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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 본편完 (김미유)
그림자 없는 밤 본편完 (김미유)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황실 주최의 사냥 대회가 이곳에서 열리게 된 것은 그러한 연유였다. 술렁이는 민심을 잠재우고, 황실의 건재함을
알리고자 열린 이 사냥 대회에는 많은 귀족과 황족, 또 황실 기사단이 출진했다.
사망한 하얀밤 기사단의 부단장. 그의 부관은 기사단의 명단 위로 하나둘 선을 그었다. 열다섯이 다치고, 일곱
명이 사망했다. 아니 부상자 열넷과 사망자 여덟 명이다. 방금 치료받던 단원 한 명이 사망하였노라 의사가
선고했다. 그는 참담함을 미처 감추지 못하고 사망한 단원의 이름을 찾아 선을 그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장녀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 올 정도의
실력을 갖춘 단원이었다. 무력은 남자 기사들에 비하면 약했지만 성실하게 일하는 태도를 높이 사 이번에 죽은
부단장이 아끼던 자였다.
부관은 다른 기사단 쪽으로 시체가 잘못 흘러갔나 싶어 사방팔방으로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머리는
어디서도 찾아낼 수 없었다.
“누님은?”
막 발견했을 당시에는 생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위중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는 곧바로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로 돌아오지 못하고 비스타에서 치료받아야만 했다.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 갔지만 그녀는
줄곧 눈을 뜨지 못했다.
하다못해 객사하는 것만은 막고 싶었던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그녀를 비스타에서 백작가로 옮기라 명했다. 환자의
몸에 무리가 가는 여정이었지만 놀랍게도 이튿날 아침, 그녀의 의식이 돌아왔다. 아가씨께서는 집에 돌아오고
싶었던 게지요. 집사는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칼릭스는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하인과 하녀 몇 명이 우르르 그의 뒤를 따랐다. 이 층에 올라서니 퉁퉁한
백작가의 주치의가 막 로젤린의 방을 나오고 있었다. 그는 찌푸린 표정으로 급하게 올라오는 칼릭스를 보더니
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누님은 좀 어떠신가.”
“아마도…….”
말이 왜 저따위야. 무사하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건지. 한층 더 사나워진 칼릭스의 표정에 주치의 바시오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원래도 땀을 많이 흘리는 자였는데, 지금은 무슨 비라도 맞은 양 흠뻑 젖어 있었다.
“그, 그것이.”
팔에 붕대를 감고 있고 얼굴엔 작은 생채기가 여럿 있었다. 얼굴이 핼쑥해 보였지마는 며칠간 생사를 오갔던
사람치고는 아주 양호해 보였다. 칼릭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치의 바시오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괜히
불안했던 것이다.
시계 침이 똑딱이는 소리가 흘렀다. 칼릭스의 물음에도 그녀는 눈만 깜박거렸다. 일자로 다물린 입은 열릴 기색이
없었다. 조금 이상한 기류에, 칼릭스는 “누님?” 하며 재차 대답을 요구했다. 예쁜 페리도트색 눈동자가 그의
모습을 담았다. 로젤린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다가, 올라갔다. 그간의 고생을 입증하는 듯 거칠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조금. 쉬……세요.”
뒤돌아선 칼릭스는 주치의를 째려보았다. 바시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방 밖을 나서는 칼릭스를 뒤따랐다.
문이 닫히고 복도에 무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칼릭스는 피곤하다는 듯이 눈 주변을 손으로 꾸욱 눌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부딪쳤다. 출혈도 심했다. 심신이 미약하여 잠시간 기억을 잃은 것 같다. 나이
든 노인들이 치매에 걸리면 언어 체계가 무너지기도 하는데 그런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치매?”
칼릭스는 인상을 확 구겼다. 총명하기 그지없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장녀에게 ‘치매’ 따위의 단어가 붙여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뇌는 아주 섬세한 부분이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뇌에 문제가 생기면 언어 체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설명 드리고 싶었던 것이지 아가씨께서 치매에 걸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편에 계속....]
2 화.
“그럼 누님께서 날 기억 못한다는 얘기인가?”
“……가능성이 높다 이거지.”
정론이다. 하나 틀림없는 말이었지만, 칼릭스는 답답한 마음에 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칼릭스의 굳은 표정을
보는 하인과 하녀들이 초조한 기색을 내보였다. 그는 제 머리를 엉망으로 쓸었다. 아까 방 안에서 보았던 누이의
행동이 머릿속을 떠나지 못했다.
“예. 도련님.”
“치료를 도와준 마른가시나무 백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군. 선물을 준비해 둬라. 서신은 내가 쓰도록
하지.”
“네, 도련님.”
“누님 방에는 전담 하녀를 정해 두고 소수만 드나들게 해라. 이상한 말이 붉은수레바퀴령에 나돌지 않도록.”
2 황자는 1 황자와 함께 황태자 후보로 꼽히는 유명 인사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위명이 자자한 만큼 적
또한 많았다. 그 탓인지 이번 사냥 대회의 사건에서도 2 황자를 집요하게 쫓더라는 얘기가 왕왕 들렸다. 다른
기사단의 배가 되는 피해가 발생한 것은 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로젤린이라는, 실력이 그다지 좋지
못한 단원이 죽었으리라 하는 추측이 기정사실화되어 나돌았던 것이고.
창밖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성벽을 물들이고 마지막 남은 하얀 천을 하인들이 거둬들이고 있었다.
천이 흩날렸다. 칼릭스는 멍하니 제 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깜박 깜박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는
행위를 어색하게 반복했다. 얕은 위화감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무언가가 마음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칼릭스는 제 마음속의 그것을 차곡차곡 접어 한구석에 두었다. 하인이
식사 준비가 끝났노라 알려 왔다.
저녁을 먹기 전에 얘기해야겠다.
* * *
볼은 다람쥐처럼 양쪽 다 불룩해져 있고, 손과 입에선 스테이크의 육즙과 적갈색의 소스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스테이크의 피가 흐르며 미묘하게 공포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칼릭스는 방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가에 우뚝 섰다. 눈앞의 광경을 현실이라고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에서 이십 년 이상 근무한 노련한 하녀조차 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상태였다. 예법을 개한테
줘 버리고 살아 돌아온 아가씨. 맨손으로 스테이크를 잡으면 뜨거우실 텐데, 라는 걱정은 그녀가 고깃덩어리를
씹어 먹는 당찬 모습에 쑥 들어갔다.
문제는 마침 방에 들어서 그 모습을 목격한 칼릭스 도련님의 입이 떡 벌어진 채로 다물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하녀는 아가씨의 거친 식사를 도와야할지, 아련히 흩어지는 도련님의 정신을 보살펴야할지 정하지 못해 멀뚱히 서
있었다. 쩝쩝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칼릭스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
“…음…… 벌써 고기를 드셔도 되는 건가? 부담이 되지는 않고?”
“의식이 없으실 때에도 수프와 환자식을 조금씩 흘려 넣긴 했다더군요. 아침에 드신 수프에도 고기를 잘게 다져서
넣었는데 별 탈이 안 나신 걸 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래…….”
칼릭스는 그녀 몫으로 나온 수프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제 몫으로 나와야 했을 스테이크의 행방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
탁.
다행히 칼릭스가 잽싸게 그녀의 손목을 잡은 덕에 미수로 그쳤다. 칼릭스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칼릭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로젤린의 짜증이라니, 정말 희귀한 것이었다. 본디 그녀는 천성이 순하고 선했으며,
남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불합리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계기로 자신을 더
돌아보고 수련했다.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그리고 그녀는 참으로 담백한 남동생이었으며 누나였다. 그 흔한 포옹도 볼에 하는 입맞춤도
해 본 적 없었다. 손을 핥기에 더럭 붙잡았지만 이 짧은 접촉마저도 참 어색했다. 어릴 때에도 잡아 본 적 없던
누님의 손을 스물 하나 먹고 잡아 보는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곧 그녀가 말릴 틈도 없이 핑거볼의 레몬을
집어 먹고 웩웩거려서 그의 감성을 다 깨 버리긴 했지만, 아무튼 간에 그런 낯선 기분에 잠시간 싱숭생숭 했다.
“누님.”
로젤린은 칼릭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듯 보였다. “응.”이라고 대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느껴졌다.
[다음 편에 계속....]
3 화.
“아버지…… 그러니까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기사단을 이끌고 국경을 수비하시는 임무를 맡으셨습니다. 마무리 할
일이 있어 곧장 오지는 못하시지만, 아버지께서도 누님 걱정을 아주 많이 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무서운 얼굴이
더 사나워져서…… 지나가는 어린 영지민마다 자지러지듯이 울었죠.”
칼릭스는 영지를 시찰하며 돌아다닐 때 ‘카민! 너 말 안 들으면 붉은수레바퀴 백작님이 이노옴 한다! 이놈
백작님 보고 이놈 하라고 한다!’ 하면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거나 하는 장면을 종종 보고는 했다. 어이가 없었다.
깊은 산에 들어가면 그림자한테 잡아먹힌다던가, 거짓말을 하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는 수준으로 제 아버지가
쓰이고 있다니.
“아버지께서는 약자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휘하의 가문들 또한 영지민을 함부로
대하지 않죠. 아버지의 이름을 딴 와인도 있을 정도로 존경받고 계십니다.”
로젤린은 호오 그렇군, 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맛은 좋아?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웃음을
작게 흘렸다.
“누님!”
“아 해 보세요.”
“아.”
칼릭스는 그녀가 이상 없음을 확인한 후에도 한참을 살폈다. 눈, 피부, 목, 그녀의 숨소리 하나하나 지켜보던
그가 숨을 크게 쉬며 풀썩 자리에 앉았다.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상태는 아주 양호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도 또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종을 울려 하인을 부르려던 차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까 전 칼릭스
몫의 스테이크를 가지러 갔던 하녀였다.
“아가씨!”
하녀가 다급히 외치며 들어왔다. 그녀 또한 지금의 상황을 눈치챈 것이다. 그녀는 로젤린에게 다가가 자신이 한
것처럼 목과 가슴, 등을 확인했다.
“아 해 보세요, 아가씨.”
“아.”
하녀는 로젤린을 샅샅이 살피다가 한숨을 푹 쉬며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 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비
소스를 끼얹은 스테이크가 올라왔다. 지글지글 끓는 스테이크를 로젤린이 손으로 잡기 전, 칼릭스는 먹기 좋게
썰어 그녀 손에 포크를 쥐여 줬다. 그가 먹는 시범을 보인 후로는 로젤린도 포크와 나이프를 곧잘 사용했다.
“그래도 천만다행이네요. 이델라브힘께서 도우시나 봅니다. 어렸을 때 알레르기를 앓다가 완화되는 경우는 있다고
듣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 알레르기 약을 식후에 드시는 편이 낫겠어요.”
하녀는 잰걸음으로 주치의를 찾아 나섰다. 칼릭스는 로젤린으로 인해 난잡해진 식탁을 하나하나 훑었다. 한입
먹고 내버린 아보카드 샐러드. 비어 있는 스테이크 접시. 흔적을 찾기도 힘든 와인 소스.
[말로 무장한, 거짓으로 위장한 자들의 이면을 읽어 내야 해. 너라면 잘 할 수 있어. 붉은수레바퀴의 사람들은
감이 좋으니…….]
그녀가 어릴 적 말했던 것과 같이 자신과 제 누이는 아주 예민했다. 문제와 사물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또한 검술 실력과 함께 뛰어난 동물의 감으로 유명한 자였다. 이상하게 후퇴하고 싶더라니
타국의 함정이 있었다더라,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어서 냅다 패고 잡아 봤더니 타국의 간자라더라.
하는 묘한 무용담의 소유자였다.
칼릭스는 매일매일 그녀를 찾아가 간호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후계자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참 눈물겨운 우애였다.
이따금 칼릭스의 태도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다. 로젤린이 실종된 기간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했던 것치고는 그렇게 기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소문의 당사자,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는 어릴 적부터 차갑고 무뚝뚝한 성정으로 유명한 자였다. 사건이 마무리되었으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뿐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로젤린의 일과는 단순했다. 일어나면 밥을 먹고, 쉬다가 먹고, 또 쉬다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먹은 후 잤다.
식사나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때문에 멍하니 백작가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여러
군데에서 목격되었다. 방 안에서나 입는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곱슬머리는 묶지도 않아 산발이 되어 있는
매우 자유분방한 차림새로.
이에 집사는 명석하고 똑똑했던 아가씨가 백치가 되어 버렸다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고 칼릭스는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가씨의 머리가 좀…….”이라는 서두로 시작했다가 옆에 있던 다른 하녀에게 등짝을 맞고서는 “역시 과하게
똑똑하셨었지…… 약간은 덜 똑똑해지셔도 괜찮아.”로 끝나기도 했고, “맨발로 걷는 게 몸에 좋대. 역시 우리
아가씨 영특해.” 혹은 “머리 풀고 계신 거 완전 와일드해. 유행을 이끌어 가는 신여성. 우리 아가씨 멋있어.”
로 이어지는 식이었다.
“네.”
“아가씨의 인품이 빛나는 순간인 거죠. 뭐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백작 부인께서 오찬을 함께하고자 하셨습니다.
아가씨도요.”
“같이 가자.”
‘같이 가자.’
[다음 편에 계속....]
4 화.
“칼릭스, 같이 가자.”
* * *
“괜찮은 겁니까?”
칼릭스의 보좌, 알터가 감흥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찬에 가기 전, 로젤린은 잠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 두 명은 근처 가까운 응접실에서 대기했다. 알터는 탁자 위에 놓인 오셀로 판의
나무 조각을 뒤적이고 있었다. 게임 하자는 건가 싶었더니 흑색 말로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뭘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장녀가 실종되었는데, 그것도 몰라. 다쳤는데, 그것도 몰라. 돌아왔는데, 그것도 몰라.
심지어 당장은 밝힐 생각조차 없으시죠? 엄청 섭섭해하시겠는데요.”
그녀는 에스터에서 제법 벗어난 바다가 보이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별장에 머물렀다. 특별히 앓는 병은 없었지만,
툭하면 쓰러지고 툭하면 아파서 요양이라는 이름하에 일 년에 반 이상은 그곳에 있었다.
“그것도 얘기 안하셨죠?”
“뭐.”
칼릭스가 눈을 시퍼렇게 빛냈다. 머리가 뭐. 내 누이 머리가 뭐. 뭐. 이상한 단어가 하나라도 나왔다가는 요절을
내 버리겠다는 표정이었다.
“……머리가…… 좀…… 귀여워졌다는 거요.”
“…….”
칼릭스는 침묵했다. 알터는 그 침묵에서 긍정의 뜻을 읽어 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앞길이 천리만리였다.
칼릭스와 알터의 시선이 그녀의 몸을 따라 쭉 내려와 드레스로 가려진 발치에 머물렀다. 눈치 빠른 하녀가
로젤린의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들은 반질반질한 구두코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신발도
신었군.
칼릭스의 팔꿈치가 알터의 옆구리를 매섭게 강타했다. 알터가 억 소리 내며 쓰러졌다. 칼릭스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짓밟고 로젤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래, 칼릭스.”
일주일간의 변화는 놀라웠다. 짧게 단어를 끊어서 얘기하던 첫날과 달리 그녀는 놀라운 속도로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여자 말투였다가, 남자 말투였다가, 존대를 했다가 반말을 했다가, 그날 들은 것에 따라
마구잡이로 변하긴 했지만 단어를 벗어나 문장을 구사하게 된 것만으로도 놀라운 발전이었다. 집사는 우리 가문에
전무후무한 천재가 나왔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칼릭스는 이 집안의 분위기가 정말 극성맞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말을 걸면요?”
“네, 또는 아니요.”
“식사 하실 때는요?”
“훌륭하십니다.”
“네.”
“아니요.”
“네.”
로젤린은 참 꼬박꼬박 대답을 잘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하셔야 대화가 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제 누이는 한번 가르치면 잊지 않는 것 같았다.
급성 단기 교육이었지만 로젤린은 포크와 나이프를 곧잘 사용했다. 칼릭스는 제 눈물겨운 노력의 흔적을 아련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예전의 로젤린을 기억하는 에델바이스에게는 많이 부족해 보이는 듯 했다. 차마 입 밖으로
타박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살짝 인상 쓰며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입을 너무 벌린다는 둥, 음식물 씹는
소리가 크다는 둥. 만약 로젤린이 다쳐서 요양 중이지만 않았더라도 진즉에 몇 마디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달그락.
로젤린이 스푼을 내려놓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크게 울렸다. 에델바이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칼릭스는 그
모습을 보다 한숨을 뱉었다. 천천히 그녀의 상태를 알릴 예정이었지만, 생각보다 그 시기를 당겨야 할 것 같았다.
“어머니.”
“왜 그러니, 칼릭스.”
“여자애가 매일 밖으로 다니기만 하고, 기사단이니 뭐니 하면서 다쳐 오잖니. 이번에도 그렇고 말이다. 이
어미가 항상 노심초사하며 걱정 하는 건 알고 있니?”
“아니요.”
“어머니, 누님께선…….”
“네.”
“이번에도 네가 다쳤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팔이 부러져도 출근하던 애가, 무슨 사달이 났기에
집안에서 쉰다는 얘기가 나오나 해서.”
“네.”
“어머니!”
여자가 작위를 받고, 여자가 상인이 되고, 여자가 검을 드는 시대에 에델바이스는 과하게 고리타분한 감이 있었다.
심지어 에델바이스의 조국은 라고슈 왕국으로, 대륙의 어떤 나라보다도 여왕들의 집권 기간이 긴 나라였다.
에델바이스는 말을 미처 끝맺지 못했다. 본인을 끼고 얘기하고 있음에도 꿋꿋하게 식사를 하던 로젤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식사법이 문제였다. 막 바닥에 떨어진 빵을 주워서 천연덕스레 뜯어 맛있게 먹는 모습에 순간
좌중이 침묵했다.
굳어 있던 칼릭스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보기 드물게 괴로운 소리를 내었고, 뒤에서 지켜보던 알터는 절레…
… 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식사 예절 교육 당시, 떨어트린 것을 집어 먹지 말라는
내용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교육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다음 편에 계속....]
5 화.
시중을 드는 하인 또한, 바닥에 떨어진 빵을 치우려고 그녀에게 다가가다가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식탁보를
정리하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처음부터 식탁보가 구겨진 게 신경 쓰여 다가온 사람 같았다. 상태 안 좋은
로젤린을 며칠간 보살핀 덕에 생긴 순발력이었다.
“……로즈?”
“네.”
* * *
물론 그건 아니었다. 칼릭스는 제 어머니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라 약간의 정보를 흘렸다.
머리를 다쳐서 행동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의사의 말로는 곧 돌아온다고 하더라.
“우리 불쌍한 로즈…… 미인이 아니어도 똑똑한 아이라 안심이었는데…… 이제 얼굴도 머리도…….”
“네 아버지는 아시니?”
다들 미쳤다던가, 모자라다던가 하는 정확한 표현은 미루고 있었다. 칼릭스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에델바이스는 마른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쓸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이며 횡설수설하더니
쉬겠다며 방으로 올라갔다.
에델바이스와 칼릭스는 거의 음식을 먹지 못했지만, 많은 접시들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로젤린의 왕성한 식욕
덕분이었다. 그녀는 후식으로 나온 케이크까지 깔끔하게 해치웠다. 저 멀리 백작가의 요리사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손주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 표정이었다. 칼릭스는 후우 숨을 내쉬었다. 길고
길었던 식사시간이 끝났다.
“제 피, 땀, 눈물입니다.”
칼릭스는 개소리를 가볍게 무시했다. 알터가 펄펄 날뛰었다. 어쨌든 이게 제 최선이라 얘기하는 것인데……
누군가를 조사해 오라 명령하면 그 사람이 삼 년 전에 버린 속옷 색이 무엇이었는지까지 알아 오던 자의 솜씨가
아니었다. 그만큼 알기 어렵고 또한 알려져 있지 않은 정보라는 뜻이었다.
맨 처음 명령을 받은 알터의 표정은 정말 볼만했다. 장성한 주인이 아이들의 입에서나 오르고 내릴 법한 허황된
괴담에 대해서 조사해 오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수족을 부리거나, 정보 길드를 통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
때문에 표정이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까라면 까는 게 하급자의 운명이었다.
그리고 알터는 정보를 수집하며 알게 되었다. 이 어이없는 명령이 단순히 자신을 골탕 먹이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발끝부터 머리까지 순식간에 관통하는 그 섬찟함이란. 제 주인은 이것을 보지 않은 채로 진실에 대해 가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알터는 시시각각 변하는 칼릭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눈썹을 들썩이기도 했고 제 턱을 마구 쓸기도 했다. 마지막
장이 팔랑, 덮임과 동시에 칼릭스는 이마를 짚고 거친 숨을 쉬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산을 경고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사나운 마수나 산의 위험함 그 자체를 그림자로
표현했다고 추측된다.]
[그 괴담은 영지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숲의 그림자는 말을 한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깊은 숲’, 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 이라는 장소의 특정과, ‘그림자’라는
존재의 확정이 있었다.]
“?”
“그림자 말이네. 선배 약초꾼들한테나 듣던 그 그림자. 겁주려고 지어낸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있었을 줄이야
…… 굶주린 맹수를 보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더군. 손발이 벌벌 떨리고 몸에 오한이 들더구만.”
“?”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나무의 그림자인 줄 알았지. 울창한 숲의 안쪽은 심해만큼 어둡기도 하니……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그 어둠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더라고.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리게, 100 세 먹은
노인보다도 느리게, 달팽이만큼이나 느리게…… 새벽안개를 헤치고 다가오더군. 아주 섬뜩하고 무서운
광경이었지.”
“?”
“글쎄, 그런 마수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없지만. 약초꾼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얘기지. 죽음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그림자가 있다고 말이야. 그놈을 보면 가까이에 죽음이 있다고 알라 하더군. 그래서 그때 마구
주위를 둘러보니 죽음이 가장 가까운 건 나뿐이지 뭔가. 내 냄새를 맡고 온 거였어, 그놈은.”
“…….”
“…….”
“?”
“햐, 아무튼 지금 와서 생각해도 무서워. 아 그리고 내가 생각해 봤지! 왜 그걸 그림자라고 부르는 걸까 하고.
온몸이 새카매서 그런가 했는데…….”
“?”
“?”
“……!”
* * *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는 손님이 많은 편이었다. 현 백작이 뛰어난 무위로 일라베니아 황제의 커다란 신임을 얻고
있기도 하고, 영지 자체도 넓고 풍요로워 상인들이 많이 드나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주고받는 서신의 내용에는 정말 특별한 게 없었다. 타 영지나 타국의 첩자들이 볼 것을 애초에
고려해서 작성했기 때문이었다.
[잘 지내고 있느냐. 나는 요즘 사슴 고기가 좋다. 푸른등불 공작의 앵무새는 후미약하고 운다. 길거리
고양이한테 배웠다고 하더구나, 신기하지 않느냐?] 따위의 정말 쓸모없는 정보뿐이었다. 누가 봐도 상관없는
내용이긴 했지만 첩자들의 손에 고이 들려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칼릭스가 발코니에 나타나자 순찰하던 기사가 집무실로 한 놈 들어갔노라 신호를 보내 왔다. 칼릭스는 검을 들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감과 동시에 검을 뽑아 눈앞에 있는 자의 목에 겨누었다. 초대받지
않은 누군가로 인해 열린 창문. 그 틈새로 불어온 바람이 커튼을 밀어내어 어두운 방 안에 달빛이 스며들었다.
“!”
허리까지 닿는 검은 머리를 가진 여자의 실루엣이 창문 앞에 드러나 있었다. 마주친 시선에 칼릭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낮에 정원을 산책하던, 그 익숙한 누이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문을 박차고
들어온 칼릭스의 행동과 위협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다음 편에 계속....]
6 화.
칼릭스는 잠시간 당황하다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원래의 목적이었던 첩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태연하게 서 있는
그녀의 발밑에 검은 덩어리가 쓰러져 있었다. 목이 완벽하게 뒤틀려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검을 다룬다고 해도
완력이 약한 여자의 몸으로는 성인 남자의 목뼈를 이렇게까지 비틀어 꺾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흉기를 들고 있는
사람을 상대로 상처 하나 없이.
쾅!
“칼릭스.”
칼릭스는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화가 나고 슬프고 답답하고
괴로웠다. 칼릭스는 그녀의 어깨를 조금 더 세게 그러쥐었다. 무시무시한 완력으로 압박하고 있음에도 그녀는
일말의 불편한 기색조차 없었다. 첫날 이후부터 이 순간까지, 변하지 않는 그녀의 표정이 그를 끝없이 자극했다.
나는 당신이 아는 그 사람이 아니야.
“네가 혈육의 모습이라고 베지 못할 것 같나? 말해! 아니면 목을 날리겠다.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온 거냐!
감히, 그 모습을 하고서!”
칼릭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다그쳤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온몸을 두드려 댔다.
“너는 대체!”
거친 손길에 밀리고 흔들려 그녀의 머리는 더 흐트러졌다. 칼릭스는 그 머리카락이 반쯤 가리고 있는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대체, 누구야!”
“나는 그림자.”
그리고는 웃었다. 칼릭스는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누군가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눈썹이 살짝 처지며 날카로운 눈이 부드러워지고,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 있는 아주 잔잔한 미소였다.
* * *
‘그것’은 가끔은 새의 모습이었다가, 혹은 벌레였다가, 때로는 커다란 야수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깊은 산, 사람이 발길이 닿지 않는 태고의 숲에서 오랜 시간 존재해 왔다. 마력의 성질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그것’은 마수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랐다.
사슴, 호랑이, 원숭이, 멧돼지, 때로는 곤충까지. ‘그것’은 자신이 과거에 먹었던 것으로 의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인간들은 이를 한 번씩 스쳐 지나가면서 봤을지는 모르나 ‘그것’의 진정한 모습은 알 수
없었다.
검은 연기 같기도 했으며 살아 있는 모래의 집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검은 ‘그것’은 정확한 경계를 가지지
못하고 부서지듯 흩어지듯 보였으나, 부서지지도 흩어지지도 않고 간신히 뭉쳐 있는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과거
누군가는 이것을 귀신이라고도 했고 과거의 또 다른 누군가는 나무의 그림자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것’들이 의태를 풀고 본 모습을 드러낼 때는 음식을 흡수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더더욱 발견된 적이 없었다.
때로는 일 년 이상 먹지 않기도 했으므로. ‘그것’이 섭취 하는 것은 죽어 있는 생물뿐이지만, 사냥이라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오래 굶주려야만 했던 이유였다. 어떤 동물, 어떤 마수도 자신이 사냥한 사냥감을 바닥에
버리고 가지 않았다.
‘그것’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먹었으며 때로는 영역 싸움의 패자들 근처에서 그들의 죽음을 기다리기도
했다. 굶주림이 극심해지면 풀이나 과일 따위를 먹기도 했지만, ‘그것’이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다. 그저
행운만을 기다리다가 소멸하는 개체도 있었다. 지능이 낮은 편은 아니었지만 다소 게으르다고 평가할 만했다.
세달 전쯤 썩어 가는 과일을 발견해 조금 먹었다. 하지만 허기를 채우기에는 부족한 양이었다. ‘그것’은 지쳐서
잠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일어난 이유는 날카롭게 제 감각을 찔러 오는 위험 때문이었다. 산의 마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과거에 먹었던 파랑새로 의태해서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건
아주 옳은 선택이었다. 얼마 후, ‘그것’이 머물던 곳까지 인간들이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그것’은
무당벌레로 변해서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찬란하게 빛나는 은색 갑주들이 저 멀리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인간들은 번개처럼 거대한 산맥을 정벌하기 시작했다.
“…….”
‘이 인간은, 곧 죽는다.’
“……당신…….”
검은 머리의 인간은 ‘그것’을 불렀다. 바람이 색색 새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그것’은 조금
주춤거리다가, 평소보다 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조금 더 가까이 섰다. 인간은 겁도 없이 ‘그것’을
덥석 잡았고 ‘그것’은 살아생전 처음 놀랐다. 그녀 또한 놀랐다. 잡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검은 연기는 마른
모래, 마른 나무 같은 익숙한 듯 생경한 감촉이었다. 부서지는 입자가 그녀의 손안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일부는 붙잡을 수 있었다.
“도, 도와주세요…….”
‘그것’은 곤란했다. 인간의 언어는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무엇을 바라는지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치료해
줄 수단이 없었다.
그 깊은 숲 어딘가.
[다음 편에 계속....]
7 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넓은 정원. 칼릭스는 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원사의 솜씨가 빛나는 색색의
화원에서 사람들이 산책 중이었다.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흰 셔츠, 회색 바지, 서스펜더를 착용한 여자가
있었다. 귀족가의 영애가 할 만한 복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전부터 드레스를 거추장스러워했다. 몸을
움직이는 게 직업인 그녀에게는 고역이었을 것이다.
“네가 더 예뻐.”
어머, 어머! 하녀들은 꺄르륵 소리를 내며 즐거워했다. 칼릭스는 전에도 이 풍경을 본 적이 있다. 꽃 피어오르는
봄날, 밖으로 놀러 가고 싶어 하는 어린 하녀들을 위해서 그다지 관심도 없는 나들이를 가셨더랬다. 하녀들이
꽃이 너무 곱다 예쁘다 조잘대면,
칼릭스는 복잡한 마음으로 알터의 보고서를 팔락였다. 그림자에 관한 서류였다. 습관적으로 계속 들여다봤더니
이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이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지키러왔다.]
무엇을?
누구를!
[하얀 밤의 주인.]
칼릭스는 그녀의 두 눈에서 무언가가 타오르며 불티가 튀어 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의심의 의심, 갖은 고뇌를 한 끝에 완벽한 타인이라 규정지었더니 그 순간에 진정 제 누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제 아버지와 대립하면서까지도 지키고 싶어 했던 이름. 그 때문에 칼릭스는 검을
치워야만 했다.
순간 칼릭스는 ‘어쩌면,’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건 그녀가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코앞에 둔 그녀의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건 그녀가 바란 모습일지도 모른다.
칼릭스는 그 날, 집무실 바닥에 널브러진 첩자의 목을 베었다. 목뼈가 뒤틀려 죽은 이상한 모습에는 누구든 쉽게
의문을 가질 수 있으니.
그는 힘겹게 말하고서 첩자의 시체를 들고 방을 나섰다. 그 밤으로부터 2 주가 흘렀다. 로젤린의 상처는 자국만
남고 거의 아물었다. 포크와 나이프도 더없이 능숙하게 사용했고 바닥에 떨어트린 음식을 주워 먹지도 않았다.
기억을 잃은 틈을 타 에델바이스가 제 딸의 드레스를 마구 사들여 입혔지만, 어느 날부터 그녀는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 셔츠와 바지, 종아리 바로 아래까지 오는 부츠까지. 에델바이스가 보고 통곡하던 옷차림새로 백작가를
돌아다녔다.
화단을 구경하던 로젤린이 돌연 고개를 휙 돌렸다. 팔짱을 끼고 내려 보던 칼릭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려 살짝 흔들었다. 칼릭스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얼떨떨하긴
했지만, 그 또한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로젤린은 살짝 입꼬리만 올려서 웃더니 다시 하녀들과 나란히 걸었다.
그 모습은 점점 작아졌고, 이윽고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알터가 뜨악한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칼릭스는 부싯돌을 들고
탁탁, 솜씨 좋게 불을 붙였다. 알터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제 피, 땀, 눈물이 몽땅 재가 되게 생겼다.
“나는 착한 동생이거든.”
“나는 따를 뿐이다.”
* * *
“도련님!”
뛰는 것 금지. 큰소리 금지. 경박한 말투 금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집사의 모범이 와장창 깨진 날이었다.
검술 수련을 하던 칼릭스는 급하게 달려오는 집사의 모습에서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또한 그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 까지도.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은 항상 로젤린을 주시했다. 1 황자파에 속하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 헌데 그 장녀가 2
황자의 기사단에 들어앉아 있으니 그 시선이 고울 리 만무했다. 한 달이 지나도록 그가 잠잠했던 것은 그녀의
부상이 심각하기도 했거니와 사냥 대회의 사건으로 그의 일정이 매우 바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수습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흘렀고 그녀의 병가 기간 또한 끝을 보이고 있었다.
급하게 본관에 들어서는 칼릭스를 따라 하녀와 하인들이 따라붙었다. 그들의 표정엔 초조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칼릭스는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
“안 막고 뭣들 했나 대체!”
칼릭스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뒤에서 도련님, 도련님! 하는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그녀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가에서 하녀들이 안절부절, 발을 동동 굴리고 있다가 칼릭스를 보고 왈칵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도련님 도련님! 칼릭스는 평생 들을 도련님소리를 오늘 다 듣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언젠가를 떠올리게 했다. 로젤린이 제 스테이크를 손으로 쥐고 뜯고 있던…… 그…… 야생.
날것의 모습.
방 안에는 하얀밤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큰뿔산양의 레이몬드. 익히 아는 자였다. 그런데
자세가 좀 이상했다. 천하를 호령하는 무장처럼 떡하니 서 있는 로젤린 앞에 두 무릎을 꿇고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었다.
레이몬드의 새파래진 낯빛이 심각해보였다. 레이몬드는 파들파들 떨면서 칼릭스의 팔을 붙잡더니 끅 소리를 내며
실신했다. 쿵. 바닥이 울렸다. 어린 하녀가 놀라서 엉엉 울었고 저 멀리에서는 집사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옆 테이블에서 스콘에 잼을 바르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아수라장이었다.
레이몬드는 손님방의 침대로 옮겨졌다. 제복을 벗겨 보니 명치에 새빨간 자국이 남아 있는데 조만간 크게 멍이 들
것 같았다. 칼릭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 누이에게 우선 물었다.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를 곱게 귀 뒤로
꽂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밀크티를 마셨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수발을 담당하는 하녀에게 물어보니 레이몬드 경이 그녀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고 했다. 무사한 아가씨를 보고 기쁜 마음에 한 행동이었다고. 어디를 더듬거나 이상한 행위를 하지는
않았단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바로 전날. 순하고 착한 아가씨가 기억을 포함한 상식까지 모두 잃어버린 것이 몹시
걱정되었던 하녀들은,
[아가씨. 우리 아랫것들이 이렇게 아가씨를 꾸며 드리려고 가끔씩 아가씨를 만지게 되잖아요. 이런 것 말고,
모르는 사람이 아가씨를 만지려고 하거나, 쓰다듬으려고 하면 꼭 말씀하세요. 그 사람은 정말, 정말 나쁜
놈이거든요? 저희가 혼내 드릴게요]
[칼릭스는?]
[다음 편에 계속....]
8 화.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안 된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 후…… 복창하세요…….”
“때리면 안 돼?”
“안됩니다.”
“알았어.”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는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세게 쓸며 괴로운 소리를 냈다. 칼릭스는 누군가가
흉기를 들거나 살의를 비친다면 패도 되고 죽여도 된다고 말을 덧붙였다.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전쟁터에서도
얌전히 화살을 맞아 주고 있을 것 같았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운 곳…….”
곧 레이몬드가 깨어났다고 하인이 알려 왔다. 손님방에 도착하니 그는 상반신을 어정쩡하게 일으킨 상태로 앉아
있었다. 이 집에 들어올 때만 해도 단정하던 레이몬드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다. 칼릭스는 벌써 피곤이
몰려왔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좋을지 한참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노라니 로젤린이 대뜸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
“…….”
로젤린은 전혀 안 미안한 얼굴로 유감을 표했다. 칼릭스는 머리가 지끈거리며 두통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로젤린?”
“그래.”
“응.”
“응. 미안.”
레이몬드는 복잡한 얼굴로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그는 까치집이 된 머리를 더 헤집으며 엉망으로 만들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젤린이 물끄러미 시선만 옮기자 그녀의 손을 잡아 일어나게 했다.
“응.”
그리고 와락 껴안았다. 로젤린은 조금 답답한 듯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교육이 효과가 있었던지 냅다 주먹을
쓰지는 않았다. 칼릭스는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쯧 혀를 찼다. 괜히 때리면 안 된다고 했나. 시집도
안간 남의 귀한 집 딸을 덥석덥석 안다니. 영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딱 한번만 눈감아 주기로 했다
“잘 살아 돌아 왔다.”
레이몬드의 얼굴, 그의 목소리에서 깊이 쌓인 감정들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 * *
“검은달?”
로젤린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어서 의문형이라고 알기 힘들었다. 레이몬드는 측은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력?”
“성력과 반대의, 상극의, 불길한 힘을 말하는 거야. 그놈들은 어둠과 혼돈의 신인 크레안 티다니온이 진정한
신이라고 생각하고 빛과 질서의 신 이델라브힘은 거짓된 존재라고 주장하는 광신도 집단이야. 2 황자 전하께서는
역대 황제들을 넘는 성력을 지니고 계셔서 항상 검은달 놈들이 노리고 있지. 암살 시도가 스물한 번을 넘어갔을
때, 하얀밤이라는 2 황자 전하의 특수 호위 기사단이 창설 되었어. 그리고 그게 우리야.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경.”
로젤린은 흠, 하고 보기 드물게 반응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다리를 쫙 벌리고 있다가 칼릭스가 “누님……
다리 좀…….” 하고 그녀의 자세를 바꿀 것을 청하자 다리를 꼬았다. 그녀의 한쪽 다리가 까닥거리며 발짓하고
있었다. 첩첩산중이었다. 칼릭스의 깊은 한숨 소리에 레이몬드가 웃었다.
“이번 사냥 대회의 사건에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많이 사망했어. 심지어는…… 음…… 부단장님도 돌아가셨지.
네가 부단장님을 많이 따랐어, 로젤린. 혹시 기억나?”
“아니.”
레이몬드는 허리에 두 손을 떡하니 올려놓고 잔뜩 뽐냈다. 로젤린은 그 모습을 보다가 “좋아?”라고 물었고
레이몬드는 그 물음에 스르륵 무너졌다.
“아니…… 안 좋아…… 누구는 승진이라고 부럽다고 하지만…… 그 부단장 밑에서 이리저리 구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하다…… 아, 참. 그리고 너도 상급 기사로 승급했어. 전에 치렀던 승급시험 점수도 좋았고
플러스로 죽은 동료들 중에 상급 기사들이 많았지. 너도 이제 2 황자님을 직접 호위하는 인원에 들어가.”
“그래?”
태평한 로젤린을 대신하여 칼릭스가 깜짝 놀랐다. 과거에 그녀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얀 밤의 주인.]
“생각보다…….”
“아.”
“…….”
그들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로젤린을 끌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로젤린은 그들의 손을 잡고 쭐레쭐레 따라갔다.
하녀가 로젤린의 긴 머리를 하나로 묶자, 레이몬드가 검을 들고 그녀 앞에 다가갔다.
레이몬드는 제 심장이 하도 쿵쿵 뛰어서 입 밖으로 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발, 제발…… 검술은 기억하고
있겠지?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칼릭스 또한 그 광경을 보며 침을 꿀떡꿀떡 삼켰다. 두 남자의 뜨거운 시선
아래, 그녀는 내밀어진 검을 뽑았다. 스르릉, 검집을 스치는 날이 예리하게 울었다.
“……크윽…….”
“…….”
“이거 내 거야?”
로젤린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제 손끝으로 바스타드 소드를 들어 보였다. 레이몬드가 입을 떡 벌리는 모습을 보고
칼릭스가 급하게 말을 붙였다.
“내가?”
“왜 안 갔어?”
레이몬드는 시답잖은 농담을 몇 번 주고받다가, 곧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로젤린은 객관적으로 괜찮은
기사였다. 힘보다는 기술과 지략을 내세우는 여자 기사들 중에서는 이미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또한
그녀 특유의 성실함을 높게 평가받아서 짧은 수습 기사 기간을 거치고 곧바로 하급 기사로 승급했었다. 하지만
하급 기사들은 수습 기사들과 달리 실력이 검증된 자들이 많았다. 조금 뛰어난 기술만으로는 그들의 실력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9 화.
로젤린은 그 한계에 부딪히고도 좌절하지 않았고 노력했다.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수련했으며 누구보다도 많이
공부했다. 장점을 갈고 닦고, 약점에서는 눈을 돌리지 않으려 했다. 여자기사라고 은연중에 무시하던 이들도
그녀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제 시선을 점차 바꿀 정도로.
상급 기사로 승급했다는 소식에, 레이몬드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녀의 노력이, 그녀의 마음이 헛되지
않았구나하며 기뻐했다. 그녀의 승급 소식을 전해 준 부단장에게 입을 맞추려다가 한 대 맞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가야해.”
“왜?”
레이몬드는 씨익 웃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하더니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하고 있다. 그녀다웠다. 로젤린은 언제
어디서든 어떤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것이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발휘되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찌르고, 베고, 막고. 검 끝은 하늘을 향했다가, 허공을 가르고 땅을 스치기도 했다. 검이 지나는 공간마다 크게
바람이 불었다. 제법 떨어져 있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검의 날카로움이 생생했다.
“후.”
레이몬드는 처음 시작할 때처럼 검을 제 얼굴 앞에 세우며 움직임을 멈췄다. 진지하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아올
쯤엔 로젤린도 뻑뻑한 눈을 깜박일 수 있었다.
“한 번 더.”
“응?”
로젤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귀찮게 말을 두 번하게 만들고 난리야. 딱 그 표정이었다.
“한 번 더.”
“한 번 더.”
“젠장! 그건 그래!”
“…….”
칼릭스는 그들의 대화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헉헉거리면서 소파에 대충 널브러졌다. 목 끝까지
채우고 있었던 제복은 단추 두어 개를 제외하고는 전부 풀려 있었다. 예전 로젤린이 보았다면 한소리 했을 복장
상태였다.
“저도 이제 슬슬 복귀해야 해서, 휴. 권유는 감사하지만 일정이 바쁘군요. 그런데 오늘 한 고생이 뭔가 소용이
있겠습니까? 몸을 직접 움직인 것도 아니고 그냥 보기만 했는데?”
칼릭스는 비죽 웃었다.
“…….”
“상급 기사로 임명되는 자들의 서임식은 2 황자 전하께서 직접 진행하실 예정입니다. 그때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을 상급 기사로 임명한다! 고 선언하실 텐데 응. 그래. 하는 사태는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오싹 하군요.”
로젤린은 검을 뽑았다. 그의 바스타드 소드와는 형태도 무게도 다른 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칼릭스는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레이몬드가 몇 시간을 보여 준 덕에 그녀는 움직이는
순서와 형태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많이 어설펐다. 검을 처음 잡아 봤을 뿐더러 파지법조차
엉망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형태가 조금씩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레이몬드의 움직임에서 자신을 찾아 갔다. 로젤린의 체격, 현재의 이 신체가 지닌 힘, 검의 길이. 모든
것을 고려한 합리적이고도 아주 영리한 형태였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수년을 검을 휘둘러 온 사람 같은
뛰어난 검술 실력을 내보일 수 있었다.
어둠의 신 크레안 티다니온을 몰아내고 세상에 빛을 가지고 온 이델라브힘의 나라.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 대륙
구석구석에 널리 퍼진 위명에 걸맞은 크기였다. 눈이 부실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백색의 성은, 아무리 멀리
내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그리고 아주 높게 펼쳐져 있었다.
로젤린은 마차의 창을 통해 아름다운 성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감상했다. 하얗다. 많다. 일정한 규칙으로
만들어져 있는 이 높은 성들은 자신이 살았던 숲과는 매우 다른 성질을 띠고 있었다. 고요하고 적막한, 아름다운
이곳은 [좋다, 싫다] 둘 중에 [싫다] 쪽에 가까웠다. 그녀의 본능이 울렁거렸다.
“로젤린!”
마차는 황성의 문을 지나고도 한참을 달렸다. 로젤린은 내리자마자 저 멀리서 달려오는 레이몬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레이몬드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녀 앞에 멈춰 섰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모습에서 누군가의 노력을 엿봤다.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레이몬드는 마차에서 그녀의 짐을
같이 내렸다. 레이몬드 휘하의 수습 기사들도 그녀의 짐을 들고 기숙사로 날랐다. 깔끔하고 커다란 건물이었다.
아직 정식 서임을 받지 않았지만, 상급 기사로 승급했기 때문에 넓고 좋은 방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그 넓은
곳에 채워 넣을 짐은 많지 않았다. 순백의 제복 몇 벌, 검 몇 자루, 평상복과 생활용품들. 그녀가 대충 짐을
던져 놓자 레이몬드가 차곡차곡 꺼내어 정리했다.
[다음 편에 계속....]
10 화.
“단장실에 가서 복귀했다고 알리는 게 우선이야. 서임식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기사단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좀
봐야 할 것 같고…… 아, 그리고 내일 상급 기사로 정식 임명된 후에는 수습 기사 몇 명이 붙을 거야. 최대 다섯
명까지. 네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는 수습 기사들이 지원하면 그중에서 뽑으면 돼. 자잘한 업무나 심부름 정도는
시킬 수 있는데, 시간 내서 돌봐 줘야 하는 게 좀 힘들긴 하지.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뽑아. 예식 순서랑
언약문은 외웠어?”
“응.”
“대단한걸, 잘했어. 그리고 로젤린 너…… 기억 잃은 건…… 음…… 어떻게 하기로 했어? 말해도 된대?”
“응.”
칼릭스는 고뇌했다. 말하자니 로젤린에게 불이익이 갈 것 같고, 말을 안 하자니 그녀의 자유분방한 행동이 납득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의 행동이 다듬어졌다고는 하나, 로젤린의 예전 모습을 알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눈치챌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통제를 벗어나 이상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기 전에 미리 다른 수를
차단해야 했다.
로젤린의 병명은 기억상실. 하지만 기사단 업무를 보는 것에 지장은 없을 것이며, 기억을 잃었음에도 남아 있는
2 황자에 대한 충심으로 기사단에 복귀하다. 그것이 로젤린의 이야기였다.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해 보게.”
“그게 무슨 소리지 레이몬드 경? 마음이 아프다니. 물론 심정은 이해하네. 나 또한 그대들처럼 동료를 잃었으니.
그러나 그 슬픔과 분노를 딛고 일어서는 게 우리들의 일이야.”
“…….”
“……?”
“대부분의 기억이 소실되었음에도 2 황자 전하를 지키고자 하는 하얀밤의 맹세는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식의 습득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그녀가 임무를 진행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대로 복귀
명령을 진행했습니다. 곧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서도 있습니다.”
스타스는 레이몬드에게서 소견서를 받아, 찬찬히 읽어 내렸다. 다른 내용은 다 흐릿한데 [기억상실] 그 단어만
아주 생생하고 뚜렷했다.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짧은 대답들이 이것으로부터 기인했던 건가.
검은 머리의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걸 빤히 들으면서도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조금은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예전의 로젤린은 관대하고 담대했지만 이런 거짓말로 제 잇속을 챙기는 능수능란한 자는
아니었다. 그녀의 성품을 잘 아는 스타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허황된 보고가 한없이 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스타스는 얼굴에 복잡한 심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참을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힘겹게 열었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타스는 조금 입가를 달싹이며 망설이다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레이몬드는 단장실에 남아 잠시간 그와 더
얘기를 나누었다.
단장실 밖에 서 있던 두 명의 수습 기사들이 그녀의 얼굴을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하얀밤 기사단 내에서
유명인사였다. 1 황자를 비호하는 가문의 장녀,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자신을
향한 여러 감정이 담긴 시선을 받으며 그녀는 미소를 띠었다.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칼릭스에게 미리 들어서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에 있는 인간들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기사단장이라는 자도 마찬가지 일 텐데. 무뚝뚝한 말투와 표정으로도 그의 걱정은 감춰지지 않았다. 문 안쪽에서
레이몬드와 스타스가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문 밖에 있었지만 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청각 능력이 뛰어나다는 무엇의 세포를 조금 빌려 왔던 덕이었다.
“……로젤린 경이…….”
“그렇다면…….”
로젤린이 떠난 후에도 기사단장의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질려할 정도였다. 로젤린은 레이몬드를
기다리며 벽에 머리를 툭 기대었다.
* * *
로젤린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옆에서 레이몬드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로젤린은, ‘그것’은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생물들은 수년의, 수백의 시간과 몇 세대를 거쳐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하며 때로는 도태되기도 한다. 근처에 있는 생물을 흉내 내어 무리에 섞이고 위협으로부터
도망치기도 했다. ‘그것’의 의태 능력은 이러한 환경에서 발달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이 로젤린에게 집중되고 있는 이 순간은 그녀를 초조한 기분으로 몰아넣는 최적의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까지 바라볼 필요가 있는 건가? 마수의 모습도 아니고, 눈이 하나 없는 것도 아니고, 팔이 한
짝 어떻게 된 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형태인데? 혹시 나도 모르게 의태가 풀렸나? 그녀는 제 팔다리를
확인한 후, 제 등을 보기 위해 낑낑거렸다.
“뭐해 로젤린?”
“나 어디 이상해?”
왜 계속 쳐다보는 거지? 레이몬드는 뱅글뱅글 도는 그녀의 모습을 쭉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을음 하나 묻지
않은 완벽한 옷차림이었다.
“네가 좋은 아이기는 하지만 로젤린. 그렇다고 해도 그게 모든 사람이 널 좋아해줄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거지.”
붉은수레바퀴의 페르탄 에스터 백작. 1 황자를 비호하며 전선에서 수많은 공을 세워 백작위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작위를 보유하고 있는 자. 한마디로 일라베니아에서도 제법 괜찮은 입김과 힘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
가문의 딸이 어느 날 2 황자의 기사단에 들어오더니 빠른 시간 안에 수습 기간을 마치고 하급 기사로 승급했다.
기사단장은 그녀를 조용히 지켜볼지언정 차별하거나 저어할 사람이 아니었고, 부단장은 다른 세력의 자식임에도 2
황자를 지키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을 갸륵하게 여기며 그녀를 몹시 아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다른 기사들이 보기에 그다지 좋은 광경이 아니었음이 문제였다. 어린 주제에. 여자 주제에, 1
황자 파 주제에, 그다지 실력도 좋지 않으면서! 주제도 수치도 모르는 자. 그들에게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사냥 대회에서의 전투로 시체조차 소실되어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로젤린을 싫어하는 이들 또한 그때만큼은 애도했다.
[다음 편에 계속....]
11 화.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로젤린은 살아 돌아왔다. 그래도 한솥밥 먹은 사람으로서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그 소식이 싫지만은 않았다. 한데 승급이란다. 상급 기사로 임명받는단다. 그녀의 적은 소리 없이 불어났다.
황자 전하를 지키고자 목숨 바친 이들의 자리를 꿰차기엔 한없이 부족한 인물이라고 여겼기에. 심지어는 추모식
때는 코빼기도 안보이고 제 영지에 박혀서 놀다가, 서임식때 나 슬그머니 기어 나오다니. 어쩌면 저렇게까지
간악할 수 있을까.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단원들은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었다.
상급 기사들은 자격과 능력이 모자란 기사가 굴러 들어오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고, 하급 기사들은 제 자리를
뺏긴 것 같아 분노했으며, 수습 기사들은 현재 로젤린의 직위가 그녀의 가문과 권력으로 얻어 낸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로젤린을 쳐다보는 수많은 눈빛들은 그런 감정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집요하게 질척거리며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열렬한 구애의 눈빛보다 더 진했다.
“로젤린.”
“응.”
“하나 말해 둘게 있는데…….”
“말해.”
“나 친구 많을 줄 알았는데.”
그녀의 또랑또랑한 표정을 보며 레이몬드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로젤린의 곁에 있어야만
했을 가상의 친구를 송두리째 뺏어 버린 것 같았다. 자신이 너무 나쁜 놈처럼 느껴졌다. 레이몬드는 찔끔 나온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레이몬드는 제 머리를 그녀의 검은 머리에 마구 비볐다. 두피가 당겨서 조금 아팠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자 둘은 사이좋게 기숙사에 딸린 식당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걸 잠깐 잊을 정도로, 식사는
맛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면 먼저 편지지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로젤린은 제 동생에게 꼬박꼬박 편지를
썼다고 했다. 성은 하얀색이었는데 자신을 마중 나온 레이몬드가 있었고 기사단장도 만났다. 사람들이 쳐다봐서
불쾌했지만 때리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난 예쁜데 친구가 별로 없다고 한다. 밥은 맛있었다. 에스터의 밤과 같이
티가드의 밤 또한 달과 별빛으로 반짝거린다.
하지만 로젤린은 오랜 여행의 피로로 인해 끝까지 쓰지 못하고 잠들었다. 책상에서 그대로 엎어진 채 그녀는
아침까지 깊은 잠을 잤다. 꿈에 로젤린이 나온 것 같았다. 널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더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능숙한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걸었더니 로젤린은 그때처럼 미소 지으며 원래 그런 거라
이야기했다.
* * *
로젤린은 눈을 떴다. 복도에서 바지런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늘을 보니 아침에 가까운 새벽의 색이었다.
오늘은 하얀밤 기사단의 서임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녀는 책상에서 일어나 거울을 확인했다. 편지지로부터 새어
나온 잉크가 볼에 몇 개의 글자를 남기고 있었다.
씻은 후 제복을 갈아입고서 머리를 묶으니,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가 노크했다. 로젤린은 감각을 곤두세워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일당백의 친구 레이몬드였다. 그녀는 방긋 웃고 문을 열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채로 의지할 수 있는 혈육과 집마저 떠나왔다. 마음고생이 심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그녀는 숙면을 취한 듯 보였다. 하얀 피부에 만질만질하게 윤기가 돌았다. 레이몬드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전에도 이렇게까지 적응력이 좋았나? 애가 죽다 살아나더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나 보다.
그녀가 제단을 멀뚱히 구경하는 사이 흰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하나둘 모였다. 그들은 누가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오와 열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것도 칼릭스에게 배운 것이었다. 맨 뒤에는 수습 기사. 중간 줄을
하급 기사, 앞줄에는 상급 기사가 서 있게 된다. 그 앞에 기사단장의 부관과 부단장, 부단장 부관이 상급 기사와
마주 보며 서 있는 형태. 제단의 한 가운데는 의식을 진행할 2 황자가 차지할 것이고 그 옆에 기사단장이 그를
지킬 것이다.
부우우.
공기를 울리는 소리가 퍼지며 얽혀 있는 빛 무리가 그려진 흰색 깃발이 차례대로 올라갔다. 기사들은 탁, 탁
움직이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곧게 펴고 차렷 자세를 했다. 저 멀리 하얀 궁에서부터 상급 기사들이 발 맞춰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좌우로 감싸고 있는 중앙에는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기사들의 제복이 아닌 신전에서나 입을 법한 화려한 예복이었다. 그는 길게 찰랑이는 머리를
늘어트리고 제단을 향해 천천히 걸어 왔다. 달빛을 담은 듯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이었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독인가? 아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있지만 여느 생물과 다르게 자신에게는 독이
통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것을 흡수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깬 부작용인가? 아니, 그렇다면 진즉에 이상을
느꼈을 것이다. 로젤린이 숨을 가쁘게 쉬며 오른손으로 가슴을 꽉 눌렀을 즈음엔, 모든 기사들 또한 그녀와 같은
동작을 했다. 기사들의 경례 방식이었다. 로젤린은 우연의 일치로 그들 속에 녹아들었다.
상급 기사들은 중앙의 남자를 제단까지 호위한 후, 자연스럽게 돌아와 그녀의 앞에 섰다. 로젤린은 앞에 서 있는
상급 기사의 어깨 너머 단편적으로 보이는 그를 응시했다.
* * *
[2 황자 전하의 생모이신 밀리아 황비님 께서는 변방 자작가 출신이십니다. 심지어는 황비님의 어머니께서는
평민이셨죠. 그래서 2 황자 전하의 출신을 걸고넘어지는 자들이 많습니다. 비천하네, 평민의 피가 흐르네
하면서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황자님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곤 하죠. 왜 그럴 것 같습니까 누님?]
[황자라서?]
[……외모?]
리카르디스의 새하얀 옷과 머리칼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햇살마저도 그의 곁을 비추는 것 같은, 그런 기이한
풍경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12 화.
그녀의 혼란스러움을 뒤로하고 예식은 이미 차례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2 황자가 두꺼운 책을 펼쳐서 읽어 주기도
했고, 기사단장 스타스가 큰소리로 무언가를 외치자 기사단원들이 같이 복창하기도 했다. 로젤린은 입을
뻥긋뻥긋하며 따라하는 시늉을 했다.
제단의 한 중앙에는 2 황자가, 그의 오른쪽에는 기사단장 스타스가, 왼쪽에는 신관이 있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2 황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걸 미쳐보지 못했다.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가 붉은수레바퀴 로젤린 에스터의 맹세를 듣는다.”
기사단장이 폐회를 선언했다. 이내 백색의 제복을 입은 하얀밤 기사단의 단원들도 모두 흩어졌다. 로젤린은
이마를 슥슥 만졌다. 그의 손끝이 닿았던 흔적은 이미 말라서 없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차가운 온도가 아직
선명하게 느껴지는 듯 했다.
* * *
의외로 평탄한 나날이 이어졌다. 상급 기사라고는 하나, 막 승급한 로젤린에게 황자 호위라는 중대한 임무가
돌아올 리 만무했다. 결국 그녀에게 돌아오는 몫의 일거리는 검술 훈련이나 문서 작업뿐이었고, 그 일감은
자연스럽게 레이몬드의 책상 위에 쌓였다.
깐깐한 부단장의 보좌로 일하며 살인적인 업무량에 시달리던 그는 밤을 새면서 그녀 몫의 문서 작업까지 해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 곧 레이몬드의 눈 아래에 시커먼 피곤의 흔적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생기만 간신히
붙어 있는 시체 같았다. 인간의 표정을 다 구분하지 못하는 로젤린이 보아도 좀 심각한 상태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미안하다는 감정의 의미를 진정 깨우친 때였다.
“미안…… 나 그런 거 할 줄 몰라서.”
“응.”
로젤린은 주위를 감싸고 있던 적막을 깨트리며 움직였다. 일라베니아의 기본 검법이었다. 그녀는 동작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짚어 가며 천천히 검을 흘렸다. 누가 보면 답답하다고 느낄 만큼 느렸지만, 움직임은 완벽함에 닿아
있었다. 햇살 아래 로젤린의 높게 묶은 검은 머리가 흔들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았다.
로젤린은 알고 있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웃는다] 그 공식이 절대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숨길
생각도 없이 로젤린에 대한 감정을 흘리고 있었다. 그 감정이 적나라한 것과 얼마간 인간으로서 쌓아 온 경험이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저들은 로젤린을 좋아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녀에게 흠을 내고 싶어 하고, 그 틈을
비집을 순간을 보고 있었다.
멀리서 그녀가 기초 검법을 연습하는 걸 지켜보던 하급 기사들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기에 그들은 연무장 중앙에 있던 로젤린에게 금방 다가섰다. 로젤린은 그들이 오는 것을
느끼고 연습을 끝맺지 못한 채 중단해야만 했다.
“감사합니다.”
“…….”
[다음 편에 계속....]
13 화.
바다협곡의 네스터. 금발의 남자는 바다협곡 백작의 차남이었다. 그는 로젤린과 같은 시기에 하얀밤 기사단의
수습 기사가 되어 동기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네스터가 보기에 로젤린은 부족한 검술 실력을 머리로 채우는
전형적인 여기사였다. 전술이야 괜찮은 전략가를 옆에 두면 되는 것이고 기사에게 중요한 것은 역시 검술 실력이
아니겠는가. 네스터는 사사건건 그녀와 자신을 비교하며 제 자존감을 채웠다.
하지만 로젤린이 먼저 하급 기사로 승급한 그 날부터 그의 자존심은 구깃구깃 구겨지고 말았다. 네스터 또한 곧
하급 기사로 승급하긴 했지만, 하루든 이틀이든 그녀가 먼저 앞서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급 기사로 승급하기까지 했다. 존경해 마지않던 기사단장의 안목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서임식을 황자 전하께서 직접 진행하는 모습을 보니 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 로젤린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하급 기사들과 그녀의 사소한 하나하나를 트집 잡아 비웃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도리어 제 꼴이
우스워 지는 것 같다고 생각할 쯤에 네스터는 보게 되었다. 로젤린이 기사 가문의 자식들이 여덟 살 때에나 하는
기본적인 검법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원래 펼치는 동작보다 수 배는 늦는 동작들이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허술할 수가! 그저 웃음만 나오는 실력이었다. 고작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상급 기사로 승급해?
네스터는 웃었다. 하급 기사에게 지는 상급 기사는 없었다. 상급 기사들 중엔 여자가 없기도 했거니와 모두가
백전노장의 전사들이었다. 머리 좀 좋을 뿐인 여자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네스터는 자신이 그
차이를 직접 몸으로 깨닫게 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런, 경우에는…….
다섯 번째로 칼릭스와 대련한 후에 그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었다. 칼릭스는 연무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왼쪽 목덜미에는 로젤린의 검이 서늘한 빛을 내고 있었다. 칼릭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몇 번 짓다가 그녀를 향해 짓궂은 표정을 했다.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
* * *
“알겠습니다.”
네스터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 중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암기 금지, 검술과 체술의 종합적인 대련. 한 사람이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지속된다. 대련 중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서로에 대해 책임은 없다. 낯선 기사 두 명이
로젤린에게 대련 조건을 읊어 줬다.
‘속전속결!’
챙!
“이, 이게 무슨……!”
네스터는 고개를 돌려 입회하고 있던 동료들을 쳐다봤다. 클로드와 바스티안의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네스터의
형형한 눈빛에 두 남자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암기 아냐. 속임수 없었어. 그 뜻을 읽은 네스터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멀거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귓가로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수, 잘 배우셨습니까.”
네스터의 얼굴이 터질듯 붉어졌다.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기사들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이를
갈았다. 운이 좋아서 힘의 중심을 어찌 받아친 모양인데 그 정도로 의기양양해하기는!
“……조금 더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
바람이 불었다. 열을 식히는 바람에 나뭇잎이 한 장 실려 와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로젤린의 눈동자와
같은 색의 잎사귀였다.
* * *
사냥 대회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하얀밤 기사단의 인원이 대폭 줄어들었다. 이후 급히 서임식을 치루며
빈자리를 채우긴 했지만, 정상궤도로 올라서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레이몬드는 각 조마다의 훈련 성과를 보고받은 것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잠시 밖으로 외출했던 부단장 나단이
멍한 얼굴로 들어오더니 자리에 털썩 앉았다. 레이몬드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예엑?”
“네엑? 아니, 제대로 못 들어서 되물은 게 아닙니다! 아니, 아니아니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로젤린 경은 현재 매우, 마음과…… 머리가 아프다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다음 편에 계속....]
14 화.
“기사단장실에 가던 길이었지.”
“……?”
“밖이 소란스럽더군.”
“좋은 생각이야. 아무튼 간에, 연무장 쪽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가봤는데…….”
“퇴근하겠습니다!”
“1 시 반에? 해가 아직 중천이네.”
“조퇴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부단장님! 레이몬드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부단장실을 뛰쳐나왔다. 가문도 확실하고, 실력도
성품도 괜찮은 놈이지만 제 사람을 너무 과하게 아끼는 경향이 있었다.
나단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다가 그녀에게 호위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 올려야 하는 서류 몇 가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는 달렸다. 나단이 보았으면 인상을 찌푸리며 한소리 했을 것이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를 걷고
있는 로젤린을 발견했다. 그녀에게는 어디 하나 작은 생채기도 찾을 수 없었다. 몇 분 전까지 대련을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해 보였으며, 제복에도 흙이나 먼지 따위가 묻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두 팔 위에
얌전히 들려 있는 네스터만 아니었더라도 앞서 그렇게 격한 대련을 했다고는 도무지 믿지 못할 것 같았다.
“……로젤린 경?”
레이몬드는 자신의 두 눈을 마구 비볐다. 로젤린은 평온한 얼굴로 네스터를 들고 있었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기사가 공주님을 안을 때처럼.
그렇게 참혹한 꼴을 당한 거니……? 얕보던 상대에게 쥐어 터져서 기절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의 품에
다소곳이 안겨 있는 모습이 매우 참혹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깨어 있었다면 수치심에 눈물이라도 흘렸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대련했습니다. 의무실에 가던 중입니다.”
“대련…… 했습니다…….”
의사가 그의 옷을 들쳐보았다가 여기저기 올라오기 시작한 시커먼 멍들을 보고 식겁했다. 그의 물음에 클로드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대련하기로 했는데, 첫 공격에 기절해 버려서 항복이라는 말을 못했…….”
레이몬드는 의사에게 그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 인력이 부족한 시기니 힘 써 달라고 했더니 인력이 부족한 걸
아는 사람이 한명의 인력을 박살 냈냐는 불손한 눈빛을 보냈다. 옆에 있는 검은 머리의 여기사가 그랬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괜히 자신이 찔려서 호탕한 웃음을 내뱉고 로젤린을 끌고 나왔다. 그녀는 대련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풀어서 손으로 대충 빗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고?”
“응. 걔 약해서.”
“응.”
“응.”
2 황자가 머무는 월장석 성. 아침부터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은 만원이었다. 황금정원 자작, 바다협곡 백작,
가을안개 백작, 푸른등불 공작. 큰뿔산양 후작까지. 2 황자 세력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술렁였다. 푸른등불 공작이 가지고 온 정보 때문이었다. 2 황자 리카르디스는 가장 상석에 앉아 태연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물론 은제 식기의 색을 확인한 후였다.
“다들 놀라는 척 하기는. 빤한 일 아니겠는가? 타국의 암살 부대가 국경을 지키는 수천, 수만의 눈에 띄지 않게
넘어온 것 까진 그렇다 치고 말이야. 우연히 발견한 막사에 공격을 퍼부은 것뿐인데 2 황자만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는 놀랍지 않나? 어떤 곳에도 1 황자는 없었다니. 이거야 원, 바보라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작위적이니
…….”
“증거는?”
황후와 황제는 멀지 않은 혈연관계였으나, 황실은 성력을 위해 근친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집착이
엘피디오에게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황후 소생이라는 강력한 뒷배, 역대 황제와 비견해도 뒤지지 않는 방대한
성력.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장자가 가문을 계승하는 일라베니아에서 엘피디오는 사실상 황태자나 다름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15 화.
황제가 여색을 밝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 다들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그녀가 황성에 입성하며 데리고
온 두 명의 아이였다. 황비와 똑 닮은 머리 색의 열 살짜리 남자아이와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는, 무려 황제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황제가 변방 시찰을 했던 때에 생긴 아이라나 뭐라나. 황실이 왈칵 뒤집혔다.
황실에 사생아란 없다. 그저 지위가 낮은 황녀 황자만 있을 뿐. 그럼에도 황제는 아이의 존재를 숨긴 것이다.
왜지? 모두의 의문이 점점 커져 갈 쯤, 사내아이는 정식으로 황실 일원이 되어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신의 햇살이 비추는 영원의 나라. 그 이름을 드높일 두 번째 황자였다.
그리고 10 살에 갑자기 나타난 황자에 대한 의문은 곧 풀리게 된다. 리카르디스가 1 황자 엘피디오를 뛰어넘는
성력을 가지고 있음이 공표된 것이다. 신의 비호를 받는 신의 나라에서 성력이란 그 어떤 힘보다 강력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황태자 후보에 이름을 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고작 시골 자작가
황비가 리카르디스를 지킬 만한 힘은 없었을 것이다. 목숨이라도 보전하기 위해 입성을 미룬 것이리라. 그때부터
황실은 바람 잘 날이 없게 되었다. 유일무이하던 황태자 후보에 한 명이 더 이름을 써 넣게 되었으니.
“농일세. 그래. 이번 시도는 제법 뼈아팠지. 내 수족들이 비스타에서 그렇게 의미 없이 죽어갈 인물들이 아닌데
말이야.”
리카르디스는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웠다. 악몽 같은 밤이었다. 일생을 편하게 살아오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슴에 남을 만한 밤이었다. 꽉 깨문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얕은 신음소리. 병장기에서 불꽃이 튀는 소리,
횃불이 공기를 태우고 나뭇가지를 밟는 사람들의 발소리. 황자 전하를! 리카르디스님을 지켜라! 상대는 독을
사용한다. 전하! 부디 몸을 피하시옵소서!
그저 허례허식이라 생각했던 때도 있었건만, 그들은 정말 그때의 맹세처럼 자신을 지키다가 죽었다. 입 안이 썼다.
몇 년 동안 자신의 옆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이 고작 독 따위에 죽었다. 그가 성력으로 치유하고자 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그때 도망치지만 않았었더라도, 그들과 싸우기만 했더라도……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항상 늦기만 했다.
어떻게든 돌려줘야 하는데. 이 엿 같은 감정을 그놈도 느끼게 해 줘야 하는데. 리카르디스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을 호위 임무에 추가하고자 합니다. 전하의 의견이 필요합니다.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리카르디스는 눈으로 추천서를 읽으며 귀로 그들의 오고가는 말을 들었다. 호오, 생각보다 그녀는 수완이 좋았던
모양이다. 바늘 하나 안 들어가는 저 기사단장의 눈에 들다니. 리카르디스는 부단장의 추천서과 기사단장의
말에서 그녀에 대한 확신을 읽어 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든 당신을 위해 죽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그
눈동자가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실력이 되지 않으면 나서지나 말 것이지. 멍청한 것. 모든 것이 다 스스로 부른
불행이었다.
* * *
‘바다협곡의 네스터.’
[다음 편에 계속....]
16 화.
‘바다협곡의 네스터.’
그와의 대련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그간 사람들이 로젤린에게 지원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그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할 거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검 실력이 뛰어난 상급자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했다. 다소 성격이 괴팍한 상급 기사라고 해도 실력만 뛰어나면 지원율이 높았다.
하지만 하얀밤 기사단 모두가 아는 로젤린이라는 사람은 그다지 강한 기사가 아니었다. 과묵하고 성실하지만
리카르디스 2 황자와 반하는 가문이었고, 여자인 데다가 약하기까지. 하급 기사들에게조차 얕보이는 그녀에게
가르침을 청할 수습 기사는 없었다. 그런데 어제 부로 하얀밤 기사단 전체에 퍼져 있었던 인식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하급 기사 네스터는 힘과 기술이 조화롭게 강한 자였다. 그 나이 또래의 하급 기사들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있었는데…….
대련 시작 삼 초 만에 검을 놓치고 2 회차에서는 첫 공격에 기절했으며, 심지어는 그보다 10 센치는 작고 한참
가느다란 대련 상대의 품에 다소곳이 안겨 퇴장했다. 그의 퇴장이 충격적인 만큼이나 그녀의 승리 또한 강렬했다.
“뭐 하는 거야, 로젤린?”
“병문안.”
지금 그녀가 가려고 하는 병문안 상대는 한 명뿐이었다. 그녀가 반죽음 상태로 만들었던 바다협곡의 네스터.
그녀가 다친 상대에게 병문안을 가야 한다는 상식을 깨우친 것 까지는 아주 좋았는데,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물건들이 문제였다. 동화책,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반지, 마카롱 세트? 설마 이거.
레이몬드는 자기도 모르게 진지한 표정을 했다. 로젤린은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병문안 선물.
동화책이랑 마카롱이 귀한 물건에 들어가다니. 이런 귀여운 아이! 착한 아이! 레이몬드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다가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
로젤린은 반지를 슥 집어서 자신의 목걸이에 매달았다. 네스터와는 결혼하기 싫은 듯 했다. 그녀는 둘 중에 한참
고민하더니 마카롱 세트를 집었다. 물론 값비싼 유명 제과점의 디저트이긴 했다. 우락부락한 남자 기사에게 영
어울리는 선물은 아니었지만…… 알 게 뭐람. 제까짓 게 뭐라고. 로젤린이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야 할 것이다.
네스터는 연한 파스텔 톤으로 포장된 마카롱 세트와 뿌리째로 뽑아 온 노란 야생화 무리를 흠칫흠칫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핑크색 레이스 리본으로 묶여 있는 상자와 아직까지 뿌리에서 흙이 떨어지고 있는 이 잡초의 조합은 대체
뭐지. 이 여자 날 엿 먹이는 건가?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황자 전하에게 하사
받듯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받았다.
“걱정해주신 덕에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안 괜찮아 보였다. 목소리도 꺼끌꺼끌하니 거칠었고 얼굴도 하루 만에 팍 삭아 버렸다. 그때의 호승심과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멍이 들었습니다.”
“멍이 들면 아픕니다.”
“조심하십시오.”
레이몬드는 어이없다는 듯이 로젤린을 쳐다보았다. 적막이 감도는 공간에 무뚝뚝한 기사와 한 남자가 이상한
기류를 형성했다. 네스터의 눈동자에 별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열린 창틈 사이로 꽃향기를 실어오는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온 것 같기도 했다. 레이몬드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키며 꿔다놓은 보릿자루같이 멀거니 서
있었다. 시퍼런 멍이 들어 있는 네스터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스터는 멍든 홍당무 같은 얼굴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겨우 쥐어 짜내었다.
환자라는 사람이 병문안 온 사람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간이 의자에 손수건을 깔고, 그녀가 화단에서 뽑아 온
야생초와 야생화 무리를 예쁘게 화병에 꽂고, 동료들이 병문안 선물로 들고 온 귀한 과일들을 손수 깎아서
로젤린에게 대령했다. 로젤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잘 받아먹었다. 네스터는 시종일관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병동을 나선 로젤린의 두 손에는 네스터가 준 병문안 선물이 가득 들려 있었다. 그녀는 신나 보이는 낯으로
병문안은 참 좋은 것이라 얘기했다. 레이몬드가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쾌유의 뜻을 전했어.”
* * *
로젤린에게 지원한 수습 기사들이 연무장 한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은 검을 휘두르며 연습하다가
멀리서 걸어오는 두 명의 남녀를 보고 황급히 경례했다. 로젤린. 그리고 그녀와 절친한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였다.
열다섯 명의 인원이 입을 모으니 공간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많은 수습 기사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기대에
가득 차 있는 눈빛들을 보고 레이몬드는 속으로 살짝 웃었다. 로젤린이 제 수습 기사였을 때가 잠시 떠올랐다.
지금보다 어리고, 지금보다 머리도 짧고, 지금보다…… 똑똑했었지…… 아냐,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레이몬드는 제 마음을 다잡고 목소리를 깔았다.
열다섯 명의 인원들이 일렬로 줄지었다. 대부분 남 기사였지만 여기사도 두 명 있었다. 레이몬드는 지원서를
로젤린에게 넘겨주었다. 그녀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가 뒤에서 아, 얘는 쟤야. 아, 이건 저기 왼쪽에서
두 번째 애야. 하고 일러 주었다. 지원서에는 그의 가문, 지원 동기, 특기 분야, 취미 등 다양한 정보들이
서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로젤린에게는 그다지 필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로젤린은 인간들과 오래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기간으로도 고작 종이 한 장에 한 사람의 모든 정보를 담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파악했다. 로젤린은
레이몬드에게 서류를 다시 넘겼다.
로젤린은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이들을 눈으로 쭉 훑다가 제일 왼쪽에 서 있는 기사의 앞에 섰다. 그녀가 다
읽지 않은 분량에 속한 지원자라 이름도 가문도 알지 못했다. 로젤린은 수습 기사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일
초, 이 초, 삼 초, 십 초, 삼십 초, 육십 초. 로젤린의 시선을 받고 있는 수습 기사는 시간이 점차 흐름에
따라 목이 타는 갈증을 느꼈다. 그늘진 녹색의 눈동자가 호수의 가장 깊은 곳만큼이나 어두워 보였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지원서에 뭔가 잘못 쓴 게 있었던가? 그렇다면 혼내도 좋으니 어떤 말이든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는 간절히 바랐다.
17 화.
“꼭 다섯 명 다 뽑아야 해?”
그들은 표정을 가다듬으려 노력했지만 히죽히죽 올라오는 웃음을 결국 감추지 못했다. 로젤린도 무표정한 얼굴에
미미한 미소를 띠었다. 수습 기사는 상급 기사의 수족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지원서만 보고 수습생들을 뽑는 상급
기사도 있었지만 로젤린은 그들을 직접 대면하길 원했다. 종이 서류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들의 생각, 그들의
눈빛, 그들이 로젤린에게 담는 감정들 또한. 로젤린이 열다섯 명의 지원자를 꼼꼼히 살펴본 이유 또한 그런
것이었다.
그녀의 육감은 뛰어났다. 공통된 언어를 가지며 그것으로 서로 교류하는 인간에 비해 산속의 많은 생물들은 그
개체 수만큼이나 다양한 언어와 습성을 가지고 있어 대화라는 것이 불가능하다시피 했다. 그 덕에 길러지는 것이
육감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생물의 행동, 분위기, 또는 주위의 상황까지 두루 살펴야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
로젤린은 오랜 시간 살아온 만큼, 다른 동물들로 많이 지내 온 만큼의 보는 눈은 있었다. 번드르르한 말로
치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런 로젤린의 눈에 두 사람은 제법 괜찮은 자들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을 섞어 놓아도 똑같이 이 사람들을 선택할 것이다.
레이몬드의 손짓에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만 남았다. 얼굴에 홍조가 가득했다.
로젤린은 열렬한 그들의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에버하르트, 레티시아.”
“예!”
“그대들은 수습 기사의 기숙사를 벗어나, 로젤린 경이 머무는 숙소 근처로 배정될 것이다. 로젤린 경의 생활과
임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고, 그대들이 하급 기사가 되어 황자 전하에게 충성을 바칠 때까지
계속된다. 그대들이 로젤린 경을 존경하며 따르는 만큼, 로젤린 경 또한 그대들을 가르치며 이끌 것이다. 이의
있는가?”
“없습니다!”
“없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상급 기사는 스승이기도 했고 주군이기도 했으며, 안정된 생활을 보증하는 무언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쪽방을 벗어나 상급 기사의 기숙사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4
“오늘부로 2 황자 전하의 호위 임무를 명받은 상급 기사,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 이 목숨을 바쳐
임하겠습니다.”
며칠이 더 지난 후였다. 로젤린은 수속과 인수인계가 끝나고 나서야 리카르디스의 호위 임무를 맡게 되었다.
리카르디스는 원목 탁자에서 종이를 팔락였다. 눈앞에서 누가 경례를 하건, 인사를 하건 말건 그다지 신경 쓰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로즈. 로젤린의 어미 되는 에델바이스가 그녀를 로즈라고 불렀다. 칼릭스에게 물어보니 그것은 ‘로젤린’의
애칭이라고 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질색하는 애칭이었다고. 그녀 자신은 꽃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고 생각했기에
로즈라는 호칭에 제법 타격을 입었었노라 현재의 로젤린에게 일러 주었다. 눈앞의 미남자는 그 사실을 알고 부른
것인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무표정하던 얼굴에 찬란한 햇살보다 눈부신 미소를 입에 걸었다. 신성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는 눈앞의 초라한 검은 머리의 여기사에게 ‘로즈’ 따위의 호칭을 입에 담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녀는 어쩌면 이 남자와 좋은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죽음의 코앞에서조차 이 남자를
지키고 싶어 했음에도 그것이 둘 사이에 어떤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리란 보장을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리카르디스의 질문은 제법 어려웠다.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 그 범위를 가늠할 만한 능력은 애초에
그녀에게 없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칼릭스가 가르쳐준 말이 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타인의 입을 다물게 하는 마법의 말이라고 했다.
“알지 못해?”
“예, 그렇습니다.”
예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쩐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딱딱 끊어지는 단답형의 말투 때문인지,
언제나 안절부절 거리며 할 말이 있다는 듯 쳐다보는 절실한 낯이 아니라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
자결하라고 명령해도 일말의 반항도 없이 알겠다며 칼을 꺼낼 것 같던 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전보다는 확실히 덜 거슬렸다.
“예.”
로젤린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제 입에서 나온 호칭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전하. 명받들겠습니다, 전하. 하던 예전의 그녀와는 영 다른
모습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18 화.
기억에 이상이 있어? 아무것도 알지 못해? 처음 듣는 얘기였다. 로젤린은 원래 말수가 적고 침착하며, 감정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리 조에 같이 편성된 적이 없다 하더라도 며칠간 지나다니면서 인사를 주고받았는데
이상한 점을 전혀 못 느꼈다니. 그녀가 대단한 건지, 자신의 무신경함이 대단한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카일로는 기사들이 쓰는 수신호로 그녀에게 괜찮은지 물어봤다. 로젤린은 그 수신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신지?’라고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기초적인 것도 잊어버렸다고? 이런 애를 지금 호위
임무에 쓰는 거야? 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 * *
2 황자의 월장석 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백작, 후작, 남작, 누구의 전령, 초대장을 들고 온 누구의
시종, 군략가, 전략가, 학자, 기사. 문무를 가리지 않고 계급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이들이 오고 갔다.
다양한 훈련을 하며 성 외부를 경비하는 하급 기사들에 비해, 상급 기사의 업무란 것은 굉장히 단조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가만히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그 긴 시간을 인내하기 위한 체력 단련이었던 건가. 평화롭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했다.
손을 분주히 움직이던 시종이 화려한 찻잔에 홍차를 따랐다. 시종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홍차를 은제 스푼으로
살짝 떠서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이상이 없다는 얘기였다. 리카르디스는 오랜만에 취하는 휴식에
느슨해져 있었다. 창밖에서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방안은 따뜻한 데다가 홍차의 향기까지 감돌았다.
휴식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오후였다.
리카르디스는 소파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찻잔을 들고 향을 맡았다. 그의 입술이 찻잔에 닿았을 때였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방안의 온도가 갑자기 뚝 떨어졌다. 카일로의 손이 검 손잡이를 배회하며
꿈틀거렸고, 리카르디스도 방금 홍차를 따라 준 시종을 쳐다보았다. 로젤린의 말을 완벽하게 신뢰하지는 않지만
시종 또한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티포트를 들고 있던 남자는 사색이 되었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자신이 방금 먹어 보았다며 독 같은 건 없었다고 항변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쿵짝이 맞는 두 남녀를 보던 시종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움직였다. 잔뜩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의 눈동자에
살의가 비쳤다. 그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뜯었다. 피부 아래 묻혀있던 날카로운 암기가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시종을 경계하고 있던 카일로가 검을 뽑았지만 리카르디스와 얘기하던 로젤린이 앞으로 나서는 것이 먼저였다.
챙!
회심의 일격이 무산되어 흔들렸던 마음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암살자는 실패를 그대로 넘기고 두 번째 수를
준비했다.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천장에 박혔다. 로젤린의 발길질 한 번에 남자의 손목이 완전히 꺾여 부러졌다.
그녀에게 날아갔던 트레이는 반파되어 공중에 흩어지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반복된 훈련으로 인해 암살자는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팔이 완전히 부러졌다. 세 번째,
네 번째의 수는 폐기. 그렇다면 그 다음 수를 준비해야 하는데…….
“?!”
“?!”
“?”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에게 돌진했다. 암살자의 시야를 검은 머리의 여기사가 가득 채웠다. 그녀의 뒤로
반짝반짝 빛나는 2 황자의 은발이 사라져 갔다.
쾅!
“……?”
매서운 기세로 들어온 기사들은 곧 검을 집어넣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부나방처럼 이리저리
달려드는 암살자의 공격이 로젤린 한 명으로 인해 전부 무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챙챙, 잘도 쳐 내고. 퍽퍽,
잘도 팼다. 잠시 지켜봤으나 무력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로젤린은 이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암살자에게 온전히 집중했다. 오감이 예민하게 바짝 일어섰다. 많이
다친 외관에 비하면 숨소리는 아직 차분했다. 암살자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음을, 다음 수를 준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종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올렸다. 퍽, 퍽, 퍽. 그녀의 주먹이 묵직한 망치처럼
둔탁한 소리를 낼 때 마다 남자들이 몸을 떨었다. 검으로 베어 낸 것도 아닌데 코와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시종의 얼굴은 겨우 몇 번의 주먹질로 뭉쳐 놓은 진흙 반죽 같은 꼴이 되었다.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패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카일로가 기겁했다. 리카르디스는 비교적 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는
머뭇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알겠습니다.”
* * *
“어떻게 알았지?”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언제나 나른하게 늘어진 목소리가 한 톤 높아져 있었다. 이 상황에 제법
흥미를 느끼는 듯 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 장면을 보기 전부터 시종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썩어 가는 피 냄새가
느껴졌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느껴질 만한 향기는 결코 아니었다. 검은달의 암살자는 시종의 얼굴 가죽을
벗겨서 쓰고 있었다. 약품처리를 했지만 완벽하게 부패를 막지 못했던 것이다. 그 냄새가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런 냄새를 풍기는 자가 평범한 인간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눈이 좋군.”
“감사합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암살자의 코인가 입에서 튄 피 몇 방울,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티 포트. 그리고 그 소란에도 용케 쏟아지지 않고 천천히 식어 가고 있는 문제의 홍차가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19 화.
텁.
로젤린은 그의 손에서 찻잔을 뺏고서야 입을 풀어 줬다. 리카르디스는 얼얼한 입가를 쓸었다. 제 그림자를 밟을까,
숨소리가 거슬릴까 초조해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사고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파격적이었다. 조금 건방진 감이 있지만 아까 세운 공을 감안해 넘어가기로 했다.
“이리 내.”
“안됩니다.”
“안됩니다, 전하!”
로젤린, 카일로, 수석비서인 잇세리온이 차례로 반박했다. 잇세리온은 로젤린이 암살자를 두들겨 패는 동안 몸을
굳히고 있다가 리카르디스의 행동으로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성큼성큼 로젤린에게 다가갔다.
로젤린의 양쪽에서 아주 난리였다. 청력이 좋아서 배로 괴로웠다. 누구에게 넘겨줘야하는지 한참 고민하고 있자,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목을 탁 잡아 왔다. 언제나 차가웠던 낯이 한층 더 싸늘해져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신성력으로 치유가 가능하니 나에게는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 살배기 귀머거리 아이도 알고 있지.
그럼에도 독인지 무엇인지를 먹이려고 했어. 이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나?”
“……무슨 수를 쓴 것이겠지요.”
“나한테도 통하는 독인데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보기만 해도 눈이 멀어 버리고, 향기만 맡아도 뇌가 썩어 버리는
것일 줄 어떻게 알고 넘기란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요즘 잠을 못자더니 머리도 굳어 버린 건가, 잇세리온.”
“전하!”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가 다투는 사이 로젤린은 찻잔에 담긴 홍차를 관찰했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발생한 작은 움직임, 그 파동에 수면이 흔들거렸다. 한 몸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홍차 속에서 무언가가
분리되어 일렁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로젤린만은 눈치챘다. 그녀는 이 기운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이루는 마의 성질. 마력이라 불리는 그것.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력과는 조금 달랐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마수들의 몸에서 떠도는 난폭한 마력과 비슷했다.
로젤린은 가만히 관조하다가 뻑뻑한 눈을 깜박였다. 집중하지 않으면 그녀에게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미약한
양이었다.
마력에 독을 결합한 새로운 물질. ‘성력과 마력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 공식을 이용한 시도는 몇 달 전
사냥 대회의 사건에서 처음 나타났다. 로젤린은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를 떠나기 전, 칼릭스에게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칼릭스가 가지고 온 암살자들의 무기가 몇 개 있었다. 로젤린은 그 암기에서 마력의 기운이 은은하게 묻어 있음을
눈치챘다. 정확히는 암기에 발려 있는 독에서 느껴졌다. 로젤린이 그 사실을 칼릭스에게 알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아, 탄식했다.
[그렇군요. 마력과 성력은 서로 간섭할 수가 없으니…… 마력이 독과 완전하게 동화된 상태라면, 성력으로
아무리 치유하려고 해 봤자 어떤 간섭도 할 수 없었을 테니. 그런……거였군요. 놈들이 아주 위험한 걸 만들어
낸 것 같습니다]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리카르디스가 의심스럽다는 듯 인상을 쓰며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칼릭스 또한 로젤린의 언질이 없었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력을 느낄 수 있는 건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뿐이었다. 마력의 집합체인 제 누이는 예외로 치더라도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말 소수에 불과했다.
성력의 무력화. 이델라브힘의 추락. 검은달이 이루고자 했던 핵심적인 요소였다. 검은달이 가장 바라는 방식인
만큼, 그들의 적인 일라베니아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애써 외면했던 건지도 모른다. 검증을
완벽하게 거치지는 않았지만, 오늘부로 리카르디스의 안에서는 확정이 났다. 검은달은 새로운 독을 만들었다.
어쩌면 이 대륙을 좌지우지할 만한 큰 패가 될 것이다. 대단하다. 적이라도 박수쳐 주고 싶었다.
리카르디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눈을 감았다. 단 한 번도 편하게 살아온 적 없고 언제나 자갈이 가득한
흙길을 걸어 왔다고 생각했건만. 본격적인 진창은 이제부터였다.
[다음 편에 계속....]
20 화.
리카르디스를 향한 암살 시도는 언제나 열렬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환한 대낮에 암기를 들고 직접적인 공격을 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더군다나 성 내부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하기까지 했으니. 그를 감싸고 있는
악의가 거세짐은 물론이요, 수법 또한 치밀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로젤린의 수습 기사인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식을 들었다. 암살자 다섯이 리카르디스
전하를 해하려고 하자 로젤린 경이 마치 팔이 여덟 개라도 된 것처럼 휘둘러 모두 잡아내었다고 했다. 독과
암기가 난무하는 사이에서 로젤린은 생채기 하나 없었을 뿐더러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피가 강처럼 흘렀다나
뭐라나. 과장이 섞인 진실이 자극적으로 변해 사람들의 입을 오르고 내렸다.
레티시아는 막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로젤린을 발견하고 에버하르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제복의 단추를 몇 개
풀고 느슨한 복장을 하고 있던 에버하르트가 급하게 몸단장을 했다.
로젤린은 붉은 노을이 퍼진 하늘을 등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반나절 만에 월장석 성의
사신으로 불리고 있는 그녀의 별명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존경의 눈빛으로 로젤린을 쳐다보았다.
로젤린은 레이몬드와 칼릭스에게 여러 가지를 들었다. 하얀밤 기사단에는 많은 수습 기사들이 있다. 하지만
기사단 내부에서는 기사라고 불리지도 못하고 고작 수습생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했다.
어떠한 신념. 그리고 그 신념을 밑받침하는 파벌 이전에 하급 기사와 수습 기사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검술
실력이었다. 그들이 아직 수습 기사에 머무르는 것은 하급 기사와 수습 기사 사이를 가로질러 놓은 기준을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둘, 다.”
“예? 예!”
“예!”
두 사람은 서두르며 목검을 잡아 들었다. 1:2 의 대치. 로젤린은 검을 들고 긴장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쭉
훑었다. 겉핥기로만 배운 듯 어설픈 자세였다. 여기 저기 빈틈 투성이라 마수가 앞에 있었다면 진즉에 잡아
먹혔을 것이다.
“…….”
“심각합니다.”
수습생 두 명이 눈에 띄게 축 처졌다.
“……어디가…… 심각…….”
“모든 게 매우 심각합니다.”
“아…… 네…….”
“네?”
“맞습니다.”
로젤린은 손수건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연무장 옆에 있는 수풀에 다가가 얇은 나뭇가지를 콱 잡았다. 나뭇가지가
당장이라도 꺾여 질 듯 휘어져 있었다. 로젤린은 더 이상 힘을 주지 않고 또 멈췄다.
“맞습니다.”
“네?”
“예?”
“아…… 네…….”
로젤린 그 징조를 읽어 내지 못했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레티시아 또한 그녀가 하고자하는 말을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얼굴을 붉혔다. 여러모로 부족하단 것이 낱낱이 드러났다.
“읽어 내십시오.”
“네!”
“예!”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의 목소리가 연무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월장석 성의 사신이라고 불리는 로젤린은
소문처럼 정말 굉장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들은 그녀에게 경례한 후, 뿌듯하게 기숙사로 귀가했다.
방심한 채 돌아가는 도중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로젤린에게 공격당하는 걸 기점으로 그들의 세상은 180 도
바뀌었다.
[다음 편에 계속....]
21 화.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지독한 냄새였다. 잇세리온은 어둡고 컴컴한 공간을 지나고 있었다. 빛 한줄기 들지 않는
곳이었으나 앞서서 걷고 있는 병사가 들고 있는 등불 덕에 어느 정도 시야가 트였다. 나방처럼 보이는 날벌레가
잇세리온을 지나쳐 뒤로 날아갔다. 그는 화들짝 놀라 손을 휘휘 저어 벌레를 쫓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리카르디스를 위한 것이었다.
“네가 병사에게 시키고, 그 병사는 또 말단에게 시키고, 그 말단은 그 말단에게 시키겠지. 답이 내게 돌아올
즈음이면 반년은 지났겠군. 기다리다가 숨 넘어 가겠어.”
잇세리온은 투덜투덜댔다. 확실히 그가 감옥을 찾지만 않았더라도 밑의 사람에게 시켜서 알아오라 했을 것이다.
하여간 성격이 급한 주인이었다.
병사가 죄수에게 찬물을 뿌렸다. 차가운 물이 그들의 상처를 후벼 팠다.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울렸지만
아까보다는 잠잠해졌다. 잇세리온은 이를 악물었다. 여전히 불쾌한 광경이었다. 그는 이 더러운 감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빛나는 주인을 돌아보았다. 리카르디스는 미간을 조금 좁히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 보였다.
하지만 항상 저런 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평소와 똑같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무덤덤한 태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광경에 일말의 신경도 두지 않는 듯 했다. 잇세리온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그를 따랐다.
최하층에서도 한참을 들어 가야하는 독방이었다. 병사가 창대로 철창을 두드렸다. 캉캉캉. 소리가 감옥을 크게
울렸다. 철장에서 녹슨 냄새가 났다. 피 냄새일지도 몰랐다. 안쪽에서 검은 형체가 꾸물거리며 움직였다. 어쩌면
밝은 금발이었을 머리카락은 흙과 피 따위가 엉겨서 갈색처럼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기어 왔다. 두 손에 씌워진
수갑이 바닥을 긁으며 철컹, 철컹하는 소리를 냈다. 더러운 누더기를 몸에 대충 감고 있던 여자가 철창을 잡고
겨우 일어섰다.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하얀 눈동자가 빛났다.
그녀가 갑자기 철창 사이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정확하게 리카르디스를 노려 왔다. 철컹!
수갑이 철창에 걸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한치 앞에 당도한 더러운 손끝을 보고도 리카르디스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거리가 아주 조금 모자라 닿지 못했다. 지켜보던 병사들이 창대 끝으로 그녀를 쳐내려 했지만
리카르디스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손버릇은 여전하고.”
잇세리온은 병사를 부르러 가야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잇세리온이 작게 혀를 찼다.
리카르디스는 품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 그녀의 손 위로 병을 떨어트렸다.
그녀는 손에 닿는 차갑고 단단한 감촉에 잠시 흠칫 몸을 굳혔지만, 곧 철창 안으로 가져갔다. 유리병의 정체를
알아보려는 듯 손으로 더듬기도 하고 흔들어 보기도 했다. 얇은 유리 너머로 찰랑이는 것이 느껴져서 그녀는 그
안에 어떤 액체가 들어있음을 눈치챘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손안의 병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자,
리카르디스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유리병을 열었다. 짙게 내려앉은 어둠, 차가운 공기에 들러붙어 있는 짙은 피와 오물냄새.
날카로운 쇠의 소리까지. 살풍경한 감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홍차의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맴 돌았다.
그녀는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제 동료들이 또 2 황자의 암살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리엔타의 알리가르테?”
그녀의 행동으로 리카르디스는 확신을 얻었다. 무색, 무미, 무취의 독에 그녀가 반응했다는 것은 그녀가 느낄 수
있을 만한 기운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마력을 가지고 있는 마인(魔人)인 만큼 소량의 마력이라고 해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손에서 눈을 떼고 다시 리카르디스 쪽을 쳐다보았다.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손목에는 녹슨 수갑을 차고 누구보다 허름한 옷을 입었으며 누구보다 쇠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이
공간에 있는 그 누구보다 의기양양해했고, 누구보다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거친 목소리가 즐겁게 울렸다.
“무엇을 알고 싶지?”
“무엇을 알고 있지?”
그녀는 편안하게 자리에 앉았다. 다소 불손해 보이는 감이 있어서 잇세리온은 속으로 작게 욕지거리를 했다.
“아주 혼자 잘났지.”
“……건방지기는.”
리카르디스가 손을 휘휘 저으며 용건이 끝났음을 알렸다. 많은 비서와 보좌관들이 썰물처럼 감옥을 빠져나갔다.
고약한 냄새와 벌레가 가득 찬 이 공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찬 후,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눈길을 보냈다.
“모두가 크레안 티다니온님의 품으로 돌아갈 거야. 눈이 멀어 버렸지만 그 광경은 환하게 보일 테지. 나에게는
살아서 그 장면을 봐야 하는 의무가 있어. 열심히 발버둥 쳐 보렴.”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죄수들이 다시 철창을 울려 대었다. 감옥이 비명과 고함소리에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다음 편에 계속....]
22 화.
* * *
잇세리온이 조잘조잘 잔소리를 쏟아 부어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크레안 티다니온을 숭배하는 광신도 집단인
‘검은달’. 그 간부였던 마녀 케틀린과 정답게 얘기를 나누면 어떻게 하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 독설이 정다워
보였다니 기가 찼다.
자신을 살해하고자 했던 독에 마력이 섞여 있음은 그녀의 말로써 확증이 되었다. 지하 감옥에서 그녀의 말을 같이
들었던 엘피디오와 황제의 사람들. 그들이 입증해 줄 것이다. 검은달, 또한 왕국 발타가 신성력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새로운 독을 만들어 내었음을. 그것은 리카르디스뿐만 아니라 일라베니아 황실에게도 큰 위협이었다. 적의
적은 많을수록 좋았다. 문제는 적과 손을 잡은 아군이 있다는 것이지만.
리카르디스는 침대에서 한참 뒤척이며 천장에 있는 문양을 눈으로 따라 그려 보았다. 언제나 쉽게 잠들지 못하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힘들었다. 피로한 몸과 달리 정신은 생생했다. 어릴 때부터의 잦은 암살 시도 덕에
앓게 된 일종의 수면 장애였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고 검은 배경 위로 양 몇 마리를 세어 보고, 어린
아이들에게 들려줄 법한 자장가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더욱 뚜렷해지기만 했다.
둥그렇게 떠 있는 달의 일부가 보였다. 새하얗게 멀어 버린 여자의 눈동자 같았다. 순식간에 기분이 더러워져서
그는 잔에 담긴 와인을 벌컥 들이켰다.
검은 달. 하얀 밤. 그것은 단순히 크레안 티다니온을 섬기는 광신도 집단의 이름도 아니고, 신성 제국 2 황자의
기사단 이름도 아니었다. 지금은 노쇠하여 죽어 가고 있는 대륙의 찬란했던 과거.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었다.
[빛의 신 이델라브힘은 그의 성력이 극으로 치달은 날, 어둠의 신 크레안 티다니온을 밤에서 몰아내었다.
……라고 알려진 것이 일라베니아, 아니 온 대륙에 퍼져있는 전설이었다. 전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 단어가 어울리는지 잠시 판별했으나, 역시 단순하게 ‘전설’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진실이라고 말하기에는 한없이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것 또한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의 밤’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모든 나라들의 건국신화가 이르듯,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가져다 붙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전설이 가지는 힘조차도 많이 퇴색 되어 버린 시대이긴 했으나
리카르디스는 알고 있었다. 그림자조차도 사라지는 비현실적인 신의 세계, 짧은 시간. ‘축복의 밤’은 존재한다.
일라베니아의 황실, 신전. 아무나 들어설 수 없는 깊숙한 곳에 숨겨진 낡은 서고. 여러 사람들이 써 내려간
책자에는 몇백 년 전, 일라베니아의 건국 때부터 반복됐던 하얀 밤과 검은 달의 기록이 생생히 남아있었다.
1 년…… 47 년…….
‘축복의 밤’을 부르기 위해서는 많은 성력이 필요했다. 막대한 성력을 가진 자가 황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축복의 밤은 점차 소실 되어 갔고, 황제들의 역량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왕왕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현 일라베니아 황제로부터 2, 3 세대 위 전대 황제들의 신성력이 강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부터도 축복의 밤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견들은 힘을
얻지 못했지만 없어지지도 못한 채 지금까지도 조용히 묻혀 있었다.
가시적인 효과는 있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 생명력이 순환하지 못하는 땅이 맞이할 결과는
뻔했다. 다급한 상황이었다.
과정과 조건에 대한 상세한 진실은 황제만이 알고 있었다. 축복의 밤을 부르는 것은 오직 일라베니아의 황제만이
가지는 가장 큰 의무이자 고유의 권한이므로. 바꿔 말하자면, ‘축복의 밤’ 을 다른 자가 띄우는 행위는 황제에
대한 모반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만약 ‘축복의 밤’ 을 부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시도해서는
안 된다. 황위를 계승 받을 때까지는.
정말 어이없고 답답한 일이었다. 현 황제는 그 자체로도 성력이 미치지 못해, 다른 조건이 충분히 채워지더라도
‘축복의 밤’ 을 부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득바득 권력을 쥐고 있었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날에는 황제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보험. 누군가를 쳐내기 위한 검이
아닌,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검이다. 때문에 전쟁터에서 구르는 와중에도, 큰 부상을 입었을 때에도, 소중한
이들이 죽어 나갈 때에조차 ‘축복의 밤’ 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왔다.
리카르디스는 와인을 물마시듯 들이켰다. 과연, 인정하기로 했다. 한 가지만을 찾아 왔다는 것을. 마녀 케틀린의
마지막 말에서 그는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하얀 밤이 나타난 날에는 항상 검은 달 또한 같이 있었다. 하얀 밤을
찾지 못했다면, 남은 것은 오직 검은 달뿐이었다.
“호위 중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23 화.
“로젤린 경.”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대답하라는 게 아니라 이리 오라고. 리카르디스는 조금 인상을 쓴 채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로젤린은 능숙하게 나무를 내려와 벽을 타고 리카르디스의 앞에 섰다. 순식간이었다. 눈치를
어디 버리고 온 대신에 실력을 얻어 온 건가?
리카르디스는 별다른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로젤린도 그를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이 야심한
시각, 남자의 방에 들어서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제 주인에게 괜한 소문이라도 돌까 싶어
들어온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텐데. 이렇게 보면 정말 기억을 잃은 것 같다가도, 제 주위를 맴도는 행태를 보면
전혀 변한 게 없어 보이기도 했다. 리카르디스는 테이블 앞에 서 있는 로젤린을 눈에 담다가 그녀에게 잔을
건넸다.
“마실 텐가?”
“괜찮습니다.”
“마셔.”
“네.”
쨍.
지금 나랑…… 건배를 한 거야, 이 호위 기사?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황당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도리어 뿌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대체 그녀는 왜 제 곁을 맴도는 것인가. 로젤린은 어떠한 영광도 어떠한 명예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리카르디스 자신이 그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을 테니. 붉은수레바퀴가 로젤린이라는 이름 앞에 있는 한, 그녀는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정확하게 자신의 뜻을 밝힌 적 있었다. 과거, 로젤린이 죄책감이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였다. 그 눈빛이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그래서 로젤린을 크게 밀어내려고 했다.
부드럽게 손질된 긴 은발이 헝클어지고 얼굴에는 까슬하게 그의 감정이 올라와 있었다. 옷도 입다 만 것인지 벗다
만 것인지 엉망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었다.
리카르디스는 제 머리를 쥐어뜯고 악을 썼다. 자학에 가까운 몸짓을 막기 위해 로젤린이 그에게 다가섰지만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개입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리카르디스의 시야에 로젤린이 인상을 쓰는 모습이 담겼다. 단맛이 적은 와인이라 그런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둘은 별다른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와인을 따를 때 마다 로젤린이 계속 건배를
하는 바람에 리카르디스가 몸을 움찔거리긴 했지만. 이후로도 로젤린이 혼나는 일은 없었다. 와인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 잔이 부딪치는 소리,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간간히 울렸다. 하루 종일 피곤했던
리카르디스와 인간의 언어가 아직 어려운 로젤린. 두 사람에게는 모두 괜찮은 시간이었다.
와인 한 병은 금방 동이나 한 병을 더 가지고 왔다. 이번에는 달콤해서 여인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산딸기 주였다.
로젤린의 구미에 맞았는지 아까보다 잘 마셨다. 그리고 한 병 더. 몇 시간 뒤에 또 한 병 더. 취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제 호위 기사의 모습은 묘하게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리카르디스는 동이 터올 즈음에는 술에 떡이
되었다. 로젤린은 언젠가 네스터를 옮겼던 것처럼 리카르디스를 번쩍 들어 침대로 옮겼다.
“대체…….”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곧 그 말들은 숨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이불 아래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고 내렸다. 로젤린은 흐트러진 리카르디스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 * *
“하카브, 이 개자식이!”
정리정돈 되어 있던 탁자가 어질러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많은 가신들이 보고 있음에도 그는 격렬한 감정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 엘피디오는 씩씩대며 화병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화병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다음 편에 계속....]
24 화.
검은달이 외부의 적이라고는 하지만 2 황자 리카르디스를 제거하겠다는 목적을 위해 잠시나마 손을 잡았다. 검은달,
아니 발타에서도 그의 존재는 눈엣가시였다. 리카르디스가 검은달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에 크게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검은달과의 동맹은 아주 빠른 속도로 성립됐다. 엘피디오의 세력만으로 견제할 때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훨씬 수월해졌지만, 리카르디스는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도리어 수세에 몰린 형국에서야
그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듯 했다. 바리바리 숨겨 놓은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동맹 후, 금방 결착이 날 것이라
생각한 승부는 아직까지도 일진일퇴를 하며 줄다리기 중이었다.
사냥 대회에서 기필코 처리를 하겠다고 하더니 실패했다. 이후에 암살자가 월장석 성내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해서 어떻게든 넣어 줬더니 그것도 실패했다. 심지어는 그날 막 호위 임무에 배치된 신입 상급 기사에게
피떡이 되었단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리카르디스 그놈이 얼마나 기고만장해할지. 상상만 해도 열이
뻗쳤다.
만약 검은달의 발톱이 자신을 향하게 된다면. 그 독을 해독할 방법이 없다면 자신 또한 위험해질 것이다. 아니
이미 위험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은 언제든 깨어질 수 있었다. 엘피디오는 그의 밝은 금발을
마구 헝클였다. 일이 엉망으로 꼬이고 있었다. 인상 쓰며 고민 중이던 강철발굽 백작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젠장, 그래도 이런 거라고 생각이라도 했겠나? 리카르디스뿐만 아니라 이제 나, 그리고 그대들의 목숨까지 전부
하카브에게 달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우리가 리카르디스의 방패가 되어 준 사이에 그 개새끼들은 일라베니아를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주 환장하겠군!”
엘피디오가 초조한 발걸음으로 방 안을 서성였다. 강철발굽 백작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윗사람으로서 보여야
할 태도는 어디에다 버리고 왔는지, 눈 씻고 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랫사람을 다독이며 차근차근 일을
해결해 나가려고 해도 모자란 판국이었다. 이렇게 오밤중에 가신들을 불러서 온갖 성질을 낸다고 풀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뻔합니다. 축복의 밤을 불러내기 위한 시도는 일라베니아 제국뿐만 아니라 발타
왕국에서도 항상 있었습니다. 황제가 되면 열람할 수 있는 비밀 서고. 그곳에 있지 않습니까? 하얀 밤을
불러내기 위한 방법이 적힌 자료가.”
“있기는 하지.”
“방법을 안다고 할 수 있었다면, 저희도 진작 했겠지요. 하카브 왕자가 그 자료를 얻는다고 해도 결코 축복의
밤을 불러내지 못합니다. 결국에는 쓸모가 없는 정보라는 얘기입니다. 검은달에 넘어간다고 저희에게 치명적일
이유는 하나 없습니다.”
“흠…….”
엘피디오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백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수천 년이 지나는 동안, 한 세대에 몇
명의 인원만이 겨우 알던 정보였다. 숨기고 숨겨 왔던, 어쩌면 예전에는 중요했을지도 모를 정보였다. 그렇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일라베니아가 대륙을 쥐고 흔들 수 있었던 강력한 무기일지도 몰랐다.
엘피디오는 고민했다. 어떻게 움직여야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황제에게 검은달의 새로운 독의
정체가 알려졌다. 황제는 신성력과 황권의 권위를 매우 중요시 여기는 자였다. 그런 제 아버지의 성질 상, 그
독의 정보를 듣게 된다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발타가 황제의 얼굴에 장갑을 던지는 행위보다
더 확실하게 결투를 신청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일렀다. 해독제 이전에, 발타는 아직 엘피디오에게 쓸모가 있는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리카르디스를 죽이는 것이 먼저였다. 일라베니아에게 오랜 숙적이 발타라면, 엘피디오에게 가장 오래된 적은
리카르디스였다. 그를 경계하면서 해독제를 가장 빠르게 얻어내는 방법. 엘피디오는 눈을 번쩍였다.
“다행히 쓸 만한 패가 하나 있군.”
“디에즈를 불러와라.”
* * *
리카르디스의 아침은 늦게 시작되었다. 간밤에 갑자기 시작된 술 대결의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꿀물을 가지고 온 잇세리온의 표정은 철없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와 많이 닮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즐비하게
굴러다니는 수많은 술병, 카펫에 얼룩덜룩 묻은 붉은 와인 자국. 아직 꿈나라에 있는 리카르디스에게서는 알콜의
향기가 풀풀 풍겼다.
막 황제의 집무실을 나서던 엘피디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면에서 걸어오던 리카르디스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를 보고 더없이 환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미소는 햇살조차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엘피디오는 그런 리카르디스의 모습을 보고 더욱 얼굴을 구겼다. 저게 약을 처먹었나.
“…그래…….”
떨떠름한 엘피디오의 답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날씨가 좋다는 둥, 이델라브힘이 굽어
살피는 좋은 낮이라는 둥, 자신에게 좋은 찻잎이 들어왔는데 선물로 드리겠다는 둥. 엘피디오는 그의 사근사근한
태도, 부드러운 말투에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다가 찻잎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최근
시도했던 회심의 암살이 빗나갔던 것을 상기해냈기 때문이었다.
월장석 성에 심어 놓은 세작의 말로는 새로이 호위 임무를 맡은 기사의 공이라고 했지만, 엘피디오는 믿지 않았다.
고작 호위 기사 한 명에게 들킬 정도로 검은달은 어수룩한 집단이 아니었다. 분명 눈치가 빠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리카르디스가 알아챘을 것이다. 엘피디오는 언제나 리카르디스의 능력을 깎아내리려 했지만, 이런
순간에는 항상 그의 유능함을 믿었다. 언제나 제 일에 훼방을 놓고 자신만만한 낯으로 저를 쳐다보던 그 오만한
눈동자. 잊히려야 잊힐 수가 없었다.
암살 집단을 지원하는 것에는 많은 수고와 노력, 자금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제법 출혈이 컸다. 그만큼 기대도
많이 했는데 이 미꾸라지 같은 것이 또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엘피디오는 얼굴을 확 굳히고 리카르디스 곁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어깨가 서로 세게 부딪쳤다.
밀려난 건 엘피디오였다. 그는 붉은 얼굴로 씩씩대다가 달리는 것 같은 속도로 걸어서 빠르게 금강석 성을
벗어났다.
리카르디스는 근사한 미소를 얼굴에서 싹 지우고 그와 닿았던 어깨를 툭툭 털어 내었다. 행동과 표정은 퍽
여상했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에 일렁이는 것은 아까의 엘피디오와 비슷해 보였다. 그의 분노는 몇 년이 지난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수그러들 가벼운 감정이 아니었다. 옆에 줄곧 서 있던 잇세리온 또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
25 화.
황제의 집무실 문밖에 서 있던 시종이 안으로 들어갔다. 리카르디스의 방문이 알려지자, 곧 문이 열렸다.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 중앙에는 밝은 금발의 황제가 심기가 불편한 듯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에 널려 있는 서류에 눈길을 돌렸다. 몇 개 보이는 단어와 문구를 조합해
보니, 발타 왕국과 인접한 영지에서 올라온 각종 보고서임을 알 수 있었다. 최근 들어 검은달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 황제가 얼굴을 구기고 있던 것도 이해가 갔다.
“마녀가 입을 열었다지.”
“예, 저번의 사냥 대회에서 처음 사용된 독입니다. 최근 월장석 성내에서도 사용되려 했지요. 이 서류를 보아도
되겠습니까, 폐하?”
“그리 하거라.”
사십 명의 인원이 어둠을 틈타 산을 넘어와 사백이 넘는 피해를 내었다. 인간의 힘도, 신의 힘도 소용이 없었다.
검은달은 과거와는 다른 위협을 휘두르고 있으니 부디 황제께서 어린 백성들을 굽어 살피시어 일라베니아의 영광을
세세토록 전하길 간절히 바란다는 내용이 길게 늘여 적혀 있었다. 마른가시나무 영지에게 사백이라는 인원은 사실
그렇게 큰 피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영지뿐만 아니라, 인접한 다른 영지에서도 비슷한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자 흐름이 심상치 않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황제가 자신의 피곤해 보이는 낯을
연신 쓸었다.
“골치 아프게 되었다. 언제까지 묻어 둘 수 있을는지…….”
“…….”
멍청하다, 멍청하다 했더니 이 정도면 가히 예술의 경지였다. 리카르디스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정말 엘피디오의 아버지가 맞았다. 정말 똑 닮은 부자지간이 아닌가. 검은달의 수뇌부가
발타의 왕실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왕실의 공식 입장은 항상 사실과 달랐다.
엘피디오가 황제보다는 머리가 조금 더 돌아갔나 보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그리고.”
황제는 팔걸이 부분에 손가락을 느릿하게 부딪치며 딱…… 딱…… 하는 소리를 내었다. 황제의 손가락이 둘
사이의 침묵을 일정한 속도로 깨트리고 있었다. 이유 모를 불쾌함이 밀려왔다.
“……발타와 인접한 영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는 이 시점에서 사절단을 보내기엔 위험이 많이 따르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새로이 만들어진 독에 대해 연구도, 완벽한 해독법도 없는 이 상황은 그들에게 훨씬 유리하게
돌아가겠지요. 사절단을 보낸다고 한들, 들이는 수고와 위험 비해 소득이 적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엘피디오가 왜 아침부터 황제를 찾았나 했더니 하여간에 잔머리는 잘 돌아가는 놈이었다. 황제를 부추겨서 자신을
사절단으로 보내 버리려는 것이다. 말이 사절단이지 지금의 상황에서야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하루에도 암살자 서넛을 보내며 죽이고자 간절히 염원했던 상대가 제 영역으로 걸어 들어온다는데……
발타의 왕자, 하카브가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으니.
“걱정이 과하구나, 리카르디스. 내가 누구더냐. 이 나라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대륙을 축복하는 영광의 빛은
눈과 귀가 먼 자들 또한 느끼는 것이다. 고작 독 하나에 수그러들 광휘가 아니다.”
새로운 독으로 인해 상황이 발타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라는 말이 매우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황제는 제
권위에 흠집이라도 간 듯 굴었다. 조금 까칠해진 태도와 목소리에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간 제
말에 토를 다는 꼴을 못 보는 인간이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발타의 들개들이 워낙 위아래를 모르는 놈들인 데다, 요즘 들어 더욱 기세가 사나워졌다
보니…… 제가 괜한 걱정을 했던 모양입니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숙이자 황제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무슨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어르고
달래는 것을 뭐 이리 지극정성으로 해야 하는지.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 그놈들의 기세가 사나워지기는 했지. 그래서 사절단을 보내려는 것이다. 네가 검은달을 누르는 것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 않느냐. 리카르디스라는 이름이 발타를 압박하기에 아주 효과적일 듯하구나. 제국의 2
황자라는 고귀한 신분과 너의 이름 안에 이델라브힘의 영광이 함께할 테니 걱정 말거라.”
26 화.
수많은 하인과 하녀들의 얼굴에 칙칙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누가 보면 월장석 성벽에 장례 중이라는 표식의 하얀
천이라도 걸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얀밤 기사들 또한 주인의 처지에 분노함과 동시에 그들 자신의 미래에
깊은 애도를 보냈다. 바람 앞의 촛불보다 아슬아슬하고 보잘 것 없는 목숨. 누군가는 체념했고 누군가는 결의를
다졌다.
로젤린은 호위 임무를 위해 월장석 성으로 향하다 그 광경을 보았다.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던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입을 떡 벌리고 산처럼 쌓이는 진귀한 선물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새벽부터 로젤린의 습격을 두
차례나 받아서 매우 피곤했지만 그것을 잊을 만큼 놀라워했다.
“로젤린 경.”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레이몬드로부터 그녀가 기억상실로 인해 지식과 상식을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이후로 고위 귀족과 황족들의 인상착의와 이름, 작위와 직위 등을 다급히 암기해 둔 상태였다. 그들의 독특한
상급 기사를 보필하기 위한 업무의 일환이었다.
로젤린은 검술을 익히는 데에는 빠른 습득 속도를 자랑했으나, 책상에 앉아 하는 모든 작업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사가 검을 잘 쓰면 됐지, 사람들의 얼굴이나 직위를 외우는 것이 뭐가 중요한 거지? 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이후 곧바로 남자 기사들의 공용 목욕탕에 태연하게 들어가려던 로젤린을 목격해, 웃음기를 얼굴에서 지워야
했었다. 그 아찔한 순간 덕분에 레티시아는 제 상급자의 상식 수준이 어느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하얀밤 기사단의 상급 기사 로젤린이 설원의 월계수 5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인상착의와 장신구를 보고 인물을 파악해 내는 능력과, 기억을 잃어버린 상급 기사의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은
별개의 것이었으므로. 이번 건은 그들의 권한 밖이었다. 수습 기사라고 해도 그녀와 함께한지 고작 2 주가 지났을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에버하르트는 진땀을 뻘뻘 흘렸다. 대화가 도무지 이어지질 않았다. 과거 로젤린도 지금의 그녀처럼 말 수가
적다고 듣긴 했으나, 지금은 상대가 황족이다 보니 자칫 무례하다 여겨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5 황자
디에즈는 그녀의 말투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잘 됐습니다. 친한 이가 몇 없어 걱정했는데. 발타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로젤린 경.”
“……발타로 떠나십니까?”
디에즈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한참 발타의 풍습과 요리를 설명하던 디에즈가 눈웃음 지으며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습 기사들을 떨어트리고
따로 얘기를 나누자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로젤린은 그의 은근한 신호를 알아들을 만한 눈치를
갖추지 못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만 5 황자의 눈짓을 알아듣고 초조하게 손바닥의 땀을 제복에 닦았다.
“…….”
몇 초가 고요히 흐르며 그들 사이에 침묵이 늘어졌다. 디에즈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이 입을 딱
다물고 있는 행동을 보고 거절당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안절부절. 마음속으로 발만 동동 구르는 에버하르트를
뒤로하고, 레티시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로젤린을 확 떠밀었다. 무례하다고 혼나는 건, 혼나는 거고 지금은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제 상급 기사를 보필해야만 했다.
로젤린이 한 발자국 앞으로 밀려나오자 디에즈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이끌었다. 로젤린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레티시아를 돌아보았다가 움찔했다. 레티시아가 눈에 불을 켜고 격렬하게 디에즈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녀의 저의를 대충 깨달은 듯 했다. “왜 5 황자 전하에게 손가락질을 합니까?” 라는 질문 없이
순순히 디에즈를 따라갔다. 수습 기사 두 명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쉴 수 있었다.
둘은 제법 인적이 드문 곳까지 걸었다. 로젤린은 계속 월장석 성을 돌아봤다. 디에즈는 로젤린의 행동으로 그녀의
마음을 읽어 냈다.
“잠깐이면 됩니다.”
“예.”
‘잠깐’이라는 기간이 정해졌음에도 디에즈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로젤린도 차분하게 그를
마주했다.
“걱정했습니다, 로젤린.”
로젤린. ‘로젤린 경’이 아니었다. 눈앞의 이 남자와 로젤린은 친근한 사이였던 건가?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콧잔등 위로 꽃잎이 내려앉았다. 로젤린이 간지러움에 코를 찡그리자 디에즈가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미소 지은 남자가 로젤린의 얼굴에서 꽃잎을 살포시 떼어 냈다. 디에즈의 손끝에
달려있던 꽃잎은 불어오는 바람에 정처 없이 날아갔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었나 보군요. 그대의 머리에 조금, 아, 실례. 기억에 이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로젤린이 고개를 저었다. 디에즈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웃었다. 기억상실이란
병은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며 도리어 그녀를 위로했다.
[다음 편에 계속....]
27 화.
“네.”
네, 아니오, 괜찮습니다. 세 가지 답변을 돌려 가면서 사용하던 로젤린의 새로운 대답이었다. 디에즈는 그녀의
반응에 들뜬 듯 보였다.
“그랬습니까.”
“도움이 못되어 미안합니다. 돌아온 이후로도 줄곧 바빠서 한번을 찾아오지 못했는데, 건강한 모습을 봐서……
음, 기쁩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로젤린.”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자니 등에 새겨진 상처도 범상치 않았다. 살가죽은 물론이거니와 근육까지 벌어져
뼈가 다 드러날 정도였으니. 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상처 하나로 충분히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 * *
“칼릭스.”
“응.”
햇빛을 받는 로젤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반가워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가면같이 온도 없는 표정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안본사이 많이 사회화된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로젤린에게 슈크림이 들어간 상자를 건넸다. 로젤린은 상자를 열어 보지도 않고 활짝 웃었다. 예민한
후각으로 내용물을 파악한 듯 했다. 로젤린이 좋아하는 음식이라 하면 단연코 고기라 말할 수 있으나, 디저트
계열 또한 뺄 수 없었다. 처음 생크림을 먹은 로젤린이 눈을 부릅뜨고서 몸을 뻣뻣하게 굳히던 모습은 아직까지도
칼릭스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로젤린은 냄새를 킁킁 맡으며 기뻐했다. 칼릭스는 제 누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상자를 열어
슈크림 하나를 칼릭스에게 건넸다. 그는 제 손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인 슈크림과 누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설마 나에게 주는 건가? 음식을 나눠먹는 수준까지 도달했단 말입니까 누님? 칼릭스는 제 지난날 폭풍 같던
고난의 나날을 생각하며 눈물을 찔끔 흘릴 뻔 했다. 칼릭스가 감격스러움에 그녀를 아련하게 쳐다보자 로젤린이
조금 시무룩한 기색을 띄웠다. 그녀의 모습에 의문을 가질 찰나, 로젤린이 박스에서 슈크림을 하나 더 꺼내어
칼릭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 감격의 눈빛을 하나 더 달라는 재촉으로 봤던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슈크림을 먹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로젤린의 입에 넣어 주었다. 수도에서
유명한 제과점이라더니, 슈크림을 음미하는 그녀의 눈이 잔뜩 가늘어져 있었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워보였다.
“응.”
로젤린이 말을 덧붙였다.
리카르디스가 발타로 떠나는 사절단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칼릭스는 먼 황성까지 와야 했다. 2 황자의
위험에는 당연히 제 누이의 위험이 따랐기 때문에. 물론, 칼릭스의 예상과 한 치도 다름없이 로젤린은 태평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복잡한 마음이 한층 더 커졌다. 누이를 잃는 심정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조각난 마음을 이제야
허술하게라도 이어 붙였건만, 또다시 그녀를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칼릭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직접적으로
황자 곁을 지켜야만 하는 상급 기사이니만큼 큰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하필이면 승급하자마자 발타로 가야하다니.
칼릭스는 목소리를 낮췄다.
“잠깐.”
드디어 사람을 덮친 건가! 다행히도 아직까지 제 누이가 지나가는 인간을 덮친 적이 없긴 하지만 칼릭스는 잘
알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녀의 야생성이 완전히 죽지 않았음을. 그 야생성은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울퉁불퉁
구겨진 공 같은 것이었다. 왼쪽으로 굴렸더니 오른쪽으로 튀어 오르고, 오른쪽으로 던졌더니 아래쪽으로 굴러가
버리고, 화가 나서 버리면 골 안으로 들어가 점수를 얻게 되는 그 미묘한 불규칙성.
그러므로 누이가 무언가를 뺏어 먹기 위해 누군가를 덮쳤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도리어
착실히 사회화가 되어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누이의 모습이 낯설 뿐이었다. 울퉁불퉁 공 같은 그녀를 알게
된지는 고작 몇 달에 불과했지만, 어떠한 면에서는 스무 몇 해를 보아 온 로젤린보다도 더 강렬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깊게 새겨졌다. 이 안정적인 불규칙성. 칼릭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칼릭스가 높은 담벼락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바라볼 쯤엔, 로젤린이 한 남자를 제압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
죽이면 안 됩니다!”라던가 “다른 사람의 음식을 뺏어 먹으면 안 됩니다!”라고 급히 말하려 했다. 하지만
로젤린에게는 딱히 살의가 없어 보였고 그들의 손에도 먹을 것이 들려 있지 않았다. 칼릭스는 담 위에서 잠자코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군청색 머리카락을 묶은 남자는 바닥에 엎어져 로젤린의 밑에 깔려있었다. 또한 적갈색 머리의 여자는
무릎걸음으로 도망가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멋지게 공중제비를 돌아 도망가던 여자의 앞에 탁 착지했다.
“히익!”
“흐아…….”
“하아아…….”
로젤린의 선고에 두 남녀가 풀썩 바닥에 누웠다. 그들의 등과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급박했던 순간의 심정을
대변했다.
“심각하군요, 레티시아.”
“벽을 디디며 올라오니 소리의 위치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벽의 상단 부분에서 소리가 나면 당연히 경계를 했어야
합니다, 에버하르트.”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억울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모의로 몇십 번씩 죽어가며 습격당해서 이제는 어느
정도 바람을 읽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던 것이 어제였는데, 바로 오늘. 그녀의 발소리가
한층 더 조용해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그녀의 전력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어디 한번 해 보시죠]
라는 대답을 했다. 에버하르트는 순간 그녀가 화난 어머니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대놓고 널 죽이겠다고 말하는
암살자보다 훨씬 두려웠다.
[다음 편에 계속....]
28 화.
로젤린은 객관적으로 훌륭한 상급자였다. 잘 챙겨 주고, 잘 가르쳐 주고. 그럼에도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그녀를 좀 어려워했다. 단순히 그녀가 직속상관이라거나, 지위가 높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신비로운.
불가사의한. 그녀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를 표현하자면 얼추 그런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껄끄러워 하지 않던가. 그들 또한 그랬다. 로젤린의 유능한 검 실력과
기묘한 분위기 사이에서 그녀를 존경도 했다가, 조금 어려워도 했다가 하며 마구 헤매었다.
에버하르트는 흙바닥에 볼을 댄 채, 우뚝 서 있는 로젤린을 쳐다봤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그녀가
에버하르트에게 눈을 돌렸다. 시선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눈이 딱 부딪치자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로젤린은 그의 제복 목덜미 부분을 잡아 불쑥 일으켰다. 어미고양이가 새끼고양이의 목을 물고 옮기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녀는 곧 비슷한 방식으로 레티시아도 일으켰다. 공포에 후들거리던 심장과 다리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된 듯 했다. 로젤린이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의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주었다. 둘은 경직된 자세로
상급자의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그들의 미묘하지만 좋은 사람인 상급자가 수습생들의 몸단장을 모두 끝냈다.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로젤린에게
경례 후 연무장으로 떠났다. 모의 죽음에도 굴하지 않는 씩씩한 발걸음이었다.
오랜만의 “안 됩니다.”였다. 칼릭스의 타박하는 말은 그녀에게 안정감을 줬다. 인간이 된 ‘그것’ 이 최초로
뿌리를 내린 붉은수레바퀴 성. 그곳을 연상시키는 문구였다.
“안 만졌는데.”
만지지 않았다. 확실히 그 먼지를 털어 내는 매서운 손길은 ‘만졌다’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았다. 구태여
따지자면 때렸다? 쳤다? 에 가까웠다. 칼릭스는 그것을 깨닫고 “함부로 접촉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을
바꿨다. “특히 엉덩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낯부끄러워서 신체부위를 언급하는 단어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녀는 정확하게 이해를 한 것 같아 보이진 않았으나, 어찌되었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칼릭스의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둘은 너른 화단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더 나눴다. 한 달여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많은 일이 있었다.
사실 누이는 한 시간만 눈을 떼어도 이런저런 사고를 쳤다. 한 달이 지났으니 정말 무수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로젤린은 무표정한 낯으로 끊임없이 조잘조잘 얘기했다. 색색으로 빛나는 화원의 느슨하고 화사한 공기가 누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예전의 과묵했던 그녀의 모습과는 달랐다. 언어라던가, 행동이라던가.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도 주위의 공간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 딱 로젤린이었다. 흰색의 나비들이 그녀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로젤린은 머리에 꽃잎이 붙던, 나비가 앉던 간에 끊임없이 얘기했다. 듣기만 해도 속이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았다.
로젤린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도 똑같이 쓰여 있던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무뚝뚝한 얼굴로 열심히
호응하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레이몬드가 쿠키도 주고, 마카롱도 주고, 하급 기사랑 대련하고, 팼고, 이겼다.
병문안도 갔다. 리카르디스 전하를 만날 때는 심장이 막 뛰었다.
“암살자요?”
“응. 내가 다 잡았어.”
“썼는데…….”
걸렸다. 월장석 성은 인간뿐 아니라 물품과 서류 따위에도 엄격한 경비가 적용되었다.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편지는 내용까지 전부 확인한 후 들어오고 나갔다.
로젤린의 편지도 당연히 확인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월장석 성 내부의 사정, 심지어는 2 황자의 안위와 관련된
내용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몰수였다. 암살자 둘을 때려잡았다는 편지의 내용 때문에 로젤린은 2 황자의 비서인
잇세리온에게 까지 불려가 혼났다.
잇세리온의 삐딱한 말에 로젤린은 무표정한 낯으로 “그럼 암살자를 나쁜 사람이라고 쓰면 보내도 됩니까.”라고
되물었다. 잇세리온은 입을 합 다물었다. 그때 잇세리온의 눈빛은 여름에 겨울옷을 꼭꼭 껴입은 사람을 보는 것과
흡사했다. 저 사람 왜 저러는 거지? 미쳤나? 적당한 의문과 의심이 섞여 있었다.
그는 회수한 로젤린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8 살 수준의 어휘력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다가 철자도 조금씩 틀리고,
필체도 완전 어린아이 같았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혹시 근 십여 년 간의 기억이 다 날아간 것일지도 몰랐다.
[안 됩니다.]
칼릭스는 흐음 하고 목 안쪽을 울렸다. 확실히. 황자의 안위와 관련 있는 중요한 내용을 외부로 반출할 수 있을
리 없다. 제 누이만 걱정하다 보니 그런 기본을 망각했던 것이다.
편지로 얘기하지 못했던 수많은 그녀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다. 로젤린은 왼손을 들면서 “이게 나야”라고 하고,
오른손을 들면서 “이건 암살자.”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왼손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오른손을 제압했다. 이렇게,
이렇게 잡은 거야. 하고 2 황자를 호위하며 잡았던 수많은 암살자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지금의 그녀에게야 간단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검은달의 암살자들은 은밀하고 강하기로 유명했다. 예전의
누이라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사고에서 정말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이 성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로젤린이 그녀의 수습 기사들을 덮치는 모습에서, 칼릭스의 머릿속에 있던 무언가가 와장창 깨졌다. 떨어져 있는
사이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러고 보면 그녀는 강했다. 맨손으로 성인 남자의 목을 비틀어 놓을 만큼.
그녀를 걱정했던 이유는 어쩌면 그녀가 ‘로젤린’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눈앞의 로젤린이 제 누이기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소중한,
“누님.”
로젤린의 왼손은 여전히 오른손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칼릭스가 그녀의 왼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었다. 닿아오는 따듯한 온기에 로젤린이 그를 쳐다보았다.
[다음 편에 계속....]
29 화.
로젤린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제철과일이 들어간 타르트나 케이크도 좋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칼릭스도 무뚝뚝한 낯을 무너뜨려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신나서 맞잡은 손을 붕붕 흔드는 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지독하게 쓰리기도 하면서, 상처를 순식간에
아물게 하는 그리운 울림이었다.
* * *
헉, 헉, 헉!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달리는 중에도 몸에서 흐르는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강한 통증이
아니더라도 상처의 깊이를 짐작 할 수 있을 만큼 진했다.
‘…….’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막사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살고자 하얀밤으로 돌아간다면, 그가 위험해질 수도 있을
테니. 하지만 알려야 했다. 알려야만 하는데! 생각해야 해. 그를 지킬 방법을!
“!”
달리던 도중 순식간에 발밑이 꺼졌다. 어두운 밤이라 풀숲에 가려진 절벽을 보지 못한 탓이다.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입술을 깨물어 겨우 삼켜 내었다. 피 맛이 진득하게 입안에 달라붙었다. 깜깜한 공간 속에서 부유하는
것도 찰나.
우드득.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아프다고 인식하기 전부터 온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세게 부딪힌 탓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묵직한 죽음이 온 몸을 짓눌러 왔다. 소리와 색이 점차 사라졌다.
“아…….”
이내 시야가 점멸했다.
“!”
어둠에 물든 나뭇잎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로젤린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저녁의 찬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꿈에서 깨어났지만, 몸이 으스러지는 감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지금 앉아 있는 곳이 그 꿈의
환경과 많이 흡사하기 때문일까. 피비린내 대신 느껴지는 산뜻한 밤공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로젤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둑한 밤이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이 리카르디스의 방, 발코니 앞의 나무 위에서
그를 호위하고 있던 중이었다. 며칠 몇 주 동안 신경을 곤두세워 호위 했던 탓에 깜빡 선잠에 들었던 듯 했다.
꿈속의 ‘나’는 도망쳤다.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으로, 이미 상처를 입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한계까지 달음박질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젖은 흙, 스치는
풀과 나무의 냄새가 아주 뚜렷했다.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눈앞에 그려진 풍경 또한 현실과 다름이 없었다.
마치 실제로 겪어 본 것만 같은 생생함이었다.
‘그것’은 깨달았다.
‘로젤린…….’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 스쳐 지나가는 나뭇가지에 하나둘 생기는 얕은 생채기들, 비구름에 가려진 달. 어둠이
내려앉은, 괴물의 아가리 안쪽 같이 깊은 숲. 나뭇가지를 우악스럽게 밟고 꺾으며 무섭게 쫓아오는 정체 모를
자의 발소리.
대체 누구였기에.
대체 무엇이었기에.
일라베니아의 수도, 티가드를 떠나는 사절단의 모습에는 비장함이 깃들어 있었다. 빛나는 갑옷과 무구를 장착한
기사들. 갈기를 휘날리며 지나가는 백마 무리.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치솟아 있는 하얀밤 기사단의 깃발들. 그
웅장하고도 위압감이 드는 한가운데, 화려한 마차에 몸을 실은 리카르디스의 모습이 보였다.
사절단의 앞길에 꽃과 색색의 종이조각이 뿌려졌다. 여인들은 창문으로 몸을 불쑥 내밀고 손수건을 던졌다. 누가
보면 큰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커다란 환성이었다.
일라베니아의 백성들은 리카르디스의 찌푸린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축제보다도 흥겨운 분위기였다.
리카르디스가 하얀밤 기사단을 이끌고 출정할 때면, 그곳이 어디든 어김없이 좋은 결과를 쟁취해 왔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발타를 향하는 목적이 전쟁이 아닌, 친교를 위함이라는 사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쟁
못지않게 중요하고 위험한 여정일 것이다.
이델라브힘의 나라를 호시탐탐 넘보는 더러운 들개의 집단. 검은달. 최근 변경에서 잦은 전투가 일어나 민중
사이에서도 많은 동요가 있는 상태였다. 그런 때에 고귀한 황자의 몸으로 멀고 험난한 길을 떠난다고 하니, 어떤
이가 그 길을 환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성에서부터 티가드를 벗어나는 모든 길에 인파가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다.
와아아-
함성소리에 리카르디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영 시끄럽고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보였다. 잇세리온이 옆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 황성을 떠나기 직전에 1 황자 엘피디오가 찾아온 이후로 줄곧 이 상태였다.
[길고 위험한 여정이 되겠구나. 무사히 돌아오기를, 이델라브힘께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겠다. 리카르디스.]
엘피디오의 덕담대로 위험한 길이었으나 본격적인 위험은 아직 형태조차 드러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함성소리는
그를 더욱 가라앉게 만들었다. 흩날리는 종잇조각 몇 개가 리카르디스의 얼굴에 착 붙었다. 그의 인상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잇세리온이 종잇조각을 그의 얼굴에서 떼어 내었다.
사절단에는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 또한 기사단장 스타스는 가을안개 백작으로서. 푸른등불 후작의 차남,
호위 기사 카일로는 후작 대리로서 사절단의 일을 도울 예정이었다.
하얀밤 기사단 이외에도 리카르디스 휘하의 가문들이 기사단의 인원을 몇 명씩 추려서 사절단에 동행시켰다.
모두가 2 황자파라 불리는 세력들이었지만 그 울타리 안에서 비껴나간 인물이 한명 있었다.
설원의 월계수 5 황자 디에즈. 예정에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발타의 1 왕자,
하카브와 타국에서 교류한 적 있다는 명분에서였다.
엘피디오가 검은달과 손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결코 그 동맹은 끈끈한 신뢰로써 형성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날카로운 이빨을 감추고 있으리라. 여기서 서로의 이익이라 함은 리카르디스, 자신의 죽음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들이 일라베니아 2 황자의 죽음이라는 뜻을 이뤄내고 난 후에는 토사구팽의 시간이
분명히 온다. 누가 누구를 잡아먹는지는 미지수라 하더라도.
로젤린은 조용하게 숨을 죽이고 있는 불꽃같은 자였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아른거리는 불티를 보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맹세가 단순히 형식적인 언어에 불과하다던가, 금방 사그라들 종류가 아님을 알았다.
[다음 편에 계속....]
30 화.
‘이 여자는 죽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 언젠가 목숨을 바치고 죽을 자다. 그 사실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수많은
시체 위에 서 있음을 알았다. 자신이 원했든 아니든 간에 제국의 2 황자라는 고귀한 자리를 위한 희생은 불가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죄책감은 쌓여 갔다. 벗어나고 싶다고 벗어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도
이따금 눈을 감기라도 하고 싶었건만. 로젤린의 존재가, 그녀의 눈빛이 끝없이 그 죄책감을 상기시켰다.
리카르디스는 다시금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때와 같지만 그때와 같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하는 행동의 본질도
지킨다는 맹세 하에 이루어 진 것이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눈 어딘가에 서려 있던 비장한 결의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조금 더 사무적이라고 해야 할지, 받는 돈만큼 일하겠습니다. 같은 느긋한 표정이었다. 물론 새벽까지
제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행동력만큼은 예전의 로젤린을 떠올리게 했지만. 어쨌거나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조금 더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첩자 역할로 따라붙은 5 황자 디에즈, 클수록 무거워지는 환성의 중압감, 수많은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제 엿 같은 심정까지. 시종일관 그의 표정이 뚱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좋은 표정이 나올
만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날이 좋긴 하군.”
* * *
기다림의 미학을 깨달았으니, 본격적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순간은 발타에서 일라베니아로 돌아오는 길이 될
것이다. 발타 왕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의 전쟁은 하카브도 바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더더욱 2 황자의 죽음은 그들과 관련이 없어야만 했다. 발타를 떠난 뒤 우연히 도적을 만나서 사망했다던가,
우연한 사고에 휘말렸다던가. 어떤 죽음이 되건 그 앞에는 ‘우연히’라는 단어가 붙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야영, 노숙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듣고 있음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상급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기사이긴 했지만 그 이전에 귀족이었다. 야영의 경험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다 해도 두 손 들어 반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군인 리카르디스조차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데
그들이 나서서 불만을 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급 기사들은 부지런히 막사를 세웠다. 리카르디스는 그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조금 더 더워지고,
습해졌다. 발타의 기후는 일라베니아의 사람들에게 혹독했다. 기사들이 지쳐 가고 있는 것이 보여서 해가 지기도
전에 행군을 멈추라 명령했다. 이틀째 야영이었지만 빨리 쉴 수 있어서인지 날카로워진 기색들이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기사들이 마실 물은 충분한가?”
잇세리온의 말은 또 한 번 무시당했다.
글쎄요?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사나이 잇세리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리카르디스의 입가에 수통을 들이댔다.
리카르디스는 짜증내면서도 한 모금 마셨다. 이후 곧바로 수통을 밀어내긴 했으나 잇세리온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훈련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배웠다는 기사가 사냥꾼 출신의 길잡이보다 더 샘을 빨리 발견한다고? 그녀의 유능함
덕인지, 길잡이의 무능함 탓인지. 아무튼 간에 어이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토끼를 잡았는가에 대한 의문은 로젤린의 뒤를 따르던 길잡이에 의해 풀렸다. 그녀의 어마어마한 사냥
솜씨에 대해 극찬을 늘여 놓는 중이었다. 번개와 같았느니, 사냥의 신이니,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니 뭐니. 확실히 토끼야 약한 초식동물의 대표로 꼽힌다지만, 산에서 사는 토끼들은 재빠르기가 바람과
같았다. 활과 덫이 없다면 사냥꾼들도 잡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사냥 경험도 별로 없는 기사가 떡하니 세
마리나 잡아왔다. 심지어는 돌팔매질로.
이후 그녀는 잇세리온, 호위 기사 카일로, 기사단장 스타스, 부단장 나단, 레이몬드에게까지 불려 다니며 혼났다.
건량보다 막 잡은 고기가 맛있겠지라는 갸륵한 마음에 리카르디스에게 넘긴 것이었는데 억울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뚱한 표정을 보면서 잇세리온에게 명령했다.
“다들 육포 씹느라 힘들지 않나? 낮부터 자리도 잡았겠다. 사냥 대회라도 간단하게 여는 게 좋겠군.”
“명 받들겠습니다.”
로젤린도 눈앞에 드러난 백옥같이 투명한 피부를 눈으로 훑었다. 이델라브힘이 정성스럽게 한 올 한 올 뽑아낸
듯한, 은사 같은 머리카락이 빛을 반사하며 몸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녀의 시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머리카락이 채 가리지 못하고 드러난 하얀 목덜미, 툭 도드라진 날개 뼈. 울퉁불퉁하게 곡선을 그리며 날렵하게
붙어 있는 가슴과 등의 근육, 척추를 따라 옴폭 들어간 허리선까지.
“…….”
“아름다우십니다.”
[다음 편에 계속....]
31 화.
“근육의 부피가 커다랗고 형태도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저도 그렇게 울퉁불퉁하게 되고 싶은데, 아무래도
신체적 조건이 남자와 다른 부분이 많아서…… 부럽습니다.”
“…그러시겠지…….”
잇세리온과 레이몬드가 그녀의 성교육 문제로 아옹다옹 다투는 사이,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복근 위에 희미하게
묻어있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녀는 수통을 꺼내서 제 손수건을 적셨다. 로젤린의 행동을 목격한 리카르디스는
‘설마……?’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실례합니다, 전하.”
“설마.”
“…….”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바지춤을 잡아 가며, 열성적으로 복부를 닦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하늘을
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이 감정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아연하다? 참담하다? 글쎄, 어떤 언어로도 지금 그의
심정을 표현하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손에서 손수건을 모질게 팩 뺏었다. 상식을 깡그리 잊어버린 이 호위 기사의 행동은
요즘따라 그를 자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대…….” 하고 입을 다물었다가 “아니, 진짜.”
하고 답답함을 호소하려다가, 결국에는 “되었다…….” 하고 아련하게 말을 흘렸다.
로젤린은 상급 기사들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야 본인 몫을 사냥하러 떠났다. 리카르디스는 숲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잇세리온과 레이몬드는 그 광경에 쩡하고 굳어 있다가
성교육 시간을 열 배로 늘려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 * *
한사람의 인영이 푸른 숲을 달렸다. 동물들은 바로 옆을 지나가는 로젤린의 모습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높은 나무의 나뭇가지를 타고 한 번의 발돋움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도달했다. 풍경이 순식간에 휙휙
바뀌었다. 나무들이 높게 솟아 있는 풍경은 일라베니아와 비슷했지만 기후가 다른 탓인지 숲을 감싸고 있는
향기가 조금 달랐다.
로젤린은 나뭇가지 위를 훌쩍훌쩍 건너뛰며 사냥감을 찾았다. 저녁거리였던 토끼 고기는 리카르디스에게 주었으니
따로 먹을 것이 필요했다. 인간으로 변이한 이후의 최고의 소득은 음식이었다. 인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기와
과일, 채소를 조리했다. 그것은 한 가지 재료만으로 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다양하고 복잡한 맛의 조화를 이뤄
내곤 했다. 로젤린은 그 조화가 놀랍고 신기하고 맛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로젤린이 된 이후에야 맛있다는
감각을 깨달았다. 한 끼를 거르는 게 아쉬운 처지였다. 그녀는 신경에 날을 세워 너른 풍경을 온몸으로
지켜보았다.
로젤린은 이 존재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보았다. 지성을 가진 이후,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 이후로 처음 만나는
동족이었다. 마력은 운용하지 않는 한 감지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 동족을 만난 것 또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사슴 안에서 힘차게 대류하고 있는 마력은 의태 직전의 징후였다. 아마 자신이 이곳을 찾지만 않았더라도
그물보다 작은 생물로 변해서 빠져나갔으리라. 그렇다면 그냥 자리를 피하면 되는 건가?
그녀가 몸을 일으킬 찰나,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금속음. 일정한 보폭. 단련된 자의
숨죽인 발걸음. 같은 사절단 일행이었다.
“도망가.”
사슴은 그녀를 째려보는 것 같았다. 네가 사라져야 도망가지. 책망의 눈길이었다. 눈앞의 어린 사슴은 동물의
대가리를 하고도 굉장히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은 한쪽 팔을 들어보였다. 그녀의 손등 위로 파충류의 비늘
같은 것이 토도독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예전에 먹은 악어의 특성이었다.
사슴은 더욱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의 손을 주시했다. 파충류의 거죽이 아닌, 그 형태 안에서 막 대류하기 시작한
마력의 기운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사슴은 그제야 눈치챘다. 눈앞의 여자는 자신과 같은 종족이었다. 로젤린은
재차 다시 말했다.
“가.”
* * *
산 중턱에 위치한 막사가 들썩였다. 여기저기 타오르는 모닥불에서 황홀한 고기 냄새가 퍼졌다. 다들 물이
가득담긴 수통을 들고 마시면서도 잔뜩 취한 것처럼 행동했다. 축제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흥겨운 분위기였다.
“로젤린! 로젤린!”
“로젤린!”
“최고다, 로젤린!”
“멋있다, 로젤린!”
마른 건량과 육포 따위로 배고픔만 간신히 달랜지 벌써 이틀째였다. 검과 갑옷의 무게를 감내하며 산을 오르는
자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주인인 리카르디스가 사냥해서 알아서 잘 먹어 보라고 했지만, 대다수의
기사들이 훌륭한 검술 실력에 비해 사냥 솜씨는 형편없었다. 누구는 개구리를 잡아 왔고, 누구는 무언가가 먹다
남긴 동물의 사체 따위를 들고 와 야유를 받았다.
그런 때에 로젤린이 어깨에 멧돼지를 지고 어두운 숲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성인 남성만 한 크기에 무게는
크기의 배가 될 것이 분명한 두툼한 멧돼지였다. 그녀는 막사에 멧돼지를 툭 떨치고는 하급 기사들에게 손질하라
했다. 가장 좋은 부위를 전하께 바치고 나면 알아서 먹으라고도 했다. 많은 자들이, 특히 개구리도 고기랍시고
잡아 온 네스터가 그녀를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너무 멋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32 화.
“방해됩니다.”
라는 로젤린의 한마디에 축 처져서 멧돼지를 손질하러 갔다. 얼마 뒤 숲에서 나오는 로젤린의 어깨에는 커다란
사슴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사냥꾼 출신의 길잡이는 감동의 물결에 허우적거리며 차마 말을 잇지도 못하고 그저
엄지손가락만 치켜세웠다.
많은 사람들이 로젤린과 한마디 얘기라도 나누고자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잡아 온 사슴을 샅샅이 살필 뿐이었다.
이후에 약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 때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사들은 다 구워진 고기를 가장 먼저 로젤린에게 건넸다. 구워진 마늘의 고소한 향기와 허브의 향긋한 냄새가
자꾸만 식욕을 자극했다. 그녀는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눈을 떼지 못했다. 무뚝뚝하던 그녀의 얼굴에는 격렬한
환희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단검으로 고기를 조금씩 베어 먹는 자들이 대다수였으나, 로젤린은 고기를 통째로
들고 와구 씹었다. 그녀가 한입 크게 베어 물자 입안에 육즙이 탁 퍼졌다. 로젤린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먹었다.
여자 기사들이 까르르 웃었다. 임무 중일 때나 남자 기사들을 대할 때보다 세 톤 정도 높은 목소리였다.
로젤린은 눈을 감고 고기를 뜯으며 한껏 음미했다. 주변의 흐뭇한 시선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볼에 홍조가 띈 것
같은 착시가 보일 정도로 그녀는 행복해했다.
“매우, 매우 맛있습니다.”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으나 곧 표정을 굳혀야만 했다. 디에즈의 눈길이 로젤린에게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안의 혓바늘이 돋은 것처럼 거슬렸다.
* * *
소란스러웠던 저녁 시간이 끝났다. 다들 막사로 들어가 고단한 여정으로 쌓인 피로를 풀었다. 머리를 대자마자
잠에 드는 자도 많았다. 몇 조는 경계 보초 서며 조용한 막사를 지켰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막사 근처, 높게
자란 나무 위에 자리 잡았다. 2 황자의 막사를 지키고 있는 상급 기사는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로젤린은 굵은 나뭇가지에 머리를 기대고 꾸벅꾸벅 졸았다. 예전에는 그다지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요즘은 일주일에 한번 꼴로는 반드시 자야 했다. 그것도 작은 소음과 미세한 살의에도 금방 깨어날 수준의 아주
얕은 잠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피로가 풀렸다.
토도도.
잠든 육체를 대신해 날카로운 감각이 나무를 타고 오르는 작은 생물의 발걸음 소리를 감지했다. 깃털 같은
무게에서 발생한 아주 작은 진동이었다. 로젤린은 눈을 번쩍 떴다.
“…….”
다람쥐였다. 또한 그녀가 구했던 사슴이기도 했다. 로젤린이 코앞에 있음에도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상하고 작은 생물이었다. 다람쥐는 폴짝폴짝 뛰어서 그녀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그 덕에 눈높이가 어느 정도
맞춰졌다. 다람쥐가 코를 씰룩이면서 쥐 같은 소리를 냈다. 찌치 찍-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로젤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나 다람쥐는 먹은 적 없어서.”
다람쥐 말은 못 알아들어. 생략된 뒷말을 눈앞의 작은 동물은 알아들었다. 동그란 눈을 날카롭게 세우며 ‘
귀찮게 하네.’라는 듯 팩 쳐다보더니 그녀의 무릎에서 내려갔다. 다람쥐의 털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기처럼 흩어지며 넓게 퍼졌다. 검은 모래의 집단은 점차 몸을 불려 사람 한 명 만큼이나 커졌다. 흐물거리는
검은 형태의 안쪽에서 마력이 세차게 대류 했다.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때부터 눈치채긴 했지만, 이 동족도 인간을 먹은 적 있는 듯 했다. 서서히 인간의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갈색 머리를 늘어트린, 젊고 예쁜 여자였다. 옷을 입고 있지 않아서 그녀의 풍만한 굴곡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말 잘하네.”
로젤린은 자신이 막 인간이 되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들리는 단어를 어설프게 흉내 낼뿐으로, 지금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눈앞의 여자는 지금의 자신보다도 훨씬 능숙하게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여자는 로젤린의 눈에 담긴 존경의 빛을 눈치채고 웃었다.
“그래도 인간이 되면 귀찮은 일이 많아서. 동물로 사는 게 훨씬 편하고 좋아. 그래서 좀 신기하네. 너 인간들
사이에서 살고 있어? 안 불편해? 우리는 태생적으로 인간을 꺼려하는데 말야. 개체마다 좀 다른가?”
“금기 때문인가?”
여자가 눈을 부릅떴다. “금기?”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로젤린은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다. 조용히 말하라는
뜻이었다. 여자는 로젤린의 검지를 손으로 찰싹 쳤다. 조용히고 뭐고.
“응.”
여자는 로젤린의 팔뚝을 한 대 더 쳤다. 찰싹하고 매서운 소리가 났지만 그다지 아프진 않았다.
로젤린은 조금 뚱해졌다. 자신도 다 사정이 있었다. 여자는 로젤린의 억울한 표정을 보고도 그녀를 한 대 더
찰싹 쳤다. 로젤린의 어미, 에델바이스에게도 이렇게 혼난 적 없는데…….
“음.”
그녀가 금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로젤린의 육체로 생활한 것이 벌써 2 개월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인간세계의 음식은 맛있지만 그것들은 인간의 육체를 이루는 영양분이 되어 줄 뿐이었다.
슬슬 본체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것’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 시체를
흡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녀는 조용한 밤. 미리 동물 사체를 준비해 놓고 의태를 풀었다. 아니 풀고자
했지만, 마력만 그녀의 껍질 안에서 고요하게 대류 할 뿐 어떠한 변화도 생겨나지 않았다. 로젤린은 번개를 맞은
듯 충격 받았다. 변화를 하지 못해?
[다음 편에 계속....]
33 화.
그런데 불현듯 치미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왜 도망을 가야 하지? 어째서 누군가를 흉내 내야만 했던 거지? 죽고
땅에 묻혀 썩어 가는 것은 자연의 당연한 섭리였다. 순환의 원리였다. ‘그것’은 그때서야 자신이, 또한
어딘가에 살고 있을 제 동족들이 이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난 이상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로젤린은 가끔씩 꿈을 꾸거나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이 아닌 로젤린의 기억이었다. 열심히
공부했던 책의 내용이 떠올랐고, 까만 숲에서 누군가에게 쫓기기도 했다. 때로는 제 어린 동생을 바라보며 ‘
착한 아이구나, 칼. 우리 칼릭스.’ 하고 다정하게 이야기 했다. ‘그것’은 이 기억들이 로젤린, 그녀가 가지고
있던 생명의 조각이라 생각했다.
