 피해가 훨씬 커질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도움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솔직히 이 왕국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결투를 부추기고 도박을 장려해서 왕실의 재정원으로 삼는 자들이
마음에 들 리 있는가.
게다가 저들은 그 가장 아래에서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굳이 도와줘 봐야 란체 왕국 백성들만 더
나락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제론은 검은 옷을 입은 조사단이 유적으로 더 많이 몰려오는 걸 확인하고는 몸을 돌렸다. 아마 싸움은 더 커질
것이다.

제론은 곧장 포어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일단 여기서 며칠 더 묵어야 하기 때문에 떠나지 않았다는 걸 알릴


필요가 있었다.
벌써 유적에서 며칠이나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떠난 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제론이 저택에 나타나자, 마침 저택 앞에 나와 있던 포어트가 제론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대체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전 말씀도 없이 사라지셔서 그냥 떠나신 줄 알았습니다.”
제론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떠나긴, 잠깐 볼일이 있었을 뿐이야.”
“그, 그러시군요.”
무슨 볼일인지는 차마 묻지 못했다. 포어트는 머뭇거리며 제론의 눈치만 살폈다.
“아, 지금 배가 상당히 고프군.”
“바, 바로 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당당하게 밥까지 요구하는 제론의 모습에 포어트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어쨌든 은인이니 그 정도
대접이야 너무나 당연했다.
제론은 자신이 며칠이나 굶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갑자기 어마어마한 허기가 몰려와 정신이 아찔해졌다.
기분으로는 쇠라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포어트는 서둘러 제론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미리 지시를 받고 분주하게 움직인 요리사들 덕분에 테이블이 금세
음식으로 가득 찼다.
제론은 그 모든 음식을 남김없이 싹 먹어 치웠다. 꼭꼭 씹어서.
배가 부르니 좀 살 것 같았다. 밥을 먹으면서 마나를 열심히 돌렸더니 온몸 구석구석으로 영양분이 충분히 공급된
느낌이 들었다. 힘이 불끈 들어갔다.
밥을 모두 먹은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포어트의 저택에 흐르는 에너지의 양이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제론이 유적을 등록하는 바람에 유적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밖으로 흘러넘치는 에너지의 양이 많이 줄어든
것이다.
물론 그래도 사람이 느끼기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포어트를 비롯해 이 저택에 사는 사람은 같은
증상을 겪게 된다는 뜻이었다.
방에 도착한 제론은 문을 닫고 침대에 앉았다. 일단 한숨 자는 게 나을 듯해서 자리에 누웠다. 생각해 보니 최근
며칠 동안 한숨도 못 잤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몸이 피곤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제론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생각의 대부분은 새로 얻은 유적과 포어트의
저택에 관계된 것이었다.
“음? 가만.”
제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뭔가 번뜩 떠올랐다.
“란체 왕국에도 소드 마스터가 하나 있었지?”
현재 알려진 소드 마스터는 크란 제국에 두 명, 그리고 란체 왕국에 한 명이 있었다.
제론은 란체 왕국의 소드 마스터도 어쩌면 유적에서 에너지를 모으는 장치 근처에서 살다가 그걸 이겨 내고 소드
마스터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피곤하지도 않은데 궁금증부터 해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에너지가 모이는 장소가 어딘지는 다 알고 있었다. 무려 20 군데나 되지만 폴타가 있으니 어디든 금방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보고도 아직 안 받았군.”
바인에게 지시를 내린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유적에서 9 번째 마나링을 만드는 내내 바인이 조사를 했을 테니
아마 분명히 테페룸 광산에 대한 모든 정보를 보고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태블릿을 통해 확인해 보니 벌써 이틀 전에 보고가 들어왔다.
제론은 가만히 위치를 가늠해 봤다. 수도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방비도 삼엄했다. 수많은 기간트가
광산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위치부터 시작해서 광산에 관계된 모든 일이 비밀이었다.
심지어 일하는 사람들조차 그곳이 테페룸 광산인지 몰랐다. 테페룸을 광물에서 뽑아내 괴로 만드는 일도 모든
것이 철저히 분업화되어 있었고, 각자의 파트에서 일하는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일했다.
물론 가끔 눈치를 챈 사람도 있긴 했지만 그렇게 눈치가 빠른 자들은 자신의 목숨이 달렸다는 걸 알고 더 철저히
비밀을 지켰다.
“뭐, 그래도 들어가는 게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군.”
제론은 마티를 이용해 테페룸 광산을 샅샅이 살폈다. 인적이 없는 곳도 제법 많았고, 잘 살피면 외부에서 들어갈
만한 빈틈도 몇 군데 있었다.
“일단 인적 없는 곳으로 이동하는 게 낫겠군.”
폴타를 이용하면 아주 간단히 그곳에 게이트를 열 수 있었다. 그렇게 이동하면 누구도 모르게 광산에 들어가는 게
가능했다.
테페룸 광산 근처에 유적이 있는 건 확실했지만, 그 유적이 광산 안에 있을지 아니면 떨어진 곳에 있을지는 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제론은 좀 더 살펴보면서 계획을 철저히 세우기로 했다. 급할 건 없었다. 에어스트 왕국에도 주기적으로
다녀오고 있었고, 특별히 처리할 일도 없었다.
슈린 왕국은 차근차근 에어스트 왕국에 흡수되고 있었다. 기존 슈린 왕국의 귀족들은 대부분 몰락하거나 외국으로
쫓겨났고, 에어스트 왕국에서 인정한, 즉, 바인이 철저히 조사를 마친 인재들로 그 빈자리가 채워졌다.
거기에 제론이 나서거나 개입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저 보고를 받고, 원하는 게 있으면 명령하면 끝이었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그러니 제론이 좀 더 오랫동안 밖으로 나돈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제론은 마티로 테페룸 광산 내부를 찬찬히 살피고, 또 주변도 살폈다.
테페룸 광산은 5 개의 커다란 마을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마을들을 이용해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인력을
수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광산의 위치 자체는 깊은 산속에 있었다. 그래서 크게 보면 큰 산 몇 개를 5 개의 마을이 둘러싼 구조였다.
보통 그런 식이면 마을 사람들은 산을 통해 생활을 영위하기 마련인데 이 마을들은 산에 가까이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섯 마을은 모두 근처에서 농사를 짓고, 또 산 옆으로 흐르는 강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아갔다. 하지만 가장 큰
수익원은 상업이었다.
다섯 마을은 각각 상단이 하나씩 있었는데, 마을 자체가 상단의 소유나 다름없었다.
참으로 특이한 구조였지만 그 다섯 상단이 모두 란체 왕국에서 운영한다는 걸 알고 나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란체 왕국은 그 다섯 상단을 이용해 테페룸을 이송하고 외부로 팔았다.
그래서 상단이 있는 마을인데도 다섯 마을에는 외부인이 많지 않았다. 외부인이 들를 만한 이유가 별로 없는 것도
이유였고, 또 의도적으로 외부인을 막기도 했다.
하지만 외부인이 마을에 간다고 해서 이상한 시선을 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최대한 조심할 뿐이었다.
제론은 일단 그 마을들부터 가 보기로 했다. 어쩌면 굳이 산에 들어가지 않고도 모든 일을 다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일단 오늘은 이 저택에 머물기로 했다. 어차피 밤이 되었으니 굳이 지금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내일 오후쯤
이동해도 충분했다.
제론은 태블릿을 통해 포어트의 저택 말고 란체 왕국의 다른 지역에 있는 에너지홀을 조사해 봤다.
20 군데나 있었지만 어차피 마티를 이용하는 것이기에 조사 자체는 아주 간단했다.
“일단 이 호수는 빼고, 여기도 빼고, 여기도…….”
에너지홀 중 10 군데는 호수라든가 황무지 혹은 숲 같은 인적이 아예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10 군데 중 5
곳은 도시와 도시를 잇는 길 한가운데에 있었다.
도로의 경우 인적이야 있겠지만 그걸로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가 어려웠다.
나머지 5 군데가 아예 사람이 정착해서 사는 곳이었는데, 포어트의 저택처럼 10 여 채의 저택이 모인 곳이 또
하나 있었고, 3 곳에는 성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3 개의 성 중 하나에 란체 왕국의 소드 마스터인 샤프트 폰 슈베르트가 살고 있었다.
“역시 그렇군.”
샤프트는 에너지홀에서 유입된 엄청난 에너지를 몸으로 받아들인 다음 그걸 극복했음이 분명했다.
아마 본인은 자신이 어떻게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해서
에너지홀의 에너지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란체 왕국이 전통적으로 소드 마스터를 보유한 적이 많은 것은 검을 숭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에너지홀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그렇게 소드 마스터가 자주 나오니 자연스럽게 검을 숭상하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Chapter 10 포어트 (3)

‘굳이 호흡법을 알려 주지 않아도 소드 마스터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는데…….’


제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포어트를 소드 마스터로 만든다고 자신에게 무슨 득이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딱히 손해날 것도 없지.’
소드 마스터가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해도 제론이나 에어스트 왕국에 손해날 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란체 왕국은 크란 제국과 인접해 있다. 크란 제국을 견제하는 효과가 생길 것이다.
제론은 일단 포어트를 소드 마스터로 만들어 주기로 했다. 물론 비밀을 지키도록 맹세를 시킬 작정이었다.
포어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맹세를 지키는 타입이었다. 설사 자신이나 가족의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해도 말이다.
제론은 그렇게 결심하고 잠을 청했다. 일단 푹 쉬고 싶었다.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튿날, 제론은 포어트 일가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본래 손님으로 왔으면 식사를 함께하는 것이 서로의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법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딱히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포어트도 마찬가지였다.
신경 쓰는 것은 포어트의 다른 가족들밖에 없었다. 다른 가족이라고 해 봐야 아내와 아들뿐이었지만 말이다.
제론은 문득 포어트의 아내를 쳐다봤다. 포어트가 결투를 할 때, 상대방이 떠들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그는 포어트의 아내와 정을 통한 것처럼 말했다. 한데 막상 확인하니 외간 남자와 불륜을 저지를 만한
여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마나를 보면 그 사람의 기질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그게 더 많이 보인다. 제론이
보기에 포어트의 아내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제론은 식사를 하며 포어트의 아들도 살펴봤다. 나쁘지 않았다. 기질이 괜찮았다. 배신할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기질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바인에게 지시하면 포어트를 더 깊이 분석할 수 있겠지만 제론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솔직히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포어트가 나중에 어떤 행동을 하든 말이다.
식사를 마친 제론은 포어트를 보며 말했다.
“잠깐 나 좀 볼까?”
포어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제론을 따라 나섰다.
제론은 저택 뒤쪽에 있는 공터로 향했다. 인적도 없고, 다른 저택에서 볼 염려도 없는 으슥한 곳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포어트의 물음에 제론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네 검술,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그 말에 포어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검에 대해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건 참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은인이라고 해도 말이다.
“말씀이 좀 심하시군요.”
제론은 포어트의 반응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뽑았다. 그리고 이리저리 휘둘러 봤다.
“이런 식이었나?”
제론이 휘두르는 검을 본 포어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제론이 펼치고 있는 것은 분명히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검술이었다. 물론 군데군데 틀린 부분도 있지만 요체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대, 대체 어떻게……!”
포어트는 혼란에 휩싸였다. 가문의 검술을 아는 건 이제 포어트와 그의 아들뿐이었다. 오래전 가문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의 후예도 같은 검술을 익힐 수 있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너무나 희박했다.
“결투를 지켜봤으니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사실은 고작 결투를 지켜봤다고 펼칠 수 있는 검술이 아니었다. 당연히 제론은 태블릿의 힘을 이용했다. 대결
자체를 녹화해서 몇 번이고 틀어 보며 검술의 형을 따 냈다.
그리고 태블릿의 계산 능력을 이용해 검술 자체를 정립했다.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았고, 썩 그럴듯했기에 제론은
그 검술을 익혔다.
모든 검술의 근본을 관통하는 건 제국 기초 검술이었다. 그걸 완벽하게 익힌 사람은 다른 검술을 익히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론은 고작 하루 만에 포어트가 익힌 검술의 요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한데 느끼는 게 고작 그것뿐이야? 같은 검술을 익혔다는 것 말고는 없어?”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마치 검이 수십 개로 늘어난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제론의 검은 빠르고
강력했다.
포어트는 제론이 검을 펼치는 광경을 보다가 표정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같은 검술인데 자신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자신이 펼칠 때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내가 저 정도로 익혔다면 그 미친놈과의 결투에서 밀릴 일도 없었겠지.’
포어트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제론은 검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어때? 이제 좀 달라 보이나?”
“그렇습니다.”
포어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대체 제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제론이 씨익 웃었다.
“내가 원하는 건 없지. 오히려 그 반대 아닌가?”
포어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검술을 다듬어 주실 생각이라면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제가 가진 단점쯤이야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검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은 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르다 보면 미묘하게 자세나 관절이 틀어지는데,
그건 포어트의 힘으로 조절이 불가능했다.
“문제가 뭐라고 생각해?”
포어트가 눈을 크게 뜨고 제론을 바라봤다.
“특별한 문제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럼 설마 문제를 고칠 수도 있습니까?”
“일단 질문에 대한 답부터 생각해 봐. 문제가 뭐라고 생각해?”
“체질입니다.”
포어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체질 말고는 답이 없었다. 그러니 아들도
비슷한 과정을 겪는 것 아니겠는가.
제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체질 문제가 아니라 마나 문제였지만 크게 따지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마나도 어쨌든 몸에 존재하는 것이니 체질이라고 할 수도 있었으니까.
“같은 체질을 가진 사람이 또 있다는 건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이 근처에서 여럿 봤습니다.”
포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말을 하고 보니 왠지 이곳이 저주받은 저택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 그건 알고 있나? 샤프트 폰 슈베르트도 같은 체질이라는 거 말이야.”
포어트가 경악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제론을 불신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 왕국이 자랑하는 소드 마스터입니다. 그런 분이 이런 저주받은 체질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주 받은 체질? 누가 그래?”
“이렇게 검을 익히기 어려운데 이게 저주받은 것이 아니면…….”
포어트는 뒷말을 흐렸다. 왠지 그 말을 끝까지 하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에게는 아직도
꿈이 있었다. 이 저주받은 체질을 이겨 내고 한 발 더 나아갈 거라는 꿈이 말이다.
“어려우니까 소드 마스터가 되었지. 의심스러우면 직접 본인에게 물어봐도 좋아.”
그 말에 포어트가 피식 웃었다. 소드 마스터인 샤프트가 뭐 아쉬울 게 있다고 자신과 만나 대화를 나누겠는가.
“왜? 못 만날 것 같아?”
“당연하지 않습니까.”
“같은 소드 마스터가 되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지. 아니, 궁금해서 오히려 그쪽에서 찾아올지도 모르겠군.”
“하하하. 빈말이라도 기분은 좋군요.”
포어트는 웃어넘겼다. 그래도 얘기를 하다 보니 기분이 좀 풀렸다.
“빈말? 하긴, 그렇게 받아들이는 게 보통이긴 하지. 그럼 만일 소드 마스터가 되면 어떻게 할 건데?”
포어트는 진지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 결국 반드시 소드 마스터가 될 것입니다. 그게 제 꿈이고 삶의 목표입니다. 그러니 그걸 가지고 뭘 어떻게
하고 말고 할 일은 없습니다.”
“내 말은 오늘 말이야. 오늘 소드 마스터가 된다면 어떻게 할 건데?”
포어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아무리 은인이지만 이런 식이면 저도 참기 어렵습니다.”
제론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문제지? 만일 되면 어쩌겠냐고 물은 것뿐인데. 어차피 안 될 거라면 뭐가 두렵지? 충성 맹세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제론의 말에 포어트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충성 맹세는 장난으로 언급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성한 의식입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면 됐다. 이제 더 대가를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좋아. 그럼 그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소드 마스터에 대해 얘기해 보지.”
“정말 끈질기시군요.”
“이리 와서 돌아서 봐. 등을 좀 만져 보고 싶군.”
포어트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무의미한 대화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제론은 포어트의 등 한가운데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고 몸 내부를 살폈다. 제론의 손바닥에서
가느다란 마나가 흘러나가 등을 뚫고 들어갔다.
마나가 몸 곳곳에 막혀서 정체되어 있었다. 이러니 제대로 검술을 못 펼칠 수밖에 없었다.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마나 자체는 엄청나게 많았다. 일반적인 익스퍼트와는 차원이 다른 양이었다. 몸 곳곳에 마나가 정체되며 그
자리에 엄청난 양의 마나가 쌓인 것이다.
마나가 정체된 것은 그 원인을 없애 주면 뚫린다. 포어트의 경우에는 마나로드의 손상이 원인이었다. 아마 소드
마스터인 샤프트는 좀 달랐을 것이다. 마나로드가 손상되었다면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없었을 테니까.
제론은 손상된 마나로드를 고쳐 주었다. 제론이 그저 소드 마스터이기만 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제론은 소드
마스터이면서 동시에 9 개의 마나링을 가진 엄청난 마법사이기도 했다.
제론의 손바닥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우우우웅!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지며 빛가루가 되어 포어트의 몸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 빛가루는 포어트의 부서진
마나로드를 복구시켰다.
그저 마나로드가 복구된다고 마나 정체가 풀리는 건 아니었다. 이제 기본적인 작업이 남아 있었다. 마나를 몸에
흐르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걸 위해서는 그동안 마나로드에 쌓인 불순물을 없애야만 했다.
마나로드 복구보다는 어려웠지만 그것도 제론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제론은 아주 간단히 마나로드에
쌓인 불순물에 구멍을 뚫었다.
콰아아아!
뚫린 구멍으로 마나가 물밀듯이 밀려갔다. 제론은 손바닥에서 뽑아 보낸 가느다란 실 같은 마나로 포어트의
마나로드에 길을 냈다.
불순물이 없는 곳도 많았지만 막힌 부분이 다 중요한 곳이라 포어트가 검술을 펼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제론은 그 모든 과정을 일사천리로 해낸 뒤 등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한 발 떨어져서 포어트를 지켜봤다. 지금 포어트는 아주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럴 때 괜히
누군가 건드리면 곤란했다.
포어트는 몸속에서 거칠게 흐르는 마나에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그 흐름의 편안함과 시원함에 몸과 마음을
맡겨 버렸다.
그것은 다분히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극히 옳은 선택이기도 했다.
툭! 투둑! 투두둑!
포어트는 속에서 뭔가가 계속 터지는 느낌에 몸을 움찔 움찔 떨었다. 한데 그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시원해졌다.
막혔던 뭔가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당연했다. 정말로 막혔던 마나로드가 뻥 뚫리고 있었으니까.

Chapter 10 포어트 (4)

“후우우욱.”
포어트는 숨을 길게 내뱉으며 눈을 떴다. 정신이 돌아오고 가장 먼저 느낀 건 지독한 악취였다.
“크윽!”
포어트는 코를 막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옷이 새까맸다. 몸에서 나온 구정물 같은 땀이 온통
배서 빨아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얼른 가서 씻고 옷부터 갈아입지?”
제론의 말에 포어트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저택 밖으로 뛰어나갔다. 너무 더러워서 차마 집에서 씻을 수가
없었다.
포어트는 집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샘으로 가서 옷을 훌훌 벗고 몸을 깨끗이 씻었다.
몸을 씻고 나니 옷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샘에서 집까지는 제법 멀었다. 거기까지 벌거벗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시커먼 옷을 다시 입기도 싫었다. 옷에서 나는 악취가 너무 지독했다.
“일단 옷부터 태웠어야지.”
포어트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봤다. 그곳에는 어느새 제론이 깨끗한 옷을 한 벌 들고 서 있었다.
제론은 포어트에게 옷을 내밀었다. 온몸이 젖어 있었지만 그건 문제될 게 없었다.
“마나를 온몸으로 뿜어내 봐.”
제론의 말에 포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감고 이미지를 세웠다. 처음에는 어떻게 할지 몰라 눈살을
찌푸리고 인상을 쓰고 난리를 피웠지만 이내 방법을 찾아냈다.
슈아악!
온몸의 물기가 마나에 밀려 싹 날아가 버렸다. 포어트는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자신의 몸을 살폈다. 물기가 거의
모두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해 놓고도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닌데, 빨리 입는 게 어때?”
제론의 말에 포어트가 머쓱한 표정으로 서둘러 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제론은 더러운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작은 마법진 하나가 생겼다가 흩어지며 불꽃이 일어났다.
화르륵!
포어트의 옷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물론 포어트는 옷을 입느라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그저 매캐한
냄새 때문에 깜짝 놀라 옷이 타고 있는 광경을 쳐다봤을 뿐이었다.
그것 역시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포어트에게 지금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자신의
몸이었다.
“따라와라.”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어딘가로 향했다. 포어트는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샘 근처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 조금 깊이 들어가니 널찍한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 한가운데에 선 제론은 포어트를 보며 검을 휙 던졌다. 포어트는 얼결에 그 검을 잡았다. 손에 착 달라붙는
것이 마치 자신의 검처럼 느껴졌다.
“굉장한 명검이로군요.”
“중요한 건 검이 아니라 실력이지. 뭔가 달라진 거 느끼지 못하겠어?”
포어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라졌습니다.”
온몸에서 힘이 넘쳐흘렀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얻었다.
“검 한번 휘둘러 봐.”
제론의 말에 포어트가 진지한 자세로 검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포어트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검술을 펼쳤다. 처음에는 느렸지만 차츰 속도를 높여 나중에는 검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휘둘렀다.
검술을 모두 펼친 포어트는 가만히 서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런 날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감상에 젖는 것도 좋지만 소드 마스터가 되었으면 마나를 써먹어 봐야지.”
그 말에 포어트가 눈을 번쩍 떴다. 소드 마스터라니! 정말로 이것이 소드 마스터란 말인가.
생각해 보면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몸이 가볍고 힘이 넘쳐흐르니 말이다. 게다가 감각도 완전히 달라졌다.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듯했다.
“이게…… 이게 소드 마스터로군요.”
포어트는 자신의 몸을 거칠게 질주하는 마나를 느끼며 그것에 의념을 집중했다. 마나는 거칠었지만 포어트의 말을
제법 잘 들었다.
우우웅!
포어트의 검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포어트는 그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샤아악!
푸른 섬광이 검에서 떨어져 나갔다.
꽈앙!
나무 한 그루가 박살 났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이게 바로 소드 마스터의 힘이었다.
“어쨌든 축하해.”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박수를 짝짝 쳤다.
포어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제론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제론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었다. 포어트에게는 은인도 중요하지만 가족이나 나라도
중요했다.
어차피 제론도 포어트에게 대단한 걸 원하지 않았다. 그의 충성을 받아서 뭐하겠는가. 어차피 포어트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사가 수백 명에 달한다.
기본적으로 에어스트 왕국의 기사들은 소드 마스터였다. 물론 제론의 기준으로는 익스퍼트였고 말이다. 게다가
그들은 강력한 검술인 라이트닝 소드를 익혀서 동급의 수준을 가진 상대와 싸우면 압도할 수 있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최하급 기사와 비교해도 포어트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심한 격차가 났다. 마나에
대한 이해도와 숙련도 차이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포어트는 이제 막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아마 10 년 정도는 더 수련하고 실전 경험을 쌓아야 에어스트 왕국의
최하급 기사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라이트닝 소드의 힘이었다.
“그거면 됐다. 어차피 나도 사람 됨됨이를 보고 한 일이야. 만일 악한 자였다면 이런 도움을 주지도 않았을
거다.”
제론의 말에 포어트는 더욱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억지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좋은 기사가 되어라. 그리고 당분간은 소드 마스터가 된 사실을 비밀로 했으면 좋겠군. 밝히는 건 내가 떠난
다음에 해라.”
“알겠습니다.”
포어트는 웬만하면 제론의 말을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체를 알게 되면 나중에라도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고 다짐했다.
“내 정체가 궁금하겠지? 그건 떠나기 전에 알려 주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빙긋 웃었다. 포어트는 그 미소를 바라보며 미안함에 고개를 숙였다.

Chapter 11 테페룸 광산 (1)

저택으로 돌아온 포어트는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 갔다. 그리고 제론은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갔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테페룸 광산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테페룸 광산이 아니라, 그 근방에
있을지도 모를 초고대유적에 대해 알아볼 계획이었다.
제론은 인적이 없는 숲으로 들어가 폴타를 이용해 게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테페룸 광산을 둘러싼 마을 근방에
대응 게이트를 열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마을에서는 좀 떨어진 곳이었고, 당연히 인적이 없는 장소였다.
제론은 게이트를 없앤 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다음 마을로 향했다. 마티를 통해 주변 지형을 충분히 숙지했기
때문에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다섯 마을의 규모는 다들 비슷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분명히 약간이나마 차이가 존재했다. 제론은 그중 가장 큰
마을로 갔다.
마을 입구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 블랙스피어 기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보통 마을의 경우는 누군가가 지키거나
하지 않고, 도시라 하더라도 기사가 아닌 병사가 지키는데, 고작 마을을 기사단이 지킨다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제론은 이미 그 부분에 대한 건 알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기사 하나가 제론에게 지극히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마을을 통과하는 누구에게나 묻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같은 답을 말한다.
“겔프 영지로 가는 길에 잠깐 들렀습니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미리 준비한 신분패를 꺼냈다. 기사는 그것을 찬찬히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
당연하다는 듯 마을로 들어선 제론은 일단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여관 밀집 지역으로 향했다.
겔프 영지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영지였다. 예전 레늄 왕국의 네이드 후작령과 비슷했다. 그리고 남부에서 겔프
영지로 가는 길 중간에 이 마을이 위치했다.
안 들를 수도 있지만 타이밍이 맞으면 이 마을에서 하룻밤 묵는 게 편했다.
제론이 가장 먼저 이 마을에 온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제일 들어가기 편한 마을이었다. 또 방비가 가장
허술한 마을이기도 했다.
마을은 상당히 번화했고, 사람도 많았다. 겔프 영지로 가기 위해 들른 사람도 제법 많았고, 원래부터 마을의
일원으로 상단에서 일하는 자의 수도 엄청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돈을 빨아먹으려는 상인들로 북적댔다.
제론은 마을의 번화가를 걸으며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이 마을에서 풍기는 느낌이 상당히 독특했다. 제론은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테페룸 때문이었다. 이 마을은 항상 테페룸이 머무는 곳이다. 기간트처럼 코어에 가둔 테페룸이 아니라
밖으로 노출된 테페룸은 확실히 주변에 끼치는 영향이 달랐다.
‘좋은 느낌은 아니야.’
제론의 아공간에도 테페룸이 잔뜩 있긴 했지만, 그건 아공간에 있기에 외부로 영향을 전혀 끼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테페룸의 영향력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이 마을은 수십 년 동안 테페룸의
영향력하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다른 곳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기간트 공방이 이 마을과 조금 비슷한 느낌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서조차 테페룸은 특별히 보관되기
때문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반면 이 마을은 테페룸 광산과 인접해 있었다. 기간트 공방과는 완전히 달랐다.
제론의 시선이 마을 밖 커다란 산으로 향했다. 봉우리가 무려 5 개나 되는 큰 산이었는데, 그곳에 테페룸 광산이
있었다.
테페룸의 매장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른 광맥과 달리 테페룸 광맥은 측정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재수 없으면 내일이라도 테페룸이 말라 버릴 수 있었다.
물론 그럴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제론은 일단 근처에서 가장 훌륭한 여관에 방을 잡았다. 거기에서부터 차근차근 초고대유적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쉽지는 않을 것 같군.’
제론은 이번 일이 굉장히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다. 마을에 오기 전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을에
오니 그게 아니었다.
테페룸 때문이었다. 테페룸의 영향력이 제론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걸 뚫고 초고대유적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 패턴을 캐치해 내야만 한다. 제론은 벌써부터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여관에서 가장 좋은 방에 들어간 제론은 습관적으로 태블릿을 꺼냈다.

Chapter 11 테페룸 광산 (2)

이미 이 여관에는 특별한 정보 수집 장치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 바인에게 그에 관한 모든 지식을 전해 줬기에


제론이 어느 여관에 머물든 그 여관에 대한 모든 것을 싹 보고했다.
제론이 태블릿을 꺼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인의 보고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매일 들어오는 일상적인 보고였는데, 에어스트 왕국의 상황이라든가, 주변의 정세에 관한 보고가 주를 이뤘다.
그리고 제론이 특별히 지시한 정보를 찾아 보고를 하기도 했다.
한데 오늘은 조금 특별했다.
“란체 왕국 암류에 관한 보고서?”
일상적인 보고는 평소의 절반도 채 안 될 정도로 적었다. 한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보고서가 엄청난
분량으로 도착했다.
“이게 뭐지?”
일상적인 보고의 양이 줄어든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슬슬 보고할 게 없어질 때가 되었다.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 말이다.
한데 란체 왕국 암류에 대한 보고라니, 제론은 갑자기 흥미가 동했다.
“어디 읽어 볼까?”
상당히 길었지만 워낙 조리 있고, 재미있게 써 놨기에, 또한 내용 자체가 상당히 흥미로웠기에 제론은 정신없이
거기에 빠져들었다.
보고서를 모두 읽은 제론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서성였다.
“블랙스피어 기사단이 란체 왕실의 기사단이 아니라고?”
보고서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블랙스피어 기사단이 란체 왕궁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설 기사단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왕실 기사단으로 위장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란체 왕실의 3 왕자가 은밀히 끌어들인 외부의
세력이었다.
워낙 교묘히 빈틈을 파고들었기에 자연스럽게 왕실 기사단처럼 인식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왕궁에 출입하는 상당수 귀족들이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도 그에 대해 전혀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바인도 알아내지 못한 걸 보면 정말 보통 놈들이 아닌데 말이야.”
블랙스피어 기사단을 누가 보냈는지 바인도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그들을 데려온 3 왕자조차 그들의 정체를
명확히 알지 못했다.
바인은 그들에게서 예전 슈린 가문이나 나베 가문의 배후 세력과 비슷한 냄새를 맡았다고 했는데, 확신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제론은 묘한 확신이 들었다. 이건 감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같은 놈들이었다.
“한데 그런 놈들이 이곳 테페룸 광산을 장악하고 있다 이거지?”
테페룸 광산을 둘러싼 다섯 마을의 관리를 블랙스피어 기사단이 맡고 있다는 건 이미 테페룸 광산조차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란체 왕국도 썩을 대로 썩었군.”
대부분의 귀족이 이런 상황을 알면서 눈감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검을 숭상하고 왕국에 충성하면 뭐하는가.
상층부가 이렇게 썩어 문드러져 있는데.
“란체 왕국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겠어.”
그리고 블랙스피어 기사단이 이 테페룸 광산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지 더 확실히 알아내야만 했다. 제론은 그들이
잘되는 꼴을 두고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주지. 숨어 있으면 끌어내면 그만이지. 아마 굉장히 당황스러울 거다.”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빛냈다. 그걸 위해서 최대한 빨리 이곳 테페룸 광산의 초고대유적을 찾아내야만
했다.

제론은 바인과 긴밀히 연락을 하며 테페룸 광산의 상황을 면밀히 확인했다. 그리고 블랙스피어 기사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뭔가 중요한 꼬투리 하나만 잡히면 일이 술술 풀릴 것 같은데 그게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일은 정말
평범했다.
블랙스피어 기사단은 테페룸 광산을 감시했고, 이송의 경계를 책임졌다. 그리고 그것을 상단에 넘기는 일까지
완벽하게 해냈다. 거기에 마을의 경비까지 맡았다.
그게 전부였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완전히 란체 왕국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럴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들이 왜 란체 왕국 좋은 일을 해 주겠는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전쟁까지 일으키는 놈들인데 말이다.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제론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마을을 거닐었다. 블랙스피어 기사단은 마을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워낙 많았기
때문에 가끔은 마을 사람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대체 이놈들 꿍꿍이가 뭐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건 테페룸을 빼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바인이 그걸 캐치해 내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이 마을의 상단이 배후 세력의 하부 조직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 부분은 바인이 아직 조사 중이었다.
하지만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그게 아닌 쪽으로 가닥이 잡혀 가고 있었다.
한창 골똘히 생각하며 걸어가던 제론은 문득 묘한 느낌이 들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 묘한 느낌이 풍기는
쪽을 쳐다봤다.
블랙스피어 기사단 몇 명이 모여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지? 이 기묘한 느낌은?’
이건 분명히 마나로부터 흘러나오는 느낌이었다. 한데 정확히 뭔지 파악이 어려웠다.
‘아티팩트로군.’
한참을 확인하고서야 그것이 아티팩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흐름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만큼 굉장한
수준의 아티팩트였다.
마나의 흐름 자체가 거의 외부로 표출되지 않는 아티팩트였다. 그걸 이렇게 애써 비집고 들어가야 파악이 가능할
정도로 잘 감춰져 있었다.
일단 하나를 발견하고 나니 나머지는 좀 더 쉬웠다. 모든 블랙스피어 기사단이 그 아티팩트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같은 아티팩트임이 분명했다. 흘러나오는 마나의 흐름이 똑같았다.
‘대체 무슨 아티팩트지?’
마나링이 9 개가 된 이후로는 웬만한 아티팩트는 단숨에 분석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그걸 이용해 이제 슬슬
마법 물품 사업을 시작할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한데 그런 제론의 능력으로도 블랙스피어 기사단이 가진 아티팩트의 능력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직접 아티팩트를 눈앞에 놓고 확인을 해 봐야겠는데?’
어렵지 않았다. 블랙스피어 기사단 하나를 잡아다가 아티팩트만 빼앗고 놔주면 된다. 미리 준비해서 비슷한
아티팩트를 하나 만들어서 바꿔치기하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짧았다. 블랙스피어 기사단은 혼자 다니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제론은 혼자 있는 기사에게 은밀히 접근해 마법을 펼쳤다.
털썩.
기사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제론은 기사의 품을 뒤져 아티팩트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느낌이 오는 곳을 뒤졌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제론은 그 부분의 옷을 들춰 봤다. 그리고 혀를 내둘렀다. 아티팩트를 몸에 심어 둔 것이다. 어쩌면 이들은
자신의 몸에 아티팩트가 있는지도 모를 수 있었다.
제론은 아티팩트가 있는 옆구리 살을 쭉 갈랐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구슬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제론이 찾던 아티팩트였다.
제론은 구슬을 빼고는 기사의 상처에 손을 갖다 댔다.
샤아아아!
마법진 하나가 나타나 가루로 흩어지며 상처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상처가 놀라운 속도로 아물었다. 제론은
상처를 완벽하게 치료한 다음 기사의 옷을 다시 원래대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손가락을 튀겼다.
딱!
그걸 신호로 잠들었던 기사가 깨어났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원래
가던 길로 갔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제론은 아티팩트를 들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을 면밀히 살치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복잡한 구조의 마법진이 구슬 안에 입체적으로 새겨져 있었다. 구슬의 내부를 깎고 조각해 마법진을
구성했다. 정말로 굉장한 아티팩트였다.
이런 걸 저 많은 기사의 몸에 심었다니 정말로 놀라웠다.
제론은 태블릿을 꺼내 구슬의 구조를 안으로 복사해 넣었다. 그리고 분석을 시작했다.
분석을 하면 할수록 제론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이놈들이 하려는 일이 뭔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테페룸 광산을 없애려고 하는군.”
이 아티팩트는 테페룸 광산을 없애기 위한 장치였다. 하나만으로는 효과가 거의 없겠지만 수백 개가 동시에
오랫동안 작동하면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만든 거지?”
이건 테페룸에 대해 재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는 한, 절대 만들 수 없는 아티팩트였다. 물론 테페룸에 대해 알고
있는 수준이 초고대문명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테페룸이 어떤 물질인지만 알아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테페룸을 분해하는 아티팩트를 만들다니. 완전히 미친놈들이로군.”
블랙스피어 기사단은 지속적으로 테페룸 광산을 출입한다. 이 아티팩트를 몸에 지니고 말이다.
아티팩트의 마법은 근처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먼 거리에 영향을 미친다.
마법의 구현 자체가 일정 거리 이상에서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 또한 바위나 흙을 통과하면서 성능이 증폭되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광맥에 존재하는 테페룸을 지속적으로 분해하기 위한 아티팩트인 것이다.
하루나 이틀 만에 성과를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수년 이상을 투자해 결과를 만들어 내겠다는 계획인
것이다.
제론은 이들이 뭘 원하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란체 왕국에 더 이상 테페룸 광산이 존재하지 않게 만들려는
것이다.
“3 왕자가 수상해.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제론의 예상은 배후 세력이 3 왕자를 란체 왕국의 국왕으로 만들려 하는 것 같았다. 아마 3 왕자는 크란
제국으로부터 테페룸을 수입할 수 있는 인맥을 갖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새로운 테페룸 광맥을 발견했다거나.”
어떤 경우든 가능성이 충분했다. 제론은 씨익 웃었다. 일단 자신이 알아낸 이상, 저들은 절대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계획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릴 테니까 말이다.
제론의 입가에 깃든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10 권에서 계속>

10 권

Chapter 1 테페룸 광산 2 (1)

제론은 바쁘게 움직였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이 근처에 있을 것이 분명한 초고대유적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없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래도 적의 야욕을 부술 수는 있었다. 블랙스피어 기사단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몸에서
아티팩트를 제거하면 된다.
하지만 그건 최하책이었다. 적에게 지나친 경각심을 심어 주게 된다. 아직 적의 정확한 정체도 모르는데 일을
크게 벌이는 건 곤란했다.
최선은 테페룸 제조에 관한 아티팩트나 시설이 있는 유적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사실 제론은 유적의 테페룸 제조 시스템이 테페룸 광산에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판단했다. 예전 철광석을
제조하던 유적처럼 말이다.
제론은 마을에 머물면서 어떤 사람들이 오가는지 잘 관찰했다. 물론 마티를 이용했다. 마티와 태블릿을 잘
이용하면 다섯 마을은 물론이고 광산까지 감시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면서 3 왕자를 철저히 감시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물론 제론도 마티를 이용해 주기적으로 3 왕자 주변을
감시했다.
혹시라도 바인이 잡아내지 못한 걸 알아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는 일이었다. 물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렇게 하면서 제론은 마을 곳곳은 물론이고 테페룸 광산을 광범위하게 돌아다니며 초고대유적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처음 제론이 예상했던 대로 테페룸 때문에 에너지의 흐름을 파악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렇게 닷새를 투자한 끝에 제론은 희미한 에너지 흐름을 잡아냈다. 근방에 분명히 초고대유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그 위치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에너지의 흐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바람에 어느 방향에서 오는
건지도 알지 못했다.
제론은 다섯 마을을 집중적으로 돌아다녔다. 시간을 들여 경험한 바에 따르면 테페룸 광산에 다가갈수록 에너지
흐름을 느끼기 어려웠다.
차라리 산에서 멀어지는 쪽이 훨씬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제론은 다섯 마을을 크게 돌기로 결정했다.
집중하며 산을 크게 돌면 에너지의 흐름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파악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요즘에는 테페룸의 방해에도 익숙해져서 간간이 에너지의 흐름을 잡아낼 수 있었다. 마을을 한 바퀴 돌면 확실히
유적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론은 차분히, 또 은밀히 다섯 마을을
경유하며 산을 크게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 ☆ ☆

란체 왕실의 3 왕자는 테라스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즐겼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각에 티타임을 즐겼다. 이건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그만의 시간이었다.
“후룩.”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마신 3 왕자는 찻잔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딸깍.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양,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문을 열고 다가와 찻잔을 치웠다.
3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집무실로 들어갔다. 테라스에서의 티타임은 반드시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슬슬 준비가 끝나 가는 모양이군.”
조금 전 찻잔 바닥에 깨알같이 적힌 암호문을 해석하면 분명히 그런 뜻이었다.
3 왕자의 티타임은 보고를 받는 시간이었다.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괴 조직이었지만 3 왕자는 그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그들은 3 왕자에게 이 나라를 갖다 바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을 예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굉장해. 설마 우리나라에 또 다른 테페룸 광산이 존재할 줄이야.”
광산이 더 존재한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걸 발견한 비밀 조직의 저력은 더욱 대단했다.
하지만 좀 더 파고들어 가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현재의 테페룸 광산을 발견한 것도 그들의 힘이었으니까.
그들은 란체 왕국에 테페룸 광산을 찾아 주었다. 그리고 그 수수료를 지금까지 받아 가고 있었다. 아주
비밀스럽게. 그 사실은 란체 왕국의 국왕을 비롯한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당연히 3 왕자에게는 그 비밀을 열람할 권한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 비밀 조직은 테페룸 광산의 운영권을 현재의 왕실에서 3 왕자로 넘기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막대한 테페룸이 증발해 버리겠지만 그건 그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 사람들은 다 좋은데, 너무 조심성이 지나치단 말이야. 연락책이 누군지도 알 수가 없으니, 원…
….”
만일 그들이 몇 가지 결과를 보여 주지 않았다면 아예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얼굴도 정체도 모르는 놈들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그들은 꾸준히 성과를 보여 주었다.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던 3 왕자를 이제 란체 왕국 차기 왕권에 가장 가까운 세
사람 중 하나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만일 이번 테페룸 광산 건이 완벽하게 마무리된다면 더 이상 3 왕자를 위협하는 세력은 없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란체 왕국 최고의 수입원은 바로 테페룸 광산이었다. 테페룸 광산에서 나오는 돈이 무려 란체 왕국 1
년 예산의 7 할이었다.
그러니 테페룸 광산을 손에 쥐고 있다는 건 란체 왕국의 경제력을 쥐고 있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3 왕자의 눈이 진한 야망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야망으로 물든 3 왕자를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또 이러는군.”
바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3 왕자의 티타임을 녹화한 영상을 반복해서 돌려 보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바인의 방 사방에 걸린 화면에서는 수백 수천 개의 장면이 쉴 새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인은 그 모든 화면을 순식간에 뇌리에 받아들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만 아니라
자동으로 머릿속에서 그걸 정리하고 분류하는 작업까지 동시에 이뤄졌다.
반쯤 무의식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작업이었다. 바인은 마치 뇌를 수십 개로 나눈 것처럼 여러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있었다.
그런 바인조차도 적 세력의 정보 전달 방식은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사실 몇 가지 특이한 사항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비밀을 풀어낼 수 없었다.
저들은 마치 마티의 존재를 알고 미리 대비하는 것처럼 정보 전달 체계를 만들었다. 엄청나게 조심스러웠고,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비밀스러웠다.
“어쨌든 찻잔에 쓰인 암호문 덕분에 저들의 목표는 완전히 알아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야.”
바인은 빠르게 정보를 정리했다. 제론으로부터 저들이 특별한 아티팩트를 이용해 광산의 테페룸을 증발시키려
한다는 걸 들었기에 더 광범위하면서도 세부적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보고를 하기 전에 예상 광맥을 찾아볼까?”
그저 저들의 목표나 3 왕자의 야망에 대한 보고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바인은 저들이 목표를 이루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새로운 테페룸 광맥을 찾아내고 싶었다.
바인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란체 왕국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론의 말에 따르면 기존
광산에서 그리 멀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바인은 그걸 토대로 새로운 테페룸 광산이 될 만한 장소를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 ☆ ☆

제론은 마을을 하나하나 들르면서 차분히 에너지의 흐름을 파악해 나갔다. 가닥가닥 끊어져 있었지만 에너지는
비교적 일관된 흐름을 보여 주었다.
문제는 그 흐름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흐름 자체가 이리저리 비틀려 있었다. 제론은 그 원인을 테페룸에서 찾았다.
테페룸은 사실 특수한 물질에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압축되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적어도 제론이
파악하기에는 그랬다.
고도로 압축된 마나는 그 자체로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였다. 그런 에너지 덩어리가 곳곳에 있으니 초고대유적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에너지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제론은 다섯 마을을 일곱 번이나 크게 도는 집중력과 끈기를 보이며 그 흐름의 구성을 어느 정도 파악해
냈다.
그걸 토대로 초고대유적의 위치를 대충이나마 알아냈다. 물론 너무 광범위해서 아직 확실히 유적을 등록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마지막 단계만 남겨 놓았을 때, 바인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그 보고를 급히 확인한 제론이 피식
웃었다.
“역시 3 왕자한테 따로 꿍꿍이가 있었군. 그나저나 그렇게 해서 비밀 조직에는 무슨 이득이 있지?”
물론 3 왕자를 국왕으로 만들면 란체 왕국에 은밀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정도 능력이
있다면 그냥 테페룸 광산 자체를 꿀꺽 삼켜도 된다.
“외부에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그런 건가?”
충분히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한 점은 많이 남아 있었다.
“3 왕자를 더 확실히 옭아맬 방법이 있는 건가?”
만일 그렇다면 조금 말이 된다. 3 왕자를 완벽하게 옭아매서 그들의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리면 어마어마한 이득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제론은 그들의 계획이 순조롭게 끝나도록 놔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제론은 나머지 보고를 차근차근
살펴봤다.
“새 테페룸 광산의 예상 위치?”
제론의 눈이 번득였다. 바인이 보고한 장소는 하나가 아니었다. 모두 네 군데나 되었다. 그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위치는 제론에게 다른 의미로 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테페룸 광산의 위치보다 훨씬 중요했다.
제론은 그 위치와 자신이 마을을 몇 바퀴나 돌며 알아낸 에너지의 흐름을 대입시켰다.
태블릿을 통해 나타난 지도에 에너지의 흐름을 손가락으로 슥슥 그렸다.
“역시!”
에너지의 흐름이 광산 후보지를 향해 휘어지고 있었다. 각각의 광산 후보지가 초고대유적의 에너지 흐름을
왜곡시킨 것이다.
제론은 그걸 분석해서 아주 간단히 초고대유적의 위치를 확정할 수 있었다. 물론 정확한 분석을 한 것은
태블릿이었다.
“좋아. 일단 여기부터 가자.”
현재 제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초고대유적을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유적이 테페룸 광산과 과연 관계가
있느냐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제론은 곧장 움직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제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나돌아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마을을 벗어난 제론은 산으로 향했다. 마을에서 산으로 가는 길에는 블랙스피어 기사단이 잔뜩 포진해 있었지만
그들의 눈을 피해 이동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예상 위치에 도착했을 때였다.
‘많군.’
그곳은 블랙스피어 기사단의 거점 중 하나였다. 블랙스피어 기사단은 마을에서 산으로 가는 길과 산기슭에 몇
군데 거점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 거점 중 하나가 초고대유적의 예상 위치였다.
그곳에는 천막으로 만든 막사가 잔뜩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검은 옷의 사내들이 막사 주위를 돌아다녔다.
제론이 가고자 하는 곳은 딱 그 중앙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모두의 시선을 받을 만한 장소였다. 한데
유적으로 내려가려면 빛에 휩싸인다.
그런 장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유적에 대해 일말의 의심이라도 갖게 하는 것이 싫었다.
제론은 멀리서 기사단의 거점을 살피며 기회를 살폈다. 일단 저들을 어딘가로 싹 유인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태블릿을 꺼낸 제론은 마티를 이용해 거점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자세히 살폈다.
블랙스피어 기사단이 이곳에서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테페룸 광산의 경계였다.
모든 운영 방식이 그걸 중심으로 이뤄졌다.
막사를 하나하나 살피던 제론은 눈을 빛냈다. 저들을 유인할 방법이 생겼다.
한가운데에 있는 막사 안에 마법진이 새겨진 석판이 있었다. 비상이 걸렸을 때, 신호를 보내는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을 분석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석판에 겉으로 드러난 마법진의 그림만으로도 어떤 마법진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석판의 마법진은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석판 아래나 속에 연결된
마법진이 또 있었다.
워낙 단순한 형태로 연결시켰기에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다른 마법진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마법진이 연결되었는지는 이렇게 마티를 통해 보는 것만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했다.
물론 제론에게는 그걸 알아볼 방법이 또 있었다.
“스키아.”

Chapter 1 테페룸 광산 2 (2)

제론의 그림자에서 스키아가 불쑥 튀어나왔다.


스키아는 제론과 시야와 청각을 공유한다. 그것만 보면 마티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지만, 스키아는 마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일단 스키아를 통해 약하지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각과 청각 외에 다른 감각도 약하지만 공유가
가능했다.
스키아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거침없이 질주했다. 제론은 스키아와 공유된 감각에 집중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럴 때 자신의 감각은 되도록 죽여 두는 편이 스키아에게 더 힘을 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완전히 감각을
닫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다가오거나 사고라도 생기면 곤란했으니까.
극히 일부의 감각만 열어 두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웬만한 상황은 바로 대처할 수 있었다. 제론과 같은
경지의 소드 마스터가 다가오지 않는 한 말이다.
스키아는 석판이 있는 막사 안에서 다시 불쑥 튀어나왔다. 스키아가 나온 자리는 막사의 구석진 곳이었다. 막사
한가운데에는 휴대용 마법등이 매달려 있었다. 페쿠니아 상단에서 판매하는 마법등이었다.
‘여기까지 마법등이 퍼진 걸 보니 돈도 제법 벌었겠군.’
마법등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원래 제론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바이스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자동으로 마법등을 제작하는 공장을 짓는 중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폭발적으로 마법등의 수요가 늘어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적어도 제론이 마법등을
제작하던 시기에는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바이스에게 제작이 넘어갈 즈음,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결국 바이스는 자신의 마법 연구 자체가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제론을 찾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마법등 제조 공장이었다. 그 공장은 현재 에어스트 왕국의 수도 바깥쪽에 세워지는
중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수도는 상당히 거대했지만, 수도 안에는 되도록 그런 시설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서 심지어는 기간트 공장도 수도 밖에 만들었다. 수도를 중심으로 수많은 공장들이 빙 둘러싼 구조였다.
어떻게 보면 방어에 취약할 수도 있지만 그건 보통의 왕국에 해당하는 얘기였다. 에어스트 왕국에는 다른 어떤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 심오한 마법 기술이 있었다.
아무튼 마법등이 만들어 낸 빛 때문에 막사 안에는 그림자가 많지 않았다. 물론 스키아에게는 그런 제약에 거의
의미가 없었다.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지 않는 한 말이다.
제론은 스키아의 시선을 통해 마법진을 쳐다봤다. 그리고 마법진 주위에 흐르는 마나를 파악해 나갔다.
마나의 흐름을 통해 확인하니, 다른 마법진은 석판 내부가 아니라 바닥에 있었다. 석판 내부는 꽉 채워져 있었다.
하긴, 석판 속을 파내고 마법진을 새기려면 엄청나게 힘들고 실패 확률이 높았다. 고작 신호만 보내는 마법진을
그렇게 어렵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제론은 스키아를 통해 마법진을 완벽하게 분석했다.
이 마법진은 몇 가지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신호를 소리와 빛으로 표현하는 아주 단순한
마법진이었다.
이걸 훨씬 복잡하게 만들면 통신 마법이 된다. 하지만 이런 거점에 굳이 통신 마법이 담긴 아티팩트를 비치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엄청나게 비싼 아티팩트였다.
아무리 테페룸 광산에서 돈이 많이 나온다고 해도 굳이 쓸데없이 그런 돈을 왜 쓰겠는가. 신호만 보내도 충분한데
말이다.
마법진을 분석하면서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다. 이 마법진에 대응하는 다른 마법진의 위치도 몽땅
알아냈다. 물론 마티를 이용해도 찾아낼 수 있겠지만, 이렇게 단번에 확인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거점이 50 개나 되는군. 많이도 모아 뒀다.’
그만큼 이곳 테페룸 광산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마법 신호를 주고받는 곳은 광산 근처의 거점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주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도 그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마법진에서 주고받는
모든 신호를 어딘가로 보내고 있었다.
제론은 눈을 떴다. 그리고 태블릿을 꺼냈다. 그 지점을 확인하려면 마티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거리가
멀어서 스키아로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스키아를 그곳으로 이동시킬 생각도 없었다.
스키아는 지금 이곳에서 할 일이 있었다. 마법진을 조작해서 신호를 보내야만 했다. 테페룸 광산에 침입자가
발생했다는 신호를 말이다.
마티를 조작해 마법진이 신호를 보내는 장소를 확인한 제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곳은 나헤 영지의 텔레포트 게이트였다. 테페룸 광산에서 가장 가까운 영지가 바로 나헤 영지였다.
‘왜 텔레포트 게이트로 가는 거지?’
제론은 의문을 잠시 접고서 다시 한 번 마법진을 살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걸 란체 왕국에서 만들었다고? 불가능한데?’
석판에 새겨진 마법진은 아주 단순했다. 그저 몇 가지 신호만 미리 연결된 마법진과 주고받는 것이니 단순한 게
당연했다.
원래 저 정도 크기의 석판이라면 한 면을 다 쓸 필요도 없었다. 한데도 그에 비해 마법진이 복잡한 이유는 저
안에 마나스톤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석판은 특별한 마법진을 이용해 주변 마나를 흡수했다. 물론 일정량 이상을 보관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신호를 보내는 마법진을 발동시킬 정도는 충분했다.
‘이건 고대에나 있었던 마법인데?’
물론 초고대에는 훨씬 월등한 마법 이론이 존재했다. 제론이 만든 마법등에 쓰인 마법이 바로 그러했다.
원래 일반적인 마법등에는 마나스톤이 들어간다. 그래서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론의 마법등은
마나를 충전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마나스톤 없이 마법진과 마법등의 구조만으로 마나를 저장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충전이 필요 없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법등을 만들 때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야
지속적인 수익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마나스톤이 없이 구동하는 마법 물품은 엄청나게 만들기 어렵다. 그뿐 아니라 고도의 마법
지식이 없으면 흉내도 내기 힘들었다.
한데 그런 대단한 지식이 깃든 마법 물품을 란체 왕국에서 만들었을 리 없었다. 란체 왕국은 검을 훨씬 숭상한다.
당연히 다른 왕국에 비해 마법이 조금 뒤떨어졌다.
기간트를 만드는 것보다는 그걸 사서 쓰는 쪽을 훨씬 선호하는 왕국이었다.
제론은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크란 제국 마탑에서 석판을 제공한 것이다. 아마 상당한 대가를
받았을 것이다. 물론 다른 마탑이나 상단이 제시한 가격보다야 훨씬 저렴했을 것이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야.’
크란 제국 마탑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서도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아마 바인의 문두스를 제외하면 전 대륙의
정보를 가장 많이 쥐고 있는 곳이 바로 크란 제국 마탑일 것이다.
제론은 스키아를 통해 마법진이 새겨진 석판에 특별한 조작을 가했다. 크란 제국 마탑이 뭘 하든 이제 진짜 일을
시작할 때였다.
50 개의 석판이 모두 마법진을 통해 연결되어 있기에 그중 하나만 건드려서 다른 모든 석판을 조작하는 것도
가능했다. 스키아를 통해 마나를 흘려보내고 그 흐름을 비틀면 되는 일이라서 간단치는 않지만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석판의 마법진은 몇 가지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하나는 적의 습격에 대한 신호였다. 적이 광산을 습격하면 붉은빛을 내뿜고, 다른 거점을 습격하면 푸른빛을
내뿜는다.
두 번째는 그저 침입자가 있을 때였다. 침입자가 발견되었다는 신호는 하얀빛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해제되면
보라색 빛이 나온다.
당연히 모든 신호는 소리와 함께 나오게 되어 있었다. 제법 큰 소리였기 때문에 혹시라도 막사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충분히 모두 알 수 있었다.
일단 제론은 날이 다시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 유적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강한 빛이 나오는데, 그걸 조금이라도
가리려면 환한 대낮이 좋았다.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제론은 기다리는 동안 3 왕자는 물론이고 이곳 마법진이 연결된 텔레포트 게이트의 상황을
유심히 살폈다.
특별한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듯했다.
이내 날이 밝았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하루 중 가장 밝은 시간이 된 것이다.
제론은 화끈하게 가기로 했다.
50 개 석판이 일제히 붉은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날카로운 소리를 토해 냈다.
삐이이이이이익!
막사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이럴 때의 메뉴얼은 딱 정해져 있었다. 모든 블랙스피어 기사단이
모여 광산으로 달려갔다.
거점에 남은 건 혹시 다른 소식이 올지 몰라 기다리는 사람과 거점 자체를 방비할 최소한의 인원뿐이었다. 그게
모두 합해 4 명이었다.
거점 규모가 제법 되기 때문에 4 명은 제론 입장에서는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제론은 유유히 거점으로 다가갔다. 마법진이 있는 막사 안에 2 명이 대기했고, 나머지 2 명은 거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순찰을 했다.
그 두 사람의 눈을 피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제론은 두 사람이 막사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 순간 팔찌에
아네모스를 넣었다.
화아악!
강렬한 빛이 제론을 휘감았다. 시야도 가려진 마당에 환한 대낮이었기에 그런 빛이 나타났는지 경계하는 기사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제론은 아무도 모르게 유적으로 들어갔다. 일단 다른 곳은 몰라도 란체 왕국 내에서는 폴타를 이용하면
어디든 갈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나가서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행동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유적의 로비는 역시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이 유적은 총 20 층이었다.


제론은 일단 최하층의 통제실로 향했다.
통제실에 도착한 제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상을 했지만 실제로 이곳에서 테페룸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환호성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이제 더 이상 테페룸 때문에 고민하고 고생할 이유가 없었다. 더불어 테페룸을 가공해서 만들어야 하는 포로스의
수급에 대한 문제도 깨끗이 해결되었다.
이 유적은 완전히 테페룸의 제조에 관한 유적이었다. 그래서 마티조차 없었다.
사실 마티가 필요 없기도 했다. 어차피 란체 왕국 수도에 있는 마티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거점 형식의 유적에 있는 마티까지 하면 란체 왕국에는 충분한 마티가 돌아다니는 셈이었다.
이 유적도 다른 유적과 마찬가지로 생활 시설과 수련실이 19 층과 18 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17 층부터 6
층까지가 오로지 테페룸의 제조에 관계된 시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이곳 유적 역시 각 층의 높이나 크기가 다른 유적보다 훨씬 컸다. 테페룸을 만들기 위한 것이니 이 정도 규모도
사실 작다고 할 수 있었다.
5 층부터 1 층까지가 완성된 테페룸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테페룸 광산은 바로 그 부분에 문제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유적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주인이 각인되어야 한다. 그렇게 등록된 다음에야 제대로 작동을 한다.
하지만 주인이 사라진 경우에도 유적이 계속 작동을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주인이 인위적으로 시스템을 멈추지 않는 한, 유적은 계속해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만 년 전, 지나치게 오랜 세월로 인해 시스템이 중지되는 바람에 멈춰 버렸다. 즉, 그 이전까지는 계속
유적이 작동했다는 뜻이었다.
고대문명의 마지막은 대략 천 년 전으로 추정된다. 당연히 초고대문명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었다.
그렇게 수만 년이 지났는데, 유적 시스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적에는 자가 복구 시스템이 있었다. 스스로 고장을 고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테페룸 광산은 그 자가 복구 시스템에 이상이 생겼다. 다른 유적과 달리 테페룸을 잔뜩 보관하고 있기에 벌어진
문제였다.
유적에 보관된 테페룸은 액체 형태였다. 그것이 다음 가공을 위해 편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보관했다. 문제는
유적을 통제하지 않아 테페룸을 끝없이 만들어 냈다는 점이었다.
테페룸에 들어가는 재료는 거의 없었다. 세상의 마나를 끌어모아서 만든 것이 바로 테페룸이었다. 물론 다른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긴 하지만 그건 극히 미미한 양이었다.
그리고 그 특별한 재료 자체도 주변의 암석이나 흙을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곳의 테페룸 제조
시스템이었다.
원래 보관소가 꽉 차면 제조를 중단해야 하는데, 보관소에 문제가 생겼다. 누출이 일어난 것이다.
액체가 누출되면서 보관 상태가 깨지니 고체로 굳어졌고, 그것이 퍼지면서 광맥이 만들어진 것이다.
누출이 되면서 보관소에 빈공간이 생겼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그렇게 엄청난
세월에 걸쳐 외부로 테페룸이 흘러나갔다.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시스템이 중지될 때까지 쌓인 테페룸이 광맥으로 만들어져 지상으로 뻗어 나갔고,
그중 하나가 란체 왕국의 테페룸 광산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3 왕자와 연관되어 비밀 조직의 물망에 오른 또 다른 테페룸 광산의 후보지 4 곳이 바로 나머지
보관함에서 비롯된 광맥이었다.
그 4 곳의 매장량도 다른 곳과 비슷했다. 다만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아서 발견이 쉽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거길 찾아낸 걸 보면 비밀 조직의 능력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Chapter 1 테페룸 광산 2 (2)

제론은 일단 그걸 모두 파악한 뒤, 외부로 흘러나간 테페룸의 회수 방안을 찾아봤다. 그런 방안이 유적 시스템


안에 있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이 유적은 테페룸을 액체 상태로 보관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외부의 테페룸을 액체로 만들어 흡수하면
끝이었다.
다만, 그러려면 보관함을 몽땅 비워야만 했다. 외부로 흘러나간 테페룸의 양이 워낙 많아서 그걸 모두 흡수하려면
지금의 보관함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가만있자, 빈 창고가 어디 없나?”
액체 테페룸을 고체로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유적 시스템 안에 다 포함되어 있었다. 테페룸을 액체 상태로
뽑아내는 것도 가능했고, 고체로 굳혀 괴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제론은 일단 테페룸을 괴로 만들어 이동시키기로 했다. 시스템을 작동시키니 로비에 테페룸괴가 차곡차곡 쌓였다.
“가만, 일단 고장 난 부분부터 손을 봐야지.”
망가진 자가 복구 시스템만 손보면 된다. 그러면 유적이 알아서 스스로를 고칠 것이다. 어렵지 않았다. 태블릿을
통해 고장 난 부분을 발견했다. 세월로 인한 마법진의 손상이었다.
제론은 손가락 몇 번 움직이는 걸로 그걸 고칠 수 있었다. 역시 태블릿은 초고대유적에서 얻은 아티팩트 중
최고였다.
자가 복구 시스템을 고치니 유적이 스스로 보관소의 이상을 복구해 나갔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테페룸괴는 로비에 차곡차곡 쌓였다. 다섯 보관소에 채워진 테페룸을 모두 괴로 바꾸면
로비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슬슬 움직여야겠군.”
제론은 서둘러 로비로 갔다. 그리고 로비에 쌓인 테페룸괴를 아공간에 쓸어 담았다.
제론의 아공간도 엄청나게 넓었다. 기간트를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공간이 30 개나 있는 데다가 팔찌의
아공간까지 하면 이곳의 보관소 하나를 싹 담아도 남을 정도였다.
테페룸괴가 쌓이는 속도는 상당했다. 일단 액체 테페룸을 고체로 굳히기만 하면 되는 일인지라 작업 자체가
간단했기에 테페룸괴가 비처럼 쏟아지는 듯했다.
제론은 그걸 아공간에 담은 뒤 다른 유적으로 가서 로비에 쌓았다.
로비의 규모 자체는 대부분 비슷했기에 란체 왕국에 있는 거점 형식의 유적에 쌓아 놓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다섯 보관소를 싹 털어서 다른 유적의 로비에 쌓아 두었다.
보관소를 비운 제론은 유적의 다른 시스템을 이용해 누출된 테페룸을 다시 흡수했다. 양이 워낙 많아서 그걸 다
흡수하는 데에만도 시간이 제법 걸릴 듯했다.
제론은 일단 다섯 보관소에서 흘러나간 테페룸을 모두 흡수했다. 일단 유적 근방의 테페룸부터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그저 근처의 테페룸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보관소를 무려 일곱 번이나 채웠다가 비워야만 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워낙 오랫동안 시스템이 가동되었고, 그것이 유출로 이어졌으니 얼마나 많은 테페룸이 흘러나갔겠는가. 그걸 다
모으기만 해도 아마 전 대륙의 테페룸 소비량을 수십 년 동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앞으로 제론이 하려는 일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말이다.
일단 주변의 테페룸을 모두 정리하는 데에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테페룸을 녹여서 다시 흡수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간단치 않았다. 게다가 주변에 가장 많은 테페룸이 집중되어 있었다.
광산의 광맥은 주변에 모인 테페룸이 지질의 구조에 의해 어느 한쪽으로 흘러가며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른 네
군데 광맥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 외에도 무수한 광맥이 존재했다. 예전 철광맥을 만드는 유적의 상황과 비슷했다.
주변 테페룸을 모두 정리한 제론은 그다음으로 광맥을 형성한 테페룸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하지만 주변의 테페룸보다는 양이 적었기 때문에 비교적 빠르게 광맥을 지워 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하루 이틀 안에 해결될 상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일단 광산과 연결된 광맥은 그냥 두고, 나머지 광맥을 흡수했다. 그렇게 하다가 비밀 조직이 노리는 곳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게 되면 그곳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거기까지 조치를 취하고 보관소에 남은 테페룸을 싹싹 긁어서 아공간에 담은 제론은 유적을 벗어났다. 물론 바로
위로 올라가지 않고 다른 유적을 통해서 이동했다.
밖으로 나온 제론은 폴타를 이용해 다시 광산 근처의 마을로 향했다. 의심을 받지 않게 마을을 벗어나고 싶었다.
의심을 받을 만한 일말의 여지조차 남기기 싫었다.
마을로 들어선 제론은 일단 머무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지난 이틀 동안에도 수시로 마을에 등장해서 얼굴을
비추고 여관에서 잠을 잤기에 제론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론은 마을을 돌며 분위기를 살폈다. 마티로 살펴도 되지만 이렇게 실제로 피부로 느끼는 게 훨씬 와 닿았다.
마을의 분위기는 약간 어수선했다. 하지만 평소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블랙스피어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만일 정말로 테페룸 광산이 습격당했다면 큰 문제가 되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
분위기만 살짝 흔들리고 말았을 것이다.
제론은 그 부분에 대해 조금 생각을 했다.
‘일단 마법진 자체를 약간 망가뜨리는 게 낫겠군.’
제론의 머릿속에 석판의 마법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마법진을 이리저리 비틀고 재구성했다. 그러면서
가장 간단하게 마법진을 변화시켜 붉은빛을 내뿜게 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모든 마법진을 손볼 필요가 없었다. 하나면 손보면 끝이었다. 그것도 우연히 그렇게 된 것처럼 믿게 만들 수
있었다.
두 개의 선만 비틀면 된다.
“스키아.”
제론은 스키아를 불러냈다. 그 일은 스키아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스키아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거점의 막사로 이동했다.
제론은 스키아를 다루면서 마을을 천천히 거닐었다. 마을의 분위기는 충분히 파악했다.
이제 이 마을에서 더 이상 얻을 게 없었다. 떠나는 일만 남았다. 일단 테페룸 광산을 얻는 것으로 란체
왕국에서의 일정은 모두 끝났다.
제론은 스키아를 통해 막사 안의 석판에 새겨진 마법진에 선을 그었다. 상당히 섬세한 작업이었다. 그냥 선을 찍
긋는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마법진 자체를 망가뜨려야 하기 때문에 물리력보다는 마나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제론에게는 충분한 마나 컨트롤 능력이 있었다. 이번 일에는 마나량이나 물리력의 강도보다 컨트롤이 훨씬
중요했다.
스키아가 석판 아래로 스며들어 갔다. 스키아를 통해 작업을 하는 데에는 석판 위보다 아래쪽이 훨씬 편했다.
그래서 제론도 석판 아래쪽에 새겨진 마법진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샤아아아.
스키아를 중심으로 마나가 모여들었다. 이것이 스키아와 마티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었다. 스키아는 주인의 능력에
따라서 이렇게 마나를 모아서 쓸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모든 일이 스키아와 제론의 링크가 얼마나 단단한가, 그리고 제론의 마나 컨트롤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에 달려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제론의 마나 컨트롤 능력은 현존하는 그 어떤 마법사보다 뛰어났다. 그것이 설사 스키아를
통해서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마법진을 구성하는 선에 흐르는 마나가 조금씩 비틀렸다. 그렇게 마나가 엇나가는 방향을 따라 스키아가 석판을
조금씩 갈았다.
사각! 사각! 사각!
마나가 움직일 새로운 길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예전의 길이 정체되었다.
제론은 그 정체된 마나를 이용해 단번에 새로운 선 하나를 그었다.
쩡!
그 순간 마법진이 완전히 달라졌다.
스키아는 작업을 마치자마자 곧장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달라진 마법진을 따라 마나가 한 바퀴 맴돌았다.
삐이이이이익!
모든 마법진이 일제히 날카로운 소리를 토해 냈다. 그리고 붉은빛을 뿜어냈다.
마법진의 오작동이 시작된 것이다.

다섯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블랙스피어 기사단이 바쁘게 움직였다. 광산이 습격당한 것이다.


물론 그 어이없는 사태는 금방 끝났다. 광산을 습격한 자가 있을 리 없었다. 마법진의 오작동이었으니까.
마법진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붉은빛을 뿜었고, 날카로운 소리를 토해 냈다.
결국 블랙스피어 기사단은 모든 마법 석판을 수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크란 제국 마탑으로 보내졌다.
당연히 크란 제국 마탑에서는 그것들의 무상 수리를 약속했다.
그런 소동이 일어나는 사이 제론은 유유히 마을을 떠났다. 제론이 한 일이라고는 몇 군데 상단에 들른 게
전부였다. 하지만 누구도 제론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제론처럼 마을에 와서 상단에 들르는 외부인이 1 년에 수십 명 정도 있었다. 제론도 자연스럽게 그들 중 하나로
여겨졌다.

Chapter 2 크란 제국으로 (1)

테페룸 광산을 끝으로 란체 왕국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미리 정보를 구한 유적은 다 찾았고, 수도 유적을
얻으면서 충분한 마티를 얻었으니 란체 왕국에서는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
제론은 곧장 다른 왕국으로 넘어갔다. 아직도 남은 왕국은 많았고, 찾아야 할 유적은 더 많았다.
그렇게 제론이 다른 왕국으로 넘어가 다른 유적을 한창 찾아다니고 있을 때, 란체 왕국의 분위기가 점점 변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란체 왕국의 3 왕자는 티타임을 즐기다 말고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 소동에 테라스 밖에서 지키던 호위 기사와 시종이 후다닥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 전하! 괜찮으십니까?”
두 사람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지만 3 왕자는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찻잔만 뚫어져라 노려봤다.
찻잔 바닥에는 암호로 된 보고서가 있었다. 한데 그 내용이 3 왕자 입장에서는 기가 막혔다.
새로운 테페룸 광산을 개발하는 데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였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인가. 대체 지금까지 자신이 왜 이들과 손을 잡고 일을 벌였는데, 이제 와서 이따위
소리를 하면 어쩌잔 말인가.
3 왕자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허탈했다. 그는 호위 기사와 시종을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됐다. 아무 일 아니니 그만 물러가라.”
“하지만 전하…….”
“됐다고 하지 않느냐!”
3 왕자의 서슬에 호위 기사와 시종이 찔끔해서 다급히 물러갔다.
홀로 남은 3 왕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찻잔 바닥에 쓰인 암호를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그 내용이
달라질 리 없었다.
‘대체 이제 뭘 어쩌지?’
3 왕자는 혼란에 빠졌다. 테페룸 광산이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 여겨 지금까지 그들이 하는 일을 묵인해 왔다.
아니, 도와줬다. 한데 이제 와서 이러면 원래의 광산은 대체 어떻게 된단 말인가.
‘젠장. 이러다가 우리 왕국 자체가 절단 나는 거 아냐?’
3 왕자는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광산에 있는 블랙스피어 기사단을 철수시킬 수도 없었다.
광산의 블랙스피어 기사단을 자신의 사람으로 채워 넣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왜 그걸 원래대로 되돌린단
말인가.
하지만 이대로 그냥 두면 테페룸 광산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르니 그건 그것대로 두려웠다.
두 가지 상반된 일이 충돌하니 극심한 혼란이 찾아왔다. 3 왕자는 비틀거리며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골몰했다.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Chapter 2 크란 제국으로 (2)

‘남은 건 크란 제국뿐이로군.’
다른 왕국은 이제 대부분 다 돌았다. 아직 돌지 않은 왕국이 몇 군데 있었지만 그곳은 오지나 다름없었기에
천천히 가도 충분했다.
게다가 그중 하나는 사막이었다. 사막은 아무리 소드 마스터인 제론이라 하더라도 가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게다가 사막에서는 일반적인 기간트로 뭔가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막에는 사막에 특화된 기간트가 필요했다.
그래서 사막에 있는 비스테 왕국은 거의 침공을 받지 않아 왔다.
아무튼 사막에 있는 비스테 왕국과 북쪽 끝에 있어서 1 년 내내 눈보라가 몰아치는 슈네 왕국을 제외하면 모든
왕국을 돌며 유적을 방문한 셈이었다.
그동안 정말로 많은 유적을 방문했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유적의 수만 해도 수백 개에 달했다. 한데 제론은 알려지지 않은 유적까지 수시로 발견해서
등록했다.
그중에는 고대유적과 연결된 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고대유적 중에는 많은 보물이 있는 곳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이 유적만 달랑 있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튼 공통적으로 그런 유적 아래에는 초고대유적이 있었고, 대부분 고대유적의 규모가 크면 초고대유적의
규모도 컸다.
고대유적을 만든 자들은 초고대유적의 존재를 알고 그것을 이용했음이 분명했다. 초고대유적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파악해 그걸 자신들의 건물에 써먹은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유적의 링크를 늘려 갈수록 다룰 수 있는 마티의 수도 늘어 갔다. 그리고 그것은 문두스의
정보력을 월등히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늘어난 정보력을 통해 발견되지 않은 유적을 찾아내기도 했고, 또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장소의 정보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 모든 정보는 고스란히 제론에게로 향했다.
그로 인해 제론이 다시 방문해야 할 지역이 더 늘어났다. 물론 지금 당장 갈 생각은 없었다. 일단 크란 제국부터
정리를 한 다음에 나머지 유적을 차근차근 돌아볼 계획이었다.
그동안 수백 개의 유적을 열면서 제론이 얻은 것은 비단 마티나 폴타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기능을 가진 거대
아티팩트도 몇 가지 얻었다.
그중 얻었을 때 가장 기뻤던 것은 단연 테페룸 제조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테페룸 가공 아티팩트였다.
크란 제국에 인접한 작은 공국에 있는 유적에서 얻었는데, 테페룸을 이용해서 포로스를 가공해 내는 곳이었다.
앞으로 더 이상 포로스 문제로 골치 썩일 일이 없어졌다. 필요한 만큼 그곳에 가서 가져오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어쨌든 그 모든 것을 다 아우른 제론은 이제 크란 제국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저기가 국경이로군.”
크란 제국은 다른 왕국과 달리 국경 관리가 엄청나게 철저했다. 아무나 들어갈 수도, 또 나갈 수도 없는 나라가
바로 크란 제국이었다.
물론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자격만 얻으면 된다. 하지만 그 자격을 얻는 것이 어려웠다.
당연히 제론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크란 제국의 국경을 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넘어간 다음이었다. 제론은 일단 크란 제국의 정보를 차분하게 모아 보기로 했다.
그렇게 제론은 크란 제국 국경 근방에 있는 교역 도시에 한동안 머물렀다.

☆ ☆ ☆

깁스 남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에는 좌우 벽에 빛을 내는 마법진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마나스톤을 쓰지 않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이었다.
복도 중간 중간에 화려하게 장식된 문이 있었다. 어떤 문에서는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고, 어떤 문은 어두컴컴한
그늘이 져 있었다.
빛이 흘러나오는 문은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는 뜻이었다.
깁스 남작은 몇 번이나 와 보는 곳이었기에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고 끝까지 걸어갔다.
복도의 끝 정면에 커다란 문이 있었다. 다른 문과 달리 아무 장식도 없이 밋밋했다. 하지만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깁스 남작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거대한 회의실이었다.
한가운데에 놓인 거대한 원탁 주위로 의자가 쭉 둘러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의자에 한 명씩 앉아 있었는데,
다들 한가운데에 마법진이 새겨진 복면을 쓴 채였다.
깁스 남작은 탁자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모두의 시선이 깁스 남작에게로 향했다. 깁스 남작은 그 시선에 살짝 긴장하며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쫙
펼쳤다.
“정기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깁스 남작은 그렇게 말을 꺼낸 뒤 두루마리에 있는 내용을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늄 왕국 분열 작전은 절반의 실패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슈린 왕국이 너무 허무하게 무너지는 바람에 레늄
왕국이 제대로 버티기 어려울 듯합니다. 더 이상의 지원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손을 뗐습니다.”
다들 묵묵히 그 보고를 들었다. 몇몇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헥서 왕국에서 동일하게 진행된 분열 작전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성공 가능성이 낮아졌습니다. 목표로
삼았던 아베티스 가문이 회생하면서 나베 공작가가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도 더 이상의 지원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손을 뗐습니다.”
이번에는 복면을 쓴 사내 중 하나가 손을 슬쩍 들었다. 그러자 깁스 남작이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너무 어이없이 실패한 것 아닌가? 상당한 지원이 간 걸로 아는데? 유적에 대한 정보까지 하면 예전 레늄 왕국의
슈린 공작가에 해 준 지원보다 더 많은 걸 해 줬는데 실패했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군.”
“모종의 세력이 개입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모종의 세력? 보고해 보게.”
“문두스라는 이름을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문두스?”
원탁에 앉은 복면인들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최근 등장한 정보 조직입니다. 모종의 세력이 문두스를 휘하에 두고 우리 일을 방해한 걸로 보입니다.”
“하면 일단 문두스부터 정리를 하면 되겠군.”
“당장은 어렵습니다.”
“어렵다?”
“너무 비밀이 많은 조직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정말로 정보 조직인지조차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것인가?”
복면인의 날카로운 질문에 깁스 남작은 빙긋 웃었다. 상당한 여유가 엿보였다.
“문두스가 대단한 조직이라고 해야겠지요. 원하신다면 언제든 이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의향이 있습니다.”
깁스 남작의 자신만만한 말에 복면인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더 자극해 봐야 소용없었다. 현재 깁스 남작보다 더
이 조직의 실무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문두스의 드러난 부분에 감시를 붙였습니다. 일단 차근차근 뒤를 캐서 수뇌부를 잡은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깁스 남작의 말에 수긍했다. 그들이 들어도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들에게는 다른
세력을 정리하는 것 외에도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 뒤로 각 왕국의 상황이 계속 보고되었다. 대부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는 음모는 대부분 이들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다. 깁스 남작은 그 실무를 담당하며 대륙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녔다.
그의 이동은 텔레포트 게이트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이미 텔레포트 게이트도 이들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정보도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보내질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란체 왕국 테페룸 광산에 관한 보고입니다.”
다들 눈을 빛냈다. 이것이 이번 보고 중 가장 중요했다. 최근 그쪽에서 좋지 않은 일이 계속 벌어진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일단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실패입니다.”
“뭣이!”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만큼 이번 일의 실패는 파장이 컸다.
“하면 우리의 연구와 조사가 틀렸다는 뜻인가?”
“처음에는 예측한 대로 진행되는 듯했습니다.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예상과 다르다고? 우리가 제공한 아티팩트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뜻인가?”
“그것이 좀 이상합니다. 아티팩트는 분명히 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그때마다
훌륭한 결과를 보여 줬습니다.”
“한데 뭐가 문제인가?”
“아티팩트를 통해 확인한 장소에서 테페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테페룸이 사라져? 하면 그곳에 있던 광맥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기존의 광맥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다만 새로운 광맥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무래도 그 계획은
이쯤에서 폐기해야 할 듯합니다.”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다들 복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확인할 순 없지만, 분명히 심상치 않은 얼굴로 인상을
잔뜩 쓰고 있을 것이다.
“그 계획을 폐기하자고? 거기 들어간 돈과 시간이 얼마인데!”
조직의 요원들을 블랙스피어 기사단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몸에 아티팩트를 이식하는 데에만도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다.
한데 그걸 이제 와서 폐기하자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3 왕자도 폐기하는 건가?”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제일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니까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을 계속 진행시킨다면 모를까, 폐기한다면 3 왕자도 함께 없애는 게 최선이었다.
“아쉽군. 우리가 실질적으로 대륙의 모든 테페룸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결국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테페룸 소모량을 공급이 따라가기 어렵지 않겠나?”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연스럽게 가격이 올라가겠지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테페룸을 무조건 수입할 수밖에 없는 왕국에서야 난리가 날 일이었지만,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써 줄 정도로 이들의 마음은 넓지 않았다.
“그럼 이제 대충 보고가 끝난 셈인가?”
“그렇습니다.”
깁스 남작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원탁의 복면인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수는 총 18 명이었다. 그리고 각각 엄청난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보고를 보면 에어스트 왕국이라는 곳이 심상치 않아 보이던데,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나?”
“방안을 말씀해 주시면 경청하겠습니다.”
“당장은 너무 멀어서 뭔가를 하기 어려우니, 그들의 경제를 무너뜨릴 방안을 찾아보게.”
“알겠습니다.”
너무 쉽게 말하고 대답했지만 에어스트 왕국은 이제 슈린 왕국을 집어삼켜 제대로 된 규모를 갖췄다. 그런 왕국의
경제를 무너뜨리는 게 결코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말을 하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깁스 남작이나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그들에게는 충분히 그럴
역량이 있었으니까.
“대충 끝난 것 같군. 이제 돌아가도 좋네.”
깁스 남작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간 뒤에도 방 안에서는 한동안 회의가 계속되었다. 깁스 남작이 비록 실무를 모두 담당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계획이나 지원에 대한 건 이들의 허가나 힘이 개입되지 않으면 실행이 불가능했다.
회의는 끝없이 이어졌다. 서로의 이익이 첨예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누구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 ☆ ☆

란체 왕국이 발칵 뒤집혔다. 3 왕자가 테라스에서 티타임을 즐기다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떨어져서 즉사한
것이다.
3 왕자의 방은 궁에서도 제법 높은 곳에 위치했기에 다들 그 죽음에 대해 수긍했다.
최근 영향력을 엄청난 기세로 늘려 차기 왕권에 가장 가까운 세 사람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리니 3 왕자에게 줄을 댔던 귀족들이 갑자기 붕 떠 버렸다.
그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서둘러 새로운 줄을 찾아 분주히 움직였다. 치열한 눈치작전이 펼쳐졌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높은 쪽에 붙어야 향후 살아남을 확률도 올라가고, 또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에도 지장이 없다.
차기 국왕으로 유력시되는 사람은 1 왕자와 왕의 동생인 쉘터 대공이 있었다.
3 왕자에게서 떨어져 나온 귀족들은 1 왕자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1 왕자에게는 란체 왕국의 소드 마스터인
샤프트 폰 슈베르트가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존재는 상당히 크다. 소드 마스터가 가진 힘도 문제였지만, 그 상징성이 훨씬 대단했다. 그걸
보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기사들이 부지기수였다.

Chapter 2 크란 제국으로 (3)


쉘터 대공은 한 가지 은밀한 정보를 듣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마차 안에 앉은 쉘터 대공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현재 그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왕위에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었다. 현재의 국왕은 그의 형님이었다. 나이 차가 제법 많이 나긴
하지만, 우애가 상당했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문제는 형님이 아니라 형님의 자식들, 즉 왕자들이었다. 그중 1 왕자가 쉘터 대공에게 가지는 경쟁심과 악의는
상상을 초월했다.
1 왕자의 경우는 쉘터 대공과 연배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고작 10 년이었다. 국왕이 워낙 일찍 본 자식이기도
했고, 국왕과 쉘터 대공과의 나이 차가 많기도 했다.
그렇기에 1 왕자는 철이 든 순간부터 쉘터 대공을 의식했다. 국왕이 항시 쉘터 대공에 대한 얘기를 했기에 점점
더 반감이 커졌다. 비교 당하는 입장에서 기분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법이었다.
결국 쉘터 대공은 1 왕자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때부터 상황 자체가 비탈길의
눈처럼 굴러가며 커져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차기 왕권을 노리는 가장 유력한 인사가 되어 버렸다.
생각해 보면 형님인 국왕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국왕의 병세가 깊어진 것에는 자신과 1 왕자의 대립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걸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냥 가만히 죽어 줄 수는 없었다. 살아남아 왕위에 오르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또
란체 왕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다.
“대공 전하, 거의 도착했습니다.”
쉘터 대공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벌써 그렇게 되었는가?”
“수도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그래, 그랬다고 했지?”
쉘터 대공의 수행원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한데…… 정말로 이런 궁벽한 곳에 소드 마스터가 있겠습니까? 증명만 하면 당장이라도 작위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글쎄, 가능성이 아무리 낮아도 확인해서 나쁠 건 없겠지. 혹시라도 그 정보가 진짜인데 손 놓고 있다가 1
왕자에게 빼앗기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나?”
“그야 그렇습니다만…….”
수행원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사실 그가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 이곳은 수도에서 벗어난 곳이었다.
만일 1 왕자가 이 사실을 알고 습격이라도 하면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수도 내라면 어떻게든 막을 방법을
만들겠지만, 여기서는 기간트를 동원할 수 있었다.
일단 기간트가 등장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도망이고 뭐고 없이 그냥 밟혀 죽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행원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리고 한껏 긴장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공을 지킬 방법을 궁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차에는 수행원 외에도 호위 기사 한 명이 타고 있었고. 그 외에 8 명의 호위 기사가 마차를 호위하며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 기간트를 보유한 라이더였다. 검술 실력도 뛰어나고, 라이더로서의 실력도 대단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음먹고 습격을 하면 버틸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적에게도 눈과 귀가 있다. 아마 호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수행원이 걱정스런 눈으로 마차 밖을 살폈다. 아직은 아무런 기미도 안 보이지만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계속 뒤통수를 간질였다.
그렇게 불안에 떠는 사이 마차가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수행원이 먼저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폈다.
“저 저택이로군.”
저택의 규모는 제법 괜찮았다. 일개 기사가 가진 저택치고는 상당히 훌륭하다 할 수 있었다. 물론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기에 저런 저택을 짓는 게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이곳 저택촌은 수도의 귀족들에게 그저 그런 기사들이 모여 사는 곳 정도로 인식이 되어 있었다. 기사들이 저택을
짓고 마을을 이뤄 모여 사는 특이한 곳이니 관심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물론 그 관심이 지속되려면 기사들의 실력이 뛰어나야 한다. 그 점에서 이곳 기사촌은 완전히 실패한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수행원은 수많은 저택 중 한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안에 기별을 넣었다.
쉘터 대공이 직접 찾아왔다는 말에 저택에서 잠깐 소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저택의 주인인 포어트가 황급히 달려 나왔다. 포어트는 수행원을 지나 마차로 다가가 어느새
마차에서 내린 쉘터 대공에게 정중히 기사의 예를 취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포어트의 인사에 쉘터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솔직히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상대가 소드 마스터인지 아닌지 말이다.
쉘터 대공은 고개를 돌려 옆의 호위 기사를 바라봤다. 호위 기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익스퍼트는 아닙니다.”
익스퍼트는 마나가 온몸을 꽉 채운 것도 모자라 밖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경지였다. 당연히 마나에 조금만
민감해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포어트의 몸에서는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포어트가 아직 익스퍼트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거나, 아니면 소드 마스터라는 뜻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마나를 감추는 특별한 방법을 알고 있거나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쉘터 대공은 다시 포어트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물었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대는 소드 마스터인가?”
포어트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수행원이었다. 그는 이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즈, 증거를 댈 수 있겠소?”
순간 포어트의 몸에서 마나의 불길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대로 쉘터 대공의 호위 기사들을 덮쳤다.
“크윽!”
9 명의 호위 기사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파도처럼 덮치는 마나의 해일을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어린 경악이 더욱 깊어졌다.
“증거가 되었습니까?”
포어트가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수행원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쉘터 대공은 눈을 빛내며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충분히 증거가 되었네. 이제 제안을 하겠네.”
쉘터 대공은 한참이나 뜸을 들인 다음에 입을 열었다.
“내게 오게.”
포어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살짝 조아렸다.
“대공 전하의 검이 되겠습니다.”
쉘터 대공은 격정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소드 마스터를 영입했다. 이젠 정말로 해볼 만했다.
아마 1 왕자 측으로 간 귀족들도 상당수가 흔들릴 것이다.
‘일단 인지도를 높일 필요가 있겠군.’
쉘터 대공은 고개를 조아린 포어트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소드 마스터의 탄생을 대대적으로 알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를 계속해서 띄워 줘야만 했다. 다른 소드
마스터인 샤프트와 대면시키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아마 서로가 알아보고 알아서 얘깃거리를 만들어 줄 것이다. 물론 그 일은 란체 왕국 곳곳을 뒤흔들 테고 말이다.
란체 왕국에서 소드 마스터가 가지는 의미는 다른 왕국에서보다 훨씬 더 컸다.
‘기간트를 구입해야겠어.’
쉘터 대공의 머릿속으로 몇 개의 기간트 모델이 지나갔다. 명색이 소드 마스터다. 결코 평범한 기간트를 내줄
수는 없었다.
“자, 일어나지. 지금 나와 함께 갔으면 하는데, 괜찮겠나?”
쉘터 대공은 과연 포어트에게 어떤 작위를 내려야 할지 고민했다. 그는 대공이기에 그의 권한으로 충분히 높은
작위를 내릴 수 있었다.
작위뿐 아니라 영지도 문제였다. 당장 포어트에게 내릴 영지가 없었다. 물론 그건 조만간 생길 것이다. 1 왕자
측과 치열하게 싸우다 보면 빈 영지가 잔뜩 나오기 마련일 테니 말이다.
포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쉘터 대공 앞에 당당하게 섰다. 그리고 몸을 돌려 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대공 전하께서는 몸을 피하셔야 할 듯합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인가?”
“누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가온다고?”
쉘터 대공은 멍청하지 않다. 포어트가 말하는 바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마차에 오르시지요.”
쉘터 대공의 마차는 특수하게 제작된 것이었다. 기간트가 밟는 정도의 하중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쉘터 대공은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마차에 난 창을 통해 밖을 살폈다. 기간트가 워낙 크기 때문에
마차의 창문이 작은 경우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을 해칠 방법이 많지 않았다.
마차에 탄 쉘터 대공은 포어트를 보다가 아직 그에게 기간트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자네도 어서 마차에 타게!”
쉘터 대공이 다급히 말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맨몸으로 기간트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자칫 귀중한
재원을 잃으면 이 얼마나 손해인가. 아니, 만일 지금 포어트가 죽으면 쉘터 대공은 결코 1 왕자를 앞지를 수 없을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대공 전하.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무모한 짓 하지 말고 어서 마차에 오르게!”
쉘터 대공의 외침과 동시에 사방에서 기간트가 불쑥불쑥 솟아났다.
쉘터 대공의 눈이 암담함으로 물들었다. 무려 30 기의 기간트가 나타났다. 그가 데려온 9 명의 호위 기사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30 기의 기간트를 상대로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적도 고르고 골라서 인원을 선발했을 것이다. 최소한 쉘터 대공의 호위 기사와 비교해 실력이 뒤떨어지지 않는
자들로 구성되었음이 분명했다.
게다가 적이 탄 기간트의 기종도 문제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전원 임베르를 타고 있었다.
쉘터 대공의 호위 기사들도 서둘러 기간트를 꺼냈다. 그들의 기종 역시 모두 임베르였다. 이젠 결코 수적 우위를
이겨 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끝장이로군.”
쉘터 대공의 표정에 체념이 어렸다. 설마 1 왕자가 이렇게 대담하게 습격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임베르를
30 기나 동원했다는 건, 이 습격이 자신의 소행이라는 것이 드러날 가능성까지 감안했다는 뜻이었다.
만일 여기서 습격이 실패한다면 1 왕자 측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쉘터 대공이 1
왕자와 이들이 얽혔다는 증거를 찾아내야겠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적이 많군요.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한 분은 어서 달려가서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포어트는 너무나도 차분하게 말했다. 다들 얼떨떨한 눈으로 그런 포어트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포어트 앞에 기간트 하나가 불쑥 솟아난 것이다. 포어트는 단숨에 기간트에 올라탔다. 과연 소드 마스터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멋지고 깔끔한 동작이었다.
키이이이이잉!
포어트의 기간트가 굉음을 토해 냈다. 그를 중심으로 강렬한 마나의 폭풍이 한차례 몰아쳤다.
“저, 저게 대체 무슨 기종인가?”
쉘터 대공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옆에 앉은 수행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처음 보는 기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신형 기간트인 모양입니다.”
“발굴형이겠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발굴형 기간트라니…….”
쉘터 대공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포어트의 기간트를 바라봤다.
포어트가 탄 기간트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문양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바탕은
흰색이었지만 두 문양이 이리저리 꼬여 있어서 흰색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로 특이한 디자인이었다.
“이 기간트는 아모르라고 합니다. 전하.”
포어트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Chapter 2 크란 제국으로 (4)

“아모르?”
역시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뛰어난 기간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저택들이 모인 지역이었다. 사실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저택의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 뒀다.
아마 이곳의 저택들은 이 싸움이 끝나면 대부분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1 왕자 측으로부터 받아 내야만
했다.
1 왕자는 이번 습격에 실패하면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30 기의 임베르를 조종하는 기사들도
마음가짐이 달랐다.
하지만 싸움은 마음가짐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아모르였다.
쿵쿵쿵!
아모르의 움직임은 그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빨랐다. 순식간에 가장 가까운 임베르와의 거리를 없애 버리고
달리는 힘을 이용해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콰우우! 꽈앙!
어깨가 박살 나며 주저앉은 임베르의 목에 아모르의 검이 꽂혔다.
콰득!
목이 너덜너덜해지며 임베르가 그대로 정지했다. 마나코어에 순간적으로 많은 부하가 걸리면서 기능이 멈춘
것이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다들 깜짝 놀랐다. 하지만 아모르의 활약은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오연하게 검을 들고 선 아모르가 주위를 슥 둘러봤다. 아모르의 눈에서 섬광이 번득였다.

☆ ☆ ☆

크란 제국 국경 인근에 위치한 교역 도시에 머물던 제론은 바인으로부터 받은 흥미로운 보고에 씨익 웃었다.


“아주 제대로 처리했군.”
제론이 제법 신경을 쓴 일이었기에 관심도 상당했다. 그래서 더 기분이 좋았다.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온
것이다.
바인은 자신이 보유한 정보원을 움직여 포어트에게 1 왕자의 움직임을 전했다. 그리고 포어트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지시를 내렸다.
제론의 부탁이라는 말 한마디에 포어트는 망설임 없이 허락했다. 포어트가 바인의 제안을 수락한 순간, 정보원은
기간트 장비를 내밀었다.
다른 기간트 장비와 달리 벨트와 몇 개의 팔찌로 이루어진 아주 가벼운 장비였다. 바로 그것이 에어스트 왕국에서
새로 개발한 기간트 아모르였다.
아모르의 출력은 무려 3.2 에 달한다. 발굴형 기간트인 아우틈의 출력이 3.3 이니 거의 그에 근접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성능은 그것을 뛰어넘었다.
아모르에는 초고대문명으로부터 비롯된 기술이 다수 쓰였다. 웬만한 엔지니어는 그걸 몽땅 분해해서 분석해도
절대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고도의 기술이었다.
기간트 장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발굴형 기간트라 하더라도 최소한 갑옷 정도 크기는 되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기간트를 담을 아공간을 쉽게 만들 수 없었다.
한데 아모르는 그 한계를 뛰어넘었다. 실제로 고대유적에서 발굴한 기간트보다 더 성능이 뛰어난 것이다.
제론이 포어트에게 준 것은 아모르의 시제품이었다. 아직 완벽하게 다듬어지지 않아서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웬만한 양산형 기간트쯤은 몇 기가 한꺼번에 덤벼도 단숨에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어쨌든 포어트는 아모르를 이용해 1 왕자가 준비한 습격을 훌륭하게 막아 냈다.
물론 함께 있던 쉘터 대공의 호위 기사들도 제몫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어트의 공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포어트는 쉘터 대공의 큰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백작 위를 받아 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적당한 영지를 구해
줄 것을 약속받았다.
포어트의 영입으로 쉘터 대공은 단숨에 밀렸던 기세를 만회했다. 아니, 오히려 더 세력이 커졌다.
란체 왕국의 세력이 팽팽해지며 물밑으로 격렬한 암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암투는 고스란히 바인의 눈과
귀에 포착되었다.
바인은 그걸 토대로 란체 왕국에 흐르는 암류를 찾아내는 중이었다. 또한 비밀 조직의 특별한 정보 전달 방법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파악해 나갔다.
물론 제론은 그에 대해서는 전혀 알 필요가 없었다. 그저 보고만 받고 원하는 걸 지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란체 왕국을 분열시키려는 놈들이 있단 말이지?”
그놈들이 누군지는 명확했다. 제론이 최종적으로 박살 내야 할 비밀 조직이었다.
어떻게 보면 제론이 포어트를 쉘터 대공에게 붙여 줌으로써 일이 그들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제론의 노림수였다.
아마 그들은 세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쉘터 대공에게 뭔가를 할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준비한
뭔가는 란체 왕국 내에 남아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이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남는 전력을 그냥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의 움직임을
파악하면 적의 정체를 약간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물론 그때는 제론도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적이 란체 왕국을 벗어나면 마티로 추적하는 데에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아모르에 대한 관심도 엄청나게 늘었군.”
바인의 보고서에는 새로운 기간트인 아모르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애초에 포어트에게 아모르를 지급한 이유도 전 대륙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전혀 새로운 형태의 기간트가
등장했으니 각국의 정보부나 수뇌부가 바짝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했다.
바인은 조금씩 아모르의 제원을 퍼트리는 중이었다. 아모르의 출력은 자그마치 3.2 에 달한다. 이는 크란 제국의
기간트를 훌쩍 능가하는 수치였다.
아무리 크란 제국이라 하더라도 발굴형 기간트보다 뛰어난 기간트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크란 제국이 만든
최고의 기간트는 켈룸으로 출력 2.3 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양산형 기체가 가질 수 있는 출력의 한계였다. 켈룸에 들어가는 마나코어가 개발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 한계를 누구도 깨지 못했다.
한데 아모르가 그걸 완전히 깨 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발굴형 기간트인 베르나 에스타스보다 뛰어난 출력을
내고 있으니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현재 각국의 정보를 담당하는 자들은 그 정보를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출력을 획기적으로 늘렸는지에 대한 것과 아모르를 만든 왕국이 대체 정확히 어디인지, 또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완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제론은 바인의 보고서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에어스트 왕국이
완전히 자리를 잡고 난 뒤부터는 그 어떤 왕국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슬슬 대체 텔레포트 게이트에 대한 일을 진행해도 되겠군.”
초고대문명의 마법공학으로 만들 수 있는 텔레포트 게이트는 기존의 게이트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 원리에서부터
구조는 물론이고 능력까지 전혀 다른 게이트였다.
현재 새로운 텔레포트 게이트의 설치에 대한 연구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 연구는 제론과 바이스가
공동으로 했다.
물론 연구의 근간이 되는 원리는 대부분 제론이 제공했다. 그래서 바이스는 새로운 마법 지식을 흡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대로 진행하면 에어스트 왕국이 안정기에 접어든 순간부터 텔레포트 게이트에 대한 일을 왕국 전역에서 동시에
진행할 수 있었다.
제론은 최종적으로 기존의 텔레포트 게이트를 다 폐쇄할 계획이었다.
제론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크란 제국 마탑으로 가는 정보와 돈을 그냥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새롭게
설치될 게이트의 사용료는 상당히 낮게 책정할 계획이었다.
아마 결국은 다른 왕국에서도 제론의 게이트를 설치하게 될 것이다. 그 유용함은 굳이 겪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일단 모든 게 순조롭군. 남은 건 유적인데…….”
제론은 전 대륙을 마티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게 안 된다. 듬성듬성 마티의
시야에서 벗어난 곳이 존재했다.
그 모든 부분을 싹 없애고 싶었다.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 아직 찾아내지 못한 모든 유적을 찾아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일단 지금은 크란 제국의 일을 먼저 해결할 때였다. 제론은 차분하게 바인이 조사하고 자신이 직접 발로
뛰어서 알아내 정리한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크란 제국에 관한 정보는 정말로 별로 없었다. 그들의 생활상 몇 가지와 풍습 몇 가지, 그리고 고위 귀족의
이름이나 그들이 다스리는 영지 정도가 거의 다였다.
나머지는 그들의 역사와 개발한 기간트 등이었는데, 그나마도 밝혀진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크란 제국은 그 넓이에 비해 감춰진 게 지나치게 많았다.
“보면 볼수록 대단해.”
이는 정보의 통제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었다. 하긴, 전 대륙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하면서 정보를
빨아들이는 나라인데, 자국의 정보 보호에 얼마나 민감하겠는가.
“일단 알려진 유적은 세 군데뿐인가?”
바인의 조사에도 크란 제국의 유적은 외부에 공개된 3 개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크란 제국은 유적의
위치도 비밀에 속했다.
심지어는 유적 근방에 사는 사람들조차 유적의 존재 유무를 모를 정도였다. 공개된 3 개의 유적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나마 공개된 3 개의 유적도 크란 제국이 초창기에 발견한 유적이었다. 당연히 관광지로 개발하지도 않았다.
제론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어쩌면 유적에 쉽게 들어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알아볼 수 있는 건 다 알아봤다. 이젠 크란 제국으로 넘어가는 일만 남았다.
제론은 날이 어두워지자, 곧장 도시를 떠났다. 교역 도시에 있는 동안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지냈다. 최대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았다. 특히 크란 제국으로 가는 길이니 더더욱 그랬다.
크란 제국 국경은 경비가 상당히 철저했다. 국경을 따라 수많은 초소가 있었고, 각 초소에는 10 명의 병사와 1
명의 기사가 상주했다.
더 놀라운 것은 초소에 상주하는 기사는 기간트를 보유한 라이더라는 점이었다.
초소의 간격을 생각하면 웬만한 전력으로 크란 제국을 침공했다간 각 초소에 있는 기간트만으로 박살 날 수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크란 제국의 국경 경계망은 무려 세 겹이나 있었다. 각 초소가 엇갈리게 배치되어 세 겹의
경계망을 만든 것이다.
각 경계망은 서로 유기적으로 협조하기 때문에 몰래 국경을 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곳곳에 숨겨진 무수한 마법 함정까지 있기에 요행을 바라고 침입했다간 그대로 골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론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크란 제국의 국경을 넘을 때는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경계망을 구축했다 하더라도 9 개의 마나링을 완성한 것도 모자라 소드 마스터에 이른
제론을 막지는 못했다.
제론은 일단 움직이면 인간의 시야로 잡아낼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것에 대비해 경계망이 세 겹으로 되어
있었지만, 제론은 그조차 뛰어넘을 정도로 빠르고 은밀했다.
마법 함정도 제론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마법 함정 근처의 마나는 다른 곳과 달리 흐름이 뒤틀려 있었다. 마나의
흐름을 마치 눈으로 보듯 느꼈기에 마법 함정에 당하는 일은 실수로라도 벌어질 수 없었다.
제론은 모든 감각을 최대한으로 개방하고는 움직였다. 제론의 감각이 점점 확장됐다. 제론은 눈을 감고도 초소에
있는 병사와 기사의 시선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시선의 사각을 경로로 만들었다. 확실히 모든 시선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이 수십 가지나 나왔다.
그 수십 가지의 길은 계속해서 변화했다. 사라지기도 했고, 다른 길과 교차되고 합쳐지기도 했다.
제론은 그 길 중 하나를 택해 바람처럼 내달렸다. 감각을 개방한 채로 달렸기에 속도는 평소보다 약간 느려졌지만,
자신이 달리는 길이 언제 사라질지, 또 그 전에 어떻게 움직여야 새로운 사각으로 들어갈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제론은 순식간에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은 다음에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국경의 경계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수많은 군부대가 있었다.
각 군부대의 경계 태세는 국경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다만 국경처럼 초소가 쭉 늘어선 것이
아니라, 길만 잘 선택하면 부대의 영역에서 벗어난 길을 통해 이동하는 게 가능했다.
제론은 국경을 방어하는 군부대까지 무사히 지나쳐 크란 제국의 첫 번째 도시로 향했다.

