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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마당 힌두교와 명상

힌두교의 세계관

1. 힌두교의 뿌리, 베다와 우파니샤드

힌두교의 뿌리인 『베다』와 인더스 문명


힌두교는 세계 7대 종교 가운데 그 성격을 정의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종교다. 일단 그
명칭에서부터 여러 가지 논란이 있다. 사실 힌두교의 힌두는 약간의 발음 차이가 있을 뿐,
사실 인도와 동의어이다.1) 그러므로 힌두교는 말 그대로 인도의 종교 내지는 인도인의 종
교를 의미한다. 힌두교라는 말은 18세기 후반에 영국인들이 만들어낸 용어로서 인도 아대륙
의 다양한 토착 종교를 통합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그런데 인도의 토착 종교라 해서 무조건 힌두교는 아니다. 잘 알다시피 불교는 분명히
인도 지역에서 발생한 종교이다. 불교는 한 때는 국가 종교의 지위에 오른 적도 있으며, 인
도 문화의 해외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종교이지만, 힌두교에 포함되지 않는다. 불교와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고 불교만큼 큰 교세를 자랑하거나 해외에 널리 전파되지는 못했지
만 2500년의 긴 세월 동안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자이나교도 힌두교에 포함되지 않
는다. 그리고 16세기 초에 인도 서북부의 펀잡 지역에서 일어나 지금은 불교나 자이나교보
다 훨씬 많은 신도를 지닌 시크교도 힌두교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면 힌두교라 불리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베다veda』에 대한 태도이다.
일반적으로 힌두교라고 할 때는 고대 인도의 종교사상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모든 종파를 지칭하는 것이다. 불교와 자이나교, 시크교는 인도에서 흥성
한 종교이지만 『베다』의 권위를 부정하였기에 힌두교에 포함되지 않는다.
사실 힌두교는 그리스도교나 불교처럼 뚜렷한 창시자나 통일된 교조와 체계를 지닌 단일
종교가 아니다. 그 속에는 실로 다양한 신앙대상과 교리체계를 지닌 다양한 종교가 있다.
지역마다 모시는 신들도 다르고 교리나 의례도 워낙 다르기 때문에 그들 각각을 개별 종교
로 여긴다면 힌두교는 실로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의 종교의 연합체라 할 수 있다. 또
한 그 속에는 원시적인 정령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저급한 종교 형태부터 고도로 세련되고
심오한 종교철학까지 실로 다양한 스펙트럼이 공존하고 있다. 그 천차만별의 다양한 종교들
을 하나로 묶는 공통의 토대가 바로 『베다』이다.
그런데 『베다』는 인도의 원주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도의 서북부에서 들어온 아리
안족이 만든 것이다. 그들의 조상은 흑해와 카스피해 주변의 대초원에서 활약하던 고대의
기마민족으로서 대략 기원전 4000년을 전후하여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서쪽으로
가서 유럽의 여러 지역에 정착했고, 일부는 동쪽으로 가서 이란고원에 정착했고, 또 일부는

1) 고대 최초의 세계 제국이었던 페르시아가 인도의 북서부에 자리한 인더스강까지 영토를 확장했을


때 페르시아인들은 토착민들이 ‘Sindhu’라 부르던 그 강을 자기네 식 발음으로 ‘Hindu’라 불렀다.
페르샤인들은 산스트리트의 ‘s’ 발음을 ‘h’로 부르는 언어적 습관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신들의 이
름을 언급할 때 다시 한 번 다룰 것이다. 아무튼, 그 말은 곧장 그리스로 전해졌는데, 그리스인들
은 ‘h’ 발음을 내지 못하기에 그냥 ‘Indos’라 불렀고, 그것이 라틴어에서 ‘Indus’가 되었다. 유럽어에
서 인도를 가리키는 말은 모두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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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강을 넘어 인도 대륙으로 들어왔다. 인도에 들어온 아리안족을 흔히 인도 아리안족이
라 부른다.
인도 아리안족이 사용하던 언어는 산스크리트어인데,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했던 베다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조로아스터의 경전인 아베스타와 놀라울 정도의 일치율을 보인
다. 그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는 고대 그리스어 및 라틴어와 매우 유사한
문법구조를 지니고 있어 누가 보아도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언어들로 여겨진다. 그래서 언
어학자들은 이들 언어를 묶어서 인도유럽어족이라 부른다.
마차를 타고 청동 무기로 무장한 아리안족이 인더스강 중류의 다섯 지류가 모여 있는 펀
잡 지역을 통해 인도에 들어온 것은 대략 기원전 1500년 전으로 추정되고, 『베다』도 대
략 이 시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인도 아리안족은 태양이나 달 강 등의 주요한 자연
대상이나 비나 바람 등의 자연현상을 신격화하고 숭배하면서 현세와 사후의 복을 빌었는데,
『베다』에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잘 나타나고 있다. 아리안족은 우수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동으로 남으로 계속 진출하여 그들의 영역을 확장해갔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베다』 문명은 이후 인도 아대륙의 종교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도에는 아리안족이 『베다』 문명을 건립하기 1000년 전인 기원전 2500년을
전후하여 이미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있었다. 바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였던 인
더스 문명이다. 20세기 초부터 발굴되기 시작된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와 하랍파 유적
은 도로와 하수시설이 잘 정비된, 당시로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수준 높은 도시 문
명을 잘 보여준다. 근래의 고고학적 발굴은 당시 인더스 문명이 이미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활발한 해상 무역을 하였음을 밝혀내었다.
아직은 문자가 완전히 해독되지 않아 그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당시의 유
적들을 통해 우리는 고대 인더스 문명의 종교문화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고, 인더스 문명의
종교문화가 후대 힌두교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더스 유적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나 이집트 지역처럼 웅장한 신전이나 큰 신상 등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다른 문명권의 유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꽤 깊고 넓은 목욕탕이 있다. 그 목욕탕
이 종교적 의례와 연관이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초기의 발굴자부터 그것이 힌두
교도들의 청결 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오늘날 갠지스강에서 성스러운 물
로 자신의 업을 정화하려는 힌두교의 의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유니콘 비슷하게 뿔이 하나밖에 없고 소와 비슷한 형상을 지닌 동물을 비롯하여 코끼리,
물소 등의 다양한 동물들이 인장에 새겨져 있거나 작은 토우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당시
인더스 문명에는 토템 사상 내지는 동물숭배 문화가 유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리아인
들은 자연현상을 인격화하여 숭배했으나 신상을 만들지는 않았고, 게다가 동물을 직접적으
로 숭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후대 힌두교에서 나타나는 반인반수의 신상이나 동물숭배는
바로 인더스 문명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후대 시바 신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근상인 링가와 여근상인 요니의 결합도 인더스 문명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면과 좌우 측면 모두 세 개의 얼굴을 지니고 가부좌 모습으로 앉아서 호랑이와 코끼리
물소 등의 여러 동물을 지배하고 있는 신상을 통해 아리안족의 베다 문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시바 신의 원형을 짐작할 수 있고, 명상의 전통이 아주 오래되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명상이나 고행의 전통은 고대 인도 아리아인에게서는 없던 전통으로서 그 뿌리는 인더스 문
명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인더스 문명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아스코 파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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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인더스 문명은 후대 힌두교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넓
고 깊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그중 흥미로운 것 두 가지만 살펴보자.
힌두교에서 보리수는 매우 신성한 나무로서 신령스러운 용이 거기서 살고 있다고 여긴
다. 그런데 보리수는 밤하늘의 중심이 되는 북극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보리수는 종종 천상의 나무로 묘사된다. 보리수의 뿌리는 공중에서 밧줄처럼 아래로 축축
처져 있는데, 『베다』에서는 그 뿌리들이 밤하늘의 별들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묶어두는
신성한 밧줄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공중에 매달린 그 뿌리들은 인간에게 생명 에너지
를 공급하는 빛의 광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의 연구에 따르면 보리수를 신성시
하는 전통은 인도 아리안 문명이 아니라 인더스 문명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2)
힌두교의 세계관에는 메루산이라는 우주의 중심이 되는 산이 있다. 베다의 시기에는 우
주의 중심이 되는 산이 없었지만, 힌두교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하늘에 있는 산이자 우
주의 중심이 되는 메루라는 산이 추가되었다. 메루산은 불교에서는 수메르산으로 바뀌어 우
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그런데 그의 연구에 따르면 산스크리트어에서 메루산의 어원은 불명
확하고, 반면 고대 드라비다어에는 이와 유사한 개념과 발음을 지닌 단어가 등장한다. 그는
메루산이 보리수와 마찬가지로 인더스 문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3)
이상으로 보아 후대 본격적인 힌두교가 형성되는 데는 인도 아리아인들의 『베다』 문명
뿐만 아니라 인더스 문명에 뿌리를 둔 토착 문명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힌두교의 뿌리를 이야기할 때 항상 『베다』가 주목받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여
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언어의 힘을 주목하고 싶다.
인더스 문명을 건설한 사람들도 분명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고 그 언어로 다양한 종교 활
동을 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후대로 전승되지 못했다. 반면 고대 인도 아리아인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신을 찬양하거나 우주의 근원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종교 행위를 자신들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세련되게 표현했고, 암송이라는 전통을 통해 그것을 후대에 잘 계승
하고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그것은 『베다』라는 이름으로 오랜 세월
인도 아대륙에 살았던 사람들의 종교 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로 인해 『베다』는
힌두교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기준이 된 것이리라.
산스크리트어 ‘베다veda’라는 말은 ‘지식’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교가 일어날 당시 소아
시아 지방에서 널리 유행했던 영지주의를 그노시티즘이라 하는데, 흥미롭게도 희랍어 그노
시스gnosis 또한 ‘앎’을 의미한다. 물론 베다나 그노시스가 강조하는 앎은 일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참된 지식, 더 근원적인 앎을 의미한다.
『베다』는 어느 특정한 저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여러 사람에 의
해 서서히 축적되었다. 『베다』는 그 성격과 내용에 따라 보통 『리그베다』, 『사마베
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 네 종류로 나뉜다. 『리그베다』는 제례에 신들을
초청하여 찬양하는 시들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는데, 전체 『베다』 중에 가장 먼저 만들
어진 것이고 고대 인도 아리아인들의 종교적 관념을 잘 보여주고 있어 가장 중시되고 가장
많이 인용된다. 『사마베다』는 『리그베다』가운데 일부의 시들을 뽑아서 아름다운 멜로디
를 넣어 노래 부르는 것이고, 『야주르베다』도 『리그베다』가운데 일부를 보다 체계적으
로 정리한 것인데, 각 신에 대한 구체적인 제례 방식이 자세히 기록된 것이 특징이다.
『아타르바베다』는 앞의 세 가지 『베다』보다 조금 더 후대에 나온 것이며, 그 성격도

2) 아스코 파폴라, 김형준·최지연 옮김, 『힌두이즘의 원류』, 378-379쪽 참조.


3) 위의 책, 379-38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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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세 『베다』와는 약간 다르다. 어느 서양 학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리그베다』
의 찬가들은 복잡하게 뒤섞이고, 초기의 신들은 혼란을 겪은 뒤에 새롭게 완성된 만신전으
로 편입된다. 낯선 신들을 불러들이는 것, 고통스러운 지옥을 인정하는 것, 수많은 신격들
대신에 그들 모두와 자연까지도 포괄하는 일자, 악한 목적에 쓰이는 마법과 유익한 목적에
쓰이는 주문, 내가 미워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향한 저주의 표현, 자식을 얻기 위해, 장
수를 얻기 위해, 사악한 마법을 해소하기 위하여, 그리고 독물이나 어떤 질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낭송되는 마술적인 시구, 희생제의의 찌꺼기로서 신격에 대한 찬양으로 나타나는
의례적인 숭배의 극치, 뱀과 질병, 수면과 시간과 별들에 대한 찬가들, 사제의 성가심에 대
한 저주, 이러한 것들이 『리그 베다』를 읽고 후에 『아타르바베다』를 대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감상이다.”4) 물론 초기에 단순 소박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신화들이 혼
탁하게 타락한 측면도 있지만, 여러 가지 재난이나 질병을 퇴치하거나 현실적인 목적을 이
루기 위한 구체적인 주문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종교적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진척된 측면도 있다.
그런데 『베다』는 그 성격에 따라 이렇게 네 종류로 나뉠 뿐만 아니라 한 종류의 『베
다』 속에서도 형성된 시기에 따라 네 가지로 나뉜다. 그 형성된 시기라는 것이 그냥
1-200년 정도가 아니라 1000년이 넘는 긴 시간이다. 가장 초기에 형성된 것은 『삼히타』
라 불리는데, 보통 ‘본집本集’으로 번역된다. 뿌리에 해당하는 문헌이라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좁은 의미로 『베다』를 언급할 때는 바로 『베다』의 본집인 『삼히타』를 가리킨
다. 위에서 설명한 네 종류의 『베다』가 지닌 특징도 바로 본집을 두고 말한 것이다.
두 번째 층은 『브라흐마나』인데, 희생 제의를 담당하는 브라만 계급의 제사장들이 제
례 의식에 대해 상세하게 해설하고 그 의미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들이다. 초기에 아리아인
들의 제례 의식은 무척 단순하고 소박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가면서 제례의 중요성이 강
조되기 시작했고, 심지어 신들에 대한 신앙보다 제례 자체를 더욱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
다. 이에 따라 제례도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체계를 갖추게 되었는데, 예컨대 말 희생 제례
인 아슈바메다의 경우 말 수백 마리의 희생 제물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준비 기간이 무려
1년이나 걸리는 엄청난 규모의 제례였다. 제례의 형식이 복잡하고 정교해지자 그렇게 까다
로운 제례 의식을 관장하는 브라만 계급의 지위도 격상되었다. 브라만을 최상위 층으로, 왕
과 귀족 등의 정치권력의 담당자들을 그 다음으로, 평민과 노예를 하층으로 두는 카스트 제
도의 기본 틀이 확립된 것도 아마 이 시기로 추정된다.
그러나 제례가 지나치게 외적 형식에 치우치게 되면서 사람들은 점차 제례의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세 번째 층인 『아란야카』가 나타난
것은 바로 이 시기이다. 아란야카는 말은 숲, 야생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흔히 삼림서森林
書라고 번역된다. 제례 의식의 좀 더 깊은 의미에 대한 해석과 토론이 주류를 이루는데,
『우파니샤드』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
마지막 층은 『우파니샤드』인데 『베다』 중에서 가장 늦게 나온 것으로서 깊은 종교적
사색과 명상을 통해 깨친 심오한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베다의 끝’이라는 의미
로 ‘베단타’라 불리기도 한다. 『베다』의 본집과 『베다』의 끝인 『우파니샤드』가 만들어
진 시기 사이에는 거의 천년이 넘는 긴 세월이 있다. 그리고 네 층의 문헌들은 구체적인 내
용뿐만 아니라 사상적 성격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로 『베다』를 언급
할 때는 네 개의 층 전체를 포괄하는 방대한 문헌 군을 가리킨다. 즉, 인도인들이 힌두교의

4) Edward Washburn Hopkins, 『The Religion of India』,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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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은 『베다』의 권위라고 말할 때의 『베다』는 바로 넓은 의미의 『베다』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우파니샤드』가 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다보니 『우파니샤
드』만 따로 편집하여 읽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도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분리해서
다루는데, 『베다』 중에서 가장 방대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리그베다』와 축의 시대를 전
후하여 등장한 『우파니샤드』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리그베다』- 원시적인 다신교와 심오한 철학적 통찰


『리그베다』는 고대 인도 아리아인의 종교적 세계관을 잘 엿볼 수 있는 자료인데, 10개
의 만달라, 1028개의 숙타로 이루어져 있다. 만달라라는 용어는 앞으로 자주 접할 텐데, 원
래는 둥근 원을 의미하는 말이며 여기서는 장이라는 단위를 가리킨다. 숙타는 시 한 편을
가리키는데, 그 길이가 들쑥날쑥하다.5) 『리그베다』는 무려 만 개 남짓의 절을 지니고 있
는데, 그리스도교의 신구약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방대한 분량이다. 그 엄청나게 방대한
분량을 긴 세월 동안 암송으로 전승해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6)
『리그베다』에는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는데 주로 하늘, 해와 달 등의 자연계의 대상이
나 비, 바람, 불, 벼락 등의 자연현상을 인격화한 신들이다. 문명의 초기에 자연의 대상이나
자연 현상을 인격화하여 그것을 숭배하는 것은 여러 문명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들이 정교한 언어로 정리되어 막강한 권위를 지니면서 긴 세월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
는 것은 매우 드물고 특수한 일이다.
『리그베다』에는 실로 수많은 신들이 나타나는데, 그 신들은 활동 영역에 따라 크게 천
상계, 공중계, 지상계 셋으로 나뉜다. 천상계의 신으로서 우선 천상의 아버지인 디아우스
Dyauṣ를 들 수 있다. 디아우스는 그 이름만 들어도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유사성이 금방
느껴진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는 달리 베다 신화의 디아우스는 그 비중이 별로
없는 신이다. 그 외 태양의 신 수리아Sūrya, 달의 신 찬드라Chandra, 새벽의 여신 우샤스
Uṣás 등이 있다.
공중계를 지배하는 신으로는 천둥과 뇌우의 신인 인드라Indra, 바람신 바유Vāyu, 바람과
폭풍우의 신 루드라Rudra 등이 있다. 이중 인드라는 『리그베다』 전체에서 가장 많이 등장
하는 신으로서, 소마를 즐겨 마시고 번개를 무기로 사용하는 강력한 전쟁의 신이다. 인드라
를 찬양하는 시구를 잠시 살펴보자.

이제 인드라의 행위를 말하노라. 천둥을 가진 자가 이룩한 위대한 행위를. 그는 용을


죽여 산의 배를 갈라 물길을 여는구나.
그는 산에 사는 용을 죽였고, 트바스트리는 그에게 천둥 소리를 만들어 주었도다. 흐
르는 물은 급히 바다로 달려가는구나. 마치 암소가 뛰어가듯이.
황소처럼 힘차게 그는 세 번의 희생 제의에서 소마를 마음껏 마시고, 화살 같은 번개
를 들고서는 용들의 우두머리를 죽였구나.7)

5) 제일 짧은 숙타는 한 개의 절로 끝나지만, 제일 긴 것은 무려 58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다. 『리그베


다』 전체가 총 10552 절로 이루어져 있으니 하나의 숙타는 평균 10개 정도의 절을 갖고 있다.
6) 인도에서 최초로 나타난 체계적인 문자는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 왕 때 나타나는 브라흐미 문자이고,
오늘날 산스크리트 기록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데바나가리 문자는 기원후 7세기 이후부터 자리를 잡
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인도의 주요 문헌들은 암송에 의해 전수되었다.
7) 『리그베다』 1. 32. 1~3.

- 5 -
이 시구들은 천둥 번개의 신 인드라가 용을 죽여서 물길을 터는 것을 찬미하는 것이다.
용을 신성한 동물로 여기는 동아시아와는 달리 유럽과 인도에서는 용을 대체로 인간에게 해
로운 괴물로 여긴다. 산에 사는 용이란 사실 산에 걸려있는 구름을 은유하는 것이고, 인드
라가 번개로 용을 죽였다는 것은 먹구름 사이에 천둥이 치면서 비가 내리는 자연현상을 신
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트바스트리는 만물을 설계하여 제작하는 신을 가리킨다. 시 구절은 제작의 신이 인드라
에게 더욱 강력한 천둥 벼락을 만들어 주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마는 황홀경과 환
각 작용을 일으키는 식물의 즙을 가리키는데, 고대 아리안들은 희생 제의를 치를 때 소마를
신들에게 바쳤다. 실제로는 제의를 치르는 사람들이 소마를 마시면서 황홀경과 환각 상태에
서 신들을 만나고 신들을 경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의 희생 제의를 통해 소마즙을
마음껏 마신 인드라가 화살처럼 번개를 내려 용들의 우두머리인 브리트라를 죽였다는 것은
몇 차례에 걸친 정성스러운 제의 끝에 마침내 비가 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의 신화는 메소포타미아의 탐무즈 신화와 유사한
데, 수확의 여신 데메테르는 자신의 딸 페르세포네가 지하의 왕 하데스에게 가 있는 동안에
는 슬픔에 빠져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다가 딸이 다시 엄마 품으로 돌아오면 데
메테르는 신이 나서 열심히 일한다. 그녀가 일하지 않을 때는 대지는 황량하고 풀과 나무들
은 땅속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다가, 그녀가 일을 시작하면 모든 식물이 다시 새싹을 틔우고
잘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그리스인들이 계절의 순환에 따라 식물들이 자라고 시드
는 것을 신화적으로 표현했듯이, 인도 아리아인들도 먹구름에 천둥이 쳐서 비가 내리는 것
을 그렇게 신화적으로 표현했다.
인드라의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다. 실제로 인드라 신은
아리아인들의 전쟁 영웅을 묘사한 것 같은 느낌도 준다. 고대인들에게 천둥 벼락은 가장 강
력하면서도 무서운 자연현상이었다. 그래서 인도 아리아인들은 천둥 벼락을 부리는 인드라
신이 자신들의 전투력을 높여줄 수 있다고 여겼다. 『리그베다』에서는 인드라와 폭풍우의
신 루드라가 동시에 등장하는 구절이 많은데, 폭풍우 또한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무서운
자연현상 중의 하나다. 루드라는 파괴의 신인 시바신의 전신이다. 루드라에 대해서는 나중
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으로 지상계를 관장하는 대표적인 신들로는 불의 신 아그니Agni, 소마 즙과 아울러
식물을 관장하는 신 소마Soma, 강의 여신 사라스바티Sarasvatī가 있다. 지상계의 중에서 가
장 중요한 신은 불의 신 아그니이다. 불이 없으면 제단을 밝힐 수도 없고, 제의의 제물을
태울 수도 없으니 그 중요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또한 아그니는 인드라를 비롯한 여러 신
들을 제단에 불러들이고 그들에게 제물을 드리는 중재자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아그니는
『리그베다』의 맨 첫 장의 첫째 절의 첫째 시구에 등장하는 영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모
든 장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소마 또한 아그니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주요한 신이다. 왜
냐하면 소마 즙도 불 못지않게 제의를 치르는 데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신들을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살펴보았지만, 영역
사이에 어떤 위계가 있는 것은 아니고 때로 둘 이상의 세계에 중복되어 등장하는 신도 있
다. 그뿐만 아니라 신들 사이의 확고한 위계질서도 없다. 필요성이 더 많은 신들이 더 자주
등장할 뿐이다.
세계의 신화 가운데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스 신화인데, 먼 옛날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인도 아리아인들의 신화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 6 -
일단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인간을 초월하는 신적인 능력도 있지만, 사랑과 미움, 욕망과
질투 등의 인간적인 요소도 매우 풍부하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의 신들 사이에는 인간적인
욕망과 감정으로 인해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전개된다. 이에 비해 베다의 신들에게는 인간적
인 감정이나 욕망이 그다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리그베다』의 신들은 자연 그 자체
보다는 자연의 기능적 측면이 신격화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태양 그 자체보다는 태양의
비추는 기능, 따스함을 주는 기능이 신격화된다.8)
그런데 『리그베다』에는 자연현상을 의인화한 신만 아니라 추상적인 우주의 법칙 내지
는 도덕률을 관장하는 신도 등장한다. 고대 인도 아리아인들은 자연의 법칙 내지는 인간이
지켜야 할 규칙을 리타ṛta라 불렀는데 천계의 신 바루나Varuna가 바로 그 리타를 관장하는
신이다. 바루나는 리타를 잘 지킨 이를 상주고 이를 어긴 이를 벌주는 역할도 하는데, 윤리
적 질서를 보호하는 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이 바루나는 때로는 데바
deva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때로는 아수라asura에 속한다는 사실이다.9) 인도 아
리안인들에 있어서 데바는 선한 신이고 아수라는 악한 신이다. 그런데 조로아스터교는 그와
는 정반대로 데바가 악한 신이고 아수라는 선한 신이다. 『리그베다』에서 ‘아수라’는 조로
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에서는 ‘아후라ahura’이며, 조로아스터가 제창한 유일신의
이름은 바로 ‘아후라 마즈다 Ahura Mazdā이다. 아득한 옛날 이란 고원에서 머물던 아리안
종족 중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그 일부가 동쪽으로 진격하여 인더스 강을 넘어와서 『베
다』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루나는 바로 그러한 갈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 중에는 『리그베다』의 바루나가 바로 『아베스타』의 아후라 마즈다에
해당하는 신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10) 바루나는 후대에는 악어를 타고 다니
는 물의 신으로도 나타나는데, 이는 아마 인더스 문명의 영향으로 보인다. 바루나는 불교를
통해 동아시아에도 전파되었는데 수천신水天神으로 불렸다. 물의 신과 하늘의 신 두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그렇게 번역된 것이리라.
『리그베다』의 주류는 자연의 기능을 신격화하여 그 신에게 건강과 장수, 가축의 번성
과 곡물의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마지막 장인 제10 만달라에는 천지만
물과 인간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창조 신화도 나타난다. 『리그베다』에 나타나
는 창조 신화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 두어 가지를 보자.