결국 그림자라 불리는 그들의 금기는 진정한 생명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생이라는 출발점이 있어야
죽음이라는 것에 닿을 수 있기에. 죽음을 경계했기에 생겨난 금기. 누군가는 섣부르다 말할 것이며, 누군가는
멍청하다 했지만 로젤린은 이미 생과 사의 기로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몰라도.
* * *
어떤 무리든 좀 덜 떨어지는 개체가 있지…… 여자가 말을 흘렸다. 자신과 로젤린이 같은 종족이라는 사실을
회피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로젤린의 모습 뒤로 오랜 과거를 떠올렸다.
여자, 또 다른 ‘그것’은 금기를 저지른 동족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굶었던 동족은 운 좋게도 죽어
있는 뱀을 발견했다. 배고픈 동족은 커다란 뱀을 흡수했다. 설마 그 배 안에 아직 살아 있는 토끼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당혹스러워하며 토끼로 살아가던 그 동족은 자신의 의태의 능력이 소실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 부분적인 변이는 가능했지만, 아무리 표범의 근육조직을 빌려 온다고 한들 토끼라는 큰 틀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고. 이후, 그 동족은 사냥꾼에게 잡혀 갔다. 웃지 못 할 희극이었다.
무기가 없다면 인간은 약해 빠진 종족이다. 날카로운 손톱이나 송곳니도, 강한 근육조차 없으니. 토끼보다야
낫긴 하겠지만 여자가 보기에는 토끼나 인간이나 그게 그거였다.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집채만 한 마수로도 변할
수 있었다. 강함의 기준이 높은 것은 당연했다.
덜떨어진 동족은 제 안위와 관련된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너는 말해라, 나는 들을 테니. 따위의 태도를 고수하며
인간들이 세워 놓은 한 막사만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딱 봐도 세상 물정이라고는 모르는 것 같은 데다가, 금기까지 저질러 의태가 불가능한
동족이라니. ‘그것’의 머리 한편에는 과거 토끼로 살다가 사냥꾼에게 잡혀간 또 다른 동족이 자꾸만 떠올랐다.
여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응.”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다. 이걸 확 그냥…….
“응.”
리카르디스의 막사 근처를 기사들이 지나갔다. 로젤린의 신경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향하자 여자가 로젤린의
팔뚝을 철썩 때리며 성질냈다. 여자는 제 입술을 꾹 한번 깨물고는 로젤린의 어깨를 더럭 잡았다. 여자의 회색
눈동자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있잖아.”
“응.”
겸사겸사 위험해 보이면 구해 주기도 하고. 인간 한 명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여자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눈을 조금 더 가늘게 뜰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여자는 깨달았다. 얘, 못 알아듣고 있네…….
그녀는 말을 고쳤다.
“앞으로 너 따라다니겠다고.”
로젤린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래.” 하고 간단한 대답을 했다. 누구는 일생일대의 결정이었건만.
얘, 생각이라는 것은 하고 사는 거겠지? 여자는 다시금 제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거나…… 잘 부탁해.”
“응.”
* * *
“다람쥐?”
“사슴?”
“사슴이랑 같이 다니는 사람을 보기는 했지. 사냥꾼이 죽여서 어깨에 매달고 있더라고.”
“……곰?”
두 여자는 여전히 나무 위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여자는 로젤린을 따라가기로 했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같은 종족이라고 해도 갑자기 나타난 바깥의 존재는 크게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군다나 인간의 지능은 다른 동물들보다 높은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어설프게 인간을
흉내 내는 제 모습에 의문을 금방 가질 것이다.
여자는 자신이 과거에 먹은 동물들의 종류를 나열했고, 로젤린은 하나씩 짚어 가며 선택했다. 하지만 다람쥐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 사슴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 곰과 마수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굉장히 희귀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여자는 로젤린이 그랬듯이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습성이 있었다.
이후에도 뱀, 흑표범, 사슴벌레, 너구리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전부 기각되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여자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간신히 떠올렸다. 산 중턱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에 살던 늙은 여자. 그녀의 오두막에는 가끔씩 사냥꾼들이
들려서 비를 피하고 갔다. 활과 덫을 위한 재료만 들고 다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간간히 사냥개나 매를
데리고 다니는 사냥꾼들도 있었다. 후보가 두 개가 생겨났지만 여자는 개도 매도 먹은 적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씩 웃었다.
“독수리는 먹은 적 있어.”
로젤린은 오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확실히 매나, 독수리나. 둘 다 맹금류의 커다란 날짐승이다. 그게
그거지 뭐. 여자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의태를 시작했다. 여자의 형체가 검게 물들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여자는 온전한 독수리의 모습이 되었다. 덩치가 예상한 것보다 제법 컸다. 로젤린은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감탄했다. 독수리는 태평하게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성대만 인간의 것으로 변이한 모양이었다.
“이 근처 왕이라고 불리던 독수리였거든. 마수랑도 싸우던 애야. 안타깝게도 수리부엉이가 저녁에 기습해서
죽었지. 밤의 수리부엉이는 낮의 독수리만큼 강하거든.”
[다음 편에 계속....]
34 화.
독수리는 제 날개깃을 부리로 정리했다. 로젤린은 그 날개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빠듯하면서도 매끄럽고 탄탄한
갑옷 같은 감촉이었다.
“매를 데리고 다니는 사냥꾼은 장갑이랑 팔 보호대 같은걸 하고 있었어. 발톱이 날카로우니깐.”
독수리는 제 한쪽 발을 들어서 까딱거렸다. 송곳같이 날카로운 발톱이 보였다. 사냥꾼이 온갖 가죽을 가지고 있는
걸 본 적 있다. 그것을 대충 잘라서 두르면 될 것 같았다.
독수리는 조류의 대가리를 하고도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인간이 데리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완벽한 동물을 찾아내어 한 사람과 한 마리는 매우 만족했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 왔다. 막사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이른 아침부터 사절단 일행이 있는 장소를 덮친
커다란 동물 때문이었다. 사냥꾼이 활을 쏘려고 했지만 로젤린이 황급히 나서서 만류했다.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공격하러 왔으리라 추측했으나 독수리는 얌전히 로젤린의 팔 위에 앉아 있었다. 마수라고
봐도 될 정도로 체구가 큰 독수리였다. 로젤린은 무겁지도 않은지 그 무게를 잘 지탱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조금 피곤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어쩐지 어제가 떠올랐다. 대체 토끼를 어떻게 잡아 왔느냐는 뜻으로 그게 무엇이냐 물었더니 “
토끼입니다…….”라는 대답을 했던 그녀의 모습이.
“독수리입니다.”
독수리와 로젤린은 조용히 당황했다. 사냥꾼들이 매를 데리고 다닌다고 했는데, 매나 독수리나 그게 그거인 거
같은데, 이상한 거 아니라 했는데. 왜 다들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경?”
“아는 독수리입니다.”
동료 기사들도 처음에는 이 상황에 의문을 가졌지만 독수리가 첩자나 암살자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다들 로젤린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독수리의 날개를 한 번 만져 보기도
하고, 그 크기에 감탄도 하면서 나름 즐거워했다.
사냥꾼은 독수리가 얼마나 위험한 동물인지 알고 있어, 다가오지 못하고 한참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곧 독수리가 위험하지 않다 못해 온순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로젤린에게 접근했다.
“덩치도 크고, 부리도 튼튼해 보이고. 굉장히 멋진 독수리로군요. 언제부터 기르게 되신 겁니까, 로젤린 경?”
어제 만났다.
“……최근입니다.”
“몇 살이나 되었습니까?”
“모릅니다.”
“이름은 뭔가요?”
“마카롱.”
“……네?”
“마카롱입니다. 이름.”
여정은 순탄했다. 암살자나 함정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을뿐더러 날씨도 좋았다. 일행은 일라베니아의 영토
내에서는 여러 마수들과 잦은 전투를 치렀지만, 발타에 들어서며 한결 여유로워졌다. 누군가가 미리 처리라도 해
놓은 듯이 마수를 발견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위험이 도사리는 나라에 발을 들여 놓은 것치고는 순탄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였다.
가끔 여우 같은 자그마한 마수가 막사를 덮치고는 했지만 하늘에서 빠르게 하강한 마카롱에게 번번이 공격당했다.
기사들은 그들보다 훌륭한 경비를 서는 마카롱에게 경의의 뜻을 담아 ‘마카롱 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경’이라는 것은 기사를 뜻한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기사는 ‘약한 자를 보호하고 명예를 알며, 강한
신념을 가진 높은 지위의 인간’이라는 것 또한 알려 주었다. 그 후부터 마카롱은 기사들이 ‘마카롱 경’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들을 내려다보며 우쭐거렸다. 매우 고압적인 태도였으나, 동물의 몸이라 티가 잘 나지 않았다.
바쁘게 움직인 덕에 어느덧 발타의 수도 ‘리비타’에 근접했다.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발타의 궁은
일라베니아의 순백의 성과는 매우 달라 보였다. 여러 가지 색의 화려한 문양과 금이 조화롭게 섞여 궁을 뒤덮고
있었다.
경비대를 마주한 이후, 하얀밤 기사단의 분위기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상급 기사들이 리카르디스의 마차에 더
가까이 붙어 섰다. 하얗고 검은 집단의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맴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경비대가 양
옆으로 갈라지며 중앙에서 금색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뚱뚱한 남자가 나타났다. 잇세리온은 몇 년 전 일라베니아에
방문했던 그와 만난 적 있었다. 발타의 재상, 아틸라크였다. 아틸라크는 두 무릎을 꿇고 발타식으로 그들에게
인사했다. 경비대의 많은 인원도 그를 따라 절도 있게 두 무릎을 꿇었다.
아틸라크가 인사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감돌던 긴장감이 이완되었다. 지금 당장의 위험성은 없다고 판단한
기사단장 스타스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리카르디스가 긴 은발을 손으로 정리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햇살이 강한 날이었던 만큼 그의 머리칼이 발하는 빛
또한 평소보다 눈부셨다. 아틸라크는 일라베니아 2 황자의 뒤에서 후광 따위가 비춰지는 것에 잠시 말을
잃어버렸다. 햇빛이 그의 뒤에서 찬란하게 산개하는 모습이 어찌나 신성하고 아름다운지.
“오랜만이군, 재상.”
리카르디스가 그에게 아는 척하자 재상이 호들갑을 떨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다. 덥지는 않으신지,
힘드시지 않으신지, 배고프지는 않으신지. 누가 보면 발타의 왕 힉살라의 종이 아닌 리카르디스의 종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사절단 일행은 곧 궁으로 안내되었다. 무장하고 있던 경비대가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둘러싼 채로 이동했다. 한
나라의 수도답게 높고 화려한 건물들이 많았다. 비록 보이지 않는 안쪽에 빈민가가 위치하고 있어도, 궁으로 가는
길만큼은 반짝반짝하게 잘 닦여 있었다. 하지만 그 풍경을 음미하며 지나가는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랜
숙적의 나라에 발을 들인 만큼 당장 위험하지 않더라도 경계하게 되는 것이었다. 로젤린도 리카르디스의 마차에
말을 가까이 붙여 몰며 주위를 경계했다.
“마카롱 경은?”
레이몬드가 골목을 주시하며 물어왔다. 항상 가까이 붙어서 날던 거대한 독수리가 사라지니 그 공백이 여간 커
보이는 게 아니었다. 로젤린은 잠시 하늘을 한 번 봤다가, 제 가슴을 한 번 내려다보며 우물쭈물했다.
“가까이에 있어.”
레이몬드를 바라보던 로젤린이 눈동자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가까이에 있는, 정확히는 심하게 가까이에 있는
마카롱이 보였다. 제복과 가슴 갑옷 사이에 들어갈 만큼 작은 생물이었다. 회색 털을 가진 쥐가 쌀알 같은
앞발로 잘 매달려 있었다. 궁 안에서는 독수리 같이 커다란 생물이 활동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리비타에 들어서기 전, 마카롱은 하늘 높이 날아가는 척하며 곧바로 쥐로 변해 그녀에게 돌아왔다. 마카롱은
주머니를 발견해 들어가서는 찍찍, 소리를 냈다.
[다음 편에 계속....]
35 화.
로젤린은 마카롱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발타의 성문이 열리고 경비대와 조우한 이후로 줄곧
눈치채고 있었다.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시선은 차단되었지만 그녀의 감각이 주위의 광경을 그려냈다. 군마
무리, 기사들의 갑주가 철컹이는 소리. 마차의 수레바퀴가 흙 자갈 위를 굴러가는 가운데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불안정하고 난폭한 기운이 주위에 넘실거렸다. 마수 한 마리의 마력이 횃불이라면, 지금 이것은 주위를 온통
뒤덮은 산불처럼 범람해 있었다. 로젤린은 이것과 비슷한 기운을 느낀 적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홍차에 섞여 있던
‘파편’과 ‘마수’ 라 불리는 흉포한 짐승들로부터.
로젤린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타의 많은 백성들이 사절단 일행을 구경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다행히도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저 경비대가 특수한 집단인 모양이었다.
발타는 넓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수도의 중앙에 위치한, 화려하기 그지없는 궁에 도착했다. 사절단의 일정으로 1
왕자 하카브와 만나기로 한 것은 이틀 뒤. 오늘은 막 도착한 만큼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틸라크는
사절단을 위해 궁 하나를 통째로 비워 두었다. 기사들이 먼저 리카르디스의 방을 샅샅이 확인하고 나서야 모두가
휴식에 들어 갈 수 있었다.
“나는 도망 갈 수 없어.”
이번에는? 마카롱이 물었다. 로젤린은 자신의 입으로 내뱉었으면서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만
했다. 그를 지키는 임무에 실패한 적은 없었는데…… 갑자기 왜 그 말이 튀어나왔을까. 로젤린과 마카롱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해답을 들려 줄 사람은 없었다. 밤이 깊어갔다.
바쳐라.
등골을 스치는 서늘한 울림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원의 모두가 몸을 곧게 세웠다. 강한 결의가 두려움을 억눌렀다.
어느 누구 하나 제 처지를 비탄하며 흐트러지지 않았다.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견고한 신념 아래 그들의
맹세가 다시금 새롭게 새겨졌다.
* * *
로젤린은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기사단장의 방문을 노크했다. 가까운 사람이라 하면 레이몬드지만, 최근에는 같은
집단 내에 있으면서도 거의 마주치지 못했다. 사절단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는 걸 봤을
뿐이었다. 이후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군가 생각해 보았더니 기사단장 모습이 딱 떠올랐다.
“들어오게.”
임시 배정된 기사단장실에 들어가니 스타스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도 많았다. 부단장 나단과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
상급 기사 몇이 지도를 펼쳐놓고 무언가를 회의 중이었다. 레이몬드가 눈웃음치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로젤린도
살짝 웃었다.
로젤린은 머뭇거리다가 기사단장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생각보다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스타스는
답지 않게 당황했다. 레이몬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로젤린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봤다. 언제든지 달려가서
로젤린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는 비장한 눈빛이었다.
로젤린이 스타스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듯 한쪽 손으로 입을 가렸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쭉 내밀어서 그 근처에
귀를 두었다. 그녀가 어떤 폭탄 발언을 할지 매우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배가 고픕니다? 내일 아침은 뭐가 나옵니까? 집에 돌아가도 됩니까? 뭐가 나와도 상사의 귓가에 남모르게 속삭일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
“…….”
“안 된다.”
“안되네.”
“안 돼!”
그녀는 결국 수긍의 표시로 고개를 위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들 사이에서 커다란 한숨이 나왔다. 어찌
되었거나 궁을 지켜보는 시선을 눈치챈 일만은 칭찬할 만했다. 로젤린은 기사단장에게 눈의 위치를 낱낱이 알려
주고 방을 나섰다.
[다음 편에 계속....]
36 화.
“실례합니다, 전하.”
“나가.”
* * *
“마카롱.”
“마카롱.”
한밤중의 고요한 화원에서 적국의 기사가 마카롱을 애타게 원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봤더라면 매우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한참을 돌아다녔다. 그때 로젤린의 예민한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작은 동물은 아니었다. 일부러 나뭇가지를 밟아 제 존재를 알리고자 하기에,
로젤린은 그 소리의 주인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뒤돌아본 그녀의 시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발타인의 특징인 검은 머리와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낮에 본 퉁퉁한 재상 아틸라크와는 생김새가 매우 달랐다.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다. 둥그렇고 부드러운 눈매에
비해 인상이 사나웠는데, 눈썹이 짙고 골격이 단단해서 그런 것 같았다. 옷 또한 재상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더
화려했다. 바닥에 자락이 끌릴 정도로 더 길기도 했다. 남자는 로젤린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몇 번 걸으니 어느새 로젤린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감사합니다.”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하얀 제복 위에서 떠돌았다. 수놓아진 하얀밤 기사단의 문양을 발견한 남자가 웃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나 짧은 시간 안에 연달아 칭찬하는 사람은 칼릭스와 레이몬드 이후로 처음이었다. 좋은 사람인 건가? 한데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로젤린의 본능이 남자를 경계했다. 남자는 로젤린이 껄끄러워 하는 기색을
눈치챈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로젤린이 말하며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하카브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다음 행동을 저지했다. 로젤린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곧 하카브의 차가운 입술이 그녀의 볼에 무겁게 눌러졌다. 그는 쪽 하고 일부러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로젤린의 코앞에서 하카브가 씩 웃었다.
아, 발타로 떠나기 전에 레이몬드가 가르쳐 줬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연장자가 그보다 어린
이들에게 먼저 볼에 입을 맞춘다. 이후 받은 사람이 입맞춤을 돌려준다. 가까운 가족뿐 아니라 친구나 사무적인
관계에서 까지 넓게 통용된다고. 하물며는 처음 보는 사람끼리도 볼에 입을 맞춘다고 하니, 일라베니아로 치면
그저 악수를 하거나 손을 흔드는 인사방법인 셈이었다.
“…….”
로젤린은 눈동자를 또르륵 굴렸다. 기사로서 보이는 정식적인 예우는, 일라베니아 황족 이외에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에 가볍게 묵례를 할 예정이었는데…… 계획이 와장창 다 깨져 버렸다. 이제 어떤 인사를 해야 하지?
일라베니아식? 발타식? 로젤린이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고 있자, 하카브가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 가까이에
얼굴을 살짝 가져다 대는 모습이, 눈치가 없는 로젤린이 봐도 발타 식으로 돌려달라는 얘기였다.
로젤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하카브가 훌쩍 컸기에,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그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하카브가 로젤린에게 맞춰 몸을 조금 숙였다. 남자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오던 참이었다.
“로젤린 경!”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로젤린의 입술은 하카브의 피부를 스치지도 못하고 떨어졌다. 로젤린은
단단하게 안겨있는 상태였다. 남자의 가슴이 등 뒤로 느껴졌다. 막 뛰어 온 듯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귓가에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로젤린의 어깨를 꾸욱 한 번 더 깊게 감싸 안은 후에
풀어줬다.
“장난이 지나칩니다, 하카브 왕자. 일라베니아의 사람에게 발타의 개방적인 풍습을 따르라니요. 로젤린 경이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개방적인 인사와 개방적이지 않은 인사의 차이를 알지 못했지만, 로젤린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디에즈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제 등 뒤로 쏙 넣었다.
“그거야 뭐…….”
가벼운 어조로 얘기를 주고받는 것치고는, 맹수 두 마리가 격돌 직전 탐색전을 하듯 살벌한 분위기였다. 친분이
있다는 관계라 들었는데 그다지 살가워 보이진 않았다. 디에즈가 로젤린의 등을 밀어냈다.
“예.”
로젤린은 하카브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화원을 벗어났다. 어쩐지 사람의 발소리가 많이 들리더라니.
쥐 한 마리 찾을 수 없던 아까와는 달리 수많은 인원이 화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디에즈의 심복들도 몇 있었고,
무장한 갈색 피부의 사람들도 많았다. 아마 하카브의 사람일 것이다. 그들의 몸 안에도 광폭한 마력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낮에 보았던 경비대보다 더 많은 양의 마력이었다. 로젤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가슴이 기분
나쁘게 울렁거렸다.
어두운 밤, 궁과 떨어져 있는 작은 화원. 주위를 지키는 사람들. 이 장소에서 디에즈와 하카브는 미리 만나기로
약속했던 게 아닐까. 그녀는 화원을 벗어나 천천히 궁을 향해 걸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예민하게 굴기는.]
[치근덕대지 말라니깐요.]
두 남자는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 안건으로 한참을 티격태격 다퉜다.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연회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양고기 요리를 올려 달라고 하던 디에즈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엘피디오의 전언입니다.]
주위에 로젤린을 지켜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녀는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디에즈와 하카브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들을 수 있는 반경을 점점 넘어서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37 화.
로젤린은 사절단이 머무는 궁을 향해 급하게 달려가던 도중, 담벼락에서 마카롱과 만났다. 회색 쥐는 달리고 있는
로젤린의 머리카락에 재주 좋게 매달렸다. 그녀의 귓바퀴 뒤에서 마카롱이 찍찍 이야기했다. 궁을 돌아다니면서
마력을 몸에 지니고 있는 자를 많이 보았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데?”
마카롱의 대답에 로젤린은 사나운 얼굴을 한층 더 사납게 만들었다. 방금 전 하카브의 수족들을 보면서 떠올랐던
불길한 예감. 혹시나 이런 자들이 예상보다 더 많은 것은 아닌가? 가늠할 수 도 없이, 셀 수도 없이?
그녀의 추측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마카롱은 짧은 다리로 많은 장소를 돌아다녔다. 경악의 연속이었다. 앞서
마주했던 기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어마어마한 양에 압살 당할 것만 같았다.
마카롱은 선천적으로 마력을 타고나는 마인(魔人)을 만나 본 적 있었다. 마인이 가진 마력의 기운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마력과 매우 흡사했다. 온건하고 조화로웠다. 이렇게나 난폭하게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이 폭주하는
힘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 그들을 단순한 ‘마인’이라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로젤린은 높이 올려 묶었던 머리를 풀었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마카롱이 머리 안쪽에 몸을 파묻고
찍찍 소리를 내며 다 숨었다고 신호했다. 로젤린은 눈앞의 창문을 힘차게 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샐러드.”
호위 기사들이 검을 집어 넣었다. 그녀는 로젤린이 맞다. 음식을 좋아하는 사실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해도,
분위기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저 모습은…… 흉내 내기도 힘들 것이다. 어느 누가 날카롭게
벼려진 검 날이 자신을 향하는데, 태평하게 음식 얘기나 하고 있단 말인가. 심지어는 2 황자 전하의 말이 자신을
시험한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 했다.
리카르디스는 상황이 종료된 것을 보고 거짓말을 수습했다. 로젤린이 방긋 웃었다. 아침햇살 저리가라 할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상급 기사들이 어처구니 없어하는 사이에, 로젤린이 가볍게 창문을 넘어왔다.
그녀는 방 안에 있던 부단장 나단에게 잠시 구석으로 불려가 혼났다. 창문으로 드나들면 안 되겠지, 로젤린 경?
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급히 창문으로 들어와야 할 만큼 중대한 사항이 있으리라 믿고 있네. 그렇지, 로젤린 경?”
부단장 나단이 은근히 압박을 주었다. 리카르디스도 발타의 성전을 덮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눈동자를
굴렸다. 디에즈 황자의 건 이전에, 발타의 궁에서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이상한 마력의 기운 때문에 불안해졌다.
그래서 무작정 찾아 왔다.
칼릭스는 그녀에게 마력을 감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마인(魔人)이라고 생각되어
어쩌면 하얀밤 기사단에서 제명 될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로젤린은 걸릴
만한 주제는 걸러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뒤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나서, 뒤돌아봤더니 모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힉살라 아돈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라고 했습니다.”
“뭐?!”
나단은 솔직히 로젤린이 쓸모없는 얘기를 하리라 예상하고서, 이미 혼낼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하카브,
발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인사만 했다고 한들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카브와의 우연한 만남. 그것을 계기로 무언가 틀어진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로젤린은 눈동자를 잠시 위로 굴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하카브가 자신에게 했던
말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왕자가 그렇게 말해서, 제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왕자가 ‘황자의 기사인 것 같은데……
제법 멀리까지 나왔군. 그대, 이름은?’이라고 물어서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
“…….”
“…….”
“제가 경계하고 있자, 왕자가 ‘나는 힉살라 아돈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다.’라고 소개를 해 왔습니다. 그
전까지 왕자라고 생각 못하고 있었지만 무례를 저지르진 않았습니다.”
“뭐?!”
“뭐!”
물론 로젤린이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그녀의 행동을 쭉 지켜봐 온 부단장에게는 아이만큼 어리숙하게 느껴졌다.
상급 기사들의 기세도 흉흉해졌다. 발타의 더러운 들개 놈이 감히 우리 동료를 건드려? 심지어는 그게
수작질이라고 인식도 못하는 맹한 애한테!
로젤린은 티 나지 않게 몸을 움츠렸다. 정확한 분노의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발타식 인사에 대해서 다들 화내는
듯 보였다. 아까 전 5 황자 디에즈 또한, 일라베니아의 사람에게 발타의 개방적인 풍습을 강요하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
로젤린은 하카브에게 발타 식으로 인사를 돌려주려 했던 사실을 조용히 묻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혼날 것
같았다. 위기감을 비료로 삼아 눈치라는 꽃이 피어난 순간이었다.
“또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했지?”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디에즈 황자님이 오셔서 전하께서 부르신다고, 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왔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38 화.
리카르디스와 나단이 한숨을 푹 쉬었다. 다행히 눈치와 생각이 있는 사람이 이후에 일어날 수작질을 막아준
모양이었다. 당연히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부른 적 없었다. 디에즈가 이 맹한 기사를 돌려보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아직도 안 끝났나?”
리카르디스는 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리카르디스를 떠나 있던 건 삼십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사이에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건지 감도 안 잡혔다. 로젤린이 끄덕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로젤린은 문득 머릿속으로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디에즈가 다정한 손길로 제 얼굴에 붙은 꽃잎을 떼어 줬다.
햇빛 아래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걱정했습니다, 로젤린.]
로젤린은 풀벌레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장악하기 전까지, 점점 작아지던 그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들새의 청력을
빌린 귓가로 두 남자의 얘기가 고스란히 닿았다.
[엘피디오의 전언입니다.]
이후에 하카브가 웃는 소리를 들었다. 진정한 친우라는 부분이 특히 웃긴 듯했다. 디에즈는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순간에도 점점 소리는 작아졌다.
[그렇습니다.]
하카브는 짧게 침묵했다. 기분이 좋은 듯 나지막이 웃는 소리만 그 공백을 메웠다.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로젤린은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해독제는,]
하카브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작아지던 소리는 완전히 멎었다.
[없다.]
* * *
“위험합니다, 전하!”
젠장! 리카르디스는 잇새로 욕을 내뱉으며 자세를 잡았다. 한 마리의 나비처럼 날아오는 로젤린을 받아 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쏜살 같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뒤로 넘어갔다. 넘어진 두 사람 옆으로 벌 한 마리가
날아다녔다. 레이몬드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어서 벌을 쫓았다. 정적이 감돌았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밑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이 유별난 호위는 어젯밤부터 지속되었다. 로젤린은
혼란스러웠다. 이 거대한 궁을 뒤덮고 있는 이상한 마력 때문이었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한두 군데도 아니었다.
사방에서 넘실댔다.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시야와 감각으로 보는 세상이 겹쳐졌다. 이질적인 마력 속의 꽃과 검. 무엇이 위험한지
순간적으로는 판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제 본능을 따라 모든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냥 지나가는 하인.
궁에 사는 고양이. 날벌레. 심지어는 잇세리온과 기사단장 스타스까지.
로젤린이 경계하며 앞을 가로막자, 스타스는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태한 태도보다야 나았다.
경계가 부족하기보단 넘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약간은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이 예뻐 보여서 그냥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넘어갔더랬다. 그 안일한 판단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전하! 위험합니다!”
“전하! 제 뒤로!”
“전하!”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제복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돌부리에 머물렀다. 마저 제거하지
못해 굉장히 아쉬워 보였다.
“이……!”
* * *
‘…….’
창문이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알려지지 않은 통로로 온 손님일 것이다. 그럼에도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은 채로 그대로 누워 있었다.
“로젤린.”
“네, 전하.”
리카르디스의 귓가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 또한 전혀 놀랍지 않다는 태도였다. 잠시 끊겼던 대화를
지속하는 듯 자연스러웠다. 리카르디스는 부스스 눈을 떴다. 머리맡에 검은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방 안을
밝히고 있는 불빛이 희미하게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흔들리는 촛불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
리카르디스는 잠결에 벌어진 셔츠를 정리했다
“천장에 길이 있었습니다.”
혼났습니다. 그녀의 숨겨진 뒷말을 읽었다. 리카르디스는 잠에 취해서 흐리게 웃었다. 이 어두운 밤에도 제 호위
기사들은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 중인 듯 했다. 그 로젤린으로부터 창문을 사수할 정도면.
[다음 편에 계속....]
39 화.
로젤린은 여전히 침대 머리맡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복도 밖에서 속삭이는 호위 기사들의 소리와 천장을
통해서 옅게 불어온 바람에도. 그녀는 다른 곳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리카르디스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극성맞은 호위는 멈출 생각이 없는가 보다. 정성이 나름 갸륵했기에 리카르디스는 나가라는
말을 온건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머뭇거리며 자리를 지켰다.
“…….”
“안 돼. 나가.”
리카르디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로젤린은 시무룩한 기색을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안 돼.”
그는 자신의 인내심이 이렇게 뛰어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로젤린은 계속된 거절에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봐, 경…….”
“무섭습니다.”
“사람은…….”
사람은 너무 쉽게 죽으니까요.
리카르디스는 담담한 말 속에 담긴 진심과 두려움을 읽어 냈다. 그의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로젤린은
참 투명했다. 좋은 것은 좋다. 싫은 것은 싫다. 무서운 것은 무섭다. 그녀 자체의 수수께끼 같은 점을 제외하고
본다면, 로젤린은 참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흔들리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밤의 장막이 걷히기 전까지의 시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시간에 누군가를 만난다거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어둠은 위안을 주곤 했지만, 때때로 길을 잃게도 했다. 혼돈을
주관하는 크레안 티다니온의 시간. 그때에는 인간이 두르고 있는 베일이 걷히며 진정한 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했다. 칼날을 무디게 하고 견고했던 방패를 녹슬게 했다.
“…….”
혹시 예전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되찾은 것일까. 그녀는 여전히 어린 동물처럼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약한 불빛에
비친 녹색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났다.
“아.”
돌연 로젤린이 소리를 냈다. 턱 아래까지 이불을 덮고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리카르디스가 의아해 할 찰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리를 한껏 죽인 작은 목소리였다.
“전하, 들리십니까?”
“……?”
리카르디스는 귀를 쫑긋 세웠다. 창문 밖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들렸지만,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
“저는 여기 있는데.”
“네. 좋은 꿈 꾸십시오.”
“…….”
고요히 시간이 흘렀다. 리카르디스는 막 잠에 빠지려는 순간,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는 손길을 느꼈다. 경,
제발 그만 좀…… 잠에 취해 어물어물 말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불에 폭 감싸인 채 잠에
빠져들었다. 모처럼 깊고 편안한 꿈을 꾸며.
* * *
“약 구백 명 정도의 사망자가…….”
소녀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전쟁이라는 단어가 두려운 듯했다. 모름지기 전쟁터란 피와 살점,
절망만이 난무했다. 소녀는 미지의 광경을 가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나쁜 기억이라도 남아 있을까
염려되는 듯 더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제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무섭네.”
“사람이 너무 쉽게 죽는 것 같아 무서워.”
그녀도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많은 얘기를 들어왔을 것이다. 일라베니아와 검은달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한지.
리카르디스 전하가 이복형제 엘피디오와 사이가 얼마나 나쁜지. 여태껏 제 오라비에게 얼마나 수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는지.
심지어는 황실의 험악한 분위기 때문에 별장으로 피신하듯 내려온 상황이었다. 그녀의 불안은 당연했다. 나는
황녀 전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녀는 손길을 즐기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응.”
“제가 지켜 드릴게요.”
세티스티아 황녀는 안전할 것이다. 자만심은 아니었다. 내가 입고 있는 하얀 제복. 하얀밤의 주인은 언제나
승리만을 이끌어 왔다. 다소 피해가 있을지라도 그는 언제나 승리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믿음은 절대적인 승리자에게 속해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대단한 분이었다. 심지가 굳고 고결한 분.
사방에 적이 도사리고 있는 황실에서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일어섰다. 안타까움과 자랑스러운 마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교만한 망상일지도 모르겠지만 감히 바라건대, 언젠가 그분께서 흐트러지는 순간이 온다면…
… 의지할 수 있는 기사로 성장하여 곁을 지켜 드리고 싶다.
“제가 꼭 지켜 드릴게요.”
소녀는 히히 웃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이 간지러운 건지, 내 말이 기쁜 것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나도 소녀를 마주 보며 웃었다.
숲속 깊은 곳의 별장.
……
……
……
내 마차를 두고 갈 테니 너는 편안하게…….
“죽여라!”
“흰색 마차다!”
화살이 쏟아졌다. 사나운 금속의 마찰음이 빗소리를 뚫고 공간을 가득 메웠다. 마차는 벼랑 위를 필사적으로
달렸다. 커다란 돌덩이가 좁은 길을 덮쳐 왔다.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시야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나는 소녀를
끌어안으며 정신을 잃었다.
[다음 편에 계속....]
40 화.
“로, 로젤린…….”
아아아아악!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명인지 울음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의, 아니
로젤린. 그녀의 목소리였다.
소녀가 했던 말이 떠오르며 과거와 현재의 공간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로젤린은 소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웃고 있었다. 햇살이 따듯하게 쏟아지고,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공기는
포근했다.
“부탁……이, 야. 오빠를…….”
[제가 지켜 드릴게요.]
* * *
로젤린은 동이 터오기 직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밤의 꿈이 뒤숭숭했던 탓인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든 리카르디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꾼 꿈이 ‘로젤린’의 기억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로젤린은 말라붙은 눈물을 대충 손으로 쓸었다. 인간으로서의 첫 눈물은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 속에 흘러갔다.
로젤린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서다가 호위 중이던 레이몬드와 마주쳤다. 2 황자의 방. 새벽. 심지어는
창문에서 남몰래? 레이몬드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한 바가지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잔소리가 길어질 듯했다. 로젤린은 그 기미를 읽어 내고는 잽싸게 도망쳤다. 바람과도 같은 빠르기였다.
레이몬드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뒷목을 잡았다.
회담은 대부분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주로 여러 세력이 모이며, 각자의
이익을 위해 칼 대신 입을 휘두르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발타의 회담은 긴장감 가득한 대부분의 나라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 겉으로 웃으며 속으로는 칼날을 가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분위기가 판이했다.
금과 다양한 색료로 화려하게 치장된 연회장은 수천 개의 등불과 촛불로 환하게 밝혀졌다. 수백 명이 있다면 그
수백 명의 다른 입맛을 모두 충족시킬 만한 온갖 진미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흥겹기도 한 노래 소리
가운데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축제나 연회라고 봐도 손색없었다.
하지만 이런 자유분방한 회담에도 공통적인 부분은 있었으니, ‘회담장 내부에서는 무기 소지가 불가하다.’라는
점이었다. 나라의 중대사가 오가며 국가의 주요 인사들이 모이는 장소인 만큼 위험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하카브 왕자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라베니아의 사절단, 전원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무기소지를
허가한다고.”
이례적인 일이었다. 기사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언제 어디서든 무기 소지를 허가? 하카브는 오늘 있는 회담을
염두에 두고 얘기한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는 고작 몇 시간 전의 갑작스러운 통보라니. 더욱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비죽대며 웃었다.
리카르디스의 태평한 태도에도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은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무기 소지를 허용하다니.
예상 못한 위험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혹시 회담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인가? 또는 무장을 빌미로
걸고넘어지려 한다던가. 하카브 왕자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사절단 일행의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의 계산속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대책을 의논할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끼고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가 파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 이상 우습게 보이는 건 좀…… 기분 나쁘군. 리카르디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로젤린 경.”
“네.”
문이 달리지 않은 연회장은 아치형의 모양으로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에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재상 아틸라크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일라베니아의 사절단이 회담장에
도착했노라, 우렁차게 알리는 소리와 함께 리카르디스는 빛나는 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하카브 왕자가 입구 쪽으로 걸어왔다. 금사로 수놓인 튜닉 위로 바닥까지 끌리는
기다란 천을 겹쳐 입은 차림새였다. 온갖 장신구가 그의 팔과 귀에서 빛나고 있었다. 하카브는 사람 좋은 미소로
사절단을 환대했다. 긴장해서 억지 미소를 걸고 있는 사절단 일행과 다르게 정말로 기분 좋아 보였다.
회담의 포문을 여는 인사에 리카르디스 또한 정중하게 응대하려 했으나, 하카브가 다가오는 게 먼저였다. 그는
거침없이 리카르디스를 향해 걸어왔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하카브를 막아섰다.
“스타스 경.”
“아.”
로젤린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카브 왕자가 어떤 행동을 할지 깨달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왕자의 얼굴이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쪽.
그는 굳은 고개를 으드득 돌렸다. 하카브 왕자의 얼굴이 바로 한 치 앞에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머리는 평소와
달리 둔하게 돌아갔다. 그러니까, 방금, 내, 볼에. 이 왕자가…….
하카브 왕자의 돌발행동에 회담장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악기를 연주하던 악단도 살짝 삐끗했다. 하지만 곧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발타의 귀족들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발타의 왕자가 이렇게까지나 일라베니아의
사절단을 반기고 있다. 진의가 무엇이건 간에, 그는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알아 두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41 화.
* * *
곧이어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일라베니아의 사절단은 회담이나 연회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음악이 좀 더 흥겨워지고 술의 도수가 미세하게 높아진 것을 눈치챘다. 사절단은 완벽하게
경계를 풀지는 않았으나 그들 나름대로 틈틈이 먹고 마시며 풀어진 분위기를 즐겼다.
리카르디스는 많은 왕족과 귀족을 만났다. 몇째 아들, 몇째 딸. 누구의 친척, 누구의 팔촌, 누구의 이웃사촌.
리카르디스는 살짝 웃는 얼굴로 차분하게 응대했다. 한구석에서 아가씨들이 삼삼오오 모여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이 유독 리카르디스를 향해 있기에 로젤린은 잠시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술맛 끝내 준다.”
듣긴 했는데……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술과 음식이 맛있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로젤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신경을 돌렸다.
“……이봐, 경…….”
리카르디스는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흠칫 놀라서 돌아보았다. 로젤린이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는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식은땀도 나는 듯 했다. 대체 뭘 얼마나 먹고 싶기에…….
“예, 전하.”
“아닙니다. 곁에 있겠습니다.”
로젤린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는 듯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손끝이 그녀의 의지를 배반하고 잘게 떨리고 있었다.
“…….”
“가!”
레이몬드는 그녀의 식사 수발을 착실히 수행했다. 새로운 음식 위주, 고기 위주, 달콤한 것 다음에는 짭짤한
음식, 그리고 다시 달콤한 것의 법칙을 지켜서 음식을 가져왔다. 여자 기사들에게서 맛있게 먹는 방법을 배워
왔다고 했다. 로젤린은 신문명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법만 지킨다면 끝도 한도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 음식에 심취해 있는 중, 익숙한 목소리가 로젤린의 귓가에 들려왔다.
“네.”
“즐기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려 했지만, 그녀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디에즈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음, 굉장히
즐기고 있구나…….
“술은 과하게 드시지 마세요. 누군가가 억지로 권하면 마시는 척…… 하면서 손수건에 뱉으세요.”
로젤린은 치즈와 고기가 켜켜이 쌓여진 음식을 먹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디에즈와 제법 허물없는
사이처럼 보였다. 그녀의 의문에 찬 눈빛을 읽은 건지 레이몬드가 답했다.
레이몬드는 먼 옛날을 생각하는 듯 아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디에즈는 “맞아, 그랬었죠. 생각난다.” 하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그리고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로젤린의 접시 위에 양고기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로젤린은 냄새를 먼저 맡은 후 고기를 입에 넣었다. 일라베니아에서 만났을 때부터 양고기 타령을 하더니, 대체
어떤 맛이기에?
“……!”
로젤린은 척추를 관통하는 짜릿한 미식의 감각에 온몸의 힘이 풀릴 뻔 했다. 과, 과연. 발타의 전통요리! 그녀의
미각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맛이었다. 결결이 스르륵 찢어지는 식감. 쫄깃하지만 질기지는 않고, 촉촉하지만
느끼하지는 않았다. 육즙과 채즙이 농축된 짭짤함과 달콤함. 양념의 배율 또한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맛과 함께 향신료의 강렬한 감각이 어우러지며 그녀를 이성을 흔들었다. 로젤린의 눈에 환희가
서린 것을 본 디에즈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맛있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디에즈는 자신의 나이가 세 살이 아니라 스물세 살이라는 얘기를 하더니 사람들 사이로 쏙 사라졌다. 로젤린은
냠냠 고기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사이 좋아 보여.”
“2 황자 전하의 적인데도?”
레이몬드는 음료를 마시던 행동을 우뚝 멈췄다. 짧게 한숨을 내뱉은 그는 시끄러운 연회장을 잠시 둘러보았다.
시선은 날카롭지 않았고 그저 목적 없이 부유했다. 경계가 아닌 생각을 환기하기 위함인 듯 보였다. 로젤린이
고기를 다 먹을 쯤, 레이몬드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는 내가…….”
[다음 편에 계속....]
42 화.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착하다.”
그는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레이몬드와 마주하던 시선을 돌리니 디에즈가 막 당도해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얀 얼굴 위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두 사람에게 잔을
건네었다. 색 없이 투명한 술이었다.
* * *
매일 매일이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연회는 삼일이나 계속되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리카르디스와 하카브는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록 무의미한 대화들만 오고가는 지루한 시간이었을지언정,
겉으로 볼 때에는 탄탄한 관계를 쌓고 있는 과정처럼 보였다. 호위하던 로젤린도 하카브를 자주 보긴 했으나,
그는 가끔 보내는 눈인사 이외에는 일절 아는 체하지 않았다.
“음식이 입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군.”
로젤린은 고기를 열심히 먹는 중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칼릭스가 입안에 음식이 있을 때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로젤린은 음식물을 필사적으로 씹어서 삼키려 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하카브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로젤린은 입을 가리며 “네.” 하고 짧은 대답을 했다. 하카브는 그녀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감상했다. 시선은
검은 머리카락에 머무르기도 했고, 우물거리는 입가를 떠돌기도 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전하의 곁을 오래 떠나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카브는 눈썹을 조금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술잔을 건네며 한 발 더 다가섰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로젤린의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젤린은 술잔을 받은 채 멀뚱히 그를 올려보았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네.”
“…….”
“싫습니다.”
하카브는 또 소리 내어 웃었다. 연회장의 귀족들이 술렁이며 그 광경을 훔쳐봤다. 하카브가 웃는 모습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웃으면 우습게 보인다는 둥, 경박해 보인다는 둥의 이상한 체면치레를 하는 여타 귀족, 황족과
다르게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카브를 쉽게 보지 못했다. 미소를 짓고 있다
하더라도 차가운 시선과 장신의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미소가 즐거운
감정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절대적인 포식자가 보이는 여유라는 점에 있어서 도리어 위축될 뿐이었다.
* * *
로젤린은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연회장의 분위기가 좋아졌지만, 그녀는 리카르디스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흉흉한 눈빛으로 막아섰다. 지위고하 막론하고 사람들을 위협하던 그녀의 행동은 부단장 나단에게 불려
가 왕창 혼나는 것으로 끝을 맞이했다. 좋게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서 혼자만 바짝 경계하는 그녀의 태도는 큰
문제를 초래할 수 있었다. 호위도 좋지만 적당히 티 안 나게 하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로젤린은 과도한 경계를 조금이나마 허물었다. 연일 계속된 연회 중, 수많은 만남이 있었으나 어느
누구 하나 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카브 왕자의 말대로 이 궁 안에서라면 리카르디스의 안전은 보장되는 듯
했다. 그제야 리카르디스는 제 앞으로 할당된 음식을 한 접시 다 온전히 먹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로젤린이
독의 유무를 판별한답시고 항상 반 정도 먹고 그에게 넘겨줬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 전하?”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가느다란 눈매가 나른해 보였다. 그녀의 장신구와 복식으로 보아
고위 귀족에 해당한다는 사실쯤은 알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이 며칠간 고위귀족에 해당하는 수많은 발타인을 만난
상태였다. 솔직히 그 여자가 그 여자로 보였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휘며 웃었다.
‘3 왕녀 간제입니다.’
“……간제 왕녀.”
“농담입니다, 둘째 날 인사 드렸었지요.”
“홀로 남으실 순간을 호시탐탐 노려 보았어요. 연회를 떠나는 사람을 붙잡고 얘기를 나누는 것만큼 촌스러운 일은
없지만, 너그러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연한 만남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연회를 벗어나 주위에 사람이 없어진 때를 노려 찾아왔으니. 뭔가 용건이
있는 건가?
“제게 하실 말이라도?”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전하의 미모에 달조차 구름 뒤로 숨어 버렸군요.”
간제가 이어서 말을 하려던 순간, 복도 끝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연회장을 벗어나는 사람들이 또 발생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입을 벌린 그대로 멈춰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다음 편에 계속....]
43 화.
간제가 신랄하게 방해꾼들을 비판했다. 퉁퉁한 발타의 남성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중이었다.
“오늘은 이쯤하고 물러나야 할 것 같군요. 다음에는 좀 더 깊은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리카르디스 전하.”
“곧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연회장의 분위기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장소였다. 몇 개의 촛불로 밝혀진 웅장한 내부는 조각과 벽화로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신전 중앙에는 커다란 샘이 있었고, 그 위로 천장이 크게 트여 있어 달빛이 그대로 들어왔다.
반듯하고 동그란 모양의 샘은 그것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졌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대륙의 모든 중요한 의식들은
언제나 물을 매개로 했다. 이델라브힘과 크레안 티다니온의 신화와 관련이 깊은 ‘약속의 호수’를 흉내 내는
것이었다.
“…….”
결혼 의식은 발타와 일라베니아뿐만 아니라 라고슈 왕국도 같았다. 대륙에 위치한 나라라고 불릴 수 없는 작은
부족들 또한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부분이야 있었지만, 기본적인 큰 틀은
동일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좋은 밤이로군요.”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라, 리카르디스는 하카브 왕자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답지
않게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로 멀거니 서 있었다. 하카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리카르디스의 곁에 다가와 섰다.
그가 보고 있는 벽화를 같이 감상하는 듯,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렇습니까.”
“그럼요.”
두 사람은 지상에서 한 뼘 정도 붕 떠있는 것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혼잣말보다도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리카르디스는 벽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해를 상징하는 동그란 원. 음각으로 깊게 파여 있어 다른 벽화들보다
어두웠다. 보통 해는 양각으로 표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던가? 뭘까. 무언가가 목에 걸린 것처럼 거슬렸다.
“오, 참신하군요.”
“글쎄요…….”
조용한 공간에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리카르디스는 벽화에서 눈을 돌려 하카브와 마주 보았다. 아까보다
어두워졌지만 하카브가 입꼬리를 올려 웃는 모습은 똑바로 보였다. 정답이라 얘기하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깨달았다. 안으로 깊게 파져있는 이 동그란 원은 해가 아니었다. 달이었다. 검은 달. 하카브의 질문에 답하며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 불과했으나, 잃어버렸던 열쇠를 찾은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리카르디스는 하카브와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하게만 보였지만, 그의 머릿속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고 있었다. 여러 기억이 깨지고, 부서지고, 합쳐졌다. 과거에 찾았던 하얀 밤의 단서와
작은 실마리들이 몸집을 불리고 서로 얽혔다.
만물이 꽃을 피우며 생명이 순환하는 밤. 축복의 밤은 일라베니아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에게 중대한
일이다. 대륙이 노쇠하면 어떠한 생명도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만약 이것이 하얀 밤을 불러내기 위한 일부의
조각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비슷한 의식의 형태를. 눈앞의 벽화는 결혼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득한 먼 옛날부터 내려왔던 축복의 밤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로써 목표가 명확해졌다. 강대한 마력을 다루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마인(魔人)이라 불리는 그들. 불길한
힘을 다룬다 해서 박해받고, 살해당하고, 꼭꼭 숨어 버린 이들을. 리카르디스는 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마카롱, 어디 있었어.”
마카롱이 튓! 무언가를 거칠게 뱉었다. 로젤린은 그것을 집었다. 조각나 있는 검은 돌이었다. 생김새는
평범했지만, 그 안에서 검붉은 모래 같은 무언가가 스르륵 움직이고 있었다. 검고 붉은 조각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낯설지 않았다. 발타 왕궁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마력이었다. 마수의 몸에서 날뛰는, 폭주하며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 하는듯한.
[다음 편에 계속....]
44 화.
“고마워. 고생했어.”
그녀는 귀환을 준비하며 분주해진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리카르디스는 측근들과 두런두런 이야기 중이었다.
푸른등불 후작의 대리인 카일로. 기사단장 스타스, 부단장 나단, 비서관 잇세리온과 레이몬드, 호위 기사 헤일과
파르딕트까지. 그들은 막 방을 들어서는 로젤린에게 시선을 주며 대화를 정리했다.
“네.”
“아니오.”
“이건…….”
리카르디스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결정 안에서 연기처럼 움직이는 검붉은 안개. 한 번도 본적 없는 물체였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보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햇빛을 받으며 빛나는 표면 안쪽에서 검붉은 안개가 스르륵 움직였다. 불길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조각난 표면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딱딱하고 차가운 돌의 감촉이 느껴졌다. 마력의
결정? 어떻게 이런 게 존재할 수 있는 거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발타가 만들어 낸 것인가? 정확한 사용법은?
용도는? 합성된 독과의 연관은?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훔쳤는데…….”
마카롱이……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로젤린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마카롱을 독수리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그리고 독수리는 지하에 있는 은밀한 장소에 숨어들어 가기 힘들다는 것도.
“들켰나?”
“아니오.”
“누가 봤을 가능성은?”
로젤린은 곰곰이 생각한 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목격자가 있다 치더라도 그저 궁내의 수많은 고양이
정도이지 않을까.
“없습니다.”
“그럼 됐어.”
“로젤린 경!”
“여기까지 하지, 잇세리온. 어차피 진흙탕 싸움은 예견되어 있다. 보석 하나의 유무로 이제와 크게 달라질 건
없어. 진흙탕에 한 줌의 진흙을 더하면 뭐가 될 것 같나?”
“그, 그렇지만……!”
리카르디스는 눈길로 그녀를 콕 가리키고 있었다. 잇세리온은 제 주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깨달았다.
로젤린이 목격자가 없다고 했다면, 들키지 않았다고 말 했다면 분명 그 말대로일 것이다. 잇세리온은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어쩔 수 없다. 이걸 다시 돌려놓고 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잠시간 골치 아팠던 기분을 말끔히 떨쳐 버린 듯 했다. 심지어는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검은 결정을 들어 빛에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내부의 느릿한 움직임이 차갑고 딱딱한 보석을 살아 있는 생물처럼
보이게 했다.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군.
“네.”
“주인에게 말입니까?”
“네.”
어디선가 들어본 말 같은데…… 로젤린은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잇세리온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또
일순간 불안해졌는지 “꼭입니다.” 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삐이익-
뜨거운 숨이 손가락 틈새를 비집고 나가며 높은 바람소리를 냈다. 궁의 반대쪽으로 출발하기 시작한 사절단의
머리 위로 독수리 한 마리가 빙빙 돌았다. 마카롱도 화답하듯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 * *
“예, 전하.”
결전은 발타의 땅 위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아무리 검은달이라 하더라도 국경을 넘어서 일라베니아의 병력과
직접 맞부딪치는 일은 반기지 않을 것이므로. 다행히도 모두의 체력이 가득 채워진 만전의 상태였다. 사절단
일행은 말을 재촉하며 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발타의 땅을 벗어나야 했다. 이틀이면 국경에 닿을 것이다.
마카롱은 하늘 위를 뱅글뱅글 돌며 사절단을 따라왔다.
“…….”
막사 안에는 리카르디스의 측근만 남았다. 잇세리온이 지도를 중앙에 펼쳤다. 부단장 나단이 턱을 쓸며 입을
열었다.
“돌아서 가야 할까요?”
“전투는 피할 수 없겠지요.”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달의 새로운 독 ‘파편’. 그 강력한 독의 해독법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병사의 머릿수도 수거니와 힘의 차이 또한 역력했다.
이길 방법이 없다! 이길 수 없다면 피해야만 한다. 활로는 오직 일라베니아로 넘어가는 국경뿐이었다. 이렇게
수세에 몰린 것은 또 오랜만이지 않은가. 리카르디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다음 편에 계속....]
45 화.
“으아아악!”
남자는 괴로움에 몸부림 쳤다. 막 오른팔에 이식한 검은 보석 때문이었다. 손가락 한마디도 안 되는 마수의 작은
결정은 고통의 씨앗 같았다.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아 자라고, 줄기를 뻗어 나가 온몸을 잠식하는 괴이한
물질이었다. 손끝까지 전해지는 저릿저릿한 감각에 남자는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끄아악!
침대에 묶여 있는 남자, 검은달의 암살 단원 자난의 비명소리가 지하의 은밀한 공간을 울렸다. 실핏줄이 터져
눈알은 붉었고,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흘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카브 왕자가 “이런, 실패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자난의 눈물을 제 소매로 닦아 냈다. 그리고는 가슴께를 도닥도닥 두드리며 어린아이를 재우는
듯 손짓했다.
“으아, 으아악!”
“회의에 이만 가보셔야 합니다, 왕자 전하. 2 황자 측에서 발타의 국경을 넘는 사절단의 인원을 늘려 달라는 청이
왔습니다.”
“오 그래, 아틸라크. 반가운 손님에게는 빨리 답을 해 드려야지. 이거 설레어서 황자가 올 때까지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군.”
“전……하…….”
하카브는 씨익 웃었다. 마수의 결정을 막 이식한 사람의 이지가 얼마나 흐트러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알아보니 기특했다.
그는 하카브의 웃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후 자난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한 발 앞서
결정을 몸에 받아들인 동료들이 흔히 말하곤 했었다.
습격대는 하카브가 손수 선별한 병사로 구성되었다. 하늘에 떠있는 달과도 같은, 가장 고귀한 분에게 선택 받은
것이다. 그들의 기분은 한없이 고양되었다.
자난은 그의 명령을 한 자 한 자 귀 기울여 들었다. 하얀밤 기사단의 용맹함과 강인함은 발타까지도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 또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인간의 틀을 벗어난 지금의 자신이라면 사람의
심장을 맨손으로 뽑아 낼 수도 있었다. 생포라는 까다로운 임무라 ‘파편’을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자신 있었다.
자난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같이 눈을 형형히 빛내는 자들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마수의 결정. 그 적성에
들어맞는 백여 명의 정예부대였다.
자난이 소속된 검은달이 ‘파편’이라는 위협을 휘두르는 시기임에도, 사절단이라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2 황자.
자난은 제국의 2 황자가 미쳤거나, 죽는 방법을 다양하게 추구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 평가를
고쳐야했다. 2 황자가 국경을 넘기 며칠 전, 일라베니아 사절단의 인원을 추가하고 싶다는 소식을 전해 왔기
때문이었다. 미친 것도 아니고 죽고 싶은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고작 그 정도의 머릿수로 이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일까. 자난은 무표정 한 낯 아래로 아둔한 황자를 비웃었다.
이후 하카브 왕자는 일라베니아 황자의 안위가 가장 중요하다며 흔쾌히 협력했으나 사절단의 수는 변하지 않았다.
오매불망 2 황자의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1 황자가 손을 썼다고 했다. 오랜 친우의 나라에 무슨 호위 인원이
그렇게나 필요하냐며 펄펄 날뛰었단다. 앞뒤로 맹수가 아가리를 벌린 채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제 나라에게 조차
버림받은 2 황자 리카르디스. 그에게 손을 내밀어줄 이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동아줄이
아닌 이상에야.
이번 습격 부대를 이끄는 대장, 타이렝이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절했다. 자난과 습격대의 단원들이 그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하카브 왕자를 향해 바닥에 엎드렸다.
“주인의 명을 받듭니다!”
가느다란 빗줄기로 인해 풍경은 안개가 낀 듯 흐려졌다. 달리는 마차 주위로 망토를 뒤집어 쓴 호위 기사들이
가까이 붙어있었다. 로젤린의 아래 입술을 꾹 물었다. 이런 광경을 전에도 본 적 있었다. 진짜 ‘로젤린’의
기억 속에서.
‘반드시…….’
꿈속과 똑같이 하얀 마차는 비에 젖어 있었다. 로젤린은 마차의 표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차갑고 딱딱했다.
마차의 덜컹거리는 움직임이 손을 통해 전해졌다. 빗방울이 그녀의 피부를 따라 흘러내렸다. 로젤린은 어린
동물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으로 마차를 쓸어내렸다.
삐이익---
마차에 닿아있던 손이 흠칫 멈췄다. 로젤린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카롱이 알려오는 소리와
동시에 그녀는 깨달았다. 숨을 죽이고 있던 살기들이 주위를 감싸오기 시작했음을.
멀지 않은 거리였다. 왼쪽, 오른쪽. 그리고 퇴로 차단을 위해 후미에도 몇 있었다. 빗소리 탓에 평소보다 청각이
둔해져서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다. 나뭇잎과 진흙을 밟는 소리와 함께 이질적인 마력의 기운이 물씬 풍겨 왔다.
로젤린은 달리던 말의 옆구리를 차, 선두에 있던 기사단장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그녀는 입을 열며 동시에 검을
뽑았다.
“포위됐습니다.”
스르릉.
로젤린의 손등에 힘줄이 짙게 올라왔다. 살기와 마력, ‘나’의 존재를 위협 하는 것들. 익숙했다. 로젤린은
언제나 그 위협 속에서 살아왔다. 도망치기도 했지만 싸우기도 했다. 때로는 곰으로, 때로는 마수로, 때로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짐승으로. 그녀의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위협을 이겨낼 만한, 보다 강한 것!
숲의 어둠을 뚫고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구릿빛 피부와 검은 머리. 코와 입을 가리는 복면을 하고, 가죽으로
된 무구를 장비한 자였다. 로젤린은 검날을 세웠다. 처음 나타난 사람을 뒤로 한 명, 두 명씩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산을 빼곡하게 매운 검은 집단의 출현이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몇 걸음 앞으로 나왔다. 안광이 이상할 정도로 번뜩이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의 심장
주위로 마력이 떠도는 것을 감지했다. 난폭한 마력은 심장을 찢어발길 듯 흉포하게 날뛰고 있었다. 넘쳐나는 힘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고 휘둘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남자의 거칠게 비틀린 목소리가 집단 사이의 침묵을 깼다.
챙!
[다음 편에 계속....]
46 화.
자난은 깨달았다. 이들은 버리는 말이다.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면 부하를 버리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2 황자의 비정과 비겁함이 엿보였다.
타이렝과 자난은 기사단장을 주시했다. 리카르디스의 마차가 하얀색이라는 점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지만, 그
안에 그 본인이 들어있으리란 확신은 없었다. 황자가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제 마차 안에 얌전히 앉아
있지 않을 테니 누군가와 분명 마차를 교체했으리라. 2 황자의 수족이자 가장 강한 하얀밤의 검. 가을안개의
스타스. 그가 아니라면 누가 리카르디스를 지키겠는가. 그가 향하는 곳에는 반드시 2 황자 리카르디스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추측을 배신이라도 하듯, 기사단장은 왼쪽으로 달려간 흰색 마차를 쫓아갔다. 허망할 정도로
자난의 기대를 배반하는 상황이었다. 어지간한 멍청이가 맞았나 보군.
타이렝의 목소리에 습격대가 흩어졌다. 2 조의 조장인 자난은 대장의 명령에 따라 즉시 흰색마차를 쫓아야만
했음에도 가만히 멈춰서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알 수 없는 묘한 감각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어딘가 이질적인 분위기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망토를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자와 눈이 한번
마주쳤다. 햇빛을 받는다면 푸르게 빛날 녹색의 눈동자였다. 호수의 잔잔한 물결 같았다. 이 상황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절망도 느끼지 않는 눈이었다.
“네.”
“네.”
조원들이 자세를 낮추며 눈에 살기를 띠었다. 마차 주위의 호위 기사들이 긴장하는 기색을 비쳤다.
“전부 죽여라.”
자난의 말에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일시에 움직였다. 휘이이, 스산한 바람소리가 일라베니아의 기사들을 덮쳤다.
‘파편’을 굳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 정도의 인원을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자난은 마차의 지붕 위로
훌쩍 뛰었다. 쿵. 하고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챙,
비가 내리는 공간임에도,
쾅!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일었다. 가느다란 금속이 낸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렬한 소리였다. 자난은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아까 눈이 마주쳤던 여기사가 보였다. 그녀는 신체가 비약적으로 강화된 검은달과 비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자난은 마저 정리하기 위해 마차의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발타에서 시종일관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니던
고귀하신, 일라베니아의 사절단 나리들을 알현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안에는…….
“마차가 비었다!”
당황한 자난의 외침에 반응하듯이 곳곳에서 다른 조원들의 목소리가 퍼졌다. 마차가 비어 있다! 안이 비어 있다!
아무도 없다!
자난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디 갔지? 애초에 비워 두었나? 어째서? 혼란스러워하며 전투를 지속하는 조원들이
보였다. 마차가 비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형성되지 않을 불안한 기류가 조원들을 감싸고 있었다. 자난은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너른 공터를 쭉 둘러보았다.
순간 여린 나뭇잎처럼 푸르렀던 눈동자. 그 눈이, 눈빛이 다시금 자난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검은 머리의 기사를 찾았다. 저 멀리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캉, 캉. 금속이 부딪치는 거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난은 깨달았다. 그녀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기사들의 전투는 방패 같은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해치우는데 급급하기보단, 무언가를 지키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자난은 그 사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거슬리는 여자 기사의 뒤. 검을 빼어 들고 응전하던 장신의 남자 기사가 다친 동료에게 손을 뻗었다.
“!”
잿빛으로 물들어 있는 숲속에 희미한 빛이 퍼졌다. 피를 멎게 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생명의 빛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난이 모를 리 없었다.
이런 미친! 왜 이곳에 황자가 남아 있는 거지? 자난은 소리를 왁 질렀다. 이곳에 2 황자가 있음을 알려야 했다.
“여기에……!”
2 황자가 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을 빛내며 이쪽을 바라보던 여기사가 한 발을 축으로 크게
돌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거친 움직임에 따라 태풍처럼 원을 그렸다.
쉬익-
* * *
“으아악!”
“왁!”
“이런 빌어먹을!”
신성 제국 일라베니아. 그들의 신 이델라브힘은 인간세계에 현신할 때, 독수리의 모습을 빌렸다고 알려져 있다.
독수리라는 동물 자체가 원체 똑똑하기로 유명했으나, 머리 위를 떠도는 저 날짐승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위대한 무언가가 독수리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았다. 진짜 이델라브힘의
사자이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다음 편에 계속....]
47 화.
타이렝은 목표를 바꾸었다. 마차의 후미에서 달리고 있는 기사단장 스타스가 보였다. 그는 화풀이라도 하듯
날렵한 손놀림으로 단검 하나를 빨간 머리통으로 날렸다.
팅.
하늘에서 날아온 독수리가 날개로 칼날을 퍽 쳐 내었다. 대체 저 깃털은 뭐야?! 강철로 만든 것도 아닐 텐데!
타이렝의 이마에 혈관이 불뚝 올라왔다.
“저 미친……!”
욕설의 대가는 곧바로 돌아왔다. 타이렝의 머리 위로 큰 돌덩이가 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삐이이. 큰 충격을
받은 머리에 이명이 일었다. 정신이 잠시 둔해진 사이 독수리의 공격은 더욱 매서워졌다. 여기저기서 이게 대체
뭐냐며 울분을 토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습격대는 수차례의 낙마와 공격을 근근이 버티며 2 황자의 흰색 마차를
쫓았다.
그렇게 잘 도망치던 흰색 마차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습격 대원들이 미리 작업해 둔 결과물이었다. 느릿하게 달리던 2 황자 무리가 하나둘 멈춰 섰다.
타이렝은 으하하 웃으며 승리를 예감했다. 지긋지긋한 술래잡기의 끝이 보이는 듯 했다. 쓰러진 나무 앞에 멈춰선
기사들이 하나 둘 망토를 젖혔다. 그들의 머리 위로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한 명, 한 명. 그리고, 이내 모든
사람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마치 일부러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암살대가 눈만 깜박이며 그들을 지켜봤다. 1 조의 조장이 머뭇거리다가 타이렝의 옷자락을 툭툭 당겼다. 어쩌면
좋겠냐고 묻는 것 같은데, 타이렝도 환장할 지경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남은 기사들과 함께 흰 마차가 있었다.
황자의 안위가 걸려 있는 이 중요한 판국에 호위를 줄이는 미친 짓을 하다니? 타이렝의 뒷골에 섬뜩한 감각이
돋아났다. 설마, 저 안에…… 2 황자가 없는 건가? 방금 달아난 무리에 2 황자가 섞여 있었나? 아니다. 그 중에
은발 머리는 없었다. 전원이 망토를 벗으며 얼굴을 드러낸 이유는 그 때문인 것 같았다. 타이렝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이놈들은 미끼다!
저 마차에 리카르디스가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열어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타이렝의
머릿속에서는 2 황자가 득의양양 한 낯으로 마차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리카르디스의 그림자가 그를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지만, 이미 실타래는 잔뜩 엉켜 있었다.
흰 마차를 둘러싼 사람들로부터 비장함이 감돌았다. 남은 하얀밤 기사단은 스타스를 비롯한 삼십여 명으로, 스무
명 남짓한 암살자들보다 많은 숫자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싸움이 일어나기 전부터 스타스는 체감하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 수의 우위로는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검은 옷을 입은 습격 대원들의 태도에는 어떠한 조급함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기이한 안광을 띠고 있는 눈동자에는 오만함이 서려 있었다. 스타스가 이끄는 이곳에 2
황자가 있건 없건 간에 모든 것은 자신들의 뜻대로 돌아가리라 확신하는 듯했다.
스타스는 얼굴의 빗물을 닦아 내며 웃었다. 습격해 온 다수의 인원은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속으로 인해 잘게
흩어지고 쪼개졌다. 그들의 전체 인력과 맞부딪쳤다면 이 자리에서 전멸했을 것이다. 애초부터 패할 것이
분명했던 싸움. 약간의 승산을 더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고래 무덤의 파르딕트와 가을안개의
스타스는 검을 다잡았다. 모두가 이 위험 속에 발버둥 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하나뿐인 주군,
리카르디스마저도.
리카르디스님을 위해!
모든 것은 힉살라의 뜻대로!
* * *
쾅!
퍽.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다른 암살자에게 날아갔다. 두 남자는 뒤엉켜 데굴데굴 구르더니 그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로젤린은 흙바닥에 떨어져 있는 발타의 검을 집었다. 지금 막 그녀에게 검을 왜 던지느냐,
대체 뭐로 싸우려고 이러냐 하며 타박하려던 리카르디스가 머쓱해하며 말을 바꾸었다.
“예.”
[그래, 그러니 해독제가 없다는 파편을…… 처음부터 사용하진 않겠지. 초반에 수를 좀 줄여야겠어.]
[마인들은 몸 안의 마력을 활용해서 신체 능력을 높이고는 하지. 마력의 양에 따라 그저 신체가 건강한 자부터
마수와 같은 힘을 내는 자까지 다양하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응축된 마력이라면, 글쎄. 대단한 병기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겠나?]
[……!]
잇세리온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분노, 경악, 공포. 막사 안에 있는 모든
이가 느끼는 공통적인 감정이었다.
[스타스 경도 빼고.]
[전하!]
[여기에 제국의 2 황자,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가 있습니다. 큰 소리로 말하고 다니지 그래.
그대들의 말대로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이 2 황자를 안 지키면 또 누굴 지키겠어. 그놈들도 똑같이 생각하겠지.
설마? 설마 2 황자 곁에 기사단장이 없겠어? 설마 기사단장이 빈 마차를 지키고 있겠어? 분명 생각해 볼 만한
틈이 있지만, 희박한 확률을 걸고 도박을 하지는 못할 테지. 하지만 나는 한다, 그 도박.]
미친 짓이었다. 어느 나라의 황족, 왕족이 제 목을 미끼로 전쟁터에 뛰어든단 말인가. 그를 위해 죽음도 불사할
스타스는 무릎을 꿇으며 그의 명에 불복하겠노라 얘기했다. 물론, 고지식한 기사단장이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던 바라 놀라울 것도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48 화.
[로젤린 경.]
[예, 전하.]
로젤린이었다. 정확히는 막사의 아래 부분을 들춰, 얼굴만 쏙 들어와 있는 머리통이 대답했다. 그녀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흙바닥에 펼쳐져 있어 다소 공포스러웠다.
[…….]
[…….]
이것 봐. 그녀도 그렇게 말하지 않나. 리카르디스는 여상한 표정으로 막사 안의 사람들에게 고루 시선을 주었다.
그들은 입만 떡 벌린 채 황당해하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버럭 소리 질렀다.
[안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고작 상급 기사 한 명으로……!]
[로젤린 경.]
[부숴버려.]
리카르디스의 농담에 모두들 어허허 웃었다. 하지만 곧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두꺼운 방패가 그녀의 손에서
종잇장처럼 우그러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콰드득, 카앙. 여린 손등 위로 힘줄이 툭 불거졌지만 그녀의
표정만은 온화했다. 점점 더 휘어지던 방패는 완전히 뒤틀리며 결국에는 타앙! 금속이 우는 소리와 함께 두
조각으로 분해되었다. 파르딕트는 방금 제 귀한 방패가 쓰레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충격 받았다.
[더 할까요?]
[그녀가 날 지킨다.]
[네, 반드시.]
* * *
누가 보아도 불리한 형국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비정상적으로 강인한 발타의 습격대를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웠다. 이미 기사단원의 삼분의 일은 차가운 비를 맞으며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큰 부상을 입은 자도, 이미
죽은 자도 있었다.
스타스와 파르딕트는 그 난전의 가운데 끝까지 버티고 서 있었다. 실력과 오랜 경험이 그들을 가까스로
지탱했지만 이미 한계였다. 급소를 스치지 않았다 뿐이지 어디 하나 성한 곳 없이 너덜너덜거렸다. 지키는 자들이
줄줄이 쓰러져 마차로 가는 길이 열렸다. 암살자 중 한명이 빠르게 접근해 흰색 마차의 문을 열었다. 널찍한
내부는 습기만이 가득 차 있었다.
“비어 있습니다!”
쯧, 혀 차는 소리가 났다. 습격대 1 조의 조장이었다. 흘러가는 분위기로 보아 이곳에 2 황자가 없으리란 것쯤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네.”
“네.”
쿵…….
쿵!
“저, 저게 대체……!”
모두들 경악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뒷걸음질 치던 암살자 한 명이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밟았다.
탁.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검은 형체가 숲의 경계를 뚫고 뛰쳐나왔다.
쿠와아아아아-!
검은 털과 날카로운 발톱. 일반적인 불곰의 서너 배 크기는 될 법한 거대한 곰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을 도륙해
나갔다. 산만한 덩치가 무색할 정도의 빠르기였다. 검은달의 암살자들 또한 자그마한 마수의 결정을 몸에 심고
있었으나,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암살자들은 맹수와 대적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도망가는 자, 전의를 상실한
자들은 곰의 두터운 앞발에 산산조각이 났다.
“다, 단장님.”
바다협곡의 네스터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스타스를 불렀다. 네스터는 검은 곰이 지나가는 길목에 서 있었지만
무사히 귀환했다. 곰이 커다란 엉덩이로 밀어 그를 튕겨냈던 것이다. 그것도 네스터의 옆에 있던 암살자의 머리를
아작아작 씹다 뱉으면서.
이후로도 야수는 몇몇 사람들을 머리나 엉덩이로 슬쩍슬쩍 밀어냈다. 모두 일라베니아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엉덩이가 튕겨낸 방향을 따라 생존자들의 무리로 합류했다. 다들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저 짐승이 검은달의 암살자만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아주 명확해 보였다. 혼란의 와중
스타스는 제복을 찢어 어깨의 상처를 지혈했다.
“부상자들을 수습한다!”
암살자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기사단원들은 스타스의 명령에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지금은
공격당하지 않고 있지만, 암살자들이 전부 죽은 후에는 사정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었다.
비명소리가 멎었다. 흙바닥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운 좋은 암살자 몇은 달아났다. 검은 짐승은 형형한
눈으로 기사단원들을 쭉 둘러보고는 어슬렁어슬렁 숲속으로 사라졌다. 암살자들이 도망간 방향이었다. 쿵, 쿵.
땅을 울리는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허…… 허억…….”
단원들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암살자들과 치렀던 전투보다도 두려운 경험이었으나 덕분에
전멸은 피했다.
“단장님.”
“눈치채셨습니까. 그 짐승.”
“전하를 뒤쫓아 간 무리도 비슷한 꼴을 당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에게는 대단한 행운이군요. 검은달 놈들이
그 곰의 돈이라도 떼먹은 걸까요?”
“…….”
이후로도 파르딕트는 부모의 원수까지 운운하며 온갖 추측을 해 댔다. 스타스는 그의 말을 받아치며 잡담에
마침표를 찍었다.
* * *
타이렝은 상당히 화가 난 상태였다. 초장에 기사단 전원을 전멸시키고 황자를 납치하려던 계획이 자꾸만 틀어지고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계략과 습격대만 공격하는 독수리까지. 아주 재수가 옴 붙은 날이 아닌가. 그는 초조함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되돌아가 상황을 마무리 지어야했다. 그러나 세 대의 마차가 있어야 할 장소에서 마주한
광경은, 그의 상상과 다소 달랐다.
“이, 이……!”
“찾아서 전부 죽여!”
“……이건?”
타이렝은 시체들 주위로 굴러다니는 작은 유리병을 집었다. 조장들에게만 배급된 발타의 마독, ‘파편’이 담긴
병이었다. 하지만 텅텅 비어 있었다. 필사의 상황이 아니면 꺼내지 않아야하는 무기인데 누군가가 사용해 버린 듯
했다.
[다음 편에 계속....]
49 화.
“다들 괜찮나?”
“예.”
“……네.”
공터에서 싸움을 끝낸 후 하얀밤의 기사들은 나뉘어 행동하기로 했다. 한 번에 많은 인원이 움직일수록 흔적이
커져 도리어 위험해 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멈춰 있던 세대의 마차와 말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보내졌다.
적의 혼란을 더해줄 것이다.
시체를 수습할 시간조차 없었다. 저마다 동료의 머리카락을 베어 품에 넣었다. 전투가 끝나 분위기가 느슨해지고
소강상태에 들어선 때였다. 죽은 척 숨을 죽이고 있던 검은달의 습격대원은 이런 방심한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품 안의 암기를 던지며 리카르디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를 노린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날아오는 작은 암기들은 상급 기사 헤일이 막아 내었고,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품에 안겨 위험에서 벗어났다. 2
황자를 잽싸게 끌어안고 바닥을 구르는 그녀의 폼이 얼마나 날렵하고 멋졌는지,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주변에서
감탄의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로젤린은 어깨에 피가 흐르는 감각을 느꼈다. 암살자의 검에 살짝 베인 듯 했지만 다행히도 큰 상처는 아니었다.
검은달의 암살자는 레이몬드의 일격에 머리가 반으로 쪼개졌다. 분노가 서려 있는 날카로운 검이었다.
호위 기사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흩어졌다. 리카르디스는 부단장 나단과 레이몬드, 상급 기사 헤일, 로젤린과
함께 움직였다. 다섯 명은 빠른 속도로 숲을 지나갔다.
“…….”
로젤린은 숨을 가쁘게 쉬었다. 겨우 이 정도의 달음박질이 힘겹게 느껴졌다. 그녀가 ‘그것’에서 점차 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처음 ‘로젤린’이 되었을 당시, 부러진 뼈와 상처를 복원했던 속도와 판이했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어깨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피가 멎고 살이 채워지고는 있었지만 현저히 느린
속도였다. 하지만 로젤린의 체력을 앗아가고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처를 통해 들어온 이질적인 기운이
몸속을 헤집으려 날뛰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 정체를 쉽게 파악했다. 그녀가 읽어 낼 수 있는 종류의 힘이었다.
‘파편’.
마지막 일격을 날리던 암살자의 눈빛이 필사적이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던 건가. ‘그것’일 때에는 어떤 독도
통하지 않았지만, 인간에 동화된 지금의 상태로는 장담할 수 없었다. 생명의 조각이 섞이기 시작한 지금. 마력의
덩어리가 아닌, 육체를 가진 생물인 지금. ‘파편’의 힘은 로젤린에게 분명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헉, 헉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자신의 몸 상태에 집중하던 로젤린은 재빨리 주위를 훑었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는 하나 주변을 경계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날카로운 감각이 주변을 향한 그 순간, 로젤린은
고통에 가득 찬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달리고 있던 상급 기사 헤일의 무릎이 한순간에 확
꺾였다는 사실 또한 인지했다. 로젤린은 재빠르게 그의 몸을 받아 냈다.
“헤일 경!”
그의 얼굴은 시체보다도 창백했다. 헤일은 코피를 흘리며 헉헉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급한 목소리에
레이몬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전하! 헤일 경이……!”
조심스럽고 낮게 외치는 목소리였지만, 다들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급하게 로젤린과 헤일에게 다가왔다.
리카르디스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헤일의 옷을 벗기며 상태를 살폈다. 그의 눈과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건
분명히 ‘파편’의 중독 증세였다. 부단장 나단과 레이몬드는 초조해하며 상황을 지켜봤다. 리카르디스가
치료하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손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젠장……!”
갈라진 리카르디스의 목소리에 절실함이 비치고 있었다. 헤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맨 처음 암기가 스쳤을
때는 작은 상처라고 생각했지만, 곧 몸속을 은밀하게 파고드는 고통에 깨닫게 되었다. 죽음이 코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이 이상 발길을 늦추게 할 수는 없었다. 암살자들은 지금도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이동한다.”
“네.”
“네.”
로젤린은 다시 달리면서 헤일이 사라진 방향을 한번 쳐다보았다. 어깨의 상처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거센 분노가 그녀의 머릿속을 사납게 헤집고 다녔다.
* * *
숲속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와 발을 끌어들이는 질퍽한 진흙길.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해
피로한 몸까지. 그들은 그 열악한 상황 속에 몇 시간을 이동했다. 지쳐서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라, 자리를 잡고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로젤린이 운 좋게도 숨겨진 작은 동굴을 발견했다. 짐승 냄새가 나는 걸로 보아
무언가의 집이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희미한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깊은 바위 굴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망토를
벗어 한쪽에 널어 두고 털썩 주저앉았다.
“이 어둠 속에서 우리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겠지요. 조금이라도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전하.”
“그래. 그대들도 좀 쉬어. 잠시 뒤에 다시 움직여야 하니.”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짙은 어둠뿐이었다. 불도 지피지
않은 동굴에서 다른 형체를 구분하리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은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왜 저러는 거지? 아. 인간은 어두우면 잘 볼 수 없지. 로젤린은 어둠 속에서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손을 잡아 육포와 수통을 넘겼다. 리카르디스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달리는 와중에
빗물을 많이 마셨는데도 갈증이 일었다.
“……허!”
그는 로젤린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짝 눈을 떴다. 그러고는 동굴 입구를 한번 훑어보더니 리카르디스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좀 주무셨습니까?”
“바닥에서 주무시기에. 처음에는 팔베개를 하려고 했습니다만, 팔뚝보다는 다리가 푹신할 것 같아서 바꿨습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다음 편에 계속....]
50 화.
“둘 다 하지 마!”
“예에.”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묶으며 흘리듯 대답했다. 귓등으로도 안 듣는 태도였다. 로젤린은 꿈나라로 떠나
있는 나단과 레이몬드를 보며 나갈 채비를 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혼란에 빠져 있는 리카르디스에게 말했다.
“…….”
“경.”
“……알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에는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혀를 차기까지 했다. 이 기사가 정말……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걱정이 괜한 기우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제발 멀리 가지 말고,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곧바로 돌아와. 급히
덧붙인 말에 그녀는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은 동굴을 벗어났다. 어제와는 달리 화창한 날씨였다. 그녀는 굵은 나뭇가지를 밟으며 높은 언덕으로
이동했다. 몇 번의 도약으로 정상에 도달했다. 나무로 빼곡히 채워진 숲의 정경이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로젤린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망토와 윗옷을 벗었다. 어깨의 상처가 아물지 못한 채 짓물러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인간의 신체라지만 치유되는 속도가 지나치게 더뎠다. 이것도 ‘파편’의 힘인가? 상처에서
피고름이 흘러내렸다. 독은 완전히 퍼져 나가지 못했으나, 해독되지도 못하고 아직까지 어깨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검은 실핏줄이 상처 부근에 울룩불룩 떠올라 있었다.
‘잘라 낼까?’
로젤린은 단검을 꺼냈다. 그녀는 제 쇄골부터 겨드랑이 아래까지 가상으로 검을 그었다. 왼팔이 통째로 잘려나갈
수 있는 범위였다.
‘아니야.’
출혈이 과하면 위험하다. 흔적이 남는다. 최소한 그가 일라베니아에 도착할 때까지는 피해야 하는 수단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오른손잡이라고 해도 왼팔과 어깨가 통째로 없어진다면, 몸의 균형이 깨질 것이다. 제대로 싸울 수
없는 건 곤란했다. 로젤린은 아쉬운 듯 단검으로 어깨를 긋는 시늉을 몇 번 더 반복했다. 하지만 차가운 금속은
그녀의 몸에 파고드는 대신 막 옆을 날아가던 산새에게 꽂혔다.
* * *
로젤린은 귀를 활짝 열어 두었다. 파삭파삭. 일행의 옷자락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찌르르 벌레 우는 소리,
돌풍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뒤섞였다. 로젤린은 그 소리 하나하나를 감지하며 판별했다. 무해하다,
무해하다. 아우우- 짐승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또한 일행을 향하지 않으니, 이 또한 무해하다.
삐이이-
로젤린은 튀어나온 거대한 나무뿌리를 콱 밟으며 급하게 발걸음을 멈췄다. 다들 로젤린의 행동을 눈치채고 걸음을
늦췄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만 들을 수 있는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숲속에서 들려오기에는
한없이 낯설고, 인위적인 소리였다. 무언가의 신호가 틀림없었다.
암구호로 이루어져 있기에 내용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 뒤에 검은 집단이 있으리라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였다. 로젤린이 짧게 고심하는 도중에도 새소리와 피리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쫓아오는 속도가
빨랐다. 솔개 한 마리가 뱅글뱅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저 짐승이 습격대에게 길을 안내했나? 그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로젤린!”
로젤린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리카르디스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걸어가 팔을 확 잡아챘다. 로젤린이
압박감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상처가 있는 쪽이라 통증이 느껴졌다.
조용한 숲속에서 적의 존재를 감지한 로젤린.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가 잘못 들은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그저 답답했다. 제 손을 단호하게 밀어내는 손길을 느끼고 있으니,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 밑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이라도 꾼 것처럼 가슴이 철렁였다.
“전하.”
[전하, 부디…….]
[전하……!]
“로젤린…….”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피로가 갑자기 밀려왔다. 억지로 쌓아 왔던 발밑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흔들려왔다.
“전하…….”
“전하!”
“나는 멈출 수 없으니.”
“그대가 와야 한다.”
로젤린은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환한 미소였다.
* * *
로젤린은 멀어지는 레이몬드의 등을 바라보았다. 빽빽한 나뭇잎의 틈새로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저 멀리서
레이몬드가 뒤돌아보는 모습이 보였다. 로젤린은 멀리서도 볼 수 있게끔 손을 높이 들고 붕붕 흔들었다. 그는
쓰게 한번 웃고 발길을 돌렸다. 그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젤린은 그제야 걸음을 돌려 반대쪽으로
향했다.
[다음 편에 계속....]
51 화.
로젤린의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다. 칼릭스, 하녀, 집사, 레이몬드, 수습 기사, 하급 기사, 상급 기사,
성의 시종들까지. 그녀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있었다. 일반적인 인간 여성, 일반적으로 단련한 인간.
로젤린은 항상 그 기준을 생각하며 넘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물론 그 기준이 매우 유해서 다른 이들이 보기에
조금은 이상해 보였을지언정, 그녀는 항상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로젤린을 보는 눈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떠난 이상, 그녀를 묶어둘 만한 금제는 어디에도 없었다.
로젤린은 몸을 빠르게 회전하며 단검을 높이 던졌다.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간 단검은 그녀를 쫓아오던 솔개의
머리에 정확히 박혔다. 그녀는 나뭇가지에 걸린 새의 사체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조용히 침묵하던 숲이
본격적으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땅이 울리도록 강하게 박차고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로젤린의 눈이 빠르게 홱홱 움직였다.
‘수는…… 열둘.’
어, 이게 무슨 개소리지. 로젤린은 어이가 없어서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남자는 그녀의 침묵을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더욱 거침없이 개소리를 했다.
로젤린은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꼈다. 머릿속은 뜨거운 용암이 가득 찼는데, 심장에는 얼음으로 만든 칼날이 박혀
있는 듯했다. 그녀는 들끓다 못해 녹아 버린 머리로 생각했다. 그래 이건 열 받은 거야. 화가 난 거야. 나는
지금 매우 화가 났어. 로젤린은 홀로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뭐?”
“이 미친년이!”
“죽여!”
그녀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흘러가는 시간을 천천히 되짚었다. 살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날카로운 검날에
햇살이 부서졌다. 발타의 습격대가 푸른 잎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로젤린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돋았다.
질긴 섬유가 압력을 못 버티고 찢기는 소리가 났다. 찌이익, 그녀의 팔이 부풀어 오르며 제복이 뜯겨져 나갔다.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손이었다. 그것은 눈 깜짝할 새에 암살자들의 몸을 갈랐다. 두 명의 암살자가 몸이
찢겨진 채 날아가 나무에 크게 부딪혔다.
“으, 으아악!”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동료의 시체를 보고 비명을 지른 것이 아니었다. 여자의 몸에 달려
있는 거대한 손 때문이었다. 팔을 온통 뒤덮은 검은 비늘, 세 갈래로 불거진 손가락, 맹금류의 부리 같은
날카로운 손톱까지. 인간에서 벗어난 기괴한 형태였다. 그 부조화에 본능적으로 거부감과 공포가 치솟았다.
습격대의 단원들은 숨을 헉 들이켰다. 저게 뭐지? 저게 대체! 그들이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한
암살자의 머리를 콱 쥐고 들어 올렸다.
콰직!
“하아…….”
“아악!”
“사, 살려……!”
전투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무력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녹음이 우거진 숲의 정경에 울긋불긋 피가 낭자하게
뿌려졌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체들은 심약한 이가 본다면 단번에 토악질을 할 정도로 처참하고 참혹했다.
“흐, 흐으으…….”
저벅.
한 걸음.
저벅.
한 걸음 더.
“더 쫓아오는 애들 있어?”
“몇 명.”
남자는 몸의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의 괴물 같은 손은 몸을 가르고 나무를 박살 냈다. 가벼운 도약으로
머리 위를 날아다니기도 했다. 때로는 암기가 공기를 울리는 소리를 듣고 능숙하게 피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
때문에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형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강대한 마력이 온 숲을 채우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는 원래부터 미약한 마력을 지닌 마인이었기에 느낄 수 있었다. 검은달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한
인간이었고, 검은 마석을 이식함으로써 비약적인 신체 능력의 상승을 가져왔을 뿐이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눈앞의 여자가 두려웠지만 경외심이 들기도 했다. 이런 존재를 보리라고, 이런 존재가 있으리라고 어떻게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몇 천 년을 살아온 거목, 폭풍우 치는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위대함을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마치, 마치…….
“아니.”
52 화.
“얼마나 남았지?”
……로젤린.
온갖 상념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리카르디스는 지끈지끈 밀려오는 두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나단은 힐끗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최근 들어 로젤린 경을 많이 아끼셨지. 자신만 해도 그 어리숙한 아이에게 정을
주지 않았던가. 열심히 노력하고 그만큼 결실을 얻던 아이였다. 이 상황은 아마 제 주군에게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세티스티아 황녀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던 그때의 일을.
시간과 공간, 인물. 어느 하나 겹치는 것이 없었지만 나단은 어쩐지 그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여자아이라
그런 것인지 대신 목숨을 잃게 되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단은 한숨을 쉬었다.
막 잠에서 깬 듯이 잠겨 있는 목소리였다.
“지쳤다.”
먼지 냄새나는 오두막에 퍼진 목소리는 꺼져 가는 것처럼 작았다. 리카르디스는 입으로 내뱉고 나서야 자신이
매우 지쳐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에 탈력감이 퍼졌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지쳤다. 그는 앉은 그
상태 그대로 잠에 빠졌다.
[지쳤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무섭다.]
몸이 따듯해졌다. 어느새 부드러운 천이 목 끝까지 덮여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차가워진 손끝에 온기가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여태껏 미처 내보이지 못했던 감정의 일부였다.
[절대 죽지 않겠습니다.]
[기어서라도 와라.]
[예.]
[시간이 흐르고 모든 일이 끝난 후에, 혼자 싸우다 혼자 아파하다 죽었노라는 한마디 말로…… 그대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지 마라, 로젤린.]
“전하!”
리카르디스는 눈을 번쩍 떴다. 다급한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짐에서 붕대를 찾아 낸 나단이 급하게 밖으로
나서는 중이었다. 순식간에 온몸으로 소름이 퍼졌다. 짧은 수면으로 머리가 느릿하게 돌아가는 중에도 예민한
본능이 먼저 상황을 그에게 알린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떨리는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문가에 있는 레이몬드가
쓰러진 누군가를 안고 있었다.
“로젤린 경!”
“레이몬드 경, 빨리!”
로젤린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차가웠다.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가슴에 얼굴을 박고는 입만 우물거리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으니 천천히 말해도 된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숨이 고르게 될 때까지 등을
도닥였다.
“전하…….”
순간 리카르디스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로젤린의 안을 떠돌던 성력이 대부분 흡수되지 못한 채 어디론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감옥에 있는 몇몇의 마인들까지 치료해 본 적 있는
리카르디스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상극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마인들마저 자연스럽게 성력을 받아들여 치유가
되는데, 그녀에게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기만 하는 것이다.
평소라면 그 이상한 현상에 대해 의문을 가졌겠지만 지금은 조급했다.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그녀의 몸으로 스며드는 소량의 신성력. 그것만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되는 마냥 꽉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끊임없이 신성력을 퍼부었다. 로젤린의 상태는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했다.
안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윽, 허억…….”
“레이몬드 경!”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나 같은 기사?]
[강하고…… 훌륭한?]
[으하하학, 요 깜찍한 녀석! 백 밤 더 자고 나면 알게 되니까 조급해하지 말아.]
비통하게 울고 있던 남자는 순식간에 기세를 바꿨다. 존경의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그 초롱초롱한 눈을
위해서라도. 누군가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을 슬퍼할 틈은 없었다.
로젤린의 내부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상처를 수복하고, 몸 안의 마력을 긁어모아 파편의 진행을
느리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도중 늘어난 상처만큼이나 ‘파편’의 양 또한 불어난 상태였다. 마독은
한껏 범람하여 둑을 무너트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53 화.
리카르디스의 상태를 염려한 나단이 몇 번이나 만류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로젤린은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는 것을 계속 반복했다. 그녀는 간간히 잠꼬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지켜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아파. 하지만 가야하는데. 이어지지 않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말들이 리카르디스를
찔렀다. 그는 이 감정에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 지 몰랐다. 단순히 아프다는 것만은 알았다. 로젤린이 어느 순간
피를 왈칵 토했다.
“로젤린!”
“내가…….”
로젤린은 번쩍 눈을 떴다. 의식을 잃은 눈동자는 초점이 맞지 않았다. 거센 기운이 그녀의 몸속을 타고 돌았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알 수 없었다. 오두막을 감싸고 있는 푸른 숲 위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
……
“전하!”
돌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듣기만 해도 마음을 몰아치게 만드는 소음들이 울렸다. 그리고 그 혼란을 뚫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따뜻한 무언가가 이마와 볼을 쓸어내렸다. 느릿한 손길. 동작 하나하나에 피곤함이
묻어 있지만 다정했다. 손을 뻗어 보려고 했으나 닿지 않았다. 가슴이 순간 덜컹거렸다. 추락하고 있다!
추락하고 있었다. 발밑이 순식간에 쑥 꺼지는 감각에 몸서리치며 비명을 질렀으나,
“아아아악!”
……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소리는 순식간에 불어나 비명을 잡아먹고 덩치를 키웠다. 어린아이, 여자, 남자,
노인, 고통에 찬 목소리와 분노하는 사람까지. 마구 뒤섞여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죽여라! 잡아! 저들을 잡아와! 대륙에 어둠을 불러오는 불길한 존재다! 숲속의 그림자 ……은 사람을 해친다!
깊은 숲의 그림자 ……은 사람을 먹는다!]
뒤쫓아 오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금속의 소리가 바싹 따라오고 있었다. 달리는 것이 점점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울고 화내며 서로 싸웠다.
[그렇지 않아, ‘우리’는 누구도 해치지 않았어! 도망치자, 숨는 거야.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잊을 때까지…
….]
“허억……!”
로젤린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이불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두리번두리번 슬리퍼를 찾다가 포기하고 맨발로 움직였다.
화려한 카펫이 깔린 바닥은 보드라웠다. 커다란 거울에 핼쑥한 얼굴의 여자가 비쳤다. 연분홍색 네글리제의
안쪽으로는 여기저기 붕대가 감겨 있었다. 로젤린은 제 얼굴을 쓸었다.
그래, 나는 로젤린이었지. 2 황자의 호위 기사. 그녀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본 광경을 반추해 보았다.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기억났다. 밤바다만큼이나 어둡고 불안한 눈동자였다. 무어라
계속 자신에게 말을 했지만,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흠…….”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혹시 파편의 마력을 흡수한 것인가? 무의식중,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발휘된
걸지도 몰랐다. 로젤린은 제 마력에 이상이 없는지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마독과 발타의 인공적인 마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변질된 마력. 그것은 로젤린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마력과는 달랐다. 이리저리 마구 날뛰는 기운을 흡수했다면 자신에게도 안 좋은 영향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세심하게 손끝, 발끝, 심장주위까지 샅샅이 살폈다. 그러나 어떤 이상도 찾을 수 없었고, 도리어 몸이 가뿐한 것
같기까지 했다.
쉬이익-
“아.”
쨍그랑 와장창 쿠당탕! 유리창을 깨고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거대한 독수리였다. 마카롱은 창을 깨고 바닥을 한
번 굴렀다가 테이블에 몸을 부딪치고 다시 겨우 날갯짓 했다. 그 거대한 날개가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방안의
물건들이 여기저기 엎어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름 모를 귀족의 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디서
종이가 펄럭펄럭 날아와 그녀의 머리에 턱 떨어졌다.
삐이익---
마카롱이 서럽게 울더니 로젤린에게 덥석 안겨 왔다. 새 가슴이 얼굴을 꾹꾹 누르고 있어, 좀 아팠다.
“마카롱, 전하는?”
마카롱은 부리로 그녀의 머리를 콱 쪼았다. 상처 나지는 않지만 딱 아플 정도였다. 처음으로 하는 말이 그거냐고
화내는 것 같았다.
“……안녕?”
“아야야, 아파.”
벌컥. 문이 열렸다.
“미, 미친…….”
그들은 손님이 깨어났다고 주인에게 먼저 보고를 해야 하는지, 독수리를 먼저 쫓아내야 하는지를 짧지만 진지하게
고심했다. 결정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뒤늦게 당도한 하녀가 손님을 잡아먹으려 드는 독수리를 보고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독수리부터 처리하자. 기사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불손한 눈빛을 보고
마카롱이 삐애애애액 울었다. 로젤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옆에서 울리는 우렁찬 소리에 귀가 멀어 버릴 것
같았다. 보통의 인간보다 귀가 몇 배로 좋아서 몇 배로 더 괴로웠다. 한쪽 귀를 막는 그녀의 행동에 마카롱이
부리를 합 다물었다.
기사들이 슬금슬금 포위망을 좁혀 왔다. 그 와중에도 다치게 할 생각은 없는지 검을 집어넣고 맨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독수리를 신성시 여기는 일라베니아인다운 태도였다. 로젤린은 한쪽 손을 들었다. 날짐승을 쫓아내려던
그들이 멈췄다.
“괜찮습니다. 친한 독수리입니다.”
아아, 일라베니아였다.
〈1 부 완결〉
[다음 편에 계속....]
54 화.
2부
8
국경이 잠시 허물어졌다. 발타의 왕, 힉살라 아돈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이었다.
병사들은 하얀밤 기사단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귀환한 기사들의 증언에 따라 그들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총원 백다섯 명 중 돌아오지 못한 기사는 서른여덟 명. 결코 작은 피해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사절단을 습격한 집단이 검은달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전투는 훌륭한 승리였노라고 역사책에 자리할
만했다. 갈수록 몸집을 불리는 집단, 검은달이 ‘파편’이라는 독으로써 한층 더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른여덟의 피해로 살아 돌아온 일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일라베니아의 백성들은 이 모두가 이델라브힘의
도움이 아니겠느냐며 얘기했다.
“이, 이델라브힘이시여…….”
“우웨엑!”
발타의 깊은 숲, 프리움. 병사들은 앞에 펼쳐진 광경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구역질했다. 하늘을 보며 기도하는
이도 있었다. 그들 또한 수많은 전투와 전쟁을 거쳐, 시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접해 본 경험이 있음에도.
참혹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앞섰다.
2 황자 직속 호위 기사단 하얀밤의 부단장 부관, 큰뿔산양 레이몬드 안디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장소에서
검은달과 전투를 치른 자는 상급 기사 로젤린 에스터, 오직 그녀뿐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의 이름은 여타 다른 무리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고, 상급 기사쯤 되면 실력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병사들은 쉽게 믿지 못했다. 대충 파악되는 시체의 수만 해도 이십 여구가 넘어섰다. 심지어
그들 모두가 악명 높은 검은달의 일원이 아니던가. 일개의 기사 한 명이 강하다고 막아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삼 일이라는 시간을 소요해 모든 임무를 끝냈다. 병사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마차와 말에 올랐다. 발타의
숲을 벗어나기 전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신입 병사가 머뭇머뭇 말을 꺼내었다.
* * *
“마인이라는 거 있지!”
“누구?”
“우리 성에 계신 손님!”
잠자는 공주님처럼 며칠간 깨어나지 못했던 그 손님이 마인이라고? 세상에나. 이델라브힘의 가호를 받는 2 황자
전하의 기사이자,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장녀가 마인이라니. 이 어찌나 흥미로운 얘깃거리란 말인가!
그들은 저마다 알고 있는 그 ‘손님’에 대한 정보를 나눴다. 초록색 머리라더라, 자그마하고 순하게 생겼다더라,
부엉이를 한 마리 데리고 있다더라. 맞는 정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소문이 어떻게 비틀리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였다.
그들의 대화가 다소 컸던 탓일까. 계단을 오르던 여자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하녀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멈췄다.
‘흠…….’
여자는 잡념을 떨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손님이 깨어났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기에.
오랜만이라는 단어가 성사되는 경우는 첫 만남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러나 로젤린은 여자를 알지
못했다. 처진 눈을 가지고도 유약하다거나 순해 보이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인상이었다. 경사도가 높은 눈썹
각도 때문인지, 붉은 입술 때문인지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로젤린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로젤린’의 기억 안에 이 여자가 있는지 뒤적여 보았다. 로젤린의 의문에 차 있는
눈빛을 읽은 여자가 말을 덧붙였다.
여자가 익숙한 태도로 로젤린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로젤린도 멀뚱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디 보자…… 열은 내렸고, 혈색도 좋네. 어디 아픈 곳 있니?”
여자가 하녀와 눈을 맞추며 적당히 손짓했다. 로젤린은 식사라는 단어에 몸을 들썩였다.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로젤린을 보며 여자가 아하하 웃었다.
마카롱이 꾸르륵 소리를 내며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세실은 거대한 독수리의 불만 가득한 소리를 듣고는
자신의 말을 반추해 보았다. 아, 확실히 다르게 해석될 만한 여지가 있었다.
마카롱이 가슴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를 멈췄다. 세실은 “굉장한걸, 말을 다 알아듣는 거니?” 하며 신기해했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 두드려 왔다. 세실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충 손짓했다. 중년의 남자가 성큼 발을
들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기사들과 복식이 비슷했으나 더 화려했다.
세실은 딱 달라붙은 드레스를 입고도 능숙하게 다리를 꼬았다. 일이 터져서 재미있다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손님이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전하거라. 비슷한 이야기만 몇 번째인지, 대체. 노망이라도 난거야? 하여간
귀찮은 늙은이라니깐.”
‘본인의 안위보다 2 황자가 중요하다는 건가? 신성 제국에서 마인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태평한 건지, 담대한 건지…….’
[다음 편에 계속....]
55 화.
“그렇습니까.”
[다친 곳은 없으셨어.]
그 한마디에 로젤린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일어난 이후로 내내 조급했던 마음이 서서히 풀려갔다.
[로젤린…….]
로젤린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기사의 임무 그 이전에 리카르디스가 무사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뻤다.
“5 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구나!
세실은 리카르디스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의 반 이상이 고기였다. 로젤린은
흐물흐물해진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잠들어 있던 미뢰가 깨어나 축포를 터트리고 화려한 파티를
벌였다. 그녀는 잠시 미간을 짚고 밀려오는 감동을 추슬렀다.
“입에는 좀 맞니?”
“네! 맛있습니다.”
“네. 제가 좀 강해서.”
하얀밤 기사단의 명성은 이번 전투로 인해 한층 더 높아졌다. 생환의 가능성이 일말도 남아 있지 않았던 험난한
길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을안개의 스타스. 큰뿔산양의 레이몬드. 고래무덤의 파르딕트.
푸른등불의 카일로.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로젤린의 전투는 평범한 인간 기준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하얀밤 기사단원은 물론이거니와 사망자들을 수습하기
위해 전투 현장을 찾았던 병사들 또한 그 사실을 인지했다. 로젤린에 관한 이야기는 은밀하게 퍼졌다. 누군가의
보고서에서, 어느 주점 술 취한 병사의 입에서, 기사들 간의 연락망을 통해서.
고래무덤의 파르딕트. 그의 고래만 한 방패를 단숨에 부쉈느니, 검은달의 암살자들을 파리처럼 보이게끔 하는
대단한 실력을 갖췄느니 하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부터. 손을 한번 휘둘렀더니 산과 강이 갈라졌다던가, 절대
죽지 않는다던가, 2 황자 전하를 아기 새 들듯이 한 손으로 들었다던가 뭐라던가 하는 과장이 보태진 것까지.
진실 여부를 판별하기 힘든 여러 소문이 섞여 있었으나, 인간의 힘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는 점만은 별다른
왜곡을 거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소문들 중에서도 사람들이 크게 주목한 것이 하나 있었다. ‘파편’은 마력과 독의 결합이라더라!
해독제가 없다더라! 그렇다면 ‘파편’에 중독되고도 살아남은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소문은 그녀의 아버지인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이 끝맺었다. 장장 스물세 장. 상당한 분량의 해명
문이었다. 로젤린의 탄생 일화, 태어나자마자 엄마라는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둥의 자랑을 빙자한 쓸모없는
내용들을 다 치고 간추려 보니……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결론만이 남았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일라베니아가 들썩였다. 2 황자의 기사이자 붉은수레바퀴의 장녀가 마인이라니. 불길한
검은 달의 힘을 가진 마인이라니. 누군가가 신성한 제국에 나타난 흉조가 아니겠느냐 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크레안 티다니온조차도 2 황자의 앞길을 보살피는 것이라 말했다.
로젤린에 관한 이야기는 비스타를 벗어나 대륙 구석구석에 퍼지는 중이었다. 그녀는 호사가들의 그럴싸한 말로
인해 희대의 악인도 되었다가, 세상에 더없을 영웅도 되었다. 어린아이들조차 로젤린의 이름을 인식하기
시작했으나, 5 일 간 자고 엿새째 느지막한 오후에 깨어난 장본인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세실은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많은 일이 있었단다.”
세실은 유심히 로젤린을 관찰했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던 탓이었다. 평생 숨겨 왔던 비밀이
파헤쳐진 상황이 아닌가. 두려워할까, 제 말을 의심하며 부정할까.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 격렬한 감정 속에서
진실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젤린은 세실의 예상을 벗어나, 그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독수리와 한 여자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 말 하려던 거 아니지 않니……? 세실이 떨떠름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밝혀도 괜찮습니까?”
마력과 성력은 서로 간섭할 수 없다. 그렇기에 마력과 독의 혼합물 ‘파편’에는 성력이 어떤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던 것. 그렇다면 마독 ‘파편’에서 마력을 우선적으로 처리할 수만 있다면, 분리된 독은 충분히 성력으로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로젤린이 ‘파편’에 중독되기 한참 전부터 떠돌던 가설이었다. 그러나 마인이 없으니 검증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렇다 할 해결 방안도 나오지 않고 그저 지지부진하게 말만 끼얹는 사람만 늘어나는 판국에, 그녀가
파편에 중독되고 살아난 것이다. 영원히 가설로 묻혀 있을 뻔한 것을 로젤린이 이번 일로 입증해 준 셈이었다.
일라베니아 내에서 마인의 평가는 노예 이하. 일라베니아 제국 내에 있는 마인이라고 할지라도 발타의 암살자
집단 ‘검은달’과 한통속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검은달’의 존재로 인해 마인의
필요성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56 화.
그런 상황에 그녀가 나타났다. 검은달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인간 병기들을 산산조각 낼 정도로 강하며, 2 황자
리카르디스를 위해 목숨도 바칠 정도로 충성심이 높은 제국의 기사 로젤린. 이 시국에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한
일라베니아의 마인이었다.
그녀에 관한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범상치 않았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비스타를 벗어나 일라베니아
전역에 퍼지고 있다고? 누군가가 작정하고서 퍼트리지 않는 이상에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 존재를 시시각각 부정하는 나라에서 태어난 마인, 그녀에 대한 동정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의 입을
오가며 만들어진 흐름은 뒤집기 힘들다.
그러나 이 상황을 알 리 없는 로젤린은 속이 꽤나 답답할 것이다. 세실이 안쓰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자고 있을 때와 다름없이 무표정하지만, 그 가면 같은 얼굴 아래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치열하게
부서지고 있을 테지. 가엾어라. 이 어린 아가씨가 헤쳐 나가기에는 너무 거센 풍파가 아닌가. 세실은 눈물이
찔끔 날 뻔 했다. 사실 조금 흥미롭기도 했지만.
그때 로젤린의 옆, 의자 등받이에 앉은 독수리가 부리의 넙적한 부분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다.
로젤린은 후식으로 올라온 마카롱을 독수리에게 내밀었다.
“이게 마카롱이야.”
“……?”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굉장히 중대한, 그녀의 인생을 뒤흔들 만한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가? 안했나? 태평하게 독수리와 마카롱을 나눠 먹는 로젤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확실하게 안 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마카롱을 먹은 독수리가 달콤함에 취해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도 “음음…….” 따위의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흥이 난 몸짓들이 방금 전 세실의 생각에 답해 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마카롱을 먹어 보니 웬걸. 평소보다 잘 구워지긴 했다.
* * *
“이렇게 말하면 하얀밤 기사단에게 실례겠어. 그쪽은 사망자가 서른여덟. 그리고 우리는 생환자가 여덟이라
말해야 정확하니 말이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2 황자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마른가시나무는 중립. 붉은수레바퀴는 1 황자 파라고는 하나, 굳이 따지자면 현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 자였다. 2
황자를 도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니, 돕는 것은 둘째라 치더라도 애초에 그들은 국경을 넘어서는 안 된다. 사절단이야 힉살라의 허가를
받았다지만 그들은 어떤 인가도 받은 적 없었다. 말인즉슨 그들이 국경을 넘은 이 일이 전쟁의 시발점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비록 국경 코앞에서 2 황자가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을지언정, 그들은 절대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들이 왜 움직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2 황자가 발타에 오기 전, 사절단의 인원을 늘려도
되겠느냐는 공문을 보낸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하카브는 리카르디스의 의중을 알아챘다. 발타의 국경을 넘은 사절단의 인원은 허가받은 수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기사단을 포함한다면 얼추 맞을 것이다. 그들이 원래 예정된
사절단의 인원이었다고 한다면 발타쪽에서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애초에 허가 인장을 찍은 것은
자신이 아니던가.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공성 무기가 축소된 것 같은 무기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국경을 넘었다고 한다.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기들이었다. 백작은 ‘파편’의 등장 후 접근전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듯 보였다. 석궁보다는 훨씬 크고
발리스타보다는 작았다. 무게가 가벼워 들고 다니기에 용이했으며, 파괴력도 상당했다. 강력한 공격이 계속해서
쏟아진 결과로 검은달은 참패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기사단은 주로 평민과 용병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백작은 압도적인 잔혹함을 원했고,
그런 경우에는 아무래도 귀족보다는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들이 훨씬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가 쓸고 간
자리의 시체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짓뭉개지곤 했다.
솔직히 하카브로서도 좀 질릴 정도였다. 전장에서 공포는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하카브와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그녀의 성정이 잔혹해서 벌이는 일이라기보다는 그 수단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성이 있는 미친개. 그래서 더욱 골치 아팠다. 발타의 전사들이 가장 기피하는 대상이 그녀라는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잘린 머리통은 따로 모아서 무언가 글자의 형태를 그려 놓았다는데, 아틸라크가 정확한 내용은 알려
주지 않았다. 하카브는 대충 감을 잡았다. 심한 욕설 따위겠지.
“마른가시나무 백작답군.”
하카브는 고개를 좌우로 잘게 흔들었다. 이후, 아틸라크의 보고는 그가 예상한 선에 흘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전투했고, 2 황자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보호 아래 무사히 귀환했느니 뭐니.
‘붉은수레바퀴라…….’
그 이름을 듣고 있으니 다른 인물이 떠올랐다. 무심한 표정을 고수하던 얼굴이 어른거렸다.
[다음 편에 계속....]
57 화.
당연히 이기는 싸움에 지고 돌아왔다. 총책임자로서 아틸라크는 한동안 고개를 못 들고 다닐 치욕스러운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정작 그 보고를 듣는 하카브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로젤린. 그대가…….”
그대는 그 푸르른 눈동자로 나를 어떻게 바라봤었지? 그대의 부드러운 피부 아래를 흐르고 있는 마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강하게 요동치며 울리고 있었나? 잔잔하게 소리 없이 그대를 휘감고 있었나?
“예, 전하.”
“로젤린과 접촉하기 전까지 2 황자는 당분간 건드리지 않는다. 괜히 밉보여서 점수를 깎을 필요는 없지. 이미
상당히 깎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크레안 티다니온의 산물. 마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순수한 마력의 결정체. 일라베니아가 낳은 최초의 괴물.
죽음의 그림자.
“아틸라크.”
“예, 전하.”
“편지로만 소식을 주고받는 것은 너무 느리다. 그냥 내가 일라베니아로 가야겠다.”
* * *
일라베니아의 위업은 ‘축복의 밤’과 마력 숭배 집단 ‘검은달’. 두 가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축복의
밤을 띄워 얼마나 대륙을 풍요롭게 만들었는지, 얼마나 검은달의 위세를 약하게 했는지가 역대 황제의 치세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번 세대에 검은달의 몸집이 급격하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아 대륙이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고질적인 문제 이외에 또 다른 골칫거리가 생긴 것이다. 사람들은 굶어 죽고, 검은달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대륙을 휘감는 불안감은 나날이 짙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라베니아의 현 황제 라이노는 이러한 사태를 조금도 완화시키지 못했다. 타고난 혈통과 귀족들 간의
긴밀한 정치 놀음으로 황위를 거머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약했던 신성력.
계속해 발목을 잡고 있는 근심거리가 다시 대두되었다.
능력은 없지만 눈치는 있어, 황제 라이노 또한 그러한 기류를 읽었다. 그는 불안했다. 네 살이었던 엘피디오의
신성력이 뛰어나다는 얘기까지 통제할 정도였다. 10 살에 갑자기 나타난 2 황자 리카르디스가 엘피디오와 황태자
위를 두고 다투지 않았더라면, 엘피디오는 성인이 되는 날 황제로 즉위했을 것이다.
두 아들의 밥그릇 싸움 덕분에 제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황제, 라이노. 역대 최악, 최약이라는 오명을 쓴 지금
이때에, 리카르디스가 검붉은 마력의 결정을 가지고 왔다. 귀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오랜 숙적 검은달과의
악연을 끝맺음 지을 첫 단추가 될 수 있으므로.
1 황자 엘피디오도 당분간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리카르디스는 황제의 크나큰 환대를 받을 것이다.
벼랑 끝에 서 있던 위기를 완벽하게 기회로 삼았다. 하여간 2 황자도 참 대단한 인물이었다.
“잘 마중 나갔지 뭐니. 황제 폐하께서 나에게도 노고를 치하해 주시겠지.”
세실은 ‘노고를 치하’라는 대목에서 검지와 엄지를 붙여 원을 그렸다. 흔히들 화폐를 상징할 때 사용하는
손동작이었다. 로젤린과 마카롱은 그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열심히 추측해 보았으나 알아내지 못하고서
포기해야 했다.
“페르탄도 무언가를 얻을 테지. 그 고지식한 남자가 그걸 바라고 움직이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네 아버지는
전후 처리로 리카르디스 전하와 같이 수도에 올라갔으니 당장은 볼 수 없단다. 너무 아쉬워 마렴. 그 목석 같은
인간이 나에게 부탁까지 하면서 너를 맡기고 간 거란다.”
“네.”
세실은 눈썹을 아래로 한껏 휘며 그녀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주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탓이었다. 로젤린과 오래 지낸 사람이 아니면 그녀의 표정을 구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는 했다.
로젤린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일자로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동생 칼릭스는 매일매일 서신과 선물을 보내며 제 누이를 잘 부탁한다 연락했다. 기사단장 스타스, 부단장
나단도 바쁜 일정 속에서 그녀를 찾았고,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는 제집마냥 그녀 옆에 붙어 있기까지 했다.
여러 가지 정보를 위해 사람을 두루두루 사귄다고 들었으나,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할 정도면 표면적인 친분에
그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속내를 알 수 없고 음흉하다는 평을 받는 클로에와 로젤린을 번갈아 떠올리자니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황금정원의 클로에가 큰뿔산양의 레이몬드와 약혼한 사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들의 기묘한 친분은 그로부터 온 것이리라.
2 황자 리카르디스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매일매일 그녀를 찾았다. 누워 있는 로젤린을 바라보는 눈길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보는 세실이 속이 다 간질간질해질 지경이었다.
아침은 고기 요리, 점심은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디저트, 저녁은 다시 고기 요리. 리카르디스 황자는 병문안 꽃
대신 갖은 음식들을 들고 와서는 로젤린의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맨 처음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황당하던지. 갓
만들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병문안 선물은 좋은 말로는 개성적이고 솔직한 말로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리카르디스는 한 손에는 고기 꼬지, 한 손에는 케이크 접시를 들고, 얼른 일어나라며 그녀에겐 들리지
않을 타박을 했다. 세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전투와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던 2 황자와
다른 모습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다음 편에 계속....]
58 화.
하지만 2 황자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모두의 걱정을 깔끔하게 불식시켰다. 청년과 소년의 사이에 놓여 있던
아름다운 황자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전쟁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지에 끈적하게 말라붙은 피,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있는 황폐한 광경이 그렇게나 어울릴 줄이야.
황자는 처음부터 전쟁터에서 자라난 나무처럼 고고하게 서 있었다. 세실은 요즘도 이따금씩 그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 2 황자의 모습만을 지켜봐 왔던 그녀로서는, 지금의 황자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또 큰 한고비를 넘겨
안전한 울타리 내에 있으면서. 공을 세워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으면서도.
[로젤린.]
[로젤린, 식당에 초콜릿 폭포가 흐르고 있어. 바나나에 초콜릿을 묻히고 견과류 위로 한번 굴리기까지 할
예정이야.]
리카르디스는 이제 와서 그 당연한 이치를 모르는 듯 굴었다. 그는 몇 번이고 로젤린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그런데 왜 그때보다도 위태로워 보일까. 전장에서조차 어떤 두려움도 모르는 것처럼 다잡고 있던 마음을, 왜
저렇게 흔들리게 내버려 두는 건가.
[로젤린.]
2 황자는 수도로 떠나기 바로 직전까지 제 호위 기사의 옆을 지켰다. 그녀는 결국 황자가 있는 동안에는 깨어나지
못했으나, 그의 목소리에 이끌려 가끔 잠꼬대를 하듯 웅얼거렸다. 2 황자는 그럴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 * *
딱 걸렸다. 세실이 모질게 그녀의 짐을 뺏었다. 로젤린은 평소보다 훨씬 단호한 표정으로 제 의사를 표현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괜찮기는 뭐가 괜찮다는 거니!”라고 하고, 전혀 안 아프다고 해도
“안 아프기는 뭐가 안 아프니!” 하고 재차 혼날 뿐이었다.
온 대륙이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이야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황성에 도착해
로젤린의 신변에 관한 확답을 받을 때까지 그녀가 보호받기를 원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또한 그의 딸이 성치
않은 몸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구경거리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그들의 제안을 수락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과 리카르디스에게 빚을 만들어 둘 기회는
흔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명의 이해관계가 얽혀 로젤린은 당분간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 머물러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로젤린이 알 리 만무했다. 세실의 만류에도 로젤린은 불만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으나, 리카르디스가 미리 남겨 놓은 편지 한 장을 읽고서는…….
계속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세실이 칼릭스가 비스타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다급하게 전했다. 얼마 뒤면 곧 도착할 것이라고. 로젤린은 어느 정도 납득을 했는지 은밀히 준비하던
탈주 시도를 손에서 놓았다.
세실은 사절단과 검은달 사이에 있었던 전투로 인해 바빴다. 황실로 보낼 보고서도 작성해야 하고, 이번 전투로
인해 검은달의 동향이 바뀌는지에 대한 면밀한 관찰 또한 필요했다. 로젤린을 보호한다고 하지만, 세심하게
그녀를 챙길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래 사람들로부터 가끔 그녀에 대한 보고를 받을 뿐이었다.
그리고 방금 세실이 막 받은 그 보고에는, 당분간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말 때문에 로젤린이 무료함에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환자이자 손님을 너무 오래 방치한 감이 없잖아 있어,
세실은 반성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에 그녀의 얼굴도 보고, 담소도 나눌 겸.
그녀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세실은 제 두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시장이라도 좀 둘러보면서 놀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독수리랑 체스를 둘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심심했던 걸까…….
로젤린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하, 한 수만 물러줘.” 하고 답지 않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독수리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근엄한 대가리를 하고는 비숍을 물어 대차게 로젤린의 킹을 후려쳤다. 로젤린이 앓는 소리를
내며 마지막 남은 쿠키를 독수리의 입에 물렸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쬐며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로젤린은 마카롱과 체스를 둔 일 때문에 미친 사람
취급 받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다지 상관없었다. 덕분에 성을 벗어나게 되지 않았던가. 어쩌면
마카롱에게 게임을 지고 있어서 백작이 더욱 걱정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좋은 날이었다. 쥐로 변해서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마카롱이 코를 실룩이며 햇살 냄새를 맡았다.
이따금 바람 울리는 소리만 나는 적막한,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정리되어 단조롭게까지 느껴지는 공간을 뒤로한
로젤린은, 새롭게 펼쳐진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우락부락한 용병들은 드잡이를 하는 중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퍼져 나오는 가운데
사람들이 흥정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옷의 색과 규격, 걸음걸이 하나하나 통제되어 있지 않은 무질서한
거리를 보자 그녀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바쁘게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시선들이 그녀의
검은 머리를 향해 모이기 시작했다.
“붉은수레바퀴의…….”
“2 황자 전하의 그…….”
사람들이 오가는 번잡한 거리가 한층 더 술렁이기 시작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수도까지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하물며 이곳은 로젤린이 요양 중인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가 아니던가.
로젤린의 인상착의 정도는 진즉에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그러면 안 돼, 마카롱.”
소문의 그녀가 시선을 약간 아래로 한 채 중얼중얼 혼잣말을 시작했다. 로젤린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로젤린은 행인들이 자신을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선에 예민해진
마카롱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안된다니깐.”
“아, 칼릭스?”
“안녕하세요.”
로젤린이 가게의 주인에게 인사했다.
[다음 편에 계속....]
59 화.
가게 주인은 멍하니 그녀의 질문을 되뇌었다. 사과 하나에 얼마죠? 사과 몇 개 주세요. 따위가 아닌, 사과를
먹어도 되겠느냐? 그냥 먹겠다는 얘기인거지, 지금? 강탈하려는 주제에 왜 이렇게 정중한 거지? 과일 가게
주인은 혼란스러웠다.
남자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그녀를 곁눈질로 보았다. 쭉 찢어진 눈매는 매서웠고, 표정은 싸늘했다. 심지어는
역광이라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상황에, 과일 깎는 칼날에 햇빛이 반사되어 그녀의 눈동자만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맹수에게 포착된 초식동물의 기분이 이러할까. 오금이 저리고 손발이 덜덜 떨릴 만큼 무서웠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로젤린은 콧노래를 부르며 사과를 살폈다. 진지한 표정으로 사과를 이리저리 들추던 그녀가 한 개를 들어 올렸다.
쌓여 있는 것들 중 가장 크고, 색이 예쁘고, 과실 향이 풍부한 사과였다. 주인은 결국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와중에 가장 맛있어 보이는 걸로 고르기까지 하는 거야?
[많을수록 좋은 거랍니다.]
라는 애매한 답변을 남겼었다. 때문에 로젤린에게 돈의 개념은 ‘많을수록 좋은 것.’, ‘마침 칼릭스가 많이
가지고 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칼릭스나 레이몬드에게 말하면 된다.’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성 내부에서만
생활하고 돈을 쓸 일이 없었으므로, 어찌 보면 예견된 참극이었다.
로젤린은 단검을 꺼내어 사과를 작게 잘랐다. 주머니에 넣으니 마카롱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각사각,
사과를 갉으면서 마카롱이 물어 왔다. 대가로 뭘 줘야 하지 않으냐고? 물물교환?
마카롱이 인간 모습으로 산 중턱의 오두막에 살 때 알게 된 것이라 했다. 물건을 가지려면, 그 가치와 상응하는
무언가와 교환해야 한다고. 여기는 큰 마을이라서 다른 건가? 사람들이 인심이 좋네. 마카롱의 말에 로젤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딱히 그런 걸 배운 적은 없는데…… 그러면 나중에 토끼라도 잡아 주면 되는 것일까?
마른가시나무 백작님에게 물어봐야 할 듯했다.
마카롱과의 대화, 외부적으로는 혼잣말로 보이는 행위를 지속한 결과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이 줄어들었다.
로젤린의 발길이 향하는 곳마다 사람들이 쫙 갈라졌다.
물론 전부 값을 치르지 않았다. 그냥 가게의 주인들에게 먹어도 되느냐 정중하게 묻기만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소문의 그녀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르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 * *
칼릭스는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서신을 전달받은 이후 곧바로 붉은수레바퀴 영지를 떠났다. 반드시 영지를 지키고
있으라는 아버지의 말을 싹 무시한 처사였다.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인 에델바이스 또한 놀란
듯 보였다. 칼릭스는 객관적으로 착하고 순종적인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가기 전부터 제 아버지와 부딪쳤다. 마찬가지로 착한 자식의 표본이었던 누이의 첫
반항이었다. 얼마 후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한 그녀의 다짐은 날이 갈수록 단단해졌다. 칼릭스는 그녀의 결단을
동경하면서도 미련하다 생각했다.
칼릭스는 로젤린만큼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을 본 적 없고, 그녀만큼 냉혹하고 냉정한 사람 또한 본 적 없었다.
어렸던 자신에게 등 돌릴 만큼 그녀가 소중하게 여기던 리카르디스의 존재를 어찌나 질투했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붉은수레바퀴의 이름을 달고 있던 자로서 조금, 아니 많이 섭섭하고 서러운 마음에 따졌다. 누이는 고운 얼굴을
무너뜨리며 서글프게 웃었다.
[그래야만 하는 때라 그래.]
하지만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편지를 받자마자 영지를 떠난 제 모습을 보며, 예전 누이가 한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하는 때’가 자신에게도 왔다는 것을 알았다.
흙먼지가 일어나는 풍경에 칼릭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편지를 받고 달려가던 중이었다.
이미 비스타에는 발을 들였고, 저 멀리 삐죽삐죽 솟은 성이 보였다.
“혼……자서 말입니까?”
그는 마차도 버리고 마을마다 말을 바꿔 가며 달려온 피로를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아련하게 잠겼던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감상도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칼릭스의 애처로운 표정을 미처 눈치 못 챘는지 세실이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아니 아마…….”
“마카롱이랑 같이 나갔지?”
“……예?”
“그, 네 누이가 데리고 다니는 독수리 있잖니. 엄청 똑똑하던데? 체스를 굉장히 잘 두더라고. 아니, 로젤린
경이 못하는 건가? 어쨌거나.”
퍽 즐겁다는 말투였다. 모두의 희망이 와르르 무너졌다. 칼릭스는 고삐를 채어 방향을 급히 돌렸다.
“누님을 찾아!”
“예!”
기사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말을 재촉하는 칼릭스의 시야로 바위에 새겨져 있는 문구가 스쳐 지나갔다. 비스타에
들어서면서부터 숱하게 보아 온 것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언제나 무력을 귀하게 다뤘고, 그만큼 비스타에는 용병과 전사들이 넘쳐 났다. 문제는
바라지 않던 양아치와 삼류 건달 또한 잔뜩 모여들었다는 점이었다. 칼릭스는 영지를 다스린 경력이 길지는
않지만, 시장은 그런 이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장소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제 누이는 혼자서 성을 벗어난 적이 없다. 황실에서 근무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워낙 급변하는 정세 때문에
2 황자의 월장석 성에만 머물렀을 텐데…….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말하기를 독수리, 그것도 체스를 굉장히 잘 두는 독수리가 함께 있다지만 마음이 놓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불안했다. 얼마간 말을 달린 후, 칼릭스는 시장의 초입에서 내려섰다.
비스타는 넓고 좁은 거리와 낮고 높은 건물들이 혼잡하게 세워져 있었다. 나름의 규칙성은 있겠지만 초행이다
보니 길이 제법 어려웠다. 사실 길이 쉽다 해도 별반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목적지가 끝없이 움직이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길이 쉽든 어렵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저 조급할 뿐이었다.
“꽃 사세요!”
상인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는 가녀린 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칼릭스는 주위를
둘러보다 골목 구석,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 두 명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골목
벽에는 곰팡이인지 이끼인지 모를 것들로 얼룩덜룩했다.
60 화.
칼릭스는 무심한 듯 새침하게 소녀들에게 은화를 한 개씩 건넸다. 어린 장사꾼들은 기쁨을 숨기지 못하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종이로 꽃다발을 만들어 주려는 듯했다.
칼릭스가 눈을 크게 떴다. 예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소녀들의 증언으로 제 누이와 자신이
같은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칼릭스가 반색하자 둘이 소근 소근
얘기를 나눴다.
칼릭스는 제 누이로부터 판매하는 음식을 갈취당한 상인에게 값을 치렀다. 물론, 구리 동전이 아닌 황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보상이었다. 상인이 너무나도 감격해서 울음을 터트렸기에 칼릭스는 더욱 미안해졌다.
“실례합니다.”
‘저기는, 백퍼센트야.’
……소문? 칼릭스는 그의 말이 심하게 신경 쓰였으나 아차하고 정신을 차렸다. 제 소문이 문제가 아니라 누이의
행방이 더 급했다.
“아, 로젤린 경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희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잔뜩 드셨죠. 어찌나 맛있게 드시는지, 사람들이
전부 사 먹지 뭡니까! 많이 팔렸으니 그것만으로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에 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는 시기였다. 거기에 굳이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상인들을 갈취하고 다닌다는 얘기까지 더할 필요는 없었다.
한데 기류가 좀 미묘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인인 데다가, 갈취까지 한 상대를 보는 눈길이 생각보다 고왔다.
칼릭스는 곰곰이 생각하다 결론을 냈다. 아까의 상인과 지금 가게 주인의 말로 짐작해 보건대, 복스럽게 잘 먹는
젊은이를 예뻐하는 어른들의 공통적인 경향이 발휘된 것이 아닐지.
그의 다급한 움직임에 거대한 꽃다발이 움직이며 시야의 반을 가렸다. 꽃다발이 거추장스러워 짜증이 울컥울컥
솟았다. 하얀 꽃송이 사이로 사람들의 머리가 흔들거리며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중 검은색을 언뜻 본
것 같았다. 칼릭스는 왁 소리쳤다.
“누님!”
억, 내가 미쳤지! 칼릭스는 경솔한 자신을 욕했다. 로젤린은 낮은 상가의 지붕에 멋지게 착지했다. 사람들이
오오, 하며 감탄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로젤린이 곧 칼릭스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그녀의 시선에 따라 칼릭스에게 거리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못 찾았나 의문이 들 정도로, 매우 눈에 띄시는 군요, 누님…….
“칼릭스!”
사람들이 나누는 얘기가 칼릭스에게 들려왔다. 그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존재를 최대한 지워 보고자
노력했다. 누님 대체 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고 다니신 겁니까?
“누님…….”
“응.”
아, 어찌나 다행인지. 칼릭스는 한참이나 묵혀 두었던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절도고 무전취식이고
뭐고. 사고 치고 다니셔도 되니 그저 건강하기만 하셔라.
거리의 소음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였으나, 로젤린이 들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로젤린은 그 믿음에
보답하듯 입꼬리를 끌어 웃었다.
“응.”
로젤린이 칼릭스를 와락 안았다. 둘 사이의 꽃다발이 구겨졌다. 꽃향기가 더욱 물씬 풍기며 두 사람을 감쌌다.
행인들이 붉은수레바퀴 남매의 상봉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감동의 눈물을 닦아 내는 모습을 보고,
칼릭스도 수치스러움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칼릭스는 로젤린의 손을 잡고 그녀가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갔다. 여기서 먹었어. 이것도 먹었어. 저것도 맛있어.
어찌나 야무지게 먹고 다녔는지 으리으리한 식당에서도 이만큼 다채롭고 호화롭게 먹지는 못할 것 같았다.
가게마다 멈춰서 외상값을 낸 결과, 로젤린은 경제가 돌아가는 원리를 대충 이해하게 되었다.
물건에는 그에 따르는 합당한 대가, 값이라는 것이 있다! 일반적인 상식을 대단한 이치라도 되는 양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고 칼릭스의 마음은 더욱 싱숭생숭해졌다. 사회에 내보내기에는 너무 일렀던 건가…… 라는 생각을 하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 누이를 야생동물 방생하는 듯 취급하는 이 패륜적인 발상은 뭐란 말인가. 칼릭스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잡념을
떨쳤다.
[다음 편에 계속....]
61 화.
“예쁜 냄새.”
로젤린은 곧 꽃 한 송이를 꽃다발에서 뽑아내, 길쭉한 줄기를 반으로 뚝 자르더니 칼릭스의 귓가에 곱게 꽂았다.
“예쁘다.”
“…….”
로젤린이 상기된 표정으로 연신 감탄했다. 그녀는 들고 있는 거대한 꽃 한 다발을 전부 똑같은 방식으로 섭취했다.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행동을 장성한 두 남녀가 하고 다니니 눈에 보통 띄는 게 아니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은 남매가 새끼 강아지라도 되는 양,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온화한 시선이 칼릭스 내부에서 들썩이는 수치심을 눌렀다. 일라베니아에서 마인은 살인자보다 무섭고
역병보다 불길한 존재다. 로젤린이 2 황자 리카르디스의 목숨을 구했다고는 하지만 그 인식만큼은 변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 가족과 감동적인 재회를 하고, 정겹게 손잡고 돌아다니는 일상은 그들의 인식을 부수기에 아주
적당했던 듯했다. 귀에 꽃을 꽂고 있는 이 수치스러운 상황을 감내하며 돌아다니는 이유는, 칼릭스가 그 분위기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만 흘러간다면, 귀에 꽃을 백번을 더 못 꽂을까. 이것도 나름 임무라면 임무인 셈이니 창피할
이유가 전혀 없다! 칼릭스는 나름의 자기 합리화를 마쳤다.
“어, 도련…….”
로젤린을 찾으러 흩어졌던 기사들이 남매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어 올리다가 어정쩡하게 다시 내렸다. 아가씨는
꽃을 물고 쪽쪽 빨고 있고, 도련님은 귀에 꽃을 꽂고 있었다.
‘……!’
가깝지는 않은 거리였다. 지나가는 남자와 부딪치는 척하며 지갑을 훔쳐 간 소년에서 느껴졌다. 순간적이고 아주
미약한 파문이었으나, 로젤린과 마카롱은 놓치지 않았다.
검은달의 마인들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순수한 마인이었다. 소년의 마력은 몸 안의 생명력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었다. ‘그것’들에게는 생명이 없었으나, 그 점만 제외한다면 똑같은 성질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지금의 로젤린에게는 이미 생명력이 섞이기 시작했으니, 더더욱 비슷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은 한참동안 답하지 않고, 그저 소매치기 소년이 사라진 골목을 계속 주시했다. 칼릭스는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차분한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으나, 눈동자 속, 깊은
무언가가 바람에 파란이 이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마인을 봐서.”
쫓아갈까 말까 고민 하고 있었어. 로젤린은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칼릭스는 순식간에 태세를 바꾸었다. 제 누이는
몰라도 자신은 적을 확신 못하는 이 상황에서 사람들이 많은 거리는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 * *
하지만 누군가가 구태여, 일라베니아에 마인이 어디 있겠느냐? 하고 묻는다면 모두 비스타를 가리킬 것이다.
수도에 가까워질수록 황실의 힘은 강해진다. 반대로 수도에서 먼 변방일수록 황실의 권한은 약해진다는 말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밑에는 강한 기사와 용병들이 많았다. 그들 중 누구라도 정체를 숨기고 있는 마인일 수 있으나,
세실이 덮는 이상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강한 전사로 활약하는 자들도 있지만, 음지로 가는 경우가 더 많다고 들었습니다. 신체적으로 뛰어난 점을
이용해서…… 나쁜 일들을…… 한다고 하더군요.”
칼릭스는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녀에게 마인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인간과 미지의 존재라는 큰 차이가
있음에도 어쩐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마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힘의
종류가 같기 때문일 것이다.
“누님, 그런데…….”
칼릭스는 마른 입술을 매만지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 갑자기 꺼낼 말이 아니란 것쯤은
알지만…….
“응.”
그러고 보니, 마카롱이라는 이름을 마른가시나무 백작에게서 들은 적 있었다. 체스를 잘 둔다던, 그 똑똑한
독수리?
“맞아. 아주 크고 멋있지.”
로젤린이 뿌듯하다는 듯 칼릭스에게 자랑했다. 칼릭스는 제 누이의 화법에 큰 문제를 느꼈다. 너무 단답형이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엮이면 단답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내 동족이야.”
아, 이건 이해해 버리고야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평범한 애완 쥐였던 마카롱이 이제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
62 화.
“괜찮아.”
“맙소사…….”
칼릭스의 입에서 신음이 섞인 감탄이 튀어나왔다. 작은 짐승이 검게 물들더니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 같았다. 짙고 검은 안개는 폭발하는 듯
부풀었다가 인간의 형태로 빠르게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것을 기점으로, 손끝, 발끝부터 검은색이 사라져 갔다.
칼릭스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감고 있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회색의 눈동자가
칼릭스를 똑바로 마주했다.
아담한 체구의 갈색 머리 여자였다. 로젤린이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마카롱이 자연스럽게
로젤린의 시중을 받았다.
여자가 갑작스레 말을 시작했다. 잠시 중단되었던 대화를 이어가는 듯 자연스러웠다. 옷매무새의 정리가 끝나자
여자가 목 뒤로 손을 집어넣어 옷 속에 들어가 있던 머리카락을 빼내었다. 로젤린의 겉옷 위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스르륵 흩어졌다.
“……네.”
여자의 얼굴은 부드럽고 가는 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하고 약한 인상이라 평할 수 있었으나, 회색 눈동자가
칼날처럼 번뜩이고 있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카롱은 제 관자놀이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군가의 어려워진 미래를 훔쳐보는 점쟁이의 고뇌
같았다.
감정은 생생하고 행동거지도 자연스러웠다. 과거의 야생동물 같던 로젤린이 수많은 교육과 경험을 거쳐 훌륭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긴 했지만, 마카롱은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인간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이것들이…… 놀고 있네…….”
“그런데 저…….”
“이럴 때 할 말은 아닌 건 알지만…….”
“마카롱이 본명이십니까?”
“왜 이름이 없습니까?”
이름이 없는 무언가와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복잡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게 아닌가. 마치 심장이 없는 사람을 보는 듯했는데, 그 심장이 없는 사람이 ‘없어도 잘 살아 있으니 굳이
심장이 있을 필요는 없잖아?’라고 말하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다소 기괴하기도, 서글프기도 했으나 말하는 당사자가 보통 태연한 게 아니라, 그저 그런가?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특별하게 너는 마카롱 경이나 마카롱 님이나 둘 중에 하나로 부르는 걸 허락해 주마. 로젤린 동생만 아니었어도
너는…… ‘마카롱’의 ‘ㅁ’도 부를 깜냥이 안 되었을 것이란 사실을 명심하고 하루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해.”
“……예, 마카롱 님…….”
또한 유명 디저트의 이름을 극존칭을 사용해서 불러야 한다는 그 이상한 기분 때문에, 칼릭스는 앞선 싱숭생숭한
의문은 곧 잊게 되었다.
* * *
덜컹 덜컹.
마차가 작게 흔들릴 때마다, 소년은 창문에 바싹 붙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렇게 좋은 마차는 처음이었다.
소년이 전에 타 본 마차들은 죄다 쿠당탕, 덜커덕덜커덕! 하는 둔중한 소리가 났다. 몸이 둥실 떠오르고
구석으로 처박히는 일 또한 예사였고.
[리카르디스.]
앞에 앉아 있던 여인이 소년을 불렀다. 소년이 고개를 돌리자 어깨까지 오는 은발이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네, 어머니.]
[티아 좀 안고 있어 주겠니?]
곱슬거리는 은발의 어린 소녀가 그녀의 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손을 뻗어 동생을 건네받았다.
네 살이 되어 부쩍 무거워진 동생을 리카르디스가 낑낑거리며 고쳐 안았다. 세티스티아가 그의 품에서
칭얼거렸다. 말랑말랑하고 따끈한 동생에게서 우유 냄새가 물씬 풍겼다.
[별다른 일이라.]
그녀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차를 호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모두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에 녹색 눈, 한쪽 눈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까지.
[별 다른 일은 없나요?]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그것 참.]
밀리아가 탄식했다
[안타깝군요.]
별다른 일이라도 있길 바랐건만. 그녀의 옆에서 잇세리온이 허둥지둥하다 그녀의 소매 자락을 슥슥 당겼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고 말리는 모양새였다. 밀리아가 호호 연극적으로 웃다가 별다른 일이 생기면 꼭꼭
알려 달라 말했다. 페르탄은 고개를 살짝 까닥이고는 다시 물러났다.
[왜 화를 내고 그러니, 잇세리온.]
[주인님!]
잇세리온이 비명 지르듯 그녀를 부르자 밀리아가 검지를 제 입술 위에 가져다 대었다. 잇세리온이 급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아가씨의 단잠을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두 사람이 아옹다옹 다투는 모습을 보다가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세티스티아는 다시 밀리아의 품
안에 있었고, 자신은 잇세리온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슥슥 비비자 잇세리온이 곧바로
잔소리를 했다.
[응…….]
[좀 더 주무세요.]
[얼마나 왔어?]
[이번에는 정말 거의 다 왔어요.]
리카르디스는 다시 창문에 후다닥 붙었다. 아까와 풍경이 달랐다. 풀과 나무 대신, 반듯한 건물들이 군집해 있는
깨끗한 거리였다. 변방의 작은 영지에서 살던 리카르디스에게는 모든 것이 크고 멋있어 보였다. 그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자 뒤에서 잇세리온이 웃었다.
[도련님, 저기요. 위를 보세요.]
[황성입니다.]
[리카르디스.]
[다음 편에 계속....]
63 화.
모두가 둥글게 모여 앉은 지금의 모습에, 리카르디스는 어쩐지 이 널찍한 마차가 자신과 잇세리온, 르원 형제의
비밀기지같이 변했다 생각했다. 누구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고, 우리 편만 들어올 수 있는.
밀리아는 입을 꾹 다물고 비밀스런 정적을 지키다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마차가 황실의 문을 지나친 그 순간.
[여기는 아주 추운 곳이야.]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말하는 ‘여기’가 그 아름다운 하얀 성을 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름이 다가와 풀잎은
푸릇하고 햇살은 따가울 정도로 뜨거워지는 이때에, 그녀가 말하는 추위는 리카르디스에게 와 닿지 못했다.
[네, 어머니.]
[리카르디스. 힘들거야. 괴로울 거야. 하지만, 견뎌 낼 수 있어. 사람은 약하지만,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으니까.]
괴롭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녀의 말은 리카르디스에게 절대적이었다. 그러니 밀리아가 했던 말은 단순한 추측이
아닌, 빠른 미래에 실현될 예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확실한, 고통스러운 미래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까지요?]
* * *
황제는 최근 더 없이 인자해졌다. 사절단이 귀환한 후부터였다. 제 손으로 사지로 떠밀었다 해도, 어찌 부모의
마음이 편했겠느냐. 제 아들이 무사히 귀환한 모습을 보니 그 사실만으로도 기뻤으리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황성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면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마저도, 황제가 기분 좋은
이유는 단순히 사절단이 무사히 돌아와서가 아니라, 그들의 귀환으로써 황제가 얻게 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예상한 바와 같이, 황제는 큰 선물을 받고 매우 흡족해진 것이 맞았다. 리카르디스는 발타와
일라베니아의 동맹 서약서와 함께, 고급스럽고 작은 상자를 황제에게 건넸다. 전자는 사절단의 표면적인
목적이었고, 후자는 실질적으로 황제가 원했던 것이었다.
발타가 사용하는 강력하고도 위협적인 무기의 근원, 마력의 결정이었다. 아직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어떤
것도 밝혀내지는 못했으나, 그 존재만으로도 앞으로의 전황을 기대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으므로 황제는
기뻐했다. 황제는 선물을 받은 이후로 불면증을 깨끗이 떨쳤노라며 리카르디스에게 큰 상을 내렸다.
죽으라고 보낸 길에서 살아오다 못해, 선물까지 들고 온 대단한 업적을 이룬 리카르디스에게 귀족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황제가 엘피디오를 잠재적인 황태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쯤이야 알겠으나,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리카르디스가 괜찮은 패라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렇게 얻은 이득과 세력을 활용해 엘피디오를 견제해야 하는 지금, 리카르디스는 보다 중요한 안건으로 한시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중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리카르디스가 비스타를 떠나는 그날까지도 일어나지
못했던, 그의 호위 기사 때문이었다.
로젤린의 이름이 거대하고 힘 있는 자들의 입에서 오르고 내렸다. 다행히도 황제의 힘이 일시적으로나마 실려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로부터 로젤린을 뺏기란 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사실을 직감한 자들이 이번에는 그녀를 흠집을 내려 했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리겠다는 심보였을까.
헛소리를 하는 작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2 황자 전하를 구해 냈다고 하지만 마인이다. 암살자들을 손쉽게
이긴 것을 보니 뭔가가 수상하다. 어쩌면 검은달과 짜고 치는 연극이 아니겠느냐는 음모론이 돌기 시작했다.
“개소리가 참신한데.”
붉은수레바퀴. 황실의 역사와 나란히 영광을 짊어진 가문이었다. 강하고, 충성심이 뛰어나고, 제국의 명령이라면
한 몸 불사하는. 그야말로 대단한 사냥개.
세상에 더없을 충신,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불길한 힘을 지닌 마인임에도 불구하고 넓은 마음으로 그녀를
받아들인 2 황자 리카르디스.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은 얘기였다. 그리고 군중들은 소설 같은 이야기일수록 더욱
빠르게 받아들이고는 했다. 그녀가 검은달의 암살자라는 얼토당토 않는 얘기는 기지개 한번 펴 보지 못하고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녀에 대한 조사를 강경하게 외치는 자들이 있었다. 엘피디오의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델라브힘의 열렬하게 믿는 가문들도 속해 있었다.
이틀 뒤. 그녀의 처우에 관한 마지막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전하?”
“어머니……가 꿈에 나오셨는데…….”
밀리아의 얘기를 하는 리카르디스의 표정과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잇세리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아까보다 한결 가뿐한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황비님다우시군요.”
“별일은 아닙니다만.”
“르원.”
“수고 많았다.”
르원은 잇세리온의 동생으로, 홀쭉한 제 형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몸집은 두 배로 두꺼운 상급 기사였다.
하얀밤 기사단 상급 기사들의 주 임무는 리카르디스의 호위였으나, 르원은 달랐다.
성 외부에 독자적인 집단을 만들어 위험인물을 감시하고 때로는 실질적으로 손을 쓰기까지 했다. 기사보다는
용병이나 암살자 쪽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상급 기사들이 표면의 임무라면, 르원은 완벽한 뒷면의 일을 도맡은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64 화.
리카르디스가 이마를 짚었다. 하카브의 생각을 알고 싶지는 않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
궁금해졌다.
“가장 괴로운 건, 내가 관심없는 사람들의 은밀한 기호까지 알게 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 뭐랄까……
회의감? 그래, 그 회의감이 너무 짙다는 거야.”
리카르디스는 피곤해 보였다. 몇 주째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한 탓에 얼굴에도 그 영향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르원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니.”
“정확하십니다. 해도 됩니까?”
“안된다니까.”
르원의 얼굴에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리카르디스는 그가 하고자 하는 질문을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어째서 로젤린을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인지. 어째서 일개 호위 기사를 위해 이 위험을 감수하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이리라.
“르원.”
“예, 전하.”
“나는 무얼 위해 싸우나?”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리카르디스가 황제의 자리에 절대 앉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르원이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물었다. 어떻게 감히 자신이, 그에게 그저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이 의미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 * *
“…!…!……!”
“형님.”
“앉아라.”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느냐고?”
“죄송합니다.”
엘피디오가 협탁에서 파이프를 꺼내어 입에 물며, 잔뜩 인상을 쓰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디에즈가 황급히
일어나 파이프에 불을 붙여 주었다.
엘피디오가 깊게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방 안에 연기가 퍼졌다. 디에즈는 코를 움찔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연초가 아니었다. 분노로 젖어 있던 엘피디오의 눈동자가 차츰 진정되는 게 보였다. 최근
일라베니아 내에서 금지하는 마약인 것 같았다.
“착하구나, 디에즈.”
“아, 리카르…….”
디에즈가 입을 닥쳤다.
“죄송합니다, 형님.”
“급한 대로 일라베니아 내의 길드에 도움을 좀 받았지. 맡겨만 달라고 떵떵거리더니…… 쓸모없는 새끼들…….”
암살자를 죽이는 일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일라베니아의 황제가 머무는 금강석 성 다음으로 경비가
삼엄한 석영 성에 누구의 눈에 띄지도 않고 시체를 가져다 놓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디에즈가 놀란 것은 그 불가능에 가까운 업적을 리카르디스가 이루어 냈기 때문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소극적인 인물이었다. 암살자를 보내면 처리하고, 막아 내기만 한다. 전장에서 공을 세워 얻게 된 권력이
위협적일지언정, 물리적으로 엘피디오를 공격하려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는 그의 동생 세티스티아
황녀가 죽었을 때조차.
그런 그가 지금 처음으로 날아온 화살을 다시 돌려보냈다. 얼마나 잘 벼려져 있건, 그 무기가 얼마나 강하건
검집 안에서 꺼낼 줄 모르던 리카르디스가, 처음으로 엘피디오를 향해 날을 겨눈 것이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사선에서 돌아온 그 대단하신 영웅님 말이야. 그녀가 리카르디스의 행동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엘피디오가 또 인상을 찌푸린 채 두리번거렸다. 디에즈가 얼른 일어서서 바닥에 뒹굴고 있는 재떨이를 집었다.
“그대로 들고 있거라.”
[다음 편에 계속....]
65 화.
자신이 올려다보는 상황이 기분 나쁜 듯, 엘피디오가 고상하게 명령했다. 디에즈가 무릎을 꿇었다. 두 손에는
공손히 재떨이를 들고 있는 채였다. 엘피디오는 그제야 만족한 미소를 보였다.
“…….”
“예, 형님.”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디에즈가 입술을 꽉 물었다. 로젤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성에 창백한 얼굴로 잠자고 있던. 그리고 더 과거의 일도.
디에즈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깨달았다. 참담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왜 이러고 있는지 잊은 것도
아니건만, 그녀는 자신을 너무 약하게 만들었다.
“……형님.”
“그래.”
* * *
칼릭스도 편지를 받았다. 리카르디스가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황가의 인장이 떡하니 찍혀있는 서신을 받았음에도
칼릭스는 좀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로젤린에 관해 할 말이 있다는 내용이었고, 칼릭스는 드디어 올 것이 왔노라
생각했다.
세티스티아의 죽음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한번 심하게 비틀렸지만, 로젤린은 그때에도 리카르디스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노력으로써 이어진 시간이었다. 비록 그 속에 어떤 감정들이 얽히고설켰는지는 몰라도.
그러니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아무리 무관심했더라도 이전의 로젤린과 현재의 로젤린을 같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테다. 기억상실이라는 어설픈 변명으로 눈을 가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칼릭스는 조금씩 닳은 그
한계가 지금에 와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때, 파르딕트의 방패를 부수라 명령한 사람이 리카르디스라고 하니 이건 뭐 들킨 건 확정이었다. 그녀가
돌보다 단단한 물건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하지만 칼릭스는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다. 제 누이가 이 성에서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 리카르디스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전대미문의 강력한 마인이 나타났음에도 주변의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로젤린이 2 황자를 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이유를 전부 설명할 수 없었다. 나쁜 얘기가 나오려고 하면 어디서부턴가 정보가 미묘하게 비틀리며
순화되었다. 로젤린이 어릴 적부터 얼마나 총명하고 자애로웠느냐를 알 수 있는 과거의 사소한 얘기들이 골목
사이마다 돌아다녔다.
더불어 밝혀지지 않았던 2 황자의 미담들 또한. 삼 년 전에 전국에 구휼미를 대대적으로 풀었던 모래절벽 자작이
사실은 2 황자의 또 다른 신분이었다나 뭐라나.
대륙 여기저기에 손을 뻗은 거대한 상단의 주인이자, 돈이 흐르는 줄기를 따라 정보를 옮기는 황금정원 가문의
솜씨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 리카르디스가 있으니 그가 주도했다 말해야 정확할 지도 몰랐다. 2 황자는
이런 여론 몰이를 즐겨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누구의 손, 누구의 발을 빌렸는지 티 나게 행동하고
있었다.
“……만장일치가 말이 되나?”
1 황자 파가 포진한 그 회의에서 만장일치라는 결과를 이끌어 냈다는 것은 단순한 수완의 문제가 아니었다.
칼릭스가 알터를 흘끗 바라봤다. 알터가 눈썹을 까딱하며 알아온 또 다른 정보를 풀었다.
칼릭스는 그 남자를 변화시킨 것이 어쩌면 제 누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 얼토당토않은가 싶다가도,
그의 행보를 보고 있자니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닌 듯도 하고. 머리가 복잡했다.
리카르디스가 그런 것처럼 칼릭스도 그에게 볼일이 있었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어찌
되었건 좋은 기회였다.
칼릭스는 감격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인 아버지도, 자신도 없는 영지를 걱정하는 제 누이의
발전이 너무나 대견했다.
로젤린은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은말 자작에 관해서
내가 일러 준 적이 있던가? 곧바로 창밖에서 마카롱이 날아오자 그의 신경은 금세 다른 곳으로 돌려졌다.
“응.”
“그럼 하던 걸 마저 할까요?”
[다음 편에 계속....]
66 화.
이번에도 주방에서 주방장과 노닥거리던 로젤린을 칼릭스가 잡아 왔다. 책상 앞에 앉아서도 로젤린은 끝까지
딴청을 피웠지만, 칼릭스가 크레페 케이크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대치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카롱이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제 누이를 먹을 거로 교육하다니 저 자식도 좀
너무하다.
“전장의 수레바퀴.”
“훌륭하십니다.”
로젤린이 부상으로 기절해 있는 동안, 마카롱은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을 본 적 있었다. 정말…… 정말 너무
잘 어울렸다. 마카롱은 “이야, 이야.”, “진짜.” 따위의 감탄사를 계속 내뱉었다. 로젤린이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 * *
칼릭스는 수도로 떠나기 전 로젤린이 보았다던 마인을 찾고자 했다. 검은달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들은 여전히 ‘파편’과 마력의 결정으로 탄생한 인위적인 마인 부대를 무기 삼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인이 많은 비스타라고 해도 자신이 마인이라며 이마에 써 놓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기에,
우선적으로 로젤린이 얼굴을 알고 있는 소매치기 소년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칼릭스는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로젤린과 마카롱에게 이 건에 대해 넌지시 말을 꺼냈다.
마카롱은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더니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칼릭스는 마카롱의 비협조적인 반응과
태도에 익숙해져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도리어 순순히 도와주겠다 하는 쪽이 이상할 것이다.
