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wnload as txt, pdf, or txt
Download as txt, pdf, or txt
You are on page 1of 1044

1 화.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은 것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점점 날이 풀림과 동시에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는 각종 야생동물과 마수는 많은 사람들의 골칫거리였다. 연에 몇


번씩 토벌대가 파견되기는 했지만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는 유독 그 횟수가 잦은 편이었다. 험준한 산세
때문에 잘 훈련된 기사들도 며칠을 버티지 못하기도 했거니와, 그것들이 몸을 숨길 만한 곳이 많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얼추 정리가 되었다 싶어도 얼마 뒤에 다시 슬그머니 기어 나와 극성을 부리곤 했다.

사냥꾼과 토벌대가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을 다녀간 이튿날, 산 뿔 멧돼지의 형태를 띤 마수 한 마리가 산 아래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토벌로 인해서 먹이가 줄어들어 마을로 내려온 듯했다. 마수는 비쩍 마른 소년을
잡아먹다가 마른가시나무 백작 휘하의 기사에게 사살당했다.

황실 주최의 사냥 대회가 이곳에서 열리게 된 것은 그러한 연유였다. 술렁이는 민심을 잠재우고, 황실의 건재함을
알리고자 열린 이 사냥 대회에는 많은 귀족과 황족, 또 황실 기사단이 출진했다.

2 황자 소속의 ‘하얀밤’ 기사단과 5 황자를 호위하는 황실 제 2 기사단 ‘깊은숲’, 그 외에도 황실 제 4 기사단


‘물보라’, ‘마른가시나무’ 기사단, ‘강철발굽’ 기사단까지. 전쟁이라도 치른다고 생각될 정도로 대거의
무력이 이동했다. 짧은 일정 동안 사냥 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험준한 산길 때문에 발목이 삔 하인 몇몇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사상자조차 없었다.

사냥 대회 5 일차. 사건이 일어났다. 제국 일라베니아와 이웃한 거대한 왕국 발타. 그 발타를 거점으로 하는


암살 부대가 일라베니아의 권력이 응집되어 있는 산을 침범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에 하나둘 횃불이 늘어나며
전투는 시작되었다. 기습을 당해 잠시간 흐트러지긴 했지만, 곧 진열이 가다듬어지며 형세가 역전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수의 차이도 차이거니와, 무력 또한 한낱 암살 부대와 비교할 수 없었다.

새벽이 찾아올 즈음, 소란은 점차 잦아들었다. 습격자들은 모두 소탕되었고, 황자들은 생채기 하나 없이


무사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에 취하기에는 아군의 피해 또한 상당했다. 아침 해가 비추어진 땅 위에는 적아를
가리지 않는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수십밖에 되지 않는 암살자들은 독과 암기를 써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피해를 남겼다.
더 이상 사냥 대회는 지속될 수 없었고 황자들은 급히 환궁했다. 각각의 기사단은 호위를 위해 수도 티가드로
향했지만, 일부의 인원이 남아 부상자와 사망자를 수습했다.

사망한 하얀밤 기사단의 부단장. 그의 부관은 기사단의 명단 위로 하나둘 선을 그었다. 열다섯이 다치고, 일곱
명이 사망했다. 아니 부상자 열넷과 사망자 여덟 명이다. 방금 치료받던 단원 한 명이 사망하였노라 의사가
선고했다. 그는 참담함을 미처 감추지 못하고 사망한 단원의 이름을 찾아 선을 그었다.

반나절 정도 지나자 어느 정도 명단이 분리되었다. 호위를 위해 떠난 자, 다친 자, 죽은 자. 부관은 종이에


적혀 있는 이름 중, 그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은 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장녀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 올 정도의
실력을 갖춘 단원이었다. 무력은 남자 기사들에 비하면 약했지만 성실하게 일하는 태도를 높이 사 이번에 죽은
부단장이 아끼던 자였다.

부관은 다른 기사단 쪽으로 시체가 잘못 흘러갔나 싶어 사방팔방으로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머리는
어디서도 찾아낼 수 없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로부터 수색대가 파견되어 숲속 아주 깊은 곳, 절벽 아래 큰 부상을 입은 그녀를 찾아낸 것은


전투가 있던 날로부터 6 일이 지난 후였다.

하얀 천을 늘어놓았던 저택은 며칠간의 긴 침묵에서 벗어났다. 사냥 대회에서 일어난 전투로 사망했을 거라


추측했던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장녀가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상을 당했다는 표식의 하얀 천은 치우다
말았는지 반쯤 애매하게 성벽에 걸쳐져 있었다. 천을 거둬들이는 것보다 급한 일이 많았다.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도 잠시, 백작가의 문이 열렸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표정을 잔뜩 굳힌 채로 들어왔다.

“누님은?”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아가씨는 방에 계십니다. 높이 계시는 분이 굽어살폈나 봅니다.”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음에도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크고 작은 상처들 때문에 출혈이


상당했으며 고열에 시달리는 상태였다고.

막 발견했을 당시에는 생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위중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는 곧바로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로 돌아오지 못하고 비스타에서 치료받아야만 했다.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 갔지만 그녀는
줄곧 눈을 뜨지 못했다.

하다못해 객사하는 것만은 막고 싶었던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그녀를 비스타에서 백작가로 옮기라 명했다. 환자의
몸에 무리가 가는 여정이었지만 놀랍게도 이튿날 아침, 그녀의 의식이 돌아왔다. 아가씨께서는 집에 돌아오고
싶었던 게지요. 집사는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칼릭스는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하인과 하녀 몇 명이 우르르 그의 뒤를 따랐다. 이 층에 올라서니 퉁퉁한
백작가의 주치의가 막 로젤린의 방을 나오고 있었다. 그는 찌푸린 표정으로 급하게 올라오는 칼릭스를 보더니
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누님은 좀 어떠신가.”

“아, 칼릭스 도련님. 아가씨께서는 이제 열도 내리시고…… 무사하신 것 같습니다…….”

말이 길게 늘어지는 것이 어쩐지 이상했다. 칼릭스는 가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침묵이 묵직하게 주치의를


압박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어코 한 단어를 더 토해 냈다.

“아마도…….”

말이 왜 저따위야. 무사하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건지. 한층 더 사나워진 칼릭스의 표정에 주치의 바시오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원래도 땀을 많이 흘리는 자였는데, 지금은 무슨 비라도 맞은 양 흠뻑 젖어 있었다.

전조가 좋지 않다. 칼릭스는 제 마음이 요동치려는 것을 겨우 다잡았다.

“누님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그, 그것이.”

칼릭스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남매지간이라 하더라도 허락 없이 드나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야, 칼릭스.’

어릴 적 많이 혼났던 행동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방 주인의 허락을 기다릴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칼릭스의


시야에 침대에 앉아 있는 누이가 들어왔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어난 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팔에 붕대를 감고 있고 얼굴엔 작은 생채기가 여럿 있었다. 얼굴이 핼쑥해 보였지마는 며칠간 생사를 오갔던
사람치고는 아주 양호해 보였다. 칼릭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치의 바시오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괜히
불안했던 것이다.

칼릭스는 미간에 잡고 있던 주름을 풀고 로젤린에게 다가섰다.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의자를 끌어 앉는 동안에도


그녀는 말똥말똥 칼릭스의 얼굴만 쳐다봤다. 제 누이의 무덤덤한 성격을 잘 알고 있으나, 그 험한 전투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의 반응이라고 생각하기엔 어딘가 어색했다. 얼싸 부둥켜안고 기뻐하지는 않더라도 이렇게까지
평온할 일도 아닐 텐데…….

“누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시계 침이 똑딱이는 소리가 흘렀다. 칼릭스의 물음에도 그녀는 눈만 깜박거렸다. 일자로 다물린 입은 열릴 기색이
없었다. 조금 이상한 기류에, 칼릭스는 “누님?” 하며 재차 대답을 요구했다. 예쁜 페리도트색 눈동자가 그의
모습을 담았다. 로젤린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다가, 올라갔다. 그간의 고생을 입증하는 듯 거칠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몸, 좀 괜찮. 어, 디 불편하…… 아니?”

칼릭스는 그녀 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몸을 확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위화감에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칼릭스는 자신의 행동이 당황스럽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로젤린은 여전히 칼릭스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감정 한 톨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는 평소보다 서늘했다.
칼릭스는 제 낯을 몇 번 쓸어내리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누가 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목소리만은
차분하고 상냥했다.

“조금 쉬세요, 누님.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조금. 쉬……세요.”

“네.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뒤돌아선 칼릭스는 주치의를 째려보았다. 바시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방 밖을 나서는 칼릭스를 뒤따랐다.
문이 닫히고 복도에 무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칼릭스는 피곤하다는 듯이 눈 주변을 손으로 꾸욱 눌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바시오는 어린 주인의 이가 빠드득 갈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차마 칼릭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송구스럽다는 듯 그의 발끝만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텐데.”

바시오는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는 달달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고 제 진단을 그에게 전했다.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부딪쳤다. 출혈도 심했다. 심신이 미약하여 잠시간 기억을 잃은 것 같다. 나이
든 노인들이 치매에 걸리면 언어 체계가 무너지기도 하는데 그런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치매?”

칼릭스는 인상을 확 구겼다. 총명하기 그지없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장녀에게 ‘치매’ 따위의 단어가 붙여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바시오는 급하게 그의 말에 대답했다.

“뇌는 아주 섬세한 부분이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뇌에 문제가 생기면 언어 체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설명 드리고 싶었던 것이지 아가씨께서 치매에 걸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편에 계속....]

2 화.
“그럼 누님께서 날 기억 못한다는 얘기인가?”

“송구합니다만, 아가씨께서는 현재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셨습니다. 하지만 방에 걸려 있는 가문의 문양을


보시더니 ‘붉은수레바퀴’라고 말씀하셨지요.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은 상태이긴 하지만 돌아올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가능성이 높다 이거지.”

“아가씨는 지금 많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사실 이런 때에는 어떤 말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도련님. 다만


아가씨의 치료가 가장 우선되어야 하며, 이에 따라 지금의 증세가 호전되리라는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육체와 정신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정론이다. 하나 틀림없는 말이었지만, 칼릭스는 답답한 마음에 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칼릭스의 굳은 표정을
보는 하인과 하녀들이 초조한 기색을 내보였다. 그는 제 머리를 엉망으로 쓸었다. 아까 방 안에서 보았던 누이의
행동이 머릿속을 떠나지 못했다.

항상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는 산발이고, 총기가 맴돌던 눈동자는 흐리멍덩했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성대에서는 거친 소리가 쉭쉭 새어 나왔다. 기사였기 때문에 항상 작고 큰 상처를 달고 살았던 누이였지만, 이런
경우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원래 아랫사람들은 주인의 행동 하나, 기분 하나에 큰 영향을 받는 자들이다. 아버지가 국경 수비 임무로 자리를


비운 지금 백작가를 통솔해야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칼릭스는 한숨을 쉬고 표정을 풀었다.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누이가 돌아온 기쁜 날에 할 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성벽의 천을 마저 거둬들여라.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무사하다. 아버지께는 알렸나?”

“예. 도련님.”

“치료를 도와준 마른가시나무 백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군. 선물을 준비해 둬라. 서신은 내가 쓰도록
하지.”

“네, 도련님.”

“누님 방에는 전담 하녀를 정해 두고 소수만 드나들게 해라. 이상한 말이 붉은수레바퀴령에 나돌지 않도록.”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도련님.”

칼릭스의 명에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수십 개의 하얀 천으로 뒤덮여 있던 커다란 성이 그 고고한 자태를


드러낼 즈음엔, 칼릭스 또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돌아오시라. 살아 돌아오기만 하시라. 그렇게 수백 번을 빌지 않았던가. 다른 기사단에 비해 로젤린이 속해 있던


2 황자의 하얀밤 기사단은 유독 피해가 컸다.

2 황자는 1 황자와 함께 황태자 후보로 꼽히는 유명 인사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위명이 자자한 만큼 적
또한 많았다. 그 탓인지 이번 사냥 대회의 사건에서도 2 황자를 집요하게 쫓더라는 얘기가 왕왕 들렸다. 다른
기사단의 배가 되는 피해가 발생한 것은 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로젤린이라는, 실력이 그다지 좋지
못한 단원이 죽었으리라 하는 추측이 기정사실화되어 나돌았던 것이고.

하지만 그녀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팔다리 어디 하나 못 쓰는 곳 없이 그 격전에서 살아남았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 또한 높다. 천운이었다.

“누님께서는 뭔가를 좀 드셨나?”

“점심에 환자식을 드셨습니다. 오래 굶으셔서 얼마 못 드실 줄 알았는데, 세 그릇 드시고도 탈이 나지 않는걸


보니 후에 저녁을 드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내 식사도 누님 방으로 올려라. 같이 먹겠다.”

“네, 도련님. 곧 준비하겠습니다.”

창밖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성벽을 물들이고 마지막 남은 하얀 천을 하인들이 거둬들이고 있었다.
천이 흩날렸다. 칼릭스는 멍하니 제 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깜박 깜박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는
행위를 어색하게 반복했다. 얕은 위화감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무언가가 마음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칼릭스는 제 마음속의 그것을 차곡차곡 접어 한구석에 두었다. 하인이
식사 준비가 끝났노라 알려 왔다.

그러고 보니 가장 먼저 해야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잘 돌아오셨다, 무사하셔서 기쁘다고.

저녁을 먹기 전에 얘기해야겠다.

* * *

결과적으로 칼릭스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제 누이가 맨손으로 스테이크를 쥐고서 우악스럽게 뜯어 먹고 있는 지금의 이 장면 때문에.

볼은 다람쥐처럼 양쪽 다 불룩해져 있고, 손과 입에선 스테이크의 육즙과 적갈색의 소스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스테이크의 피가 흐르며 미묘하게 공포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칼릭스는 방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가에 우뚝 섰다. 눈앞의 광경을 현실이라고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에서 이십 년 이상 근무한 노련한 하녀조차 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상태였다. 예법을 개한테
줘 버리고 살아 돌아온 아가씨. 맨손으로 스테이크를 잡으면 뜨거우실 텐데, 라는 걱정은 그녀가 고깃덩어리를
씹어 먹는 당찬 모습에 쑥 들어갔다.

문제는 마침 방에 들어서 그 모습을 목격한 칼릭스 도련님의 입이 떡 벌어진 채로 다물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하녀는 아가씨의 거친 식사를 도와야할지, 아련히 흩어지는 도련님의 정신을 보살펴야할지 정하지 못해 멀뚱히 서
있었다. 쩝쩝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칼릭스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
“…음…… 벌써 고기를 드셔도 되는 건가? 부담이 되지는 않고?”

그는 눈앞의 광경을 애써 무시했다. 하녀 또한 아가씨 어깨의 실밥을 떼어줄지언정 그녀의 손에 들린 고기는


보이지 않는 양,

“의식이 없으실 때에도 수프와 환자식을 조금씩 흘려 넣긴 했다더군요. 아침에 드신 수프에도 고기를 잘게 다져서
넣었는데 별 탈이 안 나신 걸 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래…….”

칼릭스는 그녀 몫으로 나온 수프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제 몫으로 나와야 했을 스테이크의 행방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식사를 내오겠습니다.”

“그래.”

칼릭스는 간이 안 되어 있는 묽은 수프를 입에 넣었다. 밍밍해서 아무 맛이 없었지만, 그 맛을 음미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로젤린은 삼분의 일쯤 남은 스테이크를 입에 욱여넣었다. 칼릭스는 두 볼 빵빵해진 제 누이의 모습을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천천히 드세요, 체하면 어쩌시려고요.”

로젤린은 한번 끄덕이고는 꼭꼭 씹었다. 두 살 차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항상 어른스럽던 누이였다. 이런


아이 같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유년기의 누이와 식사를 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살짝 미소
짓고 있던 칼릭스는 도로 표정을 일그러트려야 했다. 로젤린이 손에 묻은 소스를 핥기 위해 혀를 날름 내밀고
있었다.

탁.

다행히 칼릭스가 잽싸게 그녀의 손목을 잡은 덕에 미수로 그쳤다. 칼릭스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제가 아직 거기까지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누님.”

전과 후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과 기사도가 담겨있던 누이의 소스 핥는 모습은 너무


파괴력이 컸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제지에 인상을 썼다. 줄곧 무표정이던 얼굴에 나타난 첫 감정이었다. 짜증.

칼릭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로젤린의 짜증이라니, 정말 희귀한 것이었다. 본디 그녀는 천성이 순하고 선했으며,
남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불합리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계기로 자신을 더
돌아보고 수련했다.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대대로 내려오는 쭉 째진 날카로운 눈이 한층 더 예리해져 있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불만 가득 찬 표정을 보고 황급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누님이 좋아하시던 아보카드 샐러드입니다. 이걸…….”


‘이걸 드세요’라고 말하려던 칼릭스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샐러드를 보는 로젤린의 표정이 한층 흉흉해진
탓이었다. 뭐야 이 풀떼기는. 그녀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드시지 말고…… 조금 있으면 스테이크를 가지고 올 테니 그걸 조금만 더 드세요. 조금만입니다.”

로젤린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끄덕였다. 칼릭스는 핑거볼에 담겨 있는 물로 그녀의 손을 대충 씻어 내었다.


그녀는 쩝 하며 아쉬운 소리를 내긴 했지만, 얌전히 그에게 손을 맡겼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그리고 그녀는 참으로 담백한 남동생이었으며 누나였다. 그 흔한 포옹도 볼에 하는 입맞춤도
해 본 적 없었다. 손을 핥기에 더럭 붙잡았지만 이 짧은 접촉마저도 참 어색했다. 어릴 때에도 잡아 본 적 없던
누님의 손을 스물 하나 먹고 잡아 보는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곧 그녀가 말릴 틈도 없이 핑거볼의 레몬을
집어 먹고 웩웩거려서 그의 감성을 다 깨 버리긴 했지만, 아무튼 간에 그런 낯선 기분에 잠시간 싱숭생숭 했다.

“누님.”

로젤린의 눈동자가 굴러 칼릭스를 향했다. 웃지 않으면 째려보는 것 같다거나, 화가 난 것 같다던 평을 받는


날카로운 눈이었다. 똑같은 얼굴인데도 오늘의 여러 사건 때문인지 맹하게 보였다.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누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증조할아버지께 똑같은 질문을 했던 것이 기억나, 칼릭스는 큭 하는 신음성을 내뱉었다.


로젤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는 누님의 두 살 아래 동생 칼릭스입니다. 누님이 기사단 일로 바쁘셔서 최근에는 자주 뵙지 못했지요. 물론


편지로 안부를 전해 주시기는 했습니다. 아무리 바쁘셔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보내시더군요. 아, 누님은 황실
기사단 소속입니다. 정확히는 2 황자 전하의 직속 호위 기사단. 하얀밤의 하급 기사이시죠.”

로젤린은 칼릭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듯 보였다. “응.”이라고 대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느껴졌다.

[다음 편에 계속....]

3 화.

“아버지…… 그러니까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기사단을 이끌고 국경을 수비하시는 임무를 맡으셨습니다. 마무리 할
일이 있어 곧장 오지는 못하시지만, 아버지께서도 누님 걱정을 아주 많이 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무서운 얼굴이
더 사나워져서…… 지나가는 어린 영지민마다 자지러지듯이 울었죠.”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일라베니아 제국 평균 남자 키를 훌쩍 뛰어넘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부리부리하고


날카로운 눈, 밤을 떠올리게 하는 검은 머리, 짧게 정돈된 수염. 왼쪽 눈의 세로로 난 긴 흉터까지. 흉흉한
생김새와 더불어 가문의 기사단을 이끄는 그의 사나운 기세는 붉은수레바퀴 영지의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힘을
더했다.

칼릭스는 영지를 시찰하며 돌아다닐 때 ‘카민! 너 말 안 들으면 붉은수레바퀴 백작님이 이노옴 한다! 이놈
백작님 보고 이놈 하라고 한다!’ 하면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거나 하는 장면을 종종 보고는 했다. 어이가 없었다.
깊은 산에 들어가면 그림자한테 잡아먹힌다던가, 거짓말을 하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는 수준으로 제 아버지가
쓰이고 있다니.

“아버지께서는 약자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휘하의 가문들 또한 영지민을 함부로
대하지 않죠. 아버지의 이름을 딴 와인도 있을 정도로 존경받고 계십니다.”

로젤린은 호오 그렇군, 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맛은 좋아?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웃음을
작게 흘렸다.

“하지만 누님은 못 드십니다. 포도 알레르기가 심하시거든요. 저희 영지의 대표 작물이 포도인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며 누님께서 항시 슬퍼하셨…….”

칼릭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까 제 누이가 뜯어먹던 그 스테이크. 거기에 뿌려져 있던 소스의 색이 붉은 빛을


띠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칼릭스는 와인을 졸여 만든 소스를 좋아했다. 별다른 주문이 없었으니, 자신의 몫으로
나온 스테이크의 소스는 그것이었으리라. 손으로 식사하는 그녀의 모습에 충격을 먹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제 누이는 조리가 되어 있든 아니든, 포도를 먹으면 피부의 붉은 발진과 함께 기도가 부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극심한 알레르기가 있다. 칼릭스는 창백한 낯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누님!”

로젤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칼릭스가 마구잡이로 몸을 살피는 대로 이끌렸다. 그는 그녀의 목과 가슴팍을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진즉에 피부에 붉은 발진들이 생겼을 양과 시간이었다.

“숨 잘 쉬어지세요? 목 안이 붓는 것 같다던가, 하지는 않으십니까?”

로젤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해 보세요.”

“아.”

칼릭스는 그녀가 이상 없음을 확인한 후에도 한참을 살폈다. 눈, 피부, 목, 그녀의 숨소리 하나하나 지켜보던
그가 숨을 크게 쉬며 풀썩 자리에 앉았다.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상태는 아주 양호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도 또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종을 울려 하인을 부르려던 차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까 전 칼릭스
몫의 스테이크를 가지러 갔던 하녀였다.

“아가씨!”

하녀가 다급히 외치며 들어왔다. 그녀 또한 지금의 상황을 눈치챈 것이다. 그녀는 로젤린에게 다가가 자신이 한
것처럼 목과 가슴, 등을 확인했다.

“아가씨 숨이 제대로 쉬어지세요? 목이 붓는 것 같지 않으세요?”

로젤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 해 보세요, 아가씨.”

“아.”

하녀는 로젤린을 샅샅이 살피다가 한숨을 푹 쉬며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 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비
소스를 끼얹은 스테이크가 올라왔다. 지글지글 끓는 스테이크를 로젤린이 손으로 잡기 전, 칼릭스는 먹기 좋게
썰어 그녀 손에 포크를 쥐여 줬다. 그가 먹는 시범을 보인 후로는 로젤린도 포크와 나이프를 곧잘 사용했다.

“아가씨가 드실 줄 모르고, 제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니다. 나도 잠시간 잊고 있었으니.”

“그래도 천만다행이네요. 이델라브힘께서 도우시나 봅니다. 어렸을 때 알레르기를 앓다가 완화되는 경우는 있다고
듣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 알레르기 약을 식후에 드시는 편이 낫겠어요.”

하녀는 잰걸음으로 주치의를 찾아 나섰다. 칼릭스는 로젤린으로 인해 난잡해진 식탁을 하나하나 훑었다. 한입
먹고 내버린 아보카드 샐러드. 비어 있는 스테이크 접시. 흔적을 찾기도 힘든 와인 소스.

[정말 작은,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말고 잘 살펴야해, 칼.]

그는 등골을 서늘하게 스쳐 지나가는 감각에 얼굴을 굳혔다.

[눈썹을 움칠거린다던가, 눈동자를 굴린다던가, 식은땀이 난다던가, 혀로 입술을 핥는다던가. 숨기려 해도 그


사람은 너에게 많은 정보를 얘기하고 있을 거야. 말로 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욱더.]

칼릭스는 앞에 앉아 있는 그녀의 뒤로 예전의 로젤린을 겹쳐 보았다. 상상 속 그녀는 볼에 음식물을 묻히고


있지도 않았고 구불거리는 머리를 풀어 헤치지도 않았다. 목 끝까지 채운 하얀 제복. 하나로 높게 묶은 검은
머리, 생생하게 빛나던 올리브색 눈동자.

[말로 무장한, 거짓으로 위장한 자들의 이면을 읽어 내야 해. 너라면 잘 할 수 있어. 붉은수레바퀴의 사람들은
감이 좋으니…….]

그녀가 어릴 적 말했던 것과 같이 자신과 제 누이는 아주 예민했다. 문제와 사물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또한 검술 실력과 함께 뛰어난 동물의 감으로 유명한 자였다. 이상하게 후퇴하고 싶더라니
타국의 함정이 있었다더라,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어서 냅다 패고 잡아 봤더니 타국의 간자라더라.
하는 묘한 무용담의 소유자였다.

로젤린이 말한 대로 이상하게 발달된 감은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특징일지도 몰랐다. 칼릭스는 인정했다. 줄곧


눈앞의 누이에게서 느껴지던 얕은 위화감. 단순히 기억을 잃어 버렸다던가, 행동 양식이 예전과 다르다던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였다.

칼릭스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로젤린을 담았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소스를 날름 핥고 있었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면이 다르다면 그것은…….


* * *

로젤린은 극진한 보살핌으로 빨리 회복했다. 믿을 수 없는 회복 속도 때문에 바시오는 자신의 의술과 약 제조


실력이 이제는 신의 영역까지 손을 뻗친 건가 생각했다.

칼릭스는 매일매일 그녀를 찾아가 간호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후계자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참 눈물겨운 우애였다.

이따금 칼릭스의 태도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다. 로젤린이 실종된 기간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했던 것치고는 그렇게 기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소문의 당사자,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는 어릴 적부터 차갑고 무뚝뚝한 성정으로 유명한 자였다. 사건이 마무리되었으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뿐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로젤린의 일과는 단순했다. 일어나면 밥을 먹고, 쉬다가 먹고, 또 쉬다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먹은 후 잤다.
식사나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때문에 멍하니 백작가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여러
군데에서 목격되었다. 방 안에서나 입는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곱슬머리는 묶지도 않아 산발이 되어 있는
매우 자유분방한 차림새로.

이에 집사는 명석하고 똑똑했던 아가씨가 백치가 되어 버렸다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고 칼릭스는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백작가에 이런저런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사고 전의 로젤린이 보여 온 행실 덕분인지


다소 그 소문의 내용이 이상했는데…….

“아가씨의 머리가 좀…….”이라는 서두로 시작했다가 옆에 있던 다른 하녀에게 등짝을 맞고서는 “역시 과하게
똑똑하셨었지…… 약간은 덜 똑똑해지셔도 괜찮아.”로 끝나기도 했고, “맨발로 걷는 게 몸에 좋대. 역시 우리
아가씨 영특해.” 혹은 “머리 풀고 계신 거 완전 와일드해. 유행을 이끌어 가는 신여성. 우리 아가씨 멋있어.”
로 이어지는 식이었다.

칼릭스는 제 보좌관이 모아 온 로젤린에 관한 소문들을 쭉 읽어 내렸다. 칼릭스는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리 누님께서…… 높이 계시는 분의 가호를 받아 6 일 만에 죽음의 계곡에서 살아 돌아오신 후


백작가에 퍼진 검은 죽음의 기운을 없애기 위해 오신지 하루 만에 눈을 뜨셨고, 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백작가를
두루 살피시어 민심을 안정시키셨으며 낮은 자들을 위해 제 머리 흐트러지는 줄도 모르고서 발 벗고 나섰다고?”

“네.”

“……그래…… 정말 발 벗기는 했지…….”

하녀들의 머리가 이상한 것 같았지만, 칼릭스는 차마 그 말을 뱉지 못하고 흠 하는 소리로 묻어 버렸다. 주인의


허물을 감싸는 태도가 가상하다 못해 무서운 수준이었다.

“누님이 아이들한테 잘해 주셨다는 건 알았지만, 덜 익은 과실더러 황금 사과라고 하는 수준인데…… 뭐 누님께


해가 되는 건 아니니 주의만 조금 주도록 해.”

“아가씨의 인품이 빛나는 순간인 거죠. 뭐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백작 부인께서 오찬을 함께하고자 하셨습니다.
아가씨도요.”

“알겠다. 누님은 내가 모시고 가지.”

로젤린은 오늘 또한 복도 한 편에 앉아 있었다. 칼릭스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어


낮잠이라도 자는 듯 보였지만, 아래층의 하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는 순간 그녀의 입이 웅얼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입모양을 읽기 위해 집중했다.

‘하녀장님이 오늘은 시트 전체적으로 갈라고 하시더라. 아, 그렇지. 아가씨 실종 사건 때문에 정신없어서 저번


주는 그냥 넘겼었지? 다들 팔 걷고 나서니까 얼마 안 걸릴 거야. 일 끝나고 놀러가자. 비비안도 이번에 옷을 좀
사고 싶다던데 같이 갈까? 응, 내가 비비안이랑 같은 구역이니까 말해볼게. 아, 저기 마침 비비안이. 비비안!
오늘 저녁 일 끝내고 시장에 같이 가자. 그래, 안 그래도 이번 주 중으로 사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잘됐다. 같이
가자.’

“같이 가자.”

‘같이 가자.’

하녀들의 목소리와 로젤린의 입모양이 겹쳐졌다. 칼릭스는 제 팔뚝 위로 오소소 돋은 닭살을 확인했다. 한두 번


목격한 장면이 아니지만 볼 때마다 섬뜩했다. 그녀는 집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얘기들을 듣고 반복해서
학습하고 있었다. 무리에 섞이기 위해서는 언어를 습득해야만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처럼.

[다음 편에 계속....]

4 화.

칼릭스가 상념에서 급하게 깨어났을 때는 그녀 또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어두운 복도 한구석에서 로젤린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칼릭스는 걸음을 옮겨
로젤린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어머니께서 돌아오셨어요. 같이 점심을 하자고 하십니다.”


로젤린이 반색했다. 분명 ‘어머니’가 아니라 ‘점심’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으리라. 칼릭스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손을 잡고 냉큼 일어났다.

“칼릭스, 같이 가자.”

‘같이 가자’ 인가.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참 대단한 학습 속도였다.

* * *

“괜찮은 겁니까?”

칼릭스의 보좌, 알터가 감흥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찬에 가기 전, 로젤린은 잠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 두 명은 근처 가까운 응접실에서 대기했다. 알터는 탁자 위에 놓인 오셀로 판의
나무 조각을 뒤적이고 있었다. 게임 하자는 건가 싶었더니 흑색 말로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뭘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장녀가 실종되었는데, 그것도 몰라. 다쳤는데, 그것도 몰라. 돌아왔는데, 그것도 몰라.
심지어 당장은 밝힐 생각조차 없으시죠? 엄청 섭섭해하시겠는데요.”

붉은수레바퀴 백작 부인. 에델바이스.

그녀가 딸의 실종소식을 들은 것은 불과 이틀 전이었다. 6 일간 실종이 되었을 때에도, 로젤린이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서 치료를 받을 때에도, 또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로 돌아왔음에도, 에델바이스는 어떠한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에스터에서 제법 벗어난 바다가 보이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별장에 머물렀다. 특별히 앓는 병은 없었지만,
툭하면 쓰러지고 툭하면 아파서 요양이라는 이름하에 일 년에 반 이상은 그곳에 있었다.

칼릭스는 얼마 전, 에델바이스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상황에서 제 누이가 실종되었고 백작가에서는


하얀 천을 준비하고 있노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로젤린을 찾으면 연락해야지, 살 수 있을 것 같으면 연락해야지,
집에 오면 연락해야지, 눈을 뜨면 연락해야지 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삼일 전 겨우 연락해서 이틀 전에 소식이
닿았다.

물론 그 소식을 전하는 것도 그녀가 죽다 살아났다던가,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던가 하는 서술을 몽땅 빼먹은 채


[사냥 대회에서 조금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 집에서 심신을 안정시키며 요양 중입니다.]라고 축약해서 보내야만
했다. 만약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간 그녀는 실신할게 분명했다.

“그것도 얘기 안하셨죠?”

“뭐.”

“아가씨 머리가 좀.”

칼릭스가 눈을 시퍼렇게 빛냈다. 머리가 뭐. 내 누이 머리가 뭐. 뭐. 이상한 단어가 하나라도 나왔다가는 요절을
내 버리겠다는 표정이었다.
“……머리가…… 좀…… 귀여워졌다는 거요.”

“…….”

칼릭스는 침묵했다. 알터는 그 침묵에서 긍정의 뜻을 읽어 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앞길이 천리만리였다.

로젤린은 곧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직 군데군데 붕대를 감고 있기는 했지만 소매가 길어 거의 감춰졌다.


얼굴의 자잘한 생채기쯤은 기사단 일을 하면서 항상 달고 있던 것들과 큰 차이도 없었다. 산발인 머리도 하나로
모아 곱게 정리 되어 있었고, 드레스도 입었다. 오랜만에 보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칼릭스와 알터의 시선이 그녀의 몸을 따라 쭉 내려와 드레스로 가려진 발치에 머물렀다. 눈치 빠른 하녀가
로젤린의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들은 반질반질한 구두코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신발도
신었군.

“우리 아가씨 완전 멀쩡해 보이네요!”

칼릭스의 팔꿈치가 알터의 옆구리를 매섭게 강타했다. 알터가 억 소리 내며 쓰러졌다. 칼릭스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짓밟고 로젤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누님. 어머니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래, 칼릭스.”

일주일간의 변화는 놀라웠다. 짧게 단어를 끊어서 얘기하던 첫날과 달리 그녀는 놀라운 속도로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여자 말투였다가, 남자 말투였다가, 존대를 했다가 반말을 했다가, 그날 들은 것에 따라
마구잡이로 변하긴 했지만 단어를 벗어나 문장을 구사하게 된 것만으로도 놀라운 발전이었다. 집사는 우리 가문에
전무후무한 천재가 나왔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칼릭스는 이 집안의 분위기가 정말 극성맞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많이 부족했다. 막 입이 터서 들리는 말을 무작정 반복하는 아이와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단박에 이상함을 느낄 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전부터 말수가 적고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 정도야 간단한 대답으로도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어머니가 말을 걸면요?”

“네, 또는 아니요.”

“식사 하실 때는요?”

“포크랑 나이프랑 스푼을 써야지.”

“훌륭하십니다.”

칼릭스는 로젤린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며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빛이 부서지는 샹들리에, 백작


부인의 귀환에 잔뜩 솜씨를 부려 화려해진 만찬장. 로젤린은 그 광경을 휙휙 소리 나게 둘러보는 중이었다.

칼릭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갈색 머리의 여인과 다정하게 포옹했다. 그녀 또한 몇 개월 만에 본 아들을 품에


얼싸 안았다. 그녀는 곧 로젤린도 꼭 껴안더니 얼굴을 붙잡고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우리 로즈. 얼굴이 너무 상했구나. 아직 많이 아프니? 괜찮은 거야?”

“네.”

“숙녀 얼굴에 이게 뭐니 정말. 그런 기사단 당장 관두라고 했지!”

“아니요.”

만나자마자 쓸 수 있는 두 개의 대답을 전부 소모해 버렸다. 칼릭스가 급하게 끼어들어 둘 사이를 중재했다.

“어머니!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먼저 자리에 앉으세요.”

“그래, 그래. 내가 아픈 애를 붙들고 또 잔소리를 하고 있었어. 앉자꾸나.”

“네.”

로젤린은 참 꼬박꼬박 대답을 잘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하셔야 대화가 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제 누이는 한번 가르치면 잊지 않는 것 같았다.

급성 단기 교육이었지만 로젤린은 포크와 나이프를 곧잘 사용했다. 칼릭스는 제 눈물겨운 노력의 흔적을 아련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예전의 로젤린을 기억하는 에델바이스에게는 많이 부족해 보이는 듯 했다. 차마 입 밖으로
타박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살짝 인상 쓰며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입을 너무 벌린다는 둥, 음식물 씹는
소리가 크다는 둥. 만약 로젤린이 다쳐서 요양 중이지만 않았더라도 진즉에 몇 마디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달그락.

로젤린이 스푼을 내려놓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크게 울렸다. 에델바이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칼릭스는 그
모습을 보다 한숨을 뱉었다. 천천히 그녀의 상태를 알릴 예정이었지만, 생각보다 그 시기를 당겨야 할 것 같았다.

“어머니.”

“왜 그러니, 칼릭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그전에 나부터 말하자꾸나. 로즈?”

로젤린은 입안에 음식을 넣은 채 “네.” 하고 대답했다. 에델바이스의 표정이 확 찌푸려졌다. “어떻게…… 그런


…… 몰상식한 행동을!”이라고 당장에라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여자애가 매일 밖으로 다니기만 하고, 기사단이니 뭐니 하면서 다쳐 오잖니. 이번에도 그렇고 말이다. 이
어미가 항상 노심초사하며 걱정 하는 건 알고 있니?”

“아니요.”

칼릭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 누이의 정직함이 아찔했다. 에델바이스가 얼떨떨해 하고 있어서 그는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어머니, 누님께선…….”

“아니 되었다. 그래. 집에서 좀 떠나 있었더니 많이 섭섭했던 모양이구나.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니 로즈.”

“네.”

“이번에도 네가 다쳤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팔이 부러져도 출근하던 애가, 무슨 사달이 났기에
집안에서 쉰다는 얘기가 나오나 해서.”

“네.”

“그래서 이 어미가 별장을 떠나기 전에 여기저기 알아보았단다. 너도 가정을 이룰 때가 되었잖니…….”

“어머니!”

칼릭스는 벌떡 일어섰다. 그녀가 항시 입에 달고 살던 안건이었으나, 죽다 살아난 누이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물론 부모로서는 제 딸이 위험한 검을 놓고 좋은 집에 시집가 편하게 생활하기를 바라는 게 당연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로젤린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서로의 이상이 너무나 다른 탓에 둘은 번번이
부딪쳤다.

여자가 작위를 받고, 여자가 상인이 되고, 여자가 검을 드는 시대에 에델바이스는 과하게 고리타분한 감이 있었다.
심지어 에델바이스의 조국은 라고슈 왕국으로, 대륙의 어떤 나라보다도 여왕들의 집권 기간이 긴 나라였다.

“지금 꺼내실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누가 보면 너보고 시집가라고 하는 줄 알겠구나, 칼. 누가 지금 당장 만나라고 그랬니? 좀 쉬다가 몸이 낫거든


한번 만나나 보라는 거야. 저 꽃다운 나이에 아깝게 이게 뭐니 대체. 이 어미가 어련히 괜찮은 사람 알아
놓았겠니? 서른하나에 젊은 백작인데 장사 수완도 아주 뛰어나고, 인품도 훌륭하다고 하더구나. 내가 에스터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더니 동대륙에서 발굴되는 아주 귀한 보석을 주지 뭐니. 약혼하거든 이걸로 반지를 해서 우리
로즈가…….”

에델바이스는 말을 미처 끝맺지 못했다. 본인을 끼고 얘기하고 있음에도 꿋꿋하게 식사를 하던 로젤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식사법이 문제였다. 막 바닥에 떨어진 빵을 주워서 천연덕스레 뜯어 맛있게 먹는 모습에 순간
좌중이 침묵했다.

굳어 있던 칼릭스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보기 드물게 괴로운 소리를 내었고, 뒤에서 지켜보던 알터는 절레…
… 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식사 예절 교육 당시, 떨어트린 것을 집어 먹지 말라는
내용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교육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다음 편에 계속....]
5 화.

시중을 드는 하인 또한, 바닥에 떨어진 빵을 치우려고 그녀에게 다가가다가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식탁보를
정리하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처음부터 식탁보가 구겨진 게 신경 쓰여 다가온 사람 같았다. 상태 안 좋은
로젤린을 며칠간 보살핀 덕에 생긴 순발력이었다.

에델바이스는 지금 자신이 본 것이 ‘정말 현실인가? 뭔가 질 나쁜 장난을 하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 보아도 그녀의 딸은 바닥에 떨어진 빵을 주워 먹은 게 확실했다.
그것도 아주 맛있게.

“……로즈?”

로젤린은 주운 빵을 꼭꼭 씹어 삼키고 냅킨으로 입을 톡톡 닦았다. 그리고는 제법 도도한 표정으로,

“네.”

대답했다. 그야말로 100 점 만점의 100 점짜리 예절이었다.

* * *

칼릭스는 제 누이가 덜 똑똑해졌으며, 머리가 조금 귀여워진 것이라는 하녀와 알터의 말을 빌려 설명했다.


에델바이스는 점점 더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조금…… 덜 똑똑해질 필요성이 있어서…… 조금 덜 똑똑해졌고…… 머리가 조금 귀여워지면…… 바닥에


떨어트린 음식을 주워 먹게 되는 거니?”

물론 그건 아니었다. 칼릭스는 제 어머니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라 약간의 정보를 흘렸다.
머리를 다쳐서 행동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의사의 말로는 곧 돌아온다고 하더라.

에델바이스는 눈물 흘리며 로즈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 불쌍한 로즈…… 미인이 아니어도 똑똑한 아이라 안심이었는데…… 이제 얼굴도 머리도…….”

“……아니 그렇게 까지는…… 어머니…….”

로젤린이 집안에서 쉬는 동안 약혼을 진행하려고 했던 에델바이스의 모든 계획들이 전부 파기 되었다.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어느 백작에게 받아 왔다는 약혼석을 돌려주라고 하인에게 명령했다.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 수준의 아이를 시집보낼 순 없었다. 몸이 아픈 줄 알았더니 마음이 아픈 것이었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네 아버지는 아시니?”

“……머리를 조금 다쳤다는 건 아십니다.”

“우리 로즈가 약간…… 그…….”


에델바이스는 식사를 지속하는 제 딸을 보며 말을 최대한 골랐다.

“약간 덜 똑똑해진 건……?”

다들 미쳤다던가, 모자라다던가 하는 정확한 표현은 미루고 있었다. 칼릭스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에델바이스는 마른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쓸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이며 횡설수설하더니
쉬겠다며 방으로 올라갔다.

에델바이스와 칼릭스는 거의 음식을 먹지 못했지만, 많은 접시들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로젤린의 왕성한 식욕
덕분이었다. 그녀는 후식으로 나온 케이크까지 깔끔하게 해치웠다. 저 멀리 백작가의 요리사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손주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 표정이었다. 칼릭스는 후우 숨을 내쉬었다. 길고
길었던 식사시간이 끝났다.

정신없는 오찬 후, 고풍스러운 원목탁자에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던 칼릭스는 알터로부터 종이뭉치를 건네받았다.


자료의 양이 미비하기 짝이 없었다. 칼릭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알터가 흥 콧방귀 뀌었다.

“이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알아 오라던 자료?”

“제 피, 땀, 눈물입니다.”

칼릭스는 개소리를 가볍게 무시했다. 알터가 펄펄 날뛰었다. 어쨌든 이게 제 최선이라 얘기하는 것인데……
누군가를 조사해 오라 명령하면 그 사람이 삼 년 전에 버린 속옷 색이 무엇이었는지까지 알아 오던 자의 솜씨가
아니었다. 그만큼 알기 어렵고 또한 알려져 있지 않은 정보라는 뜻이었다.

맨 처음 명령을 받은 알터의 표정은 정말 볼만했다. 장성한 주인이 아이들의 입에서나 오르고 내릴 법한 허황된
괴담에 대해서 조사해 오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수족을 부리거나, 정보 길드를 통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
때문에 표정이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까라면 까는 게 하급자의 운명이었다.

그리고 알터는 정보를 수집하며 알게 되었다. 이 어이없는 명령이 단순히 자신을 골탕 먹이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발끝부터 머리까지 순식간에 관통하는 그 섬찟함이란. 제 주인은 이것을 보지 않은 채로 진실에 대해 가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칼릭스는 알터가 가져온 자료를 한 자 한 자 읽었다. 십 분이면 다 읽을 짧은 분량을 꼼꼼히, 오랜 시간을 들여


정독했다.

알터는 시시각각 변하는 칼릭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눈썹을 들썩이기도 했고 제 턱을 마구 쓸기도 했다. 마지막
장이 팔랑, 덮임과 동시에 칼릭스는 이마를 짚고 거친 숨을 쉬었다.

자료는 [깊은 숲에 들어가면 그림자에게 잡아먹힌다.] 라는 유명한 괴담으로 시작했다. 그 또한 어릴 적 많이


들었던 얘기였다. 개구쟁이 아이들이 겁 없이 산을 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대비책의 일종이었다. 칼릭스 역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산을 경고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사나운 마수나 산의 위험함 그 자체를 그림자로
표현했다고 추측된다.]
[그 괴담은 영지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깊은 숲에 들어가면 그림자에게 잡아먹힌다.

숲의 그림자는 사람이 보지 않을 때 움직인다.

깊은 숲에는 사람을 흉내 내는 그림자가 있다.

숲의 그림자는 말을 한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깊은 숲’, 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 이라는 장소의 특정과, ‘그림자’라는
존재의 확정이 있었다.]

그리고 종이 위에는 그 ‘그림자’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의 얘기가 있었다.

[알데스 파터 (66 세) 약초꾼.

23 년 전 란슈브 산맥 깊은 곳, 절벽에 자라는 약초를 수집하던 중 실족.]

“나도 모르게 기절을 했더라고. 분명 점심이었는데 일어나보니 아침 해가 뜨고 있더군. 몸을 일으킬 기운도


없어서 그냥 누워서 하염없이 울창한 숲을 보고 있는데…… 그때였지 그놈이 나타난 건.”

“?”

“그림자 말이네. 선배 약초꾼들한테나 듣던 그 그림자. 겁주려고 지어낸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있었을 줄이야
…… 굶주린 맹수를 보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더군. 손발이 벌벌 떨리고 몸에 오한이 들더구만.”

“?”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나무의 그림자인 줄 알았지. 울창한 숲의 안쪽은 심해만큼 어둡기도 하니……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그 어둠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더라고.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리게, 100 세 먹은
노인보다도 느리게, 달팽이만큼이나 느리게…… 새벽안개를 헤치고 다가오더군. 아주 섬뜩하고 무서운
광경이었지.”

“?”

“글쎄, 그런 마수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없지만. 약초꾼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얘기지. 죽음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그림자가 있다고 말이야. 그놈을 보면 가까이에 죽음이 있다고 알라 하더군. 그래서 그때 마구
주위를 둘러보니 죽음이 가장 가까운 건 나뿐이지 뭔가. 내 냄새를 맡고 온 거였어, 그놈은.”

“…….”

“그놈이 내 머리맡에 우뚝 서서 내려 보기만 하는 걸 보고 내가 죽는 걸 기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그 귀한 약초들을 먹고, 씹어서 바르고, 온갖 짓을 해서 버텨 봤어. 다행히 이삼일 지나니 출혈도 멎고 부목을
대 놓은 다리의 부기도 조금 가라앉더군. 아 이제 살겠다 생각했더니 계속 머리맡에서 날 내려 보던 놈이 숲을
향해서 천천히 사라지는 게 아닌가!”

“…….”

“진짜라니까! 정확히 23 년 전! 내가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해!”

“?”

“햐, 아무튼 지금 와서 생각해도 무서워. 아 그리고 내가 생각해 봤지! 왜 그걸 그림자라고 부르는 걸까 하고.
온몸이 새카매서 그런가 했는데…….”

“?”

“처음에 그놈이 다가올 때에는 검은 연기가 뭉쳐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거든?”

“?”

“그런데 며칠이 지나니 꼭 사람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더구만. 이목구비는 없지만 정말 내 그림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같은 형태였지.”

“……!”

* * *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는 손님이 많은 편이었다. 현 백작이 뛰어난 무위로 일라베니아 황제의 커다란 신임을 얻고
있기도 하고, 영지 자체도 넓고 풍요로워 상인들이 많이 드나들기 때문이었다.

그 뜨거운 인기는 밤이 된다고 식는 것이 아니어서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큰 전쟁에서 총사령관을 맡은


전적이 있는 백작은 군사 회의에서도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밤 손님들은 붉은 가시나무 백작과 그 아들이
주고받는 서신에 무슨 내용이 써져 있는지 몹시 궁금해했다. 하루에도 서넛이 왔다간 적도 있고, 사용인으로
들어와서 몰래 빼내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고받는 서신의 내용에는 정말 특별한 게 없었다. 타 영지나 타국의 첩자들이 볼 것을 애초에
고려해서 작성했기 때문이었다.

[잘 지내고 있느냐. 나는 요즘 사슴 고기가 좋다. 푸른등불 공작의 앵무새는 후미약하고 운다. 길거리
고양이한테 배웠다고 하더구나, 신기하지 않느냐?] 따위의 정말 쓸모없는 정보뿐이었다. 누가 봐도 상관없는
내용이긴 했지만 첩자들의 손에 고이 들려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칼릭스가 발코니에 나타나자 순찰하던 기사가 집무실로 한 놈 들어갔노라 신호를 보내 왔다. 칼릭스는 검을 들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감과 동시에 검을 뽑아 눈앞에 있는 자의 목에 겨누었다. 초대받지
않은 누군가로 인해 열린 창문. 그 틈새로 불어온 바람이 커튼을 밀어내어 어두운 방 안에 달빛이 스며들었다.

“!”

허리까지 닿는 검은 머리를 가진 여자의 실루엣이 창문 앞에 드러나 있었다. 마주친 시선에 칼릭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낮에 정원을 산책하던, 그 익숙한 누이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문을 박차고
들어온 칼릭스의 행동과 위협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다음 편에 계속....]

6 화.

칼릭스는 잠시간 당황하다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원래의 목적이었던 첩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태연하게 서 있는
그녀의 발밑에 검은 덩어리가 쓰러져 있었다. 목이 완벽하게 뒤틀려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검을 다룬다고 해도
완력이 약한 여자의 몸으로는 성인 남자의 목뼈를 이렇게까지 비틀어 꺾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흉기를 들고 있는
사람을 상대로 상처 하나 없이.

쾅!

칼릭스는 그녀를 붙잡아 벽으로 세게 밀어 넣고 턱밑에 검을 바싹 대었다. 그녀는 말똥말똥 눈을 뜬 채 그를


올려보기만 했다.

맑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속에서 치솟는 불길을 느꼈다. 이빨이 덜덜 떨리는 걸 막기 위해 턱에 꾹 힘을 줘야만


했다. 분노가 그녀의 목을 계속 파고들려 했지만, 자신을 닮아 있는 그녀의 그 얼굴이, 달빛을 받은 녹음의
눈동자가,

“칼릭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이렇게나 선명했다.

칼릭스는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화가 나고 슬프고 답답하고
괴로웠다. 칼릭스는 그녀의 어깨를 조금 더 세게 그러쥐었다. 무시무시한 완력으로 압박하고 있음에도 그녀는
일말의 불편한 기색조차 없었다. 첫날 이후부터 이 순간까지, 변하지 않는 그녀의 표정이 그를 끝없이 자극했다.
나는 당신이 아는 그 사람이 아니야.

온몸으로 말하는 것만 같았다. 칼릭스의 턱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한 자 한 자, 씹어 먹는 듯 말을


내뱉었다.

“네가 혈육의 모습이라고 베지 못할 것 같나? 말해! 아니면 목을 날리겠다.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온 거냐!
감히, 그 모습을 하고서!”
칼릭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다그쳤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온몸을 두드려 댔다.

“너는 대체!”

거친 손길에 밀리고 흔들려 그녀의 머리는 더 흐트러졌다. 칼릭스는 그 머리카락이 반쯤 가리고 있는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대체, 누구야!”

마지막 물음은 비명과도 같았다. 뒤에서 보면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지만, 그와 그녀의 사이는 칼


한 자루로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칼릭스는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다. 시계 초침의 소리조차 몇 번 들리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그와 조우한 순간부터 줄곧 침묵을


지키던 로젤린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이 가볍게 칼릭스의 검을 쓸었다. 칼릭스는 흠칫 떨었지만, 뒤로 물리지는
않았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줄곧 마주 닿아 있던 그녀의 시선은 검신 위를 떠돌았다. 손질이 잘 되어
있는 금속의 표면에 로젤린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잠시간 제 모습을 응시한 후 입을 열었다.

“나는 그림자.”

그리고는 웃었다. 칼릭스는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누군가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눈썹이 살짝 처지며 날카로운 눈이 부드러워지고,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 있는 아주 잔잔한 미소였다.

“나는 로젤린의, 그림자다.”

* * *

‘그것’은 가끔은 새의 모습이었다가, 혹은 벌레였다가, 때로는 커다란 야수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깊은 산, 사람이 발길이 닿지 않는 태고의 숲에서 오랜 시간 존재해 왔다. 마력의 성질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그것’은 마수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랐다.

붉게 빛나는 눈, 맹수보다 강한 힘, 공격성까지. 마수라고 정의 지어지는 틀 안에 아슬아슬하게 비껴서 있는


이것이 마수로 규정지어지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을 마수라고 부를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슴, 호랑이, 원숭이, 멧돼지, 때로는 곤충까지. ‘그것’은 자신이 과거에 먹었던 것으로 의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인간들은 이를 한 번씩 스쳐 지나가면서 봤을지는 모르나 ‘그것’의 진정한 모습은 알 수
없었다.

검은 연기 같기도 했으며 살아 있는 모래의 집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검은 ‘그것’은 정확한 경계를 가지지
못하고 부서지듯 흩어지듯 보였으나, 부서지지도 흩어지지도 않고 간신히 뭉쳐 있는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과거
누군가는 이것을 귀신이라고도 했고 과거의 또 다른 누군가는 나무의 그림자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것’들이 의태를 풀고 본 모습을 드러낼 때는 음식을 흡수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더더욱 발견된 적이 없었다.
때로는 일 년 이상 먹지 않기도 했으므로. ‘그것’이 섭취 하는 것은 죽어 있는 생물뿐이지만, 사냥이라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오래 굶주려야만 했던 이유였다. 어떤 동물, 어떤 마수도 자신이 사냥한 사냥감을 바닥에
버리고 가지 않았다.

‘그것’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먹었으며 때로는 영역 싸움의 패자들 근처에서 그들의 죽음을 기다리기도
했다. 굶주림이 극심해지면 풀이나 과일 따위를 먹기도 했지만, ‘그것’이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다. 그저
행운만을 기다리다가 소멸하는 개체도 있었다. 지능이 낮은 편은 아니었지만 다소 게으르다고 평가할 만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에 자리한 ‘마의 산’. 그 높고 험한 깊은 곳.

‘그것’은 조금 오래 굶었다. 2 년 전에 작위를 물려받은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마수 토벌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자였다. 사냥꾼과 용병들이 산을 드나든 결과, 마수와 동물의 개체 수가 급감했다. 그 때문에 ‘그것’은 오랜
시간 굶주렸다.

세달 전쯤 썩어 가는 과일을 발견해 조금 먹었다. 하지만 허기를 채우기에는 부족한 양이었다. ‘그것’은 지쳐서
잠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일어난 이유는 날카롭게 제 감각을 찔러 오는 위험 때문이었다. 산의 마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과거에 먹었던 파랑새로 의태해서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건
아주 옳은 선택이었다. 얼마 후, ‘그것’이 머물던 곳까지 인간들이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그것’은
무당벌레로 변해서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찬란하게 빛나는 은색 갑주들이 저 멀리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인간들은 번개처럼 거대한 산맥을 정벌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숨죽인 채, 그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이고 몇 년이고 숨어 지내는 것은 ‘그것’들의


특기였다. 길지 않은 기다림 끝에 조우한 것은…….

“…….”

죽어 가는 생물이었다. 검은 머리를 가진 인간이었다. 부서지고 찢어진 신체는 절벽 아래의 바위 무덤. 그중


가장 큰 바위에 걸쳐져 있었다.

하얀 꽃 한 송이를 가지고 놀던 ‘그것’은 여자를 발견하고 바위 무덤에 다가갔다. 여자는 봄에 막 싹트는


어린잎과 비슷한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깜박거리며 느리게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려지는 눈빛에 당황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것’은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렸다. 살아 있는 것을 먹는 건
유일한 금기였다. 쓸리고 부서지고 뒤틀리고 베인 상처로부터 바위는 점점 피로 젖어 갔다.

‘이 인간은, 곧 죽는다.’

‘그것’은 이런 장면을 제법 많이 보아 왔다. 높은 절벽은 인간을 단번에 죽여 주는 자비로움이 없었다. 어떤


때는 노인, 어떤 때는 건장한 젊은 남자, 어떤 때는 길을 잃은 아이.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찌르고, 입에서
피를 토하는 중에도 그들은 두려워했다. 눈앞에 떠도는 그 새카만 덩어리를 무서워했다. 인간들은 기어서라도
도망갔다. 비명을 지르고 돌을 던져서라도 그것을 쫓아내려 했다. 살고자하는 욕구가 아닌 미지의 생물에 대해
느끼는 원초적인 두려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이런 눈을 한 적 없었다. ‘그것’은 이런 눈동자를 처음 보았다. 아주 투명하고 예쁜


구슬 같은 눈이었다. 인간들이 흔히들 이런 상황에서 흘리는 눈물 같은 것도 없었다. ‘그것’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녀 또한 ‘그것’을 관찰하듯 눈을 떼지 않았다.

“……당신…….”
검은 머리의 인간은 ‘그것’을 불렀다. 바람이 색색 새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그것’은 조금
주춤거리다가, 평소보다 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조금 더 가까이 섰다. 인간은 겁도 없이 ‘그것’을
덥석 잡았고 ‘그것’은 살아생전 처음 놀랐다. 그녀 또한 놀랐다. 잡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검은 연기는 마른
모래, 마른 나무 같은 익숙한 듯 생경한 감촉이었다. 부서지는 입자가 그녀의 손안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일부는 붙잡을 수 있었다.

“도, 도와주세요…….”

‘그것’은 곤란했다. 인간의 언어는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무엇을 바라는지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치료해
줄 수단이 없었다.

검은 형체가 스르르 움직였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대류 하는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것’은 곧 어린


여자아이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고 검은 부분이 점점 사라지며 이윽고 완벽한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몇 년
전 먹은 어린아이였다. 그녀는 자신이 잡고 있던 부분 또한, 아이의 팔로 변했음을 깨달았다. 따뜻한 온기가
돌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확장되었다. 그녀는 알았다. 이 존재를 알고 있었다.

“너. 피 많다. 죽어. 나는. 안 돼.”

너는 죽을 것이고 자신은 도와줄 수 없다. 그녀는 아이의 뜻을 읽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한번 감고 떴다. 그


맑던 눈동자에 불티 같은 것이 탁탁 튀었다. 남아 있던 두려움의 한 자락, 공포의 파편이 활활 타올랐다. 출혈로
인해 점점 멀어지는 의식과 가빠지는 숨. 그녀는 자신의 상태와 상황을 제대로 인식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닳아 가는 의식 속에 한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저를 먹어도 좋아요.”

아이는 이 인간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누군가에게 허락을 맡고 먹은 적도 없었고 그 허락이 내려진 것도


처음이었다. 여자는 컥, 컥 하며 피를 토하더니 웃었다.

“대신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아이는 왜 그녀가 웃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 더 알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떠듬떠듬


그녀와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

그 깊은 숲 어딘가.

금기의 계약이 이루어졌다.

[다음 편에 계속....]
7 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넓은 정원. 칼릭스는 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원사의 솜씨가 빛나는 색색의
화원에서 사람들이 산책 중이었다.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흰 셔츠, 회색 바지, 서스펜더를 착용한 여자가
있었다. 귀족가의 영애가 할 만한 복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전부터 드레스를 거추장스러워했다. 몸을
움직이는 게 직업인 그녀에게는 고역이었을 것이다.

화단을 산책하는 그녀의 뒤로 하녀들이 졸졸 따라다녔다. 한 명은 아가씨의 피부를 위해 양산을 들고, 한 명은


아가씨가 추울까 봐 숄을 들고 있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아가씨가 더울까 봐 부채를 들고 다급히 뒤를 쫓았으며
아가씨가 배고플까 봐 간식 바구니를 들고 있는 하녀도 있었다. 칼릭스와 비슷한 연배의 그녀들은 예전부터
로젤린을 잘 따랐다. 그런 그들에게는 로젤린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칼릭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가씨 이것 보세요, 꽃이 아주 예쁘게 피었네요.”

“네가 더 예뻐.”

어머, 어머! 하녀들은 꺄르륵 소리를 내며 즐거워했다. 칼릭스는 전에도 이 풍경을 본 적이 있다. 꽃 피어오르는
봄날, 밖으로 놀러 가고 싶어 하는 어린 하녀들을 위해서 그다지 관심도 없는 나들이를 가셨더랬다. 하녀들이
꽃이 너무 곱다 예쁘다 조잘대면,

[네가 더 예쁘구나, 일리야.]

하고 엄한 마음 훔치고 있는 것이 딱 로젤린이었다. 하녀들 또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제 아가씨의 행동이


과거와 흡사함에 놀라워했다.

“아가씨는 어쩜, 기억을 못하셔도 똑같으시네요!”

“역시 아가씨는 아가씨예요!”

그녀들의 말이 칼릭스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건 로젤린이 아니었다. 저건 로젤린이 아닌데. 저건 내 누이가


아닌데. 아니었는데.

칼릭스는 복잡한 마음으로 알터의 보고서를 팔락였다. 그림자에 관한 서류였다. 습관적으로 계속 들여다봤더니
이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이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지키러왔다.]

무엇을?

[그를 지키기 위해 왔다.]

누구를!
[하얀 밤의 주인.]

완벽한 타인이었다. 로젤린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단순한 괴물이었다.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하얀 밤의 주인을


지키겠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단순히 제 누이의 탈을 쓴 무언가에 불과했는데…….

칼릭스는 그녀의 두 눈에서 무언가가 타오르며 불티가 튀어 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의심의 의심, 갖은 고뇌를 한 끝에 완벽한 타인이라 규정지었더니 그 순간에 진정 제 누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제 아버지와 대립하면서까지도 지키고 싶어 했던 이름. 그 때문에 칼릭스는 검을
치워야만 했다.

순간 칼릭스는 ‘어쩌면,’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건 그녀가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코앞에 둔 그녀의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건 그녀가 바란 모습일지도 모른다.

칼릭스는 그 날, 집무실 바닥에 널브러진 첩자의 목을 베었다. 목뼈가 뒤틀려 죽은 이상한 모습에는 누구든 쉽게
의문을 가질 수 있으니.

[밤공기가 차갑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누님.]

그는 힘겹게 말하고서 첩자의 시체를 들고 방을 나섰다. 그 밤으로부터 2 주가 흘렀다. 로젤린의 상처는 자국만
남고 거의 아물었다. 포크와 나이프도 더없이 능숙하게 사용했고 바닥에 떨어트린 음식을 주워 먹지도 않았다.
기억을 잃은 틈을 타 에델바이스가 제 딸의 드레스를 마구 사들여 입혔지만, 어느 날부터 그녀는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 셔츠와 바지, 종아리 바로 아래까지 오는 부츠까지. 에델바이스가 보고 통곡하던 옷차림새로 백작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글자와 언어를 배웠다.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 빠른 속도였다. 마치 알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잊고


있던 것을 차근차근 일깨우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화단을 구경하던 로젤린이 돌연 고개를 휙 돌렸다. 팔짱을 끼고 내려 보던 칼릭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려 살짝 흔들었다. 칼릭스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얼떨떨하긴
했지만, 그 또한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로젤린은 살짝 입꼬리만 올려서 웃더니 다시 하녀들과 나란히 걸었다.
그 모습은 점점 작아졌고, 이윽고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괜찮으십니까?”

칼릭스의 뒤에 멀뚱히 서 있던 알터가 물어 왔다. 그가 묻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도련님


당신은 괜찮으냐 또는 그녀를 그대로 두어도 괜찮으냐. 하지만 칼릭스는 온종일 로젤린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후자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알터가 뜨악한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칼릭스는 부싯돌을 들고
탁탁, 솜씨 좋게 불을 붙였다. 알터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제 피, 땀, 눈물이 몽땅 재가 되게 생겼다.

“나는 착한 동생이거든.”

착한 칼릭스. 우리 칼. 착한 아이구나. 어릴 적 로젤린이 자주 해 주던 말이었다. 칼릭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누님의 바람이 진정 이것이었다면…….”


칼릭스의 눈동자에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의 일렁임이 비쳤다. 그것은 종이의 조각 하나, 잉크 한 방울 남기지
않게 타오르고도 멈추지 않고 너울거렸다.

“나는 따를 뿐이다.”

자욱한 검은 연기는 길을 따라 굴뚝 밖으로 빠져나갔다. 로젤린은 하늘 위로 올라가는 연기를 잠시간 쳐다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도련님!”

뛰는 것 금지. 큰소리 금지. 경박한 말투 금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집사의 모범이 와장창 깨진 날이었다.
검술 수련을 하던 칼릭스는 급하게 달려오는 집사의 모습에서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또한 그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 까지도.

“큰뿔산양의 레이몬드 경께서 아가씨를 뵙고자 백작가를 방문하셨습니다!”

급한 일, 맞다. 젠장. 칼릭스는 땀투성이였지만 그걸 씻어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겉옷을 걸쳐야만 했다.


로젤린이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사람들뿐이었다. 내부적으로는
에델바이스가 제 딸의 혼삿길을 위해, 외부적으로는 현 하얀밤 기사 단원인 그녀의 직위가 위험할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은 항상 로젤린을 주시했다. 1 황자파에 속하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 헌데 그 장녀가 2
황자의 기사단에 들어앉아 있으니 그 시선이 고울 리 만무했다. 한 달이 지나도록 그가 잠잠했던 것은 그녀의
부상이 심각하기도 했거니와 사냥 대회의 사건으로 그의 일정이 매우 바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수습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흘렀고 그녀의 병가 기간 또한 끝을 보이고 있었다.

큰뿔산양 레이몬드. 그는 로젤린의 몇 안 되는 친한 단원이었다. 개인적인 병문안 겸, 단장의 압박을 함께 들고


왔으리라. 하지만 상처 회복의 유무는 둘째치더라도 그녀의 복귀가 마땅히 미뤄져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그녀는 이제 말은 곧잘 했지만, 반말과 존댓말의 차이를 잘 몰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또한 예전 로젤린의
기억도 없는 상태였다.

급하게 본관에 들어서는 칼릭스를 따라 하녀와 하인들이 따라붙었다. 그들의 표정엔 초조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칼릭스는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

“도련님, 레이몬드 경께서 먼저 아가씨를 뵙겠다며 올라가셨어요!”

“안 막고 뭣들 했나 대체!”

“친구를 만나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하느냐며 무작정 올라가시는데, 귀한 집 자제분이셔서 차마 손도 못 대고…


….”

칼릭스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뒤에서 도련님, 도련님! 하는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그녀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가에서 하녀들이 안절부절, 발을 동동 굴리고 있다가 칼릭스를 보고 왈칵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도련님 도련님! 칼릭스는 평생 들을 도련님소리를 오늘 다 듣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언젠가를 떠올리게 했다. 로젤린이 제 스테이크를 손으로 쥐고 뜯고 있던…… 그…… 야생.
날것의 모습.

방 안에는 하얀밤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큰뿔산양의 레이몬드. 익히 아는 자였다. 그런데
자세가 좀 이상했다. 천하를 호령하는 무장처럼 떡하니 서 있는 로젤린 앞에 두 무릎을 꿇고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었다.

“감히 어딜 만져. 죽고 싶나?”

그녀의 말투는 칼릭스와 많이 닮아 있었다. 요즘 뒤에서 몰래 제 모습을 지켜보더라니 그새 말투를 배웠구나


싶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녀가 말한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만져? 뭘 만져? 칼릭스는 눈에 불을 켜고
레이몬드의 어깨를 확 잡았다.

“경, 이게 지금 무슨……? 무,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몬드 경? 경?”

어깨를 잡을 때만 해도 서늘했던 칼릭스의 말투는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하게 변화했다. 추궁, 의문, 경악.

레이몬드의 새파래진 낯빛이 심각해보였다. 레이몬드는 파들파들 떨면서 칼릭스의 팔을 붙잡더니 끅 소리를 내며
실신했다. 쿵. 바닥이 울렸다. 어린 하녀가 놀라서 엉엉 울었고 저 멀리에서는 집사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옆 테이블에서 스콘에 잼을 바르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아수라장이었다.

레이몬드는 손님방의 침대로 옮겨졌다. 제복을 벗겨 보니 명치에 새빨간 자국이 남아 있는데 조만간 크게 멍이 들
것 같았다. 칼릭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 누이에게 우선 물었다.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를 곱게 귀 뒤로
꽂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밀크티를 마셨다.

“그거 아주, 아주 나쁜 놈이야.”

“……사람더러 그거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수발을 담당하는 하녀에게 물어보니 레이몬드 경이 그녀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고 했다. 무사한 아가씨를 보고 기쁜 마음에 한 행동이었다고. 어디를 더듬거나 이상한 행위를 하지는
않았단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바로 전날. 순하고 착한 아가씨가 기억을 포함한 상식까지 모두 잃어버린 것이 몹시
걱정되었던 하녀들은,

[아가씨. 우리 아랫것들이 이렇게 아가씨를 꾸며 드리려고 가끔씩 아가씨를 만지게 되잖아요. 이런 것 말고,
모르는 사람이 아가씨를 만지려고 하거나, 쓰다듬으려고 하면 꼭 말씀하세요. 그 사람은 정말, 정말 나쁜
놈이거든요? 저희가 혼내 드릴게요]

[칼릭스는?]

[칼릭스 도련님은 괜찮아요.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잖아요? 그러면…….]

‘일단 패세요.’라고 말했단다. ‘수습은 칼릭스 도련님께서 하실 겁니다.’라고도 했단다.


칼릭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이 간과했던 것은 기억을 잃은 로젤린에게 가족과 고용인을 제외하면 전부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로젤린과 함께 그녀의 방으로 갔다. 사람들을 다 물리고서야 교육은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8 화.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안 된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 후…… 복창하세요…….”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안 된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

“잘 하셨습니다. 아까 누님이 때려눕힌 분은 큰뿔산양 후작가의 레이몬드 경이십니다. 누님과 같이 하얀밤


기사단에 적을 두고 계시고, 사적으로는 친구입니다.”

“때리면 안 돼?”

“안됩니다.”

“알았어.”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는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세게 쓸며 괴로운 소리를 냈다. 칼릭스는 누군가가
흉기를 들거나 살의를 비친다면 패도 되고 죽여도 된다고 말을 덧붙였다.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전쟁터에서도
얌전히 화살을 맞아 주고 있을 것 같았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아주 아주 무서운 곳에 갑니다. 그곳에는 정말 무서운 아저씨가 있지요.”

“무서운 곳…….”

로젤린이 침을 꼴깍 삼켰다. 부족한 상상력으로나마 열심히 무서운 아저씨와 무서운 곳을 그려 보는 것 같았다.

곧 레이몬드가 깨어났다고 하인이 알려 왔다. 손님방에 도착하니 그는 상반신을 어정쩡하게 일으킨 상태로 앉아
있었다. 이 집에 들어올 때만 해도 단정하던 레이몬드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다. 칼릭스는 벌써 피곤이
몰려왔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좋을지 한참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노라니 로젤린이 대뜸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
“…….”

로젤린은 전혀 안 미안한 얼굴로 유감을 표했다. 칼릭스는 머리가 지끈거리며 두통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레이몬드는 침대에 앉아 멍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방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마지막으론 제 옷을


들어 배에 새겨진 폭력의 흔적을 확인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가는 모양이었다.

“로젤린?”

“그래.”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응.”

“아까 이 오라버니를 때린 게 너라고 로젤린?”

“응. 미안.”

“어…… 음…… 빠른 사과 아주 보기 좋아…… 좋은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의 시선 처리에서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로젤린은 침대 옆 의자를 끌어와 철퍽 앉고 레이몬드를 위해 차려


놓은 다과를 먹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쳐다보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칼릭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칼릭스 경…… 혹시…… 우리 로젤린의…….”

레이몬드는 풍부한 손짓을 하며 말을 골랐다. 손이 머리쯤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어서 그가 로젤린의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적나라한 손짓과는 별개로 그는 심사숙고하여 말을 내뱉었다.

“로젤린의 컨디션이 예전 같지 않다던가……?”

여태껏 들은 표현 중에 제일 점잖은 것이었다. 누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고난을 남겨 주고 가셨습니까.


칼릭스는 제 참담한 기분을 가다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누님의…… 컨디션이…… 약간…… 예전 같지 않으십니다…….”

레이몬드는 복잡한 얼굴로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그는 까치집이 된 머리를 더 헤집으며 엉망으로 만들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젤린이 물끄러미 시선만 옮기자 그녀의 손을 잡아 일어나게 했다.

“이번에는 때리면 안 된다, 로젤린.”

“응.”

그리고 와락 껴안았다. 로젤린은 조금 답답한 듯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교육이 효과가 있었던지 냅다 주먹을
쓰지는 않았다. 칼릭스는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쯧 혀를 찼다. 괜히 때리면 안 된다고 했나. 시집도
안간 남의 귀한 집 딸을 덥석덥석 안다니. 영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딱 한번만 눈감아 주기로 했다

“잘 살아 돌아 왔다.”
레이몬드의 얼굴, 그의 목소리에서 깊이 쌓인 감정들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 * *

“예상 했던 대로 검은달 놈들이더라.”

레이몬드는 제 옷을 들어 타격당한 부분을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새파랗다 못해 거무죽죽한 멍이 들어 있어 흠칫


몸을 떨며 놀라긴 했으나,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옷을 내렸다.

“검은달?”

로젤린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어서 의문형이라고 알기 힘들었다. 레이몬드는 측은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것도 다 잊은 거였나…… 음. 검은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신성 제국 일라베니아와 항상 사이가


안 좋았던 왕국 ‘발타’의 마력 숭배 집단이지.”

“마력?”

“성력과 반대의, 상극의, 불길한 힘을 말하는 거야. 그놈들은 어둠과 혼돈의 신인 크레안 티다니온이 진정한
신이라고 생각하고 빛과 질서의 신 이델라브힘은 거짓된 존재라고 주장하는 광신도 집단이야. 2 황자 전하께서는
역대 황제들을 넘는 성력을 지니고 계셔서 항상 검은달 놈들이 노리고 있지. 암살 시도가 스물한 번을 넘어갔을
때, 하얀밤이라는 2 황자 전하의 특수 호위 기사단이 창설 되었어. 그리고 그게 우리야.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경.”

로젤린은 흠, 하고 보기 드물게 반응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다리를 쫙 벌리고 있다가 칼릭스가 “누님……
다리 좀…….” 하고 그녀의 자세를 바꿀 것을 청하자 다리를 꼬았다. 그녀의 한쪽 다리가 까닥거리며 발짓하고
있었다. 첩첩산중이었다. 칼릭스의 깊은 한숨 소리에 레이몬드가 웃었다.

“이번 사냥 대회의 사건에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많이 사망했어. 심지어는…… 음…… 부단장님도 돌아가셨지.
네가 부단장님을 많이 따랐어, 로젤린. 혹시 기억나?”

“아니.”

“……기억 못하는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네. 많이 슬퍼했을 거야 너. 음, 아무튼 간에 새로운 부단장으로 전


부단장의 부관인 나단 경이 새로 임명되셨고, 크으…… 그리고 무려 이 몸이 부단장의 새로운 부관이 되었단
말씀.”

레이몬드는 허리에 두 손을 떡하니 올려놓고 잔뜩 뽐냈다. 로젤린은 그 모습을 보다가 “좋아?”라고 물었고
레이몬드는 그 물음에 스르륵 무너졌다.

“아니…… 안 좋아…… 누구는 승진이라고 부럽다고 하지만…… 그 부단장 밑에서 이리저리 구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하다…… 아, 참. 그리고 너도 상급 기사로 승급했어. 전에 치렀던 승급시험 점수도 좋았고
플러스로 죽은 동료들 중에 상급 기사들이 많았지. 너도 이제 2 황자님을 직접 호위하는 인원에 들어가.”

“그래?”
태평한 로젤린을 대신하여 칼릭스가 깜짝 놀랐다. 과거에 그녀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를 지키기 위해 왔다.]

[하얀 밤의 주인.]

전의 말대로 된 셈이었다. 그녀가 정말 하얀 밤의 주인을 지키는 인원 안에 들어가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기사단장이 그녀를 상급 기사로 승급시켜 줬다는 점이었다. 1 황자 파에 속하는
그녀의 가문을 알고 있음에도 더욱이 한 번 호위 임무를 실패한 적이 있는 자에게도 기회가 돌아갈 정도로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인가? 칼릭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생각보다…….”

“그렇게 됐습니다, 칼릭스 경.”

“……그렇군요. 아니 잠시만. 레이몬드 경. 문제는 그게 아닐 텐데요.”

“아.”

“…….”

칼릭스와 레이몬드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둘의 시선 끝에는 여전히 다리를 꼰 채로 발을 까닥거리고 있는


로젤린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상급 기사로 승급하기 전에, 일라베니아의 황실로
돌아가기 전에, 아주 시급한 문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로젤린을 끌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로젤린은 그들의 손을 잡고 쭐레쭐레 따라갔다.
하녀가 로젤린의 긴 머리를 하나로 묶자, 레이몬드가 검을 들고 그녀 앞에 다가갔다.

“검, 뽑아서 들어봐 로젤린.”

레이몬드는 제 심장이 하도 쿵쿵 뛰어서 입 밖으로 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발, 제발…… 검술은 기억하고
있겠지?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칼릭스 또한 그 광경을 보며 침을 꿀떡꿀떡 삼켰다. 두 남자의 뜨거운 시선
아래, 그녀는 내밀어진 검을 뽑았다. 스르릉, 검집을 스치는 날이 예리하게 울었다.

“……크윽…….”

“…….”

칼릭스는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레이몬드는 처참하게 무너져 연무장 바닥에 기대듯이


쓰러졌다. 검술 이전에 파지법조차 엉망이었다. 검이라고는 생전 처음 잡아보는 자의 것이었다. 로젤린은 눈을
빛내며 검을 이리저리 살폈다.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 같은 반응이었다.

“……로젤린…… 귀여운 건 좋은데…… 크……흑…….”

“이거 내 거야?”

“아냐…… 그거 내 검이야…… 너는 무거워서 이거 못쓰는데……? 어? 안, 안 무거워 로젤린?”

로젤린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제 손끝으로 바스타드 소드를 들어 보였다. 레이몬드가 입을 떡 벌리는 모습을 보고
칼릭스가 급하게 말을 붙였다.

“누님께서는 회복하시는 동안 체력 단련을 중점적으로 하셨습니다!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검은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체력 훈련을 평소보다 두 배, 아니 세 배 정도!”

“내가?”

“네! 누님께서 그러셨습니다!”

병가를 낸 기간 동안 하루 종일 먹고 자고 놀기만 했다. 자신의 기억과 다른 발언에 로젤린은 온 얼굴로


의아하다는 빛을 내보였지만, 칼릭스는 그녀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훈련을 했는지에 대해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며
일장 연설했다. 레이몬드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걸? 로젤린 너는 힘이 약한 게 좀 흠이었는데 쉬는 동안 잘 보완했구나. 어쩐지 아까 내 명치 때릴


때부터 범상치가 않더라니. 하하 오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빛의 강 너머에서 막 이리오라고 하시더라고.”

“왜 안 갔어?”

“아니야 로젤린…… 거기 가면 큰일나…….”

레이몬드는 시답잖은 농담을 몇 번 주고받다가, 곧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로젤린은 객관적으로 괜찮은
기사였다. 힘보다는 기술과 지략을 내세우는 여자 기사들 중에서는 이미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또한
그녀 특유의 성실함을 높게 평가받아서 짧은 수습 기사 기간을 거치고 곧바로 하급 기사로 승급했었다. 하지만
하급 기사들은 수습 기사들과 달리 실력이 검증된 자들이 많았다. 조금 뛰어난 기술만으로는 그들의 실력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9 화.

로젤린은 그 한계에 부딪히고도 좌절하지 않았고 노력했다.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수련했으며 누구보다도 많이
공부했다. 장점을 갈고 닦고, 약점에서는 눈을 돌리지 않으려 했다. 여자기사라고 은연중에 무시하던 이들도
그녀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제 시선을 점차 바꿀 정도로.

상급 기사로 승급했다는 소식에, 레이몬드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녀의 노력이, 그녀의 마음이 헛되지
않았구나하며 기뻐했다. 그녀의 승급 소식을 전해 준 부단장에게 입을 맞추려다가 한 대 맞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로젤린이 바라 왔던 것,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것. 지금 로젤린이 잊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어렵사리 온 기회를 놓치게 할 수 없었다. 레이몬드는 그녀에게 검을 건네받았다.

그는 검신을 똑바로 세워 잡았다. 넓은 바스타드 소드의 검신이 그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로젤린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너는 지금 검도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데…… 기사단에 돌아온다고 뭘 할 수나 있을까 로젤린?”

“그래도…….”

“그래도?”

“가야해.”

“왜?”

레이몬드는 얼굴 앞에 있던 검을 모로 세웠다. 날카롭게 검 날 너머로 로젤린이 두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얀 밤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레이몬드는 씨익 웃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하더니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하고 있다. 그녀다웠다. 로젤린은 언제
어디서든 어떤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것이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발휘되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레이몬드는 하하 웃으며 그녀와 확 거리를 벌렸다. 칼릭스도 레이몬드가 뭘 하려는 건지 눈치 채고 조금 물러섰다.

“잘 봐, 로젤린. 잘 기억해. 기억해야 해.”

레이몬드는 잠시간 눈을 감더니 움직임과 함께 눈을 떴다. 칼릭스만큼이나 눈에 띄는 장신이었지만, 그는 매우


재빨랐다. 정확했으며 물이 흐르는 것 같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일라베니아 제국 검법의 가장 기본이 되는
동작들이었다. 로젤린은 그의 모습 하나하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잘 봐, 잘 기억해야 해. 그의 말처럼 그녀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보고 있었다. 레이몬드의 움직임에 따라 녹색의 눈동자가 휙휙 움직였다.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이었다.

찌르고, 베고, 막고. 검 끝은 하늘을 향했다가, 허공을 가르고 땅을 스치기도 했다. 검이 지나는 공간마다 크게
바람이 불었다. 제법 떨어져 있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검의 날카로움이 생생했다.

“후.”

레이몬드는 처음 시작할 때처럼 검을 제 얼굴 앞에 세우며 움직임을 멈췄다. 진지하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아올
쯤엔 로젤린도 뻑뻑한 눈을 깜박일 수 있었다.

“끝! 이것만 다 할 줄 알아도 반은 간 거야. 사실 너는 몸보다는 머리를 쓰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차근차근 배우는 걸로 하고…….”

“한 번 더.”

“응?”
로젤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귀찮게 말을 두 번하게 만들고 난리야. 딱 그 표정이었다.

“한 번 더.”

레이몬드는 어……엇? 그, 그래 하면서 허둥지둥 두 번째로 검법 시연을 펼쳤다. 그는 어린 시절 막 검을 배우던


때를 떠올렸다. 하루에도 몇백 번씩 연습하고는 했었다. 그때는 지겨워 미칠 것 같고 힘들기만 했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도 다 추억이었다. 그가 속으로 허헛 웃으며 두 번째 시연을 끝내니,

“한 번 더.”

“……나…… 왜 좀 불안하지 로젤린……?”

레이몬드는 과거에 힘들었던 그 추억이 현실이 될 때까지 한 번 더, 한 번 더, 한 번 더. 라는 소리를 끝없이


들어야만 했다. 그의 검은 몇 시간째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밤이 찾아와 검날에 달빛이 반짝, 반짝 비칠 때까지.

“청구할 거야…… 검술 교사 비용 청구하고 말거야!”

“해. 칼릭스 돈 많아.”

“젠장! 그건 그래!”

“…….”

칼릭스는 그들의 대화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헉헉거리면서 소파에 대충 널브러졌다. 목 끝까지
채우고 있었던 제복은 단추 두어 개를 제외하고는 전부 풀려 있었다. 예전 로젤린이 보았다면 한소리 했을 복장
상태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저녁이라도 들고 가시죠, 레이몬드 경.”

레이몬드는 손을 휘휘 저었다. 대답할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저도 이제 슬슬 복귀해야 해서, 휴. 권유는 감사하지만 일정이 바쁘군요. 그런데 오늘 한 고생이 뭔가 소용이
있겠습니까? 몸을 직접 움직인 것도 아니고 그냥 보기만 했는데?”

칼릭스는 비죽 웃었다.

“누님께서는 기억력이 아주 좋으시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 2 주 뒤에 서임식이 있습니다. 부디 그때까지…… 그…… 로젤린의 말투 좀 어떻게


…….”

“…….”

“상급 기사로 임명되는 자들의 서임식은 2 황자 전하께서 직접 진행하실 예정입니다. 그때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을 상급 기사로 임명한다! 고 선언하실 텐데 응. 그래. 하는 사태는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오싹 하군요.”

칼릭스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2 주일. 검술과 예법을 익혀야 하는 시간이 고작 2


주밖에 남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바쁜 짬을 내서 겨우 찾아온 것이니 아마 다음번은 황궁에서 만나게 될 거라
그녀에게 말했다. 로젤린은 “응, 그래.”라고 대답했다. 그들의 등골은 다시금 서늘해졌다.
레이몬드는 남매의 배웅을 받고 저택을 곧 떠났다. 로젤린은 자신의 방에 걸려 있던 레이피어를 들고 연무장으로
다시 내려왔다. 칼릭스와 하녀가 식사 시간이라 알렸음에도 그녀는 연무장 중앙에 앉아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감은 그녀의 시야 너머로 흰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몸의 중심을 찾고, 왼쪽, 오른쪽, 어느 방향으로도 움직일 수 있게 경계하며, 부드럽지만 강하게. 그는
로젤린의 앞에서 끝없이 움직였다. 그녀는 한참 그 모습을 떠올렸다. 부푼 근육이 제복 위로 씰룩이는 것이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을 타고 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바람을 가르는 검의 환상이 그녀를 여러 번 베고
지나갔다.

로젤린은 검을 뽑았다. 그의 바스타드 소드와는 형태도 무게도 다른 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칼릭스는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레이몬드가 몇 시간을 보여 준 덕에 그녀는 움직이는
순서와 형태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많이 어설펐다. 검을 처음 잡아 봤을 뿐더러 파지법조차
엉망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형태가 조금씩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체격이 확연히 다른 그녀가 레이몬드를 따라 하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랐다. 검을 몇 번 휘두른 그녀는 그걸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수없이 검을 휘두르는 동안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맹목적으로 레이몬드의
움직임을 따라가지는 않았지만, 그 동작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베는 것, 찌르는 것,
막는 것, 공격하는 것, 지키는 것, 몸의 중심을 견고히 하는 것.

그녀는 레이몬드의 움직임에서 자신을 찾아 갔다. 로젤린의 체격, 현재의 이 신체가 지닌 힘, 검의 길이. 모든
것을 고려한 합리적이고도 아주 영리한 형태였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수년을 검을 휘둘러 온 사람 같은
뛰어난 검술 실력을 내보일 수 있었다.

레이몬드가 검법을 끝낼 때처럼 그녀는 검을 자신의 얼굴 앞에 세웠다. 눈을 감은 로젤린의 뒤로 하얀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굽이치는 검은 머리가 휘날리며 밤하늘에 녹아들었다.

어둠의 신 크레안 티다니온을 몰아내고 세상에 빛을 가지고 온 이델라브힘의 나라.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 대륙
구석구석에 널리 퍼진 위명에 걸맞은 크기였다. 눈이 부실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백색의 성은, 아무리 멀리
내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그리고 아주 높게 펼쳐져 있었다.

로젤린은 마차의 창을 통해 아름다운 성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감상했다. 하얗다. 많다. 일정한 규칙으로
만들어져 있는 이 높은 성들은 자신이 살았던 숲과는 매우 다른 성질을 띠고 있었다. 고요하고 적막한, 아름다운
이곳은 [좋다, 싫다] 둘 중에 [싫다] 쪽에 가까웠다. 그녀의 본능이 울렁거렸다.

항상 로젤린의 곁을 지키던 칼릭스는 지금 그녀의 곁에 없었다. 수도 티가드로 떠난 것은 오직 로젤린뿐이었다.


그는 백작 대리로써 붉은수레바퀴령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칼릭스의 끝없는 잔소리와 걱정이 덕지덕지 묻은
시선의 기억만이 그녀에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안 됩니다. 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안 됩니다. 이건 더 안 됩니다. 그건 정말로 하면 큰일 납니다, 안 됩니다.
뭘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게 많은지. 인간들은 고생을 사서 하는 종족이었다.

“로젤린!”

마차는 황성의 문을 지나고도 한참을 달렸다. 로젤린은 내리자마자 저 멀리서 달려오는 레이몬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레이몬드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몬드 경.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나한테는 편하게 해도 돼, 로젤린.”

레이몬드는 그녀의 모습에서 누군가의 노력을 엿봤다.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레이몬드는 마차에서 그녀의 짐을
같이 내렸다. 레이몬드 휘하의 수습 기사들도 그녀의 짐을 들고 기숙사로 날랐다. 깔끔하고 커다란 건물이었다.
아직 정식 서임을 받지 않았지만, 상급 기사로 승급했기 때문에 넓고 좋은 방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그 넓은
곳에 채워 넣을 짐은 많지 않았다. 순백의 제복 몇 벌, 검 몇 자루, 평상복과 생활용품들. 그녀가 대충 짐을
던져 놓자 레이몬드가 차곡차곡 꺼내어 정리했다.

[다음 편에 계속....]

10 화.

“평소보다 더 살벌한걸. 어째 드레스 한 벌이 없어.”

“칼릭스가 내 옷 다 유행 지났다고 수도 가서 사 입으랬어. 레이몬드보고 같이 가 달라고 하래.”

그 자식 나한테 다 떠넘기고 있잖아? 레이몬드는 속으로 칼릭스를 조금 욕했다. 뭐 그래도 제 동생 같은 아이를


위해서니, 휴일 정도는 반납하고 드레스 샵을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로젤린은 제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 레이몬드는 정리하던 중, 제복 한 벌을 그녀에게 건네었다.

“자, 이거 받아.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나와. 아니! 나 나가고 벗어!”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에 로젤린이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레이몬드가 황급하게 눈을 가렸다. 제복을 입고 나온


로젤린은 한동안 레이몬드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함부로 옷 벗고 막 그러면 안 돼 알겠어?
어? 빨리 이 오라버니 앞에서 약속해. 새끼손가락. 도장.
로젤린은 한동안 계속된 잔소리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꼬박꼬박 알겠다고 대답했다. 기숙사 복도는 넓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레이몬드는 쭉 길을 걸으며 그녀에게 몇 가지를 일러주었다.

“단장실에 가서 복귀했다고 알리는 게 우선이야. 서임식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기사단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좀
봐야 할 것 같고…… 아, 그리고 내일 상급 기사로 정식 임명된 후에는 수습 기사 몇 명이 붙을 거야. 최대 다섯
명까지. 네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는 수습 기사들이 지원하면 그중에서 뽑으면 돼. 자잘한 업무나 심부름 정도는
시킬 수 있는데, 시간 내서 돌봐 줘야 하는 게 좀 힘들긴 하지.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뽑아. 예식 순서랑
언약문은 외웠어?”

“응.”

“대단한걸, 잘했어. 그리고 로젤린 너…… 기억 잃은 건…… 음…… 어떻게 하기로 했어? 말해도 된대?”

“응.”

칼릭스는 고뇌했다. 말하자니 로젤린에게 불이익이 갈 것 같고, 말을 안 하자니 그녀의 자유분방한 행동이 납득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의 행동이 다듬어졌다고는 하나, 로젤린의 예전 모습을 알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눈치챌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통제를 벗어나 이상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기 전에 미리 다른 수를
차단해야 했다.

로젤린의 병명은 기억상실. 하지만 기사단 업무를 보는 것에 지장은 없을 것이며, 기억을 잃었음에도 남아 있는
2 황자에 대한 충심으로 기사단에 복귀하다. 그것이 로젤린의 이야기였다.

로젤린은 레이몬드의 안내를 받아 단장실에 도착했다. 문 앞에 수습 기사 두 명이 서 있다가 레이몬드의 얼굴을


보고 문을 열었다. 로젤린은 탁자에서 서류를 살피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 깊게 패인
주름. 관록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앞으로 이동했다. 레이몬드와
로젤린은 오른손으로 주먹을 가볍게 쥐고 손등이 보이도록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하얀밤 기사단에 막 복귀했습니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큰뿔산양 레이몬드. 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기사단장, 스타스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먹을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에게. 몸은 좀 어떤가, 로젤린 경.”

레이몬드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로젤린은 양손을 등허리에서 맞잡았다.

“괜찮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다행이야. 앞으로도 그 운을 전하를 위해 써 주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이번 상급 기사로 승급한 것 축하하네. 경이 부지런히 노력한 덕이지.”

“감사합니다.”

“임명식에 관해 궁금한 점이 있는가?”


“없습니다.”

레이몬드는 칼같이 오고가는 그들의 대화를 주시하다가 큼 흠, 목을 풀고 끼어들었다. 원래 말이 긴 편이 아님을


알더라도, 지금의 로젤린은 기사단장에게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 짧게 끊어지는 말들이 퉁명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단장님.”

“말해 보게.”

“……실은, 로젤린 경의 몸은 다행스럽게도 완벽하게 회복되었습니다만…… 그…… 마음이 아직 조금 아픈지라…


….”

스타스는 의문이 가득한 낯빛으로 레이몬드를 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 부단장 부관은?

“그게 무슨 소리지 레이몬드 경? 마음이 아프다니. 물론 심정은 이해하네. 나 또한 그대들처럼 동료를 잃었으니.
그러나 그 슬픔과 분노를 딛고 일어서는 게 우리들의 일이야.”

“…….”

너무 돌려 말했나…… 레이몬드는 입가에 띄우고 있던 미소를 한순간에 지웠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로젤린 경의 기억에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기억상실이라고 합니다.”

“……?”

언제나 무표정을 고수하는 기사단장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잔뜩 올라왔다. 아주 희귀한 광경이었다.

“대부분의 기억이 소실되었음에도 2 황자 전하를 지키고자 하는 하얀밤의 맹세는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식의 습득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그녀가 임무를 진행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대로 복귀
명령을 진행했습니다. 곧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서도 있습니다.”

스타스는 레이몬드에게서 소견서를 받아, 찬찬히 읽어 내렸다. 다른 내용은 다 흐릿한데 [기억상실] 그 단어만
아주 생생하고 뚜렷했다.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짧은 대답들이 이것으로부터 기인했던 건가.

그는 자신의 턱을 매만지면서 소견서를 한번 그리고 로젤린을 한번. 계속 번갈아 쳐다봤다. 뭔가 1 황자파의


계략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봤으나, 그녀의 올곧고 일관된 태도는 그 누가 보아도 2 황자에게 진실 된 사람이란
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1 황자파의 붉은수레바퀴 가문이라는 그 출신만 아니었더라도 더 아꼈을 것이다.

검은 머리의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걸 빤히 들으면서도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조금은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예전의 로젤린은 관대하고 담대했지만 이런 거짓말로 제 잇속을 챙기는 능수능란한 자는
아니었다. 그녀의 성품을 잘 아는 스타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허황된 보고가 한없이 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스타스는 얼굴에 복잡한 심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참을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힘겹게 열었다.

“……몸은…… 좀 어떤가, 로젤린 경.”

아까와 같은 물음이었지만, 담긴 뜻은 조금 달랐다. 로젤린은 허리를 곧게 세우며 똑바로 스타스를 쳐다봤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타스는 조금 입가를 달싹이며 망설이다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레이몬드는 단장실에 남아 잠시간 그와 더
얘기를 나누었다.

단장실 밖에 서 있던 두 명의 수습 기사들이 그녀의 얼굴을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하얀밤 기사단 내에서
유명인사였다. 1 황자를 비호하는 가문의 장녀,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자신을
향한 여러 감정이 담긴 시선을 받으며 그녀는 미소를 띠었다.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칼릭스에게 미리 들어서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에 있는 인간들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기사단장이라는 자도 마찬가지 일 텐데. 무뚝뚝한 말투와 표정으로도 그의 걱정은 감춰지지 않았다. 문 안쪽에서
레이몬드와 스타스가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문 밖에 있었지만 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청각 능력이 뛰어나다는 무엇의 세포를 조금 빌려 왔던 덕이었다.

“……로젤린 경이…….”

“그렇다면…….”

로젤린이 떠난 후에도 기사단장의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질려할 정도였다. 로젤린은 레이몬드를
기다리며 벽에 머리를 툭 기대었다.

안타깝다, 로젤린. 검은 머리의 인간. 그대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 *

로젤린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옆에서 레이몬드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여기저기서 찔러 대는 시선을 느꼈다. 지나가는 인간들 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부러 멀리서부터 찾아와서 제 얼굴과 생사를 확인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로젤린의 인내심이 슬슬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그것’은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생물들은 수년의, 수백의 시간과 몇 세대를 거쳐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하며 때로는 도태되기도 한다. 근처에 있는 생물을 흉내 내어 무리에 섞이고 위협으로부터
도망치기도 했다. ‘그것’의 의태 능력은 이러한 환경에서 발달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이 로젤린에게 집중되고 있는 이 순간은 그녀를 초조한 기분으로 몰아넣는 최적의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까지 바라볼 필요가 있는 건가? 마수의 모습도 아니고, 눈이 하나 없는 것도 아니고, 팔이 한
짝 어떻게 된 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형태인데? 혹시 나도 모르게 의태가 풀렸나? 그녀는 제 팔다리를
확인한 후, 제 등을 보기 위해 낑낑거렸다.

“뭐해 로젤린?”

“나 어디 이상해?”

왜 계속 쳐다보는 거지? 레이몬드는 뱅글뱅글 도는 그녀의 모습을 쭉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을음 하나 묻지
않은 완벽한 옷차림이었다.
“네가 좋은 아이기는 하지만 로젤린. 그렇다고 해도 그게 모든 사람이 널 좋아해줄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이상해.”

“좀 이상하고 어렵지? 인간관계가 원래 그래.”

붉은수레바퀴의 페르탄 에스터 백작. 1 황자를 비호하며 전선에서 수많은 공을 세워 백작위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작위를 보유하고 있는 자. 한마디로 일라베니아에서도 제법 괜찮은 입김과 힘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
가문의 딸이 어느 날 2 황자의 기사단에 들어오더니 빠른 시간 안에 수습 기간을 마치고 하급 기사로 승급했다.
기사단장은 그녀를 조용히 지켜볼지언정 차별하거나 저어할 사람이 아니었고, 부단장은 다른 세력의 자식임에도 2
황자를 지키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을 갸륵하게 여기며 그녀를 몹시 아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다른 기사들이 보기에 그다지 좋은 광경이 아니었음이 문제였다. 어린 주제에. 여자 주제에, 1
황자 파 주제에, 그다지 실력도 좋지 않으면서! 주제도 수치도 모르는 자. 그들에게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사냥 대회에서의 전투로 시체조차 소실되어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로젤린을 싫어하는 이들 또한 그때만큼은 애도했다.

[다음 편에 계속....]

11 화.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로젤린은 살아 돌아왔다. 그래도 한솥밥 먹은 사람으로서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그 소식이 싫지만은 않았다. 한데 승급이란다. 상급 기사로 임명받는단다. 그녀의 적은 소리 없이 불어났다.
황자 전하를 지키고자 목숨 바친 이들의 자리를 꿰차기엔 한없이 부족한 인물이라고 여겼기에. 심지어는 추모식
때는 코빼기도 안보이고 제 영지에 박혀서 놀다가, 서임식때 나 슬그머니 기어 나오다니. 어쩌면 저렇게까지
간악할 수 있을까.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단원들은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었다.

상급 기사들은 자격과 능력이 모자란 기사가 굴러 들어오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고, 하급 기사들은 제 자리를
뺏긴 것 같아 분노했으며, 수습 기사들은 현재 로젤린의 직위가 그녀의 가문과 권력으로 얻어 낸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로젤린을 쳐다보는 수많은 눈빛들은 그런 감정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집요하게 질척거리며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열렬한 구애의 눈빛보다 더 진했다.

레이몬드는 눈에 모를 세우고 주위를 쭉 둘러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하급 기사들이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죽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 축하는 못해 줄망정 뒤에서 수군거리고나 있는 작태를 보노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칼깨나 쓴다고 하는 어린 엘리트의 집단이다 보니 자존심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기사도를 백날 배우고 외우면 뭘 하나. 그것은 의미 없이 어디론가 모두 흘러가 버린 것 같은데.

“로젤린.”

“응.”

“하나 말해 둘게 있는데…….”

“말해.”

“사실…… 너…… 친구…… 나밖에 없다……?”

그녀는 눈썹 한쪽을 들고 그를 올려봤다. 퍽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나 친구 많을 줄 알았는데.”

칼릭스도, 하녀들도, 레이몬드도, 기사단장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로젤린을 좋아하는 게 빤히 보였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거울로 로젤린이라는 인간을 볼 때면 풍성한 까만 머리털엔 윤기가 반질반질 흐르는데다 눈
색은 풀잎 같아 예쁘다고 생각했다. 살이 없는 게 좀 흠이긴 하지만 키가 훤칠하니 크고 근육의 질도 좋으니까
튼튼하고 멋져보였는데…… 인간들은 외적인 부분에 많이 좌우된다더니 그것도 다가 아니었나?

그녀의 또랑또랑한 표정을 보며 레이몬드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로젤린의 곁에 있어야만
했을 가상의 친구를 송두리째 뺏어 버린 것 같았다. 자신이 너무 나쁜 놈처럼 느껴졌다. 레이몬드는 찔끔 나온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걱정 마. 이 오라버니가 일당백의 친구니까!”

레이몬드는 제 머리를 그녀의 검은 머리에 마구 비볐다. 두피가 당겨서 조금 아팠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자 둘은 사이좋게 기숙사에 딸린 식당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걸 잠깐 잊을 정도로, 식사는
맛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면 먼저 편지지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로젤린은 제 동생에게 꼬박꼬박 편지를
썼다고 했다. 성은 하얀색이었는데 자신을 마중 나온 레이몬드가 있었고 기사단장도 만났다. 사람들이 쳐다봐서
불쾌했지만 때리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난 예쁜데 친구가 별로 없다고 한다. 밥은 맛있었다. 에스터의 밤과 같이
티가드의 밤 또한 달과 별빛으로 반짝거린다.

하지만 로젤린은 오랜 여행의 피로로 인해 끝까지 쓰지 못하고 잠들었다. 책상에서 그대로 엎어진 채 그녀는
아침까지 깊은 잠을 잤다. 꿈에 로젤린이 나온 것 같았다. 널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더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능숙한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걸었더니 로젤린은 그때처럼 미소 지으며 원래 그런 거라
이야기했다.

* * *

로젤린은 눈을 떴다. 복도에서 바지런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늘을 보니 아침에 가까운 새벽의 색이었다.
오늘은 하얀밤 기사단의 서임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녀는 책상에서 일어나 거울을 확인했다. 편지지로부터 새어
나온 잉크가 볼에 몇 개의 글자를 남기고 있었다.
씻은 후 제복을 갈아입고서 머리를 묶으니,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가 노크했다. 로젤린은 감각을 곤두세워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일당백의 친구 레이몬드였다. 그녀는 방긋 웃고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야 로젤린.”

“좋은 아침. 레이몬드.”

기억을 잃어버린 채로 의지할 수 있는 혈육과 집마저 떠나왔다. 마음고생이 심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그녀는 숙면을 취한 듯 보였다. 하얀 피부에 만질만질하게 윤기가 돌았다. 레이몬드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전에도 이렇게까지 적응력이 좋았나? 애가 죽다 살아나더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나 보다.

레이몬드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갔다. 그녀는 서임식이 진행되는 넓은 제단을 보았다. 흰 돌이 크게 원을 그리고


있는 중앙에는 월계수가 있었고 그 옆에 독수리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칼릭스에게 들었던 인간의 신화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델라브힘이 하늘과 땅을 잇는 매개로 자신의 분신을 인간들에게 보냈는데 그것이
독수리였고, 그 독수리가 앉은 월계수 나무를 중심으로 일라베니아 제국이 세워졌다던가, 그래서 일라베니아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제단마다 월계수 나무와 독수리 석상이 있다던가 하는 흘려들었던 정보들이었다.

그녀가 제단을 멀뚱히 구경하는 사이 흰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하나둘 모였다. 그들은 누가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오와 열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것도 칼릭스에게 배운 것이었다. 맨 뒤에는 수습 기사. 중간 줄을
하급 기사, 앞줄에는 상급 기사가 서 있게 된다. 그 앞에 기사단장의 부관과 부단장, 부단장 부관이 상급 기사와
마주 보며 서 있는 형태. 제단의 한 가운데는 의식을 진행할 2 황자가 차지할 것이고 그 옆에 기사단장이 그를
지킬 것이다.

로젤린은 아직 정식으로 임명받지 못했으므로 하급 기사들과 같이 줄을 섰다. 여전히 곱지 않은 눈빛들이 그녀


주변을 맴돌았다. 상급 기사들은 어디 갔는지 대열에는 하급 기사와 수습 기사뿐이었다. 그 상태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부우우.

공기를 울리는 소리가 퍼지며 얽혀 있는 빛 무리가 그려진 흰색 깃발이 차례대로 올라갔다. 기사들은 탁, 탁
움직이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곧게 펴고 차렷 자세를 했다. 저 멀리 하얀 궁에서부터 상급 기사들이 발 맞춰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좌우로 감싸고 있는 중앙에는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기사들의 제복이 아닌 신전에서나 입을 법한 화려한 예복이었다. 그는 길게 찰랑이는 머리를
늘어트리고 제단을 향해 천천히 걸어 왔다. 달빛을 담은 듯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이었다.

로젤린은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누구인지 미처 알기 전이었다. 바다같이 푸른


눈동자를 본 순간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혼란이 그녀를 덮쳐 왔다. 심장이 소란스럽게 쿵쿵 로젤린을
두드려 댔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독인가? 아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있지만 여느 생물과 다르게 자신에게는 독이
통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것을 흡수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깬 부작용인가? 아니, 그렇다면 진즉에 이상을
느꼈을 것이다. 로젤린이 숨을 가쁘게 쉬며 오른손으로 가슴을 꽉 눌렀을 즈음엔, 모든 기사들 또한 그녀와 같은
동작을 했다. 기사들의 경례 방식이었다. 로젤린은 우연의 일치로 그들 속에 녹아들었다.

상급 기사들은 중앙의 남자를 제단까지 호위한 후, 자연스럽게 돌아와 그녀의 앞에 섰다. 로젤린은 앞에 서 있는
상급 기사의 어깨 너머 단편적으로 보이는 그를 응시했다.

로젤린은 들은 적이 있다. 현 일라베니아 황실에서 유일하게 은발을 가진 황자. 설원의 월계수. 2 황자


리카르디스.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하얀 밤의 주인이었다.

* * *

[2 황자 전하의 생모이신 밀리아 황비님 께서는 변방 자작가 출신이십니다. 심지어는 황비님의 어머니께서는
평민이셨죠. 그래서 2 황자 전하의 출신을 걸고넘어지는 자들이 많습니다. 비천하네, 평민의 피가 흐르네
하면서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황자님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곤 하죠. 왜 그럴 것 같습니까 누님?]

[황자라서?]

[그것도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성력이지요. 그리고 황자님의 그 외모.]

[……외모?]

[남성 여성 가릴 것 없이 추앙하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계십니다. 또한 이델라브힘을 상징하는 순백. 황자


전하의 눈부신 은발은 그것을 떠올리게 하죠. 거기에다 역대 황제들과 비견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성력의 양까지.
감이 좀 잡히십니까? 빛의 신을 모시는, 성력을 다루는 나라에서 황자 전하의 모습이 어떻게 비추어질지?]

그 당시에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현재 그 뜻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의


미의식을 다 깨우치지 못한 그녀의 눈에도 2 황자는 정신이 아득하리만큼 아름다웠다. 깊고 선명한 물색의 눈동자.
곧게 뻗은 콧날. 부드러운 입매와 도자기 인형 같은 투명하고 하얀 피부, 기사들과 비교해 보아도 흠이 없는
강건하게 단련된 몸까지.

리카르디스의 새하얀 옷과 머리칼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햇살마저도 그의 곁을 비추는 것 같은, 그런 기이한
풍경이었다.

칼릭스, 레이몬드, 백작가의 하인들과 하얀밤 기사단의 단원들까지. 로젤린은 적지 않은 수의 남자들을 보아


왔지만, 이렇게까지 본능에 호소하는 지독한 아름다움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가? 그의 겉모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심장이 이렇게 뛴 것이었나? 조금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이외의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그냥
수긍했다.

[다음 편에 계속....]

12 화.
그녀의 혼란스러움을 뒤로하고 예식은 이미 차례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2 황자가 두꺼운 책을 펼쳐서 읽어 주기도
했고, 기사단장 스타스가 큰소리로 무언가를 외치자 기사단원들이 같이 복창하기도 했다. 로젤린은 입을
뻥긋뻥긋하며 따라하는 시늉을 했다.

신관처럼 보이는 이들이 세공된 넓은 접시를 가져와 제단 앞에 올려놓았다. 얇고 하얀 접시에는 맑은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델라브힘의 독수리가 앉은 월계수. 바로 그 앞에 있는 호수의 물이었다. 성수라고도 불렀다. 그
물 자체에 무슨 효력이나 효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중요한 의식을 치를 때마다 사용되는 것이었다.

서임식은 수습 기사에서 하급 기사로 승급되는 자들부터 시작되었다. 황자는 뒤로 물러나있어 기사단장이 대신


그들의 맹세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제단에 오르고 내렸다. 하급 기사에서 상급 기사로 승급하는 이들의
서임식이 시작되자 뒤로 물러서 있던 황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들의 서임식은 리카르디스가 직접 진행했다. 모두
눈을 빛내며 하얀밤 기사단의 주인을 우러러보았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로젤린의 이름이 불렸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앞으로 나오라.”

그녀는 칼릭스가 가르쳐준 대로 걸었다. 한 발 한 발. 다리를 너무 벌려서는 안 되고 보폭이 너무 커서도


작아서도 안 된다. 목을 당기고 허리를 핀 채로 정면을 응시하며…… 그녀는 속으로 중얼중얼 칼릭스의 말을
반복했다. 제단 앞에 선 그녀는 검을 뽑아 땅에 박은 후 한쪽 무릎을 꿇어 준비를 끝냈다.

제단의 한 중앙에는 2 황자가, 그의 오른쪽에는 기사단장 스타스가, 왼쪽에는 신관이 있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2 황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걸 미쳐보지 못했다.

“하얀밤의 하급 기사 로젤린 에스터. 맹세하라.”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웅웅 울렸다. 로젤린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가 설원의 월계수 앞에서 진실 된 맹세를 하고자 합니다.”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가 붉은수레바퀴 로젤린 에스터의 맹세를 듣는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 그 잘난 맹세. 한번


해 보아라.’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검이 되겠습니다.”

“그대는 이델라브힘의 빛이 되어 검은 달을 가르라.”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약자를 보호하고 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그대는 약한 자의 강인한 울타리, 일라베니아의 부수지 못할 방패가 되어 명예를 지키라.”

“영광된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두 번째 월계수의 기사가 되어 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영광의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을 상급 기사로 임명한다.”

리카르디스는 넓은 접시에 있는 물을 손에 찍어 그녀의 이마에 죽 그었다. 로젤린은 차갑게 닿는 감촉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에는 밝은 은발이 찰랑이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아무 감정
없는 무심한 눈동자가 로젤린을 잠시간 담다가 곧 흥미 없다는 듯 다른 곳을 향했다. 로젤린은 마지막 경례 후
자리로 돌아갔다.

이후 레이몬드가 부단장 보좌로 임명 되는 짧은 의식이 있었다. 뒤를 이은 새로운 부단장의 서임식을 마지막으로


모든 일정이 마무리 되었다. 리카르디스는 임명식이 모두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단을 떠났다.

기사단장이 폐회를 선언했다. 이내 백색의 제복을 입은 하얀밤 기사단의 단원들도 모두 흩어졌다. 로젤린은
이마를 슥슥 만졌다. 그의 손끝이 닿았던 흔적은 이미 말라서 없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차가운 온도가 아직
선명하게 느껴지는 듯 했다.