Chapter 3 크란 제국 (1)

“여긴 대체 뭐지?”
제론은 도시를 앞에 두고 눈살을 찌푸렸다.
도시의 방비가 상상 이상이었다. 일반적인 도시의 경우 출입을 관리하긴 해도 대강대강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데 이곳은 너무나 철저하게 출입 관리를 했다.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가 12 개나 있었다. 동서남북에 각각 3 개의 입구가 있었는데, 각각의 입구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아무래도 국경 근처에 있는 교역 도시이기 때문에 유동 인구가 많은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일일이 검문한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각 문마다 수많은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기사도 몇 명 보였다.
“라이더?”
제론은 혀를 내둘렀다. 기사들은 전부 기간트를 보유한 라이더였다. 다들 기간트 장비를 갖추고 있었는데,
장비를 통해 유추하면 임베르가 분명했다.
경비대의 기사들조차 임베르를 타는 곳이 바로 크란 제국이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쨌든 상황이 저러니 결국은 성벽을 타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을 숨기고 마나의
흐름을 파악했다.
‘마법으로 아주 떡칠을 해 놓았군.’
제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성벽은 물론이고 성문에도 마법이 몇 겹이나 중첩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도로에도
마법이 가미되었다.
이런 도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우리 에어스트 왕국의 수도도 저런 식으로 만들면 좋겠군.’
에어스트 왕국의 수도는 아직도 한창 건설 중이었다. 잠깐 시간을 내서 돌아가 도로에 마법진을 추가한다고
공사가 더 늦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공사 기간이 단축될 것이다. 도로의 효용 가치가 높아질 테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마법 수준이 상당한데?’
정확히 말하면 상당한 정도가 아니라 차원을 달리했다. 현재의 마법 지식으로는 절대 구현이 불가능한 마법들이
성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 마법을 만나려면 고대유적에 가야만 한다. 즉, 크란 제국의 도시에 설치된 마법은 고대마법이었다.
‘고대마법을 개발해서 상용화할 정도로 발전을 시켰는데, 외부로는 조금도 유출시키지 않았다는 뜻이로군.’
제론은 그제야 크란 제국이 왜 이렇게 정보를 심하게 통제하는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마법 지식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크란 제국에 저런 마법 지식과 기술이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기간트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고, 가장 뛰어난
기간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제론은 오늘 밤 성벽을 타고 넘기로 했다. 그리고 안에 들어가서 더 자세히 확인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크란
제국에는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뭔가가 감춰져 있음이 분명했다.
밤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벽을 타고 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성벽에는 마찰을 없애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성벽에 뭔가를 박아 넣지 않고 맨손으로 타고 오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곳곳에 발광 마법진이 있어서 성벽이 전체적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그러니 한밤중에 담을 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지금까지는 성벽을 넘어서 도시 안으로 침투하려고 시도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경계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크게 감탄했다. 그 빈틈없는 모습이 크란 제국의 모습 같아서 마음이 조금 답답해졌다.
앞으로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를 들쑤셔야 하는데, 이렇게 빈틈이 없고 깐깐하니 얼마나 고단하겠는가.
그걸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제론은 성벽 위를 돌아다니는 병사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빠르게 성벽에 접근했다. 성벽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노출될 수도 있었지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밤이었다. 빠르게 이동하면 고작 성벽에서 흘러나오는 빛만으로는 결코 제론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없었다.
더구나 빛과 대비되는 어둠은 더욱 짙었기에 몸을 숨기기 좋았다.
성벽에 바짝 붙은 제론은 그대로 점프했다. 어마어마한 점프력이었다. 그리고 빨랐다. 제론은 그 한 번의 점프로
성벽에 올라설 수 있었다.
성벽의 높이는 20 미터쯤 되었다. 소드 마스터인 제론이 그걸 단번에 오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익스퍼트일 때도
기간트에 훌쩍 뛰어 탑승하던 사람 아닌가.
성벽에 오른 제론은 곧장 도시 안으로 뛰어내렸다. 이미 감각을 활짝 연 상태였기에 아래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통행증 같은 게 필요하면 낭패인데.’
미처 그 부분은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그냥 도망치면 된다. 그렇게
편히 생각한 제론은 서둘러 도시 안으로 스며들었다.
제론이 도시에 들어간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제론은 신중하게 행동했다. 아직 크란 제국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았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한밤중인데도 환한 불빛이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번잡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고, 문을 연 술집도 많았다.
거의 벗다시피 한 여자들이 길거리에 늘어선 골목도 곳곳에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내들이 그 골목을 지나며
여자들의 손에 이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제론은 그 모든 광경을 유심히 살피며 거리를 걸어갔다.
‘일단 통행증이 따로 필요한 건 아닌 모양이군.’
도시 입구에서 통행증 검사를 하지만 일단 검사에 통과하면 도시 안에서는 상당히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가끔 보이는 경비병들이 눈을 번득이며 조금이라도 수상하면 멈춰 서 통행증 검사를 하곤 했다. 그걸 보면
아무리 간담이 강한 사람이라도 철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의 방비 상황을 보면 그저 형식적으로 해도 될 것 같은데 경비병들 중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제론은 그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대체 뭐가 저들을 이렇게 빈틈없게 만들었을까.
‘이곳이 국경 근처의 도시라서 그럴지도 모르지.’
일단은 그렇게 판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일단 거리를 걸으며 머물 곳을 찾았다.
제론이 이 도시에 들어온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 도시에 유적이 있었다.
크란 제국에서 유적 발굴 사실이 알려진 세 개의 유적 중 하나가 국경 도시에 있었다. 당연히 공개되지 않았고,
관광지로 개발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이 도시 어딘가에 유적이 있다는 것만 알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혹은 발굴이 끝났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
당연히 제론도 당장은 유적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찾아봐야만 했다. 도시는 상당히 넓었다.
그러니 유적을 찾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저곳이 일단 좋겠군.’
제론은 적당한 규모의 여관을 찾아냈다. 너무 좋은 호텔에 머물면 오히려 신분이 들통 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고 너무 허름한 곳에 묵어도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런 곳에 묵으려면 옷차림을 바꿔야만 한다.
제론은 일단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여관에 묵기 위해선 통행증이 필요했다. 여관
데스크에서 병사 하나가 투숙객의 통행증을 확인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냥 나가면 당장 의심을 살 것이다. 다행히 이 여관은 식당과 주점도 겸했다. 제론은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금세 종업원이 달려와 주문을 받았다. 제론은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양을 순식간에 훑었기
때문에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맥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면서 제론은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방비가 철저한 도시에서 일을 진행하는 게 결코 쉬울
것 같지 않았다.
‘뭔가 획기적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는데?’
제론은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크란 제국의 모든 도시가 이렇게 방비가 철저한지 말이다.
이대로라면 이 도시 안에서는 방을 잡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 물론 그쯤이야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만,
방비가 너무 심하면 유적을 찾는 일도 어려워질 게 뻔했다.
‘일단 이 도시에 있는 유적을 찾으면 어찌어찌 방도가 생길 것도 같은데…….’
일단 유적에는 마티가 있다. 마티를 이용하면 이 도시의 정보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또한 그걸 토대로
다른 도시의 상황도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 유적을 찾는 것이 문제였다. 도시가 너무 넓었다. 게다가 곳곳에 경비병이 어찌나 많은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쉽지 않았다.
경비병들은 수시로 사람들의 통행증을 요구했다. 지금까지는 잘 피해 다녔지만 언제까지 의심을 사지 않고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제론은 식사를 마무리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움직이는 게 답이었다. 일단은 최대한 조심하면서
유적을 찾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국경에서 가까운 도시라 그런가? 경비병이 정말로 많네.’
제론은 밖에 나오자마자 우르르 지나가는 경비병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단 그들의 시야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딜 가나 경비병이 보였다. 그들의 눈을 피해 다니는 건 참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제론은 용케 그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도시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유적 비슷한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도시에서 특별히 경계가 심하거나,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 있는 건 아니었다. 길만 잘 찾으면 도시의
어느 곳이든 다 갈 수 있었다. 한데도 유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이 도시에 유적이 있긴 있는 건가?’
나중에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곳에 유적이 존재한다는 정보는 바인이 전해 준 것이었다. 바인이 준
정보 중에 지금까지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도시를 돌아다녀도 유적을 찾아낼 수 없으니 점점 답답해졌다.
제론은 인적이 없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태블릿을 꺼냈다. 일단 태블릿에 도시 지도를 띄웠다. 제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곳의 지도가 자동으로 태블릿에 그려졌다.
이는 태블릿이 가진 기능 중 하나였다. 물론 태블릿만으로는 안 되고 거기에 연동되는 특수한 아티팩트가
필요했다.
그 아티팩트는 기본 물품을 지급할 때 받은 팔찌의 아공간 안에 있었다. 제론은 그동안 그걸 전혀 쓰지 않았는데,
이번에 아주 톡톡히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제론은 이곳에 있는 유적을 반드시 찾고 싶었다. 그래야 향후 크란 제국에서의 활동이 편해진다.
일이 있을 때마다 제국 밖에 있는 유적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곳의 유적을 찾으면 만일의 사태에 몸을 피할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제론은 태블릿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도시의 지도가 거의 절반 이상 완성되었다.
고작 하루 만에 낸 성과치고는 상당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앞으로는 가 보지 않은 장소 위주로 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래야 가장 의심나는
부분의 정보를 얻을 테니 말이다.
제론은 태블릿의 지도를 토대로 다시 움직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도가 완성되어 갔다.

최종적으로 제론이 지도를 완성하는 데에 꼬박 이틀이 걸렸다. 제론은 완벽한 지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토대로 유적이 있을 거라고 의심되는 부분을 추려 냈다.
도시의 동쪽 중심부에 거대한 저택이 있었다. 워낙 거대해서 완성된 지도를 보면 그 부분이 텅 비어 있을
정도였다.
도시 안에 그런 곳이 모두 세 군데나 되었다. 제론은 그곳들을 중점적으로 살피기로 했다. 아마 그중 하나가
분명히 유적일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유적 찾기는 또 미궁에 빠지게 된다. 제론은 부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길 기원하며 가장
의심스러운 장소로 향했다.
‘크긴 크군.’
벽을 따라 거의 뛰다시피 해서 저택을 한 바퀴 도는 데 몇 시간이 걸릴 정로도 거대했다. 제론은 굳이 저택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스키아.”
그림자 속에서 스키아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저택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스키아는 거침없이 저택을 휘젓고 다녔다. 당연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속도도 빨랐다.

Chapter 3 크란 제국 (2)
제론은 저택의 담벼락에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겼다. 경비병의 기척이 느껴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에 서
있다가 경비병과 마주치면 틀림없이 통행증을 요구할 것이다.
제론은 가장 가까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이었기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게 움직이는
제론의 뇌리 한구석에 스키아가 보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택은 상당히 넓었다. 정문이나 담에서 건물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만 해도 엄청났다. 그리고 그 중간에 수많은
병사와 기사가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건물은 저택의 중앙에 3 개가 모여 있었는데, 일반적인 저택과는 많이 다른 형태였다. 마치 상자를 세워 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3 개의 건물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건물 주변에는 놀랍게도 기간트가 서서 지키고 있었다.
도시 내에 기간트 소환을 방해하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으니 기간트 장비를 가지고 경비를 서지 못하고, 아예
미리 소환해서 비치한 것이다.
‘중요한 곳이로군.’
저택으로 위장했지만 저택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담이나 정문이 다른 저택과 비슷했기에 다들 저택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저택이 아닌 다른 시설이었다.
스키아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건물로 스며들었다. 그림자를 통해 이동하는 스키아를 발견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첫 번째 건물은 각종 마법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9 층 건물이었는데, 각 층마다 벽과 천장 바닥에 마법진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제론은 그 마법진을 보고 살짝 놀랐다. 웬만한 수준의 마법진이라면 그저 보는 것만으로 단숨에 원리와 마나의
흐름을 파악해 어떤 마법진인지 알아냈을 것이다.
한데 이 마법진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현재의 마법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 마법진이었다.
‘이 정도면 고대문명 수준인데?’
제론이 보기에는 그랬다. 차분히 시간을 들이면 어떤 마법진인지 알아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제론은 각각의 층을 모두 확인한 후, 스키아를 다음 건물로 이동시켰다.
두 번째 건물이 진짜였다.
건물에는 수많은 창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창날이 위로 향해 있었는데, 창이 꽂힌 자리에 마법진 하나가 빛을
내고 있었다.
에너지를 끌어내는 마법진이었는데, 그렇게 끌어낸 에너지를 창으로 끊임없이 보내고 있었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창날이 모두 테페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창대에도 테페룸이 잔뜩 섞여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창대에 섞인 다른 성분은 테페룸을 가공해서 만든 물질이라는 점이었다.
‘포로스!’
하마터면 스키아와의 링크가 끊어질 뻔했다. 그 정도로 놀랐다. 창대 내부에 마나로드가 존재했다. 포로스로
만들어진 마나로드였다.
그리고 창대 곳곳에 그 마나로드와 이어지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창에 새겨진 마법진도, 또 창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마법진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법 시간을 들여야 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고 복잡했다.
마나의 흐름도 잔뜩 꼬여 있어서 그걸 하나하나 풀어 가려면 웬만한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일단 들어가야겠어.’
제론은 확신했다. 이곳에 초고대유적이 있었다. 그건 틀림없었다. 또한 고대유적도 있었다. 아니, 있었을
것이다. 그 유적을 통째로 없애고 저 건물을 세웠음이 분명했다.
스키아만으로 확인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창 하나를 훔쳐서라도 알아보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어차피 초고대유적을 발견하면 마티를 통해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제론은 스키아를 움직여 마지막 남은 건물을 확인했다. 그 건물 역시 수많은 마법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다른 곳과는 다르게 수많은 사람이 상주하고 있었고, 그들을 위한 숙박 시설과 편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물론 마법진은 편의 시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특별한 기능을 가진 것이었다. 아직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은 외부를 경계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인원이기도 했고, 또
경비를 더 철저히 하기 위한 교대 병력이기도 했다.
제론은 일단 스키아로 근방의 경계 상황이나 건물의 내부 구조 등을 세심히 살폈다. 모든 것이 제론이 몰래 숨어
들어갔을 때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에 확인한 건물 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일단 마법진이 도배된 곳에는 사람이 다가가지 않았다. 누구든
제론이 보기에도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독이라도 묻어 있는 듯한 반응이었다. 제론은 그 마법진에 뭔가가 있다고 판단했다. 나중에 몰래
숨어 들어갈 때 조심해야만 했다.
확인할 만한 것을 모두 살펴본 제론은 일단 스키아를 돌려보냈다. 이제는 실행만이 남았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무래도 그게 움직이기 편할 것이다. 하지만 건물 안에 도배된 마법진을 생각하면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만일
마법진이 특별한 상황에서 빛을 내게 만드는 것이라면 숨어 들어가는 것이 상당히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제론은 스키아를 움직이면서도 주위를 세심히 살폈다. 혹시라도 경비병이 골목으로 들어온다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일단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릴 곳이 필요하군.’
이곳은 잠깐 몸을 숨기긴 좋아도 오랫동안 머물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제론은 조심스럽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몸을 숨기더라도 이곳에서 가까운 곳이 좋았다.
제론은 적당한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생각보다 많았다. 각 건물마다 시야가 차단된 장소가 있었다. 제론은 이동 편의성을 생각해
자리를 잡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제론이 숨은 곳으로 다가오면 다른 건물의 사각으로 이동할 빈틈이 있어야 활동하기가 편했다.
그 모든 사항을 고려해 장소를 고른 제론은 기척을 죽인 채 태블릿을 꺼냈다.
해가 지려면 아직 1 시간 정도는 있어야 한다. 게다가 해가 진 직후가 아니라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활동하기가
용이했다. 즉, 최소한 2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시간 동안 뭘 하겠는가. 제론은 오늘 확인한 건물의 마법진을 분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에 있는 수많은
마법진 중 가장 궁금한 것은 바로 창과 창을 꽂은 자리의 마법진이었다.
바닥의 마법진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대충 감이 왔기에 일단 창의 마법진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스키아.”
제론은 다시 스키아를 불러 저택의 건물에 보냈다. 스키아와 공유된 감각에 창의 모습과 바닥의 마법진이 확
들어왔다.
이런 방식의 마법진은 겉만 보고는 알 수 없었다. 세심한 마나의 흐름을 통해 감춰진 부분을 확인해야 정확한
효능을 알아낼 수 있었다.
스키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지만 아직 시간이 넉넉했다. 제론은 차분하게 마법진을 하나하나 해체하며 분석해
나갔다.
제론은 스키아와 공유된 시각을 통해 마법진을 확인하고 그것을 태블릿에 옮겨 그렸다. 또한 스키아로 파악할 수
있는 마나의 흐름을 최대한 집중해서 캐치해 그것도 태블릿에 옮겼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태블릿에 창에 새겨진 마법진과 마나의 흐름, 그리고 창의 내부 구조가 조금씩 그려졌다.
그렇게 창의 마법진을 옮긴 제론은 바로 이어서 바닥의 마법진도 태블릿에 기록했다. 바닥의 마법진은 12 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드러난 부분보다 감춰진 부분이 훨씬 많았기에 그걸 모두 옮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충 흐름을 파악하는 건 가능했다.
제론은 할 수 있는 걸 다 한 다음 스키아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태블릿을 통해 마법진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완전히 옮기지 못했기에 분석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태블릿의 기능과 제론의 능력이 합해지니
어찌어찌 분석이 가능했다.
물론 완벽한 분석은 아니었다. 정말로 완벽하게 분석하려면 실제로 제론이 저 창 앞으로 가서 오랫동안 마나의
흐름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러니 지금은 정확한 분석보다는 마법진의 효능을 중점적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근차근 마법진을 분석하던 제론의 눈이 점점 커졌다.
“엄청나군.”
창에 담긴 마법진은 테페룸과 포로스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었다.
바닥의 마법진은 예상대로 에너지를 끌어내 전달하는 마법진이었다. 땅에 퍼진 지력을 모아 마법진 중앙에 꽂힌
창에 끊임없이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보통의 땅에 이런 마법진을 하나 만들어 놓는다면 지력이 완전히 바닥나 땅이 황폐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특별했다.
초고대유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고대유적에서는 끊임없이 에너지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초고대유적이 만들어 내는 에너지였다. 유적 자체가
만들어 쓰고 남은 에너지를 외부로 방출하는데, 그 에너지를 마법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창에 새겨진 마법진은 그렇게 받아들인 에너지를 저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특별한 조건을 만들면 한꺼번에 모든
에너지를 불꽃으로 바꿔 폭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테페룸과 포로스는 에너지를 저장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특별한 방법을 써야만 한다. 그걸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마법진과 창대 내부에 만들어진 구조였다.
창대 내부는 미로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모든 곳에 포로스가 꽉 채워져 있었다. 그 구조는 특별한
마법진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것이었다.
그것이 어우러져 에너지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저장하게 되어 있었다. 테페룸으로 이루어진 창날도 에너지
저장의 효과가 있었고, 나중에 그걸 터트릴 때의 역할도 컸다.
제론은 창 하나의 위력을 대충 가늠해 봤다. 아직 마법진을 완벽히 분석한 게 아니라 정확한 위력을 산출할 수는
없었기에 대충 어림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충 계산한 것만으로도 표정이 굳을 정도로 놀랐다. 창 하나를 제대로 터트리면 웬만한 성은 단번에 날려
버릴 수 있었다.
건물 안에는 이런 창이 수백 개나 꽂혀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에너지를 모아야 창을 꽉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곳에 있던 창들은 조만간 에너지가 포화 상태에 이르기 직전이었다.
‘위험해.’
정말로 위험했다. 만일 저 창들이 모두 크란 제국의 것이라면, 또 저 창이 수백 개가 아니라 이미 훨씬 많은
수를 만들어 뒀다면 무서운 일이었다.
저 창 하나면 기간트 수십 기를 동시에 박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런 창이 인간용만 있으란 법은 없지.’
만일 기간트용 창이나 검을 저런 식으로 만들었다면 그것도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저런 창을 든 기간트를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창이 에너지를 방출하는 방식을 바꿔서 단번에 폭발하지 않고 끊임없이 에너지를 뿜어낸다면, 상대하는 기간트의
몸에 스치기만 해도 박살 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못 막겠군.’
물론 제론 정도 실력을 가진 라이더라면 상대가 어떤 무기를 들더라도 승리할 수 있었다. 상대의 무기를
역이용하는 방법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보통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마 저런 무기를 든 기간트가 10 기만 나타난다 하더라도 수백 기의
기간트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책이 필요해.’
저런 무기를 상대할 대책이 필요했다. 앞으로 저 무기를 더 이상 못 만들게 할 대책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유적을 차지해 거기서 흘러 나가는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 된다.
지금까지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내버려 뒀지만 일단 유적의 주인이 되어 통제실을 장악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에너지만 막아도 더 이상 창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근처의 땅만 황폐해질 뿐 창에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를 쌓는 건 불가능해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창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디 있는지 알아내서 훔치기라도 해야 할지 모르겠군.’
마법진을 분석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날이 저물었다.
밤이 되자 제론이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저택 안에 있던 마법진들이 일제히 가동하며 주변에 촘촘한 마나의
그물을 깐 것이다.
저택에 다가간 제론은 그 마나의 그물에 담긴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건드리면 강한 빛이 터지는 마법의
일종이었다.
제론은 조용히 저택에 다가가 마나의 흐름을 몸으로 느꼈다. 감각을 최대한 마나에 집중하니 그 흐름이 눈에 보일
듯 파악되었다.
마나의 그물은 참으로 촘촘했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더구나 제론은 마나링을 9 개나 만든
대마법사였다.
제론의 심장에서 회전하던 마나링이 맹렬히 가속했다. 제론의 몸에서 가느다란 마나의 실이 가닥가닥 나왔다.
그리고 촘촘하게 짜인 마나의 그물에 스며들어 갔다.
그렇게 마나를 간섭시킨 제론은 마나의 그물을 넓혔다. 촘촘했던 마나의 그물 한 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사람이 하나 지나가고도 남을 정도로 큰 구멍이었다.
하지만 그냥 구멍 하나 뚫은 걸로는 소용이 없었다. 마나의 그물은 저택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당연히 제론도
그걸 알고 있었다.
제론은 일단 뚫린 마나의 그물을 통해 저택의 담장을 훌쩍 넘었다.

Chapter 3 크란 제국 (3)

마나의 그물만 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저택 곳곳에서 감시의 눈을 번득이는 경비병의 시선도 피해야만
했다.
제론의 마나링이 더욱 맹렬히 가속했다.
위이이이이잉!
제론 앞에 있던 마나의 그물이 투두둑 끊어졌다. 물론 마나의 그물을 이루는 마법의 흐름은 그대로였다.
그렇게 뚫린 길을 통해 제론은 빠르게 내달렸다.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고, 소리도 기척도 전혀 없을 정도로
은밀했다.
제론은 순식간에 목표로 한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 안에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했기에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워낙 빠르게 문을 열고 닫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걸 보지 못했다.
혹시라도 사람이 있을지 몰라 들어가자마자 몸을 낮추고 안을 살폈다. 텅 비어 있었다. 아니, 텅 빈 것이
아니었다. 마나로 꽉 차 있었다.
창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마나가 확연히 느껴졌다. 그 회전이 모이고 모여 건물 안을 꽉 채운 것이다.
제론은 황급히 마나링을 가속시켜 주변 마나를 장악했다. 안을 지키는 사람이 왜 없는지 알 수 있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회전하는 마나를 건드리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마나의 흐름이 틀어지면 마법이 흔들리면서 창에 모이는 에너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만일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면 대번에 밖에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마나의 흐름이 험악해질 것이다.
제론은 마나의 흐름을 안정시킨 다음 천천히 걸어갔다. 정밀한 흐름의 마나로 꽉 차 있기에 아무 대책 없이
움직이면 단번에 파탄이 날 것이다.
하지만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제론에게 있어서 마나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움직이는 건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제론은 건물 안에서 가장 마나의 흐름에서 자유로운 장소에서 걸음을 멈췄다. 공교롭게도 건물의 딱 중앙이었다.
마나링의 가속을 멈춘 제론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무도 들어올 리 없기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잠시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한 제론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지금까지 중에 가장 어렵고 중요한 순간이었다. 제론은 마나링을 가속시키며 희미하게 흘러나온 마나의 실로
주변을 장악했다. 그리고 조용히 정령을 불렀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루룽!
아네모스가 제론의 눈앞에 나타났다. 제론은 마나의 실을 이용해 아네모스 주변의 마나와 에너지의 흐름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후우. 쉽지 않군.”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긴장했다. 아네모스가 나타나며 흩뿌리는 마나와 에너지의 흐름은 작은 폭풍과 다름없었다.
자칫하면 주변 마나를 건드려 마법진을 폭주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안심이었다. 제론은 아네모스를 팔찌에 넣었다.
화아아아악!
강렬한 빛과 함께 제론의 몸이 아래로 쑥 내려갔다. 일체의 마나 유동도 없었다. 그것이 바로 초고대유적의
힘이었다.

유적 로비에 선 제론은 씨익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익숙한 광경을 보고 있으니 참으로 즐거웠다.
드디어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크란 제국에서의 첫 유적을 손에 넣은 것이다.
제론은 일단 통제실로 향했다. 서둘러 이 유적에 대해 알고 싶었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비교적 평범한
유적이었다.
다른 유적에 비해 마티의 양이 좀 많아 정보 수집 범위가 넓은 걸 제외하면 별것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단 이 도시에 대한 모든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일단 에너지의 흐름을 바꿔 놔야겠어.”
제론은 유적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의 흐름을 아래쪽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최대한 아래로 멀리 보내면 지하 깊은
곳에서 에너지가 퍼지게 된다. 그 에너지는 광범위하게 흩어져 지력으로 변할 것이다.
에너지 흐름을 바꾸는 건 간단했다. 통제실에서 명령 코드만 입력하면 끝이었다.
우우웅!
유적이 한 차례 진동하더니 에너지 흐름을 바꿔 버렸다. 이제 더 이상 유적 위 건물에서 창에 에너지를 모으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거기까지 끝낸 제론은 마티를 통해 건물을 비롯한 도시 전체를 살폈다. 앞으로 이 도시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크란
제국에 대해 알아 갈 것이다.

Chapter 4 두 번째 도시 (1)

깁스 남작은 보고서를 살피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임팩트 스피어 제작소의 에너지가 사라져?”
임팩트 스피어는 조직에서 상당히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일단 임팩트 스피어 제작소는 고대유적을 개조해서 만든 곳이었다. 즉, 고대유적을 움직이던 힘을 이용해 창을
제작했다는 뜻이었다.
고대에는 신비로운 에너지원을 이용하는 방법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그 시스템을 이용해 임팩트 스피어를
제작했다.
한데 에너지원이 갑자기 사라지다니. 무려 수천 년을 이어져 오던 에너지원이 왜 갑자기 사라진단 말인가.
“아직 목표량을 절반밖에 채우지 못했는데…… 이거 난감하군.”
더 정밀한 조사가 필요했다. 그리고 정말로 에너지원이 사라졌다면 대책 마련이 시급했다. 임팩트 스피어는
대계를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했다.
“짜증이 나는군.”
갑자기 에너지원이 사라지는 바람에 거의 완성 단계에 있던 임팩트 스피어에 쌓았던 에너지가 줄줄줄 빠져나가
버렸다.
그래서 계획이 더욱 늦춰졌다. 임팩트 스피어가 완성된다고 해서 대계를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준비가 끝날 때까지 임팩트 스피어를 준비하는 게 불가능해져 버렸으니 짜증이 나는 게 당연했다.
깁스 남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료가 쌓인 책장으로 가서 몇 개의 책자를 꺼내 살폈다.
일단 임팩트 스피어 제작소를 새로 지어야만 했다. 물론 예전처럼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었다. 기존의
건물을 철거해서 가져다가 세우면 된다.
문제는 제작소를 세울 장소였다. 아무 데나 세울 수 있는 건물이 아니었다.
깁스 남작이 지금 찾는 것이 바로 그 장소였다. 크란 제국의 모든 유적은 깁스 남작의 비밀 조직이 장악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모든 유적이 특별한 목적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장소를 정하려면 기존에 있던 건물을
없애야만 했다.
깁스 남작은 책자를 쭉 훑으며 현재 가장 필요 없는 유적을 찾아봤다.
“이건 안 되고, 이것도 곤란하고…… 아! 이거면 되겠군.”
깁스 남작은 책자 중간쯤에 있는 유적을 손으로 짚었다.
유적의 에너지를 이용해 아티팩트를 만들어 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만드는 아티팩트는 마법등이었다. 최근
페쿠니아 상단에서 내놓는 휴대용 마법등 때문에 판매량이 대폭 떨어져 버렸기에 굳이 이곳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마법등을 만드는 족족 재고가 쌓이고 있었기에 생산을 중단하고, 필요하면 직접 제작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편이 나았다.
“그나저나 아무래도 이상하군. 면밀히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어.”
깁스 남작은 결정을 내리고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유적의 에너지원에 수명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 봤다.
무려 수천 년이나 이어져 온 유적이었다.
한데 이제 와서 갑자기 에너지가 고갈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설마 다른 유적도 차례대로 에너지가 고갈되는 건 아니겠지?’
깁스 남작은 문득 든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만일 그렇게 되면 대계에 정말로 큰 차질이 생긴다. 물론 유적의
에너지원이 없다 하더라도 대계를 이루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그럴 경우 피해가 커진다.
깁스 남작의 비밀 조직은 최소한의 피해로 대계에 성공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깁스
남작에게 떨어지는 것이 많았다.
그렇기에 깁스 남작은 대계를 이루기 위한 준비에 상당히 공을 들여 왔다. 한데 이런 일이 생기니 불안해진
것이다.
깁스 남작은 애써 불안감을 지우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곳들이 어떤 곳인데.”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한번 찾아온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 ☆

제론은 유적에서 한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마티로 유적 위를 충분히 관찰했고, 마법진이 가동을 멈추며
창에서 에너지가 쭉쭉 빠져나가는 것도 확인했다.
제론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무시무시한 무기가 악인의 손에 들어간다면 참담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어쨌든 제론은 유적의 마티를 이용해 주변을 충분히 살필 수 있었고, 그것은 바인도 마찬가지였다.
바인은 도시에서 광범위한 정보를 받아들여 분류하고 분석했다. 그리고 중요한 결론을 도출할 때마다 그것을
제론에게 보냈다.
그래서 제론은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 도시의 경비병은 대부분 사병이었다.
도시의 주인인 영주보다 훨씬 많은 병사를 가진 귀족이 5 명이나 있었고, 그들의 병사가 영주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도시를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유적 위에 세워진 건물은 영주의 것이 아니라 그 다섯 귀족의 공동소유였다.
바인은 그 다섯 귀족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비밀 조직의 끈이 이어져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제론은 차분히 상황을 살폈다. 제론이 주로 확인하는 곳은 당연히 유적 위에 세워진 건물이었다.
“음?”
갑자기 건물 주위가 부산스러워지더니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병사는 아니었다. 복장이나 하는 행동을 보면
무력이 아닌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 같았다.
마법사도 많았고, 일꾼도 많았다. 물론 일꾼은 병사와 기사들이 철저히 감시했다.
그들은 건물에 달라붙더니 차근차근 건물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부수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해체였다. 벽을
조심스럽게 뜯어내고, 바닥도 신중하게 벗겨 냈다. 혹시라도 마법진이 손상될까 봐 엄청나게 조심스러웠다.
‘건물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려는 건가?’
확실히 이런 건물은 새로 만드는 것보다 옮기는 게 훨씬 싸게 먹힐지도 모른다. 시간도 덜 걸리고 말이다.
건물을 모두 해체해서 옮기는 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것도 사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세 개의 건물을
바닥까지 고스란히 뜯어서 옮겼으니 말이다.
그렇게 건물이 사라지고 나니 더 이상 이곳을 지키는 병사도 없었다. 그냥 버려진 것이다.
제론은 마티와 바인의 보고를 통해 이 넓은 땅을 영주가 다시 구입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섯 귀족은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고 비싼 값에 저택을 팔았다.
막대한 금액이었지만 영주에게도 사실 이득이었다. 저택이 있던 땅은 엄청나게 넓었다. 이곳에 뭘 조성하든
결과적으로 영주에게 굉장한 이득을 안겨 줄 테니까.
아무튼 인적과 마법진이 사라져 버려 제론이 밖으로 나가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나중에 이곳에 무엇이 생길지 알 수 없지만 원래 있던 건물만큼 경계가 심하거나 마법진으로 도배되지는 않을
것이다.
제론은 더 기다리지 않았다. 앞으로 이 도시에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니 더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제론은 유적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즉시 도시를 벗어났다.
도시의 경계가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어서 빠져나가는 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특이하게도 성벽에 도배되다시피 한 수많은 마법진 중 절반 이상이 기능을 정지해 버렸다. 그걸 확인한 제론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의 마법진도 초고대유적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해 돌린 것이다. 그것이 사라졌으니 에너지 공급이
사라진 마법진이 힘을 잃는 게 당연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 마법진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에너지원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론은 언제든 그
마법진을 다시 돌릴 수 있었다. 유적의 에너지 흐름을 다시 놓아 버리면 즉시 그렇게 될 것이다.
아무튼 제론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도시를 벗어났다. 그리고 가까운 다른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Chapter 4 두 번째 도시 (2)

“여기는 생각보다 경계가 심하지 않은데?”


두 번째 도시는 첫 번째 도시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그런데도 경계는 첫 번째 도시의 절반에도 크게 못 미쳤다.
첫 번째 도시의 경우 들어가려는 사람이 모든 문에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이곳은 별다른 검문검색 없이 성문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었다.
마티의 범위가 아슬아슬하게 이 도시에 미치지 못하기에 도시에 대해 알아보려면 직접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우르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묻어서 슬쩍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와 기사가 있었지만
다들 번득이는 눈으로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기간트 라이더로군.’
성문을 지키는 기사는 라이더였고, 기간트 장비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은 첫 번째 도시와 같았다.
아마도 이것이 최소한의 경계인 듯했다. 다른 어떤 도시에 가든 이 정도 경계는 하는 모양이었다.
‘유적의 유무가 경계의 강도를 결정하겠군.’
그렇다면 이 도시에는 유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니, 있을 수도 있었다. 고대유적과 연결되지 않은 거점 형식의
초고대유적이라면 저들도 이용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니지. 그건 확신할 수 없지.’
아무리 거점 형식의 초고대유적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다수의 마티를 보유했다. 또한 유적에서 지속적으로
에너지가 흘러나갔다. 물론 에너지의 양이 다른 유적에 비해 적었지만 말이다.
만일 비밀 조직에서 그 에너지를 찾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자리를 놓칠 리 없었다. 아무리 다른
유적에 비해 에너지의 양이 적다 하더라도 그걸 이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했으니까.
제론은 도시를 거닐었다. 저번 도시와는 달리 도시에서의 통행증을 따로 발급하지도 않았고, 그걸 확인하려는
경비병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활기가 넘쳤다. 정말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론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분위기가 조금 들뜨긴 했지만 그래도 그 안에 흐르는 삼엄함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전혀 느끼지 못했겠지만 제론은 소드 마스터이자 대마법사였다.
고작 두 개의 도시를 봤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크란 제국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에 설치된 마법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번 도시보다는 못했지만 이 도시에도 각종
마법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제론은 일단 숙박부터 알아봤다. 저번 도시에서 초반에 워낙 고생을 했기에 여기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잠자리만이라도 편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나마 다행이군.’
이곳에서도 함부로 숙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시 규모가 워낙 크니 그런 것이 가능한 여관이 있었다.
빈민가 근처에 있는 허름한 여관이었는데, 여관 주변이 심각한 우범 지대였다.
크란 제국의 치안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병사의 수도 많았고, 질도 높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범죄를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특히 빈민가 근처의 범죄율은 상당했다. 그리고 제론이 발견한 여관은 그런 범죄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신분 노출을 꺼리는 자들이 묵는 곳이기에 통행증이나 신분증이 필요 없었다.
다만 여관에서 자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었다. 또한 그렇게 당하고도 어디 가서 하소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차피 신분 확인이 불가능한 놈들에게 당한 것일 테니 말이다.
제론 입장에서는 아주 훌륭한 여관이었다. 비록 낡고 허름했지만 말이다.
제론은 적당한 방을 잡고 안을 정리했다. 일단 침대는 낡고 지저분해서 누울 기분도 생기지 않았다. 그 침대
대신 제론은 아공간에 있는 깨끗하고 푹신한 침대를 꺼냈다.
그리고 벽과 바닥에 마법진을 새겨 공기를 쾌적하게 유지했다.
그 정도만 해도 상당히 훌륭한 잠자리가 되었다.
제론은 일단 하룻밤을 잔 다음 여관에서 나갔다. 물론 그때는 침대와 마법진을 깨끗이 정리한 뒤였다.
별것 없는 도시였지만, 그래도 충분히 살펴보고 싶었다. 사실 크란 제국 내에 있는 유적을 찾아다니는 건 상당히
막막한 일이었다.
첫 번째 도시의 경우야 어찌 되었건 정보가 돌아다니니 위치를 알 수 있었지만, 나머지 유적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다.
크란 제국 내에서 알려진 유적은 세 군데뿐이었는데, 그중 하나를 찾았으니 이제 남은 건 둘이었다. 한데 그
둘은 첫 번째 유적에서 지나치게 먼 곳에 위치했다.
현 상황상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수 없기에 도시를 찾아 날아가야 하는데, 크란 제국의 경우 제대로 된
지도조차 구할 수가 없어서 도시를 찾아가는 것도 어려웠다.
아무튼 이래저래 어려움이 많아, 지금으로서는 차근차근 도시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고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도시에 유적이 있다면 경계가 심할 테니 그걸 토대로 유적의 유무를 알아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제론은 그저 무작정 도시를 걸었다. 굉장히 넓은 도시였기에 길도 많았다. 제론은 되도록 넓은 길로만 다녔다.
골목골목 다 다니기에는 너무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냥 걷기만 한 건 아니었다. 제론은 이동하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대화와 상황을 눈에 담았다.
제론이 몸에 지닌 아티팩트를 통해 그 모든 것이 태블릿에 차곡차곡 쌓였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그걸 확인하면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문득 도시의 중앙에 도착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광장이 조성되어 있었고, 그 광장
한가운데에는 아름다운 분수가 있었다.
제론은 그 광장에 들어선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법진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 광장 자체가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제론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바닥을 확인했다.
평평한 돌이 촘촘히 깔려 있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제론은 감탄했다. 그렇게 깔린 돌 중에 특별한 재질을 가진
것들이 섞여 있었다.
물론 겉으로 보면 다른 돌과 똑같았다. 아마 웬만큼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가 오더라도 돌의 차이점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제론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돌은 달랐다.
제론은 성질이 다른 돌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광장의 마법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돌들이었다.
특별한 성질을 가진 돌을 이용해 광장에 거대한 마법진을 구성한 것이다.
‘상당한 실력이군.’
마법진 자체도 뛰어났다. 예전에 창에 에너지를 주입하기 위해 만든 마법진만큼이나 대단했다. 이 역시
고대문명에서 유래된 마법인 것이다.
마법진을 완벽히 분석하려면 전체적인 마법진의 모양을 알아야 하는데, 광장이 워낙 넓었기에 그걸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제론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론은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분수로 다가갔다.
분수에 최대한 가까이 가서 멍하니 분수를 쳐다봤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넋을 잃고 구경하는 것 같겠지만
사실 제론은 자신의 감각을 넓게 펼쳐 마법진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제론의 감각은 상당해서 광장 전체를 장악했다.
일단 특수한 돌로 이루어진 마법진을 확인한 다음, 주변 마나의 흐름을 파악했다.
마법진은 3 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가장 위에 특수한 돌로 마법진을 그렸고, 그 아래에 위와 연계된 마법진을
마나스톤을 섞어서 만들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 거대한 금속판을 두고 마법진을 구성했다.
그 세 개의 마법진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활발히 주변 마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제론의 머릿속에 퍼즐이 맞물려 맞춰지듯 마법진이 착착 꿰맞춰졌다.
마법진 자체는 맞출 수 있었지만, 그걸 분석해서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 알아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이곳에
쓰인 마법진이 생각보다 복잡해서 완전히 분석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듯했다.
제론은 완전히 맞춰진 마법진을 머릿속에 담은 채 천천히 분석을 시도했다. 굳이 이 자리에서 할 필요는 없었기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다.
한데 그 순간 누군가 말을 걸었다.
“분수가 정말로 마음에 드시나 봐요.”
제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법진을 분석하고 꿰맞추는 데 너무 집중했다. 누가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이자 대마법사였다. 게다가 주변 마나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리 딴 데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다가오는 걸 놓칠 리가 없었다.
제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사람을 쳐다봤다. 엄청나게 아름다운 여인 한 명이 생글생글 웃으며
제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당한 기품이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또한 옷차림도 예사롭지 않았다. 장인이 정성을 다해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옷을 입은 여인이 보통 사람일 리 없었다.
“제게 하신 말씀입니까?”
제론의 물음에 여인이 더욱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짜고짜 손을 불쑥 내밀었다.
“반가워요. 전 로스라고 해요.”
손을 내민 로스의 눈이 이슬처럼 반짝였다.
제론은 잠시 로스의 손을 쳐다보다가 마주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파바박!
순간적으로 마나가 충돌해 스파크가 일어났다. 물론 눈에 보이는 스파크가 아니었다. 마나와 마나가 부서지며
팍팍 튀었다.
제론은 눈앞에 선 여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방금 전의 악수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여인은 굉장한
실력자였다. 현시대에는 절대 없을 거라고 믿던 존재이기도 했다.
‘소드 마스터!’
진짜 소드 마스터였다. 초고대의 기준으로 봐도 분명한 소드 마스터였다. 조금 전 악수로 그녀의 실력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놀랍군요.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로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로스였다.
“잠시 시간 좀 내 주시겠어요?”
로스는 너무나 궁금했다. 대체 눈앞에 선 사내가 누구인지. 또 어떻게 저런 거대한 힘을 손에 넣었는지 말이다.
그것은 제론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요.”
로스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향했다. 제론은 분수를 쳐다보며 머릿속에 새겨진 마법진을 재빨리 한 번 점검하고는
로스의 뒤를 따랐다.
‘나중에 틈을 봐서 태블릿에 저장해 둬야겠군.’
제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로스의 걸음은 생각보다 빨라서 잠깐이라도 딴생각을 하면 놓칠 것
같았다.

로스가 제론은 데려간 곳은 상당히 커다란 저택이었다. 제론은 저택 앞에 도착해서 눈에 이채를 띠었다. 저택의
규모에 비해 안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기척이 너무 적었다.
‘고작 4 명?’
참으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보아하니 저택을 관리하고 살림을 도맡아 하는 모양이었다.
“들어와요.”
로스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가 놓지도 않았다. 들어올 테면 들어와 보라는 듯했다. 하지만
누구도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정말로 특이하군.’
저택에 흐르는 기운이 굉장히 특별했다. 사람들이 접근하기 꺼려지게 만드는 기운이었다.
물론 제론에게는 전혀 소용없었지만 말이다.
로스가 저택에 들어가자, 저택의 기운이 흔들리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그러자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이 후다닥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제론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관찰했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치 코앞에서 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그들의 움직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저택 한구석으로 향해 모였다. 그곳에 있는 방에 함께 들어가 쥐죽은 듯 있었다.
‘꼭 도망치는 것 같군.’
제론이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빛내고 있을 때, 로스가 뒤돌아 제론을 바라봤다.
“이제 됐어요.”
제론은 로스의 말에서 방금 전 기운을 흔든 것은 로스가 의도적으로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당신 정체가 뭐죠?”
제론은 로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제론의 날카로운 감각이 그녀의 온몸을 샅샅이 훑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에 정말로 세심히 확인했다.

Chapter 4 두 번째 도시 (3)

‘마나가 불안정하군.’
제론은 왜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알아냈다. 그녀의 몸에 깃든 마나는 상당히 불안정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몸 안의 마나가 불안정할 이유가 없었다.
‘아직 소드 마스터가 아닌가? 한데 이건 좀 이상한데?’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면 몸에 저렇게 많은 마나를 담을 수가 없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다는 건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키운다는 의미도 있었다. 또한 그 그릇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도 포함된다.
한데 로스의 경우는 완성되지 않은 그릇에 마나만 강제로 채워 넣은 느낌이었다.
“제 물음에 대답하지 않으실 건가요?”
로스가 다시 물었다. 제론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로스의 몸을 좀 더 살피고 싶었기에 집중을 흐트러뜨리기
싫었다.
로스의 눈빛이 난폭해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에 잠든 마나도 난폭해졌다.
제론의 눈이 반짝였다. 방금 전의 일로 로스의 상태를 더욱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
로스는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엄청난 속도였다.
후아앙!
꼿꼿이 세운 로스의 손이 제론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단숨에 심장을 찔러 죽이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제론은 넘실거리는 살기를 담담히 받아넘기며 손을 들었다.
턱.
제론이 로스의 손목을 잡아 공격을 멈췄다. 하지만 로스는 거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온몸의 마나가 폭발하듯 몸 밖으로 터져 나왔다.
보통은 그런 마나의 기세만 맞아도 목숨을 잃을 것이다. 웬만큼 강한 기사라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제론에게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제론은 그렇게 쏟아지는 마나까지 술술 받아넘겼다. 제론과 로스의 수준 차이는 명확했다.
제론이 로스의 손목을 통해 마나를 흘려 넣었다. 그와 동시에 온몸으로 마나를 내뿜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앞으로 마나를 보냈다.
효과적으로 로스의 마나를 집어삼키고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로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붉게 물들었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경악은 이내 공포로 바뀌었다.
“요, 용서해 주세요.”
로스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제론에게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마나가 장악되면서 심령이 짓눌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에서 난폭하게 움직이는 마나가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제론은 로스의 손목을 통해 흘려 넣은 마나를 이용해 날뛰는 그녀의 마나를 차근차근 정리했다.
지나치게 난폭한 마나는 흡수하거나 없애 버리고, 그나마 갱생의 여지가 있는 마나만 잘 다독여 안정시켰다.
일단 로스가 제론과 싸울 의지를 잃었기에 마나의 장악은 금방 끝났다. 로스는 자신의 몸에 차분히 가라앉는
마나를 느끼며 더욱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거 좀 놔주세요.”
로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손목을 보며 말했다.
제론은 로스의 손목을 놓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로스는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하지만 감히
도망치지는 못했다.
“자, 이제 우리 얘기 좀 할까?”
제론의 말에 로스가 불안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쳐다보는 제론의 시선에 온몸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로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살짝 떨었다. 제론을 바라보는 눈에 어린 불안감이 점점 더 커졌다.

Chapter 5 로스의 비밀 (1)

로스는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탁자를 마주하고 앉은 제론의 시선을 피하려 애썼다.


상당히 넓고 화려한 응접실이었는데, 차를 가져다주는 사람조차 없어서 탁자 위가 텅 비어 있었다.
“얘기해 봐.”
제론의 말에 로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분수대 보셨죠?”
로스는 그렇게 말문을 열고는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제론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말을 이었다.
“거기에서 힘을 얻었어요.”
“힘을 얻어?”
로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상당히 망설이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자들은 그걸 실험이라고 했어요.”
“실험? 힘을 얻는 실험인가?”
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보고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소드 마스터라…….”
제론의 표정이 굳었다. 로스가 말한 자들은 소드 마스터에 대한 기준이 현재와 달랐다. 제론과 같은 기준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솔직히 말하면 전 싫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죠.”
힘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연약한 여자에 불과했으니 그들에게 반항조차 못 했을 것이다.
“전 이 저택을 벗어나선 안 돼요.”
제론이 로스를 쳐다봤다. 저택을 벗어나선 안 되는데 분수대에는 왜 갔단 말인가.
“하루에 한 번씩 분수대에 가야만 해요. 딱 그 시간만이 제 유일한 낙이었죠.”
“하루에 한 번 분수대에 가야만 한다고?”
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그러면 몸이 터져서 죽을 거래요.”
“몸이 터져 죽어?”
제론의 머릿속이 맹렬히 돌아갔다. 저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걸 보면 정말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면 로스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있거나.
“그 사람들이 그랬어요. 그리고 저도 느낄 수 있어요. 하루에 한 번 분수대로 가지 않으면 전 죽어요.”
제론이 로스의 몸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폈다. 그녀의 몸에 흐르는 거친 마나를 차근차근 파악해 봤다. 하지만
별다른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로스는 제론이 자신을 살피든 말든 자조적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아. 당연히 그렇겠죠. 제게 힘을 준 것이 그 분수대니까요.”
그 말에 제론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분수대가 힘을 줬다고?”
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처음에는 정말로 아팠지만, 그래도 힘을 얻었을 때는 좋았어요. 몸이 날아갈 것 같았거든요. 누구든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았고요.”
당시의 일이 떠올랐는지 로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이내 자조로 바뀌었다.
“이젠 다 틀렸지만요.”
“저택에서 나갈 수 없다는 건 널 감시하는 자들이 있다는 뜻인가?”
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이 저택을 떠나면 죽어요. 여긴 제 힘이 터지지 않게 억제해 주는 마법이 걸려 있거든요.”
“마법?”
제론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마법이라니, 말도 안 된다. 만일 이 저택에 마법이 걸려 있었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나의 흐름을 파악하는 감각 하나만은 전 대륙의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초고대문명에 가더라도 그것만은 최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니 만일 마법진이라도 있었다면 이 저택에 들어온 순간 바로 느꼈어야만 했다. 하지만 제론은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제론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감각에 집중했다. 예리하게 날이 선 감각이 저택을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마법의 흔적은 없었다.
“정말로 마법이 걸려 있다고?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그들이 말했으니까요. 절 강제로 실험에 참가시켰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어요.”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말만 믿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날 여기로 데려온 거지?”
“궁금해서요.”
“궁금해?”
“저 말고 다른 실험체를 본 건 처음이거든요. 이 도시에는 저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제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로스는 한껏 움츠러든 채로 그런 제론을 바라봤다.
“네 몸을 좀 살펴봐도 될까?”
“예? 모, 몸을요?”
로스는 조금 당황했다. 설마 제론이 그런 요구를 할 줄은 몰랐다. 사실 그녀는 상당히 아름다웠다. 그러니
남자들의 관심을 수없이 받아 왔다.
하루에 한 번씩 분수대에 가는데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가는 시각이 일정치 않았기에 하루 종일 그녀만
기다리던 남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수작을 부리다가 로스에게 처참하게 당한 뒤로는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일을 몇 번이나 겪었기에 남자가 자신을 보며 어떤 관심을 갖는지, 또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데 제론이 그걸 요구했다. 그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수십 번이나 바뀌었다.
다른 남자의 경우는 힘으로 물리쳤다. 하지만 제론을 힘으로 물리칠 자신이 없었다. 제론은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힘으로 덤비면 꼼짝없이 당할 것이다. 아까도 그저 눈빛 한 번에 몸이 굳어서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하아, 그래도 신사적이시네요. 그렇게 동의도 구하시고.”
로스가 그렇게 비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결할 용기는 더 없었다. 차라리 눈 한 번 질끈 감고 참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나중에 이에 대한 복수는 반드시 할 것이다.
“알았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로스는 그렇게 말하며 제론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녀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절대 제론의 얼굴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제론은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왜 이런 반응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잡스러운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제론은 마음을 다잡고서 로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제론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끝까지 눈을 뜰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두려웠다.
‘아플까?’
로스가 그런 생각을 떠올릴 때, 제론이 그녀의 양 손목을 잡았다. 그녀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로스는 다음에 벌어질 일을 두려워하며 마음을 다독이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제론이 움직이지 않자 결국
슬그머니 눈을 떴다.
제론은 로스의 양 손목을 잡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뭔가 집중했는지 로스가 눈을 뜨고 자신을 요모조모
살피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론 로스가 뭔가 행동을 취했다면 제론은 대번에 반응했을 것이다. 로스가 약간의 살기나 투기만 보여도 단숨에
제압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제론은 계속해서 로스의 몸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로스는 그제야 자신이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제론의 얼굴을 차근차근
뜯어봤다.
로스의 눈이 이슬처럼 반짝였다.

제론은 수십 가닥의 마나를 실처럼 뽑아 로스의 손목을 통해 몸으로 밀어 넣었다. 제론의 마나가 몸 곳곳을
누비며 로스의 마나와 몸 상태를 조금씩 파악해 나갔다.
‘난폭해.’
로스의 마나는 말할 수 없이 난폭했다. 그리고 거칠었다. 조금만 자극을 해도 급격히 날뛰었다. 안정감이 전혀
없었다.
로스가 왜 몸이 터질 거라고 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저 보기만 했을 때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직접 마나를 흘려 확인하니 이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2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긴 시간을 들여서야 간신히 로스의 온몸을 마나로 장악할 수 있었다. 지금
로스의 몸 내부에는 제론이 실처럼 뽑은 마나 수백 가닥이 흩어져 있었다.
그 모든 마나의 실을 통해 제론에게 로스의 몸에 관한 정보가 끊임없이 흘러들어 왔다.
‘마나의 그릇으로 온몸의 장기를 다 이용했군.’
몸의 장기는 각각 고유한 성질의 마나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훈련에 따라 각 장기에 속한 마나의 양을 늘리는
것도 가능했다.
한데 로스는 모든 장기에 강제로 마나를 꽉꽉 채워 넣었다. 거의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채웠기에 조금만 흔들려도
마나가 급격히 날뛰는 것이다.
‘어쩔 수 없었겠지.’
아마 그렇게 포화 상태가 되도록 마나를 밀어 넣지 않았다면 폭주로 이어졌을 것이다.
로스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각 장기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나와 강제로 밀어 넣은 마나가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걸 해결하는 방법은 외부에서 주입한 마나를 각 장기의 마나와 성질을 일치시키거나, 아니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대한 양의 마나를 통해 원래의 마나를 억누르는 것이었다.
로스는 두 번째 방법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 분수대로 가서 하루 동안 소모된 마나를 보충해야만 했다.

Chapter 5 로스의 비밀 (2)

‘근본적으로 몸의 그릇을 다시 만들지 못했기에 이대로라면 더 이상 몸이 버틸 수 없겠어.’


다른 실험체가 있는지 모르지만 아마 각자의 체질과 운에 따라 벌써 마나 폭주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
‘길어야 몇 달인가?’
로스도 이대로 가면 각 장기가 외부 마나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할 것이다.
거기까지 모두 파악한 제론은 손목을 놓으며 눈을 떴다. 그러자 제론을 빤히 바라보던 로스의 반짝이는 눈이
정면으로 보였다.
“끄, 끝나셨어요?”
로스가 당황하며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얼굴을 붉히면서도 제론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대충.”
“어, 어떤가요?”
로스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제론이 대체 무엇을 한 건지 궁금했다. 자신의 손목을 잡고 뭔가를 했고, 또 몸을
살펴보겠다고 했으니 자신에 관한 일 아니겠는가.
“폭발 일보 직전이야.”
로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데 그 말을 또 들으니 왠지 선고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침울해졌다.
“그리고 계속 마나가 장기에 무리를 줘서 장기의 상태도 한계에 달했어.”
“예?”
로스가 깜짝 놀라 제론을 바라봤다. 그건 지금 처음 듣는 얘기였다. 장기가 상했다니, 대체 그럼 자신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이 상태라면 길어야 석 달이다.”
“석, 석 달이요? 그럼 전…….”
“장기가 뭉개져 죽겠지.”
로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사실 그녀가 항상 옆에 끼고 다니던 단어였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확정적인 얘기를 들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저, 정말인가요? 거짓말이죠? 그렇다고 말해 줘요.”
“내가 거짓을 말해 뭘 하겠나?”
로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대체 이제 뭘 어쩐단 말인가. 매일 분수대에 가도 석 달 후에는 죽는다니.
왜 자신만 이런 불공평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불안과 공포에 깊이 잠식당한 로스의 귓가에 제론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살고 싶나?”
로스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증상을 한눈에 알아본 제론이라면 살아날 방법도 알지 않을까? 살고
싶으냐는 말 한마디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 당연하죠. 저…… 살 수 있나요?”
제론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가능성이야 있지만 실패하면 바로
죽음이었다.
“가능성은 있지만 성공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거다.”
로스가 그 말에 한참이나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은 결심을 굳혔다.
“그거 해 주세요.”
제론은 로스를 빤히 쳐다봤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절박한 거야 이해하지만, 뭐가 이리 당당하단 말인가. 전혀
부탁을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제론이 그 일을 해 줘야 하는 것처럼 말하다니.
“그럼 넌 뭘 해 줄 거지?”
“예?”
로스가 크게 당황했다. 뭘 해 줄 거냐니, 사람 목숨을 구하는 일이다. 거기에 왜 대가를 요구한단 말인가.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건 당연히 누구나 해야 하는 일 아닌가.
하지만 상황이 절박하니 그런 마음을 그대로 내보일 수가 없었다. 로스의 입에서는 속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갔다.
“뭐, 뭘 원하시는데요?”
솔직히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저택도 로스의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실험을 한 자들의 것이었다. 또한
저택에서 일하는 일꾼들도 로스가 고용하지 않았다.
재산도 아예 없었다. 말 그대로 빈털터리인 것이다. 그러니 대체 뭘 줄 수 있겠는가.
‘줄 수 있는 거라고는…….’
뭘 줄 수 있는지 떠올리다가 자신의 몸을 한 번 내려다본 로스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전 드릴 수 있는 게 제 몸밖에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자신의 몸을 걸고 뭔가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거슬렸다. 하지만 상대가 제론이라면 허락해 줘도 될
것 같았다.
로스는 제론을 빤히 쳐다봤다. 설마 자신의 몸을 내주겠다는데 거절할 리가 없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쓸모없군. 그럼 이 거래는 없던 걸로 하지.”
“예?”
로스가 크게 당황했다. 설마 이렇게 단호히 거절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농담이나 장난인 줄 알았다. 한데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는 제론을 보니 절대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로스는 다급해졌다. 어느새 제론이 문을 열고 저택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자,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제론은 기다리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급해진 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날렸다.
쉬아악!
바람이 갈라지며 로스의 몸이 제론 앞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제론은 충분히 피해서 지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걸음을 멈췄다.
“기다려 주세요!”
로스가 그렇게 외치며 양팔을 벌리고 제론을 막아섰다. 제론은 그런 로스를 가만히 쳐다봤다.
“잘못했어요! 그런데 정말로 전 드릴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살고 싶단 말이에요!”
제론은 그런 로스를 보다가 피식 웃고는 돌아서서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제론의
뒤를 따랐다.
로스는 최대한 제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썼다.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제론의 표정을 힐끗힐끗 살피며
제론이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뭘 보고 날 그렇게 믿는 거지? 내 말이 틀렸을 수도 있잖아?”
제론의 말에 로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쩌면 그저 분위기에 휩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믿을 수 있었다.
제론이 아니면 아무도 자신을 살려 주지 못한다는 감이 확 왔다.
‘지금까지 제 감은 거의 틀린 적이 없답니다.’
물론 그 말은 꺼낼 수 없었다. 감에 목숨을 맡겼다고 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어떤 실험에 어떻게 참여했는지 말해 달라는 거지.”
“예? 시, 실험이요?”
로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실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자신이 그걸
말해 주면 제론도 같은 실험을 통해 뭔가를 얻으려 할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대충은 짐작하니 기억나는 대로만 얘기하면 돼.”
제론은 이미 로스의 몸을 샅샅이 살펴봤다. 어떤 식으로 마나를 주입해야 몸이 이렇게 되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이제 그걸 확신하고 좀 더 세부적으로 알아내기 위해 로스의 증언이 필요할 뿐이었다.
로스는 머뭇머뭇하다가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실험은 분수대에서 벌어졌어요.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이 광장을 통제하고 절 그리로 데려갔어요.”
제론은 눈에 이채를 띠고 로스의 설명을 차분히 들었다. 로스의 몸에 에너지를 주입한 장치는 바로 분수대였다.
거기에 특별한 아티팩트를 꽂아 바늘을 통해 로스의 몸에 마나를 넣은 것이다.
당시 로스는 마나를 몸으로 받아들이며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고통이었다.
그때 수천 번이나 죽고 싶었지만 몸을 마음껏 통제할 수 없어서 그게 불가능했다. 그저 고통을 겪고 기절하고
깨어나서 또 겪고 기절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결과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소드 마스터였지만 말이다.
로스의 설명을 모두 들은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이 어디지?”
“예? 치, 침실이요?”
로스는 또 불안해졌다. 하지만 이제 더 떨어지거나 포기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제론을
침실로 안내했다.
제론은 손가락을 들어 침대를 가리켰다. 로스는 군소리 없이 침대에 누웠다.
제론은 로스 앞에 서서 양손을 들어 올리고 집중했다.
“절대 움직이지 마라. 죽기 싫으면.”
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어 본 경험이 있었다. 비록 강제이긴 했지만 그걸 견뎌 냈다.
그러니 치료 중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참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로스의 표정이 결연해지자, 제론이 손을 움직였다. 오른손은 로스의 아랫배에 그리고 왼손은 로스의 가슴
한가운데에 갖다 댔다.
가슴에 손이 닿는 순간 로스가 흠칫 놀랐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제론에게 다른 의도가 없다는 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제론의 양손에 마나가 모여들었다. 제론의 몸에서 나온 마나가 아니라 로스의 몸에서 끌어들인 마나였다.
가장 마나를 모으기 쉬운 위치가 가슴과 아랫배였다. 제론은 그쪽으로 로스의 마나를 계속 끌어들였다. 로스의 몸
곳곳에 뭉친 마나가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사실 완벽하게 하려면 로스의 몸이 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진짜 소드 마스터가 된다. 하지만 그건
그저 이렇게 마나만 모아준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려면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현재 로스는 정신도 육체도 없는 상태에서 마나만
받아들였다.
이런 경우 가장 간단하고 좋은 해결법은 마나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제론은 신중하게 마나를 모아 그것을 서서히 끌어들였다. 막대한 양의 마나가 제론의 몸으로 빨려 들어왔다.
“하으응!”
로스는 마나가 급격해 배출되자 묘한 신음을 흘렸다. 몸의 정이 빠져나가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면서 그것이
신경계를 건드린 것이다.
로스는 마나가 빠져나가는 내내 몸을 떨었다. 부끄러움 때문에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지만, 몸이 반응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론은 자신의 몸으로 빨아들인 로스의 마나를 일단 심장으로 보냈다. 제론의 몸에서 마나를 가장 빨리, 그리고
순수하게 정화시킬 수 있는 곳은 바로 심장의 마나링이었다.
마나링은 항상 회전하고 있었다. 회전과 동시에 끊임없이 불순물을 태워 버리고 파장을 동조하기 때문에 어떤
마나를 받아들이든 가장 순수한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로스의 장기에 있는 모든 마나를 빨아들여선 안 된다. 원래 로스가 가지고 있던 마나는 그대로 둬야만 했다. 그
선을 딱 잘라 내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자칫 너무 많은 마나를 가져와 버리면 장기가 힘을 잃어버리고, 그건 곧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반면 외부 마나를 남기면 다른 특성의 마나가 충돌해 장기가 무너질 것이다. 그것 역시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 선을 정확히 파악해서 마나를 빨아들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제론은 조금 다른 방법을 이용했다.
“후욱!”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했다. 제론은 심장의 마나링을 가속했다. 심장에 모은 마나가 마나링 위에서 함께 회전했다.
물론 그것에 마나링에 흡수되지는 않았다.
제론의 마나링은 지금 포화 상태였다. 심장에 마나를 받아들이려면 마나링을 새로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아직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렇게 회전시켜 깨끗이 만든 뒤 온몸으로 흩어 버릴 계획이었다.
그렇게 심장의 마나링을 가속하면서 손바닥을 통해 마나를 실처럼 뽑아 로스의 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로스의 몸에는 각 장기에 머문 마나와 분수대에서 흡수한 마나가 공존하고 있었다. 다만 양이 줄어서 이젠 약간의
충돌만 감수하면 될 정도가 되었다.
문제는 로스의 장기가 약해져서 그 정도 충격으로도 충분히 상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제론은 자신의 마나를 이용해 로스의 몸에 있는 두 가지 마나를 동조시켰다.
우우우우웅!
두 마나가 진동하며 서서히 특성이 비슷해졌다. 각 마나가 가진 고유의 파장이 있는데, 그 파장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솔직히 제론은 이 방법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론적으로는 초고대문명의 지식을 공부하며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걸 실제로 써 본 적이 없었다.
‘진짜 되는군.’
내심 안도했다. 만일 이 방법이 안 된다면 자신의 마나로 어떻게든 로스의 장기를 보호하려고 했다. 물론 그렇게
해도 타격을 입기에 로스의 수명이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동조를 했으니 로스가 가진 마나량이 늘어난 셈이 되었다.
소드 마스터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현시대 기준의 익스퍼트 정도의 실력은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다만 마나로드가 개척되지 않아 제대로 그 힘을 모두 쓸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물론 제론은 그것까지 해결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건 제론의 심력과 마나를 너무 많이 소모한다. 또한 로스에게 그걸 버틸 여력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마나로드를 만드는 것도 상당한 충격을 준다. 그걸 버티지 못하면 현재 로스의 상태로는 죽을 확률이 너무 높았다.
제론의 얼굴을 비롯해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Chapter 5 로스의 비밀 (3)

로스는 자신의 몸에 툭툭 떨어지는 제론의 땀방울을 느끼며 제론을 바라봤다. 얼마나 힘겨워하는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안쓰러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론이 천천히 로스의 몸에서 손을 뗐다.
“끄, 끝났나요?”
제론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할 수 없이 힘들고 피곤했다. 하지만 이 피로는 이제 금방 사라질 것이다.
위이이이이이잉!
제론의 심장에 있는 9 개의 마나링이 맹렬히 회전했다. 그러자 마나링에 묻어 있던 여유 마나가 온몸으로 흩어져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었다.
샤아아아아!
제론의 몸에 흐르던 땀방울이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마치 바람이라도 부는 것처럼 옷자락이 펄럭였다.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를 온몸에 받아들였다. 마나량 자체가 늘어난 건 아니었지만 그 마나를 이용해 몸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나름대로 제론에게 상당한 득이 되었다. 앞으로 제론은 더욱 뛰어난 감각을 갖게 될 것이고, 육체적 능력도
향상될 것이다.
제론은 이번에 마나호흡을 통해 1 년 이상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을 단번에 이뤘다.
“전…… 이제 살 수 있는 건가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힘은 사라졌다.”
로스는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요. 그딴 힘 같은 건…….”
로스는 결국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그동안의 맘고생과 설움이 터져서 좀처럼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제론은 그런 로스를 가만히 지켜봤다. 이렇게 응어리를 풀어 주지 않으면 나중에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었다.
후련하게 울고 나면 앞으로 더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참 동안이나 운 로스는 훌쩍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지만, 워낙 아름다웠기에
그것이 그녀의 미모를 가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눈물이 채 마르지 않아 더욱 묘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감사합니다. 몸이 정말로 상쾌해요.”
가볍지는 않았다. 막대한 힘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뭔가 훨씬 살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생기가 넘치는
듯했다. 로스는 그것이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 계속 여기 있어도 되나?”
제론의 물음에 로스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그저 살아야 한다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거기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 어쩌죠? 그들이 이 사실을 알면 아마 제 몸을 해체해 버릴지도 몰라요!”
로스는 극심한 두려움에 빠졌다. 로스를 이렇게 만든 자들은 그동안 별다른 감시를 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 가끔
찾아와 몸을 검사하는 게 전부였다.
그들이 원하는 건 실험에서 성과를 거두는 것이었기에 로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로스는 그들이 너무나
무서웠다. 언제든 자신을 뭉개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감히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실제로는 로스를 검사하는 자들은 로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로스가 마음먹고 손가락만 휘둘러도 목을 잘라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스는 절대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럼 여길 나가야겠군.”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로스를 당장 어딘가로 빼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애써
살렸는데 이대로 방치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제론이 해 놓은 것 때문에 저들이 어떤 힌트를 얻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더더욱 로스를
포기하기 싫었다.
“절 데려가실 건가요?”
“시간을 두고 방법을 생각해 보자.”
제론은 로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머리를 맹렬히 굴렸다. 사실 방법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들이 언제쯤 여기에 오지?”
“이제 5 일 남았어요.”
그들은 딱 정해진 날에만 왔기에 날짜를 계산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로스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에 깃든 간절함이 제론의 마음을 살짝 움직였다.
“어쨌든 그때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해. 집에 있는 일꾼들에게 들킬 염려는 없나?”
“그게 좀 문제이긴 하네요.”
집의 일꾼들은 로스가 밖에 나가는 시간에 맞춰 집안일을 한다. 그리고 로스가 돌아오면 후다닥 몸을 숨긴다.
로스가 폭주하면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 마나가 폭주하면 주변을 피로 물들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로스가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저택을
뒤덮는 강렬한 기세를 느끼기만 하면 후다닥 도망갔다.
즉, 마나가 폭주하며 저택을 덮치는 것이 신호였다.
제론은 로스의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해결해 줄 수 있었다. 로스의 마나가 가진
성질도 잘 알고 있으니 몇 번 쓸 수 있는 아티팩트를 만들기로 했다.
“내일 분수대에서 만나는 걸로 하지. 내가 해결 방안을 그때 줄 테니까.”
재론은 그 말을 남기고 서둘러 저택을 떠났다.
로스는 제론이 훌쩍 사라지자 진한 아쉬움이 담긴 눈으로 제론이 있던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잠시 후, 그
아쉬움이 두려움으로 바뀔 때까지 말이다.

Chapter 6 광장의 분수대 (1)

로스의 집에서 나온 제론은 곧장 광장으로 향했다. 이 도시는 경계가 심하지 않아서 그래도 이렇게 움직이기가
상당히 편했다.
분수대로 가는 도중 예전에 머릿속에 넣어 둔 광장의 마법진을 꺼내 분석을 시작했다.
쉽지 않았지만 대강 어떤 마법진인가는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다.
‘역시 에너지를 모으는 마법진이야.’
분석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첫 번째 도시에서 본 마법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진 분석이 끝났을 무렵, 제론은 광장에 도착했다. 마법진을 완전히 분석해서 그런지 광장의 마나 흐름이
참으로 익숙하게 느껴졌다.
제론은 천천히 분수대로 걸어갔다.
광장에는 제론 말고도 제법 많은 사람이 있었다. 도시 중앙에 있기에 만남의 장소로도 잘 활용되는 곳이었다.
또한 산책을 즐기고 싶을 때 오기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제론은 분수대를 빙 돌며 찬찬히 살폈다. 분수대의 문양, 그리고 주변 마나 흐름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샅샅이
확인했다.
‘역시 아티팩트였어.’
로스의 말만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제론은 분수대의 마법진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차근차근 분석했다. 보는 사람이 많았기에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했다. 그래서 분수대에 완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제론은 산책 나온 사람으로 위장해서 분수대 주변을 돌아다녔다.
분수대가 어떤 아티팩트인지 정확히 알아내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대충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만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예상하던 바도 있었고 말이다.
‘역시 에너지를 저장하는 아티팩트로군.’
에너지 저장은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분수대는 아주 특별한 물질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주로 테페룸과 포로스로 되어 있군. 그리고…… 리스모스까지?’
리스모스도 포로스와 마찬가지로 테페룸을 가공해서 만드는 물질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포로스보다 훨씬 만들기가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또한 테페룸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질도 섞어야 하기에 포로스처럼 대량생산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한데 그런 리스모스까지 이 분수대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리스모스는 마나 저장에 탁월한 성능을 보이는 물질이었다. 리스모스까지 이용했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에너지를
분수대에 저장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광장의 마법진이 어딘가에서 에너지를 빨아들여 분수대로 끊임없이 저장을 한다는
점이었다.
분수대에 저장된 에너지는 척 보기에도 엄청났다. 제론은 예리한 감각으로 분수대 내부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실로 엄청났다. 만일 저 에너지를 일시에 폭발시킬 수 있다면 이 도시쯤은 우습게 날아가 버릴 것이다.
물론 이 에너지를 그런 식으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에너지는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쓸 것이다. 예를 들면
인위적으로 소드 마스터를 만들어 내는 실험 같은 것 말이다.
‘이 막대한 에너지를 어디서 끌어왔겠어?’
제론은 피식 웃었다. 너무나 뻔한 답이었다. 이 분수대 아래에 분명히 유적이 있을 것이다. 상황을 보아하니
거점 형식의 유적인 듯했다.
하지만 그런 유적에 있는 마티만으로도 충분히 이 도시 정도는 커버가 가능했다.
제론은 일단 자리를 떴다. 인적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거점 형식의 유적이긴 하지만 부디 폴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물러났다.

제론은 일단 숙소인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방 안에서 로스에게 줄 아티팩트를 제작했다.


어차피 두 번이나 세 번만 쓰면 되니 세심하게 만들 필요도 없었다. 재료도 별로 들어가지 않았고 말이다.
크기나 모양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기에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더욱 단축되었다.
제론은 밤이 되었을 때, 아티팩트를 완성했다. 어른 손바닥 3 개 정도의 크기였는데, 작동시키면 미리 담아 둔
마나를 사방으로 퍼트리는 아주 단순한 아티팩트였다.
제론은 그 아티팩트에 자신의 마나를 담았다. 딱 3 회분이었다. 제론은 특별한 마나 컨트롤 능력을 동원해서
아티팩트에 담는 마나의 성질을 미묘하게 바꿨다.
그것이 바로 예전 로스가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난폭한 마나였다.
이것은 로스에게 잠깐의 여유를 줄 것이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로스를 외부로 빼돌릴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나저나 이 비밀 조직, 정말로 대단하군.’
제론은 초고대문명뿐 아니라 고대문명에 대해서도 제법 잘 알고 있었다. 현시대에 제론보다 더 고대어에 능통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많은 고대유적을 돌아다니고, 그 유적에 있는 글귀, 마법진, 구조 등을 분석하다 보니 고대에 관한 수많은
지식이 저절로 쌓였다.
아직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비밀 조직의 수준이 왠지 고대문명에 거의 근접한 듯했다.
테페룸을 다루는 법이라든가 포로스나 리스모스는 고대 말기에 제법 여러 곳에서 쓰였다. 물론 초고대와 비교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 정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사실 크란 제국의 수준은 다른 왕국에 비해 몇 단계나 위에 있다. 기술 수준이나 마법 수준이 최소 수백 년은
앞서 있었다.
하지만 그런 크란 제국조차 테페룸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테페룸을 가공해서 만든 포로스나 리스모스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테페룸을 제련하는 것조차 못 하는데, 그걸 어찌 가공하겠는가.
한데 이 비밀 조직은 그걸 해낼 수 있었다. 그러니 크란 제국이 향후 수천 년을 발전해 나가야 비밀 조직의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제론은 이 비밀 조직의 정체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당연히 복수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들의
정체 자체에 호기심이 들었다.
아티팩트를 품에 넣은 제론은 조용히 여관을 나섰다.
광장에 인적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건 제론에게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제론은 광장으로 향하면서 스키아를
불렀다.
스키아는 제론의 의념에 따라 먼저 광장으로 이동해 주변을 살폈다.
스키아를 통해 광장을 살핀 제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광장에는 몇 명의 기사와 그들이 이끄는 수십 명의
병사가 있었다.
‘밤에는 지키는군.’
광장 자체가 비밀 조직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물건일 테니 혹시라도 벌어질지 모를 사태에 대비하는 건 사실 너무나
당연했다.
제론은 걸음을 늦췄다. 대책도 없이 괜히 빨리 갈 이유가 없었다. 광장에 도착하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기사와 병사가 지키는 것은 명확했다. 그들은 분수대를 중심으로 마치 호위하듯 진형을 짰다.
병사 사이사이에 기사가 끼어 있어서 웬만한 자들은 분수대에 접근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사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들을 몽땅 때려눕히고 유적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란은 지금 상황에서
좋지 않았다.
정 방법을 못 찾을 경우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야만 했다. 로스를 빼돌리는
문제도 함께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Chapter 6 광장의 분수대 (2)

그렇게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제론의 감각에 뭔가가 걸려들었다. 제론은 걸음을 멈췄다.


“뭐지?”
도시가 술렁이고 있었다. 아니, 도시 곳곳에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거야 당연하지만, 제론이 이렇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들로부터 풍기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뭔가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다. 각각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투기와 살기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반란이라도 일으키려는 건가?’
제론의 눈이 반짝였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관계없었다. 중요한 건 제론에게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도시 곳곳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자들의 수는 수백 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들이 향하는 곳은 놀랍게도 광장이었다.
제론은 일단 몸을 그림자 속에 숨기고서 스키아를 통해 광장의 상황을 유심히 살폈다.
또한 감각을 최대한 활성화시켜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도시 전체가 제론의 뇌리에 조금씩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다.

☆ ☆ ☆

제헨은 은밀히 움직이며 동료들을 돌아봤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동료는 모두 124 명이었다. 제헨까지 합하면
125 명이나 되는 사람이 한꺼번에 도시를 질주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제헨의 눈에 보이는 동료는 고작 8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도시 곳곳에서 각자의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는 중이었다.
‘시간을 맞추는 게 제일 중요해.’
제헨은 손목에 칭칭 감아 놓은 팔찌를 확인했다. 마치 긴 끈을 손목에 감은 듯했는데, 그건 분명히 금속이었다.
그리고 금속의 색은 두 가지였다.
한쪽 끝이 금색이었고, 나머지는 은색이었다. 그리고 금색이 점차 길어져 은색을 잡아먹고 있었다.
이것이 동료들과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준비한 특별한 아티팩트였다.
이 아티팩트를 만들기 위해 상당한 자금을 투자했다. 그리고 최근의 작전에 상당한 도움이 되어 왔다. 투자금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어쨌든 팔찌의 색으로 판단하건대 아직 시간이 좀 있었다. 속도를 조금 늦출 필요가 있었다.
제헨은 슬쩍 팔을 들었다. 그의 신호를 받은 동료들이 속도를 늦췄다.
그들의 목표는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분수대였다. 그것은 제헨이 속한 조직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이자, 그들에게
악몽을 선사해 준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타이밍을 맞춰 일부 동료는 광장 서쪽과 동쪽에 있는 경비대를 칠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분수대를 지키는 병사와
기사를 상대할 것이다.
제헨은 그들이 그렇게 소란을 피우는 사이 분수대를 부수는 것이 목표였다. 사실상 가장 중요한 임무를 띤
셈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큰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움직이는 이유가 바로 그 분수대였으니 말이다.
제헨은 초조한 마음으로 손목을 확인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헨의 눈이 번득였다. 드디어 시간이 된
것이다.
“가자.”
제헨의 말에 그의 동료가 일제히 움직였다. 그들은 빠르게 광장으로 향했다.
그들이 광장에 들어서기 직전 다른 곳에서 움직이던 동료들이 서쪽과 동쪽의 건물을 덮쳤다.
꽈과과광!
작은 폭발형 아티팩트가 굉음과 함께 터지며 비명과 고함이 어우러졌다.
그리고 수십 명의 사내들이 광장으로 달려가 병사와 기사를 덮쳤다.
채채채채채챙!
“죽여!”
“크아악!”
“막아!”
광장이 일순간 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순간 제헨이 동료들과 함께 곧장 분수대로 내달렸다.
제헨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처음 하는 일도 아니었고, 가진 바 능력도 상당했다. 작전은 완벽했다. 이제
분수대만 터트리면 모든 게 끝난다.
서둘러야만 했다. 제헨이 빨리 끝내면 끝낼수록 동료들이 몸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날 테니까 말이다.
제헨이 품속에 있는 달걀만 한 구슬을 확인했다. 그것이 바로 강력한 화염과 바람을 일으켜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폭발형 아티팩트였다.
물론 그것 하나만으로 분수대를 부술 수는 없었다. 분수대는 엄청나게 단단했다. 각종 방어 마법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만들어진 재질 자체가 특별했다.
하지만 그런 분수대에도 분명히 약점이 있었다. 제헨이 노리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제헨과 그의 동료들은 격렬한 싸움터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빈틈을 노리고 지나가는 그들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아니, 지나가는 걸 눈치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만큼 격렬하고 흉험한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제헨은 분수대에 도착해 일단 아래를 살폈다. 그리고 준비한 단검을 꺼내 분수대와 광장 바닥이 연결된 부분에
있는 돌을 파냈다.
카가각!
특수한 재질의 돌 하나가 뽑혀 나왔다. 제헨이 그 일을 하는 동안 나머지 8 명의 동료 역시 분수대에 붙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워낙 훈련도 많이 하고 실전도 많이 겪어서 그런지 그들의 손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분수대에 붙었다 싶은 순간
벌써 돌을 파내고 품에서 달걀만 한 구슬을 꺼냈다.
그들은 돌을 파낸 자리에 그 아티팩트를 쏙 넣었다. 그리고 파낸 돌을 다시 끼웠다. 당연히 아귀가 맞지
않았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품에서 병 하나를 꺼내 그 안에 든 우윳빛 액체를 그 위에 쏟았다.
액체는 끈끈했는데, 돌에 덧씌워지니 딱딱하게 굳었다. 당연히 단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제헨은 일을 마무리한 뒤 빠르게 분수대에서 멀어졌다. 그러면서 품에서 꺼낸 신호탄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피유우우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불꽃이 하늘로 쭉 올라갔다.
그러자 제헨의 동료들이 습격을 마무리하고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 뒤를 기사와 병사들이 쫓았지만 그들의 속도가
너무 빨라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게다가 가는 길 중간중간 미리 만들어 둔 함정 때문에 간격이 벌어지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그렇게 제헨과 동료들이 한창 빠져나가고 있을 때, 분수대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습격자들을 쫓던 기사와 병사들이 당황한 눈으로 돌아봤다. 그들의 눈에 비친 광경은 커다란 분수대가 하늘 높이
솟구치는 모습이었다.
망연한 눈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던 기사와 병사들은 분수대가 다시 땅으로 떨어지자, 정신을 차리고 광장으로
달려갔다.
꽈앙!
분수대가 광장 바닥에 처박히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기사와 병사들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광장에 도착한 그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광장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분수대는 곳곳이 그을리고
부서졌지만 그래도 비교적 멀쩡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광장 바닥이 온통 뒤집어지고 부서져 있었다. 아마 다시 분수대를 설치하려면
엄청난 돈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책임을 고스란히 지게 된 기사와 병사들의 눈이 암담함으로 물들어 갔다.

☆ ☆ ☆

제론은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내심 감탄했다. 분수대를 박살 낸 방법도 대단했고, 거기에 이르는 일련의
움직임이 상당했다.
웬만한 훈련과 실전을 겪지 않았다면 엄두도 낼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어쨌든 덕분에 제론은 편하게 되었다. 아마 더 이상 분수대를 지킬 필요가 없을 테니 금세 인적이 사라질 것이다.
그때 들어가서 유적만 등록하면 된다.
아마 이 도시도 조만간 제론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이다.
병사와 기사들이 광장을 내버려 두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쨌든 도망친 작자들을 찾아야 했고, 죽은 자는 모아서
뒤를 캐 봐야 했다.
그렇게 광장이 버려졌을 때, 제론이 등장했다.
제론은 유유히 광장 한가운데, 분수대가 있던 자리에 서서 아네모스를 소환했다.
잠시 후, 환한 빛이 광장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빛을 본 몇몇 병사와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왔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한동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광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유적 로비에 선 제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우. 이거 유적에 들어올 때 꼭 빛이 나야 하는 건가? 그걸 없애는 방법은 없나?”
만일 그게 아니라면 훨씬 은밀하게 유적을 들락거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이목만 속이면 되니 대낮에 인파가
바글거릴 때에도 충분히 이동이 가능했다.
한데 워낙 강렬한 빛이 생겨나니 타인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인적이 전혀 없을 때만 이동해야 하니 너무나
불편했다.
예전부터 불만이었고, 방법을 찾아봤지만 아직까지 그걸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저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일단 최하층에 있는 통제실로 향했다. 이 유적은 거점일 게 거의 확실하지만 그래도 확인이 필요했다.
혹시라도 뭔가 쓸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통제실에 도착한 제론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적인 거점이었다. 유적에는 마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긴, 그러니까 그놈들도 에너지를 모으는 분수대 정도만 설치한 거겠지.”
제론은 마티를 유적 밖으로 모두 내보낸 다음 바로 유적에서 흘러나가는 에너지를 컨트롤했다. 첫 번째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에너지를 아래쪽으로 쏘아 보냈다.
나중에 이 에너지를 쓸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렇게 방치할 것이다.
“에너지가 사라진 걸 모르고 분수대를 또 설치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후훗.”
만일 그렇게 되면 그 비밀 조직은 헛돈과 쓸데없는 노력을 쓰게 된다. 그들이 시간과 비용을 낭비할수록
제론에게는 더 좋다.
“그나저나 이제 로스의 문제를 해결해야겠군.”
제론은 품에 넣은 아티팩트를 만지작거렸다. 분수대가 부서졌으니 이건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그냥 버릴까
생각하던 제론의 뇌리에 뭔가가 번득 떠올랐다.
“한번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야.”
제론은 아티팩트를 다시 품에 넣은 후, 유적에서 나갔다. 아마 이 유적에 다시 올 일은 이제 거의 없을 것이다.

☆ ☆ ☆

로스는 불안한 눈으로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도시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다. 가끔 밖에서 소란이 일
때마다 몸이 움찔 떨렸다.
그녀는 과연 자신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어서 빨리 제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로스는 좀처럼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밖의 소란도 가라앉았고, 도시는 다시 고요함에
빠져들었다.
“이제…… 이제 어쩌지?”
로스가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침실의 창문이 스르륵 열렸다. 비록 힘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감각만은 많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제론이 들어오는 걸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오, 오셨군요.”
다시 안 오는 줄 알았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어쨌든 이렇게 왔으니 됐다. 이젠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금세 마음이 안정되었다.
제론은 로스의 반응에 약간 당황했다. 설마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얼마나 불안할지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이걸 받아라.”
제론은 우선 아티팩트부터 넘겼다. 처음 만들었던 것에서 살짝 개조를 한 아티팩트였다.
“이게 뭔가요?”
“네 탈출을 도와줄 도구.”
“타, 탈출이요?”
로스는 탈출이라는 말 한마디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더 이상 이런 곳에 갇혀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떨려왔다.
“이, 이걸 어떻게 쓰는 건가요?”
“부수면 된다.”
“부숴요?”
“일단 시기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나 모레쯤으로 잡아야 한다. 분수대가 부서진 건 알고 있나?”
그 말에 로스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예? 분수대가 부서져요?”
분수대가 부서지다니. 만일 제론이 자신을 구해 주지 않았다면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

Chapter 6 광장의 분수대 (3)

처음에는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제론이 말을 꺼낸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분수대가 부서졌으니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이용하자는 뜻이었다.
“그럼 이 아티팩트는…….”
“대충 예상한 모양이군. 맞다. 강렬하고 난폭한 마나를 일시에 방출하는 아티팩트다. 미리 마나를 저장해 놨으니
그저 부수기만 하면 된다.”
이 아티팩트를 바닥에 던져 부수면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라지면서 막대한 마나를 방출하게 된다. 그것은 로스의
죽음과 상당히 비슷할 것이다.
“대충 상황을 머릿속으로 시연해 봤는데, 아마 정말로 그런 일이 발생하면 넌 살점도 남아나기 어려울 것이다.”
제론의 말에 로스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말만으로도 섬뜩했다. 제론이 아니었다면 실제로 겪어야 할 상황 아닌가.
‘태블릿의 시뮬레이션이니 확실하겠지.’
아마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죽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세심히 준비해야만 했다.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게 말이다.
“시체는 내가 구해 뒀다. 그러니 넌 빠져나갈 일만 생각하면 된다.”
로스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이 감옥을 빠져나갈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말이다.

로스의 저택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구석진 방에 모여서 나름대로 쉬고 있었다.


“그 괴물이 슬슬 돌아올 시간이 되었지?”
“얼추 그쯤 되었지.”
“하아, 이게 무슨 고생인지…….”
“이게 다 그 괴물 같은 여자 때문이지, 뭐.”
“근데 말조심하는 게 좋아. 얼마나 귀가 밝은지 알아?”
그 말에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만일 그 여자가 들어왔는데 이런 말을 듣는다면 아마 갈기갈기 찢어질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좀 늦는 것 같네. 너무 일찍 숨었나?”
“내가 한번 나가 보고 올까?”
“위험할 텐데…….”
“위험하긴, 얼른 도망치면 되지. 여차하면 저택 밖으로 나가도 되잖아. 그 괴물은 함부로 밖에 나갈 수 없으니까.
쫓아오기 힘들걸?”
“하긴.”
다들 수긍하자, 처음 말을 꺼낸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에서 힘쓰는 일을 도맡아 하는 일꾼이었기에 힘도
좋고 몸놀림도 재빨랐다.
사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아직 로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쯤 돌아올지
확인하고자 할 뿐이었다.
밖으로 나온 사내가 일단 전물 밖으로 나갔다. 저택에는 아무도 없어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건물에서 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이동하며 담장 밖을 확인했지만 누군가가 다가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로스는 없었다.
사내는 문득 정원보다는 밖이 낫다고 생각했다. 혹시 로스를 정원에서 맞닥뜨리면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 된다.
도망가기도 여의치 않고 말이다.
하지만 저택 밖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로스는 굳이 자신을 쫓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로스에게는 저택에 빨리
돌아와야 할 이유가 있으니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사내는 과감하게 저택을 벗어났다.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혹시 저택에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내일 로스가 나간 사이에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저택에서 나와 거리를 걸었다. 도시가 왠지 어수선했다. 하지만 저택에서 나온 지 너무 오래되어 분위기를
잊었다고 여기고는 계속 걸었다.
그냥 걷기만 한 건 아니었다. 로스가 돌아오는지 열심히 확인했다. 하지만 로스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사람들이 잔뜩 모여 떠드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이 일어 다가갔다가 그들이 큰
소리로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광장이 완전히 아작 났단 말이지?”
“그렇다니까! 분수대가 완전히 뽑혀서 광장 바닥을 뒹굴고 있더라니까?”
사내는 그제야 뭔가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뇌리에 적신호가 깜빡였다.
‘돌아가야 돼!’
이럴 때가 아니었다. 돌아가야만 한다. 만일 분수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로스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리고 죽기 직전 폭주할 가능성이 높았다.
만일 그렇게 되면 저택에 남은 일꾼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일꾼이긴 했지만 로스처럼 중요한 인물의 곁에 두는데 조직이 아무나 데려다 놓을 리 없었다. 그들은
저택의 일꾼이었지만 최하급 조직원이기도 했다.
사내는 다급히 저택으로 달려갔다. 이 사실을 어서 동료에게 알려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로스는 도착하지 않았다. 사내는 서둘러 동료가 숨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동료들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큰일이야.”
“큰일이라니?”
“광장이 부서졌어!”
다들 일제히 헉 소리를 냈다. 광장이 부서지다니, 대체 그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런 중요한 일이
벌어졌는데 왜 자신들에게 알리지도 않았단 말인가.
“그게 정말이야?”
“그래. 그러니 어서…….”
사내는 어서 빠져나가자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한데 그 순간 어마어마한 마나의 압력이 저택을 뒤덮었다.
“허억!”
“왔다!”
“늦었어!”
이 난폭한 마나는 분명히 로스의 것이었다. 로스가 돌아온 것이다. 한데 마나의 흐름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네 사람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로스가 폭주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분수대에서 마나를 보충하지 못했으니
폭주로 이어지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어쩌지?”
“도망칠까?”
“그랬다간 더 빨리 죽을 거야.”
다들 절망적인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에게 남은 희망은 이제 딱 하나였다.
“제발 폭주가 심해져서 터져 버렸으면 좋겠어.”
“그러게. 그러면 살 수 있을 텐데.”
그들은 저마다 손을 맞잡고 간절히 빌었다. 제발 로스의 마나가 폭주해서 터져 버리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던 일이 벌어졌다.
꾸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렸다. 그리고 사방의 마나가 야생마처럼 날뛰었다. 그러더니 이내 폭풍이 되어 모든 걸
휩쓸었다.
“크어억!”
“아아악!”
네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꽉 부둥켜안았다.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저택이 당장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렸다.
“우웩!”
“쿠에엑!”
다들 피를 토했다. 마나가 워낙 난폭해서 몸을 휩쓴 것만으로도 내상을 입은 것이다.
부스스스.
돌가루와 먼지가 쏟아졌다.
우지끈!
나무로 된 벽이나 문짝이 부서졌다.
쩌저저적!
우르르릉!
그리고 돌기둥에 금이 쩍쩍 가더니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네 사람은 멍하니 주위를 살피다가 이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외쳤다.
“살았다!”
“그 괴물이 터져 죽었어!”
네 사람은 기쁨에 떨며 함성을 지르느라 그 순간 저택에서 두 사람이 조용히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Chapter 7 결사대 (1)

“젠장, 난장판이 따로 없군.”


수도에서 워낙 멀리 떨어진 도시를 담당하는지라 매달 짜증을 내며 이곳을 방문하던 부르스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방금 전에 광장을 확인하고 왔다. 광장도 처참했지만 이곳은 더했다.
부르스트는 방 안을 슥 둘러봤다. 벽이고 천장이고 온통 피투성이였다. 방 한가운데에서 폭발해 사방으로 피와
살점이 튄 것이다.
인공 소드 마스터가 막바지 폭주를 못 이기고 폭발했을 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결국 여기도 이렇게 되었군.”
부르스트는 인공 소드 마스터 양산 계획의 중추를 담당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성과를 내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갈수록 어려워졌다. 힘을 주입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 이후는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그래도 미리 실험체를 준비해 둬서 다행이군.”
이럴 때를 대비해 실험체를 몇 개 더 준비했다. 마나를 잘 받아들이는 체질이 중요한데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준비 단계에서 시간을 너무 잡아먹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체질에 상관없이 소드 마스터를 찍어 낼 수 있어야 하지만 아직 그 수준까지 가는 일은 요원했다.
부르스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광장이 박살 났으니 장소도 옮겨야 했다. 이래저래 문제가 많았다.
“하여튼 그놈들을 싹 잡아 족쳐야 하는데 말이야.”
언제부터인가 분수대와 광장을 부수려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부르스트 같은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존재였다.
분수대와 광장은 인공 소드 마스터를 양산하기 위한 중요한 실험재료였고, 에너지원이었다. 그것이 없다면
부르스트의 연구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한데 그걸 부수고 다니니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건 정말로 심각한 위협이었다.
“후우, 일단 광장부터 복구를 해야 하나?”
부르스트는 광장과 분수대 복구에 들어갈 돈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현재 그곳을 쓰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바로 분수대였다.
설사 소드 마스터 양산에 쓰지 않더라도 분수대는 만들어 둬야만 했다.
“그래도 분수대가 비교적 멀쩡해서 다행이로군.”
그 엄청난 폭발에도 분수대는 많이 망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다시 만들어야만 했다. 재료가 날아가지
않았다 뿐이지 망가지긴 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광장 바닥이었다. 그곳에 조성한 마법진을 다시 설치하려면 돈도 돈이지만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걸 생각하면 향후 조직에서 부르스트의 위치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하아. 짜증 나는군.”
부르스트의 입에서 연신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어디로 가는 건가요?”
로스는 드넓게 펼쳐진 황무지를 걸으며 제론을 바라봤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아름답게만 보였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힘이었다.
“일단 국경을 넘어야겠지.”
“국경을요?”
로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란 제국의 국경은 촘촘하기로 유명했다. 그건 제국민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로스도 일단은 크란 제국의 시민이었다. 국경이 얼마나 뛰어난 경계망을 갖추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국경을 넘어가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망상에 불과했다. 절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일단 크란 제국 내에서는 네가 몸을 숨기고 살아가는 게 쉽지 않을 거야.”
“그건 그러지만…….”
크란 제국도 문제지만, 비밀 조직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그들이 크란 제국 내에서 갖는 능력은 더했다.
로스가 만일 제국에서 계속 살아간다면 조만간 반드시 들통 나게 되어 있었다. 그만큼 그들의 정보력은 대단했다.
“내가 추천하는 왕국은 란체 왕국이야. 거기라면 내가 제법 많이 도와줄 수도 있지. 아니면 상단을 추천해 줄
수도 있어.”
“상단이요?”
“페쿠니아 상단에 연줄이 좀 있거든.”
페쿠니아 상단은 최근 급부상하는 상단이었다. 휴대용 마법등 사업 때문에 엄청나게 성장했다. 하지만 로스가
알기에는 아직 많이 모자랐다.
로스는 제론이 디아만트 상단을 언급했어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녀가 굳이 상단 이름을 줄줄 외우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관심도 없었고 말이다.
어쨌든 로스는 제론의 제안을 깊이 생각했다. 크란 제국에서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야 처음부터
생각했기에 별다른 충격도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디서 뭘 할 것인가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였다.

Chapter 7 결사대 (2)

“제론님은 제가 어디로 갔으면 좋겠어요?”


제론의 의견을 묻는 로스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신중했다. 그렇기에 제론도 신중하게 생각해서 대답해 주었다.
“잘하는 게 뭐가 있지?”
“잘하는 거요?”
로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잘하는 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실험체로 살아오면서 폭주와 안정을 반복하는 단순한
삶을 살아왔는데 말이다.
제론은 로스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도와주겠다고 결정을 내렸기에 끝까지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려 주었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국경을 넘어 크란 제국을 벗어나려면 최소한 이틀은 더 필요할 것이다.
사실 이틀 만에 국경을 넘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하지만 제론이기에 가능했다. 제론은 낮에는 로스와
함께 걷고 밤에는 정령과 마법을 이용해 날아갈 계획이었다.
아마 내일 아침이면 국경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를 로스와 함께 빠져나가려면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하루가 더 필요하고 말이다.
“상단에 가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뭐든 찾아보면 있겠지. 아니면 공부를 하는 것도 괜찮겠지.”
공부라는 말에 로스가 눈을 크게 뜨고 제론을 바라봤다. 그 부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유명한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 거지.”
로스는 그 말에 마음이 혹했다.
제론은 로스가 상당히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걸 파악했기에 그 말을 던질 수 있었다. 사실 제론은 로스가
오랫동안 공부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중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괜찮고.”
제론이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인재를 지속적으로 키워 내기 위해서는 인재를 키울 교육자가 필요했다.
제론은 로스라면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로스는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겠어요. 공부해서 아이들을 가르칠 거예요.”
로스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기를 원했다. 로스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고, 바로잡아
줄 어른도 없었다.
만일 공부를 열심히 해서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게 된다면 자신이 아이들을 바로잡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로스가 진짜 원하는 것이었다.
“좋아. 결정을 내렸으니 좀 더 열심히 가 볼까?”
제론의 말에 로스가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목표가 생긴 사람의 전진은 무서운 법이었다. 제론은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로스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제론은 로스를 페쿠니아 상단 지부에 데려다 주고 상단주와 연락을 한 다음, 곧장 분수대 아래 유적으로
돌아갔다.

☆ ☆ ☆

두 개의 도시를 장악한 바인은 크란 제국에 대해 훨씬 폭넓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보는 고스란히
제론에게 전해졌다.
제론은 광장과 분수대를 새로 만들기 시작하는 걸 확인한 다음 도시를 떠났다.
이제 새로운 도시를 찾아 떠날 때가 되었다. 그러면서 향후의 계획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크란 제국이 넓긴 넓군.”
크란 제국은 동에서 서로도 길었지만 남에서 북은 대륙을 관통할 정도였다. 정말로 거대했다. 남쪽에는 광활한
밀림이 펼쳐져 있었고, 북쪽에는 얼음으로 뒤덮인 지역이 있었다.
그 넓은 제국이 제대로 통제가 되는 건 텔레포트 게이트의 존재 덕분이었다. 크란 제국에는 모든 도시에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었다.
일단 도시까지만 가면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제국 어디든 갈 수 있으니 땅덩어리가 아무리 넓다 한들 충분히
통제가 가능했다.
게다가 크란 제국 내에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비용은 거의 거저에 가까웠다. 외국에서 게이트로
벌어들이는 수입을 이용해 제국의 게이트를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더 발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아무튼 제론은 그런 텔레포트 게이트의 혜택을 볼 수 없었기에 걸어서, 혹은 날아서 이동해야만 했다. 물론
제론은 그렇게 이동하는 게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조금 더 걸려 그것이 좀 아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동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나름대로 충실했다.
제론은 거대한 농지에 접어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농지를 보고 있으니 대번에 에어스트 왕국이 떠올랐다. 문득 이
농지가 얼마나 큰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바인이 건네준 정보에 의하면 이곳이 크란 제국 최고의 곡창 지대였다.
제론은 하늘로 휙 날아올랐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농지가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었다. 기온이 후덥지근한
남쪽이었기에 계절에 상관없이 곡물이 쑥쑥 자라고 있었다.
거의 구름 높이까지 올라간 다음 아래를 내려다본 제론은 감탄했다. 정말로 넓었다. 척 보기에도 에어스트 왕국의
농지보다 세 배는 되는 듯했다.
“완전히 축복받은 땅이로군.”
땅이 어찌나 기름진지 알곡이 엄청나게 풍성했다. 물론 에어스트 왕국의 농지에서 자라는 곡물보다는 조금 못했다.
그곳의 땅은 아주 특별하다. 대륙 어디에 가도 그보다 좋은 농지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농지의 끝에 커다란 도시가 보였다. 농지에서 나는 곡물을 보관하는 도시인 듯 성벽 근처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창고가 잔뜩 세워져 있었다.
“다음 목표가 저기로군.”
바인은 두 개의 도시를 장악한 다음 크란 제국 전도를 만들어서 보냈다. 아주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세밀한 지도였다.
아마 저 도시까지 장악하면 지도가 훨씬 세밀하고 정확해질 것이다.
정보에 관한 한 바인은 괴물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랐다. 그냥 천재라고 하기에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고작 두 개의 도시를 장악한 것만으로 크란 제국의 지도를, 그것도 이렇게 정확하고 세밀한 지도를 만들어 낸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제론은 구름 위를 날아 도시로 향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그렇게 도시 안으로 들어가 높은 건물 옥상에
가볍게 내려섰다.
이 도시는 경계가 엄청나게 심했다. 첫 번째 도시와 비슷했다. 아니, 그보다 더 철저했다.
도시를 크게 둘러싼 성벽에 각각의 방향으로 문이 3 개씩 있었고, 그곳에서 경비병들이 철저히 검문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곳에 있는 기사들은 기간트를 보유한 라이더였고 말이다.
도시 내에도 경비병이 곳곳에 돌아다니며 불시에 통행증을 검사하곤 했다.
첫 번째 도시보다 규모가 훨씬 큰 곳이었는데, 그 큰 규모를 모두 커버할 정도로 경비가 철저했다.
이건 비단 치안을 유지하기 위함만은 결코 아니었다. 제론은 이곳에 큰 유적이 있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 유적의 에너지를 이용해 뭔가를 하는 중이고 말이다.
‘생각해 보니 참으로 특이하군. 만일 여기도 진짜 유적이 있다면 도시마다 유적이 있는 셈이잖아.’
어쩌면 비밀 조직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을 수도 있었다. 크란 제국이 생길 무렵이나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조직일 확률이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유적이 있는 곳을 개발해 도시를 만들었을 것 아닌가.
물론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낮았다.
제론은 순간 텔레포트 게이트로 각 도시를 찍고 유적만 찾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곧장 고개를
저었다.
‘내 행적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조심해야 돼.’
제론은 옥상에서 도시를 둘러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여기서도 제대로 된 숙박 시설에 묵기는 틀렸군.’
아마 빈민가에 가도 제대로 된 여관에서 머물지 못할 것이다. 경비병이 너무 많았다. 이 도시에서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유적이나 빨리 찾자.’
이런 도시에서 유적을 찾는 방법은 첫 번째 도시에서 한 방법이 일단 최선이었다. 그렇게 하려다가 문득 제론은
다른 방법도 있음을 깨달았다.
제론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굳이 돌아다니면서 지도를 그릴 이유가 없잖아?’
제론은 다시 하늘로 훌쩍 날아올랐다. 아래에서 혹시라도 누군가가 볼 수 있으니 몸을 감추는 마법을 걸었다.
빠르게 쭉쭉 올라가 구름이 있는 곳에 도착한 제론은 태블릿을 꺼냈다.
태블릿에는 별의별 기능이 다 있었다. 제론은 태블릿 화면을 보며 아래를 잘 겨냥했다. 그리고 태블릿의 기능 몇
가지를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태블릿 화면에 아래 도시의 모습이 나타났다. 제론은 태블릿을 잘 움직여 도시가 태블릿 화면 안에 다
들어오도록 맞췄다.
화아악!
태블릿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러자 태블릿 화면이 고정되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제론은 굳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농지를 벗어나니 작은 숲이 하나 나왔다. 제론은 그 숲으로 들어갔다.
워낙 도시에서 먼 곳이라 숲에는 인적이 전혀 없었다. 대신 맹수도 제법 있었다. 물론 제론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제론은 숲 속에 잠자리를 만들었다. 일단 큰 나무를 찾아 그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공간 안에서 침낭을 꺼내
나뭇가지에 걸치도록 펼쳤다.
그렇게 훌륭한 잠자리를 만든 다음 대충 끼니를 때운 제론은 침낭에 들어가 태블릿을 꺼냈다.
시간이 많으니 여기서 모든 작업을 마칠 생각이었다.
태블릿에 도시의 모습을 띄운 제론은 그걸 조작해 크게 확대시켰다. 그러자 도시의 골목골목까지 상세히 보였다.
제론의 입가에 미소가 씨익 그려졌다.
이로써 전혀 도시에 들어가지 않고 유적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도시가 상당히 넓긴 했지만 유력한 자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았다.
제론이 찾은 후보지는 총 네 곳이었다. 각각 커다란 저택 형태였다. 사실 제론은 그중 하나를 거의 확신하듯
찍었다. 저택 내부의 형태가 첫 번째 도시와 놀랄 정도로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곳이 아닐 가능성도 있으니 나머지 후보지도 다 눈여겨보았다. 오늘 밤에 그곳을 모두 확인할 것이다.
제론은 밤이 되기 전까지 잠깐 눈을 붙이기로 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인 피로를 이런 식으로 조금씩 풀어
줘야 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급하지 않게 차근차근 나아갈 것이다.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깜깜한 밤이 되었다. 제론은 잠자리를 정리한 다음 다시 날아서 도시로 향했다.