“아, 네. 죄송합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칼릭스의 입에서 저절로 사죄의 말이 나왔다. 그때 로젤린의 표정은 뭐랄까. 마음 속
깊숙이 무언가를 묻어 둔 사람 같았다. 그렇다. 사람 같았다.
칼릭스는 여러모로 충격을 받아, 두 번 다시 마인을 찾아보자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안 됩니다, 도련님!”
나를 왜 봐? 응?
“순탄한 여정이 되길 빌어. 네 주위에는 항상 사고가 끊이지 않으니 말이야. 다음에 만날 때까지 건강하렴.”
“네.”
무뚝뚝한 목소리 속에서 들떠 있는 그녀의 기분을 읽을 수 있었다. 칼릭스는 한숨을 삼키고 처진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로젤린은 말에 올라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는 백작의 모습이 보였다.
백작이 쪽 소리를 내며 손 키스를 그녀에게 날렸다. 그게 무슨 행위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나, 로젤린은
곧 어설프게 백작의 행동을 따라했다. 그게 어찌나 귀여웠는지 백작은 한참을 더 웃었다.
그녀의 조급함을 이해했기 때문에 하루 이틀 정도는 칼릭스도 최선을 다해 로젤린의 속도에 맞춰 말을 몰았다.
하지만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곧 한계를 맞이했다. 칼릭스는 창백한 얼굴로 헛구역질을 했다. 하도
달리는 말 위에 앉아 있다 보니 눈앞이 노랗게 변하고, 속이 다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태어나기를 강골로 태어나 그 아버지 밑에서 단련받았다. 전쟁도 겪어 봤고 일부러 몸을 괴롭게 하는 훈련도
수없이 했다. 그래도 평생에 걸쳐 감기 걸린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한 번도 심하게 앓은 적 없었는데. 고작
삼 일 만에 이 지경이 되다니. 삼 일 만에.
“괜찮아?”
칼릭스는 괜찮다는 말 대신 욱욱하는 헛구역질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은 제 수통을 열어 칼릭스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나머지 손 한쪽은 동생의 등을 두드리기도 하고, 그의 이마를 쓸어 넘기기도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중이었다.
칼릭스는 떨리는 손으로 물을 받아 마셨다. 하늘을 선회 중이던 마카롱이 나뭇가지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런가 봐.”
“어디가?”
삼 일 동안 노숙하면서 세 시간만 선잠을 겨우 자고, 밤낮없이 미친 듯이 달리면 이렇게 됩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마카롱은 규격 외라고 하더라도 제 누이는 인간의 모습이라 방심했다. 그들은 전혀, 일말도 칼릭스가 왜
아픈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유는 알더라도 그것을 공감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어쩌면 이렇게 허약한 생물이 있지? 라고 생각하는 눈빛들이었다. 마카롱은 칼릭스를 약골이라며 놀릴 생각에
내려왔지만, 그의 낯빛을 보고 심각해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인간들은 날붙이로 생긴 아주 아주 작은 상처로도
죽는 재주가 있는 종족이었다.
“죽지 마라.”
독수리의 눈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칼릭스는 새의 농담에 하하 웃다가 그 목소리가 한없이 진지한 것을 알아챘다.
진심이었나…… 그의 웃음이 뚝 끊겼다.
마침 그들의 옆을 지나가던 상단의 마차가 멈춰 설 정도의 비통한 목소리였다. 상단주가 도움을 주겠다며 친절을
발휘했다. 칼릭스는 수치스러움에 발개진 얼굴로 사양했다. 말을 장시간 타다 보니 컨디션이 좀 안 좋아졌을
뿐이라고.
[다음 편에 계속....]
67 화.
혀를 마비시킬 정도의 저릿한 쓴맛과 비린 맛의 환상적인 조화였다. 절로 눈물이 나왔다. 칼릭스는 너절해진
낯으로 입가를 쓸며 제발 천천히 가자고 부탁했다. 요즘따라 울 일이 잦았다. 그것도 주로 로젤린, 제 누이와
관련된 일로만. 로젤린이 칼릭스의 눈물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동생의 눈물 때문인지 로젤린은 자주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타인과 함께하는 여행의 속도를 깨우친 듯했다.
밤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마을이 보이면 적당히 잘 곳을 찾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큰 영지에 도착할 쯤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늦은 밤이라 불빛마저 잠들어 있었으나, 타지의 손님을 반기는
여관들이 바다의 횃불처럼 길을 안내했다. 멀리 있는 여관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던 때였다.
로젤린이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계속 좌우를 훑었다. 그녀의 행동을 칼릭스가 주시했다. 길이 좁은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것도 아닌 한적한 밤 거리. 그녀가 신경 쓸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칼릭스는 로젤린의 감각이 일반적인 인간이 느끼는 범위보다 훨씬 폭 넓고 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그녀만 감지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로젤린은 평소보다 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날카로운 눈빛은 흐릿한 빗줄기
너머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는 했지만 칼릭스는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된 행군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급격하게 말수가 줄기 시작했었다. 비를 싫어하시나?
로젤린의 주머니로 들어가려던 독수리가 삐애애액 울부짖으며 칼릭스를 위협했다. 대놓고 불만스러워 하는
모습에도 칼릭스는 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재촉했다.
마카롱은 로젤린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며 그녀를 살펴보더니 순순히 칼릭스에게 왔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진짜 상태가 안 좋잖아?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이상 상태가 혹시나 ‘그것’들의 특성인가 생각했지만, 마카롱의 상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마카롱이 쥐로 변해서 칼릭스의 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간식으로 넣어 둔 땅콩 몇 알을 먹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과 한 마리를 뒤로 하고 로젤린은 말고삐를 꽉 쥐었다. 그녀의 감각이 넓게 열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주위를 떠돌았다. 골목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날카롭다. 집집마다 울려 퍼지는 말소리와
웃음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로젤린은 제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 빗소리와
희미한 몇 개의 불빛.
기시감이 들었다. 겪어 보지 못했으나, 가슴을 두드리는 이 불안함과 온몸을 눅눅하게 만드는 습기가 익숙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로젤린은 후드를 더 꾹 눌러쓰고 말을 재촉했다.
일행은 곧 여관에 도착했다. 칼릭스가 일꾼에게 말을 맡기는 사이, 로젤린이 먼저 건물로 향했다. 빨리 안에
들어가서 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로젤린이 여관의 문고리를 잡았다. 물에 젖어 한층 차가워진 온도가
로젤린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끼이익…….
낡은 문이 열렸다.
쾅!
굉음이 울렸다. 마침 여관 밖을 나서려던 남자가 로젤린에 의해 흙탕물에 처박혔다. 남자는 일격에 기절했고, 그
남자를 기절시킨 장본인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깜박 깜박거렸다.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듯했다.
로젤린의 재빠른 사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일행은 노발대발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칼릭스는 몇 번이나 죄송하다
거듭 사과하고 물질적인 보상을 했다. 일행과 그 당사자는 싱글벙글한 낯으로 사람이 놀라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느냐 했다. 로젤린은 그 긴 피해 보상의 시간동안 그저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로젤린은 갑자기 떠오른 기억을 여러 번 반복하며 형태를 다듬었다. 점점 선명해졌다.
조용한 숲을 울리는 빗방울 소리. 어두운 밤. 빛이 쏟아지던 작은 공간. 그 빛 사이에 있는 남자. 우연히
맞물려진 상황이 로젤린의 안에 깊게 가라앉아 있던 몇몇 단편적인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로젤린’의 기억은 절벽 아래로 떨어진 시점부터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발밑이 꺼지는 공포를 느꼈고, 어두운
숲을 달리고 있었고, 넘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로젤린’은 숨소리를 죽인 채 막사 앞에 서 있었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천막의 틈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로젤린’의 시야가 흔들렸다. 하얀 털로 뒤덮인
야수의 손과 날카로운 손톱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로젤린’이 헉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미동도
없던 누군가의 거대한 손이 꿈틀, 움직였다.
기억이 다시 순서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급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천막이 펄럭이며 바람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쫓아 온 자의 공격으로 인해 등이 찢긴 채 앞으로 넘어져 몇 번을 굴렀다. 큰 상처를 입었지만,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밟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그녀가 주먹을 냅다 질러, 남자가 화려하게 날아감과 동시에 부서졌다. 그 거친 움직임으로
로젤린의 후드는 벗겨진 상태였다. 그녀의 머리 위로 비가 쏟아졌다.
* * *
로젤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칼릭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칼릭스의 이런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붉은수레바퀴 저택에 있을 때, 무언가를 깨트려 날카로운 조각에 다치거나, 목욕하고 머리를 안 말리고 나오면 꼭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칼릭스를 흘겨봤다. 나도 다 사정이 있었던 건데. 하지만 칼릭스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지 재차 물었다.
“무서운 곳에 간다…….”
칼릭스가 왁 소리를 지르자 로젤린은 기겁했다. 마카롱도 펄쩍 뛰면서 칼릭스의 목덜미를 찰싹찰싹 쳤다. 꼭 그럴
것까지야 있느냐며 말리는 느낌이었다.
“나쁜 사람……?”
그녀의 말에 칼릭스는 당황했다. 로젤린에게 무섭다는 감정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으음,
신음하고는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왜 무서우셨습니까?”
칼릭스는 침대에 앉아 있는 로젤린을 올려다 볼 수 있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로젤린의 손이 차가워, 칼릭스는
그녀의 손을 슥슥 문지르며 제 체온으로 덥혔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질문에 한참 동안 고민했다. 과거, ‘로젤린’의 기억. 기억에 실려 온 감정의 파편. 말로
풀어 설명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그녀는 인상을 쓰고 머리를 굴린 후 말했다. 몇 개의 촛불이 칼릭스의
눈에서 떠다녔다.
칼릭스의 눈동자가 촛불을 집어삼키며 더욱 형형해졌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손아귀 힘이 일순 강해진 것을 느꼈다.
잘못 봤다고 착각할 만큼 아주 짧게 몸이 덜컹이기도 했다. 칼릭스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게 잠겼다.
“네.”
로젤린은 더듬더듬 끊겨 있는 기억을 말했다. 칼릭스는 차분하게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네, 그랬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눈동자는 불타오르기도 했고, 차가운 무언가로 뒤덮이기도
했다.
[다음 편에 계속....]
68 화.
로젤린은 어쩐지 변명해야할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손 쓸 방법도
없었다는 것까지. 칼릭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등을 슥 쓸었다.
“그랬습니까.”
“으응.”
칼릭스는 이미 로젤린이 과거 제 누이의 기억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가르쳐 주지 않은
사소한 행동이라던가, 과거 그녀의 말투, 정보. 그것들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인지하고 있었기에.
“칼릭스…….”
“……누님.”
“괜찮아? 약 먹을래?”
깜깜한 시야 위로 다정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칼릭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젤린이 제
무릎 위에 엎어진 칼릭스의 뒷머리를 살살 쓸었다. 곧게 뻗은 목덜미가 촛불에 희게 빛났다. 희게 질린 것일지도
몰랐다.
“무서우셨습니까?”
로젤린은 실제로도 제 심장을 쿵쿵 쳤다. 칼릭스는 로젤린의 손에 얼굴을 묻고 있어 그녀의 행동을 보지 못했지만,
울리는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칼릭스는 상상했다. 로젤린의 말을 토대로. 어두운 숲속, 쫓아오는 추격자, 뛰는 심장, 두려움, 절벽. 찰나의
부유감.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다. 로젤린이 가슴을 치는 것으로부터 오는 진동이 칼릭스를 크게 흔들었다. 쿵, 쿵!
마치 온몸을 두드려 맞는 것 같았다.
“많이 아프셨어요?”
덧붙이는 말이 상냥해서 사랑스러웠다. 칼릭스는 울었다. 그 어두운 숲길을 달리던 두려움과,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미안했다. 혼자서 떨었을 누이가 가여웠다.
* * *
눈을 떠 보니 아침이었다. 칼릭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젤린의 침대가 비어 있었다. 화장실 쪽에서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부은 눈을 비비며 침대를 내려가려던 칼릭스는 놀라서 제자리에서 펄떡 뛰었다. 침대 아래에
물컹한 무언가가 있었다. 완전히 밟기 전에 눈치챈 것이 다행이었다.
칼릭스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되짚었다. 확실히 제 누이의 죽음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는 생각해 왔다. 왜 하필 그 절벽에서? 전투가 일어난, 막사의 정 반대편에서 왜 혼자? 칼릭스가 아는
로젤린은 적을 눈앞에 두고 도망칠 사람이 아니었다.
벌컥.
“좋은 아침.”
남자는 칼릭스의 경계를 담담히 흘러 넘겼다. 태연자약하게 작은 침대에 걸터앉기까지 했다.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날카로운 인상이 분위기에 힘입어 더욱 흉흉해졌다. 남자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부스럭거리면서
빵과 과일을 꺼내었다.
“……마카롱 님……?”
“아…… 예, 뭐…….”
“옷도 빌렸다?”
칼릭스는 속으로 남자의 죽음을 잠시간 애도했다. 마카롱은 체리를 한 알 먹더니 오, 하며 감탄했다.
“…….”
“마카롱 님.”
“어려울 텐데.”
이 종족…… 자신감이 정말 넘쳐 난다. 칼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위험 요소를 주위에 둘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누님께서도 기억해 내신 만큼 경계할 테지만, 상황상 나서기
힘든 경우도 있을 테니, 마카롱님께서 잘 좀 봐주시죠. 혹시 누군지 알아내신다면, 저에게 꼭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맡겨 놨냐?”
“꼭 좀 부탁드립니다!”
“많이 모자라니깐…….”
그녀를 바라보던 마카롱이 고개를 돌려 칼릭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남자의 눈동자가 맹수의 것처럼 쭉 찢어져
있었다.
“네.”
남의 누이를 이거 저거하면서 거시기 하다며 욕하는 통에 칼릭스는 뚱해졌다. 마카롱이 피식 웃으며 칼릭스의
볼을 꼬집었다.
로젤린, 제 누이가 강하다는 것쯤은 이미 칼릭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마카롱이 말하는 것은 그것과는 또
궤가 다른 이야기인 듯했다. 마카롱이 중얼거렸다.
마카롱이 로젤린의 산발이 된 머리를 하나로 땋았다. 로젤린은 체리를 먹다가 화색을 지었다. 맛있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칼릭스는 마카롱이 던져 준 맛없는 사과를 먹었다. 곧 로젤린이 그의 입에 체리를 넣어 줬다.
달콤하고 맛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69 화.
로젤린은 칼릭스를 염려해 쉬어 가자고 했으나, 칼릭스는 초췌한 얼굴로도 멈추지 않았다.
* * *
놀랍게도 칼릭스는 살아서 수도에 도착했다. 그들의 행군은 과하게 빠른 감이 있었다. 칼릭스처럼 단련된 남자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다.
성문 앞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이 도착해 있었다. 레이몬드였다. 로젤린이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말
위에서 펄쩍 뛰어 날아드는 모습에 레이몬드가 기겁해서 그녀를 받았다.
“위, 위험하잖아!”
“발랐어.”
그는 로젤린이 생긋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몇 번 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를 꼭
안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카, 칼릭스?”
심지어는 굉장히 까칠하기까지! 로젤린이 멀쩡하기에 눈치 못 챘는데, 역시 여행의 속도가 빠르긴 빨랐나 보다.
어린놈 답지 않게 언제나 냉철하던 칼릭스가 저렇게 흐트러질 정도면.
뒤늦은 반항기가 도래한 걸 보니, 정말, 정말 힘들었나 보다. 레이몬드는 어설프게 웃으며 로젤린을 놓아줬다.
칼릭스의 까칠한 모습을 본 로젤린이 연장자한테 그러면 못쓴다고 훈계했다.
로젤린은 그 꼴로도 태연하게 단장실로 향하려 했으나, 레이몬드가 기겁해서 말렸다. 기숙사 가서 제복으로
갈아입고 가야 한단다. 조금 귀찮았지만 인간 세상을 조금이나마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에, 로젤린은 그것이
필요한 과정이란 것을 인정했다.
기숙사에 도착했다. 로젤린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가에는 빗자루와 물 양동이가 놓여 있었다. 로젤린의
수습 기사,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방을 부지런히 청소 하는 중인 듯했다. 슥슥 삭삭. 쉬지 않는 빗질 소리에
기합이 잔뜩 들어 있었다.
‘레티시아.’
3.
2.
1.
쉬익!
수습 기사들을 교육하던, 다른 말로는 습격하던 초반에는 수도로 목덜미를 내려쳤다. 어느 정도 위기감이 있어야
한다는 로젤린의 판단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습격을 감행할 때마다 그들이 번번이 기절해 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심지어는 반나절씩.
로젤린은 평소보다 날카롭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움직임에 옷자락이 흐트러지자, 그 미세한 소리를 들은
레티시아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빗자루를 등 뒤로 돌렸다.
탁!
로젤린의 공격이 정확하게 빗자루에 막혔다. 오, 제법인데. 로젤린이 씨익 웃었다. 레티시아는 사나운 얼굴로
뒤돌았다.
“훌륭합니다. 레티시아.”
“아, 검은 달을 가르는…….”
두 사람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경례를 먼저 해야 했는데 반가운 마음이 앞서 말이 횡설수설 두서없이
나왔다. 로젤린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과 떨어져 있었던 게 두 달도 되지 않았는데, 쑥쑥 자라 있었다. 실력도, 육체적 성장도. 로젤린과 눈높이가
비슷했던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키를 넘어섰고, 진즉에 로젤린보다 컸던 레티시아도 훌쩍 자라 칼릭스와 비등할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습 기사들은 로젤린 옆에 딱 붙어서 조잘조잘 아기 새처럼 떠들어 댔다. 로젤린 경이 습격해 주지 않아서 좀
허전했다는 둥,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습격했다는 둥. 요즘 다른 수습 기사들이 우리들을 부러워 한다는 둥,
조금은 쓸모없는 내용도 있었지만 로젤린은 하나하나 고개를 끄덕여 가며 반응했다.
그녀가 에버하르트의 갈비를 팔꿈치로 푹 찍으려 했지만, 피하는 것만은 이제 수준급이 되어 버렸는지 간단하게
막았다.
‘이게!?’
“나가.”
“잠시만 좀 더…….”
에버하르트는 밀려나지 않았다. 말라깽이 같던 예전에 비해, 근육도 키도 성장한 덕분인 듯했다. 이게 왜 버티고
난리야!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며 소음을 만들어 냈지만 로젤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맛있는 게 많았습니다.”
“아, 맞아요.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까 다른 지방의 음식들도 되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살기 넘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에버하르트가 움찔했다. 하기야, 자신이 생각해도 좀 제정신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그런 얘기들을 다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대륙을 강타한 그 영웅담의 주인공이 제 상급 기사이니, 자신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보니 다가오는 게 남다른
듯했다.
[다음 편에 계속....]
70 화.
그녀가 마인이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상급 기사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얘기가 자자하게 공표된 날.
에버하르트는 지금과 같이 흥분하면서 “끝내주는데!”라는 말을 했다가 레티시아에게 얻어맞았다. 하여간 언동을
고급스럽게 좀 쓰라 했더니…….
마인이라는 점이 문제될 뻔했으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다른 기사단과 귀족들이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는
모습은 하얀밤 기사단을 하나로 뭉치게 함에 모자람이 없었다. 다들 속에서 부글부글 뭔가가 끓어올랐다.
아니, 기사가 충성심 뛰어나고 잘 싸우면 됐지! 마인이니 아니니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요즘도 촌스럽게
마인이 불길하다고 박해하는 그런 사람이 있었나? 어느 시대 사람이지, 당신은?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그녀를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넣기에 급급했다. 욕해도 내가 해. 우리
하얀밤 기사단원을 왜 네가 욕해!
언제나 정중하고 고결했던 하얀밤 기사들이 시정잡배들처럼 껄렁한 폼과 빛나는 눈으로 사냥감을 물색하고 다녔다.
로젤린의 ‘로’ 자만 나와도 어디선가 하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귀신
같은 솜씨로 인해 모두들 입단속을 해야만 했다.
로젤린과 직접 등을 맞대고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자들은, 아 역시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어쩐지 세더라니
마인이었구나. 파편에 중독되고도 살아남더라니. 마인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상급 기사들의 얼굴에서는
다행이다, 라는 숨겨진 뒷말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 * *
“많이 회복하셨습니다.”
“식욕은?”
리카르디스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까랑 비슷한 행동인데 의미가 확연하게 갈렸다.
“아플 때는 잘 먹어야지.”
“그……렇습니다…….”
칼릭스는 포기하고 열심히 과거를 돌이켜 보며 제 누이가 소고기 파인지 돼지고기 파인지를 판별했다.
“생선보다는 육류겠지?”
“사실 생선도 좋아하십니다. 가시를 좀 거슬려 하시긴 하는데, 발라 드리면 잘 드십니다. 짭짤하고 쫄깃한
생선보다는 담백하고 부드러운 쪽을 선호하시고요.”
잇세리온은 진지한 표정으로 깃펜을 열심히 놀렸다. 칼릭스는 흘끗 그 종이에 써진 내용을 봤다. 방금 전에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상하게 쓸데없는 그 정보들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회의 결과를 써 내려가는
듯 신중한 표정이었다.
“생크림을 더 좋아하십니다.”
“그럼, 그녀는?”
“예?”
칼릭스는 집무실에만 들어올 때만 해도 마음에 단단히 울타리를 세우고 방패를 들고 있었다.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막아낼 만큼 공들여 세운 울타리였으나, 리카르디스의 이상한 질문 때문에 틈이 생겨 버렸다.
칼릭스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지금 리카르디스가 무엇을 말한 것인지 반추할 정신도
없었다.
‘지금 뭘 적는 거야…….’
황당했다.
“7 년이나 내 밑에 있었는데.”
“…….”
아, 뭐랄까 그 표정이…….
어딘가에 있을 제 누이를 끌어다가 보여 주고 싶었다. 하다못해 그림이라도 그려서 보관하고 싶었다. 기뻐하지
않았을까? 누이의 일생을 크게 차지하고 있던 그 사람의 한구석, 그 한 자락을 누이도 차지하고 있었네요.
“쌉싸름한 홍차와 달콤하고 고소한 쿠키의 조합을 좋아하셨죠. 브라우니도 좋아하셨을 겁니다.”
* * *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을 찾아온 손님으로 인해 잠시 대화가 끊겼다. 칼릭스도 안면이 있는 자였다. 황금정원의
클로에. 황금정원 자작의 장녀이자, 큰뿔산양 레이몬드의 약혼자였다.
[다음 편에 계속....]
71 화.
“흥미로운 소식이군. 이 주 전, 라고슈 왕국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정보를 잘 은폐했는지 이제야 소식이
들어왔어.”
“뭐…… 그런 식으로 일라베니아를 압박하려는 요량인가 봅니다. 일라베니아 측에서 라고슈를 경계하며 병력을
완전히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얻는 이득이 있을 테니까요.”
리카르디스가 서류에 슥슥 몇 글자를 더하더니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아까보다 흥미로워
하는 기색이었다. 뭔가 급하거나 보다 더 중요한 안건이리라.
큽. 칼릭스는 역류하는 찻물을 겨우 삼켰다. 급한 서류가 아니었잖아! 아니, 라고슈 왕국의 내전이 발생했다는
중요한 안건 다음에 왜 저런 쓰잘머리 없는 것이 끼어 있어!
“제 뒷조사를 하셨습니까?”
“이런. 오해하지 말게. 로젤린 경의 소문에 딱 붙어서 와 버린 탓이니. 그래서 리쉬의 꿀은 맛있던가? 하나씩
먹어서는 성이 안 찰 텐데. 가는 길에 하나 선물하지. 이렇게 종이에 쌓인 꽃다발 말고, 유리병에 담긴
걸로다가.”
“…….”
“예, 전하.”
칼릭스는 지금 실시간으로 정보가 분류되어 퍼지게 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확실히 이 건은 수도에서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특히나 황제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만한 여지가 있었고, 그런 정보들은
뒤틀려서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칼릭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 황자가 제 누이의 울타리를 자처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눈앞에서
보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일개 호위 기사를 위해서 이렇게까지나 손을 쓴단 말인가?
“이봐, 경.”
“예, 전하.”
“물어뜯기도 좋지만,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눈앞에 있는 게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을 못하는 사냥개를 사냥개라
부를 수 있나?”
칼릭스의 표정이 이상하게 구겨졌다. 일라베니아 황실의 사냥개. 번견으로 불리는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특성상,
‘개’나 ‘개새끼’ 따위의 말을 많이 들을 수밖에 없었으나, 보통은 당사자가 없는 뒷담에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렇게 대놓고 들으니 감회가 새롭기도 했지만 우선적으로 열이 조금 올랐다. 리카르디스가 그의 표정을 보고
아차 하더니 혀를 찼다. 쯧.
“나와 그대가 비록…… 그다지 좋지 못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을지언정,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기도 하는 세상 아닌가. 아, 그렇다고 경과 내가 친구라는 얘기는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비웃음에 가깝던 입매가 부드러워지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칼릭스는 자신을 쳐다보는 리카르디스의 모습에 놀랐다.
저런 눈빛을 하는 사람이었나, 저 사람이?
녹아 내렸다. 그의 미소에 사르르. 칼릭스는 제 표현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하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마음 깊숙이는 이해하지 못 했던, 믿지 못 했던 일말의 불신이 정말 눈 녹듯 흘러내려 어딘가로 떠내려가 버렸다.
단순히 제 누이를 위해 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명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저 믿음이 갔다. 그 담담한 말투 때문인지, 날카로우면서도 이따금 풀어지는 표정 때문인지, 누군가를 그리는
다정한 눈빛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정확하게 폐부를 찌르는 말을 했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칼릭스는 자신이 멍청하게 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는 아버지? 아직 제 손에 들어오지도 않은 붉은수레바퀴 가문? 그,
1 황자 엘피디오? 아니면 그 엘피디오의 아버지인 황제? 그 누구도 정확하게 제 누이의 아군이 아니었다.
제 누이는 강했다. 하지만 그 강함이 귀족 세계에서 반드시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라는 무기를 쥐고 흔들기
위해 많은 자들이 손을 뻗칠 것이다. 칼릭스는 자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나의 힘만으로는 제
누이를 온전하게 지킬 수 없다.
칼릭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사람의 이목이 확 집중되었다.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는 ‘칼릭스가 얼마나
로젤린을 닮았는가’에 대해 토론 중이었다. 칼릭스가 한쪽 무릎을 꿇자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슥 들렸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에스터가 설원의 월계수 앞에서 진실 된 맹세를 하고자 합니다.”
“미친…….”
아주 아수라장이었다.
“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
72 화.
“이게, 무슨 지금…….”
칼릭스는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웃었다. 잇세리온은 그 짧은 사이 너절해져 있었다. 리카르디스도 심각한
얼굴로 잠시 입을 가리고 시간을 보냈다. 생각보다도 이 돌발 행동의 여파가 컸는지, 십 분의 시간이 말없이
흘러갔다.
“일단 제 결심을 보여 드리고자.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저라는 인간의 가치가 단순히 무력에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지…….”
리카르디스는 아까의 칼릭스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미심쩍고, 수상하다는 듯이. 숨기지도 않고 아주 대놓고
흘겨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풀썩 앉았다. 멀쩡한 의자를 두고 다들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착석했다.
“칼릭스 경,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이냐면.”
“예, 전하.”
“그렇습니까.”
리카르디스는 손가락으로 벌의 궤도를 그리는 시늉을 했다.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칼릭스는
웃음을 꾹 눌렀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 말하라. 물어도 되겠느냐고 하지 않는 것은 그대가 내 사람이라고 서약했기
때문이다.”
리카르디스는 진절머리를 내며 인상을 썼다. 퍽 징그럽다는 듯 보는 시선에 칼릭스는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칼릭스는 “예.” 하고 대답했다. 딱딱한 결심이 묻어 있었다. 그래야만 하는 때입니다. 리카르디스는 칼릭스의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봤다.
“…….”
“영광의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를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의
기사로 임명한다.”
“전하!”
잇세리온이 소리쳤다. 손뼉을 마주치지 않으면 그나마 불발이건만, 제대로 짝 소리가 나 버렸다.
“예, 전하.”
정보가 오고 갈 때마다 잇세리온이 ‘헉, 억!’ 따위의 감탄사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는 바람에 몇
번이나 중단 되었다.
칼릭스는 말하는 틈틈이 리카르디스의 반응을 확인했다. 이미 정보를 습득 했거나, 미리 짐작을 했다는 듯
침착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놀랍게도, 그는 칼릭스의 예상보다도 로젤린에 대해 많이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드물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제
누이가 전과 완전 별개의 존재임을 어찌 알았느냐고?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예, 전하.”
로젤린이 과거의 ‘로젤린’과 같은 존재가 아님을 자신이 알고 있노라 제 누이에게 알리지 말라는 얘기였다.
칼릭스는 입을 다문 채 그의 깊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지금 리카르디스가 말하는 것으로부터 올 어떠한 이득이나 손실을 재어 보려 했으나 생각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그 또한 미지수였다. 그러나 그가 제 누이에게 해가 될 만한 무언가를 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명 받듭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라…….’
그는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천천히 머릿속에 광경을 그렸다.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의 정체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여자, 남자? 나이는, 직위는, 목적은?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리카르디스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로젤린이라면 근무 중 함부로 자리를 이탈하지도, 다른 이의 천막을 함부로
드나들지도 않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검지로 탁자를 딱딱 두드렸다.
‘그렇다면 임무의 연장선일 가능성이 크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그녀에게 따로 임무를 내렸다는 얘기는 못 들었으니, 사냥 대회에서 죽은 부단장과 관련이
되어 있을 테다. 부단장이 그때 당시의 부단장 부관, 나단을 두고 굳이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는 얘기는……
그 심부름의 대상과 로젤린이 친분이 있는 사이였을지도.
공격은 망설임이 없었다. 목표물이 절벽에서 떨어질 때까지의 집요한 추적. 단순한 쾌락 살인이라기보다는
목격자를 없애겠다는 목적이 분명하다. 정체를 숨기고 황성에 들어온 것 또한 단순한 흥미에 그치지 않으리라.
[다음 편에 계속....]
73 화.
살아 돌아온 로젤린을 죽이려 하지 않은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그녀가 제 발로 직접 발타라는 사지에 들어갔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주위를 맴돌며 그녀를 경계했을 텐데, 그 수상한 낌새를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속마음을 능숙하게 속이고 있다는 얘기였다. 여러모로 위험인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변수는 일단 그대로 둔다. 이용하기엔 너무 불확실한 요소였다. 행운과 우연에 기댈 만큼 가볍게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천천히, 조심히, 자세하게 풀어 나가야만 한다.
* * *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물론 칼릭스도 제 아버지가 모를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애초에 로젤린이 마인이라 해명한 사람이 그가 아니던가.
칼릭스가 아는 한, 로젤린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녀를 마인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은, 아버지가 정확한
사정은 파악하지 못했더라도 ‘로젤린’이 죽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또한 지금의 로젤린이 다른
사람이라는 점도.
“감사합니다.”
페르탄이 자리에 앉았다. 그가 케이크를 맨손으로 덥석 집어 먹었다.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의 죽음을 알고 있음이 확실한데, 그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명령을 듣지 않고 누이를
보호하려던 자신을 질타할 뿐이었다. 칼릭스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누이는요!”
쾅!
흘러넘친 홍차를 가만히 바라보는 페르탄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칼릭스는 그의 말에 의구심을
가졌다. 리카르디스 전하가 엘피디오보다 위험하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 * *
1 황자 엘피디오는 두 살 무렵부터 라이노를 넘어서는 성력을 지녔다. 그의 모친이 지니고 있던 성력을 대물림
받은 것인지, 가까운 친족끼리의 근친혼으로 인한 돌연변이의 탄생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모두 앞으로를
기대할 뿐이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중요한 건 ‘앞으로 완전히 성장한 엘피디오가 얼마나 큰 성력을 지닐 것인가’가 아니었다.
자신을 넘어섰다는 것.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 어린아이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그 자체였다.
그때에 엘피디오가 태어났다.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 고귀한 혈통, 그 첫 번째 아들. 신에게 선택받은
증거인 강한 신성력. 물려받은 아름다운 외모와 밝은 금발. 비록 아직 어릴지언정,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황제의 재목이 되리라.
자신이 내려놓는 것과, 뺏기는 것은 손에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잃는다는 결과는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라이노는 십여 년 후, 제 아들에게 권좌를 빼앗길 운명에 처했다. 비참했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그 감정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역시 미래의 일. 그사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지 않나. 기다리자. 황제는 숨을 죽이고 세월을
보냈다.
라이노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위험이 거대하게 차올라 목을 조였다. 그 아이가 성력이 약했더라면, 비천한 어미를
두었다면, 적자가 아니었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엘피디오를 죽여라.]
그러나 지금 그의 명령은 후대를 위해 자라고 있는 새싹을 짓밟는, 그의 사명과 반하는 일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라이노의 욕망을 읽어 냈다. 그는 엘피디오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단순히 자신이 원할 때까지 군림하고
싶을 뿐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생각했다.
[아이?]
[아이를 찾아라.]
[명을 받듭니다.]
[엘피디오와 나이 차가 크게 나지 않는 사내아이.]
일곱 살 전후의.
강한 신성력을 지닌.
74 화.
[명을 받듭니다.]
아이는 자라고 자라 엘피디오와 다투게 될 것이다. 쓰임새가 다 하는 날에 사라지게 될 황제의 꼭두각시.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휩쓸릴 작은 운명이 안타까웠으나 신성력은 황실의 전유물이다. 그 강한 힘을 지니고 황실에 오게
될 운명 또한 신의 안배이리라.
아이는 변방의 겨울석류 자작 가문에 맡겨지게 되었다. 겨울석류 자작은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고, 제 딸이 황비가
될 수 있다는 얘기에 이 터무니없는 제안을 덜컥 승낙했다.
겨울석류 자작이 그 일을 숨긴 결과로 집안의 사용인들도 아이의 아버지를 모른다고 했다. 그 치밀함 덕분에
밀리아가 리카르디스의 부모 역으로 발탁된 것이다. 딸이 한 명 있는 흠이 있었으나, 그쯤이야 감수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리카르디스였다.
밀리아는 자신이 이 고아 소년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그 때문에 몇 년 뒤에는 바라지도 않던 황성에 끌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페르탄이 리카르디스를 데리고 오는 당일 날에 들었다. 기겁할 일이었다.
였다. 밀리아의 품안에는 그녀를 똑 닮은 은발을 가지고 있는 어린 소녀가 안겨서 우꺄우꺄 소리를 내며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밀리아가 손을 올려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은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잔뜩
경직 시킨 채 그녀의 손길을 받았다. 뺨을 맞으리라 예상했던 것 같았다.
소년은 그녀의 김빠진 반응에 자신도 김이 빠진 듯 바짝 세운 가시를 눕혔다. 언제나 반항심 넘쳐 보이던 소년이
밀리아의 손길 한 번에 누그러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페르탄은 몇 개월 주기로 리카르디스를 보러 갔다. 바싹 마르고 작았던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홀쭉했던 볼이
부드러워지고, 뻣뻣하고 정돈이 안 되어 있던 머리도 빛이 부서져 내리는 아름다운 은발이 되었다. 처음 만날
때만 해도 항시 구부정하게 몸을 옹송그렸으나, 곧게 뻗은 자세는 태생을 의심하기 힘들 정도였다.
겨울석류 가문에 끌려올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많이 깨우친 듯했다. 아이는
총명했다. 타고난 머리가 좋은 탓도 분명히 있었으나, 손가락에 박인 굳은살은 필사의 노력을 비추고 있었다.
고작 일 년 사이의 변화였다.
가족.
햇빛이 비추는 작은 정원 속. 아름다운 은발의 소년과 소녀. 여기저기 들꽃이 피어 있고 아이의 장난감 위로
무당벌레가 앉아 있다.
평화롭고,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별장에서 돌아오는 길, 수십의 무리가 습격을 감행한 결과 마차가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마차의 파편이
황녀의 복부를 찔렀으나 그녀는 즉사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통받다 죽었다. 자신보다 더 오래 그녀가 살길
바랐던 리카르디스는, 제 동생이 보다 빠르게 이 세상을 떠나지 못했음에 더 괴로워했다.
어린 황녀를 관통한 나무 파편에는 리카르디스의 문양이 조각난 채 새겨져 있었다. 습격한 자들은 그 마차를 타고
있는 사람이 그 문양의 주인이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그 이야기를 리카르디스에게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페르탄이 보아 왔던 밀리아 황비는 영민하고, 당차고 좀 이상한 여자였다. 어딘가 엉뚱하기는 하지만 이 거친
황실에서도 기죽지 않고 제 딸, 아들을 위해 우뚝 서 있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티스티아 황녀가 죽은 이후, 밀리아 황비는 미쳐 버렸다. 보통의 사람처럼, 보통의 사람보다 더. 어떤
것에도 부서지지 않게 꼿꼿이 버티고 있던 그 힘에 반발력이 작용한 듯, 더 괴롭고 아프게 부서졌다.
하루 온종일 울다가 실신하고, 깜깜한 밤에 세티스티아의 방 안을 거닐고, 갑자기 수풀로 뛰쳐나가는 등. 속으로
삭이지 못한 슬픔을 표출하는 것이었으나 그마저도 일부일 뿐이라, 그녀의 안에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는 격정적인
감정은 마모될 줄을 몰랐다.
시간이 갈수록 밀리아는 황폐해지고 쇠약해졌다. 어딘가 다치고 베이지도, 병에 걸리지도 않았으나 그녀는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밀리아 황비의 곁을 계속 지켰다.
페르탄은 밀리아를 자주 찾아갔다. 어떤 죄책감의 발로라기보다는, 밀리아가 방문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페르탄은 그녀가 아이를 잃은 분노를 풀 대상이 필요해 자신을 부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밀리아
황비는 페르탄을 보고 화내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흐려진 눈동자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너만 아니었으면!]
괴로워 보였다. 그러나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마주한, 무엇보다 아픈 칼날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 내었다.
밀리아가 그 안에 담아 낸 것을 쏟아 낼 대상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것은 리카르디스에게 향하는 질타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페르탄은 아직까지도 그녀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 했다.
세티스티아 황녀의 기일로부터 178 일 후. 리카르디스는 밀리아 황비를 떠나 보냈다. 사인은 익사였다.
자살이었는지, 약해진 몸을 이끌고 산책하다 실수로 호수에 빠진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페르탄은 리카르디스를 찾아갔다. 밀리아의 서신에 길들여진 탓이었을까.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월장석 성으로
흘렀다.
[그래서 날 찾은 거였어.]
페르탄과 황제는 단 한 번도 리카르디스에게, 그가 황자로 둔갑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 적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엘피디오와 싸워 온 그 세월은 모든 이유를 가늠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75 화.
[멋대로 주고…….]
그가 고개에 힘을 빼고 앞으로 툭 숙였다. 머리가 흐르며 그의 얼굴을 가렸다. 움찔거리는 입술만 보였다.
[멋대로 빼앗아.]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이런 운명이었어…….]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지나간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으며, 그 또한
운명이었으리라. 운명의 수레바퀴라고도 불리는 가문다운 태도를 언제나 고수했다.
그러나 페르탄은 이때 최초로 후회를 하게 되었다.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언제 어디서나 발생하는 흔하디흔한
일이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일라베니아의 평화를 위한 초석.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붉은수레바퀴가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 * *
로젤린의 귀환 소식에 기숙사 건물은 시끌벅적했다. 덕분에 로젤린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몇 시간이나 갇혀 있어야
했다. 어지간하면 리카르디스를 보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반짝이며, 더러는 눈물을 보이며 제 귀환을
축하해 주는 동료를 두고 떠나기에는 로젤린이 사회적으로 너무 성장한 상태였다.
쌀쌀맞게 굴던 상급 기사 몇몇조차도 부드러운 미소로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로젤린 경.” 하면서 갓
태어난 강아지 새끼 솜털만큼 간지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 변화가 몹시 반갑고 행복했던 로젤린은 쏟아지는
축하를 잔뜩 음미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얼마나 기뻐하는지.
그 계획의 일환으로 로젤린은 연무장의 나무에 숨어 있다 지나가는 파르딕트도 놀라게 만들었다. 파르딕트는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린 채 갑자기 나타난 로젤린을 보고 기겁해서 뒤로 넘어졌다. 그 뒤 그녀의
귀환에 기뻐하기보다는 그녀의 행위에 화냄으로써 로젤린의 기세를 한풀 꺾이게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로젤린은 행복함에 잠시 잊어버렸던 본 목적을 되찾아 왔다. 리카르디스를
만나러 가야 했다.
로젤린은 복도를 걷다 네스터와 마주쳤다. 얼굴을 붉힌 네스터는 자신이 상급 기사로 승급했노라, 은근히
자랑하며 그녀가 칭찬해 주기를 바랐다. 물론 그 은근한 자랑을 알아들을 리 없는 로젤린은 “아, 네
그렇습니까.” 정도의 건조한 답변밖에 해 줄 수 없었다.
로젤린은 정원사의 발치에 떨어진 꽃과 풀줄기 중, 본인의 기준으로 예쁜 것들만 주워 모아 아래 둥치를 끈으로
묶었다. 어설프게나마 꽃다발의 형식은 갖출 수 있었다. 냄새를 맡으니 향긋했다. 로젤린은 뿌듯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길에 로젤린은 부단장실에 들러야 한다던 레티시아와 다시 마주쳤다. 로젤린의 간식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그녀가 바구니에 샌드위치며, 케이크며, 과일이며 잼이며, 여러 가지를 바리바리 싸들고는 로젤린에게
안겼다. 로젤린은 당장 꽃보다 향기로운 빵을 음미하고 싶었으나, 드물게 식욕보다 목적이 앞선 상태였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시간이면 리카르디스는 집무실에서 서류와 눈싸움을 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정문을 향하던 로젤린의 발걸음이
멈췄다. 정문으로 가면 시종이 미리 방문자를 알리기 때문에 그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창문으로 들어가야지.’
레이몬드와 잇세리온, 나단과 스타스가 창문으로 드나들지 말라고 입이 닳도록 얘기 했으나, 지금은 그들의
잔소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로젤린은 테라스에 도착했다. 커튼은 반쯤 드리워져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로젤린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천 자락이 팔락이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과 풀벌레, 새가 저마다 요란하게
울었다. 그 사이로 고른 숨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는 로젤린을 단숨에 노곤하게 만드는
잔잔한 울림이었다.
그림자 나비가 나붓나붓 날갯짓하며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움직였다. 그때 리카르디스의 속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자신이 베고 있는 제 손으로 볼을 문질렀다. 어딘가 가려운 듯이.
‘꿈인가?’
리카르디스는 엎드린 채로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천천히 살폈다. 사방에 햇빛이 시릴 정도로 내려쬐고 있음에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얼굴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로젤린이 두 손을 교차로 한 상태로 모으고 있었다. 날개
같았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테이블 위에 거대한 꽃다발과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간식 바구니가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꽃 냄새와 달콤한 음식 냄새. 갖은 풍요롭고 예쁜 것으로 둘러싸여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한 사치가 아닌가.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왜 지금의 이 순간을 꿈보다 더 꿈같다고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방금 깼는데도 잠이 몰려왔다. 무언가가 끝난 것 같기도, 시작하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감각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76 화.
로젤린이 그의 숨소리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전하!”
‘깨신 것 맞나?’
“전하, 제가 왔습니다!”
이건 선물입니다! 위풍당당한 목소리에 비해 꽃다발을 건네는 손길은 수줍기 그지없었다. 리카르디스가 멍하니
꽃다발을 안았다. 들쭉날쭉 엉성한 데다가, 꽃봉오리가 없는 줄기도 더러 포함되어 있었다. 몇 개 있는 꽃조차
잎이 한두 개 떨어진 걸로 봐서는 어디 바닥에 있는 것을 주워 직접 만든 모양이었다.
“로젤린.”
“보고 싶었다.”
* * *
[별 다른 일은 없나요?]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그것 참 안타깝군요.]
별다른 일이 있길 바랐던 것 같은 대답이었다. 페르탄은 당황했으나 단단하게 굳어 있는 무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밀리아는 가만히 페르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드러나지 않는 당황을 읽혀 버린 느낌이었다. 페르탄은
가볍게 묵례하며 물러섰다.
성에서 시선을 돌려 마차를 바라볼쯤에는 호위 대상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페르탄은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머리가 굳어 눈동자만 굴렸다. 바로 그때 마차 안쪽에서 소곤소곤 속삭이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보니
마차 바닥에 호위 대상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여기는 아주 추운 곳이야.]
페르탄은 밀리아의 말이 그녀 스스로 다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버텨야 해, 더 차가워지고 괴로워도 견뎌. 나는
약하지만, 너희를 위해 강해지겠어. 그렇게.
[언제까지요?]
페르탄은 자신이 질문을 받은 것도 아니건만 당황했다. 그 괴로움의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일까.
밀리아도 리카르디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 하고 잠시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페르탄은 밀리아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어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얼굴이 자신과 같은 당황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봄이 올 때까지.]
10
“로……젤린 경? 로젤린?”
“아…….”
“아름다우십니다.”
“…….”
“…….”
어디로 보나 오랜만에 재회한 황자와 기사 사이에 나눌 만한 대화는 아니었다. 보통은 잘 지냈느냐, 여행길은
힘들지 않았냐는 안부가 우선이지 않나?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리카르디스는 적당한 뒷말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었다. 눈앞의 로젤린은 여전히 예쁘고 귀여웠지만, 지금 그
말을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이마와 볼에는 정체 모를 검댕이가 묻어 있었고, 머리카락 여기저기 이파리를
달고 있는 지금. 예쁘다, 귀엽다는 표현은 놀리는 듯한 느낌을 줄 것 같았다.
“아픈 곳은?”
“로젤린 경!”
외출했던 잇세리온이 로젤린을 발견하고 반가운 비명을 질렀다. 마른가시나무 성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건강해 보일 수가. 샌드위치를 씹어 먹는 게 아니라 마시는 것 같은 저
힘찬 목 넘김!
“감사합니다. 이제 정말 괜찮습니다.”
로젤린이 괜찮다고 하자마자 잇세리온이 낯빛을 싹 바꾼 채 따지고 들었다.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는지 로젤린의
시선이 슬그머니 잇세리온의 얼굴을 벗어났다. 아니 이 사람이!
로젤린은 강력한 뒷배를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가장 나쁘고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잇세리온은 그녀의 어설픈 비열함에 울컥하진 않았다.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열한
미소를 짓는, 로젤린을 바라보는, 리카르디스의 표정과 눈빛.
아닐 거야, 아니야! 부정을 해 보았으나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인간에서 살짝 빗겨 나가 있는 존재를 바라보는
리카르디스의 눈빛이, 마치 꽃물로 물들인 어린 아이의 손톱 같았다.
77 화.
여행자의 옷을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빛이라 했던가. 아니다, 전부 거짓부렁이다. 바람이다. 파괴력 있고,
종잡을 수 없는 돌풍이 여행자의 옷을 찢어 버릴 것이다!
잇세리온은 알몸이 되어 버린 제 주인의 처참한 몰골에 눈물이 절로 나왔다. 그야말로 완전한 무장해제가 아닌가.
칼릭스로부터 분명 듣지 않았던가?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놀라지 않은 듯.
침착하게 칼릭스와 얘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다고 해서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닐 텐데, 로젤린을 대하는 리카르디스의 태도는 예전과
비슷했다. 아니 예전보다 더 친숙해졌다. 말투가 부드러워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눈빛과 표정의 날카로움도 무뎌져
있었다.
“어느 쪽?”
“엘피디오는?”
디에즈가 단순히 발타와 엘피디오의 다리 역할을 자처했다면, 곧바로 엘피디오의 석영 성으로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5 황자 전하의 독단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표면상으로 드러난 황태자 위를 둘러싼 싸움의 형태는, 제법 무게가 비등하여 저울이 수평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황자들이 함부로 이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싸움도
급이 맞아야 하고, 종이 맞아야 하지. 사자 싸움에 여우나 하이에나 따위가 끼어들 수는 없었다.
괜한 분란에 휩싸이기 싫었던 라헤안시는 일찌감치 싸움에서 손을 떼고 신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리카르디스가
가끔 대신전에 들렀을 때나 종종 보는 얼굴이었는데 빈둥거리면서 잘 노는걸 보니 적성에도 맞는 듯했다. 어린 6
황자와 7 황자는 잘난 형들 아래 기죽어 얌전하게 지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과 엘피디오를 제외하면 이 싸움에 끼어들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금 이 관계를
차분히 정립해 보니. 둘만 없다면, 1 황자와 2 황자만 없다면 디에즈가 상당히 왕좌에 가까운 위치라는 걸
깨달았다.
“…….”
두 남자가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젤린은 최근 들어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읽기 시작했다.
이런 무거워 보이는 상황에서는 갑자기 맥을 끊는 개인적인 얘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 아니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종용될 거리도 아니라는 것쯤은 대충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갉작갉작 엄지손톱끼리 서로 긁는 손장난만 하며 별다른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로젤린은 배가 고팠다.
고작 과일과 빵 몇 쪼가리를 먹는 것 정도로는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이 그녀의 위장을 감돌았다.
마침 반가운 소리가 울렸다. 꼬르륵, 꾸르륵 하는 우렁찬 소리였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얘기하던 두 남자가
대화를 중단하고 로젤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리카르디스가 얼굴 근육을 씰룩이며 로젤린의 복부쯤에 시선을 두자,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 배에서 난 소리입니다. 손이라도 번쩍 들어 보일 기세였다.
“혹시…….”
“예!”
“배가 고픈가?”
“예, 전하!”
“그렇습니다!”
“요즘 들어 암살자들의 수준이 급격히 낮아졌지. 발타 쪽에서 몸을 사리는 것 같더군. 그대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하카브의 도움이 끊기자, 마음이 급해진 엘피디오가 암살자라면 닥치는 대로 보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검은달의 암살자들도 막아 냈던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고작 국내의 어중이떠중이 암살자들을 처리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덕분에 리카르디스는 어느 때보다도 쾌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줄도 알았다. 잇세리온이 가세해서 그녀를 달랬다.
“……전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리카르디스가 팔짱을 끼며 코로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상관의 입장에서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로젤린은 황자의
명령이라 해도 잘 듣는 자가 아니었기에 숨어서 호위할 것이 분명했다. 리카르디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볼일이 있었어.”
78 화.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리카르디스의 호위를 책임지는 스타스에게 그 소식이 들어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잇세리온에게 난데없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가 다급히 집무실로 찾아왔다. 무슨 일로 나가시느냐고 물으려던 스타스는 복귀 보고를
까맣게 잊은 채 신나서 희희덕거리는 로젤린을 발견했다.
그는 로젤린을 잠시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왔다. 잠시 후 돌아온 로젤린은 스타스의 뒤에서 시무룩해져 있는
상태였다. 호되게 혼난 모양이었다.
하급 기사 두 명. 바스티안, 클로드.
리카르디스와 로젤린도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복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쪽의 머리색은 밤하늘이고,
다른 한쪽은 아주 달빛 별빛마냥 찬란했다. 심각하다. 심각하게 눈에 띄었다. 잇세리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 사람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나서야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 * *
여기저기 다양한 색깔의 등불들이 비추는 거리에는 어린아이들도 돌아다녔다. 전국을 떠도는 서커스단이 공연
준비를 하고 있고, 모든 상가들이 한몫 잡기 위해 열심히 호객 행위를 하는 중이었다. 낮부터 쭉 이어진 축제는
밤이 되자 더 북적이기 시작했다. 최초의 하얀 밤과 검은 달이 뜬 날. ‘그림자 없는 밤’을 기리는 축제이기
때문이었다. 작은 마을, 큰 영지 할 것 없이 밝게 빛나며 밤을 몰아냈다. 사람들은 밝은 색의 옷을 입고,
검은색에 가까운 것은 모두 가리거나 깊은 곳에 숨겼다.
리카르디스는 이런 국가 행사에 대해 건조한 태도를 보이는 편이었으나, 마차에서 내린 로젤린을 보고는 거리의
모든 이처럼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로젤린은 그야말로 굉장한 흥분 상태였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 가며 삭삭 훑어보는 빠르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코를 움찔거리며 후각에 집중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여기저기서 풍겨 왔다. 배고픈 그녀에게는
무엇보다도 치명적일 것이다.
“꼬리가 붙었나?”
리카르디스가 르원에게 묻자, 르원이 로젤린을 쳐다봤다. 로젤린이 고개를 좌우로 젓는 걸 확인한 르원이 답했다.
“확인된 바 없습니다.”
“전하!”
아프지 않긴 했지만 뜨끔은 했다. 확실히 계속해서 전하, 전하아! 하고 목 놓아 부른다면 누구라도 이곳에 귀한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파르딕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싼,
누가 보아도 호위 대형을 짜고 있는 그들에게 목소리 낮춰 얘기했다.
“예, 전하!”
“……도련님이라고.”
“예, 도련님!”
다들 약간 모자라긴 한데, 대답은 곧잘 했다. 리카르디스는 기사들을 쭉 둘러보았다. 제복을 벗고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지만, 단련된 두터운 몸과 곧은 자세는 숨겨지지 않았다.
검으로 인한 흉터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으나 불량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가 보아도 기사였다. 알맹이가
그대로인데 옷만 바꿔 입으면 뭐하나. 리카르디스는 짜증 어린 목소리로 그들을 질책했다.
“그대들은 서로 애칭을 부르는 게 좋겠어. 말투도 좀 비격식적으로 바꾸고. 그대들의 분위기가 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일상 속에 무뎌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파르딕트 경부터 시작해.”
“파르파르입니다.”
딱히 애칭이랄 것도 없고, 이 자리에서 재빠르게 만들어 낼 만한 능력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로젤린의 어머니인
에델바이스가 부르던 것을 떠올려 입 밖에 내보냈지만, 별로 좋아하는 호칭이 아니라 인상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이후로 하니, 루루, 비스탕, 크림, 슈슈 등의 귀여운 애칭이 건장한 남자들의 입에서 줄줄이 튀어나왔다.
실제로 그들의 어머니가 사용하는 애칭이라는 사족이 덧붙여진 관계로, 리카르디스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참혹했다.
“환장하겠군.”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속지 않을 연기였으나, ‘클로드 경’, ‘슈텐 경’이라는 딱딱한 말 대신, “크림.” “
슈슈.” 와 같은 애칭으로 부르다 보니 주위 행인들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게 보였다. 이런 어설픈 수작이
생각보다 잘 먹히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자신이 로즈라고 불릴 때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동료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입술을 앙다물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하지만 파르파르에게 “떽끼. 로즈 이 녀석! 이것도 다 작전이야!” 라고 혼난 후에는 볼
안쪽을 잘근잘근 씹으며 혼자 분을 삭여야 했다.
“로즈.”
그걸 지켜보던 도련님이 그녀의 입에 구운 닭다리를 물려 주었다. 굳어 있던 로젤린의 얼굴 근육이 스르르
이완되었다. 마치, 단 한 번도 심기가 불편해 본 적 없는 사람 같았다. 그 이후로는 호칭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배고픈 로젤린보다는 배부른 로즈가 좋다는 것이 아닐까.
초반에는 누가 봐도 이름만 귀여운 기사들이던 그들이 서서히 행인들의 분위기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도련님에게
별다른 위험이 없으리란 사실을 서서히 깨우친 것이다. 위험이라고 해 봤자 삼류 건달이나 소매치기 정도였는데,
파르파르와 하니, 슈슈의 덩치를 보고도 다가올 수 있는 자는 손에 꼽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자들은 어김없이 나타난 로즈에게 제압되었다. 재빠르게, 하지만 상대를 다치지 않게
무력화 시키는 솜씨가 훌륭했다. 그녀의 밑에서 꿈틀거리며 벗어나려던 소매치기는, 로젤린이 귓가에서 낮게
속삭이는 몇 마디를 들은 후 시체처럼 미동 없이 누워 있어야만 했다.
‘마카롱한테 말해 줘야지.’
로젤린과 기사들에게 걸린, 축제의 좋은 뜻을 해치려는 불순한 분자들은 전부 치안대에 압송되었다. 경례하는
남자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평상복을 입고 있지만 워낙 유명 인사라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파르파르.”
“왜, 로즈.”
“저거 사 줘. 나 돈 안 들고 왔어.”
세상 공손한 태도라서 도련님은 알겠다고 했다. 기사들은 악세사리나 축제 기념품 등의 쓸데없는 것들을 사면서도
먹을거리가 보이면 꼭 하나씩 사서 로즈의 손에 들렸다.
그녀는 도련님에게 받은 과일과 크림이 잔뜩 들어간 크레페를 먹을 쯤에는 살짝 울먹이고 있었다. 매일이
축제였으면 좋겠다나. 마침 옆을 지나가던 어린 남자아이가 매일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겠다는 똑같은 말을 해서
리카르디스는 잠시 손으로 얼굴을 덮어야만 했다. 흑흑 소리가 나며 리카르디스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밤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이 많아졌다. 도련님 주위를 원의 형태로 호위하던 기사들의 간격도 더욱 좁아졌다. 키가
큰 사내들에 의해 앞이 잘 보이지 않자, 로젤린이 종종 헤매었다.
“먹어도 된다.”
“네.”
“……오랜만에 해 보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예전에 많이 했었지.”
이번에도 로젤린은 알록달록한 물건이 무질서하게 올라간 가판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쭈그려 앉아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열성적으로 살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의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았다.
“아니요. 저 돈 많습니다.”
뭐어?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다 삼키지 못해 조금 내뱉어 버렸다. 로젤린은 색이 비슷한 펜던트를 두 개 들고는
열심히 등불에도 비춰 보고 눈에 가까이도 대어 보았다. 그리고는 큰 결심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사겠습니다.”
“그럼요.”
“네, 예뻐서.”
로젤린이 상체를 기울이며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얼굴과 얼굴이 마주했다. 머리를 덮은 후드의
끝자락이 닿을 정도였다. 축제를 다니는 내내 후드로 가려져 잘 보지 못했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여기저기
달린 등불로 인해 하얀 얼굴은 은은하게 빛났다.
리카르디스는 펜던트의 가짜 보석보다 영롱하게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았다. 가늘게 뜨고
있는 눈가가 떨리고, 눈썹은 찌푸려져 있었다.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리카르디스는
입이 바짝 말라와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래.”
“아주 예쁘다.”
그리고 기사들은 이 모든 광경을 네 발짝 뒤에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하니와 루루는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전하…… 가시밭길을…… 걸으시는…… 우리 가엾은 전하…… 그들은 눈물이 고여
반지르르해진 눈으로 자꾸 먼 하늘만 바라봤다. 아래를 봤다가는 뚝뚝 흘릴 것 같았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리카르디스는 지금 로젤린을 단순한 부하로 대하고 있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도
못한 종류의 감정이 표출되고 있어 기사들은 억 소리도 못 내고 굳어 버렸다.
거기에다가 화려한 언변은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어린애 소꿉놀이하듯이 이거 예뻐, 저거 예뻐. 이러고 있으니
가슴이 갑갑해지고 숨이 턱턱 막혀 왔다.
하지만 소꿉놀이라도 열심히 해 보겠다는 필사적인 노력이 보였기에 신하된 자로서 기사들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졌다.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
파르딕트의 외침에 로젤린이 한 마리의 표범처럼 거리를 달려갔다. 하니가 열 받아서 파르파르의 정강이를 깠다.
루루도 이 고래 새끼…… 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파르파르만 영문을 몰라 얼떨떨해하며 까인 정강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 * *
로젤린은 혼자가 되었다. 대왕 꼬치를 발견해 양손에 떡하니 들고 흡족한 마음에 자랑이라도 할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리카르디스도, 같이 이것저것 잘 사 먹던 파르딕트도, 다른 기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아는 사람은 없었고,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로젤린은 벽에 기대어 시무룩하게 쭈그려 앉았다. 양손에 들고 있던 대왕 꼬치 두 개가 서서히 식어갔다.
그녀는 침울함에 젖은 얼굴로 우선 꼬치를 먹기로 했다.
[훌륭해.]
잃어버렸을 때의 목적지 또한 정해져 있는 상태였다. 대광장의 분수. 로젤린은 입안으로 중얼거리며 목적지를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이 암흑가의 입구에 들어서기 훨씬 전부터 알았겠지만 로젤린은 이미 중심부까지 들어선
상태였다. 이쯤 오니 로젤린도 모를 수가 없었다. 뱀의 대가리를 자르고 단검에 묻은 피를 날름 핥고 있는
남자는 암만 보아도 축제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게 뭡니까?”
로젤린의 질문에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눈썹 한쪽을 추켜세웠다. 그는 로젤린이 거리로 들어 올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는 몸짓이나, 깔끔한 후드나, 걸음걸이가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아 저절로 눈길이
갔다고 말하는 쪽이 정확했다.
“맛있는 건가요.”
와 정말로 이 사람은…….
‘완벽하게 잘못 들어왔구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약을 담은 유리병을 바라보던 로젤린의 시선이 옆으로 이동했다. 거리에 들어올 때부터
따라온 집요한 시선들이 한층 더 날카로워진 것을 눈치챈 것이다.
로젤린은 물건을 구경한다고 어정쩡하게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남자들이 검집에서 무기를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전 뱀의 피가 묻어 있던 단검을 핥은 남자도 다가오고 있었다.
80 화.
머릿속으로 살벌한 생각을 하며 로젤린은 거리를 쟀다. 남자들이 점점 다가왔다. 가판대 상인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이 좋은 날, 불행해질 여자의 미래가 빤히 보였다.
“거기 잠깐.”
저 멀리서 로젤린을 둘러싼 무리를 향해 누군가 말을 꺼냈다. 남자들이 뒤를 돌아봤다. 로젤린도 고개를 돌려 이
긴박한 상황을 깨트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남자였다.
“그쪽은 내 일행인데.”
남자는 무리의 대장처럼 보이는 사람 앞에 멈춰 섰다.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는 눈부터 코까지 덮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있지.”
남자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무거웠고, 베일 듯 서늘했다. 그제야 로젤린은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목소리는 같았지만, 평소와 분위기가 너무 달라 잠시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그 편이 너희들에게도 좋을 거라.”
서쪽 암흑가를 지배하는 큰손, 검은독사의 문양이었다. 남자가 그 문양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은
검은독사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었다. 건드렸다가는 피를 볼 게 분명했다.
로젤린이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물약을 파는 상인의 가판대에 내려놓았다.
방금 사라진 놈들을 잡아 족치라는 말이었으나, 로젤린은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로젤린의 앞에
멈춰 섰다. 한참 망설이던 그가 로젤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도 로젤린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보았다. 커다란 손은 따뜻했다. 맞닿은 온기에 로젤린의 몸이 서서히 이완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그녀는 만약 자신이 남자의 정체를 몰랐다 하더라도 이 손을 뿌리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말없이 골목을 걸었다. 반쯤 무너진 판잣집과 안쪽이 보이지 않는 가게들이 늘어선 곳이었다.
그 수많은 공간에서 음습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시선은 로젤린 그녀를 향하기도, 남자를 향하기도 했다.
어두운 밤. 어두운 골목. 뚝, 뚝……. 어디선가 물이 떨어져 고이는 소리. 퀴퀴한 곰팡이 냄새, 주위를 맴도는
시선까지.
로젤린은 갑작스럽게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숨이 거칠게 일어나고, 신경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만이 만드는 걸음 소리가 마구 불어나 뒤따라오는 기분이었다.
아까의 남자들이 쫓아온 것인가? 로젤린은 주의를 기울여 골목골목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에 집중했으나, 여전히
두 사람의 걸음 소리 뿐이었다. 로젤린은 마력을 사용해 청각을 강화했다. 작은 촛불이 아롱거리는 수십 개의
공간에서 사람들이 속삭였다. 저들은, 저 남자는. 오래된 손님이. 여자를 건드려서는, 정체는? 사람들이
로젤린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여러 말이 겹쳐져 온전한 문장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그 두루뭉술한 언어들이
뾰족하게 날카로운 형태를 띠고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았다.
로젤린이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남자가 작게 속삭였다.
“걱정 마요.”
서릿발 같던 아까와 달리, 다정한 목소리였다. 마치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안다는 듯. 남자가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남자는 지리를 잘 알고 있는지 로젤린이 한참 헤맨 복잡한 거리를 금세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어두운 골목의
끝과 밝은 거리가 만나는 곳에 잠시 멈춰 섰다. 한 걸음 밖에, 로젤린이 찾고 있던 축제의 등불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에게 혼나기 전에 디에즈와 만났다는 화제로 시선을 돌리려 했던 터라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가 대충 로젤린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웃었다.
“알겠습니다. 비밀.”
언제나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던 사람이었다. 만남부터 지금까지 ‘당신’이라는 호칭을 쓰는 걸 보면 정체가
밝혀지면 곤란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리카르디스 전하도 기사들더러 애칭을 사용하고 그 자신도 도련님 행세를
하지 않았던가. 로젤린은 디에즈 또한 그런 거라 생각하며 그의 이름과 정체를 말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축제 날에 술 취한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 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어요. 그렇다 쳐도 완전히 다른 방향이긴 하군요.
이 길을 따라가면 곧바로 대광장이 나와요.”
“네.”
불안해하는 디에즈를 뒤로하고, 로젤린은 가방 안을 열심히 뒤적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로젤린의 움직임에
따라 아래로 향했다.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사탕, 축제에 여성들이 쓰고 다니는 하얀 레이스 베일, 사냥용
올가미, 아이들 용 나무 단검, 먹다 남은 빵까지. 축제를 즐겨도 너무 즐긴 듯했다.
“여기요. 선물입니다.”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
디에즈가 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데, 기쁨을 참는 것 같기도 했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선물을 줬을 때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선물을 줬더니 추궁을 받았다. 그는 평소와 달리 웃지도 않고 굉장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당황했다. 어,
왜 선물을 주냐면…… 잘 어울리면 아무에게나 선물을 주냐면…… 그건 아니지만…….
좋아하면 선물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니깐.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무섭게 추궁할 때는 언제고
대답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하얀 베일을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도 바라던 대답이 아니었나?
“난…….”
디에즈가 속삭이듯 말했다.
디에즈가 그런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 레이스 베일 위로 제 얼굴을 묻었다. 피곤에 지친 사람이 침대에 기대는
것 같았다.
81 화.
로젤린은 디에즈와 헤어진 후 곧바로 대광장에 왔다. 광장에도 먹을 것을 파는 상점과 가판대가 즐비해 있었다.
로젤린은 디에즈의 걱정 그대로 노점 음식에 눈을 빼앗겼다.
리카르디스 및 동료들과의 재회는 그렇게 멀어지는 듯 보였으나, 그녀의 생태를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던
리카르디스 덕에 그녀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상급 기사들을 줄이 가장 길게 서 있는 음식 상점마다 배치해 놓았던
것이다. 로젤린이 ‘줄을 선 집’을 ‘맛집’으로 동일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리카르디스는 알고 있었다.
“로즈!”
“다친 곳은?”
몰래 훔쳐보던 중 리카르디스가 갑작스럽게 얘기를 꺼내서 로젤린은 화들짝 놀랐다. 곧 그가 말한 내용을 반추한
그녀의 눈동자에 의심의 빛이 서렸다.
‘분명 혼날 때인데……?’
“……없습니다.”
“그렇다면 로즈. 헤어진 사이에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전투를 벌였거나, 혹은 치안대가 주목할 만한 사건을
일으킨 적이 있나?”
“없습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과 떨어진 이후 곧바로 대광장에 왔다. 떨어져 있는 내내 그는 눈을 뜨고도 악몽에 시달렸다.
로젤린이 소동을 일으키거나, 혹은 사건에 말려들거나, 또는 치안대를 패는 장면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상상 속
로젤린이 일으킨 여러 가지 사건의 공통된 점은, 마지막은 항상 그녀가 감옥 안에 갇힌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수를 헤아려 놓아야 실제로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으므로, 로젤린은 그의 머릿속에서 세 번쯤 반역자가
되었고, 다섯 번쯤 감옥을 부수고 탈옥했다.
그렇지만 파나 채소가 끼워져 있지 않은, 고기만으로 이루어진 대왕 꼬치가 그녀를 현혹시킨 주범이었다는 사실을
들은 리카르디스는 “아, 그건 확실히…….”라는 반응을 보였다. 고양이 나무에 취해 버린 고양이처럼, 꽃에게
날아가는 나비처럼 홀렸으리라. 그쯤 되면 한눈을 판다기보다는 본능의 영역이 아닐까.
시무룩한 로젤린이 과일주를 마시고 다시 활기를 되찾았을 때였다. 떠들썩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대광장의 정중앙, 설치된 단상 위에 하얀 예복을 입은 남자가 올라왔다. 옷의 차림새와 목걸이의 모양이 남자의
지위를 나타내고 있었다. 대륙에 단 일곱 명밖에 없는 대신관 중 한 명이었다.
머리를 단정히 묶거나 깔끔하게 정리한 타 신관들과는 겉모습부터가 좀 달랐다. 등불로 인해 금발같이 보이는
옅은 분홍색 곱슬머리는 부스스하게 자연스럽게 풀려 있었다. 헐렁해 보이기도, 거꾸로 입은 것 같기도 한 엉망인
옷매무새 때문에 그가 입고 있는 것이 예복인지 하얀 커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항상 인상을 찌푸리거나 귀찮아하는 표정을 숨길 시늉도 안하는 신관들을 보아 온 탓인지, 사람들은 라헤안시의
한껏 풀어진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저 귀한 대신관이 거리에 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다는 기색이었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찡그렸다.
“……말투가 왜 저 따위지?”
리카르디스의 싸늘한 반응과 다르게, 광장의 사람들은 “오오……!” 하는 작은 함성과 함께 모두 무릎을 꿇었다.
리카르디스와 기사들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굴욕적이었다.
“태초에 혼돈, 크레안 티다니온의 암흑만이 세상을 메우고 있어 풀 쪼가리 하나 자라지 못했노니, 그 혼돈을
물러 내고 빛을 가져온 자가…… 누구?”
라헤안시는 성전을 대충 읽다가 귀 뒤에 손을 가져다 대며,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태도를 보였다. 마치
대답을 촉구하는 모양새 때문에 광장이 술렁였다. 매년 있는 그림자 없는 밤이지만 이런 설교는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망설이는 게 보이자 라헤안시가 다시 “외쳐 봐, 누구!” 하고 얘기했다. 군중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떠듬떠듬 이, 이델라브힘……. 하고 얘기했다.
“이델라브힘!”
“그렇다 이델라브힘이시다. 맨 처음 대답한 소녀여. 아주 영특하구나 상으로 성전을 주겠다. 금박이 붙어 있으니
갖다 팔면 돈이 꽤나 될 것이다.”
“이델라브힘께서 빛의 권능으로 크레안 티다니온의 암흑을 걷어 내자, 비로소 세상이 보였나니. 세상이
이델라브힘의 빛을 보았노니. 이 영광을 누구에게 돌려야 마땅하겠느냐?”
“이델라브힘!”
“그러나 크레안 티다니온도 원래의 세계를 가지고 있던 강력한 신이다. 이델라브힘과 크레안 티다니온은 사흘
밤낮을…… 아, 이 사흘 밤낮은 그저 표현상으로 집어넣은 말이니 괘념치 말라. 여하튼 그렇게 싸우고 싸웠으나
이 신들의 전쟁은 완벽한 승자와 완벽한 패자가 없이 끝나고 말았으니…… 그리하여 생겨난 것이 낮과 밤이다.
이델라브힘이 관장하는 낮과 혼돈의 장막이 덮이는 크레안 티다니온의 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
82 화.
어떻게 뒷감당하려고 저러는 거지? 리카르디스는 저 배짱 두둑한 대신관의 안위가 염려되었다. 그는 제국의 2
황자라는 지위 때문에 갖은 행사에 불려 다니는 몸이었다. 신성 제국의 특성상 행사는 신전이 엮여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만큼 지루한 설교 시간 또한 많이 접해 보았다. 그래서 잘 알고 있었다.
이델라브힘의 뜻을 따르고 그의 축복을 세상에 나누어 주는 것이 신관이었으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영광은
이델라브힘보다 일라베니아의 황제에게 더 치우쳐 있었다.
“일라베니아 제국력 589 년. 대신관 라헤안시가 자비로우신 이델라브힘을 대신하여 그대들을 축복하는 바.
헐벗은 자에게 벗어 주고 굶주린 자에게 제 먹을 것을 내어 주란 말은 안 할 테니 나쁜 짓 하지 말고 건강하라.
이상 땡땡 끝이다. 자, 해산!”
라헤안시는 대충 손을 저으며 설교를 끝냈다. 그리고는 목이 타는지 평신관이 들고 있던 접시의 성수를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졸지에 빈 접시를 들고 있게 된 신관의 표정이 볼 만했다.
단상을 쭉 둘러싼 큰 항아리들에 그런 비밀이 있을 줄이야. 사람들은 설교가 끝났음에도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다가 성수라는 말에 눈망울을 반짝였다.
신관과 성 기사들의 무서운 눈빛 아래, 사람들은 차례대로 줄을 서서 성수를 마셨다. 신전에 헌금을 어지간하게
많이 내지 않는 이상에야 성수는 쳐다볼 수도 없는 귀한 것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집안에 아픈 사람들을 데리러
가는지 분주하게 광장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단상을 둘러싼 저 수많은 항아리들. 라헤안시는 리카르디스와 엘피디오 다음으로 성력이 강한 편이었으나,
저 항아리들을 모두 성수로 채울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몇 주동안 꼬박꼬박 만들고 모아 둔 것이 아닐까.
세상만사를 귀찮아하는 태도에 비하면 만민을 굽어 살피는 훌륭한 신관의 자세가 아닌가.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고는 광장을 떠났다.
거리의 사람들은 성수를 먹었느니, 안 먹었느니. 그림자 없는 밤이 무엇인지 아느냐며 와와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축제가 한층 더 활기를 띠었다.
잠시 사라졌던 로젤린이 슬그머니 나타나서 성수를 먹어 보고 왔다고 얘기했다. 특별한 맛을 기대한 것 같은데,
그냥 시원하고 맛있는 물이었다며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로젤린은 길을 잃은 전적이 있었던 터라, 또 자리를
함부로 비웠다고 혼났다.
사절단이 일라베니아로 돌아오는 길. 리카르디스는 ‘파편’에 중독되고 큰 부상을 입었던 로젤린을 치료할 때
한계까지 성력을 쏟아부었었다. 그때야 그저 로젤린의 정체를 어림짐작만 할 뿐이었고, 정확히 아는 게 없어
뭐라도 해 보자는 마음이었으나…….
생각해 보니 돕기는커녕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성력과 마력이 간섭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 불안정한 상태에
다른 종류의 힘이 들어갔을 때의 작용은 알지 못했다. 무지가 해악은 아니나, 다소 위험을 동반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녀의 몸을 떠돌던 성력은 중간중간 어떤 힘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리카르디스는 그것이 마력일 것이라
추측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완전히 분리되어 있던 성력이 로젤린에게 조금 스며들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낮은 수준으로 흡수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그녀 또한 성력을 조금이나마 받아들이는 몸으로
변화를 한 것 같았다.
마력과 성력의 만남은 아주 기묘했다. 물과 기름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섞이지 않는 성질이지만, 서로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 객관적인 사실이 아직까지는 지켜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무엇으로도 정의되지 못한 존재였다. 일반적인의 상식을 온전히 기대하기에는 불안한 부분이
많았다. 정보가 필요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힘. 성력과 마력의 표면적인 부분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이.
리카르디스는 성력과 마력을 연구하는 기관의 이름을 아주 잘 알았다. 그 기관의 이름은 신전이며, 연구자들은
신관이다. 그리고 대신전은 그 모든 정보들이 총망라된 집합체다. 대신관이라면 아마 황태자 위에 오르지도 못한
황자보다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라헤안시…….’
“……길을 또 잃을 수도 있으니까.”
* * *
로젤린이 레이몬드와 가벼운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때였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방을 찾아와 머뭇거리다
털어놓았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번갈아 보다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엄청난 축하였다. 전(前) 수습 기사들은 감동의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에버하르트는 너무 울어서 말도 못할 정도였고, 레티시아도 마찬가지로 엉엉 울며 로젤린을 얼싸안았다.
에버하르트도 은근슬쩍 안기려고 했지만, 레티시아가 그의 발을 거세게 밟아 무산시켰다.
발타에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만큼 공석도 늘어났다. 제국의 2 황자라는 지고한 신분이기에,
애도의 시간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이 마른가시나무 영지에 있는 동안 추모식과 승단식이 모두 끝났다.
에버하르트는 로젤린이 “네.” 하고 정직한 대답을 해도 바보처럼 웃었다. 정식 단원이 되었으며, 또한 봉급도
받고 이름뿐이지만 작위도 하사받았다.
뿌리 출신인 에버하르트는 더욱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레티시아도 가난한 영지의 아가씨였던 터라, 봉급의
얘기를 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여동생들에게 괜찮은 드레스를 선물해 줄 수 있을 것이라며. 정작 그
여동생들은 드레스를 거추장스러워 하는 모양이지만, 언니 마음은 또 다른 듯했다.
유명한 장인이 그들이 선호하는 검의 형태와 무게, 손의 크기까지 고려해 만든, 세상에 둘도 없는 검이었다.
83 화.
하지만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전과 같이 로젤린을 따르겠노라 자청했다. 임무를 제외한 시간을 그녀를 위해
쓰겠다고 얘기했고, 로젤린은 기뻐서 펄쩍 뛰며 그들을 한 번씩 안아 주었다. 몇 달 되지도 않은 인연의 끈이
질기기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
연무장이 우렁차게 울렸다. 레이몬드가 피식 웃었다. 황제 폐하가 와도 저 정도의 목소리는 아니겠다 싶었다.
다들 잠시간 술렁이다 야욕이 넘치는 표정을 하고는 멋진 폼으로 검을 휘둘렀다. 너무 예상한 반응이라 웃겼다.
레이몬드는 혼자서 흐흐흥 소리 내어 웃었다. 귀엽게 놀기는, 병아리들.
선망, 존경, 호기심, 탐구.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시선들이 로젤린을 떠돌았다. 로젤린은 햇빛을 받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나른하게 서 있었다. 사람들이 열의에 가득 차서 검을 휘두르건,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무슨 짓을 하건 관심 없어 보이는 모양새였다.
“근데 레이몬드.”
레이몬드가 가리킨 남자는 아직 성장 중이긴 하지만 제법 잘생긴 축에 속하는 수습 기사였다. 은근한 눈빛을 하며
윗옷을 천천히 벗어 재끼는데, 마을 처녀들이라면 꺅꺅 소리 지르며 볼 만한 몸매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젤린은 마을 처녀가 아니었고, 이 직장은 갑옷 같은 근육을 가진 자들이 돌멩이보다 흔한 곳이었다. 수습
기사의 몸은 마치 두부 같아 보일 정도의.
“쟤는 윗옷 아예 벗었잖아.”
“어디까지 했더라.”
“지원서.”
“내가 유명해?”
“기분 최고야.”
두 사람은 연무장을 한참을 더 돌아다녔다. 레이몬드는 검을 휘두르는 수습 기사들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고,
로젤린은 수습 기사들과 일 대 다수의 대련을 했다. 그녀와 대련하던 수습 기사들 중 세 명이 기절해서 실려 나간
이후, 로젤린은 검술의 시범만 보였다. 부단장의 부관과 유명한 상급 기사가 지도해 주니 다들 의욕이 충만해서
열심히 배우려 했다.
“멋있어!”
눈이 마주치자 소년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화들짝 몸을 떨었다. 열렬하게 쳐다볼 때는 언제고, 그 적나라하기
그지없는 시선을 알아챈 로젤린이 도리어 놀랍다는 듯, 어린 얼굴에 경외가 서려 있었다. 소년이 머뭇거리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묵례했다. 로젤린이 눈을 깜박이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니까, 만지기 전에는 마카롱 경, 만지는 걸 허가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정중히 물은 다음에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 만져야 된다고…… 어허어 마카롱 경! 그러면 못써! 후배들의 실수는 사랑으로 감싸 줘야지!”
“왜 그래, 로젤린.”
아무리 하얀밤 기사단을 관리하는 자 중 한 명이라지만, 그 수많은 수습 기사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몬드는 소년의 이름을 바로 떠올려 냈다.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몬드는 당황했다. 이렇게 다들 지켜보는 가운데 뇌물을 바치다니, 배짱이 대단한 놈이 아닌가!
꽃 줄기가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가자 헤사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귀 끝부터 퍼져 나간 붉은 기운이
온 얼굴을 물들였다. 소년은 불에 덴 것처럼 허둥지둥, 몸 둘 바 몰라 하다가 곧 결의에 찬 눈동자로 로젤린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로젤린이 최근 수없이 겪었던 검은달의 마력처럼 검붉고, 난폭하게 변질된 것이 아니었다. 색으로 친다면
순수한 검정. 티 하나 없는 완벽한 암흑. 고요한 힘이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소년이
가진 마력은 로젤린의 것과 흡사했다.
가만히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의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수습 기사들의 지도 및, 마카롱 경이
멋진 자태를 뽐내던 상황을 가르며 들어온 꽃 한 송이의 파급력이었다. 이 이상하고도 어색한 기류라니. 심지어는
헤사를 바라보는 수습 기사들의 눈초리가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슬쩍 눈치 보다가 연극하는 듯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 수습생. 그러고 보니 수습 기사를 뽑으러 온 거였지. 로젤린은 본래의 목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헤사를 향했다. 레이몬드가 다들 네 수습 기사가 되기만을 바랄 것이라며, 지원서 따위는 필요
없으니 그냥 적당히 고르기만 하라고 했었다.
라고 말했다. 백 명에 달하는 수습 기사들이 있는 거대한 연무장에는 바람이 지나는 소리만 흘렀다. 바보같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헤사가 로젤린이 말한 한참 뒤에 화들짝 놀라더니 입을 가렸다.
84 화.
웃는지 우는지 놀랐는지 모를 이상한 표정을 하던 소년이 떨리는 몸짓으로 무릎을 완전히 꿇고 머리를 바닥에
대었다. 주인에 대한 종의 경외에 모두가 상황을 깨달았다. 침묵이 깨지며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모습에서 소년이 자라난 환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라베니아 내에서
노예는 불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예 취급당하는 자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었으므로.
“상급 기사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는 수습 기사는 상급자의 수족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훨씬 많은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충분히 인지한 것이 맞나?”
레이몬드는 이 소년이 로젤린을 보필하기에 부족해 보인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헤사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서 손의 거스러미를 뜯으며 아래만 쳐다보았다.
“……노력하겠습니다.”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수습생이 상급자의 명예나 체면을 훼손하는 경우를 바라지 않는다. 이번의 돌발
행위도 포함해서 얘기하는 것이다. 신중히 행동하라. 비록 정식 서임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얀밤의 이름을
달고 있다면, 모든 언행이 본인만의 책임으로 끝나지 않음을 항시 기억해라.”
못 메울 것 같지? 얘 하지마. 레이몬드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로젤린이 헤사를 바라보았다.
힐끔 눈치 보던 소년이 후다닥 시선을 내렸다. 귀 끝이 또 빨개져 있었다. 로젤린이 빙그레 웃었다.
“누구한테……?”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에게.”
“예. 괜찮습니다.”
로젤린의 말에 헤사가 고개를 들었다.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소년은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슥슥 문지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의 고집이 쉽게 꺾이지 않는다는 것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일어섰다. 여전히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으로 헤사를 훑기는 했으나,
로젤린의 선택에 더 이상 입을 대지 않았다.
“안 즈어앗어.”
“수습생. 잘해라.”
“네!”
레이몬드가 헤사의 머리를 슥슥 쓸고 나갔다. 헤사가 떠나는 레이몬드의 뒷모습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 되, 된 건가?’
헤사는 자신이 꿈에서도 바라 왔던 일이 일어났음에도 기뻐하지 못했다. 무턱대고 꽃을 선물하기는 했으나 그녀가
꽃을 포함한 자신도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헤사는 귀족들의 세계에서 ‘뿌리’라는 이름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얀밤 기사단의 위명이
높아진 만큼 이번에 들어온 수습 기사들의 수준과 지위도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어느 대단한 가문의 누구. 누구의
딸, 누구의 아들…….
헤사는 늘 그랬듯 모든 기대를 내려놓았다. 사실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세간에 떠들썩한 그 무용담의 주인공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을 뿐.
그러나 수습 기사들 사이에 둘러싸여, 커다란 독수리의 비호를 받고 있는 로젤린을 본 순간. 헤사는 저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수습 기사가 된 이후였다.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이야.’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된다.
2 황자 리카르디스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점과 마인이라는 사실이 대두되며 로젤린은 큰 화제를 모았다. 헤사의
동기 대부분이 그녀의 수습 기사가 되길 바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헤사.”
“네!”
“그러죠.”
햇빛이 쏟아지던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창을 가리는 거대한 몸집 때문이었다. 마카롱 경이 어느새 날아와
창틀에 앉아 있었다. 맹금류의 왕이 날카로운 눈으로 헤사를 응시했다. 그 그림자에 잠식된 로젤린이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눈을 감았다. 곧 세상의 소음을 잠재우는 거대한 것이 몰려왔다.
그러나 로젤린의 안에서 요동치는 강한 기운을 느낀 순간, 헤사는 딱딱하게 굳어 있던 무언가가 파사삭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거대한 힘은 그녀 안에서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헤사는 자신이 거대한 파도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끝없이 침잠하는 것 같다 느끼기도 했고, 하늘을 가득 메운 은하수가 쏟아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무서웠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 * *
“네에?”
콧노래를 부르며 로젤린을 찾아온 헤사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뭐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해서
예쁨 받을 기대에 가슴이 잔뜩 부풀어 있었건만!
로젤린은 거울을 보며 제복을 정돈하고 있었다. 헤사가 그녀의 뒤에서 울상을 지었다.
“에버하르트 경이.”
“선배인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잘 가르쳐 줄게. 로젤린 경께서 내게 특별히 부탁하셨거든. 너…… 제대로 할
줄 아는 거 하나도 없지? 이야, 고생 좀 하겠네. 열심히 하자 꼬맹아?”
헤사의 눈이 돌아갔다.
“망할 꼬맹이!”
에버하르트가 씩씩거리며 등장했다. 레티시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팔굽혀펴기를 계속했다. 새롭게 로젤린의 수습
기사가 된 뿌리의 헤사. 그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후임자를 만나러 간다고 발걸음 가볍게 떠나더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다.
로젤린에게 전해 듣기로는 ‘음. 헤사요. 굉장히 귀엽습니다. 갓 태어난 고양이같이.’라는 감상이 다였다. 지금
에버하르트의 반응을 보자니, 확신하기 어려운 정보였지만.
갑작스럽게 헤사가 결투를 신청했다고 한다. 가르침을 청한다 정중하게 얘기는 하고 있지만 눈빛이 호기로워
자라나는 새싹을 작신 밟아 줄 생각을 하던 에버하르트는…… 참패했단다.
검투에서는 간신히 이겼지만, 박투에서 굴욕적으로 명치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 끙끙거렸단다. 그런
에버하르트를 내려다보는 수습생의 눈빛은 뭐랄까.
저런 놈이니 어린애랑 수준 맞춰서 놀고 있지…… 헤사뿐 아니라 에버하르트까지 통제해야하는 레티시아는 골치가
아팠다. 그녀가 수건에 얼굴을 묻고 후우……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버하르트가 비록 촐랑거리는 멍청한 촉새라도 무력은 무시할 게 못되었다. 그가 방심을 했다고 하더라도, 새로
들어온 수습생 또한 분명 괜찮은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으리라.
“로젤린 경이 오니까 표정 싹 바꾸고는 꼬리에 불난 강아지처럼 어찌나 꼬리를 흔들어 대던지! 이중인격자야 완전!
레티시아 내 복수를 해 줘!”
레티시아가 에버하르트의 엉덩이를 퍽 찼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이 자식은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안 된다.
누가 싸우고 오랬나. 일을 가르치고 오라고 했지.
작달막한 소년이었다. 분홍색이 살짝 섞인 빨간 머리의 소년이 호기롭게 레티시아를 올려보고 있었다. 첫 만남에
보이는 적개심이라고 보기에는 과한 감이 있었다. 레티시아는 에버하르트 멍청이가 무슨 초를 쳐 놓은 게
분명하다고 직감했다.
예의는 갖췄으나 눈빛이 불손했다. 에버하르트가 뒤에서 바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저 자식은 전쟁에는 내보내면
안 되겠다. 너무 단순해서 도발에 백이면 백 넘어갈 게 분명했다.
“수습 기사는 상급자의 일과에 따라 같이 움직인다. 수습생은 상급자의 수족이나 다름없으니, 로젤린 경이 언제
일어나고, 언제 임무를 하고, 어떤 작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해. 오늘은 그 일과에 대해서
…….”
레티시아는 에버하르트를 무시한 채, 소년을 다시 찬찬히 훑어보았다. 팔이 가느다랗다. 단련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 성장기인지 몸이 덜 자란 상태였다. 에버하르트의 복부를 타격하고 바닥에서 추하게 기어 다니게 할 정도의
타격을 주기에는 한참 모자라 보였다.
‘단순히 힘이 센 게 아니군.’
‘마인이다.’
로젤린 경이 받아들인 경위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소년이 마인이라면 나름 이해가 됐다. 레티시아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피하시는 겁니까?”
에버하르트가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지만 레티시아는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이라 우습지도 않았다.
“시골 후미진 곳의 작은 영지라 잘 모를 테지. 서리나팔의 가언은 ‘서리나팔의 여자는 절대 지지 않는다.’ 이다.
이게 무얼 말하는 거라 보는가?”
“세상에 절대 지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로젤린 경이라면 또 모를까. 아니 로젤린 경도 나에게 체스를
지고는 하시니, 그분 또한 지지 않는 건 아니겠지.”
헤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법 숨기는 척하더니, 어린애는 어린애인지 감정을 손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건, 그냥 허울 좋은……. 헤사가 울컥해서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레티시아가 말을 덧붙이는 게 더 빨랐다.
“서리나팔은 가언은 그것을 말한다. 진정 싸워야 할 때가 찾아왔을 때야 말로 물러서지 말라. 그것이 이기는
길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쓸데없이 힘을 빼지 마라 수습생. 수습생이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에버하르트가 아니다. 수습생이 해야 할 일은 로젤린 경을 보조하는 것. 그리고 오늘은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다. 그런데 지금 수습생은 배우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깎아 먹고 있군. 병장기도 없이 전쟁에 나가는
꼴이다. 수습생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건 간에, 이번은 필패다. 싸움의 종류를 알고, 싸워야 할 때를 알아라.”
헤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소년이 레티시아의 시선을 피하며 손을 꼬물거렸다. 레티시아가 픽 바람
빠지듯 웃었다.
레티시아가 손을 무릎에 대고 상체를 숙여, 헤사와 눈높이를 맞췄다. 소년이 홍조가 올라온 얼굴로 눈치를 봤다.
그녀가 씨익 웃은 다음에 소년의 어깨룰 툭툭 두드렸다.
“죄송합니다.”
이후로도 헤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뾰족하게 대했지만, 로젤린과 레티시아. 레이몬드에게만은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였다. 머리가 나쁜 편도 아니고 본인도 열심이라 업무를 익히는 속도도 빨라 레티시아는 결과적으로
만족했다.
“서리나팔은 대대로 데릴사위를 들이거든. 데릴사위들은 가언을 변화시킬 영향력도 없을뿐더러, 가위 바위 보에도
열 내는 바보들이 많았다. 실제로 잘 지고 돌아다니기도 했고. 궁금증은 풀렸나?”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헤사는 테이블에 엎드려서 숨넘어가게 웃었다. 어린 웃음소리가 유리 소리처럼 맑았다.
후에, 레티시아와 로젤린이 담소를 나누며 헤사를 ‘귀엽다’라거나 ‘귀엽고 착하다.’라고 얘기를 나눴는데,
이에 공감하지 못하는 건 에버하르트뿐이었다.
86 화.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 칼릭스 에스터의 보좌관이라는 자리는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었다. 전선에 머무르는
시간이 긴 백작을 대신해 칼릭스는 주로 성안에만 머물렀고, 그 성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알터가 맡는 일 또한 쳇바퀴 굴러가듯 비슷한 일들뿐이었다.
그 일정한 굴레에서 벗어난 지는 제법 오래 되었다. 사냥 대회에서 로젤린이 실종되었던 때부터. 그때부터 알터의
순조롭고 무난한 생활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결국 스스로 달아 놓았던 ‘월급 도둑’이라는 흡족한 별명도
내려놓아야만 했다.
로젤린이 마른가시나무 성에서 요양을 마치고 칼릭스와 함께 수도로 떠났을 때, 알터는 비스타에 남아 마인을
찾기 시작했다.
발타로 떠나지 않은 마인들은 전투가 잦은 지역에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칼릭스가 이 거리에서
소매치기 마인 소년을 만났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알터는 비스타부터 뒤졌을 것이다.
그랬더니 칼릭스가 자신이 직접 알아보겠다며 비스타로 내려왔다. 평소 차분한 성격은 어디다 버리고 온 것인지.
알터는 오랜만에 보는 제 주인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두 사람은 축제의 빛이 옅어지는 좁은 골목의 안쪽에 있었다. 칙칙한 회갈색의 후드를 뒤집어 쓴 칼릭스가 하얀색
일색인 거리에서 눈에 너무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후드를 벗자니 검은 머리가 너무 눈에 띌 테고.
“알터. 지금 이 소리 들었나?”
“예? 무슨 소리?”
칼릭스가 먼 곳으로 시선을 두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알터는 거리의 소음을 뚫고 제 주인에게 들어갈 만한
특별한 소리가 있나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크으, 역시 우리 도련님. 용건만 간단히! 시계도 도련님처럼 시간을 효율적으로 나누지는 못할 겁니다!”
“그만하라고 좀.”
알터는 희희덕 웃으며 제 품에서 구깃구깃 접혀진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칼릭스는 그것을 잽싸게 펼쳐서 읽었다.
악필로 쓰인 정보들은 토막 나 완전하지 못했고, ‘?’라던가 ‘△’ 같은 기호로 뒤덮여 있었다. 총체적으로
살펴보자니 미심쩍은 구석이 있긴 한데 잘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칼릭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월급 도둑을
째려봤다.
알터의 말대로이긴 했다. 눈앞에서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펑펑 써 대어도, 마력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확정 지을
수는 없었다. 이 종이에 동그라미를 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인뿐이었다. 칼릭스는 서류를 곰곰이 읽었다. 무슨
사거리 정육점, 무기점, 용병단, 불법 투기장…….
알터는 종이에 그려져 있는 것 중 가장 큰 세모를 가리켰다. 그 아래, [불법 투기장] 이라고 적힌 글자가 알터의
침에 의해 번져 있었다.
허름하고 반 쯤 무너져 가는 것 같은 건물이었다. 알터가 안내한 불법 투기장은 불법 투기장이라는 이름이 정말
너무 잘 어울렸다.
“죽여!”
“죽어!”
눈알을 어쩌고 불알을 어쩌고! 부모님의 안부를 서로 묻는 관전자들의 거친 언사가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반쯤
내부가 보이는 건물은 전혀 방음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저 사람들 불법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맞겠지?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이 장소를 못 찾는 게 아니라 눈감아 주고 있는 것이리라.
칼릭스가 건물의 입구를 찾아 들어가려 하자, 거대한 남자들이 앞을 막아 섰다. 흉터가 여기저기 깊고 굵게
새겨진 데다가, 인상도 사납고 수염도 숭숭 나 있어 위협적이기 그지없었다.
칼릭스는 초대장을 받기 위해 알터를 돌아보았다. 알터는 입술을 흉하게 오므린 채,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고
있었다.
‘…이 자식이…….’
목소리가 컸다. 초대장도 없어 보이는 허접한 곳을 보물단지처럼 지키던 남자들의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칼릭스는 진심으로 알터를 해고하고 싶어졌다.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주위의 다른 산적 같은 사내들도 흉흉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압박하며 한걸음씩
다가왔다. 알터는 식은땀을 흘렸다. 대충 돈을 먹인다고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나.
칼릭스가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주먹보다 큰 주머니는 이미 두둑하게 무언가로 채워져 있었고, 분위기 상 대충
그 안의 내용물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칼릭스가 남자에게 주머니를 던졌다. 찰랑이는 금속음이 건물에서 퍼져
나오는 비명 소리를 뚫고 뚜렷하게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
야유가 쏟아졌다. 우리 할머니 운운하며 야유를 퍼부은 자가 어린 여자아이, 그것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라 몹시 혼란스러웠다. 피가 튀고, 술병이 날아다니고, 관전자끼리도 싸우고.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음, 개판이네.”
그는 찌푸린 인상으로 와인을 째려보다가 알터에게 병을 넘겼다. 불법 투기장을 구경하느라 한눈팔고 있던 알터는
칼릭스의 행동을 미처 보지 못했고, 그 덕에 칼릭스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알터는 와인을 마시고 말았는지 욱욱하며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그 사이 주위를 둘러봤다. 문신,
흉터, 반쯤 헐벗은 남자들, 담배 연기. 어린아이부터 노파까지. 연령대도 다양하고 거는 액수도 천차만별이었다.
칼릭스처럼 후드를 눌러쓴 자들도 있었다.
‘이 안에…….’
“도련님.”
“왜.”
“제 세모의 주인공입니다.”
87 화.
“그렇군.”
“당연히 있지요!”
보통 저런 반응 뒤에는 ‘없다’ 따위의 반응을 기대하기 마련이라,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알터가 투덜거렸다.
“이 자식이 말만 번드르르해서는…….”
“그렇겠지.”
“그런데도 비스타를 떠나지 않는단 말이죠. 난다 긴다 하는 싸움꾼이나 용병들이 비스타를 찾는 이유는 금전적인
문제뿐이고, 그게 충족되면 위험한 국경 지대를 떠나기 마련인데…… 길레드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예, 발타라는 코앞의 위험을 감수하고도 남아야 할? 비스타 내에 형성되어 있는 마인들의 연결 고리를 벗어나
외부로 향할 용기가 없다던가 하는 그런……?”
“비약인걸.”
“길레드의 대전자는 떠오르는 신성이네요. ‘애꾸눈’ 카터. 왜 애꾸눈이냐면 이길 때마다 상대방을 애꾸눈으로…
….”
“아마 길레드가 이길 겁니다. ‘애꾸눈’이나 ‘새끼손가락’처럼 영구적인 신체 손상을 입히는 대전자를 만나면
항상 이기더군요.”
칼릭스는 그에게 두었던 시선을 천천히 자신의 발치까지 끌고 왔다. 소리치고 악을 쓰는 사람을 수십 명
지나쳐야만 닿을 수 있는 먼 위치.
잠시간 닿았던 길레드의 시선이 무언가를 예감하게 했다. 비로소 칼릭스는 커다란 세모 위에 동그라미를 칠 수
있었다.
* * *
“아이고 어서 오시죠!”
길레드는 재빠르게 방 안을 훑었다. 두 사람 이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제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닫히는 문소리가 무거웠다.
‘귀족인가…….’
“갑작스럽게 불러 내어 미안하군.”
칼릭스의 인상이 사납게 구겨졌다. 불법 투기장에서 구르며 갖은 험악한 인상을 다 본 길레드가 움찔할 정도였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다.”
“편한 대로.”
길레드가 머쓱하게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칼릭스. 맞다. 그런 이름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후계자이자,
대륙에 명성이 자자하게 퍼진 ‘마인’의 혈육. 비스타에서 돈 많고 잘생긴 데다가 귀엽고 착하기까지 하다고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저를…… 아니지, 마인인가요?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감도 잡히지 않는군요.
마인과 가장 가까이에 계신 분이 아닙니까.”
칼릭스는 말을 골랐다. 허울 좋은 핑계야 만들어 내자면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자들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뒷골목을 전전하고 사는 대표적인 하층민. 그럴싸한 말로 간단히 손을 빌릴 수
있겠지만…….
어쩐지 그러기 쉽지가 않았다. 달콤한 말이 나가는 대신 입안은 쓰기만 했다. 칼릭스가 피식 웃었다.
“내 필요에 의해서.”
“만일이라 하신다면?”
“전쟁.”
길레드는 아, 하고 신음했다. 요새 비스타가 어수선하더라니. 골목골목 있는 주점마다 전쟁의 가능성이 알음알음
돌더라니. 누런 이에 정돈되지 않은 턱수염을 가진 취객들이 말하는 것과, 정장을 차려입은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가 말하는 ‘전쟁’의 무게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11
“어이, 로젤린.”
“파르파르.”
“그, 그럼 어쩔 수 없긴 하지…….”
88 화.
“어쩔 수 없긴 뭐가 어쩔 수 없습니까!”
레이몬드는 헤사가 로젤린 휘하에 들어갔음을 등록하는 서류를 대신 작성하고 접수한 후에 돌아오던 길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듣는데 아주 가관이었다. 귀여워서 뽑았다고 하질 않나, 그럼 됐다고 하질 않나.
“마른가시나무 백작님한테.”
남자는 얼굴이 전부란다. 마른가시나무 성 내부의 연무장을 같이 구경하던 중 세실이 한 말이었다. 로젤린이
보기에도 반쯤 헐벗은 남자들은 턱 선이 각지고 콧날이 우뚝하여 아주 잘생긴 편이었다. 로젤린은 세실의 말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보기에 좋았다.
“백작님…….”
세 사람이 복도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에 지나가던 상급 기사들이 하나둘 멈춰 섰다. 로젤린에게
새 수습생이 생겼다는 시답잖은 건을 주고받다, 주제는 흐르고 흘러 ‘제일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누구인가?’로
바뀌었다.
“역시…….”
“한 분밖에 없지.”
“디에즈 전하도?”
“그래도 역시…….”
“진짜 아름다우시지.”
로젤린은 상급 기사들의 말에 수긍했다. 자신도 전하를 보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열이 오른 적 있었는데!
다들 그랬구나. 전하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 거였어. 로젤린이 “저도요. 심장이 막 두근거렸습니다.” 한마디
보태니 레이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그렇다면서 로젤린과 손뼉을 짝짝 부딪쳤다.
이 모든 광경을 애칭 슈슈, 슈텐만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축제 당시 로즈와 도련님 사이에 흐르던 기묘한
공기를 보았다. 가슴 안쪽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기류가 분명 있었건만, 로젤린이 지금 완전히 길을 벗어나 버린
것이다. 로젤린 너는 거기에 끼어 있으면 안 돼…… 이 멍청이들이 지금 뭐 하는 거야…….
누군가의 말에 로젤린이 자신은 전하의 피부를 만져 봤다며 자랑했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어우야, 하면서
로젤린의 어깨를 툭 밀면서 낄낄대는데 슈텐은 환장할 것 같았다.
“엄청 매끄러우셨습니다.”
* * *
“뭐지.”
“…….”
계속해서 힐끔거리는 슈텐의 눈빛이 몹시 불쾌했던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반대쪽 창문으로
로젤린이 멍하니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말 위에서 앉은 다리를 하고 있는 재주가 아주 멋졌다. 리카르디스는
마차의 뒤를 따르던 레이몬드를 불렀다.
“레이몬드 경.”
“잠시 이리로.”
리카르디스의 대답에 로젤린이 입꼬리를 쭉 늘려 웃었다. 최상단에 위치한 결정권자가 자신의 편이라 마음이
든든한 듯했다. 삐이익!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물고 있는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빠져나왔다.
화답하듯 하늘 위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울렸다. 마카롱이 하강해 로젤린의 팔 위에 앉았다.
이름이 이름이라 그런지 오트밀 쿠키 대신에 마카롱을 먹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로젤린은 마카롱에게 쿠키를
물려 주고 제 입에도 하나 쏙 넣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 경.”
“예. 전하.”
레이몬드는 심하게 사레들렸다. 콜록거리는 소리가 요란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레이몬드는 “너, 로젤린 언제 전하와……!” 따위와 같이 무언가를 추궁하고자 했으나, 슈텐이 재빠르게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아, 맞다.”
“……안장이 불편했나?”
보통은 묻고 들어오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표정이 제법 심각해 보여 리카르디스는 뒷말을 삼켰다. 로젤린은
창문을 전부 닫는 와중 동공이 확장된 레이몬드와 눈이 마주쳤다.
탁.
로젤린은 레이몬드의 경악 어린 눈동자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가벼운 손길로 문을 닫았다. 그녀가
리카르디스를 돌아보았다.
“전하.”
또 다른 마인. 어딘가에는 살고 있었을 테지만, 시기와 장소가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잘은 몰라도 대륙에
자자하게 퍼진 명성에 따라오는 어떤 작용일 것이다. 그게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는 모르겠으나.
귀엽다고 검은달이 아닌 건 아니지만, 확실히 검은달이 귀엽지 않기는 했다. 나름 확실한 구분법인가.
리카르디스가 웃음을 흘렸다.
헤사가 부탁한 적은 없으나,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밝혀지길 바라지 않을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비밀.
로젤린은 얽힌 새끼손가락을 두어 번 세차게 흔들고 엄지를 딱 붙여 도장까지 찍었다. 이 어설픈 서약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코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둘은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밖에서 서성이는 로젤린의 보호자, 레이몬드의 기척이 느껴졌으나
두 사람 다 무시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천천히 구경 시켜 주고 싶지만, 나를 붙잡고 늘어지려는 자들이 많아. 느긋하게
둘러볼 시간은 없을 테지.”
“인간들만 없으면…….”
“안 된다.”
“안 합니다.”
89 화.
뎅-
멀리서 하늘을 울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뱃속에 구렁이 수십 마리씩 품고 있는 자들이 기거하는 곳의 상징치고는
꽤나 아름다웠다. 신전이 코앞이었다.
쿵!
로젤린의 머리와 충돌한 마차가 굉음을 냈다. 거대한 마차가 순간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거렸다.
“로젤린!”
로젤린이 머리를 감싸고 낑낑거렸다. 리카르디스가 급하게 그녀의 정수리 부근을 문질렀다.
“왜 갑자기 일어나고그래.”
리카르디스는 난데없는 로젤린의 애교…… 비슷한 것에 당황하다가 다시 그녀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로젤린은 머리로부터 밀려드는 따뜻한 기운에 눈을 감았다.
“많이 아프나?”
다정한 목소리가 마음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음의 파동이 흔들고 간 마음이 다시금 잔잔히
가라앉고 있었다.
* * *
대신전에 도착했다. 금강석 성만큼이나 화려한 건물이었다. 오라고, 오라고, 제발 한번만 방문해 주시라 아무리
빌어도 오지 않던 2 황자의 방문에, 신관이며 성 기사들이며 할 것 없이 신나서 달려 나왔다.
노쇠한 신관이 눈물을 보였다. 2 황자 전하께서는 몸은 멀리하시지마는, 마음만큼은 언제나 대신전과 함께였다는
사실을 자신은 믿고 있었노라며 감격해했다. 아니 뭘 어떻게 하면 그 말이 그렇게 해석이 되는 거지?
리카르디스는 치를 떨었다.
로젤린은 집단의 후미에서 리카르디스를 따르다가, 뒤돌아보았다.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의 시선이 와서 박혔던
탓이었다. 눈이 마주친 어린 신관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더러운 거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하얀색 일색인 인파를 죽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로젤린을 보며 전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얼굴을 일그러트린 가면들을 수백 개 걸어 놓은 공간 속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두피부터 시작해 뒷목
아래까지 거미가 천천히 기어가는 듯한. 그런 기분.
오랜만에 느끼는 적의는 낯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리카르디스는 저 앞에 있었다. 레이몬드가 의문이 섞인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잠시 발걸음을
멈췄던 로젤린이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아치 모양의 문을 지날 때였다.
챙!
“……지금 뭘 하는 짓이지?”
입구에서 출입을 허가 하지 않으면, 열에 아홉은 말없이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물러나고, 나머지 하나는 무슨
일인지 묻는 것이 보통의 경우였다.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을 벗어난 로젤린의 이상한 행동에 성 기사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아니, 자존심도 없어? 왜 기어서 들어오려는 거야?
“이런…… @#$^&%##……….”
욕이었다. 뒷골목을 전전하는 자들이나 사용할 법한 걸걸한 욕이 기어코 그의 이성을 뚫고 나오고야 말았다. 성
기사들은 2 황자의 입에서 욕이 나오는 진귀한 광경에 몸을 굳혔다.
“그, 그것이…….”
“신전의 법률이라 말했나? 일라베니아의 탄생과 시작된 신전의 법. 높으신 이델라브힘의 뜻이기에 영광스럽고
숭고하다. 하나, 시대마다 위대하신 선황들마다 조금씩의 차이를 보인다. 이 말뜻이 무엇이느냐면.”
“만물을 비추시는 분, 이델라브힘. 그분의 뜻은 미천한 우리들로는 백날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는 거다. 이
미천한 머리로는.”
성 기사의 얼굴이 발개졌다. 교리를 공부하거나 기도하는 시간을 제외하고서는 단련만 해 왔던 자신이, 곱게 자란
2 황자에게 힘으로 밀리다니.
로젤린은 눈만 굴리고 있다가 가로막고 있던 이들을 잽싸게 지나쳐 리카르디스의 뒤에 섰다. 무섭게 일그러진
표정들은 이제 그의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로젤린이 작게 숨을 쉬자 리카르디스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가 손수 더러워진 로젤린의 제복을 툭툭 털어 주었다.
“경, 괜찮나?”
리카르디스가 자세를 낮춰 그녀를 걱정 어린 다정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로젤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리카르디스가 굳은 표정을 애써 누그러트리며 웃었다.
“진짜 괜찮은 거지?”
“네.”
대신관들은 신전 내에 각각의 별관을 가지고 따로 생활했다. 라헤안시가 머무는 별관은 다른 대신관들의 건물에
비하면 작은 축에 속했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로젤린은 입을 떡 벌리고 구경했다. 리카르디스가 혀를 쯧
찼다.
라헤안시를 돕는 신관이 이미 나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로젤린도 그들의 얼굴을 알아봤다. 축제 ‘그림자 없는
밤’에서 라헤안시 뒤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90 화.
“애쓰는 모습은 안쓰럽다만, 변명은 되었다. 라헤안시 대신관의 방만함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신관이 앞서 들어가 라헤안시에게 손님의 방문을 알리려 했으나, 리카르디스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신관이 초조하게 제 손톱을 물어뜯었다.
방 안은 어지러웠다. 바닥에는 예복이, 침대 위에는 걸레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분홍색 머리의 라헤안시는
그 걸레와 함께 침대 위에서 뒹구는 중이었다. 그는 엎드려서 성전을 읽고 있었는데, 먹고 있는 과자 부스러기가
성전 위로 후드드 떨어졌다.
“아, 형 왔어?”
“……여전하구나.”
신관이 미간에 주름을 잡고 불손한 눈초리로 라헤안시를 노려보았다. 분명 설원의 월계수, 2 황자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방문하셨다고 또박또박 일렀건만, 저가 성전 읽으며 한 귀로 흘린 건 생각도 안했다.
“……모두 문밖에서 호위를 해라. 이곳에서 위험한 것은 위생 수준뿐이니. 그리고 로젤린 경은 대화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이동해 있는 게 좋겠다. 레이몬드 경이 그녀와 함께 있도록.”
“예, 전하.”
머뭇거리던 로젤린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또 다시 시무룩한 기색을 보이는 로젤린을 보며 리카르디스는 제
입술을 한번 가볍게 물었다. 곁에 두고 안심시키고 싶었지만, 어떤 대화가 오고 갈지 모르니 일단은 잠시 물러
둬야만 했다. 물러 둬야…… 물러 둬야 하는데…….
“안 됩니다.”
“깐깐하기는.”
스타스가 잠시 두 눈을 감았다.
레이몬드와 리카르디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스타스를 쳐다봤다. 기사단장이 무거운 침묵으로 그들의 불만을
가볍게 눌렀다.
* * *
슈텐과 로젤린이 방을 나와 이동했다. 생각보다도 로젤린의 귀가 성능이 훌륭해, 예상된 지점보다 멀리 와야만
했다.
로젤린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마주하고 있자 슈텐이 그녀를 가리며 앞으로 나섰다. 신관들이
슈텐의 사나운 얼굴을 보고는 슬슬 도망가듯 발걸음을 옮겼다.
로젤린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잔상처럼 남아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답답하고
불안했다. 갑자기 리카르디스가 보고 싶었다. 괜찮나? 경? 어깨에 손을 얹고 눈을 맞추는 그를 보면 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로젤린의 입술은 하도 매만져 붉게 부어 있었다.
자신을 향한 악의는 하얀밤 기사들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에도 종종 겪었으나 이것은 달랐다. 좀 더 집요하고,
좀 더 사납고, 좀 더 자신을 파헤치려는 듯했다. 슈텐의 어깨 너머로 늙은 신관과 눈이 마주쳤다. 최악의
살인자를 보는 눈빛이 그러 할까.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역하고 냄새나는 것을 모아둔 찌꺼기를 마주한 얼굴이
그러할까.
로젤린은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로젤린이 입을 가리자 슈텐이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봤다.
“속이 좋지 않아?”
“기분 나쁩니다.”
“먼저 성으로 귀환해. 내가 보고 할 테니.”
“싫습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떠올렸다. 이런 공간에 그를 두고 갈 수 없었다. 슈텐은 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것을 대충 눈치챈 듯했다.
“붉은수레바퀴의 고집이란. 대신전에서 전하를 공격할 만한 간 큰 인간은 없어. 공격은 무슨, 전하를 머리에
이고 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널렸다고.”
로젤린이 입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리질하자 슈텐이 휴 한숨을 쉬었다. 가라, 싫다. 가라고! 싫다고!
공방을 벌이고 있는 도중, 한산해졌던 복도 끝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널찍한 복도에서 굳이 가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하고 있었으니 그저 지나가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다.
“로젤린 경?”
익숙한 목소리에 로젤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디에즈가 다가오고 있었다. 축제 날 길을 잃었을 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디에즈는 그녀의 대답에 호들갑 떨며 괜찮으냐고 묻는 대신,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야에 저
멀리서 로젤린을 바라보며 소곤대는 신관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디에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디에즈가 슈텐을 바라보며 상냥하게 물을 때는, 아까의 표정이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임시 보호자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디에즈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이동했다. 언제나 차분했던 걸음걸이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빨랐다. 로젤린도 그에 맞춰서 반쯤은 달리듯 이동했다. 디에즈는 중간중간 계속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돌아볼 때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손목에 머물렀다. 자신이 그녀를 잘 잡고 있는지 확인 하는 것 같았다.
* * *
정원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땅에서 올라오는 것이고, 나무에서 열리는 것이고 할 것 없이 제 멋대로 자라
있었다. 디에즈가 말한 대로 공간 안에는 어떤 사람도 없었다. 막 이곳에 발을 들인 로젤린과 디에즈.
둘뿐이었다. 부서진 분수에는 물이 메말라 있었지만, 갈라진 틈으로 담쟁이덩굴이 감싸듯 자라고 있어 멋스러웠다.
탁 트인 공간에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로젤린은 싱그러운 풀 냄새가 섞인 바람을 맞으며 눈을 살며시 감았다.
더러워, 어떻게 저런 불길한 것이 신전에…… 속삭이던 말들이 모두 사라졌다. 귓가를 울리는 것은 새 소리와
이따금 울어대는 풀벌레들의 노래 소리뿐이었다.
바스락 바스락.
거기에 하나의 소리가 더해졌다. 로젤린은 눈을 떠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디에즈가 풀숲을 기웃거리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디에즈가 웃음을 터트렸다. 눈물까지 찔끔 흘리는데 뭐가 웃긴지 로젤린은 이해하지 못했다. 디에즈는 큰 나무
그늘 아래에 제 겉옷을 벗어 펼쳤다.
“앉아요, 로젤린.”
“안 드십니까?”
디에즈는 로젤린의 기분을 환기시켜 주려 애쓰면서도, 그녀의 기분이 저조한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저
가끔 시선이 마주치면 웃고, 바람에 나무 그림자가 움직이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음. 뭐가 고마울까요?”
제 멋대로 자라 있는 수풀. 부서져서 담쟁이덩굴에 감싸인 분수. 여기저기 매달린 과실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앞머리가 그의 눈을 가렸다. 오뚝한 콧날과 입술만 보이는 옆모습임에도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것쯤은 보였다. 기쁘다는 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딘가 침울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축제에서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요즘의 디에즈는 좀 이상했다.
“에파……는 뭡니까?”
디에즈가 머뭇거렸다.
말하던 디에즈가 황급하게 단어를 바꿨다. 특정 동물이 욕같이 들린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했다.
“……강아지입니다.”
“아, 제가 개 같다고요.”
“강아지. 입니다.”
디에즈가 정색했다. 좀 더 귀엽고 온건한 단어를 추구하려는 듯했다. 강아지라고요. 한번 더 강조해서 로젤린은
고개를 재빠르게 끄덕이며 네, 강아지. 하고 대답했다.
“제가 며칠 걸려 숙제를 해 놓으면 찢어 놓고, 겨울날 쌓인 눈으로 열심히 얼음집을 만들면 달려와서 부수고는
했었죠.”
“그날 밤에 에파가 감기에 걸렸는지 콧물 흘리면서 헥헥 거리기만 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얼음집을
부술 때만 해도 저런 개, 아니 강아지 당장 갖다 버리라고 했었는데,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얼음집이고 뭐고,
그저 아프지만 않게 해 달라며 이델라브힘께 기도했었죠.”
그러니까 결국 좋아하기는 했다는 건가? 혼란스러워 하는 로젤린의 표정을 보고 디에즈가 웃음을 터트렸다. 곧
그가 로젤린에게 두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었다. 디에즈가 이런 장난을 할 줄은 몰랐던
터라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에즈가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얄미워.”
디에즈가 꼬집던 것을 멈추고 손바닥으로 감싸듯 그녀의 볼을 덮었다. 꾹 눌러서 로젤린의 입이 새의 부리처럼
튀어 나왔다. 디에즈가 즐겁다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 로젤린은 난데없이 놀림당하는 느낌이라 어쩐지 심통이
났다.
* * *
“앉아, 형.”
“어디에?”
잇세리온은 재빠르게 라헤안시가 지목한 곳을 들춰서 의자를 발굴했다. 손수건을 꺼내서 삭삭 닦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기사들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라헤안시는 성전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과자 부스러기를 탈탈 털었다.
침대 위에서. 리카르디스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혼났겠지. 리카르디스는 뒷말을 삼켰다. 기분 좋아하는 어린애의 심기를 거스르는 악인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델라브힘의 아래 종의 역할을 맡은 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이름만을 지녔다. 어떤 가문의 라헤안시, 위대한
누구의 아들 라헤안시가 아닌 그저 한낱 미천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권력 싸움에서도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사실이 리카르디스가 라헤안시를 좀 더 편하게 여길 수 있게 했는지도 모른다.
“오늘 마침, 대신관들 일곱 중에 넷이 자리를 비우는 날이더군. 그나마 덜 마주칠 수 있으니 오늘이 적기였지.”
라헤안시는 자신이 차려 놓은 다과를 즐기며 제 이복형제를 주시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리카르디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 빛났다. 아, 거참 잘생겼다.
라헤안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린아이 때부터 배우는 개념을 지금 다시금 알려 달라는 건 아닐 테고? 마력,
마력. 크레안 티다니온. 검은 달로부터 오는 불길한 힘. 성력과 정 반대의, 상극의, 섞이지 못하는…….
“……역시 넌 알고 있었군.”
“명색이 대신관인데.”
배고픈 자에게 먹을 걸 내어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며 만민을 두루 살핀다는 선량한 성직자의 얼굴 뒤에는
다른 모습이 있었으니, 다름이 아닌 사이비 교주였다. 대신전과의 가르침과 반하는 교리를 설파하며, 백성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죄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일라베니아는 충격에 빠졌고 대신관 윈디트는 사형당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라헤안시가 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라헤안시가 대신관이 되는 것을 꺼려하는 자들이 많았다. 대신관 윈디트는 상급 신관 라헤안시를 곁에 두고
교리와 법률,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다. 접촉이 많았던 만큼 라헤안시도 당연히 물들어 있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는
당연했다.
하지만 라헤안시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제 결백을 증명했고, 그가 윈디트에게 이상한 교리를 사사 받았다는 증거
또한 한 장도 찾을 수 없었기에, 그저 의심에만 그치고 넘어갔다. 물론 그 뒷배경에는 라헤안시의 혈통이 톡톡히
작용했다. 아무리 성을 버렸다고는 하나, 황제는 제 핏줄이 그런 오명을 쓰는 것을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92 화.
“형, 윈디트는 딱히 종교를 창설하고 교리를 설파하고 다닌 적은 없어. 사이비 교주라니 말도 안 돼.”
“사형당해서 억울했겠군.”
라헤안시가 무성의하게 박수를 짝짝짝 쳤다. 대충 맞다는 얘기이리라. 발타의 신전에서 눈치챘던 것이지만, 황제
다음으로 ‘축복의 밤’에 가까운 대신관이 확인해 주니 마음이 놓였다.
“그럼에도 형. 현재의 일라베니아 백성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해. 일라베니아가 의도적으로 마인과 마력의
필요성을 지워 버린 거야. 윈디트는 그걸 알고 몰래 퍼트리고 다니다가 딱 걸렸어.”
“그것도 있지만, 형. 일정 수준의 성력을 가진 사람이 ‘축복의 밤’의 조건이라면, 마력도 마찬가지로 일정
수준이 필요하잖아?”
라헤안시는 새삼스러운 말을 되짚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럼에도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설원의 월계수의 핏줄들은 대대로 성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 역할에 부합했던 거지. 그래서 대대로 하얀 밤을
불러 왔고.”
“그렇겠지.”
그렇다면 라헤안시의 말대로, 마력을 타고나는 핏줄이 있을 가능성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떤 기록에서도,
어떤 역사책에서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인의 존재와 마력의 역할을 필사적으로 지우는 일라베니아 황실의 특성상
그 또한 가려진 부분일지는 몰랐으나,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있었어.”
그들은 분명 존재했다. 강한 마력을 타고나는 혈통.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일라베니아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떠난 것인가? 숨어 버린 것인가? 하지만 몇백 년이 지나는 세월 동안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고 숨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설원의 월계수의 혈통이 아니더라도 성력을 가진 자는 대륙 여기저기에서 태어났다. 때로는 황족을 넘볼 정도의
성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보통의 경우에는 신전에서 그들을 데리고 와 신관으로 길렀다. 강압적인 절차를
밟는 경우도 종종 있긴 했으나, 큰 보상이 따랐기에 부모들은 순순히 아이를 넘기곤 했다.
리카르디스는 실소했다. 이거야 원. 멍청한 것도 정도껏 해야지. 독식하려다가 상을 뒤엎은 꼴이었다. 설원의
월계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게 창피해질 지경이었다. 피가 이어져 있지 않은게 다행이라 여기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산뜻한 봄바람이건만 서늘하게 피부를 훑는 듯했다. 닭살이 돋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앞날의 험난함을 예고하는
한마디였다. 리카르디스도 체감했으나, 이복동생이라 해도 대신관의 위치에 있는 자에게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을 줬다. 옛날 명망 높은 대신관 몇은 예언 따위도 종종 하지 않았다던가.
첨탑에서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은 문밖을 향했다. 멀리에
있을 로젤린을 그려 보았다. 많이 불안해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리카르디스는 다음을 기약하며 일어섰다.
“라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리카르디스가 품는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라헤안시는 목걸이를 침대 아래에서
낑낑거리며 꺼내면서 말했다.
“한데?”
리카르디스가 그의 머리를 손으로 빗어 하나로 묶었다. 머리카락 하나가 당긴 것인지 아프다고 난리를 쳐서
느슨하게 다시 묶어 줘야 했다. 지저분한 머리를 묶고 나니 훨씬 인물이 살았다. 라헤안시는 거울속의 자신에게
윙크와 사랑을 화살을 한번 날린 다음에야 대답했다.
리카르디스는 거울에 비친 라헤안시의 얼굴을 보았다. 여느 때처럼 히죽히죽 웃지도, 나른하게 늘어져 있지도
않았다. 어느 한 곳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먼 곳을 그리고 있었다. 라헤안시는 곧 뒤돌아서 씩 웃었다. 언제나
보아 왔던 미소였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아까 리카르디스를 안내했던 신관이 초조한 얼굴로 라헤안시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는 이래 봬도 대신관이라 하더니, 역시 빼먹은 전적이 몇 번 있는 게 아닐까.
“담에 또 봐, 형.”
“이델라브힘의 축복이…….”
“가라고.”
갑자기 많은 정보가 쏟아져 머리가 아파 왔다. 리카르디스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인상을 썼다. 몇 세대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강한 마인의 출현. 이걸 단순하게 ‘와, 대단하다.’ 라던가 ‘와, 멋있다.’와 같은
감상으로 끝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별관을 나왔더니 저 멀리 슈텐이 홀로 서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에게 다가가 로젤린의 행방을 물었다.
“르원.”
“예, 전하.”
“저 자리를 어떻게 하면 가장 엉망으로 파할 수 있을 것 같나? 가슴에 생긴 상처 때문에 열매는 물론이고,
동그란 것까지 두 번 다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그렇겠지, 나는 나 혼자 컸으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열매를 황홀하게 바라보던 로젤린이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낮춘 자세, 까딱이며 풀고
있는 손가락, 크게 뜬 채 한 번 깜박이지도 않는 눈. 누구 하나 잡을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쾅!
로젤린은 조각상 여인에게서 도자기를 강탈하고는 더욱 흉흉한 기세로 다가왔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이 서 있는 곳에 도착하기 전에 멈춰 섰다. 그녀가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며 도자기를 날릴 준비를 했다.
하얀밤 기사단이 양 옆으로 쫙 갈라졌다.
쉬익-
퍽, 파삭.
정확하게 머리를 강타한 도자기는 산산조각 났고, 신관은 스르륵 쓰러졌다. 성난 호랑이 같던 로젤린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여러 시선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암살자입니다.”
“……그러길 바랐다.”
지나가던 선량한 신관의 머리를 깨 버리길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에. 리카르디스는 자리를 수습하라
기사단원들에게 명령했다. 곧 그는 디에즈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돌아보았다. 손수건 위의 열매가 잔뜩
으깨져 있었다. 로젤린이 앞만 보고 오느라 밟아 버린 모양이었다.
* * *
“들어오게.”
고양이가 로젤린을 쳐다보더니 노란 눈을 초록색으로 바꾸는 묘기를 선보였다. 마력의 기운이 순식간에 짐승에게
감돌았다.
‘……마카롱이잖아.’
미미는 배부른 고양이가 햇살 아래에서 일광욕을 하는 것 같은, 만족감 넘치는 표정으로 스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가 인간을 귀여워하는 이상한 광경이었으나, 둘 다 즐거워 보이니 뭐 잘된 것 같았다.
로젤린은 보고서를 포함해 각종 대회에 출전하는 서류도 함께 제출했다. 스타스는 로젤린이 한몫의 상급 기사
역할을 해내는 것을 보고 감명 깊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러 번 보고서를 훑었다.
“대회 출전은 기사들은 힘들지만 주군에게는 힘이 되는 일이지. 각 세력의 크기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 말이네.
수고해 주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많은 일라베니아 제국민들은 이 시기에 결혼을 하려 했다. 건국의 달에 맺어진 부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레이몬드와 그의 약혼녀인 황금정원의 클로에도 이때를 맞춰 결혼하기로
했다.
리카르디스의 안위가 워낙 아슬아슬하다 보니, 부하인 레이몬드도 몇 번씩이나 결혼을 미뤄야 했다. 레이몬드는
발타에서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결혼하자는 청혼 비슷한 유언을 남기고 갔었고, 다행히 살아 돌아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로젤린은 머릿속으로 오늘의 할 일 목록을 하나하나 그었다. 보고서 작성했고, 서류 단장님한테 드렸고…….
저벅저벅.
복도를 걷는 일정한 소리에 하나가 더 덧대어졌다. 또 다른 발걸음 소리는 로젤린을 끈질기게 따라왔다. 느긋하고
차분한 걸음걸이였다. 우연하게 길이 겹친 듯했기에 로젤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서 걷는 사람의 보폭이 커, 두 사람의 간격이 점차 좁혀졌다. 몇 걸음도 지나지 않아 로젤린은 그 사람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아버지.”
페르탄은 그녀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화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태도였으나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명백히 로젤린에게 맞추고 있었기에, 그녀도 페르탄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칼릭스와 레이몬드가.”
“그렇군.”
“……그렇군.”
로젤린은 살벌한 인상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페르탄을 본 순간 바로 깨우칠 수 있었다. 페르탄도
딱히 그 말에 반박하지 않는 걸 보면 제 인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94 화.
누군가에게는 로젤린이 태어날 때부터 마인이라 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당연히 로젤린은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준수한 실력을 가진 평범한 기사였을 뿐이었다. 검술 명문가인 바다협곡의 자식을 이길 만한 실력도 없었을뿐더러,
2 황자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들을 족족 잡아낼 만큼 뛰어나지도 못했다. 그 아이는 검은달의 병기들을 상대로
살아 돌아올 만큼, 그들을 모두 가리가리 찢어 버릴 만큼 강한 아이가 아니었다.
페르탄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누구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이렇게 훤히 뚫려 있는 공간에서 “
제가 로젤린이 아니라는 사실을…….” 같은 말을 대놓고 하면 어쩌자는 건가.
“너를 위한 게 아니다. 자칫 했다가는 붉은수레바퀴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었기에 묻기로 결정한 것이다.”
“슬프지 않으십니까?”
“로젤린의 선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 뻔했다. 붉은수레바퀴 성의 사람들. 영지민들. 제 의무조차
저버리고 저 멀리 밤하늘에 떠 있는 달빛을 지키겠다며 떠난 아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까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온하게, 정말 남의 일이라는 듯이. 그제야 페르탄은 그녀를
좀 더 편안하게 바라 볼 수 있었다.
“…….”
염치가 없지 않겠나. 로젤린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단순히 고민을 하는 표정이라는 사실을 페르탄은 알 수
있었다. 과거 로젤린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할 때, 지금의 그녀와 똑같았다.
“…….”
전혀 이해를 못했군. 페르탄은 얼굴만 제 딸과 같은 이 미지의 생물이 조금……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단순하게 말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명료하게, 정확한 자신의 감정을.
페르탄이 이를 한번 악문 후에 말했다.
“슬프다는 얘기다.”
슬펐다. 고통이 뼛속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비록 자신이 로젤린의 손을 놓은 결과라 하더라도, 로젤린이 자신의
손을 놓은 결과라 하더라도.
그의 얼굴에 회한이 담기건 말건, 로젤린은 “아, 역시 그렇습니까?” 같은 말을 하면서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남의 속을 후벼 파 놓고는 저렇게 후련해하다니. 기가 찼다.
페르탄은 그녀를 한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떠냐.”
“아프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페르탄은 생각을 더듬어 머릿속에 그려 내었다. 단발머리의 어렸던 리카르디스부터, 더 과거의 꾀죄죄했던 몰골의
거지 소년의 모습까지.
황실을 위한 희생양, 그리고 그 희생양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딸. 그것만 생각하면 내리는 비를 피하지 않고
수백 시간 맞은 듯 손끝이 서늘해졌다. 원망은 갈 곳 없이 떠돌다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그렇게
온몸이 난도질 되고 나서야 궁금해지게 된 것이다.
페르탄은 손등 위로 핏줄이 올라올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팔짱을 끼고 제
발치를 응시하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음, 음…… 흠. 끙……. 새끼 강아지가 간식 보채는 듯
이상한 소리까지 내 가며. 아주 열성적이기 그지없었다.
‘로젤린이…….’
부디 지켜 주세요.
내가 지키겠다.
“그렇군요.”
바닥을 휘감던 바람이 넓게 천장으로 퍼져 울렸다. 로젤린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바람의 결을 그리듯 흔들렸다.
“너는 대체 무엇인가?”
페르탄의 질문에 이리저리 이동하던 로젤린의 시선이 그의 흉갑에서 멈췄다. 로젤린은 은색 갑주에 비치는 자신을
들여다 보았다.
[나는 그림자.]
“로젤린입니다.”
* * *
그러나 ‘조만간 식사…….’로 시작하는 상투적인 문구가 ‘오늘 만나서 반가웠고,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쯤으로 해석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로젤린은, 그 말을 꺼낸 사람을 일일이 찾아가 언제 식사를 할 거냐며
닦달을 해 댔다.
95 화.
고급스러운 식당은 유명세를 자랑이라도 하듯 사람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내부는 음식점이라면 응당
들려야 할, 사람들의 담소 소리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바쁜 웨이터의 발걸음 소리. 그 어떤 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검은 머리, 녹색 눈. 거구에 흉흉한 인상! 누군지 모를 수 없었다. 황실의 충실한 번견,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인물들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페르탄.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붉은수레바퀴의, 그 로젤린까지!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라베니아에서 보기 힘든 품종의 고양이가 그들을 뒤따라 총총총 들어왔다. 말할
것도 없이 음식점은 동물 출입 금지였으나, 종업원은 미처 만류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모두들 그러고 있듯이.
보통 권세가 대단한 귀족이라면 식사를 조용히 즐기고 싶다거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한 층을 통째로
예약할 테지만,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그런 섬세함 따위는 없는 남자였다. 밥은 먹는 것. 식당은 밥을 먹는 장소.
그러니 식당에서 밥만 먹으면 되었지 뭐가 달리 필요하겠느냐는 식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의문을 읽어 낸 칼릭스만 괴로워했다. 그냥…… 보이는 남은 자리가 여기라 앉은 겁니다……
고양이는…… 미안합니다…… 제 말을 듣는 분이 아니셔서…….
칼릭스는 앞에 펼쳐진 광경을 천천히 훑었다. 앞에는 페르탄, 오른쪽에는 로젤린이, 길쭉한 테이블 위에는
고양이 미미가.
‘이델라브힘이시여…….’
칼릭스에게만 가혹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 배경은, 이 시간으로부터 이틀 전. 로젤린이 아버지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갈 거라며 칼릭스에게 자랑한 일로부터 시작됐다.
아버지가 음모나 비열함 같은 단어와 거리가 한없이 멀다는 것쯤은 자식으로서 잘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예상
외의 인물 ‘로젤린’이 있으며, ‘죽은 딸의 모습을 한 존재와 식사를 나누는 그 딸의 아버지’라는 예상 밖의
상황으로부터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행동이 누이에게 미칠 여파를 생각한 건 좋았으나, 두 사람이 외부로 끼칠 영향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누이만 문제라고 생각했지. 설마 자신의 존재까지 더해져 위압감을 배가시킬 줄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식당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내부의 공기가 훅 바뀌었다. 악단이 연주를 멈추고, 음식을 먹던 입이 멈추고,
하다못해 공기도 멈춘 것 같았다. 앞에 둔 음식이 차게 식어 가도 칼질 한번 하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칼릭스뿐이었다.
페르탄은 로젤린이 메뉴를 열심히 고민하는 십 분 가량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로젤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탄이 그제야 첫마디를 꺼냈다.
“결정 했느냐.”
“네.”
“……네.”
페르탄이 손을 들자 종업원이 바닥에 구를 듯 다급하게 다가왔다. 나이와 복식을 보건대 평범한 종업원은
아니었다. 이 식당의 주인이거나 총 지배인이지 않을까.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있는 모습이 애잔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전부.”
로젤린이 메뉴판을 덮으려 하자 마카롱이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그녀의 손등을 꾹 눌렀다. 그러고는 양 갈비
스테이크를 툭툭 가리켰다.
주문을 받는 남자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칼릭스가 급하게 마카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최대한
무해해 보이게.
곧 음식이 나왔다. 로젤린의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의 주문 덕분에 테이블 두 개를 붙여야 했는데, 놀랍게도
그 두 개의 테이블이 빈틈없이 접시로 가득 채워졌다. 다른 사람들의 음식은 다 식어 먹음직한 빛을 다 잃어버린
반면, 두 개의 테이블 위를 채운 음식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입맛이 없는 칼릭스
마저도 군침이 돌 정도였다.
“들자.”
“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왜 안 먹어. 아- 해.”
“아.”
“이거도!”
사람들은 로젤린이 움직일 때마다 조용히 술렁였다. 로젤린 경이…… 음식을 많이 시켰어! 로젤린 경이……
스테이크를 동생한테 먹였어! 로젤린의 행동 하나하나에 크게 반응을 하는데, 조만간 그녀가 숨을 쉬는 것도
신기해할 듯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것보다는 스테이크를 소스에 찍어 먹는 고양이가 더 신기하지 않나 싶었다.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잘 먹었느냐.”
“네. 맛있었습니다.”
“그러면 됐다.”
“느낌이 좋지 않다.”
“……몸조심하세요.”
“칼릭스.”
“예.”
“네 어머니에게는 내가 말해 두었다.”
“……네.”
칼릭스가 울컥해서 반격했음에도 페르탄은 전혀 타격받지 않은 듯했다. 코웃음을 치기까지 했다. 그는 겉옷을
걸치고는 마지막으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로젤린과 페르탄은 서로의 눈동자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96 화.
“로젤린 에스터.”
“네.”
“붉은수레바퀴는…….”
“네.”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네.”
제 아버지는 담담하다. 제 누이는 온화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의견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툼은 결코
담담하지도, 온화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렸던 칼릭스는 어두운 밤을 소란하게 만드는 그들의
싸움을 두려워했다.
그때의 제 누이에게 묻지 못해, 지금은 모른다. 그녀의 일라베니아는 단순히 리카르디스를 뜻하는 것이었을까.
어슴푸레하게 띤 형상만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었다. 대단한 것, 위대한 것, 가장 소중한 것.
“네.”
참 잘 어울리는 부녀지간이었다.
12
여행으로 쌓인 피로를 풀고 하나둘 연회장에 모여들 쯤에는, 아름다운 음악과 눈으로도 즐길 수 있는 음식이
손님들을 반겼다.
“잘 지내셨습니까?”
“아, 저는 잘 지냈는데 경은 어떻게 지내셨는지.”
또 다른 하나는 발타와 비등할 정도로 강한 군사를 보유한 라고슈 왕국에서 아직 사절단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라고슈에서 내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으나, 그 이후의 일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현재의 통치자,
바이페렘 플로에토가 이겼니 졌니, 죽었니 살았니. 정확한 정보가 없어 소문만 무성히 퍼져 나갔다. 일라베니아
측 사람들은 타국의 인사들이 라고슈의 내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면밀히 살폈다.
매년 많은 왕족과 귀족이 무거운 몸을 끌고 왔으나, 발타만은 항상 예외였다. 힉살라 아돈이 아파서. 날씨가
좋지 못해서. 발타에 큰 우환이 있어서. 온갖 변명을 대고 발을 들일 줄을 몰랐건만 이번에는 정말로
일라베니아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황성의 수많은 귀족들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온다는 얘기야 들었지만, 또 이런 저런 변명을 하면서 안 올 줄
알았지. 설마 왕위 계승자인 하카브가 직접 행차할 줄이야! 또한 3 왕녀, 간제까지 국경을 건넜다는 소식에
연회장은 한층 더 들썩였다.
아무리 사절단으로 친교를 맺은 직후라고는 하나, 오랜 적대 관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사절단 일로
2 황자 리카르디스가 큰일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이때. 발타는 언제나 하는 변명 ‘검은달과 발타 왕실은
어떠한 연관도 없다’라는 입장을 내세웠으나 그것이 그저 입 발린 소리임을 모르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일라베니아 내에서도 급진적으로 전쟁을 주장하는 귀족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먹잇감이 제 발로 들어온 지금의
상황을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클로에에게 귀족들의 동향을 잘 주시해라 전달했다.
발타의 사절단이 도착한 이튿날, 리카르디스는 하카브가 머물고 있는 성을 방문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그 어떤 누구도 하카브가 순수하게 일라베니아의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전쟁의 준비, 실패했던 리카르디스 납치 계획, 갑자기 나타난 강한 마인의 존재…….
그가 어떤 목적으로 발을 들였는지 모르니, 무얼 방어하고 무얼 공격해야 할지 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전쟁에 유리한 포석을 깔고 가려함인 걸까? 그렇다면 황제의 암살?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긴 했다. 육체가
강화된 발타의 인간 병기들이라면 충분할 테니. 하지만 하카브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발타의 사절단이
일라베니아에 온 그 순간부터 그 누구보다 경계 받는다는 사실을 알 텐데. 무슨 수로?
발타 왕성 내에서 봤던 것보다 화려했다. 금을 사용한 섬세한 장신구가 구릿빛 피부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남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를 보이며 사람 좋게 웃었다.
하카브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리카르디스에게 걸어왔다. 리카르디스가 뒷걸음치는 것보다 하카브가 그에게
다가오는 게 빨랐다. 와락. 껴안기고 말았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귓가에서 속삭이던 남자가 리카르디스의 볼에 입술을 꾹 찍었다. 리카르디스는 상한 음식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
리카르디스가 그의 가슴을 밀어내어 하카브의 품에서 벗어났다. 순순히 풀어 주기에 무슨 꿍꿍이인가 했더니,
하카브의 눈은 자신의 어깨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누군가를 찾았다.
“로젤린 경.”
봄볕의 따사로운 내음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한쪽 치켜 올라갔다. 이 달달한 목소리는
대체?
로젤린은 그에게 묵례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하카브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나의 검은 달! 나의 크레안 티다니온!
외치지 못한 말들이 욕망이 되어 속에서 드글드글 끓었다.
97 화.
하카브의 뜨거운 눈빛을 눈치챈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하카브가 두 팔 벌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로젤린 대신, 앞에 불쑥 나타난 레이몬드를 안게 되었다. 사내들의 단단한 가슴근육이
서로 맞닿았다. 하카브도 레이몬드도 인상을 찌푸렸다.
하카브는 로젤린을 여러 번 돌아보며 계속해 아쉽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아직 남은 기사만 열 명이라
포기해야 했다.
응접실에 들어선 로젤린은 잽싸게 주위를 훑었다. 미리 들어와 있던 호위들, 하카브와 같이 방문한 귀족들,
발타에서 같이 온 하인들과 숨 쉬지 않는 사물, 공간을 이루는 벽과 천장, 바닥까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주변을 살피는 로젤린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거나 한마디라도 하면 곧바로 튀어나갈
태세였다.
[이상 무.]
“여정은 어떠셨는지.”
그저 인사를 하고자 의례적인 대화가 오갔을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카브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니
리카르디스는 이상하게 배알이 틀렸다. 눈이 어떻게 됐느냐며 시비 걸고 싶었지만 그런 유치한 짓은 10 살 전에도
해 본 적 없으므로. 그저 생각만으로 그쳐야 했다.
리카르디스는 익숙한 홍차의 향기를 맡고 상념에서 벗어났다. 리엔타의 알리가르테. 그가 피식 웃었다. 우연도
이 정도면 신의 장난이 아닐까.
“그렇습니까?”
“제 심장이 멈춘 듯했습니다.”
당연한 것이라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마인을 병적일 정도로 긁어모으는 그들에게, 로젤린이란? 억지로 정제하여
만든 마력의 결정으로 인위적인 마인을 만드는 발타라는 나라에게, 로젤린이란? 그 인간 병기들을 손 한 번에
부숴 버리는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하카브에게 로젤린이란……
만약 하카브의 목적이 온전히 로젤린에만 국한된다면? 곤란했다. 차라리 황제를 암살하러 왔다고 말을 듣는 쪽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이 갖은 위험 도사리는 곳에, 일국의 후계자가 로젤린만을 위해 발을 들였다? 제
안위의 안녕과 모든 것을 내려놓을 정도라는 것이다.
하카브와 헤어진 후, 리카르디스는 곧바로 발타의 3 왕녀 간제를 만나러 왔다. 그녀는 하카브가 머무는 성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별관에 머물러 있었다. 구릿빛 피부의 전사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다니며 경비를 서고
있었다. 수가 어찌나 많은지 하카브보다 안전할 것 같았다.
‘곧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발타는 이미 입지를 공고히 다진 후계자가 있었다. 하카브 위 리비타. 그 어떤 세대보다 강하고, 냉혹한
후계자의 아래, 힉살라 아돈의 모든 자식들은 숨죽인 채 지내 왔다. 그것이 간제와 또 다른 자식들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였다. 알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하카브의 눈에 띄는 형제는 어김없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는 했다. 많은 왕자와 왕녀가 있었으나, 성년이 되기
전까지의 생존율이 극악한 관계로 몇 남지 않았다. 그 몇 안 되는 왕족 중 한 명이 3 왕녀 간제였다. 수많은
하카브의 형제자매들과 다른 점을 꼽자면, 그녀가 하카브와 동복남매라는 것이었다.
“간제 왕녀.”
98 화.
간제는 쯧, 혀를 차고는 고개를 까딱했다. 모르는 이가 보기에도 작작하고 좀 나가 있으라는 얘기처럼 들렸으나,
호위하는 자들은 꿈쩍 할 줄을 몰랐다.
간제의 발언 때문에 다들 잠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왕녀의 호위인 만큼이나 단순한 전사들이 아닐 거란 생각은
했으나, 하카브가 직접 붙인 사람들인 데다가, 마인 부대?
로젤린이 감지해 내지 못했으니, ‘파편’으로 만들어진 인조적인 마인 부대는 아니었다. 순수한 마인의 경우,
마력을 운용하지 않으면 로젤린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미쳤나?’
“……이토록 방문을 환대해 주시니, 기쁘군요. 음……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간제 왕녀. 여정은
어떠셨는지.”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말에 에둘러 답하며 급히 화제를 옮겼다. 간제는 욕해 달라는 말이 진심이었던지 아쉽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곧 차를 홀짝이며 흑갈색의 눈동자를 굴렸다.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곧
이마에 주름을 잡고 답했다.
호위단의 단장도 잇세리온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미쳤나? 봄날의 망아지 같은 왕녀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재앙 같은 입이 일라베니아라는 울타리 안에서 더 활개 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간제는 주위 사람들의 얼굴에 서린 경악을 읽었는지 어설프게 웃으며 변명했다. 자신이 말한 것이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미친 모양이었다. 그녀는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당신들의 나라를 모욕할 생각은
없었다는 듯.
호위대의 대장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생각해, 하카브 왕자가 불렀다며 그녀를 방 밖으로 끌어내고자 했다. 간제가
짜증냈다.
“소식을 알리는 사람도 들어오지도 않았고, 네가 나가지도 않았는데 오라버니가 불렀는지 안 불렀는지 어찌
알고그래? 오라버니와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사이더냐? 한 몸이기라도 해? 불쾌하니 썩 떨어져라.”
그녀는 씩씩 성을 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으로는 잔뜩 불만스러워 해도 순순히 따르는 걸 보면, 그녀를
호위하는 남자에게 제법 많은 권한이 있는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멈추고 간제를 염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카브가 그녀를…….’
“걱정 마시지요.”
“…….”
“오라버니는…… 하카브는.”
계속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싸늘한 무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잠깐이었고, 간제는 곧 어깨를 으쓱하며
달라붙었던 무언가를 털어 버렸다. 다시 웃은 그녀는 볼에 손을 가져다 대며 가련한 표정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몸조심하시기를.”
간제가 아하하 웃었다. 간제는 시녀와 호위단에게 쌓여서 곧 밖으로 나서야 했다. 그녀는 제 팔을 붙잡은 호위
단장의 손을 장신구의 뾰족한 부분으로 푹 찔렀다. 호위 단장이 앓는 소리를 냈다.
* * *
연회는 연일 계속 이어졌다. 참석이 의무는 아니지만, 여러 정보와 교류가 오고 가는 장소였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붙어 있는 쪽이 이득이었다. 리카르디스 또한 그런 이유로 매일 연회장에 얼굴을 보여야 했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쌓여감에 따라 그는 점점 지쳐 갔다.
제국의 황자가 매일 밤 자신의 나라더러 망하라는 말을 내뱉고 풀썩 쓰러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로젤린은
일부러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녀만큼 믿음직한 호위도 없지만, 그녀만큼 불안한 사람도 없었다.
더군다나 로젤린이 벌일 수많은 예상 범위 내의 사건을 제외하고도 불안 요소는 많았다. 로젤린의 이름이 유명한
만큼이나, 그녀를 탐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었다. 축복의 밤에 대한 비밀을 모르더라도, 강한
무기라고 하니 탐나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앞에 로젤린을 미끼로 내놓고 살살 꾀는 방법도 있으나, 미끼가 너무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그 의견은 기각되었다. 파티에서 가끔 만나는 하카브는 리카르디스의 뒤에 있어야 할,
누군가의 부재에 그저 가만히 웃기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참석했다. 돌아다니다 보니 저 멀리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칼릭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칼릭스는 스물일곱 번째 여인과 춤을 추는 리카르디스를 보며 짠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 보여도 아직 머리는 돌아가고 있다, 잇세리온. 어제 그녀가 나에게 다섯 번 찾아와 여섯 번 춤을 신청하고
내 발을 일곱 번 밟았는데 잊을 수 있을 리가.”
내 상태가 그렇게 심각해 보이나? 리카르디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힐리사고의 왕녀를 맞이했다.
리카르디스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옮기자 힐리사고의 왕녀가 작게 혀를 쯧 찼다. 돌아보니 사냥감을 놓친
맹수의 눈빛을 하고 있어 리카르디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보다 빨리 정리됐군.”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연회장 내부를 훑었다. 그는 저 멀리에 벽에 기대어 느긋하게 사태를 관전하는 하카브를
발견했다.
하카브의 자만이 아니었다. 바이페렘 플로에토의 세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었다. 라고슈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왕족과 귀족을 규합시켜 그녀를 끌어내리기에는 한참 부족할 것이다. 이번
대의 라고슈 왕족은 불의의 사고로 많이 죽어 나가, 그녀 외의 걸출한 인물은 찾기 힘들었다. 어리거나 어리석은
자들뿐이니, 내전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플로에토가 실각했다고?”
발타가 나서기 전에 일라베니아가 손을 써야 했다. 북쪽의 거대한 땅덩어리를 지배하는 라고슈. 그들은 앞으로
급격히 변화할 대륙의 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들 라고슈의 어린 왕에게 우르르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몰려드는 인파에 바이페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낯선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싸자 바이페렘은 눈에 띄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흑색의 지팡이가 홀의 바닥을 울렸다. 혼란과 소란을 잠재우는 묵직한 소리였다. 빛이
쏟아지는 입구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고집스러운 인상의 노인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는 라고슈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꽃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어린 바이페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총총
걸어갔다.
‘설마……?’
리카르디스가 당혹스러운 낯빛을 숨기기 위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는 곧 시선을 돌려 하카브를 찾았다. 아까
전 느긋하게 발걸음을 움직이던 남자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 있었다. 언제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듯
여유로웠던 남자의 표정이 조금 비틀려 있었다.
그의 주위로 발타의 사절단이 급하게 모여들었다. 정보를 물어 온 자들이 하카브의 귓가에 다급히 속삭이고
있었다. 하카브는 굳은 미소가 걸린 입술을 슥 쓸며 나이 든 여인만 주시했다.
‘곤란한데.’
리카르디스는 멀리서 그의 입 모양을 읽었다. 리카르디스는 하카브의 반응으로 노파의 정체를 확신했다. 연회장이
술렁였다. 나이 든 귀족 몇몇이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바이페렘, 딤라…….”
라고슈도 그렇게 건국된 나라였다. 그 전까지 서로 검을 겨누던 열세 개 부족은 외부의 적으로 인해 빠르게
결속했다.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키고자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그들의 맹세는 검고 단단한 라고슈의 돌에 조각되어 왕성의 최 하단부로 옮겨졌다. 라고슈의 땅을 밟고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서약 위에 살아가고 있음을 명심하길 바라며.
그들은 힘을 모아 다른 나라의 침략을 막아 내고, 서로가 서로를 지켰다. 영원한 서약의 내용 그대로. 그러나
한차례 대륙을 휘감아 몰아쳤던 전운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흩어지게 되었다. 피 냄새 나는 대지 위로 평화가
서서히 깃들기 시작했다.
분쟁을 외부로 돌리지 못했던 이유는, 대륙의 모든 나라가 휴전협정을 맺은 그때에 다시 침략전쟁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칫 했다가는 다른 나라들의 동맹군에 라고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라고슈 내부. 그들끼리의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승패가 갈림에 따라 하나가
되었던 사람들 또한 갈라졌다. 비록 ‘라고슈’ 라는 이름에 묶여 있었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균열은 점차
선명해졌다.
그러한 분위기는 아주 오래 지속되어 지금으로부터 몇 세대 전까지 이어졌다. 덕분에 약소국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뭉치지 못하니 약하며, 약하니 성장하지 못한다. 악순환의 굴레였다.
그러나 그녀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막 즉위한 철부지 여왕의 이상론으로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권력자들이 딤라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왕의 말로가 어떻겠느냐. 그것은 비단 라고슈 왕국
내부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인접한 다른 나라들이 라고슈를 넘보기 시작했다.
겔리츠 왕국이 라고슈 왕국의 국경을 무단으로 넘어서 하나의 마을을 섬멸했다. 본격적인 침략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겔리츠 왕국은 이후,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지도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지게
되었다.
[추운 나라에서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형제들이여.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키겠다는 맹세는 천년의 돌에 새겨져
열 두 개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영원히 비추리라.]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망각했던 서약을 딤라가 일깨웠다. 희미하게 꺼져 가던 제르타예의 불꽃들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물론 오랜 균열을 한 번에 이어 붙일 수는 없었다. 왕실을 경시하거나 더 나아가 반反 라고슈를 지향하는 무리도
더러 생겨나, 겨우 나아가고자 하는 라고슈의 발목을 잡았다. 그들은 온건하게 베풀기만 하는 젊은 바이페렘에게
이 세대를 이끌어갈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겔리츠 왕국과의 전쟁으로 방비가 허술해진 타 부족을
약탈하는 행위가 라고슈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딤라는 때로는 당근, 때로는 채찍으로 라고슈를 움직이고, 묻혀 있는 자원을 발굴해 타국과 무역교류를
성사시키는 등의 한 사람의 일대기라고 도무지 볼 수 없는 갖은 업적들을 이뤄 냈다.
