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득기, '봉산곡' 해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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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곡(鳳山曲) 1)

채득기2)

[가노라 옥주봉아 있거라 경천대3)야


요양4) 만릿길이 멀어야 얼마 멀며
그곳에서의 일 년이 오래라고 하랴마는]5)
상봉산 별천지6)를 처음에 들어올 때
노련의 분노7) 탓에 속세를 아주 끊고

1) 「봉산곡(鳳山曲)」은 1638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소현세자 · 봉림대군 등을 보필하러 떠


날 무렵에 지어진 작품이다. 「봉산곡」은 내용상 ① 왕명을 받들어 청나라 심양으로 떠나는 정황, ②
자신의 은거지로 찾아들게 된 내력, ③ 은거지 주변의 다채로운 경관, ④ 은거지에서 누리는 흥취, ⑤
심양으로 떠나는 심회와 군은(君恩)에 보답하겠다는 다짐, ⑥ 은거지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맹세와 기
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의 창작 계기가 어명을 받고 심양으로 떠나게 된 상황이기는 하지만, 작품의 근저에는 작자
가 은거하던 자연 공간을 떠나게 되면서 느끼는 심회(心懷)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왕명이라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경천대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 기약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경천대 일대의 승경과 그곳에서의 삶이 더욱 의미 있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고
로 두 번의 왕명 끝에 심양에 가기로 결정한 작자가 자신이 은거하던 경천대 일대의 풍광을 기억 속
에 오래도록 담아두기 위해 이 작품을 창작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2)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 1604∼1645년)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6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
문에 어린 시절 누이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으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는 바람에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15세 때 누이의 권유로 이웃에 사는 스승에게서 학문의
길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각별한 열정으로 짧은 기간에 경사백가(經史百家, 경서와 사서, 제자백가의
책이라는 뜻으로, 많은 책을 이르는 말)에 두루 통달했다고 한다. 특히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천문 · 지리 · 복서(卜筮, 팔괘 · 육효 · 오행 따위를 살펴 과거를 알아맞히거나, 앞날의 운수 · 길흉 따위
를 미리 판단하는 일) · 음률 · 병서 · 의술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에 응시해 문장을 지을 때