태초에 히란야가르바가 나타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모든 피조물의 유일한 주였다.


그는 땅과 이 하늘을 정돈시켰다. 우리가 공물로 경배해야 할 신은 누구인가?
그는 영혼을, 힘을 주는 자이며, 그의 명령에 모든 존재, 심지어 신들도 복종하도다.
그의 그림자는 불멸이자, 죽음이로다. 우리가 공물로 경배해야 할 신은 누구인가?
우주에 거대한 물이 퍼져나가면서 만물의 씨앗을 품고 불을 만들어 낼 때, 신들의 하
나의 호흡이 탄생되었도다. 우리가 공물로 경배해야 할 신은 누구인가?11)

히란야가르바Hiraṇyagarbha는 황금의 모태라는 뜻인데, 황금 계란이라고도 풀이한다.


우주의 난생설화 또한 전 세계 곳곳에서 자주 보이는 창조신화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위대

8) 류경희, 『인도의 종교와 종교문화』, 27-8쪽 참조.


9) 『리그 베다』 7. 60. 12.에서는 데바로 분류되어 있고, 5. 63. 3.에서는 아수라로 분류되어 있다.
10) 위의 책, 25쪽 참조.
11) 『리그 베다』 10.1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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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모든 생명에게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관장하는 신으로서 신들마저 복종해야 하는 대상이
다. 그리고 모든 생명이 나오기 전에, 불이 나오기 전에, 심지어 신들도 존재하기 전에 먼저
거대한 물이 있었음을 말하는데, 물이 모든 창조에 앞선다고 보는 세계관은 서론에서 언급
했던 바빌로니아의 창조신화나 유대인들의 천지창조설에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서양철학의
아버지였던 탈레스조차도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재미있게도 히란야가르
바는 최초로 요가를 알려준 자이다. 이에 대해서는 요가 명상을 다룰 때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또 하나 중요한 창조 신화는 푸루샤Puruṣa 이야기다. 원래 푸루샤는 천 개의 머리, 천
개의 눈, 천 개의 발을 지닌 우주적 거인이었다. 지상의 모든 피조물은 푸루샤의 4분의 1밖
에 되지 않고 나머지 4분의 3은 하늘의 불멸의 것들이다. 그런데 신들이 희생제물로 푸루샤
를 바칠 때 그의 몸에서 하늘과 땅, 바람, 태양과 달 등의 모든 것들이 나오게 되었으며, 심
지어 계절도 그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인간 또한 그에게서 나왔는데, 입에서는 브라만이, 팔
에서는 전사, 넓적다리에서는 평민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에서는 노예가 나왔다고 한
다.12) 원초적 우주적 거인의 몸에서 천지만물이 나왔다는 신화도 흔한 신화이고 중국의 반
고 또한 그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이다. 반고와 푸루샤의 가장 큰 차이는 반고는 그냥 죽
어서 그의 몸이 천지만물이 된 데 비해 푸루샤는 희생제의에 의해서 그의 몸에서 만물이 나
왔음을 강조한 점이다.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푸루샤 신화가 힌두교 사회의 카스트
제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리그베다』에는 위와 같이 인류문명 초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창조 신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 심오함이 느껴질 정도로 수준 높은 창조 신화도 있다.
그래서 이 창조 신화는 힌두교의 신화를 소개하는 책에서도 자주 언급되지만, 인도철학사
등의 서적에서도 종종 언급된다. 바로 나사디아Nāsadīya 노래인데, 국내에서는 흔히 ‘무유
찬가無有讚歌’로도 번역되고 있다. 워낙 중요한 내용이니 전체를 살펴보도록 하자.

태초에 비존재도 존재도 없었고, 공기도 그 너머의 하늘도 없었다. 무엇이 덮고 있었


던가? 어디서, 누구의 보호 아래? 끝없는 심연의 깊은 속에 물이 있었던가?
그때는 죽음도 죽지 않음도 없었고, 낮과 밤을 구별하는 표징도 없었다. 호흡도 없는
일자만이 그 자신의 본성으로 호흡하고 있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태초에 어둠이 어둠에 덮여 있었다. 어떤 것을 구별할 수 있는 표정도 없고, 오직 공
허하고 형태도 없는 혼돈의 물뿐이었다. 그때 타파스에 의해 일자가 탄생했다.
태초에 그 일자에게서 욕망이 일어났다. 그것이 처음 마음의 씨앗이었다. 마음속에서
지혜를 추구하던 현자들은 비존재 속에서 존재와의 관계를 느꼈다.
가로지르는 빛이 뻗어 나왔으니, 아래로 무엇이 있고 위로는 무엇이 있는가? 씨앗을
뿌리는 자들이 있었고, 강력한 힘을 지닌 자들이 있었다. 아래로 충동이 일어났고, 위로
는 에너지가 솟아났다.
누가 진정으로 아는가? 어디서 이것이 만들어졌고, 그런 창조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
었는지, 이 세상의 누가 감히 그것을 단언할 수 있을까? 신들도 이런 창조 뒤에 나타나
게 되었으니, 그 창조가 어디서 나오게 되었는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이 창조의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만들어진 것이든지 아니든지,
가장 높은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는 자, 그분만이 알 수 있으리라. 혹은 그분도 모를 것

12) 『리그베다』 10.90.1-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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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13)

첫 구절부터 심오한 철학적 용어가 나온다. 존재라는 말보다 비존재라는 말이 먼저 등장


하는데, 과연 그 시대에 이런 성숙한 사유체계가 존재했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리그베다』에서 제10 만달라는 후대인의 사유체계가 많이 첨가된 것으로 간주
되지만 이 무유찬가는 그런 의심을 더욱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어쨌든 고대 인
도인들의 사유체계를 잘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다. 세 번째 구절은 『히브리 성서』 창
세기의 맨 앞부분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흑암의 혼돈 속에서 창조주가 말을 통
해 천지창조를 한 것으로 전개하지만, 인도인들은 타파스에 의해 궁극의 일자가 나타나고
그 일자의 욕망에 의해 천지창조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타파스tapas는 후대에는 흔히 고행으로 번역되지만 고대에는 주로 ‘열기’를 가리킨다. 그
리고 열기와 고행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도에서 고행은 기이한 행위로 표현되는 경
우도 많지만 원래는 강한 의지력과 집중력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몸과 마음에 열기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더군다나 인도는 아열대 기후에 속하기 때문에 심신의 노력과 열기는 더욱 쉽
게 연결이 된다. 물론 이 신화에서 말하는 타파스는 그보다는 훨씬 심오한 차원의 뜻을 지
니고 있는데, 원초적 열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원초적 열기에 의해 일자가 나타나
고, 그 일자의 마음에 욕망이 일어나면서 천지창조가 시작되었다고 신화는 말하고 있다. 그
러나 끝에 가서는 그것 또한 단지 추측일 뿐, 우주 창조의 진실은 최고의 신만이 알 것이
고, 어쩌면 궁극의 신조차도 모를 것이라고 말한다.
『리그베다』는 대부분의 내용이 인류의 정신세계가 아직 한참 어린아이였을 때 만들어
냈던 신화적 사유 체계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때로는 참으로 심오한 종교적 세계관도 잘
간직하고 있는 훌륭한 책이다. 이러한 기초적 토양이 있었기에 후대에 가서 『우파니샤드』
와 같이 우주와 인생에 대한 깊은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는 글들이 더해졌던 것이다.

『우파니샤드』에 나타나는 새로운 세계관들


『우파니샤드』에서 ‘우파upa’는 ‘가까이’, ‘니ni’는 ‘아래로’, ‘샤드ṣad’는 ‘앉는다’이니 합
치면 ‘가깝게 아래로 앉는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높고 깊은 지혜를 터득한 현자들 아래에
가깝게 앉아서 그 진리를 배운다는 뜻이다. 주요한 『우파니샤드』에 불멸의 주석을 단 샹
카라는 ‘우파’를 ‘가까이’로, ‘니’를 ‘아래로’ 혹은 ‘완전히’로, 그리고 ‘샤드’는 ‘부수다’, ‘깨다’,
‘얻다’, ‘추구하다’ 등의 의미로 보았다.14) 이로 보았을 때 『우파니샤드』는 대중을 향해 널
리 펼치는 가르침이 아니라 자격을 얻은 제자들에게만 은밀하게 전수하는 가르침이라는 의
미도 있다. 그래서 ‘밀좌密座’라고 번역되기도 했다. 『베다』와 마찬가지로 『우파니샤드』
도 저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다. 긴 세월 익명의 수많은 구도자들이 자신들이 사색하고
탐구해오던 진리들을 제자들에게 전수해왔고, 그것이 지금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다.
현존하는 『우파니샤드』는 모두 200 종이 넘는데, 그중에서 주요한 작품들로 여겨지는
십여 종의 『우파니샤드』들은 대체로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 사이에 나온 것으로
거의 정확하게 축의 시대에 해당한다. 그 중에서도 기원전 6세기 이전에 나온 초기 『우파
니샤드』들이 사상적으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힌두교는 물론이고 불교, 자

13) 『리그베다』 10.129.1-7.


14) 이재숙 옮김, 『우파니샤드1』, 2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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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교까지 포함하는 주요 종교들이 모두 이들에게 사상적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
파니샤드』는 축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계속 창작되었는데, 이후에 나온 것들은 사상적 깊
이는 별로 없고 대부분 특정 종파의 신화나 세계관을 강조하는 것들이다. 전통적으로 우파
니샤드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주석가는 기원후 8세기의 상카라인데, 그는 11종에 대해 주
석서를 남겼다. 현대에 우파니샤드를 서구에 널리 전파하는 데 큰 공헌을 세운 라다크리슈
난은 거기에다 7종을 더하여 18종의 『우파니샤드』를 선별하여 소개하고 있다.15)
『베다』의 본집에서 마지막인 『우파니샤드』로 이르는 약 천 년의 세월 동안 어떤 변
화가 있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앞에서도 간략하게 살펴보았듯이 『베다』의 주된 내용
은 자연의 대상이나 현상을 의인화한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복을 비는 것이었다. 그러
나 후기로 갈수록 점차 다양한 신들의 상위에 있는 유일신에 대한 개념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파니샤드』에는 이러한 경향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키는 한편, 그 유일신을 좀
더 추상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한다. 즉, 그 유일신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하는 경향
이 나타났다. 인류 종교사를 볼 때 반드시 단선적인 진화 과정을 거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초기에 구체적 형태를 지닌 신을 숭배하다 점차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신을 찾아가는 것은
일반적인 발전 과정 중의 하나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형식적인 제례 중심주의에 대해 회의를 품고 저항하기 시작
했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초기의 단순하고 소박했던 희생제의는 시간이 흐를수
록 규모도 커지고 절차도 까다로워졌다. 나중에는 신들에 대한 경배보다는 희생제의 자체를
더욱 중시하면서 우주의 질서는 희생제의에 의해 유지된다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희
생제의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사색하기 시작하다 마침내 『우파니샤드』 시기에 이르러
서는 희생제의의 한계를 직시하고 내면적 구도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종
교행위의 중심축을 외적인 제례의식에서 내적 진리에 대한 탐구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공물을 바치면서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기복 신앙의 형태에서 궁
극적 진리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구도적 차원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아트만에 대한 이론들이다.
이것은 인류정신사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고 도약일 뿐만 아니라
지금의 관점에서 보아도 선진적이다. 유대교의 경우, 형상을 지니지 않는 유일신이라는 개
념은 아주 일찍부터 형성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유일신이 작은 부족 단위에서 민족 단
위로 나중에는 우주적 규모의 신으로 발전하였지만 희생제의를 중시하는 태도는 매우 오랫
동안 지속되었다. 물론 축의 시대 초기에 야훼는 번제물의 향기를 즐기기보다는 사회에 정
의와 사랑이 흐르는 것을 더욱 기뻐하신다는 선지자의 주장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희생제의
를 없애지는 않았다. 유대교에서 희생제의가 사라진 것은 자발적인 동기가 아니라 외부의
적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현실의 삶을 덧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영원히 변치 않는 궁극
의 세계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리그베다』에 나타난 고대 인도 아리안들은
다소 호전적인 기질은 있지만, 매우 진취적이고 현실의 삶을 즐기는 낙천적인 성향을 지니
고 있었다. 그들이 희생제의를 치르는 것은 사후세계의 복락을 빌기 위함이 아니라 현실 세
계에서 재앙을 방지하고 풍요를 누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 나타나는 인생
관은 현실의 삶을 고통으로 간주하는 다소 염세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라다크리슈난은
『리그베다』에 나타나는 낙천적인 성향은 저급한 종교 형태로서 아직 사물의 본질을 꿰뚫

15) Radhakrishnan, 『The Principal Upaniṣad』, George Allen & Unwin,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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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한 것임에 비해 『우파니샤드』의 인생관은 보다 높은 환희와 영적 진리의 완전한 소
유를 향한 노정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변론하고 있지만16), 『우파니샤드』가 염세적인 경향
을 띠는 것은 분명 객관적인 사실이다.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리그베다』에 나타나는 인생관은 중앙아시아 초원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도 아리아인들의 삶의 태도를 더 많이 반영하고 있는 데 비해 『우파니
샤드』에 나타나는 인생관은 아열대 기후의 인도 토착 문화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인더스 문명의 유물에서는 명상을 하고 있는 인물을 묘
사하는 인장이 나타나는데, 이로 보아 인도의 토착 문화에는 이미 명상 수행에 대한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차분히 눈을 감고 내면의 세계를 향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현세적 복
락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행복을 찾는 경향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상으로 대략 천년에 걸쳐 인도인들의 종교적 태도가 어떻게 변모하게 되었는가를 살펴
보았는데, 그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세계관과 인생관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이제 『우파
니샤드』에서 보이는 주요한 사상들을 살펴보자.
『우파니샤드』 사상의 핵심을 한 구절로 요약하라면 흔히 범아일여梵我一如로 표현된
다. 여기서 ‘범梵’은 여러 신들 위의 최고의 유일신, 나아가 궁극적 실재라 불리는 ‘브라흐만
Brahman’17)을 가리키고, ‘아我’는 변화하는 현상세계의 경험적, 표피적 개아가 아니라 불변
의 자아, 궁극적 자아인 ‘아트만Atman’을 가리키는데, 범아일여란 바로 그 브라흐만과 아트
만이 하나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브라흐만이나 아트만은 『베다』의 본집에서도 한 번씩 등장하던 말이었지만, 그 개념이
확실하게 정해지고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우파니샤드』 시기에 이르러서
였다. 어원적으로 볼 때 브라흐만은 ‘부풀다’, ‘자라나다’의 의미를 지닌 동사 원형에서 파생
된 것으로서 원래는 기도나 신성한 주문 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점차 세계를 생성 변화
시키는 신성한 에너지 내지는 원리를 가리키다, 나중에는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를 가리키는
말로 정착된 것이다. 아트만은 원래 ‘일정하게 움직이다’ 혹은 ‘퍼져나가다’의 의미를 지닌
동사 원형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아카샤ākāṡa18)’을 가리키는 이름
이기도 하고, ‘사람의 육신을 채우는 기운’ 혹은 ‘숨’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트만은 때로는
우주의 본질을 가리키기도 하고 개아의 본질, 혹은 영혼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실 우파니샤드는 어느 한 개인이 자신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써나간 것이 아니라 긴 세
월 익명의 사상가들에게 의해 집적된 문헌이기 때문에 같은 어휘라 해도 각 문헌에 따라 개
념이 조금씩 다르고 심지어 한 문헌 속에서도 여러 의미가 혼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초기
우파니샤드의 하나인 『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의 첫머리는 다음의 구절로 시작한다. “이
아트만은 처음에 홀로 있었다. 그 이외에 움직이는 자 아무도 없었다. 아트만은 세상을 창
조해볼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세상들을 창조했는데, 그 세상들은 물, 빛, 죽
음19), 그리고 바다의 세상이다.”20) 여기서 아트만은 개아의 본질 내지는 영혼이 아니라 아

16) 라다크리슈난, 이거룡 옮김, 『인도철학사1』, 209-210쪽 참조.


17) 궁극적 실재, 최상위 카스트, 제례 서적을 가리키는 말은 원래의 산스크리트 발음으로 보면 상당히
유사하고 한글로 정확히 옮기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 셋을 구분하기 위해 관례적으로 궁극적 실재를
‘브라흐만’, 최상위 카스트를 ‘브라만’, 제례서적을 ‘브라흐마나’라고 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책에
서도 그 관례를 따른다.
18) 고대인도인들은 우주의 물질적 구성요소를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오대로 간주했는데, 이 중
에서 공이 바로 아카샤이다. 서양의 에테르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그보다 좀 더 크고 복잡하다. 땅,
물, 불, 바람 등을 떠받치고 있는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빛이나 영혼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질세계에서 나타나는 모든 사건과 현상들을 기록하는 저장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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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이 우주의 창조자이다. 이외에도 브라흐만과 아트만을 혼용해서 쓰는 경우는 비일비재하
다. 브라흐만을 우주의 궁극적 실재, 아트만을 불멸의 개아로 보는 것은 다양한 문헌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가운데 나온 것이다.
『우파니샤드』에는 “내가 바로 브라흐만이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등의 구절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들은 아주 짧고 간단하지만 『우파니샤드』 전체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해
서 보여주는 핵심적인 구절이다. 첫 번째 구절은 자기가 바로 이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
라흐만임을 자각하게 되었음을 선포하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의 ‘나’는 일상적 경험적 자아
가 아니라 깊은 명상을 통해 알게 된 내 속의 불멸의 자아인 아트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두
번째 구절에서 ‘너’는 사랑하는 제자를 가리키고 ‘그것’은 브라흐만을 가리키는데, 사랑하는
제자에게 너 자신이 바로 브라흐마라는 사실을 자각하기를 촉구하는 말이다.
우파니샤드에서 범아일여 다음으로 중요한 개념은 ‘카르마karma’와 ‘삼사라saṃsāra’이다.
카르마는 원래는 ‘행동하다’, ‘행위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서 ‘행위’, 내지는 ‘행위
의 결과’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카르마는 단순히 행위의 결과
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인과율적인 의미를 가미한 말이다. 즉, 좋은 행위는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행위는 나쁜 결과를 낳는 것을 강조하는 말인데, 불교를 통해 중국에 들어와서는
‘업業’, ‘업보業報’ 등으로 번역되어 우리에게도 무척 친숙한 용어다. 삼사라는 원래 ‘배회하
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서 ‘세상’, ‘순환적 변화’를 가리키는 말인데, 종교적
관점으로는 ‘삶과 죽음의 순환’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불교를 통해 ‘윤회輪廻’라는 말로 널
리 알려져 있다.
초기 『우파니샤드』의 하나인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는 업보와 윤회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그들 중의 선업을 쌓은 자들은 좋은 탄생을 하는데, 사제로
태어나거나 무인으로 태어나거나 평민으로 태어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악업을 쌓은 자들은
당장 나쁜 탄생을 하게 됩니다. 개로 태어나거나 돼지로 태어나거나 천민으로 태어납니다.
(5장, 10편, 7절.)” 결국 선업을 쌓은 사람은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계급으로 태어나
지만, 악업을 쌓은 사람은 개, 돼지나 수드라 계급으로 태어난다는 주장이다. 이 말은 카스
트 제도에 정당성을 부과하는 구절로서 오랜 세월 인도 하층민들의 사회적 불만을 마비시키
는 아편 역할을 해왔다.
고대인들은 수렵 채집의 세계를 지나 농경과 목축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자연의
관찰을 통해 점차 자연세계의 인과율을 이해하게 되었다. 콩 심는 데 콩이 나오고 팥 심는
데 팥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면서 심은 대로 거둔다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
은 이러한 자연세계의 인과율을 확장하여 인간의 윤리적 행위에도 적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우리의 윤리적 행위는 때로 그러한 인과율이 증명이 되지만, 많은 경우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다.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그 과보를 누리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거
나 악과 불의로 타인을 괴롭히는 사람이 눈을 감는 순간까지 현세적 복락을 누리는 것을 보
면서 많은 모순과 부당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사후세계를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집트 『사자의 서』에 등장하는 사후세계의 심판, 조로아스터교에서 주장하
는 죽은 직후에 진행되는 사후의 심판과 최후의 날에 펼쳐지는 마지막 심판 등의 개념, 그

19) 여기서 죽음이란 땅을 은유하는 말이다. 땅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을 죽기 때문에 죽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물을 하늘 위에 있다고 본 것은 고대에 흔히 나타나는 세계관이다. 고대인들은 하늘에서 비
가 내리는 현상을 보면서 원래 하늘 위에 물이 있어 그것이 한 번씩 내려오는 것이라고 여겼다.
20) 『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1장, 1편,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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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인도에서 등장하는 카르마와 삼사라는 바로 그러한 염원에서 나온 것이리라.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서양 근대 최고의 지성인 중의 한 명이었던 칸트도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신
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불가지의 영역으로 간주하였으나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좀 더
확실한 도덕률의 근거를 위해 다시 끌어왔는데, 그 옛날 고대인들이 도덕적 인과율을 좀 더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 사후세계를 끌어온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우파니샤드』에서는 단순히 도덕적 인과율을 강조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보
다 심원한 사상을 모색한다. 그들은 나쁜 업보를 피하고 좋은 업보를 추구하면 일단 다음
생에 좀 더 좋은 가문에 태어나는 것이 확실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제례의식을 치르며 신에게 복을 기원하다고 해도 인생의 근원적 고통은 해결되지 않
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장 좋은 카르마를 쌓아서 최상위의 집안에 태어난다 해도 그
것은 여전히 삼사라의 굴레에 갇혀있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아예 삼사라
자체를 벗어나는 좀 더 근원적인 자유, 궁극적인 해방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온
개념이 바로 목샤mokṣa인데, 목샤는 생사윤회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의미한다. 흔히 『우파
니샤드』에서 더욱 중시되는 사상은 범아일여라고 여기지만, 영향력 면에 있어 더욱 주목해
야 할 사상은 카르마, 삼사라, 목샤 등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힌두교 종교사상에 국한되는
것이지만 후자는 불교와 자이나교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상 간단하게 『우파니샤드』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세계관을 살펴보았다. 『우파니샤
드』가 등장하기 시작한 그 당시에도 여전히 많은 대중들은 기복신앙을 원했고, 대부분의
브라만들은 그들을 위해 까다로운 제례의식을 행하면서 종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깨
어있는 선각자들은 더 이상 제례의식이나 기복신앙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목샤를 얻기 위해
명상과 고행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명상과 고행을 통하여 욕망과 감각을 제어하고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할 때,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불멸의 자아인 아트만을 찾을 수
가 있고, 그것이 바로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임을 확실하게 자각할 때, 인간은 마
침내 덧없는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불멸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상을 중시하는 태도는 힌두교에 국한되지 않고, 이후 불교와 자이나교에도 큰 영향을 미
쳐 인도에서 나온 종교의 공통적인 특징이 되었다.