목표의 위치가 어디쯤인지는 확실히 숙지하고 있었기에 일단 도시에 도착하기만 하면 곧장 모든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여기도 마찬가지로군.’
도시 외벽 곳곳이 빛나고 있었다. 여기도 첫 번째 도시처럼 온통 마법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역시 여기도 유적의 에너지를 가져다 쓰는군.’
이 도시의 규모를 생각하면 마법진에 들어가는 마나의 양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한데 척 보기에 성벽뿐 아니라 성
내부의 큰 도로에도 마법진이 깔려 있었다.
그걸로 미루어 짐작하면 이 도시 아래에 잠든 유적도 상당히 클 것이다. 과연 이곳에 있는 유적에는 어떤 선물이
잠들어 있을지 기대되었다.
제론은 빠르게 몸을 날렸다. 성벽을 넘는 건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이곳의 성벽에는 허공을 날아 넘어가는
자들에 대한 방비까지 되어 있었지만 그걸 무시할 정도로 높이 날아오르면 그만이었다.
제론의 몸이 허공으로 훌쩍 떠올랐다. 그리고 거의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이 날아 성벽 안에 사뿐히 내려섰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크란 제국 성의 방비는 낮보다 밤에 훨씬 더 철저했다.
일단 성안으로 들어가니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는 경비병이 수도 없이 보였다. 저들의 눈을 피해서 밤에 뭔가 일을
벌인다는 건 보통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제론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만이 가질 수 있는 속도를 이용해 밤거리를 내달렸다.
어두운 옷을 입고 몸의 기척을 완전히 죽인 채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는 제론의 모습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는가.
제론은 경비병들을 스쳐 지나가며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가장 먼저 확인하려고 마음먹은 목표는 첫 번째 도시에서 유적이 있던 곳과 완전히 똑같은 구조를 가진 저택이었다.
제론은 십중팔구 그곳에 유적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이곳의 방비는 첫 번째 도시의 저택보다 훨씬 심했다. 벽에 새겨진 마법진도 훨씬 많았고, 안에서 풍기는 마나의
흐름도 심상치 않았다.
‘여기도 유적에서 끌어낸 에너지를 쓰고 있군.’
이곳에 유적이 있을 확률이 더 높아졌다. 제론은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저택에 다가갔다.

Chapter 7 결사대 (3)

위이이이잉!
제론의 심장에 있는 마나링이 세차게 가속했다.
9 개의 마나링이 가속하며 주변 마나를 장악했다. 제론은 이제 모든 마나링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마나에
간섭할 수 있는 9 개의 손을 가진 것이다.
제론의 앞을 가로막은 마나는 복잡하게 얽혀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9 개나 되는 마나의 손을 다 쓸 필요도
없었다. 3 개만으로 앞을 가린 마나를 활짝 열었다.
그 안으로 제론이 쑥 들어갔다. 거침이 없었다. 담장을 넘는 동안에도 마나의 손은 3 개만으로 충분했다.
담장을 넘고 나자, 바닥에 깔린 마법진도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2 개의 손이 더 필요할 뿐이었다.
아마 이 저택과 관계된 누구도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간단히 이곳을 통과할 수 있는 존재를 말이다.
제론은 유적이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건물로 스며들어 갔다. 예상했던 대로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광경도 있었다.
‘마나스톤!’
건물 안에는 수많은 마나스톤이 빛을 밝히고 있었다. 즉, 유적의 에너지를 끌어 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
건물 안에서 쓰는 에너지는 몽땅 마나스톤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뭘 하는 건물인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스키아를 통해 확인했어야 하는 건데.’
이런 건물의 경우는 스키아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했다. 마티가 없다면 말이다. 하지만 제론은 예전의
경험을 떠올려 확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저택을 빠져나간 제론은 나머지 세 군데 저택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서야 날이 새기 전에 일을 끝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스키아.”
그래도 일단 시도는 해 봐야 했다. 더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제론은 자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게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그건 소드 마스터라면 당연히 가지는 자신감이었다.
먼저 스키아를 목표 중 하나에 보내고, 제론은 그와 정반대에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사실 제론이 가는 곳은 저택이라기보다는 그저 건물이었다. 하지만 건물의 크기가 워낙 커서 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다만 건물의 모양이 아름답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사각 상자 같았다. 게다가 건물의 크기에 비해 창이나 문의
수가 너무 적었다.
마치 일부러 안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해 만든 건물 같았다. 건물의 크기는 어찌나 큰지 제론이 목표로 한 다른
저택의 건물과 정원을 몽땅 합한 것보다 더 거대했다.
제론이 그 건물에 다가가는 사이, 스키아는 벌써 저택 안으로 스며들어 내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저택 역시 경계가 상당했다. 하지만 스키아를 통해 본 바에 따르면 별다른 특별한 점이 없었다. 그곳에도
유적이 없었던 것이다.
제론은 일단 스키아를 남은 장소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눈앞의 건물에 집중했다.
이 건물은 일단 들어갈 방법이 많지 않았다. 건물을 통틀어 문이라고는 딱 2 개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엄청난 수의
경비병과 기사가 거의 문을 틀어막다시피 했다.
또한 창문도 달랑 5 개뿐이었다. 창으로 숨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창문에도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얼핏 봐서는 몰래 숨어 들어가는 게 전혀 불가능할 듯했다. 하지만 제론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큰 건물에
구멍이 고작 7 개뿐일 리가 없었다.
또한 혹시 정말로 건물에 들어갈 구멍이 그것뿐이라도 제론은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
스키아를 통해 내부를 샅샅이 뒤지고, 은밀한 장소로 텔레포트하면 된다.
마나링이 9 개였기에 텔레포트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다만 마나링을 통한 마법만으로는 조금 어려웠다.
마법진의 도움을 살짝 받아야 했다.
물론 9 개의 마나링을 훨씬 더 세밀하게 다룰 수 있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그저 마법만으로
텔레포트를 쓸 수 있었다.
제론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이대로 쭉 성장을 하면 10 개째 마나링을 얻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제론이 건물 주변을 살피는 동안 스키아는 벌써 목표로 한 마지막 저택을 확인했다. 그곳도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여기가 진짜 목적지라는 뜻인데…….’
대체 이런 투박한 건물에서 그 막대한 에너지를 가지고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제론은 스키아를 건물 안으로 넣었다. 한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팅.
스키아가 튕겨 나왔다. 건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제론은 깜짝 놀라 다시 스키아를 이동시켰다. 창문이나 문을 통해 안으로 넣어 봤지만 번번이 튕겨 나왔다.
다른 빈틈을 찾아 넣어 봤지만 여전히 결과는 같았다. 놀랍게도 저 건물은 정령을 막고 있었다.
제론은 궁금해졌다. 과연 다른 정령도 같은 반응일지 말이다. 그래서 일단 아네모스를 불렀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루룽.
바람이 뭉치며 아네모스가 나타났다. 제론은 아네모스를 건물의 문으로 보냈다. 아네모스는 바람의 정령, 문에
난 미세한 틈을 통해 안으로 스며드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는 스키아와 똑같았다.
팅!
아네모스가 문에 채 닿기도 전에 튕겨 나오는 광경은 정말로 놀라웠다. 설마 정령의 존재를 파악해 방어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제론은 텔레포트를 이용해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일단 접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정령도 튕겨 내는
마당에 텔레포트가 제대로 성공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제론의 텔레포트는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9 개의 마나링을 더욱 완숙하게 다룰 수 있고, 또 텔레포트와
관계된 마법을 충분히 숙련시키기 전에는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쓸 수 없었다.
제론은 건물 주위를 돌며 빈틈을 찾아봤다. 이미 스키아를 통해서도 빈틈이 없다는 걸 확인했지만, 그래도 혹시
스키아로는 찾아낼 수 없는 빈틈이 있을지도 몰랐다.
상당히 큰 건물이었지만, 제론이 워낙 빨라 건물 전체를 살피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게 건물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제론은 빈틈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몰래 들어가는 건 어려웠다. 이럴 때는
지난번처럼 외부의 변수가 필요했다.
‘그자들을 이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당시 광장의 분수대를 습격해 부수던 자들 덕분에 아주 쉽게 유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을 떠올린 제론은 문득 이번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적인 도움은 아니었지만,
간접적으로는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좋아. 일단 오늘은 준비만 좀 해 볼까?’
당시 그들의 싸움은 확실히 기억해 두었다. 아니, 태블릿에 저장이 되어 있었다. 일단은 그걸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제론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된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에어스트 왕국은 안정되었고, 이제 제대로 된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일에 제론의 힘은 필요
없었다.
에어스트 왕국에는 상당히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인재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바인의
힘이었다.
그리고 제론이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론은 크란 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상당히 자주 에어스트 왕국에 다녀왔다. 제론이 아니면 처리할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예를 들면 기간트에 관한 문제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건 없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그냥 내버려 둬도 자연스럽게 굴러갈 것이다. 점점 더
강해지고 부유해지는 방향으로.
아무튼 제론은 그날은 포기하고 도시에서 나갔다. 그리고 도시에서 제법 떨어진 작은 숲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할 일이 있었다.

이튿날 밤, 제론은 다시 성벽을 넘었다. 이번에는 전날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빨랐다. 같은 곳을 두 번 뚫으니


훨씬 익숙해진 것이다.
또한 하루 만에 제론의 마법 운용 능력이 향상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제론은 곧장 예의 건물로 향했다. 오늘은 반드시 안에 들어갈 것이다.
건물에 도착한 제론은 아공간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냈다. 그 구슬은 예전 분수대를 습격하던 자들이 쓰던 것과
닮아 있었다.
제론은 그때의 영상을 보고 똑같은 모양의 마나폭탄을 만들어 냈다. 제론에게 그것은 아주 간단했다. 모양만
똑같이 맞추고 폭발력만 갖추면 되는 일이었다.
제론은 똑같은 모양으로 훨씬 강력한 폭발력을 내는 폭탄을 만들 수 있었다.
이걸 이용하면 아마 이 건물과 관계된 비밀 조직은 상당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제론은 자신을 가리는 방편으로 그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 습격대는 분명히 비밀 조직에 반감을 가진
자들이었다.
어차피 이 건물도 비밀 조직의 것이니, 건물을 한바탕 뒤집어 놓으면 그 습격자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제론은 빠르게 건물로 다가가며 감각을 최대한 활성화시켰다.
마나폭탄을 아무 데나 써선 안 된다. 가장 효과적인 부분에 써야 빈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습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조심해서 힘을 쓰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곳 건물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했다.
지원군이라도 오면 상당히 곤란해질 테니 말이다. 어디까지나 제론은 스스로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유적을
얻기만 하면 된다.
제론은 그 부분을 절대 잊지 않았다.
가장 먼저 제론이 노린 곳은 건물 외벽에 있는 마법진의 빈틈이었다.
건물 외벽에는 마법진이 촘촘히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 구조적 특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빈틈이
있었다. 그곳은 마나가 닿지 않는 곳이었고, 또 약점이 될 만한 곳이었다.
제론의 감각은 그런 부분을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정확히 그 부분에 마나폭탄을
붙였다.
턱!
마나폭탄은 마치 접착력이라도 갖고 있는 듯이 벽에 착 달라붙었다. 그리고 색을 바꿔 벽과 동화되었다.
자세히 보면 알아보겠지만, 밤에 얼핏 봐서는 절대 그곳에 마나폭탄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없었다.
제론은 건물을 돌며 모든 빈틈에 마나폭탄을 붙였다. 어제 밤을 새워서 만든 것들이었다.
만들기가 비교적 간단해서 엄청나게 많은 수를 만들었다. 어찌나 많았는지 건물의 모든 빈틈에 폭탄을 설치하고도
백여 개가 남을 정도였다.
제론은 그 남은 폭탄을, 빈틈에 설치한 마나폭탄이 폭발했을 때 상승 작용을 일으켜 가장 큰 힘을 낼 수 있을
만한 위치에 붙였다.
마법진의 빈틈에 붙인 게 아니었기에 당연히 벽의 마법진이 일제히 발동했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마나폭탄을 툭툭툭 붙이고 다녔다. 제론의 손길은 빠르고 정확했다.
마법진이 가동되니 건물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문과 창문을 지키는 경비병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제론은 그것도 미리 예상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3 개의 마나폭탄을 문에 휙 던졌다.
터더덕!
마나폭탄이 마치 원래 자리를 찾아가듯 문에 착착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안에서 일단의
병력이 뛰쳐나왔다.
“찾아라! 결사대 놈들이 왔을지 모르니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지휘관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대답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11 명이 한 조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마법진을 발동시킨 범인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렸다.
그리고 제론은 살짝 떨어진 곳에서 기척을 지운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제론이 손가락을 튀겼다.
따악!
그 순간, 문 앞에 서 있던 지휘관의 눈빛이 변했다. 그가 시선을 제론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대신 작열하는 열기를 온몸에 뒤집어썼다.
꽈아아아아아아앙!
문에 있던 마나폭탄이 가장 먼저 터졌다.
그리고 연쇄적으로 벽에 설치한 폭탄이 터져 나갔다.
꽈앙! 꽈앙! 꽈앙! 꽈앙!
꽈과과과과과광!
건물 벽에서 연달아 폭탄이 터져 나가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제론은 자신이 만든 장면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그리고 몸을 날렸다.
문에서 일어난 폭발 때문에 상당수의 병사와 기사가 휘말려 죽고 다쳤지만, 지휘관은 멀쩡했다. 그는 상당한
강자였다.
제론은 그에게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은 반드시 처리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건물 안을 휘젓고
다니기가 어려울 거란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쉬이익!
어느새 뽑은 제론의 검이 불길에 휩싸인 지휘관의 목으로 날아갔다.
쩡!
제론은 어느새 나타난 검이 자신의 공격을 막았는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몸을 빙글 돌렸다.
화아악!
지휘관의 몸에 붙었던 불길이 일제히 날아가 버렸다. 몸 곳곳에 제법 심한 화상을 입었지만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마나폭탄을 정면으로 맞았는데도 고작 그 정도이니 얼마나 강한 자인지 예측이 가능했다.

Chapter 7 결사대 (3)

‘역시!’
제론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확인하며 재차 검격을 날렸다. 지휘관은 소드 마스터였다.
쉬쉬쉭!
제론의 검이 3 개로 나뉘어 지휘관의 목과 허리, 다리를 동시에 노렸다.
그 공격에 지휘관이 당황했다. 셋 모두가 실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황은 지극히 찰나에 불과했다. 그는 침착하게 검을 휘둘러 그 세 개의 공격을 모두 막아 냈다.
쩌저정!
“크윽!”
공격을 막긴 했지만 검에 실린 위력을 모두 해소하지는 못했다. 그것이 제론과 그의 실력 차이었다.
제론은 그 작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서걱!
제론의 검이 깔끔하게 지휘관의 목을 날려 버렸다.
그다음에도 제론은 망설이지 않았다. 방금 전 자신과 지휘관의 싸움을 목격한 자들이 있었다. 바로 문을 지키던
기사와 병사들이었다.
비록 마나폭탄에 당해 큰 부상을 입었지만, 비교적 멀쩡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도망치려고 했다.
제론은 단호히 손을 썼다.
피피피피피핑!
수백 개에 달하는 마나의 화살이 쏟아져 나갔다. 그것은 도망치려던 병사와 기사의 등판을 꿰뚫었다. 아울러 남아
있던 목격자들의 목숨도 함께 빼앗아 갔다.
제론은 손을 들어 올렸다.
화르륵!
손에 새파란 불덩어리 하나가 나타났다. 그 불덩어리는 나비처럼 너울너울 날아 시체에 닿았다.
화아아아악!
모든 시체에 일제히 불길이 일어났다. 그 불길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시체를 몽땅 재로 만들기 전에는
말이다.
제론은 유유히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급하지 않았다.
밤은 길다.

☆ ☆ ☆
깁스 남작은 긴장한 표정으로 원탁에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을 바라봤다. 마법진이 그려진 복면을 쓴 자들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상황이 이 지경으로 악화될 때까지 대체 뭘 했나?”
나직했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깁스 남작은 그 어조에 담긴 살의와 분노를 읽었다. 그래서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 결사대가 그렇게 대단한 저력을 가지고 있었나?”
“그동안은 고작 분수대나 박살 내고 다닌 정도에 불과했는데 말이야.”
“최근 몇 군데나 당했지?”
중구난방으로 여기저기서 말이 튀어나왔다. 깁스 남작은 신중하게 그들의 말을 듣다가 시선이 집중되자 즉시
대답했다.
“분수대 세 곳과 시설 다섯 곳입니다.”
다들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분수대야 그렇다 치고 시설이 당한 건 정말로 치명적이었다.
“얼마 전에 에너지가 고갈된 시설도 있었지?”
“임팩트 스피어를 만드는 시설이 사라졌습니다. 대체 장소를 찾아 다시 제작 중입니다.”
“부서진 시설은 다시 복구가 가능한가?”
“가능은 합니다만,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시설은 한 번 만들 때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그동안은 차근차근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시설을 이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시설이 부서지면 그걸 복구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부서진 시설 중 반드시 필요한 곳은 얼마나 되나?”
“두 곳입니다.”
“그곳만 복구하는 게 좋겠군. 나머지는 차츰차츰 하는 걸로 하지. 분수대는 복구비용이 비교적 싸지?”
“그렇습니다.”
“그럼 분수대는 복구해야겠군. 예산을 편성해서 제공할 테니 보고서를 올리도록.”
“알겠습니다.”
깁스 남작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뒤통수 위로 누군가의 싸늘한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곤란하다는 걸 절대 잊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그 결사대 놈들, 색출할 방법을 생각해서 싹 없애 버리도록.”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깁스 남작은 그 말을 끝으로 조심스럽게 회의장에서 나갔다.
“아무래도 방안을 강구해야겠소.”
“동의하오.”
“자금을 좀 마련하는 편이 나을 듯하오.”
“그럼 전쟁을 조금 앞당기는 건 어떻소?”
“체스터 공국 말이오?”
“전쟁이 꼭 거기 한 군데만 일어나라는 법은 없지 않겠소?”
“또 준비된 곳이 있었소?”
“준비된 건 아니지만 톡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곳이 하나 있지 않소?”
“레늄 왕국 말이오?”
“거기 국왕이 제법 욕심이 있으니 적당히 공작을 하면 되지 않겠소?”
“이중으로 공작을 하면 되니 어려울 건 없겠지. 좋소. 그렇게 합시다.”
그 뒤로 몇 가지 방안이 더 논의되지만 전쟁만큼 큰 사안은 없었다.
그렇게 체스터 공국와 벨룸 왕국의 전쟁이 결정되었다. 또한 레늄 왕국과 미테 왕국의 전쟁도 확정되었다.
Chapter 8 두 공작의 선택 (1)

제론은 결사대를 이용해 상당히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 덕분에 벌써 일곱 군데의 유적을 추가로 확보했다. 또한
조만간 몇 군데의 유적을 더 등록할 수 있을 듯했다.
일단 더 활발하게 움직이니, 크란 제국은 오히려 다른 왕국보다 편한 점이 많았다.
일단 기본적으로 도시만 체크하면 된다. 크란 제국의 유적은 몽땅 도시 아래에 잠들어 있었다. 아니, 도시의
에너지원이 되어 있었다.
유적을 많이 얻은 만큼 마티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범위도 늘어났다.
거점 형식의 유적은 고작 도시를 중심으로 반경 몇 킬로미터 정도를 확인하는 게 전부였지만, 조금 특별한
시스템이 깃든 유적의 경우 그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심지어 최근 얻은 유적은 마티가 어찌나 많은지 정보 수집 범위가 다른 도시에 살짝 걸칠 정도였다.
어쨌든 그렇게 새로 유적을 많이 얻은 덕분에 바인이 알아낼 수 있는 정보의 양도 상당히 광범위해졌다.
최근 바인은 비밀 조직의 실체에 아주 조금씩이나마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비밀 조직은 크란 제국에 있었고, 크란 제국 황실이나 귀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지만, 그들에게 속한 조직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찌 보면 크란 제국 자체가 그들의 손아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말이다.
제론은 가장 최근 얻은 유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크란 제국의 지도를 확인하고 있었다.
새로 얻은 7 개 유적의 위력은 대단했다. 유적에 있는 시스템도 그랬지만, 그보다 유적을 얻음으로써 생겨난 마티
덕분에 상당히 폭넓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만일 제론 혼자라면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정보를 다루는 것은 제론이 아니라 바인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바인은 새롭게 마티의 영역이 된 도시들에서 중요한 정보를 쭉쭉 뽑아냈다. 그중에는 군사 기밀이나 다름없는
지도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대륙의 전체적인 모양은 알고 있으니, 크란 제국의 지도를 작성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더구나 크란 제국에서 제론이 원하는 건 고작 도시의 위치 정도였다. 도시만 찾으면 거기에 속한 유적을 등록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음은 이 도시로 가는 게 좋겠군.”
제론이 다음 일정을 점검하고 있을 때, 바인으로부터 보고가 도착했다. 모든 보고는 태블릿을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제로는 지도를 보면서 바인의 보고서를 쭉 읽었다.
“음? 전쟁?”
바인의 보고는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전쟁 징후에 관한 보고였다.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이야 예전부터 기미가 있긴 했지만, 여긴 좀 의외인데?”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 사이에는 제법 오래전부터 전운이 감돌고 있었기에 당장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레늄 왕국과 미테 왕국은 얘기가 좀 달랐다.
레늄 왕국은 예전 슈린 왕국과 손을 잡고 에어스트 왕국에 전쟁을 걸었다. 당시 전쟁의 여파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는데, 그걸 채 복구하기도 전에 또 전쟁을 벌인다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고서를 마저 읽었다. 그리고 점점 표정이 굳어 갔다.
발단은 벨룸 왕국과 체스터 공국의 전쟁이었다. 아직 벌어지진 않았지만 벌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물밑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에 미테 왕국과 레늄 왕국이 말려들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레늄 왕국이 거기에 발을 들였다.
현재 레늄 왕국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은 벨룸 왕국이었다. 또한 미테 왕국은 체스터 공국과 살짝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체스터 공국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미테 왕국의 도발에 자유롭기 위해 레늄 왕국에 병력을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레늄 왕국은 그 병력을 이용해 미테 왕국을 치기로 계약을 맺었다.
사실 체스터 공국 입장에서 보면 그 정도 병력을 지원할 수 있다면 국경을 보강하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그들은
더 먼 상황을 대비했다.
벨룸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다음 목표는 미테 왕국과 레늄 왕국이었다. 그리고 차근차근 에어스트
왕국까지 집어삼킬 계획이었다.
그렇게 모든 왕국을 아우른 다음 제국으로 발돋움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의도이자 목표였다.
문제는 체스터 공국에 그걸 이룰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러니까 그들이 계속 감춰 두고 있었던 힘이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내버려 두자니 미테 왕국이 마음에 걸렸다. 어찌 되었건 미테 왕국에는 세나와 바이스의 가문이 살고 있었다.
이 전쟁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들도 상당한 타격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니, 반드시 멸문하겠지. 왕국의 중추 세력을 내버려 두면 흡수가 어려워질 테니까.’
체스터 공국의 성향은 상당히 호전적이었다. 그들은 나중에 해가 될 만한 싹을 남겨 두지 않는다. 벨루스 가문과
말레피 가문은 아마 철저히 무너질 것이다.
‘어쨌든 그다음은 우리 차례겠지.’
하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에서는 착실히 신형 기간트 아모르를 생산하고 있었다. 초고대문명에서 쓰던 대량생산체제를
어느 정도 도입했기 때문에 제작 속도가 다른 기간트 공장에 비해 엄청나게 빨랐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모르는 일선 군대에 지급되어 기간트를 순차적으로 교체하고 있었다.
기존의 기간트 중 성능이 뛰어난 것들은 라이더 지망생의 훈련기로 쓰고, 남은 것들은 판매를 준비 중이었다.
아모르를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재료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가장 많이 필요한 것이 강철이었고, 그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테페룸과 포로스였는데, 그것들은 거의 무한정 생산이 가능했다.
제론은 이제 슬슬 초고대문명에서 쓰던 테페룸의 다른 가공물을 만들까 계획 중이었다. 그것까지 쓸 수 있게 되면
아마 대륙 전체의 마법공학에 대한 패러다임을 확 바꿔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시작은 에어스트 왕국이고 말이다.
제론은 고민했다. 미테 왕국을 도와주려고 해도 그 방법이 문제였다. 솔직히 제론은 미테 왕국 자체에는 미련이
없었다.
그들이 망하건 말건 무슨 상관인가. 솔직히 그냥 망하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순식간에 모든 영토를 집어삼킬
수가 있으니 말이다.
가장 합리적이고 냉정하게 결정한다면 그냥 방치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렇게 전쟁으로 약화된 두 왕국을 한꺼번에 도모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미테 왕국에 있는 두 가문은 그렇게 냉정하게 쳐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고민이 되는 것이다.
설혹 에어스트 왕국이 도와서 미테 왕국이 전쟁에 승리한다 하더라도 그 공이 벨루스 가문이나 말레피 가문에
고스란히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몰래 두 가문에 힘을 실어 줘야 하나?’
최소한 그렇게 하면 두 가문의 영향력이 훨씬 커질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미온적인 대처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제론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 두 가문의 선택에 맡겨야겠어.’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해 줄 것이다. 또한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들이 부디 자신이 마음에
둔 선택을 했으면, 하고 바랐다.
“자, 그럼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또 슬슬 일을 하러 가 볼까?”
제론은 힘차게 일어나 유적 밖으로 나갔다. 이제 또 새로운 유적을 등록하러 갈 시간이었다.
Chapter 8 두 공작의 선택 (2)

슈돌츠 국왕은 심각한 눈으로 앞에 앉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들은 현 미테 왕국을 이끌어 나가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렇기에 국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슈돌츠 국왕은 그 점이 못내 아쉬웠고 마음에 안 들었다. 이 왕국은 자신의 것이다. 왕조차 마음대로 못 하는
귀족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다. 짜증이 났다. 가끔은 살의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두 가문이 제대로 도와주지 않으면 코앞에 닥친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좋겠소?”
“일단 최대한 말로 해결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왕국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슈돌츠 국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이럴 때 두 가문이 나서서 레늄 왕국을 박살 내 주면 얼마나 좋은가.
단숨에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난다. 그 뒤에 오는 풍족함과 부유함은 오죽 대단하겠는가.
“이번 기회에 레늄 왕국을 흡수하는 건 어떤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하지만 우리의 피해가 너무 커집니다. 병합하는 것도 좋지만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저 체스터 공국이 벨룸 왕국을 무너뜨린 다음 그 발톱을 우리에게 돌릴 게 뻔한 상황
아닙니까.”
“체스터 공국도 전쟁을 하지 않소. 벨룸 왕국이 그리 만만한 곳도 아니고…….”
“전하, 체스터 공국의 저력을 간과하시면 안 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힘을 꽁꽁 숨겨 뒀습니다. 그걸 갑자기 펼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최대한 조심해야 합니다.”
슈돌츠 국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서야 둘이 말을 맞춰 자신을 공격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알았소. 오늘은 이만합시다. 돌아들 가시오.”
벨루스 공작과 말레피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하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니,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최대한 애썼다. 하지만 속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슈돌츠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이래서야 누가 국왕인지…….”
엄연히 자신은 국왕이었다. 그러니 두 공작이 자신의 말을 따르는 게 옳았다. 한데 저 무례한 태도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거 아무래도 뭔가 수를 내긴 내야겠어.”
나직이 중얼거리는 슈돌츠 국왕의 눈빛이 음험한 빛을 뿌려 댔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힘들 것 같소.”
벨루스 공작과 말레피 공작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방금 슈돌츠 국왕과 대면한 다음 미테 왕국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돌츠 국왕은 왕이 되기 전과 후가 너무 달랐다. 왕이 된 이후부터 권력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했다. 그 여파가
두 가문에도 미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좋지 않소.”
“동의하오. 우리 가문과 말레피 가문을 축출할 수도 있을 것 같소.”
“하지만 그게 쉽게 되겠소?”
벨루스 가문와 말레피 가문은 미테 왕국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두 가문을 쳐내면 미테 왕국도 존속이
어려워진다. 슈돌츠 국왕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 리 없었다.
“가문만 축출시키고 가문이 가진 힘을 고스란히 빼앗을 수 있다면 시도하지 않겠소?”
“가문만 축출? 그게 가능하오?”
“가능한 방법을 알고 있지 않소이까.”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가능한 방법이 분명히 있었다. 암살이다. 양 가문의 주요 인물을 암살하고, 허수아비
가주를 세우면 된다.
그리고 그 가주를 뒤에서 슈돌츠 국왕이 조종하면 그의 뜻대로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어느 누가 두 가문의 수장과 주요 인물을 암살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으니…….”
“후우, 이거 왠지 회의가 들지 않소?”
두 사람의 얼굴에 자조가 떠올랐다.
“그래도 어쩌겠소? 이게 우리가 선택한 길인 것을.”
“선택? 우리가 과연 선택을 했소? 떠밀린 게 아니라?”
말레피 공작의 말에 벨루스 공작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선택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들은 선택하지 않았다. 상황에 떠밀렸을 뿐이었다.
“아직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소.”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가 없다면 과감한 선택을 하는 것도 가문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었다.
물론 쉬운 선택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 ☆

제론은 오랜만에 에어스트 왕국의 왕궁에 도착했다. 유적을 통해 언제든 이동이 가능했지만 크란 제국에 들어간
이후로는 그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제법 많은 유적을 연결시켜서 비교적 자유롭게 왕복이 가능했다.
크란 제국은 유적을 에너지원으로 쓰고 있기에 그 효용이 다했다고 여겨지는 순간 버려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론은 페쿠니아 상단을 크란 제국에 진출시켜 그렇게 버려진 장소를 상단 지부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구입했다.
그렇게 구입한 곳을 이용해서 자유롭게 유적을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왕궁에 돌아온 제론은 즉시 바이스와 세나부터 만났다. 이곳에 온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으니 서둘러 처리하고
나머지 유적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크란 제국의 유적을 다 찾은 다음에도 일이 끝나지 않는다. 아직 찾지 못한 다른 왕국의
유적도 찾아야 하고, 또 가 보지 않은 곳, 비스테 왕국과 슈네 왕국에도 가 봐야 했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것, 바로 중앙 유적을 완전히 클리어하는 일도 남아 있었다.
그걸 다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제론은 서둘러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바이스와 세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론이 왕궁에 오기 전에 미리
연락을 취한 것이다.
세나와 바이스는 제론을 보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날 필요 없어. 앉아. 시간 없으니 본론만 빨리 말하고 끝내자고.”
제론의 재촉에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가문에 연락은 해 봤어?”
제론의 물음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제론이 눈을 빛냈다.
“어떻게 됐어?”
“아직 답을 못 받았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위기는 어때? 못마땅해하지는 않고?”
제론의 물음에 두 사람의 눈이 살짝 커졌다. 왠지 제론이 너무 다급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급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내 시간이 모자라서 그러는 거니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돼.”
“아, 그렇군요. 아무튼 긍정적인 반응이었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다행이군.”
정말로 다행이었다. 사실 제론이 한 제안은 두 가문 입장에서 보면 어이가 없을 수도 있었다.
“한데 가문을 우리 왕국으로 옮기면 왕국 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까요?”
“잘 조절해야지.”
제론은 아주 간단히 대답했지만 실제로 상황이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었다. 아마 대단히 복잡한 문제도 함께
가져올 것이다.
벨루스 가문이나 말레피 가문은 각자 누리던 기득권이 있었다. 그 권리를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또한 에어스트 왕국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공을 세워서, 혹은 능력을 인정받아서 그 자리에
올랐다.
그 둘이 서로 충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앞으로 그걸 어떻게 최소화하느냐에 관한 문제는 어쩌면 바이스와
세나에게 달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왜 두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하는지 알지?”
바이스와 세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뼈저리게 알기에 어깨가 무거웠다. 또한 제론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두
가문을 유치하려고 하는 이유가 자신들 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고맙기도 했다.
“좋아. 그럼 나머지는 맡기지.”
제론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뭐가 저리 바쁘실까요?”
세나가 멍하니 제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아쉬움과 서운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러게. 요즘 대체 뭘 하고 다니시는 건지…….”
하지만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제론이 뭘 하는지 모르지만 제론으로 인해서 현재 에어스트 왕국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론이 아니었다면 아모르를 대량생산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제론이 막대한 양의 강철과 테페룸을
제공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제론이 만든 상단은 또 어떠한가. 페쿠니아 상단은 이제 에어스트 왕국의 여유 식량을 혼자서 유통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페쿠니아 상단은 신생 상단이었다. 신생 상단이 이제는 크란 제국까지 진출을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제론
덕분이었다.
두 사람은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신했다. 제론이 없다면 에어스트 왕국도 성립할 수 없다고 말이다.

☆ ☆ ☆

벨루스 공작과 말레피 공작이 은밀히 만났다. 수도의 비처에서 만났는데, 제론이 제공한 장소였다. 물론 그
장소를 마련한 것은 바인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군.”
“나도 그렇소. 보안 하나는 확실하겠군.”
두 사람이 있는 장소는 어느 저택의 지하실이었는데, 어찌나 깊이 아래로 파 내려갔는지, 깊이를 추측할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중간에 몇 번이나 길이 바뀌고 어찌나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온다면 절대로 밀실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결정은 내리셨소?”
말레피 공작의 물음에 벨루스 공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렸소.”
“가기로 결정하셨소?”
“그렇소. 하면 말레피 가문은 가지 않기로 하셨소?”
말레피 공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라고 힘이 있겠소? 어제 암살 시도가 있었소.”
“나도 마찬가지요.”
“역시. 설마 처음이었소?”
“그럴 리가. 다섯 번째였소.”
두 사람은 최근 빈번한 암살 시도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아마 제론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당해도 벌써
당했을 것이다.
두 사람뿐 아니라 가문의 주요 인물이 끊임없이 암살에 시달렸다. 그들 역시 제론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전에 모든 정보를 읽고 차단하는데 거기에 당한다면 공작이라는 작위를 내다 버려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에어스트 왕국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느꼈소이다.”
“나 역시 그렇소. 대체 어떻게 암살 시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 수 있는 건지…….”
“아마 그 친구를 잘 몰랐다면 에어스트 왕국에서 벌인 자작극이라고 생각했을 거요.”
“오늘도 암살 시도가 있을 거라고 하니 이젠 지겨울 따름이오.”
둘은 잠시 그렇게 한탄하다가 이내 눈을 빛내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을 했다. 단독으로 일을 벌여선 실패
확률이 높았다.
둘이 힘을 모아야 더욱 성공할 확률도 높고 피해도 줄일 수 있었다.
“일단 재산의 경우는 일정 부분 포기를 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야 그렇지요. 영지 같은 경우 짊어지고 갈 수도 없으니…….”
그렇다고 영지를 팔아 치울 수도 없었다. 벨루스 영지나 말레피 영지의 경우 너무 컸다. 또한 벨루스 공작 같은
경우 영지민에 대한 애착이 커서 그들을 남겨 놓고 가는 상황도 마음에 걸렸다.
“마음 같아선 영지민까지 싹 데려가고 싶지만 여건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지 않겠소?”
“재산이라도 적당히 챙겨 갈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사람은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 봐야 보석류나 금으로 준비해야 하는데
그조차 갑자기 준비하려니 쉽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으면 좋으련만…….”
“아예 뒤집어엎는 건 어떻소? 우리가 손잡으면 가능하지 않겠소?”
“그다음에 레늄 왕국의 침공은 어떻게 막겠소?”
“끄응, 알고 있소. 하도 답답해서 그냥 해 본 소리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것을 깬 건 벨루스 공작이었다.
“혹시…… 에어스트 왕국에 도움을 청하면 얼마나 도와줄 것 같소?”
“글쎄올시다. 제안을 그쪽에서 한 모양새이니 최대한 도와주지 않겠소?”
“하면 그쪽에 방법을 마련해 보라고 하면 어떻겠소?”
“방법? 재산을 빼돌릴 방법 말이오?”
“그것도 그렇고 영지민까지 데려가면 좋지 않겠소? 그쪽은 여전히 인구가 모자라는 모양이던데.”
에어스트 왕국이 슈린 왕국을 집어삼키며 제법 인구가 늘어났지만 그래도 턱없이 부족했다. 아마 두 영지의
영지민을 싹 데려가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영지민까지 다 데려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레늄 왕국을 관통해서 지나가야 하는데, 그걸 누가
가만히 내버려 두겠는가.
“어쨌든 밑져야 본전이니 당장 연락해 보겠소.”
두 공작은 그렇게 결정했다. 어려울 거라고 말은 해도 내심 상당히 기대했다. 그동안 제론이 보여 준 행보를
떠올리면 불가능이 없어 보였다.
아마 이번에도 반드시 뭔가 수를 내줄 거라고 믿었다.
밀실에서 나가는 두 공작의 표정은 결과와 달리 제법 밝았다. 당연히 두 공작을 수행하는 기사와 종자들의 표정도
밝을 수밖에 없었다.
두 공작의 표정에 깃든 밝음은 분명히 희망이었다.
Chapter 8 두 공작의 선택 (3)

제론은 크란 제국에 있는 거점 중 하나에 도착했다. 아직 준비가 다 되지 않았기에 이곳에서 하루쯤 더 지내야만


했다.
결사대가 일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려면 결사대가 쓰던 마나폭탄이 필요했다. 물론 위력은 훨씬 강화되었기에 실제
그들이 쓰던 폭탄과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제론은 그 방법을 이용해 크란 제국이나 비밀 조직이 모든 걸 결사대의 작전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다.
“자, 일단 주변을 좀 살펴볼까?”
제론은 마나폭탄을 준비하면서 마티를 통해 주변을 살폈다. 유적 위에는 분수대가 있었는데, 최근 다시 공사를
시작했다.
아마 지금이야 돈과 노동력을 들여 저렇게 복구를 하지만, 조만간 그것도 그만둘 것이다. 아니, 다시 처음부터
에너지원을 찾는 것부터 시작할 확률이 높았다.
“그건 참 궁금하군.”
과연 비밀 조직이 초고대유적의 에너지원을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했다. 어떤 장비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방법을
썼는지 말이다.
생각해 보면 제론도 초고대유적을 찾으려면 확실치 않은 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만일 그들이 쓴 방법을
알아낸다면 제론도 훨씬 수월하게 유적을 찾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마나폭탄은 벌써 잔뜩 만들어 뒀다. 남은 건 그 안에 충분한 양의 마나를 주입하는 일이었다.
위이이이잉!
제론은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제론의 심장에서 마나가 실처럼 뽑혀 나왔다. 그리고 그 마나의 실이 각각의
마나폭탄에 연결되었다.
마나가 꿀렁꿀렁 마나폭탄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제론은 그렇게 마나를 넣으며 태블릿을 이리저리 조작했다. 태블릿 위에 박살 난 분수대과 광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많기도 하군.”
막대한 인력을 투입했기에 공사는 빠르게 진척되고 있었다. 물론 공사가 끝난다 하더라도 더 이상 분수대에
에너지는 모이지 않을 것이다.
제론은 태블릿을 이리저리 조작해 이번에는 다른 곳을 비추었다. 그러다가 왠지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음?”
평범하게 생긴 사내였는데, 공사 현장을 몰래 숨어서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제론은 직감이 확 왔다.
“결사대가 분명해.”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조심스럽게 분수대 공사 현장을 지켜볼 리가 없었다.
제론은 그가 왜 그렇게 분수대 공사 현장에 관심을 두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분수대를 저렇게 만든 것이
누군지 궁금한 것이리라.
‘잘하면 비밀 조직을 제대로 흔들어 볼 수도 있겠는데?’
아직 베일에 싸여 있기에 흔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저 지금까지 제론이 한 일들이 그들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줬을 거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한데 이번 기회에 결사대와 접촉해서 그들을 조금만 도와준다면 비밀 조직을 훨씬 더 거칠게 흔들어 놓을 수 있지
않겠는가.
결심을 굳힌 제론은 일단 몰래 숨은 결사대원에게 마티를 붙였다. 언제든 확인이 가능했고, 또 범위를 넘어가면
즉시 알려 주도록 태블릿에 미리 설정을 해 뒀다.
아마 오늘 안으로 저 결사대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또 다른 동료는 어디에 있는지 몽땅 다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나가면 좋겠지만 공사 현장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제론은 일단 밤이 되기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태블릿을 조작해 도시에 다른 수상한 자가 없는지 확인하는 한편
끊임없이 마나폭탄에 마나를 주입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밤이 되었다.

Chapter 9 레벨리오 (1)

제론은 유적에서 나갔다. 밤이 되면서 공사가 중지되어 광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번 테러를 당했던 곳이라
그런지 찾아오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
공사가 아니라면 일꾼들도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제론에게는 오히려 더 편했다. 신경 쓰지 않고 유적을 들락거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다른
유적도 다 이런 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제론은 미리 마티를 통해 확인한 결사대원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어차피 밤이었기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으니 괜히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경비병은 피해 다녀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도시는 경비가 그리 삼엄하지 않았다. 제론은 거침없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사실 제론은 비밀 조직에 대해 상당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얼마 전까지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숨어 있으니 까다롭긴 해도 제대로 정체만 파악하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얼마 전 그 조직의 사람으로 보이는 소드 마스터를 만났다. 비록 실력은 제론보다 한참 아래였지만 그래도
소드 마스터였다.
만일 그 비밀 조직에 소드 마스터가 여럿 존재한다면, 또 제론이 타는 기간트인 테오스에 맞먹는 기간트가 있다면
상대하기가 정말로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그 역사가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그러니 그동안 쌓인 저력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걸 모두 감안하면 결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조직이 아니었다. 그들을 제대로 상대하려면 훨씬 더 큰 힘이
필요했다.
또한 제론을 도와줄 조력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지금 제론이 찾아가는 결사대원은 그런 조력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들로 인해 비밀 조직이 수면 위로
드러날지도 모르고 말이다.
제론은 나름대로 큰 기대를 안고 결사대원을 찾아갔다.
“여기로군.”
제론은 빈민가 골목 깊숙한 곳에 도착했다. 막다른 골목이었는데, 그곳에는 문도 창문도 없었다. 그저 삼면이
벽으로 막힌 장소였다.
그 장소의 끝에 커다란 뚜껑이 있었다. 하수구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뚜껑을 열었다.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아네모스.”
제론은 정령을 불러 주변 공기를 정화시켰다. 굳이 애써서 악취를 맡을 이유가 없었다.
하수구 구멍 안으로 거침없이 몸을 날린 제론의 주위로 바람이 씽씽 불었다.
아네모스의 능력은 상당히 뛰어났다. 아니, 아네모스를 다루는 제론의 힘이 대단했다. 아네모스는 열린 하수구
구멍을 통해 끊임없이 신선한 공기를 유입해 제론에게 공급했다.
덕분에 제론은 상당히 쾌적한 공기를 맡으며 하수구 안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수도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사실 이 하수도라는 것이 아예 없는 왕국도 있었다. 물론 제론이
다스리는 에어스트 왕국에는 제대로 정비된 깔끔한 하수도가 존재했다.
제론은 초고대문명의 지식을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위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도시를 설계하면서 하수도를
먼저 만들었다.
반면 크란 제국의 하수도는 처음 만들어진 다음부터 계속 확장에 확장을 거듭한 케이스였다. 당연히 내부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안에서 길을 찾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칫 길을 잃으면 하수구 구멍을 찾지 못해 끝없이 헤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티를 통해 미리 하수도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는 제론이 길을 못 찾을 리 없었다. 제론은 단번에
목적지까지 내달렸다.
사실 하수도에서 오래 버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아네모스를 이용해 몸 주위를 쾌적하게 유지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한참을 가니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그곳이 바로 목적지였다.
제론은 불빛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어느 순간부터 불빛 옆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당연히 그 사람은 제론을 발견하지 못했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거니와, 제론은 지금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움직였다. 또한 아네모스가 소리까지
차단하고 있었으니 제론이 다가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였다. 제론이 제법 가까이 다가가자, 사내도 제론을 발견했다. 그는 빠르게 다가오는
제론을 보고는 크게 당황했다.
“허억!”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하수도 안에서도 비교적 깨끗한 곳에 자리를 잡긴 했지만 그래도 이동하며 오물이 묻을
수밖에 없어 사내의 몰골은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제론은 지저분한 상태로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이대로 도망치게 둘 생각도
마찬가지로 없었다.
“네로.”
촤아아아악!
물의 정령, 네로가 나타났다. 비록 지저분한 오물투성이었지만 하수도도 엄연히 물이 흐르는 곳이었다. 당연히
네로가 활동하기 좋은 영역이었다.
네로는 오물에서 튀어나왔음에도 한없이 깨끗하고 순수했다. 투명할 정도로 맑은 물이 휘몰아치자, 사내는
도망가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네로를 사내에게 날려 보냈다.
쏴아아아아!
촤아악!
물벼락이 사내를 덮쳤다. 사내는 깜짝 놀라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버둥거려도 물덩이를 벗어날 수 없었다.
“어푸푸푸! 어푸푸!”
사내가 괴로워할 틈도 없이 물이 사라져 버렸다. 제론이 네로를 돌려보낸 것이다.
사내가 언제 젖었냐는 듯 뽀송뽀송해진 몸과 제론을 번갈아 바라봤다. 사내의 시선은 그저 멍했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또 눈앞에 선 사람은 누구인지 정말로 궁금했다.
“누, 누구십니까?”
사내가 보기에 제론은 조금 어려 보였다. 하지만 결코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제론으로부터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결사대, 맞나?”
제론의 질문이 떨어진 순간, 사내가 인상을 구겼다.
“젠장!”
사내는 다급히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느새 그의 앞을 제론이 막고 있었다.
쉬익!
사내가 품에서 단검을 뽑아 찔렀다. 수천 번은 훈련했을 법한 깔끔한 찌르기였다. 물론 제론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챙강!
제론은 손가락으로 단검의 날을 잡아 그대로 부러뜨렸다. 워낙 간단히 처리했는지라 마치 과자로 만든 단검을
서로 짜 맞추듯 찌르고 부러뜨린 듯했다.
사내가 멍하니 부러진 단검과 제론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는 단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그대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턱!
제론은 사내가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예상했기에 지극히 간단히 그것을 막았다.
첨벙!
단검이 사내의 손에서 떨어졌다. 사내가 당황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암담해졌다.
“아무래도 잠깐 자고 있는 게 낫겠군.”
제론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사내의 눈이 그대로 감겼다. 마법으로 재워 버린 것이다.
“네로.”
촤아아악!
물줄기가 쫙 솟아 나와 쓰러지던 사내를 받쳤다. 물기둥이 사내를 칭칭 휘감자, 제론이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
그렇게 하수도를 벗어난 제론은 사내를 데리고 몸을 날려 도시를 벗어났다.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곳에 도착한 제론은 네로를 돌려보내고 사내를 넓적한 바위에 눕혔다.
마법으로 재웠으니 깨우는 것도 아주 간단했다. 제론은 손가락을 튀겼다.
딱!
사내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다짜고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제론이 또 손가락을 튀겼다.
딱!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히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았다. 사내의 눈이
공포에 잠겼다.
사내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두려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자신이 뭘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대였다. 그저 순응하는 편이 나았다. 사내는 그저 고통 없이 죽여 주기만을
기대하며 최대한 불쌍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사내가 체념한 걸 본 제론이 다시 손가락을 튀겼다.
딱!
제론을 중심으로 마나가 한바탕 휘몰아쳤다. 그 마나의 바람은 사내의 몸에 걸린 마법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자, 이제 대화를 나눠 볼까?”
제론의 말에 사내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봤다.
“아, 아아, 아아아.”
사내는 신기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고작 손가락을 튀기는 것만으로 마법을 걸고 풀다니. 이런 건 솔직히
처음 봤다.
그들이 사용하는 마나폭탄을 만든 사람도 굉장한 마법사였지만 그조차 이런 식으로 마법을 쓰지는 못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는 걸 확인한 사내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대, 대체 누구십니까? 그리고 절 왜 이런 곳으로 데려오셨습니까?”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제야 주변을 자세히 살펴봤다. 아직 한밤중이라서 사방이 깜깜했다. 하지만 이곳이
넓은 공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니, 이곳은 광활한 들판이었다.
오늘은 달도 뜨지 않은 밤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쏟아질 듯 반짝였는데, 그것만으로는 시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 제론과 단둘이 있는 듯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어두운데 제론의 모습만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홀로 빛나듯이 말이다.
화들짝 놀라 자신의 몸을 살펴보니 자신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이건 빛이 아니었다. 만일 몸에서 빛이 나는 거라면 주변에 희미하게라도 빛이 퍼져 나가야 정상이었다.
한데 마치 검은 도화지 위에 화려한 색으로 그림을 그려 놓은 것처럼 딱 제론과 자신만 도드라졌다.
사내는 그제야 이것도 마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알아챈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돌 도돌 돋았다.
“결사대를 찾아왔을 뿐이다. 혹시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Chapter 9 레벨리오 (2)

결사대라는 말에 사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 하수도에서 만났을 때도 저 말 때문에 도망치려고 했었다.
한데 여기서 또 그 말을 들으니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런 건 없습니다.”
사내의 표정은 완강했다. 어떤 협박이나 회유에도 응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당연했다. 사내의 조직을 결사대라고 부르는 자들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내의
조직이 존재한다.
“날 못 믿는 건가?”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일방적이었다. 얘기를 들어 볼 생각도 않고 저렇게 불신 가득한
건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좋아. 그럼 믿게 해 줘야지. 일단 하나씩 차근차근 하자고.”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구슬 하나를 꺼냈다. 제론이 만든 마나폭탄이었다.
“이거 보여?”
사내는 제론이 들고 있는 마나폭탄을 보고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마, 마나폭탄?”
“잘 아는군.”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사내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아마 사내라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 것이다.
관심이 있어서 오늘 광장에 갔을 테니까.
역시 제론의 예상대로 사내의 눈이 이내 커다래졌다.
“서, 설마!”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설마가 정답이야.”
사내가 경악했다.
“설마 당신이 분수대를 부쉈단 말이오? 대체 어떻게?”
사내는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혼자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분명히
마나폭탄이었고, 또 분수대가 부서져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혹시 비밀 조직에서 벌이는 공작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은 깊고 거대하다. 분수대 한두
개 희생시키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희와 같은 방법으로.”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신들에 대해 대체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또한 뭘
원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건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언제 혼자 했다고 한 적 있었나?”
“그럼……!”
제론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혼자 했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누군가와 함께 했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굳이 진실을 꼬치꼬치 밝혀 줄 필요는 없었다. 상대가 알아서 생각하게 만들면 된다. 그 편이 훨씬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일단 내가 먼저 제안을 하지.”
제론의 말에 사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바라봤다. 긴장감이 한가득 느껴졌다.
“이 마나폭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마나폭탄을 휙 던졌다. 사내는 기겁을 하며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나폭탄을 살폈다.
마나폭탄은 상당히 불안정했다. 그래서 자칫 원치 않는 상황에서 폭발할 위험이 있었다.
“그건 터질 염려 없으니 걱정할 거 없다.”
제론의 말에 사내가 깜짝 놀라 마나폭탄과 제론을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럼 이 마나폭탄은 뭔가가 다르기라도 하다는 뜻 아닌가.
“그 마나폭탄이 너희 것과 같아 보이나?”
“그럼 다릅니까?”
사내가 다시 한 번 유심히 마나폭탄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겉모양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양은 완벽하게 같았다.
사내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다른 점을 모르겠군요.”
제론은 품에서 다른 마나폭탄을 우르르 쏟아 냈다. 수백 개나 되는 마나폭탄이 나타나자 사내가 기겁을 했다.
“이, 이게 다 뭡니까?”
제론은 그중 하나를 집어서 위로 던졌다 받으며 사내를 슬쩍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만일 여기서 마나폭탄이 터지면 이 수백 개의 폭탄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이 일대가 싹 날아가 버릴 것이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마나폭탄을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멀리 던졌다.
쌔애애액!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마나폭탄은 순식간에 수백 미터나 날아갔다. 그리고 폭발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수백 미터나 떨어져 있음에도 폭발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 열기가 확 밀려왔다.
사내는 휘몰아치는 불꽃의 폭풍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삐걱거리는 목을
억지로 움직여 제론을 바라봤다.
“대, 대체 이게 뭡니까?”
“뭐긴, 마나폭탄이지. 제법 괜찮지?”
제법 괜찮냐니, 이건 고작 그 정도로 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만일 이 마나폭탄이 있다면 훨씬 더 편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또한 굳이 분수대만 작살내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파악한 좀 더 큰 장소를 공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사내의 표정은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이 마나폭탄이 정말로 탐나지만, 자신은 이걸 구입할 여력이
없었다. 또한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조직의 돈줄은 이제 말라비틀어진 지 오래였다.
그걸 미리 파악하고 이 마나폭탄을 내민 거라면 다른 조건을 걸 것이다. 하지만 그 조건이 결코 가벼울 리 없었다.
이래저래 사내에게는 그걸 마음대로 결정하기에는 권한이 많이 모자랐다.
게다가 고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적 조직의 감시가 훨씬 치밀해졌다. 연이어 피해를 입으니 독이 오를
대로 오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나폭탄의 위력만 믿고 작전을 펼치다간 다들 골로 가는 수가 있었다.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 없어. 그 마나폭탄은 공짜로 주는 거니까.”
“예? 그, 그게 정말입니까? 하지만…….”
사내는 거기에 무슨 조건이 달릴지 두려워 제론을 바라봤다. 하지만 제론은 아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그리고 조건 따위는 아무것도 없어. 그저 더 열심히 활동을 하라는 것 외에는 말이야.”
“정말로 그것뿐입니까? 하지만…….”
제론이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내 목표는 그 얼토당토않은 조직을 무너뜨리는 거야. 거기에 일조를 하고 있는 조직이니 당연히 도와야 하지
않겠어?”
제론의 말에 사내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러니 마나폭탄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만 하라고.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그 말이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외로운 투쟁을 해 왔던가. 누구의 호응도 얻지 못하고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저 피로 얼룩진 희생을 토대로 계속해서 싸우고 또 싸워 왔다. 하지만 이젠 슬슬 그것도 한계에 이른 상태였다.
그 와중에 이런 도움을 받으니 정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다.”
너무나 정중한 사내의 인사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또 준비한 것을 꺼냈다.
“이것도 받도록.”
“이게 뭡니까?”
제론이 사내에게 준 것은 얇은 종이였다. 수백 장이나 되어서 제법 무게가 나갔는데, 모든 종이에는 정교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사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론의 말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스크롤이라는 거야. 둘둘 말아서 가지고 다니다가 찢으면 거기 새겨진 마법이 발동하는 거지. 참고로 거기
그려진 마법진은 아무리 분석해 봐야 소용없으니 괜한 수고 하지 마.”
“스, 스크롤 말입니까?”
사내도 스크롤이라는 말을 어렴풋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건 고대유적을 발굴할 때 간혹 나오는 귀중한
물건이었다.
일종의 아티팩트인데, 마법진을 종이에 그려 일회용으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재료의 특성상, 제대로 보존된
것이 없어서 웬만한 아티팩트보다 훨씬 귀하고 비쌌다.
한데 그런 스크롤을 이렇게 잔뜩 주다니. 마치 누군가 대량으로 그려 낸 것 같지 않은가.
‘가만, 그러고 보니…….’
종이의 상태가 너무 깨끗했다. 정말로 방금 그린 듯한 스크롤이었다. 또한 유적에서 출토되는 스크롤과 달리 돌돌
말려 있지 않고 그냥 펼쳐져 있는 것도 이상했다.
“설마 이걸 다 만드신 겁니까?”
사내가 경악 어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론은 대답대신 씨익 웃었다.
“그건 모습을 감춰 주는 스크롤이야. 기척은 감춰지지 않고 모습만 사라지니까 그 점은 감안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건 아주 중요한 점이었다. 만일 적진에 소드 마스터가 있다면 통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또한 이 스크롤에 새겨진 마법은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가지는 감각의 한계를 이용해 몸을
감추는 것뿐이었다.
당연히 감각이 예민하거나 특별한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제론은 그 점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사내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론의 말을 듣기만
했다.
“대체…… 대체 왜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 것입니까?”
제론이 씨익 웃었다.
“말했잖아. 적의 적은 친구라고. 너희가 싸우는 조직은 내 적이기도 해. 아직 이름도 모르지만.”
사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수없이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은 결심을 굳혔다. 사내의 얼굴이 갑자기 편안해졌다. 그리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적 조직의 이름은 아직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조직 수뇌부는 알 겁니다. 우리 조직에 대한 것도 솔직히
전 잘 몰라서 제대로 말씀을 해 드릴 수가 없군요.”
사내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레벨리오.”
제론이 사내를 똑바로 쳐다봤다.
사내는 제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레벨리오.”
사내는 마치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그렇게 말하고는 제론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게 그쪽 조직의 이름인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결사대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결사대라고 부르는 자들은 그놈들이 유일합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제야 왜 사내가 처음에 자신을 그렇게 못 믿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적이 그들을 결사대라고 부르기에 정말로 이름이 그런 줄 알았다.
한데 그건 적의 호칭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내가 반감을 가질 만도 했다. 아마 제론을 비밀 조직의
일원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전 브릭이라고 합니다.”
사내는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자신이 지금 가진 모든 감정을 담은 진심 어린 인사였다.
제론은 그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떠나 버렸다.
브릭이 고개를 들었을 때, 제론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브릭은 다시 한 번 제론이 있던 자리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서둘러 주위를 정리했다.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이 중요한 물건들을 조직에 전달해야만 했다.
아마 앞으로는 정말 볼 만할 것이다.
브릭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제론은 브릭에게 준비한 물품을 모두 넘긴 다음 곧장 다음 도시로 떠났다. 제론이 활발하게 움직여 주는 편이


레벨리오의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상승 작용을 일으키다 보면 비밀 조직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젠 그 조직에 대해서도 좀 알아내야 하는데…….’
그렇게 부딪치는데도 아직 알아낸 것이 거의 없었다. 그들의 목표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심지어는 그들의 명칭조차 모르니 말 다 한 것 아닌가.
비밀 조직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제론의 사고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대항하는 조직 레벨리오에게로
이어졌다.
레벨리오의 목적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어쨌든 제론의 적과 싸우고 있었다. 나중에야 관계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은 제론에게 힘이 될 것이다.
‘차츰차츰 레벨리오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야겠어.’
물론 조사는 제론이 아니라 바인이 할 것이다. 제론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철저하게 말이다.
제론의 머릿속에는 레벨리오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올랐다. 과연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또 어떤 식으로
이용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일단 다음 목표부터.”
다음 목표는 현재 브릭이 열심히 뛰어서 가고 있는 목적지였다. 제론은 그 도시의 유적부터 접수하기로 했다.
그것이 향후 레벨리오를 파악하기에 편하니까.

Chapter 9 레벨리오 (3)

브릭은 갖은 고생 끝에 자신과 조직의 유일한 연결점을 찾아갔다.


자신이 활동하던 도시가 아니라, 제법 떨어진 도시에 있었기에 찾아가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브릭이 그렇게 조직의 연결점을 찾아가는 동안 벌써 2 개의 적 기반이 박살 났다.
실로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하지만 아직 적 조직이 가진 기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어서 빨리 자신이 조직에 이 물건을 전해 줘서 그자와 연계할 필요가 있었다. 아마 적 조직은 상당한 기반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시 근처에 도착한 브릭은 도시로 가지 않고 도시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부분을 열심히 뒤졌다. 곳곳에 바위가
놓여 있고, 드문드문 나무가 있긴 했지만 그저 황무지에 불과했다.
그런 곳을 열심히 뒤지고 다니는 브릭의 태도는 더없이 신중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까 상당히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찾았다.”
브릭은 커다란 바위 아래에 놓인 넓적한 돌판을 잡고 힘을 주었다.
“끄응.”
돌판이 옆으로 밀려나며 구멍 하나가 나타났다. 그곳이 도시 안의 하수구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레벨리오가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 낸 비밀 통로였다.
브릭은 구멍으로 쑥 들어간 다음 돌판 바닥에 만들어진 손잡이를 잡고 힘껏 당겼다.
돌판이 흙을 긁으며 움직여 다시 구멍을 덮었다. 더불어 구멍 안은 어둠으로 잠겨 버렸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브릭은 능숙하게 길을 찾아 나아갔다.
통로는 직선이 아니라 이리저리 구불거렸다. 하지만 브릭은 정확히 어디를 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딱 정확한
순간 방향을 틀었고, 걸음걸이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이 바로 하수도와 비밀 통로가 연결되는 곳이었다.
레벨리오에서 브릭이 상부와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 바로 하수도였다. 여기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비로소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레벨리오의 상부에는 황족이 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해서는 소문과 짐작만 무수했지 정작 진실은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브릭은 하수도 안에 있는 거점으로 향했다.
하수도의 거점에서 머물고 있던 사내가 브릭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이렇게 찾아와선 안 된다는 걸 모르나!”
사내는 브릭의 상급자이자, 하수구와 도시에 있는 조직의 연결점을 가진 자였다.
“긴급 사항입니다.”
브릭의 말에 사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긴급 사항?”
긴급 사항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지금까지 하부에서 상부로 보고할 만한 일 중에서 긴급이라고 할
만한 사항은 없었다.
그렇기에 사내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브릭도 그 제반 사정을 다 이해하기에 사내의 태도가 별로 불쾌하지는 않았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브릭도
사내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뭔지 보고해 보도록.”
“위력이 향상된 마나폭탄과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스크롤을 구했습니다.”
사내의 눈이 커다래졌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로 긴급하게 보고할 만한 사항이었다. 또한 자신이 더
위로 올라가는 데 지대한 도움이 될 물건들이었다.
“그게 정말인가? 어디 보여 주게!”
브릭은 사내의 말에 미리 준비한 마나폭탄 하나와 스크롤 한 장을 건넸다.
사내는 그것을 받고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마나폭탄과 스크롤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게 정말로 그런 건가?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확인하셨으면 절 상부로 안내해 주십시오. 직접 보고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건 안 될 말이지. 그런 예외는 인정할 수 없다. 그러니 물건을 놓고 돌아가도록. 보고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브릭의 표정이 굳었다. 사내가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죠.”
브릭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는 미리 준비한 물건을 내밀었다. 상자에 담아 뒀기에 따로 챙기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다.
사내는 상자를 받으며 씨익 웃었다. 이 물건만 있으면 상부에 인정을 받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브릭은 상자만 넘기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미리 생각한 바가 있었기에 최대한 서둘렀다.
사내는 브릭이 떠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마나폭탄 3 개와 스크롤 3 장이 들어 있었다.
그걸 본 사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건 수가 너무 적은데?”
고작 이걸 누구 코에 붙인단 말인가. 사내는 순간 정신이 들어 브릭을 찾았다. 하지만 브릭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젠장, 이놈이 날 물 먹였군.”
사내는 잠시 고민했다. 일단 이걸 상부에 제출한 다음 브릭에게 나머지 물량을 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먼저
물건부터 확보해야 할지 말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브릭이야 갈 곳이 뻔했다. 또한 사내에게는 브릭을 찾을 방법이 있었다.
“일단 물건부터 확보해야지.”
물량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고, 앞으로 지속적으로 물량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또한 이 물건이
얼마나 성능이 뛰어난지 테스트도 해 봐야 했다.
그러니 먼저 브릭부터 찾는 게 나았다. 테스트는 그동안 하고 말이다.
사내는 상자를 품에 넣고, 작은 구슬 하나를 꺼냈다.
“플리커.”
시동어와 함께 구슬에 희미한 빛이 어렸다. 그리고 구슬에서 빛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빛은 아주 느리게 깜빡였다. 사내는 그 구슬을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내의 걸음에 따라 구슬이 점멸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이 구슬은 미리 시드를 심은 상대와 가까워지면 점멸
속도가 빨라지는 간단한 아티팩트였다.
보통은 조직에 갓 들어온 신입을 믿기 어렵기 때문에 혹시 있을지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시드를 심는다. 하지만
브릭은 이미 그런 시기를 넘었다.
사내는 브릭뿐 아니라 자신이 관리하는 모든 조직원에게 시드를 심었다. 당연히 동의를 구하지 않고 몰래 심었다.
레벨리오라는 조직의 목표와 비밀을 우연히 알아낸 이후부터 사내는 활동 방식을 많이 바꾸었다. 일단 조직의
중추에 올라가야만 했다.
레벨리오가 승리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지만, 일단 성공한 이후에는 무한한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사내는
레벨리오를 배신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레벨리오는 일단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면 배신이 불가능했다. 사내도 그걸 알기에 배신은 꿈도 꾸지 않았다.
다만 레벨리오가 진짜 목표를 달성했을 때 좀 더 많은 영광을 가져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물건은 레벨리오의 승리에 도움을 주는 건 물론이고, 자신의 목표도 달성하게 해 줄 달콤한 열매였다.
사내는 그 열매를 놓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쓰레기군.”
제론은 태블릿을 통해 브릭을 지켜보고 있었다. 브릭보다 먼저 이 도시에 와서 유적을 찾은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이곳에 브릭의 목표가 있으니 그걸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이 도시의 유적은 아주 조용히 얻었다. 상당히 많은 준비가 필요했지만 예전처럼 통짜 건물로 막아 놓지 않아서
그래도 은밀히 유적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다만 다시 나오는 게 문제였는데, 그건 아주 간단히 해결되었다. 이 도시의 유적에는 폴타가 있었다. 그래서
일단 들어가서 등록한 이상,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현재 제론은 유적의 침대에 누워 아주 편안한 자세로 태블릿을 조작하고 있었다.
태블릿에는 브릭의 모습과, 브릭을 쫓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브릭은 사내에게 붙잡힐 것이다.
그리고 물건을 몽땅 빼앗길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브릭의 목숨을 노리지는 않을 것이다. 물건의 출처를 알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브릭도 모른다. 나중에 제론이 브릭에게 접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마 사내는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날 기다리거나, 아니면 그냥 보고하러 가거나.”
제론은 보고를 먼저 할 거라고 확신했다. 자신이 이렇게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까 말이다.
상황은 제론이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제론은 혹시 몰라 폴타를 통해 언제든 근처로 이동할 수 있게 미리 준비를
해 뒀다.
사내가 브릭을 죽이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말이다. 제론은 일단 브릭을 통하는 게 훨씬 편했다. 또한 브릭이
레벨리오라는 조직의 요직에 앉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도 좋았다.
제론이 지켜보고 있는 동안 브릭은 결국 가지고 있는 모든 물건을 강탈당했다. 사내의 실력이 상당해서 브릭이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나마 고문까지 가지 않은 것은 브릭이 타이밍 좋게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상당한 고문이
뒤따랐을 것이다.
“역시 쓰레기야.”
브릭이 쉽게 포기한 것은 고문이 두려웠기 때문도 있지만, 사실 그보다는 결과적으로 누가 보고를 하건 조직에
득이 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공로만 포기하면 끝이니 그걸 선택하는 것이 가장 편했다.
다만 그걸 강탈해 간 사내에 대한 앙금은 잔뜩 남았지만 말이다.
브릭은 허탈한 표정으로 주저앉아서 쉬고 있었다. 제론은 브릭을 살피며 동시에 브릭에게서 물건을 강탈해 간
사내를 추적했다.
마티 하나만 붙여 놓으면 끝이니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사내는 하수구에서 나가 도시의 빈민가로 향했다. 어쨌든 가장 숨기 쉽고 활동하기 편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레벨리오의 수뇌부가 거기에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사내는 빈민가 골목골목을 지나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허름한 집으로 들어갔다.
“슈틀러 님.”
슈틀러는 다음 작전을 짜고 있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외침에 인상을 썼다. 복잡하게 이어지던 머릿속의 작전이
그대로 헝클어졌다.
“무슨 일이냐!”
슈틀러의 몸에서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사내는 그걸 마주하고는 다리를 덜덜 떨었다.
“슈, 슈틀러 님. 기, 긴급 보고 사항이…….”
그제야 슈틀러의 기세가 가라앉았다. 사내는 비틀거리며 다가가 공손하게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
“신무기입니다.”
“신무기?”
슈틀러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내의 성정은 슈틀러도 잘 알고 있었다. 레벨리오는 생각보다 치밀한 조직이었다.
하부자의 성정쯤은 애초에 다 파악해 두었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을 건사하기 어려웠으니까.
슈틀러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사내가 내미는 상자를 받아서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마나폭탄 3 개와 스크롤 3
장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마나폭탄인가?”
사내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개량한 마나폭탄과 스크롤입니다.”
“스크롤?”
마나폭탄이라는 말은 듣는 순간 날아가 버렸다. 스크롤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파괴력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슈틀러는 스크롤을 한 장 들었다.
“이게 스크롤이라고?”
“그렇습니다. 모습을 감춰 주는 스크롤입니다.”
슈틀러가 스크롤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확인했다. 특별한 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작 3 장뿐이니 만일 진짜
스크롤이라 하더라도 그저 연구할 가치밖에 없었다.
사내는 그런 슈틀러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물량은 충분히 있습니다.”
슈틀러의 눈이 번득였다.
“물량이 충분하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사내는 브릭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해 주었다. 물론 물건을 공급해 줄 사람이 브릭을 찾아갈 거라는 말을 뺐다.
모든 공을 자신이 가졌다.
사내의 설명을 모두 들은 슈틀러가 물었다.
“그럼 지금 물량이 얼마나 있지?”
사내는 말없이 스크롤 더미와 마나폭탄들을 내려놓았다. 그걸 보는 슈틀러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물량이 많으니 괜찮겠군. 한 장 찢어 봐라.”
“예.”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스크롤 한 장을 찢었다. 사실 처음 테스트 하는지라 조금 떨리긴 했다. 하지만 내친
걸음이었다.
찌익!
스크롤이 찢어졌다. 그 순간 스크롤에 잠들어 있던 마나가 깨어나 사내의 몸을 휘감았다.
슈틀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갑자기 눈앞에 있던 사내가 사라져 버렸다.
“기척은 완전히 지우지 못하는군.”
슈틀러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슈틀러의 실력과 감각이 뛰어나기
때문이지 결코 스크롤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이걸…… 대체 얼마나 더 얻을 수 있는 거지?”
“꾸준히 공급해 준다고 했습니다.”
“꾸준히? 더 정확히 말해라. 어느 정도의 기간을 두고 몇 장이나 전해 준다고 했느냐?”
“아직 그건 확실히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충분히 쓸 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슈틀러는 크게 흥분했다. 이런 물건이 있다면 앞으로 작전을 짜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게다가 피해도 확 줄일 수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대단한 물건을 공급해 주는지 고맙고 궁금했다. 반드시 만나 보고 싶었다.
“언제 다음 물건을 받기로 했지?”
“이걸 다 소진하면 알아서 찾아오기로 했습니다.”
“알아서?”
슈틀러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알아서 찾아오다니. 대체 어떻게 그렇게 한단 말인가. 이건 레벨리오 내의
정보가 새나 간 게 분명했다.
‘문제가 있군. 확인을 좀 해 봐야겠어.’
내심 고개를 끄덕인 슈틀러가 섬뜩한 눈으로 사내를 쳐다봤다.
“이만 가 봐라. 난 다음 작전을 짜야 하니까. 조만간 부르겠다.”
“예. 알겠습니다.”
사내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인사를 했다. 조만간 요직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슈틀러는 사내가 물러가자 싸늘한 표정으로 눈앞에 놓인 물건을 쳐다봤다.
“왜 하필 저런 쓰레기 같은 놈에게 접근한 거지? 대체 무슨 목적일까?”
하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하는 것보다는 이 물건을 이용해 쓸 만한 작전을 짜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마 당분간은
승승장구할 수 있으리라.

Chapter 10 마나폭탄과 스크롤 (1)

브릭은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체념했다. 당시 제론을 만났을 때의 느낌을 떠올리면 자신을 동정할
것 같지 않았다. 상당히 냉정해 보였다.
그러니 이런 억울한 심정을 토로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제론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저 마나폭탄과
스크롤을 전해 주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닌가.
“후우, 신세 처량하군.”
그냥 처량한 정도가 아니었다. 아주 처절했다. 설마 이렇게 구금될 줄은 몰랐다.
현재 브릭이 있는 장소는 하수도 깊숙한 곳에 땅을 파고 만든 곳이었다. 특별히 뭔가를 감출 일이 있거나 몸을
숨길 때 쓰라고 레벨리오에서 제공한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장소는 원래의 목적과 다르게 쓰이고 있었다. 브릭은 팔다리가 묶인 채 그곳에 갇혔다. 워낙
비좁은 곳이라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몸을 구기고 있으려니 연신 한숨만 흘러나왔다. 하지만 어쩌랴 힘이 없는 것을.
브릭이 그렇게 한숨만 푹푹 쉬고 있을 때, 비밀장소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브릭을 이곳에 구금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잘 있었나?”
브릭은 사내를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반쯤은 체념했다. 아마 사내가 물건 공급책을 담당하게 되는
순간 자신은 목숨을 잃을 것이다.
현재 브릭의 효용은 딱 하나였다. 물건을 들고 찾아올 사람을 기다리는 것 말이다.
“자, 슬슬 움직여 보자고. 네가 원래 있던 자리에 돌아가야 그 사람이 찾아오지 않겠어?”
브릭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사내는 비열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내는 브릭을 어깨에 짊어지고 하수도의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갔다. 브릭이 원래 담당하던 도시로 가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사람을 짊어지고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내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자신의 미래가 활짝 열릴 거라고 생각하니 온몸에서 기운이 샘솟았다.
반면 브릭은 이동하는 내내 죽을 지경이었다. 누군가의 어깨에 걸쳐진 채 오랫동안 버티려니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그렇게 브릭이 담당하는 도시로 향했다.

슈틀러는 차가운 눈으로 사내를 노려봤다. 약속한 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믿고서 작전에 마나폭탄과 스크롤을
아낌없이 투입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스크롤로 모습을 감추니 작전을 수행하기가 훨씬 편해졌다. 게다가 처음에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마나폭탄의 위력은 정말로 엄청났다.
그 두 가지가 어우러지니 작전 성공률이 올라가는 건 너무나 당연했고, 피해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두 가지 물건을 계속 쓸 수 있다는 가정하에 수많은 작전을 세웠다. 그동안은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작전도 수두룩했다.
만일 이 작전들이 모두 성공한다면 적 조직을 크게 뒤흔들 수 있을 터였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물량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눈앞의 사내를 불러 추궁하는 중이었다.
“아직도 연락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 그게…….”
사내는 솔직히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브릭의 공을 가로채기 위해 그로부터 물건을 강탈했고, 공급책을 맡기
위해 브릭을 감금했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그 사실이 알려지면 그냥 죽은 목숨이었다. 아니, 곱게 죽지도 못할 것이다. 갖은 고초를 다 겪은 다음
천천히 죽어 갈 것이다.
그러니 입을 꾹 다물고 그저 모른다는 말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슈틀러는 눈살을 찌푸린 채 사내를 노려봤다. 분명히 뭔가 속이는 게 있었다. 짐작 가는 바가 몇 가지 있었지만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정작 공급책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말이다.
“네가 연락을 취할 방법은 없나?”
“어, 없습니다.”
사실 모른다. 브릭을 고문해 봤지만 브릭 역시 아는 게 없었다. 제론이 알아서 찾아가기로 했으니 브릭이라고 뭐
다르겠는가.
“무책임하군.”
슈틀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많이 아쉬웠을 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펼칠 작전을 쓰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자연 슈틀러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리고 그 눈빛을 정면에서 마주해야 하는 사내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정말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나?”
“없습니다!”
사내가 즉시 대답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의심을 더 크게 살 수 있었기에 최대한 신경을 썼다.
“정말인가?”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글쎄, 과연 정말일까?”
슈틀러는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크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다가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이곳은 허름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상당한 방비가 되어 있었다. 각종 마법이 감춰져 있었고, 허락받지 않은
자가 이곳까지 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곳에 걸린 마법은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종류였다. 허락받지 않은 자가 오면 길을 빙 둘러 다시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억지로 뚫고 들어오면 슈틀러에게 신호가 간다. 즉, 지금 들어온 사람은 그 마법을 강제로 뚫고 들어온
게 아니라 마법 자체를 해체하면서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그런 실력자가 눈앞에 있으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슈틀러는 슬그머니 허리춤에 있는 검을 쥐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 순간 제론의 몸이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슈틀러 앞에
나타났다.
턱!
제론이 슈틀러가 쥔 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눌렀다. 슈틀러는 검을 뽑으려다가 막히는 바람에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났다.
제론은 그걸 보며 빙긋 웃었다. 쫓아가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싸우러 온 것이
아니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스릉!
슈틀러가 검을 뽑았다. 일단 검을 뽑자 바닥에 착 가라앉은 듯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검을 겨누자, 산
같은 기세가 일어났다.
제론은 살짝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아직 소드 마스터는 아니었다. 정확히 따져
보면 소드 마스터가 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 직전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마지막 한 발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했다. 그 마지막
걸음은 슈틀러보다 훨씬 낮은 성취를 얻은 사람도 충분히 걸을 수 있었다.
“굳이 싸울 필요가 있을까?”
“정체를 밝혀라. 그리고 여기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지 말해라.”
슈틀러의 단호한 말에도 제론은 피식 웃기만 했다.
“일단 정체부터 밝혀야겠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마나폭탄 하나를 꺼냈다.
“이걸 보면 알 수 있겠지?”
슈틀러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사내의 눈도 커졌다.
드디어 물건을 공급해 줄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기다려도 오지 않더니 이렇게 놀라게 할 줄이야. 사내는
기쁜 표정으로 제론에게 다가갔다.
“기다렸습니다. 안 그래도 물건이 떨어져서 필요하던 참이었습니다.”
제론이 슬쩍 고개를 돌려 사내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 어린 차가움에 사내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제론은 다시 고개를 돌려 슈틀러를 쳐다봤다.
“원래는 물건을 공급하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제론의 말에 사내가 깜짝 놀라 외쳤다.
“그,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제론은 사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제론의 시선은 시종일관 슈틀러에게 머물러 있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조건을 붙일 생각이오?”
슈틀러가 정중히 물었다. 어쨌든 칼자루를 쥔 것은 저쪽이었다. 최대한 맞춰 줄 필요가 있었다.
“조건은 처음부터 없다고 했을 텐데?”
“그럼 이유가 무엇이오?”
“레벨리오의 미래가 어두워 보여서.”
슈틀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레벨리오를 폄하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우리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소!”
제론이 씨익 웃었다.
“발끈하기는. 동료를 핍박해 공을 가로채는데도 가만히 보고만 있는데, 미래가 어둡지 않다고? 그 말
진심인가?”
슈틀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던 사내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브릭의 동의를 얻어서…….”
“동의? 고문이 아니라?”
“고, 고문이라니요. 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사내가 슈틀러를 향해 피를 토하듯 말했다. 하지만 슈틀러의 표정은 굳은 채 다시 펴지지 않았다.
사내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감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솔직히 말해. 알고 있었지?”
제론의 물음에 슈틀러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은 하고 있었소.”
“그런데 왜 내버려 뒀지?”
슈틀러는 대답하지 못했다. 공급책을 바꿔도 되는지 확인하고자 했다고 말하기가 민망해졌다. 사실 마나폭탄과
스크롤을 슈틀러가 직접 받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작전 구상이 훨씬 편해질 것이다.
또한 직접 협상을 벌이는 것도 가능해진다. 공급을 늘이거나 혹시 있을지 모르는 다른 아티팩트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솔직히 스크롤의 존재는 슈틀러에게 있어서도 충격적이었다. 만일 스크롤 제작 기술을 얻게 된다면 향후
레벨리오의 미래를 완전히 뒤바꿔 놓을 수도 있었다.
“자, 내가 레벨리오의 미래에 대해 내린 평가가 과했나?”
제론이 다시 물었다. 슈틀러는 대답할 수 없었다. 레벨리오를 지금 이 상황 하나만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
하지만 그 말조차 못 했다.
“부끄럽소.”
슈틀러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사내를 돌아봤다.
사내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전신을 감쌌다.
슈각!
슈틀러가 난데없이 검을 휘둘렀다. 사내의 목이 허공에 떠올랐다. 온갖 생각이 가득한 표정 그대로 잘려 바닥에
뒹굴었다.
제론은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결단력이 뛰어났다. 그동안 지켜본 대로였다.
“향후 물건은 브릭을 통해 공급하지.”
“브릭?”
“저 몰염치한 놈이 감금한 진짜 공로자.”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슈틀러는 그 웃음이 왠지 무섭게 느껴졌다.
“되도록 가까이 놓고 대우해 주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제론이 사라졌다. 슈틀러는 등줄기를 벼락처럼 관통하는 소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이지 않았어.’
마법도 아니었다. 마법을 썼다면 분명히 마나가 조금이라도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징후는 없었다. 그저
사라져 버렸다.
그 말은 슈틀러가 눈으로 좇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겹겹이 둘러싼 마법트랩을
뚫으며 말이다.
마법트랩도 발동하지 않은 걸 보면 차근차근 해체하면서 지나갔다는 뜻이다. 그런 복잡한 일을 하면서도 슈틀러의
안력을 벗어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니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슈틀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수하들에게 다급히
명령을 내렸다.
“브릭! 브릭을 찾아와라!”
슈틀러의 명령에 수하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들도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브릭이 누군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수하들을 보며 슈틀러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부디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군.”
예감이 나쁘지는 않았다. 고문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브릭을 죽였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브릭이
죽었다면 레벨리오의 미래는 여전히 어둠 속에 맴돌 것이다.

☆ ☆ ☆

제론은 브릭이 감금된 곳으로 갔다. 유적을 통해 도시 자체를 순식간에 왕복할 수 있기 때문에 슈틀러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수도 안에 마련된 비밀 장소에 도착했다.
제론은 그동안 수없이 봐 온 장면이었기에 아주 간단히 비밀 장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문을 여니 온몸이 꽁꽁 묶인 브릭이 보였다. 제론은 말없이 다가가 브릭의 몸에 감긴 끈을 향해 손날을 휘둘렀다.
투두두둑!
그저 허공에 손짓을 한 번 했을 뿐인데 끝이 가닥가닥 끊어져 버렸다.
브릭은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리고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먹였다.
“가, 감사합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브릭의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더 일찍 구해 줄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약간 방치했다. 그래야 더 고마워할 테니까.
앞으로 브릭은 제론이 하기에 따라서 레벨리오보다 오히려 제론을 더 따를 수도 있었다. 물론 제론은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저 브릭이 레벨리오의 중추에 앉아 제론과의 연결을 원활히 하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충분했다.
“기다려라. 몸을 치료해 주지.”
제론이 브릭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위이이이잉!
마나링이 가속하며 손바닥 앞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브릭을 삼켜 버리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샤아아아아.
마법진이 흩어지며 브릭을 향해 빛가루를 쏟아 냈다. 브릭은 마나의 가루에 갇혀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곧 경악했다. 고문으로 인해 온몸에 난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제론은 그걸 보며 아공간에서 포션 한 병을 꺼내 브릭에게 내밀었다. 포션과 병행하면 훨씬 빨리 상처가 나을
것이다.
브릭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마셨다. 청량한 향이 혀끝에 맴돌았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시원한
느낌이 식도를 타고 이어져 온몸으로 쫙 퍼져 나갔다.
“가, 감사합니다. 으흐흑.”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지만 제법 움직일 만했다. 워낙 고문을 심하게 받아서 이 정도로 나아진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사실 포션만으로는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었다.
포션이 대단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만능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잘린 팔을 붙이는 건 가능해도, 팔을 칼로
잘게 저미면 포션으로도 완치가 불가능했다.
포션은 회복력을 비정상적으로 높이는 약이지, 모든 걸 원래대로 돌리는 약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제론의 마법이 큰 역할을 했다. 브릭은 포션과 마법의 상승 작용으로 인해 부작용 없이 대부분의 상처가
아물었다.
브릭은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동안 갇혀 있으면서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고문을 받을 때마다 정신이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모든 걸 다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고문은 끝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브릭은 정말로 몰랐는데, 고문을 하는 사내는 그걸 믿지 않았다. 그래서 고문이 더 심해졌고, 상처도 많아졌다.
몸에도 마음에도.
그리고 그 두 가지 상처를 제론이 치유해 주었다. 제론의 존재 하나만으로 브릭은 마음에 큰 안정을 찾았다.
처음에는 냉정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구함을 받고 나니, 완전히 달리 보였다.
“일단 나가지.”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비밀 공간을 나갔다. 브릭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머뭇거리다가 다시 이곳에
갇힐까 봐 두려웠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그 사안에 한해서는 논리적인 접근이 불가능했다.
제론은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었다. 제론이 향하는 곳은 원래 브릭이 머물던 공간이었다.
그곳에 도착한 브릭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안을 둘러봤다.
그런 브릭 앞에 제론이 상자를 턱턱 쌓았다. 상자가 쌓일수록 브릭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 이게 다 뭡니까?”
“알면서 왜 묻지?”
브릭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앞에 놓인 상자의 수는 모두 10 개였다. 게다가 상자 하나하나의 크기도 상당했다.
“이건 젖지 않게 잘 보관해야 하는 것 알고 있겠지?”
제론은 커다란 종이 뭉치를 건넸다. 브릭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 뭉치를 받았다.
1 천 장은 넘는 것 같았다. 너무 무거워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그 정도로 많은 스크롤을 한꺼번에 받았다.
“그걸 어떻게 전달하건 다 네 마음대로다. 알아서 해라.”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브릭은 멍하니 제론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복이 있어서 저런 사람을 만났는지, 그저 고맙고 또 고마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릭은 슈틀러의 호출을 받았다. 드디어 레벨리오의 중추에 접근한 것이다.

Chapter 10 마나폭탄과 스크롤 (2)

제론은 슈틀러와 브릭이 만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겼다. 레벨리오가 알아서 초고대유적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건물을 박살 내 주고 다닐 테니,
제론은 그저 폐허가 된 건물에 들어가 유적만 차지하면 된다.
물론 따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훨씬 빠른 속도로 유적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점점 거점이 늘어나고 수집하는 정보의 양이 많아질수록 제론이 서둘러서 먼저 차지해야 하는 유적을 찾을 확률이
높아진다.
제론은 일단 크란 제국의 테페룸 광산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크란 제국에는 2 개의 테페룸 광산이 있는데, 그곳만
장악하고 나면 나머지 유적은 조금 여유를 가지고 등록할 계획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상황을 좀 더 지켜볼 때였다.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진다. 에어스트 왕국도 그 전쟁에 무관할 수
없었다.
미테 왕국와 레늄 왕국의 전쟁은 분명히 향후 에어스트 왕국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전쟁에 개입해야 하나?”
제론은 그 부분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일단 전쟁에 개입하게 되면 얻는 이득은 많아지겠지만 에어스트 왕국이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
아마 상당히 많은 견제가 들어올 것이다.
제론은 냉정하게 현재 에어스트 왕국이 가진 힘을 계산해 봤다. 일단 정보력은 최고였다. 그 어떤 왕국보다
뛰어났다. 또한 크란 제국보다도 뛰어나다고 자신했다.
기간트 전력도 상당했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물량에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아무리 제론이 테오스를 타고 싸운다
하더라도 혼자서 모든 적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근방의 왕국들은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 아니, 압도할 수 있었다.
크란 제국만 가만히 있으면 된다. 제론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크란 제국은 정말로 대단했다. 아직까지는 그들과
정면으로 붙으면 위험했다.
하지만 크란 제국은 당장은 움직일 수 없었다. 레벨리오의 활동이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레벨리오는 제론이 공급한 마나폭탄과 스크롤을 이용해 엄청난 작전을 동시에 수행했다. 제론은 그것을 잘
관찰하다가 타이밍에 맞춰 브릭을 찾아가 미리 준비한 마나폭탄과 스크롤을 넘겼다.
레벨리오의 마법사들이 모여서 스크롤을 분석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지만 제론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제론이 제작한 스크롤은 분석이 불가능했다.
스크롤은 아주 얇은 2 겹의 종이를 붙여서 만드는데, 그 2 장의 종이 사이에 특별한 마법진이 들어간다. 완벽하게
마나만으로 만든 마법진이 말이다.
스크롤의 겉에 그려진 마법진은 종이 사이에 만들어진 마나의 마법진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스크롤 제작 기법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었다. 분석을 시작하면 내부의 마나가 즉시 날아가
버릴 텐데 무슨 수로 분석을 하겠는가.
어쨌든 제론이 공급한 물건 덕분에 레벨리오의 활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제 크란 제국에서도 크게 신경을
써야 할 정도였다.
그러니 크란 제국이 다른 왕국의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있겠는가. 그들이 신경을 쓸 때쯤이면 이미 에어스트
왕국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현재 세나는 아모르 양산 공장을 완성한 다음, 지휘관형 기간트의 설계에 들어갔다.
제론이 기간트 설계에 관한 지식을 한 보따리 풀었기 때문에 그걸 공부하고 분석해서 새로운 기간트를 설계할
준비를 대부분 마쳤다.
또한 바이스도 제론에게 새로운 마법 지식을 잔뜩 받아서 그걸 연구 중이었다. 아마 조만간 에어스트 왕국 마탑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한 아티팩트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페쿠니아 상단은 지금도 꾸준히 성장 중이었다. 나중에 바이스의 마탑과 연계라도 하면 어마어마한 폭풍이
되어 대륙 상계를 덮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태블릿을 가만히 지켜보던 제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음? 이거 느낌이 좋지 않은데?”
제론은 다급히 태블릿을 조작해 마티로 근방의 모습을 비췄다.
빈민가로 수많은 병력이 들어서고 있었다.
“크란 제국 정규군은 아닌 것 같은데?”
병사의 복장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사병이 분명했다. 그들의 이동 경로를 확인한 제론은 그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정보가 샜군.”
제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으로 짜증 나는 일이었다. 이제 간신히 관계를 구축해 놨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니 말이다.
“아니지.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일단 저들은 살리고 보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슈틀러와 브릭은 살려 두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편했다. 그리고 지금 살려 주면 이들에게
빚을 하나 더 지워 두는 셈이니 언제고 써먹을 일이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계산한 제론은 마티를 사방에 풀어 빈민가의 상황은 물론이고 근방의 상황까지 싹 허공에 띄웠다.
유적 로비에 수십 개의 화면이 둥둥 떠서 각각 제론이 선택한 모습을 비췄다.
“많이도 데려갔군.”
병사의 수는 어림잡아도 수천 명에 달했다. 빈민가에 있는 레벨리오의 조직원이 몇이나 있는지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제론이 파악하기로 빈민가에는 레벨리오의 조직원이 2 백 명쯤 있었다.
그중 일반 병사들이 아무리 많이 덤벼도 상대가 불가능한 강자는 10 명 정도였다.
제론은 빈민가로 접어드는 병사들 중 실력자를 파악해 봤다. 직접 마주하고 마나를 알아보거나 느낌을 확인해야
하는데 마티로만 보려니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실력자는 걸음걸이부터가 다르다. 움직임을 살피면 어느
정도까지는 구분이 가능했다.
“많기도 하군.”
대충 파악해도 최소 100 명 이상이 상당한 실력자였다. 즉, 기사라는 뜻이었다. 그들이라면 빈민가의 레벨리오를
완전히 몰살시킬 수도 있었다.
제론은 빈민가 전체를 확인하며 탈출로를 파악해 봤다. 일단 하수도를 통해 빠져나가는 방법을 떠올렸다. 마티를
하수도에 보냈는데, 하수도에도 병사가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정말 제대로 벼른 모양이군.”
엄청난 조사를 토대로 작전을 세워 공격하는 것이 분명했다. 시간도 별로 없었다. 병사들의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수없는 모의 훈련을 거친 것이 틀림없었다.
“누군지 정말 대단한데?”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론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다.
폴타를 쓰면 된다. 이 도시의 유적에는 폴타가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폴타를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면 돌파였다. 제론이 앞장서서 뚫으면 분명히 돌파가 가능할 것이다. 어느 정도 희생만 각오하면 충분히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돌파하고 나면 적의 추적을 계속 받아야 한다. 아마 도시 밖으로 나가면 기간트의 추적까지 받을
것이다.
그 상태로 도망가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텔레포트를 쓰는 수밖에 없나?”
제론은 9 개의 마나링을 얻는 순간부터 비교적 안정적인 텔레포트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제대로 만들려면 마법진을 그리고 충분한 준비를 거쳐야 하지만 급할 때는 그저 약간의 시약과 마나링의
마나만으로 텔레포트를 구현할 수 있었다.
다만 위험성이 약간 존재했다. 하지만 그 정도 위험은 충분히 감안할 만했다. 거의 희생 없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까.
결정을 내린 제론은 슈틀러와 브릭의 상황을 살폈다. 그제야 보고가 들어갔는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었지만 도망칠 길이 완전히 막힌 상황이라는 사실만 점점 확실해지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드리운 절망감이 점점 짙어졌다.
제론은 슬슬 자신이 등장할 타이밍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럼 가 볼까?”
제론은 폴타를 이용해 인적이 없는 빈민가 한구석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일단 시간을 좀 더 벌 필요가 있었다. 텔레포트를 제대로 구현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위이이이이잉!
마나링이 맹렬히 가속했다. 사방으로 올올이 풀려 나가는 마나의 실이 허공 가득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샤아아아아!
어마어마한 마나의 가루가 폭풍처럼 휘날렸다. 그리고 빈민가 전역에 흩어지며 허공에 녹아들었다.
제론은 달리면서 손가락을 튀겼다.
따악!
그걸 신호로 마법이 발동되었다. 이제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방금 펼친 마법은 대규모 환상을 보여 주는
마법이었다.
아마 교묘하게 생겨난 벽과 뒤틀린 길로 인해 병사들이 제법 헤맬 것이다.
제론은 발걸음을 빨리해 슈틀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서두른 덕분에 제론은 빠르게 슈틀러와 브릭을 만날 수 있었다.
브릭은 제론을 발견하자마자 구원자라도 본 표정으로 감격에 젖었다.
“은인께서 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외친 브릭은 아차하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지, 지금은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곤란합니다! 적이 습격했습니다. 이대로 계시면 위험합니다!”
제론은 브릭의 반응을 무시하고 슈틀러를 쳐다봤다.
“사람을 전부 모아. 도망갈 길을 열어 줄 테니까.”
제론의 말은 가뭄의 단비 같았다. 슈틀러는 서둘러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수하들의 사방으로 흩어져 적과
싸우러 갈 준비를 하고 있는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사람이 모이는 동안 슈틀러는 복잡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우리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이유가 뭐요?”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대답할 말을 찾기가 애매했다. 솔직히 말하면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둬도 상관없었다.
이들이 다 죽는다고 레벨리오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다른 레벨리오의 조직원을 찾아 브릭에게 한 것과 똑같이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딱 꼬집어 이유를 얘기하라면 할 말이 없었지만 말이다.
제론은 묵묵히 시약을 꺼내 바닥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한꺼번에 200 명을 옮겨야 하기에 시약을 이용해 그리는
임시 마법진이 상당히 중요했다.
제론은 집중해서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은 아주 간단했다. 사실 마법진보다는 실제 마법을 펼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마법진은 그저 보조의
역할밖에 없었다. 지금 이 경우에는 말이다.
“다 모았나?”
제론의 물음에 슈틀러가 주위를 둘러봤다. 수하들이 어찌나 열심히 뛰어다녔는지 벌써 사람을 다 모았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시작하지. 멀리 이동하는 게 아니라 도시를 벗어나는 정도니까 이동 후에도 죽지 않으려면
열심히 달려야 할 거야.”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위이이이이잉!
세차게 돌아가는 마나링의 힘찬 마나를 느끼며 제론이 손가락으로 마법진을 가리켰다.
“다들 올라가.”
슈틀러와 브릭을 시작으로 모든 사람이 마법진에 올라섰다. 200 명이나 되는 수가 다 올라가기에는 마법진이 살짝
비좁았다.
하지만 그들은 바짝바짝 붙고 서로를 안아 올리는 방식으로 결국 200 명 모두가 마법진에 올라갈 수 있었다.
제론은 마나링을 조절해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었다. 200 명의 사람들 머리 위에 만들어진 마법진이 차츰차츰
아래로 자라나 입체적인 마법진을 구성했다.
이내 원통 모양의 마법진이 사람들을 온통 감쌌다. 그리고 그대로 부서졌다.
샤아아아아아!
빛가루와 함께 200 명의 레벨리오 조직원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제론은 씨익 웃었다. 성공했다.

도시 밖에 빛가루와 함께 나타난 조직원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들이 도시 밖으로 이동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조금 전 그 마법이 바로
텔레포트였던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그런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지?”
브릭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존재한단 말인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생각해 보면 스크롤도 그렇다. 현시대에 스크롤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건 크란 제국 마탑도
못 하는 일이었다.
한데 그는 그걸 척척 해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서둘러야 해! 출발한다!”
슈틀러가 크게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슈틀러의 말이 옳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할 때였다.
거점이 사라졌으니 새로운 거점으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거점을 들켜선 안 된다.
슈틀러는 서둘러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크게 걱정을 했다.
적이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해 습격했다는 사실은 조직 내 누군가가 배신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과연 제대로 도망갈 수 있을까? 그리고 거점으로 그냥 가도 되는 걸까?’
슈틀러의 머릿속에 수많은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결국 슈틀러는 다른 거점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장소에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슈틀러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자 뒤를 따르는 조직원들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들은 다른 비밀 거점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슈틀러의 능력은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아 중간에 방향을 바꿀 가능성은 없었다.
“혹시 다른 곳으로 가시는 것입니까?”
“그렇다.”
슈틀러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면서 예리하게 날 선 감각을 이용해 조직원들의 동태를 살폈다.
순간적으로 멈칫한 조직원이 있었다. 그가 배신자일 확률이 컸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실이 되어 나타났다.
조직원 중 하나가 갑자기 원통 하나를 꺼내더니 하늘로 불꽃을 쏘아 올렸다.
피유우우우웅!
날카로운 소리까지 났다. 그걸 쏜 조직원이 갑자기 대열을 이탈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였다.
그것을 본 슈틀러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도망치기 위해 속도가 빨라지는 아티팩트까지 챙긴
모양이었다. 아니, 적 조직이 제공했을 것이다.
슈틀러는 검을 꺼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그를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검을 포기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슈틀러는 검에 막대한 마나를 밀어 넣었다. 얼굴이 창백해질 지경이 되었다. 그 순간 검을 던졌다.
쌔애애애애애액!
바람을 찢으며 검이 날아갔다. 도망치던 조직원이 그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검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퍼억!
그 조직원은 경악한 표정 그대로 절명했다.
마나를 머금은 검은 끝없이 날아갔다. 다시 찾을 수 없을 때까지.
“후우, 끝났군.”
이제 끝났다. 정말로. 도시에서 거대한 기간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제는 죽었다 깨나도 도망가는 게
불가능해졌다.
쿵쿵쿵쿵쿵!
슈틀러와 브릭이 암담한 눈으로 점점 다가오는 기간트를 바라봤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브릭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은인이 한 번만 더 도와주시면…….”
브릭의 말을 들은 슈틀러가 피식 웃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대단해도 도시에서 나오는 50 기의 기간트를
상대로 뭘 어쩌겠는가.
그것도 50 기 모두가 켈룸이었다. 출력이 2.3 이나 되는 양산형의 끝에 서 있다고 알려진 기간트였다. 그런
켈룸이 무려 50 기나 달려오는데 무슨 수로 저걸 막는단 말인가.
“은인이 나타나 저걸 막아 주면 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지.”
슈틀러가 그렇게 말했다.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말을 하다 보니 진심이 되었다. 그만큼 지금은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슈틀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 믿어도 되나?”
슈틀러와 브릭이 깜짝 놀라 뒤돌아봤다. 그곳에는 제론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대체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해야 정상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슈틀러와 브릭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두 사람을 지나쳐 걸어갔다.
“간만에 한번 즐겨 볼까?”
그렇게 중얼거린 제론이 다가오는 기간트들을 향해 그대로 내달렸다.
다들 앗 소리도 못 내고 당황해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쩍 벌렸다.
갑자기 제론이 달려가는 그대로 기간트로 변했다.
테오스였다.
새까만 기간트가 50 기나 되는 켈룸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쿵쿵쿵쿵쿵쿵!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돌진이었다. 누가 봐도 기간트 하나가 50 기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왠지 그
광경을 지켜보는 슈틀러와 브릭은, 아니, 200 명의 조직원들은 가슴이 뛰었다.
50 기의 켈룸보다 저 한 기의 새까만 기간트가 훨씬 더 거대해 보였다.
그렇게 1 대 50 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11 권에서 계속>

11 권

Chapter 1 1 VS 50 (1)

드로센 자작은 부관들의 보고를 받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쉽게 처리될 거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설마 이 정도로
완벽하게 당할 줄은 몰랐다.
“다 도망갔다고? 한 놈도 못 잡았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놈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도시에서 벗어나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럼 가서 잡으면 되겠군.”
“켈룸 50 기를 보냈습니다.”
드로센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견 과한 감이 있긴 했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려면 그 정도는 보내는 게
좋았다.
현재 적이 보유한 기간트가 없다는 정보를 얻긴 했지만 그 정보라는 것이 아주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대충
추격대를 보냈다가 혹시 그놈들에게 기간트가 몇 기만 있어도 아주 골치 아파진다.
“그럼 이제 짓이겨진 놈들의 시체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드로센 자작은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조금 마음이 풀렸다. 도시에서 도망가기 전에 처리하지 못한
것이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놓친 게 아니니 상관없었다.
어떻게 되든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 일 아닌가.
“하여튼 최근에 너무 나대긴 했지. 그놈들에게 무너진 공장이 벌써 몇 개야?”
최근 조직에 피해가 제법 많았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결사대 소탕에 나섰다.
사실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분수대나 부수고 다니는 게 전부였다. 분수대는 다시 만들면 그만이고, 그나마 그 일도
제대로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워낙 비밀스러운 조직이라서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정보를 모으는 노력 자체가 낭비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항상 신경은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데 이번에 결사대의 항전이 상당히 격렬해졌다. 또한 굉장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조직의 사기에도 큰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또한 조직의 피해도 엄청났다. 재정적인 피해는
물론이고 인명 손실도 급격히 늘어났다.
결국 조직은 본격적으로 그들의 소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훨씬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또 그 정보를 토대로 치밀한 작전을 세웠다. 아무리 작은 적의 동태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고, 또 기회를 봐서 결사대 안에 첩자를 심었다.
물론 첩자를 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정보를 확보하다 보면 포섭이 가능한 자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식으로 충분한 정보를 모았다. 그걸 토대로 오늘의 일을 계획한 것이다.
“가 보시겠습니까?”
부관의 말에 드로센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물었다.
“굳이 갈 필요가 있나? 어차피 지금쯤이면 다 끝났을 터인데.”
“그래도 그동안 골치 썩이던 놈들의 최후는 지켜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관의 말에 드로센 자작이 눈을 빛냈다.
“뭔가 조치를 취해 놓은 모양이군.”
부관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자작님께서 도착하기 전에는 죽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드로센 자작이 빙긋 웃었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마차를 준비해라.”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부관이 정중히 드로센 자작을 모셨다.
드로센 자작은 살짝 거만한 표정과 태도로 부관을 따라가 마차에 올랐다.
여덟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거침없이 도시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 ☆ ☆

꽈아아아아아앙!
테오스가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켈룸의 가슴을 어깨로 받아 버렸다.
갑자기 앞에서 자세를 낮추며 어깨를 들이밀었기 때문에 켈룸은 손쓸 틈도 없이 가슴을 허용하고 말았다.
꽈과과광!
양측이 달려오던 속도가 워낙 엄청났는지라 어깨에 받힌 충격도 어마어마했다.
켈룸은 뒤이어 따라오던 동료들과 뒤엉켜 나뒹굴었다.
테오스는 어깨로 켈룸을 들이박자마자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빠르게 다가오는 다른 켈룸의 손목을 낚아챘다.
켈룸 2 기가 각각 테오스의 손에 잡혀 빙글 휘돌았다.
꽈과광!
테오스가 근처에서 달리던 다른 기간트를 향해 켈룸을 휘둘렀다. 서로 부딪쳐 기간트들이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한 바퀴 돌린 다음 여전히 달리는 걸 멈추지 않은 켈룸들을 향해 그것을 던져 버렸다.
후우웅!
꽈과과과광!
그걸로 달리던 모든 켈룸을 멈출 수 있었다. 그들이 지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테오스는 혼자였다. 50 기의 켈룸과 싸우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그들이 싸우지 않고 레벨리오의 조직원을
학살하면 곤란했다.
그리고 지금 그걸 막았다.
테오스는 모든 켈룸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켈룸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새 테오스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철컹!
너무나 깔끔하게 켈룸 한 기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 일격에 두 동강이 난 것이다.
테오스는 그걸로 멈추지 않았다. 근처에서 당황한 채 서 있던 다른 켈룸들을 향해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쩡! 쩡! 쩡! 쩡!
대부분 테오스의 검을 못 막았다. 워낙 빨랐고, 빈틈을 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기는 막았는데,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테오스의 힘이 워낙 강해서 형편없이 밀려났다.
그리고 그렇게 균형을 잃고 밀려난 기간트를 제론이 가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테오스가 그 빈틈을 꿰뚫고 검을 찔러 넣었다.
콰직! 콰직!
순식간에 10 여 기의 켈룸이 잘라지고 부서져 바닥에 누웠다.
하지만 아직도 40 기에 가까운 켈룸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테오스와의 싸움에
대비했다.
다들 검을 뽑았고, 테오스와 거리를 벌리려 애쓰며 견제를 시작했다.
상당한 훈련을 거친 자들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전열을 가다듬는다 싶더니 어느새 테오스를 빙 둘러 포위해
버렸다.
하지만 테오스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래로 늘어뜨린 검이 흔들거렸다.
적이 레벨리오의 조직원을 노리고 달려가지 않는 한, 테오스가 당황할 일은 없었다. 테오스는 아래에서 흔들던
검을 마치 채찍처럼 휘둘렀다.
쩌정!
가까이에 있던 켈룸 한 기의 목에 쩌적 금이 갔다.
그 광경에 다들 경악했다. 분명히 거리가 모자랐다. 그런데도 당한 것이다.
모두가 놀라는 사이 테오스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콰우우우!
테오스의 검 주위로 거센 돌개바람이 일어났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뻗어 가는 검의 궤적에 켈룸 3 기가
걸려들었다.
문제는 거리였다. 테오스의 검이 그들을 베려면 적어도 3 미터는 더 길어야만 했다.
콰득! 콰득!
다들 눈을 의심했다. 테오스의 검이 마치 순간적으로 채찍으로 변한 듯했다. 길게 늘어나 낭창낭창 휘어지더니 2
기의 켈룸을 동시에 베어 냈다.
쿠궁!
가슴이 비스듬하게 잘린 켈룸의 상체가 땅에 떨어지며 묵직한 소리를 울렸다.
그 소리는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가슴도 무겁게 만들었다.
다들 굳어 버렸다. 그 상태에서 여유를 가지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테오스뿐이었다.
콰우우우!
콰득! 콰득! 콰득!
테오스는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검을 휘둘렀다. 검의 궤적에 정확히 걸려든 켈룸은 말할 것도 없고, 검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켈룸도 연이어 잘려 나갔다.
사방에 잘린 켈룸의 잔해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 어떤 켈룸도 테오스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했다. 한꺼번에 10 여 대가 동시에 달려들기도 해 봤지만 테오스는
그들의 빈틈을 유유히 뚫고 나가 거침없이 검을 휘둘러 그들의 몸통을 잘라 냈다.
싸움을 지켜보던 브릭이 슈틀러에게 물었다.
“저게…… 저게 가능한 겁니까?”
슈틀러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치…… 소드 마스터가 직접 움직이는 것 같군.”
하지만 그 어떤 소드 마스터라도 기간트를 타고 저런 식으로 움직이지는 못한다.
슈틀러가 말하는 소드 마스터는 당연히 현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레벨리오에도 특별한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
예전에 우연히 그가 싸우는 모습을 봤는데, 그것이 눈앞에서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슬슬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브릭의 물음에 슈틀러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다. 괜히 움직여서 저들의 이목을 끌 필요가 없다.”
현재 켈룸들은 모두 테오스에게 홀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하지만 괜히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이 움직여
그들의 관심을 끌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우회해 달려올지 모른다.
켈룸 2 기만 따로 빠져도 이곳에 있는 200 명의 조직원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적에게는 아직 그 정도 여력이 있었다.
“음? 도시 쪽에서 뭔가가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브릭의 말에 슈틀러가 시선을 돌렸다.
과연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여덟 마리의 말이 끄는 화려한 마차였다. 또한 마차를 호위하듯 열두 마리의 말이
각각 기사를 태운 채 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나오는 것 같군.”
슈틀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 박살을 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
“다들 전투 준비를 해라.”
보아하니 마차 주위를 호위하는 기사들은 전부 라이더였다. 기간트도 보유한 듯했다. 마차 안에도 호위가 있을
것이고, 그 역시 라이더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테오스와 싸우는 켈룸의 수는 급격히 줄어 이제는 고작 10 여 기만 남아 있었다.
저 10 여 기가 모두 박살 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렇게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이 나름대로 전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드로센 자작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 저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마차 앞에 난 구멍을 통해 전면이 훤히 보였는데, 그의 눈에 비친 광경은 힘없이 쓰러지는 켈룸의 모습과 무수히
쌓인 켈룸의 잔해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고고히 서 있는 새까만 기간트가 눈에 확 들어왔다.
“다들 뭘 하고 있느냐! 가서 저놈을 당장 막지 않고!”
드로센 자작은 최악의 선택을 했다. 사실 이 다급한 상황에서 주위가 보일 리 없었다. 만일 그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 준비를 하고 있는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을 발견했다면 그런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드로센 자작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다급히 기간트를 소환했다.
재력이 풍부한 유력 귀족의 호위 기사답게 모두 발굴형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12 기의 아우틈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 거의 동시에 아우틈에 탑승했고, 아우틈이 가동하면서 곧장 전장에 뛰어들었다.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순식간에 싸움에 개입할 수 있었다.
테오스는 남은 10 여 기의 켈룸을 차근차근 잘라 나갔다. 그러다가 12 기의 아우틈이 달려오는 걸 보며 그들의
실력을 가늠해 봤다.
기간트 라이더의 실력을 파악하는 건 사람의 실력을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제론처럼 경험이 많고 감각이
예민하며 실력까지 뛰어난 라이더에게는 그랬다.
적어도 조금 전에 싸운 켈룸보다는 뛰어났다. 하지만 제론의 기준에서 보면 그게 그거였다.
어차피 개미가 아무리 커진다고 해서 고양이로 변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테오스가 근처에 있던 켈룸들을 내버려 두고 득달같이 달려 나갔다.