마다 지나치게 방만하여 법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수차례 응시했음에도 입격(入格)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재야에 은거하며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음에도 청에 볼모로 끌려간 왕손들을 보필하라는
왕명을 받게 되었다. 이에 한 차례 왕명을 거부했으나, 두 번째 왕명에 응하여 그들을 보필하는 소임
을 정성껏 수행하였고, 환국해서는 다시 은일(隱逸) 생활을 이어가다가, 이듬해(1646년) 43세라는 이
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환국 후에 조정으로부터 벼슬길에 나올 것을 여러 차례 권유받았음에
도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그런 점에서 그는 처사(處士)의 은일을 실천한 선비였다고 할 수
있다.
3) 경상도 상주의 낙동강 가에 있는 절벽. 낙동강을 따라 깎은 듯 서 있는 기암절벽과 송림(松林)이 절경
을 이루기 때문에 하늘이 만든 경치라는 뜻으로 원래 ‘자천대(自天臺)’라 불렸으나, 이곳에 터를 잡은
작자가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하늘과 땅은 명나라의 것이고, 해와 달은 숭정제[의
종]의 것이다.)’이란 글을 새기고, 하늘을 떠받든다는 뜻으로 ‘경천대(擎天臺)’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4) 중국 요령성 심양(瀋陽)의 남서쪽에 있는 도시. 청나라의 태조 누르하치가 1621년부터 1625년까지 도
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작자가 청나라로 떠났던 때가 1638년이므로, 여기서 요양은 심양이 되어야 한
다.
5) 이 작품은 서두에서 임금의 부름에 응해 심양으로 떠나야 하는 상황을 짤막하게 진술한 다음, 다시
작품 말미에서 소현세자를 보필하러 떠나는 심회와 임금에 대한 충정 의식을 진술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일종의 액자 형식을 취하게 되는데, 액자 안의 그림에 해당하는 내용은 은일 생활에서 느
끼는 흥취, 그리고 은일을 지향하는 가치 의식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봉산곡」은 왕명 수행을 위해
심양으로 떠나는 심경을 작품 창작의 계기로 삼았을 뿐, 작자가 추구하는 은일 생활의 내용을 진술하
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은일 가사로 분류할 수 있다.
6) 특별히 경치가 좋거나 분위기가 좋은 곳.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은 선경(仙境, 신선이 산다는 곳)
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다.
7) ‘노련의 분노’는 주(周)나라의 천자를 버리고 진나라 왕을 천자로 부르려는 것에 대한 노중련의 분노
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명(明)나라를 버리고, 청(淸)나라를 섬기는 것에 대한 화자의 분노를 뜻한다.
발 없는 구리솥 하나 전나귀8)에 싣고서
추풍 부는 돌길로 와룡강9) 찾아와서
천주봉10) 석굴 아래 초가 몇 칸 지어 두고
고슬단 행화방에 정자 터를 손수 닦아11)
낮에야 일어나고12) 새 달이 돋아 올 때
지도리13) 없는 거적문과 울 없는 가시사립
적막한 산골에 손수 일군 마을이 더욱 좋다14)
생애는 내 분수라 담박한들 어찌하리15)
밝은 세상 한 귀퉁이에 버린 백성 되어서16)
솔과 국화 쓰다듬고 잔나비와 학을 벗하니17)
어와 이 강산이 경치도 좋고 좋다
높다란 금빛 절벽18) 허공에 솟아올라
구암19)을 앞에 두고 경호20) 위에 선 모양은