‘저들끼리 잡아먹는 무식한 야만인의 나라’에서, ‘자칫하면 잡아먹힐지도 모르니 건드리면 안 되는 야만인의
나라’로. 그 얘기를 들은 딤라는 왕좌 위에서 굴러 떨어져 깔깔깔 웃었다고 한다.
손녀, 플로에토가 라고슈에 다른 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국가의 자원을 야금야금 빼돌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만약 딤라가 무덤 안에 있었다고 해도 관 짝을 발로 차고 나올 만한 사태였으니, 지금의 상황에
그녀의 등장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00 화.
여태껏 하카브가 딤라의 존재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녀가 은퇴한 지 수십 년은 지났거니와, 그
이후로는 일절 왕국의 일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설적인 바이페렘. 하지만 지난 시대의 인물이며, 옛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 옛날의 설화가 갑자기 튀어나와
살아 있는 인물이 된 지금의 상황이 당혹스러운 건 하카브 뿐만이 아니었다.
플로에토는 유폐되고, 라고슈는 새로운 바이페렘을 맞이했다. 어린 왕, 관디테는 실각된 플로에토의 조카로
딤라에게는 증손녀가 되는 셈이었다. 딤라는 아직 어린 바이페렘을 보호하기 위해 은거를 마치고 섭정으로서
나섰다. 몇 대 전에 물러간 노쇠한 여왕이었으나, 아직 그녀의 힘은 라고슈 전역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었다.
바이페렘, 아니 이제 섭정이 된 딤라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린 바이페렘이 총총 걸음으로 그녀를 따랐다.
하카브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녀의 핏줄을 이런저런 수작질로 꼬여 내어 라고슈에 혼란을 야기한 자, 하카브. 그에 대한 딤라의 감정이
어떨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암만 거친 라고슈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팡이로 냅다 머리를 내려치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온건히 인사만 오가는 장면은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라고슈의 사절단을 주시했다. 딤라가 하카브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하카브와 발타의 귀족들. 그리고 딤라와 소녀의 뒤를 따르는 라고슈 사절단. 두 무리가 대치했다. 연회장에
라고슈의 싸늘한 북풍이 불어오는 듯했다.
잇세리온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럴싸한 미소를 띠고 있는
하카브도 잇세리온과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한없이 기뻐졌다. 리카르디스는 꽁꽁 얼어 있는
주위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주 꿀맛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
달그락. 딤라의 지팡이가 바닥을 뒹굴었다. 일부러 떨어트린 것인지, 실수인지는 모르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실수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카브가 굳은 낯으로 그녀의 지팡이를 주워 주었다. 딤라는 하카브의 손길이 닿은
부분을 손수건으로 슥슥 닦으며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별 말씀을.”
즐거운 대화… 아……. 누군가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돌아서서 걷다 하카브를 돌아보았다.
딤라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고, 어린 바이페렘을 끌고 다니며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녔다.
한 나라의 왕과 섭정이라기보다는 증손녀와 증조모처럼 보일 뿐이었다.
“걱정 마시죠.”
당당해도, 당당해도, 당당을 해도! 이렇게나 당당할 수가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망설이다가 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칼릭스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딤라를 향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곧 무릎을 꿇고 딤라의 손등에 제 이마를 가볍게 대었다. 라고슈의 아이들이 어른에게 보이는 예의였다.
챙그랑.
누군가가 떨어트린 포크가 대리석에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를 울렸다. 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경악했다.
리카르디스는 미간을 좁힌 채 머리를 굴렸다. 잇세리온과 르원도 사태를 깨닫고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당장 섭정관 딤라가 칼릭스의 증조모라는 사실도 기겁하며 놀랄 일이었으나, 그보다 이 성안에 있을 또 다른
증손주가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로젤린. 그녀 또한 붉은수레바퀴의 자식이 아니던가. 딤라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로젤린을 둘러싼 정세가 어떠한
방향으로 흐를지, 휩쓸리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 둬야 했다.
라고 잇세리온이 말하는 순간 딤라가 무릎을 꿇은 칼릭스의 볼에 진하게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는 주름진 손으로
칼릭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쓰다듬다가 꼬집기도 하고, 다시 반대쪽 볼에 입을 맞추고 활짝 웃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핏줄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살가웠다.
어린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칼릭스는 무척이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딱딱한 얼굴을 부드럽게
녹이며 애정을 온전히 받아 내었다.
101 화.
“처음으로 일라베니아의 연회에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각국의 주요 인사가 모이는 자리라 중압감이 크셨을
텐데, 아주 의연하셨습니다.”
“……네!”
칼릭스가 붉은수레바퀴 백작을 쏙 빼닮았다는 사실은 제국민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대체 어머니의 흔적을
어디서 찾은 것인지는 몰라도 증조모가 닮았다는데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여기가.”
‘음…….’
“거짓말 못하는 성미는 붉은수레바퀴를 닮았느냐. 외관이야 붉은수레바퀴를 찍어 낸 듯하다만, 눈빛이 사벡을
닮았다. 제 가진 만큼의 다정함을 담아 낸 시선이야. 인간을 이루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물려주어
다행이구나.”
칼릭스는 어렸을 적부터 에델바이스에게 딤라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어려워하거나
무서워했지만, 자신은 어릴 때부터 하나도 안 무서웠다고.
요즘도 에델바이스는 주기적으로 딤라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게 딤라가 말하는 다정함일까. 그렇다면 제 누이가
훨씬 닮은 것이리라. 그녀 또한 기사단 일로 바빠도 꼭 편지를 보내 주지 않던가. 먼 사람과 안부를 주고받는
일상적인 행위도 오랜 기간 쌓이고 쌓이면 다정함이 되곤 하니까.
솔직히 자신은 증조모 앞이라 갖은 귀여운 체 하고 있지, 평소의 모습을 보면 그녀도 다정하다는 말은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더러 냉혈한이니,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이니, 제 아버지랑 겉과 속이
똑 닮았느니 말하는 사람들이 딤라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할지 조금 궁금했다.
“안타깝게 되었구나.”
딤라가 혀를 찼다. 칼릭스는 ‘죽이지 못해서’라는 뒷말을 읽어 내었다.
라고슈는 발타와는 다르지만, 발타만큼이나 폐쇄적인 기질이 있다. 외부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고, 저들끼리 꽁꽁
뭉친다. 그래서 여타 다른 나라처럼 일라베니아 제국 사람과 혼인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혼인하게 되었고, 딤라는 페르탄에게 덕담을 가장한 경고와 협박을 했다.
[감이 좋지 않다.]
발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그랬던 게 아니었어?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내려간 거야? 심지어 라고슈 사절단에
대한 정보는 황실에서조차 몰랐는데, 단순히 감 하나로 회피했단 말인가? 정말 기가 막혔다.
딤라가 이렇게 성을 내는데도 관디테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분명히 라고슈에서도 욕을 많이 했겠지 싶었다.
칼릭스는 딤라가 제 아버지 욕을 하는 것에 열심히 맞장구 쳤다. 맞습니다. 아버지가 좀…… 그러시는 경향이
있죠.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너무 진심이라서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딤라는 칼릭스의 호응에 마음이 풀렸는지
성난 기색을 누그러트렸다.
“칼.”
“네, 증조할머님.”
바라건 바라지 않건, 모두들 그녀를 그렇게 볼 것이다. 힘을 쥐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딤라를 향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염치도 없다 할 것이다. 평생 만나지도 않던 혈육을
보자마자 그걸 이용할 생각부터 해? 솔직히 그런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본인의 미래고
안위고 다 버리고 뛰어든 판에 그 감정을 하나하나 음미할 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러니, 염치 불고하고.’
딤라의 낯빛이 바뀌었다. 귀여운 손주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과거 라고슈를 호령했던 바이페렘의 위엄이 언뜻
비쳤다.
“태어난 날이…….”
“한참 남았습니다.”
딤라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웃기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한참 어이없어 한 이후에
칼릭스의 볼을 토닥이며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 * *
월장석 성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칼릭스가 보내 온 서신에 바이페렘 관디테와 섭정관 딤라를 모시고 월장석 성에
방문해도 되겠냐는 내용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칼릭스의 서신을
다시 읽었다.
붉은수레바퀴 후계자의 이름을 달고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 보겠다더니, 생각보다도 도움이 빠르게 왔다.
102 화.
월장석 성 안에서 무슨 얘기가 오고 가는지 알 수 없으니, 다들 상상력을 발휘하며 소문을 크게 부풀릴 것이다.
딤라가 월장석 성을 방문하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리카르디스 2 황자와 라고슈가 동맹을 맺었다는 허황된
얘기들이 나돌아 다니리라.
딤라의 방문이 반가운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딤라의 혈육임이 밝혀진 지금, 로젤린의 가치는 더욱 올라갔다.
그녀를 탐내는 자들이 더욱 군침을 흘리는 문제가 발생했지만 반대로 더더욱 손을 대기는 힘들어졌다. 욕심을
잘못 부렸다간 그 딤라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단 일라베니아의 귀족과 타국의 왕족뿐 아니라, 일라베니아 황실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특히나
발타의 기류가 심상치 않은 지금에는 더더욱.
라고슈의 힘이 어디에 실리느냐에 따라 판도가 뒤집힐 가능성도 있었다. 딤라가 제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그게 그녀의 심기를 거슬러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딤라의 눈치를 봐서라도 황제나
엘피디오마저도 로젤린을 제멋대로 휘두르려 하지 못할 것이다.
딤라가 거대한 힘을 쥐고 있는 권력자이고, 도움을 받으면 좋다는 식의 언급은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로젤린을 회유하여 딤라를 포섭하는 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리카르디스가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보다 의욕이 넘친 로젤린이 판을 아주 엎어 버리는 불상사가 굉장히 높은 확률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유가 더
크긴 했다.
약속의 때가 다가왔다. 찬란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리카르디스의 장신구가 번쩍 번쩍 빛났다. 로젤린은 시야를
가득 채우는 빛 무리에 계속 눈을 끔벅거려야만 했다. 리카르디스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슬쩍 웃고 있을 때
마차가 도착했다. 칼릭스가 맨 처음에 내려, 딤라와 관디테를 에스코트했다.
표정을 구긴 채,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면서 눈을 깜박이는 누이의 모습이 약간은… 좀…… 많이…… 영특해
보이지는 않았다. 일라베니아와 라고슈의 고위 인사들이 만나는 자리라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해 칼릭스의 마음은
답답해져 갔다. 아니, 평소에는 저렇게까지는 아니고요, 저것보다는 좀 낫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상은
그 말 또한 안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캉!
반쯤 날을 보였던 검이 다시 검집에 처박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울렸다. 로젤린이 손잡이의 끝을 콱 짓눌러 밟아
검을 뽑으려던 호위의 행동을 저지시킨 것이다.
“로젤린!”
“누님!”
악, 꺅 비명 소리가 퍼졌다. 로젤린이 딤라를 공격할 이유는 없었으나,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거기까지 추론할
여유가 없었다.
모두 숨소리도 못 내고 그녀를 바라봤다. 로젤린이 주먹을 제 앞으로 가지고 와서 쫙 폈다. 손바닥 안에 거대한
벌이 한 마리 죽어 있었다.
“벌입니다.”
로젤린은 자신이 밟은 검의 주인에게 사과하고 손잡이를 닦아 주었다. 남자의 표정이 몹시 이상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구석구석까지 세심하게 마무리했다. 뒤에서 관디테가 까치발을 하고 기웃거렸다. 무얼 원하는지
눈치챈 로젤린이 등검은말벌을 소녀에게 보여 주었다. 관디테가 오, 하며 눈을 반짝였다.
“가지시겠습니까?”
“…….”
탁탁.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까 리카르디스가 물었던 ‘오는 길은 어떠셨습니까?’ 의 대답인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확실히,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리카르디스와 바이페렘 관디테, 섭정관 딤라와 로젤린, 칼릭스. 그리고 호위들까지 줄줄이 이동했다. 날이 좋아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복도를 걷던 중, 관디테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으나 로젤린이 잽싸게 옷깃을 잡아채서 똑바로 세웠다.
대롱대롱 매달려 목이 졸린 소녀가 기침을 했다.
로젤린이 쩔쩔매며 관디테의 상태를 확인했다. 칼릭스도 당황해서 제 누이와 같이 자세를 낮추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관디테는 이 상황이 웃긴지 줄곧 고수하던 무표정을 지우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관디테의 의견이 어찌되었건, 연이어 발생한 사고에 로젤린은 스타스에게 기둥 뒤로 불려 가 잠시간
혼났다. 먼저 보고하고 움직여라, 왕족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마라, 왕족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라. 둘 다 좋은
뜻에서 했는데 혼만 나서 그녀는 심통이 났다.
관디테가 눈알 굴리며 딤라의 눈치를 봤다. 딤라는 혼자서 아주 다 해 먹지 그러냐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칼릭스를 흘겨보았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눈웃음을 쳤다. 잇세리온이 칼릭스를 보고 입을 가렸다. 저것이
소문의 그 귀염둥이 칼…….
관디테는 로젤린과 칼릭스를 대동하고 정원을 구경하러 떠났다. 두 명의 성인이 어린아이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는 뒷모습을 딤라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달그락. 리카르디스가 내려놓은 잔이 접시에 부딪치며 맑은 소리가
울렸다. 딤라는 그제야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딤라의 주름진 이마가 꿈틀거렸다. 잠시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시선이 리카르디스를 가늠하고 있었다.
옛 사람들이란 제 찬란했던 과거를 돌이켜 볼 때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일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탓이었을까.
딤라는 일라베니아에 도착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공통된 기류를 읽었다. 그녀를
섭정관이 아닌 과거의 위대한 바이페렘으로 보았다. 현재의 작고 어린 바이페렘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103 화.
으로 시작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딤라는 멍청한 놈들의 머리를 지팡이로 후려치는 대신 인자하게도
말로 설명해 줬다.
그렇게까지 말해도 멍청한 놈들은 아이고 무슨 말씀을 하시냐, 하면서 다시 금칠하기 바쁘더라. 그것을 단순한
겸양의 한 종류로 보았던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황제,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까지도. 딤라는 황제라는 놈이
달고 있는 것이 머리인지 장식물인지, 눈인지 옹이 구멍인지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 그런지 첫째 아들 엘피디오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였고.
“리카르디스 황자.”
“예, 섭정관,”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라고슈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이때에 제국의 어떠한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 이렇게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가 명령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기껍지 않을 리 없으니. 모르는 일로 하기에는 너무 아깝군요.
차 한잔 하시며 편히 계시다 가시지요. 더 이상 섭정관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리카르디스는 딤라의 잔을 직접 채웠다. 그녀는 차를 따르는 모습이 그렇게까지 우아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두고도 기죽지 않는 이는 몇 되지 않는데, 그런 척 위장하는 게 아니라 정말
대등한 위치에서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걸 배포가 크다 해야 하는지, 아니면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라 봐야 하는지.
딤라는 나뭇잎 그림자 사이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에 그림같이 반짝이는 남자를 바라보다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일라베니아에 머무는 지금까지 사람을 끝없이 마주해 피로하였습니다. 권하신 시간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서 리카르디스도 그녀에게 시선을 떼고는 불어오는 바람결을 제 눈으로 그렸다. 화창하게 좋은 날. 구름이
예쁘게 하늘에 수놓아져 있는 날이었다.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편안히 앉아 있던 딤라가 어느새 주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푸른 정원, 색색의
꽃이 만발해 있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공간. 그 끝에 바이페렘 관디테와 칼릭스. 그리고 로젤린이 보였다.
리카르디스를 향할 때 매섭게 불타오르던 딤라의 눈동자는 한 겨울의 난롯불처럼 따스한 온도로 그들을 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고정했다.
관디테가 무어라 말하자 로젤린이 살짝 웃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리카르디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평소 웃는 모습을 많이 보지 못했던 탓일까. 햇살을 받으며,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웃는 로젤린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주 웃으면 좋을 텐데. 저리 웃으니 얼마나 예뻐.
“리카르디스 황자.”
“예, 섭정관.”
리카르디스는 동요했던 마음을 숨기고 침착하게 대답하려 했으나 결국 깜짝 놀라고 말았다. 딤라의 표정이 한껏
구겨져 있었다. 너, 이 자식…… 하고 욕이라도 할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심기가 불편해진 이유가 뭔지 몰라
리카르디스는 당황스러웠다.
“……섭정관? 무슨 문제라도…….”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과 슬쩍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녀가 월장석 성까지 무거운 발걸음을 한 것에 그런 이유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딤라는 여전히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리카르디스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드러났습니까.”
쪼그려 앉아 관디테와 얘기하던 그녀의 옆모습이 햇빛에 은은하게 빛났다. 눈을 깜박, 깜박하던 그녀가 서서히
얼굴을 돌렸다. 눈이 딱 마주친 순간 리카르디스의 숨이 멎었다. 로젤린이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덜컹,
심장도 멎는 것 같았다.
“전하, 섭정관.”
“이걸 보십시오.”
테이블에 다가온 그녀가 모은 두 손을 불쑥 들이밀었다. 리카르디스와 딤라의 시선이 그녀의 손 안쪽을 향했다.
삐약 뺙. 꺅. 작은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하얗고 자그만 새가 나뭇잎을 겹겹이 쌓은 더미 위에 올라와 있었다.
“라고슈에서는 볼 수 없는 짐승이구나.”
“둥지에서 떨어진 모양입니다. 사람의 냄새가 나면 어미가 버린다고 해서, 나뭇잎으로 일단 감쌌습니다. 둥지로
올려놓기 전에 보여 드리고 싶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로젤린이 뿌듯하다는 듯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옆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딤라의 시선도 까맣게
잊은 채 미소 지었다. 예쁘고 귀여운 것을 보여 주고 싶어 소중하게 두 손 안에 가지고 왔다니. 이 얼마나
귀여운……. 가슴이 울렁거렸다.
“전하를 똑 닮았습니다.”
“귀여워서 지켜 주고 싶지 않습니까?”
“예.”
“귀엽다 하더군요.”
104 화.
“갈라·제르타예의 불꽃은 바이페렘 곁이 아니더라도 타오르는 모양이지만, 귀여운 것에 한정되는 모양입니다.”
딤라는 자신의 주름진 손을 보았다. 오래된 시야는 먼지 낀 듯 부옇고, 늙은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은 간헐적으로
떨렸다. 몸 어디 한 곳 성한데 없고,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고장 날 일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삐걱거리다 보면 결국에는 멈추게 되리라.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과거 불 같았던 때보다
성미가 급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리카르디스 황자.”
“……말씀하시지요.”
바람에 꽃잎이 실려와 찻잔에 떨어졌다. 짙고 맑은 홍차에 파문이 잔잔하게 일어났다. 딤라는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산송장. 바이페렘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젖먹이라 불립니다. 라고슈는 상처로 너덜거려 두 살 난 아이처럼
부는 바람에도 울고, 발타의 더러운 들개 놈들은 그 상처의 냄새를 맡고 주위를 빙빙 돌며 군침을 흘리고 있는
지금, 대륙의 아버지는 보아야 할 것을 외면하는 비겁자에 불과해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순히 플로에토를 실각시키기 위해 오랜 은거 생활을 청산했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딤라의 눈은 라고슈를 벗어나
대륙에 드리워진 전쟁의 기운에 닿았다. 거대한 두 집단의 싸움이다. 그 거대한 흐름 사이에 있는 것들은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일라베니아와 발타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치며, 모두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피와 비명이
휩싸는 거대한 흐름이기에 결코 좋은 방향이라 말 할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왕국의 문을 걸어 잠그는 일은 그저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후대에 미룰 뿐인 비겁한 일이노라고.
그녀는 미래의 라고슈를 위해 힘든 싸움을 감내하겠다 말한 것이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물어도 될는지요, 섭정관. 혹…… 저에게 기대를 거시는 겁니까?”
“기대는 누군가에게 걸 수 있는 종류의 마음이 아닙니다, 황자. 저절로 향하는 마음을 어찌 걸었네, 마네
하겠습니까. 그저 그 본인이 기대를 이끄는 힘이 있어야 하는지라,”
* * *
“미미!”
관디테의 무릎 위에서 고양이가 배를 보이며 뒹굴 거렸다. 소녀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제 감정을
자제하려 노력하며 부드럽게 짐승을 쓰다듬었다. 털 한 가닥 상할까 염려하는 조심스러운 손짓에 고양이 미미가
가르릉 거리며 기분 좋은 듯 울었다.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하던 중, 분수의 가장자리를 도도하게 걸어가던 미미를 만나고부터 관디테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로젤린이 “미미.” 하고 불렀으나, 미미는 그녀의 말을 싹 무시하고 고양이 세수만 했다. 관디테가
애절하게 고양이를 쳐다보는 모습에 칼릭스는 결국 힘겹게 걸음을 옮겨 미미에게 다가가야만 했다.
억지로 데려오려는 것인가? 작은 짐승이라고 해도, 발버둥 치면 어린 바이페렘에게는 위험할 텐데. 관디테의
시종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소녀를 따르던 시종들만 이 상황에 혼란스러워했다. 지금 칼릭스 경과 고양이 미미 간에 무슨…… 모종의 거래가
오간 거 같은데 아니야? 하는 의문이 잔뜩 담겨 있으나 칼릭스는 그들의 시선을 회피함으로써 그들의 의문도
회피했다.
그러고는 제 누이한테 다가가서 저번에 간 그 음식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 같은데요. 거기에 더해서 일일
노예권이요. 아 진짜……. 하면서 소곤거리는데, 시종들은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관디테는 분수에 앉아 고양이를 본격적으로 쓰다듬었다. 미미는 귀찮을 법도 한데 거래의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걸 다 감당해 내었다.
한참 놀다 돌아가니 리카르디스와 딤라가 가볍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칼릭스는 재빨리 그들의 분위기를 읽었다.
음, 뭔가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딤라도 다른 귀족들을 압박할 때와는 다르게 편안히 있는 듯하고.
“영광입니다.”
잇세리온이 입을 턱 가렸다. 정원 여기저기에 널린 나무의 열매를 드셨다고요 바이페렘? 제대로 씻지도 않고,
깎지도 않고, 접시 위에 예쁘게 장식해서 진상한 걸 드신 게 아니고요?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일국의 왕이
그럴 리 없었다. 로젤린의 소행이 분명했다.
105 화.
“예, 바이페렘…….”
이후 딤라와 로젤린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로젤린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어찌나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지.
그리고는 월장석 성에서는 애를 굶기냐고, 애가 이렇게 살도 하나 없이 말라비틀어진 게 안보이냐고 리카르디스를
닦달해 대서 그는 좀 억울했다.
딤라는 정말 평범한 할머니처럼 로젤린을 귀여워했다. 리카르디스는 그 광경에 조금 놀라는 중이었다. 그것은
리카르디스가 딤라를 대단하고 무서운 바이페렘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로젤린에 대한 인식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마인 파문에 휩싸여 있었다. 여러 공으로 인해서 악의가 누그러졌다고는 해도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라고슈에서는 마력과 성력이 가진 의미가 일라베니아와 다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체감하니 느낌이 이상했다. 리카르디스의 의문을 눈치챈, 로젤린의 입에 케이크를 주입하던 딤라가 말했다.
“마력이니 성력이니 하는 것은 제국인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라고슈의 추위는 마력보다 사납고, 봄날의 햇빛은
성력보다 따듯하니, 그저 그런 것 또한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대신전에서 들으면 난리가 날 소리였다. 그 위대한 힘이 어찌 한낱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느냐고. 역시 라고슈의
야만인이라며 펄펄 날 뛸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제 턱선을 손가락으로 훑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걸었다.
“섭정관은 신이 없다 생각하십니까?”
뼈 있는 대답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정보를 취합하여 그려낸 그림. 일라베니아 황실에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는
지금의 사태에 큰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진실이라도 되는 양 말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눈썹만 까닥였다.
딤라가 피식 웃었다.
13
“섭정관 딤라의 월장석 성 방문 건으로 로젤린 경에게 많은 시선이 쏠려 있습니다. 무투 대회의 출전이 지금의
상황에 도움이 될지 회의적입니다.”
리카르디스는 피곤함이 묻어 있는 얼굴을 쓸었다. 예상했던 바와 같이, 딤라와 리카르디스의 만남은 큰 화제를
낳았다. 하카브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던 딤라가 일라베니아의 2 황자를 만나러 그의 성까지 친히 행차했다.
단순히 안부만 물어볼 리 없으니 대단한 건이 오갔지 않겠냐는 소문이 돌았다.
황제는 딤라가 월장석 성을 방문한 이유가 오로지 로젤린을 보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보다 윗세대의
인물이긴 하지만, 딤라의 성정이 어떤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고슈의 핏줄들을 아끼고, 타국을
배척하는.
더군다나 하카브의 일로 라고슈가 큰일을 겪은 시점에서 후계자가 되지도 못한 타국의 황자와 동맹?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래서 리카르디스도 사실을 기반해, 딤라가 로젤린을 만날 겸 최근 발타의 땅에서 큰일을 당할 뻔한 자신을
위로하고자 방문하셨다고 대충 둘러 말했다.
좋은 조짐은 아니었다.
“로젤린 경을 숨기는 것은 임시방편도 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황제의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무언가 찔리는 게
있으니 숨기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황제가 ‘축복의 밤’에 대한 정보를 알면서도 마인인 로젤린 경을 내 곁에 머물게 하는 이유는 내가 그 의식에
대해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겠지. 거기에다 그녀가 붉은수레바퀴라는 사실이 이점으로 작용한
듯해. 황제에게 붉은수레바퀴는 충실한 사냥개. 그리고 로젤린은 그 자식이니. 황제는 그녀 또한 제 손 위에
있다 생각하는 것일지도. 또한 황제의 미약한 신성력으로는 축복의 밤을 부를 만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니
그녀의 존재가 무용지물이지 않나. 그러니 그녀를 그저 검은달의 대항마로 내세우려 내 곁에 뒀던 것이다. 내가
최전선에서 싸우는 인물이니.”
클로에는 깃펜을 들었다. 종이에는 회의 내용이 아니라 꽃이나 하트모양의 낙서 따위로 도배되고 있었다. 그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이었다.
“어휴, 미운 47 살.”
“폐하께서 오늘 로젤린 경이 무투 대회에 나오는지 물어보더군. 나가야겠지. 준비된 무대에서 예정대로 활약하게
둔다. 마력은 보이지 않지만 무력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부풀려진 소문이 입증되는 순간이며, 일라베니아
황실과 나란히 걸어온 붉은수레바퀴의 충실함이 그녀를 영웅으로 만들 것이다.”
“레이몬드에게 맡기겠어요.”
“어머, 걱정 안하셔도 괜찮답니다. 준비는 레이몬드가 혼자서도 빈틈없이 하고 있어요. 오늘은 제 드레스를
고르러 간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네요.”
그 복잡한 결혼 준비를 혼자서 하고 있다고? 심지어는 웨딩드레스도 혼자 고르러 가는 거야? 남자들이 속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스타스가 대답했다.
“내장이라든가, 눈알이라든가, 팔을 뽑는다든가, 머리를 이렇게 저렇게 한다든가. 아무튼 관객들이 잔인하게
느낄 법한 전투 방식은 안된다고도.”
* * *
클레이모어를 휘두르며 묵직한 일격을 날리는 레티시아, 정석적인 검술이 눈에 띄게 노련해진 에버하르트. 그리고
새로운 수습 기사 헤사는 가볍지만 날카로운, 변칙적인 공격을 사용했다.
레티시아의 거대한 검이 로젤린을 향해 내려앉았다. 그녀의 붉은 갈색 머리가 머리끈을 탈출해 거칠게 흩어졌다.
하급 기사들에게 암암리에 붉은 사자라 불린다고 했던가. 레티시아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챙!
보통의 대련이라고 하면 검투와 박투를 나누어 진행하고는 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실제의 전투에서 검으로만,
주먹으로만 싸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직접 체감했다. 갖은 암기와 더러운 수를 사용하며 제자들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숱하게 겪은 결과,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초기 고전하던 모습을 탈피해 이제 제법
능숙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레티시아의 움직임을 눈으로 훑던 로젤린이 빙긋 웃었다. 큰 무기를 휘두르는 것치고는 빈틈이 크지 않다.
이정도면 합격선이었다.
106 화.
“예. 새콤달콤.”
헤사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로젤린을 올려보았다. 무언가를 깊게 갈망하는 눈빛이었다. 로젤린이 헤사의
머리를 슥슥 쓸자, 소년은 그제야 만족한 듯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기는 것이
기분 좋아 예상보다도 시간을 더 크게 할애했다. 헤사는 햇살 아래 조는 동물처럼 눈을 나른하게 깜박였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하얀밤 기사단에서 무투대회에 참가한 단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참가하라며 몇 명에게 권해
보기도 했으나 모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어젯밤. 파르딕트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 죽여 버려.”라고 했다가 부단장 나단에게 몹시 혼났다. 진짜
죽이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하지만 로젤린도 이제는 그런 말은 적당히 걸러 들을 정도로는 성장했기에, 뼈 한두
개 정도면 되는 건가? 하고 받아들인 상태였다.
타 기사단의 경우, 로젤린을 아니꼽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부풀려진 자극적인 소문들
사이에서 진실을 가려내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었으므로.
그나마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마인이라는 사실 하나뿐인데, 일라베니아의 기사가 고작 마인 한 명에게 겁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하여 무투 대회는 여느 때보다 뜨거웠고, 강한 자들이 여기저기 도사렸다.
로젤린이라는 기사를 시험하고 싶은 자들이 반, 그녀의 강함은 충분히 인지했으나 호기롭게 도전하는 이들이 반.
대기실을 가득 메운 거구의 남자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어떤 긴장감도 보이지 않는 느긋한
태도가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실력에 기반한 자신감인지, 근거 없는 소문을 잡아먹은 자만감인지. 예선전은
비공개로 치러졌기에 아직까지 그녀의 실력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넓은 대기실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잇세리온이었다. 로젤린 혼자 참가자들 사이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하얀 제복도 제복이고, 몇 없는 여자 참가자 중 하나이기도 하고, 머리색도 까맣기 때문인지 유독 눈에 확
띄었다.
“로젤린 경!”
“아, 비서관님.”
“봐드리지는 않습니다.”
“아, 아니, 아니. 저는 참가하지 않습니다! 멀쩡히 있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요. 전하께서 경을 찾으셔서 온
겁니다!”
“전하.”
계단 아래에 있는 리카르디스는 오늘따라 더욱 빛났다. 그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빛나고
있었다. 귀걸이, 목걸이, 반지, 심지어는 입고 있는 옷에도 금사와 은사, 보석으로 치장되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건국일이 가까워 질 즈음이면 황족들의 씀씀이는 헤퍼지고 치장은 화려해졌다. 오랜 기간 동안 대륙을 지배해 온
패왕의 저력을 보이는 것이다. 한낱 쓸데없는 허례허식이었으나 보여 주기식이 중요할 때도 있었다.
리카르디스도 그것을 잘 알았다. 평소에는 황족 반지만 착용하고 다니며, 화려한 것이라고는 제 얼굴뿐인 그도
온갖 장신구로 꾸며야 하는 때가 왔다. 피할 수 없으니 그저 최대한 장신구의 개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할 뿐.
밝아지는 시녀들의 표정만큼 리카르디스의 표정은 가라앉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아름다우시다, 누가 보석인지
모르겠다는 헛소리들을 들어서 슬슬 열 받고 있었다. 반짝반짝한 것을 좋아하던 누군가를 위한 치장이었는데,
이게 뭐하는 미친 짓인지 공허한 마음이 들쯤이었다.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영혼이라도 빼앗긴 듯한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로젤린의 표정에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녀의 살짝 열린 틈새로 느릿한 숨이 내뱉어졌다. 열에 가득 찬 눈동자였다. 리카르디스는
목을 가다듬으며 달콤한 고뇌와 함께 꿀꺽 침을 삼켰다.
형식적인 질문에 로젤린의 눈빛이 싹 바뀌었다. 구름같이 부드럽고 봄바람처럼 따뜻한 감정을 단 한 번도 담은 적
없다는 듯. 매섭고 사납게. 덕분에 리카르디스도 진정할 수 있었다.
“만전의 상태입니다.”
로젤린은 크게 충격 받았다. 중요한 행사라고 들었는데? 그녀의 생각을 읽어 낸 리카르디스가 입가를 만지며
웃었다.
“아.”
“전하.”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말하는 요지를 깨달았다. 그가 숨기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영예와 영광을 바친다 어쩌고 하는 의례적인 말들이 마음에 걸린다는 거다. 자신이 충성한 것은 리카르디스,
2 황자이니.
목소리가 잔뜩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로젤린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치지만 마라.”
“다치지 않습니다.”
“빨리 돌아와라.”
“금방 끝내겠습니다.”
107 화.
“이것은 내 가호다.”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리카르디스가 몸을 움찔 떨었다. 로젤린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부지런하게 냄새를
맡던 그녀가 고개를 확 들어올렸다. 리카르디스는 다시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개를 들던 와중, 그녀의
코가 리카르디스의 턱을 가볍게 스친 탓이었다.
“전하에게서…….”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이 분위기 지금 뭐야. 나쁘진 않은데 뭔가 좀……. 그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의미 없는 반항은 끝을 맞이했다. 등에 벽이 턱 닿았다.
“부드럽고.”
“달콤한.”
리카르디스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아니 이 사람! 왜 이렇게 잘생기고 박력이…….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시합 준비를 돕는 사람이 그녀를 찾았다. 한 마리의 맹수와, 그 맹수에게 먹히고 싶어 하는 이상한
먹잇감의 기묘한 대치는 끝을 맞이했다.
* * *
그녀가 일어서자 모든 사람이 쳐다보았다. 로젤린은 그들의 시선을 무심히 떨치고는 대기실을 나섰다.
붉은 수레바퀴의 로젤린!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소문의 그녀! 일라베니아의 마인! 상상만 하던 그녀의 무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삼십 년, 아니 평생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붉은수레바퀴.”
“필요 없다.”
들뜬 기색으로 친절을 발휘하려던 남자는 제안이 거부당하자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칼릭스는 남자의
태도가 ‘칼릭스’가 아닌, 제 누이 ‘로젤린’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것이라 직감했다.
‘2-7……2-…….’
계단을 오르며 표에 적힌 자리를 찾던 칼릭스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지정된 자신의 좌석 옆에 낯익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 은색 눈동자. 순한 인상의 얼굴과 작은 체구를 가진 황금정원 자작의 장녀,
클로에였다.
칼릭스는 자리에 앉은 채 주위를 둘러봤다. 클로에가 있다면 레이몬드도 있을 줄 알았는데. 큰뿔산양의 기사들은
보이는 반면 그는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슬슬 시작하려는 것인지 대회의 진행을 원활하게 도울 병사들이 나와서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축제의 분위기에 취해 시끄럽게 떠들어 대었다. 칼릭스는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반지를 돌리며 손장난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없네요.”
“제게 무슨 용건이십니까?”
“용병왕에 금화 한 개.”
둘 다 말없이 관전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한참 밀리던 용병왕이 갑자기 기세를 바꿔서 미친 듯 무기를 휘둘렀다.
매서운 일격들이 계속 이어지며, 깊은숲의 상급 기사가 검을 놓치고 말았다. 용병왕의 승리였다. 와아아,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
“그런 눈빛으로 볼 필요는 없어요. 상대가 강하면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닌가요? 상대가 어떤 검술을 쓰는지,
장점이 무엇인지 단점이 무엇인지. 그 정도는 알 수 있으나 강함의 척도는 숫자와 글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저 역시 도박을 하는 것과 다름없답니다.”
페이던과 패자가 경기장을 내려가고, 두 사람이 올라왔다. 사회자가 그들의 이름을 쩌렁쩌렁 외쳤다.
“좀 힘든 일, 정도로 말할 수 있는 부분입니까?”
“저는 사소하다 말할 수 있는 정보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랍니다. 그 노력이 칼릭스 경께서
놀라워하신……이 대회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했어요. 심지어는 오늘 만나지도 않은 레이몬드의 속옷이
연분홍색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답니다. 대단하지요?”
어마어마한 행위라니. 굉장히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자극적인 문구였다. 물론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2 황자
리카르디스에게 기사의 맹세를 했다고 조목조목 짚어 가며 말할 수 없기에 우회한 표현이겠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껄끄러웠다.
물보라 기사단의 하급 기사가 승리했다.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하인들이 부지런히 치웠다. 클로에는 팔짱을 낀 채
경기장을 내려 보고 있었다.
“저는…… 예상 못한 요소가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상황을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칼릭스 경.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잘 만들어진 배가 한 척이 있어요. 하지만 순항을 결정하는 것은 배의 능력만이 아니죠. 바다가
잔잔하길, 그 속에 송곳처럼 튀어나온 암초가 없길 바라야 해요. 여기서 우리는 그날의 날씨와, 암초의 위치를
습득해 폭풍과 암초를 피해갈 수 있겠죠. 하늘에 맡긴다, 운에 맡긴다. 저는 그런 말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늘에 맡길 때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끝낸 후 뿐이에요. 그리고 생각보다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폭넓고, 깊고, 끝없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클로에는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암초같이 갑자기 튀어나온 칼릭스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피를 보는 것 자체도 불쾌한 듯 보였다.
주위는 함성 소리로 시끄럽고 먹먹한 가운데 두 사람의 침묵은 그보다도 무거웠다. 한참 뒤 칼릭스가 대답했다.
참신한 표현이 웃긴지 칼릭스가 슬쩍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클로에가 타박하듯 부채로 그의 어깨를 살짝 쳤다.
탁. 소리는 당연히 묻혔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다들 울부짖는 수준으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로젤린의 등장이었다.
클로에가 눈빛으로 대답을 촉구했다. 칼릭스는 주머니를 뒤지며 슬쩍 일어섰다. 로젤린의 등장에 펄펄 날뛰며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 그가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여전히 앉아 있는 클로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칼릭스가 체면도 버리고 열심히 천 조각을 흔드는 모습을 본 클로에는 눈물을 닦아 내야만 했다. 이게 그
대답인가. 누이 사랑이 지긋하단 말이렷다. 생긴 것보단 귀여운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무투회장이 흔들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환호성 때문에, 시합은 진행되지 못하고 잠시 미뤄졌다.
* * *
로젤린의 상대는 불화살 용병단의 단원이었다. 용병단의 유명세와 더불어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자였다. 사절단의 일만 아니었더라도 카델, 그가 더 유명했을 정도였다.
로젤린을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거구의 남자는 사나운 인상을 찌푸려 더욱 사납게 만들고 있었다.
수염이 숭숭 나 있는 거친 남자들이 관중석에서 카델의 이름을 연호했다. 저 쥐방울만한 계집에게 본때를 한번
보여 주라며 난동을 피우다가 병사들에게 끌려 나갔다. 한껏 움츠러든 뒷모습이 초라했다.
넓은 경기장 위에 남자의 흉흉한 기세가 가득 찼다. 진행 요원이 진땀을 흘리며 카델의 눈치를 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무기, 허용. 몸싸움, 허용. 암기와 독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승리의 조건은 상대가 경기장을 벗어나는 경우,
상대가 패배를 시인하는 경우, 상대가 사망하는 경우, 상대가 전투 불능이라고 제가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항복을 했음에도 공격을 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에는 탈락과 더불어 조치에 들어갑니다.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로 예를 지켜 간단하게 인사해 주세요.”
“어디 한번 그 잘난 솜씨 좀 보자고.”
남자의 협박을 멍하니 흘리던 로젤린은 그의 뒤쪽 관중석에서 천 조각을 흔들고 있는 칼릭스를 발견했다.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카델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왜, 왜 날보고 웃는 거지?
[사랑해요 로젤린]
칼릭스가 있는 방향의 관중석이 난리가 났다. 날, 날보고 손을 흔드셨어! 날 보고 웃으셨어! 착각이 파도처럼
우르르 일어났다.
카델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는 중이었다. 진행요원이 매우 지친 표정으로
“집중해주세요…… 이제 시합 곧 시작 하겠습니다…….” 하고 말 안 듣는 두 참가자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쿠우웅…….
큰 타격음이 종소리의 여운을 뚫고 공간에 울렸다. 사각형의 경기장 밖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일어났다.
“어?”
“지금 무슨 일이…….”
드디어 상황을 이해한 사람들이 입을 쩍 벌렸다. 눈 깜짝할 새 승패가 갈렸다. 바람같이 돌진한 로젤린은 상대가
무기 한번 휘두를 시간을 주지 않았다.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 없는 자비! 저 극악무도함! 남자들이 온갖
괴성과 짐승 소리를 내며 환호했다.
여자들도 비명을 지르며 들고 온 꽃을 경기장 안으로 던졌다. 앞선 경기들 또한 훌륭했으나, 이것은 차원이
달랐다. 피 한 방울 나지 않은 승리는 오직 확연한 실력 차만이 이뤄 낼 수 있는 것이므로.
우수수 꽃비가 내렸다. 로젤린은 몸을 곧게 펴고서 심장 위에 주먹을 올려놓았다. 기사의 경례에 무투회장은 다시
한 번 터질 듯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병사와 신관, 의사가 카델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뒤로, 로젤린은 경기장을
내려와 대기실로 이동했다.
109 화.
하지만 몇몇 귀족들과 건국을 축하하러 온 타국의 왕족들은 초대권이 있었기에 자리싸움 따위는 먼 얘기…… 여야
했는데. 싸움은 치열하면 더 치열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닌, ‘
누구 옆에 앉느냐’하는 것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오전에 치러진 16 강전 뒤의 휴식 시간을 즐기고 돌아왔다. 비어 있던 자리가 하나둘 채워질 쯤 그들은
유달리 눈에 띄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앞선 경기에는 없던, 발타의 유력 후계자 하카브 왕자였다.
하카브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간제를 향하고 있던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망설이던 왕세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람의 왕세자는 불쾌한 농담에도 불구하고 하카브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색을 지었다. 간제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하카브를 바라보았다. 말 한마디에 쥐락펴락. 아주 가지고 논다 놀아.
“아, 그…….”
“즐거운 시간되시길.”
하카브가 웃는 얼굴로 왕세자를 쫓아냈다. 왕세자는 떠나는 중에도 그를 흘끗흘끗 돌아보았다. 구체적으로 약속을
잡고 싶은 모양인데 하카브가 다시 간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니 방도가 없었다.
옆이 소란스러운데도 간제는 팔짱을 낀 채 무투회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카브가 간제의 어깨를 감싸고는
그녀의 머리에 제 머리를 콩 대었다.
“그냥요.”
“그냥 뭐?”
“머리통? 왜. 따다 주련?”
하카브는 뭐가 웃긴지 호탕하게 웃고는 그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간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곱게 정리했다.
“바이페렘.”
“똑똑하구나.”
하카브는 흠 숨을 짧게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어 있는 자리를 탐내는 눈빛들이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간제는 그의 웃는 표정의 진정한 뜻을 읽어 냈다. 아까 자신에게 말한 것처럼 머리통을 죄 따 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바이페렘.”
하카브가 아까 하던 말을 이어했다.
어느 쪽이라? 간제가 말한 ‘바이페렘’은 당연히 딤라였다. 현재의 바이페렘 관디테가 딤라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간제는 지금 제 오라비가 말한 ‘바이페렘’이
딤라가 아닌 관디테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 우연히 일라베니아의 신관들이 라고슈 사절단이 머무는 성에 들렀다는 소식을 들었지. 섭정관의 건강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야. 애석하게도.”
그때 입구에서 한 무리가 나타났다. 시종 몇을 데리고 온 바이페렘 관디테였다. 하카브의 예상대로 딤라는 보이지
않았다.
빈자리를 탐색하는 관디테를 발견한 하카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다가서자 시종들이 관디테에게 한
발짝씩 더 붙었다.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기색을 보이다 시종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시종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왕자.”
소녀는 자신보다 근 두 배가 커 보이는 하카브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얼굴에는 경계의 빛이 올라와
있었다.
소녀의 시선이 뒤에 있는 시종을 향했다. 그는 결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깜박, 깜박. 관디테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속에서 손쉽게 갈등을 읽어 낼 수 있었다. 하카브의 위험함은 익히 알고 있으나,
정중하게 건네 온 요청을 물리치자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부탁한다, 왕자.”
“바이페렘.”
간제는 웃는 얼굴로 바이페렘에게 인사했다. 관디테도 가볍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하카브는 두 사람이 인사하는
것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관디테는 경계를 아주 지우지는 않았지만, 나름 즐겁게 하카브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어려운 말과 정치 용어를
빼고, 자신이 본 라고슈의 눈 덮인 산, 굳어 보석처럼 빛나는 얼음 결정, 해안가에 남아 있는 고래의 뼈 등. 그
놀라운 광경이 얼마나 가슴 깊이 새겨졌는지 어린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 주듯 조곤조곤 풀어 냈다.
“고드름이다.”
“아하하!”
소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하카브는 소녀를 따라 웃다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관디테의 표정이 딱 굳었다. 유폐된 전 바이페렘의 얘기가 나오니 다시 경계의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110 화.
“진정 라고슈를 위했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이 거대한 대륙에 아버지를 자처하는 일라베니아의
어두운 면을 보고, 그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너무 거대했고, 또 다른 힘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녀가 나라를 팔아먹은 여왕이라는 오명을 감수하고도 저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모두
라고슈를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라고슈의 행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슈의 위대한 뜻을 품고
있으나, 방향이 달랐을 뿐이라,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절자, 배신자. 수많은 오명이 플로에토를
둘러싼 지금이 너무나도 가혹하게 느껴집니다, 바이페렘. 부디.”
하지만 라고슈에 대한 얘기로 경계심을 조금 풀고, 금기나 다름없는 화제를 직접 꺼내어 어린 소녀를 흔들었다.
플로에토를 그리는 눈빛에서 모두가 위험하다 손가락질 한 남자의 진실어린-진실 어려 보이는- 모습이 보였다.
하카브의 보기 역한 연극이 진심처럼 보이는 이유는 출중한 연기 실력뿐 아니라, 그가 한 말들이 대부분 사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고슈의 많은 형제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는 것도 현실이고, 일라베니아는 대륙의
아버지로 누릴 것은 누리되 죽어가는 땅을 외면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관디테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카브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유효한 모양이었다. 관디테는
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아래를 보던 시선을 하카브에게 옮겼다. 하카브가 애절한 표정으로 애써 미소 지었다.
시합을 알리는 사람이 나와 소식을 알렸다. 로젤린의 대전자가 기권을 했다는 얘기였다. 그녀가 등장하기만을
바라던 사람들이 일시에 아쉬운 소리를 냈다.
관디테는 로젤린의 경기 소식에도 하카브의 얘기를 반추하는 듯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소녀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카브는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시든 만디라.”
“라고슈 높은 곳에서 자라는 만디라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만큼 귀중한 약초다, 왕자. 시든 만디라. 만디라가
시들어 봤자 만디라지. 조금 상하거나 형태가 변하는 걸로 값어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라고슈의 속담 중 하나다”
“로젤린 경의 경기가 취소되어 매우 상심할 뻔했으나, 오늘의 외출은 이 몸에게 값졌노라. 왕자가 재밌는 얘기를
들려 준 덕이다.”
하카브는 가만히 소녀를 바라보다가 일어서서 아까와 같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발을 받쳐 주었다. 소녀가 그의
어깨를 잡고, 손을 밟은 후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감사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간제는 당장 쫓아가서
소녀의 볼에 키스하고 싶었다. 간제의 엉덩이가 들썩이던 그 때, 소녀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하카브를 보며 소녀가 생긋 웃었다.
* * *
첫째 날
32 강전 4 초
둘째 날
16 강전 21 초
8 강전 0 초(부전승)
셋째 날
4 강전 23 초
준결승전 45 초
32 강전의 상대, 불화살 용병단의 카델은 신성력은 뛰어난 신관이 붙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틀 동안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그 소식을 들은 로젤린도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다음 경기부터는 조금 더 힘을 풀고
상대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단순히 신분 차이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어서인지, 칼릭스의 얼굴은 혼란스러운 감정에 물들어
있었다. 울지도 자리배치웃지도 못하는 이상한 표정을 본 클로에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제국…….”
칼릭스는 진절머리 난다는 식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레이몬드와 클로에가 어떻게 만나 어떻게 사귀게 된 것인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것 같은데…….
클로에는 [남편이 나와도 우승은 로젤린] 이라 적혀 있는 천 조각을 들고서는 흥겨운 축제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111 화.
말을 말자. 칼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선을 옮겼다. 경기장을 내려와 대기실로 이동하는 로젤린이
보였다. 가까운 관중석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자리 싸움에 져서 무력하게 밀려나
있었다. 승리자들은 그 남자 군단의 반이나 될까 싶은 가느다란 아가씨들이었다. 다들 손수건과 꽃다발 따위를
로젤린에게 내밀고자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친 상태였다.
“로젤린 경! 여기 한번만 봐 주세요!”
“로젤린 경!”
여자들에게서 전운이 감돌았다. 칼릭스는 그쪽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마치 맹수들의 격돌 같았다. 그리고
난간은 맹수들의 거친 싸움을 버텨 낼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삐걱 소리와 함께 난간 한 쪽이 우그러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갖은 환호와 소란 속에서 로젤린은 난간이 비틀리는 소리를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다지 높지 않지만 인간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약한 생물이었다. 염려의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던 터라, 사고가 일어남과 동시에 움직일 수
있었다.
“꺄악!”
로젤린의 팔과 어깨에 걸쳐진 여자와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가 앞선 비명보다 높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다시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의 눈빛에서 어떤 욕망을 느낀 로젤린이 흠칫 몸을 굳혔다. 곧 안전하게 바닥에 도착한 여자들이 달콤한
한숨을 내뱉었다.
“어, 어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다리로 향했다. 당황한 여자가 가려 보려 했지만, 크게 찢겨 나간 조각이 있어
어려움을 겪는 중이었다. 로젤린이 제복 겉옷을 벗으며 그녀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로젤린이, 그 유명한 기사가 자신의 허리에다 제복을 묶어 주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무사하신 걸로 됐습니다.”
미친, 바람까지 왜 저래. 칼릭스는 절망했다. 심각하게 멋있었다. 심지어는 제 누이의 목소리가 제법 낮은
편이라는 것이 이 상황에 힘을 더하고 있었다.
난간 안쪽에서 지켜보던 아가씨들의 눈빛도 몽롱해졌다. 어두운 건물 안쪽으로 사라져 가는 로젤린의 뒷모습을,
그들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강하고 상냥한 기사님의 향기는…… 달콤했다. 로젤린이 실제로 경기 전에 달콤한
과자를 많이 먹고 왔기 때문이었으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 * *
32 강전, 1 분 12 초.
16 강전, 7 분 45 초.
8 강전, 6 분 22 초.
4 강전, (부전승)
준 결승전, 9 분 59 초.
얼음창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경기 내용이 훌륭하다는 점에서 마르틴의 이름이 로젤린과 함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모두 십 분을 넘기지 않고, 심지어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길면
한 시간 넘게도 싸우는 것이 무투 대회의 일반적인 풍경이었건만, 얼음창의 위명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준비가 끝났다. 앞선 패자들의 붉은 흔적이 심란하게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마르틴은 찝찝한 마음으로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로젤린이 보였다.
마르틴도 그 수많은 기사들 중 한 명이었다. 로젤린과 검을 맞대고, 대련도 하고 결투도 해 보고 싶었다. 얼마나
강한가. 정말로 딱밤으로 암살자의 머리를 날렸는가! 마력은 얼마나 강하고 불길한 힘인가. 보고 싶었다.
기사단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리고 권력 없는 자들의 출세 관문이나 다름없는 무투회장에 발을 들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 마르틴은 그 어느 때보다 흥분했다. 높은 자리에서 관람중인 황제의
존재도 잊을 정도였다. 진행자가 다가오다 선뜩한 기운에 발을 잠시 주춤거렸다. 참가자 마르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온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무기, 허용. 몸싸움, 허용. 암기와 독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승리의 조건은 상대가 경기장을 벗어나는 경우,
상대가 미리 패배를 시인하는 경우, 상대가 사망하는 경우, 상대가 전투 불능이라고 제가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항복을 했음에도 공격을 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에는 탈락입니다. 미리 주의해 주세요. 서로 예를 지켜
간단하게 인사해 주세요."
“하얀밤의 상급 기사 로젤린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안된다는데요.”
112 화.
“기사단장님이 절대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촤아악, 마르틴의 부츠가 바닥을 긁었다. 잽싸게 검을 바닥에 박아 넣은 덕에 경기장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한 발자국 뒤에 경기장의 끝이 있었다. 경험이 빛을 발했다.
챙!
왼쪽, 오른쪽, 허리, 심장, 다리. 굵은 혈관이 있는 지점을 날카롭게 베어 내려 했으나 그 어떤 공격도 그녀를
스치지 못했다.
“항복하시겠습니까?”
라고 했다.
어, 의외의 반응인걸. 보통 이러면 졌다고 하던데.
“알겠습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거리를 벌렸다. 진행자가 승리자를 외치려다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어? 보통
이쯤에는 졌다고 하던데? 자기들끼리 알아서 봐달라고 하고, 알아서 봐준 다음에 2 차전을 준비하는 지금의
상황을 대체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까. 관중석도 술렁였다.
두 사람이 다시 검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얼떨떨한 기색을 지우지는 못했으나 곧 빠져들어 관전했다.
마르틴은 몇 번이나 한번만 더 봐달라고 했으며, 로젤린은 몇 번이나 그 제안을 승낙했다. 심지어는 검을 제외한
박투도 실행되었고, 달리기 시합과 팔씨름까지 경기장 내에서 이루어졌는데 진행자의 얼굴이 볼 만했다. 딱히
팔씨름을 하지 말라 규정되어 있지 않아 말릴 수가 없었다.
* * *
리카르디스는 힐끔 눈알만 굴려 옆에 앉아 있는 황제의 얼굴을 살폈다. 유례없이 이상한 결승전을 목격한 황제의
표정은……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로젤린 경이야 마력이라는 수단으로 신체를 강화한다 치더라도, 마르틴 경은 정말 훌륭하군요. 역시 폐하의
호위 기사답습니다.”
얼음창은 황제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집단이었다. 로젤린이 승리하는 경우 황제의 심사가 크게 뒤틀릴 가능성도
있었다. 다행히 경기 내용이 이상하게 튀는 덕에 기분 나쁘고 말고 할 상황이 오지 않았다.
입 벌리고 볼 때는 언제고, 엘피디오가 정신 차리고 공격을 시작했다. 황제의 제일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하하, 비약이 심하시군요 형님. 일라베니아 황실의 권위가 고작 기사 두 명 때문에 흔들리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마르틴 경의 이름을 연호하는 수많은 자들을요. 더군다나 무투 대회에서 만나는
참가자들끼리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기도 합니다만, 두 사람은 검으로 얘기하고 땀으로 우정을
쌓았습니다. 건국제의 흥을 돋운다는 그 취지에 적합한 경기가 아니었습니까, 폐하?”
“마인을 품으시는 폐하의 자비로우심이 진정 하늘에 닿으셨는지요? 만백성이 칭송하며 우러러볼 위대한
업적입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황제만 경기장에 내려가야 했지만, 과하게 흡족해 버린 탓인지 리카르디스도 같이 대동했다.
웃음소리가 호탕했다. 횃불로 밝혀진 몇 개의 복도를 지나쳤다. 넓게 트인 공간으로 나오자마자 햇빛이 쏟아져
눈이 부셨다. 황제는 양옆에 일렬로 서 있는 병사들과, 얼음창 기사단을 지나쳐 경기장 중앙에 있는 로젤린에게
다가갔다.
로젤린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따라 관중석에 있던 자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정적이 감돌았다.
하늘에 가장 가까운 자. 일라베니아의 통치자. 대륙의 주인. 황제의 등장이었다. 그 누구도 황제의 허락 없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것이 한 시간이건, 하루건 간에.
리카르디스가 볼 때에는 이성적인 척하는 반 미치광이였다. 가장 고상한 척하는 미친놈이 권좌에 앉아 있다.
하지만 권좌에 앉았던 자들은 다 그놈이 그놈이니. 그렇다면 전후 관계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미친놈들이 권좌에
앉은 게 아니라, 권좌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보는 쪽이 더 타당할지도 몰랐다.
“고개를 들라.”
근엄한 목소리에 로젤린이 고개를 들었다. 황제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던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설핏 굳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딱딱하고 날카로웠다.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이 예민해진 것이 확실하게
티가 났다. 긴장이라도 한 걸까? 그 로젤린이?
황제는 사나운 그녀의 인상에 놀랐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은 사이, 로젤린의 눈동자가
또르륵 굴러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괜찮다고 말해
줄 수 없으니 웃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113 화.
‘로젤린. 우승 축하한다.’
경기장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검을 하늘로 치켜들자 관중들이 환호했다. 꽃과 꽃잎이 휘날리는 가운데 황제가
로젤린에게 검을 하사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두 손으로 검을 받아들였다.
“이델라브힘의 아래, 가장 높이 계신 위대한 분. 황제 폐하께 이 자리를 바칠 수 기회가 오다니…….”
[……목을…… 조른 것 같은 목소리?]
[눈물이 안 나면.]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빨개지는 정도까지는 해냈다. 황제는 흐뭇하게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저에게.”
[말을 한번 더듬는다.]
“아름다운 일라베니아. 영광의 일라베니아. 그 울타리와 방패.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가장 험난한 곳에서
가장 빛나고 날카로운 황제 폐하의 검이 될 자의 이름입니다.”
타고난 강렬한 눈빛에 황제는 깊은 감명을 받은 기색이었다. 모두가 칭송한 강한 무기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건 황제는 흡족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턱수염을
쓰다듬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붉은수레바퀴로구나!”
로젤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하늘 높이 치켜 세웠다.
로젤린의 목소리가 넓은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단단하고 힘이 넘치지만, 은은한 부드러움이 날카로움을
상쇄시켰다. 관중들이 그 목소리에 홀린 듯 일어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맞춰 같이 외쳤다.
삐이익---
리카르디스와 로젤린, 그리고 하얀밤 기사단원들에게는 익숙한 소리였다. 사람들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마구
헤매었다. 사람들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휙휙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관중들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어, 저기!”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전율이 일 정도의 광경이었다. 이델라브힘의 사자, 독수리. 선명한
햇빛 아래 그의 영광을 노래하던 때에 독수리가 나타났다. 마치 하늘 높은 곳의 이델라브힘이 땅 아래를 굽어
살피는 것만 같았다.
신의 이름과 나라의 영광을 드높이는 말이었다. 그네들이 불길하다 박해하던 마인의 입에서 나온 말임에도 모두
열기에 취해 있었다. 정말 망각이라도 한 듯이. 그 어떤 승리의 순간보다 무투회장은 크게 진동했다. 웅웅,
공간을 울리는 수백의 목소리는 사람들 마음 안쪽 깊은 곳의 무언가를 타오르게 했다. 황제 또한 분위기에
심취하여 군중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외울 듯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이 거대한 공간, 군중의 목소리에 휩쓸린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한 걸음 떨어진 채 바라보았다.
미소 띤 얼굴은 그 아래의 생각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로젤린은 군중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황제를 흘끗 곁눈질로 훔쳐봤다. 그러고는 하사받은 검을 슬쩍 가리키고,
리카르디스를 콕 집어 가리키더니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대충 자신에게 영광을 바치겠다는 말일 것이다. 눈에 안
띄려 작고 소심하게 행동하는 걸 보니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왜 그렇게 웃는 건지 이해
못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마지막에는 빙그레 웃었다.
함성 소리는 끊이지 않고 울렸다. 마카롱이 다시 날아올라 회장을 휘저었다. 로젤린은 비행 궤적을 눈으로
그리다가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황제가 걸어왔던 통로. 그늘진 내부는 밖의 환희가 닿지 않는 듯 차가워
보였다.
사랑스러운 디에즈, 상냥한 디에즈. 모두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과 장면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좋은 날,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아름다운 이 순간에? 어째서?
“영광의 일라베니아!”
사람들이 환성과 꽃잎이 널리 퍼질수록 디에즈의 얼굴은 무섭게 구겨졌다. 칼날같이 서늘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태양처럼 뜨겁게 일렁이던 황금색 눈동자가 눈물에 차갑게 굳어 가는 듯 보였다.
어째서? 멀리 있어서 묻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옆에 있었다고 한들 묻지 못했을 것이다. 디에즈 전하, 당신은 왜
그런 표정으로, 그런 눈빛으로 그렇게 비참하다는 듯 울고 있습니까?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디에즈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음에 놀라지도, 피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저
로젤린과 빤히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 * *
그녀는 방금 목격했던 장면을 몇 번이고 반추했다. 환하게 웃는 디에즈의 모습과 눈물을 흘리던 지금의 모습까지.
속이 쓰려 왔다.
디에즈의 눈동자는 그의 친부, 제국의 황제 라이노와 환성이 가득 차 있던 공간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황제의 얼굴이 다르게 보이기라도, 그 공간의 환성이 다르게 들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우헤허헉!”
저 멀리 보이는 대기실에서부터 복도 끝까지 시끌벅적한 소리가 퍼졌다. 웃음소리와 괴성이 섞인 흥겨운 소리였다.
생각에 깊이 빠져 잠시 인지하지 못했던 듯했다. 로젤린은 어두운 복도를 후다닥 달려 방문을 열었다. 빛이 확
쏟아졌다.
“로젤린 경!”
칼릭스, 레이몬드, 파르딕트, 르원, 슈텐, 네스터, 바스티안, 클로드.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 헤사까지.
하얀밤 기사단원 중 리카르디스의 호위를 맡은 사람만 빼고 다 와 있는 것 같았다. 넓은 대기실이 거구의
기사들로 꽉 찼다.
114 화.
“로젤린! 요 예쁜 것! 역시 내 제자야!”
“재밌어.”
“로젤린 경!”
“맞습니다. 제가 제일 강합니다.”
“이 미친 인간들!”
“로젤린.”
“응.”
“잘했어. 멋있었어.”
레이몬드가 바보처럼 웃었다. 로젤린은 그로부터 꽃목걸이와 샴페인 한 병을 받았다. 목걸이도 걸고, 샴페인도
터트렸다. 뻥! 소리가 나며 거품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로젤린이 그 샴페인을 제 머리 위에 뿌리며 눈을 감았다.
뜨겁던 머리가 식어 갔다.
“넌 안 돼.”
레이몬드가 경고했다. 칼릭스도 문득 불안한지 그녀의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웠다. 로젤린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기사들은 어느새 자리를 준비해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로젤린과 마르틴의 경기에 영향을 받은 듯했다.
파르딕트가 잇세리온을 이겼다. 고래와 토끼의 싸움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억지로 팔씨름을 다섯 번을 더 해야만 했던 잇세리온의 말이었다. 로젤린이 아하하 웃으면서 손뼉을 짝짝 쳤다.
잇세리온은 로젤린에게 팔씨름 신청을 받고 다시 버럭 화냈다.
“제가 그걸 하겠습니까?!”
로젤린은 이 상황이 웃겨서 까르륵하며 반쯤 넘어갔다.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본 상급 기사들이 잇세리온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질척거리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다.
어느새 고양이 한 마리가 대기실에 들어와 바닥에 흘려진 샴페인을 할짝거렸다. 눈이 가늘어진 것을 보니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다른 기사들 모르게 한 병을 슬쩍 숨겨 두었다.
“억!”
“이런……. 좋은 때를 방해하였구나.”
오랜 세월을 보내 거칠어진 목소리였다. 기사들은 방문자의 정체를 깨닫고 미친 듯이 몸단장을 했다.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파르딕트면 족했다.
로젤린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폴짝 내려왔다. 파르딕트는 여전히 상체를 탈의한 상태로 굳어 있었다. 로젤린이
그의 등짝을 찰싹 쳤다.
“비켜, 파르파르.”
그래도 비키지 않아서 쭉 밀어내야 했다. 로젤린은 그제야 마주친 딤라와 관디테를 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바이페렘! 섭정관!”
“감사합니다, 바이페렘.”
로젤린에게 샴페인을 끼얹은 기사들이 쥐죽은 듯 침묵만 지켰다. 칼릭스가 웃음소리를 내며 문가로 다가왔다.
“섭정관. 일라베니아의 풍습이 이러한 것은 아닙니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하얀밤 기사단 특유의 행사가
아닐는지.”
딤라와 관디테, 로젤린과 칼릭스는 자리를 옮겨 한적한 복도 중앙에 멈춰 섰다. 딤라는 그새 구해 온 천으로
그녀를 둘둘 말았다. 로젤린은 전혀 춥지 않았지만 가만히 있기로 했다.
“일라베니아에 머무르는 마지막 날에 좋은 모습을 보고 갈 수 있어 다행이구나.”
“일라베니아를 떠나십니까?”
이 시기에 일라베니아에 들리는 이유는 대개 건국제를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무투 대회는 고작 시작에
불과하며, 건국일은 한참 남아 있는 상태였다.
“아직 여독이 쌓여 있으실 텐데……. 긴 여행길이 귀한 분의 몸에 부담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신관들을 부지런히 불러 여기저기를 손보았단다. 엄살을 피웠더니 멈추지 못하고 성력을 퍼붓다가 한 놈은
쓰러지기까지 했지 뭐냐. 덕분에 몸도 기분도 좋아졌구나.”
딤라는 악당같이 웃었다. 아, 며칠 성에서 나오지 않으시더니, 다음 여정을 위한 준비였던 것인가. 칼릭스는
안심도 되고, 웃기기도 해서 웃음을 흘렸다.
외가의 힘이 강하지 못했으나 본인의 능력만으로 1 황자 엘피디오와 비등한 세력을 거느리게 된 2 황자 리카르디스.
명석한 머리, 시류를 읽는 눈과 귀, 처세술,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담함, 죽음에서 번번이 살아 돌아온
운까지.
아름다운 얼굴 뒤에는 칼날처럼 위험하고 날카로운 이면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날카로움이 나타나는 것은
오직 위험이 다가왔을 때, 또한 자신의 사람들을 지킬 때뿐이라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런 사내가 로젤린을 귀하게 여기는 모습을 두 눈 똑똑히 보았으니, 로젤린의 위험이 리카르디스로 인한
것일지라도 어딘가 마음이 든든해지기는 했다.
“예.”
“예, 할머님.”
“예.”
“이것이 내 유언이다.”
115 화.
로젤린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보였다. 그녀는 잠자코 있다가 무릎을 꿇었다. 칼릭스도 그녀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두 남매의 이마가 꽉 잡은 딤라의 손에 닿았다. 딤라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가 남매의 볼에 한 번씩
키스를 했다.
“……예.”
“예, 잘 먹습니다!”
“…….”
그냥 정신이 없었던 거겠지. 아니면 급하게 라고슈에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건가? 말은 무수했다.
14
“말로만 듣던 일라베니아의 무투 대회를 본다는 생각에 설레어 잠도 설쳤습니다. 과연 부족한 수면이 불만스럽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경기들이었습니다.”
하카브의 반짝이는 눈은 엘피디오의 너머를 보고 있었다. 경기의 내용을 반추하는 것 같았다. 엘피디오가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마지막 결승전만 아니라면 훌륭한 경기가 많았다. 로젤린의
존재 때문에 참가자들 대다수가 검증된 강자들이었고, 자연스럽게 무투 대회의 수준이 올라가게 된 것이다.
결승전 후, 황제에게 검을 하사 받는 로젤린의 모습은 무척이나 멋졌다. 엘피디오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하늘을
가르며 나타난 독수리가 경기장을 둥글게 휘젓고 바람을 일으켰다. 이델라브힘의 현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위엄 어린 등장이었다. 기분 좋아진 황제가 술에 취해 늘어져 있던 모습을 생각하니 뒷목이 뻣뻣해졌다.
리카르디스의 손 안에서 놀아나는 한심한 인간 같으니…….
엘피디오의 눈이 사나워졌다. 하카브는 조용히 분노를 곱씹고 있는 엘피디오를 바라보았다. 눈과 얼굴에 욕망이
비쳤다. 욕망 또한 생각의 일부. 이렇게 생각을 내보이는 자가 쉽지 않을 리 없다. 하카브가 이를 보이며
시원하게 웃었다.
“발타의 사절단 일로 큰 사고를 당한 내…… 동생. 리카르디스가 최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어 형으로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근심이 뿌리 뽑힌 것은 아니라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군요. 검은달이 언제쯤
다시 뜰는지…….”
그러고는 먼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하카브 쪽으로 옮겼다. 하카브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호탕하게 웃던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미소였다.
“검은달이라…… 그들도 피해가 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강대한 마인이 일라베니아에 있으리라곤 예상도 못한 것
같더군요. 하하, 같은 일라베니아 사람들도 몰랐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만요. 그래도 그렇게 철저하게 숨긴 덕에,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난 듯합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엘피디오가 이를 갈았다. 네 정보가 부족한 탓이 아니냐. 네 옆집에 마인이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뭐 했느냐
타박을 받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이델라브힘께서 도우셨지요. 그러나 습격대를 물리쳤다고는 해도, 검은달은 건재하지 않습니까. 치밀하고
끈질긴 집단이니 고작 한 번의 실패로 물러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국의 황자에게 해악을 끼치려는 크나큰 일을 벌인 자들인 것을요. 그게 실패로 돌아간 이상, 당분간은 정황을
살펴보려는 것이 아닐까요. 대륙의 모든 눈과 귀가 검은달을 주목하고 있을 테니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제 살만
깎아 먹는 꼴이 되리란 걸 알겠지요. 그들의 우두머리도 머리를 달고 있으니 말입니다.”
일라베니아까지 기어 들어왔으면 뭐라도 해 보라는 말에 엉뚱한 반응이 나왔다. 엘피디오가 미간을 좁혔다.
미쳤나, 갑자기 왜 저래?
하카브는 기회! 기회. 중얼거리며 무릎을 치기도 했다. 찰랑이는 금빛 장신구가 그의 눈동자에 비쳤다. 욕망이
일렁였다. 엘피디오가 의문을 가질 정도의 적나라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황자.”
* * *
“아름다우세요.”
오늘의 머리도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도 제 머리에 철썩 맞지 않을 것이다. 로젤린이 흡족함에
고개를 끄덕이자 헤사도 웃으며 끄덕였다.
헤사가 온 이후로 로젤린의 머리 모양은 다양해졌다. 땋기도 하고, 가르마를 바꾸기도 하고, 반 묶음을 해
보기도 하고, 뜨거운 인두를 들고 와 머리를 펴기도 했다. 여기저기 다니며 시녀들에게 배웠다고 한다. 업무며,
검술이며, 성에서의 생활이며 배울 것이 한두 개가 아닌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었는지.
피로한 소년의 얼굴에서 삶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소년은 우와 우와 소리를 내며 즐거워하는 로젤린의
모습을 보고 피곤함도 싹 잊은 듯이 행복하게 웃었다.
“손재주가 있는 편이라서요.”
하하 웃던 레티시아가 무섭게 표정을 바꿨다. 손에는 소매에 가려져 있던 뭉툭한 나무 단검이 들려 있었다.
순식간에 로젤린의 목덜미를 향해 나무 단검이 쇄도했다.
“악!”
근육의 뒤틀림을 따라 레티시아의 몸이 자연스레 돌아갔다. 그녀는 로젤린에게 완전하게 등을 보이는 모습이
되었다. 로젤린은 레티시아의 손에서 떨어진 나무 단검을 낚아채, 그녀의 목에 바짝 갖다 대었다.
“졌습니다.”
“안 하는 게 좋겠군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보이니까.”
116 화.
“아…… 부족했습니다.”
“또한, 몸이 움직이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미묘한 변화를 예상하고 조절하면 좋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정공법으로 상대가 될 리 없었기에 로젤린이 방심한 틈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두 하급 기사의
몸짓은 미묘하게 암살자를 닮아 가는 중이었다.
헤사에게 부족한 부분은 정통 검술이었다. 로젤린은 자신도 처음에는 그랬다며 그를 위로했다. 기초 검술을
레이몬드에게 배웠다고 하니, 옆에 있던 레이몬드가 제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라 했다. 마침 지나가던 큰뿔산양
후작이 자신은 선대 후작에게 배웠다고 해서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그저 기초에 불과한 검술이 몇 대째 내려오는 가문의 대단한 비법처럼 탈바꿈되었다. 헤사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선대 큰뿔산양 후작님께 누가 안 되도록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후작이 흐뭇해하며 헤사의 머리를
쓰다듬고 갔다.
이상하게 제 가문이 엮여 버린 레이몬드는 로젤린과 함께 헤사를 열심히 가르쳤다. 덕분에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몇 번 더 암살 훈련인지 뭔지를 반복하던 로젤린과 레티시아는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이 있어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훈련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헤사도 덩달아 놀라
로젤린이 챙겨 가야 할 간식 바구니를 잽싸게 챙겼다.
소년은 마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시끌벅적하던 공간이 조용해졌다.
헤사는 뻑뻑한 눈을 몇 번 비비고, 여기저기 굳어 있는 몸을 풀기 위해 팔을 위로 쭉 늘렸다. 새벽 늦게까지
공부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정을 몇 주간 반복하다보니 피로가 축적된 듯했다.
‘아!’
주방에 잼을 졸여 둔다 올려놓고는 깜박했다! 헤사는 황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헤사는 빠르게 업무를 익혔다. 로젤린에게 맡겨진 일부터 시작해,
그녀의 머리 모양을 어떻게 다양하게 예쁘게 할 것인가에 이르는 소소한 일까지.
헤사는 잠시 멈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발타에서 온 사절단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여기는
손님들이 머무는 성과 한참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마력이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무거운 족쇄가 끊긴 것처럼 가벼워져, 바닥을 딛는
간격이 넓어지고 빨라졌다. 돌아서 가야 하는 길도 벽을 타고 훌쩍 넘었다.
바닥에 착지해 앞으로 뛰어나가는 그 순간. 헤사는 바로 뒤에서 덮칠 듯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었으나 그보다도 뒤에 있던 사람이 헤사를 찍어 누르는 것이 먼저였다.
퍽!
얼굴이 바닥에 세게 부딪혀 머리가 울렸다. 입이 가려지고 뒷목을 잡힌 채 짓눌렸다.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식은땀부터 흘렀다. 떨고 있던 헤사는 낮은 웃음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잡고 있는 사람이 내뱉는
것은 아니었다.
자상한 목소리였다.
“풀어주어라, 아순.”
등 뒤에서 압박하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헤사는 덜덜 떨며 바닥을 딛고 상체를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황금빛의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남자가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멀리서나마 본 적 있는
인물이었다. 발타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 위 리비타.
‘무슨 헛짓거리지?’
전혀 넘어가지는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보다 웃으며 접근하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헤사는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소년의 경계를 읽은 하카브가 씩 웃었다.
* * *
오늘은 수도에 있는 큰뿔산양 후작의 저택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창문을 열어 두니 마차 안으로 바람이 솔솔 새어
들어왔다. 로젤린은 창문 턱에 팔을 건 채 밖을 구경했다.
큰뿔산양의 저택은 웅장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고풍스러운 감은 있어도 세심하게 관리되어 도리어 그게
멋스러웠다. 그 앞에 펼쳐진 정원에는 분수와 화단이 촌스럽지 않게 조화를 이루며 방문객을 반기는 중이었다.
집사와 하녀장, 하녀와 하인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허리를 숙였다.
“악!”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색색의 꽃잎과 종이 조각이 2 층에서 떨어져 내렸다. 레티시아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꽃비를 아연하게 쳐다보다 다시 시선을 1 층으로 옮겨 왔다.
아까까지 점잖게 두 손을 앞에서 모으고 있던 하녀와 하인들이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악기를 들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철컥철컥 박자를 쪼개는 금속 악기도 있었다. 사용인들은 몸을 들썩이고 머리를 휘둘러 가며 격렬하게
연주했다. 광란의 음악 연주회 한가운데 로젤린과 레티시아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노래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복식을 한 여자와 남자들이 화음을 쌓으며 등장했다. 눈
감는 것 하나, 팔을 뻗는 동작 하나하나가 똑같은 것으로 그들의 직업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남자는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와 로젤린에게 화관을 걸었다. 노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레티시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레티시아가 애타게 상사를 찾았다. 당신의 집이니 당신이 좀 어떻게 해 보라는 간절한 뜻이 담겨 있었다. 종이
조각과 꽃잎으로 시야가 어지럽고, 가득 찬 악기 소리가 시끄러워 정신없었다. 한참 둘러보던 레티시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게 찾아 헤매었던 레이몬드는 하인들 사이에 끼어서 신나게 연주 중이었다. 레티시아의 시선을 느낀
레이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듯했다.
“아, 우리 형.”
117 화.
그런데 저 남자가 큰뿔산양 후작의 장남, 아렌트였다니. 레티시아는 말문을 잃어버렸다. 한 가문의 후계자가 왜,
저러고 있어……?
아렌트는 레티시아를 발견하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꽃을 그대로 잡았다. 그러고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시, 싫어. 레티시아가 어색하게 웃는 낯으로 슬그머니 물러났으나, 금세 따라잡히고 말았다.
아렌트는 기어코 레티시아의 귓가에 꽃을 꽂아 주고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로젤린 경……!”
과연 무예의 기재! 반복된 춤사위를 그새 외우고 완벽하게 추고 계신다. 헤사가 봤으면 눈물을 흘리며 마음속에
저장했을 광경이었다. 저택의 입구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무대는 끝을 향해 달렸다.
레이몬드는 기분이 고양된 것인지 무릎을 꿇고 이로 만돌린을 연주했다. 훌륭한 솜씨라서 더 어이없었다. 금속
악기가 차르르르 울리며 노래가 끝났다.
“환영합니다, 손님!”
모두가 행복하게 웃었다. 레티시아만 빼고. 아렌트가 으하하 웃으며 다시 그들에게 다가왔다.
아마 그의 기준에서 작달막한 소녀가 쪼르르 돌아다니며 열심히 검을 휘두르던 모습이 인상 깊었던 것이리라
레이몬드는 추측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로젤린과 언제 만나든 번번이 “로젤린 경. 많이 컸군. 요만했었는데.”
하면서 손녀 보는 할아버지같이 굴었다고 했다.
“……네.”
“뭘 좀 아는 친구로군, 으하하!”
레티시아는 그때서야 떠올렸다. 그녀의 가문인 서리나팔이 변두리의 작은 영지라 미처 접점이 없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큰뿔산양 후작가의 유별난 가풍은 유명했다. 흥도 많고 음악도 좋아하는 집안이라 주기적으로 공연을
펼치는 것은 예사였다.
레티시아는 이곳이 큰뿔산양 영지의 성이 아님에 감사했다. 만약 그곳에 방문했다면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달 동안 여행길에 올랐던 손님을 붙잡고 장장 세 시간의 축하 공연을 펼쳤다던가. 오싹했다.
하얀밤 기사단 내에서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레이몬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노래 부르던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형, 어디가려고?”
“으하하학, 완전 지각이네!”
안부터 밖까지 아주 쏙 빼닮아 있었다. 두 사람은 정말 누가 봐도 형제였다. 하인과 하녀들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 조각과 꽃을 치웠다. 작은 조각들이라 여기저기 구석구석에 박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 부드러운 우유푸딩.”
“내 달콤한 허니버터캔디.”
“……”
레티시아는 오싹했다. 그 대단한 환대 공연이 제대로 맞이한 게 아니었다니. 로젤린이 가볍게 묵례했다.
“감사합니다, 영애.”
클로에가 눈을 접으며 생긋 웃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로젤린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적막에 의문이
들 때쯤 클로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아픈 곳은 없나요?”
그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마치 그 편지의 필체와 내용을 그대로 형상화 한 것 같았다.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로젤린은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레티시아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봐도
괜찮은 건가 이거.
클로에가 레이몬드를 보내고 자리에 앉았다. 로젤린은 쿠키를 먹지 않고 들고만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먹고 싶은 마음이 어디 가지는 않았기에 손에 들린 쿠키 개수가 점점 늘어났다.
“어머, 그럼요.”
“사랑하는 사이니까요.”
역시 못 보게 했어야 했는데! 레티시아는 로젤린과 클로에를 번갈아 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한 일이에요. 키스는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거든요.”
로젤린이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클로에는 매끄럽게 대응했다. 어린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상냥함이 비쳤다. 로젤린은 크게 충격 받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118 화.
‘로젤린’이 레이몬드의 수습 기사였던 시절. 그녀는 좀처럼 하얀밤 기사단에 융화되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녀
자체로는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이 받쳐 주지 않으니 상황은 나날이 악화될 뿐이었다.
그녀는 로젤린의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레이몬드가 바깥의 스승이라면, 클로에는 내부를 정리하며 차곡차곡 쌓는
법을 알려 줬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근 몇 년 동안은 서로의 위치에서 바쁘게 일한 덕분에 일 년에 한두 번도
보지 못했다.
그때로부터 시간도 많이 흘렀고, 지금의 로젤린은 그 기억마저도 희미했으나, 감정만은 남아 있었다. 그녀에
대한 신뢰. 호의.
로젤린은 입가를 더듬거리다가 얘기를 꺼냈다. 여러 번 눈치를 보며, 몇 번 말을 멈추긴 했지만 대화는
느릿하게라도 이어졌다. 한번 물꼬가 트이니 순식간이었다.
클로에의 얼굴에는 평온한 미소가 올라와 있었지만, 손은 스스로의 허벅지를 쥐어뜯고 있는 중이었다.
레티시아의 손에서 떨리는 찻잔이 잔 받침대와 부딪쳐 달그락달그락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클로에는 웃음을 꾹
참고 시선을 내렸다. 이 순간만은 레티시아를 타박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전하…….’
뻥이다.
“무운을 빌고 축복을 하는 거죠. 그래도 모두에게 하는 것은 아니고 정말, 전하께서 믿고 의지하는 기사에게만
하는 거라 자주 못 봤을 뿐이에요.”
뻥이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었다.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자신을 의지했다니! 로젤린은 들뜬 기색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클로에는 웃음을 꾹 눌렀다.
“예?”
“그렇습니까?”
정말로 넘어가겠지. 로젤린은 대단한 정보를 들었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는 웃음을
터트렸다.
* * *
“팔을 벌려 주시겠어요?”
응접실 한가운데에 서서 허수아비처럼 팔을 들고 있자, 자그마한 여자들이 달라붙어 줄자로 여기저기 치수를 쟀다.
오늘 클로에가 로젤린을 큰뿔산양 후작저에 초대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건국제의 무도회가 목전인데
드레스를 준비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어서. 붉은수레바퀴 백작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칼릭스까지 챙기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날카로운 척하면서 맹한 구석이 있는 게 제 누이랑 판박이였다.
“부인, 제발…….”
“화려할수록 예쁘다는 인식이 아직까지 윗세대에는 있어서 그런지, 프릴과 리본을 선호하시는 경향이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은 심각하네요, 이것은…….”
“이걸 입고 무도회에 가셨으면 두고두고, 자자손손대대 얘깃거리가 되었을 겁니다. 로젤린 경.”
“좋은 겁니까?”
남작 부인이 작은 눈을 부릅떴다.
“아니요!”
“아닙니다!”
“네…….”
격정적인 반응에 로젤린이 그녀의 눈치를 봤다. 에델바이스가 보낸 옷 중 가장 빛나고 화려한, 그녀의 심미안으로
보기에 예쁜 드레스였는데…….
로젤린과 레티시아는 뭐가 문제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았다. 클로에는 가슴이 답답했다. 하여간 기사란
족속들은 검밖에 없다. 여자건 남자건 정말.
초췌한 얼굴이었다. 로젤린은 괜히 미안해져서 그녀에게 쿠키를 건넸다. 남작 부인은 쿠키를 씹어 넘기며
응접실을 나섰다.
로젤린은 가르쳐 주는 것을 빠르게 흡수했다. 어찌나 다양하고 많은 부채 언어가 있는지, 레티시아가 질려서
고개를 절로 저을 정도였다.
“이 동작은 이성에게 사용할 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당신에게 마음을 여는 중입니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최근에 다른 뜻이 하나 더 생겼더군요.”
“이건 ‘내가 당신을 한 대 치고 싶으니 기다리세요.’라는 뜻이에요. 당신이 나에게 매우 무례한 행동을 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둘러…… 말하는 건 아니구나. 대놓고 말하는 거죠. 아까와 비슷하지만 표정 하나로 뜻이 조금
달라졌지요?”
로젤린은 곧 부채를 펼쳐 클로에와 같은 동작을 했다. 날카로운 눈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클로에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고 있는 중입니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뉘엿뉘엿해질 때까지 로젤린은 부채를 왼손으로도 들었다가, 돌렸다가, 반쯤
펼쳤다가, 빠르게 부치기도 하고. 다양하게 사용했다.
“네…….”
“네…….”
“아차, 그리고.”
풀죽었던 레티시아가 부활해서 기함했다. 로젤린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설레는 몸짓이었다.
로젤린이 ‘키스해 주세요’를 연습하는 것을 본 레티시아가 그녀의 손에서 부채를 뺏었다. 클로에가 호호 웃으며
그들을 구경했다.
119 화.
큰뿔산양 후작 저에서 돌아올 쯤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클로에에게 선물로 받은 부채를 이리저리
가지고 놀고 있으려니 어느새 저 너머에 월장석 성이 보였다. 레티시아는 거리에 살 것이 있다며 아까 전에
헤어진 터라,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로젤린뿐이었다.
그녀는 기숙사로 향하다가 건물 앞에서 쪼그려 앉아 있는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헤사였다. 로젤린이 가까이
다가가도 무릎을 끌어안은 채 바닥만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깊게 생각해서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평소에도 고양잇과 맹수들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다녀 기척이 전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로젤린 경.”
“무슨 일 있습니까?”
언제나 자신을 향하던 시선은 마주칠 줄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다. 왼쪽, 오른쪽, 어두운 수풀을 향했다가,
다시 바닥. 로젤린은 자세를 낮춰 헤사와 눈을 맞췄다.
“무슨 일입니까.”
“헤사?”
무언가에 대한 방어도, 공격도 없었다, 어떤 행위를 위한 것이 아닌, 목적성 없는 마력은 로젤린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물건을 잃어버렸다더니 갑자기 마력은 왜 사용하는 것일까?
그 순간 로젤린은 정원 저 멀리 여기저기 흩어진 사람들의 기척이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여기. 헤사와 그녀가 있는 분수대 앞으로.
헤사가 고개를 휙 들어 로젤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눈망울 한가득 눈물을 채우고
있던 모습과 달랐다. 눈썹을 찌푸리고는 있지만 울고 있지 않았다.
로젤린은 거기까지 얘기를 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벅저벅. 사방에 포진한 사람들이 가까워졌다. 로젤린은
그들의 정체를 눈치챘다. 뜬금없이 소년의 몸을 휘감은 마력. 그것을 기점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빤하지 않은가.
마인이라는 뜻이었으며, 로젤린이 알기로 자신과 헤사를 제외한 수많은 마인들의 정체라면…….
“로젤린.”
하카브의 호위들밖에 없었다. 남자는 열에 달뜬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로젤린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구릿빛의 사내가 두 사람만 있던 장소로 발을 들였다. 그와 동시에 분수대를 둘러싼 미로 정원의 수풀 벽 바로
너머에 수십 명의 사내들이 포진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카브가 헤사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로젤린은 그제야 헤사가 자신을 이곳에 부른 배경에 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입술을 짓이기는 행동에서 소년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던 갈등을 읽을 수 있었다. 로젤린은 한숨을 푹 쉰
다음에 헤사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딱!
소리는 가볍지 않았다. 헤사가 이마를 붙잡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있던
소년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먼저 기숙사에 가 있으세요. 나는 조금 있다 갈 테니.”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던 헤사는 이마를 누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정원을 빠져나가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로젤린이 앞에 있는 하카브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볼 수 있었던 건 그림자 진 그녀의
뒷모습뿐이었다.
헤사의 기척이 멀어졌다. 그녀를 대단한 명화라도 되는 듯 황홀한 눈빛으로 감상하던 하카브가 움직였다.
“하기 싫습니다.”
“네. 아마도.”
하카브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로젤린은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거슬려 표정 없이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하카브가 몸을 숙이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까의 상황과 완전히 반전되었다. 이제는 하카브가 로젤린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되었다. 로젤린은 답지 않게 당황했다. 음, 이거 좀, 느낌이 이상하다. 남자가 살살
눈웃음을 쳤다.
“어때.”
“매우 불편합니다.”
“목이?”
“유감입니다.”
“아, 네. 기쁘시겠습니다.”
하카브가 잠시 자신의 눈을 덮고 어깨를 들썩였다. 시간이 흐른 후, 드러난 흑갈색 눈동자는 등불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약간 물기 어린 걸 보니 조금 운 것 같기도 했다.
“그래. 기쁘다. 곧 모두가 나를 이렇게 올려다봐야 한다는 것이, 치가 떨릴 만큼 기뻐. 하지만 로젤린.”
하카브가 대뜸 로젤린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제 얼굴 쪽으로 가까이 끌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는 기행까지
벌였다. 하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막을 틈도 없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나 나를 그 위치에서 볼 수 있어. 발타의 힉살라가 영원히 그대의 발아래에서 그대를
경배하며, 사랑을 바칠 것이다.”
단조롭던 대답에 변화가 생겼다. 아니? 뭔 소리신지? 라고 황당해하는 표정까지. 아니라는 대답이야 대충
유추했더라도 상대방이 이렇게 헛소리를 들은 듯한 반응을 하니, 하카브도 약간은 상처받았다.
로젤린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을 걸고 있었다. 하카브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하카브가 쿡쿡 웃었다.
하카브는 말하는 중간중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로젤린은 그 만행에도 개의치 않고, 그의 뒷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기한은 그대가 원하는 때까지. 평생을 바란다면 평생을 바쳐 엘피디오로부터, 또한 황제로부터 그를 보호한다.
‘그때’와 같은 입 발린 동맹이 아니야 로젤린. 이건 정말…… 나로서도 큰 결심이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군.
또한 내가 이런 말을 꺼낼 정도로…….”
하카브가 로젤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꾹, 한번 누르고 떨어진 입술은 다시 그녀의 손마디에 닿아 더듬듯
천천히 내려왔다.
120 화.
손톱 끝까지 그의 입술이 닿았다. 목 뒤로 돋은 소름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카브는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돌려 달라 말하지 못했다. 로젤린이 어색하게 제 쇄골 아래 늘어진 차가운 금속을 만지고 있자, 달 아래의 검은
남자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의 목을 훑었다.
“전하.”
하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도 눈치챘다. 평범하게 정원을 산책하러 온 사람들이 입구에 발을 들여 놓은
듯했다. 아쉬워하던 하카브가 수풀 벽에 나 있는 꽃 한 송이를 뽑아 그녀의 귀에 꽂았다.
“좋은 답을 기다리겠다.”
주위를 둘러쌌던 하카브의 호위들이 넓게 퍼지며 정원을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로젤린은 하카브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멍했다. 벌어진 셔츠와 제복 단추를 다시 꼭꼭 여몄다. 목걸이를 걸어
주던 차가운 손끝의 감촉이 떠올랐다. 뱀같이 느릿하게 피부 위를 흐르던 손길. 로젤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원의 입구에서는 아까 전, 큰뿔산양 후작 저에서 돌아왔을 때에 보았던 광경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나무
아래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소년의 그림자가 작달막했다. 로젤린은 코로 숨을 후 내쉬었다. 헤사가
후다닥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군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일라베니아의 마인이 얼마나 가혹한 취급을 받는지. 나는 일라베니아와 2 황자의
적이긴 하나, 결코 그녀의 적은 아니다. 쉽게 믿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안다. 하지만 잘 생각해라. 2 황자의
입지는 단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또한 허상에 불과하지. 황제는 사지로 제 아들을 몇 번이나 집어넣은
사람이다. 중요한 건 그런 위험한 길을 걷는 리카르디스의 뒤에 로젤린이 있다는 것. 여차하면 그를 대신해 죽을
각오로 말이야. 내 말 이해하나? 그의 곁에 있으면 아무리 강한 마인이라 해도 반드시 죽는다는 얘기다.]
로젤린은 다소 기형적일 정도로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자라 왔다. 황실을 지킨다. 리카르디스를 지킨다.
그 반짝이는 사명을 황실은 단순한 화살 받이로 이용할 뿐인데, 어찌 내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른 길도 있노라 알려 주고 싶을 뿐이라고.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숨겨 두어 만날 방도가 없는데
어찌하겠느냐. 네가 진정 로젤린을 좋아하고 따른다면, 그녀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그녀를 위한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겠느냐. 반듯하게 생긴 남자가 구구절절하고 애절하게 말했었다.
무섭게 표정을 굳히고 쳐다보는 로젤린을 보노라니, 시간을 되돌려 했던 짓을 취소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헤사. 나를 걱정한 건 좋지만, 하얀밤 기사단의 모두는 리카르디스 전하를 위해 존재합니다. 이번 일은 헤사의
본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말의 끝이 흐려졌다.
헤사는 결국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로젤린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후회
따위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잘못했어요…… 로젤린 경.”
* * *
리카르디스가 성질을 못 이기고 서류를 집어 던졌다. 죽이지도 못하고 벌집만 들쑤시는 꼴이 될 것이 빤한데, 이
멍청한 자식들이……. 하카브가 머물고 있는 성에 호위 병력을 더 붙여야 하나? 리카르디스가 욕을 뇌까렸다.
멍청한 놈들 때문에 두 배로 고생하게 생긴 셈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한참 더 밖을 바라보다가 몽롱한 기운에 눈이 스르륵 감기려 하자 그때야 발길을 돌렸다. 푹신한
침대에 폭 빠진 몸이 무거웠다. 리카르디스는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잘 어울려, 아름답다.]
제 목덜미를 만지던 구릿빛 사내가 한 말이었다. 로젤린은 남자가 만졌던 부분을 지우듯 따라 더듬었다. 서늘한
금속이 만져졌다. 하카브가 청혼을 하며 준 목걸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벽에 걸린 거울이 보였다. 창백해
보이는 하얀 피부 위로 금색의 화려한 장신구가 걸려 있었다.
[그대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때부터, 발타는 일라베니아의 2 황자 리카르디스의 우군이 된다. 기한은 그대가
원하는 때까지. 평생을 바란다면 평생을 바쳐 엘피디오로부터, 또한 황제로부터 그를 보호한다.]
121 화.
‘나는…… 전하를…….’
‘지키고 싶어.’
리카르디스가 몸을 뒤척이더니 반대로 누웠다. 이제는 등밖에 보이지 않았다. 로젤린은 뭔가 울컥 서러워졌다.
‘나는 전하의…….’
‘곁에 있고 싶어.’
“네…….”
……부드러워?
바람소리도 읽는 예민함은 어디다 버리고 온 것인지. 로젤린은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숙면하고 있었다. 눈꺼풀이
떨리는 걸 보면 자그마한 자극에 일어날 것같이 보이긴 했지만…….
주위를 경계하며 암살자들을 척척 잡아내고 위험이란 위험은 다가오기도 전에 차단해 버리는 대단한 호위 기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기척마저 읽어 내는 그녀가 제 품 안에서 완전히 늘어져서 자고 있었다. 누군가의 무방비한 모습에
가슴이 설레는 날이 올 줄이야. 한 시간이면 한 시간, 여덟 시간이면 여덟 시간 내내 로젤린의 자는 모습만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제 슬슬 잇세리온이 일어날 때라는 것이었다.
새벽과 아침 사이의 희미한 햇살에도 문양의 굴곡을 따라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는 금색의 펜던트. 로젤린의
셔츠 안쪽에서 빼꼼 모습을 드러낸 펜던트의 문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리카르디스가 모를 리 없었다. 따스하게
데워지고 있던 가슴 안쪽의 온도가 순식간에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카브 위 리비타…….’
왕가의 표식을 줬으니, 단순히 내 부하로 오라는 둥의 시시한 얘기가 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 마력이 수준
이상이라고 하면 신분의 고하는 막론하고 왕실과 혼인으로 엮어 버리는 것이 그네들이 하는 일이었으니. 하카브가
무슨 말을 했을 지는 빤했다. 제 열네 번째인가 열다섯 번째 부인이 되라는 그런 얘기였을 테다.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침이라 그런지 볼과 입술이 부어 통통해져 있었다. 그
모습에서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양 볼에 음식을 잔뜩 욱여넣은 채 씹고 있는 광경을 연상했다. 냠냠. 때를 맞춘
듯 로젤린이 또 꿈속의 무언가를 먹었다. 그녀의 입속에 머리카락 한 올이 무서운 기세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
손으로 슥 빼내 줬다.
‘……설마 먹을 거라던가.’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로젤린이 거기까지는 아니…… 겠지. 리카르디스는 미심쩍은 믿음을 기반으로 미심쩍게
확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뭘까. 로젤린이 왜 하카브에게 받은 목걸이를 걸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걸고 있는 것인지…….
로젤린은 자신이 뭘 베고 있는지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서 리카르디스의 반대쪽으로 한 바퀴 굴렀다. 하지만
침대가 넓었기 때문에 굴러 봐야 침대 위였다. 로젤린은 엎드린 채 눈을 크게 뜨고 깜빡깜빡 거리기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옆으로 누워 턱을 괴고는 그녀와 눈을 맞췄다. 눈매를 휘며 환하게 웃으니 로젤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은 잘 잤나, 로젤린 경?”
‘……그게 뭔지 알고 있군.’
로젤린이 셔츠 단추를 잽싸게 잠그고는 힐끗, 옆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을 즈음의
리카르디스는 선량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걸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별일 없이?”
목이 떨어져 나갈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을 바랐던 대답에 긍정만 돌아올 뿐이라, 리카르디스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거 다행이군.”
목걸이를 숨기는 손길은 다급하고, 시선은 흔들렸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불안을 똑똑히 읽어 내었다. 로젤린의
마음을 뒤흔들 만한 일은 몇 가지 없을 것이다. 먹을 것, 가족, 친구…… 그리고 ‘2 황자 리카르디스 황자’의
안위까지.
의논을 하고 싶었다면 진즉에 말했을 것이다. 입을 딱 다물고 목걸이를 숨기고 있는 지금은 리카르디스도
인내해야만 했다. 가뜩이나 하카브의 수작질로 흔들리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불안을 내보이는 것은 결코 좋은
수단이라 할 수 없었다. 그가 애써 평정을 유지하는 이유였다.
“로젤린.”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더 끌어당겼다. 몸이 맞닿아 꾹 눌리자, 그녀가 뻣뻣하게 굳었다. 경직된 초록색
눈동자에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비쳤다. 실크처럼 흘러내리는 은색 머리카락이 한 가닥, 한 가닥 아침 햇살에
빛났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내려 깔며 웃었다. 로젤린의 숨이 멎었다. 미모에 넋을 잃고 있어 미처 몰랐는데,
거리가 좀…… 많이 가까운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자각한 로젤린이 깜짝 놀라 한쪽 손으로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더 이상은 다가오지 말라는 듯이.
셔츠 자락이 벌려져 있는 탓에 손바닥에 탄탄한 가슴이 그대로 닿았다. 로젤린은 더 당황해 버렸다. 피부가
부드럽다 못해 매끄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가, 자신이 왜 그 가슴에 손을 대었는지
깨닫고는 다시 밀었다. 그리고는 다시 당황해서는 떼었다가, 아차 맞다 하고 또 꾸욱 밀었다.
“전하 뭔가 좀…….”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만류, 그녀의 당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이마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허억,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공기 속으로 녹아내릴 듯 아련한 미소였다. 하늘을 덮은 먹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한줄기 햇빛이 드리운 자연
광경보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얼굴이었다. 로젤린은 그의 믿을 수 없는 외모에 쩍 굳어 버렸다. 그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 * *
“정확하다. 그 느낌으로.”
옆에 있던 잇세리온이 두 사람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한나는 속으로 그를 응원했다. 치장은 무슨. 얼굴에
뭐 하나 바르는 것도 질색하시는 분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저러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잇세리온
비서관도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
그의 뒤에서 상급 기사 르원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형제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툴툴거렸다.
한나가 조금만 기다려 달라 말하고는 황급하게 시녀를 모두 끌고 나갔다. 보물 창고를 털어올 기세였다. 시녀들이
빠진 방 안은 적막이 감돌았다.
르원이 제 턱을 긁적이다가 슬그머니 리카르디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잇세리온과 르원 형제도 무슨 일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설마…… 연애하시나? 월장석 성에도 꽃이 피는 거야? 은근슬쩍 물어보려던 순간,
리카르디스가 그를 먼저 불렀다.
“르원.”
“어…… 예?”
팔짱을 끼고 저 너머를 날카롭게 응시하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글쎄…… 장미의 치명적 어쩌고에 가깝긴 했지만
봄 햇살에 아련하게 흩어지는 어쩌고는 아닌 것 같았다.
“또.”
“헤사라 했던가.”
“헤사가 누굽니까?”
“레이몬드 경도.”
심지어는 보호자까지.
‘진짜 무슨 짓을 한 건지…….’
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섰다. 잔뜩 들뜬 걸음으로 돌아오는 시녀장 한나의 모습을 보고 그는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나의 기대대로 연애가 조금은 섞여 있을 수도 있지만, 연애 초기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분위기보다는 끈적끈적하고 각종 술수가 난무하는 치정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한나가 과연 그걸
바랐을는지…….
* * *
달칵.
텅 빈 것이나 다름없는 정돈된 방 안. 거대한 침대 아래에 헤사가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본인의 방에서
안자고 왜 바닥에서…….
‘아…… 맞다.’
[진짜 아름다우시지.]
언젠가 동료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당시에도 공감했던 말이었으나, 지금은 정말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얼굴이 화끈하고 눈도 못 마주칠 것 같았다. 여태껏 그를 어떻게 보아 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아, 맞다.’
하카브. 또 까먹고 있었다. 로젤린은 이번에는 집중해서 잠깐 그의 제안을 다시 돌이켜 보았다. 혼인하면
리카르디스를 건드리지 않을 뿐더러 지켜 주기까지 하겠다. 혼인…… 혼인이라.
[……어…… 음….]
[혼자서는 그릇된 행동이나 결정을 내릴 때가 많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불완전하고, 때문에 종종 실수를
저지르고는 합니다. 그걸 서로서로 도우며 보완하라 신께서 저희들을 함께 세상의 빛을 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누님, 어떤 일이 있다면 고민만 하지 마시고 믿을 만한 사람들과 함께 그 생각을 나눠 보는 게 어떨까요.
사람 머리 하나보다는 사람 머리 둘, 둘보다는 셋이 나은 법이죠.]
덕분에 인상 깊게 새겨져 있었다. 골머리를 앓고 있으려니 칼릭스의 조언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고민해서 무얼 하겠나. 답이 나오지를 않는데.
123 화.
“정략혼이라. 뭐 흔한 일 아닙니까.”
“카일로 경은 혼인하셨습니까?”
“파르파르는?”
“하나, 애가 셋이다.”
“정략혼?”
보자마자 잔소리였다. 로젤린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내어 깔고 앉았다. 레이몬드는 그제야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두 남자의 싸움을 관전하고 있는데, 시선이 따가웠다. 나무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는
흘끗흘끗 내려다보는 레이몬드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귀족 세계에서 흔하다는 정략혼. 조건과 조건만 맞으면 결혼하지 않나. 본인의 목적과, 그 조건이 맞아
떨어진다면 하는 쪽이 나은 것일까? 목적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정략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너무 철없는 일이겠지? 다들 하는 건데 너무 껄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겠지? 딱 그 정도.
레이몬드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애써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볼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중이었다.
“요즘도 많이 하잖아.”
“당연히 하는 사람들이야 있지. 가문의 세를 불리거나 동맹을 위한 수단으로. 사랑 없이. 그저 조건만 보고!
하지만 로젤린, 결혼은 신성한 거란다!”
“일생에 한 번뿐인,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앞으로 하나의 길을 걸어가리라 약조하는 그 기회를 단순히 조건만
보고 결혼한다고? 심지어는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데? 그건 팔려 가는 거야. 결혼이 아니라!”
“…….”
뭔가 아까랑 말이 좀 다른 것 같았다.
“어우, 그건 좀……. 말이 심하시네요, 카일로 경……. 아무튼, 카일로 경도 이렇게 말하잖아 로젤린. 내가
뭐라 했어!”
“……바닥에 그냥 앉지 마라?”
레이몬드가 그녀의 두 어깨를 꽉 쥐었다. 로젤린은 어젯밤 자신이 헤사의 어깨를 잡고 훈계하던 때를 떠올렸다.
친구 레이몬드에게서 과거, 동경했던 상급 기사 레이몬드 경의 얼굴이 보였다.
“……지키려고?”
“기사의 귀감이라 눈물이 나올 뻔했네. 그것도 맞아. 하지만 본디 검은 무기야 로젤린. 적을 베고 찌른다. 싸워
이기기 위한 무기. 너는 그 무기를 쥘 자격을 지닌 기사고, 그렇다면 휘둘러야지. 싸워서 쟁취해 내야지.
지레짐작 두려워하지 말아.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패배를 시인하는 만큼 기사에게 굴욕적인 일이 어디겠어.
너는 강한 아이잖아.”
정략혼의 기원이라든가 정략혼의 폐해. 수많은 실패 사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카브의 욕과 레이몬드와
클로에의 연애담까지.
‘……어?’
석양빛이 하얀 커튼에 투과되어 어스레 떠도는 집무실 안에 꽃이 잔뜩 장식되어 있는 탓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촛대에서 피어오르는 불꽃들이 문이 열림과 동시에 흔들흔들 춤을 췄던 탓일까? 아니면 그렇게 장식된 공간 속,
갖은 장신구로 치장한 남자가 오늘따라 더욱 청초해 보인 까닭이었을까? 로젤린은 몇 초간 움직이지 못하고 그를
바라만 보았다.
“로젤린.”
‘요정?’
로젤린의 시선은 흘러, 부츠나 구두를 신지 않은 리카르디스의 맨발로 향했다. 사람의 발이 이렇게나 예쁜
기관이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크고 발가락도 길쭉하고, 뼈대도 곧고 예쁜 데다가, 그 위를 가로지르는
핏줄까지도 예뻤다. 바깥 복사뼈에서 다리로 올라가는 선도 어찌나 선명하고 아름다운지. 로젤린은 살짝 분홍색
빛이 도는 그의 복사뼈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로젤린? 무슨 문제라도 있나?”
124 화.
로젤린이 입을 떡 벌렸다. 이상한 사람들이 아닌가! 호위 기사가 급한 일이 있다고 자리를 비워? 카일로 경……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잇세리온 비서관님도 너무했다.
눈을 내리깔며 말을 흐리는 남자의 미소에는 어딘가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방과 이 성까지
모두 리카르디스의 것이었으나, 이 거대한 공간에 그만 홀로 남은 듯 외로워 보였다. 로젤린의 가슴 한가득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 차올랐다. 노을 지는 하늘보다도 어딘가 마음 한쪽을 시리게 만드는…….
“그대가 와 주어 기쁘다.”
그러고는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로젤린은 다른 사람, 기사단장, 기사단장 부관, 부단장, 부단장 부관,
수석 비서관에게 들키면 크게 혼날 걸 알면서도 기어코 그의 옆자리에 앉고야 말았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돌연 생긋 웃었다. 심장이 발밑으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그걸 권할 때서야 음식의 존재를 눈치챘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지만 그녀는 손을 뻗지
못했다. 가슴 안쪽을 꽉 채운 감정들로 인해 배가 부르기까지 한 것 같았다. 로젤린이 망설이고 있으니
리카르디스가 포도 한 알을 떼어 그녀의 입안에 쏙 넣어 주었다.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그가 생긋 웃었다.
로젤린은 난생 처음으로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넣고, 씹고, 삼키는 행동만을 반복했다. 먹는 모습이
관찰당하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리카르디스가 흐뭇하다는 듯 웃는 모습에 신경이 쏠려 그랬던
것일지도. 로젤린은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체한다’라는 감각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편하게 들어.”
그의 가슴이 일정한 속도로 오르내렸다.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쩐지 터질 것 같고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로젤린은 오늘 여러 동료와 지인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또한 그 얘기들로 결심했지만 아직까지
확신을 가지지 못한 자신의 마음에 대해, 그에게 말해야겠다 생각했던 것까지도.
“저 서류는…….”
“내 일기다.”
“아, 일기요.”
진지하게 읽어 내던 그의 표정이 이해가 갔다. 업무만큼은 아니지만 일기도 중요했다. 칼릭스와 레이몬드가
꼬박꼬박 쓰라고 해서, 로젤린도 벌써 책 한 권 분량을 거의 다 채운 상태였다. 덕분에 나날이 글씨체도
예뻐지고 어휘력도 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유려한 글씨체 또한 일기로 단련이 된 것이 아닐까.
“그래, 무슨 일이지 로젤린?”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나 나를 그 위치에서 볼 수 있어. 발타의 힉살라가 영원히 그대의 발 아래에서 그대를
경배하며, 사랑을 바칠 것이다.’라고 한 다음에 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게 아니야.
길은 많을수록 좋으니, 그저 내 제안을 기억해 두기만 해. 분명 그대는 언젠가 일라베니아에 많이 실망하게 될
테니.’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됩니까?”
일라베니아의 황자 전하이신데?
“그랬군. 그것 참 불쾌했겠어.”
빠른 대답에 리카르디스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로젤린이 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었다. 금색의
펜던트. 오늘 아침만 해도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것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하.”
“그래.”
“제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하카브 전하가 전하의 우군이 되어 준다 했습니다. 엘피디오 전하로부터, 황제
폐하로부터. 보호해 주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짧은 순간이 조급했다. 실상 새벽부터
계속된 기다림이기 때문이었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 그녀가 뱉은 대답은 ‘하겠다’도
아니고 ‘하지 않겠다’도 아니었다.
로젤린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금속이 흐르듯 움직였다. 자그락, 자그락. 불쾌한 소리였다.
“그 또한 잘 알고 있다.”
“그게 두렵습니다.”
“로젤린.”
“어제 좋은 아침이라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이 오늘은 없을 수도 있다. 하나둘 사라져 가고,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기억했던 사람들도, 그 다음날에는 없다. 결국 내일에 남을 것은 나뿐이다. 괴로움의 몫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혼자 짊어져야만 하겠지. 죽음마저 반갑게 느껴지는 고통이다. 그걸 알기에 나는 그대의
두려움을 이해한다. 그 감정만이 나를 이루는 전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잃는다는 것은 가깝고 또 익숙하다. 겪은 적 있기에 그게 얼마나 아픈지도 잘 알아. 그래서 피하고
싶고 두렵다. 그렇지?”
“로젤린.”
“……예.”
“로젤린 에스터.”
“예.”
“예.”
어딘가 익숙한 말이었다. 로젤린은 기시감의 정체를 떠올려 내었다. 자신이 무투 대회에서 우승했을 적,
황제에게 했던 입 발린 문구였다. 로젤린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하카브의 목걸이에서 벗어난 시선은 그보다도
빛나는 사람을 담았다.
“나의 검.”
“예. 전하.”
“그대는 나를 위해 강해져라.”
그리고 기어코, 로젤린의 손은 온전히 무언가를 잡아 낸 모양새가 되었다. 더 이상 찬란한 금색으로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던 목걸이는 보이지 않았다. 부러질 듯 연약해 보였던 남자는 한 꺼풀 무언가를 벗어던진 것
같았다. 흔들리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결코 무르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를 잃는 상상만 해도 사고를 멎게 만드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카브의 제안에 갈등한 이유였다.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까득…….
그녀의 손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금속과 금속이 비벼지다 못해 강한 압력에 서로 쓸릴 때 나는 비명 소리였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쥐고 있는 로젤린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떨림이 그녀의 혼란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꽉 쥐어져 있는 주먹에 뼈가 도드라졌다. 서로가 서로의 틈에 들어가던
장신구가 한계까지 응축되었다.
탕!
쇳더미 위로 쇠가 떨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공간을 파도처럼 덮쳤다가 사라졌다. 귀에 이명이 일 정도로 강력한
소리였다. 그녀의 손에서 후드득 목걸이의 잔해가 떨어졌다. 반쯤 구겨진 펜던트와 부속물들이 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붉은 노을에 반짝거리며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예, 전하.”
15
알몸의 남자와 단둘이 있기 위해 서두르는 자신의 모습을 문득 돌이켜 본 칼릭스의 얼굴에 회의감이 짙게 드리웠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레이몬드만큼이나 장신인 잿빛 머리의 남자는 태평하게 돌아다니다가 와인장을 발견하고는 화색을 지었다.
남자가 손날로 병의 목을 퍽 소리 나게 쳤다. 윗부분이 칼날로 잘린 것처럼 예리한 단면을 보이며 떨어져 나갔다.
유리 조각이 들어가는 걸 염려한 것인지 단면을 후후 불던 남자가 와인을 들이켜고는 크으, 아저씨 같은 소리를
냈다.
“……마카롱 님. 언제 오셨습니까?”
마카롱이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편해 보였으나 꼴 보기 싫었다. 알몸이다 보니 유독 중심이 눈에 띄었다.
“옷을…… 드릴까요?”
입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은 “아니. 곧 날아가야 해서 귀찮고.”라는 마카롱의 대답에 무산되었다. 정말
보기 싫었다. 칼릭스는 그를 최대한 외면한 채 테이블로 걸어가며 말했다.
칼릭스가 서랍을 뒤적여 가죽으로 감싼 물건을 조심스럽게 탁자에 올려놓았다. 마카롱은 와인 병을 대충 소파에
던지고 그것을 냉큼 집었다.
“그거 맞네.”
“……예. ‘파편’입니다.”
마카롱은 성급한 손놀림으로 끈을 풀어 감싸진 가죽을 벗겨 내었다. 그러자 녹슬어 있는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카롱의 감각은 평범한 인간들은 결코 보지 못할 무형의 기운을 읽어 내었다. 단검에서 검고 붉은 것이 일렁였다.
마카롱의 눈이 가늘어졌다. 발타에서 보았던, 인간들의 몸에 심어져 있던 검붉은 기운. 거칠게 박동하며 사납게
날뛰는 마력. 이것을 마력이라 불러도 되는 것일까? 씨앗은 같으나 발아 과정과 꽃의 종류가 다르다. 인간들도
참 대단하네.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대?
“쫄지 마라.”
“……네.”
‘흠…….’
“마카롱 님!”
칼릭스가 악 소리를 지르며 마카롱의 손을 거칠게 잡아챘다. 하지만 이미 상처를 통해 ‘파편’이 스며든 후였다.
“미쳤습니까?”
“이놈의 자식이?”
마카롱이 칼릭스를 퍽 쳤다. 칼릭스는 옆구리를 붙잡고 인상을 썼다. 힘은 왜 이렇게 센 거야?
칼릭스는 초조한 표정으로 마카롱의 상처와 얼굴을 번갈아 봤다. 로젤린이 ‘파편’을 결국 이겨 냈으나, 며칠간
생사를 오갈 정도로 마독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릭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마카롱은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칼릭스의 혈압이 올랐다.
검은 바다가 ‘파편’을 도리어 뒤덮기 시작했다. 퍼졌던 길을 따라 빠른 속도로.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춤추던 ‘파편’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하나의 촛불까지 남김없이 집어삼킨 마카롱이 눈을 떴다. 바로 앞에서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칼릭스가 보였다. 마카롱이 씩 웃었다.
“별거 아닌데?”
마카롱이 애처로운 눈빛을 가장하며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손등의 상처도 언제 있었냐고 말하는 양 말끔했다.
칼릭스는 제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에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다행이긴…… 했는데…….
일정량 흡수하긴 했으나 아직 ‘파편’은 잔존하고 있었다. 마카롱은 잠시 그것을 보다가 일어섰다. 시야 정면에
마카롱의 신체가 한가득 들어와 칼릭스는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마카롱을 바라볼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의 형체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창백한 피부색에서 갈색으로, 검은색으로 검게 물들며 무너졌다.
칼릭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찰나의 시간이 지났다. 자리에는 검은 그림자 같은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흐르는 듯, 무너지는 듯, 흩어지는 듯, 연기같이, 밤하늘을 한 줌 떠 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칼릭스는 잠시 말을 잃었다. 온전한 ‘그것’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것’은 바람에 흐르는 구름처럼 느리게
움직이며, 탁자에 있는 암기를 완전하게 덮쳤다.
칼릭스는 마카롱의 의도를 알아챘다. 약해 빠졌다고 놀리긴 했으나, ‘파편’이 인간에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은
마카롱도 잘 알고 있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온전히 흡수하려는 것이 아닐까.
검은 안개 안에서 무언가가 물결치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주저하며 손을 뻗었다. 마카롱의 표면에 닿은 손바닥에
간지러운 무언가가 스쳤다. 칼릭스는 용기를 내서 손을 더 깊이 넣었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밀도
높은 공기 같기도 하고, 미세한 모래 입자 같기도 했다.
126 화.
마카롱은 이 장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보고 있기만 해도 짜증나고, 어딘가 껄끄러웠다. 자주 밖을 떠돈다고 해도,
그 껄끄러운 장소를 집이라도 되는 양 꼭 돌아가는 이유는 오로지 로젤린 때문이었다.
커다란 침대에서 뒹굴고 있으니 헤사가 들어왔다. 시트를 갈고 고양이 미미를 실컷 만진 소년이 뿌듯한 얼굴로
방을 떠났다. 후에 로젤린이 돌아왔다. 미미를 발견한 로젤린이 침대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고양이의 보드라운
배에 얼굴을 묻었다.
“어디 갔었어.”
“아, 칼릭스한테.”
“뭐 했는데?”
“뭐 좀 먹고 왔어.”
“어린애는 먹는 거 아냐.”
마카롱이 반색하며 잽싸게 인간 여자 모습으로 의태했다. 두 사람이 부어라 마셔라 하는 사이 커다란 샴페인이
금세 동났다. 취하지 않는 두 사람은 입맛만 다셨다. 취하는 기분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상큼한 과실 향을
맡으니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라는 답변이 돌아와 마카롱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은 마카롱의 심심한 반응에 열성적으로
리카르디스의 어디가 아름다운지 설명했다. 반짝거리는 눈가가, 오뚝한 콧날과 각진 턱선이, 탄탄한 가슴이,
복사뼈가!
“…….”
마카롱은 복사뼈가 어떻게 생기면 아름다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젤린은 옷을 갈아입고서는 창문을 통해
나갔다. 또다시 리카르디스에게 간다고 했다.
고양이는 소파에서 테이블로 풀쩍 뛰었다. 달큼한 과일의 잔향에 꼬리가 절로 살랑거렸다. 마카롱은 쓰러져 있는
샴페인 입구를 할짝거렸다. 이상하게 잠이 몰려왔다. 정말 취하기라도 한 것일까.
* * *
아아아악!
비명 소리에 깨어난 마카롱은 자신이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를 감싼 공기에 피 냄새가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가슴 안쪽이 무서울 정도로 박동하고, 온몸이 당장 흩어질 것처럼 떨렸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부드러운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나는 지금 도망치고 있다!
뒤를 돌아보았다. 밤중에도 환하게 빛나는 백색의 성이 보였다. 헛구역질이 나서 잠시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머리를 숙이자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그런데 뭐지, 이 피 냄새는. 어디서, 어디서 계속 피 냄새가…….
아이들이 엉엉 운다. 그 소리에 가슴이 저며 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디 있지? 둘러보아도 아이들은 없었다.
어둑한 숲길이었다.
아, 피가.
자꾸만 피 냄새가.
* * *
밤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환한 풍경이 창밖에 펼쳐져 있었다. 밤하늘의 별보다 많은 수의 등불이 하얀
성을 둘러싸고 빛나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으나, 다른 나라에서 방문한 귀족들은
번번이 놀라운 광경에 입을 모아 찬사했다. 밤에도 영광으로 빛나는 일라베니아!
“아름다워.”
하카브 또한 하늘까지 닿을 것 같은 등불의 향연에 크게 감명 깊어 했다. 소파에 편안하게 드러누워 보는 창은
마치 한 편의 명화라 보아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로 인해 이따금 빛이
흔들거렸기에, 살아 있는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위명이 헛되지 않는군. ‘축복의 밤’이라……. 어둠을 몰아내는 영광은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어.
디에즈, 그대도 구경하지 그래. 매년 보는 거라 감흥이 없나?”
디에즈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술을 따르고, 삼키고, 테이블에 놓고, 다시 따르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말술인 건
알고 있지만 혼자서 두 병을 넘게 마셨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다니. 술 한 잔도 못 마실 것처럼 생겨
놓고서는.
“농담도 잘하긴.”
“살짝이요?”
“한…… 이 정도.”
하카브가 테이블 위에 있는 냅킨을 살짝 접었다. 모서리를 새끼손톱만 한 정도로. 디에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하카브가 피식 웃으며 포도를 집어 먹었다.
디에즈는 뭐라 말하려다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하 한숨을 쉬었다. 항상 번듯하게 펴져 있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감정이 드러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보였다.
순간, 디에즈의 눈빛이 변했다. 부드러운 눈매에 날카로운 빛이 서렸다. 그의 시선이 창문이 있는 방향으로
흘렀다.
쨍그랑!
그때, 창문이 깨지며 파편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디에즈가 서 있는 창이 아닌, 테라스 쪽이었다.
생각보다는 아주 멍청한 건 아닌가. 양동 작전이라…….
“나서지 마세요.”
두 명의 침입자가 자세를 낮추고 빠르게 달려왔다. 어설픈 위협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법 훈련된 암살자인
듯했다. 하지만 검은달의 암살자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라 봐도 무방했다.
침입자의 검이 사선을 그었다. 무심한 눈으로 그 공격을 바라보던 디에즈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등에
부딪친 무기가 부서져 날아갔다. 암살자가 주춤 물러서며 당황했다.
쉬익.
디에즈가 부서진 나무 조각을 집고는 암살자의 머리에 천천히 집어넣었다. 단단한 두개골의 저항은 그의 힘 앞에
의미 없이 무너졌다. 파삭, 뼈와 근육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피가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디에즈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의 전투도 소강상태인 듯했다. 흰 대리석 위로 피가 너절하게 뿌려져 있었다.
창문 유리에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린 그의 모습이 비쳤다. 디에즈는 다시 손으로 꾹꾹 눌러 미간의 주름을 폈다.
디에즈는 유리에 비친 모습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성 여기저기를 빛내고 있는 등불이 보였다. 밤하늘 별보다
밝고 환한 빛무리가 은하수같이 수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환하게 빛나는 하얀 밤 속에서 기어코 어둠을 찾아내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
127 화.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그놈이 뭐가 예쁘다고 밤을 새워 경비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 직접 기사단장
스타스에게 항의했다가 혼났다. 전쟁이 일어나면 책임질 수 있느냐는데, 확실히 그건 두 사람이 책임지기 힘든
사안이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경비하겠습니다. 기사단장 스타스는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 손에 쿠키를 쥐여
주고 내보냈다. 두 명은 기사단장실을 나오며 묘한 표정을 했다.
“…….”
늦은 밤까지도 성의 시녀들이 돌아다녔다. 비슷한 처지라 가볍게 인사하고 스쳐 지나갔다. 시녀들이 꺅꺅 소리를
내며 에버하르트를 몰래 훔쳐봤다. 에버하르트는 멋진 척하며 어깨를 쭉 펴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어 눈을 가늘게 떴다.
“봤어, 레티시아?”
에버하르트가 풀 죽었다. 그런데 순간, 그의 분위기가 변했다. 전투 직전의 날카로움이 에버하르트의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이상을 눈치챈 레티시아가 시야를 넓게 했다. 무언가 거슬렸다.
“레티시아.”
“알아.”
“3 번 주요 호위 지점!”
“내부로 두 명 침입!”
쿵!
“아아악!”
후웅!
그녀가 휘두르는 검에서 예사롭지 않은 소리가 났다. 레티시아의 검격에 암살자들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흩어졌다.
암기 따위가 날아와도 귀신같이 알아채 쳐 내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했다. 황실 기사 특유의 탄탄한
기초도 빛을 발해,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 * *
황성이 왈칵 뒤집혔다. 타국의 왕족이 간밤에 암살 위협을 받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불의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2 황자 리카르디스가 황실 기사단의 협력을 받아 미리 호위 병력을 늘려 둔 덕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암살자를 잡아 낸 것도 하얀밤 기사단의 하급 기사 두 명이었으니, 리카르디스의 평가가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은 당연했다.
하카브 왕자는 제 안위가 달린 문제임에도 넉넉한 태도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일라베니아의 건국일을
모두가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가 아니던가. 그러니 모두가 기뻐할 만한 결과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짧게
언급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그가 강대국의 압력 때문에 속없이 구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날카롭게 갈린 무기가
검집에 들어가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완성되지 못한 검은 검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가 모든 일에 대비책을
세워 뒀음을 알 수 있었다.
암살자를 간밤에 보낼 정도로 하카브의 죽음을 간절히 원하던 자들도 몸을 웅크렸다. 그들이 건들고 있는 게
벌집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아챈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그걸 이제야 알아 처먹었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등신 같은 작자들이라고도 했다. 분명 인간이라면
그런 생각을 못할 것이니, 절지동물의 형상일 것이며, 그것도 머리가 없을 게 분명하다고 악담했다.
하카브는 자신이 머무는 곳을 찾은 리카르디스를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감격, 감동, 환희. 자신의
호위 인력을 빼서라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겁니까? 라고 묻는 듯한 눈이었다.
진정성 있게 떨리는 하카브의 목소리에 리카르디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안에서 들끓는 욕설이 행여나
빠져나올세라, 아주 꼭꼭.
하카브가 갖은 수작질로 로젤린을 흔들어 놓은 직후라 감정이 더욱 악화된 시점에서 하카브에게 감사 인사를 듣고
있으려니 절로 열이 뻗쳤다. 하카브가 일라베니아에서 나쁜 일을 당하면 안 된다는 것쯤이야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암살자들의 성공을 은근히 바라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카브는 사절단 이후 리카르디스를 줄곧 주시해 왔다. 깊게 파고들지 않아도,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단단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행동으로부터 고스란히 드러났다. 단순히 부하를 위하는 것치고는 과할 정도였다.
하카브의 미소가 짙어졌다. 로젤린도 로젤린이지만 이 남자가 흔들리는 모습도 보고 싶었는데. 조금은 아쉬웠다.
주머니 입구를 열어서 보니, 예상했던 대로 자신의 목걸이였다. 로젤린에게 줬던 청혼의 증표가 처참하게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하카브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흘렸다.
128 화.
“오, 이럴 수가.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황자. 주워 준 기사가
누구입니까?”
“레이몬드라면…….”
쾅!
“잇세리온.”
“예, 전하.”
“위험을 무릅쓰고 타국에 발을 들여 로젤린 경에게 접근했으나, 그 야망이 코앞에서 부서지다 못해 산산조각이 난
채로, 현재 로젤린 경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리카르디스 전하에게 그 부서진 야망을 건네받은 하카브가! 훨씬
더 상심하고 속이 쓰라린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전하! 부서진 목걸이를 건네는 전하의 미소가 얼마나
근사했는지, 저라면 얄미워서 아주 바닥을 굴렀을 겁니다!”
클로에는 분노에 제 몸을 맡기고 활활 불타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가만히 지켜보며 홍차를 저었다. 우유가 섞여
금세 탁해졌다. 각설탕을 네 개 넣을 무렵에는 리카르디스도 간신히 무언가를 집어던지지 않게 되었다.
“그래, 그 쓸모없는 인간들. 가만히나 있던가,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머저리 같은
작자들. 뭘 하나 해도 그런 식이겠지. 불쌍한 인생들이로군.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외딴곳에 홀로 쓸쓸하게
죽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평소보다 더 독기 어린 비난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별다른 감흥 없이 말을 내뱉었다가, 클로에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유순한
인상으로도 음흉함은 가려지지 않았다. 뭔가 기분이 싸했다.
“하지 마.”
싱긋 웃은 클로에가 가볍게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방을 나서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돌연 다시
리카르디스를 돌아보았다.
“아차.”
리카르디스가 찻잔을 초조하게 만지다가 그녀의 뒷말에 몸을 떨었다. 홍차가 흘러넘쳤다. 클로에와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딱 부딪쳤다. 눈매가 능글맞게 휘어져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두 손을 들었다. 귓가가 절로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건국일을 맞이한 무도회에 하얀색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황족, 또한 황족의 파트너뿐이었다. 애초 그녀의 드레스를 제작할 때 황족의 파트너가 되리란
사실을 감안했다는 것이었다.
“네에?”
“귀엽기도 하시지.”
* * *
헤사가 달리는 힘을 이용해 그대로 나무를 밟고 올랐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가뿐한 몸놀림이었다. 두세
걸음 만에 사람의 키보다 높이 올라간 소년이 나무에 쿵, 발을 굴렀다. 위로 자란 나뭇가지를 디딤돌 삼은
것이라, 그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향했다. 몸에 추를 달고 있는 듯 묵직한 공격과 함께였다. 자그마한 인영이
회전하며 공중에 날카롭게 검을 그었다.
로젤린은 발을 살짝 움직여 반걸음 물러서는 것만으로도 공격을 피해 냈다. 소년의 목검이 공중을 가르고 바닥에
박혔다. 헤사는 검을 그대로 손에서 놓아 버리고는 앞으로 굴렀다. 그리고 허리와 엉덩이가 바닥에 닿기 전,
어깨와 팔로 몸을 튕겨 내었다. 로젤린을 향한 발차기가 칼날처럼 예리했다.
턱, 로젤린이 매서운 발차기를 손으로 막아 냈다. 소년이 공중제비로 폴짝폴짝 물러났다. 구경꾼들은 감탄하는
소리를 차마 막지 못하고 흘려 버렸다. 네스터도 본 목적을 잊고 손뼉을 쳤다.
로젤린이 한층 더 밝아진 얼굴로 다가온 헤사의 머리를 살살 쓸어 주었다. 바람이 불며 소년의 머리를 더욱
흐트러트렸다. 헤사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머리카락과 로젤린의 손길이 간지러워 눈을 감았다.
[헤사, 좋은 아침입니다.]
하카브에게 이용당했던 이틀 뒤의 아침. 로젤린이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를 건네며 헤사를 맞이했다. 헤사는
문가에 가만히 서 있다 눈물을 흘렸다. 주적이자 타국의 왕족의 말에 혹해서 제 직속상관을 속이는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르고도, 소년은 어떤 벌도 받지 않았다. 로젤린은 물론이고 일라베니아 2 황자이자 하얀밤 기사단의
주인인 리카르디스에게도.
로젤린은 흔들렸던 모습을 완전히 떨쳐 내고서 무뚝뚝한 인사를 하고 있었다. 헤사가 눈물만 뚝뚝 흘리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기도 했다. 벅벅, 마치 창문을 닦아 내는 듯한 거친 손놀림이었지만 그게 너무나도
반가웠다.
129 화.
헤사의 실수는 하카브와 로젤린, 리카르디스와 리카르디스의 명령을 받은 르원, 잇세리온. 몇몇의 주요 인물들만
알고 있었다. 얘기가 퍼졌다고 가정했을 시, 혼란이 야기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헤사를 수습 기사로 계속 둘
생각이면 함구하는 것이 좋다며 리카르디스가 조언한 결과였다. 헤사는 언젠가 그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
헤사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로젤린도 마주 웃어 주었다. 오늘의 간식에 대해 얘기하던 헤사가 순식간에 낯빛을
바꿨다. 로젤린의 저 뒤에서 거대한 꽃다발을 끌어안고 달려오는 남자 때문이었다.
“로젤린 경.”
바다협곡의 네스터였다. 헤사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치켜뜨는 것으로 불만스러운 마음을 표현했다.
‘지긋지긋한 인간 같으니…….’
소년은 ‘상급 기사’가 얼마나 바쁜지 잘 알고 있었다. 거의 매일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로젤린을 찾아올
정도의 시간도 없을뿐더러, 다른 기사의 일정을 이렇게 세세하게 알 정도로 할 일이 없지 않다는 얘기였다.
“네스터 경.”
“대련 잘 보았습니다. 언제나 대단하십니다. 이 수습생도 나날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아주 훌륭한 기사로
성장하겠군요. 로젤린 경의 수습 기사가 되다니, 참 운 좋은 녀석입니다. 부러워…….”
이 사람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고 있잖아. 네스터가 하하 웃으며 헤사의 머리를 슥슥 쓸었다. 머리를
짓누를 듯한 거친 손놀림이었다.
“아, 그렇지.”
“있습니다.”
생을 기약해 보심이. 뒷말은 억지로 내뱉은 기침 소리와 섞였으나 네스터는 분위기상으로 대충 알아들었다.
네스터가 뭐라 말하기 전, 헤사는 그가 로젤린에게 내밀고 있던 꽃다발을 채 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태도라,
마치 네스터가 헤사에게 꽃다발을 바치고자 얼굴을 붉히고 있던 것처럼 되어 버렸다.
네스터는 제 빈손을 쳐다보며 이 어이없는 기분을 소년에게 피력하고자 했다. 헤사가 그의 눈빛을 읽고 태연하게
말했다.
“아, 실례했습니다. 네스터 경. 하지만 로젤린 경께서는 곧 호위 임무로 본성에 가셔야 하니, 제가 대신 잘
가져다 놓겠습니다.”
로젤린은 헤사가 언급한 제 파트너가 누구인지 열심히 유추하는 중이었다. 딱히 들은 기억은 없지만, 헤사가
있다고 했으니 있는 것이리라.
네스터는 파트너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전하입니다!”
소년이 소리쳤다. 그리고 멀리서 걸어오던 전하, 리카르디스는 깜짝 놀랐다. 헤사가 확정하듯 다시 한번 말했다.
“바로 그거야!”
리카르디스는 건국의 달을 맞이해 한층 더 화려해진 상태였다. 아름다운 예복, 귀걸이, 목걸이, 반지. 갖은
장신구와 더불어 본래 가지고 있던 잘난 얼굴까지.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아름다움에 모두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굉장히 매끄러운 연기를 펼쳤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깜박하며 헤사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헤사가 남몰래 웃었다.
은혜 갚을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와서 다행이었다.
* * *
큰뿔산양과 황금정원. 그 외에도 수많은 가문이 참석해 성이 북적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모르는 얼굴은
없었다. 경사스러운 날인 만큼 모두 웃는 얼굴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 오랜만이오. 건국의 달에는 처음인가. 건국의 달이라고 하니 하는 말입니다만, 이번에 하카브 왕자가 오지
않았습니까. 하는 식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주제가 무겁게 변했다. 예복을 입은 신부도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왕자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니, 움직임이 제한되는구만. 엘피디오 전하와는 자주 만나는 것 같긴
합디다.”
“굳이 따지자면 엘피디오 전하께서 하카브 왕자가 있는 성에 자주 드나드는 것이죠. 하카브는 그다지 그들의
동맹을 중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아요.”
하카브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1 황자 파에 속하는 귀족들과의 만남을 추진한다든가, 여기저기 다니며
분탕질을 친다든가 하는 행위가 일절 없었다는 얘기였다. 굵직한 행사에 얼굴을 비추긴 했으나 건국제에 참석한
타국의 귀족들이 으레 보이곤 하는 행보와 다름없었다.
적지에 발을 들일 정도의 거대한 음모나 목표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강한 마인, 로젤린에게 한번 접근하려
했다지마는, 그 이후로는 접촉하려는 시도도 없다고 하지 않나. 또한 그들로서는 일국의 후계자가 단순히
로젤린만을 위해 갖은 위험을 감수한다는 가정을 도무지 떠올려 낼 수 없었기에 의문은 계속해 커져 가는 중이었다.
대체 무얼 원하는 것일까.
표면적으로 발타가 마력을 귀하게 다루는 나라이긴 했으나, 마력은 단순히 강한 무기의 역할만을 맡고 있지는
않았다. 축복의 밤. 죽어 가는 땅 밑에 잠들어 있는 씨앗을 키워 꽃을 피워 내는 강력한 힘의 한 축이 아니던가.
만약 비밀을 알고 있다면 로젤린을 단순한 ‘강한 마인 한 명’이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나단은 퀭한 눈으로 초콜릿을 섭취했다. 당이 부족한 기분이었다. 클로에가 생긋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130 화.
“무운을 빕니다.”
피곤해 보이는 중년 남자들이 동시에 초콜릿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다들 당분에 목말라 하는 모습이었다.
큰뿔산양가의 하녀장이 급한 발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왔다.
하녀장의 무서운 눈빛에 남자들이 분주히 얼굴 근육을 단속했다. 웃겼는데. 확실히 신부 입에서 수의라는 단어는
문제가 있나? 웃겼는데.
똑똑. 열려 있음에도 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클로에는 고개를 돌려 예의 있는 방문자를 확인했다.
“클로에 양.”
“로젤린 경.”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로젤린의 손에는 하얗고 작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여기저기 흔하게 볼 수 있고,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잡초와 형, 동생 하는 정도의 취급을 받는 꽃이었다.
리쉬. 클로에가 웃음을 흘렸다. 언젠가 로젤린의 소문을 수집하고 다닐 때가 생각났다. 그녀가 동생 칼릭스와
같이 꿀을 쪽쪽 빨고 다녔던 그 꽃. 반가움에 손이 먼저 나갔다.
“리쉬네요. 고마워요.”
“맛있습니다.”
클로에는 웃음을 터트렸다. 맛있었구나. 그런데 자세히 보고 있으려니 줄기 하나하나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고
들쭉날쭉했다. 하얀 레이스로 감싸긴 했으나 어정쩡하고 리본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느 꽃집이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지?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클로에가 급하게 꽃다발을 쓰다듬자, 로젤린이 뿌듯해했다. 로젤린은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키며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을 설명했다. 레이스는 어머니가 보내 주신 드레스에서 뜯었다. 리본은 저번에 레이몬드가 준 마카롱
포장지에 있던 건데 예쁘다. 리쉬 꽃은 월장석 성 정원에서 잘라 왔다. 정원사 아저씨한테 혼났지만 제일 활짝
핀 걸로 골랐다. 리본 묶는 건 헤사가 가르쳐 줬다. 로젤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얘기했다.
“어머, 그래요?”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 * *
[여자 친구]
[남자 친구]
[신부] [신랑]
함께 발맞춰 걸어가겠다는 여러분의 다짐과 함께, 부부의 이름은 왼쪽, 오른쪽. 사이좋게, 나란히 놓이게 됩니다.
결혼하세요.
결혼은 인생의 중대한 행사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 하더라도, 그 순서를 되짚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신부와 신랑은 웨딩드레스와 정장을 입기 전, 하얀색의 예복을 먼저 입습니다. 호수에 해가 가장 빛나게 떠오를
때, 신부와 신랑은 호수에 들어갑니다. 이델라브힘의 축복 아래 사랑을 맹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도 배우자가 될 분이 자연 호수를 고집하는 경우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수영은 배워
두는 편이 좋겠군요.
신부와 신랑이 헤엄치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는 가정을 하고 다시 결혼식 얘기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호수에
들어갑니다. 호숫가의 얕은 부분도 좋고, 깊은 중앙도 좋습니다. 해가 가장 높이 떠오르고 이델라브힘의 광휘가
비출 때, 두 사람은 맹세합니다. 주고받아야 하는 언약문은 그다지 짧은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긴 편도
아니니, 꼭 외워 두도록 합시다.
* * *
“이 약 파는 것 같은 책자는 뭐지?”
“최근 인공 호수를 대여하는 방식으로 결혼식을 주도하는 어떤 상단의…… 상단주가 작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클로에 양이 결혼 준비하면서 받은 것인데 심심할 때 보면 아주 재밌다네요. 참고로 상단주는 세 번째 부인을
맞이했다는군요.”
큰뿔산양, 푸른등불, 바다협곡, 고래무덤, 가을안개. 여러 가문과 더불어 몇몇 황족들까지. 상단을 이끄는
클로에는 물론이거니와, 레이몬드가 워낙 발이 넓은 덕이었다. 친분이 있는 몇몇만 초대했음에도 월장석 성의
후원이 가득 찼다.
리카르디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식을 먹고 담소를 나누는 화기애애한 사람들, 그 한구석에 이질적인 분위기의
무리가 있었다.
우중충한 남자들이 한 테이블을 끼고 인상을 찌푸린 채, 카드를 뒤적이고 있었다. 파르딕트와 큰뿔산양 후작가의
후계자 아렌트, 몇몇 익숙한 고위 귀족들이 보였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갈색 머리의 낯선 여자였다.
그녀가 패를 펼치자마자 사방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시시덕거리며 금화를 쓸어 모았다. 누가 봐도
도박판이 아닌가.
돈이 다 떨어졌는지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리카르디스는 그 남자에게 가려져 있던, 그 누구보다
카드 게임을 즐기는 중인 4 황자이자 현 대신관 라헤안시를 발견했다.
여자는 담배 피우는 남자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금화들이 전부 그녀 앞에 쌓였다.
“투, 투 페어?”
“…….”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만의 세상이 형성된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131 화.
정오를 알리는 종이 공기를 진동시키며 오랫동안 귀에 머물렀다. 식이 시작할 때였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푸른 월계수 나무 한 그루가 심어진 호숫가로 발을 옮겼다. 라헤안시가 쪼르륵 뒤따라와 그에게 성전을
건넸다.
“잇세리온, 내 것을.”
“예, 전하.”
어디서 도박하고 온 손으로 과자 기름 묻어 있는 성전을 건네주고 있는 건지. 두 사람의 앞날에 흙탕물을 끼얹고
싶어 작정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라헤안시는 축 처져 하객들 사이로 돌아갔다.
“……?”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을 신랑과 신부는 어디 갔는지, 날카로운 인상을 더욱 구기고 있는 로젤린만 보였다.
햇살에 눈이 부셔 찌푸리고 있는 것은 알겠지만, 순간적으로 움찔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도
흠칫했을 정도였다.
로젤린의 손에는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그녀가 들러리 역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은
친분이 있는 어린아이들이 귀엽게 차려입고 신부와 신랑이 가는 앞길에 꽃을 뿌렸다. 때문에, 이렇게 건장한
데다가 무표정한 들러리는 하객들로서도 최초였다.
로젤린이 발걸음을 옮기며 꽃을 뿌렸다. 던지는 솜씨가 좋아 가벼운 꽃잎들이 사방으로 잘 흩어졌다. 그녀의 뒤로
새하얀 예복을 입은 신랑과 신부가 등장했다. 두 사람이 로젤린의 뒤를 따라 호수를 향해 걸었다.
부서지는 햇살이 찬란하게 두 사람을 축복했다. 신부의 볼이 과일처럼 싱그러웠다. 레이몬드는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표정을 일그러트리다가 종국에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8 년 짝사랑, 4 년 연애 기간의 결실이
눈앞에 보이니,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클로에는 아이고 못살아. 하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띠고 제 예비
남편을 바라보았다.
콧물 줄줄 흘리며 우는 레이몬드의 모습을 본 파르딕트는 바닥에 엎어져서 울듯이 웃었다. 나단이 참지 못하고
그의 등을 매섭게 때렸다.
“일라베니아 건국력 589 년, 달은 기울고 이델라브힘의 광휘가 떠올랐으니, 호수로 찾아온 두 사람을 축복할
때이다.”
클로에가 싱긋 웃었다.
“이델라브힘의 아들. 일라베니아의 아들. 큰뿔산양의 두 번째 아들. 위대한 안디 산맥의 절벽을 건너뛰는
용맹함을 지닌 갈색산양. 레이몬드 안디가 영원한 사랑을 맺고자 합니다.”
* * *
호수의 표면에는 태양과 리카르디스의 성력이 아른아른하게 겹치며 마치 두 개의 태양이 하나가 되는 듯한 광경이
그려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가 봐도 어딘가 엄숙하고 마음속에 깃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황금정원 자작은
위험할 정도로 울다가, 부인이 건네주는 초콜릿을 먹었다.
짧은 예식이 끝났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폭탄주를 제조해서 레이몬드에게 다가갔다. 짓궂은 표정의 기사들은 그에게 채 다가가기도
전에 새 신부에게 막혔다.
“보고 싶네요.”
“예?”
어라. 뭔가 좀 이상한데. 그렇게 생각했으나 파르딕트는 자신이 들고 온 폭탄주를 단숨에 들이켜야만 했다. 새
신부가 보고 싶다는데, 싫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독주가 많이 들어가 있었던 탓에, 파르딕트는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어느 구석에서 쓰러져 있어야 했다. 음식에 정신이 팔려 있던 로젤린이 밟고 지나가도
일어나지 못했다.
“레이몬드.”
“전하!”
디에즈가 단독으로 하카브와의 접선을 했다는 정보를 들은 순간부터, 레이몬드는 완벽하게 그를 적으로 인식했다.
수년 동안 그래 왔듯이 환한 미소를 보인 것은 실수에 가까운 일이었다. 등을 돌렸다 하더라도 오랜 친구를 보니
반가움이 앞섰다. 레이몬드는 이리저리 휩쓸리는 제 어수룩함이 씁쓸해, 어색하게 웃었다.
디에즈가 멀리서 하객들과 얘기를 나누는 클로에를 한번 보더니 다시 레이몬드에게 시선을 옮겼다.
디에즈는 두 손으로 레이몬드의 손을 꽉 붙잡았다. 손길이 따스했다. 금색 눈동자는 반짝거리고 미소는 녹아내릴
듯 부드러웠다. 오랜 친우의 경사를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레이몬드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입가가 어색하게 떨리는 것 같아 신경 쓰였다. 그는 우헤헤 소리를 내며 바보처럼 웃었다.
디에즈가 천사 같은 얼굴로 엉큼한 농담을 했다. 레이몬드는 그의 옆구리를 제 팔꿈치로 쿡 찌르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디에즈는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다며 황족 상해죄로 체포하겠다고 정색했다. 가엾게 여겨서 오늘 밤은
넘기게 해 준단다. 두 남자가 되지도 않는 농담을 하면서 낄낄거렸다.
레이몬드는 직감했다. 가까운 미래에 자신과 디에즈가 함께 있다면, 그 장소가 어디건 간에 필히 전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위기이리라고.
132 화.
사나운 눈초리들이 주위를 배회했다. 칼릭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입 크기의 음식을 집어 먹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붉은수레바퀴의 입에 들어가는 것은 진흙도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가장 끈질긴 눈빛을 보내는 젊은 귀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딱 마주쳤다. 바다협곡 백작의
삼남인가 사남인가 하는 자였다. 남자는 일순 움찔했으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제 편이라는 것을 깨닫고
가슴을 폈다.
칼릭스는 입안에 있는 음식을 씹으며,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납고 집요한 시선에 남자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끈기 없기는.’
칼릭스는 지나가던 시종의 트레이에서 잔을 집었다. 서늘한 온도가 느껴졌다. 유리잔 하나까지 차갑게 해 두는
세심함이 돋보였다. 물 자국 하나 없는 표면에 수많은 사람들이 비쳤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남자들의 얼굴이
차가운 온도에 녹아들었다. 칼릭스는 태연하게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월장석 성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감당해야 하는 문제들이었다. 큰뿔산양과 황금정원의 행사였으니, 당연히 하객의
98%는 2 황자 파였다. 중립도 간간이 보였으나 1 황자 파에 속하는 가문은 자신뿐이었다.
“우리 로젤린…….”
약속을 지킬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쯤은 대충 알 수 있었다. 칼릭스는 나오는 한숨을 와인과 함께 넘겼다.
라는 구구절절한 장문으로 수신인란이 꽉 차 있었다. 때마침 마카롱이 맞은편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던 터라,
청첩장의 내용을 읽어 줬더니 덜컥 자신도 가겠다는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 칼릭스는 경악 어린 표정으로 편지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싫습니다.]
라고 했지만 물론 통할 리 없었다.
왜 요즘따라 인간형으로 많이 다니십니까? 칼릭스의 물음에, 마카롱은 글쎄, 하고는 이상하게 웃었다. 눈썹은
찌푸려져 있고 입꼬리만 올라가 있어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인간 같은 표정이었다.
회상은 짧았다. 칼릭스는 잔 밑에 찰랑거리는 와인을 마저 삼켰다. 마카롱이 자신의 둥그런 뺨에 가느다란 손을
가져다 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가끔은 되지도 않는 수작질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어깨를 부딪친다든가, 와인을 뿌린다든가 하는 식의 상투적인
괴롭힘들. 하지만 대부분 시도에만 그쳤다.
‘호오…….’
마카롱이 속으로 감탄했다. 그 로젤린의 동생인 데다가 제 누이를 대하는 태도가 흐물흐물해서 맹탕인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딱딱하다. 마카롱은 음식을 집어 먹고는 손에 묻은 소스를 날름 핥았다.
칼릭스는 익숙하다는 듯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손을 닦았다.
“칼릭스. 나, 간다.”
“예. 예? 어디를!”
“성 구경.”
“새삼스럽게요? 매일 보시잖습니까.”
칼릭스는 곧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지만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뭐.”
“이거 들고 가세요.”
“대신 뭐든 치기 전에 이걸 보고 좀 참으세요.”
“그게 본론이겠구만.”
“…가세요…….”
“가로로도 가능하고 세로도 가능하다.”
“아, 좀 가시라고.”
* * *
마카롱은 길에서 벗어나 풀숲을 통해 이동했다. 독수리의 모습으로 황성을 전체적으로 둘러봤기에 구조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숲이 마카롱이 입은 드레스를 붙잡았다. 마카롱은 거친 손놀림으로 옷자락을 잡아챘다. 밑단의
레이스가 투둑 뜯겨 나갔다. 몇 걸음도 못가서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마카롱은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인간 모습으로 있는 이상 감내해야 하는 문제였다.
마카롱은 풀숲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그대로 계속 갔다가는 신전에 도착할 무렵에는 거지꼴이 되어 있으리라.
얼마 걷다 보니 정돈된 거리가 보였다. 마카롱은 무성하게 자란 잎사귀들을 헤치고 깔끔하게 정리된 길에 발을
디뎠다.
“…….”
젠장, 고양이 미미라면 서류를 찢어도 애교 한 번으로 넘길 수 있을 텐데. 기사단장 스타스는 인간들에게는 가차
없는 자였다. 마카롱은 어정쩡하게 풀숲에 걸쳐 두었던 한쪽 다리를 마저 넘어오게 했다.
그녀가 태연한 손놀림으로 드레스와 머리에 붙은 풀잎을 제거하는 중에도 스타스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 상당히 집요하다. 고양이 미미한테 뽀뽀해 달라고 끈덕지게 조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칼릭스 경과는?”
“그런데 왜 풀숲을…….”
“그랬군.”
“그랬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손을.”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실례.”
“미미라고 불러 주세요.”
스타스는 이 아가씨의 이름이 제 고양이와 똑같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대체 어떤 이상한 부모가 애완동물
내지는 어린아이의 인형 같은 이름을 딸에게 붙였는가에 대해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카롱은 호호 웃었다.
“설마요.”
농담이었나?
“어머니께서 지어 주셨죠.”
“음…….”
“대단히 귀엽지요?”
스타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스의 거대한 밤색 말이 투레질했다. 마카롱은 꺅, 하는 소리와
함께 스타스의 가슴에 바싹 붙었다. 스타스가 하하 웃으며 마카롱의 어깨를 도닥였다.
다그닥, 다그닥.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말발굽 소리가 이십 분 정도 울렸을 때였을까. 거대한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장엄한 하얀색 건물이 빛나고 있었다. 마카롱은 잠시 숨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황제의 방패이자, 수족. 권력의 근원이며, 권좌의 역사를 쌓아 온 모든 일의 시작점.
대신전이었다.
스타스는 친절하게도 자질구레한 수속까지 처리해 줬다. 일라베니아 전역에 위치한 평범한 신전과 달리 대신전은
평민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마카롱은 더럽게 치사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찌 되었건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반지를 가지고 있기도 했거니와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이 데려온 손님이니만큼 대신전의 신관도 그녀를 환영했다.
떠나는 스타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카롱은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딜 보아도 순수한 하얀색뿐.
공간은 저가 가진 크기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비어 보이고, 서늘했다.
눈을 천천히 깜박이던 여자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옆에 있는 수습 신관이 방문자의 달라진 분위기에 잠시
흠칫 몸을 떨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환대에 감사드려요.”
마카롱은 신관을 뒤따라 걸으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높은 천장, 거대한 기둥. 빼곡하게 새하얀 색으로
채워진 공간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박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울
뿐이었다.
익숙하다.
[칼릭스, 나 간다.]
[예. 예? 어디를!]
[성 구경.]
[새삼스럽게요? 매일 보시잖습니까.]
문득 칼릭스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눈썹을 일그러트리던 그의 얼굴. 인간 모습으로 처음이라? 그것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라도 있는지 묻는 듯했다. 마카롱은 피식 웃었다. 물었다면 ‘그렇다’고 기꺼이 대답해 줬을 것이다.
과거에도 종종 인간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가 있었으나 그때와 달랐다. 단순한 흉내 내기가 아닌, 잠자고
있던 세포가 하나하나 깨어나 감각을 채우는 듯했다. 살아 있는 인간을 먹은 적도 없건만.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그 몇 번의 의문 끝에 마카롱은 스스로 답을 찾아내었다.
제 이름을 도박왕 라헤라고 부르라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고위 귀족이 아닐까 생각했다. 도박왕 라헤를 따라왔던
두 명의 남자는 연패하는 그가 부끄러웠는지, 양산으로 가리며 도박왕 라헤의 모습을 외부로부터 차단하고자 했다.
[도박왕 라헤님.]
도박왕 라헤는 뒤를 돌아보고 아차 했다. 양산에 떡하니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심지어는 위아래 양옆, 네
개씩이나.
[아이고 답답하게 이 사람들아, 그걸 고대로 들고 오면 어떻게 하나! 신전에서 나왔다고 차라리 소리를
지르시게들!]
바로 이곳.
마카롱은 어린 수습 신관의 뒤를 따라갔다. 여기는 기도실, 이곳에는 이델라브힘의 동상이 있으며…… 소녀가
조잘조잘 얘기하는 내용은 의미 없이 마카롱을 스쳐 지나갔다. 마카롱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신전 여기저기를
눈에 담았다.
수습 신관은 대신전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그녀를 보고 남몰래 웃었다. 눈을 떼지
못하고, 놀라워한다. 하지만 그들이 놀라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황실의 성보다도
더욱 웅장하게 느껴질 것이다. 신전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수성까지 더해진 덕이었으나,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 못할 사실이었다.