* * *

의외로 평탄한 나날이 이어졌다. 상급 기사라고는 하나, 막 승급한 로젤린에게 황자 호위라는 중대한 임무가
돌아올 리 만무했다. 결국 그녀에게 돌아오는 몫의 일거리는 검술 훈련이나 문서 작업뿐이었고, 그 일감은
자연스럽게 레이몬드의 책상 위에 쌓였다.

깐깐한 부단장의 보좌로 일하며 살인적인 업무량에 시달리던 그는 밤을 새면서 그녀 몫의 문서 작업까지 해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 곧 레이몬드의 눈 아래에 시커먼 피곤의 흔적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생기만 간신히
붙어 있는 시체 같았다. 인간의 표정을 다 구분하지 못하는 로젤린이 보아도 좀 심각한 상태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미안하다는 감정의 의미를 진정 깨우친 때였다.

“미안…… 나 그런 거 할 줄 몰라서.”

로젤린의 시무룩한 반응에 레이몬드는 왈칵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마음만으로는 이깟 서류작업 따위 천년만년


해줄 수도 있었지만, 그런 건 로젤린을 위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배고픈 자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낚시하는
방법을 알려 주라고 하지 않던가. 슬슬 그녀도 하얀밤 기사단에 정착할 때였다. 레이몬드는 애써 웃으며 시무룩한
그녀를 다독였다.

“아니야. 모르면 배우면 되지 뭐, 넌 머리가 좋아서 금방 익힐 거야.”

“응.”

“필요한 건 도서관에서 내가 빌려 올게. 지금쯤이면 연무장 비어 있겠다. 가서 검술 훈련하고 있어. 매일 하고


있지?”

“응. 방에서 매일매일. 남는 시간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그 성실함이 어디 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레이몬드는 유명 제과점에서 사 온 쿠키를


그녀에게 건넸다. 큰뿔산양 저택의 강아지를 교육할 때에도 포상용 간식이 있었는데…… 까지 생각이 미친 그의
기분은 급격히 참담해져 버렸다. 어쨌거나 로젤린은 초코 칩이 박힌 쿠키를 맛있게 먹으며 레이몬드의 말을 따라
연무장으로 향했다.

로젤린은 레이몬드의 충고에 따라 검술은 방 안에서만 수련했다. 준비가 덜 된 상황인 만큼 다른 기사들과


마주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넓어서 충분히 움직일 공간이야 있지만 연무장의 흙냄새와 땀이 날
즈음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까지. 그 어떤 것도 없어서 아쉬웠던 참이었다.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 식사 후 조금의 휴식시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로젤린은 검을 뽑았다.
머릿속으로 두 남자의 모습을 그렸다. 레이몬드와 칼릭스는 그녀의 상념 안에서 끝없이 움직였다. 길고 무거운
검이 나비가 움직이듯 나긋나긋하게 춤추고 있었다. 어떤 때는 무게가 한 톨도 느껴지지 않다가도 어떤 때는
태산보다 무겁게 내려앉았다.

로젤린은 주위를 감싸고 있던 적막을 깨트리며 움직였다. 일라베니아의 기본 검법이었다. 그녀는 동작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짚어 가며 천천히 검을 흘렸다. 누가 보면 답답하다고 느낄 만큼 느렸지만, 움직임은 완벽함에 닿아
있었다. 햇살 아래 로젤린의 높게 묶은 검은 머리가 흔들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았다.

한참을 움직이던 로젤린의 감각에 불순물이 끼어들었다. 하얀밤 기사단에 오고 나서 줄곧 느껴 왔던 껄끄러운


시선이었다. 로젤린은 검술 연습을 지속하며 그 시선의 근원을 찾았다. 저 멀리 장신의 남자들 몇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달고 있는 견장의 모양에서 하급 기사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은 로젤린을
쳐다보다가 입을 모아 무언가를 얘기했다. 그리고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로젤린은 알고 있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웃는다] 그 공식이 절대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숨길
생각도 없이 로젤린에 대한 감정을 흘리고 있었다. 그 감정이 적나라한 것과 얼마간 인간으로서 쌓아 온 경험이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저들은 로젤린을 좋아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녀에게 흠을 내고 싶어 하고, 그 틈을
비집을 순간을 보고 있었다.

[누님에게는 적이 많으십니다. 정확히는 적이 많은 곳으로 누님이 들어가신 겁니다. 그걸 각오하고 성으로


가셔야 할 겁니다.]

칼릭스가 해 주는 말들은 정말 하나같이 옳았다. 그녀는 적이 많았다. 같은 종족인 데다가 같은 옷을 입고,


더욱이 한 건물 아래 같이 사는 인간들은 어떻게든 그녀를 끌어내리고 싶어 하며 로젤린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신경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로젤린의 검은 여전히 느렸지만 몹시 날카로워졌다.

멀리서 그녀가 기초 검법을 연습하는 걸 지켜보던 하급 기사들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기에 그들은 연무장 중앙에 있던 로젤린에게 금방 다가섰다. 로젤린은 그들이 오는 것을
느끼고 연습을 끝맺지 못한 채 중단해야만 했다.

다섯 명 전부 주먹을 심장 위에 올려놓으며 경례했다. 입을 한쪽으로 비틀며 웃고 있던 금발의 젊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젤린 경.”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그나마 다행인 건 기사단은 상하 관계가 분명한 집단이라는 겁니다.]

칼릭스의 목소리 위로 웃음기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상급 기사로 승급하신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귀띔이라도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전에 같이 조를 짰던 때를 생각해 보면…… 음…… 상상도 못할


일이었던지라, 축하 선물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했지 뭡니까.”
[……상하 관계가 분명한…….]

“…….”

아닌 것 같은데…… 상하 관계 분명하지 않은 거 같은데…… 로젤린은 과거의 칼릭스가 가르쳐 준 내용에 딴죽을


걸었다. 금발의 남자는 자신에게 지금 시비를 걸고 있는 중이었다. 둔한 로젤린이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13 화.

로젤린은 외유내강을 넘어서, 겉으로 보기에 아주 물렁한 사람이었다. 같이 조를 짠 하급 기사들이 싫은 말을


해도 묵묵히 받아 넘기고, 이상한 장난질을 치거나 시비를 걸어도 상관에게 보고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승급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여전했다. 계급으로 타인을 찍어 누를 생각도 없어 보였고, 다른 상급
기사라면 진즉에 처벌하고도 남았을 발언에도 그저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이 다소 위협적으로
보이긴 했지만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로젤린은 원래 저렇게 생긴 사람이었다.

바다협곡의 네스터. 금발의 남자는 바다협곡 백작의 차남이었다. 그는 로젤린과 같은 시기에 하얀밤 기사단의
수습 기사가 되어 동기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네스터가 보기에 로젤린은 부족한 검술 실력을 머리로 채우는
전형적인 여기사였다. 전술이야 괜찮은 전략가를 옆에 두면 되는 것이고 기사에게 중요한 것은 역시 검술 실력이
아니겠는가. 네스터는 사사건건 그녀와 자신을 비교하며 제 자존감을 채웠다.

하지만 로젤린이 먼저 하급 기사로 승급한 그 날부터 그의 자존심은 구깃구깃 구겨지고 말았다. 네스터 또한 곧
하급 기사로 승급하긴 했지만, 하루든 이틀이든 그녀가 먼저 앞서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급 기사로 승급하기까지 했다. 존경해 마지않던 기사단장의 안목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서임식을 황자 전하께서 직접 진행하는 모습을 보니 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 로젤린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하급 기사들과 그녀의 사소한 하나하나를 트집 잡아 비웃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도리어 제 꼴이
우스워 지는 것 같다고 생각할 쯤에 네스터는 보게 되었다. 로젤린이 기사 가문의 자식들이 여덟 살 때에나 하는
기본적인 검법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원래 펼치는 동작보다 수 배는 늦는 동작들이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허술할 수가! 그저 웃음만 나오는 실력이었다. 고작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상급 기사로 승급해?

네스터는 웃었다. 하급 기사에게 지는 상급 기사는 없었다. 상급 기사들 중엔 여자가 없기도 했거니와 모두가
백전노장의 전사들이었다. 머리 좀 좋을 뿐인 여자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네스터는 자신이 그
차이를 직접 몸으로 깨닫게 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때 서로의 등을 맡겼던 것도 인연인데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로젤린 경.”

네스터의 뒤에 서 있던 하급 기사들이 웃음을 겨우 삼키는 게 보였다. 로젤린은 그들의 모습을 쭉 지켜보았다.


이럴 경우는 어쩌라고 했더라. 이런 경우는…….

[그래도 가끔씩 질투에 눈이 멀어서 위아래를 모르는 놈들이 있긴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누님이 검술이 약하다는 걸 꼭 걸고넘어지겠죠.]

다섯 번째로 칼릭스와 대련한 후에 그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었다. 칼릭스는 연무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왼쪽 목덜미에는 로젤린의 검이 서늘한 빛을 내고 있었다. 칼릭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몇 번 짓다가 그녀를 향해 짓궂은 표정을 했다.

[검투건 박투건,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로젤린은 몇 개의 키워드를 기억해 내었다. 원하는 대로 해줘라.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더라?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

아, 그래.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였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스터는 갑자기 몰려오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네스터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상급 기사가 됐다고 검술 실력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줄 아는 건가?

“입회인을 두고 정식으로 하시죠. 대련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클로드 경, 바스티안 경. 부탁합니다.”

네스터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 중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암기 금지, 검술과 체술의 종합적인 대련. 한 사람이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지속된다. 대련 중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서로에 대해 책임은 없다. 낯선 기사 두 명이
로젤린에게 대련 조건을 읊어 줬다.

두 하급 기사의 입회 아래, 로젤린과 네스터의 대련이 준비되었다. 로젤린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묶을 쯤엔


사람들이 하나둘씩 연무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연습이라도 하러 왔다가 우연한 광경에 눈을 뺏긴 듯 보였다.
결투처럼 입회인까지 두고 대치하는 모습을 보고 다들 즐거워하며 구경했다. 소문의 상급 기사 로젤린. 그리고
하급 기사이긴 하지만 검 실력이 깨나 좋다는 바다협곡의 네스터.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짧은 시간 안에 소문이 퍼졌는지 수습 기사, 하급 기사 할 것 없이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간간히 상급
기사들도 끼어 있었다. 네스터는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면 볼수록
로젤린을 끌어내리기에 용이할 것이다.

네스터는 빛나는 눈으로 로젤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여자치고는 큰 키.


미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흔하디흔한 생김새는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더욱 박한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주위의
소동에도 별 다른 반응 없이 몸을 풀고 있었다. 부서지는 검 날에 다치면 큰일이니 구경하던 자들도 조금 더
거리를 벌렸다.

로젤린과 네스터는 검을 뽑았다. 날이 검집을 스치는 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두 사람 다 얼굴 앞에 검을


세웠다가 검 끝을 서로 마주했다. 얇고 가느다란 검과 크고 넓은 검의 대비가 극명했다. 챙.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다.

‘속전속결!’

네스터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을 부러트릴 것 같은 우악스런 힘이 그녀의 검을 향했다.

챙!

금속끼리의 마찰음이 크게 울리더니 검신이 크게 하늘로 떠올랐다. 허공에서 뱅글뱅글 도는 검을 따라 햇빛도


반짝이며 반사되었다. 높게 떠있던 검은 공중에 머무르는 듯싶더니 이내 연무장 바닥에 퍽 박혔다.

기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검을 놓치는 것은 수습 기사들도 하지 않는 행위였다.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네스터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검을 놓친 건 로젤린이 아니었다.

네스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순간에 큰 충격을 받아 버린 손은 그의 통제를 벗어나 떨리고 있었다. 마치


돌 벽에 대고 검을 내려친 것 같았다. 이게 뭐지? 대체 무슨 일이 나에게, 그녀에게 일어난 거지?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네스터는 눈을 굴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네스터는 그녀의 녹안을 보고 지금의 상황을 인지했다.

“이, 이게 무슨……!”

네스터는 고개를 돌려 입회하고 있던 동료들을 쳐다봤다. 클로드와 바스티안의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네스터의
형형한 눈빛에 두 남자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암기 아냐. 속임수 없었어. 그 뜻을 읽은 네스터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멀거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귓가로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수, 잘 배우셨습니까.”

네스터의 얼굴이 터질듯 붉어졌다.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기사들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이를
갈았다. 운이 좋아서 힘의 중심을 어찌 받아친 모양인데 그 정도로 의기양양해하기는!

“……조금 더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

알겠다더니 왜 검을 집어넣지? 네스터의 의문은 곧 풀렸다. 그녀가 허리춤에 있던 검집을 풀어 멀리 던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황당해하는 사이, 로젤린은 주먹을 쥐어 박투 자세를 취했다.
지금 나랑 체술을 겨뤄 보자는 건가? 저 여자 미친 거 아냐? 체급도 체급이지만 여자와 남자는 종이 다르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힘의 차이가 있다. 여자의 몸으로 기사가 되어 그 사실에 대해 누구보다 체감하고 있어야 할
그녀가 지금 주먹 너머로 눈을 번쩍이고 있었다.

네스터가 보기엔 로젤린은 그저 자신보다 한참 작고 마른 인간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의 몸에서 무언가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전쟁을 치룬 적 있는 네스터는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압력이다. 자신의 본능이 진심으로
저 여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대련 초의 미소를 잃은 지는 오래되었다. 네스터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박투 자세를
취했다. 기사들 또한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바람이 불었다. 열을 식히는 바람에 나뭇잎이 한 장 실려 와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로젤린의 눈동자와
같은 색의 잎사귀였다.

그것이 네스터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 * *

사냥 대회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하얀밤 기사단의 인원이 대폭 줄어들었다. 이후 급히 서임식을 치루며
빈자리를 채우긴 했지만, 정상궤도로 올라서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현재 2 황자의 성을 호위할 만한 인력은 넉넉했다. 문제는 2 황자 리카르디스의 곁을 지킬 만한 실력을 갖춘 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예전엔 3 교대로 빈틈없이 호위했었지만 지금은 최소한의 2 교대 호위조차도 겨우
해내고 있을 정도였다. 상급 기사로 올라온 자들의 급속한 성장이 필요한 시기였다.

레이몬드는 각 조마다의 훈련 성과를 보고받은 것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잠시 밖으로 외출했던 부단장 나단이
멍한 얼굴로 들어오더니 자리에 털썩 앉았다. 레이몬드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부단장님?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을 2 황자 전하의 호위로 넣는다.”

“예엑?”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을 2 황자 전하의 호위로 넣는다.”

“네엑? 아니, 제대로 못 들어서 되물은 게 아닙니다! 아니, 아니아니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로젤린 경은 현재 매우, 마음과…… 머리가 아프다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다음 편에 계속....]
14 화.

“기억하네. 기억상실이라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애가 들으면 얼마나 상심하겠습니까!”

나단은 헛소리를 하고 있는 레이몬드를 가는 눈으로 보았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지 이 부관은? 기억상실을


기억상실이라고 하지 달리 뭐라고 표현한단 말인가. 레이몬드도 “아차, 이게 아니라!” 하고 급하게 말을
덧붙이며 본론으로 돌아왔다.

“로젤린 경이 뛰어난 기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자 전하의 호위를 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몇 달 훈련을 더 받은 후에…….”

“기사단장실에 가던 길이었지.”

“……?”

나단은 뜬금없이 말을 내뱉었다. 레이몬드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했다.

“밖이 소란스럽더군.”

“사건으로부터 시일이 지나 좀 해이해졌나 봅니다. 더 굴리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아무튼 간에, 연무장 쪽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가봤는데…….”

“기특하게 훈련이라도 하고 있었습니까?”

“로젤린 경이 네스터 경을 개 패듯이 패고 있더군. 아니 로젤린 경은 동물을 때릴 것 같지 않으니 개라면 그렇게


안 팼겠어. 말을 바꾸지. 수련용 허수아비를 패듯이 팼다고.”

레이몬드는 입을 떡 벌렸다. 누가, 뭘 패?

“상대방이 하급 기사 바다협곡의 네스터 경이 맞습니까?”

“볼이 심각하게 부어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아마도 맞네.”

레이몬드는 네스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사건건 로젤린에게 시비 걸던 아주 저열한 놈이었다. 무례한 행동을


뒷받침하듯 검술 실력만은 제법 훌륭했고, 로젤린은 그런 네스터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넘어가곤
했다. 때문인지 네스터는 자신이 로젤린보다 위라고 생각하며 기고만장하게 구는 편이었다. 이번에 그가 승급하지
못한 것은 상급 기사가 단순히 검술 실력만으로 결정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가 객관적으로 둘 중에 누구의 검술 실력이 더 뛰어난지 레이몬드에게 물어본다면, 그는


당연히 네스터의 손을 들었을 것이다. 그 정도의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로젤린이 네스터를 개
패듯이 팼다고?

“네스터가…… 취한 것 같아 보이진 않았습니까? 아니면 앞서 누군가에게 쥐어 터지고 왔다던가?”

“……자네, 로젤린 경을 아끼는 것에 비하면 그녀에 대한 신용은 별로 없는 것 같군.”

레이몬드는 입을 합 다물었다. 확실히 로젤린에게 실례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검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퇴근하겠습니다!”

“1 시 반에? 해가 아직 중천이네.”

“조퇴하겠습니다!”

“아주 난리가 났군. 휴식 시간 줄 테니 한 시간 안에 돌아오게.”

사랑합니다, 부단장님! 레이몬드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부단장실을 뛰쳐나왔다. 가문도 확실하고, 실력도
성품도 괜찮은 놈이지만 제 사람을 너무 과하게 아끼는 경향이 있었다.

나단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다가 그녀에게 호위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 올려야 하는 서류 몇 가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는 달렸다. 나단이 보았으면 인상을 찌푸리며 한소리 했을 것이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를 걷고
있는 로젤린을 발견했다. 그녀에게는 어디 하나 작은 생채기도 찾을 수 없었다. 몇 분 전까지 대련을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해 보였으며, 제복에도 흙이나 먼지 따위가 묻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두 팔 위에
얌전히 들려 있는 네스터만 아니었더라도 앞서 그렇게 격한 대련을 했다고는 도무지 믿지 못할 것 같았다.

“……로젤린 경?”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레이몬드는 자신의 두 눈을 마구 비볐다. 로젤린은 평온한 얼굴로 네스터를 들고 있었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기사가 공주님을 안을 때처럼.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녀 뒤에는 익숙한 얼굴 두 명이 새파랗게 질린 채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하급 기사 클로드와 바스티안. 항상


네스터와 같이 다니며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니던 자들이었다. 한데 지금은 엉덩이를 맞은 어린 강아지같이
잔뜩 풀 죽어 있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경, 그, 그건 아니 네스터 경은 어쩌다가…….”

그렇게 참혹한 꼴을 당한 거니……? 얕보던 상대에게 쥐어 터져서 기절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의 품에
다소곳이 안겨 있는 모습이 매우 참혹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깨어 있었다면 수치심에 눈물이라도 흘렸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대련했습니다. 의무실에 가던 중입니다.”

그가 궁금했던 것은 그녀가 대답한 [대련했습니다] 의 조금 더 길고 상세한 설명이었지만, 보는 눈이 있어서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네 명은 사이좋게 의무실로 향했다. 의사와 의무실에 상주하는 신관이 네스터의 몰골을
보고 헉 숨을 들이켰다. 뭐지? 낙마해서 말한테 밟힌 건가?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마수라도 나타났습니까?”

어, 예리한걸. 로젤린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그녀를 대신해 바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대련…… 했습니다…….”

“대련이요? 얼굴이 이렇게 떡이 될 때까지 하는 대련이 있습니까?”

의사가 그의 옷을 들쳐보았다가 여기저기 올라오기 시작한 시커먼 멍들을 보고 식겁했다. 그의 물음에 클로드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대련하기로 했는데, 첫 공격에 기절해 버려서 항복이라는 말을 못했…….”

클로드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어마어마했던 광경을 반추하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로젤린의 강해진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상식을 깡그리 잃어버린 것 또한 잘


알았다. 로젤린은 기절해 버려서 항복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은 네스터를 계속 팼을 것이고, 그는 항복이란 말을
못해서 계속 맞았을 것이다. 그 광경을 조금 지켜보던 바스티안과 클로드가 기겁하며 대신 항복 선언을 하지
않았다면. 음.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레이몬드는 의사에게 그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 인력이 부족한 시기니 힘 써 달라고 했더니 인력이 부족한 걸
아는 사람이 한명의 인력을 박살 냈냐는 불손한 눈빛을 보냈다. 옆에 있는 검은 머리의 여기사가 그랬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괜히 자신이 찔려서 호탕한 웃음을 내뱉고 로젤린을 끌고 나왔다. 그녀는 대련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풀어서 손으로 대충 빗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고?”

“응. 걔 약해서.”

“그거 네스터 앞에서는 얘기하면 안 된다?”

“응.”

“그리고 다음부터 대련할 때는, 기절하면 항복이라고 말 안 해도 패면 안 돼. 알겠지?”

“응.”

어, 알았어. 나 알았어. 얘 문서 작업은 무리야. 절대 안 되겠네. 지금의 로젤린에게는 호위 임무가 적격이다.


조용히 곁을 서 있다가 수상한 자를 쥐어 패는 임무. 부단장의 선견지명이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 * *

2 황자가 머무는 월장석 성. 아침부터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은 만원이었다. 황금정원 자작, 바다협곡 백작,
가을안개 백작, 푸른등불 공작. 큰뿔산양 후작까지. 2 황자 세력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술렁였다. 푸른등불 공작이 가지고 온 정보 때문이었다. 2 황자 리카르디스는 가장 상석에 앉아 태연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물론 은제 식기의 색을 확인한 후였다.

“다들 놀라는 척 하기는. 빤한 일 아니겠는가? 타국의 암살 부대가 국경을 지키는 수천, 수만의 눈에 띄지 않게
넘어온 것 까진 그렇다 치고 말이야. 우연히 발견한 막사에 공격을 퍼부은 것뿐인데 2 황자만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는 놀랍지 않나? 어떤 곳에도 1 황자는 없었다니. 이거야 원, 바보라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작위적이니
…….”

그의 말에 큰뿔산양 후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런 간악한 놈들. 어찌 일라베니아의 황자라는 자가 타국의


광신도와 손을 잡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래도 1 황자 전하께서는 검은달과 손을 잡으셨다고 확정을 내려도 될 것 같습니다. 아, 발타 왕실이라고


정정할까요?”

“뭐 굳이 구분까지 할 필요가 있나. 검 은달 놈들이 왕실까지 들어앉아 있는데. 그놈이 그놈이지.”

리카르디스는 지루해하며 턱을 괴었다. 변함없이 치졸한 수법이었다. 제 형님이라는 자가 그러했다. 그 황제라는


자리가 대체 무엇이건데 그토록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인지. 우스울 뿐이었다.

“증거는?”

“쉽게 발 뺄 수 있을 겁니다. 도리어 덮어쓸지도 모릅니다.”

“나와 내 기사들이 가장 피해를 많이 입었음에도?”

“정치적인 쇼라고 말할 겁니다.”

“정확하군, 후작. 형님이 하실 만한 헛소리야.”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들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리카르디스보다 황태자 위에 근접한 1 황자 엘피디오. 그는


일라베니아라는 대륙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제국을 이끌어갈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1 황자로서 군주학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두루 공부해 왔지만 주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꼴을 보지 못했고, 오냐오냐 떠받들어지며
자란 탓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오만한 성질까지 갖추었다.

그러나 그의 뒤에 있는 황후, 정확히는 황후의 집안 사자갈기 공작가. 그 세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제국에 몇 없는 공작위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요, 애초에 황실로부터 갈라져 나온 방계 가문이었기 때문에.

황후와 황제는 멀지 않은 혈연관계였으나, 황실은 성력을 위해 근친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집착이
엘피디오에게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황후 소생이라는 강력한 뒷배, 역대 황제와 비견해도 뒤지지 않는 방대한
성력.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장자가 가문을 계승하는 일라베니아에서 엘피디오는 사실상 황태자나 다름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15 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은 일어났다. 엘피디오가 11 살 되는 해, 황제가 새로운 비를 맞이했다. 시골


자작가의 비천한 출신의 황비. 가난한 탓에 사교계에서도 본 적 없는 인물이었다. 다들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장점이라고는 곱상한 얼굴과 달빛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머리 색 밖에 없는 여자였다.

황제가 여색을 밝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 다들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그녀가 황성에 입성하며 데리고
온 두 명의 아이였다. 황비와 똑 닮은 머리 색의 열 살짜리 남자아이와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는, 무려 황제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황제가 변방 시찰을 했던 때에 생긴 아이라나 뭐라나. 황실이 왈칵 뒤집혔다.

황실에 사생아란 없다. 그저 지위가 낮은 황녀 황자만 있을 뿐. 그럼에도 황제는 아이의 존재를 숨긴 것이다.
왜지? 모두의 의문이 점점 커져 갈 쯤, 사내아이는 정식으로 황실 일원이 되어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신의 햇살이 비추는 영원의 나라. 그 이름을 드높일 두 번째 황자였다.

그리고 10 살에 갑자기 나타난 황자에 대한 의문은 곧 풀리게 된다. 리카르디스가 1 황자 엘피디오를 뛰어넘는
성력을 가지고 있음이 공표된 것이다. 신의 비호를 받는 신의 나라에서 성력이란 그 어떤 힘보다 강력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황태자 후보에 이름을 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고작 시골 자작가
황비가 리카르디스를 지킬 만한 힘은 없었을 것이다. 목숨이라도 보전하기 위해 입성을 미룬 것이리라. 그때부터
황실은 바람 잘 날이 없게 되었다. 유일무이하던 황태자 후보에 한 명이 더 이름을 써 넣게 되었으니.

당연하다는 듯 황실에서 황태자 수업을 받는 엘피디오와 달리 리카르디스는 직접 전쟁과 정치를 겪어 왔다. 그의


행보에서 자신의 길을 찾은 자들이 한 명 두 명 붙어, 오늘날에야 1 황자와 비견할 만한 세력이 갖춰졌다.

리카르디스가 황실 일원으로 인정받은 이후부터 암살 시도는 꾸준히 있었지만, 최근 몇 년간은 이델라브힘의 하늘


아래 같은 공기 마시고 살 수 없다는 식의 필사적인 태도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 싸움에 휘말려 리카르디스의
하나뿐인 동복 여동생이 목숨을 잃었다. 리카르디스가 황태자위 싸움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그때부터였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그저 몸 풀기였다는 듯,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공을 세웠다. 그것에


초조함을 느낀 1 황자가 사냥 대회라는 좋은 기회를 틈타 또 암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심지어 일라베니아의 오랜
정적, 발타과 손을 잡고서. 정말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좋을지 감도 안 잡히는 멍청함이었다.

“실패했으니 몸이 달았겠군. 내 기사들이 아주 솜씨가 좋아서 말이지…… 나를 이델라브힘에게 닿게 하려면 그


정도로는 안 된다고 친히 말해 줘야 했을까, 백작?”

“무서운 소리를 하시는군요, 전하.”


바다협곡 백작이 연신 땀을 닦아가며 그의 말에 답했다. 리카르디스는 차가운 미소를 입에 걸었다.

“농일세. 그래. 이번 시도는 제법 뼈아팠지. 내 수족들이 비스타에서 그렇게 의미 없이 죽어갈 인물들이 아닌데
말이야.”

리카르디스는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웠다. 악몽 같은 밤이었다. 일생을 편하게 살아오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슴에 남을 만한 밤이었다. 꽉 깨문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얕은 신음소리. 병장기에서 불꽃이 튀는 소리,
횃불이 공기를 태우고 나뭇가지를 밟는 사람들의 발소리. 황자 전하를! 리카르디스님을 지켜라! 상대는 독을
사용한다. 전하! 부디 몸을 피하시옵소서!

[하얀밤 기사단!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맺었던 언약 대로, 목숨을 바쳐라!]

그저 허례허식이라 생각했던 때도 있었건만, 그들은 정말 그때의 맹세처럼 자신을 지키다가 죽었다. 입 안이 썼다.
몇 년 동안 자신의 옆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이 고작 독 따위에 죽었다. 그가 성력으로 치유하고자 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그때 도망치지만 않았었더라도, 그들과 싸우기만 했더라도……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항상 늦기만 했다.
어떻게든 돌려줘야 하는데. 이 엿 같은 감정을 그놈도 느끼게 해 줘야 하는데. 리카르디스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최근 상급 기사들의 얼굴에 점점 피곤한 낯빛이 돌기 시작했다. 사냥 대회에서의 실패 이후 암살 시도가


수그러들기는커녕 활발해졌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독을 타랴 밤에는 비수를 들고 찾아오랴. 그들이 바쁜 만큼
호위들도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 상태에서 제대로 교대할 만한 인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 더욱
힘겨워 보였다. 엘피디오 그 멍청이는 전략상 후퇴라는 말도 모르는 건가?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엘피디오의 욕을
신나게 했다.

“의미 없이 죽은 것은 아니지요.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웃기는 소리야. 난 나를 위해 죽는 자는 필요 없다.”

“그래도 전하를 호위할 인원은 필요합니다. 마침 그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리카르디스는 턱을 괴고 기사단장직을 맡고 있는 스타스를 쳐다보았다. 가을안개의 스타스 백작. 꼬장꼬장하지만


충성스러운 가신이 무슨 말을 할지 얌전히 기다렸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을 호위 임무에 추가하고자 합니다. 전하의 의견이 필요합니다.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팍 구겼다. 주위 가신들의 표정도 확 찌푸려졌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일라베니아 제국 내에 또 있는 건 아닐 테고.”

“제가 알기로도 그렇습니다.”

스타스의 표정은 태평했다.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경은 아주 농담을 잘하는군. 지금 엘피디오의 밑이나 닦아 주는 붉은수레바퀴를 내 곁에 두라고 얘기 하는


건가?”

“새 부단장 나단 경의 추천서가 열두 장이 쌓여 있습니다. 누군가의 아첨을 듣는 자도,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자도 아닙니다. 그가 부단장 부관일 때부터 같이 일 해왔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나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봅니다. 또한 제가 보았을 때에도 로젤린 경은 그녀의 가문만
아니었다면 괜찮다고 평할 수 있는 기사입니다.”

스타스는 나단의 추천서를 리카르디스에게 넘겨주었다. 리카르디스는 열두 장이나 되는 추천서를 차근차근 읽어


내렸다. 그 사이 바다협곡 백작이 얼굴을 붉히며 스타스의 의견에 반박했다. 정말 얼토당토 않는 일이었다. 현
황제의 충실한 가신이기도 하지만, 1 황자의 손 또한 들어 주고 있는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자식을?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호위 임무를 맡겨?

“가문만 아니면 괜찮은 기사라지만, 그 가문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니오!”

“암살 시도는 더욱 늘어날 것이며 호위 인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부족하지. 칼을 잘 쓰는 자는 많지만, 전하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 자는 몇 없소.”

“그렇다면 그녀가 백작에게 확신이라도 준다는 겁니까? 그녀가 붉은수레바퀴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소.”

리카르디스는 눈으로 추천서를 읽으며 귀로 그들의 오고가는 말을 들었다. 호오, 생각보다 그녀는 수완이 좋았던
모양이다. 바늘 하나 안 들어가는 저 기사단장의 눈에 들다니. 리카르디스는 부단장의 추천서과 기사단장의
말에서 그녀에 대한 확신을 읽어 냈다.

그들의 언쟁 위로 하나의 목소리가 더 얹어졌다. 조용히 듣고 있던 큰뿔산양 후작이었다. 그는 자신의 콧수염을


만지며 눌린 목소리로 얘기했다. 영 탐탁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어 얘기한다는 식이었다.

“내 아들놈이 그녀는 말만 앞서는 기사들과는 다르다는 말을 입에 아주 달고 살더군요. 믿을 만하고, 충심이


깊은 데다 지휘관의 재능도 있고 애가 착하고 성실하고 어쩌고, 저쩌고. 누가 보면 내 아들놈의 손녀라도 되는지
알 겁니다. 요컨대. 자격은 갖추었다고…… 하더군요.”

후작의 지원으로 천천히 추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붉은수레바퀴임에도, 2 황자 전하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목숨을 바친 자. 성실하고, 명석하고, 명예를 알고 있는 자.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든 당신을 위해 죽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그
눈동자가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실력이 되지 않으면 나서지나 말 것이지. 멍청한 것. 모든 것이 다 스스로 부른
불행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녀가 엘피디오의 정보를 물어다 주는 파랑새가 될지도 모르지.”

리카르디스는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퍽 불쾌해 보이는 낯빛이었다.

“어디 한번 지켜보기로 할까.”

* * *

기사단을 위해 오래 일했다거나 단순히 강한 기사라는 것. 상급 기사는 이런 두 가지의 조건으로만 선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한 명 한 명이 법, 예, 정치 모든 분야를 두루 익혀 언제든 병사들을 이끌 수 있는 지휘관의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하급 기사들 중에서는 평민들도 간간히 있었지만, 상급 기사부터는
고위 귀족가의 자제들이 주를 이루었다.

현 하얀밤 기사단에는 열 명의 상급 기사가 있다. 수습 기사들은 존경하는 상급자에게 지원하고 상급 기사는


지원자의 가문과 성품, 발전 가능성 등 여러 가지를 따진 후 곁에 두었다. 수습 기사들은 상급 기사를 따르며
검을 배우고 그들의 일을 도왔다.

로젤린 또한 상급 기사로써 몇 명의 수습 기사를 데리고 다녀야 하는 권리와 임무가 생겼다. 문제는 어느 그


누구도 그녀에게 지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밑에 있는 수습생들을 쥐어 패서 보낼까 생각도
해 봤지만, 차라리 제 목을 베라는 식으로 반항하는 그들에게 끝까지 강요 할 수 없었다. 수습 기사들이
진심으로 그녀를 따르지 않는다면 힘든 것은 오로지 로젤린만이 감당하게 될 테니.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눈앞에 쌓여 있는 것은 로젤린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수습 기사들의 지원서였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협곡의 네스터.’

[다음 편에 계속....]

16 화.

‘바다협곡의 네스터.’

그와의 대련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그간 사람들이 로젤린에게 지원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그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할 거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검 실력이 뛰어난 상급자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했다. 다소 성격이 괴팍한 상급 기사라고 해도 실력만 뛰어나면 지원율이 높았다.

하지만 하얀밤 기사단 모두가 아는 로젤린이라는 사람은 그다지 강한 기사가 아니었다. 과묵하고 성실하지만
리카르디스 2 황자와 반하는 가문이었고, 여자인 데다가 약하기까지. 하급 기사들에게조차 얕보이는 그녀에게
가르침을 청할 수습 기사는 없었다. 그런데 어제 부로 하얀밤 기사단 전체에 퍼져 있었던 인식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하급 기사 네스터는 힘과 기술이 조화롭게 강한 자였다. 그 나이 또래의 하급 기사들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있었는데…….
대련 시작 삼 초 만에 검을 놓치고 2 회차에서는 첫 공격에 기절했으며, 심지어는 그보다 10 센치는 작고 한참
가느다란 대련 상대의 품에 다소곳이 안겨 퇴장했다. 그의 퇴장이 충격적인 만큼이나 그녀의 승리 또한 강렬했다.

“해서, 찾아 온 거야. 뽑아 주셔야겠습니다. 로젤린 경.”

수습생들의 지원서를 들고 있는 레이몬드를 문가에 세워 둔 채, 로젤린은 제 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동안 방안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동화책 한 권, 붉은수레바퀴 가문을 상징하는 반지
하나, 방금 레이몬드가 갖다 준 마카롱 세트를 늘여놓고서는 팔짱을 끼고 인상을 썼다. 매우 고심하는 모양새였다.
그녀의 이마 사이에 잡혀 있는 주름을 보고 레이몬드가 끼어들었다.

“뭐 하는 거야, 로젤린?”

“병문안.”

지금 그녀가 가려고 하는 병문안 상대는 한 명뿐이었다. 그녀가 반죽음 상태로 만들었던 바다협곡의 네스터.
그녀가 다친 상대에게 병문안을 가야 한다는 상식을 깨우친 것 까지는 아주 좋았는데,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물건들이 문제였다. 동화책,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반지, 마카롱 세트? 설마 이거.

“병문안 선물이라던가…… 하는 건 아니지 로젤린? 빨리 아니라고 말해. 어서.”

레이몬드는 자기도 모르게 진지한 표정을 했다. 로젤린은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병문안 선물.

“책에서 봤어. 병문안 때에는 꽃과 선물을. 빠른 쾌유를 비는 의미로 귀한 물건을 줘야 한다고.”

동화책이랑 마카롱이 귀한 물건에 들어가다니. 이런 귀여운 아이! 착한 아이! 레이몬드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다가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반지는 주면 안 돼. 결혼하자는 얘기야, 그거.”

“아.”

로젤린은 반지를 슥 집어서 자신의 목걸이에 매달았다. 네스터와는 결혼하기 싫은 듯 했다. 그녀는 둘 중에 한참
고민하더니 마카롱 세트를 집었다. 물론 값비싼 유명 제과점의 디저트이긴 했다. 우락부락한 남자 기사에게 영
어울리는 선물은 아니었지만…… 알 게 뭐람. 제까짓 게 뭐라고. 로젤린이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야 할 것이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선물 감사…… 합니다, 로젤린 경. 레이몬드 부관님.”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에게. 몸은 좀 괜찮습니까.”

네스터는 연한 파스텔 톤으로 포장된 마카롱 세트와 뿌리째로 뽑아 온 노란 야생화 무리를 흠칫흠칫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핑크색 레이스 리본으로 묶여 있는 상자와 아직까지 뿌리에서 흙이 떨어지고 있는 이 잡초의 조합은 대체
뭐지. 이 여자 날 엿 먹이는 건가?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황자 전하에게 하사
받듯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받았다.

“걱정해주신 덕에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안 괜찮아 보였다. 목소리도 꺼끌꺼끌하니 거칠었고 얼굴도 하루 만에 팍 삭아 버렸다. 그때의 호승심과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로젤린이 네스터의 말에 바로 붙여 답했다. 와락 구겨지는 그의 표정과 달리 로젤린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레이몬드는 로젤린의 뒤에 서 있다가 제 눈을 가렸다. 솔직함이 과했다. 병실을 나가면 그런 말들은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것이라 꼭 가르쳐야겠어…….

네스터도 매우 당황하는 중이었다. 역시 이 여자 날 엿 먹이는 거 같은데. 그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 네…… 그러시군요…….”

걱정을 안 하셨다니, 다행…… 걱정을 많이 하면 잠을 설쳐서 몸에 안 좋고…… 네스터는 횡설수설했다. 그가


눈을 도통 마주치지를 못하자, 로젤린이 네스터의 턱을 손으로 올려서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네스터와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이몬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디 고개를 한번 들어 보아라. 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손짓이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며 상처를 눈으로 훑었다.

“멍이 들었습니다.”

“예! 경이 어제…… 아니, 제가 약한 탓에!”

“멍이 들면 아픕니다.”

“네? 네, 그렇습니다. 멍은 아픕니다!”

“조심하십시오.”

까불면 또 패겠다는 소리인가? 두 남자가 소리 없이 경악했다.

로젤린이 그의 턱을 고정하고 있던 한쪽 손을 움직여, 멍든 그의 얼굴 위로 흐트러져있던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주었다. 보기에 거슬려서 무의식중에 손이 나간 것이었다. 네스터는 그녀에게 얻어 맞는 줄 알고 경기하듯
몸을 떨다가 부드러운 로젤린의 손길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할 테니, 빨리 나으시죠.”

레이몬드는 어이없다는 듯이 로젤린을 쳐다보았다. 적막이 감도는 공간에 무뚝뚝한 기사와 한 남자가 이상한
기류를 형성했다. 네스터의 눈동자에 별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열린 창틈 사이로 꽃향기를 실어오는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온 것 같기도 했다. 레이몬드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키며 꿔다놓은 보릿자루같이 멀거니 서
있었다. 시퍼런 멍이 들어 있는 네스터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스터는 멍든 홍당무 같은 얼굴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겨우 쥐어 짜내었다.

레이몬드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그녀가 별 감정 없이 한 행동이란 건 알지만, 보기에 매우, 좀,


그랬다. 어느 소설에 나오는 남자 기사가 순진한 시골 아낙을 꾀는 손길 같았다. 순진한 시골 아낙 네스터는
그녀가 병실을 나설 때까지 열렬하게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환자라는 사람이 병문안 온 사람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간이 의자에 손수건을 깔고, 그녀가 화단에서 뽑아 온
야생초와 야생화 무리를 예쁘게 화병에 꽂고, 동료들이 병문안 선물로 들고 온 귀한 과일들을 손수 깎아서
로젤린에게 대령했다. 로젤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잘 받아먹었다. 네스터는 시종일관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병동을 나선 로젤린의 두 손에는 네스터가 준 병문안 선물이 가득 들려 있었다. 그녀는 신나 보이는 낯으로
병문안은 참 좋은 것이라 얘기했다. 레이몬드가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그거 뭐 한 거야, 로젤린? 막 손으로…… 네스터 경의 얼굴을 막…… 그거 있잖아.”

“쾌유의 뜻을 전했어.”

레이몬드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칼릭스가 너무 보고 싶었다.

* * *

로젤린에게 지원한 수습 기사들이 연무장 한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은 검을 휘두르며 연습하다가
멀리서 걸어오는 두 명의 남녀를 보고 황급히 경례했다. 로젤린. 그리고 그녀와 절친한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였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열다섯 명의 인원이 입을 모으니 공간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많은 수습 기사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기대에
가득 차 있는 눈빛들을 보고 레이몬드는 속으로 살짝 웃었다. 로젤린이 제 수습 기사였을 때가 잠시 떠올랐다.
지금보다 어리고, 지금보다 머리도 짧고, 지금보다…… 똑똑했었지…… 아냐,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레이몬드는 제 마음을 다잡고 목소리를 깔았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전부 모인건가?”

“예, 레이몬드 부관님.”

열다섯 명의 인원들이 일렬로 줄지었다. 대부분 남 기사였지만 여기사도 두 명 있었다. 레이몬드는 지원서를
로젤린에게 넘겨주었다. 그녀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가 뒤에서 아, 얘는 쟤야. 아, 이건 저기 왼쪽에서
두 번째 애야. 하고 일러 주었다. 지원서에는 그의 가문, 지원 동기, 특기 분야, 취미 등 다양한 정보들이
서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로젤린에게는 그다지 필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로젤린은 인간들과 오래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기간으로도 고작 종이 한 장에 한 사람의 모든 정보를 담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파악했다. 로젤린은
레이몬드에게 서류를 다시 넘겼다.

로젤린은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이들을 눈으로 쭉 훑다가 제일 왼쪽에 서 있는 기사의 앞에 섰다. 그녀가 다
읽지 않은 분량에 속한 지원자라 이름도 가문도 알지 못했다. 로젤린은 수습 기사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일
초, 이 초, 삼 초, 십 초, 삼십 초, 육십 초. 로젤린의 시선을 받고 있는 수습 기사는 시간이 점차 흐름에
따라 목이 타는 갈증을 느꼈다. 그늘진 녹색의 눈동자가 호수의 가장 깊은 곳만큼이나 어두워 보였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지원서에 뭔가 잘못 쓴 게 있었던가? 그렇다면 혼내도 좋으니 어떤 말이든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는 간절히 바랐다.

한참 뒤. 로젤린이 두 번째로 서 있던 수습기사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첫 번째 지원자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몰아쉬며 옆에 서 있는 동기의 안녕을 빌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급 기사 로젤린은 두 번째
지원자를 슥 한번 쳐다보고는 바로 세 번째 지원자로 넘어갔다.
[다음 편에 계속....]

17 화.

무슨 기준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구의 앞에서는 몇 분 동안 머무르는 반면, 누구의 앞에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그렇게 열다섯 명의 인원을 한 번씩 마주하고서야 레이몬드의 곁으로 돌아갔다.

“꼭 다섯 명 다 뽑아야 해?”

“아니 최대 정원이 다섯 명. 네 마음대로 해.”

“당신. 당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남자는 에버하르트, 여자는 레티시아.”

“에버하르트, 레티시아.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첫 번째로 그녀의 시선을 가장 오래 받은 군청색 머리의 남자 기사와, 키가 로젤린보다 큰 적갈색 머리 여자


기사가 지목되었다. 둘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뛸 듯이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로젤린 경. 저는 올해로 3 년 차 된 수습 기사, 서리나팔의 레티시아입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뿌리의 에버하르트입니다. 수습 기사가 된 지는 4 년입니다. 뽑아 주신 것에 후회가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표정을 가다듬으려 노력했지만 히죽히죽 올라오는 웃음을 결국 감추지 못했다. 로젤린도 무표정한 얼굴에
미미한 미소를 띠었다. 수습 기사는 상급 기사의 수족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지원서만 보고 수습생들을 뽑는 상급
기사도 있었지만 로젤린은 그들을 직접 대면하길 원했다. 종이 서류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들의 생각, 그들의
눈빛, 그들이 로젤린에게 담는 감정들 또한. 로젤린이 열다섯 명의 지원자를 꼼꼼히 살펴본 이유 또한 그런
것이었다.

얘는 눈빛이 영 더럽고, 얘는 로젤린을 얕보고 있고, 얘는 레이몬드만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서 왜 자신에게


지원한 건지 도통 모르겠고, 얘는 남들이 지원하니까 자신도 따라 지원했다는 식으로 의욕이라고는 없어 보이고.
총체적 난국 속에 딱 두 명이었다. 그들 또한 눈빛에 가득 욕심을 담고 있었지만 그것은 좋은 상급 기사를 만나
실력을 향상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게다가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는
어쩐지 존경의 빛까지 서려 있었다.

그녀의 육감은 뛰어났다. 공통된 언어를 가지며 그것으로 서로 교류하는 인간에 비해 산속의 많은 생물들은 그
개체 수만큼이나 다양한 언어와 습성을 가지고 있어 대화라는 것이 불가능하다시피 했다. 그 덕에 길러지는 것이
육감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생물의 행동, 분위기, 또는 주위의 상황까지 두루 살펴야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
로젤린은 오랜 시간 살아온 만큼, 다른 동물들로 많이 지내 온 만큼의 보는 눈은 있었다. 번드르르한 말로
치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런 로젤린의 눈에 두 사람은 제법 괜찮은 자들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을 섞어 놓아도 똑같이 이 사람들을 선택할 것이다.

지목된 두 명을 제외한 수습 기사들은 기분이 매우 상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레티시아는 중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힘없는 몰락 귀족 출신이었다. 심지어는 ‘뿌리’의 에버하르트까지 뽑다니. ‘뿌리’는 작위를 받지
않은 평민 출신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가문 명이었다. 평민과 몰락 귀족? 고작 저런 이들을 곁에 둔단 말인가?
상급 기사쯤 되면 더욱 위로 올라가기 위해 세력을 모으기 마련인데 붉은수레바퀴 로젤린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속으로 불쾌한 감정을 삭이려 노력했다.

레이몬드의 손짓에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만 남았다. 얼굴에 홍조가 가득했다.
로젤린은 열렬한 그들의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에버하르트, 레티시아.”

“예!”

“그대들은 수습 기사의 기숙사를 벗어나, 로젤린 경이 머무는 숙소 근처로 배정될 것이다. 로젤린 경의 생활과
임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고, 그대들이 하급 기사가 되어 황자 전하에게 충성을 바칠 때까지
계속된다. 그대들이 로젤린 경을 존경하며 따르는 만큼, 로젤린 경 또한 그대들을 가르치며 이끌 것이다. 이의
있는가?”

“없습니다!”

“없습니다.”

에버하르트는 이제 숨기지도 않고 싱글벙글 미소 짓고 있었다. 수습 기사는 이름만 기사지, 정식으로 서임받은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월급을 받지도 않고 기초적인 가르침 이외에는 어떠한 교육도 받지도 못했다. 허름하고
낡은 건물에 몇 십 명이 함께 살아가며 생활비 또한 자신이 충당해야 했다.

그런 그들에게 상급 기사는 스승이기도 했고 주군이기도 했으며, 안정된 생활을 보증하는 무언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쪽방을 벗어나 상급 기사의 기숙사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로젤린의 방만큼 호화롭지는 않지만, 여태껏 지내 왔던 곳과는 비교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직 하급


기사로 정식 서임받은 것도 아니지만 몇 년간의 고생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레티시아는 눈시울을 붉히다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가다듬고, 활짝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4
“오늘부로 2 황자 전하의 호위 임무를 명받은 상급 기사,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 이 목숨을 바쳐
임하겠습니다.”

며칠이 더 지난 후였다. 로젤린은 수속과 인수인계가 끝나고 나서야 리카르디스의 호위 임무를 맡게 되었다.
리카르디스는 원목 탁자에서 종이를 팔락였다. 눈앞에서 누가 경례를 하건, 인사를 하건 말건 그다지 신경 쓰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로젤린은 무뚝뚝한 표정 아래로 숨을 후 쉬었다. 서임식 때의 일이 깊게 남았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를


조우하고서는 터질듯 뛰었던 심장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의 잘난 얼굴은 여전했으나 다행히도
심장은 문제없이 잔잔하게 순항 중이었다.

그는 깃펜으로 무언가를 쓰고 읽으며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나른하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잔득 날이 선 목소리였다.

“그대의 목숨 따위는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로즈 경.”

로젤린은 눈동자를 굴려 반짝반짝 빛나는 그의 은색 머리를 내려 보았다. 칼릭스에게 ‘대화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교류이다.’라고 배웠지만 리카르디스는 그 간단한 이치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시선은 탁자와 종이 언저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리카르디스는
업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로즈. 로젤린의 어미 되는 에델바이스가 그녀를 로즈라고 불렀다. 칼릭스에게 물어보니 그것은 ‘로젤린’의
애칭이라고 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질색하는 애칭이었다고. 그녀 자신은 꽃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고 생각했기에
로즈라는 호칭에 제법 타격을 입었었노라 현재의 로젤린에게 일러 주었다. 눈앞의 미남자는 그 사실을 알고 부른
것인가?

“듣고 있나, 로즈 경?”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무표정하던 얼굴에 찬란한 햇살보다 눈부신 미소를 입에 걸었다. 신성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는 눈앞의 초라한 검은 머리의 여기사에게 ‘로즈’ 따위의 호칭을 입에 담고 있었다.

서임식 그리고 지금. 고작 두 번의 만남이었으나 저렇게까지 대놓고 티를 내는데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간간히 느껴지는 말과 시선에 담겨 있는 감정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니 저 ‘로즈’라는 호칭 또한
어떤 애정을 기반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게 옳았다.

로젤린은, 그녀는 어쩌면 이 남자와 좋은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죽음의 코앞에서조차 이 남자를
지키고 싶어 했음에도 그것이 둘 사이에 어떤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리란 보장을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지 않는 눈으로 그녀를 채근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입을 열었다.

“듣고 있습니다, 전하.”

“아무튼 그 독과 암기 사이에서 살아 돌아오다니, 생각보다 재주가 뛰어나군.”

“감사합니다.”

“기억에 조금 이상이 있다지? 스타스 경에게 들었어.”


한 사람의 중대사를 얘기하는 것치고는 담백하고 무성의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 무성의함에 상처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 또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지?”

리카르디스의 질문은 제법 어려웠다.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 그 범위를 가늠할 만한 능력은 애초에
그녀에게 없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칼릭스가 가르쳐준 말이 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타인의 입을 다물게 하는 마법의 말이라고 했다.

그녀는 칼릭스가 일러준 대로 말하기 위해 “아무것도.”라고 운을 띄웠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끝맺기 전에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게 더 빨랐다.

“알지 못해?”

“예, 그렇습니다.”

그는 삐딱하게 턱을 괴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밝은 은발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예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쩐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딱딱 끊어지는 단답형의 말투 때문인지,
언제나 안절부절 거리며 할 말이 있다는 듯 쳐다보는 절실한 낯이 아니라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
자결하라고 명령해도 일말의 반항도 없이 알겠다며 칼을 꺼낼 것 같던 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전보다는 확실히 덜 거슬렸다.

“그대의 활약을 기대하지, 로즈 경.”

“예.”

로젤린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제 입에서 나온 호칭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전하. 명받들겠습니다, 전하. 하던 예전의 그녀와는 영 다른
모습이었다.

로젤린은 경례하고 나서 그의 탁자 바로 옆에 섰다. 리카르디스가 집무실에 있을 때의 배치는 문 앞에 두 명,


집무실 안에 두 명, 집무실 밖, 창가에 세 명을 두는 형태였다. 로젤린은 그 중 집무실 안에서 그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사실 어중이떠중이 같은 경우야 문 앞에서 다 걸러지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집무실 안까지
위험 요소가 들어올 일이 적었다. 그녀가 네스터를 박살 냈다고는 하지만 상급 기사들의 신임을 얻기는 아직
부족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험이 적은 집무실 안에 배치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18 화.

그녀와 같이 집무실에 있는 호위기 사는 로젤린보다 2 년 먼저 상급 기사가 된 자였다. 푸른등불의 카일로.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젤린을 쳐다봤다.

기억에 이상이 있어? 아무것도 알지 못해? 처음 듣는 얘기였다. 로젤린은 원래 말수가 적고 침착하며, 감정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리 조에 같이 편성된 적이 없다 하더라도 며칠간 지나다니면서 인사를 주고받았는데
이상한 점을 전혀 못 느꼈다니. 그녀가 대단한 건지, 자신의 무신경함이 대단한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카일로는 기사들이 쓰는 수신호로 그녀에게 괜찮은지 물어봤다. 로젤린은 그 수신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신지?’라고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기초적인 것도 잊어버렸다고? 이런 애를 지금 호위
임무에 쓰는 거야? 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 * *

2 황자의 월장석 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백작, 후작, 남작, 누구의 전령, 초대장을 들고 온 누구의
시종, 군략가, 전략가, 학자, 기사. 문무를 가리지 않고 계급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이들이 오고 갔다.

월장석 성의 호위 기사들은 위험인물을 골라내기 위해 모두들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별 사건 없이 시간이


순탄하게 흘러감에 따라 그들의 칼날은 조금씩 평화로움에 무뎌지기 시작했다. 카일로는 하품이 찔끔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지금은 손님조차 없이 리카르디스가 여러 가지 서류를 처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양한 훈련을 하며 성 외부를 경비하는 하급 기사들에 비해, 상급 기사의 업무란 것은 굉장히 단조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가만히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그 긴 시간을 인내하기 위한 체력 단련이었던 건가. 평화롭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했다.

리카르디스의 휴식시간이 찾아왔다. 내리 세 시간을 일하던 그가 한숨을 길게 쉬는 것을 기점으로 그의 수석


비서관이 종을 울렸다. 곧 시종이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리카르디스가 좋아하는 홍차와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간식거리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손을 분주히 움직이던 시종이 화려한 찻잔에 홍차를 따랐다. 시종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홍차를 은제 스푼으로
살짝 떠서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이상이 없다는 얘기였다. 리카르디스는 오랜만에 취하는 휴식에
느슨해져 있었다. 창밖에서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방안은 따뜻한 데다가 홍차의 향기까지 감돌았다.
휴식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오후였다.

리카르디스는 소파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찻잔을 들고 향을 맡았다. 그의 입술이 찻잔에 닿았을 때였다.

동상처럼 우뚝 서 있기만 하던 로젤린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찻잔을 쥐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손목을 덜컥


잡았다. 홍차가 흘러 넘쳐 그의 옷을 더럽혔다.
“지금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로젤린 경!”

카일로는 대경실색하며 소리쳤다. 감히 한낱 기사가 고귀한 황자 전하께 손을 대다니! 대신해 펄펄 날뛰는 자가


있어서 리카르디스는 짓궂게 웃기만 했다.

“무슨 일이지, 로즈 경?”

“드시지 마십시오. 뭔가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방안의 온도가 갑자기 뚝 떨어졌다. 카일로의 손이 검 손잡이를 배회하며
꿈틀거렸고, 리카르디스도 방금 홍차를 따라 준 시종을 쳐다보았다. 로젤린의 말을 완벽하게 신뢰하지는 않지만
시종 또한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티포트를 들고 있던 남자는 사색이 되었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자신이 방금 먹어 보았다며 독 같은 건 없었다고 항변했다.

“게, 게다가. 황자 전하께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든 아는 사실인데 무슨 소용이 있다고 제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로젤린은 높낮이 없는 태평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독이 통하면 그런 짓을 하겠다는 얘기입니까.”

그녀의 말을 듣고 리카르디스는 오호라, 하는 소리를 냈다.

“그거 말 되는군. 아니면 통하는 독을 만들어 냈다던가?”

“그럴 수도 있겠군요.”

쿵짝이 맞는 두 남녀를 보던 시종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움직였다. 잔뜩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의 눈동자에
살의가 비쳤다. 그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뜯었다. 피부 아래 묻혀있던 날카로운 암기가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시종을 경계하고 있던 카일로가 검을 뽑았지만 리카르디스와 얘기하던 로젤린이 앞으로 나서는 것이 먼저였다.

챙!

로젤린의 얇은 검이 날아오는 암기를 쳐냈다. 아무도 그녀가 검을 뽑는 모습을 보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시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검은달 내에서도 암기의 대가였다. 바람과 같은 속도로 날아간 것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쳐 내다니. 신입 호위 기사는 생각보다 실력이 좋은 듯 했다.

회심의 일격이 무산되어 흔들렸던 마음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암살자는 실패를 그대로 넘기고 두 번째 수를
준비했다.

그는 신발 밑창에 있던 단검을 꺼내고 리카르디스에게 몸을 날렸다. 로젤린에게는 트레이를 집어 던져 시야를


방해시킨 후였다.

그러나 암살자는 2 황자에게 조금도 닿지 못했다.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천장에 박혔다. 로젤린의 발길질 한 번에 남자의 손목이 완전히 꺾여 부러졌다.
그녀에게 날아갔던 트레이는 반파되어 공중에 흩어지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반복된 훈련으로 인해 암살자는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팔이 완전히 부러졌다. 세 번째,
네 번째의 수는 폐기. 그렇다면 그 다음 수를 준비해야 하는데…….

눈앞에 이상한 게 보였다. 검은 머리의 호위 기사가 제 검을 호기롭게 내팽개치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검을


왜?

“?!”

“?!”

“?”

검을 왜…… 왜 버려? 카일로도, 수석비서인 잇세리온도, 리카르디스 조차 조금 당황해 버렸다.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에게 돌진했다. 암살자의 시야를 검은 머리의 여기사가 가득 채웠다. 그녀의 뒤로
반짝반짝 빛나는 2 황자의 은발이 사라져 갔다.

쾅!

몸과 몸이 충돌했다고 믿기지 않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의 몸이 빠르게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단단한 벽이


굉음을 울렸다. 이변을 알아차린 호위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우르르 나타났다.

“……?”

매서운 기세로 들어온 기사들은 곧 검을 집어넣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부나방처럼 이리저리
달려드는 암살자의 공격이 로젤린 한 명으로 인해 전부 무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챙챙, 잘도 쳐 내고. 퍽퍽,
잘도 팼다. 잠시 지켜봤으나 무력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로젤린은 자신에게 덤비는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 컥 소리 내며 날아간 암살자는 문 앞에 서 있던 상급 기사들의


발치까지 굴러갔다. 그들이 넝쿨째 굴러온 그를 포박하려고 했지만, 로젤린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에 움칠
몸을 떨고 물러났다.

로젤린은 이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암살자에게 온전히 집중했다. 오감이 예민하게 바짝 일어섰다. 많이
다친 외관에 비하면 숨소리는 아직 차분했다. 암살자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음을, 다음 수를 준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로젤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빛을 등지고 있었으나 그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종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올렸다. 퍽, 퍽, 퍽. 그녀의 주먹이 묵직한 망치처럼
둔탁한 소리를 낼 때 마다 남자들이 몸을 떨었다. 검으로 베어 낸 것도 아닌데 코와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시종의 얼굴은 겨우 몇 번의 주먹질로 뭉쳐 놓은 진흙 반죽 같은 꼴이 되었다.

죽은 거 아냐? 죽은 거 같은데? 리카르디스가 앞의 참혹한 꼴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 카일로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경! 로젤린 경 그만! 죽겠습니다!”

로젤린은 그의 말에 잠시 너덜너덜해진 시종을 들여 보았다. 신음소리와 심장이 뛰는 게 들렸다. 로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패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카일로가 기겁했다. 리카르디스는 비교적 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는
머뭇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배후를…… 캐야하니…… 로즈…… 아니 로젤린 경. 넘기고, 뒷정리만 좀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로젤린은 시종의 머리를 잡고 벽에 퍽 박았다. 수박 터지는 소리 같은 것이 났다. 그녀의 손에 잡혀 기절한 척


하고 있던 시종은 정말 기절해 버렸다. 열린 문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흠칫거리며 그녀에게서 실신한
남자를 받았다. 따로 묶지 않아도 도망갈 힘이 없을 것 같긴 했지만 일단 포박하고 끌고 갔다. 시종이 지나간
자리에는 피가 길을 만들고 있었다. 곧 들어온 시녀들이 떨리는 손으로 핏자국을 치웠다.

로젤린은 후, 하고 숨을 내뱉으며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 * *

싸움이 끝났다. 로젤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숨을 골랐다.

“어떻게 알았지?”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언제나 나른하게 늘어진 목소리가 한 톤 높아져 있었다. 이 상황에 제법
흥미를 느끼는 듯 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질문에 조금 전의 상황을 반추했다. 남자는 은제 스푼으로 홍차를 살짝 떠서 꿀꺽 삼켰다.


하지만 로젤린에게는 남자의 목울대 울리는 소리가 다소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이후 남자가 홍차를 소매에
스며들게 뱉는 것도 보았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만지는 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평범한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 장면을 보기 전부터 시종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썩어 가는 피 냄새가
느껴졌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느껴질 만한 향기는 결코 아니었다. 검은달의 암살자는 시종의 얼굴 가죽을
벗겨서 쓰고 있었다. 약품처리를 했지만 완벽하게 부패를 막지 못했던 것이다. 그 냄새가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런 냄새를 풍기는 자가 평범한 인간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마시는 척을 했습니다.”

“눈이 좋군.”

“그리고 피 냄새가 났습니다.”

“코도 좋아. 대단한걸, 기대 이상이야.”

“감사합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암살자의 코인가 입에서 튄 피 몇 방울,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티 포트. 그리고 그 소란에도 용케 쏟아지지 않고 천천히 식어 가고 있는 문제의 홍차가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19 화.

리카르디스가 찻잔을 들자 카일로와 로젤린이 몸을 움찔거렸다. 당장에라도 찻잔을 후려치고 싶어 하는


표정들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으며 잔을 얼굴 가까이로 가져대었다. 홍차의 정체를 가늠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향을 맡아 보려는 것이었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홍차를 마시기 위한 준비 동작처럼 보였다. 카일로가
기겁하며 만류하기 전에 로젤린이 빠르게 움직였다. 바람과도 같은 빠르기였다.

텁.

“로젤린 경, 지금 무슨 무례를! 전하 일단 찻잔을! 아니, 로젤린 경, 손을 얼른!”

로젤린의 손이 리카르디스의 입을 꼭꼭 덮었다. 로젤린은 아까 자신이 리카르디스의 손목을 잡았을 때 카일로가


큰 무례라고 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손목을 잡는 게 무례하다면 다른 걸 해야겠다. 라는 갸륵한
사고방식에서 나왔지만 상황은 도리어 악화되었다. 카일로는 뒷목 잡기 일보 직전이었고, 리카르디스는
어이없다는 듯 눈알만 굴려서 그녀를 올려보았다. 여전히 입은 막혀 있었다.

로젤린은 그의 손에서 찻잔을 뺏고서야 입을 풀어 줬다. 리카르디스는 얼얼한 입가를 쓸었다. 제 그림자를 밟을까,
숨소리가 거슬릴까 초조해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사고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파격적이었다. 조금 건방진 감이 있지만 아까 세운 공을 감안해 넘어가기로 했다.

“이리 내.”

“안됩니다.”

“안됩니다, 전하!”

“아니 됩니다 전하!”

로젤린, 카일로, 수석비서인 잇세리온이 차례로 반박했다. 잇세리온은 로젤린이 암살자를 두들겨 패는 동안 몸을
굳히고 있다가 리카르디스의 행동으로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성큼성큼 로젤린에게 다가갔다.

“이리 주시죠, 로젤린 경. 제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안 돼, 내 거야. 얼른 내놔, 경.”


“안됩니다! 스물다섯이나 드시고 이게 무슨 억지입니까, 전하! 독이 들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한테 주세요,
로젤린 경!”

로젤린의 양쪽에서 아주 난리였다. 청력이 좋아서 배로 괴로웠다. 누구에게 넘겨줘야하는지 한참 고민하고 있자,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목을 탁 잡아 왔다. 언제나 차가웠던 낯이 한층 더 싸늘해져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신성력으로 치유가 가능하니 나에게는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 살배기 귀머거리 아이도 알고 있지.
그럼에도 독인지 무엇인지를 먹이려고 했어. 이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나?”

“……무슨 수를 쓴 것이겠지요.”

“나한테도 통하는 독인데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보기만 해도 눈이 멀어 버리고, 향기만 맡아도 뇌가 썩어 버리는
것일 줄 어떻게 알고 넘기란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요즘 잠을 못자더니 머리도 굳어 버린 건가, 잇세리온.”

“그렇다고 고귀한 몸으로 독을 감별하려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신전 쪽에 한번 맡겨 보지요.”

“알량한 신성력 믿고 세금 축내는 무능력한 밥버러지들?”

“전하!”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가 다투는 사이 로젤린은 찻잔에 담긴 홍차를 관찰했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발생한 작은 움직임, 그 파동에 수면이 흔들거렸다. 한 몸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홍차 속에서 무언가가
분리되어 일렁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로젤린만은 눈치챘다. 그녀는 이 기운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이루는 마의 성질. 마력이라 불리는 그것.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력과는 조금 달랐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마수들의 몸에서 떠도는 난폭한 마력과 비슷했다.

로젤린은 가만히 관조하다가 뻑뻑한 눈을 깜박였다. 집중하지 않으면 그녀에게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미약한
양이었다.

마력에 독을 결합한 새로운 물질. ‘성력과 마력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 공식을 이용한 시도는 몇 달 전
사냥 대회의 사건에서 처음 나타났다. 로젤린은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를 떠나기 전, 칼릭스에게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많은 기사들이 죽었다. 신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얕은 상처를 입은 자들도 모두 죽었다.


암살 부대 ‘검은달’이 새로운 독을 만들어 내었다고 추정했다.

칼릭스가 가지고 온 암살자들의 무기가 몇 개 있었다. 로젤린은 그 암기에서 마력의 기운이 은은하게 묻어 있음을
눈치챘다. 정확히는 암기에 발려 있는 독에서 느껴졌다. 로젤린이 그 사실을 칼릭스에게 알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아, 탄식했다.

[그렇군요. 마력과 성력은 서로 간섭할 수가 없으니…… 마력이 독과 완전하게 동화된 상태라면, 성력으로
아무리 치유하려고 해 봤자 어떤 간섭도 할 수 없었을 테니. 그런……거였군요. 놈들이 아주 위험한 걸 만들어
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독이 신성력에 파훼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냥 대회의 일로 검증되었다. 수많은 기사들의 죽음으로써


입증되었다. 그들의 암살 시도가 날뛰는 것은 그 사실에 힘입은 것일지도 몰랐다. 로젤린은 여전히 말다툼을 하고
있는 그들의 목소리를 툭 끊었다.
“사냥 대회에서 썼던 독인 것 같습니다.”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리카르디스가 의심스럽다는 듯 인상을 쓰며 그녀를 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지?”

로젤린은 찻잔에서 시선을 들어 그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칼릭스는 황실 쪽에서도 곧 독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침묵을 지키는 황실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독의 치유법을 연구 중인 것이라고 추측했으나
…… 황실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 아직까지 작은 실마리조차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칼릭스 또한 로젤린의 언질이 없었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력을 느낄 수 있는 건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뿐이었다. 마력의 집합체인 제 누이는 예외로 치더라도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말 소수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마력은 크레안 티다니온의 산물이라 하여 그 힘을 가지고 있는 자는 불길하다고 박해받았다.


이델라브힘에 대한 믿음이 강한 마을에서는 마인(魔人)을 화형시키는 풍습도 종종 있다고 했다. 마력을 몸에
품고 있는 마수는 언제나 인간의 천적이었으니. 인간을 향해 손톱을 세우는 그 불길한 힘의 그릇이 동물에서
인간으로 바뀐다 하여도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마인들은 살해당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으며, 숨기도 했다. 그들은 점차 자취를 감춰 이제는 강한 신성력을 가진 사람의 수만큼이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것이 발타에서 새로 만든 독을 알아보지 못한 배경 중 하나였다. 마력을 가진 자가 없으니 당연히 알아보지


못할 수밖에. 그래서 칼릭스는 황실이 아직까지 독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으리라는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누님 기억하세요. 혹시나 황궁에서 그 독을 다시 보게 되거나 누군가에게 말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단


한마디만 말하시면 됩니다]

과거 칼릭스의 목소리와 로젤린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마력과 성력은 서로 간섭하지 않으니까요.”

이 말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잇세리온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리카르디스는 눈썹을 한쪽만 꿈틀거렸다.


황실에서도 사냥 대회에서 사용된 독의 조사를 시행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무색, 무미, 무취. 극악한
생존율을 보장하는 강한 독이라는 것 이외에는 밝혀지지 않았다. 성력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긴 했으나
신관들의 신성력이 약한 탓이라 생각했다.

마력과 성력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는 상식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 그대로였다. 잇세리온은 의식도 못하고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 그렇군요. 신성력이 닿기 전에 이미 많이 진행되어서 죽은 게 아니라, 애초에 성력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설득력 있습니다. 왜 그걸 생각 못 했을까요! 굉장하군요, 로젤린 경! 일단 검증은 해
봐야겠지만 아마도 그게 맞을 것 같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쯧,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 또한 로젤린의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검은달이 새로이 만든


독은 분명 마력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니, 연관이 있다.

즉사만 하지 않는다면 죽어가는 사람조차 살려 내는 신성력을 가진 2 황자. 검은달이 정보 조사에 치밀한


집단이란 건 차치하더라도 그의 신성력은 이미 온 대륙에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 2 황자에게 통할 것이리라
확정한 독이라면, 마력과 성력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공식을 이용하는 길 밖에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언제나 성력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낮게 끌어내리고자 했으니…… 독을 치유하지 못하는 신성력? 볼
것도 없었다. 이델라브힘의 권위가 땅으로 추락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검은달이 가장 바라 왔던 일이다.
“그래 굉장하군. 이런 것까지 만들어 냈단 말이지. 성력이 치유할 수 없는, 성력이 간섭할 수 없는 독의
영역이라.”

정말 기분 엿 같았다. 독의 조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리카르디스 또한 신성력을 쏟아부어본 적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물과 기름처럼 부드럽게 분리될 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은 있었다. 설마 이 독, 마력과 관련이 있는가?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독이라는


물질과 섞는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정말 그렇다면…… 자신도, 이델라브힘 조차 손을 대지 못하는 영역이
아니겠는가. 그때의 리카르디스는 그렇게 의심을 묻어 두기만 했다.

성력의 무력화. 이델라브힘의 추락. 검은달이 이루고자 했던 핵심적인 요소였다. 검은달이 가장 바라는 방식인
만큼, 그들의 적인 일라베니아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애써 외면했던 건지도 모른다. 검증을
완벽하게 거치지는 않았지만, 오늘부로 리카르디스의 안에서는 확정이 났다. 검은달은 새로운 독을 만들었다.
어쩌면 이 대륙을 좌지우지할 만한 큰 패가 될 것이다. 대단하다. 적이라도 박수쳐 주고 싶었다.

리카르디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눈을 감았다. 단 한 번도 편하게 살아온 적 없고 언제나 자갈이 가득한
흙길을 걸어 왔다고 생각했건만. 본격적인 진창은 이제부터였다.

[다음 편에 계속....]

20 화.

소문은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호위 임무에 막 배치된 상급 기사 로젤린 경이 암살자를


떡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바닥에 뿌려진 피를 치우던 시녀 몇 명, 암살자를 인계받은 병사 몇 명. 그
목격자들에게서 그녀의 무용담은 확대되어 퍼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를 향한 암살 시도는 언제나 열렬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환한 대낮에 암기를 들고 직접적인 공격을 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더군다나 성 내부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하기까지 했으니. 그를 감싸고 있는
악의가 거세짐은 물론이요, 수법 또한 치밀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이자 성공으로써 마지막이 될 수 있었던 위험한 시도는 한 명의 호위 기사로 인해 단숨에 무너졌다. 일개


신입 호위 기사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낮았던 탓이었을까. 로젤린의 공은 더욱 빛났다.

로젤린의 수습 기사인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식을 들었다. 암살자 다섯이 리카르디스
전하를 해하려고 하자 로젤린 경이 마치 팔이 여덟 개라도 된 것처럼 휘둘러 모두 잡아내었다고 했다. 독과
암기가 난무하는 사이에서 로젤린은 생채기 하나 없었을 뿐더러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피가 강처럼 흘렀다나
뭐라나. 과장이 섞인 진실이 자극적으로 변해 사람들의 입을 오르고 내렸다.

레티시아는 막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로젤린을 발견하고 에버하르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제복의 단추를 몇 개
풀고 느슨한 복장을 하고 있던 에버하르트가 급하게 몸단장을 했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성안에 자자하게 퍼진 소문처럼 그녀는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듯 했다. 흰 제복 위로 마른 피가 엉겨 붙어


있어서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로젤린은 평온한 얼굴로 그들에게 인사했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로젤린은 붉은 노을이 퍼진 하늘을 등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반나절 만에 월장석 성의
사신으로 불리고 있는 그녀의 별명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존경의 눈빛으로 로젤린을 쳐다보았다.

호위 임무 첫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암살자와의 격전에도 불구하고! 바쁜 시간을 쪼개어 연무장에 수습 기사들을


살펴보러 와 주다니. 그들은 기합이 들어 빳빳하게 서 있었다. 로젤린은 그들의 모습을 쭉 훑어보았다. 열심히
검을 휘둘렀는지 서늘한 바람에도 땀이 식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로젤린은 레이몬드와 칼릭스에게 여러 가지를 들었다. 하얀밤 기사단에는 많은 수습 기사들이 있다. 하지만
기사단 내부에서는 기사라고 불리지도 못하고 고작 수습생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했다.

그러니 기사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하급 기사로 승급하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목표인 셈이었다. 레티시아는


몰락 귀족 출신에다가 여자. 에버하르트는 평민. 수습 기사들 모두가 절실했지만, 그들 또한 매우 절실했다.
노력해 봤자 뒷받침해 주는 가문이 없다 보니 현실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았다. 재정적인 부분은 차치하고 검법을
배울 수 있는 환경조차 갖추지 못한 것이다.

어떠한 신념. 그리고 그 신념을 밑받침하는 파벌 이전에 하급 기사와 수습 기사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검술
실력이었다. 그들이 아직 수습 기사에 머무르는 것은 하급 기사와 수습 기사 사이를 가로질러 놓은 기준을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그런 둘을 하급 기사로 끌어올려야만 하는 과제를 가지게 되었다. 로젤린은 어제 자기 전 곰곰이


생각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 인간에게 부족한 것. 로젤린은 그것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수습 기사들의 실력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녀는 연무장 구석에서 뒹굴고 있는 목검을 들었다. 둔탁한
목재의 감촉이 익숙했다. 그녀는 목검의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일단 봅시다. 레티시아, 에버하르트.”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허둥지둥 당황했다. 그사이 로젤린은 자신의 얼굴 앞에 검을 세웠다. 대련 전의 준비


자세였다. 두 수습 기사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네가 먼저 할래? 내가 먼저 할까? 눈빛으로 서로에게
순서를 미뤘다. 얼마 전 그녀에게 쥐어 터졌던 네스터의 모습이 아른아른거렸다. 그 자는 아직까지 얼굴에 멍을
달고 다녔다. 수습 기사 두 명을 지켜보던 로젤린이 입을 열었다. 잔잔한 목소리가 연무장에 쿵, 무겁게
떨어졌다.

“둘, 다.”
“예? 예!”

“예!”

두 사람은 서두르며 목검을 잡아 들었다. 1:2 의 대치. 로젤린은 검을 들고 긴장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쭉
훑었다. 겉핥기로만 배운 듯 어설픈 자세였다. 여기 저기 빈틈 투성이라 마수가 앞에 있었다면 진즉에 잡아
먹혔을 것이다.

로젤린은 팔에 힘을 실었다. 그녀의 근육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두 사람은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으나, 이미 주위에는 그 작은 움직임과 상반되는 흉흉하고 거대한
기운이 떠돌았다. 당장에라도 그들의 목을 베어 낼 듯 날카로웠다.

“…….”

로젤린은 할 말을 잃었다. 이들은 마치…… 아기 사슴 같았다. 아니 아기 사슴보다도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떨어졌다. 이렇게 왼쪽, 오른쪽, 밑, 위. 다양한 방향으로 위협을 해도 ‘응? 언제 공격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낯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로젤린은 검을 거둬들였다.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은 채, 대련이 종료되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로젤린에게 그들의 능력을 판별할 만한 탐색전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수습 기사들에게도 공통적으로 기본 검술을 배우는 시간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검을 어떻게 휘두르느냐에 관한


기본기에서 그쳤다.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과 검을 맞대는 대련시간조차 방어구와 목검을 사용해, 실전보다는 말
그대로 ‘대련’ 에 익숙해질 뿐이었다.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며 뭉툭한 나무 검을 휘두르는 것에서 위기감을
느끼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닐 것이다.

로젤린이 인간이 된 이후 느낀 것도 그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생명의 위협이라는 것이, 위기감이라는 것이,


본능이라는 것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어지간히 강한 인간이 아니고서야 인간은 정말 약한 종족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필요한 과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심각합니다.”

수습생 두 명이 눈에 띄게 축 처졌다.

“……어디가…… 심각…….”

“모든 게 매우 심각합니다.”

“아…… 네…….”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힐끗 힐끗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로젤린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부터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를 공격합니다.”

“네?”

“아침부터 자는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마십시오.”


언제 어디서든 제가 당신들을 노립니다. 로젤린의 높낮이 없는 고요한 말투와 내용이 오싹했다. 그들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다른 상급 기사에게 소속된 수습 기사들에게서는 이런 이상한 내용의
훈련 방법을 듣지 못했다. 수습생들이 검을 휘두르면 상급 기사가 부족한 점을 말해 준다던가 검법을 가르쳐
준다던가 하는 일반적인 가르침뿐이었다. 레티시아가 머뭇머뭇 손을 들었다. 로젤린이 고개를 까딱하자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음, 로젤린 경. 조금 더 상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로젤린은 조금 고민하더니 주머니에서 꽃이 잔뜩 수놓아진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레이몬드가 손수


자수해서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의아하다는 듯 지켜보는 수습 기사들의 시선아래, 그녀는 몸을 구부려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잡기 전 바로 한치 앞에서 멈췄다.

“제가 뭘 하는 것 같습니까,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눈을 마구 굴리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손수건을…… 주우시려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로젤린은 손수건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연무장 옆에 있는 수풀에 다가가 얇은 나뭇가지를 콱 잡았다. 나뭇가지가
당장이라도 꺾여 질 듯 휘어져 있었다. 로젤린은 더 이상 힘을 주지 않고 또 멈췄다.

“제가 뭘 할 것 같습니까, 에버하르트.”

“나뭇가지를 꺾으려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로젤린은 나뭇가지를 꺾었다.

“방금 대련할 때에도 제가 여러 번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를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네?”

“예?”

그냥 가만히 서 있었잖아? 둘은 혼란스러웠다. 분명 그냥 서 있기만 했는데…….

“전혀 모르고 있더군요.”

“아…… 네…….”

에버하르트는 로젤린이 한 행동과 말을 이제야 이해했다. 물론 손수건을 잡지 않았고 나뭇가지를 꺾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후에 취할 행동은 누구든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다. 대련했을 때에도 그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는 공격전의 징조를 뚜렷이 내보였을 것이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눈동자, 한쪽 발에 실리는 무게.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며 수축, 팽창하는 근육의 움직임 따위로.

로젤린 그 징조를 읽어 내지 못했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레티시아 또한 그녀가 하고자하는 말을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얼굴을 붉혔다. 여러모로 부족하단 것이 낱낱이 드러났다.
“읽어 내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본능이 얘기하는 그 영역까지.

“네!”

“예!”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의 목소리가 연무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월장석 성의 사신이라고 불리는 로젤린은
소문처럼 정말 굉장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들은 그녀에게 경례한 후, 뿌듯하게 기숙사로 귀가했다.

방심한 채 돌아가는 도중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로젤린에게 공격당하는 걸 기점으로 그들의 세상은 180 도
바뀌었다.

[다음 편에 계속....]

21 화.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지독한 냄새였다. 잇세리온은 어둡고 컴컴한 공간을 지나고 있었다. 빛 한줄기 들지 않는
곳이었으나 앞서서 걷고 있는 병사가 들고 있는 등불 덕에 어느 정도 시야가 트였다. 나방처럼 보이는 날벌레가
잇세리온을 지나쳐 뒤로 날아갔다. 그는 화들짝 놀라 손을 휘휘 저어 벌레를 쫓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리카르디스를 위한 것이었다.

“이런 곳까지 직접 행차하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리카르디스는 얼굴 주위에서 펄럭거리는 그의 손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네가 병사에게 시키고, 그 병사는 또 말단에게 시키고, 그 말단은 그 말단에게 시키겠지. 답이 내게 돌아올
즈음이면 반년은 지났겠군. 기다리다가 숨 넘어 가겠어.”

잇세리온은 투덜투덜댔다. 확실히 그가 감옥을 찾지만 않았더라도 밑의 사람에게 시켜서 알아오라 했을 것이다.
하여간 성격이 급한 주인이었다.

그들은 나선형으로 돌고 도는 몇 백 개의 계단을 내려가 최하층에 도달했다. 철창 안에 갇힌 짐승 같은 인영들이


울부짖으며 마구 손을 뻗었다.
“예쁘게 생겼네. 이리와, 이리와 봐 예쁜이.”

“죽, 여줘. 죽여줘. 제발!”

“배고파요, 쥐가 음식을 다 먹어 버렸어! 개 같은 자식들! 죽여 버릴 거야!”

병사가 죄수에게 찬물을 뿌렸다. 차가운 물이 그들의 상처를 후벼 팠다.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울렸지만
아까보다는 잠잠해졌다. 잇세리온은 이를 악물었다. 여전히 불쾌한 광경이었다. 그는 이 더러운 감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빛나는 주인을 돌아보았다. 리카르디스는 미간을 조금 좁히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 보였다.
하지만 항상 저런 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평소와 똑같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무덤덤한 태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광경에 일말의 신경도 두지 않는 듯 했다. 잇세리온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그를 따랐다.

최하층에서도 한참을 들어 가야하는 독방이었다. 병사가 창대로 철창을 두드렸다. 캉캉캉. 소리가 감옥을 크게
울렸다. 철장에서 녹슨 냄새가 났다. 피 냄새일지도 몰랐다. 안쪽에서 검은 형체가 꾸물거리며 움직였다. 어쩌면
밝은 금발이었을 머리카락은 흙과 피 따위가 엉겨서 갈색처럼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기어 왔다. 두 손에 씌워진
수갑이 바닥을 긁으며 철컹, 철컹하는 소리를 냈다. 더러운 누더기를 몸에 대충 감고 있던 여자가 철창을 잡고
겨우 일어섰다.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하얀 눈동자가 빛났다.

“이델라브힘의 개가 왔나? 냄새가 나는걸.”

“크레안 티다니온의 노예를 보러 왔지. 신수가 훤한걸 보니 그간 평안했나 보군?”

“입만 살아 있는 데다가 재수까지 없는걸 보니 두 번째 월계수로구나.”

그녀가 갑자기 철창 사이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정확하게 리카르디스를 노려 왔다. 철컹!
수갑이 철창에 걸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한치 앞에 당도한 더러운 손끝을 보고도 리카르디스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거리가 아주 조금 모자라 닿지 못했다. 지켜보던 병사들이 창대 끝으로 그녀를 쳐내려 했지만
리카르디스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손버릇은 여전하고.”

“위로해 주려고 했지. 또 네 형이 괴롭힌 거니?”

잇세리온은 병사를 부르러 가야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잇세리온이 작게 혀를 찼다.

“사람 기분 더럽게 하는 것도 여전하군.”

리카르디스는 품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 그녀의 손 위로 병을 떨어트렸다.
그녀는 손에 닿는 차갑고 단단한 감촉에 잠시 흠칫 몸을 굳혔지만, 곧 철창 안으로 가져갔다. 유리병의 정체를
알아보려는 듯 손으로 더듬기도 하고 흔들어 보기도 했다. 얇은 유리 너머로 찰랑이는 것이 느껴져서 그녀는 그
안에 어떤 액체가 들어있음을 눈치챘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손안의 병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자,
리카르디스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대를 위해 가져온 선물이야, 케틀린.”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유리병을 열었다. 짙게 내려앉은 어둠, 차가운 공기에 들러붙어 있는 짙은 피와 오물냄새.
날카로운 쇠의 소리까지. 살풍경한 감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홍차의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맴 돌았다.
그녀는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제 동료들이 또 2 황자의 암살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리엔타의 알리가르테?”

알리가르테는 리엔타 지방에서 나는 홍차 이름이었다. 날카로운 시선 가운데에서 그녀는 홍차의 종류까지 맞출


정도로 여유로워 보였다.

“교양이 뛰어 나시군요, 레이디.”

팔짱을 끼고 철창 기대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목소리는 퍽 느긋했다. 그녀는 비죽 웃더니 홍차를 손바닥에 살짝


부었다. 코에 가까이 대어 냄새를 좀 더 깊게 맡기도 했고 손끝으로 만져보기도 했다. 그녀는 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 손바닥 안에 얕게 고여 있던 홍차에서 익숙한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생생한 광경을 선사했다. 검붉게 물든 아지랑이 같은 것이 손바닥에서 피어올랐다. 아주 미약한 양이었지만,
그녀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조국, 발타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녀가 일라베니아에
잡혀 있는 사이 독과 마력의 결합물, ‘파편’의 제조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행동으로 리카르디스는 확신을 얻었다. 무색, 무미, 무취의 독에 그녀가 반응했다는 것은 그녀가 느낄 수
있을 만한 기운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마력을 가지고 있는 마인(魔人)인 만큼 소량의 마력이라고 해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손에서 눈을 떼고 다시 리카르디스 쪽을 쳐다보았다.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손목에는 녹슨 수갑을 차고 누구보다 허름한 옷을 입었으며 누구보다 쇠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이
공간에 있는 그 누구보다 의기양양해했고, 누구보다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거친 목소리가 즐겁게 울렸다.

“무엇을 알고 싶지?”

“무엇을 알고 있지?”

그녀는 편안하게 자리에 앉았다. 다소 불손해 보이는 감이 있어서 잇세리온은 속으로 작게 욕지거리를 했다.

“나는…… 리카르디스. 나는 아주 많은걸 알고 있어.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아. 또한


이델라브힘의 빛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도, ‘이것’이 나타난 이상 너희 더 이상 승산이 없어졌다는 것도. 난
다 알고 있어.”

“아주 혼자 잘났지.”

“……건방지기는.”

그녀는 잡혀 있는 3 년간, 단 한 번도 일라베니아에게 정보를 넘긴 적이 없었다. 끈질긴 고문 끝에 뱉은 정보라고


하더라도 이미 사건이 일어난 이후라 소용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입을 열고자 한 것은 리카르디스가 1 황자
엘피디오보다 덜 재수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또한 그가 선물이랍시고 가지고 온 것에서 오랜 숙원을 풀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이제 크레안 티다니온의 뜻대로 돌아갈 것이며, 고작 독의 정체를 하나 밝혀낸다고 한들 크게 바뀌는


일은 없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일라베니아 제국에 검은 장막이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휩싸고
도는 희열에 몸을 잘게 떨었다.

“나에게 가지고 온 것을 보면 너도 이미 알고 있는 거겠지. 그래 맞아. 이것은 위대한 크레안 티다니온의 산물.


감히 이델라브힘 따위가 끼어들 수 없는 완벽한 혼돈의 영역.”
“말을 개떡같이 하는 재주가 있었나?”

“……이 독에는 마력이 섞여 있어.”

“알아듣기 쉽고 좋군. 완벽해.”

이미 독의 정체를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는 일은 없었다.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 대신, 그 뒤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술렁였다. 감옥이 그들의 동요로 들썩였다. 독과
마력의 결합이라니. 결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허름한 여자는 검은달의 간부였던 자였다.
신용할 수도 없지만 쉽게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신성력으로 치료되지 않는 독. 마력을 숭배하며 많은 마인들을 보유하고 있는 검은달. 그리고 마녀 케틀린의


입에서 나오는 말까지. 많은 정황과 상황이 리카르디스의 의견을 밑받침했다.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의 뒤로 서
있던 남자들이 작은 종이에 무언가를 사각사각 써 내려갔다. 그 증언들은 황제에게, 엘피디오에게, 귀족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손을 휘휘 저으며 용건이 끝났음을 알렸다. 많은 비서와 보좌관들이 썰물처럼 감옥을 빠져나갔다.
고약한 냄새와 벌레가 가득 찬 이 공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찬 후,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눈길을 보냈다.

“남은 건 선물이야 케틀린. 몸에는 안 좋지만 그대의 정신 건강에는 좋을 테지.”

빛 한줄기 들지 않는 어둡고 습한 공간에서 제대로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고문을 받는 삶을 스스로 끝낼


기회를 주겠다. 리카르디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케틀린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온갖 악독한 고문을 일삼는
엘피디오와는 다르게 귀여운 맛이 있는 황자였다. 그녀의 웃음소리에서 그 뜻을 읽은 리카르디스가 얼굴을 팍
구겼다.

“이 선물은 사용하지 않을 거야, 예쁜이.”

이 여자가 정말.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편안하게 죽지는 못할 거다.”

“모두가 크레안 티다니온님의 품으로 돌아갈 거야. 눈이 멀어 버렸지만 그 광경은 환하게 보일 테지. 나에게는
살아서 그 장면을 봐야 하는 의무가 있어. 열심히 발버둥 쳐 보렴.”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죄수들이 다시 철창을 울려 대었다. 감옥이 비명과 고함소리에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다음 편에 계속....]
22 화.

“네가…… 되찾을 수…… 이 어둠 속에서…….”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잇세리온이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얼른 나가자고


재촉하는 통에 그 또한 독방 앞을 떠났다.

리카르디스는 솜씨 좋게 그녀의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서 복원했다. 그녀의 입모양이 한 글자, 한 글자를 그려


냈다. 저주인가? 또는 어떤 것의 암시? 지금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있는 독방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네가 이델라브힘의 존재만으로 하얀 밤을 되찾을 수 있을지, 이 어둠 속에서 지켜보겠다, 리카르디스.

* * *

잇세리온이 조잘조잘 잔소리를 쏟아 부어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크레안 티다니온을 숭배하는 광신도 집단인
‘검은달’. 그 간부였던 마녀 케틀린과 정답게 얘기를 나누면 어떻게 하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 독설이 정다워
보였다니 기가 찼다.

자신을 살해하고자 했던 독에 마력이 섞여 있음은 그녀의 말로써 확증이 되었다. 지하 감옥에서 그녀의 말을 같이
들었던 엘피디오와 황제의 사람들. 그들이 입증해 줄 것이다. 검은달, 또한 왕국 발타가 신성력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새로운 독을 만들어 내었음을. 그것은 리카르디스뿐만 아니라 일라베니아 황실에게도 큰 위협이었다. 적의
적은 많을수록 좋았다. 문제는 적과 손을 잡은 아군이 있다는 것이지만.

리카르디스는 침대에서 한참 뒤척이며 천장에 있는 문양을 눈으로 따라 그려 보았다. 언제나 쉽게 잠들지 못하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힘들었다. 피로한 몸과 달리 정신은 생생했다. 어릴 때부터의 잦은 암살 시도 덕에
앓게 된 일종의 수면 장애였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고 검은 배경 위로 양 몇 마리를 세어 보고, 어린
아이들에게 들려줄 법한 자장가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더욱 뚜렷해지기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푹 쉬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역시나 잠들기는 영 그른 듯했다. 긴 밤을 지루하지 않게


해 줄, 처리해야 하는 업무는 언제나 많았다. 여태껏 불면의 날에는 주로 깃펜을 들고는 했으나…….

오늘따라 유독 와인이 차곡차곡 눕혀져 있는 수납장에 눈이 갔다. 리카르디스는 이런 날에는 책상 위에 앉는 것이


좋은 선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와인을 한 병 집어 들고 긴 소파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었다.
고작 몇 개의 촛불이 있을 뿐이라, 방 안은 밝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눈에 띄었다. 하얗고 희미한 빛이 와인
잔과 탁자를 비추고 있었다. 살짝 열려져 있는 커튼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달빛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 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둥그렇게 떠 있는 달의 일부가 보였다. 새하얗게 멀어 버린 여자의 눈동자 같았다. 순식간에 기분이 더러워져서
그는 잔에 담긴 와인을 벌컥 들이켰다.

검은 달. 하얀 밤. 그것은 단순히 크레안 티다니온을 섬기는 광신도 집단의 이름도 아니고, 신성 제국 2 황자의
기사단 이름도 아니었다. 지금은 노쇠하여 죽어 가고 있는 대륙의 찬란했던 과거.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었다.

[빛의 신 이델라브힘은 그의 성력이 극으로 치달은 날, 어둠의 신 크레안 티다니온을 밤에서 몰아내었다.

낮보다도 더 환한 축복의 하얀 빛이 온 세상을 비췄다. 만물은 소생했다. 땅과 하늘을 덮고 있던 검은 장막은


서서히 하늘의 한 편으로 물러났다. 어둠의 상징인 그림자 또한 사라졌으며, 이로써 대지에 내려앉은 일말의
어둠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하얀 밤이 세상을 뒤덮었다. 크레안 티다니온은 밤에서 쫓겨나 달에 몸을 숨기고,
세상을 하얗게 물들인 이델라브힘의 밤이 사라질 때까지 검게 변한 달에 머물렀다]

……라고 알려진 것이 일라베니아, 아니 온 대륙에 퍼져있는 전설이었다. 전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 단어가 어울리는지 잠시 판별했으나, 역시 단순하게 ‘전설’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진실이라고 말하기에는 한없이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것 또한 알았다.

삼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하얀 밤과 검은 달이 뜨는 소생의 날, ‘축복의 밤’ 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몇백 년이라는 세월은 진실을 숱한 전설 중 하나로 만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의 밤’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모든 나라들의 건국신화가 이르듯,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가져다 붙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전설이 가지는 힘조차도 많이 퇴색 되어 버린 시대이긴 했으나
리카르디스는 알고 있었다. 그림자조차도 사라지는 비현실적인 신의 세계, 짧은 시간. ‘축복의 밤’은 존재한다.

일라베니아의 황실, 신전. 아무나 들어설 수 없는 깊숙한 곳에 숨겨진 낡은 서고. 여러 사람들이 써 내려간
책자에는 몇백 년 전, 일라베니아의 건국 때부터 반복됐던 하얀 밤과 검은 달의 기록이 생생히 남아있었다.

1 년…… 47 년…….

236 년…… 243 년, 263 년

297 년…… 345 년…… 3……4…….

[일라베니아의 황제가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빌어, 크레안 티다니온을 달로 몰아내고 하얀 밤을 불러왔노라.


그림자가 사라진 대지는 축복으로 물든다. 생명은 순환하며 싹이 움트고 꽃은 피어, 열매를 맺는다]

‘축복의 밤’을 부르기 위해서는 많은 성력이 필요했다. 막대한 성력을 가진 자가 황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축복의 밤은 점차 소실 되어 갔고, 황제들의 역량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왕왕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현 일라베니아 황제로부터 2, 3 세대 위 전대 황제들의 신성력이 강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부터도 축복의 밤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견들은 힘을
얻지 못했지만 없어지지도 못한 채 지금까지도 조용히 묻혀 있었다.

축복의 밤이 뜬 마지막 기록으로부터 어느덧 몇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대륙은 서서히 죽어 가는 중이었다.


성력과 성수로 축복한 땅은 다시 살아나긴 했지만, 곡식의 수확량과 열매 맺는 나무의 숫자가 점차 줄어드는 것은
멈출 수 없었다.

신성력이 닿는다고 죽어 가는 땅이 완벽하게 회복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주기적으로 축복을 하지 않으면


다시 메마른 땅으로 곧바로 돌아갔다. 신전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거친 결과, 신성력으로 땅을 살리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상자에게 약초를 달여 먹이는 정도의 일차적인 효과일 뿐이라는 결과로 확정지었다.

가시적인 효과는 있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 생명력이 순환하지 못하는 땅이 맞이할 결과는
뻔했다. 다급한 상황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황제의 눈을 피해 ‘축복의 밤’ 에 대해 조사했다. 황실에 있는 자료가 안 된다면 지역마다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구전이나, 옛 도서관의 성서라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자료는 소실되었고, 오랜
얘기들은 변질되고 잊힌 후였다.

과정과 조건에 대한 상세한 진실은 황제만이 알고 있었다. 축복의 밤을 부르는 것은 오직 일라베니아의 황제만이
가지는 가장 큰 의무이자 고유의 권한이므로. 바꿔 말하자면, ‘축복의 밤’ 을 다른 자가 띄우는 행위는 황제에
대한 모반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만약 ‘축복의 밤’ 을 부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시도해서는
안 된다. 황위를 계승 받을 때까지는.

정말 어이없고 답답한 일이었다. 현 황제는 그 자체로도 성력이 미치지 못해, 다른 조건이 충분히 채워지더라도
‘축복의 밤’ 을 부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득바득 권력을 쥐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축복의 밤’ 에 대한 정보를 캐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인간 위에


서 있는 정점. 말 한마디로 수십, 수백, 수만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자에게 반발하는 행위였으니.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다소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날에는 황제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보험. 누군가를 쳐내기 위한 검이
아닌,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검이다. 때문에 전쟁터에서 구르는 와중에도, 큰 부상을 입었을 때에도, 소중한
이들이 죽어 나갈 때에조차 ‘축복의 밤’ 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왔다.

형체조차 보이지 않아 흐릿하던 것이 오늘에서야 조금이나마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이델라브힘의 존재만으로 하얀 밤을 되찾을 수 있을지, 이 어둠 속에서 지켜보겠다. 리카르디스.’

리카르디스는 와인을 물마시듯 들이켰다. 과연, 인정하기로 했다. 한 가지만을 찾아 왔다는 것을. 마녀 케틀린의
마지막 말에서 그는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하얀 밤이 나타난 날에는 항상 검은 달 또한 같이 있었다. 하얀 밤을
찾지 못했다면, 남은 것은 오직 검은 달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와인 잔을 들고 발코니로 향했다. 리카르디스는 불그스름하게 물든 얼굴을 하고 창을 열었다. 그는


발코니를 향해 발을 떼기 전, 우뚝 굳어 버렸다. 정면에 높이 자라있는 나뭇가지 위에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엉망으로 얼굴을 구겼다.

“이게…… 대체…… 무, 뭘 하는 거지 로젤린 경?”

그 답지 않게 당황해 말도 더듬었고 목소리도 한톤 높았다. 비명 안 지른 것이 용할 정도로 정말 깜짝 놀랐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나뭇가지 위에 고양이처럼 앉아 있는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녀는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호위 중입니다.”

“……그대의 호위 시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었나?”

“암살자가 제 호위 시간을 생각해서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로젤린은 곧바로 자신의 말을 확인시켜 줬다. 잎이 무성하게 자라 우거진 나무 안쪽에서 무언가를 잡아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인간이었다. 그 사람은 이미 로젤린에게 당한 후인지 기절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말도 못하게 유능한 제 호위 기사를 한 번, 나무 아래 피 흘리며 쓰러진 암살자를 한 번 보다가
사람을 부르는 종을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이 몰려왔다.

[다음 편에 계속....]

23 화.

호위 기사들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로젤린을 한 번, 피떡이 되어 있는 암살자를 한번 번갈아 보았다.


그들의 미묘한 표정이 리카르디스와 매우 닮아 있었다. 로젤린이 그들에게 “수고하십니다.” 하며 경례했다.
그녀의 태평한 태도에 상급 기사들은 더욱 심란해졌다. ‘굉장히 유능하긴 한데…… 음…… 뭐…… 괜찮겠지…
….’라고 생각을 마친 그들은 이 이상한 상황을 적당히 합리화하고 방을 나섰다. 잠시 소란스러웠던 방 안에
다시금 적막이 감돌았다.

리카르디스는 발코니 문을 닫고 들어가려다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나뭇가지에 앉아 조용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로젤린이 보였다. 그녀의 행동이 신경을 자극했다. 어떤 과거가 떠올랐던 건지도 몰랐다.

“로젤린 경.”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대답하라는 게 아니라 이리 오라고. 리카르디스는 조금 인상을 쓴 채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로젤린은 능숙하게 나무를 내려와 벽을 타고 리카르디스의 앞에 섰다. 순식간이었다. 눈치를
어디 버리고 온 대신에 실력을 얻어 온 건가?

리카르디스는 별다른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로젤린도 그를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이 야심한
시각, 남자의 방에 들어서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제 주인에게 괜한 소문이라도 돌까 싶어
들어온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텐데. 이렇게 보면 정말 기억을 잃은 것 같다가도, 제 주위를 맴도는 행태를 보면
전혀 변한 게 없어 보이기도 했다. 리카르디스는 테이블 앞에 서 있는 로젤린을 눈에 담다가 그녀에게 잔을
건넸다.

“마실 텐가?”

“괜찮습니다.”
“마셔.”

“네.”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손에 들린 잔을 받았다. 로젤린의 손마디가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반면, 로젤린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는 곧 와인 잔을
하나 더 가지고 와, 두 개의 잔을 직접 채웠다. 로젤린은 그가 와인을 따르는 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음에도 리카르디스가 눈치챌 정도의 강렬한 시선이었다. 로젤린은 먼저 와인을 받고
기다리고 있다가 다른 잔에 와인이 마저 채워지자마자 잽싸게 움직였다. 바람과도 같은 속도였다.

쨍.

질 좋은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리카르디스가 어이없다는 듯 로젤린을 쳐다봤다. 아까


채워지는 잔을 열렬히 바라본 것이 이런 이유였던 건가.

지금 나랑…… 건배를 한 거야, 이 호위 기사?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황당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도리어 뿌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잔을 나누고 나면 서로 가볍게 잔을 부딪쳐 소리 낸다. 로젤린은 칼릭스에게 배운 것을 잊지 않고 재빠르게


해냈다. 명석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누님. 칼릭스의 박수갈채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로젤린의 뿌듯한
표정은 그에 기인한 것이었다. 물론 칼릭스가 알았다면 무척이나 괴로워했을 상황일 테지만, 로젤린은 알지
못했다.

리카르디스는 입가를 쓸었다. 요즘 따라 당황할 일이 많았다. 기억상실은 정말 사람을 크게 바꿔 놓는구나 싶었다.


그게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아직 판가름 나지 않았지만. 그는 “흠…….”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허물을 묻었다. 로젤린이 굉장히 뿌듯해 보였기 때문에 차마 혼낼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에게 진지하게 화내는
꼴이 될 것 같았다. 로젤린의 돌발 행동으로 잠시간 까먹었지만, 리카르디스는 사실 그녀를 방 안으로 데리고
와서 몇 가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사고방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나, 그녀를 이루고 있는 근본은 크게 바뀌지 않아 보였다. 우선 굳이 시키지도


않았건만 목숨을 걸고 제 곁을 지키려고 하는 점이 아주 똑같았다. 기억상실이라고 보고한 것이 거짓이 아닌지
여러 번 의심할 정도로. 하지만 기본적인 상식 따위를 어딘가에 몽땅 버리고 온 걸 보면 기억상실이란 말도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그렇다면 대체 그녀는 왜 제 곁을 맴도는 것인가. 로젤린은 어떠한 영광도 어떠한 명예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리카르디스 자신이 그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을 테니. 붉은수레바퀴가 로젤린이라는 이름 앞에 있는 한, 그녀는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정확하게 자신의 뜻을 밝힌 적 있었다. 과거, 로젤린이 죄책감이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였다. 그 눈빛이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그래서 로젤린을 크게 밀어내려고 했다.

부드럽게 손질된 긴 은발이 헝클어지고 얼굴에는 까슬하게 그의 감정이 올라와 있었다. 옷도 입다 만 것인지 벗다
만 것인지 엉망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었다.

[떠나, 떠나라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아주 지긋지긋해 죽을 것 같으니! 대체 왜 내 곁에 있는 거냐!]

지금보다 어렸고 지금보다 감정을 숨기지 못했던 때라 해도 매우 격정적이었다. 그때 당시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사망했던 상황의 특수성 때문인지도 몰랐다. 로젤린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온갖 집기가 부서진 방의
중간에 무릎 꿇고 있었다. 떨리며 흐느끼는 말이 그녀의 입술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지켜 드리겠습니다 전하. 제가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전하만은 제가…… 꼭…… 목숨을 바쳐서라도…….]

리카르디스는 제 머리를 쥐어뜯고 악을 썼다. 자학에 가까운 몸짓을 막기 위해 로젤린이 그에게 다가섰지만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개입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그대가 뭐라고 날 지켜! 네가 뭐라고 나를 지킬 수 있어!]

그 대화가 오고 갔던 장소였다. 로젤린이 다시 이 방에 발 들일 수 있으리라고, 리카르디스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기억상실 전의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전과 달리 이렇게 차분하게 로젤린을 바라보고 있자니
느낌이 이상했다. 정말이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과거의 일 이전에 애초에 술잔을 나눌 만한 사이조차
아니었다.

리카르디스의 시야에 로젤린이 인상을 쓰는 모습이 담겼다. 단맛이 적은 와인이라 그런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둘은 별다른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와인을 따를 때 마다 로젤린이 계속 건배를
하는 바람에 리카르디스가 몸을 움찔거리긴 했지만. 이후로도 로젤린이 혼나는 일은 없었다. 와인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 잔이 부딪치는 소리,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간간히 울렸다. 하루 종일 피곤했던
리카르디스와 인간의 언어가 아직 어려운 로젤린. 두 사람에게는 모두 괜찮은 시간이었다.

와인 한 병은 금방 동이나 한 병을 더 가지고 왔다. 이번에는 달콤해서 여인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산딸기 주였다.
로젤린의 구미에 맞았는지 아까보다 잘 마셨다. 그리고 한 병 더. 몇 시간 뒤에 또 한 병 더. 취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제 호위 기사의 모습은 묘하게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리카르디스는 동이 터올 즈음에는 술에 떡이
되었다. 로젤린은 언젠가 네스터를 옮겼던 것처럼 리카르디스를 번쩍 들어 침대로 옮겼다.

그는 신음소리를 내며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뉘였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이불까지 곱게 덮어 주고 뒤돌아설


때 쯤, 그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대체 왜 곁에 있냐는 이상한 물음이었다. 로젤린은 그다지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냥 하다 보니? 또는


직업이라서? 아니면 누군가와 약속해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하얀 밤의
주인을 지킨다.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로젤린은 붉은 얼굴로 눈을 깜박이고 있는 리카르디스에게 작게 속삭였다.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곧 그 말들은 숨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이불 아래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고 내렸다. 로젤린은 흐트러진 리카르디스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는 고요한 새벽이었다.

* * *

“하카브, 이 개자식이!”
정리정돈 되어 있던 탁자가 어질러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많은 가신들이 보고 있음에도 그는 격렬한 감정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 엘피디오는 씩씩대며 화병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화병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밤이 까마득하게 내려앉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1 황자 엘피디오의 석영 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엘피디오의 호출 때문이었다. 2 황자 리카르디스가 마녀 케틀린을 통해 새로운 독의 정체를 알아냈다. 이미 몇몇
주요 고위 귀족과 황제의 귀에도 들어 갔을 것이다.

“뭐? 마력? 마력과 독을 섞어?”

엘피디오의 보좌관은 그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주인이 이렇게까지 심사가 뒤틀려 있는 경우에는 백번


조심해도 부족했다. 보좌관의 예상대로 그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엘피디오가 손바닥으로 보좌관의
머리를 퍽퍽 쳤다.

“야, 너 뭐 하는 놈이야. 뭐 하는 새끼냐고! 그런 거 먼저 알아오라고 그 자리 앉혀 놓은 거 아냐? 내가 언제


리카르디스 그 자식 꽁무니나 쫓아다니면서 정보 주워 오라고 했어?!”

“죄송합니다. 하카브 왕자 쪽에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기에…….”

“더러운 발타의 개자식! 하여간 마음에 드는 놈이 하나 없어! 어떻게 일이 이지경이 되도록 다들 손만 빨고


있었나!”

엘피디오가 잔뜩 성내며 주위를 쭉 훑었다. 세간에 1 황자를 지지한다고 알려져 있는 귀족들이었다. 제국 내


외부로 명성이 자자한 가문의 수장들이건만, 그깟 독 하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24 화.

검은달이 외부의 적이라고는 하지만 2 황자 리카르디스를 제거하겠다는 목적을 위해 잠시나마 손을 잡았다. 검은달,
아니 발타에서도 그의 존재는 눈엣가시였다. 리카르디스가 검은달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에 크게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검은달과의 동맹은 아주 빠른 속도로 성립됐다. 엘피디오의 세력만으로 견제할 때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훨씬 수월해졌지만, 리카르디스는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도리어 수세에 몰린 형국에서야
그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듯 했다. 바리바리 숨겨 놓은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동맹 후, 금방 결착이 날 것이라
생각한 승부는 아직까지도 일진일퇴를 하며 줄다리기 중이었다.
사냥 대회에서 기필코 처리를 하겠다고 하더니 실패했다. 이후에 암살자가 월장석 성내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해서 어떻게든 넣어 줬더니 그것도 실패했다. 심지어는 그날 막 호위 임무에 배치된 신입 상급 기사에게
피떡이 되었단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리카르디스 그놈이 얼마나 기고만장해할지. 상상만 해도 열이
뻗쳤다.

그 상황에서 리카르디스가 독의 정체를 알아냈다. 마력과 독이 섞인 혼합물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성력으로


치유가 되지 않는다고. 엘피디오는 어이가 없었다. 성력이 무쓸모해지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독의 존재 자체가
문제였다. 엘피디오는 검은달로부터 그런 정보를 전달받지 못했다. 하카브가 동맹이라는 이름 하에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전혀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만약 검은달의 발톱이 자신을 향하게 된다면. 그 독을 해독할 방법이 없다면 자신 또한 위험해질 것이다. 아니
이미 위험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은 언제든 깨어질 수 있었다. 엘피디오는 그의 밝은 금발을
마구 헝클였다. 일이 엉망으로 꼬이고 있었다. 인상 쓰며 고민 중이던 강철발굽 백작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전하. 하카브 왕자가 패를 전부 보이지 않았으리라고는 예상했던 일


아니겠습니까.”

“젠장, 그래도 이런 거라고 생각이라도 했겠나? 리카르디스뿐만 아니라 이제 나, 그리고 그대들의 목숨까지 전부
하카브에게 달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우리가 리카르디스의 방패가 되어 준 사이에 그 개새끼들은 일라베니아를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주 환장하겠군!”

엘피디오가 초조한 발걸음으로 방 안을 서성였다. 강철발굽 백작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윗사람으로서 보여야
할 태도는 어디에다 버리고 왔는지, 눈 씻고 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랫사람을 다독이며 차근차근 일을
해결해 나가려고 해도 모자란 판국이었다. 이렇게 오밤중에 가신들을 불러서 온갖 성질을 낸다고 풀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직 동맹을 맺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아직 바라는 것이 남아 있는 겁니다. 그것을 쥐고 한번


거래를 해 보시지요. 해독제가 없는 독은 없습니다. 우선적으로 그걸 받아내도록 하시지요, 전하.”

엘피디오는 씨근덕대는 것을 멈추고 그제야 백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뻔합니다. 축복의 밤을 불러내기 위한 시도는 일라베니아 제국뿐만 아니라 발타
왕국에서도 항상 있었습니다. 황제가 되면 열람할 수 있는 비밀 서고. 그곳에 있지 않습니까? 하얀 밤을
불러내기 위한 방법이 적힌 자료가.”