당시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득세하자, 조정에서는 청과 강화를 맺고자 하는 의론(議論)이 있었


다. 작자는 이를 강력히 배척하면서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깊숙이 은둔하려는 생각에 고향을 떠나 속
리산 동북쪽 화산(華山) 선유동(仙遊洞)으로 들어가 일생을 마칠 계획이었다. 그는 1636년 천문을 관
측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했다고 한다. 이후에 실제로 병자호란(1636~1637년)이 일어났고,
인조가 피신해 있던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이에 통분하고 화의(和議)를 배척하며 다시 상산(商山, 지
금의 상주) 무지산(無知山)에 들어가 별좌대(別坐臺)를 쌓고 두문불출하면서 독서에 전념했다. 그러다
가 상주 천주봉(天柱峯) 아래 우담(雩潭)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고, 그곳 경천대(擎天臺) 옆에 무우정
(舞雩亭)을 짓고 자연 속에서 소요하며 지냈다. 경천대 아래로는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다가 우담(雩
潭)이라는 큰 소를 이루는데, 그는 우담을 자호(自號, 자기 스스로 지어 부르는 칭호)로 삼았다. 이는
공자의 제자인 증점(曾點)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겠다.[자
연 속에서 흥취를 느끼며 살겠노라는 뜻]’라고 한 고상한 뜻까지를 함께 추구한 것이었다.
8) 다리를 절름거리는 나귀.
9) 경천대 동쪽 강물 위에 있는 바위 봉우리.
10) 경상북도 상주의 해발 606m의 봉우리.
11) 공자가 고향 땅 노나라에서 제자들을 데리고 천하를 주유(周遊)하기 시작한 때는 그의 나이 55세였
다. 공자가 제자들 일행을 데리고 떠난 것은 오직 자기를 알아주는 제후를 만나 이상 정치를 펼쳐 보
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공자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자, 그의 나이 68세가 되던 해에 고향 땅에
돌아온다. 그 후 공자는 매일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과 거문고를 타며 『서경(書經)』, 『예기(禮記)』
등을 찬술했다고 한다. 이 구절은 공자의 고사와 관련하여 작자가 무우정이라는 정자 터를 닦을 때
살구나무[행화방(杏花坊)]를 심고 거문고를 타는 단[고슬단(鼓瑟壇)]을 만들어 공자의 행적을 추종했
다는 뜻이다.
12) 세속과 떨어져 지내니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을 하였다는 뜻이다.
13) ‘지도리 없는 거적문’은 원문의 ‘기돌 읍신 거젹문’을 풀이한 것이다. ‘기돌’이 무슨 뜻인지는 명확
하지 않은데, 제대로 된 문짝도 마련하지 않고 거적을 문짝으로 삼았다는 정황을 고려할 때 ‘기돌’을
‘기둥’으로 풀이하는 것보다는 ‘돌쩌귀’로 풀이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14) 손수 초가집을 짓고, 정자 터를 닦아서 일구어 놓은 자신의 은거지에 대한 화자의 애착과 만족감을
드러내고 있다.
15) 화자는 전원에 은거해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담박한 생활을 자신의 분수로 여기고 있다. ‘담박(淡
泊)하다’는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다.’는 뜻이다.
16) 원문의 ‘大明天地(대명천지) 一片土(일편토)의 바린 百姓(백성) 도야 잇셔’를 풀이한 것이다. 이 구절
에서 ‘大明天地(대명천지) 一片土(일편토)’는 ‘위대한 명나라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한 조각 땅에 해당
하는 조선’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구절은 작자의 숭명(崇明) 의식을 잘 보여 준다. 그리고 ‘바린 百
姓(백성)’은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과 군신 관계를 맺었으니, 이제 화자는 명나라 황제로부터 버림받
은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7) 자연을 벗 삼아 지낸다는 뜻이다. 여기서 ‘솔’, ‘국화’, ‘잔나비’, ‘학’은 자연의 대유적 표현이다.
18) 햇빛에 비친 경천대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19) 귀암(龜巖). 옥주봉 아래에 있는 낙동강 가의 바위로, 엎드린 거북처럼 생겼으며, 수백 명이 앉을 정
삼신산21) 제일봉이 여섯 자라 머리22)에 벌인 듯
붉은 놀, 흰 구름에 곳곳이 그늘이요23)
유리 같은 온갖 경치 빈 땅에 깔렸으니24)
용문(龍門)25)을 옆에 두고 펼쳐진 모래밭은
여덟 폭 돌병풍을 옥난간에 두른 듯26)
맑은 모래 흰 돌이 굽이굽이 경치로다
그중에 좋은 것이 무엇이 더 나은가27)
구암이 물을 굽혀 천백 척 솟아올라28)
구름 위로 우뚝 솟아 하늘을 괴었으니
어와, 경천대야, 네 이름이 과연 헛된 것 아니로다29)
<중략>
시비 영욕 다 버리고 갈매기와 늙자더니30)
[무슨 재주 있다고 나라31)에서 아시고
쓸데없는 이 한 몸을 찾으시니 망극하구나]32)
상주 십이월에 심양 가라 부르시니33)
어느 누구 일이라 잠시인들 머물겠는가
임금 은혜 감격하여 행장을 바삐 챙기니34)
삼 년 입은 옷가지로 이불과 요 겸하였네35)