뎅-
종이 울렸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종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웅장한 소리를 공간에 가득 퍼트렸다. 신전 내부를
울림통으로 삼아 종소리는 노래처럼 흘렀다. 수습 신관은 더욱 뿌듯해졌다. 대신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내부에서
종소리를 듣고 더욱 놀라고는 했다. 밖에서 듣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높은 곳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뚫려 있는 공간을 통해 대신전 내부로 들어오고, 바람 소리와 함께 동그란 공간을
웅웅 울렸다. 천상의 노랫소리가 이러할까 싶다며 다들 말하곤 했다. 마음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소리였다.
134 화.
“미레이미님?”
신관은 당황했다. 여자가 울고 있었다.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에서 차가운 눈물이 끝없이 떨어졌다. 눈썹은 잔뜩
일그러져 있고 입으로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방문자는 공간에 잔류한 소리를 눈으로 좇듯 넓은 공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턱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물기 젖은 눈동자에 아름다운 대신전의 풍경이 비쳤다.
“저, 정말.”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화난 아이가 문을 닫듯, 거칠게 짓눌렀다. 그 사이로 나오는 게 피가 아니라 눈물인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소녀는 허둥지둥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아름다운 소리네요.”
“꿈결에서 들은 것만 같은…….”
마카롱은 제 드레스 자락에 얼굴을 묻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눈물이 끝없이 그녀의 손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신관은 자신의 예상보다 더 감격스러워하는 방문자의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눈알만 도르륵 굴리던 신관은 얼마
후 자리에서 벗어났다. 대신전을 방문한 손님이 감동의 여운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소녀는 멀어지면서도 마카롱을 흘끗, 흘끗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
자세로 울고 있을 뿐이었다.
텅 빈 공간이 조용했다. 마카롱은 천천히 일어나 비척거리며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눈가에 덧칠해 놓았던 화장이
짙게 흘러내렸다.
쾅!
새하얀 벽을 강타한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여린 손등 위로 뼈가 날카롭게 서며, 핏줄이 불뚝불뚝 올라왔다.
종소리가 이명처럼 들러붙었다. 신전 내부를 가득 채우던 소리는 공간을 빠져나간 지 오래였으나, 마카롱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요란하게 울리는 중이었다. 뎅, 뎅, 뎅. 세 번의 종소리가 수없이, 끝없이, 꿈과 현실의
경계를 깨 버리기라도 하는 듯.
사나운 충동이 가득 차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오랜 꿈에서 도망쳤던 공간에 발을 들이니, 보다 뚜렷한 분노가
막연한 두려움을 짓눌렀다.
속에서 뜨겁고 날카로운 것들이 치밀어 올랐다. 몸 안의 근육 하나하나가 당장에라도 터질 듯 수축했다. 견고한
벽에 그녀의 손톱이 하나둘 박혔다. 툭, 투둑…… 벽에 거미줄처럼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마카롱은 꺾이는 복도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어린 수습 신관들이
기도 시간에 맞춰 이동하는 소리였다.
그녀의 손에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났다. 관자놀이와 목에 핏줄이 섰다. 눈빛은 흐릿해지며 기이한 안광이
떠올랐다. 하얀 피부는 점점 짙어지며 질겨지며, 두터워졌다. 손이 전부 짐승의 가죽으로 뒤덮였을 무렵에는
사람의 머리만 한 크기로 커져 있었다.
거칠게 호흡하는 마카롱의 입가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들과는 판이했다. 자세를
낮추고, 숨과 기척을 죽여야만 사냥의 성공률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제어가 되지 않았다. 마치
마수라도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마구 울렸다. 죽여, 죽여!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죽여 버려! 목소리가 익숙했다. 자신의
것이었다. 떨쳐 내 보려 머리를 흔들었지만, 머릿속, 손끝 발끝까지 가득 들어찬 저주 같은 언어들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옷매무새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톱에 치맛자락이 걸렸다. 둔탁한 송곳니처럼
생긴 손톱은 천 조각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옷자락 안쪽에 숨겨 놓았던 주머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땡그랑, 땡그랑! 수십 개의 금화가 쏟아졌다. 도박왕 라헤와 큰뿔돼지 장남으로부터 얻어 낸 금화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며 영롱한 소리를 냈다. 햇빛에 반사되는 금화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반짝 반짝, 벽을 장식하는
빛무리가 찬란하게 공간을 메웠다.
탁.
그때, 금화가 떨어지는 맑고 높은 소리를 뚫고 둔탁한 음이 들려왔다. 마카롱은 멍하니 제 발치를 바라보았다.
수수한 은색 반지가 떨어져 있었다.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문양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반지였다.
마카롱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짐승의 것과 흡사했던 손은 어느새 다시 그녀의 외관에 어울리는
생김새가 되어 있었다. 평범한 인간의 피부에 닿는 금속의 감촉이 차가웠다. 그 온도가 마카롱을 서서히 식혔다.
“아, 진짜?”
“인생 역전!”
금화를 발견한 어린아이들이 기쁨의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분실물이지만 한 개 정도는 어떻게 슬쩍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아이들이 까르륵 웃었다. 아이들이 웃는다. 그리운 소리였다.
그렇게 한참 지났을 즈음, 어둡던 시야에 눈이 부실 정도의 환한 빛이 번졌다. 마카롱은 그때야 멈춰섰다.
그녀는 쏟아지는 햇빛을 보고서야 자신이 신전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복도를 달렸던 과정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햇살에 더욱 하얗게 빛나는 백색의 신전이…….
흰색의 성들이 하늘 높게 솟아 있고,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리고는 했던. 새가 지저귀며 영광을 노래하고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아름다운 이곳.
운명이다. 운명이었다.
* * *
로젤린은 제 몸이 침대에 쑥 빨려 든다고 생각했다. 팔다리가 무거운 가운데 침대가 말랑말랑하고 산뜻하게 몸을
받쳐 줬다. 피곤함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피로한 때야말로 느낄 수 있는 아늑함이었다.
“마카롱…….”
“추웠는데…….”
“이제 따뜻해.”
로젤린이 히죽 웃었다. 따뜻하다. 아늑하다. 코끝에는 꽃향기가, 시트의 햇살 냄새가. 마카롱의 풀잎 냄새가
난다. 그것들이 둥실둥실, 자신을 좋은 꿈으로 데려다줄 것 같았다.
16
“끄에엑!”
밖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리든 말든 리카르디스는 차분한 손길로 이불을 정돈했다. 무슨 소란이건 간에
로젤린의 선에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암살자들에게는 자비가 없는 기사였다.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혼자서 이러고 있으니 좀 미친 사람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저 연분홍색 개털은!’
135 화.
“히이익!”
남자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죽음의 문턱 어딘가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리카르디스의 말을 통해
깨닫게 된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부루퉁한 표정을 했다. 딱히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잘 아실 만한 분께서…….”
스타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면이 팔리는 듯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속된 말로 쪽팔렸다. 곧 두 명의 신관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들은 면구스러워 하며 고개를 연신
숙였다.
보호자로 호출된 신관들은 저희 대신관님께서…… 로 시작하는 구구절절한 문구와 익숙한 사죄의 표정으로
스타스의 기분을 빠르게 풀었다. 능숙한 솜씨였다. 어떻게 단련되었는지 알 것 같았던 터라, 리카르디스는
측은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라헤안시는 로젤린의 안내를 받아 월장석 성에 정식으로 발을 들였다. 로젤린은 뒤에서 쏟아지는 끈질긴 시선에
흘끗 돌아보았다. 눈높이가 비슷해서 그런지 눈이 딱 맞았다. 라헤안시는 싱글벙글 웃으며 로젤린을 보고 있었다.
“예.”
라헤안시는 조금 당황했다. 보통은 ‘그’, ‘유명한’ 따위의 수식어가 제 이름과 붙어 있으면 “아닙니다.
헛된 위명이지요.”와 같은 겸손한 반응을 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겸손을 기대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지만, 너무
당당한 대답이었던 터라 라헤안시도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녀는 로젤린도 맞고 유명한 것도
맞다.
“그렇습니다.”
라헤안시가 껄껄 웃었다. 딱딱하고 정석적인 기사의 태도를 고수하면서도 가끔씩 묘한 면이 보인다. 재밌는
기사였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리카르디스의 방 앞이었다. 소란에 깨어난 잇세리온이 퀭한 눈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머리가 눌려 엉망이었다.
로젤린이 잇세리온에게 “머리 모양이 이상합니다.”라고 지적했다. 잇세리온은 힘없이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로젤린은 그의 머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어쩐지 새 같아 보인다고도 했다. 잇세리온은 알겠으니 제발
들어가라며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수면 시간이 짧아 화낼 힘도 없는 듯 보였다. 라헤안시는 소동의 주범으로서
제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을 느꼈다.
콧날은 여전히 우뚝하고 얼굴선은 여전히 날렵하다. 서류를 읽는 눈이 잠에 조금 잠겨 있었으나 도리어 그것이
나른한 분위기를 형성해 평소와 다른 아름다움을 비출 뿐이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새벽빛이 방 안을
어슴푸레하게 떠도는 가운데 남자의 은발이 반짝였다. 참 그림 같은 광경이다. 라헤안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
이복형의 눈부신 자태를 감상했다.
“아, 형!”
“그래서, 이 새벽부터.”
“찾아올 아주 급한 이유가.”
그의 턱 근육이 움찔거렸다.
“있겠지. 라헤안시.”
“그러엄!”
“앉아.”
“신관이 살해당했어.”
별일이었다.
“황실 내의 숲에서 시체로 발견됐는데 짐승의 소행이라 하더라고. 크게 번질 일은 아니야. 오늘의 보고 끝!”
별일이라면 별일이고 별일이 아니라면 아니었다. 신관이 죽은 일이야 중대사일 수 있지만, 굳이 이 새벽에 월장석
성까지 와서 얘기할 건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팔짱을 끼고 빤히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라헤안시가 히죽 웃었다.
“하여간 눈치 빠르다니깐.”
“빨리 말해.”
리카르디스는 찻잔을 느릿하게 만지며 그가 말했던 내용을 반추했다. 신관이 죽었다. 황실 안의 숲에서
발견되었다. 짐승의 소행이다. 확실히 미심쩍었다. 어지간하면 대신전 안에서만 생활하는 자가 황실 숲까지 간
것도 이상하고, 그곳에 사람을 해칠 만한 맹수가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의 말대로 당연한 일이었다. 건국의 달에 들어선 이때. 심지어는 발타의 왕자와 왕녀가 일라베니아에 있는 이때.
신관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단순한 한 사람의 불행을 넘어서, 일라베니아의 명성에 금을 가게 할 수도 있었다.
일라베니아가 단순한 대륙의 패왕이 아닌, 신의 영광을 업고 있는 신성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신관이 온전히 칼로 난도질당했다 하더라도, 짐승의 소행이다. 안타까운 사고였다. 그렇게 공표할
판이니, 짐승인지 사람인지 범인의 모습이 흐릿하다면, 일라베니아가 내릴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가.”
136 화.
눈앞에는 역대 최고의 신성력을 지닌, 어떤 위험한 전쟁에서도 승리만을 이끄셨다는, 만민을 두루 살피시는,
눈부신 아름다움에 삼천 명을 실명시킨 전적이 있다는! 그 설원의 월계수, 2 황자 리카르디스 전하가 계시지
않은가.
두 시간 정도를 돌아다닌 후, 단장은 고객의 요구에 응하는 적합한 장소를 찾았다. 리카르디스의 “좋군.” 한
마디에 단장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리카르디스는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물리고 로젤린과 장소를 둘러보았다. 따라오던 마카롱이 나뭇가지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지나온 장소를 반추했다. 나무, 돌, 지형, 수풀의 모양. 하나하나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네.”
“위험한 것이 그대를 쫓고 있다는 소식을 칼릭스 경에게 들었다. 내가 그자라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무기를 들고 다니는 것이 당연한 공간이니 말이야. 게다가 언제나 동료들과 함께 있던 그대가 혼자 떨어져
행동하는 만큼, 내일은 그자에게 좋은 기회가 될 테지.”
“만약이라는 거지. 누군지 모르지 않나. 그러니 내일 숲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그대와 얼마나 친밀했건, 그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건. 절대 믿어서는 안 돼.”
“예…….”
“사건이 일어나리란 걸 예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상황의 우위를 점하기는 힘들지. 그게 장소를 정한 이유다.”
“지금 당장의 위험은 피할 수도 있다. 경이 사냥 대회에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니. 하지만 그러면 문제는 더
심각해지겠지. 얼굴도, 정체도 모르는 자가 언제 어디서 그대를 노릴지 모르게 되지 않겠나. 일라베니아의
정세는 현재 몹시나 불안하고, 지금보다 상황은 점점 나빠질 가능성이 많아. 위험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으려는
이유다. 최악을 피해야 하기에 차악을 선택해야만 해.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로젤린, 경이지만…… 미끼도
경이다. 위험이 없을 수 없어.”
“괜찮습니다.”
“마카롱 경.”
“그대가 로젤린을 계속 따라다닌다면 그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황실에 있었던 만큼,
로젤린을 따라다니는 독수리는 저와 같은 존재라고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로젤린 경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이번 사냥 대회에서 그자의 꼬리라도 잡아야 해. 그러니 로젤린이 혼자 다닌다는 점이 내일의 일에 전제되어야
한다.”
“상황은 최악을 상정해야 한다. 상대는 과거의 로젤린을 한번 죽였던 사람. 그대 또한 그자의 능력을 모르지
않나. 그대들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자의 능력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한계치까지 올린 것뿐이다.”
로젤린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리카르디스와 마카롱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대화가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전하는 왜 마카롱이 말하는데 놀라지 않는 거지? 마카롱은 정체가 들켰는데 왜 저렇게
태연해? 어, 어…….
“로젤린 경.”
“예! 로젤린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자도 경의 뒤를 따르며 별다르게 마력을 운용하지는 못하겠군. 그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끼고서 곰곰이 고민했다. 물론 내일 반드시 일이 일어나리란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 또한 없었다. 무슨 일이든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것을 대비해야만 했다. 때문에
위험인물이 로젤린을 뒤따른다는 가정 아래 계획은 세워졌다.
로젤린은 내일, 사냥 대회가 시작하면 이곳으로 온다. 동족이라는 독수리가 보이지 않음에 의문을 가지고 의심할
수는 있으나, 그녀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리카르디스가 용병단 ‘올가미’에게
한 의뢰는 모두 두 가지였다.
‘조건에 부합하는 장소를 찾아낼 것’, ‘사냥 대회가 시작되면 이 장소로 오는 길목 길목에 포진해 있을 것.’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해도 일반적인 인간보다 감각이 훨씬 예민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러니 뒤를
쫓아서는 안 된다. 그저 사냥 대회의 진행을 위해 산 여기저기 퍼져 있는 용병들 중 하나로 보이게끔 한다.
그 사이에 마카롱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올가미’ 용병단의 단장과 얘기해 두었다. 그들과 함께
신입 용병 단원인 척 숲속에서 대기한다. 마카롱은 기다리다, 용병 단원들로부터 누군가가 로젤린을 쫓아갔다는
정보를 듣고 움직인다.
하지만 단순히 로젤린이라는 유명 인사와 대화하고 싶은 사람일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마카롱이 움직이는 때는 마력을 느낀 후여야만 한다. 마력을 사용한 것이 추적자이든 로젤린이든 간에 그만큼
상황은 위험하다는 뜻일 테니.
인간으로 변한다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전하. 마카롱은 평범한 독수리입니다.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따위를 말하고 싶었던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가 다정하게 웃으며 로젤린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읍, 어버버……. 당혹스러워하는 로젤린과 달리
마카롱은 코웃음만 지었다.
137 화.
“믿어?”
“믿는다.”
“손을 빌려주겠어.”
“감사를 표한다.”
“그 또한, 가 봐야 알 문제겠지만.”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죽었음을 안다! 그것은 지금의 자신이 과거 ‘로젤린’과 완벽한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는 말이었다. 마카롱에 대한 다양한 정보는 사실 그녀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마력을 사용하고,
변이가 가능하고, 무엇이건 간에! 들켰다. 들통 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젤린, 그녀는 자신이 굉장히 치밀하게 행동했노라 자부했다. 그는 알 도리도 방법도
없었으리라. 대체 어떻게? 언제부터? 혼란스러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로젤린은 뒷걸음질 쳤다. 생각해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본능에 가까웠다. 이 자리에서 도망을 쳐야만 할 것
같은, 벗어나고 싶은 그런 느낌에 발이 먼저 슬금슬금 움직였다. 리카르디스도 그녀의 수상한 기색을 눈치챘다.
눈으로 재빠르게 도주 경로를 훑는데, 모르는 게 이상했다. 리카르디스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쫙 피며
만류했다.
“로젤린!”
사실상 그녀가 마음을 먹는다면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리카르디스도 그녀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세 걸음,
눈치 보며 물러서던 로젤린이 기세를 확 바꿔 뒤돌아 도망쳤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드러난 숲. 몸을 숨길 곳이
별로 없다 하더라도 빠른 속도로 내달리니 벌써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기함하며 그녀를 쫓았다.
리카르디스는 언제나 암살 위협을 달고 살았던 몸이라 상급 기사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받고는 했다. 최선을 다해
도망치는 로젤린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쫓아갈 수 있는 배경에는 그의 체력과 순발력, 운동 능력이 고루고루
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체력, 순발력, 운동 능력이 죄 인간의 기준을 훌쩍 넘어선 이가 상대이다 보니, 한계가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거친 숲을 내달리는 로젤린은 실로 한 마리의 야생동물 같았다. 이대로는 그녀와 대화는 고사하고
한마디 꺼내는 것조차 힘들 것 같았다.
“윽!”
“전하!”
“시, 신관을!”
리카르디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성의하게 말했다. 모로 보나 거짓말이었지만 로젤린은 의심의 눈빛을 지우고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두 손으로 더럭 잡았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마음이?”
“확인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마음이 아픈 건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 거지? 리카르디스의 의문은 곧 풀렸다. 로젤린이 두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춘 후, 그의 가슴 왼쪽에 귀를 대었다. 리카르디스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평균 심장박동수를 확인하는 겁니다. 제가 헤아리는 시간은 시계와 0.5 초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기 때문에,
급한 대로. 말하지 마시고 가만히 있어 주십시오.”
그런 재주도 있었단 말이지. 하여간 여러모로 대단했다. 보통은 손목에 손을 대고 확인하겠지만, 거기까지는
배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얌전히 있었다.
“많이 아프십니까?”
“죽을 것 같지만 죽지는 않으니 걱정 말아. 그저 심각하게 연약해서 세심한 주의와 관심, 많은 사랑을 필요로 할
뿐이다. 외로우면 남몰래 울고는 하지. 그런데 그런 날 두고 도망쳐? 호위 기사가 호위 대상을 놓고 도망쳐?
내가 숲 어딘가에서 쓰러져서 쓸쓸하게 혼자 죽건 말건 나 몰라라 하면서?”
“아, 아니 저는 그게 아니라…….”
로젤린이 뾰족한 것으로 찔린 듯한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눈치를 봤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도망가는
중이었다는 사실과 왜 도망을 가려 했는지에 대해 모두 떠올린 기색이었다.
“그…… 전하께서…….”
“알고 있지.”
단호한 대답에 로젤린은 덜컥 겁을 먹었다. 그녀는 깊고 황량한 숲을 떠돌 시절, 자신이 마주쳤던 인간들이 보인
반응을 기억하고 있었다. 괴물, 귀신! 비명을 지르고 도망쳤다. 코앞에 둔 죽음보다 자신을 두려워했다.
로젤린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알고 있지’라고 대답을 내뱉은 입술에서 시선을 올려 리카르디스를 조심스레 살폈다. 침착하게
감정을 가다듬은 남자의 표정은 평소보다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하고 있으나
그것이 도리어 두려웠다.
138 화.
리카르디스에게 비치는 제 모습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한순간에 시간을 돌아가, 형태 없이 그림자처럼 어둠에
스며들던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로젤린은 급하게 시선을 그의 발치로 떨구었다. 리카르디스가 자신을 혐오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상상만 해도
몸이 떨려 왔다. 손끝이 딱딱하게 굳더니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로젤린.”
하, 한숨을 내쉬는 남자의 행동에 로젤린은 눈물이 울컥 나왔다. 그녀를 보던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로젤린이 본능적으로 몸을 물렸으나 그의 손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로젤린 에스터.”
뭔가 화를 꾹 누르는 목소리였다.
“예…….”
“내가 왜 그대에게, 내가 그런…… 정보들을 알고 있노라 얘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이 사람이 정말.”
“내가 그대의 비밀을 알고 있다 알리지 않았던 것은, 불필요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비밀은 중대했고, 그 중대한
건에 대해 그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는 전혀 몰랐어. 그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조차 하지 못해. 물론
좋게 흘러갈 수도 있지. 그러나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이것이 그대의 치부라면? 그대가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었다면?”
“로젤린.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모든 상황을…… 최악을 상정한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불필요하게
그대를 상처 입히고 휘두르는 일이 될까 봐. 지금처럼.”
로젤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할 줄 몰라 말하지 않았다?
어떤 일에 있어 상대방의 입장에만 신경을 기울이는 그 행위가, 사납고 따가울 리 없었다. 부드럽고 따스했다.
로젤린은 그의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한 번 더 확인받고 싶었다. 불안함에 꼬인 실타래는 이미
슬금슬금 풀려, 종국에는 완전히 풀어질 것을 알면서도 한 번 더.
“제가 왜 상처 입지 않기 바라십니까?”
“당연한 걸 묻고 그래.”
남자가 씩 웃고 대답했다.
리카르디스는 도주로를 훑던 그녀의 눈빛, 필사적인 달음박질, 흔들리는 시선에서 그녀가 가진 불안의 크기를 알
수 있었다. 꽝꽝 얼어 있고 꾹꾹 뭉쳐 있는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건만. 자신의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에 로젤린은 쌓아 뒀던 불안한 감정들을 모두 해소한 듯 보였다.
* * *
“예.”
“아쉬운걸, 한번 보고 싶었는데.”
리카르디스는 잠시간의 만남으로도, 마카롱의 성격을 많이 파악했다. 적의가 넘쳐흘렀다. 그것은 다년간 숱하게
느꼈던 살의는 아니었으나, 꼬장꼬장 늙은 귀족들이 그를 바라볼 때의 시선과 비슷하기는 했다. 아니꼬워,
죽겠다. 라는 표정이었다.
어찌 되었건 호의적인 감정은 전혀 아니었기에, 그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는 마카롱의 모습이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로젤린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지 시무룩한 기색을 띠었다.
한참 말없이 있던 그녀가 갑자기 소매를 급하게 걷었다. 로젤린의 하얀 손에 힘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헉, 숨을 삼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그녀의 피부가 점점 짙어지고 질겨졌다. 가죽이 뒤덮이더니
다시 그 위를 단단한 비닐이 덮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합쳐지며 네 개의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변했다.
“이거 아주 멋있군!”
그래서 검은달 놈들의 시체가 다들 그 모양이었던 거군.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검고
거대한 손을 만지작거렸다. 차갑고 단단한 비늘, 날카로운 손톱. 보다 보니 윤기가 잘잘 흐르는 게 아주
멋스러웠다. 집중해서 만지고 있자 로젤린이 신나서 눈 색도 바꿨다가, 동공도 맹수의 것처럼 길게 바꿨다가,
키를 조금 키웠다가, 줄였다가. 얼굴 골격도 조금 바꿔 가며 열심히 자랑했다.
“정말…… 굉장해.”
“로젤린.”
“예.”
“음…… 그대는, 예전 로젤린 경의 기억을 일부이긴 하지만 가지고 있는 듯한데, 내 추측이 맞나?”
“예, 시간이 갈수록 로젤린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고는 합니다. 전하께서 저에게 막 성질냈던 것도 압니다.”
“그건, 미안하지만…… 아니, 나는 그대에게 성질을 내지 않았어! 그녀에게 냈었지! 물론, 그것도…… 잘한
것은 아니야. 미안하게 되었어. 아무튼!”
“로젤린이 그대 안에 얼마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모든 기억이 떠오르면…… 어떻게 되나. 그러니까, 지금의
그대는 음…… 없어지는 건가?”
“제가 케이크라면.”
굉장한 도입부였다.
“제가 케이크라면, 로젤린이 케이크의 몇 조각을 차지하고, 제가 그 나머지를 차지하는 식이 아니고, 밀가루에
버터와 우유, 달걀을 더하고 이스트도 넣은 후 오븐에서 구워 내고 생크림을 바르고 제철 과일을 올린 상태가
저입니다. 원료가 그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밀가루가 케이크와 동일한 존재이지는 않으니, 케이크는 케이크,
그저 주된 재료가 밀가루일 뿐입니다. 그런 느낌인데,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모든 상황에 대응하는 그대의 사고는 그대의 것이긴 하나, 그녀의 생각과 기억에 기반한다는 것이겠군.”
“그러면 지금의 온전한 그대에게 묻건대. 로젤린 경의 마지막은. 그녀의 마지막과 생각은 어떠했나?”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로젤린의 마지막?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갔다.
139 화.
“저는 인간입니다.”
“아무튼, 나는 지금 눈앞의 그대를 케이크의 재료인 밀가루라고, 딱 지금만 그렇게 그대를 생각하겠다.”
“예.”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예, 전하.”
그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괴롭지는 않지만, 안정적으로 조여 오는 악력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로젤린은
넋 빼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국의 황자. 리카르디스가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무 이상한
광경이었다.
“그래도 된다.”
저 멀리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진 두
사람을 찾는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로젤린은 웃으며 그의 곁에 섰다.
* * *
날이 밝았다. 비어 있던 공간에 사람들이 채워지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했다. 여러 황족들과 귀족들, 타국의
손님들. 기사단과 병사, 하인들. 넓은 산이 터져 나갈 정도로 복작복작했다.
몇몇 귀족들은 몇 개월 전, 검은달의 암살자들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침투했던 그때를 잠깐 상기했다. 위치,
장소, 시기. 연관성을 가진 요소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저 ‘사냥 대회’라는 이름에 막연히 불안감을 가지게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때의 사건이 일어났던 국경 지대가 아니었다. 무려 대륙의 아버지. 일라베니아의 수도 티가드가
아니던가. 불길한 마의 힘을 믿고 설치는 자들이 함부로 발을 들일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발타와 거리가 먼
만큼이나 다들 안심할 수 있었다.
지나가던 귀족 무리가 리카르디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카르디스는 급하게 잇세리온과 마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사람 참!”
황실의 숲속. 신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사건이 떠올랐다. 위험한 것이 가까이서 도사리는 가운데 아직 정체도
모른다니. 로젤린의 힘, 마카롱의 존재. 자신의 성력까지. 어지간하면 큰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상대방이 베일에 가려져 있으니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날카롭게 주위를 훑다가 로젤린을 발견했다. 그녀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나무에 어깨 한쪽을
기대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햇살의 나른함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의식도 못 하고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하얀밤 기사단에서는 로젤린과 슈텐, 클로드가 대표로 사냥 대회에 출전했다. 저 멀리 클로드와 슈텐은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하느라 바쁜데 그녀만 태평했다. 대신 손이 남는 단원들이 로젤린의 검 상태를 확인하고,
화살도 확인하고, 수통이랑 비상식량을 준비했다. 레이몬드가 로젤린의 허리띠에 보조 가방을 단단하게 매는 사이,
네스터가 로젤린의 군마 ‘초콜릿’의 등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
“맛있나?”
로젤린이 눈을 반짝 떴다. 그녀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얼굴에 띠고는 육포를 하나 꺼내서 리카르디스에게
들이밀었다. 리카르디스는 손으로 건네받지 않고 곧바로 입으로 육포를 잡아챘다. 쫀득하고, 부드럽고, 적당히
짭짤하고 맛있었다. 보조 식량으로 배분되는 육포보다 상등품인 듯했다.
“맛있는걸.”
“…….”
“금식이 원칙인 것은 주의가 흐트러지기 때문이 아닙니까, 부단장님? 저는 먹으면서도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 * *
한쪽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는 눈빛에 아니꼬워 죽겠다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가 만약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리카르디스는 이 잿빛 머리의 남자가 마카롱이라는 사실을 분명 알아챘으리라 생각했다.
“별로 안 친한 사람들은 쥬쥬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렇게 불러 주시죠.”
“……친한 사람들은?”
140 화.
“일어서라.”
“가암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목소리 같지 않았다. 잇세리온은 뒷목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고, 주위의 호위들도 로젤린을 제외하고는
눈빛이 매서워져 있었다.
“안됩니다, 전하.”
로젤린에 대한 정체는 하얀밤 기사단 내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강한 마인. 세간에 알려진 것과 동일했다. ‘
그녀의 뒤를 위험한 자가 쫓고 있다.’, ‘그를 대비하기 위해 부른 사람이다.’쯤으로 마카롱을 알고 있기에,
경계가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되, 될 것 같은데.”
로젤린이 소심하게 의견을 냈지만 묻혔다.
스타스는 가만히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타스는 경례하고 단원을 이끌고 막사를
나섰다. 사람들이 없어지자 마카롱과 로젤린이 동시에 바깥을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잘은 몰라도 사람들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판단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충분히 물러난 것인지 두 사람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곧 마카롱은 한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실은 불량한 자세로 팔짱을 꼈다.
“보통의 평민이나 용병은 황자를 독대한다고 찾아오지 않으니 그대를 수상쩍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
어쨌거나. 인상적인 첫 만남이었다. 쥬렌즈.”
“확실하게 익혔다.”
말이 짧아졌다.
“어떤 최악이 올 줄 알아야 준비를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전하는 지금. 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그렇게 여기고 그에 맞춰 대비를 한 거겠지.”
“따지자면, 그러하다.”
“꼴을 보아하니 칼릭스랑 얘기 좀 했겠구나 싶고, 그놈이 먼저 얘기할 리는 없으니 그쪽에서 어느 정도 가설을
세우고 애를 탈탈 턴 모양인데…….”
리카르디스는 잠깐 머뭇거렸다. 어떻게 우리의 정체를 알았느냐, 우리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그게 궁금한 게
아니었던가? 저 존재들을 아우르는, 그들을 관통하는? 생물학적 정보가 아닌?
쓸데없이 솔직했다. 이것도 종족의 특성인가? 어이가 없어진 리카르디스는 힘없이 대답했다. 시비 걸고
싶었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래.”
* * *
황제 라이노가 사냥 대회를 맞이해 연설했다. 다들 바보같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선수들의 출전 준비가 끝났다.
리카르디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은 화창하고 따스한 날 덕분인지 평소보다 더 나른해
보였고, 그 태도는 전투태세와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둘 생각이 전혀,
조금도, 생각에도, 꿈에도 없는 듯했다.
무투 대회에 이어 사냥 대회까지 석권하면 그녀의 이름이야 드높여지겠지만, 다소 귀찮은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황제의 질투라던가. 낯이 화끈해져서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할 말이지만, 실제로 가능성이
농후했다.
때문에 사냥 대회의 1 등은 티 나지 않게 얼음창 기사단에 넘기기로 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치지 말 것.”
“삼 개월 동안.”
“네. 반드시!”
“그리고 절대로…….”
“전하.”
리카르디스는 좀 놀랐다. 발타의 사절단이 처음 도착한 날 이후로 보이지 않기에, 솔직히 죽었거나 어디 한구석
잘못됐을 줄 알았는데, 멀쩡해 보였다.
“억.”
“어머나.”
상황이 불쾌할 법도 한데, 간제는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연신 싱글거렸다. 로젤린도 고개를 숙여 간제의 볼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경쾌했다.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손으로 각자의 입을 가렸다. 이거 왠지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인 것 같은데…….
“발타의 세 번째 딸을 뵙습니다.”
간제는 코앞에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손은 여전히 로젤린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141 화.
간제가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로젤린이 저지른 일은 무례하다 걸고넘어질 수 있었으나, 간제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누구에게 키스하든지 인사를 하겠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되었다는 태도였다.
“예.”
“어허허험!”
간제가 빙그레 웃으며 로젤린을 꼭 껴안았다. 로젤린도 엉거주춤하게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귓가에 숨소리가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거리에 로젤린과 간제는 서로 눈을 맞췄다. 간제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곧 로젤린에게서
떨어진 간제가 리카르디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전하, 저에게 배정된 막사가 글쎄, 병장기를 모아 두는 곳 바로 옆이지 뭡니까! 우당탕 쿠당탕 아주 시끄러워
죽겠습니다.”
“세상에, 참 자상하십니다.”
리카르디스는 간제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사냥 대회를 위해 모인 사람들의 이목이
그들을 향해 쏠렸다. 정확히는 간제와 간제의 호위 전사들을 향하는 것이었다. 구릿빛 피부, 검은 머리카락,
기묘하게 휘어 있는 무기의 형태. 하나하나가 일라베니아인에게는 위협적이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줄지은 막사마다 부지런해지기 시작했다. 늘어져 있던 기사들이 눈빛을 달리하고 탈출로를 점검했다. 숲에서
술래잡기하던 라헤안시를 잡아와 다들 제 막사로 데려가고자 했다. 웃고 즐기던 것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맑은 웅덩이에 떨어진 미꾸라지 한 마리. 간제는 그 모습을 쭉 둘러보며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기가 차서 허, 숨을 내뱉었다. 하카브도 없는 이 자리에 왜 나타났나 했더니.
간제는 자기 자신과 발타인들을 ‘사냥 대회’라는 곳에 떨어트려, 그때의 상황을 상기시켰다. 검은달의 암살
부대가 일라베니아의 땅을 침범했던, 그날.
그러니 이것은 경고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내가 이곳에 있으며, 내 오라비인 하카브 왕자 또한 일라베니아의
중심부에 있다. 검은달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있으니. 경계하라, 조심하라.
단순히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리카르디스는 어쩐지 간제가 일라베니아
측을 일깨우기 위해 이 장소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뵈어 참 좋군요.”
* * *
부우우, 사냥 대회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수십 필의 말이 한순간에 내달렸다. 로젤린의 뒷모습이
숲속에 푹 파묻혔다. 검은 머리카락이 한 올도 보이지 않게 되자,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막사로 돌아갔다.
사냥 대회는 총 여섯 시간. 기사들이 돌아오기까지는 모두 자신에게 배당된 막사에 쉬거나, 연회장을 통째로
옮겨온 것 같은 저 밖에서,
“하하하!”
“호호호!”
저렇게 또 웃고 있어야 했다. 리카르디스는 당연히 전자를 택했다. 신경 쓸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바보처럼 웃을 여력 따위는 없었다.
밖에서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던 간제가 막사로 들어가자 또 흥겹게 즐기는 소리가 가득해졌다. 물론 경계야
늦추지는 않겠으나, 그녀 한 명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얘기였다. 누가 봐도 인위적인 저
웃음소리들은 아마 간제, 그녀 한 명만을 위한 연극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도 나름 손님이라면 손님인 셈. 리카르디스는 제 정신력과 시간을 소모해 간제를 파티에 데려가
에스코트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간제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꺄아악!”
막사로 기사들이 들어옴과 동시에 비명 소리가 울렸다. 르원. 부단장 나단, 레이몬드, 상급 기사 카일로,
파르딕트.
그들은 리카르디스를 등지고 사방을 경계하는 태세로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눈빛에 비하면 그다지 태도가 다급해 보이진 않았다. 아주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는 건가? 부단장 나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명 피해는?”
“아직까진 없습니다. 간제 왕녀 덕분에 막사와 파티장을 둘러싼 호위 병력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던 터라.”
크르르…….
짐승이 위협하는 소리가 들렸다. 챙, 챙.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리카르디스는 보이지 않는 막사 밖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리카르디스는 막사를 나왔다. 상황은 정리된 후였다. 귀부인들이 남편의 품에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군중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대가리가 잘려 있는 늑대 한
마리였다.
“늑대?”
“마수입니다. 흰자위가 빨갛고, 이상할 정도로 공격적이며, 갑옷을 일그러트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흠.”
“잇세리온.”
“예, 전하.”
“그러면 인간이 진화하면 마인이냐며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상하게 그가 했던 주장이
떠오르는군. 정말 그냥…….”
하지만 평범한 동물이라면 이렇게 위협적인 무기가 가득한 곳에 홀로 쳐들어오지도 않고, 갑옷을 일그러트리는
힘을 지니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 기괴한 야수는 그저, 죽을 때까지 눈앞의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는 일그러진
목적성을 지닌 돌연변이에 불과했다.
막사를 지키던 레이몬드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누구인지 듣지 않았다 하더라도 알 수 있었으리라. 그 소동에도
얼굴 한번 안 비춘 인물일 것이 빤하지 않은가. 그렇다 하더라도 마치 제 막사인 양 편안하게 앉아 있는 간제의
모습을 보니 황당하기는 했다.
142 화.
“왕녀.”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호위를 다 떼어 놓고 왔습니다.”
“……왕녀를 두고?”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끈질기고 거침없는 행보가 단순히 개인과 개인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라베니아 대 발타? 이름뿐인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자가, 하카브라는 왕을 두고서 감히?
“리카르디스 전하.”
“안 합니다.”
간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희 왕실에 미래를 읽는다는 명목으로 한자리 꿰차고 있는 늙은이가 있는데 말입니다. 훨씬 솜씨가
좋으십니다.”
“그거 영광이군요.”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간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잠시 후 깔깔 웃었다. 리카르디스도 어딘가 미묘해 보이는 미소를 입에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 번 찔러 봤는데, 진짜였을 줄이야.
그녀가 단순히 자신에게 첫눈에 반해서 이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척 봐도, 누가 보아도 그녀는
하카브의 눈에 어긋나 있는 존재였다.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혈육의 정?
하카브는 그렇게 달콤한 말이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러고도 제 오라비의
눈에서 멀어질 일만 골라 했다. 죽지 않았다고는 하나 다소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
간제는 어쩌면, 혼인이란 이름의 동맹을 맺고자 이 자리에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하카브의
계산속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함부로 덜컥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건이 아니었다.
“발타에서는 사람의 말을 세 번까지는 들어 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시간이, 상황이 달라지며 무언가 변할지도
모르니, 심사숙고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남은 두 번의 기회는, 저 또한 물러 두겠습니다. 무언가 변하는 게
있을 때까지.”
“글쎄요.”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말을 찬찬히 되새겼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역사의 보고다. 어릴 적부터 갖은 교육을
받았으나, 그런 비슷한 얘기라고는 한 톨도 본 적 없었다.
“아.”
‘시기가…….’
우연일 리 없다.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며 하나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어 있는
곳이 많아 그 조각에 어떤 그림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형상이 어슴푸레 그려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잘게 손을 떨었다.
* * *
들판에 어린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강한 힘으로 사지를 뽑아 낸 비참한 모습으로, 심장이 사라진 채였다.
지방 영지의 작은 마을 하나가 몰살당했다. 또한, 앞선 사건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범인은 그 마을에 살던
마인이었다. 크레안 티다니온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사람들을 죽였노라 증언했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전역 동시다발적으로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남루한 차림의 마인 한 명이 거리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마인이 저지른 모든 끔찍한 살인 사건들은 황실의
음모라는 얼토당토않은 거짓을 전파했다. 남자는 순찰하던 병사에 의해 즉결 처형당했다. 그 마인이 왜 도망가지
않고 사람 많은 거리를 뛰어다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력을 타고 흐르는 광기가 도진 것이리라.
287 년, 축복의 밤.
일라베니아에 불길한 그림자를 몰고 온 마인들의 존재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는 마인이 없으면
하얀 밤이 찾아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했으나, 올해에 뜬 하얀 밤의 빛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셨다. 마인, 그
불길한 것들이 빛을 가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일라베니아여, 영원하라.
17
그림자가 드리워진 숲속은 밖보다 차가운 공기가 머물렀다. 로젤린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감이 예민하게 다듬어지자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의 정경까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말발굽이 땅을 울렸다. 미미한 진동에 다람쥐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새 수십 마리가 하늘로 날아갔다. 토끼와 사슴이 무언가에 쫓겨 겅중겅중 도망쳤다.
잡아, 저기! 저기에 숨어 있다! 남자들이 소리치고, 화살이 빠르게 날아갔다. 환호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반복되며 울렸다. 정복자들의 거침없는 발걸음. 그 아래 우드득, 수풀의 나뭇가지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까지.
귓가를 울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로젤린은 인상을 잔뜩 쓰고 초콜릿의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풀을 뜯고 있던 초콜릿이 투레질을 하더니 천천히 움직였다.
이동할수록 사람들의 기척과 소리가 사라져 갔다. 로젤린은 초콜릿의 목을 끌어안고 찰싹 붙었다. 부드러운
갈기가 그녀의 볼을 간지럽혔다. 불편했던지 초콜릿이 거친 숨소리를 냈다. 그녀는 눈앞에 여우 새끼가 지나가도,
토끼가 달아나도 쫓아가지 않았다.
143 화.
오래되고 깊은 숲이었다. 산새들이 자신을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할 정도의 긴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런데 묘하다.
로젤린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의문의 추적자는 멈추지 않았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 갔다. 저벅저벅.
부츠에 흙 자갈이 마찰 되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로젤린은 보조 가방에서 해풍에 말린 쫄깃 달콤한 육포를 꺼냈다. 씹으며 기다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로젤린과 한 공간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녀가 뒤돌아보면 어떤 장애물도 없이 온전히 마주 볼 수 있는 거리.
열세 걸음.
여덟 걸음.
세 걸음.
“떽끼.”
언젠가 많이 들었던 타박의 말에, 로젤린은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 목소리가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 못써요.”
남자가 로젤린을 그대로 지나쳐 초콜릿의 주둥이를 찰싹 때렸다. 초콜릿이 황당하다는 듯 그를 노려봤다.
로젤린도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위험…… 인물?
“디에즈 전하?”
로젤린은 부루퉁한 목소리로 지금의 심정을 드러냈다. 남의 귀한 집 자식을 왜 때리나. 디에즈가 손을 저으며
급하게 해명했다.
“예. 사람의 진정한 모습은 동물과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하.”
“아닙니다!”
디에즈는 무척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곧 그는 다급한 몸놀림으로 초콜릿이 고개를 파묻고 있던 수풀에서
무언가를 한 움큼 뜯었다.
로젤린이 화들짝 놀라 안장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초콜릿의 입을 쩍 벌리고 샅샅이 훑었다. 곧 풀려난 짐승이 큰
콧구멍으로 씩씩 숨을 내쉬며 분노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네.”
디에즈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로젤린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수락했음에도
디에즈는 웃지 못했다. 웃기는커녕 심란해 보였다.
“전하.”
디에즈가 아차,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얘기가 다른 곳으로 새고 있었다. 그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하하…… 농담입니다.”
“언제나 많았죠.”
“대단하네요, 그 짧은 시간 안에.”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디에즈가 치켜세워 주는 말에 없던 제 노고가 툭툭 튀어나왔다. 모름지기 힘들게
얻은 것이 더 귀해 보이지 않던가.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고 질긴 나뭇가지가 로젤린의 후드를 잡아챘다. 그녀가 주춤거리자 디에즈가
단검을 꺼냈다. 로젤린은 잠시 몸을 굳히고 그를 주시했다.
위험해 로젤린. 누구도 믿지 마. 리카르디스가 속삭였다. 그러나 디에즈의 단검은 미련 없이 그녀의 후드를 잡고
있는 가지를 끊어 낼 뿐이었다.
“저도 그랬거든요.”
아, 그가 실어증에 걸렸을 때를 말하는 것인가. 로젤린은 고개를 까닥이며 디에즈에게 감사를 표했다.
두 사람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걸었다. 인간들의 발길이 닿아 생긴 좁은 길마저 사라지니, 완전한 숲속이었다.
“마수라도 나올 것 같은 풍경이네요.”
디에즈가 흘리듯 내뱉은 말을 들은 로젤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거의 그녀, ‘그것’이 지내던 숲과 비슷해
보였다. 죽어 가는 땅 위에 간신히 숨만 붙이고 있거나, 아니면 죽은 채 우뚝 서 있거나. 안쪽으로 들어올수록
초록색 잎은 보기 힘들어졌다. 디에즈는 담담한 얼굴로 숲의 풍경을 훑었다.
대륙은 서서히 죽어 가고 있으나, 일라베니아는 아직 나무가 자라며, 과실이 맺혔다. 일라베니아가 쥐고 흔드는
신의 힘. 성력의 진면모였다. 치유력은 인간, 동물, 식물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힘이 죽어 있는
대지에까지 영향을 주라고, 축복의 밤이 순리대로 찾아오던 그때에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땅이 죽어 가고 황폐해져 가자, 어떻게든 황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성수를 뿌리던 행위가 탁월한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비록 몇 년, 몇 개월 정도의 가시적인 조치에 불과했을지라도.
로젤린에게 보통의 숲이란, 이렇게 죽음에 반쯤 걸쳐진 풍경이었다. 인간이 되고 한참이 지난 후. 역사를 배우고
나서야 이 모든 것이 어딘가 어긋나 버린, 잘못된 결과라고 알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정말 멋있었습니다.”
디에즈가 맞아요. 정말 멋있었어요. 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미묘하게 놀리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디에즈도 싱글벙글이었고, 로젤린도 기분이 좋은 터라 마주 보고 방긋 미소지었다.
“음…… 그래요…….”
144 화.
“예쁘니까요.”
디에즈의 얼굴에 걸려 있던 어색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고
눈동자를 슬슬 굴렸다. 학술지를 읽을 때의 표정 같았다. 고민, 고찰, 고심. 리카르디스 전하가 예쁘다는 말이
그렇게 고민할 거리인가?
“아!”
로젤린은 최근, 스스로 기민한 눈치를 가지게 되었다 자신했다. 이런 경우에 다른 사람을 칭찬하면, 앞에 있는
사람이 기분이 상할 것이다!
“그럼, 제가 더 좋습니까?”
예쁘면 좋다. 그렇다면 더 예쁜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니냐. 디에즈는 완벽한 논리에 입각한 주장을 펼쳤다.
로젤린은 침울해졌다. 역시 거짓말은 할 게 못 된다.
로젤린은 여기저기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밟으며 열심히 디에즈를 쫓았다. 사박사박, 사뿐사뿐하게 걷는 소리가
뒤따라오자 디에즈의 속도가 느려졌다. 로젤린도 그에 맞춰서 차분하게 걸었다.
디에즈는 입가를 쓸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한걸음 뒤에서 의기소침한 얼굴로 따라오는 로젤린이 그려졌다.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풀렸다. 두 사람은 그 미묘한 기류를 유지한 채 몇 분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때, 로젤린의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디에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로젤린이 마른 수풀을 뒤적이고 있었다.
벼락에 쪼개진 고목, 메마른 땅, 바싹 마른 나뭇가지들이 늘어진 이곳은 황량한 무덤이나 다름없으리라. 온통
칙칙하고 보기만 해도 머리가 쭈뼛 서는 풍경 안에 하얀 꽃 하나가 피어 있었다. 디에즈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죽어 버린 땅에서도 피어나는가. 대단한 생명력이었다. 지긋지긋하게도.
로젤린이 꽃의 이파리 하나하나를 곱게 다루는 모습을 보고, 그는 깨달았다. 저것은 선물이었다. 저 색을 닮은,
누군가를 위한.
숨이 막히는 기분에 디에즈는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멈춰 버렸나 했더니 심장박동은 어느 때보다 컸다. 고장
난 듯 불규칙적으로 두근…… 두근, 쿵쿵하고 울렸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황금색 눈동자가 석양에
물들어 있었다. 디에즈의 눈과 머리카락에서 붉은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그의 말은 로젤린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렇군요. 납득하며 체념하는 기색이 비치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하지만 로젤린은 굳이 그의 말에 답을 붙였다.
“예.”
“로젤린.”
“예, 전하.”
“부탁이 있어요.”
부탁? 아까 군마 초콜릿을 구해 준 답례를 말하는 것일까. 디에즈의 표정은 아까의 차가움과 딱딱함이
온데간데없이 부드럽게 변했다. 평소에 보던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왜…….
부드러운 목소리에, 주위를 포근하게 만드는 그 미소에 로젤린은 이상하게 한기가 느껴진다 생각했다. 솜털이
쭈뼛 서며,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누구도 믿지 말 것.]
본능이 위험하다 말했다. 로젤린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던 제 행동을 멈췄다. 디에즈가 위험? 그가 위험하다?
자신에게? 로젤린은 짧은 시간 자신을 휘감고 간 본능의 경고에 살짝 혼란스러워졌다.
생각해 보면 해 볼수록 디에즈는 아닌 것 같았다. 피어오르는 불안감, 불씨는 너무 작았고, 그 조금의 가능성을
가리는 신뢰는 보다 짙고 커다랬다. 로젤린은 천천히 끄덕였다.
“어떤 부탁입니까?”
디에즈가 두 팔을 크게 벌렸다.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요.”
“갑자기요?”
“로젤린을 좋아했거든요.”
어두운 밤, 더러운 골목을 손잡고 빠져나올 때. 말하지 않아도 모든 감각을 공유하는 것 같던. 그가 보여 왔던,
그와 그녀가 쌓아 왔던 시간 그 이상의 유대. 마치 본능 같은, 오랜 기억 너머에 새겨져 있는 것.
로젤린은 주춤거리다 디에즈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한걸음 딛자 디에즈가 환하게 웃었다. 그 속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동글동글 부드럽고, 예쁜 색채가 가득한 좋은 감정들뿐이었다.
회장의 중간에서 황제가 자신에게 검을 하사하고, 관중들이 환호를 지르는 위로 독수리가 날개를 펄럭이던 그때.
찬란하게 햇살이 내리쬐던 날의 디에즈의 얼굴.
그날의 뜨겁게 작열하던 햇살은 똑똑히 기억한다. 널찍하게 뚫린 공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함성까지도.
아름다운 황금색 눈동자 속에서 들끓던 분노를 똑똑히 보았다. 그것을 가리는 완벽한 가면. 디에즈가 어떤 식으로
웃는지 기억났다. 지금처럼, 아주 다정하게.
“컥!”
145 화.
로젤린은 목구멍 끝에서부터 느껴지는 핏물을 느끼고 상황을 겨우 인지했다. 공격당했다. 등 뒤의 완벽한
사각으로부터. 숲의 가지를 치던 용도로 줄곧 들고 있던 단검일 것이다. 몸을 뒤튼 덕에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스치고 바로 옆에 꽂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큰 타격을 입었으리라.
“아악!”
로젤린은 재차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일격이 빗겨 나간 것을 눈치챈 디에즈가 박혀 있는 단검을 그대로 비틀어
내부를 헤집었기 때문이었다. 뼈와 근육이 벌어지는 고통은 신경을 예민하게, 머리를 무디게 만들었다.
어떤 살의도 느끼지 못했다. 어떤 낌새도 읽을 수 없었다. 사람의 심장. 기관의 중심부를 향한 공격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온화하고 어떠한 의도도 없었기에, 한순간 디에즈가 실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디에즈. 그였다.
또 다른 ‘그것’.
* * *
천막이 바람에 천천히 나부꼈다. 틈새로 어두운 숲이 비쳤다. 빗소리를 뚫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똑똑히
닿았다. 눅눅한 공기를 폐 깊숙한 곳까지 보내는, 그 경악 어린 숨소리!
디에즈는 잠시도 주춤하지 않고 튀어 나갔다. 공기는 천 한 장을 경계로 온도가 바뀌었다. 휘이이, 칼바람이
불었다. 비가 머리와 얼굴 위로 쏟아졌다. 망토를 휘날리며 도망치는 불청객이 보였다.
쿵, 쿵, 쿵!
어디지? 어디부터 봤을까. 아까 전 천막 밖을 나갔던 구릿빛 피부의 사내들도 보았을까? 이 손도? 인간의 것이라
믿기지 않는, 이 기괴한 몰골의 손도?
실수. 다른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습격 전 접선한 검은달의 암살자들이 이번만큼은 리카르디스도 칼날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디에즈는 힘차게 내달렸다. 벌어져 있던 거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젖은 흙과 나무, 피의 냄새. 그 사이를 뚫고,
디에즈는 익숙한 이의 향기를 맡았다.
* * *
필사의 힘으로 디에즈의 품에서 벗어난 로젤린이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힘겹게 숨을 골랐다. 그녀는
비틀거리다가 컥컥 소리를 내며 피를 토했다. 깊은 상처의 여파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디에즈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내가 ‘로젤린’을 죽였지. 피 냄새를 맡은 후에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걸 또다시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디에즈는
웃음을 흘렸다.
인간이라면 치명상. 피 냄새의 농도만으로도 그 상처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나에게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누구도 믿지 말 것.]
로젤린은 울었다. 고통의 자극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이었다. 그녀가 숨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로젤린을, 죽인 건…….”
“저예요, 로젤린.”
젖은 녹색 눈동자가 안쓰러웠다.
“나는…….”
“난, 로젤린.”
파삭, 파사삭.
서로 마주 보고만 있던 그때, 말라비틀어진 나뭇잎과 앙상한 가지를 지나치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보다도 선명한 것은, 마치 심장박동처럼 뛰는 거대한 마력이었다. 무시무시한 압력을 내뿜으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디에즈는 그 누군가의 존재를 확정했다. 로젤린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맹금류의 왕이리라.
디에즈는 그곳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단검을 보았다. 검신을 뒤덮은
피는 아직까지도 뚝뚝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그 붉은 빛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일깨웠다.
끝맺음.
한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디에즈가 움직였다. 저벅, 저벅. 그녀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녀에게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로젤린은 디에즈를 올려다보았다. 미소 한 점, 감정 한 점 읽어 낼 수 없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디에즈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로젤린이 휘청이며 피를 토했다. 그녀가 큰 빈틈을 보였으나, 검날은 로젤린을 조금도
스치지 못했다. 디에즈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로젤린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사나운 기운을 생생하게 느꼈다. 온 산을 뒤덮는 강력한 어둠. 마력을 가진
생물이라면 숨죽이고 고개를 조아려야 할 것 같은 이, 거대한 힘. 디에즈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멈칫한 찰나의 순간. 숲속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던 소리가 막 당도했다. 얼기설기 얽힌 나뭇가지들을 뚫고
무언가가 날아왔다. 디에즈는 빠르게 방어 태세를 취했다.
쿵!
“물 마셔.”
마카롱이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건네준 성수를 기억해 내고 떨리는 손길로 수통을 열어
마셨다. 큰 효과는 없으나 아주 조금씩 피가 멎는 것 같긴 했다.
그들 사이의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두 남자도 로젤린도 아닌 무리를 이룬 발소리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카롱의 시선이 흘끗 그 방향을 향했다가 다시
디에즈에게 돌아갔다.
디에즈가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세 사람의 침묵으로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이 뚝 끊겼다. 다시 무언가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 마카롱이 몸을 굳히며 그를 경계했다. 하지만 충돌은 없었다.
로젤린은 그들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마카롱과 디에즈. 두 사람의 만남이 이번이 처음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절단에 있었을 때 독수리의 모습으로 지나쳤기야 했을 테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뭐랄까. 잘 아는
사이 같았다.
146 화.
“로젤린 경! 아니 쥬, 쥬쥬 씨 이게 무슨…….”
“이제 좀 자.”
디에즈는 천천히 걸어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멀어졌다. 자연히 발걸음은 깊은 숲속을 향했다. 바람이 기묘하게
많이 부는 곳이라 했더니,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절벽이 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바람이 불어왔다. 디에즈는
그곳에 로젤린을 찌른 단검을 떨어트렸다. 피 냄새가 실려 와 어지러웠다.
로젤린은 자신이 떠나는 그 순간까지 눈동자에 의문을 담고 있었다. 어째서 당신은 로젤린의 죽음을 바랐는가?
그녀를 왜 죽였어? 왜 나를 또다시 죽이려 해?
로젤린 당신은 알 것이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근접한 거리의 사냥감을 결코 놓칠 리 없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그녀가 절벽 아래에 떨어졌다는 것.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로젤린. 그대만은 알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는 기어코 죽이지도 못해, 벼랑으로 그녀를 몰았던. 제 계획,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위험을 뒤로한 채 떨어지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던. 내가 왜 또다시. 너를 어떻게.
* * *
황금을 녹인 듯한 금발과 금안의 소년은 침대에 앉아 화려하게 치장된 방 안을 쭉 훑었다. 장식물, 바닥을 덮은
카펫, 창문을 가린 커튼,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장식물들의 생김새는 그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성적인 소년은 별달리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없었던지, 애완동물이었던 자신, ‘에파’에게 이 공간을 답답하다
항상 말하곤 했다. 그때는 질릴 정도로 화려한 방 안이라는 감상뿐이었으나.
확실히, 지금 이 ‘디에즈’의 황금색 눈동자로 본 방 안은 인형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시녀들이 음식을 나르자 내내 무표정하던 디에즈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는 포크를 어설프게 쥐고는 닭
가슴살이 올라간 샐러드를 야무지게 찍어서 먹었다. 세 종류의 버섯이 들어간 수프도 후후 불면서 잘 떠먹고,
빵도 예쁘게 찢어서 잘 씹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잘 드시는 황자 전하가 기특하고 고마워 눈물짓기만 했다. 잘 먹어야 낫는다 하지 않던가.
그게 육체적인 문제 외에도 효험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과거 ‘디에즈’가 어머니라 부르던 인간이었다. 겉가죽을 뒤집어쓸 수 있는 괴물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면서, 제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을까. 절절한 피의 연결 고리가 끊긴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녀라면 반드시 알아챌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소국 힐리사고 왕국, 그중에서도 권세가 대단치 못한 집안의 장녀였다. 일라베니아 황제의 반려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나, 아름다웠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조건이 충족된 셈이었다.
황제의 부인이라고 하면. 나라의 어머니나 다름없다 하지 않나? 나는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데?
평범하게 비슷한 직위의 귀족과 결혼해서 애 둘 셋 낳고, 평범하게 가정을 지키다가…….
물론, 그녀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황제의 계획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혼인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어린 나이. 득세하지 못한 귀족 가문의 여인이 상상한 미래는 이렇지는 않았다. 그녀가 현실 감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너무 괴상하게 흘러간 탓에, 그녀는 황실에서 지내는 모든 나날을 힘겨워 했다.
어디든 기대고자 했지만, 그 어디에도 기댈 곳은 없었다. 그녀의 외가 또한 그녀를 팔아넘긴 장사치에 불과했다.
그저 어려서 풋풋하고, 예쁘니 보기 좋다. 딱 그 정도의 관심. 그 정도의 애정. 그것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런 배경에서 디에즈가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엘피디오가 얼마나 강력했건 간에, 아들인 이상
황태자 후보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조용하던 백옥 성에 사람들이 드나들며 축하하고, 황제도
아들이라는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를 칭찬했다. 갖은 빛나는 것과 많은 이들이 탐내는 것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금발의 사내아이는 아름다울뿐더러, 명석했다. 기대는 그만큼 높아졌다. 자랄수록 엘피디오의 세가 급격히
불어나며, 현 황제의 자리까지 위협하는 위치에 올랐음에도 그녀는 디에즈가 다음 대의 황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덕분에 디에즈는 그녀의 집요한 눈길 아래에서 자라났다. 입는 것, 먹는 것, 배우는 것. 지내는 공간, 온전히
그만의 것이었어야 할 시간. 그의 모든 생각까지.
“디에즈.”
너울거리는 불빛이 어두운 하늘을 비췄다. 디에즈는 열기가 닿는 곳에서 탁탁 튀어 오르는 불티들을 손으로 콕콕
찔렀다. 뜨거웠다.
콰르르 소리와 함께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디에즈가 한걸음 물러서자마자 그 자리로 무거운 조각들이 떨어졌다.
디에즈는 걸음을 돌려, 처음 시작한 장소로 향했다. ‘디에즈’가 사라지고, 지금의 자신으로 변한 호숫가. 그는
꽃이 예쁘게 핀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147 화.
그는 조각나 알 수 없는 기억을 찾아 이곳에 왔다. 코를 찌르는 선명한 피 비린내. 어두운 공간, 춥고 습한,
불쾌한 냄새가 나는 곳. 이름 한번 불러 보지 못한 아이들. 사람들의 비명 소리. 하얗고 뾰족한 성. 울리는
아름다운 종소리.
속을 헤집어 할퀴는 그 기억들 사이, 이상한 게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그것은 그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과거
‘디에즈’의 기억이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뭐가 그렇게 예쁜지, 뭐가 그렇게 빛나는지. 왜 생각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지는지. 기억 없이 감정만 물려받은 지금의 디에즈는 황당할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질감을 느낀다 하더라도, 부모와 동생, 제 수발을 들던 사용인들까지 죄 불타
죽고 혼자만 살아남은 큰 사건을 겪었다면, 심경의 변화가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선이 부딪쳤다.
훔쳐보고 있다가 딱 걸렸다. 황실 도서관. 아동용 동화책 뽑아 놓고도 테이블에 엎어져 자고 있는 레이몬드를
제외하고, 두 사람은 이것저것 쌓아 놓고 읽던 중이었다.
로젤린은 사람의 눈을 피하지 않고, 가만가만 그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묵직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고, 디에즈도
똑바로 쏟아지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났다. 침묵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내 상사이자 당신의 친구가 바보라서, 민망하죠? 동의를 구하는 눈빛에 디에즈가 피식 웃었다. 레이몬드가 바보
같아서 절로 나온 웃음이었다. 로젤린도 소리 없이 웃었다. 처음 보는 미소였다.
많은 얘기를 나누고,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것을 기억에 새기고, 그 기억에 새롭게 행복해하고
싶었다. 고통의 시간은 너무 길지 않았나. 그것을 끝내기 위해서 나는 여기에 온 것인가?
이상하게 눈이 시린 기분이라 디에즈는 눈을 비비며 시선을 떨궜다. 로젤린을 훔쳐보느라 넘기지도 못하고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장면은…….
철창 안, 죽어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 속을 할퀴던 고통이 무엇인지. 어슴푸레한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몸이 떨렸다.
누가 목을 조르듯 답답했다. 디에즈는 그 상황에서도 완벽하게 평범한 ‘디에즈’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으므로,
로젤린은 그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도서관의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푸헤히흐흑!”
“봐라 봐라, 자알 봐라. 거봐라. 딱 봐라! 어린 애들이나 하는 놀이나 한다고 날 무시했지! 넌 뭐냐 베르움!
그깟 어린 애들 놀이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꼬라지 좀 보라지! 으허, 으후허허헉! 내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 이놈아!”
오랜 수련을 거친 신관의 성미를 황량한 가시나무 숲으로 만드는 오락거리를 어린 아이들의 놀이라 말했다니.
미쳤지, 내가 미쳤지. 이딴 걸 어떻게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졌지! 나한테 졌지! 계속 지고, 지겹지도 않은지 또 졌지! 이야, 이 정도면 진짜 쉽지 않거든, 한 번쯤 이길
법도 한데 말이다!”
베르움이 뚱하게 카드 패를 담요에 던지자 라헤안시가 손을 그에게 내밀고 까딱거렸다. 돈놀이하는 인간이 빚
받으러 온 듯 당당한 태도였다.
“뭡니까, 대신관님.”
“이 무슨 날강도……? 그런 말 없었잖습니까!”
당신 방금, 도박이라고 말하려고 했지. 그리고 유일신 이델라브힘을 믿는, 그것도 무려 대신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놀이의 신 따위를 운운하다니. 대체 이 인간 누가 대신관 시켜 준 거야?
148 화.
베르움과 라헤안시가 아옹다옹 다투는 사이, 그들이 있는 막사 안으로 무언가가 타오르는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라헤안시가 코를 킁킁 움직였다.
“베르움.”
“예, 대신관님.”
“무슨 일을 말씀하십니까?”
“보통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는 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인데, 끝날 때까지 조용해서 심심하단 말이다.”
“물보라 기사단의 할 경이 다람쥐를 잡으려 했는데 너무 귀엽게 생겨서 미처 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우를 잡으려 했더니, 기르다 방생했는지 배를 보이고 애교를 부려서 또 놓아주었다 합니다. 어떻게 어떻게
너구리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근처에서 새끼 너구리 두 마리를 발견한 것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다 우울증 같은
게 생긴 모양입니다. 신관은 몸의 상처는 치료해 주지만, 마음의 상처에는 효과가 없다고 하니 시무룩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참 여린 기사님이 아닌지.”
베르움이 담요 위에 널브러진 카드를 뒤적거리는 모습을 본 라헤안시가 반색하며 잽싸게 일어섰다. 베르움이
간신히 체면을 차리며 흐, 흠 한 판뿐입니다. 하며 새침 떨자 라헤안시가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헤안시가 패를 섞는 장면을 바라보던 베르움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르틴은 곧 사냥 대회를 관리하는 행정관에게서 로젤린의 점수를 비밀리에 입수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의
기록은 하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점수로 치면 작은 동물(+5) 네 마리를 잡은 정도였다. 로젤린의 솜씨라고
보기에는 영 허술했다.
마르틴은 이에 대해 묻고자 로젤린을 찾았으나, 사냥 대회의 폐회식이 끝나고도 그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 * *
어두운 밤. 로젤린은 눈을 떴다. 비틀거리며 상체만 일으켜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지금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푹신한 침대, 화려하지만 정돈된 방 안. 여기저기 리카르디스의 문양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아하니 월장석 성 내에 있는 수많은 방 중 하나인 듯했다.
다친 상처 부위가 저릿하게 쑤셨다. 헤집어진 내부는 아직까지 아물지 않았으나, 많이 호전 된 상태이긴 했다.
최근 자신의 재생은 완벽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이렇게 치명적인 상처라면 속도는 더욱 늦어졌다. 아직 완벽하게
성력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라 하더라도 그 손길이 닿았노라 짐작할 수 있었다.
이후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은 리카르디스의 찌푸려진 얼굴이었다. 드문드문 흔들리는 마차와 분을 삭이는 숨소리,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직까지 심장에 칼이 박힌 것처럼 서늘했다. 로젤린은 제
가슴께에 손을 대고 후 숨을 천천히 들이쉬다 내뱉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로젤린의 고개가 우뚝 고정되었다. 구석의 소파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커튼이 바람이
흔들렸다. 조명같이 환한 달빛이 창문에서부터 소파까지 길을 만들 듯 비췄다.
“전하.”
로젤린이 일어나려 하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다시 엉덩이를 침대에 붙였다. 리카르디스는 깍지
낀 채 가만히 제 손 마디만 쓸고 있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로젤린은 불안해졌다.
“왜…….”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숙이며 제 이마를 짚었다. 그는 아픈 로젤린보다 괴로워
보였다. 떨리는 손 위로 뼈가 곧게 돋고 혈관이 선명하게 올라와 있었다. 무언가를 꽉 쥔 것처럼, 무언가를 꾹
참는 사람처럼 보였다.
“왜 다친 거야, 로젤린.”
이상한 질문이었다. 어쩌다 다쳤느냐, 어떻게 다쳤느냐가 아니라, 왜 다쳤느냐? 답을 하자니 애매했다.
로젤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내에서 최선의 답변을 했다.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
“아니, 아니!”
리카르디스가 바닥을 향하던 고개를 들었다. 날카롭고 뾰족뾰족하고 아프고 사나운 감정들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이 보였다. 로젤린은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치지 말라 했다.”
“그, 저는.”
“누구도 믿지 말라,”
얼굴까지.
“그렇게 말했었잖아.”
“등에서부터 찔린 상처였다. 이것은 디에즈, 그자가 강했기에, 그대가 싸워 패배했기에 입은 상처가 아니란 걸
안다. 방심이다. 그를 믿은 것이다. 등을 내줄 만큼이나.”
“저는…… 전하, 그게. 디에즈 전하가, 디에즈 전하께서 저를, 구해 주시고, 또, 길을 안내해 주시고,
초콜릿도 구해 주셔서, 부, 부탁이 있다고, 한 번만…….”
로젤린은 횡설수설 말하며 침대 시트를 매만졌다. 목적 없이 떠도는, 떨리는 손에서 그녀의 마음이 드러났다.
그녀는 초조했다.
리카르디스는 말을 힘겹게 내뱉었고, 한 마디, 한 글자가 더해질 때마다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평소 그가
자신을 혼낼 때 미간에 주름을 가볍게 잡고는 안 돼, 로젤린. 하지 말라 했잖아. 하고 타이르듯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믿지 말라고 했어! 그날에, 그대의 뒤를 쫓는 자가 칼릭스 경이라 해도, 레이몬드 경이라 해도! 나라고
해도 믿지 말라 했어!”
앞에서 무섭게 다그치는 리카르디스의 모습이 흐려졌다. 로젤린은 고인 눈물을 소매로 급하게 닦았다. 그녀의
눈가가 발개진 것을 보고도 리카르디스는 질책을 멈추지 않았다.
“마카롱의 말대로, 나는 그대를 전부 알지도 못하고, 디에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서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감히 예측하겠나. 변수가 많고 확실하지
못한 기반 위에 쌓인 계획에는 빈틈이 많을 수밖에 없었어! 위험해, 위험한 것이 당연해!”
“그럼에도 내가 그대를 보낸 이유는, 내가, 내가 그대를 믿었기 때문이야. 내가 한 말을, 그대가 들어주리라.
그 약속을 지켜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야! 로젤린. 로젤린 경! 어찌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149 화.
피 냄새가 났다. 로젤린이 눈물을 닦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리카르디스가 쥐고 있는 시트에 붉은색이 배어
나왔다. 손바닥에 손톱이 강하게 파고든 탓이었다. 로젤린이 기겁해서 그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오늘도 그대는 나를 마주하다 눈을 감았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처였다. 괜찮을 거라
생각해야만 했다. 비록 그대가 하루하루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을지언정. 모든 상처가 보통의 사람들과 다름없이
그대에게 새겨지리란 사실을 알고 있을지언정. 괜찮다. 괜찮을 거다. 강한 사람이니까. 언제나 다시 내게
돌아왔으니까. 이번에도…… 이번에도 괜찮을 거라…….”
“로젤린 경.”
로젤린이 울먹거리고 있자,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부드럽게 당겼다. 로젤린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리카르디스가 무릎으로 침대를 짚은 채, 그녀를 받아 내었다. 로젤린의 얼굴에 리카르디스의 가슴이 닿았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와 등을 감싸 오는 크고 따뜻한 손을 느꼈다. 맺혀 있던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쿵. 문이 닫혔다. 로젤린은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방 안을 둘러보았다.
로젤린은 누군가가 부드럽게 건드리는 손길에 잠시 정신을 차렸다. 불편하게 엎드려 웅크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똑바로 누워 있었다. 로젤린은 부은 눈을 비비며 올려다보았다. 마카롱이었다.
로젤린이 안도감인지 불안함인지 모를 것에 훌쩍훌쩍 울자, 그가 가만히 내려다보다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그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이 이상하게 서러워 로젤린은 계속 울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일어나 보니
아침이었다. 마카롱은 없었다.
* * *
“아, 싫다. 싫다고! 형님의 호출이야. 잘은 모르겠지만…… 혼난다! 그 건인지, 두 달 전에 그건지, 아니면
어제 했던 그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엄청 혼날 거라고!”
“형님이 아니라, 황자 전하라 부르셔야 합니다, 대신관님. 신관의 법도를 따르셔야죠. 그리고, 그 건은 뭐고,
두 달 전에 그거는 뭐고, 어제 했던 그거는 뭡니까!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시는 겁니까!”
“왜 이렇게 늦어!”
“라헤안시!”
“예! 형님!”
그 모습을 목격한 라헤안시가 재빠르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잇세리온이 라헤안시 옆에 쪼그려 앉더니 그에게
귓속말했다.
집무실에서 한참 멀어진 후에야 라헤안시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다. 요즘 들어
제법 말랑해졌던 제 이복형의 성질 머리가 다시 원상 복구 되다 못해 더 나아가 가시나무처럼 변하지 않았나.
“로젤린 경이 다쳤나?”
“………기밀입니다.”
거드름을 피우는 태도에 잇세리온이 기가 찬다는 듯 눈길을 주고는 돌아서 나갔다. 방 안에는 한 명이 더 있었다.
큰뿔산양의 레이몬드로, 접시에 토끼 모양으로 자른 사과를 예쁘게 장식해 두고 있었다. 기사도 칼 쓰는 직업이라
그런지, 엄청 섬세했다. 라헤안시는 내심 와 하고 감탄했다.
그는 토끼 사과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다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옆에서 붙어 보살피는
태도가 범상치 않았다.
150 화.
두 남자의 어르고 달래고,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연극에도 당사자인 로젤린은 시무룩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의 말을 잘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로젤린은 라헤안시를 보고 힘없이 고개만
까딱거렸다. 다쳤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다쳐도 보통 다친 게 아닌 것 같았다. 기운이 쏙 빠져 있지 않은가.
로젤린은 힘없이 꾸물거리며 뒤돌아 앉았다. 대충 등 어딘가가 다쳤다는 얘기인 듯했다. 자세한 위치는 칼릭스가
가르쳐 줬다. 라헤안시는 그녀의 등에 손을 올리고 성력을 불어 넣었다.
‘어?’
“그건…….”
“마인을 치료하신 적 없는 분이, 지금의 현상에 대해 이상하다, 평범하지 않다 경솔하게 판단을 내리시는 것은
환자의 마음을 몹시 불안하게 만드는 일인 듯합니다. 환자의 건강을 위해 이 자리에 계신 것이 아닙니까. 높은
지위와 그에 따른 능력을 가지신 분이니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하셔야지요.”
사나운 질책에 라헤안시는 위축되었다. 심지어 키는 훌쩍 크고, 인상 더럽기로 유명한 가문의 후계자가 무섭게
표정을 굳히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이몬드도 불쑥 끼어들었다.
“보십시오. 얼굴이 반쪽이 됐습니다! 애가 이렇게 다 아파서 죽어 가는데, 대신관님은 단순한 자신의 호기심에
환자를 외면하시는 겁니까! 그러고도 라헤안시 대신관님께서 진정 어린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이델라브힘의 종이
맞습니까!”
마치 공주님을 둘러싼, 맹견과 충견 같았다. 라헤안시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성력을 열심히 부었다. 내가, 여길,
다시 오면, 성을 갈겠다! 다짐했으나 생각해 보니 성은 이미 갈아 치운 이후였다.
성력으로 치료하는 중에도 두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춥냐, 덥냐, 아프냐. 안 아프냐. 이거 좀 먹어 봐라. 왜
입맛이 없느냐, 다른 음식을 가져오면 먹겠느냐. 아주 난리였다. 라헤안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봤다. 대체 제 형이 뭘 어떻게 했기에 이 사달이 났는지 감도 안 잡혔다.
“차도는.”
리카르디스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팔걸이에 몸을 지탱한 채 이마를 짚고 있었다. 아까보다 버럭 수치는
줄어들었으나, 폭풍 전 고요처럼 느껴질 뿐이라 무서운 건 매한가지였다.
“어디가 어떻게.”
“어, 그게. 약간 시무룩하고, 옆에서 칼릭스 경이랑 레이몬드 경이 보기 역한 애교를 부려도 반응이 없고,
입맛도 없다고 그러고……?”
‘이놈의 성…….’
라헤안시는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맹견, 충견 다음에는 광견이라니. 최악이었다. 라헤안시는
이십 분을 더 혼나고 나서야 월장석 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서럽게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러엄, 이 몸이 누구더냐.”
“나는 예전에도 몇 명 치료해 봤느니라. 마인도 이델라브힘의 빛 아래 살아가는 생명들 아니더냐. 다 똑같다.”
“아, 그렇습니까?”
베르움은 고개를 끄덕이다 불신의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이 인간이 성 밖으로 나가는 꼴을 못 봤는데 언제
마인을 치료해 봤대? 그 눈빛을 읽은 라헤안시가 창밖으로 제 모자를 던졌다. 베르움이 잔뜩 성내며 마차를
멈추고 주우러 갔다.
* * *
“약간의 문제라니요, 다 낫고도 당분간 호위 임무에서 제외되어야 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가 아닙니까!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저도 이제 전하의 충성스러운 기사인데 이렇게 숨기시려니 섭섭하기
그지없습니다.”
“삐졌다.”
“……제 누이가요?”
“내가.”
“내가 삐졌어!”
“……예, 뭐…… 아무튼 그 기억도 기억이거니와, 누님은 잘 해 주고 다정한 사람이면 한없이 약해지는
분이시니까요. 더불어 눈치는 못 챘어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같은 종족으로서의 유대감 따위를 가졌겠지요. 누님이
방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디에즈 전하의 탈을 쓴 그것이 누이의 약점을 속속들이 파악해서
파고들었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전하.”
“속상한 것이다. 그녀가 언제나 다치는 일에. 나는 그릇이 소스 그릇만도 못한 인간이라, 그 속상함이 이렇게
쪼잔하고 치졸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뿐이다. 다친 사람 붙잡고 울면서 화내는 인간이 정상이겠나? 미친놈이
따로 없지.”
151 화.
“……울면서 화내셨군요.”
“……그건 몰랐나 보군. 어쨌거나. 안 그래도 작은 소스 그릇이 넘쳐서 찰랑거리는데 흔들지 마라. 더 넘치는 건
그렇다 쳐도 열 받는다.”
“무슨 일인가.”
리카르디스는 칼릭스와의 대화로 여전히 심통이 나 있어, 툴툴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클로에가 애처로운 표정을
하며 두 손 모아 그를 바라보았다.
“일단 본론으로 넘어가서, 디에즈 전하와 하카브 왕자에게서는 수상한 움직임을 읽을 수 없었어요. 그저 파티에
얼굴을 비추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는 하지만 했던 말 하고 또 하는 흔히 파티장에서 쓰이는 의례적인 문장의
반복일 뿐이었습니다. 두 사람 간의 접촉도 크게 두드러지지 않아 뭐라 수상하다 꼬집을 수는 없었지만…….”
“발타 내부에서는 열심히 대규모 전쟁 준비 중이니, 그게 도리어 수상해지는 것이죠. 일라베니아 황실 쪽에서도
발타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대비를 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여기 있다. 일라베니아의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온 발타의 왕자 하카브. 그래서 이상했다. 일라베니아의
중심부를 쳐서 제국을 와해시키겠다는 계획이라면 소수 정예로 이끌어야 하며, 수상한 낌새를 주지 않고
방심시켜야 한다. 그들 나라에서 열심히 물자와 사람을 모아 가며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미를 마구
표출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엘피디오는?”
“사절단에서 무사 귀환하신 전하께 치이고, 폐하께 치이고, 하카브에게 치여서 상심이 커 보이시더군요. 그래서
요즘은…….”
“그쪽은 사람이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서 다행이군. 그래서 칼릭스 경. 내 형님이 뭐라 구애하던가?”
“요즘 따라 잘생겨졌답니다.”
“그래, 뭐…… 상황은 대충 알겠다. 하카브는 하카브대로 여전히 수상하고, 발타는 발타대로 전쟁 준비 중이라는
것. 바뀐 게 있다면…….”
검은달과 손잡고 자신을 죽이려 한 배경에는 ‘디에즈’가 있는지, 디에즈가 있는 것인지. 확실한 것은, 몸의
주인이 머무르던 백옥 성을 태워 그 친지를 다 죽여 버리는 잔혹성이, 여전히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친우의
심장에 칼을 꽂는, 그 냉정함이.
리카르디스는 지금의 디에즈가 엘피디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싹 지웠다. 도리어 엘피디오가 그의
손에서 놀아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기세등등한 꼬락서니를 보노라면, 본인이 디에즈의 뜻대로 흘러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으나.
* * *
명령 불복종으로 한 달간 호위 임무에서 제외된 사람이, 또다시 전하의 명령에 불복해? 가만히 방 안에만
있으라는 얘기는 기억을 못하는 건지, 안 하고 싶은 건지.
로젤린이 다친 날로부터 사 일이 흘렀다. 겉보기에 멀쩡해 보일지언정, 상처가 속까지 완벽하게 아물었으리란
보장은 할 수 없어 큰 움직임은 지양해야 했다. 더군다나 아직까지 디에즈의 일도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라 근신
겸, 보호 겸, 감금은 나름 합당한 구석이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삐짐이 치졸하게 발현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생각보다 막말을 잘하시는 군요, 로젤린 경. 아닙니다. 제 입이 5 쿠퍼짜리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전하께서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레이몬드 경은 로젤린 경이 눈물 한번 글썽이면 입을 다물 사람이지만, 저는 제 숨소리가
잔잔하게 가라앉아 완벽하게 수면 상태로 빠진 것같이 되었을 때,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창문으로 다가가
밖으로 나가려는 경의 표정이 얼마나 비장했는지, 미주알고주알, 일장연설하며 고자질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입니다. 그렇게 제가 다 털어놓았을 때 전하께서 어찌 반응하시겠습니까. 요즘 하루에도 스무 번씩 소설에
나오는 귀한 집 망나니처럼 패악을 부리시는, 전하께옵서!”
카일로가 흥 콧방귀를 끼고는 침대로 돌아가라고 턱짓을 까딱했다. 여유로운 그의 모습에 로젤린은 울컥했다.
그녀는 어지간하면 이래도 저래도 좋은 사람이었으나, 사람을 놀리고 약 올리는 카일로의 행태에는 배겨 낼 수
없이 성이 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성나 있는 로젤린의 눈앞에서 카일로가 병문안 온 클로에가 선물하고 간 초코
쿠키를 날름 집어 먹었다.
“이, 이익!”
152 화.
“들어오시죠.”
“내 방입니다! 들어오세요.”
카일로를 퍽 밀치고 로젤린이 다시 잽싸게 대답했다. 카일로가 얄밉게 웃었다. 살의가 솟구쳤다.
“교대 시간입니다.”
들어온 것은 상급 기사, 바다협곡의 네스터였다.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꽃다발 하나, 과일 바구니 하나, 케이크와
샌드위치 바구니 하나를 든 채였다. 로젤린은 반색했고, 카일로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하하, 농담도.”
카일로야 그녀의 반응이 재밌어서 놀리는 것이었으나, 네스터가 보기에는 정말 정다울 뿐이었다. 그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사이가…… 좋으시군요…….”
“안 좋습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로젤린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다 나았다고 하면 이 감금을 멈추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었으나, 네스터는 눈을
마주치자 얼굴을 붉게 물들일 뿐이었다. 그의 수줍음에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리라 예상한 로젤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이 남자, 눈치 없어. 평가가 더 떨어졌다.
“나갈 겁니다.”
“예?”
“나갈 거라고.”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아무에게도 안 들키면 문제없지 않습니까. 남자들이 대범하지를 못해서. 짜증나,
진짜.”
“내 이럴 줄 알았지.”
* * *
빛이 부서지는 샹들리에, 아름다운 대리석 위에서 사람들이 춤을 췄다. 음악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끈적하게 흐르며 파티의 흥을 돋우고 있었다.
뽀글뽀글, 터지는 기포 너머로 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물에 빠진 듯 일렁이던 인영이 점점 커졌다.
음악을 뚫고 뚜벅뚜벅, 걷는 소리가 날 즈음, 리카르디스는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형님.”
“디에즈.”
“아, 오늘 다쳤던 악단의 수석 연주자가 돌아왔습니다. 알고 계셨나요, 형님? 그래서 그런지 평소보다…….”
리카르디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관찰했다. 온갖 분노를 표출하고 싶은 반면, 평소와 다름없이 상냥하게 말을
걸어 오는 그 저의를 알 수 없어 몸이 바짝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제 정체를 다 들켰음을 알 텐데도
바뀐 구석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디에즈는 그저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반 박자 늦게 흥얼, 흥얼. 되새기듯 콧노래를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디에즈가 지나가는 시종의 트레이에서 샴페인 두 잔을 들어서는 한 잔을 리카르디스에게 건넸다. 리카르디스가
디에즈의 손에서 잔을 건네받아 꼴깍 마셨다.
심장이었다. 진정 살의를 가져야만 내지를 수 있는 일격이었다. 그 행위를 직접 저지른 사람이 내뱉는 말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평온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어떤 죄책감도, 그로 인해 제 비밀이 알려질까
전전긍긍하는 조바심도 보이지 않았다.
로젤린을 향한 눈과 귀가 많은 기간. 일부러 월장석 성 내부에만 두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녀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라면 곧이곧대로 들을 얘기였으나, 디에즈는 그 말이 거짓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테라스 안쪽의 양옆, 바깥쪽, 테라스 아래에 포진해 있던 기사들도 손잡이를 놓고 경계를 풀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의 목적이 단순히 황제의 자리에 머문다 생각했다. 그를 단순한 ‘디에즈’라고 여겼을 때.
하지만 하루아침에 그는 디에즈를 벗어나 가늠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목적이 무엇일까. 검은달과 손잡고,
자신을 죽이려 하며, 황실에서 숨죽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 * *
“꺼지라는 거지.”
케틀린은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리카르디스는 철창에 등을 기댔다. 그녀를 찾아온 목적은 뚜렷하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로서는 상상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그 미지의 힘. 그 힘이 마지막 톱니바퀴가 되어 거대한 흐름을
이끌고 있었다.
153 화.
디에즈와 그녀의 존재는 마력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완벽하게 다른 존재였으나, 그들의 행보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숨을 죽이고 일라베니아에 칼을 겨눈다. 오랜 시간을, 인내한다.
“케틀린.”
“부르지 마, 정들어.”
“욕을 들으면 기뻐하는 그런 부류였나……. 흠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인간미 있어 보이긴 하는데, 약간의
부작용이 따르네. 미안한데 좀 멀리 떨어져.”
그도 그럴 것이, 검은달의 간부에게 누가 ‘암살을 시도하려 했던 이유가 뭔가요? 어떤 심정에 저지른 것이죠?’
따위를 누가 묻겠는가. 동료는 또 누가 있나, 다른 2 차 계획이 있나, 검은달의 권력 구조는? 우두머리의 이름은?
규모는? 필요한 정보만 얻기 원했을 뿐이었다.
알고 있었다. 검은달은 황실뿐 아니라, 국경에 근접한 영지나 마을을 몰살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죄 없는 이들 또한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무슨 죄가 있었을까? 이델라브힘의 빛을 가리고 불길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기라도 했나. 개소리하지 말고.
아니란 걸 알잖아. 나는 똑같이 되돌려 주려 할 뿐이야. 왜, 그러면 안 되는 건가? 내가 용서해야 할 것 같아?
나도 똑같은 죄를 저질렀으니까? 아, 이델라브힘께서는 어찌나 자애로우신지. 뭐든 용서하라 하시네. 네가
얼마나 괴로웠건, 힘들었건, 피부가 화염에 지져지는 고통과, 숨을 말라붙게 하는 까만 연기 속에 죽어 가더라도,
용서해. 뭘 하려 해 봤자 내가 그 나쁜 사람과 같이 나쁘게 될 뿐이며, 용서야말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찾아
주신다고. 용서해. 용서하라 그래.”
리카르디스가 만류하자 병사들이 주춤주춤 물러서며 그의 눈치를 봤다. 그녀는 바닥을 짚고서 콜록거렸다.
케틀린의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자는 중얼거렸다. 안광이 기이하게 밝았다.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죽인다. 갓난아이를 죽이고, 노인도 죽이겠다. 칼로 찔러 죽이고 찢어서 죽일 것이다.
굶겨서 죽이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뜯어내어 고통에 발버둥 치게 하다 죽이고, 산 채로 땅에 묻고, 물에 빠트리고,
불에 태우겠다. 너희들이 오랜 세월 망각하던 고통을, 뼈에 하나하나 새겨지도록.”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도록.”
케틀린이 깔깔, 감옥이 떠나가라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병사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찌 되었건. 고맙게 되었다 리카르디스. 감옥 생활은 지루해서, 이따금 자극제가 필요하기 마련이거든.
그걸로 값을 치렀다 해 주마.”
검은달과 일라베니아의 싸움은 그저 사상과 사상의 차이라 여겼다. 그러나 별개의 문제로 마인에게 이뤄진 모든
일들은 일라베니아의 업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검은달과 마인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있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일라베니아가 만들었다. 누구는 업보라 부르고 누구는 운명이라 부를 것이었다. 덮쳐 오는
악의는 사납다. 과거 일라베니아가 그들에게 그랬듯이.
“신이 도와주시겠지.”
“상관없어! 나는 무신론자거든!”
케틀린의 귓가로 그가 계단을 따라 뚜벅뚜벅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휭하니 가 버렸다. 남은 케틀린은 어안이
벙벙한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예쁜이가 오늘따라 아주 새로웠다.
“하루면 충분하겠군요.”
“그렇겠지.”
그렇다. 디에즈는 인간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의 악의가 황실뿐 아닌,
이델라브힘의 빛 아래에 서 있는 모든 것을 향하고 있다면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디에즈는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이 가장 사람들을 많이 죽였나. 역사가 증명했다. 전염병의 창궐과 전쟁이다.
그러나 신성력이 있는 한, 전염병은 크게 힘을 쓰지 못하고 수그러들 터. 그리하여 남은 것이 전쟁이란 말이었다.
규모가 크면 클수록 죽는 사상자는 늘어난다.
[죽어서도, 눈 감지 못하도록!]
154 화.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쓰러질 것 같은 건 잇세리온 쪽이었다. 더불어 르원도 허리에 팔을 얹고는 짐짓 혼내는 태도로 그를 대했다.
“알았다. 알았다.”
그런데 잇세리온이 침대가 주인 얼굴 잊어버리겠다고, 매일매일 새 시트로 갈며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아냐며
대성통곡을 하는 통에, 오늘은 침실로 들어야겠다 마음먹었다. 아니, 시트를 가는 건 시녀의 몫이 아니던가.
거짓말 같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 아무것도.”
“전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더거.”
“……옷, 젖었나?”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엉덩이와 등 부분이 축축했다.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푹 쉬고는 그녀를 욕조 안에
내려놓았다. 안 젖었다면 밖으로 바로 건져 내면 될 테지만, 젖은 채로 오래 밖에 있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
것인가.
로젤린은 따듯한 온기와 향긋한 냄새가 마음에 드는지, 손으로 살짝 물을 휘저었다. 장미 꽃잎이 울렁거리며 퍼져
나갔다.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러다간, 보인다! 그가 급하게 그녀의 손을 딱 잡았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예?”
리카르디스가 황급하게 말했다. 아니 이 사람이, 아래를 보면 어떻게 해! 장미꽃이 아무리 빽빽하게 떠다녀도
그렇지!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로젤린은 울컥했다. 고개도 내 마음대로 못 숙이나!
한풀 꺾이다 못해 흩어져 사라질 것 같은 목소리에 리카르디스의 마음이 흔들렸다. 몸도 마음도 건강했던 사람이,
지금은 몸도 마음도 약해져 있지 않은가. 너무 화냈나? 사람이 좀 너무 화내긴 했지.
지금도 비록 명령을 어겼지만, 대화를 하겠다고 온 사람한테 너무 박하게 대한 게 아닌가 하고, 리카르디스의
단단한 마음이 서서히 풀려 가고 있었다.
“충정……?”
“그대 진짜…….”
너무나 진지한 목소리라 차마 싫다는 둥, 하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로젤린은 왼쪽으로 가지도 오른쪽으로
향하지도 못한 채 허둥지둥 당황하는 중이었다. 로젤린이 결의 어린 표정을 하더니 리카르디스에게 소곤거리며
말했다.
“……그거 굉장한데.”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녀의 능력에 감탄이 나왔다. 로젤린이 실제로 욕조로 잠수할 듯 머리를 물에 박으려
하자 리카르디스만 기겁했다. 아니, 들어가면은! 안되지! 들어가면, 안된다고!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채 겨우 제지했다. 난장판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잇세리온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이 헉 숨을 들이쉬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를 악 물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로젤린의 등에 단단한 온기가 닿았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몸을 돌린 채, 그대로 밀착해서
끌어안았다.
“무슨 일인가 잇세리온. 이 근처는 물기로 젖어 있으니, 들어오지 말고 거기에서 편하게 얘기하도록 해.”
배려심이 철철 넘쳤다. 로젤린은 욕조에 입까지 담그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물에 퍼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하나로 모아 그녀에게 넘겨줬다. 로젤린도 제 머리카락을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꽉 쥐었다.
155 화.
그때 자신을 형아라 부르던 리카르디스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르원을 실은 짐마차 백 개가 있어도 바꾸지
않았을 것이라며 행복해했다. 그 아름다운 추억의 나날들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잇세리온을 뒤로,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다.
전하에게 그런 과거가! 잇세리온 비서관님을 형아라고 불렀대! 사탕이 녹아 없어지는 게 아까워서 먹다가 남겨
뒀대! 선물 받은 망아지가 너무 좋아서 마구간에 가서 몰래 자다가 들켰대!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이 귀담아듣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리카르디스는 괴로워했다.
누구는 가슴 졸이며 한 사람을 숨기고 있건만, 다른 누구는 즐겨도 너무 즐기고 있었다. 얄미웠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로젤린은 꼬집히면서도 즐거운지 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제 손길이
닿은 곳의 그을음이 닦여지는 것을 보고, 물기 젖은 손으로 그녀를 대충 세수시켰다. 어휴 꼬질꼬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잃는 것도 많았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전하…….”
“애달프다는 듯 부르지 마라. 객관적 사실을 짚었을 뿐이다.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쌓여
있는 껍데기에 배불러 하다가는 엘피디오 꼴이 나겠지. 그 본인은 행복함을 만끽하고 있으니 상관은 없겠다마는.”
“가혹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잇세리온. 단 한 순간도 안주할 수 없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하물며 그
엘피디오도 칼릭스 경에게 집적거리고 있지 않나. 그러니 걱정 마라. 내가 약하다는 걸 아는 것은, 나아갈
방향을 아는 것이다. 발버둥 치는 모습이 괴로워 보일지언정, 그건 나아가리라 내가 마음먹었다는 것이니.”
“고맙다.”
“말 안 듣는 사람은 안 데려간다.”
“예?”
코끝이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웠다. 갑자기 훅 들어온 공격에 리카르디스가 숨을 들이켠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눈썹을 찌푸린 채 애절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로젤린이 엉금엉금 기어, 욕조의 반대편 끝에 도달하자 리카르디스는 앓던 이 빠진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로젤린은 아까의 항변이 끝나지 않았는지 그 멀리서 제 의견을 피력했다.
열성적으로 말하는 모습이 웃겼다. 피와 독, 비명과 저주가 가득한 길이 뭐가 좋다고 함께 가려고 저러는지.
저가 좋아하는 갖은 맛있는 것과 평온한 일상을 두고 어디라고 가려고 하는지.
이 맹목. 이 충성. 호의적인 감정들.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굳어져 선명한 것들. 그런 것들이 로젤린을
가득 채우고 있음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하지 않았다.”
로젤린이 눈을 깜박거리며 제 입술을 매만졌다. 녹색 눈동자를 굴리며 마구 고민하던 그녀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칼날이 도사리는 한 가운데, 폭풍의 눈, 기름 머금은 장작에 곧 떨어질 불꽃의 존재를 알면서도. 뭐가 웃기다고
이렇게 실없이 웃음이 나오는지. 리카르디스는 아하하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던가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일은…… 아니다, 사람이 한 입으로는 두말할 수 없지.
뭐가 필요하나, 경.”
입꼬리가 씰룩 씰룩 떨렸지만, 리카르디스는 각오했다. 넓은 욕탕,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뚫고, 그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156 화.
리카르디스는 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소원이었다. 그는 멍하니 그녀의 이름을 흘렸다.
“로젤린.”
“예.”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눈썹 끝이 아래로 처지는 모양에서 그녀의 감정을 읽어 냈다. 리카르디스는 시선을
방황하며 손마디로 제 입술을 쓸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언젠가부터 그녀를 로젤린이라 불렀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야 ‘로젤린 경’이라 불렀으나, 단둘이 있을 때는 높은 비율로 그녀의 이름만.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귓가가 홧홧해지며, 지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했다. 혈액순환이
원활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큰일 난다. 진짜 큰일 나. 비록 그녀가 자신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하더라도! 리카르디스는 눈을 질끈 감고 악 소리쳤다.
“페르벨강! 젠장!”
쾅!
욕실의 벽 한쪽에서 르원이 튀어나왔다. 그 빠른 등장에서 르원이 미리 비밀 통로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로젤린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갑자기 튀어나온 르원을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붉어진 얼굴로 성질냈다. 르원은 그제야 대충 상황을 눈치챘다. 장미꽃잎이 큰일을 하고 있구나.
* * *
리카르디스의 말은 로젤린을 향하지 않았고, 그녀도 그걸 알 수 있었다. 그의 뒤에서 르원이 고개를 저었다.
“에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벗겠습니다!”
“아니!”
“안 돼, 경!”
리카르디스와 르원이 소리 높여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로젤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알만 굴렸다.
“그렇군…….”
“르원!”
르원이 음흉한 미소를 걸고 리카르디스를 쳐다보았다. 리카르디스가 소파 위의 쿠션을 그에게 던졌다. 르원이
슬쩍 피하고는 문을 열었다. 그는 마침 문밖에 딱 달라붙어 염탐 중이던 잇세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달콤한 향?’
“……다 나았습니다.”
“어림도 없다.”
리카르디스는 딱 잘라 말하며 포크로 소시지를 찍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로젤린은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을 펴고선 행복하게 받아먹었다.
저녁을 훌쩍 넘긴 시간의 와인 안주라 하면, 치즈나 과일같이 간단한 목록이 주를 이뤄야 할 테지만, 테이블
위는 만찬장을 축소한 듯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로젤린의 기호에 맞춘 것이 분명했다. 르원, 그 남자. 정말로
치밀했다. 누가 잇세리온 동생 아니라고 할까 봐.
며칠간 칼릭스, 레이몬드를 통해 로젤린이 제대로 밥을 먹지 않았노라 보고를 받았던 참이라, 그녀가 음식에
무서운 열정을 불태우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눈길을 주는 접시를 그녀의 앞에 밀어
놓았다. 로젤린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리카르디스는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 두 잔. 비워지는 잔의
수만큼 취기가 돌았다.
“아는 노래입니다.”
“유명한 곡이다.”
“지금 맞춰 보지.”
달빛이 강하게 새어 드는 테라스 앞. 리카르디스는 하얗게 빛나는 로젤린의 얼굴을 보며 왼손을 들었다. 로젤린이
그의 손에 제 손을 겹치며, 춤을 추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를 취했다.
157 화.
그의 경직은 곧 풀리게 되었다. 로젤린이 흥얼거림과 동시에 리카르디스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아니
세상에.
‘무슨…….’
“……안 아프나?”
“깃털 같습니다.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수치스러웠다. 깃털 같을 리가! 180 을 넘는 근육덩어리 깃털이 어디 있어! 슬쩍 발밑을 보니, 심지어 그녀는
맨발이었다.
“신발은 어디 두었나.”
그렇게 꿈과 희망이 넘쳐 나는 공간이었던가 그곳이? 빛나고 아름다운 선율 속 사람들이 웃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행복한 자는 몇 되지 않을 것이 빤했다. 그녀는 그 극소수에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으나
…… 리카르디스는 머릿속으로 남들과 똑같이, 웃고 있을 한 남자를 떠올렸다.
“로젤린.”
“예, 전하.”
“네, 걱정 마십시오!”
“나 말고.”
로젤린의 눈이 확장되었다.
“황제 폐하.”
로젤린이 마구 손짓하며 무언가를 설명하려 했다. 안될 것 같은 이유를 꺼내고 싶은데 그다지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까만 해도 기분 좋다는 듯 미소를 걸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입가의 호선이 뒤집혀져서 안쓰러웠다.
“평생 그러라는 게 아니라, 무도회 때에만. 황제 폐하를 둘러싼 호위는 우습게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성기사를 포함해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들 오십여 명이 곁을 항상 지킨다. 일상적으로 금강석 성내에 있을 때
죽이는 건 힘들 테니, 그 호위망이 얕아졌을 때. 다가오는 건국제의 무도회가 적기라 보고 있다. 사실 그대뿐
아니라, 하얀밤 기사단을 포함해 여러 가문이 폐하를 지키고 있을 거라, 그대가 나서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아, 그 정도라면…….”
“전하, 춤을 출 때는 그렇게 신경을 분산시켜서는 안 됩니다. 온전히 음악과 파트너, 자신의 몸이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를 조절해야 하는 일종의…… 예술인 것이죠.”
“……그렇지만 저는 희대의 천재라는 말을 들었던 사람인 만큼, 폐하를 지켜보며 춤을 출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 *
거대하고 묵직한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칼릭스는 제 탁자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우기
전부터 손님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탁, 창틀에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마카롱…… 님…….”
칼릭스는 마카롱이 누운 맞은편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의 입술은 말을 내뱉지 못하고 달싹거리기만 했다.
마카롱이 죽은 듯 눈 감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해도 됩니까?”
칼릭스는 제 얼굴을 쓸다가 턱을 만졌다.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난처한 상황에
어찌할 바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정말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영역.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으리라. 칼릭스는 그런 생각에 남은 원망도
털어 낼 수 있었다.
“어디 해 보던가.”
“……이게 이제 기어오르네…….”
“로젤린은.”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 ‘꼴에 능력이 있다는 사람’이 리카르디스를 가리키고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신분이고 사람이고 가리지 않는 저 시비. 저 적의. 며칠 행방불명된 사이 많은 심경의 변화를 거친 것처럼
보였지만, 그 기질은 어디 가지 않은 듯했다.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시 마카롱이 자신을 떠날지, 혹시 디에즈처럼 자신을 미워하게 된 건지. 물어볼
당사자도 없으니 답도 얻을 수 없어 애먼 속만 끓였더랬다. 마카롱은 가만히 누운 채로 지친 듯 말을 흘렸다.
칼릭스는 귀 기울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를…….”
“예.”
“나를 찾는 여행을…….”
“……아프십니까?”
중년의 남성이 술 마시고 주정 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칼릭스가 짜증 부리지 못했던 이유는, 살짝 보이는
그의 옆모습에서 무언가를 읽어 냈기 때문이었다. 마카롱은 엎드린 그대로 계속 중얼거렸다.
“이해를 도와주자면…….”
“예.”
“……가짜, 아니거든요.”
“우쭈쭈, 우리 애기 삐졌니.”
“너라면 그걸 봤을 때 어쩔 것 같냐.”
“…말리…… 겠지요.”
“그리고?”
그리고? 칼릭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뭘 어떻게 할까. 왜 죽이려 했느냐 물어봐? 어머니와 대치하고, 싸워?
자신은 뭘, 어떻게 해야…… 혼란스러워하는 칼릭스의 귓가로 나직한 목소리가 꽂혔다.
“그런 거야.”
디에즈가 드러낼 때까지 마카롱은 그의 정체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 마력으로 이루어진 그 존재들.
그 종족끼리 공유하는 어떤 깊은 관계와 감정이 있다고 봐야 마땅했다. 로젤린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의가 어디서
왔는지도 대충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을뿐더러, 제 누이의 말대로 죽이고자 했다면 기회는 많았다. 이보다도 더 좋은 기회들이.
그것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벼랑 끝까지 몰리고 나서야 터트렸다. 칼릭스는 디에즈가 로젤린을 해친 일련의
과정에서 망설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해쳐야 했는가? 왜 반드시 해야만 했는가. 방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칼릭스가 아는 한, 리카르디스와 디에즈 간의 큰 갈등은 없었다. 그렇다면 과거의 ‘디에즈’가 아닌, 지금의
디에즈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더욱 깊고 오래된 시간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 왔던.
생각해 보니 마카롱도 인간이고 황실이고 기분 나빠서 한 공기 마시고 살 바에 차라리 벼랑에서 뛰어내려 죽겠다는
말을, 독수리의 모습으로 간간이 하고는 했다. 종이 달라 본능적으로 나오는 거부감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마카롱도 디에즈와 같은 감정을 깊숙한 곳에 품고 있는 게 아닐까? 그저 본인의 성정이 유난스럽게 신경질적인 줄
알았는데…….
“뭘 봐. 콩만 한 게 확 씨…….”
이렇게.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뭔가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다면 마카롱 또한 그 악의에
잠식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나? 디에즈가 그랬듯, 제 누이의 가슴에 칼을 꽂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나?
로젤린의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마카롱님.”
칼릭스는 마카롱의 말을 다시 돌이켜 생각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어머니가 로젤린을
찌르고 있었다. 그랬을 때 나는 어쩔 것인가.
‘아…….’
“그런 나는 결국 어쩌겠어.”
“그런 거야.”
그런 거였다. 칼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나.
까득…….
“……누님?”
“마카롱!”
로젤린이 창문을 훌쩍 넘어 우다다 달려왔다. 헐렁한 셔츠와 바지 차림새에 두 남자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어떻게
봐도 남자의 옷이었다.
“너, 이…….”
“누님, 그 옷…….”
“어디 갔었어.”
“몸은 어때.”
“완전 좋아.”
“기분은 어때.”
“진짜 좋아.”
“로젤린.”
“응.”
“내가 지켜 줄게.”
* * *
누구지?
저번 방문 때만 해도,
이라는 말로 환영 인사를 대신했던 인간이! 라헤, 저번에는 수고가 많았…… 따위의 치하와 함께 상냥한
목소리와 미소로 자신을 반기다니. 라헤안시는 코를 씰룩거리며 경직된 미소를 지었다.
“예에 형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이 아우가 아주 기쁩니다……. 가, 갑작스럽게 방문하겠다 연락을 드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귀한 손님이 왔는데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얘기하자. 뭐라도 들겠니?”
“라헤.”
“예, 형님!”
“급한 일이 있다면서.”
“아차.”
달그락.
리카르디스가 찻잔을 내려놓고,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켜 앞으로 숙이자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또’라…….”
159 화.
리카르디스의 말투가 평소처럼 돌아왔다. 라헤안시는 숨이 탁 트이는 후련한 기분에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그놈의 권위는 더럽게 귀중히 여기는 작자였다.
신관이 또 죽었다. 리카르디스는 두 신관 살인 사건의 배경에 디에즈나 검은달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디에즈는
혹은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단순한 원한이라면 고작 두 명의 피해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필요에
의해서? 5 황자의 탈을 쓰고 있는 강한 무언가와 검은달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고작 신관 두 명의 죽음으로 이뤄
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와사삭, 와작.
“…….”
정확히는 라헤안시 혼자 떠들고 있었고 잇세리온은 묵비권을 행사 중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인상이 험악해지기
시작하자 라헤안시가 아차 하며 눈치를 다시 살살 봤다.
“헤헤, 형, 소식 잘 물어 왔지?”
“……그래 뭐, 고생했다.”
두 사람은 조금 더 얘기를 나눴다. 베르움이 밤새도록 카드 게임을 연구하고 있다는 둥, 버려진 정원을 공사할
예정이었는데, 도자기를 들고 있는 여인의 석상이 부서져 있어서 어린 신관들이 술렁거리고 있다는 둥. 하카브
왕자가 대신전에 들러서 구경하고 갔는데, 진짜 잘생겼다는 둥, 아니 그래도 형이 훨씬 더 잘생겼으니까 걱정
말라는 둥. 9 할 정도가 라헤안시의 쓰잘머리 없는 잡담이었다.
로젤린 경의 머릿결이 좋아서 부러운데, 비법이 뭔지 알려 달라는 얘기가 나왔을 때, 리카르디스의 눈썹의 위치가
살짝 높아졌다. 그가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별다른 점은 못 느꼈고?”
“그으…… 렇지 않을까요.”
“내 동생, 라헤안시…….”
리카르디스가 씩 웃었다.
자신이 로젤린의 이상을 알아챌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니. 라헤안시가 아는 리카르디스는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와 같은 도박을 즐기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분명 로젤린이 일반적인 마인과 다르다는 얘기를
자신이 발설하지 않으리라, 확신을 가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정보일 뿐, 어떻게 다뤄야 할지는 미지수였다. 섣부르게 터트렸다가는 얻는
것도 없이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라헤안시가 그 결과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걱정하는 일은 ‘죽기밖에’가 아니라
‘얻는 것도 없이’였다.
싱숭생숭한 기분을 달래고 있는데 옆에서 베르움이 울컥 화를 냈다. 요즘 카드 게임에서 자주 지더니 성미가
까다로워졌다.
“아니 이놈이! 오늘은 아무 짓도 안 했거든? 편들어 주는 건 내 양심상 바라지도 않는다만, 누명을 씌우지는
말아야지!”
라헤안시는 창밖으로 제 신발을 던졌다. 베르움이 잔뜩 성질 낸 후, 시시각각 멀어지는 신발을 주우러 갔다.
18
짝짝짝짝짝…….
방 안을 울리는 박수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라리티아 남작 부인과 그녀의 하인들, 큰뿔산양 후작가의 하녀들,
그리고 클로에까지. 모두 감명 깊은 표정으로 박수쳤다. 그 옆에서 레티시아도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는 영원히
끊이지 않을 듯한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로젤린이 빙그르르 돌았다. 하얗게 빛나는 드레스 자락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클로에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로젤린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구경했다. 과거 로젤린의 어머니, 에델바이스가 사 준 드레스도 소매와
치맛자락이 풍성하고 반짝반짝해서 예쁘긴 했지만, 그녀의 안목으로도 지금의 드레스가 자신에게 훨씬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치마를 둥글게 부풀린 일반적인 드레스가 아니었다. 몸의 선을 따라 딱 달라붙어 내려오는 드레스 라인은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었으나 엉덩이 아래를 기점으로 뒤편으로 넓게 퍼졌다. 흰색의 천에는 레이스와 자수를
덧대었고, 반짝거리는 보석도 촘촘히 일정한 간격으로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케이크!”
“예?”
로젤린이 입을 떡 벌렸다.
“저, 저는 대체 귀에 뭘 걸고 있는 겁니까?”
860 개의 케이크?
“로젤린 경도 참. 귀걸이를 걸고 있잖아요? 참고로 옷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니까요. 먹다가 묻히고,
누구 패서 피 묻히면 안 되는 거 아시죠? 피는 잘 빠지지도 않아요.”
엄청난 결의가 느껴졌다. 클로에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움직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굳어 있었다. 목각 인형에다가 드레스를 입혀 둔 것 같았다. 클로에가 호호 웃었다.
“엉덩이 넣고.”
클로에는 계속해서 로젤린의 턱을 고정시킨 채 그녀의 날개 뼈 중앙을 부드럽게 눌렀다. 평소에 보던 로젤린의
곧바른 자세였다.
똑, 똑.
160 화.
로젤린은 조심조심 움직이다가 그녀의 말에 화색을 지었다. 로젤린이 급하게 거울을 보고 머리를 정리했다.
“그럼요.”
“예쁩니까?”
“세상에서 제일.”
클로에가 단언하는 말에 로젤린의 자신감이 상승했다. 라리티아 남작 부인도, 그녀의 하녀들도, 레티시아도,
클로에도, 모두 깜짝 놀라며 칭찬해 주지 않았나.
로젤린,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오늘의 자신은 매우 심각하게 예뻤다. 이 정도면 전하께서 깜짝 놀랄 것이다!
로젤린이 마음의 준비를 끝낸 모습을 보고 클로에가 손짓했다. 문이 열렸다.
* * *
성을 둘러싼 경비는 어느 때보다 삼엄했다. 병장기가 철컥, 덜그럭 소리를 울리는 바깥과 달리, 벽 하나를 두고
안쪽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춤을 추기도 하고, 술잔을 부딪치기도 했다. 황실 내에서 가장 넓은 파티 홀은
과장을 보태어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황제와 디에즈, 하카브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은 목적 없이 돌아다니며 아는 얼굴과
인사를 나눴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귀족과 왕족이 드나드는 문은 1 층, 황족과 그 파트너가 입장하는 곳은 2 층으로
연회장 안의 계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2 층 문이 열리면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든,
대화하든, 음식을 먹든, 밀회를 나누든 상관없이 그곳으로 눈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2 층의 육중한 문이 열렸다.
엘피디오였다. 인성과 상반되는 외모인 만큼이나 하얀 예복이 잘 어울렸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려오는
아가씨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고고한 자태를 선보였다. 스타스는 직감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동요하게 만든 것이
황족의 입장이 아닌, 그 옆의 아가씨로 인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파르딕트도 그 여자를 보고 커헉, 하는 소리를
냈다.
스타스가 깜짝 놀라 그의 발을 다시 꾹 밟았다.
이후, 참다못한 그녀의 아버지 강철발굽 백작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라 별장에 처박았다더라, 그 별장에서
하루에 몇십 장씩 성전만 필사하고 있다더라, 소문만 무성하게 있었는데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테레지아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요조숙녀인 양 사랑스럽게 웃으며 엘피디오와 나란히 발맞춰 내려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엘피디오를 둘러쌌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만큼의 세력이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때였다. 엘피디오는
기분 좋다는 듯 웃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갖은 공을 세웠더라도, 지지 기반이 단단하니 불안감이 가시는
모양이었다.
“……그건, 정말 그렇군.”
외적으로 보기에는 둘 다 잘생기고 예쁘니 흠잡을 구석 없지만, 외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흠잡을 구석밖에 없다는
게 정말 잘 어울렸다. 강철발굽 백작이 노심초사하는 표정으로 제 딸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아직까지 그녀의
특이한 기질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타스는 돌아다니는 르원을 손짓해 불렀다.
르원에게 그 경계 대상이 누구라 꼬집어 말하지 않았음에도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스타스는 거대한 커튼이
물결치는 뒤에서 르원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의 귓가로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튼에 가려져 있는 스타스를 보지 못했기에, 그를 지척에
두고 그의 주인을 욕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마인 하나를 등에 업고는 기세등등하지 않소. 이러다간 폐하가 건국일을 선포하고 난 다음에야 연극의
주인공처럼 나타날는지도.”
“이번 파트너도 붉은수레바퀴라 합디다.”
“…….”
“…….”
남자들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그들은 그들의 진영에 붉은수레바퀴의 딸보다 유난스럽고, 미천한 출신이고 뭐고
간에 반반한 얼굴에 홀랑 넘어간, 정신머리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또 다른 영애의 존재를 자각한
모양이었다. 남자들이 심기 불편한 듯 크, 크흠 하며 애써 강철발굽의 테레지아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일라베니아를 끌어갈 유력한 후보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자들이 웃는 낯으로 엘피디오에게 접근했다. 스타스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새기듯 바라보았다. 음악이 두 번 정도 바뀌었을 때였을까.
여기저기, 왼쪽, 오른쪽, 뒤쪽. 서로를 향하거나 아슬하게 빗겨 나간 시선들이 서서히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의 이목이 살짝 위를 향해 있었기에, 스타스는 리카르디스가 무도회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천사?”
“아, 아름다워!”
사실 건국제에 황족들이 입는 하얀색 예복은 매년 특별할 것 없이 비슷한 형태였다. 다른 이들처럼 색으로 승부할
수 없으니, 화려한 형태를 덧대고, 금실, 은실을 사용한 화려한 자수를 덧대고, 또 두르고.
그러나 리카르디스는 아주 적당히, 과하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단정하여 어딘가 금욕적으로 느껴지는 옷의
형태! 색은 고고하고, 형태는 단아하고, 장신구는 화려하게 띄워 주고, 그 모든 아름다움의 마침표는, 얼굴로!
어린 아가씨들이 눈물지었다. 다들 문이 열림과 동시에 환각을 보았다. 리카르디스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그런
환각이었다. 오늘따라 더욱 결 좋게 빛나는 은발, 몸의 선을 따라붙는 복식은 섬세한 자수로 인해 더욱 그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여러 개의 반지와 치장한 장신구들이 도리어 모자라 보일 정도의, 저 얼굴. 저, 몸. 완벽하다. 신이 빚은
피조물 중 가장 완벽한 형태!
좋게 봐 줘도 평범한 수준이라는 평가였다. 매섭고, 날카롭게 쭉 찢어진 눈매도 눈매고, 체구도 아담한
맛이라고는 없이 길쭉하고 튼튼하고 탄탄하니 여기저기 보이는 어린 아가씨처럼 아기자기하고 풍성한 솜사탕 같은
드레스가 어울릴 리가 없었다.
‘음…….’
계단의 뒤로 로젤린의 하얀 드레스 자락이 스르륵 끌렸다. 몸의 선에 딱 달라붙다가 엉덩이 아래부터 퍼지는
드레스는 인어의 꼬리처럼 우아하게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살랑였다.
굴곡진 검은 머리를 한쪽 어깨로 늘어트려 날카로운 눈매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매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잘 벼려진 칼같이, 맹수의 눈과 같이 어딘가 장엄한 기세가 느껴졌다. 어깨는 바르게 펴져 있고, 곧은
자세는 기품이 어려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는 그녀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더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161 화.
로젤린을 평가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의식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녀는 개별적으로 떨어트려
놓고 생각해 보자면 전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으나, 붙여 놓고 보니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남자 혼자
멀대같이 크거나, 여자가 난쟁이처럼 보일 정도의 부자연스러운 키 차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둘의 조화에 한 몫
더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점보다도 이따금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미소 짓는 두 사람의 사소한 행동에서 분위기가 녹아들며
맞춰지고 있었다. 같지 않아 겹쳐질 수는 없으나, 한 그림의 퍼즐같이 맞아떨어지기는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조화가 제법 묘해서 그런지,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이 계단을 내려오고도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다.
리카르디스의 눈동자는 로젤린만 담고 있었다. 환한 조명 아래 로젤린은 말 그대로 반짝, 반짝. 빛나는 중이었다.
그녀는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풍경이 휙휙 달라졌다.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멋진지. 넋을 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그 끈질긴 시선에 로젤린이 고개를 돌려 의문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딱, 두 시선이 맞아 떨어졌다. 로젤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아까까지 검날같이 주위를 겨누던 예리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딘가 멍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리카르디스는 무형의 기운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그녀의 허리에 제 손을 두었다. 로젤린이 멍한 표정을 천천히
누그러트리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빛을 받는 눈가가 반짝였다. 리카르디스는 손에 난 땀을 자신의 옷에 슥
문질러 닦았다.
오죽하면 클로에가, 상단에 큰 타격을 입어도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는 그 클로에가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지금, 파트너가 몇 시간 동안 씻고, 향유로 문지르고, 닦고, 만지고, 바르고, 입는 개고생을 하고 나타났는데,
예쁘다는 말 한마디가 없어? 그러고도 전하가 남자입니까? 그러고도 사람이야! 하고 윽박지르고 싶어 하는
살벌한 얼굴이었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진짜야, 내가 본…….]
[전하가 더 예쁘십니다…….]
확실히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자면 여지없이 그렇다 해야 할 테지만, 리카르디스는 곧이곧대로 ‘그건 그렇지’
라는 대답을 할 정도의 인간 말종은 아니었다. 그는 로젤린의 말에 부정한 후, 최선을 다해, “저기 사람들이 왜
쳐다보는지 아나? 경이 너무 예뻐서다.”라던가, “오늘따라 하늘의 별이 흐드러졌다. 경이 너무 눈부셔서 별인
줄 알고 마중 나왔나 보다.” 따위의 10 세 미만 소녀들에게도 먹히지 않을 법한 개수작을 부렸다.
로젤린은 그 내용보다 리카르디스의 필사적인 자세가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마음을 풀고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하지만 예쁘다는 말 자체를 받아들인 건 아닌 듯해, 리카르디스는 내내 마음이 쓰였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연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 이곳을 쳐다보는 젊은 남자들을 향했다. 그들의 눈동자는
정확히 로젤린을 담고 있었다. 흥미, 혹은 호감이 느껴지는 눈빛.
쏟아지는 시선과 감탄에 로젤린이 으쓱하는 걸 본 리카르디스는 혈압이 올라서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안된다.
이대로는 안 돼. 진짜. 내가 제일 먼저 기쁘게 해 줄 거야. 다가오는 놈은 죽인다.
“로젤린.”
“내 마음이 설렌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슬쩍 아래로 내렸다. 속눈썹이 깜빡거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지금 망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로젤린이 수줍어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로젤린은 수줍어하는 게 맞았다.
그렇게 도착한 연회장. 로젤린은 여지없이 자신이 할 일을 수행했다. 위험 요소가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느라
신경은 잔뜩 곤두서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누군가의 끈질긴 시선을 빠르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집요한 눈길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조명이 눈부셔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사이
리카르디스가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대리석에 반사된 빛무리가 넘실거리는 공간 속에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아름다운 리카르디스였으나, 환한 조명 아래의 그는 정말 벽에 그려진 그림이 튀어나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부드러운 눈빛과 표정이 로젤린의 마음 어딘가를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허리에 올라와 있는 단단한 손의
감촉에 몸 안쪽부터 떨려 왔다. 여전히 눈을 떼지 않고, 리카르디스는 말했다.
설렌다! 로젤린은 그제야 제 몸 안쪽을 잘게 떨게 만드는, 마음 어딘가가 간지러워 계속 웃음을 배어나게 만드는
이 이상한 마음이 ‘설렌다’라는 말에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데 이런 마음을 리카르디스가 먼저 말했다. 설렌다고. 놀라운 일이었다. 리카르디스 전하도 설레고 있었다니!
가슴을 뜨겁게 만들던 열은 점점 부풀며 머리로 올라갔다. 고개를 툭 떨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기묘한 열로 인해
머리가 무거워졌기 때문이었다. 전에 없던 감정의 자각과 함께 유례없는 반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수줍어하는’ 반응에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진심을 알아챘다 하더라도
‘아, 그렇지요? 저도 오늘 제가 굉장히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반응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갔다니.
“저도.”
“전쟁, 발타.”
“하카브.”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은 리카르디스는 완벽하고도 멋진, 아름답고 여유로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가실까요, 레이디.”
162 화.
사람들 사이를 거닐던 로젤린은 스타스를 발견하고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음식 냄새에 취한 듯 몽롱하던
눈동자의 빛이 예리해져 있었다. 수백 명의 사람이 있는 너른 홀을 훑어본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푸른등불 공작, 큰뿔산양 후작, 바다협곡 백작, 황금정원 자작 등, 리카르디스의 아래에 있는 가문 이외에도
줄지어 그에게 인사하러 다가왔다. 그때마다 로젤린은 한걸음 앞에 나서서 다가온 사람을 위아래로 훑었다.
심장박동과 눈동자,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어떤 수작을 부리려 하지 않은지 판별하기 위함이었다.
“실례합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느릿하게 쳐다보는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덫에
걸린 쥐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로젤린이 가볍게 숨을 쉬며 눈을 깜박이고, 한 걸음 물러서면 그때는 통과라는
뜻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파트너로 참석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호위를 데리고 온 건지, 파트너를 데리고
온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외양이 많이 달라졌다 생각했으나, 로젤린은 여기서도 여전히 로젤린이었다.
로젤린은 잠시 부단장 나단에게 불려 가 또 혼났다. 리카르디스 전하를 뵙고자 하는 사람마다 예비 범죄자 취급을
해 가며 위아래로 훑어보면 어쩌냐고 펄펄 날뛰었다. 로젤린은 멍한 얼굴로 나단의 잔소리를 흘렸다. 귀담아듣지
않는 방법을 터득한 모양이었다.
로젤린이 혼나는 사이 리카르디스는 저 멀리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엘피디오에게 시선을 두었다. 눈이
마주치자 엘피디오가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것인지, 미간의 주름이 평소보다 약했다.
“이야, 엘피디오 전하께서도 나름 성장하신 것 같군요. 예전 같으면 앞뒤 안 가리고 전하께 시비를 걸었을
텐데요. 그러다 도리어 혈압이 오르셨겠지만.”
연회가 계속되는 중에도 엘피디오는 리카르디스만 보면 다른 곳으로 자리를 피했다. 급한 용무가 있다는 듯
가장했으나, 다른 사람들조차도 엘피디오가 리카르디스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두 형제간의
관계라면 같은 성 안에 있는 것도 힘든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냐며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왼쪽은 레이몬드, 오른쪽은 파르딕트, 뒤쪽은 슈텐으로 평균 키 192cm 의 거대한 벽으로
둘러싼 후에야 마음껏 먹고 오라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불안해하던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스타스와 나단, 카일로 포함한 호위들에게 보호받는 모습을 보고 걸음을
옮겼다. 도도하지만 재빠른 발걸음이 얼른 먹고 돌아오겠다는 의지를 표출하고 있었다.
그렇게 떨어진 지 십오 분.
‘고작 십오 분 만에.’
로젤린을 둘러싼 192cm 의 벽들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음식 테이블에서 이게 맛있네, 저게
맛있네 하며 희희덕거리던 네 명의 기사들에게 화려하게 치장한 아가씨들이 돌입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예전에 클로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여자와 남자는 몸으로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이다!
로젤린은 흥미롭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적나라한 시선에 몸으로 사랑의 대화를 나누던 자들은
당황했다. 커튼을 열어젖힌 남자만 태연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이런 실례.”
아치 모양의 경계가 연회장 안쪽의 광경을 고스란히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발코니는 안쪽보다도 조용하고
어두웠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로젤린이 연회장으로부터 눈길을 돌린 순간, 그녀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밝은 금발을 뒤로 넘겨, 잘생긴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눈빛은 그윽하고 코도 오뚝했다. 총체적으로
평하자면 미남이라 말할 수 있었으나, 어딘가 오만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리카르디스 전하에 대한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토론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제 얘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빨리 돌아가 봐야 합니다.”
“급하시군요, 우선 숨 좀 돌리죠.”
“아니요.”
사자갈기라고 하면…….
사자갈기 공작가. 엘피디오의 어머니이자 일라베니아의 황후인 트리파의 가문이었다. 누구와 비슷하게 생겼다
했더니, 드윗의 얼굴에서 엘피디오가 언뜻 보였다. 같은 금발이라도 엘피디오와 디에즈보다, 엘피디오와 드윗이
더 형제 같아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드윗이 디에즈보다 성격이 더 나빠 보이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교육받았던 일라베니아 고위 귀족에 대한 정보 속에서 ‘드윗’이라는 이름을 떠올려 냈다. 사자갈기
공작가의 차남. 그러나 출중한 능력으로 장남을 꺾고 후계 위를 공고히 함.
그러니 자신을 드윗이라 소개한 이 남자가 사자갈기 공작가의 차기 공작이라는 소리였다. 엘피디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가문의 후계자.
어렸을 적 만났다는 말은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가기 전의 얘기일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의미가 없다 못해, 좋지 않게까지 변질될 수 있는 과거의 인연.
이 남자는 왜 자신을 부른 것일까. 로젤린의 눈은 드윗의 입에서 ‘사자갈기’라는 이름이 나올 때부터 경계의
빛을 담고 있었다
“기억상실이라더니 익히는 속도가 빠르군요. 로젤린 양은 예전부터 머리가 좋았죠. 그런데 아르페커 백작님이라니.
로젤린 양에게 그렇게 불리니 기분이 굉장히 미묘한데요. 그냥 예전처럼 편안하게 오라버니라 부르면 됩니다.”
“예, 오라버니.”
“…….”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어릴 때 로젤린 양이 나보고 혼인해 달라며 쫓아다녔던 건 기억합니까? 이렇게 예뻐질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확
결혼해 버렸을 텐데.”
“예?”
163 화.
로젤린은 그제야 그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젤린의 눈이 날카롭고 뾰족하게 바뀌자 드윗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연극배우같이 호탕하게 웃더니, 이내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젤린은 한껏 분위기 잡은 드윗의 촉촉한
눈빛을 무표정한 얼굴로 멀뚱히 지켜보았다. 딱히 할 말도 없던 터라, 입마저 딱 다물고 있자, 그의 반듯한
얼굴에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드윗이 쳇 하는 소리를 잇새로 내뱉었다.
드윗은 멋들어진 미소를 지우고 불량한 자세로 난간에 슬쩍 기대었다. 거리가 몹시 가까우나 정중하던 아까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로젤린은 드윗의 바뀐 태도보다, 그가 내뱉은 말이 신경 쓰여 되물었다.
주위에 남자들이 많은 직업의 특성상, 로젤린은 ‘꼬신다’는 은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고상함으로 무장하고 있는 기사들은 이상하게 여자 문제가 엮이면 고상함을 벗다 못해 천둥벌거숭이처럼 구는
경향이 있었고, 덕분에 저렴해 보이는 어휘도 몇몇 개 익힌 상태였다.
“인사한답시고 손등에 입술을 오 초 정도 붙이고 있으면 대부분은 알아채던데……. 더군다나 그 가까운 거리에서
갖은 교태를 부리며 웃고 집적거리면…….”
뭔가 좀 재수 없었다.
드윗의 말에 로젤린은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 안쪽, 저 멀리에 리카르디스가 보였다. 그리고 그 리카르디스에게
푸른빛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다가가는 중이었다.
테레지아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하자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지탱했다. 리카르디스의 품 안에 테레지아가 폭 안겼다.
로젤린은 순간 속에서 확 하고 솟아오르는 불길에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손이 우악스럽게
부채를 쥐었다. 대가 휘더니 파작,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테레지아가 리카르디스의 팔뚝을 은근히 더듬고 있었다. 로젤린의
얼굴에 살기가 비쳤다. 그녀는 테레지아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부채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이로
부채의 끝을 잘근잘근 물고 싶은 걸 참고 있던 로젤린은 무언가가 자신의 허리를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채의 사용법? 여러 형태와 여러 움직임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 로젤린은 자신의 부채가 어떤 모양으로,
어디에 가 있는지 확인했다.
“…….”
로젤린은 반 정도 펼쳐진 상태로 입술에 닿아 있는 부채를 조심스레 내리고는 드윗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의
얼굴에 퍼져 있는 흐린 미소에 로젤린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방금, 자신이 했던 행동이 무얼 뜻하는지는
클로에에게 이미 배워 알고 있었다.
‘키스해 주세요’ 였다. 그 ‘키스’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행위라는 사실과 더불어, 어딘가 야시시한
느낌이라는 것을 로젤린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렇게 초면의 사람과 나눌 만한 행위도 아니었고,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확실하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로젤린은 고개를 슬쩍 숙이고 웅얼거렸다.
드윗이 피식 웃었다.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백작님이라 부르겠습니다.”
“나를 벌레 쳐다보듯 하던 로젤린 양이 순수한 표정으로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기회를 놓치다니. 멍청한 짓을 했어.
이래서 사람은 한때의 욕망에 몸을 맡기면 안 된다고 그러는 건가.”
“사이가 별로 안 좋았습니까?”
“로젤린 양은 내 자유로운 행동을 그다지 곱게 보는 부류가 아니었고, 나는 형처럼 나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던 로젤린 양을…… 내심 돌이나 한 달간 건조한 바게트라고 생각했던 부류였지.”
“사이가 안 좋았군요.”
어쩐지 욕하는 것 같아 기분 나빴다. 로젤린의 그런 마음도 모르고 드윗이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로젤린은 조금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꼬시지 마시죠.”
“아,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그만. 아무튼, 나도 예전처럼 물불 안 가리던 때보다는 얌전해졌고, 로젤린 양도
예전보다는 유해졌지 않습니까. 오늘을 기회로 만나면 인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같이 놀러
나가기도 하고, 로젤린 양은 저를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그렇게 지내죠.”
“싫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백작님이 좀 웃기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자갈기는 전하와 반목하고 있으니, 저 또한 반목할
수밖에요.”
드윗이 씩 웃었다.
“로젤린 양이 잘못 알고 있는 점은, 사자갈기는 리카르디스 전하와 반목하는 게 아니라, 엘피디오 전하를 지지할
뿐이라는 것이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같은 말이면 똑같이 말하면 되지, 왜 부러 입 아프게 다르게 말합니까. 들어 본 적 있을 텐데, 로젤린 양?”
“그럼 누가 붙잡습니까?”
“비겁한 기회주의자.”
164 화.
“참고로 말하자면, 사자갈기가 대외적으로 내세운 건 용맹함이 맞으니 아무 데서나 ‘사자갈기는 비겁한
기회주의자’ 이런 말 하면 큰일 납니다, 로젤린 경.”
“그러면 말을 해도 되는 곳이 있습니까?”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드러난 로젤린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녀가 부르르 떨자,
그것을 추워서 나온 행동이라 착각한 드윗이 겉옷을 벗으려 했다.
턱.
드윗은 손목을 감싼 단단한 악력에 순간 악, 비명이라도 지를 뻔했다. 홱 고개를 돌려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한
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리카르디스는 엘피디오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그에 비하면 한없이 정중하고 점잖은, 그야말로 ‘황실의
고귀함’이란 단어를 인간으로 형상화한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인식이 박혀 있던 터라, 드윗은 지금
리카르디스가 ‘……이 새끼…….’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환청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의 ‘키스해 주세요’부터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이 집적거리는 모습까지 모두 보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각도 상 키스를 했다 착각했을 수도 있지만, 다 큰 성인 여자 남자가 밤의 연회에서 끈적한 기류를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제야 드윗은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맹수 같은 눈빛이 보통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만약 시선으로 찌를 수 있었다면 난도질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설마…….’
누가 봐도 순진한 아내를 꼬여 낸 불한당을 족치러 온 남편…… 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별다른 거사도
치르지 않았건만 익숙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다니. 드윗은 속으로 한탄했다. 그가 아픈 손목을 어루만지며 살짝
묵례했다.
스르륵. 그게 끝이었다.
드윗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신의 가슴을 한바탕 휩쓸고 간 위기와 허망한 감정을 곱씹었다. ‘그’ 리카르디스
전하가, ‘그’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을?
드윗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다가 저 멀리에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아가씨들을 보고는 근사한
미소를 걸친 채 걸음을 옮겼다.
스르륵.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를 갈면서 지금은 붉은 커튼으로 가려진, 드윗이 사라진 발코니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까
물러간 드윗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올 기세였다. 하지만 리카르디스가 그의 머리채 대신 쥐어 잡은 것은 자신의
머리였다. 정돈된 머리를 헤집는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서 있었다. 잘 보니 살짝 떨리고 있기까지 했다.
리카르디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단단한 손마디가 로젤린의 입술을 부드럽게 스쳤다. 리카르디스는
그에 그치지 않고 엄지손가락으로 화장이라도 하듯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그럼 합의된 사항이란 말인가? 그대가 허락했다고? 그러고 보니 입가에 부채를 먼저 가져다 댄 건, 젠장.
로젤린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고? 그래, 그대도 이제 스물세 살, 다음 달 생일이 지나면 스물네 살!
어엿한 성인이라는 걸 내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그래도 상대는 가려야지 사자갈기의 드윗? 드윗 아르페커? 그
자유분방한 하반신을 가진 몹쓸 망종…… 아니, 나와 반하는 세력의 남자와?”
“아, 백작님은 전하와 반목하는 것이 아니라 엘피디오 전하를 지지할 뿐이라고 합니다.”
“로젤린 에스터!”
이거다.
입에 부채를!
로젤린은 답을 유추해 냈다. 확실히, 다른 세력의 유력한 가문 후계자와 자신이 입을 맞추다니, 간자라
의심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의 분노는 그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었으나, 로젤린은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165 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전하. 저는 백작님이 리카르디스 전하에 대한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토론을 하자고 해서
……. 아차, 백작님이 말하고 싶은 사람한테 사자갈기는 용맹하지 않다는 얘기를 전해도 좋다고 했는데요, 제가
전하께 말씀 드리고 싶다고 말했었던가요?”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목소리는 음산했다. 로젤린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지 대답을 빨리
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키스해 주세요……!”
“알고 있었어?”
이후 닿은 것은, 차갑고 시린 목소리가 아니라, 싸늘해진 누군가의 입술이었다. 로젤린의 입술이 거칠게
짓눌렸다.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읍!”
로젤린은 놀라서 짧은 비명을 질렀다. 입술이 닿은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더 나아가, 입술 위를 뜨겁고 축축한
무언가가 느릿하게 가로질렀다.
“으읍!”
로젤린은 벌레를 발견한 6 살배기 어린아이가 입을 가리고 경악하는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놀랍고, 간지럽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머릿속을 잔뜩 채웠다.
로젤린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숨 가쁜 애원을 했다. 리카르디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 무표정한 얼굴 속, 미동 없이 자신을 포착한 눈을 보고 부르르 떨었다.
로젤린이 한걸음 물러서자 리카르디스가 한걸음 따라붙었다. 몇 번 반복된 짧은 술래잡기는 로젤린의 등이 벽에
닿고서야 끝났다.
로젤린은 눈동자를 굴리며 여전히 당황하는 중이었고, 리카르디스는 벽에 자신의 구두코가 닿을 정도로, 그녀와
바싹 붙어서 섰다. 몸이 틈새 없이 딱 달라붙었다. 로젤린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그녀의 온기와 심장
소리가 리카르디스를 부드럽게 짓눌렀다. 그는 가만히 로젤린을 가만히 응시하다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로젤린의 몸이 흠칫 떨렸다.
로젤린의 엉덩이 위, 허리 부근에 올라와 있던 커다란 손이 스르륵 움직이며 그녀의 날개뼈 아래까지 지그시 쓸어
올렸다. 몇 겹의 천 위로 닿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의 손가락이 로젤린의 척추를 따라 들어간 부분을 부드럽게
덧그렸다.
“싫으면 밀어내.”
앞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를 들었다.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학습이 아니라 본능이었나?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았다.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입술과 입술이 몇 번씩이나 부드럽게 맞닿기만 했다. 그의 차가운 입술이 열 오른
로젤린의 온도와 융화될 때까지,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입가와 입술에 끈질기게 입 맞췄다. 서서히 로젤린의
움츠러든 어깨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경직된 몸이 서서히 이완되고 있음을 느끼고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살짝 깨물고, 그 자리를 핥고, 빨아 올리고, 딱 다물린 입술의 틈새를 정성스럽게.
그녀의 감탄은 곧 감각에 침식당했다. 팽팽한 이성이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몸을 꽉 결박한 기분 좋은 압박과
자신의 뒤 목을 감싼 리카르디스의 차가운 손끝, 입안을 뜨거운 온도로 채우는 그 모든 감각이 생생했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입가를 핥더니 입술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그 후로도 핥고, 빨고, 문지르고. 한참을
지분거리던 그가 숨을 가볍게 몰아쉬다 머리를 살짝 뒤로 물렸다.
리카르디스 시선이 로젤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촉촉하고 붉어진 눈가, 젖어 있는 입술을 훑어 내렸다.
리카르디스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로젤린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리카르디스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리카르디스가 어이없다는 듯 노려보다 그녀의 입술을 왕하고 깨물었다. 입술로 잡아채듯 한 것이라 아프지는
않았다.
“냄새만 좋나?”
“예?”
리카르디스가 곁눈질로 그녀를 재촉했다. 로젤린은 약간 어색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한 발짝 뒷걸음질한 리카르디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쥐구멍을 포함한 숨을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절망 가득한 얼굴을 큰 손으로 뒤덮어 가렸다. 시간이 흐른 후,
리카르디스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청해라.”
“예?”
“결투 재판을 신청해라. 실수로 죽여도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지. 신청해라. 그리고 날 죽여. 심장은 여기다.”
“……….”
“충성 맹세를 했다고 배려해 줄 필요 없다. 나는 그대가 이런 행위에 대한 통념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맞을 거고. 그런 약삭빠른 계산이었던 것이지. 나는 잘생겼고, 솔직히 그대도 나한테 호감이 좀 있지 않나.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잘생겼으니까, 그대가 잘 모르는 행위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거부하지 않을 거라는 그런
계산을…… 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은연중에 했을 거다. 금수보다 못한 머저리에게는 죽음이 차라리 자비로울
터. 죽여라.”
리카르디스는 다른 사람이 로젤린에게 입맞춤을 강요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입술이 닿기도 전에 머리가 반파되어
있는 결말밖에 나지 않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현실적인 위로였다.
“……그건…… 정말 그렇군.”
“기분 좋았습니다.”
리카르디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166 화.
“전하?”
“……이건…… 수치도 모르는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좋다고 그 말을 되새기며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서 나온
자괴감의 발로이니……. 그대는 상냥함으로 더 이상 나를 찌르지 마라……. 시궁쥐에게 햇살은 너무 눈부시다…
….”
“로젤린.”
“예.”
“방금, 그, 걸. 내가 한, 입, 입. 마, 앚…… 이입…….”
“키스요.”
“……………그래. 그것.”
잘은 모르겠지만 아까 전부터 극단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한탄하며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로젤린은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전하께서 반복해 사과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하, 저도 키스에 대해서는
무지하지 않습니다. 클로에 양에게 배운 적 있습니다.”
난데없는 칭찬에도 로젤린은 뿌듯했다. 난간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서 있던 리카르디스가 똑바로 몸을 일으켰다.
바람이 불었다. 그의 머리가 넓게 퍼지며 달빛에 빛났다. 아름다운 꽃이 휘날리는 것 같았다. 로젤린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예, 전하.”
“내가, 그대에게.”
로젤린은 갑작스럽게 울리기 시작한 심장 소리에 깜짝 놀랐다. 자신의 심장이 이렇게나 세차게 뛸 수 있었는지는
또 몰랐다. 리카르디스에게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컸다. 피가 빠르게 도는 느낌이 들더니, 귀 끝에 열이
몰렸다. 로젤린은 괜히 손장난을 하다가 예, 하고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더 이상 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어,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따뜻한 입술이 망설임 없이 그녀의 입가에 살포시
닿았다. 정중하고, 부드럽고, 아주 연약한 것이 부서질까 염려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 것만 같았다.
짧은 키스가 계속되며, 로젤린은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쪽쪽,
키스는, 사랑한다는 말의, 쪽, 다른 표현. 사랑한다는 말이야, 쪽.
로젤린의 볼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뭐지, 사랑한다는 표현인데 왜 이렇게 몸 둘 바 모르는 기분이 되어 버리고
마는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장난기 넘치게 미소 짓고 있는 아름다운 남자를 보자니 눈도 시리고,
가슴도 시리고, 그에 반해 얼굴과 몸은 뜨겁게 달아오를 뿐이었다.
로젤린이 바라보자 리카르디스가 제 가슴에 올라와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 입 맞췄다. 손끝, 손마디, 손바닥에
도장이라도 찍듯이.
“그대는 정말…….”
“……예뻐.”
“너무 예뻐.”
리카르디스가 붉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로젤린은 눈을 굴리며 망설이다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리카르디스처럼 혀를 막 이렇게 저렇게…… 하는 그건 몇 번 더 하고 배워 봐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똑똑.
그때,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리카르디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로젤린도 닫힌 붉은 커튼을
바라보았다. 커튼에서 그런 딱딱한 소리가 날 리 없으니, 누군가가 발코니 문가를 두드렸다고 봐야 했다.
리카르디스가 황급하게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살짝 촉촉한 입가를 문질러 닦고, 드레스 자락을
정리했다. 분주한 손놀림과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무슨 일인가.”
“……손님들이, 찾으시기에.”
울음을 삼키는 비통한 목소리였다. 내용은 정중했으나 말투는 그만 좀 쪽쪽 대고 나오라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저 피눈물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레이몬드는 안쪽에서 일어난 분홍빛 기류를 읽어 낸 게
틀림없었다. 리카르디스는 화끈해진 얼굴을 손 부채질로 식혔다.
“크흐흑…….”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이 두 사람을 스쳤다. 로젤린은 뱅글뱅글 도는 동작을 하며 여지없이 웃다가, 리카르디스의
눈에 비친 달빛을 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 *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그새 마음을 많이 정리한 듯이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그러나 들어온 직후, 화장이 말끔하게 지워진 로젤린의
입술을 본 레이몬드는 큭, 하는 신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손을 덜덜 떨면서도 완벽하게 로젤린의 화장을 고쳤다.
“전하께서는…… 배가 부르시겠습니다…….”
167 화.
“내가 그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서. 악운을 부르는 주문이라고 할까. 그런
느낌이다.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겠다 다짐했었는데, 아까 만났을 때 너무 당황해서 실수로 불러 버렸어.
오늘은 반드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무슨 상황에든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게 대비하라.”
“그렇습니까?”
세 사람은 발코니에서 나와 연회장에 발을 들였다. 잠시간 사라졌던 리카르디스가 나오자 눈을 번쩍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로젤린은 발코니에서 있었던 일로 이상하게 들떴던 마음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리눌렀다. 그녀의
감각이 다시 예리하게 주위를 경계했다. 화색이 돌던 얼굴은 차갑게 식고, 눈빛은 날카롭게 세워졌다.
“귀여워…….”
“…….”
“그런 건 적당히 모른 척하는 거다. 딸 빼앗겼다고 언제까지 툴툴거릴 생각인가, 좀생이처럼. 이 제국에 나만큼
괜찮은 남자가 있을 것 같나.”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두 남자의 시선이 다시 로젤린에게 쏠렸다. 그녀는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부채를 펴 살랑살랑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반갑습니다’, 혹은 ‘안녕하세요’ 쯤 되는 행동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가 사자갈기의 드윗을 보게 되었다. 그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아, 아르페커 백작님이 말하고 싶은 사람에게 말하라 했습니다. ‘로젤린 양이 잘못 알고 있는 점은, 사자갈기는
리카르디스 전하와 반목하는 게 아니라, 엘피디오 전하를 지지할 뿐이라는 것이지.’라고.”
“그게 그거 아닌가.”
“제가 그렇게 말했더니, 백작님이 ‘같은 말이면 똑같이 말하면 되지, 왜 부러 입 아프게 다르게 말합니까. 들어
본 적 있을 텐데, 로젤린 양? 사자 갈기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용맹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기에 제가 ‘
그럼 누가 붙잡습니까?’ 물었더니…….”
“비겁한 기회주의자.”
“그 말을 아십니까?”
단순히 수작 부리는 것으로 보기에는, 상대의 덩치가 컸다. 그런 잡스러운 수작질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거란 말이었다.
“품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적당히 얘기를 들어 주는 척하고, 드윗이 2 황자와 접촉했다, 엘피디오 전하 측에
알려서 배반자로 낙인찍히게 한 다음에, 울며 겨자 먹기로 재산과 정보를 토해 내게 하는 수단으로 그냥 이용만
해도 되니까요. 영 내키지 않으시면 그렇게 쓰고 버리셔도 되지 않겠어요?”
“마음에 들어.”
리카르디스는 클로에의 흉악한 획책에 흐뭇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피디오가 저 멀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또다시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뎅…….
그때,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가 너른 연회장을 한가득 메웠다. 대신전의 종이 황제가 등장할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쿠구궁…….
황제는 곧바로 계단을 내려오지 않고 가만히 서서 아래에 선 사람들을 응시했다. 제국민들과 건국일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타국의 인사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온화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을 기점으로 많은 이들의 눈이 바빠졌다. 황제의 호위인 얼음창 기사단, 그리고 위험한
인물이 도사리고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는 하얀밤 기사단원들까지.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며 사방을 경계했다.
황제는 고개를 숙인 자들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사람들이 몇 발자국씩 물러나며 길을 만들었다. 그가 흐뭇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황제는 이 자리를 찾은 모든 이에게 이델라브힘의 축복이 가득하기 바란다는 의례적인 인사로 포문을 열었다.
나라가 건국되었다는 하나의 주제로 매년 얘기하다 보니 특별함이 있을 리 없었다. 고만고만한 문구의 반복들.
어쩐지 작년에도 들었던 것 같고, 재작년에도, 한 십여 년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 얘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어?”
어느 귀족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황제 라이노와 주위 모든 사람의 매서운 눈빛이 그를 향했다. 그러나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에 당황하지 않고, 어느 한 곳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남자가 바라보는 곳을 향했다. 별이 총총한 어두운 밤을 명화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줄지은
창문들. 그 지극히 평범한 광경 속, 이상한 것이 보였다.
“불이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삐익!
기사단장 스타스가 손가락을 물어 휘파람을 불었다. 흩어져 있던 하얀밤 기사단원이 리카르디스를 둘러쌌다.
로젤린도 빠르게 전투태세로 돌입해 그를 등지고 다른 사람들의 동향을 살폈다. 스타스의 경고에 정신을 차린
얼음창 기사단도 잽싸게 황제와 황비를 보호했다.
저 멀리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하나, 황제가 등장하는 시간에 맞춰 일어난 불? 사고라 보기에는 공교로웠다. 만약
누군가가 발견했다면 진작에 소화 작업에 들어갔어야 했다. 말인즉슨, 성의 경비가 뚫렸다는 것.
“하카브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디에즈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리카르디스는 하늘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저것은 단순한 속임수다. 이미 위험은 불타는 석영
성을 벗어나 이 홀에 숨죽이고 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화려하게 일을 벌일수록 황제의 보호는 더더욱 강해진다.
“2 황자 전하!”
얼음창 기사단이 하얀밤 기사단에 협력을 요청했다. 황족들을 모아 같이 보호하려는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황제에게 걸음을 옮기면서 계속 머리를 굴렸다. 이러한 사태에는 보통 황족들을 같이 보호하고는 했다. 디에즈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상황을 바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황족들을 한곳에 모을 필요성?
어째서?
엘피디오는 잽싸게 보호의 원 안에 들어가 있었다. 어린 황녀들도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단서를 따라 사고가 흘렀다. 그는 자연스레 로젤린의 호위 첫날을 떠올렸다. 익숙한 시종의 얼굴을 하고,
날카로운 비수를 속에 숨기고 있던 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들어 황제를 쳐다봤다. 얼음창 기사단이 사람들을 바라보며 단단한 경계를 세우고 있으나,
위험은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이 아닌, 뒤에 있었다. 황제의 옆에!
사취. 시체의 썩는 냄새였다. 진한 향수의 냄새가 억누르고 있으나, 로젤린을 그 아래 가려져 있는 역한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리카르디스가 황제가 위험 바로 코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시간에
이루어졌다.
“로젤린!”
휘익, 로젤린이 공중에서 빙글 빠르게 돌았다. 무언가가 빛을 받아 반짝이며 날아갔다. 얼음창 기사단은
갑작스레 황족을 향해 공격해 온 그녀를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챙그랑.
로젤린의 귀걸이와 누군가의 손에서 떨어진 비수가 대리석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로젤린은 얼음창
기사단의 어깨를 밟고 한 번 더 뛴 다음 황족들이 모인 곳에 있던 남자를 덮쳤다.
“꺄악!”
황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를 제압했다.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얼음창
기사단이 로젤린을 막기 위해 무기를 뽑았으나,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한명씩 맡아 그들의 팔이나 관절을 꺾으며
필사적으로 방해했다.
“이게 무슨, 불경한!”
“스타스 경, 이게 무슨 짓이오!”
1 황자,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의 손을 완벽하게 제압한 로젤린이 그의 얼굴, 턱 뒤를 더듬더니 콱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얼굴 가죽이 짝 소리와 함께 벗겨지며, 코와 골격이 뭉개진 흉한 얼굴이 드러났다.
꺄아아악!
황후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엘피디오가 들고 있던 단검에 찔릴 뻔한 황제는 아직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엘피디오가 왜 다가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로젤린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가까이에 접근하면, 그녀가 반드시 알아챘을 것이기에. 대체 언제부터 낯선 자가 ‘엘피디오’의 가죽을 쓰고
있었나?
리카르디스는 곰곰이 돌이켜 생각하다가 디에즈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가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때의 황제는 엘피디오와 얘기 중이었다. 어쩌면, 디에즈는 황제가 아닌 엘피디오를 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로젤린의 밑에 깔려 제압당해 있던, 엘피디오의 얼굴 가죽이 벗겨진 남자가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남자가 이를 콱 물었다. 입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로젤린이 암살자의 머리를 콱 잡아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찍었지만, 이미 그가 무언가를 뱉어 낸 후였다. 남자의 입에서 튄 거뭇한 액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5 황녀 레이비아의 드러난 다리에 한 방울 투둑, 튀었다.
“아아악!”
“꺄악!”
로젤린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피 흘리고 비명 지르는 사람들을 바라만 봐야 했다. 하나, 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춤을 추던 사람들이 무력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그 위를 살아 있는 자들이 살고자 무심히 밟고
지나갔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어느 어린아이의 심장에 길쭉한 암기가 박혔다. 소년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심장에서부터 피가 뿜어져
나왔다. 공중에 흩뿌려지는 핏방울들을 본 순간, 로젤린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방울방울, 조명을
받아 빛나는 핏방울에 사람들의 절규가 비쳤다.
로젤린은 어쩐지, 이 장면이 굉장히 익숙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몸이 떨려 왔다. 숨이 턱 막혔다. 아이의 몸이
서서히 기울어지며 대리석에 가까워졌다.
쿵!
소년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지며 큰 소리를 냈다. 비명이 가득 찬 난장판 속, 그 작은 소리가 들릴 리 없으나,
로젤린은 머릿속에 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걸 기점으로 로젤린은 깨어났다. 헉,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까지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 사태를 주도하던 남자들은 점차 제압되었다. 연회장을 지키던 기사,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검을 내려놓고 왔으나, 본디 무기를 들고 있는 시간이 훨씬 긴 자들이 전면적으로 나섰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큰뿔산양 후작, 크레이튼. 큰뿔산양의 아렌트, 바다협곡의 자식들, 강철발굽 백작,
사자갈기 공작가의 후계자를 포함한 일라베니아의 귀족들과, 타국의 사람들도 몇 나서서 남자들을 제압했다. 그중
회색 머리칼을 가진 낯선 시종이 나선 이들 중 가장 많은 머릿수를 처리했다.
“으으으…….”
“아파…… 살려 주세요…….”
남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진실을 숨기는 비겁자여, 우리는 피로써 시작을 알린다. 피로 쌓아 올린 권좌가 무너질 때가 되었다! 이미
너희들의 손으로 인해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던 그것이, 이델라브힘의 빛과 함께 스러져 갈 때가 되었다! 보아라,
위대한 밤, 크레안 티다니온의 빛이 떠오르리니!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너에게 보낸다! 네 혈육의
피로써, 시작을 알린다!”
169 화.
“이 건방진…….”
철컹.
케틀린은 병사들이 벽에 비스듬히 세워 두었던 창을 드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도 온몸이 성하지 못하게 두드려
맞으리라. 그래도 그녀는 저들의 돼지 멱따는 소리를 멈춘 것만 해도 기뻤다.
말투는 내가 실수를 했다는 듯 고분고분했으나, 그녀의 가운데 손가락이 기상 넘치게 그들을 향해 세워져 있었다.
일라베니아 거리에서 통용되는 욕으로, 해석을 하자면 네…… 를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남자들이 허리춤을 더듬어 열쇠를 다급히 찾는 소리가 들렸다. 케틀린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곧 익숙한
고통이 찾아오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표정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쾅!