2. 힌두교의 전개, 서서시와 푸라나

원시 힌두교의 몰락에서 새로운 힌두교의 부상까지


축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인도의 종교 환경은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리그베다』 이후
천년 가까이 계속되어온 원시 힌두교를 흔히 브라만교라고도 불리는데, 소박한 농경 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브라만 계급들이 희생제의를 중심으로 대중들의 기복신앙을 만족시켜주는 종
교였다. 그러나 철기 농기구의 보급으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여 잉여생산물을 교환하
는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수공업과 상업을 직업으로 갖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점차 거대한
규모의 도시가 형성되어 갔다. 그리고 부족중심의 사회체계도 점차 붕괴되면서 마가다국,
코살라국 등의 고대국가가 형성되어갔다. 이렇게 크게 급변하는 사회체제 속에서 사회의 통
합을 위하여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새로운 종교적 세계관이 필요했다.
그러나 소박한 농경사회 중심의 브라만교는 이러한 새로운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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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등장한 『우파니샤드』는 그 통합적이고 보편적인 사상을 지니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최고의 이상인 목샤의 추구는 본질상 개인주의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공동체를 통합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담당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우파니샤드 사상
은 베다의 전통 아래에 일어난 자기 개혁적인 움직임이었고, 후대의 인도의 종교 사상 전반
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에 요청되던 종교적, 사회적 에토스를 제공하
는 데는 실패했다. 게다가 탈속적이고 사색적인 경향은 대중의 기복적이고 현세적인 경향과
는 거리가 있었다. 21)

그러는 사이에 기존의 종교의 한계점을 극복하고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새로운 종교
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종교운동의 주창자들은 브라만
계급이 아닌 다른 사회계층, 특히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들이 많다. 보리수 아래에서 큰 깨
달음을 얻은 뒤에 불교의 개조가 된 석가모니나 극도의 고행을 통한 해탈을 추구하는 자이
나교의 교주인 마하비라도 크샤트리아에 속한 사람들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기존의 브라만
교의 기반이 주로 농민들이었다면, 불교나 자이나교의 지지 기반은 도시의 상인계급이었다
는 사실이다. 그것은 불교나 자이나교가 새로운 사회변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는 것
을 말해준다. 이 중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훨씬 많이 받은 종교는 불교였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불교 역시 최종 목표가 해탈이기 때문에 『우파니샤드』의 지향점과
비슷하게 개인주의적인 성향도 있고, 불교의 교리도 탈속적이고 사색적인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점도 있다. 일단 불교는 기존의 『베다』의 전통
을 반대하였고, 특히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게다
가 석가모니는 중생들을 향한 자비라고 하는 새로운 고등윤리를 제창하였고, 기존의 브라만
교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는 새로운 종교 조직을 갖추었다.
사부대중이란 남자 출가수행자, 여자 출가수행자, 남자 재가신도, 여자 재가신도를 가리
키는데, 특히 여자 출가수행자인 비구니 집단을 만든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안이었
다. 카스트 제도의 부정, 새로운 고등 윤리, 새로운 종교 조직을 갖춘 불교는 긴 세월 『베
다』의 전통에 물려버린 인도의 종교문화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등장
한 거대한 규모의 사회체계 속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통합하는 데도 효험이 있었기 때문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갈 수가 있었다. 이후 최초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이 불교를 국교로 선택하면서 불교는 인도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운동 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브라만교의 지식층은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데, 그 중 하나는 『베다』의 종교이념과 실천윤리를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들은 베다
의 다양한 지식분파들을 여섯 갈래의 문헌들로 분류하는 베당가 문헌으로 정리하고, 사회
종교적인 삶의 규칙들도 정립시켰지만,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런 가운데 민간에서는 아리안 문화와 토착문화의 융합작용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앞
에서 아리안족 침입 이전의 인더스 문명을 간략히 소개할 때 언급했지만, 아리아인들은 인
도로 진입해 들어오는 가운데 토착적인 종교문화를 완전히 멸절시키거나 배척하지 않고 공
존관계를 이루면서 자신들의 종교문화에 없는 부분들은 어느 정도 수용하기도 했는데, 『베
다』에서도 그런 흔적은 분명히 보인다. 그러나 주류는 아리안 문화였고, 토착적 요소들은
그저 보완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만교가 크게 약화되면서 이들 토착적인 종교
문화들이 크게 부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나타난 것은 이전
의 브라만교와는 달리 다양한 종교 관념과 신앙체계, 그리고 여러 방향의 삶의 윤리들을 종

21) 류경희, 『인도의 종교와 종교문화』. 11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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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적으로 통합하는 새로운 차원의 종교였다.
일단 인드라, 아그니, 소마 등의 『리그베다』 전통의 주요 신들은 그 지위가 크게 격하
되고, 브라흐마, 비슈누, 쉬바 등의 새로운 인격신이 주요한 신으로 등장했다. 브라흐마는
창조의 신이고, 비슈누는 유지의 신이고, 쉬바는 파괴의 신인데, 이들 세 신은 우파니샤드에
서 확립한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을 인격신으로 재정립한 것이다. 사실 브라흐만은
비인격적인 신으로 철학적으로 종교사상적으로 볼 때 심오하지만, 일반 대중의 관점에서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종교적 감흥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브라흐만의 가장 중요한
행위인 창조, 유지, 파괴를 구체적인 인격신으로 형상화한 것이 이들 세 신인데, 흔히 힌두
교식 삼위일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실제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브라흐마는 대중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고, 유지의 신 비슈누와 파괴의 신이 양대 산맥을 이루고, 그 외에 다양한
토착 신들이 새롭게 유입되었다.
또한 삶의 가치와 궁극적 목표도 새롭게 정립되었다. 그 기본적인 특징은 『리그베다』
에서 보였던 세속적 복락을 추구하는 경향과 『우파니샤드』에서 강조하는 탈속적 해탈을
지향하는 경향을 중도적으로 통합하고 거기에다 사회적 책임감 및 의무를 더하여 종합 선물
과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실천 윤리가 제시된 것은 당시 탈속적인 종교
사상에 몰두된 사람들이 세속의 관심을 버리고 명상적 사색에만 몰두함으로써 야기된 사회
적인 폐해, 이에 대한 대응으로 현세적 종교이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의 문제점, 그리
면서도 제의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리안 사회의 안정과 진보 증진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측
면 등을 종합적으로 인식한 데 기인한다.22)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종합화 시도는
세력이 약화된 전통 종교가 자신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대중
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다시 주류 종교의 지위를 되찾을 수가 있었다. 흔히 새로운
차원의 종교부터 정식 힌두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새로운 종교 운동은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마우리아 왕조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기원전
2세기경의 숭가 왕조부터 크게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는데, 숭가 왕조는 염세적 세계관과 무
신론적 태도를 지닌 불교보다는 현실 긍정적 세계관과 유신론적 경향을 지닌 힌두교를 선호
했다. 그 뒤에 등장한 쿠샨 왕조는 다시 힌두교보다는 불교를 선호했는데, 이 시기에 등장
한 불교는 대승 불교였고, 이 대승 불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널리 전파
되었다. 그러다 4세기 초에 다시 힌두교를 선호하는 굽타 왕조가 들어서면서 힌두교가 크게
부상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힌두교 부흥 운동을 주도한 것은 바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라는 서사
시들이었는데, 초기에 민간의 전설에서 시작된 이들 서사시는 몇 세기에 걸쳐 다듬어지면서
점차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이들 서사시의 대유행은 사회 곳곳에 깊숙이 파고들
면서 힌두교가 점차 세력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세기 초에 건립된 굽타 왕
조에 이르러서는 힌두교는 크게 융성하게 되고 만신전의 규모도 점차 커져갔다. 이러한 종
교적 변화의 추세에 맞추어 4,5세기부터는 다양한 신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각 종파마다 새
롭게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결과 『푸라나』라고 하는 방대한 신화집이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 세기에 걸쳐 이어졌다. 힌두교 부흥의 일등 공신은 바로 이들 서
사시와 신화집이었다.

22) 위의 책, 11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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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시의 힘, 『마하바라타의 노래』와 『라마야나』
고대의 신화는 단순히 세계 창조나 자연의 변화, 영웅의 활약 등을 노래하는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고대인들에게 있어 신화는 오늘
날처럼 단순히 흥미를 유발하는 이야기 거리가 아니라 심오한 종교적 세계관과 종교 체험을
담고 있는 경전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아슈타르와 탐무즈의 신화는 그냥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신전에서 행하는 거대한 규모의 제례의식의 근원이 된다. 탐무즈가 명계에
서 돌아오는 시기는 메말랐던 땅에 다시 식물들이 소생하는 시기인데, 이 시기의 신전에서
는 탐무즈의 귀환을 환영하는 제례의식을 치르면서 신전에서는 남녀의 자유로운 성적 향연
을 펼치기도 했고 공창들은 신전에서 성을 제공하고 돈을 받아 신전에 헌납하기도 했다. 고
대인에게 있어 쟁기로써 땅을 일구는 행위는 성행위와 유사한 행위로 여겨졌기에 농경의 풍
요를 기원하는 행사에는 성적 제의를 펼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슈타르와
탐무즈에 관련된 신화는 지극히 외설스러운 표현들도 많이 등장한다.
그리스에서도 어떤 신화들은 강력한 종교적 기능을 수행했다. 디오니시우스나 오르페우
스에 관련된 신화들은 디오니시우스교와 오르페우스교의 종교 의례와 깊은 관련이 있었고,
그 종교 의례에 참석한 여자 신도들은 술을 마시며 광란의 춤을 추고, 짐승의 날고기를 갈
기갈기 찢어서 씹어 먹기도 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그보다 좀 더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종
교 의례와 관련이 있는 신화도 있다.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신화는 죽음과 부활에 관련된
종교적 제례 의식의 원천이 되었다. 아테네에서 그리 멀지 않는 작은 도시 엘레우시스는 바
로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죽음과 재생의 종교적 의례를 진행하던 곳
이다. 의례는 정식으로 입문한 사람들에게만 베풀어졌고, 세부적인 의례에 관련된 사항들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기에 후대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지만 그리스
도교가 유입된 뒤에도 꽤 오랜 기간 유지되었다.
인도에서 만들어진 신화들은 이들 지역의 신화에 비해 좀 더 후대에 만들어졌지만, 그
영향력은 그보다 훨씬 크고 심원하다. 왜냐하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나 그리스 지역의 신화
들은 한 때는 종교적 성격이 강했지만, 배타적 유일신교가 그 지역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고
난 뒤에는 종교적 색채를 박탈당하고 그저 옛날이야기의 성격만 남게 된 데 비해, 인도 지
역에서 나온 서사시나 푸라나들은 오히려 힌두교의 부흥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기에 후대에
도 여러 가지 제례나 축제, 공연 등의 형태로 계속 유지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거기에 담
긴 종교적 세계관이나 종교체험이 더욱 확산되어갔기 때문이다.
서양 문학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신화의 일부분을 대서사시로 기록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도의 양대 서사시는 그 규모면에서 이들을 완전히 압도
하고 있다. 『마하바라타』는 지금까지 인류가 생산한 서사시 중에서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
다. 가장 긴 버전을 기준으로 볼 때 18권, 100,000 송으로 구성되어 있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합친 것의 열 배 정도의 분량이고, 『라마야나』의 대략 네 배 남짓의 분량
이다.
형성 시기는 『라마야나』가 『마하바라타』보다 약간 앞선다. 민간에서 나온 서사시는
그 형성 시기를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러 가지 설들이 있는데 『라마야나』는
대략 기원전 7-8세기 전후에 초기 버전이 나온 뒤에 점차 확장되어가다 기원전 2세기 숭
가 왕조 시절에 후 3세기 경에는 전체적인 틀이 확정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에
비해 『마하바라타』는 그 이야기의 원형은 기원전 8-9세기 경에 일어난 왕위 쟁탈전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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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데, 대략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하여 서사시의 초기 버전이 형성되고, 그 후 몇 세기에
걸쳐 이야기의 규모가 점차 커지다가 굽타왕조 초기인 기원후 4세기 경에 최종적인 편찬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우선 『마하바라타』부터 살펴보자. ‘마하바라타Mahābhārata’는 ‘위대한 바라타’란 뜻인
데, 현재의 델리 근처인 쿠루셰트라 지역에 있던 쿠루 왕국의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바라
타 족의 동일 후손인 카우라바 가문과 판다바 가문이 펼치는 길고 거대한 내전을 다룬 이야
기다. 카우라바 집안의 아들은 무려 100명이었고, 판다바 집안의 아들은 5명이었는데, 이들
은 사촌지간이다. 원래 판다바 집안의 아들에게 돌아가야 할 왕위를 카우라바 집안의 아들
들이 욕심을 부려 그들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면서 양측의 갈등은 심화된다. 나중에 집안의
현명한 어른의 충고로 나라를 둘로 나누어 옛 수도에서는 카우라바 집안의 아들이 계속 통
치하고 판다바의 아들에게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우라바 집
안의 형제들은 판다바 집안의 왕국마저 빼앗기 위해 음모를 꾸며 판다바 집안의 형제들은
다시 위기에 빠져 기나긴 망명 생활을 한다. 다시 돌아온 판다바 형제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돌려받기를 원하고 카우라바 형제들이 그것을 거부하자 마침내 양대 진영은 숙명적인 전쟁
을 치르게 된다. 18일 간의 긴 전쟁 끝에 마침내 카우라바 형제들은 대부분 전사하고 판다
바 형제들이 승리를 거두면서 왕국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판다바의 다섯 형제는 긴 세월 나
라를 잘 통치하다 만년에는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히말라야의 메루 산에 올라가 신들의
왕국으로 들어간다.
이야기의 골격도 워낙 크고 세부적인 플롯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방대한 서사시이지
만 그것이 긴 세월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속에 초급 단계에서 고
급 단계에 이르기까지 힌두교의 거의 모든 종교적 세계관들이 총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리그베다』에서 이미 나왔던 여러 가지 버전의 천지창조의 이야기가 반복되어
나타나고, 데바와 아수라들이 서로 협력하여 우유 바다를 저어 불멸의 생명수를 얻은 뒤에
그것을 서로 쟁취하려고 싸우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신이 인간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아바타르 사상도 등장하고, 영겁에 걸친 우주의 창조와 파괴의 순환
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 거창한 신화적 세계관만 나오는 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하는 거대한 규모의 말 희생제의도 등장하여 제례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가 하면,
『우파니샤드』에서 강조하는 카르마와 삼사라의 법칙을 진지하게 설명하고, 나아가 궁극적
해방에 이르는 목샤의 길도 강조한다. 심지어는 천지만물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고 그 특징
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인도철학사상의 정수 중의 하나인
상키야 - 요가학파의 사상을 빌려오기도 한다.
『마하바라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양측이 전쟁을 시작하기 직전에 판다바 집안의
셋째 아들이자 용맹한 장수인 아르주나가 적의 진영에 사랑하는 스승과 친척들이 있음을 보
고 고뇌에 빠져 전쟁을 포기하려 할 때 아르주나Arjuna의 전차를 모는 마부이자 그의 스승
인 크리슈나Kṛṣṇa가 그에게 가르침을 펼치는 장면이다. 이 부분은 후대에 독립된 문헌으로
도 널리 읽혀졌는데, 바로 『바가바드기타』이다. ‘바가바드기타Bhagavadgītā’란 ‘신의 노
래’, ‘천상의 노래’라는 뜻이다.
『바가바드 기타』의 핵심 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첫째로 들 수 있
는 것은 육화된 신, 아바타르에 대한 관념이다. 아르주나가 큰 고뇌에 빠져 있을 때 그에게
전쟁을 격려하는 크리슈나는 바로 비슈누 신의 화신이었다. 아르주나에게 설법하던 크리슈
나는 도중에 자신의 실제 모습을 아르주나에게 보여주고, 아르주나는 그 장엄한 광경에 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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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인 전율을 느낀다. 루돌프 오토는 누미노제의 성스러움이 연약한 인간을 완전히 압도할
때 인간은 전율을 느끼게 된다고 주장했는데, 이 장면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부 학
자들은 『바가바드 기타』는 원래 비슈누를 유일신으로 숭배하던 종파의 문헌이었는데, 후
대에 『마하바라타』에 첨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23) 그들은 크리슈나를 통해 절대적 권
위를 지닌 비슈누 신의 모습과 인간적인 친밀감을 지닌 비슈누 신의 모습을 종합하여 대중
적인 인지도를 크게 높일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진리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목적지
에 도달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다원주의와 일원주의를 절묘하게 조화시
켜 당시 인도에서 유행하던 여러 수준과 형태의 종교 행위를 하나로 통합했다. 크리슈나는
제자 아르쥬나에게 진리에 이르는 여러 가지 요가를 소개한다. 이때의 요가란 나중에 소개
할 구체적인 명상 테크닉으로서의 요가가 아니라 일종의 ‘길’ 정도의 의미이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수많은 종류의 요가를 설명하는데, 그 중에 핵심적인 세 요가는 카르마 요가,
지나나 요가, 박티 요가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행위의 길, 지혜의 길, 헌신의 길이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카르마 요가이다. 왜냐하면 『바가바드 기타』는 일촉즉발의
전쟁터에서 전쟁이라는 행위를 망설이는 장수에게 전쟁이라는 행위를 격려하기 위해 펼쳐지
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좋은 카르마가 좋은 내생으로 인도하고 나쁜 카르마가 나쁜 내생
으로 인도한다는 주장은 당시 인도의 모든 종교인들에게는 이미 상식이 되었다. 게다가 어
떠한 카르마도, 심지어 우주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위조차도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할 수 없다는 사상도 이미 나왔다. 더군다나 친척과의 전쟁은 엄청나게 나쁜 카르마를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아르쥬나는 전쟁을 앞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것이다. 그런데 크
리슈나는 진정으로 카르마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행위를 포기하기보다는 행
위에 따르는 이기심과 애착을 버려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집착 없는 행위는 행위의 기
피보다 뛰어나다고 역설하고 있다.
다음은 지나나 요가로서 지혜의 길이다. 크리슈나는 애욕과 무지와 의혹을 지혜의 칼로
써 베어버림으로써 삼라만상의 배후에 있는 브라흐만과 자신 속에 있는 불멸의 아트만을 바
로 알고 절대해탈에 들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지나나 요가는 카르마요가와 밀
접한 관련이 있다. 크리슈나는 겉으로 볼 때는 칼에 의해 인간이 죽는 것으로 보이지만 생
명은 죽일 수 있지만, 지혜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속에 있는 아트만은 죽지 않음을 강조한
다. 게다가 지혜의 칼로 탐욕과 무지를 베어버리지 못하면 집착 없는 행위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가바드기타』에서는 이 둘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카르마요가와 지나나 요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오랜 정신수련과 자기단련이 필요하
다. 이것은 소수의 구도자들에게는 가능한 일이지만, 일반대중에게는 그리 쉽지 않은 길이
다. 크리슈나는 그러한 일반 대중을 위해 박티 요가, 즉 헌신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박티
요가란 최고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헌신만으로도 절대 구원과 해방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크리슈나는 누구든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반드시 그를 구원
해 주겠다는 말을 반복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소수의 사제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브라만교가
대중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힌두교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가바드 기타』의 세 번째 특징은 종교적 해탈이나 구원의 길과 일상 현실에서의 책
임과 의무를 적절히 절충하여 통합적인 삶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 『베다』
에 나타난 인도 아리아인들은 기본적으로 현세 기복주의를 추구했고, 그것의 연장으로 사후

23) 류경희, 『인도 힌두신화와 문화』, 7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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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복락도 꿈꿨다. 그런데 『우파니샤드』 시기에서는 현세의 부귀와 영화, 사후세계의
복락은 모두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 있는 것이어서 영원한 행복을 주지는 못한다고 여기고
궁극의 해방을 얻기 위해 탈속적인 명상의 길을 택하는 사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탈속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면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양자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힌두교의 주요한 과제가 되었는데,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이 둘을 적절히 잘 통합하고 있다.
크리슈나는 카르마 요가를 언급하면서 이기심 없는 행위,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는 행위
가 해탈의 길에 이르는 지름길임도 강조했지만, 좀 더 구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카르마 요
가란 모든 사람은 제각기 자기가 속한 카스트 속에서 자신의 다르마dharma를 다해야 함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다르마란 불교에서는 흔히 우주의 진리, 석가의 가르침 등의 번역되지
만, 힌두교에서는 우주의 진리이자 법칙인 동시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영원한 가르침, 그리
고 행해야 할 윤리 규범이라는 뜻도 지닌다. 크리슈나는 신이 자신의 다르마를 다하지 않으
면 이 우주가 멈추어 버리듯이, 인간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다르마를 다하지 않으면 사회는
붕괴되어 버린다고 힘주어 말한다.
서사시의 이런 가르침을 따라 후대 힌두교에서는 네 카스트가 각기 지켜야 할 윤리 규범
과 의무를 정하고,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네 가지 기본 덕목을 정하고, 인생
의 네 단계를 정했다. 네 가지 덕목이란 카마kama, 아르타artha, 다르마, 목샤이다. 즉, 사람
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생리적 욕망의 충족, 사람이면 누구나 풍요로운 삶의 향유, 우주
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사회적 종교적 의무의 수행, 궁극적 해탈의 추
구를 말한다. 인생의 네 단계란, 배우고 익히는 학습기學習期, 가정을 이루어 가족을 부양하
고 공동체의 복지를 위해 헌신하면서 동시에 삶의 여러 즐거움과 풍요를 누리는 가장기家長
期, 숲에서 은둔하며 모든 삶의 향유를 정리하는 임처기林處期, 그리고 세속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방랑생활을 하면서 오직 진리를 향한 구도에만 전념하는 수행자기修行者期이다. 이
중 앞의 세 시기는 수드라를 제외한 모든 카스트가 지켜야 하지만, 마지막 수행자기는 소수
의 사람들만 실천하는 덕목이다.
『라마야나』는 7권, 24,000 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하바라타』에 비해 분량도
적고 스토리도 훨씬 단순명료하기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더욱 인기가 높았다. ‘라마야나
Rāmāyana’는 ‘라마Rāma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라마Rāma는 초기 판본에서는 정의롭고 이
상적인 왕이자 영웅으로 묘사되었는데, 후대에 첨가된 부분에는 라마도 비슈누 신의 아바타
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라마의 아내인 시타Sītā도 비슈누 신의 아내인 락슈미의 화신
으로 그려진다. 이로 보아 『라마야나』도 비슈누 파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서사시는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힌두교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동남아시아 태국 등지에
서도 널리 유행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아수라들의 왕인 라바나가 데바들을 압박하여 세상의 질서가 흔들리자 비슈누가 아요디
아의 왕의 장남인 라마로 태어난다. 라마는 시타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왕위 계승을
준비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셋째 왕비가 자신의 아들 바라타를 왕위로 책봉할 것을 요구하
면서 라마를 14년간 유배 보낼 것을 주장한다. 라마는 그 뜻을 따라 동생인 락슈마나와 아
내 시타와 함께 유배지인 깊은 숲으로 가서 은둔한다. 한편 라바나는 인도 남단의 섬 랑카
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라마의 아내인 시타를 납치하여 랑카로 도망친다. 라마 형제가 시타
를 찾기 위해 방랑하다 원숭이들의 왕 하누만이 시타가 랑카에 유폐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라마의 군대는 하누만이 지휘하는 원숭이 군대의 도움으로 라바나의 군대를 격파하고 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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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구출한다. 라마는 시타가 라바나의 궁궐에서 1년간 지냈기 때문에 다른 남자를 택할 권
리를 주지만, 정조를 의심 받은 시타는 불의 제단을 만들고는 불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때 신들이 내려와 시타의 정조를 확인해준다. 라마는 유배기간을 마친 뒤에 야요디아의 왕
이 되었는데, 백성들 사이에 왕비의 정조를 의심하는 소문이 돌자 하는 수없이 다시 한 번
시타에게 정절을 입증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시타는 크게 상심하여 불 시련을 택하는
대신 그냥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이에 대지의 신이 그녀를 데려갔다. 라마는 크게 슬
퍼하다 지상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 비슈누 신의 형태를 취한다.
그 종교적 세계관의 기본틀은 『마하바라타』와 거의 비슷한데, 인간 사회의 다르마를
좀 더 강조하고 있다. 특히 시타의 정조에 관한 문제가 핵심적인 주제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힌두 사회의 가부장적 권위를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
다. 힌두 사회에서 남편이 죽은 뒤에 과부를 같이 화장시키는 풍습을 라마의 부인 시타의
이름을 빌려 시타라고 부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 지배할 때부터
시타를 법적으로 금지했고, 인도의 건국 이후 시타는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농촌 마을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몰래 시타를 행하여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힌두교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뿌라나』들