도로 넓다.
20) 경천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의 물줄기인데, 강물이 거울처럼 맑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21)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 방장산(方丈山), 영주산을 통틀어 이르는 말. 진시황과 한무제가 불로불
사약을 구하기 위하여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다고 한다. 이 이름을 본떠 우리나라의 금강산을 봉래
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이르기도 한다.
22) 중국 전설에 따르면, 발해의 동쪽에 다섯 선산이 있는데, 선산이 바다에 떠 있어서 물결을 따라 흔
들리므로, 상제(上帝)가 여섯 마리의 큰 자라로 하여금 머리로 선산을 이고 있도록 했다고 한다.
23) 해 질 무렵에는 붉은 노을이, 낮에는 흰 구름이 경천대 곳곳에 그늘을 만들어 주어 시원하다는 뜻이
다.
24) 유리같이 아름다운 경치가 임자 없는 자연에 펼쳐져 있다는 뜻이다. ‘유리’는 칠보(七寶, 일곱 가지
주요 보배로, 불교에서는 금, 은, 유리, 파리, 마노, 거거, 산호를 칠보라 이른다.)의 하나이다.
25) ‘용문’은 중국 지명을 차용하여 낙동강 상류의 여울목에 붙인 이름이다. 원래의 ‘용문’은 중국 황허
강(黃河江) 중류에 있는 여울목으로, 잉어가 이곳을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고 전하여진다.
26) 맑은 모래와 흰 돌이 굽이굽이 펼쳐져 만들어진 모래사장의 절경을 여덟 폭으로 이루어진 돌병풍을
옥난간에 둘러놓은 듯하다고 비유한 표현이다.
27) 눈앞에 펼쳐져 있는 절경 중에 어느 것 하나도 좋지 않은 것이 없다는 찬사(讚辭)이다.
28) 낙동강 물줄기가 귀암에 부딪혀 천백 척이나 허공으로 솟아오른다는 뜻이다. ‘천백 척 솟아올라’는
과장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29) 구름 위로 우뚝 솟아서 하늘을 괴고 있는 듯한 경천대의 모습을 보니, ‘경천대’라는 이름이 허명(虛
名)이 아니라는 뜻이다. ‘경천대’의 ‘경천(擎天)’는 하늘을 떠받든다는 뜻이다.
30) 화자가 이곳 상봉산으로 들어올 때의 마음가짐이다. ‘시비 영욕’은 세상사[세속의 일]에 해당하고,
‘갈매기’는 자연을 대유한 표현이다.
31) 임금을 가리킨다. 왕조 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 아니라 왕이기 때문에 왕을 나라라고 표현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32)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여 불러 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구절이다. ‘무슨 재주 있다고’와 ‘쓸데없는
이 한 몸’은 자신의 재능을 낮추어 겸손하게 일컫는 표현이다.
33) 심양에 있는 소현세자 일행을 보필하라는 인조의 어명이다. 작자는 다방면에 박식하고, 특히 의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인조가 소현세자 일행의 건강 관리를 위해 작자를 심양으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34) 잠시도 지체함이 없이 왕명을 수행하려는 화자의 모습에서 군은(君恩)에 보답하고자 하는 화자의 충
정(忠情)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남쪽의 더운 땅36)도 춥기가 이렇거든
한겨울 깊은 때37)에 우리 임38) 계신 데야
다시금 바라보고 우리 임 생각하니
[이국(異國)39)의 겨울 달을 뉘 땅이라 바라보며]40)
타국 풍상을 어이 그리 겪으신가41)
높은 언덕에 뻗은 칡이 삼 년이 되었구나42)
굴욕이 이러한데43) 꿇은 무릎44) 언제 펼까
조선에 사람 없어 오랑캐 신하 되었으니45)
삼백 년 예악 문물 어디로 갔단 말고46)
오늘날 포로들이 다 옛날 관주빈이라47)
태평 시절 막히고 찬란한 문물 사라지니48)
동해 물 어찌 퍼 올려 이 굴욕 씻을런가49)
오나라 궁궐에 섶을 쌓고 월나라 산에 쓸개 매다니50)

35) 한겨울에 먼 길을 떠나야 하지만, 행장을 매우 소박하고 단출하게 꾸렸다는 뜻이다.