으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이 계단 통로를 타고 실려 왔다. 병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황급히 케틀린이 갇힌 감옥의
철창문을 다시 걸어 잠갔다. 평소 같았으면 네놈들이 그러면 그렇지, 여자 하나 못 이겨서 꽁무니 빼고
도망친다고 욕설이라도 해 주었을 케틀린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거리, 위치. 모든 것을 혼동하게 만드는 이 거대한 마력의 기운이란! 케틀린의 등골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최하층을 지킬 네 명의 병사를 제외한 나머지 남자들이 모두 위층으로 올라갔다. 케틀린은 철창은 잡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거대한 마력보다 한 발짝 먼저, 소리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돌계단을 지그시 누르며
다가오는 느긋한 발걸음 소리였다.
“아악!”
“……그래.”
“이봐, 나, 나를 꺼내 줘!”
“죽여주는데! 진짜 죽였으니까!”
“잘생겼네…….”
고문과 오랜 감금으로 약간 미쳐 버렸는지 독특한 감상평이 많았다. 하카브는 그들의 감상평에 씨익 웃고는
케틀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녀는 하카브가 자신을 구하는 목적으로 일라베니아에 발을 들였을 거라고, 새끼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모든 인간은 쓰기 쉬운 도구와 다름없다는 사실은 정말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 이번 건국제에 흥미로운 게 있어서 보러 왔지. 겸사겸사 네가 살아 있는지도 확인해 보기도 하고. 그런데
왜 시선이 약간 빗겨 나간…… 아, 눈이 안 보이나?”
“가르면 되잖아요.”
“더럽잖나.”
“옆에 애들은 뒀다가 수프 끓여 드시려고 그러시나. 원래도 직접 뭐 하시지도 않는 분이 왜 그러신대.”
“그 약해 빠진 놈 중에 아순이 있단다.”
“전하, 빨리 꺼내 주세요.”
쿵!
“아, 역시 느껴지나?”
“저…… 사람은.”
“나의 검은 달이다.”
그러나 케틀린은 ‘검은 달’이라는 이름을 하카브가 얼마나 귀중히 여기는지 잘 알았다. 으레 발타라는 나라가
마력을 숭배하기를 저를 낳은 어미보다, 제 목숨을 구한 은인보다, 수천 명을 살리고 죽은 위인보다 대단하다
여겼으나, 하카브는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띌 정도로 마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력을 타고나는 자가 많은 발타 왕조에서, 미숙아로 다름없이 취급받는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난 설움이 표출된
것일까? 느끼지 못하는, 알지 못하는 힘을 숭배하는 그의 모습은 솔직히 케틀린이 보기에는 좀 우스운 감이
있었다. 동경, 갈망. 글쎄 그 끈적한 욕망을 표현하면 좋을지.
“디에즈.”
170 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케틀린은 하카브의 말로 인해 그 거대한 마력을 지닌 사람이, 디에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케틀린은 경악했다. 그녀가 아는 디에즈라고는 일라베니아의 5 황자 디에즈밖에 없었다. 디에즈?
그가 마인이었다고?
뚜벅, 뚜벅.
마침 하카브의 호위가 병사의 시체 안에서 열쇠를 꺼내어 왔다. 하카브가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쾅!
손짓하며 호위를 닦달하는 하카브의 말 위로, 귀가 먹먹하게 멀어 버릴 정도의 굉음이 덮쳤다. 하카브는 놀라지
않고 그를 돌아보았다.
마력으로 강화된 일격이 철창을 타격했다. 하지만 우수수, 천장에서 흙먼지와 돌가루가 떨어질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쾅!
쾅!
쾅!
쾅!
캉, 콰드득, 끼이익. 소리가 연쇄적으로 울렸다. 서서히 휘어지던 철창이 완전히 구겨졌다.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한 돌벽이 검고 긴 강철을 뱉어 냈다. 갈라진 틈새에서 조각난 돌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케틀린은 보이지 않는 광경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수년간 그녀를 가로막던 거대한 철창이 무너진 모습은 본 적
없어 쉬이 그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에, 그들이 쌓아 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그 소리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케틀린은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더듬더듬. 가슴팍부터 올라간 그녀의 손이 디에즈의 얼굴에 닿았다.
케틀린은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남자의 눈물을 닦았다.
“네? 죽이셨어요?”
하카브가 계속해 로젤린에 대해 탐욕을 드러내자, 엘피디오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난리도 아니었다. 자신의
사람도 아니건만, 발타의 후계자가 황실의 ‘것’을 눈독 들이니 경계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로젤린 경이야, 충실한 황실의 기사지요. 이번 무투 대회도 황실에 대한 충정을 내세우기 위해 참가한 것이니
말입니다. 다양한 경험을 위해 지금은 리카르디스의 밑에서 수행하고 있으나 이제 그녀도 슬슬 방황을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카브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자 그는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순진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카브 왕자. 우리들의 위치에서는 마음에 두고, 두지 않고가 중요한 부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필요 하느냐’, ‘필요하지 않으냐’인 것이죠.]
하카브는 기절할 만큼 좋아서 넘어갈 뻔했다. 아름다운 흰색 털의, 야수의 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림자! 디에즈가 로젤린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때만 떠올리면 극도의 흥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케틀린에게 설명하는 지금도 하카브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도는 중이었다.
“그래, 그래. 디에즈가 그거였다. 진즉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무튼, 그때 디에즈가 얼마나 아름다웠냐면…
….”
그림자. 케틀린은 그 거대한 마력의 정체를 깨우쳤다. 과연, 하카브 왕자가 ‘나의 검은 달’ 운운을 할 법한
일이었다.
형태를 따라 ‘그림자’라 불리는 존재들에 관한 것이었다. 마력을 숭배하는 발타에게 그 존재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위대한 것이었다.
“듣던 중 다행이네요.”
디에즈가 급작스럽게 일으킨 사건을 뒤처리하는 상황에서도 그런 장난질까지 치다니.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이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엘피디오를 향한 감정은 소소하지만 차곡차곡 쌓아 제법 몸집을 불린
상태였다. 그가 겪었다는, 나름의 고난 정도로는 맞바꿀 수 없었다.
“뭘 이렇게 태우셨어요?”
171 화.
거리가 소란스러워졌다. 남자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케틀린은 마수처럼 날뛰는
사람들에게서 피어오르는 마력의 기운을 읽었다. 이 근처뿐 아니라, 수도 저 멀리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가고
있었다. 마치 구름에 가려졌던 무수한 별이, 바람이 지나며 제 모습을 일시에 드러내는 것처럼.
케틀린이 말 위에 앉아 씩 웃었다.
“제법 장관인데요.”
* * *
엘피디오가 죽었다. 모두의 예상을 넘어선 파란이 일게 될 것이다. 발타와의 전쟁 이전에 일라베니아 내부에서
무언가가 먼저 터져 나올 수도 있었다. 갖은 준비를 한 상대를 두고 최선의 대비를 할 수 없는 전쟁의 끝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발타 쪽에도 일라베니아와 걸맞은 혼란을 선물해야 하리라.
하카브는 발타의 힉살라, 아돈을 대신해 왕실을 통제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사라질 경우, 발타의 움직임에는
당분간 제동이 걸리게 될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놀란 황제고, 기절한 황후고 뭐고 간에 제일 먼저 하카브를
쫓으려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막 도착한 성 기사들과 밖에 경비를 서던 병사들의 무기를 잠시 빌렸다. 빌려주는 사람들과
합의가 되지는 않았으나, 급한 상황이라 하나하나 설명할 틈이 없었다. 로젤린은 얼음창 기사단의 부단장
마르틴에게 검을 뺏어 왔다.
로젤린은 긴 드레스 자락을 찌익 찢었다. 들쭉날쭉하게 찢어진 드레스는 그녀의 무릎 위에서 살랑거렸다.
시종들이 급하게 말을 몇 마리 데리고 왔다.
삐이익----
먼저 살펴보러 떠났던 마카롱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삐익, 삑 삑, 깩!
독수리가 무언가 조잘조잘 얘기하자 로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로젤린의 말을 들은 하얀밤 기사단원 모두가 고삐를 틀어 방향을 바꾸었다. 로젤린도 재빨리 그들을 따랐다.
아란페디스의 검은 독사. 일라베니아의 암흑가 큰손 중 가장 유명한 자였다. 디에즈가 그의 표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로젤린 너 진짜!”
잘못한 것은 빨리 인정해야 했다. 눈치 보던 로젤린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자 씩씩 화내려던 하얀밤 기사 단원들이 일시에 숨을 죽였다.
그녀는 서쪽 거리뿐 아닌, 수도 비스타 전역에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마력을 느꼈다. 마수에서나 느낄
수 있는 기운이 이질적이었다. 검은달의 인조 마인 부대일까 생각해 보았으나, 그보다도 더 이성을 잃고 날뛰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수도에 있었다면, 분명 그들의 존재를 알아챘을 것이다. 이것은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석영 성의 화재를 신호로, 검은 독사가 마수의 결정을 무작위로 사람들에게 심고 다닌 결과였다. 마수의 결정은
마치 잠자고 있는 씨앗 같아 아주 가까이에서도 미약한 마력을 느끼는 정도였으나, 그것이 사람의 몸을 토양 삼아
자라나기 시작하면 폭발하듯 기운이 터져 나왔다.
“서쪽 거리를 마수의 결정과 같은 종류의 마력이 뒤덮었습니다. 수, 스물…… 아니, 스물다섯. 서른셋. 일곱,
계속 늘어납니다. 여기저기에서 날뜁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확인했습니다. 거리에 많은 피해가
예상됩니다!”
리카르디스가 이를 으득 갈았다.
“로젤린!”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로젤린을 목격한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로젤린이 고양잇과의 동물처럼
유연하게 착지하고는 앞으로 한 바퀴 굴렀다. 그녀의 시야가 휙휙 바뀌었다. 빠르게 달려오는 소, 바닥, 하늘.
쾅!
살과 근육이 있는 두 생물이 부딪쳤다고 믿기지 않는 딱딱한 굉음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로젤린의 맨발이 바닥에
박혀 드드득 밀려났다. 그러나 고작 한 걸음 반 정도의 거리.
소의 난폭한 질주로 시끄러웠던 거리가 순식간에 잠들었다. 짐승이 앞발을 들며 일어서려 했으나 로젤린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을 굴러다니는 부서진 나무 각목을 발로 차서 올려 빠르게 잡아챘다. 짐승의
단말마를 끝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일행은 리카르디스를 에워싸고 달렸다. 독수리는 기사단의 한참 위에서 로젤린과 나란히 비행 중이었다. 거리는
엉망이었다. 사람들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비명을 질렀다. 아까까지 누군가의 얼굴을 핥던 짐승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익숙한 피 냄새를 뚫고 거리를 빠르게 지나쳤다.
삐이익---
마카롱이 길게 울었다. 무언가가 보인다는 신호였다. 로젤린이 눈을 변형시키며 한계까지 시력을 강화했다. 저
멀리, 말에 타고 있는 무리가 보였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사람들의 혼란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느긋한 걸음이 무언가를 예감하게 했다.
“디에즈……전하.”
로젤린이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불타오르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고, 사람들의 비명 때문에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디에즈는 그녀의 말에 반응하듯,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제나 했던 인사말과 함께였다. 로젤린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를 주시했다. 하늘을 떠돌던 마카롱이 어느 지붕
위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172 화.
디에즈는 그 말을 하며 로젤린은 찬찬히 훑었다. 리카르디스의 인상이 굳어졌다. 디에즈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
자신의 뒤로 흘끗 시선을 주었다. 그의 뒤에 있던 보라색 머리칼의 여자가 디에즈의 눈짓을 보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디에즈가 그걸 받아 하얀밤 기사단원들 쪽으로 던졌다.
“연회장에 체리트가 없던 걸 알고 계셨던 것 같군요. 덕분에 얘기가 빨라지겠어요.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 형님.
형님은 그 선에서 넘어오지 마시고…….”
디에즈의 말대로, 리카르디스는 건국일을 맞이한 연회에 체리트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다. 어린 7 황녀는
디에즈를 잘 따랐고, 그는 그것을 잘 이용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디에즈를 처단하고 하카브를 쫓아야만 했다. 목숨의 무게는 결코 같지
않다는 사실을 리카르디스는 잘 알았다. 체리트를 살리는 것, 하카브를 죽이는 것.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명백했다.
하카브가 살아 돌아가게 된다면 분란과 전쟁은 가속화될 것이다. 어떤 때보다 하카브를 둘러싼 방어가 얕은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알고 있다. 잘 알고 있지만…….
하지만 체리트를 구하기 위해서는 로젤린을 홀로 보내야 했다. 그녀가 디에즈에게 어떤 일을 당했던가. 그가
로젤린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던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녀의 등을 헤집었다. 날카로운 검으로 그녀의 심장을
노렸다.
체리트를 구하고자 하면 하카브와 로젤린을 놓친다. 로젤린과 하카브를 손에 쥐기 위해서는 체리트가 죽는다.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는 잘 알고 있음에도 리카르디스는 망설였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들고 나서야, 자신이 계속해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로젤린의 시선이 맞닿았다. 로젤린이 경직된 리카르디스의 손을 꽉 쥔 채,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전하. 걱정 마세요.”
여기저기 거리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화재로 인해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울음소리와 비명은 점점 커졌다.
주변이 소란하고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요란하게 울려 대는 가운데. 그녀 혼자 달빛 아래에서 고요하게 서
있었다.
삐이익----
로젤린이 하늘을 한번 보더니, 리카르디스와 기사 단원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두운 밤,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불꽃이 담겼다.
언제나 초연했던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것은, 리카르디스가 가진 것과 비슷한 종류의 분노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 또한 누군가를 잃은 적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 * *
여자는 씩 웃으며 그들에게 묵직한 주머니를 던져 줬다. 평소에도 그래 왔다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후드를
뒤집어쓴 로젤린은 히죽히죽 웃는 병사들의 얼굴을 외워 뒀다. 이 나쁜 사람들.
그가 자신을 찔렀기 때문이 아니라, 납치한 소녀의 구두를 무성의하게 바닥으로 던졌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누르고 얘기했다.
“황녀 전하께서는요.”
“나에게 무얼 원합니까.”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얘기를 하자고, 해야만 하는 얘기가 있다고 해 놓고서는 디에즈는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느새 좁은 숲길이었다. 나뭇잎이 하늘을 얼기설기 가리기 시작하자 무리의 위에서 날던 독수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나무 위를 토도도 뛰어다니는 다람쥐가 그들을 줄기차게 쫓아왔다. 숲길을 천천히 가로지르던
디에즈가 말의 고삐를 쥐었다. 말이 제자리에 멈춰 서며 투레질을 했다.
로젤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전 지나온 성벽, 거리들, 여기저기
불씨를 틔운 화재와 중앙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하얀 성까지.
“이건, 그래요. 내가 하려던 말은 아니지만,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로젤린. 당신이 형님을 따르고
지키고자 하는 건, 그녀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까요? 그 오래된 기억에, 고작 조각난 기억에. 나의 것도 아닌
기억에 매달리는 건 왜, 어째서.”
잔잔했던 남자의 목소리는 갈수록 분노에 차 흔들렸다. 한 자, 한 자. 그의 감정이 꾸역꾸역 들어가 있어 그녀도
잘 느낄 수 있었다. 조각난 기억, 나의 것도 아닌 기억? 로젤린은 과거 ‘로젤린’과 자신을 애써 분리하려 하지
않았기에 디에즈의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알을 깨고 나온 짐승이 처음 본 무언가를 따르는 각인일까요? 이전에도 그래 왔으니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그저 관성적인 행동에 불과할까요. 정말로 당신이 하는 모든 사고, 관념. 그 모든 것이 당신만의 의지로
이뤄지고 있는 게 맞습니까? 그 속에 당신이 있기는 해요?”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하는 행동은 로젤린의 기억뿐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있는 것이라고.
리카르디스를 지키고, 그를 위해 검을 드는 행동까지 모두.
디에즈는 대충 답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분노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큰 숨소리를 내는 짐승의 위에 앉아, 힘을 빼고 앉아 있는 디에즈는 어쩐지 살아 있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녹아서, 부서져서 달빛과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로젤린.”
그가 작게 속삭였다.
“로젤린…….”
173 화.
“나쁜 장난을 즐기는군요, 황자.”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하카브 왕자. 어린아이의 실수나 장난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나이가 아닌 줄로
압니다만, 어찌 이런 금지 구역까지 오셨는지.”
“그렇게 하죠.”
“한…… 안 가십니까?”
한가하십니까? 로 들렸다.
하카브는 있는지 없는지 존재조차 몰랐던 디에즈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고 열심히 책을
읽었다가 끼우기를 반복하는 소년의 어깨 위로 제 손을 뻗어 책장을 짚었다. 디에즈는 졸지에 그와 책장 사이에
갇히게 되어 버렸다. 디에즈가 고운 얼굴을 확 찌푸렸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디에즈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하카브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디에즈는
편하게 책장에 등을 기대며 그와 마주 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싱글벙글하며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저는 그런 걸 좋아합니다.”
“말해 보시지요.”
“미신, 속설.”
“좋군요. 저도 그런 걸 좋아합니다.”
“터무니없는 것.”
몇 개의 촛불로 밝혀진 도서관 내부는 어두웠다. 그 속에 황금빛의 황자만이 고요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다에 잠긴 보물 상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하카브가 웃었다. 그쪽 핏줄은 어지간하면 바보거나 멍청이뿐인데, 황실의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머리가 비상했다.
일라베니아에 쓸 만한 인물은 리카르디스뿐인 줄 알았더니…….
“일라베니아.”
하카브가 피식 웃었다. 제국의 5 황자가 주겠다는 대가치고는 크기가 너무 크다. 그래도 당찬 기세 하나와 내용
자체는 썩 마음에 드는 터라, 그 값을 후하게 치기로 했다.
* * *
발타로 귀화한 일라베니아 병사로부터의 증언이다. 정리된 문서는 소실되어, 그 당시 증언을 그대로 속기한
내용밖에 남아 있지 않다. 다른 병사들의 증언과 대조해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수칙 두 번째는, 함부로 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병사들의 이목을 피해 불온한 대화가 오고 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몇 년 전에는 기침 소리로 신호를 주고받은 적도 있었기 때문에, 숨 쉬는 것 하나하나도 주의 깊게
살피고, 처벌했습니다. 허튼 생각을 못하도록요.]
[오, 물론이죠. 그런데 어린 수감자들은 그걸 이해하기 좀 어려워했을 것 같은데, 그 경우는 어떻게 했죠?]
[어…… 그러니까…….]
[아니요. 사람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수감자들은 아침, 저녁으로 식사를 배급하고, 특별 수감자들보다
양도 많습니다. 특별 수감자들은…… 아시잖습니까.]
(……중략)
[이름이 없어요?]
[감옥에서 부모가 살갑게 이름을 붙여 주겠습니까, 누구야 하면서 안아 줄 수나 있습니까. 부를 필요도 없고,
불릴 이유도 없으니 이름도 없었죠. 병사들이 부를 때는 그냥 야, 너. 하거나 창대 끝으로 툭툭 치거나 했죠.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고, 상부 지침이라. 예, 상부 지침.]
(……중략)
[지하 깊은 곳이다 보니까 습하고 춥습니다. 곰팡이도 잔뜩 펴 있어요. 일주일만 근무해도 다들 기관지에 무리가
와서요, 어우. 다들 배정되기 싫어했죠. 그런데 월급날 되면 그런 것도 사실 뭐 버틸 만했어요.]
[힘들었겠어요.]
(중략)
[이제 사건 당일 날에 대해 말해 주시겠어요?]
[제가 저녁-새벽 교대 조거든요. 갑옷 챙겨 입고, 장비하는데 뭐 밖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헐레벌떡 뛰어갔더니
특별 수감소 문이 열렸다고 그러지, 마인들은 도망갔다 그러지, 신관들은 살해당했다고 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더라고요. 여기저기 불타고 있어서 불도 꺼야겠고. 쫓아도 가야겠고 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알고
보니까 도망가고 시간이 제법 흐른 후였습니다. 목격자고 뭐고 다 죽이고 가서 몇 시간 동안이나 몰랐던 거예요.
아무 죄 없는 어린 수습 신관들까지 죽였다는데, 아주 잔인한 놈들이지 않습니까?]
174 화.
[그렇군요.]
[네.]
* * *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돌을 던져야 하는 대상을 사건을 일으킨 몇몇 마인이 아닌, 그 힘을 가진
자들 전체로 확장한 것이다. 그들이 가진 힘이 온건하지 못하고 다소 위험성을 동반하고 있는 사실 또한 그
커다란 일의 배경이 되었다.
그중 강한 마력을 타고나는 혈족이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황제와 영광을 나눠 가지던 자들이었다. 몇 세대
걸쳐 쌓아 온 우정이 한순간에 꺾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들은, 보호라는 이름을 앞세운 황제의
거짓된 약속에 속아 넘어갔다.
사건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사람들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황실 깊은 곳에 숨어 있으라. 오랜 우정이 그대들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마인에 대한 원성은 잦아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인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마인을 향한
거부감은 더더욱 날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때가 무르익고서야 황실이 전면적으로 개입했다. 수천이 넘는
황실의 병력이 대대적으로 움직였다. 평화롭던 대륙에 피 냄새가 퍼졌다. 누구는 사냥이라 했고, 누구는
학살이라 했고, 누구는 정화라고 했다.
마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죽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했다. 대륙에서 마력이라는 힘과 마인이라는 존재는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몇몇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중, 달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다른 신생아들보다 가볍고
작았다. 산모가 제대로 먹지 못했던 탓이 컸다.
그 아이가 태어남과 동시에 감옥 안의 모든 마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아이의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엄청난 마력의
기운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역사가 일렀다. 몇 세대에 걸쳐 강력한 왕이 태어난다. 마력을 타고나는 그들의 핏줄에서도 유독 강하고,
응축된 마력을 타고나는 자라 했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가 이 상황을 타개해 주리라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강한 마력과 함께 운명을 거머쥐고 있다는 왕의 탄생이 기쁘고, 또 슬퍼서.
감옥 안은 춥고 습했다. 곰팡이가 펴 있고,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아이가 보아 온 공간은 변함없이 이랬던 터라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그저 언제나 배고플 뿐이었다. 아이가 쥐나 벌레를 입에 넣으려고 하면, 아이보다 두어
살 많은 또 다른 아이가 서둘러 뺏었다.
아이가 열 살이 되었다. 언제나 조용했던 감옥이 시끄러워졌다. 무섭게 매질하고, 걷어차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피가 고여 아이들이 있는 곳까지 흘렀다. 아이들은 갑작스런 상황에도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오랜 기간 학습되어 온 효과로, 그저 벌벌 떨며 굳어 있을 뿐이었다.
아이가 있는 옥방의 철창문도 열렸다. 어느 여자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는 두려움에 찰싹 매달렸다.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데, 소리를 내면 안 되는데, 혼날 텐데, 아플 텐데. 배가 고프고 괴롭게 되는데.
어른들은 탈출하지 못한 마인들이 사냥개가 되어 자신들을 추적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또한, 도망친 자들을
잡건, 놓치건 간에 이미 탈옥은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지내 왔던 것보다 더더욱 괴로운 나날이 그들에게 펼쳐질
거란 사실 또한 잘 알았다. 그들이 창을 들고 가족의, 연인의, 친구의, 자식의 심장을 꿰뚫은 이유였다.
여자에게 안겨 계단을 오르던 아이는 뒤에서 퍼지는 비명에 몸을 떨었다. 병사들은 진작에 다 처리했으니,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백했다. 하지만 아이의 사고 능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 그저 퍼지는 비명과
울음소리에 가슴이 덜컹. 절로 눈물이 날 뿐이었다.
둥그렇고 새하얀 무언가가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까만 천장에는 빛나는 조각들이 무수히 박혀 있다. 처음 보는
세계였다. 아이는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동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근육이 퇴화한 탓에 넘어지는 일이 잦았다. 그들은 산 길목에서
상단을 급습해 마차를 얻었다. 야생동물을 사냥하거나 과일을 채집해 먹을 걸 구했다. 아이는 처음 맛보는 달콤한
과일을 허겁지겁 삼키다가 배앓이를 하기도 했다.
수일이 흘렀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쳤다. 간악한 마인들이 탈옥했다는 방문이 여기저기 붙었다. 포위망은 점점
좁아졌다. 필사적으로 도망가고 있으나 목적지는 없었다. 그들은 그저 그 어둡고 추운 공간에서 보다 멀어지길
바랐다.
사람들은 울었다. 절망하고 화를 냈다. 하지만 종국에는 허름하고 녹슨 날붙이를 꽉 쥐었다. 스르릉, 날카로운
금속음이 아이의 마음을 무섭게 다그쳤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불빛들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날에는, 영영 하늘의 빛을 잃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는 두려웠다. 두근, 두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작은 몸 안에서 마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다가오는
병사들이 소리쳤다. 저기에 있다! 저것들을 당장……! 화살이 날아와 아이의 옆에 있던 소년의 머리에 꽂혔다.
아이의 여린 몸은 그 거대한 힘을 감당해 내지 못했다. 육체가 파괴되기 시작했다. 비명이 울린 숲속. 마인들이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하나, 둘 떨어트렸다. 그들이 덜덜 떨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이에게 동조해 마력이 널뛰며 폭주했다. 모두의 안에 흐르는 마력이 몸집을 키우며 부풀어 올랐다. 사람들이
괴롭다는 듯 몸을 뒤틀며 피를 토했다. 오랜 세월 시든 육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세포 하나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아파, 괴로워, 무서워, 죽여! 도망쳐야 해, 복수를, 더 깊은 곳으로, 부디 누구라도! 기억이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가리가리 찢겨 나갔다.
펑!
그와 동시에 무형의 기운이 터지듯 퍼졌다. 나뭇가지가 꺾이고, 작은 돌들이 바깥으로 밀려났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던 병사들은 갑자기 세차게 불어온 바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밀려날 정도의 강풍이었다.
그것들은 어둠을 헤치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피해 더욱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남은 기억의 잔재가 그들을
이끌었다. 더 깊게, 더 깊은 곳으로.
그 사나운 맹수들은 마인의 광기를 닮았다 해서 마수라는 이름으로 묶여 살아가게 되었으나, 검고 불투명한, 연기
같은 그것들은 흔적도 없이 그림자 속에 녹아들어 이따금 그림자나, 귀신, ‘그것’ 따위로 불릴 뿐이었다.
ㅡ 2 부 완결.
175 화.
19
잿빛 하늘 위로 검은 연기가 퍼졌다.
“여기, 누가 제발 도와주세요!”
아주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은 고삐를 잡아 멈췄다. 병사들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리를 감지하지는 못했으나, 로젤린과 함께 있던 몇 시간의 경험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수도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인들의 난동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치안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에,
황실 기사들 일부가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을 도왔다. 그중에는 로젤린도 있었다.
물론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연회장의 사건을 주도한 범인은 모두 수도를 떠났지만,
그렇다고 그게 모든 위험이 없어졌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전에 없던 단호한 태도로
로젤린에게 치안대의 지원을 명령했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구하라고.
로젤린은 한숨을 후 쉬고는 무너진 벽에 다가섰다. 귀를 기울이자 안에서 약한 신음이 들렸다. 생존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거뭇하게 물든 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장정 다섯이 모여도 들지 못하고, 밀어도
움직이지 못하던 거대한 건물의 잔해가 가볍게 들렸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돌아서는 어린 병사가 툴툴대며 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웠다. 쓰러진 과일 바구니 밑에 있던 종이는 여태껏 내리는
비에도 귀퉁이만 젖어 있었다.
뒤돌아선 남자들의 뒷모습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남자의 악관절이 느리게 꿈틀거렸다. 더러운 놈들.
한 번 더 욕설을 내뱉었다. 로젤린은 종이에 베인 듯 섬뜩한 기분에 잠시 몸을 굳혔다.
“그게 뭡니까?”
로젤린의 질문에 병사들이 화색을 지으며 뒤돌아보았다. 진득하게 붙어 오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깨졌다.
“예! 이게 무엇이냐면!”
“제가 주웠습니다! 예, 로젤린 경! 여기 있습니다! 한번 보시죠, 발타 그놈들이 얼마나 뻔뻔한지 황성과 거리에
그 사달을 내놓는 것도 모자라 일라베니아를 모욕했지 뭡니까!”
발타 욕을 한껏 퍼붓던 남자들은 지나가던 상관에게 걸려 모조리 끌려가야 했다. 한시가 급한 와중에 놀고 앉았어?
하지만 그런 그들의 상관도 로젤린에게 다가와 수줍게 경례하고서야 만족스러운 듯 떠나갔다.
홀로 남은 로젤린은 종이를 펼쳐 내용을 살폈다. 갖은 욕설과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법을 빼고 요약하자면, 축복의
밤이 떠오르던 먼 옛날. 일라베니아가 홀로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마인을 음해하였다는 것.
또한 축복의 밤을 위해서는 성력뿐만 아니라 마력도 필요했기에 마인들을 황실의 감옥에 오랜 세월 감금하고
이용했다는 것이었다. 운 좋게 도망친 마인들이 모두 죽어 버리게 된 탓에 더 이상 축복의 밤을 부를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일라베니아는 대륙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진실을 숨긴 비겁자 일라베니아여!
거짓된 영광을 내려놓고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
멍하니 보고 있던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가 돌연 사라졌다. 로젤린은 갑작스럽게 사라진 종이의 행방을
따라 고개를 올렸다.
그녀의 앞엔 마찬가지로 빗물에 축축하게 젖어 있는 인간 남자 형태의 마카롱이 보였다. 그는 어디서 주워 입은
것인지, 꽃이 수놓아진 연 분홍색 여성용 상의에 몸에 달라붙는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다. 복식의 조화에 큰
관심이 없는 로젤린의 눈에도 괴악한 옷차림새였다.
마카롱이 한쪽 손을 허리에 놓고 삐딱하게 서서는 종이의 내용을 읽었다. 중간중간 감탄사를 넣던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왜 뺏어가.”
“이게 진흙에서 뒹군 곰이야, 거지야. 분간을 할 수 없어. 꼬질꼬질, 드러워 죽겠네. 어디 가서 나 안다고
얘기하지 마, 창피하니까.”
로젤린은 키 큰 남자가 반쯤 가린 좁은 문틈 사이의 풍경을 응시했다.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핏물과 잿물이
뒤섞인 바닥은 엉망이었다. 로젤린은 그 장면을 멍하니 흘리며 사과를 손등에서 팔꿈치까지 굴렸다. 팔꿈치에서
툭 튕긴 사과는 다시 로젤린의 손으로 들어왔다. 빗줄기가 만드는 일정한 크기의 소음이 예민해진 신경을
가라앉혔다.
로젤린은 사과를 두 손으로 잡아 아삭아삭 씹었다. 입안 가득 상큼한 과즙이 퍼졌다. 로젤린은 그제야 자신이
굉장히 허기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천천히 사과를 씹으며 멍하니 상념에 잠겼다.
* * *
황실은 싸늘한 정적에 잠겼다. 제국의 장자가 죽고, 귀족들이 살해당했으며, 그 주범은 유유자적하게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슬퍼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연회장 안에는 많은 신관이 있었으나, 쓰러진 모두를 살려 내지는 못했다. 발타의 비수는
급소를 스쳐 지나가는 법이 없었고,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아무리 리카르디스라고 해도 죽은 자를 살려 내는
기적을 일으키진 못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에 수도는 아직 혼란스러웠다. 그 탓이었을까. 적아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도 더러
생겨났다.
그날.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만이 ‘디에즈’라는 제국의 배반자를 발견하는 성과를 이룩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하카브도, 3 왕녀 간제나 고위 귀족 중 그 누구도, 하다못해 디에즈도 잡지 못한 채 돌아왔다.
그나마 납치되었다 알려진 체리트 황녀를 찾아내긴 했지만…….
체리트는 디에즈가 주장했던 것처럼 위험하고 먼 곳에 있던 것이 아닌, 황실 숲에서 고이 잠자고 있었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황실 숲에 대체 왜 있는지 모를 아기자기한 침대 위에서 편안하게 쿨쿨. 동화책 한 장을 떼어다 현실에
가져온 듯한 장면에 사람들은 많이 당혹스러워했다. 디에즈 황자는 애초에 그녀를 데리고 가지도 않았고, 해칠
생각도 없던 것이다.
176 화.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로젤린은 잠결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무언가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킨 로젤린은 벽에
걸린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꿈은 길고도 짧았다. 코끝을 스치는 퀴퀴한 냄새. 어두컴컴한 공간, 저 멀리에서 보이는 희미한 횃불의 빛.
끈적한 철창, 곰팡이와 이끼가 낀 바닥과 벽의 온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덜덜 떨 수밖에 없던 그때의
감정과 모든 감각이 선명했다.
눈을 뜨니 머리는 혼몽했고, 잠에서 덜 깬 몸은 축축 늘어져 현실이 도리어 꿈같이 느껴졌다. 로젤린은 눈물도
닦지 않고서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코를 훌쩍이고 있는 사이, 멀리서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아무리 깊게 잠들어도 타인의 기척을 예민하게 읽어 내는 로젤린은 언제나 헤사가 깨우기 전에 일어났다. 그래서
헤사는 오늘도 어김없이 “먼저 일어나 계셨네요.”라는 말로 아침 인사를 대신 할 예정이었는데…….
로젤린은 시트를 끌어당겨 아직 덜 마른 눈물을 문질렀다. 헤사가 가져온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하고, 헤사가 챙겨
준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몸단장을 끝내고 나니 헤사가 머리를 정리해 묶어 줬다. 소년은 아직까지도 흘끗흘끗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로젤린은 헤사의 시선을 뒤로한 채 거울을 바라보았다. 엉망이던 아까와 달리, 평소 같은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꿈속에서부터 계속 들러붙어 있던 감정만은 계속해서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헛소리하면 그냥 무시해.”
리카르디스가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이게 최선이란 걸 알고 있으나, 로젤린을 물어뜯을 준비가 끝난 승냥이
굴로 직접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이 마뜩잖은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쯧, 혀를 차고는 노망난 영감들 같으니,
라고 악담했다가 아차 하고 로젤린의 눈치를 살폈다. 로젤린은 기분이 저조한 와중에도 그를 보며 살짝 웃을 수
있었다.
“어떤 말이 헛소리입니까?”
대화를 나누는 사이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시선이 쏟아졌다. 로젤린은 자신에게 와서 박히는
날카로운 눈빛들을 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앉으며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노려보듯 둘러보았다.
“오늘은 부디 그 돌림노래 같은 지겨운 얘기에서 벗어나 성과를 얻고 돌아갔으면 좋겠군. 어제의 약속을 잊지
않길 바란다. 강압적이고 난폭한 어투, 여러 명이 질문을 겹치며 추궁하는 식의 발언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
기사는 죄인이 아니고, 순수하게 그대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해, 바쁜 와중에 친히 걸음 한 것이란 걸
유념해라.”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질문은 리카르디스가 대충 이러한 경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하고 짚어 준 예상 질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디에즈 전하가 로젤린 경 당신만 독대하길 바라지 않았나, 무슨 얘기를 했나, 체리트 전하의 위치를 들었으면
디에즈 전하를 제압해도 되는 게 아니었나, 그 후 하카브를 쫓으면 되는 일 아니었나, 설마 모종의 거래를 하고
놓아준 거 아니냐. 등등.
로젤린은 세간에 떠도는 악의 어린 소문들이 그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 중이었다. 사람들은 당시의
상황을 보지도, 알지도 못했으니까. 그래서 설명하면 될 문제라 여겼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이 수많은 시선 가운데 자신은 이미 죄인이었다. 로젤린은 그들이
바라는 대답이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써 눌러두었던, 꿈속에서부터 이어받은 감정이 널뛰기
시작했다.
“……경?”
걱정하는 리카르디스의 목소리에 로젤린은 정신을 차렸다. 간신히 감정을 가다듬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디에즈 전하와는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마지막에 황녀 전하의 위치만을 가르쳐 주며, ‘파편’을 먹여
두었다고 했다. 일라베니아 황실에 내가 아는 또 다른 마인이 없기에, 우선적으로 황녀 전하의 치료를 위해
돌아온 거다.
“디에즈 전하께서 ‘파편’을 먹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주할 시간을 벌어야 하니 거짓말을 하셨겠죠.”
또 다른 남자가 질문했다.
원하는 대답이 빤하게 보였다. 로젤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살짝 흘렸다. 그녀의 실소에 회장이 다시 한번
싸늘해졌다. 로젤린은 개의치 않고 그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다 하더군요.”
“없습니다.”
로젤린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남자의 질문을 헛소리라고 판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는 결백합니다.”
남자가 피식 웃었다.
공간에 잠시간 정적이 일었다. 로젤린을 공격하던 남자는 잠시간 입꼬리만 씰룩였다.
“모든 정황이…….”
“어떻게 정황만으로 사람을 죄인이라 확정 지으려 합니까. 저의 결백이 저의 증언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처럼,
저의 죄 또한, 정황만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로젤린이 짧게 혀를 찼다.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던 귀족들의 눈이 커졌다. 그건 리카르디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내 기사가 저렇게 말을
잘해? 순간 과거 ‘로젤린’을 보는 것만 같았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가 설원의 월계수 앞에서 진실된 맹세를 하고자 합니다.”
난데없는 충성 맹세에 귀족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남들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로젤린은 다른 사람들도 익히 따라 말할 수 있을 법한 서약문을 줄줄 외웠다.
“아니, 그 맹세야…….”
177 화.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사건 당일, 그 혼란한 와중에 자신더러 거리의 상황을 수습하라고 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지금 눈치챘다. 홀로 디에즈를 따라갔고, 누구도 잡아 오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런
파문이 일어나리라, 리카르디스는 그때부터 예상했던 것이다.
“저, 전하!”
변화의 이유를 알고 있는 자신도 당황스러운데 리카르디스는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싶었다. 그에게라도 디에즈와
나눈 대화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결국은 또 말하지 못했다.
홀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로젤린은 모호한 말로 후일을 기약했었다. 리카르디스는 ‘알겠다’고만 답했다.
그것이 더욱 미안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 한 로젤린은 결국 한숨만 토해 내었다.
* * *
[더러운 것들 같으니.]
탁.
로젤린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크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위협하지
않았음에도, 남자들은 그녀의 시선이 닿자마자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며 흩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주위에 수군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머리는 싸늘하게 식어 가는 반면, 심장은 빠르게 박동하며 가열되고 있었다. 화가 났다. 당장 어딘가에 터트려
버리고 싶을 정도로.
[저는 알고 있어요.]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나쁜 짓’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말하는 디에즈의 표정은 평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숨쉬기 버겁고, 못 견디게 고통스러워 보였다.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기억하지 못할 뿐. 하지만 사절단 이후로 조금씩 떠올릴 수 있었겠죠. 그때의
전투로 우리가 잃어버렸던 분노의 파편을 받아들였으니까요.]
로젤린은 디에즈가 말하는 잃어버렸던 분노가 마독 ‘파편’, 정확히는 파편에 섞여 있는 마수의 마력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파편을 흡수한 후부터 이상한 꿈을 꾸거나, 황실에 대한 거부감이 짙어졌음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디에즈는 로젤린의 발치에 결정을 던졌다. 그녀의 시선이 결정을 따라 이동했다. 시야 밖에서 디에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걸 알게 된다고 당신의 다짐이 달라지리라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하고 망설이겠죠. 이따금
이게 옳은 건지, 이대로도 괜찮은 건지. 고민하게 될 겁니다. 그렇길 되기 바랍니다. 부디. 그 망설임이 당신의
발목을 잡아,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멈춰 서게 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디에즈는 다람쥐가 떨어트린 돌멩이에 한 대 맞고서도 평온한 표정으로 떠났다. 마카롱은 모든 광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디에즈가 준 결정을 회수하려 하지도 않았고,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시간이 지나, 꿈에서 흘린 눈물이 차고 넘쳐 현실에서 흐르기까지 일주일도 필요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결정의
힘뿐만 아닌 다른 요소도 작용하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과 어둠 속 불타는 하얀 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비추는 아름다운 하얀 달까지.
과거와 비슷한 상황들은 로젤린이 잊고 있던 기억을 깨우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모든 기억을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이따금 흔들고는 했던 격렬한 감정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변할 것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한데 자신을 둘러싼 이 눈빛들이, 적의가, 불합리한 분노가, 거짓을 진실이라 믿는 자들의 모든 행동이.
‘짜증 나.’
‘너무 화가 나.’
사람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계속 달렸다. 이 자리에서 벗어난다 해도 결국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지 않으리란 사실은 알았지만, 어디라도 좋으니 달아나고 싶었다.
사람들이 시선이 닿지 않을 곳, 숨을 수 있는 곳.
“……누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고개만 반대로 휙 돌렸다. 테이블을 끼고 칼릭스와 인간 여자 형태의
마카롱, 미미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미미는 술병을 테이블 위에 놓고서는 칼릭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참 신기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화가 나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는데…….
로젤린은 침대에서 일어나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미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미는 술을 마시고 크하, 하는 걸걸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뭘
보고 있냐.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당장 터질 것 같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기 시작했다.
“재밌는 얘기 해 줘.”
미미는 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이었고, 칼릭스는 눈동자를 굴리며 당혹스러운 감정을 표출하는
중이었다.
“빨리.”
칼릭스는 초조한지 팔짱을 낀 채 다리를 떨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머뭇거리며 재밌는 얘기를 시작했다.
“음, 일주일 전에 알터가 눈에 커다란 멍을 달고서 집무실로 들어오더군요. 부상의 이유를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아서 묻지 않았는데, 알터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하면서 막무가내로 얘기를 시작하지 뭡니까.”
알터와 그의 여동생 일리야는 평소같이 말다툼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졌다고 한다. 결국 몸싸움으로 번졌고,
윗사람으로서의 아량이고 뭐고 간에 진심으로 상대하려 했는데 처참하게 패배했단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동생에게 지고, 분해서 울었다는 알터의 얘기가 너무나 재밌는지 칼릭스는 말하는 중간중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놀리지도 못할 만큼 처참했다.”
178 화.
로젤린은 칼릭스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자 칼릭스가 이것 보라는 표정으로 미미를 흘겼다. 미미가 콧방귀를 뀌었다.
“웃기다.”
“보세요.”
“또 얘기해 줘.”
“잘 논다.”
칼릭스는 또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여러 재밌는 얘기들을 했다. 하나같이 재밌지도 웃기지도 않은 것들뿐이었으나,
최선을 다하여 ‘재밌고 유쾌한 이야기’를 떠올리기 위해 고뇌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응.”
“저희가 앉았던 자리가 관광 명소처럼 되었다더군요. 이 자리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앉았던 자리, 이 메뉴는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한 번 더 시킨 메뉴. 이런 식으로요.”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에도 로젤린은 술 취한 사람처럼 헤헤거리기만 했다. 그런 그녀를 잠시간 바라보던
칼릭스가 손을 뻗었다. 굳은살과 흉터가 눈에 띄는 손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든 아이의 요람을 흔드는 바람이 이러할까.
“무슨 일 있으세요?”
로젤린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상하게 화가 나서.”
“누님께서 왜 화가 나셨을까요?”
“나쁜 사람들이네요.”
“손가락질했어. 재수 없어.”
“교양 없는 인간들이로군요.”
“그걸 반대로 꺾어야지 그대로 두냐.”
로젤린은 짜증과 분노를 되짚어 가며 객관적으로 자기 상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사람들이 욕하고, 손가락질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재단하고. 여러 이유가 있으나…….
“네.”
“음, 그랬군요.”
[모든 걸 알게 된다고 당신의 다짐이 달라지리라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하고 망설이겠죠. 이따금
이게 옳은 건지,]
“무엇이 옳은 건지.”
머리가 복잡했다. 가슴을 죄는 듯한 끈적한 분노와 불안함이 신경을 바늘처럼 가늘고 뾰족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일라베니아는 자신에게 너무나도 잔혹했다. 그리고 제 가족과 친구들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도
무자비하게 굴었다. 그것이 불합리하고 지탄받을 일이라는 것은 그때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에서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지금 이 자리. 일라베니아의 황성에 있었다. 일라베니아의 기사로서.
자신과 자신의 생각과 관념이 충돌하자 맹세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괴롭다고, 도무지 견딜 수 없다고 하면 그대로 놓아줄 것만 같았다.
“누님.”
“응.”
“새로 마주한 사실은 이따금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어요.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누님. 그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 누님에게 가장 중요하느냐……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너, 너무 혼란스러워.”
미미가 피식 웃었다.
“전혀?”
“콩 맛이 나는 고기보다, 고기 맛이 나는 콩이 더 좋지 않을까?”
“그러네?”
로젤린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도 감탄했다. 정말 맞춤형 설명이라며. 칼릭스는 은근 뿌듯해하며 말을
이었다.
“누님께서 앞으로도 접하게 될 수많은 사실들은, 기존의 관념을 완전히 흔들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모든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중심.
* * *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의 중앙에는 하얀 대리석이 원형으로 깔려 있으며, 중앙으로 갈수록 층계가 높아지는
형식이었다. 낮은 단을 세 번 올라서야 도달할 수 있는 중앙에는 사람들의 허벅지쯤 되는 높이의 제단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제단 위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하얀 석관이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하얀 꽃에 둘러싸인 채 평안하게 눈을 감고 있어야 할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석관의 뚜껑이 조금의 틈도
없이 굳게 닫혀 있기 때문이었으나,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령 석관이
열려 있다 하더라도, 엘피디오의 시신을 볼 수 없으리란 사실을.
하카브가 도망치고 리카르디스와 황녀 체리트의 증언으로 5 황자 디에즈가 제국을 배반했음이 알려졌다. 발타와의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황후 트리파는 제 아들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것에만
혈안이었다.
엘피디오의 시신이 불태워졌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나, 황후는 거짓된 정보라 일축하고는 많은 인원을 동원해
황실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들인 시간과 인력이 무색하리만큼 어떤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시체가
소각되었다는 소문의 신빙성이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후는 수색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것이 엘피디오의 장례가 늦어진 이유였다. 만약 황제가 수색 중단과 장례식의 준비를 명령하지 않았다면,
황후는 한 달이건, 일 년이건 재가 되어 사라진 엘피디오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제단 위에 올라가 있는 황후는 언제나 보여 왔던 고고한 태도를 내려놓고서는 머리를 풀어헤친 몰골로
석관 위에 엎어져 있었다. 석관을 쓰다듬다가, 손톱으로 긁어내리다가, 머리를 박고는 숨이 멎을 듯 울었다.
“아, 아아…… 폐하 제발. 엘피디오를 이렇게 보내시다니요! 전하의 첫 아이가 아닙니까! 어떻게 고작 가죽 한
장만을 남기고 영광된 빛의 길로 떠나라 하십니까! 눈이 없어 길을 보지 못하고 발이 없어 걷지도 못할 텐데,
엘피디오를, 어, 어떻게…… 폐하 제발. 조금만 더 찾으면 될지도 모릅니다. 발타의 간악한 것들이
일라베니아의 황자를 끝까지 욕보이려 하는 수작일 뿐이니 제발, 폐하!”
나이가 지긋한 대신관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황후를 보고는 그대로 장례식을 시작했다. 성스럽고 서글픈 노래에
대신관의 축복이 한 구절 한 구절 더해졌다. 트리파의 울음소리는 영광스러워야 할 장례식을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다.
179 화.
수백이 가득 차 있는 공간은 마치 대신관과 황후 트리파, 그리고 엘피디오의 석관만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투둑,
투두둑. 잘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모두의 숨소리마저 가렸다.
리카르디스는 잎을 툭툭 두드리는 빗줄기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물방울이 속눈썹에 맺혔다가 떨어져 나갔다.
흐릿했던 인영이 또렷해졌다. 로젤린이었다.
언제나 보는 얼굴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왜일까. 왜 낯선 걸까. 그 이유를 생각하던 리카르디스는 곧 깨달았다.
로젤린은 타인의 시선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언제 어디서나 시선이 오는 방향을 바라보았기에, 리카르디스의
기억 속 로젤린은 언제나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처럼 상념에 잠겨 이런 적나라한 시선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레이몬드가 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 동시에 기사단원 전원과 기사단장 스타스, 그리고 리카르디스까지
황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장례식이 끝난 지 오래라 남은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하얀 무리에서 안도의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로젤린이 입이 막힌 채 수화로 얘기했다.
[시도한 적 없음]
리카르디스와 스타스는 진심으로 그 친구에게 고마워했다. 스타스는 그 친구가 자신이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는,
올가미 용병단의 임시 단원 쥬쥬라는 사실을 듣고 나서는 미묘한 반응을 보이긴 했다.
“음…….”
그가 곤란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세티스티아가 죽고, 이후 밀리아도 제 딸을 따라가듯 목숨을 잃었다. 세티스티아의 죽음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엘피디오의 공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증오한다는 말로는 엘피디오와 자신의 관계를
다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 그렇게 기쁘지는 않군. 이건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아. 한 사람의 죽음에 인도적으로 슬픈 감정이
들어서는 아니야. 나는 그대와 달리 선한 사람이 아니거든.”
“청소를 해야겠어.”
“청소……?”
“초상화.”
몇 년 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또 다른 황태자 후보, 리카르디스의 존재 덕분에 황제는 평안한
나날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너그러워진 상태에서 리카르디스의 생일이 찾아왔다. 소원이
있으면 들어주겠다는 황제의 말에 리카르디스는 오직 엘피디오를 괴롭히겠다는 일념 하나로 부탁했다.
언제나 형을 가지고 싶었는데, 엘피디오 형님이 있어 너무 기쁘다. 둘이서 사이좋게 있는 모습의 초상화를 가지고
싶다. 내 일생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 될 것이다!
엘피디오의 석관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던 황후 트리파의 모습을 본 이후부터였다. 엘피디오는 자기도취에 빠진
인간이었다. 소설 속 영웅같이 근육이 울룩불룩한 모습의 동상을 세우고, 잔뜩 미화된 자신의 초상화를 성 복도에
쭉 늘여 놓고 감상하곤 했다.
엘피디오 때문에 밀리아가 그렇게 되었는데. 수년간의 고통은 고작 엘피디오의 죽음 정도로 해소될 만큼 작은
크기가 아니었다. 당연히 원한은 남아 있었다.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겠지.”
180 화.
리카르디스는 어떤 장면을 상상했다. 현재와 같은 시간과 공간이었으나 그곳에 로젤린이란 존재는 없었다. ‘만
약’으로 시작하는 의미 없는 가정 속의 장면은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자신은 혼자였다. 죽은 엘피디오의 관을 보며 혼자 끈적한 감정을 곱씹고 휘둘린다.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없으니
멈춰 있기만 한다. 버릴 필요를 못 느끼니 끌어안고 있다. 점점 가라앉다가, 가라앉다가. 결국 그렇게 끝맺는
이야기였다. 한 명이 있는 세상과 한 명이 없는 세상은 그렇게 달랐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응시했다.
로젤린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고 있었다.
“버릴 것은 버리고.”
* * *
그렇게 수백 년간 무너지지 않았던 균형을 깨트린 쪽이 발타라는 사실은 일라베니아의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건국제 무도회의 참사 이후, 일라베니아는 병력을 대대적으로 움직여 하카브의 뒤를 쫓았지만 결국은 잡지 못했다.
어떻게 확보했는지 모를 도주로와 어떻게 심어 놨는지 모를 첩자들 등.
전투가 잦던 국경 지역은 발타의 공세에 빠르게 대응했으나, 평소와 달리 승리로 가는 길은 버거웠다. 발타의
병력이 예상했던 수와 힘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어디에 숨겨서 대체 어떻게 키운 건지도 모를 훈련된 병력이었다.
그뿐이었다면 좋으련만, 국경뿐 아니라 수도 티가드도 피해가 막심했다. 국경 관문처럼 대규모의 병력과
마주하지는 않았으나, 병사보다 암살자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소규모 집단의 행패로 주요 인물 몇몇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중에 일라베니아 제국 군사 조직의 우두머리, 총사령관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세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차갑게 웃고는 다시 파이프를 물었다. 후, 그녀의 입에서 연기가 퍼져 나왔다.
세실이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놈이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텐데? 그나마 없는 쪽이 개소리가
덜해서 일이 빨리 진행되기는 하겠네. 그리고 엘피디오 황자 전하께서 돌아가신 건 제국의 백성으로 함께 눈물
흘릴 일이기는 하다만, 발타 놈들이 쳐들어오고 있잖아? 무얼 먼저 처리해야 하겠다는 감이 오지 않나? 살아
있는 사람들도 다 같이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지.”
“중앙 상비군은 일라베니아를 지킵니다, 백작! 발타의 공세가 지난 수십 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사나움을 내
모르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아직 그 마인 부대의 움직임을 못 읽어 내지 않았소. 그 부대가 수도로 침투하는
가정을 아주 배제할 수 없음을 알 거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중앙의 병력을 분산시키란 말이오! 변경 주둔군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병력이 있지 않소. 계속 지원 요청을 하는 것은 백작의 무능을 나타내는 일밖에 되지
않으니, 잘 생각하고 발언하기를 바라오.”
세실이 눈을 접어 웃었다.
그녀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진동에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소음을 만들어 내자 남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세실이 파이프를 한번 물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가 후우, 연기를 내뱉자 남자가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세실이 줄줄 얘기할 동안 얼빠진 듯 입만 벌리고 있던 검은파도 남작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황제 폐하께서 보낸 엄중한 명령에 감히……! 이 무례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소! 사태가
끝나고 나서도 인간 백정 짓으로 가까스로 유지하던 지위를 달고 있을지는 내 확답해 드리진 못하겠소.”
쾅!
“피곤해라…….”
“와인을 준비하겠습니다.”
세실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 황제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쪽은 투견이고, 저쪽은
충견이니. 국경 지역에서 허무하게 죽을 인물은 대체 가능하지만,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구르라고 하면 구르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 사람은 구하기 힘들 것이다.
위험한 순간에 써먹게 옆에 데리고 있으려는 모양인데, 내용을 살펴보자니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꿈적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복은 죽음으로 여기던 인간이 몇 번이나 계속된 것 같은 권고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세실은 테이블 위의 촛불에 서신을 가져다 대었다. 닿은 부분이 검게 물들어 가더니 순식간에 불이 번졌다. 아직
너울거리는 불꽃을 품은 재가 테이블 위로 투둑 떨어졌다.
181 화.
* * *
쩍!
“건방진 놈! 이거 놓아라!”
“악!”
지금 막 간제가 또 다른 호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남자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간제의 팔을 한쪽씩 잡고 있는 호위들은 오랜 여행에도 지치지 않았으나,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주인의 패악에는
몹시나 고단해 보였다.
간제는 성난 들소보다 무섭게 씩씩댔다. 힘도 들소에 뒤지지 않는 것 같았다. 간제를 둘러싼 마인 호위대는
쩔쩔매며 그녀를 억류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다치지 않게끔 간제를 제압하는 일이란 정말 너무 힘든 일이었다. 3
왕녀 간제 또한 그들과 같은 마인이었기에. 심지어는, 마력의 양으로 따지면 간제 쪽이 우세했다.
둔은 안되겠다 싶어 뒤에서 그녀를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팔까지 끌어안겨 옴짝달싹할 수 없…… 어야 했는데.
간제가 발꿈치로 호위의 발가락을 무참하게 내리찍었다.
“아악!”
“왕자 전하의 명령이셨습니다. 일라베니아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어떤 위험과 돌발 상황이 있을지 모르는 터라,
왕녀 전하께서 큰 충격을 받을까 걱정하셔…….”
부대장의 얼굴에 화병이 직격 했다. 쨍그랑! 조각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부대장은 얼굴에 달라붙은 화병
조각과 코피를 쓱쓱 닦으며 말을 이었다.
간제가 긴 수면에서 막 깨어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호위가 급하게 그녀의 입에 수면제를 들이부었다. 몽롱한
상태의 간제는 남자의 다급한 숨소리에 이변을 깨닫고 호위의 얼굴에 수면제를 냅다 뱉어 냈다. 순간적인 기지로
남자의 소중한 급소를 까 버린 후, 사투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이었다.
“오라버니는.”
간제가 움직이자마자 만류의 손길이 사방에서 뻗쳐 왔다. 간제는 바닥을 굴러 회피하고서는, 창문을 열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왕녀 전하!”
“저 개망나니가!”
간제는 바로 아래층의 돌출된 지붕에 착지한 후에 바로 옆 난간에 매달렸다. 호위들이 따라 뛰어내리려 했다.
그녀는 콧방귀를 뀐 다음에 아래층 창문으로 쏙 들어갔다.
쨍그랑!
수놓아진 커튼이 불룩 솟으며 간제가 나타났다. 그녀는 유리창 조각이 쏟아진 바닥에 구르며 벌떡 일어섰다. 방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눈만 크게 뜨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간제를 바라보았다.
간제는 맨발로 저벅저벅 방을 가로질러 빈 의자에 앉았다. 옆자리의 중년 남자가 의자를 반대쪽으로 슬쩍 옮겼다.
리비타 왕실의 유명한, 목숨 내놓고 사는 미친 왕녀. 엮이면 피곤할 게 불 보듯 빤했다.
간제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소녀와 소년이 보였다. 그녀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발타는 왕실 ‘위’ 가문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큰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중 쌍둥이 남매가 가주를 맡은
가문이라면 ‘싱’ 외에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싱.”
소녀는 말 못하는 소년의 몫까지 말했다. 사랑스러운 외모의 두 남매가 같이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간제는
일어난 이래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준수한 미남자와,
흉악하게 생긴 거인과,
* * *
전운이 감돌았다. 시녀들은 연회 준비를 할 때처럼 항상 지쳐 있었고, 기사들은 실전 같은 대련과 훈련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징집, 군의 편제가 마무리되어 언제든지 출진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황실은 아직까지 침묵하는 중이었다. 나라와 나라의 운명을 건 거대한 전투를 대비한 대군은 그대로 묶여
있고, 고작 일만여 명의 병력을 국경에 지원했을 뿐이었다. 없는 것보단 낫긴 한데, 크게 도움이 되는 정도는
아닌, 생색내기 좋은 딱 그 정도. 분통이 터진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한 자, 한 자 분노를 채운 서신을 보낸 일도
이해가 갔다.
여유로워 보이는 황실의 움직임에 백성들은 안도했다. 별일이 아닌가 보다. 괜찮나 보다. 발타 놈들이 해 봤자지.
그런 식이었다.
황제가 정확하게 노린 바였다. 일라베니아는 누대에 걸쳐 서서히 몰락하는 중이었다. 축복의 밤으로 풍요로웠던
대륙은 메말라서 성수를 들이부어도 잠깐의 곡식을 허용할 뿐이었다. 황금의 땅이라 불리던 일라베니아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절대적이던 권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불만을 가진 자들이 늘어난 시점에서, 황실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음이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면 문제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먼저 터질 가능성도 있었다. 황제가 염려하는
부분이었다.
황실의 핏줄을 죽이고 일라베니아 한복판에서 간악한 짓거리를 저지른 발타에게 죗값을 묻는 것은, 잠시 요동치는
민심을 다스리고 난 이후일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로젤린이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흔들거리던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지나가는 카일로에게 딱딱한 열매를 뜯어 던졌다. 갑자기 봉변당한 카일로가 분노하며
펄쩍펄쩍 뛰었다. 로젤린이 히죽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고압적이고도 오만한 미소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카일로와 다투는 모습은 평소와 다르지 않지만, 그전에 멍하니 허공을
훑던 그녀는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부터였다. 로젤린은 이따금 하던 행동을 멈추고 상념에 잠겼다. 생각은 깊어졌고, 말하는 것도
전보다 능숙해졌다. 어리숙한 사고가 서서히 깨어나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최근 그녀에게서 과거 ‘로젤
린’의 모습을 몇 번씩이나 느끼곤 했다.
182 화.
똑똑똑.
누군가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최근 월장석 성에서 일하게 된 시녀였다. 갈색
머리와 잿빛 눈동자를 지닌 자그마한 여자의 이름은 미레이미, 일명 ‘미미’였다. 올가미 용병단의 쥬쥬와는
남매 관계라는 ‘설정’이란다.
“하셨잖아요?”
“전하 앞에 있는 접시, 그거는 전하 거, 이거, 이거, 이거는 로젤린 거. 나중에 먹여. 그리고 나머지는 다 내
거. 이야, 전하 이름 대니까 주방장이 혼을 쏟아부어서 만들던데. 앞으로도 종종 해도 되나?”
“……들키지만 말고.”
월장석 성내에서 주인의 이름을 사칭해 디저트를 빼돌리는 간 큰 시녀가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하겠지만.
미미는 입에 크림을 묻히고 낄낄거렸다. 그러더니 아차, 하고는 제 치맛자락을 뒤졌다. 보기 좀 그런 광경이라
리카르디스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한참 치마 안쪽을 뒤적거리던 미미가 “아, 찾았다.” 하고는 무언가를 불쑥 꺼냈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미의 손에는 접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가 종이를 툭 하고 그의 앞에 던졌다.
종이가 들어 있던 장소도 장소고, 건네준 사람이 그녀이기에 의심을 지울 수 없어, 리카르디스는 찝찝한 감정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이게, 뭐지……?”
“내 마음.”
미미는 종이를 읽어 내리는 푸른 눈동자를 지켜봤다. 무표정한 얼굴, 날카로운 눈빛. 하지만 그 눈동자가 종이의
끝자락에 닿았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아마 그 종이의 존재에 대해,
혹은 종이에 적힌 내용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목소리에 어떠한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미는 시간을 잘 맞춰 적당히 우러난 차를 마시고, 입안 가득 감도는
향을 즐긴 다음에야 대답했다.
“그리고 그 이후, 마수라 불리는 흉포한 존재들이 생겨났다. 산과 들, 숲.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과 마을.
어디고 나타나서 목숨을 앗아 가는 마수는 일라베니아를 떨게 만들었지. 개체 수가 많이 줄어든 지금까지도
말이야.”
발타에서 검붉은 보석을 가지고 올 때까지만 해도 정확하게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으나, 최근 마수의 몸에서
생성되는 결정이라 판명되었다. 또한 로젤린의 증언으로 마독 ‘파편’, 인조적인 마인 부대가 지닌 마력과
결정의 마력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까지도 알게 된 상황이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던 마수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진화해서 일라베니아의 목을 죄어 오고 있었다.
“사라진 마인 가문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의문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사라진 즈음, 공교롭게도
축복의 밤 또한 자취를 감추었어. 그들이 아니더라도 강한 마인은 또 태어났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들이 죽은,
혹은 사라진 이후부터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만약 단순히 그 이유로 마수가 생겨났다면, 강한 마인은 왜 태어나지 않았는가? 대륙을 소생시키는 그
강한 힘이 어딘가에 있다면, 일라베니아가 아닌 그 누군가의 눈에라도 띄어야 말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정적이 인 공간 속에 바람이 불었다. 마카롱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었다. 다소 불량한 자세였다. 그녀가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바로 여기에.”
“저기에.”
정말, 너무 놀랐다. 리카르디스는 마카롱이 답변을 마치자마자 손을 내려놓다가 생크림 케이크를 깍지 낀 손으로
박살 내고 포크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떨어트린 포크를 어마어마한 반사 신경으로 발로 찼다가 튕겨 오른 포크에
코를 맞았다. 마카롱은 정말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통탄하는 어조였다. 놀리는 의도가 느껴졌지만 리카르디스는 미처 신경 쓰지도 못했다. 머리에서 생각을 담당하는
기관만 슬쩍 빼서 얼음물에 담가 놓은 것 같았다. 동면에 들어간 물고기의 사고가 이러하리라.
리카르디스는 얼얼한 코를 쓱 문질렀다. 그 과정에서 손으로 으깬 케이크의 잔해가 묻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마카롱은 콧잔등 위에 생크림을 묻히고 있는 그를 보고 놀리기 위해 열었던 입을 그대로 닫았다.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아픈 사람은 놀리는 거 아니니까.
“……그대가 정말…….”
리카르디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갈색 머리 여자의 본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어쩌면 그들의 모습 또한 그러한 흐름의 하나가 아닐까. 그러나 그 흐름이 부자연스럽다는 게 문제였다. 모든
진화와 퇴화는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나곤 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축복의 밤이 사라진 시기와 마수가 생겨난 시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존재가 무엇이라 해도 변화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일 텐데.
183 화.
“이 모습은.”
“걔가 한 거야.”
“……로젤린이?”
리카르디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로젤린이 했다? 무얼 했다는 말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이라…….”
“솔직히 나도 그 ‘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잘 몰랐어. ‘마력 엄청 많은 사람’을 왕이라 말하는 건 줄 알았지.
운명이니 뭐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어찌 믿을 수 있겠어. 그래서 그때야 처음 알게 된 거지. 운명을
이끈다는 왕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
“전하도 알다시피 내가 이렇게까지 친절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느냐면, 상황이
아주 드럽게 흘러가고 있어서야.”
“하지만 로젤린이 전쟁에 못 나가도록 묶어서 감금시키지는 않을 거야. 내가 로젤린을 지키고 싶은 건 단순히
몸의 안녕뿐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 아이는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까. 지금 이 상황의 문제점은 단
하나.”
“……로젤린은 과거의 기억이 거의 없었어. 디에즈나 나처럼 일라베니아 놈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갈아 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지. 기억한다고 해도 그저 그때 있었던 상황에 대한 명확하지 않은 감정의 조각
정도가 아닐까.”
“좀 어렸거든.”
얼마나 어렸나. 그때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상황을 인지하기보다 단순히 그때의 감정만을 새겨
뒀을 정도.
어리둥절해한다. 먹을 것을 좋아한다. 감정이 앞선다. 마카롱, 디에즈와 달리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더디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말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 말한다.
종의 변화라는 거대한 흐름. 하지만 그것은 위대한 업적이 아닌 한 어린아이가 벼랑에 몰린 결과였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아이는 숨죽이고, 도망쳤다. 그러나 위태로워진 마지막 순간에는 시간을 빠르게 돌려,
그들에게 덧씌워진 죽음이라는 운명을 벗어나게 했다.
그 모든 형태에 아이의 희망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때는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존재에 껄끄러움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었으나, 지금 남은 건 연민뿐이었다. 불쌍하고, 너무 불쌍해서 목 안쪽이 고통스러웠다.
괜히 들쑤셔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는 얘기였다. 리카르디스도 공감할 수 있었다. 과거의 그 일 자체가 상처가
될 뿐 아니라, 과거의 일과 ‘로젤린’의 기억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로젤린은 기로에 서서 선택을 해야
할 것이고, 그것은 로젤린을 매우 힘들게 할 테다.
“……그래.”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로젤린의 행복과 걔가 생각하는 스스로의 행복은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을지도 몰라. 그럴
경우에 우선되어야 할 건, 당연하게 본인의 의사야. 그리고 로젤린은 자신이 가진 기억과 발타 놈들이 뿌리고 간
종잇조각과 디에즈의 말로 어느 정도 과거를 깨우친 상태지. 그러고도, 지금 그 아이는 여기 있는 거야. 전하의
옆에. 고민은 좀 하는 것 같다만.”
“로젤린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전하니까, 전하가 직접 한번 물어봐. 어떻게 하고 싶은지. 이후에 로젤린이
남아 있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맹수용 쇠사슬을 준비해야겠지.”
“이봐요, 전하.”
“왜 그러나.”
“나도 그래.”
로젤린이 좋은 거 먹고, 좋은 옷 입고, 햇살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예쁘게 생긴 잡초도 한번 뜯어 먹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지기도 하고-물론 떨어지지 않겠지만, 이라는 사족이 붙었다- 어쩌다 다치기도 할
테지만, 시간은 상처가 나을 만큼 그 아이에게 허락될 것이라고.
마카롱이 그리는 미래에는 오직 로젤린뿐, 마카롱은 없었다. 그 사실과 더불어 그녀가 말하는 소소하고도 원대한
행복의 내용에 리카르디스는 꾹 참고 있던 눈물을 한 방울 흘리고야 말았다.
* * *
페르탄은 머리를 묶으며 다가오는 부관, 진을 보았다.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한 걸 보니, 페르탄이 어디에 있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허탕을 친 모양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안 주무셨습니까?”
184 화.
“백작 부인께 이를 목록을 적고 있습니다. 평소 사령관님께서 사랑의 편지를 보낼 때마다 끼워서 보내고는 하지요.
부인의 말은 들으실 것 같아서. 오늘은 또 ‘전투의 피로가 쌓였음에도 주무시지 않고 홀로 돌아다니심’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꽤 고전하실 겁니다. 소상히 일러 드릴 예정이라.”
어쩐지 답신이 올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머리 감고 잘 말리시는 게 좋다, 고기만 말고 채소도 드셔라,
혼자 돌아다니시지 마시고 호위를 대동하시라 같은 염려뿐이더라니. 페르탄이 피식 웃자 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죽을병에 걸리셨군요.”
아니, 죽을병에 걸리신 겁니까? 도 아니고 확정이었다. 죽을병에 걸린 게 틀림없다! 보좌관의 단언에 페르탄은
한 번 더 웃었다. 진은 소스라치게 한 번 더 놀라며 그에게 다가갔다.
“느낌이 좋지 않다.”
전쟁에 거칠어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은 페르탄이 말하는 ‘느낌’이 얼마나 적중률이 높은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도 전황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페르탄의 불안을 이해했다.
발타의 병력은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그러나 발타와 일라베니아를 가로지르는 관문의 주둔군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방심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위기감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마독과 인조적인 마인들이 아직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훌륭한 무기들을 내보이지
않는다? 분명 꿍꿍이가 있었다. 여러 상황을 가정했으나, 관문 주둔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밀려드는
발타군을 막아 내는 것뿐이었다.
성벽 아래의 병사들이 페르탄을 발견하고 경례했다. 페르탄은 인사를 받아 준 후 품 안에서 초콜릿과 사탕을
꺼내어 성벽 아래로 후두둑 떨어트렸다. 병사들이 망토를 펼쳐서 재빠르게 받아 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그런지 이제는 받아 내는 일도 능숙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의 짤막한 평화였다.
* * *
승리하였다.
사람들은 불안을 떨치고서는 노래를 불렀다. 어떤 짙은 어둠도 빛으로 떨쳐 낼지니, 영광의 일라베니아!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일라베니아의 국기를 흔들었다. 잠시 잠잠했던 주점에도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환한 햇살 아래 웃음소리가 퍼졌다. 스타스는 고삐를 쥐어 걸음을 멈추고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옆에 있던
르원이 의문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문제가…….”
뻥! 샴페인의 코르크가 날아가며 소음을 냈다.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바닥에 술을 질질 흘려 댔다. 그걸 목격한
스타스의 표정이 더욱 모호해졌다.
“있군. 확실하게.”
“동감일세. 이만 가지.”
“들어와!”
분노가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르원이 알기로 그가 이렇게 감정을 격하게 드러낼 만한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무슨 일이 또 일어난 것이리라.
“저 없다고 또 안 주무셨지요.”
리카르디스가 팔로 눈을 가리고 손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고풍스러운 문양에 금박을 입힌
초대장이 놓여 있었다. 르원은 리카르디스의 다리를 꾹꾹 마사지하며 나머지 한쪽 손으로 초대장을 펼쳤다.
짤막한 문구들을 다 읽은 르원이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뭐가 또 일렀기에?”
“정말, 너무 일러…….”
* * *
엘피디오의 죽음은 비극이었다. 하지만 귀족은 그 비극으로 일어날 손익 계산이 더더욱 중요한 부류였다. 몇
년간의 치열한 싸움을 벌인 1 황자와 2 황자의 싸움은 리카르디스의 승리로 끝났다. 누구라 공표되지는 않았으나,
그가 황태자였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일라베니아의 황제가 될 자!
최근 전선에서의 거듭된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전쟁에 관련된 그 누구보다 리카르디스가 조명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를 탐탁지 않게 보던 무리조차도 접근해 리카르디스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의 태도는 예전과 같았다. 특별하게 승리에 심취해 있지도, 전에 없이 거만하지도, 조금의
방심도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 위에 걸고 있는 웃음은 상대방을 한 발짝 물러서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태도는 정중하지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이제 모두를 포용하고
끌고 가야 하는 한 나라의 후계자가 혼자서 전쟁이라도 치르는 기세였으니.
리카르디스는 귀족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는 구석으로 가서 파트너로 온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과 이런저런
음식에 손을 댈 뿐이었다.
“아, 이건 처음 먹어 봅니다.”
“그거 내 알 바는 아니군.”
르원의 시시한 농담에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때마침 종이 뎅 울렸다. 황제의 등장이었다. 설원의 월계수,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황제 폐하 듭십니다! 시종이 소리 높여 그의 행차를 알렸다. 모두가 고개를 숙였으나,
그중 리카르디스만 가만히 서 있었다.
황제는 평소보다 수척해 보였다. 장례식 이후 그는 며칠간 금강석 성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일 거라, 리카르디스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정도의 감상이겠지 싶었다.
제 지위를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아들을 견제하기 위한 꼭두각시 인형.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다음 황좌를 물려줄
뛰어난 아들이 죽고, 꼭두각시 인형이 살아남았다. 꼭두각시 인형은 충실하며, 훌륭했다. 그 누구도 황가의
핏줄이 아님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누구도 그 이외의 황태자 후보는 찾지 못할 정도로.
그러한 상황에서 엘피디오의 장례식 이후로 후계자를 공표해야 된다는 귀족들의 발언이 늘어났다. 슬픔은 기쁜
일로 잊힐 테니, 훌륭한 인재가 다음 세대의 일라베니아를 이끌어나가리란 희망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얘기였다.
185 화.
리카르디스는 발타와 전쟁이 정말 끝나고 평화로운 바람이 일라베니아 전역을 스치고 흐른다 하더라도, 황제가
말한 ‘그럴 때’가 찾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천한 평민을 황태자로? 그것은 커다란 치욕일
것이다.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는 엘피디오의 대항마! 나약한 황제는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평민을 데리고 와
방패를 삼았다!’
황제는 예상한 바와 같이 시시껄렁한 소리를 했다. 만약 중앙 상비군까지 전면적으로 나서게 되었다면,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을 것이다.
식료품이 동나고, 쿠퍼 한 개짜리 빵을 쿠퍼 열 개는 줘야 살 수 있을 것이며, 신경이 예민해진 자들끼리 잦은
다툼이 일어나 거리의 민심이 흉흉해질 것이 아닌가. 불온한 분자들이 검을 들고 일어서면 백성들의 안전은 더
이상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병력을 지원해 준 다음부터 전선에서는 연승하고 있지 않나. 그
정도로 충분했다는 거다.
하지만 상대는 발타였다. 심지어 이번에는 일라베니아의 중심부에 사건을 터트리는 만행을 저지르며 큰 전쟁을
예고했는데, 그 대비는 미숙했다. 다행히도 전력이 우세해서 이기고는 있는 모양이지만, 리카르디스가 보기에
위태롭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로젤린.”
싸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의 로젤린이 고개를 돌려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순식간에
이완되었다. 리카르디스는 내심 흡족했다. 이상한 거 보지 말고 좋고 예쁜 거 보고 마음 풀라는 뜻에 부른
것인데, 효과가 아주 좋았다.
그런데 그 순간, 로젤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녀의 시선이 리카르디스에게서 벗어나 바깥쪽을 향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가 바라본 방향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의문이 깊어 갈 무렵, 아치 모양의 거대한 문으로 한 남자가 헐떡이며 들어왔다. 변경 주둔군의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런 연회에 입고 오기에는 부적절한 차림새였다. 심지어는 여기저기 먼지가 묻어 더러워져 있었다.
귀족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몇 걸음 걷다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예의를 차린 것일 수도 있으나, 지쳐서 쓰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니다.”
쨍그랑!
하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기묘한 정적에 리카르디스는 살짝 고개를 돌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 * *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깃발에는 발타를 이끌어 가는 다섯 개의 가문 중 하나, ‘람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발타의 수도를 거점으로 한 대귀족 가문이었다.
“정신 차려 이 새끼들아!”
기헤란 산맥와 맞닿아 있는 남부 관문의 봉화가 불타올랐다. 발타의 궁수가 쏘아 올린 화살이 때를 알리며,
전쟁은 시작되었다.
공성전 1 일 차.
산맥과 이어지는 거대한 관문은 견고했다. 그러나 발타 측에서 사용한 공성 무기가 성벽을 넘으며 큰 피해를
낳았다. 불에 타는 거대한 구체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서는 방벽과 관문 내의 각종 구조물을 산산조각 냈다.
그것만으로도 피해는 막심했으나, 잘 꺼지지 않는 끈적한 화염과 사람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독이 은밀하게 퍼졌다.
공성전 5 일 차.
대군이 총력을 벌였다. 발타군이 마침내 성벽 위로 올라왔다. 앞선 며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수라장이
펼쳐졌다.
진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거대한 발타의 병사에게는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남자의 발길질에
진은 몸을 구부리며 헛구역질했다. 투구가 나가떨어지자 어깨를 스치는 길이의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음험하게 웃는 병사가 그녀의 머리채를 쥐어 들었다. 피와 침,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보고 병사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대머리, 너. 발타 놈이 아니군.”
진은 사내의 말투에 발타가 아닌 왕국 마람쪽의 사투리가 섞여 있음을 눈치챘다. 아까까지 히죽거리던 남자의
낯빛이 변했다.
기헤란 남부 관문. 페르탄이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성장시킨 기사와 병사는 마인이라는 초인적인 힘에도
굴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처참한 전투였으나 결국은 승리를 쟁취해내었다. 그 선두에는 어느새 얼굴에
하나 더 큰 흉터를 새긴 페르탄이 있었다.
진은 자신이 마주한 병사에게서 얻은 정보를 그에게 전달했다. 마람 왕국의 개입이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에도
페르탄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 또한 알고 있던 정보인 듯했다. 발타 측의 병사들이 조롱을 퍼부을 때마다
항상 성벽 위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더라니. 내용을 듣기는커녕 그 속에서 필요한 정보만 쏙쏙 빼먹고 있던
것이다. 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공성전 8 일 차.
전투의 피로가 팔다리를 무겁게 했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동료들의 시체가 마음을 짓눌렀다. 간절히 바랐건만,
오늘도 해가 뜨고 말았다. 남부의 다른 관문에서 지원 요청을 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남부 영지와
중부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시간을 끈다면 승산은 충분히 있으리라.
관문의 아침은 언제나 연기와 함께 시작했다. 매일 하나의 봉화를 올리며 이상 없음을 알리던 평화로운 때도
있었으나, 최근은 다섯 줄기의 봉화를 피워야만 했다. 다섯 줄기의 봉화는 적과 교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186 화.
진은 멍하니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불안한 소리가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허리에 찬 검이 한없이 무르고 약해 보였다. 꺾여서 쓰러져 일어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진은 페르탄을 찾았다. 시야가 흐려져 힘들었다. 멀리서 거구의 검은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페르탄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모두에게 깃든 두려움이 그에게는 조금도 닿아 있지 않았다. 병사들은 기헤란 남부 관문의
사령관만을 바라보았다.
진은 페르탄이 자신의 어깨를 탁, 하고 붙잡는 손길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고개를 들었다. 페르탄은 며칠 전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다 확신했던 때와 같은 미소를 걸고 있었다. 진은 어쩌면 그는 그때부터 이러한 상황까지
예측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 사령관마저 완전히 손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절망스러운 듯했다. 관문이
뚫리면 그때부터 펼쳐질 광경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으리라. 죄 없는 백성들이 죽어 나갈 것이고, 그중에는
병사들의 가족들도 있었다.
“병력을 둘로 나눈다.”
“그리고 남는 자들은 분견대가 영지민을 피신시키고, 이동할 때의 시간을 벌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 자, 검을
뽑아라! 의미 없는 개죽음은 아닐 것이다. 그대들의 시체가 쌓여 저들을 가로막을지니!”
“사령관님!”
진이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페르탄은 그녀의 반박이 들리지 않는 듯 방벽 위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그녀가
뒤를 따르며 항변했다. 사령관의 부재 시, 병력은 혼란에 빠진다. 황실에서도 사령관님의 귀환을 바라지 않더냐.
“모두가 그러합니다!”
페르탄은 뒤돌아 성벽 밖, 전장의 반대쪽인 일라베니아를 바라보았다. 저 울퉁불퉁한 산 너머에는 영지가 있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기헤란 관문이 지키고자 하는 땅. 일라베니아.
하지만 미처 위로의 말 한마디 내뱉지 못했던 것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후회가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관문을 지키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후회를 품고 있었노라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의 가장
커다란 마음이었다.
병력 만 오천 중, 칠천의 분견대는 근처 영지의 주민들을 피신, 중부의 병력과 연계하여 전선을 재구축.
* * *
어머니, 에델바이스에게.
“…….”
금강석 궁,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의 사후 문제로 황제를 짧게 대면한 칼릭스는 나오자마자 알터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도련님께서는 안 웃으면 흉흉해 보이니 선량한, ‘저는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미소를 잃으면 안 된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니 이놈이? 인상을 찌푸린 것도 아니고 그냥 무표정이었는데 시비를 걸어? 칼릭스는 울컥하다가 한숨을 쉬며
말을 돌렸다. 알터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할 기력도 없었다.
그리고 그 서류는 죄다 붉은수레바퀴 영지의 성에 잠자고 있었다. 전시이다 보니 특례법으로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더니 황제가 무척 깐깐하게 굴었다. 분명 뭔가 있겠다 싶어서 자세를 낮춰 황제의 기분을 맞춰 준
덕에 이유는 대충 알아내었다.
칼릭스도 의심을 피해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문제없는 후계자에게 언제까지 작위를 안 물려줄 수도 없으니,
정식 절차대로 진행하는 정도의 시간은 두고 지켜보겠다는 얘기였다. 칼릭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칼릭스는 황성에 온 김에 로젤린을 보러 가기로 했다. 월장석 성에 도착한 칼릭스는 성문 앞에서 기다리던 수습
기사 헤사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이동했다.
“칼.”
“누님.”
헤사가 잽싸게 방을 나갔다. 칼릭스는 분위기 파악이 빠른 소년의 뒷모습을 흘끗 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헤사 군도 많이 컸군요.”
“…….”
그런 구체적인 수치를 바라지는 않았다. 제 누이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수습 기사의 키를 꼬박꼬박 재 볼
만큼 섬세하지는 않으니, 눈대중으로 나온 수치이리라. 그럼에도 지나치게 상세해서 무서웠다.
칼릭스는 은근히 기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우선 승계 문제와 관련된 얘기를 로젤린에게 들려줬다. 당분간은
발이 묶이겠지만, 최대한 빨리 처리한 후 따라가겠노라고. 칼릭스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내쉬었다.
정적 속에서 두 남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 다 번듯하게 차려입은 것에 비하면 어딘가 퀭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피로에 찌들어 있는 표정이었다.
187 화.
붉은수레바퀴 남매는 요 며칠간 굉장히 바빴다. 애도를 보내오는 수많은 귀족들을 상대해야 하고, 중부에 있는
붉은수레바퀴 령의 문제로 상의도 하고, 황제도 만나야 했고, 승계 문제 등등. 한 사람의 공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쏟아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로젤린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완전히 대고는 고개도 뒤로 꺾었다. 칼릭스는
턱을 괴고는 테이블에 엎드리다시피 했다. 둘 다 완전히 지친 모습이었다. 일이 대충 일단락되자 미뤄 둔 피로가
밀려왔다.
“힘들어.”
“저도요.”
“……저도요.”
정말 그런 책략이었던 것인가? 칼릭스는 자신이 만약 바쁘지 않았다 하더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제 아버지는 언제나 가장 위험한 곳에 있었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죽음의 위기도 몇 번이나 건넜다.
쇠가 담금질 되며 서서히 단단해지듯, 칼릭스는 어릴 적부터 ‘페르탄의 죽음’에 단단해졌다. 부고가 도착했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아 그런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는 지금도 눈물보다는 한숨만 나왔다.
“비극적인 일이 닥치거든 울기보다 헤쳐 나아갈 방법부터 생각하라 하셨죠. 자식들을 강하게 키우시더니 성공하신
것 같네요.”
칼릭스는 어이가 없어져서 웃으며 얼굴을 마구 쓸었다. 그래도 피로가 걷어지지는 않았다.
매년 새로 작성하여 공증받는 유서에는 후계 문제를 비롯한 재산 분할에 관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올해분은
확인해 보지 않았으나, 과거에 폐기된 여러 장의 유서는 로젤린이 하얀밤 기사단에 투신한 이후부터 언제나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니 올해도 같은 내용일 것이다.
“……알고 계셨네요.”
“그때 씩씩 화내면서, 결혼할 생각이 없는데 결혼 지참금을 어디에 쓰냐고, 그딴 돈 아버지나 많이 쓰시라
했지.”
“그래서 아버지가 애초에 그런 효과를 노리고 유서를 작성하신 게 아닌가? 했던 기억이 나.”
로젤린은 살짝 웃고는 고개를 살짝 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햇빛이 부서지는 광경을 보다 말을
이었다.
* * *
일라베니아의 최남단에 설치된 관문으로 형성되어 있던 전선이 밀려났다. 그것은 방벽 밖에서 이뤄지던 전투가
일라베니아 제국의 영지 내에서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기헤란 관문의 사령관이었던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판단으로, 근처 영지의 영지민들을 피신시켰다. 그러나 모든
영지를 챙길 수는 없었다. 발타와 인접해 있던 남부 영지의 대다수는 초토화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지금도 발타의 검은 손길은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또 다른 남부 관문의 사령관인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채고 전황이 완전히 뒤바뀌기 전에
병력을 보존하여 후퇴했다.
그녀의 영지인 비스타는 난공불락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방벽 하나만 세워져 있는 관문과 달리,
비스타에서는 이런저런 전략과 전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덕분에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거친 공세에도 무너지지
않고 발타군 일부의 발을 묶어 둔 채 공방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기병 몇 만, 보병 몇 만, 궁병을 몇…… 아무튼 시급한 상황이니 최대한 중부를 지원하여 일라베니아를 수호하고
더 나아가 발타를 뿌리 뽑을 수 있도록 하라.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고 리카르디스는 예상했었다. 때문에 험난한 앞길을 생각하며 침울해하지도, 기어코
다시 한번 자신을 사지에 밀어 넣으려는 황제의 태도에 분노하지도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전쟁에 관련된 문제로 며칠 밤낮을 새우다 오늘에야 겨우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서도 서류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글자들이 흔들거렸다. 몽롱하게 흐려지더니, 까무룩.
눈앞이 어두워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형상을 어슴푸레하게 그려 냈다. 오랜만에 보는 로젤린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사후,
로젤린은 하루도 바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오늘도 테라스 바깥 나무에서 호위를 하려다가 잠을 버티지 못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불을 끌어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턱을 괴고 한참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녀가 눈을 떴다.
“……로젤린.”
“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이건 그대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 개인적인 사정 이외의 이유다. 굳이 따지자면, 그대의 사정
때문이지.”
“이걸 보신 겁니까?”
“발타가 얼마나 악랄한 짓을 벌이고 있건 간에, 대외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일라베니아가 과거에 저지른 일과
더불어, 그로 인해 벌어진 대륙의 몰락. 그 죗값을 받아 내겠다는 것이지. 그 명분과 그대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있음을…… 아, 알고 있나?”
188 화.
“……그대가 들고 있는 종이에 나온, 그 박해받은 ‘마인들’중 그대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 그대는 어디까지
알고 있나?”
“기억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감옥 안에서 병사한테 창대 끝으로 맞았던 때에 숨도 못 쉬도록 아팠던 건 상세하게
기억나는데, 대부분은 흐릿합니다.”
“황성에서 지내다 보니 과거를 연상할 만한 부분이 많은 터라. 여기는 몇백 년 전이랑 그다지 변한 게 없어서요.
신전도 불에 타기는 했지만 복구한 모양입니다.”
리카르디스는 입술을 잘근 문 채, 종이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로젤린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예.”
리카르디스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은근슬쩍 ‘황제 폐하’에서 ‘폐하’라는 호칭을 빼 버렸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알고 있었나?”
“예.”
“언제부터?”
“…….”
리카르디스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올곧은 사람이었다. 사랑과 자비에 관해 서술된 책에서 볼 법한
대답이었다. 피는 피로 씻기지 않는다. 죄를 죄로 덮어서는 안 된다.
“원한이 있느냐, 없느냐 하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원망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나쁜 짓을 저질렀던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을 테고요.”
“……그렇겠지.”
“엘피디오 전하의 장례식에서 깨달았습니다. 일라베니아 황가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모두 죽인다고 이 원한이
풀리지는 않을 것 같다고. 저는 대체 과거의 죗값을 누구에게, 얼마나 물어야 합니까?”
어려운 얘기였다. 리카르디스는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누굴 미워해라, 누구는 미워하면 안 된다. 그것은 타인이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많이 배웠지만, 아직 모르는 것도 많기에 섣부르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 결정으로 사람들이 다치게
되는 결과가 따라온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생각하고요.”
“아, 그렇습니까?”
로젤린이 씩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이 와중에도 가슴이 설렌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잠시 후, 로젤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 먼 옛날에요.”
동화책의 첫 문장을 읽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아주아주 먼 옛날’은 지독하리만큼 처절한
현실이리란 사실을 리카르디스는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래.”
리카르디스는 지나온 나날들의 로젤린을 떠올렸다. 언제나 자신의 앞에서 등을 보이며, 검을 빼 들고 있었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반드시 자신을 지켜 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그때의 마지막 기억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은 과거의 괴로웠던 시간보다 훨씬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그,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지낸 긴 시간이 겨울잠을 자는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벽에 걸려 있는 깃발의 붉은수레바퀴 문양을 보고 기억이 났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하얀밤의 주인을
지킨다.’ 아마 그것이 ‘로젤린’에게 가장 중요한 기억이 아닐까 싶습니다.”
“…….”
“제 과거와 현재는 결국 다르지 않습니다. 소중한 걸 지킨다. 어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때에도 기억했습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가진 진정한 힘이 마력이나 육체의 강인함 따위가 아니란 걸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은 그녀의 입으로 구체화 되었다. 지키고 싶다. 그 맹세 자체가 로젤린을 움직이게
하고 어떤 희생도 감내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의 결정이나 다름없었다.
“칼릭스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찾으라 했습니다. 알던 사실이 뒤바뀌고, 상황이 달라져 혼란스러울
때에 그것이 중심을 잡아 줄 수 있을 거라고요. 저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킨다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것이 제 중심입니다.”
로젤린이 말한 대로였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 눈앞의 로젤린과 지금은 없는 ‘로젤린’.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닮아 있었다. 단순히 외모가 같기 때문이 아니었다.
“저의 힘이 닿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과거에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이번에는 지키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얼 해야 하는지 지금의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제 힘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닿았다. 로젤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피부에 닿았다. 무게가 실리자 깍지 낀 손이 서서히 시트에 닿았다.
“로젤린.”
“예.”
“예.”
“예.”
도와 달라는 말에 답에 어울리지 않는, 두서없고 장황한 말이었음에도 로젤린은 환하게 웃었다.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밀리아, 세티스티아, 붉은수레바퀴 백작, 황제, 디에즈, 케틀린.
189 화.
20
적의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2 황자’의 모습. 임명서를 보고도 눈하나 깜빡 안하며 여유롭게 내용을 읽어 내릴
뿐이었다. 이렇게 되니 괜히 눈치가 보이는 건 황제 쪽이었다. 그는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보다가 목을 가다듬고
급히 얘기를 꺼내었다.
리카르디스가 싱긋 웃었다.
“일라베니아에 악재가 따르는 상황에서, 황태자 위를 내리는 것이 마땅치 않다 여겼다.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만백성이 널 반길 것인즉. 그때야말로 적기가 아니겠느냐.”
리카르디스는 황제가 겸양이 섞인 대답을 하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니, 제가 어떻게 황태자 위를
받겠느냐…… 따위의. 리카르디스는 대답 대신 내리깐 눈을 들어 올리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폐하. 혹시 기억하십니까?”
“무얼 말하느냐.”
“어릴 적, 저의 호위 기사단이 창설을 코앞에 뒀을 때 말입니다. 제가 어리석어 ‘하얀 밤’이 가지는 의미를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해, 그 이름을 달라 청했었지요.”
암살자 따위의 손에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던 터라, 호위가 더욱 강화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리카르디스의 호위 기사단이 창설을 코앞에 두고 있을 무렵, 리카르디스가 금강석 성을 찾아왔다.
이것은 황제의 입장에서는 역모였고,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리카르디스를 황태자로 생각하고 있다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는 허, 허. 경직된 웃음만 내뱉었다. 리카르디스는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의 안전을 위해 특별히 호위 기사단의 창설을 허가해 주셨음을 충분히 인지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영광이긴
하나, 저의 쓰임새를 완전하게 하고 싶으시다면, 폐하. 조금이나마 이 싸움이 비등해 보이도록, 힘을 실어
주시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또한, 대외적으로는 제가 대신관 누구보다 신성력이 뛰어나니 하얀 밤을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하사했다 하신다면, 과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황제는 그때까지도 리카르디스를 데리고 온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한 적이 없었다. 물론 천치가 아닌 이상에야
엘피디오를 저지하기 위한 꼭두각시라는 사실 정도야 알아챘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모든 항목에서 수재 이상의
평가를 받는 그때의 소년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가 자신이 황실에 온 이유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을 꺼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참으로 맹랑했다. 네가 네 아들을 견제하기 위해 날 데리고 왔지 않으냐, 라고 말하고 있었으니.
황제는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렸던 아이는 더 이상 없었다. 청년은 부서지는 햇살 아래에서 선명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껄끄러웠다. 그때의 죄책감이 살아나는 듯, 언젠가 사라질 ‘하얀밤 기사단’의 미래가 떠오르는 듯. 황제는
입안에 고여 넘어가지 않는 침을 차와 함께 넘겼다. 리카르디스가 맞은편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황제의 낯이 굳었다. 리카르디스가 말하는 ‘하얀밤’은 단순히 그의 기사단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황제는
다르게 느꼈다. 그가 축복의 밤을 불러내겠다고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권력을 쥐고 흔들고 싶어 하는 황제에게 우수한 아들이란 정말 너무나도 위협적일 것이다. 그것이 발타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우수한 아들이라면 더더욱. 리카르디스 휘하 세력의 대다수는 그가 평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나, 그러한 이유로 황제가 그의 죽음을 바란다는 것을 납득하는 중이었다.
“농이었다. 뭔가.”
“……칼릭스 경이 왜 여기 있습니까?”
그래, 왜 칼릭스 경이 여기에…… 왜 여기에 있어? 엘피디오가 죽었다고 돌아섰나? 아까부터 신경 쓰였어. 방
안이 작게 속삭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소란 속에서 리카르디스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내 사람이었다.”
“예?”
“예에?”
“언제부터…….”
“…….”
기가 찬다는 칼릭스의 표정에 모두가 리카르디스의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로젤린만 눈을 빛내며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랬어? 우리 전하의 인품을 흠모했어? 언제 충성 맹세를 했어? 묻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190 화.
“그래,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일 출진하기 전에 총사령관 임명식이 있을 것이다. 직위를 받을 사람은 당연히
나고. 전쟁터에서 ‘총사령관’이 암살 명단 제 0 순위라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겸사겸사, 전쟁에서 패한다면 그
책임 또한 물으려고 하는 것이고.”
“효율 좋은 책략이로군요.”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다.
“죽으라고 보내는 곳이다. 전쟁에서 발타의 기세를 눌렀다 싶으면 그때부터 내가 위험해지겠지. 그러나, 내가
참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라 본다. 그 누구든 무슨 수를 썼겠지. 그래서 나는 기꺼이
검을 들고 전장으로 가겠다. 조금이라도 내가 내 운명을 택할 수 있는 길이기에 가겠다. 그 사지 속에 아주 좁은
틈의 활로가 있으리라, 믿는다.”
[설원의 월계수,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가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를 대 발타의
병력을 이끄는 일라베니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델라브힘의 가호 아래 일라베니아를 수호하고 대륙을 불안에
떨게 한 발타와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라.]
“반드시 승리한다.”
* * *
햇살과 함께 꽃잎이 내려지는 공간 속, 일라베니아의 국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은 기시감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달라진 점을 꼽자면, 그때보다 인원수가 많아졌다는 것과 더불어 일라베니아의 대군을 독수리 한 마리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삐이익---
독수리가 한 번씩 창공을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낼 때면 병사들은 번번이 우러러보며 감탄했다. 이델라브힘의
가호가 따른다며 무척이나 좋아한다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사기가 올라갔다.
똑똑.
바깥에서 마차 문을 두드려왔다.
“무슨 일이지?”
“전하, 그…….”
‘환각이 아니었군.’
라헤안시는 어디서 구한 것인지 늙은 당나귀를 타고 있었다. 당나귀는 무언가를 천천히 씹으며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 위의 라헤안시는 헥헥대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당나귀를 어떻게든 재촉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속도는 전혀 빨라지지 않았고 그냥 꼴 보기 싫은 효과만 더하고 있었다.
“혀엉!”
그는 입술을 한번 꾹 깨물었다. 입 밖으로 내뱉기 싫었으나, 앞에서 저렇게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으니
한번은 맞춰 줘야 할 거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창문에 팔을 걸며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내 동생, 라헤안시를.”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난데없이 펼쳐진 깨가 쏟아지는 형제들의 애정 행각에 괴로운 듯 얼굴을 구겼다.
리카르디스로서도 입 밖으로 내뱉는데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으나, 라헤안시가 코를 먹는 소리까지 내 가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름 보람을 느꼈다.
“라헤.”
“잘 왔다.”
“……허락은 맡고 왔나?”
* * *
사건이 있기에 앞서 일라베니아를 떠났던 라고슈의 바이페렘, 관디테에게도 그 소식이 닿았다. 왕좌에 앉은
소녀는 큰 동요를 보이지 않고 과일을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관디테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딤라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관디테가 과일 한 조각을 다시 입안에 집어넣었다. 가득 퍼지는 새콤한 맛에 말랑말랑한 소녀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게 무엇이냐.”
“혹시나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전쟁 때문입니까?”
“형제가 염려한 대로, 그렇다. 나는 오늘 일라베니아와 발타의 전쟁에, 라고슈가 참전하겠노라는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제르타예를 불러 모았다.”
“웩.”
191 화.
딤라는 제르타예들의 말을 들으며 손으로 눈을 덮었다. 이 자식들을 어쩌면 좋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 명,
두 명,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소리가 불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딤라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딱. 유별나게 큰 소리도 아니었음에도 제르타예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반대.”
“찬성.”
“마음 같아서는 반대에 들고 싶었지만, 이런 중대한 사항을 의논도 하지 않으시고 ‘참전하겠다’고 하신 말씀이
신경 쓰여서 말입니다.”
“소심함?”
“결정 장애?”
딤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소심함과 결정 장애라고 말한 남자와 여자를 두들겨 팼다. 다른 제르타예들이
딤라의 건강을 염려해 말리는 사이, 관디테가 갈라·제르타예를 보며 생긋 웃었다.
“그게 누굽니까.”
남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주 상냥하고 귀여운 형제들이었노라. 특히 로젤린 경의 경우에는,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하곤
했지.”
갈라·제르타예의 가주, 귈테는 복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동생? 언니가 아니라? 그가 모호한 표정을 하자
관디테가 흐흐 웃었다.
“냉혹한 추위만이 꺼지지 않는 불꽃을 만들어 내리라 생각했으나, 씹다 뱉은 음식물같이 미적지근한 온도를 지닌
일라베니아에서도, 과연 제르타예는 제르타예였다.”
“아주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만, 가장 중요한 건 제르타예가 누구의 곁에서 타오르고 있느냐 아니겠나.”
“나는 영원한 서약으로서, 우리가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결코 잊지 않았다. 나의 모든 결정은
오로지 라고슈만을 위한다. 갈라·제르타예. 일라베니아와 발타가 싸운다고 하지만, 결코 그것은 그 둘만의 일이
아니다.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은 것이 얼마나 지났던가. 그 사이 대륙에는 오물과 쓰레기가 끼어 도무지 쓸
만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쓸어 버릴 것은 쓸어 버리고, 남길 것은 남긴다. 새로운
대륙에서, 새로운 싹이 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이 자라나, 종국에는 라고슈까지 피어날 수 있도록.”
“일라베니아에서 만난 황자는 그나마 싹수가 있는 놈이었다. 설원의 월계수에서 어떻게 이렇게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놈이 있나 싶을 정도였지. 다음 대의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으나, 라이노 그 소인배가 제 권력 유지해
보겠다고 아들을 전쟁터로 밀어 넣었지.”
* * *
일라베니아 중부.
일라베니아 제국군이 오늘 머무르게 될 영지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전쟁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대지는 나무와
풀이 말라붙어 있음에도 황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 닦인 도로와 거리를 돌아다니는 분주한 사람들. 반듯한
건물 굴뚝에서 퍼져 나오는 따스한 연기까지.
추위에 잠든 희끄무레한 땅을 석양이 뒤덮자 황금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로젤린은 부쩍 성장해 다른 군마들보다
몸집이 훌쩍 커진 초콜릿의 위에서 영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인간으로서 처음으로 발돋움을 했던 곳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령, 에스터.
“영광을 그대에게.”
로젤린도 칼릭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안 본 사이 더 말랐는지, 인상이 날렵해져 예민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쩐지 죽은 페르탄이 생각났다. 이 거대한 영지와 수많은 사람들을 책임지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칼릭스가 날카로운 인상을 누그러트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두 남매는 나란히 이동했다. 잘 지냈느냐 안부를 주고받는데, 칼릭스가 모호한 방식으로 말을 끌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용건을 꺼내지 못하고 빙 둘러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로젤린이 참지 못하고 묻자 칼릭스가 끙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칼릭스가 그녀에게 다가서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예전 같으면 무얼? 하고 물었겠으나, 로젤린은 사라진 주어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에델바이스. 로젤린의
어머니. 그녀가 제 딸의 죽음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응.”
“응.”
로젤린이 희미하게 웃었다. 칼릭스가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해가 저물었다. 로젤린은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서 목욕하고, 주방장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음식을 섭취한 후
자신의 방에서 잠시 쉬고 있던 중이었다.
“들어오세요.”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로 방문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로젤린의 허락에 방문이 서서히 열렸다.
에델바이스였다.
“잠시 시간 괜찮니?”
애써 웃고 있는 낯이었다. 로젤린은 가만히 에델바이스를 보다가 그녀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에델바이스는 시선을
떨군 채 한참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얘기는 대충 들었단다.”
그녀는 손톱을 문지르거나 살갗을 비비는 행동을 했다.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에델바이스는 그 말 이후 다시
몇 초간 침묵을 지키다 어이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에델바이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로젤린을 훑었다. 머리, 이마, 눈, 코, 입……
발끝까지. 에델바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다.
“잠시, 왼손 좀 줘 보겠니?”
로젤린이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에델바이스는 샅샅이 로젤린의 손을 훑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
끝에 작게 난 점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로젤린에게 다가온 에델바이스가 성급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소매를 걷었다. 팔꿈치 아래에 작은 흉터가 보였다.
그리고 바닥에 풀썩 앉아서는 그녀의 헐렁한 바지를 걷었다. 정강이를 따라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에델바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로젤린은 그녀가 웅크린 채 울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래…….”
그녀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로젤린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에델바이스를 부축해서
일으키려 하자, 그녀는 발작하듯 로젤린의 손을 떨쳐 내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가 보였다. 혐오감도,
두려움도 아닌 오직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는 눈이었다.
192 화.
한참 뒤, 에델바이스가 비틀거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어지러운지 마른 손으로 이마를 짚고선 헐떡였다.
로젤린은 말없이 그녀가 숨을 고르길 기다렸다. 에델바이스는 등받이에 눕듯이 기댄 채,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투두둑. 코끝까지 습한 냄새가 나더라니, 비가 내렸다.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에델바이스는 잠에서 깨어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젤린이란 꽃 이름은 없었다. 아마 여러 사정에 부딪혀서 애칭만이라도 꽃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리라. 로젤린은
자신을 로즈, 로즈. 하고 부르는 에델바이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정말 그런 목소리였다.
“가는 길을 응원해 줄 걸 그랬나. 어미라는 사람이 볼 때마다 그렇게 뭐라고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겠지.”
“행복하고, 빛났던 모든 시간이 후회로 뒤덮여, 색이 바래어진 기분에 나는 지금…… 너무나도, 비참하구나.”
로젤린은 걸음을 돌려 담요를 가지고 돌아왔다. 에델바이스의 무릎에 담요를 덮자 그녀가 흠칫 놀라서 눈을
가리던 손을 떨어트렸다. 무릎을 꿇고 담요를 정리 중이던 로젤린과 그녀의 눈이 딱 마주쳤다. 에델바이스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는 로젤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착하구나.”
“참 착해.”
에델바이스가 힘겹게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 로젤린에게서 멀어졌다. 로젤린은 이것이 그녀가 건넨 마지막
작별 인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델바이스는 자신의 존재를 견딜 수 없이 괴로워했다. 그 사실이 못내 괴로웠다.
자신의 잘못도, 그녀의 잘못도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탓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인.”
“건강하세요.”
* * *
로젤린은 익숙한 침대에 파묻혀 가만히 누워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코를 킁킁거리니 내리는 비 냄새가 한껏
들어왔다. 그녀는 원래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소리였다.
한데 지금은 피부에 닿는 끈적한 공기가 짜증 났다. 잠들 즈음이면 톡 소리를 내서 정신을 깨우는 빗소리가
거슬렸다. 내일 또 행군을 해야 하는데, 진흙 때문에 초콜릿이 고생할 생각을 하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런저런 일과 공기 하나까지 트집을 잡아 가며 투덜거리던 로젤린은 자신의 사고가 어느새 아까의 대화로 흐르고
있음을 자각했다. 애써 다른 생각을 해 봐도 결국은 돌아왔다.
똑똑.
“로젤린.”
로젤린은 홀린 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목소리의 잔상을 따라 스르륵 움직였다. 손이
문고리에 닿았다.
달칵.
“들어가도 될까.”
진군하는 내내 볼 수 없었던 편안한 옷차림새였다. 냉엄한 표정으로 대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그가 은색 갑주를 벗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날카로운 눈빛과 딱 다물린 입술, 힘이 들어가
있는 어깨와 온몸으로 사방을 경계하는 날카로운 기세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분위기. 분위기가 다르구나.
로젤린은 깨달았다.
그녀는 문을 더 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리카르디스는 야심한 시각, 다 큰 아가씨의 방에 들어가도 되냐는
대범한 요청을 한 것치고는 무척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들어올 생각은커녕, 방안을 흘끗흘끗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아차 하고는 발걸음을 옮기긴 했으나, 목을
가다듬는다든가, 손으로 아랫입술을 구깃구깃하게 만진다든가 하는 갖은 쑥스러움을 동반한 채였다.
로젤린은 자신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는 리카르디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공간에 들어온 적 없는 이가
서 있는 광경은 이상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저, 전하.”
로젤린은 당황하는 제 목소리가 낯설어 더욱 당황해 버렸다. 리카르디스는 기어코 슬리퍼를 신겨 주고서야
일어났다.
두 사람은 낮은 테이블을 끼고 앉았다. 로젤린은 그제야 리카르디스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작은 트레이에는 투명한 찻주전자와 유리잔, 그리고 찻잎을 담아 두는 나무 상자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냥 그대와 같이 마시고 싶어서 왔는데,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걸 문을 두드리고서야 알았어. 내쫓을
건가?”
리카르디스가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대체 얼마나 특별한 차이기에?
굳이 빗물을? 이렇게나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니. 로젤린도 자리에서 일어나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창문 밖으로 돌출된 부분에는 꽃 화분 몇 개가 올려져 있었고, 찻주전자는 그 옆에서 같이 비를 맞는 중이었다.
투두독. 조금씩 내리는 빗줄기가 투명한 유리에 달라붙었다. 한 방울이 더 붙으니 무거운지 그제야 스르르 안으로
떨어졌다. 로젤린이 집중해서 바라보는 모습에 리카르디스가 남몰래 작게 한숨을 쉬었다.
로젤린은 흔들리는 불빛을 보다가, 이따금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히고 있었다.
193 화.
“좀, 번거롭지.”
“아뇨. 재밌습니다.”
“……잠시 눈 좀 감고 있으면…….”
“예?”
“누, 눈 좀.”
‘레몬?’
“이제 떠도 된다.”
“와…….”
“……마법이야.”
“예?”
“…….”
로젤린은 그제야 리카르디스가 진정 이 현상을 마법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가 자신과
에델바이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고, 위로해 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는 것 또한.
칼릭스가 말해 준 것일까. 그래서 걱정이 되었던 걸까. 머릿속으로 찻주전자를 비장하게 들어 올리던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몰래 숨겨 온 레몬즙을 잽싸게 뿌리고 어딘가로 숨겨 놓았을 거라 생각하자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효과가 굉장합니다.”
“그래?”
“비밀이야.”
그렇게 말한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내부에서 휘몰아치던 수치심을 걷어 냈는지, 한결 가벼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사기를 쳤다는 걸 자각한 리카르디스는 가슴을 펴고 자랑스러워하던 걸 멈추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콧잔등을 쓸며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대가 행복해지게.”
21
일라베니아 제국군은 중부 관문에서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휘하에 있던 변경 주둔군과 일부의 병력을 흡수하여
남하했다. 제국군의 목적지는 놋쇠저울 성곽도시로, 발타군이 중부 관문에 도달하기 전 반드시 만나게 되는
곳이었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제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거기다 날씨까지 좋았던 터라 예상했던
날보다 이틀은 더 빠르게 도착했다. 저 멀리 도시를 보호하는 거대한 성곽이 보였다. 전투의 열기와 시끄러운
병장기 소리는 이미 대기를 울리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바람이 세게 분다 싶더니, 거대한 독수리가 일라베니아 제국군을 향해
날아왔다. 전황을 둘러보기 위해 떠났던 마카롱이었다. 마카롱은 말 위에 서 있는 로젤린을 발견하고 내려왔다.
로젤린이 팔을 내밀자 마카롱이 그 위에 살포시 안착했다. 그녀의 귓가에 대가리를 가까이 한 독수리가 남에게
들리지 않게끔 부리를 작게 열고 닫으며 무언가를 속삭였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밟고 있던 안장에
앉았다. 그리곤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접근해 속삭였다.
“영주인가.”
괜히 볼모로 붙잡혀서 몸값을 요구받거나, 성문을 개방하라는 지시를 받으면 곤란하건만. 리카르디스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독수리가 다시 한번 로젤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중앙군의 기병대와 궁기병대가 먼저 출진한다. 본격적인 섬멸전에 앞서 발타군의 신경을 교란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병대가 궁기병대를 엄호하여, 후방에 있을 고위 지휘관들을 사살하라. 결코, 깊게 파고들지 말라. 그리고
로젤린 경.”
“예, 전하.”
“그대도 같이 출진한다.”
“명을 받듭니다.”
“전하.”
“되어, 있…….”
지 않았다. 이마에 따스한 감촉이 닿았다. 철컹, 철컹! 와장창! 뒤에서 누군가가 무기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울렸다.
리카르디스는 느리게 상황을 인식했다. 그러니까 로젤린이 지금, 일라베니아 제국군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춘 것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너무 놀라서 강철처럼 굳어 버렸다.
미소를 날린 로젤린이 투구를 쓰고 고삐를 돌렸다. 얼마나 자연스럽고 멋있는 뒷모습인지. 얼굴이 발개진
리카르디스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굳어만 있었다.
[예?]
[그렇습니까?]
[마찬가지로 전하의 무운을 비는 거예요.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기사가 무운을 빌어 주니, 얼마나
든든하시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레티시아는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접근할 때부터 불안한 기운을
느꼈다. 발걸음을 급히 재촉했었으나, 늦어 버린 후였다. 레티시아는 차마 그 광경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손으로
두 눈을 가려야만 했다.
‘이델라브힘이시여…….’
194 화.
놋쇠저울 영지에 발타의 선발대가 도착한 건 8 일 전이었다. 총 만 오천 정도의 병력으로, 규모가 크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발걸음마저 맞추는 병사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얼마나 고도로 훈련받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놋쇠저울의 영주, 빌렘은 분견대를 보내어 그들의 후방을 공격했다가 아까운 병력만 줄인 후로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수성에 집중했다.
그러나 산적이나 도둑만 잡아 왔던 영지의 병사들에게는 전쟁이라는 단어는 너무 낯설었다. 더군다나 영지를
지키는 병력의 반은 남부 관문이 무너지기 전 소집령으로 불려 간 상태라 마땅하게 싸울 인원이 없던 것도 그들의
고단함을 한층 더했다. 그나마 성곽이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였기에 겨우 버티고 있는 실정이었다.
영주는 싸울 만한 장정들을 차출하여 무장시켰다. 다행히 물자는 충분했지만, 문제는 물자가 아니었다. 발타군은
지치지도 않는지 밤새 꼬박 공성 무기를 조립했고, 이틀 전부터는 돌과 썩은 동물의 사체, 불타고 있는 기름
단지 등을 날려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쾅!
“아악!”
8 일째 계속된 공성은 낮밤을 가리지 않았다. 먼저 지치기 시작한 쪽은 민간인이 많이 포함된 놋쇠영지군
측이었다. 경험도 경험이고, 일라베니아의 남부 관문이 허물어지고 적이 이곳까지 당도하였노라는 사실 자체가
그들을 크게 흔들었다. 언제나 승리했던 일라베니아가 이번만큼은 패배할지도 모르겠다고.
사기는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만큼 떨어져 가는 반면,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오늘을 넘기기가 힘들어 보였다.
와아아-
발타군 측에서 함성이 들렸다. 공성 탑이 기어코 성벽에 당도했다. 하단만 고정되어 있는 나무판자가 열리며
성벽에 걸쳐졌다. 곧 방패를 든 구릿빛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석궁대가 일제히 사격했으나 방패에 전부 가로막혔다. 재장전 속도가 늦은 석궁의 특성상 적의 침입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성벽 위 놋쇠저울군과 공성 탑에서 쏟아져 나온 발타군이 무기를 맞부딪쳤다. 챙, 챙. 금속음이
소름 끼치게 가까워져 갔다.
“이거 놓아라! 발타군의 지원 병력이 왔어, 이번에는 북문 쪽에서! 어차피 죽을 거라면 명예롭게 죽을 것이다!”
“일라베니아 제국기입니다!”
아군이었다. 빌렘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눈물을 멈췄다. 귀족 가문의 문양이 아닌, 일라베니아 제국기라면
제국 직속의 군대가 왔다는 얘기였다. 발타의 병사들도 눈치챈 듯 움직임이 뜸해졌다.
일라베니아의 거대한 군대에서 한 덩어리가 떨어져 나왔다. 대략 삼천쯤 될 것 같은 분견대는 본대를 뒤로하고
돌진했다. 북측에서 반 바퀴 빙 돌아 성벽의 남문 방향까지 왔다. 마치, 남쪽 성벽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하늘에서 본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알았을까. 혼란스러운 빌렘의 머리 위로 거대한 독수리의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두두두, 먼 거리에서 달려오고 있음에도 땅이 울렸다. 갑옷을 착용하고 말을 탄 중장기병과 궁기병으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빛을 받는 은색 갑주들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그들의 파괴력은 창 아래에 쓰러지는 발타군의 숫자로
가늠할 수 있었다.
발타의 보병과 일라베니아의 중장기병대가 분전을 치르는 가운데, 선두에 서 있던 기사가 갑작스레 말에서
뛰어올라 보병 셋을 뭉갰다. 이후에 인파에 묻혀 사라진 기사는 십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예상외의 장소에서
튀어나왔다. 바로 남쪽 성벽에 걸쳐진 공성 탑의 가장 높은 곳, 놋쇠저울의 병사들을 공격하는 발타군 바로
뒤에서.
소란은 찰나에 불과했다. 기사가 성벽 위의 발타군에게 커다란 무언가를 휘둘렀다. 반쯤 부서져 있어서 잘은
모르겠으나, 공성 탑의 층마다 설치되어 있는 투석기의 일부분인 것 같았다. 거대한 나무와 쇳조각은 발타의
병사를 이끌고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아, 그렇군.”
기사는 망설임 없이 성벽 아래로 발타의 병사를 집어 던졌다. 비명이 멀어져 갔다. 기사는 성벽 위를 한번
찬찬히 둘러보더니, 더 이상 발타군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
“예!”
기사의 한마디에 병사들이 한 구석에 반쯤 엎어져 있던 놋쇠저울의 빌렘을 대령했다. 빌렘은 비틀거리면서도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기사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무섭게 기세를 내뿜으며 싸우는 모습만 봤을 때는 한없이 커
보였는데, 막상 마주 서자 기사의 몸집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빌렘이 입을 떡 벌렸다. 일라베니아 사람 중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마주 인사했다.
“본대가 곧 도착할 예정이니, 조금만 더 버텨 주시죠. 남쪽 성벽의 활로는 만들고 가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철컥, 다시 바이저가 닫혔다. 빌렘은 허둥지둥하다가 가슴 위에 주먹을 올려놓는 경례로 그녀를 배웅했다.
로젤린은 막 성벽으로 진입하려는 발타의 병사 둘을 떨어트린 후, 성가퀴 위로 올라섰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커다란 전투 도끼를 주워, 공성 탑과 성벽을 연결하고 있는 나무판자를 세게 내려쳤다.
쾅!
그녀는 성가퀴를 박차고 떨어져 있는 공성 탑으로 돌진했다.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는 그 호쾌함이란. 빌렘은
옆으로 화살이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로젤린의 전투를 관전했다.
그녀가 들어간 공성 탑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과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 삐걱거리는 나무 소리까지.
나무 우리 안에 맹수와 토끼 여러 마리를 집어넣는다면 저런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쾅!
다시 굉음이 울렸다. 공성 탑의 한 면에서 나뭇조각이 터지며 병사들이 날아갔다. 사람을 투석기에 태워서 날려
보내도 저렇게는 안 될 것 같았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오오…….” 하며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이후로도
왼쪽, 오른쪽, 뒷면 앞면 할 것 없이 무언가가 터져 나갔다.
삐걱, 삐걱. 거대하고 견고한 공성 탑이 포악한 맹수의 움직임에 비명을 질렀다. 공성 탑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더니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단순히 부순다고 저렇게 무너져 내릴 수 없으니, 아마 어떻게
조립되었는지 구조를 파악해서 주요 기둥들을 파괴한 모양이었다.
무너진 잔해를 피해 발타의 병사들이 흩어졌다. 그러나 때는 늦었고, 그들은 재앙을 피할 수 없었다. 군집하여
일정하게 공격하던 이들이 흐트러지며 어수선해졌다.
* * *
대략적인 수습을 마친 후, 놋쇠저울의 빌렘은 일라베니아 제국군의 총사령관을 알현했다. 밤하늘의 달빛보다
빛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
놋쇠저울 백작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리카르디스가 눈동자만 굴려 빌렘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는 고고한 자태가 더해지니 그저 기품이 넘치게 보일 뿐이었다.
놋쇠저울의 빌렘은 그를 대면하고 한 10 초간 멍청하게 서 있다가 감탄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천사……?”
“……같이 강림하셔서 놋쇠저울을 위기에서 구원하신 대제국 일라베니아의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2 황자 전하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 또 영광일 뿐이라 하십니다.”
195 화.
“전하를 뵈옵니다!”
희끗희끗한 백발이 뒤덮은 흰머리의 노인이 눈물을 철철 흘리며 오열했다. 보좌관이 다시 뒤에서 대답했다.
“대 일라베니아 제국의 위험에 이 늙은 목숨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다 말씀해 주시니, 백성 된 자로서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하십니다.”
참으로 유능한 보좌관이었다. 놋쇠저울의 빌렘은 눈물을 닦다가, 집무실 한구석에서 아옹다옹 작게 다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벽을 보고 서 있는 로젤린과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갈색 머리의 기사가 있었다.
남자도 낯에 익었다. 상업 도시인만큼이나 황금정원 상단과 교류가 잦았고, 관련자인 큰뿔산양 레이몬드도 몇 번
본 적 있었다. 언제나 헤실헤실 웃기만 하던 사내가 무섭게 인상을 굳히고 로젤린을 혼내고 있었다.
아직?
“스물네 살입니다.”
“……놀랍게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
스타스는 그제야 안심하고 나갔다. 나단과 스타스, 레이몬드, 파르딕트와 르원, 잇세리온에게 둘러싸여 한차례
혼난 그녀는 중앙의 의자에 앉아 의기소침하게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하, 숨을 쉬며 그녀의 맞은편 의자를 끌어 앉았다. 시선이 닿자 로젤린이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뭐라 했었지?”
“무운을 빕니다?”
“더 전에!”
“그것이…….”
“없습니다!”
“없어야지! 홀로 씩씩하게 수천 명 사이로 돌진하는 행동에는 본인이 무사할 거라는 보장이 있어야만 했을
테니까!”
안 풀린 것 같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자신에게 은근히 약하다는 것을 이용하기 위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의 사고와 상식이 점점 돌아오면서 느는 건 처세술뿐이었다.
“……기병대장이 그러던가?”
리카르디스는 엄지로 미간을 꾹 눌렀다. 공성 무기들이 성곽을 두드려 대고 있긴 했지만, 놋쇠저울의 성곽이 아주
높고 두껍게 축조되었다는 얘기는 행군 도중 수십 번을 했다. 본대는 몇 십 분 뒤에 곧바로 도착할 예정이고,
새삼스럽게 위기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을 텐데.
‘……이건 또 예상외로군.’
리카르디스는 분견대를 이끌었던 대장의 보고로 그녀의 걱정이 현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지러운 전장
속에서 그런 판단을 빠르게 내렸다니. 물론 지휘관이나 대장들은 보면 파악했을 테지만, 로젤린에게 그런 전황을
보는 눈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욱 예상외였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눈동자가 자신을 담자마자 시선을 떨궜다.
애처로워 보이는 모습에 리카르디스의 화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물론, 화가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로젤린의 말대로 남쪽 성벽이 위험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녀의 활약으로 많은 희생이 줄어든 것도 맞았다.
하얀밤 기사단은 총사령관 리카르디스의 호위 부대로 어지간하면 직접적인 전투를 벌일 일이 적었다. 그런 이에게
일부러 임무를 주어 보낸 이유는 로젤린의 명성이 좋은 쪽으로 퍼지기를 리카르디스가 바랐기 때문이었다.
영웅으로 내세우자니 그녀가 위험해지고, 그렇다고 옆에만 두자니 활약할 수가 없고, 내보냈더니 덜컥 사고를
치고 있고.
그녀가 잽싸게 리카르디스를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몸이 닿아 왔다. 리카르디스는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잇새 사이로 분한 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약기는.”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라고 눈치챈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말없이 씩 웃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 *
전투가 끝난 후, 놋쇠저울 도시는 더욱 분주해졌다. 부상자와 사망자의 수습. 군대의 정비. 무너진 성곽과
건물의 보수. 포로의 수용 등. 놋쇠저울 백작은 물론이고, 리카르디스도 하루에 두 시간 정도 짧은 수면을 취할
정도로 바빴다.
그의 일정에 맞춰 움직이던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로부터 짧은 휴가를 받았다. 격렬한 전투가 고단했으리라 그가
판단했기 때문이었으나, 로젤린은 정말 조금도 고단하지 않았기에 휴가를 반납했다.
“싫습니다.”
말 잘 듣겠다는 얘기는 불타 없어지다 못해 먼지가 되어 바람결에 흩어진 지 오래인 듯했다. 한참을 반항하던
로젤린은 놋쇠저울의 특산물이 염소 치즈라는 얘기를 듣고 급하게 말을 멈췄다. “싫습.”까지 얘기한 그녀가
마지못해 받아들여 준다는 식으로 휴가를 쟁취하고 떠났다.
빤히 보이는 속마음과 어리숙한 영악함이 귀여웠던지라 리카르디스는 짧게 웃으며 떠나는 그녀를 기꺼이 배웅했다.
룰루랄라 길을 가던 로젤린이 레이몬드와 얘기하는 장면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가
아니었지만, 입 모양이 정확하게 ‘염소 치즈’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로젤린을 바라보던 리카르디스는 곧 바쁘게 몰아치는 일에 신경을 빼앗겨 자신만의 짧은 휴식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196 화.
그 시각, 거리로 내려온 로젤린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저기 무너져 있는 건물
사이로 흐르는 악기 소리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아름다웠다. 로젤린은 그 소리를 따라갔다.
로젤린은 그 수많은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보였다. 그녀가 듣고 홀린 듯
따라왔던 아름다운 음률의 정체였다. 낡은 후드를 쓰고 있었지만, 후드 안으로 보이는 옷감이 재질이라든가 들고
있는 악기의 휘황찬란한 생김새로 높은 신분의 사람인 걸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남자는 조용한 군중 속에서 노래했다. 대중들도 잘 아는 성가였지만, 이델라브힘을 찬양하는 기존의 가사와
달랐다. 신의 가호를 받는 두 번째 월계수가 어둠을 밝힐 것이니 더 이상 밤이 두렵지 아니할 것이라는 희망찬
내용이었다.
“…….”
로젤린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며 살벌해지기 시작할 때 박수 소리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났다.
로젤린의 시야에 남자의 입가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것이 보였다. 그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두 팔을 벌렸다.
마치, 광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포근하게 안아 주려는 것처럼.
“놋쇠저울의 백성들이여.”
“…….”
말투는 늙수그레한데, 목소리만은 젊었다. 로젤린은 남자의 정체를 곧바로 파악했다. 대신관 라헤안시였다.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된 로젤린은 당혹스러움에 잠시 굳어 있었다. 그가 왜 리카르디스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른단
말인가?
그는 바람에 망토가 펄럭이는 순간 라헤안시의 몸에 연결된 어떤 실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망토의 매듭이 바람에
날린 듯이 자연스럽게 풀리며 가려져 있던 라헤안시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저, 저건!”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낸 라헤안시의 복장, 정확히는 목걸이를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다. 언뜻 단순해 보일 수 있는
장신구였으나 그것의 가치는 재화로 환산할 수 없었다. 일라베니아의 대신관만이 지닐 수 있는 징표이기
때문이었다.
“대신관님이시다!”
“대신관님이셨어!”
“놋쇠저울에 대신관님께서!”
“…….”
괘념치 말라더니 일라베니아에 대신관이 단 일곱 명뿐이며, 자신은 그중 하나라는 사실을 굉장히 강조하고 싶은
것 같았다. 로젤린의 표정이 께름칙하게 변했다. 라헤안시가 자애로운 미소를 걸고서는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신관님!”
라헤안시가 훗 웃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로젤린은 왜인지 모르게 속이 거북해져 인상을 찌푸렸다. 라헤안시의
뒤에 있는 베르움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예언하셨어! 예언을 하신 거야! 소란이 전염되듯 수많은 군중 속으로 녹아들었다.
라헤안시가 하늘을 쳐다보며 두 손을 모았다. 그러고 눈을 감으니 완전히 기도를 올리는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노인이 깜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들이 다시 한번 수군거렸다. 역시, 예언을 하시는 거야! 예언의
능력이 있으신 게 분명해!
로젤린은 성에 돌아가 리카르디스 앞에서 라헤안시의 설교-사기 행각-을 재현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벌리고,
하늘을 보며 아련한 표정을 하고, 두 손을 경건하게 모으며 엄숙하게 기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 또한 토씨
하나 안 틀리게.
그 한 편의 연극을 본 하얀밤 기사단 전원이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차마 내뱉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런 가신들을 대신해 리카르디스가 진실을 말했다.
아, 역시나.
“딴에 그런 재주가 있긴 했지. 이델라브힘도 지금쯤이면 후회하지 않을까. 자신의 종이 그 훌륭한 노래와 악기
연주 솜씨로 뭘 하고 있는지 보면 통탄할 것 같은데.”
* * *
마차가 자갈 위를 튀어 오르며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반동과 소음에 잠깐 잠들었던 케틀린이 깨어났다.
그녀는 잠시간 눈을 깜박이며 흐릿한 의식을 깨웠다.
‘뭔가 이상한데.’
“……내 허벅지입니다.”
197 화.
“베개가 좋아서요.”
“꺄아악!”
아악, 제발, 살려 주세요! 마차 밖에서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발타군이 날뛰고 있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케틀린은 창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비 냄새가 났다. 그 습한 냄새에 비릿한 냄새가 섞여
악취를 풍겼다. 지하 감옥에 있을 때가 떠올랐다. 케틀린은 가만히 옷을 여몄다.
“춥습니까?”
디에즈의 말대로 일라베니아의 겨울은 춥고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사실상 대륙의 북단에 위치한 라고슈의 추위가
더욱 혹독할 테지만, 죽는 사람은 일라베니아 쪽이 훨씬 많았다. 케틀린은 아마 일라베니아의 사람들이 따스한
계절의 온도에 추위를 망각했던 탓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왜인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서늘해진 때였다. 케틀린의 어깨 위로 따스하고 포근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그녀는
손을 더듬어 물체의 정체를 파악했다. 담요였다. 쌀쌀하다는 한마디에 디에즈가 둘러 준 모양이었다.
케틀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담요를 만지작거리며 디에즈를 빤히
바라보았다.
참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 속에 맹수가 있다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물론 지금이 모습이 가식이라거나, 거짓된
모습이라고는 생각되지는 않았다. 보통 사람들만 해도 양면적이고 다면적인 구석이 있지 않던가. 하물며 전혀
다른 타인의 기억과 함께 인간의 생을 이어받은 디에즈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것도 디에즈, 그것도 디에즈.
[……비록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그 모습의 결과로 봄이 지나고 시작되었어야 할 전쟁이 앞당겨져 따뜻한 나라에
사는 우리 병사들이 개고생 하지만?]
바른말에 뼈아팠던 하카브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못했지만 케틀린의 볼을 쭉 잡아당기는 식의 소심한 복수를
했다.
하카브는 ‘마음에 안 든다’의 발언에 충실하여, 디에즈의 상냥한 모습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처참하게
훼손된 마인 병사들의 시체를 보여 준다든가 하는 방식이 그 일환이었다. 전쟁 중 당연하게 발생하는 피해였으나,
디에즈는 얼굴을 익힌 마인들의 시체를 볼 때마다 고요해 보이는 낯 아래로 분노를 끓였다.
어찌나 절절한 동족애인지. 보는 사람마저 가슴이 미어질 정도였다. 케틀린은 그런 디에즈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했다. 그의 감정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없으나, 지난 시간에 얽매인 자가 과거의 상실에 얼마나 집착적으로
반응하는지는 잘 알았다. 자신 또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디에즈가 가만히 마인 시체를 볼 때면, 하카브는 유례없이 시끄러운 입을 닫고 있었다. 케틀린은 하카브가
그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디에즈를 쳐다보며 즐겁다는 듯 미소 짓고 있을 테다.
‘재수 없어.’
케틀린은 기가 찼다. 사랑한다느니, 나의 검은 달이니 어쩌니 할 때는 어쩌고 사람을 그렇게 악랄하게 괴롭히다니.
“예상외의 말인데요. 그 ‘나쁜 친구’가 일부러 당신을 내게 붙인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개인적인 충고로 봐도
되겠습니까?”
본인이 날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걸 왜 내 생각으로 덮어씌워? 열 받은 그녀의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던
것인지 하카브는 한마디를 덧붙였었다.
본인의 품위만 생각한 모양이었다. 케틀린은 반박을 포기하기로 했다. 말도 통해야 하는 법이었다.
하카브가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케틀린은 자신이 지지해야 하는 부분이, 디에즈의 속에서 가끔 흔들리곤 하는
분노라는 것을 깨달았다. 칼날이 벼려지는 것과 같이 서로가 서로의 망치가 되어 과거를 두드리라는 뜻이리라.
분노가 더욱 뾰족해지고 단단해질 수 있도록.
그러나 케틀린은 하카브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들을 생각이 없어서, 일라베니아의 욕이나 피해자의 가슴 아픈 사연
대신 “오늘의 밥은 뭘까 궁금하네.”라든지, “마차가 별로라서 그런 걸까요. 엉덩이가 네 쪽이 된 기분이네요.”
따위의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기만 했다. 그럼에도 디에즈가 하카브의 속내를 파악하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디에즈가 말을 흐렸다. 그 망설임에서 케틀린은 그가 하카브의 의중을 깨달은 배경을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음, 네.”
“검은달 애들 붙잡고 제 과거사를 아느냐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알고 있을 겁니다. 모르는 한 명은 얘기가 나왔을
때 졸았던 놈이겠죠. 가슴 아픈 사연일수록 사람들의 마음에 잘 파고들곤 하니까요. 분노는 집단을 규합하는 좋은
수단이잖아요? 하카브 전하께서 제 과거 얘기를 듣고 잘 써먹을 수 있겠다 싶었는지 굉장히 기뻐하시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몹쓸 인간 같으니. 아무튼, 당사자의 동의 없이 얘기를 들었다고 그렇게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요. 하카브 전하께서는 디에즈님이 신경 쓰길 매우 바랐겠지만.”
[쓸모 있구나.]
“재수 없어…….”
케틀린이 마차의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하게 말을 흘리자, 디에즈가 흠칫했다. 하지만 케틀린은 별다른 뒷말을
붙이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깜깜한 시야 속에 비명이 둥둥 떠다녔다.
* * *
남부 관문이 함락당한 가장 큰 이유는 발타의 병력이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부관이었던 진의 증언에 따라, 마람 왕국과 너른 땅을 옮겨 다니며 사는 소수부족들의 참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순한 용병일 수도 있으나, 최근 마람과 일라베니아의 교류가 뜸해진 만큼 발타와 친분이 두터워 보이는 것을
보면 전쟁을 위해 세력을 규합했을 수도 있겠다는 가정 또한 버릴 수 없었다.
황실 수뇌부는 이번의 전쟁이 일라베니아와 발타가 아닌, 일라베니아와 대 일라베니아 연합의 전쟁이라 규정짓고
병력의 규모를 늘렸다. 일라베니아뿐만 아니라 라고슈 왕국을 포함한 힐라사고 왕국 등 인접한 주변국에 참전을
요청한 상태였다. 출병하기 전에 전령을 보냈으니, 한두 달 안에는 원군이 오리라 예상하는 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이끄는 제국군은 전쟁에 도움이 될 지리적 이점을 지닌 영지들을 거점으로 움직였다. 앞서 놋쇠저울
영지에서 포획했던 발타군의 지휘관으로부터 발타군이 다섯 개의 큰 덩어리로 나뉘어 일라베니아의 땅에서 각기
전투를 벌이고 있음을 알아냈다. 리카르디스는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지금이 적기라 판단하여, 영주와 성을
함락하려는 그들의 뒤를 치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척후병들이 주둔지로 돌아왔다. 제국군이 향하던 소금바위 영지가 이미 함락당했다는 정보와 함께였다.
일라베니아의 남부는 일라베니아를 노리는 세력과 맞닿아 있기에 다른 지역들보다도 방어가 두터웠다. 아무리
발타군이 강하다고는 하나, 성을 함락하는 속도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빨랐다.
발타군이 벌인 대학살에 지레 겁먹은 영주가 냅다 항복해 버렸다는 얘기였다. 적이 강해서가 아니라, 아군이
약해서 빠르게 함락된 것이었다. 접근은 여전히 조심스러워야 할지언정 망설일 필요는 없을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척후병의 보고를 마저 들으며 미간을 좁혔다. 영지로 가는 길목 길목마다 사람들이 창만큼 기다란
꼬챙이에 꿰어 죽어 있다는 대목 때문이었다.
198 화.
“그, 그런 잔인한!”
지휘관들의 낯이 파리해졌다. 영주가 생각 없이 항복할 리 없으니 영지민과 자신의 안전을 요구했을 텐데,
입성하자마자 말을 뒤바꾸고 학살을 벌인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만 있었다. 그의 태연한
반응에 지휘관들이 평정심을 되찾기 시작했다.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던 리카르디스가 입을 열었다.
“……익숙한 방식인데.”
리카르디스는 변경 지역에서 일어나는 전투를 숱하게 겪어 왔다. 그중에는 ‘검은달’의 이름을 뒤집어쓴,
발타와 아무 상관 없다고 우기는 집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막사는 리카르디스의 한마디에 쥐죽은 듯 조용해진 상태였다. 모두가 리카르디스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드디어
딱 다물린 그의 입이 서서히 움직였다.
“…….”
“…….”
“힘은 세지만 멍청하고 도발에 잘 걸려서 함정이란 함정에 죄다 걸리고서는 운이 좋아서 어떻게 목숨만 부지하는,
그런 인간이 지휘관일 가능성이 높아.”
“쓸데없이 잔인한 처형, 그리고 과시하는 방법까지. 내가 예전에 맞붙어 본 적 있는 머저리와 흡사하다.
불안해하는 그대들을 위해 신빙성을 더해 주자면, 척후병, 그 꿰어 죽은 시체들 중에는 여자가 없지 않던가.”
“예, 예 맞습니다.”
“머리가 부족하지 힘이 부족한 인간은 아니다. 전면전은 어지간하면 피해야겠군. 함정을 놓고 상대를 밖으로
끌어내야겠다.”
거대한 병력을 운용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자였다. 먹지 못하면 싸울 수 없다. 싸우지 못하면 지게
된다. 당연한 이치였다. 리카르디스는 지금 식량을 이용해 그들을 바깥으로 끌어내자고 하는 것이었다.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와중 로젤린만 인상이 심각했다. 제국군의 주 전력이자, 마인에 관련된 사항
때문에 그녀도 참석한 상태였다. 하지만 여태껏 발언 없이 조용히 오고 가는 얘기만 듣고 있었는데 지금은 뭔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나와 같은 의견이로군. 그러니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뿐 아니라, 성안의 물자를 동나도록 만들어야겠다.”
“성 내부와 이어져 있는 지하 통로가 있다. 싸우기도 전에 영주가 백기를 들었기 때문에, 발타군에 들키지는
않았을 테지.”
리카르디스는 정보의 출처를 묻기 위해 일부러 성질을 버럭 냈다. 지휘관들은 울상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확인이 끝난 정보이니 진위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일라베니아의 고위 지휘관들조차 모르는 정보를
발타군이 미리 알아챘을 가능성은 낮으니,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지. 소수의 부대를 편성한다. 임시로 이름을……
굴속에서 활동하는 야행성 동물이 뭐가 있었지?”
“오소리가 있습니다.”
“좋다. ‘오소리’라고 부르겠다. 제국군이 출진하여 성벽 주위를 돌며 주의를 끄는 사이, 오소리가 지하 통로로
이동해, 식량 저장고를 모두 불태운다.”
지휘관들은 리카르디스의 입에서 빠르게 나오는 작전 계획을 허둥지둥 받아 적었다. 로젤린은 회의의 내용을
통째로 외우고 있어 여유롭게 그에게 질문할 수 있었다.
“식량 저장고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소수로 투입되는 만큼 정보의 정확도를 높여야
합니다.”
심지어는 손수 그리셨어? 지휘관들의 얼굴에 아연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들의 원래 상사였던 죽은 전 총사령관은
정말 놀고먹을 줄만 아는 전형적인 중앙 귀족이었다. 지휘관들이 안건을 내놓으면 해라, 말아라, 두 대답 중
하나를 할 뿐이었건만.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에도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냥 어깨를 가볍게 으쓱할
뿐이었다. 뭐 대수로운 일로 그러냐는 듯.
“그, 그걸 다 기억하십니까?”
“한 번 본 걸 왜 기억 못 하나.”
“최근 그 영지를 들른 몇몇 상인과 귀족, 병사들의 증언으로 내가 기억하던 때와 구조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더 궁금한 점은?”
“좋은 질문이다. 간단한 장치를 이용해서 시간을 조절해, 비슷한 시점에 발화되게 만들 생각이다. 질 좋은 초 몇
개만 있어도 가능하겠지.”
회의가 끝난 후, 특수부대 ‘오소리’의 선발이 빠르게 이뤄졌다.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그녀의 수제자이자
몸이 가볍고 날랜 에버하르트와 헤사. 그리고 로젤린이 주의 깊게 살펴본 몇몇을 포함해 총 열 명의 인원으로
결정되었다.
생각한 것보다도 더 소수의 인원인 터라 염려의 말이 나왔으나 로젤린은 열 명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사람이
많으면 방해될 것 같다며, 임무를 성공리에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그걸 말한 사람이 다름 아닌 로젤린이라는 점에서 조금씩 나오던 잡음은 쑥 들어가게 되었다.
헤사는 처음 맡게 된 임무에 흥분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착지한
순간 지나가던 부단장 나단과 눈이 딱 마주쳤다. 나단은 소년의 혈기 어린 모습을 애써 못 본 척하며 넘어갔지만,
소년은 크게 상처를 받아 버렸다. 헤사는 의기소침해서 로젤린이 머무는 막사로 돌아갔다.
“로젤린 경, 헤사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로젤린은 막사 중앙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헤사는 발끝으로 서서 그녀가 무얼 하는지 살폈다. 로젤린은
그녀의 앞에 놓인 길쭉하고 짤막한 수십 개의 초를 응시 중이었다. 초가 완전히 녹아내리며 마지막 불꽃이 바닥에
닿은 순간 로젤린이 중얼거렸다.
“오 분 십 초.”
“오 분, 십삼 초.”
소름이 돋았다.
* * *
코코 사르체는 달리듯이 걸음을 재촉해 성벽 위에 올랐다. 총 병력의 수는 비등해 보였다. 하지만 성을 수비하는
측보다 공격하는 측의 병력 소모가 훨씬 심각한 게 일반적이니 제국군이 불리한 형국이라 봐야 했다. 무슨 용기로
저 숫자로 공성전을 치르러 온 것인지 코코는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공성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성
무기들의 숫자도 변변찮았다.
199 화.
코코 사르체는 이변이 일어났음을 깨닫고 황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라베니아군의 발견과 동시에 잠들었던
성채 도시는 횃불로 밝혀졌었는데, 그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범상치 않은 크기와 밝기의 화재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지 못했던 이유는.
코코는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건물들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누군가가 양동이로 물을 퍼 나르자 불이
꺼지기는커녕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우르릉, 쾅! 마치 벼락에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사르체는 한 통 넘게 마신 와인의 취기가 싹 가시는 느낌을 받았다. 가을의 결실을 모아 두었던 많은 식량들이
죄다 잿더미로 변했다.
* * *
임무는 성공리에 마무리 지었다. 식량 창고뿐 아니라, 가축과 군마, 우물에도 손을 써 놓았다. 다시 지하 통로로
돌아오던 오소리들 중 한 명인 헤사는 가장 후미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벽을 짚고
차근차근 걷고 있었다.
그 상태로 바닥에 툭 튀어나온 구조물이나 돌을 피하는 모습이 보통 멋있는 게 아니었다. 전해지는 진동으로
위쪽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라 했는데, 헤사는 벽을 짚어 보아도 차가운 돌의 온도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소년은 대략 한 시간이 넘는 짧은 임무에서 로젤린이 벌였던 활약상을 떠올리고 새삼스럽게 속으로 감탄했다.
건물과 건물을 이동하는 시간을 계산해 초를 잘라 설치하고, 몇 번이나 마주칠 뻔했던 발타 병사들의 이목을
귀신같이 피하며, 가끔 피치 못한 상황에는 상대가 비명 한 번 지를 시간을 주지 않도록 빠르게 손을 썼다.
오소리들은 일을 처리하는 동안 대장 오소리에게 몇 번씩이나 도움을 받았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돌아오지 못했을
오소리 또한 있었으리라. 아찔했지만 굉장한 경험이었다. 모두가 한 번씩은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헤사도
한 번 더 그녀를 돌아보았다가, 막 눈을 뜬 로젤린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직 전투 중인 걸 보니 들키지는 않았나 보군. 아니면 화재 쪽으로 인원을 분산할 수 없게 전투를 지속하는
것일 수도. 일이 크게 틀어지지는 않았지만 서두르지.”
“예!”
“예!”
“뭔가?”
“혼납니다. 놓고 가시죠.”
“이건…….”
“훈제한 돼지 뱃살 고기다.”
“…….”
뭐? 언제? 오소리들이 식겁했다. 로젤린은 임무에 투입될 때보다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용한 통로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오소리들은 입에서 아주 살살 녹는 훈제 고기를 먹으며 지하 통로를
걸었다. 병사들에게 배급되는 싸구려 육포나 딱딱한 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기름지고도 부드러운,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는 것 같은 황홀한 맛이었다.
로젤린은 지하 통로의 끝에 오늘의 수확물을 두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식으로 완전 범죄를 꿈꾸었다. 아쉽게도
지하 통로의 끝에서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임무는 대성공이었으나, 사욕을 채운 그녀의 행동은 질타받아 마땅했으므로 부단장 나단이 불같이 화를 냈다.
입과 장갑에 기름을 잔뜩 묻힌 오소리들은 두 손을 등 뒤로 맞잡고 고개를 푹 숙이는 방식으로 나름의 죄책감을
표현했다.
“아니요…… 그냥 맛만 조금…….”
분명 입에서 살살 녹는다고 그녀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기억이 있지만, 공범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에버하르트는
로젤린에게서 완전히 제거된 위엄과 멋을 보며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성벽 바깥에서 보일 정도로 화려한 불길이었지.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무리 했으니 경도 그만하지. 식량 창고에
로젤린 경을 보내는데 이 정도도 예상 못했을 것 같나?”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혼나는 모습을 보다가 손을 저으며 대충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는 로젤린의
거대한 자루를 뒤적이며 품목을 하나씩 보았다. 주로 고기였지만, 말린 과일과 술에 절인 과일이 들어간 빵도 몇
개씩이나 있었다.
“……아주 골고루 가지고 왔군. 맛이 섞일까 봐 걱정했나 본데. 이것 봐, 포장을 아주 잘했어, 하하…… 대체
그럴 틈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로젤린이 눈을 질끈 감고는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리카르디스는 덜컥 불안해졌다. 그녀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리카르디스에게 접근해 자루 속을 뒤적였다. 고기와 빵 덩어리에 가려져 있던 가죽 물주머니 열다섯 개가 그녀의
손에 끌려 나왔다. 막사 안의 모두가 침묵했다.
“…….”
“…….”
* * *
도끼와 검, 휘어져 있는 발타식 단검이 교차 되어있는 ‘사르체’의 문양은 가문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발타의 힉살라는 황무지를 떠도는 거친 부족들을 매우 골치 아파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가문이 사르체였다. 강한
부족 몇몇을 발타로 끌어들여 사르체의 이름을 하사해 다른 부족들을 막는 방파제로 이용한 것이었다.
그들은 강하며, 야성적이었고, 용맹한 데다가…… 무식했다. 치명적인 단점이 있긴 했지만, 사르체는 수십 개의
가문이 몰락하는 그 사이에서 발타의 강력한 무기의 한 축이 되어 현재의 다섯 가문중 하나로 정착할 만큼 성장을
이뤘다.
전투, 전쟁광. 그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였다. 심지어는 가주의 선발 또한 적장자가 이어받는
일반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가주에게 결투를 신청해 이긴 자가 그다음 대의 가주가 되는, 누군가가
표현하기로는 ‘야만적’ 이지만, 그들의 말로는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덕분에 가주는 5 년마다 바뀌고는 했는데, 그건 결투를 신청할 수 있는 기간이 5 년에 한 번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과거, 결투 신청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을 당시엔, 사르체의 가주는 일 년 동안에도 여럿 바뀌었다.
발타의 힉살라는 매번 알현하러 오는 가주의 얼굴이 달라짐에, 또한 사관들이 작성하는 당대의 역사서가 쓸데없는
일로 두꺼워지고 권수가 늘어나고 있음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꼈다. 허구한 날 ‘누구와 누가 싸워 누가 이겨서
가주가 되었다.’라든지 ‘가주 누가 결투 후 사망하여, 누가 가주가 되었다’ 등의 전투 기록서 같이 되어 가고
있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게 지금 소금바위 성채를 점령한 발타의 장군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코코’는 옛 부족의 언어로 ‘근육’
이라는 뜻이라더군. 누가 지었는지 참. 아무튼, 그 때문인지 무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지. 고작 식량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제 모습을 수치스러워할 거다. 언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보급 물자를 기다리며 굶어 죽기보다
정면 돌파 하는 쪽을 선택하겠지.”
* * *
발타군의 식량 사정은 한계에 달했다. 독을 먹고 죽은 가축과 군마의 고기를 먹어야 할 정도의 비상 상황이었다.
여타 다른 건물과 각자가 들고 있는 군량 등을 모았더니 일주일 정도는 버틸 수 있는 양이 나왔다. 하지만 말
그대로 버틸 수 있을 뿐이었다.
코코 사르체는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기 전에 일찍이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작전 참모가 척후병을 보내어 첩보를
수집해야 한다,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른다고 하도 난리를 쳐서 여태껏 시간을 끌 수밖에 없었다.
200 화.
“전면전이다.”
코코 사르체의 얼굴 근육이 흉악하게 꿈틀거렸다. 전술과 전략을 도맡는 지휘관들 몇이 반대했다. 발타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했다.
“내부에서는 식량을 태우고, 외부에서는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정도의 군대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몰이사냥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저희 쪽에서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지하 통로와 모든 식량
창고의 위치를 알고 있을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제국군 측에서 용맹무쌍한 사르체에 대한 정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고작 그 정도 수 차이로 승리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요.”
“머리 쓴다는 놈들은 죄다 겁쟁이란 말인가! 너의 망설임은 네가 약하기 때문이다! 네가 조그맣기에 상대가 커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식량을 태웠다는 자만감에, 사르체가 우위를 점한 상황을 끌어내렸다는 것에
만족하여 그저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뿐이다!”
“부디, 재고를!”
“닥쳐라!”
* * *
이러한 상황에서 사르체군이 구태여 단단한 성벽을 뒤로하고 공격을 감행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그래서 코코는
그 생각의 허점을 찌르기로 했다. 식량 창고 화재 사건으로부터 고작 사 일이 지난 시점에서 먼저 공격하리라고는
일라베니아 측도 결코 생각하지 못할 테니.
코코 사르체도 구겨진 자신감과 공을 세우려는 욕심만 없었더라도 성채 안에서 지원을 기다렸을 것이다.
소금바위 성채 도시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성문과 일라베니아의 진지가. 그리고 동쪽에는 비스듬히 흐르는
강줄기가, 남쪽에는 나무가 무성한 구릉지대가 있었다.
제국군이 큰 실수를 한 것은 성문이 하나라고 그 앞에서만 고집을 피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서쪽의 성문과 정
반대 방향의 동쪽 성벽은 쥐 한 마리가 드나들 만한 출입구도 없으니까. 물론,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는 얘기였다.
음영이 짙어지는 낮에는 그냥 성문이 있구나 하고 착각할 정도로 반듯한 모양이었다. 문을 설치하기 위해 벽을
허물던 와중 전쟁 소식을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큰 돌덩이를 부랴부랴 쑤셔 넣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휘부는 이 우연한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런, 젠장.”
병사들이 잇새로 욕을 내뱉으며 진군했다. 흙이 고운 지역이다 보니 신발에 진흙이 들러붙는 정도를 넘어서
발목까지 깊게 발을 끌어 들이기까지 했다. 힘이 강한 사르체 군단은 대다수가 중장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검날과 화살을 튕겨 내는 단단한 갑옷은 지금만큼은 행군의 고단함을 더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며칠 동안 하루에
한 끼, 그것도 빵 반쪽과 콩 다섯 알만 먹은 그들의 체력은 처음부터 반 정도 깎여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병사들은 빠르게 지쳐 갔다.
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고난도 끝날 거란 사실을 잘 알았다.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거나 일라베니아군을 작은
소리로 욕하며 방패로 바닥을 찍고, 반쯤은 기어서 강가를 빠져나왔다. 선두에 서 있던 코코 사르체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반쯤 거지꼴을 하고 있는 사르체군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얼마 후, 발타군은 목적지까지 도달했다. 코코는 병사들을 멈춰 세웠다. 모두가 호흡을 노련하게 골랐다. 코코는
거대한 짐승이 웅크린 것처럼 보이는 가파른 구릉지대를 응시했다. 저 너머에 일라베니아군의 진지가 있었다.
코코가 손짓하자 멈췄던 병사들이 조용히 언덕에 올랐다.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서 일라베니아군의 진지를 내려다
볼 때까지는 조심해야 했다. 전투에 유리한 높은 지대를 확보하고, 허를 찔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이 줄을 맞춰 조용히 언덕을 오르며 콧김을 내뱉었다. 일라베니아군의 공작으로 고생한 며칠간의 원한이
발타의 병사들을 가득 채웠다. 그 누구도 곧 일어날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라베니아군은 사냥감이며,
사르체는 위대한 전사였다. 지쳤던 병사들에게서 끝없는 힘이 솟아났다. 눈이 번쩍이며, 근육은 꿈틀거렸다.
전투 전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연설은 이미 성채 안에서 끝냈다. 뿔피리가 울리면 숨소리마저 죽이고 진군했던
병사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숲에서 쏟아져 내릴 것이다. 갑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검은 잃어버리고
방패는 거꾸로 든 채 허둥지둥할 일라베니아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런데 그 순간.
‘…….’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뚝, 한순간에 코코의 걸음이 멈췄다. 우두머리가 멈춰 서자 병사들 또한 진군을
중단했다. 코코가 느낀 것은 마력이었다. 사르체 군단만 해도 마인이 제법 포함되어 있었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기운이 언덕 위쪽에서 느껴진다는 게 문제였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기습이 실패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병사들에게 알리려는 순간, 언덕 위의 수풀처럼
보이던 무언가가 흔들렸다.
부우우-
뿔피리 소리가 구석구석 울려 퍼졌다. 발타군이 아닌 일라베니아군의 뿔피리였다. 발타군은 기함하여 방패를 들고
허둥지둥 무기를 뽑았다. 고지대를 선점하기 전에 공격을 당하다니!
숙련된 병사들이 마음을 가다듬기 시작했을 때, 밤하늘에서 반짝거리며 빛나던 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열기에 발타군은 기겁했다. 불화살이었다.