대체적으로 볼 때 서사시의 시대가 끝나고 난 뒤부터 『푸라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간주하면 된다. 『마하바라타』가 대략적인 틀을 완성한 것은 굽타 왕조 초기인 4세기이고,
초기 『푸라나』가 나타난 시기가 바로 그 즈음이기 때문이다. ‘푸라나Purāṇa’는 ‘고대의’
‘오래된’이라는 뜻으로서 예로부터 민간에 구전으로 떠돌던 신화와 전설 등을 집대성한 것
들이다. 서사시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종교적 주제들을 담고 있어 거의 힌두교 백과사전
이라 불린다. 우주생성론, 우주론, 신과 여신들의 계보, 왕들, 영웅들, 반신반인들, 순례자들,
사원들, 제례의식, 의약지식, 점성술, 광물학, 사랑이야기, 문법, 윤리도덕, 신학, 철학 등등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다.
『푸라나』의 수는 대략 200여개에 이르는데, 『마하바라타』나 『라마야나』 등의 서
사시들이 비록 비슈누 파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종파에 상관없이
모든 힌두교도의 사랑을 받는 것임에 비해, 『푸라나』는 기본적으로 각 개별 종파의 세계
관이나 의례 등을 담고 있어 종파적 성격이 강하다. 200개의 푸라나는 흔히 크게 둘로 분
류되는데, 더 널리 알려져 있고 대체로 더 큰 종파에서 사용하는 것을 『마하푸라나』라
부르고, 비교적 덜 알려져 있거나 지역신앙이나 개별 종파에 관련된 것들은 『우파푸라나』
라 부른다.
앞에서 간략하게 언급했듯이 힌두교의 만신전에서 가장 중요한 삼신 중에 브라흐마는 대
중적인 인기가 거의 없고, 비슈누를 숭상하는 종파와 쉬바를 숭상하는 종파가 주류를 이룬
다. 그외 여신들을 숭상하는 샥티파를 제3의 종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마하푸라
나』는 18개가 있는데, 비슈누 파에서 나온 것들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시바파에서 나온
것들이다. 샥티파의 『푸라나』도 있지만, 단독으로 나오지는 않고 비슈누 파나 시바 파의
푸라나에 편입되어 있다.
비슈누 파에서 나온 여러 푸라나 중에서도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바가바타 푸라나』이다. 『스리마드 바가바탐』이라고도 불리는데, 가장 먼
저 유럽어로 번역된 『푸라나』로서 1788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된 이후 유럽에서 여러 언어
로 번역되었다. 게다가 20세기 들어서는 크리슈나에 대한 박티를 강조하면서 거리에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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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크리슈나!”를 외치는 <국제크리슈나 의식 협회(ISKCON)>를 통해 전 세계에 널리 퍼지
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80년대 초반만 해도 힌두교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아주 가
까운 도반이 스와미Swami 프라부파다Prabhupada가 영어로 번역한 『스리마드 바가바탐』
에 심취하여 무려 50권이 넘는 그 방대한 힌두 경전을 열심히 읽는 바람에 나도 부분적이
나마 그 맛을 볼 수가 있었다. 『바가바타 푸라나』가 그만큼 전 세계에 널리 퍼졌다는 것
을 잘 말해준다.
『푸라나』의 주제들 중에서 중요한 것들은 이미 앞에서 다룬 내용과 중복이 많고, 중요
하지 않은 것들은 너무 번쇄하기 때문에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을 하나만 다루자면 우주의 창조와 파괴의 시간에 대한 주제다. 이것은 물론 우
주적 시간의 대한 이야기가 『푸라나』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베다』에서
부터 『우파니샤드』를 거쳐『마하바라타』에도 등장하고, 심지어는 인간사회의 법을 다루
는 인도 최고의 법전인 『마누법전』에도 등장한다. 『푸라나』가 가장 후대에 만들어진 방
대한 경전이기 때문에 가장 풍성하고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인도에서 시간은 칼라kala라고 불리는데, 칼라는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고 그 속
에는 여러 단위의 시간들이 있다. 그 중에서 우주적 시간의 가장 기본 단위는 유가yuga이
다. 유가는 네 종류가 있는데 시작과 끝에 10분의 1의 전이기간이 있다. 첫 유가인 크리타
유가는 4,000신년에 양 끝의 전이기간 각 400신년을 합해 4,800신년이고, 둘째 유가인 트
레타 유가는 3,000신년에 전이기간 각 300신년을 합쳐 3600신년이고, 셋째 유가인 드파파
라 유가는 2,000신년에 전이기간 각 200년을 합쳐 2,400신년이다. 그리고 넷째 유가인 칼
리 유가는 1000신년에 전이기간 각 100신년을 합쳐 1200신년이다. 네 유가의 기간은
12,000신년이다.
여기서 신년이란 신의 한 해를 가리킨다. 신의 하루는 인간의 360일에 해당하고 신의
한 해는 인간의 360년이다. 네 개의 유가를 다 합친 12,000신년을 1 마하유가라고 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432만년이다. 그런데 그 마하유가가 1000번이 반복되는 기간이
이 우주의 1회 존속 기간인데, 그것이 바로 1칼파kalpa이다. 칼파는 한자로는 겁劫으로 번
역되었는데 1겁은 인간의 시간으로 43억 2천만년이다. 1겁이 43억 2천만년이라면 영겁永劫
은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일까. 인도인들의 수학적 상상력은 정말 놀랍다.
그런데 인도인들은 각 유가마다 다르마가 운행되는 정도가 다르다고 여겼다. 먼저 첫째
유가인 크리타 유가는 모든 다르마가 완전하게 운행되는 지복의 시대이자 황금의 시대이고,
다음 유가인 트레타 유가는 다르마가 4분의 3밖에 운행되지 않고 사람들도 고통이 생기기
시작한다. 다음 유가는 다르마가 절반이고, 마지막 유가인 칼리 유가는 다르마가 4분의 1밖
에 운행되지 않고 인간의 고통, 근심, 기아, 질병 등이 극에 달하는 암흑의 시기라고 설명한
다. 그러다 칼리 유가의 끝 무렵에 오면 이 세상은 홍수나 불로 파괴된다고 말한다. 아득한
고대를 황금기로 보는 것은 고대인들의 일반적인 사유체계로 보인다.
다시 시간 단위로 돌아와서 1겁은 브라흐마가 하루 낮을 보내는 시간이다. 밤이 되어 그
가 잠에 들면 이 우주는 해체되어 브라흐마 신의 몸 안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이 때 우주는
구체적 형상으로 드러나지 않고 다만 잠재력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다시 브
라흐마신의 몸으로부터 우주가 재창조된다. 브라흐마의 낮과 밤은 같은 시간이기 때문에 브
라흐마의 하루는 2겁이다. 그러나 브라흐마의 생애도 유한하다. 브라흐마의 생애는 100년인
데, 그것은 무려 72,000겁이고, 인간의 시간으로는 311조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다. 그러나
브라마의 이 어마어마한 일생도 영겁의 시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주의 창조와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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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계속 반복될 뿐이다.
엘리아데는 인도인들이 엄청난 수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거대한 스케일의 우주적 창조
와 파괴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 출발점은 다른 대부분의 원시 사회와 마찬가지로 달의 주기
적인 성장과 소멸을 바라보면서 유추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엘리아데는 인도인들이 시간
의 단위를 무한적으로 증폭시킨 것은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메소포타미아의
천문학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한다. 그러면 인도인들은 왜 이렇게 시간의 단위를
무한으로 증폭시켜놓았을까? 엘리아데는 해탈이나 구원의 필요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시
간의 규모를 그렇게 과장했을 것이라고 본다.24)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도 때로는 지겹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파니샤드 이후에 카르마로 인한 삼사라의 굴레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진 가운데서 삶과 죽음의 윤회가 1,2 번, 1,2 만회, 1,2억 정도가 아니라 영겁으로 이어진
다고 생각해보라. 그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그런데 명상을 통해 불멸의 진아인 아트만을 발
견하는 순간, 영겁으로 이어지는 무한 반복은 끝이 난다. 게다가 『바가바드 기타』에서 신
의 화신인 크리슈나는 어렵고 까다로운 명상을 통하지 않고서도 자기에게 온전한 사랑과 헌
신을 바치는 사람들은 바로 구원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3. 힌두교 사상의 정화

이상 힌두교의 주요 경전을 중심으로 힌두사상의 대략적인 발전의 과정을 보았다. 힌두


교 종교사상의 본격적인 전개는 육파철학에 의해 이루어졌다. 육파철학은 시기적으로 보아
대체적으로 보아 불교와 자이나교의 흥기 이후에 발달하였는데 특히 불교철학의 활발한 전
개에 자극을 받아서 형성된 것들이다. 육파철학이 모두 『베다』나 『바가바드기타』의 사
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힌두교의 정통철학으로 여겨지고 있다.
육파철학은 상키야 학파, 요가학파, 니야야 학파, 바이세시카 학파, 미맘사 학파, 베단타
학파를 가리키는데 그 중 가장 비중이 크고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학파를 들자면 샹키
아 학파, 요가 학파, 그리고 베단타 학파를 들 수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힌두교의 세계관을
살펴보자.

상키아-요가 학파
육파 철학에서 상키아Saṁkya 학파와 요가Yoga 학파는 그 기본적인 세계관을 거의 대부
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흔히 두 학파를 합쳐 상키아-요가 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
학파 중에서 시기적으로 좀 더 먼저 탄생하여 사상적 기초를 다진 학파는 상키아 학파이고,
조금 더 후대에 성립되어 실제 수련의 차원에 좀 더 치중한 학파가 요가 학파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상키아 학파를 먼저 설명하도록 하겠다.
사실 상키아 학파는 일반적으로 육파철학 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학파로 여겨진다. 옛
날에 인도학자들은 상키아 학파가 아주 옛날 『베다』 시대의 현자인 카필라Kapila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고 자기 학파의 권위
를 높이기 위해 무조건 고대로부터 연원을 찾으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중기 『우파니

24) 미르치아 엘리아데, 이재실 옮김, 『이미지와 상징』, 85-8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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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드』에서도 그 이름이 등장하고25) 그 사상적 단서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대략 기원전
4-5세기 경에는 소략한 학설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마하바라타』에서는 상키아-요
가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에는 분명 학설로서의 일정한 체계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키아 학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한 최초 문헌은 대략
A.D 4세기 경 이슈바라크리슈나Īśvarakŗṣṇa가 저술한 『상키아 카리카Kārikā』이다.
흔히 상키아 학파의 주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는 중기『우파니샤드』의 두어 구절
을 살펴보자.

한 쌍의 두 마리 새가 항상 나란히 앉아있는 자리는 한 그루 나무이니, 그 중 한 새


는 달콤한 과일을 쪼아 먹고, 다른 새는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구나. 『슈베타슈
바타라 우파니샤드』 4장 6절

감각들을 넘어서면 마음이 있고, 마음을 넘어서면 진리가 있고, 진리를 넘어서면 위
대한 아트만, 그것을 넘어서면 그보다 훌륭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존재 미현인이 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존재를 넘어서면 푸루샤가 있는데 그는 하늘의 광할함과 같으며
그 안에 세상에 있는 어떠한 특성도 갖고 있지 않은 자로다. 그 푸루샤를 알게 되면 그
는 해탈하여 불멸을 얻으리라. 『카타 우파니샤드』 3부, 1장, 7-8절

상키아 학파의 기본적인 특징은 이 세계를 푸루샤puruṣa와 프락크리티prakŗti라는 두 개


의 형이상학적 원리로 설명하는 이원론에 있다. 이 중에서 푸루사는 순수 정신을 가리키고,
프라크리티는 삼라만상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자 질료인質料因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철
학에 익숙한 사람들은 데카르적 심신이원론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렇지가 않다. 프라크리
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물질의 원인이자 질료일 뿐만 아니라 감각, 지각, 사유
등의 정신적인 작용들의 원인이자 질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푸루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
반적인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관조자를 의미한다. 첫 번째 예문에서 한 그루
의 나무는 우리의 몸을 가리키고, 달콤한 과일을 쪼아 먹는 새는 프라크리티에 속하는 일반
적인 자아이고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는 새는 순수관조자인 푸루사를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예문에서는 직접적으로 푸루사를 언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파니샤드에서 아
트만은 궁극의 자아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푸루사의 하위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아트만은
‘진리를 넘어서는 위대함’의 특성이 있는데 비해 푸루사는 이 세상의 어떤 특성도 지니지
않고 있다. 이렇게 자아를 그 어떠한 특성도 없는 순수정신인 푸루사와 그 외의 것으로 나
누는 이원론이 상키아 학파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다.
『마하바라타』에서는 상키아-요가 학파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자주 등장하고 그 설도
훨씬 복잡하다. 일부는 정통 상키아 학파의 설과 부합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약
간씩 차이가 있다. 아마도 『마하바라타』의 성립시기에 유행했던 상키아-요가 학설은 후
대 하나의 정통 학설로 정립되기 이전의 여러 학설들의 흔적일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내용이 복잡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언급은 생략하고 바로 정통 상키아 학설을 살펴보자.
정통 상키아 학파에서는 나와 세계를 25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푸루사는 나와 세계를 관

25) 중기에 나온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6장 13절에는 “상키아-요가를 통해 근원인 지고의


아트만을 아는 자는 모든 굴레에서 풀려나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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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는 순수정신으로서 아무런 특성도 없고, 따라서 아무런 변화도 없다. 프락크리티는 나
와 세계를 전개시키는 근원적 질료이기 때문에 흔히 원질原質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프라크
리티는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타마스tamas 세 가지의 구나guṇa를 지니고 있다. 구나는
속성 내지는 성질을 의미하는데 사트바는 순수함, 미세함, 가벼움, 빛남의 구나를 지니고 있
다. 라자스는 활력과 운동의 구나를 지니고 있고, 타마스는 무거움, 조잡함과 탁함, 어두움
의 구나를 지니고 있다. 이 세 가지 구나는 인도의 명상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개
념이다.
현상계의 물질의 차이는 바로 프라크리티의 이 세 가지 구나가 어떻게 배합되어 있는가
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의 작용 또한 이 세 가지 구나의 배합에 의해 결정된
다. 사트바 구나가 지배적일 때는 우리의 마음은 고요하고 가라앉아 있고, 라자스 구나가
지배적일 때우리의 마음은 들떠있거나 격동적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타마스 구나가 지배적
일 때 우리의 마음은 무지하고 나태하고 탐욕스러운 상태에 빠진다. 우리가 먹는 음식도 이
세 가지 성질에 따라 분류가 된다. 고기와 술 등은 타마스 구나에 속하고, 고추나 카레 등
의 양념은 라자스 구나에 속하고 정갈한 곡류, 잘 익은 과일, 순수한 우유나 버터 등은 사
트바 구나에 속한다.
원질인 프라크리티에서 세 가지 구나의 배합에 의해 나머지 23가지 요소가 나온다. 밝은
지성이라 불리는 붓디buddhi가 먼저 나오고 거기서 자기의식인 아함카라ahaṁkāra가 나온
다. 그리고 아함카라로부터 헤아리는 마음, 다섯 가지 감각기관, 다섯 가지 행위 기관, 다섯
가지 감각의 대상, 다섯 가지 물질의 요소가 각각 나온다.
이렇게 삼라만상이 어떤 궁극적 실재로부터 변화되어 나온다고 보는 학설을 전변설轉變
說이라 한다. 전변설은 어떤 원인 속에 결과가 숨어 있다고 보는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에서
나온 주장이다. 어떤 원초적 실재, 궁극적 실재 속에 나중에 사물로 변화될 요소가 이미 내
재되어 있다고 보는 설이다. 예컨대 포도의 씨앗 속에는 나중에 포도로 자랄 수 있는 요소
가 이미 있다. 그래서 물과 햇빛을 잘 받고 시간이 흐르면 포도씨앗은 포도로 변화할 수 있
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상키아학파는 프라크리티 속에 23가지 요소가 이미 숨어 있다가 세
가지 구나의 작용으로 변화되어 나온다고 본다.

순수정신

원질 - 지성 - 자기의식 - 의식
- 눈, 귀, 코, 혀, 피부
- 성대, 손, 발, 항문, 생식기
- 소리, 감촉, 색, 맛, 향 - 공空, 풍風, 화火, 수水, 지地

위의 도표를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듯이 프라크리티가 삼라만상의 원질이어서 거기


서 23가지 요소가 다 흘러나온 데 비해 푸루샤는 삼라만상의 원인도 결과도 아닌 어떤 존
재이다. 푸루샤는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이다. 그것은 감각이나 사고는 물론이고 최고의 순
수지성으로도 지각할 수 없는 것으로서 모든 감각이나 사고 및 지성 작용까지 멈추었을 때
나타나는 순수정신이다.
푸루샤는 이 세상의 어떤 물질적 정신적 요소와도 분리되어 있는 초월적 존재라는 의미
에서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아트만이나 브라흐만과 유사하다. 그러나 큰 차이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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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우주의 유일한 실재인 반면 푸루샤는 개체의 수만큼 존재하는
것이다. 즉, 상키아 학파는 개개 존재의 순수정신만 인정하고 우주 전체를 총괄하는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정통 상키아 학파는 무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상키야 학파의 궁극적 목표는 프라크리티에 의해 나타나는 마음의 작용을 자기 자신이라
고 여기는 착각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인 푸루샤를 찾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애욕으로 들끓는 거친 감각작용부터 점차 순화시켜나가면서 사고 작용도 멈추고 나아가 순
수한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붓디의 작용도 멈추는 실제적인 수행을 해야 한다. 상키야 학파
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에 있어서는 요가학파의 이론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요가 학파를 완성한 사람은 파탄잘리이다. 그가 남긴 『요가수트라』는 단순히 요가학파
의 경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파를 떠나 요가를 수행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
다. 파탄잘리의 생존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기원후 4세기로 보는 것이 정설이
다. 한 때 파탄잘리는 기원전 2세기경에 산스크리트 문법서를 쓴 파탄잘리와 같은 사람이라
는 설이 있었지만, 많은 연구에 의해 그 설은 부정되는 추세다.
요가학파는 세계관에 있어서는 상키야 학파의 이론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으며, 거기에
바탕을 둔 구체적인 수행 체계를 중점적으로 논하고 있다. 하나의 큰 차이점이 있다면 상키
아 학파에서는 다수의 푸루샤만 인정하였던 데 비해 요가학파에서는 푸루샤 외에 이슈바라
Īśvara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슈바라는 흔히 자재신自在神으로 번역되는데 그냥 순수
한 관조자인 개아의 푸루사와는 달리 일종의 초월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요가수트
라』23경은 “혹은 자재신에 대한 경건한 명상을 통해서도 (삼매에 도달한다.)”이고, 뿐만 아
니라 26경에서는 “자재신은 시간에 의해 한정되지 않기 때문에 선조들에게도 스승이다.”라
고 말하고 있는데 이들을 보면 자재신이 하나의 경배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요가학파에서
말하는 자재신의 구체적인 성격이 무엇인지, 그것이 『우파니샤드』의 브라흐만이나 서사시
에 등장하는 신들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 많은 설들이 있다. 자재신은 궁극적인 실
재나 전지전능한 구세주라기보다는 프라크리티의 다양한 전개과정을 조화롭게 인도하며 동
시에 모든 구도자들로 하여금 푸루샤를 해방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어떤 존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는 서론에서 명상과 세계관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요가학파에서 주
장하는 명상 수련 체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연히 요가 학파의 세계관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요가학파는 그 기본적인 세계관을 상키아 학파와 공유하고 있
다. 『요가수트라』의 제1경은 “이제 요가의 가르침이 (시작된다)”이고 본격적인 가르침의
첫 구절인 제2경은 “요가는 마음의 작용을 억제하는 것이다.”이다. 왜 마음의 작용을 억제하
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상키아의 학설에 따르면 모든 마음의 작용이 다 멈추었을
때 비로소 푸루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베단타 학파
육파철학 가운데 가장 늦게 형성되었으며 후대 힌두교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지금도 주류를 이루고 학파는 베단타학파이다. 베단타는 『베다』의 끝, 즉 『우파니샤드』
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우파니샤드』의 철학사상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의
미로 베단타학파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베단타학파 속에는 다양한 갈래가 있지만 다양한 현
상세계의 배후에는 단 하나의 궁극적이고 통일적인 실재가 있다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주
장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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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단타 학파의 대표자는 A.D. 8세기 전후에 활동한 상카라이다. 상카라는 불교의 논사들
과 치열한 논쟁을 벌리면서 힌두교의 우수성을 널리 선양했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관
점에서는 불교적 유심론도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이 세계가 푸루사와 프락크리티로 이루어져
있다는 상키야의 이원론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는 이 우주에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모
든 형상과 성질과 차별성과 다양성을 초월한 브라흐만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다양한 현상세계는 어디서 나온 것이며 무슨 원
리로 그렇게 존재하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상카라는 현상세계는 우리가 지닌 무지의 힘
과 브라흐만이 펼치는 마야, 즉 환상의 힘이 서로 만나서 가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
였다. 즉, 현실세계는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상의 세계일 뿐이
다. 이것을 가현설이라고 한다. 상카라의 가현설도 인중유과론에서 나온 것이다. 브라흐만이
라는 궁극적인 실재가 원인이고 거기서 마야의 힘에 의해 가상의 세계라는 결과가 펼쳐진
것이다. 프라크리티라는 원질이 구나의 작용에 의해 여러 가지 요소로 변화되어 나왔다는
전별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상카라에 따르면 프라크리티와 푸루사 따위의 이원적 요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고 심
지어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구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상카라에 의하면 참된 자아인 아트만은
순수하고 무차별적인 의식이다. 브라흐만과 마찬가지로 아트만도 어떠한 형상이나 성질도
없고 차별성과 다양성이 없다. 아트만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일상적인 어떠한 경
험에 의해서도 인식될 수 없으며 다만 깊은 명상을 통해 인식주체, 인식대상, 인식활동을
넘어선 고차원적 인식상태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아트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구분이 사라지고 아와 비아의 경계도 사라지기 때문에 아트만
이 바로 브라흐만이고 브라흐만이 바로 아트만이 되는 것이다. 상카라의 학설은 물질과 정
신, 브라흐만과 아트만, 아와 비아 등의 어떠한 이원론도 철저하게 부정하기 때문에 흔히
불이론적不二論的 베단타 철학이라고 한다.
사실 상키아 사상의 이원론이나 베단타 사상의 일원론은 모두 그 뿌리를 『우파니샤드』
에 두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많은 익명의 사상가들에 의해 집적된 문헌이기 때문에 일
관성이 부족한 면이 있지만, 범아일여라는 구절이 보여주듯이 그 기본적인 색깔은 일원론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자아와 세계의 구성 원리에 대해 명료한 설명을 하지 못한 초보적인 일
원론이었기 때문에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순수관조자와 원질이라는 이원론을 상정하고
그 원질이 전변하여 몸과 마음, 그리고 대상세계를 만들어냈다는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26)
그 주장이 나름 정교한 이론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많은 지지를 받아왔는데,
상카라라는 위대한 사상가가 나타나 보다 정교한 논리를 갖춘 새로운 차원의 일원론을 펼치
자 상키아의 이원론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번에는 명상적인 관점에서 두 사상의 차이를 살펴보자. 상키아-요가 학파에 의하면
깊은 명상을 통해 프락크리티에서 나온 자아의식이나 밝은 지성마저 다 멈추었을 때 순수한
관조만 남는다. 그러면 상카라의 사상에 따라 명상을 하여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구분이 사
라진 경지에 이르면 무엇이 남는가? 상카라는 깊은 명상을 통해 이런 경지에 이르렀을 때는
다만 삿sat, 칫chit, 아난다ananda만 남는다고 한다. 삿, 칫, 아난다는 각각 존재, 의식, 지복
으로 번역된다. 존재 그 자체를 의식하면서 지복의 상태에 머문다는 뜻 정도로 풀이하면 될
것이다. 명상의 궁극의 경지는 어떠한 생각이나 느낌도 초월한 세계라고 말하지만, 현실적
으로 볼 때 분명의 차이가 있다. 순수 관조만 남는다고 할 때는 무언가 담백한 느낌을 주