“있기는 하지.”

“방법을 안다고 할 수 있었다면, 저희도 진작 했겠지요. 하카브 왕자가 그 자료를 얻는다고 해도 결코 축복의
밤을 불러내지 못합니다. 결국에는 쓸모가 없는 정보라는 얘기입니다. 검은달에 넘어간다고 저희에게 치명적일
이유는 하나 없습니다.”

“흠…….”

엘피디오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백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수천 년이 지나는 동안, 한 세대에 몇
명의 인원만이 겨우 알던 정보였다. 숨기고 숨겨 왔던, 어쩌면 예전에는 중요했을지도 모를 정보였다. 그렇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일라베니아가 대륙을 쥐고 흔들 수 있었던 강력한 무기일지도 몰랐다.

“나에게는 쓸모가 없고, 남에게는 필요하다면 최대한 비싼 값으로 팔아 넘겨야지요.”


“그건…… 그렇지.”

“2 황자 전하께서 파악한 독의 정체는, 이미 황제 폐하의 귀까지 들어갔을 겁니다. 빨리 움직이셔야 합니다,


전하.”

엘피디오는 고민했다. 어떻게 움직여야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황제에게 검은달의 새로운 독의
정체가 알려졌다. 황제는 신성력과 황권의 권위를 매우 중요시 여기는 자였다. 그런 제 아버지의 성질 상, 그
독의 정보를 듣게 된다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발타가 황제의 얼굴에 장갑을 던지는 행위보다
더 확실하게 결투를 신청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일렀다. 해독제 이전에, 발타는 아직 엘피디오에게 쓸모가 있는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리카르디스를 죽이는 것이 먼저였다. 일라베니아에게 오랜 숙적이 발타라면, 엘피디오에게 가장 오래된 적은
리카르디스였다. 그를 경계하면서 해독제를 가장 빠르게 얻어내는 방법. 엘피디오는 눈을 번쩍였다.

“다행히 쓸 만한 패가 하나 있군.”

죽어도 상관없는. 엘피디오는 뒷말을 삼켰다. 수십 개의 눈이 엘피디오에게 와서 박혔다.

“디에즈를 불러와라.”

* * *

리카르디스의 아침은 늦게 시작되었다. 간밤에 갑자기 시작된 술 대결의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꿀물을 가지고 온 잇세리온의 표정은 철없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와 많이 닮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즐비하게
굴러다니는 수많은 술병, 카펫에 얼룩덜룩 묻은 붉은 와인 자국. 아직 꿈나라에 있는 리카르디스에게서는 알콜의
향기가 풀풀 풍겼다.

몸을 흔드는 손길에 리카르디스는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빛의 방향 때문에 잇세리온의 짙은 갈색 머리가


검은색처럼 보였다. 그는 흠칫 몸을 떨고 눈을 비볐다. 보좌관 잇세리온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한순간 그를
로젤린으로 착각했다는 것이 창피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언제쯤 방을 나갔지?

술을 과하게 마셔서 두통이 약간 있는 걸 빼면 나름 숙면을 취했다. 덕분에 오늘은 모처럼 몸이 가벼웠다.


잇세리온이 미리 준비해 놓은 목욕물에는 김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는 코 밑까지 깊게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에
몸이 노곤히 풀리자 어젯밤의 기억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까무룩 잠들기 전에 그녀가 무어라 말했던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막 황제의 집무실을 나서던 엘피디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면에서 걸어오던 리카르디스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를 보고 더없이 환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미소는 햇살조차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엘피디오는 그런 리카르디스의 모습을 보고 더욱 얼굴을 구겼다. 저게 약을 처먹었나.

“이런,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래…….”
떨떠름한 엘피디오의 답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날씨가 좋다는 둥, 이델라브힘이 굽어
살피는 좋은 낮이라는 둥, 자신에게 좋은 찻잎이 들어왔는데 선물로 드리겠다는 둥. 엘피디오는 그의 사근사근한
태도, 부드러운 말투에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다가 찻잎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최근
시도했던 회심의 암살이 빗나갔던 것을 상기해냈기 때문이었다.

월장석 성에 심어 놓은 세작의 말로는 새로이 호위 임무를 맡은 기사의 공이라고 했지만, 엘피디오는 믿지 않았다.
고작 호위 기사 한 명에게 들킬 정도로 검은달은 어수룩한 집단이 아니었다. 분명 눈치가 빠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리카르디스가 알아챘을 것이다. 엘피디오는 언제나 리카르디스의 능력을 깎아내리려 했지만, 이런
순간에는 항상 그의 유능함을 믿었다. 언제나 제 일에 훼방을 놓고 자신만만한 낯으로 저를 쳐다보던 그 오만한
눈동자. 잊히려야 잊힐 수가 없었다.

암살 집단을 지원하는 것에는 많은 수고와 노력, 자금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제법 출혈이 컸다. 그만큼 기대도
많이 했는데 이 미꾸라지 같은 것이 또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엘피디오가 황제를 알현함으로써 형국은 다시 한 번 리카르디스에게 불리해졌다. 이번에야말로 저 곱상한 얼굴에


죽음의 그늘이 확실하게 드리워졌다. 엘피디오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미리 축배를 들 수는 없었다. 상대는 그
리카르디스였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도 어떠한 희생을 하고서라도 살아남는. 거머리 같은, 잡초 같은
생명력을 지닌 2 황자.

엘피디오는 얼굴을 확 굳히고 리카르디스 곁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어깨가 서로 세게 부딪쳤다.
밀려난 건 엘피디오였다. 그는 붉은 얼굴로 씩씩대다가 달리는 것 같은 속도로 걸어서 빠르게 금강석 성을
벗어났다.

리카르디스는 근사한 미소를 얼굴에서 싹 지우고 그와 닿았던 어깨를 툭툭 털어 내었다. 행동과 표정은 퍽
여상했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에 일렁이는 것은 아까의 엘피디오와 비슷해 보였다. 그의 분노는 몇 년이 지난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수그러들 가벼운 감정이 아니었다. 옆에 줄곧 서 있던 잇세리온 또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감정을 못 숨겨서야 원. 진지하게 대하던 내가 다 창피해지는군.”

“……비위 상하지도 않으십니까?”

리카르디스는 하하 소리 내며 웃었다. 아까 엘피디오에게 웃어 보였던 것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잔뜩 날카로워진


서늘한 얼굴이었다.

“내가 기분 더럽더라도 그놈이 더 기분 나쁘면 돼.”

“항상 느끼고 있지만 전하께서는 성격이…… 참…….”

“성격 참 좋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잡담은 그만하고 들어가지.”

[다음 편에 계속....]
25 화.

황제의 집무실 문밖에 서 있던 시종이 안으로 들어갔다. 리카르디스의 방문이 알려지자, 곧 문이 열렸다.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 중앙에는 밝은 금발의 황제가 심기가 불편한 듯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설원의 월계수, 영광의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하얀 밤의 축복을. 어서오너라 리카르디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에 널려 있는 서류에 눈길을 돌렸다. 몇 개 보이는 단어와 문구를 조합해
보니, 발타 왕국과 인접한 영지에서 올라온 각종 보고서임을 알 수 있었다. 최근 들어 검은달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 황제가 얼굴을 구기고 있던 것도 이해가 갔다.

“마녀가 입을 열었다지.”

“예, 저번의 사냥 대회에서 처음 사용된 독입니다. 최근 월장석 성내에서도 사용되려 했지요. 이 서류를 보아도
되겠습니까, 폐하?”

“그리 하거라.”

리카르디스는 제일 위에 펼쳐져있던 종이를 잡았다. 수십 장 쌓여 있는 서류의 제일 상단에는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사냥 대회가 있었던 넓은 영토 비스타를 다스리는 자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변경백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황제에게 하사받은 영토를 방어하는 의무만 있는 타 귀족과 달리, 타국을 먼저
침범할 수 있는 권리까지 지닌 작위였다. 자치적인 군사권을 가지고 있어 다른 백작들보다 힘이 강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위는 대대로 머리가 좋고 호전적인 인물이 물려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2 년 전에 마른가시나무 백작 위를 승계한 그녀는 전대, 선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전쟁광이었다. 여자라고 우습게 보던 이들의 말이 한순간에 쏙 들어갈 정도로 피가 자욱한 행보를 보였다.
마른가시나무 영지를 지키는 수가 많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전투에 대한 감각이 유달리 뛰어난 인물이었다. 군사를
잘게 흩트리고, 합치고,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전술은 마치 그 자체가 살아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이 있었다. 많은
전술가들이 그녀를 그렇게 평했다. ‘경계의 학살자’, ‘미친개’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선의 상황을 이끌어내는 이였는데…… 지금 리카르디스가 보고 있는 서류에는 그녀에


대한 인식과는 제법 다른 내용이 서술 되어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사십 명의 인원이 어둠을 틈타 산을 넘어와 사백이 넘는 피해를 내었다. 인간의 힘도, 신의 힘도 소용이 없었다.
검은달은 과거와는 다른 위협을 휘두르고 있으니 부디 황제께서 어린 백성들을 굽어 살피시어 일라베니아의 영광을
세세토록 전하길 간절히 바란다는 내용이 길게 늘여 적혀 있었다. 마른가시나무 영지에게 사백이라는 인원은 사실
그렇게 큰 피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영지뿐만 아니라, 인접한 다른 영지에서도 비슷한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자 흐름이 심상치 않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황제가 자신의 피곤해 보이는 낯을
연신 쓸었다.
“골치 아프게 되었다. 언제까지 묻어 둘 수 있을는지…….”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게 어디 숨겨질 만한 사안이던가. 검은달이 만들어 낸 새로운 독은 어떤


의사의 힘도, 어떤 신관의 힘도 간섭하지 못했다. 사냥 대회 이후로 잠잠하던 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짐과 동시에
독의 사용도 점차 늘고 있었다. 검은달과 잦은 전투를 치러야만 하는 변경의 영지들은 빠른 시간 안에 높은
치사율을 가진 독에 의문을 가질 것이다.

“나는 독의 쓰임새와 영향이 확대되기 전에 발타를 지도에서 없애 버리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

멍청하다, 멍청하다 했더니 이 정도면 가히 예술의 경지였다. 리카르디스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정말 엘피디오의 아버지가 맞았다. 정말 똑 닮은 부자지간이 아닌가. 검은달의 수뇌부가
발타의 왕실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왕실의 공식 입장은 항상 사실과 달랐다.

검은달이 발타에 주둔한다고는 한들 우리 발타 왕실과는 전혀 관련 없으며, 발타 또한 검은달을 축출해 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그 얘기를 믿을 만한 나라는 대륙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찌되었든
표면적으로나마 그런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일라베니아와 발타는 아직까지 큰 전쟁을 치른 적이 없었다. 한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싸우는 것과 달리 나라와


나라의 충돌은 커다란 피해를 낳기 마련이었다. 그랬기에 전쟁은 명분이 중요했다. 발타는 검은달이라는 집단을
왕실과 분리함으로써 명분을 싹 지워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는 명분이고 나발이고 전쟁부터 일으키자는데,
그 생각 없음에 두통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심지어 다른 나라도 아니고 빛의 신을 모시는 신성 제국에서 다른
나라에 먼저 쳐들어가자고? 일라베니아 제국의 백성들조차 기함할 일이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들어 황제를 쳐다보았다. 진짜로 전쟁 일으킬 생각은 아니겠지? 라는 뜻이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황제도 그 뜻을 읽은 모양이었다.

“한데 엘피디오가 돌아가는 추이를 좀 더 살펴보자 하더구나.”

엘피디오가 황제보다는 머리가 조금 더 돌아갔나 보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그리고.”

황제는 팔걸이 부분에 손가락을 느릿하게 부딪치며 딱…… 딱…… 하는 소리를 내었다. 황제의 손가락이 둘
사이의 침묵을 일정한 속도로 깨트리고 있었다. 이유 모를 불쾌함이 밀려왔다.

“사절단을 보내자는데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엘피디오 이 개새끼가. 리카르디스는 얼굴을 확 굳혔다. 황궁에 사는 모든 이가 그렇듯이 그 또한 제 감정과


표정을 숨기는 것에 매우 능숙했다. 그 엘피디오에게 조차 사랑스러운 남동생 역할을 해내지 않았던가. 지금의
리카르디스는 곧 수습했다고는 하지만, 제 감정의 파편을 황제에게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다행히도 황제는
제 할 말만 늘여놓느라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발타에 사절단이 방문했던 게 2 년 전이었던가. 제법 오래되었군. 슬슬 그 놈들을 압박할 때도 되었어……


더러운 들개 놈들 같으니.”

“……발타와 인접한 영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는 이 시점에서 사절단을 보내기엔 위험이 많이 따르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새로이 만들어진 독에 대해 연구도, 완벽한 해독법도 없는 이 상황은 그들에게 훨씬 유리하게
돌아가겠지요. 사절단을 보낸다고 한들, 들이는 수고와 위험 비해 소득이 적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엘피디오가 왜 아침부터 황제를 찾았나 했더니 하여간에 잔머리는 잘 돌아가는 놈이었다. 황제를 부추겨서 자신을
사절단으로 보내 버리려는 것이다. 말이 사절단이지 지금의 상황에서야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하루에도 암살자 서넛을 보내며 죽이고자 간절히 염원했던 상대가 제 영역으로 걸어 들어온다는데……
발타의 왕자, 하카브가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으니.

사냥 대회에서 생환한 지 얼마 되었다고 황제는 또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으려 했다. 만약 2 황자 리카르디스가


발타에서 죽게 된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전쟁의 명분은 없을 테니까. 사절단으로서 발타에서 무언가를 얻어 와도
그만, 리카르디스의 죽음으로써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생겨도 그만. 엘피디오의 얘기를 수락한 배경에는 그런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다.

“걱정이 과하구나, 리카르디스. 내가 누구더냐. 이 나라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대륙을 축복하는 영광의 빛은
눈과 귀가 먼 자들 또한 느끼는 것이다. 고작 독 하나에 수그러들 광휘가 아니다.”

새로운 독으로 인해 상황이 발타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라는 말이 매우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황제는 제
권위에 흠집이라도 간 듯 굴었다. 조금 까칠해진 태도와 목소리에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간 제
말에 토를 다는 꼴을 못 보는 인간이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발타의 들개들이 워낙 위아래를 모르는 놈들인 데다, 요즘 들어 더욱 기세가 사나워졌다
보니…… 제가 괜한 걱정을 했던 모양입니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숙이자 황제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무슨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어르고
달래는 것을 뭐 이리 지극정성으로 해야 하는지.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 그놈들의 기세가 사나워지기는 했지. 그래서 사절단을 보내려는 것이다. 네가 검은달을 누르는 것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 않느냐. 리카르디스라는 이름이 발타를 압박하기에 아주 효과적일 듯하구나. 제국의 2
황자라는 고귀한 신분과 너의 이름 안에 이델라브힘의 영광이 함께할 테니 걱정 말거라.”

한번 만류하려던 것은 이미 실패했다. 리카르디스는 황제의 뜻을 거스르려는 시도를 두 번은 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보이는 황제의 태도는 그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엘피디오가 솜씨 좋게 제 아비를
구워삶은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수많은 죽음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리카르디스는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황제가 허허 웃으며 리카르디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정식으로 사절단을 보내겠다 공표하는 것은 며칠 뒤가


될 거라 했다. 리카르디스는 알겠노라 대답하고 황제의 방을 떠났다. 리카르디스의 뒤를 따르던 잇세리온이
분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거친 숨소리로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꽉 물었다. 살짝 뜯긴 입술로부터 피 맛이 비릿하게 느껴졌다.

“월장석 성으로 돌아간다.”

백색의 제복을 입은 호위 기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다음 편에 계속....]

26 화.

2 황자 리카르디스가 발타로 떠나는 사절단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월장석 성은 낮게 가라앉았다. 몇 달 전


사냥 대회에서 수많은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사망했을 때만큼이나 어두운 분위기였다. 단순히 월장석 성의
주인이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리라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일라베니아 제국과 검은달. 국경을 두고 나란히 있는 두 세력 간의 분쟁은 오랜 기간 지속되어왔다. 검은달이


발타 왕실의 수족임을 모르는 자는 대륙 어디에도 없는 관계로, 일라베니아와 발타. 두 나라간의 분쟁이라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사절단이라는 책무는 그저 이름만 평화로울 뿐, 단두대에 목을 들이미는 행위나
진배없었다. 심지어 리카르디스는 검은달과 분쟁이 있을 때마다 선두에 서 있었으며, 또한 언제나 승리해 왔다.
발타의 입장에서 그보다 더한 원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공이 빛나는 만큼이나 단두대의 칼날 또한 번쩍번쩍
빛나고 있으리라.

수많은 하인과 하녀들의 얼굴에 칙칙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누가 보면 월장석 성벽에 장례 중이라는 표식의 하얀
천이라도 걸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얀밤 기사들 또한 주인의 처지에 분노함과 동시에 그들 자신의 미래에
깊은 애도를 보냈다. 바람 앞의 촛불보다 아슬아슬하고 보잘 것 없는 목숨. 누군가는 체념했고 누군가는 결의를
다졌다.

12 월의 눈 쌓인 숲만큼 고요했던 월장석 성이 잠시간 떠들썩거렸다. 성을 방문한 손님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사절단의 총책임자로 임명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월장석 성을 향하던 발길을 끊었다. 행여나 그의 눈에 들어
발타로 같이 먼 길을 떠나야 할까, 하는 걱정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누군가는 간사하다고 비난하는
행동이었지만 리카르디스는 그들을 이해했다. 자신이라 하더라도 얼씬도 안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랜만의
손님이었다. 게다가 풍족한 선물과 함께였다. 발타의 왕자, 하카브가 좋아한다던 일라베니아 명장의 술과 각종
진귀한 보석, 산해진미, 아름다운 예술품이 늘여진 풍경이 장관을 이루었다.

로젤린은 호위 임무를 위해 월장석 성으로 향하다 그 광경을 보았다.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던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입을 떡 벌리고 산처럼 쌓이는 진귀한 선물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새벽부터 로젤린의 습격을 두
차례나 받아서 매우 피곤했지만 그것을 잊을 만큼 놀라워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스쳤다.

“로젤린 경.”

밝은 금발의 남자가 인파 속에 묻혀 있다가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리카르디스에 비견할 만큼의 장신이었다. 그의


유순한 인상이 단단한 체격에서 풍기는 위압감을 어느 정도 상쇄했다. 로젤린이 멀뚱히 그를 바라만 보고 있자
뒤에서 레티시아가 속삭였다.

‘설원의 월계수, 5 황자, 디에즈 전하이십니다.’

로젤린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레이몬드로부터 그녀가 기억상실로 인해 지식과 상식을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이후로 고위 귀족과 황족들의 인상착의와 이름, 작위와 직위 등을 다급히 암기해 둔 상태였다. 그들의 독특한
상급 기사를 보필하기 위한 업무의 일환이었다.

로젤린은 검술을 익히는 데에는 빠른 습득 속도를 자랑했으나, 책상에 앉아 하는 모든 작업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사가 검을 잘 쓰면 됐지, 사람들의 얼굴이나 직위를 외우는 것이 뭐가 중요한 거지? 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물론 그 사실을 알 도리 없는 두 명의 수습 기사들은, 황족과 고위 귀족은 고사하고 황제의 얼굴도 모를 것이라는


레이몬드의 말에 농담이 과하다며 웃어 넘겼으나…….

이후 곧바로 남자 기사들의 공용 목욕탕에 태연하게 들어가려던 로젤린을 목격해, 웃음기를 얼굴에서 지워야
했었다. 그 아찔한 순간 덕분에 레티시아는 제 상급자의 상식 수준이 어느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하얀밤 기사단의 상급 기사 로젤린이 설원의 월계수 5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로젤린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 또한 그녀를 따라 무릎 꿇었다.

“이런. 일어나세요, 경. 오랜만입니다.”

로젤린이 수습 기사 두 명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저랑 5 황자 알던 사이입니까?’ 하고 묻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요동치며 흔들렸다. 모…… 모르는데…… 모릅니다…… 그들이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인상착의와 장신구를 보고 인물을 파악해 내는 능력과, 기억을 잃어버린 상급 기사의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은
별개의 것이었으므로. 이번 건은 그들의 권한 밖이었다. 수습 기사라고 해도 그녀와 함께한지 고작 2 주가 지났을
뿐이었다.

로젤린은 다시 5 황자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봄날의 햇살 저리가라 할 정도로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많이 다쳤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했는데, 이리 건강해 보이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형님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지요? 이번 사절단에도 같이 떠나겠군요.”

“그렇습니다.”

에버하르트는 진땀을 뻘뻘 흘렸다. 대화가 도무지 이어지질 않았다. 과거 로젤린도 지금의 그녀처럼 말 수가
적다고 듣긴 했으나, 지금은 상대가 황족이다 보니 자칫 무례하다 여겨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5 황자
디에즈는 그녀의 말투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잘 됐습니다. 친한 이가 몇 없어 걱정했는데. 발타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로젤린 경.”

“……발타로 떠나십니까?”

로젤린이 드물게 되물었다. 그녀는 사절단으로 떠나는 인원 명단 중에 다른 황자들이 없었음을 알고 있었다. 5


황자가 예쁘게 웃어 보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발타의 하카브 왕자와는 만난 적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친분이지만요.”

디에즈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사절단에 뽑힌 귀족들은 자신의 죽음을 눈으로 보고 온 듯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다녔다. 또는 그들의 가족이


대신 거무죽죽한 낯으로 참담해 하고 있거나. 하지만 눈앞의 남자, 5 황자 디에즈의 반응은 그들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다.

발타의 전통 음식 중에 어린 양을 향신료와 함께 통째로 삶는 것이 있는데 그게 아주 환상적이라는 둥, 자신이 잘


아는 곳이 있는데 나중에 리카르디스 형님과 같이 가자는 둥. 5 년 전 만났을 때는 하카브가 자신보다 키가
컸는데 최근 자신이 급성장해서 이제는 본인이 더 클 거라는 둥. 철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낙관적인 태도였다.
로젤린은 꼬박꼬박 네, 예, 기대됩니다. 네 맛있겠군요. 예. 참 크십니다.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참 발타의 풍습과 요리를 설명하던 디에즈가 눈웃음 지으며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습 기사들을 떨어트리고
따로 얘기를 나누자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로젤린은 그의 은근한 신호를 알아들을 만한 눈치를
갖추지 못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만 5 황자의 눈짓을 알아듣고 초조하게 손바닥의 땀을 제복에 닦았다.

“…….”

몇 초가 고요히 흐르며 그들 사이에 침묵이 늘어졌다. 디에즈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이 입을 딱
다물고 있는 행동을 보고 거절당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안절부절. 마음속으로 발만 동동 구르는 에버하르트를
뒤로하고, 레티시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로젤린을 확 떠밀었다. 무례하다고 혼나는 건, 혼나는 거고 지금은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제 상급 기사를 보필해야만 했다.

로젤린이 한 발자국 앞으로 밀려나오자 디에즈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이끌었다. 로젤린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레티시아를 돌아보았다가 움찔했다. 레티시아가 눈에 불을 켜고 격렬하게 디에즈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녀의 저의를 대충 깨달은 듯 했다. “왜 5 황자 전하에게 손가락질을 합니까?” 라는 질문 없이
순순히 디에즈를 따라갔다. 수습 기사 두 명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쉴 수 있었다.

둘은 제법 인적이 드문 곳까지 걸었다. 로젤린은 계속 월장석 성을 돌아봤다. 디에즈는 로젤린의 행동으로 그녀의
마음을 읽어 냈다.

“잠깐이면 됩니다.”

“예.”

‘잠깐’이라는 기간이 정해졌음에도 디에즈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로젤린도 차분하게 그를
마주했다.

“걱정했습니다, 로젤린.”
로젤린. ‘로젤린 경’이 아니었다. 눈앞의 이 남자와 로젤린은 친근한 사이였던 건가?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콧잔등 위로 꽃잎이 내려앉았다. 로젤린이 간지러움에 코를 찡그리자 디에즈가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미소 지은 남자가 로젤린의 얼굴에서 꽃잎을 살포시 떼어 냈다. 디에즈의 손끝에
달려있던 꽃잎은 불어오는 바람에 정처 없이 날아갔다.

로젤린은 바람을 좇던 눈동자를 굴려 그를 올려보았다. 스스럼없이 다정한 손길이었다. 이 남자와 로젤린은


친했나보다. 생각보다도, 훨씬.

“감사합니다.”

그녀의 변하지 않는 딱딱한 대답에 디에즈는 기운 없는 미소를 띠었다.

“정말이었나 보군요. 그대의 머리에 조금, 아, 실례. 기억에 이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디까지 기억하십니까? 저는 기억합니까?”

로젤린이 고개를 저었다. 디에즈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웃었다. 기억상실이란
병은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며 도리어 그녀를 위로했다.

디에즈는 사건 이후 그녀에게 일어난 일 하나하나를 알고 싶은 듯, 여러 가지를 질문했다. 로젤린은 ‘네.’와


‘아니오.’를 적극 활용하며 열심히 답했다. 디에즈는 그녀의 무성의해 보이는 대답에도 어느 정도의 궁금증을
해소한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다음 편에 계속....]

27 화.

“절벽에서 떨어졌다고 레이몬드에게 들었습니다. 정말 이만하길 다행이군요. 이델라브힘께서 로젤린을 도우셨나


봅니다.”

“네.”

“전투가 막 일어났을 때, 제가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안 보여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막사와 그렇게 멀리


떨어진 절벽에 있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가 발견되었던 절벽이 막사와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까?”

네, 아니오, 괜찮습니다. 세 가지 답변을 돌려 가면서 사용하던 로젤린의 새로운 대답이었다. 디에즈는 그녀의
반응에 들뜬 듯 보였다.

“네, 정 반대 방향이었습니다. 그래서 찾는 게 좀 더 늦었다고 하더군요.”

“그랬습니까.”

“도움이 못되어 미안합니다. 돌아온 이후로도 줄곧 바빠서 한번을 찾아오지 못했는데, 건강한 모습을 봐서……
음, 기쁩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로젤린.”

디에즈의 눈이 둥글게 휘어지며 곡선을 그렸다. 디에즈는 그녀가 봐 온 사람들 중에 가장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의 미소를 따라 로젤린도 입꼬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짧은 대답에도 그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디에즈는 곧 로젤린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아까의 마지막 안부 인사가 그의 진짜 목적인 듯 했다.

로젤린은 지금까지 줄곧 가지고 있었지만, 잠시 잊고 있던 의문을 떠올렸다. 레이몬드에게도 들었던 적 있었다.


암살 부대가 새벽에 막 습격했을 당시에는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노라고,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보지
못했다고. 그때는 단순히 인원이 많아서 확인하지 못했던 건가? 하고 두 사람 다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었다.
하지만 오늘 5 황자의 말로써 그 전투 당시, 또는 이전부터 로젤린이 현장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처음 로젤린의 몸을 구성하자마자 몸을 치유하는 것에 많은 힘을 썼다. 추락했을 당시에 발생했으리라


유추되는, 부러진 뼈들. 그로 인해 압박되고 손상된 장기들. 가장 큰 치명상이 그것이었기에 살갗이 찢어지거나,
벌어진 외부적인 상처는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자니 등에 새겨진 상처도 범상치 않았다. 살가죽은 물론이거니와 근육까지 벌어져
뼈가 다 드러날 정도였으니. 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상처 하나로 충분히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암살 부대의 습격 당시 그녀의 부재. 막사와는 한참 먼 곳에 위치한 그때의 절벽. 등 뒤에 깊게 찢겨 있던 상처.


몇 가지 사실이 얼기설기 맞춰지며 여태껏 로젤린이 알고 있던 사실을 비틀었다.

어쩌면 그녀는 암살 부대의 습격 이전에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 * *

“칼릭스.”

칼릭스는 멍한 눈길로 제 누이를 바라보았다. 웃는 얼굴이 봄바람만큼 부드러웠다. 안 본 사이 그녀는 더욱더


‘로젤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젤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칼릭스를 와락 껴안았다. 그는 흠칫 몸을
떨다 곧 그녀를 마주 안았다. 뭔가 좀 쑥스러웠지만 손은 어느새 제 누이의 등을 도닥이고 있었다. 칼릭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누님.”

“응.”

햇빛을 받는 로젤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반가워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가면같이 온도 없는 표정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안본사이 많이 사회화된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로젤린에게 슈크림이 들어간 상자를 건넸다. 로젤린은 상자를 열어 보지도 않고 활짝 웃었다. 예민한
후각으로 내용물을 파악한 듯 했다. 로젤린이 좋아하는 음식이라 하면 단연코 고기라 말할 수 있으나, 디저트
계열 또한 뺄 수 없었다. 처음 생크림을 먹은 로젤린이 눈을 부릅뜨고서 몸을 뻣뻣하게 굳히던 모습은 아직까지도
칼릭스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로젤린은 냄새를 킁킁 맡으며 기뻐했다. 칼릭스는 제 누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상자를 열어
슈크림 하나를 칼릭스에게 건넸다. 그는 제 손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인 슈크림과 누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설마 나에게 주는 건가? 음식을 나눠먹는 수준까지 도달했단 말입니까 누님? 칼릭스는 제 지난날 폭풍 같던
고난의 나날을 생각하며 눈물을 찔끔 흘릴 뻔 했다. 칼릭스가 감격스러움에 그녀를 아련하게 쳐다보자 로젤린이
조금 시무룩한 기색을 띄웠다. 그녀의 모습에 의문을 가질 찰나, 로젤린이 박스에서 슈크림을 하나 더 꺼내어
칼릭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 감격의 눈빛을 하나 더 달라는 재촉으로 봤던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슈크림을 먹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로젤린의 입에 넣어 주었다. 수도에서
유명한 제과점이라더니, 슈크림을 음미하는 그녀의 눈이 잔뜩 가늘어져 있었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워보였다.

“그런데 누님. 지금은 황자 전하를 호위하는 시간이 아닙니까?”

“응.”

“그런데 여기에…… 이렇게 계셔도 됩니까?”

“응. 전하가 허락했어.”

로젤린이 말을 덧붙였다.

“죽기 전에 가족은 한번 봐야 하지 않겠냐하시던데.”

“……여전하시군요, 리카르디스 전하께서도…….”

리카르디스가 발타로 떠나는 사절단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칼릭스는 먼 황성까지 와야 했다. 2 황자의
위험에는 당연히 제 누이의 위험이 따랐기 때문에. 물론, 칼릭스의 예상과 한 치도 다름없이 로젤린은 태평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복잡한 마음이 한층 더 커졌다. 누이를 잃는 심정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조각난 마음을 이제야
허술하게라도 이어 붙였건만, 또다시 그녀를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칼릭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직접적으로
황자 곁을 지켜야만 하는 상급 기사이니만큼 큰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하필이면 승급하자마자 발타로 가야하다니.
칼릭스는 목소리를 낮췄다.

“발타를 통치하는 1 왕자 하카브는 분명 검은달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발타의 최고 통치자가 검은달이니, 발타


왕국 그 자체가 2 황자 전하의 적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응.”

“……위험…… 하실 겁니다. 폐쇄적인 기질을 가진 곳이라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많습니다. 새로 합성해 낸 마독


이외의 다른 위험 요소들도 많을 겁니다. 정말 조심하셔야,”

“잠깐.”

로젤린은 한쪽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어 내었다. 그녀는 야생동물같이 고개를 휙 돌리며 높게 세워진 벽 너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로젤린은 곧 능숙하게 벽을 타고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칼릭스의 귓가에 “으아악!” “
꺄악!”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사람을 덮친 건가! 다행히도 아직까지 제 누이가 지나가는 인간을 덮친 적이 없긴 하지만 칼릭스는 잘
알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녀의 야생성이 완전히 죽지 않았음을. 그 야생성은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울퉁불퉁
구겨진 공 같은 것이었다. 왼쪽으로 굴렸더니 오른쪽으로 튀어 오르고, 오른쪽으로 던졌더니 아래쪽으로 굴러가
버리고, 화가 나서 버리면 골 안으로 들어가 점수를 얻게 되는 그 미묘한 불규칙성.

그러므로 누이가 무언가를 뺏어 먹기 위해 누군가를 덮쳤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도리어
착실히 사회화가 되어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누이의 모습이 낯설 뿐이었다. 울퉁불퉁 공 같은 그녀를 알게
된지는 고작 몇 달에 불과했지만, 어떠한 면에서는 스무 몇 해를 보아 온 로젤린보다도 더 강렬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깊게 새겨졌다. 이 안정적인 불규칙성. 칼릭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칼릭스는 로젤린을 따라 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녀가 오를 때에는 손바닥으로 가볍게 벽을 치는 소리가 났었다.


칼릭스는 도움닫기부터 땅이 파일정도로 깊고, 무겁게, 그리고 쿵쿵 두드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 극명하게
비교되었다.

칼릭스가 높은 담벼락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바라볼 쯤엔, 로젤린이 한 남자를 제압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
죽이면 안 됩니다!”라던가 “다른 사람의 음식을 뺏어 먹으면 안 됩니다!”라고 급히 말하려 했다. 하지만
로젤린에게는 딱히 살의가 없어 보였고 그들의 손에도 먹을 것이 들려 있지 않았다. 칼릭스는 담 위에서 잠자코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군청색 머리카락을 묶은 남자는 바닥에 엎어져 로젤린의 밑에 깔려있었다. 또한 적갈색 머리의 여자는
무릎걸음으로 도망가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멋지게 공중제비를 돌아 도망가던 여자의 앞에 탁 착지했다.

도망가던 여자, 레티시아는 고요하게 강림한 로젤린의 바지 자락을 보고 경기했다.

“히익!”

로젤린이 쭈그려 앉아 레티시아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또 죽었습니다. 레티시아. 에버하르트.”

“흐아…….”

“하아아…….”

로젤린의 선고에 두 남녀가 풀썩 바닥에 누웠다. 그들의 등과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급박했던 순간의 심정을
대변했다.

“벽을 타고 오르는 소리도 못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못 들었습니다…….”

“심각하군요, 레티시아.”

“작게 듣긴 했는데, 그냥 벽을 콩콩 치는 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벽을 디디며 올라오니 소리의 위치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벽의 상단 부분에서 소리가 나면 당연히 경계를 했어야
합니다, 에버하르트.”

칼릭스는 그 알 수 없는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제 누이의 깔끔한 존댓말에 감격했다. 영명 하십니다 누님……!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억울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모의로 몇십 번씩 죽어가며 습격당해서 이제는 어느
정도 바람을 읽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던 것이 어제였는데, 바로 오늘. 그녀의 발소리가
한층 더 조용해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그녀의 전력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로젤린의 습격을 못 막을 시, 혹독한 체력 단련 10 세트를 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체력


단련을 할 때마다 그녀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적이 없었기에, 한번은 에버하르트가 ‘단련을 했는지 안했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혹시 저희가 거짓말을 한다던가…….’ 하는 소심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그의 물음에
로젤린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살짝 웃었다. 그리고는.

[어디 한번 해 보시죠]

라는 대답을 했다. 에버하르트는 순간 그녀가 화난 어머니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대놓고 널 죽이겠다고 말하는
암살자보다 훨씬 두려웠다.

[다음 편에 계속....]

28 화.

로젤린은 객관적으로 훌륭한 상급자였다. 잘 챙겨 주고, 잘 가르쳐 주고. 그럼에도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그녀를 좀 어려워했다. 단순히 그녀가 직속상관이라거나, 지위가 높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신비로운.
불가사의한. 그녀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를 표현하자면 얼추 그런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껄끄러워 하지 않던가. 그들 또한 그랬다. 로젤린의 유능한 검 실력과
기묘한 분위기 사이에서 그녀를 존경도 했다가, 조금 어려워도 했다가 하며 마구 헤매었다.
에버하르트는 흙바닥에 볼을 댄 채, 우뚝 서 있는 로젤린을 쳐다봤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그녀가
에버하르트에게 눈을 돌렸다. 시선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눈이 딱 부딪치자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로젤린은 그의 제복 목덜미 부분을 잡아 불쑥 일으켰다. 어미고양이가 새끼고양이의 목을 물고 옮기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녀는 곧 비슷한 방식으로 레티시아도 일으켰다. 공포에 후들거리던 심장과 다리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된 듯 했다. 로젤린이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의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주었다. 둘은 경직된 자세로
상급자의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로젤린은 에버하르트의 엉덩이 부분에 묻어 있는 먼지들도 털어 내었다. 퍽, 퍽. 거친 손길이 거침없었다. 유독


엉덩이 부분에 흙이 많이 묻어 있어, 로젤린의 손은 오랫동안 그 위에 머물렀다. 에버하르트는 침묵하며 제
상급자를 쳐다보았고 레티시아는 고개를 돌려 로젤린의 허물을 보는 것을 회피했다. 그리고 칼릭스는 담벼락
위에서 한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얼마간 겪지 못했던 두통의 재래였다.

에버하르트는 경직된 낯 안쪽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녀를 한 겹 감싸고 있는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은 이렇게


미묘한 상냥함으로 중화되고는 했다. 그 때문인지, 친한 수습 기사들이 로젤린에 대해 물었을 때 자신은 “어…
… 어…… 좋은 분이야?”하는 어색한 대답을 했던 지도 모른다. 레티시아는 “아! 로젤린 경 정말 좋은 분이야!
좋은 분인데…….”라는 찝찝함이 다소 묻어 있는 평가를 했지만, 뒷말을 더 이상 하지 않음으로써 어쨌든 간에
둘 다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냈었다.

그들의 미묘하지만 좋은 사람인 상급자가 수습생들의 몸단장을 모두 끝냈다.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로젤린에게
경례 후 연무장으로 떠났다. 모의 죽음에도 굴하지 않는 씩씩한 발걸음이었다.

두 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칼릭스가 담벼락에서 내려왔다. 그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님. 다른 사람의, 특히 이성…… 그러니까 남자의 신체부위를 함부로 만지시면 안 됩니다.”

오랜만의 “안 됩니다.”였다. 칼릭스의 타박하는 말은 그녀에게 안정감을 줬다. 인간이 된 ‘그것’ 이 최초로
뿌리를 내린 붉은수레바퀴 성. 그곳을 연상시키는 문구였다.

“안 만졌는데.”

만지지 않았다. 확실히 그 먼지를 털어 내는 매서운 손길은 ‘만졌다’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았다. 구태여
따지자면 때렸다? 쳤다? 에 가까웠다. 칼릭스는 그것을 깨닫고 “함부로 접촉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을
바꿨다. “특히 엉덩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낯부끄러워서 신체부위를 언급하는 단어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녀는 정확하게 이해를 한 것 같아 보이진 않았으나, 어찌되었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칼릭스의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둘은 너른 화단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더 나눴다. 한 달여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많은 일이 있었다.
사실 누이는 한 시간만 눈을 떼어도 이런저런 사고를 쳤다. 한 달이 지났으니 정말 무수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로젤린은 무표정한 낯으로 끊임없이 조잘조잘 얘기했다. 색색으로 빛나는 화원의 느슨하고 화사한 공기가 누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예전의 과묵했던 그녀의 모습과는 달랐다. 언어라던가, 행동이라던가.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도 주위의 공간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 딱 로젤린이었다. 흰색의 나비들이 그녀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로젤린은 머리에 꽃잎이 붙던, 나비가 앉던 간에 끊임없이 얘기했다. 듣기만 해도 속이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았다.
로젤린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도 똑같이 쓰여 있던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무뚝뚝한 얼굴로 열심히
호응하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레이몬드가 쿠키도 주고, 마카롱도 주고, 하급 기사랑 대련하고, 팼고, 이겼다.
병문안도 갔다. 리카르디스 전하를 만날 때는 심장이 막 뛰었다.

그게 뭐였을까. 심장이 왜 그렇게 쿵쿵한 걸까. 로젤린이 차분하게 물었다. 칼릭스는 한층 날이 선 뚱한


표정으로 “글쎄요.” 하고 대답했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보이는 성의 없는 답변이었다. 그리고는 “저도
리카르디스 전하를 보면 심장이 쿵쿵하더군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라는 거짓말도 덧붙였다.

이야기는 흘러 흘러 암살자 몇을 때려잡았다는 얘기까지 도달했다. 칼릭스의 눈이 번쩍 빛났다. 사나워진 기세에


비해 목소리는 더욱 조용해졌다. 칼릭스의 얼굴이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암살자요?”

“응. 내가 다 잡았어.”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껏 뿌듯해하는 중이었다. 참새를 잡아 온 붉은수레바퀴 성의 고양이같이 가슴을 쭉


피고서.

“그건 왜 편지에 안 쓰셨습니까?”

“썼는데…….”

걸렸다. 월장석 성은 인간뿐 아니라 물품과 서류 따위에도 엄격한 경비가 적용되었다.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편지는 내용까지 전부 확인한 후 들어오고 나갔다.

로젤린의 편지도 당연히 확인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월장석 성 내부의 사정, 심지어는 2 황자의 안위와 관련된
내용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몰수였다. 암살자 둘을 때려잡았다는 편지의 내용 때문에 로젤린은 2 황자의 비서인
잇세리온에게 까지 불려가 혼났다.

안 그래도 1 황자파인 붉은수레바퀴 가문이라 주시하고 있었건만, 이런 내부 사정까지 제 집안에 흘리려고 해? 내


이 기사를 요절을 내 버리고 말리라! 하고 마음먹고 그녀를 불렀지만…….

[이런 내용을 쓰시면 곤란합니다, 로젤린 경.]

[어떤 내용을 말하시는 겁니까.]

[제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암살자라는 단어가 있군요. 문제를 모르시겠습니까?]

잇세리온의 삐딱한 말에 로젤린은 무표정한 낯으로 “그럼 암살자를 나쁜 사람이라고 쓰면 보내도 됩니까.”라고
되물었다. 잇세리온은 입을 합 다물었다. 그때 잇세리온의 눈빛은 여름에 겨울옷을 꼭꼭 껴입은 사람을 보는 것과
흡사했다. 저 사람 왜 저러는 거지? 미쳤나? 적당한 의문과 의심이 섞여 있었다.

그는 회수한 로젤린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8 살 수준의 어휘력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다가 철자도 조금씩 틀리고,
필체도 완전 어린아이 같았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혹시 근 십여 년 간의 기억이 다 날아간 것일지도 몰랐다.

잇세리온의 화는 로젤린이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인해 누그러들다 못해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총기가 넘치던 이였는데…… 잇세리온은 연민의 감정을 연보랏빛 눈동자에 한가득 담고는,

[안 됩니다.]

라고 했다. 연민이고 뭐고 간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이후 로젤린은 암살자를 ‘검은 옷을 입은 인간’, ‘전하를 공격하는 사람’, ‘독을 들고 다니는 남자’ 등
다양하게 표현하며 잇세리온에게 번번이 불려 갔고, 지금은 대충 어떤 내용이 안 되는지 맥락을 파악하게 되었다.

칼릭스는 흐음 하고 목 안쪽을 울렸다. 확실히. 황자의 안위와 관련 있는 중요한 내용을 외부로 반출할 수 있을
리 없다. 제 누이만 걱정하다 보니 그런 기본을 망각했던 것이다.

편지로 얘기하지 못했던 수많은 그녀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다. 로젤린은 왼손을 들면서 “이게 나야”라고 하고,
오른손을 들면서 “이건 암살자.”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왼손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오른손을 제압했다. 이렇게,
이렇게 잡은 거야. 하고 2 황자를 호위하며 잡았던 수많은 암살자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지금의 그녀에게야 간단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검은달의 암살자들은 은밀하고 강하기로 유명했다. 예전의
누이라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사고에서 정말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이 성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칼릭스가 먼 황성까지 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만두시라. 힘들고 모진 시련만 가득한 그 길을 걷는 것을


그만두시라, 그 말만을 전하기 위해 왔다. 베이고 다치고 죽는 것이 기사의 숙명이라지만 가족으로서 그 모든
일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지금의 ‘로젤린’이 진정 무엇이건 간에 그녀는 제 누이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나무만큼 높게 쌓아져 있는 담을 소리 없이 올라갔다. 악의의 냄새를 맡고,


타인의 얼굴거죽을 뒤집어 쓴 자를 한눈에 알아봤다. 뜻이 있다면 눈앞에 있는 것이 바위이건 강철이건 간에 그
얇은 검으로도 베어 낼 수 있었다.

로젤린이 그녀의 수습 기사들을 덮치는 모습에서, 칼릭스의 머릿속에 있던 무언가가 와장창 깨졌다. 떨어져 있는
사이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러고 보면 그녀는 강했다. 맨손으로 성인 남자의 목을 비틀어 놓을 만큼.
그녀를 걱정했던 이유는 어쩌면 그녀가 ‘로젤린’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눈앞의 로젤린이 제 누이기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소중한,

“누님.”

로젤린의 왼손은 여전히 오른손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칼릭스가 그녀의 왼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었다. 닿아오는 따듯한 온기에 로젤린이 그를 쳐다보았다.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누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29 화.
로젤린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제철과일이 들어간 타르트나 케이크도 좋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칼릭스도 무뚝뚝한 낯을 무너뜨려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착한 아이구나, 칼.”

신나서 맞잡은 손을 붕붕 흔드는 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지독하게 쓰리기도 하면서, 상처를 순식간에
아물게 하는 그리운 울림이었다.

* * *

헉, 헉, 헉!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달리는 중에도 몸에서 흐르는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강한 통증이
아니더라도 상처의 깊이를 짐작 할 수 있을 만큼 진했다.

‘…….’

그자는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비가 내려 망토를 입고 있었음에 감사했다. 어느 기사단 할 것 없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밋밋한 무늬의 망토였다. 그것만으로는 누구인지 판별하지 못할 것이다. 멀리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 뒤로 소름이 돋으며 핏기가 가셨다.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막사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살고자 하얀밤으로 돌아간다면, 그가 위험해질 수도 있을
테니. 하지만 알려야 했다. 알려야만 하는데! 생각해야 해. 그를 지킬 방법을!

“!”

달리던 도중 순식간에 발밑이 꺼졌다. 어두운 밤이라 풀숲에 가려진 절벽을 보지 못한 탓이다.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입술을 깨물어 겨우 삼켜 내었다. 피 맛이 진득하게 입안에 달라붙었다. 깜깜한 공간 속에서 부유하는
것도 찰나.

우드득.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아프다고 인식하기 전부터 온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세게 부딪힌 탓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묵직한 죽음이 온 몸을 짓눌러 왔다. 소리와 색이 점차 사라졌다.

“아…….”

이내 시야가 점멸했다.

“!”

어둠에 물든 나뭇잎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로젤린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저녁의 찬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꿈에서 깨어났지만, 몸이 으스러지는 감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지금 앉아 있는 곳이 그 꿈의
환경과 많이 흡사하기 때문일까. 피비린내 대신 느껴지는 산뜻한 밤공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로젤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둑한 밤이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이 리카르디스의 방, 발코니 앞의 나무 위에서
그를 호위하고 있던 중이었다. 며칠 몇 주 동안 신경을 곤두세워 호위 했던 탓에 깜빡 선잠에 들었던 듯 했다.

리카르디스의 방을 바라보니 창을 통해 촛불이 아른거렸다. 초의 길이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시간이 별로


흐르지도 않은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로젤린은 긴 꿈을 꾸었다. 누군가의 기억이었다.

꿈속의 ‘나’는 도망쳤다.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으로, 이미 상처를 입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한계까지 달음박질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젖은 흙, 스치는
풀과 나무의 냄새가 아주 뚜렷했다.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눈앞에 그려진 풍경 또한 현실과 다름이 없었다.
마치 실제로 겪어 본 것만 같은 생생함이었다.

‘그것’은 깨달았다.

‘로젤린…….’

‘로젤린’의 기억이었다. 쫓아오는 자는 보지 못했지만 도망치던 ‘내’가 몸서리치며 두려워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검은달의 암살자? 아니다. 암살자였다면 로젤린은 도망치기보다 검을 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기사였던 그녀의 본분이기도 했으니.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외에 그녀가 두려워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 스쳐 지나가는 나뭇가지에 하나둘 생기는 얕은 생채기들, 비구름에 가려진 달. 어둠이
내려앉은, 괴물의 아가리 안쪽 같이 깊은 숲. 나뭇가지를 우악스럽게 밟고 꺾으며 무섭게 쫓아오는 정체 모를
자의 발소리.

대체 누구였기에.

대체 무엇이었기에.

일라베니아의 수도, 티가드를 떠나는 사절단의 모습에는 비장함이 깃들어 있었다. 빛나는 갑옷과 무구를 장착한
기사들. 갈기를 휘날리며 지나가는 백마 무리.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치솟아 있는 하얀밤 기사단의 깃발들. 그
웅장하고도 위압감이 드는 한가운데, 화려한 마차에 몸을 실은 리카르디스의 모습이 보였다.

사절단의 앞길에 꽃과 색색의 종이조각이 뿌려졌다. 여인들은 창문으로 몸을 불쑥 내밀고 손수건을 던졌다. 누가
보면 큰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커다란 환성이었다.

일라베니아의 백성들은 리카르디스의 찌푸린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축제보다도 흥겨운 분위기였다.
리카르디스가 하얀밤 기사단을 이끌고 출정할 때면, 그곳이 어디든 어김없이 좋은 결과를 쟁취해 왔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발타를 향하는 목적이 전쟁이 아닌, 친교를 위함이라는 사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쟁
못지않게 중요하고 위험한 여정일 것이다.

이델라브힘의 나라를 호시탐탐 넘보는 더러운 들개의 집단. 검은달. 최근 변경에서 잦은 전투가 일어나 민중
사이에서도 많은 동요가 있는 상태였다. 그런 때에 고귀한 황자의 몸으로 멀고 험난한 길을 떠난다고 하니, 어떤
이가 그 길을 환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성에서부터 티가드를 벗어나는 모든 길에 인파가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다.

와아아-

함성소리에 리카르디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영 시끄럽고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보였다. 잇세리온이 옆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 황성을 떠나기 직전에 1 황자 엘피디오가 찾아온 이후로 줄곧 이 상태였다.

[길고 위험한 여정이 되겠구나. 무사히 돌아오기를, 이델라브힘께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겠다. 리카르디스.]

입에서 나오는 내용과 다르게 엘피디오의 히죽거리는 낯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속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리카르디스는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릴 수 있도록, 이 동생이 열심히 하겠습니다. 형님.]

네가 검은달과 손잡았다는 증거를 열심히 찾아내서 널 엿 먹이고야 말겠다, 멍청아. 라는 리카르디스의 뜻이 잘


전해졌는지, 엘피디오의 히죽대는 낯이 굳어 버렸다. 두 형제는 그 후로도 웃는 얼굴로 덕담을 몇 번을 더
주고받았다.

엘피디오의 덕담대로 위험한 길이었으나 본격적인 위험은 아직 형태조차 드러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함성소리는
그를 더욱 가라앉게 만들었다. 흩날리는 종잇조각 몇 개가 리카르디스의 얼굴에 착 붙었다. 그의 인상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잇세리온이 종잇조각을 그의 얼굴에서 떼어 내었다.

“어휴 우리 전하, 더우시죠?”

잇세리온이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며 리카르디스를 달랬다.

사절단에는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 또한 기사단장 스타스는 가을안개 백작으로서. 푸른등불 후작의 차남,
호위 기사 카일로는 후작 대리로서 사절단의 일을 도울 예정이었다.

하얀밤 기사단 이외에도 리카르디스 휘하의 가문들이 기사단의 인원을 몇 명씩 추려서 사절단에 동행시켰다.
모두가 2 황자파라 불리는 세력들이었지만 그 울타리 안에서 비껴나간 인물이 한명 있었다.

설원의 월계수 5 황자 디에즈. 예정에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발타의 1 왕자,
하카브와 타국에서 교류한 적 있다는 명분에서였다.

디에즈는 굳이 분류하자면 엘피디오의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욕심이 없고 원체 성정이 순해


적극적으로 권력 다툼에 끼어든 적은 없었다. 그저 성 한 구석에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조용하게 살았을
뿐이었다. 그런 디에즈를 사절단이라는 지저분한 권력 다툼의 최전선으로 끌어낸 자는 엘피디오가 분명했다. 물론
디에즈가 물질적인 무언가를 얻고자 그를 따른 것은 아닐 테고, 그저 엘피디오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엘피디오가 검은달과 손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결코 그 동맹은 끈끈한 신뢰로써 형성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날카로운 이빨을 감추고 있으리라. 여기서 서로의 이익이라 함은 리카르디스, 자신의 죽음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들이 일라베니아 2 황자의 죽음이라는 뜻을 이뤄내고 난 후에는 토사구팽의 시간이
분명히 온다. 누가 누구를 잡아먹는지는 미지수라 하더라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관계 위에 믿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위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이상 엘피디오는


결코 발타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디에즈가 필요했다. 죽어도 상관없는 일회용 눈. 겸사겸사
하카브와의 연락책이기도 할 테고.

엘피디오가 자신을 곱게 보내 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선언이라도 하는 듯 디에즈를 붙여 놓은


모양새가 의심스러웠다. 하기야 디에즈가 엘피디오 측의 사람이라고 한들 리카르디스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여태 그래 왔듯,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다. 리카르디스에게 깊게 박혀 있는 최초의 맹세였다.

리카르디스는 크게 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호위 중인 상급 기사들 몇 명이 눈에 들어왔다. 말 위에


앉아서 권태롭게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 머리의 기사 또한 그 속에 있었다. 햇빛이 눈부신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손수건과 꽃송이를 머리에 잔뜩 달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를 향해 날아가는 것은 종이 쪼가리
하나라도 전부 쳐내고 있는 반면에 본인의 몰골은 생각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가 웃었다. 저 우스꽝스러운 꼴의 기사 덕에 여러 번 살아남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위기에서 자신을 몇


번이고 건져 올리곤 했던.

[전하. 제가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전하만은 제가…… 꼭…… 목숨을 바쳐서라도…….]

로젤린은 조용하게 숨을 죽이고 있는 불꽃같은 자였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아른거리는 불티를 보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맹세가 단순히 형식적인 언어에 불과하다던가, 금방 사그라들 종류가 아님을 알았다.

[다음 편에 계속....]

30 화.

‘이 여자는 죽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 언젠가 목숨을 바치고 죽을 자다. 그 사실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수많은
시체 위에 서 있음을 알았다. 자신이 원했든 아니든 간에 제국의 2 황자라는 고귀한 자리를 위한 희생은 불가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죄책감은 쌓여 갔다. 벗어나고 싶다고 벗어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도
이따금 눈을 감기라도 하고 싶었건만. 로젤린의 존재가, 그녀의 눈빛이 끝없이 그 죄책감을 상기시켰다.

2 황자 리카르디스를 지킨다. 로젤린이 바라는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어떤 영광도, 기사로서의 명예도 바라지


않았다. 고요하게 들끓는 그녀의 감정이 버거웠다.

리카르디스는 다시금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때와 같지만 그때와 같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하는 행동의 본질도
지킨다는 맹세 하에 이루어 진 것이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눈 어딘가에 서려 있던 비장한 결의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조금 더 사무적이라고 해야 할지, 받는 돈만큼 일하겠습니다. 같은 느긋한 표정이었다. 물론 새벽까지
제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행동력만큼은 예전의 로젤린을 떠올리게 했지만. 어쨌거나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조금 더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첩자 역할로 따라붙은 5 황자 디에즈, 클수록 무거워지는 환성의 중압감, 수많은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제 엿 같은 심정까지. 시종일관 그의 표정이 뚱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좋은 표정이 나올
만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말 위에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따끈한 햇빛을 받고 있는 제 호위 기사를 보노라니 몸이 노곤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옆에서 잇세리온이 부지런히 그의 기분을 풀기 위해 말을 걸어 왔다.

“날이 참 좋지 않습니까, 전하? 그저께까지만 해도 비가 많이 내렸는데, 이델라브힘께서 전하의 앞길을 굽어


살피시나 봅니다!”

그저 혼잣말처럼 한번 말해 본 것에 불과했는데, 그 순간 리카르디스의 무거운 입술이 열렸다. 턱을 괴고 있는


그의 자세만큼이나 나른한 목소리였다.

“날이 좋긴 하군.”

잇세리온이 신나서 더욱 떠들었지만 시끄럽다는 타박만 돌아왔다.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는 정말 좋은


날이었다.

* * *

순조로운 여정이었다. 밤을 보낼 만한 마을 한두 군데는 항상 있었고 큰 영지를 지날 때면 영주의 성에 머무르며


피로를 풀었다.

리카르디스는 오랜 시간 엘피디오와 부딪친 만큼 그의 성격을 질릴 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앞뒤 잴 줄 모르고


무작정 밀어붙이는 멍청함과 무식함. 분명 가는 길 또한 온갖 암살자며 함정을 풀어 놓아 험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폭풍 전의 하늘처럼 고요할 뿐이었다.

최후까지 기다렸다가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을 때 목을 물어뜯는다. 사냥의 기본 방법이었다. 이때까지 엘피디오는


그 기본조차 갖추지 못해서 사냥감을 번번이 놓치는 부류였으나, 이번만큼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 기회의
가치를 높게 치는 듯 했다. 말인즉슨 생각보다 더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기다림의 미학을 깨달았으니, 본격적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순간은 발타에서 일라베니아로 돌아오는 길이 될
것이다. 발타 왕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의 전쟁은 하카브도 바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더더욱 2 황자의 죽음은 그들과 관련이 없어야만 했다. 발타를 떠난 뒤 우연히 도적을 만나서 사망했다던가,
우연한 사고에 휘말렸다던가. 어떤 죽음이 되건 그 앞에는 ‘우연히’라는 단어가 붙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가는 길만이라도 편하겠군.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들은 이제 일라베니아의 영토를


벗어나 발타의 끝자락에 발을 들인 상태였다. 길이 험하고 복잡한 탓에 길잡이 몇 명을 고용해 빠르게 이동하고
있음에도, 앞으로 하루 이틀간은 산에서 야영을 해야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야영, 노숙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듣고 있음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상급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기사이긴 했지만 그 이전에 귀족이었다. 야영의 경험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다 해도 두 손 들어 반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군인 리카르디스조차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데
그들이 나서서 불만을 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급 기사들은 부지런히 막사를 세웠다. 리카르디스는 그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조금 더 더워지고,
습해졌다. 발타의 기후는 일라베니아의 사람들에게 혹독했다. 기사들이 지쳐 가고 있는 것이 보여서 해가 지기도
전에 행군을 멈추라 명령했다. 이틀째 야영이었지만 빨리 쉴 수 있어서인지 날카로워진 기색들이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물을 좀 드시지요, 전하.”

일곱 번째였다. 충신 잇세리온이 끊임없이 물을 권했다. 더워지는 기온을 염려한 탓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기사들이 마실 물은 충분한가?”

“아까 로젤린 경이 작은 샘을 발견했습니다. 막사가 세워지면 다들 수통을 채우라 하겠습니다. 전하, 물을


드시지요.”

잇세리온의 말은 또 한 번 무시당했다.

“수질은 괜찮고? 병이라도 걸리면 곤란한데.”

“로젤린 경이 마셔 보더니 괜찮다고 하더군요. 흙과 자갈에 걸러진 깨끗한 물이라고 합니다.”

“……그런 걸 로젤린 경이 어떻게 알지? 귀하게 자란 귀족가의 여식이 아니었나?”

글쎄요?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사나이 잇세리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리카르디스의 입가에 수통을 들이댔다.
리카르디스는 짜증내면서도 한 모금 마셨다. 이후 곧바로 수통을 밀어내긴 했으나 잇세리온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 생활을 한지 제법 되니, 훈련하면서 여기저기서 배웠지 않겠습니까?”

훈련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배웠다는 기사가 사냥꾼 출신의 길잡이보다 더 샘을 빨리 발견한다고? 그녀의 유능함
덕인지, 길잡이의 무능함 탓인지. 아무튼 간에 어이없는 일이었다.

얼마 후, 리카르디스의 곁으로 다가오는 로젤린의 손에는 토끼 세 마리가 들려 있었다. 그는 아까와 비슷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그게…… 뭐지……? 로젤린 경?”

로젤린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토끼입니다.”

리카르디스는 한층 더 어처구니없어졌다. 토끼인 것은 보면 알았다. 그녀는 그의 표정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


토끼…… 세 마리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여서 리카르디스의 입을 기어코 다물게 했다.

어떻게 토끼를 잡았는가에 대한 의문은 로젤린의 뒤를 따르던 길잡이에 의해 풀렸다. 그녀의 어마어마한 사냥
솜씨에 대해 극찬을 늘여 놓는 중이었다. 번개와 같았느니, 사냥의 신이니,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니 뭐니. 확실히 토끼야 약한 초식동물의 대표로 꼽힌다지만, 산에서 사는 토끼들은 재빠르기가 바람과
같았다. 활과 덫이 없다면 사냥꾼들도 잡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사냥 경험도 별로 없는 기사가 떡하니 세
마리나 잡아왔다. 심지어는 돌팔매질로.

로젤린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토끼와 리카르디스를 번갈아보다가 그에게 토끼 사체를 더럭 안겼다. 리카르디스의


옷이 피로 축축하게 젖어 갔다. 잇세리온이 짧게 비명을 지르며 경악했다.

이후 그녀는 잇세리온, 호위 기사 카일로, 기사단장 스타스, 부단장 나단, 레이몬드에게까지 불려 다니며 혼났다.
건량보다 막 잡은 고기가 맛있겠지라는 갸륵한 마음에 리카르디스에게 넘긴 것이었는데 억울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뚱한 표정을 보면서 잇세리온에게 명령했다.

“다들 육포 씹느라 힘들지 않나? 낮부터 자리도 잡았겠다. 사냥 대회라도 간단하게 여는 게 좋겠군.”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이, 토끼는 내 저녁으로 할 테니 손질해 오고.”

리카르디스의 말에 로젤린이 그를 향해 획하니 고개를 돌렸다. 부루퉁하던 낯이 어느새 활짝 펴 있었다. 그


재빠른 표정 변화에 리카르디스가 웃었다.

잇세리온의 명령이 하달되자마자 기사들은 삼삼오오 조를 꾸렸다. 몇 조는 남아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했고 몇


조는 사냥을 하러 떠났다. 그들이 돌아오고 나면 교대로 사냥을 나가는 방식이었다. 상급 기사들도 숲속으로 많이
떠났지만 로젤린은 멀거니 리카르디스의 곁을 지켰다.

잇세리온이 새 옷을 건네자, 리카르디스는 토끼의 피로 젖은 상의를 훌쩍 벗었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그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헉, 헉! 막사 주변을 호위하던 하급 기사들이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로젤린도 눈앞에 드러난 백옥같이 투명한 피부를 눈으로 훑었다. 이델라브힘이 정성스럽게 한 올 한 올 뽑아낸
듯한, 은사 같은 머리카락이 빛을 반사하며 몸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녀의 시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머리카락이 채 가리지 못하고 드러난 하얀 목덜미, 툭 도드라진 날개 뼈. 울퉁불퉁하게 곡선을 그리며 날렵하게
붙어 있는 가슴과 등의 근육, 척추를 따라 옴폭 들어간 허리선까지.

“…….”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멀뚱히 쳐다보는 시선을 눈치챘다. 그녀의 직업 특성상 남자들의 벗은 몸을 자주 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쳐도 미세한 동요조차 없는, 그야말로 무심의 눈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다른 여자들이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같은 성별이어도 가끔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으니
그런 그가 보기에 로젤린은 아주 희귀한 생물이나 다름없었다. 뭐, 호위 기사로써는 백점 만점에 백점을 줄 수
있는 좋은 태도였다.

다만 굳이 문제점을 꼽자면, 한 가지. 로젤린이 눈을 빛내며 제 몸을 계속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리카르디스에게 수치심의 정의를 일깨웠다. 묘하게 추행당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어서
그가 한마디 하려고 할 찰나, 로젤린이 더럭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내내 무심했던 표정을 지우고 눈매를 부드럽게
휘면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름다우십니다.”

[다음 편에 계속....]

31 화.

콜록콜록! 리카르디스는 사레가 들려 속이 쓰린 기침을 했다.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물론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찬사를 내뱉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급습하듯 튀어나온 미사여구의 파괴력은 컸다. 주위에 있던 다른 호위 기사들은 차마 기침을 뱉지도 못하고, 컥.
하고 목울대를 강하게 맞은 소리를 냈다.

끄, 끌어내…… 하고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몇년 전, 리카르디스에게 청혼서를 하루에 스무 장씩 보내며


쫓아다니던 한 영애에게 내렸던 조치이기도 했다.

“근육의 부피가 커다랗고 형태도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저도 그렇게 울퉁불퉁하게 되고 싶은데, 아무래도
신체적 조건이 남자와 다른 부분이 많아서…… 부럽습니다.”

진심으로 부러움이 가득 들어찬 눈빛이었다. 아, 경계 해제, 경계 해제. 기사들이 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장면이 리카르디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시겠지…….”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래, 이게 로젤린이다. 이 기사에게 뭘 더 바라겠는가. 잠시간 흐트러졌던


마음은 무슨 일 있었냐는 양 잔잔해졌다. 마치 잘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색채가 아름답군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감상평이었다. 딱히 기분 상할 부분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신경에 거슬렸다. 로젤린을 흘끗 바라보니
그녀는 허공에다가 유려한 손짓으로 리카르디스의 몸 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너무 과하지 않나. 풍만한 몸매를 지닌 여성의 굴곡도 저만큼은 안 될 것 같은데…….’

로젤린은 곧 잇세리온에게 나쁜 손을 찰싹 맞고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 후 성희롱이라고 엄청 혼났다.


성교육을 해야겠다며 씩씩거리던 잇세리온은 레이몬드를 불러냈다. 보호자 호출이라는 명목이었으나 레이몬드는 2
황자 수석비서관의 눈을 슬슬 피했다. “우리 로젤린의 보호자는……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누가 봐도
성교육 담당을 하고 싶지 않아 떠넘기는 거였다.

잇세리온과 레이몬드가 그녀의 성교육 문제로 아옹다옹 다투는 사이,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복근 위에 희미하게
묻어있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녀는 수통을 꺼내서 제 손수건을 적셨다. 로젤린의 행동을 목격한 리카르디스는
‘설마……?’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실례합니다, 전하.”

“설마.”

그의 입에서 아까 생각했던 그대로의 대사가 나왔다. 로젤린은 성큼 그에게 다가서서 손수건으로 복부 위에


말라있는 핏자국을 문질렀다. 복부를 스치는 천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새 피가 말랐는지 로젤린은 무릎까지 꿇어 가며 열성적으로 닦았다.

“…….”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바지춤을 잡아 가며, 열성적으로 복부를 닦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하늘을
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이 감정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아연하다? 참담하다? 글쎄, 어떤 언어로도 지금 그의
심정을 표현하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손에서 손수건을 모질게 팩 뺏었다. 상식을 깡그리 잊어버린 이 호위 기사의 행동은
요즘따라 그를 자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대…….” 하고 입을 다물었다가 “아니, 진짜.”
하고 답답함을 호소하려다가, 결국에는 “되었다…….” 하고 아련하게 말을 흘렸다.

로젤린은 상급 기사들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야 본인 몫을 사냥하러 떠났다. 리카르디스는 숲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잇세리온과 레이몬드는 그 광경에 쩡하고 굳어 있다가
성교육 시간을 열 배로 늘려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 * *

한사람의 인영이 푸른 숲을 달렸다. 동물들은 바로 옆을 지나가는 로젤린의 모습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높은 나무의 나뭇가지를 타고 한 번의 발돋움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도달했다. 풍경이 순식간에 휙휙
바뀌었다. 나무들이 높게 솟아 있는 풍경은 일라베니아와 비슷했지만 기후가 다른 탓인지 숲을 감싸고 있는
향기가 조금 달랐다.

로젤린은 나뭇가지 위를 훌쩍훌쩍 건너뛰며 사냥감을 찾았다. 저녁거리였던 토끼 고기는 리카르디스에게 주었으니
따로 먹을 것이 필요했다. 인간으로 변이한 이후의 최고의 소득은 음식이었다. 인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기와
과일, 채소를 조리했다. 그것은 한 가지 재료만으로 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다양하고 복잡한 맛의 조화를 이뤄
내곤 했다. 로젤린은 그 조화가 놀랍고 신기하고 맛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로젤린이 된 이후에야 맛있다는
감각을 깨달았다. 한 끼를 거르는 게 아쉬운 처지였다. 그녀는 신경에 날을 세워 너른 풍경을 온몸으로
지켜보았다.

나무를 타고 넘던 그녀는 익숙한 풍경과 조우했다. 아까 길잡이와 둘러보았던 구역 근처였다. 그러고 보니 덫을


설치했었지. 문득 떠오른 기억에 로젤린은 높은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쿵, 땅을 울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작은 소음마저 흙바닥에 스며든 것처럼 고요했다.
비이이- 피이이-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러 동물을 먹어 본 적 있는 로젤린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사슴이었다.


그녀는 그 소리의 주인을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냥꾼이 설치해 놓은 덫, 그물에 걸려 있는 어린 사슴이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반짝였다. 사슴은 꾸물거리며 그물에서 벗어나려다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아이 같았다. 로젤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린 사슴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옅은 갈색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그 안쪽. 사슴의 형태 안에서 대류하고 있는
마력의 기운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로젤린은 이 존재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보았다. 지성을 가진 이후,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 이후로 처음 만나는
동족이었다. 마력은 운용하지 않는 한 감지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 동족을 만난 것 또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사슴 안에서 힘차게 대류하고 있는 마력은 의태 직전의 징후였다. 아마 자신이 이곳을 찾지만 않았더라도
그물보다 작은 생물로 변해서 빠져나갔으리라. 그렇다면 그냥 자리를 피하면 되는 건가?

그녀가 몸을 일으킬 찰나,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금속음. 일정한 보폭. 단련된 자의
숨죽인 발걸음. 같은 사절단 일행이었다.

로젤린은 쪼그려 앉아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는 어린 사슴과 눈을 맞췄다.

“도망가.”

사슴은 그녀를 째려보는 것 같았다. 네가 사라져야 도망가지. 책망의 눈길이었다. 눈앞의 어린 사슴은 동물의
대가리를 하고도 굉장히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은 한쪽 팔을 들어보였다. 그녀의 손등 위로 파충류의 비늘
같은 것이 토도독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예전에 먹은 악어의 특성이었다.

사슴은 더욱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의 손을 주시했다. 파충류의 거죽이 아닌, 그 형태 안에서 막 대류하기 시작한
마력의 기운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사슴은 그제야 눈치챘다. 눈앞의 여자는 자신과 같은 종족이었다. 로젤린은
재차 다시 말했다.

“가.”

사슴의 눈에 결의의 빛이 스쳤다. 그물에 얼기설기 얽혀 있던 어린 짐승의 다리에서 색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옅은 갈색에서 나무의 색으로, 그리고는 완전한 검은색으로. 그것은 점차 퍼져서 사슴의 온 몸을 뒤덮었다.
사슴의 그림자처럼 온통 어둡던 형태가 조금씩 부스러졌다. 모래처럼, 연기처럼 퍼지고 흘렀다. 로젤린이 눈을
깜박 하는 짧은 사이 어둠이 걷혔다.

사슴이 있던 자리에는 자그마한 다람쥐 한 마리가 대신 남아 있었다. 그 작은 동물은 연신 코를 씰룩거리며


로젤린을 한참을 쳐다보았다. 까맣고 반질반질한 눈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기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다람쥐는 재빨리 그물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나무로 올라가기 직전 다시 한 번 그녀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얼마 후 덫을 확인하러 왔을 땐, 다람쥐나 사람의 흔적은 숲속에 스며들어 찾을 수 없었다.

* * *
산 중턱에 위치한 막사가 들썩였다. 여기저기 타오르는 모닥불에서 황홀한 고기 냄새가 퍼졌다. 다들 물이
가득담긴 수통을 들고 마시면서도 잔뜩 취한 것처럼 행동했다. 축제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흥겨운 분위기였다.

“로젤린! 로젤린!”

“로젤린!”

“최고다, 로젤린!”

“멋있다, 로젤린!”

상급 기사들이 와하하 웃으며 그녀의 등을 퍽퍽 두드리고 지나갔다. 로젤린도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 많은


인원이 먹고 있는 고기의 5 할이 로젤린의 성과였으므로, 이 축제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에도 그녀가 큰 기여를 한
셈이었다.

마른 건량과 육포 따위로 배고픔만 간신히 달랜지 벌써 이틀째였다. 검과 갑옷의 무게를 감내하며 산을 오르는
자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주인인 리카르디스가 사냥해서 알아서 잘 먹어 보라고 했지만, 대다수의
기사들이 훌륭한 검술 실력에 비해 사냥 솜씨는 형편없었다. 누구는 개구리를 잡아 왔고, 누구는 무언가가 먹다
남긴 동물의 사체 따위를 들고 와 야유를 받았다.

그런 때에 로젤린이 어깨에 멧돼지를 지고 어두운 숲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성인 남성만 한 크기에 무게는
크기의 배가 될 것이 분명한 두툼한 멧돼지였다. 그녀는 막사에 멧돼지를 툭 떨치고는 하급 기사들에게 손질하라
했다. 가장 좋은 부위를 전하께 바치고 나면 알아서 먹으라고도 했다. 많은 자들이, 특히 개구리도 고기랍시고
잡아 온 네스터가 그녀를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너무 멋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32 화.

해가 저물기 시작한 숲은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나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뒤를 따르고 싶은 네스터가 “방해가 안 된다면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지만…….

“방해됩니다.”

라는 로젤린의 한마디에 축 처져서 멧돼지를 손질하러 갔다. 얼마 뒤 숲에서 나오는 로젤린의 어깨에는 커다란
사슴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사냥꾼 출신의 길잡이는 감동의 물결에 허우적거리며 차마 말을 잇지도 못하고 그저
엄지손가락만 치켜세웠다.

많은 사람들이 로젤린과 한마디 얘기라도 나누고자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잡아 온 사슴을 샅샅이 살필 뿐이었다.
이후에 약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 때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로젤린은 그 이후로도 토끼와 날아가던 새, 야생 산닭을 몇 마리 더 잡았다. 그것에 더해 사냥에


성공한 자가 몇 명 있었다. 리카르디스 배 사냥 대회는 막사의 모든 인원이 풍족한 식사를 할 정도의 수확을
얻으며,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리카르디스도 야영치고는 호화로운 식단에 흡족해했다. 지쳐 가던 이들에게 활력을 불어 일으키는 좋은 밤이었다.


몇 없는 여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고기를 구웠다. 로젤린도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적당히 가죽만 벗겨 구워
먹는 남자 기사들에 비해, 여자 기사들은 소금과 후추를 뿌려서 지글지글 달궈진 돌판 위에 고기를 굽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공수한 것인지 모를 허브 따위도 보였다. 사절단에 포함된, 황족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요리사만큼이나 정성을 들이는 듯 했다. 리카르디스는 아마 제 접시 위에 있는 고기나 여기사들이 먹는 고기나
크게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여기사들은 다 구워진 고기를 가장 먼저 로젤린에게 건넸다. 구워진 마늘의 고소한 향기와 허브의 향긋한 냄새가
자꾸만 식욕을 자극했다. 그녀는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눈을 떼지 못했다. 무뚝뚝하던 그녀의 얼굴에는 격렬한
환희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단검으로 고기를 조금씩 베어 먹는 자들이 대다수였으나, 로젤린은 고기를 통째로
들고 와구 씹었다. 그녀가 한입 크게 베어 물자 입안에 육즙이 탁 퍼졌다. 로젤린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먹었다.
여자 기사들이 까르르 웃었다. 임무 중일 때나 남자 기사들을 대할 때보다 세 톤 정도 높은 목소리였다.

로젤린은 눈을 감고 고기를 뜯으며 한껏 음미했다. 주변의 흐뭇한 시선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볼에 홍조가 띈 것
같은 착시가 보일 정도로 그녀는 행복해했다.

“맛이 어떠십니까, 로젤린 경?”

“매우, 매우 맛있습니다.”

“다행입니다. 20 분 전에 라임과 로즈마리로 마리네이드했습니다. 구울 땐 레몬 밤과 마늘 가루를 섞은 허브


버터를 사용했고요.”

로젤린은 다소 충격 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도 충격 받았다. 이 와중에 마리네이드까지 했어


……?

“과연…… 그래서 이런 맛이…… 대단하십니다, 경.”

알 수 없는 공감대가 형성된 여자 무리에서 다시 한 번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멍하니 여자 기사들, 특히 로젤린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15 살 먹은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리카르디스는 츳, 혀를 차고 접시 위의 고기를 씹는 것에 전념했다. 어느 정도 접시를 비운 리카르디스는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자리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5 황자인 디에즈 또한 식사 중이었다. 그는 고기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어딘가를 열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아있는 방향이 익숙했다. 그녀들이 앉아 있는
모닥불 쪽이었다. 여기에 또 다른 사춘기 소년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으나 곧 표정을 굳혀야만 했다. 디에즈의 눈길이 로젤린에게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안의 혓바늘이 돋은 것처럼 거슬렸다.

* * *

소란스러웠던 저녁 시간이 끝났다. 다들 막사로 들어가 고단한 여정으로 쌓인 피로를 풀었다. 머리를 대자마자
잠에 드는 자도 많았다. 몇 조는 경계 보초 서며 조용한 막사를 지켰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막사 근처, 높게
자란 나무 위에 자리 잡았다. 2 황자의 막사를 지키고 있는 상급 기사는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로젤린은 굵은 나뭇가지에 머리를 기대고 꾸벅꾸벅 졸았다. 예전에는 그다지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요즘은 일주일에 한번 꼴로는 반드시 자야 했다. 그것도 작은 소음과 미세한 살의에도 금방 깨어날 수준의 아주
얕은 잠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피로가 풀렸다.

토도도.

잠든 육체를 대신해 날카로운 감각이 나무를 타고 오르는 작은 생물의 발걸음 소리를 감지했다. 깃털 같은
무게에서 발생한 아주 작은 진동이었다. 로젤린은 눈을 번쩍 떴다.

“…….”

다람쥐였다. 또한 그녀가 구했던 사슴이기도 했다. 로젤린이 코앞에 있음에도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상하고 작은 생물이었다. 다람쥐는 폴짝폴짝 뛰어서 그녀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그 덕에 눈높이가 어느 정도
맞춰졌다. 다람쥐가 코를 씰룩이면서 쥐 같은 소리를 냈다. 찌치 찍-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로젤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나 다람쥐는 먹은 적 없어서.”

다람쥐 말은 못 알아들어. 생략된 뒷말을 눈앞의 작은 동물은 알아들었다. 동그란 눈을 날카롭게 세우며 ‘
귀찮게 하네.’라는 듯 팩 쳐다보더니 그녀의 무릎에서 내려갔다. 다람쥐의 털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기처럼 흩어지며 넓게 퍼졌다. 검은 모래의 집단은 점차 몸을 불려 사람 한 명 만큼이나 커졌다. 흐물거리는
검은 형태의 안쪽에서 마력이 세차게 대류 했다.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때부터 눈치채긴 했지만, 이 동족도 인간을 먹은 적 있는 듯 했다. 서서히 인간의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갈색 머리를 늘어트린, 젊고 예쁜 여자였다. 옷을 입고 있지 않아서 그녀의 풍만한 굴곡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로젤린은 조금 떨어진 리카르디스의 막사를 내려 보았다. 상급 기사도 저 멀리 있었고, 그들의 얘기를 들을 만큼


귀가 좋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 또한 없었다. 갈색 머리의 여자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몸을 움직이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어색한 몸짓이었다. 그녀는 아, 아. 하면서 목소리를 확인하더니, 부드러운 눈매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몸은 역시 영 별로야. 근육이 허접해.”

“말 잘하네.”

로젤린은 자신이 막 인간이 되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들리는 단어를 어설프게 흉내 낼뿐으로, 지금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눈앞의 여자는 지금의 자신보다도 훨씬 능숙하게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여자는 로젤린의 눈에 담긴 존경의 빛을 눈치채고 웃었다.

“인간으로 살아 본 적 있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할매랑 살았지. 나를 손녀딸로 착각하더라고.”

맨 처음은 아예 말을 못하는 벙어리 흉내를 내었다고 했다. 어느 정도 입이 트일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다고.


세상에 그런 방법이. 로젤린은 감탄했다.

“그래도 인간이 되면 귀찮은 일이 많아서. 동물로 사는 게 훨씬 편하고 좋아. 그래서 좀 신기하네. 너 인간들
사이에서 살고 있어? 안 불편해? 우리는 태생적으로 인간을 꺼려하는데 말야. 개체마다 좀 다른가?”

태생적으로 인간을 꺼려한다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확실히 비스타의 깊은 숲에서 살 때만 해도 인간들을 피해


다니곤 했다. 인간보다 훨씬 강한 마수와 동물들은 무섭지 않았지만, 인간들에게는 알 수 없는 원시적인 공포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이 된 이후로 서서히 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혹시 금기를 저지른 탓인가?
로젤린은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던 말을 그대로 흘렸다.

“금기 때문인가?”

여자가 눈을 부릅떴다. “금기?”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로젤린은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다. 조용히 말하라는
뜻이었다. 여자는 로젤린의 검지를 손으로 찰싹 쳤다. 조용히고 뭐고.

“설마 살아 있는 인간을 먹은 거야, 너?”

“응.”

여자는 로젤린의 팔뚝을 한 대 더 쳤다. 찰싹하고 매서운 소리가 났지만 그다지 아프진 않았다.

“돌았어? 우리들 중에 암만 생각 없이 사는 애들이 많다지만 너는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본능조차 거스를


정도로 멍청한 건가? 대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거야, 너?”

로젤린은 조금 뚱해졌다. 자신도 다 사정이 있었다. 여자는 로젤린의 억울한 표정을 보고도 그녀를 한 대 더
찰싹 쳤다. 로젤린의 어미, 에델바이스에게도 이렇게 혼난 적 없는데…….

“도망치지도 못하잖아 이 기지배야! 너 이제 그 몸으로 죽어야 돼!”

“음.”

“음. 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알고는 있었던 거야?”

본능은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이미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동물이 독버섯을 본능적으로 기피하는 것과 같았다.


저 독버섯은 위험해. 먹으면 안 돼. 먹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먹으면 위험할 것이다. 피에서
피로 전해지는 기억이었다. ‘그것’들의 금기 또한 그런 본능의 영역이었다.

‘살아 있는 것을 흡수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금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로젤린의 육체로 생활한 것이 벌써 2 개월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인간세계의 음식은 맛있지만 그것들은 인간의 육체를 이루는 영양분이 되어 줄 뿐이었다.

슬슬 본체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것’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 시체를
흡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녀는 조용한 밤. 미리 동물 사체를 준비해 놓고 의태를 풀었다. 아니 풀고자
했지만, 마력만 그녀의 껍질 안에서 고요하게 대류 할 뿐 어떠한 변화도 생겨나지 않았다. 로젤린은 번개를 맞은
듯 충격 받았다. 변화를 하지 못해?

[다음 편에 계속....]

33 화.

다른 생물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사실이었지만, ‘그것’에게는 손발을 잃은 것 보다 더 큰 결핍이었다.


죽음을 선고하는 날카로운 송곳니보다 무서운 위협이었다. 로젤린은 처음으로 인간이 된 후 벌벌 떨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 이상 상태가 금기로부터 이뤄진 어떤 벌, 어떤 부작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호랑이의 근육조직을
빌려 온다던가, 매의 청각을 빌려 온다던가, 단단한 마수의 가죽을 빌려 온다던가 하는 부분적인 변이는 가능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더 이상 완전한 ‘그것’의 형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만약 ‘그것’이 로젤린의 껍데기를 막 뒤집어 쓴 초기에 이런 사실과 마주했었다면, ‘그것’은 거대한 공황


속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그것’, 로젤린은 인간의 삶에 점점 녹아들고 있었다. 칼릭스라는
동생이 있었고 레이몬드라는 친구도 있었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이 생물들의 세계에는 ‘그것’으로서,
동물로서 느낄 수 없는 다양한 감정과 강렬한 감각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림자로서의 삶이 조금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가 때가 되면 시체를 먹고


기다리고 또다시 잠이 드는 그 수백 년의 일상을 깨트린 인간의 삶이, 어쩌면 좋아지고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것’은 제 안에 있는 마력에 희미하게 섞이기 시작한 어떤 종류의 힘을 느꼈다. 검은 머리의 인간 로젤린.


그녀의 안에 있는,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힘. 생물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그
원초적인 힘, 생명. 그 생명이 조금씩 제 안에 녹아들며 융화되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것’들의 금기는
살아 있는 생물 그 자체보다는 그들의 안에 있는 생명력을 경계한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로젤린도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럼 이제 더 이상 다른 생물을 흉내 낼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어?


누군가가, 어떤 무언가가 날 죽이고자 하면 그대로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란 말인가?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불현듯 치미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왜 도망을 가야 하지? 어째서 누군가를 흉내 내야만 했던 거지? 죽고
땅에 묻혀 썩어 가는 것은 자연의 당연한 섭리였다. 순환의 원리였다. ‘그것’은 그때서야 자신이, 또한
어딘가에 살고 있을 제 동족들이 이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난 이상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죽을 것이다. 육체를 가지게 되었으니 어떤 사건 사고가 없더라도 이 몸에 담긴 힘이 닳는 날에는 숨이


끊어진다. ‘그것’은 로젤린으로서 죽을 것이다. 당연한 이치였다. 모든 생물과 생명이 그렇듯이.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완전한 의태를 이루지 못하는 것도 크게 두렵지 않았다. 누군가에게서 끊임없이 도망치고자
했던 본능, 무언가를 공격하거나 죽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거부감 또한 수그러들었다.

그 이후로 로젤린은 가끔씩 꿈을 꾸거나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이 아닌 로젤린의 기억이었다. 열심히
공부했던 책의 내용이 떠올랐고, 까만 숲에서 누군가에게 쫓기기도 했다. 때로는 제 어린 동생을 바라보며 ‘
착한 아이구나, 칼. 우리 칼릭스.’ 하고 다정하게 이야기 했다. ‘그것’은 이 기억들이 로젤린, 그녀가 가지고
있던 생명의 조각이라 생각했다.

결국 그림자라 불리는 그들의 금기는 진정한 생명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생이라는 출발점이 있어야
죽음이라는 것에 닿을 수 있기에. 죽음을 경계했기에 생겨난 금기. 누군가는 섣부르다 말할 것이며, 누군가는
멍청하다 했지만 로젤린은 이미 생과 사의 기로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몰라도.

로젤린은 제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피부 아래 심장이 거세게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 * *

로젤린은 죽어 가는 검은 머리 인간을 만난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걔가 부탁을 해서, 살아 있는 걸


먹어야만 했던 거야. 여자는 예쁜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로젤린을 보았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뭐라는 거야. 처음부터 설명해도 전혀 이해 못하겠거든? 그래, 뭐…… 가끔 원숭이 중에도 나무 못 타는


애들이 있긴 하더라…….”

어떤 무리든 좀 덜 떨어지는 개체가 있지…… 여자가 말을 흘렸다. 자신과 로젤린이 같은 종족이라는 사실을
회피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로젤린의 모습 뒤로 오랜 과거를 떠올렸다.

여자, 또 다른 ‘그것’은 금기를 저지른 동족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굶었던 동족은 운 좋게도 죽어
있는 뱀을 발견했다. 배고픈 동족은 커다란 뱀을 흡수했다. 설마 그 배 안에 아직 살아 있는 토끼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당혹스러워하며 토끼로 살아가던 그 동족은 자신의 의태의 능력이 소실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 부분적인 변이는 가능했지만, 아무리 표범의 근육조직을 빌려 온다고 한들 토끼라는 큰 틀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고. 이후, 그 동족은 사냥꾼에게 잡혀 갔다. 웃지 못 할 희극이었다.

무기가 없다면 인간은 약해 빠진 종족이다. 날카로운 손톱이나 송곳니도, 강한 근육조차 없으니. 토끼보다야
낫긴 하겠지만 여자가 보기에는 토끼나 인간이나 그게 그거였다.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집채만 한 마수로도 변할
수 있었다. 강함의 기준이 높은 것은 당연했다.

덜떨어진 동족은 제 안위와 관련된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너는 말해라, 나는 들을 테니. 따위의 태도를 고수하며
인간들이 세워 놓은 한 막사만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딱 봐도 세상 물정이라고는 모르는 것 같은 데다가, 금기까지 저질러 의태가 불가능한
동족이라니. ‘그것’의 머리 한편에는 과거 토끼로 살다가 사냥꾼에게 잡혀간 또 다른 동족이 자꾸만 떠올랐다.
여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인간을 먹었거든.”

“응.”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다. 이걸 확 그냥…….

“그 덕에 다른 동족들보다 좀 더…… 뭐랄까. 생각이란 걸 하는 편이더라고. 인간이 동물보다는 지성이 좀 높은


편이잖아?”

“응.”

여자가 로젤린에게 조금 다가왔다. 풀 냄새가 언뜻 로젤린의 코를 스쳐 지나갔다.

“인간이랑 지내기도 해서 공동체? 같은 걸 알아. 그래서 걱정이란 것도 한단 말이지. 좀 들어, 기지배야!”

리카르디스의 막사 근처를 기사들이 지나갔다. 로젤린의 신경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향하자 여자가 로젤린의
팔뚝을 철썩 때리며 성질냈다. 여자는 제 입술을 꾹 한번 깨물고는 로젤린의 어깨를 더럭 잡았다. 여자의 회색
눈동자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있잖아.”

“응.”

“금기를 저지른, 동족의 끝을 내가 지켜봐 줄게.”

겸사겸사 위험해 보이면 구해 주기도 하고. 인간 한 명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여자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눈을 조금 더 가늘게 뜰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여자는 깨달았다. 얘, 못 알아듣고 있네…….

그녀는 말을 고쳤다.

“앞으로 너 따라다니겠다고.”

로젤린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래.” 하고 간단한 대답을 했다. 누구는 일생일대의 결정이었건만.
얘, 생각이라는 것은 하고 사는 거겠지? 여자는 다시금 제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거나…… 잘 부탁해.”

“응.”

로젤린이 손을 내밀었다. 여자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꼴에 이런 인사는 또 배운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기였다.

* * *

“다람쥐?”

“이상하잖아. 다람쥐를 대체 왜 데리고 다녀.”

“사슴?”

“사슴이랑 같이 다니는 사람을 보기는 했지. 사냥꾼이 죽여서 어깨에 매달고 있더라고.”
“……곰?”

“사람이랑 같이 다니긴 하겠지. 곰의 위장 안에 사람이 잘 있겠지.”

두 여자는 여전히 나무 위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여자는 로젤린을 따라가기로 했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같은 종족이라고 해도 갑자기 나타난 바깥의 존재는 크게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군다나 인간의 지능은 다른 동물들보다 높은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어설프게 인간을
흉내 내는 제 모습에 의문을 금방 가질 것이다.

여자는 자신이 과거에 먹은 동물들의 종류를 나열했고, 로젤린은 하나씩 짚어 가며 선택했다. 하지만 다람쥐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 사슴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 곰과 마수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굉장히 희귀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여자는 로젤린이 그랬듯이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습성이 있었다.

이후에도 뱀, 흑표범, 사슴벌레, 너구리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전부 기각되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여자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예전에 할매랑 살 때, 동물 데리고 다니는 사람 봤어!”

그녀는 간신히 떠올렸다. 산 중턱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에 살던 늙은 여자. 그녀의 오두막에는 가끔씩 사냥꾼들이
들려서 비를 피하고 갔다. 활과 덫을 위한 재료만 들고 다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간간히 사냥개나 매를
데리고 다니는 사냥꾼들도 있었다. 후보가 두 개가 생겨났지만 여자는 개도 매도 먹은 적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씩 웃었다.

“독수리는 먹은 적 있어.”

로젤린은 오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확실히 매나, 독수리나. 둘 다 맹금류의 커다란 날짐승이다. 그게
그거지 뭐. 여자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의태를 시작했다. 여자의 형체가 검게 물들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여자는 온전한 독수리의 모습이 되었다. 덩치가 예상한 것보다 제법 컸다. 로젤린은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감탄했다. 독수리는 태평하게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성대만 인간의 것으로 변이한 모양이었다.

“이 근처 왕이라고 불리던 독수리였거든. 마수랑도 싸우던 애야. 안타깝게도 수리부엉이가 저녁에 기습해서
죽었지. 밤의 수리부엉이는 낮의 독수리만큼 강하거든.”

[다음 편에 계속....]

34 화.
독수리는 제 날개깃을 부리로 정리했다. 로젤린은 그 날개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빠듯하면서도 매끄럽고 탄탄한
갑옷 같은 감촉이었다.

“매를 데리고 다니는 사냥꾼은 장갑이랑 팔 보호대 같은걸 하고 있었어. 발톱이 날카로우니깐.”

독수리는 제 한쪽 발을 들어서 까딱거렸다. 송곳같이 날카로운 발톱이 보였다. 사냥꾼이 온갖 가죽을 가지고 있는
걸 본 적 있다. 그것을 대충 잘라서 두르면 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말하면 안 돼.”

독수리는 조류의 대가리를 하고도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인간이 데리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완벽한 동물을 찾아내어 한 사람과 한 마리는 매우 만족했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 왔다. 막사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이른 아침부터 사절단 일행이 있는 장소를 덮친
커다란 동물 때문이었다. 사냥꾼이 활을 쏘려고 했지만 로젤린이 황급히 나서서 만류했다.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공격하러 왔으리라 추측했으나 독수리는 얌전히 로젤린의 팔 위에 앉아 있었다. 마수라고
봐도 될 정도로 체구가 큰 독수리였다. 로젤린은 무겁지도 않은지 그 무게를 잘 지탱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건…… 또 뭐지, 로젤린 경?”

리카르디스는 어쩐지 어제가 떠올랐다. 대체 토끼를 어떻게 잡아 왔느냐는 뜻으로 그게 무엇이냐 물었더니 “
토끼입니다…….”라는 대답을 했던 그녀의 모습이.

“독수리입니다.”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예상은 했지만 짜증났다.

“독수리가 왜 경과 함께 있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가?”

독수리와 로젤린은 조용히 당황했다. 사냥꾼들이 매를 데리고 다닌다고 했는데, 매나 독수리나 그게 그거인 거
같은데, 이상한 거 아니라 했는데. 왜 다들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리카르디스가 대답을 재촉했다.

“경?”

로젤린은 독수리를 쳐다보면서,

“아는 독수리입니다.”

라는 대답을 했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독수리는


그녀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 부리의 넙적한 부분을 로젤린의 머리에 부비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사나운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예전에 칼릭스에게 배운 마법의 말을 또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정확한 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 살다보면 아는 독수리 한 마리쯤은 있을 수도 있지. 그 독수리가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던가, 일라베니아에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발타의 땅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던가하는 문제는 딱히 신경 쓸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리카르디스는 결국 또 “그래…….”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동료 기사들도 처음에는 이 상황에 의문을 가졌지만 독수리가 첩자나 암살자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다들 로젤린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독수리의 날개를 한 번 만져 보기도
하고, 그 크기에 감탄도 하면서 나름 즐거워했다.

사냥꾼은 독수리가 얼마나 위험한 동물인지 알고 있어, 다가오지 못하고 한참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곧 독수리가 위험하지 않다 못해 온순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로젤린에게 접근했다.

“덩치도 크고, 부리도 튼튼해 보이고. 굉장히 멋진 독수리로군요. 언제부터 기르게 되신 겁니까, 로젤린 경?”

어제 만났다.

“……최근입니다.”

“몇 살이나 되었습니까?”

한 몇백 년 될 것이다. 정확한 나이는…….

“모릅니다.”

“이름은 뭔가요?”

아, 이름. 독수리와 로젤린이 시선을 교환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로젤린은 잠시 고민했다. 이름을 알지 못하니 적당히 붙여야 할 텐데. 그 순간 그녀는 누군가가 바삭하게 마른
낙엽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로젤린의 의식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갔다. 바삭하는 음식 중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마카롱.”

“……네?”

“마카롱입니다. 이름.”

독수리는 마카롱이 대체 무엇인지 가늠해 보는 표정이었다. 사냥꾼이 조금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쁜


이름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로젤린은 어쩐지 뿌듯해보였다. 사냥꾼은 마카롱이라는 이름이 독수리에게
붙여지기에는 지나치게 달콤하고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뭐, 주인이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가볍게 넘어갔다.

마카롱을 먹어 본 마카롱은 제 이름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했지만, 그것은 조금 더 후의 일이다.


6

여정은 순탄했다. 암살자나 함정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을뿐더러 날씨도 좋았다. 일행은 일라베니아의 영토
내에서는 여러 마수들과 잦은 전투를 치렀지만, 발타에 들어서며 한결 여유로워졌다. 누군가가 미리 처리라도 해
놓은 듯이 마수를 발견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위험이 도사리는 나라에 발을 들여 놓은 것치고는 순탄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였다.

가끔 여우 같은 자그마한 마수가 막사를 덮치고는 했지만 하늘에서 빠르게 하강한 마카롱에게 번번이 공격당했다.
기사들은 그들보다 훌륭한 경비를 서는 마카롱에게 경의의 뜻을 담아 ‘마카롱 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경’이라는 것은 기사를 뜻한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기사는 ‘약한 자를 보호하고 명예를 알며, 강한
신념을 가진 높은 지위의 인간’이라는 것 또한 알려 주었다. 그 후부터 마카롱은 기사들이 ‘마카롱 경’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들을 내려다보며 우쭐거렸다. 매우 고압적인 태도였으나, 동물의 몸이라 티가 잘 나지 않았다.

바쁘게 움직인 덕에 어느덧 발타의 수도 ‘리비타’에 근접했다.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발타의 궁은
일라베니아의 순백의 성과는 매우 달라 보였다. 여러 가지 색의 화려한 문양과 금이 조화롭게 섞여 궁을 뒤덮고
있었다.

사절단 일행은 외벽에 들어섰다. 열린 성문 안쪽에는 경비대가 대거 서 있었다. 붉은 흙 같은 갈색 피부의


남자들이었다. 로젤린은 발타인의 머리카락이 모두 검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하얀 피부에 다양한 머리 색을
가진 일라베니아의 사람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생김새였다. 그들은 갑옷이 아닌 가죽을 무두질해서 만든
보호구를 주로 입고 있었다. 우거진 숲과 늪, 험난한 지형으로 둘러싸인 발타에서는 활동성을 더 중요시 여겼다.
갑옷같이 무거운 장비를 착용하고 느릿느릿 움직이다간 화살 맞아 죽기 십상이었다.

경비대를 마주한 이후, 하얀밤 기사단의 분위기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상급 기사들이 리카르디스의 마차에 더
가까이 붙어 섰다. 하얗고 검은 집단의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맴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경비대가 양
옆으로 갈라지며 중앙에서 금색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뚱뚱한 남자가 나타났다. 잇세리온은 몇 년 전 일라베니아에
방문했던 그와 만난 적 있었다. 발타의 재상, 아틸라크였다. 아틸라크는 두 무릎을 꿇고 발타식으로 그들에게
인사했다. 경비대의 많은 인원도 그를 따라 절도 있게 두 무릎을 꿇었다.

“오오, 일라베니아의 귀빈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힉살라 아돈의 충실한 종인 아틸라크입니다.


부족하나마 발타의 재상직을 맡고 있습니다.”

아틸라크가 인사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감돌던 긴장감이 이완되었다. 지금 당장의 위험성은 없다고 판단한
기사단장 스타스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리카르디스가 긴 은발을 손으로 정리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햇살이 강한 날이었던 만큼 그의 머리칼이 발하는 빛
또한 평소보다 눈부셨다. 아틸라크는 일라베니아 2 황자의 뒤에서 후광 따위가 비춰지는 것에 잠시 말을
잃어버렸다. 햇빛이 그의 뒤에서 찬란하게 산개하는 모습이 어찌나 신성하고 아름다운지.

“오랜만이군, 재상.”

리카르디스가 그에게 아는 척하자 재상이 호들갑을 떨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다. 덥지는 않으신지,
힘드시지 않으신지, 배고프지는 않으신지. 누가 보면 발타의 왕 힉살라의 종이 아닌 리카르디스의 종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사절단 일행은 곧 궁으로 안내되었다. 무장하고 있던 경비대가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둘러싼 채로 이동했다. 한
나라의 수도답게 높고 화려한 건물들이 많았다. 비록 보이지 않는 안쪽에 빈민가가 위치하고 있어도, 궁으로 가는
길만큼은 반짝반짝하게 잘 닦여 있었다. 하지만 그 풍경을 음미하며 지나가는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랜
숙적의 나라에 발을 들인 만큼 당장 위험하지 않더라도 경계하게 되는 것이었다. 로젤린도 리카르디스의 마차에
말을 가까이 붙여 몰며 주위를 경계했다.

“마카롱 경은?”

레이몬드가 골목을 주시하며 물어왔다. 항상 가까이 붙어서 날던 거대한 독수리가 사라지니 그 공백이 여간 커
보이는 게 아니었다. 로젤린은 잠시 하늘을 한 번 봤다가, 제 가슴을 한 번 내려다보며 우물쭈물했다.

“가까이에 있어.”

레이몬드는 넓은 하늘을 쭉 살펴보았다. 가까이에 있다더니 하늘은 구름 한 점, 독수리 한 마리 없이 푸른빛


일색이었다. 곧 궁의 모습이 보이자 레이몬드는 다시 경계 태세로 돌입했다.

레이몬드를 바라보던 로젤린이 눈동자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가까이에 있는, 정확히는 심하게 가까이에 있는
마카롱이 보였다. 제복과 가슴 갑옷 사이에 들어갈 만큼 작은 생물이었다. 회색 털을 가진 쥐가 쌀알 같은
앞발로 잘 매달려 있었다. 궁 안에서는 독수리 같이 커다란 생물이 활동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리비타에 들어서기 전, 마카롱은 하늘 높이 날아가는 척하며 곧바로 쥐로 변해 그녀에게 돌아왔다. 마카롱은
주머니를 발견해 들어가서는 찍찍, 소리를 냈다.

[다음 편에 계속....]

35 화.

로젤린은 마카롱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발타의 성문이 열리고 경비대와 조우한 이후로 줄곧
눈치채고 있었다.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시선은 차단되었지만 그녀의 감각이 주위의 광경을 그려냈다. 군마
무리, 기사들의 갑주가 철컹이는 소리. 마차의 수레바퀴가 흙 자갈 위를 굴러가는 가운데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불안정하고 난폭한 기운이 주위에 넘실거렸다. 마수 한 마리의 마력이 횃불이라면, 지금 이것은 주위를 온통
뒤덮은 산불처럼 범람해 있었다. 로젤린은 이것과 비슷한 기운을 느낀 적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홍차에 섞여 있던
‘파편’과 ‘마수’ 라 불리는 흉포한 짐승들로부터.

아틸라크라는 재상에게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절단을 둘러싼 경비대 한 명, 한 명이 모두 그 기운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그 탓에 마수가 많기로 유명한 마의 산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진풍경이 그녀의 감은 눈 위로 펼쳐졌다.
이렇게 한곳에 응집해 있을 수 있는 힘이 결코 아니었다. 기괴한 광경을 마주하자 신경 하나하나가 저릿할 정도로
오싹했다. 팔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마카롱이 식겁해서 계속 무어라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마카롱 또한
이렇게 마력이 응집되어 있는 경우는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로젤린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타의 많은 백성들이 사절단 일행을 구경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다행히도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저 경비대가 특수한 집단인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불안한 마음에 리카르디스의 마차 근처로 말을 바싹 붙여 몰았다. 마차를 끌고 있는 말들이 푸르릉,


소리 내며 성질낼 정도였다. 마카롱이 말의 투레질 소리를 듣고 얼른 주머니에서 기어 나와 말들에게 삿대질하며
화냈다. 늙은 할머니랑 살았다더니 욕하는 솜씨가 남달랐다. 찍찍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서 로젤린은 마카롱을
다시 들여보냈다. 다행히도 이 상황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발타는 넓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수도의 중앙에 위치한, 화려하기 그지없는 궁에 도착했다. 사절단의 일정으로 1
왕자 하카브와 만나기로 한 것은 이틀 뒤. 오늘은 막 도착한 만큼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틸라크는
사절단을 위해 궁 하나를 통째로 비워 두었다. 기사들이 먼저 리카르디스의 방을 샅샅이 확인하고 나서야 모두가
휴식에 들어 갈 수 있었다.

로젤린도 방을 배정받아 갑옷을 벗고 무구를 손질했다. 갑옷 위에서 마카롱이 계속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쌀알만 한 눈동자가 가느스름해져 깨알만 해져 있는 걸 보니, 성질이 보통 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질적인 마력의 농도가 기분 탓으로 넘길 수 없을 만큼 더욱 짙어졌다. 발타의 궁전을 고요하게 둘러싸고 있는


힘은 그들을 압도하듯이 거대한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이 넓은 궁전 전체가 커다란 마수의 입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로젤린은 검 날을 뽑아 들어 달빛에 비춰 보았다. 검이 날카롭게 빛났다.

“위험하면 도망가, 마카롱.”

찍찍. 마카롱이 그녀를 째려보았다.

“나는 도망 갈 수 없어.”

찌치지지찍! 쥐가 펄쩍펄쩍 뛰었다.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어. 이번에는 반드시.”

이번에는? 마카롱이 물었다. 로젤린은 자신의 입으로 내뱉었으면서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만
했다. 그를 지키는 임무에 실패한 적은 없었는데…… 갑자기 왜 그 말이 튀어나왔을까. 로젤린과 마카롱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해답을 들려 줄 사람은 없었다. 밤이 깊어갔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하얀밤 기사단을 모두 모아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발타까지 오느라 다들 고생 많았네.”

다들 새삼스럽게 왜 이러냐는 둥, 월급 올려 달라는 둥 농담을 했다. 스타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로젤린이


감탄하며 그의 웃는 모습을 바라봤다. 천년 묵은 돌 같던 기사단장의 미소란 제법 희귀했다. 주머니에 들어가
얼굴만 쏙 내밀고 있던 마카롱이 꿈틀거리면서 움직였다. 잘생긴 수컷…… 어쩌고 말했는데 정확하게는 알아듣지
못했다.

“일라베니아로 귀환하는 길에 진정한 위험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이 궁에 발을 들이고 있는 한 어떤 장담도 할 수


없다는 건…… 그대들도 잘 알고 있을 거라 믿네.”
상급 기사들이 예, 하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스타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층 더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어두운 낯빛이었다.

“만일의 경우를 위해 미리 말해 두겠네. 기사단장인 나,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 경. 상급 기사 중에는 파르딕트


경, 카일로 경, 로젤린 경, 헤일 경. 그리고 하급 기사 중에는 네스터 경, 클로드 경, 바스티안 경, 슈텐 경,
아르만 경. 궁에서 전투가 발생할 시, 기사단장 제외 총 열 명의 인원이 2 황자 전하와 5 황자 전하를 모시고
발타의 궁을 탈출한다. 호명되지 않은 기사들은 무력으로 응전하며 탈출을 위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 모두들
언젠가의 맹세를 떠올리며 목숨을,”

바쳐라.

등골을 스치는 서늘한 울림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원의 모두가 몸을 곧게 세웠다. 강한 결의가 두려움을 억눌렀다.
어느 누구 하나 제 처지를 비탄하며 흐트러지지 않았다.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견고한 신념 아래 그들의
맹세가 다시금 새롭게 새겨졌다.

상급 기사 앞에 서 있던 부단장 나단과 그의 부관인 레이몬드가 스타스를 향해 경례했다. 이후 상급 기사 하급


기사 할 것 없이 그들과 똑같이 심장 위에 주먹을 올렸다. 스타스 또한 단단하게 굳어진 부하들을 보며 심장 위에
주먹을 올렸다. 기사단장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정적을 깨며 방안을 울렸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 * *

일라베니아의 사절단 일행이 머무르는 궁에는 많은 눈이 붙어 있었다. 하녀와 하인들, 천장 위, 바닥 아래, 나무


위 등. 그러나 그저 사절단의 동향을 감시할 뿐, 어떠한 살의도 비치지 않았다. 의뭉스러운 타국의 시선은
로젤린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죽여야 하나? 아니, 발타에서는 함부로 사람 죽이면 안 된다고 칼릭스가
그랬는데. 어쩌면 좋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이 행동은 해도 되는 것인가? 아닌가? 헷갈리신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행동하셔야 합니다. 반. 드. 시. 누님과 가깝다거나, 누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반. 드. 시.]

로젤린은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기사단장의 방문을 노크했다. 가까운 사람이라 하면 레이몬드지만, 최근에는 같은
집단 내에 있으면서도 거의 마주치지 못했다. 사절단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는 걸 봤을
뿐이었다. 이후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군가 생각해 보았더니 기사단장 모습이 딱 떠올랐다.

“들어오게.”

임시 배정된 기사단장실에 들어가니 스타스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도 많았다. 부단장 나단과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
상급 기사 몇이 지도를 펼쳐놓고 무언가를 회의 중이었다. 레이몬드가 눈웃음치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로젤린도
살짝 웃었다.

“무슨 일인가, 로젤린 경?”

로젤린은 머뭇거리다가 기사단장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생각보다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스타스는
답지 않게 당황했다. 레이몬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로젤린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봤다. 언제든지 달려가서
로젤린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는 비장한 눈빛이었다.

로젤린이 스타스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듯 한쪽 손으로 입을 가렸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쭉 내밀어서 그 근처에
귀를 두었다. 그녀가 어떤 폭탄 발언을 할지 매우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배가 고픕니다? 내일 아침은 뭐가 나옵니까? 집에 돌아가도 됩니까? 뭐가 나와도 상사의 귓가에 남모르게 속삭일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쭉 빼고 있어서 조금 흉한 몰골이 되어 버렸지만 그 덕에 그녀가 하는 말을 전부 엿들을 수


있었다. 곁에 서 있던 부단장 나단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레이몬드를 쳐다보았다. 아이를 과보호하는 부모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사이 로젤린의 질문이 레이몬드와 스타스의 귓가로 흘러들어 갔다.

‘궁을 주시하는 자들이 있는데 죽여도 됩니까?’

“…….”

“…….”

스타스는 조용히 음…… 하며 신음하더니,

“안 된다.”

라고 했다. 레이몬드도 “안 돼, 로젤린.” 하고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로젤린은 칫,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어지간히도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름 평화 사절단이라는 이름으로 방문한 상태였다.
발타에서 전쟁을 일으킬 만한 명분을 일라베니아 측에서 먼저 제공할 수는 없었다. 궁을 주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이쪽에서 먼저 그들의 목숨을 끊으면 도리어 사절단 쪽의 입장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지금은 인내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로젤린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기사단장의 귀로 돌진했다. 레이몬드도 다시 그 공간 사이에 파고들었다.


아까보다 더 가까운 거리였다. 부단장 나단은 전보다 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까?’

“안되네.”

“안 돼!”

전혀 알아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로젤린의 볼이 부루퉁해졌다. 그녀는 기사단장과 레이몬드에게 혼났다.


절대, 절대 절대로 손끝 하나 대지 말라고, 먼저 덤벼 오지 않는 한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로젤린은 그 짧은
사이에 ‘절대’와 ‘안 된다’라는 말만 수십 번을 들었다.

그녀는 결국 수긍의 표시로 고개를 위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들 사이에서 커다란 한숨이 나왔다. 어찌
되었거나 궁을 지켜보는 시선을 눈치챈 일만은 칭찬할 만했다. 로젤린은 기사단장에게 눈의 위치를 낱낱이 알려
주고 방을 나섰다.

[다음 편에 계속....]
36 화.

로젤린은 돌아가는 도중에 리카르디스의 방에 한 번 더 들렀다. 검만 안 들었다 뿐이지 사방에 적이 포진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경계심은 늦춰질 새 없이 단단해져 갔다.

“실례합니다, 전하.”

로젤린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리카르디스는 상의를 벗은 채, 하의마저도 막 벗고 있던 중이었다. 방 안에


같이 있던 상급 기사들과 잇세리온은 로젤린의 기습에 쩍 굳었다. 리카르디스의 인상이 사나워졌다. 그가 한 자
한 자 씹어 먹을 듯이 이를 갈며 말을 내뱉었다.