Chapter 1 1 VS 50 (2)

다가오던 12 기의 아우틈은 그 모습에 처음에는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어이없다는 듯 진형을 넓히며 검을 뽑았다.


상대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혼자서 50 기의 켈룸을 상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설사 아우틈에 탄 자신이라 하더라도 50 기의 켈룸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7 기 정도는 어떻게든
상대가 가능했다.
그 정도 실력을 가진 아우틈이 무려 12 기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함께 싸우는 것이 혼자 싸우는 것보다 훨씬
능숙했다. 그런 경험도 많았고, 훈련도 많이 쌓았다.
그렇기에 자신감이 넘쳤다.
테오스가 갑자기 시야에서 훅 사라져 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콰득! 콰득! 콰득! 콰드드득!
아우틈을 모는 라이더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서 뭔가를 꿰뚫는 소리가 연이어 울리더니 근처가
소란스러워졌다.
꽈과과과광!
그리고 옆으로 동료가 나동그라졌다. 달려가던 아우틈들이 억지로 전진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리고 경악으로 인해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곳에는 쓰러진 5 기의 아우틈을 밟고 서 있는 테오스가 있었다.
“대체 어떻게…….”
갑자기 앞에서 사라진다 싶더니 어느새 뒤로 돌아가 있단 말인가. 시야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진짜 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라이더 훈련은 물론이고 검술도 상당한 수준까지 익힌 그들이 그것도 구분하지 못할 리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정황을 보면 저 새까만 기간트가 순간적으로 그들의 뒤를
점하고 등을 찌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아우틈들은 얼떨떨하고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테오스에게 달려들었다. 또한 전장에서 살짝 벗어났던
켈룸들도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지금이 아니면 테오스를 잡을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물론 주도권은 테오스에게 있었다.

“바, 방금 그게 대체 뭐였습니까?”
브릭이 경악해서 물었다. 하지만 슈틀러라고 그걸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테오스가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사라짐과 동시에 아우틈들의 뒤에 나타났다. 그게 순간 이동이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인가.
“분명히 순간 이동이었습니다. 어떻게 기간트를…….”
브릭이 중얼거리다가 퍼뜩 놀았다. 기간트를 이동시켰다면 그걸 도와준 사람이 있을 것 아닌가.
“저분의 동료가 근처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슈틀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더 말이 안 된다. 누군가 지켜보다가 딱 타이밍에 맞춰 마법을 걸었다는 뜻인데,
그건 더 불가능했다.
더구나 저런 거대한 몸체를 이동시킬 정도의 마법을 썼다면 마나 유동이 엄청났을 것이다. 하지만 슈틀러의
예리한 감각에도 마나의 움직임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슈틀러는 멍하니 테오스와 아우틈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아우틈의 라이더들은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누구보다 슈틀러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 본인보다 더 그들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해 뒀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마차의 주인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적을 파악하는 것이 싸움의 기본이었다. 더구나 레벨리오처럼 지극히 미미한 힘으로 거대한 적을 상대하는
경우에는 적의 실체를 훨씬 명확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슈틀러는 놀랐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냉정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군의 수는 200. 그리고 적은 저 기간트와 마차.’
기간트는 테오스가 막고 있으니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즉, 남은 적은 마차 하나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문제는 마차 안에 과연 호위 기사가 타고 있느냐 하는 것이겠지.’
드로센 자작의 호위 기사쯤 되려면 소드 마스터일 게 분명했다. 그것도 대외적으로 알려진 수준의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 진짜 소드 마스터일 것이다.
“아무래도 쉽지 않겠군.”
기간트라도 보유하고 있다면 뭔가 해 볼 여지가 있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아마 드로센 자작은 전황이 조금만
더 불리해지면 곧장 도망칠 것이다.
일단 살아야 나중에 보복을 하건 부귀영화를 누리건 할 것 아닌가. 드로센 자작은 누구보다 자신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또한 누구보다도 짜릿한 자극을 원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도망가지 않고 지켜보는 것도 아마 그 자극의 일환일 것이다. 도망칠 방법을 만들어 둔 것이 분명했다.
“역시 텔레포트인가?”
그럴 확률이 컸다. 텔레포트 마법이 저장된 스크롤은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하지만 드로센 자작 정도
되면 가지고 있다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아마 도착지는 자신의 저택 가장 깊숙한 곳이거나, 아니면 비밀리에 준비해 둔 안가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슈틀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적들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데, 과연 그게
가당키나 한지 몇 번이고 다시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 벌써 발을 깊이 담가 버렸는데.
슈틀러는 다시 한 번 드로센 자작의 마차를 노려봤다. 미련을 떨칠 수 없었다. 지금 드로센 자작을 죽이거나
사로잡을 수 있다면 향후 레벨리오의 행보가 상당히 편해질 것이다.
“기간트를 준비하지 못한 게 한이로군.”
아쉬운 듯 중얼거렸지만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크란 제국의 도시는 모두 적 조직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을 피해서 조직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당연히 기간트를 몰래 들여오는 일은 불가능했다. 기간트를 담은 아공간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대번에 알아차릴
테니 말이다.
도시 전체에 아공간 감지 마법과 아공간 교란 마법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걸 관리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만일 슈틀러가 기간트를 들여왔다면, 그 순간 이 도시 내의 조직은 일망타진되었을 것이다.
슈틀러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기간트 전투도 서서히 끝으로 치달아 갔다.

꽈과과과광!
마지막 남은 기간트가 조각나며 바닥에 처박혔다. 이제 서 있는 기간트는 오로지 테오스뿐이었다.
드로센 자작은 한없이 굳은 표정으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단 한 기의 기간트가 12 기의 아우틈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조직에서
상급의 능력을 인정받은 라이더가 타고 있는데 말이다.
테오스가 고개를 돌려 드로센 자작이 탄 마차를 쳐다봤다. 드로센 자작은 마치 기간트와 눈이 마주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섬뜩하군.”
“어찌할까요?”
자작 앞에 앉은 부관이 물었다. 마차 벽에 붙은 석판을 부수면 마법이 발동되어 단숨에 저택의 비밀스런 장소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일종의 스크롤이나 다름없었다.
부관은 그 석판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마나를 손에 집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힘만 주면 석판이
부서지고, 그들은 저택으로 이동할 것이다.
“기다려 봐라. 대화라도 나눠 봐야 하지 않겠느냐?”
“위험합니다.”
부관도 전투를 지켜봤다. 저 기간트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쩌면 이 정도 거리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한 방 정도는 버틸 수 있을 테니까.”
드로센 자작은 그렇게 말하며 반지를 쓰다듬었다. 반지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마차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설사 아우틈이라 하더라도 흠집조차 내지 못할 테니 이제 걱정할 필요 없다.”
방금 전 건 강화 마법은 상당히 강력했다. 일정 이상의 물리력을 가하지 않으면 깨지지도 않는다. 또한 엄청나게
강한 충격을 받더라도 그 충격을 흡수, 분산시키기 때문에 마법은 깨지더라도 마차 자체는 보호가 된다.
게다가 마차도 보통 재질이 아니었다. 그러니 한 방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버티는 동안 부관이
석판을 깨 텔레포트로 이동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쿵! 쿵! 쿵!
테오스가 천천히 마차로 다가갔다.
드로센 자작은 그것을 보면서도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처음 보는 디자인이었다.
“가만있자…… 발굴형 기간트는 아닌 것이 분명한데…….”
발굴형 기간트는 히엠스, 아우틈, 에스타스, 베르 이렇게 네 종류뿐이었다.
사실 아우틈이라고 해서 다 같은 아우틈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도 상당한 성능 차이가 존재했다. 또한 많은
부분이 달랐다.
고대에는 기간트를 라이더의 취향이나 습관에 맞춰서 각각 따로 디자인할 수 있었다. 안에 들어가는 마법까지 다
달랐다.
그러니 저렇게 색다른 모양의 기간트라면 발굴형은 절대 아닐 것이다. 아마 어디에선가 새로 만든 기간트가
분명했다.
“성능이 상당한 것 같았는데, 저걸 새로 만들었다고? 그게 가능한가?”
드로센 자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현재 가장 뛰어난 기간트 제작 기술을 보유한
곳이 바로 그가 속한 조직, 엠페리움이었다.
한데 얼핏 보기에도 저 기간트는 그들이 만든 기간트보다 훨씬 뛰어나 보였다. 아니, 웬만한 발굴형 기간트보다
더 좋은 듯했다.
아무리 라이더의 실력이 다르다 하더라도 저렇게 아우틈 12 기를 농락할 수는 없었다. 기간트 자체의 성능이
다르지 않다면 말이다.
“증폭 마법을 발동시켜라.”
“알겠습니다.”
부관이 마차 안의 마법진을 조작해 증폭 마법을 걸었다. 마나의 바람이 마차 안을 한바탕 휘젓고 사라졌다.
“거기 검은 기간트, 들리나?”
드로센 자작의 말이 증폭 마법을 거쳐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그와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었다. 잡고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저자가 아직도 도망가지 않는 걸 보면 뭔가 숨겨 둔 수가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뻔했다.
제론은 드로센 자작이 어떤 수를 쓸 건지 몇 가지를 예상한 다음 각각에 대한 대비책을 싹 세웠다.
테오스가 성큼성큼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쿵! 쿵! 쿵!
드로센 자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가 자신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뭔가를 캐내려면
대화를 이어 나갈 거라 여겼다.
“설마 날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드로센 자작의 말에 테오스가 걸음을 멈췄다. 드로센 자작은 그제야 자신의 말이 통했다고 여겨 빙긋 웃었다.
일단 주도권을 잡고 의도대로 끌고 들어오면 나머지는 아주 간단했다. 상대의 모든 것을 완전히 발라 먹을 자신이
있었다.
그 순간 테오스가 몸을 살짝 웅크렸다. 마치 점프하기 전의 자세 같았다.
그걸 본 부관이 깜짝 놀라 외쳤다.
“한 번에 달려들 모양입니다!”
그냥 단순한 주먹질이나 발길질이라면 방어 마법이 막아 주겠지만 저런 식으로 점프해서 때리면 자칫 방어막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드로센 자작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아무래도 대화를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돌아가야겠어.”
드로센 자작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관이 석판을 깨뜨렸다.
콰드득!
석판이 깨지며 그 안에 잠들어 있던 마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마나는 마차 전체를 휘감았다. 그리고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화아악!
빛이 어찌나 강했는지 마차 안에 탄 사람들도 눈을 질끈 감았을 정도였다.
드로센 자작은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지독하군.”
하지만 이 정도 빛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목숨을 구하지 않았는가.
빛이 사라지고 시야가 돌아오자 드로센 자작은 피식 웃으며 마차에서 나가려 했다.
“기다리십시오!”
드로센 자작은 부관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부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왜 그러는가?”
“실패했습니다.”

Chapter 1 1 VS 50 (2)

“응? 실패? 뭘 말인가?”


“텔레포트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부관의 말에 드로센 자작이 깜짝 놀라 마차 앞쪽을 쳐다봤다. 밖을 보기 위해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여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새까만 기간트의 모습이 보였다.
“마, 말도 안 돼!”
드로센 자작의 외침이 신호라도 되는 듯, 그 순간 테오스가 땅을 박찼다.
꽈앙!
테오스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그리고 아래로 떨어지면서 주먹을 내리쳤다.
쩌저저정! 콰득!
마차에 걸린 방어 마법이 힘없이 깨졌다. 그리고 마차 천장이 움푹 아래로 들어갔다.
“으아악!”
드로센 자작이 비명을 질렀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정말 크게 놀랐다. 천장이 납작 내려앉으니 마치 자신을 덮치는
듯했다.
이대로 깔려 죽는다고 생각하니 절로 비명이 튀어나왔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부관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무력이 없는 간부는 짜증이 난다. 저렇게 떨고만 있으면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할뿐더러 대처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자작님. 아직은 괜찮습니다.”
부관의 차분한 말에 그제야 드로센 자작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두려운 눈으로 부관을 바라봤다.
“이, 이제 어쩌면 좋은가?”
“걱정 마십시오. 제가 나가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겠습니다. 자작님께서는 그사이에 달아나십시오. 말이 없어도
도시까지는 마차가 달릴 수 있지 않습니까.”
드로센 자작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차는 아주 특수하게 제작되었다. 일회용이긴 하지만 말 없이 혼자
움직이는 것도 가능했다.
단, 그걸 쓰면 마차는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부관은 의연한 모습으로 마차에서 나갔다. 그리고 기간트를 소환했다. 그는 부관이자 드르센 자작의 호위
기사였다.
히엠스가 나타났다. 부관은 즉시 히엠스에 탑승했고, 그사이 말과 연결된 끈을 모두 자른 마차가 혼자서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테오스는 히엠스가 나타나는 순간 마차가 달리는 걸 보고는 그쪽으로 이동했다.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부관이
히엠스에 탑승하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꽈앙!
순식간에 이동해 마차 앞을 가로막은 테오스의 다리에 마차가 강하게 충돌했다.
그런 테오스를 향해 히엠스가 달려들었다. 제론은 그 순간 그가 소드 마스터임을 확신했다. 움직임이 보통이
아니었다.
히엠스의 검이 순식간에 테오스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테오스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그것을 막아 냈다. 검의 면을 손바닥으로 쳐 낸 것이다.
꽈앙!
히엠스의 균형이 흔들렸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답게 균형이 무너진 쪽으로 회전하며 순식간에 자세를 잡았다.
그러면서 다가오는 테오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물론 고작 그 정도로 테오스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테오스는 목으로 날아오는 검을 아래에서 쳐올렸다.
쩌엉!
검이 테오스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테오스는 그렇게 드러난 히엠스의 겨드랑이에 검을 찔러 넣었다.
콰득!
검격이 어찌나 빠르고 정확했는지 히엠스는 아예 손을 쓸 수도 없었다. 테오스의 검이 겨드랑이를 깊이
파고들었다.
그 순간, 멈췄던 마차가 다시 달렸다.
테오스는 다급히 마차를 쫓아가려 했다. 한데 히엠스가 겨드랑이에 낀 검을 꽉 잡아 버렸다.
순간 테오스의 검에서 눈부신 광채가 솟아났다.
슈가각!
히엠스의 어깨가 통째로 잘려 나갔다.
눈부신 광채가 히엠스의 허리로 날아갔다. 히엠스가 다급히 검을 들어 그것을 막으려 했다.
슈각!
아주 깔끔하게 검과 허리가 동강났다.
테오스는 그렇게 히엠스를 무력화시킨 뒤, 그대로 몸을 날려 마차를 막았다.
꽈득!
마차 윗부분에 테오스가 손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마차를 들어 올렸다.
마차 바퀴가 맹렬하게 돌아갔지만 허공에 들린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돌아가던 바퀴가 서서히 속도를 잃어 갔다. 그리고 이내 멈췄다. 마차의 힘이 다한 것이다.
테오스는 마차를 든 채로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쿵! 쿵! 쿵!
쿠웅!
레벨리오의 조직원들 앞에 마차를 내려놓은 테오스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기간트도, 라이더도 없었다.
다들 덩그러니 놓인 마차만 멍하니 바라봤다.

Chapter 2 엠페리움 (1)

드로센 자작은 두려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설마 이렇게 사로잡힐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동안은 엠페리움에 대항하는 결사대를 개미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여겼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그는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의자에 칭칭 감겨 있었다. 아예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움직일 수 있는 건
목 윗부분뿐이었다.
“애쓸 필요 없다. 설사 네가 소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드로센 자작이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어디서
나오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드로센 자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럴 때일수록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혹시 고문이라도 할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아마 채 고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무서워서 아는 모든 걸 얘기할 것이다.
“일단 손가락부터 하나 자르고 시작하는 게 좋겠군.”
“말하겠다! 뭐든 다 말하겠다!”
드로센 자작이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큭큭큭큭. 좋아, 잘 생각했어. 거짓을 말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야. 우리도 나름대로 아는 것이 있고, 잘
섞어서 질문할 테니까.”
“자, 그럼 먼저 조직의 이름부터 얘기해 보는 게 좋겠지?”
레벨리오는 아직 상대하는 조직의 명칭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부 조직원들은 자신이 어떤 조직에
속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대부분은 그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요인을 사로잡은 것은
레벨리오에서도 처음인지라 물어볼 것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에, 엠페리움.”
드로센 자작이 두려움에 찬 눈으로 그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작이 입에서 피를 토했다.
“쿠웨엑!”
드로센 자작의 입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다. 어둠 속에 숨어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당황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피를 쏟아 내는 드로센 자작의 몸이 점점 미라처럼 말라갔다. 몸 안에 있던 모든 피가 입을 통해 쏟아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아니, 모든 체액이 싹 빠져나가는 듯했다.
결국 드로센 자작은 손쓸 틈도 없이 죽어 버렸다. 온몸의 체액을 바닥에 쏟은 채로 말이다.
“지독하군.”
어둠 속에서 몇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드로센 자작의 끔찍한 몰골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알아낸 건 적 조직의 이름이 엠페리움이라는 것뿐이군.”
“보고는 올렸나?”
“이곳의 심문을 처음부터 지켜보셨을 테니 따로 보고할 필요가 없네.”
“그렇군.”
사내들은 말라비틀어진 드로센 자작의 시체를 잠시 살펴봤다.
“별로 알아낼 만한 점은 없는 것 같군. 일단 시체부터 치워야겠는데?”
“그냥 갖다 버리면 곤란하니 태우는 게 낫겠군.”
그렇게 시체의 처리를 의논하고 있을 때, 사내 중 하나가 크게 놀라며 드로센 자작의 시체를 가리켰다.
“저걸 보게!”
모두의 시선이 시체로 향했다.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아니,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끈적끈적하면서도 불길한 마나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피해!”
사내 중 하나가 위험을 직감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피하기엔 이미 늦어 버렸다.
번쩍!
강렬한 핏빛 섬광이 시체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 빛은 방 안 모든 것을 휘감았다.
그리고 폭발했다.
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이었다. 건물 자체를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정도로 큰 폭발이었다. 아니, 주변 건물까지 다
휘감아 버릴 정도였다.
폭발이 주로 위로 솟구치는 방향으로 일어나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근방을 완전히 초토화시켰을 것이다.

크란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붉은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다행스럽게도 폭발이


옆으로 일어나지 않고 위로만 치솟았기에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저기로군. 출동시켜.”
테라스에 앉아 폭발을 지켜보던 노인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주변이 살짝 부산스러워졌다.
그리고 잠시 후, 폭발 지점을 향해 수천의 병사와 기사가 움직였다. 한동안 크란 제국 수도는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폭발로 인해 솟구친 불기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위치를 알려 주는 이정표 역할이라도
하려는 듯 사라지지 않고 사방에 빛과 열기를 뿌려 댔다.
노인의 눈에 수천의 병사들이 몰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드로센 자작이 죽은 건 좀 아쉽지만, 그 하나의 희생으로 저 정도 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장사지.”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와 기사들이 폭발이 일어난 곳 주변을 완전히 장악했다.
“대담한 놈들이군. 설마 수도에 본거지를 만들었을 줄이야.”
수도는 엠페리움이 완전히 장악하다시피 한 곳이었다. 한데 거기에 결사대의 본거지가 있다니 완전히 허를 찔린
셈 아닌가.
엠페리움은 대부분의 도시를 장악했다. 각 도시에 특별한 힘이 잠들어 있고, 그 힘 자체가 엠페리움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그 힘을 자유롭게 이용하려면 도시를 장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도시를 장악했다는 것이 그 도시를 다스린다는 뜻은 아니었다. 도시의 정보와 돈, 그리고 무력을 장악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런 도시 중에서도 수도는 특별했다.
수도에는 정말로 거대한 에너지가 잠들어 있었다. 또한 그 에너지 위에 세워진 고대유적의 규모도 엄청났다.
그것은 고대의 성이 분명했다. 모양도 시설도 그러했으니 거의 확실했다.
그 유적을 살짝 개조해서 왕궁으로 쓰고 있었다. 왕궁은 정확히 수도의 중심에 있었다.
엠페리움은 수도에서 상당히 많은 제작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분수대도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총 4
개나 만들어 뒀다.
수도의 에너지원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그렇게 많은 제작소와 분수대를 세웠는데도 에너지가 남아 일부를
엠페리움의 간부들이 소유한 저택에 공급하고 있었다.
그 저택을 짓고 위치를 결정할 때도 상당히 다양한 점을 고려했다. 그렇게 해서 저택의 위치와 공급되는 에너지의
흐름을 이용해 거대한 마법진까지 만들었다.
그렇게 했기에 수도에 결사대의 본거지가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결사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야겠어. 분명히 뒤에 제법 먹음직스러운 놈이 도사리고 있을 테니까.”
노인의 눈빛이 잠시 살기로 번득였다. 하지만 그 살기는 이내 씻은 듯이 사라지고 표정 가득 인자함이 깃들었다.
“허허허. 자, 그럼 난 앙칼진 고양이나 달래 주러 가 볼까.”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어린 황제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아니, 그 황제 뒤에 서 있는
황후를 농락할 시간이 되었다.

Chapter 2 엠페리움 (2)

“잘한 건지 모르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슈틀러와 브릭을 구해 주고 드로센 자작을 넘겨준 것은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간신히 만든 레벨리오와의 끈을 그렇게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 상황에서 테오스를 등장시킨 일은 과연 잘한 일인지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 괜한 걱정이긴 했다. 테오스를 본 사람은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이 전부였다. 그들은 아무래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니 테오스의 존재에 대해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까지 싹 지울 수는 없었다. 어쨌든 테오스를 등장시켰고,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었으니까.
“뭐, 적당히 힘을 조절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려나?”
테오스의 힘은 그보다 훨씬 대단했다. 솔직히 말하면 테오스가 아니라 이스히스나 타히티만 꺼내 놨어도 그들을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제론이 마음 단단히 먹고 움직였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겠는가.
하지만 제론은 뒤에서 지켜보는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을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힘을 상당 부분 줄였다.
지금이야 어떨지 몰라도 나중에는 적으로 돌아설지도 모를 관계 아닌가.
어쨌든 레벨리오에 대한 일은 그쯤에서 마무리하는 걸로 결정했다. 앞으로는 가끔 만나서 아티팩트만 전해 주면
된다.
“그럼 저기 보이는 저 도시만 접수하고 슬슬 에어스트로 돌아가야겠군.”
제론은 멀리 보이는 도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접수한 도시에 비해 상당히 규모가 큰 곳이었다.
수도와 비교하면 절반에도 크게 못 미치지만 그래도 처음 접수한 국경 도시에 비하면 몇 배나 큰 곳이었다.
일단 저 도시의 유적을 접수한 다음, 에어스트 왕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아직 전쟁이 터진 건 아니었지만
그에 준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이번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이번 기회에 예전 레늄 왕국의 영토를 몽땅 집어삼킬 수도 있었다.
더불어 레늄 왕국과 항상 영토 분쟁을 해 온 벨룸 왕국이나, 그들과 전쟁을 시작하려 하는 체스터 공국까지
아우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무려 3 개 왕국이 병합되는 셈이었다. 아마 가신들이 칭제를 하라고 난리 칠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렇게 크게 모두를 아우르고, 그걸 안정시킬 수 있다면 주변이 훨씬 안전해질 거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때부터는 초고대 문명의 기술과 지식을 조금씩 전파할 생각이었다. 물론 급격해선 안 된다. 아주 조금씩 맛만
보여 주는 식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그래야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차근차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또한 그렇게 천천히 발전해야 통제와 조절이 가능하다. 그게 불가능해서 제론의 손을 떠나 버리면 그건 위협이
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물론 그따위 위협쯤이야 제론에게 있어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론에게는 그 정도 힘이 있었다.
하다못해 제론이 테페룸 광산과 연결된 유적만 싹 장악해도 전 대륙의 테페룸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제론은 대륙을 뒤흔드는 게 가능했다.
그러니 제론이 고작 어설픈 위협에 겁을 먹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은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이야 그
어떤 상황이 오건 겁날 게 없지만, 주변을 보호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힘을 키워야만 했다. 그리고 그 힘을 주변에 조금씩 흘려야만 했다.
바이스에게 초고대의 마법을 일부 가르치고, 세나에게 초고대의 기술을 가르친 이유도 다 그런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부디 저 도시에는 좀 더 쓸 만한 게 있었으면 좋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빠르게 도시로 다가갔다. 유적에 별다른 특징이 없으면 최소한 도시에서 뽑을 수 있는
정보를 통해 더 큰 걸 얻을 수 있어도 좋았다.
그렇게 나름대로 기대를 안고 도시에 도착한 제론은 경비의 눈을 피해 성벽을 훌쩍 타고 넘어갔다.
이젠 경험이 쌓이고, 실력도 늘어서 이렇게 훤한 대낮에도 도시에 몰래 숨어 들어가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제론의 감각은 크란 제국에 오기 전보다 최소 두 배는 성장했고, 마법 실력도 엄청나게 늘었다. 특히 마나를
정교하게 컨트롤하는 능력은 이미 9 개의 마나링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에 이르렀다.
달리면서 주변 마나를 장악해 성벽에 깔린 마법진을 강제로 열고, 그러면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정도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성벽을 넘어간 제론은 일단 도시 중심부를 향해 달렸다. 유적이 어디 있는지만 확인하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거의 기계적으로 해치울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이제 슬슬 엠페리움에서도 대응책을 마련할 때가 되었다. 어떤 대응책이건 제론에게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레벨리오의 습격에 대한 대비책만 세웠을 테니까.
일단 이 정도 규모의 도시에는 분수대가 있을 리 없었다. 도시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안에 있는 유적의 규모도
크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모습을 감춘 채로 빠르게 도시 중심부로 향했다. 그렇게 한창 달리던 제론은 앞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에 달리는 걸 멈추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소드 마스터?’
이 느낌은 일전에 만났던 소드 마스터와 상당히 흡사했다. 같은 방식으로 소드 마스터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즉, 마나호흡법이나 검술이 똑같다는 의미였다.
‘저들에게 훌륭한 마나호흡법과 검술이 있다는 뜻이로군.’
아무리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고 기척을 지웠다곤 하지만 소드 마스터에겐 무용지물이었다. 소드 마스터는 마나 그
자체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소드 마스터의 감각을 속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론은 골목을 달리다가 벽을 밟고 위로 솟아올랐다.
탁탁탁!
제론의 몸이 순식간에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차라리 위에서 다니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옥상으로 이동하니 사야가 확 열렸다. 골목을 돌아다니는 병사와 기사들이 한눈에 보였다.
제론은 일단 거대한 기운을 가진 사람, 소드 마스터부터 찾았다.
‘저기 있군.’
과연 소드 마스터였다. 다른 병사나 기사는 전혀 없이 혼자서 움직이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순찰을 도는 게
아니라 어딘가로 단순히 이동하는 듯했다.
‘하긴, 소드 마스터가 순찰을 돈다는 게 웃기는 일이긴 하지.’
제론은 소드 마스터를 유심히 살폈다. 현재 이 도시에서 유적을 찾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저 소드
마스터였다.
소드 마스터는 유흥가가 밀집한 거리로 가더니 그중 가장 화려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일단 당분간은 걱정할 거 없겠군.”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지만 술집에서 여자와 난잡하게 논다면 감각이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라도 같은 소드 마스터가 아니다. 소드 마스터가 만나는 벽을 몇 차례 허문 상태였다. 그
경지는 보통 소드 마스터와는 하늘과 땅 차이었다.
익스퍼트가 아무리 높은 경지에 이르러도 소드 마스터와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처럼 말이다.
제론은 빠르게 도시 중심부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그야말로 거대한 탑이 하나 서 있었다.
높이는 그리 높지 않은데, 넓이가 어마어마했다. 또한 탑 전체에 특이한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는데, 때때로
은빛 물결이 치듯 번득였다.
제론은 단번에 은빛 문양이 특별한 종류의 마법진임을 알아차렸다. 문양 가득히 느껴지는 마나가 그것을 증명했다.
‘전부 방어에 관계된 마법이로군.’
탑 표면에 새겨진 마법은 방어나 탐색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마법이 워낙 방대하고 치밀해서 몰래 숨어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마법진이 내부 정보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내부 사정을 알아보려면 마나의 흐름을 감각으로 잡아내야
하는데, 그 자체가 원천봉쇄되어 있었다.
정령도 막아 놨을 것이 분명했지만 혹시나 해서 제론은 일단 스키아를 보냈다.
스키아는 탑의 벽을 아예 뚫지 못하고 맴돌기만 했다. 문이 열린 틈을 타고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엠페리움이라…….”
참으로 의미심장한 이름이었다. 그들의 목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 이름을 알아냄과 동시에 크란 제국 수도에 있던 레벨리오 본부가 날아갔다고 하니, 이들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멀리서 마법을 통해 감시한 덕분에 이름이라도 알게 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저 본거지
하나만 날리고 말았을 것이다.
어쨌든 적의 실체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막연히 존재할 거라는 확신만 가졌다. 하지만
이젠 이름까지 얻었다.
엠페리움은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조직이었다. 바인이 그들의 정보를 얻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고 있지만
아직까지 딱히 특별한 소득을 얻지는 못했다.
대신 엠페리움에 대항하는 레벨리오의 정보는 꾸준히 얻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레벨리오는 엠페리움에 비해 보안이 약했다. 그렇다고 해서 곳곳에 정보가 흘러 다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엠페리움의 정보 차단 능력이 레벨리오에 비해 훨씬 대단했다. 그들이 가진 기술이나 힘은 현재 존재하는 그
어떤 조직이나 왕국보다 뛰어났다.
반면 레벨리오는 엠페리움에 비해서는 많이 뒤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레벨리오 역시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대단한 엠페리움을 상대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능력을 입증한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엠페리움이
아직까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당장 엠페리움이 작정하고 나서니 본거지가 박살 나지 않았던가. 그 일 하나만으로 두 조직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일단 여기까지 한 다음 레벨리오 지원 방안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군.”
제론은 레벨리오가 좀 더 제대로 엠페리움을 상대하도록 만들 계획이었다. 그래야 큰 그림이 그려진다.
레벨리오는 아직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지원하느냐에 따라 엠페리움을 견제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일단은 저 유적부터 처리하자.”
제론은 눈앞의 탑에 집중했다. 안으로 들어갈 틈이 없으니 강제로 틈을 만들어야만 했다. 또한 저 탑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도록 박살을 내면 더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 벌인 일이 레벨리오의 소행처럼 포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제론은 당분간 정체를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제론이 정체를 드러내는 건 이번 전쟁을 완벽하게 마무리한 다음의 일이었다.
그때부터는 제대로 크란 제국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엠페리움을 무너뜨릴 공작을 펼치고 말이다.
제론은 자신만만했다.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확신에 가득 찬 제론의 시선이 마법진으로
도배된 탑을 샅샅이 훑었다.

꽈과과과과광!
엄청난 폭발이 탑 곳곳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탑의 내부는 물론이고 주변도 난리가 났다. 워낙 방어가 철저해서
탑이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당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탑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결사대 놈들이 나타났다!”
“모습을 감췄어! 찾아내!”
레벨리오의 습격은 항상 모습을 감추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에 그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엠페리움의 병사와
기사들은 일단 모습을 감춘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을 찾아내려 애썼다.
방법은 많았다.
엠페리움의 병사들이 새하얀 가루를 들고 다니면서 사방에 뿌렸다. 그 가루는 사람의 몸에 닿으면 희미한 빛을
내는데, 아무리 모습을 마법으로 감췄다 하더라도 그렇게 빛이 나면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만일 평소대로 레벨리오의 습격이었다면 분명히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레벨리오는 제대로 습격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당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레벨리오의 습격이 아니라 제론의 습격이었다. 당연히 그런 방법은 아예 효과가 없었다.
제론은 벌써 탑 꼭대기에 서서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탑의 옥상은 평평했다. 그리고 다른 벽과 마찬가지로 마법진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제론은 탑의 벽에 촘촘히 붙여서 동시에 터트린 마나폭탄의 힘을 이용해 시간을 벌었다. 이렇게 탑 꼭대기에서
마법진을 분석할 시간을 말이다.
솔직히 시간이 많지 않았다. 탑 내부에도 분명히 소드 마스터가 하나 있을 것이다. 또한 조만간 술집에서
질펀하게 즐기던 소드 마스터도 달려올 것이다.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하지 못할 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세함으로 인해 탑을 부수는 일에는 큰 차질이
빚어지게 된다.
소드 마스터 특유의 감각을 이용해 제론의 위치를 특정하면 다른 병사나 기사들도 얼마든지 제론을 공격할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병사나 기사의 실력이야 제론이 신경 쓸 정도로 대단치 않지만, 그들이 가진 아티팩트는 조심하는 게 좋았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기능의 아티팩트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테오스를 꺼내면 모를까, 지금 상태로 혼자서 그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었다.

Chapter 2 엠페리움 (3)

제론은 재빨리 옥상의 마법진을 분석했다. 제론의 마법 수준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빠르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제론이 원한 것은 마법진의 완벽한 분석이 아니었다. 그저 마법의 흐름만 파악하면 충분했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마법진은 방어에 관한 것이다. 그 맥만 짚으면 충분했다. 그렇게 제론은 마법진의 약점을
찾았다.
수많은 마법이 겹쳐 있었기 때문에 마법진과 마법진 사이에 빈틈이 있었다. 제론이 원한 것은 바로 그 빈틈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옥상에는 총 4 개의 빈틈이 있었다. 제론은 즉시 손바닥의 아공간에서 검을 뽑았다.
촤아아악!
은빛 검신이 눈부신 자태를 드러냈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빈틈에 검을 찔러 넣었다.
콰득!
마법진의 빈틈을 파고 들어간 제론의 검이 옥상을 마치 두부 으깨듯 부숴 버렸다.
마법진 일부가 뭉개지며 주변 마법이 작동을 멈췄다.
제론은 나머지 빈틈에도 똑같이 검을 찔러 넣었다.
콰득! 콰득! 콰득!
옥상의 마법진 중 절반 이상이 기능을 멈췄다. 그때부터 제론은 옥상을 마구 부수기 시작했다.
꽈과과과과광!
옥상 곳곳이 부서져 나갔다. 일단 방어 마법이 깨진 이상, 그저 검을 휘두르기만 해도 돌가루가 풀풀 날리며
바닥이 뭉개졌다.
그렇게 뭉개지는 부분이 넓어질수록 마법진의 기능도 점차 죽어 나갔다.
이 탑의 마법진은 모두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큰 손상을 입으면 다른 부분의
마법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눈을 빛내며 손가락을 튀겼다.
따악!
그 순간 탑의 벽에 설치해 뒀던 마나폭탄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꽈과과과과과과광!
처음 터트린 마나폭탄보다 훨씬 파괴력이 강력한 폭탄이었다. 일부러 이중으로 마나폭탄을 설치했고, 두 번째는
제론이 마법을 통해 발동시키지 않으면 폭발하지 않도록 장치해 두었다.
그 폭발로 인해 탑에 새겨진 마법진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
일단 마법진이 정지된 이상, 제론은 거칠 것이 없었다. 먼저 검을 크게 휘둘러 옥상에 구멍을 냈다.
꽈드드득!
옥상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을 통해 탑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놀랍게도 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따로 층이 있거나 방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통짜로 된 하나의 공간만 있었다. 탑의 규모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간이었다. 심지어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탑 내부는 제론이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대체 여기서 뭘 한 거지?’
제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여기서 뭘 했단 말인가. 곳곳에 늘어져 있는 시체를 보면 좋은 일로 만든
장소는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저런 식으로 시체가 생길 만한 연구는 많지 않았다.
시체를 살펴보니 노인과 아이뿐이었다. 노동력이 낮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내부에도 온통 마법진으로 가득했다. 바닥이고 벽이고 가릴 것 없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상당한 수준이었기에 분석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제론은 일단 태블릿의 기능을 이용해 마법진을 싹
복사했다.
그리고 보는 눈이 없는 순간을 이용해 유적으로 들어갔다.

유적에서 제론은 한동안 탑에 새겨진 마법진을 분석했다. 태블릿과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았기에 예상보다 금방
분석이 끝났다.
“에너지를 강제로 주입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군.”
노인과 아이의 시체만 가득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강제 에너지 주입을 이겨 내지 못한 것이다.
강제로 몸에 스며드는 에너지를 버티려면 상당한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했다. 그러니 그 두 가지가 모두 모자란
아이와 노인은 죽는 게 당연했다.
개중에도 성공한 사람이 있겠지만, 그들은 따로 이송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기본이었다. 여기서 토대가 만들어진 사람들을 분수대 쪽으로 보내 소드 마스터를 양성하는 시스템이었다.
“가만, 로스는 힘도 분수대에서 받았다고 했는데…….”
분수대의 역할은 아주 명확했다. 어떤 기능을 담고 있는지, 또 어떻게 힘을 처리하는지 낱낱이 파헤친 상태였다.
그렇기에 제론은 지금 당장 분수대를 하나 만들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분수대가
가지는 한계와 부작용에 대해서도 비교적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제론은 분수대와 이곳 탑을 가만히 비교해 봤다. 분수대에 비해 탑의 효율이 떨어졌다. 하지만 더 안전했다.
“방식을 바꿨군.”
그리고 바뀐 방식을 제대로 활용하기도 전에 제론이 탑을 만신창이로 만든 것이다.
이미 제론이 유적에서 밖으로 나가는 에너지의 흐름을 바꿨으니 더 이상 탑을 이용해 뭔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엠페리움 입장에서는 악재가 겹친 셈이었다.
제론은 유적에서 마티를 통해 엠페리움의 탑을 자세히 살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며 탑을 빠르게 복구해 나가고
있었다.
제론은 그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평범한 병사와 기사, 그리고 마법사의 복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엠페리움의
조직원일 것이다.
“말단 조직원이겠지?”
수많은 말단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에게 각각 하나씩 마티가 따라붙었다.
지금까지 거쳐 온 모든 도시에서 같은 일을 반복했다. 조직원으로 의심되는 사람에게 마티를 붙이고, 그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조직원이 아닌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아주 명확히 밝혀지지 않으면 마티를 회수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엠페리움에 대한 정보망을 넓혀 갔다. 바인이 그동안 찾아낸 엠페리움의 독특하고 은밀한 정보 전달
방식만 해도 7 가지가 넘었다.
하지만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방법이 무수히 많았다. 그걸 다 파악하기 전에는 엠페리움의 실체를 완전히 그려 낼
수 없을 것이다.
제론은 내친김에 유적에서 오랫동안 휴식을 취했다. 어차피 지금은 위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탑을 복구하는
작업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워낙 많은 병사와 기사가 있었기에 무턱대고 나갔다가는 대번에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제론은 유적에서 쉬는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바인과 연락을 하며 에어스트 왕국 주변 상황을 끊임없이 확인했다.
벨룸 왕국과 체스터 공국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약간의
국지전이 몇 번 벌어지긴 했지만 분위기만 흉흉하게 만들었을 뿐, 진짜 전쟁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반면 레늄 왕국과 미테 왕국의 경우는 훨씬 빨랐다. 벌써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양측이 아직 전력을 다하지는 않고 있지만 제법 전쟁이 커지고 있었다.
“이걸 빨리 마무리하고 싹 흡수하는 편이 더 낫겠지?”
전쟁을 하면 백성만 힘들어진다. 또 전쟁이 길어지기라도 하면 백성의 삶은 피폐해진다. 그러다가 결국 난민이
되어 떠돌게 된다.
예전이라면 이런 상황을 반겼을 것이다. 난민을 흡수해서 모자라는 인구를 보충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직 인구가 충분한 건 아니었지만, 인구를 확실히 늘릴 수 있는 훨씬 좋은 방법이 있었다.
에어스트 왕국이 나서서 싹 쓸어버리면 된다.
예전의 레늄 왕국 영토를 모조리 얻어 에어스트 왕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했다. 다만 외부의 시선이 문제인데, 이제 슬슬 그것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힘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모르의 양산은 어떻게 되었지?”
제론은 태블릿을 슥슥 조작해 에어스트 왕국의 상황을 살폈다.
아모르의 생산은 폭발적이었다. 무한정 공급되는 강철과 테페룸, 그리고 포로스 덕분에 공장이 쉴 새 없이
가동되고 있었다.
물론 그로 인해 공장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와 마법사는 죽어 나가고 있지만 말이다.
“이 정도면 슬슬 모든 라이더에게 아모르를 지급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
에어스트 왕국이 보유한 라이더는 2 천 명에 달한다.
슈린 왕국을 흡수하면서 엄청난 숫자의 라이더가 생긴 것이다. 바인의 정보력을 통해 철저한 뒷조사를 했고,
문제가 없다고 판단된 라이더만 뽑았는데도 그 정도였다.
2 천 명에 달하는 라이더 전원을 아모르로 무장시키면 크란 제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는 한, 두려울 게 없을
것이다.
더구나 에어스트 왕국의 라이더 훈련은 지독하기로 유명했다. 당연히 다른 어떤 왕국의 라이더보다 평균적인
실력이 뛰어났다.
중요한 점은 그 모든 라이더가 왕국 소속이라는 것이었다. 모두 제론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다른 영주나 귀족의 기사가 아니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귀족의 힘이 상당히 약했다. 영지를 인정하지 않고, 관리를 파견해 영토를 다스렸다.
다른 왕국처럼 나중에 귀족들이 나서서 전쟁의 판도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집중된 화력으로 밀어붙이는 데에는
최고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가만있자…… 그래도 아직 전쟁 초반이라서 피해가 크지는 않군.”
전쟁 준비에 백성을 쥐어짰기에 다들 궁핍한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 상태로 버티기만
하면 된다.
전쟁이 더 길어져 추가 물자를 징발하고 새로운 병력을 모집하기 전까지는 괜찮을 것이다.
제론은 최적의 타이밍에 나서서 그들을 단번에 쓸어버릴 계획을 세웠다. 당연히 그 타이밍을 재는 것은 바인이 할
일이었다.
“물자의 흐름이 나쁘군.”
제론은 바인의 보고 중 물자의 흐름에 관한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인위적인 개입이 느껴졌다. 바인도
비슷한 의견을 첨언했다.
“이 정도로 은밀하게 물자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는 곳은 딱 한 군데뿐이지.”
엠페리움이 드디어 에어스트 왕국에 마수를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제론은 간단히 거기에서 벗어날 자신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흐름을 역으로 추적해 그들의 손발을 꺾어
놓을 생각이었다.
“좋은 기회로군.”
제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앞으로 정말 재미있어질 것이다.

☆ ☆ ☆

“또 작동하지 않는다고?”
깁스 남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었다. 최근 습격을 받아 부서진 곳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가.
“젠장, 에너지 감지 시스템을 다시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군.”
엠페리움에서 쓰던 에너지 감지 시스템은 만드는 데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간다. 아니, 비용만으로 만들 수 있는
아티팩트가 아니었다.
에너지 감지 시스템은 아주 오래전에 쓰임을 다하고 수명이 끝났다.
하지만 그것을 쓴 덕분에 엠페리움은 크란 제국에 세워지는 도시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었다. 사실 모든 것은
크란 제국이 채 세워지기도 전에 계획된 일이었다.
물론 깁스 남작은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을 통해서 보고 알았지 실제로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깁스 남작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최근 지나칠 정도로 많은 에너지원이 사라졌다. 깁스 남작은 다시 한 번 자료를
뒤적였다.
“역시!”
에너지원이 사라진 도시를 보면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레벨리오의 습격을 받은
곳은 반드시 에너지원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즉, 레벨리오가 에너지원에 간섭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저 우연만으로 이뤄진 타이밍이라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절묘했다.
레벨리오의 습격을 받지 않고 저절로 에너지원이 사라진 곳도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깁스 남작은 그곳 역시
레벨리오가 어떻게든 관여했을 거라고 믿었다.
“아무래도 대책이 필요하겠어.”

Chapter 2 엠페리움 (4)

비록 얼마 전 레벨리오의 본거지를 토벌했지만, 아직 그들을 완전히 뿌리 뽑지는 못했다.


수도의 근거지를 부순 이후에도 레벨리오의 습격이 있었다. 그 습격으로 인해 아주 중요한 시설을 잃었다.
앞으로 시설에 대한 방비를 훨씬 더 철저히 할 것이다. 인력이 한정되어 있으니 몇 군데는 아예 포기할
생각이었다.
최근 별 효용을 찾기 어려운 분수대는 그냥 내버려 두고 중요한 시설에 인력을 집중해서 철저히 방어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그러면서 레벨리오의 뒤를 캐 나가다 보면 그들을 박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쯧. 지금까지는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허섭스레기 같은 조직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깁스 남작은 짜증을 내며 다음 보고서를 읽었다. 그의 표정이 또 구겨졌다.
“빨리빨리 진행할 것이지, 무슨 뜸을 이렇게 들이는지…….”
벨룸 왕국과 체스터 공국의 전쟁이 빨리 터져야 그 안에서 또 뭔가 공작을 벌일 텐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고
있었다.
언젠가 벌어지긴 벌어지겠지만, 이대로라면 곤란했다. 자칫 여기에 헥서 왕국을 끼워 넣는 작전이 실패할 수도
있었다.
체스터 공국과 헥서 왕국이 너무 많이 성장했다. 슬슬 한 번쯤 꺾어 줄 때가 되었다.
또한 최근 무한정 들어간 엠페리움의 자금을 다시 채워 넣기 위해서도 이번 전쟁은 꼭 필요했다.
“그래도 시간을 끌어 봐야 오래 걸리지 않겠지. 이놈들 전쟁이 끝나면 쉽지 않아질 테니까.”
현재 레늄 왕국과 미테 왕국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전쟁이 마무리되면 체스터 공국도 선뜻 전쟁을
벌이기가 쉽지 않아진다.
지금이 기회였다. 사실 체스터 공국이 이렇게 전쟁을 뒤로 미루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미테 왕국과 레늄
왕국까지 한꺼번에 노리기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힘이 약화되었을 때, 벨룸 왕국을 밀어 버리고 곧장 쳐들어가면 모든 왕국을 단번에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덩치를 키워 놓으면 결국 끝에 몰린 에어스트 왕국도 끝장날 수밖에 없었다.
깁스 남작이 굳이 더 공작을 벌여서 전쟁을 서두르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에어스트 왕국이 마음에 걸렸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신경도 쓰지 않지만 깁스 남작은 그렇지 않았다.
이번에 물류의 흐름을 이용해 장난질을 좀 쳤지만 그게 효과를 발휘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또한 그것만
가지고 몰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결국은 무너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흔들릴 때 체스터 공국이 전쟁을 벌이면 그들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깁스 남작은 그걸 원했다. 그 그림만 제대로 그려지고 나면, 더 이상 뒤통수가 간지럽지 않을 것 같았다.
체스터 공국의 수뇌부는 벌써 엠페리움의 조직원이 장악해 버렸다. 그들이 근방의 왕국을 싹 병합하고 나면 한결
다스리기가 수월해질 것이다.
그것이 엠페리움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벨룸 왕국에 헥서 왕국까지 싹 아우르면 제법 큰 제국이 되겠군.”
물론 아무리 그래도 크란 제국에는 못 미친다. 또한 크란 제국와 그들 사이에 있는 다른 왕국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엠페리움의 입장에서는 그저 좀 더 먹기 좋은 형태로 바뀌는 것 외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탁!
깁스 남작은 보고서를 덮었다. 이젠 머릿속으로 이걸 정리할 시간이었다. 아마 정리가 끝나고 나면 제법 그럴듯한
계획 몇 가지가 또 생각날 것이다.
소파에 몸을 묻은 깁스 남작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매달렸다.

Chapter 3 혼란의 시작 (1)

제론은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수뇌부를 모두 회의장으로 불러 모았다.


드디어 에어스트 왕국이 날아오른다고 생각한 주요 인물들이 다급히 회의장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회의장 상석에 앉아 있는 제론을 발견하고는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동안 긴장감 넘치는 침묵이 흘렀다. 다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써야만 했다.
제론은 분위기가 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제론의 시선이 세나와
바이스 쪽에 잠시 머물렀다.
“말레피 가문과 벨루스 가문은 제대로 자리를 잡았나?”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인으로부터 이미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말로 확인을 해 주는 것도
필요했다.
바이스와 세나는 제론에게 상당히 고마워했다. 만일 제론이 미리 일을 추진해서 두 가문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아마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미테 왕국이 그럭저럭 버티고 있지만, 조만간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레늄 왕국에 누군가가 은밀히
기간트를 지원해 주는 바람에 힘의 축이 급격히 기울어 버렸다.
“다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겠지?”
제론의 물음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에어스트 왕국의 수뇌부에게는 상당한 정보가 제공된다. 아니, 정보 열람실이 따로 있어서 신분에 맞는 정보를
언제든 확인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 자리에 참석하는 자들은 현재 미테 왕국과 레늄 왕국의 전쟁 상황이나,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이
언제쯤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할 것인지까지 모두 확인한 상태였다.
“딱 좋은 타이밍이 왔다.”
제론의 말에 다들 눈을 빛냈다. 간신히 진정시켰던 심장이 다시 미칠 둣이 뛰었다.
“레늄 왕국을 친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튀겼다.
딱!
탁자에 빛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 빛이 이리저리 뒤틀리며 색색으로 물들더니 이내 거대한 지도로 변했다.
앞으로 전장이 될 왕국의 지도였다. 에어스트 왕국에서부터 레늄 왕국, 미테 왕국은 물론이고, 벨룸 왕국과
체스터 공국, 심지어는 헥서 왕국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제론은 손가락으로 먼저 레늄 왕국을 짚었다. 그다음 미테 왕국으로 선을 쭉 그었다. 제론의 손가락을 따라 붉은
선이 나타났다.
“다음 미테 왕국을 삼킨다.”
거기까지 말한 제론은 좌중을 둘러봤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이 보였다. 제법
기분이 달아올랐다.
“우리가 전쟁을 시작하면 체스터 공국도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는 대부분 읽고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핵심이라고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제론은 그들의 생각을 아득히 먼 곳으로 날려 버렸다.
제론의 손가락이 헥서 왕국을 짚었다.
“헥서 왕국이 끼어들 것이다.”
“예?”
누군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나머지도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심정은 그와
똑같았다.
헥서 왕국이 뭐 아쉬울 게 있다고 이런 진흙탕 같은 전쟁에 끼어든단 말인가.
“헥서 왕국의 목표는 레늄 왕국과 미테 왕국이다.”
다들 긴장감 가득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힘이 약해진 모든 왕국을 체스터 공국이 집어삼키게 될 것이다.”
제론의 말에 다들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체스터 공국이 대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비록 약소국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강국도 아니었다. 공국이라는 건 공왕이 다스린다는 뜻이었다. 체스터
공국의 공왕은 사실 벨룸 왕국에서 떨어져 나온 공작이었다.
즉, 일개 공작령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그들이 몇 개의 왕국을 몽땅 집어삼킬 만한 힘을 어떻게 키울 수 있단
말인가.
제론은 그들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원래는 그렇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원래는.”
그제야 다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제론에게 집중했다. 지금은 미래를 위한 회의 중이었다.
“체스터 공국은 그렇게 모든 왕국을 아우른 다음 내실을 다지고 차근차근 우리 왕국을 병합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다들 이를 악물었다. 만일 그렇게 되면 다 박살을 내 버릴 것이다. 에어스트 왕국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모든 왕국을 차근차근 병합할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사람들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그리고 떨리는 눈빛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다들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나 보군.”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지도에 표시된 왕국들을 탁탁탁탁 짚었다.
“이것들, 우리가 다 먹는다.”
지도를 바라보는 모든 이의 가슴에 폭풍이 휘몰아쳤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그리고
심장이 미칠 듯이 두근두근 뛰었다.

☆ ☆ ☆

“폐하! 큰일 났습니다! 폐하!”


레늄 왕국의 국왕은 거의 구르듯이 달려오는 시종장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데 그리 경박하게 구는 게냐!”
하지만 시종장은 국왕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폐하! 선전포고입니다!”
“선전포고?”
국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하자 시종장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에어스트 왕국에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에어스트 왕국? 그놈들이 대체 왜!”
국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에어스트 왕국의 저력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물론 정확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전력을 가졌든 간에 지금 이 상황에서 공격을 받았다가는 완전히 끝장이었다.
“대체 무슨 명분으로!”
시종장은 입을 다물었다. 명분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애초에 레늄 왕국은 슈린 왕국을 도와서 에어스트 왕국에
전쟁을 걸었다.
솔직히 에어스트 왕국이 슈린 왕국만 먹고 전쟁을 멈췄을 뿐이지 사실 아직까지 전쟁이 끝난 건 아니었다.
그건 레늄 왕국의 국왕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종장의 답을 바라지도 않았다.
“젠장! 그래서 지금 다들 어쩌고 있느냐!”
“그, 그게…….”
“똑바로 말해라!”
“벌써 국경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뭐? 그럴 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솔직히 레늄 왕국이 미테 왕국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건 뒤에서 도움을 준 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상당한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존한 전력은 당연히 에어스트 왕국과의 국경에 모아 뒀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벌써 국경이 뚫렸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대, 대체, 대체 왜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공격을 한단 말이냐! 이 무도한 놈들 같으니!”
시종장은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에어스트 왕국은 선전포고를 하고 이틀 후에 공격을
시작했다. 문제는 레늄 왕국에 있었다. 제대로 보고가 올라가지 않은 것이다.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대책! 대책 회의를 소집해야겠다! 어서 대신들을 모아라!”
시종장은 국왕의 명령을 받아 서둘러 움직였다. 그날부터 왕궁에서는 매일 회의가 벌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회의가 길어져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에어스트 왕국의 군대는 차근차근 레늄 왕국을 정리해 나갔다.

Chapter 3 혼란의 시작 (2)

“너무 순조로운데?”
“순조로우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점령지는 잘 관리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때를 대비해 엄청난 수의 관리를 쓰지도 않으면서 키우고 영입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모자랄 텐데?”
“그거야 나중 일 아닙니까. 아직도 꾸준히 관리를 양성하고 있으니 전쟁을 진행하면서 차근차근 투입하면
됩니다.”
제론은 엔트의 말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쪽으로는 능력이 뛰어났다. 추진력도 제법 있었고
말이다.
“헥서 왕국 쪽도 슬슬 움직이려는 모양입니다. 기간트 부대를 미테 왕국과의 국경에 배치했습니다.”
“급하긴 급했나 보군.”
엔트의 보고에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바인으로부터 들은 보고였다.
에어스트 왕국의 행보는 주변 모든 왕국을 당황시켰다. 완전히 의표를 찌른 것이다.
체스터 공국은 다급히 전쟁을 시작했다. 어찌나 급했는지 선전포고까지 잊었다는 후문이 돌 정도였다.
사실 현재 에어스트 왕국이 벌인 전쟁은 헥서 왕국이 먼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한데 에어스트 왕국이 움직이는 바람에 모든 것이 틀어진 것이다.
그들도 설마 에어스트 왕국이 이렇게 전격적으로 움직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에어스트 왕국은 슈린 왕국과 전쟁을 벌려 그 영토를 흡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아직도
내정에 힘써야 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다들 에어스트 왕국이 최소한 몇 년 동안은 내치에 전력을 쏟아야 전쟁 준비라도 시작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마 뒤에서 이 모든 일을 계획한 조직인 엠페리움은 다시 계획을 짜 맞추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걸 생각한
제론은 빙긋 웃었다. 왠지 속이 조금 후련했다.
“극도로 혼란스러워지겠군. 이 기회를 잘 노리면 큰 피해 없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겠어.”
제론의 중얼거림에 엔트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 보면 왠지 무서우시다니까.’
엔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엔트가 몸을 떨고 있을 때, 제론의 무심한 말이 그의 뒤통수에 떨어졌다.
“헥서 왕국에 연락을 해. 미테 왕국 건드리지 말라고.”
“예?”
엔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 제론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찢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 명분도 있잖아.”
“며, 명분 말입니까?”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다. 미테 왕국은 한때 벨루스 가문과 말레피 가문이 있던 왕국이다. 그들이 영지민까지
몽땅 끌고 오긴 했지만 그 관계가 칼처럼 잘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니, 칼처럼 잘라 냈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면 미테 왕국이 무릎을 꿇고라도 관계를 다시 이으려 할 것이다.
그것 말고도 얼마든지 명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문제는 명분이 아니었다.
“그, 그러다가 헥서 왕국의 칼끝이 우리 왕국으로 향할 수도 있습니다.”
제론이 씨익 웃었다. 왠지 그 웃음이 섬뜩해 엔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면 더 좋지. 훨씬 쉬워지니까. 하지만 그놈들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야.”
“하, 하면…….”
“그냥 무시하겠지.”
“하면 그들이 미테 왕국을 공격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엔트는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물었다. 왠지 확인하고 싶었다. 또 엿보고 싶었다. 제론의 생각을 말이다.
“당연히.”
엔트는 이어질 제론의 말을 기다렸다. 헥서 왕국이 우리의 말을 무시한다면 그 대가를 치르게 해야만 한다.
엔트는 설마설마하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헥서 왕국이 미테 왕국을 공격하는 순간, 우리도 헥서 왕국을 친다.”
엔트는 제론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헥서 왕국은 내가 직접 친다.”
국왕이 직접 전쟁에 나선다고 하면 말려야 정상이다. 하지만 엔트는 오히려 걱정되기보다는 안심이 되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거기 아는 사람도 좀 있고.”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 제론의 모습에 엔트는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몸이 또 떨려 왔다.

파죽지세.
에어스트 왕국의 진군은 그 한마디로 표현이 가능했다.
무려 1 천 기의 아모르가 동원되었다. 출력이 무려 3.2 에 달하며 초고대문명의 기술이 다수 들어간 기간트였기에
사소한 움직임부터가 달랐다.
레늄 왕국은 계속된 전쟁으로 사실 여력이 거의 남지 않았다. 각 영지의 기간트마저도 몽땅 징발해서 쓰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에어스트 왕국의 병력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사령관님, 진군이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카이트는 자신의 호위로 따라붙은 베샤이덴과 슈빅의 말에 피식 웃었다.
“아직도 느리다. 폐하께서는 더 빨리 진군하라 명하셨다.”
“이보다 더 빨리 말입니까?”
베샤이덴과 슈빅은 지금도 지나치게 빠르다고 여겼다. 하루에 거의 100 킬로미터 가까이 진군을 하고 있으니,
이대로 가면 며칠 안에 레늄 왕국의 수도를 함락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처음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가 가장 컸다. 물론 그 전투도 거의 일방적이었다. 아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완파된 기간트는 아예 없었고, 수리가 필요한 것들이 수십 기 있었는데, 그나마도 하루 만에 싹 고쳐 버렸다.
그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소소하게 게릴라의 습격이 몇 번 있긴 했지만 아군에 생채기도 내지 못하고 스러져 갔다.
처음 국경에서의 전투 이후, 1 천 기의 기간트는 각각 100 기씩 나눠서 한 군데씩 열 군데를 따로 점령했다.
그렇기에 점령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카이트도 100 기의 기간트만 이끌고 진군했다. 한 번에 영지 하나씩 점령하면 되기에 사실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변변한 병력이 남은 영지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기간트라도 몇 기 있으면 다행이었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군. 이번에도 간단히 끝내 버리자고.”
“맡겨 주십시오.”
베샤이덴과 슈빅은 든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을 보는 카이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 ☆ ☆

“이게 무슨 짓이오!”
텔레포트 게이트를 담당하는 크란 제국 마탑의 마법사인 슈렉케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선 기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명입니다. 앞으로 이 영지의 텔레포트 게이트는 더 이상 운영할 수 없습니다.”
“하면 게이트에 들어간 막대한 재료는 대체 어쩔 셈이오! 우리 마탑이 무슨 자선사업이라도 하는 줄 아는 거요!”
기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마법사를 슈렉케를 바라봤다.
“재료비는 애초에 마탑 설치비에 포함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 그건……!”
슈렉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기사의 말 대로였다. 재료비는 애초에 설치비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안 되오! 우리가 그냥 물러나면 텔레포트 게이트를 뜯어서 연구할 수도 있지 않소! 우리의 마법을 그런
식으로 공개할 수는 없소!”
“하면 게이트를 해체하십시오.”
“해, 해체?”
“단, 재료는 모두 그대로 두셔야 합니다. 그것은 엄연히 우리 왕국의 재산입니다.”
슈렉케는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아니, 솔직한 마음으로는 해체하기 싫었다. 게이트를 해체하면 다시
마탑까지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
보아하니 다른 영지의 게이트도 몽땅 이런 식으로 철수시키는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이보게. 잘 생각하게. 아니, 폐하께 잘 말씀드려 보게. 텔레포트 게이트가 없으면 앞으로 어쩔 셈인가! 왕국이
뒤로 후퇴할 수도 있네!”
슈렉케의 말에도 기사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건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슈렉케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러니 페하께 잘 말씀드려 달라는 거 아닌가!”
“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즉시 떠날 준비를 해 주십시오.”
슈렉케는 경직된 기사의 태도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는 전적으로 영주의 권한이었다.
‘젠장, 대체 이걸로 얼마나 돈을 벌 수 있는지 모른단 말이냐! 에어스트 왕국의 국왕은 바보 멍청이야!’
슈렉케는 암담한 눈으로 텔레포트 게이트를 돌아봤다. 대체 이걸 언제 다 해체한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앞으로는 어쩐단 말인가.
‘이대로 마탑으로 돌아가 봐야…….’
크란 제국 마탑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마법사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수의 마법사가 파견 나간
상태였다. 파견 임무의 대부분이 텔레포트 게이트의 관리였다.
이대로 돌아가면 그야말로 찬밥 신세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사의 표정과 태도를 보아하니 절대 번복되지 않을 것이다.
슈렉케는 일단 굳은 표정으로 게이트의 마법진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핵심이 되는 부분만 해체하면 된다.
나머지까지 다 해체하는 건 노동력 낭비였다.
해체를 마친 슈렉케는 서둘러 게이트의 물건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탑의 지원병을 이끌고 서둘러 영지를 떠났다.
어쩌면 아직 해체가 끝나지 않은 게이트가 있을지 몰랐다. 늦기 전에 도착하면 텔레포트를 이용해 에어스트
왕국을 떠날 수도 있었다.
걸어서 왕국을 벗어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 ☆ ☆

깁스 남작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표정은 끝까지 감췄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네의 능력이야 우리도 잘 알고 있지만 요즘은 성과가 너무 미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깁스 남작은 할 말이 없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추진하는 일이 연달아 실패하고 있으니 말이다.
“에어스트 왕국, 정말 거슬리는군. 처리할 방도가 있나?”
“당장은 어렵습니다.”
“당장은 어렵다라…….”
거대한 원탁에 빙 둘러 앉은 사내들이 눈을 빛냈다. 마법진이 새겨진 복면을 쓰고 있어 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근방의 다른 왕국을 충동질해 에어스트 왕국을 일제히 공격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상당한
무리수를 던져야 합니다.”
“흐음.”
원탁의 사내들이 심각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다. 엠페리움은 아직까지 굳건했다. 굳이 무리수를 던지면서까지
일을 진행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어 쌓이면 조직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굳건하지만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레벨리오는 요즘 어쩌고 있나?”
사내 중 하나가 분위기를 전환하는 의미로 질문을 던졌다.
“본거지가 무너진 이후로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하지만 그들의 습격을 받은 시설의 에너지원이 사라지는 점은 충분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깁스 남작은 잠시 뜸을 들이며 분위기를 살폈다. 그러다가 사내들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자, 말을 이었다.
“에너지 감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분위기가 더욱 심각해졌다.
“그걸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과 돈이 들어가는지 모르는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앞으로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깁스 남작의 말에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들도 그 점을 알고 있기에 강력하게 반대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안건은 기각하겠네.”
“하지만……!”
깁스 남작이 발끈했지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복면을 쓴 사내가 손을 들어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게. 무슨 말을 해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워낙 단호했는지라 깁스 남작도 그냥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깁스 남작은 바보가 아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돈이나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뭔가 다른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걸 굳이 캐내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그게 신상에 이로웠다.
“체스터 공국 쪽에 집중하게. 그 일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돼.”
“알겠습니다.”
깁스 남작은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Chapter 3 혼란의 시작 (3)

그가 나가자 회의실 안의 분위기가 더욱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그분의 부재가 이렇게 아쉽기는 처음이로군.”
“동감하오.”
복면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는 복면에 그려진 마법진이 다른 사람들과 약간 달랐다.
“진척은 좀 있소?”
시선을 받은 사내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소. 다만 더 많은 생명력이 필요하오.”
“그래서 큰 판을 벌이지 않았소. 이번 전쟁이 끝나면 얼추 될 것 같소?”
“내 생각에는 그렇소.”
그 말에 다들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한계가 보이고 있었는데 다행이오.”
“그분이 없는 엠페리움은 엠페리움이 아니지. 그렇지 않소?”
“물론이오.”
“아무튼 다들 조금만 더 힘냅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눈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분이 다시 오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 일을 성공시키는 자체에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만일 성공한다면, 그건 그들의 영생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Chapter 4 파죽지세 (1)

레늄 왕국의 국왕은 침통한 표정으로 마차에 앉아 창밖을 내다봤다.


“후우, 꼴이 말이 아니군.”
“폐하…….”
마차에 함께 탄 호위 기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국왕을 바라봤다.
국왕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라. 더 비참해질 뿐이니.”
“죄, 죄송합니다. 폐하.”
“훗. 죄송할 게 뭐 있느냐. 다 내가 못난 탓인 것을.”
국왕은 자조적인 표정으로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마차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현재 그들은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는 중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빨랐다. 아무리 수도에 남은
기간트가 있다고 하지만,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전선으로 도망치기로 말이다.
사실 전투에 참여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국왕이 선택할 마지막 길은 망명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대체 어디로 망명을 간단 말인가. 근처 왕국이 모두 전화에 휩싸였다. 어디를 가건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마차 주위에는 수백 명의 기사가 호위하듯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들 중 50 명이 기간트를 보유한 라이더였다.
또한 마법사와 엔지니어를 태운 마차도 몇 대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통신과 기간트 정비를 담당했다.
그리고 그 뒤에 왕족을 태운 마차가 줄줄이 이어졌다. 마법사나 엔지니어를 태운 마차보다 그게 훨씬 더 많았다.
“과연 이들을 데리고 내가 뭘 할 수 있겠느냐?”
국왕의 어조는 공허했다. 호위 기사는 고개를 들어 국왕을 바라봤다. 고개는 창밖으로 돌린 채였지만, 보지
않아도 눈빛이 보이는 듯했다. 텅 빈 눈빛 말이다.
잠시 감돌던 침묵을 깨뜨린 것은 마차 뒤에서 다급히 달려온 말발굽 소리였다.
“폐하! 수도에서 보내온 소식이옵니다!”
통신을 담당하는 마법사가 전해 준 보고서였다. 국왕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사실 보지 않아도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그래도 확인해야만 했다.
보고서를 펼친 국왕의 고개가 뚝 떨어졌다.
“수도가…… 벌써 함락되다니…….”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지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때는 아직 적이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이었다.
한데 벌써 함락되었다니, 믿기가 어려웠다.
“폐하, 속도를 더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호위 기사의 말에 국왕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속도를 올리지 않으면 붙잡히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왕국을 갖다 바치는 꼴이 된다.
“최소한 발악은 해 봐야겠지.”
국왕은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명령을 내렸다.
“속도를 높여라.”
행렬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 ☆ ☆

헥서 왕국군 사령관인 슈피겔은 부관의 보고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건방진 놈들이 정말로 그따위로 말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꽈앙!
탁자가 산산조각 났다. 슈피겔의 온몸에서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마나가 마구 뿜어져 나왔다.
“고작 영지 몇 개 얻어먹은 소국 주제에 감히, 뭐? 미테 왕국을 건드리지 말라고? 감히!”
슈피겔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후욱! 후욱! 후욱!”
슈피겔은 상당한 다혈질이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기 전에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아 언제나 냉정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셨지?”
슈피겔의 눈빛이 차가워진 것을 확인한 부관이 대답했다.
“사령관 각하의 판단에 맡기셨습니다.”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그렇습니다.”
슈피겔은 씨익 웃었다. 전권을 자신에게 준다면 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정보가
필요했다.
“에어스트 왕국의 군대가 지금 어쩌고 있는지 아나?”
“레늄 왕국의 수도를 어제 무너뜨렸습니다.”
“벌써?”
미테 왕국을 공격할 작전을 짜느라 잠깐 신경을 안 쓴 사이 벌써 수도를 점령했다니, 슈피겔은 에어스트 왕국군의
빠른 진격에 혀를 내둘렀다.
“굉장하군. 병력 상황은 어떻게 되나?”
“1 천 기의 기간트를 동원했습니다.”
“1 천 기라…….”
“참고로 에어스트 왕국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는 총 2 천 기입니다.”
“어마어마하군. 하지만 미테 왕국까지 정벌하려면 그리 넉넉하지는 않겠어.”
슈피겔이 그렇게 말하며 부관을 쳐다보자, 부관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현재도 지속적으로 추가 병력을 투입하고 있다고 합니다.”
“추가 병력?”
“레늄 왕국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그 여세를 몰아 미테 왕국까지 한꺼번에 집어삼키려는 작전으로 보입니다.”
슈피겔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에어스트 왕국이 단단히 벼르고 있었나 보군.”
사실 슈피겔이나 그의 부관은 에어스트 왕국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여겼다. 고작 레늄 왕국 끝자락에 있는
백작령에 불과했는데, 어느새 왕국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것도 고작 몇 년 만에 말이다.
이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슈피겔은 에어스트 왕국의 국왕이자, 붉은 학살자로 이름 높은 제론 폰
에어스트가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잘하면 그 붉은 학살자와 싸워 볼 수 있겠군.”
“사령관 각하께서 이기실 겁니다.”
슈피겔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비록 일대일로 싸워서 이길 자신은 없지만, 전술의 승리도 승리는 승리니까.”
슈피겔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뛰어난 기간트 라이더였다. 하지만 붉은 학살자의 전설에 도전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붉은 학살자는 솔직히 헥서 왕국 내에서는 국왕만큼이나 이름이 높았다.
그런 붉은 학살자를 자신이 이길 수 있다면 슈피겔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높아지겠는가.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슈피겔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제부터는 작전을 짜야 한다. 치밀한 계획으로 붉은 학살자를 잡아내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붉은 학살자를 잡으면 전쟁은 끝이다. 그가 바로 에어스트 왕국의 국왕이니까.
그렇게 헥서 왕국도 서서히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

체스터 공국의 총사령관인 브루노 후작은 이를 갈았다. 그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안광이 폭사되었다.
그 모든 기세를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부관은 그저 죽었다 생각하고 납작 엎드렸다.
“또 패배했다고?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부관은 덜덜 떠느라 대답도 못 했다. 부르노 후작은 평소에는 순하고 사람 좋지만, 일단 한 번 돌아 버리면
지휘고하를 따지지 않고 목을 날려 버리는 걸로 유명했다.
“똑바로 보고해라. 대체 왜 그 많은 기간트가 몰려갔는데도 꼬랑지를 말고 도망갔는지!”
부관은 즉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이럴 때 뜸을 들였다가는 그냥 죽은 목숨이었다.
“적의 함정에 빠졌다고 합니다!”
“함정? 무슨 함정?”
“피해를 줄이기 위해 기습을 시도했는데, 그게 들통 나는 바람에 초반에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고작 기습 실패로 피해를 입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벨룸 놈들이 역으로 기습을 했습니다.”
“역으로 기습을 해?”
부르노 후작의 표정이 묘해졌다. 대체 이게 뭔가? 우리 쪽 기습은 들키고 적 기습만 성공했다니. 아무리 머저리
지휘관이라 해도 그렇게 어이없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 생각을 말해 봐라.”
“예?”
부관이 깜짝 놀라 부르노 후작을 바라봤다. 부르노 후작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우리 쪽 운이 지지리도 없어서 그렇게 되었을까? 병력 차를 생각해
봐라. 아무리 기습이라도 그렇게 큰 피해를 입었다면 생각지도 못한 허를 찔렸다는 뜻이다.”
“사실 좀 이상하긴 합니다. 아군의 이동은 극비리에 이루어졌습니다. 적이 그렇게 적절한 순간 기습을 한 것이
좀 이상하긴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나?”
부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부르노 후작이 그런 부관은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배신자를 찾아라. 우리 측 정보를 흘리는 놈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부관이 급히 예를 취하고 후다닥 나갔다.
부르노 후작은 그 모습을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짜증이 났다. 아니, 초조했다.
사실 이번 전쟁은 이기는 게 당연했다. 전력 차이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얼마나 빨리 벨룸 왕국을
무너뜨리느냐가 관건인 전쟁이었다.
한데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속 상황이 꼬이기만 했다.
물론 모든 전투에서 진 것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밀어붙여 승리한 전투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결정적일 때마다 교묘하게 적의 함정에 빠져 큰 패배를 겪어야만 했다.
그로 인해 전쟁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이래서는 정말로 곤란했다.
“이거야 원. 원래 지금쯤 벨룸을 완전히 밀어 버렸어야 하는데…….”
벨룸을 순식간에 밀어 버리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미테와 레늄, 그리고 헥서 왕국까지 싹 병합한 다음, 느긋하게
에어스트 왕국을 도모하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한데 지금 상황이 참으로 요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가만히 있을 줄 알았던 에어스트 왕국이 난데없이 튀어나와 전장을 휩쓸고 있었다.
벌써 레늄 왕국은 거의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수도가 함락되었고, 국왕은 피난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나저나 헥서 왕국이 에어스트 왕국을 공격한다고 했지?”
부르노 후작에게는 그런 은밀한 정보를 알려 주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체스터 공국의 배후이기도 했고, 또
체스터 공국의 수뇌부를 장악한 자들이기도 했다.
헥서 왕국은 처음 레늄 왕국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이 레늄 왕국을 밀어 버리고 미테 왕국과 싸우며
힘을 소진하는 동안 체스터 공국이 벨룸 왕국을 무너뜨렸어야만 했다.
한데 헥서 왕국이 할 일을 에어스트 왕국이 하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 빨리 정리해 버리는 바람에 미테 왕국의
힘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
“후우, 내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벨룸 이 씹어 먹을 것들을 대체 어떻게 족치지?”
이대로 정보가 계속 새나 가면 전쟁이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예상보다 피해가 커지게
된다.
나머지 왕국을 정리하려고 해도 힘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대로라면 그저 벨룸 왕국을 집어삼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부르노 후작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절대로 안 되지. 방법을 강구해야 돼. 방법을…….”
생각에 잠긴 부르노 후작의 눈빛이 점점 섬뜩해졌다.

Chapter 4 파죽지세 (2)


“이번 전투가 마지막인가?”
카이트는 담담한 눈으로 멀리 진을 치고 있는 기간트 부대를 쳐다봤다.
거침없이 레늄 왕국을 내달려 여기까지 왔다. 수도를 함락시키자마자 출발했다면 레늄 왕국의 국왕을 중간에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가서 쓸어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베샤이덴의 물음에 카이트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힘을 쓸 필요가 없지. 아마 저들도 살기 위해 발악을 할 거야. 우리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돼.”
“그냥 기다립니까? 이렇게 숨어서?”
“그래.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어. 사실 우리도 그동안 너무 강행군했잖아. 좀 쉬어야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전 아직 더 싸울 수 있습니다.”
“그거야 우리 생각이고. 다른 사람은 안 그럴걸?”
카이트의 말에 베새이덴과 슈빅이 고개를 돌려 다른 라이더들을 바라봤다. 다들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도열해
있었다. 언제든 싸울 태세가 갖춰졌기에 정말로 믿음직스러웠다.
“다들 멀쩡한데요?”
“눈빛만 볼 건가? 명색이 익스퍼트가 왜 이래?”
에어스트 왕국에서는 익스퍼트라는 말이 다른 왕국과 많이 달랐다. 에어스트 왕국에서의 익스퍼트는 다른
왕국에서 부르는 소드 마스터와 동급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위에 있었다.
카이트는 물론이고 베샤이덴과 슈빅도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였다. 그들은 누구보다 마나에 민감했다.
카이트가 한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감각을 활짝 열어 라이더들이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마나의 흐름을 살폈다. 이내 두 사람의
표정이 축 늘어졌다.
“제 생각이 좀 짧았군요.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예. 적어도 사흘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아. 이번 기회에 한 닷새 푹 쉬자고.”
“예? 그렇게 오래요? 그러다가 저놈들 다 도망가면 큰일 아닙니까?”
“도망가라지. 그리고 그냥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베샤이덴과 슈빅은 눈에 마나를 집중해 적진의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적은 이쪽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저들은 미테 왕국과 한창 전쟁 중이었다. 그리고 국왕이 합류하면서
전력이 상당 부분 강화되었다.
“아무래도 저쪽을 뚫고 나갈 가능성이 높겠군요. 우리와 대적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주면 줄수록 준비를 철저히 해서 공격하겠지.”
베샤이덴과 슈빅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게 되면 미테 왕국의 전력까지 깎아 낼 수 있었다.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길 자신이 있지만, 더 쉬운 길을 두고 굳이 어렵게 갈 필요는 없었다. 피해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그럼 다들 쉬게 하겠습니다.”
베샤이덴이 먼저 나서서 도열한 라이더들에게 달려갔다. 잠시 후, 곳곳에 천막이 쳐졌다. 그리고 여기저기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에어스트 왕국군은 실로 오랜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레늄 왕국군은 카이트의 예상대로 행동했다. 전열을 정비한 다음 그대로 밀고 들어간 것이다.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50 기의 기간트는 모두가 임베르였다. 엠페리움에서 제공한 기간트를 국왕이 자신의
호위에게 지급한 것이다.
임베르 50 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안 그래도 국왕의 호위 기사이니 라이더로서의 실력도 엄청났는데, 그들이
임베르를 움직이니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꽈과과과광!
굉음이 울려 퍼졌다. 가장 앞에서 돌격하던 임베르들이 미테 왕국의 기간트들을 박살 내는 소리였다.
그렇게 임베르가 안으로 파고든 자리를 레늄 왕국의 나머지 기간트들이 채워 갔다. 마치 상처를 내고 그걸 강제로
벌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미테 왕국의 기간트 부대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길을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투가 끝난 건 아니었다. 미테 왕국 측 기간트 부대도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막아! 뚫리면 끝장이다!”
만일 이 전선이 뚫리면 레늄 왕국군이 미테 왕국 내부로 들어오게 된다. 모든 영토가 유린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다들 필사적으로 막기 위해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가족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전투는 점점 치열해졌다. 하지만 승기는 레늄 왕국에 있었다. 그들의 힘이 더 컸고, 그들도 마찬가지로
필사적이었다.
여기서 막히면 그저 죽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국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사방에 부서진 기간트가 나뒹굴었다. 그리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흙먼지가 만들어 낸 안개 속으로 강철과
강철이 부딪쳐 생겨난 불꽃이 튀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진행되는 전투를 멀리서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이러다가 뚫리겠는데요?”
“걱정할 거 없다.”
“뚫리면 저놈들 그냥 도망만 가지는 않을 겁니다. 막지 않으면 나중에 힘들어지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어차피 다 우리 왕국이 될 거 아닙니까?”
“괜찮아. 나도 다 생각이 있다.”
카이트가 너무 여유를 부리니 베샤이덴과 슈빅은 점점 애가 탔다.
이대로 레늄 왕국군이 전선을 뚫고 지나가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당하는 건 백성들이었다. 수백 기의 기간트가 짓밟고 지나간 영토는 폐허가 되기 마련이었다. 다들 희망을 잃고
주저앉을 게 뻔한데, 그걸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베샤이덴과 슈빅은 카이트를 바라보다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카이트와 제법 오랫동안 함께해 왔다.
카이트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카이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한데 카이트의 얼굴이 너무나 평안했다. 그들이 아는 카이트는 백성의 피눈물을 그냥 두고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과를 안다면 결코 이대로 방치할 리 없었다.
“우리가 레늄 왕국을 이렇게나 빨리 무너뜨릴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카이트의 난데없는 질문에 베샤이덴과 슈빅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별로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우리 왕국의 기간트인 아모르의 힘입니다.”
“그리고 우리 라이더의 실력 때문입니다.”
정설이었다. 그리고 카이트도 그 말에 이견을 달 생각은 없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굉장한 승리를
연달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이렇게 빨리 레늄 왕국을 에어스트 왕국의 품에 안은 데에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카이트는 두 사람을 차분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보다.”
베샤이덴과 슈빅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보가 중요하다는 건 전쟁을 겪다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실질적인 무력보다 우위에 둔다고 생각하니 뭔가가 꺼림칙했다.
그들이 힘을 중시하는 기사이자 라이더이기 때문이었다.
카이트가 손가락을 들어 전장을 가리켰다.
“자, 자세한 것은 보면서 얘기하지. 아마 조만간 신나게 싸울 일이 있을 테니 긴장을 풀지는 말고.”
베샤이덴과 슈빅의 시선이 전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마침 딱 레늄 왕국군이 미테 왕국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순간이었다.
“아!”
“결국!”
베샤이덴과 슈빅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미테 왕국은 기간트 군단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 것이다.
한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꽈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레늄 왕국군의 선봉이 갑자기 세차게 나자빠졌다. 아니, 구덩이에 빠져 나뒹굴었다. 그 뒤를 이어서 오던
기간트들도 거기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이때다! 쳐라!”
미테 왕국군 사령관의 목소리가 전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그 명령에 따라 수많은 기간트들이 구덩이에
빠진 레늄 왕국군을 공격했다.
또한 다시 굳건하게 방어망을 구성했다. 돌파가 실패한 것이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결과였다. 대체 미테 왕국은 저런 준비를 언제 해 뒀단 말인가.
“이제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좀 이해했나?”
베샤이덴과 슈빅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전황이 한순간에 뒤바뀌는
광경을 보고 있으니 소름이 오싹 돋았다.
만일 저 함정에 빠진 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대번에 표정이 굳었다. 만일 자신들이 낸 의견이 받아들여서 곧장
밀고 들어갔다면 분명히 저 함정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함정을 판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힘이다. 우리가 점령한 영지에서 왜 아무런 잡음이 안 들린다고 생각하나?”
“그것도…… 정보입니까?”
카이트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너희도 슬슬 거기까지 생각할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내 호위 명목으로 따라다니면서 싸움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카이트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할 것이 참으로 많았다.
짝짝!
카이트는 손뼉을 쳐서 두 사람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생각은 싸움이 끝나고 해도 된다. 우리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베샤이덴과 슈빅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장을 바라봤다.
치열했다. 하지만 조만간 결과가 나올 듯했다. 아무리 함정을 파고 분전했지만 승패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레늄 왕국군이 벨룸 왕국군의 방어망을 돌파할 것이 분명했다.
“자, 슬슬 우리 차례다. 준비해.”
카이트가 일어나며 말하자, 베샤이덴과 슈빅이 나머지 라이더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까지 쉬고 있던 라이더들이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도열했다. 그동안 받은 훈련의 성과였다. 이대로
기간트를 소환해 타고 달려도 대열이 절대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소환!”
카이트의 명령에 따라 모든 라이더가 일제히 기간트를 소환했다.
키이이이이이잉!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수백 기의 아모르가 나타났다.
“돌격!”
카이트가 명령을 내렸다. 당연히 그와 동시에 가장 앞에서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다.
“돌격!”
“돌격!”
베샤이덴과 슈빅이 카이트의 명령을 받아 또 외쳤다. 그러자 수백 기의 아모르가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쿵쿵쿵쿵쿵쿵쿵!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도 대열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전장과는 제법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워낙 달리는 속도가 빨라서 그야말로 순식간에 난입할 수 있었다.
꽈아아아앙!
카이트를 선두로 수백 기의 아모르가 전장에 난입했다. 일단 어깨로 들이받은 다음, 검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아모르의 움직임은 기계적이었다. 검격 하나하나가 일사불란하고 절도 있었으며, 발걸음 하나조차 딱딱 맞춰
동시에 움직였다.
마치 거대한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꽈과광!
꽈득! 꽈득! 꽈득!
꽈과과광!
아모르들이 전장을 마구 휘저었다. 아모르가 지나간 자리에는 부서진 기간트의 잔해만 남았다.
안 그래도 피해가 극심한 상태였는데, 그 와중에 에어스트 왕국군이 들이닥치니 레늄 왕국군과 미테 왕국군은
거의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아모르 부대가 난입한 지 고작 1 시간 만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단 한 기의 기간트도 전장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또한 레늄 왕국군이 그렇게 보호하려 애쓰던 국왕을 비롯한
왕족들도 모두 사로잡혔다.
에어스트 왕국군은 기간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당한 숫자의 기병과 보병도 함께 있었다. 게다가 일반 병사의
실력이 웬만한 기사를 웃돌 정도로 대단했다.
그러니 그들이 고작 왕족 몇 명 잡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국왕 근처에 실력이 뛰어난 호위 기사가 있긴 했지만
에어스트 왕국 병사들의 합공을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카이트는 전투가 끝난 전장을 둘러보며 명령을 내렸다.
“정리해라.”

Chapter 4 파죽지세 (3)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아모르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수백 기의 아모르가 여기저기서 쿵쿵거리며 포로를 한데


모았다. 그리고 기간트의 잔해를 한쪽으로 치웠다.
예전 같으면 기간트의 잔해도 아주 중요한 전리품이 되었겠지만, 이제는 그저 고철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마나코어에서 나오는 포로스의 원료는 모두 수거하겠지만, 나머지는 그냥 고철로 취급되어 용광로에 들어갈
것이다.
다른 왕국이라면 이 안에서 멀쩡한 부품을 뜯어내 잘 보관하겠지만, 에어스트 왕국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기간트의 잔해는 한곳에 산처럼 쌓였다. 이것은 나중에 차근차근 날라 녹일 것이다.
전장의 포로도 한군데로 모았다. 사실 포로도 필요 없었다. 수뇌부만 제거하면 병사야 그냥 풀어 줘도 그만이었다.
물론 아무나 막 풀어 줘선 안 된다. 말썽의 소지가 없는 병사만 선별해서 풀어 주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것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일이었다.
카이트가 기간트에 탄 채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카이트에게 기간트 하나가 다가왔다.
쿵! 쿵! 쿵!
같은 아모르였지만 디자인이 약간 다른 지휘관형이었다. 지휘관형 아모르에는 전투형 아모르에 없는 기능 몇
가지가 추가되어 있었다.
“사령관님. 레늄 왕국 국왕과 왕족, 그리고 호위 기사들은 어떻게 할까요? 수도로 이송해야 합니까?”
카이트는 보고를 하는 부관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수도로 이송? 그런 번거로운 일을 왜 하지?”
“예? 하지만 포로를 달고 전쟁을 하는 것이 훨씬 번거롭지 않겠습니까?”
“포로를 달고 전쟁을 해? 왜?”
“예? 그, 그럼…….”
“네가 짐작하는 그거대로 처리해.”
부관은 잠시 당황해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쿵! 쿵! 쿵!
부관이 돌아가자, 카이트가 차갑게 웃었다. 왕족이니 귀족이니 다 쓸모없었다. 이럴 때는 그냥 깨끗이 없애
버리는 게 향후 레늄 왕국을 영토로 병합시키기가 편했다.
원래 백성은 왕이 누구든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이 얼마나 배불리 먹을 수 있는지에 훨씬 큰 관심이 가는
법이었다.
“뭐, 나중에는 좀 달라지겠지만.”
사실 카이트는 에어스트 왕국을 보면서 놀랄 때가 많았다. 에어스트 왕국의 백성들은 누가 시키거나 강제하지
않아도 왕국에 대한 충성심이 엄청났다.
아마 에어스트 왕국은 다른 나라에 먹히더라도 백성들이 그냥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레늄 왕국이나 미테
왕국과는 많이 달랐다.
카이트는 백성들에게 필요한 건 꼭 빵만이 아니라는 걸 요즘 조금씩 깨달아 가는 중이었다.
“자, 그럼 오늘부터 이틀 동안 최대한 편안히 쉬라고 전해. 그다음부터 또 강행군이다.”
카이트의 말에 옆에서 그를 지키고 있던 베샤이덴과 슈빅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이대로 미테 왕국까지
집어삼키면 예전 레늄 왕국을 몽땅 병합하는 셈이었다.
일개 백작령에서 시작해 정말로 왕국을 먹어 버렸다. 그 역사적인 순간이 눈앞에 있는데 어찌 가슴이 안 뛰겠는가.
“명령대로 시행하겠습니다.”
베샤이덴이 서둘러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틀 동안 에어스트 왕국군은 신나게 먹고 마셨다. 그리고 그동안 참아 왔던 잠도 푹 잤다.
그렇게 충분히 쉰 다음, 곧장 미테 왕국으로 진격했다.
주력군이 완전히 박살 난 상황이었기에 더 이상 에어스트 왕국군을 제대로 막아서는 군대는 없었다.
에어스트 왕국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해 미테 왕국까지 차근차근 집어삼켰다.

Chapter 5 헥서 왕국의 공격 (1)

슈피겔이 이끄는 헥서 왕국군이 은밀히 움직였다. 그들은 가장 어려운 길을 택했다.


하이쓰 산맥을 넘기로 한 것이다.
하이쓰 산맥은 험난한 길이었다. 아니, 길 자체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표를 찌르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다.
하이쓰 산맥을 넘으면 바로 에어스트 왕국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하이쓰 산맥 쪽은 방비가 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헥서 왕국도 다를 게
없었다.
하이쓰 산맥은 막대한 피해를 각오하지 않으면 넘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전쟁을 앞둔 마당에 피해를 감수하면
향후 전쟁 자체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슈피겔은 하이쓰 산맥의 끝자락을 이용하기로 했다.
상대적으로 산맥의 다른 부분에 비해 위험도가 현저히 낮은 부분이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하이쓰 산맥은 하이쓰 산맥이었기에 일반 병사만으로는 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곳이었다.
하지만 헥서 왕국의 주력군 전체가 넘는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하이쓰 산맥이 위험한 이유는 지형에도 있지만 산맥에서 살아가는 강하고 흉포한 몬스터였다. 하지만 그들도
생명체이기에 수만 명이나 되는 병력이 모여 있으면 절대 함부로 덤벼들지 않았다.
슈피겔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성공적이었다. 거의 몬스터의 습격이나 피해 없이 하이쓰 산맥을 절반 이상 넘어갔다.
“이대로만 가면 성공적이겠군.”
슈피겔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진을 치고 휴식을 취하는 병사와 기사들을 바라봤다. 이번 원정에 헥서 왕국의
전력을 이끌고 왔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은 미테 왕국을 정벌하는 데 전력을 쏟고 있었다. 만일 하이쓰 산맥을 넘어서 목표로 하는
곳을 점령할 수 있다면 에어스트 왕국도 별수 없을 것이다.
“사령관 각하.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슈피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와.”
10 명의 병사가 우르르 달려와 슈피겔 앞에 식탁을 차리고 식사 준비를 했다. 슈피겔은 하이쓰 산맥을 넘는
와중에도 화려한 식사를 즐겼다.
그를 위해 전속 요리사가 무려 3 명이나 동행하고 있었다.全力
느긋하게 식사를 하며 슈피겔은 부관들의 보고를 받았다.
“식사가 끝나고 오후까지 이동을 하면 하이쓰 산맥의 절반을 넘어가게 됩니다.”
“좋군.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여유를 부려서도 안 된다.”
슈피겔은 피식 웃었다.
“하여튼 웃기는 놈들이란 말이야. 이런 전시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철수시키다니, 멍청하긴.”
슈피겔이 공격 시점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일제히 철수시켰다. 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말이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유지비가 들어가지 않는다. 그저 일정한 사용료만 물면 된다. 게다가 그 사용료 중 상당한
액수가 세금으로 되돌아온다.
말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한데 그걸 왜 없앤단 말인가. 슈피겔이 보기에 그건 돈을 내다 버리고 있는
거였다.
비단 에어스트 왕국뿐 아니라, 점령지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텔레포트 게이트의 철수이니, 멍청한 정도가
너무 심했다.
“게이트라도 있으면 습격에 대비해서 어떻게 해 볼 수 있겠지만, 이젠 기습을 당해도 병력을 되돌릴 방법이
없으니 완전히 땅 짚고 헤엄치기지.”
슈피겔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부관을 힐끗 쳐다봤다.
“산맥을 넘은 다음에는 더욱 은밀히 움직여야 하니 미리 준비해 놓도록.”
“준비 중입니다. 산맥을 넘어간 다음 준비를 마무리하면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슈피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아주 순조로워. 이대로라면 제대로 성공할 수 있겠어. 목표의 상황은 좀 알아봤나?”
“예. 지속적으로 정보를 입수하고 있습니다. 남은 병력이 거의 없는 게 확실합니다.”
슈피겔이 씨익 웃었다.
“그렇겠지. 저렇게 큰 판을 벌이는데 안을 단속할 여유가 있겠어? 자기들은 날아오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날개가 꺾이기 일보직전이라는 걸 모르는 거지. 재미있지 않나? 으하하하핫!”
슈피겔이 즐겁게 웃었다. 부관은 그 모습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식사는 그 뒤로도 2 시간이나 이어졌다. 시간은 충분했기에 다들 여유로웠다. 병사와 기사들도 그 안에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대충 식사 자리를 정리한 다음, 다시 출발했다. 아무리 여유가 넘치고 인원이 많아 안전하다고 해도 하이쓰
산맥은 하이쓰 산맥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사람이 죽고 다치는 곳이었다.
헥서 왕국군은 차근차근 하이쓰 산맥을 넘어 진군해 나갔다.

제론은 들판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봤다. 새까만 하늘에 점점이 박혀 반짝이는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아름답군.”
초고대문명에는 놀랍게도 저 반짝이는 별을 직접 찾아가려는 시도가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그런 일을 시도했는지
자세히 기록된 문서도 존재했다.
제론은 그 문서를 읽으며 상당히 감탄했다. 문서의 내용은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들이었다.
“저 반짝이는 별 하나하나에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과 비슷한 곳이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지? 정말로 믿기
어려워.”
하지만 이제는 믿는다. 초고대문명의 마법 아티팩트를 통해 별 하나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가까운 별이었기에 멀리 볼 수 있는 아티팩트를 통해 확인이 가능했다. 지금 이곳에서 확인 가능한 별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초고대문명은 멸망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살아갈 다른 세상을 원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별에서 찾았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초고대문명의 힘으로도 다른 별로 이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그 일이 해결된다 하더라도 살아갈 만한 환경을 갖춘 별을 찾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초고대문명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멸망을 맞이했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제론도 알지 못했다. 거기에
대해서 남아 있는 기록이 없었으니까.
제론은 한참 동안 별을 보다가 태블릿을 꺼냈다.
헥서 왕국군은 하이쓰 산맥을 넘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하이쓰 산맥에는 특별한 유적이 있었다.
제론은 하늘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밤중이라 어둡기 그지없었지만 제론에게는
아무 상관 없었다.
하늘에 떠 있는 아티팩트는 대단히 특별했다.
“아주 편안히 쉬고 있군. 그건 좀 곤란하지. 이쪽은 병력이 좀 모자라거든.”
제론은 미리 저들이 이동할 경로 중 싸우기 좋은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헥서 왕국이 먼저 시작했으니 거리낌 없이 그들을 칠 수 있었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했다. 헥서 왕국군의 규모가 너무 컸다. 저들을 상대하려면 제법 피해가 클 것이다. 더구나
제론이 데려온 병력은 정규군이 아니었다.
“과연 얼마나 해낼 수 있을까.”
제론은 몸을 일으켜 들판에 쫙 펼쳐져 있는 막사들을 쳐다봤다. 막사의 수는 수십 개나 되었다. 그곳에서
에어스트 왕국의 기간트 라이더가 자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정식 라이더가 아니라 견습 라이더였다. 정규군에 편성되기 전에 혹독한 훈련을 쌓는 과정에 있는
자들이었다.
실력은 정규군에 비해서 많이 떨어지지 않지만, 실전 경험이 좀 모자랐다. 최소한 오우거라도 상대해 봐야 하는데,
그런 경험도 없었다.
물론 다른 왕국의 라이더와 비교하면 전혀 손색이 없었다. 아니, 훨씬 실력이 뛰어났다. 다만, 실전 경험이
모자랄 수는 있었다.
제론은 그런 견습 라이더를 무려 200 명이나 데려왔다. 그들에게 지급한 기간트는 몰레스였다.
에어스트 왕국은 정규 라이더의 기간트를 전부 아모르로 교체했기 때문에 원래 쓰던 기간트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당연히 견습 라이더의 몫이 되었다.
사실 더 좋은 기간트를 지급할 수도 있었지만, 기종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몰레스를 지급했다. 200 명이나 되는
라이더에게 지급하기에는 몰레스보다 더 뛰어난 기체의 수가 많이 모자랐다.
제론은 저들로 방어망을 구성하고 혼자서 나가 싸울 작정이었다. 이번 기회에 테오스와 그의 기사들, 이스히스,
타히티, 마크리아와 함께 싸워 볼 생각이었다.
솔직히 타히티의 지원만 받아도 상당할 것이다. 테오스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타히티가 적을 견제해 준다면
무서울 게 뭐 있겠는가.
한데 이스히스와 마크리아까지 있다.
제론은 솔직히 어떤 적이 몰려오든 승산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도 적의 힘을 빼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지. 할 수 있는데 안 할 이유가 없잖아?”
그런 걸 방심이라고 한다. 사실 아직 에어스트 왕국은 많은 부분이 모자랐다. 왕국의 규모도 모자랐고,
내부적으로 완벽히 안정되지도 않았다.
더구나 한창 영토를 늘려 나가는 입장이라서 혼란이 더 심했다. 물론 미리 준비한 인재 덕분에 혼란을 최소로
막아 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니 여유를 부리고 있을 입장이 아니었다. 어떤 싸움이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Chapter 5 헥서 왕국의 공격 (2)

제론은 태블릿을 손가락으로 슥슥 그었다. 예전에 한 번 써먹은 방법이라 더 간단했다.


태블릿을 통해 적 상황을 보면서 날씨 조절 아티팩트를 이용했다. 아마 저들은 하이쓰 산맥을 넘느라 모든 기력을
다 소모해야 할 것이다.
“기습을 할 필요는 없겠지? 아니, 할까?”
제론은 잠시 고민했다. 테오스를 타고 타히티를 불러 기습하면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도 기회로 활용해야지. 우리 견습 라이더에게 좀 더 안전한 상황에서 실전을 겪게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결정을 내린 제론은 다시 바닥에 누웠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며 제론의 눈동자 속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젠장! 또 비야? 이놈의 산맥, 정말 치가 떨리는군.”


슈피겔은 짜증을 넘어 분통이 터졌다. 하필이면 이럴 때 날씨가 이 모양이란 말인가.
하이쓰 산맥이 위험한 곳은 맞지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종종 산맥을 넘은 사람도 있고, 또
거대한 원정을 준비해 산맥을 넘어 상행을 다닌 상단도 드물지만 존재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하이쓰 산맥에 이렇게 비가 많이 온다는 정보를 주지 않았다.
“사령관 각하. 아무래도 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뭐가 말인가?”
“꼭 비구름이 우리를 쫓아오는 것 같습니다.”
슈피겔이 피식 웃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비구름이 우리를 쫓아와? 왜? 갑자기 등장한 대마법사가 날씨 조절 마법이라도
썼나?”
현재 마법은 기간트를 만들기 위한 부분을 제외하면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다. 마법사도 전투에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한데 날씨 조절 마법이라니. 그건 아무리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도 구현이 불가능한 마법이었다. 아예 존재하지가
않으니까.
만일 누군가 그런 마법을 만들어 냈다면 크게 이름을 떨쳤을 것이다.
그런 마법사가 갑자기 등장해서 하이쓰 산맥에 비를 내리게 한다? 그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비구름을 보면 그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부관의 말에 슈피겔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시커먼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한데 부관의 말대로
먹구름이 좀 작긴 했다. 일단 의심을 가지고 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흐음.”
슈피겔은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번 의심을 시작하니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설마…….”
“어떻게 할까요?”
“일단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아직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 진군 속도를 조금 늦춘다. 체력 비축을 우선으로
하고, 조심해서 이동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산사태의 조짐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말고.”
“사방으로 정찰병을 파견하겠습니다.”
슈피겔은 부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수상한 먹구름이 하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호오. 이놈들 조심성이 대단한데?”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려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확실히 헥서 왕국군 사령관은 능력이
뛰어난 자였다.
그런 자가 이끄는 군대가 약할 리 없었다. 또한 훈련 상태가 어설플 리도 없었다.
아마 정면에서 맞붙으면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제론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습이라…….”
결국 이대로는 적의 힘을 소진시키겠다는 계획이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남은 건 기습뿐이었다.
물론 기습을 주로 할 수는 없었다. 기습을 하면 적도 쉬지 못하지만 기습을 하는 당사자도 쉬지 못한다.
‘나 혼자서 기습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제론은 그것도 자신 있었다. 제론에게는 테오스도 있고, 타히티도 있었다.
타히티를 이용한 기습전을 펼치면 적도 동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정을 내린 제론은 견습 라이더들을 대기시키고는 하이쓰 산맥으로 들어갔다.
지금 이 순간, 헥서 왕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론은 빠르게 산을 내달렸다. 여전히 날씨 조절 아티팩트는 헥서 왕국군 근방에 비를 쏟아 내고 있었다.