26) 정승석, 『인도의 이원론과 요가』, 38-3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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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삿, 칫, 아난다가 남는다고 할 때는 무언가 풍성하고 달콤한 느낌을 준다.
옛날 상키아-요가 학파가 번창할 때 『요가수트라』에 따라 명상 수행을 열심히 하여
삼매의 경지에 들었을 때는 분명 초롱초롱한 순수 관조의 느낌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카라의 불이론적 베단타 철학이 유행하고 난 뒤에 그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사람
들은 깊은 삼매를 통해 삿칫아난다의 풍성하고 달콤한 느낌을 더 많이 가질 것이다. 실제로
현대의 요가 수행자들은 거의 대부분 베단타 사상에 의지하여 명상을 하기 때문에 그들이
체험하는 삼매의 세계는 그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상의 불이론적 입장만을 강조하다보면 한 가지 큰 문제가 발생한다. 고매한 식
견과 강한 정진력을 지닌 수행자들이야 사상적으로도 명상적으로도 크게 만족할 수 있겠지
만, 박티 요가를 선호하는 일단 대중들은 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불이론적
베단타 사상을 철저하게 지키려면 기존의 힌두교에서 형성된 모든 신들을 부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브라흐만조차도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브라흐만은 인간을 사
랑하고 벌을 주고 심판하는 야훼나 알라와는 달리 어떠한 속성도 지니지 않는 순수한 존재
이고 바로 자신에게 내재된 아트만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바로 브라흐만인데 어떻게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상카라는 높은 수준의 인식상태에 이르렀을 때는 아무런 속성도 없
는 브라흐만을 인식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아트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낮은
수준의 인식상태에서는 브라흐만을 현상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최고신으로서 인식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는 설을 제시하였다. 브라흐만 자체가 둘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수준에 따라서 둘로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현실적인 타협이라고 볼 수 있지
만 이 타협으로 인해 상카라의 사상은 대중적으로도 널리 지지를 받게 되었고 결국 힌두 종
교사상의 주류가 될 수 있었다.
상카라가 활약하였던 당시는 후기 대승불교 사상이 흥성하고 있을 때이다. 상카라의 불
이론적 베단타 철학은 힌두교의 사상 수준을 격상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불교 철학
의 퇴조와 힌두 철학의 흥성을 가지고 왔다. 수많은 후인들이 그의 저서에 주석을 달면서
그를 추앙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후대에 박티 요가가 크게 유행하면서 상카라의 철학에 불만을 지닌 사람들이 나
타났다. 상카라가 주장한 높은 수준의 인식상태와 낮은 수준의 인식상태의 구분은 박티 요
가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신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만족스러운 학설이
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카라의 불이론을 수정하려는 사상가가 나타났는데 바로
11세기의 라마누자였다. 그의 사상은 한 마디로 말해 상카라의 불이론적 철학과 상키아 학
파의 이원론적 철학을 절충한 것이었다.
우선 그는 상카라의 설을 좇아 브라흐만의 유일한 실재성을 인정했다. 브라흐만의 유일
한 실재성을 인정했으니 분명 불이론이라 할 수 있다. 라마누자는 브라흐만이 상카라가 말
하는 것처럼 아무런 속성이 없는 완벽한 비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속성과 차별성을 지니고
있는 인격적인 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을 흔히 한정불이론限定不二論이라고
부른다.
그가 크게 반대한 것은 상카라의 가현설이다. 상카라에 따르면 이 현실세계는 그저 마야
의 힘으로 나타난 거짓 세계일뿐인데, 라마누자는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상카라가 반대했던 상키아 학파의 전변설을 응용하여 이 세계는 원래 모두 브라흐만
속에 내재되어 있다가 그로부터 전개되어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라크리티 대신에 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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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만을 대입한 것이다.
라마누자에 따르면 브라흐만에는 두 개의 상태가 있다. 하나는 세계가 아직 브라흐만으
로부터 전변되어 나오지 않은 상태이거나 혹은 세계가 모두 해체되어 브라흐만 속으로 흡수
된 상태이고, 또 하나는 이 세계가 브라흐만으로부터 전변되어 나온 상태이다. 그의 주장은
『푸라나』에서 나온 주장, 브라흐마의 낮은 1겁으로서 이 세계가 그로부터 창조되어 펼쳐
진 상태가 지속되는 시간이고, 브라흐마의 밤도 1겁으로서 이 세계가 해체되어 브라흐마 속
으로 흡수된 상태가 지속되는 시간이라는 주장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라마누자는 비슈누 숭
배자로서 비슈누 파의 『푸라나』에 깊게 심취했던 사람이다. 사상적으로 볼 때 다소 유치
한 면이 있지만, 후대로 갈수록 신에 대한 박티를 선호했던 힌두교의 풍토 아래서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힌두교의 명상

1. 고대 인도의 명상적 전통
고대 인더스 문명 유적지에서 발굴된 인장 중에는 명상하는 모습의 신상이 담긴 것도 있
다. 우리는 이를 통해 어렴풋이 인도에서 명상의 전통이 아주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리수 나무에 대한 숭배도 명상적 전통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고대 인도인들이 보
리수 아래서 명상을 하면서 무언가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낀 가운데 보리수를 밤하늘의 중심
이 되는 북극성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고 공중에 매달린 뿌리들로부터 빛의 광선을 느끼는 것
도 명상 행위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전통이 있었기에 석가모니도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하다 깊은 깨달음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추측일
뿐, 문자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러면 베다 시대에는 어땠을까? 『베다』에도 명상을 추측하게 하는 시구들은 거의 없
다. 다만 『리그베다』10만달라, 136숙타에는 장발의 무니muni를 묘사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 부분이 약간 명상과 관련성이 있다. 무니는 후대에는 성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27)
그러나 그 당시는 성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특이한 행색을 지닌 사람을 가리켰다. 그런
데 그의 행색이 요가 수행자와 통하는 면이 있다.

장발자는 불을, 장발자는 물을, 장발자는 천지를 지탱하노라. 장발자는 만물을 보기


위한 태양이니 장발자는 이러한 광명으로 불리노라.
바람을 허리띠로 두르고 갈색의 더러운 옷을 입은 무니들은 바람의 질주를 뒤따라 신
들이 들어갔던 그것으로 가노라.

장발자라는 모습은 기존의 사회의 틀을 벗어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불과 물


과 천지를 지탱한다는 말은 무언가 보통 사람이 행할 수 없는 위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바람을 허리띠로 두르고 더러운 옷을 입은 무니들이 바람의 질주를 따라
신들이 들어갔던 그것으로 가노라.”라는 구절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나체

27) 석가모니의 모니의 원래의 발음이 무니인데,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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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나 누더기 옷을 입은 수행자가 명상이나 황홀경 속에서 초월의 세계를 노니는 것을 말
해준다. 아마 이런 고행 수행자의 전통은 아리아인들의 전통에는 없는 것으로서 매우 낯설
게 느껴졌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7절의 내용은 “그를 위해 바유를 휘저어 섞고, 쿠난나마는 짜냈나니, 장발자는
그것을 그릇에 담아 루드라와 함께 마셨노라.”인데, 바유와 루드라는 바람의 신과 폭풍의 신
이다. 쿠난나마는 마녀로 간주되거나 약초를 짜는 것과 관련되어 번역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루드라인데, 루드라 신은 흔히 시바 신의 원형으로 묘사되고, 시바신은 요가 수행자의
수호자로 여겨진다. 이런 저런 상황으로 볼 때 분명 요가 수행자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자료가 너무 단편적이어서 그 당시에 진짜 요가수행자가 있었다고 단
언하기는 힘들다.
그러다 우파니샤드 시대에 들어오면 명상 수행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보인다. 왜냐하
면 우파니샤드의 저자들은 대부분 진리를 탐구하는 사상가인 동시에 실제적인 명상 수행도
행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 중기에 나온『카타 우파니샤드』 3부, 1장 11에
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처럼 감각들이 고정되어 미동하지 않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하는 것을 요가라고


부른다. 구도자는 조금의 자만심도 갖지 않는 지경에 이를 수 있으니 요가로써 마음의
내달림과 평온함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가가 할 수 있는 것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감각을 제어하여 미동하지 않는 단


계에 이름과 마음의 내달림과 평온함을 조절할 수 있음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 날의 명상
교사가 수련생에게 가르치는 말과 그다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경지들은 요
가 수련의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경지이다. 그
런데 바로 몇 절 뒤인 16절에는 매우 비밀스러운 테크닉이자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푸루샤의 심장에는 101개의 기도가 흐르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머리의 정수리를


통과하는 것이다. 이 길을 통해 위로 향하는 사람은 불멸을 얻게 되고, 그 외 다른 여러
방향의 기도를 따라는 사람은 속세의 단계에 머무르게 된다.

푸루샤의 의미가 워낙 많기 때문에 이 문장에서 푸루샤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단정


짓기는 힘들지만 대략 명상 수행자의 몸 가운데서 더욱 미세한 몸, 좀 더 근원적인 몸을 가
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해부학적으로 심장에는 혈관만 있지 기도는 없으며 더군
다나 101개의 기도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푸루샤의 심장에 흐르는
101개의 기도는 분명히 육체의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유체도 아니고 그보다 더 근원
적인 몸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심장 속의 기도가 101개라는 구절은 여기에만 나타나
는 것이 아니라 『찬도기야 우파니샤드』8장, 6편, 6절에도 비슷한 형태로 나온다.

심장 속의 기도들은 백하고도 하나요, 그 중 하나가 머리의 정수리를 향해 가니, 그


길은 위로 올라가 불멸을 얻는 자리로 통하도다. 그러나 다른 기도들은 다른 방향으로
가서 모두 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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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도기야 우파니샤드』는 전체 우파니샤드 중에서도 상당히 이른 시기에 나온 문헌인
데, 그 시기는 대략 축의 시대의 출발점인 기원전 7-8세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 단락
이 위의 단락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축의 시대가 시작될 당시부터 우파니샤드
의 현인들 사이에서는 불멸의 길로 나아가게 해주는 명상 비법이 있었고, 그것을 소수의 구
도자들에게 전하면서 공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때로는 이런 신빙성이 떨어지는 비법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상세한 명상법을 설명하는 구
절도 있다.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2장 8절부터 14절까지 살펴보자.

상체의 세 부분(가슴, 목, 머리)을 곧추 세워 몸의 균형을 유지하고 감관들을 마음과


함께 심장에 안착시켜, 브라만(옴 소리)의 뗏목으로 무시무시한 급류를 건널 수 있다.
여기서 숨들을 억제하고 나서, 감각의 내달림을 통제하라. 숨을 더 이상 절제할 수
없을 때 아주 조금씩 콧구멍으로 숨을 내쉬라. 현자는 사나운 말에 메인 수레를 모는 마
부처럼 신중하게 마음을 몰아야 할 것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 평탄하고 깨끗하고 자갈이나 불이나 모래가 없는 곳, 물소리
가 없고, 습기가 없는 곳, 마음에 잘 맞고 눈을 괴롭히지 않는 곳, 바람을 피하기에 안전
한 동굴에서 요가에 전념해야 한다.
안개, 연기, 태양, 바람, 불, 떠다니는 불똥, 번개, 수정 이러한 것은 명상의 초반에
브라흐만의 표상으로 만들어져 나타나는 것들이다.
명상 중에 다섯 가지 근원 물질을 느끼면 그는 요가의 불로 달구어진 몸을 갖게 되어
이제 더 이상의 병고나 늙음, 죽음을 겪지 않으리라.
요가 수행자의 몸이 가벼워지고, 질병이 없어지며, 차분해지고, 몸에서 윤택이 나며,
목소리가 듣기 좋게 변하고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나고, 배설물이 아주 적어지는 등등 이
러한 현상은 요가 수련의 초기에 생기는 현상이다.
먼지 등으로 더렵혀진 거울을 깨끗하게 닦고 나면, 밝게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추어 보
여주듯, 수행자가 그처럼 아트만의 본체를 보고 나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성취한 것이
니 더 이상의 슬픔이 없게 된다.

8절은 명상 수련을 하기 위해 필요한 올바른 자세와 집중처, 그리고 옴 수련의 효과 내


지는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고, 9절은 호흡법을 통해 감각의 교란과 마음의 산란함을 다
스리는 방법을 설명하고, 10절은 명상 수행을 하기에 좋은 장소를 선택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고, 11절은 명상 수행 도중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이한 심신의 현상에 대처하는 법을
말하고 있고, 12절은 명상 중에 지수화풍공 다섯 근원물질을 느끼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는
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13절은 현대의 요가 명상 수련원의 광고문에서도 볼 수 있을 정
도로 유명한 문장이고 14절은 명상 수행의 경지가 깊어져 깨달음에 이른 경지를 말해주고
있다. 앞 뒤 순서가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수련의 단계를 매
우 잘 설명하고 있다.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는 중기에 나온 것인데 이로 보아 우파니샤드 시대의 중
기, 즉 축의 시대의 한 가운데를 점하는 기원전 4-5전후에는 명상 수련에 대한 체계가 이
미 상당 수준으로 갖추어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대략적으로 불교와
자이나교가 흥기한 시기에 해당한다. 인도의 구도자들 사이에 명상은 이미 보편적인 수행의
도구가 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주 이른 시기부터 이러한 전통이 있었기에 인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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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명상이 거의 모든 종교의 핵심적인 수행법으로 자리 잡을 수가 있었다.