36) 작자의 은거지인 경상북도 상주를 가리킨다.
37) 원문의 ‘北極窮陰(북극궁음) 깁푼 고’를 현대어로 풀이한 것이다. ‘북극궁음 깁푼 고’는
소현세자 일행이 볼모로 잡혀간 북쪽 땅 심양의 음력 섣달을 가리킨다. 참고로 음력 12월을 계
동(季冬)이라 이른다.
38) 여기서 ‘우리 임’은 인조가 아니라, 소현세자를 가리킨다.
39) 원문의 ‘오국(五國)’을 풀이한 것이다. ‘오국’의 본이름은 오국성(五國城) 또는 오국두성(五國頭城)이
라 하는데, 중국 송(宋)나라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金)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모진 수모를 당
하다가 죽은 곳이다.
40) 오랑캐 땅인 심양에서 겨울 달을 바라보며 참담한 심정을 느끼고 있을 소현세자의 모습을 화자가 떠
올린 것이다.
41) 차디찬 이국땅에서 고초를 겪고 있을 소현세자의 처지에 대한 화자의 탄식을 드러낸 것이다.
42) 『시경(時經)』의 ‘언덕 위의 저 칡넝쿨이여, 마디마디 길어졌다. 旄丘之葛兮(모구지갈혜) 何誕之節兮
(하탄지절혜)’라는 구절을 차용하여 조선이 청나라에 굴욕을 당한 지가 3년이 지났음을, 또는 소현세
자 일행이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게 된 지가 3년이 지났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다.
43)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를 사대의 예로 섬기게 되었고, 소현세자 일행이 볼모 끌려간 지가 3년이 지
났음을 의미한다.
44)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것을 말한다. 삼전도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송파동에 있
던 나루인데, 조선 시대에 한양과 남한산성을 이어 주던 나루였다.
45) 원문의 ‘漢朝(한조)의 람 읍셔 犬羊臣(견양신)이 되야시니’를 현대어로 풀이한 것이다. 원문을 풀이
하면, ‘중국에 나라를 구할 만한 인재가 없어서 청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니’의 뜻이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조선의 형편도 명나라와 다를 바가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조(漢朝)’는 중국[명나라]을
뜻하고, ‘견양신(犬羊臣)’은 개와 양의 신하[청나라의 신하]를 뜻한다.
46) 청나라를 사대의 예로 섬기면서 300년을 지켜왔던 예약과 문물이 사라지게 된 것을 개탄하고 있다.
47) 오늘날 항복하여 포로가 된 사람들은 모두 옛날 주(周)나라를 관찰하러 갔다가 손님이 된 것과 같다
는 뜻인데, 오랑캐에게 굴욕을 당한 사람들이 설욕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오랑캐에게 동화되어
가는 현실에 대한 개탄이다.
48) 원문의 ‘堯天(요천)이 久閉(구폐)고 宋日(송일)이 잠겨시니’를 풀이한 것이다. 원문은 ‘요임금의 하
늘은 오래도록 막혀 있고, 송나라의 해는 (구름에) 잠겨 있으니’로 풀이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명나라
가 청나라에게 패배하여 태평성대와 찬란한 문물이 사라져 버렸다는 뜻인데, 이 말 속에는 조선의 형
편도 명나라와 다를 바가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원문에서 ‘요천(堯天)’은 요임금이 다스리던 태평
성대를, ‘송일(宋日)’은 송나라[넓게는 중국 한족]의 찬란한 문물을 뜻한다.
49) 청나라에게 당한 치욕을 씻어내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비분강개의 심정을 표출하고 있다.
50) 섶[땔나무]에 누워 자고 쓸개를 맛보며 복수를 다짐한다는 고사성어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차용한
표현이다. ‘와신상담’은 춘추 시대 오나라의 부차(夫差)는 아버지 합려(闔閭)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섶
에서 자면서 월나라의 구천(句踐)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하였고, 부차에게 패배한 구천은 쓸개를 핥으
면서 복수를 다짐했다는 고사성어이다.
임금이 굴욕당하면51) 신하는 죽어야 고금의 도리인데52)
하물며 우리 집이 대대로 은혜 입었으니53)
아무리 힘들다고 대의54)를 잊겠는가
어리석은 계략으로 거센 물결55) 막으려니
재주 없는 약한 몸이 기운 집56)을 어찌할까
방 안에서 눈물 내면 아녀자의 태도로다57)
이 원수 못 갚으면 무슨 얼굴 다시 들까
악비의 손에 침을 뱉고 조적의 노에 맹세하니
내 몸의 생사야 깃털처럼 여기고
동서남북 만리 밖에 왕명 좇아 다니리라58)
있거라 가노라 가노라 있거라59)
무정한 갈매기들은 맹세 기약 웃지마는60)
성은이 망극하니 갚고61) 다시 돌아오리라62)

51) 삼전도의 치욕을 가리켜 표현한 구절이다.