당연히 시야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그것을 적절히 이용했다. 지반이 물러진 상태에서 강한 충격을 주면 산사태가 일어난다. 문제는 엄청난
수의 정찰병이었다.
정찰을 통해 지반이 물러지거나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으면 빠르게 보고를 해서 진군 방향을 조절했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지반을 다져 무너지지 않게 바닥을 보강했다.
그러니 날씨를 이용해서 피해를 강요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제론은 일단 정찰병을 정리하기로 했다. 정찰병만 없어져도 작전을 펼치기에 상당히 유리했다.
하이쓰 산맥은 워낙 컸기에 정찰병의 수도 많았고, 또 정찰할 지역도 많았다.
‘일단 하나 발견.’
제론은 자신이 미리 만들어 놓은 지반을 향해 이동하는 정찰병 무리를 발견하고는 씨익 웃었다.
고작 7 명이었다. 익스퍼트에 이르지도 못한 병사 7 명은 제론이 손만 슬쩍 휘둘러도 처리가 가능했다.
제론은 빠르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신호를 보낼 틈도 줘선 안 된다. 그럴 때는 은밀함이 생명이었다.
바람보다 빠르게 이동해 정찰병들의 뒤를 잡은 제론은 그대로 검을 뽑음과 동시에 휘둘렀다.
스아악!
7 명의 목에 동시에 가느다란 실선이 생겨났다.
투두둑.
7 명의 정찰병은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는 사이 목이 떨어져 죽었다.
소드 마스터만이 보일 수 있는 일격이었다.
제론은 태블릿을 꺼내 아티팩트를 통해 산맥을 위에서 살폈다. 미리 준비한 지점 근방을 지나는 정찰병을 찾기
위함이었다.
“여기 또 있군.”
준비 지점을 향하는 정찰병은 아니었지만 근방을 통과하기에 지반 상태를 확인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었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내 비 때문에 질척질척한 지역에 들어섰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곳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것만으로 힘겹겠지만,
제론에게는 평지를 달리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번에도 정찰병의 뒤를 잡았다. 인원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7 명이었다.
아티팩트를 통해 정찰병의 위치와 상황을 훤히 꿰고 있었기에 그들을 기습하는 건 정말 간단했다.
스아악!
제론의 검이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투두둑.
7 개의 목이 떨어졌다. 이로써 준비 지점으로 향하는 정찰병을 모두 처리했다. 이제는 헥서 왕국군이 목표 지점을
통과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제론은 근처에 앉아 태블릿을 꺼냈다. 이제는 타이밍을 맞춰야 하기에 적의 동태를 더욱 세심히 관찰해야만 했다.
“음? 이놈들 봐라?”
한동안 적의 모습을 확인하던 제론이 눈을 빛냈다. 헥서 왕국군이 기간트를 소환하고 있었다. 은밀히 이동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기간트를 꺼내면 적지 않은 부담이 될 터였다.
한데도 기간트를 꺼냈다는 건, 분명히 적 사령관이 뭔가를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대단한데?”
제론은 적 사령관의 결단에 감탄했다. 만일 기간트를 소환하지 않고 산사태를 맞이한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기간트를 몽땅 소환했으니 아무리 산사태가 일어나도 최소한의 피해만으로 막아 내는 것이 가능했다.
각 기간트에게 커다란 방패를 지급해 무너지는 토사물을 막기만 해도 상당한 수의 병사를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래도 준비한 걸 썩힐 수는 없지.”
제론은 적당한 타이밍을 잰 다음 테오스를 소환했다. 아무리 지반이 물러져 있다 해도 산사태를 일으킬 정도의
충격을 주려면 기간트의 힘이 필요했다.
테오스의 주먹이 희미하게 빛났다. 마나코어가 맹렬히 돌며 온몸에 마나를 공급했다. 더불어 제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거대한 회전을 시작했다.
우우우웅!
주먹에 모인 마나가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테오스가 주먹을 높이 들었다가 바닥을 찍었다.
꾸웅!
거대한 울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우르르르.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테오스의 주먹이 떨어진 자리를 중심으로 금이 쩍쩍 갔다.
꽈르르릉!
약해진 지반이 그대로 무너졌다.
테오스는 허공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떠오른 테오스의 발밑으로 흙더미가 쏟아져 내려갔다.
산사태가 일어났다.
우르르르르르르릉!
굉음을 토해 내며 쏟아지는 토사물이 산자락을 훑으며 내려갔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헥서 왕국군을 향해
나아갔다.
무너진 지반 위에 서서 쏟아지는 토사물을 보던 테오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이 아니면 기습의 기회가
없었다. 어쨌든 전력을 제법 많이 깎아 내야만 했다.
테오스의 신형이 순식간에 산 아래로 사라졌다. 그런 테오스의 뒤로 타히티가 눈부신 빛과 함께 나타나 따라갔다.

“방패 박아!”
슈피겔의 명령이 떨어지자, 나란히 선 기간트들이 거대한 방패를 땅에 푹 꽂았다. 그리고 어깨로 그것을 단단히
받쳤다.
그 방패가 쏟아지는 토사물을 막아 낼 것이다.
꽈르르르릉!
무지막지한 양의 토사물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헥서 왕국군을 덮쳤다.
“버텨! 무너지면 뒤에 있는 병사가 죽는다! 어떻게든 버텨! 뒤에 선 기간트들 뭐 하나! 밀리지 않게 등을
받쳐!”
방패를 든 기간트의 뒤에 서 있던 동료 기간트가 어깨로 등을 단단히 받쳤다. 쏟아지는 토사물의 힘은 기간트
혼자 버티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꽈과과광!
토사물이 연이어 방패를 때렸다. 그러면서 계속 흘러갔다.
헥서 왕국군은 기간트가 든 방패를 이용해 비스듬하게 산 아래로 길을 만들었다. 토사물을 정면으로 막는 건
힘들었기에 비스듬하게 흘려 버렸다.
모든 것은 슈피겔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방패와 방패의 틈으로 토사물이 좀 쏟아져 들어오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기간트 뒤에 숨은
병사들은 안전하게 보호되었다.
이대로라면 무사히 산사태를 막아 낼 수 있을 듯했다.
슈피겔은 그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대처하길 잘했군.”
정찰병과의 연락이 끊기자마자 기간트를 소환시켰고, 이런 대처를 만들었다.
예상보다 산사태가 조금 늦게 온 덕분에 충분히 대처를 할 수 있었다. 슈피겔은 정찰병과 연락이 끊긴 이유가
산사태에 파묻혔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급하게 준비를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한 덕분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꽈앙! 꽈앙!
토사물에 밀려온 나무나 바위가 방패를 두들길 때마다 기간트들이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산사태는 한순간에 몰아친다. 이제 거의 끝났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슈피겔이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때, 눈부신 빛이 중간에 선 기간트의 등을 꿰뚫었다.
꽈아앙!
꽈르르릉!
방패를 받치던 기간트가 힘없이 무너졌다. 그 기간트를 받치던 기간트는 쏟아지는 토사물에 동료 기간트의
무게까지 더해지자, 그걸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꽈르르르릉!
빈틈을 통해 참사가 벌어졌다. 기간트 뒤에 숨어 있던 병사들을 토사물이 덮친 것이다. 빈틈은 일단 생기면 더
크게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대로 양옆의 기간트까지 토사물에 쓸려 넘어지고 말았다. 빈틈이 더 커졌다. 그리고 빈틈이 커진 만큼 피해도
늘어났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연이어 빛줄기가 날아왔다. 그것은 타히티가 쏘는 빛의 화살이었다.
꽈앙! 꽈앙! 꽈앙!
기간트들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아직 산사태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렇게 산사태가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쓰러진 수십 기의 기간트로 인해 산사태의 마지막 포효를 막아
내지 못했다.
토사물이 병사들을 그대로 덮쳤다. 그리고 산 아래로 쓸려 내려가 버렸다.
꽈르르르릉!
거대한 울림을 동반한 산사태가 산 아래로 쏟아져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적막이 찾아왔다.
산사태가 끝난 것이다.
Chapter 5 헥서 왕국의 공격 (3)

슈피겔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눈앞에 벌어진 참상을 바라봤다.


“이럴 수가…….”
토사물에 쓸려 내려간 기간트가 수십 기에 달했다. 게다가 거의 1 천 명에 가까운 병사를 잃었다.
물론 전체 규모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은 손실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사기였다. 이번 산사태로 인해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슈피겔은 옆에서 명령을 기다리는 부관을 향해 힘없이 말했다.
“정리해라.”
“예. 알겠습니다.”
부관이 서둘러 명령을 정리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꾸역꾸역 움직여 부상자를 수습했다. 그리고 기간트들이
나서서 주변을 정리했다.
일단 오늘은 더 이동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서 하루를 쉬면서 제대로 정비를 해야만 했다.
슈피겔은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방비를 해야만 했다. 그는 분명히 보았다. 기간트를 꿰뚫는
빛줄기를 말이다.
그것은 빛의 화살이었다. 누군가 멀리서 저격을 한 것이다. 믿기가 어려웠지만 말이다.
일단 그걸 막아야만 했다.
“부관! 기사단장들을 몽땅 데려와!”
기사단장은 라이더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수십 명의 기사단장이 각각의 기사들을 맡고 있었다. 그들을 몽땅
모은다는 건 뭔가 특별한 지시를 내리겠다는 뜻이었다.
부관이 서둘러 움직였다. 슈피겔에게는 10 명의 부관이 있었는데, 각각 슈피겔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게 안 되면 언제든 부관의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기사단장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슈피겔에게 명령을 받았다. 처음에는 황당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당시 그 모든 광경을 멀리서 확실히 지켜본 사람은 슈피겔뿐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간트를 꿰뚫을 정도로 강력한 빛의 화살이라니, 그게 말이 되나?”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어쩌면 누군가 고대유적에서 아티팩트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그걸
빼앗아야 하지 않을까?
기사단장은 각자의 자리에서 모든 라이더에게 경계를 하라고 지시 내렸다. 기간트를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기간트를 꿰뚫을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라면 절대 맨몸으로 받아 낼 수 없었다.
일단 경계를 통해 적의 위치를 특정해야만 했다.
기간트들이 사방에 자리를 잡고 경계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하늘을 통해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제론은 기간트의 경계 상황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몇 번만 더 흔들어 주면 되겠군.”
굳이 여기서 모든 싸움을 끝낼 생각은 없었다. 이건 견습 라이더에게도 좋은 기회였지만, 제론에게도 제법
매력적인 기회였다.
현재 헥서 왕국군이 동원한 기간트의 수는 500 기가 넘었다. 외부에서 보기에 에어스트 왕국은 전력을 이번
전쟁에 투입했다.
왕궁을 지키는 기간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해도 500 기의 기간트면 넘칠 정도로 과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가면 상황이 전혀 달랐다. 이번에 제론이 동원한 견습 라이더의 수가 무려 200 명이었다.
그들에게 몰레스라는 동일 기체를 지급할 정도로 풍부한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것이 에어스트 왕국의
저력이었다.
제론은 혼자서 500 기에 달하는 기간트와 싸울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혼자서 싸울 생각은
없었다. 타히티와 이스히스, 그리고 마크리아도 동원할 것이다.
그들과 함께 미리 짜 맞춘 진형을 테스트해 보고, 또 테오스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확인할
계획이었다.
그 와중에 제론의 손이 미처 닿지 않은 적들은 제론이 함께 데려온 견습 라이더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적이 길목을 뚫지 못하도록 굳건히 막는 역할만 충실히 수행하면 된다.
그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적의 수가 상당히 많았으니까. 어쩌면 거의 비슷한 수의 적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도록 제론이 최대한 애쓸 테지만 말이다.
만일 뚫렸을 경우의 대비도 어느 정도 해 뒀다.
현재 여기서 갈 수 있는 영지는 정해져 있었다. 그 영지의 방어를 보강했다. 상당한 수의 기간트를 투입했다.
물론 견습 라이더도 함께 투입했기에 웬만한 공격은 방어가 가능했다.
허무하게 뚫려서 대부분의 병력을 고스란히 보낸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제론은 테오스에 탄 채로 적의 방어 상황을 계속해서 살폈다.
“타히티를 이용하는 게 제일 좋겠군.”
제론은 테오스로 기습하되 타히티의 지원을 받기로 결정했다. 타히티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적을 저격하면 아마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제론은 타히티를 이끌고 자리를 이동했다.
타히티의 배치가 중요했다. 평지였다면 거리가 별 상관 없었겠지만, 하이쓰 산맥은 나무와 바위가 엄청나게 많고
험했다.
그러니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빈틈을 통해 저격이 가능한 장소를 선점해야만 했다.
산사태가 벌어질 때는 가까이서 저격을 했기에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니 자리를 잘 잡아야만 했다.
일단 산 정상으로 간 다음 천천히 내려오면서 시야를 확인했다. 그렇게 절반쯤 내려왔을 때, 적당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커다란 바위 위였는데, 나무로 가려져 있긴 하지만 그 틈을 파고들 수 있다면, 즉, 실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습이 가능한 자리였다.
그리고 타히티는 그 정도 빈틈을 찌를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
타이티를 그곳에 배치시킨 제론은 테오스를 타고 조용히 이동했다.
테오스는 기본적으로 마법이 가능한 기간트였다. 제론과 똑같은 실력을 가진 기간트인 셈이었다. 게다가 마법의
위력은 훨씬 컸다.
마나링의 크기부터 다르니 동원할 수 있는 마나의 양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마나링을 가속하며 소리와 기척을 없앤 테오스는 빠르게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지금.”
제론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타히티가 미리 준비한 화살을 날렸다.
큐우우웅!
빛의 화살이 나무와 나무 사이의 빈틈을 꿰뚫고 나아갔다. 그리고 헥서 왕국군의 기간트 중 하나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꽈앙!
화살의 위력은 엄청났다. 순수하게 에너지로만 이루어진 화살답게 충돌과 동시에 강력한 충격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
그 충격으로 인해 기간트의 가슴이 부서졌고, 에너지가 흩어지는 여파에 의해 라이더가 절명해 버렸다.
“적이다!”
헥서 왕국군이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일단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병력을
보내는 것이 정석이었다.
큐우우웅!
“또 날아온다!”
빛의 화살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왔다. 기간트들이 분분히 흩어졌다. 하지만 화살을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꽈앙!
기간트의 어깨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걸로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저쪽이다! 서둘러!”
슈피겔은 큰 소리로 명령했다. 그는 아주 안전한 곳에 숨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이 죽거나 다치면
끝장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전에 이런 일이 있을 경우 나서기로 한 기간트 부대가 우르르 움직였다.
그리고 그 앞을 테오스가 막아섰다.
“뭐냐!”
숨은 적을 찾아 나서려던 기간트 부대의 책임자인 기사단장이 테오스를 향해 소리쳤다. 그는 정말로 당황했다.
정황상 적이 분명했는데, 얼른 반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잠시의 빈틈은 테오스에게 있어선 아주 좋은 기회였다.
테오스의 검이 눈부신 속도로 기사단장이 모는 기간트의 배를 찔렀다.
콰득!
파지직!
그 한 방에 마나코어가 박살 났다.
테오스는 바람처럼 움직였다. 다가오던 기간트 무리로 슬쩍 파고들어서 풍차처럼 검을 휘둘렀다.
콰콰콰콰콰!
10 기의 기간트가 순식간에 해체되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가슴이 갈라졌다.
테오스는 그렇게 한 다음 유유히 사라졌다.
슈피겔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며 너무 당황해서 쫓으라는 명령을 내리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빛의 화살이 또 날아왔다.
큐우우우웅!
꽈득!
기간트의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슈피겔은 그 모습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뭣들 하고 있나! 가서 잡아!”
이번에는 10 기가 아니라 거의 100 기에 가까운 기간트가 움직였다. 누가 움직일지 특정 지어 주지 않으니
한꺼번에 우르르 달려간 것이다.
하지만 슈피겔은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수가 많을수록 좋았다. 방금 본 테오스의 능력은 가공했다. 10 기나
되는 기간트를 한순간에 썰어 버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100 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숫자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그냥 마구
달려들기만 해도 제압이 가능했다.
큐우우웅!
콰득!
빛의 화살이 또 날아왔다. 달려가는 100 기의 기간트 중 하나가 그대로 쓰러져 동료의 발에 짓밟혔다.
하지만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일단 적을 잡는 게 먼저였다.
큐우우웅!
콰득!
또 한 기의 기간트가 무너졌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무려 7 기의 기간트가 더 빛의 화살에 꿰뚫려 쓰러졌다.
그리고 그제야 그들은 커다란 바위 위에 서서 빛의 화살을 겨누고 있는 타히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큐우우웅!
빛의 화살이 날아왔다. 어찌나 빠른지 누구도 반응하지 못했다.
콰득!
가슴이 꿰뚫려 또 한 기의 기간트가 쓰러졌다. 하지만 다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그저 달렸다.
저놈을 잡기만 하면 팔다리를 잡아 뜯고 조종석을 뽑아내겠다고 벼르고 또 별렀다.
쿵쿵쿵쿵쿵!
기간트들이 달리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타히티는 적이 지척에 이르렀는데도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눈부신 빛이 길게 늘어나 화살이 되었다.
큐우웅!
빛의 화살이 날았다. 그리고 바로 앞에 막 도착한 기간트의 가슴을 그대로 꿰뚫었다. 그것만으로 모자라 뒤에
바짝 붙어서 달려오던 기간트의 가슴에 그대로 박혔다.
꽈앙!
꽈득!
두 기의 기간트가 쓰러졌다. 하지만 뒤이어 도착한 다들 기간트들이 쓰러진 동료를 밟고 몸을 던졌다. 그들의
손이 우악스럽게 타히티를 움켜쥐었다.
후웅!
꽈과광!
몇 기의 기간트가 헛손질을 하며 바닥에 넘어졌다. 커다란 바위 위였기에 일부는 바위에서 떨어져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놀랍게도 그들이 잡은 것은 타히티의 잔상이었다.
타히티는 적 기간트의 손에 닿기 직전 고속 이동을 통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찌나 빨리 이동했는지 잔상이
남을 정도였다.
무려 100 기의 기간트가 농락당한 것이다.
타히티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로 어떻게 이동했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Chapter 5 헥서 왕국의 공격 (4)

슈피겔은 분통을 터트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에 떨었다.


적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기간트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발굴형 기간트가 분명했다.
그 위력은 정말로 무시무시했다. 혼자 난입해 수십 기의 기간트를 순식간에 썰어 버렸다. 게다가 그 멀리서 빛의
화살을 날려 기간트를 하나하나 무력화시켰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기간트 아닌가.
그나마 다행인 점은 수가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보아하니 2 기가 전부인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기습의 규모가
훨씬 커졌을 것이고, 피해도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테니까.
“후우, 피곤하군.”
슈피겔은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피로가 갑자기 몰려왔다. 그것은 비단 지금 벌어진 습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으로 이런 습격이 몇 번이나 더 있을지 모른다. 그게 지금 입은 피해보다 훨씬 큰 문제였다.
“치가 떨리는군.”
조금 전 난데없이 등장해 아군 기간트를 무너뜨린 새까만 기간트의 움직임을 떠올린 슈피겔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두려웠다. 그 기간트를 상대로 싸울 자신이 없었다.
슈피겔은 헥서 왕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뛰어난 기간트 라이더였다.
그렇기에 붉은 학살자를 상대로도 싸워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주변 기사들의 도움을 좀 받아야겠지만
말이다.
한데 그 검은 기간트는 아예 상대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아무리 주변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순식간에
나가떨어질 게 분명했다.
“기간트의 성능 자체가 달라.”
어쩌면 기간트 문제가 아니라 라이더 문제일 수도 있지만 슈피겔은 억지로 그렇게 생각했다. 만일 그게 기간트
문제가 아니라 라이더의 실력 문제라면 자괴감이 더 커질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슈피겔은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쉬지 못하고 한껏 긴장한 상태로 경계에 여념이 없었다. 강제로라도 쉬게 해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슈피겔도 경계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무방비한 상태로 그런 강력한 기간트의 습격을 받으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질 공산이 컸다.
그것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하이쓰 산맥을 완전히 넘기 전까지는 이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산맥을 넘고 난 다음에는 평지가
계속되니 빠르게 이동이 가능할 것이다. 또 경계를 하기에도 더 편하고 말이다.
슈피겔은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피곤했다.

Chapter 6 초고대 기간트의 위용 (1)

습격을 성공적으로 끝낸 제론은 다시 견습 라이더가 머무는 진지로 돌아왔다.


당연히 태블릿을 통해 헥서 왕국군의 상태를 꾸준히 확인했다. 그들은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 제론은 그들의
피로를 가중시키기 위해 날씨 조절 아티팩트를 다시 한 번 가동시켰다.
이번에는 굳이 산사태를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그저 피로를 더 가중시키고 몸 상태를 악화시키고자 했다.
습격 이전이라면 별 효과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대단히 효과적으로 적의 체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헥서 왕국군은 산맥에서의 습격이 정말로 위험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렇기에 행군 속도를 높였다.
그런 상황에서 쏟아지는 비는 그들의 체력과 체온을 순식간에 빼앗아 버렸다.
드디어 제론의 의도가 제대로 먹혀들게 된 것이다.
제론은 일단 그걸로 만족했다. 남은 일은 저들과의 싸움을 확실하게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카이트는 잘하고 있으려나?”
최근 며칠 헥서 왕국군을 상대하느라 에어스트 왕국군의 싸움에 아예 신경을 쓰지 못했다.
“간만에 여유가 생겼으니 좀 살펴볼까?”
제론은 태블릿을 통해 에어스트 왕국군의 상황을 확인했다. 또한 그동안 밀렸던 바인의 보고서도 차근차근 읽었다.
“호오, 벌써 미테 왕국을 정리했군.”
카이트와 바인이 힘을 모으니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카이트는 바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주력군을 셋으로
나누었다.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고 하지만, 미테 왕국에 남은 병력이 그리 많지 않아서 전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셋으로 나누는 바람에 효율이 높아져 진군 속도에서부터 점령 속도까지 모든 것이 빨라졌다.
원래 미테 왕국은 그 크기가 슈린 왕국이나 레늄 왕국에 비해 조금 손색이 있었다. 그렇기에 점령하는 데 걸린
시간도 비교적 짧았다.
전투다운 전투는 처음에 한 번 했을 뿐, 그 이후에는 큰 어려움 없이 각 영지를 복속시켜 나갔기 때문에 그야말로
순식간에 미테 왕국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인가?”
어차피 처음 레늄 왕국을 공격했을 때부터 거기까지 염두에 두었다. 또한 헥서 왕국도 안 끼었다면 모를까 끼어든
이상 가만둘 생각은 없었다.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의 전쟁은 여전히 치열했다. 일진일퇴의 공방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양국의 피해가 점점 극심하게 쌓여 가는 중이었다. 보유 기간트의 수도 급격히 줄어들었고, 병력도
상당히 많이 소모되었다.
전쟁은 돈 먹는 괴물이었다. 양국의 재정 상황도 점차 악화되는 중이었다.
애초에 전쟁이 금방 끝날 거라고 믿었던 체스터 공국 쪽의 타격이 훨씬 컸다.
하지만 벨룸 왕국도 무사하지는 않았다. 바인의 정보 조직인 문두스가 경제 쪽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며
조금씩 재정을 갉아먹고 있었다.
조만간 양국은 돌이키기 어려운 치명적인 상황에 봉착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에어스트 왕국이 진격할 시점이었다.
“체스터 공국과 밸룸 왕국을 동시에 정리해도 되겠군.”
물론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적당한 시기가 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그동안 카이트는 에어스트 왕국군을 한데 모으기만 하면 된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군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저력이 워낙 대단한지라 병합한 왕국의 안정화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서도
바인의 문두스가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정보 조직은 정말로 쓸모가 많았다.
제론은 모든 보고서를 읽고 카이트의 상황을 확인한 다음 태블릿을 집어넣었다.
“이제 남은 건 몰려오는 헥서 왕국군을 완벽하게 박살 내는 것뿐인가?”
제론이 씨익 웃었다. 자신 있었다. 슈피겔이 이끄는 부대는 헥서 왕국의 주력군이었다. 그것만 무너뜨려도 헥서
왕국의 전력을 절반 이상 깎은 걸로 봐도 무방했다.
“그럼 슬슬 준비를 해 볼까?”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견습 라이더들을 둘러봤다. 제론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그 미소를 확인한 견습 라이더들이 불안감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날부터 견습 라이더의 지옥 훈련이 시작되었다. 조만간 생명이 오가는 전투가 시작되니 조금이라도 더 생존
확률을 높여 놔야만 했다.
그리고 나흘 후, 헥서 왕국군이 하이쓰 산맥을 벗어났다.

슈피겔은 단단한 진형을 갖춘 몰레스 군단을 보며 이를 갈았다.


“설마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에어스트 왕국에 여전히 저 정도 전력이 남아 있다는 자체가 놀라웠다. 대체
변방의 작은 백작령이 언제 이 정도 힘을 키웠단 말인가.
슈피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희망을 놓지는 않았다. 적의 전력은 몰레스 200 기. 아군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현재 헥서 왕국군은 450 기의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비록 지쳤고 사기도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두 배가
넘는 전력이었다. 그러니 질 리 없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는가이다. 만일 여기서 극심한 피해를 입는다면 애써서 하이쓰 산맥을 넘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특별한 작전이나 전략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주친 상황에서 그런 것이 갑자기 떠오를
리 없었다.
‘대체 이 많은 기간트를 왜 발견하지 못한 거지?’
슈피겔은 짜증이 나면서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방이 확 트인 광활한 벌판이었다. 한데 이렇게 많은 기간트가
보이지 않았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몰레스만 200 기라…….”
헥서 왕국군의 기간트는 다양한 기종이 섞여 있었다. 대부분이 카타락타였고, 그다음으로 많은 기종이
크라테르였다. 물론 몰레스도 어느 정도 있었다.
기사단장 중에는 발굴형 기간트를 보유한 자도 있었지만, 그건 극히 드물었다.
전체적인 기간트의 질이 너무 떨어졌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슈피겔은 질서정연하게 진형을 갖춘 적의 모습을 보고는 수준 차이를 직감했다.
슈피겔이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급조해서라도 그럴듯한 작전을 만들어야만 했다. 아니면 저런 형태의 진형을
파괴할 방법이라도 제시해야만 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에어스트 왕국군 앞으로 새까만 기간트 한 기가 걸어 나왔다.
쿵! 쿵! 쿵!
슈피겔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어찌 저 모습을 잊을 수 있겠는가. 헥서 왕국군을 습격한 바로 그 기간트
아닌가.
테오스가 앞으로 나서자, 그 뒤로 이스히스와 마크리아가 따라나섰다.
그들의 모습도 위풍당당했다. 또한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그 기세는 헥서 왕국군을 압도했다.
슈피겔은 눈살을 찌푸렸다. 테오스는 봐서 안다. 한데 뒤따라오는 저 2 기의 기간트는 대체 무언가. 손에 든
무기를 보니 하나는 도끼를 쓰는 듯했고, 다른 하나는 창을 쓰는 기간트였다.
‘그럼 화살을 쏘던 그 기간트는?’
강렬한 경고가 슈피겔의 뇌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큐우우웅!
빛의 화살이 날아올 때 났던 그 소리가 들려왔다. 슈피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꽈앙!
헥서 왕국군의 기간트 한 기가 완전히 박살 났다. 화살이 가슴에 틀어박힌 순간 폭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테오스가 달려들었다.
쿵쿵쿵쿵!
테오스와 동시에 이스히스와 마크리아도 함께 달렸다.
쿵쿵쿵쿵!
3 기의 기간트가 순식간에 450 기나 되는 기간트 군단을 덮쳤다.
꽈아아아앙!
테오스도 테오스지만 이스히스와 마크리아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스히스가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거기에 맞은 기간트가 허공을 훌훌 날아 동료를 덮쳤다.
마크리아는 마치 수십 개의 창을 동시에 다루는 것 같았다. 마크리아 근처에 있던 기간트는 어김없이 가슴이
꿰뚫려 정지했다.
그리고 테오스는 그 둘을 합한 것보다 더욱 대단한 신위를 보였다.
테오스의 검은 눈부시게 빛났다. 그 빛이 검을 온통 휘감은 채 길게 뻗어 나갔다. 그 빛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싹둑싹둑 잘렸다.
테오스를 중심으로 수십 기의 기간트가 고철이 되어 쓰러졌다.
슈피겔은 일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는
거칠게 외쳤다.
“다들 뭐 하고 있나! 한꺼번에 달려들어! 그동안 수도 없이 연습한 합공은 뒀다 뭐 하나! 어서 움직여!”
슈피겔의 외침은 적절했다. 헥서 왕국의 기간트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테오스에게 대항했다.
꽈과과광!
테오스에게 동시에 10 기의 기간트가 달려들었다. 공간의 제약이 있어 동시에 공격하는 건 사실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들이 하려는 건 테오스를 그저 덮치는 것뿐이었다.
일단 덮쳐서 움직임을 봉쇄한 다음 처리하는 작전이었다. 기간틱 마스터를 상대할 때 쓰려고 만든 전투법이었다.
테오스뿐 아니라 이스히스와 마크리아에게도 각각 10 기씩의 기간트가 달려들었다.
일단 멀리서 포위한 다음, 급격히 거리를 줄이며 도망갈 방향을 차단하며 덮치는 방식이었다.
10 기의 기간트가 동시에 달려들면 그 뒤에 20 기의 기간트가 뒤를 받쳤다. 혹시라도 빈틈으로 빠져나갈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30 기의 기간트가 하나를 위해 동원된 셈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기간틱 마스터라면 그 정도 희생은
충분히 고려할 만했다.
사실 아무리 기간틱 마스터라 할지라도 10 기의 기간트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버거운 일이었다. 더구나 이렇게
막무가내로 덮쳐서 움직임을 봉쇄하려는 경우는 더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이 작전은 실제로 붉은 학살자를 겨냥해서 만들어졌다. 슈피겔이 생각해 낸 전투법이기도 했다.
슈피겔은 이 방법을 쓰면 아무리 붉은 학살자라도 피할 수 없다고 자신했다. 점프를 통해 빠져나가도 뒤에서
대기하는 다른 기간트에 의해 움직임이 제한될 테니 말이다.
Chapter 6 초고대 기간트의 위용 (2)

꽈과과광!
이스히스와 마크리아는 그 진형에 갇혀 버렸다. 일단 점프를 통해 빠져나가려 했지만 뒤에 대기하던 다른
기간트들이 달려들어 똑같은 진형을 만들어 가둬 버린 것이다.
10 기의 기간트가 마크리아와 이스히스에게 매달렸다. 아무리 두 기간트의 힘이 강해도 10 기의 기간트가 붙들고
늘어지는 걸 쉽게 떨쳐낼 수는 없었다.
슈피겔은 그것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 특이한 새로운 형태의 발굴형 기간트를 잡았으니 그 성과가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건 성급한 판단이었다. 에어스트 왕국 측에는 아직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기간트가 하나 있었다.
큐웅! 큐웅! 큐웅! 큐웅! 큐웅!
빛의 화살이 연이어 무더기로 날아왔다. 날아오는 방향은 놀랍게도 하이쓰 산맥 쪽이었다.
꽈과과과광!
이스히스와 마크리아에게 매달려 있던 기간트 몇 기가 순식간에 박살 나며 떨어져 나갔다.
이스히스는 특유의 괴력을 이용해 온몸을 휘둘렀다.
꽈과과과광!
팔다리에 매달려 있던 기간트들이 마치 인형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동료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꽈아아앙!
이스히스가 던진 기간트는 헥서 왕국군 측 기간트 몇 기를 동시에 뭉개 버렸다.
그렇게 달라붙은 적을 떨쳐 낸 이스히스는 빠르게 이동해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리고 다시 학살을 시작했다.
마크리아 역시 비슷했다. 일단 양팔에 붙은 기간트를 빛의 화살이 날려 버리고 나니 창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키이이이이잉!
마크리아가 풍차처럼 창을 휘둘렀다. 창이 빙글빙글 돌며 가공할 풍압을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 창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창의 회전이 만들어 내는 바람에 빛이 실렸다. 사방으로 빛가루가 휘날리며 다리와 몸에 달라붙은 기간트들에게
날아갔다.
콰콰콰콰콰콰!
기간트들이 갈려 나갔다. 조각조각 부서져 사방으로 잔해가 튀었다.
그렇게 마크리아도 자유로워졌다.
마크리아는 빠르게 포위망을 벗어나며 사방으로 창을 찔러 댔다.
쩌저저저저정!
가슴이 꿰뚫린 기간트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마크리아도 이스히스와 마찬가지로 학살을 시작했다.
테오스는 이스히스나 마크리아와는 조금 달랐다.
제론은 다른 라이더와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테오스의 능력은 그 어떤 기간트도 견주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다.
심지어는 이스히스나 마크리아도 테오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포위를 해서 달려든다고 해도 테오스를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무려 10 기의 기간트가 한꺼번에 달려드는데도 제론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가 넘쳤다.
제론의 눈에는 기간트가 동시에 달려드는 걸로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앞서고 뒤선 기간트가 존재했다.
테오스가 가장 먼저 달려온 기간트를 향해 한 발 나아가며 손을 내밀었다.
콰득!
테오스가 기간트의 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당기며 허벅지를 걸어 버렸다.
꽈앙!
기간트가 벌렁 뒤집어지며 달려들던 동료 기간트의 중심에 떨어졌다.
꽈과광!
졸지에 동료의 손에 잡힌 기간트가 처참하게 우그러졌다.
테오스는 아주 여유롭게 포위망을 벗어났다. 하지만 미리 대기 중이던 20 기의 기간트가 재빨리 달려들었다.
조금 전의 광경을 봤기에 섣불리 덤벼들지 않고 천천히 거리를 좁히며 포위망을 굳건히 다졌다.
테오스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다가 발에 힘을 꽉 주었다.
꽈앙!
테오스가 폭발적으로 달려 나갔다. 앞으로 점프를 하듯 나아갔는데, 워낙 속도가 빨라 그 잔상조차 잡지 못했다.
꽈과광!
테오스의 어깨가 앞을 막은 기간트의 가슴에 박혔다. 그 한 방에 기간트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그 정도로
테오스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포위망을 벗어난 테오스의 검이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슈가가가가각!
사방으로 기간트 잔해가 흩날렸다. 테오스의 검격은 무시무시했다. 게다가 걸리는 모든 걸 잘라 내니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슈피겔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그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이대로는 절대 승산이 없었다.
그제야 슈피겔의 시선이 질서정연하게 진형을 갖추고 있는 에어스트 왕국의 몰레스 군단에게로 향했다.
슈피겔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저길 뚫어라! 일단 뚫고 나가!”
아직은 수가 많아서 압도할 수 있었다. 저 위력적인 기간트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저쪽을 뚫고 도망치면 된다.
이기지 못할 거라면 최소한 에어스트 왕국에 피해는 줘야만 했다. 뚫고 나아가 영지 몇 개라도 박살 내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목표한 대로 네이드 영지를 차지하거나.
슈피겔의 명령은 정확히 전달되었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까지 기사단장들과 충분히 여러 전략에 대한 논의가
있었기에 다들 목표를 명확히 세우고 있었다.
쿵쿵쿵쿵쿵쿵!
기간트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테오스를 비롯한 초고대 기간트에게 당한 자들이 제법 많았지만, 전체와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는 수였다.
아직도 헥서 왕국군 측에는 수백 기의 기간트가 남아 있었다.
그 모든 기간트가 일제히 달렸으니 얼마나 위용이 대단하겠는가. 아쉬운 점은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 않아
파괴력이 반감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했다.
넓게 포진한 몰레스 군단은 긴장감을 끌어 올리며 마나엔진을 맹렬히 돌렸다. 달려드는 적을 몸으로 저지해야만
했다.
키이이이이잉!
꽈과과광!
양측이 충돌했다. 당연히 수가 많은 헥서 왕국군 측이 유리했다. 에어스트 왕국군은 뒤로 쭉쭉 밀려났다.
에어스트 왕국군은 진형을 제대로 갖춰서 힘을 집중할 수 있었기에 수가 모자라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한계는 아주 명확했다.
이대로라면 몇 분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밀려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최소한 200 기 이상의 기간트가 방어망을
뚫고 빠져나갈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초고대 기간트들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큐우웅! 큐웅! 큐웅!
빛의 화살이 연달아 날아왔다. 그것은 정확히 힘겨루기를 하던 헥서 왕국의 기간트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꽝! 꽝! 꽝!
머리가 사라진 기간트는 그대로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에어스트 왕국의 견습 라이더는 이와 똑같은 상황에 대한 훈련을 충분히 했다. 최근 이 근방에서 하던 지옥 훈련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몰레스가, 힘을 잃고 늘어진 헥서 왕국의 기간트를 발로 세차게 밀었다.
쿠광쾅!
기간트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그 기간트를 밟고 뒤에 있던 헥서 왕국의 기간트가 자리를 채웠다.
하지만 일단 숨을 돌린 상황이었기에 에어스트 왕국의 기간트는 조금 전처럼 밀려나지 않고 팽팽히 힘으로 맞섰다.
큐웅! 큐웅! 큐웅!
빛의 화살은 쉴 틈 없이 날아왔다. 그리고 정확히 힘겨루기를 하는 기간트의 머리통만 날려 버렸다.
꽝! 꽝! 꽝!
늘어진 기간트를 몰레스가 발로 밀어 차 버렸다.
쿠과광!
이와 같은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균형이 맞춰지려고 할 때, 이스히스와 마크리아가 그들의 뒤를 덮쳤다.
꽈과과과과광!
꽈득! 똬득! 꽈득! 꽈득!
이스히스의 도끼가 번득이며 헥서 왕국 기간트의 등판을 갈랐다. 그리고 마크리아의 창이 등을 찔러 조종석을
꿰뚫었다.
전황은 극심한 혼란으로 치달았다.
헥서 왕국군은 뒤통수를 계속 맞는 상황이었지만, 꿋꿋하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전진했다. 어떻게든 앞을
뚫으면 모든 상황이 끝난다고 믿으며 힘을 냈다.
지금은 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테오스가 나섰다.
위이이잉!
테오스의 마나링이 급격히 가속했다. 그러자 정면에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입체 마법진이었는데, 그것은 나타남과 동시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샤아아아아.
쩌저저적!
마법진이 사라지고 나타난 건 얼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창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수백 개나 되는
어마어마한 수였다.
각각의 얼음 창 뒤꽁무니에는 작은 마법진이 매달려 있었다.
그 마법진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며 강렬한 바람을 만들어 냈다.
콰우우우우우!
수백 개의 얼음 창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헥서 왕국 기간트의 뒤를 덮쳤다. 테오스
쪽을 보며 상황을 확인하던 사람은 오직 슈피겔뿐이었다.
슈피겔은 어마어마한 수의 얼음 창이 날아오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꽈드드드드드드득!
얼음 창이 헥서 왕국 기간트들의 등을 파고들었다. 이스히스와 마크리아는 이미 자리를 피한 뒤였다.
수백 개의 얼음 창이 만들어 낸 광경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얼음 창이 어찌나 빠르게 날아갔는지 그 파괴력이 엄청났다. 하나같이 기간트의 등을 꿰뚫고 가슴으로 삐져나올
정도였다.
기간트 한 기에 10 여 개의 얼음 창이 박혔다. 당연히 그렇게 된 기간트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헥서 왕국군의 가장 뒤에 있던 기간트가 일제히 무너졌다. 무려 100 기가 넘는 기간트가 그 한 방에
날아가 버렸다.
꽈과과과광!
뒤 열이 무너지고 나니, 헥서 왕국군의 힘이 훨씬 약해졌다. 압박이 사라지고 나니 에어스트 왕국군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
제대로 진형을 갖추고 지옥 같은 훈련을 견뎌 낸 에어스트 왕국의 견습 라이더는 이제 제법 훌륭한 진짜 라이더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번 실전을 겪으며 한층 더 성장했다. 앞으로는 아모르를 지급받아 실제 전장에 투입되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꽈과과광!
전투는 점점 더 치열해졌다. 아직까지는 팽팽했지만 승기가 어느 쪽에 있는지는 확실했다.
제론은 더 이상 전투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지금은 위기에 처한 자만 도와주면 된다. 그리고 그건
타히티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마무리를 해 볼까?”
제론의 의념을 받은 테오스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히엠스를 탄 헥서 왕구군의 총사령관 슈피겔이
있었다.
쿵! 쿵! 쿵!
테오스가 한 발 한 발 히엠스를 향해 걸어갔다. 히엠스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기세에 압도당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결국 테오스가 히엠스 앞에 섰다.
꽈득!
테오스가 히엠스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13 미터나 되는 히엠스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꽈드드득!
목을 쥔 손에 힘이 더욱 강하게 들어가자, 히엠스의 목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발굴형 기간트는 그냥 강철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주 특별한 고대의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당연히 변형이나
파괴가 쉽지 않았다. 특히 히엠스는 더더욱 특별했다.
한데도 테오스는 아주 간단히 그것을 우그러뜨렸다. 그리고 더욱 힘을 주자, 목이 그대로 끊어져 버렸다.
꽈득!
쿠웅!
목 떨어진 히엠스가 바닥을 굴렀다. 테오스는 그런 히엠스의 가슴에 발을 올렸다.
콰직!
히엠스의 가슴이 그대로 함몰되었다. 그것이 슈피겔의 허무한 최후였다.
히엠스와 슈피겔을 동시에 정리한 테오스가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Chapter 6 초고대 기간트의 위용 (3)

전투는 여전히 치열했다. 하지만 승기는 완전히 에어스트 왕국 쪽으로 넘어갔다.


큐웅! 큐웅!
꽈앙! 꽈앙!
타히티는 여전히 잘해 주고 있었다. 위기에 빠져 라이더의 목숨이 날아갈 상황이 되면 어김없이 빛의 화살이
날아와 상황을 반전시켰다.
그리고 근처에서 지켜보던 이스히스와 마크리아가 망가진 기간트를 뒤로 빼내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빼돌렸다.
거기까지 확인한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테오스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냈다.
이스히스, 타히티, 마크리아는 임무가 끝나면 자동으로 아공간에 들어갈 것이다. 제론이 대륙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말이다.
이곳에서의 일은 모두 끝났다. 전투가 끝나면 견습 라이더들끼리 알아서 전장을 정리하고 부대로 복귀할 것이다.
“다른 견습 라이더들에게도 실전을 경험시켜야겠어.”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슬슬 진짜 전장에 가 봐야 할 때가 되었다.
Chapter 7 새로운 게이트 (1)

에어스트 왕국이 레늄 왕국과 미테 왕국을 순식간에 무너뜨리자,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도 더 이상 전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놀랍게도 에어스트 왕국은 두 왕국을 집어삼키면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즉,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막강한 전력을 이끌고 국경을 넘으면 순식간에 당한다는 걸 잘 알기에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은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군은 국경에 모여 있었다. 왕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기간트 부대가 모두 합류한 것이다.
무려 2 천 기에 달하는 아모르가 고스란히 남았다. 부서진 아모르는 즉시 수리해서 다시 투입되었다.
또한 이 와중에도 에어스트 왕국에 있는 아모르 제작 공장에서는 끊임없이 아모르를 토해 내고 있었다.
제론은 진지에 질서정연하게 줄 맞춰 서 있는 2 천 기의 아모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군.”
확실히 이런 기간트 군단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무려 2 천 기의 아모르였다. 이들이 일제히 진군하면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아무도 아모르에 타고 있지 않다. 기간트만 소환해 놓고 다들 쉬고 있는 중이었다.
제론은 결코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인 카이트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레늄 왕국과 미테 왕국은 가진 바 힘도 크지 않았고, 원래
한 나라였기에 병합도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체스터 공국이나 벨룸 왕국은 그렇지 않다. 거기에 헥서 왕국까지 무너뜨려 흡수하려면 적지 않은
부작용을 감당해 내야만 한다.
그걸 차근차근 해결하면서 전투까지 벌여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이쪽에는 바인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전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망을 갖춘 문두스가 있었다.
그들의 힘을 이용하면 비교적 쉽게 장악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레늄 왕국과 미테 왕국을 병합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겠지만 말이다.
아모르 군단을 보고 있는 사람은 제론뿐이 아니었다. 제론 옆에 카이트도 함께 서 있었다. 카이트 역시 남다른
감회에 잠겨 있었다.
“그나저나 아쉽군요.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이 조금만 더 싸워 줬으면 훨씬 편해졌을 텐데 말입니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하지만 달라질 건 없어.”
“맞습니다. 우리는 강합니다.”
카이트의 어조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위압감 넘치는 기간트 군단을 보고 있으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투지가
끓어올랐다.
“적이 국경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군이 진을 친 곳은 체스터 공국과의 국경이었다. 먼저 체스터 공국을 친 다음 곧장 벨룸
왕국까지 연이어 격파할 계획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무모하다고 기겁했겠지만, 카이트는 자신 있었다. 이번 전쟁은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었다.
“벨룸 왕국이랑 제법 치열하게 싸운 모양이야. 남은 전력이 고작 그것뿐이니.”
카이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예상외였다. 현재 체스터 공국이 배치한 전력은 고작 기간트 1200
기에 불과했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반나절 안에 완전히 뭉개 버릴 수 있었다. 2 천 기의 아모르가 내뿜는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벨룸 왕국의 칼끝이 향한 방향이 좀 걱정됩니다.”
벨룸 왕국도 국경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한데 그 위치가 참으로 애매했다.
레늄 왕국 쪽으로 진격할 태세였다.
물론 벨룸 왕국의 전력도 그리 시원치 않았다. 그들의 전력도 체스터 공국과 비슷했다.
하지만 전혀 방비가 안 된 상태라면 그조차 상당한 위협이 된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전력을 둘로 나누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차근차근 부수면 돼.”
“하지만 저들이 먼저 행동에 나서면 곤란해집니다.”
“그쪽은 충분히 시간을 끌어 줄 병력이 있다.”
카이트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시간을 끌어 줄 병력이라니, 대체 그런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아모르 200 기가 추가로 준비되었거든.”
“200 기나 말입니까?”
카이트는 혀를 내둘렀다. 마치 틀로 기간트를 찍어 내는 것 같지 않은가. 2 천 명의 라이더에게 간신히 기간트를
지급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200 기나 추가했단 말인가.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던 카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아모르를 탈 라이더가 없을 텐데요? 남은 라이더는 대부분 견습이라서…….”
제론이 씨익 웃으며 카이트를 쳐다봤다.
“우리 견습은 실력이 탄탄하잖아. 실전만 겪으면 진짜 라이더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카이트는 퍼뜩 떠오른 게 있어서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다른 왕국이 습격했습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헥서 왕국에서 하이쓰 산맥을 넘어왔다. 덕분에 제대로 된 실전을 경험한 200 명의 라이더가 생겼지.”
카이트의 표정이 밝아졌다. 200 기의 아모르라면 충분히 상대를 견제할 수 있었다. 아니, 그걸 떠나서 자신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문제는 만일의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가 얼마나 빨리 그곳에 갈 수 있느냐, 로군요.”
“금방 갈 수 있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제론은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안 그래도 슬슬 그 부분에 대한 일을 시작할 참이었다.
“점령지를 관리하면서 최우선적으로 텔레포트 게이트를 철수시켰겠지?”
“그렇게 진행했습니다. 현재 우리 왕국과 점령지 내에 남은 텔레포트 게이트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게이트를 관리하던 마법사는?”
“다들 떠났습니다. 확인은 안 해 봤지만 크란 제국 마탑으로 돌아간 걸로 판단됩니다.”
“그렇겠지.”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모두 크란 제국 마탑이 파견한 마법사였다. 사실 냉정히 따지면
마법사라기보다는 장사꾼이나 정보원에 더 가까웠지만 말이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상당히 많이 쓰이는 유용한 시설이었다. 수많은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수시로 사용해 왔다.
한데 이제 그게 사라져 버렸으니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물론 아직까지는 그런 불만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은 전시였고, 병합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점령지의 귀족이나 상인들의 경우는 외출도 조심하는 상황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영주나 귀족을 존중하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없애는 방향으로 처리했기에 다들 숨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조만간 여유가 생기면 분란의 씨앗이 될 것이다. 그걸 미연에 방지하려면 최소한 텔레포트 게이트 정도는
만들어 줘야만 했다.
일단 급한 대로 전장에서 가까운 곳부터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써먹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벨룸 왕국은 그들을 이용해서 견제하면 되니까 걱정할 거 없고, 체스터 공국을 병합하는 것에
집중하도록.”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카이트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체스터 공국은 영토가 그리 넓은 편도 아니었다. 물론 하나에서 넷으로 갈라져 생긴
미테 왕국이나 레늄 왕국보다야 크지만, 그래도 다른 왕국에 비하면 영토가 좁은 편이었다.
문제는 벨룸 왕국이었다. 벨룸 왕국은 구 레늄 왕국보다 오히려 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헥서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그 두 왕국에 비하면 체스터 공국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그 이후 영토를 병합하는 과정이 훨씬 어려웠다. 각 영지가 마음먹고 반항을
시작하면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각 영지가 반항을 하는 바람에 점령을 포기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영지의 반항은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전쟁 상황이 아닌데도 그러니
전쟁으로 점령당하면 얼마나 지독하겠는가.
그걸 생각하면 점령지가 넓으면 넓을수록 제대로 된 병합이 어렵다는 건 불문가지였다.
차라리 식민지로 만들어 착취를 하는 건 훨씬 쉬웠다.
그 왕국의 백성 중 몇을 선발해 권력을 쥐여 주면 된다. 그러면 알아서 수탈을 하고 뇌물을 갖다 바칠 테니까.
하지만 지금 에어스트 왕국이 하려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완벽하게 한 나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그러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적당한 시기에 진군해. 난 텔레포트 게이트 문제를 해결하고 올 테니까.”
카이트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제론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 ☆ ☆

벨룸 왕국군은 모든 전력을 모아 에어스트 왕국이 점령한 곳, 레늄 왕국과의 국경을 향해 진군했다.


기간트를 박박 긁어모으니 1400 기에 달했다. 그 정도 전력이면 단숨에 국경을 무너뜨리고 안쪽 깊은 곳까지
진출이 가능할 것이다.
벨룸 왕국군의 총사령관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공격은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다.
사실 벨룸 왕국 측에서는 에어스트 왕국에 은밀히 사절단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국왕인 제론의 옷자락도 보지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에어스트 왕국의 태도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체스터 공국과 손을 잡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으르렁거리며 전쟁을 벌이던 사이였지만 각각의 위기 앞에서는 얼마든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정치였다.
벨룸 왕국이 맡은 임무는 솔직히 체스터 공국에 비하면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체스터 공국은 정면으로 에어스트 왕국군의 주력과 싸워야만 한다. 그들에게 뭔가 복안이 있으니 그 일을
맡겠다고 스스로 나섰겠지만, 어쨌든 에어스트 왕국군의 어마어마한 전력과 정면으로 붙으면 결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벨룸 왕국군은 텅텅 빈 것이나 다름없는 곳을 짓밟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임무를 맡았다.
물론 그 임무에도 위험이 따른다. 에어스트 왕국군의 전력이 곳곳에 흩어져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무지막지한 전력을 한껏 무리해서 모았다. 그 결과가 1400 기의 기간트였다.
그리고 그들은 국경을 넘기 직전, 에어스트 왕국군을 볼 수 있었다.
“대체…… 저 많은 기간트가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군.”
벨룸 왕국군의 총사령관은 지끈거리는 골치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무려 200 기의 아모르가 보였다.
아모르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1400 기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한 숫자이긴 하지만, 아모르라면
충분히 조심해야만 했다.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200 기의 아모르 뒤로 거의 1 천 기는 될 것 같은 기간트가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즉, 적의 전력은 1200 기가 되는 셈이었다. 그것도 200 기의 아모르를 앞세운 1200 기였다.
이런 상대와 정면으로 싸우면 필패였다. 저걸 어떻게 이간단 말인가.
“에어스트 왕국의 저력이…… 이렇게 대단했나?”
총사령관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현재 체스터 공국과 대치 중인 에어스트 왕국군에는 2 천 기의 아모르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데 여기에 또 1200 기의 기간트가 더 나타났으니 기겁하는 게 당연했다.
결국 벨룸 왕국군은 국경에 진을 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들의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벨룸 왕국은 또 다른 왕국에 도움을 청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가장 먼저 헥서
왕국에 도움을 청했고, 그 외의 다른 나라에도 도움을 청했다.
어쩌면 향후 그들에 의해 왕국이 피폐해질 수도 있지만, 전쟁에 져서 영토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벨룸 왕국군은 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갔다.

Chapter 7 새로운 게이트 (2)

제론이 가장 먼저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하기로 한 곳은 체스터 공국과의 국경 근방에 있는 작은 도시였다.


그곳에는 원래도 텔레포트 게이트가 없었기에 완전히 새로 설치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반드시 설치해야만 했다.
기존의 텔레포트 게이트와는 차원이 다른 게이트였다. 초고대문명의 마법공학이 잔뜩 들어갔으니 당연했다.
제론의 계획은 모든 도시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류의 혁명을 가져올 것이다.
에어스트 왕국이 보유한 상단들은 모두 그에 맞춰 체질을 바꿔 나가고 있었다.
물류의 혁명이 일어나면 기존처럼 물류의 비중이 큰 상단은 그 규모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제론이 설치하려는 텔레포트 게이트는 규모 면에서 기존의 텔레포트 게이트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안전성도 더 뛰어났다.
이는 제론이 9 개의 마나링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이동 방식도 달랐다. 미리 위치를 설정해 놓으면 그저 게이트를 통과하는 것만으로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게다가 거리 제한도 없었다. 기존 게이트는 왕국을 횡단하려면 게이트를 여러 번 이용해야 했는데, 제론의
게이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게이트만 확실히 설치되면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이동하는 것도 간단했다. 더구나 게이트 이용 시 몸에 오는
부담도 전혀 없었다.
기존 게이트는 이용할 때마다 몸에 부담이 쌓여 하루에 한 번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제론의 게이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가.
게이트 설치에 들어가는 비용도 기존의 것에 비하면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건 에어스트 왕국이
무한한 테페룸을 보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론의 게이트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물질은 테페룸과 포로스였다.
그러니 실제로 에어스트 왕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게이트를 만들고자 한다면 기존의 게이트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갈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게이트의 성능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충분히 돈값을 하겠지만 말이다.
도시는 황량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근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게다가 도시를 다스리는 수뇌부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으니 분위기가 뒤숭숭한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래도 에어스트 왕국군은 군기가 엄정해 절대 약탈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들 불안하기는 해도 두려움에
떨지는 않았다.
제론은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광장에 도착했다. 이곳에 게이트를 만들면 다들 편히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은 게이트를 관리할 마법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제론이 만들 게이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게이트 주변을
정리할 병사 한두 명만 있으면 충분했다.
광장은 한산했다. 보통 광장이라면 분수대도 있고 화단도 조성해 놓고 하겠지만, 이 도시는 규모가 워낙 작고,
유동 인구의 대부분이 병사였기에 그런 것조차 없었다.
차라리 그래서 더 편했다.
제론은 광장의 정중앙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구경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기에 시야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위이이이이잉!
9 개의 마나링이 맹렬히 회전했다. 그러자 제론의 발밑에 빛나는 마법진 하나가 그려졌다.
샤아아아아아.
마법진이 부서지며 바닥을 타고 빛가루가 사방으로 흘러갔다.
그와 동시에 광장이 우윳빛 막으로 뒤덮였다.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해 주는 막이었다. 또한 물리력까지 가지고
있어서 함부로 막을 통과해 들어올 수도 없었다.
그렇게 광장을 격리한 제론은 아공간에서 테페룸을 꺼냈다.
마법진의 기본 골격은 테페룸으로만 만들어야 했다.
위이이이이잉!
마나링의 가속이 더욱 빨라졌다. 그러자 제론의 손에 있던 테페룸괴가 흐물흐물해지더니 쭉 늘어났다.
제론은 물러진 테페룸을 주물러 모양을 만들어갔다. 테페룸을 애초에 충분히 꺼냈기 때문에 기본적인 골격을
만드는 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제론은 반구형의 골조를 만들었다. 골조의 모양 자체가 커다란 마법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즉, 반구형의 입체
마법진이었다.
테페룸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은 지속적으로 주변 마나를 흡수한다. 즉, 별도의 마나스톤이 없어도 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골조의 모양이 반구형이었기에 제론은 땅을 팠다. 물론 마법을 이용해 아주 간단히 작업을 끝냈다.
이제 진짜 마법진을 만들 차례였다.
제론은 골조를 이루고 있는 테페룸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위이이이이이잉!
마나링이 굉음을 토해 낼 정도로 맹렬히 가속했다. 그리고 제론의 손끝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제론은 직접 마나를 뿜어내 그걸로 테페룸 골조 위에 선을 새겨 넣었다.
가느다라면서 정교한 문양이 골조에 가득 새겨졌다.
마법진을 모두 새기는 데 무려 5 시간이나 들었다. 그만큼 정교하고 세밀하며 복잡한 문양이었다.
골조에 문양을 새기며 떨어져 나간 테페룸의 양도 상당했다. 물론 제론은 그걸 다시 회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건 그것대로 쓰임이 있었다.
가루나 마찬가지 상태가 된 테페룸을 한데 모아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몽땅 넣었다.
제론은 그 테페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거대한 마법진이 손바닥 앞에 나타났다.
샤아아아아아.
마법진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며 구덩이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러자 테페룸 가루가 흐물흐물해지더니 그대로
녹아 버렸다.
그렇게 액체가 된 테페룸이 제론의 마법에 의해 얇게 펴졌다.
슥슥슥.
마치 붓으로 테페룸을 칠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구덩이가 매끈해졌다. 매끈한 반구형 구덩이가 된 것이다.
테페룸으로 감싸인 구덩이 말이다.
휘이잉.
차가운 바람이 불어 액체가 된 테페룸을 굳혔다.
제론은 거기까지 한 후, 아공간에서 포로스를 꺼냈다. 그리고 테페룸 골조에 새긴 문양에 조심스럽게 포로스를
흘려 넣었다.
포로스가 홈을 빈틈없이 메워 갔다. 그렇게 모든 홈이 포로스로 가득 차자, 제론은 마나를 이용해 포로스를
문양에 안착시켰다.
제론은 그렇게 만들어진 마법진을 구덩이에 넣었다. 마치 미리 맞춘 듯 딱 맞았다.
손바닥을 펼친 제론이 마나를 모았다. 손바닥에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마나가 날아가
구덩이를 가득 메웠다.
번쩍!
강렬한 섬광이 일며 골조와 구덩이를 감싼 테페룸이 하나가 된 듯 붙어 버렸다.
번쩍! 번쩍! 번쩍!
연달아 섬광이 일었다. 골조가 구덩이에 닿는 부분이 섬광과 함께 딱 달라붙었다.
여기까지 했으면 게이트가 거의 완성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면 게이트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마법사가 필요했다.
제론이 원하는 건 체계적으로 게이트를 관리할 사람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리스모스였다.
제론은 아공간에서 리스모스를 꺼내 마법진의 빈 공간에 꽉꽉 채워 넣었다.
리스모스는 테페룸을 가공해서 만들어지는 것 중 하나로, 마나 저장 효율이 엄청나게 좋은 물질이었다.
들어가는 테페룸의 양에 비해 부피가 상당히 컸기에 이렇게 입체 마법진의 빈 공간에 채워 넣는 용도로 쓰기에
상당히 좋았다.
가장 좋은 것은 리스모스를 이용해 마법진을 추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복잡한 마법을 추가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지만, 기존 마법진에 간섭하지 않으면서 연동시키는 것이 가능했기에
잘만 쓰면 정말로 괜찮은 기능을 추가할 수도 있었다.
제론이 원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기능 추가였다.
일단 태블릿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에 조금 전 만든 구조물을 띄웠다. 미리 설계한 마법진이었기에 손가락 몇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 마법진이 상세히 떠올랐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만들어진 마법진 위에 손을 올렸다. 사실 보지 않아도 할 수 있었지만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보이지 않는 부분을 세공해서 마법진으로 만드는 일이었기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사각! 사각! 사각!
리스모스가 사각거리며 갈려 나갔다. 반구형 구덩이 안에 가득 채워진 리스모스가 조각되며 거대한 입체 마법진이
만들어져 갔다.
마법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조각되었다. 리스모스 특유의 마나 저장 능력 덕분에 안이 마나로 가득 채워졌다.
물론 처음에는 제론이 주변 마나를 움직여 안에다 밀어 넣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테페룸 특유의 성질 때문에 주변 마나를 끊임없이 흡수해 저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게이트가 더욱 원활하게 작동되도록 안정감을 부여하게 될 것이고 말이다.
우우우우우웅!
게이트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더니 그 위에 빛으로 이루어진 문이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제론의 텔레포트 게이트였다.
그리고 게이트 옆에 길쭉한 빛의 기둥 하나가 솟아났다. 그 기둥이 바로 리스모스에 새겨진 마법진 때문에 나타난
결과물이었다.
제론은 테스트를 위해 빛의 기둥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러자 눈앞에 새하얀 판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판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다른 게이트가 만들어져야 이 판이 활성화될 것이다. 이미 거기까지
예상하고 마법진을 설계했다.
그 판에는 향후 만들어질 텔레포트 게이트의 위치가 나타날 것이다. 도시 이름과 고유 번호로 이루어진 리스트가
뜰 것이고, 그중 하나를 골라서 게이트로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마법사가 필요 없었다. 누구나 빛의 기둥에 손을 대고 목적지를 고르면 된다.
그렇게 고른 목적지는 게이트 위에 빛으로 이루어진 문자가 되어 떠오르게 되어 있었다.
같은 목적지로 가는 사람이라면 그걸 확인하고 그저 게이트를 통과하기만 하면 된다. 물건이나 마차를 이동시키는
것도 상관없었다.
“일단 몇 군데 더 만들어 봐야 제대로 돌아가는지 확인이 가능하겠군.”
제론은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벨룸 왕국군과 대치를 하는 국경 근처의 도시였다.
그곳 역시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광장에 게이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게이트가 훌륭히 작동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텔레포트 게이트 하나를 만드는 데에 걸리는 총 시간은 무려 7 시간이었다. 그것도 7 시간을 쉬지 않고 만들어야만
했다.
잠자는 시간을 고려하면 하루에 2 개 만드는 것이 한계였다.
하지만 제론은 걱정하지 않았다. 게이트를 만드는 것도 마법진을 그리는 것이나 아티팩트 제작과 비슷했다. 결국
같은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숙련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숙련되면 숙련될수록 제작에 걸리는 시간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지금은 하루에 2 개가 전부지만 조만간 하루에 3 개, 4 개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루에
10 개 이상의 게이트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리라.
제론은 그렇게 확신했다.

☆ ☆ ☆

엠페리움의 최고 회의가 또 열렸다. 같은 장소 같은 사람이 참석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무거웠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지? 계획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최고 회의에서 가장 많은 식은땀을 흘리는 사람은 바로 깁스 남작이었다. 그는 오늘도 원탁에 둘러앉은 수뇌부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꼬일 수 있단 말인가.
“에어스트 왕국의 저력이 엄청나군. 아모르는 구했나?”
“예. 간신히 한 기 구했습니다.”
에어스트 왕국에서는 아모르의 관리가 워낙 철저해 거기서 빼돌리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깁스 남작은
에어스트 왕국이 각국의 주요 인물에게 선물한 것을 은밀히 구입했다.
“분석은?”
“하는 중입니다만, 어렵습니다.”
“어렵다고?”
깁스 남작은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식은땀이 등을 따라 줄줄 흘렀다. 오늘은 정말로 긴장감이 넘쳤다.
당장이라도 목이 날아갈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모든 마법진이 감춰져 있습니다. 몸체를 만든 재료도 생소합니다. 구동 방식도 완벽하게 감춰져 있어서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분해도 안 된단 말인가?”
“구동 방식을 알아내고자 분해를 시도한 부분이 폭발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 사고로 수석 엔지니어 둘이
죽었습니다.”
“안타깝군.”
다른 건 몰라도 수석 엔지니어를 잃은 것은 타격이 컸다. 수석 엔지니어는 고대문명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조직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그들이 죽었다면 조직의 기술력이 퇴보한 거나 다름없었다.
문서로 존재하는 기술과 그걸 몸으로 습득한 사람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Chapter 7 새로운 게이트 (3)

“그 기간트의 설계도를 얻어 내는 건 어떻게 되었나?”


깁스 남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진척된 게 전혀 없었다. 에어스트 왕국에 은밀히 잠입시킨 정보원들이 몽땅 연락이
끊겨 버렸다.
게다가 최근 에어스트 왕국에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모두 철수시켰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얻던 정보도 모조리
차단되었다.
엠페리움 입장에서 보면 에어트스 왕국은 완전히 장막에 가려진 셈이었다.
“좋아. 아모르는 그렇다 치고, 새로 등장했다는 기간트들에 대해서는 조사가 끝났나?”
깁스 남작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 역시 아직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었다. 그저 엄청난 성능을 가진
기간트가 무려 4 종이나 새로 등장했다는 것이 그가 알아낸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알음알음 소문으로 퍼져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어떻게든 알아내게. 설계도까지 입수하면 더 좋고.”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누구도 테오스가 발굴형 기간트라고 믿지 않았다.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발굴형 기간트는
오로지 4 종뿐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번에도 그 침묵을 깬 것은 수뇌부 중 한 명이었다.
“그건 그렇고 전쟁은 어떻게 할 건가? 손써 보기도 전에 당했는데, 만회할 방법이 있나?”
깁스 남작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망할 에어스트 왕국 때문에 꼴이 정말로 우습게 되었다.
설마 에어스트 왕국이 그렇게 빨리 레늄 왕국과 미테 왕국을 정리해 버릴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로 인해 처음
세웠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게다가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의 전쟁도 너무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그 이면에 문두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얼마나 분통을 터트렸는지 모른다.
한데 이제 에어스트 왕국이 체스터 공국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벨룸 왕국까지 노리고 있으니
점입가경이었다.
“이대로라면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은 물론이고 헥서 왕국까지 넘어갈 수도 있다. 대책을 세워야 해.”
“알고 있습니다.”
대답을 하긴 했지만 딱히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에어스트 왕국의 힘이 워낙 대단해서 어설픈 작전을 펼치면
외려 당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만일 에어스트 왕국이 정말로 그 모든 왕국을 아울러 거대한 제국이 된다면
그들은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체스터 공국에 2 천 기의 기간트를 추가로 지원하도록 하지.”
“2 천 기나 말입니까?”
깁스 남작이 깜짝 놀라 원탁의 수뇌부를 바라봤다. 예전이라면 2 천 기쯤 아무것도 아닌 수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엠페리움의 상황이 상당히 악화되었기 때문에 2 천 기의 기간트를 지원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다.
“왜? 어렵나?”
깁스 남작은 그 말에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역량으로 2 천 기를 만들어 지원하라는 뜻이었다. 즉, 조직
수뇌부의 힘을 완전히 배제하고 일을 진행하라는 것이니 순간적으로 반감이 치솟았다.
하지만 깁스 남작은 그저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자신은 힘없는 약자였으니까.
“해 보겠습니다.”
“해 보겠다는 말로는 부족해. 어떻게든 해내게.”
“알겠습니다.”
깁스 남작은 힘없이 물러났다. 2 천 기의 기간트를 자력으로 만들 생각을 하니 골이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떻게들 생각하시오?”
“뭘 말이오? 2 천 기의 기간트를 저놈이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 말이오?”
“훗. 그거야 당연히 만들지 않겠소? 근방의 왕국들을 조금만 찔러도 그쯤이야 만들고도 남을 거요.”
“하면 뭘 말하는 거요?”
“우리도 따로 그 전쟁에 개입해야 하지 않겠소?”
“흐음.”
다들 심각하게 고민에 빠졌다. 그 전쟁은 그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했다. 기간트 전투만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전쟁이었다.
그 전쟁에서 피를 얼마나 많이 흘려 주느냐, 또 얼마나 많은 난민을 발생시키느냐에 따라 향후 엠페리움의 행보가
달라질 것이다.
“켈룸 1 군단을 지원하겠소.”
“호오! 그럼 나도 질 수 없지 네불라 군단을 지원하겠소.”
“네불라? 정말 그걸 내놓을 셈이오?”
“일단 에어스트 왕국을 막아야 하지 않겠소?”
켈룸은 크란 제국에서 만든 양산형 기체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기간트였다. 무려 2.3 의 출력을 자랑하는 기간트로
양산형 출력의 한계를 규정한 기간트이기도 했다.
그리고 네불라는 아직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기간트였다.
비록 출력은 2.1 에 불과하지만 마나코어에서 나오는 출력 일부를 소음 제거로 돌려 은밀한 작전에 유용한
기간트였다.
엠페리움의 기간트 1 개 군단은 300 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니 각각 300 기씩 벌써 600 기의 기간트가 모인
셈이었다.
그러니 다른 수뇌부도 저마다 자신의 힘 중 일부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다른 자들과 비슷하게 맞춰야
했기에 상당한 수의 기간트가 모였다.
“난 누베스 1 개 군단을 내놓겠소.”
“그럼 난 임베르 2 개 군단을 내놓지.”
그렇게 모인 기간트의 수를 모두 합하니 그것만으로도 2 천 기가 넘었다.
깁스 남작이 2 천 기의 기간트를 동원하면 총 4 천 기의 기간트가 추가되는 셈이었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에어스트 왕국이 아무리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도면 안심해도 되겠군. 혹시 모르니 그들을 지휘할 사람을 내가 보내겠소.”
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눈을 빛내며 바라봤다. 무려 4 천 기의 기간트를 지휘할 총사령관이다. 아무나 보낼
수는 없었다.
“크라프트 경을 보내겠소.”
다들 눈을 크게 떴다. 크라프트 경은 엠페리움이 보유한 기사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다. 당연히 소드
마스터였고, 또한 전략에도 밝았다.
“크라프트 경이라면 찬성이오.”
다들 고개를 끄덕이자, 크라프트를 보내겠다고 말한 사람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이견이 없는 걸로 알고 이만 회의를 끝내겠소. 최대한 서두릅시다.”
그렇게 회의가 끝났다. 그리고 전쟁의 변수가 될 수 있는 거대한 병력이 이동을 시작했다.
전쟁의 소용돌이는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고 있었다.

Chapter 8 베젤 평원 전투 (1)

에어스트 왕국군과 체스터 공국군은 베젤 평원에서 대치 중이었다.


카이트는 지금까지 워낙 강행군을 했기에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일단 시작하면 지금까지보다 더 심하게 몰아칠 계획이었기 때문에 피로를 말끔히 없애지 않으면 곤란했다. 자칫
나중에 중요한 순간 심각한 문제가 되면 안 되지 않겠는가.
한데 휴식을 그렇게 며칠을 쉬면서 보니 적진에 묘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더 많은 기간트 병력이 충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뭔가 이상한 조짐을 느낀 카이트는 문두스와의 연락을 시도했다. 그리고 바인으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받을 수
있었다.
“주변국이 도와주고 있다고?”
문제는 체스터 공국의 주변국이 아니라 벨룸 왕국과 헥서 왕국의 주변국까지 몽땅 이곳에 기간트를 지원해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텔레포트 게이트까지 이용해서 빠르게 국경으로 모여들었다.
그 수가 무려 2 천 기에 달했다.
“황당하군. 2 천 기나 되는 기간트가 추가되다니.”
물론 카이트는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니, 이걸 빌미로 나중에 전쟁이 끝난 다음 주변국을 압박할
카드로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일단 날개를 편 이상, 그냥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올 생각은 없었다. 주변국이 이런 식으로 개입하는 건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주는 격이었다.
현재 체스터 공국에는 1200 기의 기간트가 있었다. 한데 주변국에서 2 천 기의 기간트를 지원했으니 총 3200
기가 되는 셈이었다.
카이트는 자신 있었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다.
아모르는 뛰어난 기간트였다. 적 기간트에 비해 성능이 최소 두 배 이상 높았다.
기간트의 성능은 꼭 출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부분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하면 두 배로도 모자랐다.
또한 라이더의 실력도 에어스트 왕국 쪽이 훨씬 뛰어났다. 에어스트 왕국의 모든 라이더는 기간틱 마스터에
버금갈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전력을 가지고 있으니 아무리 적의 수가 늘어났다고 해도 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카이트의 생각은 차츰 바뀔 수밖에 없었다.

“또 늘어났다고?”
카이트는 무려 2 천 기의 기간트가 추가되었다는 말에 기함을 했다. 문제는 그 2 천 기의 기간트가 모두 크란
제국에서 생산된 기간트라는 점이었다.
“크란 제국의 모든 기간트를 모아 놓은 셈이로군.”
카이트는 바인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정보를 확인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적은 총 5200 기의 기간트를 보유한 셈이 되었다. 이는 에어스트 왕국군의 2.5 배가 넘는 수였다.
아무리 아모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정도 전력 차라면 결코 쉽게 볼 수 없었다. 아니, 자칫하다가는 질
수도 있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이대로 싸워서 큰 피해를 입으면 승리해도 문제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곧장 진격해서 체스터 공국을 완전히 점령해야 하는데, 피해가 크면 그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폐하의 기간트라도 있으면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카이트는 제론의 기간트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제론의 기간트는 제론의 실력만큼이나 놀라운 성능을 자랑한다. 그 기간트는 다른 기간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카이트는 실바에서 시작해 히엠스까지 모든 기간트를 겪어 봤다. 또한 최근에는 아모르를 타고 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더 제론의 기간트가 가지는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카이트가 판단하기에 아모르는 오히려 히엠스보다 나았다. 출력은 히엠스가 훨씬 위였지만, 세부적인 성능이
히엠스를 능가했다.
출력이 아무리 높으면 뭐하는가, 그 출력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용해 어떤 힘을 이끌어 내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아모르는 정말로 대단한 기간트였다.
하지만 그 아모르조차 제론의 기간트에 비하면 초라해진다.
아모르를 제론의 기간트와 비교하느니 차라리 낡은 실바를 막 발굴해서 온전한 힘을 낼 수 있는 히엠스와 비교하는
것이 나았다.
게다가 제론에게는 테오스 말고도 새로운 기간트가 3 기나 더 있었다. 대체 그걸 누가 타고 있는지는 카이트조차
몰랐다. 아니, 누구도 몰랐다. 심지어 세나와 바인조차도.
적이 코앞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라 함정도 준비할 수 없었다. 드넓은 평원인지라 특별한 작전을 짜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기껏해야 별동대를 구성해 우회해서 옆을 치는 정도인데, 그것은 오히려 이쪽에서 조심해야 할 작전이었다.
상대는 병력이 월등히 많았다. 그리고 새로 모인 기간트 중에는 크란 제국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네불라가 있었다.
사실 카이트도 네불라라는 기간트는 이번에 처음 들어 봤다. 바인이 알려 주지 않았다면 아마 아직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소음과 기척을 극도로 줄인 기간트라니, 더 골치 아프게 되었어.”
그런 기간트 부대가 밤을 틈타서 기습하면 대책을 세우기가 만만치 않아진다. 더구나 그들은 기동력도 뛰어나다고
하니, 우회 공격도 주의해야 한다.
카이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졌다.

Chapter 8 베젤 평원 전투 (2)

체스터 공국군도 사실 그리 순조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문제는 새로 등장한 총사령관이었다.
각국에서 보내 준 기간트 부대에는 각각의 사령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자신의 능력을 내세워 한
자리라도 차지하려고 기 싸움을 벌였다.
그 와중에 어디에서 보낸 건지 모를 자가 새로운 총사령관으로 등장했다.
문제는 그의 출신이 어딘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다들 그의 정체를 의심했다. 그리고 그가
총사령관이 된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짜증 나는군.”
크라프트는 만사가 귀찮았다. 지금 그는 벽을 깨기 일보직전이었다. 엠페리움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굳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확신했다. 자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조용한 공간이라고, 그곳에서 명상을 통해 마음에 검을 세우고 그것을
갈고닦아야 한다고.
실전이 도움을 줄 시기가 있고, 그것이 오히려 방해가 될 시기가 있는데, 지금은 후자였다. 굳이 실전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
한데 이런 번잡스러운 전쟁터에 온 것도 못마땅한데 어설픈 놈들의 기 싸움까지 보고 있으려니 짜증이 솟구치다
못해 살의가 일었다.
크라프트는 치솟는 살기를 억지로 가라앉혔다. 지금은 이런 살의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지금은 마음을
명경지수처럼 고요히 가라앉혀야 한다.
“후우, 참자. 이러다가 간신히 세운 검이 박살 날라.”
그동안의 명상을 통해 마음에 검 한 자루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제 벽을 깨기 위해 그 검을 갈고닦아야만 한다.
그렇게 벼린 마음의 검으로 벽을 부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 어렵게 세운 검을 여기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다스려야만 했다.
그걸 완성하기만 하면 크라프트는 엠페리움에서 가장 강한 기사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아마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이런 전쟁터에 불려 다니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무엇이든
거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크라프트는 그 부분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을 참아 낼 수 있었다.
“쓸데없는 피를 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잡음을 줄이고 일을 빨리 끝내려면 어쩔 수 없지.”
크라프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감시 겸 경계를 위해 막사 밖을 지키고 있는 호위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휘관을 모두 불러 모아.”
크라프트의 명령에 기사 몇 명이 다급히 움직였다. 어쨌든 그는 공왕이 임명한 총사령관이었다. 또한 다른
지휘관들에게 미리 들은 명령도 있었다.
어쩌면 이번이 총사령관의 기를 꺾을 절호의 기회인지도 모른다.
잠시 소란이 일더니 여기저기서 지휘관들이 모여들었다. 그 수가 상당했다.
무려 5200 기의 기간트가 모인 곳이다. 당연히 지휘관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크라프트는 그것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일단 지휘관을 반으로 줄여야겠군.”
크라프트의 중얼거림은 아주 나직했지만,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었다.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다들 깜짝 놀라 크라프트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이를 갈았다. 지휘관을 반으로 줄인다는 말은 이곳에 있는
지휘관 중 절반을 잘라 낸다는 뜻이었다.
대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사령관! 지금 그 말, 진심이오?”
지휘관 중 하나가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동조하듯 여기저기서 성토가 쏟아졌다.
“우리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요!”
“지휘관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크라프트는 그 많은 성토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지극히 담담한 눈빛으로 지휘관들을 쭉 둘러봤다.
그는 격하게 성토하는 지휘관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리고 검을 뽑았다.
스릉.
크라프트가 검을 뽑자, 다들 깜짝 놀랐다.
“사령관!”
“이게 무슨 짓이오!”
지휘관들도 저마다 검을 뽑았다. 자칫하다간 이대로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또 이번 기회에 사령관을
정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후자의 비중이 훨씬 컸다.
몇몇의 눈빛이 일렁였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모인 지휘관은 모두 익스퍼트
이상이었다.
게다가 한두 명도 아니었다. 이곳의 모두가 나선다면 사령관은 당연히 죽은 목숨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확인했어야만 했다. 크란 제국의 기간트를 끌고 온 지휘관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표정이 긴장감으로 한껏 굳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눈빛 깊은 곳에 일렁이는 두려움을.
크라프트가 귀찮음이 물씬 느껴지는 태도로 검을 휙 내저었다. 마치 얼쩡거리는 파리를 쫓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것을 보며 검을 뽑은 지휘관들은 코웃음을 쳤다. 대체 저게 지금 뭐 하는 것인가.
지휘관들이 힘껏 땅을 박차고 앞으로 돌진했다. 일단 기선 제압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수틀리면 죽여 버리고
말이다.
투두두둑.
촤아아아!
앞으로 나가려던 지휘관의 몸통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그리고 피분수가 쏟아졌다.
크라프트가 눈에 담은 지휘관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몸통이 동강 나서 죽었다.
어마어마한 공포가 좌중을 휩쓸고 지나갔다.
“절반은 남기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쓸 만한 놈이 별로 없군.”
남은 지휘관의 수는 3 할 정도였다. 순식간에 절반이 넘는 지휘관이 죽은 것이다. 이는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크라프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지휘관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당장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뇌리를 뒤흔드는 공포가 그들의
이성을 와구와구 잡아먹었다.
“제자리로 돌아가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며칠 후에 공격을 할 테니까.”
크라프트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막사로 돌아갔다. 그러자 막사 앞을 지키던 호위 기사 5 명의 몸통이 비스듬히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투두둑.
촤아아악!
피분수가 막사 앞을 흥건히 적셨다. 또 한 번의 공포가 해일처럼 좌중을 휩쓸었다.
“명령을 두 번 내리게 할 셈인가?”
막사 안에서 나직한 크라프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사신의 호통보다 더 무서웠다.
남은 지휘관들이 후다닥 물러갔다.
크라프트의 막사 앞은 피비린내와 적막만 가득했다.

크라프트는 체스터 공국군 지휘관들의 정신을 힘과 공포로 짓눌렀다.


만일 그가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할 것이었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크라프트가 원한 것은 짧은
기간 동안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정신을 짓눌러서라도 명령에 절대복종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크라프트는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먹혔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전투 준비를 지시했다.
정신을 짓눌러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했다. 이번 전투는 어떻게 성공적으로 끝낸다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정신을 압박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크라프트는 이번 전투에 모든 걸 걸 생각이었다.
어차피 엠페리움의 명령은 체스터 공국이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크라프트는 이번 전쟁을 끝까지 수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번 전투로 끝낼 계획이었다.
보아하니 에어스트 왕국군은 지금 모인 전력을 완전히 잃으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 듯했다.
이쪽에는 5200 기의 기간트가 있었다. 이 정도 전력을 보존할 수만 있다면 향후 전쟁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즉, 이번 전투에 얼마나 적은 피해로 적을 완벽하게 궤멸시키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리고 크라프트는 그걸 해낼
자신이 있었다.
5200 기의 기간트가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그 광경은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질식할 정도로 위압감이
넘쳤다.
크라프트는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봤다. 별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이길 전쟁이었다. 자신이 나선 이상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크라프트는 자신의 기간트를 소환했다. 그의 기간트는 히엠스였다. 일단 그가 가진 역량을 소화해 낼 수 있는
기간트가 현재는 그것뿐이었다.
히엠스에 탑승한 크라프트는 한 손을 번쩍 들어 에어스트 왕국군의 진영을 가리키며 외쳤다.
“진군!”
5200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쿵!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울림이 규칙적으로 반복되었다. 5200 기의 기간트가 만들어 내는 발 구름 소리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크라프트는 히엠스를 움직여 조금 떨어진 곳에서 느긋하게 그 뒤를 따라갔다.
일단 작전은 세웠다. 5200 기의 기간트 중 일부는 크게 우회할 것이다. 당연히 네불라 부대를 쓸 것이다.
밤에 기습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괜히 기습 사실을 들켜서 네불라 부대를
잃어버리는 게 오히려 더 손해였다.
지금 정면 대결을 하면서 은밀히 빼돌려 우회 기습을 하는 편이 훨씬 큰 효과를 얻어 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마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기만 하면 최소한의 피해로 적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무려 300 기나 되는 네불라가 적의 뒤를 친다면 순식간에 적의 후미가 무너지지 않겠는가.
일단 진형이 무너진 적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그때부터는 오합지졸을 상대하는 거나 다름없어진다. 아무리
대단한 기간트를 몰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크라프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의 히엠스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그가 기다리는 건 사실 에어스트 왕국의 아모르 군단이 아니었다. 저 뒤에 있을 진짜 신형 기간트였다.
피가 끓어올랐다.
“휘유. 저걸 어떻게 상대한다…….”
설마 저렇게 많이 모일 줄은 몰랐기에 카이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이길 자신은 있었다. 카이트는 그만큼 아모르의 힘을 믿었다.
하지만 그냥 이긴다고 전부가 아니었기에 난감했다. 에어스트 왕국은 계속 전력을 공급받기가 어려웠다. 사실
힘겨운 전쟁을 이어 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피해를 최소로 줄여야만 했다. 그게 어려웠다.
“아무튼 준비를 해야겠지.”
카이트가 막 방어 진형을 짜라고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그 옆에 밝은 빛무리가 일어났다.
“헉!”
카이트는 허리에 매달린 검을 꽉 쥐었다. 하지만 빛이 사라지고 나타난 사람을 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폐하!”
제론이었다. 딱 맞춰서 나타난 것이다.
“벌써 시작했나?”
“아직 거리가 좀 있으니 대처할 시간은 있습니다.”
카이트는 다급히 말하고는 적진을 바라봤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진형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니 상당히 훈련을 잘 받은 라이더였다.
“수가 많군.”
“예. 5200 기쯤 됩니다.”
“정면으로 붙으면 우리 피해가 제법 크겠는데?”
“아무래도…….”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쓸 만한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어쨌든 제론은 테오스의 주인이었다.
“내가 해결하지. 저들의 진형을 무너뜨릴 테니까 돌격 준비를 해.”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는 적을 살폈다. 그리고 눈을 빛냈다. 적진 후미에서 은근슬쩍 뒤로 빠지는 일단의
기간트 부대를 발견했다.
“뒤통수까지 때리려고 준비 중이었군.”
제론은 머릿속으로 몇 가지 작전을 구상했다. 일단 우회 기동하는 적은 섬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300 기라…… 적당하군.”
300 기 정도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정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제론이 빠져 버리면 이쪽에 문제가 생긴다.
300 기가 빠져 봐야 4900 기가 남는다. 그 정도 숫자면 4900 이든 5200 이든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내가 빠지지 않으면서 저들을 섬멸할 방법이라…….’
남은 방법은 딱 하나였다. 제론은 함정을 파서 우회 기동하는 별동대의 발을 묶어 두기로 했다.

Chapter 8 베젤 평원 전투 (3)

“자, 다들 준비하라고 해.”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테오스를 소환했다. 소환과 동시에 탑승이 되는 테오스의 특징에 따라 테오스는
나오자마자 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위이이이이잉!
테오스의 마나링이 맹렬히 가속했다. 함정을 파는 데에는 마법이 최고였다.
테오스가 옆으로 팔을 쭉 뻗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쫙 폈다. 그러자 그 앞에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이제 제론은 더 이상 테오스의 존재나 위력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테오스의 힘이 잘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안전해진다.
제론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앞으로 계속 규모를 키워 갈 기간트 군단이 있었다.
샤아아아아아.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지며 빛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 빛가루가 바람을 타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제론의 눈에는 빛가루가 날아가는 방향 멀리 있는 300 기의 기간트 부대가 똑똑히 보였다. 빛가루는 그곳을
목표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촤촤촤촤촤!
빛가루가 결국 빛줄기로 변해 300 기의 기간트를 덮쳤다. 그 기간트 부대가 빛줄기에 맞더니 환하게 빛났다.
그렇게 빛무리에 휩싸인 그들은 그대로 이동을 멈췄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거대한 빛무리가 생겨났다. 가끔 꿈틀거리긴 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제론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처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앞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기간트
군단이었다.
이번에는 테오스가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직 마법을 펼칠 때는 아니었다. 하지만 미리 준비해서 타이밍을 딱 맞춰야만 했다.
“돌격 준비!”
카이트의 명령이 떨어지자, 2 천 기의 아모르가 일제히 움직여 진형을 바꾸었다.
방어 진형을 돌격 진형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에어스트 왕국군의 라이더는 이 정도
진형 변형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심지어 돌격 중간에 진형을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쿵! 쿵! 쿵! 쿵!
체스터 공국군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슬슬 돌격을 시작할 타이밍이었다.
위이이이이잉!
테오스의 마나링이 가속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9 개의 마나링을 모두 써야 할 정도로 큰 마법이었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어찌나 복잡하고 아름다운지 다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마법진은 나타난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뒤로도 마나링이 계속 가속하며 점점 자라났다.
복잡한 문양이 자라나 반경이 커지는 광경은 정말로 경이로웠다.
그렇게 자란 마법진이 마치 거대한 벽처럼 앞을 가려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다음이 되어서야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샤아아아아아아아.
빛가루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마치 하늘로 강물이 흘러가는 듯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높이까지 올라갔다.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테오스가 손을 내렸다. 거기에 타고 있는 제론은 숨을 훅 내쉬었다. 정말로 힘들었다. 상당히 어려운 마법이었다.
테오스의 힘을 빌려서 펼쳤기에 5 천 기에 달하는 기간트를 덮칠 만한 마법이 되었다.
만일 제론이 맨몸으로 펼쳤다면 그 정도 위력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테오스가 고개를 돌려 카이트가 탄 아모르를 쳐다봤다.
카이트는 그 신호를 바로 알아차렸다.
“돌격!”
카이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모르 군단이 일제히 달려갔다.
쿵쿵쿵쿵쿵쿵쿵!
엄청나게 빠르게 달리는데도 진형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모르 군단이 달려들자, 체스터 공국군은 오히려 속도를 늦췄다. 돌격을 그대로 받을 이유가 없었다.
크라프트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적절한 명령을 내렸다. 속도를 줄인 것도 모두
크라프트의 명령에 의해서 이뤄진 일이었다.
돌격하는 적은 길을 터 주며 옆을 공략하면 된다.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타이밍이 엄청나게 중요했다.
크라프트는 그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그를 위해 지휘관의 마음을 짓누른 것이다.
크라프트가 적당한 타이밍을 잡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크라프트는 물론이고 체스터 공국군의 모든 기간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들 경악했다.
하늘에서 뭔가가 잔뜩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들이 하늘을 꽉 메워 빛이 가려진 것이다.
“대체 저게 뭐지?”
크라프트가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곧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주먹만 한 쇳덩어리였다.
그것들이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콰우우우우우!
쇳덩어리는 내려오면서 점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뜨겁게 달아오른 쇳덩이가 일제히 바닥을 때렸다. 당연히 그
사이에 있던 기간트들 역시 쇳덩이에 얻어맞았다.
피할 겨를이 없었다. 워낙 광범위하게 쏟아졌기에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었다.
꽈과과과과과과과광!
크라프트는 자신에게 떨어진 쇳덩이를 향해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쩡! 쩡! 쩡! 쩡! 쩡!
수십 개의 쇳덩이를 옆으로 쳐 냈다. 그럴 때마다 온몸에 충격이 쌓였다. 그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쉿덩이를 모두 쳐 냈을 때 그의 검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우그러지고 뜯어져 더 이상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크라프트는 멍하니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바라봤다. 무려 4900 기의 기간트가 거기에 있었다. 한데 몸이 성한
기간트는 거의 없었다,
완전히 뭉개진 기간트가 중앙 부분에 몰려 있었고, 움직일 수는 있지만 전투가 불가능한 기간트가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리고 비교적 멀쩡한 기간트가 외곽에 있었다.
어쨌든 이대로는 적을 상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어스트 왕국의 아모르 군단은 딱 그 시기에 짓쳐 들었다.
꽈과과과과광!
2 차 피해가 발생했다. 비교적 멀쩡했던 기간트들이 완전히 부서져 나갔고, 뭉개진 기간트는 짓밟히는 바람에
고철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전투가 불가능한 기간트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이건…… 말도 안 돼…….”
크라프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조건 승리할 거라 자신했다. 한데 이게 대체 뭔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쿵! 쿵! 쿵!
크라프트 앞에 아모르 한 기가 다가왔다. 크라프트는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아모르를 바라봤다.
그 아모르의 주인은 카이트였다. 크라프트는 직감적으로 눈앞의 기간트가 적의 사령관임을 알아차렸다.
“일단 머리부터 차근차근 잘라 가야겠군.”
전투에서는 졌지만 최소한 사령관의 목이라도 가져가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라도 안
하면 위신이 서지 않았다.
크라프트의 히엠스가 찌그러진 검을 들어 아모르를 겨눴다.
아모르가 달려들었다.
꽈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이번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제론은 전장을 슥 둘러봤다. 압도적이었다. 그런 큰 마법을 썼으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마법은 9 개의 마나링을 풀가동하고도 펼치기 어려운 마법이었다. 적 전력이 너무 많아서 살짝 무리를 한
것이다.
하늘 높은 곳에 쇳덩이를 소환해 떨어뜨리는 마법으로 그저 쇳덩이가 떨어지면서 얻는 힘만으로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엄청난 위력의 마법이었다.
만일 마법을 조금 변형시켜서 쇳덩이의 크기를 키우고 높이를 더 높이면 지형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위력도 낼
수 있었다.
어쨌든 어려운 마법이었지만 그걸 성공시켰고, 그로 인해 전투가 훨씬 수월해졌다.
아군의 피해는 극히 미미할 것이다. 이미 초토화된 적을 그저 유린하기만 하면 끝이었으니까.
제론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적 사령관과 대치 중인 카이트가 보였다.
적 사령관의 역량이 상당한 것 같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적 사령관의 히엠스에는 충격이 쌓여 있었다.
실제로 카이트의 실력이 조금 모자라겠지만 기간트 성능의 차이가 있으니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제론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빛무리를 쳐다봤다.
“내가 저것만 해결하면 되겠군.”
그곳에는 300 기의 네불라가 있었다. 그것만 정리하고 나면 이 전투는, 아니, 이 전쟁 자체가 사실상 끝나는
거나 다름없었다.
테오스가 천천히 빛무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어느새 테오스 뒤로 타히티, 이스히스, 마크리아가 하나씩
나타나 따라갔다.

네불라 부대의 대장인 츠바이는 억지로 당황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주위를 둘러봤다.
온통 새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주변에 있는 동료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던 츠바이는 갑자기 아래에서 뭔가가 휙 솟아나자 깜짝 놀라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나타난 것은 거대한 오우거였다. 새까만 오우거였는데, 츠바이는 저런 색의 오우거가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크워어어!”
오우거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츠바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쩌저저정!
츠바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무슨 오우거가 이렇게 강해!”
오우거의 팔이 네불라의 검을 모두 막아 냈다. 팔이 잘라져야 하는 게 당연한데, 너무 멀쩡했다.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쿠오오오!”
오우거가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부우웅!
풍압이 네불라의 몸을 흔들 정도로 강력했다. 츠바이는 깜짝 놀라 검을 들며 몸을 비틀었다.
쩌어엉!
빗겨 막았는데도 충격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츠바이는 기겁을 하며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네불라 특유의 민첩한 움직임이 오우거의 두 번째 공격을 간신히
피해 냈다.
후웅!
쩌저저저저저정!
네불라의 검이 오우거의 몸을 난타했다. 팔로 막았을 때와는 달리 몸에서는 피가 튀었다. 하지만 그 어떤 상처도
깊지 않았다.
그저 베는 것만으로는 큰 타격을 입힐 수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오우거의 상처가 거의 즉시 아물어 버린다는 점이었다.
“정말 괴물이로군.”
츠바이는 기가 질렸다. 대체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잠깐 여유를 가지니 슬슬 다른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 괴상한 빛무리에 갇힌 것은 자신뿐이 아니었다.
동료들도 함께 갇혔다.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자신도 이렇게 고전하는데 동료들은 과연 무사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젠장!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츠바이는 이를 악물었다. 검은 오우거가 또 달려들었다. 오우거의 주먹에 무지막지한 바람이 뭉쳐 휘몰아쳤다.
후웅! 후웅!
츠바이의 네불라가 오우거의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그리고 검을 그대로 찔렀다.
꽈득!
네불라의 검이 오우거의 가슴을 꿰뚫었다. 온 힘을 다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오우거는 고작 그 정도로 죽지 않았다. 오우거가 네불라를 꽉 끌어안았다. 가슴이 꿰뚫린 채로 기간트를
옥죄는 오우거의 힘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꽈드득! 꽈득!
네불라가 비틀어지며 부서지는 소리가 몸 곳곳에서 들려왔다. 츠바이는 크게 당황했다.
“이익!”
네불라가 몸부림쳤다. 하지만 오우거의 힘이 워낙 대단한지라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도 조금씩 비틀어 틈을 만들 수 있었고, 네불라는 결국 검을 뽑으며 푹 주저앉아 오우거의 품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촤악!
가슴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콸콸 쏟아지는 피를 보고 있으니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츠바이는
이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Chapter 8 베젤 평원 전투 (4)

오우거의 가슴이 서서히 아물어 갔다. 당연히 쏟아지는 피도 줄어들었다.


“크워어어어어!”
오우거가 포효하며 자신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쾅쾅쾅쾅쾅!
그리고 다시 츠바이의 네불라에게 달려들었다. 츠바이는 죽을 맛이었지만 그래도 오우거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솔직히 이제는 좀 할 만했다.
그렇게 오우거를 다시 상대하려고 할 때, 갑자기 휘청거리며 균형이 무너졌다.
“어? 뭐지?”
츠바이는 그 순간 자신의 눈앞을 가렸던 빛이 모두 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당연히 검은 오우거도 빛과 함께
없어졌다.
그리고 몸이 서서히 기울어졌다.
“뭐지?”
츠바이는 크게 당황했다. 빛이 사라지고 나니 사야가 확 열렸다. 동료들이 탄 네불라가 보였다. 그들은 다들
제자리에 서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동료들이 대체 왜 저러는지, 또 자신은 왜 이렇게 넘어지고 있는지 말이다.
쿠웅!
츠바이의 네불라가 바닥에 쓰러졌다. 츠바이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아니, 자신이 탄 네불라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다리 하나가 사라졌다. 뭔가가 뜯어낸 듯했다. 그제야 츠바이의 눈에 다가오는 새까만 기간트가 보였다.
새까만 기간트, 테오스가 검으로 네불라의 가슴을 푹 찍었다.
그것이 츠바이가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제론은 테오스를 타고서 주위를 둘러봤다. 제론이 테오스를 통해 펼친 마법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러니
네불라들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서서 우왕좌왕 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왕좌왕하는 네불라들 사이로 타히티의 화살 하나가 날아갔다.
큐웅!
꽈드득!
네불라 한 기의 어깨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네불라에게 이스히스가 다가갔다.
이스히스는 망설임 없이 도끼로 네불라의 머리를 찍어 버렸다. 네불라는 그 공격에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콰직!
네불라의 머리가 둘로 쪼개졌다. 그것도 모자라 가슴도 절반이나 갈라졌다. 당연히 그 안에 있던 라이더도
절명했다.
큐웅!
콰득!
타히티의 화살이 네불라 하나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크리아가 네불라의 가슴에 창을 찔러
넣었다.
꽈드득!
네불라의 가슴이 소용돌이치듯 창에 의해 말려들어 가며 함몰되었다. 이번에도 라이더는 절명했다.
그런 식으로 타히티의 화살이 날아갈 때마다 네불라가 하나씩 쓰러졌다.
테오스도 그 안에 합류했다. 닥치는 대로 네불라를 베어 내는 테오스의 신위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렇게 네불라 부대 300 기의 기간트가 순식간에 전멸했다.
테오스가 펼친 환상 마법의 위력이 너무 대단했기에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기간트 부대 하나를 괴멸시킨 것이다.
네불라 부대를 정리한 제론은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장도 거의 정리가 끝나가는 분위기였다.
남은 건 적 사령관인 크라프트와 에어스트 왕국군 사령관인 카이트의 대결뿐이었다.
꽝! 꽝! 꽝! 꽝!
둘의 대결도 거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대결은 백중세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카이트의
아모르가 크라프트의 히엠스를 조금씩 압도하기 시작했다.
크라프트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은 소드 마스터였다. 물론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기간트에 타면 한계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보통 라이더에 비하면 월등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한데 저 보잘것없는 놈의 기간트를 박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밀리는 중이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히엠스가 강하게 발을 구르며 검을 내리그었다. 벼락같은 일격이었다.
하지만 아모르는 비스듬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그 공격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려 버렸다. 그와 동시에 아모르의
팔꿈치가 히엠스의 겨드랑이를 그대로 찍었다.
꽈득!
겨드랑이가 움푹 들어가며 히엠스가 비틀거렸다. 강한 충격에 잠시 균형을 잃은 것이다.
크라프트의 능력이 워낙 뛰어나 금세 균형을 잡았지만, 그를 상대하는 카이트의 실력도 엄청났다.
아모르가 재빨리 파고들었다. 히엠스가 균형을 막 잡았을 때, 이미 아모르의 다리가 히엠스의 다리를 건 상태였다.
아모르가 어깨로 히엠스를 밀었다. 그러자 다리에 걸려 히엠스가 그대로 넘어갔다.
쿠웅!
바닥에 누운 히엠스를 아모르가 밟았다.
콰득!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히엠스는 미처 피하지도 못했다. 바닥에 채 쓰러지기도 전에 아모르가 다리를 들고
있었으니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었다.
히엠스의 발목이 찌그러졌다. 아모르가 노린 부위가 바로 그곳이었다. 히엠스의 기동력을 빼앗기 위한 공격이었다.
또한 시야에 닿지 않는 곳을 공격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회피를 미연에 방지했다.
일단 발목이 찌그러진 히엠스는 더 이상 조금 전처럼 활발한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다.
바닥을 굴러 몸을 일으켰지만, 승부는 이미 난 거나 다름없었다.
아모르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히엠스가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아모르의 어깨가 히엠스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꽈앙!
히엠스가 허공에 붕 떠서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꽈과광!
히엠스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가슴이 함몰되면서 라이더인 크라프트가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이다.
그걸 마지막으로 체스터 공국과의 첫 번째 전투가 끝났다. 비록 한 번의 전투에 불과했지만, 그 규모나 상황을
따지면 향후 일어날 그 어떤 전투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이 전투가 전쟁의 흐름을 결정해 버렸다.
당분간 에어스트 왕국군을 제대로 막아 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

Chapter 9 흡수 (1)

베젤 평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에어스트 왕국군은 그 여세를 몰아 체스터 공국을 차근차근 무너뜨려 나갔다.
그러는 와중에 벨룸 왕국과의 국경에서 소소한 전투가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거의 비슷한 전력으로 대치하고 있으니 단숨에 큰 전투로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국지전은 상당히 빈번하게 벌어졌다.
그리고 그런 식의 국지전이 조금씩 벨룸 왕국의 전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거기에 당황한 벨룸 왕국은 무리를 해서라도 증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왕국의 재정을 탈탈 털어
기간트를 구입하고, 그것을 전장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좋은 선택은 아니었지만, 벼랑 끝에 몰린 벨룸 왕국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에어스트 왕국이 벨룸 왕국보다 훨씬 발 빠르게 움직였다.
국지전을 통해 상대의 전력을 잔뜩 깎은 다음 곧장 치고 들어간 것이다.
에어스트 왕국의 선봉에 선 200 기의 아모르가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벨룸 왕국군은 국지전에서 야금야금 병력을 잃어 기간트의 수가 1 천 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 상황에서 200 기의 아모르가 벨룸 왕국군의 진형을 뒤흔들고, 그 뒤를 나머지 기간트 군단이 들이밀고
들어가니 제대로 대항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사실상 양측의 라이더 실력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에어스트 왕국군의 라이더는 전부 견습, 혹은 채 견습
딱지도 떼지 못한 신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단지 아모르 200 기의 힘이 큰 격차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어쨌든 에어스트 왕국군은 벨룸 왕국과의 첫 번째 전투를 대승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비록 약간의 피해를 입긴
했지만, 그쯤이야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그로 인해 벨룸 왕국만 다급해졌다. 어떻게든 기간트를 조달해 전력을 맞출 생각이었는데, 채 그렇게 하기도 전에
당해 버렸으니 이젠 더 이상 손 쓸 방도가 없었다.
결국 벨룸 왕국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국왕을 비롯한 주요 귀족들이 몽땅 옆 나라로 망명을 해 버렸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벨룸 왕국과는 더 이상 치열한 전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비 라이더로 구성된 에어스트
왕국군은 국경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벨룸 왕국의 영토를 정리해 나갔다.
체스터 공국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첫 전투에 쏟은 전력이 워낙 막대했는지라, 더 이상 기간트를 투입할 여력이 없었다.
반면 에어스트 왕국군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체스터 왕국도 벨룸 왕국과 같은 선택을 했다. 공왕을 비롯한 주요 귀족들이 옆 나라로 망명을 한 것이다.
체스터 공국도 그렇게 벨룸 왕국도 그렇고, 왕족이나 귀족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망명을 하면서
그 모든 걸 싸 들고 갈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은 상당한 재산을 포기하고 목숨을 구걸하러 떠났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나라를 수복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결과가 어찌 되었건 수뇌부가 몽땅 사라진 덕분에 에어스트 왕국은 비교적 손쉽게 두 왕국을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령과 흡수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제론은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을 완벽하게 흡수하기를 원했다.
더불어 아직 남아 있는 헥서 왕국도 꿀꺽 삼킬 계획이었다.
헥서 왕국의 주력도 제론에게 한 번 박살이 났기 때문에 사실 큰 걸림돌은 없었다.
제론은 기세를 탔을 때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병력을 반으로 쪼개 헥서 왕국의 국경을
넘었다.