2. 힌두교를 대표하는 요가 명상
사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요가는 고대 인도사상사에 등장하는 육파철학 가운데 하나이
다. 그러나 요가라는 것은 육파철학 가운데 하나인 요가학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해탈
을 추구하는 힌두교의 전문 수행자들이 행하는 심신수련체계 전체를 통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도에는 수많은 요가 문파가 있고 다양한 명상 테크닉이 있다. 그 다양한 요가들은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주만물 속에 실재하는 존재이자 근원적인 존재인 브라흐만과의 합일, 즉 범
아일여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요가의 ‘묶다’라는 의미의 가장 심오한 의미는 바로 유한한 개
별자를 무한한 우주와 하나로 묶는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전요가,『요가수트라』의 8단계 요가
고대 요가학파의 집대성자인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는 해탈에 이르는 명상 수행의
단계를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인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최고의 경지인 삼매를
증득하는 데까지 여덟 단계로 나누어 매우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설이 종합적이고
체계적이어서 지금도 요가의 개요를 설명할 때 널리 쓰인다. 흔히들 『요가수트라』의 요가
를 팔 단계 요가, 혹은 고전요가라 부른다.
첫째 단계는 야마yama인데 흔히 금계禁戒로 번역된다. 사회적으로 지켜야 할 계율이라
고 할 수 있다. 살생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성욕을 자제할 것, 불
필요한 소유를 하지 말 것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계율과 거의 비슷한데 특히 불살
생의 계율인 아힘사ahimsa는 인도의 종교사상 전반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계율이다. 불살
생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 물질적 정신
적 폭력을 행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비폭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거짓말을 하지 말
것, 도둑질을 하지 말 것 등은 요가를 수행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도 반드시 지켜
야 할 기본적인 계율이라 할 수 있다.
이보다는 조금 더 지키기 어려운 계율은 성욕의 통제와 소유의 자제이다. 특히 성욕의
통제는 요가 수행자에게 매우 중요한 계율이다. 일차적으로는 부적절하거나 과도한 섹스를
금하는 것인데 때로는 성적 욕구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가는 성 에너
지를 매우 중시한다. 왜냐하면 성 에너지는 그 어떤 욕구보다도 강력한 것으로서 성적 쾌락
에 지나치게 탐닉하게 되면 육체적으로도 쇄약해질 뿐만 아니라 정신력을 약화시키고 정신
의 집중을 어렵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러한 성적 욕구가 제어될 수만 있다면
성 에너지를 명상적 에너지로 전환시켜 명상을 급속도로 향상시킬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성적 욕구를 제어하는 것은 요가 수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니야마niyama이다. 야마가 주로 사회적 도덕률과 상관이 있는 반면 니
야마는 내면적 종교적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권계勸戒라고 번역된다. 청정, 만족, 고
행, 학습, 자재신에 대한 봉헌 등으로 구성된다. 이 중 오해의 소지가 많은 것은 고행인데
흔히 고행이라고 하면 촘촘히 박힌 못 침대 위에 눕는 행위 따위의 육체를 학대하는 행위와
혼동한다. 이것은 고행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고행은 타파스인데,『리그베다』의 창조신화를 언급할 때 설명했듯이, 원래를 열기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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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는 말이었고, 나중에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뜨거운 노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마누법전』11장 237절을 보면 “건너기 어렵고, 가지기 어렵고, 접근하기 어렵고, 행하기
어려운, 이 모두는 고행을 통해 이룬다. 고행은 어려운 것을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고, 12장 104절에는 “고행과 학문은 브라만에게 지고의 행복이다. 고행으로 죄를 없
애고 학문으로 불멸을 얻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타파스라는 말이 얼마나 풍부한 뜻이 있는
단어인지 알 수 있다. 명상적인 관점에서 나온 권위 있는 주석서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의
고행이란 배고픔과 목마름, 찬 것과 뜨거운 것, 서있는 것과 앉아있는 것 등 존재를 특징짓
는 서로 반대되는 극단의 것들 사이의 모순을 극복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것은 인
간존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요가수트라』에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요가 수행을 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
한 계율 중의 하나는 음식에 대한 통제이다. 요가에서는 육류를 섭취하는 것을 강력히 금하
고 있다. 인도적 토양에서 나온 불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요가나 불교에서는 육류를 탐식하
는 것은 살생의 업보를 몸에 축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관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수행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육류를 먹으면 육체적인 힘
은 왕성해지겠지만 정신 수양에는 별로 좋지가 않다.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고 명정하게 하
는 데에는 역시 담백한 채소류가 더욱 좋다.
그런데 계율이란 묘한 것이어서 억지로 금하게 되면 이상하게도 더욱 사람을 유혹한다.
나는 요가 수행에 접하기 전에는 고기를 아주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요가 수행을 시작하면서
비장한 각오를 하고 모두 끊어버렸다. 육류만이 아니라 어패류 및 계란까지도 금하였다. 처
음 몇 달 동안은 워낙 구도에 대한 열정이 워낙 강하여 큰 문제가 없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
나면서 육류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은 그다지 원하지 않지만 문제는 입이
었다. 처음에는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하여 무조건 욕망을 억눌렀다. 그러다가 도저히
욕망을 견디기 어려울 때는 간혹 한 번씩은 마음껏 먹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수행에 대한 안목이 생기면서 욕망이란 단순히 억압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
을 알고 욕망에 대하여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관법 위주의 수행을 하였다. 관법 수행을
하면서 점차 욕망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욕망을 일으키고 욕망 속에서 허덕이고 또한 그
욕망을 억누르려고 노력하는 내 마음의 정체도 알게 되었다. 또한 욕망이란 것은 참으로 묘
한 놈이어서 그 정체가 드러나면 서서히 사라지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울러 계속되는 요가
체조와 명상을 통하여 섬세한 감각이 살아나면서 점차 고기를 비롯한 탁하고 거친 음식에
대한 욕구는 자연스럽게 순화되었다. 술이나 담배에 대한 욕구도 마찬가지였다.
수행을 하는 과정에 있어 계율을 지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에 너무 얽매이게 되면 보다 소중한 것을 놓치기가 쉽다. 더군다나 계율 가운데는 대체
로 시공을 초월해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특수한 시간적 공간적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도 있다. 살인을 하지 마라 같은 경우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편적으로
지켜야 하는 계율이지만 고기를 먹지 마라는 후자에 가까운 것이다.
인도는 더운 나라이기 때문에 고기를 많이 먹으면 몸에 불필요한 열도 많이 나서 정신
수행에는 그다지 좋지가 않다. 게다가 그렇게 더운 나라에서는 육류를 잘 못 먹으면 식중독
에 걸릴 확률도 훨씬 높다. 그러나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고기가 어느 정도 필요
하다. 티베트의 유명한 성자 밀라래빠는 고기와 술을 먹고서도 그것을 먹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만약 에스키모 인에게 물고기를 먹지마라고 하면 그들
은 먹을 것이 없게 된다. 문제는 틀에 박힌 계율에 얽매이기보다는 수행자 스스로 자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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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맞은 계율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자기합리화에 빠지기 쉽다. 수행자는 스스로 자신을 엄하게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지금은 특별하게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육류는 그다지 먹지
않는 편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먹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내 스스로 자율적으로 조절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다.
나는 육류를 일체 먹지 않기도 하였고, 어떤 때에는 곡류를 끊고 순수하게 야채와 과일
만으로 먹는 생식을 오랫동안 실천하기도 하였다. 물론 단식도 수없이 많이 시행하였다. 그
러한 과정을 다 거친 뒤에 이제는 나름대로 자기에게 맞는 식생활을 찾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요가의 첫 두 단계인 금계와 권계는 모든 형태의 금욕주의적 종교수양
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요가에만 고유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야먀와 니
야마를 실천했다고 해서 어떤 특정한 요가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세번째 단계는 아사나āsana이다. 아사나는 자세를 말하는데 흔히 좌법으로 번역된다. 여
기서부터 본격적인 요가 기법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요가의 아사나에는 수많은 동
작들이 있다. 그 중에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괴한 동작들도 많다. 그러나 아사나의
진정한 의미는 특이한 동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요가수트라』에서는 아사나를 “안정되고
편안한 자세”라고 정의하고 있다. 아사나의 원래의 목적은 명상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안
정되고 편안한 자세를 만드는 것이다. 긴 시간 명상에 몰두할 수 있으려면 한 가지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아사나를 좌법坐法으로 풀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명상을 위한 가장 편안하고 안정된 자세로는 흔히 결가부좌라고 불리는 연꽃 자세를 든
다. 먼저 오른쪽 다리를 구부려서 왼쪽무릎 위에다가 올려놓고 또 왼쪽다리를 구부려서 오
른쪽 무릎위에다가 올려놓는다. 양손을 겹쳐놓은 다리 위에 살며시 포개 놓는다. 손에 대해
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오른손을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밑에 놓고 왼손도 손바닥을
위로 한 채 그 위에 놓고 양 손 엄지손가락을 가볍게 맞대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
다. 척추는 반듯하게 세우고 턱은 약간 끌어당기듯이 해서 목 뒤도 세우되 어깨와 가슴의
긴장을 푸는 것이 중요하다. 결가부좌 외에 권장되는 요가의 명상자세로는 길상좌, 달인좌
등이 있다.
아사나의 일차적인 목표는 명상을 위한 편안한 자세를 만드는 것이지만 더 궁극적인 목
적은 몸의 통제를 통하여 의식의 통제를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요가에서는 일반적
으로 몸과 마음을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요가에서는 몸을 의식의 통제 아래에 둘 수
있게 되면 육체가 더 이상 우리를 속박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해방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아사나는 몸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행해져야 한다고
한다. 그때 비로소 요가 수행자는 육체를 잊게 되고 더 이상 의식이 몸의 현존으로 말미암
아 고통을 받지 않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아사나의 동작이 수없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아사나를 수행해온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실제 수행에 필요한 동작들은
앞으로 굽히기 자세, 좌 우 비틀기 자세, 활 자세, 코브라 자세, 고양이 자세, 물고기 자세,
쟁기 자세, 역물구나무 서기, 물구나무 서기 등의 기본 동작 열 몇 가지 내외이다. 이 기본
동작만으로도 사지와 척추를 골고루 자극할 수 있다. 이러한 동작들을 하고 나면 몸이 유연
해지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네 번째 단계는 프라나야마prāņayāma이다. 프라나야마는 프라나라고 하는 생명에너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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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하는 것으로 이것은 주로 호흡의 조절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조식調
息으로 번역된다. 파탄잘리는 자세가 안정되었을 때 다음 단계인 호흡의 제어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주로 들숨과 날숨 혹은 숨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훈련이고, 숨의 길이, 부피,
참는 정도에 대한 규제이고, 숨을 길게 연장시키고 연마시키는 훈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
반적으로 조식의 기법은 들숨과 날숨을 가능한 한 천천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들이 쉰 숨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몸 안에 정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들이쉰 숨을 몸 안에 오래 유지하는 것을 요가에서는 쿰바카kumbhaka라고 하여 매우 중
시하고 있다.
많은 요가 책에서 들이마시고 참고 내쉬는 비율을 1 : 4 : 2 로 잡고 있는데, 이로 보아
요가에서는 들숨보다는 날숨을 길게 하고 날숨보다는 멈추기를 더욱 길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억지로 이 비율에 맞추려 하다보면 오
히려 부작용이 생기는 수가 있다. 호흡의 비율에 대해서는 요가 내에서도 파에 따라 설이
분분하고 또 동북아시아의 단학에 오면 전혀 다른 주장을 펼치기 때문에 사실 객관적인 기
준은 없다.
나는 처음 입문할 때부터 요가난다 계열의 호흡법을 하였는데 거기서는 일단 호흡의 비
율을 어떻게 하기보다는 호흡을 자연스럽게 하되 호흡에 대해 깨어있는 것을 중시한다. 나
의 경험에 의하면 호흡에 대해서 깨어있으면 자연스럽게 호흡은 깊어지고 점차 숨이 멈추어
지는 시간도 길어진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숨이 멈추어지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 억지로
숨을 참는 것보다 훨씬 안전할 뿐만 아니라 더욱 고차원적인 수행법이다. 간혹 억지로 숨을
참는 것을 수련하다가 몸이 크게 상하는 경우도 있다. 특이한 호흡법은 스승의 정확한 지도
없이 함부로 하는 것은 위험하니 조심해야 한다.
힌두 전통에서 호흡은 항상 생명 에너지와 결부되어 등장한다. 힌두 전통은 아트만을 인
간의 본질로 보고 호흡을 인간의 생명 에너지로 본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생명 에너지를 부
여받았는데, 호흡의 기능은 바로 이 생명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매체라는 것이다. 요가에서
호흡은 가장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 생명 그 자체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조식은 생명체로
서의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자신의 생명체의 에너지에 대한 직관지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랫동안 명상하면서 호흡은 몸과 마음의 교량으로서 몸의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태와도 많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운동량이 많을 때 호
흡이 가빠지고 몸이 긴장되어 있거나 몸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도 호흡이 가빠진다. 그러다
가 몸이 쾌적해지고 편안해질 때 호흡도 깊어지고 느려진다. 호흡은 마음의 상태와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감정이 격해질 때 호흡이 가빠지고 거칠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질 때 호
흡도 느려지고 깊어진다. 그리고 잡생각이 많아지고 근심이 많아질 때 호흡이 가빠지고 한
가지 생각에 깊게 집중하거나 걱정 근심이 없을 때 호흡도 줄어든다. 오랜 명상 경험에 따
르면 대체로 호흡이 얕고 거칠 때 우리의 의식도 얕고 거칠지만 호흡이 깊고 고요해질 때
우리의 의식도 깊어지고 고요해진다.
조식의 일차적인 목적은 생명에너지를 조율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마음을
더 깊은 상태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다. 요가 수행자는 호흡의 제어를 통하여 깊고 고요한
의식 상태로 들어갈 수 있고 그것은 바로 본격적인 명상을 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프라나야마도 아사나와 마찬가지로 더 깊은 명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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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단계는 프라티아하라pratyāhāra인데 감각기관을 제어하는 기법이므로 흔히
제감制感으로 번역된다. 제감의 본질은 외부로 향해있는 감각을 안으로 철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제감은 거북이가 목과 사지를 몸통 껍질 안으로 철수하는 것으로 비유된다. 보
통의 의식작용은 감각에 의해 자극받고 감각기관의 활동의 유형에 따른다. 제감은 외부의
대상들로부터 감각을 거두어들임으로써 의식을 자유롭게 하고 감각기관의 명령에 상관없이
외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기법이다.
그렇다면 제감이 이루어졌을 때 사물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요가에서는
마음의 직관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하고, 이러한 직관적 인식이 감각기관에 의존한 일반적인
인식보다 오히려 더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고 마음이 본래의 자기 모
습을 되찾게 되면 마음은 모든 사물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꿰뚫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자신의 관점을 개입시키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섯째 단계는 다라나dhāraṇā이다. 마음을 한 가지 대상에 고정시키는 것이므로 흔히
응념凝念으로 번역된다. 제감이 되고 나면 외부로부터의 감각에 인해 미혹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부의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기 때문에 마음은 내면의 욕구나 사념을
쫓아 여전히 움직인다. 응념은 이리 저리 움직이는 마음을 한 가지 대상으로 모으는 것이
다.
응념은 우선 집중의 대상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요가의 기본 목표가 자신의
참 자아인 아트만을 알기 위한 것이므로 응념의 대상으로 이용되는 것은 주로 자기 몸의 에
너지 센터이거나 종교적 대상이다. 흔히 사용되는 대상은 양미간, 코끝, 가슴 등 자신의 신
체 중 어느 특정 부위일 수도 있고, 신의 이름이 될 수도 있으며, 촛불이나 성스러운 도형
등의 시각적 대상일 수도 있고, 성스러운 주문과 같은 청각적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요가 수행자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간에 마음을 그 대상에 집중시키도록 노력한다. 만
약 마음이 다른 대상으로 움직일 때는 즉각 원래의 대상으로 되돌리도록 한다. 이렇게 꾸준
히 수행하다보면 마음이 어느 한 대상에 온전히 집중되는 순간이 온다. 그것이 바로 응념을
제대로 달성한 순간이다.
응념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일곱 번째 단계인 디아나dhyāna로 나아간다. 파탄잘리는
‘대상을 향한 통합된 의식의 흐름’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풀이하자면 선택된 대상에 대해
온 마음이 흘러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체의 산란한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고 대상에
온전하게 머무를 수 있기 때문에 흔히 정려靜慮라고 번역된다. 응념의 단계가 아직 의도적
으로 대상에 몰두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이 단계는 자연스럽게 온 마음이 대상을 향해 흘러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명상의 단계에 오른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요가의 마지막 단계는 사마디samādhi다. 음역하여 삼매三昧라고 한다. 파탄잘리는 삼매
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삼매는 대상만이 빛나고, 자기 자신은 공허하게 된 상태이
다.” 앞 단계의 정려가 마음이 대상과 하나가 된 주객합일의 상태라면 삼매는 주관이 사라
지고 대상만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삼매의 단계에서 요가 수행자는 더 이
상 명상 행위와 명상의 대상을 서로 분리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삼매에 의해 모든 착각
과 상상은 사라지고 우주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응념, 정려, 삼매는 요가의 마지막 삼단계로서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서 그 중 하나
를 시도하면 그 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게 나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중요한 차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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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마음의 모든 교란이 제거되어 마음이 단 하나의 대상에 지배된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
일하지만, 응념과 정려의 단계에서는 아직 수행자가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방해
하는 요소가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수행자 자신의 자아의식이다. 삼매의 단계에 이
르면 자아의식이 사라진다. 자아의식이 사라질 때 인식주체와 대상은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고 그러할 때 대상이 온전히 있는 그대로 비쳐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속에는 주체와 대상
의 구분이 전혀 없으며 오직 하나의 순수의식만이 남아있다.
파탄잘리는 삼매를 유상有想 삼매와 무상無想 삼매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는데 전자는
생각을 어떤 구체적 대상이나 개념에 고정시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고 후자는 어떠한 외적
이고 심적인 관계로부터도 분리되고 어떤 타자도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유상 삼매보다 무상 삼매를 더 깊은 경지로 보기 때문에 무상 삼매에 이를 때 비로소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되고 무의식적인 잠재력만이 남는다고 한다. 『요가수트라』의 첫 머리에
서는 “마음의 작용을 없애는 것이 요가”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바로 이 무상 삼매에 이를
때 그 목적이 달성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의 작용을 소멸시켜 삼매를 얻는 것은 결국 무었을 위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순수
정신인 푸루샤를 프라크리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요가 학파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상
키야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을 이루고 있는 육체라는 물질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각작용
과 판단하고 헤아리는 마음의 작용, 그리고 매우 미세한 인식작용인 붓디조차도 모두 프라
크리티에서 나온 것으로서 순수의식인 푸루샤의 발현을 방해하는 것이다. 삼매의 단계에 이
르렀을 때 비로소 푸루샤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후대의 베단타 학파에서는 삼
매에 이르는 목적을 푸루샤 대신 아트만을 온전하게 인식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아트만을
아는 것은 바로 브라흐만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를 아는 것임과 동시
에 최고의 법열을 체험하는 것이다.
표현이야 서로 다르지만 덧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 던져진 유한한 존재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영원하고 무한하고 완전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오랜 역사를 통
해 수많은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은 바로 삼매를 통하여 완전한 자유를 체험하였고 지금도
많은 요가 수행자들은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삼매는 반드시 위에서 말한 일곱 단계를 두루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각 문파마다 서로의 관점이나 입장이 조금씩 다르고 사람마다 체질이나 개성이 다르
기 때문에 수행의 과정상 나타나는 양상이 서로 다를 수가 있다. 다만 요가에서는 이 삼매
상태가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는 면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모든 요가 수행은 삼매를 얻기 위
한 방법이며 또한 그 삼매를 더욱 깊게 하고 그 삼매를 시간적으로 더욱 확대하기 위한 것
이다.

다양한 테크닉의 요가들 - 몸, 마음, 소리, 도형, 에너지


위에서 설명한 파탄잘리의 팔단계 요가는 고대의 요가학파에서 다루는 정통적인 요가라
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팔단계의 요가를 고전 요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힌두교의 다양
한 전통 속에서는 이외에도 다양한 유파의 요가가 발전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요가의 유
파는 대략 하타 요가, 라자 요가, 만트라 요가, 얀트라 요가, 쿤다리니 요가 등이다. 사실 엄
밀히 말하면 여기서 라자 요가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대부분 탄트리즘 이후에 등장한 것
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탄트라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미 요가의 그늘 아래 순화되었기
때문이다. 탄트라의 특징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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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타hatha 요가를 보도록 하자. ‘하’라는 말은 해를 가리키고 ‘타’라는 말은 달을 가
리킨다. 해와 달은 양과 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타 요가는 우리 몸의 양기와 음기를 서로
조화시킨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하타 요가는 여러 가지 동작과 호흡법을 통하여 육체와 정
신의 단련을 위주로 수행하는 요가이다.
물론 하타 요가의 궁극적인 목표 또한 고전요가 이후 대부분의 요가의 목표가 그러하듯
이 삼매이다. 그래서 삼매를 증득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체위나 호흡조절법과 아울러 명상
수련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좌법을 하기 전에 신체의 정화를 위한 여러 가지 수행법
들, 예컨대 콧구멍이나 위장이나 항문 및 대장을 청소하는 방법 등을 선행해야 함을 강조하
고 무드라와 반다를 추가하고 있다. 무드라는 제스츄어라는 뜻인데 에너지의 흐름을 조절하
는 특이한 자세를 가리키고, 반다는 항문이나 복부나 목구멍 등을 조이는 테크닉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몸의 생명에너지를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고 프라나야마와 밀접한 관련
이 있다.
고전 요가에서도 호흡을 통한 생명에너지의 통제를 중시한다. 그러나 인체의 생명에너지
가 어떤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이에 비해 하타 요가에서는 이를 매우 중시하며 이를 위하여 독특한 요가 생리학을 제시하
고 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프라나prāṇa’가 있다. 프라나란 동북아시아의 단전호흡법에
서는 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디nāḍī’라고 하는 게 있다. 이 나디는 기가 흘러
가는 통로이다. 동북아시아권에서의 경락과 같은 것이다. 우리 몸에는 수많은 나디가 있는
데 그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척추를 한가운데로 관통하는 스슘나sushumna 나디이다.
그 다음에 그 척추를 양쪽으로 교차하면서 지나가는 이다iḍā 나디와 핑갈라piṅgala 나디가
있다. 이다 나디는 음의 통로이고 핑갈라 나디는 양의 통로인데 스슘나 나디를 축으로 해서
교차를 하고 있다.
스슘나 나디 선상에서 이다 나디와 핑갈라 나디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주요한 에너지
센터인 차크라cakra가 있다. 일반적으로 요가의 주요 차크라는 7개라고 한다. 물라다라
mūlādhāra 차크라는 우리의 항문과 성기 사이, 즉 회음에 위치하고 있다. 이 차크라는 성
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다음에 스바디스타나svādhiṣṭhāna 차크라는 단전보다 조금
더 아래 방광 근처에 있다. 그 다음에 마니퓨라maṇipūra 차크라는 배꼽 근처의 태양신경총
근처에 있다. 그 다음에 아나하타anāhata 차크라는 심장 근처에 있는 차크라로서 이곳은
흔히 사랑과 헌신의 센터라고 한다. 그 다음에 비슈다viśuddha 차크라는 경추에 있는 차크
라이다. 그 다음에 아지나ājñā 차크라는 눈썹 사이의 안쪽에 있다. 지혜를 각성시키는 곳이
다. 그 다음에 사하스라라sahasrāra, 차크라는 정수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서 깨달음의
완성을 상징한다.
이상으로 보아 하타 요가는 신체 수련과 아울러 미세한 생명에너지를 조율하는 수련을
매우 중시하는 요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타 요가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는 역시 신체
단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하타 요가라고 하면 아사나를 통한 신체
훈련을 먼저 떠올린다. 하타 요가를 소개한 책자를 보면 대부분 여러 가지 신체적 동작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 가운데는 정말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여러 가지 고난도의 동작들
도 많이 보인다.
인도의 여러 가지 요가 가운데서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진 것은 바로 이 하타 요가이
다. 생명에너지를 각성시켜 더 깊은 명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안된 하타 요가의 여러 동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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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인체의 근육에 효율적인 자극을 주고 스트레스로 위축된 근육들을 이완시키는 데도 매
우 탁월한 효과가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 구미에서는 아사나의 생리적 심
리적 효과에 관련된 수많은 논문과 저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실용주의적 태도를 지니
고 있고 과학적 검증을 좋아하는 서구인들의 눈에도 하타 요가의 아사나는 생리적 심리적
효과가 매우 높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로 인해 구미에서는 오래전부터 하타 요가가 널리 유
행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요가센터도 바로 이 하타 요가를
가르치는 곳이다.
시중의 일반적인 요가센터에서는 대체로 다이어트나 미용 등의 목적으로 아사나를 수련
한다. 그러나 정통 하타 요가에서 아사나의 관건은 외양적으로 고난도의 동작을 얼마나 멋
지게 하느냐에 있지 않고 그 동작들을 할 때 의식의 집중처에 얼마나 깊게 집중하느냐에 있
다. 하타요가에서 아사나는 원래 우리 몸에 흐르는 미세한 생명에너지인 프라나의 통로와
프라나의 센터를 각성시키는 것이 목표이므로 매 동작마다 고유의 의식 집중처가 있다. 그
집중처에 의식을 집중하지 않고 아사나를 하는 것은 일반 체조나 스트래칭 운동과 전혀 다
를 바가 없다.
끝으로 아사나에 대한 나 자신의 견해를 말하고자 한다. 나는 아사나를 사십년 이상 계
속 해왔고 지금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처음에 아사나를 할 때는 인도의 정통 하타
요가 책에 나와 있는 대로 의식의 집중처에 마음을 모으는 수련법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는 명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안목을 터득하면서 보다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수행법을 개발하
였다.
그것은 나 자신의 동작의 과정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동작을 할 때 나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방법이다. 특히 동작을 취할 때 몸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자극을 잘 알아차리고, 동작을 마친 뒤 편한 자세를 취하고 이완할 때는 몸에서 느
껴지는 이완감에 대해 민감하게 깨어있으려는 훈련을 많이 하였다. 이것은 요가의 아사나에
다 불교의 위빠사나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타 요가의 아사나가 특수한 부위에 의식을 집중하여 우리 몸의 프라나를 각성시키는
것이라면 내가 하는 아사나는 자신의 몸 전체에 대하여 깨어서 바라보는 힘을 기르는 것이
다. 나의 관점으로는 프라나를 각성시키는 것보다는 깨어서 바라보는 의식을 각성시키는 것
이 보다 본질적인 수행이라고 본다. 아울러 내 몸의 느낌에 대해 훨씬 민감해져서 평소 일
상생활 중에서도 내 몸이 언제 어떻게 긴장되고 어떻게 하면 이완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
다. 그래서 긴장이 생기는 경우 그것을 그때그때 이완시킬 수가 있게 되었다. 이것은 수행
을 어느 특정 시간에 국한시키지 않고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는 라자rāja 요가를 보도록 하자. ‘라자’라는 말은 왕이란 뜻이다. 즉 왕의 요가라
는 말이다. 왕의 요가라는 말은 모든 요가 수행법 중에 으뜸의 수행법이라는 뜻이다. 흔히
『요가수트라』에 나오는 팔단계 요가를 라자요가라 부르기도 한다. 그보다는 많은 요가 문
파에서 자신들의 수행법이 최고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요가를 라자 요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라자요가라고 해서 고전 요가를 원형 그대로 수련하거나 가르치는 곳은 거
의 없다. 대부분 현대적 상황에 맞게끔 혹은 자신들 문파의 사상적 특징에 맞게끔 변형된
명상법을 가르친다. 그래서 라자 요가라는 개념은 때로는 매우 막연하고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명상법에 있어서는 각문파마다 천차만별이어서 일률적으로 설
명하기는 힘들다.
일반적으로는 라자요가라 하면 육체적인 수련을 위주로 하는 하타 요가와 대비하여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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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라자 요가에서는 하타 요가는 단지 라자 요가를 제대
로 하기 위한 기초단계에 불과하다고 말하거나, 아예 하타 요가를 거치지 않고 바로 라자
요가를 통하여 직접적으로 요가의 최고의 경지인 삼매에 들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것은 물론 하타 요가에 대한 라자 요가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태도에서 나온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튼 라자 요가에서는 신체나 생명에너지를 다루기보다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다
루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하타 요가가 신체의 요가라면 라자 요가는 마음의 요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만트라mantra 요가이다. ‘만트라’라는 말은 진언眞言 내지는 주문呪文이라는
뜻이다. 만트라 요가에서는 이 우주는 극미 세계로부터 극대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파동
으로 되어있으며 모든 소리는 각기 고유의 파동 영역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특수
한 소리들은 우리의 마음을 빨리 각성시키는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진언이나 주문은 바로
그러한 특수한 소리를 가리킨다.
만트라 요가란 바로 진언을 반복하는 것을 위주로 수행하는 요가이다. 만트라 요가에는
직접 입으로 소리를 내는 방법도 있고 입으로는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반복하는
방법도 있다. 입으로든지 마음으로든지 주문을 계속 반복함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보다 집중
된 상태로 만들려는 것이 만트라 요가의 목적이다.
사실 주문을 반복하는 수련은 고래로부터 널리 애용되어온 정신집중법이다. 왜냐하면 단
순한 소리를 반복하는 것은 정신집중에 매우 강력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대
부분의 종교 수행에서는 만트라 요가적인 요소가 있고 인도에서도 『베다』에서부터 수많은
만트라가 나타나고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만트라는 우주창조의 원음인 옴(AUM)이고
이것은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
7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널리 확산된 TM(Transcendental Meditation) 명상법은 바로
이 만트라 요가를 이용한 명상법이다. 단순한 주문을 반복하는 TM 명상법은 특히 심리적
긴장을 완화시켜주고 불면증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연구결과에 의해 심리치료에도
널리 쓰여 졌다.
만트라 수행은 고도의 정신 집중을 불러올 수 있고 그 정신 집중이 초능력을 부르기도
한다. 예로부터 초능력을 행하는 사람 가운데 만트라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지금도 우리가 흔히 장난으로 ‘수리수리 마하수리’라는 만트라를 하면서 도술을 부리는 흉
내를 내기도 하는데, 이는 그러한 사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물론 만트라 요가의 목적이 단지 정신집중력을 향상시키거나 초능력을 개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것은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한 것이다. 만트라 요가의 근본 목적은 우주의
순수한 파동의 소리를 계속 반복함으로써 우주의식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앞
에서 말한 삼매와 다름없다. 어쨌든 만트라 요가는 수행방법이 간단하고 효과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왜냐하면 특정한 의미와 특정한 파장을 지닌 소리를 계속 반복하게 되면 그
만트라가 만들어내는 의식세계의 파장에 쉽게 공명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불교에서 많이 하는 주력呪力 수행은 바로 만트라 요가의 영향으로 인해 생긴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석가모니는 주력 수행법을 가르친 적이 없고 초기 불교에도 이러한
수행법은 없었다. 이것은 대승불교가 후기에 이르러 밀교화되면서 불교 내에 요가와 탄트라
적인 요소가 대거 스며들 때 그 영향으로 인해 형성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불교의 주력 수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산스크리트 원문인
진언을 가지고 하는 방법과 하나는 부처와 보살의 이름을 가지고 하는 방법이다. 산스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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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어 진언으로는 ‘옴마니반메훔’이나 『천수경』에 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고 불보살의 이름으로는 관세음보살,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등
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일심일념으로 진언이나 불보살의 이름에 몰두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의식의 변화를 체험
할 수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소리를 내어 주력 수행을 하면 더 빨리 효과를 볼
수가 있다. 소리의 힘은 여럿이 같이 할 때 더욱 더 증폭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사
찰이나 불교 수련장에 가보면 많은 불교 신자들이 목탁 소리에 맞추어 밤새도록 ‘관세음보
살’이나 ‘석가모니불’을 계속 부르는 수행법을 행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만트라 명상은 간단하면서도 효과가 빠른 대신 깊은 깨달음을 주기 어렵다는 단
점이 있다. 물론 당사자들은 만트라 명상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선전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주장일 뿐이다. 만트라 명상은 어느 특정한 의미와 파장을 지닌 소리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최면적인 요소가 없을 수가 없다. 즉, 그 만트라가 만들
어내는 의식세계에 갇혀버리는 단점이 있다.
그 다음에는 얀트라yantra 요가를 살펴보자. ‘얀트라’라는 말은 도구, 도형이라는 뜻이다.
어떤 특정한 소리들이 우리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힘이 있듯이 어떠한 특정한 형태 또한 우
리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힘이 있다고 한다. 얀트라 요가는 주로 사각형, 삼각형, 육각형, 원
형 등의 추상적인 도형들을 배치한 특수한 그림을 바라보면서 수행하는 것이다. 얀트라가
표현하는 세계는 주로 우리의 내면의식의 세계를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불교의 만다라는 엄밀히 말해 얀트라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종교적 상징을 시각적으
로 표현하였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
는 부적 같은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얀트라라고 할 수 있다. 이 얀트라 요가는 특히 시각이
나 형태감이 발달한 사람들, 예컨대 미술을 전공으로 한 사람들에게 더욱 어울린다. 얀트라
요가는 도형이 수행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도형의 요가라고 할 수 있다.
얀트라 수행법은 만트라 수행법에 비해서는 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는 편이다. 우리 나
라 불교 사찰에도 만다라를 그린 탱화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구체적인 수행을 하
는 경우는 그리 많이 없다. 그리고 부적이라고 하는 것도 주로 사악한 기운을 방지하는 용
도로 많이 쓰이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정신집중 수련을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 이유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시각적인 효과가 청각적인 효과에 비해서는 아
무래도 강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쿤다리니kuṇḍalinī 요가를 살펴보자. 요가 생리학에 의하면 우주 창조의 근원
적인 힘이 소우주인 우리 인간의 몸에도 숨겨져 있는데, 그것이 바로 쿤다리니이다. 쿤다리
니는 우리 몸의 항문과 성기 사이인 회음 안쪽, 즉 물라다라 차크라에 나선형의 모양으로
숨겨져 있다고 한다. 흔히 뱀의 모양으로 묘사되는데 그래서 영어로는 ‘Serpent power’로
번역되기도 한다. 쿤다리니는 성기 근처의 회음에 숨어있다가 요가를 통하여 각성이 되면
척추를 따라 올라가 정수리에 까지 이르게 된다고 한다. 쿤다리니가 각성될 때 몸과 마음은
크게 변하여 여러 가지 초월적인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쿤다리니 요가는 신체동작과 호흡법을 통하여 우리 몸에 숨겨진 생명에너지를 각성시키
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넓게 보면 하타 요가에 포함된다. 실제로 하타 요가 또한 쿤다리니
를 각성시키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하타 요가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요가의 유파에서도 쿤
다리니 각성에 대한 체험은 일어나고 있고 그것을 매우 중요한 단계로 두고 있다. 그렇지만
특히 쿤다리니 각성을 수행의 핵심개념으로 삼고 그것을 위해 여러 가지 신체 동작이나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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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법 및 집중법을 사용하는 요가를 쿤다리니 요가라고 한다. 쿤다리니 요가에서는 쿤다리니
가 완전히 각성되어 정수리까지 올라갔을 때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다른 수행체계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
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사들이 깨달을 때는 이러한 체험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의 관점으로는 쿤다리니의 각성이 어느 정도 깨달음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쿤다리니의 각성 자체가 깨달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간혹 가다가 쿤다리니 요가는 물론이고 요가 수행을 전혀 해보지 않은 일반인 가운
데서도 쿤다리니가 각성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쿤다리니가 각성되면 종종 초능력을 동반하
기도 한다. 수행에 대한 안목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 쿤다리니가 각성되거나 초능력이 생기
게 되면 도리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특히 조그마한 초능력을 마치 깨달음이
라고 착각을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나 또한 쿤다리니가 부분적으로 각성되는 것을 체험한 적이 있다. 93년도 여름에 무기한
단식 수련을 할 때의 일이다. 단식 32일째 나는 매우 특이한 상태를 체험하였다. 매우 강력
한 힘이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면서 나의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의식은 또렷이 깨어있으
나 일체의 의지작용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단지 깨어있는 상태에서 내 몸 안의 원초적
에너지가 내 몸을 움직여서 여러 가지 동작을 만들고 내 입을 움직여 여러 가지 소리를 내
고 내 생각을 움직여 행위 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지켜보기만 하였다.
이런 상태가 열 몇 시간 동안 계속되다가 나중에는 저절로 특이한 자세를 취하고 특이한
호흡법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미저골 아래에서부터 엄청나게 강한 에너지가 솟구쳐 오
르는 것이었다. 온 몸에 에너지가 너무 강하게 솟아나와 마치 몸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특히 척추를 중심으로 해서 마치 강한 불기둥 같이 강력한 에너지 장이 형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바로 쿤다리니라는 것을 알았다. 쿤다리니는 미저골에
서 척추를 타고 강력하게 위로 올라가다가 가슴에 와서는 점차 약화되더니 목 근처에 와서
는 점차 사그라졌다. 평소에 쿤다리니 현상을 깨달음의 주요한 기준이라고 여겼다면 쿤다리
니가 사하스라라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노력했겠지만 나는 쿤다리니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
았기 때문에 그냥 그런 체험 정도로 만족했다.