“나가.”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안을 쭉 둘러보며 이상한 점은 없는지 구석구석 살폈다. 방 안에 있는 상급 기사들만


죽을상을 했다.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골반쯤에 걸쳐진 바지를 붙잡고,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한참을 둘러본 로젤린이 꾸벅 인사하고 나가자마자 리카르디스는 제 옷을 패대기쳤다. 진짜 저 기사를
내가 진짜…….

* * *

방으로 돌아갔지만 마카롱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회색 쥐를 찾기 위해 침대 밑, 이불 아래, 창문 틀, 물 컵


안 등등을 살폈다.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몇 시간 전에 궁을 뒤덮은 난폭한 마력을 살펴보겠다고 방을
나섰는데, 해가 진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마카롱을 찾으러 가기로 결심했다.

현재 리카르디스를 호위하고 있는 인물들은 뛰어난 실력을 가진 상급 기사들이었다. 더군다나 발타의 왕궁이라는


위치적 특수성 때문에 호위 인력은 평소의 배로 불어난 상태였다. 로젤린은 안심하고 잠시 그의 곁을 떠나 있을
수 있었다.

“마카롱.”

복도에서 한참을 돌아다녀 봤지만 궁에 살고 있는 고양이만 몇 마리 발견했다. 자그마한 회색 쥐를 좋아할 것처럼


생긴 고양이들이었다. 불안감이 차올랐다. 로젤린은 걸음을 바쁘게 움직여서 사절단이 머무르는 궁을 벗어났다.

꽃이 피어 있는 화원이었다. 밤의 장막에 가려져 있지만 햇살을 받는다면 오색찬란하게 빛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꽃이나 풀의 냄새가 일라베니아와는 달랐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킁킁 코를 움직여서 냄새를 맡다가 아차하고
목적을 상기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카롱.”

한밤중의 고요한 화원에서 적국의 기사가 마카롱을 애타게 원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봤더라면 매우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한참을 돌아다녔다. 그때 로젤린의 예민한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작은 동물은 아니었다. 일부러 나뭇가지를 밟아 제 존재를 알리고자 하기에,
로젤린은 그 소리의 주인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뒤돌아본 그녀의 시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발타인의 특징인 검은 머리와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낮에 본 퉁퉁한 재상 아틸라크와는 생김새가 매우 달랐다.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다. 둥그렇고 부드러운 눈매에
비해 인상이 사나웠는데, 눈썹이 짙고 골격이 단단해서 그런 것 같았다. 옷 또한 재상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더
화려했다. 바닥에 자락이 끌릴 정도로 더 길기도 했다. 남자는 로젤린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몇 번 걸으니 어느새 로젤린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름다운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군.”

정작 그렇게 말을 꺼낸 남자의 머리카락 또한 검은 색이었다. 로젤린의 머리카락보다 색이 밝아, 빛을 받는다면


흑갈색처럼 보일 것이다. 검은 머리는 일라베니아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 흔한 색 또한 아니었다.
제국 내에서도 ‘와, 검은 머리네요’ 하는 소리를 간혹 들을 정도였으니, 발타인의 입장에서는 희귀하게 생각
될 법도 했다. 남자는 로젤린의 검은 머리카락이 흥미로운지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하얀 제복 위에서 떠돌았다. 수놓아진 하얀밤 기사단의 문양을 발견한 남자가 웃었다.

“황자의 기사인 것 같은데…… 제법 멀리까지 나왔군. 그대, 이름은?”

하대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남자가 발타의 높은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그녀의 추측이 힘을 얻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

“강인해 보이는 좋은 가문 명이야. 이름도 예쁘고.”

“감사합니다.”

이렇게나 짧은 시간 안에 연달아 칭찬하는 사람은 칼릭스와 레이몬드 이후로 처음이었다. 좋은 사람인 건가? 한데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로젤린의 본능이 남자를 경계했다. 남자는 로젤린이 껄끄러워 하는 기색을
눈치챈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힉살라 아돈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다.”

로젤린도 아는 이름이었다. 발타의 1 왕자. 병환을 앓고 있는 발타의 왕을 대신해서 실질적인 통치를 하는


능구렁이 같은 자라고 했다. 능구렁이라는 주석은 리카르디스가 달았지만, 칼릭스나 레이몬드도 비슷한 평가를
했다. 많은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이는 무서운 사람이라고도 했다.

‘…….’

로젤린은 마주한 남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무섭다기보다 기묘했다.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왕자가 웃는 모습에 로젤린은 급하게 상념에서 깨어났다. 여태껏 빤히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왕자라고 했지. 혹시 그가 왕자라고 밝히기 이전에 무례를 저질렀던가? 이것은
어떤 사고의 한 종류가 아닌가? 로젤린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아닌 듯 했다!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뵙습니다.”

로젤린이 말하며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하카브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다음 행동을 저지했다. 로젤린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곧 하카브의 차가운 입술이 그녀의 볼에 무겁게 눌러졌다. 그는 쪽 하고 일부러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로젤린의 코앞에서 하카브가 씩 웃었다.

“힉살라 아돈의 영혼이 그대와 함께한다.”

아, 발타로 떠나기 전에 레이몬드가 가르쳐 줬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연장자가 그보다 어린
이들에게 먼저 볼에 입을 맞춘다. 이후 받은 사람이 입맞춤을 돌려준다. 가까운 가족뿐 아니라 친구나 사무적인
관계에서 까지 넓게 통용된다고. 하물며는 처음 보는 사람끼리도 볼에 입을 맞춘다고 하니, 일라베니아로 치면
그저 악수를 하거나 손을 흔드는 인사방법인 셈이었다.

“…….”

로젤린은 눈동자를 또르륵 굴렸다. 기사로서 보이는 정식적인 예우는, 일라베니아 황족 이외에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에 가볍게 묵례를 할 예정이었는데…… 계획이 와장창 다 깨져 버렸다. 이제 어떤 인사를 해야 하지?
일라베니아식? 발타식? 로젤린이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고 있자, 하카브가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 가까이에
얼굴을 살짝 가져다 대는 모습이, 눈치가 없는 로젤린이 봐도 발타 식으로 돌려달라는 얘기였다.

로젤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하카브가 훌쩍 컸기에,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그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하카브가 로젤린에게 맞춰 몸을 조금 숙였다. 남자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오던 참이었다.

“로젤린 경!”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로젤린의 입술은 하카브의 피부를 스치지도 못하고 떨어졌다. 로젤린은
단단하게 안겨있는 상태였다. 남자의 가슴이 등 뒤로 느껴졌다. 막 뛰어 온 듯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귓가에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로젤린의 어깨를 꾸욱 한 번 더 깊게 감싸 안은 후에
풀어줬다.

로젤린은 고개만 살짝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표정으로 하카브를 마주하고 있는 5 황자 디에즈가 보였다.


사절단의 여정이 고단해도 한 번도 찌푸려진 적 없던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그녀의 기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장난이 지나칩니다, 하카브 왕자. 일라베니아의 사람에게 발타의 개방적인 풍습을 따르라니요. 로젤린 경이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개방적인 인사와 개방적이지 않은 인사의 차이를 알지 못했지만, 로젤린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디에즈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제 등 뒤로 쏙 넣었다.

“발타에 오면, 발타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디에즈 황자?”

“저랑은 몇 년을 알고 지내면서도 안하셨던 인사 같은데…….”

“그거야 뭐…….”
가벼운 어조로 얘기를 주고받는 것치고는, 맹수 두 마리가 격돌 직전 탐색전을 하듯 살벌한 분위기였다. 친분이
있다는 관계라 들었는데 그다지 살가워 보이진 않았다. 디에즈가 로젤린의 등을 밀어냈다.

“형님이 찾으시더군요. 먼저 들어가 보세요, 로젤린 경.”

“예.”

떠나는 로젤린의 등 뒤로 하카브가 웃음기 어린 인사를 건넸다.

“또 보도록 하지. 로젤린.”

로젤린은 하카브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화원을 벗어났다. 어쩐지 사람의 발소리가 많이 들리더라니.
쥐 한 마리 찾을 수 없던 아까와는 달리 수많은 인원이 화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디에즈의 심복들도 몇 있었고,
무장한 갈색 피부의 사람들도 많았다. 아마 하카브의 사람일 것이다. 그들의 몸 안에도 광폭한 마력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낮에 보았던 경비대보다 더 많은 양의 마력이었다. 로젤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가슴이 기분
나쁘게 울렁거렸다.

어두운 밤, 궁과 떨어져 있는 작은 화원. 주위를 지키는 사람들. 이 장소에서 디에즈와 하카브는 미리 만나기로
약속했던 게 아닐까. 그녀는 화원을 벗어나 천천히 궁을 향해 걸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예민하게 굴기는.]

[타국의 기사한테 치근덕대지 마세요. 없어 보입니다.]

[밤보다 깊은 검은 머리더군. 아름다웠다. 하얀 피부를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오늘 처음


일라베니아의 미의식을 아주 조금 이해한 것 같기도 해.]

[치근덕대지 말라니깐요.]

두 남자는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 안건으로 한참을 티격태격 다퉜다.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연회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양고기 요리를 올려 달라고 하던 디에즈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엘피디오의 전언입니다.]

주위에 로젤린을 지켜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녀는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디에즈와 하카브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들을 수 있는 반경을 점점 넘어서고 있었다.

이내 그녀의 귓가에는 풀벌레가 찌르르- 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다음 편에 계속....]
37 화.

로젤린은 사절단이 머무는 궁을 향해 급하게 달려가던 도중, 담벼락에서 마카롱과 만났다. 회색 쥐는 달리고 있는
로젤린의 머리카락에 재주 좋게 매달렸다. 그녀의 귓바퀴 뒤에서 마카롱이 찍찍 이야기했다. 궁을 돌아다니면서
마력을 몸에 지니고 있는 자를 많이 보았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데?”

마카롱의 대답에 로젤린은 사나운 얼굴을 한층 더 사납게 만들었다. 방금 전 하카브의 수족들을 보면서 떠올랐던
불길한 예감. 혹시나 이런 자들이 예상보다 더 많은 것은 아닌가? 가늠할 수 도 없이, 셀 수도 없이?

그녀의 추측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마카롱은 짧은 다리로 많은 장소를 돌아다녔다. 경악의 연속이었다. 앞서
마주했던 기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어마어마한 양에 압살 당할 것만 같았다.

마카롱은 선천적으로 마력을 타고나는 마인(魔人)을 만나 본 적 있었다. 마인이 가진 마력의 기운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마력과 매우 흡사했다. 온건하고 조화로웠다. 이렇게나 난폭하게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이 폭주하는
힘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 그들을 단순한 ‘마인’이라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순간 마카롱은 떠올렸다. 붉은 안광을 띄고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공격하는, 그 사나운 짐승들. 마수. 커다란


짐승들조차 감당하지 못한 힘을 한낱 인간이 운용한다고? 마카롱은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마카롱은
감각을 벼려 넓은 궁을 훑어보았다. 밤보다 어두운 기운이 진득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로젤린은 높이 올려 묶었던 머리를 풀었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마카롱이 머리 안쪽에 몸을 파묻고
찍찍 소리를 내며 다 숨었다고 신호했다. 로젤린은 눈앞의 창문을 힘차게 열었다.

벌컥 문이 열리기 바로 전. 호위 기사들은 창밖에 누군가가 있음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검을 빼들고 경계


중이던 그들의 시야로 익숙한 이의 얼굴이 보였다. 로젤린은 날카로운 검 끝을 그저 멀뚱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태도에 호위 기사들이 한숨을 쉬며 짜증냈다. 왜 멀쩡한 문을 두고서 창문으로


들어오고 난리란 말인가. 일단 로젤린의 얼굴이긴 했으나, 검은달이 다른 사람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그들은 로젤린을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발타의 성전을 읽고 있던 리카르디스는 기가 찬다는 듯 그 대치 상황을 바라보았다. 보통 호위 기사를 흉내


내려는 암살자라면, 결코 창문으로 들어오는 수상한 짓은 안 할 것이다. 저건 어느 모로 보나 백퍼센트
로젤린이었다. 리카르디스가 발타의 성전을 뒤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발타에서는 아침밥으로 샐러드만 먹는다더군. 알고 있었나, 로젤린 경?”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로젤린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로젤린은 헉 숨을 들이켜며 제 입을


막았다. 어…… 어떻게…… 그토록…… 잔인한…… 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표정이었다.
“정말입니까? 정말…… 풀만 나옵니까?”

로젤린이 충격에 횡설수설하자 리카르디스가 무심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샐러드.”

호위 기사들이 검을 집어 넣었다. 그녀는 로젤린이 맞다. 음식을 좋아하는 사실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해도,
분위기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저 모습은…… 흉내 내기도 힘들 것이다. 어느 누가 날카롭게
벼려진 검 날이 자신을 향하는데, 태평하게 음식 얘기나 하고 있단 말인가. 심지어는 2 황자 전하의 말이 자신을
시험한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 했다.

“우리는 발타 사람이 아닌 데다가 손님이니 채소만 나오진 않겠지.”

리카르디스는 상황이 종료된 것을 보고 거짓말을 수습했다. 로젤린이 방긋 웃었다. 아침햇살 저리가라 할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상급 기사들이 어처구니 없어하는 사이에, 로젤린이 가볍게 창문을 넘어왔다.

그녀는 방 안에 있던 부단장 나단에게 잠시 구석으로 불려가 혼났다. 창문으로 드나들면 안 되겠지, 로젤린 경?
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급히 창문으로 들어와야 할 만큼 중대한 사항이 있으리라 믿고 있네. 그렇지, 로젤린 경?”

부단장 나단이 은근히 압박을 주었다. 리카르디스도 발타의 성전을 덮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눈동자를
굴렸다. 디에즈 황자의 건 이전에, 발타의 궁에서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이상한 마력의 기운 때문에 불안해졌다.
그래서 무작정 찾아 왔다.

칼릭스는 그녀에게 마력을 감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마인(魔人)이라고 생각되어
어쩌면 하얀밤 기사단에서 제명 될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로젤린은 걸릴
만한 주제는 걸러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카롱을 찾으러, 잠시 밖에 나갔습니다.”

“음……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계속 해 보게.”

“그러가다 이 궁에서 좀 벗어난 꽃밭에 들어갔습니다.”

“단독 행동을 하지 말라는 얘기는 전혀 안 들었다는 건 잘 알겠네.”

나단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도 턱을 괴고 그녀의 얘기를 집중했다.

“뒤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나서, 뒤돌아봤더니 모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힉살라 아돈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라고 했습니다.”

“뭐?!”

리카르디스는 인상 쓰며 버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단은 당황을 숨기려고 애써 보았지만, 콧수염이 씰룩거리며


그의 마음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다른 상급 기사들도 입을 쩍 벌렸다. 갑자기 왜 거기서 하카브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나단은 솔직히 로젤린이 쓸모없는 얘기를 하리라 예상하고서, 이미 혼낼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하카브,
발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인사만 했다고 한들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자가 그대에게 뭐라고 했나! 그대는 그자에게 뭐라고 했어!”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카브와의 우연한 만남. 그것을 계기로 무언가 틀어진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로젤린은 눈동자를 잠시 위로 굴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하카브가 자신에게 했던
말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군.”

방안에 순식간에 싸한 기운이 돌았다. 상급 기사 파르딕트가 제 귀를 후볐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헷갈리는 듯 했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나단은 헛기침을 몇 번 하긴 했지만, 비교적 빨리 평정을
찾았다. 로젤린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왕자가 그렇게 말해서, 제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왕자가 ‘황자의 기사인 것 같은데……
제법 멀리까지 나왔군. 그대, 이름은?’이라고 물어서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

“…….”

“그랬더니 왕자가 ‘강인해 보이는 좋은 가문 명이야, 이름도 예쁘고.’라고 해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

리카르디스는 으으음 하고 깊게 신음했다. 지금 자신이 뭘 듣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카브 그


자식은 왜 남의 기사에게 껄떡대고 있는 거지? 그는 로젤린을 남자로 치환해서 상황을 다시 상상해보았다.

몇 부분이 좀 걸리긴 하지만, 단순히 검은 머리 자체에 대한 호감이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제가 경계하고 있자, 왕자가 ‘나는 힉살라 아돈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다.’라고 소개를 해 왔습니다. 그
전까지 왕자라고 생각 못하고 있었지만 무례를 저지르진 않았습니다.”

로젤린은 무표정한 얼굴로도 매우 뿌듯해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왕자의 소개에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자에게 인사하는 법은 알고 있었군.”

리카르디스는 ‘용케’라는 단어를 겨우 빼고 그녀에게 칭찬 아닌 칭찬 비슷한 걸 했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일라베니아 식으로 인사하려고 했는데, 왕자가 먼저 볼에 입을 맞춰 와서…….”

“뭐?!”

“뭐!”

그 미친놈이! 검은 머리 자체에 대한 호감은 개뿔. 하카브 왕자는 로젤린에게 갖은 수작질을 하고 있는 게


맞았다.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부단장 나단도 애써 유지하던 평정을 깨트렸다. 그놈이 건드릴 여자가
없어서 이 어린애를! 나단이 무섭게 화냈다.

물론 로젤린이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그녀의 행동을 쭉 지켜봐 온 부단장에게는 아이만큼 어리숙하게 느껴졌다.
상급 기사들의 기세도 흉흉해졌다. 발타의 더러운 들개 놈이 감히 우리 동료를 건드려? 심지어는 그게
수작질이라고 인식도 못하는 맹한 애한테!

로젤린은 생각지도 못한 그들의 격한 반응에 말을 멈췄다. 머리카락 안쪽에서도 찍찍찍! 하는 울분에 찬 쥐


울음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찍찍거리는 격한 소리를 콜록콜록 헛기침을 내뱉어서 무마했다. 나랑 떨어져 있던
그 짧은 사이에 대체 어떤 놈팡이가! 마카롱이 분노했다.

로젤린은 티 나지 않게 몸을 움츠렸다. 정확한 분노의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발타식 인사에 대해서 다들 화내는
듯 보였다. 아까 전 5 황자 디에즈 또한, 일라베니아의 사람에게 발타의 개방적인 풍습을 강요하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

로젤린은 하카브에게 발타 식으로 인사를 돌려주려 했던 사실을 조용히 묻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혼날 것
같았다. 위기감을 비료로 삼아 눈치라는 꽃이 피어난 순간이었다.

“또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했지?”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디에즈 황자님이 오셔서 전하께서 부르신다고, 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왔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38 화.

리카르디스와 나단이 한숨을 푹 쉬었다. 다행히 눈치와 생각이 있는 사람이 이후에 일어날 수작질을 막아준
모양이었다. 당연히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부른 적 없었다. 디에즈가 이 맹한 기사를 돌려보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곳을 벗어나는데…….”

“아직도 안 끝났나?”
리카르디스는 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리카르디스를 떠나 있던 건 삼십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사이에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건지 감도 안 잡혔다. 로젤린이 끄덕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디에즈 황자가 하카브 왕자에게 ‘엘피디오의 전언입니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소리를 내어 억지로 웃었다. 그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방 안의 분위기가


송곳처럼 뾰족해졌다. 로젤린은 대충 이해했다. 그는 리카르디스의 적인 1 황자의 전언을 가지고 하카브와
접촉했다. 그런 디에즈가 리카르디스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 할 수 없었다.

로젤린은 문득 머릿속으로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디에즈가 다정한 손길로 제 얼굴에 붙은 꽃잎을 떼어 줬다.
햇빛 아래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걱정했습니다, 로젤린.]

목소리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웠다. 그 안에 호의가 가득 담겨있다는 사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로젤린은 이 상황을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디에즈는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리카르디스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다. 좋은 사람 내 편, 나쁜 사람 남의 편. 마음속에 정해 놓은 확고한 경계선이 있었으나 디에즈는
그녀가 분류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행보를 보였다. 그는 나의 적인 걸까?

“도착한 첫날부터 접촉하다니, 어지간히 급했나보군. 또 다른 말 들은 건 없나, 로젤린 경?”

로젤린은 풀벌레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장악하기 전까지, 점점 작아지던 그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들새의 청력을
빌린 귓가로 두 남자의 얘기가 고스란히 닿았다.

[엘피디오의 전언입니다.]

[이런, 미천한 발타의 아들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실까.]

[‘마력과 독의 결합물이라니, 듣지 못한 것이다.’]

[정확히는 ‘파편’이라고 부르는 독이지.]

[‘마력과 독의 결합물이라니 듣지 못한 것이다. 서로의 앞날을 위해 맞잡은 손이었으나, 진정한 친우로


거듭났다고 생각했다.’]

이후에 하카브가 웃는 소리를 들었다. 진정한 친우라는 부분이 특히 웃긴 듯했다. 디에즈는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순간에도 점점 소리는 작아졌다.

[‘어설프게 쌓아진 신뢰 관계 위에서 어떤 대업을 이루겠는가. 내가 그대를 믿은 만큼, 그대 또한 신뢰를 보여


주길 바란다…….’라고 하셨습니다.]

[말 한번 요란하게 꼬아 대는군. 요지는 해독제가 있냐는 말 아닌가?]

[그렇습니다.]

하카브는 짧게 침묵했다. 기분이 좋은 듯 나지막이 웃는 소리만 그 공백을 메웠다.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로젤린은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해독제는,]
하카브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작아지던 소리는 완전히 멎었다.

[없다.]

찌르르 풀벌레만 우는 밤이었다.

* * *

“위험합니다, 전하!”

어디에선가 로젤린이 날아왔다.

젠장! 리카르디스는 잇새로 욕을 내뱉으며 자세를 잡았다. 한 마리의 나비처럼 날아오는 로젤린을 받아 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쏜살 같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뒤로 넘어갔다. 넘어진 두 사람 옆으로 벌 한 마리가
날아다녔다. 레이몬드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어서 벌을 쫓았다. 정적이 감돌았다.

‘자른다. 일라베니아에 돌아가면 기필코 자른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밑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이 유별난 호위는 어젯밤부터 지속되었다. 로젤린은
혼란스러웠다. 이 거대한 궁을 뒤덮고 있는 이상한 마력 때문이었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한두 군데도 아니었다.
사방에서 넘실댔다.

사물을 관찰하는 뛰어난 눈과 귀. 살기를 포착하는 동물적인 감. 마력을 읽는 ‘그것’의 특성까지. 평소


훌륭하게 공을 쌓았던 로젤린의 능력이 도리어 독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알릴 수도 도망갈 수도 없었다. 먼저
공격을 해 오지 않는 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방패의 역할뿐이었다.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시야와 감각으로 보는 세상이 겹쳐졌다. 이질적인 마력 속의 꽃과 검. 무엇이 위험한지
순간적으로는 판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제 본능을 따라 모든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냥 지나가는 하인.
궁에 사는 고양이. 날벌레. 심지어는 잇세리온과 기사단장 스타스까지.

로젤린이 경계하며 앞을 가로막자, 스타스는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태한 태도보다야 나았다.
경계가 부족하기보단 넘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약간은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이 예뻐 보여서 그냥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넘어갔더랬다. 그 안일한 판단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전하! 위험합니다!”

풀밭에 드러누워 앞발을 할짝거리는 고양이였다.

“전하! 제 뒤로!”

저 멀리서 식사하던 궁의 하인이었다. 로젤린의 외침에 사레가 들렸는지 한참을 콜록거렸다.


“피하십시오!”

바람에 날려 온 나뭇잎이었다. 계속된 과잉 호위에 짜증내던 잇세리온도 이쯤에서 포기했다.

“전하!”

쭉 뻗은 로젤린의 팔이 리카르디스를 막아섰다.

“그만! 제발 그만, 로젤린 경!”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보며 버럭 소리 질렀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양,


발밑의 돌부리를 필사적으로 캐내려 시도할 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자신이 무엇이 된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아흔 살 노인도 아니고 갓난아이도 아니건만 대체 이 기사는!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제복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돌부리에 머물렀다. 마저 제거하지
못해 굉장히 아쉬워 보였다.

“이……!”

리카르디스는 순간 욱했지만 심호흡하며 겨우겨우 제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른 이였다면 괴롭힘의 일종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상대는 로젤린이었다. 모두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다. 잘 알고 있다.
그래, 알고는 있지만…… 과해도 너무 과했다.

“나도 눈이 있어, 로젤린 경. 돌부리는 내가 알아서 피할 테니, 좀…… 그만하지.”

리카르디스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주위에서 사라지라고 하고 싶었으나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몇 분 전,


참다못해 휴식시간을 줘서 억지로 내보냈더니 고작 꿀벌의 출현과 함께 바람처럼 다시 나타났다. 떨어져 있는
시간과 거리에 비례해 그녀의 호위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녀는 얘기에 전혀 집중하지 못한 채 계속 주위를 휙휙 둘러보고 있었다. 경계심이 극도로 높아져 있는


모습이었다.

타국이라서? 오랜 숙적의 땅이라서? 기사단장의 말에 다시금 위험을 깨달아서? 아니면 그녀 혼자만 아는


무언가가 있어서? 짐작만 할 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더 이상 돌아다니다가는 하카브
왕자를 만나기도 전에 로젤린 때문에 혈압이 올라 죽을 것 같았다. 로젤린은 불안한 듯 주위를 더 둘러보았다.
곧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얼른 쫓았다.

* * *

리카르디스는 깊게 잠들지 못했다. 몇 날 몇 밤을 새더라도, 고작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뜨기도


했고, 방 안의 촛불이 꺼진 정도로 일어나기도 했다. 그에게 방심이 허락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방심은 위기로
직결되며, 자는 순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위기는 개인 사정에 맞춰서 찾아오지 않는다. 리카르디스는 어린 나이
때부터 그 사실을 이미 깨우쳤다.

그 결과, 리카르디스는 수면을 취할 때에도 제 무의식을 어슴푸레 인식 할 수 있는 곳까지 끌어올려 둘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누군가에게는 질병이라고 불릴지라도 리카르디스는 흡족하게 생각했다.
리카르디스는 방 안을 감싸는 공기가 미세하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고요하게 흐르던 공기를 가르고 다른 공간에서
바람이 밀려왔다. 부드럽게 천이 스치는 소리에는 풀냄새 따위가 섞여있었다. 누군가가 들어왔다. 리카르디스는
몽롱하게 잠에 빠진 채로 기척을 읽었다.

‘…….’

창문이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알려지지 않은 통로로 온 손님일 것이다. 그럼에도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은 채로 그대로 누워 있었다.

“로젤린.”

“네, 전하.”

리카르디스의 귓가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 또한 전혀 놀랍지 않다는 태도였다. 잠시 끊겼던 대화를
지속하는 듯 자연스러웠다. 리카르디스는 부스스 눈을 떴다. 머리맡에 검은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방 안을
밝히고 있는 불빛이 희미하게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흔들리는 촛불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
리카르디스는 잠결에 벌어진 셔츠를 정리했다

“어디로 들어왔지? 문 열리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천장에 길이 있었습니다.”

“뚫어놓은 발타 놈들이나, 그걸 찾아서 오는 경이나. 재주도 참 좋군.”

“처음에는 창문으로 들어오려고 했는데 파르딕트 경한테 걸려서…….”

혼났습니다. 그녀의 숨겨진 뒷말을 읽었다. 리카르디스는 잠에 취해서 흐리게 웃었다. 이 어두운 밤에도 제 호위
기사들은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 중인 듯 했다. 그 로젤린으로부터 창문을 사수할 정도면.

리카르디스는 그녀에게 굳이 왜 왔느냐, 뭐 하러 왔느냐. 하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내내 유별난


호위를 펼치던 로젤린의 모습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39 화.
로젤린은 여전히 침대 머리맡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복도 밖에서 속삭이는 호위 기사들의 소리와 천장을
통해서 옅게 불어온 바람에도. 그녀는 다른 곳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리카르디스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이지?”

“아침까지 있어도 됩니까?”

“……내일은 피곤할 일이 많아. 휴식을 취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이 늦은 시간까지 극성맞은 호위는 멈출 생각이 없는가 보다. 정성이 나름 갸륵했기에 리카르디스는 나가라는
말을 온건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머뭇거리며 자리를 지켰다.

“전하의 침대 밑에 들어가서 휴식해도 됩니까?”

“…….”

리카르디스는 쩍 굳어 버렸다. 종잡을 수 없는 그녀에게 슬슬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안 돼. 나가.”

리카르디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로젤린은 시무룩한 기색을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러면 저쪽 구석의 소파라도…….”

“안 돼.”

로젤린은 침대 밑, 소파, 옷장, 천장, 탁자 등 여러 곳을 휴식하고픈 장소로 꼽았다. 물론 전부 리카르디스의


반경을 얼마 벗어나지 못한 장소들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되뇌었다. 얘는, 기억상실이다…… 이 기사는…
… 안타깝게도 기억상실이다…… 마음이 아픈 자다…….

그는 자신의 인내심이 이렇게 뛰어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로젤린은 계속된 거절에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봐, 경…….”

“무섭습니다.”

로젤린이 대뜸 입을 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리카르디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절실해 보이기까지 하는


강렬한 감정이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불꽃은 여전히 아른거리며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피어올랐다.

“사람은…….”

로젤린의 말이 점점 작아졌다. 마지막에는 숨과 함께 섞일 정도로 약한 소리가 되었지만, 그마저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은 너무 쉽게 죽으니까요.

리카르디스는 담담한 말 속에 담긴 진심과 두려움을 읽어 냈다. 그의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로젤린은
참 투명했다. 좋은 것은 좋다. 싫은 것은 싫다. 무서운 것은 무섭다. 그녀 자체의 수수께끼 같은 점을 제외하고
본다면, 로젤린은 참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흔들리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밤의 장막이 걷히기 전까지의 시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시간에 누군가를 만난다거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어둠은 위안을 주곤 했지만, 때때로 길을 잃게도 했다. 혼돈을
주관하는 크레안 티다니온의 시간. 그때에는 인간이 두르고 있는 베일이 걷히며 진정한 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했다. 칼날을 무디게 하고 견고했던 방패를 녹슬게 했다.

리카르디스는 후, 한숨을 크게 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손에는 그가 덮고 있던 이불이 들려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리카르디스의 뒤로 로젤린의 열렬한 시선이 따라다녔다. 리카르디스는 소파를 침대 곁으로 끌어 옮겼다.
누워있다면 시선이 마주칠 수 있을 만큼 근접한 거리였다. 그는 긴 소파 위에 베개를 툭 떨어트렸다. 대충 몸을
누일 수 있는 정도의 공간으로는 보였다.

“침대 밑보다야 낫겠지. 로젤린 경, 누워.”

로젤린은 답지 않게 눈치를 보고 있었다. “누우라니까.” 재촉하는 말에 로젤린이 어정쩡하게 눕는 시늉을 했다.


머리가 여전히 공중에 떠 있어서,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이마를 꾹 눌렀다. 그제야 로젤린의 머리가 베개에
안착했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한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에게 이불을 올려 주고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그녀 또한 자신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뭔가 좀 낯간지러운 상황이었다. 가족 이외에 이렇게 눈을 마주치며 침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아마 그녀가 최초였다.

잠시 소란스러웠던 공기가 다시 느슨해졌다. 로젤린은 말 수가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리카르디스 또한 필요할 때


외에는 입을 떼지 않는 편이었다. 조용한 공간 속에 색색 숨 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지만 확실한 타인의
흔적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로젤린이 했던 말이 계속 떠돌았다. 사람은 너무 쉽게 죽으니…….

“…….”

혹시 예전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되찾은 것일까. 그녀는 여전히 어린 동물처럼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약한 불빛에
비친 녹색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났다.

“아.”

돌연 로젤린이 소리를 냈다. 턱 아래까지 이불을 덮고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리카르디스가 의아해 할 찰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리를 한껏 죽인 작은 목소리였다.

“전하, 들리십니까?”

“……?”

“밖에 파르딕트 경이…….”

리카르디스는 귀를 쫑긋 세웠다. 창문 밖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들렸지만,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아까 전에 창문으로 들어가려던 로젤린 경을 막았다며, 레이몬드 경에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

마흔 넘은 아저씨 수준하고는…… 리카르디스는 말을 삼켰다. 로젤린은 잔뜩 들떠있었다. 퍽 의기양양해


보이기도 했다.

“저는 여기 있는데.”

로젤린은 흥, 콧김을 불었다. 나쁜 짓 하는 어린아이 같은 반응이었다. 배덕에서 오는 흥분을 한껏 즐기는


모양새였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리카르디스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걸리면 분명 혼날 텐데, 뒷일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얼른 자기나 해.”

“네. 좋은 꿈 꾸십시오.”

“…….”

누군지는 몰라도 예의범절을 잘 가르쳤나 보다. 잠들기 전 인사를 들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이없기도,


웃기기도 해서 리카르디스는 평소보다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그래, 그대도 좋은 꿈을.”

고요히 시간이 흘렀다. 리카르디스는 막 잠에 빠지려는 순간,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는 손길을 느꼈다. 경,
제발 그만 좀…… 잠에 취해 어물어물 말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불에 폭 감싸인 채 잠에
빠져들었다. 모처럼 깊고 편안한 꿈을 꾸며.

* * *

“약 구백 명 정도의 사망자가…….”

“아니지, 아니야. 로젤린. 구백 서른하고도 둘이야. 로젤린에게 불리지 못한 서른 두 명의 기사가 얼마나


슬퍼하겠어?”

옅은 하늘빛의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눈앞에서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녀의 손에는 서류 몇 장이 들려


있었다. 이번에 일어난 검은달과의 전투 보고서였다. 그런 살벌한 정보가 어린 황녀 전하에게 들어갈 리 없었다.
그녀의 오라비, 리카르디스 전하의 집무실에 놓여 있던 서류를 몰래 읽은 것이었다. 들키면 혼나실 텐데.
리카르디스 전하는 어린 여동생에게 한없이 약했다. 투쟁뿐인, 매일매일 싸워 버텨야 하는 모습을 감추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탁상 위에 돌려놓지 않으시면 리카르디스 전하께 혼나십니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소녀는 움찔 몸을 굳히더니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서류는 슬그머니 탁자 위에


놓여졌다. 나는 그녀의 완전 범죄를 돕기 위해 서류의 위치를 조정했다. 조금 더 왼쪽에 있었고 각도도 달랐다.
세심함을 발휘하고 있는 사이, 그녀는 의자에 풀썩 앉았다. 자그마한 체구 때문에 몸이 쏙 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커다란 의자 위에서 발을 까딱거렸다.

“로젤린은 전쟁에 나가 본 적 있어?”


“네. 후방 부대였지만요.”

소녀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전쟁이라는 단어가 두려운 듯했다. 모름지기 전쟁터란 피와 살점,
절망만이 난무했다. 소녀는 미지의 광경을 가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나쁜 기억이라도 남아 있을까
염려되는 듯 더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제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무섭네.”

의아한 눈길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우울해 보였다.

“사람이 너무 쉽게 죽는 것 같아 무서워.”

그녀도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많은 얘기를 들어왔을 것이다. 일라베니아와 검은달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한지.
리카르디스 전하가 이복형제 엘피디오와 사이가 얼마나 나쁜지. 여태껏 제 오라비에게 얼마나 수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는지.

심지어는 황실의 험악한 분위기 때문에 별장으로 피신하듯 내려온 상황이었다. 그녀의 불안은 당연했다. 나는
황녀 전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녀는 손길을 즐기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걱정 마세요, 황녀 전하.”

“응.”

“제가 지켜 드릴게요.”

세티스티아 황녀는 안전할 것이다. 자만심은 아니었다. 내가 입고 있는 하얀 제복. 하얀밤의 주인은 언제나
승리만을 이끌어 왔다. 다소 피해가 있을지라도 그는 언제나 승리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믿음은 절대적인 승리자에게 속해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대단한 분이었다. 심지가 굳고 고결한 분.
사방에 적이 도사리고 있는 황실에서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일어섰다. 안타까움과 자랑스러운 마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교만한 망상일지도 모르겠지만 감히 바라건대, 언젠가 그분께서 흐트러지는 순간이 온다면…
… 의지할 수 있는 기사로 성장하여 곁을 지켜 드리고 싶다.

“제가 꼭 지켜 드릴게요.”

소녀는 히히 웃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이 간지러운 건지, 내 말이 기쁜 것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나도 소녀를 마주 보며 웃었다.

숲속 깊은 곳의 별장.

그 3 층에 위치한 리카르디스의 집무실.

세티스티아 황녀가 발을 까닥이던 장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새벽에 온 파발마. 황자 전하와 비서관이 얼굴을 찌푸리고,

어린 소녀는 불안함에 내 옷자락을 말아 쥐었다.


리카르디스 전하, 급히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미안하다, 세티스티아. 먼저 떠나야해. 너는 예정대로 내일 출발해.

……

내 마차를 두고 갈 테니 너는 편안하게…….

다시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보슬비가 내리는 숲속. 마차가 덜컹이며 달렸다.

“저기에 2 황자가 있다!”

“죽여라!”

“흰색 마차다!”

화살이 쏟아졌다. 사나운 금속의 마찰음이 빗소리를 뚫고 공간을 가득 메웠다. 마차는 벼랑 위를 필사적으로
달렸다. 커다란 돌덩이가 좁은 길을 덮쳐 왔다.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시야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나는 소녀를
끌어안으며 정신을 잃었다.

[다음 편에 계속....]

40 화.

“로, 로젤린…….”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 어…… 으…… 온전하게 형태를 갖추지 못한 신음소리만 새어 나왔다.


반파되어 있는 마차 내부에는 피 냄새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무, 사해서 다행이야…….”


날카롭게 부서진 마차의 파편이 소녀의 복부를 관통해 있었다.

아아아아악!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명인지 울음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의, 아니
로젤린. 그녀의 목소리였다.

[무섭네. 사람이 너무 쉽게 죽는 것 같아서, 무서워.]

소녀가 했던 말이 떠오르며 과거와 현재의 공간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로젤린은 소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웃고 있었다. 햇살이 따듯하게 쏟아지고,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공기는
포근했다.

[걱정 마세요. 황녀 전하.]

“부탁……이, 야. 오빠를…….”

[제가 지켜 드릴게요.]

* * *

로젤린은 동이 터오기 직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밤의 꿈이 뒤숭숭했던 탓인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든 리카르디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꾼 꿈이 ‘로젤린’의 기억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로젤린은 말라붙은 눈물을 대충 손으로 쓸었다. 인간으로서의 첫 눈물은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 속에 흘러갔다.

로젤린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서다가 호위 중이던 레이몬드와 마주쳤다. 2 황자의 방. 새벽. 심지어는
창문에서 남몰래? 레이몬드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한 바가지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나, 나는…… 널 그렇게 안 키웠다, 로젤린!”

잔소리가 길어질 듯했다. 로젤린은 그 기미를 읽어 내고는 잽싸게 도망쳤다. 바람과도 같은 빠르기였다.
레이몬드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뒷목을 잡았다.

방으로 돌아가니 찻잔 안에서 자고 있던 마카롱이 부스스 눈을 떴다. 검은깨같이 작은 눈이 깜박거렸다.


포동포동한 배 위에는 먹다 남은 옥수수 알갱이의 부스러기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이놈의 기지배…… 너
밤늦게 싸돌아다니고…… 그러면 안 돼…… 찍찍거리는 소리가 잠에 늘어졌다. 바깥을 쳐다보니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회담은 대부분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주로 여러 세력이 모이며, 각자의
이익을 위해 칼 대신 입을 휘두르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발타의 회담은 긴장감 가득한 대부분의 나라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 겉으로 웃으며 속으로는 칼날을 가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분위기가 판이했다.

금과 다양한 색료로 화려하게 치장된 연회장은 수천 개의 등불과 촛불로 환하게 밝혀졌다. 수백 명이 있다면 그
수백 명의 다른 입맛을 모두 충족시킬 만한 온갖 진미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흥겹기도 한 노래 소리
가운데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축제나 연회라고 봐도 손색없었다.

하지만 이런 자유분방한 회담에도 공통적인 부분은 있었으니, ‘회담장 내부에서는 무기 소지가 불가하다.’라는
점이었다. 나라의 중대사가 오가며 국가의 주요 인사들이 모이는 장소인 만큼 위험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하카브 왕자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라베니아의 사절단, 전원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무기소지를
허가한다고.”

이례적인 일이었다. 기사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언제 어디서든 무기 소지를 허가? 하카브는 오늘 있는 회담을
염두에 두고 얘기한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는 고작 몇 시간 전의 갑작스러운 통보라니. 더욱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비죽대며 웃었다.

“그 좋은 성격이 어디 갔나 했지. 괜한 동요를 일으키려는 수작이다. 모두 신경 쓰지 마라.”

리카르디스의 태평한 태도에도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은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무기 소지를 허용하다니.
예상 못한 위험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혹시 회담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인가? 또는 무장을 빌미로
걸고넘어지려 한다던가. 하카브 왕자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사절단 일행의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의 계산속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대책을 의논할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끼고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가 파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 이상 우습게 보이는 건 좀…… 기분 나쁘군. 리카르디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회담장에 들어가는 모든 인원은 무장을 해제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다들 허리춤에 매어놓은 검집을 풀었다. 로젤린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들고 가도 된다는데 대체 왜


무장을 해제하라는 건지. 그녀는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느리게 검을 내려놓았다.

“로젤린 경.”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불렀다.

“네.”

“부츠 안에 있는 무기도 빼야지.”

로젤린이 부츠 안에서 슬그머니 단검 두 개를 꺼냈다.

리카르디스에게는 사실 고민할 거리도 아니었다. 하카브는 다른 사람을 제 손 안에서 쥐락펴락 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별 의미 없는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로 다른 이들을 흔들고, 그 모습을 즐기며 지켜봤다.
엘피디오는 그 성격을 개 같다고 했고, 리카르디스는 엿 같다고 표현했다.

“흔드는 대로 쉽게 흔들리면 쓰나.”

잇세리온은 감명받은 표정이었다. 이 어찌나 대담한 분이신지……!

리카르디스는 말없이 앉아 있는 디에즈를 쳐다보았다. 디에즈는 그의 결정에 옹호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흐르면 흘러가는 대로 물 위에 떠있는 나뭇잎 같았다.

문이 달리지 않은 연회장은 아치형의 모양으로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에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재상 아틸라크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일라베니아의 사절단이 회담장에
도착했노라, 우렁차게 알리는 소리와 함께 리카르디스는 빛나는 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하카브 왕자가 입구 쪽으로 걸어왔다. 금사로 수놓인 튜닉 위로 바닥까지 끌리는
기다란 천을 겹쳐 입은 차림새였다. 온갖 장신구가 그의 팔과 귀에서 빛나고 있었다. 하카브는 사람 좋은 미소로
사절단을 환대했다. 긴장해서 억지 미소를 걸고 있는 사절단 일행과 다르게 정말로 기분 좋아 보였다.

하카브의 시선은 리카르디스의 뒤를 향했다. 그는 하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들의 허리쯤. 기사단이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하카브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피디오였다면 분명 이런저런 무기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왔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역시 이쪽이
훨씬 번거롭겠어.

“먼 길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일라베니아의 귀빈 여러분. 저는 힉살라 아돈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입니다.”

회담의 포문을 여는 인사에 리카르디스 또한 정중하게 응대하려 했으나, 하카브가 다가오는 게 먼저였다. 그는
거침없이 리카르디스를 향해 걸어왔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하카브를 막아섰다.

“스타스 경.”

리카르디스가 낮게 그를 불렀다. 스타스는 까닥 묵례하고 다시 물러섰다. 발타인의 대화 거리는 일라베니아인보다


훨씬 가깝다. 또한, 발타의 1 왕자 하카브는 그렇게 아둔한 인물도 아니었다. 회담장에서 갑자기 칼을 빼 들고
일라베니아의 황자를 해하려는 시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스타스는 이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수를 했다.
하카브가 회담 직전에 사절단 측을 흔들어 놓은 장치가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검은 머리의 왕자는 기분 좋은 듯
눈웃음을 지으며 스타스를 스쳐 지나갔다.

리카르디스의 주위로 호위가 허물어졌다. 하카브는 웃으면서 한 걸음 더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발끝이 서로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너무 가깝지 않나? 리카르디스조차도 인상을 굳힌 순간이었다.
하카브가 리카르디스의 한쪽 어깨에 제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아.”

로젤린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카브 왕자가 어떤 행동을 할지 깨달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왕자의 얼굴이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쪽.

공간을 메운 음악 소리를 뚫고 리카르디스는 들었다. 고막에 생생하게 박힌 그 소리를.

느꼈다. 볼에 꾹 눌러진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을.

그는 굳은 고개를 으드득 돌렸다. 하카브 왕자의 얼굴이 바로 한 치 앞에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머리는 평소와
달리 둔하게 돌아갔다. 그러니까, 방금, 내, 볼에. 이 왕자가…….

“꼭 뵙고 싶었습니다. 리카르디스 황자.”


하카브는 열세 명의 후궁에게 두루 사랑받는다는 소문을 입증이라도 하듯, 근사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리카르디스는 얼굴을 파삭 구겼다. 디에즈도 드물게 눈살을 찌푸렸다. 볼에 입을 맞추는 인사는 발타의
풍습이었다. 간혹 타국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면 하는 경우가 간혹 있긴 했지만……
단 한 번도 중요한 회담자리에서, 심지어 타국의 사자에게 행해진 적은 없었다.

하카브 왕자의 돌발행동에 회담장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악기를 연주하던 악단도 살짝 삐끗했다. 하지만 곧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발타의 귀족들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발타의 왕자가 이렇게까지나 일라베니아의
사절단을 반기고 있다. 진의가 무엇이건 간에, 그는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알아 두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사절단도 왕자의 뜻을 알아들었다. 몇백 년간 싸워 온 앙숙의 나라였지만 그 중심부에 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발타의 왕족, 귀족. 어느 누구도 적대감의 흔적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능숙하게 속을 가리는
웃는 얼굴이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 되는 것 보단 훨씬 나았다. 애정
어린 인사를 받은 리카르디스 황자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여하간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화기애애했다.

[다음 편에 계속....]

41 화.

연회 같은 회담은 잘 진행되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일라베니아 사절단 측과 발타의 왕자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하카브 왕자는 사절단의 말을 경청했다. 검은달이 일라베니아에게 행하는 횡포에 크게
분노하기도 했고 검은달이라는 집단을 발타에서 뿌리를 뽑겠노라 다짐하기도 했다.

“보다 강한 신뢰로, 보다 더 굳건한 동맹을!”

하카브가 잔을 높이 들었다. 연회장의 모두가 그를 따라 잔을 들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으며 그와 건배했다. 챙.


유리가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 속,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고요한 탐색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 *
곧이어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일라베니아의 사절단은 회담이나 연회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음악이 좀 더 흥겨워지고 술의 도수가 미세하게 높아진 것을 눈치챘다. 사절단은 완벽하게
경계를 풀지는 않았으나 그들 나름대로 틈틈이 먹고 마시며 풀어진 분위기를 즐겼다.

리카르디스는 많은 왕족과 귀족을 만났다. 몇째 아들, 몇째 딸. 누구의 친척, 누구의 팔촌, 누구의 이웃사촌.
리카르디스는 살짝 웃는 얼굴로 차분하게 응대했다. 한구석에서 아가씨들이 삼삼오오 모여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이 유독 리카르디스를 향해 있기에 로젤린은 잠시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안주가 따로 없네, 따로 없어.”

“술맛 끝내 준다.”

듣긴 했는데……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술과 음식이 맛있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로젤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신경을 돌렸다.

로젤린은 여전히 리카르디스의 한 걸음 뒤에서 졸졸 따라다녔다. 잇세리온이 이젠 좀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야 할 일이 많은 리카르디스는 여기저기 부지런히 돌아다녔고, 로젤린은 배가 고팠다. 몇 시간째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의 뒤를 쫓고 있는 상황이라 심각하게 허기졌다. 심지어 처음 보는 음식들이 천지에
널려있는 공간이었다. 여기는 훈제한 고기가 쌓여 있고, 저기는 꿀에 절인 과일이 반지르르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흘끗흘끗 음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열망이 타올랐다. 배가 부르더라도 입에 욱여넣고 싶을
정도였으니, 배가 고픈 지금에서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위험한 곳에서 리카르디스의 곁을 떠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헉헉…… 헉 가쁘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폐 깊숙이 음식 냄새라도 간직하기 위해.

“……이봐, 경…….”

리카르디스는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흠칫 놀라서 돌아보았다. 로젤린이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는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식은땀도 나는 듯 했다. 대체 뭘 얼마나 먹고 싶기에…….

“예, 전하.”

“식사하고 와. 아무도 경에게 굶으라고 말한 사람 없어.”

“아닙니다. 곁에 있겠습니다.”

로젤린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는 듯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손끝이 그녀의 의지를 배반하고 잘게 떨리고 있었다.

“…….”

웃기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리카르디스는 기사 몇 명을 더 불러 모아 아까보다 촘촘하게 호위망을 구성했다.

“이 정도면 위험할 일 없으니 이만 가봐. 어떤 사태가 올지 모르는 거고,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야지.”

로젤린은 머뭇거렸다. 그녀는 “그럼…….”이라는 말로 운을 띄우며 기사 두 명을 콕콕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이 두 명은 빼고, 파르딕트 경과 카일로 경으로 대체해 주시면 잠시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에게 손가락질 당한 두 명은 하급 기사였다. 실력을 영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지목당한


바다협곡의 네스터가 우울한 표정으로 곧 파르딕트와 카일로를 불러왔다. 그들은 불려온 이유를 건네 들었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로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젤린은 음식을 먹으러 가는 와중에도 열두 번 정도 뒤돌아봤다. 리카르디스는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인내심은 딱 여기까지였다. 열세 번째로 그녀가 뒤를 돌아봤을 때, 열 받은 리카르디스가
레이몬드를 소환했다.

“가서 저 문제아에게 음식을 좀 먹이고 와!”

“……예, 전하…… 저희 애가 원래는 이러지 않는데…… 심려 끼쳐 드려 매우 송구…….”

“가!”

레이몬드는 면구스럽다 듯 고개를 꾸벅꾸벅 숙인 후에, 곧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로젤린은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무어라 말하며 열네 번째로 리카르디스를 돌아보았다. 리카르디스가 뒷목을 잡기 직전,
레이몬드가 근처에서 먹기 좋은 크기의 음식을 집어 그녀의 입에 확 집어넣었다. 로젤린의 표정이 스르르 풀렸다.
레이몬드는 흐물흐물해진 로젤린의 손을 잡고 음식이 쌓여 있는 테이블로 이끌었다. 과연 로젤린을 다루는데
일가견이 있는 훌륭한 솜씨였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식사 수발을 착실히 수행했다. 새로운 음식 위주, 고기 위주, 달콤한 것 다음에는 짭짤한
음식, 그리고 다시 달콤한 것의 법칙을 지켜서 음식을 가져왔다. 여자 기사들에게서 맛있게 먹는 방법을 배워
왔다고 했다. 로젤린은 신문명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법만 지킨다면 끝도 한도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 음식에 심취해 있는 중, 익숙한 목소리가 로젤린의 귓가에 들려왔다.

“좋은 밤입니다. 즐기고 있습니…… 있네요, 로젤린.”

“네.”

“즐기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려 했지만, 그녀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디에즈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음, 굉장히
즐기고 있구나…….

레이몬드가 흐리게 웃으며 디에즈를 맞았다.

“여독은 좀 풀리셨습니까, 전하?”

“나야 편하게 앉아서 마차 여행을 했을 뿐인데요. 고생은 여러분들이 전부 했지요.”

“술은 과하게 드시지 마세요. 누군가가 억지로 권하면 마시는 척…… 하면서 손수건에 뱉으세요.”

디에즈가 푸하하 웃었다.

“알았다니까요. 걱정이 과합니다, 레이몬드.”

로젤린은 치즈와 고기가 켜켜이 쌓여진 음식을 먹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디에즈와 제법 허물없는
사이처럼 보였다. 그녀의 의문에 찬 눈빛을 읽은 건지 레이몬드가 답했다.

“아, 디에즈 전하와 나는 어렸을 때 같은 가정교사를 두고 있었거든. 그때부터 좀 친했지. 너는 내 수습 기사일


때부터 디에즈 전하와 알며 지냈고. 셋이 자주 놀러 다녔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하와 네가 도서관에 갈 때
…… 내가… 억지로 끌려갔었지…….”

레이몬드는 먼 옛날을 생각하는 듯 아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디에즈는 “맞아, 그랬었죠. 생각난다.” 하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그리고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로젤린의 접시 위에 양고기를 올렸다.

“이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양고기를 버터에 구웠다가 각종 향신료와 채소를 집어넣고 오랜 시간


삶는다고 하더군요. 드셔 보세요.”

“감사합니다.”

로젤린은 냄새를 먼저 맡은 후 고기를 입에 넣었다. 일라베니아에서 만났을 때부터 양고기 타령을 하더니, 대체
어떤 맛이기에?

“……!”

로젤린은 척추를 관통하는 짜릿한 미식의 감각에 온몸의 힘이 풀릴 뻔 했다. 과, 과연. 발타의 전통요리! 그녀의
미각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맛이었다. 결결이 스르륵 찢어지는 식감. 쫄깃하지만 질기지는 않고, 촉촉하지만
느끼하지는 않았다. 육즙과 채즙이 농축된 짭짤함과 달콤함. 양념의 배율 또한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맛과 함께 향신료의 강렬한 감각이 어우러지며 그녀를 이성을 흔들었다. 로젤린의 눈에 환희가
서린 것을 본 디에즈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맛있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디에즈는 흐뭇해하며 양고기가 담긴 접시를 두 개 더 들고 와 그녀에게 건넸다. 로젤린이 볼이 불록해질 정도로


음식을 밀어 넣는 모습을 지켜보던 디에즈가 아차, 하는 소리를 내었다.

“이것과 잘 어울리는 발타의 술이 있는데, 그걸 꼭 같이 먹어야 하거든요. 그걸 같이 마시지 않으면 호렘보를


먹지 않은 것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 호렘보는 그 요리 이름이에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로젤린.”

디에즈가 연회장을 가로지르며 후다닥 뛰어갔다. 레이몬드가 그의 뒤로 소리 질렀다.

“뛰면 넘어지십니다, 전하! 조심하세요!”

디에즈는 자신의 나이가 세 살이 아니라 스물세 살이라는 얘기를 하더니 사람들 사이로 쏙 사라졌다. 로젤린은
냠냠 고기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사이 좋아 보여.”

“그렇지 뭐. 좀 불경스럽게 표현하자면 소꿉친구 같은 거니까.”

“2 황자 전하의 적인데도?”

레이몬드는 음료를 마시던 행동을 우뚝 멈췄다. 짧게 한숨을 내뱉은 그는 시끄러운 연회장을 잠시 둘러보았다.
시선은 날카롭지 않았고 그저 목적 없이 부유했다. 경계가 아닌 생각을 환기하기 위함인 듯 보였다. 로젤린이
고기를 다 먹을 쯤, 레이몬드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 로젤린. 내가 이래 보여도 공과 사는 잘 구분하는 편이거든.”

레이몬드가 제 가슴을 툭툭 쳤다.

“언젠가 필요하다면, 저분이 나아가는 길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만큼 위험해 진다면.”


레이몬드는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로젤린의 입가에 묻은 양념이 그의 손수건에 닦여 나갔다.

“그때는 내가…….”

레이몬드가 빙긋 웃었다. 우는지 웃는지 모를 미묘한 표정이었다.

“아, 왜 이렇게 안 닦여. 고개 살짝 들어 봐 로젤린.”

레이몬드가 인상을 쓰며 손수건에 물을 묻혔다. 로젤린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하도 닦아 내어 입가가 쓰릴


정도였다.

[다음 편에 계속....]

42 화.

“경계는 하되 너무 미워는 하지 마, 로젤린. 외로운 분이시니까. 어렸을 적에 전하가 기거하시던 백옥 성이 불타


버린 사건이 있었어. 두 살 밑의 왕자 전하와 전하의 어머니이신 황비 전하까지 전부 이델라브힘의 품으로
돌아가셨지. 전하만 창문에서 뛰어내려 가까스로 살아남으셨어.”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로젤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이몬드는 그런 그녀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봤다.

“이후에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리셔서 몇 년간 요양하셨는데…… 성으로 돌아올 쯤엔 아무도 손 내밀어 주지


않았어. 모든 걸 잃어버린 5 황자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그때 디에즈 전하를 거둬들인 분이 엘피디오
전하야.”

“실어증은 어디가 아픈 건데?”

아. 레이몬드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잠시 말을 못하게 되는 병이야. 로젤린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술 석 잔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오는 디에즈가 보였다. 그는 그늘 한 점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엘피디오 전하의 세력이 훨씬 컸으니까. 또 그때의 리카르디스 전하께서는 누군가를 품어 줄


만한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냥, 그렇게 알고만 있어 로젤린. 티 내지 말고. 괜히 더 위해 주려고도
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응.”

레이몬드가 씩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착하다.”

그는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레이몬드와 마주하던 시선을 돌리니 디에즈가 막 당도해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얀 얼굴 위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두 사람에게 잔을
건네었다. 색 없이 투명한 술이었다.

로젤린이 디에즈에게 먼저 건배했다. 쨍 하는 맑은 유리 소리가 울렸다. 레이몬드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하급자는 상급자한테 먼저 그러는 거 아니야 로젤린…… 조금 이따가 일러둬야 할 것 같았다. 디에즈는 잠시 놀란
표정을 했다. 하지만 곧, 황금색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을 가득 담으며 환하게 웃었다.

* * *

매일 매일이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연회는 삼일이나 계속되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리카르디스와 하카브는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록 무의미한 대화들만 오고가는 지루한 시간이었을지언정,
겉으로 볼 때에는 탄탄한 관계를 쌓고 있는 과정처럼 보였다. 호위하던 로젤린도 하카브를 자주 보긴 했으나,
그는 가끔 보내는 눈인사 이외에는 일절 아는 체하지 않았다.

리카르디스가 잠시 휴식을 취하러 들어갔던 때였다. 로젤린은 그 틈을 타서 배를 채우기 위해 연회장을 떠돌았다.


한참을 이것저것 집어 먹고 있는데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카브 왕자였다.

“음식이 입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군.”

로젤린은 고기를 열심히 먹는 중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칼릭스가 입안에 음식이 있을 때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로젤린은 음식물을 필사적으로 씹어서 삼키려 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하카브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귀엽기는. 천천히 들게.”

로젤린은 입을 가리며 “네.” 하고 짧은 대답을 했다. 하카브는 그녀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감상했다. 시선은
검은 머리카락에 머무르기도 했고, 우물거리는 입가를 떠돌기도 했다.

“우리의 전통 의상을 입은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 안타깝군. 지금이라도 입어 볼 텐가? 그대를 위해 기꺼이


선물하겠다.”

그쯤 되어 로젤린은 음식을 꿀꺽 다 삼켰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사양하지 않아도 괜찮다.”

“전하의 곁을 오래 떠나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카브는 눈썹을 조금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술잔을 건네며 한 발 더 다가섰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로젤린의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젤린은 술잔을 받은 채 멀뚱히 그를 올려보았다.

“걱정마라. 이 궁 안에서 황자가 위험할 일은 없을 테니까.”

“아니오. 괜찮습니다.”

이후로도 하카브는 끈질기게 권했다. 로젤린은 “괜찮습니다.”와 “아니오, 괜찮습니다.”만 반복하며 여섯 번의


시도를 모두 퇴짜 놓았다. 어조와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하카브는 흠, 하며 팔짱을 꼈다. 짓궂은 표정이었다.

“왜, 나를 못 믿겠나? 황자를 해칠 것 같아서?”

로젤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카브는 허를 찌른 질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만만한 표정은 로젤린의 이어진 대답에 와르르 무너졌다.

“네.”

“…….”

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지? 딱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었다. 하카브는 잠시 무표정해졌다가, 허리까지 굽혀


가면서 와하하 웃었다. 반달로 접힌 그의 눈꼬리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대, 정말 마음에 든다. 황자를 떠나고 싶어지거든 나에게 와라.”

“싫습니다.”

하카브는 또 소리 내어 웃었다. 연회장의 귀족들이 술렁이며 그 광경을 훔쳐봤다. 하카브가 웃는 모습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웃으면 우습게 보인다는 둥, 경박해 보인다는 둥의 이상한 체면치레를 하는 여타 귀족, 황족과
다르게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카브를 쉽게 보지 못했다. 미소를 짓고 있다
하더라도 차가운 시선과 장신의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미소가 즐거운
감정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절대적인 포식자가 보이는 여유라는 점에 있어서 도리어 위축될 뿐이었다.

그런 하카브가 진심으로 유쾌해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흘려 가며 웃는 그의 모습은 오래 일한 시종들도 처음


목격했을 정도로 희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찾아와라. 리비타의 궁은 그대에게 언제나 열려 있을 테니.”

로젤린은 조금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생각하는 속이 빤히 다


들여다보였다. 하카브는 제 턱을 느릿하게 손마디로 쓸었다.

발타나 일라베니아나, 두 나라 다 사람 사는 곳 아니었나? 어쩌다 일라베니아에 이런 귀여운 게 나타난 거지? 흠.


하카브는 유쾌한 제 기분을 거스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즐겼다. 조만간 그녀가 죽어 버리게 되면 다시 느낄 수
없는 감정이 아닌가. 약간은 아쉬웠다. 부디 그렇게 되기 전에 내게 와 주면 좋으련만.

* * *

로젤린은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연회장의 분위기가 좋아졌지만, 그녀는 리카르디스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흉흉한 눈빛으로 막아섰다. 지위고하 막론하고 사람들을 위협하던 그녀의 행동은 부단장 나단에게 불려
가 왕창 혼나는 것으로 끝을 맞이했다. 좋게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서 혼자만 바짝 경계하는 그녀의 태도는 큰
문제를 초래할 수 있었다. 호위도 좋지만 적당히 티 안 나게 하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로젤린은 과도한 경계를 조금이나마 허물었다. 연일 계속된 연회 중, 수많은 만남이 있었으나 어느
누구 하나 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카브 왕자의 말대로 이 궁 안에서라면 리카르디스의 안전은 보장되는 듯
했다. 그제야 리카르디스는 제 앞으로 할당된 음식을 한 접시 다 온전히 먹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로젤린이
독의 유무를 판별한답시고 항상 반 정도 먹고 그에게 넘겨줬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시끄럽고 화려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로젤린과 상급 기사 몇 명이 호위를 위해 그의 뒤를 따랐다.

“리카르디스 전하?”

뒤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한 사람 가면 한 사람 오고, 두 사람 가면


두 사람이 오는 연회장을 벗어났더니, 기어코 쫓아오기까지 한다. 발타인들은 지독한 구석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돌아서며 파삭 구겼던 얼굴을 피고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달이 밝은 밤입니다. 연회는 즐거우셨는지요?”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가느다란 눈매가 나른해 보였다. 그녀의 장신구와 복식으로 보아
고위 귀족에 해당한다는 사실쯤은 알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이 며칠간 고위귀족에 해당하는 수많은 발타인을 만난
상태였다. 솔직히 그 여자가 그 여자로 보였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휘며 웃었다.

“즐거움에 취하는 것 같아 잠시 달구경이나 할까 나와 보았습니다…….”

잇세리온이 뒤에서 소근거렸다.

‘3 왕녀 간제입니다.’

“……간제 왕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만나 뵈는 겁니다만, 절 알고 계시다니 기쁘군요.”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을 슬쩍 째려봤다. 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인사 했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 그


또한 많은 인물들을 만나다 보니 착각했던 듯 했다.

“농담입니다, 둘째 날 인사 드렸었지요.”

……착각이 아니었다. 간제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홀로 남으실 순간을 호시탐탐 노려 보았어요. 연회를 떠나는 사람을 붙잡고 얘기를 나누는 것만큼 촌스러운 일은
없지만, 너그러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연한 만남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연회를 벗어나 주위에 사람이 없어진 때를 노려 찾아왔으니. 뭔가 용건이
있는 건가?

“제게 하실 말이라도?”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전하의 미모에 달조차 구름 뒤로 숨어 버렸군요.”

간제가 두 손을 모으며 눈을 반짝였다. 리카르디스의 대외적 가면에 조금 금이 갔다.

“감사합니다만…… 용건이 그게 전부라면…….”

“설마요, 지금은 그저 순간의 감상을 내뱉었을 뿐이랍니다.”

간제가 이어서 말을 하려던 순간, 복도 끝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연회장을 벗어나는 사람들이 또 발생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입을 벌린 그대로 멈춰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간제가 난처하다는 듯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쓸모라고는 없는 작자들 같으니.”

[다음 편에 계속....]

43 화.

간제가 신랄하게 방해꾼들을 비판했다. 퉁퉁한 발타의 남성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중이었다.

“오늘은 이쯤하고 물러나야 할 것 같군요. 다음에는 좀 더 깊은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리카르디스 전하.”

“짧지만 즐거운 만남이었습니다. 간제 왕녀.”

간제가 무릎을 살짝 굽혀 그에게 인사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금빛 장신구가 찰랑이며 흘러내렸다.

“곧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녀가 돌아서며 생긋 웃었다.

“그때까지 몸조심하시기를, 황자 전하.”


리카르디스의 발길은 궁 내부에 있는 커다란 신전을 향했다. 간제 왕녀가 떠나기 직전 그에게 추천해 준 곳이었다.
어지러운 연회장보다도 어쩌면 볼 거리가 많을지도 모른다고.

연회장의 분위기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장소였다. 몇 개의 촛불로 밝혀진 웅장한 내부는 조각과 벽화로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신전 중앙에는 커다란 샘이 있었고, 그 위로 천장이 크게 트여 있어 달빛이 그대로 들어왔다.
반듯하고 동그란 모양의 샘은 그것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졌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대륙의 모든 중요한 의식들은
언제나 물을 매개로 했다. 이델라브힘과 크레안 티다니온의 신화와 관련이 깊은 ‘약속의 호수’를 흉내 내는
것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인공 샘에서 시선을 돌렸다. 결혼 의식이 새겨져 있는 벽화가 보였다. 안쪽으로 파여 조각 되어


있는 동그란 원. 그리고 그 아래에는 호수 가운데에 들어가 기도하고 있는 두 사람이 새겨져 있었다.

발타와 일라베니아의 결혼 예식은 매우 비슷했다. 몸을 담글 수 있는 물이 있다던가, 그 수면에 해가 떠오를 때


이루어진다는 점이 같았다. 해는 이델라브힘의 상징. 수면에 해가 비칠 때 결혼하는 두 사람은 빛의 신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받는다. 그렇게 믿어 널리 굳어진 관습이었다.

“…….”

결혼 의식은 발타와 일라베니아뿐만 아니라 라고슈 왕국도 같았다. 대륙에 위치한 나라라고 불릴 수 없는 작은
부족들 또한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부분이야 있었지만, 기본적인 큰 틀은
동일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좋은 밤이로군요.”

리카르디스는 대뜸 인사를 건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예상대로 하카브 왕자였다. 동생


다음에는 오빠인가. 피로가 몰려왔다. 하카브는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골치 아픈 일이 많은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습니다, 황자.”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라, 리카르디스는 하카브 왕자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답지
않게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로 멀거니 서 있었다. 하카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리카르디스의 곁에 다가와 섰다.
그가 보고 있는 벽화를 같이 감상하는 듯,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뒤를 살짝 돌아보니 상급 기사 몇 명에게 로젤린이 제압당해 있었다. 또 그 유별난 호위를 하려다가 저지당한 게


아닐까. 상급 기사 파르딕트가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놨다. “내 일은 전하를 지키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달려드는 경을 막는 게 아니야!”라며 화내고 있었다.

“어디 저만 고생하고 있겠습니까. 하카브 왕자 역시 검은달 때문에 바쁘신 걸로 압니다.”

리카르디스의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뜻이 달라졌다. ‘검은달이 요즘 사고치고 다니던데, 발타의 왕자로서


수습하느라 참 바쁘겠다.’라고 들리기도 했고, ‘너 요즘 나한테 자주 암살자 보내던데 참 부지런하기도 하더라.’
라고도 들렸다. 물론 일라베니아와 발타의 유례없는 굳건한 동맹이 맺어진 상황에서야, 전자로 해석해야만 했다.
하카브는 그 중의적인 뜻을 파악했으면서도 살살 눈웃음을 쳤다. 껄끄러운 상대였다.

“황자께서 발타까지 친히 발걸음해 주신 만큼, 곧 좋은 결실을 맺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럼요.”
두 사람은 지상에서 한 뼘 정도 붕 떠있는 것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혼잣말보다도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리카르디스는 벽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해를 상징하는 동그란 원. 음각으로 깊게 파여 있어 다른 벽화들보다
어두웠다. 보통 해는 양각으로 표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던가? 뭘까. 무언가가 목에 걸린 것처럼 거슬렸다.

“그러고 보니 검은달이 새로운 독을 만들어 냈다고 하던데…….”

하카브 왕자가 이 주제로 먼저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리카르디스는 흠, 얕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마력과 독을 섞은 것입니다. ‘파편’……이라는 이름이더군요.”

“오, 참신하군요.”

그런 이름은 난생 처음 듣는다는 양, 흥미로워 하는 목소리였다. 왕자의 연기는 수준급이었지만, 리카르디스는


그의 반응에 세심한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아까부터 음각으로 조각되어 있는 해가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벽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카브가 그런 리카르디스를 보며 미소를 입에 걸었다.

“파편, 재미있는 이름입니다. 파편이라…… 무엇의 파편일까요?”

“글쎄요…….”

천장을 통해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 신전을 밝히고 있던 촛불 몇 개가 꺼졌다. 리카르디스가 시선을 주던 벽이


한층 어두워졌다. 안쪽으로 깊게 파여 있던 해의 조각 또한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로 검게 변했다. 검고,
동그란…….

“검은 달, 일지도 모르겠군요.”

조용한 공간에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리카르디스는 벽화에서 눈을 돌려 하카브와 마주 보았다. 아까보다
어두워졌지만 하카브가 입꼬리를 올려 웃는 모습은 똑바로 보였다. 정답이라 얘기하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깨달았다. 안으로 깊게 파져있는 이 동그란 원은 해가 아니었다. 달이었다. 검은 달. 하카브의 질문에 답하며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 불과했으나, 잃어버렸던 열쇠를 찾은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리카르디스는 하카브와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하게만 보였지만, 그의 머릿속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고 있었다. 여러 기억이 깨지고, 부서지고, 합쳐졌다. 과거에 찾았던 하얀 밤의 단서와
작은 실마리들이 몸집을 불리고 서로 얽혔다.

온 대륙을 관통하는 똑같은 방식의 결혼식.

이상한 일이었다. 이델라브힘을 믿지 않는 발타와 신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대륙 끝자락의 소부족조차 결혼


의식의 형태가 같다고? 어쩌면 이는 더 중요한 일을 가리키는 지표인지도 몰랐다. 보다 중요한,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약속보다 중요한, 어쩌면 생명과 관련된…….

만물이 꽃을 피우며 생명이 순환하는 밤. 축복의 밤은 일라베니아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에게 중대한
일이다. 대륙이 노쇠하면 어떠한 생명도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만약 이것이 하얀 밤을 불러내기 위한 일부의
조각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비슷한 의식의 형태를. 눈앞의 벽화는 결혼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득한 먼 옛날부터 내려왔던 축복의 밤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 그런 거였나. 그런 거였어. 리카르디스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축복의 밤을 부르는


의식을 꼭꼭 감추고 있었다. 그들의 황권을 유지하기 위해. 마치 그들이 신의 사자라도 되는 양, 포장하기 위해.
하지만 사람들은 잊지 않고 기억해 왔다. 몇 세대가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사람과 사람의 약속 안에 축복의
비밀을 간직해 왔던 것이다.

[네가 이델라브힘의 존재만으로 하얀 밤을 되찾을 수 있을지, 이 어둠에서…….]

지하 감옥, 그 깊숙한 곳에서 마녀라 불리는 여자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로 인해 하얀 밤이 아닌


검은 달을 찾아야 하나 추측했다.

리카르디스는 벽화에 그려진 검은 달 아래의 두 사람을 보았다. 하얀 밤만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검은


달만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얀 밤과 검은 달은 하나의 조각, 하나의 축복, 맞물려진 톱니바퀴였다.

이로써 목표가 명확해졌다. 강대한 마력을 다루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마인(魔人)이라 불리는 그들. 불길한
힘을 다룬다 해서 박해받고, 살해당하고, 꼭꼭 숨어 버린 이들을. 리카르디스는 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발타를 떠나는 날이었다. 연회 내내 보이지 않던 마카롱이 돌아왔다.

“마카롱, 어디 있었어.”

방에 둔 과일이나 치즈 같은 간식거리가 주기적으로 없어지지 않았다면, 어디서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마카롱의 볼이 빵빵해져 있었다. 볼 주머니에 음식을 가득 구겨 넣은 모양새였다.

마카롱이 튓! 무언가를 거칠게 뱉었다. 로젤린은 그것을 집었다. 조각나 있는 검은 돌이었다. 생김새는
평범했지만, 그 안에서 검붉은 모래 같은 무언가가 스르륵 움직이고 있었다. 검고 붉은 조각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낯설지 않았다. 발타 왕궁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마력이었다. 마수의 몸에서 날뛰는, 폭주하며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 하는듯한.

‘그것’이었던 시절에도 이러한 돌조각, 아니 보석을 본 적이 있었다. 죽은 마수들의 시체에서 간혹 볼 수 있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몇 백 년 살며 시체만을 찾아다녔던 ‘그것’도 자주 발견하지는 못했다. 발타는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이 보석을 찾아낸 듯 했다. 발타에서 마수를 찾아보기가 힘든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사체에서
마력의 결정을 찾기 위해 대대적인 학살이 벌어졌을 것이다.

찍. 마카롱은 호두를 들고 갉아 먹었다. 궁의 깊은 곳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방안에서 발견했다고 했다. 그곳에


있는 몇 개의 상자에 이런 보석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하나정도 없어져도 모르겠지. 마카롱은 흥하고 콧김을 세게
불었다. 로젤린이 손가락 끝으로 마카롱의 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다음 편에 계속....]
44 화.

“고마워. 고생했어.”

그녀는 귀환을 준비하며 분주해진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리카르디스는 측근들과 두런두런 이야기 중이었다.
푸른등불 후작의 대리인 카일로. 기사단장 스타스, 부단장 나단, 비서관 잇세리온과 레이몬드, 호위 기사 헤일과
파르딕트까지. 그들은 막 방을 들어서는 로젤린에게 시선을 주며 대화를 정리했다.

“……아무튼 전달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늘에 맡기도록 하지.”

“네.”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끼며 턱을 살짝 치켜 올렸다.

“그래. 집에 갈 준비는 다 끝내고 온 거겠지, 로젤린 경?”

“아니오.”

“……그래, 나는 경의 그…… 진솔한 면이 참 보기 좋다고…… 항상 생각해 왔지…….”

로젤린은 주머니에서 검붉은 결정을 꺼내서 리카르디스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조각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건…….”

리카르디스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결정 안에서 연기처럼 움직이는 검붉은 안개. 한 번도 본적 없는 물체였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보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것은…… 혹시, 마력입니까?”

잇세리온이 작게 소리쳤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에게서 검붉은 보석을 받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돌조각이 담겼다.

햇빛을 받으며 빛나는 표면 안쪽에서 검붉은 안개가 스르륵 움직였다. 불길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조각난 표면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딱딱하고 차가운 돌의 감촉이 느껴졌다. 마력의
결정? 어떻게 이런 게 존재할 수 있는 거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발타가 만들어 낸 것인가? 정확한 사용법은?
용도는? 합성된 독과의 연관은?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이걸, 대체 어디서 가지고 온 겁니까 로젤린 경?”


잇세리온의 물음에 방안의 시선이 모두 그녀를 향했다. 리카르디스도 보석에서 눈을 떼고 로젤린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이걸 대체 어디서……?

로젤린은 그들의 열렬한 시선을 슬쩍 피하고 입을 우물댔다.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뭐지, 이번엔 또 뭘 한 거야 로젤린!

“훔쳤는데…….”

마카롱이……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로젤린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마카롱을 독수리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그리고 독수리는 지하에 있는 은밀한 장소에 숨어들어 가기 힘들다는 것도.

레이몬드가 허헉…… 하는 신음을 내뱉으며 제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리카르디스는 두 눈을 꾹 눌렀다.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들켰나?”

“아니오.”

“누가 봤을 가능성은?”

로젤린은 곰곰이 생각한 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목격자가 있다 치더라도 그저 궁내의 수많은 고양이
정도이지 않을까.

“없습니다.”

“그럼 됐어.”

전하! 잇세리온이 입을 떡 벌렸다. 되기는 뭐가 돼!

“하카브 왕자가 눈치챌 경우 일이 크게 번질 수 있습니다, 전하!”

“거기에 이런 검은 조각 많았습니다. 하나 빠진다고…….”

모를 텐데…… 그녀의 말은 작게 흩어졌다.

“로젤린 경!”

잇세리온이 버럭 화를 냈다. 질책을 담은 시선을 마주하니 억울했다. 누구 좋으라고 가져왔는데. 로젤린은


조가비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언제나 무표정했으나 한층 더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여기까지 하지, 잇세리온. 어차피 진흙탕 싸움은 예견되어 있다. 보석 하나의 유무로 이제와 크게 달라질 건
없어. 진흙탕에 한 줌의 진흙을 더하면 뭐가 될 것 같나?”

“그, 그렇지만……!”

“그리고 로젤린 경이 목격자가 없다고 했지. 이, 로젤린 경이.”

리카르디스는 눈길로 그녀를 콕 가리키고 있었다. 잇세리온은 제 주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깨달았다.

그녀는 ‘강하다’라는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나뭇잎, 소리 없이 날아다니는 날벌레의 기척까지 읽어


내는 사람에게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좋을까. 잇세리온은 내심 ‘유능하다’ 정도의 평가를 그녀의 이름 석 자
앞에 붙여 두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마뜩잖았다.

로젤린이 목격자가 없다고 했다면, 들키지 않았다고 말 했다면 분명 그 말대로일 것이다. 잇세리온은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어쩔 수 없다. 이걸 다시 돌려놓고 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잠시간 골치 아팠던 기분을 말끔히 떨쳐 버린 듯 했다. 심지어는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검은 결정을 들어 빛에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내부의 느릿한 움직임이 차갑고 딱딱한 보석을 살아 있는 생물처럼
보이게 했다.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군.

“발타가 동분서주하며 날뛴 덕에 대륙 전체에 마력의 영향력이 짙게 퍼져 있는 상황이지. 이런 때이니 만큼 이


작은 보석이 군침을 흘릴 만한 훌륭한 먹이가 될 거다. 일라베니아의 고귀하신 분에게도, 심지어는 2 황자
리카르디스의 시체를 바라는 자라고 할지라도.”

잇세리온은 아, 하더니 눈을 반짝 빛냈다. 그도 아까와는 다르게 만면에 히죽대는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군요, 그렇지요.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집니다. 잘했습니다, 로젤린 경.”

로젤린은 잇세리온으로부터 과자 몇 개를 받았다. 아까의 닦달이 못내 마음이 쓰여 성의를 표시한 것이었다. 비록


그 과자가 레이몬드의 주머니에서 나왔을 지라도, 어쨌거나.

레이몬드는 강탈당한 과자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애초에 왼쪽 주머니에 항상 넣어


다니는 간식들은 모두 로젤린을 위한 거였다. 잇세리온은 여전히 흡족한 듯 로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 이 일은 함구하세요. 아시겠지요?”

“네.”

“그리고 앞으로는 훔치기 전에 허락 맡고 훔치세요.”

“주인에게 말입니까?”

그건 훔치는 게 아니지 않나? 리카르디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니요. 저나 전하께 묻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부득이한 상황이라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라도


물어보세요.”

“네.”

“꼭, 꼭 먼저 묻고 행동하셔야 합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 같은데…… 로젤린은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잇세리온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또
일순간 불안해졌는지 “꼭입니다.” 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훔친 일이 걸리면 어떻게 하나 고민을 한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리비타의 궁은 소란스러운 기색조차 없었다.


물론 그 침묵이 들키지 않았으리란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철저한 단속이 필요했다. 상급 기사들은
티끌만 한 책 하나 잡히지 않기 위해 기사단원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매섭게 단속했다. 로젤린이 맛있는 간식을
먹는 사이 단원들은 열심히 굴렀다.
수확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었던 일주일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하카브 왕자는 궁 바로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리고 또 다시 리카르디스의 볼에 입을 맞췄다. 얼렁뚱땅 넘어갔던 첫인사에 비해 조금 더 끈질긴 태도였다.
리카르디스는 결국 그의 볼에 인사를 돌려 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정겨운 모습을 보면서 디에즈는 하하
웃었으나 곧 하카브에게 똑같은 ‘인사’를 당했다. 디에즈는 잠시 전의 리카르디스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두
남자의 썩어 가는 표정을 보면서도 하카브는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힉살라의 영혼이 일라베니아 귀빈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가시는 길 또한, 평안하시길.”

하카브는 마지막으로 로젤린과 눈을 맞췄다. 그는 빙그레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움직였다.

‘그대의 무운을 빌지, 로젤린.’

로젤린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하카브의 집요한 시선 아래 그녀는 검지와 엄지를 입에 물고 세게 바람을


불었다.

삐이익-

뜨거운 숨이 손가락 틈새를 비집고 나가며 높은 바람소리를 냈다. 궁의 반대쪽으로 출발하기 시작한 사절단의
머리 위로 독수리 한 마리가 빙빙 돌았다. 마카롱도 화답하듯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 * *

“최대한 빨리 발타를 벗어난다.”

“예, 전하.”

결전은 발타의 땅 위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아무리 검은달이라 하더라도 국경을 넘어서 일라베니아의 병력과
직접 맞부딪치는 일은 반기지 않을 것이므로. 다행히도 모두의 체력이 가득 채워진 만전의 상태였다. 사절단
일행은 말을 재촉하며 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발타의 땅을 벗어나야 했다. 이틀이면 국경에 닿을 것이다.
마카롱은 하늘 위를 뱅글뱅글 돌며 사절단을 따라왔다.

해가 저물 쯤 일행은 자리에 멈췄다. 까맣게 변한 숲은 아군의 눈을 가리고 적의 모습을 숨기고는 했다.


더군다나 길을 잃어버릴 가능성 또한 무시하기 어려웠다. 사절단은 분주히 천막과 간이 울타리를 세웠다. 밤에
이동할 수 없는 만큼 경계는 배로 강화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천막으로 숨어들다가 레이몬드에게 걸려서
끌려 나갔다.

“…….”

막사 안에는 리카르디스의 측근만 남았다. 잇세리온이 지도를 중앙에 펼쳤다. 부단장 나단이 턱을 쓸며 입을
열었다.

“틸락, 차보, 다리온. 세 개의 마을이 교차하는 지점일 줄 알았습니다만…….”

“하카브 왕자는 허를 찌르는 걸 좋아하더군. 천성이 그런 모양이야.”

“가장 경계하는 첫 날에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걸까요.”


“왕자의 생각이 무엇이건 간에, 결과적으로는 말이지.”

스타스는 바닥의 돌멩이를 주워서 지도 위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여기, 여기. 많은 인원을 숨겨 놓을 수 있을 만한 곳은 두 군데입니다. 하카브 왕자의 성격상, 정정당당하게


정공법으로 오지는 않을 겁니다. 매복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돌아서 가야 할까요?”

나단의 물음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저었다.

“돌아서 가면 길이 너무 길어져. 게다가 이렇게 확연하게 보이는 매복 지점. 우리 측에서 눈치챘으리라고


하카브도 생각할 거다. 돌아서 가는 길에도 군대를 심어 뒀을 가능성이 높아.”

잇세리온이 신음을 흘렸다.

“전투는 피할 수 없겠지요.”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달의 새로운 독 ‘파편’. 그 강력한 독의 해독법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병사의 머릿수도 수거니와 힘의 차이 또한 역력했다.

이길 방법이 없다! 이길 수 없다면 피해야만 한다. 활로는 오직 일라베니아로 넘어가는 국경뿐이었다. 이렇게
수세에 몰린 것은 또 오랜만이지 않은가. 리카르디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국경이 걸어서 우리에게 다가오길 간절히 바래야겠군.”

다들 씁쓸히 웃었다. 스타스가 돌멩이를 올려 놓은 곳은 사절단의 현재 위치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

45 화.

“으아아악!”

남자는 괴로움에 몸부림 쳤다. 막 오른팔에 이식한 검은 보석 때문이었다. 손가락 한마디도 안 되는 마수의 작은
결정은 고통의 씨앗 같았다.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아 자라고, 줄기를 뻗어 나가 온몸을 잠식하는 괴이한
물질이었다. 손끝까지 전해지는 저릿저릿한 감각에 남자는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몸이 덜덜 떨렸다. 남자는 검은달에 속한 암살자였다. 고문과도 같은 고된 훈련을 참는 것은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런 남자의 인내심이 고갈될 정도의 극심한 통증이 몰아쳤다. 거대한 마수가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듯한 거센 압력이 느껴졌다. 혈관을 따라 독을 품은 개미들이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는 제발 그만해
달라고 애원하며 울었다.

“정말이지 용맹하지 않나.”

단조로운 어조였다. 집무실에서 지루한 책을 볼 때에나 나올 법한, 사무적이고 어떤 감흥도 없는 목소리였다. 그


때문에 침대에 묶여 비명을 지르는 남자와 그의 공간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듯 느껴졌다.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황자 말이야.”

끄아악!

침대에 묶여 있는 남자, 검은달의 암살 단원 자난의 비명소리가 지하의 은밀한 공간을 울렸다. 실핏줄이 터져
눈알은 붉었고,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흘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카브 왕자가 “이런, 실패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자난의 눈물을 제 소매로 닦아 냈다. 그리고는 가슴께를 도닥도닥 두드리며 어린아이를 재우는
듯 손짓했다.

“이렇게 좋은 기회는 좀처럼 자주 오지 않으니, 꼭 가지고 싶구나. 그의 성력은 나에게 제법 쓸모가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죽이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 하카브는 작게 중얼거렸다.

“으아, 으아악!”

“믿고 있다, 자난. 내가 바라는 것을 네가 가지고 돌아오리라고.”

그의 검은 눈동자는 멀리 있는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회의에 이만 가보셔야 합니다, 왕자 전하. 2 황자 측에서 발타의 국경을 넘는 사절단의 인원을 늘려 달라는 청이
왔습니다.”

“오 그래, 아틸라크. 반가운 손님에게는 빨리 답을 해 드려야지. 이거 설레어서 황자가 올 때까지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군.”

자난은 왕자 전하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발타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라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달의 주인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고통으로 시야가 흐릿해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자난은 잔뜩 상해 버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

하카브는 씨익 웃었다. 마수의 결정을 막 이식한 사람의 이지가 얼마나 흐트러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알아보니 기특했다.

“그래, 얼른 얼른 일어나라. 네가 날 위해 해 줘야 할 일이 많다.”

그는 하카브의 웃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후 자난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한 발 앞서
결정을 몸에 받아들인 동료들이 흔히 말하곤 했었다.

‘새로 태어난 것 같다.’

과장이라며 비웃었던 그 말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핏줄을 따라 퍼져 있던 고통은 끝없이 샘솟는 힘의


원천으로 탈바꿈 했다.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고, 특히 결정을 박아 넣었던 오른팔의 힘은 인간의
한계를 훌쩍 넘어섰다. 그는 곧 일라베니아로 귀환하는 사절단을 습격하는 인원으로 선발되었다.

습격대는 하카브가 손수 선별한 병사로 구성되었다. 하늘에 떠있는 달과도 같은, 가장 고귀한 분에게 선택 받은
것이다. 그들의 기분은 한없이 고양되었다.

[국경을 넘기 전, 일라베니아의 2 황자 리카르디스를 생포한다. 만약 놓칠 것 같으면 처리하라.]

자난은 그의 명령을 한 자 한 자 귀 기울여 들었다. 하얀밤 기사단의 용맹함과 강인함은 발타까지도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 또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인간의 틀을 벗어난 지금의 자신이라면 사람의
심장을 맨손으로 뽑아 낼 수도 있었다. 생포라는 까다로운 임무라 ‘파편’을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자신 있었다.

자난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같이 눈을 형형히 빛내는 자들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마수의 결정. 그 적성에
들어맞는 백여 명의 정예부대였다.

자난이 소속된 검은달이 ‘파편’이라는 위협을 휘두르는 시기임에도, 사절단이라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2 황자.
자난은 제국의 2 황자가 미쳤거나, 죽는 방법을 다양하게 추구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 평가를
고쳐야했다. 2 황자가 국경을 넘기 며칠 전, 일라베니아 사절단의 인원을 추가하고 싶다는 소식을 전해 왔기
때문이었다. 미친 것도 아니고 죽고 싶은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고작 그 정도의 머릿수로 이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일까. 자난은 무표정 한 낯 아래로 아둔한 황자를 비웃었다.

이후 하카브 왕자는 일라베니아 황자의 안위가 가장 중요하다며 흔쾌히 협력했으나 사절단의 수는 변하지 않았다.
오매불망 2 황자의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1 황자가 손을 썼다고 했다. 오랜 친우의 나라에 무슨 호위 인원이
그렇게나 필요하냐며 펄펄 날뛰었단다. 앞뒤로 맹수가 아가리를 벌린 채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제 나라에게 조차
버림받은 2 황자 리카르디스. 그에게 손을 내밀어줄 이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동아줄이
아닌 이상에야.

이번 습격 부대를 이끄는 대장, 타이렝이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절했다. 자난과 습격대의 단원들이 그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하카브 왕자를 향해 바닥에 엎드렸다.

“주인의 명을 받듭니다!”

가느다란 빗줄기로 인해 풍경은 안개가 낀 듯 흐려졌다. 달리는 마차 주위로 망토를 뒤집어 쓴 호위 기사들이
가까이 붙어있었다. 로젤린의 아래 입술을 꾹 물었다. 이런 광경을 전에도 본 적 있었다. 진짜 ‘로젤린’의
기억 속에서.

그때 또한 이런 보슬비 속을 헤치고 하얀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꿈의 끝은 좋지 못했다. 지키겠다 맹세했던


황녀는 죽었고, 로젤린은 살아남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능력 밖의 일이었다. 백 명 정도의 무장한 인원이
기습했다. 꿈속의 로젤린은 ‘대신 죽어야 했는데, 지켜 드리겠노라 약속했는데.’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언제나 담대했던 주인의 무너진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로젤린은 성치 못한 몸으로 며칠 밤낮을 울고 목과
가슴팍을 쥐어뜯었다. 지켜 드리겠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키고야 말겠다. 어디서 온지도 몰랐던 그 다짐은
자신의 속에 있었다.

‘반드시…….’

로젤린은 다시 그 말을 꼭꼭 씹어 마음에 눌러 담았다.

꿈속과 똑같이 하얀 마차는 비에 젖어 있었다. 로젤린은 마차의 표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차갑고 딱딱했다.
마차의 덜컹거리는 움직임이 손을 통해 전해졌다. 빗방울이 그녀의 피부를 따라 흘러내렸다. 로젤린은 어린
동물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으로 마차를 쓸어내렸다.

삐이익---

마차에 닿아있던 손이 흠칫 멈췄다. 로젤린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카롱이 알려오는 소리와
동시에 그녀는 깨달았다. 숨을 죽이고 있던 살기들이 주위를 감싸오기 시작했음을.

멀지 않은 거리였다. 왼쪽, 오른쪽. 그리고 퇴로 차단을 위해 후미에도 몇 있었다. 빗소리 탓에 평소보다 청각이
둔해져서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다. 나뭇잎과 진흙을 밟는 소리와 함께 이질적인 마력의 기운이 물씬 풍겨 왔다.
로젤린은 달리던 말의 옆구리를 차, 선두에 있던 기사단장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그녀는 입을 열며 동시에 검을
뽑았다.

“포위됐습니다.”

스타스는 머리를 덮고 있던 망토를 젖혔다. 드러난 붉은 머리카락이 비에 젖기 시작했다. 그가 거대한 검을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들어 올렸다.

“정지한다, 전투 준비! 마차를 보호하라!”

스르릉.

빠르게 검을 빼어 드는 금속음이 빗소리를 뚫고 공간을 울렸다.

로젤린의 손등에 힘줄이 짙게 올라왔다. 살기와 마력, ‘나’의 존재를 위협 하는 것들. 익숙했다. 로젤린은
언제나 그 위협 속에서 살아왔다. 도망치기도 했지만 싸우기도 했다. 때로는 곰으로, 때로는 마수로, 때로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짐승으로. 그녀의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위협을 이겨낼 만한, 보다 강한 것!

로젤린의 피부 안쪽에서 근육이 변형되기 시작했다. 한 번의 손짓에 아름드리나무를 부러트리는 마수의


조직이었다. 다소 기묘할 정도로 부풀어 오른팔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망토가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숲의 어둠을 뚫고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구릿빛 피부와 검은 머리. 코와 입을 가리는 복면을 하고, 가죽으로
된 무구를 장비한 자였다. 로젤린은 검날을 세웠다. 처음 나타난 사람을 뒤로 한 명, 두 명씩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산을 빼곡하게 매운 검은 집단의 출현이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몇 걸음 앞으로 나왔다. 안광이 이상할 정도로 번뜩이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의 심장
주위로 마력이 떠도는 것을 감지했다. 난폭한 마력은 심장을 찢어발길 듯 흉포하게 날뛰고 있었다. 넘쳐나는 힘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고 휘둘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남자의 거칠게 비틀린 목소리가 집단 사이의 침묵을 깼다.

“힉살라의 영혼이 우리와 함께한다.”

“그거 우연이로군. 우리도 그러하오.”


스타스는 사절단이 떠나기 직전, 하카브 왕자가 했던 인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힉살라의 영혼이 일라베니아의 귀빈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양쪽을 다 축복하다니 힉살라의 영혼도 바쁘겠군. 스타스는 검을 고쳐 잡았다. 남자도 허리춤에 매어 있던 검을


뽑았다. 그의 뒤편에 서 있는 습격대 무리도 검을 꺼내 들었다.

챙!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숲에 울려퍼졌다.

[다음 편에 계속....]

46 화.

그 날카로운 소리를 기점으로 일라베니아의 사절단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검을 호기롭게 뽑아 든 기사들이 말을


탄 채 줄행랑을 쳤다. 화려한 장식의 흰색 마차와 그를 호위하는 인원이 왼쪽. 베이지색의 마차와 그를 따르는
호위 기사들은 오른쪽. 습격대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난은 본능적으로 튀어 오르는 몸을 겨우 억눌렀다. 작전 지점의 공터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세 대의 마차


때문이었다. 남겨진 자들은 어딘가로 달아나지 못한 채 멀뚱히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마차 주위를
둘러싸며 엄호했다. 호위 기사의 숫자는 고작 열 명 정도에 불과했다.

자난은 깨달았다. 이들은 버리는 말이다.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면 부하를 버리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2 황자의 비정과 비겁함이 엿보였다.

하얀밤의 기사단장은 노련하게 검을 흘려 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검이나 팔 둘 중 하나가 부러졌을 것이다. 그는


타이렝과 검을 부딪친 이후 곧바로 물러섰다. 타이렝의 이상할 정도로 강한 힘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기사단장은
곧장 말을 몰아 공터에서 벗어났다.

타이렝과 자난은 기사단장을 주시했다. 리카르디스의 마차가 하얀색이라는 점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지만, 그
안에 그 본인이 들어있으리란 확신은 없었다. 황자가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제 마차 안에 얌전히 앉아
있지 않을 테니 누군가와 분명 마차를 교체했으리라. 2 황자의 수족이자 가장 강한 하얀밤의 검. 가을안개의
스타스. 그가 아니라면 누가 리카르디스를 지키겠는가. 그가 향하는 곳에는 반드시 2 황자 리카르디스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추측을 배신이라도 하듯, 기사단장은 왼쪽으로 달려간 흰색 마차를 쫓아갔다. 허망할 정도로
자난의 기대를 배반하는 상황이었다. 어지간한 멍청이가 맞았나 보군.

“1 조, 2 조는 흰색 마차를, 3 조는 반대를 향한다! 4 조는 남은 자들을 처리해라!”

타이렝의 목소리에 습격대가 흩어졌다. 2 조의 조장인 자난은 대장의 명령에 따라 즉시 흰색마차를 쫓아야만
했음에도 가만히 멈춰서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알 수 없는 묘한 감각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뭔가…… 무언가가 이상하다.’

어딘가 이질적인 분위기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망토를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자와 눈이 한번
마주쳤다. 햇빛을 받는다면 푸르게 빛날 녹색의 눈동자였다. 호수의 잔잔한 물결 같았다. 이 상황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절망도 느끼지 않는 눈이었다.

기사는 자난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머리를 덮고 있던 망토를 뒤로 넘겼다. 높게 묶은 검은 머리가 드러나며 비에


젖기 시작했다. 여자였다. 사절단의 중요한 인물을 여자 기사가 호위할 리 없다. 확실히 이 공터에 남은 세 대의
마차에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불안은 괜한 기우였나. 기왕 남은 것, 빨리 정리하고 쫓아가면 될 일이었다.

“4 조는 현장을 정리하고 1, 2 조를 엄호한다.”

“네.”

“네.”

조원들이 자세를 낮추며 눈에 살기를 띠었다. 마차 주위의 호위 기사들이 긴장하는 기색을 비쳤다.

“전부 죽여라.”

자난의 말에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일시에 움직였다. 휘이이, 스산한 바람소리가 일라베니아의 기사들을 덮쳤다.
‘파편’을 굳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 정도의 인원을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자난은 마차의 지붕 위로
훌쩍 뛰었다. 쿵. 하고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챙,

비가 내리는 공간임에도,

쾅!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일었다. 가느다란 금속이 낸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렬한 소리였다. 자난은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아까 눈이 마주쳤던 여기사가 보였다. 그녀는 신체가 비약적으로 강화된 검은달과 비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어깨로 밀쳐 내고 발로 걷어차 거리를 벌리는 둥, 임기응변에 익숙해 보이는 전투 방식이었다. 주위의 다른 남자


기사들이 느리게 보일 정도로 그녀의 동작은 재빨랐다. 태생적으로 힘이 약한 여자만 아니었더라도 더욱 훌륭한
기사가 될…….
콰직! 그녀의 발길질 한 번에 조원 한 명이 날아와 마차에 처박혔다. 자난은 덜컹거리는 마차 위에서 흔들리는
제 몸을 겨우 수습했다. 자난은 여기사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대단히 훌륭한 기사였다.

그녀는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자신에게 향하는 공격 뿐 아니라, 다른 기사들에게 닿는 공격까지 중간에서 계속 쳐


내고 있었다.

‘이런. 나도 모르게 손이 놀고 있었잖아.’

자난은 마차 근처에서 전투 중이던 기사의 등에 칼을 꽂았다 빼내었다. 기사는 피를 토하더니 풀썩 주저앉았다.


비범한 솜씨의 여기사가 흥미롭긴 했으나 쭉 여유부릴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자신도 빨리 2 황자를 뒤쫓아야
했다.

자난은 마저 정리하기 위해 마차의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발타에서 시종일관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니던
고귀하신, 일라베니아의 사절단 나리들을 알현할 시간이었다.

덜컥. 마차의 문이 거칠게 뜯겨나갔다.

하지만 안에는…….

“마차가 비었다!”

당황한 자난의 외침에 반응하듯이 곳곳에서 다른 조원들의 목소리가 퍼졌다. 마차가 비어 있다! 안이 비어 있다!
아무도 없다!

자난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디 갔지? 애초에 비워 두었나? 어째서? 혼란스러워하며 전투를 지속하는 조원들이
보였다. 마차가 비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형성되지 않을 불안한 기류가 조원들을 감싸고 있었다. 자난은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너른 공터를 쭉 둘러보았다.

아까만 해도 부상으로 바닥을 기고 있던 일라베니아의 기사들이 펄펄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등에 칼을 꽂았던 기사 역시 어느새 일어서 다시 싸우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단련했다고 해도 그들은 인간이었다. 위대한 크레안 티다니온의 힘 앞에 한낱 인간이 상대가 될 리 없는


것이다.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어쩌면 아까 느꼈던, 제 발목을 붙잡았던 기묘한 불안은 이
때문인지도 몰랐다. 뭐지, 뭐가 있는 거냐? 자난은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순간 여린 나뭇잎처럼 푸르렀던 눈동자. 그 눈이, 눈빛이 다시금 자난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검은 머리의 기사를 찾았다. 저 멀리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캉, 캉. 금속이 부딪치는 거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난은 깨달았다. 그녀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기사들의 전투는 방패 같은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해치우는데 급급하기보단, 무언가를 지키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자난은 그 사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거슬리는 여자 기사의 뒤. 검을 빼어 들고 응전하던 장신의 남자 기사가 다친 동료에게 손을 뻗었다.

“!”

잿빛으로 물들어 있는 숲속에 희미한 빛이 퍼졌다. 피를 멎게 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생명의 빛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난이 모를 리 없었다.

이런 미친! 왜 이곳에 황자가 남아 있는 거지? 자난은 소리를 왁 질렀다. 이곳에 2 황자가 있음을 알려야 했다.

“여기에……!”
2 황자가 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을 빛내며 이쪽을 바라보던 여기사가 한 발을 축으로 크게
돌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거친 움직임에 따라 태풍처럼 원을 그렸다.

쉬익-

섬광이 바람 소리와 함께 쇄도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보이지 않았다. 쿨럭, 자난은 피를 왈칵 토했다.


자신의 목 아래에 정확하게 검이 박혀있었다. 살기를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날아왔다. 속도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이런 말도, 안되, 는…….’

자난의 몸이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흘러내린 피가 비 웅덩이 사이로 퍼져 나갔다.

* * *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흰색 마차가 끊임없이 덜컹거렸다. 말이 달리는 것에 비하면 현저히 느린 속도였음에도


타이렝은 아직까지 마차의 뒤꽁무니만 쫓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는 반드시 잡는다! 습격 대원들이
속도를 내기 위해 말의 옆구리를 힘차게 찼다. 그때였다.

“으아악!”

“왁!”

상공에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하강해, 발타의 습격 대원들을 퍽, 퍽 치고 지나갔다. 복잡한 시장 바닥에서


사람들을 어깨로 치고 다니는 건달이 연상되었다. 물론 그것보다 몇 배는 아프고 위협적이었다.

두세 사람은 거뜬하게 집어 삼킬 것 같은 거대한 독수리였다. 잠시간 마수가 나타난 거라 생각했지만 타이렝은 그


가설이 틀렸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피아 식별을 할 줄 모르고 눈앞의 모든 걸 파괴하는 마수의 행동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습격대만 주구장창 공격하는 걸 보면 누군가에게 길들여진 게 분명했다.
불시의 기습을 받은 조원이 말을 탄 채로 꼬꾸라지자, 뒤따라오던 대원들도 그에 걸려 연쇄적으로 줄줄이
낙마하고 쓰러졌다. 아비규환의 상황을 적당히 수습하고 다시 쫓아갈 쯤에는 흰색 마차는 또 한참 멀어져 있었다.
아까부터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타이렝이 씩씩거리며 욕을 내뱉었다. 하강하는 때를 맞춰 단검을 던져 보아도 재주넘기라도 하듯 신묘하게 피하고,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까닥까닥거리며 약 올리는 듯한 몸짓을 하기까지! 새 한 마리에 휘둘리는 상황이 이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없었다. 타이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신성 제국 일라베니아. 그들의 신 이델라브힘은 인간세계에 현신할 때, 독수리의 모습을 빌렸다고 알려져 있다.
독수리라는 동물 자체가 원체 똑똑하기로 유명했으나, 머리 위를 떠도는 저 날짐승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위대한 무언가가 독수리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았다. 진짜 이델라브힘의
사자이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다음 편에 계속....]

47 화.

타이렝은 목표를 바꾸었다. 마차의 후미에서 달리고 있는 기사단장 스타스가 보였다. 그는 화풀이라도 하듯
날렵한 손놀림으로 단검 하나를 빨간 머리통으로 날렸다.

팅.

하늘에서 날아온 독수리가 날개로 칼날을 퍽 쳐 내었다. 대체 저 깃털은 뭐야?! 강철로 만든 것도 아닐 텐데!
타이렝의 이마에 혈관이 불뚝 올라왔다.

“저 미친……!”

욕설의 대가는 곧바로 돌아왔다. 타이렝의 머리 위로 큰 돌덩이가 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삐이이. 큰 충격을
받은 머리에 이명이 일었다. 정신이 잠시 둔해진 사이 독수리의 공격은 더욱 매서워졌다. 여기저기서 이게 대체
뭐냐며 울분을 토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습격대는 수차례의 낙마와 공격을 근근이 버티며 2 황자의 흰색 마차를
쫓았다.

그렇게 잘 도망치던 흰색 마차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습격 대원들이 미리 작업해 둔 결과물이었다. 느릿하게 달리던 2 황자 무리가 하나둘 멈춰 섰다.
타이렝은 으하하 웃으며 승리를 예감했다. 지긋지긋한 술래잡기의 끝이 보이는 듯 했다. 쓰러진 나무 앞에 멈춰선
기사들이 하나 둘 망토를 젖혔다. 그들의 머리 위로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한 명, 한 명. 그리고, 이내 모든
사람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마치 일부러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 무리 사이에 있는 5 황자 디에즈를 발견하고 타이렝은 당황했다. 오른쪽 갈림길로 들어갔으리라 예상했던


디에즈가 이 자리에 있다니. 무언가가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타이렝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스타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신호를 기점으로 디에즈와 함께 기사들의 반절이 되는 인원이 말을 탄 채로 나무를 훌쩍 뛰어
넘었다.

암살대가 눈만 깜박이며 그들을 지켜봤다. 1 조의 조장이 머뭇거리다가 타이렝의 옷자락을 툭툭 당겼다. 어쩌면
좋겠냐고 묻는 것 같은데, 타이렝도 환장할 지경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남은 기사들과 함께 흰 마차가 있었다.
황자의 안위가 걸려 있는 이 중요한 판국에 호위를 줄이는 미친 짓을 하다니? 타이렝의 뒷골에 섬뜩한 감각이
돋아났다. 설마, 저 안에…… 2 황자가 없는 건가? 방금 달아난 무리에 2 황자가 섞여 있었나? 아니다. 그 중에
은발 머리는 없었다. 전원이 망토를 벗으며 얼굴을 드러낸 이유는 그 때문인 것 같았다. 타이렝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이놈들은 미끼다!
저 마차에 리카르디스가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열어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타이렝의
머릿속에서는 2 황자가 득의양양 한 낯으로 마차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리카르디스의 그림자가 그를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지만, 이미 실타래는 잔뜩 엉켜 있었다.

검은 집단은 곧 타이렝의 지시 하에 세 개로 나뉘었다. 이곳에 남을 자, 베이지색 마차를 쫓을 자, 세 개의


마차가 남아 있는 최초의 지점으로 돌아갈 자. 검은달의 대원들은 재빠르게 숲속을 헤치며 사라졌다. 타이렝 또한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2 황자를 추격하기 위해 떠났다.

흰 마차를 둘러싼 사람들로부터 비장함이 감돌았다. 남은 하얀밤 기사단은 스타스를 비롯한 삼십여 명으로, 스무
명 남짓한 암살자들보다 많은 숫자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싸움이 일어나기 전부터 스타스는 체감하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 수의 우위로는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검은 옷을 입은 습격 대원들의 태도에는 어떠한 조급함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기이한 안광을 띠고 있는 눈동자에는 오만함이 서려 있었다. 스타스가 이끄는 이곳에 2
황자가 있건 없건 간에 모든 것은 자신들의 뜻대로 돌아가리라 확신하는 듯했다.

스타스는 얼굴의 빗물을 닦아 내며 웃었다. 습격해 온 다수의 인원은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속으로 인해 잘게
흩어지고 쪼개졌다. 그들의 전체 인력과 맞부딪쳤다면 이 자리에서 전멸했을 것이다. 애초부터 패할 것이
분명했던 싸움. 약간의 승산을 더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고래 무덤의 파르딕트와 가을안개의
스타스는 검을 다잡았다. 모두가 이 위험 속에 발버둥 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하나뿐인 주군,
리카르디스마저도.

마차를 둘러싼 두 무리가 충돌했다.

리카르디스님을 위해!

모든 것은 힉살라의 뜻대로!

* * *

쾅!

검을 던져 버린 로젤린은 적과 몸을 부딪치며 직접적인 힘겨루기를 했다. 검은 복면의 남자가 나무에 처박히며


꿈틀거렸다. 또 다른 암살자가 그녀의 목을 향해 예리한 검을 휘둘렀다.

로젤린은 몸을 깊게 숙여 칼날을 피한 후, 상대의 발목을 휙 잡아채어 들어 올렸다. 그녀의 어마어마한 힘에


남자는 몸의 균형을 잃었다. 로젤린은 그 품으로 한 발짝 깊게 파고 들어가며 팔꿈치로 관자놀이를 세게 찍었다.

퍽.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다른 암살자에게 날아갔다. 두 남자는 뒤엉켜 데굴데굴 구르더니 그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로젤린은 흙바닥에 떨어져 있는 발타의 검을 집었다. 지금 막 그녀에게 검을 왜 던지느냐,
대체 뭐로 싸우려고 이러냐 하며 타박하려던 리카르디스가 머쓱해하며 말을 바꾸었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으니 검 좀 그만 버려, 경! 위험하잖아!”

“예.”

그녀는 듣는 둥 마는 둥 설렁설렁 대답하면서 주위를 쭉 살폈다. 세 대의 마차가 있는 넓은 공터. 하얀밤


기사단을 둘러싸고 있는 암살자의 수는 스물이 조금 넘었으나 현재는 반 이하로 줄었다. 하얀밤 기사단 측의
피해는 크지 않은 상태였다. 강력한 치유의 힘을 지닌 신성력 덕분이었다.

피가 분수같이 쏟아지던 머리에서는 상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팔이 뜯겨 나갈 듯 너덜거리는 상처도


순식간에 아물었다. 습격 대원들의 안색이 점차 파리해졌다. 허벅지를 꿰뚫렸던 기사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자난이 다 말하지 못한 채 죽어 버렸지만, 모두가 깨닫고 있었다. 2 황자 리카르디스가
이곳에 있다.

베어도 찔러도 죽지 않는 무시무시한 군단이었다. 상처는 생성된 그 순간부터 사라졌고, 흉터 하나 남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섭리를 무시하는 듯 했다. 저것이 인간의 힘이란 말인가? 두려움에 팔다리가 떨렸다. 크레안
티다니온의 창을 막는 이델라브힘의 방패. 대륙에 널리 퍼진 명성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다. 그들에게도 신성력은 필요한 것이니까.]

전날 밤이었다. 군사 회의는 밤이 새도록 계속되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리카르디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몇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신성력의 소유자 2 황자 리카르디스가 그들의 영역인 발타의 땅 안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하카브 왕자가 이 귀중한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우선 전하를 생포하려는 시도를 하겠지요?]

[그래, 그러니 해독제가 없다는 파편을…… 처음부터 사용하진 않겠지. 초반에 수를 좀 줄여야겠어.]

[단순히 수의 차이로 우위를 점하려 할까요?]

[하카브 왕자가 그렇게 쉽게 나올 리가. 몇 가지 가정은 있었지만 ‘이것’이 내게 확신을 주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훔쳐 왔던 검은 보석을 들어 보였다. 마력이 담긴 검은 돌이었다.

[마인들은 몸 안의 마력을 활용해서 신체 능력을 높이고는 하지. 마력의 양에 따라 그저 신체가 건강한 자부터
마수와 같은 힘을 내는 자까지 다양하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응축된 마력이라면, 글쎄. 대단한 병기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겠나?]

[……!]

다들 리카르디스의 손에 담긴 검은 보석을 쳐다보았다. 그 작은 돌 안에서 연기가 불안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마수의 결정을 꽉 쥐었다. 뾰족한 파편이 그의 손을 파고 들 듯했다.

[인위적인 마인의 제조라…… 하카브 왕자도 제법 재밌는 짓을 벌이는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그런 간악한…….]

잇세리온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분노, 경악, 공포. 막사 안에 있는 모든
이가 느끼는 공통적인 감정이었다.

[몸에 심는 것이려나. 흠…… 사용법까지는 모르겠군. 어쨌든, 신체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증폭 되어 있는


집단이겠지. 보통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지는 싸움이지만 내가 나서면 판도는 달라진다. 신의 가호가 있는 이상
그대들은 쉽게 다치지 않을 테니.]
[너무 무모합니다, 전하!]