☆ ☆ ☆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헥서 왕국의 국왕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대신들을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도 국왕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후우, 아무도 의견이 없단 말이오? 이대로 우리 왕국을 에어스트 왕국에 갖다 바쳐야겠소?”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데도 의견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어려운 상황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파죽지세로 4 개나 되는 나라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막대한 영토를 소화시키는
중이었다.
속속 정보가 들어왔다. 그 정보를 토대로 판단하면 에어스트 왕국은 이미 크란 제국만큼이나 대단한 힘을 가진 게
분명했다.
헥서 왕국도 나름대로 상당한 정보를 사방에서 수집했다. 그래서 이번 전쟁에 크란 제국이 은밀히 관여했고, 또
주변 왕국들이 기간트를 상당히 지원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한데 에어스트 왕국은 그 모든 전력을 단숨에 박살 내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그 와중에 헥서 왕국에서 보낸 병력까지 쓸어 버렸다. 무려 하이쓰 산맥을 넘어가 기습한 기간트
군단을 말이다.
그것이 헥서 왕국의 주력군이었다. 그래서 현재 헥서 왕국은 에어스트 왕국의 침공을 제대로 막아 낼 여력이
부족했다.
국왕은 좌중을 쓸어 봤다. 그는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의 왕족과 귀족이 무슨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장 망명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았다. 죽어라 발악하면 아무리 에어스트 왕국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쉽게 왕국을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다.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이 손도 못 써 보고 당했다는 걸 알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이 커져 갔다.
“폐하. 잠시 피신을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피신?”
국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겉보기에는 분노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기다렸던 말이었다. 하지만 속내를 절대
드러낼 수 없었다.

Chapter 9 흡수 (2)

“나보고 지금 도망을 가란 말이오?”


“도망이 아닙니다. 잠시 피신하여 힘을 비축하는 것입니다.”
“힘을 비축한다?”
“그렇습니다. 현재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의 수뇌부도 피신을 했습니다. 그들과 손잡고 힘을 비축해 단숨에
에어스트 왕국을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흐음.”
국왕이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사실 기다리던 말이었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속 보이는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더 전쟁이 길어져 피해가 커지기 전에 피신하는 편이 나중을 위해서도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귀족 중 하나가 은근한 목소리로 계속 설득했다. 그의 말에 국왕뿐 아니라 나머지 다른 귀족들도 서서히 넘어가고
있었다.
결국 동조하는 사람이 하나둘 나타났다.
“제 생각에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체스터 공국이나 벨룸 왕국도 나름대로 힘을 숨겨서 망명하지
않았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들과 손을 잡으면 에어스트 왕국에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대로 시간을 더 끌다가 에어스트 왕국군이 들이닥치면 후일을 기약하기도 어려워집니다.”
동조해서 말을 쏟아 내다 보니 슬슬 조급해졌다. 서두르면 한재산 챙겨서 망명할 수 있겠지만, 더 늦으면 자칫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나마 그렇게 해서라도 도망가면 다행인데, 만일 붙잡히기라도 하면 정말로 큰일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적의
왕족이나 귀족을 살려 두지 않고 처참히 죽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귀족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탰다. 그 모든 말을 듣고 있던 국왕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좌중이
조용해지자 이내 입을 열었다.
“좋다. 경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나도 따라야지. 당장 망명 준비를 하도록.”
국왕의 결단에 귀족들이 반색했다. 그리고 서둘러 회의를 종료하고 돌아갔다. 이제부터는 도망갈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냥 도망이 아니었다. 가문의 기반을 싹 들어서 가져가야만 했다.
망명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일단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으니 다른 나라로 피신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게다가 국왕령으로 게이트를 개방해
버렸다.
게이트의 지분에 크란 제국 마탑의 것이 섞여 있었지만, 나머지 지분을 몽땅 포기하는 조건으로 당분간 무료
이용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것을 공표하는 것은 국왕을 비롯한 주요 귀족들이 외국으로 망명한 다음이 될 것이다.

☆ ☆ ☆

제론은 크란 제국에 있는 유적 중 하나에 앉아 편히 쉬고 있었다.


아직 전쟁이 끝난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굳이 제론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의 주력 부대를 괴멸시켰으니 에어스트 왕국군에 대항할 만한 병력도 남지 않았다.
게다가 그 두 왕국의 수뇌부는 이미 망명해 버렸다. 무주공산이 된 것이다.
그렇게 쓰레기 버리듯 나라를 버린 왕족과 귀족의 행태에 하위 귀족들이 크게 실망해서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았다.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을 거의 동시에 정리해 나가는데도 그 속도가 엄청났다.
제론은 느긋하게 태블릿을 꺼내 바인이 보낸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요즘에는 상당히 많은 보고서가 자주 올라오고 있었다. 바인은 문두스를 더 크게 키워서 막대한 정보를 다루는 게
가능해졌다.
“헥서 왕국도 수뇌부가 망명을 했군.”
에어스트 왕국군은 헥서 왕국도 함께 점령 중이었다. 그 속도가 또 엄청나게 빨랐다.
세 왕국의 백성이나 하위 귀족들이 느끼는 배신감이 그만큼 컸다.
에어스트 왕국이 세 왕국을 점령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안정적인 흡수였고, 그다음이 텔레포트 게이트를
철거하는 일이었다.
“할 일이 많아졌군.”
현재 에어스트 왕국에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제론뿐이었다.
게이트 설치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전수한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에 오로지 제론 혼자서 그 많은 게이트를
설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재 틈틈이 유적 간 텔레포트를 통해 에어스트 왕국 곳곳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하고 있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원하는 모든 도시에 게이트를 만드는 데 몇 년은 걸릴 듯했다.
“레벨리오의 활동도 도와야 하는데…….”
현재 제론이 해야 할 일을 크게 나누면 그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어느 하나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텔레포트 게이트의 설치는 거대해진 에어스트 왕국의 물류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레벨리오의 활동을 지원해야 향후 크란 제국의 유적을 등록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크란 제국에 꽁꽁
숨어서 눈을 번득이는 엠페리움을 상대할 수 있게 된다.
엠페리움의 힘은 제론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들을 그냥 방치했다간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차근차근 병행하자.”
일단 하루에 최소 하나의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들기로 했다. 잠을 줄이는 한이 있어도 그건 반드시 할 필요가
있었다.
크란 제국 마탑이 수집하는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 점령지의 텔레포트 게이트를 몽땅 폐쇄했다.
당연히 크란 제국 마탑의 반발이 있었지만 제론은 그걸 깨끗이 무시했다.
크란 제국 마탑은 에어스트 왕국 출신에게 타 왕국의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제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다.
예전을 기준으로 3 개 왕국과 1 개 공국이 병합되었다.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 안에서만 제론의 게이트를 통해 물류 혁명을 일으켜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살 수 있었다.
타 왕국과 무역을 하는 상단의 경우 타격을 입겠지만, 4 개 나라의 병합이 가져오는 막대한 이득이 있다면 타
왕국의 모든 걸 포기해도 상관없었다.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각종 시뮬레이션을 통해 제론이 직접 확인했다.
게다가 제론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이번 전쟁에 기간트를 지원한 왕국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일단 이번에 병합한 나라들을 안정시키고 나면 차츰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들이 반발을 하든 움츠러들든 상관없었다.
반발하면 박살 내서 새로운 영토로 흡수하고, 움츠리면 계속 압박하면 그만이었다.
그들은 이번 일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를 것이다. 행한 일의 몇 배로 말이다.
이번 전쟁에 기간트를 지원한 왕국들은 대부분 소국이었다. 다만 연합을 형성하고 있어서 주변 강국의 힘을 버틸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연합을 해도 엄청난 힘이 밀고 들어가면 힘없이 와해될 것이다. 에어스트 왕국은 이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아모르 생산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확인해 볼까?”
태블릿을 조작한 제론은 흥미로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모르 생산량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제 아모르 공장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느낌이었다. 기간트 제작에
숙련이 붙으며 속도와 질이 함께 증가했다.
“그래도 아직 멀었지.”
최소한 2 천 기 이상의 아모르가 더 필요했다. 이번에 새로 실전을 겪으며 급격히 성장한 견습 라이더에게
아모르를 지급해야만 했다.
또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정식 라이더가 생기면 바로 아모르를 지급해야 한다.
게다가 조만간 아모르를 다운그레이드해서 타 왕국에 판매할 계획이었다.
그 모든 걸 소화하려면 아모르를 훨씬 많이 생산해 내야만 했다.
지금 속도로 아모르를 생산단하면 머지않아 이번에 새로 정식 라이더가 된 자들에게 모두 지급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뒤로 생산되는 아모르는 적당량을 우선적으로 란체 왕국에 수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란체 왕국의 상황은 다른 어떤 왕국보다 세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왕국 전역을 뒤덮는 거대한 마티의 영역
덕분이었다.
현재 란체 왕국은 두 개의 파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포어트라는 새로운 소드 마스터가 등장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포어트는 쉘터 대공 아래로 들어가 1 왕자와
대립했다.
그리고 바인은 지속적으로 쉘터 대공 쪽에 특별한 정보를 지급해 힘을 실어 주었다.
당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쉘터 대공 쪽에 유리한 구도가 만들어져 갔다.
제론과 바인은 그 뒤를 예측했다. 그래서 아모르의 생산을 서두른 것이다.
아마 조만간 란체 왕국은 거대한 전쟁에 휘말릴 것이다. 제론과 바인의 예상대로라면 1 년 안에 크란 제국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아니, 크란 제국이 아니라 엠페리움에서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현재 곳곳에서 그 비슷한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그 조짐은 에어스트 왕국군이 체스터 공국군을 박살 낸 다음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5200 기의 기간트가 박살 나며 체스터 공국이 회생 불능의 상태에 빠진 순간부터 크란 제국 내에 전쟁과 관련된
움직임이 조금씩 나타났고, 바인은 그것을 정확히 집어냈다.
그것은 크란 제국의 분위기라기보다는 엠페리움이 조장한 분위기일 확률이 높았다.
적어도 제론과 바인은 그렇게 판단했다.
“가만 보면 이놈들은 무슨 전쟁을 못 일으켜서 안달이 난 것 같단 말이야.”
사실 제론이 더 적극적으로 이번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있었다.
에어스트 왕국이 참전하기 전까지 저들은 약탈을 무한정 허용하는 전쟁을 벌였다. 물론 약탈까지 가기 전에 모든
것이 정리되었지만, 만일 에어스트 왕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어마어마한 참극이 벌어졌을 것이다.
피를 본 군대가 약탈을 시작하면 결코 약자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한없이 잔혹해지며, 상황에 미쳐 버린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거의 기간트 전투로만 끝이 나 버렸다. 워낙 압도적인 승리라서 보병이 할 일이라고는
점령지를 정리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에어스트 왕국군은 결코 약탈을 하지 않았다. 전쟁의 목적 자체가 영토를 흡수해 왕국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왕국의 백성이 될 사람들을 약탈해서 뭐하겠는가. 에어스트 왕국군의 목표는 안정이었다.
약탈을 금지하고 합리적인 행정 체계를 도입해 점령지 백성들에게 더 나은 생활을 보장하고 신뢰를 심어 주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행정력은 대륙 최고였다. 제론이 초고대문명에서 뽑아 도입한 체계가 행정의 전체 흐름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것은 특별한 몇 가지 아티팩트가 없으면 실현이 불가능한 체계와 방식이었다.
제론은 그 아티팩트를 무한정 제작해 공급했다.
아티팩트 제작을 맡은 것은 마탑이었다. 에어스트 왕국 마탑은 그 어떤 마탑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과 마법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티팩트 제작 기술도 최고였다.
에어스트 왕국 마탑은 그 기술력과 마법을 이용해 실용적인 아티팩트를 잔뜩 제작했다. 그것은 새로운 점령지에
어마어마하게 풀려 나갔다.
그리고 점령지 안정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되다 보니 피를 볼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치안도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바인의 정보력을 통해 완전히 믿을 만한 자들을 뽑아 치안대를 조직했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왕족과 귀족에 대한 반발심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에어스트 왕국에 대한 적의도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약탈을 하지 않고 거의 기간트 전투로만 전쟁을 끝냈기 때문에 백성들이 피부로 느끼는 악감정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나마 약간 있던 감정도 에어스트 왕국군을 통해 들어온 아티팩트와 행정 체계, 그리고 풍부한 식량 때문에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에어스트 왕국은 성공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새로운 점령지를 흡수해 나갔다.
“그럼 분위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볼까?”
제론은 바인의 보고서와 자신이 직접 다루는 마티를 통해 크란 제국의 분위기를 확인했다. 역시 은밀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크란 제국은 무려 7 개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중 가장 강한 나라가 란체 왕국이었고, 나머지 왕국은
고만고만했다.
그래도 하나하나가 거의 헥서 왕국에 필적할 정도로 강했다. 그 정도 역량조차 없다면 크란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살아남을 수 없었다.
“설마 이 7 개 왕국 전체와 한꺼번에 전쟁을 벌이는 건 아니겠지?”

Chapter 9 흡수 (3)

제론은 냉정하게 전력을 따져 봤다. 크란 제국은 동시에 7 개 왕국과 전쟁을 벌일 충분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문제는 ‘지속적으로 7 개의 전선을 유지할 재정적 여유가 있느냐.’였다.
잠시 태블릿을 조작하던 제론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파악한 바만으로도 크란 제국은 충분히 그 정도
힘과 역량이 있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나라였다.
“더 파악해야 돼. 대체 왜 갑자기 전쟁을 일으키려는지.”
만일 크란 제국이 자체적으로 전쟁을 원한 거라면 대륙 정벌의 꿈을 펼치는 거라고 판단하겠지만, 그게 아니라
뒤에서 엠페리움이 컨트롤하는 거라면 분명히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론은 그 이유를 알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더 빨리 이유를 알아내려면 제론이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였다.
“슬슬 새 유적을 찾아야겠군.”
제론은 일단 수도의 본거지가 박살 나면서 폭삭 주저앉은 레벨리오부터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론은 레벨리오의 위치부터 파악했다.
다행히 아직 마티로 추적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었다. 물론 하수도 안에 마련된 피신처였다.
“정말 할 일이 많군. 저들의 수뇌부도 완벽하게 파악해야 하는데 말이야.”
바인의 예상으로는 크란 제국의 왕족 중 하나일 확률이 높다고 하는데, 그 부분은 제론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였다.
레벨리오는 가진 힘에 비해 얻는 정보가 지나치게 중요했다. 그 정도 역량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특히 엠페리움의 시설물에 대한 정보를 지금까지 하나하나 찾아낸 것을 보면 원래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왕족이었다.
크란 제국의 왕족이라면 아무래도 엠페리움과 관련된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을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엠페리움에 장악당한 왕족의 권위를 되찾고자 만든 조직일 수도 있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론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레벨리오의 정체를 파고드는 것보다는 다 죽어 가는 그들을 되살려야 할 때였다.
그래야 제론이 활동하기가 편해질 테니까 말이다.
제론은 미리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이 숨어 있는 도시로 곧장 이동했다.

Chapter 10 레벨리오의 잔당 (1)

엠페리움의 회의가 또 열렸다. 원래 엠페리움의 회의는 한 달에 한 번 열리는데, 최근에는 계속 일이 터지고


있어 자주 열렸다.
오늘도 불과 열흘 만에 열린 회의였다.
그리고 오늘은 깁스 남작이 참석하지 않았다.
“전쟁 준비가 거의 끝나 가고 있소.”
“자금도 준비가 끝났소.”
“그럼 이제 피를 볼 일만 남았군. 시기는 언제쯤으로 잡고 있소?”
“한 달 안에 시작할 계획이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은 누군가의 한숨으로 인해 깨졌다.
“후우.”
엠페리움이 예전 같지 않았다. 예전에는 엠페리움이 뭔가 일을 시작하면 반드시 좋은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전
대륙을 좌지우지했다.
한데 이제는 엠페리움의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에어스트 왕국과 레벨리오 때문이었다.
최근 레벨리오의 본거지를 털어 버리긴 했지만, 그간 입은 피해를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레벨리오의 잔당은 어떻게 되었소? 그놈들 그냥 내버려 둬선 안 될 것 같은데…….”
“본거지를 털렸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소? 그때 수장으로 보이는 놈을 죽였으니 아마 앞으로는 괜찮을 거요.
실제로 최근에는 전혀 활동이 없지 않소.”
“그건 그렇지만…….”
“지금은 그쪽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오. 모든 정보력을 전쟁에 집중해야만 하오. 우리가 이 전쟁을 왜
일으켰는지 잊었소?”
그렇게까지 말하지 더 주장을 펼칠 수가 없었다.
“알겠소. 전쟁에 집중합시다.”
“참, 그건 그렇고 드로센 자작의 후임은 결정했소?”
“카체 백작으로 결정했소. 그가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이 될 거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카체 백작은 우리에게도 제법 중요한 요인이니 호위를 제대로 붙이는 게 좋겠소.”
“안 그래도 소드 마스터를 셋이나 붙였소. 아마 그 누구보다 안전할 거요.”
이들이 말하는 소드 마스터는 고대 기준의 소드 마스터였다. 잘못된 기준으로 인해 소드 마스터가 된 익스퍼트가
아니었다.
카체 백작은 향후 주변 왕국들을 식민지로 만들면 그곳의 총독이 될 사람이었다.
당연히 엠페리움의 수뇌부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엠페리움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다. 향후
엠페리움이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내세운 자였다.
“피도 중요하지만 타 왕국의 유적도 중요하오.”
레벨리오의 활동 때문에 수많은 시설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어떻게 된 건지 그곳의 에너지가 고갈되었다.
그러니 새로운 시설을 세우기 위해서는 다른 에너지원이 필요했다. 이번 전쟁에는 그 에너지원을 충당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에너지원을 찾아내는 아티팩트가 없더라도 에너지원을 쉽게 찾아내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유적이었다.
고대유적은 반드시 에너지원 위에 존재했다. 그 에너지를 이용해 모든 시설과 장비를 돌렸으니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니 유적을 장악하면 새로운 에너지원을 아주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성체를 옮길 준비를 미리 해 둬야 하지 않겠소?”
“그건 식민지가 된 이후에 해도 충분하오.”
“전쟁 중에 하는 편이 관심을 덜 받으니 훨씬 쉽지 않겠소? 아무리 식민지라도 계속 노예로 사람을 잡아가 죽이면
문제가 생길 소지가 많소.”
“하긴…….”
“그럼 그렇게 합시다. 역시 전쟁 중에 하는 편이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포획할 수 있으니 훨씬 편할 거라
생각하오.”
“하면 성체는?”
“오늘 꺼내서 이송 준비를 하는 게 어떻소?”
“오늘 당장 말이오?”
“생각보다 시간이 많지 않소. 미리 적당한 장소를 만들어 둬야 일이 편해진다는 걸 생각해 보시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모두의 동의가 이어졌고, 다들 사이하게 빛나는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눈빛에 기대감이 한껏 일렁였다.

☆ ☆ ☆

제론은 하수도를 느긋하게 걸었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일단 그들에게 마나폭탄과 스크롤을 잔뜩 전해
주는 것이 오늘의 계획이었다.
사람을 지원해 줄 수 없는 것이 좀 아쉬웠지만 그건 레벨리오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제론의 감각이 하수도 곳곳을 훑고 지나갔다. 어디쯤 있는지 위치를 알고 있긴 하지만 혹시 누군가 다가올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레벨리오의 은신처 쪽에서 왔기에 그가 레벨리오의 일원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굳이 마주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제론은 기척을 죽였다. 그리고 마법을 펼쳤다. 사실 소드 마스터의 실력을 드러내면 은밀하게 스쳐 지나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법을 자주 써 줘야 실력이 줄지 않을 테니까.
제론의 몸을 마나가 휘감았다. 강제로 사각을 만들어 내 몸을 숨기는 마법이었다.
기척까지 죽였으니 누구도 제론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설사 같은 소드 마스터가 오더라도 말이다.
제론은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그러자 잠시 후 앞에서 다가오는 사내가 보였다.
어렴풋이 기억에 있는 자였다. 지난번 브릭과 슈틀러 일행을 도와줄 때 본 기억이 났다.
물론 그에게 굳이 아는 척을 할 필요가 없어 그냥 지나쳤다. 제론은 서둘러 레벨리오의 은신처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수도의 물이 쏟아지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레벨리오의 은신처는 물이 쏟아지는 자리
뒤에 있었다.
어두운 데다가 물이 쏟아지고 있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저 뒤에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저 물을 다 맞고 지나갈 수는 없지. 네로.”
제론은 물의 정령인 네로를 불렀다. 하수도 물이 쭉 솟아올랐다.
쏴아아아아.
썩은 내가 나는 하수도의 물이 마치 정화라도 된 듯 깨끗한 물줄기만 남았다.
“저 물을 좀 치워 줘.”
제론의 명령에 네로가 쏟아지는 하숫물로 다가갔다.
쏴아아아!
하숫물이 둘로 갈라졌다. 그 틈으로 뻥 뚫린 구멍이 보였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다시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 네로가 아래로 푹 꺼지며 돌아갔다.
제론은 몸에서 열기를 뿜어내 근처의 눅눅한 공기를 건조하게 말려 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직각으로 꺾이는 부분이 세 군데나 있었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렇게 길을 따라가다 보니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마티를 통해 미리 확인했기에 규모가 크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는 무려 1 천 명이 넘는 사람이 지내고
있었다.
제론은 그곳에 들어가 일단 슈틀러와 브릭을 찾았다. 괜히 모습을 드러내서 소란을 일으키기는 싫었다. 최대한
조용조용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그나저나 이 정도로 사람이 많으니 물건을 더 많이 줘도 되겠어.’
이곳에 모인 사람이 전부일 리 없었다. 아마 이와 비슷한 은신처가 최소 다섯 곳은 더 있을 것이다.
제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안쪽 가장 깊은 곳에 슈틀러와 브릭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곳 은신처의 책임자가 슈틀러인 듯했다.
그리고 브릭은 이제 슈틀러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앉은 듯했다.
제론은 그들 앞에서 마법을 풀었다.
“헉!”
“당신은!”
두 사람은 갑자기 제론이 눈앞에서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제론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슈틀러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지금
제론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은 몰랐소.”
슈틀러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론에게 정중히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에 감사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는데 잘 찾아오셨소. 정말 감사드리오.”
슈틀러는 갑자기 나타난 제론에 대해서 일말의 의구심도 내비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이 은신처를 찾았는지
궁금할 법도 한데, 그 부분에 관해서는 조금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원래 이곳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대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브릭은 내심 감탄했다. 익히 제론이 어떤 방식으로 찾아오는지 잘 아는 자신도 지금
깜짝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저리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단 말인가.
“오랜만이군. 레벨리오는 요즘 좀 괜찮은가?”
슈틀러가 쓴웃음을 지었다.
“수도에 있던 본거지가 괴멸되면서 크게 위축되었소.”
“다시 일어날 자신은 있고?”
“물론이오. 여기서 끝날 거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 거요.”
“그렇겠지. 내가 찾아온 이유는 짐작하겠지?”
“기다리던 바요.”
제론은 아공간에서 100 개의 상자를 꺼내 차곡차곡 쌓았다. 상자가 나타날 때마다 슈틀러와 브릭의 눈에 깃든
놀람의 강도가 점점 세졌다.
“마나폭탄의 위력을 조금 더 강하게 조절했다. 그러니 쓰기 전에 몇 번 테스트를 해 보는 게 좋을 거야.”
슈틀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이, 이렇게 많이 줘도 괜찮소?”
제론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말했다.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도 있나?”
슈틀러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확실히 지금 레벨리오에는 여유가 없었다.

Chapter 10 레벨리오의 잔당 (2)

레벨리오의 뒤를 봐주던 자가 최근 연락을 끊었다. 물론 당분간 자중하고 있으면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평생 연락이 없을 수도 있었다.
“대체…… 우리에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요?”
제론이 단호히 대답했다.
“내게 필요하니까.”
어찌나 단호하고 냉정하게 말했는지 슈틀러는 섬뜩함마저 느꼈다. 마치 모든 감정을 싹둑 잘라 내는 것 같았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정을 붙이지 말라고?’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의 레벨리오에는 제론이 꼭 필요했다. 잊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은혜를 잊고 날뛰는
쓰레기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언제부터 활동을 재개할 생각이지?”
“물건이 왔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오. 다만, 아직은 조직을 추스를 준비가 좀 필요하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다. 아마 현재 레벨리오는 정보력도 상당히 부족할 것이다.
아쉽게도 그 부분은 제론이 채워 줄 수 없었다. 제론이 이들에게 원하는 건 새로운 도시의 시설이었다. 이미
장악한 도시의 활동은 전혀 원하지 않았다.
‘가만, 굳이 이들을 그렇게만 쓸 이유가 있나?’
제론은 광장을 둘러봤다. 천 명이 넘는 사람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뭔가를 하고 있었다. 이런 은신처가 최소
다섯 군데만 더 있어도 어마어마한 인원이 된다.
그들을 그냥 놀리는 건 인력 낭비였다.
물론 저들도 놀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 제론에게 도움이 되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너희, 레벨리오의 목적이 정확히 뭐지?”
제론의 뜬금없는 물음에 슈틀러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풀렸다. 생각해 보면 이런 질문을 이제야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많은 도움을 무상으로 제공하는데 무슨 일을 하는 조직인지도 모른다는 것이 정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그저 엠페리움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전부인가?”
“……엠페리움으로부터 이 대륙을 구해 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요.”
“대륙을 구한다고? 엠페리움이 꼭 대륙을 멸망시키려는 것처럼 들리는군?”
슈틀러가 묘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럼 그것도 모르고 우리를 도운 거요? 대체 우리를 이렇게 도와주는 이유가 뭐요?”
“나도 목적은 같아. 엠페리움을 무너뜨리는 것이지.”
슈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도움을 주지도 않았을 테니까.
생각해 보면 지금 레벨리오와 제론은 손을 잡은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엠페리움에 대한 정보를 좀 줄까?”
슈틀러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게 가능하오?”
“명확한 정보를 주겠다는 게 아니야. 너희들이 아마 상당히 열심히 발로 뛰어서 정확한 정보로 만들어야 할
거야.”
“하면 이 마나폭탄과 스크롤은…….”
“아, 지금까지 하던 일도 계속해야지. 너희도 알겠지만 그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 엠페리움의 힘이
거기에서 비롯되니까.”
슈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레벨리오의 수뇌부라면 누구든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후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생각해 보면 정말로 힘든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벌써 포기하고 조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슈틀러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정보를 주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슈틀러의 말에 제론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물었다.
“레벨리오에서 너의 위치가 어느 정도지?”
슈틀러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슈틀러는 수뇌부 중에서도 중간 이하에 속하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많이 달라졌다.
“수도의 본거지가 날아가는 바람에 수뇌부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알기에 기대를 가지고 물어본 것이었다. 예상이 맞다면 슈틀러의 지위는 상당히
높아졌을 것이다.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갑니다.”
“세 손가락 안이라…… 그 말은 세 번째라는 뜻이 아니군?”
슈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와 같은 지위를 가진 자가 둘 더 있습니다. 셋이 의논을 해서 레벨리오를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제론은 슈틀러의 말을 듣고 레벨리오의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라면
레벨리오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봐도 괜찮을 듯했다.
사실 수도의 본거지가 날아가면서 레벨리오는 거의 와해 직전이었다. 레벨리오의 수뇌부가 사라지면서 자금이
말라 버린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해 레벨리오에 지급되는 보급도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이젠 모든 걸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그런 상황을 굳이 제론에게 시시콜콜 애기하진 않았다. 하지만 제론은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이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식량 조달은 어떻게 하고 있지?”
“아직 아무 대책도 없소.”
제론이 의아한 눈으로 슈틀러를 쳐다봤다.
“대책이 없다고?”
“남은 식량이 조금 있소. 당분간은 그걸로 버텨 보고 다음 일은 떨어진 다음 정할 생각이오. 그래서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있소.”
“움직임을 최소화한다고? 정찰도 안 한단 말인가?”
“그렇소.”
“그럼 아까 내보낸 사람은 뭐지? 정찰을 보낸 것도 아니고 식량 조달을 위한 것도 아니면 그냥 혼자서 나간
건가?”
제론의 말에 슈틀러의 안색이 급변했다.
“누군가 나갔소?”
제론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길에 마주쳤지. 물론 내 모습이 안 보였을 테니 들키진 않았지만.”
제론은 시시각각 변하는 슈틀러의 표정을 보고는 사태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배신자가 나온 것이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군. 보아하니 다들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야.”
배고픔 때문에 조직을 배신했다고 믿기는 싫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슈틀러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부끄럽소.”
난감했다.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을 이제 어디로 피신시킨단 말인가.
제론이 이곳에 도착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났으니 아마 지금쯤 크란 제국의 병력이 하수도로 들어왔을 것이다.
도망칠 길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한 번 더 도와줘야 할 것 같군.”
제론의 말에 슈틀러가 깜짝 놀라 바라봤다.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었다.
“원하는 게 뭐요?”
제론이 씨익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 있는 모두.”
슈틀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설마 우리를 당신 발아래 놓고 싶다는 거요?”
“발아래 둔다는 말은 좀 심하고. 내 조직에 들어오라는 뜻이지. 하는 일은 지금까지와 다르지 않을 거야.
어때?”
슈틀러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레벨리오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건 곤란하오. 난 우리 조직을 떠날 수 없소.”
“내 말을 오해했군. 조직을 떠나라는 말이 아니야. 통째로 내 휘하에 들어오라는 뜻이지.”
슈틀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그 말 아닌가.
“말장난 따위를 할 생각도 시간도 없소.”
“잘 생각해 보라고. 그러니까 지금까지처럼 마음대로 조직을 운영해. 그러다가 내 지시가 떨어지면, 그 지시
사항만 이행하면 되는 거야. 어때? 이래도 같다고 생각하나?”
“그 말은 우리를 독립적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뜻이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앞으로 상당히 많은 일이 벌어질 거야. 요즘 분위기 안 좋은 거 알지? 이럴 때 나 같은 든든한 버팀목에게
잠시 기대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슈틀러는 마음이 흔들렸다.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혼자 결정할 수 있어. 난 다른 사람들을 원하는 게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만 원해.”
“그건……!”
슈틀러는 할 말이 없었다. 대체 그게 무슨 뜻인가, 자신보고 레벨리오에서 나오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레벨리오는 레벨리오고 난 나야. 적을 두 개 두는 건데 어렵나? 서로 배척되면 어느 편을 들어도 상관없어.”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슈틀러는 제론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모두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슈틀러는 말투와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이제부터 제론은 자신의 상관이 되었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돌아섰다.
“잠시만 기다려. 금방 돌아올 테니까.”
제론은 광장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은밀한 곳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호오, 많이도 몰려왔군.”
하수도 안에 들어온 병사의 수가 상당했다. 하지만 왠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적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싹 쓸어버릴 것 같았는데, 그런 모양새가 아니었다.
물론 병력이 많긴 했다. 그리고 상당한 실력자들이 많이 들어왔다.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고 적을 괴멸시키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이 빈틈은 뭐지? 만일 이쪽으로 도망쳤으면 다 놓치는 거 아닌가?”
포위망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물론 그 구멍으로 빠져나갈 확률이 적긴 했다. 하지만 만일 저들이 정말로
절실하게 레벨리오를 잡아내려 했다면 그런 구멍조차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저 구멍을 통과해서 가기에는 이미 늦었군.”
조금 더 서둘렀다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인원이 좀 많긴 했지만 제론이 한바탕 휘저어
주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너무 늦어 버렸다.
“일단 돌아가서 준비를 해야겠군.”
태블릿을 이용해 도시 주변 상황도 모두 파악했다. 도망칠 위치까지 정한 제론은 서둘러 은신처로 돌아갔다.

제론이 돌아온 걸 확인한 슈틀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자신들을 버리고 그냥 갔을까 봐 상당히
걱정을 했다.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고 믿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슈틀러와 브릭이 제론에게 다가갔다. 둘의 표정에는 다급함이 어려 있었다.
“준비할 테니 다들 물러나라고 해.”
제론의 말에 슈틀러와 브릭이 서둘러 주변을 정리했다. 순식간에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아공간에서 마법진을 그릴 재료를 꺼낸 제론은 일단 바닥의 물기를 싹 말려 버렸다.
화아아악!
강렬한 열기가 제론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바닥이 바짝 말랐다.
제론이 손을 뻗어 바닥을 가리켰다. 손앞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샤아아아.
마법진이 부서지며 바닥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바닥이 평평하게 깎여 나갔다.
파파파파파팍!
평평해진 바닥에 제론이 시약을 이용해 마법진을 그렸다. 단방향 텔레포트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은 엄청나게 거대했다. 사람들이 물러나 만들어진 넓은 공간을 거의 꽉 채울 정도였다.
시약을 바닥에 줄줄 흘려서 마법진을 그렸는데, 그냥 물을 흘리는 거나 다름없는데도 엄청나게 정교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시약이 바닥에 닿는 순간 빛을 내며 안착했다.
그렇게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의 위용은 모두를 압도했다.
다들 멍하니 마법진이 그려지는 광경을 바라봤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은 가느다란 펜으로 그려도 제대로 그리기
어려울 정도로 세밀하고 정교했다.
한데 그런 마법진을 그저 시약을 바닥에 줄줄 흘려서 그렸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정말로 멋진 마법진이었다. 은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 빛에 몸이 닿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힘이 느껴졌다.
제론 옆으로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슈틀러였다. 그 뒤를 브릭이 서둘러 따라왔다.
“대, 대체…… 대체 무엇으로 그리신 겁니까?”
슈틀러는 대번에 알아봤다. 마법진을 그린 시약이 아주 특별하다는 것을 말이다. 제론의 능력도 굉장했지만,
시약이 없다면 이런 마법진은 절대 만들어질 수 없었다.
제론이 시약이 든 병을 흔들며 말했다.
“느낌이 안 오나? 아는 줄 알았는데.”
제론의 말에 슈틀러가 침을 꿀꺽 삼켰다.

Chapter 10 레벨리오의 잔당 (3)

“서, 설마 정말로 테페룸입니까?”


제론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슈틀러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테페룸이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테페룸은 쉽게 녹일 수 있는
금속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녹이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녹이는 게 불가능하니 당연히 액체 상태로 보관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안 갈 건가?”
제론의 말에 슈틀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의 휘하에 있는 천여 명의 조직원이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슈틀러는 고개를 돌려 제론을 바라봤다.
“다들 이 위에 올라가.”
제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슈틀러가 손짓을 했다. 그러자 모든 조직원이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마법진이 워낙
컸기 때문에 모두 올라가고도 공간이 약간 남았다.
제론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조직원이 마법진에 올라탄 것을 확인하고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거대한 마법진이 앞에 나타났다. 그 마법진의 모양은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과 상당히 비슷했다.
샤아아아아.
제론의 마법진이 부서지며 빛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화아아아아아아악!
바닥의 마법진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제론은 마법진에 올라탄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슈틀러와 브릭이 당황한 얼굴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들이 막 뭐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강렬한 빛이 그들을 온통
휘감아 버렸다.
빛이 사라진 자리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다들 텔레포트를 통해 이동한 것이다.
제론은 잔여 마나의 흐름을 통해 마법이 제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다음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론의 손을 통해 마나가 흘러나갔다. 그 마나는 바닥의 마법진을 자연스럽게 감쌌다.
슈슈슈슈슈슈슈!
마법진이 마나에 잠겨 증발하기 시작했다. 테페룸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그대로 허공에 녹아들었다.
순간적으로 은신처 안의 마나 밀도가 수백 배나 높아졌다.
이런 마나를 그냥 내버려 두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고 마나를 빨아들였다.
쉬이이이이익!
제론의 온몸으로 마나가 스며들었다. 일단 받아들인 마나를 아랫배와 심장으로 나눠 보냈다. 지금은 융화되지
않지만 차츰차츰 마나호흡을 통해 녹이면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래 봐야 마나가 엄청나게 많이 늘어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버리는 게 아까워서 흡수했을 뿐이었다.
“자, 그럼 나도 슬슬 빠져나가 볼까?”
제론은 굳이 텔레포트를 쓸 생각이 없었다. 그냥 하수도를 통해 빠져나가면 된다.
태블릿을 꺼내 하수도의 상황을 확인한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빈틈은 그대로 있었다. 물론 이젠 아주
적은 수가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지만.
제론은 태블릿을 든 채로 일단 은신처를 빠져나갔다. 태블릿에 하수도의 거미줄 같은 길이 쫙쫙 그려졌다. 그리고
적의 위치가 빨간 점으로 표시되었다.
제론은 빨간 점이 오지 않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이미 마법을 통해 모습을 감추고 마나를 통제해 기척도
없앴기 때문에 웬만해선 제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빈틈을 찔러 이동하니 제론이 적에게 잡힐 리 없었다. 물론 잡히더라도 간단히 상황을 타파하고
도망쳤겠지만 말이다.
제론은 빠르게 하수도를 벗어났다. 하수도 밖에도 수많은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하수도 구멍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제론은 도시 밖으로 이어진 하수도 구멍을 선택했다. 그곳을 지키는 병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편이 나았다. 어쩌면 엠페리움은 레벨리오에 대한 관심을 상당 부분 접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레벨리오의 잔당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판단하면 수뇌부가 날아간 상황에서 굳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제론은 하수도를 빠져나가 빠르게 목적지로 향했다.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은 도시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벌판에 있었다. 제론은 마법까지 써서 속도를 높였다.
아직 그들과 헤어져선 안 된다. 그들에게 지시할 것이 있었다.
그리고 미처 챙겨 가지 못한 마나폭탄과 스크롤도 전해 줘야 하고 말이다.
제론의 신형이 마치 빨랫줄처럼 쭉 늘어났다. 그렇게 순식간에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사방을
살피는 장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레벨리오의 새로운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격렬하고 지능적이었다.
그리고 교묘했다.
레벨리오는 엠페리움에게 예전보다 훨씬 더 골치 아픈 존재가 되었다.
그 중심에 슈틀러가 있었다.

Chapter 11 정복전쟁 (1)

크란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각국 수뇌부로 들어갔다.


그 정보의 출처는 문두스였다.
크란 제국은 전쟁 준비를 상당히 은밀히 진행시켰다. 선전포고와 동시에 쳐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래야 대비할
시간이 부족해 그대로 국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한꺼번에 7 개 왕국과 전쟁을 벌이려니 그런 기습이 반드시 필요했다.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말이다.
한데 문두스 때문에 그게 불가능해졌다. 문두스는 크란 제국이 전쟁을 벌이려는 7 개 왕국에 각각 얼마나 되는
병력을 준비했는지 상세히 조사해 정보로 넘겼다.
게다가 아주 은밀히 정보를 전달했기 때문에 7 개 왕국도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어느 정도 벌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7 개 왕국은 정말로 파격적인 지원을 은밀히 받을 수 있었다.
에어스트 왕국이 그들에게 아모르를 지원해 주었다. 물론 다운그레이드된 판매용 아모르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아마 크란 제국이 전쟁을 벌인다 하더라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워낙 은밀하게 준비했고, 또 문두스가 나서서 정보를 차단했기 때문에 크란 제국도 전쟁 준비가 완벽하게 끝나
선전포고를 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전쟁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지금 포기하면 손해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전쟁을 반드시 일으켜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크란 제국이 7 개 왕국을 향해 동시에 선전포고를 하고 진군을 시작했다.

카체 백작은 크란 제국군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7 개 왕국에 각각 적당한 수의 병력을 나눠 보냈다.


엠페리움으로부터 얻은 정확한 정보에 따라 전력을 배치했기 때문에 패배할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다만
전투가 좀 더 치열해질 뿐이었다.
카체 백작은 총사령관 직속 부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병력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상당한 실력의 라이더로
이루어져 있기에 크란 제국군이 보유한 부대 중 가장 강력했다.
총사령관 직속 부대는 각 왕국의 전황을 파악해 가장 취약한 곳이거나 가장 압도적인 곳에 보내기 위해 준비한
전력이었다.
취약한 곳에 보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고, 압도적인 곳에 보내 전투를 보다 빨리 끝내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최대한 빨리 왕국 하나를 짓밟고, 그곳에 투입한 병력을 근처 다른 왕국으로 돌리는 것이 카체 백작이 생각한
작전이었다.
아주 간단했지만, 압도적인 전력이 없다면 시도조차 해 볼 수 없는 전략이었다. 또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전쟁이었는데,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순조롭게 상황이 풀려 가지 않았다.
카체 백작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린 채 사령부의 귀족들을 쭉 둘러봤다.
다들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령부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으니 당연했다.
“승리한 곳이 어디라고?”
“1 군과 3 군입니다.”
“나머지는?”
카체 백작은 이미 보고서를 읽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사령부의 귀족들을 압박하기
위한 조치 중 하나였다.
“2 군과 4 군, 그리고 5 군은 성과 없이 전투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6 군은 패배했습니다.”
“7 군은?”
보고를 하던 부관이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싸한 긴장감이 장내를 한껏 짓눌렀다.
“대패했습니다.”
“대패라면 어느 정도지?”
“기간트의 대부분이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습니다.”
카체 백작이 피식 웃었다.
“7 군이라면 란체 왕국인가?”
“그렇습니다.”
카체 백작이 좌중을 쓸어 봤다. 그의 눈빛에서 강렬한 섬광이 일어나는 듯했다.
“그렇다는군. 자, 이제 대책을 말해 봐.”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괜히 나서서 말을 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카체 백작은 그런 귀족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쓰레기 같은 놈들.’
카체 백작은 자신이 엠페리움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더불어 엠페리움에
속하지 않은 귀족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엠페리움의 일원이 되려면 선택받아야 한다. 또한 능력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 둘을 모두 갖췄으니 얼마나 자부심으로 똘똘 뭉쳤겠는가.
“우리 제국의 병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패배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여전히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첫 전투는 작전의 실패였다. 크란
제국이 세운 작전의 빈틈을 적들이 너무나 정확하게 찔렀다.
하지만 압도적인 전력 덕분에 승기를 잃지는 않을 수 있었다. 1 군과 3 군은 상당히 큰 승리를 일궈 냈다.
아마 조만간 그 두 왕국은 깨끗이 정리가 될 것이다. 물론 식민지로 만들기 전에 엠페리움의 지시대로 한껏 피를
볼 계획이었다.
나머지 비긴 전투의 경우도 승기를 놓치지 않았다. 물론 전력 차이를 생각하면 압도적으로 밀어붙였어야 하지만
말이다.
문제는 패배한 전투였다.
6 군의 패배는 멍청한 사령관 때문이었다. 빈틈을 찔려 당황한 나머지 최악의 선택을 해 버렸다. 무작정 후퇴를
명령한 것이다.
당연히 기세가 살아 오른 적의 추격을 받았고,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빨리 퇴각을 명령한 덕분에 피해가 크지는 않았다. 거의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것 외에는 손실이 없었기에
다시 전력을 가다듬고 싸우면 충분히 압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7 군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뼈아팠다.
사실 란체 왕국과의 전쟁이 가장 쉬울 거라고 예상했다. 란체 왕국에는 크란 제국과 손을 잡은 세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란체 왕국의 1 왕자에게 엠페리움의 손길이 닿았다. 그래서 내부에서 뒤통수를 때리기로 미리 약속을 했다.
현재 란체 왕국의 세력 구도는 쉘터 대공 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1 왕자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 왕자는 쉘터 대공의 뒤통수를 치는 대가로 향후 란체 왕국의 왕권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식민지의 총독이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그래도 1 왕자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자리라도 감지덕지였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걸 잃고 무너질 판이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카체 백작이 입맛을 쩍 다셨다. 갑자기 짜증이 확 일었다.
“7 군 사령관이 죽었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잘 죽었군. 스프를 떠서 입에 넣어 줬는데도 뱉어 내는 멍청이가 사령관 자리에 어떻게 앉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카체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사령부의 귀족들을 다시 한 번 쓸어 봤다. 그의 눈빛이 더욱 섬뜩하게 빛났다.
그리고 카체 백작 뒤에 서 있던 세 호위 기사의 눈에서도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거기에 닿은 모든 사람의 몸에
오돌오돌 소름이 돋았다.

Chapter 11 정복전쟁 (2)

각 군의 사령관을 임명한 것은 사령부 회의에서였다. 카체 백작은 그 회의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사령부의 기를 꺾기 싫었다. 또한 자신이 가진 정보만으로 각 군의 사령관을 결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말이다.
한데 그 결과가 이렇게 나왔으니 이젠 그 모든 것이 사령부의 귀족들 책임이 되었다.
“능력이 없었던 건지, 운이 없었던 건지 모르겠군.”
카체 백작의 말에는 의심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당연히 사령부의 귀족들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더욱 깊이
조아렸다.
여기서 괜히 나섰다간 집중 포화를 맞고 쓰러진다. 자신만 죽는 게 아니라 가문까지 풍비박산이 날 수도 있었다.
이럴 때는 그저 숨죽이고 있는 것이 최고였다.
란체 왕국의 쉘터 대공은 대군을 직접 이끌고 크란 제국군을 맞이했다.
그리고 1 왕자는 상당한 병력을 동원하고도 모자라 엠페리움의 지원까지 받아서 크란 제국이 공격 시점에 딱 맞춰
쉘터 대공의 뒤를 쳤다.
한데 쉘터 대공의 그 많은 병력이 결정적인 순간 싹 빠져나가 버렸다.
대체 어떤 방법을 써서 어디로 빠져나갔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로 최고의 작전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결국 1 왕자가 이끄는 병력과 크란 제국군이 부딪쳤다.
카체 백작이 분노하는 부분이 바로 그 점이었다. 만일 크란 제국 사령관에게 생각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결코
거기서 막무가내로 돌진해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적진에 크란 제국의 기간트가 섞여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최소한 의심이라도 했을 것이다.
한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전력만 믿고 무작정 밀어붙였다.
당연히 1 왕자가 이끄는 병력은 큰 힘을 쓰지 못하고 끊임없이 밀려났다. 하지만 독기만 남은 1 왕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대항했다.
결국 크란 제국군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까지 큰 패배를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 순간, 쉘터 대공의 병력이 크란
제국군의 뒤를 치기 전까지는 누구도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쉘터 대공은 병력을 어디로 빼돌려서 데려왔는지, 크란 제국군의 뒤를 쳤다.
크란 제국군은 앞뒤로 찌부러지는 형국이 되었다. 게다가 쉘터 대공의 전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제대로 힘을
쓰지도 못했다.
크란 제국군의 선택은 1 왕자군을 밀어 버리고 그쪽을 통해 후퇴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쪽을 관통해 란체
왕국으로 그냥 밀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결국 1 왕자군을 완전히 밀어 버릴 수 있었는데, 그 순간 쉘터 대공의 병력이 크란 제국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란 제국군은 신출귀몰한 쉘터 대공의 병력 운용 앞에 크게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했다.
그리고 쉘터 대공의 기간트 군단이 그들을 추격하며 어마어마한 피해를 안겼다.
결국 란체 왕국에 크란 제국이 준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란체 왕국의 골칫거리인 1 왕자를 처리해 주었고, 또 1 왕자에게 지원한 엠페리움의 기간트를 몽땅
잃어버렸다.
반면 쉘터 대공은 적절한 순간 치고 빠져서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했다.
이제 란체 왕국을 치려면 새로운 병력을 모아야만 했다. 물론 그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쉘터 대공이 쓴 그
신출귀몰한 병력 운용의 비밀을 알아내지 않으면 같은 결과가 반복될 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란체 왕국은 내가 직접 가는 수밖에.”
카체 백작의 말에 사령부 귀족들이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바라봤다.
“나 대신 갈 사람이 혹시 있나?”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갈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란체 왕국은 병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반면 란체
왕국을 정벌하기 위해 간 7 군은 거의 괴멸된 거나 다름없었다.
거길 맡으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셈인데, 누가 가겠는가.
그런 위험한 곳을 카체 백작이 직접 맡아 주겠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전략을 좀 수정해야겠다. 앞으로 란체 왕국 쪽은 버티기로 들어간다. 나머지 왕국에서의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모든 전력을 란체 왕국에 투입한다.”
카체 백작의 말에 사령부 귀족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감이 높아졌다. 앞으로 대체 얼마나 밀어붙일지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패배한 지역에 보강 전력을 보내도록. 다시 패배하면 사령관부터 참수할 테니 각오하라는 전언도 함께 보내라.”
카체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전투 결과가 잘 나오길 바라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한 카체 백작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뇌가 녹아 버릴 정도로 머리를 굴려. 그럴듯한 작전을 짜란 말이야. 그게 사령부의 일 아닌가? 기간트도 없이
최전방에서 싸우고 싶지 않으면 죽을 정도로 머리를 써야 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카체 백작이 밖으로 나갔다.
막사 안에는 한동안 긴장과 침묵이 감돌았다. 다들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할 뿐이었다.

☆ ☆ ☆

쉘터 대공은 흐뭇한 눈으로 포어트를 바라봤다. 이번 전쟁에는 포어트의 공이 가장 컸다. 아니, 포어트가
끌어들인 비밀 세력 문두스의 힘이 일등공신이었다.
“대체 그런 자들을 어디서 찾은 건가? 난 그런 조직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말이야.”
“사실 절 도와준 은인입니다.”
쉘터 대공의 눈이 커다래졌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래? 대체 어떤 은혜를 입었기에 자네가 그렇게 말하는지 궁금하군.”
“절 소드 마스터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쉘터 대공은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포어트를 소드 마스터로 만들어 주다니.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제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 주었습니다. 벽을 깰 실마리를 던져 준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아마 그들이
아니었다면 전 아직도 그저 그런 실력으로 전장을 전전했을 것입니다.”
“흥미롭군.”
“그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자세히 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도 믿기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하면 자네에게 아모르를 선물로 준 것도 그들이겠군.”
“그렇습니다.”
사실 포어트에게 그 모든 일을 해 준 것은 제론이었다. 하지만 포어트는 그 사실을 그대로 말할 생각이 없었다.
제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쉘터 대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두스는 정말로 굉장한 도움을 주었다.
탁월한 정보력을 통해 적의 공격 시점과 작전을 고스란히 알 수 있었다. 심지어 1 왕자가 뒤통수를 칠 것까지
알아냈다.
그뿐 아니라 아모르까지 지원해 주었다. 물론 막대한 자금을 들여 구입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걸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한 일이었다.
현재 아모르는 대륙 최고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번 전투의 회피 작전의 중심이 바로 문두스였다. 문두스는 특별한 방법으로 쉘터 대공의 병력을 크란
제국군 뒤로 이동시켰다.
어떤 방법으로 이동시켰는지는 알 수 없었다. 미리 준비한 거대한 상자 안에 들어간 채, 상자만 그들이 옮겼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이용한 기만전술을 통해 전장을 빠져나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당시
상황을 곱씹어 볼수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분명히 뭔가 다른 방법이 있었다. 아주 특별한 그들만의 방법이 말이다.
“아무튼 그들의 수장을 만나 보고 싶네. 자네가 한번 힘을 써 보게.”
“최대한 애써 보겠습니다.”
포어트는 정중히 대답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두려웠다. 쉘터 대공이 문두스를 집어삼키려는 시도를 하면 정말로 큰일이었다. 문두스 뒤에는 에어스트 왕국이
있었다.
그리고 에어스트 왕국에는 제론이 있었다. 그 붉은 학살자 제론이 말이다.
포어트는 제론에 대한 고마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왠지 제론이 마음먹으면 란체 왕국 정도는
단숨에 뒤집어엎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긴, 이젠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없군.’
포어트는 이미 제론의 사람이었다. 란체 왕국에서 쉘터 대공을 위해 싸우고 있지만, 그것 자체가 제론이 원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었다.
제론을 떠올린 포어트가 팔뚝에 돋는 소름을 쓰다듬어 잠재웠다.
현재 란체 왕국에는 쉘터 대공도 모르는 소드 마스터가 무려 10 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제론의 은혜를
입어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당연히 제론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아마 이번 전쟁이 길어지면 그들이 하나둘 나설 것이다.
‘과연 쉘터 대공이 란체 왕국의 왕이 될 수 있을까?’
포어트는 그 생각이 들자 또다시 팔뚝에 소름이 오돌오돌 돋았다.
제론과 문두스를 떠올리기만 해도 두려웠다. 그리고 함께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안도했다.

☆ ☆ ☆

“폐하. 재고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엔트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엔트 옆에는 바이스와 카이트, 그리고 세나가 있었다.
다들 불안이 가득한 표정으로 제론만 바라봤다.
제론은 씨익 웃었다. 어찌나 미소가 밝은지 순간적으로 불안감이 싹 날아갈 정도였다.
“모습을 바꾸고 갈 테니까 아무도 모를 거야. 걱정할 거 없어.”
“하지만 새로운 용병단이, 그것도 기간트를 무려 100 기나 보유한 용병단이 나타났다고 하면 다들 의심을 할
것입니다.”
“문두스 못 믿어? 다 알아서 할 거야. 정보는 벌써 조작해 뒀어. 그리고 소문도 적당히 흘리고 있고.”
“하지만…….”
제론이 단호히 말했다.
“이번 전쟁이 그렇게 단순한 것 같아? 엠페리움 놈들이 뭔가를 꾸미고 있어.”
제론은 세 사람을 슥 둘러봤다.
“하지만 폐하께서 용병대장이라니요. 너무 위험합니다.”
“내가 위험할 것 같아?”
제론이 자신만만하게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제론이라면 그 어떤 상황에서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믿음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전쟁터였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 아닌가.
제론의 고집을 못 꺾을 것 같자, 이번에는 세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저는요? 이젠 아모르도 다 만들었는데, 전 또 기다려요?”
제론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세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엠페리움 놈들을 정리하고 난 다음에 우리 결혼하자.”
결혼이라는 말에 세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지금까지 얼마나 기다려 왔던
말이던가.
하지만 남은 길이 너무 험난했다. 엠페리움이라니, 아직 실체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놈들인데 대체 언제 그들을
정리한단 말인가.
그래도 희망은 생겼다. 그걸로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제론은 환하게 웃으며 뒤로 슬쩍 물러났다.
“그럼 다녀오지.”
“폐하!”
“기다려 주십시오!”
다들 다급히 제론을 불렀지만 이미 그 자리에 제론은 없었다.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중앙 유적으로 텔레포트한
것이다.
다들 허탈한 표정으로 방금 전 제론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이튿날, 크란 제국과의 전쟁에 특별한 용병단이 참전했다는 소문이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그 용병단의 이름은 테오스였다.

<12 권에서 계속>

12 권

Chapter 1 기간트 용병단 테오스 (1)

“저자들이 테오스 용병단인가?”


모나트 왕국군 사령관인 딘스탁은 흥미로운 눈으로 막사 앞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쉬고 있는 용병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딘스탁 옆에 선 그의 부관이 즉시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전원 기간트 라이더로 구성되어 있고, 각자 개인 기간트를 보유한 용병들입니다.”
“저런 자들이 있다는 얘기를 그동안은 왜 못 들었지? 저 정도라면 독보적인 용병단일 텐데.”
“최근 만들어진 용병단입니다. 하지만 상당히 유명합니다.”
“최근에 만들어졌는데 유명하다? 단순히 기간트 때문에 유명해진 건 아니겠지?”
“구 레늄 왕국의 라이더 출신들입니다.”
딘스탁은 그제야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보통 용병과는 좀 다른 느낌이 든다 했다.
처음 흥미를 가진 이유도 그래서였다. 저들은 용병이라기보다는 군인에 더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아마 저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면 즉시 익숙한 진형으로 모일 것이다. 흩어져서 쉬는 자리도 다들 정해진 듯했다.
심지어는 막사의 위치도 단순하지 않았다.
“실력은 확실하겠군.”
“예. 안 그래도 테스트를 좀 해 봤는데, 용병단장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호오. 자네가 대단했다고 말하는 걸 보니 보통이 아닌 모양이군.”
“일대일 대결에서는 그를 이길 수 있는 라이더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딘스탁이 깜짝 놀라 부관을 바라봤다.
“그 정도인가?”
“예. 그리고 집단전에도 대단한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군 출신이라면 당연히 그렇겠지.”
“어떤 작전이든 성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어쨌든 그 자신감이 정말로 실력으로 인한 거라면 우리로서야 나쁠 게 없지.”
딘스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만간 크란 제국이 또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지난 전투는 기적적으로 버텨 냈지만, 그와 비슷한 공격이 또
시작되면 아마 이번에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왕실로부터 특별한 정보가 지속적으로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간신히 버티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에 달했다.
정보에 의존해 적의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는 이제 더 버틸 수 없었다. 그만큼 크란 제국과의 전력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그래도 모나트 왕국은 나은 편이었다. 이렇게 기간트로 이루어진 용병단을 구했으니 말이다.
“다른 왕국의 소식은 없나?”
“보흐 왕국이 대패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
“크란 제국군이 무자비하게 학살을 한다고 합니다.”
딘스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번 전쟁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크란 제국이 갑자기 대륙을 정벌하겠다고 전쟁을 일으킨 것부터가 너무나 이상했다.
게다가 크란 제국은 이상할 정도로 피와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일단 전투에서 승리해서 한 지역을 점령하면
엄청난 약탈을 자행했다.
살아남는 것이 용할 정도로 처절하고 잔인한 약탈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니 다른 왕국들이 그 소식에 덜덜 떨
지경이었다.
크란 제국은 한꺼번에 7 개 왕국을 동시에 공격했다. 그중 그나마 잘 막아 내고 있는 곳은 란체 왕국뿐이었다.
나머지 왕국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나트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후우. 적의 동태는 좀 어떤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조만간 대대적으로 밀고 내려올 것 같습니다.”
“그래? 조금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음? 뭔가. 말해 보게.”
“테오스 용병단을 이용해 기습하는 건 어떻습니까?”
딘스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가능할 거라 보나? 그건 그들을 그냥 죽이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네.”
“그들이 먼저 제안해 왔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허어…….”
“일단 기습이 성공하기만 하면 시간을 많이 벌 수 있습니다.”
딘스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성공만 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한결 여유를 가지게 되니, 향후 전쟁을
이끌어 나가기도 편해진다.
아니, 정말 제대로 습격에 성공한다면 타이밍 맞춰 공격해서 적에게 큰 타격을 안겨 줄 수도 있었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모나트 왕국도 란체 왕국과 비슷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란체 왕국처럼 교착 상태가 이어지면 결과적으로 모나트 왕국의 국력이 점점 쇠퇴할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지고 말이다.
하지만 다른 왕국과는 달리 끝까지 버틸 수는 있었다.
크란 제국도 이렇게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무한정 이어 가는 건 아무리 대륙 최고의
강대국인 크란 제국이라 할지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점점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낀 딘스탁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모든 것이 테오스 용병단의 희생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딘스탁은 그들이 성공할 거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의 타격은 분명히 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제대로
빈틈을 찔러 기습한다면 말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에게 그 최소한의 빈틈을 만들어 주기 위해 최대한 애쓰는 것뿐이었다.
“승인하지.”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부관이 한껏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테오스 용병단을 향해 달려갔다.
딘스탁은 그런 부관의 뒷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부관은 아연한 얼굴로 테오스 용병단의 단장을 바라봤다.


“지, 지금 그 말 정말이오?”
부관은 귀족이었지만 테오스 용병단에게는 절대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들 중에는 몰락한 귀족가 출신의 라이더도
제법 있었다. 또한, 기사 출신의 라이더도 있었다.
용병단장은 어디 출신인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함부로 말을 놓지도 못했다. 한낱 용병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무튼, 부관은 조금 전 용병단장이 한 말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왜, 뭐 문제라도 있소?”
거친 인상을 가진 용병단장의 말에 부관은 그걸 말이냐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저런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보고 있으니 열을 내는 사람만 우스워질 것 같았다.
“그…… 차라리 야간 기습을 시도하는 건 어떻겠소?”
“야간에는 저들이 경계를 안 할 것 같소? 아마 기습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요.”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낮에 기습하겠다는 건 너무 무모했다.
“그쪽은 우리가 기습에 성공하도록 조금만 도와주면 되오.”
“우리가 도와야 한단 말이오?”
“그럼 날로 먹으려고 했소? 이런 큰 전쟁을?”
이번에도 할 말이 없었다. 그야 당연히 날로 먹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무모한 도전을 함께할 생각도 없었다.
“대단한 걸 원하는 게 아니오. 그러니 그렇게 똥 씹은 표정 지을 거 없소.”
부관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상당히 모욕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용병단장의 말에 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도발 준비만 해 주시오. 어차피 기습에 성공하면 공격할 생각 아니었소?”
“그야 그렇지만…… 기습에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이오?”
“기습에 성공하면 파란 연기를 세 가닥 피우겠소. 연기가 올라가면 전군을 이끌고 돌격하시오.”
그 말을 들은 부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이건 자기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령관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다.
‘과연 허락하실까?’
만일 테오스 용병단이 크란 제국군과 손을 잡았다면 모나트 왕국군은 함정에 알아서 발을 디디는 꼴이었다.
사령관인 딘스탁도 그걸 잘 알고 있을 텐데 굳이 모험을 감행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허가를 받아 내는 것도,
또 작전에 성공하는 것도 가능성이 희박했다.
“혼자 머리 굴리지 말고 보고부터 하시오. 우리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거, 명심하시오.”
용병단장의 말에 부관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런 말을 일개 용병단장에게 들어야 한다는 현실이 짜증 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수긍이 갔다.
‘뭐, 한때 보통 사람이 아니었겠지.’
라이더로서의 실력만 봐도 구 레늄 왕국에서 아무 자리나 지키고 있던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모나트 왕국과는 거리가 제법 있어서 레늄 왕국에 대한 정보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한 지위였을 거라는
추측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알았소.”
부관은 순순히 대답하곤 물러났다. 그리고 사령관에게 바로 그 일을 보고했다. 뜻밖에 사령관은 흔쾌히 그 작전을
허락했다.
테오스 용병단에 대한 신뢰가 상당하지 않으면 보일 수 없는 반응이었다.
부관은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사령관인 딘스탁의 판단은 지금까지 틀린 적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판단에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아마 이번에도 분명히 부관이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테오스 용병단의 기습 작전이 결정되었다.

제론은 긴장감 가득한 수하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두렵나?”
“아닙니다!”
용병들이 일제히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었다.
그제야 그들의 눈빛에 자신감이 맴돌았다. 그리고 온몸으로 투기를 내뿜었다.
제론은 그 모습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든든했다.
현재 제론과 함께 용병으로 온 사람들은 모두 에어스트 왕국의 견습 라이더였다.
이번에 실전을 경험하고 나면 정식 라이더가 될 것이다. 이들 모두가 에어스트 왕국의 미래였고, 힘이었다.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우렁찬 대답이 터져 나왔다. 작전은 사전에 몇 번이나 설명했다. 그것도 모자라 모의 훈련까지 수십 번은 했다.
사실 이 기습 작전은 용병단으로 위장해 모나트 왕국군에 지원하기 전에 이미 세워서 충분한 훈련을 마친 상태였다.
당연히 자신감만 있으면 작전은 무조건 성공할 수 있었다.
변수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정도는 훈련량과 제론의 존재만으로 해결이 가능했다. 어떤 상황이 오건 작전은 성공할
것이다.
다만 피해를 얼마나 줄이느냐가 관건이었다.
제론의 목표는 인명 피해 없이 작전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성공한 다음 다른 견습 라이더로 단원을 바꿔서
다른 왕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일단 그런 식으로 크란 제국에 크게 몇 방 먹여 전쟁을 고착화시키는 것이 제론의 최종 목적이었다.
그게 성공하면 아무리 엠페리움이라 하더라도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현재 엠페리움은 안팎으로 공격받고 있었다. 크란 제국 내에서 레벨리오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그들은 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자, 그럼 가 볼까?”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씨익 웃었다.
우렁찬 함성과 함께 테오스 용병단, 실제로는 에어스트 왕국의 라이더들이 일제히 달려갔다.

Chapter 1 기간트 용병단 테오스 (2)

멀리서 테오스 용병단이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딘스탁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습하겠다는 자들이 저렇게 소란스럽게 달려가다니. 제대로 일을 해낼지 걱정이 되는군.”
뒤에서 그 말을 들은 부관이 깜짝 놀라 딘스탁을 바라봤다. 보아하니 딱히 테오스 용병단을 신뢰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대체 왜 저런 임무를 맡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내가 저들의 말을 따르는 게 이상한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이상할 거 없다. 왕실에서 내려온 명령이니까.”
“예? 왕실이요?”
“뭘 새삼스럽게 그러나? 왕실에서 계속 정보를 보내오는 것 알고 있으면서.”
“하면…….”
딘스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왕실에서 따로 명령서가 내려왔다. 저들에게 기습을 시키고 타이밍에 맞춰 크란 제국을 공격하라더군.”
부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멀어져 가는 테오스 용병단을 바라봤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왕실에 계속
정보를 주는 자들이 누구일까 하고 말이다.

☆ ☆ ☆

크란 제국군은 공격 준비에 한창이었다. 내일 오전부터 대대적인 공세로 들어가서 모나트 왕국군을 완전히 밀어
버릴 계획이었다.
그를 위해 전력도 상당히 보충했다.
모나트 왕국군의 전력은 뻔했다. 지원군까지 도착한 크란 제국군을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뻔했다. 그나마 성공할 확률이 있는 것은 야간 기습 정도였다.
크란 제국군은 그에 대한 대비를 아주 확실히 했다.
야간 기습에 대비해 상당수의 병력으로 불침번과 경계를 섰다.
야간 경계가 철저하니 상대적으로 낮에는 경계가 살짝 소홀했다. 대신 정보원을 색출하는 작업은 정말로 철저했다.
크란 제국군은 정보만 외부로 유출하지 않으면 된다고 판단했다. 철저히 정보를 차단하면 그들의 힘을 모나트
왕국이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제론은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사실 제론은 크란 제국군의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현재 크란 제국군이
진을 친 장소는 마티의 정보 수집 영역이었다.
당연히 경계의 빈틈부터 그들의 작전까지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가공해서 조금씩 모나트 왕실에 흘렸다. 그들은 그걸 이용해 크란 제국의 공세를 근근이 버텨
왔다.
제론이 이끄는 100 명의 라이더는 기간트를 소환하지 않은 채로 은밀히 이동했다.
에어스트 왕국의 라이더는 기본적으로 라이트닝 검술을 익히게 되어 있었다.
라이트닝 검술은 총 3 단계로 나뉘어 있는데, 에어스트 왕국의 모든 병사에게 1 단계를 공개했고, 라이더에게는 2
단계까지 공개했다.
그것만으로도 익스퍼트, 즉 현재의 기준으로 소드 마스터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수뇌부에게 제공되는 3 단계의 검술을 익히면 초고대의 기준으로 소드 마스터에 이를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상당한 운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견습 라이더도 라이더는 라이더였다. 그들은 라이트닝 검술 2 단계를 상당히 숙련시켰다. 물론 아직 익스퍼트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웬만한 기사보다 훨씬 뛰어났다.
100 명의 견습 라이더는 제론의 속도에 맞춰 기척을 죽이고 이동하는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는 뜻이었다.
현재 제론이 이끄는 100 명의 라이더가 견습 중에서는 상위의 실력을 갖췄다고 하지만, 나머지 이곳에 오지 않고
대기 중인 라이더들 역시 상당한 실력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실전에 투입할 때까지 조금이라도 실력을 더 키우려 무진 애를 쓰는 중이었다. 다음 임무에 투입할
때가 되면 지금 이곳에 있는 라이더의 현재 실력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못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두터운 라이더 층은 에어스트 왕국의 숨은 저력 중 하나였다.
제론이 이동하다가 손을 슬쩍 들었다.
그것을 본 라이더들이 움직임을 서서히 멈췄다.
제론도 조금 더 이동하다가 멈추고 몸을 숙였다. 그러자 나머지 라이더들도 몸을 낮추고 숨을 죽였다.
쿵! 쿵! 쿵!
기간트 한 기가 언덕 너머로 이동 중이었다. 크란 제국의 경계 부대였다. 기간트 뒤로 일단의 병사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신호를 보내거나 혹은 적 정찰병을 사로잡았을 때 압송하는 임무를 가진
자들이었다.
제론은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굳이 충돌할 필요가 없었다. 경계병과 충돌하는 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다음이었다.
쿵! 쿵! 쿵!
정찰 부대가 멀어져 갔다.
제론은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이동했다.
이곳이 경계의 빈틈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적 진지의 중심부였다.
그곳에는 수많은 기간트 라이더가 있을 것이다. 제론의 목표는 그들이었다.
아직 전투가 시작되지 않았으니 기간트를 소환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장비조차 착용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제론은 라이더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장소를 미리 파악해 뒀다.
크란 제국이 모나트 왕국에 보낸 기간트의 수는 2500 기였다. 모나트 왕국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기에 그
정도면 왕국을 쓸어버리고도 남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문두스 때문에 결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제론은 언덕 아래에 몸을 숨긴 채 감각을 활성화시켰다. 일단 언덕만 넘으면 적 진지였다. 그곳에 라이더가
머무는 막사가 모여 있었다.
기간트를 소환해 일제히 달려가 짓밟으면 단숨에 적 기간트 전력을 반토막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서두르지 않았다. 뭐든 확실한 게 좋았다. 또한 안전이 최고였다. 기습도 중요하지만 퇴로를
확보하는 건 더 중요했다.
감각을 최대한 넓게 퍼트린 제론의 머릿속으로 기습 경로가 일목요연하게 그려졌다.
수십 개의 막사가 모여 있었고, 막사마다 라이더들이 십여 명씩 쉬는 중이었다. 기간트를 소환해 단숨에 덮치면
대부분 짓밟을 수 있을 것이다.
‘기간트는 총 350 기. 기간트가 오기 전에 막사를 끝장내고 도망치면 돼.’
물론 그 와중에 푸른 연기 세 가닥을 피우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아마 크란 제국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모나트 왕국은 아직 출진 준비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언제든 기간트 부대로 돌격할 수 있게
라이더들에게 미리 명령을 내려 두었다.
푸른 연기 세 가닥이 보이면 즉시 모든 라이더가 기간트를 소환해 적진을 향해 달려가도록 사전에 미리 지시해
놓은 것이다.
달려가는 데 시간이 상당히 걸리겠지만, 상관없었다.
아무리 모나트 왕국군을 막을 준비를 서둘러 마친다 하더라도 제론의 기습으로 엄청난 피해를 본 뒤이고, 제론의
기간트 부대를 쫓기 위해 병력이 나뉘게 될 테니까.
“준비.”
제론의 말에 견습 라이더들이 다들 긴장했다. 그들의 시선은 온통 제론의 입으로 향해 있었다.
그들은 기간트를 소환할 때 방해가 되지 않게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있었는데 그 자체로 진형을 이룰 수 있도록
위치를 절묘하게 잡았다.
“소환!”
제론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100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나타났다.
기종은 모두 몰레스였다.
아모르로 하지 않은 것은 에어스트 왕국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감추기 위함이었다. 나중에야
드러나더라도 당장은 감추는 편이 좋았다.
제론도 이번에는 베르를 가져왔다. 사실 제론은 테오스를 타지 않는 한, 어떤 기종의 기간트를 타건 큰 상관이
없었다.
그 정도로 제론의 실력은 다른 라이더와 차원을 달리했다.
101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언덕을 넘었다.
쿵쿵쿵쿵쿵!
언덕을 넘어서 내리막길을 달려가는데도 진형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혹독한 훈련의 결과였다.
“적이다!”
“습격이다!”
“막아!”
“뭐 해! 기간트를 소환해! 빨리!”
막사 근방은 난리가 났다. 서둘러 기간트를 소환하려는 라이더들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어렸다.
테오스 용병단이 달려드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들은 채 기간트를 소환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짓밟혀야만 했다.
쿵쿵쿵쿵!
꽈득! 꽈득!
“크아악!”
“피해!”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졌다. 100 기의 기간트가 짓밟고 지나간 막사의 잔해는 그저 처참하다는 말만으로는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리고 막사 주변으로 피가 흥건했다. 막사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라이더들이 짓눌려 터지는 바람에 흐른
피였다.
키이이이잉!
그 와중에 테오스 용병단의 기간트를 피해 도망친 라이더들이 저마다 기간트를 소환했다.
곳곳에서 기간트가 솟아났다. 그리고 라이더들이 거기에 올라타려고 했다.
하지만 제론은 결코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목표 변경!”
제론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몰레스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막 소환된 기간트에 달려들었다.
꽈과과광!
미처 라이더가 타지 못한 기간트들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근처에 있던 라이더가 자신의
기간트에 깔려 죽어 버렸다.
꽈광! 꽈광! 꽈과과광!
100 기의 몰레스가 날뛰니 그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크란 제국이 보유한 기간트와 라이더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모든 라이더를 없앨 수는 없었다.
곳곳에서 솟아난 기간트에 라이더가 탑승했고, 마나코어가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이이잉!
500 기가 넘는 기간트가 움직였다. 그들은 당장에라도 사방에서 날뛰는 몰레스를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시기적절한 제론의 명령이 떨어졌다.
“후퇴!”
쿵쿵쿵쿵쿵!
제론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말의 망설임이나 미련도 남기지 않고 모든 몰레스가 미리 정해 둔 도주로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덤벼들려던 크란 제국 기간트들이 움찔 움직임을 멈췄다.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그 짧은 멈춤이 테오스 용병단에게 도망칠 틈을 주었다.
적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기간트도 있었는데, 그들조차 다들 무사히 빠져나온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론의 베르가 그 뒤를 따랐다. 제론이 가장 뒤에 선 것은 이유가 있었다. 적의 추격을
효과적으로 방해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아직 피우지 않은 푸른 연기도 피워야 했다.
쿵쿵쿵쿵쿵!
테오스 용병단이 썰물 빠지듯 멀어져 가자, 크란 제국 기간트들이 다급히 그 뒤를 쫓았다.
“뭣들 하나!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싹 잡아!”
만일 이번 습격에 성공한 저들을 놓치면 그야말로 위신이 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또한, 저들이 무사히 도망가
이곳에서 있었던 참상을 모나트 왕국군에 알리면 전쟁 상황이 상당히 복잡해진다.
현재 크란 제국군은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부서진 기간트를 수습하고, 죽은 라이더를 대신할 자들을 뽑아야만
했다.
쿵쿵쿵쿵!
500 기가 넘는 기간트가 테오스 용병단의 뒤를 따랐다.
제론이 탄 베르가 조금씩 속도를 줄였다. 이제 슬슬 불을 피울 시간이 되었다.
베르의 오른쪽 허벅지에 넓적한 철판 하나가 붙어 있었다. 워낙 잘 붙어 있었기에 얼핏 보면 베르의 강판 중
하나로 착각할 만했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보면 그것이 베르의 부품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제론의 베르가 그 철판을 뗐다.
꽈득!
철판이 너무나 간단히 떨어져 나왔다. 그 철판에는 복잡한 마법진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그 철판을 뒤에서 쫓아오는 크란 제국 기간트들을 향해 던졌다.
콰우우우!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가는 철판의 위력에 가장 앞에서 쫓아가던 기간트들이 기겁하며 몸을 낮췄다.
꽈드드득!
2 열에서 쫓아가던 기간트가 미처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철판은 기간트의 얼굴에 틀어박혀 그대로 기간트를 뒤로
넘겨 버렸다.
꽈앙!
바닥에 뻗은 기간트의 얼굴에 철판이 박혀 있었는데, 그 철판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났다.
푸른 연기였다. 그것도 세 가닥이 동시에 올라갔다. 연기는 순식간에 하늘 높이 올라갔다. 세 가닥의 연기는
바람이 불어도 잘 흩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연기를 신호로 모나트 왕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Chapter 1 기간트 용병단 테오스 (3)

쿵쿵쿵쿵쿵쿵쿵!
모나트 왕국군의 사령관인 딘스탁은 동원 가능한 모든 기간트를 싹 출진시켰다.
미리 계획한 대로였다.
무려 1 천 기의 기간트가 굉음을 토해 내며 크란 제국군 진영을 향해 달려 나갔다.
거리가 제법 있었기에 도착하려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최소 한 시간이 넘게 걸릴 것이다. 하지만 딘스탁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기습에 성공했다는 신호가 왔다. 그리고 비공식적인 연락이 왔다. 적의 기간트 500 기를 적진에서 분리했다는
것이었다.
습격에 성공한 것도 모자라 500 기나 되는 기간트를 분리했다니, 이런 상황인데도 이기지 못한다면 이건 사령관의
자질 문제였다.
하지만 진군하는 기간트 부대의 가장 후미에서 따라가는 딘스탁의 가슴은 미칠 듯이 두근거렸다.
이번에는 아무리 그래도 너무 큰 모험을 했다. 만일 적의 피해가 경미하다면 이번 공격은 그야말로 무모한 짓이
된다.
사실 공격을 거절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딘스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포기하기에는 지금까지 왕실이 보내 준 정보와 명령이 너무나 정확히 적의 빈틈을 찔렀다.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아예 첫 전투 때 모나트 왕국은 끝장났을 것이다.
“속도를 높여라!”
쿵쿵쿵쿵쿵!
딘스탁의 명령에 기간트 군단이 더욱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살짝 무리할 정도의 속도였다.
하지만 딘스탁은 그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정보대로라면 지금 적은 모나트
왕국군을 제대로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만일 분리된 500 기의 기간트가 돌아온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그럴 때 테오스 용병단이 그들의 뒤를
치기로 되어 있었다.
이 전투는 무조건 이기는 싸움이었다. 테오스 용병단의 첫 기습이 성공했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저 멀리 크란 제국군 진영이 보였다. 이쪽에서 공격을 시작했다는 정보를 듣고 싸울 준비를 마친 기간트들이 서
있었다. 한데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작 400 기!’
딘스탁은 눈을 빛냈다. 적 기간트의 수는 400 기가 채 안 되는 듯했다. 반면 모나트 왕국군은 무려 1 천 기의
기간트를 끌고 왔다.
성능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충분히 압도할 수 있었다. 아무리 한 시간이나 달려와 힘든 상태라 하더라도 말이다.
“공격!”
딘스탁의 외침이 크게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쳐라!”
모나트 왕국군의 기간트 부대가 더욱 기세를 올리며 달려들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사기가 크게 올랐다.
다들 없던 기운까지 내서 방어 진형을 촘촘히 짠 크란 제국군의 기간트 부대를 그대로 덮쳤다.
꽈과과과과광!
크란 제국군의 방어는 견고했다. 하지만 모나트 왕국군의 기간트가 너무 많았다.
딘스탁은 200 기의 기간트를 따로 빼서 크란 제국군의 진지를 짓밟았다.
크란 제국군은 그 부분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진지를 지키던 병사와 기사, 그리고 장교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그리고 진지의 막사와 건물이 순식간에 박살 났다.
크란 제국군은 분전했지만, 무려 두 배가 넘는 수의 기간트를 상대로는 버티는 것도 버거웠다. 결국 조금씩
밀렸고, 그것이 빈틈을 만들어 냈다.
처음에는 작은 빈틈이었지만 그것은 견고한 방어진을 뒤트는 결과를 낳았다.
꽈과과과과과광!
빈틈이 벌어져 방어진이 흔들리자, 그 뒤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렸다.
그렇게 크란 제국군은 모나트 왕국군에 의해 완전히 박살이 났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고 잠시 후, 500 기의 기간트가 뒤늦게 도착했다.
딘스탁은 예상한 상황이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서둘러 방어진을 짰다.
기간트의 수가 많으니 견고한 방어진으로 상대를 견제하며 밀어붙이기만 해도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양측이 팽팽하게 맞선 순간, 테오스 용병단이 다시 나타났다.
“한 놈도 남겨 두지 마라!”
제론의 명령과 함께 100 기의 몰레스가 크란 제국군 기간트 부대의 뒤를 쳤다.
꽈과과과과광!
그동안 도망만 치느라 전투 욕구가 잔뜩 쌓인 테오스 용병단은 거칠게 크란 제국군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전투가 상당히 치열했다. 가끔 테오스 용병단이 위험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제론이
나서서 조금씩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웅크리고 있던 모나트 왕국군이 기지개를 켰다.
꽈과과과과광!
모나트 왕국군까지 거센 공격을 시작하니 크란 제국군은 가운데 낀 꼴이 되었다.
결국 크란 제국군의 기간트 부대는 끝까지 분전했지만 전멸하고 말았다.
“이겼다!”
딘스탁은 한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정말로 기뻤다. 가슴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 대단한 크란 제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이겨 버렸다.
크란 제국이 여기서 끝낼 리 없으니 아마 추가 병력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두렵지 않았다. 그들은 모나트
왕국뿐 아니라 다른 왕국들과도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아마 모나트 왕국에 예전처럼 강력한 기간트 군단을 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란체 왕국처럼 되겠군.’
딘스탁은 그걸 원했다. 란체 왕국처럼 전쟁이 대치 상태로 이어지기만 해도 어떻게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왕국의 전쟁 상황에 따라 크란 제국이 다시 물러갈 수도 있었다.
이제 정말로 한시름 놓은 것이다.
딘스탁은 이 말도 안 되는 승리의 주역인 테오스 용병단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지극히 용병답게 행동하고 있었다.
‘전리품…….’
딘스탁은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한때는 한 나라의 군인이었던 자들이 저러고 있으니 화가 났다.
테오스 용병단은 각자 흩어져 가장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챙기고 있었다.
딘스탁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테오스 용병단의 단장이 다가왔다.
‘이름이 테오스라고 했지?’
단장의 이름은 테오스로 알려져 있었다. 제론은 자신의 이름 대신 테오스라는 가명을 쓰는데도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자신의 원래 이름이 테오스라도 된 것 같아서 처음에는 오히려 당황했을 정도였다.
“무슨 일인가?”
딘스탁이 약간 퉁명스럽게 물었다. 두 사람 모두 기간트를 타고 있었기에 그 목소리가 사방에 우렁우렁 울렸다.
“계약에 따라 전리품을 인정받고자 합니다.”
딘스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스 용병단은 기간트를 101 기나 보유한 용병단이었다. 당연히 의뢰 금액이
어마어마했다.
그 의뢰비를 깎기 위해 모나트 왕국군에서 제안한 것이 바로 전리품에 대한 권리였다.
테오스 용병단이 직접 처리한 기간트를 전리품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지금 제론이 요구한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가져가라.”
딘스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솔직히 테오스 용병단은 크란 제국군의 기간트 부대를 이끌고 도망 다니기만
했다. 진짜 싸움은 처음 기습과 마지막 전투에서 뒤를 친 것뿐이었다.
그래서 별다른 전리품이 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제론은 딘스탁의 반응에 씨익 웃었다. 이렇게 될 걸 미리 예상했다. 나중에 터질 잡음을 미리 조금이나마 제거한
셈이었다.
“얘기 들었지? 가져가라신다. 얼른 챙겨라.”
제론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오스 용병단원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전원 기간트를 돌려보내고 맨몸으로
내달렸다.
그들이 향한 곳은 처음 기습을 한 장소, 바로 라이더의 막사였다.
제론도 기간트를 돌려보냈다. 이제 아공간에 기간트 장비를 챙겨 담을 시간이었다. 어림잡아 1500 개는 될
것이다. 물론 망가진 것도 많겠지만 말이다.
100 명의 용병이 정신없이 휘젓고 다니자, 기간트 장비를 회수하는 건 금세 끝났다.
제론은 그 모든 장비를 벨트의 아공간에 넣었다. 장비가 엄청나게 많았지만 아직 아공간이 많이 남아서 충분히
담을 수 있었다.
테오스 용병단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던 딘스탁은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한참 보고 있으니 그들이
챙기는 것이 바로 기간트 장비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멈춰라!”
딘스탁이 크게 외치며 기간트를 몰아 테오스 용병단에게 다가갔다.
쿵! 쿵! 쿵! 쿵!
딘스탁의 기간트가 위압감 넘치는 모습으로 테오스 용병단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테오스 용병단은 그의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제론의 명령에만 따랐다. 상대가 누구든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테오스 용병단이 전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기간트 장비를 찾아 나르자, 딘스탁이 크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멈추라고 하지 않느냐!”
꽈앙!
딘스탁의 기간트가 세게 발을 굴렀다. 바닥이 은은히 진동했다. 하지만 여전히 테오스 용병단은 할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놈들이……!”
딘스탁이 다시 행동을 취하려 할 때, 그 앞에 거대한 기간트 한 기가 불쑥 나타났다. 제론의 베르였다.
갑자기 나타난 베르 때문에 딘스탁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제론이 베르의 조종석에 훌쩍
뛰어올랐다.
키이이이이잉!
베르가 가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양발을 살짝 벌려 안정감 있는 자세를 취했다. 그 자세 덕분에 아주 자연스럽게
딘스탁의 기간트가 나갈 진로를 막아섰다.
“이게 무슨 짓이냐!”
“저야말로 묻고 싶군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네 눈에는 저것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누가 함부로 기간트 장비를 가져가라고 했느냐!”
“전리품에 대한 협의는 끝나지 않았습니까.”
“누가 협의했단 말이냐! 너희 용병단이 처리한 기간트만 가져가야지 장비를 챙겨 가면 어쩌겠단 말이냐!”
“우리가 처리한 기간트입니다만…….”
“웃기지 마라!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너희는 우리가 싸울 때 뒤를 친 것 밖에 없지 않느냐!”
제론이 피식 웃었다.
“기습으로 처리한 기간트입니다. 설마 아까 전투에서 상대한 기간트가 전부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딘스탁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 제론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면 저
많은 기간트를 그냥 내줘야 할 판이었다.
“인정할 수 없다. 당장 수거한 기간트 장비를 반납해라.”
딘스탁의 어조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제론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계약을 위반할 생각입니까?”
“계약 위반이 아니다. 계약에서 어긋난 행동을 하는 건 너희들이야!”
제론은 고개를 돌려 열심히 기간트 장비를 찾아 한곳에 모으고 있는 테오스 용병단을 쳐다봤다.
초기에 가져온 기간트는 모두 아공간에 넣었고, 남은 건 500 개쯤 되는 듯했다.
“다들 멈춰라.”
제론의 명령에 테오스 용병단이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제론에게 모여들었다. 그들의 행동에는 절도가 가득했다.
딘스탁은 모나트 왕국군보다 오히려 더 군인 같은 테오스 용병단을 보며 순간적으로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저런
자들을 왕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만, 불가능할 것도 없지.’
딘스탁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기사 작위를 미끼로 저들을 끌어들이면 당장 올 것
같았다.
“이 일은 나중에 엄중히 항의할 겁니다. 딘스탁 경.”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기간트에서 내린 다음, 기간트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냈다.
“가자.”
제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테오스 용병단이 제론의 뒤를 따랐다. 그냥 대충 쫓아가는데도 줄이 딱딱 맞았다.
지독한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그걸 보는 딘스탁이 입맛을 다셨다. 당장이라도 포섭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뭣들 하느냐! 저 기간트 장비를 당장 챙겨라! 그리고 아직 수거하지 않은 것들도 다 찾아내라!”
딘스탁의 명령에 모나트 왕국군이 서둘러 움직였다.
그렇게 전장이 서서히 정리되어 갔다.

Chapter 2 포섭 (1)

제론은 모나트 왕국군의 행동에 코웃음을 쳤다.


“막사 배정을 바꿔? 포섭을 해 보시겠다?”
모나트 왕국군은 테오스 용병단의 막사를 분리해서 배정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전격적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테오스 용병단의 막사는 모나트 왕국군 진영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원래 용병단의 막사는 하나로 모아 관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식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용병단 막사를 이렇게 흩어 놨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용병들을 믿기 어려워 따로 분리해서 관리할 때나 쓰는
방법이었다.
막사 하나에 20 명의 용병이 들어간다. 즉, 테오스 용병단에 배정된 막사가 모두 5 개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제론에게는 따로 개인 막사를 지급했다.
결국 총 6 개의 막사를 따로 흩어 놓은 것이다.
제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테오스 용병단은 에어스트 왕국의 견습 라이더였다. 이제 실전을 겪었으니 슬슬
정식 라이더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한데 그런 그들을 고작 기사 작위를 미끼로 내걸어 포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또한 에어스트 왕국의 라이더는 제론에 대한 충성심이 엄청났다. 굳이 강대국이 된 에어스트 왕국과 제론을
배신하고 모나트 왕국 같은 약소국에 몸담을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고작 기사로 말이다.
제론은 피식 웃으며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개인 막사를 지급하면서 침구를 비롯한 모든 물품을 최상급으로 맞춰
주었다.
“이거 하나는 조금 마음에 드는군.”
생활이 편해졌다. 물론 오래가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테오스 용병단은 내일 중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아직 통보
전이었지만 계약은 끝났다.
테오스 용병단의 경우 1 개월 단위로 계약을 했다. 또한 전투가 승리로 끝났을 때 기간을 다 채우지 않아도
계약이 끝나게 되어 있었다.
미리 상황을 예상한 제론이 추가한 조건이었다.
다들 당연히 테오스 용병단이 재계약을 할 거라 믿었다. 이 상황에서 굳이 계약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딘스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워낙 큰 승리를 거뒀기에 더 이상 테오스 용병단을 고용할 필요는 없었다. 향후
전선은 고착 상태에 빠질 확률이 컸다.
더 이상 큰 전투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간트 부대로만 이루어진 용병단은 괜한 지출이었다.
딘스탁에게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라이더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또한 빼돌렸을 것이 분명한 크란 제국군의 기간트 장비를 회수하는 것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제론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제론이 그런 생각을 하며 막사에서 쉬고 있을 때, 막사 앞을 지키던 병사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사령관 각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병사는 제론에게 상당히 깍듯했다. 제론이 은연중 풍기는 분위기가 일반적인 용병과는 많이 달랐기에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제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막사 중앙에 마련된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절부절못하고 지켜보던 병사가 그제야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못마땅한 표정의 사령관, 딘스탁이 나타났다.
딘스탁은 자신이 왔는데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제론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못마땅했는데,
더 짜증이 났다.
딘스탁은 제론 앞에 털썩 앉았다. 막사 앞은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당분간 아무도 이곳에 오지 못할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우리 모나트 왕국의 정식 기사가 되어 주게.”
“죄송합니다.”
제론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단호히 거절했다. 마치 칼로 잘라 내는 듯한 태도에 딘스탁의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기분이 잔뜩 상한 것이다.
“이유가 뭔가? 어차피 용병보다는 기사가 훨씬 낫지 않은가. 돈이 문제인가? 그 부분도 해결해 주지. 전리품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 주겠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뭔가? 동료들이 문제인가? 다 같은 기사단에 배정해 주지. 자네는 기사단장이 되는 거고. 지금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네. 그저 배경이 생길 뿐이지. 이래도 싫은가?”
“제 대답은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말은 죄송하다고 하지만 표정이나 태도를 보면 전혀 그런 거 같지 않았다. 딘스탁은 분노로 어금니를 꽉 물었다.
“보아하니 후일을 기약할 여지가 없군. 하면 이제부터 나도 우리 기사가 아닌 용병으로 대할 수밖에 없겠군.”
딘스탁은 그렇게 말하고는 사납게 웃었다.
“빼돌린 기간트 장비를 내놓게.”
제론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빼돌릴 시간이나 주셨습니까?”
“충분했지. 난 자네들이 싸워 이긴 기간트에 대한 권리만 인정했네. 라이더를 죽여 그 장비를 빼돌리는 건 계약
위반이야.”
제론은 어깨를 으쓱했다.
“찾아보시죠. 제가 보기엔 빼돌려서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아 보입니다만.”
딘스탁이 손가락을 딱 튀겼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샅샅이 뒤져라.”
이미 예전에 제론이 쓰던 막사와 그 주변은 완벽하게 파헤쳤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곳은
여기뿐이었다.
기사들이 막사를 이 잡듯 뒤집었다. 하지만 기간트 장비는 발견되지 않았다.
“역시 아공간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딘스탁이 제론을 노려보며 말했다. 제론은 잠시 고민했다. 이 멍청한 놈들을 싹 죽여 버리고 그냥 이곳을 뜰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향후 크란 제국과의 전쟁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딘스탁에게 좋은 감정이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유능한 사령관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당분간은 그가
필요했다.
“아공간 감지 아티팩트를 가져와라.”
딘스탁의 명령에 기사 하나가 작은 스틱형 아티팩트를 가져왔다. 국소 범위에 한해 아공간의 유무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는 특별한 아이템이었다.
우우우웅.
딘스탁은 즉시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당장 제론의 몸 근처에서 아공간 반응이 나타났다.
“역시. 그걸 넘겨라.”
제론은 어이없는 눈으로 아티팩트가 가리키는 물건을 쳐다봤다. 그것은 제론의 기간트 장비였다.
“이건 내 베르의 장비입니다만.”
딘스탁은 제론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기사에게 명령했다.
“저 장비를 가져가서 확인해라.”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제론의 기간트 장비를 가져갔다. 제론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 광경을 그냥 지켜봤다.
솔직히 베르 한 기 정도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런 행태가 참으로 괘씸했다.
‘뭐, 어쩔 수 없나?’
이번 전투에서 모나트 왕국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물론 크란 제국군에 비하면 훨씬 나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기간트가 필요했다. 전투로 얻은 기간트는 상당한 수리가 필요하기에 당장 전력으로 써먹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더의 막사를 덮쳐서 얻은 기간트는 달랐다. 직접적인 전투를 치르지 않은 기간트인 데다가 평소에
워낙 정비를 잘해 두어서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테오스 용병단을 몰아낸 뒤 라이더의 막사를 뒤졌지만, 모나트 왕국군이 확보한 기간트 장비의 수는 500 개도
되지 않았다.
정보를 통해 파악한 크란 제국군 기간트의 수를 생각하면 거의 1 천 개 이상이 모자란 셈이었다.
딘스탁은 그것을 제론이 빼돌렸다고 확신했다.
제론은 딘스탁을 가만히 노려봤다. 자신의 기간트 장비를 기사들이 가져가는데도 거기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마음대로 용병의 기간트 장비를 빼앗아 가도 되는 겁니까?”
“저 기간트의 아공간에 아무것도 없다면 사과하지.”
제론이 피식 웃었다.
“아공간에 아공간 장비를 넣는 것이 과연 가능할 거라고 봅니까?”
그 말에 딘스탁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그 부분은 아예 생각도 못 했다. 그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과연
아공간에 또 다른 아공간을 넣는 것이 가능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딘스탁이 불안해할 때, 옆에 있던 기사 하나가 말했다.
“통상적으로는 아공간에 다른 아공간을 넣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고대 유물의 경우 가능한 것도 있습니다.”
기사의 말에 딘스탁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기사도 확신을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말했을 뿐이었다. 사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와는 아무 상관 없었다. 그저 빨리 베르의 아공간을 확인한 다음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나가서 확인해라.”
기사가 베르의 장비를 들고 나가려 하자, 제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게.”
딘스탁이 나직하지만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제론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내 장비를 가져가는데 가만히 있으란 말입니까? 최소한 참관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제론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딘스탁은 얼굴을 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다들 막사에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강제로 베르를 소환했다.
베르의 아공간을 쓰려면 베르를 통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공간 장비는 기간트의 마나코어와 연결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 아공간은 기간트만의 것이었다.
그렇기에 기간트의 아공간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기간트가 직접 물건을 들게 해서 아공간에 넣어야만 했다.
그나마도 용적량이 그리 크지 않았다.
막사와 막사 사이에 마련된 공터에 베르가 나타났다. 당연히 아무것도 들지 않은 맨몸이었다.
대번에 딘스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기에도 없다면 대체 그 많은 기간트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제론은 팔짱을 낀 채 딘스탁을 쳐다봤다. 이제 어쩔 거냐는 눈초리였다. 딘스탁은 그 눈빛에 굴욕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어쩔까요?”
부관이 다가와 딘스탁에게 물었다. 딘스탁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 됐다. 다들 철수해. 그리고 이 주변을 철저히 감시하고 확인해라. 적진을 다시 한 번 파헤쳐. 거기에
감춰 뒀을 수도 있으니까.”
딘스탁의 명령에 부관이 즉시 대답하고 물러갔다. 기사들도 새로운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우르르 이동했다.
그들이 가는 곳은 예전 크란 제국군이 자리를 잡고 있던 진지였다.
제론은 베르를 다시 아공간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장비를 챙겼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 앞으로 더 이상 모나트 왕국에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모나트 왕국군이 크란 제국의 저력을 끝까지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지만, 거기까지는 알 바 아니었다.
제론은 냉정하게 몸을 돌려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Chapter 2 포섭 (2)

프로쉬는 동료들과 함께 막사에서 쉬다가 갑자기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마나가 그의 몸을 한 차례 휘돌았다.
에어스트 왕국의 견습 라이더인 프로쉬는 라이트닝 검술과 거기에 딸린 마나호흡법을 익혔다.
그 마나호흡법은 정말로 놀라웠다. 이렇게 불시에 마나를 움직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막사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모두 3 명이었다. 프로쉬는 그들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모나트 왕국군의 기사이자
라이더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프로쉬는 정중히 물었다. 일단 내일이면 본국으로 돌아가 정식 라이더가 되기 위한 마무리 훈련에 들어가겠지만,
지금은 일개 용병 신분이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 것 없네. 다들 편히 앉게.”
기사들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용병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용병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기사들이 그들 앞에 섰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자네들에게 제안할 것이 있어서 왔네.”
제안이라는 말에 용병들의 눈이 반짝 빛났다. 뭔가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 왕국의 기사가 될 생각 없나?”
“기, 기사 말입니까?”
프로쉬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러자 말을 꺼낸 기사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니 일이 수월하게 풀릴 듯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보아하니 다들 예전 레늄 왕국 출신이더군. 맞나?”
“맞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에어스트 왕국의 라이더는 대부분 예전의 레늄 왕국 출신이었다. 물론 신분은
다양했지만 말이다.
프로쉬만 해도 그렇다.
프로쉬는 평범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평생 농사만 지으며 살 팔자였다. 하지만 라이더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라이더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이렇게 견습 라이더의 자리까지 올라왔다.
“이런 위험한 용병 일을 하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차라리 우리 왕국에 뿌리를 내리게. 기사가
되면 여러 모로 좋은 일이 많을 걸세.”
딘스탁은 테오스 용병단이 구 레늄 왕국의 군부 출신들이 모여 만든 용병단이라고 확신했다. 군부 출신 라이더와
기사 출신 라이더는 은연중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한데 자네가 쓰는 기간트는 용병단의 것인가, 아니면 자네 개인의 것인가?”
기사가 넌지시 물었다. 프로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당연히 용병단의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기간트는 전부 우리 단장님의 소유입니다.”
기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설마 그 많은 기간트가 한 사람의 소유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쨌든 그가 할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모나트 왕국군에는 주인 잃은 기간트가 잔뜩 있었다. 그러니 실력이 뛰어난 라이더를 영입하면 상당히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그건 몰랐군. 어쨌든 우리 왕국의 기사가 될 생각이 있나? 자네 소유의 기간트를 지급해 줄 수도 있네.”
기사의 말에 좌중이 한차례 술렁였다. 개인 소유의 기간트를 지급해 준다는 것은 사실상 수만 골드를 주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분위기를 보면 크란 제국군으로부터 얻은 전리품을 지급할 확률이 높았다. 크란 제국의 기간트는 다른
기간트에 비해 훨씬 가격이 높았다.
동요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말을 꺼낸 기사가 자신의 예상대로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들을 끌어들이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아무튼 잘 생각들 해 보게. 참고로 남은 자리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네. 정확히는 남은 기간트가 많지 않다네.
이리저리 지급하고 나면 50 기쯤 남을 것 같군.”
기사는 그렇게 말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해 둬야 조급한 마음이 일어 선택을
빨리 하게 된다.
막사에 들어왔던 기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마치 한차례 폭풍이라도 몰아친 것 같았다.
프로쉬는 기사들이 나가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나트 왕국에 라이더가 그렇게 부족한가?”
프로쉬의 말에 옆에 있던 동료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라이더야 많겠지. 하지만 쓸 만한 놈은 별로 없을걸?”
“하긴.”
그들은 이번에 전쟁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의
선배이자 상관인 정식 라이더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확실히 파악했다.
에어스트 왕국의 라이더는 정말로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 대단하다는 크란 제국의 라이더와
비교를 해도 분명한 우위에 있었다.
크란 제국 라이더의 실력은 냉정하게 평가하면 에어스트 왕국의 견습 라이더보다 약간 아래였다.
이는 에어스트 왕국의 병사만 되어도 누구나 익힐 수 있는 라이트닝 검술의 힘이었다.
또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수뇌부의 철저한 훈련 덕분이었다.
“하면 우리한테만 손을 뻗은 게 아니겠군. 다른 동료들도 지금쯤 기사들의 방문을 받고 있겠어.”
“당연히 그렇겠지.”
“하면 폐…… 아니, 단장님께도 사람이 갔을까?”
“갔겠지. 다만 우리랑은 조금 다른 의미로 방문했을 거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투가 끝나고 난 다음 전리품에 대한 의혹이 곳곳에서 불거졌다. 그 이유가 다
테오스 용병단 때문이었으니 그 화살이 제론에게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우리는 앞으로 어쩌지?”
용병 중 하나가 그렇게 물으며 프로쉬를 바라봤다. 프로쉬는 10 명으로 이루어진 전투조의 조장이기도 했다. 모든
명령이나 지시 사항은 프로쉬를 통해 전달되었다.
“우리야 당연히 예정대로 하는 거지. 내일 여길 뜬다. 혹시라도 남고 싶은 사람은 남아도 된다고 하셨으니 잘
생각해.”
프로쉬는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이곳에 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이렇게 농담처럼 말을
덧붙일 수 있었다.
아무리 크란 제국의 기간트를 지급해 준다고 해도 그 기간트가 에어스트 왕국의 아모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제 곧 정식 라이더가 된다. 에어스트 왕국의 정식 라이더가 된다는 말은 곧 아모르의 주인이 된다는
말과 같았다.
비록 개인 소유는 아니었지만, 다른 기간트를 탐낼 필요가 없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라이더에게 지급되는 급료는
딴생각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풍족했다.
게다가 라이더는 기간트를 타고 싸워야 한다. 성능이 좋은 기간트를 타야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건 상식이었다.
아무리 개인 기간트를 지급받아 봐야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게다가 개인 기간트라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었다. 개인 소유이니만큼 거기에 들어가는 유지비도 개인이 상당
부분을 책임져야만 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면 빛 좋은 개살구였다.
그러니 누가 모나트 왕국에 남겠는가.
“그나저나 우리가 무사히 여길 나갈 수 있을까?”
용병 중 하나가 살짝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프로쉬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아직 에어스트 왕국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아마 자신도 몇 가지 일을 겪지 않았다면 저런
걱정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제론의 힘만으로도 모나트 왕국군을 유린할 수 있었다.
프로쉬는 제론의 진짜 기간트인 테오스의 위용을 확인했기에 그 부분에 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걱정도 하지 않았다.
일이 잘못돼도 제론이 혼자 나서서 다 박살을 내 버리면 그만 아닌가. 물론 일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도록 다
준비를 하겠지만 말이다.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하고 충분히 쉬어 둬. 정작 필요할 때 힘들어서 못 따라가면 손해니까.”
프로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저마다 야전 침대에 누웠다. 약간의 취침을 통해 피로를 풀고, 그다음
적당히 몸을 풀어 놔야 했다.
그래야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준비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바로 이 전장 아니던가.
이내 막사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프로쉬는 자신의 말에 따라 잠을 청하고 있는 동료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확신컨대,
저들도 모두 자신과 같은 마음이리라.
프로쉬도 침대에 누워 지그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이내 고요한 숨소리가 막사 안을 가득 채웠다.

아침햇살이 막사 안으로 스며들었다.


딘스탁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번쩍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식사를 기다리면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거의 몸을 다 풀었을 때, 부관이 헐레벌떡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딘스탁은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가슴 한구석에 묘한 불안감이 피어나는 걸 억지로 가라앉혔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인가!”
딘스탁이 나직이 호통을 쳤다. 부관은 딘스탁의 호통에도 다급히 다가와 보고를 했다.
“테오스 용병단이 사라졌습니다!”
딘스탁의 눈이 커다래졌다.
“사라져? 그게 무슨 말이냐!”
“밤사이 모두 진지를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감시하던 놈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이냐!”
부관은 식은땀을 흘렸다. 감시를 철저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가자.”
딘스탁은 서둘러 막사를 나섰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막 막사를 나선 딘스탁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발걸음을 멈췄다.
“가만. 우리가 그놈들에게 의뢰비를 지급했던가?”
“절반만 지급하고 나머지 절반은 아직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부관의 대답에 딘스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용병이 돈을 포기하고 도망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용병단장도 사라졌느냐?”
“그 부분은 아직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딘스탁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방향을 돌려 제론의 막사로 향했다.
막사 앞은 병사 몇 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사령관이 다가오자 바짝 얼어 군례를 취했다.
“충!”
“비켜라!”
딘스탁은 병사들을 옆으로 밀치고 막사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막사 안에는 제론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보아하니 지금 막 일어난 모양이었다.
“다들 어디로 빼돌렸느냐?”
딘스탁의 말에 제론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아, 마침 찾아오셨으니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의뢰가 끝났으니 나머지 의뢰비를
지급해 주십시오. 오늘 중으로 떠나겠습니다.”
딘스탁이 이를 갈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웃기지 마라! 날 이렇게 농락하고 그냥 떠나겠다고? 넌 그 어디도 갈 수 없다!”
제론이 씨익 웃었다.
“모나트 왕국의 공식적인 입장입니까?”
딘스탁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왕국의 공식적인 입장을 자신이 어떻게 결정한단 말인가. 하지만 상대가 일개
용병단장임을 깨닫고 인상을 썼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어쨌든 넌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딘스탁은 그렇게 억지를 부리고는 막사에서 나갔다. 부관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제론의 막사에서 나간 딘스탁은 씩씩대며 사령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히며 상황을 차분히
되새겼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테오스 용병단에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그게 뭔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래야 앞으로도 그들을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딘스탁의 고민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부관이 또 다급히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사령관 각하! 크란 제국군이 움직였습니다!”
부관의 외침이 딘스탁의 모든 상념을 한 방에 날려 버렸다.