3. 좌도 탄트라 명상

탄트라tantra는 고대 인도의 모계중심의 원주민의 문화에 뿌리를 둔 것이다. 근래에는 고


대 군인들의 출정식 전후에 열리는 난교 축제와도 관련이 있고 인도 밖의 다른 지역인 중앙
아시아 남부 지역의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지역의 고대 문화와도 관련이 있음을 주장하는 학
자도 있다.28) 탄트라의 성격은 매우 복잡한데, 대체로 모계문화의 특징으로 인해 남신보다
는 여신을 더 중시하고 육체에 대해 긍정적이고 특히 섹스를 수행의 주요한 도구로 인식하
였다. 그리고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전반적으로 이성적 합리적 요소보다는 감성적 주술적 요
소가 더 많다.
탄트라는 5-6세기를 전후로 하여 인도사회에 등장하여 8세기 이후에는 폭발적으로 유
행하면서 힌두교와 불교 심지어는 자이나교에 이르기까지 인도사상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28) 아스코 파폴라, 『힌두이즘의 원류』, 458-46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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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쳤다. 다양성의 수용과 조화를 중시하는 인도문화의 특징으로 인해 요가와 탄트라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혼융되었기 때문에 양자를 명확히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주술적 경향이 강한 만트라 요가나 얀트라 요가가 탄트라의 영향을 입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술적인 소리를 중시하거나 상징적인 도형을 중시하
는 것은 탄트라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흔히 불교에서 만트라를 위주로
하거나 얀트라와 비슷한 상징적 도형인 만다라를 중시하는 종파를 탄트라 불교라고 하는 것
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쿤다리니의 각성을 핵심 개념으로 삼고 있는 쿤다리니 요가 또한 탄트라 사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현대의 여러 요가 유파 중 가장 대중성을
지니고 있고 전 세계에 요가를 널리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하타 요가 또한 그 사상적
계보를 엄밀히 추적해보면 신체를 수행의 주요한 도구로 인식하는 탄트라 사상으로부터 상
당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현대 요가의 대부분은 탄트라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양자의 경계는 매우
애매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요가와는 대립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어 일반 요가 수행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특수한 탄트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한다. 앞에서 요가와 탄
트라의 차이를 설명할 때도 언급했듯이 일반적으로 요가는 금욕을 강조하고 특히 섹스의 억
제를 주장한다. 그러나 탄트라는 인간의 감각을 통제하기보다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섹스를 수행의 주요한 도구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섹스의
활용이야말로 본격적인 탄트라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탄트라 수행법의 특징을 설명하기 전에 우선 그 철학적 배경을 살펴보자. 원래 탄트라
철학에서는 우주는 순수의식인 시바와 원초적 에너지인 샥티Śakti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한다. 시바와 샥티는 절대자로서의 신의 양면성을 가리킨다. 시바가 시간성을 초월한 순수
한 불변의 존재라고 한다면 샥티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창조적 에너지를 가리킨다. 탄트
라 철학에서는 시바와 샥티가 우리 인간에게도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주의 절대정신인
시바는 정수리의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숨어있고 그 다음에 우주창조의 원초적인 힘, 샥티는
쿤다리니 형태로 성기 근처의 물라다라 차크라에 숨어있다고 한다.
탄트라에서는 시바와 샥티가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완성이라고 보았다. 절
대신인 시바와 샥티가 원래 부부인 것처럼 인간에게 있어서도 내재적 절대정신과 창조적 에
너지가 서로 하나가 되어야 신성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철학적으로는 대립적
인 이원성을 극복하여 하나의 전체성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탄트라에서는 가만히 있는 시바보다는 움직이는 샥티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탄트라
가 여신을 더욱 숭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탄트라의 수행의 원리에 의하면 물라다라
에 있는 쿤다리니가 각성이 되어 스바디스타나 차크라, 마니퓨라 차크라 등을 거쳐 점점 올
라가서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이르렀을 때 바로 최고의 삼매에 들 수 있다고 한다.
쿤다리니 각성은 요가에서나 탄트라에서나 다 같이 매우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각
성시키는 방법에 있어 요가와 탄트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요가에서는 일반적으로
물라다라 차크라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영적으로 정화가 되지 않은 상태
에서 물라다라 차크라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쿤다리니가 각성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라다라 차크라에 집중하다 보면 잠재된 성적 욕망이 갑자기
들끓어 솟구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요가에서는 하부 차크라인 물라다라에 집중하기 보다는 상부 차크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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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나 차크라나 사하스라라 차크라 혹은 아나하타 차크라에 집중할 것을 권한다. 그들은
몸이 정화되고 에너지 통로가 열리게 되면 쿤다리니는 저절로 올라오게 된다고 주장한다.
요가 중에서도 쿤다리니 요가와 같이 직접적으로 쿤다리니를 각성시키는 수행법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비교적 온건하고 점진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편이다.
이에 비해 탄트라는 쿤다리니를 직접 자극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들은 상부에 있는
차크라를 자극하기 보다는 쿤다리니가 숨어있는 물라다라 차크라를 직접 자극하는 편이 훨
씬 빠르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여러 가지 특수한 호흡법이나 주문 등도 사용
하였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섹스의 직접적인 활용이다.
흔히 탄트라를 우도 탄트라와 좌도 탄트라로 나누는 경우가 있는데 그 기준은 바로 섹스
의 활용 여부에 있다. 우도 탄트라는 시바와 샥티의 결합을 하나의 내면적인 상징으로 이해
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즉 물라다라 차크라에 숨어있는 쿤다리니가 각성되어 사하스라
라 차크라로 올라가는 것 자체가 바로 음과 양의 결합이고 시바와 샥티의 결합이라고 보려
는 것이다. 비교적 점진적인 태도이다. 이들은 쿤다리니의 각성을 위하여 여러 가지 특수한
비법이나 비밀스러운 의식도 사용하였지만 섹스를 직접 수행법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반면 좌도탄트라에서는 시바와 샥티의 결합을 상징으로만 보지 않고 실제적인 남과 여의
성적 결합으로 보려고 하였다. 그들은 내면의 세계는 바깥 세계와 서로 대응한다고 생각하
였다. 따라서 시바신은 바로 남자를 가리키는 것이고, 샥티는 바로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들은 내면의 남성 원리인 시바신과 여성 원리인 샥티신을 서로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실제
로 남성과 여성이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섹스의 감각적 쾌락이 극대화될 때
쿤다리니가 완전히 각성이 되어 여러 차크라를 거쳐 사하스라라 차크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상당히 파격적인 사고방식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탄트라라고 하면
대체로 좌도 탄트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좌도 탄트라 가운데서 제일 대표적인 것이 오마사五摩事라고 하는 특이한 의식이다. 오
마사 수행은 다섯 가지 비밀스러운 방법을 동원하는 것인데 그 다섯 가지란 술, 육류, 생선,
곡류, 섹스이다. 다섯 가지 모두 산스크리트어로 ‘M’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오마사라 한다.
술은 불, 고기는 바람, 생선은 물, 곡물은 땅을 상징하는데, 이 네 가지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의 사대원소四大元素를 말하고, 그 다음에 남녀 간의 합일은 완전한 것, 본질적인 것, 공空
이라고 하는데 이를 합쳐 오대五大라고 한다.
이 의식은 주로 한밤중에 아주 비밀스런 장소, 예를 들어 주로 공동묘지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그 전에 행하는 것은 보통 ‘황혼의 기도’, ‘원소의 정화’, ‘여러 가지 수인手印’, ‘마
음속 독송’ 등이다. 그러니까 해가 질 때부터 기도를 하고, 다섯 가지 원소를 정화하는 의식
을 거행하고, 손으로 여러 가지 무드라 형태를 취하면서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작업을 하
고, 이어서 마음속으로 탄트라의 주요한 경전을 독송한다. 긴 시간을 준비한 뒤에 한 밤중
이 되었을 때 비밀스러운 장소에 모인다. 좌도 탄트라를 행할 남자 수행자들과 여자수행자
들이 서로 짝을 지어 둥근 바퀴 모양으로 둘러앉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그날 집회의 리
더인 남녀가 같이 앉는다. 리더의 인도 아래 남자 수행자가 여자 수행자를 숭배하고 그런
다음에 술과 고기와 생선과 곡물을 먹고 서로 교합하는 의식을 행한다. 탄트라 집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카스트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부가 교합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처나 공동의 여인과 교합한다.
이처럼 좌도 탄트라는 지나치게 파격적이기 때문에 일반사람들의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
려운 점이 많다. 그래서 항상 비밀리에 행해졌다. 근세이후에 인도에 진출한 유럽인들은 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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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탄트라에 대해 통렬하게 비난하고 매도하였다. 윤리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그리스도교인
들의 입장으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교적인 윤리를 강조하는 동북아에서도 마찬가지라
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성적인 개방이 가속화되면서 좌도 탄트라는 다시 각광받고
있다.
한 때 세계를 풍미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었던 라즈니쉬는 바로 좌도 탄
트라적인 수행법을 강조하고 있다. 인도의 푸나에 있는 그의 아쉬람에는 지금도 성적으로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그의 아쉬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에이즈 검사를 받아야 한다.
과거 좌도 탄트라 수행자의 가장 무서운 적은 편견과 선입관에 사로잡힌 주변 사람들의 따
가운 시선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은밀하게 수행하였다. 현대의 탄트
라 수행자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에이즈라고 할 수 있다. 에이즈는 자신들을 죽
음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지만 심정적으로 탄트라를 동경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 가지 중요한 전제를 망각하고 있다. 섹스를 이용하는 탄트라 수행법은 속도가
빠른 만큼 위험성도 많다는 것이다.
좌도 탄트라의 원리는 우리의 에너지 가운데 가장 강력한 에너지인 성 에너지를 통하여
쿤다리니를 각성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성 에너지를 이용하여 쿤다리니를 각성시키려면 성
에너지가 성기를 통하여 밖으로 배출되지 않고 안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성 에너지가
안으로 방향을 틀 수 있을 때 비로소 쿤다리니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 에너
지가 쿤다리니를 자극하여 각성시키려면 상당히 강화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
람들은 성 에너지의 통로가 밖으로 향해있기 때문에 섹스를 하게 되면 짜릿한 쾌감을 느낌
과 동시에 성 에너지가 밖으로 사정될 수밖에 없다. 설령 성 에너지가 안으로 방향을 바꾸
었다 하더라도 성 에너지의 힘이 쿤다리니를 각성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다.
좌도 탄트라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 에너지의 방향을 안으로 전환시키고 동
시에 그 힘을 고도로 증폭시키는 까다로운 훈련을 거쳐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오랜 세월
을 거쳐 특수한 자세와 호흡법들을 완전히 익혀야 한다. 완전히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좌도
탄트라를 하다가 성 에너지를 밖으로 배출해버리는 경우 성 에너지의 낭비가 보통 사람의
섹스에 비해 훨씬 크다.
그뿐만 아니다. 성 에너지가 안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챠크라와
나디를 잘 정화해야 한다. 쿤다리니는 강력한 만큼 매우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쿤다리니가
다니는 길을 미리 잘 정비해야 한다. 차크라와 나디가 제대로 정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쿤다리니가 갑자기 각성되는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쿤다리니의 위험성은
요가에서는 익히 알려져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보통 사람들은 좌도 탄트라는 함부로 흉내를 내지 않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좌도 탄트라는 마치 밧줄을 잡고 절벽을 올라가는 것과 같다.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이지만 만약 실수하여 밧줄을 놓치면 바로 낭떠러지에 떨어지
는 것이다. 원래 이런 급진적인 방법은 정통한 스승의 엄밀한 지도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
다. 어설픈 호기심이나 빨리 될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좌도 탄트라 수행을 하다 보면 자
칫 잘못하면 도리어 해가 되기 십상이다.

4. 짚어보기와 새로운 방향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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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와 명상법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토양 속에서 오랜 세
월에 걸쳐 발전해온 것이다. 종교와 명상법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토양 속에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종교와 명상법은 그 지역의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요가와 탄트라는 사실 힌두교의 정수이다. 요가와 탄트라의 성과와 한계를 논
하는 것은 사실 힌두교의 성과와 한계를 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지역의 문화를
논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그 문화의 정수인 종교와 명상법과 깨달음을 논한다고 하는 것
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는 과감하게 시도해 볼 필요성이 있다. 그래야 보
다 종교와 명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종교문화와 명상문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 - 번화미 속의 조화미를 뽐낸다, 진부함은 조금 아쉽다.


서론에서 이야기했지만, 이제 종교는 집단주관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집단주관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 종교에서 강조하는 세계관이 정말 우주의 절대 진리인지 아니면 착
각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그 아름다움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느낌으로 힌두교의 아름다움으로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것은 번화미繁華美이다. 번화
미의 느낌은 수많은 꽃들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넓은 정원의 이미지에 가깝다. 전
세계 종교 가운데 힌두교만큼 그토록 긴 역사 속에서 그토록 풍성하고 다양한 꽃을 계속 피
워온 종교가 있을까? 또 하나 놀라운 것은 그렇게 수많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지만 서로
를 침범하지 않고 나름 적절한 조화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는 실로 수많은 종족과 언어가 공존하는 나라이고, 지역마다 기후가 다르고 토양이
다르듯 문화적인 색깔도 상당히 다르다. 그러다 보니 종교 또한 다른 어떤 지역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다양성을 자랑한다. 종교란 원래 강한 주관적 내지는 집단주관적 신심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때로는 엄청난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세월
종교로 인한 갈등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질적인 종교문화를 지닌 외부세력에 의해 꽤 긴
세월 침범을 받아왔지만, 종교적 갈등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근래
에 들어와서 일부 과격한 극렬주의자들이 이슬람을 공격하여 세간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지
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라 생각한다.
사실, 힌두교는 앞에서 대략 그 역사적 흐름을 추적해보았지만 문화의 퇴적층도 상당히
두터울 뿐만 아니라 실로 다채롭다. 초기에 거센 위용을 자랑했던 인드라와 아그니, 소마
등은 세월이 흐르면서 비슈누나 시바 등의 신인에게 무대의 주역 자리를 빼앗겼다. 그러나
주역의 자리를 빼앗겼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비록 옛날만큼의 존재감은 사라졌지만 여전
히 새롭게 주어진 자리를 잘 지킨다. 그리고 초기에 『리그베다』를 만들었던 아리아인들의
인생관이나 삶의 태도는 현세 복락적이었고, 진취적이었지만 『우파니샤드』 시대가 되면서
탈속적 해탈을 추구하는 다소 염세적인 인생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그 또한 서사
시의 시대가 되면서 일정 부분의 자기 몫을 되찾는다. 물론 세월의 흐름 속에 아예 잊혀진
세계관이나 인생관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 많은 꽃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면
서도 다른 꽃들과 조화를 이루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를 생각해볼 때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픈 종교는 힌두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많은 꽃들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면서 긴 세월을 버티다 보니 때로는 시대의
추이에 따라 변화가 필요한 때에도 여전히 과거의 조화미를 계속 유지하려고만 할 뿐, 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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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다양한 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것
은 좋지만 정체된 가운데서 너무 오래 현상태를 유지하다 보니 약간은 지루하고 답답한 느
낌도 있다. 그냥 지루하고 답답한 느낌만 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쾌쾌하고 진부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 원래 우리의 감각기관 중에서 후각이 제일 빨리 마비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속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정원에 조금씩 손질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먼저 정원의 울타리, 나의 용어
로는 집단주관의 틀 밖으로 나와 보는 것이 필요하다. 정원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약간 거리
를 두고 바라보면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유가 있
다면 다른 정원을 한 번 둘러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게 자기 정원의 울타리 밖으로 나와서 시각과 후각을 정화한 뒤에 다시 돌아가서 후
각을 잘 느끼면서 찬찬히 정원을 살펴보면 그 아름다운 꽃들 가운데는 겉으로는 여전히 아
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생명력을 잃어 점차 악취가 나는 꽃도 있을 것이다. 그
런 꽃이나 나무들은 뽑아내거나 전지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상으로 힌두교에 대한 나
의 느낌을 소략하게 적어보았다.

요가 - 다양한 길과 황홀한 체험이 있다, 그러나 몽롱하다


요가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의 육체와 마음 그리고 육체보다 좀 더 섬세한 몸 등의 전반
에 걸쳐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섬세한
몸이란 뼈와 살로서 이루어진 이 육체보다 섬세한 몸으로서 프라나로 이루어진 몸인데, 흔
히 미세한 몸(Subtle body)라고 한다. 앞에서 말한 프라나, 나디, 차크라 등은 모두 육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미세한 몸에 속하는 것들이다. 앞에서 지나나 요가, 박티 요가,
카르마 요가, 그리고 하타 요가, 라자 요가, 만트라 요가, 얀트라, 쿤다리니 요가 등의 다양
한 요가를 설명할 때 보았듯이 요가는 세계의 모든 수행법을 거의 포괄하고 있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동북아시아의 단학이나 유가 및 도가 등에는 이러한 포괄성이 부족하다. 단학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보다는 우리의 육체나 기로 이루어진 미세한 몸을 각성시키는 쪽으로 치
우쳐있고 이에 비해 유가와 도가는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것을 강조하지만 구체적인 수행법
이 약간 부족하다. 그리고 불교는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훌륭한 행법들이 많이 있지
만 초보자들이 쉽게 효과를 느낄 수 있는 단계적인 수행법은 부족하다.
게다가 동북아시아의 수행법은 전반적으로 사랑과 헌신의 감정을 개발하는 수행법이 부
족하다. 에너지의 각성이나 지혜의 열림도 소중하지만 사랑과 헌신의 감정을 개발하는 것
또한 수행에 있어서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수행법들은 이러한 면
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편이다.
반면 그리스도교나 이슬람 등의 수행법들은 사랑과 헌신의 감정을 각성시키는 데는 탁월
하지만 세계와 인생에 대하여 깊은 예지가 부족하다는 점이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
다. 세계와 인생에 대한 예지가 없이 사랑과 헌신만을 강조할 때는 자칫 잘못하면 배타적인
도그마의 함정에 빠지거나 맹목적인 광신에 빠질 우려가 많다. 사랑과 헌신을 강조하는 그
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수많은 종교재판과 종교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생명을 앗
아간 것은 바로 맹목성과 배타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볼 때 유럽과 서남아시아의 수행법들이 초월자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강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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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심에 바탕을 둔 수행법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반면 동북아시아의 수행법들은 초월자에
대한 신앙심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지혜를 각성시키거나 구체적으로 기를 각성시키는
수행법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인도는 양자의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다. 즉, 동과
서의 장점을 겸비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도의 지리적인 배경도 상당히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인도는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인도의 문화는 동양적인 요소와 서양적인
요소를 아울러 지니고 있다. 인도 사람들은 직관도 중시하지만 아울러 논리에 대해서도 상
당히 중시하고 있다. 게다가 인도 사람들은 민족성 자체가 종교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지난 몇 천년 동안은 정신세계에 있어서 인도가 그 원류의 역할을 해왔다고 해도 크
게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인도의 요가는 아주 부드럽고 달콤한 황홀경을 제공한다. 요가 명상은 수행의 도
중에도 달콤한 행복감을 선사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표인 삼매에 이르게 되면 그 황홀경은
극대화된다. 책으로 소개되어 우리에게 알려진 요가의 삼매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고 할 수 있는 요가난다의 삼매 체험을 살펴보자. 요가난다의 자서전에서 그의 스승 스리
유크테스와르의 에너지적인 도움으로 처음으로 삼매 상태를 체험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갑자기 스승께서 나의 가슴을 건드리셨다. 그 순간 나의 몸은 딱 정지되어 큰 자력에 끌


리듯이 호흡이 허파에서 빠져나갔다. 영혼과 마음마저도 나의 모든 털구멍 밖으로 불꽃처럼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육체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정지되었지만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깨어 있었다. 그리고 의식은 육체에서 벗어나 주변의 사물로 확장되었다. 먼저 나
의 광대한 시야에 멀리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들어왔고, 풀과 나무들의 뿌리가 흙을 통해
투명하게 보였으며, 수액들이 뿌리 속을 흐르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 이러한 모든
것이 내 시야에서 파동 치고 있을 때 나의 몸과 스승의 몸, 그리고 둥근 기둥이 늘어선 뜰
과 마루와 수목, 태양 등이 갑자기 무섭게 요동치며 빛나는 바다 같은 곳으로 모두 녹아들
기 시작했다. 마치 설탕 결정이 유리컵 속에서 흔들리며 용해되듯이 이 통일된 빛의 바다는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한 인과의 법칙을 보여 주면서 물질과 비물질의 세계를 교차하고 있었
다. 드넓은 대양과도 같은 기쁨이 고요하고 가없는 내 영혼의 바닷가에서 파도쳤다. 나는
신의 영혼은 무한한 기쁨 그 자체이며, 그 몸은 무수한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
다. ... 나는 그때서야 가장 높은 천상의 중심이 바로 직관적 인식을 맡은 심장의 한 점이라
는 것을 알았다. 빛나는 광명은 나의 중심으로부터 우주 끝까지 발산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이 발하는 우주 창조의 진동음인 옴 소리가 온 천지에 울려 퍼졌다.