[백 명이 넘는 인원을 내가 하나하나 치료해 가며 끌고 갈 수는 없어. 상급 기사들로만 호위 조를 구성한다. 열


명 안쯤이면 적당하겠군.]

잇세리온은 거품 물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삼천 명이 달라붙어서 호위해도 모자랄 판에 열 명? 심지어 열 명


안쯤이란다.

[스타스 경도 빼고.]

[전하!]

이번에는 스타스도 기겁했다. 기사단장을 떼어 놓고 대체 어쩌겠다는 건지! 모두가 눈을 뒤집고 기함했지만


리카르디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기에 제국의 2 황자,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가 있습니다. 큰 소리로 말하고 다니지 그래.
그대들의 말대로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이 2 황자를 안 지키면 또 누굴 지키겠어. 그놈들도 똑같이 생각하겠지.
설마? 설마 2 황자 곁에 기사단장이 없겠어? 설마 기사단장이 빈 마차를 지키고 있겠어? 분명 생각해 볼 만한
틈이 있지만, 희박한 확률을 걸고 도박을 하지는 못할 테지. 하지만 나는 한다, 그 도박.]

미친 짓이었다. 어느 나라의 황족, 왕족이 제 목을 미끼로 전쟁터에 뛰어든단 말인가. 그를 위해 죽음도 불사할
스타스는 무릎을 꿇으며 그의 명에 불복하겠노라 얘기했다. 물론, 고지식한 기사단장이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던 바라 놀라울 것도 없었다.

정공법으로 싸운다면 전멸이다. 리카르디스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분명 많은 기사들이


죽을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아둔해 보일 정도로 이 방법을 고집하는 이유는 제 사람들의 승률을 조금이라도 더
올리기 위함이었다. 아주 조금 더 이길 수 있는 가능성, 아주 조금 더 살 수 있는 가능성. 본말이 전도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사가 주군을 지키는 것이지, 주군이 기사를 지키는 게 아니었다.

[다음 편에 계속....]

48 화.

막사 안이 들썩였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리카르디스의 작전에 강하게 반대했다. 제 시체를 밟고 가시라,


죽어도 안 된다! 핏발이 번뜩번뜩하게 비치는 것에서 그들의 결의가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쐐기를 박기 위해
누군가의 이름을 입안에 담았다. 바로 옆에 있는 잇세리온과 스타스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

[로젤린 경.]

높낮이 없이 잔잔한 대답이 들려왔다.

[예, 전하.]

로젤린이었다. 정확히는 막사의 아래 부분을 들춰, 얼굴만 쏙 들어와 있는 머리통이 대답했다. 그녀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흙바닥에 펼쳐져 있어 다소 공포스러웠다.

[…….]

[…….]

아, 아까 분명 레이몬드한테 잡혀 갔는데 언제 또 들어와 있었지? 그것도 머리만? 파르딕트와 카일로는 그녀의


집념에 식겁했다. 리카르디스가 유쾌하다는 듯 하하 웃었다.

[스타스 대신 그녀가 날 지킨다. 그렇지 로젤린 경?]

[네. 제가 전하를 지킵니다.]

[호위 인원이 적고 많고는 딱히 상관없지 않나, 경?]

[그렇습니다. 솔직히 움직이는데 방해만 됩니다.]

이것 봐. 그녀도 그렇게 말하지 않나. 리카르디스는 여상한 표정으로 막사 안의 사람들에게 고루 시선을 주었다.
그들은 입만 떡 벌린 채 황당해하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버럭 소리 질렀다.

[안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고작 상급 기사 한 명으로……!]

리카리디스가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의 말을 끊었다.

[로젤린 경.]

그녀는 몸을 굴려 완전하게 막사 안에 들어왔다. 하얀 제복에 흙먼지가 얼룩덜룩하게 묻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구석에 있던 거대한 방패를 그녀에게 넘겼다. 중장비 전사인 파르딕트의 방패라 그런지, 로젤린이 들고 있으니 몸
대다수가 가려질 정도였다.

그녀는 물끄러미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부숴버려.]

리카르디스의 농담에 모두들 어허허 웃었다. 하지만 곧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두꺼운 방패가 그녀의 손에서
종잇장처럼 우그러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콰드득, 카앙. 여린 손등 위로 힘줄이 툭 불거졌지만 그녀의
표정만은 온화했다. 점점 더 휘어지던 방패는 완전히 뒤틀리며 결국에는 타앙! 금속이 우는 소리와 함께 두
조각으로 분해되었다. 파르딕트는 방금 제 귀한 방패가 쓰레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충격 받았다.

[더 할까요?]

리카르디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잇세리온은 어버버,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제 두 눈으로 뭘 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조용해진 공간 속에서 말을 이었다.

[그녀가 날 지킨다.]

아까와는 다른 무게를 지닌 말이었다.

[네, 반드시.]

* * *

누가 보아도 불리한 형국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비정상적으로 강인한 발타의 습격대를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웠다. 이미 기사단원의 삼분의 일은 차가운 비를 맞으며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큰 부상을 입은 자도, 이미
죽은 자도 있었다.

스타스와 파르딕트는 그 난전의 가운데 끝까지 버티고 서 있었다. 실력과 오랜 경험이 그들을 가까스로
지탱했지만 이미 한계였다. 급소를 스치지 않았다 뿐이지 어디 하나 성한 곳 없이 너덜너덜거렸다. 지키는 자들이
줄줄이 쓰러져 마차로 가는 길이 열렸다. 암살자 중 한명이 빠르게 접근해 흰색 마차의 문을 열었다. 널찍한
내부는 습기만이 가득 차 있었다.

“비어 있습니다!”

쯧, 혀 차는 소리가 났다. 습격대 1 조의 조장이었다. 흘러가는 분위기로 보아 이곳에 2 황자가 없으리란 것쯤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몇 놈 안 남았으니 마저 처리하고 간다.”

“네.”

“네.”

스타스가 복부의 길게 난 상처를 붙잡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끝인가. 승패는 이미 갈렸다. 그러나


하얀밤 기사단원 중 그 누구도 끝까지 검을 놓지 않았다. 스타스는 덜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두 명을 더 베어 내다
어깨를 꿰뚫렸다. 그는 이를 꽉 깨물며 신음을 참아냈다.

“제법 끈질겼다. 일라베니아의 기사여.”

무릎을 꿇은 스타스의 목덜미로 암살자의 검날이 향했다.

쿵…….

검을 내리치려던 손길이 잠시 정지했다. 암살자는 괴이한 소리에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잘못 들었나?


쿵.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무거운 것이 내려앉는 소리가 그들의 귀로, 땅의 진동으로 전해졌다.

쿵!

크고 묵직한 울림에 간신히 땅을 딛고 서 있던 기사단원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천둥소리처럼 온 공간이


울렸다. 놀란 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뭐, 뭐야. 하얀밤 기사단원 뿐만 아니라 검은달의 암살자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쿵, 쿵. 소리는 점점 빨라지고 발밑은 더욱 요동쳤다. 콰드득, 와직. 수백 년 그 자리를 지키던 거목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푸른 잎이 빼곡히 채워진 숲에서 기묘한 움직임이 일었다. 갈대밭에 바람이 불듯이 나무가
하나씩 눕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저, 저게 대체……!”

모두들 경악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뒷걸음질 치던 암살자 한 명이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밟았다.
탁.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검은 형체가 숲의 경계를 뚫고 뛰쳐나왔다.

쿠와아아아아-!

귀가 멀어 버릴 정도의 포효였다. 스타스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던 자의 상반신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스타스의


얼굴 위로 피가 확 튀었다. 눈을 깜박이며 핏물을 시야에서 몰아낸 것은 시간이 조금 흐른 후였다. 그 사이에도
인간의 비명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검은 털과 날카로운 발톱. 일반적인 불곰의 서너 배 크기는 될 법한 거대한 곰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을 도륙해
나갔다. 산만한 덩치가 무색할 정도의 빠르기였다. 검은달의 암살자들 또한 자그마한 마수의 결정을 몸에 심고
있었으나,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암살자들은 맹수와 대적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도망가는 자, 전의를 상실한
자들은 곰의 두터운 앞발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데 왜…… 스타스의 의문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로 인해 끝맺지 못했다.

“다, 단장님.”

바다협곡의 네스터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스타스를 불렀다. 네스터는 검은 곰이 지나가는 길목에 서 있었지만
무사히 귀환했다. 곰이 커다란 엉덩이로 밀어 그를 튕겨냈던 것이다. 그것도 네스터의 옆에 있던 암살자의 머리를
아작아작 씹다 뱉으면서.

아저씨, 길 막지 마시고요. 방해되니까 좀 비키세요. 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거슬리는 물건을 치워 버리는


듯한 느낌으로.

이후로도 야수는 몇몇 사람들을 머리나 엉덩이로 슬쩍슬쩍 밀어냈다. 모두 일라베니아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엉덩이가 튕겨낸 방향을 따라 생존자들의 무리로 합류했다. 다들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저 짐승이 검은달의 암살자만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아주 명확해 보였다. 혼란의 와중
스타스는 제복을 찢어 어깨의 상처를 지혈했다.

“부상자들을 수습한다!”

암살자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기사단원들은 스타스의 명령에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지금은
공격당하지 않고 있지만, 암살자들이 전부 죽은 후에는 사정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었다.
비명소리가 멎었다. 흙바닥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운 좋은 암살자 몇은 달아났다. 검은 짐승은 형형한
눈으로 기사단원들을 쭉 둘러보고는 어슬렁어슬렁 숲속으로 사라졌다. 암살자들이 도망간 방향이었다. 쿵, 쿵.
땅을 울리는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허…… 허억…….”

단원들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암살자들과 치렀던 전투보다도 두려운 경험이었으나 덕분에
전멸은 피했다.

“단장님.”

파르딕트가 스타스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 또한 허벅지에 대충 천을 둘러 지혈해 놓은 상태였다.

“눈치채셨습니까. 그 짐승.”

스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혼이 쏙 빠져 있어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두 사람은 눈치챘다. 그 검은


곰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피에 잔뜩 젖어 있었다.

“전하를 뒤쫓아 간 무리도 비슷한 꼴을 당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에게는 대단한 행운이군요. 검은달 놈들이
그 곰의 돈이라도 떼먹은 걸까요?”

“농담에는 영 재주가 없군, 파르딕트 경. 놈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얼른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지.”

“아니면 먹잇감을 빼앗겼다던가? 새끼를 건드렸다던가?”

“…….”

이후로도 파르딕트는 부모의 원수까지 운운하며 온갖 추측을 해 댔다. 스타스는 그의 말을 받아치며 잡담에
마침표를 찍었다.

“뭔지는 몰라도 소중한 걸 위협하지 않았겠나.”

스타스는 문득 하늘을 올려봤다. 그들 머리 위를 날아다니던 독수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 * *

타이렝은 상당히 화가 난 상태였다. 초장에 기사단 전원을 전멸시키고 황자를 납치하려던 계획이 자꾸만 틀어지고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계략과 습격대만 공격하는 독수리까지. 아주 재수가 옴 붙은 날이 아닌가. 그는 초조함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되돌아가 상황을 마무리 지어야했다. 그러나 세 대의 마차가 있어야 할 장소에서 마주한
광경은, 그의 상상과 다소 달랐다.

“이, 이……!”

타이렝은 주위를 빠른 눈으로 훑었다.

“이런 젠장! 그 망할 놈들이!”


공터에는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차도, 말도, 살아 있는 하얀밤의 기사도. 진흙을 피로 흥건하게
물들이고 있는 시체들만 차가운 비속에 널브러져 있었다. 수십 구의 시체는 대부분이 검은달의 습격대원 이었고,
하얀밤 기사단원의 시체는 고작 넷에 불과했다. 작전 지점으로 돌아온 대원들이 모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타이렝이 버럭 소리 질렀다.

“찾아서 전부 죽여!”

그는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2 조를 관리하는 자난의 시체가 보였다. 감이 좋은 놈이었다.


이 웃기지도 않은 계획을 혼자 알아채고 이곳에 남은 듯 했다. 타이렝은 이빨을 으득으득 갈았다.

“……이건?”

타이렝은 시체들 주위로 굴러다니는 작은 유리병을 집었다. 조장들에게만 배급된 발타의 마독, ‘파편’이 담긴
병이었다. 하지만 텅텅 비어 있었다. 필사의 상황이 아니면 꺼내지 않아야하는 무기인데 누군가가 사용해 버린 듯
했다.

[다음 편에 계속....]

49 화.

“다들 괜찮나?”

“예.”

“……네.”

빗줄기가 굵어지며 더 억세졌다. 체력은 뺏기겠지만 지나온 흔적은 쉽게 씻겨 나갈 것이다.

공터에서 싸움을 끝낸 후 하얀밤의 기사들은 나뉘어 행동하기로 했다. 한 번에 많은 인원이 움직일수록 흔적이
커져 도리어 위험해 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멈춰 있던 세대의 마차와 말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보내졌다.
적의 혼란을 더해줄 것이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기사들은 리카르디스의 망토 자락에 입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보는 주군의 모습일지도 몰랐기에 기사들은 몇


번이고 그를 눈에 담았다. 회색의 숲에 이델라브힘의 빛이 아름답게 떠도는 광경은 기사들의 마음을 굳세게
만들었다. 내려앉은 어둠을 걷어 내는 자. 리카르디스의 축복이었다. 상처가 사라지고 몸에는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시체를 수습할 시간조차 없었다. 저마다 동료의 머리카락을 베어 품에 넣었다. 전투가 끝나 분위기가 느슨해지고
소강상태에 들어선 때였다. 죽은 척 숨을 죽이고 있던 검은달의 습격대원은 이런 방심한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품 안의 암기를 던지며 리카르디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를 노린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날아오는 작은 암기들은 상급 기사 헤일이 막아 내었고,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품에 안겨 위험에서 벗어났다. 2
황자를 잽싸게 끌어안고 바닥을 구르는 그녀의 폼이 얼마나 날렵하고 멋졌는지,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주변에서
감탄의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로젤린은 어깨에 피가 흐르는 감각을 느꼈다. 암살자의 검에 살짝 베인 듯 했지만 다행히도 큰 상처는 아니었다.
검은달의 암살자는 레이몬드의 일격에 머리가 반으로 쪼개졌다. 분노가 서려 있는 날카로운 검이었다.

호위 기사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흩어졌다. 리카르디스는 부단장 나단과 레이몬드, 상급 기사 헤일, 로젤린과
함께 움직였다. 다섯 명은 빠른 속도로 숲을 지나갔다.

“…….”

로젤린은 숨을 가쁘게 쉬었다. 겨우 이 정도의 달음박질이 힘겹게 느껴졌다. 그녀가 ‘그것’에서 점차 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처음 ‘로젤린’이 되었을 당시, 부러진 뼈와 상처를 복원했던 속도와 판이했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어깨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피가 멎고 살이 채워지고는 있었지만 현저히 느린
속도였다. 하지만 로젤린의 체력을 앗아가고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처를 통해 들어온 이질적인 기운이
몸속을 헤집으려 날뛰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 정체를 쉽게 파악했다. 그녀가 읽어 낼 수 있는 종류의 힘이었다.

‘파편’.

마지막 일격을 날리던 암살자의 눈빛이 필사적이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던 건가. ‘그것’일 때에는 어떤 독도
통하지 않았지만, 인간에 동화된 지금의 상태로는 장담할 수 없었다. 생명의 조각이 섞이기 시작한 지금. 마력의
덩어리가 아닌, 육체를 가진 생물인 지금. ‘파편’의 힘은 로젤린에게 분명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헉, 헉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자신의 몸 상태에 집중하던 로젤린은 재빨리 주위를 훑었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는 하나 주변을 경계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날카로운 감각이 주변을 향한 그 순간, 로젤린은
고통에 가득 찬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달리고 있던 상급 기사 헤일의 무릎이 한순간에 확
꺾였다는 사실 또한 인지했다. 로젤린은 재빠르게 그의 몸을 받아 냈다.

“헤일 경!”

그의 얼굴은 시체보다도 창백했다. 헤일은 코피를 흘리며 헉헉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급한 목소리에
레이몬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전하! 헤일 경이……!”

조심스럽고 낮게 외치는 목소리였지만, 다들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급하게 로젤린과 헤일에게 다가왔다.
리카르디스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헤일의 옷을 벗기며 상태를 살폈다. 그의 눈과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건
분명히 ‘파편’의 중독 증세였다. 부단장 나단과 레이몬드는 초조해하며 상황을 지켜봤다. 리카르디스가
치료하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손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곧 헤일의 손목 부근에 길게 그어진 상처 한줄기를 발견했다. 상처 부위에는 이미 새카만 핏줄들이


떠올라 있었다. 암살자의 암기를 쳐 내다가 스쳤던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손에서 안개 같은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반딧불 같은 작고 하얀 빛 무리가 안개를 감쌌다. 이델라브힘의 빛은 오랜 기간 상처의 곁에 머물렀지만,
거미줄같이 퍼진 검은 핏줄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이미 상당한 양의 신성력을 쏟아부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성력이 몸 안에 들어갈 때면 잠시 얼굴에


생기가 도는 정도에 불과했다. 헤일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가 다시 한 번 힘을 쓰려고
하자, 헤일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아 만류했다. 헤일은 로젤린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 이미 전투에서 힘……을 많이 쓰셨습니다, 전하. 갈 길이 아, 아직 멉니다. 힘을 아끼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레이몬드 경이 부축해. 걸어라.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갈라진 리카르디스의 목소리에 절실함이 비치고 있었다. 헤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맨 처음 암기가 스쳤을
때는 작은 상처라고 생각했지만, 곧 몸속을 은밀하게 파고드는 고통에 깨닫게 되었다. 죽음이 코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이 이상 발길을 늦추게 할 수는 없었다. 암살자들은 지금도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저……는 이 길을 벗어나 흔적을 남기며 다, 른 곳으로 걷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스타의 사냥 대회에서도 살아남았던, 오랜 기간 그의 곁에서 호위 임무를


맡았던 기사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이렇게나 덧없이…… 사람이 죽는 것이 이렇게나 쉽다니. 헤일은 힘겹게
무릎을 굽혀 리카르디스의 더러운 부츠 끝에 입을 맞췄다.

“부, 부디. 전하의 앞길에, 이델라브힘의 빛이 깃들기를……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헤일은 로젤린에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황자 전하를 잘 부탁한다, 로젤린 경. 피가 목에 막혀 있는 것


같은 거친 목소리였다. 로젤린이 경례하자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길을 벗어나 걸었다. 안개 깔린 숲은 금세 한
사람의 모습을 집어 삼켰다.

“……이동한다.”

“네.”

“네.”

로젤린은 다시 달리면서 헤일이 사라진 방향을 한번 쳐다보았다. 어깨의 상처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거센 분노가 그녀의 머릿속을 사납게 헤집고 다녔다.

* * *

숲속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와 발을 끌어들이는 질퍽한 진흙길.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해
피로한 몸까지. 그들은 그 열악한 상황 속에 몇 시간을 이동했다. 지쳐서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라, 자리를 잡고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로젤린이 운 좋게도 숨겨진 작은 동굴을 발견했다. 짐승 냄새가 나는 걸로 보아
무언가의 집이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희미한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깊은 바위 굴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망토를
벗어 한쪽에 널어 두고 털썩 주저앉았다.

“이 어둠 속에서 우리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겠지요. 조금이라도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전하.”
“그래. 그대들도 좀 쉬어. 잠시 뒤에 다시 움직여야 하니.”

지친 목소리였다. 로젤린은 잠시간 그를 바라보다 동굴 벽을 따라 흐르는 빗물을 수통에 채웠다. 그 사이 남은


기사들이 각자의 주머니를 뒤져 식량을 확인했다.

“전하. 여기, 육포입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짙은 어둠뿐이었다. 불도 지피지
않은 동굴에서 다른 형체를 구분하리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은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왜 저러는 거지? 아. 인간은 어두우면 잘 볼 수 없지. 로젤린은 어둠 속에서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는 제 입안을 비집고 들어온 짭짤한 고기의 맛에 흠칫 몸을 떨었다. 로젤린이 그의 입에 더럭 쑤셔


넣은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잠시 어처구니없어 하기는 했으나 그녀의 행동에 딴죽을 걸지는 않았다. 힘겹게
육포를 씹어 삼켰더니, 곧바로 달달한 과자 한 조각이 입에 들어왔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계속 어미 새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 꼴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손에 올려 주면 되지 않나, 경?”

“아. 그렇군요.”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손을 잡아 육포와 수통을 넘겼다. 리카르디스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달리는 와중에
빗물을 많이 마셨는데도 갈증이 일었다.

그는 동굴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주위가 온통 어두워 뜨고 있는 것과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귓가로 호위


기사 세 명이 도란도란 음식을 나눠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삭와삭. 과자가 입안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지금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일상의 소리였다. 몸이 이완되며 날뛰던 심장이 차분해졌다. 리카르디스는 그
소리를 들으며 스르르 잠들었다.

비 그친 새벽녘의 하늘이 푸른색을 띠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눈꺼풀 위로 비치는 희미한 빛을 감지하고 눈을


떴다.

“……허!”

리카르디스는 허, 억 크게 숨을 들이켰다. 눈을 감고 있는 로젤린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가볍게 간질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뒤통수를 따뜻하게 감싸오는 온기를 느끼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설마, 지금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는 건가? 상황을 파악한 리카르디스가 경악했다. 이런,
미친. 내가 지금, 미, 미친.

그는 로젤린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짝 눈을 떴다. 그러고는 동굴 입구를 한번 훑어보더니 리카르디스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좀 주무셨습니까?”

리카르디스는 그때까지도 자신의 정신머리를 욕하고 있었다. 아무리 고단하다고 해도 제 몸을 건드리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다니.

“오늘도 하루 종일 움직여야 하는데,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야!”


“저는 괜찮습니다.”

로젤린은 제 말을 입증하듯 가뿐한 몸놀림으로 벌떡 일어서 기지개를 켰다.

“바닥에서 주무시기에. 처음에는 팔베개를 하려고 했습니다만, 팔뚝보다는 다리가 푹신할 것 같아서 바꿨습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다음 편에 계속....]

50 화.

세상에, 이델라브힘이시여.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머릿속에서 또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로젤린의 품에 안겨, 팔을 베고 누워 있는 제 모습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둘 다 하지 마!”

“예에.”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묶으며 흘리듯 대답했다. 귓등으로도 안 듣는 태도였다. 로젤린은 꿈나라로 떠나
있는 나단과 레이몬드를 보며 나갈 채비를 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혼란에 빠져 있는 리카르디스에게 말했다.

“잠시 바깥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놈들과 부딪히면, 응전하지 말고 바로 돌아와.”

“…….”

“경.”

“……알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에는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혀를 차기까지 했다. 이 기사가 정말……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걱정이 괜한 기우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제발 멀리 가지 말고,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곧바로 돌아와. 급히
덧붙인 말에 그녀는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은 동굴을 벗어났다. 어제와는 달리 화창한 날씨였다. 그녀는 굵은 나뭇가지를 밟으며 높은 언덕으로
이동했다. 몇 번의 도약으로 정상에 도달했다. 나무로 빼곡히 채워진 숲의 정경이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로젤린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망토와 윗옷을 벗었다. 어깨의 상처가 아물지 못한 채 짓물러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인간의 신체라지만 치유되는 속도가 지나치게 더뎠다. 이것도 ‘파편’의 힘인가? 상처에서
피고름이 흘러내렸다. 독은 완전히 퍼져 나가지 못했으나, 해독되지도 못하고 아직까지 어깨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검은 실핏줄이 상처 부근에 울룩불룩 떠올라 있었다.

‘잘라 낼까?’

로젤린은 단검을 꺼냈다. 그녀는 제 쇄골부터 겨드랑이 아래까지 가상으로 검을 그었다. 왼팔이 통째로 잘려나갈
수 있는 범위였다.

‘아니야.’

출혈이 과하면 위험하다. 흔적이 남는다. 최소한 그가 일라베니아에 도착할 때까지는 피해야 하는 수단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오른손잡이라고 해도 왼팔과 어깨가 통째로 없어진다면, 몸의 균형이 깨질 것이다. 제대로 싸울 수
없는 건 곤란했다. 로젤린은 아쉬운 듯 단검으로 어깨를 긋는 시늉을 몇 번 더 반복했다. 하지만 차가운 금속은
그녀의 몸에 파고드는 대신 막 옆을 날아가던 산새에게 꽂혔다.

일단은 보류한다. 어제보다 ‘파편’이 더 스며들었으나, 아직까지는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로젤린은 숲


저 너머를 응시했다. 새벽 공기를 실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로젤린은 킁킁, 소리를
내며 코를 움찔거렸다. 나무 잎과 흙의 냄새 바뀌고 있었다. 발타의 숲에 일라베니아의 냄새가 섞이기 시작했다.

* * *

불을 피울 수 없어서 고기는 날것으로 먹어야 했다. 리카르디스는 꼬질 해진 낯으로 로젤린이 넘겨 주는 생고기를


씹었다. 잇세리온이 보았다면 바닥을 굴러다니며 대성통곡했을 장면이었다.

식사 후에 네 사람은 다시 움직였다. 부츠 자국이 아직 다 마르지 못한 진흙에 새겨졌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숲을 스쳐 지나갔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는 시간이 흐르며 뜨거워졌다. 작열하는 빛이 잎을 뚫고 찬란하게
내려쬐었다.

로젤린은 귀를 활짝 열어 두었다. 파삭파삭. 일행의 옷자락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찌르르 벌레 우는 소리,
돌풍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뒤섞였다. 로젤린은 그 소리 하나하나를 감지하며 판별했다. 무해하다,
무해하다. 아우우- 짐승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또한 일행을 향하지 않으니, 이 또한 무해하다.

삐이이-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삐이이, 삐이이. 피이…… 로젤린은 눈을 번뜩였다. 이것은 위험하다!

로젤린은 튀어나온 거대한 나무뿌리를 콱 밟으며 급하게 발걸음을 멈췄다. 다들 로젤린의 행동을 눈치채고 걸음을
늦췄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만 들을 수 있는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숲속에서 들려오기에는
한없이 낯설고, 인위적인 소리였다. 무언가의 신호가 틀림없었다.

암구호로 이루어져 있기에 내용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 뒤에 검은 집단이 있으리라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였다. 로젤린이 짧게 고심하는 도중에도 새소리와 피리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쫓아오는 속도가
빨랐다. 솔개 한 마리가 뱅글뱅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저 짐승이 습격대에게 길을 안내했나? 그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놈들이 붙었습니다. 먼저 떠나십시오, 제가 남겠습니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린 리카르디스가 입을 떼기 전, 레이몬드가 먼저 소리쳤다.

“로젤린!”

“어서가, 레이몬드. 거리가 멀지 않아.”

로젤린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리카르디스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걸어가 팔을 확 잡아챘다. 로젤린이
압박감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상처가 있는 쪽이라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 말을 할 시간에 달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빠른 속도로 쫓아오고 있습니다. 제가 저들의 발을 묶을 수 있습니다.”

조용한 숲속에서 적의 존재를 감지한 로젤린.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가 잘못 들은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그저 답답했다. 제 손을 단호하게 밀어내는 손길을 느끼고 있으니,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 밑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이라도 꾼 것처럼 가슴이 철렁였다.

“절대, 안 돼. 같이 이동한다, 로젤린 경!”

“전하.”

“이동한다고 했어! 어서 움직여, 로젤린!”

리카르디스는 버럭 소리 질렀다. 쫓아오는 자들이 듣건 말건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그들은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로젤린은 딱딱한 얼굴을 한층 더 굳히며 리카르디스의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어이없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파편을 들고 있을 겁니다. 제가 나서야 합니다.”

“파편이 그대는 피해간다던가? 헛소리 말아.”

로젤린이 제 망토를 홱 젖혔다. 흰 제복의 어깨 부분은 찢겨 있었고, 피가 굳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세


남자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설마, 설마…….

“저는 이미 중독되어 있습니다. 진행 속도는 늦지만, 파편이 틀림없습니다.”

가세요, 전하.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멀거니 서 있었다. 땅이 흔들거렸다. 아니, 그의 몸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손은


공기를 잡듯이 허공을 부유하며 그녀에게 나아갔다. 하지만 손길이 로젤린에게 닿기 전, 나단이 급하게
리카르디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셔야 합니다, 전하.”

단 한마디, 그 한마디 말이 끝나지 않는 악몽이 되어 그를 끌어들였다. 리카르디스는 가슴을 억죄어 오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저……는 이 길을 벗어나 흔적을 남기며 다, 른 곳으로 걷겠습니다.]

[전하!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하얀밤 기사단,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맺었던 언약대로 목숨을 바쳐라!]

[…황자 전하를 모시고 이곳을 벗어나라!]

[전하, 세티스티아 황녀님께서…….]

[전하, 부디…….]

[전하……!]

전하! 미친 듯 소리를 지르고 울고 있는 말소리가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과거 그를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절대 죽지 않는다. 반드시 살아남는다! 나를
대신해 누군가가 죽더라도 이미 그 희생을 밟고 나아왔으니 멈출 수 없다. 죽은 이들의 바람이라 하여, 그들의
희생을 값지게 만드는 것은 나의 승리뿐이라 해서. 그렇게 이곳까지 왔다. 하지만 지금은…….

“로젤린…….”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피로가 갑자기 밀려왔다. 억지로 쌓아 왔던 발밑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흔들려왔다.

“전하…….”

“전하!”

멍한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그 짧은 단어 안에 발걸음을 재촉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앞에 서 있는 나단과 레이몬드를 쳐다봤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로젤린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자신의 심장이 찢기던 뇌가 녹아내리던, 갈 길은 정해져 있었다. 하나뿐이었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로젤린이 한 걸음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어서 떠나라며


밀어내는 손짓이었다. 따뜻했다. 새벽 내내 닿아 있었던 체온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로젤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리카르디스가 있었다.

“나는 멈출 수 없으니.”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긴 속눈썹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 반짝반짝하고 예쁘다.


그렇게 생각할 즈음 로젤린은 제 이마 위를 가볍게 누르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서임식 때 리카르디스가
성수를 찍어 줬던 이마의 정중앙이었다. 따스한 기운이 흘러들어 왔다. 마치 따듯한 물속에서 유영하는 것 같았다.
기분이 몽롱해졌다. 로젤린은 눈을 스르륵 감았다.

“그대가 와야 한다.”
로젤린은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환한 미소였다.

* * *

레이몬드는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미소 한 점 없는 그늘진 얼굴이었다. 평소 그가 로젤린을 어떻게


대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놀라워 할 광경이었다. 울지 않았고 화내지도 않았다.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로젤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로젤린은 다시 “레이몬드, 빨리.” 하고 그를 다그쳐야만 했다. 레이몬드의 턱 근육이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눌러 참는 듯 움찔거렸다. 그는 빠르게 다가와 로젤린을 아플 정도로 꽉 끌어안았다. 짧은
시간이 흘렀다. 그는 곧 앞서 달려간 리카르디스와 나단의 뒤를 쫓았다.

로젤린은 멀어지는 레이몬드의 등을 바라보았다. 빽빽한 나뭇잎의 틈새로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저 멀리서
레이몬드가 뒤돌아보는 모습이 보였다. 로젤린은 멀리서도 볼 수 있게끔 손을 높이 들고 붕붕 흔들었다. 그는
쓰게 한번 웃고 발길을 돌렸다. 그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젤린은 그제야 걸음을 돌려 반대쪽으로
향했다.

[다음 편에 계속....]

51 화.

저 멀리 기척을 숨기지도 않고 무섭게 쫓아오는 자들이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망토를 훌쩍 벗고, 부츠 안의
단검을 꺼냈다.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높게 묶을 쯤에는 발소리가 더욱 바싹 다가왔다.

로젤린은 단검을 살짝 던졌다가 받으며 손장난을 했다. 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묘기 같은 손놀림이었다.


그녀는 탁, 탁 손안에 차갑게 떨어지는 일정한 소리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로젤린의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다. 칼릭스, 하녀, 집사, 레이몬드, 수습 기사, 하급 기사, 상급 기사,
성의 시종들까지. 그녀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있었다. 일반적인 인간 여성, 일반적으로 단련한 인간.
로젤린은 항상 그 기준을 생각하며 넘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물론 그 기준이 매우 유해서 다른 이들이 보기에
조금은 이상해 보였을지언정, 그녀는 항상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로젤린을 보는 눈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떠난 이상, 그녀를 묶어둘 만한 금제는 어디에도 없었다.
로젤린은 몸을 빠르게 회전하며 단검을 높이 던졌다.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간 단검은 그녀를 쫓아오던 솔개의
머리에 정확히 박혔다. 그녀는 나뭇가지에 걸린 새의 사체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조용히 침묵하던 숲이
본격적으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땅이 울리도록 강하게 박차고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로젤린의 눈이 빠르게 홱홱 움직였다.

‘수는…… 열둘.’

예상보다 적은 인원수였다. 여러 갈래로 찢어 놓은 작전이 어느 정도 유효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고 걸음을 멈췄다. 나무 몇 그루를 사이에 두고 긴장감이 흘렀다.

로젤린의 눈에 익은 얼굴이 하나 있었다. 맨 처음 습격당할 당시에 기사단장 스타스와 검을 부딪쳤던 자였다. 이


암살자들의 우두머리가 아닐까. 그에게서는 다른 암살자들보다도 훨씬 많은 마력이 느껴졌다. 암살자들을
탐색하고 있는 와중에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황자를 넘기면 네 목숨만은 살려 주마.”

어, 이게 무슨 개소리지. 로젤린은 어이가 없어서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남자는 그녀의 침묵을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더욱 거침없이 개소리를 했다.

“앞서 사지가 찢겨 나간 네 동료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입을 여는 게 좋을 거다.”

로젤린은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꼈다. 머릿속은 뜨거운 용암이 가득 찼는데, 심장에는 얼음으로 만든 칼날이 박혀
있는 듯했다. 그녀는 들끓다 못해 녹아 버린 머리로 생각했다. 그래 이건 열 받은 거야. 화가 난 거야. 나는
지금 매우 화가 났어. 로젤린은 홀로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너의 다른 동료들은 어디 있지?”

남자의 거칠고 낮은 목소리와는 상반되는 고운 목소리였다.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지금 태평하게 질문을 건넨


것이 저 여자가 맞는 건가? 생각보다는 담이 강하군. 벌벌 떨면서 도망치지 않는 것만 해도 용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담이 강한 여기사의 말은 이후로도 끊이지 않았다.

“정보를 넘겨도, 목숨은 살려 주지 않겠다.”

“……뭐?”

“다른 곳으로 간 네 동료들은 사지 멀쩡히 죽었겠지만, 너희들은 그렇지 못한다.”

“이 미친년이!”

검은 머리의 기사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너희들 중 그 누구도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차분하고 고운 음색이었다. 타이렝은 제 몸을 감싸고도는 오싹한 감각에 몸서리쳤다. 저 온도 없이 창백한 낯빛


때문인가? 딱딱 끊어지는 말투 때문인가? 알 수 없었다. 그저 제 감각이 무수히 경계를 내리고 있었다. 저
기사는 위험해, 위험하다!

“죽여!”

고작 한 명 앞에서 이 무슨 추태냐. 남자는 겁먹은 자신을 추슬렀다. 까닥이는 손짓 한 번에 검은 옷의 무리가


일제히 몸을 날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흘러가는 시간을 천천히 되짚었다. 살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날카로운 검날에
햇살이 부서졌다. 발타의 습격대가 푸른 잎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로젤린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돋았다.
질긴 섬유가 압력을 못 버티고 찢기는 소리가 났다. 찌이익, 그녀의 팔이 부풀어 오르며 제복이 뜯겨져 나갔다.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손이었다. 그것은 눈 깜짝할 새에 암살자들의 몸을 갈랐다. 두 명의 암살자가 몸이
찢겨진 채 날아가 나무에 크게 부딪혔다.

“으, 으아악!”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동료의 시체를 보고 비명을 지른 것이 아니었다. 여자의 몸에 달려
있는 거대한 손 때문이었다. 팔을 온통 뒤덮은 검은 비늘, 세 갈래로 불거진 손가락, 맹금류의 부리 같은
날카로운 손톱까지. 인간에서 벗어난 기괴한 형태였다. 그 부조화에 본능적으로 거부감과 공포가 치솟았다.
습격대의 단원들은 숨을 헉 들이켰다. 저게 뭐지? 저게 대체! 그들이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한
암살자의 머리를 콱 쥐고 들어 올렸다.

콰직!

뼈가 으스러지며 피가 섞여 있는 액체가 검은 비늘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과를 으깨는 일보다 손쉬워 보였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아…….”

그녀는 숨을 내쉬었다. ‘파편’을 막고 있던 마력을 팔의 변이에 운용하다보니 점점 독이 퍼지기 시작했다.


날카롭고 사납게 날뛰는 마독이 그녀의 몸속을 가르며 마구잡이로 파고들었다. 머리가 저릿저릿해질 정도의
고통이었다. 빨리 끝내자. 그녀는 한층 차가워진 낯으로 땅을 박찼다.

“아악!”

“사, 살려……!”

한 번의 손짓에 몸을 가르고, 한 번의 공격에 뼈를 부수고, 한 번의 움직임으로 팔다리를 뜯어냈다. 로젤린은 그


거대한 손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자들이 힘을
모아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빗나갔으나, 운 좋게 스치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몸을 관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로젤린은 멈추지 않았다. 몸에 칼이 박히고서도 변함없는 표정으로 손을 휘둘렀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다녔다. 악몽 같았다. 아니, 차라리 꿈이 더 현실감이 있을 듯 했다.

그들 또한 크레안 티다니온의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정예 대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앞에서


어떤 가치도 의미도 없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그들이 결정의 일부를 사용해서 신체를 강화하는 것에
불과했다면, 로젤린은 마수의 힘 자체를 자유자재로 구현하고 있었다.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몇몇의 검날에 발려 있는 ‘파편’이, 깊고 작은 상처를 통해 그녀에게 침투했다. 로젤린은 제 몸을 파고드는


고통을 이기기 위해 소리쳤다. 으아아아! 그녀가 사나운 짐승처럼 울부짖자 일순 산이 소란에 휩싸였다. 새가
날아가고, 그로 인해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거센 바람이 그녀의 비명소리와 함께 숲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맹수와 벌레들이 위협적인 포식자의 싸움에 숨을 죽이며 존재감을 지웠다.

전투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무력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녹음이 우거진 숲의 정경에 울긋불긋 피가 낭자하게
뿌려졌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체들은 심약한 이가 본다면 단번에 토악질을 할 정도로 처참하고 참혹했다.
“흐, 흐으으…….”

숨을 쉬고 있는 자는 로젤린이 의도적으로 살려 둔 한 명뿐이었다. 그는 도망친다던가, 검을 들고 대적한다던가


하는 선택지가 없는 듯이 그저 무릎을 꿇고 몸을 떨기만 했다. 로젤린이 몸에 꽂힌 검을 무심하게 뽑아내자
남자의 몸이 흠칫 튀어 올랐다. 깊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로젤린은 대수롭지 않은 듯 피를 툭툭 털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벅.

한 걸음.

저벅.

한 걸음 더.

그는 급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한참 위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악귀같이 동료의 목을 잡아 뜯던 이 같지


않았다.

“더 쫓아오는 애들 있어?”

“네, 네네! 그, 그렇습니다. 미끼인 걸 확인하고 나면, 하, 합류하기로…….”

“몇 명.”

“여…… 열 하나에, 또 다른 지원 부대가 이십 명 더…….”

남자는 몸의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의 괴물 같은 손은 몸을 가르고 나무를 박살 냈다. 가벼운 도약으로
머리 위를 날아다니기도 했다. 때로는 암기가 공기를 울리는 소리를 듣고 능숙하게 피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
때문에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형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강대한 마력이 온 숲을 채우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는 원래부터 미약한 마력을 지닌 마인이었기에 느낄 수 있었다. 검은달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한
인간이었고, 검은 마석을 이식함으로써 비약적인 신체 능력의 상승을 가져왔을 뿐이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눈앞의 여자가 두려웠지만 경외심이 들기도 했다. 이런 존재를 보리라고, 이런 존재가 있으리라고 어떻게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몇 천 년을 살아온 거목, 폭풍우 치는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위대함을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마치, 마치…….

힐끗 시선을 들어 올리자 피로 물든 부츠가 보였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크레안 티다니온이십니까?”

로젤린은 바닥에 있는 검을 발로 차 올려 공중에 띄웠다. 솜씨 좋게 손잡이를 잡은 그녀는 곧바로 남자의 목을


강하게 내려찍었다.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있던 남자가 피를 토했다. 그녀는 검을 그어서 완전히 머리를 잘라 냈다.
남자의 머리가 데구루루 굴렀다.

“아니.”

로젤린은 차갑게 대답을 내뱉었다. 코에서 흐르는 피를 대충 닦아 낸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 계속....]

52 화.

세 사람은 빠르게 달렸다. 레이몬드조차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리카르디스는 이따금 한 번씩 발을


멈췄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와 숲에 사는 동물들이 내는 기척을 기다리던 누군가로 착각한 것이다. 멈춰
있는 시간은 짧았다. 하지만 이후로도 리카르디스는 자주 발걸음을 늦추고는 했다. 수없이 속고 수없이 다시
멈추기를 반복했다.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고 밤이 찾아왔다. 주위를 살펴보니 오두막 한 채가 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다. 허름하고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밤이슬을 피할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얼마나 남았지?”

“반나절 정도 더 움직이면 될 것 같습니다.”

“중간에 길을 틀어서 조금 어긋났을 수도 있습니다.”

세 사람 다 암묵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동료들의 희생과 몇 시간까지만 해도 있었던 누군가의 부재.


리카르디스는 오두막 안에 들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숨을 크게 쉬고는 무릎에 이마를 대고 한참 그대로
있었다.

발타, 일라베니아, 검은달, 하얀밤, 설원의 월계수, 하카브, 엘피디오, 디에즈.

……로젤린.

온갖 상념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리카르디스는 지끈지끈 밀려오는 두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나단은 힐끗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최근 들어 로젤린 경을 많이 아끼셨지. 자신만 해도 그 어리숙한 아이에게 정을
주지 않았던가. 열심히 노력하고 그만큼 결실을 얻던 아이였다. 이 상황은 아마 제 주군에게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세티스티아 황녀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던 그때의 일을.

시간과 공간, 인물. 어느 하나 겹치는 것이 없었지만 나단은 어쩐지 그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여자아이라
그런 것인지 대신 목숨을 잃게 되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단은 한숨을 쉬었다.

“조금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전하.”


“……그래.”

막 잠에서 깬 듯이 잠겨 있는 목소리였다.

“지쳤다.”

먼지 냄새나는 오두막에 퍼진 목소리는 꺼져 가는 것처럼 작았다. 리카르디스는 입으로 내뱉고 나서야 자신이
매우 지쳐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에 탈력감이 퍼졌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지쳤다. 그는 앉은 그
상태 그대로 잠에 빠졌다.

리카르디스는 누군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위험이 닥쳐올 때에는 그녀가 항상 나타나지 않았던가. 분명히 로젤린일 것이다. 무심하고 담담한, 나의 호위
기사.

[지쳤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웅웅 울렸다. 꿈이었다.

[이겼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내 손에 남아 있는 것이 없어. 그래서 지쳤다. 로젤린 경.]

[토끼를 잡아 드리겠습니다. 맛있는 걸 드시면 힘이 나실 겁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은 채로 피식 웃었다. 흐트러진 머릿결을 정돈해 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무섭다.]

[밤새 옆에서 지켜 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이 참 쉬워서, 치가 떨리게 무섭다. 로젤린.]

[걱정 마세요. 제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몸이 따듯해졌다. 어느새 부드러운 천이 목 끝까지 덮여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차가워진 손끝에 온기가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여태껏 미처 내보이지 못했던 감정의 일부였다.

[그대가 죽는 게 무섭다, 로젤린.]

[절대 죽지 않겠습니다.]

힘이 빠져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뜨는 것조차도 힘겨웠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겨우겨우 눈을 떠서 제 머릿결을 정리하는 손길의 주인을 마주 보았다. 푸르고 생생한 눈동자였다.

[나는 멈출 수 없으니, 그대가 와야 한다.]

[죄송합니다. 어깨가 다쳐서 갈 수 없습니다.]

[그대의 빠른 다리로 달려 와라.]


[다리도 다쳤습니다.]

[기어서라도 와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없는 곳에서 죽지 마라.]

[예.]

[시간이 흐르고 모든 일이 끝난 후에, 혼자 싸우다 혼자 아파하다 죽었노라는 한마디 말로…… 그대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지 마라, 로젤린.]

예, 전하. 그녀의 말이 웅웅 울렸다. 머릿속에서 단어 하나하나가 쪼개지고 합쳐졌다. 명 받들겠습니다. 예,


전하. 전하. 전하…….

“전하!”

리카르디스는 눈을 번쩍 떴다. 다급한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짐에서 붕대를 찾아 낸 나단이 급하게 밖으로
나서는 중이었다. 순식간에 온몸으로 소름이 퍼졌다. 짧은 수면으로 머리가 느릿하게 돌아가는 중에도 예민한
본능이 먼저 상황을 그에게 알린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떨리는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문가에 있는 레이몬드가
쓰러진 누군가를 안고 있었다.

밤보다도 검고, 별보다 빛나는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레이몬드는 로젤린의 얼굴 위로 눈물을 툭툭 떨어트렸다. 그의 품에 안긴 로젤린은 어느 한구석 성한 곳이 없었다.


낮에 보았던 어깨의 상처부터 허리와 등, 팔과 다리까지. 작고 큰 상처로 하얀 제복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일어나려 했지만 힘이 풀렸는지 도로 풀썩 주저앉았다. 허물어지는 몸을 레이몬드가 급하게
받아 냈다.

“로젤린 경!”

부단장님…… 그녀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파르르 떨었다. 리카르디스가 황급히 무릎을 꿇고 로젤린의


상태를 살폈다. 얼핏얼핏 드러난 피부에 검은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파편’의 흔적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이가
으스러질 정도로 꽉 물었다.

“레이몬드 경, 빨리!”

리카르디스는 레이몬드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그녀의 등을 확 감싸 안으며 소리쳤다. 레이몬드는 손만 벌벌 떨다가


고함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계속 로젤린을 안고 있다고 해도 그녀의 상태가 좋아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재빠르게 리카르디스의 품으로 로젤린을 건넸다.

로젤린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차가웠다.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가슴에 얼굴을 박고는 입만 우물거리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으니 천천히 말해도 된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숨이 고르게 될 때까지 등을
도닥였다.
“전하…….”

“그래. 로젤린 경.”

“이제, 괜찮습니다. 쫓아오는 자는 없으니…… 편하게…….”

“같이 천천히 가자. 수고 많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안아 들고 오두막 안쪽으로 이동했다. 검은 머리를 따라 흐르고 있던 핏방울이 리카르디스의


가슴팍에서 번져 나갔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급히 망토를 벗어 둘둘 말아, 로젤린의 머리 아래에 깔았다.
그녀의 입에서 후우, 하는 얕은 숨소리가 배어 나왔다.

리카르디스는 단검으로 그녀의 옷을 베어 낸 후 인상을 찌푸렸다. 피가 잔뜩 엉겨 굳어 있었고 날카로운 무기에


꿰뚫린 상처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다. 그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온 몸에 떠올라 있는 파편의 흔적이었다.
핏줄을 따라 번진 독이 만들어낸 형상은 마치 검은 거미줄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어두운 오두막에 하얀 안개가 떠돌았다.

순간 리카르디스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로젤린의 안을 떠돌던 성력이 대부분 흡수되지 못한 채 어디론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감옥에 있는 몇몇의 마인들까지 치료해 본 적 있는
리카르디스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상극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마인들마저 자연스럽게 성력을 받아들여 치유가
되는데, 그녀에게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기만 하는 것이다.

평소라면 그 이상한 현상에 대해 의문을 가졌겠지만 지금은 조급했다.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그녀의 몸으로 스며드는 소량의 신성력. 그것만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되는 마냥 꽉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끊임없이 신성력을 퍼부었다. 로젤린의 상태는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했다.
안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윽, 허억…….”

그녀는 콜록이는 소리와 함께 울컥울컥 무언가를 토해 냈다. 반쯤 뜯긴 나무 문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소리를


다 흘려보냈다. 나단이 어설프게 닫아 놓았으나 마음만 먹는다면 내부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두
남자는 숲을 바라보며 뒤돌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윽윽 소리를 참으며 눈물만 흘렸다. 나단은 그에게 들어가서
로젤린의 곁을 지켜 주라고 살짝 권해보았다. 로젤린이 그의 수습 기사였을 시절부터 유달리 아끼며 이끌어 왔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레이몬드는 대답 대신 머리를 쥐어뜯던 손으로 제 얼굴을 퍽퍽 쳤다. 나단이
기겁하며 말릴 정도였다.

“레이몬드 경!”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벌겋게 변한 볼 위로 눈물이 줄줄 떨어지고 있었다. 괜찮다는 말이 그다지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머릿속에서 로젤린의 모습을 그렸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하는 검은머리를 질끈 묶고 있던 그 풋풋하던
때를.

[경. 어떻게 하면 레이몬드 경 같은 기사가 될 수 있습니까?]

[나 같은 기사?]

[강하고…… 훌륭한?]
[으하하학, 요 깜찍한 녀석! 백 밤 더 자고 나면 알게 되니까 조급해하지 말아.]

레이몬드는 눈물콧물을 소매로 슥슥 닦았다. 아직 물기 어린 눈동자에 독기가 올라왔다.

“로젤린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저도 제 일을 하겠습니다.”

비통하게 울고 있던 남자는 순식간에 기세를 바꿨다. 존경의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그 초롱초롱한 눈을
위해서라도. 누군가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을 슬퍼할 틈은 없었다.

로젤린의 내부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상처를 수복하고, 몸 안의 마력을 긁어모아 파편의 진행을
느리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도중 늘어난 상처만큼이나 ‘파편’의 양 또한 불어난 상태였다. 마독은
한껏 범람하여 둑을 무너트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신성력은 금이 가고 있는 둑에 진흙을 바르는 정도의 역할이었다. 독을 치유하지는 못했지만, 지친


신체에 활력을 불어넣어 그녀를 지탱했다. 제국과 대륙이 칭송하는 신성력이 고작 이것밖에 할 수 없다니. 그는
자신의 무력함에 치를 떨었다. 리카르디스의 턱선을 따라 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안색은 로젤린과 함께 점점
파리해졌다.

[다음 편에 계속....]

53 화.

리카르디스의 상태를 염려한 나단이 몇 번이나 만류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로젤린은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는 것을 계속 반복했다. 그녀는 간간히 잠꼬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지켜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아파. 하지만 가야하는데. 이어지지 않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말들이 리카르디스를
찔렀다. 그는 이 감정에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 지 몰랐다. 단순히 아프다는 것만은 알았다. 로젤린이 어느 순간
피를 왈칵 토했다.

“로젤린!”

똑바로 누워 있던 탓인지 기도로 잘못 넘어간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품에 안아 제 몸에 기대게 했다.


그녀의 얼굴과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시체를 연상하게 만드는 서늘한 온도였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그녀의
몸.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신음이 그녀가 살아있음을 입증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고통에 감사했다. 아직
살아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품 안에서도 끝없이 피를 토했다.
리카르디스는 초췌한 낯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입이 여러 번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했다.

“내가…….”

약한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다. 그는 품 안에 있는 로젤린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이 식은땀과 피에 젖어 볼에 붙어 있었다. 수차례 반복하며 얼굴을
매만졌음에도 그녀는 눈을 뜨지 못했다.

“내가 대체 뭐라고 그대가 날 지키려 해…….”

알 수 없는 감정이 피로와 함께 밀려왔다. 몸은 이미 한계에 달했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의


손에서 발해지던 하얀 빛 또한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완전히 어두워진 공간.

로젤린은 번쩍 눈을 떴다. 의식을 잃은 눈동자는 초점이 맞지 않았다. 거센 기운이 그녀의 몸속을 타고 돌았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알 수 없었다. 오두막을 감싸고 있는 푸른 숲 위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

모래와 자갈을 진동시키는 말발굽의 소리.

……

화살의 날카로운 파공음.

“전하!”

……누군가를 찾는 소리. 다급하고 초조한…….

돌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듣기만 해도 마음을 몰아치게 만드는 소음들이 울렸다. 그리고 그 혼란을 뚫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따뜻한 무언가가 이마와 볼을 쓸어내렸다. 느릿한 손길. 동작 하나하나에 피곤함이
묻어 있지만 다정했다. 손을 뻗어 보려고 했으나 닿지 않았다. 가슴이 순간 덜컹거렸다. 추락하고 있다!
추락하고 있었다. 발밑이 순식간에 쑥 꺼지는 감각에 몸서리치며 비명을 질렀으나,

“아아아악!”

……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소리는 순식간에 불어나 비명을 잡아먹고 덩치를 키웠다. 어린아이, 여자, 남자,
노인, 고통에 찬 목소리와 분노하는 사람까지. 마구 뒤섞여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죽여라! 잡아! 저들을 잡아와! 대륙에 어둠을 불러오는 불길한 존재다! 숲속의 그림자 ……은 사람을 해친다!
깊은 숲의 그림자 ……은 사람을 먹는다!]

뒤쫓아 오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금속의 소리가 바싹 따라오고 있었다. 달리는 것이 점점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울고 화내며 서로 싸웠다.
[그렇지 않아, ‘우리’는 누구도 해치지 않았어! 도망치자, 숨는 거야.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잊을 때까지…
….]

[아니! 맞서서 싸우고, 죽여야만 해! 단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악을 쓰며 저주를 퍼부었다. 용서 못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반드시 되돌아가겠다.


그때에는 너희들이 했던 그 말 그대로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겠다! 어떻게 해서라도 너희들의 나라에 어둠을
드리우고야 말겠다…… 우는 목소리가 고통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허억……!”

로젤린은 크게 호흡하며 몸을 일으켰다.

낯선 광경이었다.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넓은 방, 푹신한 침대. 깨끗한 이불, 빛이


아른하게 들어오는 얇은 커튼. 침대 맡 테이블 위의 화병에는 향기로운 꽃이 장식되어 있고, 벽에는 빈틈이 없을
만큼 그림이나 장식물 따위가 잔뜩 걸려 있었다. 귀족의 저택이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알 수 없었지만 집안을
감도는 특유의 향기가 어쩐지 익숙했다.

로젤린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이불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두리번두리번 슬리퍼를 찾다가 포기하고 맨발로 움직였다.
화려한 카펫이 깔린 바닥은 보드라웠다. 커다란 거울에 핼쑥한 얼굴의 여자가 비쳤다. 연분홍색 네글리제의
안쪽으로는 여기저기 붕대가 감겨 있었다. 로젤린은 제 얼굴을 쓸었다.

그래, 나는 로젤린이었지. 2 황자의 호위 기사. 그녀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본 광경을 반추해 보았다.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기억났다. 밤바다만큼이나 어둡고 불안한 눈동자였다. 무어라
계속 자신에게 말을 했지만,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죽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어떤 감각인지는 잘 몰랐으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력이라는 둑을


무너트리고 기어코 심장을 파고든 ‘파편’을 느꼈다. 이후에 기억이 끊겨 버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로젤린은 몸 안의 마력에 집중했다.

“흠…….”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혹시 파편의 마력을 흡수한 것인가? 무의식중,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발휘된
걸지도 몰랐다. 로젤린은 제 마력에 이상이 없는지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마독과 발타의 인공적인 마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변질된 마력. 그것은 로젤린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마력과는 달랐다. 이리저리 마구 날뛰는 기운을 흡수했다면 자신에게도 안 좋은 영향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세심하게 손끝, 발끝, 심장주위까지 샅샅이 살폈다. 그러나 어떤 이상도 찾을 수 없었고, 도리어 몸이 가뿐한 것
같기까지 했다.

쉬이익-

그때 로젤린의 예민한 귓가로 바람소리가 들렸다. 이건 뭐지? 날개소리…… 같은데?

“아.”

그 정체를 가늠하자마자 밖에서 날아온 그림자가 유리창에 돌진했다.


쨍그랑!

쨍그랑 와장창 쿠당탕! 유리창을 깨고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거대한 독수리였다. 마카롱은 창을 깨고 바닥을 한
번 굴렀다가 테이블에 몸을 부딪치고 다시 겨우 날갯짓 했다. 그 거대한 날개가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방안의
물건들이 여기저기 엎어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름 모를 귀족의 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디서
종이가 펄럭펄럭 날아와 그녀의 머리에 턱 떨어졌다.

삐이익---

마카롱이 서럽게 울더니 로젤린에게 덥석 안겨 왔다. 새 가슴이 얼굴을 꾹꾹 누르고 있어, 좀 아팠다.

“마카롱, 전하는?”

마카롱은 부리로 그녀의 머리를 콱 쪼았다. 상처 나지는 않지만 딱 아플 정도였다. 처음으로 하는 말이 그거냐고
화내는 것 같았다.

“이 덜떨어진 기지배야! 지금 죽다 살아나서 처음으로 하는 말이 그거야?!”

“……안녕?”

“허이구 한가롭게 인사까지 하시네! 조금 있으면 점심은 먹었냐고 물어보겠어!”

성대를 변이한 마카롱이 씩씩 화냈다.

“너의 그 은발 인간은 너보다도 멀쩡하니까, 걱정 마시지.”

굳이 따지자면 ‘나의 은발 인간’은 아니었지만, 조용히 넘어갔다. 지은 죄가 있으니. 전투가 일어나기 전,


그녀는 마카롱에게 다른 기사들의 호위를 부탁했다. 마카롱은 로젤린을 떠나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의 똥강아지
같은 눈빛에 제안을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욕을 몇 번 내뱉고 난 후였다. 마카롱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작 인간 하나 지켜 보겠다고 죽을 뻔한 로젤린이나, 그런 로젤린에게 약한 자신이나.

동족, 동족하며 좀 챙겼더니 정말 정이라도 든 것인가. 가족 놀이라도 하는 마냥 행동하는 게 우스웠다.


로젤린은 붕대를 여기저기 감고는 초췌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 불쌍하고 초라한 꼬락서니가 괜히 괘씸했다.
마카롱은 제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쭉 잡아 당겼다.

“아야야, 아파.”

마카롱의 잔소리는 끊길 줄 모르고 계속되다, 문 너머 복도에서부터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에 중단되었다.


독수리와 한 여자의 고개가 소리의 방향을 따라 휙 돌아갔다. 둘은 눈빛으로 얘기했다. 온다.

벌컥.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십, 허, 헉…….”

“미, 미친…….”

칼을 빼어 든 다섯 명의 기사가 입을 떡 벌리고 경악했다. 그들이 입고 있는 회색 제복의 왼쪽 가슴 위에는


가시나무가 서로 얽히고 꼬여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로젤린은 그 문양을 쓰는 가문이 어딘지 알았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그것’이 최초로 인간이 되었던 마의 산이 있는 비스타였다. 아. 이 땅은 더 이상 발타가


아니었다. 서 있는 장소가 바뀌었을 뿐인데 긴장이 탁 풀렸다.

기사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엉망이 된 방을 훑어보았다. 유리창은 깨졌고 기절해 있던 손님은 산발과


맨발이었다. 거기다 왜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독수리가 손님을 덮치고 있기까지 했다. 커다란 발톱으로
그녀의 검은 머리를 잡아당기며.

그들은 손님이 깨어났다고 주인에게 먼저 보고를 해야 하는지, 독수리를 먼저 쫓아내야 하는지를 짧지만 진지하게
고심했다. 결정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뒤늦게 당도한 하녀가 손님을 잡아먹으려 드는 독수리를 보고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독수리부터 처리하자. 기사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불손한 눈빛을 보고
마카롱이 삐애애애액 울었다. 로젤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옆에서 울리는 우렁찬 소리에 귀가 멀어 버릴 것
같았다. 보통의 인간보다 귀가 몇 배로 좋아서 몇 배로 더 괴로웠다. 한쪽 귀를 막는 그녀의 행동에 마카롱이
부리를 합 다물었다.

기사들이 슬금슬금 포위망을 좁혀 왔다. 그 와중에도 다치게 할 생각은 없는지 검을 집어넣고 맨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독수리를 신성시 여기는 일라베니아인다운 태도였다. 로젤린은 한쪽 손을 들었다. 날짐승을 쫓아내려던
그들이 멈췄다.

“괜찮습니다. 친한 독수리입니다.”

기사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은 빙긋 웃었다.

아아, 일라베니아였다.

〈1 부 완결〉

[다음 편에 계속....]

54 화.

2부

8
국경이 잠시 허물어졌다. 발타의 왕, 힉살라 아돈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이었다.

병사들은 하얀밤 기사단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귀환한 기사들의 증언에 따라 그들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총원 백다섯 명 중 돌아오지 못한 기사는 서른여덟 명. 결코 작은 피해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사절단을 습격한 집단이 검은달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전투는 훌륭한 승리였노라고 역사책에 자리할
만했다. 갈수록 몸집을 불리는 집단, 검은달이 ‘파편’이라는 독으로써 한층 더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른여덟의 피해로 살아 돌아온 일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일라베니아의 백성들은 이 모두가 이델라브힘의
도움이 아니겠느냐며 얘기했다.

“이, 이델라브힘이시여…….”

“우웨엑!”

발타의 깊은 숲, 프리움. 병사들은 앞에 펼쳐진 광경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구역질했다. 하늘을 보며 기도하는
이도 있었다. 그들 또한 수많은 전투와 전쟁을 거쳐, 시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접해 본 경험이 있음에도.
참혹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앞섰다.

시체들은 부서지고, 찢어지고, 갈라지고, 뭉개져 있었다. 푸른 잎에 엉겨 붙은 피가 거뭇거뭇하게 굳어 늪지대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조각난 인간의 시체와 특유의 썩는 냄새가 그 풍경의 처참함을 더욱 강조시켰다. 그나마
위안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시체들이 전부 검은달의 습격자라는 사실이었다.

“이, 이게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신입 병사가 고개를 위로 고정시킨 채 말을 더듬었다. 그의 눈동자에 상반신만 남아 있는 시체가 비쳤다. 피가


한 방울 뚝. 바닥으로 떨어지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대도 한참 시간이 걸릴 만한
어마어마한 높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상상력을 발휘해 보아도 어떤 경위로 어떻게 전투가
진행되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2 황자 직속 호위 기사단 하얀밤의 부단장 부관, 큰뿔산양 레이몬드 안디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장소에서
검은달과 전투를 치른 자는 상급 기사 로젤린 에스터, 오직 그녀뿐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의 이름은 여타 다른 무리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고, 상급 기사쯤 되면 실력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병사들은 쉽게 믿지 못했다. 대충 파악되는 시체의 수만 해도 이십 여구가 넘어섰다. 심지어
그들 모두가 악명 높은 검은달의 일원이 아니던가. 일개의 기사 한 명이 강하다고 막아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전투 지점으로부터 거슬러 가며 사절단의 시체 한 구, 한 구를 수습했다. 여기저기에서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으나, 그 어떤 곳도 아까의 광경을 잊게 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삼 일이라는 시간을 소요해 모든 임무를 끝냈다. 병사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마차와 말에 올랐다. 발타의
숲을 벗어나기 전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신입 병사가 머뭇머뭇 말을 꺼내었다.

“그게…… 정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일까요?”


누군가가 답해 주길 바란 것이 아닌 듯했다. 그는 멀어지는 숲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 * *

“마인이라는 거 있지!”

“누구?”

“우리 성에 계신 손님!”

“어머, 어머! 진짜?”

어린 하녀들이 소곤소곤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눴다.

잠자는 공주님처럼 며칠간 깨어나지 못했던 그 손님이 마인이라고? 세상에나. 이델라브힘의 가호를 받는 2 황자
전하의 기사이자,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장녀가 마인이라니. 이 어찌나 흥미로운 얘깃거리란 말인가!

그들은 저마다 알고 있는 그 ‘손님’에 대한 정보를 나눴다. 초록색 머리라더라, 자그마하고 순하게 생겼다더라,
부엉이를 한 마리 데리고 있다더라. 맞는 정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소문이 어떻게 비틀리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였다.

그들의 대화가 다소 컸던 탓일까. 계단을 오르던 여자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하녀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멈췄다.

‘흠…….’

그녀도 며칠 전 부터 들어 왔던 이야기였다.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시간만 나면 그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 통에 이제는 내용을 죄다 외울 정도였다. 이 입에서 저 입을 거치며 엉망이 되어 버린 소문들 속에서 단
하나의 진실만은 여자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것.

여자는 잡념을 떨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손님이 깨어났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기에.

“우리 잠자는 공주님이 일어나셨네. 오랜만이야, 로젤린 경.”

오랜만이라는 단어가 성사되는 경우는 첫 만남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러나 로젤린은 여자를 알지
못했다. 처진 눈을 가지고도 유약하다거나 순해 보이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인상이었다. 경사도가 높은 눈썹
각도 때문인지, 붉은 입술 때문인지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로젤린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로젤린’의 기억 안에 이 여자가 있는지 뒤적여 보았다. 로젤린의 의문에 차 있는
눈빛을 읽은 여자가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정식으로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란다. 나 혼자 일방적으로 경이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래서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지 뭐니? 내가 요즘 이렇게 깜박깜박한다니깐.”

여자가 익숙한 태도로 로젤린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로젤린도 멀뚱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디 보자…… 열은 내렸고, 혈색도 좋네. 어디 아픈 곳 있니?”

“아니오. 아프지 않습니다.”

“잘 됐네, 그럼 식사나 할까? 아플 때는 잘 먹어야 해.”

여자가 하녀와 눈을 맞추며 적당히 손짓했다. 로젤린은 식사라는 단어에 몸을 들썩였다.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로젤린을 보며 여자가 아하하 웃었다.

“눈을 뜨고 있는 쪽이 훨씬 좋구나. 아차,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소개도 안 했었네. 마른가시나무의 세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라고 소개하는 편이 좀 더 알기 쉽겠니?”

아, 과연. 로젤린은 그제야 누워만 있는 제 모습을, 보아 왔다던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사냥 대회 사건 때의


실종 직후에 한 번, 그리고 이번 발타 사절단 건으로 한 번. 우연히도 항상 의식이 없을 때마다 그녀의 영지에
머물렀던 것이다. 친밀감을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인 듯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항상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

“폐는 무슨. 경이 올 때마다 항상 일이 터져서 말이지, 그걸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

마카롱이 꾸르륵 소리를 내며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세실은 거대한 독수리의 불만 가득한 소리를 듣고는
자신의 말을 반추해 보았다. 아, 확실히 다르게 해석될 만한 여지가 있었다.

“사경을 헤매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얘기가 아니니 오해 말고.”

마카롱이 가슴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를 멈췄다. 세실은 “굉장한걸, 말을 다 알아듣는 거니?” 하며 신기해했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 두드려 왔다. 세실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충 손짓했다. 중년의 남자가 성큼 발을
들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기사들과 복식이 비슷했으나 더 화려했다.

“백작님. 강철발굽 백작이 손님을 뵙고자 합니다.”

“이것 보라니깐. 내가 일이 터진다고 했지?”

세실은 딱 달라붙은 드레스를 입고도 능숙하게 다리를 꼬았다. 일이 터져서 재미있다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손님이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전하거라. 비슷한 이야기만 몇 번째인지, 대체. 노망이라도 난거야? 하여간
귀찮은 늙은이라니깐.”

로젤린은 눈만 깜박거렸다. 기사의 입에서 나온 손님이라는 말이 어쩐지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세실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로젤린 경을 찾는 사람이 아주 많아. 당장 수도로 귀환 시켜야 한다는 둥, 잡아가야 한다는 둥.


헛소리들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하지만 걱정 마렴.”

그녀가 손을 들자 하인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튼을 열었다. 넓은 창으로부터 빛이 쏟아졌다. 날카롭게


비죽비죽 솟은 회색의 탑이 줄지어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탑의 꼭대기마다 거대한 발리스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어느 곳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전장의 한 중앙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귀족의
성이라기보다는 이곳은 마치…….
“이곳은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철의 요새 비스타. 내가 허가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으니.”

요새. 맞다. 그 이름이 딱 어울렸다. 어떤 사소한 장식으로도 꾸며져 있지 않은, 오직 적을 공격하고 막아 내는


것에 치중한 형태였다.

“설령 내 울타리 안에 마인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로젤린은 창밖에 두던 시선을 돌렸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일단 식사부터 할까. 우리 얘기할 게 많을 것 같네. 그렇지?”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상을 채웠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식사 준비 시간만큼 잠시 중단되었다. 로젤린은 음식


냄새를 맡으면서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깊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나가자마자
로젤린이 입을 열었다.

“리카르디스 전하는 무사하십니까?”

로젤린의 질문에 세실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볼에 보조개가 폭 파였다.

‘본인의 안위보다 2 황자가 중요하다는 건가? 신성 제국에서 마인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태평한 건지, 담대한 건지…….’

그러고 보니,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안위를 더 걱정하던 사람이 한 명 더 있긴 했다. 의식 없는 로젤린을 안아


든 채 마른가시나무 성에 입성한 2 황자 리카르디스였다. 어찌나 유별나게 굴던지. 다른 사람이 로젤린을 대신
안아 들겠다 한마디 했을 때 서슬 퍼런 눈빛으로 노려보던 것이 떠올랐다.

[다음 편에 계속....]

55 화.

그에 그치지 않고 제 기사를 직접 침대에 눕히고, 겉옷과 부츠를 벗겼다. 제국의 황자가 손수 할 만한 일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따뜻한 물을 대령하라 닦달을 해 대는 기세는 당장 누구의 목이라도 칠 듯
매섭더니,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닦아 내는 손길은 솜털보다 부드러웠다. 닿으면 부서질세라,
만지면 깨질세라.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얼른 황성으로 돌아가야 했음에도 최대한 시일을 늦춰 출발하기까지
했다.

지금의 로젤린이 하고 있는 행동도 딱 그와 같았다. 저가 마인이라는 사실이 들켰든 아니든 간에 황자 전하께서는


무사하신 겁니까? 부터 묻고 있으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실이 턱을 괴고 대답했다.

“어제 황성으로 출발하셨단다. 좀 피곤해하셨지만, 다친 곳은 없으셨어.”

“그렇습니까.”

로젤린의 시선은 먼 창밖을 떠돌았다.

[다친 곳은 없으셨어.]

그 한마디에 로젤린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일어난 이후로 내내 조급했던 마음이 서서히 풀려갔다.

피를 토할 때마다 자신을 꽉 끌어안던 단단한 품.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던 젖은 속눈썹. 먼지가 쌓여 있던


오두막의 냄새. 숨죽인 울음소리. 그 조각난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괜찮아. 로젤린 괜찮다. 내가 여기 있어. 다정한 말이 그의 눈물과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로젤린…….]

흔들리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다친 곳 하나 없이 건강하시단다. 걱정 마렴.”

로젤린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기사의 임무 그 이전에 리카르디스가 무사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뻤다.

물론 마카롱으로부터 그가 무사하다는 얘기를 전해 듣긴 했으나, 마카롱의 ‘무사’와 다른 사람들의 ‘무사’는


기준이 좀 다른 편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아픈 곳, 상한 곳 없이 괜찮으냐를 기준으로 둔다면, 마카롱은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기준으로 두는 느낌이라. 영 신빙성이 없었다.

“적어도 5 일 동안 의식불명이었던 경에게 걱정 받을 정도는 아니니까.”

로젤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5 일?”

그 극렬한 기세에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흠칫 놀랄 정도였다. 로젤린은 그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5 일 동안 의식불명? 그렇다는 말은…… 내가 5 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구나!

의도치 않았던 단식 기간을 정확하게 알게 되자마자 배가 고파 왔다. 로젤린은 주린 배를 잡은 채 테이블 위를


빠르게 훑었다. 무표정하던 기사의 얼굴에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음식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챈 세실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까의 생각을 정정해야 할 듯했다. 서로 아끼는 건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황자 전하 쪽의 감정이 더 깊어 보였다.


로젤린은 본능이 우세한 모양이고.
“어서 들렴. 전하께서 경이 일어나거든 환자식 그딴 거 말고 고기를 먹이라 하시더구나. 그냥 고기도 아니고
맛있는 고기라면서. 어찌나 민망해하면서 말씀하시는지, 나도 모르게 웃었다가 잇세리온 비서관에게 눈총 받았지
뭐야.”

로젤린이 눈을 반짝였다. 전하…… 감사합니다…… 진심을 다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충성하겠습니다…….

세실은 리카르디스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의 반 이상이 고기였다. 로젤린은
흐물흐물해진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잠들어 있던 미뢰가 깨어나 축포를 터트리고 화려한 파티를
벌였다. 그녀는 잠시 미간을 짚고 밀려오는 감동을 추슬렀다.

“입에는 좀 맞니?”

“네! 맛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구나. 아, 그러고 보니 로젤린 경. 마인이라면서?”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앞과 뒤가 이어지지 않는 독특한 화법을 구사했다. 로젤린은 씹던 걸 꿀떡 삼키고 나서 “


아니오.” 하는 건조한 대답을 했다. 그녀의 담담한 반응에 세실이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로젤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혼자서 검은달의 암살 부대를 막아 냈는데도 아니니?”

“네. 그들이 좀 약해서.”

“파르딕트 경의 그 커다란 방패를 맨손으로 부쉈다 하던데. 그래도 아니야?”

“네. 제가 좀 강해서.”

세실이 옆에 서 있던 기사단장을 퍽퍽 치며 웃었다. 렉시드. 얘 좀 봐. 너무 웃긴 거 있지. 그녀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생각보다 뻔뻔한 구석이 있구나. 그런 점 싫지 않아.”

하얀밤 기사단의 명성은 이번 전투로 인해 한층 더 높아졌다. 생환의 가능성이 일말도 남아 있지 않았던 험난한
길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을안개의 스타스. 큰뿔산양의 레이몬드. 고래무덤의 파르딕트.
푸른등불의 카일로.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유독 주목받는 이름이 있었으니…… 2 황자 리카르디스의 호위 기사,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녀였다.

로젤린의 전투는 평범한 인간 기준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하얀밤 기사단원은 물론이거니와 사망자들을 수습하기
위해 전투 현장을 찾았던 병사들 또한 그 사실을 인지했다. 로젤린에 관한 이야기는 은밀하게 퍼졌다. 누군가의
보고서에서, 어느 주점 술 취한 병사의 입에서, 기사들 간의 연락망을 통해서.

고래무덤의 파르딕트. 그의 고래만 한 방패를 단숨에 부쉈느니, 검은달의 암살자들을 파리처럼 보이게끔 하는
대단한 실력을 갖췄느니 하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부터. 손을 한번 휘둘렀더니 산과 강이 갈라졌다던가, 절대
죽지 않는다던가, 2 황자 전하를 아기 새 들듯이 한 손으로 들었다던가 뭐라던가 하는 과장이 보태진 것까지.
진실 여부를 판별하기 힘든 여러 소문이 섞여 있었으나, 인간의 힘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는 점만은 별다른
왜곡을 거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소문들 중에서도 사람들이 크게 주목한 것이 하나 있었다. ‘파편’은 마력과 독의 결합이라더라!
해독제가 없다더라! 그렇다면 ‘파편’에 중독되고도 살아남은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소문은 그녀의 아버지인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이 끝맺었다. 장장 스물세 장. 상당한 분량의 해명
문이었다. 로젤린의 탄생 일화, 태어나자마자 엄마라는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둥의 자랑을 빙자한 쓸모없는
내용들을 다 치고 간추려 보니……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결론만이 남았다.

일라베니아 제국이 마인을 배척하니 갓난아이 시절부터 그 죄와 업보를 제 딸이 지고 가야했던 것이 아니냐. 우리


딸이 잘못한 게 아니라, 그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니들이 잘못한 거다. 니들이 그렇게 이빨만 까던
때에 내 딸은 제국의 고귀한 2 황자를 위해 제 목숨을 바쳤느니, 그 업보의 무게가 2 황자 목숨의 무게보다 무거운
것이겠느냐!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일라베니아가 들썩였다. 2 황자의 기사이자 붉은수레바퀴의 장녀가 마인이라니. 불길한
검은 달의 힘을 가진 마인이라니. 누군가가 신성한 제국에 나타난 흉조가 아니겠느냐 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크레안 티다니온조차도 2 황자의 앞길을 보살피는 것이라 말했다.

로젤린에 관한 이야기는 비스타를 벗어나 대륙 구석구석에 퍼지는 중이었다. 그녀는 호사가들의 그럴싸한 말로
인해 희대의 악인도 되었다가, 세상에 더없을 영웅도 되었다. 어린아이들조차 로젤린의 이름을 인식하기
시작했으나, 5 일 간 자고 엿새째 느지막한 오후에 깨어난 장본인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세실은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많은 일이 있었단다.”

세실은 그녀가 잠들어 있던 때에 일어난 일을 순차적으로 들려줬다. 마른가시나무 기사단과 붉은수레바퀴


기사단이 국경을 넘어 사절단을 보호한 그때의 일부터, 지금 대륙을 들썩이게 만든 마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세실은 유심히 로젤린을 관찰했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던 탓이었다. 평생 숨겨 왔던 비밀이
파헤쳐진 상황이 아닌가. 두려워할까, 제 말을 의심하며 부정할까.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 격렬한 감정 속에서
진실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젤린은 세실의 예상을 벗어나, 그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아버지께서 제가 마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저는 마인이…….”

의자 등받이 위에 앉아 있던 독수리가 날개로 그녀의 머리를 퍽 쳤다.

“입니다. 마인…… 맞습니다.”

독수리와 한 여자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 말 하려던 거 아니지 않니……? 세실이 떨떠름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밝혀도 괜찮습니까?”

“뭐…… 예전이랑은 상황이 다르니 말이야.”

마력과 성력은 서로 간섭할 수 없다. 그렇기에 마력과 독의 혼합물 ‘파편’에는 성력이 어떤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던 것. 그렇다면 마독 ‘파편’에서 마력을 우선적으로 처리할 수만 있다면, 분리된 독은 충분히 성력으로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로젤린이 ‘파편’에 중독되기 한참 전부터 떠돌던 가설이었다. 그러나 마인이 없으니 검증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렇다 할 해결 방안도 나오지 않고 그저 지지부진하게 말만 끼얹는 사람만 늘어나는 판국에, 그녀가
파편에 중독되고 살아난 것이다. 영원히 가설로 묻혀 있을 뻔한 것을 로젤린이 이번 일로 입증해 준 셈이었다.

일라베니아 내에서 마인의 평가는 노예 이하. 일라베니아 제국 내에 있는 마인이라고 할지라도 발타의 암살자
집단 ‘검은달’과 한통속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검은달’의 존재로 인해 마인의
필요성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라베니아에서 마인을 찾기란 아주 힘든 일이었다. 핍박받고 살해당해 발타로, 다른 먼 곳으로 이주하거나 숨어


버린 사람들. 심지어는 찾아낸다고 한들 일라베니아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결코 일라베니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56 화.

그런 상황에 그녀가 나타났다. 검은달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인간 병기들을 산산조각 낼 정도로 강하며, 2 황자
리카르디스를 위해 목숨도 바칠 정도로 충성심이 높은 제국의 기사 로젤린. 이 시국에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한
일라베니아의 마인이었다.

‘근데 좀 이상하단 말이지……?’

그녀에 관한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범상치 않았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비스타를 벗어나 일라베니아
전역에 퍼지고 있다고? 누군가가 작정하고서 퍼트리지 않는 이상에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 존재를 시시각각 부정하는 나라에서 태어난 마인, 그녀에 대한 동정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의 입을
오가며 만들어진 흐름은 뒤집기 힘들다.

그러나 이 상황을 알 리 없는 로젤린은 속이 꽤나 답답할 것이다. 세실이 안쓰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자고 있을 때와 다름없이 무표정하지만, 그 가면 같은 얼굴 아래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치열하게
부서지고 있을 테지. 가엾어라. 이 어린 아가씨가 헤쳐 나가기에는 너무 거센 풍파가 아닌가. 세실은 눈물이
찔끔 날 뻔 했다. 사실 조금 흥미롭기도 했지만.

그때 로젤린의 옆, 의자 등받이에 앉은 독수리가 부리의 넙적한 부분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다.
로젤린은 후식으로 올라온 마카롱을 독수리에게 내밀었다.
“이게 마카롱이야.”

“……?”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굉장히 중대한, 그녀의 인생을 뒤흔들 만한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가? 안했나? 태평하게 독수리와 마카롱을 나눠 먹는 로젤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확실하게 안 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혹시, 이 사태에 대해서 별 생각 없는 거 아냐?’

마카롱을 먹은 독수리가 달콤함에 취해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도 “음음…….” 따위의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흥이 난 몸짓들이 방금 전 세실의 생각에 답해 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마카롱을 먹어 보니 웬걸. 평소보다 잘 구워지긴 했다.

* * *

“서른여덟이라. 그리고 우리는 여덟 명이고?”

하카브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아틸라크로부터 전투 보고를 막 받은 참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하얀밤 기사단에게 실례겠어. 그쪽은 사망자가 서른여덟. 그리고 우리는 생환자가 여덟이라
말해야 정확하니 말이다.”

아틸라크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한 명, 한 명이 인간 병기나 다름없는 정예부대가


처참히 무너지다니. 심지어는 2 황자의 생포 또는 척살이라는 임무도 완수하지 못했다. 돈은 돈대로, 고생은
고생대로 들어가고 소득은 없는 것이다. 도리어 잃으면 잃었지.

“사망자도 아니고 생환자가 여덟이라…….”

하카브가 낯부끄러운 보고 내용을 계속 읊었다. 아틸라크만 죽을 맛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국경을 넘어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도왔습니다.”

“음? 황금정원이나 푸른등불도 아니고, 마른가시나무와 붉은수레바퀴라. 이거 참신한데……. 무슨 생각으로


움직인 거지? 사절단을 보내서 친교를 맺은 직후인데 전쟁이라도 할 참인가? 황제가 절대 좌시하지 않을 텐데…
….”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2 황자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마른가시나무는 중립. 붉은수레바퀴는 1 황자 파라고는 하나, 굳이 따지자면 현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 자였다. 2
황자를 도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니, 돕는 것은 둘째라 치더라도 애초에 그들은 국경을 넘어서는 안 된다. 사절단이야 힉살라의 허가를
받았다지만 그들은 어떤 인가도 받은 적 없었다. 말인즉슨 그들이 국경을 넘은 이 일이 전쟁의 시발점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비록 국경 코앞에서 2 황자가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을지언정, 그들은 절대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들이 왜 움직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2 황자가 발타에 오기 전, 사절단의 인원을 늘려도
되겠느냐는 공문을 보낸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랬지. 허가했으나 엘피디오가 훼방을 놓아 원래 인원대로 오지 않았던가. 아, 그랬군. 비는 인원이 있었어.”

하카브는 리카르디스의 의중을 알아챘다. 발타의 국경을 넘은 사절단의 인원은 허가받은 수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기사단을 포함한다면 얼추 맞을 것이다. 그들이 원래 예정된
사절단의 인원이었다고 한다면 발타쪽에서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애초에 허가 인장을 찍은 것은
자신이 아니던가.

“한 방 먹었군. 엘피디오가 하도 난리를 쳐서 증원을 막았다기에 별다른 수작이라고 생각을 못했다.”

하카브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아마 리카르디스는 엘피디오의 반응 또한 예측했으리라. 엘피디오만큼 알기


쉬운 사람도 또 없으니. 만약 처음부터 삼백이라는 인원이 있었다면, 그 수에 맞춰서 습격을 준비했을 것이다.
리카르디스의 노림수가 정확하게 맞아 들었다. 강아지라고 생각해 작은 포획 틀을 준비해 갔더니, 다이어울프가
기다리고 있던 셈이었다.

“엘피디오는 배 아파 죽을 지경이겠군. 저가 한 말에 걸려 넘어지다니. 우스운 일이야. 나도 같이 걸려 넘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쯧, 하여간 쓸모없는 인사 같으니.”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공성 무기가 축소된 것 같은 무기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국경을 넘었다고 한다.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기들이었다. 백작은 ‘파편’의 등장 후 접근전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듯 보였다. 석궁보다는 훨씬 크고
발리스타보다는 작았다. 무게가 가벼워 들고 다니기에 용이했으며, 파괴력도 상당했다. 강력한 공격이 계속해서
쏟아진 결과로 검은달은 참패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기사단은 주로 평민과 용병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백작은 압도적인 잔혹함을 원했고,
그런 경우에는 아무래도 귀족보다는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들이 훨씬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가 쓸고 간
자리의 시체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짓뭉개지곤 했다.

이번 전투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만약 그 자리에서 전투를 한 자가 마른가시나무 백작이라 누가 일러 주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수작질도 어지간해야 화가 나지, 도를 지나치니 남는 건 두려움뿐이었다.

솔직히 하카브로서도 좀 질릴 정도였다. 전장에서 공포는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하카브와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그녀의 성정이 잔혹해서 벌이는 일이라기보다는 그 수단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성이 있는 미친개. 그래서 더욱 골치 아팠다. 발타의 전사들이 가장 기피하는 대상이 그녀라는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잘린 머리통은 따로 모아서 무언가 글자의 형태를 그려 놓았다는데, 아틸라크가 정확한 내용은 알려
주지 않았다. 하카브는 대충 감을 잡았다. 심한 욕설 따위겠지.

“마른가시나무 백작답군.”

하카브는 고개를 좌우로 잘게 흔들었다. 이후, 아틸라크의 보고는 그가 예상한 선에 흘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전투했고, 2 황자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보호 아래 무사히 귀환했느니 뭐니.

하카브는 턱을 괴고 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붉은수레바퀴라…….’
그 이름을 듣고 있으니 다른 인물이 떠올랐다. 무심한 표정을 고수하던 얼굴이 어른거렸다.

로젤린. 2 황자의 호위 기사였으니 아마 죽지 않았을까? 가장 위험한 전투를 치러야만 하는 위치였으니.


아쉬웠다. 역시 빼돌려야 했나. 하카브는 곧 그 아련한 감정을 싹 지워야만 했다. 아틸라크가 제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로젤린에 대한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검은 머리의 기사? 로젤린?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라고?”

“예, 전하. 검은 머리의 여자 기사가 서른 명이 넘는 습격 대원들을 상대했다고 합니다.”

아틸라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뒷골목의 건달들이 이따금 일 대 십칠로 싸워서 이겼느니 하는 허풍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검을 들어 보고, 조금이라도 전투와 전쟁을 해 본
자들이라면 잘 알 것이다. 수적으로 열세인 경우에는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이 한없이 낮아진다. 심지어는 두 배,
세 배도 아닌 서른세 배에 달하는 적과 싸워 승리했다는데, 실제로 눈으로 보았다고 해도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습격 대원들이 그녀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미 여기저기


다쳐서 피 흘리고 있는 기사에게 전멸을 당할 것이라고. 정말 누가 알았겠는가.

그 전투에서 살아난 습격 대원은 한 명뿐이었다. 그가 보고하기로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괴이하게 변한 검은


손을 휘두르며, 바람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고 했다. 그녀가 많이 지쳐 확인 사살을 하지 않고 돌아선 게
천운이었던 것이다.

그는 무서운 학살자가 전투 현장을 떠나고도 죽은 듯 누워 있었다고 했다. 한참 전에 사라진 그녀가 남긴 공포가


온몸을 짓눌러 왔었다고.

검은달에 들어오는 자들은 가장 먼저 감정을 죽이는 일 부터 했다. 그리고 백 명 중 다섯 명 정도만 살아남는


극도의 위험한 훈련들을 거쳤다. 오직 임무를 위해, 오직 검은달만을 위해, 크레안 티다니온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이번 습격대에 뽑힌 인물들은 그중에서도 소수의 엘리트들이었다. 포로로 잡힐 시에 당장 자결하라는 명령까지


거리낌 없이 수행할 정도였다. 그런 이에게 마음 깊숙이 공포를 박아 넣다니, 얼마나 압도적인 전투였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57 화.
당연히 이기는 싸움에 지고 돌아왔다. 총책임자로서 아틸라크는 한동안 고개를 못 들고 다닐 치욕스러운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정작 그 보고를 듣는 하카브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그는 이를 시원하게 드러내어 웃고 있었다. 마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신체를 강화시키거나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뿐. 그렇다면, 마수처럼 기이하게 변한 팔과 마인의 범위조차 뛰어넘은 힘이라면?

그 낯설고 기괴한 현상이 지표가 되어 길을 안내했다.

“로젤린, 그대는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반짝이며 멀리 있는 누군가를


그렸다. 하카브의 얼굴에서 뜨겁고 생생히 날뛰는 감정이 비치기 시작했다.

“로젤린. 그대가…….”

하카브는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대가 ‘그림자’였을 줄이야…….”

대단하다. 이것은 마치 운명 같다. 이 세상이 그대와 나를 만나게 했는가. 내가 그대에게 끌렸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까? 알았다면 이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자세히 봐 둘 것을 그랬다. 하얀 피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흐트러진 검은 머리. 곧게 피고 있던 허리.


담담한 말투. 단편적으로 기억하는 겉모습만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대는 그 푸르른 눈동자로 나를 어떻게 바라봤었지? 그대의 부드러운 피부 아래를 흐르고 있는 마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강하게 요동치며 울리고 있었나? 잔잔하게 소리 없이 그대를 휘감고 있었나?

하카브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디에즈가 어째서 내게…… 아니다. 어쨌든 연락을 해 봐야겠어.”

“예, 전하.”

“로젤린과 접촉하기 전까지 2 황자는 당분간 건드리지 않는다. 괜히 밉보여서 점수를 깎을 필요는 없지. 이미
상당히 깎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2 황자의 안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귀중한 존재였다.

크레안 티다니온의 산물. 마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순수한 마력의 결정체. 일라베니아가 낳은 최초의 괴물.
죽음의 그림자.

하카브는 입술을 짓이기던 것을 멈추고 낯빛을 싹 바꾸었다.

“아틸라크.”

“예, 전하.”
“편지로만 소식을 주고받는 것은 너무 느리다. 그냥 내가 일라베니아로 가야겠다.”

아틸라크는 그의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힉살라 아돈의 후계자 1 왕자 하카브. 그가 지금 국경 너머 저 위험한


곳에 발을 디디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하카브는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하카브는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심장을 찢을 듯한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로젤린. 그대는 나의 검은 달인가?

* * *

리카르디스가 들고 온 검붉은 조각은 마력의 결정이라는 거창한 임시 이름이 붙여졌다.

신체가 이상할 정도로 발달된 암살자 집단. 마력을 이용한 독 ‘파편’.

최근 검은달이 휘두르는 두 가지 강력한 무기의 공통점은 마력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검은 조각이 그


무기를 이루는 근간이리라 생각했다. 마력의 결정을 어떻게 얻었는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었지만, 이것이 일라베니아가 여태껏 풀지 못했던 문제의 해답이 되리라 직감했다.

일라베니아의 위업은 ‘축복의 밤’과 마력 숭배 집단 ‘검은달’. 두 가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축복의
밤을 띄워 얼마나 대륙을 풍요롭게 만들었는지, 얼마나 검은달의 위세를 약하게 했는지가 역대 황제의 치세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번 세대에 검은달의 몸집이 급격하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아 대륙이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고질적인 문제 이외에 또 다른 골칫거리가 생긴 것이다. 사람들은 굶어 죽고, 검은달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대륙을 휘감는 불안감은 나날이 짙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라베니아의 현 황제 라이노는 이러한 사태를 조금도 완화시키지 못했다. 타고난 혈통과 귀족들 간의
긴밀한 정치 놀음으로 황위를 거머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약했던 신성력.
계속해 발목을 잡고 있는 근심거리가 다시 대두되었다.

황제의 자리야 이델라브힘이 내려 준 것이라 떠받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감히 의심이라는 것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마땅히 자리에 앉을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인가 하고.

능력은 없지만 눈치는 있어, 황제 라이노 또한 그러한 기류를 읽었다. 그는 불안했다. 네 살이었던 엘피디오의
신성력이 뛰어나다는 얘기까지 통제할 정도였다. 10 살에 갑자기 나타난 2 황자 리카르디스가 엘피디오와 황태자
위를 두고 다투지 않았더라면, 엘피디오는 성인이 되는 날 황제로 즉위했을 것이다.

두 아들의 밥그릇 싸움 덕분에 제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황제, 라이노. 역대 최악, 최약이라는 오명을 쓴 지금
이때에, 리카르디스가 검붉은 마력의 결정을 가지고 왔다. 귀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오랜 숙적 검은달과의
악연을 끝맺음 지을 첫 단추가 될 수 있으므로.

1 황자 엘피디오도 당분간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리카르디스는 황제의 크나큰 환대를 받을 것이다.
벼랑 끝에 서 있던 위기를 완벽하게 기회로 삼았다. 하여간 2 황자도 참 대단한 인물이었다.
“잘 마중 나갔지 뭐니. 황제 폐하께서 나에게도 노고를 치하해 주시겠지.”

세실은 ‘노고를 치하’라는 대목에서 검지와 엄지를 붙여 원을 그렸다. 흔히들 화폐를 상징할 때 사용하는
손동작이었다. 로젤린과 마카롱은 그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열심히 추측해 보았으나 알아내지 못하고서
포기해야 했다.

“페르탄도 무언가를 얻을 테지. 그 고지식한 남자가 그걸 바라고 움직이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네 아버지는
전후 처리로 리카르디스 전하와 같이 수도에 올라갔으니 당장은 볼 수 없단다. 너무 아쉬워 마렴. 그 목석 같은
인간이 나에게 부탁까지 하면서 너를 맡기고 간 거란다.”

“네.”

붉은수레바퀴의 페르탄.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딸을 두고 2 황자와 수도로 올라갔다.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나, 로젤린의 입장에서는 무정하다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저 뚱하고 날카롭고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은 그 서운함의 방증이리라. 불쌍한 것.

세실은 눈썹을 아래로 한껏 휘며 그녀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주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탓이었다. 로젤린과 오래 지낸 사람이 아니면 그녀의 표정을 구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는 했다.

여전히 수심이 깊어 보이기도, 불만 가득 차 보이기도 하는 로젤린의 표정에 세실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참, 그러고 보니 붉은수레바퀴 백작 말고도 경을 잘 부탁한다고 한 사람이 여럿 있었지. 사람들이 너무


드나들어서 문이 다 닳을 정도였단다. 정말 인기가 굉장하던 걸?”

로젤린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일자로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어머, 말을 돌린 게 정답이었나 보네.’

세실은 내심 기뻐하다가 곧 이어지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습니다.”

인기가 좋다는 말에 저렇게 뻔뻔하게 대답하다니. 아니, 사실이니 뻔뻔한 건 아닌가?

그녀의 동생 칼릭스는 매일매일 서신과 선물을 보내며 제 누이를 잘 부탁한다 연락했다. 기사단장 스타스, 부단장
나단도 바쁜 일정 속에서 그녀를 찾았고,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는 제집마냥 그녀 옆에 붙어 있기까지 했다.

그 외에도 많은 하얀밤 기사단원이 다녀갔다. 상급 기사, 하급 기사 할 것 없었으나 바다협곡의 네스터는 그중


유별나게 많이 드나들었다. 심지어는 황금정원의 클로에까지 로젤린을 잘 부탁한다며 금보다 귀하다는 온갖 약을
보내왔다. 그녀의 연락에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깜짝 놀랐었다. 거대한 상단과 정보 집단의 수장 격이라 말 할 수
있는 여자였다.

여러 가지 정보를 위해 사람을 두루두루 사귄다고 들었으나,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할 정도면 표면적인 친분에
그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속내를 알 수 없고 음흉하다는 평을 받는 클로에와 로젤린을 번갈아 떠올리자니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황금정원의 클로에가 큰뿔산양의 레이몬드와 약혼한 사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들의 기묘한 친분은 그로부터 온 것이리라.

2 황자 리카르디스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매일매일 그녀를 찾았다. 누워 있는 로젤린을 바라보는 눈길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보는 세실이 속이 다 간질간질해질 지경이었다.

아침은 고기 요리, 점심은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디저트, 저녁은 다시 고기 요리. 리카르디스 황자는 병문안 꽃
대신 갖은 음식들을 들고 와서는 로젤린의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맨 처음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황당하던지. 갓
만들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병문안 선물은 좋은 말로는 개성적이고 솔직한 말로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리카르디스는 한 손에는 고기 꼬지, 한 손에는 케이크 접시를 들고, 얼른 일어나라며 그녀에겐 들리지
않을 타박을 했다. 세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전투와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던 2 황자와
다른 모습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처음으로 2 황자 리카르디스를 본 것은 전장에서였다. 열여섯, 그가 막 성인이 된 해였다.

[‘나팔이 울리면 도망간다’에 내 전 재산을 걸겠어]

[전쟁이 누구 놀이터도 아니고 말이야…….]

지휘관부터 말단 병사까지 뒤에서 수군거렸다. 황실 암투가 험난하다고는 하나 그것은 전쟁과는 다른 종류였다.


황성에서의 싸움이 독이라면, 전쟁은 보다 가까운 칼날이라 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다.

그리고 10 살부터 줄곧 황성에서 살았던 어린 황자에게 이런 종류의 전투 경험이 있을 리 만무했다. 모두가


염려의 눈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굳이 따지자면 어린 황자의 안위보다는 그가 전장에 투입됨으로써
일어날 흐름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58 화.

하지만 2 황자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모두의 걱정을 깔끔하게 불식시켰다. 청년과 소년의 사이에 놓여 있던
아름다운 황자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전쟁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지에 끈적하게 말라붙은 피,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있는 황폐한 광경이 그렇게나 어울릴 줄이야.
황자는 처음부터 전쟁터에서 자라난 나무처럼 고고하게 서 있었다. 세실은 요즘도 이따금씩 그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 2 황자의 모습만을 지켜봐 왔던 그녀로서는, 지금의 황자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또 큰 한고비를 넘겨
안전한 울타리 내에 있으면서. 공을 세워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으면서도.

[로젤린.]

누워 있는 제 호위 기사를 부르는 목소리가 그렇게 애처로울 수가 없었다. 조금 궁상맞아 보이기까지 했다. 희생


없는 전쟁은 없다. 그리고 리카르디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로젤린, 식당에 초콜릿 폭포가 흐르고 있어. 바나나에 초콜릿을 묻히고 견과류 위로 한번 굴리기까지 할
예정이야.]

리카르디스는 이제 와서 그 당연한 이치를 모르는 듯 굴었다. 그는 몇 번이고 로젤린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이것 봐, 이 고기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군. 요리사의 솜씨가 좋은 모양인데.]

2 황자 리카르디스는 16 살의 첫 전투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많이 성장했다.

[내가 다 먹어 버리기 전에 어서 일어나.]

그런데 왜 그때보다도 위태로워 보일까. 전장에서조차 어떤 두려움도 모르는 것처럼 다잡고 있던 마음을, 왜
저렇게 흔들리게 내버려 두는 건가.

[로젤린.]

2 황자는 수도로 떠나기 바로 직전까지 제 호위 기사의 옆을 지켰다. 그녀는 결국 황자가 있는 동안에는 깨어나지
못했으나, 그의 목소리에 이끌려 가끔 잠꼬대를 하듯 웅얼거렸다. 2 황자는 그럴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 * *

하루 먼저 출발한 리카르디스를 따라잡기 위해, 로젤린은 깨어난 그날 바로 짐을 꾸렸다.

“아픈데 가기는 어딜 가니!”

딱 걸렸다. 세실이 모질게 그녀의 짐을 뺏었다. 로젤린은 평소보다 훨씬 단호한 표정으로 제 의사를 표현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괜찮기는 뭐가 괜찮다는 거니!”라고 하고, 전혀 안 아프다고 해도
“안 아프기는 뭐가 안 아프니!” 하고 재차 혼날 뿐이었다.

로젤린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온건한 감금은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 2 황자


리카르디스의 합의로 발생한 상황이었다. 물론 거기에 감금당한 당사자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으나, 그녀의
안위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온 대륙이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이야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황성에 도착해
로젤린의 신변에 관한 확답을 받을 때까지 그녀가 보호받기를 원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또한 그의 딸이 성치
않은 몸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구경거리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모든 일이 처리되기 전까지 그녀를 지킬 견고한 벽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그 견고한 벽은 가까이에 있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 비스타. 그녀가 경계의 학살자 내지는 미친개라고 불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으며, 그
미친개를 함부로 건드릴 간이 부은 자는 많지 않았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그들의 제안을 수락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과 리카르디스에게 빚을 만들어 둘 기회는
흔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명의 이해관계가 얽혀 로젤린은 당분간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 머물러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로젤린이 알 리 만무했다. 세실의 만류에도 로젤린은 불만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으나, 리카르디스가 미리 남겨 놓은 편지 한 장을 읽고서는…….

계속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세실이 칼릭스가 비스타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다급하게 전했다. 얼마 뒤면 곧 도착할 것이라고. 로젤린은 어느 정도 납득을 했는지 은밀히 준비하던
탈주 시도를 손에서 놓았다.

세실은 사절단과 검은달 사이에 있었던 전투로 인해 바빴다. 황실로 보낼 보고서도 작성해야 하고, 이번 전투로
인해 검은달의 동향이 바뀌는지에 대한 면밀한 관찰 또한 필요했다. 로젤린을 보호한다고 하지만, 세심하게
그녀를 챙길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래 사람들로부터 가끔 그녀에 대한 보고를 받을 뿐이었다.

그리고 방금 세실이 막 받은 그 보고에는, 당분간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말 때문에 로젤린이 무료함에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환자이자 손님을 너무 오래 방치한 감이 없잖아 있어,
세실은 반성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에 그녀의 얼굴도 보고, 담소도 나눌 겸.

그녀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세실은 제 두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시장이라도 좀 둘러보면서 놀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독수리랑 체스를 둘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심심했던 걸까…….

로젤린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하, 한 수만 물러줘.” 하고 답지 않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독수리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근엄한 대가리를 하고는 비숍을 물어 대차게 로젤린의 킹을 후려쳤다. 로젤린이 앓는 소리를
내며 마지막 남은 쿠키를 독수리의 입에 물렸다.

그 결과로, 로젤린은 지금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구경 할 수 있게 되었다. 백작이 사람을 붙여 주겠다 했지만


사양했다. 성 밖을 나서는 그녀의 뒤로 세실의 혼란스러운 눈빛이 끝까지 따라붙었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쬐며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로젤린은 마카롱과 체스를 둔 일 때문에 미친 사람
취급 받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다지 상관없었다. 덕분에 성을 벗어나게 되지 않았던가. 어쩌면
마카롱에게 게임을 지고 있어서 백작이 더욱 걱정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좋은 날이었다. 쥐로 변해서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마카롱이 코를 실룩이며 햇살 냄새를 맡았다.

로젤린은 ‘로젤린’이 된 후로 거의 성 내부에서만 생활을 했다. 붉은수레바퀴 성, 일라베니아의 황성. 발타의


궁전, 그리고 지금의 마른가시나무 성까지. 초반에는 인간의 생활양식들을 배워야 해 바빴고, 이후로는 임무
때문에 벗어날 틈이 없었다.

이따금 바람 울리는 소리만 나는 적막한,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정리되어 단조롭게까지 느껴지는 공간을 뒤로한
로젤린은, 새롭게 펼쳐진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우락부락한 용병들은 드잡이를 하는 중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퍼져 나오는 가운데
사람들이 흥정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옷의 색과 규격, 걸음걸이 하나하나 통제되어 있지 않은 무질서한
거리를 보자 그녀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바쁘게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시선들이 그녀의
검은 머리를 향해 모이기 시작했다.

“붉은수레바퀴의…….”

“2 황자 전하의 그…….”

사람들이 오가는 번잡한 거리가 한층 더 술렁이기 시작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수도까지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하물며 이곳은 로젤린이 요양 중인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가 아니던가.
로젤린의 인상착의 정도는 진즉에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검은 머리와 녹색 눈. 일라베니아 여성 평균 키를 웃도는 장신. 그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으니 못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돼, 마카롱.”

소문의 그녀가 시선을 약간 아래로 한 채 중얼중얼 혼잣말을 시작했다. 로젤린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로젤린은 행인들이 자신을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선에 예민해진
마카롱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작은 쥐가 주머니 속에서 찍찍찍 격렬하게 역정을 냈다. 눈 두 개, 귀 두 개, 코 하나 입하나 달고 있는 사람


처음 보느냐며, 저것들을 이렇게 저렇게 해 버리겠다는데 구체적으로는 풀어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수위였다.

“안된다니깐.”

혼잣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자 다들 그녀로부터 몇 발짝 멀어졌다. 요양 중이라더니 몸이 아니라 머리가 아픈


거였어? 안 그래도 마인이라는 사실만 해도 껄끄러운데, 심지어 상태가 살짝 안 좋기까지 하다니! 옷깃을 스치는
가벼운 인연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칼릭스가 무기를 들지 않은 사람을 다치게 하면 무서운 곳에 간다고 하지 말래.”

어린아이에게 일러 주듯 조곤조곤한 말투였지만, 내용이 살벌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시장 거리를 채우고 있는


우락부락한 장정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최대한 구석으로 제 몸을 욱여넣었다.

“아, 칼릭스?”

그녀는 목에 걸려 가슴께에서 대롱대롱 흔들리는 주머니를 내려 보며 중얼거렸다.

“내 동생이야. 착하고 예뻐.”

로젤린은 거리를 구경하다 과일이 잔뜩 쌓여 있는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붉은 사과가 반지르르 윤이나 탐스러워


보였다. 꼬르륵, 그녀의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아, 그러고 보니 밥을 먹은 지 오래 됐네. 한…… 두 시간 쯤.’

거리를 구경하느라 배고프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로젤린이 가게의 주인에게 인사했다.

“어, 어서 오십시오. 나, 나, 날이 참 좋지요.”

사실 그에게 날씨가 좋은지 안 좋은지를 판별할 만한 여력은 없었으나, 다년간 쌓아 온 상인의 혼이 먼저


반응했다. 로젤린은 쌓여 있는 사과를 가리키며 정중하게 물었다.

“이 사과를 제가 먹어도 되겠습니까?”

[남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허락을 꼭 받으세요]

로젤린은 칼릭스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

59 화.

가게 주인은 멍하니 그녀의 질문을 되뇌었다. 사과 하나에 얼마죠? 사과 몇 개 주세요. 따위가 아닌, 사과를
먹어도 되겠느냐? 그냥 먹겠다는 얘기인거지, 지금? 강탈하려는 주제에 왜 이렇게 정중한 거지? 과일 가게
주인은 혼란스러웠다.

남자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그녀를 곁눈질로 보았다. 쭉 찢어진 눈매는 매서웠고, 표정은 싸늘했다. 심지어는
역광이라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상황에, 과일 깎는 칼날에 햇빛이 반사되어 그녀의 눈동자만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맹수에게 포착된 초식동물의 기분이 이러할까. 오금이 저리고 손발이 덜덜 떨릴 만큼 무서웠다.

남자는 결국 “사과 한 개에 5 쿠퍼입니다.”라는 말 대신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로젤린은 콧노래를 부르며 사과를 살폈다. 진지한 표정으로 사과를 이리저리 들추던 그녀가 한 개를 들어 올렸다.
쌓여 있는 것들 중 가장 크고, 색이 예쁘고, 과실 향이 풍부한 사과였다. 주인은 결국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와중에 가장 맛있어 보이는 걸로 고르기까지 하는 거야?

로젤린은 사과를 제 옷에 슥슥 닦은 후, 목을 숙여 인사하고 다시 거리를 걸었다. 가게 주인의 복잡한 심정은


로젤린이 떠나고 나서도 가실 줄을 몰랐다.
이 사태는 로젤린이 붉은수레바퀴 성의 하녀들에게 배운 단편적인 정보가 그대로 고착되어 버린 탓에 일어나게
되었다.

[아가씨, 걱정 마세요. 도련님은 돈이 아주 많으시거든요.]

먹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많던 로젤린에게 하녀 일리야가 한 말이었다. 돈이 무어냐 묻는 로젤린의


말에 일리야는,

[많을수록 좋은 거랍니다.]

라는 애매한 답변을 남겼었다. 때문에 로젤린에게 돈의 개념은 ‘많을수록 좋은 것.’, ‘마침 칼릭스가 많이
가지고 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칼릭스나 레이몬드에게 말하면 된다.’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성 내부에서만
생활하고 돈을 쓸 일이 없었으므로, 어찌 보면 예견된 참극이었다.

로젤린은 단검을 꺼내어 사과를 작게 잘랐다. 주머니에 넣으니 마카롱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각사각,
사과를 갉으면서 마카롱이 물어 왔다. 대가로 뭘 줘야 하지 않으냐고? 물물교환?

마카롱이 인간 모습으로 산 중턱의 오두막에 살 때 알게 된 것이라 했다. 물건을 가지려면, 그 가치와 상응하는
무언가와 교환해야 한다고. 여기는 큰 마을이라서 다른 건가? 사람들이 인심이 좋네. 마카롱의 말에 로젤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딱히 그런 걸 배운 적은 없는데…… 그러면 나중에 토끼라도 잡아 주면 되는 것일까?
마른가시나무 백작님에게 물어봐야 할 듯했다.

마카롱과의 대화, 외부적으로는 혼잣말로 보이는 행위를 지속한 결과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이 줄어들었다.
로젤린의 발길이 향하는 곳마다 사람들이 쫙 갈라졌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편하다! 로젤린은 흐뭇해하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길거리에서 나무 꼬챙이에 꿰어


파는 닭고기도 먹고, 막 구운 빵 위에 꿀과 버터를 뿌려 주는 디저트도 먹었다.

물론 전부 값을 치르지 않았다. 그냥 가게의 주인들에게 먹어도 되느냐 정중하게 묻기만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소문의 그녀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르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 * *

칼릭스는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서신을 전달받은 이후 곧바로 붉은수레바퀴 영지를 떠났다. 반드시 영지를 지키고
있으라는 아버지의 말을 싹 무시한 처사였다.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인 에델바이스 또한 놀란
듯 보였다. 칼릭스는 객관적으로 착하고 순종적인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가기 전부터 제 아버지와 부딪쳤다. 마찬가지로 착한 자식의 표본이었던 누이의 첫
반항이었다. 얼마 후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한 그녀의 다짐은 날이 갈수록 단단해졌다. 칼릭스는 그녀의 결단을
동경하면서도 미련하다 생각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는 대대로 황실의 신임을 받아 왔던 가문이었다. 일라베니아 황실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그


곁을 지킬 몇 안 될 이름이었다. 만약 제 누이가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후계자는 그녀가 됐을 것이다.

칼릭스는 로젤린만큼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을 본 적 없고, 그녀만큼 냉혹하고 냉정한 사람 또한 본 적 없었다.
어렸던 자신에게 등 돌릴 만큼 그녀가 소중하게 여기던 리카르디스의 존재를 어찌나 질투했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때는 어린 날, 그것도 열여섯이라는 장성한 시기이긴 했으나 지금보다는 어린 날에 그녀에게 물었더랬다.


어떻게 붉은수레바퀴를 놓으실 수 있으세요 누님? 당신의 인생에 가장 큰 부분이 아니었던가요?

붉은수레바퀴의 이름을 달고 있던 자로서 조금, 아니 많이 섭섭하고 서러운 마음에 따졌다. 누이는 고운 얼굴을
무너뜨리며 서글프게 웃었다.

[그래야만 하는 때라 그래.]

그것은 칼릭스가 납득할 만큼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했다. 그래야만 하는 때라니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저


모두 누님의 선택일 뿐인데, 왜 누군가가 떠밀어서 결정해야만 했다는 듯이 얘기하는 건가요? 물론 내뱉지는 못한
생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편지를 받자마자 영지를 떠난 제 모습을 보며, 예전 누이가 한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하는 때’가 자신에게도 왔다는 것을 알았다.

붉은수레바퀴의 이름을 이어받을 자에게 아버지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붉은수레바퀴는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붉은수레바퀴를, 일라베니아를 최우선으로 두고 생각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 그것을 모두


저버리겠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로젤린의 손도 놓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래야만 하는 때였다.