Chapter 2 포섭 (3)

크란 제국군은 다시 진지를 구축했다. 모나트 왕국군이 예전 진지를 부수기만 하고 점령하지 않았기에 굳이 다른


장소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 자리에 다시 진지를 만들었다.
크란 제국의 저력은 과연 대단했다. 순식간에 모나트 왕국군과 비슷한 수의 기간트를 준비한 것이다.
전쟁은 다시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앞으로는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크란 제국이 진지를 구축한 날, 제론도 모나트 왕국군 진영에서 사라졌다.
딘스탁이 길길이 날뛴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눈앞에 닥친 상황에 집중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그날 이후, 더 이상 왕실로부터 정보가 내려오지 않았다. 앞으로는 순수한 힘으로 크란 제국군을 막아야만
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딘스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스 용병단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같은 조건으로 보헤 왕국에 가 있었다.
보헤 왕국 역시 모나트 왕국과 마찬가지로 크란 제국의 침공을 받은 나라였다.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상황이었는데, 테오스 용병단이 가세하면서 전황을 빠르게 안정시키는 중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딘스탁은 속이 쓰렸다. 만일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면 모나트 왕국의 상황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렇게 아슬아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크란 제국을 몰아붙였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당시 테오스 용병단이 보여 준 활약은 인상적이었다.
이제 그 활약을 보헤 왕국에서 펼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속이 쓰리다 못해 아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떠나간 배인 것을.

Chapter 3 전쟁의 목적 (1)

“이제 좀 한가해졌군.”
제론은 테오스 용병단을 이용해 크란 제국의 공세를 막아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엠페리움의 동태를 살폈다. 이번 전쟁의 뒤에 엠페리움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전쟁을
방해하면서 그들의 의도를 알고자 했다.
물론 그것은 제론이 직접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마티를 이용해 바인이 조사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제론은 정보 수집을 바인에게 맡겨 놓고, 본격적으로 유적에 관계된 일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일단 중앙 유적을 클리어하는 일과 크란 제국의 유적을 모두 등록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제론은 거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자 했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이 새로 병합한 왕국을 하나로 만들면서 차츰차츰 제국으로 발돋움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보류시켜 놓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제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제론은 이런저런 복잡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중앙 유적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이스히스와 타히티를 동시에 상대해야만 한다. 둘과 치열하게 싸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만간 벨트에 있는 30 개의 아공간을 모두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진정한 테오스의 기사단이 탄생하게 된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제론은 기분 좋게 웃으며 중앙 유적 로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싸울 시간이 되었다.

☆ ☆ ☆

“간신히 준비가 끝났군.”


엠페리움에서 파견한 기사들이 거대한 마법진 위에 서서 중얼거렸다.
그 마법진 아래에는 관 하나가 묻혀 있었다. 그리고 그 관 안에 성체가 잠들어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성혼을 담은 육체가 누워 있었다.
이제 그 성혼을 깨우고 육체에 안착시킬 시간이 되었다.
물론 그냥 되는 건 아니었다. 그건 이제 조만간 이곳에 도착할 수많은 노예의 피와 영혼에 의해 이뤄질 일이었다.
“이번으로 마무리되면 좋겠는데…….”
기사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씁쓸함이 가득했다.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였다. 같은 일을 다섯 번이나 하다 보니 이젠 정신적으로도 지쳐 버렸다.
게다가 그 일이라는 것이 수많은 목숨을 없애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피로감은 더 심했다.
슬슬 피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스스로를 느끼며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그것이 기사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이 짓을
조금만 더 하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노예를 끌고 와라.”
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거대한 마나스톤을 꺼냈다. 그리고 그 마나스톤을 마법진 중앙에 박아 넣었다.
지이이이잉!
마나스톤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은은히 진동하며 마법진 곳곳에 스며들어 갔다. 이 마법진은 아주 특별했다.
테페룸을 특수한 방법으로 가공해서 만든 재료로 만들어졌다.
이 마법진 한 번 그리는 데 수천만 골드가 필요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마법진인지 충분히 알 만했다.
곳곳에 마나가 스며든 마법진이 검붉은 핏빛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맞춰 수천 명의 노예가 나타났다.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마법진을 바라보는 노예 무리의 눈에 아득한
절망감이 피어났다.
“뭣들 하느냐! 시간이 없다! 서둘러!”
기사의 명령에 병사들이 움직였다.
“빨리빨리 걸어!”
병사들이 창으로 사정없이 노예를 찔렀다.
“아악!”
“크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공포에 질린 노예들이 서둘러 달렸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마법진 위였다.
수천의 노예가 마법진 위에 올라갔다. 마법진이 크긴 했지만 수천 명이 모두 올라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절반 정도는 마법진 밖으로 삐져나왔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 부분은 용인한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병사의 눈빛에 다급함이 어려 있었지만
공포에 질린 노예들은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고오오오오오!
마법진에서 더욱 강렬한 핏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노예들을 휘감아 버렸다.
촤촤촤촤촤촤촤악!
“크아아악!”
“아악!”
“살려 줘!”
마법진의 중앙에서부터 노예들이 핏빛 기운에 의해 갈려 나갔다. 조각도 남지 않고 핏물이 되어 쏟아졌다.
그걸 본 노예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핏빛 기운은 그저
노예를 죽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도망치지도 못하게 했다.
촤촤촤촤촤촤악!
“아악!”
“으아악!”
수천의 노예가 몽땅 핏물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노예들이 그렇게 죽어 나갈 때, 기사들은 전부 품에서 핏빛 구슬을 꺼내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허공을 유영하던 무언가가 기사가 들고 있는 구슬에 빨려 들어갔다. 구슬은 무언가를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점점 더 짙은 핏빛이 되어 갔다.
지독한 의식이었다. 그걸 지켜보는 병사들도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도 움직이거나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지금 움직이면 위험하다는 것을 지난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내 바닥에는 핏물만 남았다. 그리고 그 핏물이 마법진을 향해 스며들어 갔다. 아니, 마법진이 핏물을 남김없이
싹싹 빨아들였다.
스으으으으으.
핏물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는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그걸 듣고 있으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벌써 몇 번째 같은 광경을 보고 같은 소리를 듣는데도 그러했다. 이건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종류의 끔찍한
의식이었다.
“후우. 끝났군.”
바닥의 마법진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마법진을 구성하는 물질과 핏물이 혼합되어 아래에 파묻은 관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땅을 파라!”
기사의 명령에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리고 서둘러 땅을 파헤쳤다. 이곳에 더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오래 남아 있으면 정신이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땅을 적당히 파헤치자 검붉은 관이 나타났다. 표면에 새빨간 마법진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는데,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두려웠다.
기사들이 다가가 관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멀었군. 아무래도 숫자를 늘려야겠어.”
생각해 보면 고작 수천의 노예를 이용하자고 수뇌부에서 전쟁을 결정했을 리가 없었다.
‘역시 수만 단위는 되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 어쩌면 최소한 10 만은 모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10 만이나 되는 사람을 한데 모으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 중이니 가능하기는 하겠지.’
기사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시간이 없었다. 구슬에 모으는 영혼도 턱없이 모자랐다.
이 일을 빨리 끝내려면 더 잔인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 스케일을 키우는 수밖에 없었다.
“관을 마차로 모셔라. 돌아간다!”
기사의 명령에 병사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이내 화려하고 튼튼한 마차가 나타났고, 그 안에 관이 실렸다.
그리고 마차와 함께 모든 기사와 병사들이 떠나갔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걸로는 그러했다.

☆ ☆ ☆

제론은 유적 로비에 누워서 숨을 헐떡였다. 조금 전 싸움은 정말로 치열했다. 지금까지 중에 최고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승리했다.
“이제야 대충 패턴에 익숙해졌군.”
제론은 세 기간트를 동시에 상대해서 이겼다. 이스히스와 타히티, 그리고 마크리아가 동시에 덤벼드니 처음에는
제대로 반응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충분히 그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세 기간트가 싸울 때 쓸 수 있는 패턴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거기에만 익숙해지면 그럭저럭 상대가 가능했다.
물론 그 전에 제론의 실력 자체가 높아진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결코 그들을 이길 수
없었으리라.
“이제 8 기가 되었군.”
이스히스와 타히티가 각각 3 기씩이고 마크리아가 2 기였다. 이번에 동시에 3 기의 기사를 얻으면서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볼 때 앞으로는 더 많은 기간트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즉, 한 번에 얻는 기사의 수가 더
많아진다는 뜻이었다.
‘이대로라면 몇 번 더 이기면 벨트의 아공간을 꽉 채울 수 있겠어.’
벨트를 꽉 채우려면 앞으로 22 기의 기사를 더 얻으면 된다. 상대하는 기간트의 수가 계속 늘어날 거라고
가정하면 최대 네 번만 더 승리하면 된다.
물론 한 번 한 번의 싸움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수가 늘어나면 공격 패턴도 훨씬 다양해질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제론은 자신 있었다. 남은 싸움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빨리 끝날 것이다. 지금 제론은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더 강해지면 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벽을 무너뜨리면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제론은 습관적으로 아공간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그리고 바인의 보고를 확인했다.
“음?”
이번에 온 바인의 보고는 제론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누워 있던 제론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바인의 보고를 찬찬히 읽었다. 제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거 완전히 미친놈들이로군.”
마티를 통해 저장한 영상이 태블릿에서 펼쳐졌다. 제론은 그 영상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지독했다.
“대체 저건 누구의 관이지?”
궁금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확인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관을 든 병사들이 마티의 영역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건 직접 몸으로 뛰는 수밖에 없겠어.”
제론은 잠깐 유적에서 나가 보기로 결정했다. 사실 30 기의 기사를 모두 채우기 전에는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저 문제는 그냥 내버려 두면 큰일 날 것 같았다.
태블릿을 다시 아공간에 넣은 제론은 사건이 벌어진 곳에서 가장 가까운 유적으로 이동했다.

Chapter 3 전쟁의 목적 (2)


“전쟁이 너무 지지부진하군. 이래서야 제대로 피를 볼 수가 없지 않은가.”
엠페리움의 회의실에서 복면을 쓴 사내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자가 그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전력을 더 투입해야 할 것 같소.”
“우리가 일곱 왕국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인가?”
“그보다는 방해꾼이 있는 것 같소.”
“방해꾼?”
“문두스.”
“끄응. 문두스…….”
문두스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짜증이 났다. 그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짜증 나는 보고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역시 이번에도 어김이 없었다.
“카체 백작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그라고 별수 있겠소?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정보전에서 밀리면 방법이 없는 법이오.”
“끄응.”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정해야만 했다. 엠페리움의 정보력은 문두스에 비해서 한참이나 모자란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보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힘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겠군.”
“각자 알아서 내놓읍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전쟁을 길게 끌면 안 될 것 같소.”
“동감하오. 에어스트 왕국 쪽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소.”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에어스트 왕국 쪽에 나가 있던 대부분의 끈이 떨어져 나갔다.
에어스트 왕국은 모든 텔레포트 게이트를 폐쇄해 버렸다.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조치였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엠페리움이 정보를 얻는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 한데 그게 싹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어스트 왕국에 병합된 나라의 경우 엠페리움의 정보 조직이 차츰차츰 정리되는 중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 귀신같이 찾아내서 족족 박살을 내 버리는 통에 대부분의 정보 조직이 날아가 버렸다.
또한 아직 남아 있는 정보 조직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 모든 활동을 중지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에어스트 왕국 쪽의 정보가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다. 대체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그런 상황이니 이번 전쟁을 길게 끌어선 안 된다.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빨리 끝내서 그분의 부활을 서둘러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감춰 둔 전력을 꺼내야겠군. 난 베르 150 기를 내놓겠소.”
나머지 사내들도 각자 감춰 두었던 전력을 꺼냈다. 전쟁을 빨리 끝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주로 발굴형 기간트였는데, 다 모으니 무려 1 천 기가 넘어갔다. 발굴형으로만 그 정도 수가 되면 어떤 왕국이든
단번에 밀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서두릅시다. 최대한 빨리 기간트를 모아서 전장으로 보내야겠소. 일단 모나트 왕국부터 쓸어버립시다.”
“동의하오.”
그들은 그렇게 중지를 모은 다음 곧장 움직였다.
1 천 기가 넘는 기간트 부대가 곧장 전선으로 이동했다.

☆ ☆ ☆

제론은 엠페리움이 처참한 광경을 펼쳤던 장소에 도착해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피의 흔적도 없었다.
그렇게 많은 피를 쏟아 냈는데, 그 흔적이 전혀 없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제론의 감각은 이제 엄청난 수준에 올라 있었다. 당연히 시각이나 청각은 물론이고 후각도 어마어마하게 예민했다.
그런 제론의 후각에도 전혀 피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피를 흘렸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이곳에 머물렀던 기사들의 시큼한 땀 냄새도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인데 피 냄새가
없다니 그게 어떻게 말이 된단 말인가.
“그 마법진이 주변의 피까지 말끔히 빨아들인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불길했다. 제론은 태블릿을 꺼내 당시의 영상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남김없이 피를 빨아들이는 마법진과 그 피를 모두 받아들였을 걸로 의심되는 관, 그리고 기사들이 들고 있던
구슬까지 어느 하나 범상한 게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지? 그리고 저 관 안에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야?’
제론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엠페리움이 벌이는 일이었다. 그게 평범할 리 없었다. 아마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것이다. 저렇게
어마어마한 사람을 희생해 가면서 이뤄야 할 일이라는 것이 세상에 이득이 될 리 없지 않은가.
엠페리움이 가진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은 현시대에 없는 기술을 쓸 수 있었다. 그들의 시설에서 테페룸
가공 물질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제론은 그들의 목적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태블릿에 다급히 떠오른 보고들 때문이었다.
“모나트 왕국이 무너져? 그것도 고작 하루 만에?”
제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비록 모나트 왕국에 정보를 주지 않았다곤 하지만, 제아무리 크란 제국이라도 그들을
하루 만에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모나트 왕국에는 크란 제국군으로부터 빼앗은 기간트가 엄청나게 많았다. 그걸 이용해 원래보다 전력을 더 키울
수 있었다.
그러니 설사 테오스 용병단이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쉽게 크란 제국에 밀려날 리 없었다.
“게다가 크란 제국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쳤다고?”
크란 제국은 동시에 7 개국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니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마당에 더욱 전력을 집중해 공격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다른 왕국의 전력을
빼돌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테오스 용병단이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전황을 유리하게 바꿔 놓았다.
그걸 다 해결하기 위해선 적지 않은 전력이 필요했다. 즉, 한군데로 전력을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한데도 고작 하루 만에 모나트 왕국을 무너뜨렸다고 하니 믿기가 어려웠다.
제론은 이어지는 보고를 서둘러 읽었다.
“1 천 기의 발굴형 기간트가 추가로 투입되었다고?”
제론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기존의 기간트 부대에도 더 많은 기간트를 보냈다. 단숨에
전력이 절반 이상 늘어난 셈이었다.
그로 인해 전황이 급격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다른 왕국들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대단하긴 대단하군.”
제론은 이 전쟁이 일단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테오스 용병단을 빼돌리고 그 이후의 일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 시간을 끌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젠 불가능해 보였다.
제론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 ☆ ☆

“빨리빨리 움직여라!”
촤아악!
“꺄악!”
새까만 채찍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때마다 비명이 울렸다. 채찍질 소리와 비명 소리가 어우러져 사람들에게
공포를 선사했다.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이 거지꼴로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다들 핼쑥하기 그지없었고, 몸은 피골이 상접해서 뼈만 남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데도 그들을 관리하는 병사와 기사들은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거침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짜악! 짜악!
“멈추지 말고 걸어라! 꾸물대면 차라리 죽고 싶어지는 것이 뭔지 알게 될 것이다!”
짜악! 짜악!
“아악!”
“꺄악!”
연달아 채찍이 움직였고, 그때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는 건 공포가 주는
힘이었다.
그들은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은 엄청난 넓이의 벌판이었다. 그곳에는 먼저 도착해서 뭔가를 준비한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복장을 보면 마법사와 기사인 듯했다. 그들은 난민들이 도착하자 눈을 빛내며 인솔 책임자에게 다가갔다.
“목표치는 맞췄나?”
“30 만 명입니다.”
기사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잘했다.”
그들이 세운 목표치가 30 만 명이었다. 그동안 관에 흡수시킨 사람과 관에 새겨진 마법진의 변화를 토대로 계산한
숫자였다.
아마 계산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번 한 번으로 모든 일이 끝날 것이다.
“다들 저 위로 모아.”
벌판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인원이 30 만 명이나 되니
그들을 모두 처리하기 위해선 평소보다 몇 배나 더 큰 마법진이 필요했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와 병사들이 움직였다.
“다들 움직여!”
짜악! 짜악!
채찍이 날았고, 사람들이 비명과 함께 우르르 걸어갔다. 이내 모든 사람들이 벌판 위에 그려진 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당연히 마법진에 모두 올라갈 수 없어서 대부분은 마법진 밖에 위치했다. 물론 전혀 상관없었다.
일단 발동하기만 하면 이 마법진은 모든 사람을 핏물로 만들어 흡수할 것이다.
거기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마법진이 커진 만큼 영향력을 미치는 범위도
넓어졌을 테니 평소보다 훨씬 더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기사들이 품에서 구슬을 꺼냈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흡수하는 아티팩트였다.
아티팩트에 마나를 흘려 넣으니 은은한 진동과 함께 구슬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진이 가동되었다.
우우우우웅!
촤촤촤촤촤촤악!
“으아아아악!”
“꺄아아악!”
마법진 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인간이 기이한 힘에 의해 갈려 나가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도망치려고 애썼지만 누구도 도망치지 못했다. 마법진에서 흘러나온 핏빛 기운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며
사방을 휩쓸었다.
“크윽!”
멀리 떨어져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거기에 휘말렸다. 그들의 예측보다 마법진의 범위가 훨씬 넓었다.
콰콰콰콰콰!
병사들을 휩쓴 핏빛 소용돌이가 더욱 반경을 넓히며 그 뒤에 선 기사들까지 휘감았다.
다들 기겁을 하며 물러나던 와중이었는데, 기운이 퍼지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채 도망치기도 전에 휩쓸려
버렸다.
“크아아악!”
고통스런 비명이 벌판을 가득 울렸다.
이미 끌려온 사람들은 다 죽은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들을 데려온 기사와 병사들도 몽땅 죽었다.
그 정도로 마법진의 범위가 넓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손에 아티팩트를 든 기사들뿐이었다.
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에서 핏물이 되어 마법진으로 끌려 들어가는 동료를 곁눈질로 확인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끌려갈 것만 같았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듯해서 두려웠다.
콰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핏빛 소용돌이가 탐욕스럽게 피를 흡수해 마법진으로 이끌었다.
그 모든 피가 마법진 속으로 깨끗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어마어마한 수의 영혼이 구슬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내 소용돌이가 사라졌다. 그리고 마법진도 사라졌다.
살아남은 기사들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손에 든 구슬을 놓치지 않으려 소중하게 품었다. 그걸
놓치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구슬이 뿜어내는 빛에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 구슬에 영혼이 꽉 찼다는 뜻이었다.
기사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관을 꺼내야만 했다.
품에 구슬을 넣은 기사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그들은 저마다 검을 뽑아 땅을 파헤쳤다. 마나가 담긴 검이 땅을 거칠게 헤집었다.
이내 관이 나타났다. 관에 새겨진 마법진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끝났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필요가 없었다.
“크윽!”
기사들이 갑자기 신음을 흘렸다. 품에 넣은 구슬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다.
“뭐, 뭐지?”
가슴에서 연기가 흘러나왔다. 구슬이 달아오르면서 옷과 살을 태운 것이다.
“크악!”
기사들이 다급히 품에 넣었던 구슬을 꺼내 바닥에 휙 던졌다. 가슴에 파고들던 구슬을 강제로 빼내는 바람에
손에도 극심한 화상을 입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자신의 손과 바닥의 구슬을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전해 들은 바가 없었다.
스으으으.
바람이 불었다. 기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바람인 줄 알았는데 바람이 아니었다. 관에서 흡력이
일어난 것이다. 그 흡력 때문에 주변 공기가 흘러가 바람이 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구슬이 관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착! 착! 착! 착!
구슬이 관에 달라붙었다. 마치 원래 구슬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 놓은 듯 구슬이 달라붙은 자리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구슬이 그 자리에 들어가니 끼워 맞춘 듯 딱 맞았다.
수십 개의 구슬이 관에 절반쯤 박혔다. 그리고 관의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구슬의 빛이 하나로 합해지면서
더욱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화아아아악!
기사들은 순간적으로 눈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빛을 본 순간 눈이 멀어 버린 것이다.
“크아악!”
눈알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에 다들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고통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흐어억!”
기사들은 갑자기 온몸이 분해되는 고통에 괴성을 질렀다. 눈이 멀어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몸이 조각조각 잘려
나가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실했다. 온몸이 고통스럽다가 서서히 감각이 사라졌다.
그리고 기사들이 핏물로 변해 관으로 스며들었다.
그 자리에는 요요로운 빛을 흘리는 관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지이이이잉.
관이 은은하게 진동했다. 흘러나오는 빛도 점점 더 강해졌다.
그리고 한순간 빛이 하늘로 쭉 솟아올랐다. 마치 핏빛 기둥이 하늘을 꿰뚫는 것 같았다.
핏빛 기둥은 나타남과 거의 동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관에서 흘러나오는 빛도 모두 사라졌다.
관에 새겨진 마법진이 희미해졌다. 그리고 관이 푸석푸석해지더니 풀썩 주저앉았다.
먼지구름이 자욱이 일어났다.
휘이익!
바람이 불어 먼지를 싹 날려 버렸다.
그 자리에는 젊은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사내는 벌거벗고 있었는데, 자신의 몸이 신기한지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좋은 몸이로군.”
사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옷이 없었지만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따악.
사내가 손가락을 튀기자 사방의 마나가 빨려들었다. 그리고 마법이 펼쳐졌다.
앞으로 사내의 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감각이 극도로 예민한 자들 외에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소드 마스터
말이다. 물론 기준은 고대였다.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치 싱그러운 공기와 햇볕을 즐기기라도 하듯 양팔을 넓게 벌리고 고개를 살짝
치켜든 채 눈을 감고서 말이다.

Chapter 4 부활 (1)

마법진이 그려진 복면을 쓴 10 명의 사내가 바닥에 이마를 댄 채 엎드려 있었다. 그들은 엠페리움의 수뇌부였다.
그리고 젊은 사내 하나가 그런 그들을 나른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그 말 한마디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내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고스란히 가슴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그는 정말로 고마워했다.
사내는 무심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이리저리 돌려 봤다.
자신의 손인데도 생소했다. 아직 제대로 몸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움직임이 어색했고, 주름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는 남의 것 같았다.
“거울을 가져와라.”
사내의 명령에 마치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듯 옆에 서 있던 시녀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사내가 볼 수
있도록 커다란 거울을 들었다.
사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런저런 표정을 지으며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확인했다.
‘저게 나란 말이지.’
아직 어색하긴 했지만 마음에 들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수려한 미남자였다. 게다가 가볍게 걸친 옷
사이로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몸도 상당히 훌륭했다.
사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일단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을 정리하느라 미처 떠올리지 못한 것 한 가지를
확인해야만 했다.
사내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맴돌았다.
아랫배와 심장에 꽉 뭉친 마나 덩어리가 느껴졌다. 새 몸을 얻는 바람에 힘도 처음부터 다시 얻어야 하는지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을 듯했다.
물론 예전 그가 가지고 있던 힘에 비하면 좁쌀만큼도 안 되는 작은 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본이 되는 씨앗의 유무는 그가 힘을 얼마나 빨리 되찾게 해 주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우우우웅.
주변의 마나가 사내의 의념에 따라 은은하게 진동했다. 그 진동을 느낀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이걸 직접 몸으로 느끼고 나니 진정 그들의 왕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일단 난 당분간 몸을 추슬러야겠다. 한 달 정도 걸릴 것이다. 그 전에 내가 급히 해야 할 일이 있느냐?”
10 명의 수뇌부가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댔다.
“폐하의 옥체가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이옵니다!”
10 명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에 사내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가슴이 울리는 것 같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수뇌부 중 하나가 일어나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장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제게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사내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나섰다.
이내 방 안에는 9 명의 수뇌부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드디어……!”
“드디어 폐하께서 부활하셨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부활을 위한 준비에만 수십 년이 걸렸다. 부활 의식에 필요한 재료와 기술,
그리고 마법을 준비하느라 그들의 세월 대부분을 바쳤다.
물론 그들의 왕이 죽기 전에 전해 준 것들이 없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해냈다. 크란 제국이 직접 전쟁을 일으키는 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이 잘 풀렸다.
왕이 부활했으니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왕의 힘으로 그들도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몸을 준비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다. 반쪽 부활이 되지 않으려면 몸에 각종 안배가 필요했다. 그래서 다시
힘을 되찾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어야만 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끝났다. 왕은 힘을 되찾을 것이고, 그들은 다시 예전처럼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후우. 앞으로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우선 부활의 법부터 정확히 전수받아야 하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그들의 부활은 왕이 맡았다. 당연히 왕의 부활은 스스로 해결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왕의 죽음이 너무나 급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왕이 색다른 것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부활의 준비를 미룰 정도로 깊은 흥미를 느끼는 바람에 다른 모든 걸 제쳐 두고 거기에 매달렸다.
물론 그 덕분에 그들의 힘만으로 왕의 부활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또한 왕이 다시 힘을 되찾는 시간도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이 모든 것이 왕이 관심을 가진 그것 덕분이었다.
“사실 난 폐하께서 우리를 넘어서는 고대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셨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했네.”
“나도 마찬가지일세.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테니까.”
“어쨌든 이제 한시름 놓았군. 슬슬 우리의 몸이 무너질 때를 대비해서 새로운 육체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그래야지. 그래도 각자 나름대로 준비해 둔 것이 있지 않나? 난 조금 준비했네만…….”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니 그 정도 준비를 안 했을 리 없었다.
“앞으로 거기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겠군.”
“하면 지금 하는 전쟁은 어쩌면 좋겠나?”
그 말에 나머지 수뇌부가 차갑게 웃었다.
“어쩌긴. 생명을 더 많이 확보해 놔야 하지 않겠나? 그 일곱 왕국을 정벌한 다음 그들을 이용해 피와 영혼을
모을 생각이네.”
“대륙 전체에 피바람이 불겠군.”
“항상 해 오던 일 아닌가.”
그 말에 다들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련한 눈으로 회상에 잠겼다.
그동안 대륙에 벌어졌던 큰 전쟁은 전부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오로지 부활을 위해서.

☆ ☆ ☆

에어스트 왕국은 새로운 점령지를 안정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지금까지는 여력을 상당히 남겨 두고 차근차근
진행했는데, 갑자기 방침이 바뀌었다.
새로운 방침을 세운 것은 에어스트 왕국의 국왕인 제론이었다.
제론이 갑자기 나타나 모든 것을 바꿔 버렸다. 또한 군사 훈련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 갑작스러운 행보에 다들 당황했다. 하지만 유능한 인재들답게 그러면서도 조금도 차질 없이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렇게 에어스트 왕국의 방침을 바꾼 제론은 다시 크란 제국으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더욱 치열하게 유적을 등록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겨 버렸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크란 제국의 정보망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었다면 미연에 막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에어스트 왕국의 일을 처리한 다음, 크란 제국에 도착했을 때, 바인으로부터 새로운 보고서가
들어왔다.
“난민이 대거 이동했다고? 무려 30 만 명?”
크란 제국군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30 만 명의 난민을 모아 어디론가 끌고 갔다는 보고였다.
다만 그들이 향한 곳이 마티의 범위를 벗어나는 바람에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물론
유추는 가능했다.
지난번 벌였던 일을 반복했을 것이다. 지난번에는 수천 명이었지만 이번에는 30 만 명이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대체 그렇게 많은 사람을 학살해서 무엇을 이루려 한단 말인가.
제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음이 무거웠다. 또 막지 못했다.
이런 걸 막으려면 더욱 넓고 촘촘한 정보망을 가져야만 했다. 그러려면 일단은 유적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전쟁은 어떻게 되었지?”
당연히 전쟁에 관한 보고도 있었다. 모나트 왕국을 집어삼킨 크란 제국은 파죽지세로 나머지 왕국도 밀어붙였다.
1 천 기가 넘는 발굴형 기간트가 일제히 몰려오는데 그걸 제대로 막을 수 있는 왕국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나머지 왕국도 순차적으로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이제 란체 왕국만 남아 있었다.
란체 왕국은 아모르를 공급받은 덕분에 크란 제국의 공세를 꿋꿋이 버텨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1 천 기의 발굴형 기간트가 몰려오는데 아무리 아모르 군단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걸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제론은 일단 7 개 왕국은 더 이상 손댈 수 없다고 판단했다. 란체 왕국을 지금 가서 도와 봐야 시간과 힘만
낭비할 뿐이었다.
지금은 차라리 새로운 유적을 등록하는 편이 나았다.
아직 크란 제국에는 등록해야 할 유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 모든 유적을 다 등록하지 않으면 엠페리움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솔직히 아직 제론은 그들에 대해 너무나 모른다.
지금까지 알아낸 거라고는 크란 제국에 근거지가 있다는 점과,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어떻게든 그들에 대해서 알아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있었다.
향후 그들이 얼마나 더 미친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뭘 하든 미리 알아내기만 하면 막아 내는 게
가능했다.
제론은 오랜만에 레벨리오에게 연락을 취했다. 일단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편이 좋았다.
차근차근, 하지만 빠르게 유적을 차지할 것이다.

☆ ☆ ☆

한 달이라는 시간은 어떻게 보면 길고, 또 짧다면 엄청나게 짧은 시간이었다.


엠페리움의 수뇌부에게 있어서 최근 한 달은 정말로 긴 시간이었다.
한 달 만에 7 개 왕국을 복속시켰다. 그들을 크란 제국의 영토에 편입시키진 않았지만 식민지로 만들어 이미
착취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앞으로 하게 될 일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이 할 진짜 일은 전쟁이었다. 어마어마한 피를 부를
전쟁 말이다.
그 전쟁에서 7 개 왕국은 지독한 짓을 저지를 예정이었다. 일단 포로는 없었다. 병사건 민간인이건 족족 죽일
것이다.
왕이 돌아오셨으니 그분의 방법으로 부활이 가능했다. 그것은 왕을 부활시킨 방법보다 훨씬 간단하고
효과적이었다.
그 방법을 살짝 응용해서 예전 란체 왕국의 테페룸 광산을 말려 버리고자 했었다. 물론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걸 위해선 왕이 내려 주는 생령주가 필요했다. 그 구슬은 피의 정화와 영혼을 담을 수 있었다. 하나의
생령주로 한 명을 부활시킬 수 있으니 얼마나 효율적인가.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그래서 한 달 30 일을 마치 30 년 같이 기다렸다. 생령주를 채워 넣을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말이다.
“생령주에 몇 명의 피를 채워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 반 기대 반이로군.”
생령주에 채워야 하는 피의 양과 영혼의 수는 정해지지 않았다. 생령주의 상태에 따라 달랐다. 그리고 생령주의
상태는 소유주에 따라 달라졌다.
현재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다들 늙었다. 생령주를 통해 부활하는 경우 수명이 엄청나게 늘어나서 오랫동안 버틸
수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시간이 지나 버렸다.
모든 것이 왕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제 대체 얼마나 많은 피와 영혼이 필요할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우리도 30 만 명 정도면 되지 않겠소?”
“글쎄. 우리는 폐하와 많이 다르니 그보다 훨씬 많이 들지 않겠소?”
“하지만 폐하를 부활시킨 방법은 생령주가 아니었으니, 효율 면에서 상당히 떨어졌을 거요.”
“확실히 그건 그렇지.”
“어차피 의미 없는 대화일 뿐이오.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 않겠소?”
그 말에 다들 수긍했다. 확실히 생령주의 비밀에 대해서는 아무리 애써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들의 왕이 그걸 감춘 게 아니었다. 워낙 난해하고 어려운 데다가 이해하는 데 특별한 재능과 능력이 필요했기에
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일단 생령주를 받고 부활의 법을 제대로 배우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오.”
“동의하오.”
설사 생령주가 없다 하더라도 부활의 법을 정확히 꿰고 있으면 충분히 부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부활의 법 자체가 생령주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제대로 익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10 명이 동시에 배우면 각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부분이 다를 테니 나름의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혹시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수월하게 왕을 부활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사실 어설픈 부활의 법으로 부활이 가능한 사람은 그들의 왕이 유일했다. 왕 자체가 완성되어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영영 왕을 깨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번에는 정말로 완전히 끝나는 줄 알았소. 그러니 다음에는 결코 이런 일이 반복되어선 안 되오.”
“당연한 일 아니겠소? 미리미리 준비해 둡시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표정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슬슬 왕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아직 나타나지 않아
불안했다.
만일 왕이 이대로 훌쩍 떠나 버리면 그들은 완전히 닭 쫓던 개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왕이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왕에게 있어서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오랜 신하이자 동료였다. 또한 노예이기도 했다. 그들은 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수족을 그냥 내다 버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그들이 아니었다면 다시 부활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것 아닌가.
그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거대한 존재감이 그들을 짓눌렀다.
“허억!”
“이, 이것은!”
존재감이 너무나 거대해서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드디어 그들의 왕이 돌아온 것이다.

Chapter 4 부활 (2)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리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온몸에서 줄기줄기 뿜어내는 위압감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그 익숙함에 눈물을 흘렸다.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왕이시여!”
10 인의 신하가 일제히 부복했다. 왕은 그들의 조아림을 느긋하게 즐기며 그 사이를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왕좌에 앉았다.
마치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딱 맞았다. 왕은 편안한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벌써 수백 년 동안 써
온 왕좌였다. 그 익숙함과 편안함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좋군.”
왕의 말에 신하들이 고개를 더욱 깊이 조아렸다. 왕의 기쁨은 곧 자신들의 기쁨이었다. 그들은 애초에 그런
존재였다.
왕이 앞에 없을 때는 딴생각을 하고 왕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막상 왕 앞에 서면 한없이 초라해지고, 모든 것을
왕에게 갖다 바쳐야만 하는 것이 그들에게 지워진 숙명이었다.
고작 한 달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왕은 자신의 예전 힘을 모두 되찾았다. 대체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나름대로 준비를 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역시 페하시군.’
10 인의 신하는 경이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고개를 조아리고 있어서 그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자,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 너희가 필요한 일을 하도록 하자. 뭘 원하느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신하들은 저마다 답을 동료에게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도 왕에
대한 불충이었다.
결국 모두 입을 맞춰 동시에 말을 했다.
“생령주를 원합니다.”
왕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왕이 손을 한 번 내저었다.
퍼버버벅!
땅에 닿을 듯 숙인 고개 바로 위 바닥에 뭔가가 박혔다. 각각 하나씩 모두 10 개였다.
신하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워낙 날카롭고 강렬한 기운을 동반했는지라 머리통이 날아가는 걸로 착각을
했다.
그들은 왕이 노린 것이 자신의 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크게 안도했다. 만일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왕의
심기를 거슬렀을 것이다.
신하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머리맡에 박힌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리고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새, 생령주!”
그것은 생령주였다. 대체 언제 이걸 10 개나 만들었단 말인가.
“힘을 되찾으면서 무료할 때마다 하나씩 만들어 봤다. 마침 너희가 원한다니 잘됐군.”
신하들의 눈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역시 자신들의 왕이었다. 수십 년을 기다린 보람이 느껴졌다.
“이제 생령주를 얻었으니 슬슬 전쟁을 시작해야겠군.”
왕의 눈에 언뜻 광기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었다. 눈동자 깊은 곳에 똬리를 틀었다.
어쨌든 수십 번의 생을 반복해 온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보통 사람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광기로
똘똘 뭉쳐 있었다.
“오랜만에 피를 볼 수 있겠군. 재미있겠어.”
왕의 입매가 뒤틀렸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피의 폭풍을 예고하는 듯했다.
물론 왕 앞에 고개를 조아린 10 명의 신하 역시 그와 비슷한 눈빛이었다. 그들은 영생을 위해서라면 세상 그 어떤
것이든 희생시킬 준비가 된 자들이었다.

☆ ☆ ☆

“완전히 미친놈들이로군.”
제론은 레벨리오와 함께 거의 동시에 3 개의 유적을 등록한 다음 태블릿을 통해 바인의 보고서를 확인했다.
크란 제국이 또 전쟁을 벌였다. 아니, 정확히는 크란 제국이 아니라 크란 제국에 의해 식민지가 된 7 왕국이
동시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게다가 그냥 전쟁이 아니었다. 잔인한 학살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었다.
마티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보면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들이 없었다.
“대체 저건 뭐지?”
제론은 심각한 표정으로 기사들이 저마다 들고 다니는 검을 쳐다봤다.
특이한 검이었다. 사람을 죽인 다음 심장에 찔러 넣으면 피를 몽땅 빨아들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손잡이와 검신을 연결하는 폼멜에 작은 구슬 두 개가 박혀 있었다. 하나는 붉은색이었고 다른
하나는 푸른색이었는데, 피를 빨아들일 때는 붉은 구슬이 빛났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순간에는 파란 구슬이 반짝 빛났다.
모든 기사가 그 검을 들고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전쟁보다는 사람을 죽여 피를 빨아들이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쟁 중에 죽는 기사가 있으면 동료가 반드시 그의 검을 회수하는 걸로 봐서 검에 박힌 두 개의 구슬이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역할을 할 걸로 보였다.
“피를 모아? 보아하니 저 파란 구슬은 영혼을 모으는 것 같고…….”
제론은 그 광경을 보며 대번에 예전 영상으로 확인했던 그 처참한 의식이 떠올랐다.
마법진에 사람을 몰아넣고 완전히 핏물로 갈아서 흡수하던 그 영상 말이다. 거기에서도 기사들이 커다란 구슬을
들고 뭔가를 흡수했다. 제론은 그것이 영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즉, 지금 전쟁을 벌이는 7 개 왕국의 기사들이 그때 크란 제국 기사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피와 영혼을 모아서 뭘 하려는 거지?”
그냥 피를 모으는 것도 아니었다. 저 구슬 안에 들어가는 것은 피보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였다. 그게 뭔지는
제론도 알 수 없었다.
“초고대문명의 지식을 뒤지다 보면 뭔지 나올까?”
그럴 수도 있었다. 제론은 태블릿을 들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단어로 검색해 보았다.
상당히 다양한 지식이 나왔지만, 딱히 이거다 하는 것이 없었다. 초고대에는 피에 관해서도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대부분 치료를 위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영혼에 대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몇 시간이나 태블릿을 뒤적였지만 특별히 알아낸 건 없었다. 제론은 결국 포기하고 태블릿을 아공간에 넣었다.
답답했다.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에어스트 왕국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과 계속 초고대유적을 정복해 나가는
것 외에는 없었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새로운 유적을 찾아갈 시간이 되었다.

☆ ☆ ☆

“역시 생령주를 채우는 데 전쟁만큼 효과적인 건 없군.”


“그러게 말이오. 벌써 절반은 채운 것 같군.”
“이 구슬 하나에 피의 정화와 영혼을 함께 가둘 수 있다니 정말 폐하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소.”
“그나저나 이번 전쟁은 그동안과는 좀 달라서 살짝 꺼림칙하군. 안 그렇소?”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엠페리움이 취한 방법은 크란 제국을 직접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왕국들을 크게 뒤흔들어 전쟁을
일으키는 식이었다.
때로는 크란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왕국에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고, 또 때로는 크란 제국과 국경을
맞댄 곳에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부활해야 할 인원이 총 11 명이나 되다 보니, 죽여야 하는 인간의 수도 엄청났다.
생령주를 꽉 채우는 데 필요한 생명의 수가 때에 따라 변하기에 어떤 경우 수십만 명이 넘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때도 있었다.
그리고 부활의 법을 발동시키는 데 들어가는 최소한의 생명력이 있기에 적어도 5 만 명 이상의 희생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니 11 명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최소 55 만 명의 생명을 죽여야만 했다. 그리고 운이 나쁘면 수백만 명이
넘는 생명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말이 수백만 명이지 정말로 어마어마한 수였다. 그냥 보통 전쟁 한 방으로 채울 수 있는 인원이 아니었다.
정말로 큰 전쟁을 일으키고 그와 더불어 학살을 해야만 처치가 가능한 숫자였다.
더구나 전쟁의 양상이 기간트 위주로 돌아가면서 생명을 취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전투 중에 취할 수 있는
생명이 거의 없었기에 전투가 끝나고 민간인을 학살하면서 생명을 채워야만 했다.
어쨌든 예전에는 그런 대학살을 다른 왕국들만 움직여서 행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못해서 상당히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폐하께서는 어쩌고 계시오?”
“우리가 부탁했던 것을 준비 중이시오.”
그 말에 다들 눈을 빛냈다. 그들이 현재 간절히 원하는 것은 에너지 감지 아티팩트였다.
여전히 레벨리오의 공격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한동안 사라져서 이제 완전히 와해된 줄 알았는데, 최근 다시
기승이었다.
“아무래도 전쟁은 전쟁이고 레벨리오 놈들을 박살 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소.”
“동의하오.”
“하면 무슨 수를 내 봅시다. 그놈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은데…….”
“그러려면 그럴듯한 미끼가 필요하오.”
“미끼라면 적당한 것들이 많지 않소.”
“부활하기 전에 마무리를 지었으면 좋겠소.”
“슈탐 후작을 이용하는 건 어떻소?”
“슈탐 후작이라…….”
슈탐 후작은 소드 마스터였다. 물론 고대 기준이었고, 레벨리오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레벨리오
입장에서는 가장 죽이고 싶은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레벨리오의 조직원을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었다.
특히 지난번 레벨리오의 본거지를 습격할 때, 엄청난 활약을 통해 수백의 레벨리오 조직원을 학살했다.
레벨리오에서는 슈탐 후작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하지만 슈탐 후작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는 엠페리움에서
철저히 감추고 보호하는 중이었다.
레벨리오의 능력으로는 절대 그의 위치를 알아낼 수 없었다. 또한, 습격도 쉽지 않았다. 슈탐 후작은 소드
마스터였다. 웬만한 습격으로는 그를 어쩌지 못한다.
슈탐 후작을 전면에 내세우면 분명히 레벨리오의 습격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레벨리오의 습격을 막아야 할 곳이 워낙 많아서 지금이야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지만, 막아야 할 곳을 하나로
한정하면 얼마든지 대처가 가능했다.
“슈탐 후작 정도면 레벨리오도 혹할 수밖에 없긴 하겠소만…….”
“뭐 걸리는 거라도 있소?”
“슈탐 후작은 그냥 희생시키기엔 너무 큰 패 아니오?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유능한
사람을 잃기라도 하면 곤란하오.”
“뭘 그리 걱정하시오. 슈탐 후작은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상당한 강자에 속하오. 그가 쉽게 당할 리 없소.
게다가 함정을 잘 파기만 하면 레벨리오는 슈탐 후작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할 거요.”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표했다.
냉정히 따져 계산해 보면 그 말이 옳다. 슈탐 후작이 어떤 존재인가. 같은 소드 마스터라도 그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레벨리오의 소드 마스터는 지난번 습격에서 죽어 버렸다. 레벨리오는 이제 소드 마스터를 막아 낼 무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마나폭탄을 이용해 기습하면 모르겠지만, 그 부분은 미리 대비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좋소. 그렇게 결정합시다.”
“동의하오.”
“나도 동의하오.”
다들 동의를 표하자, 의견을 냈던 사내가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다들 동의했으니 일을 진행하겠소. 아마 아주 재미있을 거요.”
하지만 다른 자들은 전혀 그 말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정이 난 순간부터 그들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지금 이 순간 오직 하나, 부활이었다.

Chapter 5 함정 (1)

제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슈틀러가 결국 무릎까지 꿇었다. 그는 이번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를 처리한다고 뭐가 달라지지? 그저 적 하나가 사라질 뿐이야. 한데 거기에 조직의 전력을 투입하겠다고?
함정인 걸 뻔히 알면서 거길 들어가겠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제론의 신랄한 말에 슈틀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슈틀러 뒤에 서 있던 나머지 조직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도와주십시오.”
그들은 제론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다. 물론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또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정보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지금까지의 경험만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런 제론이 도와준다면 이번 일은 분명히 성공할 수 있으리라. 물론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제론은 그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왜 괜히 희생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그저 시간을 더 두고 차근차근
공략해 나가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는 목표였다.
한데 왜 그걸 서두른단 말인가.
“내가 도와주면 뭐가 달라지지?”
그제야 슈틀러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성공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슈틀러도 이 일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들만으로는 절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안다는 말이었다.
제론은 가만히 슈틀러를 쳐다봤다.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그 깊은 곳에 냉철함이 번득였다.
그걸 보고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을 말해 봐라.”
슈틀러는 기다렸다는 듯이 브리핑을 했다.
“현재 슈탐 후작은 펠츠 성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엠페리움의 시설에 숨어서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기다리고 있다, 라…….”
슈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미리 준비한 함정입니다. 아마 그 시설 자체가 함정과 관계가 있을 걸로 보입니다.”
“무슨 시설인지는 모르고?”
“예. 알아낸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위험하다. 아무런 정보가 없이 함정이라는 것 하나만 알고 쳐들어가야 한다. 그것도 단단히 벼르고 있는
적을 향해서 말이다.
“저희만으로는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되지?”
슈틀러는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무런 계획도 없습니다. 그 부분에서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제론은 조금 황당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슈탐 후작이라는 자가 레벨리오의 조직원을 그렇게 많이
학살했다니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고, 기회가 왔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있으려니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게
당연했다.
“좋아. 일단 좀 알아보고 오지.”
제론은 하수도를 개조한 공간에 머물고 있는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을 슥 둘러봤다. 어느새 2 천 명이 넘었다. 다른
곳에 흩어진 조직원들을 다시 모은 것이다.
‘여기를 치면 이들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도 있겠군.’
제론은 엠페리움이 뭘 생각하는지 대충 짐작했다.
제대로 된 함정을 준비해 저들 모두가 움직이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망타진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목표였다.
아마 그 목표는 달성할 확률이 지극히 높을 것이다. 제론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말이다.
제론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슈틀러를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레벨리오의 수뇌부가 완전히 사라진 상황인데 굳이 이런 게릴라전을 이어 갈 이유가 따로 있나?”
슈틀러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레벨리오의 수뇌부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고? 그럼 그 남은 사람이 너희를 움직이고 있는 건가?”
슈틀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분은 지시를 내리거나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제론은 그 말을 들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황족인가?”
제론의 말에 슈틀러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렇게 집어낼 줄 알았다. 이제 더 숨기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렇습니다.”
“역시 그래야 그동안의 일이 다 이해가 가지. 그럼 황족들도 엠페리움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슈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동안 엠페리움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움직여 왔으니 말입니다.”
제론은 순간 레벨리오의 수뇌부가 황족 한 명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명이 아니군?”
제론의 날카로운 질문에 슈틀러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졌다. 제론이
거기까지 유추할 수 있으리란 건 사실 너무나 뻔했다.
“그렇습니다.”
“몇 명이지?”
사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저 흘러가듯 나온 질문에 불과했다. 하지만 슈틀러의 답은 제론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전부입니다.”
“음? 전부?”
“예. 모든 황족이 레벨리오의 수뇌부입니다.”
제론은 깜짝 놀랐다. 설마 모든 황족이 작당해서 엠페리움에 대항하는 조직을 만들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황족이면서 황족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상대적
박탈감이 굉장했을 것이다.
‘재미있군.’
어떻게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일 아닌가.
대륙 최고의 강대국인 크란 제국이 실제로는 황제와 황족이 아니라 엠페리움이라는 조직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이를 막기 위해 황족들이 나서서 불법 조직을 만들어 제국의 시설을 파괴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래서야 꼭 황족이 반란군 같지 않은가.’
크란 제국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엠페리움은 레지스탕스나 다름없었다. 한데 정작 상황은 그 반대가 되어 있으니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그럼 레벨리오의 진짜 목적은 황권을 원래대로 돌리는 일이겠군.”
이제야 아귀가 조금씩 맞아떨어진다. 아마 레벨리오를 조직하는 데에도 엄청난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골라내기도 쉽지 않았을 테고, 또 그들을 이용해 조직을 강하게 키우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레벨리오가 이런 반편이 같은 조직이 된 것이다. 고작해야 광장에 있는 분수대나 부수고 다니는 어설픈
조직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이들로서는 할 만큼 한 셈이긴 하지.’
광장의 분수대는 인공 소드 마스터를 양산하기 위한 실험 장치 중 하나였다. 그걸 파괴해서 엠페리움의 수단이 될
것을 미리 없애는 것이니, 나름대로 중요한 일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시설에 비해서 경계 수준이 형편없이 낮았다. 그러니 제대로 된 힘을 갖추지 못한 레벨리오의
입장에서 그 정도면 정말 할 만큼 한 것이었다.
제론은 잠시 고민했다. 레벨리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할 점이 많았다.
‘그나저나 용케 배신자가 나오지 않았군.’
황족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그러니 그중 배신자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배신자가 더 많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데도 아직 이렇게 조직이 괴멸되지 않은 걸 보면 철저하게 비밀을 지켰다는 뜻이었다.
지난번 본거지가 털린 것도 포로로 잡아간 드로센 자작에 의한 것이지, 특별히 내부의 정보가 샌 것이 아니었다.
“사실 저희 레벨리오에 관한 사항은 폐하만이 알고 계십니다.”
제론의 의문을 느꼈는지 슈틀러가 알아서 말을 꺼냈다. 그는 간절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걸
던져서라도 눈앞의 조력자를 얻고 싶었다.
“나머지 황족은 그저 조력자에 불과합니다. 물론 아무리 조력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굉장한 각오로군.”
확실히 대단했다. 아무리 그래도 황족이다. 황족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각오를 과연 쉽게 할 수 있을까?
엠페리움에게만 고개를 숙이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존재 아닌가. 한데 그 모든 걸 포기할 정도라니, 보통
각오로는 불가능했다.
슈틀러가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에는 몰랐으니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레벨리오 자체가 거의 붕괴하였기에 황족을 제외한 레벨리오의 실질적 업무를 담당하는 수뇌부가 몽땅 사라져
버렸다. 슈틀러는 그 와중에 아주 자연스럽게 최고 수뇌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실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엠페리움에게 있어서 황족은 그저 노예에 불과했다. 게다가 누구도 엠페리움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일개 기사나
남작의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만일 황족이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황족이라도 엠페리움의 손길을 피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야말로 노예보다 못한 처지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그렇게 몰락한 황족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된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가능성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법이었다.
모든 황족은 엠페리움을 두려워했고, 또 그 때문에 함부로 황족의 권위를 세우지도 못했다.
크란 제국 백성의 처지에서는 어찌 보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족으로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 레벨리오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 엠페리움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한편 궁극적으로 그들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황족에게는 그것을 이룰 만한 능력이 있었다. 가만히 두려움에 떨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이 엠페리움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서 오는 차이었다.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보통 귀족의 경우, 오히려 황족이 훨씬 무서운 존재였다. 다만 엠페리움과 다른 점은
존재 자체를 명확히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황족은 엠페리움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가지는 두려움이 훨씬 더 컸다.
슈틀러는 잠시 고민했다. 그 부분을 명확히 설명해 주지 않는 편이 제론을 설득하는 데 더 유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감추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결국 거짓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최소한 제론과는 끝까지 신뢰를 이어 가야만 했다.
“실은…… 황족들도 그리 편한 상황이 아닙니다.”
슈틀러는 그 말을 시작으로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제론은 슈틀러의 말을 들으며 레벨리오에 대해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제론이 가만히 슈틀러를 쳐다봤다. 솔직히 의외였다. 이렇게 모든 속내를 다 털어놓을 줄은 몰랐다. 이는
자칫하면 레벨리오 자체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사항 아닌가.
“좋아. 일단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그를 처리하는 걸 최대한 도와주겠다.”
“감사합니다!”
슈틀러의 눈에 격동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아마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론이 도와준다면 이번 계획은 무조건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예전에 봤던 그 굉장한 기간트가
나선다면 슈탐 후작쯤이야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가 있는 펠츠 성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성공에 대한 자신감은
변함없었다.
“계획이 어떻게 되지?”
슈틀러의 계획은 아주 단순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슈탐 후작이 펠츠 성에 머무는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복잡한 계획을 세울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단순하게 힘을 이용한 것이었다.
기존에 수많은 반복을 통해 효과가 입증된 방법을 쓰되, 힘을 더욱 집중하고 희생을 감수해 더욱 과감하게 밀고
나갈 계획이었다.

Chapter 5 함정 (2)

모든 계획을 확인한 제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계획은 너무 단순한데? 마나폭탄을 아무리 퍼부어 봐야 제대로 공격이 먹히지 않으면 곤란하지 않나?”
“하지만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성공을 경험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거야 적이 제대로 방비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고.”
그동안은 아무리 엠페리움이라도 제대로 된 방어를 할 여력이 없었다.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를 레벨리오의
습격을 대비해 모든 시설에 전력을 확충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저 예상되는 몇 군데를 찍어서 함정을 파는 정도였는데, 그것으로는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했다.
레벨리오도 기본적인 정보력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 제론이 문두스의 정보를 제공하니 더더욱 그런 함정에 당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물 수밖에 없는 미끼를 함정 안에 넣어 둔 격이었다. 아마 지독한 함정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하면…… 어찌할까요?”
슈틀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론이 도와주기로 한 상황이었다. 제론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이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제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길이기도 했다.
제론은 슈틀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혹시 기간트 라이더를 보유하고 있나?”
슈틀러는 기대에 찬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물론입니다. 레벨리오의 조직원이 되려면 기간트에 대한 소양 교육을 기본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기본적이라면 어느 정도지?”
“최소한 기간트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정도는 됩니다.”
“전투는?”
“현 인원 중 능숙하게 전투가 가능한 자는 300 명 정도입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목표로 하는 시설 근처에서 일제히 기간트를 소환해 공격하는 작전은 어떤가?”
“예? 그,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다.”
슈틀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펠츠 성이 비록 크고 보유한 군사의 규모도 상당했지만 그래도 수백 기의 기간트가 도시 중심에서 갑자기 나타나면
그걸 막아 내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기간트의 기종은 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괜찮은가?”
“무, 물론입니다!”
슈틀러의 머릿속에 수십 가지 작전이 휘몰아쳤다. 기간트를 쓰면 펼칠 수 있는 작전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일단 마나폭탄과 병행하는 방법에서부터 마나폭탄을 미끼로 던지고 적이 함정을 열면 기간트로 그 함정의 빈틈을
찌르는 수도 있었다.
“아, 몇 기의 기간트를 주실 수 있습니까?”
슈틀러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몇 기의 기간트를 움직일 수 있느냐에 따라 작전의 양상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제론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전투 가능한 라이더가 300 명이라고 하지 않았나? 300 기의 카타락타를 지급해 주겠다.”
슈틀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300 기의 기간트를 내줄 줄은 몰랐다. 대체 이 사람은 자신들에게 뭘
원하기에 이리도 큰 것을 내준단 말인가.
“그렇게 알고 작전을 짜도록. 기간트 300 기와 마나폭탄, 그리고 스크롤을 지급해 주면 굳이 내가 없어도
되겠지?”
“그, 그렇습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기간트 장비를 공수해 올 차례였다. 물론 그 장비에 담긴 아공간은 기존의 기간트
장비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아공간 간섭 마법진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아공간일 테니까.’
제론은 에어스트 왕국의 모든 기간트 장비를 교체했다. 이제 에어스트 왕국의 기간트는 더는 아공간에 관한
마법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 장비를 레벨리오에 나눠 줄 생각이었다.
제론이 굳이 기간트까지 주면서 몸을 빼려는 이유는 유적 때문이었다.
최근 이상하게 유적 클리어에 대한 욕심이 부쩍 늘었다. 이렇게 레벨리오를 도와 엠페리움을 방해하는 것보다
그게 더 중요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제론은 일단 유적을 모두 클리어하고 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사실 크란 제국의 전쟁에 좀 더 깊이 개입할 수도 있는데 굳이 발을 뺀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다.
‘이게 그저 욕심인가?’
제론은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봤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욕심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유적을 최대한 빨리 클리어하는 것뿐이었다.
“그럼 조만간 기간트를 가지고 올 테니 그동안 차분히 계획을 세우고 있도록.”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중앙 유적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기간트를 조달해 유적 간 텔레포트로 다시 돌아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 이후, 레벨리오가 작전 준비를 빠르게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제론은 유적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 ☆ ☆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고개를 땅에 처박은 채 덜덜 떨었다. 그들의 왕이 갑자기 나타나 온몸으로 공포스러운
기운을 줄기줄기 뿌려 대니 견딜 재간이 없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도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할 수 없었다. 안다는 말을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한단 말인가.
왕의 얼굴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왕의 분노가 시작된 것이다.
“레벨리오라는 놈들에 대해 상세히 보고해라.”
신하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우리를 적대하는 조직입니다.”
“그딴 놈들을 아직도 내버려 뒀다고?”
“그, 그게 지금까지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는지라…….”
레벨리오의 뒤를 캐서 그들을 분쇄하는 데 들어가는 힘과 돈이 차라리 그들의 습격으로 말미암은 피해보다 훨씬
크다고 판단했기에 내버려 뒀다.
또한, 습격 때마다 레벨리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기에 그냥 내버려 두면 지리멸렬하겠거니, 쉽게 생각한 것도
있었다.
어쨌든 레벨리오는 미미한 조직이었고, 굳이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들의 습격 규모가 이렇게 갑자기 커지기 시작한 건 최근부터였다.
“더 자세히 고해라.”
왕의 말에 깃든 살기에 고개를 든 신하가 부르르 떨었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그걸
이겨 내고 말하지 않으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조, 조사 중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잡기 위한 함정을 팠습니다.”
신하는 더욱 자세히 함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제야 왕의 분위기가 살짝 풀어졌다. 하지만 근본적인 분노가
사라지지 않았기에 다들 공포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놈들을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라.”
신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왕은 신하들을 죽 둘러보며 차분히 말했다.
“레벨리오가 에너지를 없앤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어쩌면 그들이 에너지원을 탈취했을 가능성도 있다.”
왕은 그 말을 하고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생각할수록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그걸 알아내지 못하면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상당히 복잡하고 잔혹해진다는 것을 머리에 새겨라.”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번쩍 들고 왕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 복잡해지고
잔혹해진단 말인가.
“영생을 이어 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라서 잠시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내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생령주입니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생령주가 가장 중요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왕의 부활을
기다린 이유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생령주의 주인인 왕은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 생령주가 없더라도 얼마든지 영생을 이룰 수 있다. 너희가 산 증인 아니더냐. 생령주 없이 날
부활시켰지 않느냐.”
“하지만…….”
즉시 반박하려던 신하들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왕의 말이 옳았다. 생령주가 반드시 필요하긴 하지만, 그 기능이
중요했다. 대체할 물건이 있다면 사실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면 피와 영혼입니까?”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그건 부활에 필요한 재료에 불과하다. 언제까지고 부활에 의존해서 영생 흉내만 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으냐.”
“헉! 그, 그렇다면……!”
“그리 놀랄 것 없다. 이미 수백 년 동안이나 이어 오던 연구니까.”
다들 왕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찌 그런 중요한 얘기를 이제야 해 준단 말인가.
“이제야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짜증이 나는구나.”
왕의 태도에 신하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면 대체 그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왕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에너지다.”
“예?”
“육체와 정신을 유지할 에너지가 필요하단 말이다. 섭리를 거스르고 영혼을 육체에 담아 둘 정도로 거대한 에너지
말이다.”
왕을 바라보는 신하들의 목울대가 또 한 번 움직였다. 만일 그게 정말이라면 큰일이 난 셈 아닌가. 육체를
유지할 에너지가 사라지는 셈이니 말이다.
“사라진 에너지원이 너무 많다. 이래서야 우리 모두의 육체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해.”
그제야 신하들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챘다. 영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자신일지도 몰랐다.
다들 긴장한 눈으로 왕을 바라봤다. 여기까지 와서 버려지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 방법이 안 된다면
생령주를 이용한 부활을 이용해서라도 영생을 이어 가면 될 것 아닌가.
“생령주를 이용한 부활에는 한계가 있다. 앞으로 몇 번을 더 할 수 있을지 이제는 나도 장담하지 못한다.”
왕의 말은 신하들의 얼굴에 절망을 드리웠다. 설마 생령주에도 그런 문제가 있을 줄은 몰랐다. 한계가 있다니.
그렇다면 정말로 영생을 위한 에너지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 아닌가.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레벨리오를 생포해라. 특히 수뇌부는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에너지원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면 끝장이야.”
신하 중 하나가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왕에게 물었다.
“하면…… 만일 정말로 에너지원이 사라진 거라면 어찌합니까?”
왕의 얼굴에 냉막한 기운이 차르르 흘렀다. 그의 입에서 더없이 차가운 말이 튀어나왔다.
“그때는 방법을 바꿔야지. 생령주를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면 된다.”
“다, 다른 방식 말입니까?”
“그래. 인간이 가지는 에너지는 막대하지. 인간의 몸 자체에서 나오는 에너지도 그렇지만 정신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하지.”
왕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크란 제국을 움직여 대륙을 정복해야지. 아마 그렇게 되면 전 대륙에 공포의 대왕이 강림할 것이다.”
그제야 신하들의 표정에 여유가 떠올랐다. 왕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들이
누구보다 잘하는 일이었다.
대륙을 발아래 두고 도탄에 빠뜨려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떨고, 비탄에 빠지고, 또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들,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미래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그들의 왕이 지은 잔혹한 얼굴과
닮아 있었다.

☆ ☆ ☆

슈틀러는 레벨리오의 모든 조직원을 동원했다. 이번 작전에 조직의 사활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체 정체가 뭘까?’
생각할수록 제론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파고들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그저
호의에 감사하며 눈앞의 계획에 모든 걸 집중해야만 할 때였다.
“다들 준비되었나?”
슈틀러는 눈을 빛내며 조직원들을 둘러봤다. 이번 작전에 걸린 의미는 상당히 컸다.
슈탐 후작은 레벨리오의 조직원을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었다. 또한 레벨리오 본거지를 박살 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가장 선두에 서서 레벨리오를 박살 낸 사람이자, 엠페리움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였다.
슈탐 후작을 징치하는 것은 향후 레벨리오가 더 성장하는 데에도, 또 레벨리오의 활동을 이어 나가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자신 있었다. 현재 레벨리오에는 아공간 간섭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300 기의 기간트가 있었으니까.
“가자.”

Chapter 5 함정 (3)
슈틀러는 직접 조직원을 이끌었다. 그는 미리 준비한 하수도의 길을 통해 목적지로 향했다.
무려 5 천 명이나 되는 조직원이 슈틀러의 뒤를 따라갔다. 한두 명도 아니고 그렇게 많은 인원이 이동하는데
소리가 안 날 리 없었다.
슈틀러는 그 부분도 미리 준비했다.
“여기서 흩어진다.”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거미줄처럼 복잡한 하수도 곳곳으로 조직원이 흩어졌다.
슈틀러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고작 300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번 작전의 핵심인 기간트 라이더였다.
“일단 슈탐 후작이 정말로 있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다.”
슈틀러는 스스로 암시를 걸듯 중얼거렸다. 절대 평정심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슈탐 후작이 이곳, 펠츠 성에 머문다는 정보는 상당히 신빙성 있는 루트를 통해 얻었다. 하지만 더 정확한
확인이 반드시 필요했다.
안 그래도 함정에 뛰어드는 꼴인데, 거기에 목표조차 없다면 그저 바보 멍청이가 되는 셈이었다.
펠츠 성에는 레벨리오에서 오래전부터 심어 둔 비선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미리 침투시켜 요직에 앉도록 조처를
한 정보원이 제법 많았다.
펠츠 성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펠츠 성의 정보원이 슈탐 후작의 존재를 발견한 것도 우연이었다. 하지만 그걸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슈틀러는 그 정보원의 목숨을 요구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정보원도 레벨리오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레벨리오를 통해 막대한 도움을 받은 그의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슈틀러는 하수도에서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나온 300 명의 라이더가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며
각자 자리를 잡았다.
그때,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펠츠 성에서 푸른 불꽃이 번쩍이며 위로 솟아올랐다.
슈틀러는 그것을 보며 눈을 빛냈다.
“작전 개시.”
저 불꽃은 작전을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또한, 펠츠 성에 있는 정보원이 슈탐 후작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제 본격적인 작전이 시작될 것이다. 물론 적이 함정을 준비했으니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래도
성공할 자신은 충분했다.
‘300 기의 기간트를 과연 막아 낼 수 있을까?’
슈틀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못 막는다. 슈탐 후작이 아무리 뛰어난 소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인간이야 소드 마스터가 무섭겠지만, 기간트가 상대라면 얘기가 완벽히 달라진다.
게다가 이쪽은 기간트만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기간트를 투입하기 전에 상대를 크게 뒤흔들 준비도 충분히 했다.
신호가 올라갔으니 이제 슬슬 그들이 움직일 것이다. 마나폭탄과 스크롤로 무장한 5 천 명의 레벨리오 조직원들이
말이다.
이번에 제론이 공급한 스크롤은 두 가지였다. 또한, 마나폭탄의 위력도 예전보다 더 강력해졌다. 제론이 직접
참여하지 못하니 더욱 확실한 성공을 위해 신경을 써 준 것이다.
‘그나저나 도시가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군.’
펠츠 성도 조용했고, 도시도 조용했다. 마치 사람들을 미리 대피라도 시킨 것 같았다. 뭔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금세 그 생각을 지웠다.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시 곳곳에 있는 하수구에서 나타난 사람들이 일제히 펠츠 성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을 제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펠츠 성은 단단히 성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도시 한가운데에 있긴 하지만 높고 단단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마치 도시와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성에 다가간 조직원들이 마나폭탄을 던졌다. 막는 사람이 없기에 모습을 감추는 스크롤은 쓸 필요도 없었다.
꽈과과과과과과과과광!
엄청난 폭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나폭탄의 위력이 올라갔기 때문에 성벽에 가해지는 충격도 엄청났다.
우우우웅!
성벽에 마법 문양이 한가득 떠올라 빛났다. 그것은 견고한 방어 마법이었다.
하지만 마나폭탄의 위력은 방어 마법에 균열을 만들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 폭발이 연달아 일어나니 결국 방어
마법도 깨질 수밖에 없었다.
꽈아아아앙!
성벽 곳곳이 무너졌다. 또한, 성문도 박살 나서 날아가 버렸다.
슈틀러는 은밀하게 이동했다. 일단 성문과 성벽이 무너졌으니, 적당한 타이밍에 맞춰 일제히 기간트를 소환해
달려들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슈탐 후작이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가 만일 비밀통로라도 이용해 몰래 빠져나가 버리면 답이 없다. 그래서
슈틀러는 그 부분에 제법 신경을 썼다.
언제라도 돌격해 성에 진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은 슈틀러는 품에서 스크롤 한 장을 꺼냈다.
이 스크롤은 다른 조직원이 가진 스크롤과 전혀 다른 종류였다. 이것은 마법을 담은 스크롤이 아니라, 마법을
발동시키는 스위치 역할을 하는 스크롤이었다.
슈틀러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찢었다.
찌이익!
우우우웅!
강렬한 마나의 파동이 스크롤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펠츠 성을 중심으로 총 열 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꽈과과과과과광!
폭발 위치가 마치 펠츠 성을 포위하는 듯했다.
슈틀러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각의 위치에서 마나폭탄 10 개를 터트렸다. 그것도 몰래 바닥에
깔린 돌을 드러내고 땅을 파서 묻은 마나폭탄이었다.
그 부분은 펠츠 성의 비밀통로가 위치한 곳이었다. 비밀통로에 숨어 들어가서 마나폭탄을 터트리는 것이 가장
확실하지만, 그럴 방법이 없었기에 위에서 폭발시켜 통로를 무너뜨렸다.
성능이 강화된 마나폭탄 10 개의 위력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만일 그걸 다닥다닥 붙여 터트렸다면 성벽도
무너졌을 것이다.
‘그래도 이럴 때는 제법 도움이 되는군.’
펠츠 성의 비밀통로에 대해 알려 준 건 당연히 레벨리오의 수뇌부, 황족이었다. 아무리 허수아비 같은 존재라
해도 황족이었다. 성의 설계도면 정도야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펠츠 성 중심부의 도면은 얻지 못했지만 말이다.
펠츠 성 중심부에는 엠페리움의 시설이 있었다. 그 시설과 관계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리 황족이라 하더라도
결코 얻어 낼 수 없었다.
어쨌든 황족은 그들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 덕분에 비밀통로를 막아서 슈탐 후작이 도망갈 수 없도록 펠츠 성에
가뒀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작전은 절반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다.
‘슬슬 기간트를 소환해야겠군.’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남은 건 성으로 들어가서 기간트를 소환하느냐, 아니면 기간트를 소환해 성으로
돌진하느냐를 결정하는 것뿐이었다.
슈틀러는 후자를 선택했다. 성으로 들어가서 기간트를 소환하는 건 상당한 위험 부담을 안아야만 했다.
물론 그편이 적의 방심을 조금이라도 더 유도해서 성공 확률을 높여 주긴 하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딱히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 순간, 갑자기 도시의 도로에 빛나는 선이 나타났다.
시작은 펠츠 성이었다. 펠츠 성을 중심으로 도시의 도로를 따라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선이 죽 그어졌다.
슈틀러는 발밑을 지나가는 빛의 선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머뭇거림은 지극히
짧았다.
“기간트를 소환해!”
슈틀러의 외침에 갑자기 나타난 빛의 선에 넋을 놓고 있던 라이더들이 일제히 기간트를 불러냈다.
키이이이이잉!
301 기의 기간트가 동시에 나타났다. 미리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기간트를 소환할 공간을 확보했기 때문에 별다른
혼란은 없었다.
“달려!”
슈틀러는 기간트에 타자마자 명령을 외쳤다. 왠지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쿵쿵쿵쿵쿵쿵!
슈틀러의 명령을 받은 라이더들이 기간트를 움직였다. 301 기의 기간트가 펠츠 성을 향해 달려갔다.

펠츠 성의 중심에 있는 첨탑. 그 꼭대기 방에 한 사내가 서서 도시의 정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오. 기간트? 아공간 간섭을 벗어나는 방법까지 가지고 있다니 정말로 놀랍군.”
사내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수백 기의 기간트가 성벽을 지나 달려오는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그저 나른했다.
“과연 기간트를 상대로도 통할지 모르겠군.”
말은 모른다고 하면서 표정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펠츠 성에 보관된 엠페리움의 시설은 다른 곳과는 조금
성격이 달랐다.
이곳에 있는 시설은 그 자체로 공격 무기이자, 방어 도구였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사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닥을 내려다봤다.
바닥에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마법진이 가득 그려져 있었는데,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마나스톤이 박혀 있었다.
사내는 마나스톤으로 다가가 그것을 발로 꾹 밟았다.
철컹!
마나스톤이 아래로 쑥 내려가며 어딘가에 걸렸다. 그러자 마법진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사내는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도시 전체를 감싼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 빛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대로 멈췄다.
“역시 탁월해.”
무려 5 천 명이나 되는 적이 이 한 방에 무력화되었다.
쿵! 쿵! 쿵!
“역시 기간트에는 안 되는 건가?”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기간트가 다가오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 걸로 봐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그럼 안전장치를 마련해 볼까?”
사내는 다시 바닥의 마법진을 내려다봤다. 방금 전 사내가 발로 박아 넣은 마나스톤 외에도 조금 떨어진 곳에
마나스톤 하나가 더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거기로 다가가 마나스톤을 발로 꾹 밟았다.
철컹!
이번에도 역시 마나스톤이 움푹 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색깔이 바뀌었다.
우우우웅!
사내가 있는 첨탑이 은은히 진동했다. 그리고 마법진의 빛과 같은 색의 빛이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걸로 당분간은 안전해지겠군.”
사내는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사실 지금 취한 조치는 딱 첨탑만 방어하는 것이었다. 성의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 성 밖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무기력해졌을 것이다. 또한, 기간트의 공격에 성이 부서지면 속절없이 죽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다 죽을 거라 예상한 작전이었다. 저들 역시 이번
함정의 미끼 중 하나였다. 아니, 미끼를 강화하기 위한 장식이었다.
사내의 무심한 시선이 성안으로 들어와 힘겹게 걷고 있는 기간트로 향했다.

슈틀러는 크게 당황했다. 설마 준비한 함정이 이런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기간트의 시야를 통해 성에


진입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조직원의 모습이 보였다.
‘이대로라면 남은 마나폭탄은 물론이고 스크롤까지 몽땅 빼앗기겠군.’
이건 정말로 큰일이었다. 이번 작전에 확실히 성공하기 위해 각 조직원에게 지급한 마나폭탄의 수는 무려 15 개에
달했다. 개중에는 20 개를 지급받은 자도 있었다.
이번 작전에만 총 10 만 개의 마나폭탄을 투자했다. 게다가 스크롤도 각각 2 장씩 챙겼다. 하나는 모습을 감추는
스크롤이고, 다른 하나는 용이한 탈출을 위한 스크롤이었다.
한데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로 변해 버렸다. 기간트에 타고서도 이렇게 몸이 무겁고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맨몸인
자들은 오죽하겠는가.
‘몽땅 사로잡히겠군.’
슈틀러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펠츠 성안에서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단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 수는
100 명에 달했는데, 그들이 입은 갑옷에 그려진 마법진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저 갑옷의 마법진이 도시의 마법진을 벗어날 방법인 모양이군.’
슈틀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만일 슈탐 후작이 저 갑옷을 입고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난감한 일이었다. 이렇게
몸이 무거운 상태로 소드 마스터를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그래도 기간트에 타고 있으면 저 마법진에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일단 성부터 부수는 것이 순서였다.
“당황하지 마라! 성부터 부숴!”
슈틀러의 명령에 300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꽝! 꽝! 꽝! 꽝! 꽝!
성이 워낙 컸기에 300 기의 기간트가 모두 달라붙을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성은 기간트의 주먹질에 속절없이
부서져 나갔다.
아무리 마법진에 의해 움직임이 둔해진 기간트라고 하지만 그래도 기간트는 기간트였다. 고작 성 하나 부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꽈르르! 꽈르르릉!
성이 우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펠츠 성은 대단히 컸다. 부수고 또 부숴도 새로운 건물이 나타났고, 벽이
나타났다. 하지만 기간트가 무려 300 기였다. 누구도 펠츠 성의 규모에 감탄하지 않았다.
꽝! 꽝! 꽝! 꽝!
꽈르르! 꽈르르릉!
끊임없이 성이 무너졌다. 성안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 성에 사는
사람의 대부분이 엠페리움과 관계된 자들이었다.
그렇게 성이 모두 무너지고 이제 첨탑 하나만 남았다. 그것은 성 중앙에 있던 탑이었는데, 검은 광택이 마치
물결처럼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슈틀러는 첨탑 창가에 서서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슈탐 후작을 발견했다.

Chapter 5 함정 (4)

“슈탐 후작이다! 쉬지 말고 첨탑까지 무너뜨려!”


슈틀러의 명에 첨탑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기간트 3 기가 다가가 주먹을 휘둘렀다. 첨탑이 그리 크지 않아 가까이
갈 수 있는 기간트의 수는 3 기가 한계였다.
쩡! 쩡! 쩡!
놀랍게도 검은 광택이 흐르는 첨탑은 실금조차 가지 않았다. 기간트의 주먹이 처음보다 좀 더 둔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을 본 슈틀러는 다급해졌다. 바닥에서 빛나는 마법진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기간트에 타고 있다 하더라도 버티기 어려웠다.
“비켜!”
슈틀러는 직접 나섰다. 생각해 보면 굳이 주먹을 쓸 이유가 없었다. 슈틀러의 기간트가 검을 뽑았다.
후웅!
슈틀러는 검을 뽑자마자 휘둘렀다. 다른 기간트와 달리 검에 실린 힘이 상당했다. 그나마 다른 조직원보다
마법진의 영향을 덜 받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쩌어어어엉!
슈틀러의 검이 첨탑에 꽂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첨탑이 움푹 들어갔다.
그것을 본 슈탐 후작의 눈에 놀람이 어렸다.
“호오. 설마 이 탑의 방어 마법을 뚫을 줄이야! 생각보다 대단하군!”
슈탐 후작의 눈에 탐욕이 일어났다. 슈틀러가 타고 있는 기간트는 카타락타처럼 보였지만 결코 카타락타가
아니었다. 모양만 같은 다른 기간트가 분명했다.
‘본인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슈탐 후작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알아보지도 못하는 놈이 보물을 가지고 있어 봐야 뭐하겠는가. 저런 보물의
주인은 따로 있는 법이다.
“그래…… 확실히 하기 위해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볼까?”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의 힘이 점점 더 강력해졌다. 사실 도시 위에 있는 사람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은
마법진의 진짜 효용이 아니었다.
이 마법진의 기능과 목적은 원래 전혀 다른 것이었다. 심지어 첨탑에 흐르는 방어 마법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을 잘 맞추려면 긴장을 늦춰선 안 되지. 마법진이 완벽하게 발동하기 전에 저 보물을 들고 몸을 빼야
하니까.”
마법진이 제대로 발동하면 아무리 슈탐 후작이라도 결코 멀쩡히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그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첨탑 안에 있으면 안전했다. 하지만 그건 첨탑이 멀쩡했을 때의 얘기다. 저렇게
무지막지한 공격을 계속 받으면 결국 첨탑이 망가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첨탑 정도야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다. 이 마법진이 발휘하는 힘은 그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쩌어어어엉!
그 순간 또 기간트의 검이 첨탑을 찍었다. 첨탑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강렬한 일격이었다.
“그나저나 저놈은 왜 저렇게 멀쩡하지?”
슬슬 다른 기간트는 하나둘 무릎을 꿇고 있었다. 라이더가 제대로 몸을 못 가누니 균형을 못 잡고 기간트의
무게에 눌린 것이다.
하지만 슈틀러의 기간트는 여전히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건 아니었다. 슈틀러도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대로 상당히 오랜 시간을 버티는 게 가능해 보였다. 슈탐 후작은 더 기다리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쯧. 조금 귀찮아졌군.”
슈탐 후작은 검을 뽑았다. 생각해 보면 지금 첨탑을 부수는 걸 막고 나중에 결정적인 순간 다시 혼자서 첨탑에
들어오면 된다.
적은 기간트를 타고 있으니 당연히 첨탑에 못 들어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마법진의 거대한 에너지 흐름에 휩쓸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릴 것이다.
결정을 내린 슈탐 후작이 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마침 기간트가 첨탑을 후려치려고 검을 크게 젖힌 순간이었다.
후웅!
슈탐 후작이 떨어지면서 검을 그대로 내리그었다. 주변 공기가 모조리 휩쓸려 거대한 폭풍이 되었다.
슈틀러도 그것을 발견하고는 급히 검의 궤도를 수정해 휘둘렀다. 솔직히 지금 이것은 바라 마지않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직접 슈탐 후작을 죽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쩌어어어어엉!
사람이 휘두른 검과 기간트가 휘두른 검이 부딪쳤는데, 마치 동등한 개체가 충돌한 것처럼 거친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그리고 슈탐 후작은 다시 허공으로 훌쩍 떠올랐다.
슈틀러의 카타락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쿠웅!
뒷발이 땅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 정도로 충격이 컸다는 뜻이다.
슈탐 후작은 다시 떨어지며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슈틀러는 슈탐 후작을 쓸어버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엉!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되었다.
슈틀러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반면 슈탐 후작은 여유가 넘쳤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 적절한 순간에 창을 통해 첨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면 끝이었다.
슈틀러도 슈탐 후작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점점 밝아지는 바닥의 마법진은 불길함을
더해 갔다.
쩌어어엉!
슈탐 후작이 다시 높이 떠올랐다. 슈틀러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대신 첨탑을 향해 몸을
날렸다.
꽈아아아앙!
카타락타의 어깨가 첨탑을 들이받았다.
슈탐 후작의 눈에 노기가 깃들었다. 그의 검이 카타락타의 등을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슈틀러는 등 쪽으로 느껴지는 위기감을 무시하고 첨탑에 검을 찔렀다. 그곳은 그동안 몇 번이나 타격을
가해 드러난 빈틈이었다. 그리고 몸으로 검을 밀었다.
꽈아앙!
슈탐 후작의 검이 카타락타의 등에 꽂혔다.
그리고 그 순간 슈틀러는 모든 힘을 다해 검을 찔렀다. 그의 의념이 하나로 모였다. 그것은 기적을 만들어 냈다.
쩌저저저정!
카타락타의 검이 희미하게 마나를 머금었고, 첨탑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 틈으로 카타락타의 어마어마한 힘이
밀고 들어갔다.
쩌저저저정!
첨탑에 거미줄 같은 금이 쩍쩍 갔다. 그리고 그대로 부서져 쏟아졌다.
꽈르르르르!
바닥의 마법진이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슈틀러는 물론이고 슈탐 후작마저도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 버렸다.
“안 돼!”
슈탐 후작의 공허한 외침이 거대한 빛무리에 묻혀 버렸다.
콰우우우우우!
도시 하나 크기의 빛기둥이 하늘을 꿰뚫고 솟아올랐다.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그곳에 있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당연했다. 빛기둥은 도시의 모든 것을 삼켜 버렸으니까. 건물도, 성도, 사람도, 그리고 기간트까지도.

Chapter 6 섬광의 창 (1)

“섬광의 창이 제대로 발동했습니다.”


신하의 보고에 왕은 흡족하게 웃었다. 일단 섬광의 창이 발동한 이상, 에어스트 왕국은 끝장이었다.
“목표 설정은 제대로 했겠지?”
“예. 에어스트 왕국의 왕궁으로 정확히 설정했습니다.”
“잘했다. 그럼 레벨리오 놈들은?”
“5 천 명을 사로잡았습니다.”
왕은 이번에도 흡족하게 웃었다. 슈탐 후작이 죽은 건 아쉽지만, 그 정도야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패였다.
“섬광의 창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나?”
“15 분 후에 에어스트 왕궁에 도착합니다.”
“좋군. 그럼 에너지원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 5 천 명 전원의 살을 바르고 피를 뽑아서라도.”
“알겠습니다.”
신하들이 모두 나가자 왕은 홀로 남아 손가락을 딱 튀겼다.
그러자 대전의 문이 저절로 벌컥 열렸다. 그 뒤에는 미리 준비한 술과 음식을 든 시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녀들은 갑자기 문이 열리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배시시 웃으며 술과 음식을 대전 안으로
들였다.
순식간에 상이 차려졌다.
그리고 시녀들이 다소곳이 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왕좌에서 일어난 왕이 음식이 차려진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시녀가 따라 주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좋구나.”
왕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맺혔다. 그의 손이 옆에 앉은 시녀의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죽음과 함께한 시간 동안 굶주렸던 것을 해결할 시간이 되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욕구를 충족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했다. 오랜 죽음 탓에 비워진 것들을 채워야만 했다. 비단
육체적인 부족함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부족함까지도.
일그러진 성욕을 채우는 동안에도 왕은 뇌리에 지금 한창 목표를 향해 하늘 높이 날아가고 있을 섬광의 창을
떠올렸다.
섬광의 창을 날리기 위해 크란 제국에 남은 모든 에너지원을 다 동원했다. 그 에너지를 한데 모은 것은 오로지
왕의 능력이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것을 과연 에어스트 왕국이 막아 낼 수 있을까?
“절대로 불가능하지.”
왕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제론은 중앙 유적에서 그야말로 미친 듯이 수련에 몰두했다.


지금은 총 6 기의 기간트를 동시에 상대하는 중이었다. 각각 2 기의 이스히스, 타히티, 마크리아와 싸우는 것인데,
5 기일 때와는 또 차원이 다를 정도로 어려웠다.
사실 5 기나 6 기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짤 수 있는 전투 패턴도 그리 많이 차이 나지 않는다. 더구나 5 기일
때보다 고작 마크리아 한 기가 늘어난 것이니 더더욱 차이가 미미했다.
하지만 실제 싸움은 그렇지 않았다. 제론은 그 이유를 금세 파악했다.
6 기의 기간트는 그동안 가해졌던 힘의 제한이 상당 부분 풀려 있었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빠르고 강했으며, 머리도 좋아졌다. 상황 대처 능력도 올라갔고, 순간적으로 작전이나 패턴을
바꿔 제론을 당황하게 했다.
이건 그저 미친 듯이 도전만 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제론도 그걸 알았지만 지금은 딱히 다른 수가 없었다. 그저 하고 또 해서 이뤄 내는 것이 제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막 죽음 직전까지 다녀온 뒤 로비로 튕긴 제론은 바닥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호흡을 조절하며 몸 상태를
관조하며 어떻게 6 기의 기간트를 동시에 상대할지 차분하게 작전을 다시 짰다.
아마 이번에 이기고 나면 다음 7 기의 기간트를 상대하는 건 더욱 어려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모두 자신의 온전한 힘을 사용할지도 모르지.’
아니, 그게 확실하다. 이번 6 기의 기간트가 가진 힘을 생각하면 다음 7 기의 기간트는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한데 남은 하나는 뭐가 나올까?’
7 기의 기간트가 나온다면 이스히스, 타히티, 마크리아가 각각 2 기씩 나오고도 한 기가 남는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하긴, 뭐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어려울 텐데.”
제론은 그렇게 대충 생각을 넘기고는 다시 작전에 몰두했다.
그 순간, 갑자기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 위치는 하늘이었다.
제론은 안색이 굳어 누운 채 위를 쳐다봤다. 투명한 천장을 통해 국왕 전용 연무장이 보였다.
따악!
손가락을 한 번 튀기자, 천장이 비추는 모습이 스르륵 흩어지더니 이내 바뀌어 버렸다. 이제는 왕궁 위 하늘을
비췄다.
끝없이 높은 하늘에 거대한 빛무리가 있었다.

Chapter 6 섬광의 창 (2)

“저게…… 뭐지?”
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존재감만으로 판단하면 왕궁 정도는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정도로 대단했다.
유적의 에너지를 이용해 각종 방어 마법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파괴하고도 남을 정도로
막대한 힘이 느껴졌다.
제론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태블릿을 꺼냈다. 저게 뭔지 알아내야만 했다. 정말로 불길했다.
태블릿을 통해 하늘 높이 떠 있는 빛무리를 분석했다. 그리고 놀라운 결론을 얻어 냈다.
“저게…… 여기를 공격하려는 거라고?”
빛무리의 이동 궤적을 모두 추적해 냈다. 저것은 크란 제국에서 쏘아 보낸 것이었다. 출발 위치가 공교롭게도
슈틀러가 작전을 펼치겠다고 했던 그곳이었다.
제론의 표정이 굳었다. 예상이 맞는다면 엠페리움은 이번 함정에 상당히 많은 걸 걸었다. 저 정도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날려 버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너지를 저렇게 한데 모아 날리기 위해선 저것보다 훨씬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추가로 필요했다.
태블릿의 분석을 통해 저 빛무리가 얼마나 막대한 에너지 덩어리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도 고도로 압축된
에너지였다.
만일 저것이 이 왕궁 위로 떨어진다면 왕궁은 물론이고 수도 자체가 싹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에너지였다.
“일단 나가야겠어.”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저 에너지 덩어리는 하늘 높은 곳에서 주변의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더
큰 에너지로 진화하는 중이었다.
예상컨대, 2 분 안에 낙하를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 낙하하면 저걸 막아 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리라.
제론은 서둘러 유적에서 나갔다. 그리고 하늘로 훌쩍 날아올랐다.
땅에서 저걸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설사 막아 낸다 하더라도 그 피해가 엄청날 것이다.
그러니 공중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제론은 마나링을 가속하며 하늘로 쭉쭉 날아올랐다. 원래는 빛무리 가까이 다가갈 생각이었지만, 절반도 가지
못해 멈추고 말았다.
“어마어마한 압력이로군.”
에너지로부터 쏟아지는 압력이 너무 거대해서 더는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무리하면 올라갈 수야 있겠지만
그럼 오히려 몸이 상하게 된다. 그래서는 올라가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저걸 대체 어떻게 처리하지?”
빛무리는 여전히 탐욕스럽게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저기에는 마법도 소용이 없다. 아마 마법을 쓰면 그
마법의 에너지까지 남김없이 빨아들일 것이다.
방법은 하나였다. 더 큰 힘, 그것도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제론의 힘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제론은 문득 테오스가 떠올랐다.
‘테오스라면 가능할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테오스의 능력은 제론의 힘에 비례한다. 기본적으로 제론이 가진 힘을 증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서 지금의 힘으로는 결코 저 에너지 덩어리를 압도할 정도의 파괴력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로군.’
유일한 방법은 저 빛무리가 에너지 흡수를 멈추고 떨어질 때,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것이었다.
아마 제론의 힘으로는 안 되고 테오스를 불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없었다. 압도적으로 밀어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저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를 과연 막아 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제론은 빛무리가 뿜어내는 에너지의 파장이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것처럼 압박해 오자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무조건 해내야만 한다. 아니면 다 죽을 테니까.
에어스트 왕궁에는 지금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론의 사람이었다. 제론은 단 한 명도 이번 일로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모두를 지켜 내고 말 것이다. 제론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테오스.”
순식간에 제론이 떠 있던 자리에 테오스가 나타났다. 테오스의 거대한 마나링도 맹렬히 가속 중이었다.
놀랍게도 테오스 역시 마법을 통해 허공에 떠 있었다.
테오스가 가진 마나링의 힘이 워낙 큰 데다가 테오스의 몸에 깃든 마나가 무게 자체를 줄여 버린 결과였다.
위이이이잉!
테오스의 마나링이 맹렬히 회전했다. 제론은 그 마나링을 이용해 주변 마나를 마구 빨아들였다.
빛무리가 더 에너지를 흡수하지 못하도록 그 주변의 마나를 빨아들여 순간적으로 공백 상태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었다.
제론의 시도는 상당히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테오스의 마나링도 제론의 것과 마찬가지로 9 개였다. 9 개의 마나링이 빨아들일 수 있는 마나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마나를 흡수하는 주체가 테오스이니 훨씬 더 막대한 양의 마나가 몰려들었다.
테오스는 빛무리보다 훨씬 세심하고 복잡한 마나의 운용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빛무리 주변으로 9 개의 손을 뻗어
그 근방의 마나를 우선적으로 빨아들였다.
빛무리에 흡수되는 마나의 양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워낙 단순했기에 근방의 마나가 희박해지니 아래로 떨어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제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상황이 더 커지는 걸 막아 냈다. 이젠 눈앞에 있는 저 우환덩어리만
막아 내면 된다.
고오오오오오!
빛무리가 더욱 환해졌다. 지금까지 빨아들이던 마나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장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모은 마나를 이용해 마법을 펼쳤다.
위이이이이잉!
마나링이 더욱 맹렬히 가속하면서 미리 모아 둔 마나를 복잡하게 움직였다.
테오스의 몸이 거대한 빛으로 휩싸였다. 그 빛은 서서히 소용돌이쳤다.
테오스가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손바닥 앞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새하얗게 빛나는
마법진이었는데, 나타남과 동시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거대한 빛기둥이 거기에서 시작해 하늘을 꿰뚫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그것이 현재 남은 시간 동안 펼칠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위력이 강력한 것이었다. 단순히 위력만으로는 이 마법을
따라갈 만한 것이 드물 정도로 강했지만, 그래도 떨어지는 빛무리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쩌어어어어어엉!
빛무리와 빛기둥이 충돌하며 충격파가 발생했다. 그나마 하늘에서 부딪친 것이 다행이었다. 근방의 모든 공기를
찢어발기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충격파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만일 지상에서 이런 충격파가 발생했다면 에어스트 왕궁은 물론이고 도시 전체가 그대로 휩쓸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제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고작 충격파만으로 이 정도 위력이었다. 그러니 저 빛무리가 진짜 땅에 처박히면 얼마나 막대한 피해를 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왕국이 완전히 박살 날지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저 에너지 덩어리가 땅속 깊은 곳으로 파고든 다음 폭발하면 아마 에어스트 왕국 전역에
지진이나 화산 폭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마법이 끝났다.
제론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당연히 빛무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도 이 정도 마법을 퍼부었으면 그 위력이 많이 깎여 나갔으리라 예상했다. 한데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조금 전 테오스의 마법이 이뤄 낸 일은 떨어지는 빛무리의 속도를 떨어뜨린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속도가 줄어들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저 정도 속도로 떨어지면 땅속 깊이 파고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저 단순한 폭발만 일어난다는 뜻이다. 물론
그래도 에어스트 왕국의 수도는 흔적도 없이 날아갈 것이다.
아니, 수도뿐이 아니다. 수도 옆에 조성된 거대한 농지도 함께 날아갈 것이다. 또한 수도 근방의 영지들도 몽땅
사라져 버릴 것이다.
거기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빠드득!
제론의 이가 조금씩 부서졌다. 상상만 해도 분노가 치밀었다.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우우웅!
제론의 아랫배에 머물고 있는 마나가 활기차게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테오스의 아랫배에 잠들어 있던 마나가
깨어났다.
테오스의 아랫배에는 거대한 마나홀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마나코어가 움직일 때 약간씩
도움을 주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마치 제론과 한몸인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였다.
콰아아아아!
테오스의 온몸이 마나로 충만해졌다. 아랫배의 마나뿐 아니라 주변의 마나도 남김없이 싹싹 긁어서 빨아들였다.
제론은 떨어지는 빛무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제론의 집중력이 점점 고조되었다.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마치
테오스와 한몸이 된 듯한 느낌이 깊어졌다.
아니, 실제로 테오스와 일체화되고 있었다. 마치 테오스의 몸 구석구석이 자신의 몸인 것처럼 느껴졌다. 몸의
내부 구조가 파악된다는 것이 아니라, 테오스가 마치 자신의 몸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테오스가 검을 뽑았다.
샤아아아아!
유적을 클리어한 보상으로 받은 특별한 검이었다. 검을 꽉 쥐자, 마치 검 역시 한몸인 것처럼 손에 착 감겼다.
고오오오오.
검에 마나가 집중되었다. 아니, 힘이 집중되었다. 검에 모여든 것은 마나뿐만이 아니었다. 제론의 마음이 함께
깃들었다.
그 순간 제론은 자신이 벽 하나를 더 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끝없이 펼쳐진 길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을 만끽할 여유도 없었다. 빛무리는 지금도 시시각각 다가오는 중이었다.
‘일검에 박살 낸다!’
현재의 실력과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해내야만 했다. 실력을 뛰어넘어서라도 해내야만 했다. 모든
걸 던져서라도 이뤄 내야만 했다.
그래야 내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더불어 모두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제론의 마음이 점점 더 많이 검에 실렸다. 그리고 그 마음이 점차 단단해졌다.
빛무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하아아아아아압!”
제론은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테오스도 함께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제론과 테오스는 그 순간 완벽히 하나가 되었다.
쿠오오오오오오!
빛무리가 테오스를 덮쳤다. 둘은 한몸이 되어 아래로 떨어졌다.
아래로 떨어지는 빛무리에서 긴 빛줄기가 꼬리처럼 빠져나갔다. 빛의 꼬리는 점점 두꺼워지고 거대해졌다.
그와 비례해 빛무리의 크기가 점차 작아졌다.
꼬리의 두께가 빛무리와 정확히 일치했을 때,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꽈아아아앙!
강렬한 섬광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정말로 어마어마한 폭발이었다. 빛과 열이 사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다행인 점은 폭발이 허공에서 일어나 지상에 미친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또한, 테오스가 아래에서 위로 타격을 했기에, 떨어지는 에너지 파편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이 피해를 크게
줄였다.
물론 그럼에도 에어스트 왕궁을 비롯한 도시 곳곳에 수천 개의 에너지 파편이 비 오듯 쏟아졌다.
쩡! 쩡! 쩡!
왕궁 수십 미터 위에서 연달아 에너지 파편이 수도를 보호하는 방어 시스템과 충돌해 섬광과 열기를 남기고 사라져
갔다.
그 소란에 수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봤다.
위를 확인한 사람들은 멍하니 그 화려한 광경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환한 대낮인데도 빛이 어찌나 강렬한지 똑똑히 보였다.
도시 방어 시스템에 에너지 파편이 충돌할 때마다 사방으로 빛이 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순식간에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아서 더없이 아름다웠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불꽃놀이도 결국 끝났다. 그리고 하늘에는 힘없이 떨어지는 기간트 한 대만 남아 있었다.
쿠웅!
땅이 크게 흔들렸다. 기간트가 떨어지면서 만들어 낸 결과였다. 즉, 떨어지는 기간트를 도시 방어 시스템이 막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걸 눈치챈 사람들이 의아한 마음을 품었지만, 더 깊이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잠깐의 흥미로운 일탈로
여기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에어스트 왕국은 여전히 대륙에서 가장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Chapter 6 섬광의 창 (3)

테오스는 중앙 유적 로비에 누워 있었다. 왕궁에 떨어져 바닥과 충돌한 순간 중앙 유적이 스스로 움직여 테오스를
받아들인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테오스와 일체화를 이룬 제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제론은 깨어나지 못했다. 빛무리와 충돌하며 받은 충격이 너무 엄청나서 온몸이 거의 부서진 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심장의 마나링도 몽땅 파괴되었고, 아랫배의 마나도 싹 증발해 버렸다.
테오스의 상태도 만만치 않았다.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외관이 망가진 것은 물론이고 내부 기관도 심각하게
부서졌다.
그런 상태인데도 테오스는 아공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실 테오스의 아공간은 수복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저 안에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게 가능했다.
보통 이런 때 자동으로 아공간에 들어가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라이더가 심각하게 다친 상황이었다.
게다가 정신을 잃었다.
테오스는 라이더를 보호하기 위해 돌아가지 않고 남았다. 자신의 몸으로 라이더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현재 테오스의 모든 기능은 정지된 상태였다. 남은 모든 여력은 라이더인 제론에게로 향해 있었다. 끊임없이
에너지를 흘려보내 제론의 몸을 회복시키려 애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둘 다 워낙 심각하게 망가진 상태라 거의 효과가 없었다. 물론 그 덕분에 제론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다.
제론과 테오스는 기적처럼 죽음을 이겨 내는 중이었다.
우우우웅!
유적이 나직이 울었다. 로비의 벽 전체에 기이한 문양이 나타나 빛났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유적은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죽어 가는 제론과 테오스를 그냥 내버려 뒀다.
그렇게 제론은 죽음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대륙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Chapter 7 대륙정복전쟁 (1)

“뭐? 멀쩡해? 불꽃놀이? 그게 무슨 개소리냐!”


왕의 호통에 엠페리움의 수뇌부 전원이 고개를 바닥에 댄 채 엎드려 덜덜 떨었다. 다들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답답해진 왕이 또 소리 질렀다.
“똑바로 고하란 말이다! 제대로 확인은 했느냐!”
“해, 했습니다.”
“설명해.”
왕의 말에 담긴 압박에 신하 하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섬광의 창이 제대로 목표 상공에 도착한 것까지는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에너지 라인을 통해서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으니 그 부분은 확실합니다.”
섬광의 창은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 마지막에 에너지 라인을 통해 정확한 상태를 확인하게 되어 있었다.
그걸 통해 에너지 덩어리의 위력에서부터 위치, 그리고 에너지의 성장 한계까지 모두 파악이 가능했다.
엠페리움에서는 그걸 통해 정확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이 에어스트 왕궁에 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미리 계산을 끝냈다.
한데 그 어떤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보원을 통해 정확히 확인한 정보가 아니라, 섬광의 창이 떨어졌을 때의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실패라고 가정했다는 뜻이로군. 맞느냐?”
“그, 그렇습니다.”
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명을 듣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확실히 그 부분은 이상했다. 하지만 정확히
확인했다고 보기에는 좀 모자란 구석이 있었다.
“좋아. 그 부분은 차츰 드러나겠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얘기해 보자.”
섬광의 창에 사용했던 에너지는 막대했지만, 차츰차츰 원래대로 회복 중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모든 시설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더 그 문제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 여차하면 섬광의 창을 한 방 더 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때는 훨씬 더 무리해서 에너지를 운용해야 하지만 말이다.
“레벨리오 놈들을 심문한 결과를 보고해라.”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바닥에 엎드린 신하들은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그 정도로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다.
“설마…… 아무것도 못 알아낸 건 아니겠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아니, 딱 한 가지 알아낸 것이 있었다.
“누군가가 도와줬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허어, 이거 참 어이가 없구나.”
자그마치 5 천 명을 사로잡았다. 한데 알아낸 게 고작 그거 하나라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래, 조력자가 누구라더냐?”
신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걸 본 왕은 숫제 허탈했다.
“그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다만 그 조력자라는 놈의 능력이 심상치 않은 듯합니다.”
“그래? 어떤 점이?”
“포로들로부터 압수한 스크롤입니다.”
신하가 공손히 내미는 스크롤을 받아 든 왕이 그것을 펼쳐 확인했다. 그의 눈빛이 몇 번이나 번득였다. 왕의
눈이 놀람이 어렸다.
“이걸 대체 몇 장이나 가지고 있더냐?”
“각각 한 장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5 천 명 전원이?”
“그렇습니다.”
왕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의 지식과 능력으로도 스크롤에 담긴 마법을 온전히 파악해 내지 못했다. 아마 한동안
연구를 하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엄청나게 걸릴 것이다.
그 정도로 복잡하고 전혀 새로운 방식의 마법이었다. 게다가 스크롤로 제작하려면 그냥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마나폭탄입니다.”
왕은 마나폭탄도 받아 들었다.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이걸 몇 개나 가지고 있었다고?”
“각각 15 개씩 받았다고 합니다.”
왕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이 조력자라는 놈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아니,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이 마나폭탄은 자신도 만들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만드는 법은 단순했다. 마나를 고도로 압축시켜서 용기에 담은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용기 표면에 마법적 처리를 해서 평소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지만,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왕에게만 그러했다. 보통 마법사에게 그런 걸 시키면 아마 백이면 백 제조 도중 마나폭발로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걸 만든 조력자가 누구인지 어떻게든 알아내라. 그놈들을 몽땅 고문해 죽여서라도 반드시!”
“예. 알겠습니다.”
왕의 태도가 어찌나 심각하고 무서웠는지 대답하는 신하의 목소리가 크게 떨렸다.
“그건 그렇고 에너지원을 검사하는 건 어떻게 되었느냐?”
신하 중 하나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레벨리오에 습격당하지 않은 시설의 에너지원은 그대로입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하지만 말과는 달리 왕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동안 받은 피해가 너무 컸다.
‘이대로라면 생명 유지 장치에 많은 힘을 쏟기 어려워지는데…….’
그냥 생명만 유지하는 거라면 사실 그 정도로 많은 에너지원이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앞으로 오랫동안 살아가며 대륙을 다스리려면 그에 걸맞은 힘이 있어야만 한다.
“후우. 전쟁을 일으켜라. 대륙을 정복한다.”
왕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륙정복에 관한 얘기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최소한 이
자리에 있는 신하들은 왕이 말한 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다른 왕국의 에너지원까지 싹 훑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각각 나라 하나씩 맡아서 다스려야겠다.”
그제야 모든 신하가 고개를 들고 자신들의 왕을 바라봤다. 그들의 눈에 감격이 어렸다. 역시 왕은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쿵!
10 명의 신하가 한몸이 되어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왕은 그런 신하들을 흡족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슬슬 황족을 정리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나면 싹 갈아치우는 걸로 하자.
쓸데없는 조직을 통해 골치가 아프게 만들었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지.”
그 말은 레벨리오의 뒤에 황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왕의 말에도 신하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또한,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많았다. 특히 최근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이번에 사로잡은 5 천 명의 포로는 전혀 그 부분에 대해 모르고 있었지만, 그런 건 조사할 필요도 없었다.
엠페리움의 존재를 아는 건 오로지 황족과 같은 조직원뿐인데, 엠페리움에 대항하는 조직이 있다면 황족이 뒤에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쨌든 엠페리움은 황족의 정리를 결정했다. 물론 그것은 크란 제국이 대륙을 정복한 이후의 일이 될 것이다.

☆ ☆ ☆

레벨리오를 완벽히 정리한 엠페리움이 크란 제국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저력은 엄청났다. 그동안 엠페리움에 선을 대고 있던 모든 귀족이 움직였고, 또 엠페리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황실도 함께 움직였다.
결과적으로 어마어마한 대군이 조성되었고, 크란 제국은 본격적으로 대륙정복전쟁을 시작했다.