요가난다는 이외에도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하나이고, 나와 너, 앎, 아는 자, 알아지는


대상이 모두 하나임을 말하고 있다. 굉장한 체험이다. 여기에는 온 우주를 대상으로 하는
초월적 감각, 엄청난 정서적 고양, 그리고 나와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 등이 다 갖추어져
있다.
요가 명상에서는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궁극적인 체험의 대열에 끼일 수가 있다. 요
가난다 계열에서는 이렇게 호흡이 정지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삼매를 사르비칼파 사마디라
고 한다. 나중에 가서는 이 삼매의 상태가 호흡을 하는 일상생활에서도 늘 이루어질 수 있
는데, 이를 니르비칼파 사마디라고 한다.
『쿤다리니』라는 책의 저자인 고피 크리슈나의 삼매 체험도 요가난다의 그것과 비슷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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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이 많다. 고피 크리슈나는 스승 없이 혼자서 명상 수행을 하다가 갑자기 쿤다리니가 각성
되어 삼매를 체험하게 되었다. 최초로 쿤다리니가 각성되었을 때의 체험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척추 아래 부분에서 미묘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차츰 상승하다가 나중에 폭포가 쏟아지
는 굉음과 함께 한 다발의 빛줄기가 척수를 통하여 사하스라라 차크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 뒤 의식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이 넓고 넓은 빛의 바다에
잠겨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시야가 점점 넓어지면서 의식의 지각 대상인 육체는 차츰 멀리 끌려 내려가더니
급기야는 아주 사라져 볼 수도 느낄 수도 없게 되고 의식만이 남게 되었다. 사방팔방으로
끝없이 펼쳐친 공간을 의식하면서 찬란한 빛의 바다에 잠기게 되었다. 그 때 고피 크리슈나
는 자신이 육체 속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육체를 포괄하는 거대한 우주의식임을 확실히 알
게 되었다. 동시에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무한한 환희에 잠기게 되었다.
그외 크리슈나무르띠, 라마크리슈나, 라마나 마하리쉬,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즈 등의 현대
인도의 명상의 대가들도 다들 제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의 계기나 방법을 통하여
삼매를 체험하였다. 그들의 삼매는 자세히 살펴보면 나타나는 양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적으로 보았을 때 거의 비슷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삼매 체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자아의 확장 내지는 소멸을 동반한 우주와의 합일
의식, 영원성과 무한성에 대한 통찰, 그리고 모든 부정적인 정서와 감각을 다 녹여버리는
지고의 황홀경이라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밖으로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황홀경이다.
베단타 철학의 영향을 받은 주류 요가에서는 진리의 속성, 브라흐만의 속성을 존재, 의
식, 지복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세 가지 가운데서도 요가 수행자들이나 그를 따르는 추종자
들에게 가장 매혹적인 것은 역시 아난다이다. 왜냐하면 존재라든지 의식 등은 겉으로 표현
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 지복은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덧
없는 일상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있는 영원하고도 다함없는 기쁨, 즉 지고의 행복
이다.
그래서 요가난다는 신을 영원한 기쁨이라고 정의하였고 요가 수행은 바로 우리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신성, 즉 영원한 기쁨을 찾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모든 요가 수행자들에게도 이러한 영원한 기쁨을 추구하는 경향이 깔려있
다. 요가에서 지복을 얼마나 많이 강조하고 있는가는 요가의 구루들의 이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요가난다, 시바난다, 사치다난다, 데바난다, 비베카난다, 묵다난다... 등등 아난다를 자
신에 이름에 넣고 있는 사람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지고의 기쁨이란 일반적인 덧없는 기쁨과는 비교가 안 되는 거룩한 기쁨이요, 영원한 기
쁨이다. 그리고 자기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지극한 기쁨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원래 있는, 그리고
신이 부여한 영원한 기쁨이라고 여기고 있다. 인도의 요가 철학에서는 이 거룩한 기쁨이 본
질적인 것이고 영원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좀 더 깊게 바라보면 요가 명상의 최대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이 달콤한 황홀경
이 어떤 면에서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 준비마당에서 언급하였듯이 부분적인 효율성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면 삶의 전체성에 펑크가 나기 쉽다. 즉, 현실을 초월한 황홀경에 너무 함
몰되어 있으면 일상의 삶은 아무래도 소홀히 하게 되기가 쉽다. 그래서 명상의 세계와 일상
의 삶이 서로 평행선을 그리는 상황이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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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인도를 거지와 성자의 나라, 삶과 죽음이 병존하는 나라라고 한다. 옛날 인도를 여
행하며 명상의 성지들을 순례할 때 바라나시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다. 힌두교 최대의 성지
중의 하나인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가에는 한 쪽에는 수많은 거지들이 애절한 표정으로 구걸
하고 있었고 또 한쪽에서는 각양각색의 고행자와 성자들이 깊은 명상과 기도의 세계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한 쪽에서는 화장을 하여 다 태운 시체를 강으로 흘려보내고 있었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 물에 목욕하고 그 물을 마시기는 장면을 볼 수도 있었다. 참으로 낯선 풍경
이자 충격적인 풍경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리어 이것을 미화하면서 그것이 바로 인도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지와 성자가 나란히 있고 삶과 죽음이 같이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실로 이
우주란 그리고 우리의 삶이란 빛과 그림자의 양면성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인도야말
로 우리의 삶의 이원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우
리의 영혼은 더욱 빨리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덧없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
고 이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다 떨쳐버리고 영원한 기쁨을 찾아 떠나게 되는 것이
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기에는 참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 인도인의 삶은 어떤 면에서는 지
나치게 이분법적이다. 즉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난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반
면 소수의 종교인들이나 수행자들은 신앙이 주는 내면적 기쁨과 삼매가 주는 지고의 황홀함
의 세계에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이것은 어찌 보면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나는 그리 바람직
한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나 또한 한 때는 초월적인 깨달음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고 나니 초월적인
깨달음의 세계는 이 일상의 현실세계와 결코 멀리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
었다. 그것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뒤 깨달
음과 수행의 내면세계와 현실적 일상세계가 지나치게 동떨어진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요가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내면적인 깨달음을 너무 강조하여 외면적인 일상 세계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존의 대부분의 수행이 그러하지만 요가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하다. 요가 수행자들을 보라. 그들은 대부분 내면의 기쁨을 찾아 나선 순례자들이다. 그리
고 그들의 삼매를 보라. 얼마나 황홀하고도 달콤한가? 그래서 요가의 성자들은 신성한 기쁨
과 무한의식의 위대함 때문에 현실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해지는 경향이 많다. 물론 요가 수
행자들 중에서도 일상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고 극소수이지만 현실 참여를 통
한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봐서는 내면의 기쁨에 너무 치우
친 나머지 현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인도를 다니면서 느낀 것은 수행도량인 아쉬람의 안과 밖이 너무나 대조적이라는 사실이
다. 한 때 참으로 존경하였던 라마나 마하리쉬가 평생 머물렀던 아루나찰라 산 아래의 아쉬
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쉬람 밖에는 그렇게 암담하고 처절한 삶이 펼쳐지고 있는데 아쉬
람에만 가면 그렇게 평온하고 잔잔한 기쁨이 흐르는 것이었다. 인도의 대다수의 민중들이
겪고 있는 암담하고 처절한 삶의 현실은 깊은 평화와 고요한 영적 기쁨으로 가득한 아쉬람
안으로는 전혀 침투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참담한 현실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혼자만이 기쁨의 세계에 몰입되
어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요가의 성자들은 자신만의 기쁨
에 도취되어 있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의 지고의 평화와 기쁨을 고통 받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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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나누어준다. 그리고 많은 인도인들이 그러한 성자들과 종교를 통하여 현실의 고통을
잠시라도 잊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에게 현실
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마취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도의 암담한 현실은 이러한 종교
와 성자에 대한 도취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인도의 현실 가운데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카스트 제도이다. 카스트 제도는 실로 전근대
적인 신분제도로서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20세기가 끝나가려는 이
시점에 아직까지 이러한 신분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인도 밖에 없을 것
이다. 왜 인도인들은 카스트 제도를 버리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릇되고 비합리적인 종교적
세계관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가장 먼저 핵폭탄을 만들고 세계적인 과학자들
을 배출한 인도이지만 지금도 인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고대 신화에 수준에 머
물고 있는 힌두교적인 세계관이다. 그리고 이러한 힌두교적 세계관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요가의 성자들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요가 수행자들은 브라만 계급이거나 적어도 크샤트리아 계
급들이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카스트 제도의 유지를 돕고 있다. 물론 요가의 성자들이 개
인적으로 의식적으로 카스트 제도를 지지한다는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깨달은 요가 성자들
은 카스트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들은 천민들에게도 아낌없고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
어준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들의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인해 하층 카스트에 속하는
신도들은 더욱 큰 감동을 받게 되고 요가의 성자들을 더욱 존경하고 따른다. 그 결과 현실
개혁의 의지는 자연스레 체념하게 된다. 이러한 존경과 체념이 바로 힌두교적 세계관을 유
지시키는 힘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요가의 성자들은 카스트 제도에 대한 무의식
적인 방조자들인 것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 왜 그들은 내면의 지고한 기쁨만을 추구하고 그
들의 암담한 현실을 그렇게 묵과해버리는가? 그것은 힌두교적 세계관과 요가 철학의 한계에
서 나온 것이다. 그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 현실 세계는 덧없는 꿈이고 내면의 무한한 지
복만이 진실한 실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요가의 구루들은 깨치고 난 뒤에도 그저
연민의 눈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바라볼 따름이지 현실의 모순을 구체적으로 개혁하려는 생
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현실의 물질세계의 풍요에 빠져 정신세계를 추구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정신세계의 기쁨에 빠져 왜곡된 현실 세계를 개선하려 하지 않는 것
도 문제이다. 양쪽 다 중도의 길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양자를 중도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탄트라 - 현대성과 심오함이 있다, 그러나 미신과 유치함도 있다


탄트라 수행의 가장 큰 장점은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지 않고 긍정한다는 데에 있다. 기
존의 수행체계에서는 대부분 인간의 감각적 욕망이란 억압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이것은
성스러움을 얻기 위하여 속됨을 억압하고 물리치려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사실 성스러움
과 속됨을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이전에 인류의 정신은 기
본적으로 이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종교나 수행에 있어서는 더
욱 심하였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금기는 점차 깨어졌다.
탄트라의 사고방식은 근대적이라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만
큼 파격적인 요소가 있다. 탄트라에서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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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욕망을 억압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아니 단순히 억압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그
것을 더 높은 단계의 욕망인 자기초월에의 욕망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라고 말한
다. 이것은 상당한 안목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성스러움과 속됨을 나누는 이원론적인 사
고방식을 넘어서야 더 큰 성스러움을 알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심리학적으로 보았을 때 사실 욕망이란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극복이 되는 것이다. 억압
은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하다.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겉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
라도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 숨어서 언젠가는 충족되기를 기다린다. 그러므로 욕망을 무조
건 억압하기보다는 그것을 충족시켜 놓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물론 여기서의 충족이란 무작정 탐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욕망에 허덕이면서
좇아가는 것은 탐닉하는 것이고, 그 욕망을 그대로 깨어서 바라보면서 깊은 만족을 느끼는
것이 충족시키면서 놓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욕망을 깨어서 바라보지 못하고 어설프게 흉내를 낼 경우에는 차
라리 금욕적인 태도보다 더 못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금욕을 하면서 수행을 하면 그런대로
일정 점수 이상의 고득점은 유지할 수 있지만 욕망을 긍정하면서 수행을 하다보면 자칫 잘
못하면 최하의 기본 점수마저도 다 놓쳐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사실 탄트라는 의식이
일정 수준 이상 성숙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은 탄트라적인 수행 태도가 지니는 장점에 대한 이야기다.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들
어가 보면 생각보다는 단점들이 많이 있다. 탄트라 수행의 단점으로는 먼저 수행 방법이 지
나치게 번거롭고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적인 안목으로 보았을 때 실로 고소를 금치 못할 부분들도 많이 있다.
탄트라는 실로 모래와 금이 뒤섞여있는 사금이라고 할 수 있다. 지극히 현대적이고 진보
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아주 전근대적인 비의적 요소도 뒤섞여있다. 또한 고도의 심오한 철
학이 있는가 하면, 잡다하고 유치한 미신과 주술이 공존하고 있다. 무조건적으로 미신적인
것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무조건적으로 미화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그래서
탄트라 수행을 대할 때는 신중한 태도로써 옥석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이상이 탄트라 전반에 걸친 장점과 단점이라면 이번에는 성 에너지를 활용하는 좌도 탄
트라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겠다. 사실 좌도 탄트라는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효과는 엄
청 강력하다는 장점이 있겠지만 수행법 자체가 일반인들이 실행하기에는 너무 까다롭고 어
려운 점이 있다. 게다가 수행의 남녀 파트너가 정식 부부이거나 연인 사이의 성인 남녀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일반적인 사회윤리와 크게 저촉될 수가 있다는 점도 큰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정식 오마사 같은 것은 아예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대
신 좌도 탄트라의 철학적인 개념이나 수행의 기본 원리 등은 제대로 활용할 경우 명상에 많
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명상 수행에 있어 섹스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 몸의 활동은 실로 종류가 다양하
지만 그 에너지의 원천은 하나이다. 그것은 마치 뜨거운 열을 내는 전기난로나 차가운 바람
을 내는 에어컨이 동일한 전기의 힘에 의해 가동되는 것과 같다. 육체적인 에너지나 정신적
인 에너지는 겉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하나이다. 대체로 신경이 날카로운 사람은
아무리 잘 먹어도 살이 잘 찌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신적 에너지를 과다하게 낭비하기 때문
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에너지를 섭취하고 에너지를 사용한다. 성적 쾌락은 우리가 즐길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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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쾌감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다. 그만큼 소모되는 에너지도 강력하다. 성적인 에너지를
지나치게 낭비하면 자연 정신은 흐려지게 된다. 내가 아는 요가회 후배 가운데서도 고등학
교 때 자취를 하면서 연상의 직장여성과 과도한 성관계를 가져서 결과적으로 정신이 흐려지
게 된 친구가 있다. 그는 명상을 하려고 앉아있어도 머리가 무겁고 멍한 기운 때문에 명상
이 잘 안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과도한 성 에너지의 낭비가 수행에는 치명적인 방해가 된다
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전 세계 대부분의 수행법에서 성에 대한 금욕을 주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경우 그 반대 작용도 있다. 한 번도 성관계를 가지지 않
고 출가하여 수도생활을 하는 승려들이나 신부들 가운데서는 종종 성문제 때문에 제대로 깊
은 정진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고고하고 심오한 정신세계에 있는 것 같
지만 수행자로서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해보면 성에 대한 말 못할 고민들을
많이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성이란 참으로 뿌리 깊은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식으로는 억누를 수 있지만 잠재의식에
서는 성에 대한 갈망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들끓는 욕망을 억압하는 데에도 상
당히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가기 힘들다.
이 둘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탄트라 수행이야말로 그것의 모순
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쇄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탄트라 수행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
나 입장을 중심으로 수행자로서 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이야기하겠다.
처음 명상에 접하였을 때 나는 장차 홀로 깊은 산중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리고 성생활은 수행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예 평생을 금욕하기로
마음먹었다. 점차 명상에 대한 안목이 깊어지면서 성 에너지를 단순히 억압만 해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알고 성 에너지를 순화시킬 수 있는 요가 체위나 호흡법을 많이 행하였다. 우도
탄트라를 행하였던 것이다. 고기와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않고 성 에너지를 순화시키는 수
행법을 열심히 하니 성욕이 거의 일지 않게 되었다.
옛날 학창시절에 도반들과 함께 해인사 백련암에 가서 성철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법당에
서 부처님께 삼천 배를 드린 적이 있다. 그때 밤늦게 삼천 배를 하는 도중에 과일을 들고
찾아온 백련암의 젊은 승려와 진지한 수행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절을 찾아오는
아리따운 여자 신도들을 보면 때로 치솟는 성욕 때문에 힘들다는 고백을 했다. 현재 한국의
불교 수행법에는 그저 음심을 극복해야 한다는 계율이 있을 뿐, 성욕을 완화시키고 승화시
키는 구체적인 명상법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그에게 몇 가
지 요가 아사나와 호흡법을 가르쳐 주었다.
다리를 앞으로 뻗고 척추를 앞으로 굽히는 파치모타나 아사나를 하거나 배와 가슴을 바
닥에 대고 누운 상태에서 척추를 말아서 들어 올리는 코브라 자세를 취할 때, 의식을 미저
골과 천추에 집중하면서 의념으로 에너지를 정수리 방향으로 상승시키는 방법이다. 아주 간
단한 방법이지만 꾸준히 행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 독신생활의 의무를 지켜야 하는 승려나
신부 등의 종교인이나 개인적으로 독신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방법이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나중에 가서 수행에 대한 관점이 바뀌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수행을 하
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도 생각이 바뀌게 되었
다. 수행에 관심이 있는 도반을 만나 같이 수행하는 것이 훨씬 대승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
다. 그래서 결국 교내 명상요가 동아리의 후배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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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혼 초기에는 중도 탄트라를 결혼 생활의 이상으로 삼고 수행하였다. 중도 탄트라
는 내가 만들어낸 말로서 지나친 금욕생활과 성에의 탐닉을 중도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으로
서 가급적이면 금욕생활을 위주로 하되 부부관계를 가질 때에는 서로 격렬하게 성 에너지를
밖으로 발산시키기 보다는 성 에너지를 내면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중도 탄트라에 대한
당시의 나의 이론은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욕망이 그러하지만 성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탐닉할수록 갈증을 더해지지는 것
이다. 그래서 갈수록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짜릿한 것을 원하게 된다. 특히 성을 상품화
하는 요즈음은 영화나 소설 등에서 오르가즘이니 에스타시 등의 성적 쾌락을 과장 묘사한
것을 많이 접하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에 대하여 막연한 환상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사실 욕망을 무작정 좇아가기만 하면 진정 자신이 바라는 오르가즘이니 에스타시
등은 더 얻기가 힘들고 갈증만 더해갈 뿐이다. 오르가즘이나 에스타시는 외적인 감각에 있
기 보다는 오히려 내면의 마음 자세에 있다. 진정으로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있고 아울러
내면의 섬세한 감각이 살아있다면 포옹만으로도 충분히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감성적으로 보다 민감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다. 이때의 오르가즘은 내면화된 희열이기 때문에 성행위할 때의 오르가즘에 비해 훨
씬 부드럽고 깊다.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피로는 거의 없고 오히려 의식을 고양시켜주는 장
점이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깊은 상태로 나아가면 일체의 외적인 성적 대상 없이 순수하게 내면
의 사랑만으로도 에스타시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명상이나 기도를 통해 느끼는 황
홀경이다. 가톨릭의 성녀들이 영적 황홀경의 상태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묘사한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외적으로는 성적 오르가즘과 거의 비슷하다. 사실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같
은 것이다. 다만 성적 에스타시는 에너지를 밖으로 배출하면서 느끼는 희열이고 내적 황홀
경은 에너지를 안으로 승화시키면서 느끼는 희열이라는 차이점이 있을 따름이다.
아무튼 성 에너지를 내면화하는 것은 명상에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 에
너지를 내면화시키기 위해서는 특수한 자세와 특수한 호흡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배워서 익히기도 힘들고 또 굳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육
체의 자세나 호흡법보다는 마음의 자세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첫째, 스스로 성 에너지를 내면화시키겠다는 의지를 지녀야 한다. 그래서 부부관계를 할
때에는 격렬한 동작보다는 가급적 부드럽고 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의식을 가슴 쪽으로 집중
시키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성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점차 내면으로 향하게 된다.
처음에 잘 되지 않더라고 꾸준히 실천하면 점차 내적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적절히 금욕하려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에너지가 밖으
로 배출되는 통로만 열려있지 안으로 승화되는 통로가 열려있지 않기 때문에 내면의 통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금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육체를 정화시키는 요가 아
사나 등의 수행을 곁들이는 것이 좋다. 특히 가슴에 있는 아나하타 차크라를 각성시키는 수
행법을 행하면 내면의 통로가 더 빨리 개발된다. 왜냐하면 이 차크라는 사랑의 센터이기 때
문이다. 이 아나하타 차크라를 각성시키기 위해서라도 평소 가급적이면 금욕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차크라가 각성되려면 어느 정도 에너지가 축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도 탄트라를 잘 실천하면 성 에너지를 충분히 절제하거나 내면화시킬 수 있고 그 에너
지를 다른 창조적인 활동에 쏟아 부을 수 있다. 아울러 서로에 대한 사랑을 더욱 고차원적
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즉 서로가 상대방을 욕망으로 소유하려는 소유의 사랑을 벗어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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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의 더 깊은 의식의 영역을 이해하고 서로를 자아실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존재의
사랑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중도 탄트라는 단순히 명상에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주는 역할도 한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이 하나가 되고 이상과 현실이 서로 합치되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중도 탄트라가 제대로 구현되려면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배려심도 필요하지만 기본적으
로 성에 대한 성향이나 욕구의 정도가 어느 정도 일치하거나 적어도 상호 보완적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 한쪽에서는 성에 대한 민감도가 매우 높은데 한쪽에서는 둔감한 경우 중도 탄
트라가 원만하게 구현되기란 쉽지가 않다. 또한 어느 한 쪽에서는 성에 대한 욕구가 강한데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금욕을 강조하는 경우 심각한 갈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나 또한 결혼 이후 중도 탄트라를 추구하면서 초기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
도 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터져 나오면서 심각한 갈등도 많이 겪었
다. 그러나 중도 탄트라를 바람직한 결혼 생활의 이상으로 여기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
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근대 이전 대부분의 종교와 명상에서는 성에 대해 금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고 일반
적인 사회 윤리도 그와 비슷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근대 이후에 들어 성에 대한 억압은
많이 완화되고 점차 개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금은 과도기여서 두 가지 흐름이
서로 충돌하면서 많은 갈등과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성을 주요한 상품의 하나로 여기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한편으
로는 전근대적인 성윤리에 강요당하면서 한편으로는 너무나 자극적인 성적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 누구나 손가락의 터치 몇 번으로 지극히 선정적인 동영상을 쉽게 접할 수가 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선정적인 성적 광고물들에 의해 집요한 공
격을 당하고 있다.
포스트 모던의 사회분위기에 맞는 새로운 성윤리의 확립을 위해서는 탄트라의 오래된 지
혜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일 필요성이 있다. 낡은 미신이나 세계관들은 버리고 이 시대의
상황에 맞게끔 재해석하고 재조명하면 탄트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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