흙먼지가 일어나는 풍경에 칼릭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편지를 받고 달려가던 중이었다.
이미 비스타에는 발을 들였고, 저 멀리 삐죽삐죽 솟은 성이 보였다.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백작님?”

“네 누이. 시장에서 놀고 있을 거야. 걱정 마렴, 치안이 제법 좋단다, 내 영지는.”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말에 칼릭스가 얼굴을 굳혔다.

“혼……자서 말입니까?”

그는 마차도 버리고 마을마다 말을 바꿔 가며 달려온 피로를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아련하게 잠겼던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감상도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칼릭스의 애처로운 표정을 미처 눈치 못 챘는지 세실이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아니 아마…….”

칼릭스와 뒤를 따르던 붉은수레바퀴 백작령의 기사들이 침을 꼴딱 삼켰다. 적어도 사고 치면 수습할 만한


인재들은 딸려 보냈겠지?

“마카롱이랑 같이 나갔지?”
“……예?”

“그, 네 누이가 데리고 다니는 독수리 있잖니. 엄청 똑똑하던데? 체스를 굉장히 잘 두더라고. 아니, 로젤린
경이 못하는 건가? 어쨌거나.”

퍽 즐겁다는 말투였다. 모두의 희망이 와르르 무너졌다. 칼릭스는 고삐를 채어 방향을 급히 돌렸다.

“누님을 찾아!”

“예!”

기사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말을 재촉하는 칼릭스의 시야로 바위에 새겨져 있는 문구가 스쳐 지나갔다. 비스타에
들어서면서부터 숱하게 보아 온 것이었다.

[두려움 없는 칼날만이 비스타의 문을 열 수 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언제나 무력을 귀하게 다뤘고, 그만큼 비스타에는 용병과 전사들이 넘쳐 났다. 문제는
바라지 않던 양아치와 삼류 건달 또한 잔뜩 모여들었다는 점이었다. 칼릭스는 영지를 다스린 경력이 길지는
않지만, 시장은 그런 이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장소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제 누이는 혼자서 성을 벗어난 적이 없다. 황실에서 근무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워낙 급변하는 정세 때문에
2 황자의 월장석 성에만 머물렀을 텐데…….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말하기를 독수리, 그것도 체스를 굉장히 잘 두는 독수리가 함께 있다지만 마음이 놓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불안했다. 얼마간 말을 달린 후, 칼릭스는 시장의 초입에서 내려섰다.

역시나 비스타였다. 거리의 팔 할을 차지하는 것이 남자. 또 그 남자들의 팔 할이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용병이었다. 인상이 사납고 행동도 거친 자들이 많아 칼릭스는 더욱 심란해졌다. 누님에게 괜한 시비라도 거는
놈이 있으면 어쩌지? 그들의 안위와 안녕이 걱정되었다.

비스타는 넓고 좁은 거리와 낮고 높은 건물들이 혼잡하게 세워져 있었다. 나름의 규칙성은 있겠지만 초행이다
보니 길이 제법 어려웠다. 사실 길이 쉽다 해도 별반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목적지가 끝없이 움직이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길이 쉽든 어렵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저 조급할 뿐이었다.

“꽃 사세요!”

상인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는 가녀린 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칼릭스는 주위를
둘러보다 골목 구석,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 두 명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골목
벽에는 곰팡이인지 이끼인지 모를 것들로 얼룩덜룩했다.

그런 쾨쾨한 냄새가 나는 공간이야 비스타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 아님에도 유독 눈에 띄었다. 그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하얀 꽃송이 때문일까. 칼릭스는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 보면 그는 지금 나름 오래 헤어져 있던 제 누이와의 해후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다고는


하나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손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식은땀밖에 없는 이 상황에서 하얀 꽃에 이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제 누이라면 꽃보다는 입에 넣을 수 있는 무언가를 더 좋아할 테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축하의 의미로 꽃을


건네곤 하니까. 그리고 사선에서 살아 돌아온 제 누이에게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같은 말보다 수고하셨다, 돌아오셔서 기쁘다는 말이 훨씬 어울릴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60 화.

칼릭스의 갈등을 읽어 냈는지 소녀들이 눈을 반짝였다. 어려도 장사꾼은 장사꾼이었다.

“어서 오세요! 열 송이에 1 쿠퍼예요! 첫 손님이시니 한 송이 더 드릴게요!”

올망졸망한 눈들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부 다오. 잔돈은 필요 없다.”

칼릭스는 무심한 듯 새침하게 소녀들에게 은화를 한 개씩 건넸다. 어린 장사꾼들은 기쁨을 숨기지 못하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종이로 꽃다발을 만들어 주려는 듯했다.

칼릭스는 얼룩덜룩한 벽에 잠시 몸을 기대었다. 행인들이 ‘거 사람. 그렇게 안 생겼는데 보기와 다르게


상냥하구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지나가는 것이 보여, 낯이 화끈해졌다. 아닌데. 그냥 누이에게 줄 선물을
샀을 뿐인데…… 라고 말하는 쪽이 더 구차해 보일 터라 칼릭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꽃을 이렇게 대량으로 사 가는 손님이 없었던지, 포장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칼릭스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가만히 있는 이 순간에도 제 누이가 철창 안에서 자신을 쳐다보며 ‘배고파 칼릭스. 감옥의 밥은 맛이 없어.
수프에 고기가 내 새끼손톱만큼 들어가 있어.’라고 말하는 광경이 이렇게 생생할 수가 없었다.

“혹시 이십 대 초중반의 검은 머리 여성을 본 적 있나?”

얇은 풀 줄기로 리본을 묶던 소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 이십 분 전쯤에 뵈었어요.”

칼릭스가 눈을 크게 떴다. 예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소녀들의 증언으로 제 누이와 자신이
같은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칼릭스가 반색하자 둘이 소근 소근
얘기를 나눴다.

“저기에서 파는 꼬지 네 개 가져다주신 것도 얘기해야 돼? 돈 안 내신 거 같던데…….”


“쉿, 에밀리. 조용히 해.”

칼릭스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 누님…… 그러고 보니 제가 화폐와 경제 원리를 안 가르쳐 드렸군요……


어쩐지 황성에서 편지를 보내실 때마다 월급을 동봉하시더라니…….

칼릭스는 제 누이로부터 판매하는 음식을 갈취당한 상인에게 값을 치렀다. 물론, 구리 동전이 아닌 황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보상이었다. 상인이 너무나도 감격해서 울음을 터트렸기에 칼릭스는 더욱 미안해졌다.

그는 또 다시 걸었다. 꽃을 한 아름 안은 채였다. 뒤에서 소녀들이 손을 흔들었다. 칼릭스는 자신이 두 손 가득


안고 있는 꽃다발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앞에 내놓은 자그마한 꽃다발이 전부가 아니었어? 뒤에 천으로
덮어 놓은 바구니까지 전부 꽃이었을 줄이야.

꽃다발의 크기가 비정상적으로 컸다. 이건 꽃다발이 아니라, 꽃이 잔뜩 핀 들판의 일부분을 떼어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많은 시선이 칼릭스를 맴돌았다. 그는 약간의 수치심을 감내하며 어지러운 거리를 휙휙
둘러보았다. 금색, 갈색, 보라색, 하늘색. 온갖 머리 색이 여기저기 퍼져 있는 가운데, 검은 머리만 보이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칼릭스는 근처 가판대의 상인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남자가 제 누이의 행방을 알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상인이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아, 칼릭스 경 아니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뭘 드릴까요!”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지? 칼릭스는 잠시 당황했으나, 로젤린이 현재 이 대륙에서 제일가는 유명 인사라는


사실을 금방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그녀와 매우 닮았다는 것 또한. 그렇다 쳐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
자신을 반가워하니 좀 황당하긴 했다. 칼릭스가 떨떠름하게 로젤린의 행방을 물었다.

“로젤린 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손에 큰 사과를 들고 저쪽 길로 가시더라고요. 어찌나 복스럽게 잘 드시던지.”

그 ‘복스럽게 잘 드신다던 사과’가 어느 과일 가게에서 강탈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이 미치자, 반가운


소식을 그저 웃으며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칼릭스는 상인에게 고맙다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칼릭스는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발견했다. 빵집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기는, 백퍼센트야.’

문을 열고 들어가니 딸랑, 하고 종이 울렸다. 빵집 안은 고소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하얀 모자를 쓴


주인장이 꽃다발을 들고 있는 칼릭스를 보며 방긋 웃었다. 아이고 누나한테 준다고 꽃다발 들고 온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미소였다. 순식간에 다섯 살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칼릭스 경 아니십니까. 과연 소문대로시구먼요.”

……소문? 칼릭스는 그의 말이 심하게 신경 쓰였으나 아차하고 정신을 차렸다. 제 소문이 문제가 아니라 누이의
행방이 더 급했다.

“아, 로젤린 경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희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잔뜩 드셨죠. 어찌나 맛있게 드시는지, 사람들이
전부 사 먹지 뭡니까! 많이 팔렸으니 그것만으로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에 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는 시기였다. 거기에 굳이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상인들을 갈취하고 다닌다는 얘기까지 더할 필요는 없었다.

한데 기류가 좀 미묘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인인 데다가, 갈취까지 한 상대를 보는 눈길이 생각보다 고왔다.
칼릭스는 곰곰이 생각하다 결론을 냈다. 아까의 상인과 지금 가게 주인의 말로 짐작해 보건대, 복스럽게 잘 먹는
젊은이를 예뻐하는 어른들의 공통적인 경향이 발휘된 것이 아닐지.

칼릭스는 주인에게 대금을 치르고 나온 후 더욱 급해졌다. 긴 여정이었다. 그 먼 거리와 시간만큼 누이를


걱정하는 마음은 커져가기만 했으나, 지금은 걱정의 종류가 좀 변질되었다. 누님……의 아련함에서 누님! 의
다급함이 뒤섞여 버린 탓이었다.

주위 행인들과 턱턱 부딪치는 일이 잦아졌다. 거친 사내들이 눈을 부라리기 전에 칼릭스는 “눈 똑바로 뜨고


다녀!” 하고 버럭 성질냈다. 그의 인상도 인상이고, 체구도 체구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남자들은 그저 입을 딱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칼릭스가 노파에게 아주 살짝 부딪친 후 정중한 사과를 건네는 모습을 본 남자들은
더욱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의 다급한 움직임에 거대한 꽃다발이 움직이며 시야의 반을 가렸다. 꽃다발이 거추장스러워 짜증이 울컥울컥
솟았다. 하얀 꽃송이 사이로 사람들의 머리가 흔들거리며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중 검은색을 언뜻 본
것 같았다. 칼릭스는 왁 소리쳤다.

“누님!”

검은 머리는 사람들에게 묻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략 이 초간의 공백 후 인파 사이로 무언가가 확


튀어나왔다. 로젤린이었다. 그녀가 사람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게 도약한 것이다. 마치 한 마리의 개구리,
하늘로 쏘아진 화살, 장애물을 넘는 검은 군마와 같이 장렬한 기세로.

억, 내가 미쳤지! 칼릭스는 경솔한 자신을 욕했다. 로젤린은 낮은 상가의 지붕에 멋지게 착지했다. 사람들이
오오, 하며 감탄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로젤린이 곧 칼릭스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그녀의 시선에 따라 칼릭스에게 거리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못 찾았나 의문이 들 정도로, 매우 눈에 띄시는 군요, 누님…….

“칼릭스!”

로젤린은 곧 다시 펄쩍 날아올라 칼릭스 앞에 착지했다. 사람들이 짝짝짝 박수쳤다. 대단한 묘기였다.


마인이라더니 아주 팔팔하게 잘 뛰는구만! 아, 저 남자는 아까 로젤린 경이 말하던 그 동생인가 보네. 왜 있잖아,
그 돈 많고 예쁘다던 칼릭스. 아, 그 예쁘고 착하다던 칼릭스? 아, 그 귀염둥이 칼?

사람들이 나누는 얘기가 칼릭스에게 들려왔다. 그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존재를 최대한 지워 보고자
노력했다. 누님 대체 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고 다니신 겁니까?

“누님…….”

“응.”

대체 무슨 말을 하셨느냐고 물으려던 칼릭스는 로젤린의 시선과 딱 마주치고 말을 흐렸다. 그녀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칼릭스는 제 누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건강해 보였다. 어디 하나 부러진 곳 없어 보였고, 피부도 상처 하나 없이 여전히 고왔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호의로 인해 볼에는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도리어 며칠간 쉬지 않고 달려온 칼릭스가 더 아파 보일
지경이었다.

아, 어찌나 다행인지. 칼릭스는 한참이나 묵혀 두었던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절도고 무전취식이고
뭐고. 사고 치고 다니셔도 되니 그저 건강하기만 하셔라.

칼릭스는 부끄러움에 발개진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거리의 소음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였으나, 로젤린이 들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로젤린은 그 믿음에
보답하듯 입꼬리를 끌어 웃었다.

“응.”

로젤린이 칼릭스를 와락 안았다. 둘 사이의 꽃다발이 구겨졌다. 꽃향기가 더욱 물씬 풍기며 두 사람을 감쌌다.
행인들이 붉은수레바퀴 남매의 상봉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감동의 눈물을 닦아 내는 모습을 보고,
칼릭스도 수치스러움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칼릭스는 로젤린의 손을 잡고 그녀가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갔다. 여기서 먹었어. 이것도 먹었어. 저것도 맛있어.
어찌나 야무지게 먹고 다녔는지 으리으리한 식당에서도 이만큼 다채롭고 호화롭게 먹지는 못할 것 같았다.
가게마다 멈춰서 외상값을 낸 결과, 로젤린은 경제가 돌아가는 원리를 대충 이해하게 되었다.

물건에는 그에 따르는 합당한 대가, 값이라는 것이 있다! 일반적인 상식을 대단한 이치라도 되는 양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고 칼릭스의 마음은 더욱 싱숭생숭해졌다. 사회에 내보내기에는 너무 일렀던 건가…… 라는 생각을 하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 누이를 야생동물 방생하는 듯 취급하는 이 패륜적인 발상은 뭐란 말인가. 칼릭스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잡념을
떨쳤다.

[다음 편에 계속....]

61 화.

칼릭스는 흐트러진 꽃다발을 다시 예쁘게 정리한 후 그녀에게 건넸다.


“선물입니다, 누님.”

“예쁜 냄새.”

로젤린은 꽃다발을 끌어안은 채로 냄새를 킁킁 맡았다. 먹을 게 아니었지만, 그녀는 예쁜 냄새에 퍽 만족한


기색이었다.

“아, 맞아. 나 이거 레이몬드한테 배웠어.”

로젤린은 곧 꽃 한 송이를 꽃다발에서 뽑아내, 길쭉한 줄기를 반으로 뚝 자르더니 칼릭스의 귓가에 곱게 꽂았다.

“예쁘다.”

“…….”

로젤린은 어떤 모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싫다고 얘기하지 못할 만큼 환하게 웃었다.

‘레, 레이몬드 이 인간이…….’

칼릭스는 잠시 표정을 일그러트렸으나, 지금의 로젤린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 온 자의 숙련된 솜씨로 감정을


빨리 갈무리했다. 내 귀 위에는 꽃이 얹어져 있지 않아. 사람들이 날 쳐다보는 건…… 내가 잘생겨서야. 약간
미친 척 자기 암시를 해야 했으나, 나름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칼릭스도 애써 사람들의 시선을 넘기며 꽃다발에서 한 송이 뽑아냈다. 그는 줄기와 이파리, 꽃 받침대까지 다


떼어 내고 로젤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살짝 빨아들여 보세요.”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던 로젤린이 꽃술 뒷부분을 머금고 쪽쪽 빨았다. 헉, 이것은! 로젤린의 눈이 확장되었다.

“이게 팬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그 꿀의 정체입니다.”

“이건, 굉장히…… 굉장히 대단하다. 칼릭스.”

로젤린이 상기된 표정으로 연신 감탄했다. 그녀는 들고 있는 거대한 꽃 한 다발을 전부 똑같은 방식으로 섭취했다.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행동을 장성한 두 남녀가 하고 다니니 눈에 보통 띄는 게 아니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은 남매가 새끼 강아지라도 되는 양,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온화한 시선이 칼릭스 내부에서 들썩이는 수치심을 눌렀다. 일라베니아에서 마인은 살인자보다 무섭고
역병보다 불길한 존재다. 로젤린이 2 황자 리카르디스의 목숨을 구했다고는 하지만 그 인식만큼은 변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 가족과 감동적인 재회를 하고, 정겹게 손잡고 돌아다니는 일상은 그들의 인식을 부수기에 아주
적당했던 듯했다. 귀에 꽃을 꽂고 있는 이 수치스러운 상황을 감내하며 돌아다니는 이유는, 칼릭스가 그 분위기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만 흘러간다면, 귀에 꽃을 백번을 더 못 꽂을까. 이것도 나름 임무라면 임무인 셈이니 창피할
이유가 전혀 없다! 칼릭스는 나름의 자기 합리화를 마쳤다.

“어, 도련…….”
로젤린을 찾으러 흩어졌던 기사들이 남매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어 올리다가 어정쩡하게 다시 내렸다. 아가씨는
꽃을 물고 쪽쪽 빨고 있고, 도련님은 귀에 꽃을 꽂고 있었다.

음, 그러고 보니 갑자기 바쁜 일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들은 스쳐 가는 인연인 것처럼 그대로 사라졌다.


칼릭스는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

그가 배신감에 치를 떠는 사이, 로젤린의 눈동자가 사람으로 꽉 찬 거리를 순식간에 꿰뚫었다. 키가 크고 작은


사람. 뚱뚱하고 바싹 마른 사람. 어지럽게 오고가는 발걸음과 각자의 사정들로 시끄러운 공간. 로젤린은 그
수백의 기척 속에서 익숙한 기운의 파동을 느끼고 오감을 예민하게 다듬었다. 주머니 안의 마카롱도 꿈틀거렸다.

가깝지는 않은 거리였다. 지나가는 남자와 부딪치는 척하며 지갑을 훔쳐 간 소년에서 느껴졌다. 순간적이고 아주
미약한 파문이었으나, 로젤린과 마카롱은 놓치지 않았다.

검은달의 마인들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순수한 마인이었다. 소년의 마력은 몸 안의 생명력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었다. ‘그것’들에게는 생명이 없었으나, 그 점만 제외한다면 똑같은 성질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지금의 로젤린에게는 이미 생명력이 섞이기 시작했으니, 더더욱 비슷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누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로젤린은 한참동안 답하지 않고, 그저 소매치기 소년이 사라진 골목을 계속 주시했다. 칼릭스는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차분한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으나, 눈동자 속, 깊은
무언가가 바람에 파란이 이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로젤린이 잠시 후 대답했다. 여전히 시선은 어두운 골목을 향한 채였다.

“마인을 봐서.”

쫓아갈까 말까 고민 하고 있었어. 로젤린은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칼릭스는 순식간에 태세를 바꾸었다. 제 누이는
몰라도 자신은 적을 확신 못하는 이 상황에서 사람들이 많은 거리는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성에 가서 마저 얘기하시죠. 마차를 부르겠습니다.”

칼릭스가 휘파람을 짧게 끊어 세 번을 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붉은수레바퀴의 기사들이 남매를 둘러쌌다.


사람들이 오가는 어지러운 거리 위로 석양이 붉게 물들었다. 로젤린이 잠시 멈춰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
칼릭스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 * *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남매를 맞이하기 위해 성문 바로 앞까지 나왔다가 박장대소했다. 칼릭스의 귀에 얹혀 있는


한 송이 꽃 때문이었다. 어찌나 안 어울리는지.

더군다나 그 웃기는 꼴이 로젤린의 작품이란 사실이 빤한 시점에서, 제 누이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 계속 그


웃긴 꼴을 하고 있는 노력이 가상하기도, 귀엽기도 했다. 그녀는 옆에 서 있는 마른가시나무 기사단장의 어깨를
잡고 헐떡이며 웃었다. 칼릭스는 울컥해하면서도 끝내 제 손으로 꽃을 뽑지는 못했다.
세실은 오랜 여정으로 지쳤을 칼릭스를 생각해 식사나 파티에 초대하지 않았다. 사람의 몰골을 보고 비웃는 둥의
배려라고는 없는 사람치고는 썩 괜찮은 배려였다.

“아, 검은달의 마인이 아니라 그냥 마인이었습니까?”

칼릭스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응, 그냥 마인. 다른 사람 지갑 훔치더라.”

그 자식, 교육상 안 좋은 것을 보이다니! 잡아서 치안대에 넘기고 말겠다. 그건 그렇고…….

“비스타에는 마인이 많다는 소문이 항상 돌았죠. 사실이었나 봅니다.”

뜬소문만 무성했건만 그것이 진실이었을 줄이야. 그 많은 마인들이 다 어디로 갔는가. 죽는 것이 반, 도망친


것이 반. 그리고 도망친 자들 중에 발타로 넘어간 자들이 또 거기에서 반 이상. 어찌 되었든 일라베니아
내에서는 보기 힘들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구태여, 일라베니아에 마인이 어디 있겠느냐? 하고 묻는다면 모두 비스타를 가리킬 것이다.
수도에 가까워질수록 황실의 힘은 강해진다. 반대로 수도에서 먼 변방일수록 황실의 권한은 약해진다는 말이었다.

수도에서 가장 먼 변방의 영지 비스타는 그 요건을 아주 완벽하게 충족했다. 일라베니아의, 이델라브힘의 영광


이전에 전쟁과 전투에서 당장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 지면 이델라브힘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이길 수만 있다면
마인의 힘이라도 빌리겠다! 불손한 이야기도 왕왕 나오는 영지이니 만큼 마인들이 지내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밑에는 강한 기사와 용병들이 많았다. 그들 중 누구라도 정체를 숨기고 있는 마인일 수 있으나,
세실이 덮는 이상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강한 전사로 활약하는 자들도 있지만, 음지로 가는 경우가 더 많다고 들었습니다. 신체적으로 뛰어난 점을
이용해서…… 나쁜 일들을…… 한다고 하더군요.”

비스타에 마인이 많으리라는 얘기를 한 뒤부터 로젤린은 자주 창밖을 쳐다보았다. 먼 산을 보는 것 같기도, 작은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칼릭스는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녀에게 마인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인간과 미지의 존재라는 큰 차이가
있음에도 어쩐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마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힘의
종류가 같기 때문일 것이다.

“누님, 그런데…….”

칼릭스는 마른 입술을 매만지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 갑자기 꺼낼 말이 아니란 것쯤은
알지만…….

“응.”

“그…… 음…… 쥐는 대체…… 뭡니까?”

칼릭스는 로젤린의 깊은 상념을 깨야 할 만큼,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쥐가 너무 신경 쓰였다. 가슴을 쭉


펴고 두 발로 서 있는 작은 짐승의 자세가 심히 기세등등했다. 로젤린은 아차, 깜박했네. 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제 어깨 위의 쥐를 슬쩍 바라보았다.

“마카롱, 얘가 내 동생 칼릭스야. 칼릭스, 여기는 내 친구 마카롱.”

칼릭스는 충격받았다. 제 누이에게 교육을 한 적 있던 부분이었다. 높은 사람에게 먼저 낮은 사람을 소개시켜


주고, 그 다음에 낮은 사람에게 높은 사람을 소개해야 한다는 예의. 그녀가 저 좋은 머리로 잊었을 리도 없을
테니, 제 누이는 지금 저 회색 쥐를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생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마카롱이라는 이름을 마른가시나무 백작에게서 들은 적 있었다. 체스를 잘 둔다던, 그 똑똑한
독수리?

“마카롱은 독수리가 아닙니까?”

“맞아. 아주 크고 멋있지.”

로젤린이 뿌듯하다는 듯 칼릭스에게 자랑했다. 칼릭스는 제 누이의 화법에 큰 문제를 느꼈다. 너무 단답형이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엮이면 단답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내 동족이야.”

아, 이건 이해해 버리고야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평범한 애완 쥐였던 마카롱이 이제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운 것은 칼릭스뿐이 아니었다. 마카롱도 깜짝 놀라 로젤린의 어깨 위에서 펄떡 한 번 뛰었다. 그리고는


쌀알 같은 손으로 그녀를 철썩 치는데, ‘미쳤어, 이 기지배!’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로젤린 혼자만 태평한
태도로 부츠 끈을 풀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62 화.

“괜찮아.”

쥐, 아니 마카롱을 보니 두 발로 펄쩍펄쩍 뛰며 제 누이를 위협…… 뭐 비슷한 것을 하는 중이었다.


“아냐, 안 그래. 우리 칼릭스 착하고.”

칼릭스가 그 말에 남몰래 씨익 웃는 모습을 보고 마카롱은 아주 기가 찼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건 이 집안의


특성이었나?

마카롱은 콧방귀를 뀌더니 세상 다 산 노인 같은 발걸음으로 털레털레 바닥으로 내려갔다.

“맙소사…….”

칼릭스의 입에서 신음이 섞인 감탄이 튀어나왔다. 작은 짐승이 검게 물들더니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 같았다. 짙고 검은 안개는 폭발하는 듯
부풀었다가 인간의 형태로 빠르게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생명을 가지고 살아 숨 쉬면 저런 모습이 되는 걸까. 기이한 광경이었다. 무릎을 꿇고 몸을 웅크린


그림자의 등이 느릿하게 오르락내리락하며 생동감 있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것을 기점으로, 손끝, 발끝부터 검은색이 사라져 갔다.
칼릭스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감고 있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회색의 눈동자가
칼릭스를 똑바로 마주했다.

아담한 체구의 갈색 머리 여자였다. 로젤린이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마카롱이 자연스럽게
로젤린의 시중을 받았다.

“뭐든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라.”

여자가 갑작스레 말을 시작했다. 잠시 중단되었던 대화를 이어가는 듯 자연스러웠다. 옷매무새의 정리가 끝나자
여자가 목 뒤로 손을 집어넣어 옷 속에 들어가 있던 머리카락을 빼내었다. 로젤린의 겉옷 위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스르륵 흩어졌다.

“절대적인 신뢰도 영원한 관계도 없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쪽이지.”

마카롱은 칼릭스의 바로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로젤린의 식은 홍차로 목을 살짝 축인 후에 빙그레


웃었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칼릭스는 어색하게 제 손을 매만졌다.

“그래서 네가 무엇이건 간에, 너도 믿지 않아. 착하고 예쁜 칼릭스.”

“……네.”

여자의 얼굴은 부드럽고 가는 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하고 약한 인상이라 평할 수 있었으나, 회색 눈동자가
칼날처럼 번뜩이고 있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키는 건 어렵고 버리는 건 쉽지. 부디 네가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뭐랄까, 그렇게 되면


내가 너의 인생을…… 매우 어렵게 만들어 버릴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드네…….”

마카롱은 제 관자놀이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군가의 어려워진 미래를 훔쳐보는 점쟁이의 고뇌
같았다.

감정은 생생하고 행동거지도 자연스러웠다. 과거의 야생동물 같던 로젤린이 수많은 교육과 경험을 거쳐 훌륭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긴 했지만, 마카롱은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인간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칼릭스는 첫 만남에 악담을 퍼붓는 그녀의 행동을 미처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마카롱의 모든 면이 놀라웠다.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얼씨구, 대답은 잘해요.”

마카롱이 빈정대는 것을 듣고 로젤린이 내 동생 괴롭히지 말라며 끼어들었다. 칼릭스는 감동받은 표정으로 제


누이를 바라보았다. ‘내 동생’ 그 세 글자에 칼릭스의 속이 간질간질해졌다.

마카롱이 기가 찬다는 듯 환상의 한 쌍을 번갈아 보았다.

“이것들이…… 놀고 있네…….”

“그런데 저…….”

칼릭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카롱이 눈썹만 까딱이며 계속해 보라는 뜻을 내보였다.

“이럴 때 할 말은 아닌 건 알지만…….”

“왜 이렇게 사족이 길어?”

칼릭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마카롱이 본명이십니까?”

“……잘도 본명이겠다, 그렇지?”

마카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칼릭스이 머쓱하게 제 목을 쓸었다.

“우리에게는 이름이 없으니깐 말이야, 그저 편의상으로 얘가 갖다 붙인 거지.”

“왜 이름이 없습니까?”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모든 사물에는 으레 이름이 있기 마련이니. 마카롱은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고 있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상한 걸 다 묻네. 부를 필요도 없고, 불릴 이유도 없으니까.”

이름이 없는 무언가와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복잡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게 아닌가. 마치 심장이 없는 사람을 보는 듯했는데, 그 심장이 없는 사람이 ‘없어도 잘 살아 있으니 굳이
심장이 있을 필요는 없잖아?’라고 말하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다소 기괴하기도, 서글프기도 했으나 말하는 당사자가 보통 태연한 게 아니라, 그저 그런가?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특별하게 너는 마카롱 경이나 마카롱 님이나 둘 중에 하나로 부르는 걸 허락해 주마. 로젤린 동생만 아니었어도
너는…… ‘마카롱’의 ‘ㅁ’도 부를 깜냥이 안 되었을 것이란 사실을 명심하고 하루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해.”
“……예, 마카롱 님…….”

또한 유명 디저트의 이름을 극존칭을 사용해서 불러야 한다는 그 이상한 기분 때문에, 칼릭스는 앞선 싱숭생숭한
의문은 곧 잊게 되었다.

* * *

덜컹 덜컹.

마차가 작게 흔들릴 때마다, 소년은 창문에 바싹 붙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렇게 좋은 마차는 처음이었다.
소년이 전에 타 본 마차들은 죄다 쿠당탕, 덜커덕덜커덕! 하는 둔중한 소리가 났다. 몸이 둥실 떠오르고
구석으로 처박히는 일 또한 예사였고.

그런데 이 거대한 마차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이 거친 길을 달리면서도 고작 덜컹, 덜컹 정도의


소음과 가벼운 흔들림뿐이었다. 그마저도 부드러운 시트가 다 흡수를 하고 있어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도 위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리카르디스.]

앞에 앉아 있던 여인이 소년을 불렀다. 소년이 고개를 돌리자 어깨까지 오는 은발이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네, 어머니.]

[티아 좀 안고 있어 주겠니?]

곱슬거리는 은발의 어린 소녀가 그녀의 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손을 뻗어 동생을 건네받았다.
네 살이 되어 부쩍 무거워진 동생을 리카르디스가 낑낑거리며 고쳐 안았다. 세티스티아가 그의 품에서
칭얼거렸다. 말랑말랑하고 따끈한 동생에게서 우유 냄새가 물씬 풍겼다.

리카르디스가 미소 지으며 세티스티아의 등을 토닥였다. 그 사이 여자는 옆에 앉아 있는 청년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오늘 안에는 도착 하겠니, 잇세리온?]

[예, 주인님. 해가 지기 전에는 황성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요.]

[별다른 일이라.]

그녀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차를 호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모두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에 녹색 눈, 한쪽 눈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까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마차만큼이나 거대한 덩치가 그 흉흉한 인상에 한층 더 힘을 실었다.


마차를 호위하는 책임자로 뽑힌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페르탄이 마차에 가까이 접근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밀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별 다른 일은 없나요?]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그것 참.]

밀리아가 탄식했다

[안타깝군요.]

별다른 일이라도 있길 바랐건만. 그녀의 옆에서 잇세리온이 허둥지둥하다 그녀의 소매 자락을 슥슥 당겼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고 말리는 모양새였다. 밀리아가 호호 연극적으로 웃다가 별다른 일이 생기면 꼭꼭
알려 달라 말했다. 페르탄은 고개를 살짝 까닥이고는 다시 물러났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주인님!]

[왜 화를 내고 그러니, 잇세리온.]

[저, 저분이 누군지 아시잖아요. 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 모르겠어. 황제 폐하의 충실한 개잖아.]

[주인님!]

잇세리온이 비명 지르듯 그녀를 부르자 밀리아가 검지를 제 입술 위에 가져다 대었다. 잇세리온이 급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아가씨의 단잠을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두 사람이 아옹다옹 다투는 모습을 보다가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세티스티아는 다시 밀리아의 품
안에 있었고, 자신은 잇세리온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슥슥 비비자 잇세리온이 곧바로
잔소리를 했다.

[비비면 안 됩니다 도련님. 눈 나빠져요.]

[응…….]

[좀 더 주무세요.]

잇세리온이 리카르디스의 등을 쓸며 다시 재우려 하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얼마나 왔어?]

[이번에는 정말 거의 다 왔어요.]

리카르디스는 다시 창문에 후다닥 붙었다. 아까와 풍경이 달랐다. 풀과 나무 대신, 반듯한 건물들이 군집해 있는
깨끗한 거리였다. 변방의 작은 영지에서 살던 리카르디스에게는 모든 것이 크고 멋있어 보였다. 그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자 뒤에서 잇세리온이 웃었다.
[도련님, 저기요. 위를 보세요.]

잇세리온의 손가락을 따라 방향을 옮기니 태양을 찌를 듯 높게 서 있는 새하얀 성들이 보였다.

[황성입니다.]

아름다웠다. 리카르디스가 태어나 본 것 중 가장. 그는 하얀 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카르디스의 주의를


일깨운 것은 어딘가 딱딱하게 느껴지는 밀리아의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

뒤를 돌아보자 밀리아가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 잇세리온. 가까이 오렴.]

여느 때와 같은 미소 위로 어둠이 내려앉은 것을, 리카르디스는 눈치챘다.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발치에 앉았다. 밀리아도 세티스티아를 안은 채 바닥에 앉았다. 잇세리온은 잔소리를 하고 싶어
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란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다음 편에 계속....]

63 화.

모두가 둥글게 모여 앉은 지금의 모습에, 리카르디스는 어쩐지 이 널찍한 마차가 자신과 잇세리온, 르원 형제의
비밀기지같이 변했다 생각했다. 누구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고, 우리 편만 들어올 수 있는.

밀리아는 입을 꾹 다물고 비밀스런 정적을 지키다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마차가 황실의 문을 지나친 그 순간.

[여기는 아주 추운 곳이야.]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말하는 ‘여기’가 그 아름다운 하얀 성을 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름이 다가와 풀잎은
푸릇하고 햇살은 따가울 정도로 뜨거워지는 이때에, 그녀가 말하는 추위는 리카르디스에게 와 닿지 못했다.

[영원히 녹지 않는 눈이 쌓여 있고,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 불어와. 눈을 깜박하는 사이에 어둠이 내려앉아


추위를 한층 더 혹독하게 만드는, 그런 곳이야.]
리카르디스는 창밖을 통해 다시 한 번 하얀 성들이 늘어서 있는 광경을 보았다. 아까보다 가까워진 성은 햇빛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웠으나, 밀리아의 말을 듣고 보니 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겨울의 자작나무
숲같이 보이기도 했다.

[모든 공간, 모든 사람들이 너에게 겨울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리카르디스.]

[네, 어머니.]

[버텨 내기 위해서는 이 얼음 숲보다 더 차갑고, 더욱 혹독하게 변하는 수밖에 없어.]

더 차갑게, 더욱 혹독하게. 밀리아의 말이 서리처럼 리카르디스에게 달라붙었다. 밀리아가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의 등을 감싸 안듯 그들을 모았다. 세 사람의 머리가 맞닿았다. 그들 사이에서 세티스티아가 꼬물거렸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세티스티아를 지켜보다 눈을 감았다.

[리카르디스. 힘들거야. 괴로울 거야. 하지만, 견뎌 낼 수 있어. 사람은 약하지만,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으니까.]

밀리아가 그 말을 하며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심각한 분위기를 읽지도 못하는 어리고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었다. 괴로움은
리카르디스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기에.

하얀 성이 더욱 가까워졌다. 밀리아는 그 눈부신 광경을 보며 말을 흘렸다.

[참아 내고 기다려야 해, 리카르디스.]

괴롭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녀의 말은 리카르디스에게 절대적이었다. 그러니 밀리아가 했던 말은 단순한 추측이
아닌, 빠른 미래에 실현될 예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확실한, 고통스러운 미래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까지요?]

밀리아가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웃는 모습이 괴로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리카르디스는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 밀리아가 무어라 얘기했으나, 지금의 리카르디스는 그 답을 잊어버렸다. 그저 어린 아이를 달래기 위한,


의미 없는 말이었으리라.

* * *

황제는 최근 더 없이 인자해졌다. 사절단이 귀환한 후부터였다. 제 손으로 사지로 떠밀었다 해도, 어찌 부모의
마음이 편했겠느냐. 제 아들이 무사히 귀환한 모습을 보니 그 사실만으로도 기뻤으리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황성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면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마저도, 황제가 기분 좋은
이유는 단순히 사절단이 무사히 돌아와서가 아니라, 그들의 귀환으로써 황제가 얻게 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예상한 바와 같이, 황제는 큰 선물을 받고 매우 흡족해진 것이 맞았다. 리카르디스는 발타와
일라베니아의 동맹 서약서와 함께, 고급스럽고 작은 상자를 황제에게 건넸다. 전자는 사절단의 표면적인
목적이었고, 후자는 실질적으로 황제가 원했던 것이었다.

발타가 사용하는 강력하고도 위협적인 무기의 근원, 마력의 결정이었다. 아직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어떤
것도 밝혀내지는 못했으나, 그 존재만으로도 앞으로의 전황을 기대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으므로 황제는
기뻐했다. 황제는 선물을 받은 이후로 불면증을 깨끗이 떨쳤노라며 리카르디스에게 큰 상을 내렸다.

죽으라고 보낸 길에서 살아오다 못해, 선물까지 들고 온 대단한 업적을 이룬 리카르디스에게 귀족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황제가 엘피디오를 잠재적인 황태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쯤이야 알겠으나,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리카르디스가 괜찮은 패라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힘들어졌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좋다든가, 신성력이 엘피디오를 훨씬 웃돈다든가하는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 이외에도, 그


험난한 사선을 거쳐 살아남은 리카르디스에게 진정 신의 가호가 따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일라베니아 사람
특유의 종교적 기조가 발휘된 것이다.

월장석 성에 부쩍 손님이 늘게 된 것은 그러한 연유였다. 사절단이 출발할 당시만 해도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던


귀족들이 줄을 이어 방문했다. 그렇게 리카르디스는 얻을 것은 얻고, 버릴 것은 버리며 차츰 세력을 불려 나갔다.

그렇게 얻은 이득과 세력을 활용해 엘피디오를 견제해야 하는 지금, 리카르디스는 보다 중요한 안건으로 한시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중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리카르디스가 비스타를 떠나는 그날까지도 일어나지
못했던, 그의 호위 기사 때문이었다.

로젤린의 이름이 거대하고 힘 있는 자들의 입에서 오르고 내렸다. 다행히도 황제의 힘이 일시적으로나마 실려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로부터 로젤린을 뺏기란 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사실을 직감한 자들이 이번에는 그녀를 흠집을 내려 했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리겠다는 심보였을까.
헛소리를 하는 작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2 황자 전하를 구해 냈다고 하지만 마인이다. 암살자들을 손쉽게
이긴 것을 보니 뭔가가 수상하다. 어쩌면 검은달과 짜고 치는 연극이 아니겠느냐는 음모론이 돌기 시작했다.

“개소리가 참신한데.”

다양한 개소리를 모아 온 서류를 보며 리카르디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의 반응과 같이, 개소리가 퍼질


만큼 녹록한 세상이 아니었다. 검은달에 속하기에는 로젤린이 달고 있는 이름이 너무나 강력했다.

붉은수레바퀴. 황실의 역사와 나란히 영광을 짊어진 가문이었다. 강하고, 충성심이 뛰어나고, 제국의 명령이라면
한 몸 불사하는. 그야말로 대단한 사냥개.

그런 가문의 딸에게 첩자의 신분을 씌우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리카르디스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제할 것은 제하고 부풀릴 것은 부풀려 이미 세상에 풀린 지
오래였다.

세상에 더없을 충신,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불길한 힘을 지닌 마인임에도 불구하고 넓은 마음으로 그녀를
받아들인 2 황자 리카르디스.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은 얘기였다. 그리고 군중들은 소설 같은 이야기일수록 더욱
빠르게 받아들이고는 했다. 그녀가 검은달의 암살자라는 얼토당토 않는 얘기는 기지개 한번 펴 보지 못하고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녀에 대한 조사를 강경하게 외치는 자들이 있었다. 엘피디오의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델라브힘의 열렬하게 믿는 가문들도 속해 있었다.
이틀 뒤. 그녀의 처우에 관한 마지막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전하?”

리카르디스는 스르륵 눈을 떴다. 몇 주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보니, 의자 위에서 짧게 졸고 말았다.


잇세리온이 옆에 서서 걱정이 가득 찬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반쯤 감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꿈에 나오셨는데…….”

잇세리온이 눈을 깜박였다. 리카르디스는 밀리아의 죽음 이후, 단 한 번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 없었다.


혹시 잠꼬대인가? 잇세리온이 그 몰래 식은땀 뻘뻘 흘려 가며 고민했지만 리카르디스는 산뜻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지금의 내 상황과 절묘하게 이어지는 듯한, 으음…….”

리카르디스는 목을 잡고 고개를 좌우로 꺾어 가며 뭉친 근육을 풀었다. 이 짧은 동작으로 그간 쌓였던 피로가


풀릴 리 없으나, 기분을 환기시키는 정도는 되었다.

“물렁하게 굴다가는 잡아먹힌다는 경고를 하러 오신 것 같아.”

밀리아의 얘기를 하는 리카르디스의 표정과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잇세리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아까보다 한결 가뿐한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황비님다우시군요.”

“정신이 번쩍 들었지 뭔가. 그래서, 무슨 일이지?”

최근 들어 자신의 수면 시간을 가장 걱정하는 잇세리온이 깨울 정도면 그의 선에서 해결할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별일은 아닙니다만.”

잇세리온의 뒤에서 상급 기사 르원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온 게 별 일이 아니야?


리카르디스가 르원을 발견하고 작게 미소를 띠었다.

“르원.”

르원이 한쪽 무릎을 숙이며 주먹을 가슴 위에 올렸다.

“하얀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전하를 뵙습니다.”

“수고 많았다.”

르원은 잇세리온의 동생으로, 홀쭉한 제 형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몸집은 두 배로 두꺼운 상급 기사였다.
하얀밤 기사단 상급 기사들의 주 임무는 리카르디스의 호위였으나, 르원은 달랐다.

성 외부에 독자적인 집단을 만들어 위험인물을 감시하고 때로는 실질적으로 손을 쓰기까지 했다. 기사보다는
용병이나 암살자 쪽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상급 기사들이 표면의 임무라면, 르원은 완벽한 뒷면의 일을 도맡은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그에게 그런 임무를 맡기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으나, 르원이 그를 위해 기꺼이 나섰다. 이런 일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며. 그렇다 해도 그동안 나설 일이 많지 않았던 르원은, 최근 로젤린
덕분에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64 화.

“발타의 동향이 어수선합니다. 듣자 하니 하카브 왕자가 건국제를 맞이해 일라베니아에 올 준비를 하고


있다더군요. 클로에 양이 전달을 부탁한 사항입니다.”

“……그럼, 정확하겠군. 아니 대체 그 자식은…….”

리카르디스가 이마를 짚었다. 하카브의 생각을 알고 싶지는 않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
궁금해졌다.

“엘피디오 전하께 선물을 보내고 왔습니다. 내일쯤 받아 보시겠죠. 다른 목표들은 잠잠합니다. 겁을 준 게


유효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전하께서 이렇게까지 더럽게…….”

잇세리온이 르원의 다리를 퍽 걷어찼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공격한 적이 없으시다 보니.”

리카르디스가 목 안쪽으로 웃음을 삼켰다.

“원래 안 그러던 놈이 그래야 더 무서운 법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말이야.”

르원은 이후로도 처리한 몇 개의 일과, 그로부터 알게 된 몇 가지 정보를 보고했다. 리카르디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가장 괴로운 건, 내가 관심없는 사람들의 은밀한 기호까지 알게 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 뭐랄까……
회의감? 그래, 그 회의감이 너무 짙다는 거야.”

“……예, 뭐…… 죄송합니다. 그것까지는 말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아니야 뭐든 아는 게 힘이라고……도 했고 근심이라고도 했지. 이제야 그 말뜻을 절감하고 있다.”

리카르디스는 피곤해 보였다. 몇 주째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한 탓에 얼굴에도 그 영향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르원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전하?”

“아니.”

르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답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보통은 하게 해 주시지 않습니까?”

“보통 그런 요청 뒤에는 청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 따라오기 마련이거든. 그리고 그대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알 것 같은 기분이라. 로젤린 경……으로 시작하는 문장 아니었나?”

“정확하십니다. 해도 됩니까?”

“안된다니까.”

르원의 얼굴에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리카르디스는 그가 하고자 하는 질문을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어째서 로젤린을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인지. 어째서 일개 호위 기사를 위해 이 위험을 감수하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이리라.

다소 무정해 보일 수 있지만 르원은 로젤린을 먹이로 던져 주는 쪽이 더 이득일 거라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같은 하얀밤 기사단의 일원이다 보니, 르원도 로젤린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르원에게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대상은 리카르디스였다.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보호하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정작 그를 위험에 빠트린다면, 르원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로젤린을 쳐 낼 수 있었다. 애초에 리카르디스가 말을 한마디도 꺼낼 수 없게 해서 버리니 마니 논의 할 수조차
없었지만.

“르원.”

“예, 전하.”

리카르디스는 피곤한 듯 턱을 괴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나는 무얼 위해 싸우나?”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리카르디스가 황제의 자리에 절대 앉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르원이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물었다. 어떻게 감히 자신이, 그에게 그저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이 의미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리카르디스는 르원이 내뱉지 못한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사람은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르원?”

르원이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 *

디에즈는 이른 아침부터 엘피디오의 석영 성에 방문했다. 성문 앞에는 엘피디오의 시종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 손수건을 댄 채로 디에즈를 맞이했는데, 천에는 이미 피가 배어 있었다. 척 봐도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있었다. 시종도 상처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 행동하며, 방문한 손님을 안내하는 목적에만 충실했다.

“…!…!……!”

응접실 바깥에서부터 갖은 욕설로 시끄러웠다. 제국의 황자가 대체 어딜 쏘다니기에 저런 추잡스러운 욕설을 알고


있는 건지. 디에즈가 한숨 쉬었다.

엘피디오가 욕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제 이복형 리카르디스. 이번 사절단 일로 콧대가


금강석 성 끝까지 솟았다던. 물론 이 또한 엘피디오가 한 말이었다.

디에즈는 시종에게 눈짓했다. 문이 열렸다. 응접실은 엉망이었다. 탁자 위는 이미 한번 헤집어 놓았는지 서류며


책 따위가 바닥에서 나뒹굴고, 화병이 소파에 거꾸로 박혀 있었다. 문이 열리는 기척이 나자 씨근대던 엘피디오가
뒤를 돌아봤다. 그의 어깨가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형님.”

엘피디오가 거친 동작으로 소파에 소리 나게 앉았다.

“앉아라.”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느냐고?”

엘피디오가 피식 웃더니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디에즈, 네가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나는. 이번에는 좀 멍청한 것 같고. 그 말을 한 게


다른 놈이었으면 이게 얼굴로 날아갔을 거다.”

엘피디오가 제 옆에 거꾸로 뒤집혀 있는 화병을 툭툭 건드렸다.

“죄송합니다.”

디에즈가 엘피디오의 맞은편에 앉았다. 돌아온 직후에 호출당한 뒤로 처음이었다. 해독 약이 없노라, 받아 내지


못했다 전했던 이후로 처음. 다행히도 마인이 있다면 ‘파편’의 힘을 상쇄할 수 있음이 입증되어 디에즈는
그에게 따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소득이 없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열한 살 이후로부터 줄곧 그 자식으로 인해 ‘무슨 일’ 이 많이 있었지.”

엘피디오가 협탁에서 파이프를 꺼내어 입에 물며, 잔뜩 인상을 쓰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디에즈가 황급히
일어나 파이프에 불을 붙여 주었다.
엘피디오가 깊게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방 안에 연기가 퍼졌다. 디에즈는 코를 움찔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연초가 아니었다. 분노로 젖어 있던 엘피디오의 눈동자가 차츰 진정되는 게 보였다. 최근
일라베니아 내에서 금지하는 마약인 것 같았다.

“끊으세요, 형님. 몸에 좋지 않습니다.”

엘피디오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미묘한 표정이었다.

“착하구나, 디에즈.”

눈치도 볼 줄 모르는 멍청한 놈. 착하다는 말에 담겨 있는 뜻이었다. 엘피디오가 느릿하게 머금은 연기를


내뱉었다. 방 안에 그 몽롱한 냄새가 가득 차오를 즈음 엘피디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리카르디스가 선물을 보냈다. 발신인이 따로 적혀 있지 않았지만 확실해. 물론 수신인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석영 성에 보냈으니 나에게 보낸 게 맞을 테고.”

“아, 리카르…….”

디에즈가 무어라 말하려 하자 엘피디오가 급하게 검지를 들어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아니, 리카르디스 형님께서요? 좋은 선물입니까? 따위를 내뱉으면 진짜 열 받을 거 같으니까 입 닥치는 게


좋겠다. 디에즈.”

디에즈가 입을 닥쳤다.

“검은달 놈들이 갑자기 연락을 끊어서 내가 곤란해졌어.”

“죄송합니다, 형님.”

“급한 대로 일라베니아 내의 길드에 도움을 좀 받았지. 맡겨만 달라고 떵떵거리더니…… 쓸모없는 새끼들…….”

검은달이 손을 빌려주지 않자, 급한 대로 일라베니아의 암살 길드를 이용했다는 얘기였다. 확실히, 검은달도


막아 내는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그런 삼류 암살자를 못 막아 낼 리 없었다.

“아침에 성의 요리사가 솥을 열었다가 졸도했지. 그 안에 시체를 욱여넣었다더구나. 시체의 문신으로 그 길드


소속인 걸 알아냈고.”

디에즈는 그제야 리카르디스가 보낸 ‘선물’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엘피디오가


피식 웃었다.

“네가 그런 표정을 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데.”

암살자를 죽이는 일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일라베니아의 황제가 머무는 금강석 성 다음으로 경비가
삼엄한 석영 성에 누구의 눈에 띄지도 않고 시체를 가져다 놓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디에즈가 놀란 것은 그 불가능에 가까운 업적을 리카르디스가 이루어 냈기 때문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소극적인 인물이었다. 암살자를 보내면 처리하고, 막아 내기만 한다. 전장에서 공을 세워 얻게 된 권력이
위협적일지언정, 물리적으로 엘피디오를 공격하려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는 그의 동생 세티스티아
황녀가 죽었을 때조차.
그런 그가 지금 처음으로 날아온 화살을 다시 돌려보냈다. 얼마나 잘 벼려져 있건, 그 무기가 얼마나 강하건
검집 안에서 꺼낼 줄 모르던 리카르디스가, 처음으로 엘피디오를 향해 날을 겨눈 것이다.

엘피디오가 평소보다 흥분한 기색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째서일까.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만히 숨죽이고만 있던 리카르디스가 왜 지금에 와서? 사절단 일로 힘을


얻었다고 생각해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생각해서 반격의 서막을 올린 것일까? 아니다. 사절단 일로 많은 치하를
받기는 했지만, 그전부터도 리카르디스는 수많은 공을 세워 왔다. 그렇다면 왜?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디에즈가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엘피디오가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선에서 돌아온 그 대단하신 영웅님 말이야. 그녀가 리카르디스의 행동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엘피디오가 또 인상을 찌푸린 채 두리번거렸다. 디에즈가 얼른 일어서서 바닥에 뒹굴고 있는 재떨이를 집었다.

“그대로 들고 있거라.”

탁자에 놓으려 하자 엘피디오가 디에즈에게 명령했다. 디에즈는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그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했다. 디에즈가 들고 있는 재떨이 위로 엘피디오가 파이프를 툭툭 털었다. 재가 날리며 후끈한 기운이 그의
피부에 닿았다.

[다음 편에 계속....]

65 화.

“그런데 나는 뭔가 더 있을 거 같다. 황금정원까지 움직이며 페르탄의 딸을 보호하고 있다더구나. 심지어는 안


하던 협박까지 하고…… 물론 축복의 밤을 위해서는 마인이 필요하니, 그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단순히 도구로 보는 것 같지 않아.”

엘피디오가 서 있는 디에즈를 흘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눈높이가 비슷한 상대와 대화를 하는 걸 좋아한단다, 디에즈.”

자신이 올려다보는 상황이 기분 나쁜 듯, 엘피디오가 고상하게 명령했다. 디에즈가 무릎을 꿇었다. 두 손에는
공손히 재떨이를 들고 있는 채였다. 엘피디오는 그제야 만족한 미소를 보였다.

“세티스티아가 어릴 때부터 알아 왔다 하니, 오랜 인연이겠지. 리카르디스는 그래 보여도 좀 무른 구석이 있으니,


어쩌면 그녀를…….”

엘피디오가 웃었다. 눈동자가 뱀의 비늘처럼 번들거렸다.

“사람은 소중한 게 생기면 약해지기 마련이지. 내가 왜 널 부른지 알겠느냐?”

“…….”

“네가 붉은수레바퀴의 여식과 친하다지.”

“예, 형님.”

“역시 넌 쓸모가 있어.”

디에즈는 엘피디오의 무릎만 보며 말을 어물거렸다. 엘피디오가 담배 파이프를 강하게 재떨이에 툭, 떨어트렸다.


디에즈가 화들짝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내가 틸렌드 그 병신 새끼보다 널 좋아한다고 했었지.”

3 황자 틸렌드는 엘피디오의 동복동생이었다. 성격이며 외모며 그와 쏙 빼닮은 인물이었으며, 야망 또한 그에


뒤지지 않았다.

“너는 분수를 알아.”

엘피디오는 그 말을 하며 디에즈를 위아래로 훑었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재떨이 역할을 하는, ‘분수’를 디에즈에게 자각 시켰다.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해, 디에즈. 내 말 알아먹었어?”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디에즈가 입술을 꽉 물었다. 로젤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성에 창백한 얼굴로 잠자고 있던. 그리고 더 과거의 일도.

어깨에 오는 짧은 머리의 그녀는 햇빛 아래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인다. 새삼스럽게 엘피디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소중한 게 생기면 약해지기 마련이지.]

디에즈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깨달았다. 참담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왜 이러고 있는지 잊은 것도
아니건만, 그녀는 자신을 너무 약하게 만들었다.

“……형님.”

“그래.”

“저는 형님이 황금으로 빛나는 월계관을 쓰는 날을 항상 그리고 있습니다.”

엘피디오가 씩 웃으며 디에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날이 좋구나. 밖에 나가서 차라도 한잔하자.”

* * *

로젤린이 마른가시나무 성에서 눈을 뜬지 이 주 하고도 닷새가 지난 날이었다. 수도, 티가드에서부터 반가운


편지가 왔다. 몸이 다 낫거든 하얀밤 기사단에 복귀하라는 명령서였다. 로젤린이 편지를 받자마자 짐이고 뭐고
챙기지도 않고 떠나려는 것을 칼릭스가 겨우 말렸다.

칼릭스도 편지를 받았다. 리카르디스가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황가의 인장이 떡하니 찍혀있는 서신을 받았음에도
칼릭스는 좀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로젤린에 관해 할 말이 있다는 내용이었고, 칼릭스는 드디어 올 것이 왔노라
생각했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의 만남은 생각보다 오래 거슬러 가야 했다. 하얀밤 기사단의 수습 기사로 입단 했을


때부터니, 햇수로만 7 년이 다 되어갔다. 몇 없는 여자 기사라는 이유 때문에 로젤린은 입단하자마자
세티스티아의 호위가 됐었다. 세티스티아는 로젤린을 매우 좋아했고, 리카르디스는 제 동생이라면 끔벅 죽는
시늉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셋이 어울리는 시간도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었다.

세티스티아의 죽음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한번 심하게 비틀렸지만, 로젤린은 그때에도 리카르디스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노력으로써 이어진 시간이었다. 비록 그 속에 어떤 감정들이 얽히고설켰는지는 몰라도.

그러니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아무리 무관심했더라도 이전의 로젤린과 현재의 로젤린을 같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테다. 기억상실이라는 어설픈 변명으로 눈을 가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칼릭스는 조금씩 닳은 그
한계가 지금에 와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생각했다.

리카르디스는 결코 아둔하거나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챘지만, 덮어 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덮어 두고 있었다.

칼릭스는 제 누이가 파르딕트 경의 방패를 맨손으로 부숴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자자하게 퍼진


로젤린에 관한 소문 중 하나였으나, 칼릭스는 그 얘기가 진실임을 직감했다. 같이 듣고 있던 로젤린이 “맞아,
내가 부쉈어.” 하고 뿌듯하다는 듯이 얘기해서 칼릭스의 마음은 더욱 갑갑해져 버렸다.

파르딕트는 거친 뱃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고래무덤 가문에서도 독보적인 체구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


파르딕트의 방패는 그보다도 더 유명했다. 명장 누구의 솜씨로 삼 년만에 태어난 걸작이라던가 뭐라던가.
사람들은 방패의 크기와 두께를 보며 놀라워했다.

그걸 맨손으로 부숴 버렸다는데…… 칼릭스는 그 얘길 듣고 마카롱을 조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독수리 마카롱은 새의 대가리를 하고도 뜨끔하는 표정을 짓더니 모른 척 고개를 휙 돌렸다. 그때는 잠시
순찰중이라 같이 없었단다.

아무튼 그때, 파르딕트의 방패를 부수라 명령한 사람이 리카르디스라고 하니 이건 뭐 들킨 건 확정이었다. 그녀가
돌보다 단단한 물건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하지만 칼릭스는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다. 제 누이가 이 성에서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 리카르디스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전대미문의 강력한 마인이 나타났음에도 주변의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로젤린이 2 황자를 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이유를 전부 설명할 수 없었다. 나쁜 얘기가 나오려고 하면 어디서부턴가 정보가 미묘하게 비틀리며
순화되었다. 로젤린이 어릴 적부터 얼마나 총명하고 자애로웠느냐를 알 수 있는 과거의 사소한 얘기들이 골목
사이마다 돌아다녔다.

더불어 밝혀지지 않았던 2 황자의 미담들 또한. 삼 년 전에 전국에 구휼미를 대대적으로 풀었던 모래절벽 자작이
사실은 2 황자의 또 다른 신분이었다나 뭐라나.

대륙 여기저기에 손을 뻗은 거대한 상단의 주인이자, 돈이 흐르는 줄기를 따라 정보를 옮기는 황금정원 가문의
솜씨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 리카르디스가 있으니 그가 주도했다 말해야 정확할 지도 몰랐다. 2 황자는
이런 여론 몰이를 즐겨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누구의 손, 누구의 발을 빌렸는지 티 나게 행동하고
있었다.

로젤린의 뒤에 2 황자 리카르디스가 있음을 알라는 얘기였다. 그와 그녀의 주적들에게.

일주일 전, 로젤린의 처우에 관한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리카르디스에게 모든 권한이 위임되었다는 소식을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칼릭스에게 전해 줬다.

“……만장일치가 말이 되나?”

칼릭스의 비서, 알터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웃었다.

“2 황자 전하께서 생각보다 수완이 좋으신가 봅니다.”

1 황자 파가 포진한 그 회의에서 만장일치라는 결과를 이끌어 냈다는 것은 단순한 수완의 문제가 아니었다.
칼릭스가 알터를 흘끗 바라봤다. 알터가 눈썹을 까딱하며 알아온 또 다른 정보를 풀었다.

“회의가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몇몇 귀족 가문에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는군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공론화 시킬 수 없는…… 어, 그러니까 좀 구린 구석이 있는 부분들이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가문들은 우연히도 전부 1 황자 파에 속하는 귀족 가문들이었다고 하는군요. 덕분에
회의에서 힘 뺄 여력이 없었고요.”

“그것 참 공교롭게 되었어.”

“대단히 굉장한 우연이죠.”

칼릭스는 알터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좋은 결과였으나, 과정이 생각보다 거칠었다. 다소 소극적이게


방벽만 쌓던, 여태껏 리카르디스가 해 온 방식과는 달랐다.

칼릭스는 그 남자를 변화시킨 것이 어쩌면 제 누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 얼토당토않은가 싶다가도,
그의 행보를 보고 있자니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닌 듯도 하고. 머리가 복잡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지 리카르디스는 울타리 밖을 서성이던 제 누이를 확실하게 그의 영역 안으로


집어넣고 보호했다. 그 덕분에 칼릭스는 편안한 마음으로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그런 것처럼 칼릭스도 그에게 볼일이 있었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어찌
되었건 좋은 기회였다.

칼릭스는 편지를 품 안에 넣었다.

“수도까지 긴 여행이 되겠군요, 누님. 채비를 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가는 거야? 에스터는?”

칼릭스는 감격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인 아버지도, 자신도 없는 영지를 걱정하는 제 누이의
발전이 너무나 대견했다.

“붉은수레바퀴 산하의 붉은말 남작가가 맡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아, 마르슈 아저씨가.”

로젤린은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은말 자작에 관해서
내가 일러 준 적이 있던가? 곧바로 창밖에서 마카롱이 날아오자 그의 신경은 금세 다른 곳으로 돌려졌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님께 부탁해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응.”

로젤린이 더없이 해맑게 웃었다.

“그럼 하던 걸 마저 할까요?”

칼릭스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턱 펼쳤다. 로젤린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다음 편에 계속....]

66 화.

“누님, 붉은수레바퀴 가문 이름의 유래를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로젤린의 교육 시간이었다. 시간이 남는 겸 부족했던 상식을 채우기 위해 칼릭스가 책상 앞에 앉았다. 어지간하면


제 동생의 말을 잘 따르는 로젤린도 공부 시간은 티 나게 싫어했다. 매번 도망가고 숨었지만, 그녀에 관해서는
통달한 칼릭스가 매번 찾아내었다.

이번에도 주방에서 주방장과 노닥거리던 로젤린을 칼릭스가 잡아 왔다. 책상 앞에 앉아서도 로젤린은 끝까지
딴청을 피웠지만, 칼릭스가 크레페 케이크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대치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카롱이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제 누이를 먹을 거로 교육하다니 저 자식도 좀
너무하다.

“전장의 수레바퀴.”

“훌륭하십니다.”

적군의 피로 물든 수레바퀴로부터 가문의 이름은 시작되었다. 과거 배운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지 로젤린은 금방


답을 내놓았다.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쳤다. 마카롱은 침대 위를 뒹굴며 깔깔 웃었다.

“정말 너희들의 아버지와 딱 어울리는 가문 명이야.”

로젤린이 부상으로 기절해 있는 동안, 마카롱은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을 본 적 있었다. 정말…… 정말 너무
잘 어울렸다. 마카롱은 “이야, 이야.”, “진짜.” 따위의 감탄사를 계속 내뱉었다. 로젤린이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또 있어. 운명의 수레바퀴라고도 한 대.”

“잘도 끼워 맞추고 있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아니야? 완전 웃겨.”

칼릭스가 의자에 앉아 뚱하게 쳐다봤다. 그 표정이 더 웃겨서 마카롱은 낄낄 웃었다.

* * *

칼릭스는 수도로 떠나기 전 로젤린이 보았다던 마인을 찾고자 했다. 검은달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들은 여전히 ‘파편’과 마력의 결정으로 탄생한 인위적인 마인 부대를 무기 삼아 지니고 있었다.

로젤린이 아무리 강하고, ‘파편’을 이겨 낼 수 있다고 한들 개인으로서는 해 낼 수 있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검은달에 속하지 않은 마인의, 마인들의 힘이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인이 많은 비스타라고 해도 자신이 마인이라며 이마에 써 놓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기에,
우선적으로 로젤린이 얼굴을 알고 있는 소매치기 소년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칼릭스는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로젤린과 마카롱에게 이 건에 대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숨어 살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다 있는 거겠지.”

마카롱은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더니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칼릭스는 마카롱의 비협조적인 반응과
태도에 익숙해져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도리어 순순히 도와주겠다 하는 쪽이 이상할 것이다.

문제는 로젤린의 차가운 반응이었다.

“아니. 칼릭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아, 네. 죄송합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칼릭스의 입에서 저절로 사죄의 말이 나왔다. 그때 로젤린의 표정은 뭐랄까. 마음 속
깊숙이 무언가를 묻어 둔 사람 같았다. 그렇다. 사람 같았다.
칼릭스는 여러모로 충격을 받아, 두 번 다시 마인을 찾아보자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덕분에 넉넉하게 잡아 뒀던 준비 기간이 단축되었다. 칼릭스가 오후에 곧바로 떠나자는 말을 꺼낼 즈음에는


로젤린은 평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됩니다, 도련님!”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기사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호위 없이 단 둘이 수도로


올라가겠다니, 이게 무슨 말인지! 기사들이 펄펄 날뛰었다.

“굶어 죽는 대신 산으로 숨어들어 도적 행세를 하는 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위험하시니 같이


가겠습니다.”

칼릭스는 그들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슬쩍 돌려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기사들의


시선도 그를 따라 돌아갔다. 남자들의 시선이 한 번에 모이자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였다.

나를 왜 봐? 응?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아쉬울 수가.”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이 두 남매를 배웅하기 위해 바쁜 일정 속에 짬을 내었다.

“나랑 칼릭스에게 줄 화관을 만들기로 약속했잖니, 로젤린.”

칼릭스의 무표정한 얼굴에 울컥한 기색이 비치자 백작이 깔깔 웃었다.

“순탄한 여정이 되길 빌어. 네 주위에는 항상 사고가 끊이지 않으니 말이야. 다음에 만날 때까지 건강하렴.”

백작은 로젤린이 제 딸이라도 되는 마냥 애틋한 기류를 형성했다. 로젤린의 손을 잡고 연신 쓸더니, 끝에 가서는


와락 껴안기까지 했다. 백작이 로젤린의 품에 쏙 들어갔다. 로젤린도 어설프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너도 잘 가렴. 누나 손 잘 잡고 다니고. 페르탄에게 안부 전해 주고.”

백작은 이후 손을 휘휘 저으며 칼릭스를 배웅했다. 대접이 어마어마하게 차이 났지만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저 까탈스러운 성미의 백작이 누이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구나 싶을 뿐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준비한 마차 세 대는 로젤린이 사양했다. 너무 느리단다. 당연히 먹을 식량이며, 물이며,


옷이며 사람을 실은 마차는 말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 로젤린은 지금 그것을 다 버리고 가겠다는 이야기였다.
수도로 갈수록 마을도 많으니 노숙은 별로 안 할 테지만 고생은 꽤나 할 게 분명했다.

“정말 안 챙겨 가도 되겠니? 힘들 텐데…….”

“네.”

로젤린이 당당하게 대답했고, 칼릭스는 울고 싶어졌다. 붉은수레바퀴 성에서부터 비스타까지 미친 듯이 달려온 그


추억의 날들이 다시 살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가자, 칼릭스.”

무뚝뚝한 목소리 속에서 들떠 있는 그녀의 기분을 읽을 수 있었다. 칼릭스는 한숨을 삼키고 처진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로젤린은 말에 올라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는 백작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어쩐지 길게 엮일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백작이 쪽 소리를 내며 손 키스를 그녀에게 날렸다. 그게 무슨 행위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나, 로젤린은
곧 어설프게 백작의 행동을 따라했다. 그게 어찌나 귀여웠는지 백작은 한참을 더 웃었다.

로젤린은 결코 지치지 않았다. 분명 같은 걸 먹었는데…… 양이 좀 많기는 했지만 아무튼 같은 종류였다.


칼릭스는 그럼에도 제 누이가 대체 뭘 먹었기에 저렇게 펄펄 날뛰는 건가 의문스러워졌다.

그녀의 조급함을 이해했기 때문에 하루 이틀 정도는 칼릭스도 최선을 다해 로젤린의 속도에 맞춰 말을 몰았다.
하지만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곧 한계를 맞이했다. 칼릭스는 창백한 얼굴로 헛구역질을 했다. 하도
달리는 말 위에 앉아 있다 보니 눈앞이 노랗게 변하고, 속이 다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태어나기를 강골로 태어나 그 아버지 밑에서 단련받았다. 전쟁도 겪어 봤고 일부러 몸을 괴롭게 하는 훈련도
수없이 했다. 그래도 평생에 걸쳐 감기 걸린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한 번도 심하게 앓은 적 없었는데. 고작
삼 일 만에 이 지경이 되다니. 삼 일 만에.

로젤린이 급하게 말을 세웠다. 잠시 신경을 못 쓴 사이 제 동생이 반쯤 시체 같은 꼴이 되어 있지 않은가.


하늘을 보니 해가 산 너머로 넘어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해가 뜨기 전부터 달리긴 했지. 조금 오래 달렸나?
말도 힘든지 거친 콧김을 씩씩 내뱉는 중이었다. 오래 달렸구나…….

로젤린이 말에서 내려오자 칼릭스도 굴러 떨어지듯 내려왔다.

“괜찮아?”

칼릭스는 괜찮다는 말 대신 욱욱하는 헛구역질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은 제 수통을 열어 칼릭스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나머지 손 한쪽은 동생의 등을 두드리기도 하고, 그의 이마를 쓸어 넘기기도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중이었다.

‘이제는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시는군요. 감개무량합니다…….’

칼릭스는 떨리는 손으로 물을 받아 마셨다. 하늘을 선회 중이던 마카롱이 나뭇가지에 가볍게 착지했다.

“뭐야, 얘 왜이래. 아픈 거야?”

“그런가 봐.”

“어디가?”
삼 일 동안 노숙하면서 세 시간만 선잠을 겨우 자고, 밤낮없이 미친 듯이 달리면 이렇게 됩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마카롱은 규격 외라고 하더라도 제 누이는 인간의 모습이라 방심했다. 그들은 전혀, 일말도 칼릭스가 왜
아픈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유는 알더라도 그것을 공감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어쩌면 이렇게 허약한 생물이 있지? 라고 생각하는 눈빛들이었다. 마카롱은 칼릭스를 약골이라며 놀릴 생각에
내려왔지만, 그의 낯빛을 보고 심각해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인간들은 날붙이로 생긴 아주 아주 작은 상처로도
죽는 재주가 있는 종족이었다.

“죽지 마라.”

독수리의 눈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칼릭스는 새의 농담에 하하 웃다가 그 목소리가 한없이 진지한 것을 알아챘다.
진심이었나…… 그의 웃음이 뚝 끊겼다.

한 마리와 한 여자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의사를 불러오느니, 몸에 좋은 약초를 찾아 오겠느니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칼릭스, 죽으면 안 돼……!”

마침 그들의 옆을 지나가던 상단의 마차가 멈춰 설 정도의 비통한 목소리였다. 상단주가 도움을 주겠다며 친절을
발휘했다. 칼릭스는 수치스러움에 발개진 얼굴로 사양했다. 말을 장시간 타다 보니 컨디션이 좀 안 좋아졌을
뿐이라고.

백발이 희끗한 상단주는 칼릭스를 무척이나 한심하다는 듯 눈을 흘기더니 매일 삼십 분 정도의 운동은 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칼릭스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괜찮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로젤린은 상단주에게서 괴악한
이름의 약을 몇 포 구입했다. 무슨 뱀의 꼬리를 말려 빻은 것이라나.

칼릭스는 약을 먹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반항했다. 하지만 인간 여자로 의태한 마카롱의 합세로 그 반항은


무의미해져 버렸다. 칼릭스는 자신보다 한참 가느다란 여자 두 명에게 붙잡힌 채, 무언가의 가루를 한 줌도
남기지 않고 먹어야만 했다.

[다음 편에 계속....]

67 화.

혀를 마비시킬 정도의 저릿한 쓴맛과 비린 맛의 환상적인 조화였다. 절로 눈물이 나왔다. 칼릭스는 너절해진
낯으로 입가를 쓸며 제발 천천히 가자고 부탁했다. 요즘따라 울 일이 잦았다. 그것도 주로 로젤린, 제 누이와
관련된 일로만. 로젤린이 칼릭스의 눈물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동생의 눈물 때문인지 로젤린은 자주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타인과 함께하는 여행의 속도를 깨우친 듯했다.
밤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마을이 보이면 적당히 잘 곳을 찾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큰 영지에 도착할 쯤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늦은 밤이라 불빛마저 잠들어 있었으나, 타지의 손님을 반기는
여관들이 바다의 횃불처럼 길을 안내했다. 멀리 있는 여관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던 때였다.

로젤린이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계속 좌우를 훑었다. 그녀의 행동을 칼릭스가 주시했다. 길이 좁은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것도 아닌 한적한 밤 거리. 그녀가 신경 쓸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칼릭스는 로젤린의 감각이 일반적인 인간이 느끼는 범위보다 훨씬 폭 넓고 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그녀만 감지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칼릭스가 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누님?”

로젤린은 평소보다 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날카로운 눈빛은 흐릿한 빗줄기
너머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는 했지만 칼릭스는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된 행군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급격하게 말수가 줄기 시작했었다. 비를 싫어하시나?

빨리 어디든 들어가서 그녀를 쉬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칼릭스는 로젤린이 타고 있는 말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하늘을 날고 있던 마카롱이 슬슬 쉬기 위해 내려왔다.

“마카롱 님. 저한테 오세요.”

로젤린의 주머니로 들어가려던 독수리가 삐애애액 울부짖으며 칼릭스를 위협했다. 대놓고 불만스러워 하는
모습에도 칼릭스는 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재촉했다.

“누님이 피곤하시니, 어서 이리 오세요.”

마카롱은 로젤린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며 그녀를 살펴보더니 순순히 칼릭스에게 왔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진짜 상태가 안 좋잖아?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이상 상태가 혹시나 ‘그것’들의 특성인가 생각했지만, 마카롱의 상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마카롱이 쥐로 변해서 칼릭스의 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간식으로 넣어 둔 땅콩 몇 알을 먹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과 한 마리를 뒤로 하고 로젤린은 말고삐를 꽉 쥐었다. 그녀의 감각이 넓게 열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주위를 떠돌았다. 골목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날카롭다. 집집마다 울려 퍼지는 말소리와
웃음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로젤린은 제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 빗소리와
희미한 몇 개의 불빛.

기시감이 들었다. 겪어 보지 못했으나, 가슴을 두드리는 이 불안함과 온몸을 눅눅하게 만드는 습기가 익숙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로젤린은 후드를 더 꾹 눌러쓰고 말을 재촉했다.
일행은 곧 여관에 도착했다. 칼릭스가 일꾼에게 말을 맡기는 사이, 로젤린이 먼저 건물로 향했다. 빨리 안에
들어가서 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로젤린이 여관의 문고리를 잡았다. 물에 젖어 한층 차가워진 온도가
로젤린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끼이익…….

낡은 문이 열렸다.

어둠이 깔려 있는 밤, 문을 경계로 빛이 쏟아졌다. 환한 배경 가운데로 역광으로 검어진 사람의 인영이 흔들렸다.


로젤린은 숨을 멈췄다.

쾅!

굉음이 울렸다. 마침 여관 밖을 나서려던 남자가 로젤린에 의해 흙탕물에 처박혔다. 남자는 일격에 기절했고, 그
남자를 기절시킨 장본인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깜박 깜박거렸다.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듯했다.

물론 뒤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칼릭스는 그보다 더 당혹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멈춰 서 있었다.

‘혹시 저 남자가 암살자였나? 그런 것치고는 너무 당황하시는데?’

칼릭스의 미심쩍은 눈빛에 로젤린이 들고 있던 주먹을 슬그머니 내렸다.

“아, 실수였습니다.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로젤린의 재빠른 사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일행은 노발대발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칼릭스는 몇 번이나 죄송하다
거듭 사과하고 물질적인 보상을 했다. 일행과 그 당사자는 싱글벙글한 낯으로 사람이 놀라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느냐 했다. 로젤린은 그 긴 피해 보상의 시간동안 그저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로젤린은 갑자기 떠오른 기억을 여러 번 반복하며 형태를 다듬었다. 점점 선명해졌다.

조용한 숲을 울리는 빗방울 소리. 어두운 밤. 빛이 쏟아지던 작은 공간. 그 빛 사이에 있는 남자. 우연히
맞물려진 상황이 로젤린의 안에 깊게 가라앉아 있던 몇몇 단편적인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로젤린’의 기억은 절벽 아래로 떨어진 시점부터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발밑이 꺼지는 공포를 느꼈고, 어두운
숲을 달리고 있었고, 넘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로젤린’은 숨소리를 죽인 채 막사 앞에 서 있었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천막의 틈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로젤린’의 시야가 흔들렸다. 하얀 털로 뒤덮인
야수의 손과 날카로운 손톱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로젤린’이 헉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미동도
없던 누군가의 거대한 손이 꿈틀, 움직였다.

기억이 다시 순서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급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천막이 펄럭이며 바람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쫓아 온 자의 공격으로 인해 등이 찢긴 채 앞으로 넘어져 몇 번을 굴렀다. 큰 상처를 입었지만,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밟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달린다. 그리고 예정대로 절벽에서 떨어진다. 모든 것이 어두워진다.


로젤린은 인간이 된 이후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고는 했으나, 그렇게 두려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아주 강렬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그녀가 주먹을 냅다 질러, 남자가 화려하게 날아감과 동시에 부서졌다. 그 거친 움직임으로
로젤린의 후드는 벗겨진 상태였다. 그녀의 머리 위로 비가 쏟아졌다.

투두둑. 혼란은 부서지고 차가운 물줄기가 현실을 상기시켰다.

로젤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

황실에 ‘그것’이 있다. 로젤린을 죽이려 하던 ‘그것’이.

* * *

칼릭스가 무서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막 씻고 나온 로젤린은 칼릭스를 보자마자 다시


들어가서 씻고 싶어졌다. 마카롱은 가라앉은 방 안의 기류를 읽고 조용히 칼릭스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

로젤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칼릭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칼릭스의 이런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붉은수레바퀴 저택에 있을 때, 무언가를 깨트려 날카로운 조각에 다치거나, 목욕하고 머리를 안 말리고 나오면 꼭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요?”

로젤린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칼릭스를 흘겨봤다. 나도 다 사정이 있었던 건데. 하지만 칼릭스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지 재차 물었다.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요, 누님? 어떻게 된다고 했지요, 제가?”

“무서운 곳에 간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누님도 무서운 곳에 가야겠군요.”

칼릭스가 벌떡 일어나 로젤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어디든 끌고 가려는 시늉을 해서 로젤린은 몸에 힘을 딱


주고 버텼다. 큰 돌덩이처럼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무서운 사람들 보고 와서 누님 잡아가라고 해야겠습니다. 여기요! 무서운 아저씨!”

칼릭스가 왁 소리를 지르자 로젤린은 기겁했다. 마카롱도 펄쩍 뛰면서 칼릭스의 목덜미를 찰싹찰싹 쳤다. 꼭 그럴
것까지야 있느냐며 말리는 느낌이었다.

“나쁜 사람인 줄 알았어!”

칼릭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쁜 사람……?”

그의 목소리가 조금 풀린 것을 느낀 로젤린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서워서 그랬는데. 일부러 그런 거 아니고. 진짜 실수. 그래서 진심으로 사과도 했는데…….”

그녀의 말에 칼릭스는 당황했다. 로젤린에게 무섭다는 감정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으음,
신음하고는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왜 무서우셨습니까?”

칼릭스는 침대에 앉아 있는 로젤린을 올려다 볼 수 있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로젤린의 손이 차가워, 칼릭스는
그녀의 손을 슥슥 문지르며 제 체온으로 덥혔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질문에 한참 동안 고민했다. 과거, ‘로젤린’의 기억. 기억에 실려 온 감정의 파편. 말로
풀어 설명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그녀는 인상을 쓰고 머리를 굴린 후 말했다. 몇 개의 촛불이 칼릭스의
눈에서 떠다녔다.

“나를 죽인 사람인줄 알고.”

칼릭스의 눈동자가 촛불을 집어삼키며 더욱 형형해졌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손아귀 힘이 일순 강해진 것을 느꼈다.
잘못 봤다고 착각할 만큼 아주 짧게 몸이 덜컹이기도 했다. 칼릭스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게 잠겼다.

“……누님을 죽인 사람이, 있습니까?”

자상한 표정이었음에도 로젤린의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두렵다기보다는 몸이 살기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어, 그러니까. 나를 죽인 건 아닌데, 그때 사냥 대회 날에…… 막 비가 와서.”

“네.”

로젤린은 더듬더듬 끊겨 있는 기억을 말했다. 칼릭스는 차분하게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네, 그랬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눈동자는 불타오르기도 했고, 차가운 무언가로 뒤덮이기도
했다.

로젤린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얘기했다. 또 다른 ‘그것’을 보았고, 존재를 들켰고, 비 오는 어두운 숲을


도망갔고, 떨어졌고, 나를 만났노라고.

[다음 편에 계속....]

68 화.
로젤린은 어쩐지 변명해야할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손 쓸 방법도
없었다는 것까지. 칼릭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등을 슥 쓸었다.

“그랬습니까.”

“으응.”

칼릭스는 이미 로젤린이 과거 제 누이의 기억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가르쳐 주지 않은
사소한 행동이라던가, 과거 그녀의 말투, 정보. 그것들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래서 지금 그녀가 마치 자신이 겪은 일인 양 말하는 모든 것들이 ‘로젤린’의 기억으로부터 왔으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칼릭스는 아픈 사람처럼 온몸을 벌벌 떨었다. 로젤린이 그 떨림을 눈치채고 이름을 불렀다.

“칼릭스…….”

작은 말소리는 잔잔한 바람같이 포근했다. 로젤린. 제 누이였다. 칼릭스는 눈을 감고 그녀의 손등 위에 얼굴을


묻었다.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누님.”

“괜찮아? 약 먹을래?”

깜깜한 시야 위로 다정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칼릭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젤린이 제
무릎 위에 엎어진 칼릭스의 뒷머리를 살살 쓸었다. 곧게 뻗은 목덜미가 촛불에 희게 빛났다. 희게 질린 것일지도
몰랐다.

“무서우셨습니까?”

“응, 막, 심장이 쾅쾅하고 막.”

로젤린은 실제로도 제 심장을 쿵쿵 쳤다. 칼릭스는 로젤린의 손에 얼굴을 묻고 있어 그녀의 행동을 보지 못했지만,
울리는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칼릭스는 상상했다. 로젤린의 말을 토대로. 어두운 숲속, 쫓아오는 추격자, 뛰는 심장, 두려움, 절벽. 찰나의
부유감.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다. 로젤린이 가슴을 치는 것으로부터 오는 진동이 칼릭스를 크게 흔들었다. 쿵, 쿵!
마치 온몸을 두드려 맞는 것 같았다.

“많이 아프셨어요?”

“아, 막 등이 찢겨서 피가 나고, 뼈가 막 부서져서…….”

찍, 마카롱의 소리가 시야 밖에서 울렸다. 로젤린은 어, 하면서 당황스러워하더니 말을 급하게 바꿨다.

“별로 아프진 않았어.”

신빙성 가는 말이 아니었다. 마카롱이 뭐라 언질을 준 것이리라. 마카롱은 제 누이보다 인간의 생태나 감정


따위에 더 밝았으니.
“진짜로.”

덧붙이는 말이 상냥해서 사랑스러웠다. 칼릭스는 울었다. 그 어두운 숲길을 달리던 두려움과,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미안했다. 혼자서 떨었을 누이가 가여웠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이 손길의 상냥함이 부디 누이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졌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눈을 떠 보니 아침이었다. 칼릭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젤린의 침대가 비어 있었다. 화장실 쪽에서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부은 눈을 비비며 침대를 내려가려던 칼릭스는 놀라서 제자리에서 펄떡 뛰었다. 침대 아래에
물컹한 무언가가 있었다. 완전히 밟기 전에 눈치챈 것이 다행이었다.

로젤린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는지 바닥에서 이불을 꼭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며칠 노숙하는


동안에 그녀가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피로가 오늘와서야 퍼진 것인지 도로롱 도로롱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깨지 않았다.

칼릭스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어 침대 위로 옮겼다. 물론 로젤린이 이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상대가 칼릭스라는 것을 알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칼릭스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되짚었다. 확실히 제 누이의 죽음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는 생각해 왔다. 왜 하필 그 절벽에서? 전투가 일어난, 막사의 정 반대편에서 왜 혼자? 칼릭스가 아는
로젤린은 적을 눈앞에 두고 도망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라. 사람의 팔에 달려 있는 마수와 동물의 손. 확실히 기괴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는 제


누이가 도망쳤다는 행동을 설명하기 힘들었다. 무언가가 더 있다.

벌컥.

방의 문이 열렸다. 낯선 남자가 태연하게 방 안에 발을 들였다. 칼릭스는 의자 위에 걸쳐 놓은 검집을 재빠르게


잡아챘다. 스릉, 순식간에 날의 형태가 반쯤 드러나 아침 햇살에 예리하게 빛났다.

“좋은 아침.”

남자는 칼릭스의 경계를 담담히 흘러 넘겼다. 태연자약하게 작은 침대에 걸터앉기까지 했다.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날카로운 인상이 분위기에 힘입어 더욱 흉흉해졌다. 남자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부스럭거리면서
빵과 과일을 꺼내었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침입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태연했고, 방을 착각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혹시? 칼릭스는 이 방에 없는 한 마리를 떠올렸다.

“……마카롱 님……?”

남자는 사과를 한입 베어 물더니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 드럽게 맛없네. 이건 너 먹어라.”

그러고는 한입 베어 문 사과를 던지는데…… 마카롱이다. 이 남자는 분명 마카롱이었다.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큼지막한 사슴 고기가 들어간 스튜가 먹고 싶어서. 잠시 나갔다 왔지. 네 돈 좀 썼다?”

“아…… 예, 뭐…….”

그러고 보니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이 낯설지 않더라니…… 칼릭스의 눈빛을 느꼈는지 마카롱이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빵을 씹다가 다시 말했다.

“옷도 빌렸다?”

“아…… 네…… 뭐…… 그런데 왜 굳이 남자 모습으로……?”

“여자 혼자 다니면 피곤한 일이 많아.”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카롱은 제 누이보다 인간에 대해 잘 아는 듯했다. 제법 세심한 부분까지.

“이 남자는 친구랑 놀러 왔다가 호수에 빠져 죽었지. 친구가 등을 밀더라고. 호수에서 기어 나오는 걸 발로 막


짓밟고…….”

“아뇨, 보통 그런 관계를 친구라고 부르진 않죠.”

칼릭스는 속으로 남자의 죽음을 잠시간 애도했다. 마카롱은 체리를 한 알 먹더니 오, 하며 감탄했다.

“이건 맛있네. 로젤린 줘야지.”

“…….”

요즘 따라 제 취급이 한없이 낮아지는 기분이었는데, 단순한 기분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마카롱 님.”

“부르지 마라. 그래봤자 안 줄 거니까.”

아니 저 인간이 정말…… 체리를 먹고 싶었던 게 아닌데도 칼릭스는 울컥했다.

“어제 누님의 말…… 기억하시죠.”

남자가 체리의 씨를 불량스럽게 바닥에 툭 뱉었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태도에 비하면, 그의 눈은 착실하게


칼릭스를 담고 있었다.

“누님이 전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그 자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선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란 건 부정할


수가 없군요. 살아 돌아온 누님을 제거하려는 행동을 할지도 모릅니다.”

마카롱이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웃었다.

“어려울 텐데.”
이 종족…… 자신감이 정말 넘쳐 난다. 칼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위험 요소를 주위에 둘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누님께서도 기억해 내신 만큼 경계할 테지만, 상황상 나서기
힘든 경우도 있을 테니, 마카롱님께서 잘 좀 봐주시죠. 혹시 누군지 알아내신다면, 저에게 꼭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맡겨 놨냐?”

“꼭 좀 부탁드립니다!”

칼릭스가 울컥해서 외치자 마카롱이 낄낄 웃었다. 마카롱은 봉투를 뒤적이며 빵을 꺼내더니 쭉 찢어 먹기


시작했다.

“뭐, 기본적으로 그놈이 다른 인간들을 죽이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저거는…….”

마카롱이 말한 ‘저거’는 빵 냄새를 맡고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있는 로젤린이었다. 머리는 산발을 해서는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마카롱이 애잔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많이 모자라니깐…….”

로젤린이 고소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빵으로 손을 뻗쳤다. 마카롱이 그녀의 손을 찰싹 쳤다.

“드러운 기지배. 세수하고 손 씻고 와!”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로젤린은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낯선 남자가 마카롱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로젤린이 마카롱의 말을 따라 세수하러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바라보던 마카롱이 고개를 돌려 칼릭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남자의 눈동자가 맹수의 것처럼 쭉 찢어져
있었다.

“건드리면 곱게는 못 죽지.”

농담처럼 가벼운 어조임에도 오싹할 정도의 한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는 것 같아 말해 주겠는데…….”

“네.”

“저게 저렇게 진짜 심각한 수준으로…… 좀 거시기 해도.”

남의 누이를 이거 저거하면서 거시기 하다며 욕하는 통에 칼릭스는 뚱해졌다. 마카롱이 피식 웃으며 칼릭스의
볼을 꼬집었다.

“쟤 마력이 제법 대단한 수준이라서 말이지. 어디 가서 쉽게는 안 당할 테니까, 안심하라고.”

로젤린, 제 누이가 강하다는 것쯤은 이미 칼릭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마카롱이 말하는 것은 그것과는 또
궤가 다른 이야기인 듯했다. 마카롱이 중얼거렸다.

“이상할 정도로 마력이 강하단 말이지…….”

“마카롱 님보다 말입니까?”


“아아니?”

아, 역시 마카롱이 더 강한 것인가? 칼릭스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마카롱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나를 포함한, 이때 동안 만난, 마력을 가진 모든 것들 중 가장.”

칼릭스는 그의 말을 곰곰이 되뇌었다. 마력을 가진 모든 것들 중, 가장 마력이 강하다? 칼릭스는 알 수 없는


세계라 하더라도, 마카롱의 말이니 믿을 수는 있었지만…….

칼릭스는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온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눈은 퉁퉁 부었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마카롱이


로젤린을 맹한 어린아이 다루듯 할 때마다 칼릭스는 번번이 울컥해했지만, 실은 그 또한 제 누이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 취급을 했다.

그저 먹을 거 좋아하고, 예쁜 것도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로젤린. 그런 그녀가 매우, 굉장히, 엄청나게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마카롱이 로젤린의 산발이 된 머리를 하나로 땋았다. 로젤린은 체리를 먹다가 화색을 지었다. 맛있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칼릭스는 마카롱이 던져 준 맛없는 사과를 먹었다. 곧 로젤린이 그의 입에 체리를 넣어 줬다.
달콤하고 맛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69 화.

일행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칼릭스가 잎사귀 말 뱀 말린 걸 빻아서 어쩌구를 먹고, 울기 전.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쉬지 않고 달리던 때와 비슷한 속도였다.

로젤린은 칼릭스를 염려해 쉬어 가자고 했으나, 칼릭스는 초췌한 얼굴로도 멈추지 않았다.

* * *

놀랍게도 칼릭스는 살아서 수도에 도착했다. 그들의 행군은 과하게 빠른 감이 있었다. 칼릭스처럼 단련된 남자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다.

성문 앞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이 도착해 있었다. 레이몬드였다. 로젤린이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말
위에서 펄쩍 뛰어 날아드는 모습에 레이몬드가 기겁해서 그녀를 받았다.

“위, 위험하잖아!”

로젤린이 아기 원숭이처럼 레이몬드에게 덜렁 안겨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레이몬드는 그녀를 끌어안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조금 더 쉬다 오지, 왜 이렇게 빨리 올라왔어! 얼굴 까칠해진 것 좀 봐. 아이고 내가 못


살아. 자기 전에 충분히 보습하라 그랬지, 내가. 하여간 좋은 거 사다 주면 뭐해! 바르지를 않는데!”

“발랐어.”

“이거 입에 침도 안 묻히고 거짓말하는 것 좀 봐!”

그는 로젤린이 생긋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몇 번 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를 꼭
안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계속 걸렸는데, 일주일 걸릴 거리를 사 일 만에 주파할


정도면 회복을 좀 과하게 했다고 해도 이상한 게 아니리라.

레이몬드는 그녀를 꼭 안은 채 시선을 돌렸다가 기겁했다. 말 위에 앉아 서슬 퍼런 눈빛을 하고 있는 칼릭스와


눈이 마주쳤다. 살이 쏙 빠져서 한층 더 날카로워져 있고, 눈 밑은 거뭇거뭇했다.

“카, 칼릭스?”

“경과 제가 이름만 부르는 친근한 사이었을 줄은 몰랐군요.”

심지어는 굉장히 까칠하기까지! 로젤린이 멀쩡하기에 눈치 못 챘는데, 역시 여행의 속도가 빠르긴 빨랐나 보다.
어린놈 답지 않게 언제나 냉철하던 칼릭스가 저렇게 흐트러질 정도면.

칼릭스는 “누님은 언제까지 안고 계실 작정이시죠? 그러다 엄한 소문이라도 돌면 책임지실 겁니까?” 하고


까칠함을 계속 과시했다.

뒤늦은 반항기가 도래한 걸 보니, 정말, 정말 힘들었나 보다. 레이몬드는 어설프게 웃으며 로젤린을 놓아줬다.
칼릭스의 까칠한 모습을 본 로젤린이 연장자한테 그러면 못쓴다고 훈계했다.

“네, 누님. 잘못했습니다.”

이 자식…… 선택적 까칠함이냐…… 레이몬드는 그를 눈으로 흘겼다.

로젤린은 먼저 단장실에 들러 복귀 보고를 해야 했다. 여행 내내 입고 있던 긴 후드에는 먼지가, 부츠에는


진흙이 잔뜩 엉겨 있었다.

로젤린은 그 꼴로도 태연하게 단장실로 향하려 했으나, 레이몬드가 기겁해서 말렸다. 기숙사 가서 제복으로
갈아입고 가야 한단다. 조금 귀찮았지만 인간 세상을 조금이나마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에, 로젤린은 그것이
필요한 과정이란 것을 인정했다.
기숙사에 도착했다. 로젤린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가에는 빗자루와 물 양동이가 놓여 있었다. 로젤린의
수습 기사,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방을 부지런히 청소 하는 중인 듯했다. 슥슥 삭삭. 쉬지 않는 빗질 소리에
기합이 잔뜩 들어 있었다.

로젤린은 방문 바로 옆의 벽에 딱 붙어 조용히 숨을 죽였다. 조금 기다리니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닥을 울리는 소리의 무게. 걷는 습관과 보폭을 고려한 결과.

‘레티시아.’

그녀였다. 성큼성큼 소리가 다가왔다.

3.

2.

1.

쉬익!

눈으로 인지하기도 전에 로젤린의 손이 먼저 움직여, 빗자루를 들고 막 방을 나서는 레티시아의 목덜미로 향했다.


로젤린은 그녀의 완벽한 사각에 들어가 있었다.

수습 기사들을 교육하던, 다른 말로는 습격하던 초반에는 수도로 목덜미를 내려쳤다. 어느 정도 위기감이 있어야
한다는 로젤린의 판단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습격을 감행할 때마다 그들이 번번이 기절해 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심지어는 반나절씩.

하루에 세 번 습격당한 에버하르트가 24 시간 중 20 시간을 누워 있게 되자 로젤린도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그냥


목덜미를 잡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수습 기사들이 기쁨의 눈물을 줄줄 쏟아 냈었다. 사실 그마저도
막는 것을 힘들어 했으나, 최근에는 제법 높은 수준으로 주위를 읽게 되었는데 상급자가 자리를 비운지 오래되어
해이해진 것은 아닐지.

로젤린은 평소보다 날카롭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움직임에 옷자락이 흐트러지자, 그 미세한 소리를 들은
레티시아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빗자루를 등 뒤로 돌렸다.

탁!

로젤린의 공격이 정확하게 빗자루에 막혔다. 오, 제법인데. 로젤린이 씨익 웃었다. 레티시아는 사나운 얼굴로
뒤돌았다.

“누구…… 악! 로, 로젤린 경!”

레티시아가 공포인지 기쁨인지 모를 비명을 내뱉었다. 로젤린이 판단하기로는 공포 쪽에 좀 더 가까웠다.

“훌륭합니다. 레티시아.”

문밖에서 터져 나온 레티시아의 비명 같은 외침에 방 안의 에버하르트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로젤린은 그 순간


복도에 있던 물 양동이를 들어 그에게 냅다 던졌다. 에버하르트는 화살같이 앞구르기를 시전해서 양동이를 피했다.
멋진 솜씨였다.
그의 뒤에서 양동이가 구르며 굉음을 냈다. 에버하르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른 힘을 이용해 부드럽게 일어났다.

“로젤린 경! 언제 오셨, 아니, 검은 달을 가르는…….”

“아, 검은 달을 가르는…….”

두 사람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경례를 먼저 해야 했는데 반가운 마음이 앞서 말이 횡설수설 두서없이
나왔다. 로젤린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훌륭해졌습니다. 저는 아직 복귀전이니 인사는 생략해도 좋습니다.”

로젤린이 없는 사이에도 열심히 수련한 것이 딱 티가 났다. 로젤린의 칭찬에 두 사람이 연신 몸을 들썩이며


가만히 두지 못했다.

그들과 떨어져 있었던 게 두 달도 되지 않았는데, 쑥쑥 자라 있었다. 실력도, 육체적 성장도. 로젤린과 눈높이가
비슷했던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키를 넘어섰고, 진즉에 로젤린보다 컸던 레티시아도 훌쩍 자라 칼릭스와 비등할
정도였다.

“건강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생각보다도 빨리 돌아오셨군요. 혹시 몰라서 미리 청소해 놓길 잘했네요.”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밖에 없는데요.”

수습 기사들은 로젤린 옆에 딱 붙어서 조잘조잘 아기 새처럼 떠들어 댔다. 로젤린 경이 습격해 주지 않아서 좀
허전했다는 둥,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습격했다는 둥. 요즘 다른 수습 기사들이 우리들을 부러워 한다는 둥,
조금은 쓸모없는 내용도 있었지만 로젤린은 하나하나 고개를 끄덕여 가며 반응했다.

로젤린은 깨끗해진 방 안을 보면서 후드의 끈을 풀었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으려는 것을 눈치챈 레티시아가


에버하르트에게 눈짓했다. 나가라는 뜻임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에버하르트는 뭉그적대며 방안을 떠나지
않았다.

“저도 키가 많이 커서 레티시아를 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레티시아가 저보다 더 자라더군요. 평생


지나도 따라잡기 힘들지 않을까요?”

별 쓰잘머리 없는 말까지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로젤린은 옷을 벗는 걸 멈추지 않았다. 후드와 겉옷에 이어


이제는 셔츠에까지 손을 대고 있는 터라 레티시아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가 에버하르트의 갈비를 팔꿈치로 푹 찍으려 했지만, 피하는 것만은 이제 수준급이 되어 버렸는지 간단하게
막았다.

‘이게!?’

레티시아는 울컥해서 그를 밀어냈다.

“나가.”

“잠시만 좀 더…….”

“좀 더 보겠다고? 미친 거 아냐? 꺼져!”


“좀 더 얘기하겠다고!”

에버하르트는 밀려나지 않았다. 말라깽이 같던 예전에 비해, 근육도 키도 성장한 덕분인 듯했다. 이게 왜 버티고
난리야!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며 소음을 만들어 냈지만 로젤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로젤린 경, 비스타는 어떠셨어요?”

“맛있는 게 많았습니다.”

“아, 맞아요.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까 다른 지방의 음식들도 되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에버하르트는 레티시아에 의해 슬금슬금 밀려나면서도 끝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눈은 초롱초롱하고 얼굴에는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영웅을 만난 소년 같은 반응이었다. 로젤린을 존경해 마지않는
레티시아가 질릴 정도였다.

아직까지는 힘의 우위를 점하는 레티시아가 겨우 승리했다. 로젤린이 세 번째 단추에 손대기 전에 그를 몰아낸


것이다. 그녀는 로젤린의 제복을 챙겨 주고 나오자마자 에버하르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부, 부러져! 부러졌나? 부러졌어!”

“로젤린 경이 옷 갈아입는 방 안에 있고 싶으면 네 하잘 것 없는 걸 떼어 놓고 와…….”

살기 넘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에버하르트가 움찔했다. 하기야, 자신이 생각해도 좀 제정신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그런 얘기들을 다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뿌리들은 소탈한 영웅들을 좋아한다고 레티시아!”

“제국에서 긴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의 영애에게 소탈하다는 말을 잘도 붙이는구나.”

“전혀 권위를 세우시지 않는 분이잖아.”

에버하르트는 귀족답지 않다는 말을 재주 좋게 돌려 했다. 레티시아도 후 한숨을 쉬며 동의했다. 그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던가. 고생의 순간이 눈앞에서 아른아른했다.

에버하르트도 비슷하게 고생했지만 받아들이는 게 좀 다른 듯했다. 뿌리 출신이라 그런 것 같았다. 구색만


어설프게 갖춘 ‘뿌리’라는 가문 이름은 그들이 평민이라는 것을 전혀 가리지 못하고, 도리어 부각시키는 역할만
했다.

그들이 이 귀족 세계에서 천대받고 멸시받는 일은 전혀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뿌리들끼리의 연대


하나만큼은 끈끈했지만, 외부적으로 기댈 곳이 전혀 없었는데…….

대륙을 강타한 그 영웅담의 주인공이 제 상급 기사이니, 자신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보니 다가오는 게 남다른
듯했다.

[다음 편에 계속....]
70 화.

그녀가 마인이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상급 기사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얘기가 자자하게 공표된 날.
에버하르트는 지금과 같이 흥분하면서 “끝내주는데!”라는 말을 했다가 레티시아에게 얻어맞았다. 하여간 언동을
고급스럽게 좀 쓰라 했더니…….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에 대한 감상은 몇 개월 주기로 바뀌고 있었다. 실력 없는 기사에서 죽음에서 생환한 자.


그리고 지금은 전장의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마인이라는 점이 문제될 뻔했으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다른 기사단과 귀족들이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는
모습은 하얀밤 기사단을 하나로 뭉치게 함에 모자람이 없었다. 다들 속에서 부글부글 뭔가가 끓어올랐다.

아니, 기사가 충성심 뛰어나고 잘 싸우면 됐지! 마인이니 아니니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요즘도 촌스럽게
마인이 불길하다고 박해하는 그런 사람이 있었나? 어느 시대 사람이지, 당신은?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그녀를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넣기에 급급했다. 욕해도 내가 해. 우리
하얀밤 기사단원을 왜 네가 욕해!

언제나 정중하고 고결했던 하얀밤 기사들이 시정잡배들처럼 껄렁한 폼과 빛나는 눈으로 사냥감을 물색하고 다녔다.
로젤린의 ‘로’ 자만 나와도 어디선가 하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귀신
같은 솜씨로 인해 모두들 입단속을 해야만 했다.

이번 사절단 임무로 한층 더 지위가 높아진 2 황자의 직속 호위 기사단 ‘하얀밤’이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들썩이는 성을 안정시켜 놓은 당사자들은 더 이상 그녀를 욕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마인인 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2 황자 전하께서 그녀를 받아들이셨는데 더 할 말 있느냐고 사람들을 겁박하고 다닌 게
자신들이 아니었던가. 다들 조금 찜찜해 할지언정 마인이라는 것을 문제 삼지는 못했다.

게다가 로젤린과 함께 싸운 하급 기사와 상급 기사들은 모두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다. 생환가능성이 거의 없던 2


황자가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 자체가 그 방증이었다. 아마 로젤린이 아니었더라면 피해는 더욱 컸을 것이며, 2
황자의 안위도 장담하지 못 했을 테다.

로젤린과 직접 등을 맞대고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자들은, 아 역시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어쩐지 세더라니
마인이었구나. 파편에 중독되고도 살아남더라니. 마인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상급 기사들의 얼굴에서는
다행이다, 라는 숨겨진 뒷말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복도 사방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저 창 너머, 멀리서 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상기된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가 도착했다는 사실이 연무장까지 흘러갔나 보다.
두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가까운 계단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릴 쯤엔 전부 정리가 끝났다.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복도에 햇빛이 쏟아졌다.

* * *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설원의 월계수 2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그대에게. 오랜만이로군, 경. 앉지.”

칼릭스는 리카르디스의 바로 맞은편에 앉았다. 딴눈을 팔면 안 되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이라니.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인 칼릭스가 발을 들일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빨리 올라왔군. 이 주 뒤쯤에나 도착할 줄 알았는데.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아닌가?”

칼릭스는 여기서 황자가 걱정하는 사람이 제 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누가 봐도 아파 보이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는 태연하게 잘도 묻고 있었다. 하기야 황자와 자신은 그런 시답지 않은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니긴 했다.

“많이 회복하셨습니다.”

“많이 회복했다는 건 무슨 뜻이지? 아픈 부분이 조금 남아 있다는 건가?”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완벽하게 건강한 상태이십니다.”

“식욕은?”

뭘 묻고 있는 거지, 이 황자는? 남의 누이 식욕 사정을 왜 저가…… 칼릭스는 황당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빤히 보고 있음에도 리카르디스는 뻔뻔한 낯으로 고개를 까닥이며 대답을 촉구했다.

“들르는 음식점마다 주방장이 인사 나올 정도는 되십니다.”

리카르디스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까랑 비슷한 행동인데 의미가 확연하게 갈렸다.

“아플 때는 잘 먹어야지.”

“그……렇습니다…….”

뭔가 이 말을 하려고 부른 것은 아닐 텐데도, 제법 진지한 태도를 보이며 묻고 있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도


그렇고, 황자도 그렇고. 까다롭고 까칠한 자들이 푸딩처럼 말랑말랑한 태도를 보였다. 이상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로젤린 경은 소고기 파인가, 돼지고기 파인가?”

물론 이런 질문들은 영 이해할 수 없었으나 황자가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어 그저 웃어넘기지 못했다.


대체 자신이 왜 2 황자 리카르디스와, 2 황자의 집무실에서, 제 누이의 식성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회의감이 몰려왔다.

칼릭스가 침묵을 지키는 시간이 길어지자, 리카르디스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수석 비서관 잇세리온이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큼, 흠. 하면서 무형의 재촉으로 옆구리를 찌르기까지 하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칼릭스는 포기하고 열심히 과거를 돌이켜 보며 제 누이가 소고기 파인지 돼지고기 파인지를 판별했다.

“구워 먹는 건 소고기를 좋아하시지만 양념된 건 돼지고기를 조금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고기면 잘 드시는 편입니다.”

“생선보다는 육류겠지?”

“사실 생선도 좋아하십니다. 가시를 좀 거슬려 하시긴 하는데, 발라 드리면 잘 드십니다. 짭짤하고 쫄깃한
생선보다는 담백하고 부드러운 쪽을 선호하시고요.”

“질보다 양인가? 양보다 질인가?”

“기본적으로 양이기는 하지만, 최근 입맛이 고급스러워지셨는지라 어느 정도 질이 따라 주기는 해야 합니다.”

잇세리온은 진지한 표정으로 깃펜을 열심히 놀렸다. 칼릭스는 흘끗 그 종이에 써진 내용을 봤다. 방금 전에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상하게 쓸데없는 그 정보들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회의 결과를 써 내려가는
듯 신중한 표정이었다.

“초콜릿과 생크림 중에서는?”

“생크림을 더 좋아하십니다.”

잇세리온은 그럴 줄 알았다며 칼릭스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다.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칼릭스의 얼굴


위로 피곤이 오도독 돋을 때쯤이었다.

“그럼, 그녀는?”

“예?”

그는 잇세리온이 건넨 로젤린의 입맛 보고서를 눈으로 훑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누이는 무엇을 더 좋아하냐고.”

칼릭스는 집무실에만 들어올 때만 해도 마음에 단단히 울타리를 세우고 방패를 들고 있었다.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막아낼 만큼 공들여 세운 울타리였으나, 리카르디스의 이상한 질문 때문에 틈이 생겨 버렸다.

“그러고 보면 초콜릿 케이크를 자주 먹었지. 우리 세티스티아랑 같이.”

칼릭스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지금 리카르디스가 무엇을 말한 것인지 반추할 정신도
없었다.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세티스티아의 입맛에 맞춰 준건지 잘 모르겠어.”

칼릭스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제 누이를 위해 밤낮없이 고생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사실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2 황자쯤 되는 위치라면 제 이득을 위해
약간의 희생은 감수할 수 있을 테다. 지금 일라베니아에서 ‘마인 로젤린’은 좋은 패. 단순한 도구를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칼릭스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 아래 생각이 들쭉날쭉하게 뒤섞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칼릭스를 잠자코 지켜보다, 깃펜을 들어 ‘소고기’라고 적힌 품목 밑에 ‘레몬 밤


마리네이드.’라고 적었다. 칼릭스의 딱딱하던 얼굴에 금이 갔다.

‘지금 뭘 적는 거야…….’

황당했다.

“7 년이나 내 밑에 있었는데.”

“…….”

리카르디스가 엄지손가락으로 제 눈썹 뼈를 훑으며 말을 흘리듯 내보냈다. 칼릭스는 속으로 탄식했다.

아, 뭐랄까 그 표정이…….

양립할 수 없는 붉은수레바퀴의 자식에게 보여 줄 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가 자신의 울타리를 허물어서


속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고 있었다.

어딘가에 있을 제 누이를 끌어다가 보여 주고 싶었다. 하다못해 그림이라도 그려서 보관하고 싶었다. 기뻐하지
않았을까? 누이의 일생을 크게 차지하고 있던 그 사람의 한구석, 그 한 자락을 누이도 차지하고 있었네요.

칼릭스는 속이 울렁거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조금 기쁜 것도 같았다. 칼릭스는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확연하게 기쁜 기색이 묻어 있는 목소리라 좀 창피했다.

“쌉싸름한 홍차와 달콤하고 고소한 쿠키의 조합을 좋아하셨죠. 브라우니도 좋아하셨을 겁니다.”

“그거 기쁜 소식이로군. 티아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 할 거라고 생각하는 아이니까, 또 억지로


먹였나 했지.”

리카르디스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는 세티스티아 황녀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게끔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건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 * *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을 찾아온 손님으로 인해 잠시 대화가 끊겼다. 칼릭스도 안면이 있는 자였다. 황금정원의
클로에. 황금정원 자작의 장녀이자, 큰뿔산양 레이몬드의 약혼자였다.

칼릭스가 가볍게 묵례했다. 클로에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녀는 서류 뭉치만 대충 리카르디스에게


전달하고 곧바로 방문을 나섰다. 레이몬드를 보고 가라는 그의 말에도 “바쁜 거 빤히 아시는 분께서.” 하는
대답만 남기고 사라졌다.

[다음 편에 계속....]
71 화.

“흥미로운 소식이군. 이 주 전, 라고슈 왕국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정보를 잘 은폐했는지 이제야 소식이
들어왔어.”

칼릭스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일라베니아 제국 아래 발타 다음으로 가장 큰 왕국 라고슈. 현재 라고슈를


다스리는 바이페렘 플로에토는 암암리에 발타의 하카브 왕자와 은밀한 관계라는 말이 돌고 있는 여자였다.

“플로에토를 실각시키고 싶어 하는 무리가 있나 본데, 아마 좀 힘들 것이다. 사랑에 빠져 사리분별이 흐려졌어도


결코 세력이 약하지는 않으니.”

“……라고슈의 바이페렘이 하카브 왕자와 음……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입니까? 좀 상스러워 말을 잇지 못했으나 리카르디스는 여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고 그런 사이다. 하카브가 어떻게 꼬여 내었는지 아주 죽고 못 살지. 올해 일라베니아의 건국제에 하카브가


온다고 했으니 깨가 쏟아지는 모습을 보겠군. 불쾌하다. 내전이 길게 이어져서 플로에토가 못 오기를 바랄
뿐이다.”

“뭐…… 그런 식으로 일라베니아를 압박하려는 요량인가 봅니다. 일라베니아 측에서 라고슈를 경계하며 병력을
완전히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얻는 이득이 있을 테니까요.”

“내전이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길 바라야겠군.”

리카르디스가 서류에 슥슥 몇 글자를 더하더니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아까보다 흥미로워
하는 기색이었다. 뭔가 급하거나 보다 더 중요한 안건이리라.

칼릭스는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리카르디스는 호오, 호.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 비스타에서 귀엽고 예쁜 데다가 착하기까지 하고 돈도 엄청 많기로 유명하다는데, 알고 있었나?”

큽. 칼릭스는 역류하는 찻물을 겨우 삼켰다. 급한 서류가 아니었잖아! 아니, 라고슈 왕국의 내전이 발생했다는
중요한 안건 다음에 왜 저런 쓰잘머리 없는 것이 끼어 있어!