어둠에 잠겼던 수풀은 금세 환해졌다. 언덕에 무엇을 뿌려 두었는지 불이 번지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사르체는
물러나지 않으나, 군대에는 사르체뿐만 아닌 발타 왕실군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우레와 같은 함성, 쏟아지는 불화살, 그리고 허를 찔렸다는 그 사실에 우왕좌왕하던 징집병의 일부가 이탈했다.
코코 사르체는 이를 갈며 소리 높여 명령했다.
“진격하라! 쓸어 버려라!”
발밑에는 말뚝이 있고, 말뚝을 넘어서면 구덩이가 있었다. 밧줄에 걸려 넘어지면 화살이 와서 꽂히고, 기름
구덩이에 빠지면 불화살이 날아왔다.
“이 쓰레기들이…….”
“코코 사르체?”
“맞나 보군.”
스르릉, 기사의 검이 천천히 검집을 스치며 오싹한 소리를 울렸다. 사르체는 본능적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은백색의 아름다운 검신에 유난히 밝은 달빛이 반사되었다. 빛이 궤적을 그리는 듯, 그녀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비로소 코코는 여자의 눈동자가 빛날 때면 선명한 연녹색을 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201 화.
해는 어제와 다름없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아침이 내리쬐는 대지는 어제와는 전혀 달랐다. 까맣게 타고,
화살에 머리를 꿰뚫리고, 창에 찔리고 검에 베인 시체들이 간밤의 참상을 말하기라도 하는 듯 널려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성벽 위에서 그 광경을 쭉 훑어보는 중이었다.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즌하.”
“으침잇니다.”
리카르디스는 찌푸린 미간을 풀고서 웃었다. 두 사람은 성가퀴 위에 바구니를 늘어놓고 아침 식사를 했다. 그녀도
간밤에 일어났던 전투로 지쳤는지 별다른 말 없이 열심히 음식을 섭취하기만 했다. 생각해 보니 로젤린은 식사 땐
음식에만 집중하는 사람이긴 했다. 다른 곳으로 눈 돌리지 않고 무언가를 씹으면서, 다음 먹을 것을 탐색하는…
….
“로젤린.”
“저길 좀 봐.”
로젤린이 하염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자 리카르디스는 만족한 듯 웃고는 그녀의 입에 구운 소시지를 넣어 주었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 소시지에!”
“치즈가 들어 있습니다!”
* * *
“그렇습니다!”
“…….”
“너무 들떠 있어서 말해 주겠다. 우리는 대 일라베니아 연합군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그 일부를 격퇴했을
뿐이다. 더군다나 일라베니아의 지형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일라베니아의 제국군이, 이점이 많은 일라베니아의
땅에서 제국군 보다 적은 수의 군대를 물리친 게 그렇게 큰 자랑거리가 되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이제
다 떠들었으면 일들 좀 하지 그러나.”
총사령관의 싸늘한 반응에 지휘관들은 그제야 분위기를 읽고서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했다. 발타군이 남겨 둔
문서와 그 전 성주가 갖고 있었던 문서들이 남아 있었던 덕에 전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또한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대충은 유추할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회의를 가볍게 끝맺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소리 부대와 병사들에게 임무를 맡긴 후,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대동하고 거리를 걸었다. 놋쇠저울 영지와 다르게 공성전을 치르지 않아서 그런지 무너진 건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사람이 극도로 적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다수 여자와 어린아이였다. 장성한 사내들은 위협이 될 수
있으니 본보기 삼아 잔혹하게 죽이고, 병사들의 수발을 들어 줄 노예들이 필요하니 상대적으로 덜 경계해야 하는
사람들만 살려 둔 것이었다.
“공간이 넉넉한 곳에 다친 자들을 모아 치료하고 음식을 배급하라. 영지민들을 위협하거나 희롱하는 자들은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즉결 처형하겠다.”
리카르디스는 스타스의 입에서 나오는 명령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간의 주름을 완화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리카르디스가 도착한 곳은 성채 내의 신전이었다. 놋쇠저울 영지와 다르게 신전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구색을 맞춘 흰색의 돌은 빛이 바랜 데다가 때가 묻어 누리끼리한 회색이고, 신전의 문양 또한 한 축이
닳아 버려 다른 종교같이 변모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완벽한 점은 반쯤 무너져 있다는 것이었다. 발타군이 신나게 망치를 휘두르는 모습이 절로 연상되는
광경이었다. 신전을 가만히 응시하던 리카르디스가 망토를 끌러 바닥에 패대기쳤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깜짝
놀라 리카르디스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주군이 패악을 부리는 모습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감췄다. 스타스는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대동하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었나 잠시 생각했다.
“그, 그렇게 낙관적인 대답만을 내놓는 가신은 주군이 바른길을 가도록 못 이끌지 않겠습니까?”
리카르디스가 르원을 노려보다가, 바닥의 돌을 걷어차며 신전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처참한 모습이 세세하게
보이자 더더욱 혈압이 올랐다.
이곳의 가치는 단순히 일라베니아 전역에 세워진 수많은 신전 중 하나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일라베니아, 그
최초의 신전이기 때문이었다. 황실의 대신전보다도 오래되고, 더 많은 세월을 겪어 왔다. 어쩌면 황실보다
축복의 밤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는 장소. 리카르디스가 소금바위 성채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 형? 벌써 회의 다 끝났어?”
느물느물한 미소와 말투였다. 리카르디스는 서고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굉장히 온화해진 상태라 간신히 라헤안시를
때리지 않을 수 있었다.
“왜에? 왜 숨을 그렇게 크게 쉬는 거야? 뭐가 찔리는 구석이 있어? 말과 숨이 턱 막혀?”
202 화.
라헤안시가 스승이었던 윈디트와 각별한 사이란 건 알고 있었으나, 그게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었다.
“라헤.”
“왜에?”
라헤안시는 씩씩 화내던 걸 멈추고 리카르디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간 공간을 가득 메웠던 적막이 곧 깨졌다.
“축복의 밤을 띄우려고?”
“윈디트?”
하지만 라헤안시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수치심이나 그와 비슷한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손끝은 살짝 떨리고, 얼굴
근육은 경직되어 딱딱했다. 그 눈빛, 표정, 자그마한 몸의 신호까지. 리카르디스는 라헤안시를 덮고 있는 것이
분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난한 자도 사랑하고 토사물에 파묻혀 있는 더러운 거지도 따스하게 안아 줄 수 있고, 병든 자들의 상처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그런 자비로운 신이 있다면…… 나는 그게 반드시 윈디트일 거라고 생각했어.”
농담인가? 진심이야, 저거? 리카르디스가 모호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라헤안시가 바보처럼 히쭉 웃었다.
“이런 진지한 얘기를 하다 보면 예리하고 냉철한 나의 본모습이 드러난단 말야. 고생하시는 아버지에게 은퇴를
선물로 드릴 때까지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라헤로 있어야 한다구. 그래서 형. 언제 축복의 밤 부를까. 오늘?”
“……전쟁이 끝날 즈음.”
“그렇게 늦게?”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보름달이 뜬 밤. 호수. 충분한 양의 성력과 마력을 가진 두 사람. 그리고
일라베니아의 역사보다 오래된 결혼식에 쓰이는 언약문까지.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추측이 크게 틀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것은 라헤안시에게 확인하면 될 문제지만, 그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물.”
라헤안시가 슬쩍 미소 지었다.
“바람.”
리카르디스가 허공에 검지로 원을 그렸다. 그 궤적을 따라 하얀빛이 잔상처럼 둥그렇게 남았다 곧 사라졌다.
리카르디스의 부루퉁한 얼굴을 보고도 라헤안시는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둥의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로 대단했다. 백성들은 물론이고 신의 종이라 일컬어지는 신관들조차도 성력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저 대단한 신의 성스러운 힘. 치유의 빛쯤 되는 개념일까.
대신관 윈디트는 신의 은총 아래 살아가던 평범한 나날 중 갑작스러운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렇게 대단한
신의 힘이 왜 죽은 자를 살려 내지는 못하는가?
냄새 나는 낡은 거리에 폐병에 걸린 노인이 있었다. 가래가 끓는 기침을 하고, 피까지 토했다. 그 어떤 중상자도
살려 내는 윈디트의 신성력이 따스하게 노인을 감쌌다.
그 원초적인 의문과 쌓여 온 수많은 죽음이 정답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신성력은 치유력이 아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부의 생명을 빠르게 순환시키는 것이었다. 인간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인간이 가진
본연의 힘. 그리고 그 힘을 이끌어 내는 것이 성력의 역할이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윈디트는 다음의 질문을 떠올렸다. 성력이 힘을 순환시킨다면, 그렇다면 마력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리카르디스의 질문에 라헤안시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역시나 사고가 비슷하게 흐르는 모양이었다. 라헤안시는
피식 웃은 뒤 대답했다.
“대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명을 잃어 간다. 그렇다면, 대륙을 소생시킬 생명의 힘은 어디에서부터 오나?”
“그러면 지금 우리가 말한 가정 아래, 마력은 특정한 날에 성력이라는 순환의 바람을 타고 민들레 씨앗처럼 전
대륙에 퍼진다. 그렇다면 강한 마력을 담고 있던 자는 어떻게 되나? 그 사람은 무엇을 잃게 되는 거지?”
203 화.
“어라,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나도 본 적 없는 것 같아.”
라헤안시는 멍청한 소리를 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축복의 밤을 위해서는 마력과 성력이
필요하다는 것만 알았지,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축복의 밤’ 자체가 가장 중요했을
뿐이었다. 라헤안시의 태평한 대답에 리카르디스가 눈에 불을 켜고는 이를 갈며 말했다.
은빛 늑대가 으르렁 거리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성큼성큼 다가와 라헤안시의 볼을 두 손으로 쭉 늘어트렸다.
“으허어어! 압허!”
너무 아프게 꼬집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라헤안시는 이제야 리카르디스가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축복의 밤이 지난 후 마인들은 무사한가?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리카르디스가 축복의 밤을 띄우는 일은 없으리라. 라헤안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람이 생각이 좀 짧을 수도 있지, 거 되게 뭐라 하네! 나도 황실에서 난 놈이긴 하지만, 황실과 신전의 주입식
교육을 받아 왔다고! 하나만 가르치기에 알아서 다섯을 알았더니, 열을 모른다고 뭐라 그래!”
라헤안시가 입을 쭉 빼고 툴툴댔다.
“똑똑한 녀석.”
미간에 주름을 잡고서 짜증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고수하던 리카르디스가 돌연 표정을 바꾸며 상냥하게 칭찬했다.
라헤안시는 제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부르르 떨었다.
“손잡은 첫 기념이다 라헤. 특별히 너에게만 일거리를 주지. 축복의 밤에 관련된 마인의 정보가 필요해. 뭐라도
좋으니 찾으렴, 너만 믿는다.”
“베, 베르움!”
수백 수천의 병사가 스물여섯의 잔당을 발견하는 동안, 오소리 부대는 팔십 여덟 명을 잡아냈다. 오소리 부대의
대원, 세이파가 존경의 눈으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제 어깨가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병사들이 대장을 선망의 눈으로 보고 지나갈 때마다 1 센티씩 높아졌지
뭡니까.”
“두 명이니까 2 센티.”
“슬슬 전부 잡은 것 같긴 합니다.”
세이파와 에버하르트는 레티시아의 뒷말에 ‘죽고 싶지 않으면’이 생략되었음을 깨닫고 진지한 자세로 복도를
걸었다.
[우측, 둘]
오소리 부대들은 그녀의 수신호를 보고도 소리를 낮추거나 무기를 꺼내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분위기와
걸음걸이로 태연하게 행동했다. 상대가 방심하도록.
쾅!
콰직. 로젤린의 주먹이 남자의 얼굴을 강타했다. 부상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파괴력 있는 소리였다. 호기롭던
두 명의 잔당이 순식간에 널브러졌다.
“이야, 정말 대단하십니다.”
“으아악!”
에버하르트와 세이파가 그녀의 말에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파가 뒷골목 건달 같은 자세로 쭈그려
앉더니 단검을 꺼냈다. 그가 웃음기 하나 없이 싸늘한 얼굴로 로젤린에게 말했다.
남자가 히익 하는 소리를 냈다. 레티시아는 연기에 나름 재주가 있는 두 바보를 마음속으로 흡족해했다. 로젤린은
지금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해, 그들의 연극을 진짜라 받아들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고민하다가 순수한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자, 자, 잠시만요!”
로젤린이 팔짱을 풀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서서히 자세를 낮춰 눈높이를 맞췄다. 로젤린의 손이 서서히
가까워지자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뛰어난 직감이 경고했다. 거짓을 말했다간 죽는다. 남자는 격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추호도 없습니다!”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중에도 그녀는 손을 심장에서 떼지 않았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한 말이 모두 진실인가?”
“예!”
“진심이군.”
오소리 부대는 감격에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정말, 우리 대장 너무 멋있다. 진짜.
로젤린과 오소리 부대는 발타의 마인, 차가를 끌고 가며 지금 필요한 정보를 물었다. 발타군이 일라베니아군을
치기 위해 출병했던 때, 성채 내에 남았던 병력의 수.
차가는 사르체군 내에서 고위직을 맡고 있던 지휘관인 만큼 정확하게 수를 파악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오백인가?”
레티시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차가의 말을 들으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500 명 중,
일라베니아와 교전하여 사망하거나 붙잡힌 병사가 382 명. 118 명이 남는다. 도망갈 길이 없으니 전부 성채 내에
있다 판단해야 했다.
204 화.
“딱 두 명 남았네요.”
“헉 씨, 두 명이요?”
“없었다. 모두 발타인이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을 불태울 거라며 별 되도 않는 객기를…… 아무튼,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서 고위 지휘관이
들릴 가능성이 있다고, 그때를 노릴 거라…….”
오소리 부대들은 리카르디스의 일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리카르디스는 회의를 마친 후
부상자들을 살필 예정이었다. 차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젤린이 화살 같은 속도로 복도를 내달렸다. 그러다
이것도 아니다 싶었는지, 창을 열고 훌쩍 뛰어내렸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오소리들이 깩 비명을 질렀다.
“로젤린 경!”
한참을 달리자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건물이 보였다. 로젤린은 그 속에서 마력의 기운과 소란스러운 기색을 읽어
냈다. 로젤린은 이를 꽉 물고 훌쩍 뛰었다. 튀어나온 부분을 몇 번 밟아 뛰는 것만으로도 목적지에 도달했다.
손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보게 된 광경은 로젤린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하얀밤 기사단원 아래
어떤 남자가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스타스와 르원이 리카르디스를 보호하듯 가로막고 있었고, 그 앞,
간이침대에 있는 남자가 손이 잘린 채 울부짖고 있었다.
“으아악!”
* * *
전쟁의 수습이 필요했다. 성안에 남아 있을 발타의 병력을 파악하고 확보, 또한 부상자들의 치료, 성채 도시
내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다독이는 일이 그 일환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부상자들을 모아 둔 건물로 향했다. 하얀밤 기사단원이 줄줄이 그를 따랐다. 아직까지는 성안의
안전이 완벽하게 확보가 된 상태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든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주위를
경계해야만 했다. 먼저 기사단원들이 내부를 확인한 후에야 리카르디스가 들어갈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약초의 알싸한 향기와 살이 썩는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신관과 치료사들이 손을 쓰기는 했지만, 한 사람에게 모든 성력을 퍼부을 수 없었기에, 당장의 위기만 넘기도록
조치를 취해 놓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부상자만 해도 수십 명이었다.
눈을 감은 남자는 이마부터 머리까지 쭉 찢어져 있었다. 지혈이 될 정도의 신성력은 퍼부었는지 피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낯빛은 아직 파리하고, 의식은 되찾지 못한 듯 소란스러운 병동 안의 분위기에도 눈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른 병사들에게 들어 보니 계속 의식을 되찾지 못해 신원도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무리 계책을 쓰고 계획을
해도 사상자는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조금 가라앉은 낯으로 병사를 바라보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으으…….”
“정신이 드나 보군.”
“아아악!”
“전하!”
“잡아!”
소란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리카르디스는 뒤늦게 상황을 인식했다. 가슴 부근의 옷자락이 베여서 팔락이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치료하려던 남자의 손에는 비수가 들린 채였다. 종이 한 장 차이. 만약 조금 늦었다면 심장에
비수가 박혔으리라. 주위에 신관이 많다지만, 그들도 죽은 사람은 살려 낼 수 없었다.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전하는?”
“무사하십니다.”
“한 명 더, 제압했습니다!”
“마…… 미미?”
“무사하세요?”
“무사하시네요.”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조용히 리카르디스를 따라다니던 월장석 성의 시녀, 미미의 색다른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잠시 멈춰 있었다. 검을 집어넣지 않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은 이 자리에서 잔당의 존재가 확인되었기뿐만
아니라, 미미의 행동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가 리카르디스를 구해 줬다고는 하지만, 수상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기에.
경계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미미가 갑작스럽게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격하게 숨을 몰아쉬는 로젤린이 창문의 빛을 가리듯 그곳에 있었다. 그녀가 재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훑더니 리카르디스에게 다가왔다.
“전하!”
“으읏…….”
심장에 비수가 박힐 뻔했던 아까보다 지금이 심장이 더 벌렁거렸다. 스타스는 소란스러워진 공간을 한번 눈으로
훑은 후, 피곤한 듯 눈을 지그시 눌렀다.
“……좋은 생각이다.”
일행은 자리를 옮겨 사람이 없는 조용하고 넓은 방으로 이동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모호한 표정으로 미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평범한 시녀인 줄 알았던 그녀가 그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해 2 황자 리카르디스를 구해
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나 운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추행의 충격과 미미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고 상황을 살폈다. 칼릭스가
너무 보고 싶었다.
205 화.
“미레이미 양?”
“네.”
“별말씀을.”
한데 지금은 싸늘한 미소, 불량한 태도, 수상한 행적까지. 전혀 다른 사람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물론
월장석 성의 모습이 가면임을 알고 있는 리카르디스에게는 지금의 마카롱이 훨씬 더 친숙하긴 했다.
“…….”
“마인이다. 발타와 엮인 지금의 상황에 마력을 감지하는 힘이 필요하리라 판단한 로젤린 경의 추천으로,
비밀스럽게 내 호위를 하던 중이었지.”
완벽하다. 완벽해. 심지어는 반쯤 사실에 기반해서 말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변명은 점수를 매긴다면 100 점
만점에 100 점 정도를 줄 수 있으리라.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몇몇 기사들과 스타스, 나단,
레이몬드와 르원만은 여전히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로젤린 이외의 마인이 2 황자 전하의 곁에 있다. 그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건 없겠죠. 적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그에 대한 대비를 전부 마쳤을 때뿐일 테니. 방심한 적만큼 쉬운 상대는 없습니다.”
미미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스타스는 리카르디스의 뒤에 선 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적의도 경계도
아닌, 탐색의 눈빛이었다. 미미가 그의 시선을 받으며 씨익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간신히 잦아들었던 위염이
도지는 기분을 느꼈다.
“상황과 장소에 따라 사람들은 옷차림과 자세를 다르게 하곤 하더군요. 세간에서는 그걸…… 예의라 부르던가?”
“허술하지.”
“속 꿍꿍이가 있는 자였다면 그녀가 말하는 예의를 계속 차리고 있었을 테지. 경계를 사면 안 될 테니.”
“그리고 로젤린 경이 허술한 구석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전하의 안전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예리한 시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네. 그런 그녀와 사이가 제법 막역해 보이는 걸 보면, 적어도 발타 측의 인물은 아니겠지.”
“큰 도움이 되겠군.”
스타스가 살짝 미소 지었다. 반년에 한 번씩 웃을까 말까 한 얼음 같은 기사단장이, 미미가 상냥한 시녀 가면을
쓰고 있을 때만 해도 언제나 무뚝뚝하게 반응하던 스타스가 미소 짓다니.
‘……취향이 독특한걸.’
* * *
전략과 전술, 전장의 기류를 읽는 눈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것은 악독한 집요함이었다. 아주
조그마한 피해라도 입는 즉시 관문은 비상사태에 들어가며, 침입자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어떤 막대한 피해를
입더라도 끝까지 추적한다. 그녀의 집요함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였다.
그리고 한때 그걸 몰랐던 완달 타탄은 잘못된 판단을 내렸고, 그로 인해 다음 대 타탄의 가주가 되었을 아들을
잃었다.
더군다나 발타를 코앞에 둔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수상쩍은 기류를 보고도 대비를 안 해 뒀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오래된 공방전에 마른가시나무 백작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투항을 요구하는 서신과 함께 전령을 보내 두었다. 그리고 지금 막 전령이 돌아온
참이었다. 조각조각 분리되어, 마차에 실린 채로. 반쯤 부서져 있는 마차에는 전령의 시체뿐 아니라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인장이 찍힌 서신도 함께 있었다. 완달 타탄은 찝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서신을 뜯었다.
[홀로 먼 길 떠난 아들이 그리웠나? 따라가고 싶어 하는 걸 보니, 그 절절한 부성애에 가슴이 아프지 뭐야. 이
가슴 아픈 촌극을 어떻게 지켜만 보겠나. 선물을 동봉한다. 전령의 입 안을 보라.]
완달 타탄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의 얼굴 근육이 경직되어 단단해지며 붉어졌다. 압력에 실핏줄이 터져 그의
흰자위 또한 붉게 변했다. 서신을 내팽개친 완달 타탄이 잘린 전령의 머리통을 들고 입을 우악스럽게 벌렸다.
완달은 떨리는 손으로 나머지 조각 하나를 닦았다. 피와 세월에 부식된 펜던트의 장식물이었다. 타탄 가문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 * *
“내가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잖니.”
“타탄이 나를 굉장한 악당 취급을 하잖니. 내 아들의 복수! 내 부하의 복수! 이런 느낌으로 말이야. 굳이
따지자면 쳐들어온 건 저쪽, 나는 그 쳐들어온 걸 막아 내는 피해자의 입장인데…… 그래서 기왕 악당 취급받는
김에?”
“뭘 숨기고 있는지 봐야만 하겠어. 아무것도 모른 채 하루하루 오늘을 넘긴 것에 감사하며 지내다 뒤통수 맞는
것은 사절이야.”
206 화.
“완달 타탄이 비스타로 오게 된 배경에 아들의 복수가 포함되어 있다면 백작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흘러가리라
봅니다.”
“……으음, 확실히 타탄 가문은 발타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요. 굳이 따지자면 본대에 포함되어
중부로 나아가는 측에 포함되어야 했을 텐데, 비스타로 온 걸 보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닌 듯합니다.
게다가 오늘 아들의 뼈까지 받지 않았습니까. 빤히 보이는 도발이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 그거.”
“……펜던트는…….”
“그건 진짜고. 시체는 진작에 들개 먹이로 던져 줬지. 나는 귀찮게 남의 시체를 몇 년씩이나 보관하고 있을
위인은 못 돼.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군.”
쾅! 쾅! 쾅!
“왔구나.”
세실은 팔짱을 낀 채 성벽에 금이 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자신의 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버티고
있지만, 조금 삐끗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끝나 버릴 테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적이 승리에 취해 자신의 시체 위에서 술잔을 부딪치고 있으리란 상상만 해도 속이
뒤집혀서 쓰러질 것 같았다.
‘혼자서는 못 죽지.’
위기에 몰린 그녀의 목표는 승리가 아닌 공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 몇 주간의 공방을
치르며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생각했다.
타탄 가문은 여력을 남겨 두고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여력을 남겨 두었는가. 그것도 코앞에 원수를
두고서!
참으로 구미가 당기는 단어가 아닌가. 중요한 전력이라니. 세실은 움직이지 않던 타탄군의 좌익이 서서히 성채에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입술에 손가락을 올려 둔 채 피식 웃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건 네놈만이 아니다, 완달 타탄. 내 시체를 네가 밟을지언정, 마른가시나무에 들어온 그
사실만은,”
이를 가는 소리가 섬뜩했다.
* * *
휘장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다. 케틀린은 고급스러운 막사 내부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가 차가운
바람이 흘러 들어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독사의 전령이었다. 밀정인 그녀가 현재 일라베니아 제국의 정보를 보내왔다. 흥미로운 소식이었기에 당장
하카브에게 전달해야 할 듯싶었다. 케틀린은 막사 한구석에서 고집스럽게 서 있는 호위 아순에게 물었다.
“오.”
“전하께서 직접 하신 말입니다.”
더욱 불쾌해졌다. 그때, 마침 막사 밖에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기색이 느껴졌다. 곧 겨울의 찬 공기가 난로로
덥혀진 막사 내부의 공기를 밀어내며 들어왔다. 디에즈와 하카브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날 두고 어디를 가려고.”
디에즈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하카브를 흘겼다가 그에게서 멀어지며 침대 가에 앉았다. 하카브는 그대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딱거렸다.
“일라베니아 중부 관문에 머무를 것이라 생각했던 2 황자 리카르디스가 남부에 있음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중앙군의 일부를 중부 관문에 남기고, 중부 관문까지 후퇴했던 변경 주둔군 중 일부를 흡수해 놋쇠저울,
소금바위를 통과하며 점점 내려가고 있다고 하더군요.”
디에즈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로 다가왔다. 탁자를 짚은 채 지도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손가락으로 경로를 쭉
그렸다.
“사르체까지 물리친 제국군의 목적은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이겠군요. 비스타가 함락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을
어떻게 했을까요. 이건 리카르디스로서도 도박이었을 텐데.”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관문이 무너지기 전에 병력을 보존한 채 후퇴했으니. 거기에다 수성에 유리한 비스타
성채가 있고, 성채의 책임자가 ‘그’ 마른가시나무 백작이니까?”
하카브가 ‘그 마른가시나무 백작이니까?’ 부분을 강조해서 얘기했다. 케틀린이 흐흥 코웃음 치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녀가 버리기 아까운 패이기는 하지만, 남부로 내려올 정도의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까요.”
중부 관문은 발타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남부 관문에 비해서 방비가 덜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성벽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어 체계가 잘 잡혀 있었다. 더군다나 연합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병력을
끌어모았을 게 빤하니, 상대하기는 더욱 까다로워졌다. 아무리 연합군이라 하더라도 뚫고 나가려면 시일이 제법
걸릴 것이다.
소수의 병력을 움직여서 일라베니아의 황제를 먼저 잡을까? 아니면 돌아가서 리카르디스와 전면전을 벌여야 하나
고민하던 중, 가만히 그들의 토론을 듣고 있던 케틀린이 끼어들었다.
“강한 신성력, 아름다운 외모, 명석한 두뇌, 어리고 약한 것들에게 인자한 군주의 면모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일라베니아의 차기 황제 후보?”
“그때는 황실이 황실의 일원인 리카르디스를 이용해 권위를 세우려 내세운 것에 가깝죠.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하네요? 리카르디스가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 사이에서 칭송이 자자하게 퍼진다고. 그렇게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한 그의 입지는 현재…… 대충 이델라브힘의 바로 밑쯤이라네요.”
“수작?”
디에즈는 ‘검은 머리의 기사’라는 부분 때문에 상념에 잠겼다. 빛나는 리카르디스 옆에서 검을 들고 있는
로젤린의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숱하게 보아온 장면이었으니까.
결국 그녀는 그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망설이긴 했을까, 과거를 묻기로 한 것일까. 디에즈의 속이 새까맣게
물들어 갔다. 그의 낯빛 또한 차츰 어두워졌다.
여태껏 사람들은 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황제인 줄 알았다. 황제가 일라베니아라는 나라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랬기에 하카브도 수도를 향하고 있던 것이었다.
* * *
리카르디스가 기존의 계획대로 중부 관문에 머무르지 않고,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으로 떠난 이유는 제국군이
당도할 그때까지도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버티고 있으리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연합군의 목적이 마른가시나무 성채를 함락하는 것이 아니기에, 병력의 전체가 그곳에서 시간을 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예상대로 연합군의 본대는 남부를 쓸며 중부 관문으로 나아가는 중이었고,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는 발타군의 일부만이 주둔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국군은 연합군의 본대를 비스듬히 빗겨 나가며 빠르게 진군했다. 마른가시나무 영지가 코앞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지휘관들과 회의를 나누며 곧 다가올 거친 전쟁을 대비했다.
로젤린은 오가는 회의 내용을 들으며,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의 모습을 찬찬히 떠올렸다. 지형, 지리, 성벽의
두께와 예상되는 적의 진군로, 그리고 그녀가 보았던 비스타의 높고 낮은 규칙성이라고는 없던 거리의 모습까지.
그때 척후병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곧 척후대의 대장이 지휘부의 막사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리카르디스와 지휘관들은 남자의 굳은 표정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푹 쉰 후 그에게 물었다.
“상황은.”
“마른가시나무 성채의 성벽이 일부 허물어졌으며, 또한 성채를 둘러싸고 있어야 할…… 발타군의 모습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막사 안이 침묵에 잠겼다. 성채 도시를 둘러싸고 돌과 독을 날려 가며, 사다리를 타고, 해자를 메우고 있어야 할
발타군이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성벽이 무너져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대가?”
“마카롱 경.”
리카르디스는 태연하게, “아, 실수.” 하고는 다른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서 독수리에게 다시 물려 주었다.
이제야 육포를 먹기 시작하는 독수리를 보고 어느 지휘관 한 명이 떨떠름해하며 물었다.
“일반 병사들에게 배급되는 육포를 실수로 줬지 뭔가. 이건 상급 지휘관 전용이다. 마카롱 경이 입맛이
까다롭거든.”
막사 안에서는 여러 회의가 오고 갔다. 우선 정찰을 보낸 마카롱이 돌아와야 자세한 논의가 이뤄질 테지만,
마른가시나무가 함락당했다는 것만은 이견이 없었다. 일부의 병력을 남겨 놓고 타탄군도 이동을 한 것인지, 혹은
그대로 주둔하고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을 거쳐 발타로 진군하려 했던 계획은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지.
로젤린은 마카롱이 뱉어 놓고 간 딱딱한 육포를 씹으며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기를 한참, 저 멀리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바라보자 산꼭대기를 넘어오는 마카롱의 모습이 보였다.
막사 주위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로젤린이 다가가서 팔을 내밀자 제자리에서 몇 번
날갯짓하던 마카롱이 부드럽게 그녀의 팔에 안착했다. 로젤린은 마카롱의 한쪽 다리에 묶여 있는 무언가를
확인하고 곧바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리카르디스는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로젤린과 마카롱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횃대에 마카롱을 옮겨
두자, 마카롱이 한 발을 내밀고 발을 까딱거렸다. 맹금류의 두터운 발목에 주머니가 묶여 있었다.
로젤린은 마른가시나무 백작 성에서 먹었던 마카롱의 맛과 독수리 마카롱과 함께 즐겼던 체스 게임을 기억했다.
그녀의 표정이 환해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물론 이것이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아직 성채를 지키고 있다는 증거라고
설명하는 일은, 긴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이동하던 제국군은 마른가시나무 성채가 보이는 거리에서 다시 멈췄다. 여기저기 부서진 수레와 공성
무기들, 발타군의 시체와 군마의 사체, 여기저기 널브러진 무기까지. 치열한 전투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 선했다.
마른가시나무 성채는 척후병이 말했던 대로 한쪽 성벽 가운데가 와르르 무너져 있었다. 총 세 겹이나 되는 성벽을
뚫고 발타군이 기어이 진입했다는 것이었다. 성벽이 저 꼴이 되었는데 수성에 성공하다 못해, 완달 타탄을
몰아내기까지 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8 화.
경계하며 서서히 다가가는데 성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은빛 갑주를 입은 한 무리가 우르르 빠져나왔다. 다가오는
기사단의 위로 삐쭉 솟아 있는 깃발에는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뭉쳐 있던 기사단이
양쪽으로 갈라지자, 중앙에 있던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뒤에는 머리와 왼쪽 눈에 붕대를
둘둘 감은 기사단장 렉시드가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가만히 세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다가갔다. 세실을 직접 일으켜 세운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어깨를 잡은 채 지그시 눈을 맞췄다.
그런 그들의 위로 독수리가 둥글게 날아다니며 길게 울었다. 삐이익. 병사들은 그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밝은 햇살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 * *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리카르디스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로젤린은 안장을 밟고 서서 성채의 내부를
천천히 훑었다. 기억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호기심이 생긴 로젤린이 말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레이몬드가
채 만류하기도 전에 로젤린은 사삭 벽을 타고 올랐다.
그런 로젤린을 목격한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뒤쪽을 쳐다 본
리카르디스는 마치 한 마리의 도마뱀처럼 높은 망루를 오르는 로젤린을 볼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녀야 언제나 건강했지…….”
‘미로?’
마치 거대한 미로 같았다. 있던 건물을 허물고, 건물과 건물을 연결해 벽을 만들고, 거리의 한 중앙에 석재와
흙으로 성벽을 쌓아 올리는 둥.
로젤린은 시선을 돌려 발타군의 유일한 진입로가 되었을 무너진 성벽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발타군이 들어온다. 짧은 화살이 많은 것으로 보아 성벽 위에 석궁 부대가 배치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공격받은 병사들이 쓰러지고 살아남은 자들은 앞으로 이동.
로젤린의 눈동자가 상상 속 발타의 병사들을 따르듯 움직였다. 그리고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제멋대로 변형시킨
거리 때문에 발타군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 끝에는 함정과 각각의 부대가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무언가가 터진
듯한 흔적과 불타서 무너진 가벽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로젤린은 집중해서 전투의 흔적을 읽어 냈다. 결과는 놀라웠다. 성벽 너머가 아닌 직접적인 맞대결을 하는
이상에야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의 피해가 없을 리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얼추 살피는 것만으로도 발타군의 피해가
백작군의 피해를 훨씬 웃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감이라.”
“성벽이 무너지니 마른가시나무가 함락된 줄 알더군요. 그 의기양양한 함성 소리를 들려 드려야 하는데. 얼마나
가관이던지, 혼자 듣기 아까웠습니다. 성이야 무너지면 다시 쌓으면 되고, 건물도 마찬가지죠.”
“완달 타탄은?”
세실이 눈을 휘며 웃었다.
“손쉬웠지요.”
“마인 부대가 상대하기 쉬운 상대는 아니었을 텐데.”
렉시드가 준비했다는 듯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불타는 건물 속에서 괴로워하며 빠져나오는 발타 전사 몇몇이
그려져 있었다. 진짜 그려 둘 줄이야. 사람 성격 참 굉장했다.
현 연합군에는 발타군과 마람 왕국, 그 외에도 몇몇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람을 포함한 연합군의 대다수가
발타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라는 것을 어떤 사람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발타군이 무너지면, 연합군 전체가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지금쯤이면 하카브도 제국군이 서서히 내려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겠지. 회군할 가능성이 높아.”
* * *
발타의 수도, 리비타로 진격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숲 너머로 흙먼지가 이는 것이 보였다. 대군이
움직이지 않는 이상 저러한 현상이 일어날 리 없었다.
마른가시나무 성채 도시는 경계 상태로 돌입했다. 얼마 후 팔천여 명 쯤 되어 보이는 병력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른가시나무 성채에 가까이 접근하는 무리의 위로 깃발이 펄럭였다. 누군가가 외쳤다.
“사자갈기다!”
드윗 아르페커. 건국제 무도회 때에 로젤린에게 집적거렸던 남자였다. 키스했다는 것이 오해라 깨닫기는 했으나
한 번 자라난 악감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자마자 꺼지라는 뜻을 내보였음에도 드윗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착석할 뿐이었다.
한데 공교롭게도 드윗이 황제의 감시역으로 발탁된 모양이었다. 기막힌 인선이라고 할지, 기가 차는 인선이라고
할지 아직까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대가 도착한 시기로 보아, 아마 놋쇠저울 영지에서 있었던 전투 이후 곧바로 출발한 것 같은데.”
“정확하십니다. 라헤안시 대신관님께서 예언인가 뭔가를 하셨다던데, 그 건으로 황제 폐하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하십니다.”
209 화.
황제가 불안해하리란 것쯤은 예상했으나 감시역이 파견되는 것이 생각보다도 빨랐다. 리카르디스가 실소를
터트렸다.
“아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총사령관님의 충성스러운 가신인 저는 그런 무서운 얘기는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보이십니까?”
“자원했습니다.”
“제국의 황자라는 사람이 발타의 전쟁을 앞세워 몰래 공작질을 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펄펄
날뛰었습니다. 다소 위험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제국의 역사와 함께해 온 사자갈기로서 어떻게 이런 무도한 일을
방관할 수 있겠느냐 하니 황제 폐하께서 무척이나 기뻐하시더군요.”
“많이 나댔지요.”
“…….”
22
일라베니아 제국군은 마른가시나무와 사자갈기의 병력을 흡수해 덩치를 불린 뒤, 빠르게 남하했다. 제국군이
향하는 목적지는 ‘싱’으로, 발타의 수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영지였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싱만큼은 병력을 보존해 두었다고 들었습니다. 국경과 가까운 영지이다 보니
마른가시나무 성채와 같은 역할을 하거든요. 아, 그리고 요새에 가주 두 명이 다 남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원정군에 포함되기에는 어린 나이라서요.”
연합군이 회군할 가능성이 있는 시점에서 공성전을 치른답시고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었다. 병력을 분산시키기에는
리비타의 방비 또한 만만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세실이 생긋 웃었다.
진지를 구축하고 함정을 만들 만한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싱 측에서는 제국군의 존재를 모른다는 점에서,
일라베니아에게는 더 없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정면에서 제국군 본대가 상대하는 동안 멀리 돌아간 두 개의
별동대, 로젤린이 이끄는 중장기병대와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이끄는 관문 주둔군이 양옆에서 공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혼란스러운 전장 속 거세게 가해지는 심리적 압박은 유일하게 열려 있는 퇴로의 존재를 집중하게 만들 것이다.
* * *
“아니 바유. 가야 돼. 언제까지 어리다고 뒤에 물러서 있을 수는 없어. 게다가 싸우는 건 우리가 아닌걸.
타탄의 가주에게 군대만 빌려주면 되는 문제야.”
부우우우.
그 순간 뿔피리가 울려 퍼졌다. 군마들이 흥분해 날뛰었다. 마차도 크게 흔들려 소녀와 소년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수백, 수천. 헤아릴 수도 없이 수많은 금속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적습이다!”
갑작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에 남라는 정신 못 차리고 휩쓸려 갔다. 마차 바닥에 쓰러져 덜덜 떨기만 하는 남라를
바유가 꽉 끌어안았다.
“전투 준비!”
“진형을 갖춰라!”
하지만 수가 적어도 발타군의 정예병들이었다. 전투태세를 제대로 갖추자 전황은 차츰 안정되어 갔다. 전면에
있는 제국군을 막아 내기 위한 최상의 진형이 갖춰졌을 무렵.
부우우.
자르파가 소리쳤다.
210 화.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을 상대하는 측면을 지원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자르파는 뒤에서부터 덮쳐 오는 기운에
우뚝 멈춰 섰다.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마른가시나무군의 반대편에서 쏟아져 오는 수천 기의 중갑기병들이 있는
곳이었다.
검은 군마를 탄 기사. 자르파와 라닉은 그 기사가 반드시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일 거라 직감했다. 단순히 그
기사가 보이는 압도적인 힘뿐만이 아닌, 마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기운의 크기 때문이었다.
* * *
로젤린의 눈이 재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제국군에는 수도 상비군과 변경 주둔군, 그리고 징집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비군, 주둔군과 달리 많은 수를 차지하는 대다수의 병사들은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못했다.
평범한 농민과 상인에게 갑옷과 검을 들려 보낸 것이라 봐야 했다.
‘뭔가 이상한걸.’
거대한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져 체계적으로 전투를 치르는 발타군. 그것은 그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가
뛰어나다는 것을 이르고 있었다.
로젤린의 머릿속으로 정보가 빠르게 지나쳐 갔다. 싱의 가주는 어리다. 그리고 그 어린 가주를 대신하여 몇몇
장수가 군을 통솔한다. 일라베니아도 지휘관에 대한 의존도가 낮다 말할 수 없으나, 싱의 경우에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잔챙이들은 두고 돌파한다.”
“돌파한다!”
쾅!
로젤린의 창과 자르파의 도끼가 충돌하며 전장 속 모든 이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소음을 만들어 내었다.
제국군의 장수와 발타군의 장수가 만나자 틈 없이 공간을 메우고 있던 병사들이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발타군과 제국군은 전투를 멈추고 로젤린과 자르파를 지켜보았다. 순식간에 간이 투기장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두
사람의 승패에 따라 오른쪽 측면의 전황이 뒤바뀌게 될 것이다. 갑옷을 착용한 로젤린보다 두 배는 더 큰 거구의
남자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전의를 불태우던 자르파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끊겼다. 그의 시선이 거대한 흑마 위에 앉아 있는 로젤린의 투구를
향했다. 그림자 진 안쪽에서 그녀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자르파는 로젤린에게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마력을 느꼈다. 여태껏 사용하던 마력은 호수에서 물 한 양동이를
사용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느낄 수 있었다. 기세를 펼치기 시작한 그녀의 진정한 저력은
너무 거대해서 미처 가늠할 수도 없었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절대적인 존재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히 쳐다볼 수도, 감히 대적할 수도 없는 기운이었다.
모든 의지가 바스라 흩어졌다.
‘머리가 잘렸군.’
* * *
‘생각보다도…… 어리군.’
“처형하라는 것인가?”
“그러는 게 좋겠군.”
한데, 상황은 또다시 묘하게 돌아갔다. 교섭을 위해 먼저 싱의 성채를 찾아갔던 전령과 함께 돌아온 어느 남자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 또한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최근에도 건국제 무도회에서 봤었다.
힐리사고의 왕자였다. 통통한 남자가 무릎 한쪽을 꿇으며 리카르디스의 망토에 입을 맞췄다. 비대한 몸을 가졌던
힐리사고의 왕자는 그 짧은 사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일라베니아 황실이 힐리사고를 쥐어짰다더니, 그간 겪어 온
마음고생이 눈으로 보였다.
힐리사고 왕국은 라고슈와 발타 다음으로 큰 대륙의 나라로 일라베니아의 신하 역할을 자처하는 곳이었다. 황제의
말 한마디에 왕실의 후계자를 갈아치우는 일도 빈번할 정도였다.
한데 힐리사고 왕국, 한미한 귀족 가문의 핏줄인 디에즈가 일라베니아의 뒤통수를 치고 발타로 떠났다.
일라베니아와 끈을 하나 대어 놓았다 흡족해하던 힐리사고 왕실 입장에서는 황당하다 못해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으리라.
리카르디스야 디에즈의 속에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알고 있으나,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맹을
요청한 나라들 중 가장 먼저 도착한 것만 봐도 그들의 다급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제국군이 리비타로 향하겠다 언질한 적은 없었지만, 동향을 보고 힉살라를 노린다 깨닫고 싱을 미리 함락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리카르디스는 오랜만에 미소를 보이며 왕자의 지원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왕자는 뛸 듯이 기뻐했다.
“리비타의 독특한 구조 때문에 공성에 시간이 제법 걸릴 겁니다. 왕자가 점령한 싱이 연합군을 막는 방벽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리카르디스는 힐리사고군의 합류로 바뀌게 된 전략과 전술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차근차근 원하는 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사실 이런 때야 말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때였다. 승리가 익숙해져 당연해져 갈 때. 전쟁에 ‘
무조건’이라든지 ‘반드시’와 같은 말은 있을 리 없으니.
* * *
“아, 아닙니다.”
“예! 죄송합니다!”
로젤린 경의 친구다. 마인이다. 리카르디스 전하의 특별 호위다. 성격이 더럽다. 눈을 마주치면 공격당한다.
소문이란 대개 믿을 수 없는 허황한 말로 이루어져 있으나, 미레이미의 경우에는 제법 정확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살해 시도를 하기도 전에 수상함을 포착하는 능력까지 있었는데, 스타스는 그 모습에서 로젤린을 연상할
수 있었다.
211 화.
“미미 양.”
검지와 중지만 펼쳐 병사의 두 눈과 자신의 눈을 교대로 가리키고 있던 미미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스타스의
얼굴을 확인하고 난 후 싸늘한 표정을 거뒀다. 여전히 무표정에 가깝긴 했지만.
“단장님. 무슨 일 있나요?”
마카롱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억지로 하하 호호 웃을 마음은 추호도 없어서 사실을 변명처럼 앞세웠다. 한데,
그 말을 들은 스타스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무뚝뚝한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예민한 마카롱은 그의 얼굴 근육이 아주 미세하게 바뀌었음을 포착해 냈다. 최근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다 무너진 마을에서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마른 강아지를 볼 때의 표정이었다.
그 취급이 어이없었던 마카롱이 눈살을 찌푸렸다. 잘생긴 얼굴을 보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뭐라 하려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적당한 공터에서 멈췄다. 마카롱이 쓰러진 나무에 앉으려 하자 스타스가 손수건을 꺼내어 깔아 줬다.
갑자기 손수건을 전시하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마카롱은 손수건을 피해 다른 곳에 앉았다. 스타스가 어색하게
손수건을 회수했다.
“마시겠나?”
스타스가 건넨 건 물주머니였다. 마개를 뽑으니 청량한 술 향기가 퍼져 나왔다. 마카롱은 이 물주머니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까 전 고래무덤의 파르딕트가 가지고 있던 술이었다. 몰래 물주머니에 넣어 마시다 기사단장인
스타스에게 딱 걸려서 압수당한 것이었는데, 그게 여기서 나올 줄이야. 마카롱은 주머니를 받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녀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게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거기에다가 일라베니아
제국의, 일라베니아 제국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이라니. 마카롱은 로젤린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디에즈와 함께
행동하고 있었을 거라 강하게 확신했다.
마카롱의 대답에 스타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카롱은 그걸 눈치채고 술 주머니를 흔들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가.”
“……음.”
다 큰 남자들의 변명을 듣는 소년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알겠다 대답했다고 한다. 자존심이 상하고 불안했을 법도
했는데, 전혀 그런 기색을 읽을 수 없었다고. 스타스는 어린 2 황자가 영특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때의 위험한
상황을 깊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당시 중앙을 무대로 활동하지 않았던 스타스가 리카르디스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황실 도서관에서만
열람할 수 있는 귀중한 서적을 보러 몇 개월 만에 들린 것이었는데, 거기에 리카르디스가 있었다.
[그대는?]
[이 손수건은 내가…….]
돌려주겠다 말하려던 것 같았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거기에서 더 말을 잇지 않았다. 호의에 보답하고자 선물을
보내려 한다 해도, 막상 받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으리란 계산이 끝난 모양이었다. 이 황실 누구라도
엘피디오와 황후의 눈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소년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손수건만 만지작거렸다. 언어, 산술, 역사, 문화, 정치, 사상, 철학, 제왕학.
어른들도 펴자마자 덮어 버릴 것 같은 복잡한 책을 읽는 명석한 소년이 그 나이 대의 어린아이로 보였다. 연약한
기대감이 피로 젖은 손수건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우연한 만남이 약혼녀를 잃은 슬픔으로 황실 기사단을 떠났던 스타스를 다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전 얼음창 기사단 단장 스타스가 하얀밤 기사단 단장 스타스가 되었다.
212 화.
“그건…… 그렇군.”
정말 통하는 데가 있었다. 스타스는 다시 한번 웃음을 흘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빛이 비추는 길을 따라 그녀와
함께 걸었다.
* * *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졌다.
“올겨울은 비가 많이 내리는군.”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로젤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빛 먹구름에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싱의 군대는 힐리사고 왕국군이 완전히 격파했다고 들었다. 그중 일부가 살아남았을지도 모르지만, 도망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크고 견고한 다리를 부술 만한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근처 요새의 발타 수비군들이 일라베니아 제국군이 온다는 정보를 접해, 시급하게 부쉈을 수도 있다.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지만 찝찝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상류로 간다.”
* * *
하루를 더 걷고서야 상류의 다리에 도착했다. 그 무렵에는 비가 그쳐 먹구름 사이로 햇빛이 드문드문 들어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상류의 다리는 무사했다. 부수다가 중단한 것인지 다리 여기저기에 거친 흠집이 나 있었지만, 제 기능을
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문제는 그 다리를 방어하고 있는 수비대가 있다는 점이었다. 다리로 가는 길목에 흙벽을 쌓아 진지를 구축한
상태였다.
곧 전투가 시작되었다.
힐리사고군이 발타의 수비대와 교전하는 사이, 제국군의 지휘부는 강을 건널 방법을 모색해 보았다. 하지만
며칠간 내린 비로 수심이 깊어져 있어 다리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제국군은 그대로 발이 묶인 채 전투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발타 수비대의 방어는 견고했다. 한정된 좁은 면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실력이 뛰어난 탓도 있었다. 어느
군대의 정예 병력이라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초조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잘근 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스타스가 손수건을 꺼내어 그의 손을
닦아 주었다. 리카르디스가 겸연쩍은 듯 웃었다.
“사상자가…… 적은 편이군요.”
잠시간 전장을 바라보던 로젤린이 대뜸 꺼낸 말이었다. 이목이 그녀에게 쏠렸다. 로젤린은 손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며 날카로운 소음이 나는 곳을 주시했다.
그녀는 말을 더 붙이지 않고 계속해서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공간은 적고, 사람은 많았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니 만큼 전투는 지지부진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사상자가 적은 것은 그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뭔가…….’
눈으로 보는 것, 생각하는 것 그 너머에서 경종이 울렸다. 전투 중이라 예민해져 공연히 불안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때, 힐리사고 기사의 검날이 발타 수비대 누군가의 머리를 가격했다. 이미 헐거워져 있던 것인지 투구가 털썩
벗겨지며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수수해서 인상에 남지 않을 법한 사내였으나, 로젤린은 그가 누구인지
보자마자 기억해 내었다.
[대다수의 병사들은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병사들은 포로로 억류 중입니다. 대장군을 포함한 지휘관들은 모두
처형했습니다.]
싱의 대장군. 리마.
투구가 벗겨진 그의 머리 위로 누군가의 검이 쇄도했다. 찰나의 순간, 검날의 궤도가 틀어지며, 머리가 아닌
단단한 흉갑 위를 의미 없이 스쳤다. 로젤린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전투는 잘 짜인 한 편의 연극에 불과하다!
힐리사고는 애초에 싱의 요새를 함락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처형하고 포로로 잡아 두었다던 싱의 군대가
지금 다리에 있는 수비대일 것이라, 로젤린은 확신했다.
로젤린이 고개를 휙 돌렸다. 갑자기 달라진 그녀의 기세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의 눈빛이 변했다.
“좌익군이 먼저 출진한다. 다소 피해가 생기더라도 하나하나 처리하지 말고 돌파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로젤린
경에게는 현장 지휘관으로서 드윗 경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격을 부여하겠다. 선두에 서는
기병대를 이끌어라.”
“명을 받듭니다!”
상황과 명령이 빠르게 하달되며 그간 잠잠했던 제국군 진영이 소란스러워 시작했다. 곧 좌익군이 움직이며 좁은
바늘구멍 같은 다리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전장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연합군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지금의 제국군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어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류로 온 것이 다행이었다. 그나마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213 화.
[일반적으로 화약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위력이 강할 거라 하더군요. 이것저것을 섞었다고. 그런데 급하게 만든
터라 실험해 볼 틈이 없었습니다. 그 영감이 솜씨는 좋은데 실패도 많이 해서……. 최악은 불발까지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뭘 폭파하시려는 겁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편에서 힐리사고군이 나타났다. 싱의 요새를 차지했다던 왕자의 군대였다. 연합군이 오기
전까지 발을 묶기 위한 병력이리라, 리카르디스는 직감했다.
그리고 그들의 노림수대로 일라베니아 제국군은 다리를 건너지 못한 채, 힐리사고군과 교전해야 했다.
거대한 무리에서 한 남자가 호위를 대동한 채, 전열로 나섰다. 멀리에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하카브, 그
남자였다. 그가 흡, 숨을 들이켜더니 소리를 질렀다.
“로젤린 에스터!”
캉!
높은 쇳소리가 나더니 창이 공중에서 몇 바퀴 회전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추락해 바닥에 꽂혔다. 하카브의 앞을
막아선 자는 디에즈였다. 일라베니아의 배신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발타에서는 사람의 말을 세 번까지는 들어 보라는 속담이 있어, 디에즈. 어쩌면 그녀도 마음이 변했을지도
모르니까 한번 권해 보기나 한 거야.”
“일라베니아의 병사들은 들어라! 일라베니아의 중부관문으로 발타와 마람뿐 아니라 힐리사고의 군대까지 진군하고
있다. 너희에게 승산은 없다. 하지만 그대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 그저 일라베니아에 태어났을 뿐인 것을. 하여,
기회를 주겠다.”
그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하카브가 손을 들어 올린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것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를 대신한다는 사실은
대다수가 알지 못했다. 연합군의 진영에서 화살 한 발이 하늘로 쏘아졌다. 그리고 곧바로 제국군 진영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 뭐야?”
제국군의 측면, 적막을 끊어 낸 날카로운 병장기 소리가 그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하카브의 명령을 받고 숲을
돌아서 간 별동대가 제국군의 방심을 뚫고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마인 병사 몇몇이 강물에서
튀어나와, 진형의 안쪽에 있던 지휘관들을 살해했다.
어수선해졌던 제국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고 잠시 멈춰 있었다. 하카브는 이목이 전방을 벗어난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제국군과 대치 중이던 연합군의 전열이 움직였다. 곧 첫 번째 파동이 제국군을 덮치며 사납게 그들을 흔들었다.
예정된 난장판이 벌어졌다.
이미 전의를 잃었던 자들의 방패는 연약했다.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온 발타의 병사들이 활개 쳤다. 한 명 한 명이
무너지자 전체가 흔들거렸다. 그들을 다잡아 줄 지휘관들은 살해당한 지 오래였다. 지휘 계통이 마비된 곳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후퇴, 후퇴하라!”
그때 디에즈와 케틀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상에서부터 하늘로 급격하게 치솟는 마력을 느낀 탓이었다.
거대한 독수리가 화살처럼 쏘아지듯 비상하고 있었다. 곧 전장 위를 덮는 울음소리가 울렸다.
삐이익----
* * *
콰앙!
무언가가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로 일대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폭발로 자욱해졌던 시야가 확보된 후에야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나는 솔직히 신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 렉시드.”
“……예, 백작님.”
그녀가 머리를 헝클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수레 열 개 분량의 화약과 신무기가 투입되어 폭발을 일으켰음에도
댐은 여전히 건재했다. 연기가 자욱하게 나고 소리만 요란했지,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 멀리 격전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댐이 무너질 것을 대비해 제국군은 강가에서 많이 벗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기존 계획이 틀어진 이상 정규전을 각오해야 했다.
“명령을 받듭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이 떠난 뒤, 연기가 걷혔다. 그곳에는 그녀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희미한 균열이 새겨져
있었다.
* * *
멀리서부터 굉음이 들렸다. 저 멀리에서 범상치 않은 크기의 연기가 뭉게뭉게 퍼지고 있었다. 자주 범람하는
미노가 강의 하천 지대를 위해 설치한 홍수 조절용 댐이 있는 곳이었다.
다행히도 소리만 요란했지,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단단하게 지어진 댐을 터트리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하카브는 강 건너의 리카르디스를 발견했다. 높은 지대로 올라가는 다른 제국군 병사들과 달리 하얀밤 기사단을
포함한 기병대가 강줄기를 따라 상류로 향하고 있었다.
‘댐으로 가는 거로군.’
“뭡니까.”
214 화.
큰 소리가 난 시점으로부터 몇 십 분이 흘렀음에도 강가의 수위는 높아질 줄을 몰랐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천여 명 되는 부대가 본대에서 빠져나와 강가를 따라 이동했다. 뒤에서 발타의 병사들이 끈질기게 따라왔다. 옷을
입고 합류한 마카롱이 나무를 쓰러트리며 뒤에서 달라붙는 발타군의 발을 잠시간 묶었다.
마인 병사, 인조적인 마인들, 그리고 파편까지. 사방이 마력으로 일렁였다. 로젤린은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 ‘
마력’을 위험한 것으로 분류했다. 보지 않는 방향이라 해도 파편과 마인 병사들의 움직임만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덜컹, 둔중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것에 로젤린이 미처 반응하지 못했던 이유는, 후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의 기운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거대한 마력.
디에즈였다. 그가 강대한 마력을 난폭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그걸 느낀 로젤린과 마카롱의 시선이 디에즈에게로
향했다. 그 찰나의 순간, 느슨해진 경계를 뚫고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콰직.
로젤린은 제 시야 밖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디에즈의 마력이 자신과
마카롱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도.
로젤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리카르디스 옆에 양팔을 쫙 벌린 스타스가 있었다. 검고 뾰족한 무기가 그의
가슴을 꿰뚫은 채였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말발굽에 밟힌 자갈이 튀어 오르고, 먼지가 자욱했다. 공중에 흩뿌려지는 핏방울이
리카르디스의 은색 갑주에 닿았다. 스타스의 투구 안에서 피 끓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인영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급하게 말고삐를 잡아 방향을 틀었던 탓인지, 스타스의 말과 리카르디스의 말이 거세게 충돌했다. 두 사람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아악!”
누군가가 내지른 비명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로젤린은 멍해진 머리로 생각했다. 파르딕트인가, 르원인가. 어쩌면
자신이 내뱉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다시 되돌아왔다.
“전하!”
로젤린은 손을 덜덜 떨었다. 리카르디스가 바닥에, 그리고 그 위에 스타스가 있었다. 스타스의 가슴을 꿰뚫은
검은 쇠가 리카르디스의 흉갑에 닿으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은 미동도 없었다. 주위가 소란해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단, 단장님.”
스타스가 콜록거리며 피를 토했다. 로젤린은 급하게 수통에 담긴 성수를 먹이려 했지만 그가 고개를 돌려 피했다.
고작 그 정도로 치료되지 않으리란 생각이 미친 탓이었다.
“단장님!”
“전하!”
“허억…….”
‘나, 나는 또…….’
미처 속으로도 완성하지 못한 생각에 손이 떨렸다. 시야가 깜깜했다.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칠게 뛰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로젤린이 비틀거리자 상급 기사 카일로가 급하게 그녀를 지탱했다. 나단이 건틀렛을 벗으며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살피고 호흡을 관찰했다.
“잠시 기절하신 것 같지만, 말에서 떨어진 부상이라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 빨리 안전한 곳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숨죽인 울음소리가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들려왔다. 스타스의 눈동자가 하얀밤 기사단원들 훑더니 쓰러진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그가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마지막으로 쳐다본 것은 그간 멍하니 서서 떨기만 하던
로젤린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레이몬드의 수습 기사 시절.
[경은 힘이 약한 편이군.]
[……예]
[예?]
무슨 소린가 싶었다.
로젤린은 스타스가 말하는 ‘쓸데없는 잡념’이 여태껏 자신을 흔들어 왔던 고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이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움직여라, 당장.”
로젤린은 먼 시간에서 돌아와 현재의 스타스를 똑바로 마주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스타스는 제 어깨를 밀고
있었다. 한없이 연약하고 위태로운 손길임에도, 로젤린은 스타스가 그때처럼 자신의 등을 강하게 떠밀어 주고
있다고 느꼈다.
“퇴각한다!”
로젤린은 산길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았다. 낮은 지대에 있는 연합군이 보였다. 마치 거대한 생물처럼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그들의 중심이 강가로 이동한 상태였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아직 연기가 나는
먼 곳을 보았다. 그녀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로젤린, 파르딕트, 레이몬드, 네스터, 슈텐, 레티시아, 에버하르트 경을 포함한 오소리 대가 전하를 보필,
미미 양은 다른 부대에서 로젤린 경의 역할을 맡아 마인 병사들의 이목을 끈다. 합류지는 기억하겠지.]
[예!]
만약의 때를 대비한 명령은 이미 상급 지휘관들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상태였다. 지금 그들은 그러한 일정한
계획에 따라 여러 갈래로 쪼개어져 이동하고 있었다.
그중, 제국기와 하얀밤 기사단의 깃발이 휘날리는 중앙 부대에서 강한 마력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미끼 역의
마카롱이 힘을 쓴 것이었고, 그 노림수대로 대부분의 마인 병사들이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215 화.
‘이게 무슨 미친 짓이지.’
리카르디스와 호위대는 기존의 대피로를 무시하고 다른 길로 달리고 있었다. 호위대의 현 책임자 레이몬드가
입술을 짓이겼다. 다른 누구도 아닌 리카르디스의 호위를 맡은 호위대가 결코 저질러서 안 되는 짓이었다.
[우리보다 저들이 지리에 밝을 수밖에 없어. 연합군이 저 수로 수색에 나서면 전하의 안위도 장담하지 못해.
지금이 절호의 기회야, 연합군이 전부 다리를 건너 강가를 벗어나기 전에!]
댐을 폭파한다는 작전은 완전히 폐기한 상황이었음에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레이몬드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잘 도주해 제국군과 합류한다 하더라도 뒤바뀐 전쟁의 판국을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제국군은 뿔뿔이
흩어져 조만간 추적대에게 따라잡혀 처형당하거나 포로로 잡힐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있다 하더라도 이 전쟁은 그
못지않게 머릿수가 중요한 싸움이었다.
“꼬리가 붙었습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로젤린이 멈춰 대응하려 하자 레이몬드가 소리쳤다.
“전력으로 달린다!”
멈춰 선 호위대 뒤로 적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교롭게도 힐리사고의 왕자가 포함된 힐리사고의 정예병들이었다.
오백여 명쯤 될 뿐인 호위대에 비해, 힐리사고군은 이천에 달하는 숫자였다. 로젤린이라 하더라도 상대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동안 리카르디스의 안전을 장담할 수도 없었다.
쾅!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다!”
“화살을 쏴!”
쾅!
‘제발.’
쾅!
다시 한번.
쾅!
‘호흡이 거칠어.’
로젤린은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파악했다. 호흡은 거칠고, 자세가 흐트러져 있었다.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에 동작만 크고 힘을 싣지 못했다.
로젤린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깊숙하게 몸 안을 타고
돌았다. 맥동이 난폭하게 뛰며 온몸을 둥둥 울렸다.
제발, 제발. 눈물을 흘리며 무력하게 하늘의 달에게 빌기만 했던 감정이 떠올랐다. 제발 그 누구라도 도와주세요.
하지만 구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로젤린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에게서 마력의 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하며 안을 타고 돌았다. 근육이 한계까지 응축되었다. 힐리사고 측의
몇몇 병사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못 박힌 듯이 로젤린만 바라보았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쾅!
쩍, 쩌적.
그녀의 주먹을 중심으로 균열이 선명하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빠르게 사방으로 치닫는
균열의 소리와 댐 너머의 물이 세차게 울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뛰어!”
로젤린은 나무를 부러트려 집어 던지며 힐리사고의 병사들을 공격했다. 굉음과 땅의 진동, 로젤린의 공세 때문에
그들이 잠깐 물러선 사이, 호위대는 강가에서 산기슭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제국군을 쫓으려던 힐리사고군이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이런, 젠장!”
“댐이 무너진다!”
“퇴, 퇴각하라!”
힐리사고군은 기겁하여 그제야 강줄기에서 벗어나 산비탈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붕괴가 이미 시작된 후였다.
로젤린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댐을 바라보았다.
‘댐이 붕괴되면 물이 쏟아지리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단순한 홍수라 표현할 수 없는 파괴적인 장면이었다. 탁류가 한 마리 거대한 생물처럼 나무, 흙, 돌,
인간.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한때 부드럽게 흐르던 강물은 섬찟하고도 육중한 소음을 내며 땅을 울리고 있었다.
발밑을 흔드는 진동에 놀란 군마가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중에는 리카르디스를 싣고 있는 말도 있었다.
기사들이 다급히 고삐를 쥐려 했으나, 비틀거리던 말은 비스듬히 난 돌멩이를 밟고 말았다. 땅에서 뽑혀 나간
돌멩이가 구르고, 그 위로 군마도 굴렀다.
“안 돼!”
“전하!”
“로젤린!”
* * *
“……이게, 무슨…….”
케틀린은 새삼스럽고 당연한 감상에 잠시 휩싸였다 빠져나왔다. 그녀는 아까 전 방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온
방향을 다시 쳐다보았다.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자라면 결코 무시할 수도, 눈을 뗄 수도 없는 힘이었다. 그렇게 시선과 정신을 빼앗긴
사이, 곧바로 무언가가 부서지고 터져 나오는 소리가 연합군이 있는 곳까지 들이닥쳤다.
다행히 케틀린과 하카브는 디에즈와 마인 부대의 도움으로 거센 물길을 피해갈 수 있었으나, 대다수의 병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무거운 갑옷과 무기를 들고 있던 병사들은 헤엄쳐 나오려다가도 가라앉아 버렸다. 숲, 나무, 그
일대의 모든 것이 잠겼다. 강가를 뒤덮었던 연합군의 병력은 반절로 줄어 버렸다. 케틀린은 그런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으나 들려오는 비명과 하카브의 싸늘한 목소리로부터 대충의 상황을 짐작했다.
쾅!
23
강물에 다양한 것이 떠내려왔다. 나무, 배, 사체 등. 빠른 유속을 감당하지 못해 갈가리 찢기거나 부서진 채였다.
땅 깊게 뿌리박은 거대한 나무는 간신히 떠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그때 강물 아래의 둥치에 무언가가 세게 부딪친
듯 나무가 텅, 하고 진동했다. 곧 물속에서 창백하리만치 하얀 손이 솟아났다. 나무 기둥을 몇 번 더듬은 손은
옹이구멍과 굵은 나뭇가지를 이용해 점차 기어 올라왔다.
“하아, 하……!”
곧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리카르디스를 어깨에 걸친 로젤린이었다. 두 사람의 무게가 더해지자 여태껏 잘
버티던 나무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216 화.
“이런, 씨.”
로젤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짧게 욕을 내뱉었다. 뿌리가 뽑히며 기울어지는 순간 로젤린이 나무를 박차고 뛰었다.
강기슭 위로 로젤린과 리카르디스가 얽혀 데굴데굴 굴렀다.
“허, 헉…….”
세티스티아 황녀의 모습이 리카르디스의 위로 끝없이 덧대어졌다. 싸늘해진 살갗의 온도. 도무지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까지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로젤린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리는 누군가가 세게 누르는 것처럼 먹먹하고,
고통스러웠다. 안쪽부터 뜨거워졌다. 그게 코까지 치닫는다 했더니 기어코 피가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로젤린의
손 위로 붉은 자국이 번졌다. 피 냄새를 맡은 그녀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스타스가 피를 흘리던 모습이
로젤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로젤린은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끝없이 되뇌었다. 숨을 불어넣기 위해 입술을 가져다
대었으나, 차갑게 식어 버린 입술의 감촉은 로젤린을 더욱 무섭게 옥죄었다.
‘숨을 불어넣고…….’
“전하!”
로젤린은 비명을 지르듯 부르자, 리카르디스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이내 초점 없이 흐릿한 눈동자가
드러나며 로젤린을 담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응시한 채 간절하게 그의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리카르디스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로젤린은 붉어진 눈을 거칠게 문지른 후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숨은 쉰다. 맥동은 느릿하지만,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머리의 부상은 심하지 않았다. 걱정되는 것은
다리. 아무래도 왼쪽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았다. 몸을 더듬어 보니 갈비뼈 쪽에도 이상이 느껴졌다.
낙마하고 급류에 휩쓸려 심장까지 멎었다 겨우 살아난 사람이 겨울의 찬 공기에 그대로 노출된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갑옷을 강물에 던지고 자신의 갑옷도 던져 버렸다. 곧 그를 안아 든 그녀가 어둠 속으로
발을 옮겼다.
로젤린은 버려진 민가를 찾아냈다. 주위를 살핀 그녀는 리카르디스를 안으로 데리고 가 그의 옷을 급하게 벗겨
냈다. 집안에 정체불명의 알 수 없는 천이 있어서 물기를 닦아 내고, 남은 것으로는 그를 감쌌다.
부싯돌이 젖어 점화되지 않았다. 로젤린은 다소 원시적인 방법으로 불을 붙여야만 했다. 마음이 급해서 몇
번씩이나 실패했으나 결국에는 그녀의 손안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그제야 젖은 옷을 벗었다. 철벅, 철벅. 나무 바닥에
젖은 옷이 달라붙으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머리카락도 하나로 모아 빨래를 짜듯이 하자 후드득 물이 쏟아졌다.
맨살에 와 닿는 서늘한 공기에 로젤린은 팔을 쓸며 부르르 떨었다.
“아!”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 사이로 수통이 보였다. 너무 급해서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로젤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밤 기사단에게 배분된 수통의 내용물은 죄다 성수였다. 그것도 질 높은.
로젤린은 허벅지에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올리고 수통을 기울여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성수는 입안에
고이기만 할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로젤린은 성수를 입에 머금고 리카르디스에게 입을 맞춰 흘려 넣는 일을 몇
번 반복했다.
그래도 안색이 돌아오지 않았다. 로젤린이 다급한 손놀림으로 그의 손과 발을 주물렀다. 살갗을 비비며 아주 짧은
순간 돌았던 온기는 금세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저 최대한 밀착해서 끌어안는 수밖에 없었다. 살갗에 와 닿는 그의 차가운 온도가 심장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픈 숨소리가 쌕쌕 울렸다. 그녀는 눈물을 훌쩍이다 그를
더 끌어안았다.
로젤린은 지금에 와서는 아무 의미 없는 가정을 머릿속으로 반복했다. 만약 이렇게 했으면, 이쪽으로 갔으면,
기존의 대피로를 따라 이동했다면. 그랬으면. 그러지 않았다면. 그녀는 끝없이 자신을 혹독하고 매섭게 다그치다
어느 순간 잠들어 버렸다.
* * *
‘여기는…….’
고개를 돌릴 힘도 없어 눈앞에 보이는 시야로만 상황을 판별해야 했다. 눅눅한 습기가 가득 찬 낡은 가옥이었다.
양식으로 보아 발타의 것이었고.
리카르디스는 두통이 인 머리로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 냈다. 앞에서 달리던 스타스가 갑작스럽게 말고삐를 쥐고
틀었다. 그렇게 비스듬히 자신을 가리자마자 스타스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심장에는 검고 뾰족한 철을 박은
채였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
리카르디스는 감기는 눈꺼풀의 움직임에 저항하지 않았다. 시야가 깜깜해지자 그 위로 투구 너머로 마주쳤던
눈동자가 그려졌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급박한 눈. 위험하다 피하셔라. 그뿐이었으리라. 심장에 보기만 해도
끔찍한 쇠를 달고도 그뿐이었으리라.
사람의 기척에 놀라서인지 갑작스럽게 숨이 터졌다. 리카르디스는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머리맡에 앉아 있는 로젤린이 보였다.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간질였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다 죽어 가는 소리를 냈다.
로젤린의 손바닥은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단단했다. 따뜻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으나 리카르디스는
안온함을 느끼며 볼을 그녀의 손바닥에 가볍게 비비듯 문질렀다. 눈을 감자 통증과 고열 때문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로젤린이 엄지손가락으로 그 눈물을 훔쳐 냈다.
“스타스 경은……?”
“전하…….”
217 화.
“원래, 사람은 아프면…… 약해지잖나. 그러니까 오늘만 이렇게 할게……. 내일부터는…… 다시, 할 테니까,
오늘만…….”
딱 오늘 하루만. 중얼거리던 리카르디스는 곧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로젤린은 그가 붙잡은 손을 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잃어 올 때마다 혼자서 아파했을 그가 안타까워 함부로 어떤 행동조차 할
수 없었다.
짐승들이 질척이는 흙과 땅을 짓밟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눈을 깜박이며 흐릿한 정신을 깨웠다.
리카르디스의 손을 잡고 있다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리카르디스를 살폈다. 손등이 이마에 살짝 맞닿기도 전에 불에 덴 듯 뜨거운 온도가
느껴졌다. 이마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계속해서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로젤린은 이를 꽉
깨물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리카르디스를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파악할 수 없었기에 합류지와의 거리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음식물을 섭취한 지 하루가 다
되어 갔다.
‘약이 필요해.’
하지만 집 안에는 지푸라기나 찢긴 천 조각만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삐뚤어진 문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림자의 위치가 바뀔 만큼 걸었음에도 풍경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일라베니아와 마찬가지로, 그보다도
심하게 발타의 땅은 죽어 가고 있었다.
한참 뒤, 목책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보였다. 로젤린은 벽에 몸을 붙여 은폐하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엿들었다.
‘억양이 독특해.’
로젤린의 눈이 지나다니는 아낙들의 옷차림새를 훑었다. 천 위에 수놓아진 자수는 발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양식보다는 일라베니아와 많이 닮아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발타인보다
연한 피부색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재빠르게 정보를 훑어 결론을 내렸다.
‘투라르…… 많이 떠내려왔는걸.’
그녀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리카르디스가 있는 버려진 민가와도 전혀 상관없이
동떨어진 곳이었다. 로젤린은 눈을 감은 채 주위의 기척을 읽었다. 바람이 황량한 숲속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만
무성했다. 사람은커녕 동물조차 없는 것 같았다.
로젤린은 다시 눈을 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 이거 힘든데.”
중얼중얼 혼잣말로 한탄한 로젤린이 주먹을 꽉 쥐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에 마력이 퍼지기 시작했다. 우득,
우두득. 로젤린에게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고통에 몸을 구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로젤린의 몸에서 무언가가 울룩불룩 움직였다. 체구가 줄어들기
시작하며, 머리 색과 눈동자 색 또한 변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흑색에서, 진한 고동색으로. 페리도트를 닮은
녹색에서, 연한 갈색 빛으로.
“으윽…….”
팔을 휘둘러 보니 느낌이 달랐다. 힘과 속도가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발타의 여성들은 일라베니아의
사람들보다 키가 작고 아담했다. 원래 모습은 눈에 띌 가능성이 높기에 이 정도의 불편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쳐 죽일 놈들!”
로젤린이 터트린 댐의 피해자들이었다. 그녀는 가슴을 콕콕 찌르는 양심을 애써 무시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참 거리를 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한 로젤린은 피곤에 지친 듯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재앙에
지친 이재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 *
몽롱한 의식 속, 리카르디스는 입술에 무언가가 와 닿는 걸 느꼈다. 입술을 가볍게 문지르던 그것은 사이를
파고들며 입을 부드럽게 열었다. 리카르디스는 끙끙 앓으며 열띤 호흡을 내뱉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 헐떡이자, 누군가가 달래듯 볼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굳은살이 박인 익숙한 살갗의
감촉에 리카르디스는 숨을 쉬며 몸의 긴장을 느슨하게 했다.
“윽.”
속눈썹과 눈가가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던 터라 시야가 흐렸다. 하지만 검은색 머리카락만큼은 똑바로 보였다.
로젤린, 부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말을 뺏었다.
“아 하세요. 이건 입가심이에요.”
그렇게 말한 로젤린이 숟가락으로 무언가를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썩은 구정물의 맛이리라
생각했는데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진득이 퍼졌다. 리카르디스는 잔뜩 찌푸렸던 인상을 펴며 입을 우물거렸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지만 로젤린이 미소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전하?”
무어라 뾰족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지만, 무척이나 낯익었다. 그게 더 이상했다. 처음 본 사람이 낯익다니.
리카르디스는 미간을 좁힌 채 여자를 바라보았다.
황급히 다가온 여자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이마에 손을 짚어 열을 확인하고, 들어온 외부의 빛으로 안색을
확인하는 둥, 대단히 부산스러웠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여자를 응시했다. 머리 색과 눈 색만 보면 발타인인데,
피부색이 연했다.
‘혼혈인가?’
“괜찮으세요?”
리카르디스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던 여자가 살짝 미소 지었다. 담담하게 웃는
모습도 어쩐지 낯익었다.
218 화.
‘대체 누구지?’
“뭐 하는 짓, 윽…….”
여자, 로젤린은 잔뜩 경계하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보고서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목소리가 왜 저렇게
싸늘하지? 우리 전하는 나한테는 안 저러는데…….
“……아.”
로젤린이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는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귓가로 작은 속삭임이 울렸다.
“로젤린입니다.”
“……그게 무슨…….”
리카르디스는 여자를 밀어내려다가 그녀의 생김새를 보고 멈췄다. 전체적으로 작고 동글동글하지만 이목구비가
로젤린과 비슷했다. 로젤린의 동생이라든가, 사촌이라고 말하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젤린?”
“그럼 여기까지만.”
“……지금의 상황은?”
로젤린도 보고서에 가깝게 사실을 나열하는 식으로 현재의 상황을 서술했다.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가렸다. 한참 후, 그가 거칠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댐이…… 부서졌나?”
“예. 제가.”
로젤린에게서 순식간에 날카로운 기세가 감돌았다. 그 어떤 고통도 감미롭게 만드는 짜릿한 희열이 리카르디스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가.”
“여기는 어디지?”
“투라르라…….”
리카르디스가 지금의 위치를 대충 머릿속으로 그렸다. 멀긴 하지만 합류지를 찾아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의 몸 상태와 더불어 장소까지 도달하는데 들키지 않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외형이 달라진
로젤린이면 몰라도 자신은 너무 눈에 띄었다.
리카르디스가 생각에 잠긴 사이, 로젤린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허름한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옷,
먹을 것, 지도, 발타식 단검까지.
“투라르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로젤린…….”
목소리가 나긋나긋하며, 어조는 독특했다. 잘 모르는 리카르디스가 듣기로도 흉내 내기가 아닌 완벽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로젤린은 계속해서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정체불명의 풀 무더기까지 꺼내자 그제야 가방이 텅 비었다.
리카르디스는 지금 자신의 몰골과 그녀의 차림새를 보았다. 돈이 나올 구석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그 시선을
깨달은 건지 그녀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
전투용이 아닌 예식용 검을 말하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푸른빛의 강옥과 금강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자신의
검을 떠올렸다. 찬란하게 빛을 반사하며 빛나는 보석들은 쉽사리 볼 수 없는 상등품이었다. 너무 눈에 띄는 게
아닐까 하고 리카르디스가 염려하려는 찰나 로젤린이 말을 이었다.
“강옥이 질이 좋고 크기가 크다 보니 출처를 의심받을 것 같아서 몇 조각 내어 일부만 팔았습니다.”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로군.”
“…….”
“그렇군…….”
“보통 연인이나 부부들은 경계를 덜 하더군요. 아무튼, 남편이 많이 다쳤다고 하니 대도시로 나가는 편이 좋을
거라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투라르에는 변변한 치료사가 없다고요. 다행히 한 달에 한 번씩 큰 도시에서 상단이
온다고 하는군요, 그때 삯을 주고 같이 이동해야겠습니다.”
몇 개의 정보만으로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발타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알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짧은 순간 사람들의 사투리를 익혀 활용하고, 환자를 데리고 발타를 가로지르는 대담한 작전까지.
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그녀는 지식, 경험, 능력.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깨우며 성장해 가고 있었다.
잠시 잠자고 있던 꽃봉오리가 이슬을 맞으며 일시에 개화하는 것처럼. 그것은 굉장히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 * *
계획이 정해진 후 두 사람은 이런저런 준비로 바빴다. ‘한창 알콩달콩할 때의 연인’을 흉내 내어 연습해 보기도
했고, 마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로부터 폐쇄된 길과 영지 등을 알아내며 주변 정세 또한 살폈다.
투라르 인근의 다른 마을에도 다녀온 로젤린이 무언가를 리카르디스에게 보여 줬다. 총사령관 리카르디스의
인상착의가 그려진 종이였다.
“전혀 안 닮았습니다.”
“머리를 조금 자르셔야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엉덩이 아래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머리카락의 길이는 확실히
범상치 않았다.
219 화.
“그냥 둘까요?”
“…….”
긴 머리가 취향인가? 마음속 어딘가에 정보를 저장한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들고 있는 단검을 뺏었다. 그러고
머리를 모아 잡아 확 끊어 냈다.
“아악!”
“멋있습니다.”
“……고마워.”
“아니, 정말…….”
로젤린은 뭔가 더 미사여구를 붙이고 싶어 했지만, 결국에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했다.
“진짜…… 잘생겼다.”
“음…… 한번 고쳐 볼게요.”
그렇게 말한 로젤린은 부서진 수레를 붙잡고 몇 십 분 동안 뚝딱 뚝딱거렸다. 부서진 부분을 제거, 나무로
비슷하게 부품을 만들고, 마을에서 사 온 끈과 못으로 고정하더니, 기어코 수레를 굴러가게끔 만들었다.
요모조모 능력이 있는 모습이 참 멋있었다.
“타요, 달링.”
몇 번을 들어도 파괴력이 넘치는 애칭이었다.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다리우. 달링. 그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글자가 단 두 글자로 축약되며 말랑말랑한 분위기를 입게 될 줄은, 그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 로즈.”
거기에 더해, 사랑하는 부인이 끌고 가는 수레에 타야 한다는 죄책감이 그를 몹시 서글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고집 부려 걸어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건 본인이 더 잘 알았다. 리카르디스는 얌전하게 수레 위에 올라탔다.
“로즈. 안 힘들어?”
“하나도요.”
한 시간 정도 지나고 나서야 멀리서 마을의 목책이 보였다. 제일 먼저 세워진 혼혈 마을인 만큼 규모도 상당히
컸다. 로젤린은 수레를 근처에 세워 두고 리카르디스를 부축했다. 느린 걸음으로 마을 입구에 다가가자, 어떤
청년이 껄렁거리며 다가왔다. 창을 들고 있긴 하지만, 병사처럼 보이진 않았다. 마을 자치대의 일원 같은데 뭐가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통행권은?”
며칠간 앓은 것 때문에 수척해지긴 했지만, 리카르디스의 몸매는 여전히 탄탄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남자가 말을
재빨리 바꿨다.
“희멀건 해서 검이나 한번 휘둘러 봤을까 싶은 놈이 용병일 리가 있나. 너한테 거짓말 한 거라고, 로즈.”
‘저 자식이……?’
‘죽일까?’
‘죽이자.’
“어?”
“손 떼.”
“이, 이 미친놈이…….”
두 사람은 일순 집중되는 사람들의 눈길에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눈에 띄는 피부색과 입구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시선을 끈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절뚝이는 불편한 행동 아래 긴장을 삼켰다. 누군가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저 사람…….”
“……….”
“로즈가 아깝지.”
리카르디스는 잠시 칼릭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칼릭스가 어떻게 ‘귀염둥이 칼’이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는지의
경위도 잠깐.
“그거라도 해야지.”
실상은 로젤린이 지켜 줬다는 점에서 리카르디스는 자괴감에 휩싸여 괴로워해야 했다.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등을 토닥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220 화.
로젤린은 친해진 부인의 집에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며칠 머무르기로 했다. 퉁퉁한 부인이 못마땅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리카르디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가상의 인물 ‘로즈’의 집안에 결혼 허락을 받으러 발을 들인
느낌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리고 그쪽도’라는 대목에서 온도가 뚝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어쨌건 간에,
로젤린은 정말 훌륭하게 투라르에 녹아드는 것에 성공한 듯 보였다.
두 사람은 전쟁 때문에 상단이 오는 날이 불규칙해졌다는 불우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상단이 예상보다 늦게
도착할지도 몰랐다. 초조할 만도 한데 로젤린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마을 사람들을 따라 일을
다니며 품삯을 받아 오기까지 했다. 그 돈으로 리카르디스를 입히고, 먹이고, 치료했다. 헌신적인 로젤린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감명 깊어 했다.
로젤린이 대외적으로 활동한 덕에 리카르디스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몸 상태가 약간 호전되었다. 혼자서 움직일 수 있게 된 후 리카르디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집
밖을 나서는 것이었다. 로젤린이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너무 신경 쓰여 도리어 회복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가끔 거리에 출몰하게 된 남자의 시선 끝에는 언제나 로젤린이 있었다. ‘로즈’의 말대로 사교성이고
사회성이고 죄다 가뭄인 남자는 마을 사람들과 말 한번 섞지 않고 오직 부인만 바라보는 집착을 보였다.
오늘도 소문의 그 남자는 나무 상자위에 걸터앉아 마을 아낙들과 어울리는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구경하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그러게.”
“그러게.”
* * *
상단의 마차가 도착했다. 싣고 온 상품들을 마을에 풀었으니 마차도 가벼워진 참이었다. 어차피 가는 길, 한두
사람 더 태우고 삯을 받을 수 있으면 이득이었기에 상단주와의 교섭은 빠르게 이뤄졌다.
로젤린은 마을 사람들과 헤어지며 눈물을 흘렸다. 남편이 다 낫거든 다시 돌아오겠다며 훌쩍이는데 얼마나 절절한
이별인지, 리카르디스의 가슴이 다 아플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마차는 덜컹거리며 길을
달렸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며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큰 상단이라 그런지 발타
변두리의 마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의심의 눈초리로 응시하는 눈길이 느껴졌다.
‘실력자들이 꽤 있는 것 같아.’
‘죽이다. 숨기다.’
죽여서 목격자를 없애 버린다는 뜻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마차에 타기 전 확인했던 상단의 인원수를 확인했다.
상단의 사람들만 해도 열 명이 넘었고 용병까지 합해 도합 오십 명은 되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황금정원의
클로에를 통해 상단과 금전의 흐름에 따라 정보가 얼마나 손쉽게 이동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놓치면 곤란해질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다 전력이 되지 못하는 만큼, 로젤린의 발목을 잡게 될 상황
역시 간과할 수 없었다. 들키기 전까지는 최대한 숨겨야 했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볼에 입 맞춘 채 애교 있게
속삭였다.
“아니야, 내가 더 사랑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의심은 점점 풀렸다. 로젤린이 며칠간 마을 아낙들을 훔쳐보며 눈으로 익힌 발타의 생활
풍습은 흠잡을 곳 없었고, 리카르디스 또한 힐리사고의 사정에 정통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틈날 때마다
붙어서 쪽쪽 거리는 두 사람은 사랑이 넘치는 연인. 그 이외의 단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우리 연합군의 피해가 컸다지만, 일라베니아 놈들도 만만치 않으니까. 총사령관도 실종됐고, 아니 실종이 뭐야.
죽었겠지 뭐. 아무튼, 그런데다가 제국군 놈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고 있는 처지이니 말이야. 그런
오합지졸 군대 정도로 리비타를 함락하기는 무리지. 함락은 무슨. 곧 수색대에게 지근지근 밟힐 걸세.”
중부 관문 다음은 황도였다. 남자의 말대로 중부 관문이 버티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리카르디스는 초조함을
가리기 위해 용병들이 준 싸구려 담배를 물었다. 연기가 입김처럼 번져 나갔다.
* * *
앞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느리게 움직이던 마차가 완전히 멈췄다. 리카르디스는 긴장한 용병들의
태도를 바라보곤 흘끗 로젤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종아리에 매어 둔
단도가 있는 위치였다. 리카르디스도 옆에 풀어 둔 검을 가까이에 두었다.
바깥에서 오고 가는 소리가 길어졌다. 마차 안 다른 자들의 이목이 밖으로 쏠렸을 때, 로젤린이 잽싸게 수화로
무언가를 말했다.
[수색대]
발타의 수색대와 우연히 마주친 것이었다. 철걱, 철걱. 갑주를 입은 병사가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의 시선이 로젤린과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그들을 날카롭게 죄였다.
“투라르…… 강가에서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못 걸어갈 거리는 아니군. 거기에다가 힐리사고의 용병이라.
발타에는 언제 처음으로 왔나?”
“3 년 전쯤입니다.”
상단주는 곤란해 보이는 낯으로 수색대의 대장과 리카르디스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리카르디스가
주머니를 뒤적이자 수색대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건 용병들이 피는 싸구려 담배였다.
그가 담배를 물고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여유로운 숨과 연기가 퍼져 나갔다.
“3 년 내내 발타에 있지는 않았죠. 힐리사고와 발타를 돌아다니며 일했습니다. 아름쉬에의 무지개 비늘 상단.
거기에 확인해 보시면 될 겁니다.”
“용병 일은 발타 내에서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부인이 있는데도 제법 떠돌이 생활을 즐기나 보군.”
리카르디스는 귀찮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경계하는 시선이 모여 든 상황.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간 이곳이 전장으로 변할 터였다.
그때 로젤린이 나섰다.
“아, 그게…….”
221 화.
“뭐, 이 미친…….”
“저 개…….”
수색대의 대장이 리카르디스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돌려 따가운 사내들의 시선을
피했다. 로젤린이 두 손을 내저으며 황급하게 말했다.
리카르디스는 순식간에 순진한 여자를 꾀어내 두 집 살림하는 천하의 개망나니가 되었다. 수색대의 대장이
들으라는 식으로 혀를 찼다.
수색대가 떠난 뒤, 상단의 사람들의 눈빛도 변했다. 방금 전까지는 싸가지는 좀 없지만, 부인을 아끼는 놈을
보는 시선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개잡놈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중점을 흐리는 훌륭한 화술로 그들의 경계를 벗어났으나, 리카르디스는 속이 쓰렸다. 옆을 바라보니 로젤린이
남몰래 엄지를 척 치켜세우고 있었다. 얄미웠다.
“도적이다!”
안 그래도 수색대의 대장이 떠나기 전에 이르고 간 내용이었다. 최근 전쟁 때문에 높아진 세율로 마을을 버리고
어설픈 강도 흉내를 내는 자들이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상단의 사람들보다 도적의 수가 두 배 이상이 많았다. 더군다나 상대는 농기구를 들고 있는 어설픈 산적이 아니라,
무기와 방어구를 갖춘 집단이었다. 전황이 불리했으나 로젤린은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헤어진 수색대 중에
마인이 있다면 마력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재빨리 판단을 마친 그녀가 마부석에 앉았다. 곧 말 두 필이 이끄는 작은 마차가 홀로 길가를 벗어났다. 전투를
벌이던 용병들이 그 모습을 목격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도적들도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끊임없이
화살을 날려 보냈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아하니 쫓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길가 옆에 난 나무가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도적들이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였다. 로젤린이 말고삐를 잡아 방향을 틀어 보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나무 기둥이 떨어지며 쿵! 하고
땅을 울렸다. 놀란 말이 앞다리를 치켜들고, 나머지 한 마리는 나무에 부딪쳤다. 마차가 기우뚱 기울었다.
발밑이 불안해진 순간 리카르디스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로젤린을 보았다. 그녀가 껴안자마자 마차가 쓰러지며
비탈을 굴렀다.
마차가 비스듬한 면을 따라 뒤집힐 때마다 리카르디스는 온몸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까지 몸이 다 낫지
않은 상황에서 버티기엔 너무 큰 충격이었다. 시야가 초 단위로 바뀌었다. 바닥이 천장에 가 있고 천장을 밟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게 또 순식간에 뒤집혔다.
쾅!
뻥 뚫린 틈으로 두 사람의 인영이 얽혀 빠져나왔다. 텅 빈 마차는 계속해서 산비탈 밑으로 굴러가며 부서져
내렸다.
“으윽…….”
리카르디스는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통증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짧은 사이 땀으로 옷이 흠뻑 젖었다.
“달링!”
정신이 혼미해지는 고통 속에서도 뇌리에 똑똑히 박히는 애칭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헐떡이며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았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겨우겨우 로젤린을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흐릿해 그녀가 두세 명으로
흩어져 보였다.
“……괜찮아. 그대는?”
“저는 괜찮지만,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마력을 써 버렸어요. 마차에서 탈출하려다가 그만…….”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다 시선을 휙 돌렸다. 보이지도 않는 저 먼 곳에서부터 익숙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험한 말을 내뱉었다.
“젠장.”
“들켰습니다. 빨리 이동하겠습니다.”
두 사람을 태운 말이 산길을 내달렸다. 리카르디스는 갈비뼈를 붙잡고 애써 신음을 참아 냈다. 거대한 짐승의
발이 땅을 구르는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칼로 찌르는 듯한 선명한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로젤린도 그런 리카르디스의 상태를 눈치챘으나 멈출 수 없었다.
마인의 기운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마차에서 탈출하고 난 후부터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용케
위치를 파악하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두 사람이 탄 말보다 한 사람이 탄 말이 속도가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추격자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근접한 상황이었다.
끈질긴 추격전은 두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고 나서야 멈추게 되었다. 한걸음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찔한 절벽
아래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말이 푸르르 투레질했다.
로젤린은 말에서 내려와 주위를 살폈다. 쫓아온 자의 숫자는 오십여 명. 그중 마인은 다섯쯤 되는 것 같았다.
상대하지 못할 숫자는 아니지만, 리카르디스를 보호하면서 싸워야 했기에 불리했다. 조금만 방심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로젤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더니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짙은 갈색에서 완전한 흑색으로, 두피에서
머리끝까지. 그녀는 검을 꽉 쥔 채 몸을 웅크렸다. 바닥에 닿아 있던 검 끝이 땅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등,
어깨, 드러난 팔의 근육이 섬유의 위로도 보일 만큼 역동적으로 꿈틀거렸다.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이 입을 꾹 다물며 검을 들어 병사들을 향해 겨눴다. 그제야 발타의 병사들은 잠에서 깨어난 듯 일시에
움직였다.
“……?”
로젤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병사들이 검을 뽑거나 공격하려는 의도를 보이지 않고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잠시간 그들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이 교전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친 상대들을 잽싸게 살해해 버리려 마음을 먹었던 때, 가운데에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까 전 로젤린에게 남자 보는 눈 좀 키우라 했던 수색대의 대장이었다.
* * *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로젤린의 눈은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정비된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어 흔들림이 심하지
않았지만, 그것마저도 지금의 그에게는 큰 충격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결국 그 제의를 승낙했다. 쫓아온 추격자들이 우위에 서 있는 상태였음에도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과 ‘주인’이라는 자의 이름이 기묘한 신뢰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멈췄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부축한 채 건물 안으로 이동했다. 미로같이 복잡한 곳이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고, 왼쪽으로, 중앙 길로, 지하로 내려갔다가, 다시 계층을 오르고. 로젤린은 침착하게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 지리를 익혀 두었다.
병사들이 큰 방 앞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천으로 가려진 안쪽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로젤린이 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수색대의 대장에게 들었던 대로, 간제가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222 화.
“왕녀 전하.”
“전하인가요?”
“…….”
로젤린은 간제가 안내한 너른 침대에 리카르디스를 눕혔다. 그는 신음을 겨우 삼키고서 간제를 올려다보았다.
“아아니! 로젤……!”
완벽한 문장이 구사되기 전, 간제가 남자의 입을 확 막아 버렸다. 라헤안시는 그제야 자신이 발타 한가운데에서
발타인들이 간절히 죽이고자 하는 사람의 이름을 외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라헤안시가 눈물을 글썽이더니 두 손을 모아 하트를 그렸다. 대충 반갑고 너무나 좋다는 뜻이겠거니 싶었다.
로젤린은 답변을 돌려주는 대신 라헤안시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대로 질질 끌고 간 로젤린이 라헤안시를
던지다시피 침대에 밀어 넣었다.
당혹스러워하던 라헤안시는 침대 위에서 신음을 내뱉는 남자를 발견하고서는 표정을 굳혔다. 머리 길이와 색이
달랐지만 누군지 금세 알아챈 듯했다. 라헤안시가 자세를 잡고선 리카르디스의 몸 위로 손을 얹었다. 그 주위로
하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팔짱을 낀 채,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만히 그의 곁을 지켰다.
로젤린의 가슴을 꽉꽉 틀어막고 있던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눈물이 투두둑 흘러내렸다. 그녀는
리카르디스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그 위에 젖은 얼굴을 묻었다.
* * *
“…….”
“……하.”
‘로젤린은 어디 있지?’
‘리비타에서 멀지 않은 곳이군…….’
리카르디스는 기존의 목적지였던 리비타, 그리고 그 안에 있을 힉살라를 잠시간 떠올렸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이곳에 있었다. 일국의 왕녀가 이 전시 상황에 수도의 궁전에서 벗어나, 적군의 총사령관을 은밀하게 찾아
보호했다. 단순한 일탈이라 말할 수 없는 행위였다.
“…….”
리카르디스가 간제의 호위에게 눈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호위도 아는 바가 없는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악!”
어깨가 빠질 뻔한 간제가 비명을 질렀고, 로젤린은 그때야 그녀의 존재를 깨달았다. 로젤린은 단단히 묶은 끈을
풀 여유조차 없는지, 간제를 한쪽 어깨에 위에 얹고서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잠에 덜 깬 간제가 우으으
하면서 그녀의 어깨 위에 늘어졌다.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리카르디스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대도.”
“……아, 네. 그건 제가 인질이라서.”
“인질?”
“물론이지요.”
인질이 생긋 웃으며 다과를 인질범에게 밀어 주었다. 인질범은 그걸 또 좋다고 먹고 있었다. 희한한 광경이었다.
그건 라헤안시가 대신 설명했다.
“도망치고 있는데 갑자기 저기에서 물이 해일처럼 밀려오잖아! 어쩌다 휘말려서 떠내려갈 뻔했는데, 누가 나를
건져 줬어. 근데 그게 발타의 병사들이지 뭐야. 아, 나는 여기서 죽겠구나 싶었는데, 다른 사람들 몰래
빼돌리더라고! 와, 뭐지? 이제 죽겠구나 싶었거든? 근데 날 구해 준 사람의 상사가 왕녀 전하였지 뭐야!”
라헤안시가 리카르디스의 귓가에 뒤 내용을 속삭였다.
“……그래. 잘됐구나.”
“예.”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마저 말을 이었다.
“많이 안 좋습니다.”
“…….”
말 안 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개인감정을 미뤄 두고서라도 저에게는 하카브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아니, 정확히는 발타예요.”
간제가 상체를 숙이며 턱을 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테이블에 닿아 소리를 냈다. 간제는 그때마다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요소를 꼽았다.
간제가 피식 웃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저에게는 자부심보다 전쟁으로 죽어 나가는 많은 발타인의 목숨이 소중하고,
개중 비옥하다고는 하나 마찬가지로 노쇠해 가는 일라베니아의 영토도 그다지 탐나지 않습니다. 보석과 황금.
그것은 빠르게는 수년, 늦게는 백여 년 안에 가치를 잃고 아무 가치 없는 반짝거리기만 하는 돌덩이가 될 겁니다.
그것을 먹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간제가 제 팔찌를 와구 와구 먹는 시늉을 했다.
223 화.
간제는 하카브와 마찬가지로 미소로 무장하여 본심을 숨기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과거 일라베니아의
성에서 “하카브는 저를 결코 죽일 수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던 때와 지금만큼은 가면이 벗겨지고 그녀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났다. 결코 변명이나 거짓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진심이 보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제 이상과 전하의 이상은 완전히 같지 않겠죠. 그러니 저는 전하의 온정에 기대어 부탁을 드리진
않겠습니다. 이것은 거래입니다. 제 조건을 말씀드리지요.”
“축복의 밤을 부를 것.”
간제가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무언가를 꽉 움켜진 듯한 모양의 손 뒤에서 간제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대단한 기세에 리카르디스와 라헤안시가 움찔거렸다. 간제는 씩씩거리던 걸 진정하고 다시 침착하게 얘기했다.
간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발타가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시 일라베니아의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그 미래를
비튼 값으로 발타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이득일 수 있었다.
“이해했습니다.”
“뭡니까, 그 눈빛은.”
“설마 저보고 힉살라를 설득해 달라든지, 혹은 반역 일으키는 걸 도와서 왕녀를 힉살라로 만들어 달라든지 하는
것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아니긴 하지만 힉살라께서도 제 말보다는 리카르디스 전하의 말을 좀 더 귀 기울여 들으실 것 같다는 점에서
그 의견도 나쁘진 않네요.”
“나쁩니다.”
“아, 네.”
지금 자신은 발타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있었다. 어떤 권력, 무력도 동원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빤히 알면서
무얼 도와달라고 하는 것일까. 가진 것이라고는 신성력밖에 없는데.
‘아.’
발타의 힉살라를 대신해 하카브가 왕실을 통제하기 시작한 건 올해로 7 년쯤 되었다. 그동안 힉살라는 내내 투병
중이라 알려지긴 했으나, 공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실상은 그가 죽은 사람일 것이라는 음모론까지 돌
정도였다.
치료하지 않고 일부러 놔둔다는 얘기였다.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자초지종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손마디로
턱을 쓸었다.
간제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말을 망설였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국의 총사령관이 발타의 궁전으로? 호랑이의 아가리에 핏물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들고 가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전하께서 위험한 일에 처하지 않으리라 장담 드리긴 어렵습니다. 리비타의 궁전에는 하카브의 사람들이 깔려
있는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저도 제 나름의 세력을 구축해 뒀답니다.”
“……위험을 감수할 만하다 인정합니다. 순식간에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기회니까요. 하지만, 치료가 끝난
힉살라께서 간제 왕녀와 같은 뜻이리라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일라베니아 황성에 발타의 깃발을 꽂기
직전인 이 상황을, 발타의 힉살라가 기껍게 여기지 않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설마 그럴 리가요.”
“왕녀 전하.”
“어머, 별말씀을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저는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리비타의 궁전으로 가시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습니다.”
간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리카르디스는 당황을 숨기고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표정으로 간제를 응시할 뿐이었다.
“계획은 확실하지 않고 변수는 많으며, 깨어난 힉살라께서 하카브 왕자를 후계자로 여기지 않을 거라는 말 또한
추측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불확실한 가능성만 보고 제국의 총사령관께서 위험을 감수하실 수는 없습니다.”
한마디 한마디를 더하는 로젤린의 표정이 점점 싸늘해졌다. 간제는 그런 로젤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름
평화롭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방 안에 있는 호위들이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는 발타의 한가운데이며, 너희들은 적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간제의 말대로 이곳의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간제의 협박에 응수했다.
“왕녀 전하께서도 현실을 아셔야겠습니다. 어제 인질이 되어 달란 말이 농담처럼 들렸나 봅니다.”
“저, 저어…….”
224 화.
리비타의 궁전을 넘어 힉살라의 방에 침입한 뒤, 치료를 끝내고 제국군과 합류해 중부 관문으로 간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게 분명했다. 간제는 라헤안시가 말한 대로 리카르디스에게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신관님께서?”
“형, 걱정 마.”
라헤안시가 낄낄거렸다.
“우리 지금 되게 멋있지 않았어? 역사서에 기록되면 ‘발타. 위험의 한가운데에서도 우애로 얽힌 맹세가
일어났노니…….’ 이런 식으로…….”
간제는 막 엎어질 뻔한 거래가 간신히 이뤄졌음에 감격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간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으며 크게 외쳤다.
“……그래요. 좋은 생각입니다.”
* * *
“……그.”
“……힘?”
“왕녀.”
대화가 많이 왜곡된 상태였다.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피로감을 나타냈다. 간제가 깔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세심하시네요.”
“음, 안전하냐, 안전하지 않냐를 묻는다면 안전하다고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대륙을 소생하는 거대한 힘의
주축이니 만큼, 후에 변화가 있긴 합니다.”
“변화라 하신다면?”
* * *
힐리사고 왕국이 일라베니아의 동맹이 아닌 발타의 연합군에 속해 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이 대륙에 널리 퍼졌다.
경악할 일이었다. 힐리사고가 일라베니아를 배신하다니.
이것은 일라베니아가 발타와 손을 잡았다는 것만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대륙의 아버지, 축복의 밤을
부르는 영원한 영광. 일라베니아를 호시탐탐 노리던 발타와 결탁을 하다니. 대륙의 많은 권력자들이 힐리사고를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힐리사고 왕국이 정식으로 소명하며 기류는 점차 뒤바뀌기 시작했다. 유일 제국이라는 일라베니아의 이름
아래 그들이 얼마나 횡포를 저질러 왔는가? 권리만을 누리고자 하고 그에 따르는 의무는 수백 년간 저버리며
대륙을 도탄에 빠트리지 않았나.
하지만 일라베니아의 친구였던 힐리사고가 전면적으로 나서며 증거까지 내세우자 상황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축복의 밤을 위해서는 성력뿐 아닌 마력도 필요하다.
일라베니아가 진정 제 욕심만 챙기려다 대륙을 죽음으로 물들였단 말인가?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이에 대해 사실무근, 조작된 증거라 일축했다.
그렇게 힐리사고의 참전으로 외부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하는 가운데, 내부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발타와
힐리사고가 연달아 일라베니아에 손가락질하며 어이없는 증거 따위를 드밀어도 콧방귀만 뀌던 병사들의 낯이
어두워졌다. 지원을 보내기로 한 국가들 측에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시간을 미루는 것은 물론, 발타 연합군
측으로 돌아선 국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225 화.
아무리 강철 같은 믿음이 있어도, 외부에서 흔들리니 내부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탈영병이 속출하고, 황실
직속 지휘관에 반발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황도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어느 기관 하나도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엉망진창이 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전시라는 말이 어울리는 아수라장이었다.
간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라헤안시를 한 번 보더니 리카르디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일라베니아가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노라는 나쁜 소식을 전달했건만 반응이 남달랐던 탓이었다.
이쪽도 정말 집안 꼴 장난 아니었다.
* * *
화톳불 위에서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어 갔다. 지글지글, 표면에서 끓던 기름이 뚝뚝 떨어졌다. 고소한 냄새가
연기와 함께 모락모락 퍼지기 시작했다.
“…….”
하지만 오랜 시간 굶주린 남자들은 식욕이라는 본능마저 잃어버린 듯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망토
아래로 흙과 먼지, 피로 더럽혀진 하얀밤 기사단의 갑주가 빛났다. 백여 명이 넘게 모여 있는 숲속은 바람
지나가는 소리만 이따금 씩 날 뿐, 고요했다.
“멍청한 새끼…….”
“에버하르트, 그만.”
옆에서 레티시아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에버하르트는 손목을 비틀어 빼내고서는 계속해서 의미 없는
자학을 반복했다. 레티시아는 이마를 쓸며 한숨을 쉬었다.
“이거 놓, 어? 미, 미미 양?”
“미미 양!”
하얀밤 기사단원들과 같이 움직이는 미미는 이따금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가 불쑥불쑥 나타나고는 했다. 지금도
제법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다들 걱정하던 참이었다.
“알아서 뭐 하게.”
마카롱이 뜨거운 고기를 맨손으로 덥석 집어 먹으며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고기를 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흙과 먼지, 피로 더러워진 갑주. 산발이 된 머리, 우울한 표정의 인간들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마카롱 또한, 로젤린이 급류에 휩쓸렸다는 얘기를 듣고는 한번 미쳐 날뛰긴 했었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로젤린의 신체 능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마카롱이었다.
몇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재해 속에서 로젤린은 살아남았을 거라고 마카롱은 확신했다. 리카르디스는 어떻게
되었을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카롱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는 빨간 두 눈을 끔벅이고 있는 에버하르트의 입에 고기를 쑤셔 넣었다.
실핏줄이 터져 눈에서 피가 흘렀다. 가슴이 꿰뚫린 고통 속에서도 단 한 순간도 눈을 돌리지 않고 떠나는 하얀밤
기사단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스쳐 지나가는 자신의 손을 꽉 잡았다.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서 어떻게
그런 힘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알았어요.]
그렇게 마카롱이 대답하자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뭐가 좋다고 웃고 있는지. 타박하기도 전에 스타스는 고개를
떨궜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쳐 가지고 알겠다고 대답했구나. 마카롱은 짙은 회의감에 휩싸여 자리에 털썩 앉았다. 주위를 정찰하러
잠시 떠났던 나단이 그 즈음 돌아왔다.
“미미 양. 걱정했다네.”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남자를 바라보며 마카롱은 다시금 제 처지가 서글퍼졌다. 하얀밤 기사단 내에
있을수록 자신이 멍청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카롱은 손에 묻은 기름을 에버하르트의 옷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어느 가게의 스튜가 맛있다던데, 하는 말투였다. 그 때문에 단원들은 그 얘기를 듣고도 잠시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곧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이 헉 숨을 들이켰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실종 이후 처음 듣는 첫
소식이었다. 단원들의 한걸음 뒤에서 마카롱을 바라보던 나단이 부하들을 퍽 밀치고 가까이 다가왔다.
“갑옷?”
“네, 갑옷만.”
마카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날카롭고 예민해 보이던 표정을 고수하던 남자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그가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델라브힘이시여…….”
뭐, 갑옷을 발견했다고? 시체는 없었다는 거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 정보가
반드시 리카르디스가 무사할 거라는 보증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일말의 희망을 자라나게 할 수는 있었다.
* * *
어쨌거나 살아남았다. 차가는 뿔뿔이 흩어진 발타의 병사들과 함께 근처의 요새로 잠시 몸을 의탁했다. 이런저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상급 지휘관인 만큼 차가는 발타의 요새에서도 환영받았다.
‘거기에다가…….’
차가는 상념에서 벗어나 거울 앞에서 꽃단장했다. 귀한 분이 불렀다는 소식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용사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듣고 싶은지도 모른다. 곧 시녀가 안내를 위해서 방문했다. 차가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를 뒤따랐다.
226 화.
“고개를 들어라.”
“예, 전하!”
“호오, 그렇구나.”
차가는 옆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방에 들어갔던 시녀가 막 나오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 뒤,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중 한명과 눈이 마주친 차가가 숨을 들이켰다.
“헉!”
차가의 눈동자가 쉼 없이 흔들리며 간제를 향했다.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느긋하게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예에……?”
“아는, 얼굴이냐고.”
차가가 머리를 바닥에 쿵 박았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가느스름해지자, 간제가 싱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원래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눈치가 빠르다는 거죠. 별다른 설명을 할 필요
없으니 얼마나 편합니까?”
그때 로젤린이 나섰다.
“괜찮습니다. 배신…….”
“못 할 테니까요.”
차가는 침을 삼키며 로젤린을 올려다보았다. 댐이 붕괴되기 직전, 멀리서 퍼져 나오던 마력의 파동이 떠올라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태초의 세계에는 어떠한 것도 없이 빛과 어둠뿐이었다 전해졌다. 차가는 어쩌면 그 태초의 어둠이 로젤린이라는
사람이 지닌 마력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 *
전쟁이 일어났던 초기만 해도 일라베니아의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국의 장자가 사망한 일과
전쟁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 휩쓸려 불안해했을 뿐이었다. 일라베니아는 절대적인 강자며 지배자였다.
신의 안배 아래 쓰디쓴 고난이 곧 달콤한 승리로 바뀌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단단한 믿음은 남부 관문이 무너지며 한번 흔들리고, 남하했던 제국군의 패배와 총사령관 리카르디스의
실종으로 크게 한 번 더 흔들렸다. 그리고 지금, 중부 관문에서 보일 정도로 근접한 까만 대군의 모습으로
기어코 산산조각 나 무너지게 되었다.
병력과 물자, 지휘관만큼이나 전쟁에서 중요한 것이 기세와 흐름이었다. 지금 이 공간의 흐름은 연합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일라베니아군이 뾰족한 수를 쓰지 않는 한 이것은 뒤집기 힘들었다.
‘이델라브힘이시여…….’
신을 불렀으나 대답은 없었다. 밝은 햇살이 내리쬐던 평화로운 대지는 안개에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 *
“잠깐 정지.”
수색대의 대장이 무리를 쭉 훑었다. 발타인으로 보이는 병사들 사이에 흰 피부를 가진 이들이 몇몇 보였다. 다른
나라의 용병들이 있으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제국군이 발타의 깊숙한 곳까지 침범한 상황이다 보니 주의 깊게
살펴야만 했다.
무리의 책임자처럼 보이는 이가 일행을 한번 돌아보고 나섰다. 그 또한 하얀 피부의 사람이라 수색대 대장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껄렁껄렁하게 걸어온 남자가 입을 열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건성건성 건네는 인사에 수색대 대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주머니를 뒤져서 신분 패를
내밀었다.
사르체군의 천인대장임을 증명하는 패였다. 수색대의 대장은 뒤늦게나마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 차가는
귀찮은 듯 손을 저으며 인사를 물렸다. 그리고 곧이어 왕실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꺼냈다. 수색대의 대장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껄껄 웃던 수색대의 대장은 다시 바쁘게 길을 떠났다. 차가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끝났습니다, 경.”
짐마차에 고개를 빼꼼 들이민 차가가 작게 속삭였다. 그림자 진 안쪽, 로젤린이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검을 손질하던 중이었는지,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번쩍였다. 차가는 자기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차가와 수색대 대장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수색대의 병사들은 흩어져서 무리를 살폈다. 이 짐마차 까지도.
로젤린은 합류하게 될지도 모르는 동료들을 의식해 머리색만 변형한 상태였다. 허술한 변장이었기에 그녀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스쳐 지나가는 이목을 피할 정도는 되는 듯 했다.
로젤린은 무심하게 차가를 쳐다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출발하라는 얘기였다. 왜 말을 하지 않나 했더니, 검푸른
머리의 사내가 그녀의 무릎을 벤 채 잠들어 있었다. 힐리사고의 용병으로 위장하고 있는 리카르디스였다.
차가는 존경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맹수를 앞에 두고서 잠을 자다니. 심지어 맹수에게 머리라는
급소를 온전히 맡긴 채로! 저쯤 되어야 일라베니아의 총사령관을 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차가는 부르르 떨며
소리 없이 부하들을 재촉했다.
“더 주무세요.”
“시간이 너무 흘렀군.”
한데 아까 전, 마주친 수색대의 대장이 근처에 제국군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 경고했다. 합류지에 미처
도착하지 못한 병력인지, 아니면…….
“전하를 찾기 위해 일부의 병력이 남은 게 아닐까 싶은데요.”
227 화.
“멀리 가지 마.”
“나 무서우니까.”
“아, 네!”
그 말 이후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뒤에서 차가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피 냄새.’
로젤린의 눈이 번쩍였다. 장작을 내려놓은 그녀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리카르디스와 대부분의 병사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차가를 비롯한 마인들은 일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모였다.
“믿겠다.”
로젤린은 빠르게 숲을 내달렸다. 피 냄새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얼마쯤 야영지에서 벗어났을 무렵. 저
멀리에 서 있는 인영이 로젤린의 시야에 들어왔다. 잠시 멈칫하던 인영이 로젤린의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침착하게, 그리고 발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굵은 나무뿌리가 많은 곳이라 성큼성큼 뿌리를 건너며
뛰어야만 했다. 그렇게 힘차게 발을 구른 그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발목을 휘감았다. 강한 힘에 이끌린
로젤린이 비틀거렸다. 휙, 채찍을 휘두르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눈 깜짝할 새에 시야가 뒤집혔다.
“…….”
함정이었다. 로젤린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몇 초 정도 뒤집혀 대롱거리기만 했다. 무력과 기민한 감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자존심이 몹시 상해 버렸다.
하지만 로젤린은 발목을 휘감은 올가미를 끊어 내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함정에 걸린 이후 도망가던 사람이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자신이 약자처럼 보이는 지금의 이 모습이 목표로 가는 빠른 길이리란 걸 직감했다.
로젤린의 예측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조용하던 숲속에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겹쳐졌다. 하나, 다섯,
십, 오십, 백…….
곧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익숙한 듯이 대형을 갖추며 그녀를 에워쌌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병사의 몸놀림이었다. 그중 한 명이 둥그런 원을 그리고 있는 무리에서 벗어나 로젤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흘러내린 로젤린의 긴 머리카락을 보고 남자가 흐음, 하는 콧소리를 냈다.
“…….”
로젤린은 콧방귀를 뀌고서는 밧줄을 끊어 냈다. 높은 나무에서 추락하는 그녀의 몸이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남자가 감탄하며 검을 뽑았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걸 보니, 혹시 마인인가? 계급이 높으면 좋겠는데. 사냥도 이제 지쳐서 말입니다.”
로젤린을 둘러싼 남자들이 일시에 검을 빼 들고 간격을 좁혀 왔다. 로젤린은 피식 웃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묶었다.
남자가 머리를 덮고 있는 후드를 젖혔다. 눈이 휘둥그레 변해 있었다. 그다지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만, 반가운
마음이 솟았다.
“오랜만입니다.”
산의 중턱에 위치한 큰 동굴 안.
로젤린과 리카르디스가 포함된 발타 부대와 일라베니아 제국군이 한자리에 모였다. 드윗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리카르디스의 망토에 입을 맞췄다.
“살아계시리라 믿었습니다.”
장난기 어린 말투에 드윗이 살짝 웃었다. 리카르디스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드윗을 일으켜 세웠다.
드윗이 감동이 일렁이는 촉촉한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포옹하려는 듯한 드윗의 행동에 리카르디스가 곧바로
정색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야.”
“아, 네.”
간제 휘하의 발타 병사들과 사자갈기군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저녁 준비를 끝냈다. 그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로젤린과 리카르디스, 드윗만 대화를 나눴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예상대로 제국군의 대부분은 발타를 빠져나간 상태였다. 연합군의 수색대가 눈에 불을 켠
상황이라 힘들 법도 한데, 무사히 국경을 건넜다는 소식에 리카르디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수고가 많았습니다. 여기저기 병력을 흩트려서 치고 빠지는 솜씨가 어찌나 대단한지.
덕분에 이목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습니다.”
그렇게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시선을 끄는 사이 제국군은 발타에서 탈출, 일부의 병력만이 남아 리카르디스를
수색하고 있었다. 사자갈기군과 하얀밤 기사단, 오소리 부대 외의 두 개의 부대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래.”
리카르디스가 감흥 없이 대답하자 싱거운 소리만 하던 드윗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밤늦게까지 드윗과 정보를 나누며 얘기하던 리카르디스가 눈을 깜박깜박하며 졸기 시작했다. 드윗이 무어라
말하려 하자 리카르디스의 옆에 앉아 있던 로젤린이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로젤린은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기울여, 다섯 번째로 제 허벅지에 눕혔다. 그녀가 손짓하자 저 멀리서 쉬고
있던 발타 병사가 달려와 모포를 건넸다.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치료는 했지만 떨어진 체력이 돌아올 만큼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따금
피곤해하시더군요.”
적국의 땅. 도망자. 싸늘한 온도, 더러운 동굴. 그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이곳에 있었다. 안락함,
평온한 숨소리, 화톳불의 색이 담긴 따뜻한 시선, 거친 담요에서 일어난 민들레 씨 같은 보푸라기들, 그리고 그
위를 다정하게 덮고 있는 부드러운 손길까지.
드윗은 둘 사이에 일국의 총사령관과 호위 기사 사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애틋함이 녹아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로젤린이 어떤 행동을 더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보면 안 될 것 같은 광경이었다.
“갖고 싶은 게 있습니까?”
“예?”
정중한 말투에는 의심의 빛이 섞여 있었다. 농담처럼 꺼낸 말 속에서 어떤 진의를 파악했던 모양이었다. 드윗은
흠, 하며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경답군요.”
“…….”
228 화.
무언가가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가 무자비하게 부러지고, 나무들이 콰직 콰직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장애물이 있건 말건, 일직선이었다. 그 집요하고 악착스러운 행동에서 뚜렷한 목적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적의, 살의.
하얀밤 기사 단원들은 소리를 감지한 후 신호를 나누는 것만으로 모든 준비 태세를 마쳤다. 모두의 눈이
날카로워진 채 가까워져 가는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크와악, 귀가 멎을 듯한 소리를 터트린 마수가 전열의 파르딕트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앞발을 세차게 휘둘렀으나, 두터운 앞발은 방패에 채 닿기도 전에 막혔다. 곰의 앞발을 막아 낸 자는 그 몸집의
반의반의 반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작은 여자였다.
“미미 양!”
뒤에서 나단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마인이라지만 저렇게 흉포한 마수 앞에서는…….
마카롱이 곰의 명치에 주먹을 내질렀다. 나무에 머리를 부딪칠 때도 개의치 않던 곰이 움찔하며 몸을 웅크렸다.
잠시간 고통에 입을 다물고 있던 곰이 마카롱을 희번덕거리며 보았다.
“확 씨.”
마카롱은 곧바로 주먹으로 곰의 머리를 내리치며 응징했다. 곰이 허우적거리며 앞발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마수가
물기 어린 눈을 마구 굴려 댔다.
‘눈치를 보고 있는 건가?’
강아지가 주인에게 혼났을 때 보이는 표정과 흡사했다. 귀가 처지고 자세를 낮춘 채로 눈알만 데굴데굴. 한참
흔들리던 붉은 눈동자는 마카롱에게서 벗어나 그녀의 뒤에 있는 하얀밤 기사단에게로 고정되었다. 마수의
콧잔등이 다시 구겨졌다.
“이게 좋은 성격 다 버려 놓네…….”
마카롱이 다시 때리려는 듯 시늉하자 마수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힐끔힐끔 아쉬운 듯 인간들을 바라볼 때마다
마카롱이 발로 땅을 구르며 으르렁거렸다. 기회를 엿보던 마수는 그 위협에 꼬리를 내리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나단은 얼떨떨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수가 인간을 두고 돌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높은 공격성을 가진 마수와의 조우는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의 결말밖에 없었다. 무력으로
위협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사람들이 마수를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아아…….”
나단은 혼자 학구열에 불타는 듯했다. 흥분에 떨리는 남자의 콧수염을 바라보며 미미가 피식 웃었다.
“글쎄요.”
예전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마수, 그 존재 자체에 대해서. 그것들은 대게 무엇을 공격하거나
누구를 잡아먹는 것으로 일생을 바쳤다. 그래서 그것들을 메우고 있는 것이 오직 분노뿐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파편’을 통해서 과거의 기억을 일부분 되찾은 후, 마수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되었다.
과거의 자신이, 친구와 부모가, 연인이, 사랑스럽다 여긴 어린아이가 잃어버린 파편이었다.
“……그것보다는 동족애라든지?”
나단이 자리를 떠났기에 마카롱이 중얼거리는 말은 그에게 닿지 못했다. 마카롱은 방금 만난 마수의 존재로,
아득한 옛날을 떠올렸다. 여태껏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미레이미’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적이었다. 약초를 캐던 중, 마수가 나타났다. 그때 당시도 갑작스럽게 나타나
으르렁거리는 건방진 짐승을 가만히 놔둘 만한 성질머리가 아니었다. 언제든지 한 대 패 버리려고 마력을 사용한
순간, 늑대가 갑작스럽게 위협을 멈추고 자세를 낮췄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킁킁 냄새를
맡던 늑대가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왔다.
마카롱은 그렇게 가까이서 마수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실핏줄이 터진 마수의 눈에서는 피와 눈물이 섞여
흐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붉은 눈을 순하게 깜박거렸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기억났다. 지금의 마카롱은 그때와 달리 실소했다. 그 생각이 지금에 와서 고스란히
돌아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그때 불쌍하게 여긴, 고통에 피눈물을 흘리는 기괴한 짐승은 과거의 잃어버린 제 친구였으며, 부모였고,
연인이고, 마지막까지 품에 안고 있던 어린아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었다.
“…….”
마카롱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직까지도 그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분노였다. 과거의 분노는
너무나도 깊게 새겨져 세월이 흐른다고 퇴색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직 로젤린을 지키기 위해 잠시간 뚜껑을
닫아 뒀을 뿐이었다.
마카롱은 멀어져 가는 마수의 뒷모습을 보았다. 닿았던 뜨거운 체온이 기억났다. 피부가 갈라져 드러나고, 뼈는
기괴하게 튀어나와 있으며, 눈은 왜 하나 더 달고 있는 것인지. 잘 보이지도 않는 것 같은데.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플 것 같았다.
이것은 로젤린을 떠올릴 때면 항상 하던 생각이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분노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끝없는 괴로움에서 홀로 발버둥 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분노는 온당하며, 나와 우리는 분노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해서 너를 괴롭게 하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그걸 보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마카롱은 발타 왕실에서 보았던, 수북이 쌓인 마수의 결정을 떠올렸다. 지금은 인간의 몸에 이식되어 다시금
자라나고 있을 과거의 싹이자 ‘우리’의 일부. 모든 것이 흘러가는 동안 그것만 시간을 멈춘 채 굳어 있었다.
마카롱, 그녀와 디에즈처럼.
‘디에즈.’
마카롱은 그와 자신은 결코 이 분노를 잊지 못하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마카롱은 지금 간절하게 원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누군가의 분노를 녹여 흘려보내고 싶었다. 과거의 그들이 더
이상 괴롭지 않도록. 방법은 모르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떻게든 그것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 주고 싶었다.
마카롱은 인상을 쓴 채 심각한 생각에 잠겼다. 우선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운다. 시간이 지나면 썩거나 벌레,
짐승에게 먹힐 것이다. 그리고 그 시체를 먹은 벌레나 짐승도 죽을 것이고, 땅으로 흩어지거나 물에 섞이거나…
….
마카롱은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어디로든 가겠지 싶었다. 그리고 그곳은 수백 년 동안 분노에 휩싸여 있던
지금보다는 훨씬 좋을 것이다.
쿵, 소리가 무섭게 몸을 묵직하게 무언가가 눌렀다. 아까 전 떨어질 때에는 거미처럼 쫙 다리를 벌리고 있던
인간이 닿자마자 등과 다리를 꼭꼭 옭아맸다.
“마카롱…….”
“다녀왔어.”
* * *
229 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산 길목에 간이 막사가 세워졌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 하얀밤의 상급기사들, 마카롱,
사자갈기의 드윗까지 그 안을 채웠다.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흘끗흘끗 보며 놀라워했다. 리비타를 점령해 힉살라를 볼모로 붙잡으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으며, 전투에서는 패배해 병력과 사기를 잃었다. 뿔뿔이 흩어진 패잔병들은 근근이 목숨만 붙은 상태로
공격받는 중부 관문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일라베니아에 승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한 리카르디스는 우연히 간제를 만나 동맹을 맺었다. 무려 하카브를 몰아내고자 하는 동맹.
이 어둡고 끝없는 절망 속에 한 줄기 빛이 아닐 수 없었다.
“발타인들 역시 축복의 밤을 신성시 여긴다. 검은달이 뜨는 신성한 밤에는 피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첫
번째 율법이라고 하더군.”
“그 말은…….”
발타뿐 아니라, 일라베니아를 공격하는 연합군의 대다수가 공격을 멈출 것이다. 그들은 축복의 밤을 볼모로
대륙을 쥐고 흔들던 일라베니아를 규탄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축복의 밤이 뜨게 된다면 명분이
사라지는 셈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여태껏 말하지 않았던 축복의 밤에 대한 정보를 말했다. 황제를 의식해 몇몇 수하들을 제외하고서는
알지 못했던 정보였다.
몇몇 기사들이 리카르디스의 입에서 나온 정보를 중얼중얼 되뇌었다. 축복의 밤에 성력뿐 아닌 마력이 필요하다는
대목에서는 놀라는 자도 있었으나 고개를 끄덕이는 자도 있었다. 발타가 내세운 주장을 허투루 듣지 않은
것이었다. 일라베니아에 대한 믿음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발타는 결혼식을 저녁에 치르곤 하지. 일라베니아가 의식을 숨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밤을 낮으로 바꿔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사람들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리카르디스는 노을이 깔리기 시작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낀 하늘은
평소보다 둔하고 탁해 보였다.
필요한 것은 보름달뿐이 아닌, 수면 위에 비치는 ‘보름달’ 이었다. 구름이 가리게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보름달은 구름에 갇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이 지날 때까지 리카르디스는 잠들지
못하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어스름 해가 뜰 때까지도 하늘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을 뿐이었다.
24
“이 쓸모없는 놈!”
발타의 궁전에 어울리지 않는 하얀 피부의 남자가 버럭 성질을 냈다. 그의 손에는 막 건네받은 융단이 들려
있었다.
남자가 눈에 불을 켜며 시종장에게 융단을 집어 던졌다. 그의 얼굴에 부딪친 융단이 촤르륵 펼쳐졌다. 한 중앙에
통통하고 어린 호랑이가 수놓아져 있었다.
잠시간 궁을 떠났던 간제가 데리고 온 남자였다. 현재 일라베니아 남부는 발타의 영역이나 다름없었고, 그 안의
모든 자원 또한 발타의 것이었다. 그것이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일라베니아 노예들이 생겨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것이 리비타의 궁까지 얼굴을 들이밀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간제 왕녀가 장난감을 데리고 왔구나 싶었을 뿐이었다.
발타 왕실은 남자의 출신 때문에 그가 간자일 가능성도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하지만 남자는 일반적인 간자가
보일 법한 얌전하고 눈에 띄지 않는 행동 따위를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물이 뜨겁다, 차갑다. 다시 해
와라. 입맛에 안 맞는다. 지금 내 것만 요리를 이따위로 하는 거냐.
보물 창고를 개방해라. 왕녀 전하께서 나 다 준다고 하셨는데 네깟 것들이 왜 난리냐. 하지만 이걸로도 부족하니
보석상을 불러라. 열 손가락에 전부 금강석 반지를 끼고 싶다. 향유는 이걸로 해라. 어, 근데 생각보다 향이
역하다. 내가 이걸 선택하겠다고 말했을 때 왜 안 말렸냐, 등등.
까탈스럽기는 얼마나 까탈스럽고 지랄 맞기는 얼마나 지랄 맞는지. 수려한 외모의 사내는 매일매일 다채로운
패악을 부려 댔다.
오늘도 시종장은 귀여운 호랑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남자에게 잔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간제의 총애가
사라지거든 리비타 궁에서 곧바로 사라질 인물이라고는 하나, 살의가 솟구쳤다.
그때, 간제가 방 안에 들어왔다. 까칠하게 시종장을 갈구던 남자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달고서는 그녀에게
달려갔다.
“전하아!”
남자가 그녀의 목을 감싸 안으며 매달렸다. 왕실의 핏줄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간제는 가뿐하게 남자를 안아
올렸다.
남자는 훌쩍이며 간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은 맹렬하게 시종을 가리키고 있었다.
“흐흑, 저는…… 그저 전하께서 귀여운 것도 좋아하시고 호랑이도 좋아하시니까, 귀여운 호랑이를 수놓은
융단으로 방을 장식하여 기쁨을 드리고 싶었을 뿐인데…… 저 치가 저렇게 흉측하고 무서운 것을 가져왔지 뭡니까.
저는 너무 무서워서 그만 정신을 잃을 것만 같습니다!”
촉촉한 눈동자로 미모를 잔뜩 뽐내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눈은 나른해졌고, 얼굴 근육도
느슨해지며 의욕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인상이 되었다. 밝은 금발만 분홍빛이었다면, 여느 때와 다름없는
라헤안시의 모습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두 남녀가 마주 보며 낄낄 깔깔 웃었다.
하카브는 간제가 소유한 것에 한정해서 매우 넉넉한 태도를 보였다. 어차피 제 손안의 동생이며, 동생의 장난감
하나 못 사 주겠냐는 느낌에 가까웠다. 간제는 그 점을 이용해, 자신의 소유물인 애완 인간 ‘타타라’를 보란
듯이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다.
일국의 왕녀가 망측하게 남자 애인, 그것도 지금 전쟁을 치르는 타국의 인간을 옆에 둔다는 사실에 많은 인사들이
기함했다. 하지만 간제가 저질렀던 일은 대부분 기함할 일이었기에, 저 인간이 또 하던 짓 하는구나,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자들이 많았다.
의심이 아닌 경멸의 시선을 보면서 간제가 뿌듯하다는 듯 얘기했는데, 나름 내놓은 자식에 속하는 라헤안시도
그때만큼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230 화.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경계는 생각보다도 빠르게 느슨해졌다. 제 오라비가 없는 틈을 타서 간제가 세력을
키우려거나 수상쩍은 행동을 보이지 않았던 탓도 있으나, 라헤안시의 탁월한 연기 솜씨가 그에 한몫을 크게
더했다. 며칠 전 리비타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간자라 의심받았던 라헤안시는 왕녀의 총애를 받아 겁 없이
날뛰는 애완 인간 정도로 입지가 굳어지고 있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조만간 아틸라크가 근처 요새로 중요한 회동을 하기 위해 궁을 나선다고 하는군요.”
재상 아틸라크는 하카브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라헤안시의 그 대단한 연기에도 여전히
의심의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있는 이상 힉살라의 궁에 발을 들여 놓는 것조차
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한데 마침 딱 좋게 아틸라크가 궁을 비우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뿔뿔이 흩어진 제국군 중,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병력이라 생각되는 군대가 여기저기 활개를 치고 다닌 탓이었다. 끝을 보는 그녀의 성정은 발타에서도
유명했다. 문제가 심화되기 전에 처리하기 위해서 현 발타의 책임자가 나서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아틸라크는 차라리 귀엽다 싶을 정도로, 궁의 경비에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입니다. 지긋지긋하죠.
평생에 제대로 된 일탈 한번 해 본 적 없는 저마저도 그를 보면 주눅이 들 정도라고 할까요.”
많이 혼났나 싶었다. 라헤안시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면 더욱 상황이 나빠지는 게 아닐까? 그 의문은 곧바로
간제의 말로 증명이 되었다.
“무척 곤란한 상황이 되기는 할 겁니다. 그가 오는 즉시 귀여운 타타라는 지하로 끌려가서 온갖 고문을 받으며
추궁당할 예정이라서요. 이 시국에 일라베니아인이라니 너무 수상하잖습니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간제는 뒷말을 삼켰다. 그 미심쩍은 표정으로 라헤안시는 제 운명을 깨달아 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곧 헤어지게 될 제 열 손가락에 안녕을 고했다.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서러운 기세였던
터라 간제가 급히 그를 위로했다.
간제는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같이 딱딱한 남자를 떠올렸다. 브네학스 아문. 원칙주의자, 번견. 여러 단어로
그를 나타낼 수 있으나 발타에서는 ‘아문’이라는 가문 자체가 그러한 뜻으로 통용되었다. 힉살라에 살고
힉살라에 죽는다. 일라베니아로 치자면 붉은수레바퀴쯤 될 것이고, 실상은 그보다 더 심했다.
그것이 하카브가 아직까지 브네학스 아문의 충성을 받아 내지 못한 이유였다. 힉살라가 버젓이 살아 있기 때문에.
* * *
발타로 남하했던 제국군과 리카르디스의 수색을 위해 남았던 일부 병력 또한 몇 번의 교전 끝에 무사히 탈출했다.
일라베니아의 땅을 밟았으나, 이곳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제국군은 은밀하게 움직이며 산길같이 인적이
드문 곳을 통해 이동했다.
완만한 산길이 지친 병사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지리도 익숙해 진군에 어려움은 없었다. 가끔 툭툭
튀어나오는 마수들만 뺀다면. 다행히도 마력을 아주 잘 감지하는 몇몇 인물이 있었기에 조금의 피해도 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과거 사냥 대회 때, 디에즈의 막사가 있었던 곳을 지나치고, 쫓기며 달렸던 풀숲을 지나, 그녀는 이내 익숙한
장소에 도달했다. 석양빛이 섞인 밤하늘 아래의 절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로젤린은 몇 걸음을 더 옮겨
절벽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섰다.
“……?”
로젤린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과거 ‘그것’으로 지냈던 산이니만큼 당연히 익숙하겠지만,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기시감은 공간을 새삼스럽게 조명했다.
‘나는…… 이곳을 본 적이 있어.’
‘그렇군, 여기는…….’
일라베니아 대신전의 지하 감옥에 갇혔던 마인들은 오랜 시도 끝에 마침내 탈옥에 성공했다. 지나가던 마차를
탈취하기도 했고, 작은 동물을 사냥하거나 마을에서 음식을 훔쳐 먹으며 다른 나라로 달아나고자 했으나, 결국
국경지대와 가까운 어느 산에서 인간의 생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아주 짧게 로젤린을 스쳤던 기시감은 반복해서 돌아올 때마다 더욱 선명하게 덧칠해졌다. 그녀는 조각나 완전하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며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과거, 달빛마저 가릴 정도로 무성했던 나뭇잎은 겨울이 아니더라도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성인 남자 다섯이 둘러
안으려 해도 길이가 부족한 거대한 나무는 어느 마수가 부순 것인지 밑동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몸을 숨겼던, 서로가 기대듯 자란 이상한 모양의 나무와 바위에 난 커다란 흠집, 굴러떨어졌던 가파른
단층 지대. 무너진 절벽의 바위들이 엉겨 있는 이 장소만은 수백 년이 지났으나 기억과 같이 자리에 있었다.
바스락, 로젤린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어두운 숲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사람이었다. 점점 다가오던 사람은 나무 그림자에서 벗어나 이내 달빛이 닿는 바위 무덤까지 도달했다.
“마카롱.”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지 않은 마카롱이었다. 그녀는 로젤린과 마찬가지로 한동안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응, 여기.”
“이름 한번…….”
잘 어울리네, 무덤이라니. 마카롱이 어이없다는 듯 감탄했다. 두 사람은 잠시간 머무르다 장소를 떠났다.
마카롱이 하얀밤 기사단원들과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 줬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저지른 화려한 전적이 있어서 로젤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두운 숲에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홀로 달빛을 받는 것 같은 바위 무덤의 풍경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보통 무덤을 떠올리면 삭막하고,
황량한 느낌이 드니 이상한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런가.”
“다음에 꽃 들고 같이 올래?”
“그래. 다음번에는 샌드위치랑 케이크도 들고.”
231 화.
발타로 남하한 제국군의 패배, 총사령관의 부재, 초토화된 일라베니아 남부의 상황까지. 거듭된 악재 속에서도
제국군은 중부 관문을 지켜 내는 중이었다. 수비하는 측이 유리한 전쟁의 특성상, 버티기만 하면 지친 발타에게서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으리란 계산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힐리사고를 포함한 크고 작은 왕국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위태로운 것은
중부 관문뿐만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필연적으로 중부 관문에 결집해 있던 병력 또한 분산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부 관문의 방어벽이 줄어들게 된 그때, 여태껏 보이지 않던 발타의 무기, ‘파편’과 마인 부대까지 투입되어
전장을 휘젓기 시작했다.
일라베니아 중부 관문.
중부 관문의 사령관인 푸른등불 공작이 부담스럽게 얼굴을 가깝게 들이대며 질문했다. 그의 어깨 위에서는 화려한
색의 커다란 앵무새가 후미약 울면서 칼릭스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칼릭스는 몸을 뒤로 빼며 대답했다.
“다 알면서 그러시는군요.”
갑작스럽게 픽픽 쓰러져 가는 병사들과 어깨에 화살을 맞고 사망한 지휘관의 모습에서 모두가 ‘파편’의 존재를
눈치챘다. 지휘관을 잃은 자들과 그 위력을 실감해 겁먹은 병사들의 동요에 전장이 어수선해졌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데리고 온 용병 군단들이 나서서 중독자들을 살핀 것은 그때였다.
신성력도 통하지 않는 파편에 치료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는데, 놀랍게도 부상자들의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곧이어 신관들의 치료를 받은 병사들은 당장 전투에 투입되어도 될 정도로 빠르게 회복했다. 파편의
중독자가 빠르게는 수분, 늦게는 수십 분 안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파편은 마력과 독이 섞인 물질. 치료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력을 분리해 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는 반드시
마인의 힘이 필요하며, 이는 로젤린의 증언으로 입증된 바 있었다. 이후 체내에 남은 독을 따로 치료하는 작업이
필요하지만 평범한 독이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평범한 해독 약으로 살아난 지금의 부상자들처럼.
푸른등불 공작과 중부 관문의 지휘관들은 그제야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움직이지 않던 부대의 진의를 깨달았다.
그들 모두가 마인이었다.
일라베니아의 지휘관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이 모두 마인이라는 점은 간과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연합군의 세작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여태껏 숨긴 걸 보니 뭔가 좀
수상하다 등등.
푸른등불 공작은 중부 관문의 사령관으로서 사기고 전의고 다 잃어버린 병사들을 이끌고 여태껏 버틸 만큼
유능했으나, 무척 깐깐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그의 뾰족한 질책에 지휘관들은 애처로울 정도로 메말라 갔다.
제 몫을 넘치게 하는 칼릭스는 메말라 가는 지휘관들 옆에서 푸른등불 공작과 잔을 부딪치며 여유로운 티타임을
가졌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인 듯 보였다.
“데리고 온 게 아니라, 그들이 직접 온 겁니다. 저는 제의를 했고, 그들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어, 백작의 사람이라…… 위험한 말을 하는군. 지휘관들이 백작의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며 아우성치는 소리를
그대도 들었을 텐데.”
“애초에 마력을 숭배하는 발타와 싸우는 이 공간에, 마인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제가 그들을 믿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보다 그들을 모르는 이들이 못 믿겠다 밀어내려고 하는군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들을 신뢰하겠습니까. 어떤 증거와 어떤 증언이 있어야만 믿겠습니까.”
쯧, 혀를 찬 칼릭스는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정중히 푸른등불 공작에게 사과했다. 가만히 칼릭스의 얘기를
듣기만 하던 푸른등불 공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멋있군.”
“…….”
칼릭스는 귀를 의심했다.
“멋있어! 멋있어!”
공작의 어깨에 앉은 앵무새가 그의 말을 반복했다. 아까까지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던 까칠한 중부 관문의
사령관은 어디에도 없었다. 푸른등불 공작은 몹시 인자한 미소를 띤 채로 칼릭스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뭐지, 이 반응은? 생각지도 못한 공작의 모습에 칼릭스는 얼떨떨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칼릭스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그는 마인들을 이 전쟁에 끌어들이며 약속했다. 쓰고 버리는 도구처럼 이용하지
않겠노라고.
“안 그래도 적은 수라, 충원이 어려워 전투로 소비할 수 없습니다. 신관과 같이 움직이게 하며 파편과 마인의
움직임을 읽고 대응하는 정도에만 그쳐도 되겠습니까?”
반응이 제법 좋았다. 여기서 좀 더 가, 말아? 칼릭스는 짧은 고민을 마치고 애수 어린 표정으로 시선을 떨궜다.
“그러면 쓰나. 백작은 내 직속의 군으로 따로 빼서, 다른 이들의 협조 요청을 가장한 명령은 들어가지 않게 해
두겠네.”
“아니 이게 누구야.”
어제의 전투에서 실수를 저지른 지휘관인 듯했다. 앵무새가 뒤따라서 싸늘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뻔뻔하기 짝이 없네!”
뭐야, 인간이 말하는 줄 알았잖아. 칼릭스는 식겁했다. 잠시간 서류를 살피던 칼릭스는 똑똑, 막사의 입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곧 소리 죽인 인기척이 막사 안에 고요히 스며들었다.
“백작님.”
“길레드.”
남자가 순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뒷골목의 불법 투기장에서 칼릭스와 만났던 허수아비
길레드였다. 그는 평소와 달리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걱정하던 차, 칼릭스는 그 표정이
어디서 왔는지 깨달았다.
칼릭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232 화.
“됐고. 용건은?”
“아,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네요. 동부 전선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곧 전령이 올 테지만,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칼릭스는 얼마간 잠잠했던 두통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기분을 느꼈다. 마인? 마인의 공통점인가?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 이래? 다 이런 사고뭉치들이야?
길레드의 성정이 유해서 가끔 잊어버렸지만, 그는 가장 험하고 거칠기로 유명한 지역, 그것도 뒷골목에서 오랜
시간 구른 사람이었다. 법보다는 불법이 조금 더 가까운, 그런 사람.
칼릭스는 팔짱을 꼈다. 전선이 무너진 후, 부랴부랴 급하게 형성한 2 차 전선까지 뚫리기 직전이었는데,
연합군을 퇴각시켰다? 심지어 1 차 전선 밖까지?
‘외부의 도움?’
“설마…….”
길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칼릭스에게 서신을 넘겨주었다. 그곳에는 보다 자세한 전황이 서술되어 있었다.
엿듣기만 한 게 아니라 서류도 빼돌렸단 말이지…… 칼릭스는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떨치고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종이에는 동부에 있는 병력과 대치 중이던 연합군의 수. 그리고 뒤에서 나타난 제국군의 병력과 당시의 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이 서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원군이 왔다고 해도 제국군 쪽이 열세라는 판단밖에 들지
않았다.
칼릭스의 눈이 보고서를 빠르게 훑었다. 빠른 판단, 지리와 지형을 활용한 책략, 훌륭한 지휘관의…… 몇몇
단어가 그의 눈에 담겼다.
발타의 땅으로 남하했던 제국군은 누구보다도 뼈아픈 패배를 겪은 자들이었다. 드높은 사기는 짓뭉개진 지
오래였으며, 우두머리를 잃고 나서는 뿔뿔이 흩어지기까지 했다. 말이 좋아 원군이지, 실상은 도망쳐 온 패잔병
무리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들을 이끌고 동부 전선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단순한 지휘 능력뿐 아니라, 병력을 규합할 수 있을
정도의 권력과 신임을 받는 자가 있다는 얘기였다. 칼릭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동부 전선의 승리도 중요했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승리 뒤에 누가 있느냐’였다. 어쩌면, 그 사람은…….
* * *
동부 전선의 승리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당장에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던 상황이었기에 승리의 가치는 더욱더
값지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 기적 같은 승리가 이룩해 낸 것은 동부 전선에 있는 연합군의
일시적인 후퇴일 뿐이었다. 연합군은 건재했고, 일라베니아는 여전히 위태로웠다.
한데 그 승리를 기점으로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연합군 측으로 흐르던 기류가 완전히 뒤바뀐 것은
아니었으나, 전쟁의 판도가 잠시나마 주춤거리게 되었다. 동부 전선의 연합군 대다수를 구성하는 룩세인 왕국이
갑작스럽게 전선에서 발을 빼며 연합군이 와해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이라에서는 금보다 물이 비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성채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커다란 우물이
마이라의 유일한 수원이었으며, 물을 뜰 수 있는 시간 또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거리는 멀고, 하루에 한
번, 새벽에만 나갈 수 있었다. 그런 구조적 특성과 시간적 제한이 더해지니 물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상 시간의 제한은 잘 지켜지지 않는 편이었다. 하루에 한 번 새벽에만 성문이 열린다는 법이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평화로운 성채에서는 그 언제든 ‘새벽’이었다. 아침밥 먹고 난 이후도 ‘새벽’. 점심 먹고
오후 티타임을 즐긴 이후에도 ‘새벽’. 술 먹고 기절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일어난 누군가에게는 그때가 ‘새
벽’이었다. 자유롭다면 자유롭고 나태하다면 한없이 나태한 것이 장점이자 단점인 곳이었다.
전쟁의 무대가 룩세인 왕국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대륙에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룩세인 왕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성과 요새가 불온한 무리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잦아졌다며 왕실에서 공문이 내려오기도 한 참이었다.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끼기긱, 성문 옆의 작은 문이 개방되고 여인들이 줄지어 성채를 나섰다. 병사들은 우물로 걸어가는 여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잡담을 나누었다.
미젤 요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으로, 만약 룩세인 왕국을 침략할 셈이라면 태우는 것이 아니라 점령한 채
사용해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 사실을 이해하는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시한 잡담을 나누던 남자들은 곧 주사위 도박에 푹 빠졌다. 위에서 쪼아대는 통에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서
고생하고 있지만, 전쟁이고 위험이고 사실 먼 나라의 얘기였다. 직접 겪지 못했으니 체감할 수도 없었고, 그런
만큼 태도가 갑자기 바뀔 리도 없었다.
“아름다운 사람이로군…….”
“오,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니.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렴, 하늘에게도 너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
줘야지. 태양이 널 질투할까 봐 그러니?”
아까 전 병사에게 안부 인사를 들었던 여자가 무리의 가운데에서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고 있었다.
여인으로 치장한 한 남자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혼자 벽에 기대어 조용히 상황을 관람하던 여자가 웃으며
서서히 움직였다.
오랫동안 평화에 물들어 병사들의 경계심이 느슨한 것을 제외하면 마이라 성채는 정석적인 공성전으로는 함락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몇 차례 성채와 요새를 함락한 마른가시나무군을 뒤쫓아 룩세인 왕국군이 움직이고 있어서
시간도 길게 끌 수 없었다.
세실은 리카르디스에게 들었던 마이라 성채의 특징을 다시금 복기해 내었다. 하루에 한 번, 특수하게 열리는
시간대가 있다. 아침에 물을 뜨러 나오는 것은 모두 여자뿐.
‘섞여 들어가야겠군.’
233 화.
맨 처음, 세실이 직접 작전에 참여할 의사를 밝히자, 마른가시나무 기사단의 단장인 렉시드가 의욕을 내보였다.
하지만 눈이 멀어 버린 자도 남자라고 알 수 있을 만큼 사내의 특징이 뚜렷했던 터라 그의 의견은 기각당하고
말았다.
그 후, 마른가시나무군 내에서 체구가 작고 예쁘장한 병사를 골라내는 것에만 하루가 걸렸다. 그렇게 수백, 수천
명의 투표와 토너먼트를 반복해서 뽑힌 다른 의미의 정예병 일곱 명은 여인들 무리에 이질감 없이 녹아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탓에 도리어 눈에 띄어 버리긴 했지만, 잠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슬슬 움직일까.”
세실에게 붙잡힌 마이라 성채의 지휘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왕국의 군대가 불타는 마이라
성채를 발견했을 무렵에는, 침략자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름 모를 집단은 그런 룩세인 왕국을 비웃기라도 하듯, 덜미를 잡을 즈음이면 귀신같이 도망쳤다. 어떻게
타국의 군대가 지리를 이만큼이나 잘 알 수 있겠느냐. 이것은 내부의 소행이다. 어쩌면 병력이 빠진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키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룩세인 왕국군은 일라베니아의 동부 전선을 채 넘어서기 전에 급하게 군대를 물려야 했다. 구색
맞추기용으로 조금 남겨 둔 병력으로는 동부 전선에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그 덕분에 여유가 생긴 동부
전선의 병력이 다시 중부 관문으로 이동, 휘청이던 일라베니아 제국의 숨통이 조금 트였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겠죠.”
그 누구도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을 일라베니아 제국군이라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일라베니아의 갑옷을
벗어서가 아니라, 그저 누가 봐도 훌륭한 산적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의
병사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모습과 그들은 너무나도 달랐다.
마른가시나무군을 목격한 룩세인 왕국 사람들은 그들의 전투 방식과 악행을 보고 범죄자 집단일 거라 확신했다.
실제로도 마른가시나무군에는 범죄자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으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그렇게 의심군에서 벗어난 그들은 리카르디스가 알려 준 경로를 통해 이동하며 빠르게 주변 왕국을 휘저었다.
때로는 몇 백 정도의 소부대, 때로는 몇 천의 강력한 군대의 규모로. 잠입, 뇌물, 변장 등. 다양한 편법을
이용한 마른가시나무군은 성과 요새를 단숨에 함락시켰다.
그들이 그렇게 타국을 휘젓는 동안 덜미를 잡히지 않은 배경에는 리카르디스의 지식, 거기에서 더 나아가
황금정원이 있었다. 일라베니아에서부터 뻗어 나간 대상단 황금정원은 타국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황금정원의 클로에가 리카르디스를 만나면서부터 그 성질은 조금 더 정보기관에 가깝게 변모했고, 금전과 물품이
움직이는 길을 따라 수많은 정보가 수년간 차곡차곡 쌓였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알기 어려운 뒷길과 산길, 이맘때쯤이면 물이 빠져 길을 드러내는 계곡, 각 왕국의 병력과 주요
성채에 머무는 주둔 병력 등등.
준비가 갖춰져 있다고는 하나 급조된 계획들이었다. 변수는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었음에도 왕국이 빠르게 꼬리를
마는 꼴을 보면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평소와 같이 잘 처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생각나는 게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하지만 세실은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다.
세실이 씩 웃었다.
[그리고 보통 사냥개는 목줄이 풀리고 나서야 일을 더 잘하는 법이지요. 염려 마십시오, 전하. 저도 이대로 끝낼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 호언장담대로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일을 잘 처리해 줬다. 덕분에 당장에라도 뚫릴 것 같던 방어선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일 터였다.
‘……할 수 있을까.’
“어떻게든 해야지.”
* * *
시종장은 서늘한 인상의 사내를 보자마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 도착할 것이라는 얘기는 전달받았지만, 그게
12 시 종이 울리고 다음 날이 된 지 1 분쯤 지난 지금을 이르는 것이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소란 피우지 말아라. 환대를 받고자 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삼엄해야 할 리비타 궁의 경비가 미흡한
것은 송구할 만한 일이긴 하지. 대체 책임자가 무얼 했기에 경비가 이렇게 방만하게 구는 것인가. 힉살라의 밤을
방해할 종자들이 날뛰지 않는 게 이상하다. 그렇게 될 시 면구스러워 리비타의 궁전에서 내내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것 같으니 당장 경비대의 책임자를 불러라. 내 친히 문책하도록 하겠다.”
경비대장을 부르러 가려던 시종장은 궁전 한쪽에서 황급하게 움직이는 시종과 시녀들을 발견하고 잠깐 발을 멈췄다.
브네학스 또한 이 밤의 고요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눈으로 베어 버릴 듯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시종장은
기겁해서 그들을 불렀다.
“이, 이 무슨 소란이냐!”
테이블, 의자, 찻주전자 등을 분주하게 옮기던 시종들은 시종장 뒤의 브네학스를 보고 헉 숨을 들이켰다. 시종과
시녀가 우물쭈물하며 답하지 못하자 브네학스가 시종장의 어깨를 밀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인가.”
시종 중 한 명이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말에 답했다.
시녀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장소는 리비타 궁전의 정원 중 호수가 크게 자리한 곳이었다. 시녀와 시종들이 간단한
다과와 담요 등을 나르는 중이었고, 호수 근처에서는…….
“아하하, 전하!”
“…….”
간제는 자신을 몸으로 덮치듯 누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그의 턱을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남자는 조이는 옷자락 때문에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켁켁 거리는 소리만 냈다. 브네학스를 발견한 간제는 자세를
바꿔, 풀밭에 모로 누운 채 턱을 괴었다.
“이게 누구야. 아문의 가주가 아닌가. 내일 온다 들었는데, 아니지. 종이 울렸으니 내일이 되긴 했군. 시간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지킨다니까.”
234 화.
“브네학스 아문이 고귀한 발타의 따님을 뵈옵니다. 상황이 이러하여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그 전에 그 손부터 놓아라.”
브네학스는 간제를 응시한 채, 손에 힘만 풀었다. 풀려난 남자가 재빠르게 간제의 뒤에 숨었다. 그가 눈물을
글썽였다.
“일라베니아인이군.”
타타라, 라고 불린 남자의 억양을 확인한 브네학스는 그의 출신을 확신했다. 브네학스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웃지도 못했다. 리비타 궁전에서 일라베니아인? 그것도 이런 전시에? 그의 눈동자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브네학스는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간제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재상 아틸라크와 브네학스 아문은 앙숙이었다. 브네학스는 리비타의 주인을 두고
제 입맛대로 행동하는 아틸라크가 마음에 찰 리 없고, 아틸라크는 사사건건 옳은 말만 해 대는 브네학스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타타라’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점 또한 그 일환이었다.