52) 임금이 굴욕을 당한 것은 신하가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므로, 신하는
마땅히 죽음으로써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 속에는 인조가 삼전도의 치욕을 당할 때
작자 자신은 마땅히 죽었어야 했는데, 그때 죽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어명을 받들어
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53) 작자의 가문이 대대로 벼슬을 하는 군은(君恩)을 입었다는 뜻이다.
54)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큰 도리. 여기서는 신하가 임금에게 지켜야 하는 도리인 ‘충
(忠)’을 뜻한다.
55) 원문의 ‘旣倒狂瀾(기도광란)’을 풀이한 것으로, 이미 기울어진 사나운 물결의 뜻이다. 이 말은 조선의
형세가 걷잡을 수 없는 위기 상황이라는 뜻으로, 청나라를 염두에 둔 말이다.
56) 원문의 ‘大厦將傾(대하장경)’을 풀이한 것으로, 큰 집이 장차 무너지려고 함을 뜻한다. 이 말에는
조선이 큰 위기 상황이라는 화자의 인식이 담겨 있다.
57) 방 안에 틀어박혀 눈물만 흘리는 것은 아녀자의 태도라는 뜻이다. 즉, 무릇 사내대장부라면 원수를
갚기 위해 떨치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58) 악비(岳飛)와 조적(祖逖)의 고사를 인용하여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으려는 작자의 의지를 표현한
구절이다. 악비는 송나라 고종(高宗) 때의 충신으로, 손에 침을 뱉어 맹세하면서 금(金)나라와의 강화
를 반대하다가, 주화파인 진회(秦檜)의 참소로 옥사하였다. 진회는 악비를 죽이고 주전파를 탄압하면
서 금나라와 굴욕적인 화약(和約)을 맺어 뒤에 간신으로 몰리었다. 한편, 조적은 중국 동진(東晉) 원
제(元帝) 때 사람으로, 유민들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다가 노로 뱃전[또는 돛대]를 치며 “내가 중원(中
原)을 깨끗이 소탕하지 못한다면 이 강을 다시 건너지 않겠다.”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 구절은 화자
가 강화를 반대한 악비나 북벌을 주장하며 장강을 건넜던 조적과 같이 만 리 밖을 다니겠다고 다짐하
는 부분으로, 화자의 배청(排淸) 의식과 충정(忠情) 의식이 드러나 있다.
59) 작자는 옥주봉과 경천대를 호명하면서 정든 은거지와의 이별을 고하는 서사(序詞)를 시작하고, 다시
‘있다’와 ‘가다’를 반복하면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다짐하는 결사(結詞)로 마무리하고 있다. 그리고 서
사에서는 대상을 호명하면서 ‘가다’라는 단어를 먼저 제시한 다음 이어서 ‘있다’라는 단어를 활용하고
있는데 반해, 결사에서는 대상을 호명하지 않고 ‘가다’와 ‘있다’의 순서도 바꾸어 활용하고 있다. 이를
보면, 서사와 결사에서는 활용되고 있는 단어와 어법이 반복되면서도 순서의 변화를 주고 있다는 점
을 확인할 수 있고, 이는 곧 서사와 결사가 수미 상관(首尾相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
여 준다.
60) 표면적으로는 무정한 갈매기가 정든 은거지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화자의 맹세와 기약을 비웃는다고
하였지만, 이면적으로는 정든 은거지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기약이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화자의
의구심(疑懼心)을 갈매기에게 투영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61) 군은에 보답하겠다는 화자의 충정 의식이 드러나 있다.
62) 속세를 떠나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자 했던 은거지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화자의 의지가 드러나 있다.
돌아올 기약 없이 청나라로 떠나는 화자에게 있어서 정든 은거지는 이제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
라는 귀향처이자, 안식처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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