칼릭스는 매섭게 그를 노려봤다.

“제 뒷조사를 하셨습니까?”
“이런. 오해하지 말게. 로젤린 경의 소문에 딱 붙어서 와 버린 탓이니. 그래서 리쉬의 꿀은 맛있던가? 하나씩
먹어서는 성이 안 찰 텐데. 가는 길에 하나 선물하지. 이렇게 종이에 쌓인 꽃다발 말고, 유리병에 담긴
걸로다가.”

“…….”

이제는 대놓고 놀리고 있었다. 시장 거리에서 제 누이와 꽃을 물고 꿀을 쪽쪽 빨고 다닌 소식이 수도까지 진출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서류를 한 번, 그리고 칼릭스를 한 번 번갈아 보는 행동으로 그를 더욱 열 받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읽던 리카르디스가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경의 누이가 힐리사고 왕국의 변방에서 크레안 티다니온의 현신이라고 불린다는군.”

정말로……? 칼릭스의 미심쩍어 하는 표정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인가 보다.

“다행히도 나쁜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일라베니아에서 멀어질수록 크레안 티다니온의 악한 성향은 순화되고는


하니. 그저 대단한 신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아무튼 간에 이 소문은 좀 위험한 것 같군…… 흠. 잇세리온,
클로에에게 이건 일단 묶어 두라고 하지.”

“예, 전하.”

칼릭스는 지금 실시간으로 정보가 분류되어 퍼지게 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확실히 이 건은 수도에서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특히나 황제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만한 여지가 있었고, 그런 정보들은
뒤틀려서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칼릭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 황자가 제 누이의 울타리를 자처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눈앞에서
보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일개 호위 기사를 위해서 이렇게까지나 손을 쓴단 말인가?

칼릭스의 눈에 미심쩍은 빛이 올라오자, 리카르디스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로젤린이 맹한 만큼 칼릭스가 배로


빠릿빠릿한 느낌이었다.

“이봐, 경.”

“예, 전하.”

칼릭스의 눈동자는 로젤린의 것과 똑 닮은 녹색이었다. 닮은 것은 색뿐만이 아니었던 건지 날카로운 눈매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물어뜯기도 좋지만,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눈앞에 있는 게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을 못하는 사냥개를 사냥개라
부를 수 있나?”

칼릭스의 표정이 이상하게 구겨졌다. 일라베니아 황실의 사냥개. 번견으로 불리는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특성상,
‘개’나 ‘개새끼’ 따위의 말을 많이 들을 수밖에 없었으나, 보통은 당사자가 없는 뒷담에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렇게 대놓고 들으니 감회가 새롭기도 했지만 우선적으로 열이 조금 올랐다. 리카르디스가 그의 표정을 보고
아차 하더니 혀를 찼다. 쯧.

‘아니 혀까지 차?’


칼릭스의 얼굴에 울컥하는 기색이 비치자. 리카르디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오해는 하지 말게. 1 황자 쪽 노친네들에게 한마디라도 더 기분 나쁘게 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하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그래. 경이 마음을 못 정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살짝 넘어왔다는 걸 머리는 이해하는데 아직 마음이
이해하지 못했나 봐. 계속 시비를 걸고 싶은걸 보니. 그대도 애매하게 선에서 놀지 말고 확실하게 태도를 정하는
게 좋겠어.”

꿀을 선물해 주겠노라 놀릴 때부터 유달리 공격적이더니 그런 속사정이 있었나. 칼릭스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나와 그대가 비록…… 그다지 좋지 못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을지언정,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기도 하는 세상 아닌가. 아, 그렇다고 경과 내가 친구라는 얘기는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말 하나하나를 참…… 칼릭스의 뚱한 표정을 본 리카르디스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칼릭스의 얼굴에서


로젤린이 보였다. 닮은 구석이 많은 남매였다.

“경은 로젤린 경과 아주 똑 닮았군.”

비웃음에 가깝던 입매가 부드러워지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칼릭스는 자신을 쳐다보는 리카르디스의 모습에 놀랐다.
저런 눈빛을 하는 사람이었나, 저 사람이?

칼릭스는 제 마음에 여러 겹 방어벽을 둘러 두었다. 리카르디스가 이상한 방식으로 하나둘 깨고 들어왔으나


마지막 한 겹이 든든하게 버티는 중이었다. 이 마지막 벽은 무엇보다 두껍고 단단해 무엇으로 깨어 버릴 수 없다
생각했는데, 글쎄 이게…….

녹아 내렸다. 그의 미소에 사르르. 칼릭스는 제 표현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하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마음 깊숙이는 이해하지 못 했던, 믿지 못 했던 일말의 불신이 정말 눈 녹듯 흘러내려 어딘가로 떠내려가 버렸다.

단순히 제 누이를 위해 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명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저 믿음이 갔다. 그 담담한 말투 때문인지, 날카로우면서도 이따금 풀어지는 표정 때문인지, 누군가를 그리는
다정한 눈빛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정확하게 폐부를 찌르는 말을 했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칼릭스는 자신이 멍청하게 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는 아버지? 아직 제 손에 들어오지도 않은 붉은수레바퀴 가문? 그,
1 황자 엘피디오? 아니면 그 엘피디오의 아버지인 황제? 그 누구도 정확하게 제 누이의 아군이 아니었다.

제 누이는 강했다. 하지만 그 강함이 귀족 세계에서 반드시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라는 무기를 쥐고 흔들기
위해 많은 자들이 손을 뻗칠 것이다. 칼릭스는 자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나의 힘만으로는 제
누이를 온전하게 지킬 수 없다.

로젤린은 언제나 누구도 손 내밀어 주지 않는 낭떠러지에 혼자 서 있었다. 그 아슬아슬하던 행위는 결국 그녀의


죽음으로 끝맺어졌고, 칼릭스는 바보 같은 짓을 두 번 다시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하다못해 손을 잡고 같이
떨어지는 일이라도 해야겠다. 이것이 더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마음은 단단하게
굳어졌다.

칼릭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사람의 이목이 확 집중되었다.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는 ‘칼릭스가 얼마나
로젤린을 닮았는가’에 대해 토론 중이었다. 칼릭스가 한쪽 무릎을 꿇자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슥 들렸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에스터가 설원의 월계수 앞에서 진실 된 맹세를 하고자 합니다.”

“미친…….”

이건 리카르디스가 한 말이 아니었다. 잇세리온이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그대로 흘려 버렸다. 리카르디스의


표정도 구겨져 있었다. 칼릭스는 두 사람의 경악 어린 시선을 뒤로 계속 말을 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는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검이 되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칼릭스 경! 인생은 너무나도 길고……!”

잇세리온은 어버버 말을 더듬으며 그를 만류했다. 칼릭스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리카르디스를 마주 보며


흔들리지 않았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는 약자를 보호하고 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칼릭스 경. 이게 갑자기…… 아니, 내가 확실히 하란 건 그런 느낌이 아니라…… 알지 않나?”

“영광된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악! 미, 미쳤어! 미쳤나 봐! 칼릭스 경. 이게 무슨 의미인지……!”

두 사람의 동공이 점점 더 커졌다.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명은 무릎을 꿇고, 두


사람을 벌떡 일어나 초조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우리 대화로 풀지! 경!”

“두 번째 월계수의 기사가 되어,”

“붉은수레바퀴 백작에게 이를 겁니다!”

아주 아수라장이었다.

“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낮지만 확고한 마침표였다. 그것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머릿속에 경종이 땡땡 울렸다.

[다음 편에 계속....]
72 화.

“이게, 무슨 지금…….”

리카르디스는 말문이 막혀 그저 칼릭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은 후련하다는 표정을 하고 벌떡


일어섰다. 리카르디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아주 남매가 양 옆에서 번갈아 가며 뒤통수를 치고
있었다. 사람 황당하게 하는 것이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특성인가?

칼릭스는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웃었다. 잇세리온은 그 짧은 사이 너절해져 있었다. 리카르디스도 심각한
얼굴로 잠시 입을 가리고 시간을 보냈다. 생각보다도 이 돌발 행동의 여파가 컸는지, 십 분의 시간이 말없이
흘러갔다.

“그러니까 경이, 지금…… 내 기사가 되겠노라 선언한 게 맞는가?”

“예, 그렇습니다만,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그럼 왜 이, 이, 이 사달을 만든 겁니까!”

잇세리온이 버럭 성질냈다. 칼릭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제 결심을 보여 드리고자.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저라는 인간의 가치가 단순히 무력에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지…….”

“저는 붉은수레바퀴의 이름을 달고 있을 때,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일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간다고 붉은수레바퀴의 이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으나, 후계자의 이름이 계속 남아
있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저희 누님처럼 말입니다. 이 이름을 달고 만일의 사태에 전하께 도움이 될 수 있게
힘을 모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아까의 칼릭스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미심쩍고, 수상하다는 듯이. 숨기지도 않고 아주 대놓고
흘겨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풀썩 앉았다. 멀쩡한 의자를 두고 다들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착석했다.

“칼릭스 경,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이냐면.”

“예, 전하.”

“꿀 한 조각 따러 갔다가 벌집이 통째로 떨어진 기분이다.”

“그렇습니까.”

“벌집 주위로 벌들이 날아다니긴 하는데, 독이 없는 종류라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이제 남은 건


꿀이 가득한 벌집을 들고 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리카르디스는 손가락으로 벌의 궤도를 그리는 시늉을 했다.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칼릭스는
웃음을 꾹 눌렀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리카르디스는 저 태평한 남자의 머릿속을 좀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여간 이 검은 머리 남매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 말하라. 물어도 되겠느냐고 하지 않는 것은 그대가 내 사람이라고 서약했기
때문이다.”

칼릭스는 손을 깍지 끼고 엄지손가락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제가 새삼스럽게 전하의 인품에 반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그건 바라지 않으니.”

리카르디스는 진절머리를 내며 인상을 썼다. 퍽 징그럽다는 듯 보는 시선에 칼릭스는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저 누님께서 전하를 놓지 못하기에.”

“단순한 가족애로 위험한 길을 걷고자 자처하는 것이냐.”

칼릭스는 “예.” 하고 대답했다. 딱딱한 결심이 묻어 있었다. 그래야만 하는 때입니다. 리카르디스는 칼릭스의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봤다.

그는 이런 표정을 하는 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할지, 어떤 결의를 가지는지 잘 알았다. 아주


예전의 로젤린이 떠오르는 표정이었다. 무언가를 위해서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자의 눈빛이었다. 단단하게 굳어
쉽게 부서지지 않는 종류의 마음이었다.

속이 갑갑해졌다. 정말 이 남매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일방적인 희생을 건네받은 기분이 얼마나 엿 같은지 설명을 해 주고 싶지만…….”

“…….”

“우선적으로 이 말부터 하지.”

리카르디스는 벌떡 일어나서 탁자 한 편에 놓아 둔 화병에서 꽃을 확 뽑아냈다. 잇세리온이 악 소리를 냈다. 그


귀한 꽃을……!

리카르디스는 화병의 물을 받아 칼릭스의 이마에 철퍽하게 묻혔다. 물이 뚝뚝 콧날을 따라 떨어졌다. 갑자기


물세례를 받은 칼릭스는 눈만 깜빡거렸다.

“영광의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를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의
기사로 임명한다.”

“전하!”

잇세리온이 소리쳤다. 손뼉을 마주치지 않으면 그나마 불발이건만, 제대로 짝 소리가 나 버렸다.

“……솔직히 받아 주실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믿으시는 겁니까?”


리카르디스는 손에 묻은 물기를 칼릭스의 옷에 슥 문질러 닦았다. 그가 기가 막혀 하는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 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우직한 성질 머리들은 잘 알고 있지. 그대가 간자가 되기 위해 허언할 성격도 아니거니와, 다른


건 몰라도 제 누이를 끔찍이 아끼는 것만은 알겠다. 그대의 손으로는 결코 로젤린 경을 위험에 빠트리지 못 할
테지. 나는 그대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두려움을 믿는다. 잃어 본 자들만이 아는, 두려움을 믿는다.”

“예, 전하.”

칼릭스는 고개를 깊게 숙이며 대답했다.

리카르디스는 이후로도 한참을 더 칼릭스와 얘기했다. 한 치의 변함없는 표정을 고수하는 두 남자 옆에서,


잇세리온의 얼굴만 핏기가 빠져나간 듯 새하얘졌다가, 새파래지기를 반복했다.

미지의 존재, 의태가 가능한…… 마력을 다루는…….

정보가 오고 갈 때마다 잇세리온이 ‘헉, 억!’ 따위의 감탄사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는 바람에 몇
번이나 중단 되었다.

칼릭스는 말하는 틈틈이 리카르디스의 반응을 확인했다. 이미 정보를 습득 했거나, 미리 짐작을 했다는 듯
침착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놀랍게도, 그는 칼릭스의 예상보다도 로젤린에 대해 많이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홍차로 목을 축인 후, 잠시 손장난을 하며 머뭇거렸다.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전하?”

“얼마나 대단한 걸 물어보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나.”

“그, 대체 제 누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칼릭스는 드물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제
누이가 전과 완전 별개의 존재임을 어찌 알았느냐고?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모르는 쪽이 이상하지 않나? 사고 전까지만 해도 수습 기사들에게도 팔씨름을 지던 사람이, 기억을


잃고 난 뒤로는 암살자를 맨손으로 때려 잡고 제압하는데?”

“아버지께서 해명한 것과 같이 그저 마인임을 숨겨 왔다고는 생각 안 하십니까? 솔직히 제가 보기에는 그쪽이 더


설득력 있는 터라.”

리카르디스가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로젤린 경이 태어날 적부터 마인이라는 말을 했었던가.”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말을 이었다.

“단 한순간도. 로젤린 경이 정말 마인이었다면 세티스티아의 위험을 두고 보지는 않았겠지. 그녀와 내가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못했지만, 그런 점에 있어서는 신뢰할 수 있어.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렇습니까. 칼릭스는 목이 잠긴 채 대답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예, 전하.”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함구하라.”

로젤린이 과거의 ‘로젤린’과 같은 존재가 아님을 자신이 알고 있노라 제 누이에게 알리지 말라는 얘기였다.
칼릭스는 입을 다문 채 그의 깊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지금 리카르디스가 말하는 것으로부터 올 어떠한 이득이나 손실을 재어 보려 했으나 생각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그 또한 미지수였다. 그러나 그가 제 누이에게 해가 될 만한 무언가를 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명 받듭니다.”

순순한 대답에 도리어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미심쩍다는 듯 변했다.

“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닌데…… 뭐…… 그대가 어느 정도 나에 대한 믿음을 가졌노라 생각해도?”

리카르디스가 눈썹을 까딱하자 칼릭스가 살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될 듯합니다.”

“그것 참 영광인 걸.”

리카르디스의 빈정거림을 듣던 칼릭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귀한 분의 시간을 너무 뺏었군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클로에를 통해서 연락하도록 하지. 영지로 내려갈 건가?”

“아니요. 당분간은 수도에 머무를 예정입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칼릭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리카르디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방을 나섰다.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과연 붉은수레바퀴. 제 누이에 죽고 못 사는 모습을 보여도 실상은 전장에서 날뛰는


사냥개다.

‘처리해야 할 일이라…….’

리카르디스는 그 일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칼릭스로부터 ‘로젤린’의 석연치 않은 죽음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뒤를 쫓은,


야수의 손을 가진 자가 있다는 것.

그는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천천히 머릿속에 광경을 그렸다.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의 정체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여자, 남자? 나이는, 직위는, 목적은?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리카르디스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로젤린이라면 근무 중 함부로 자리를 이탈하지도, 다른 이의 천막을 함부로
드나들지도 않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검지로 탁자를 딱딱 두드렸다.
‘그렇다면 임무의 연장선일 가능성이 크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그녀에게 따로 임무를 내렸다는 얘기는 못 들었으니, 사냥 대회에서 죽은 부단장과 관련이
되어 있을 테다. 부단장이 그때 당시의 부단장 부관, 나단을 두고 굳이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는 얘기는……
그 심부름의 대상과 로젤린이 친분이 있는 사이였을지도.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순식간에 찢겨 나갔다 하시더군요.]

공격은 망설임이 없었다. 목표물이 절벽에서 떨어질 때까지의 집요한 추적. 단순한 쾌락 살인이라기보다는
목격자를 없애겠다는 목적이 분명하다. 정체를 숨기고 황성에 들어온 것 또한 단순한 흥미에 그치지 않으리라.

[다음 편에 계속....]

73 화.

살아 돌아온 로젤린을 죽이려 하지 않은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그녀가 제 발로 직접 발타라는 사지에 들어갔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주위를 맴돌며 그녀를 경계했을 텐데, 그 수상한 낌새를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속마음을 능숙하게 속이고 있다는 얘기였다. 여러모로 위험인물인 셈이다.

로젤린은 사지에서 또 다시 살아 돌아왔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만약 그녀를 죽인 ‘그것’이며, 지금의 상황에


놓여 있다면, 반드시 로젤린의 죽음으로써 이야기를 끝맺길 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며 소름이 돋았다. 로젤린에게 가는 화살을 다 쳐 내고 있다 생각했건만, 그보다 더 위험한


무언가가 그녀 곁을 맴돌고 있다니.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유일한 변수라고 부를만한 게 있다면, 로젤린과
그자가 같은 성질을 띤 존재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한들 반응을 예상할 수 없었다. 호의? 적의? 스물다섯이 되는 동안


인간으로밖에 살아 보지 못한 자의 한계였다.

그렇다면 변수는 일단 그대로 둔다. 이용하기엔 너무 불확실한 요소였다. 행운과 우연에 기댈 만큼 가볍게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천천히, 조심히, 자세하게 풀어 나가야만 한다.

조급함에 놓치는 것이 없도록.

* * *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앉으라는 말씀은 없으셨지만, 앉겠습니다. 얘기가 길어질 듯하니.”

칼릭스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번듯한 장식 하나 없이 생활과 집무에 필요한 가구만 갖춰 놓은 이곳은


일라베니아의 수도에 있는 붉은수레바퀴 저택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은 아들이 왔음에도 창가에 서서
바깥만 보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 영지를 지키라 명령했다.”

“누님께서 아프셨습니다. 또한 2 황자 전하로부터의 서신이 있었기에, 월장석 성에 발을 들여놓은 것뿐입니다.”

페르탄이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너는 지금 무엇을 누님이라고 부르고 있느냐.”

영지를 지키라는 명령을 무시한 것, 또한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로서 월장석 성에 출입한 것. 두 가지의 큰 건을


두고 페르탄은 다른 점을 콕 집었다.

“알고 계셨군요. 누님께 그다지 관심이 없으셔서 모르실 줄로만 알았습니다.”

물론 칼릭스도 제 아버지가 모를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애초에 로젤린이 마인이라 해명한 사람이 그가 아니던가.

칼릭스가 아는 한, 로젤린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녀를 마인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은, 아버지가 정확한
사정은 파악하지 못했더라도 ‘로젤린’이 죽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또한 지금의 로젤린이 다른
사람이라는 점도.

“건방지게 굴지 말거라. 제 누이의 치마폭에서 좀 벗어났나 했더니, 안 본 사이에 아주 세 살배기가 되었구나.”

“붉은수레바퀴의 요람에서 벗어나 걸음마를 하는 중입니다. 자랑스럽지 않으십니까.”

페르탄은 몸을 완전히 돌려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붉은수레바퀴는 총명하고 강한 후계자가 있으니 걱정 없으리라. 숱하게 들어온 말이었으나…….”

그가 창가에서 테이블로 걸어왔다. 칼릭스에게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너는 어리석고, 약하구나.”

칼릭스는 제 아버지를 올려다보고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페르탄이 자리에 앉았다. 그가 케이크를 맨손으로 덥석 집어 먹었다.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의 죽음을 알고 있음이 확실한데, 그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명령을 듣지 않고 누이를
보호하려던 자신을 질타할 뿐이었다. 칼릭스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네가 붉은수레바퀴를 잊어버린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누이는요!”

쾅!

칼릭스가 테이블을 치자 찻잔이 흘러 넘쳤다. 페르탄은 손에 묻은 크림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너마저 붉은수레바퀴를 위험하게 만들지 마라. 그것이 네가 달고 있는 이름 위에 서는 자로서의 의무이자,


숙명이다.”

“재밌는 말씀을 하십니다. 엘피디오야 말로 발타 이전에 일라베니아에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입니다.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함부로 황족의 이름을 거론하지마라.”

“황제는 무능하지만 제 밥그릇만 있으면 만족하는 인물입니다만, 엘피디오는 무능하면서 남의 밥그릇까지 탐을


냅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아버지가 가는 길이 그렇습니다. 대륙 위의 사람들은 죽어 나가고, 엘피디오는 제
배 불리기만을 원할 텐데 진정 붉은수레바퀴만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칼릭스는 눈이 뒤집어져서 씩씩거렸다. 페르탄의 왼쪽 눈썹이 움찔거렸다. 흉터가 있는 부위는, 그의 통제를


벗어나 속내를 드러내고는 했다.

“엘피디오 전하는, 통제 할 수 있는 위험이다.”

그 개차반을 통제할 수 있는 위험이라 말하다니. 바닥을 치던 존경심이 조금 올라왔다.

“그러나 리카르디스 전하는…… 위험하다.”

흘러넘친 홍차를 가만히 바라보는 페르탄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칼릭스는 그의 말에 의구심을
가졌다. 리카르디스 전하가 엘피디오보다 위험하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결코 황제가 될 수 없고.”

페르탄이 읊조리는 말은 반항기 넘치는 아들이 아닌, 그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 * *

황제 라이노는 분노했으나, 그를 지배하는 것은 그보다 더 큰 두려움이었다. 그 대상이 제 핏줄이라 할지라도 제


몸에서 떨어져 나온 이상 그것은 완벽한 타인이었다.

1 황자 엘피디오는 두 살 무렵부터 라이노를 넘어서는 성력을 지녔다. 그의 모친이 지니고 있던 성력을 대물림
받은 것인지, 가까운 친족끼리의 근친혼으로 인한 돌연변이의 탄생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모두 앞으로를
기대할 뿐이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중요한 건 ‘앞으로 완전히 성장한 엘피디오가 얼마나 큰 성력을 지닐 것인가’가 아니었다.
자신을 넘어섰다는 것.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 어린아이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그 자체였다.

어차피 축복의 밤은 누구도 띄울 수 없을 텐데, 이런 시대에 신성력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러나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얘기했다. 이델라브힘의 더욱더 강한 힘이 필요하다. 그에


걸맞은 사람이 없었기에,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때에 엘피디오가 태어났다.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 고귀한 혈통, 그 첫 번째 아들. 신에게 선택받은
증거인 강한 신성력. 물려받은 아름다운 외모와 밝은 금발. 비록 아직 어릴지언정,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황제의 재목이 되리라.

자신이 내려놓는 것과, 뺏기는 것은 손에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잃는다는 결과는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라이노는 십여 년 후, 제 아들에게 권좌를 빼앗길 운명에 처했다. 비참했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그 감정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역시 미래의 일. 그사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지 않나. 기다리자. 황제는 숨을 죽이고 세월을
보냈다.

엘피디오가 일곱 살이 되었다. 총명하여 모든 것을 빠르게 흡수하고,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었다. 몇 명의 아래


형제들이 있으나, 엘피디오는 자신이 황제가 되리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라이노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위험이 거대하게 차올라 목을 조였다. 그 아이가 성력이 약했더라면, 비천한 어미를
두었다면, 적자가 아니었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이는 얼마든지 또 있다. 엘피디오는 너무나 큰 위험이다. 죽여야 한다!

그가 생각한 것 중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제 아들을 죽인 비정한 황제라 불리는 것이 제 아들에게 패배해


꼬리 말고 도망가는 무능한 황제보다는 나았다.

라이노는 일라베니아와 같이 발맞춰 걸어온 충실한 번견, 붉은수레바퀴 백작에게 명령했다.

[엘피디오를 죽여라.]

갖은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유일하게 망설인 순간이었다. 그의 가문은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황제를 지키는 일은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것. 그것이 몇 대를 걸쳐 온 오랜 사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명령은 후대를 위해 자라고 있는 새싹을 짓밟는, 그의 사명과 반하는 일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라이노의 욕망을 읽어 냈다. 그는 엘피디오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단순히 자신이 원할 때까지 군림하고
싶을 뿐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생각했다.

엘피디오를 살려야 한다.

선대 황제는 병에 걸려 죽는 그 순간까지 권좌에 앉아 있었다. 그가 특별하게 신성력이 강했던 것도, 특별하게


유능했던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아들 덕분이었다. 모두가 황제가 되고 싶어 하지만 자리는 하나. 싸움은 불가피
했다. 선대는 한 명의 후계를 정확하게 꼽지 않았기에 싸움은 선대가 죽을 때까지 치열하고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 황제의 다른 아들들은 능력이 따라 주지 않을뿐더러 야욕이 없었다. 모두 엘피디오가 차기


황제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엘피디오에게도 그만한 대항마가 있다면, 황실에서 그가 유일해지지
않는다면…….
[아이를 찾겠습니다.]

[아이?]

[월계수의 고귀한 혈통이 아니더라도 신성력을 강하게 타고나는 아이들은 있습니다.]

황제는 그 말만으로 백작의 모든 뜻을 알아챘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깊게 생각했다. 곧바로 황제가


씩 웃었다.

[아이를 찾아라.]

[명을 받듭니다.]

[엘피디오와 나이 차가 크게 나지 않는 사내아이.]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머릿속으로 아직 찾지 못한 아이의 모습을 그렸다.

일곱 살 전후의.

[엘피디오와 비등하거나 그를 넘어서는 신성력.]

강한 신성력을 지닌.

[황실의 혈통이 될 테니 아름다운 머리 색을 지닌 것은 당연해야 한다.]

밝은 금발이나 은발의 아이.

74 화.

[명석하면 그 또한 좋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면 될 터.]

평민 출신일 가능성이 높으니, 교육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 한다. 적어도 이 년, 삼 년.

[그 아이의 부모가 될, 귀족 가문 또한 찾으라. 과거 내가 시찰을 간 적 있는 지역 안에서. 그 아이는 그때


태어난 것이다. ]
평민에게서 난 자식은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러니 변방의 영지에 시찰 갔을 때, 여인과 정을
통해 낳은 아이라 속이자는 것이다.

[이름은…… 그래. 리카르디스가 좋겠다. 다음 아이가 태어나거든 붙여 주려 했었지. 위대한 치세를 펼친


일라베니아 황제의 이름이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명을 받듭니다.]

아이는 자라고 자라 엘피디오와 다투게 될 것이다. 쓰임새가 다 하는 날에 사라지게 될 황제의 꼭두각시.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휩쓸릴 작은 운명이 안타까웠으나 신성력은 황실의 전유물이다. 그 강한 힘을 지니고 황실에 오게
될 운명 또한 신의 안배이리라.

페르탄은 곧 한 명의 아이를 찾아냈다. 아이는 작은 야생동물 같았다. 뒷골목의 고아 출신. 쓰레기를 주워 먹고


구걸하는 아이들 중 하나였다. 바싹 마르고 볼품없다. 꾀죄죄한 데다가 행동거지가 사납다.

그러나 흙먼지에 가려져 있던 밝은 은발은 아름다웠고, 맑은 눈동자는 총기가 넘쳐 보였다. 나이 대도 적당하며,


신성력은 이례적인 수준. 고아이기에 핏줄의 개입도 없다. 완벽한 적합자였다.

아이는 변방의 겨울석류 자작 가문에 맡겨지게 되었다. 겨울석류 자작은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고, 제 딸이 황비가
될 수 있다는 얘기에 이 터무니없는 제안을 덜컥 승낙했다.

자작의 딸, 밀리아는 지나가는 음유시인과 사랑에 빠져 일 년 전 여자아이를 낳은 후, 집안에서 구금되다시피


지내 왔다. 미혼의 몸으로 천한 평민 남자의 아이를 낳다니, 알려지면 귀족 사회에서 대대로 회자될 수치였다.

겨울석류 자작이 그 일을 숨긴 결과로 집안의 사용인들도 아이의 아버지를 모른다고 했다. 그 치밀함 덕분에
밀리아가 리카르디스의 부모 역으로 발탁된 것이다. 딸이 한 명 있는 흠이 있었으나, 그쯤이야 감수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리카르디스였다.

밀리아는 자신이 이 고아 소년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그 때문에 몇 년 뒤에는 바라지도 않던 황성에 끌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페르탄이 리카르디스를 데리고 오는 당일 날에 들었다. 기겁할 일이었다.

그러나 밀리아가 처음 본 리카르디스에게 한 말은.

[어머, 오빠 생겨서 좋겠네, 우리 티아!]

였다. 밀리아의 품안에는 그녀를 똑 닮은 은발을 가지고 있는 어린 소녀가 안겨서 우꺄우꺄 소리를 내며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밀리아가 손을 올려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은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잔뜩
경직 시킨 채 그녀의 손길을 받았다. 뺨을 맞으리라 예상했던 것 같았다.

소년은 그녀의 김빠진 반응에 자신도 김이 빠진 듯 바짝 세운 가시를 눕혔다. 언제나 반항심 넘쳐 보이던 소년이
밀리아의 손길 한 번에 누그러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페르탄은 몇 개월 주기로 리카르디스를 보러 갔다. 바싹 마르고 작았던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홀쭉했던 볼이
부드러워지고, 뻣뻣하고 정돈이 안 되어 있던 머리도 빛이 부서져 내리는 아름다운 은발이 되었다. 처음 만날
때만 해도 항시 구부정하게 몸을 옹송그렸으나, 곧게 뻗은 자세는 태생을 의심하기 힘들 정도였다.
겨울석류 가문에 끌려올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많이 깨우친 듯했다. 아이는
총명했다. 타고난 머리가 좋은 탓도 분명히 있었으나, 손가락에 박인 굳은살은 필사의 노력을 비추고 있었다.
고작 일 년 사이의 변화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단발머리의 소년이 밀리아의 딸, 세티스티아를 안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맑고


푸른 눈동자가 애정을 듬뿍 담고 있었다. 밀리아는 그런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소년은 더 이상 그녀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몸을 움츠리지 않았다. 어린 새싹이 봄의 햇빛을 부드럽게


담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가족.

가족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연극을 위해 모아 둔 꼭두각시 인형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페르탄은 가문을 뒤돌아 나가며 저 멀리 화원에서 어린 동생과 소꿉놀이하는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여자아이가 오바, 오빠. 하면서 알 수 없는 옹알이 같은 걸 섞어 무어라 말하자, 리카르디스는 더 없이 행복하게
웃었다.

햇빛이 비추는 작은 정원 속. 아름다운 은발의 소년과 소녀. 여기저기 들꽃이 피어 있고 아이의 장난감 위로
무당벌레가 앉아 있다.

평화롭고,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세티스티아 황녀가 죽었다. 그녀가 제 오라비를 따라 황실 일원으로 인정받은지 10 년 만의 일이었다.

별장에서 돌아오는 길, 수십의 무리가 습격을 감행한 결과 마차가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마차의 파편이
황녀의 복부를 찔렀으나 그녀는 즉사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통받다 죽었다. 자신보다 더 오래 그녀가 살길
바랐던 리카르디스는, 제 동생이 보다 빠르게 이 세상을 떠나지 못했음에 더 괴로워했다.

어린 황녀를 관통한 나무 파편에는 리카르디스의 문양이 조각난 채 새겨져 있었다. 습격한 자들은 그 마차를 타고
있는 사람이 그 문양의 주인이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그 이야기를 리카르디스에게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슬픔에 잠겨 오랫동안 웅크렸지만, 곧 다시 일어섰다. 세티스티아가 떠났다 하더라도 그가 지켜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슬픔에 온전히 잠기는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페르탄이 보아 왔던 밀리아 황비는 영민하고, 당차고 좀 이상한 여자였다. 어딘가 엉뚱하기는 하지만 이 거친
황실에서도 기죽지 않고 제 딸, 아들을 위해 우뚝 서 있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티스티아 황녀가 죽은 이후, 밀리아 황비는 미쳐 버렸다. 보통의 사람처럼, 보통의 사람보다 더. 어떤
것에도 부서지지 않게 꼿꼿이 버티고 있던 그 힘에 반발력이 작용한 듯, 더 괴롭고 아프게 부서졌다.

하루 온종일 울다가 실신하고, 깜깜한 밤에 세티스티아의 방 안을 거닐고, 갑자기 수풀로 뛰쳐나가는 등. 속으로
삭이지 못한 슬픔을 표출하는 것이었으나 그마저도 일부일 뿐이라, 그녀의 안에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는 격정적인
감정은 마모될 줄을 몰랐다.

시간이 갈수록 밀리아는 황폐해지고 쇠약해졌다. 어딘가 다치고 베이지도, 병에 걸리지도 않았으나 그녀는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밀리아 황비의 곁을 계속 지켰다.

페르탄은 밀리아를 자주 찾아갔다. 어떤 죄책감의 발로라기보다는, 밀리아가 방문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페르탄은 그녀가 아이를 잃은 분노를 풀 대상이 필요해 자신을 부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밀리아
황비는 페르탄을 보고 화내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흐려진 눈동자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밀리아 황비는 페르탄에게 악을 쓰며 저주하는 대신,

[네가, 내 아이를 죽인거야.]

그녀가 소중하게 지탱하고자 했던 제 아들, 리카르디스에게 모든 것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너만 아니었으면!]

정신이 이상해졌다기보다는, 꾹 눌러 담았던 그녀의 진심이 드디어 터져 나온 것이라고 페르탄은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그 말을 참아 낼 힘이 없었던 게 아닐까.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 도무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에게 모진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씩 움직였다. 턱 근육이 씰룩이고 눈썹이 일그러졌다.

괴로워 보였다. 그러나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마주한, 무엇보다 아픈 칼날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 내었다.
밀리아가 그 안에 담아 낸 것을 쏟아 낼 대상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밀리아 황비는 금이 가 있는 얇은 유리 같았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너무 무거웠다. 무겁고 날카로워 그녀


자신조차 상처 입혔다. 리카르디스는 밀리아가 그 무겁고 날카로운 것들을 자신에게 쏟아 내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비워 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언제나 리카르디스를 탓하지 만은 않았다. 미안하다며 리카르디스의 손을 잡고 울기도 했다. 내가 너무 약해서


미안해. 리카르디스. 혼자서 버텨 내게 해서 미안해. 그렇게 숨이 닳는 듯 헐떡이며 울었다.

그것은 리카르디스에게 향하는 질타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페르탄은 아직까지도 그녀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 했다.

세티스티아 황녀의 기일로부터 178 일 후. 리카르디스는 밀리아 황비를 떠나 보냈다. 사인은 익사였다.
자살이었는지, 약해진 몸을 이끌고 산책하다 실수로 호수에 빠진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페르탄은 리카르디스를 찾아갔다. 밀리아의 서신에 길들여진 탓이었을까.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월장석 성으로
흘렀다.

리카르디스는 그저 커튼을 친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울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으나 어딘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방 안은 어두웠고, 정돈되지 않아 어지러웠다.

침묵을 지키던 리카르디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내가 없었다면 엘피디오는 죽었겠군.]

손톱이 서로 부딪치며 딱, 딱 불쾌한 소리를 울렸다.

[그래서 날 찾은 거였어.]
페르탄과 황제는 단 한 번도 리카르디스에게, 그가 황자로 둔갑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 적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엘피디오와 싸워 온 그 세월은 모든 이유를 가늠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75 화.

리카르디스의 말대로, 황제는 제 친아들을 배제하면서까지 제 욕망을 이루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만약


페르탄이 황제에게 아이를 찾자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엘피디오는 죽었을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이거 참…… 대단하군. 대단해…….]

그가 소파의 손잡이를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뼈가 날카롭게 돋아난 손등에 힘줄이 꿈틀거렸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멋대로 주고…….]

그가 고개에 힘을 빼고 앞으로 툭 숙였다. 머리가 흐르며 그의 얼굴을 가렸다. 움찔거리는 입술만 보였다.

[멋대로 빼앗아.]

페르탄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는가, 백작. 그대가 그랬지. 신성력은 황실의 전유물. 내가 힘을 지닌 것 또한


황실로 오게 될 운명을 신이 안배한 것이라고.]

방 안이 점점 어두워졌다. 선명하던 햇살이 가득했는데, 먹구름이라도 드리운 것이었을까. 더욱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남자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렇군. 나는…… 이런 운명이었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이런 운명이었어…….]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지나간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으며, 그 또한
운명이었으리라. 운명의 수레바퀴라고도 불리는 가문다운 태도를 언제나 고수했다.

그러나 페르탄은 이때 최초로 후회를 하게 되었다.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언제 어디서나 발생하는 흔하디흔한
일이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일라베니아의 평화를 위한 초석.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붉은수레바퀴가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손에 남은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런 것을 바란 건 아니었을 텐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러나 이미 그


길로부터 너무나 많이 걸어왔으며, 돌아본다고 해도 돌아갈 수는 없다. 앞으로를 준비하는 것이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붉은수레바퀴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차마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서서히 깨져 가고 있는 어린 소년의 미래를 본 페르탄은, 그 순간만큼은 또


다른 운명이 그에게 찾아오길 바랐다.

* * *

로젤린의 귀환 소식에 기숙사 건물은 시끌벅적했다. 덕분에 로젤린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몇 시간이나 갇혀 있어야
했다. 어지간하면 리카르디스를 보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반짝이며, 더러는 눈물을 보이며 제 귀환을
축하해 주는 동료를 두고 떠나기에는 로젤린이 사회적으로 너무 성장한 상태였다.

쌀쌀맞게 굴던 상급 기사 몇몇조차도 부드러운 미소로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로젤린 경.” 하면서 갓
태어난 강아지 새끼 솜털만큼 간지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 변화가 몹시 반갑고 행복했던 로젤린은 쏟아지는
축하를 잔뜩 음미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얼마나 기뻐하는지.

흐뭇해하는 로젤린에게, 에버하르트가 작은 의견을 냈다. 동료 기사들을 더 깜짝 놀라게 해 주자는 것이었다.

로젤린은 문 뒤에 웅크려 숨어 있다가 갑작스레 앞구르기를 하며 튀어나온다든가, 큰 나무 상자에 몸을 구기고


들어가 있다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뚜껑을 열어 주는 순간 펄쩍 날아오른다든가 하는 식의 이벤트로 사람들의
깜짝 지수를 더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로젤린은 연무장의 나무에 숨어 있다 지나가는 파르딕트도 놀라게 만들었다. 파르딕트는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린 채 갑자기 나타난 로젤린을 보고 기겁해서 뒤로 넘어졌다. 그 뒤 그녀의
귀환에 기뻐하기보다는 그녀의 행위에 화냄으로써 로젤린의 기세를 한풀 꺾이게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로젤린은 행복함에 잠시 잊어버렸던 본 목적을 되찾아 왔다. 리카르디스를
만나러 가야 했다.

로젤린은 복도를 걷다 네스터와 마주쳤다. 얼굴을 붉힌 네스터는 자신이 상급 기사로 승급했노라, 은근히
자랑하며 그녀가 칭찬해 주기를 바랐다. 물론 그 은근한 자랑을 알아들을 리 없는 로젤린은 “아, 네
그렇습니까.” 정도의 건조한 답변밖에 해 줄 수 없었다.

저 멀리 보니 정원사가 나무를 솎고 있었다. 로젤린은 네스터와의 이야기를 중단하고 미련 없이 떠났다. 네스터가


뒤에서 울상을 지었다.

정원사가 가지를 솎거나 꽃을 새로 심을 때면 로젤린은 항상 그 곁을 떠돌았다. 운이 좋으면 잎이 한두 개 떨어진


꽃 무리를 거저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정원사의 발치에 떨어진 꽃과 풀줄기 중, 본인의 기준으로 예쁜 것들만 주워 모아 아래 둥치를 끈으로
묶었다. 어설프게나마 꽃다발의 형식은 갖출 수 있었다. 냄새를 맡으니 향긋했다. 로젤린은 뿌듯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길에 로젤린은 부단장실에 들러야 한다던 레티시아와 다시 마주쳤다. 로젤린의 간식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그녀가 바구니에 샌드위치며, 케이크며, 과일이며 잼이며, 여러 가지를 바리바리 싸들고는 로젤린에게
안겼다. 로젤린은 당장 꽃보다 향기로운 빵을 음미하고 싶었으나, 드물게 식욕보다 목적이 앞선 상태였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시간이면 리카르디스는 집무실에서 서류와 눈싸움을 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정문을 향하던 로젤린의 발걸음이
멈췄다. 정문으로 가면 시종이 미리 방문자를 알리기 때문에 그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창문으로 들어가야지.’

레이몬드와 잇세리온, 나단과 스타스가 창문으로 드나들지 말라고 입이 닳도록 얘기 했으나, 지금은 그들의
잔소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리카르디스가 깜짝 놀라며, 아니 로젤린 경! 세상에! 언제 온 건가! 아니, 이 꽃다발은? 완벽하다. 역시 내


기사야. 보고 싶었다! 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배가 부른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져 왔다.

‘역시 창문으로 들어가자.’

로젤린은 호위들의 눈에 띄지 않게 살금살금 벽을 기어오르다가 상급 기사 카일로에게 딱 걸렸다. 완전 혼났다.


로젤린은 제 원대한 계획을 필사적으로 피력했다. 카일로는 어처구니 없어 했지만, 로젤린에게서 작은 쿠키
하나를 뇌물삼아 받아 들고는…….

“두 개 더 주시죠. 협상은 없습니다.”

라고 했다. 너무 강경한 태도라 두 개를 더 줘야 했다. 로젤린은 화가 나서 씩씩거렸고 카일로는 그녀의 반응에


은근 즐거워했다. 여동생이 두 명 있다더니, 놀리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로젤린은 테라스에 도착했다. 커튼은 반쯤 드리워져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로젤린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천 자락이 팔락이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과 풀벌레, 새가 저마다 요란하게
울었다. 그 사이로 고른 숨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는 로젤린을 단숨에 노곤하게 만드는
잔잔한 울림이었다.

로젤린은 꽃다발과 간식 바구니를 든 채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에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리카르디스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숨소리로 인해 그가 얕은 잠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로젤린은 꽃다발과 간식 바구니를 그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를 자세히 관찰했다. 리카르디스는 잔뜩 인상을


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펴 주고 싶었다. 로젤린은 테이블 옆에 있던 협탁을
끌어 의자 삼아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팔을 얹어 턱을 괴어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바람이 흔들렸다. 커튼이 춤을 추고 그 움직임에 햇빛이 고스란히 리카르디스에게 쏟아졌다. 그가 인상을 쓰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로젤린이 턱을 괸 채 다른 손을 들어 그의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과 그녀의 손이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그림자가 크게 드리웠다.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기분이 좋아진 로젤린이
혼자 씩 웃었다.

그러고도 한참 지났다. 사십 분쯤. 팔이 아프지는 않지만 심심했다. 로젤린은 그의 얼굴을 덮고 있는 제 손


그림자를 변형시키며 놀았다. 햇빛이 강한만큼이나 그림자가 선명했다. 강아지, 여우, 새, 백조, 나비.
칼릭스가 과거의 로젤린이 자신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며, 지금의 로젤린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림자 나비가 나붓나붓 날갯짓하며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움직였다. 그때 리카르디스의 속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자신이 베고 있는 제 손으로 볼을 문질렀다. 어딘가 가려운 듯이.

곧, 스르륵하고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초점이 맞지 않는 듯이 두어번 깜박이더니 로젤린을 눈에 담았다.


그녀가 밝은 창밖을 쳐다보며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둥그스름한 이마와 콧날의 선이 빛을 받아 희게 빛나고
있었다.

‘꿈인가?’

리카르디스는 엎드린 채로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천천히 살폈다. 사방에 햇빛이 시릴 정도로 내려쬐고 있음에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얼굴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로젤린이 두 손을 교차로 한 상태로 모으고 있었다. 날개
같았다.

그녀의 손이 그림자를 만들어 제 눈을 따가운 햇빛으로 부터 가려 주고 있었다. 손가락 틈새로 빛이 깜박깜박


점멸했다가 다시 나타났다.

테이블 위의 식은 홍차가 아직 향을 내고, 습도 하나 없이 바싹 마른 공기는 상쾌했다. 햇빛이 쏟아지며


테이블의 나무 무늬를 선명하게 다시 그리고, 공중에는 먼지가 반짝였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테이블 위에 거대한 꽃다발과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간식 바구니가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꽃 냄새와 달콤한 음식 냄새. 갖은 풍요롭고 예쁜 것으로 둘러싸여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한 사치가 아닌가.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왜 지금의 이 순간을 꿈보다 더 꿈같다고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방금 깼는데도 잠이 몰려왔다. 무언가가 끝난 것 같기도, 시작하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감각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76 화.
로젤린이 그의 숨소리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전하!”

로젤린이 방긋 웃으며 그를 불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테이블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똑바로 앉아서도 별 다른 반응 없이 가만히 눈만 깜박거렸다. 속눈썹이 나른하게 팔랑였다.

‘깨신 것 맞나?’

로젤린은 아직 꿈의 세계에 반쯤 정신을 걸쳐 둔 것 같은 그를 깨우기 위해 테이블 위의 꽃다발을 들어 올렸다.

“전하, 제가 왔습니다!”

이건 선물입니다! 위풍당당한 목소리에 비해 꽃다발을 건네는 손길은 수줍기 그지없었다. 리카르디스가 멍하니
꽃다발을 안았다. 들쭉날쭉 엉성한 데다가, 꽃봉오리가 없는 줄기도 더러 포함되어 있었다. 몇 개 있는 꽃조차
잎이 한두 개 떨어진 걸로 봐서는 어디 바닥에 있는 것을 주워 직접 만든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곧 꽃다발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색색의 꽃잎에서 향기가 흘러 넘쳤다. 푸릇한 빛깔의 향기가 선명해, 눈꺼풀 안쪽에도 색이 만개했다. 부드러운
이파리가 입술과 피부를 간지럽게 스쳤다. 가슴 안쪽 가득 봄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로젤린.”

잠겨 있는 목소리였다.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눈을 뜨니 로젤린이 뿌듯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어설픈


꽃다발이 아니라 갖은 보석과 귀한 것을 선물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꽃다발을 안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줬다.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예쁜 것만을 담아 소중하게 모아 온


것이리라. 자리에 쭈그려 앉아 한 송이 한 송이 판별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리카르디스는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몇 번이나 삼켰다가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보고 싶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이상하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네가 왔다.

* * *

[별 다른 일은 없나요?]

겨울석류의 밀리아가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페르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그것 참 안타깝군요.]
별다른 일이 있길 바랐던 것 같은 대답이었다. 페르탄은 당황했으나 단단하게 굳어 있는 무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밀리아는 가만히 페르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드러나지 않는 당황을 읽혀 버린 느낌이었다. 페르탄은
가볍게 묵례하며 물러섰다.

날은 맑고, 길은 정돈되고, 바람도 잘 불지 않는 좋은 여행길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별다른 일’이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황성이 코앞이었다.

그맘때쯤 다시 창문이 열렸다. 곧 황실의 일원이 될, 리카르디스가 창문에 찰싹 붙어 높디 높은 황성을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찬사가 들리는 듯했다. 페르탄도 순백의 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군집한 성을 바라보았다. 티 한 점 없이 아름다웠다.

성에서 시선을 돌려 마차를 바라볼쯤에는 호위 대상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페르탄은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머리가 굳어 눈동자만 굴렸다. 바로 그때 마차 안쪽에서 소곤소곤 속삭이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보니
마차 바닥에 호위 대상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여기는 아주 추운 곳이야.]

페르탄은 그녀가 말하는 ‘여기’가 그 아름다운 하얀 성을 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원히 녹지 않는 눈이 쌓여 있고,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 불어와. 눈을 깜박하는 사이에 어둠이 내려 앉아


추위를 한층 더 혹독하게 만드는, 그런 곳이야.]

가혹한 운명이 찾아오리라. 열 살 난 어린 아이에게 닥칠 것이라 예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하고 싸늘하게.

밀리아는 거듭해서 경고했다. 이곳은 영원한 겨울이야. 버텨 내야 해. 더 차가워지고, 더욱 혹독해지더라도.


괴롭더라도 견뎌야 해. 사람은 약하지만,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어.

페르탄은 밀리아의 말이 그녀 스스로 다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버텨야 해, 더 차가워지고 괴로워도 견뎌. 나는
약하지만, 너희를 위해 강해지겠어. 그렇게.

[언제까지요?]

페르탄은 자신이 질문을 받은 것도 아니건만 당황했다. 그 괴로움의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일까.

밀리아도 리카르디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 하고 잠시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페르탄은 밀리아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어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얼굴이 자신과 같은 당황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주 잠시간의 공백 후, 밀리아가 어린 소년의 어깨를 꽉 쥐었다.

[봄이 올 때까지.]

영원한 겨울 속의 봄. 그려지지 않는 미래였다. 그녀 또한 그 모순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때까지 반드시 기다리는 거야, 리카르디스.]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밀리아를 올려다보던 리카르디스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방긋 웃었다.


[네, 어머니. 기다릴게요.]

10

리카르디스의 환한 미소가 점차 의문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마주한 로젤린이 눈을 부릅뜬 채 굳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숨도 멈춘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뭐지? 무슨
일이지?

“로……젤린 경? 로젤린?”

한참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녀가 꿈틀, 움직이더니 이내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아…….”

아. 감탄사인지 아니면 어떤 단어의 시작인지 모호한 말이었다.

“아름다우십니다.”

“…….”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말이었다. 걱정스레 그녀를 지켜보던 리카르디스가 허탈함에 웃었다. 로젤린은 다시 한번


파들파들 떨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찬란하게 빛나는 미모에
연신 충격을 받는 중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웃는 모습을 아주 보지 못한 것도 아니며, 그가 아름다운 게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로젤린이 이토록 경악하는 이유는 오늘의 리카르디스가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를 감싼 주위 공기가
깃털처럼 가볍고 봄 햇살에 말린 시트처럼 포근했다. 행복하다는 듯 눈을 휘며 제 모습을 담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로젤린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정말, 너무 완벽했다. 얼굴이……!

“…….”

어디로 보나 오랜만에 재회한 황자와 기사 사이에 나눌 만한 대화는 아니었다. 보통은 잘 지냈느냐, 여행길은
힘들지 않았냐는 안부가 우선이지 않나?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대도 오랜만에 보니…….”

리카르디스는 적당한 뒷말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었다. 눈앞의 로젤린은 여전히 예쁘고 귀여웠지만, 지금 그
말을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이마와 볼에는 정체 모를 검댕이가 묻어 있었고, 머리카락 여기저기 이파리를
달고 있는 지금. 예쁘다, 귀엽다는 표현은 놀리는 듯한 느낌을 줄 것 같았다.

“…눈이…… 더…… 뾰족해진 것 같군. 아주 멋있어.”

신성 제국 일라베니아의 2 황자,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고작 이것밖에 못해? 독설가, 달변가, 15 살에


학자와 토론을 했던 내가, 고작 눈이 뾰족해? 뾰족해서 멋있어? 미친 거 아니야?!

리카르디스가 자괴감에 휩싸여 무너져 갈 때, 로젤린은 한껏 흐뭇해하는 중이었다. 맞습니다, 제 눈이 좀


뾰족하고 멋있죠. 하는 듯이. 그제야 리카르디스의 입가가 풀어졌다.

그가 손을 들어 로젤린의 머리에 파묻힌 나뭇잎을 떼어 냈다.

“아픈 곳은?”

“아, 장시간 말을 타느라 엉덩이가 조금,”

“그래! 그래, 이만 하지. 피곤한 사람을 붙들고 내가 너무 배려가 없었어.”

리카르디스가 황급하게 말을 돌렸다.

‘역시 방심하는 순간 튀어나오는군.’

정말 그녀는 여전했다. 리카르디스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로젤린 경!”

외출했던 잇세리온이 로젤린을 발견하고 반가운 비명을 질렀다. 마른가시나무 성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건강해 보일 수가. 샌드위치를 씹어 먹는 게 아니라 마시는 것 같은 저
힘찬 목 넘김!

로젤린이 입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회복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건강해 보이는군요! 아이고, 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정말 괜찮습니다.”

“그런데, 로젤린 경. 스타스 경에게 복귀 보고는 하고 온 겁니까?”

로젤린이 괜찮다고 하자마자 잇세리온이 낯빛을 싹 바꾼 채 따지고 들었다.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는지 로젤린의
시선이 슬그머니 잇세리온의 얼굴을 벗어났다. 아니 이 사람이!

“어쩐지 스타스 경이 퇴근 시간인데도 집무실을 떠나지 않더라니! 초조하게 서류만 뒤적이더니만!”

“제가 갔을 때는 자리에 안 계셨기에…… 그래서 그냥…… 왔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오면 어떻게 합니까!”

리카르디스는 잇세리온을 의식하고 목 아래로 웃음을 꾹 눌렀다.

“아까 문밖의 호위 기사분들이 로젤린 경의 얘기는 안하던데…… 아앗! 또 창문으로 들어왔군요!”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혀 차는 소리를 들었다. 거 눈치 되게 빠르네. 분명 그런 뜻이었다. 잇세리온도


알아들었는지 잔소리를 마구 퍼부었다. 아까 칼릭스에게 인간을 벗어난 존재 어쩌고 얘기 들은 건 전부 잊은
눈치였다.

“잇세리온. 그쯤하고 넘어가지. 막 도착해서 피곤한 사람 아닌가.”


최근 들어 로젤린의 일 때문에 무척이나 피곤한 잇세리온은 원망스럽다는 눈빛으로 제 주인을 쳐다봤다.

로젤린은 강력한 뒷배를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가장 나쁘고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잇세리온은 그녀의 어설픈 비열함에 울컥하진 않았다.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열한
미소를 짓는, 로젤린을 바라보는, 리카르디스의 표정과 눈빛.

잇세리온은 머리를 크게 한 대 맞은 기분이 되었다.

‘어, 억…… 설마. 아니겠지.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아닐 거야, 아니야! 부정을 해 보았으나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인간에서 살짝 빗겨 나가 있는 존재를 바라보는
리카르디스의 눈빛이, 마치 꽃물로 물들인 어린 아이의 손톱 같았다.

77 화.

여행자의 옷을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빛이라 했던가. 아니다, 전부 거짓부렁이다. 바람이다. 파괴력 있고,
종잡을 수 없는 돌풍이 여행자의 옷을 찢어 버릴 것이다!

잇세리온은 알몸이 되어 버린 제 주인의 처참한 몰골에 눈물이 절로 나왔다. 그야말로 완전한 무장해제가 아닌가.

“가시밭길을 좋아하시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전하…… 왜…… 하필…….”

“……가시밭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잇세리온은 손수건으로 제 눈물을 찍었다.

‘흐흑 전하…… 이제는 눈치도 닮아 가시는 겁니까…….’

칼릭스로부터 분명 듣지 않았던가?

마력에 근간을 두고 있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 잇세리온은 기함했었다. 대충


로젤린이라는 기사가 변화했다는 것쯤은 그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저 나이 대의 아이들은 하루하루가
다르지.’ 쯤의 노인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덕분에 충격도 두 배였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놀라지 않은 듯.
침착하게 칼릭스와 얘기를 주고받았다.

잇세리온이 아는 리카르디스는 상황과 정보를 합산하여 여러 가지 결과를 그려 내는 일을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이런 상상도 하지 못할 안건에서조차 빛을 발할 줄은 몰랐다. 리카르디스는 대화 내내
칼릭스에게 정보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정보를 확인하는 식의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고 나갔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다고 해서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닐 텐데, 로젤린을 대하는 리카르디스의 태도는 예전과
비슷했다. 아니 예전보다 더 친숙해졌다. 말투가 부드러워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눈빛과 표정의 날카로움도 무뎌져
있었다.

세티스티아 황녀가 살아 있던 때가 생각나는 얼굴이었다. 잇세리온은 웃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모습에 가슴이


찡해져서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물론, 화목하고 가슴 찡했던 상황은 곧 끝을 맞이했다. 샌드위치의 소스를 리카르디스의 손에 한 방울 떨어트린


로젤린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아 날름 핥았기 때문이었다. 잇세리온이 뒷목을 잡았다. 로젤린 경, 감히 황족의
몸에 어쩌고저쩌고! 잔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얼굴이 발개져 있는 리카르디스도 이번만큼은 잇세리온의
잔소리를 막지 못했다.

한참 뒤 진정한 잇세리온은 자신이 집무실에 들린 진짜 목적을 상기했다. 그가 들고 있던 서류를 팔락거렸다.

“전하. 성과가 좀 있었습니다.”

“어느 쪽?”

“백옥 성입니다. 어수선함을 틈타, 발타에서 접촉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백옥 성은 5 황자 디에즈가 머무는 곳이었다. 발타가 엘피디오의 석영


성이 아닌 백옥 성으로 바로 접촉을 했다?

“엘피디오는?”

디에즈가 단순히 발타와 엘피디오의 다리 역할을 자처했다면, 곧바로 엘피디오의 석영 성으로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5 황자 전하의 독단입니다.”

리카르디스에게 디에즈는 언제나 엘피디오의 뒤에 가려져 있는 흐릿한 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생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순하게 엘피디오를 비호하며 등 뒤를 지키는 자가 아니었다. 엘피디오의
그림자에 숨어, 발타와의 독자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무엇을 위해서? 단순한 실리를
위함인가,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일까.

리카르디스는 먼 곳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현 황태자 자리에 가까운 건 자신과 1 황자 엘피디오였다.


군중들이야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황태자는 엘피디오였다. 황제가 선언만 하지 않았을 뿐.

설령 리카르디스가 위에 서는 자의 소명을 가슴속 깊이 끌어안고 있어 훌륭한 황제의 재목이건, 설령 엘피디오가


멍청하여 나라를 다 말아 먹을 작자이건. 황태자는 엘피디오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표면상으로 드러난 황태자 위를 둘러싼 싸움의 형태는, 제법 무게가 비등하여 저울이 수평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황자들이 함부로 이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싸움도
급이 맞아야 하고, 종이 맞아야 하지. 사자 싸움에 여우나 하이에나 따위가 끼어들 수는 없었다.

3 황자 틸렌드는 1 황자 엘피디오의 동복동생이다. 리카르디스 다음으로는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으나, 사자갈기


공작가는 엘피디오에게 힘을 쏟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안 그래도 나날이 리카르디스의 몸집이 커지고
있는 판에 힘을 나눌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틸렌드 또한 야욕이 큰 사내였다. 혼자서 파벌을 만들어 엘피디오의 그늘을 피해


조금씩 세력을 확장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어머니, 황후에게 딱 걸려서 죽지 않을 만큼 혼났다. 형을
도와줘도 모자랄 판에 뒤통수를 치려고 하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이후 틸렌드는 얌전히 제 형의 왼팔인지
오른팔인지를 담당하여 싸움에서 물러났다.

4 황자 라헤안시는 리카르디스와 마찬가지로 외가의 힘이 크지 못했다. 싸움에 끼어들기에는 지위, 세력 모두


부족한 점이 많았으나, 후계 구도에서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애초에 그가 권력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괜한 분란에 휩싸이기 싫었던 라헤안시는 일찌감치 싸움에서 손을 떼고 신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리카르디스가
가끔 대신전에 들렀을 때나 종종 보는 얼굴이었는데 빈둥거리면서 잘 노는걸 보니 적성에도 맞는 듯했다. 어린 6
황자와 7 황자는 잘난 형들 아래 기죽어 얌전하게 지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과 엘피디오를 제외하면 이 싸움에 끼어들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금 이 관계를
차분히 정립해 보니. 둘만 없다면, 1 황자와 2 황자만 없다면 디에즈가 상당히 왕좌에 가까운 위치라는 걸
깨달았다.

아, 그런 거였나. 거대한 맹수 두 마리의 싸움. 패자는 죽고 승자 또한 큰 상처를 입을 것이다. 디에즈는


숨죽이고 있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위태로운 승리의 상처에 제 발톱을 들이 미는 때를 간절히 기다리며.

“…….”

두 남자가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젤린은 최근 들어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읽기 시작했다.
이런 무거워 보이는 상황에서는 갑자기 맥을 끊는 개인적인 얘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 아니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종용될 거리도 아니라는 것쯤은 대충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갉작갉작 엄지손톱끼리 서로 긁는 손장난만 하며 별다른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로젤린은 배가 고팠다.
고작 과일과 빵 몇 쪼가리를 먹는 것 정도로는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이 그녀의 위장을 감돌았다.

마침 반가운 소리가 울렸다. 꼬르륵, 꾸르륵 하는 우렁찬 소리였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얘기하던 두 남자가
대화를 중단하고 로젤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젤린이 방긋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들으셨습니까? 배가 고픕니다! 알아주시는 겁니까?


그녀가 너무나도 해맑은 표정을 지어서, 그들은 일순 잘못 들은 건가 착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배는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얼굴 근육을 씰룩이며 로젤린의 복부쯤에 시선을 두자,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 배에서 난 소리입니다. 손이라도 번쩍 들어 보일 기세였다.

리카르디스는 입가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음…… 로젤린 경.”


“예! 전하!”

“혹시…….”

“예!”

“배가 고픈가?”

“예, 전하!”

이렇게 힘차게 대답할 것까지야. 상급 기사 서임식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리카르디스는 이마를 짚는 척, 얼굴을 가리고 나서야 흐느끼며 웃었다.

“몸도 다 낫지 않은 사람이…… 흐흠, 배가 고프면 쓰나.”

“그렇습니다!”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해. 오는 길, 정말 수고 많았다.”

“호위가 적습니다. 곁을 지키겠습니다.”

“요즘 들어 암살자들의 수준이 급격히 낮아졌지. 발타 쪽에서 몸을 사리는 것 같더군. 그대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하카브의 도움이 끊기자, 마음이 급해진 엘피디오가 암살자라면 닥치는 대로 보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검은달의 암살자들도 막아 냈던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고작 국내의 어중이떠중이 암살자들을 처리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덕분에 리카르디스는 어느 때보다도 쾌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줄도 알았다. 잇세리온이 가세해서 그녀를 달랬다.

“오늘만이라도 푹 쉬시죠, 경. 축제 날이 아닙니까. 온 거리에 먹을 것, 구경할 것, 먹을 것이 넘쳐 납니다.”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을 바라보았다. 지금 ‘먹을 것’ 두 번 얘기한 거 아닌가? 어쩐지 실수가 아닌 것 같았다.

“……전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반복된 먹을 것 얘기 두 번에 로젤린은 혹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곧 리카르디스를 두고 갈 바에는 사흘간


굶겠다는 듯 결의에 찬 눈빛을 했다.

리카르디스가 팔짱을 끼며 코로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상관의 입장에서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로젤린은 황자의
명령이라 해도 잘 듣는 자가 아니었기에 숨어서 호위할 것이 분명했다. 리카르디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축제에 볼일이 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습니까?”

로젤린이 반색했다. 잇세리온은 얼굴 표정을 구깃구깃하게 만들었다. 그런 일정 없습니다, 전하! 라고 반박할


마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과 지긋하게 눈을 맞추며,

“볼일이 있었어.”

하고 단정 짓는 바람에 말하기도 전에 막혀 버렸다. 잇세리온은 분한 마음에 큭, 윽. 하며 목 끝까지 차오른


온갖 말들. 안 된다. 위험하다. 무슨 생각을 하시냐. 말이 되냐. 따위의 모든 것들을 속에서 잠재워야만 했다.

78 화.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로젤린만 신났다. 리카르디스는 “그래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군.”이라는 태평한 대답을 하며 불만스러워 하는


잇세리온에게 손짓했다. 준비하란다. 잇세리온은 속을 부글부글 끓이며 옷이며 돈이며 축제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물론, 리카르디스 정도의 신분을 지닌 사람이 고작 호위 한 명만을 대동한 채, 성 밖을 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호위를 책임지는 스타스에게 그 소식이 들어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잇세리온에게 난데없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가 다급히 집무실로 찾아왔다. 무슨 일로 나가시느냐고 물으려던 스타스는 복귀 보고를
까맣게 잊은 채 신나서 희희덕거리는 로젤린을 발견했다.

그는 로젤린을 잠시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왔다. 잠시 후 돌아온 로젤린은 스타스의 뒤에서 시무룩해져 있는
상태였다. 호되게 혼난 모양이었다.

이후, 스타스는 리카르디스로부터 ‘축제에 볼 일이 있어 가 봐야겠다’ 라는 말을 듣고는 다시 로젤린에게 슬쩍


시선을 두었다. 매년 축제마다 소란스럽다며 질색하던 리카르디스가 수배는 시끄러울 게 빤한 거리로 나갈 이유가
짐작된다는 표정이었다. 황자가 기사를 위해 놀러 나가려 한다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스타스는
최선의 인선을 위해 골똘히 고민했다.

야간 근무를 맡은 상급 기사 네 명. 파르딕트, 하가넬, 르원, 슈텐.

하급 기사 두 명. 바스티안, 클로드.

총 일곱 명의 호위 인력이 움직였다. 다들 하얀 제복을 벗고 가벼운 셔츠와 튜닉으로 갈아입었다. 사람들이 산을


이루고 강을 이루는 축제 거리. 호위도 두 배로 번거로울 것이 뻔했지만, 축제에 간다고 하니 모두들 은근히
즐거워했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도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복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쪽의 머리색은 밤하늘이고,
다른 한쪽은 아주 달빛 별빛마냥 찬란했다. 심각하다. 심각하게 눈에 띄었다. 잇세리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 사람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나서야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 * *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흥에 취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마차 안까지 실려 왔다. 로젤린이 잽싸게 창에 붙어


바깥을 구경했다. 어두운 밤이 잠시 사라진 듯 모든 공간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여기저기 다양한 색깔의 등불들이 비추는 거리에는 어린아이들도 돌아다녔다. 전국을 떠도는 서커스단이 공연
준비를 하고 있고, 모든 상가들이 한몫 잡기 위해 열심히 호객 행위를 하는 중이었다. 낮부터 쭉 이어진 축제는
밤이 되자 더 북적이기 시작했다. 최초의 하얀 밤과 검은 달이 뜬 날. ‘그림자 없는 밤’을 기리는 축제이기
때문이었다. 작은 마을, 큰 영지 할 것 없이 밝게 빛나며 밤을 몰아냈다. 사람들은 밝은 색의 옷을 입고,
검은색에 가까운 것은 모두 가리거나 깊은 곳에 숨겼다.

리카르디스는 이런 국가 행사에 대해 건조한 태도를 보이는 편이었으나, 마차에서 내린 로젤린을 보고는 거리의
모든 이처럼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됐나…….’

로젤린은 그야말로 굉장한 흥분 상태였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 가며 삭삭 훑어보는 빠르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코를 움찔거리며 후각에 집중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여기저기서 풍겨 왔다. 배고픈 그녀에게는
무엇보다도 치명적일 것이다.

“꼬리가 붙었나?”

리카르디스가 르원에게 묻자, 르원이 로젤린을 쳐다봤다. 로젤린이 고개를 좌우로 젓는 걸 확인한 르원이 답했다.

“확인된 바 없습니다.”

“그러면 됐군. 그대들도 조금 느슨해져도 괜찮지 않겠나.”

“전하!”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쓰며 파르딕트의 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툭 쳤다.

“혹시 설교용 단상이 필요하나, 파르딕트 경? 올라가서 크게 외쳐 보지그래.”

아프지 않긴 했지만 뜨끔은 했다. 확실히 계속해서 전하, 전하아! 하고 목 놓아 부른다면 누구라도 이곳에 귀한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파르딕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싼,
누가 보아도 호위 대형을 짜고 있는 그들에게 목소리 낮춰 얘기했다.

“호칭 정리부터 하지. 일단 나는…… 도련님으로 할까.”

“예, 전하!”
“……도련님이라고.”

“예, 도련님!”

다들 약간 모자라긴 한데, 대답은 곧잘 했다. 리카르디스는 기사들을 쭉 둘러보았다. 제복을 벗고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지만, 단련된 두터운 몸과 곧은 자세는 숨겨지지 않았다.

검으로 인한 흉터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으나 불량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가 보아도 기사였다. 알맹이가
그대로인데 옷만 바꿔 입으면 뭐하나. 리카르디스는 짜증 어린 목소리로 그들을 질책했다.

“좀 이 거리의 분위기에 맞출 수는 없는 건가?”

기사들은 우물쭈물하며 그의 눈치를 봤다. 고급스럽긴 하지만 돈 많은 평민들이 입을 법한 복식인데 뭐가 문제인


걸까?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본래 평민 출신이었던 르원만 피식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대들은 서로 애칭을 부르는 게 좋겠어. 말투도 좀 비격식적으로 바꾸고. 그대들의 분위기가 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일상 속에 무뎌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파르딕트 경부터 시작해.”

“파르파르입니다.”

파르딕트를 제외한 여섯 명이 인상을 찌푸렸다. 로젤린만 멀뚱히 “파르파르.” 하며 입으로 한번 되뇌어


암기했다. 그 다음으로 로젤린이 “……로즈입니다.” 하고 반 박자 늦게 답했다.

딱히 애칭이랄 것도 없고, 이 자리에서 재빠르게 만들어 낼 만한 능력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로젤린의 어머니인
에델바이스가 부르던 것을 떠올려 입 밖에 내보냈지만, 별로 좋아하는 호칭이 아니라 인상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이후로 하니, 루루, 비스탕, 크림, 슈슈 등의 귀여운 애칭이 건장한 남자들의 입에서 줄줄이 튀어나왔다.
실제로 그들의 어머니가 사용하는 애칭이라는 사족이 덧붙여진 관계로, 리카르디스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참혹했다.

“환장하겠군.”

상처만 남은 애칭 정하기 시간이었다.

파르파르는 입에 낯선 호칭을 사용해 가며 어설픈 연기를 보였다.

“저, 기. 두 번째 골목의. 주점에, 숙성 사슴 고기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들어 봤어, 로, 로즈?”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속지 않을 연기였으나, ‘클로드 경’, ‘슈텐 경’이라는 딱딱한 말 대신, “크림.” “
슈슈.” 와 같은 애칭으로 부르다 보니 주위 행인들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게 보였다. 이런 어설픈 수작이
생각보다 잘 먹히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자신이 로즈라고 불릴 때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동료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입술을 앙다물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하지만 파르파르에게 “떽끼. 로즈 이 녀석! 이것도 다 작전이야!” 라고 혼난 후에는 볼
안쪽을 잘근잘근 씹으며 혼자 분을 삭여야 했다.

“로즈.”
그걸 지켜보던 도련님이 그녀의 입에 구운 닭다리를 물려 주었다. 굳어 있던 로젤린의 얼굴 근육이 스르르
이완되었다. 마치, 단 한 번도 심기가 불편해 본 적 없는 사람 같았다. 그 이후로는 호칭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배고픈 로젤린보다는 배부른 로즈가 좋다는 것이 아닐까.

초반에는 누가 봐도 이름만 귀여운 기사들이던 그들이 서서히 행인들의 분위기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도련님에게
별다른 위험이 없으리란 사실을 서서히 깨우친 것이다. 위험이라고 해 봤자 삼류 건달이나 소매치기 정도였는데,
파르파르와 하니, 슈슈의 덩치를 보고도 다가올 수 있는 자는 손에 꼽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자들은 어김없이 나타난 로즈에게 제압되었다. 재빠르게, 하지만 상대를 다치지 않게
무력화 시키는 솜씨가 훌륭했다. 그녀의 밑에서 꿈틀거리며 벗어나려던 소매치기는, 로젤린이 귓가에서 낮게
속삭이는 몇 마디를 들은 후 시체처럼 미동 없이 누워 있어야만 했다.

로젤린이 방긋 웃었다. 마카롱에게 배운 몇 가지 험한 말들을 했을 뿐인데 효과가 엄청났다.

‘마카롱한테 말해 줘야지.’

로젤린과 기사들에게 걸린, 축제의 좋은 뜻을 해치려는 불순한 분자들은 전부 치안대에 압송되었다. 경례하는
남자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평상복을 입고 있지만 워낙 유명 인사라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파르파르.”

“왜, 로즈.”

“저거 사 줘. 나 돈 안 들고 왔어.”

파르파르는 허, 참, 내. 어이가 없으려니. 너 나한테 빚진 거 있거든? 방패 값 물어내라? 툴툴대면서도 그녀가


사 달라는 소 염통 직화 구이의 대금을 치렀다. 이후 그녀는 하니 이거 사 줘, 슈슈 저거 사 줘, 비스탕 저거 사
와 하고 돌려 가며 빚을 지다가 안 되겠는지 도련님에게 돈을 꿨다.

“월급 가불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도련님. 일 열심히 하겠습니다.”

세상 공손한 태도라서 도련님은 알겠다고 했다. 기사들은 악세사리나 축제 기념품 등의 쓸데없는 것들을 사면서도
먹을거리가 보이면 꼭 하나씩 사서 로즈의 손에 들렸다.

그녀는 도련님에게 받은 과일과 크림이 잔뜩 들어간 크레페를 먹을 쯤에는 살짝 울먹이고 있었다. 매일이
축제였으면 좋겠다나. 마침 옆을 지나가던 어린 남자아이가 매일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겠다는 똑같은 말을 해서
리카르디스는 잠시 손으로 얼굴을 덮어야만 했다. 흑흑 소리가 나며 리카르디스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우시는 겁니까, 도련님?”

“아니 잠시…… 머리가 아파서…….”

어떻게든 어물쩍 넘어갔다. 동그란 달이 밤하늘에 가장 높게 걸릴 쯤엔 기사들도 완벽하게 축제에 동화되었다.


이제는 도련님을 호위 하는 게 아니라, 도련님을 끌고 다니며 놀러 다니는 느낌에 가까웠다. 로즈와 파르파르는
죽이 잘 맞는지 많이 먹기 대회 또는 많이 마시기 대회마다 석권하며 축제를 만끽했다.
79 화.

밤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이 많아졌다. 도련님 주위를 원의 형태로 호위하던 기사들의 간격도 더욱 좁아졌다. 키가
큰 사내들에 의해 앞이 잘 보이지 않자, 로젤린이 종종 헤매었다.

“이런, 이러다 길이라도 잃겠어. 이리와 로즈.”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어깨를 끌어 제 곁에 서게 했다. 기사들이 방패막이 되어 걷기가 수월해졌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리카르디스가 걸고 있는 꽃 목걸이의 향기가 진해졌다. 로젤린이 코를 킁킁거리며 꽃향기를 맡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제 가슴께에서 떠도는 로젤린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먹어도 된다.”

“네.”

로젤린은 칼릭스에게 배운 대로 이파리를 떼어 내고 꽃술 뒷부분을 머금고 쪽쪽 빨았다. 리카르디스도 그녀를


흉내 내서 연분홍의 꽃을 입에 물었다. 한 방울도 안 되는 달콤함이 꽃 향과 함께 입안에 물씬 풍겼다.

“……오랜만에 해 보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예전에 많이 했었지.”

리카르디스는 그 말을 내뱉으며, 칼릭스가 거리에서 꽃을 물고 다닌 일을 더 이상 놀릴 수 없게 되어 버렸음에


아쉬워했다.

로젤린은 어린아이들이나 살 법한 싸구려 악세사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조금이라도 반짝이는 게 보일라치면 멈춰


서니, 이쯤 되면 까마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로젤린은 알록달록한 물건이 무질서하게 올라간 가판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쭈그려 앉아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열성적으로 살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의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았다.

“필요하다면 사 줄테니 몇 개 골라 봐.”

“아니요. 저 돈 많습니다.”

뭐어?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다 삼키지 못해 조금 내뱉어 버렸다. 로젤린은 색이 비슷한 펜던트를 두 개 들고는
열심히 등불에도 비춰 보고 눈에 가까이도 대어 보았다. 그리고는 큰 결심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사겠습니다.”

“어머, 아가씨가 안목이 높으시네!”

“그럼요.”

장사치들이 으레 하는 말에도 로젤린은 뿌듯해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 옆에 딱 붙어서 칭찬했다.

“예쁜걸. 반짝반짝하고 투명해서.”

“네, 되게 예쁩니다. 도련님 눈동자처럼.”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딱 굳었다. 그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어, 어 뭐…… 내 눈이 좀…… 보석 같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 그래서…… 산 건가?”

“네, 예뻐서.”

리카르디스의 귀 끝이 붉어졌다. 그가 어색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덮은 후드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오갈 곳 없이


방황하던 그의 시선이 가판대 위의 또 다른 펜던트에 닿았다. 예쁜 페리도트색. 리카르디스는 부끄러워하던 것도
잊고 손을 뻗었다. 그는 옆에서 구경 중이던 로젤린의 얼굴 옆에 펜던트를 딱 붙였다.

“이건 네 눈 색과 비슷하다. 로즈.”

“아, 진짜네요. 예쁩니다. 제 눈도 예쁘니까요.”

로젤린이 상체를 기울이며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얼굴과 얼굴이 마주했다. 머리를 덮은 후드의
끝자락이 닿을 정도였다. 축제를 다니는 내내 후드로 가려져 잘 보지 못했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여기저기
달린 등불로 인해 하얀 얼굴은 은은하게 빛났다.

리카르디스는 펜던트의 가짜 보석보다 영롱하게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았다. 가늘게 뜨고
있는 눈가가 떨리고, 눈썹은 찌푸려져 있었다.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리카르디스는
입이 바짝 말라와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래.”

로젤린이 눈을 휘며 웃자 그녀의 눈동자 안에 담겨 있던 등불들이 반짝거렸다. 리카르디스가 얼굴을 붉히고는 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아주 예쁘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로젤린은 용케 알아들었는지 “그렇지요?” 하고 신나 했다.

그리고 기사들은 이 모든 광경을 네 발짝 뒤에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하니와 루루는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전하…… 가시밭길을…… 걸으시는…… 우리 가엾은 전하…… 그들은 눈물이 고여
반지르르해진 눈으로 자꾸 먼 하늘만 바라봤다. 아래를 봤다가는 뚝뚝 흘릴 것 같았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리카르디스는 지금 로젤린을 단순한 부하로 대하고 있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도
못한 종류의 감정이 표출되고 있어 기사들은 억 소리도 못 내고 굳어 버렸다.

물론 리카르디스 혼자만의 얘기인 것 같긴 했으나, 그래서 더 문제였다. 리카르디스가, 2 황자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가 짝사랑을 한다? 심지어 상대가 로젤린 에스터? 소설로 나와도 허황되다고 욕먹을 판에,
눈앞에서 목격하니 충격이 세 배였다.

거기에다가 화려한 언변은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어린애 소꿉놀이하듯이 이거 예뻐, 저거 예뻐. 이러고 있으니
가슴이 갑갑해지고 숨이 턱턱 막혀 왔다.

하지만 소꿉놀이라도 열심히 해 보겠다는 필사적인 노력이 보였기에 신하된 자로서 기사들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졌다.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

“로즈! 저기에 맛있는 거 있다!”

파르딕트의 외침에 로젤린이 한 마리의 표범처럼 거리를 달려갔다. 하니가 열 받아서 파르파르의 정강이를 깠다.
루루도 이 고래 새끼…… 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파르파르만 영문을 몰라 얼떨떨해하며 까인 정강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 * *

로젤린은 혼자가 되었다. 대왕 꼬치를 발견해 양손에 떡하니 들고 흡족한 마음에 자랑이라도 할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리카르디스도, 같이 이것저것 잘 사 먹던 파르딕트도, 다른 기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파도같이 밀려들었고, 로젤린도 어어 하며 밀려나 발길이 닿는 대로 이동해야만 했다.


로젤린은 좁은 골목 사이에 몸을 쏙 집어넣었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아는 사람은 없었고,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로젤린은 벽에 기대어 시무룩하게 쭈그려 앉았다. 양손에 들고 있던 대왕 꼬치 두 개가 서서히 식어갔다.
그녀는 침울함에 젖은 얼굴로 우선 꼬치를 먹기로 했다.

후후 불어 베어 먹으니 한 조각만에 입안이 가득 찼다. 소스는 달콤하고 껍질은 타서 살짝 눌어붙은 부분이 있어


고소했다. 먹다 보니 저조했던 기분이 좀 괜찮아진 것도 같았다. 로젤린은 입을 부지런히 놀렸다. 어서 먹고
일행을 찾으러 가야 할 듯했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여기저기 쏘아 다니는, 흥분 상태의 로젤린을 본 리카르디스는 미리 이 사태를 예견했으므로


…….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로즈?]

[대광장의 분수 앞에서 기다립니다.]

[훌륭해.]

잃어버렸을 때의 목적지 또한 정해져 있는 상태였다. 대광장의 분수. 로젤린은 입안으로 중얼거리며 목적지를
다시 한 번 되뇌었다.

꼬치를 다 먹은 후 로젤린은 술에 취한 남자가 알려 준 대로 걸어, 대광장에 도착했다.


‘대광장?’

무척이나 클 것 같은 이름에 비해, 좁은 거리가 얼기설기 이어져 있는 공간이었다. 밤인 줄도 모르고 빛나던


여타 거리와 다르게 너무 어두웠다. 마치 이곳만 잠들어 있는 듯.

악기를 연주하고, 행복함에 푹 빠져 노래하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불콰하게 물든 얼굴로 실성한 듯 웃고


있거나, 또는 살벌하게 인상을 구기며 거리에 새로 들어온 인물을 훑어볼 뿐이었다.

‘음, 대광장 아니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이 암흑가의 입구에 들어서기 훨씬 전부터 알았겠지만 로젤린은 이미 중심부까지 들어선
상태였다. 이쯤 오니 로젤린도 모를 수가 없었다. 뱀의 대가리를 자르고 단검에 묻은 피를 날름 핥고 있는
남자는 암만 보아도 축제에 어울리지 않았다.

[나쁜 사람들이 모이는 거리도 있으니. 그런 곳은 안 들어가는 게 좋아 로즈.]

대충 여기가 나쁜 사람들이 모이는 거리이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뱀의 피를 핥는 건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냥


느낌이 그랬다. 로젤린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도중, 아까 지나쳤던 가판대에 눈길을 빼앗겼다. 작은
유리병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는데 뭔가 알록달록해 예뻐 보였다.

“이게 뭡니까?”

로젤린의 질문에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눈썹 한쪽을 추켜세웠다. 그는 로젤린이 거리로 들어 올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는 몸짓이나, 깔끔한 후드나, 걸음걸이가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아 저절로 눈길이
갔다고 말하는 쪽이 정확했다.

눈이 삐지 않은 이상 잘못 들어올 리 없으니, 아마 새로운 고객쯤 되리라. 하지만 그가 파는 품목 중, 돈깨나 쓸


것 같은 사람이 살 만한 물건은 없었다. 뒷골목에 나도는 것 중에서도 유독 싸구려였기 때문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약이지만 아가씨가 살 만한 약은 아니겠군.”

“맛있는 건가요.”

와 정말로 이 사람은…….

‘완벽하게 잘못 들어왔구나.’

새로운 고객도 아니었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작게 속삭였다.

“……얼른 이 거리를 떠나시게. 아가씨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야.”

보름달이 성의 끝에 걸리는 축제 날. 암흑가라 하더라도 아주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었다. 상인이 친절을 발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눈치가 심각하게 없어 보이는 이 아가씨도 축제를 즐기러 나왔을 테니, 부디 불운이 빗겨
나가길 바라며.

그러나 상인의 경고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가 그랬듯이 거리 골목골목에 있는 남자들 또한 로젤린의 ‘맛있는


건가요.’ 발언으로 새로운 인물이 고객이 아님을 완전히 깨달았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약을 담은 유리병을 바라보던 로젤린의 시선이 옆으로 이동했다. 거리에 들어올 때부터
따라온 집요한 시선들이 한층 더 날카로워진 것을 눈치챈 것이다.

로젤린은 물건을 구경한다고 어정쩡하게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남자들이 검집에서 무기를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전 뱀의 피가 묻어 있던 단검을 핥은 남자도 다가오고 있었다.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지만, 이미 일어나 버린 후였으니. 빨리 정리하는 게 최선이다. 로젤린이 몸


안에서 마력을 대류 시켰다.

80 화.

‘한 사람당 한 방씩이면…… 기절시키거나 다리를…….’

머릿속으로 살벌한 생각을 하며 로젤린은 거리를 쟀다. 남자들이 점점 다가왔다. 가판대 상인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이 좋은 날, 불행해질 여자의 미래가 빤히 보였다.

열 명이 넘는 남자들이 로젤린을 넓게 둘러쌌다.

그들 중 하나가 자신이 가진 목소리보다 더 낮게, 위협적으로 “이봐, 아가씨.”라고 말하기 바로 직전.

“거기 잠깐.”

저 멀리서 로젤린을 둘러싼 무리를 향해 누군가 말을 꺼냈다. 남자들이 뒤를 돌아봤다. 로젤린도 고개를 돌려 이
긴박한 상황을 깨트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남자였다.

로젤린은 곰곰이 남자의 목소리를 반추했다.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데…….

“그쪽은 내 일행인데.”

남자들이 코웃음을 쳤다.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이쪽이 댁의 일행이라고 우리가 얌전히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나?”

남자는 무리의 대장처럼 보이는 사람 앞에 멈춰 섰다.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는 눈부터 코까지 덮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있지.”
남자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무거웠고, 베일 듯 서늘했다. 그제야 로젤린은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목소리는 같았지만, 평소와 분위기가 너무 달라 잠시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그 편이 너희들에게도 좋을 거라.”

가면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을 보고 남자들이 움칠 몸을 떨며 몇 걸음 물러섰다. 머리가 세모난 검은 뱀이 그려진


가면. 남자가 말한 대로 건드려서 하등 좋을 게 없다는 뜻의 표식이었다.

서쪽 암흑가를 지배하는 큰손, 검은독사의 문양이었다. 남자가 그 문양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은
검은독사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었다. 건드렸다가는 피를 볼 게 분명했다.

남자들이 다급한 손놀림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아, 아이고. 저희가 귀한 분인 줄도 몰라 뵙고…… 하여간 거리가 너무 어두워서 헤헤…… 제가 항상 등불 좀


많이 걸어놓자고 건의를 하는데도, 참…… 사람들이 그러면 다른 거리랑 차별화가 안 된다고 그러지 뭡니까…
….”

“내가 너희들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남자들이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슬슬 멀어졌다.

로젤린이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물약을 파는 상인의 가판대에 내려놓았다.

“이 패의 주인에게 전해라. 거리의 들쥐 때문에 내 기분이 몹시…… 상했다고.”

검은 독사가 그려져 있는 패와, 질 좋아 보이는 보석이었다. 상인은 화들짝 놀라며 그걸 소중히 품 안에 넣고


가판대를 버려 둔 채 어느 골목 구석으로 사라졌다.

방금 사라진 놈들을 잡아 족치라는 말이었으나, 로젤린은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로젤린의 앞에
멈춰 섰다. 한참 망설이던 그가 로젤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도 로젤린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보았다. 커다란 손은 따뜻했다. 맞닿은 온기에 로젤린의 몸이 서서히 이완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그녀는 만약 자신이 남자의 정체를 몰랐다 하더라도 이 손을 뿌리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말없이 골목을 걸었다. 반쯤 무너진 판잣집과 안쪽이 보이지 않는 가게들이 늘어선 곳이었다.
그 수많은 공간에서 음습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시선은 로젤린 그녀를 향하기도, 남자를 향하기도 했다.

어두운 밤. 어두운 골목. 뚝, 뚝……. 어디선가 물이 떨어져 고이는 소리. 퀴퀴한 곰팡이 냄새, 주위를 맴도는
시선까지.

로젤린은 갑작스럽게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숨이 거칠게 일어나고, 신경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만이 만드는 걸음 소리가 마구 불어나 뒤따라오는 기분이었다.

아까의 남자들이 쫓아온 것인가? 로젤린은 주의를 기울여 골목골목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에 집중했으나, 여전히
두 사람의 걸음 소리 뿐이었다. 로젤린은 마력을 사용해 청각을 강화했다. 작은 촛불이 아롱거리는 수십 개의
공간에서 사람들이 속삭였다. 저들은, 저 남자는. 오래된 손님이. 여자를 건드려서는, 정체는? 사람들이
로젤린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여러 말이 겹쳐져 온전한 문장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그 두루뭉술한 언어들이
뾰족하게 날카로운 형태를 띠고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았다.
로젤린이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남자가 작게 속삭였다.

“걱정 마요.”

서릿발 같던 아까와 달리, 다정한 목소리였다. 마치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안다는 듯. 남자가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우리를 쫓아오지 않고.”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누구도 당신을 위협할 수 없으니.”

온기가 묻어 있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로젤린은 제 안에서 서서히 조여 오던 기묘한 감각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가시처럼 곤두서 있던 신경과 거칠어졌던 심장박동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로젤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웃고 있던 남자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

남자는 잡고 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려 로젤린의 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딱히


기분 나쁠 것도 없어서 로젤린은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았다. 남자가 곤란하다는 듯 웃고는 다시 걸었다.

남자는 지리를 잘 알고 있는지 로젤린이 한참 헤맨 복잡한 거리를 금세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어두운 골목의
끝과 밝은 거리가 만나는 곳에 잠시 멈춰 섰다. 한 걸음 밖에, 로젤린이 찾고 있던 축제의 등불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남자가 가면을 벗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둠에 잠겨 있던 황금색 눈동자가 본연의 빛을 되찾았다.

“저는 일이 있어 이쯤에서 헤어져야 할 것 같네요. 오늘 이곳에서 만난 건 비밀로 해 줄래요?”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에게 혼나기 전에 디에즈와 만났다는 화제로 시선을 돌리려 했던 터라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가 대충 로젤린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웃었다.

“길을 잃어버렸었거든요. 창피하니까 비밀이에요.”

길을 잃어버린 또 다른 사람으로서 로젤린은 자신이 창피할 만한 상황에 처해 있었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비밀.”

디에즈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곰곰이 무언가를 되짚었다. 그는 곧 이상한 점을 깨닫고는 그녀에게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거기 있었죠?”

언제나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던 사람이었다. 만남부터 지금까지 ‘당신’이라는 호칭을 쓰는 걸 보면 정체가
밝혀지면 곤란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리카르디스 전하도 기사들더러 애칭을 사용하고 그 자신도 도련님 행세를
하지 않았던가. 로젤린은 디에즈 또한 그런 거라 생각하며 그의 이름과 정체를 말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일행을 만나려 사람들에게 물어서 대광장에 가려고 했습니다. 저도 길을 잃었나 봅니다.”

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축제 날에 술 취한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 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어요. 그렇다 쳐도 완전히 다른 방향이긴 하군요.
이 길을 따라가면 곧바로 대광장이 나와요.”

디에즈는 문득 불안했는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누가 말 걸면 따라가지 말고, 한눈팔지 말고 곧장 가세요.”

성을 나올 때에 상급 기사들과 리카르디스, 잇세리온에게 번갈아 가며 들었던 경고 문구였다. 로젤린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심드렁한 반응에 그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맛있는 건 일행들 만난 다음에 사 먹고요.”

“네.”

정말 이렇게 믿음이 안 갈 수가!

불안해하는 디에즈를 뒤로하고, 로젤린은 가방 안을 열심히 뒤적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로젤린의 움직임에
따라 아래로 향했다.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사탕, 축제에 여성들이 쓰고 다니는 하얀 레이스 베일, 사냥용
올가미, 아이들 용 나무 단검, 먹다 남은 빵까지. 축제를 즐겨도 너무 즐긴 듯했다.

로젤린은 그 중에서 하얀 레이스 베일을 꺼내 들었다.

“여기요. 선물입니다.”

디에즈는 눈을 크게 뜨고는 베일과 그녀를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선물을 받았다.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

디에즈가 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데, 기쁨을 참는 것 같기도 했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선물을 줬을 때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왜 저에게 이걸…… 주는 겁니까?”

로젤린은 눈알을 굴리다가 의문형으로 대답을 했다.

“잘…… 어울리실거 같아서?”

그냥 딱히 별 이유가 없었기에, 아까의 말을 그대로 답습했다.

“잘 어울리면 아무에게나 선물을 줍니까?”

선물을 줬더니 추궁을 받았다. 그는 평소와 달리 웃지도 않고 굉장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당황했다. 어,
왜 선물을 주냐면…… 잘 어울리면 아무에게나 선물을 주냐면…… 그건 아니지만…….

“제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좋아하면 선물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니깐.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무섭게 추궁할 때는 언제고
대답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하얀 베일을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도 바라던 대답이 아니었나?

“난…….”
디에즈가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이 무사히 돌아와 기쁩니다.”

만난 지 몇십 분이 지난 지금에 하기는 늦은 감이 있는 데다, 나누던 대화에서 어긋나 생뚱맞기까지 한 말이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저도 당신의 무사한 모습을 봐서 기분이 좋습니다!”

디에즈가 그런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 레이스 베일 위로 제 얼굴을 묻었다. 피곤에 지친 사람이 침대에 기대는
것 같았다.

81 화.

로젤린은 디에즈와 헤어진 후 곧바로 대광장에 왔다. 광장에도 먹을 것을 파는 상점과 가판대가 즐비해 있었다.
로젤린은 디에즈의 걱정 그대로 노점 음식에 눈을 빼앗겼다.

리카르디스 및 동료들과의 재회는 그렇게 멀어지는 듯 보였으나, 그녀의 생태를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던
리카르디스 덕에 그녀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상급 기사들을 줄이 가장 길게 서 있는 음식 상점마다 배치해 놓았던
것이다. 로젤린이 ‘줄을 선 집’을 ‘맛집’으로 동일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리카르디스는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고기 맛집 앞에서 로젤린은 파르딕트에게 딱 걸려서 잡혀 왔고, 모두에게 둘러싸여 혼났다.

“로즈!”

파르딕트가 허리에 손을 얹고 왁 소리를 질렀다.

“전…… 도련님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이 녀석!”

로젤린은 입만 쭉 빼고 툴툴거렸다. 잘못한 것은 있으니.

“주인 잃은 개마냥 어찌나 불안해하시는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어!”

부적절한 표현 때문에 파르딕트는 르원에게 걷어 차였다.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낀 채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아, 자는 건가 싶을 정도의 평온한 얼굴이었음에도 로젤린은 힐끔힐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다친 곳은?”

몰래 훔쳐보던 중 리카르디스가 갑작스럽게 얘기를 꺼내서 로젤린은 화들짝 놀랐다. 곧 그가 말한 내용을 반추한
그녀의 눈동자에 의심의 빛이 서렸다.

‘분명 혼날 때인데……?’

생각보다 목소리가 담담했다.

“……없습니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뜨고 로젤린에게 다가왔다. 그보다도 키가 큰 사내들이 무섭게 으르렁거리며 위협했을 적에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 그녀에게 밀려왔다. 혼난다! 완전 혼난다!

“……그 의심의 눈빛은 뭘까. 아무튼 다친 곳이 없다니 그건 다행이군.”

앗, 오늘의 전하는 굉장히 상냥하다! 로젤린은 풀 죽었던 강아지의 탈을 벗어 던지고 방긋 웃었다.

“그렇다면 로즈. 헤어진 사이에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전투를 벌였거나, 혹은 치안대가 주목할 만한 사건을
일으킨 적이 있나?”

싸움 직전까지는 갔지만, 직접적으로는 싸우지 않았으니까…… 말 안 해도 되는 게 아닐까!

“없습니다!”

활기찬 대답에 리카르디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천천히 뒤로 젖혔다.

‘진짜로 없기는 한 것 같군…….’

리카르디스는 로젤린과 떨어진 이후 곧바로 대광장에 왔다. 떨어져 있는 내내 그는 눈을 뜨고도 악몽에 시달렸다.
로젤린이 소동을 일으키거나, 혹은 사건에 말려들거나, 또는 치안대를 패는 장면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상상 속
로젤린이 일으킨 여러 가지 사건의 공통된 점은, 마지막은 항상 그녀가 감옥 안에 갇힌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수를 헤아려 놓아야 실제로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으므로, 로젤린은 그의 머릿속에서 세 번쯤 반역자가
되었고, 다섯 번쯤 감옥을 부수고 탈옥했다.

눈앞에서 히히 웃고 있는 로젤린을 보니 그제야 불안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부릅떴다. 그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고 로젤린을 혼내기 시작했다. 호위 기사가 호위 대상을 놓쳐? 그것도 먹을 거 때문에?
내가 음식만도 못하나? 나야, 먹을 거야! 하며 그녀를 들들 볶아 댔다.

그렇지만 파나 채소가 끼워져 있지 않은, 고기만으로 이루어진 대왕 꼬치가 그녀를 현혹시킨 주범이었다는 사실을
들은 리카르디스는 “아, 그건 확실히…….”라는 반응을 보였다. 고양이 나무에 취해 버린 고양이처럼, 꽃에게
날아가는 나비처럼 홀렸으리라. 그쯤 되면 한눈을 판다기보다는 본능의 영역이 아닐까.

시무룩한 로젤린이 과일주를 마시고 다시 활기를 되찾았을 때였다. 떠들썩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대광장의 정중앙, 설치된 단상 위에 하얀 예복을 입은 남자가 올라왔다. 옷의 차림새와 목걸이의 모양이 남자의
지위를 나타내고 있었다. 대륙에 단 일곱 명밖에 없는 대신관 중 한 명이었다.

머리를 단정히 묶거나 깔끔하게 정리한 타 신관들과는 겉모습부터가 좀 달랐다. 등불로 인해 금발같이 보이는
옅은 분홍색 곱슬머리는 부스스하게 자연스럽게 풀려 있었다. 헐렁해 보이기도, 거꾸로 입은 것 같기도 한 엉망인
옷매무새 때문에 그가 입고 있는 것이 예복인지 하얀 커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대신관은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성전을 뒤적였다. 덕분에 모자도 더 삐뚤어졌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나이 든


사람처럼 느릿했다. 하지만 환한 단상 위의 대신관은 스무 살이나 겨우 채웠을까 싶을 정도로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신관이 되기 위해서는 성력의 양도 중요했지만, 신의 믿음 아래 얼마나 오래 수련했는지 또한 무시할 만한


항목이 아니었다. 그러니 저 젊은 대신관은 아주 어릴 때 신전에 들어갔거나, 또는 세월을 무시할 만큼 뒷배가
단단하다는 얘기였다.

로젤린을 제외한 일행들은 모두 그의 정체를 알아챘다.

“라헤안시 대신관님이 설교를 맡으신 모양이군요.”

설원의 월계수. 그 이름을 버린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의 4 황자. 라헤안시였다.

하얀 밤과 관련된 국가 행사에는 항상 대신관들이 참가했다. 올해의 ‘그림자 없는 밤’은 라헤안시가 맡은


모양이었다. 황자 출신의 대신관이라지만, 늙은 대신관들의 압박을 피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성전 글귀를 읽어 주는 것이나,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 역시 신관의 일이었다. 하지만 귀족들과 달리 평민들에게는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글을 모르니 성전을 줘도 소용없고, 내용도 이해 못하니 풀어 설명해 줘야 했다.
주머니에 은근슬쩍 찔러 주는 금은보화도 없으니, 이런 곳에 기꺼이 오겠다 하는 대신관이 있을 리가.

항상 인상을 찌푸리거나 귀찮아하는 표정을 숨길 시늉도 안하는 신관들을 보아 온 탓인지, 사람들은 라헤안시의
한껏 풀어진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저 귀한 대신관이 거리에 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다는 기색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누구에게든 저놈은 원래 나무늘보 같은 인간이라며 설명하고 싶었다. 도통 그럴 방도가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공적인 자리에서만이라도 빠릿빠릿하게 굴면 안 되는 건가?’

라헤안시가 한쪽 손을 들었다. 조용하던 군중들이 한층 더 숨을 죽였다.

“어허어 보자 보자, 보름달이 일라베니아의 성 끝에 걸렸으니 이로써 그림자 없는 밤이 찾아왔도다,


백성들이여.”

리카르디스가 눈을 찡그렸다.

“……말투가 왜 저 따위지?”

리카르디스의 싸늘한 반응과 다르게, 광장의 사람들은 “오오……!” 하는 작은 함성과 함께 모두 무릎을 꿇었다.
리카르디스와 기사들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굴욕적이었다.

“태초에 혼돈, 크레안 티다니온의 암흑만이 세상을 메우고 있어 풀 쪼가리 하나 자라지 못했노니, 그 혼돈을
물러 내고 빛을 가져온 자가…… 누구?”
라헤안시는 성전을 대충 읽다가 귀 뒤에 손을 가져다 대며,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태도를 보였다. 마치
대답을 촉구하는 모양새 때문에 광장이 술렁였다. 매년 있는 그림자 없는 밤이지만 이런 설교는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망설이는 게 보이자 라헤안시가 다시 “외쳐 봐, 누구!” 하고 얘기했다. 군중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떠듬떠듬 이, 이델라브힘……. 하고 얘기했다.

“안 들리는구나 더 크게! 누구라고!”

“이델라브힘!”

“그렇다 이델라브힘이시다. 맨 처음 대답한 소녀여. 아주 영특하구나 상으로 성전을 주겠다. 금박이 붙어 있으니
갖다 팔면 돈이 꽤나 될 것이다.”

라헤안시의 뒤로 성수를 들고 있던 평신관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자세히 보니 관자놀이가 씰룩거리고 있었는데,


여간 골치가 아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단상과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소녀는 성전을 건네받고는
어리둥절하다는 듯 눈동자만 굴렸다. 정말로 넘길 줄이야. 리카르디스는 차가운 눈으로 그 광경을 봤다. 미친놈
…….

“이델라브힘께서 빛의 권능으로 크레안 티다니온의 암흑을 걷어 내자, 비로소 세상이 보였나니. 세상이
이델라브힘의 빛을 보았노니. 이 영광을 누구에게 돌려야 마땅하겠느냐?”

“이델라브힘!”

“그렇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구나, 백성들이여. 심각하게 똑똑하니 내 마음이 심히 흡족하도다.”

다들 입을 모아 이델라브힘의 이름을 외치는 광경이 아주 장관이었다. 라헤안시는 보슬보슬한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계속 말했다.

“그러나 크레안 티다니온도 원래의 세계를 가지고 있던 강력한 신이다. 이델라브힘과 크레안 티다니온은 사흘
밤낮을…… 아, 이 사흘 밤낮은 그저 표현상으로 집어넣은 말이니 괘념치 말라. 여하튼 그렇게 싸우고 싸웠으나
이 신들의 전쟁은 완벽한 승자와 완벽한 패자가 없이 끝나고 말았으니…… 그리하여 생겨난 것이 낮과 밤이다.
이델라브힘이 관장하는 낮과 혼돈의 장막이 덮이는 크레안 티다니온의 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신관들이 외워서 읽어 주는 문구들은 그들이 아는 단어로만 이루어져 어렵기 마련이었다. 글자를 좀 알고 배운


자들도 골머리를 썩어 가며 해석해야 하는 것이 성전인데, 라헤안시의 얘기들은 다소 약장수 같고 불경한 감이
있지만 귀에 쏙쏙 들어왔다. 다른 대신관과 황족들이 알면 기함하기는 할 테지만.

“그렇다면 매년 찾아오는 그림자 없는 밤이 무어냐! 그것은 우리의 이델라브힘께서 최초로 밤을 빼앗은 날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힘. 성력이 극으로 치닫는 날, 밤의 장막은 사라지고, 온 세상이 축복의 빛으로 뒤덮이노니.
만물이 소생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성전에는 이 축복의 밤은 우리 미천한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신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 되어 있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은 그 방증이라 한다. 으음 뭐……
솔직히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평신관들이 또 뒤에서 인상을 팍 찌푸렸다. 잘나가다가 꼭 한마디를 덧붙여서…….

“아무튼 그리하여, 이델라브힘의 축복은 독수리와 함께 뭐, 호수로 내려와서 일라베니아 초대 황제 폐하께 뭐,


그 축복의 밤을 열 수 있는 권능을 주셨나니, 어허…… 이 부분부터는 내가 영 재미가 없어서……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대충 그리 알면 된다. 우리 황제 폐하 만만세다.”

“…….”
82 화.

어떻게 뒷감당하려고 저러는 거지? 리카르디스는 저 배짱 두둑한 대신관의 안위가 염려되었다. 그는 제국의 2
황자라는 지위 때문에 갖은 행사에 불려 다니는 몸이었다. 신성 제국의 특성상 행사는 신전이 엮여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만큼 지루한 설교 시간 또한 많이 접해 보았다. 그래서 잘 알고 있었다.

이델라브힘의 뜻을 따르고 그의 축복을 세상에 나누어 주는 것이 신관이었으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영광은
이델라브힘보다 일라베니아의 황제에게 더 치우쳐 있었다.

신성 제국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위대한 신. 그러나 그 신에게 선택받은 황제가 더 위대하다. 신은 멀리 있고.


인간인 황제는 가까이 있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교묘하게 인간인 황제에게 돌아가게끔 교육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정반대로 일라베니아의 위업을 대폭 줄이다 못해 거의 삭제해 버리기까지 했으니. 누군가가 이


설교를 문제 삼는다면 라헤안시에게도 큰 타격이 갈 것이다.

“일라베니아 제국력 589 년. 대신관 라헤안시가 자비로우신 이델라브힘을 대신하여 그대들을 축복하는 바.
헐벗은 자에게 벗어 주고 굶주린 자에게 제 먹을 것을 내어 주란 말은 안 할 테니 나쁜 짓 하지 말고 건강하라.
이상 땡땡 끝이다. 자, 해산!”

라헤안시는 대충 손을 저으며 설교를 끝냈다. 그리고는 목이 타는지 평신관이 들고 있던 접시의 성수를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졸지에 빈 접시를 들고 있게 된 신관의 표정이 볼 만했다.

“아, 아차. 맞다 맞다. 이 항아리에 내 축복을 담은 물이 있으니 한 모금씩 먹고 돌아가거라. 만병통치는


아니지만 감기 정도는 낫게 해 줄 터이니. 어허, 새치기하는 나쁜 아이에게는 줄 수 없다.”

단상을 쭉 둘러싼 큰 항아리들에 그런 비밀이 있을 줄이야. 사람들은 설교가 끝났음에도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다가 성수라는 말에 눈망울을 반짝였다.

신관과 성 기사들의 무서운 눈빛 아래, 사람들은 차례대로 줄을 서서 성수를 마셨다. 신전에 헌금을 어지간하게
많이 내지 않는 이상에야 성수는 쳐다볼 수도 없는 귀한 것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집안에 아픈 사람들을 데리러
가는지 분주하게 광장을 빠져나갔다.

기사들은 짧지만 폭풍 같았던 설교를 반추하며 입을 여전히 다물지 못했다.


“괴, 굉장해.”

그 굉장하다는 말이 과연 좋은 쪽에 속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리카르디스는 그의 말에 동감했다. 굉장한


미친놈이었다.

하지만 단상을 둘러싼 저 수많은 항아리들. 라헤안시는 리카르디스와 엘피디오 다음으로 성력이 강한 편이었으나,
저 항아리들을 모두 성수로 채울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몇 주동안 꼬박꼬박 만들고 모아 둔 것이 아닐까.
세상만사를 귀찮아하는 태도에 비하면 만민을 굽어 살피는 훌륭한 신관의 자세가 아닌가.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고는 광장을 떠났다.

거리의 사람들은 성수를 먹었느니, 안 먹었느니. 그림자 없는 밤이 무엇인지 아느냐며 와와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축제가 한층 더 활기를 띠었다.

잠시 사라졌던 로젤린이 슬그머니 나타나서 성수를 먹어 보고 왔다고 얘기했다. 특별한 맛을 기대한 것 같은데,
그냥 시원하고 맛있는 물이었다며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로젤린은 길을 잃은 전적이 있었던 터라, 또 자리를
함부로 비웠다고 혼났다.

‘아니 근데…… 성수를 먹어?’

먹어도 되는 거야? 리카르디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절단이 일라베니아로 돌아오는 길. 리카르디스는 ‘파편’에 중독되고 큰 부상을 입었던 로젤린을 치료할 때
한계까지 성력을 쏟아부었었다. 그때야 그저 로젤린의 정체를 어림짐작만 할 뿐이었고, 정확히 아는 게 없어
뭐라도 해 보자는 마음이었으나…….

생각해 보니 돕기는커녕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성력과 마력이 간섭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 불안정한 상태에
다른 종류의 힘이 들어갔을 때의 작용은 알지 못했다. 무지가 해악은 아니나, 다소 위험을 동반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로즈. 잠시만 손을…….”

리카르디스가 손을 내밀자 로젤린이 그 위로 손을 탁 얹었다. 커다란 개가 손을 불쑥 내미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리카르디스는 곧 정신을 차리고 본 목적으로 돌아가 성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제 힘을 가르며 들어오는 성력을 느끼고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몸을 떠돌던 성력은 중간중간 어떤 힘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리카르디스는 그것이 마력일 것이라
추측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완전히 분리되어 있던 성력이 로젤린에게 조금 스며들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낮은 수준으로 흡수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그녀 또한 성력을 조금이나마 받아들이는 몸으로
변화를 한 것 같았다.

마력과 성력의 만남은 아주 기묘했다. 물과 기름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섞이지 않는 성질이지만, 서로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 객관적인 사실이 아직까지는 지켜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무엇으로도 정의되지 못한 존재였다. 일반적인의 상식을 온전히 기대하기에는 불안한 부분이
많았다. 정보가 필요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힘. 성력과 마력의 표면적인 부분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이.

리카르디스는 성력과 마력을 연구하는 기관의 이름을 아주 잘 알았다. 그 기관의 이름은 신전이며, 연구자들은
신관이다. 그리고 대신전은 그 모든 정보들이 총망라된 집합체다. 대신관이라면 아마 황태자 위에 오르지도 못한
황자보다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라헤안시…….’

조만간 그를 찾아가 봐야겠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는 로젤린의 손을 꼭 잡았다.

“……길을 또 잃을 수도 있으니까.”

그는 굉장히 현실감 있는 변명을 하며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걷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그의 옆에 바싹 붙어 걷다가


잡혀 있는 손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폈다.

“도련님의 손은 굉장히 크네요. 멋있습니다. 손가락도 길고.”

로젤린이 잡혀 있지 않은 손으로 리카르디스의 손등과 손가락을 덧그리듯 톡톡 두드렸다. 리카르디스의 귀 끝이


빨개졌다. 이후에 후드 자락을 슬쩍 들어 손에서 이어지는 팔목 라인을 은근히 과시하는데 르원은 차마 그 광경을
두 눈 뜨고 보지 못했다.

모두 천천히 두 사람의 뒤를 따르는 중, 눈치 없는 파르파르가 “다들 이렇게 느려서 호위하겠어?”라는 망발을


내뱉었다. 파르파르는 하니에게 매우 혼났다. 육지로 올라왔으면 좀 인간 흉내라도 내란다. 언제까지 고래로 살
거야! 이어서 루루가 너무 진심으로 화내서 파르파르는 굉장히 시무룩해져 버렸다.

* * *

로젤린이 레이몬드와 가벼운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때였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방을 찾아와 머뭇거리다
털어놓았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번갈아 보다 환하게 웃었다.

“아, 정말 축하합니다. 정말 잘됐군요. 수고 많았습니다, 정말.”

‘정말’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엄청난 축하였다. 전(前) 수습 기사들은 감동의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에버하르트는 너무 울어서 말도 못할 정도였고, 레티시아도 마찬가지로 엉엉 울며 로젤린을 얼싸안았다.
에버하르트도 은근슬쩍 안기려고 했지만, 레티시아가 그의 발을 거세게 밟아 무산시켰다.

발타에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만큼 공석도 늘어났다. 제국의 2 황자라는 지고한 신분이기에,
애도의 시간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이 마른가시나무 영지에 있는 동안 추모식과 승단식이 모두 끝났다.

슬픈 일이 있었지만 기쁜 일도 있었다. 몇 년째 수습 기사에서 머무르던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가 드디어 승급한


것이다.

하급 기사로 승급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만 했다. 기본적인 지식과 예법 등의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숙사에서 받는 벌점이 기준보다 낮아야 하는 것 또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검술 실력이었다. 기초적인 체력 검사, 평소 검술 교관의 평가와 수습


기사들끼리의 대무까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그 까다로운 승단 심사를 통과한 것이다.