“물러가라 하였다.”
“데려가라.”
“아, 저 개싸가지.”
“그만!”
“브네학스 아문.”
“하명하십시오.”
“죄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첩자가 아닌 내 손님이다. 신체적 상해를 입히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정성껏 대우해야
할 것이다. 감히 내 귀여운 타타라를 개처럼 끌고 가서 죄인 취급할 생각은 아니겠지.”
“……이해했습니다.”
간제가 웃으며 브네학스를 검지로 콕 가리켰다. 브네학스는 간제의 눈동자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이겨 보겠다는
열정이 불타고 있음을 발견했다.
간제의 심술궂은 말에 타타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브네학스는 잠시간 가만히 간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명령을 받듭니다.”
‘히, 히익.’
“모시겠습니다.”
브네학스는 제 머리통에 과자를 집어 던지는 간제의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돌아 걸어갔다. 브네학스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한 궁전 복도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무섭도록 일정한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 타타라가 머쓱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브네학스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간제와 하하호호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수상한 것 이전에 좀
이상한 인간인 것 같았다.
“…….”
리비타 궁전, 지하 감옥 안.
“출신은?”
“일라베니아요.”
“일라베니아 어디.”
“남부.”
쾅!
얼마나 세차게 내리찍었는지, 테이블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타타라가 밭은 숨을 뱉어 냈다. 단도는 중지와 검지
사이에 정확하게 꽂혀 있었다. 브네학스가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상한 정황이 발견되었다. 이후 끈질기게 추궁한 끝에 일라베니아 황실과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하여, 정보를
얻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노라…….”
브네학스는 꽉 쥐고 있던 타타라의 손목을 그대로 잡아당겼다. 그가 소파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테이블로 끌려왔다.
단도를 한 바퀴 돌린 브네학스가 타타라의 목덜미 아래에 단검을 댔다.
“저, 저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냥 전하의 사랑을 받아서 좀 겁대가리가 없어지긴 했는데, 지금 다시 생기기
시작했거든요? 아, 맞아…… 겁대가리란 이런 거였지…… 하고 기억나기 시작했다고요!”
브네학스는 말없이 단도를 그의 목에 더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감각이 닿자 타타라가 끼엑 소리를 내며
진저리쳤다.
“어떻게.”
“그, 그게…….”
“…….”
브네학스는 순간 말을 잃어버렸고, 병사들의 표정도 애매하게 변했다. 타타라가 앙칼지게 병사들을 다그쳤다.
“왕녀 전하의 총애를 받는 내 몸을 그렇게 보고 싶은 거야? 이 미모가 아무리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야, 징그러운 털보들 같으니!”
귀밑 수염, 턱수염이 풍성한 털보들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브네학스는 하, 한숨을 쉬며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 털보들이 씩씩거리며 방에서 퇴장했다. 브네학스는 병사들이 나간 곳을 바라보다가 다시
타타라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리비타 궁전에 속한 치유사들 중에서도 이렇게 순식간에 상처를 아물게 하는 자는 없었다. 귀족 가문에
의탁하여 지내는 치유사들은 작은 생채기 정도만 회복하는 정도도 허다했다. 그것은 일라베니아의 신관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특수한 사람들만 빼면 한적한 영지의 신관 같은 경우에는 큰 힘을 지니지 못했다.
이 정도의 힘을 쓸 수 있는 자는 대륙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이리라, 브네학스는 확신했다.
“……너는…….”
“나는 일라베니아에 단 일곱뿐인 대신관, 라헤안시. 발타의 힉살라를 치료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노니. 그대,
아문의 가주 브네학스는 필시 나에게 예를 갖춰야만 할 것이다.”
235 화.
어김없이 밤이 찾아왔다. 병사들이 주위의 눈과 말라비틀어진 초목을 정리하고 야영을 준비했다. 리카르디스는
막사에서 벗어나 부지런히 움직이는 병사들을 보았다. 제국에서 발타 왕국으로, 그리고 끈질긴 추적을 떨쳐 내고
다시 제국으로 돌아와 격렬한 전투까지. 쉴 틈 없이 혹독한 시간을 보내 온 병사들은 몹시 지쳐 있었다. 중부
관문에 도달한다고 해도 큰 전력이 되기는 힘들어 보였다.
“신관님!”
리카르디스는 가까이 다가가 남자의 상태를 자세히 확인했다. 부르튼 얼굴과 갈라진 입술, 여기저기 얼굴에 난
생채기, 어깨에 꽂힌 부러진 화살 등. 명백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병사 두 명에게 걸쳐져 막사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망토가 휘날렸다.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따뜻한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사내는 잠시 기절했다. 리카르디스는 그 틈을 타서 치료사들과 함께 남자를
보살폈다. 때마침 로젤린이 돌아왔다.
“혹시 아는 얼굴인가?”
작게 속삭이는 리카르디스의 말에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날이 선 기세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정찰병들은 붉은말의 데런이 향하던 곳이 지금의 사자갈기군 진영이 아닌, 중부 관문 측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지원 요청이로군.”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쓸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단순한 도적의 소행일 수도 있으나, 지원이 필요할 정도로 큰
전투라면 연합군과 충돌했다고 보는 쪽이 더 확률이 높았다. 영토가 광대한 만큼 일라베니아에는 빈틈이 많았다.
수십, 수백 개의 방어선, 험준한 산길 등. 그 빈틈을 뚫은 병력이 기어코 중부에 침입했다는 것이다.
“중부 관문에 서신을 보낸다. 미처 감지하지 못한 연합군이 붉은수레바퀴령에서 공방전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휘관 사자갈기 드윗은 이 사태를 엄중하다 판단하여, 사자갈기군과 제국군을 이끌고 곧바로
붉은수레바퀴령으로 진군하겠다. 부디,”
중부 관문에 얼마쯤 뒤면 당도할 예정이라 알렸는데, 그 일정이 뒤틀어지게 되었다. 합류할 지원군만 기다리고
있던 중부 관문으로서도 큰 출혈이었다.
“무운을 빈다.”
붉은말의 데런은 이동하기 직전 깨어났다. 곁에 서 있던 로젤린을 발견한 그는, 그녀의 머리 색이 갈색이건,
코와 입을 가린 상태이건 신경도 쓰지 않고 눈물부터 펑펑 흘렸다.
“아가씨! 죽여 주십시오!”
“……?”
데런과 얘기를 나눈 결과, 확률 높은 가설이 진실임을 확인했다. 소수의 부대로 방어 병력에 들키지 않게 잘게
쪼개져서 국경을 넘은 연합군이 붉은수레바퀴령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이었다. 외성을 넘은 그들은 백작령의
사람들을 학살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현재 내성 안으로 피신하여, 고군분투 중이라 했다.
붉은말의 데런은 목숨을 걸고 빠져나와 중부 관문에 지원을 요청하러 가는 길이었다. 추격대가 따라붙어 부하도
다 잃고 본인도 부상을 입었지만,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 중부 관문으로 가던 중 사자갈기군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데런의 목울대가 꿀렁거리며 세차게 움직였다. 어쩌면 지금쯤 함락되었을지도 모르겠노라는 말을 삼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붉은수레바퀴령의 상황을 알고 있는 것도, 연합군과 대치할 정도의 병력을 지니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이 사자갈기군뿐이었다. 병사들 또한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지친 발걸음을 애써
이끌고 빠른 속도로 진군했다.
사자갈기의 드윗, 로젤린과 데런, 오소리 부대를 포함한 기병대 천기는 무리에서 벗어나 한발 빠르게 이동했다.
로젤린은 무리의 선두에서 달렸다. 하아, 하아. 급하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눈앞에서 하얗게 번졌다.
[로즈, 아가.]
어릴 적 로젤린에게 일라베니아란 오로지 붉은수레바퀴령, 에스터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세계의 전부,
그녀가 아는 가장 아름답고 포근한, 그녀가 사랑하는 곳이었다.
좌절에 쓰러지거나 흔들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로젤린은 홀로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달리자, 말이 지쳐
쓰러지면 내 발로 달려가자. 그녀는 고삐를 세게 그러쥐었다.
* * *
그렇게 삼 일을 달린 결과, 로젤린은 드디어 붉은수레바퀴령의 경계를 밟았다. 땅은 여기저기 불타고, 건물들은
이미 반쯤 무너진 상태였다. 군마들이 땅을 진동시키자 와르르 잔해가 쏟아져 내렸다. 흙먼지가 뽀얗게 떠오르며
내리는 눈과 뒤섞였다.
한때 전투와 살육으로 시끄러웠을 장소는 고요했다. 거리에는 영지민과 연합군 병사의 시체, 병장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위에 뒤덮인 눈의 두께로 사건 발생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지원군이
오기 훨씬 전에 전투는 이미 끝난 것이다.
멍하니 거리를 보던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성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과거의
어리고 작은 소녀가 말했다.
숨이 턱 막혀 왔다.
236 화.
그걸 확인한 순간 로젤린의 속 깊은 곳에서 뜨겁고 날카로운 감정이 끓었다. 하늘하늘 내려오는 눈송이가
로젤린의 피부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녀는 창대를 우그러트릴 듯 강하게 쥐고서 등자에 무게를
지탱한 채 몸을 일으켰다.
기병대의 돌진으로 거리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다. 그 희뿌연 공간 안에 두 무리가 대치했다. 사자갈기의 드윗이
무리에서 빠져나와 로젤린에게 다가갔다.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로즈 경,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적이 아닙니다.”
성문 쪽에 있던 거구의 남자가 귀를 후비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휘날리는 깃발에 새겨진 문양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로젤린이 가장 잘 알았다.
건초 더미에서 겨우 빠져나온 데런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달려왔다. 로젤린은 그제야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 * *
“그 연기가…… 이 연기였군요…….”
익숙한 정원과 복도를 지나쳐, 커다란 홀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따뜻한 온기가 퍼져 나왔다. 여기저기
의자나 카펫 위에 적당히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이 문이 열리는 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그중 상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화한 갈색 눈동자를 지닌 중년 남자는 로젤린이 아는
누군가를 많이 닮아 있었다. 에델바이스의 아버지이자, 갈라·제르타예의 수장인 귈테였다.
드윗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드윗 경!”
“예?”
에델바이스는 떨리는 손으로 제 볼을 쓸고 있었다. 전투의 여파로 아직 불안한 것일까. 로젤린은 투구 속에서
눈알만 도르륵 굴렸다.
“사벡.”
귈테가 점잖게 에델바이스를 만류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드윗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예에, 그렇습니다.”
“호, 혹시…….”
“그래요. 그래야죠.”
“손이 차군요.”
* * *
로젤린은 제 옆에서 소곤거리는 데런의 말에 동의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규모가 작은 왕국이라곤
하지만, 그 짧은 새에 전쟁을 종식시키고 오다니. 그 단편적인 부분만으로도 라고슈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귈테.”
“뭔가, 셍고.”
“어, 그러게.”
“이런, 들켰습니까.”
237 화.
리카르디스는 빈자리에 앉은 후,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후드를 젖혔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사르륵 흐트러졌다.
오, 미남 하는 소리가 테이블 어딘가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쪽의 사정으로, 첫 만남이 불투명했던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제국의 총사령관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가 라고슈의 지원에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음…….”
“하지만,”
“2 주라…….”
리카르디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초저녁, 아직 다 차오르지 못한 달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찬성.”
“그렇다는군요.”
“그러기 위해 왔습니다.”
귈테가 말했다.
* * *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회의가 끝났다. 하녀와 하인들이 드나들며 서류와 지도가 널브러져 있던 테이블 위를 음식
접시로 채우기 시작했다.
‘로젤린!’
그는 회의에 집중하느라 잠깐 잊고 말았던 자신의 호위 기사를 급하게 찾았다. 로젤린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 채
고요히 서 있었다. 투구로 가려진 안쪽에서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쓸쓸해 보였다.
“…….”
정체를 밝히지 않은 탓에 자리에 앉지도, 함부로 음식에 손대지도 못하고 있던 것이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한껏
아래로 휘었다. 불쌍하고 귀여웠다.
하인들이 음식 접시를 다 나르고, 식사 준비를 끝낸 후 나가자마자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불렀다.
“로젤린 경. 이리로.”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자신을 ‘로젤린 경’이라고 부른 시점에서 투구를 벗어 던진 상태였다. 그리고 후다닥
달려가 리카르디스의 옆에 서서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리카르디스는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겨우 단속하고
제르타예들을 둘러보았다. 귈테와 생고·제르타예의 수장이 로젤린이라는 이름에 반응해 식사를 중단한 채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에게 흘끗 눈짓했다. 인사할 기회가 드디어 만들어졌다. 로젤린은 배고픔의 고통을 간신히
견뎌 내는 중이었다. 아무리 식욕에 눈이 돌아갔어도, 할아버지를 앞에 두고 음식에 먼저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지켜야 할 순서가 있으니 우선 그 순서부터 빠르게 진행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로젤린의 식욕 때문에 감동적이었어야 할 만남이 5 초 만에 얼렁뚱땅 지나가게 되었다. 귈테는 어안이 벙벙한지
가만히 바라만 보다가, 자신을 간절히 올려다보는 로젤린의 눈에서 욕망을 읽어 내곤 그녀를 곧바로 일으켰다.
“네, 할아버지!”
로젤린이 씩씩하게 대답하고 귈테가 내어준 자리에 앉았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할아버지!’라고 말하는 순간
귈테의 턱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무척 좋아하는데 간신히 참아 내는 모양새였다.
“갈라 놈을 아주 쏙 뺐구만.”
회의장에서 내내 험악한 기운을 풍기던 이들이 엄마 아빠의 재롱을 보는 아기마냥 방싯방싯 웃는, 나름 진귀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렇게 로젤린이 행복에 겨워할 때, 회의 시간 내내 식사와 잠자리를 준비하느라 바빴던 에델바이스가 들어왔다.
손님들에게 음식이 입에는 좀 맞느냐 묻기 위해 왔던 그녀는 로젤린을 둘러싼 소란을 보고 잠깐 멈춰 섰다.
리카르디스를 지나친 에델바이스는 서서 떠드는 제르타예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짚으며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리카르디스를 포함한 일라베니아인들은 전혀 듣지 못했다.
곧장 무리가 해산되었다.
“저거, 저거 성격 안 죽은 거봐라…….”
238 화.
주책바가지 사촌, 삼촌, 이모, 작은 할아버지 등등을 쫓아낸 에델바이스가 로젤린의 왼쪽에 앉았다.
리카르디스는 저번에 붉은수레바퀴령에 들렸을 적, 로젤린이 보였던 반응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에델바이스가 주고자 한 음식을 받는 사람은 과거의 제 딸이 아닌, 현재의 로젤린이었다. 로젤린도 그를
깨달았는지 잠시 멍하니 음식 접시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곧 부지런히 입을 움직여 접시를 비워 냈다.
에델바이스는 그런 로젤린의 옆에서 계속해서 음식 접시를 밀어 주기를 반복했다. 지금의 그녀가 좋아할 법한
요리들로만.
그것은 참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광경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조심스레 그들을 훔쳐보았다. 딸을 잃어버린 여인은
속 끓는 슬픔과 고통, 미련을 여전히 떨쳐 버리지 못했다. 복잡한 상념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 있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에델바이스는 한걸음 내디뎌 나아가기로 마음먹은 듯 보였다. 과거의 로젤린을 잊는 게 아니라, 지금의
로젤린과 과거의 그녀를 완전히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라, 그저 현실에 눈 돌리지 않고, ‘로젤린’의
기억과 흔적을 지닌 지금의 로젤린을 오롯이 마주 보는 것. 그것에 가슴이 더욱 헤집어져 상처가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참 강인한 사람이었다.
왁자지껄한 식사 시간이 끝났다. 에델바이스도 성의 주인으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로젤린이 분주하게 제 품을 뒤지며 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에델바이스는 로젤린이 건네준 소라 껍데기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녀가 귓가에 껍데기를 가져다 대며 눈을
감았다.
에델바이스가 피식 웃었다.
* * *
잠이 늘었다. 멍하니 있다가도 사소한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어린아이처럼 손을 물어뜯기도 했다. 가끔은
악몽을 꾼 듯 급하게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불안해 보였다. 이는 지금 전쟁을 겪는 사람 중 열에 여덟은
보이는 모습이었다. 특별할 게 없었으나, 대상이 디에즈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하지만 이렇게 디에즈가 병든 닭처럼 꾸벅거리는 모습을 볼 때면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상처 입은 짐승들은 잠이
많아진다. 하카브는 어릴 적 많은 동물을 길렀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약초를 뜯어 먹는 것도 아니고, 상처에
약을 바르는 것도 아니고. 이런 미련한 수면 행위가 대체 무엇에 도움이 되는 걸까.
일종의 기도와 같은 행위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뤄지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하고 나면 제 마음의 위안이 되는.
하지만 하카브는 디에즈가 이 긴 잠 끝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로젤린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나? 그러나 디에즈는 로젤린을 죽이고자 했다. 칼로 찔렀으나 실패했다며 싸늘한
얼굴로 얘기했었다. 그래 놓고서는 이제 와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굴다니. 그런 양가적인 감정을
가진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 아닌가? 하카브는 팔짱을 낀 채 그를 의문스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검은 달이 뜨지 않은지 몇 백 년이 지났던가. 마력이 없는 자들도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신성한 밤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하카브는 조급해졌다. 대체 그 힘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기에 한 나라가 이다지도 광적으로 매달리게
되었단 말인가.
의문이 짙어졌을 때, 디에즈를 만나게 되었다. 하늘에 뜬 ‘검은 달’처럼 확실하게 증명 가능한 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력. 인간을 초월한 존재. 디에즈는 그야말로 검은 달이었다. 그래서 하카브는 한때, 정말 신이라도
만난 마냥 들떠 있었다.
“흠.”
눈을 뜨자마자 인상을 찌푸린 디에즈가 하카브의 손을 틱 치워 냈다. 사춘기 동생 같아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니 진짜 사춘기였던 간제는 웃음이 나올 만한 정도의 소소한 규모로 일을 치진 않았기에, 하카브는 금세 자신의
생각을 반성했다.
“어, 어. 안 됩니다.”
다투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이 힘차게 펄럭였다. 이렇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들어올 인물이라고는 하카브가 아는
내에서는 한 명뿐이었다.
“디에즈님!”
그녀는 발타의 다섯 가문 중 하나인 ‘람가’의 가주로, 연합군 본대에서 굵직한 전투를 치러 온 전사였다.
마인이라 그런지 디에즈의 마력을 한번 느끼고 난 이후로는 어미 새 따라다니듯 그만 졸졸 따라다니는데,
하카브는 그녀를 괘씸하게 여겨야 하는지, 아니면 내 편끼리 사이좋게 지내니 기뻐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239 화.
“검은독사로부터 서신이 왔습니다. 산맥을 통해서 일라베니아에 침투하기로 한 애들이 무사히 성공해서
붉은수레바퀴령까지 닿았는데, 그게 글쎄.”
“인내심 되게 없으시다니까.”
차호트가 껄껄 웃고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얼마나 성질내실지 디에즈 님이랑 내기하려고 했거든요. 원래 키티랑 하는데, 지금 없더라고요. 원래
사람들은 누구 욕할 때 단합이 제일 잘되잖아요. 디에즈 님이랑 친분도 쌓을 겸 몰래 욕하려고 그랬는데 왜 눈치
없이 끼어 드셔서 제대로 욕도 못 하게 합니까, 거.”
곧 전령이 도착해 서신을 전달했다. 차호트가 말했던 불발된 계획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하카브가 턱을 쓸며
웃었다.
“내가 너무 안일했나?”
이제야 좀 재밌어지겠네. 바깥으로 나가는 차호트의 발걸음이 룰루랄라 가벼웠다. 하카브가 어이없다는 듯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길레드!”
“무슨 일?”
“또 누가 무슨 일을…… 저질렀나요?”
“저지르다마다!”
칼릭스와 계약한 마인들은 대략 사백여 명이었다. 이번 전쟁의 규모로 따지자면 결코 큰 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파편과 적군 측 마인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감지해 큰 타격을 입기 전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는
역할로,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전력이었다.
“하…….”
사건이 정식으로 보고되면 얘기가 퍼지기 쉽고, 얘기가 쉽게 퍼지면 그만큼 마인에 대한 인식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최악은 푸른등불 공작이 마인 부대에 대한 권리를 거두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마인들을
보호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워진다. 이래저래 뇌물이 최선이었다지만, 백작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이런
불법적인 일에 엮이다니. 하늘에서 보고 계실 아버지가 통탄할 일이었다.
“죄, 죄송…….”
“이름을 다 외우셨습니까?”
몇 백 명이나 되는데?
“사고 치는 놈들은 고만고만하게 정해져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백 명 이상은 외운 상태야. 그만큼 돌아가면서
사고를 잘 쳤다는 얘기지…… 길레드!”
길레드가 나가자마자, 곧바로 알터가 들어왔다. 이 겨울철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더워서 저러나 싶었는데,
안색은 새파랬다. 최근 알터가 이런 식으로 들어왔을 때는 마인들이 사고 쳤을 때밖에 없었다.
“아, 제발.”
칼릭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
“누님이 보고 싶어.”
테이블 위로 엎어진 칼릭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심 어린 말에 알터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렇게 칼릭스는
한참을 눈을 감은 채 테이블에 볼을 대고 있었다. 조용한 공간에서 홀로 사색을 즐기려 했건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으하하, 으헤헤, 꺄르륵 웃어 대는 병사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칼릭스가 알기론, 붉은수레바퀴 진영의
병사들은 지휘관의 막사 앞에서 저런 크기의 목소리를 낼 만큼 간이 크지 않았다.
칼릭스는 힘겹게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간이 투기장을 만들어 싸움박질하는 어른 사고뭉치들이 보였다.
붉은수레바퀴 산하 특별 마인 부대, 원숭이 대의 대장이 내깃돈 장부를 열심히 작성하며 칼릭스를 향해 소리쳤다.
대장이라는 인간이 대원들을 단속하지는 못할망정, 부추기고 판을 키우고 있다니. 하지만 칼릭스에게는 더 이상
그들을 교육할 힘이 없었다. 허술한 투기장 안의 선수를 확인한 칼릭스가 체념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어금니에게.”
어금니는 어금니 대의 대장을 이르는 말이었다. 칼릭스는 품에서 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동전이 꺼내어,
엄지손톱 위에 놓고 튕겼다. 반짝이는 금속은 원숭이 대 대장의 손으로 쏙 들어갔다. 그녀가 끄악 비명을 질렀다.
“부자!”
“부자 최고!”
“백작님을 찬양하라!”
원숭이와 어금니가 칼릭스의 허벅지 아래에 어깨를 받치고 그를 띄웠다. 두 사람의 어깨에 칼릭스가 앉게 된
셈이었다. 칼릭스는 팔짱을 낀 채 초연한 표정으로 그들이 둥개둥개 우리 부자 백작님을 부르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참 좋은 말이었다. 모든 걸 포기한 칼릭스가 까마귀 대 대장에게 뺏은 싸구려 와인을 마시며 투기장의 판돈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백작님!”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더니 칼릭스의 코앞에서 넘어져 데구루루 굴렀다. 식량 창고 방화 사건의 범인이리라
예상되는 5 인조의 대장 격인 에렌이었다. 칼릭스는 오늘 있었던 화재 사건에 대해 물어보려다가, 사색이 된 그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240 화.
“모, 몰래 엿들었는데요.”
제국군 중앙 진영에서 또 뭔가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평소 같으면 하지 말라고 설교라도 했을 테지만, 칼릭스는
그의 입에서 나오려는 말을 재촉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인내심을 쓰고 있었다.
“중부 관문으로 오던 사자갈기군으로부터 서신이 왔어요. 연합군이 붉은수레바퀴령을 침략해서 예정된 합류를
틀어, 에스터를 지원하러 간다고 했어요.”
칼릭스는 입안을 감도는 피 맛에 정신을 차렸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이로 짓씹은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손수건으로 피를 꾹 누른 채 고개를 들었다. 중앙 본대에서 파견된 전령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 가도 괜찮을까요?”
피곤한 듯, 지친 듯한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작아졌다. 종래에는 뚝 끊겼다. 복잡한 상념들이 칼릭스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는 것으로 일순 드러났던 감정을 모두 지워 버렸다.
“쉬어라.”
그렇게 말한 칼릭스는 겨울철 싸늘한 공기에 하얀 입김을 뿜으며 돌아섰다. 마인 부대의 각 대장들은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뒤를 지켜보았다. 칼릭스가 머무르는 막사의 불은 그날 밤이 지새도록 꺼지지 않았다.
‘이 인간들이?’
“백자악님!”
“몰래 엿들었는데요!”
“……그래.”
그렇겠지.
“백작님! 무사하시대요!”
연회를 벌이는 무리 바깥에서 본대로부터 도착한 전령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성이고 있는 게 칼릭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높은 곳의 이점이었다.
그들은 인간 가마 고객의 바람을 훌륭하게 하나만 접수하여, 그대로 중부 관문 제국군 본대 둔영지까지 이동했다.
둥둥, 짤랑짤랑, 뿌우우 갖은 소음을 내는 무리를 본 제국군 병사들이 질린 표정으로 길을 텄다.
푸른등불 공작은 난데없이 들리는 소음에 막사를 나왔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칼릭스가 뒷골목 깡패
같은 이들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었다.
“이게 뭔…….”
칼릭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인간 가마에서 내려 푸른등불 공작에게 다가갔다. 설명을 요구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도
칼릭스는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 미소 지을 뿐이었다.
* * *
칼릭스의 눈이 반짝이자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후드를 뒤집어쓴 어떤 신관을 가리킨 후, 자신의
얼굴도 한번 콕 찍고는 엄지를 두 개 추켜올렸다.
총사령관의 실종에 사기는 낮아진 상태였다. 다행히 동부 전선과 여기저기에서 승전보가 울려 퍼지며 조금
회복되었다지만,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얘기를 알리는 것만큼의 효과는 없을 게 분명했다. 그걸 감안하고도 생존
사실을 숨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칼릭스는 계속해서 한 명에게 가려는 시선을 애써 떼어 내고 건물로 발을 들였다.
중부 관문의 지휘관들은 라고슈의 지원 병력과 제국군의 일부가 도착한 현 상황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계산을 마친 후에는 여전히 상황을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평소의 피로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급 지휘관들이 주르륵 나가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꽂혔다. 드윗의 뒤에 서 있던, 후드를 눌러쓴
신관에게로. 얼굴을 반쯤 가린 신관이 턱을 쓸다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푸른등불 공작은 평소의 냉철하고 까칠한 모습은 어디로 지워 버렸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콧수염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공작이 고개를 숙이자 리카르디스가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살아 계실 거라 믿었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바다협곡과 고래무덤이 해상에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라고슈의 해군 또한 합류할
예정이라고 하니, 해안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로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연갈색 나무 조각은 일라베니아의 병력을, 검은 나무 조각은
연합군의 병력을 뜻하는 모형이었다. 압도적으로 검은색의 수가 불어나 있었다. 멀리 떨어진 나무 조각들조차
모두 중부 관문을 향했다. 병력의 집결. 총력전이 펼쳐질 양상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연합군의 병력이 중부 관문으로 모이고 있는 상황이다. 하카브도 더 이상 시간을 끌기에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으니 말이야. 발타를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도 견제해야 하고, 금전적으로도, 병사들의
체력적인 면으로도 시간을 끌면 피차 좋을 게 없으니까.”
241 화.
“쓰러지거든 일으켜 세워라. 거짓말을 하든, 돈을 쓰든, 그들의 어머니와 자식의 이름을 불러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희망을 붙들어 둬라. 2 주. 단 2 주다.”
리카르디스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방 안의 모두를 지나친 눈동자는 단 한 사람만을 담았다. 로젤린을 응시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 * *
“저기요.”
반듯한 브네학스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뭐, 뿅이라니? 감히 힉살라께 뿅? 이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멀찍이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간제가 간식을 먹으며 그 신경전에 끼어들었다.
“뭐, 치유의 힘을 가진 자들이 리비타의 궁에도 있긴 합니다만, 애초에 마인은 건강하고 다쳐도 빨리 나으니까
성력을 접해 볼 기회가 적긴 하지요. 아문은 마인 중에서도 강한 축이라 감기도 걸려 본 적 없을걸요.”
“어쩐지. 며칠 동안 고생에 절어 밤마다 시체처럼 늘어지는 나를 무능하다는 식으로 쳐다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악!”
갑작스럽게 두 남자가 산만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간제도 이상을 깨닫고 일어났다. 몇 년의 세월 동안 노인처럼
변모한 힉살라의 주름진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과’는 힉살라의 징표로, 힉살라의 이름 아래 펼쳐지는 모든 문서에 찍히게 되는 도장이었다. 발타의 역사와
함께한 과가 없으면 힉살라의 자리에 오른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힘을 얻지 못해 허수아비처럼 세월만 보내게 될
뿐이었다.
아버지,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흐흑, 어서 깨어나세요. 이런 것쯤을 바랐던 라헤안시가 기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크, 크윽…….”
브네학스가 탄성을 터트렸다. 리비타의 주인이 깨어난 것에 감격한 그와 달리, 라헤안시는 힉살라가 조금
가여웠다. 의식을 차리자마자 듣는 내용이 저딴 거였으니, 혈압이 오를 만도 하지.
힉살라는 긴 수면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얼굴 근육이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으나, 브네학스와
간제의 얼굴을 알아보는 걸 보니 회복되는 건 시간문제인 듯했다.
“그러하옵니다.”
힉살라가 이를 갈았다.
“……오랫동안 잠들어 계셔서 자극적인 음식이나 소화하기 어려운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힉살라께서는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이니, 제발, 음식은 소화하는데 힘이 필요한 종류가 아니라, 알아서 소화되는
거로, 하라고…….”
말의 끝은 짜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두 남녀는 자신들이 모르는 분야인 만큼 라헤안시의 말을 존중하기로 했다.
브네학스가 분주하게 방을 나선 사이, 간제는 힉살라의 곁에 앉아서 여전히 혈압이 오를 만한 과거의 일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분하게 서술했다. 하카브가 궁전을 장악하고 나서 힉살라의 세력부터 먼저 잘라 내었다던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어린 황자도 결국 암살당했다던가 하는 하카브의 악행과 관련된 얘기였다. 그게 잘 먹힌
것인지 힉살라는 연신 부들부들 몸을 떨어 댔다.
과거에서부터 흐른 얘기가 현재를 따라잡았다. 대륙에 발발한 전쟁과 간제, 그녀 자신이 오로지 힉살라에 대한
애정 하나로만 위험을 감수하고 대신관을 리비타 궁전으로 데려온 것, 브네학스의 협조와 힉살라가 눈을 떴다는
얘기까지.
라헤안시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게 통하나 했는데, 어린 시절의 간제만을 기억하는 힉살라는
진심으로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음…….’
힉살라의 명령 아래,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몸을 회복하여 운신할 수 있기 전까지 조심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힉살라의 방 안에는 소수의 시종과 브네학스, 간제와 간제의 사람들, 라헤안시만이 드나들었다. 그럼에도
고요하게 불기 시작한 태풍을 눈치챈 것인지 리비타의 궁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힉살라가 깨어나고 며칠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잠들어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과를
찾아와 명령을 내린다든가, 군대를 물리려고 한다든가 하는 행동은 물론이고 그와 비슷한 의지도 엿볼 수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라헤안시는 힉살라의 방으로 걸어가던 중 간제와 마주쳤다. 그녀는 라헤안시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묻고 싶은 부분이 어떤 건지 안다는 듯이.
“이해는 합니다.”
어느 나라건 그런 경향이 있으나, 발타는 자식을 소유물처럼 여기는 경향이 조금 더 강했다. 간제가 위험을
감수해 빛나는 공을 세웠다지만, 부모인 힉살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라고 인식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무언가를 바란다면 그때부터 의심을 받을 게 빤했다.
242 화.
“면목 없습니다.”
힉살라는 앉아서 식사 중이었다. 놀랍게도 고기를 먹고 있었다.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 미친 마인들
같으니. 라헤안시는 질색하는 얼굴로 힉살라를 잠깐 바라보았다가, 그의 시선이 닿자마자 생긋 웃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힉살라가 껄껄 웃었다.
“이 늙은 몸에게 무슨 힘이 있겠나.”
간제는 한쪽 벽면에 서서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여태껏 그녀가 꺼내지 못했던 본론이, 갑작스럽게
시작되고 있었다.
“과는 어디 있습니까?”
라헤안시가 타타라였을 때에 보이던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힉살라의 얼굴에는 어느덧 호랑이 같은 맹수의
기질이 떠올라 있었다.
“아들에게 배신당해 수년의 세월을 잠들었고, 그사이 재상과 발타의 다섯 가문 중 네 개의 가문이 넘어가고,
궁인들 또한 하카브의 손아귀에 있다고 하고. 여기서 과연, 아문의 가주와 하카브 왕자 전하의 동복동생인 간제
왕녀 전하의 충성심은…… 순수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힉살라는 얼굴을 흉흉하게 일그러트린 채 웃고 있었다. 라헤안시가 손바닥을 마주쳐 짝 소리를 냈다.
“이것이 힉살라의 발에 채워진 하나의 족쇄입니다. 그리고 상황을 끌면 끌수록, 나라의 위기에 적진
한가운데까지 들어올 정도로 애국심이 대단한 저 ‘대신관’이 그 위급함에 합당한 가격을 제시하리라. 이게
힉살라의 다른 발에 채워진 나머지 족쇄 하나입니다. 두 개의 족쇄 때문에 한 걸음도 앞으로 걷지 못하시는군요,
제가 깨워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럴 거면 오지 말 걸 그랬나 봅니다.”
구석에 서 있는 브네학스 아문은 기뻐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하나가 남은 셈이지. ‘적진 한가운데까지 들어올 정도로 애국심이 대단한 저 대신관이 그 위급함에
합당한 가격을 제시하리라.’라고 말했던가? 그래, 대신관은 내게 감히 실례를 저지를 만큼 퍽 다급해 보이긴
하는군.”
“얼마를 바라십니까?”
힉살라는 흐음, 하며 말을 끌더니, 둥그런 모양의 전통 과자를 하나를 집었다. 그러고 반을 뚝 잘라
라헤안시에게 내밀었다.
하고? 힉살라의 의문스러운 눈빛 아래, 라헤안시가 과자를 다시 얌 베어 물었다. 순식간에 1/8 개가 되었다.
“이만큼이 적당하겠군요.”
그 정도가 안 된다고 하면 제 가치를 깎아 먹게 생긴 셈이었다. 힉살라가 무어라 불만을 터트릴 기색을 보이자
라헤안시가 과자를 앞니로 살짝 갉아 먹었다. 이 미친놈이? 힉살라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욕심이 과하십니다.”
“욕심이 과하다……? 가만히 있으면 대신관이 말한 대로 제국의 커다란 부분이 발타의 것이 될 터인데?”
“힉살라께서 계시겠습니까?”
라헤안시는 자신을 싸늘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브네학스 아문을 보고도 웃기만 했다. 힉살라는 브네학스를
만류하지 않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만약 이 싸움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면,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실 텐데요. 하카브 전하에게
이번 전쟁의 승리는 단순히 ‘얻어 들이는 재화가 많아진다.’에 그치지 않습니다.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으로서
동맹국의 신임을 받고 세력을 더욱 불리게 될 겁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힉살라는 병을 오래 앓아 이지가
흐려져 있다 알려질 것이며, 그렇다면 가짜 과가 진짜 과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하카브 전하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는 현시점에서 많아 보이지 않는군요. 그가 일개 왕자의 신분일 때라든가,
혹은 왕자 전하가 전쟁에 정신이 팔려 힉살라의 움직임을 읽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을 때라든가. 세상에, 그러면
……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많은 권력자들이 그러하듯, 힉살라 또한 나라의 부강보다 자신의 안위가 먼저 앞서는 자였다. 그러니 반드시
전쟁이 끝나기 전에, 힉살라의 명령으로 군대를 돌려 하카브를 패배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자신도 조급한 상황이지만, 나라를 잃게 생긴 대신관만큼은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힉살라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기다렸다. 라헤안시가 서서히 고조되는 감정에 휘둘리게끔. 지금 보니 휘둘리기는커녕, 의도를 빤히 다
읽고 있어 소용없는 짓이 되어 버린 것 같긴 했지만.
힉살라가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라헤안시는 잠깐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무얼 쳐다보는지 한참을 그렇게
있던 그가 다시 힉살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힉살라시여.”
“말하라.”
“…….”
“죽은 땅이 살아나는 기적이 펼쳐질 것입니다. 사상과 이념, 종교. 각자의 이유로 다투던 모든 이들이 검을 놓고
환희에 가득 차 노래를 부를 겁니다.”
243 화.
라헤안시에게서는 일견 장난스러워 보이고, 상대를 흔들려던 정치꾼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진중한
눈빛과 태도, 차분히 이어 가는 담담한 말투는 성서를 읽는 듯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한번 말을 끊은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역사에 새겨질 새로운 세상의 첫발이 코앞에 있습니다. 부디 손을 맞잡고, 멈춰 있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새 시대를 함께 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흠…….’
“돈?”
“더…… 많은 돈?”
“새로운 세상이라.”
“아, 그러면…….”
“그래도 받을 건 받아야지.”
“아, 예…….”
“그래서 과는 어디 있습니까?”
“…….”
“뭐…… 알겠네.”
얼른 얼른! 재촉하는 라헤안시를 힉살라가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라헤안시는 막연하게 과라는 것이 어느 깊숙한
금고나, 그가 믿는 가신 중 한 명이 맡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무려 그 하카브가 수년을 찾아 헤매고, 수백의
인간을 고문하고 죽였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한 귀물이었다.
“여기 있네.”
“여기에.”
힉살라의 다리. 허벅지 안쪽에 있다는 말이었다. 세 명이 숨을 크게 들이켜며 기겁하는 때에, 힉살라가 잠깐
멈칫하더니 중얼거렸다.
“……오른쪽인가?”
“…….”
일반적으로 중부 관문은 일라베니아의 수도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세렘 관문만을 뜻했다. 국경
지대 못지않게 훈련된 병사들이 상주하며, 삼엄하고 까다로운 검문으로 일라베니아를 위협하는 요소를 걸러 내는
곳이었다.
하지만 전쟁 시에는 세렘 관문에서 떨어진, 구석진 곳에 있는 바르제 방벽까지 통틀어서 중부 관문이라 말하곤
했다. 보통 때에는 커다란 벽에 불과하지만, 파괴한다면 어쨌거나 지나갈 수 있는 문이 생기는 것이었으니.
제국군은 두 개의 ‘문’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였다. 이따금 투입되는 마인과 ‘파편’, 수적
우위로 찍어 누르려는 연합군의 매서운 공세에도 세렘 관문은 힘겹게나마 버텨 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일주일 전, 바르제 방벽이 무너졌다. 지휘관이 재빠르게 대응한 덕에 적을 방벽 뒤로 허용하지는 않았으나,
보수할 틈도 없이 적군이 매일매일 밀려들며, 위기가 지속되었다. 막아 내기 위해서는 병사들이 무너진 벽
바깥으로 나와 기존 바르제 방벽의 역할을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국군이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이 시점에서, 사자갈기군과 라고슈가 바르제 쪽의 전장에 합류하기로 결정되었다.
“대장.”
그렇게 미레이미가 사라졌다. 죽음을 넘어, 동고동락해 온 미미가 사라지자 하얀밤 기사단의 거의 모든 인원이
그녀를 찾아 댔다.
[엄마가…… 있었어?]
쥬쥬는 기가 막혀서 농담같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실상 정답에 가까웠다. 자유분방하고 강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인, 미레이미는 가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인상을 주고는 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은근 실례했다는
걸 깨닫고 그 자리에 없는 미미에게 미안해했다. 그리고 곧바로 쥬쥬를 바라보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런 이상한 연결 고리로 혈연을 입증한 쥬쥬는 부관으로서 로젤린의 옆에 서게 되었다. 대체로 부관이 맡는 일은
하지 않고, 찾을 때마다 없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부관이긴 했다.
244 화.
“무슨 소리?”
로젤린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쥬쥬의 말대로 장미대의 병사들이 겁먹은 강아지처럼 눈동자를 굴리며 떨고
있었다. 추위가 아닌, 순수한 공포심 때문이었다.
로젤린이 픽 웃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무명의 기사가 오천의 대를 이끄는 지휘관을 맡게 되었다. 무척이나 뛰어난 무장이자
지휘관이다. 라는 짧은 설명을 듣긴 했지만, 단순히 들은 말로 한 사람을 파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귀족
나으리라 그냥 한자리 꿰찼겠거니 하는 시선들이 만연했다.
전방의 연합군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뜬 로젤린의 속눈썹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살에 반짝거렸다.
“그러니 보여 줘야지.”
미소 지은 로젤린이 투구를 꾹 눌러썼다. 마카롱이 한 손으로 그녀의 삐뚤어진 투구를 똑바로 고쳐 주었다.
전장에서의 수 차이가 얼마나 유의미한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기 이전에,
덩치를 불린 적의 모습에서 위압감을 느끼는 것이 먼저였다. 제국군 병사들의 눈동자 속에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저 개 같은 놈.”
“안 나가면 안 되나?”
아르고의 얼굴에 불신이 어렸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사람이 우리 대의 대장이어도 괜찮은 건가?
하고 미심쩍어하는 모양새였다.
“조롱을 듣고 감내하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거기에다가 만약 해치울 수만 있다면 적의 지휘관을 대군을
뚫지 않고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거니까요.”
장군 자릿이 다시 소리쳤다.
껄껄껄 호탕한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장미대의 병사들이 욕설을 얹었다. 아, 재수 없어. 속 깊이 우러나온
누군가의 진심에 로젤린이 피식 웃었다. 로젤린은 등자에 발을 걸친 채, 말의 옆구리를 살짝 두드렸다. 군마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 어?”
“대장?”
자릿이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력을 등한시하는 일라베니아의 특성상 고위 관직을 마인이 맡고
있을 리 없으니, 그냥 평범한 인간일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여자라니. 이전에 죽였던 지휘관들이
한주먹거리라면, 그녀는 반주먹거리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쓸데없이 말이 많군.”
로젤린은 창을 들어 올렸다.
쾅!
일대에 굉음이 퍼져 나갔다. 두 장수는 한 번의 충돌 이후로 엇갈린 채,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각자 반대편
진영으로 나아갔다. 양 측의 병사들이 침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거리가 멀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직까지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로젤린은 천천히 방향을 틀어 뒤에 있는 자릿을 보았다. 터벅, 터벅. 군마가 걸어가는 그 작은 흔들림에 자릿이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패배한 남자의 추락에 흙먼지가 부옇게 일어났다.
“우아아악!”
“미쳤나 봐!”
“멋있어!”
제국군 측에서 비명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연합군은 숨죽인 채 동요했다. 어깨를 노리는 창을 비스듬히 흘린
후, 투구 아래의 목을 찌른 것. 딱 한 합만에 결판이 났다. 일대일 대결을 하더라도 이렇게 빨리 승부가 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작게는 몇 분에서 많게는 한 시간 가까이까지 길어지는 경우도 허다한데, 단 한순간에
승패가 갈린 것이다.
로젤린은 방금 전까지 결투를 한 사람답지 않게 덤덤한 모습으로 제국군 진영에 복귀했다. 장미대 병사들이
감격에 겨워하며 덜덜 떨고 있었다.
“대장!”
“대장! 완전 멋있습니다!”
꺄악 꺄악 소리치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귀여워 로젤린이 슬쩍 웃었다. 연합군 측은 자릿의 시신을 수습하고
동요하고 있는 병사들을 다독였다.
* * *
해가 저물었다. 사상자만 수천에 달하는 오늘의 혈전도 마무리되었다.
무시무시한 양의 마력을 운용하는 로젤린, 쥬쥬와 일라베니아인보다 두 배가량 체구가 큰 라고슈 지원군의 힘이
합해진 돌파력은 연합군이라 해도 막아 내기 힘들었다.
장미대는 이후로도 연합군 장수의 목 두엇을 따고, 밀리는 제국군을 지원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혼란한 전장
속에서 어디가 중심인지, 어디가 위기에 처했는지 판별하는 눈은 연합군의 지휘관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개인으로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전쟁은 집단과 집단의 싸움이었다. 장미대가 부단히 노력하긴 했으나,
사상자는 비슷하게 발생했다. 같은 수라면 제국군의 피해가 훨씬 큰 셈이었다.
로젤린은 하아 숨을 내쉬었다. 어두운 공간에 그녀의 숨이 하얗게 번져 나갔다. 그녀는 잠시간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둔영지로 돌아갔다. 피에 젖은 땅도 잠드는 시간이 찾아왔다.
245 화.
푸른등불 공작을 포함한 제국군의 상급 지휘관들은 인상을 찌푸린 채 테이블 위의 서류를 훑었다. 한참 동안
계속된 침묵을 뚫고 푸른등불 공작이 입을 열었다.
비 때문에 이틀간 전쟁이 중단되었다. 그사이 양측은 내부를 점검하고 여태껏 치러 왔던 전쟁을 분석, 새롭게
전략을 수립했다. 서로 상대편이 어떤 대비책을 준비했는지 모르니만큼, 경계하며 움직임을 살핀 것이었다.
“오늘 하루가 나쁘지 않게 마무리되었지만, 중부 관문이 곧 무너질 거라며 자포자기한 이들도 많더군. 그건
병사만을 이르는 얘기는 아닐세. 이런 말을 하긴 싫었지만, 지휘관들은 아래 사람들을 잘 단속하시게.”
“사령관님!”
병사 한 명이 헐레벌떡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테이블을 쾅 치고 일어난 푸른등불 공작은 버럭 성질부터 낸 후, 빛모래 남작이 어디 소속인지 기억을 뒤졌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신관이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어찌 되었나!”
병사가 눈치를 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모두의 시선이 눈동자의 방향을 따라갔다. 팔짱을 낀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그 자리에 있었다. 갑자기 주목된 시선에도 태연한 태도였다.
“내 부하들인가?”
“…….”
이 껄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용케도 저런다 싶었다. 칼릭스는 목소리에 조금 짜증을 담아 병사에게 얘기했다.
“그런데.”
“그런데…… 붉은수레바퀴 측의 병력이 그 시간에 망루에 있는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어서 말입니다. 본인들도
입을 열지 않아……”.
칼릭스는 그제야 자초지종을 알아챘다. 목격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연합군 병사들을 들이고 애꿎은
남작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인지, 아니면 정말 순수한 협조자인지 알 길이 없다는 얘기였다.
“백작, 그대가?”
“최근 빛모래 남작을 한번 본 적 있습니다.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의 불안이 단순히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과는 다른 듯하여 주시하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아군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만연하여 좋을 것이 없으니, 직접적인 조사 이전에 몰래 붙여 놨던 참입니다. 비밀스러운 임무라 제 수하들이
말을 아낀 모양입니다. 어쨌거나 제 독단으로 벌인 일이니, 이에 대한 책임은 제가 물겠습니다.”
“……글쎄요.”
원숭이와 에렌도 칼릭스가 대뜸 내뱉는 말에도 당황해하지 않고, 연극의 신빙성을 높이는 순진무구하고
청렴결백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것들.’
사건의 개요를 간략하게 전해 들은 푸른등불 후작이 수색을 명령했다. 병사들은 빛모래 남작의 막사를 갈아엎듯이
뒤졌고, 곧 간이침대의 밑, 땅 아래에 묻힌 금화 주머니를 찾아내었다. 연합군 측이 다른 망루의 책임자들에게도
접선해 오지는 않았는지 확인이 필요한 때였다.
“길레드!”
분노에 찬 칼릭스의 목소리를 들은 길레드가 자다 말고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길레드는 칼릭스의 양손에 뒷덜미가
잡혀 있는 원숭이와 에렌을 발견하고 절망했다.
칼릭스는 제 막사에 두 사람을 던지듯 집어넣고 의자에 앉았다. 원숭이와 에렌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헤헤 웃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제국군에 도움을 줬으니 이건 괜찮겠지 하는 계산이 깔려 있는 웃음이었다. 칼릭스는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어느 날 밤, 둔영지를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남작이 금속음이 나는 커다란 주머니를 옮기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후 빈틈을 타서 그의 막사 안에 침입한 두 사람은 땅에 묻어 둔 주머니를 발견, 속에 있는 것이 금화와
보석이라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놀랍게도. 라는 말은 뺐다.
에렌이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칼릭스는 양심은 그런데 쓰는 단어가 아니라 정정해 주고 싶은 마음에 잠깐
사로잡혔다. 끄덕거리며 에렌의 말에 동조하던 원숭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머리는 있는 모양이었다.
남작이 살아 있을 경우, 자신들이 죄를 뒤집어쓸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는 얘기였다. 망루의 책임자가 버젓이
있는데, 뜬금없이 다른 진영에 있는 병사들을 걸고 넘어지는 게 얼마나 황당한 말이겠느냐마는, 애초 마인들은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죄야 벗겨질 것이다. 하지만 결백이 입증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는 불 보듯 빤했다.
“우선, 이번 일은 위험을 감수하고 노력해 줘 고맙다. 덕분에 위기를 넘겼군. 하지만 네 입으로 말했다시피,
자칫 잘못하면 너희가 위험할 뻔했어. 차라리 내게 와서 말해. 알아서 처리할 테니.”
“바빠 보이셔서.”
“……말해.”
칼릭스가 이를 으득 갈았다. 원숭이와 에렌, 길레드까지 고개를 급하게 끄덕였다. 칼릭스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그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예엡!”
“네!”
“아이고, 그럼요.”
다들 참 해맑았다.
하지만 그들은 계약 내에 있는 일뿐만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보 빼돌리기와
기밀 훔쳐 듣기, 수상한 인물과 배반자 제거하기 등, 하나같이 불법적인 느낌이 가득한 일들이었지만. 어쨌거나
노력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칼릭스는 그런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에 일라베니아에 희생당했다던 강한 마인 가문뿐 아니라, 그
힘이 엮인 모든 이들이 일라베니아의 이름 아래 억압받았다.
이딴 나라 망해 버리라지.
그런 마음을 먹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246 화.
“……그래.”
자라나는 새 나라의 청년이 지나치게 순수해서, 전쟁이 끝나는 대로 교육시켜야 할 것 같았다. 단순명료한 에렌과
달리 원숭이와 길레드는 긴 시간을 고심했다. 그들의 복잡한 심상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길레드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뭐, 사실 이유야 다양하겠죠. 마인이라고 서로의 마음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각자의 삶과 생각이 있으니까요.
더군다나 몇 세대 위의 일을 제가 어떻게 짐작하겠습니까? 떠나지 못했을 수도, 떠나지 않았을 수도. 하지만
이따금 현세대의 마인들과 얘기를 해 보면 항상 그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누가 도와줬다.”
잠시간 뜸을 들인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
“살려 줬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마인을 증오하고 핍박했기에 이러한 기조가 형성된 것이긴 하죠. 하지만, 이따금
도움도 받았다는 겁니다. 저희를 밀어내는 손이 백 명의 것이라면, 그래도 한두 명 정도는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있었어요. 그게 별 게 아니라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저희들은 그 한두 명을 평생 잊지 못해요.”
“어쩌면 우리가 일라베니아의 땅에 태어난 것도, 아주 오래전 마인 사냥을 당했던 이들을 숨겨 주고, 도와주고,
살려 준 일라베니아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요. 물론 속 편한 자기 위로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뭐, 허수아비같이 심각하게 인류애가 넘치는 부류가 아니긴 하지만 동감하는 부분도 있네요.”
“나두 나두.”
에렌이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래서 여기 있어요. 과거의 나를 도와준 일라베니아의 사람들과 일라베니아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백작님을
위해서요.”
“……내가 너의 손을 잡았던가?”
“또 시작이다?”
“그건 몰랐군.”
“내 나이가 몇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연합군의 세작인지 아닌지 판별할 시간도 정보도 없으면서,
믿으셨잖아요. 말씀드렸죠. 저는, 우리는, 손을 잡아 준 사람을 결코 배신하지 않아요.”
* * *
전쟁이 재개된 후로부터 삼 일이 지났다. 매일매일 크고 작은 승리와 패배가 생겨났으나 그것이 중부 관문의
함락이나 연합군의 패퇴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인적, 물적 자원은 빠르게 소모시키며 서로의 몸집을
조금씩 깎아 내는 양상이었다.
연합군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반쯤 무너진 바르제 방벽을 둘러싼 공방전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제국군의 끈질긴 방어에는 라고슈 지원군의 합류가 큰 역할을 했다. 단순히 병력 4 만이 더해졌다는 것뿐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전사라는 점에서 그들의 전략적 가치는 본래의 수를 훨씬 웃돌았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르제 방벽의 새로운 지휘관이었다.
비가 오기 전과 비가 온 후, 제국군의 움직임이 완전히 달라졌다. 모자란 머릿수를 메우는 뛰어난 전술은 여태껏
까다롭다고 생각한 전 지휘관의 능력을 무색하게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전장에서 장미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 무시무시한 돌파력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묘한 움직임
때문만은 아니었다.
“…….”
연합군의 마인들이 일반인을 조금 사나운 강아지쯤으로 여겼다면, 장미대 대장 로즈의 앞에서 마인들은 온순한
토끼쯤 되었다. 싸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약자를 상대로 힘을 자랑하며 낄낄거렸던 건 애초에 연합군이
먼저였다.
“연합군 측에서는 나를 상대할 장수가 없나! 아픈 게 무서울 정도로 연약하면 집 안에나 박혀 있을 것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추한 꼴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
“제국군의 기사들은 불리한 조건의 승부에도 응하여 명예롭게 결투를 벌였다. 그 사실을 잊지 마라. 아, 혹시
명예의 뜻을 모르는 것인가?”
몸놀림만큼이나 날래고 치명적인 로즈 경의 도발은 아직까지 호기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장수들을 번번이 결투의
장으로 불러들였다. 뼈아픈 역지사지였다. 제국군이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연합군은 매일 아침마다 한 명의
장수를 잃고 전쟁을 시작했다.
그렇게 바르제 방벽에서 로즈 경이나 장미대가 연합군 장수의 목이든, 작은 승리든 성과를 일궈 내면 그 업적은
중앙의 세렘 관문까지 빠르게 퍼졌다. 무서운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를 했다는 소식만으로도 병사들은 지친 몸을
일으켰다.
연합군 장군 누구의 죽음, 어느 전장에서 연합군의 패배, 제국군 병사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다양한 승리만 얽어
보면 연합군은 곧 꼬리를 말고 도망갈 것 같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전과 같으며 간신히 버텨 내고 있을 뿐이었다.
병력이 충분해서 교대하며 쉴 수 있는 연합군의 형편에 비해, 제국군 병사들은 하루도 쉬지 못하고 다치면 다친
대로, 팔이 없으면 팔이 없는 대로 매일 전장에 나서야 했다. 연일 발생하는 사상자가 수습할 수도 없을 만큼
늘어 갔다. 날이 추워 전염병이 돌지 않는 것만이 위안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서류를 읽다가 휴 한숨을 내쉬었다. 인조 마인 부대와 파편도 본격적으로 투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정도라니. 아무리 전략을 짜내도 전쟁은 결국 머릿수 싸움이었다. 로젤린은 누구보다 강하지만, 그녀 혼자
수만의 대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심란한 마음에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레 발길이 향한 곳은 로젤린이
잠들어 있는 그의 침상이었다. 침대 가에 앉은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피부 위로 검붉은
핏자국이 여기저기 말라붙어 있고, 머리카락에는 재 따위가 엉긴 채였다. 이런 집요한 시선에도 로젤린은 눈을
뜨지 않았다. 무척 지쳐 보였다.
로젤린은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전장 속에서 병력을 이끌며, 놀라운 활약으로써 제국군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쉼 없이 쌓아 온 업적은 그 어떤 훌륭한 장수라고 한들 감히 대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로젤린의 행보를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대단하다는 한마디로 넘길 수 없었다.
그는 로젤린이 이 전쟁에서 더 이상 피 흘리지 않기를 바랐다. 일라베니아의 업보로 일어난 전쟁에 일라베니아의
희생자가 나선 꼴이었으니.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눈에는 이보다 황당한 일이 없었다.
그대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며 만류하려던 참에, 로젤린이 그의 팔에 손을 살며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싸우겠습니다.]
로젤린이 눈을 떴다. 그녀가 초점을 맞추듯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로젤린의 눈동자에
비치는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달라졌다.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풀리고, 경직되어 있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로젤린.”
“예.”
매일 다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로젤린, 여기서 그만…….
“오늘도 수고 많았어.”
247 화.
해안을 지키는 고래무덤과 바다협곡 측에서 대어를 낚았다는 소식이 도달하기가 무섭게, 그 대어가 중부 관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등불 공작과도 친분이 깊어 보이는 고위 신관의 등장에, 마차 주위의 병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그를
맞이했다. 그들의 인사를 받은 리카르디스가 병사들에게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께서는 뭘 하고 계십니까?”
도착한 게 언제인데 아직까지 미적거리고 올라올 생각을 안 하느냐는 뜻이었다. 병사들이 대답하기 전, 마차
안쪽에서 우렁찬 코골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것 같군요.”
리카르디스는 마차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추하게 침까지 흘리면서 잠든 남자가 보였다. 피부가 거칠고
눈 밑이 퀭했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보여 그 추한 모습을 보고도 리카르디스의 가슴이 아주 약간 찡해졌다.
대신관은 종신직이었다.
리비타로 떠났던 대신관 라헤안시가 귀환했다는 소식에 리카르디스의 가신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리카르디스는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상태의 남동생을 억지로 끌고 가서 세수시킨 후 방으로 밀어 넣었다. 라헤안시는 조금
전의 몰골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고아한 태도로 가신들에게 인사한 후 자리에 착석했다. 모두의 이목이 쏠렸을 때
라헤안시의 입이 열렸다.
“……나쁜 소식은.”
발타의 수도 리비타를 두고 내전이 벌어졌다. 라헤안시는 무력 충돌이 심화되기 바로 직전에 브네학스의 도움으로
궁전에서 빠져나와, 해상을 통해 일라베니아로 도착할 수 있었다.
라헤안시는 평소와 달리 장난기 어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그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알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동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줬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크게 확률이 높은 계획이 아니었기에, 전략을 짤 때에도 발타의 협조를
배제시켜 놓기는 했었다. 그럼에도 작게 붙잡고 있던 기대마저 놓아 버려야 하니, 아쉽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로젤린이 바르제 방벽 공방전을 지원한 첫날부터 ‘제국군에 강한 마인 기사가 있다.’는 얘기가 연합군 측에 널리
퍼졌다. 디에즈는 그걸 들은 순간부터 로젤린을 염두에 두었다.
디에즈는 연합군 진영에서 저 멀리, 수만과 수만의 군대가 격돌하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숨 막힐 정도로 밀도
높은 마력이 전장을 뒤덮고 있었다.
‘로젤린.’
로젤린의 생존을 확신했을 즈음 하카브가 디에즈에게 건넨 말이었다. 디에즈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카브는 알
만하다는 식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디에즈의 분노를 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디에즈는 로젤린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경계가 아닌, 기대와 가까운 감정이었다.
로젤린을 죽이고자 그녀의 심장에 단검을 박아 넣었던 그때에 모든 것을 버렸다 생각했는데. 마음은 버린다고
버려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나. 디에즈는 혼자 실소했다.
예상은 했지만, 로젤린은 살아 있었다. 이 살벌할 정도의 짙은 마력이 그녀가 아니라면 그게 더 문제였다.
로젤린의 존재를 느끼자마자 생각과 목적, 감정이 각기 날뛰며 또다시 디에즈를 흔들었다. 슬프고, 원망스럽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고, 기쁘다.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기쁘거나 통쾌하지는 않았다. 성취감 같은 감정과도 달랐다. 그저,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디에즈는 말에 올라타 격전이 벌어지는 전장으로 돌진했다. 마력의 묵직한 압박감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디에즈는 마력을 온몸에 두른 채, 덤벼 오는 제국군 병사들을 베어 내며 전진했다.
‘장미.’
거칠게 돌진해 온 것은 물체가 아닌 갑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낙마한 디에즈를 덮치듯 몸에 올라탄 남자가
디에즈의 투구를 벗겨 냈다. 좁았던 시야가 단숨에 넓어졌다.
“오랜만이다?”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인상을 찌푸린 채 사납게 웃고 있었다. 디에즈는 곧 얼굴이 옆으로 돌아갈 정도로 강하게
얻어맞았다. 입 안쪽이 터지며 피가 흘렀다. 주먹이 아니라 망치로 맞은 듯했다.
디에즈가 비죽 웃자 마카롱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으르렁거리던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려던 차, 용감한 발타의
기병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마카롱이 바닥의 돌을 주워 손가락으로 튕겨 냈다. 화살처럼 날아간 뾰족한 돌이 군마의 눈에 박혔다. 발작하듯
날뛰는 군마의 움직임에 버티지 못한 기병이 나가떨어졌다. 안타깝게도 목이 부러져 즉사했다.
248 화.
디에즈는 입안에 고인 피를 마카롱의 얼굴에 뱉어 내며 단검을 잽싸게 빼 들었다. 무방비한 목으로 향하던 일격은,
마카롱이 디에즈의 손목을 붙잡으며 허무하게 끝났다. 마카롱이 날카로운 단검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뭐 하냐.”
마카롱은 디에즈가 정신 못 차리는 사이 덤벼드는 발타의 병사의 목을 꺾고, 베고, 찌르고, 집어던졌다.
시체들을 방어벽처럼 만든 후, 다시 디에즈에게 돌아온 마카롱이 그의 멱살을 잡고 다시 뺨을 짝 때렸다.
디에즈의 입가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여기까지는 내 분풀이.”
“봐야 할 게 있으니까.”
“봐야, 한다니?”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
한참을 시체처럼 누워 있던 디에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단검도 뽑아 바닥에 버렸다. 어깨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혼란한 전장 속을 걸었다.
연합군 진영으로 걸어가던 디에즈는 다시금 살벌하게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기운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인파에 파묻혀 로젤린은 보이지 않았다. 대지를 뒤덮어 버린 시체만이 디에즈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고자 하는 것은, 봐야 하는 것은 오직 이뿐이었다. 그 이외에 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연합군, 발타 진영.
차호트가 디에즈의 얼굴을 붙잡고 끄악 비명 질렀다. 디에즈는 고개를 살짝 트는 것으로 그녀의 손에서 벗어났다.
“디에즈 님께서 전장에 계시는 동안 여기도 일이 많았어요. 식량 창고가 불탔다고 알리는 전령이 도착했거든요.
어쩐지 보급이 늦더라니.”
“……음.”
흔히들, 전쟁은 식량의 싸움이라 말하곤 했다. 보급이 끊기면 수만의 병력이 굶주리게 되며, 이는 당연히 전쟁의
승패로 이어졌다. 디에즈가 미간을 좁혔다.
“대충…….”
도무지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디에즈는 피가 흐르는 입술을 매만지기만 했다. 차호트가 다시 손가락에 침을
묻혀 디에즈의 멍든 피부 위로 살살 펴 바르며 말을 이었다.
“뭐 중부 관문 안쪽에는 식량이 있겠죠. 군량 건이 아니더라도 슬슬 이쪽에 올 예정이었는데 겸사겸사
잘됐네요.”
그녀가 씨익 웃었다.
“……좋은 생각이네요.”
* * *
사르체는 전투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전투광,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는 걸 아니 함정을 파 놓고 유인하면 된다.
아문은 발타 왕실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날카로운 검. 이쪽은 융통성이 없어서 예상외의 상황을 만들어
발을 묶을 수 있다.
하지만 람가는 그런 단점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힘이 있고, 기술도 있다. 일정한 규칙에 속해 있다가도
자유롭게 움직일 줄 알아 전략의 짜임새를 폭넓게 한다. 물러서도 되는 싸움과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을 안다.
그런 식으로 얻게 된 패배와 실패가 많아, 람가보다 사르체가 강하다 받아들여지고는 했다. 하지만 람가가
마음먹고 나선 전장에서는 언제나 승리의 뿔피리가 울려 퍼졌다.
“세렘 관문 공방전에서는 람가의 진가가 나오지 않았겠지만, 백병전이 벌어지는 바르제에서는 무엇보다 위험한
수가 될 터. 병력을 보강하여 장미대를 중심으로 배치를 새롭게 한다.”
말인즉슨 밤샐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람가의 가주가 나선 전투는 몇 되지 않았다. 전술을 어떤 식으로 세워야
할지 한참 고민하던 중, 전령이 급하게 소식을 알렸다. 이번만큼은 반가운 일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오랜만에 웃었다. 피곤해하던 지휘관들의 얼굴에도 지금만큼은 화색이 돌았다. 연합군의 보급선에
문제가 생겼다.
그들은 점령한 일라베니아의 성채를 병참 기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발타와 각 나라로부터 오는 식량, 그리고
일라베니아 영토 내에서 수탈한 것들까지 보관하며, 일정한 주기마다 중부 관문으로 보급품을 지원하던
참이었는데…….
“이것 참.”
그리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병참 기지의 책임자는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서의 패배로 일시적으로 직위가
강등된 완달 타탄이었다. 그때의 패배에 이어 또 다시 세실에게 당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
지휘관들이 모호한 표정으로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보았다. 적이 되지 않아서 다행인 건 리카르디스라는 인물에도
해당되는 말인 듯해서.
식량 부족은 전투력의 저하와 무리의 분열을 야기한다. 연합군은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중부관문을 넘어서려
더욱 필사적으로 공세할 것이다.
“……힘들겠어.”
* * *
로젤린은 오늘도 전투에 앞서 일대일 대결을 신청했다. 혹여 람가의 가주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했으나,
로젤린의 원색적인 도발에 걸려든 것은 하급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어젯밤 리카르디스가 말했던 부분이라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좀 아쉬웠다. 하급 지휘관을 처리한 후, 발걸음을
돌려 본대로 귀환하려던 로젤린은 돌연 뒤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기운에 말고삐를 잡아채 자리에 멈춰 섰다.
249 화.
그녀는 고개만 살짝 틀어 연합군 진영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수백 명의 마인이 마력을 쓰기에 공격이라도
감행하나 싶었는데, 별다른 소란 없이 잠잠할 뿐이었다. 뭐지?
로젤린은 계속해서 느껴지는 마력이 거슬려서 걷다가 뒤돌아보는 행위를 반복했다. 본대에 돌아갈 때까지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그녀와 달리, 마카롱은 상황을 파악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침 마카롱과 가까이 있던
리카르디스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저거 아주 또라이네.”
마카롱은 눈가를 간지럽히는 앞머리를 쓸어 넘긴 채 고정했다. 시선은 여전히 연합군 측 진영을 향하고 있었다.
뼈다귀를 어디에 묻어 두고 온 강아지 마냥……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뒷말을 간신히
생략했다.
“선전포고?”
“아니.”
마인들은 여전히 마력을 운용한 채,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군대 사이에서 규칙성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좌우 대칭의 완만한 곡선, 두 개의 봉우리와 뾰족하게 만나는
하나의 점까지.
“하트.”
“…….”
리카르디스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곧 로젤린이 본대로 귀환했다. 람가군의 마인들이 마력을 쓰고 있다며, 왜 저러냐고 투덜거리는 그녀에게
리카르디스는 들은 대로 그 의미를 일러 줬다. 잠깐 다시 뒤를 돌아본 로젤린이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하트 모양이었던 듯했다.
“그런데 왜……?”
로젤린이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를 포함한 다른 어떤 누구도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사이
연합군에서도 오늘 사망한 하급 지휘관의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을 끝냈다.
여태껏 이 전장에서 활약했던 연합군의 마인들은 본대에 포함되지 않고 따로 움직이며, 제국군의 측면을 기습
공격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그 때문에 로젤린의 장미대 또한 좌익군 소속이라는 틀을 벗어나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전투를 치른 것이었다.
뿔피리가 울리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수만과 수만의 덩어리가 충돌하자 뿌연 흙먼지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람가군과 장미대만이 격전지에서 동떨어진 채 서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람가군의 군마들이 투레질하며 앞발을
들어 올리는 즉시, 장미대도 나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세 시간이 지나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로젤린도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여태껏 연합군의 장수들은 장미대를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제국군의 방어벽을 두텁게 하는 눈에 띄는 요소였으니까. 그래서 람가군 또한 장미대를 처리하기 위해
투입되었다고 생각했다.
“람가의 군대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장미대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양측의 주력부대가 참전하지 않는
것이지만, 전체적인 머릿수는 저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병사들의 체력 또한 비할 바가 못 돼. 이런 식의
소모전으로는 우리의 한계만 빠르게 드러나겠지.”
장미대라는 무기를 봉쇄한 채, 제국군의 머릿수를 깎아 내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수가 줄어들게 된다면 장미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연합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한번 차고는 지도를 빠르게 살폈다.
“세렘 관문에 지원을 요청한다.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연합군은 바르제 방벽을 통과하는 방법을 택한 것
같군. 예비 병력을 모두 이쪽으로 돌려야겠다.”
드디어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전투를 마무리 짓고 서로의 진영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 이게…….”
누구도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해가 산 뒤로 넘어가고, 하늘은 검게 물드는데, 짓눌리며 부서지는 두 무리의
격전은 식을 줄을 몰랐다.
차호트 람가. 그녀가 제국군의 지휘관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밤하늘 아래에서 더욱 거세게 제국군을 도륙했다.
* * *
“리카르디스가 보고 싶군.”
“오해하지 말아, 디에즈. 리카르디스 황자가 보고 싶다기보다는, 지금쯤 당황하고 있을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얘기야.”
디에즈와 케틀린이 얼굴을 구겼다. 하카브는 두 사람의 반응에도 그저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전장을 바라보았다.
모든 연합군이 중부 관문 앞으로 결집하여 전보다 거세게 공세를 펼치는 중이었으나, 일라베니아는 끈질기게도
버텼다. 종횡무진 전장을 휘젓는 장미대와 라고슈 지원군을 필두로 한 제국군은 이따금 예상할 수 없는 전략에
따라 움직이며 이 상황을 버텨 내는 것 이상의 힘을 보이기도 했다.
거센 저항에 연합군의 사기가 늘어지기 시작했다. 점차 추워지는 날씨가 병사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식량 창고마저 마른가시나무 백작에게 털렸다. 그전에도 결코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이제는
마른가시나무라는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그렇게 악재가 겹친 상황에 차호트 람가가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세렘 관문이었다. 거대하고 두꺼운 관문을 공략하는 전투는 일반적인 전투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전력을 요구했기에, 반 이상의 병력이 세렘 관문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그걸 여기로.]
[사실 장미대와 라고슈 지원군만 아니면 바르제 방벽은 뚫려도 진즉에 뚫렸을 거잖아요. 그 둘만 발을 묶어 두면
일이 수월해지겠죠.]
[어떻게?]
[제가 다른 전장에 있는 마인 애들까지 전부 모아서 데리고 갈게요. 수가 많을수록 그쪽도 맞춰서 편제할 거고.]
[내가 마인들을 데리고 있다는 걸 아는 제국군 측에서 어중이떠중이에 머릿수만 믿은 군대를 붙일 리는 없잖아요?
결국 장미대와 라고슈 지원군이 나를 견제하려 들 겁니다. 내가 움직이면 그들도 움직일 거고, 내가 안 움직이면
그들도 못 움직이겠죠. 치열하게 눈치 싸움이나 해 볼까 합니다.]
모든 마인을 람가의 깃발 아래 소집한다. 그 파괴력 넘치는 군단을 막기 위해 장미대를 포함한 정예병이 꾸려질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람가는 움직이지 않을 테니, 장미대와 제국군의 정예병 또한 발이 묶이게 된다.
전장에서 가장 위협적인 요소가 사라지게 된 셈이었다. 장미대와 라고슈 지원군을 제외한 나머지는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수로써 찍어 누른다면 이 전쟁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날 수도 있었다.
250 화.
그녀는 말하면서도 나무 조각을 계속 바르제 방벽 쪽으로 옮겼다. 하카브도 람가의 문양이 새겨진 나무 조각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필요합니다. 오래 싸울 예정이라.]
[오래?]
[아침부터 밤까지.]
[그 다음 날의 아침과 밤까지.]
연합군 또한 피해가 클 테지만, 시간이 촉박한 이상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과격한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확실히,
이런 방식으로 전투를 지속한다면 제국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
어제 나눴던 얘기가 오늘 실현되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카브는 어두워진 전장 너머, 바르제 방벽을
바라보았다. 실종된 일라베니아의 총사령관,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그는 아마도 중부 관문, 그것도
장미대가 있는 바르제 방벽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우두머리의 부재는 무리의 전체적 사기를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사항이었다. 분명 그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기에,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의 수를 떠올려도 지금의 전황을 뒤집을 만한 수단은 없었다.
없다, 없는데.
‘리카르디스.’
계속해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죽지 않는, 끈질기게 살아남는, 반드시 무언가를 준비해 두는. 주도면밀한
리카르디스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일말의 경계가 가시지 않았다.
하카브는 차호트 람가의 계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제국군 진영을 바라보았다. 둥그런 달이 어두워진 전장을
비추고 있었다.
* * *
예상치 못한 야간전에 제국군의 지휘관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이런 식으로 밤낮없이 전투를 지속했다간 내일
아침이면 전부 지쳐 검을 들 힘마저 잃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부우우-
갑작스러운 장미대의 출진에 대다수의 지휘관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리카르디스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
로젤린이 이동하는 마인 부대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구름이 많아 달빛마저 희미한 공간 속에 벌어진
난전을 지켜보았다. 찢어지는 괴성들만 무성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횃불이나 이따금 빛을 반사하는 갑옷
정도였다.
장미대와 연합군이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인과 거인이 무기를 맞부딪친 듯한 굉음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를
악물었다.
‘로젤린.’
그 시각.
하지만 차호트 람가 또한 로젤린의 접근을 알아채고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 제국군을 학살했다. 직접 부딪치는
상황을 피하고 제국군의 수를 줄이는 것에 주력하려는 속셈이었다. 로젤린은 앞을 가로막는 연합군 병사들을
흉폭하게 베어 넘겼다. 하지만 적이 아무리 쓰러져도, 람가군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적이 너무 많아.’
후욱,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전장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대한 구름이 달을 가렸다. 희미하던 달빛조차 어둠에
잠겨 버렸다.
“딱 좋네.”
찰나의 순간에 쥬쥬에게서 짙은 마력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형체가 삽시간에 흐물거렸다. 야행성 동물의
눈을 빌리고 있는 로젤린만이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말에서 풀쩍 뛰어내린 마카롱의 모습이 어둠과 인파에 가려졌다. 곧 지상에서부터 무언가가 화살처럼 쏘아지듯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람 소리에 접근하는 기척을 숨긴 독수리는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형태를 허물어 다른 모습으로 변이했다. 검고
거대한, 탄력 있는 근육을 가진 흑표범이 하늘에서부터 비스듬히 쇄도했다. 연합군의 병사는 코앞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에 잠시 몸을 굳혔다.
“으아아악!”
어둠 속을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는 전장에서 들리는 그 어떤 비명보다 고통에 차 있었다. 주위의 병사들이 고개를
휘휘 둘러보았으나, 흑표범은 이미 어둠 속에 녹아든 상태였다. 빛나는 두 눈만이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의
궤적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흑표범은 온몸으로 돌진하고, 물어뜯으며 전열을 흐트러트렸다. 땅에 발돋움한 흑표범이 병사의 방패를 밟고
뛰어오르며 다시 독수리로 화했다. 그것은 크게 날갯짓하며 조금 더 중앙부로 이동했다. 하늘에서부터 무언가가
연합군의 한복판에 뚝 떨어졌다. 이번엔 흑표범이 아닌 거대한 곰이었다.
크와아아! 맹수의 울부짖는 소리가 전장을 쩌렁하게 울렸다. 거대한 곰이 앞발을 휘두르자 병사 다섯이 갑옷 채로
찢겨 나가며 절명했다.
“으아악!”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 공격당하는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질러 댔다. 무작정 도망가는 사람,
사태를 깨닫지 못해 전방의 제국군 병사에게만 집중하는 사람, 혼란의 원인을 처리하기 위해 무리를 거슬러 가는
사람들까지. 일정했던 연합군의 흐름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집단이 개인이 되며, 연합군의 치밀했던 대열이
성기게 변모했다.
로젤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뭉쳐 연합군을 돌파했다. 뜨거운 핏방울이 그녀의 투구에 선을 그리듯 튀었다.
* * *
아침 해가 붉게 물든 대지를 비췄다.
밤새 분전했으나, 연합군과 제국군의 병력 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제국군이 연합군의 부대를 궤멸시켜도 병력을
다시 투입해, 수적 우위를 철저하게 지키며 제국군을 압박했다.
허억, 헉. 장미대의 병사들이 말라붙은 숨소리를 냈다. 호흡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오로지 정신력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날이 밝아 올 무렵. 로젤린은 장미대와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던 람가군과 드디어 격돌했다. 하지만 마력이라는
신체 강화 수단을 지닌, 훈련받은 병사들의 집합은 로젤린이 부딪친 그 어떤 적보다도 강력했다.
파편까지 사용하는 마인 군대의 거친 공세에 해치운 적보다 쓰러진 아군이 훨씬 많아졌다. 로젤린은 단신으로
돌파하여 차호트 람가를 잡고자 했으나, 두텁고 견고한 벽은 허물어도 허물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후 장미대의 측면을 연합군이 공격해 왔다. 장미대가 측면의 공격에 고전하는 사이, 람가군은 유유히 자리를
벗어나 또다시 제국군의 약한 부분을 파쇄해 나갔다.
차호트 람가는 현장에서 전략을 곧바로 수정하고 다른 군대와 협공하는 등의 움직임으로 전장의 전체적인 흐름을
장악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이 흐름을 끊어 내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차호트 람가를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야.’
병사들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람가의 군대를 뚫고 차호트 람가에게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힘도,
수도 부족했다.
부우우-
251 화.
로젤린은 전장을 급하게 이탈해서 붉은수레바퀴 깃발을 건 무리에 다가갔다. 가장 선두의 기사가 바이저를 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로젤린은 그 눈동자를 본 순간 흥분으로 들떠 있던 정신이 차분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주위 사람을 의식하며 딱딱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으나, 칼릭스의 눈만큼은 둥글게 휘어 로젤린을 반가워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바닥에 지도를 펼치고 차호트 람가를 제거하기 위해 모의했다. 훈련된 병사들로 이루어진 람가군의
벽은 견고했다. 정석적인 방법으로 싸운다면 반드시 패배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기습 같은
예상외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람가군은 다른 장소에서 전투를 치르는 중에도 계속해서 장미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기습이 통할 리
없으니, 여태껏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붉은수레바퀴군이 그 역할을 맡는 수밖에 없었다.
장미대가 정석적으로 람가군을 상대하는 사이, 붉은수레바퀴군이 람가군의 측면으로 돌격한다. 측면의 방비는
다소 허술하니 그 틈을 뚫고 중앙부의 차호트까지 도달하라는 것이 이번 작전의 표면적인 내용이었다.
준비가 끝나고, 장미대가 다시 전장으로 돌진했다. 이동하던 람가군이 장미대와 충돌했다. 삼만 대 일만.
수적으로도, 힘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장미대의 병사들은 람가군의 주의를 이끌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투했다.
시간이 흐르고, 람가군의 이목이 장미대만을 향했을 때, 붉은수레바퀴군이 람가군의 측면을 쳤다. 차호트 람가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함성과 충돌음에 고개를 틀어 옆을 바라보았다.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깃발을 확인한 그녀가
슬쩍 웃었다.
창처럼 뾰족하게 힘을 응축한 형태로 돌격하는 그들의 행보에, 람가군의 측면이 침입을 허용했다. 차호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이마를 긁적였다.
“아, 되게 놀랐네.”
뜬금없이 제국군 측에서 마인 집단이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마인의 씨가 말랐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일라베니아에서.
하지만 그런 당황도 아주 잠시였다. 측면의 병사들이 차호트와 마찬가지로 평정을 되찾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붉은수레바퀴군이 뚫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람가군이 그들을 포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차호트가 쯧쯧 혀를
찼다.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모두가 강한 게 아니었다. 일라베니아의 마인들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평범한 인간들보다
낫다 정도였다. 힘만 세고 기술이 없거나, 마력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몰라 헛되게 소비할 뿐. 그에 비해
발타군의 마인들은 대다수가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은 전사였다.
마인들을 이만큼 모은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쉽게 뚫을 수 있을 리가. 차호트가 흐뭇하게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부관에게 명령을 내린 차호트는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라 예상되는 기사의 전투를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는
놀랍게도 제법 잘 싸우고 있었다. 무기를 흘리고 베어 나가는 행위가 마치 손가락을 움직이는 듯이 자연스럽고
능숙했다. 그건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검을 휘둘러 왔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검 실력도 유전인가.’
차호트는 남부 관문에서 붉은수레바퀴의 페르탄에게 베였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평범한 인간이라고 방심한
대가가 흉터로 새겨져 있는 곳이었다.
활시위를 놓으려는 순간. 뒷덜미와 가슴 안쪽을 물들이는 오한이 돌연 차호트를 덮쳐 왔다. 많은 전투를 치러 온
전사로서의 감각이 인지에 앞서 차호트에게 경계를 보내고 있었다.
차호트는 빠르게 눈을 굴렸다. 앞뒤 양옆. 말 그대로 사방이 다 막혀 있는 이 상황에서 오한이 느껴질 정도의
위험이라니? 설마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왔단 말인가?
사고의 흐름에 따라 차호트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아주 느릿하게 흐르는 찰나의 시간 속, 그녀가 밟고 선
땅이 새카맣게 뒤덮이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였다.
‘새?’
차호트는 생각과 동시에 활을 하늘로 겨누었다. 위험을 감지한 본능이 몸을 먼저 움직이게 한 것이었다. 그림자를
드리운 무언가의 정체를 목도한 순간, 그녀의 숨이 일순간 멈췄다. 예상을 까마득하게 벗어난 광경이었다.
위를 스쳐 지나가는 독수리 아래로, 한 사람이 빠르게 낙하하고 있었다. 차호트는 다급히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떨어지는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그 사람, 로젤린은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만으로 차호트의 공격을
무산시켰다.
“위다!”
차호트가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마인들이 차호트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로젤린이 떨어지는 게
먼저였다.
쾅!
흙먼지가 일었다. 차호트는 엎어진 채 콜록거렸다. 머리가 세게 부딪쳤는지 어지러워 일어설 수 없었다.
흔들거리는 시야에 공격을 막기 위해 내밀었던 검이 산산조각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위로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그 생각을 끝맺기가 무섭게 차호트가 왈칵 피를 토해 내었다. 그녀는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를 더듬었다가
깨달았다. 갑옷 채로 심장이 꿰뚫려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나의, 완패다.”
기이한 웃음소리를 내던 차호트의 숨이 완전히 멎었다. 햇살 아래에서도 그녀의 눈동자는 빛바래어 흐릿해져
있었다. 가장 강했고, 가장 까다로웠던 적의 죽음이었다.
아군 진영의 한복판에서 지휘관이 살해당했다. 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로젤린에게 다가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로젤린의 압도적인 무력과 마력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강림한 신의 사도와 같이 느껴졌다. 기세에 눌린 연합군의
병사들이 그녀의 주위에서 주춤주춤 물러섰다.
차호트 람가의 가치는 단순한 장군 한 명, 지휘관 한 명 정도에 그치지 않았던 듯했다. 술렁이던 람가군의
병사들이 이내 눈물을 떨어트렸다. 존경하는 무인이자 주인이었던 이의 허무한 죽음에 그들은 전의를
불태우기보다는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로젤린은 죽은 차호트 람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 부근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흘러나온 목걸이에 반지가
걸려 있었다. 로젤린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그녀는 거칠게 목걸이를 뜯어 내었다. 여기저기 흠집 난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반지가 손바닥 안에서 도르륵
굴렀다. 로젤린은 그걸 손에 꾹 쥔 후, 품에 곱게 넣었다.
“후…….”
* * *
우두머리를 잃어버린 람가군은 전만큼의 위력을 보이지 못했다. 그들이 싸우는 전장은 물론이고, 람가군의
활약으로 덕을 보던 연합군까지 주춤하게 되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푸른등불 공작이 기겁하며 만류했다. 리카르디스는 분주히 준비하며 르원에게 갑옷을 가져오라 일렀다.
“정보와 명령을 주고받는 시간이 너무 늦어. 전장에서 바로바로 전략을 수정하고 지시를 내릴 사람이 필요하다.
밤사이 연합군의 공세에 제국군이 찢긴 상태라 이대로는 저녁까지 버티기 힘들어. 차호트 람가가 죽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열세인 상황이고, 조만간 하카브가 나서게 되면 그들의 동요 또한 가라 앉을 테니 지금이 아니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이 없다. 그러니 불필요한 입 싸움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252 화.
리카르디스는 밤사이 뿔뿔이 흩어져 연합군 사이에 고립된 아군들을 모아 차츰 전열을 가다듬어 갔다.
리카르디스의 의도를 읽은 장미대가 적절하게 전장을 휘저으며 연합군을 교란했다. 마치 리카르디스의 움직임을
예상이라도 한 듯 보였다.
작전이 다소 무모한 감이 있다 생각한 사자갈기의 드윗은 로젤린의 도움으로 차근차근 정리되는 상황에 감탄했다.
리카르디스는 어지러운 전장 속에서 침착하게 병사들을 통제하며, 방어에 주력하는 방진을 점점 넓혀 갔다.
병사들로 벽을 친 안쪽에는 신관과 보급 부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관문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이었다. 지친 병사들은 목을 축이고 배를 채웠다. 밀려드는 부상자에게 신관과 군의관들이 달라붙었다.
저쪽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며 성수를 퍼 나르는 대신관 라헤안시조차도 이 정도의 성력을 가지지는 못 했을 텐데.
차기 대신관 후보인가? 병사들이 술렁였다.
연합군, 발타 진영.
차호트는 전쟁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 장수와 장수가 맞붙는 것이 아닌, 집단과 집단의 격돌이라는
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개인의 명예나 자존심 따위를 내세우며 이기지도 못할 싸움에 괜히 덤비는, 코코 사르체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한데 지금의 상황은 차호트가 코코 사르체처럼 행동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체계적인 훈련으로 탄생한 람가군의 방어벽은 그 무엇보다도 강했다. 로젤린이 마인들의 벽을 뚫고 차호트에게
접근할 방법은 없었다. 차호트가 로젤린에게 일대일로 붙어 보자며 덤비지 않는 이상에야.
“……하늘을 날았다고.”
디에즈가 손을 들어 올려 병사의 말을 중단했다. 갑옷을 착용한, 단련된 기사의 무게는 100kg 을 상회했다.
그런 사람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는 괴물 같은 독수리라고는 디에즈가 아는 내에서 딱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불운함은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것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야. 전체적인 전황은 여전히 연합군이
우세하다. 흔들리는 것들을 바로 잡아야겠어. 기껏 차호트가 제국군의 병력을 그만큼 깎아 놨는데, 오늘 안에
중부 관문을 넘어서지 못하면 미안하지.”
“어떻게 하시려고요?”
어제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는 그날의 밤과 오늘의 새벽을 지나, 해가 저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중이었다. 장장
삼십여 시간 동안 벌어진 격전은 양측의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시험하듯 몰아쳤다.
계속해서 새로운 전력을 투입하는 연합군과 달리 제국군은 한정된 병력 내에서 긴 시간을 버텨 내야만 했고, 아침
해가 뜰 무렵 한계가 드러났다. 힘겹게 전투를 치르던 제국군의 한 축이 무너지며 전황이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차호트 람가가 장미대 대장 로즈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는 소식이 퍼지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연합군은
혼란에 휩싸였고, 제국군은 그 틈을 타서 신관과 치료사들을 파견하여 병사들을 보조했다. 로젤린의 시기적절한
활약과 리카르디스의 빠른 판단 덕분에 제국군은 이 전투를 더 이어 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눈에 띄게 전투력을 상실했던 연합군도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하카브를 바르제 방벽 전장의 지휘관으로 맞이하며
반격에 나섰다. 반드시 오늘 안에 중부 관문을 넘어서고야 말겠다는 듯, 아주 매섭게.
충돌음이 한차례 주위를 휩쓸었다. 마지막까지 적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던 칼릭스는 자신에게 달려들던 병사가
나가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어금니대의 대장이 달려와 몸통 박치기를 한 것이었다. 연합군의 병사가 마차에
치인 듯 어딘가로 날아가 박히자 붉은수레바퀴군의 마인들이 칼릭스를 감싸듯 보호했다.
“내 금덩어리!”
칼릭스와 칼릭스의 마인대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슬슬 허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넘어지고, 무기를 놓치고, 평소
같으면 손쉽게 막아 냈을 일격에 피해를 입는 둥.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원초적인 행동조차도 버거워했다.
그야말로 정신력과 고집 하나로 버텨 내고 있는 시점이었다.
칼릭스는 자신을 감싸듯 포진해 있는 마인들이 일시에 행동을 멈춘 것을 알아챘다. 어딘가로 향하는 그들의
시선이 칼릭스의 눈길을 이끌었다. 연합군 측의 인조 마인 부대가 있는 곳이었다.
“으아아악!”
이건…… 위험하다.
칼릭스는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으아아아!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의 고통스러운 소리였다. 그즈음 칼릭스의 마인대가 한 발짝씩 물러났다. 미처 의식하지도
못한 행동처럼 보였다.
칼릭스는 그들을 한번 살핀 후, 다시금 아까의 병사를 바라보았다. 잠깐 눈길을 뗀 사이, 남자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드득, 까드득. 뼈가 자라고, 근육이 팽창하며 찌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체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눈에 띌 정도의 기괴한 변화에 그의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소란스러웠던 전장이 마치 멈춘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싸움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기괴한 생명체는
성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철걱.
정적을 뚫는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제국군 병사가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바닥에 떨어진 병장기를 걷어차고 만
것이었다. ‘그것’의 근육이 갑작스러운 금속음에 반응하듯 꿈틀거렸다.
크아아아!
그때부터 멈췄던 전장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그것’이 괴이하게 울부짖으며 팔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손톱에 제국군 병사들이 가리가리 찢겨 날아갔다. 기괴한 모습의 외형과 갑옷을 입은 사람을 두 동강 내 버리는
믿을 수 없는 힘에서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마, 마수다…….”
253 화.
대치 중이었던 제국군의 병사들은, 그것의 손톱에 아군이 가리가리 찢겨 나가자 모든 투지를 상실했다. 남은 것은
오로지 도망가야겠다는 본능뿐이었다.
“으아악!”
“괴, 괴물이야!”
뒤돌아선 제국군은 너무나도 무력하게 짓밟혔다. 통째로 머리를 뜯어내어 씹어 버리고, 몸으로 깔아뭉개며
들이받고, 팔다리를 잡아 뜯어 버리는 그것의 방식은 연합군 측의 병사들조차 겁을 먹을 정도였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윤리적으로?]
[난들 아나.]
어금니는 마수들의 불길한 마력을 반추하며 계속 중얼거렸다. 정말로 그걸? 그 무서운 걸 어떻게…… 그의
혼잣말은 칼릭스는 감지할 수 없는 마수의 마력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해 줬다.
어떻게, 그걸.
이틀간의 전투가 그들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음이 분명했다. 마수의 힘이 장기간 전투에 지친 육체와 정신력을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순간 오한이 칼릭스를 덮쳤다.
“모두-!”
“에렌!”
에렌은 굳어만 있었다. 아예 소리를 듣지도 못한 것 같았다. 도망치는 병사들을 거스른 칼릭스는 마수가 에렌을
짓뭉개기 전에 당도했다.
‘안 돼.’
어떤 방법을 써도 막아 내지 못할 것이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크아아악!”
마수가 고통스러워하며 팔을 붕붕 휘둘렀다. 화살을 쏘자마자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칼릭스는 마수가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창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움직임이 단순해졌군.’
칼릭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며 창 하나를 던졌다. 일부러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방패에 맞췄던 터라 소리가
크게 났다. 마수의 주의가 그곳으로 향했다.
칼릭스는 바닥을 미끄러지듯 들어가며 마수의 심장에 창을 박아 넣었다. 두터운 근육을 뚫고 심장까지 닿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꿰뚫린 심장은 상처가 난 즉시 몸 안을 거칠게 도는 마력에 의해 수복되기 시작했다.
창을 비틀어 확실하게 타격을 주려 했던 칼릭스는 다시금 발악하듯 팔을 휘두른 마수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커억!”
바닥을 구른 칼릭스는 속이 뒤집어지는 통증에 일어서지 못했다.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이 정도라니. 물소가
들이받은 것만 같았다. 칼릭스는 잠시간 숨을 쉬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피와 침이 섞여 그의 턱을 따라
흘러내렸다.
흔들리고 부예진 시야로 심장에 창을 꽂은 마수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음에도 칼릭스는 움직이지 못했다.
끝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발걸음 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곧 누군가의 발이
칼릭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갑옷이나 부츠 따위가 아닌, 맨발이었다.
칼릭스가 헐떡이며 그를 불렀다. 마카롱은 흘끗 칼릭스를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마수를 마주했다.
칼릭스는 역광으로 그림자가 드리운 남자의 표정이 평소와 다른 것을 눈치챘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은
분노를 곱씹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눈물을 간신히 참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의 턱 근육이 경직되어 움직였다.
마카롱은 눈앞의 괴물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었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분노는 인조 마인들을 만들어 낸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다.
마카롱의 팔에 핏줄이 올라오더니 손톱이 날카로워졌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달려들었던
괴물의 최후는 허무할 정도였다. 마카롱이 괴물의 어깨에 손을 쑤셔 넣자마자 그 큰 몸이 털썩 쓰러졌다. 심장에
창을 박고도 날뛰었던, 그것이.
마카롱이 피가 묻은 손으로 제 얼굴을 닦아 냈다. 속눈썹에 고인 핏방울이 투두둑 흘러내렸다. 눈에서 볼을 지나,
턱으로. 마카롱의 얼굴에 붉은 궤적을 남긴 피가 눈물처럼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쯤에는 원숭이가 달려와 에렌의 등짝을 때리고, 어금니와 까마귀대의 대장이 다가와 칼릭스를 부축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마카롱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칼릭스도 그를 부르지 못했다.
* * *
으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에 디에즈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감각과 차가운 시선이 전장을 훑었다. 갑작스럽게 마수의
기운이 증폭하더니, 기묘한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디에즈에게 상황을 전달받은 하카브는 인조 마인들이 완전히 변이하기 전에 제국군의 중앙으로 몰아넣었다.
연합군에 피해가 오기 전에 먼저 패를 버린 것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제국군 사이에서 위기에 몰린 인조 마인들이
하나둘 비명을 지르며 변이하기 시작했다.
디에즈의 예민한 감각에 전장 여기저기에서 피어오르는 마수의 마력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마른 들판에 불이
옮겨붙는 듯한 빠른 속도였다.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 인조 마인들은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울부짖었다. 위협적인 모습의 일면에는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또한 공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몸을 뒤틀고, 눈물을 흘리며, 제국군을 찢어발겼다.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고 일라베니아로 나아가는 변이자들에게는 아주 뚜렷한 목적이 있는 듯 보였다.
디에즈는 그것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들의 몸 안쪽에서 사납게 요동치는 감정이 마력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디에즈는 거친 감정의 격류에 몸을 맡겼다. 그는 과거의 파편들과 함께 인간들을 짓밟으며 천천히 나아갔다.
디에즈는 날아오는 무기를 건틀렛으로 쳐 내고, 맨손으로 병사의 목을 잡아 뜯었다. 눈알에 피가 튀어도 눈
깜짝하지 않았다. 중부 관문과 그 너머를 향하는 집요한 시선에는 똘똘 뭉친 집념이 느껴졌다.
무너져, 무너져라.
254 화.
무서운 맹공격이 이어졌다.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죽음조차 불사하는 발타의 병사들은 괴이한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변이자들 때문에 혼란에 잠긴 제국군에게 영리한 타격을 가하며 마지막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허억, 헉. 자신이 내뱉는 숨소리가 귀에서 울리는 듯 선명하고 크게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힘겹게 연합군의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앞으로 넘어질 뻔한 그녀를 에버하르트가 겨우 지탱했다.
괴물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승리를 목전에 둔 연합군의 병사들은 장시간의 전투를 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제국군을 밀어붙였다.
‘목말라.’
‘쉬고 싶어.’
허억, 숨을 크게 들이쉬자 차가운 공기가 목구멍 안쪽에 쩍쩍 달라붙었다. 감각이 하나씩 무뎌졌다. 코를 찌르던
역겨운 피 냄새가 사라졌다. 여기저기 찔리고 베인 상처들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눈으로 전장을 보면서도
이것이 무슨 광경인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이 몽롱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또 한 명.
‘뭘 위해서, 우리는…….’
한계에 몰린 정신이 발목을 붙들려 했지만, 숨을 쉬는 것처럼 훈련해 왔던 지난날의 본능이 레티시아의 몸을
이끌었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 살짝 고개를 틀어 피하고, 상대의 움직임을 읽어 내 공격을 예측하고,
막아 내고, 죽이고, 피하고, 죽였다.
[레티시아.]
[곧…….]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레티시아가
다리에 힘을 주고 쓰러지는 몸을 겨우 지탱했다.
덜그럭. 금속음이 가까이서 나기에 바라보니, 발 위로 검이 떨어져 있었다. 정신을 잃은 찰나 떨어트린 것이었다.
주울 힘조차 없었다. 레티시아는 비틀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인상을 쓰고 달려드는 살육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상대를 찢어발길 듯한 사나운 악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눈앞에 있는 적들이 아닌, 사각에서 오는 본능의 경고를 감지했다. 날카롭게 회전하는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였다. 자신을 향하지 않았으나, 옆에는…….
캉!
“레티시아!”
“아아악!”
레티시아는 흐릿한 감각을 난폭하게 비집고 들어오는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작은 도끼가 건틀렛을 뚫고 살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레티시아는 덜덜 떨었다. 이보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적은 있지만, 이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좁은 혈관과
신경을 가시 줄기가 파헤치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레티시아는 헐떡거리며 헛구역질했다.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반응에서 이것이 단순한 부상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가 급하게 그녀의 건틀렛을 벗겨 냈다. 피부 바로 아래 혈관들이 튀어나올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파편’
이었다.
“누가……!”
“허, 윽…….”
핏줄이 터진 레티시아의 눈이 붉게 변했다. 눈물이 줄줄 흐르고 한계를 넘은 고통이 온몸을 마비시켰다. 짐처럼
끌려가던 레티시아는 주위에서 픽픽 쓰러지는 병사들을 바라보면서도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에 비친
광경을 멍하니 되새길 뿐이었다.
‘…….’
[레티시아.]
[곧…….]
로젤린의 입이 움직였다.
[밤이 온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던가. 붉은 석양빛은 사라지고 밤의 장막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놋쇠저울과 소금바위,
마른가시나무, 발타와 동부 전선, 붉은수레바퀴령까지의 길고 험난한 여정과 모래성 같은 중부 관문을 지키며
필사적으로 버텨 낸 2 주의 시간. 그 간절한 기다림의 끝이 찾아왔다.
훅, 바람이 불었다. 무너진 방벽 위의 깃발을 흩날리게 하고, 에버하르트의 눈물을 얼어붙게 만들며, 땅에 닿아
있는 레티시아의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이 일대 모두를 휩쓸 듯 몰아치는 거대한 돌풍이었다.
밤바다를 표류하는 배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던 구름이 떠밀렸다. 어두웠던 땅 아래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하얀 보름달에서 눈이 시릴 정도의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빛과 함께, 조용한 변화가
피어올랐다.
“……로젤린.”
그 힘은 그때처럼 다시금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때처럼 고통스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전장 위로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디에즈는 자기도 모르게 검을 떨어트린 채,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라베니아를 향하던 과거의 분노가
로젤린의 힘에 이끌리듯 변화하고 있었다. 수백 년의 원념, 마수의 결정은 어떤 보석보다 단단했고, 그
무엇으로도 깨트릴 수 없었다. 디에즈는 최소한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
디에즈의 눈앞에 있던 변이자 한 명이 갑작스럽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털썩, 육중한 무언가가 땅에
충돌하는 소리가 하나둘 늘어났다. 변이자들이 기절하듯 쓰러졌다.
무엇으로도 깨지지 않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흘러내린 그것은 이내 땅으로 녹아내렸다. 바람에 섞여
불어오며, 치달았다. 달빛 아래 찬란히 비산했다.
오로지 마력을 가진 이들만이 느낄 수 있었다. 눈이 시큰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 감각의 세계에 그려졌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에는, 일라베니아를 향하던 과거의 원념들이 모두 녹아, 멈춰 쓰러져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디에즈의 손이 잘게 떨렸다. 우리가 바라던 결말은 이게 아니지 않았나? 일라베니아는?
일라베니아의 죽음은…….
디에즈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종래에 그의 시선은 전장이 아닌 제 발아래를 향했다. 그곳에는 피 묻은
자신의 검이 있었다. 한 번 떨어트렸지만,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손이 닿는 그곳에 여전히 있었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장 먼저 피고, 가장 나중에 진다. 지금의 세대에는 퇴색되어 버린 지난날 ‘축복의 밤’의 상징이었다.
디에즈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발아래로 녹색과 흰색의 연약한 생명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하나, 셋, 일곱,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나 무성하게. 널브러진 무기와 시체의 옆에 자라난 꽃은 피가 굳어
검어진 땅을 온통 하얗게 뒤덮었다.
어느새인가부터 금속음이 들리지 않았다. 마력을 가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도 멈춰 서 있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만이 공간을 울렸다.
255 화.
그 정적인 공간 속. 갑작스럽게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수만의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의
행방을 찾았다.
무너진 성벽 위에 한 남자가 있었다. 피와 재, 진흙과 오물, 시체가 늘어선 광경에 그는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대신관의 의복과 금박을 입힌 화려한 하프까지.
제국군의 병사들은 남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대신관 라헤안시였다. 그의 손가락이 유려하게 흘렀다.
비현실적인 신의 세계 속. 사람들은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세간에 떠돌기 시작했던 ‘예언’을 상기했다.
이델라브힘의 사자, 독수리의 가호를 받는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와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어둠을 걷어
내고 대륙을 빛으로 물들일 것이라는 내용의.
삐이이익---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창공을 찢으며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독수리가 하얀 밤과
검은 달빛을 가로지르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도무지 현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 * *
로젤린은 조용한 공간을 눈에 새기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멍하니 말을 꺼내었다.
“조용하네요.”
“그런데 이런 거였네요.”
* * *
늦은 밤부터는 부슬비가 내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검은 달빛이 수십, 수백 갈래로 쪼개져 비산하는
광경은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오랫동안 기억할 광경이었다.
각국의 사령관들이 모이는 대회의가 열렸다. 연이은 승리에 취해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낭패가 서려 있었다.
“그러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라도 할까요? 대체 무어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리카르디스.’
그렇게 연합군은 전의와 무기.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두 가지를 잃었다. 제국군보다 우세한 병력만큼은 지켜 내야
했다. 코앞이었다. 일라베니아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딱 한 발짝만 더 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연합군의 사령관들도 그 때문에 당장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어물쩍거리는 것이었다. 두렵긴 한데, 아깝기도
하니까. 온전히 줏대를 세우지도, 완전히 휩쓸려 나가지도 못하는 개만도 못한 종자들 같으니. 하카브는 속에서
분노를 끓였다.
선동이 어느 정도 유효했던 것인지 하카브의 의견에 옹호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났다. 일라베니아를 배신했던
힐리사고도 입장이 입장인 터라, 전쟁을 재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맞는 말이었다. 축복의 밤으로 일라베니아의 죄의 증거가 사라졌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과거의 죄마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일라베니아가 있는 한 영원히 새겨져 있을 낙인이었다. 그러니 일라베니아의 횡포 아래
고통받았던 연합군이 전쟁을 지속할 명분은 여전히 있는 셈이었다.
“총사령관님!”
발타의 병사가 막사의 천을 헐레벌떡 지나쳐 들어왔다. 하카브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그는 말을 듣기도 전에
일어나 병사를 밀치고 성큼성큼 걸었다.
막사의 입구를 나서자 쨍한 햇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하카브는 손을 들어 올려 그늘을 만들며 눈을 찡그렸다.
빛에 차츰 익숙해진 눈이 낯익은 이의 얼굴을 담아 냈다.
“하카브 위 리비타.”
발타 왕국의 3 왕녀, 간제 위 리비타. 그녀가 전쟁터가 아닌 궁전이 어울릴 법한 정복 차림새로 연합군의 주둔지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하카브의 시선이 간제에게서 벗어나, 그녀의 곁에 서 있는 브네학스 아문과 포위하듯 둘러싼 발타의 병사들에게
닿았다.
“지고한 신분으로 백성을 겁박하여 불법적인 실험을 자행한 죄, 탐욕에 눈이 멀어 피를 나눈 형제, 자매를
살해한 죄, 과를 위조하여 지엄한 리비타의 법도를 어지럽힌 죄, 힉살라를 음독하여 시해하려 한 죄. 수백 년간
지속된 평화 협정을 깨어 대륙을 도탄에 빠트린 죄.”
“죽음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무거운 죄로다. 간제 위 리비타가 지고한 힉살라의 명령을 받들어 이 자리에
왔노니.”
간제가 손을 뻗었다.
“죄인을 포박하라.”
하카브의 친위대조차 하카브를 감싸지 못했다. 힉살라의 명령 하에만 움직이는 아문의 가주가 간제와 함께하고
있었으며, 과의 문장이 찍힌 서신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이에 하카브가 끌고 온 발타의 병력도 간제의 휘하에
흡수된 상태였다. 친위대 몇 천 명 정도로는 그 수에 대항할 수 없었다.
‘한 발.’
그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고작 한 발짝 남았는데.’
거친 남자들의 손이 무자비하게 하카브를 붙잡아 무릎을 꿇렸다. 간제는 그런 하카브의 모습을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 * *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하카브가 공식적으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이후, 남은 연합군은 더욱 거센 혼란에 휩싸였다.
발타의 새로운 사령관, 간제 위 리비타가 이번 전쟁에서 손을 떼겠다 공표했을 뿐 아니라, 발타의 수족이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마람 왕국 또한 병력을 물리겠다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병력의 25 정도가 뭉텅 떨어져 나간
셈이었다. 연합군으로서도 위기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분열이 심화 되었다. 발타와 마람까지 빠진 지금, 중부 관문 공략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 더 나아가
중부 관문을 넘어설 수는 있을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256 화.
발타와 마람의 병력이 사라진 이후 가장 강경한 주전파가 된 힐리사고의 사령관은 그 점을 끝없이 주지시키며
타국의 사령관들을 설득했다.
“축복의 밤만 아니었더라도 바르제 방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틀간의 전투로 제국군이 입은 피해는 몇 시간
정도의 유예로 수복될 만한 것이 아니고, 발타와 마람군이 빠졌으나 여전히 연합군의 수가 우세합니다. 다 이긴
전쟁이라 이 말입니다. 헛된 신의 위명에 겁먹지 마십시오.“
회의 이후. 흩어져 각자의 진영에 도착한 연합군의 사령관들은 본 적 없는 새로운 모양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받았다.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뭐, 이, 미친.”
미노가 강 전투로 사망한 힐리사고의 첫째 왕자를 대신하여 전장에 나와 있는 둘째 왕자는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 * *
마인을 학대하는 풍습을 거슬러 올라간 역사에는 일라베니아의 치부가 새겨져 있었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아니다,
사실무근이다, 증거 있냐, 발뺌했지만 발타와 힐리사고를 포함한 대륙의 여기저기에 그들의 만행에 대한 단서가
조금씩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단서일 뿐, 정확한 증거가 되지 못했다. 수백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목격자나
확인 가능한 증거가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일라베니아 황실이 여태껏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황실의 입장과 다르게 반응하는 자들도 있었다. 탐욕스러운 황실 아래 굶주렸던 수많은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일라베니아 황제가 ‘신의 아들인 내가, 이델라브힘의 뜻을 받들어 너희들을
굽어살피겠다.’ 하며 너희들도 영광된 신성 제국 아래 살아가는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라-세금을 많이 내라-
고 얘기했던 그 긴 세월들을.
이델라브힘을 맹신하는 마음 아래 묻어 두었던 황실에 대한 불신이 불어오는 바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자는 닫힌 커튼을 살짝 열어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둑한 바깥에서 횃불의 무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와아아,
함성과 무언가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 황실에 대해 욕설을 지껄이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금정원의 클로에. 백작위를 계승받은 레이몬드의 부인이자, 리카르디스의 가신인 그녀는 황제파 중에서도
세력이 거대한 어느 귀족과 마주하는 중이었다.
“이파리를 뜯어 낼까. 굵은 가지를 쳐 낼까. 그것도 아니면 굵은 기둥을 잘라 버릴까. 하지만, 밑동만 남는다
하더라도 긴 세월 뒤에는 다시 가지를 뻗고 푸른 이파리로 그늘을 드리우겠지. 어쩌면 좋을까. 그대라면 어떻게
하겠나?”
“……백작 부인.”
남자는 지금만큼 ‘뿌리’의 존재를 뼈저리게 실감했던 적이 없었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클로에를 노려보았다.
클로에가 사뿐히 걸어와 공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의미 없는 대화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각하. 유예 기간은 충분했던 걸로 압니다. 이제 선택해
주셔야겠습니다.”
클로에가 내놓은 선택지란 딱 두 개뿐이었다. 그 선택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위험은 따라오게 되어 있었다.
공작은 고개를 숙여 손등에 이마를 댄 채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황실은 전쟁을 치르며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신에게서 받은 절대적인 권력과 나라를 다스리는 거대한 무력을
잃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명으로 점철된 역사뿐이었다.
황실은 백성을 버렸고, 백성도 황실을 버렸다. 나라의 틀을 유지할 수 있는 수백 년의 유대감은 산산조각 나
뾰족뾰족한 형태로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공작도 그를 모르지는 않았으나 반란이 실패하게 될 시의 위험성이
너무 높았다. 그 결말은 단두대뿐일 테니.
“무척 신중하시군요.”
클로에가 뒤에 있는 남자에게 손짓해 무언가를 가져오게 했다. 잘 접혀 있는 손수건 뭉치였다. 공작의 얼굴에
의문의 빛이 어렸다. 하지만 클로에가 손수건을 테이블 위로 하나하나 펼쳐서 나열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공작의
얼굴에는 의문이 아닌 경악이 대신 떠올랐다.
공작은 말을 잇지 못하고 아연하게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총 스물네 장의 손수건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클로에는 태연하게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하고는 다시 남자를 마주했다. 그녀가 느긋하게 찻잔을 집어 들어
공중에서 기울였다. 주르륵 아래로 흘러내린 찻물이 그녀의 치마 끝자락을 물들였다.
“어머, 차를 흘려 버렸네요.”
클로에가 눈을 접어 생긋 웃었다.
“감사드립니다, 각하”
* * *
리카르디스도 전쟁이 발발한 처음부터 반란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황실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이 공고히 쌓여
있던 그때 반란을 저질렀다간 고꾸라지게 되는 것은 도리어 리카르디스 쪽이었을 것이다.
한데 전쟁이 진행되는 일련의 흐름이 일라베니아를, 정확히는 일라베니아의 황실을 거세게 흔들었다.
리카르디스는 발타에서 간제와 동맹을 맺은 이후, 자신이 일평생 겨뤄 왔던 황실에서의 사투와 이번 전쟁을 한
번에 끌어내릴 방법을 찾았다.
몇 주 전, 동부전선.
[축복의 밤을 기점으로 연합군이 분열될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려는 자들도 있을 테고, 이 땅에 축복을 불러온
새로운 신의 아들에게 검을 겨눠도 되는가? 고민하는 자도 있을 것이고, 그와 상관없이 일라베니아를
무너트리겠다는 열성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자도 있겠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함께 나아가던 이들이 각자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전쟁은 일시적으로 멈추게 되어 있다.]
‘축복의 밤’을 중부 관문을 보호하는 방벽으로 쓰겠다는 리카르디스의 계획을 들은 클로에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나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축복의 밤을 띄운다고 해도, 일라베니아가 과거에 저지른 죄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인들을 살해하여 이
땅을 불모지로 만든 것도 모자라, 그 사실을 은폐하고 수백 년간 대륙을 기만한, 그 죄가.
[일라베니아를 무너트린다.]
[이거…….]
[될 거 같네요.]
257 화.
[그렇지?]
수도라는 공간으로 한정 짓는다면 리카르디스 휘하의 세력보다 황제의 세력이 아직 더 강했다. 황제의 수족을
잘라 내고, 포섭하는 일이 반란의 시작이 될 것이다.
평화로운 일라베니아였다면 불가능했을 테지만, 지금은 전란의 한가운데였다. 일라베니아 제국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황실에 절개를 지킬 이들은 많지 않았다.
[대신관 라헤안시가 일라베니아의 죄를 입증할 것이다. 그를 통해 일라베니아를 둘러싼 추문이 진실임을 확인한 2
황자 리카르디스가 일라베니아의 땅 위를 살아가는 백성들을 위해 반기를 들었다는 것쯤으로 해 두지. 비록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미는 용서 못 할 죄를 저지르는 것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노라 하고 말이야.]
[아무튼, 축복의 밤으로 전쟁이 일시적으로 멈췄을 때, 황실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음을 선포한다.]
비슷한 시각, 리카르디스의 서신을 받은 연합군의 세력 중 이탈하겠다 말하는 이들이 갑작스럽게 늘어났다.
힐리사고의 왕자는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아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단체로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 짜고 치는 연극을
하는 기분이었다.
서신 위에는 힐리사고와 이웃한 왕국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갑작스럽게 이들에게서 연락이 올 이유를 찾지 못해
힐리사고의 왕자는 혼란스러웠다.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이 나라에서 왜 나에게? 그는 황급히 서신을 열어
펼쳤다.
첫마디는 단조로운 인사말이었다. 차근차근 글자를 읽어 내리던 남자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때의 평화 협정을…….]
“젠장!”
평화 협정이란 과거, 서로가 서로의 재화를 탐했던 전란의 시대를 거치며 만들어진 약속이었다. 그때의 일로
대륙의 인구가 반이 줄었으며, 불태워진 대지는 황폐해지고 썩은 시체들로 전염병이 도는 등. 축복의 밤이
소실되지 않았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보다도 더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힐리사고의 왕자님, 대륙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일라베니아를 단죄하고자 하는 대의를 위해 전쟁에 나선다고
하셨죠. 그런데 일라베니아가 망했다는데 왜 안 돌아오십니까? 혹시, 일라베니아를 단죄하는 것보다 전쟁으로
얻을 이득에 더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시겠죠? 저희 왕국이 설마 침략자랑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고 있었던
겁니까? 세상에, 너무 무서워서 다른 나라랑 손잡고 힐리사고를 없애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라는 뜻이었다.
왜 연합군에서 군대가 하나둘 이탈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도 비슷한 내용의 서신을 받았으리라. 왕자가
이를 갈았다.
‘어? 그런데 뭐가 좀……?’
“…….”
준비해 뒀군.
왕자의 시야에 아까 그가 찢어발긴 서신이 들어왔다. 작은 조각에 글자가 빼꼭하게 새겨져 있었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 * *
정복과 적대 행위의 금지, 평화 관계의 회복 등. 본래라면 배상청구권에 대한 의논이 필요했을 테지만, 애초에
새로운 나라의 탄생으로 끝난 전쟁이니만큼, 일라베니아의 입장으로 침략자들에게 요구할 권리도 없었다. 하지만
승자와 패자가 없는 싸움이었기에 모두가 크고 작은 피해를 떠안는 셈이었다.
관문의 감옥 안에는 중요한 인물 몇몇이 갇혀 있었다. 디에즈와 검은달의 간부 케틀린, 그리고 평화 협정을
체결한 이후 발타로부터 처분을 양도받은 발타의 왕자, 하카브가 각각 다른 층에 수감되어 병사 수백 명의 삼엄한
감시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일라베니아 출신인 디에즈와 케틀린은 당연히 신생 왕국 리쉬에의 권한이었지만 하카브는 발타의 왕자였다.
그것도 힉살라를 시해하려고 했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
하지만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물을 사람이 필요했다. 간제와 동맹을 맺었을 당시, 그녀는 전쟁을 일으킨
주범에서 발타를 빼는 대신 하카브의 이름을 써 넣으라 했다. 그때의 약조와 더불어 라헤안시가 힉살라에게
끈덕지게 군 덕에 그 권한은 리쉬에 왕국의 몫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지하 감옥의 최하층. 그 중앙에 몇 겹의 굵은 쇠사슬과 거대한 족쇄로 결박되어 있는 남자가 보였다. 찬란하게
빛나던 금색 머리카락은 재와 먼지, 피가 엉겨 탁하게 변해 있었다.
“…….”
리카르디스는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서로 검을 겨누던 사이지만, 이런 장소에서 그를 마주하자 착잡한
마음부터 올라왔다.
“디에즈 레예 일라베니아.”
리카르디스는 디에즈가 단순히 일라베니아라는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왕조를 무너트리고 새로 세운다는 단순한 논리 하나로 디에즈가 납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로젤린의 얼굴을 기억했다. 여정의 끝을 맞이한 모험자는 비로소 검을 놓고 꽃향기가 실려 온
바람을 음미하고 있었다.
258 화.
적막만 남은 공간에 하얀 눈송이가 둥실둥실 떠다녔다. 리카르디스의 망토 끝자락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눈송이는
나풀나풀 날아, 이내 철창 안까지 굴러갔다. 디에즈의 눈동자에 그것이 비쳤다.
눈이 아니었다. 축복의 밤과 함께 피어난 리쉬의 꽃잎이었다. 디에즈는 결박된 상태로 불편하게 고개를 숙여
바닥에 있는 눈과 꽃, 바람의 잔향을 들이마셨다. 그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아하.”
리쉬, 정식 명칭 리쉬에.
삐이익---
26
“전쟁이 끝나면 무너진 건물과 피해가 알아서 복구되는 것이었나? 축복의 밤이 그런 기적까지 일궈 냈던 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
지휘관들은 쌓여 가는 서류와 리카르디스의 닦달에 웃음을 완전히 잃어버리다 못해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그렇게 리카르디스의 보이지 않는 채찍질에 펜잡이들이 데굴데굴 구르는 사이, 칼잡이들도 방 안에서 뒹굴뒹굴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수십 일간의 대장정. 그간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 병사들은 지쳐 쓰러져 먹고 자기만
했다.
그렇게 헤사가 입에 무언가를 넣어 주고, 리카르디스가 찾아와서 따뜻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기를 몇 차례.
끙끙 앓아 가면서 수십 시간 잠만 자던 로젤린이 깨어났다. 어둑한 밤이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퉁퉁, 캉캉. 무언가를 두드려 대고, 쨍그랑, 뭘 깨트리고 와하하 하는 웃음소리까지.
로젤린은 침대에 앉아서 몇 분간 그 요란스러운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먹고 죽자!”
기껏 살아난 병사들이 죽자고 소리치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방벽은 무너지고, 땅에는 아직 화살이 꽂혀
있고, 상처도 다 낫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탁, 무언가가 풀리며 마음이 둥실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잡고 있지 않으면 날아갈 만큼이나 가벼워졌다.
이제야 무언가가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로젤린은 동동 뜬 마음을 안고 걸음을 옮겼다.
“어이, 거기 아가씨.”
“몸은 좀 어때.”
고대부터 내려오는 문헌에는 축복의 밤 이후, 마력을 가진 자는 대륙을 소생하는 대가로 힘을 완전히 잃는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로젤린은 여전히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 마인 정도에 불과하지만, 문헌과는 다른
결과였다. 아마도 본래 가지고 있던 마력의 양이 상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로젤린과 마카롱은 추측했다.
마카롱이 안부를 집요하게 묻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로젤린의 마력 양이 변화했다는 이유뿐
아니라, 그녀가 변이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금기를 저지른 로젤린은 완전한 ‘그것’으로는 돌아가지 못했지만, 부분적으로 변이하여 일상생활에서 다양하게
사용했다. 손이 미끄러워 잼 뚜껑이 안 열릴 때 손바닥 가죽을 빳빳하게 변이한다든지, 편지 봉투를 열 때
페이퍼 나이프가 없어서 손톱을 날카롭게 한다든지 등의 용례가 그러했다. 한데 축복의 밤의 의식에 마력을
쏟아부은 후, 그 변이 능력조차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괜찮아.”
로젤린이 그새 습관이 된 대답을 내뱉자 마카롱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붙잡았다. 볼이 눌려 입이 부리처럼
나왔다. 그가 로젤린의 볼을 밀가루 반죽이라도 되는 양 조몰락거렸다.
로젤린은 금기를 저지르고 난 후, ‘그것’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자각했던 때의 당황했던 제 감정을
반추했다. 물론 지금도 불안한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가 훨씬 무서웠어.”
“전쟁이 끝났잖아.”
“그래서요.”
259 화.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마카롱은 인상을 찌푸린 채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어떤 감정이 아주 짧은 순간 머무르다 스쳐 지나갔다. 그게 무엇일지 결론을 내리기 전, 마카롱이 붙잡고
있는 로젤린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그가 흐응 하는 소리를 냈다.
마카롱이 손을 뻗어 로젤린의 머리를 마구 헤집듯 쓰다듬었다. 으어, 아으. 로젤린은 마카롱이 쓰다듬는 대로
휘둘리다가,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머리카락과 마카롱의 손으로 시야가 가려져 살짝 미소 짓고
있는 입매만 얼핏 볼 수 있었다.
마카롱은 로젤린의 머리를 새집으로 만들고 곧바로 뒤돌아섰다. 로젤린이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있는 곳에 같이
가자 청했지만, 그는 할 일이 있다며 거절했다.
“껄껄껄!”
“하하하!”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바깥과 다르지 않았다. 도리어 추운 바깥이 아니라 그런지 웃통을 훌렁 벗은 채
춤을 추고 난리도 아니었다.
구석에는 라고슈 부족의 수장들과 라헤안시, 그리고 라헤안시의 뒤처리 담당인 베르움이 카드 게임을 벌이는
중이었다. 라헤안시와 베르움은 그들보다 체구가 두 배는 큰 제르타예들을 상대로 당당하게 사기를 치며 도박판을
흔들고 있었다.
“이건 사기야!”
“아까 내가 버린 패인데!”
“잘못 보신 게 아닐지요? 본인의 실력 부족을 사기라 일축하다니. 신께서 지켜보시는데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신께서 지켜보시는데 손장난하고도 저렇게 떳떳하다니. 베르움이 누구의 영향을 받아 타락했는지 너무 투명했다.
귀를 의심하던 귈테가 곧 셍고의 수장을 경멸하는 듯 바라보았다. 패가망신이 코앞으로 다가온 셍고·제르타예와
라고슈 지원군 일가의 고뇌는 전혀 닿지 않는 듯, 방의 중앙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탁자 위에서 레이몬드가 만돌린을 연주하고 그의 형인 아렌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로젤린을 발견한
레이몬드가 화색을 지으며 탁자 위의 무언가를 발로 걷어찼다.
“빨리 마셔!”
“부상 입었다는 작자들이 술을 퍼먹고…… 저렇게 심하게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라, 아니지 기분이
아니지! 그러면 안 되지. 부상자 막사에서도 비슷한 꼴을 봤더니 속이 다 뒤집어져! 기껏 살려 놨더니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 해!”
하, 한숨을 쉰 리카르디스는 테이블 위로 올라가 춤추기 시작한 에버하르트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미소와 해괴망측한 몸놀림들이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리카르디스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미간이 여전히 찌푸려져 있긴 했지만.
* * *
리카르디스의 보이지 않는 채찍질 아래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칼릭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릭스는 전투의
피로를 다 풀지도 못한 채 리카르디스와 푸른등불 공작의 수족이 되어 다양한 일을 빠르게 처리해 냈고, 그런
그를 몹시 탐내는 푸른등불 공작의 시선을 내내 견뎌야만 했다.
겨우 일을 끝마친 칼릭스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는 참에 길레드와 마주쳤다. 그에게 인사하려던
칼릭스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길레드의 눈빛이 마치 석 달간 쫓은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
“한 삼십 년은 놀고먹기만 해도 되겠지?”
황홀함에 젖어 얘기하는 여자의 눈은 칼릭스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칼릭스는 울컥했다. 자신은 까마귀의
금은보화도, 방이 두 개 딸린 어금니의 집도 아니었으며, 삼십 년의 방탕한 삶을 보증하는 원숭이의 무언가도
아니었다.
전쟁이 끝났다. 완벽한 승리도 아니지만, 최악의 패배 또한 아니었다. 모두가 기뻐하던 때에 유독 기뻐하던
이들이 있었으니, 꿀이 흐르는 붉은수레바퀴 영지에서의 삶과 자유…… 와 많은 돈을 약속받은 마인 부대의
일원들이었다.
“저어 백작님…….”
울컥해서 뭐라 하려던 칼릭스는 뒤에서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몰래 출진해서
단단히 혼난 에렌과 그의 친구 네 명, 칼릭스가 사고뭉치 단이라고 부르는 이들이었다.
“……물론이지.”
까마귀와 원숭이, 어금니가 뒤에서 어? 하며 의문스러워했다.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를 대할
때랑 반응이 다른데…….
그러면 같겠냐.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반박한 칼릭스는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는 사고뭉치 단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 주었다.
그들은 단순히 붉은수레바퀴령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기뻐하는 게 아니었다.
마인들이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일라베니아와 마인에 대한 과거의 비밀이 밝혀지며 사라졌다. 여태껏
마인을 핍박하던 악습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야 없으나, 차츰 변화해 나갈 것이다. 리쉬에 왕실이 그런 흐름을
주도해 나갈 것이며, 이들은 점차 발길이 닿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원하는 곳에, 그 어디든 갈 수 있으리라.
그런 마인들이 붉은수레바퀴령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에렌이 기뻐하는 이유는 그저 ‘마인’이 필요해서 계약을 하자 말했던 칼릭스가 더 이상 마인이 필요해지지 않은
시점에도 전과 다름없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사람들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태도가
달라지곤 하니까. 마인들은 약자의 입장으로서 그런 이들을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칼릭스는 어른 마인들 또한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의 주위를 떠돌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말하는 본새가 기분
나빠서 사납게 대했을 뿐이었다.
260 화.
칼릭스는 흘끗 옆을 보았다. 에렌이 그의 눈치를 보며 반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완벽히 행복한 미소를
짓기에는 아직 안심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전후 처리로 바빠서 마인대를 별로
신경 써 주지 못했더니 자기들끼리 별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모양이었다.
‘쉬기는 글렀군.’
어른 마인들이 활짝 웃으며 또 인간 가마를 태우려고 들었다. 칼릭스는 필사의 힘으로 싸워 자신의 두 다리로
걸을 권리를 얻어 냈다.
그렇게 이동하던 중, 마인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멈춰 섰다. 한곳을 바라보는 그들의 행동에서 칼릭스는 기시감을
느꼈다. 전장에서 마력을 감지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동료 마인들도 널린 이곳에서 단순히 작은 마력에
이들이 이렇게 반응할 리 없었다.
여러모로 위험한 인물이기에 추적은 불가피했다. 추적대를 따로 구성하려던 차, 사자갈기의 드윗이 나서서
디에즈를 쫓겠다 말했다. 리카르디스는 그 의견을 수용하여, 사자갈기군에게 디에즈의 추적 임무를 맡겼다. 수백
마리의 사냥개가 밤을 찢는 울음소리를 냈다.
* * *
하얀 밤하늘에 검은 달이 떴다. 사람들은 쏟아지는 아름다운 검은 달빛과 겨울의 추위 속에서 피어나는 강인한
생명력을 목도했다. 전설처럼 전해져 왔던 ‘축복의 밤’이 수천, 수만을 넘어선 대륙 모든 이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축복의 밤이 전쟁에 어떤 효과를 끼칠지 그때는 모르는 일이었으나, 모두가 그 빛에서 희망을 느꼈다.
오로지 황실만이 검은 달빛에 분노했다. 일라베니아가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황실은 2 황자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더 집중했다.
황제의 명령에 군대가 소집되어 ‘반역자’ 리카르디스를 처단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황성을
둘러싼 짧은 교전이 발생했다. 그리고 채 하루가 넘어가기도 전에 일라베니아 황실이 전복되었다. 내부에서
황제를 지키는 가문 중 가장 힘이 강한 ‘사자갈기’의 배신 때문이었다.
급격한 흐름에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했지만, 백성들을 아끼고 위하는 리카르디스가 새로운 왕국의 통치자가 되어
침략자들을 몰아내었다는 사실에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도리어 사람들은 리카르디스가 패륜아라는 오명을 감수하고서라도 반역을 저지를 수밖에 없게끔 상황을 몰고 간
일라베니아 황실의 죄와 황제의 무능을 손가락질했다.
한 명은 일라베니아의 백성들을 살려 보겠다고 적진의 깊숙한 한가운데까지 침투할 정도로 위험을 무릅쓴 반면에,
그 아비라는 작자는 편안한 황성 안에 박혀 있다가 일라베니아가 위험하다는 소리에 수도를 버리고 도주하려 했다.
수도 티가드의 성문이 열렸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의 상징인 깃발이 보이자 사람들은 손을 번쩍 치켜들고
고함을 고래고래 질러 댔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가슴 벅차도록 희망찬 기쁨을 안고 웃고, 울고, 노래했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그 어느 곳보다 출입이 까다로운 수도 티가드의 성벽과 황성의 문을 지났다.
일라베니아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기사와 병사들을 마주했으나, 그들은 어떤 방해도 하지 않았다. 반역자
리카르디스가 아닌 새로운 왕을 맞이하는 자세로 경의를 표하며 무릎을 꿇을 뿐이었다.
일라베니아 황제의 상징인 금강석 성에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도달했다. 압도적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거대한 성이 리카르디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천천히 숨을 쉬며 그 모습을 훑었다.
한데 지금은 어떻게 된 일인지. 언제나 무거웠던 어깨가 아주 가벼웠다. 눈앞에 보이는 금강석 성의 모습이
평소와 달라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계단에는 아직 거뭇거뭇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정렬된 조각상은 부서지고, 유리창은 깨져 있고, 나무는 불탄
채 스산한 분위기를 조성 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리카르디스!”
곧 뒤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3 황자 틸렌드의 목소리였다. 헝클어진 머리, 흐트러진 옷차림새, 불콰한
얼굴까지. 누가 봐도 취객 같은 남자가 금강석 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리카르디스에 대한
욕과 저주를 끊임없이 내뱉었다.
틸렌드가 계단에 접근하려 하자 병사들이 황급히 나섰다. 틸렌드는 붙잡히기도 전에 다가오는 병사들의 얼굴에
주먹질하며 패악을 부렸다.
틸렌드는 화들짝 놀라며 계단에서 급히 발을 떼어 내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검을 그에게 겨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세워서 자신의 얼굴 앞에 두었을 뿐이었다. 틸렌드는 스스로의 추태에 얼굴을 붉혔다.
눈이 마주친 순간 틸렌드는 기사들이 들고 있는 검보다도 선명한 무형의 위협을 느꼈다. 검은 머리가 하얀 계단을
불태우는 검은 연기처럼 흩날렸다. 그리고 바람이 잦아들자, 아까 전 마주했던 녹색 눈동자는 다시 주인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문을 열어라.”
쿠구궁…….
일라베니아가 쌓아 온 역사만큼이나 두텁고 무거운 문이 밀렸다. 안쪽의 텅 빈 공간이 문이 열리는 소리를
동굴처럼 울려 퍼지게 했다.
환한 샹들리에 아래, 언제나 오색찬란한 빛이 부서져 내리던 공간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벽면의 촛불 몇몇 개와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햇살만이 내부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쓰레기처럼 바닥에 뒹굴고 있는 일라베니아 제국기와 잘 벼려진 검에 닿았다. 내내 실감이
나지 않던 황권 교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던 순간이었다.
바람이 깨진 유리창을 스치고 들어오며 황량하고 스산한 소리를 냈다. 차가운 공기의 흐름에 따라 리카르디스의
눈이 다시금 공간을 훑었다.
261 화.
반역을 이끌었던 클로에는 성공리에 일을 마무리 지은 후, 황제를 다른 이들처럼 감옥에 집어넣지 않았다. 황제의
수족들만 철저하게 쳐내 버린 채 그저 가만히 두었다.
매일 차려지는 음식, 언제나 지내 왔던 아름다운 성에서의 생활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내일을 보장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리카르디스의 귀환까지 약속된 유예일 뿐이란 걸 라이노는 잘 알았다. 호화로운 우리에 갇힌 돼지나
다름없었다. 이럴 바에 차라리 감옥에 갇히는 것이 나았으리라.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그래서 라이노는 여상한 얼굴로 말을 꺼내는 리카르디스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고, 한참 뒤에야 ‘그간 평안
…….’이라는 황당한 말을 인식하고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가 눈을 접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황제의 상징인, 황금으로 만든 월계관은 지금도 라이노의 머리 위에 얹어져 있었다. 라이노는 결국 수치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기절했다. 라이노의 머리가 기울자 그 위의 황금 월계관이 툭 떨어졌다. 붉은 융단과 몇 개의
단층을 도르륵 구른 왕관이 리카르디스의 발치에 부딪힌 후 멈췄다.
리카르디스는 문 바깥에 있는 기사들을 불러 황제를 데리고 가라고 명령했다. 기사들이 물러간 뒤에는 다시 두
사람만이 남았다.
“여기까지 십오 년.”
“길었다.”
울고, 괴로워하고. 또 울고, 고통스러워하며,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가던 소년과 청년과 남자를,
로젤린은 기억했다. 그를 묶어 두던 과거의 상념, 거칠고 따갑기만 하던 감정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뒤에서 쏟아지는 빛 아래, 리카르디스는 잠든 숲속의 나무처럼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다. 오랫동안 이런 순간이
찾아오길 바랐었다. 로젤린은 기꺼운 마음에 웃었다.
* * *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해야 할 일은 왜 그렇게 많고,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지. 단순히 황위를
물려받은 것이 아닌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킨 시점부터 예견된 일이었지만 리카르디스는 지금이 중부 관문 전쟁
때보다 고되다고 생각할 정도로 힘겨워했다.
리카르디스는 오늘도 밤을 지새우는 중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리카르디스는 미간의 주름을 펴고
들어오라 명령했다.
황후, 트리파. 1 황자 엘피디오와 3 황자 틸렌드의 어머니이자 일라베니아 제국의 어머니인 트리파의 문양이었다.
“…….”
“이걸 지금?”
“예,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리카르디스는 황성으로 귀환한 이후, 황후와 만나기 위해 그녀의 성으로 여러 번 서신을 보내었다. 하지만 황후가
번번이 아프다, 몸이 좋지 않다며 거절한 통에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성의 없는 핑계로 거절할 때는 언제고 이런 야심한 시각에? 이상하다 못해 수상할 정도였다. 로젤린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만나 뵈러 가야겠군.”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은 그 앞에서 의외의 인물과 만났다. 남자는 리카르디스가 진주성에 방문할 예정이란 걸 알고
있었는지 당황하지 않고 정중하게 예의를 차렸다.
디에즈의 추적을 맡았던 사자갈기군의 지휘관, 드윗이 어떤 보고도 없이 갑자기 황성에 나타나다니. 심지어는
황후의 성 앞에.
“……예.”
진주성의 시종장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안내에 따라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조용한 성을
가로질렀다.
황후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기척을 느꼈음에도 창밖의 어두운 밤 풍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눈짓으로 단원들을 물렸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를 제외한 단원들이 응접실을 나가고, 문이 닫혔다.
262 화.
한참 후, 황후의 입이 열렸다.
“예.”
축복의 밤이 하늘을 물들인 그날. 반역이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황제의 곁에 있던 사자갈기 가문이 변절했다.
클로에가 규합한 집단이 황실을 점거하는 과정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도 사자갈기 가문이었다. 바깥에서
두드리는 힘은 안쪽에서 문을 여는 힘만 못했다.
실상 황실을 점거하는 일이 시간문제였다 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며 단기간에 계획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은 황후의 공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황후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길 뿐 아니라,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단순히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고 생각해서 배를 옮겨 탔다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황후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나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허황된 거짓말을 내뱉거나 지켜 왔던 비밀을 말하는
둥, 실수를 저지르니 말입니다.”
여태껏 창밖, 테이블, 와인 잔과 손끝만을 향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리카르디스를 겨냥하듯 주시했다.
리카르디스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녀를 마주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냉철한 모습만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굳은 얼굴로 있던 황후가 후 코웃음을 쳤다. 이 짧은 대화로 리카르디스는 황후를 만나고자 했던 목적을 충족했다.
황후는 왜 황제를 배신했는가?
황후의 분노는 언제나 리카르디스를 향하고 있었지만, 모든 걸 알고 난 후, 그녀의 화살은 황제에게 돌아갔다.
황후는 황제가 내뱉은 ‘천한 고아, 평민.’이라는 말만 듣고 깨달은 것이었다. 뛰어난 아들에게 황위를 뺏길까
두려워, ‘리카르디스’라는 도구를 만들어 낸 저의를.
리카르디스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황후도 와인만 홀짝일 뿐,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 다시 그녀가 입을
열었다.
황후가 왜 갑자기 만나고자 한 것인지 지금의 말로 어렴풋하게 유추할 수 있었다. 뭔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진주성 밖에서 만난 사자갈기 드윗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뒤 벽면에는 한 장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엘피디오의 장례식 이후,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주었던 어린
시절 엘피디오의 그림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잠시 그걸 눈에 담다가 방을 떠났다.
성 밖으로 나오자마자 다시 사자갈기의 드윗과 마주쳤다. 진주성에서 리카르디스가 나오길 기다린 듯했지만, 정작
드윗의 얼굴에는 그 기다림이 영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생긋 웃으며 턱짓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드윗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걸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전선에서 돌아오자마자 내가 아닌 전 왕조의 황후를 뵈러 간 것을 뭐라고 해석하면 좋을까. 로젤린 경?”
로젤린은 말없이 검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드윗은 초조해하다가 그 나름의 멋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황후 폐하가 아닌, 가까운 친척 어른을 보러 간 거라고 생각하시면…….”
“……음.”
“거래가 있었습니다.”
[가지고 싶은 게 있습니까?]
[나름 험하게 자랐다 자부하고 있지만, 요즘만큼 험하게 굴러 본 적이 없어요. 전쟁이라. 막연하게 떠올린
상상보다 조금 더 지긋지긋하군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도, 우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것 같지 뭡니까.]
[경답군요.]
의미심장한 말을 마지막으로 로젤린은 다시 현실의 젊은 사자와 마주했다. 로젤린은 비로소 드윗이 했던 그때의
말을 이해했다.
그 말이 엘피디오의 복수. 즉 디에즈의 죽음을 뜻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드윗의 귀환이 목적
달성의 여부와 맞물려 있으리란 것 또한.
“그 대가로 뭘 얻었나.”
“됐고.”
“……예.”
“예.”
* * *
달칵.
“…….”
대체 어떻게 온 거지? 마차에서 내린 건 기억나는데 방까지 도착하는 과정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방 안을 훑었다. 촛불과 벽난로가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었다. 로젤린은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들으며 문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똑똑.
로젤린이 방으로 돌아온 기척을 느낀 헤사가 방문을 두드렸다. 뭐 필요한 게 있느냐 물어보려던 소년은 로젤린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고서는 곧바로 다시 나가, 와인에 과일과 계피, 향신료 등을 넣고 끓여 왔다. 배고플 때의
표정과 비슷해서 착각한 것이었다.
로젤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픈 그녀를 측은하게 여긴 헤사가 견과류 몇 알을 더 챙겨 주고 떠났다.
로젤린은 따뜻한 와인을 테이블에 두고서 침대에 엎어지듯 누웠다. 푹신하고 아늑한 침대가 오늘따라 다르게
느껴졌다. 밤공기가 눅눅하게 달라붙은 이불이 차가워서 그런지도 몰랐다.
그렇게 무리한 활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피로했다. 뻑뻑한 눈을 문지르던 로젤린은 몸을 구부정하게 만
채 덮쳐 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이불은 계속해서 차가웠다. 이쯤이면 따뜻해질 때도 되었을 텐데. 차가워.
추워.
탁탁탁.
누군가가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어둡고 추운 공간을 내달리며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은 너무나도 멀리 있고, 길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복잡한 미로 같았다. 힘없이 떨리는 다리로 한두 걸음
나아갔더니, 소리가 바로 바짝 따라붙었다.
탁탁탁탁탁탁탁.
심장이 크게 부풀었다가 씨앗만큼 쪼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뒷덜미의 솜털이 삐쭉 서며 머리끝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다리가 떨리고 눈물이 울컥 나왔다. 무서워서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손에서 압력이 느껴졌다. 로젤린은 자신이 누군가와 손을 꼭 잡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챘다.
[괜찮아. 손 놓지 마.]
263 화.
헐떡이는, 절박한 숨이 섞인 목소리가 지금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한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로젤린은 결국 주저앉았다. 소리는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로젤린이 넘어질 때마다 일으켰고, 짐처럼 질질 끌고 가다시피 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반복했다. 눈물이 계속 흘러넘쳐 시야가 성에 낀 유리창같이 흐렸다.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두운 공간이 빛나기 시작했다. 저 멀리 보이던 희미한 불빛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축제의 등불이었다.
[걱정 마요.]
축제의 등불이 환하게 빛났다. 눈부신 빛에 시야가 이지러지며, 디에즈의 얼굴을 다시 흐리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보았던, 알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이 그 위로 겹쳐졌다. 그가 말했다.
로젤린은 부스스한 몰골로 꿈에서 깨어났다. 벽난로의 장작불이 어느새 꺼져 있었다. 어둑해진 방 안의 모습
때문인지 공기가 더욱 쌀쌀하게 느껴졌다. 로젤린은 담요를 두르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입안이 깔깔했다. 로젤린은 테이블에 있던 잔을 집었다. 따뜻하게 데웠던 와인은
식어 버렸지만, 목을 축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로젤린은 달콤한 와인을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르스름한 새벽이 찾아오고 있었다.
디에즈가 죽었다.
드윗은 디에즈가 오로지 그 장소에 도달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바위가 쌓여 있는 절벽
아래에서,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고. 다가오는 검날을 보면서도 눈을 감을 뿐이었다고. 그렇게 죽었다고 한다.
* * *
“오늘만을 기다렸지.”
하얀밤 기사단의 연무장. 그 중앙에서 로젤린과 파르딕트가 대치했다. 바쁜 일정에 수염도 제대로 깎지 못해 한층
험상궂어진 파르딕트가 목검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악당처럼 웃었다.
“지난날의 굴욕.”
“지난날의 치욕!”
“왜 이렇게 춥게 입고 다녀.”
“안 추워.”
“이제 좀 약해졌다며.”
“아니 이 인간들이?”
파르딕트가 씩씩 성내며 로젤린을 닦달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쿠키를 한 움큼 집어 먹고는 목검을 들었다.
대치하던 두 사람은 푸른등불의 카일로가 휘파람을 부는 소리와 함께 격돌했다.
따악! 목검과 목검이 부딪쳤다. 로젤린은 파르딕트의 목검을 자신의 목검으로 밀며 발을 굴렀다. 닿아 있는
접점을 중심으로 빙글 회전한 그녀가 파르딕트의 등을 훌쩍 뛰어넘었다.
대결이 끝났다.
파르딕트가 바닥에 목검을 매섭게 내팽개쳤다.
“약해졌다며!”
“파르파르.”
“왜.”
“…….”
“정말 대단하다.”
본인의 기준에는 미달이라고 하지만 로젤린은 여전히 하얀밤 기사단 내에서 최강자의 자리를 지킬 정도로 강했다.
파르딕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정말 재수 없었다.
낮은 나무의 가지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로젤린은 공연히 그걸 손으로 쓸어 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손에
녹아들며, 축축하게 엉겨 붙었다. 후두둑, 하얀 눈덩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더기로 떨어져 내렸으나, 발이
닿는 모든 곳에서 푸릇하게 자라나는 새싹들은 미처 다 덮지 못했다. 어느새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었다.
휙, 무언가가 날아오는 소리에 로젤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차가운 흰 덩어리가 그녀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돌아본 곳에는 월장석 성의 시녀, 미미가 인상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맞으라고 던졌는데.”
“알았어. 다시 해.”
시녀들이랑 놀다 온 모양이었다.
“몸은 좀 어때.”
한동안 듣지 못했던 ‘몸은 좀 어때’였다. 지겨울 정도로 들었던 질문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로젤린은
마카롱의 그림자 진 얼굴에서 무언가를 예감했다.
전쟁이 끝났다. 한때 모두를 휩쓸어 가 버릴 폭풍처럼 불어 왔던 위험이 사라졌다. 검은 언제나 날카롭게 벼려져
있을지언정, 검집 안에서 잠자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겨울은 가고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모두가 완연하게 그 따스함을 느끼며 웃고, 떠들고, 행복해했으나 마카롱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무뚝뚝했고, 여전히 시답잖은 시비를 걸고 다니며, 여전히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
오로지 마카롱만이 이 공간에서 이질적으로 떠 있었다. 모두에게 전쟁의 종결은 새로운 시작이 되었으나,
마카롱은 아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전쟁에 자신의 목적을 둔 적 없었다. 마카롱이 바라보는 곳은 이
자리보다는 조금 더 멀고, 이보다 더 희미했다. 닿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괜찮아.”
“나 이제 괜찮아.”
“눈치가 조금 빨라졌네.”
일라베니아 황실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마카롱과 이 공간은 공존할 수 없었다. 보다 뚜렷한 기억을 가진 자로서,
마지막 남은 분노의 파편으로서. 그녀는 단순히 로젤린이라는 동족을 위해 유예를 가졌을 뿐이었다.
마카롱이 자신의 머리에 묶인 리본을 풀어 내렸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마카롱이 활짝 웃었다.
처음 보는 환한 미소였다. 로젤린의 눈가가 붉게 변하며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마카롱의 손이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가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과거 만났던 동족은 토끼가 되어 사냥꾼에게 잡혀 죽었다고 했다. 지금 그거랑 비교한 거야? 사냥꾼의 고기가 된
것보다 조금 더 나은 처지였어, 나? 로젤린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코를 훌쩍이는 로젤린을 보고
마카롱이 웃었다.
“아니. 제법 괜찮아.”
“괜찮아 보여.”
마카롱의 말은 희미하게 느껴지는 평화에, 앞으로도 괜찮으리라는 로젤린의 마음에 확신을 더했다. 그녀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로젤린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한참 작은 여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로젤린은 부디 마카롱이 원하는 곳에 닿기를 바랐다. 그곳이 어디든지. 얼마나 멀든지. 마카롱에게는 아주 긴긴
시간이 있을 테니.
264 화.
마카롱은 평소와 같이 여기저기 시비 걸면서, 맛있는 걸 많이 먹고 다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떠난 흔적도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긴 여행을 떠날 때 무언가, 옷이나 빗 따위의 사소한 물건이라도 챙기곤
하지 않던가. 그런 빈자리의 흔적이 생겨야 마땅함에도, 마카롱이 떠나기 전과 후의 광경은 조금도 다른 게
없었다. 생각해 보니 마카롱은 자신만의 물건이랄 게 딱히 없었다. 처음부터 떠나기 쉽도록 이별을 염두에 두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어…….”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니 평소보다 더 어수선했다. 로젤린은 다시 출근길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단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별의 슬픔을 곱씹느라 미처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
로젤린은 오십 년이 지나도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던 슬픔의 늪에서 단숨에 빠져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신전의 기둥이 부서져?
“뭐 짐작이 가는 부분이라도……?”
“그, 그럴 리가요.”
“의견을 모았지.”
로젤린이 부은 눈으로 방긋 웃으며 대답하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 * *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었는데?
간이 울타리를 쳐 놓은 텃밭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냥 수풀도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허브와 딸기 잎이 엉켜 있는 것이었다. 작게 열매도 맺혀 있었다.
헤사가 만든 레몬 허브티는 당도와 산도, 향이 아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로젤린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
중 하나였다. 로젤린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 뿌듯해하는 소년이 흙 묻은 손으로 코밑을 슥 훔쳤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성장은 헤사의 텃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대륙, 하늘 아래의 모든 영역에 푸른 잎이
돋아나고 열매가 영글었다. 아직까지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축복의 밤을 보았던 모든 이들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을 칭송했다. 의식에 대한 진실이 풀리긴 했으나, 그
진실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이 이 땅에 다시금 생명을 불러일으킨 업적을 퇴색시키진 못했다.
각국의 사절단은 아직 전쟁의 상처가 낫지도 않은 시점에 리쉬에 왕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오늘 저녁에 있을
리카르디스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왕성과 왕성을 둘러싼 거리는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가 만연했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과 행복이 가득했다.
몇몇 사람들만 빼고.
“집어치워!”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보게 된 것은 서류를 집어던지며 성질내는 리카르디스였다.
“권력 남용? 신께서 주신 권력을 함부로 쥐고 흔들 셈이냐고? 정확하다고 전해 줘라. 권력을 쥐고 흔들 이날만을
위해 살아왔다고. 그게 내 열 살적부터의 꿈이었지.”
어?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리카르디스의 커다란 포부를 들은 신관은 모호하고 애매한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
그렇게 살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바빠서 식사도 대충 때운 적이 많았다. 오늘도 테이블 위에 차려진 식사는
서류 작업을 하면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종류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걸 보는 로젤린의 표정이 울적하게
변했다.
“나가자.”
“거리 축제가 그렇게 호화롭다지. 즉위식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돌아오면 되겠지.”
265 화.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은 나단과 잇세리온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후에야 짧은 일탈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하얀밤 기사단원 몇 십 명을 포함해서. 리카르디스는 불만스러워했지만, 일국의 왕이 호위도 없이 거리에 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단, 르원, 레이몬드, 파르딕트, 슈텐, 네스터, 클로드, 바스티안, 레티시아, 에버하르트, 헤사. 외에도
기사들 중 실력이 좋은 몇몇을 더하여, 평민들의 옷으로 환복한 후에 성을 나섰다.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가 보니, 평민들의 옷을 입고도 너무나도
고상한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보였다. 말을 타고 가면서 봐도 귀족이었다. 결국 과거에 썼던 방법이 차용되었다.
“다니입니다.”
“…….”
레몬, 파르파르, 루루, 슈슈…… 다니까지. 귀엽고 상큼하고 사랑스러운 애칭의 시커먼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도련님은 착잡한 표정을 떨치지 못했다.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가시지요, 도련님.”
걸걸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정말 아니었는데.”
레몬이 능청스러운 연기를 하며 로젤린의 망토를 젖혔다. 그녀를 따라 리카르디스도 소심하게 망토를 끌어 내렸다.
그의 남다른 미모에 잠깐 시선이 집중되긴 했으나, 이곳은 축제의 한가운데였다. 모두가 웃고 떠들고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는 이 땅에 축복을 불러온 누군가의 위대한 업적 덕분에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로젤린은 재빠른 동작으로 주위를 훑었다. 고초를 겪으며 황폐해졌던 수도 거리는 수복되기도 전에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벽의 균열을 따라서 저렇게 그림을 그리다니! 깨진 유리창 파편에 색을 칠해서 줄에 매달아
조명에 반사되게 하다니!
사람들의 창의력과 어떻게든 축제를 즐기겠다는 집념이 놀라웠다. 어쩌면 평소보다도 볼 게 많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둘러보는 것도 잠시. 로젤린은 거리를 꽉 메운 음식 냄새에 정신을 빼앗겼다.
고기만 있는 대왕 꼬지, 허브 로스트 치킨, 치즈에 꿀을 곁들인 디저트, 돼지고기 스테이크, 따뜻한 스튜, 머랭
쿠키, 눈에 시럽을 뿌린 빙수.
방긋방긋 웃던 로젤린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헤사는 그것이 맛있음의 한계치를 넘으면 나오는 로젤린의
진짜 반응이란 걸 알고 있었다. 축제 한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냉철하고 싸늘한 걸 보니, 정말
심각하게 맛있는 모양이었다. 헤사도 로젤린을 따라서 대왕 꼬지를 사 먹고 양념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파악하려 노력했다.
아기 새와 동급이로군…….
로젤린은 자신을 바라보며 뭔가를 말하려는 파르딕트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파르딕트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채
나오기도 전에, 뒤에서 튀어나온 르원이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결국 듣지 못했지만 대충 저기에 맛있는 거 있다,
내지는 어떤 대회가 있으니 같이 참가하자쯤 되겠지 싶었다.
르원이 씩씩대면서 눈치 좀 챙기라고 파르딕트를 혼냈다. 눈치를 챙겨? 무슨 뜻인가 생각하던 로젤린은 곧
깨달았다. 르원이 리카르디스와 자신의 사이를 배려해 주고 있다는 것을.
로젤린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청년은 꺼냈던 돈주머니를 주인의 품에 잽싸게 넣은 후, 로젤린을 바라보며 두
손을 삭삭 비볐다. 로젤린은 코웃음을 치고 청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후, 제 앞도 한번 손가락으로 짚었다.
“…….”
팡!
뚱하던 로젤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순식간에 리카르디스의 멱살을 잡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오감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주위에서 흐흐 껄껄 웃던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어느새 눈빛을 다르게 하고
로젤린과 리카르디스의 주위를 포위하듯 섰다.
하지만 그들에게 닿은 것은 화살이나 검, 적이나 암살자 따위가 아니었다. 로젤린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얀색
종이와 하얀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로젤린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로 여린 잎이 나긋이
내려앉았다.
코끝에 화약 냄새가 희미하게 스쳤다. 아마도 화약을 사용해서 꽃잎을 퍼트리는 장치를 한 모양이었다. 주로
전장에서 사용되는 화약을 축제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공중에 터져 나온
하얀 눈송이 같은 것들을 보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대로 똑바로 일어나 반대로 로젤린을 자신의 품에 넣었다. 두 눈이 마주친 사람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