에어스트 왕국의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그 회의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인물 하나가 없었다. 바로
국왕이었다.
“이럴 때 폐하가 안 계시니…….”
“대체 왜 안 돌아오시는 걸까요?”
수뇌부 회의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사람은 단연 바이스와 카이트, 그리고 세나였다.
“어쨌든 폐하께서 오시기 전까지 우리 왕국의 방침을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엔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은 그래야만 할 때였다.
“폐하도 계시지 않은 마당인데, 참전은 당연히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현재의 대륙은 혼란의 극치였다. 이 모든 것이 크란 제국 때문이었다.
크란 제국은 제국 내의 모든 전력을 모아서 대륙 정복을 선포했다. 크란 제국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불과 얼마 전에 7 개 왕국을 동시에 공격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전력을 이끌고 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도 엄청났다.
7 개 왕국에 인접한 12 개 왕국이 단숨에 크란 제국의 군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더 싸워 볼 여력도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패배였다.
크란 제국은 12 개 왕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작업을 하며 계속 진군했다.
그 탓에 대륙 전체가 술렁였다. 다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크란 제국의 어마어마한 전력은 대륙의 나머지 왕국까지 몽땅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크란 제국이 불과 얼마 전 일으켰던 12 개 왕국과의 전쟁에서 보여 준 잔인함이 모두의 마음을 다급하게
하였다. 크란 제국은 당시 점령했던 왕국의 왕국민 수십만을 학살했다. 당시의 전쟁은 정복전이라기보다는
섬멸전에 가까웠다.
그런 일이 자신의 왕국에서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지금이야 정석에 가까운 방법으로 식민지를 만들고
있지만, 나중에 어떻게 마음이 변할지 알 수 없지 않은가.
전 대륙이 힘을 모아서 대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수많은 왕국이 하나로 모이는
일이었다. 당연히 의견 수렴이 힘들었고, 그것도 하나의 혼란이 되었다.
크란 제국이 전쟁을 일으킴으로 인해서 발생한 혼란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전 대륙의 텔레포트 게이트는 크란 제국 마탑의 것이었다. 게이트를 설치할 때 돈을 들인 것은 엄연히 게이트가
위치한 영지였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것은 크란 제국 마탑이 맡았으니 그들이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이럴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전 대륙의 텔레포트 게이트가 멈춰 버렸다. 게이트가 움직이는 곳은 크란 제국과 크란 제국이 집어삼켜 이미
식민지가 된 영토뿐이었다.
그 때문에 기간트 이동에 큰 문제가 생겼다. 빠르게 다른 왕국으로 지원을 나가기 위해선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한
이동이 필수였다.
한데 그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반면 크란 제국은 자국의 게이트를 이용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병사들도 게이트를 이용했기에 그
기동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당연히 그 차이는 전쟁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제국군의 공세에 나머지 왕국은 변변한
힘도 못 쓰고 허무하게 무너져 가고 있었다.

Chapter 7 대륙정복전쟁 (2)

“기간트라도 지원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세나가 걱정스런 눈으로 의견을 말했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의 기간트 공장에서는 끊임없이 아모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벌써 에어스트 왕국의 모든
라이더에게 아모르를 지급했다.
그러고도 기간트가 남아돌고 있기에 성적이 좋은 견습 라이더를 선발해 하나씩 아모르를 풀어 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아모르를 지원하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아마 제대로 다른 왕국에 아모르를 제공하게 된다면 크란
제국의 발을 어느 정도는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다들 침음을 삼키며 생각에 잠겼다.
“으음. 확실히 고려해 봐야 할 문제로군요. 일단 폐하가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니 우리로서도 시간을 벌어야 하니
말입니다.”
“예비 라이더를 더 굴려야겠군. 아무래도 더 많은 라이더가 필요하게 될 것 같으니.”
“그리고 문두스에 협조를 요청해서 우리 왕국에 병합되기 전에 라이더로 활약했던 자들을 모아야겠습니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의 전쟁은 기간트가 가장 중요했다. 그러니 라이더를 몇 명이나 보유하고 있느냐가 강함의 척도를 나타내는
기준 중 하나였다.
믿을 수 있는 라이더를 더 확보할 수 있다면 그만큼 에어스트 왕국이 강해진다는 뜻이니 지금과 같은 난세에는
반드시 시행해야 할 일이었다.
“일단 우리는 전쟁에 참여하기보다는 내실을 기하는 쪽으로 갑시다. 동의합니까?”
바이스가 나서서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어쨌든 전쟁에 참여하는 중요한 사안을 국왕이 없이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럼 타 왕국을 지원하는 건 어쩌죠?”
세나가 차분하게 묻자, 다들 난감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 문제도 국왕의 인가 없이 진행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니 그 정도는
해도 문제가 없을 듯했다.
어차피 크란 제국은 대륙을 정벌하겠다고 공표했다. 이렇게 전쟁이 이어지면 결국은 에어스트 왕국도 그들과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물자를 지원해서 전쟁을 연합군에 유리하도록 이끌어 나가는 편이 나았다. 시간도 끌고 제국의
힘도 소진시키고 말이다.
“물자 지원은 하는 걸로 합시다. 아모르도 최대한 맞춰 봅시다. 수출용 다운그레이드형은 얼마나 있습니까?”
“아직 100 기 정도밖에 없어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공장을 이원화하면 생산량을 늘릴 수는 있어요.”
세나의 말에 엔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물자가 풍부하니 그걸 이용해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유리해질
테니까요.”
현재 에어스트 왕국은 새로 병합한 왕국들 때문에 영토가 어마어마하게 넓어졌다. 또한, 그 안에 있는 유적을
통해 제론이 만들어 놓은 생산 시스템으로부터 막대한 물자를 쌓아 뒀다.
그렇기에 시간을 들여 내실을 다지면 훨씬 강해질 여지가 많았다.
다들 그걸 알기에 엔트의 말에 수긍했다.
“그나저나 폐하께서 빨리 돌아오셔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에어스트 왕국의 발전 속도는 제론이 관여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가 엄청났다. 제론이 나서면 유적의
힘을 이용하니 당연히 그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제론이 가진 유적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지만, 이들은 그래도 경험적으로
제론에게 뭔가 비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폐하께만 의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우리 능력도 보여 드려야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그럼 시간이 없으니 빨리 시작할까요?”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에서 서둘러 나갔다. 이제부터는 참으로 바쁜 나날이 계속될 것이다.
모두의 얼굴에 결연함이 깃들었다.

☆ ☆ ☆

크란 제국군은 결국 12 개 왕국과 인접한 왕국들을 복속시켰다. 물론 그 와중에 어마어마한 양의 기간트가


파괴되었다.
왕국들의 기간트야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 완파되었다. 그리고 크란 제국의 기간트도 상당히 많이 부서져 버렸다.
그래도 기간트의 경우 마나코어만 멀쩡하면 얼마든지 다시 수리해서 사용이 가능했다. 다만 그렇게 수리를 하기
위해서도 상당한 물자가 필요했다.
크란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였다. 영토의 크기는 물론이고, 그 비옥함도 최고였다. 게다가 보유한 광산의
수도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정 없이 물자를 보급하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아직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얘기가 많이 달라질 것이다.
어쨌든 제국은 그들을 복속시킨 다음,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다른 왕국에서는 크란 제국이 재정비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크란 제국군은 아직도
전쟁을 곧장 이어 갈 여력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전쟁을 이어 가지 않고 멈춘 것은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대륙 정벌이 아니라 제국이 아닌 다른
왕국에 있는 에너지원이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심각했다. 현재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새로 복속한 왕국에 모여 있었다. 이미 각 왕국을 샅샅이 뒤진


다음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모르겠군.”
“심지어 유적조차 에너지원이 남지 않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거요?”
“그러게 말이오.”
정복한 모든 왕국을 뒤지느라 무려 한 달을 썼다. 한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허탈하다 못해 화가 치밀었다.
“아무래도 그 조력자라는 놈이 의심스럽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틀림없이 에너지원에 관한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을 거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왕께는 뭐라고 보고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
“솔직히 보고하시오. 어차피 이럴 때를 대비해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 아니겠소?”
“맞는 말씀이오.”
대충 결론은 그런 식으로 났다. 하지만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고대유적에 에너지원이 없다는 사실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고대의 번성은 모두 그 에너지원에 의해 이뤄진 일이었다. 한데 그게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니, 왠지
근원이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엠페리움의 수뇌부인 그들은 고대의 사람이었다.
“하면 전쟁은 언제 다시 시작하면 되겠소?”
“당장 합시다. 저놈들이 힘을 키울 시간을 줄 필요가 있겠소?”
“그럽시다.”
그렇게 결정이 났고, 그날 오후 크란 제국이 다시 진격을 시작했다.

크란 제국은 그동안과는 달리 이번에는 하나의 왕국에 힘을 집중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이끌어 나갔다.
오랫동안 전쟁을 벌여야 하기에 전력을 낭비하지 않고 신중하게 전선을 유지했다. 물론 치고 나가야 할 때는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밀어붙였다.
그리고 대륙의 모든 왕국이 크란 제국과 싸우는 나라에 지원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크란 제국은 대륙 전체와 싸우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엄청난 저력이었다.
현재 크란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나라는 메르츠 왕국이었는데, 란체 왕국과 비견될 정도의 강국이었다.
하지만 그런 메르츠 왕국도 크란 제국의 공세를 간신히 감당해 내는 게 전부였다. 물론 주변 왕국의 지원을
받았기에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사라지니 타 왕국의 지원을 받는 게 힘들어졌다. 그것은 크란 제국의 공세를 막아 내는 데
상당한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든 시기에 에어스트 왕국의 지원 물품이 도착했다.
메르츠 왕국군 진영에 엄청난 크기의 짐을 실은 마차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왕국군 사령관인 크라베는 그것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다행이야. 조금만 더 늦었어도 돌이킬 수 없었을 텐데 말이야.”
전 대륙에서 메르츠 왕국에 지원군을 보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메르츠
왕국군의 힘으로는 그 시간 동안 크란 제국을 막아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한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 놀랍게도 에어스트 왕국의 지원이 도착했다.
물론 병사나 라이더를 지원해 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좋은 것을 받았다. 다름 아닌 에어스트
왕국에서 새로 개발한 최신형 기간트인 아모르를 보내 준 것이다.
크란 제국과의 전쟁에서 메르츠 왕국군이 계속 밀리는 이유는 기간트의 성능 차이 때문이었다.
크란 제국의 저력은 정말로 놀라웠다. 크란 제국에서 개발한, 뛰어난 성능을 가진 기간트인 임베르, 누베스,
켈룸, 네불라로만 이루어진 기간트 부대가 한 번 전장을 휩쓸고 지나가면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성능이 모자라면 양으로라도 해결해야 하는데, 기간트의 수도 크란 제국이 월등히 많았다.
당연히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그나마 크란 제국이 기존에 병합한 왕국을 추스르느라 공세를 늦췄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메르츠 왕국은
절단이 나도 벌써 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슬슬 크란 제국의 공세가 거세질 무렵 시기 좋게 에어스트 왕국의 지원품이 도착했다.
“저거라면 최소한 다른 왕국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크라베의 표정은 희망과 우려가 뒤섞여 있었다.
일단 크란 제국을 막아 내는 건 좋은데, 전장이 메르츠 왕국이라는 점이 걱정스러웠다.
전쟁이 계속되면 왕국 전체의 삶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왕국의 재정도 흔들릴 것이다.
다른 왕국이 지원을 해 준다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강 건너 불구경에 더 가까웠다. 왕국의 재정이 흔들릴
정도로 지원해 줄 나라는 없었다.
그나마 에어스트 왕국의 지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서 다행이긴 했지만, 이대로라면 크란 제국을 결국 막아
내도 문제였다.
메르츠 왕국은 국력이 크게 쇠해져서 주변 왕국이나 크란 제국에 마구 뜯어먹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에 진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크라베가 염려하는 것은 그 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눈앞의 전쟁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전력을 기울여 이기고 봐야 했다.
보통 전쟁에서 이기면 상호불가침 협정을 맺으며 이긴 쪽에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크란 제국이 뭐가 아쉬워 그런 짓을 하겠는가. 오히려 여기서는 메르츠 왕국이 약자였다.
물론 나머지 모든 왕국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들고 일어나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크라베가 그렇게 딴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의 행렬이 끝났다. 그리고 잠시 후, 부관이 다급히 다가와 군례를
취하고 보고를 시작했다.
“에어스트 왕국의 지원품이 모두 도착했습니다.”
“기간트는 몇 기나 되나?”
“아모르 300 기입니다.”
“아모르 300 기라…….”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이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최소한 1 천 기는 필요했다.
아무리 아모르의 성능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크란 제국군의 기간트도 만만치 않다. 물론 그 점은 크라베가 제대로
아모르를 타 본 적이 없어서 생겨난 착각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크게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크란 제국에는 그들이 개발한 기간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발굴형 기간트의 수도 어마어마했다.
비록 아직은 그것이 투입되지 않았지만, 메르츠 왕국에서 아모르를 쓰기 시작하면 분명히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전황은 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무너지게 된다. 이건 굳이 겪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건?”
“어마어마한 식량을 보내왔습니다. 최소 1 년은 군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말에는 크라베도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여유 식량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도 메르츠 왕국군을 1 년
이상 유지할 수 있을 정도라니, 대체 에어스트 왕국에는 얼마나 많은 식량을 보유하고 있단 말인가.
‘보통이 아니야. 대체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성장한 거지?’
에어스트 왕국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개 백작령이었다. 물론 그들이 새로운 농토를 개척해서 어마어마한
식량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개국하고, 주변 왕국을 병합해서 제국이나 다름없는
광대한 영토를 갖게 되었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물품도 상당합니다. 이대로 다른 왕국의 지원군을 받아도 당분간은 함께 유지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크라베는 조금 가벼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에어스트 왕국에서 굳이 지원군을 보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아니, 차라리 지원군보다 이런 것이 훨씬 나았다. 사람이 없어도 전쟁을 이어 가지 못하겠지만, 돈이 없는
전쟁은 더 가능성이 없었다.
“좋아. 일단 버티기로 들어간다. 적에게는 기습을 통해 지속적인 타격을 주고, 우리는 방어 체계를 더욱 굳건히
한다.”
“알겠습니다.”

Chapter 7 대륙정복전쟁 (3)

크라베는 부관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부관이 다시 군례를 취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이젠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이었다.
부관이 나가자 크라베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흐음. 대체 문두스가 우리를 도와주는 이유가 뭘까?”
이제 문두스는 상류 계층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확한 정보력을 가지고 전 대륙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으니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문두스의 정보력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자들이 바로 힘 좀 있다는 상류 계층이었으니 말이다.
크라베는 문두스로부터 매일 정보를 받았다. 그 방식이 워낙 은밀해서 근원을 캐낼 수가 없었다. 어떨 때는
식사와 함께 주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집무를 보는 책상 위에 놓여 있을 때도 있었다.
또 가끔은 전령을 통해 전달하기도 했는데, 그 전령조차 자신이 뭘 배달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실로 혀를 내두를 정도로 교묘하고 은밀했다. 그래서 크라베는 그들의 뒤를 캐는 걸 포기한 지 오래였다.
어쨌든 문두스의 정보는 메르츠 왕국에 큰 도움이 되었으니 말이다.
크라베는 잡념을 털어 내고 품에서 꺼낸 정보 서류에 집중했다. 이 정보를 잘 파악해야 다음 작전을 수행하기가
편해진다.
현재 메르츠 왕국과 크란 제국의 전장은 대부분 마티의 영역 안에 있었다. 더구나 수뇌부의 위치는 완벽하게
영역에 포함되었다.
그렇기에 바인도 아주 정확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었고, 그걸 제대로 가공한 정보를 크라베에게 수시로
전달해 주었다.
“흐음. 군 배치도라…… 새삼스럽지만 정말 대단하군.”
대체 이런 정보를 어떻게 얻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서류에는 현재 크란 제국군의 기간트 부대가 어디에
머무르는지, 또 어떤 상태인지, 언제 정찰을 하는지까지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걸 보면 기습 경로를 짜는 건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아모르를 이용하면 훨씬 빠르고 강력한 타격을 줄 수
있으니 더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럼 기습 경로를 짜 볼까?”
크라베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일단 아모르가 300 기나 있으니 각각 100 기씩 나눠서 운용하기로 했다.
세 군데의 침투로를 정하고, 세 군데의 도주로를 정해야만 한다. 그래야 안전하게 기습 부대를 지속해서 운용할
수가 있다.
아모르는 현재 메르츠 왕국군의 최고 전력이었다. 아모르는 최대한 잃지 않도록 조심해서 운용해야만 했다.
그래야 더 오랫동안 시간을 끌 수 있었다.
‘일단 대륙 전역에서 지원군이 도착하기만 하면…… 반전을 노릴 수도 있다.’
크라베가 최종적으로 노리는 점은 그것이었다. 전력을 잔뜩 모아 크란 제국에 반격을 가하는 것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메르츠 왕국 발전의 토대를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크라베는 그런 희망을 품으며 크란 제국군의 전력 배치도를 뚫어져라 살펴봤다.

Chapter 8 벽을 넘어서 (1)

제론이 테오스에 탄 채로 유적 로비에 누운 지 무려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제론과 테오스는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것 같지만, 내부적으로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제론은 맹렬히 죽음과 싸우고 있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워낙 강했기에 주변에 있는 모든 기운과 힘을
이용해 몸을 치유해 나갔다.
섬광의 창은 크란 제국에 남은 모든 유적의 에너지가 집중된 형태였다. 그 때문에 아직도 크란 제국에 있는
엠페리움의 시설들은 몽땅 가동이 중지된 상태였다.
그 정도 위력을 테오스와 둘이서만 막아 냈으니 사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제론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또렷하고 맑았다. 다만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정신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물론 제론은 그쯤이야 얼마든지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동안 유적에서의 수련은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 내는
과정이었다. 그걸 통해서 새로운 힘을 얻고, 그 힘에 익숙해졌다.
그러니 이런 고통쯤은 얼마든지 견뎌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한 달이나 지난 지금도 정신을 맑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지금도 제론은 끊임없이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 아니, 죽음과 싸우는 중이었다.
제론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위태롭게 걸었다. 조금만 삐끗하면 곧장 죽음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제론은 그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통해 보통 사람은 결코 얻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그것도 지속해서
말이다.
죽음을 끊임없이 경험하면서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한 달이나 겪으면서
제론은 조금씩 변해 갔다.
그런 변화를 통해 제론 앞에 드리워진 거대한 벽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테오스가 큰 역할을 했다. 테오스는 자신의 몸이 부서져 흩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힘과
역량을 제론의 치유에 집중했다.
물론 테오스의 상태도 좋지 않았기에 그 영향력은 지극히 미약했다. 하지만 그 미약한 힘 덕분에 제론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다.
만일 테오스의 힘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제론은 이 한 달 동안 몸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제론에게 큰 기연이 되었다. 그런 절묘한 상황 덕분에 제론 앞에 드리워진 거대한 벽에 균열을
만들었으니까.
쩌저저적!
제론은 끝없이 펼쳐진 벽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실제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제론의
정신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아니, 제론의 마음을 가둔 단단한 요람을 부수는 소리였다.
꽈과과광!
결국 벽이 산산이 부서졌다. 순간, 제론의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독할 정도의
고양감이 제론의 몸과 마음을 지배했다.
보통이라면 이쯤에서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여전히 정신을 놓지 않았다. 마음을 꽉 붙잡았다.
그런 제론의 뇌리로 수많은 깨달음의 물결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것은 그냥 깨달음이 아니었다.
‘테오스?’
제론의 뇌리로 스며드는 것은 테오스와 관계된 지식이었다. 아니, 지식을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우득! 우득! 우드드득!
제론의 온몸이 뒤틀렸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찾아왔다. 몸의 뼈와 근육, 피부를 비롯한 모든 장기가 새로
태어나는 중이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고통을 동반했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편하다. 의식이 사라진 사이 몸의 재구성이 끝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제론은 이
와중에도 정신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또 한참을 참아 내자, 이내 제론의 뇌리와 마음에 뭔가가 스며들었다.
제론의 눈앞에 거대한 벽이 또 나타났다. 그리고 그 벽은 생겨나자마자 산산이 부서졌다.
그렇게 벽이 나타나고 부서지기를 아홉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 나서야 제론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모든 고통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의 순간은 끝나지 않았다. 고통이 끝남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희열이 몰려왔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처럼 모든 고통을 이겨 낸 뒤에 찾아온 희열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제론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오히려 고통을 참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것도 이겨 냈다. 아득히 피어나는 고양감으로 인해
날아가 버리려는 정신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 큰 희열로 변했다. 진짜 깨달음에 의한 희열이었다. 당연히 정신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느낌도 없었고, 그저 지극한 충족감만 가득했다.
제론은 그 순간 심장의 마나링과 아랫배의 마나 덩어리가 하나로 합해지는 걸 느꼈다. 온몸의 마나가 하나로 뭉쳐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었다.
결과적으로 제론은 모든 마나를 잃었다. 하지만 모든 마나를 진실로 얻었다.
제론은 온몸이 꽉 차는 기분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테오스의 눈을 통해서 보는 천장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는 천장이었다. 그리고 그 천장을 통해
유적 밖의 모습이 보였다.
에어스트 왕궁 구석구석이 보였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방식으로 모든 에어스트 왕궁이 제론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천장에 비추는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이젠 에어스트 왕국 곳곳을 보여 줬다. 마치 제론의
마음이라도 읽는 듯, 가장 궁금한 곳만 골라서 착착 보여 줬다.
제론은 가만히 그것을 보며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는 에어스트 왕국의 모습에 안도했다.
이제 알고 싶은 건 다 알았다. 남은 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이 얼마나 건재한지 모두에게 보여 주는
일뿐이었다.
제론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 테오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론은 테오스 안에 있었다. 깨달음의 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르지만 제론이 느끼기에는
지극히 짧았다.
한데 그 짧은 순간 동안 테오스가 사라져 버렸다. 제론은 지금 맨몸으로 유적 로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테오스!”
제론은 테오스를 불렀다. 하지만 테오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제론은 억지로 차분함을
유지하며 다시 한 번 테오스를 불렀다.
“테오스!”
하지만 테오스는 이번에도 제론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마치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제론은 다시 한 번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현재 제론의 힘은 연이은 깨달음과 육체의 재구성 덕분에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힘이 강해졌어도 테오스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는 없었다. 테오스는 제론이 가진 힘의 상징과도
같았다. 제론과 함께 성장해 나가는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테오스는 어쩌면 제론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런 테오스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독이었다. 만일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전이라면 어떻게든 행동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제론은 충분히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후우. 일단 차근차근 확인해 보자.”
제론은 우선 그동안 얻은 테오스의 기사들을 불러내기로 했다. 기사를 불러내는 건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제론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었다.
슈슈슈슈슉!
그들을 떠올림과 동시에 모든 기사가 순식간에 나타났다.
모두 17 기나 되는 테오스의 기사들이 제론을 에워싼 상태로 나타났다. 그들은 제론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
나타나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제론에게 고개를 살짝 조아렸다.
그들을 보며 제론은 씨익 웃었다. 이들이 이렇게 건재한데 테오스가 사라졌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
슈슈슈슉!
테오스의 기사들은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제론은 다시 곰곰이 테오스를 떠올렸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차근차근 짚어 나갔다.
일단 테오스는 제론이 죽지 않도록 최대한 애를 썼다. 그동안 몸체가 계속 흩어졌지만 그래도 완전히 사라질
정도는 아니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제론은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제론의 의념은 곧장 벨트의 아공간에 닿았다.
새로 각성한 제론의 능력은 가공할 정도였다. 제론은 아공간 안을 감각으로 휘저을 수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이 강해진다면 아공간에 간섭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제론은 현재 초고대에 12 개 이상의 마나링을 가진 마법사만이 가능했다는 마법을 펼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의념만으로 마법을 일으키는 것이다. 생각의 흐름이 곧 마나의 흐름이 되는 경지였다.
그렇기에 아공간에 간섭할 수 있었다. 아공간도 마법으로 이루어진 공간, 당연히 다른 마법적 힘을 통해 변형을
가할 수 있었다. 물론 아공간 자체가 상당히 난해했기에 변형 자체가 지극히 어려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아공간에 더욱 확실히 간섭하기 위해선 더 높은 경지와 실력이 필요했다. 최소한 제론이 조금 전
깨뜨렸던 그 거대한 벽 하나는 더 깨뜨려야만 할 정도로 큰 힘이 있어야만 했다.
아공간 안의 기운이 제론의 감각에 걸렸다. 제론은 벨트의 아공간에 머무는 테오스의 기사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건 이스히스로군. 이건 타히티고…….’
모든 기사를 마치 눈으로 보듯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벨트 중앙에 위치한 아공간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니, 알아냈다. 그 아공간은 비어 있었다.
‘대체…… 대체 테오스는 어디로 간 거지?’

Chapter 8 벽을 넘어서 (2)

테오스가 완전히 부서졌을 리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테오스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점점 깊어졌다.
제론은 새삼 테오스와 자신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깨달았다.
당장에라도 부르면 테오스가 뛰쳐나올 것 같았다. 한데 아무리 불러도 테오스를 소환할 수 없었다.
제론은 눈을 감았다. 테오스를 되찾지 못하면 아무리 벽을 많이 부수고 넘어도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제론에게
테오스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아니, 또 다른 분신이었다.
테오스가 아공간에 없다면 과연 어디에 있을까? 테오스의 아공간은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테오스의 기사 전부가
들어가도 충분히 공간이 남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 정도가 아니었지만, 제론이 힘을 키우면서 테오스의 힘도 자연스럽게 늘어났고, 그와 동시에
테오스의 아공간도 쑥쑥 자라났다.
그렇게 넓은 아공간이었지만 그 안에 테오스가 있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아공간은 비어 있는
게 맞다.
아마 앞으로는 수납공간으로만 쓰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제론은 생각을 달리했다. 아공간에 없다면 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 부분을 깊이 고민하고 성찰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명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봤다.
‘테오스!’
제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시나 하고 시도해 본 일이었는데, 진짜로 거기에 있을 줄은 몰랐다.
테오스는 제론의 몸속에 있었다. 온몸에 녹아들어 있었다. 거의 제론과 한몸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
테오스에 탑승한 채로 연달아 깨달음을 얻으면서 테오스 자체를 온몸으로 흡수해 버린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이야?’
테오스는 기간트였다. 초고대문명 기술의 정화로 이루어진 기간트였다. 한데 그 기간트를 자신이 흡수해 버렸다.
인간인 자신이 말이다.
‘이러니 소환이 안 되지.’
제론은 과연 테오스를 소환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해내야만 했다.
테오스를 몸으로 흡수하긴 했지만, 테오스의 힘 자체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든 건 아니었다. 그러니 테오스를
소환할 수 없다면 힘이 급감한 거나 다름없었다.
제론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간절히 테오스를 불러냈다. 테오스의 존재 자체를 바라고 또 바랐다.
후아아아앙!
제론의 간절한 바람이 테오스에게 닿았다. 유적 로비 한가운데 테오스가 나타났다.
“이, 이게…… 이게 대체 뭐지?”
제론은 황당한 눈으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테오스로 변해 버렸다.
제론은 주먹을 꽉 쥐었다.
테오스의 거대한 주먹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자르르 흘렀다.
제론은 팔다리를 움직였다.
테오스의 거대한 팔다리가 제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제론은 검을 뽑았다.
아공간에서 테오스의 검이 쑥 뽑혀 나왔다. 그리고 제론의 움직임에 따라 검을 마구 휘둘렀다.
테오스의 검에서 거대한 마나가 휘몰아쳤다. 당연히 제론이 한 일이었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였다. 아니, 이젠 그조차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가 되었다. 당연히 그런 제론이 펼치는 검술이
평범할 리 없었다.
그리고 테오스가 펼치는 제론의 검은 훨씬 더 어마어마했다.
꽈과과과과광!
테오스의 검에서 응축된 마나가 튀어 나가 유적 벽을 마구 할퀴었다. 응축된 채로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기에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동안 어떤 힘으로 타격을 줘도 끄떡없던 유적의 벽이 형편없이 부서져 버렸다.
제론은 그제야 검을 멈췄다. 자칫 유적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후우우우.”
제론은 숨을 길게 내쉬며 테오스를 돌려보냈다. 처음 부르기가 어려웠지 일단 성공하고 나니 부르고 돌려보내는
건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제론은 부서진 유적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혀를 차며 그것을 쓰다듬었다.
“쯧, 너무 힘에 취했어. 그나저나 설마 이렇게 쉽게 부서질 줄은 몰랐는데…….”
그동안 아무리 큰 힘을 얻었어도 유적 벽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굳이 테오스에 타지 않아도
이곳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이번에 제론이 얻은 힘은 대단했다.
“이걸 어쩌지?”
제론의 중얼거림에 유적 시스템이 대답을 해 주었다.
―자동복구까지 36 시간 남았습니다.
제론이 눈을 빛내며 부서진 벽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그 위를 타고 흐르는 마나를 확인했다. 부서진 부분이
더욱 확실히 떨어져 나가고, 그 뒤에 새로운 벽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모습이 보였다.
제론은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초고대문명 유적다웠다.
“자아. 그럼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니 슬슬 돌아가 볼까?”
제론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로비를 둘러싼 벽이 일제히 빛을 뿜어냈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유적이 제론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였다.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명령에 더 가까웠다. 제론을 강제하려는 듯했다.
“뭐지?”
제론은 차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생각해 보니 그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마치 유적을
모두 클리어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수련을 하고 유적을 클리어해 나갔다.
한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이 유적에 휘둘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또한,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적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그 빛은 제론의 머릿속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제론의 표정이 굳었다. 만일 마지막 희열의 벽을 넘지 못했다면 여기에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수준의 정신 간섭으로는 제론을 어쩌지 못한다. 제론의 정신력은 이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다.
제론은 유적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단숨에 파악해 냈다.
“그러니까 한시라도 빨리 모든 층을 클리어하라 이건가?”
유적이 제론에게 원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이쯤 되니 제론은 대체 유적이 왜 그렇게 제론을 압박하는지 궁금해졌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유적을 빨리 클리어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일단 내 주변의 안전부터 챙겨야지.”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유적에서 나가 버렸다.
제론이 사라지자 유적 벽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리고 안타깝게 깜빡였다. 마치 시간이
없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유적에서 나간 제론은 다른 사람을 만나기 전에 일단 태블릿부터 확인했다. 바인이 꾸준히 보고서를 보냈을 테니,
그것만 봐도 돌아가는 상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제론은 태블릿을 꺼내자마자 깜짝 놀랐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이 날짜였는데, 자기 생각과 한 달이나 차이가 났다.
“설마 날짜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었다, 태블릿은 그 무엇보다 정확했다. 절대 틀릴 리가 없었다.
“그럼……!”
짧은 순간이라고 여겼던 깨달음의 시간이 실제로는 한 달이 넘게 이어졌다는 뜻 아닌가.
제론은 잠시 멍하니 그 순간을 되돌아봤다. 벽 하나하나를 부수던 때는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다시
돌이켜봐도 그랬다.
“믿을 수가 없군.”
제론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무려 두 달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틴 셈이었다. 한데도 몸은 탄탄하기
그지없었다.
근육이 온몸을 촘촘히 뒤덮고 있었다. 게다가 몸에서 느껴지는 활력은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식사를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사람 같았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재구성의 효과였다. 최적의 상태를 항상
유지할 수 있도록 육체는 물론이고 몸 내부의 기운까지 변해 버렸다.
“설마 앞으로도 계속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는 건 아니겠지?”
제론은 그런 실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태블릿에 집중했다. 한 달이 더 지나갔으니
생각보다 상황이 다급할 수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야만 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바인은 꾸준히 보고를 올렸다. 매일 최소 3 장 이상의 서류로 이루어진 보고서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제론은 그것을 시간순으로 쭉 읽었다.
이번에 깨달음과 함께 두뇌 쪽도 개발되어 이해력이나 암기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기에 그저 대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역시 그 함정에 레벨리오가 끝장났군.”
에어스트 왕국을 노린 섬광의 창은 제론이 막아 냈지만, 그것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던 레벨리오는 전멸해 버렸다.
“또 전쟁이라…….”
크란 제국의 뒤에는 엠페리움이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거대한 전쟁을 일으킨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말이다.
“호오. 생각보다 선전하고 있는데?”
불과 얼마 전에 메르츠 왕국이 함락되었다. 메르츠 왕국은 크란 제국의 공세를 몇 달이나 버텨 냈다.
물론 고작 몇 달 만에 왕국이 넘어간 거니 엄청나게 빠른 속도이긴 했다. 하지만 그 상대가 크란 제국이니 굉장한
선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전은 딱 거기까지였다. 일단 메르츠 왕국이 넘어가고 나니, 나머지 왕국들은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속속 무너져 버렸다.
전 대륙의 전력을 메르츠 왕국에 집중한 상황이었다. 그 모든 걸 크란 제국은 고작 한 달 만에 밀어 버렸다.
그러니 주변에 있던 왕국이 쉽게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제 남은 왕국은 3 개뿐인가? 그나마도 오래지 않아 끝장나겠군.”
보고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크란 제국, 아니, 엠페리움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그 3 개 왕국이 무너지고 나면 그다음은 바로 에어스트 왕국 차례였다. 제론은 에어스트 왕국이 그동안 크란
제국이 일으킨 대륙정복전쟁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확인했다.
“계속 기간트와 물자만 지원했군.”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지원군을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남은 자들이 가진
권한을 최대한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물품 지원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아모르를 지원한 것도 상당한 월권이었다. 물론 제론은 절대 그것을 문제 삼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칭찬해 주고 싶었다. 그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데 한 달이나 걸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야.”
이렇게 시간을 끌어 주는 바람에 에어스트 왕국의 피해가 전혀 없었다.
크란 제국도 정면으로 밀어붙이는 것에만 집중해 뒤 공작은 전혀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계속 진군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었으니 이대로 잘 끝날 거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정복된 곳의 행태가 심상치 않은데…….”
엠페리움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정복한 지역에는 마티가 촘촘히 깔려 모든
상황이 바인에게 전달되었다.
크란 제국은 정복한 왕국을 공포 정치로 다스렸다. 크란 제국 휘하로 들어가 식민지가 된 왕국민은 매 순간 벌벌
떨어야만 했다.
하루에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인간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과 치욕 속에서
개처럼 죽어 갔다.
그리고 엠페리움은 유적에 대한 조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기묘하게 생긴 아티팩트를 들고 유적 근방을
구석구석 뒤졌다.
“에너지를 찾는 거로군.”
제론은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엠페리움은 크란 제국 내에 있던 에너지원을 대체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제론이 초고대유적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흐름을 바꿔 버렸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거지?”
제론은 혹시나 싶어서 보유한 모든 유적의 에너지 흐름을 바꿔 놓았다. 에어스트 왕국의 것만 제외하고 말이다.
에어스트 왕국의 에너지원은 유용하게 쓸 계획이었다. 수도에 지은 왕궁처럼 성을 지어도 되고, 또 공장을 지어
돌려도 된다.
그러니 엠페리움이 정말로 원하는 걸 얻으려면 에어스트 왕국을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그것도
소용없었다. 제론을 굴복시켜야만 했다.
“이 탄압도 분명히 거기에 관계된 걸 거야.”
제론은 엠페리움이 예전에 어떤 짓을 벌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피와 영혼을 모으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아마 이번 전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좋아. 대충 파악했으니 슬슬 가 볼까?”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하 연무장에서 나갔다.

Chapter 8 벽을 넘어서 (3)


대전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하지만 대전에 모인 신하들의 눈빛에 원망과 희망이 동시에 어려 있는 걸 보면,
누군가 불씨만 던져도 충분히 아수라장이 되어 버릴 것이다.
왕좌에 앉은 제론이 좌중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수고 많았다.”
침묵은 잠시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세나였다. 이 중에서 누구보다 제론과 가까운 사람이니
자신이 나서는 게 옳다고 여긴 것이다.
“폐하께서는…… 어디에 다녀오신 건가요?”
그녀는 침착하려고 애썼지만, 목소리에 담긴 원망을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그만큼 기다리는 시간이 힘들었다.
상황이 점점 악화하니 그 힘겨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지기만 했다.
“조금 다쳐서 몸을 추스르느라 늦었다.”
제론의 말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쳤다니, 대체 뭐가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괘, 괜찮으신가요?”
세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가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본 제론이 빙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것 없다. 몸은 더 좋아졌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대전에 모인 사람들 전부가 걱정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렇게 제론을 보던 바이스의 뇌리에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설마 두 달 전에 수도를 덮쳤던 불꽃들이……!”
바이스의 말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바이스는 그때의 정황을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마탑주였으니까.
제론이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자, 바이스는 자신이 알아본 바와 생각한 바를 정리해서 천천히 말했다.
“당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마나의 반응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곧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치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아! 그때 수도 상공에서 있었던 불꽃놀이가 그럼…….”
“그건 불꽃놀이가 아니라 폭발력을 가진 마나의 잔해가 쏟아지는 걸 수도의 방어 시스템이 막아 내며 만들어 낸
현상이었소.”
모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설마 그때의 불꽃놀이가 그런 것인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다들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제론이 목숨을 걸고 위험을 막아 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다. 어쨌든 이렇게 살아났고, 훨씬 강해졌으니까.”
재론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찌나 담담했는지 다들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수습할 정도였다. 괜히 아무것도 아닌
일에 과한 반응을 보인 모양새가 된 듯해 쑥스러웠다.
“자, 이제 인사는 이쯤 하면 됐으니 슬슬 진짜 회의를 시작하지. 언제쯤 우리 왕국에 크란 제국이 쳐들어올 것
같나?”
“아무리 최대로 잡아 봐야 닷새를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최대한 물자 지원을 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크란 제국의 힘을 막아 낼 수 없습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예상하던 바였다. 사실 이제는 크란 제국으로부터 세 왕국을 구해 내는 건 늦어
버렸다.
“전쟁 준비는 잘되어 가나?”
이미 바인의 보고를 통해 알아낼 건 다 알아냈지만 그래도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물었다.
“최전방에 3 천 기의 아모르를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뒷받침할 기간트 부대가 준비 중입니다. 전후방 합해
총 1 만 기의 아모르입니다.”
“3 년 동안 쓸 수 있는 물자도 확보했습니다.”
“예비 전력을 빠르게 양성 중입니다.”
제론은 보고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들이 제법 멀리 바라보며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 전쟁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도록.”
이번 전쟁에는 제론도 빠질 수 없었다. 하지만 제론의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해서 유적 클리어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아모르는 보통 기간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아모르의 성능은 이번 크란 제국과의 전쟁에서 제대로 증명되었다.
게다가 다른 왕국에 전한 아모르는 다운그레이드형이었다. 출력이나 성능이 원래의 것보다 떨어졌다. 그런
아모르로도 크란 제국의 기간트를 압도했다. 또한, 발굴형 기간트에도 밀리지 않았다.
그러니 에어스트 왕국이 준비한 진짜 아모르의 성능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아마 크란 제국도 이번에는 고생깨나
할 것이다.
‘아니, 우리가 이긴다. 내가 나설 테니까.’
제론의 눈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이번에 벽을 넘으며 얻은 힘은 어마어마했다. 기분대로라면 혼자서 크란 제국과
전쟁을 벌여도 이길 것 같았다. 물론 기분과 현실은 다르겠지만, 그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일단 적의 선봉과 예봉을 꺾은 다음 유적을 클리어해야겠어.’
제론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지금 더 급한 것은 유적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왠지 유적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참으로 묘했다. 이상하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나? 빨리 움직이도록.”
제론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들 예를 취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날부터 에어스트 왕국이 더욱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전쟁의 시작이었다.

Chapter 9 초전 (1)

크란 제국군은 3 개 왕국을 순식간에 정벌하고 에어스트 왕국의 국경에 진을 쳤다.


에어스트 왕국군은 이미 그 전에 크란 제국군을 맞이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3 천 기의 아모르가 언제든 돌격할 수 있도록 대기 중이었고, 또 7 천 기의 기간트 라이더가 텔레포트 게이트
근처에 병영을 만들어 훈련 중이었다.
또한, 수만 명의 예비 라이더가 피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 역시 텔레포트 게이트 근처에서 훈련했기에 언제든
전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텔레포트 게이트 시스템은 제론이 다시 등장함과 동시에 제작이 재개되었고, 주요 위치에
설치되었다.
제론의 실력이 엄청나게 늘어났기에, 예전에 비하면 지극히 짧은 시간 만에 만들어졌다.
그로 인해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사람을 언제든 이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 제론의 게이트는 그저 미리 만들어진
포탈을 통과하기만 하면 마치 길이 이어진 듯 곧장 원하는 곳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동의 후유증도 없었고, 거리의 제약도 없었다. 이대로 모든 왕국에 설치되면 물류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또한, 이번 전쟁에 정말로 큰 힘이 될 것이다. 병력 보충이 크란 제국보다 훨씬 빠를 테니 그만큼 더 유리해지지
않겠는가.
제론은 최전방에서 다른 라이더와 함께 대기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저 돌격대장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제론은 선봉 라이더 부대의 천인장들을 모아서 작전 회의를 했다.
3 천 라이더의 천인장답게 다들 완숙한 익스퍼트의 경지였다. 현재의 기준으로는 강력한 소드 마스터인 셈이었다.
세 천인장은 각자 제론이 나눠 준 서류를 한 장씩 들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 바인으로부터 받은 보고서 중, 크란
제국군의 동태를 정리한 내용이었다.
“그걸 보면 알겠지만 크란 제국은 오늘 국경에 도착했다. 지금 한창 진을 치는 중이지.”
천인장들이 눈을 빛냈다. 그들의 눈빛에 기대감이 어렸다. 그동안 훈련만 쌓았기에 실전에 목이 마른 상황이었다.
드디어 전투다운 전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다들 마른침을 삼켰다.
“방비가 상당히 튼튼하지만 난 지금이 기습의 적기라고 판단한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인장들을 둘러봤다. 다들 명령만 내리면 당장에라도 돌격하겠다는 듯 뜨거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이 지도를 보도록.”
제론은 탁자 위에 놓인 지도를 가리켰다. 근방의 지형이 아주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크란 제국군의 현재 위치를
입체적으로 표시한 지도였다.
작은 사람과 마차, 막사가 반투명하게 떠올라 있었는데, 그 신비로운 모습을 보고도 천인장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이미 이런 아티팩트를 자주 접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지도 위의 크란 제국군은 실시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세 군데를 짚었다.
“여기와 여기, 그리고 여기가 취약점이다. 아마 크란 제국 놈들에게도 그리 중요치 않은 지점이겠지.”
군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곳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제론이 짚은 부분이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솔직히 기습의 효과도 크게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기습 부대의 규모가 크면 어떻게 될까?”
제론의 말에 천인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제론을 바라봤다. 그들의 눈이 번득였다.
“각자 거느린 부대를 몽땅 이끌고 그곳을 기습한다. 최대한 빠르게 파고들 수 있을 만큼 파고든 다음, 곧장
후퇴한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예.”
말 그대로 허를 찌르는 기습 작전이었다. 크란 제국군도 설마 선봉으로 나온 모든 기간트를 이끌고 기습 작전을
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것이다.
“작전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난 따로 움직일 것이다. 내가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는 참고 대기하도록. 알겠나?”
“알겠습니다.”
제론은 세부적인 작전을 지시하고는 천인장들을 돌려보냈다. 시간이 촉박했다. 적이 태세를 정비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기습을 해야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제론은 잠시 머릿속으로 작전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첫 전투는 전쟁에서 아주 중요했다. 모든 싸움은 기세와 흐름이 절반 이상을 먹고 들어간다. 초전을 승리로
장식하는 건 기세와 흐름을 결정하는 요소였다.
“그냥 승리여서는 안 돼. 아주 통쾌하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야 해.”
제론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눈앞의 전쟁도 중요하지만 뒤에서 벌어지는 일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제론이 상처를 회복하고 깨달음을 얻는 두 달 동안 바인은 크란 제국 내부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래서 에어스트 왕궁을 노렸던 것이 섬광의 창이라는 엠페리움의 비밀병기란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유사시 그걸 또 쓸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아냈다.
섬광의 창을 막으려면 크란 제국 내의 유적을 더 등록해야만 했다. 그래야 그것을 만들 에너지가 모자라 다시는
그런 위험한 무기를 쓰지 못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제론은 결연한 표정으로 막사를 나섰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어느 하나 놓칠 수 없었다. 제론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무조건 해낼 것이다. 무조건.

크란 제국군은 아직 진지를 제대로 구축하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모든 기간트를 꺼내 놓고 철저히 방비했다.


진지를 구축하고 마법진을 깔아 방어 시스템을 갖추기 전에는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
제론은 멀리 떨어진 곳에 은신한 채 제국군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들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에어스트 왕국의
저력을 알기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에어스트 왕국이 다른 나라에 아모르를 지원하지 않았다면 대륙정벌은 훨씬 빨리 끝났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방심하겠는가.
제론은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그저 담담했다. 이미 새로운 경지에 오른 그의 눈에는 진지에 구축하는
마법진의 흐름이 훤히 보였다.
크란 제국군이 구축하는 방어 시스템은 그저 적의 공격을 막아 내기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각종 공격 마법을 통해 적의 공세를 늦추거나, 기간트가 기습했을 때, 한두 기의 기간트 정도는 기동 불능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화력을 갖춘 마법진도 준비했다.
“생각보다 간단하게 혼란을 줄 수 있겠군.”
아직 마법진이 완전히 설치되지 않았다. 그저 기본적인 부분만 설치되었고, 보안에 관계된 부분은 아직 손도 대지
않았다.
만일 다른 마법사라면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달랐다.
제론의 몸을 중심으로 마나가 휘몰아쳤다. 철저하게 마나의 움직임을 통제해 이곳에서 움직이는 마나의 흐름이
절대 멀리 퍼지지 않게 조절했다.
아무리 제론이라도 이번에 마지막 벽을 넘지 못했다면 결코 해낼 수 없는 극도로 어려운 마나 컨트롤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여전히 담담했다. 벽을 넘지 못했다면 모를까, 일단 넘은 이상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론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제론 앞에 투명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나 컨트롤 능력이 극에 이르면 이렇게
마법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제론이 손을 휘젓자, 투명한 마법진이 작게 압축되었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날아가 크란 제국의 마법진에
스며들었다.
“됐군.”
제론은 눈을 빛내며 언제든 테오스를 부를 수 있도록 준비했다. 혼란이 시작되면 테오스를 타고 곧장 돌격할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17 기의 기간트 기사가 지원할 것이다.
그렇게 크란 제국군을 엄청난 혼란에 몰아넣은 다음, 이제나저제나 제론의 신호만 기다리고 있는 기간트 부대가
기습하면 작전이 완성된다.
아마 에어스트 왕국군의 기간트 부대는 제법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서 상당한 피해를 강요할 수 있으리라.
제론은 조용히 심호흡하며 열심히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크란 제국군 진영을 쳐다봤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다.

Chapter 9 초전 (2)

크란 제국군의 마법사들은 이를 악물고 마나를 불어 넣었다.


일단 마법진을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굉장한 양의 마나가 필요했다. 더구나 이곳에 설치할 마법진의 경우 규모가
너무 커서 마나를 컨트롤할 사람이 따로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휘몰아치는 마나 사이로 압축된 마법진이 파고들었다. 투명했기에 누구도 마법진이 파고드는 걸 보지
못했다. 또한, 워낙 많은 마나가 움직이고 있었기에 마법진의 존재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샤아아아아아.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지며 투명한 마나가 크란 제국 마법진에 스며들었다.
우우우우웅!
갑자기 마법진이 진동하며 이상 작동을 하기 시작했다. 마나가 거칠게 날뛰었고, 마법진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법사들이 당황하며 어떻게든 마나를 안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기울여도 마나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
“피해! 마법진이 작동한다!”
수많은 마법진이 동시에 빛을 뿜으며 마나를 빨아들였다. 본래라면 다가오는 적을 향해 쏟아져야 할 마법이었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후아앙!
마법진에서 거대한 불꽃의 창이 튀어나왔다. 요격 시스템으로 설치한 화염의 창이었다.
화염의 창은 가장 먼저 마법사들이 모인 곳을 노리고 날아갔다. 원래 마나의 움직임을 감지해서 따라가도록
설계했다. 그러니 근처에서 마나를 다루던 마법사를 노리는 게 당연했다.
화르르륵!
화염의 창이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엄청난 속도였다. 원래 설계했던 마법진의 마법보다 더욱 강해지고 빨라졌다.
화염의 창은 마법사들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꽈아아아아아앙!
화염의 창 한 방에 백 명이 넘는 마법사가 잿더미로 변했다.
후우웅!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법진이 빛나며 새로운 화염의 창을 토해 냈다.
우우우우웅!
다른 마법진도 모두 작동하며 근처에 있는 사람과 기간트를 노렸다.
꽈앙! 꽈앙!
빠지지지직!
화염과 전격이 마구 쏟아져 나갔다.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날아오는 마법에 크란 제국군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피해! 또 온다!”
“사령관 각하께 보고해! 어서!”
제국군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법은 일단 적중하면 근방을 초토화하니 흩어지는 것이 그나마 피해를 줄이는
길이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마법진부터 부수지 않고!”
언제 나타났는지 사령관이 기간트를 탄 채 나타나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기간트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연이어 쏟아지는 마법을 몸으로 막으면서 다가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는
사이 피해가 속출했다.
사람만 죽고 다친 게 아니었다. 기간트의 피해도 그리 가볍지 않았다. 마법진의 위력이 설치한 것보다 훨씬
강해지는 바람에 아무리 기간트라도 정면으로 맞으면 멀쩡하게 버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간트의 수가 워낙 많으니 마법진에 다가가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근처에 도착한 기간트가
검을 뽑아 마법진을 찔렀다.
쩌어어어엉!
투명한 막이 마법진을 보호하고 있었다. 방어 시스템이 작동한 것이다.
파지지지직!
충격을 전격으로 바꿔 방출하는 마법진이 작동하며 검으로 찌른 기간트를 덮쳤다.
쿵쿵쿵!
기간트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사령관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쉽지 않겠군.”
마법진을 부순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마법진을 부순 다음에는 그걸 다시 설치해야만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진지를 구축하고 전쟁에 임할 수 있었다.
지금 설치한 마법진에 들어간 돈도 어마어마했는데, 저걸 또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쩌엉! 쩌엉! 쩌엉!
파지지지직!
쿵쿵쿵쿵!
더 많은 기간트가 도착하며 방어막을 공격했다. 기간트의 피해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대로라면 곧
마법진을 부수고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크란 제국군에는 불행하게도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큐웅! 큐웅! 큐웅! 큐웅!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어디선가 날아온 빛의 화살이 마법진을 때리던 기간트의 가슴을 꿰뚫어 버렸다. 당연히 기간트는 움직임을 멈췄고,
그 기간트를 마법진의 마법이 덮쳤다.
파지지지직!
쿠웅! 쿠웅!
기간트들이 연달아 쓰러졌다.
“기습이다! 다들 경계를 늦추지 마라! 어떻게든 잡아내!”
아직 전쟁을 사직하지도 않았는데, 사고가 나고 기습을 당하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쿵쿵쿵쿵쿵쿵!
“저쪽이다!”
기간트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지금까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모양의
기간트 부대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빛의 화살이 날아왔다.
큐웅! 큐웅! 큐웅!
콰직! 콰직! 콰직!
빛의 화살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그리고 기간트의 가슴을 단번에 꿰뚫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크란 제국군의 기간트 부대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마법진이 날뛰고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를 화살에
아군이 쓰러지는데, 정면으로는 듣도 보도 못한 기간트 부대가 달려오고 있으니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뭣들 하느냐! 일단 달려오는 놈들부터 막아!”
크란 제국군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는 1 만 기가 훌쩍 넘을 정도로 많았다. 그렇게 많은 기간트가 고작 10 여 기의
기간트에 당황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신 차려! 적은 고작 10 여 기에 불과하다! 차분하게 대응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사령관의 명령이 재차 쏟아지자, 크란 제국군이 차츰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딱 그 순간, 사방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꾸아아아아아앙!
“적이다!”
“기습이다!”
다시 혼란이 찾아왔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천 기의 기간트가 혼란으로 정신없는 크란 제국군 진영을 기습한 것이다.
사령관은 멀리서 날뛰는 기간트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아모르……!”
수천 기의 기간트가 몽땅 아모르였다. 에어스트 왕국이 작정을 하고 기습을 건 것이다.
만일 정면으로 붙었다면 상대를 압도하지는 못해도 충분히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아모르가 아무리 뛰어난
기간트라 하더라도 수적 우위를 앞세워 밀고 나가면 결국은 많은 쪽이 이기게 되어 있었다. 그것이 기간트
전투였다.
한데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이제는 숫자만으로 전투를 논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크윽!”
사령관이 침음을 삼켰다. 짜증이 났다. 하지만 이대로 넋 놓고 당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사태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여전히 우리가 많다! 당황할 것 없다! 일부는 기습을 막고 일부는 정면을 막아! 마법진은 포기한다! 다들
마법진에서 떨어져!”
사령관은 단호히 마법진을 포기했다. 어차피 이곳에서 싸우면 마법진은 아모르건 크란 제국군이건 가리지 않고
공격할 것이다.
당연히 수가 더 많은 크란 제국군이 피해를 받겠지만, 그 정도는 무시할 수 있었다. 코앞의 전투에 집중해서
적을 빨리 물리치는 편이 나았다. 마법진은 그다음에 차근차근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크란 제국군 사령관은 한 가지를 간과했다. 정면에서 달려오는 10 여 기의 기간트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100 기나 되는 기간트가 달려갔으니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라 여기고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전투 진형을 막 바꾸기 시작했을 때, 100 기의 기간트 부대와 10 여 기의 선두에 있던
테오스가 부딪쳤다.
꽈과과광!
테오스의 위력은 엄청났다. 가장 앞에 있는 기간트 10 여 기가 단번에 뭉개지며 사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뒤를 테오스의 기사들이 덮쳤다.
꽈과과과과과광!
기사들의 위력도 엄청났다. 물론 테오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테오스는 제론의 실력에 비례해서 강해진다. 그리고 지금은 제론 혼자서 그의 기사 모두를 이길 수 있을 정도였다.
제론이 벽을 넘으면서 엄청나게 강해지는 바람에 테오스도 덩달아 강해졌다.
어쨌든 크란 제국군에서 달려온 100 기의 기간트 부대가 뭉개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기간트 부대를 박살 내고 크란 제국 본진에 들이닥쳤다.
꽈과과과광!
테오스와 기사들은 파죽지세로 크란 제국군 본진을 유린했다. 워낙 강력한 데다가 크란 제국군 전체가
테오스보다는 기습을 가한 3 천 기의 아모르 부대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더욱 피해가 막심했다.
테오스를 중심으로 기사들이 사방으로 거리를 벌렸다. 점점 영역을 확대해 나가며 크란 제국군에 더욱 큰 피해를
안겨 주었다.
그것을 확인한 크란 제국군 사령관은 다급해졌다.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놈들이!”
사령관은 서둘러 전황을 살폈다. 그리고 이를 바득 갈았다. 기습을 가했던 3 천 기의 아모르 부대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크란 제국군 기간트 부대가 본격적으로 태세를 정비해 전투에 임하려는 순간 귀신같이 그걸 알아차리고 물러난
것이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들부터 없애지 않고!”
사령관의 명령이 다시 떨어졌다. 그렇게 빠르게 공격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최소한 지금 공격하고 있는 저 괴물 같은 기간트 부대라도 잡지 않으면 앞으로의 전쟁 자체가 괴로워질 테니까
말이다.
쿵쿵쿵쿵쿵!
크란 제국군의 기간트 부대가 다급히 움직였다. 그리고 결국 각각의 기간트들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아무리 초고대문명의 기간트인 이스히스나 마크리아가 빠르고 강하다고 해도, 이렇게 수로 밀어붙이면 답이
없었다. 그들의 몸체에 하나둘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게 다치면서도 착실히 적의 수를 줄여 나갔다. 크란 제국군은 정말 어마어마한 피해를 보았다.
제론은 테오스와 거의 한몸이 되어서 움직였다. 검을 휘두르는 동작에 조금도 괴리감이 없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소드 마스터를 아득히 넘어설 정도로 강해졌는데, 움직임도 인간과 다를 바가 없으니 아무도
테오스를 당해 내지 못했다.
그나마 수백 기에 달하는 발굴형 기간트가 몽땅 몰려와서 견제한 덕분에 테오스의 움직임을 조금이나마 제지할 수
있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을 것이다.
제론은 공격을 하면서도 냉정하게 전황을 살폈다. 3 천 기의 에어스트 왕국군은 몸을 빼는 데 완벽히 성공했다.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고 적에게 피해만 강요하고 물러난 것이다.
‘작전 성공이로군.’
작전에 성공했으니 이제 슬슬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다. 기사들의 피해가 점점 누적되고 있었다. 어차피 아공간에
들어가 있으면 차츰 회복되니 걱정할 건 없었지만, 너무 많이 부서지면 회복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리니 곤란했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기사들을 돌려보냈다.
순식간에 사라진 적을 보며 크란 제국 기간트 라이더들이 멍하니 서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기간트가 갑자기 사라졌으면 라이더라도 남아야 하는데, 마치 공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것도 없었으니
당황스러웠다.
“남은 한 놈이라도 철저히 부숴!”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으로 제론이 탄 테오스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예전의
테오스라면 모를까, 지금은 절대 잡을 수 없었다.
꽈과과광!
테오스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빠르고 강했지만, 순간적으로 몇 배나 더 빨라진 것이다.
그 빠른 속도와 힘에 테오스를 포위했던 기간트들이 단숨에 나가떨어졌다. 그것도 허공에 붕 뜬 채로 날아가
동료를 덮쳤다.
꽝! 꽝! 꽝! 꽝!
테오스 주변에 공간이 생겼다. 테오스가 그 공간 안에서 두 발을 뛰었다.
쿵! 쿵!
그리고 점프했다.
꽈앙!
테오스의 몸이 하늘에 떠올랐다. 보통의 점프로는 절대 올라갈 수 없을 정도의 높이었다.
다들 멍하니 고개를 들고 테오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테오스는 그렇게 허공에 뜬 상태로 휙 날아갔다.
후웅!
테오스는 가볍게 크란 제국군 진영을 넘어갔고, 그 뒤로 빠르게 달려서 사라졌다.
다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심경으로 테오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크란 제국군 진영은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Chapter 9 초전 (3)

“대승입니다!”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이렇게 통쾌하게 적을 뭉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더구나 피해가
전무했다.
아군 기간트는 3 천 기가 고스란히 남았고, 적은 마법사를 비롯한 막대한 물자와 인재를 잃었다. 또한, 기간트
피해도 엄청났다.
제론은 그렇게 기뻐하는 천인장들을 슥 둘러본 다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제론의 담담한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천인장들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간신히 흥분만 가라앉혔을 뿐,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기습을 한 번 더 한다.”
“또 말입니까? 하지만 한 번 기습에 당했으니 이젠 방비를 더 철저히 할 텐데요.”
“그러니 지금 당장 하는 거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탁자 위에 놓인 전장의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위이이이잉!
지도 위에 크란 제국군의 현재 상황이 그대로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천인장들이 눈을 빛냈다.
“방심하고 있군요.”
크란 제국군은 전투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간트를 몽땅 동원해서 주변을 치우고 있었는데, 경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설마 바로 연이어 기습을 또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피로
문제도 있고, 기간트 정비 문제도 있으니 기습을 성공하고 물러나자마자 또 들이닥칠 확률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에어스트 왕국군은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했다. 지금 당장 기습을 또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번에는 좀 크게 간다. 확실히 타격을 줘야 한다. 최소한 적의 기간트 수를 절반 이하로 줄이는 걸 목표로
한다.”
“예.”
“이번에도 셋으로 나눠 기습한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기습 위치를 짚었다. 그 부분은 확실히 방어가 모자랐다.
천인장들은 공격 방법과 시기를 정확히 정한 다음 돌아갔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적이 방심을 버리기 전에
서둘러 공격해야 효과가 극대화된다.
제론은 이번 기습으로 적의 사령관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확실히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선봉을 완전히 무너뜨리면 당분간 쉽게 도발하지 못할 것이다.’
그 부분은 확실했다. 문제는 섬광의 창이었다.
크란 제국이 미친 척하고 섬광의 창을 또 쓰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보고 말 것이다.
‘그때는 또 내가 나서는 수밖에.’
달라진 자신의 힘이라면 어떻게든 테오스와 함께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조금만 더 사전에
알아낸다면 더욱 빨리 막아 낼 수 있고 말이다.
‘미리 알아내기만 하면 돼.’
에너지를 축적하기 전에 검으로 갈라 버리면 된다. 예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젠 가능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제론이 상념에 젖어 있을 때, 천인장 하나가 들어와 보고를 마쳤다.
“가자.”
제론은 결연한 눈으로 막사를 나섰다. 전쟁의 흐름을 바꿀 시간이 되었다.

Chapter 10 유적 클리어 (1)

두 번째 기습은 너무나 싱겁게 끝났다.


설마 연이어 기습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크란 제국군은 에어스트 왕국군의 공격을 거의 막아 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와중에 제론이 사령관을 없애면서 전황이 거의 결정되어 버렸다.
기습이 워낙 훌륭했기에 굳이 철수하지 않고 전투를 끝까지 이어 나갔다.
그렇게 크란 제국군의 선봉이 전멸했다.
무려 1 만 기가 넘는 기간트가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크란 제국이라도 이건 뼈아픈 손실이었다.
제론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3 천 기의 아모르를 이끌고 진군했다.
크란 제국군의 본진은 무려 10 만 기의 기간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론은 거기에 싸움을 걸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제론이라도 10 만이나 되는 기간트가 집중되어 있으면 상대하기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력을
분산시키기로 했다.
3 천 기의 아모르 부대를 각각 100 기씩 나눠 사방으로 흩어 버렸다. 앞으로 그들은 게릴라전을 시작할 것이다.
물론 본대는 철저히 피하라고 지시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상황이 되면 무조건 도망가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것이 이번 게릴라전의 핵심이었다.
크란 제국이 무서운 이유는 본대에 있는 10 만 기의 기간트 외에도 엄청난 전력이 준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전력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해진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게릴라 부대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 기간트들이었다.
아무리 크란 제국이라도 전 대륙을 아우를 정도로 많은 기간트를 보유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흩어진 기간트는 그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물론 아무리 적다 하더라도 각각 수십 기에 달했기에
식민지를 힘으로 다스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크란 제국 본진은 각종 마법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곳이 털리면 완전히 끝장이었기 때문에 방비가 더없이
철저했다.
그래서 제론도 굳이 거기를 노릴 생각은 없었다. 무리하지 않아도 조만간 그들은 흩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흩어진 순간이 승부를 걸 타이밍이었다.
제론은 이미 에어스트 왕국의 본진에 명령을 내려 두었다. 진격할 준비를 하라고 말이다.
누가 봐도 1 만 기로 10 만 기의 기간트를 상대한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하지만 에어스트 왕국군은
제론의 명령에 일말의 의구심도 가지지 않았다. 그저 명령에 따랐다.

☆ ☆ ☆

“골치 아프게 됐군.”


“역시 제일 어려울 것 같더라니…….”
“그보다 보고가 들어왔던 기간트에 대해 알아봤소?”
“예전에 몇 번 보고가 되었던 기간트인 것 같기는 한데…… 알 수 없었소.”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마 왕이 자리에 없는 게 다행이었다. 아마 왕이 있었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았으리라.
현재 왕은 피와 고통을 이용해 영생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었다. 그 준비에 상당한 시간과 피, 그리고 인간의
마이너스적인 감정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걸 준비하느라 다들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대륙 정복이 쉬울 거라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로 어렵게 될 거라고도 생각지 않았는데…….”
다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는 참 잘 왔는데,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 두고 크게 휘청이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에어스트 왕국 놈들은 지금 어쩌고 있소?”
“일단 병력을 분산시켜서 게릴라전을 막기는 했는데…… 그 때문에 본진에 피해가 크오.”
“일단 태세를 정비할 필요가 있겠군.”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다들 표정이 심각해졌다.
“깁스 남작은 요즘 뭐 하고 있소?”
“왕께서 데려가셨소.”
“왕께서?”
다들 놀란 눈으로 말을 꺼낸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능력 하나는 쓸 만한 놈 아니오. 왕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데려오라 하셨소.”
“허어, 이번 전쟁에 그놈을 좀 써먹어 볼까 했더니 아깝게 되었군.”
“난 그보다 왕께서 그놈을 지나치게 총애하시게 될까 걱정이오.”
“하긴, 그놈 성격에 왕의 총애를 받으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긴 하지.”
“아무튼, 우리도 나름대로 대비를 해야 하오.”
“그 전에 왕께서 모든 준비를 끝마치시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걸 잊어선 안 되오.”
“끄응, 그게 문제요. 일단 한 달 정도 전력을 추스릅시다. 그다음 모든 전력을 박박 긁어서 단숨에 쓸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소.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합시다.”
“숨겨 둔 패가 있으면 다들 꺼내 보시오. 일단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남겨 봐야 소용없지 않겠소?”
그 말에도 다들 동의했다. 왕의 눈에 들지 못하면 영생을 얻을 수 없다. 그럼 힘을 가진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수뇌부가 마지막까지 꼭꼭 숨겨 둔 패를 몽땅 꺼냈다. 그들도 나름대로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그렇게 모인
전력이 크란 제국을 한 번 뒤집을 정도로 컸다.
“이번에도 안 되면 섬광의 창을 한 번 더 쓸 수밖에 없을 것 같소. 다들 동의하오?”
섬광의 창은 모든 에너지원을 한 달 동안이나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기에 쓰기 위해선 수뇌부 전원의 동의가
필요했다.
물론 왕의 허락이 있어야 하지만 지금은 허락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니 선조치 후보고의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면 섬광의 창이라도 써야만 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크흐흐. 고작 시종이 된다고 하니 불만이 생기느냐?”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전 그 정도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납작 엎드린 사람은 깁스 남작이었다. 그는 왕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대충 눈치챘다.
그렇기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즉시 깨달았다.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깁스 남작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왕이 씨익 웃었다.
“쓸 만한 시종이 되겠구나. 앞으로 잡일은 몽땅 네게 맡기도록 하마.”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깁스 남작은 희열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잡일을 맡긴다는 건 자신에게 대륙을 마음대로 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왕이 원하는 건 크지 않았다. 그저 꾸준히 피와 인간의 마이너스 감정을 공급하면 된다. 왕은 고작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물론 필요한 양이 어마어마하긴 했지만, 전 대륙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면 그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멍청한 것들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어야 한다니 갑자기 짜증이 나는구나. 가서 심장을 가져오너라.”
“예.”
깁스 남작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동안 깁스 남작도 그리 곱게 살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하는 일은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다.
깁스 남작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펄떡이는 심장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왕은 그것을 받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왕의 몸에서 불그스름한 안개가 피어났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깁스 남작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진정 마왕이 되어 가는구나.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일까?’
조금 전, 살아 있는 사람의 가슴에서 숨이 끊어지기 전에 심장을 뽑아냈다. 그때 잠깐 들었던 생각이 그 심장을
씹어 먹는 왕을 보며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깁스 남작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여기 붙어 있지 않으면
엠페리움의 수뇌부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고려의 여지가 없는 지극히 뻔한 수순이었다.
왕은 마왕이 되어 가고 있었다. 깁스 남작의 뇌리에 어쩌면 자신이 좌지우지할 대륙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왕이 진짜 마왕으로 변하면, 대륙을 산산조각 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부쩍 들었다.
심장을 삼킨 왕이 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핫!”
그의 웃음에는 기쁨과 광기가 뒤섞여 있었다.
깁스 남작은 다시 납작 엎드려서 덜덜 떨었다.
두려웠다.

Chapter 10 유적 클리어 (2)

크란 제국군에 멋지게 한 방 먹인 덕분에 제법 많은 시간을 번 제론은 곧장 유적으로 향했다.


계속해서 드는 꺼림칙한 느낌을 해결하기 위해선 일단 유적 클리어 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건 확신이었다. 이번에
얻은 깨달음 때문에 갖게 된 확신 말이다.
에어스트 왕국은 여전히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크란 제국군에 한 방 크게 먹이긴 했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크란 제국의 저력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아마 다음 공격은 훨씬 거대한 규모로 압박해 올 것이 분명했다.
에어스트 왕국은 그걸 막아 내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아모르 생산에 박차를 가했고, 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전쟁에는 이겼지만, 에어스트 왕국도 피해가 없을 수는
없었다. 아니, 제법 피해가 컸다.
물론 그 정도 피해로 크란 제국을 막아 냈으니 엄청나게 잘 싸운 것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당장 한 번 이겼다고 모든 전쟁이 끝난 게 아니었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사실 냉정하게 따지면 이 전쟁은 에어스트 왕국에 극도로 불리했다. 하지만 왕국민 누구도 전쟁에서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수뇌부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수뇌부는 오히려 더 승리를 확신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제론은
왕이라기보다는 신에 가까웠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몽땅 해결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니 아무리 크란 제국이 강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크란 제국에 힘이 있다면 에어스트 왕국에는 제론이 있었다.
그것이 에어스트 왕국의 수뇌부가 바라보는 제론이었다.
제론은 당분간 자신이 없어도 크게 상관이 없도록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유적에 갔다.
유적에서도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도전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아주 간단히 6 기의 기간트를 물리쳤다.
이제 남은 건 7 기의 기간트뿐이었다. 거기까지 클리어하면 벨트의 모든 아공간을 기간트로 채우게 되는 셈이었다.
즉, 30 기의 기사가 생긴다는 의미였다.
“마지막 하나는 기사단장이려나?”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제론은 맨몸으로 완전한 성능을 발휘하는 이스히스, 타히티, 마크리아를 상대해야만
한다.
물론 자신 있었다,
제론은 곧장 유적으로 내려갔다.

“호오. 분위기가 정말 다른데?”


분위기뿐 아니라 시작하는 방식도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내려오자마자 6 기의 기간트가 보였다. 마치 제론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제론은 6 기의 기간트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완전한 성능을 발휘하는 기간트였다.
아마 예전이라면 1 분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기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냥 시작하면 되나?”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간트들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엄습하는 강렬한 기운에 급히
몸을 옆으로 굴렸다.
화아악!
어마어마한 빛이 제론이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제론은 자세를 잡으며 기운만으로 자신을 공격한 존재를 확인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형태의 기간트였다.
머리에 뿔이 세 개나 달렸고, 어깨에도 뿔이 촘촘히 나 있었는데 이스히스나 타히티, 마크리아와는 다르게 검을
들고 있었다.
“이름이 뭐지?”
―디아스티마.
“기사단장인가?”
―그렇습니다.
제론은 눈을 빛냈다. 조금 전의 대화는 유적 시스템과 한 것이 아니었다. 디아스티마와 직접 나눈 대화였다. 즉,
디아스티마는 다른 기사와 달리 말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신기했다. 말하는 것이 인간과 거의 다를 게 없었다. 그저 몸만 기간트일 뿐이었다.
“널 꺾으면 되는 건가?”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 보이는군.”
―시작하겠습니다.
디아스티마는 그렇게 말하고 곧장 몸을 날렸다. 거대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속도였다. 타히티의 고속
이동보다 훨씬 빨랐다.
하지만 제론은 이미 인간이라 여기기 어려울 정도의 강자였다. 디아스티마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 낸 뒤,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엉!
디아스티마의 거대한 검과 제론의 검이 부딪치며 충격파가 일어났다.
후우웅!
쿵쿵쿵쿵!
뒤에 늘어서 있던 6 기의 기간트가 충격파를 거스르며 달려왔다. 그들의 진형은 지금까지와는 많이 달랐다.
마크리아와 이스히스가 각자의 거리를 지키며 제론을 견제했고, 타히티가 빈틈을 노려 빛의 화살을 날렸다.
한데 너무나 잘 맞물려 들어갔다. 제론이 어떻게 움직이든 그 미묘한 차이를 파악해 내고 간격을 맞추는데, 만일
제론이 마지막 벽을 넘지 못했다면 그 연쇄 공격을 견디지 못했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 맞물리는 연쇄 공격 사이에 갑자기 빈틈이 만들어졌다. 그 빈틈을 디아스티마의 검이 파고들었다.
쩌어어엉!
제론은 간신히 그 검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허공에 붕 떠서 날아갔다.
허공에 뜬 제론을 향해 수십 발이나 되는 빛의 화살이 날아갔다.
콰콰콰콰콰콰!
고작 두 기의 타히티가 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화살이었다.
제론은 그제야 디아스티마의 진짜 능력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증폭과 지휘였다.
디아스티마는 휘하 기사들을 적절히 지휘해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의 능력을 증폭시킬 수 있었다.
제론은 검을 휘둘러 화살을 쳐 냈다.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화살을 쳐 내며 그 힘을 이용해
착지 지점을 바꾸면서 가속도를 얻었다.
타다닥!
착지와 동시에 빠르게 달린 제론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타히티를 먼저 노렸다. 원거리 공격부터 없애야 앞으로의
싸움이 편해진다.
타히티가 고속 이동으로 제론의 공격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걸 예상한 제론은 타히티의 움직임에 맞춰
급가속했다.
꽈앙!
타히티의 어깨가 매끈하게 잘렸다. 제론의 검이 그곳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제론의 검에는 세상 그 무엇이라도 자를 수 있을 것 같은 예기가 차르르 흘렀다.
타히티의 한쪽 팔을 자른 제론은 미련 없이 돌아서서 몸을 날렸다. 타히티의 가장 큰 무기는 활인데, 한쪽
팔로는 활을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 전력에서 제외된 거나 다름없었다.
제론의 다음 목표는 근처에 있던 마크리아였다. 하지만 그 목표는 이룰 수 없었다. 디아스티마가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쩌어어어엉!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그것을 버텨 냈다. 발을 땅에 붙인 채로 충격파를 이겨 내고 디아스티마의 검을 옆으로
흘렸다.
꽈앙!
디아스티마의 검이 바닥을 때렸다. 돌과 흙이 제론에게 쏟아졌다. 놀랍게도 각각의 돌과 흙에 마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제론은 정신없이 검을 휘둘러 그것을 막아 냈다.
쩌저저저저정!
그리고 빛의 화살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큐웅!
제론은 훌쩍 점프를 해서 화살을 피했다. 하지만 화살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방향을 바꿔 제론을 쫓아갔다.
결국 제론은 마법을 썼다.
후웅!
제론의 몸이 하늘을 날아 방금 화살을 날린 타히티 앞에 떨어졌다. 워낙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그 어떤
기간트도 반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찰나의 빈틈은 제론에게는 억겁의 시간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길었다.
콰콰콰콰콰콰!
제론의 검에서 거센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 수백 개를 동시에 던진 듯했다.
카각! 카각! 카각!
타히티의 몸이 십여 조각으로 잘렸다. 제론의 검격이 워낙 강력해서 아무리 초고대 기간트라도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2 기의 타히티를 먼저 처리하고 나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제론은 눈을 빛내며 다음 목표를 정했다. 이번에는
이스히스였다.
이스히스는 순간적으로 멀리서 돌격하는 능력이 있기에 미리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
제론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는지 이스히스와 마크리아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제론의 앞을 디아스티마가
막아섰다.
디아스티마의 주변으로 나머지 기간트들이 모여들었다. 바로 옆에 이스히스가, 그리고 살짝 뒤에 마크리아가
자리했다.
각자의 무기가 가진 간격을 고려한 위치 선정이었다. 이 역시 디아스티마의 명령에 따른 것이리라.
제론은 가만히 서서 그들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아직 제론은 모든 힘을 발휘하지 않았다. 사실 디아스티마의
힘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제 충분히 확인했다. 기대에는 약간 못 미쳤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만족할 수 있었다. 디아스티마는
강력함보다는 독자적으로 전술을 쓸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었다.
“슬슬 끝내야겠군.”
온몸의 마나를 폭발적으로 회전시켰다. 이는 마법을 쓸 때 마나링을 가속하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제론은 주먹을 꽉 쥐었다.
뿌드드득!
제론의 주먹에 거대한 기운이 응축되었다. 제론은 그것을 앞으로 가볍게 내질렀다.
꽈아앙!
이스히스 한 기가 뒤로 휙 날아갔다. 가슴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제론은 날아가는 이스히스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연이어 주먹을 내질렀다.
꽈앙! 꽈앙! 꽈앙!
남은 세 기의 기간트가 뒤로 날아갔다. 조금 전 이스히스와 마찬가지로 가슴이 움푹 들어간 채였다.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제론이 날린 것은 고도로 압축된 마나덩어리였다.
1 차로 물리적 충격을 준 다음 안으로 스며들어서 2 차로 내부를 한바탕 휘저어 마나코어 자체를 망가뜨렸다.
기간트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제론은 이번엔 옆으로 대충 손을 휘둘렀다.
쩌엉!
멀찍이 떨어져서 기회를 엿보던 외팔 타히티가 날아갔다. 옆구리에 긴 상처를 입은 채로 말이다.
꽈과광!
타히티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제론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기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제론은 오직 디아스티마만 쳐다봤다.
디아스티마는 천천히 제론 앞으로 걸어갔다.
쿵! 쿵! 쿵! 쿵!
제론은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디아스티마는 제론 앞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쿠웅!
무릎을 꿇는 소리가 제론의 가슴을 울렸다.
―마스터.
디아스티마가 고개를 조아렸다. 몸체가 거대했지만, 고개를 숙이니 머리에 난 뿔이 제론 앞으로 내려왔다.
제론은 그 뿔에 손을 갖다 댔다.
화아아악!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디아스티마를 삼켰다. 또한, 바닥에 널브러진
기간트와 그 잔해들도 모두 삼켰다.
빛이 사라졌다. 그가 감싼 모든 것들과 함께.
제론은 고개를 돌려 공간의 한가운데를 쳐다봤다. 지금까지는 그곳에서 선물이 나왔다.
지이이잉.
아니나 다를까 기둥이 솟아났다.
제론은 그 기둥에 천천히 다가갔다. 기둥 안에는 디아스티마를 비롯한 6 기의 기간트가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디아스티마가 제론 앞에 한족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마스터.
제론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뒤, 그들을 모두 벨트의 아공간에 넣었다.
그 순간, 벨트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기사를 모두 모아야만 얻을 수 있는 벨트의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벨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점점 모여들었다. 그리고 빔이 되어 바닥으로 쏘아졌다.
그 자리에 빛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한 명 나타났다. 사람이 완전히 형체를 갖추자, 벨트의 빔이 사라졌다.
제론은 그가 이 유적과 관계된 초고대문명의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분위기를 보니 시간이 제법 많이 흐른 모양이군.”
빛으로 이루어진 사내가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제론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반갑군. 난 카타그라고 하네.”
“제론입니다.”
제론은 빛으로 이루어진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신기했다.
“초고대문명의 분이십니까?”
“초고대문명? 그렇게 불릴 정도로 오래되었나? 잠깐만 기다려 주게.”
카타그는 눈을 감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에 기이한 문양이 물결쳤다.
잠시 후, 눈을 뜬 카타그가 기이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시스템이 한 번 리셋되었군. 최소 1 만 년 이상이 흘렀다는 뜻인데…….”
카타그가 중얼거리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여기까지 와서 날 불러냈단 말인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몰라서 오히려 괜찮았던
건지…….”
“무슨 말씀입니까?”
카타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기가 유적의 끝이라는 뜻이다. 이 유적을 완전히 클리어한 걸 축하한다.”

Chapter 10 유적 클리어 (3)

카타그의 말에 제론은 빙긋 웃었다. 혹시나 하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진짜라고 들으니 정말로 기뻤다. 하지만
왠지 이게 끝이 아닌 것 같아서 대놓고 좋아할 수가 없었다.
“역시 최초로 클리어한 사람답군. 예상한 대로라네. 이건 끝이 아니야.”
“하면 아직 층이 남은 것입니까?”
카타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았지. 그것도 아주 많이 남았지. 그나저나 1 만 년 이상이라……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겠군. 원래 예상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카타그는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제론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예상을 뛰어넘는 성취를 이룬 건 맞는데…… 그래도 자신할 수가 없으니…….”
카타그가 계속 혼자 중얼거리자, 제론이 슬쩍 끼어들었다.
“저도 알 수 있게 말씀해 주십시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에너지가 너무 많이 모였다. 네 몸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일단 이 시설을 왜 만들었는지부터 설명해야겠군.”
카타그의 말에 제론이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사실 초고대유적은 의문점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도 그 의문을
속 시원히 해결할 수가 없었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설은 신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너무나도 뜬금없고 황당한 말에 제론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신을 만들기 위한 거라니, 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아, 너무 거창하게 갔군. 신에 근접한 존재를 만들기 위한 시스템이라는 뜻이야. 우리가 신의 존재에 대해 뭘
얼마나 알겠나. 그저 더 강력한 힘을 얻으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예상한 것뿐이야.”
“그, 그렇군요.”
대답은 했지만, 솔직히 제론은 카타그를 비롯한 이 유적을 만든 자들의 생각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뭐하러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당시 우리가 판단한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여야만 했지. 그래서 마티를 대륙 전역에 뿌렸다.”
제론의 표정이 멍해졌다. 설마 마티를 그런 이유로 만들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론은 크란 제국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 있는 유적을 등록했다. 한데 대륙을 뒤덮을 정도는 아니었다.
“왜 그러나? 설마 마티로 대륙 전역을 커버하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대륙 전역을 커버하기엔 마티의 활동 범위가 많이 모자라지 않습니까?”
카타그가 빙긋 웃었다.
“그건 아직 마티의 진짜 성능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야.”
“진짜 성능?”
“각각의 마티를 10 개로 분리할 수 있지.”
제론은 입을 다물었다. 마티를 10 개로 분리할 수 있다니. 그럼 마티의 수가 10 배로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수와 범위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렇게 분리를 하면 떨어져 나온 마티는 주변 지역으로 이동해. 자신의 활동 범위를 그쪽으로 한정하는 거지.
그 정도면 대륙 전역을 커버한다는 내 말이 허풍으로 들리지 않겠지?”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카타그의 말대로 대륙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속속들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인지하는 전지의 능력이었다. 물론 물리적인 인지의 영역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혼자서 그 모든 걸 제대로 다룰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카타그가 정색하며 말했다.
“가능하다. 여기까지 클리어했으면 두뇌 변환과 활성화를 이용해서 모든 마티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여 판단할 수
있다. 어렵지 않은 일이야.”
정말로 놀라웠다. 역시 초고대문명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어떻게 인간의 뇌를 그렇게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여기까지 클리어하지 못했을 때는 쓸 수 없는 방법이라는 뜻입니까?”
카타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육체나 마나가 완성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방법이다. 제대로 육체만 만들어져도 위험하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다.”
위험하지 않다는 말에 제론도 고개를 끄덕였다. 1 만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일하게 유적을 클리어한 존재가 바로
제론이었다. 카타그가 그런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늦었다. 신을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세상을 구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강한 호기심이 제론을 자극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런 대단한 업적을 이뤄 낸 문명이 그렇게 쉽게 사라졌다니 믿기 어렵습니다.”
“병이다.”
너무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라 제론은 그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카타그를 보기만 했다.
“누구도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 병이었다. 발병하면 온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병이었지.”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들이 만들고자 한 신은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힘만으로 과연
원인조차 발견하지 못한 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우리가 원했던 건 신으로 가는 다리였다. 육체와 정신이 높은 경지에 이르면 상차원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세상의 비밀이자 신의 비밀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고작 비밀을 조금 엿보는 정도로는 부족했지.
그래서 전 대륙을 아우르는 거창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카타그는 잠시 회한에 잠겼다. 그는 만들어진 존재지만, 기억은 당시의 사람에게서 고스란히 가져왔다. 당연히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로 필사적이었지. 시스템을 만들면서 당시의 시설을 하나하나 이전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어서 완전히
무너지더라도 다시 시작할 기반을 마련해 두었다.”
제론은 그 말을 들으며 그제야 각각의 유적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달았다.
초고대유적은 고대유적과는 그 근본부터 전혀 달랐다. 이곳은 과거의 문명을 보존하기 위한 금고가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열기 위한 주춧돌이었다.
제론은 문득 벽을 넘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언뜻 보이던 것들이 상차원의 비밀인 모양이었다. 물론 너무나
희미해서 뭐가 뭔지는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1 만 년이나 지났다니 너무 늦었다. 우리는 멸망했고, 새로운 문명이 열렸구나.”
제론은 그 부분을 정정해 주었다.
“새로 열린 문명도 끝났습니다. 지금은 그 뒤의 문명입니다.”
카타그가 탄식을 토해 냈다.
“허어, 그럼 아예 새로운 세상이 된 거나 다름없구나.”
사실 이렇게 된 이상 카타그의 존재 의의가 사라졌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카타그는 이 시스템을 그렇게 그냥
버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시스템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만일 제론이 조금만 더 늦게 클리어했다면 카타그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맡은 임무를 수행해야겠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구나.”
카타그는 부드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이리 오너라.”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카타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잡았다.
빛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분명한데 놀랍게도 손이 만져졌다. 물론 사람의 손을 만지는 것과는 촉감이 전혀 달랐다.
뜨거울 정도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시작하겠다.”
카타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 경관이 바뀌었다. 어느새 그곳은 새까만 벽과 천장으로 이루어진 넓은 방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검은 벽에 새하얀 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얗게 빛나는 선이 벽을 기이한 문양으로 채워 나갔다.
이내 모든 벽과 천장이 문양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붉은색 선이 벽 바로 앞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려진 붉은 문양이 벽의 하얀 문양과 이어졌다.
붉은 문양이 사방을 가득 채우자, 이번에는 주황색 선으로 이루어진 문양이 그 앞을 메웠다.
그다음에는 노란색 문양이, 또 그다음에는 초록색 문양이 나타났다.
그렇게 무지개색으로 그려진 입체적 문양이 사방을 꽉 채웠다. 마지막으로 검은색 선으로 이루어진 선명한 문양이
나타났다.
다른 문양과 달리 상당히 성글었는데, 그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건 제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검은 문양이 완성되자, 그 문양들이 소용돌이치며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그곳이 바로 제론의 머리였다.
휘이이이잉!
제론은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입을 열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갑자기 강하게 들었다. 제론의 시선이 카타그에게로
향했다. 카타그의 긴장 어린 눈빛을 보니 오히려 거짓말처럼 긴장감이 사라지고 고통만 남았다.
하지만 고통은 얼마든지 참아 낼 수 있었다.
억겁과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벽면의 모든 문양이 사라졌다. 그리고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제론의
머리가 마치 호흡이라도 하듯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약동했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빠르게 두근거렸지만 차츰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리고 이내 원래의 머리로 돌아왔다.
제론이 눈을 떴다.
번쩍!
제론의 눈에서 섬광이 일어났다.
“후우우.”
제론은 세상이 전혀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달라진 건 세상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대륙 모든 마티가 머릿속에 있었다. 한데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인지 범위와 능력이 어마어마하게
달라졌다. 이것이 바로 전지의 영역이었다.
“어때? 세상이 좀 달라 보이나?”
“그렇습니다.”
제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카타그를 쳐다봤다. 카타그는 이런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만들어진
존재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니, 오히려 바인이 더 대단한가?’
제론은 어쩌면 바인이 바라보는 세상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보다야 못하겠지만 말이다.
“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놀라면 안 되지.”
카타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튀겼다.
딱!
그 순간 마티가 분열했다. 각각의 마티가 10 개로 늘어나더니 자신의 영역을 찾아갔다. 이제 마티는 대륙 모든
곳에 존재했다.
심지어 제론이 아직 등록하지 않은 유적의 마티까지 몽땅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마티를 얻었다고 해서 개별 시스템 등록을 잊으면 안 된다. 모든 시스템은 등록이 필요해. 아마 등록을 마치면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일 거야.”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하지 말라고 해도 할 생각이었다. 아직도 유적에는 제론이 얻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자, 이제 하나는 끝났고…….”
카타그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길지 않았다. 원래 그 목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답게 결정이 빨랐다.
“남은 건 하나다. 이 유적의 진정한 힘을 얻는 것.”
“이보다 대단한 힘이 남았습니까?”
제론은 마티를 얻으며 유적이 그동안 시킨 훈련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만일 그 훈련이 없었다면
아무리 벽을 넘었다 해도 마티를 제대로 얻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얻은 마티의 힘은 굉장했다. 아니, 마티도 대단했지만 그걸 모두 조망할 수 있게 된 두뇌의
능력이 더욱 대단했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초고대의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한데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이 남았다니 이젠 오히려 두려워질 정도였다.
“강제로 경지를 높이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강제로 에너지를 주입하는 것이다.”
제론의 표정이 굳었다. 얼핏 생각해도 그것이 과히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보통은 악영향을 미치겠지. 하지만 우리는 그걸 대부분 해결했다. 극도로 순수한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지.”
카타그는 그렇게 말하며 제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두뇌를 발달시켰으니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도 올라갔을 테고. 참고로 순수한 에너지로 정제하면 원래
에너지의 0.0001%밖에 남지 않는다.”
그 말은 100 만이라는 에너지를 얻으면 1 밖에 안 남는다는 뜻이었다.
“한데…….”
카타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시간이 너무 오래되었다는 게 문제다. 1 만 년이 넘었으니 모인 에너지의 양이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걸 모두
받아들이면 아무리 이 시스템을 클리어하면서 육체가 바뀌었다고 해도 견딜 수 없지.”
카타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한데 넌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 희망적이다. 네 육체나 정신은 솔직히 말해서 이 시스템을 완벽하게
클리어한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수준이다. 아니, 아예 불가능한 수준이야.”
카타그는 정말로 신기했다. 그래서 더 신기했다. 하지만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목적을 잃은 일이었다.
여기서 강제로 시스템을 진행하는 건 의미 없는 강요에 불과했다.
“선택권은 네게 주겠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거부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불이익도 없다. 하지만 내 수명이 다했으니 이 시스템은 사라지겠지.”
“대륙의 모든 유적이 사라진다는 뜻입니까?”
카타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 이 시스템과 나만 특별하다. 이 시스템은 엄밀히 따지면 내 것이다. 즉, 내가 사라지면 시스템도
주인을 잃고 사라진다는 뜻이지. 양도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이 시스템을 얻기 위해선 다음 단계를
진행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 중앙 유적만 특별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제론은 카타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유적 사이를 오가는 텔레포트의 경우 모든 유적에서 일단 이곳 중앙 유적에 오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는 건 중앙
유적이 사라지면 유적 간 텔레포트를 쓰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한데 과연 텔레포트만 못 쓰게 되는 걸까?’
제론은 카타그의 눈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전혀 흔들림 없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카타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모든 걸 없애고자 하는 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한 제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제론의 말에 카타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인가? 후회하지 않겠나?”
“반대로 선택했다면 후회했겠지요.”
제론의 말에 카타그가 빙긋 웃었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로군. 알았다. 그럼 진행하자. 미리 얘기해 두지만 아마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또한, 죽을 확률이 살 확률보다 크다. 그래도 하겠느냐?”
“하겠습니다.”
제론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한 카타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보여 주지 않았던 자애로운 표정이었다.
그는 제론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고맙구나. 이리 오너라.”
제론은 그것이 다음 단계의 시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머뭇거림은 없었다. 단호한 표정과 걸음으로 카타그에게
다가가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1 만 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 온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이제 곧 사라질 존재에 대한 안타까움이 함께
담긴 포옹이었다.
카타그 역시 마찬가지 감정을 담아 포옹했다. 시스템이 정한 한계를 넘어선 제론에 대한 경이로움, 그리고
죽을지도 모를 길을 선택한 용기와 안타까움을 담아 힘껏 끌어안았다.

Chapter 10 유적 클리어 (4)

“시작한다.”
카타그의 몸이 눈부신 빛이 되었다. 그리고 그대로 제론에게 스며들었다.
1 만 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모인 에너지의 정화는 카타그의 몸을 통해 제론에게 이어졌다.
“크으윽!”
고통이라면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왔다.
온몸의 모공을 통해 빨려 들어오는 에너지의 흐름이 생생히 느껴졌다. 정말로 끝없이 에너지가 흘러 들어왔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걸 이대로 둬선 안 된다. 뭔가를 시도해야만
했다.
제론은 본능적으로 마나호흡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들어오는 에너지의 양이 너무
많았다.
내부를 가득 채운 에너지를 조금도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
제론의 몸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받아들인 에너지를 이기지 못하고 몸이 터지려는 것이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추가되었다. 제론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 죽으면 모든 걸 잃는다. 제론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 모든 사람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마티를 받아들이며 제론은 순식간에 대륙 전역을 한 번 훑었다. 그리고 엠페리움의 왕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것이 너무 강렬해서 다른 건 뇌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엠페리움의 왕을 그냥 내버려 두면 대륙의 모든 사람이
도탄에 빠질 것이다. 공포에 허우적거릴 것이다.
제론이 의지를 강하게 다진 순간, 몸에 들어온 에너지 일부가 머리로 흘러갔다. 전체 에너지에 비하면 티끌이나
다름없는 양이었지만 머리 입장에서는 갑자기 엄청난 에너지가 몰려온 꼴이었다.
만일 제론의 두뇌가 발달하기 전이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달라진 두뇌는 그 에너지를 충분히
받아들일 여력이 있었다.
에너지를 받아들이며 두뇌가 또 한 번 변화를 시작했다. 끊임없이 에너지가 두뇌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제론의
두뇌는 점점 변해 갔다.
두뇌가 변해 감에 따라 제론의 정신력이 큰 폭으로 향상되었다. 그 말은 의지력이 훨씬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몸에 꽉 찬 에너지 일부가 제론의 의지하에 놓였다.
제론은 억지로 그것을 움직였다. 이걸 회전하거나 압축하지 않으면 몸이 터져 버릴 것이다. 아니, 그 두 가지
모두 성공해야만 했다.
후우우웅!
제론의 몸을 중심으로 마나가 회오리가 쳤다. 제론에게 흘러 들어가는 에너지는 곧 극도로 순수한 마나였다.
마나는 세상을 이루는 근본이었다. 그리고 초고대유적이 그 오랜 시간 동안 모은 마나의 양은 현재 전 대륙에
퍼져 있는 마나를 다 합한 것보다 많았다.
즉, 제론은 온몸에 세상을 담는 중이었다.
제론의 의지가 에너지에 개입한 순간부터 제론의 몸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우드득! 우드득!
뼈가 뒤틀리고 피부가 갈라졌다. 그리고 근육이 끊어졌다가 붙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새로 얻은 육체도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막대한 에너지를 버티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론은
의지를 놓지 않았다.
우드드드득!
제론의 몸이 또 부서지고 새로 만들어졌다. 두 번째 재구성이었다.
그렇게 몸이 무너지고 다시 만들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 와중에 제론의 두뇌도 계속 변해 갔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 정도로 막대한 에너지였다. 한계의 한계에 도달했지만, 아직 절반도 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게 한계의 막바지에 이른 순간, 제론 안에 있는 또 다른 존재가 눈을 떴다.
테오스였다.
남아 있던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테오스에게 흘러갔다. 테오스는 제론이 스스로 에너지를 다룰 수 있도록
넘치는 에너지를 가져갔다. 그리고 모자라면 다시 내줬다.
그런 식으로 테오스와 제론이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위기를 모면했다.
절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테오스 덕분에 해결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위기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여전히 위험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버틸 수 있었다.
그것은 엄청난 차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갔다. 그와 함께 유적의 에너지도 흐르고 또 흘렀다.
결국, 제론은 그 많은 에너지를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테오스와 나눠 가졌다.
제론이 눈을 떴다.
번쩍!
엄청난 섬광이 일어나며 제론이 있던 공간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은 금세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제론이
튀어나가려던 에너지를 제어한 것이다.
“후우. 끝났군.”
제론은 주위를 둘러봤다.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지만 왠지 카타그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느낌이 정확했다. 카타그는 없었다. 에너지로 변해 사라진 것이다. 아니, 제론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제론은 카타그를 흡수하면서 유적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솔직히 카타그를 흡수할
필요도 없었다. 제론이 얻은 힘과 능력이라면 강제로 유적을 취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제 제론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대륙 전역에 퍼진 마티를 통해 현재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그려졌다. 바인보다 더 뛰어난 정보처리 능력을
가졌기에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돌아가야겠군.”
그 중얼거림과 함께 제론의 모습이 사라졌다. 유적을 떠난 것이다.
제론이 사라진 자리에 희미하게 카타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카타그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이내 카타그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Chapter 11 에어스트 대륙

거대한 동공에 피로 이루어진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수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한가운데서 파문이 일어나더니
거칠게 출렁였다.
호수 곁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깁스 남작은 잔뜩 긴장했다. 부디 저 안에서 나올 괴물이 일말의 이성이라도
갖고 있기를 기도했다.
촤아아아아!
출렁이던 호수의 피가 순식간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존재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쏴아아아아아!
호수 밑바닥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는 존재에게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싹 흡수되었다.
번쩍!
사내가 눈을 뜨자 동공 안이 핏빛으로 가득 찼다.
깁스 남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신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저 호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존재는 과거의 그 어떤 약속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한없이 차가운 눈빛이 그걸 증명했다.
“크흐흐흐흐. 드디어 완성되었구나.”
깁스 남작은 그 목소리에서 거대한 악의를 느꼈다. 그리고 그 악의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향하는 것도 함께 느꼈다.
“커억!”
깁스 남작이 고통스럽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핏빛 사내가 천천히 걸어 깁스 남작 앞에 도착했다.
“생각해 보니 내 종이로구나. 살려 주마.”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깁스 남작을 압박하던 악의가 씻은 듯 사라졌다.
“허억! 허억! 가, 감사합니다!”
사내가 깁스 남작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동공 위를 올려다봤다.
쩡!
동공 윗부분이 싹 날아가 버렸다. 말 그대로 사라진 것이다. 사내가 쳐다본 것만으로 산 하나가 증발해 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동공은 작은 산 아래에 있었으니까.
그걸 본 깁스 남작이 덜덜 떨었다. 상상을 초월한 힘이었다. 이런 존재가 세상으로 나가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니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끝장이다. 세상은 다 끝났어.’
그냥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거대한 악의로 이루어졌다. 아마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멸할 것이다.
그렇게 떨고 있을 때, 동공 위 뚫린 구멍을 통해 뭔가가 뚝 떨어졌다.
깁스 남작은 화들짝 놀라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나타난 자는 상상치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제, 제론 폰 에어스트?”
제론이 씨익 웃으며 깁스를 노려봤다.
“너로구나.”
제론은 깁스 남작이 어떤 사람인지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마티를 통해 무수한 정보가 뇌리에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정리해서 착착 정보로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통해 깁스 남작이 엠페리움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에어스트 가문을 몰락시킨 원흉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넌 일단 거기서 지켜보고 있어라.”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텅!
깁스 남작이 힘없이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몸에 큰 충격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통스러웠다.
놀라운 것은 그가 벽을 파고들어 꽉 박혔다는 점이었다. 보통 사람이 그 지경이 되면 온몸이 으스러질 것이다.
한데 몸은 멀쩡했다.
깁스 남작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제론에게서 거대한 뭔가가 느껴졌다. 엠페리움의 왕을 볼 때와는 또 다른 공포가
슬금슬금 밀려왔다.
어쨌든 그는 꼼짝없이 그곳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예 움직이질 못했으니까.
제론은 눈앞에 선 존재를 가만히 쳐다봤다. 온통 핏빛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가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기에 찾아온 것이다.
“엠페리움의 왕답지 않군. 아예 마왕이 되어 버렸는데?”
“크흐흐. 피와 쾌락의 왕이지.”
사내는 마왕이라는 말에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크흐흐흐. 거슬리는 놈이로군. 죽어라.”
사내가 손가락을 들어 제론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통해 악의 덩어리가 튕겨 나갔다. 조금 전 산을 날려 버린
것보다 수십 배는 더 강력한 일격이었다.
제론은 손을 들어 그것을 잡았다.
꽈드드득!
제론의 손을 갈아 버리겠다는 듯 악의 덩어리가 맹렬히 회전했지만, 제론의 손을 망가뜨리지도, 거기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소멸했다.
그제야 사내의 표정이 변했다.
“넌 뭐냐?”
“알 필요 없다.”
제론이 사내를 향해 한 발 걸었다. 그러자 어느새 사내 앞에 나타나 사내의 목을 쥐고 있었다.
사내가 당황하며 몸부림쳤다.
“크아아아아아!”
괴성을 내지르며 반항했지만 온 세상의 힘을 한 몸에 지닌 제론의 힘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태어나선 안 될 균열 같은 존재로군.”
사내를 쥔 제론은 더더욱 그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었다. 세상을 몸에 담으며 세상의 흐름을 파악했다.
초고대문명에서 상차원의 비밀이라고 여겼던 것이 바로 세상의 흐름이었다.
엠페리움의 왕은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존재였다. 세상의 균열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내버려 두면 세상을
파괴할 것이다.
제론의 손에 막대한 기운이 어렸다.
왕의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다.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소멸을 눈앞에 두니 어쩔 수가
없었다.
파스스스스.
엠페리움의 왕이 그 표정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제론은 손을 탁탁 털고는 돌아서서 벽에 박힌 깁스 남작을 쳐다봤다.
깁스 남작은 벽에 박힌 채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었다. 감히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인 왕을
가루로 만든 자였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제론은 손가락을 틱 튕겼다.
퍽!
깁스 남작이 그대로 사라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든 원흉인 깁스 남작을 살려 둘 수는 없었다.
제론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모든 것이 끝났다.
“아니, 아직 끝난 건 아니지.”
제론이 씨익 웃었다. 아직 등록하지 못한 유적이 무수히 남아 있었다.
크란 제국을 제외한 나머지 유적은 거의 다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직 잔뜩 남아 있었다.
게다가 크란 제국도 아직 발을 들이지 못한 두 왕국도 남아 있었다. 그곳의 유적에는 아직 손도 못 댔다.
1 년 내내 눈보라가 몰아치는 북쪽 끝, 슈네 왕국과 사막 속에 있는 비스테 왕국 말이다.
제론은 천천히 걸어서 동공을 나섰다. 이제 정말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크란 제국이 시작한 대륙정복전쟁은 결국 제국의 패배로 끝났다.


크란 제국의 선봉이 전멸하고 본진이 유린당한 상황에서 에어스트 왕국의 아모르 군단이 파죽지세로 진격해 크란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거기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것은 에어스트 왕국의 새로운 기사단이었다.
30 기의 기간트로 이루어진 기사단이었는데, 그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크란 제국군의 기간트 부대가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어찌나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지 종적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전술도 상당히 훌륭했고, 기간트의 성능
자체가 달라서 크란 제국군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기사단의 이름은 디아스티마였다. 에어스트 왕국에서 디아스티마 기사단의 존재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은
오로지 국왕인 제론뿐이었다.
어쨌든 에어스트 왕국은 크란 제국을 무너뜨려 흡수했다. 시작은 크란 제국이 했지만, 대륙 정복은 에어스트
왕국이 한 셈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크란 제국을 정복한 뒤, 제국에서 암약하던 비밀 조직을 색출한 다음, 크게 공표했다.
엠페리움은 그렇게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몰락과 함께 말이다.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목이 잘려 가장 잘 보이는 성문 위에 효수되었다.
사람들은 엠페리움이라는 조직이 수백 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크란 제국 황실 자체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끝났다. 크란 제국은 물론이고 전 대륙에 걸쳐 흩어져 있던 엠페리움의 모든 조직원이
색출되었고,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았다.
그렇게 엠페리움이 사라졌다.
전쟁이 끝난 뒤, 에어스트 왕국은 제국으로 칭호를 바꿨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을 에어스트 대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에필로그

가도 가도 끝없는 모래뿐이었다. 모래로 이루어진 산을 넘으면 또 모래 산이 나왔고, 꼭대기에 올라가면 끝없이


이어진 모래 산들이 보였다.
“사막이 뜨겁긴 뜨겁네요.”
더없이 아름다운 여인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하자, 그 옆에 서 있던 사내가 여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시원하게 해 줄까?”
여인이 고개를 돌려 사랑스러운 눈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눈보라 속에서 뜨겁게 해 주겠다고 말하고 저한테 한 짓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여인의 눈빛이 더없이 고혹적으로 빛났다.
사내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그래서 싫었어?”
여인이 새치름하게 눈을 흘겼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두 사람은 모래 산 정상에 서서 앞을 바라봤다.
“얼마나 더 가야 하죠?”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오아시스가 나올 거야. 그리고 유적도 있을 거고.”
사내가 여인의 어깨에 두른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렇게 여행하는 것도 즐겁지?”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데 우리 이렇게 계속 여행만 해도 되는 거예요? 물론 목적이 있다고 하지만…….”
사내가 씨익 웃었다.
“우리 없어도 잘 돌아가잖아. 그동안 못 해 본 모든 걸 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 말에 여인도 공감한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하긴, 저도 너무 오래 기다리긴 했어요. 이제 그 보상을 받을 시간인 거로군요.”
“그렇지.”
사내가 여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을 감쌌다. 사내가 부른 바람의 정령이 벌인
일이었다.
“온 대륙을 다 돌아본 다음에 아이를 갖자.”
사내의 말에 여인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이에게 행복이 있기를.”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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