로젤린 대신 그 승급 심사를 지켜본 레이몬드의 말에 따르면 에버하르트는 마치 다람쥐같이, 레티시아는 마치


표범같이 상대의 공격을 피해 냈다고 한다. 어찌나 날랜 솜씨인지 부단장 나단 경이 눈여겨볼 정도였다고.
“저는 공격을 피하는 능력만 좋아졌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글쎄 상대방의 공격이 다 보이지 뭡니까. 로젤린 경이
저희들을 보는 기분이 그랬을까요?”

에버하르트는 로젤린이 “네.” 하고 정직한 대답을 해도 바보처럼 웃었다. 정식 단원이 되었으며, 또한 봉급도
받고 이름뿐이지만 작위도 하사받았다.

뿌리 출신인 에버하르트는 더욱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레티시아도 가난한 영지의 아가씨였던 터라, 봉급의
얘기를 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여동생들에게 괜찮은 드레스를 선물해 줄 수 있을 것이라며. 정작 그
여동생들은 드레스를 거추장스러워 하는 모양이지만, 언니 마음은 또 다른 듯했다.

로젤린은 수습 기사들을 받아들인 이후 곧바로 제작했었던 검 두 자루를 그들에게 선물했다. 승급한 수습


기사들에게 스승인 상급 기사가 검을 선물하는 것이 관례라는 레이몬드의 조언을 따른 것이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멍한 얼굴로 받은 검을 더듬었다. 레티시아가 검을 들어 허공을 천천히 그었다. 그녀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돌았다.

유명한 장인이 그들이 선호하는 검의 형태와 무게, 손의 크기까지 고려해 만든, 세상에 둘도 없는 검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고려하는 세심함은 로젤린이 아닌 레이몬드의 결과물이었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저


스승의 은혜에 가슴이 사무쳤는지 눈물을 재차 쏟아 낼 뿐이었다. 눈알이 흐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울어서
로젤린은 매우 당황했다. 기쁜데 왜 울지. 우는 그들을 붙잡고 물어봤더니 너무 기쁘면 눈물도 나온다며
에버하르트가 필담으로 알려 줬다.

아, 그래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그럼 매우 기쁜 거로군요. 로젤린은 흡족해하며 눈물을 더 흘리라고 권유했다.


우십시오. 더 우세요. 마음껏.

그 눈물의 현장 뒤에서 레이몬드가 머뭇거리며 “그, 그 검 말이야, 그거 내가…….” 하고 말하려 했지만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의 엉엉 우는 소리에 묻혔다. 그 뒤에도 “내가, 그걸!”이라든가, “그 장인에게 아무나
부탁 못하는데 말이야……!” 따위의 시도가 있었으나 역시나 두 하급 기사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이몬드는 결국 시무룩한 얼굴로 차만 홀짝였다.

83 화.

하급 기사가 된 수습 기사들은, 상급 기사의 지도 아래에서 벗어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자와 스승이 아닌


동료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관계의 형태를 다시 쓰게 되는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정식으로 기사가 된 만큼 임무를 배정받아, 하루 종일 상급자를 따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급 기사가 되면 기사로서 일 인분은 하게 된 것이라 으쓱하게 되어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일을 기피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전과 같이 로젤린을 따르겠노라 자청했다. 임무를 제외한 시간을 그녀를 위해
쓰겠다고 얘기했고, 로젤린은 기뻐서 펄쩍 뛰며 그들을 한 번씩 안아 주었다. 몇 달 되지도 않은 인연의 끈이
질기기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

“발전했지만 부족한 부분도 많으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해 보도록 하죠, 우리.”

두 사람은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섬칫한 기운에 잠시 몸을 떨었다. 살짝 미친 짓 하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괘,


괜찮겠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소리 없이 시선을 주고받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로젤린의 편의를 돌볼 것이라 해도,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수습


기사가 더 필요하긴 했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수습 기사들이 단련하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승급한 수습 기사들보다 새로 들어온 자들이 훨씬 많다더니, 너른 연무장이 꽉 찰 정도였다. 아직은 어린 티가


나는 자들이 기사랍시고 등을 꼿꼿이 한 채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와 로젤린을 맞이했다. 대부분의 시선은
로젤린에게 쏠려 있었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연무장이 우렁차게 울렸다. 레이몬드가 피식 웃었다. 황제 폐하가 와도 저 정도의 목소리는 아니겠다 싶었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편하게들 쉬도록 해. 로젤린 경의 수습 기사가 될 만한 인재가 있는지 둘러


볼 뿐이니.”

편하게 쉬라는 레이몬드의 말은 그들의 반대쪽 귀로 흘러 사라졌다.

‘로젤린 경의 수습 기사가 될 만한 인재?’

다들 잠시간 술렁이다 야욕이 넘치는 표정을 하고는 멋진 폼으로 검을 휘둘렀다. 너무 예상한 반응이라 웃겼다.
레이몬드는 혼자서 흐흐흥 소리 내어 웃었다. 귀엽게 놀기는, 병아리들.

선망, 존경, 호기심, 탐구.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시선들이 로젤린을 떠돌았다. 로젤린은 햇빛을 받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나른하게 서 있었다. 사람들이 열의에 가득 차서 검을 휘두르건,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무슨 짓을 하건 관심 없어 보이는 모양새였다.

“근데 레이몬드.”

“왜 로젤린. 아, 쟤 봐라, 옷 벗는다. 너한테 복근을 보여 주려는 모양인데.”

레이몬드가 가리킨 남자는 아직 성장 중이긴 하지만 제법 잘생긴 축에 속하는 수습 기사였다. 은근한 눈빛을 하며
윗옷을 천천히 벗어 재끼는데, 마을 처녀들이라면 꺅꺅 소리 지르며 볼 만한 몸매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젤린은 마을 처녀가 아니었고, 이 직장은 갑옷 같은 근육을 가진 자들이 돌멩이보다 흔한 곳이었다. 수습
기사의 몸은 마치 두부 같아 보일 정도의.

“지원서 안 받았잖아. 나한테 지원한 애들 모아서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저 정도 복근이라면…….”


로젤린은 제복을 슬쩍 까서 제 배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것이 더 훌륭해. 레이몬드가 식겁해서 그녀의
제복 상의를 얼른 내렸다.

“로, 로, 로젤린! 밖에서 그러면 안 돼!”

“쟤는 윗옷 아예 벗었잖아.”

레이몬드는 저놈이 잘못한 거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거기 너! 어디서 기사가 단정하지 못하게 옷을 벗어! 일주일 근신이다!”

근육을 자랑하던 수습 기사는 축 쳐져서 기숙사로 돌아갔다. 아, 나도 안 되고 쟤도 안 되는 거였어? 합리적인


결말에 로젤린은 수긍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레이몬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어디까지 했더라.”

“지원서.”

“아, 그래. 지원서. 그건 딱히 안 받아도 될 것 같아서. 다들 네 수습 기사가 되기만을 바라고 있을걸? 지금


네가 얼마나 유명한지 모르는구나?”

“내가 유명해?”

로젤린이 눈을 동글동글하게 뜨고 올려봤다. 레이몬드가 흐흐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와락 안아 어깨동무했다.

“그럼. 멋지게 리카르디스 전하를 구한 강한 기사 로젤린! 다들 널 좋아하고 존경하니까. 적당히 보고 너……


내 수습 기사가 되어라…… 하면 다들 황송해하면서 네 발밑에 몸을 던질 거야.”

로젤린은 다들 자신을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대목에서 크게 감명 받은 눈치였다. 예전에 레이몬드에게서 “너……


친구…… 나밖에 없다?”는 말을 들은 게 충격이었던 만큼 기쁜 듯했다.

로젤린은 주위를 쭉 둘러봤다. 여자 기사, 남자 기사 할 것 없이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쩐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생각나는 눈동자들이었다. 로젤린은 히죽 웃었다.

“기분 최고야.”

레이몬드도 그녀와 마주 보며 와하하 웃었다. 우리 로젤린 인기 많은데? 대단한데? 하고 빤히 보이는 식으로


추켜세워 줘도 굉장히 으쓱해했다.

두 사람은 연무장을 한참을 더 돌아다녔다. 레이몬드는 검을 휘두르는 수습 기사들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고,
로젤린은 수습 기사들과 일 대 다수의 대련을 했다. 그녀와 대련하던 수습 기사들 중 세 명이 기절해서 실려 나간
이후, 로젤린은 검술의 시범만 보였다. 부단장의 부관과 유명한 상급 기사가 지도해 주니 다들 의욕이 충만해서
열심히 배우려 했다.

눈치 보며 머뭇거리던 수습 기사들도, 하늘 위에서 빙글빙글 돌던 마카롱이 내려오는 것을 기점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로젤린 경의 유명한 애완동물, 마카롱 경이 아닌가!

“와, 마카롱 경!”


“진짜 크다!”

“멋있어!”

“독수리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입니다!”

마카롱은 고개를 하늘 쪽으로 뻗는다던가, 날개를 한쪽을 슥 들어 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수습 기사들에게 멋진


자태를 뽐냈다. 주인이나 애완동물이나 참 사람 좋아하는 애들이야……. 레이몬드는 흐릿하게 웃었다.

너른 연무장을 꽉 채우던 수습 기사들은 로젤린과 레이몬드의 근처에서 웃고 떠들었다. 그 때문에, 홀로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는 소년이 더 눈에 띄었는지도 몰랐다. 마카롱의 날개깃을 쓰다듬던 로젤린도 소년의 존재를
눈치챘다. 산딸기로 만든 와인과 비슷한 예쁜 머리색을 가진 소년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소년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화들짝 몸을 떨었다. 열렬하게 쳐다볼 때는 언제고, 그 적나라하기
그지없는 시선을 알아챈 로젤린이 도리어 놀랍다는 듯, 어린 얼굴에 경외가 서려 있었다. 소년이 머뭇거리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묵례했다. 로젤린이 눈을 깜박이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니까, 만지기 전에는 마카롱 경, 만지는 걸 허가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정중히 물은 다음에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 만져야 된다고…… 어허어 마카롱 경! 그러면 못써! 후배들의 실수는 사랑으로 감싸 줘야지!”

레이몬드는 수습 기사 한 명을 공격하는 마카롱을 말리던 중 로젤린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 방향을 따라가니 곱상하게 생긴 소년이 보였다.

“왜 그래, 로젤린.”

“쟤는 이름이 뭐야?”

아무리 하얀밤 기사단을 관리하는 자 중 한 명이라지만, 그 수많은 수습 기사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몬드는 소년의 이름을 바로 떠올려 냈다.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들어온 애들 중 몇 안 되는 뿌리 출신의 헤사. 검술은 좀…… 많이 약하지만 박투에서는 두각을


보이더라고. 기본적인 전투 감각이 뛰어나서 선발됐어.”

수습 기사, 헤사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나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한 송이 들꽃이


들려 있었다. 수많은 수습 기사들을 헤치고 그녀의 앞에 선 소년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 소년이 고개를 푹
숙이고 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귀 끝이 발개져 있었다.

“이 꽃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로젤린 경?”

레이몬드는 당황했다. 이렇게 다들 지켜보는 가운데 뇌물을 바치다니, 배짱이 대단한 놈이 아닌가!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년이 건넨 꽃을 받았다.

꽃 줄기가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가자 헤사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귀 끝부터 퍼져 나간 붉은 기운이
온 얼굴을 물들였다. 소년은 불에 덴 것처럼 허둥지둥, 몸 둘 바 몰라 하다가 곧 결의에 찬 눈동자로 로젤린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로젤린의 얼굴에 미묘한 이채가 떠올랐다. 동시에 레이몬드의 팔 위에 앉아 있던 마카롱도 헤사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소년의 몸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장박동과 함께 세차게 마력이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로젤린이 최근 수없이 겪었던 검은달의 마력처럼 검붉고, 난폭하게 변질된 것이 아니었다. 색으로 친다면
순수한 검정. 티 하나 없는 완벽한 암흑. 고요한 힘이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소년이
가진 마력은 로젤린의 것과 흡사했다.

로젤린의 떠나지 않는 시선에 헤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가만히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의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수습 기사들의 지도 및, 마카롱 경이
멋진 자태를 뽐내던 상황을 가르며 들어온 꽃 한 송이의 파급력이었다. 이 이상하고도 어색한 기류라니. 심지어는
헤사를 바라보는 수습 기사들의 눈초리가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슬쩍 눈치 보다가 연극하는 듯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로, 로젤린 우리 이제 슬슬 돌아갈까? 수습생들은 다음에 둘러보고?”

아, 수습생. 그러고 보니 수습 기사를 뽑으러 온 거였지. 로젤린은 본래의 목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헤사를 향했다. 레이몬드가 다들 네 수습 기사가 되기만을 바랄 것이라며, 지원서 따위는 필요
없으니 그냥 적당히 고르기만 하라고 했었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몬드는 돌아가자는 제 말에 그녀가 답한 줄 알고 반색했지만, 로젤린은 자리에서


꿈적도 하지 않고,

“너, 내 수습 기사가 되어라.”

라고 말했다. 백 명에 달하는 수습 기사들이 있는 거대한 연무장에는 바람이 지나는 소리만 흘렀다. 바보같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헤사가 로젤린이 말한 한참 뒤에 화들짝 놀라더니 입을 가렸다.

84 화.

웃는지 우는지 놀랐는지 모를 이상한 표정을 하던 소년이 떨리는 몸짓으로 무릎을 완전히 꿇고 머리를 바닥에
대었다. 주인에 대한 종의 경외에 모두가 상황을 깨달았다. 침묵이 깨지며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도 입을 떡 벌렸다. 아까 자신이 말한 “다들 황송해하며 네 발밑에 몸을 던질 거야.”의 완벽한 표본이


아닌가! 그건 비유였지 실제로 일어날 상황을 예견한 게 아니었는데!
* * *

레이몬드와 로젤린, 헤사는 자리를 옮겼다.

헤사는 방에 들어와 앉으라는 말을 들은 이후 줄곧 그녀 발치에 무릎을 꿇고 올려보고 있었다. 로젤린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레이몬드는 신경 쓰였다.

“……자리에 앉는 게 대화하기에 용이하지 않겠나?”

헤사가 얼굴을 붉혔다. 그는 허둥지둥하며 비어 있는 의자에 얼른 착석했다. 레이몬드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미간을 문질렀다. 예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뿌리 출신이기까지 하니.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데…….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모습에서 소년이 자라난 환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라베니아 내에서
노예는 불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예 취급당하는 자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었으므로.

소년의 성장배경이 안타깝기는 했으나, 수습 기사를 동정심으로 뽑을 수는 없었다. 공은 공, 사는 사.


레이몬드는 부러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상급 기사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는 수습 기사는 상급자의 수족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훨씬 많은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충분히 인지한 것이 맞나?”

레이몬드는 이 소년이 로젤린을 보필하기에 부족해 보인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헤사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서 손의 거스러미를 뜯으며 아래만 쳐다보았다.

“……노력하겠습니다.”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수습생이 상급자의 명예나 체면을 훼손하는 경우를 바라지 않는다. 이번의 돌발
행위도 포함해서 얘기하는 것이다. 신중히 행동하라. 비록 정식 서임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얀밤의 이름을
달고 있다면, 모든 언행이 본인만의 책임으로 끝나지 않음을 항시 기억해라.”

헤사는 고개를 더 푹 숙이고 아래 입술을 물었다. 눈동자가 반지르르해지고 눈 밑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로젤린 경은 어떻게 생각하지? 헤사 수습생이, 에버하르트 경과 레티시아 경의 공백을 충분히 메울 수 있을 것


같은가?”

못 메울 것 같지? 얘 하지마. 레이몬드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로젤린이 헤사를 바라보았다.
힐끔 눈치 보던 소년이 후다닥 시선을 내렸다. 귀 끝이 또 빨개져 있었다. 로젤린이 빙그레 웃었다.

“모르면 배우면 됩니다.”

“누구한테……?”

레이몬드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너한테 배우라고 지금?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에게.”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해도 그들 또한 임무가 있어서 수습생의 교육에 온전히 힘을 쓸 수 없다. 정말 괜찮겠나?”

아, 얘는 진짜 아닌 거 같아 로젤린. 다시 생각해 봐. 레이몬드가 또 표정으로 얘기했다.

“예. 괜찮습니다.”

로젤린의 말에 헤사가 고개를 들었다.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소년은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슥슥 문지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의 고집이 쉽게 꺾이지 않는다는 것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일어섰다. 여전히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으로 헤사를 훑기는 했으나,
로젤린의 선택에 더 이상 입을 대지 않았다.

“하여간 고집불통. 내가 너 강아지 같은 거 몰래 주워 올 때부터 다 알아봤어.”

레이몬드가 로젤린의 볼을 쭉 늘어트렸다.

“안 즈어앗어.”

“기억 못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거든, 로젤린.”

‘로젤린’이 강아지를 주워 오는 일이 잦았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자신이 한 일도 아닌데 혼나서 지금의


로젤린은 몹시 심통이 났다. 레이몬드가 딱딱하던 말투와 기세를 바꾸자 헤사가 눈알을 또르륵 굴렸다.

“수습생. 잘해라.”

“네!”

레이몬드가 헤사의 머리를 슥슥 쓸고 나갔다. 헤사가 떠나는 레이몬드의 뒷모습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 되, 된 건가?’

헤사는 자신이 꿈에서도 바라 왔던 일이 일어났음에도 기뻐하지 못했다. 무턱대고 꽃을 선물하기는 했으나 그녀가
꽃을 포함한 자신도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헤사는 귀족들의 세계에서 ‘뿌리’라는 이름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얀밤 기사단의 위명이
높아진 만큼 이번에 들어온 수습 기사들의 수준과 지위도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어느 대단한 가문의 누구. 누구의
딸, 누구의 아들…….

그 어마어마하고 대단히 고귀한 사람들 사이, 뿌리 출신은 단 네 명뿐이었다. 백 명이 넘는 수많은 자들 중, 단


넷. 이 숫자가 ‘뿌리’ 출신에 대한 취급을 어느 정도나마 나타내고 있다 말할 수 있었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운이 좋아 꽃다발 사이에 끼어 들어온 뿌리 한 줄기. 딱 그 정도.

신분의 벽이 높으리란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나, 헤사는 입단 후에 그걸 더 뼈저리게 체감했다.


합격이라는 말을 듣고 부풀어 떠올랐던 가슴은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에 찔리고 찢어져, 서서히 가라앉았다.

헤사는 늘 그랬듯 모든 기대를 내려놓았다. 사실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세간에 떠들썩한 그 무용담의 주인공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을 뿐.
그러나 수습 기사들 사이에 둘러싸여, 커다란 독수리의 비호를 받고 있는 로젤린을 본 순간. 헤사는 저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수습 기사가 된 이후였다.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이야.’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된다.

2 황자 리카르디스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점과 마인이라는 사실이 대두되며 로젤린은 큰 화제를 모았다. 헤사의
동기 대부분이 그녀의 수습 기사가 되길 바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로젤린 또한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수상한 뿌리 출신은 휘하에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단순히


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얕은 동질감 하나로 자신을 허락한 것인가? 물론 그러길 바라서 마력을 운용했으나,
솔직히 통할 거라고는 일말도…….

“헤사.”

“네!”

헤사가 경기하듯 몸을 떨며 대답했다.

“마력을 움직여 보겠습니까.”

헤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그의 안을 관조했다. 검고 빛나는 마력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커다랗고 따듯한 것이 소년의 몸을 가득


메우고 박동했다. 밤하늘을 보는 기분이었다. 로젤린이 날카로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웃었다.

“마인을 이렇게 가까이서 만난 건 처음이라. 신기하군요.”

헤사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웃어 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가 제 편이 되어 줄 것만, 되어


준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하급자가 청하기에는 어쩌면 건방질 수도 있는 부탁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어
버린 것은.

“실례가 안 된다면, 로젤린 경의 마력을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물론 헤사는 그 말을 내뱉고 0.1 초 후에 바로 입을 가렸다. 미쳤나? 오늘따라 행동이 제어가 잘 되지 않았다.


마인들은 어딘가 다들 이상하고 미쳐 있는 구석이 있다더니!

“그러죠.”

로젤린의 대답은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소년은 아, 이게 별 일은 아니었나? 하고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햇빛이 쏟아지던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창을 가리는 거대한 몸집 때문이었다. 마카롱 경이 어느새 날아와
창틀에 앉아 있었다. 맹금류의 왕이 날카로운 눈으로 헤사를 응시했다. 그 그림자에 잠식된 로젤린이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눈을 감았다. 곧 세상의 소음을 잠재우는 거대한 것이 몰려왔다.

소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대륙에 하얀 밤이 찾아오지 않은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다.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일라베니아는 곪을 대로


곪아 갔고, 그 모든 책임과 원망은 마인들이 지고 가야 했다. 헤사 또한 태어난 순간부터 그 낙인이 찍혀 있었다.
더러운 것, 불길한 것. 이델라브힘의 빛을 가리고, 대륙에 암운을 드리우는 저주받은 자들!

헤사는 언제나 순응했다. 싸운다 해도 얻는 것이 없었기에, 언제고 쉽게 얻어 본 적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말들 또한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신이 가진 힘이 불길하고 더러우며, 저주받았다고.

그러나 로젤린의 안에서 요동치는 강한 기운을 느낀 순간, 헤사는 딱딱하게 굳어 있던 무언가가 파사삭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거대한 힘은 그녀 안에서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헤사는 자신이 거대한 파도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끝없이 침잠하는 것 같다 느끼기도 했고, 하늘을 가득 메운 은하수가 쏟아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무서웠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헤사는 눈을 감았다. 검은 바다 안은 따듯했다. 위로 어스름한 달빛이 내려앉으며 물결을 따라 그물같이 반짝였다.


그 안의 부드러운 흐름이 자신을 좋은 곳으로 떠내려 보내 줄 것만 같았다.

헤사의 눈꼬리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아, 어쩌면 이렇게나 아름다운…….

수없이 들어 왔던 저주 같던 말들이 파도의 포말처럼 산산조각 나며 부서져 갔다.

* * *

“네에?”

콧노래를 부르며 로젤린을 찾아온 헤사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뭐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해서
예쁨 받을 기대에 가슴이 잔뜩 부풀어 있었건만!

“원래 하얀밤의 수습 기사로 입단하면 상급 기사를 따를 때의 교육도 따로 받습니다. 헤사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로젤린은 거울을 보며 제복을 정돈하고 있었다. 헤사가 그녀의 뒤에서 울상을 지었다.

“그, 그렇긴 하지만…….”

“그래서 당장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 거라 말하더군요.”

헤사가 그녀의 뒤에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떤 놈이 쓸데라고는 없는 말을…….

“에버하르트 경이.”

에버하르트…… 헤사가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85 화.

“전 수습 기사였던 레티시아 경과 에버하르트 경이 남는 시간에 헤사의 교육을 도맡기로 했습니다. 오늘부터 당장


시작하기로 했다니, 열심히 배우십시오. 솔직히 내게 주어진 업무의 반 이상은 레티시아 경과 에버하르트 경이
처리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돕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돕는 쪽에 가까웠기 때문에. 헤사에게도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업무라고는 처리할 줄 모르며, 네가 열심히 배워 오면 다 맡길 예정이라는 말을 굉장히 당당하게 했다. 하지만


헤사는 그녀의 태만한 업무 태도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헤사에게도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기대하고 있다고 하지 않나! 전의 수습 기사들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는 몰라도, 지금 로젤린과 함께 있는 건


자신이었다. 그들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수습 기사가 되리라!

헤사는 오후에 바로 전 수습 기사 중 한 명인 에버하르트와 만났다. 에버하르트는 헤사를 보자마자 히죽히죽


웃으며 손을 머리로 뻗어 왔다. 헤사는 눈을 크게 뜬 채 경직했다. 다가오는 손이 당장에라도 자신을 아프게 할
것 같았으나…….

그저 섬세하지 못하게 머리를 헤집을 뿐이었다. 에버하르트는 몹시 들떠 있던 상태라 제 손길에 잠시 굳어 버린


소년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작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워하기 바빴다.
헤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하급 기사 에버하르트다 꼬맹아!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이게 그 에버하르트…… 헤사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에버하르트는 룰루랄라 콧노래만


불렀다.

“선배인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잘 가르쳐 줄게. 로젤린 경께서 내게 특별히 부탁하셨거든. 너…… 제대로 할
줄 아는 거 하나도 없지? 이야, 고생 좀 하겠네. 열심히 하자 꼬맹아?”

헤사의 눈이 돌아갔다.

“망할 꼬맹이!”

에버하르트가 씩씩거리며 등장했다. 레티시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팔굽혀펴기를 계속했다. 새롭게 로젤린의 수습
기사가 된 뿌리의 헤사. 그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후임자를 만나러 간다고 발걸음 가볍게 떠나더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다.
로젤린에게 전해 듣기로는 ‘음. 헤사요. 굉장히 귀엽습니다. 갓 태어난 고양이같이.’라는 감상이 다였다. 지금
에버하르트의 반응을 보자니, 확신하기 어려운 정보였지만.

“고오오이연놈! 시건방진 새끼!”

에버하르트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계속 씩씩거렸다. 레티시아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에버하르트는 화내는 와중에도 마른 수건을 가지고 와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같은 뿌리 출신인 데다가 성별도 같으니 말이 잘 통할 거라며 그렇게나 거들먹거리더니…….’

레티시아가 쯧 혀를 차고 수건으로 땀을 닦아 냈다. 에버하르트는 옆에서 헤사의 만행을 종알종알 얘기했다.

갑작스럽게 헤사가 결투를 신청했다고 한다. 가르침을 청한다 정중하게 얘기는 하고 있지만 눈빛이 호기로워
자라나는 새싹을 작신 밟아 줄 생각을 하던 에버하르트는…… 참패했단다.

검투에서는 간신히 이겼지만, 박투에서 굴욕적으로 명치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 끙끙거렸단다. 그런
에버하르트를 내려다보는 수습생의 눈빛은 뭐랄까.

“씹다 뱉은 음식물에 벌레가 꼬여 있는 걸 보더라도 그것보다는 부드러웠을걸! 쥐새끼 같은 게 얼마나 이리저리


약 올리면서! 레티시아 혼내 줘!”

저런 놈이니 어린애랑 수준 맞춰서 놀고 있지…… 헤사뿐 아니라 에버하르트까지 통제해야하는 레티시아는 골치가
아팠다. 그녀가 수건에 얼굴을 묻고 후우……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버하르트가 비록 촐랑거리는 멍청한 촉새라도 무력은 무시할 게 못되었다. 그가 방심을 했다고 하더라도, 새로
들어온 수습생 또한 분명 괜찮은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으리라.

“로젤린 경이 오니까 표정 싹 바꾸고는 꼬리에 불난 강아지처럼 어찌나 꼬리를 흔들어 대던지! 이중인격자야 완전!
레티시아 내 복수를 해 줘!”

레티시아가 에버하르트의 엉덩이를 퍽 찼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이 자식은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안 된다.
누가 싸우고 오랬나. 일을 가르치고 오라고 했지.

일과를 마치고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문제의 수습생을 만나러 갔다. 에버하르트는 싸움 지고 나서 제 형을


데리고 가는 꼬마 애처럼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그 꼴사나운 어깨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내가 널 어떻게 해 버리겠어.”

레티시아의 서늘한 협박에 에버하르트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작달막한 소년이었다. 분홍색이 살짝 섞인 빨간 머리의 소년이 호기롭게 레티시아를 올려보고 있었다. 첫 만남에
보이는 적개심이라고 보기에는 과한 감이 있었다. 레티시아는 에버하르트 멍청이가 무슨 초를 쳐 놓은 게
분명하다고 직감했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에게. 수습생 헤사. 나는 로젤린 경의 휘하에 있는 하급 기사, 서리나팔의


레티시아다.”
“헤사입니다.”

예의는 갖췄으나 눈빛이 불손했다. 에버하르트가 뒤에서 바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저 자식은 전쟁에는 내보내면
안 되겠다. 너무 단순해서 도발에 백이면 백 넘어갈 게 분명했다.

“수습 기사는 상급자의 일과에 따라 같이 움직인다. 수습생은 상급자의 수족이나 다름없으니, 로젤린 경이 언제
일어나고, 언제 임무를 하고, 어떤 작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해. 오늘은 그 일과에 대해서
…….”

헤사가 손을 가볍게 들었다. 레티시아가 턱짓으로 발언을 허가했다.

“대련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에버하르트가 뒤에서 방방 뛰었다. 저거야 저거! 저놈이 저거 해서 내가! 잉잉 레티시아! 하는 속마음이 다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에버하르트를 무시한 채, 소년을 다시 찬찬히 훑어보았다. 팔이 가느다랗다. 단련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 성장기인지 몸이 덜 자란 상태였다. 에버하르트의 복부를 타격하고 바닥에서 추하게 기어 다니게 할 정도의
타격을 주기에는 한참 모자라 보였다.

‘단순히 힘이 센 게 아니군.’

그렇다면 하나밖에 더 없지 않은가.

‘마인이다.’

로젤린 경이 받아들인 경위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소년이 마인이라면 나름 이해가 됐다. 레티시아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듣지 못했나. 오늘은 수습 기사가 할 일에 대해 배운다고 했어.”

도발에도 안 넘어 오자 헤사가 입술을 잘근 물었다. 저 뒤의 원숭이는 잘 넘어오던데…… 하는 당황의 기색이


느껴졌다.

“……피하시는 겁니까?”

에버하르트가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지만 레티시아는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이라 우습지도 않았다.

“서리나팔의 가언을 알고 있나, 수습생?”

헤사가 눈썹을 치켜뜨고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시골 후미진 곳의 작은 영지라 잘 모를 테지. 서리나팔의 가언은 ‘서리나팔의 여자는 절대 지지 않는다.’ 이다.
이게 무얼 말하는 거라 보는가?”

“강하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세상에 절대 지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로젤린 경이라면 또 모를까. 아니 로젤린 경도 나에게 체스를
지고는 하시니, 그분 또한 지지 않는 건 아니겠지.”
헤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법 숨기는 척하더니, 어린애는 어린애인지 감정을 손쉽게 읽을 수
있었다.

“사소한 싸움의 승패 하나에 웃고, 하나에 울며 이겼네, 졌네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다. 지금 내가


수습생에게 이기면 어쩔 것이고, 지면 어쩔 것 같나. 진다 해도 그것은 앞으로 내가 강해지기 위한 밑거름이 될
뿐이다. 나의 패배가 전혀 중요한 싸움이 아니라는 거다.”

그건, 그냥 허울 좋은……. 헤사가 울컥해서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레티시아가 말을 덧붙이는 게 더 빨랐다.

“서리나팔은 가언은 그것을 말한다. 진정 싸워야 할 때가 찾아왔을 때야 말로 물러서지 말라. 그것이 이기는
길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쓸데없이 힘을 빼지 마라 수습생. 수습생이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에버하르트가 아니다. 수습생이 해야 할 일은 로젤린 경을 보조하는 것. 그리고 오늘은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다. 그런데 지금 수습생은 배우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깎아 먹고 있군. 병장기도 없이 전쟁에 나가는
꼴이다. 수습생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건 간에, 이번은 필패다. 싸움의 종류를 알고, 싸워야 할 때를 알아라.”

헤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소년이 레티시아의 시선을 피하며 손을 꼬물거렸다. 레티시아가 픽 바람
빠지듯 웃었다.

뿌리 출신이 황성에서 얼마나 갖은 설움을 당했겠는가. 바짝 선 가시를 눕히려 해도 눕힐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본분을 잊고서 원초적인 힘 대 힘으로 싸워 기를 누르겠다는 건방진 생각은 따끔하게 혼내야 하지만,
반성의 기미가 보였다. 천성이 나쁜 아이는 아닌 듯했다.

레티시아가 손을 무릎에 대고 상체를 숙여, 헤사와 눈높이를 맞췄다. 소년이 홍조가 올라온 얼굴로 눈치를 봤다.
그녀가 씨익 웃은 다음에 소년의 어깨룰 툭툭 두드렸다.

“배짱은 썩 좋아 마음에 든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에서는 물러나지 마라 헤사 경.”

헤사가 손의 굳은살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뒤에서 에버하르트가 입을 떡 벌린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후로도 헤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뾰족하게 대했지만, 로젤린과 레티시아. 레이몬드에게만은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였다. 머리가 나쁜 편도 아니고 본인도 열심이라 업무를 익히는 속도도 빨라 레티시아는 결과적으로
만족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업무를 익히는 도중 헤사가 뜬금없이 물었다.

“……서리나팔의 남자는 지기도 합니까?”

서리나팔의 ‘여자’만 지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나 보다. 레티시아가 살짝 웃었다.

“서리나팔은 대대로 데릴사위를 들이거든. 데릴사위들은 가언을 변화시킬 영향력도 없을뿐더러, 가위 바위 보에도
열 내는 바보들이 많았다. 실제로 잘 지고 돌아다니기도 했고. 궁금증은 풀렸나?”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헤사는 테이블에 엎드려서 숨넘어가게 웃었다. 어린 웃음소리가 유리 소리처럼 맑았다.
후에, 레티시아와 로젤린이 담소를 나누며 헤사를 ‘귀엽다’라거나 ‘귀엽고 착하다.’라고 얘기를 나눴는데,
이에 공감하지 못하는 건 에버하르트뿐이었다.

86 화.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

인상을 찌푸린 두 남자가 골목 입구에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거 노동 착취 아닙니까, 도련님?”

알터가 앓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렇게 빤히 보이는 약한 척이 칼릭스에게 통하지 않으리란


것쯤은 알았으나, 그 나름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 칼릭스 에스터의 보좌관이라는 자리는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었다. 전선에 머무르는
시간이 긴 백작을 대신해 칼릭스는 주로 성안에만 머물렀고, 그 성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알터가 맡는 일 또한 쳇바퀴 굴러가듯 비슷한 일들뿐이었다.

그 일정한 굴레에서 벗어난 지는 제법 오래 되었다. 사냥 대회에서 로젤린이 실종되었던 때부터. 그때부터 알터의
순조롭고 무난한 생활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결국 스스로 달아 놓았던 ‘월급 도둑’이라는 흡족한 별명도
내려놓아야만 했다.

로젤린이 마른가시나무 성에서 요양을 마치고 칼릭스와 함께 수도로 떠났을 때, 알터는 비스타에 남아 마인을
찾기 시작했다.

발타로 떠나지 않은 마인들은 전투가 잦은 지역에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칼릭스가 이 거리에서
소매치기 마인 소년을 만났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알터는 비스타부터 뒤졌을 것이다.

문제는 어딘가에 분명 있을 마인과 함께 마인처럼 무섭게 생긴 자들도, 마인처럼 강한 자들도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용병과 싸움꾼들이 쉼 없이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알터는 그들을 구별해 낼 만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직접 발로 뛰어다녀도 얻는 소득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니, 칼릭스가 하루 걸러 하루 닦달해 대는
서신들에도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며 차일피일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칼릭스가 자신이 직접 알아보겠다며 비스타로 내려왔다. 평소 차분한 성격은 어디다 버리고 온 것인지.
알터는 오랜만에 보는 제 주인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최초의 하얀 밤과 검은달이 뜬 날 ‘그림자 없는 밤’ 축제부터 시작해서, 일라베니아 제국의 밤은 연일 빛나고


있었다. 오늘도 여전히 갖은 색깔의 아기자기한 등불들이 거리를 밝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축제의 빛이 옅어지는 좁은 골목의 안쪽에 있었다. 칙칙한 회갈색의 후드를 뒤집어 쓴 칼릭스가 하얀색
일색인 거리에서 눈에 너무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후드를 벗자니 검은 머리가 너무 눈에 띌 테고.

알터는 좁고 어두운 골목과 대비되는 밝은 상 거리를 바라보며 종일 투덜거렸다. 노동 착취 투덜투덜, 휴식을


휴식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투덜투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따라가는 게 아니었는데 투덜투덜…….

“알터. 지금 이 소리 들었나?”

“예? 무슨 소리?”

칼릭스가 먼 곳으로 시선을 두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알터는 거리의 소음을 뚫고 제 주인에게 들어갈 만한
특별한 소리가 있나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칼릭스가 후드를 젖히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의 눈썹이 까딱거렸다.

“네 월급이 오르는 소리.”

짜릿한 돈의 맛! 알터가 감격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 도련님…… 제가 까라면 까겠다고 말씀 드린 적


있던가요?

“제 취미가 노동 착취당하는 거라고 말씀드린 적 있던가요!”

“싱거운 말 그만하고 본론으로 넘어가.”

“크으, 역시 우리 도련님. 용건만 간단히! 시계도 도련님처럼 시간을 효율적으로 나누지는 못할 겁니다!”

“그만하라고 좀.”

알터는 희희덕 웃으며 제 품에서 구깃구깃 접혀진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칼릭스는 그것을 잽싸게 펼쳐서 읽었다.

악필로 쓰인 정보들은 토막 나 완전하지 못했고, ‘?’라던가 ‘△’ 같은 기호로 뒤덮여 있었다. 총체적으로
살펴보자니 미심쩍은 구석이 있긴 한데 잘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칼릭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월급 도둑을
째려봤다.

“마인도 아닌 제가 뭔 수로 확실하다 동그라미를 칩니까. 의심은 가지만 물증이 없으니 확정 지을 수 없는


노릇이고.”

알터의 말대로이긴 했다. 눈앞에서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펑펑 써 대어도, 마력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확정 지을
수는 없었다. 이 종이에 동그라미를 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인뿐이었다. 칼릭스는 서류를 곰곰이 읽었다. 무슨
사거리 정육점, 무기점, 용병단, 불법 투기장…….

“그리고 이건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동그라미죠.”

알터는 종이에 그려져 있는 것 중 가장 큰 세모를 가리켰다. 그 아래, [불법 투기장] 이라고 적힌 글자가 알터의
침에 의해 번져 있었다.
허름하고 반 쯤 무너져 가는 것 같은 건물이었다. 알터가 안내한 불법 투기장은 불법 투기장이라는 이름이 정말
너무 잘 어울렸다.

몇 번의 골목을 꺾어 숨겨진 문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허름한 건물에서 쨍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절그럭거리는 쇠사슬과 검날이 부딪히는 소리도 간간히 들렸다.

“죽여!”

“죽어!”

눈알을 어쩌고 불알을 어쩌고! 부모님의 안부를 서로 묻는 관전자들의 거친 언사가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반쯤
내부가 보이는 건물은 전혀 방음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저 사람들 불법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맞겠지?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이 장소를 못 찾는 게 아니라 눈감아 주고 있는 것이리라.

칼릭스가 건물의 입구를 찾아 들어가려 하자, 거대한 남자들이 앞을 막아 섰다. 흉터가 여기저기 깊고 굵게
새겨진 데다가, 인상도 사납고 수염도 숭숭 나 있어 위협적이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들보다 곱절은 더 사나운 인상의 소유자를 부모로 두고 있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방문객의 태도에 남자가 씩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로구만. 초대장은?”

칼릭스는 초대장을 받기 위해 알터를 돌아보았다. 알터는 입술을 흉하게 오므린 채,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고
있었다.

‘…이 자식이…….’

칼릭스의 눈매가 더욱 사나워졌다. 알터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런 허접한 곳에 초대장 같은 게 있을 줄은 몰랐죠.”

목소리가 컸다. 초대장도 없어 보이는 허접한 곳을 보물단지처럼 지키던 남자들의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칼릭스는 진심으로 알터를 해고하고 싶어졌다.

혀를 찬 칼릭스가 품에서 금화 하나를 튕겼다. 남자가 공중에 떠오른 금화를 잡아챘다.

“이봐, 나는 이깟 돈이 아니라 초대장을…….”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주위의 다른 산적 같은 사내들도 흉흉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압박하며 한걸음씩
다가왔다. 알터는 식은땀을 흘렸다. 대충 돈을 먹인다고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나.

“도, 도련님 그냥 우선 나갔다가…….”

칼릭스가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주먹보다 큰 주머니는 이미 두둑하게 무언가로 채워져 있었고, 분위기 상 대충
그 안의 내용물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칼릭스가 남자에게 주머니를 던졌다. 찰랑이는 금속음이 건물에서 퍼져
나오는 비명 소리를 뚫고 뚜렷하게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

남자가 산적 같은 얼굴을 누그러트려 활짝 웃었다.


“잘 받았습니다, 손님! 즐거운 시간 되십쇼!”

……그 말 하려던 거 아니지 않나. 뭐 결과가 좋으니 됐지만…….

알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알터와 칼릭스 주위를 포진해 있던 많은 남자들이 꽃집 청년


같은 상냥한 미소를 띠며 문을 활짝 열어 줬다.

알터는 허망함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칼릭스의 뒤를 따라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이 병신 같은 새끼! 일어나! 일어나라고!”

“목을 졸라! 죽여 버려! 대가리를 박살 내!”

투기장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좁아 보였다. 사람들로 꽉 차 있는 탓이었다. 그 중앙에는 네 개의 나무 기둥을


세워, 쇠사슬과 밧줄을 칭칭 감아 놓아 장소를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그 안에서 두 남자가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한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고 그 위로 피 흘리는 남자가 올라타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우리 할머니가 그 안에 있었으면 니들은 이미 뒤지고도 남았어, 소꿉놀이 하냐!”

야유가 쏟아졌다. 우리 할머니 운운하며 야유를 퍼부은 자가 어린 여자아이, 그것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라 몹시 혼란스러웠다. 피가 튀고, 술병이 날아다니고, 관전자끼리도 싸우고.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음, 개판이네.”

알터가 감상을 늘여 놓았다. 칼릭스는 구석에 나무 상자를 쌓아 올려 술 장사를 하는 자에게 와인 한 병을 샀다.


와인을 한입 머금은 칼릭스는 곧바로 손수건에 마신 만큼 뱉어 냈다.

그는 찌푸린 인상으로 와인을 째려보다가 알터에게 병을 넘겼다. 불법 투기장을 구경하느라 한눈팔고 있던 알터는
칼릭스의 행동을 미처 보지 못했고, 그 덕에 칼릭스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알터는 와인을 마시고 말았는지 욱욱하며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그 사이 주위를 둘러봤다. 문신,
흉터, 반쯤 헐벗은 남자들, 담배 연기. 어린아이부터 노파까지. 연령대도 다양하고 거는 액수도 천차만별이었다.
칼릭스처럼 후드를 눌러쓴 자들도 있었다.

‘이 안에…….’

마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데…….

힘을 숨긴다고 해도 양지보다는 그늘진 쪽으로 숨어들었다고 하니, 영 이상한 장소는 아니었다.

“도련님.”

“왜.”

“저기 구석에 녹색 머리 보이십니까?”


알터가 가리킨 곳은 다음 결투를 위해 몸을 풀고 있는 자들이 대기하는 장소였다. 그 중, 유별나게 체구가
크지도 않고, 유별나게 강해 보이지도 않는 평범한 남자가 보였다. 그 거친 이들 사이에 있기에는 어딘가 살짝
유약해 보였으나, 몸에 덕지덕지 붙은 흉터가 배경에 녹아들게 했다.

“제 세모의 주인공입니다.”

칼릭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동그랗고 맑았다. 소나 말 같은 초식동물이 떠오르는 눈동자였다.

“이 투기장의 붙박이라 하더군요. 허수아비 길레드.”

87 화.

“투기장의 별칭이라 보기에는…….”

투기장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거칠고 땀내 나는 사내들의 무식한 싸움장. 그 만큼


별명들도 무식하고 거친 것들이 즐비했다. 예를 들자면 투견이라던가 손톱수집가, 사형집행인 따위의.

그러다보니 ‘허수아비 길레드’ 라는 평범한 이명이 도리어 튀어 보였다.

“소탈한 감이 있지요? 어딘가 비실비실해 보이고.”

“그렇군.”

“정확히 그겁니다. 수련용 허수아비같이 맞을 줄만 안다고 붙은 별명이라더군요. 싸움질은 허접한데 맷집만 좋다


합니다. 승률은 저조하지만, 가끔 터지는 행운의 한 방으로 배당금을 적당히 챙기기도 한. 그저 그런 나쁘지
않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싸움꾼입니다.”

허수아비 길레드는 목을 돌리며 몸을 풀고 있었다. 거대한 남자가 어깨로 퍽 치고 지나가며 시비를 걸자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나 투기장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우연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기고 지는 패턴이 단순합니다. 은밀하고 복잡하게, 자연스러움을


위해 섞어 놓은 여러 경기들이 도리어 지표가 된 달까요. 물론 길레드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정도의
소득이지만, 외부에 한패가 있다면 얘기는 다르지요. 제법 한 몫 잡았을 겁니다.”

“싸움 잘하고 연기 잘하는 사기꾼일 가능성은?”


알터가 와하하 웃었다. 투기장의 소음에 묻혀 그다지 눈에 띄진 않았다. 그가 칼릭스의 어깨를 탁탁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연히 있지요!”

보통 저런 반응 뒤에는 ‘없다’ 따위의 반응을 기대하기 마련이라,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알터가 투덜거렸다.

“아, 제가 마인도 아니고 어떻게 압니까. 제가 저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세모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련님도 참. 그렇게 욕심 부리시면 배탈 납니다.”

“이 자식이 말만 번드르르해서는…….”

칼릭스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는 듯 꽉 막힌 목소리로 얘기하자 알터가 흐흐 웃었다.

“마인인 것은 알 수 없어도. 승부 조작은 확실하거든요? 심지어는 이 짓을 십 년 넘게 해 왔으니 돈도 제법


벌었을 테고.”

“그렇겠지.”

“그런데도 비스타를 떠나지 않는단 말이죠. 난다 긴다 하는 싸움꾼이나 용병들이 비스타를 찾는 이유는 금전적인
문제뿐이고, 그게 충족되면 위험한 국경 지대를 떠나기 마련인데…… 길레드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건가.”

“예, 발타라는 코앞의 위험을 감수하고도 남아야 할? 비스타 내에 형성되어 있는 마인들의 연결 고리를 벗어나
외부로 향할 용기가 없다던가 하는 그런……?”

“비약인걸.”

“비약이죠. 정확히 알지 못하니 그려 보는 수밖에요. 생각보다 이런 수가 제법 통하기도 하거든요.”

와아악! 비명 소리인지 함성 소리인지 모를 것들이 섞여 있었다. ‘새끼손가락’이 경기장 밖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새끼손가락’은 자신이 이길 때마다 상대의 새끼손가락을 자르는 기행으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역시나 불법 투기장다웠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번의 패배로 인해 대전자의 새끼손가락을 자를 수 없게 되었다.

허수아비 길레드가 올라갈 차례였다.

“길레드의 대전자는 떠오르는 신성이네요. ‘애꾸눈’ 카터. 왜 애꾸눈이냐면 이길 때마다 상대방을 애꾸눈으로…
….”

미친놈들이다. 칼릭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길레드가 이길 겁니다. ‘애꾸눈’이나 ‘새끼손가락’처럼 영구적인 신체 손상을 입히는 대전자를 만나면
항상 이기더군요.”

그 순간 칼릭스는 허수아비 길레드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으로 가득 찬 이 난장판 속에서, 길레드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칼릭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알터와 칼릭스의 대화를 들은 것처럼.

칼릭스는 그에게 두었던 시선을 천천히 자신의 발치까지 끌고 왔다. 소리치고 악을 쓰는 사람을 수십 명
지나쳐야만 닿을 수 있는 먼 위치.

‘……설마, 이 거리에서 우리의 얘기를 들은 건가?’

잠시간 닿았던 길레드의 시선이 무언가를 예감하게 했다. 비로소 칼릭스는 커다란 세모 위에 동그라미를 칠 수
있었다.

* * *

“아이고 어서 오시죠!”

길레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문을 열어 주는 남자가 너무 해맑았다.

그는 불법 투기장에 있던 다른 동료들을 통해 수상한 두 남자의 정보를 몇 개 얻어 냈다. 처음 보는 인물들.


허수아비 길레드, 자신에 대해 미리 조사하고 왔다. 마인임을 의심한다. 승부 조작을 눈치챘다. 등등.

승부 조작 건을 통해 그 불법 투기장까지 흘러왔다니. 소설을 기가 막히게 잘 쓴다면 잘 쓰는 자들이고, 머리가


좋다면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비스타에서 몰래 ‘마인’이라는 물건을 찾는 사람 중에 그걸 떳떳한 곳에 사용하려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도, 약점 잡히는 것도 질색이라 여차하면 손에 피를 묻힐 각오까지 하고 왔건만.

“들어오세요, 뭐라도 드시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남자가 정말 해맑았다.

길레드는 재빠르게 방 안을 훑었다. 두 사람 이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제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닫히는 문소리가 무거웠다.

의자에는 또 다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어 코와 입만 간신히 보였다.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길레드는 긴장을 유지한 채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검을 잡을 때 생기는 굳은살이 있지만 거리에 숱하게 보이는 용병 같은 부류는 아닌 듯했다. 곧게 핀 허리와 태도


하나하나에 이런 뒷골목에서 보기 힘든 품위가 느껴졌다.

‘귀족인가…….’

길레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갑작스럽게 불러 내어 미안하군.”

“……아닙니다. 용건을 말씀하시죠.”

남자가 느릿하게 제 후드의 끈을 잡아끌었다. 후드를 완전히 벗어서 곱게 접어 소파 한 편에 놓아 두는 태연한


행동을 보며, 길레드는 눈을 홉뜨고 있었다. 검은 머리, 날카로운 눈매. 녹색 눈동자. 그 특징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
“귀염둥이 칼!”

칼릭스의 인상이 사납게 구겨졌다. 불법 투기장에서 구르며 갖은 험악한 인상을 다 본 길레드가 움찔할 정도였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다.”

“아, 네. 카, 칼릭스 님? 경?”

“편한 대로.”

길레드가 머쓱하게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칼릭스. 맞다. 그런 이름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후계자이자,
대륙에 명성이 자자하게 퍼진 ‘마인’의 혈육. 비스타에서 돈 많고 잘생긴 데다가 귀엽고 착하기까지 하다고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문을 가진 사람치고는 인상이 영, 아니긴 했다. 잘생겼다는 사실은 인정하겠지만, 저


날카로운 눈매에서 착하다는 단어를 떠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귀엽다는 얘기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길레드는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된다고 생각했다.

“아, 예. 칼릭스 님. 저는 길레드라고 합니다.”

“일단 자리에 앉지.”

길레드는 아까 전에 비해 누그러진 기색을 보였다. 적의 대신에 자리 잡은 것은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탐색의 눈빛이었다. 대륙에 자자하게 퍼진 ‘붉은수레바퀴’의 이름 덕분이었다. 숨어 사는 마인들에게 로젤린의
얘기는 전설이나 영웅담처럼 퍼지고 있었고, 그 영향이 지금도 드러나는 것이었다.

“내 사정으로 인해, 그쪽이 원치 않았던 식의 접근을 하게 된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저를…… 아니지, 마인인가요?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감도 잡히지 않는군요.
마인과 가장 가까이에 계신 분이 아닙니까.”

칼릭스는 말을 골랐다. 허울 좋은 핑계야 만들어 내자면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자들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뒷골목을 전전하고 사는 대표적인 하층민. 그럴싸한 말로 간단히 손을 빌릴 수
있겠지만…….

어쩐지 그러기 쉽지가 않았다. 달콤한 말이 나가는 대신 입안은 쓰기만 했다. 칼릭스가 피식 웃었다.

“내 필요에 의해서.”

“제가 어디에 필요합니까?”

“만일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만일이라 하신다면?”

칼릭스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매끈한 탁자 표면에 그가 비쳤다. 탁, 탁, 탁. 일정한 소리를 내던


손가락이 멈췄다. 정적이 무거웠다.

“전쟁.”
길레드는 아, 하고 신음했다. 요새 비스타가 어수선하더라니. 골목골목 있는 주점마다 전쟁의 가능성이 알음알음
돌더라니. 누런 이에 정돈되지 않은 턱수염을 가진 취객들이 말하는 것과, 정장을 차려입은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가 말하는 ‘전쟁’의 무게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칼릭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얘기를 이었다.

“내가 지금부터 꺼내는 제안은 너와 네가 알고 있는 또 다른 마인들에게 건네는 제안이다. 결코 강제하지 않으며,


거부한다고 해도 불이익이 따르지 않으리라, 내 누이의 이름에 맹세하지.”

11

뿌리 출신의 수습생들은 어지간히 실력이 뛰어나지 않는 이상 상급 기사의 눈에 들기 힘들었다. 고만고만한


실력들이라면 상급 기사도 당연히 친하거나 도움이 될 만한 가문의 자식들을 데려왔다. 스승이 없는 이상 큰
성장을 보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것이 뿌리 출신들 대다수가 수습생에만 머무르는 이유였다.

그 와중에 로젤린의 휘하에는 뿌리 출신의 기사가 두 명이나 있었다. 동료 상급 기사들이 그녀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 취급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복도를 걷던 중, 로젤린은 파르딕트와 만났다.

“어이, 로젤린.”

“파르파르.”

두 사람이 주먹을 부딪쳤다. 파르딕트가 가르쳐 준 인사법이었다.

“너 또 뿌리 출신 데리고 왔다며. 수집하는 거야? 대체 왜 뽑았어, 걔는?”

로젤린은 생각하다가, “귀여워서.”라고 했다. 파르딕트는 잠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어쩔 수 없긴 하지…….”

88 화.
“어쩔 수 없긴 뭐가 어쩔 수 없습니까!”

“오, 이게 누구야. 레이몬드 부관.”

레이몬드는 헤사가 로젤린 휘하에 들어갔음을 등록하는 서류를 대신 작성하고 접수한 후에 돌아오던 길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듣는데 아주 가관이었다. 귀여워서 뽑았다고 하질 않나, 그럼 됐다고 하질 않나.

“로젤린 이 녀석! 사람을 얼굴만 보고 판단하는 건 누구한테 배웠어!”

“마른가시나무 백작님한테.”

남자는 얼굴이 전부란다. 마른가시나무 성 내부의 연무장을 같이 구경하던 중 세실이 한 말이었다. 로젤린이
보기에도 반쯤 헐벗은 남자들은 턱 선이 각지고 콧날이 우뚝하여 아주 잘생긴 편이었다. 로젤린은 세실의 말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보기에 좋았다.

“얼굴만 보고 뽑은 애들도 있대.”

“백작님…….”

레이몬드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과연 마른가시나무 백작이라면 그런 말을 하고도 남겠지.

세 사람이 복도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에 지나가던 상급 기사들이 하나둘 멈춰 섰다. 로젤린에게
새 수습생이 생겼다는 시답잖은 건을 주고받다, 주제는 흐르고 흘러 ‘제일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누구인가?’로
바뀌었다.

“역시…….”

“한 분밖에 없지.”

“디에즈 전하도?”

“엘피디오 전하도 얼굴은 괜찮지.”

“그래도 역시…….”

이견 없이 만장일치였다. 월장석 성의 주인, 리카르디스가 1 위에 올랐다.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가장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전하 같은 미모를 가진 사람은 보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그 나머지였다.

“보면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맞아, 막 얼굴이 화끈하면서 눈도 못 마주치겠고.”

“진짜 아름다우시지.”

로젤린은 상급 기사들의 말에 수긍했다. 자신도 전하를 보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열이 오른 적 있었는데!
다들 그랬구나. 전하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 거였어. 로젤린이 “저도요. 심장이 막 두근거렸습니다.” 한마디
보태니 레이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그렇다면서 로젤린과 손뼉을 짝짝 부딪쳤다.
이 모든 광경을 애칭 슈슈, 슈텐만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축제 당시 로즈와 도련님 사이에 흐르던 기묘한
공기를 보았다. 가슴 안쪽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기류가 분명 있었건만, 로젤린이 지금 완전히 길을 벗어나 버린
것이다. 로젤린 너는 거기에 끼어 있으면 안 돼…… 이 멍청이들이 지금 뭐 하는 거야…….

“피부도 엄청 좋으시지 않나.”

누군가의 말에 로젤린이 자신은 전하의 피부를 만져 봤다며 자랑했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어우야, 하면서
로젤린의 어깨를 툭 밀면서 낄낄대는데 슈텐은 환장할 것 같았다.

“엄청 매끄러우셨습니다.”

로젤린이 말했다. 아, 로젤린. 진짜…… 아. 로젤린…….

* * *

“뭐지.”

“…….”

“살면서 몇 번 보지 못한 눈빛인데. 왜 나를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거지 슈텐 경?”

남자의 눈빛에 연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비 오는 겨울 날 거리에 버려진 강아지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안 그래도 싫어하는 장소에 가는데, 더 찝찝하게 만들지 말고 당장 그만둬.”

슈텐의 어깨가 축 쳐졌다.

리카르디스를 실은 마차는 대신전을 향하고 있었다. 같은 황성 내에 있지만, 마차를 타고 삼, 사십분은 가야


하는 먼 거리였다.

날씨가 좋아 창을 열어 뒀더니, 옆에서 말을 타고 있던 슈텐이 내내 저런 표정을 하고 있어 리카르디스는 확


기분이 상해 버렸다.

계속해서 힐끔거리는 슈텐의 눈빛이 몹시 불쾌했던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반대쪽 창문으로
로젤린이 멍하니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말 위에서 앉은 다리를 하고 있는 재주가 아주 멋졌다. 리카르디스는
마차의 뒤를 따르던 레이몬드를 불렀다.

“레이몬드 경.”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잠시 이리로.”

리카르디스는 레이몬드가 말을 몰아 다가오자 그의 윗주머니에 있는 과자를 쏙 빼앗았다. 당당한 도둑의 태도에


레이몬드는 아, 어, 입술을 오므리기도 벌리기도 했지만 결국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리카르디스는 강탈한 과자를 그대로 로젤린에게 던졌다. 그녀는 마차의 반대쪽을 보고 있었으면서도 날아오는
과자를 확 낚아챘다. 손을 펴 건포도 오트밀 쿠키의 정체를 확인한 로젤린이 눈을 크게 뜨며 반색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살그머니 움직이더니, 마차의 앞에서 호위하는 기사단장 스타스의 뒤통수 어디쯤을 떠돌았다.

“근무 중인데 먹어도 됩니까?”

“된다. 크게 다친 후이니 잘 먹어야지.”

리카르디스의 대답에 로젤린이 입꼬리를 쭉 늘려 웃었다. 최상단에 위치한 결정권자가 자신의 편이라 마음이
든든한 듯했다. 삐이익!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물고 있는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빠져나왔다.
화답하듯 하늘 위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울렸다. 마카롱이 하강해 로젤린의 팔 위에 앉았다.

“같이 먹자, 마카롱.”

이름이 이름이라 그런지 오트밀 쿠키 대신에 마카롱을 먹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로젤린은 마카롱에게 쿠키를
물려 주고 제 입에도 하나 쏙 넣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 경.”

“예. 전하.”

“수습 기사를 한 명 더 들였다면서.”

마차 주위를 호위하던 다른 상급 기사들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리카르디스가 제 사람들을 아끼는 거야


유명하다지만, 수습 기사를 한 명 더 들였니 안 들였니 정도의 소소한 것을 알 정도는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요새 리카르디스의 관심은 유별나게 로젤린을 향하고 있었다.

“예. 헤사입니다. 전에 전하와 같이 밤에 마셨던 산딸기 와인이랑 비슷한 머리 색을 가졌습니다. 웃을 때 눈이


완전히 접히는데 아주 예쁘고 귀엽습니다.”

레이몬드는 심하게 사레들렸다. 콜록거리는 소리가 요란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레이몬드는 “너, 로젤린 언제 전하와……!” 따위와 같이 무언가를 추궁하고자 했으나, 슈텐이 재빠르게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아, 맞다.”

아옹다옹 다투는 두 남자의 공방을 보던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완쾌 선물로 받은 검은 군마, ‘초콜릿’을 마차


곁으로 바짝 몰았다. 안장 위에 일어선 그녀는 자연스럽게 창을 통해 마차로 쏙 들어갔다.

빈 안장 위에는 마카롱이 그녀 대신 앉아 고삐를 물었다. 초콜릿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등 뒤를 슥 한번 보기는


했지만 문제없이 운행되었다.

“……안장이 불편했나?”

“아니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실례합니다.”

보통은 묻고 들어오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표정이 제법 심각해 보여 리카르디스는 뒷말을 삼켰다. 로젤린은
창문을 전부 닫는 와중 동공이 확장된 레이몬드와 눈이 마주쳤다.

탁.
로젤린은 레이몬드의 경악 어린 눈동자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가벼운 손길로 문을 닫았다. 그녀가
리카르디스를 돌아보았다.

“전하.”

“불안하게 자꾸 왜 이럴까. 아직 수습 가능한 정도일 수도 있으니 얼른 말해 봐. 안 그런 척 하고 있지만 사실


굉장히 초조하다.”

“전하. 제 새로운 수습 기사가 마인입니다.”

리카르디스의 눈썹 위치가 올라갔다. 그가 제 눈썹을 한번 쓸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미묘하게 큰 사건인 듯 아닌 듯…… 이 정도는 괜찮군.”

또 다른 마인. 어딘가에는 살고 있었을 테지만, 시기와 장소가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잘은 몰라도 대륙에
자자하게 퍼진 명성에 따라오는 어떤 작용일 것이다. 그게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는 모르겠으나.

“검은달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주 귀엽습니다.”

귀엽다고 검은달이 아닌 건 아니지만, 확실히 검은달이 귀엽지 않기는 했다. 나름 확실한 구분법인가.
리카르디스가 웃음을 흘렸다.

“일라베니아 내에도 마인은 있을 테니.”

“전하, 방금 한 얘기는 비밀입니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시면 안 됩니다.”

헤사가 부탁한 적은 없으나,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밝혀지길 바라지 않을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비밀.

“약속하겠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코앞에 불쑥 튀어나온 로젤린의 새끼손가락을 보고 당혹스러워 했다.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이라니. 세티스티아가 살아 있을 적에나 몇 번 해 본 것이었다. 리카르디스가 머뭇거리자 로젤린이 손을 그의
얼굴에 더욱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무언의 압력이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제 새끼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에 꿰었다.

로젤린은 얽힌 새끼손가락을 두어 번 세차게 흔들고 엄지를 딱 붙여 도장까지 찍었다. 이 어설픈 서약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코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헤사가 전하께 폐가 안 되도록 하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 예쁘다는 소년이 진정 검은달의 암살자일지언정, 갖은 수단을


동원해 회개시키겠다는 것 같은데…… 아무튼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걸고 한 말인 만큼 반드시 지켜지리라.

둘은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밖에서 서성이는 로젤린의 보호자, 레이몬드의 기척이 느껴졌으나
두 사람 다 무시했다.

“그때의 사냥 대회 이후로는 대신전에 가 본 적이 없겠군.”


“예.”

“웅장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천천히 구경 시켜 주고 싶지만, 나를 붙잡고 늘어지려는 자들이 많아. 느긋하게
둘러볼 시간은 없을 테지.”

“인간들만 없으면…….”

먼 곳을 바라보는 로젤린의 눈빛이 선뜩하게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급하게 말을 붙였다.

“안 된다.”

가만히 기도 잘하고 있는 신관 털 한 올 건드릴 생각 말라는 얘기였다. 로젤린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안 합니다.”

저를 뭐로 보냐는 식으로 흘겨보는데, 리카르디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안 된다’는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는 걸 보니.

89 화.

뎅-

멀리서 하늘을 울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뱃속에 구렁이 수십 마리씩 품고 있는 자들이 기거하는 곳의 상징치고는
꽤나 아름다웠다. 신전이 코앞이었다.

그 순간, 로젤린이 불에 꼬리 데인 고양이처럼 펄쩍 뛰는 듯 일어섰다.

쿵!

로젤린의 머리와 충돌한 마차가 굉음을 냈다. 거대한 마차가 순간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거렸다.

“로젤린!”

로젤린이 머리를 감싸고 낑낑거렸다. 리카르디스가 급하게 그녀의 정수리 부근을 문질렀다.

밖에서 스타스가 마차 창문을 두드리며 무슨 일 있느냐 물어 왔다. 리카르디스는 대충 얼버무렸다. 마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는, 좀 바보 같은 일이 있어났노라 하면 그녀의 체면이나 위신이 상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정작 그 당사자는 제 체면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로젤린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리카르디스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서 한참 끙끙거렸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머리를 문지르기도 하고, 그녀의 얼굴을 잡아 올려 눈물을 닦아 주기도 했다. 따뜻한 손의 온도에
로젤린은 고통이 좀 덜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왜 갑자기 일어나고그래.”

왜 그랬더라. 로젤린은 그의 질문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냥 종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도망가고 싶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아까 전 마차가 흔들거렸듯이, 마음이 계속 요동쳤다. 로젤린은 다시
리카르디스의 허벅지에 머리가 닿게 푹 고개를 숙였다. 그의 다리를 꽉 안고 있는 채였다.

리카르디스는 난데없는 로젤린의 애교…… 비슷한 것에 당황하다가 다시 그녀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로젤린은 머리로부터 밀려드는 따뜻한 기운에 눈을 감았다.

“많이 아프나?”

다정한 목소리가 마음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음의 파동이 흔들고 간 마음이 다시금 잔잔히
가라앉고 있었다.

* * *

대신전에 도착했다. 금강석 성만큼이나 화려한 건물이었다. 오라고, 오라고, 제발 한번만 방문해 주시라 아무리
빌어도 오지 않던 2 황자의 방문에, 신관이며 성 기사들이며 할 것 없이 신나서 달려 나왔다.

“하얀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뵙습니다.”

“축복을 그대들에게. 대신관 라헤안시를 만나러 왔을 뿐이니, 신경 쓸 것 없다.”

“귀한 분이 오셨으니, 안내를…….”

“필요 없으니 물러가라. 어릴 적부터 다닌 곳이니 눈감고도 갈 수 있다.”

노쇠한 신관이 눈물을 보였다. 2 황자 전하께서는 몸은 멀리하시지마는, 마음만큼은 언제나 대신전과 함께였다는
사실을 자신은 믿고 있었노라며 감격해했다. 아니 뭘 어떻게 하면 그 말이 그렇게 해석이 되는 거지?
리카르디스는 치를 떨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것같이 애타게 매달리건 말건 리카르디스는 제 갈 길을 갔다. 한마디라도


붙이고 싶어 종종걸음으로 쫓아오는 자들도 있었으나, 거구의 하얀밤 기사단원들의 호위 망에 전부 걸러졌다.

로젤린은 집단의 후미에서 리카르디스를 따르다가, 뒤돌아보았다.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의 시선이 와서 박혔던
탓이었다. 눈이 마주친 어린 신관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더러운 거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하얀색 일색인 인파를 죽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로젤린을 보며 전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얼굴을 일그러트린 가면들을 수백 개 걸어 놓은 공간 속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두피부터 시작해 뒷목
아래까지 거미가 천천히 기어가는 듯한. 그런 기분.
오랜만에 느끼는 적의는 낯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리카르디스는 저 앞에 있었다. 레이몬드가 의문이 섞인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잠시 발걸음을
멈췄던 로젤린이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아치 모양의 문을 지날 때였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리카르디스는 소리를 따라 뒤를 돌았다. 입구를 지키는 두 명의 성 기사들이 창을


교차하며 로젤린의 앞을 정확하게 막아 서고 있었다. 로젤린은 멈춰 서서 눈만 깜박깜박 감았다 뜨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음, 하고 입술을 물며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가, 교차된 창 밑으로 들어가기 위해 슬그머니 자세를


낮췄다.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그녀를 내려다보던 성 기사들이 당황해서 창의 위치를 조정했다.

“……지금 뭘 하는 짓이지?”

성 기사들은 서릿발이 내리는 차가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2 황자 리카르디스는 무뚝뚝하지만 쉽게 화를 내는 성품이 아니라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 시선, 딱딱하게 굳은 와중에도 이따금 꿈틀거리는 턱 근육까지. 누가 보아도 분노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젤린은 다시 한 번 자세를 낮췄다. 성 기사들이 얼어 있는 틈을 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화들짝 놀라며 창을 움직여 가로막자, 로젤린이 아쉬움에 작게 혀를 찼다.

입구에서 출입을 허가 하지 않으면, 열에 아홉은 말없이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물러나고, 나머지 하나는 무슨
일인지 묻는 것이 보통의 경우였다.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을 벗어난 로젤린의 이상한 행동에 성 기사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아니, 자존심도 없어? 왜 기어서 들어오려는 거야?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물었을 텐데.”

성 기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신전 법률에 따르면 마인은 이 축복의 문을 통과할 수 없음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잠시 이마를 짚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미간에는 잔뜩 주름이 잡힌 채였다.

그의 입이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는데…….

“이런…… @#$^&%##……….”

욕이었다. 뒷골목을 전전하는 자들이나 사용할 법한 걸걸한 욕이 기어코 그의 이성을 뚫고 나오고야 말았다. 성
기사들은 2 황자의 입에서 욕이 나오는 진귀한 광경에 몸을 굳혔다.

로젤린은 바닥에 배를 붙인 채 턱을 괴고 사태를 관전했다.

“너의 위대하신 이델라브힘께서 그리하라 하더냐?”

“이, 이것은 몇백 년 전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나의 자비로우신 이델라브힘께서 그리하라 하더냐!”

리카르디스는 앞에서 바짝 굳어 있는 성 기사들을 보며 한 자 한 자를 씹어 말했다.

“세상에 빛이 되어 축복을 내리시고, 이 땅 위에 열매 맺게 하여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시는 이델라브힘께서.


마인이 불길하니, 내 신전에, 발걸음 하게 하지 말라, 네게 직접 말하셨느냐 물었다.”

“그, 그것이…….”

“신전의 법률이라 말했나? 일라베니아의 탄생과 시작된 신전의 법. 높으신 이델라브힘의 뜻이기에 영광스럽고
숭고하다. 하나, 시대마다 위대하신 선황들마다 조금씩의 차이를 보인다. 이 말뜻이 무엇이느냐면.”

리카르디스는 저벅저벅 성 기사를 향해 걸어갔다.

“만물을 비추시는 분, 이델라브힘. 그분의 뜻은 미천한 우리들로는 백날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는 거다. 이
미천한 머리로는.”

리카르디스가 성 기사의 머리를 퍽 쳤다. 아프지는 않지만 딱 기분 나쁠 정도로.

“영원한 뜻은 있으나 영원한 법은 없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우선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가운데


이델라브힘의 뜻을 가장 잘 헤아리시는 황제 폐하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 황제 폐하께서 로젤린 경을 마인이 아닌
내 호위 기사로 인정하여 머물게 하셨으니…… 그대들은 지금 황제 폐하의 인정을 받은 나의 호위 기사에게
시비를 건 셈이지.”

성 기사들이 바짝 얼어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고귀한 황자에게서 나올 법한 압력이 아니라, 무슨 맹수를


눈앞에 둔 것 같았다. 하얀 피부가 얼어붙은 듯 서늘하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시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리카르디스가 이를 갈며 두 개의 창 중 하나를 콱 틀어쥐었다.

“내 사람에게 겨눠진 날카로움은 나를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

그들은 급하게 창을 거두었다. 리카르디스에게 창을 잡힌 성 기사도 창을 제 품으로 가져오려 했으나,


리카르디스의 손에 잡힌 상태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맨 처음에는 그가 잡고 있는 것도 까먹고 휙 당겨
보았지만 꿈쩍도 안했다.

성 기사의 얼굴이 발개졌다. 교리를 공부하거나 기도하는 시간을 제외하고서는 단련만 해 왔던 자신이, 곱게 자란
2 황자에게 힘으로 밀리다니.

리카르디스는 창을 잡은 채로 가만히 그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창을 그의 가슴에 퍽 소리나게 밀어 붙였다.


거칠게 무기를 건네받은 성 기사가 고개를 푹 숙이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로젤린은 눈만 굴리고 있다가 가로막고 있던 이들을 잽싸게 지나쳐 리카르디스의 뒤에 섰다. 무섭게 일그러진
표정들은 이제 그의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로젤린이 작게 숨을 쉬자 리카르디스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가 손수 더러워진 로젤린의 제복을 툭툭 털어 주었다.

“경, 괜찮나?”

리카르디스가 자세를 낮춰 그녀를 걱정 어린 다정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로젤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리카르디스가 굳은 표정을 애써 누그러트리며 웃었다.
“진짜 괜찮은 거지?”

“네.”

리카르디스의 손길과 다정한 시선에 속 안에 꾹꾹 뭉쳐 들어찬 것들이 풀려 나갔다. 역시 황자 전하가 최고였다.


로젤린은 아직까지 어쩔 줄 모르는 성 기사들을 보며 악당같이 씨익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기분을 조금 풀 수 있었다.

긴 복도를 걷는 동안 로젤린은 스타스와 레이몬드, 슈텐과 바스티안, 잇세리온에게 번갈아가면서 위로받았다.


다들 한마디씩 건네며 그녀의 입에 작은 과자를 하나씩 넣었다. 로젤린은 시무룩해하면서도 분주히 입을 움직였다.

대신관들은 신전 내에 각각의 별관을 가지고 따로 생활했다. 라헤안시가 머무는 별관은 다른 대신관들의 건물에
비하면 작은 축에 속했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로젤린은 입을 떡 벌리고 구경했다. 리카르디스가 혀를 쯧
찼다.

“명색이 신관이라는 놈들이…….”

라헤안시를 돕는 신관이 이미 나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로젤린도 그들의 얼굴을 알아봤다. 축제 ‘그림자 없는
밤’에서 라헤안시 뒤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90 화.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뵙습니다.”

“축복을 그대에게. 라헤안시 대신관은?”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방문하셨노라 전했으나…….”

젊은 신관의 시선은 리카르디스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그의 머리 끝, 발끝, 손끝, 어깨 끝 등을 다양하게


배회했다. 리카르디스는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알 만하군.

“뒹굴고 있겠지. 알겠으니 물러가라.”

“저희 대신관님께서 현재 몸이 미령하시어…….”

“애쓰는 모습은 안쓰럽다만, 변명은 되었다. 라헤안시 대신관의 방만함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축 처진 어깨를 하고서는 앞서 걸었다. 고단함이 느껴지는 발걸음이었다. 한참을 더 깊게 들어가고, 몇


번의 복도를 지나치니 커다란 문이 나왔다.

신관이 앞서 들어가 라헤안시에게 손님의 방문을 알리려 했으나, 리카르디스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신관이 초조하게 제 손톱을 물어뜯었다.

방 안은 어지러웠다. 바닥에는 예복이, 침대 위에는 걸레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분홍색 머리의 라헤안시는
그 걸레와 함께 침대 위에서 뒹구는 중이었다. 그는 엎드려서 성전을 읽고 있었는데, 먹고 있는 과자 부스러기가
성전 위로 후드드 떨어졌다.

라헤안시는 “아앗, 기름 번진다.”라고 중얼거리며 당황하고 있었다. 신관이 라헤안시의 그 꼴과 방문한 2


황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이델라브힘을 부르짖는 몸짓을 했다. 리카르디스는 문을 열기 전에 초조해하던
신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 내놓아도 참 부끄러웠으리라.

“아, 형 왔어?”

리카르디스는 그 처참한 꼴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여전하구나.”

“누가 온다더니만, 형이었네. 말을 하지. 마중 나갔을 텐데.”

신관이 미간에 주름을 잡고 불손한 눈초리로 라헤안시를 노려보았다. 분명 설원의 월계수, 2 황자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방문하셨다고 또박또박 일렀건만, 저가 성전 읽으며 한 귀로 흘린 건 생각도 안했다.

“……모두 문밖에서 호위를 해라. 이곳에서 위험한 것은 위생 수준뿐이니. 그리고 로젤린 경은 대화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이동해 있는 게 좋겠다. 레이몬드 경이 그녀와 함께 있도록.”

“예, 전하.”

머뭇거리던 로젤린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또 다시 시무룩한 기색을 보이는 로젤린을 보며 리카르디스는 제
입술을 한번 가볍게 물었다. 곁에 두고 안심시키고 싶었지만, 어떤 대화가 오고 갈지 모르니 일단은 잠시 물러
둬야만 했다. 물러 둬야…… 물러 둬야 하는데…….

돌아서는 뒷모습이 여간 작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로젤린 경. 누군가가 시비 걸면 패도 된다.”

“안 됩니다.”

스타스가 차분하게 반박했다.

“깐깐하기는.”

“로젤린 경은 신전 관계자에게 손대지 말고. 무슨 일이 생기거든 레이몬드 경이 대응한다.”

레이몬드는 제 가슴을 주먹으로 퍽 쳤다. 자신감 넘치는 몸짓이었다.


“예, 적당히 패겠습니다!”

스타스가 잠시 두 눈을 감았다.

“슈텐 경이 레이몬드 경 대신 그녀와 함께 건물 밖에서 대기한다. 유사시에 슈텐 경이 대응하도록.”

레이몬드와 리카르디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스타스를 쳐다봤다. 기사단장이 무거운 침묵으로 그들의 불만을
가볍게 눌렀다.

* * *

슈텐과 로젤린이 방을 나와 이동했다. 생각보다도 로젤린의 귀가 성능이 훌륭해, 예상된 지점보다 멀리 와야만
했다.

슈텐은 기둥에 몸을 기댔고, 로젤린은 복도 난간 위에 걸터앉았다. 저 멀리 하얀 건물의 둥근 지붕 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반짝거리며 흩어지는 빛무리에 로젤린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곧 다시 눈을 뜬 이유는,
아까 대신전 입구에서 겪었던 종류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자신을 꿰뚫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지나가는 신관들마다 로젤린의 검은 머리를 보고 멈춰 섰다. 그들은 흘끗 쳐다보기도 하고 대놓고 역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 어느 공간보다 이델라브힘에 대한 믿음이 강한 이곳은, 그 어느 공간보다도 크레안
티다니온의 힘을 배척했다. 로젤린이 아무리 2 황자 리카르디스를 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녀가 마인이라는
사실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로젤린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마주하고 있자 슈텐이 그녀를 가리며 앞으로 나섰다. 신관들이
슈텐의 사나운 얼굴을 보고는 슬슬 도망가듯 발걸음을 옮겼다.

로젤린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잔상처럼 남아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답답하고
불안했다. 갑자기 리카르디스가 보고 싶었다. 괜찮나? 경? 어깨에 손을 얹고 눈을 맞추는 그를 보면 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로젤린의 입술은 하도 매만져 붉게 부어 있었다.

그 뒤로도 사람들은 끝없이 지나갔다. 그들이 속삭였다.

마인, 마인이야. 그 로젤린. 2 황자의 호위 기사. 더러워. 붉은수레바퀴! 불길한…….

자신을 향한 악의는 하얀밤 기사들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에도 종종 겪었으나 이것은 달랐다. 좀 더 집요하고,
좀 더 사납고, 좀 더 자신을 파헤치려는 듯했다. 슈텐의 어깨 너머로 늙은 신관과 눈이 마주쳤다. 최악의
살인자를 보는 눈빛이 그러 할까.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역하고 냄새나는 것을 모아둔 찌꺼기를 마주한 얼굴이
그러할까.

로젤린은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로젤린이 입을 가리자 슈텐이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봤다.

“속이 좋지 않아?”

“기분 나쁩니다.”
“먼저 성으로 귀환해. 내가 보고 할 테니.”

“싫습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떠올렸다. 이런 공간에 그를 두고 갈 수 없었다. 슈텐은 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것을 대충 눈치챈 듯했다.

“붉은수레바퀴의 고집이란. 대신전에서 전하를 공격할 만한 간 큰 인간은 없어. 공격은 무슨, 전하를 머리에
이고 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널렸다고.”

로젤린이 입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리질하자 슈텐이 휴 한숨을 쉬었다. 가라, 싫다. 가라고! 싫다고!
공방을 벌이고 있는 도중, 한산해졌던 복도 끝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널찍한 복도에서 굳이 가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하고 있었으니 그저 지나가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다.

“로젤린 경?”

익숙한 목소리에 로젤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디에즈가 다가오고 있었다. 축제 날 길을 잃었을 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5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5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디에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축복을 그대들에게. 로젤린 경 무슨 일 있습니까?”

그는 건성으로 인사를 넘기고는 로젤린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입을 가린 채 대답했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디에즈는 그녀의 대답에 호들갑 떨며 괜찮으냐고 묻는 대신,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야에 저
멀리서 로젤린을 바라보며 소곤대는 신관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디에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디에즈가 슈텐을 바라보며 상냥하게 물을 때는, 아까의 표정이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하얀밤 기사단의 상급 기사, 두번째송곳니 슈텐입니다.”

“그래요, 슈텐 경. 경들이 여기 있는 걸 보니 형님이 근처에 계시는 것 같군요. 로젤린 경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 제가 잠시 데려가 쉬게 해도 되겠습니까? 두 번째 건물의 뒤편에 작은 정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장소이니, 그쪽에 있겠습니다. 형님이 나오시거든 데리러 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슈텐 경? 두 사람
다 이동하면 나중에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부탁해도 될까요.”

디에즈가 눈을 접으며 사르르 웃어 보였다. 슈텐은 그 미소에 홀려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 보호자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디에즈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이동했다. 언제나 차분했던 걸음걸이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빨랐다. 로젤린도 그에 맞춰서 반쯤은 달리듯 이동했다. 디에즈는 중간중간 계속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돌아볼 때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손목에 머물렀다. 자신이 그녀를 잘 잡고 있는지 확인 하는 것 같았다.

* * *

정원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땅에서 올라오는 것이고, 나무에서 열리는 것이고 할 것 없이 제 멋대로 자라
있었다. 디에즈가 말한 대로 공간 안에는 어떤 사람도 없었다. 막 이곳에 발을 들인 로젤린과 디에즈.
둘뿐이었다. 부서진 분수에는 물이 메말라 있었지만, 갈라진 틈으로 담쟁이덩굴이 감싸듯 자라고 있어 멋스러웠다.

탁 트인 공간에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로젤린은 싱그러운 풀 냄새가 섞인 바람을 맞으며 눈을 살며시 감았다.
더러워, 어떻게 저런 불길한 것이 신전에…… 속삭이던 말들이 모두 사라졌다. 귓가를 울리는 것은 새 소리와
이따금 울어대는 풀벌레들의 노래 소리뿐이었다.

바스락 바스락.

거기에 하나의 소리가 더해졌다. 로젤린은 눈을 떠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디에즈가 풀숲을 기웃거리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초록색 잎사귀 사이로 아직 다 익지 않아 푸른빛을 띠는 열매와 산딸기들이 알록달록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로젤린이 와 감탄했다. 디에즈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속 안 좋은데 먹어도 괜찮겠어요?”

“먹어서 누르면 됩니다.”

디에즈가 웃음을 터트렸다. 눈물까지 찔끔 흘리는데 뭐가 웃긴지 로젤린은 이해하지 못했다. 디에즈는 큰 나무
그늘 아래에 제 겉옷을 벗어 펼쳤다.

“앉아요, 로젤린.”

로젤린은 겁도 없이 황족의 옷 위에 착석했다. 디에즈는 손수건을 꺼내서 그 위로 산딸기와 채집한 여러 열매들을


올려놓고 자신도 제 옷 위에 앉았다. 알록달록한 과일 위로 나무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로젤린은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상급자가 음식에 손에 댈 때까지 침만 삼켜야 하는 것이 하급자의 운명이었다. 로젤린은 우선 얌전히


기다렸다. 흐흥. 노래를 부르며 열매를 한번, 그를 한번 번갈아 보며.

“안 드십니까?”

갖은 눈치를 줬다. 디에즈가 산딸기 하나를 집어 그녀의 입에 쏙 넣었다.

아, 달콤하다. 로젤린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91 화.

디에즈는 로젤린의 기분을 환기시켜 주려 애쓰면서도, 그녀의 기분이 저조한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저
가끔 시선이 마주치면 웃고, 바람에 나무 그림자가 움직이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음. 뭐가 고마울까요?”

“신전 안에서 꺼내 주신 거요. 감사합니다.”

굳이 따지면 이 정원 또한 신전에 속해 있었으나, 그건 로젤린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하나가 정돈되어


있고, 하얗게 빛나는 곳. 사람들이 불온한 시선을 보내는 공간과 이곳은 같은 신전이라 하더라도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제 멋대로 자라 있는 수풀. 부서져서 담쟁이덩굴에 감싸인 분수. 여기저기 매달린 과실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디에즈는 어떻게 이런 곳을 알고 있을까. 그에게도 이곳이 필요한 때가 있었을까?

디에즈는 감사하다는 로젤린의 말에 숨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제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슬쩍


돌렸다.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앞머리가 그의 눈을 가렸다. 오뚝한 콧날과 입술만 보이는 옆모습임에도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것쯤은 보였다. 기쁘다는 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딘가 침울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축제에서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요즘의 디에즈는 좀 이상했다.

디에즈는 한참 뒤에 제 얼굴을 두 손으로 쓸더니 웃었다.

“정말 로젤린은…… 에파 같아요.”

“에파……는 뭡니까?”

디에즈가 머뭇거렸다.

“이건,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절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에파는…… 제가 어릴 적 기르던 개…….”

말하던 디에즈가 황급하게 단어를 바꿨다. 특정 동물이 욕같이 들린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했다.
“……강아지입니다.”

“아, 제가 개 같다고요.”

“강아지. 입니다.”

디에즈가 정색했다. 좀 더 귀엽고 온건한 단어를 추구하려는 듯했다. 강아지라고요. 한번 더 강조해서 로젤린은
고개를 재빠르게 끄덕이며 네, 강아지. 하고 대답했다.

“제가 며칠 걸려 숙제를 해 놓으면 찢어 놓고, 겨울날 쌓인 눈으로 열심히 얼음집을 만들면 달려와서 부수고는
했었죠.”

이거, 욕이구나! 로젤린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강아지’가 아닌 ‘며칠 걸린 숙제와 얼음집을 파괴하는


강아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그렇게 크게 욕먹을 만한 짓을 했나…… 사사건건 그의 일을 훼방 놓은
애완동물과 비슷하다는 욕을 들을 만한…… 로젤린은 충격 받았다.

“특히 얼음집은 동상까지 걸려 가면서 일주일 동안 열심히 만든 거였는데요.”

나쁜 에파…… 로젤린의 눈꼬리가 축 쳐졌다.

“그날 밤에 에파가 감기에 걸렸는지 콧물 흘리면서 헥헥 거리기만 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얼음집을
부술 때만 해도 저런 개, 아니 강아지 당장 갖다 버리라고 했었는데,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얼음집이고 뭐고,
그저 아프지만 않게 해 달라며 이델라브힘께 기도했었죠.”

그러니까 결국 좋아하기는 했다는 건가? 혼란스러워 하는 로젤린의 표정을 보고 디에즈가 웃음을 터트렸다. 곧
그가 로젤린에게 두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었다. 디에즈가 이런 장난을 할 줄은 몰랐던
터라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에즈가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얄미워.”

디에즈가 꼬집던 것을 멈추고 손바닥으로 감싸듯 그녀의 볼을 덮었다. 꾹 눌러서 로젤린의 입이 새의 부리처럼
튀어 나왔다. 디에즈가 즐겁다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 로젤린은 난데없이 놀림당하는 느낌이라 어쩐지 심통이
났다.

* * *

“앉아, 형.”

“어디에?”

“거기 있잖아. 곰 인형 들춰 보면 의자 나올……걸? 미안해, 좀 지저분하지?”

“지저분한 걸 아는 머리였다는 게 더 놀라울 뿐이다.”

잇세리온은 재빠르게 라헤안시가 지목한 곳을 들춰서 의자를 발굴했다. 손수건을 꺼내서 삭삭 닦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기사들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라헤안시는 성전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과자 부스러기를 탈탈 털었다.
침대 위에서. 리카르디스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축복의 밤에 설교하는 거 잘 봤다. 곧잘 하더구나.”

라헤안시가 느슨한 눈을 휘면서 활짝 웃었다.

“어어? 봤어? 아, 정말 왔으면 왔다고 하지. 부끄럽게…….”

그가 으헤헥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비비 꼬았다.

“진짜 회심의 설교라고 생각했거든. 크, 폐하께서 보셨으면 아주 그냥…….”

혼났겠지. 리카르디스는 뒷말을 삼켰다. 기분 좋아하는 어린애의 심기를 거스르는 악인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근데 말투는 왜…… 그랬던 거냐?”

“이번에 했던 설교가 내 첫 데뷔였거든. 좀 위엄 있어 보이게 하려고 살짝 바꿔 봤는데, 웬걸. 끝내주지 뭐야.”

정말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대신관 경력을.

“할배들이 나 어리다고 시비 걸어서 바꾼 말투가 설교에도 이렇게나 유용할 줄이야.”

“살아 봤자 얼마나 더 산다고. 어린 네가 이해해라.”

다소 수위 높은 농담에 라헤안시가 좋아서 넘어갔다. “어, 얼마 못 산대…… 이히힉끽……!” 하면서 좋아하는데


농담한 리카르디스가 민망해질 정도였다.

리카르디스는 바라지 않은 이복형제자매들이 많은 편이었다. 황자만 여섯, 황녀는 일곱. 도합 열세 명. 그러나


리카르디스와 교류하는 형제는 손에 꼽았다. 다른 형제들은 몰라도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배가 다를 뿐 아니라,
씨도 다른 자식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데다가, 다른 여러 가지 문제와 더불어 본인의 성정까지 교류를 끊는 것에
한몫 더했다.

그 중, 유일하게 라헤안시와는 이따금 만나서 차를 마신다든가 안부 인사를 나누는 둥의 소소하지만 질긴 교류가


이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 황자 리카르디스와 라헤안시의 우애가 깊다는 얘기가 돌지 않은 것은,
라헤안시가 더 이상 설원의 월계수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델라브힘의 아래 종의 역할을 맡은 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이름만을 지녔다. 어떤 가문의 라헤안시, 위대한
누구의 아들 라헤안시가 아닌 그저 한낱 미천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권력 싸움에서도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사실이 리카르디스가 라헤안시를 좀 더 편하게 여길 수 있게 했는지도 모른다.

라헤안시는 손수 차를 끓여 와 테이블처럼 보이는 잡동사니 위에 다과를 차렸다. 그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손대지


않았지만, 라헤안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배들이 한번만 만나 달라고 노래를 부를 때는 무시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온 거야?”

“오늘 마침, 대신관들 일곱 중에 넷이 자리를 비우는 날이더군. 그나마 덜 마주칠 수 있으니 오늘이 적기였지.”

“신전에 사람 심어 놨다는 말을 대신관 앞에서 그렇게 태평하게 해도 되는 거야?”

리카르디스는 다리를 꼬면서 웃음을 흘렸다. 가늘어진 눈동자가 라헤안시를 응시했다.


“그 노친네들이 퍽이나 모르겠다.”

“하기야. 그래서 뭐. 형이 가지고 온 결정에 대한 연구 결과? 그건 아직 멀었는데?”

“그건 알아서 하고. 오늘은 그 건이 아니라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라헤안시는 자신이 차려 놓은 다과를 즐기며 제 이복형제를 주시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리카르디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 빛났다. 아, 거참 잘생겼다.

“라헤. 마력은…… 대체 뭐지?”

라헤안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린아이 때부터 배우는 개념을 지금 다시금 알려 달라는 건 아닐 테고? 마력,
마력. 크레안 티다니온. 검은 달로부터 오는 불길한 힘. 성력과 정 반대의, 상극의, 섞이지 못하는…….

“우리 똑똑한 형…….”

라헤안시가 제 머리를 매만지면서 웃었다. 곱상한 얼굴인데도 히죽 웃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발타에 가서 축복의 밤에 대한 단서라도 얻었어?”

“……역시 넌 알고 있었군.”

“명색이 대신관인데.”

라헤안시는 긴 의자에 늘어져 반쯤 눕는 듯, 반쯤 앉은 듯한 묘한 자세를 유지했다.

“사실 나는 신참 대신관이라 다 알려 주지는 않지. 내가 따로 공부하고 알아낸 것도 있고. 우리 스승님이 알려


준 것도 있고.”

리카르디스는 라헤안시 입에서 나온 스승님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라헤안시가 스승이라 부를 만한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그가 아직 설원의 월계수 라헤안시라 불릴 때,


그에게 신학을 가르친 대신관 윈디트일 것이다. 신전에서는 스승이란 호칭은 사용하지 않았으나, 어릴 적 입에
익은 탓인지 라헤안시는 신전에 들어가고서도 그녀를 종종 스승님이라 부르곤 했다.

리카르디스는 슬그머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하얀밤의 기사단원들과 잇세리온뿐이었다. 그가 어울리지도


않는 눈치를 본 이유는, 몇 년 전 처형당한 대신관 윈디트에게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걸 내어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며 만민을 두루 살핀다는 선량한 성직자의 얼굴 뒤에는
다른 모습이 있었으니, 다름이 아닌 사이비 교주였다. 대신전과의 가르침과 반하는 교리를 설파하며, 백성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죄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일라베니아는 충격에 빠졌고 대신관 윈디트는 사형당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라헤안시가 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라헤안시가 대신관이 되는 것을 꺼려하는 자들이 많았다. 대신관 윈디트는 상급 신관 라헤안시를 곁에 두고
교리와 법률,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다. 접촉이 많았던 만큼 라헤안시도 당연히 물들어 있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는
당연했다.

하지만 라헤안시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제 결백을 증명했고, 그가 윈디트에게 이상한 교리를 사사 받았다는 증거
또한 한 장도 찾을 수 없었기에, 그저 의심에만 그치고 넘어갔다. 물론 그 뒷배경에는 라헤안시의 혈통이 톡톡히
작용했다. 아무리 성을 버렸다고는 하나, 황제는 제 핏줄이 그런 오명을 쓰는 것을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92 화.

사건 당시 리카르디스도 대신전의 신관들이 라헤안시를 추궁하는 것을 모두 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신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라헤안시는 눈물 콧물 흘리며 바닥을 뒹굴고 어린애처럼 서럽게 울고 있었다.

[아, 모른다니까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모른다니까아! 일라베니아를 음해하는 미친 여자에게서 뭘 배웠으려고! 엉엉 목 놓아 울어 당연히 윈디트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스승이 알려 주고 간 것이 있다고?

“너, 윈디트의 가르침은 받지 못했다고 했잖아.”

“내가 스승님 밑에 몇 년을 있었는데 설마. 그 말을 믿었다니 형도 생각보다 순진한걸…….”

이 자식이? 리카르디스는 그를 흘겨보았다. 라헤안시는 의자에서 뒹굴 거리면서 낄낄댔다.

“형, 윈디트는 딱히 종교를 창설하고 교리를 설파하고 다닌 적은 없어. 사이비 교주라니 말도 안 돼.”

“사형당해서 억울했겠군.”

“그저 일라베니아와 황제 폐하 욕을 심하게 하고 다녔을 뿐이야.”

“……사형당해도 억울하지는 않았겠는데?”

라헤안시는 “확실히…… 내가 들어도 그 말은 좀 심하긴 하더라…….” 하면서 과거를 반추하는 눈을 했다.


대체 무슨 욕을 하고 다닌 건가, 전 대신관 윈디트…….

“다른 곳도 아닌 발타에서 ‘축복의 밤’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면, 단순히 성력만으로 하얀 밤과 검은 달을 불러


낼 수 있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다. 필요한 것은 두 개의 힘. 두 사람. 성력과 마력을 지닌 자. 그리고 문헌에 적힌 걸로 보아,


일시도 중요한 것 같더군. 굳이 따지자면…… 보름달이 뜰 때?”

라헤안시가 무성의하게 박수를 짝짝짝 쳤다. 대충 맞다는 얘기이리라. 발타의 신전에서 눈치챘던 것이지만, 황제
다음으로 ‘축복의 밤’에 가까운 대신관이 확인해 주니 마음이 놓였다.
“그럼에도 형. 현재의 일라베니아 백성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해. 일라베니아가 의도적으로 마인과 마력의
필요성을 지워 버린 거야. 윈디트는 그걸 알고 몰래 퍼트리고 다니다가 딱 걸렸어.”

리카르디스는 신전이라면 질색인 터라, 대신관들과 친분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 윈디트도 그저 오며 가며 스치듯


봤을 뿐이었다. 그렇게 배짱 좋은 사람이었을 줄은 또 몰랐다.

“확실히 황제 입장에서는 곤란할 만했겠어.”

“뭐,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그렇다면 왜 일라베니아에 하얀 밤이 찾아오지 않느냐…… 하면.”

“현 황제의 역량 부족과, 숨어 버린 마인들?”

“그것도 있지만, 형. 일정 수준의 성력을 가진 사람이 ‘축복의 밤’의 조건이라면, 마력도 마찬가지로 일정
수준이 필요하잖아?”

라헤안시는 새삼스러운 말을 되짚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럼에도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설원의 월계수의 핏줄들은 대대로 성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 역할에 부합했던 거지. 그래서 대대로 하얀 밤을
불러 왔고.”

“그렇겠지.”

“그러면 형. 마력을 강하게 타고나는 핏줄은? 지금 어디 있을까?”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띵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맞는 말이었다. 설원의 월계수. 그 이름을 달고


있는 자들은 성력의 양과 상관없이 대다수의 인원이 성력을 타고 났다. 그것이 하얀 밤을, 축복의 밤을 불러오는
자격을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라 하여 모든 정당성과 권리를 손안에 쥐고 있었다.

그렇다면 라헤안시의 말대로, 마력을 타고나는 핏줄이 있을 가능성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떤 기록에서도,
어떤 역사책에서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인의 존재와 마력의 역할을 필사적으로 지우는 일라베니아 황실의 특성상
그 또한 가려진 부분일지는 몰랐으나,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없었을 수도?”

그래서 이런 얼간이 같은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라헤안시는 반쯤 감긴 눈을 더욱 느슨하게 했다. 이제는


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는 시선을 어디에도 맞추지 않고 멀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눈이었다.

“있었어.”

존재를 확정하는 그의 짧은 말은, 현재가 아닌 과거를 가리키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라헤안시가 그저 제 감만으로 이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윈디트에게서든, 대신관만 열람할 수 있는 서고를 통해서든…… 이것은 진실일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그들은 분명 존재했다. 강한 마력을 타고나는 혈통.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일라베니아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떠난 것인가? 숨어 버린 것인가? 하지만 몇백 년이 지나는 세월 동안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고 숨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설원의 월계수의 혈통이 아니더라도 성력을 가진 자는 대륙 여기저기에서 태어났다. 때로는 황족을 넘볼 정도의
성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보통의 경우에는 신전에서 그들을 데리고 와 신관으로 길렀다. 강압적인 절차를
밟는 경우도 종종 있긴 했으나, 큰 보상이 따랐기에 부모들은 순순히 아이를 넘기곤 했다.

이와 같이 몇백 년 동안 성력이 강한 자들이 대륙 곳곳에서 태어났다면 마찬가지로 상당수준의 마력을 가진 자도


태어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혈통이 아니더라도 마인은 있다. 그럼에도 일라베니아 황실이 몇백 년 동안 하얀
밤을 띄우지 못했다는 얘기는…… 그 조건에 부합하는 마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혈통이 세상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강한 마인이 씨가 마른 것이다. 헤아릴 수도 없는 먼 과거에, 무슨 일이


분명 일어났다. 그 모종의 일로 인해 대륙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그 시발점에는 아마
일라베니아 황실이 있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실소했다. 이거야 원. 멍청한 것도 정도껏 해야지. 독식하려다가 상을 뒤엎은 꼴이었다. 설원의
월계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게 창피해질 지경이었다. 피가 이어져 있지 않은게 다행이라 여기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는데…….”

라헤안시가 말을 이었다. 의자에서 뒹굴거리던 것은 언제 멈췄는지 똑바로 앉아서 과자 기름이 묻은 성전을


뒤적이고 있었다.

“지금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강한 마인이 한 명 있다지.”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날카로운 눈빛을 걸었다.

“비밀에 접근한 사람일수록 로젤린 경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할 거야.”

산뜻한 봄바람이건만 서늘하게 피부를 훑는 듯했다. 닭살이 돋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앞날의 험난함을 예고하는
한마디였다. 리카르디스도 체감했으나, 이복동생이라 해도 대신관의 위치에 있는 자에게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을 줬다. 옛날 명망 높은 대신관 몇은 예언 따위도 종종 하지 않았다던가.

첨탑에서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은 문밖을 향했다. 멀리에
있을 로젤린을 그려 보았다. 많이 불안해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리카르디스는 다음을 기약하며 일어섰다.

라헤안시도 하늘하늘한 잠옷을 훌러덩 벗고 바닥에서 뒹구는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생각보다 성실하게 하는구나.”

“이래 봬도 대신관이라우…… 다음에 또 봐.”

“라헤.”

라헤안시는 하얀 대신관용 모자를 쓰면서 씨익 웃었다.

“정겹게 왜 그래 형. 형은 나한테 묻고 싶은 거나 필요한 거 있음 꼭 그렇게 부르더라.”

“항상 대답을 피하기만 하더니. 오늘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냐.”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분주한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라헤안시. 라헤. 세티스티아가 그를 부를 때 사용하던


애칭이었다.
라헤안시는 형제들 중 유독 리카르디스와 친근하게 지내는 듯했으나, 리카르디스의 손을 들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축복의 밤. 하얀 밤. 뭐 그런 것들. 리카르디스가 전장에서 구르면서, 암살자의 칼날을 피하면서 알기
바라 왔던 어떠한 단서, 정보, 진실들. 라헤안시는 그 일부를 알면서도 결코 리카르디스에게 가르쳐 준 적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리카르디스가 품는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라헤안시는 목걸이를 침대 아래에서
낑낑거리며 꺼내면서 말했다.

“솔직히 형은 빨리 죽을 거라 생각했어. 내 예상대로라면 한 육 년 전쯤에 죽었어야 했는데. 정말 대단해 형.”

“칭찬 참 고맙구나, 동생아.”

리카르디스는 심드렁하게 턱을 괴었다. 라헤안시는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를 슥슥 정리하는 중이었지만, 전혀


정리되고 있지 않아 결국 리카르디스가 도와줘야만 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지. 아무에게나 기밀을 누설하고 다닐 수는 없잖아? 이쪽도 나름 목숨이 걸린 일인


걸.”

“한데?”

리카르디스가 그의 머리를 손으로 빗어 하나로 묶었다. 머리카락 하나가 당긴 것인지 아프다고 난리를 쳐서
느슨하게 다시 묶어 줘야 했다. 지저분한 머리를 묶고 나니 훨씬 인물이 살았다. 라헤안시는 거울속의 자신에게
윙크와 사랑을 화살을 한번 날린 다음에야 대답했다.

“이제야 목숨을 걸어 봄 직하다는 거지.”

리카르디스는 거울에 비친 라헤안시의 얼굴을 보았다. 여느 때처럼 히죽히죽 웃지도, 나른하게 늘어져 있지도
않았다. 어느 한 곳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먼 곳을 그리고 있었다. 라헤안시는 곧 뒤돌아서 씩 웃었다. 언제나
보아 왔던 미소였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아까 리카르디스를 안내했던 신관이 초조한 얼굴로 라헤안시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는 이래 봬도 대신관이라 하더니, 역시 빼먹은 전적이 몇 번 있는 게 아닐까.

라헤안시는 이크이크, 지각이다 지각. 하면서 입만 바쁜 시늉을 했다.

“담에 또 봐, 형.”

“얼른 가기나 해라.”

“이델라브힘의 축복이…….”

“가라고.”

라헤안시는 치근덕대면서 끝까지 뭉그적거리더니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93 화.

갑자기 많은 정보가 쏟아져 머리가 아파 왔다. 리카르디스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인상을 썼다. 몇 세대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강한 마인의 출현. 이걸 단순하게 ‘와, 대단하다.’ 라던가 ‘와, 멋있다.’와 같은
감상으로 끝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별관을 나왔더니 저 멀리 슈텐이 홀로 서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에게 다가가 로젤린의 행방을 물었다.

“디에즈 전하와 잠시 신전 내에 있는 정원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대답에 리카르디스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상태 안 좋은 동료를 왜 애먼 사람에게


맡기냐며 슈텐은 몹시 혼났다. 리카르디스는 씩씩 성내다가, 앞장서 안내하는 슈텐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바쁘게
움직였다.

정돈 되지 않은 허름한 정원 속. 큰 나무 그늘 아래 두 남녀가 사이좋게 앉아 있었다. 바닥에 펼친 손수건


위에는 붉고 노란 열매가 올라가 있어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가…… 좀, 가깝지 않아?’

많이 가까운 거 같은데? 거의 딱 붙어 있지 않은가. 어깨도 닿은 것 같은데?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멈춰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무어라 말하자 디에즈가 열매 하나를 집어 로젤린의 입에 쏙 넣어 줬다. 그녀의
볼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겼다.

“디에즈 레예 일라베니아…… 저 천사 같은 얼굴로 이 무슨 음탕한……!”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르원이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전하. 전혀 음탕하지…… 않았습니다만…….”

“저 손길에 음심이 가득한 것이 보이지 않나 르원.”

“……자세히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남자의 질투. 흉했다.

“르원.”

“예, 전하.”
“저 자리를 어떻게 하면 가장 엉망으로 파할 수 있을 것 같나? 가슴에 생긴 상처 때문에 열매는 물론이고,
동그란 것까지 두 번 다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저는 전하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나는 나 혼자 컸으니까.”

아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씀을 하실 수 있느냐. 제가 전하의 기저귀까지 갈아 드린 게 기억나지 않으시냐.


일곱 살 때 처음 만났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냐. 하면서 두 사람이 아옹다옹 하는 사이에 그늘 아래의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리카르디스의 바람대로 깨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열매를 황홀하게 바라보던 로젤린이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낮춘 자세, 까딱이며 풀고
있는 손가락, 크게 뜬 채 한 번 깜박이지도 않는 눈. 누구 하나 잡을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로젤린은 척척 걸어오다가 도자기를 들고 있는 여인의 석상을 부쉈다.

쾅!

흙먼지가 우수수 일어났다. 르원이 짤막하게 감상을 말했다.

“우리 편이라 정말 다행입니다.”

로젤린은 조각상 여인에게서 도자기를 강탈하고는 더욱 흉흉한 기세로 다가왔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이 서 있는 곳에 도착하기 전에 멈춰 섰다. 그녀가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며 도자기를 날릴 준비를 했다.
하얀밤 기사단이 양 옆으로 쫙 갈라졌다.

로젤린이 채찍으로 후려치듯 도자기를 날렸다.

쉬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선명했다. 도자기의 종착지는, 지나가던 어떤 신관의 머리였다.

퍽, 파삭.

정확하게 머리를 강타한 도자기는 산산조각 났고, 신관은 스르륵 쓰러졌다. 성난 호랑이 같던 로젤린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여러 시선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암살자입니다.”

“……그러길 바랐다.”

지나가던 선량한 신관의 머리를 깨 버리길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에. 리카르디스는 자리를 수습하라
기사단원들에게 명령했다. 곧 그는 디에즈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돌아보았다. 손수건 위의 열매가 잔뜩
으깨져 있었다. 로젤린이 앞만 보고 오느라 밟아 버린 모양이었다.

아니, 저렇게까지 처참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남자의 순정을 짓밟다 못해 으깨다니!

‘로젤린, 정말…… 너무…….’

마음에 든다.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디에즈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눈동자가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성정이 순하고 유약한
아이라, 이런 폭력적인 장면을 즐길 리 없을 텐데?

디에즈의 황금색 눈동자가 로젤린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 * *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오게.”

로젤린은 헤사의 도움을 받아 몇 장의 보고서를 작성한 후, 기사단장실에 들렀다. 검은달과의 전투 보고서였다.


전투 내용이야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지만 형식상으로 필요한 절차였다.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에게. 어서 오게, 로젤린 경.”

방 안에 발을 들인 로젤린의 시선이 스타스를 벗어나, 그의 앞에 있는 탁자 쪽을 향했다. 정확히는 탁자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 한 마리에게로. 연한 갈색에 노란빛이 섞인 털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발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품종이었다. 고양이는 골골 소리를 내며 기사단장의 부드러운 손길을 만끽하고 있었다.

고양이가 로젤린을 쳐다보더니 노란 눈을 초록색으로 바꾸는 묘기를 선보였다. 마력의 기운이 순식간에 짐승에게
감돌았다.

‘……마카롱이잖아.’

로젤린은 오늘 내내 마카롱을 보지 못해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기사단장의 집무실에 있을 줄이야.

로젤린의 눈길이 탁자 위의 고양이에게 닿는 걸 보고 스타스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사절단 이후로 종종 보이더군. 마차의 짐 사이에 숨어 온 게 아닐까 싶은데…… 먹이를 한번 줬더니 가끔


찾아오지 뭔가. 참 똑똑한 고양이야.”

스타스는 그 이후로도 “우리 미미가 다른 사람들이 주는 건 안 먹는데…….”부터 시작해서 “파르딕트 경과


슈텐 경은 만지려다가 물렸는데…….”까지 미미가 자신을 진짜 너무 좋아한다는 얘기를 은근슬쩍 자랑했다.

미미는 배부른 고양이가 햇살 아래에서 일광욕을 하는 것 같은, 만족감 넘치는 표정으로 스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가 인간을 귀여워하는 이상한 광경이었으나, 둘 다 즐거워 보이니 뭐 잘된 것 같았다.

로젤린은 보고서를 포함해 각종 대회에 출전하는 서류도 함께 제출했다. 스타스는 로젤린이 한몫의 상급 기사
역할을 해내는 것을 보고 감명 깊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러 번 보고서를 훑었다.

“대회 출전은 기사들은 힘들지만 주군에게는 힘이 되는 일이지. 각 세력의 크기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 말이네.
수고해 주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이니 최선은 다하지 말게.”

로젤린은 미미와 스타스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이번 달부터 다음 달까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라며 칼릭스가 일러 줬다. 로젤린이 최초로 겪은 축제,


‘그림자 없는 밤’을 시작으로 다음 달까지 사냥 대회, 무투 대회, 건국일, 무도회 등등. 온갖 행사가 잔뜩
포진해 있었다. 심지어는 그 사이에 지인의 경사도 끼어 있었으니, 다름이 아닌 레이몬드의 결혼식이었다.

많은 일라베니아 제국민들은 이 시기에 결혼을 하려 했다. 건국의 달에 맺어진 부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레이몬드와 그의 약혼녀인 황금정원의 클로에도 이때를 맞춰 결혼하기로
했다.

리카르디스의 안위가 워낙 아슬아슬하다 보니, 부하인 레이몬드도 몇 번씩이나 결혼을 미뤄야 했다. 레이몬드는
발타에서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결혼하자는 청혼 비슷한 유언을 남기고 갔었고, 다행히 살아 돌아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레이몬드는 손수 쓴 청첩장을 로젤린에게 건넸다. 신랑 측 들러리로 서게 된 로젤린은 축사를 맡을 뻔했지만,


하얀밤 기사단 모두의 만류로 불발되었다.

로젤린은 머릿속으로 오늘의 할 일 목록을 하나하나 그었다. 보고서 작성했고, 서류 단장님한테 드렸고…….

저벅저벅.

복도를 걷는 일정한 소리에 하나가 더 덧대어졌다. 또 다른 발걸음 소리는 로젤린을 끈질기게 따라왔다. 느긋하고
차분한 걸음걸이였다. 우연하게 길이 겹친 듯했기에 로젤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서 걷는 사람의 보폭이 커, 두 사람의 간격이 점차 좁혀졌다. 몇 걸음도 지나지 않아 로젤린은 그 사람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로젤린에게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파르딕트나 슈텐과 비견될 만한 거구의 남자였다. 그녀가 흘끗 위를


올려다보자 역광에 침식되어 더욱 어두워진 검은 머리가 보였다.

검은 머리, 왼쪽 눈의 흉터, 거구. 날카로운 인상.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 에스터. 로젤린의 아버지였다.

“아버지.”

페르탄은 그녀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화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태도였으나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명백히 로젤린에게 맞추고 있었기에, 그녀도 페르탄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낯선 이에게 듣는 소리치고는 퍽 친근한 호칭이로군. 나를 어떻게 알아 봤는가?”

“칼릭스와 레이몬드가.”
“그렇군.”

“아버지는 살벌한 인상이라고 말해 준 적 있습니다.”

“……그렇군.”

로젤린은 살벌한 인상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페르탄을 본 순간 바로 깨우칠 수 있었다. 페르탄도
딱히 그 말에 반박하지 않는 걸 보면 제 인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한 번 로젤린을 흘끗 내려다봤다. 구불거리는 결 좋은 검은 머리, 푸르른


녹음이 드리운 눈동자, 건강하게 혈색이 도는 하얀 피부.

페르탄은 분명 알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분명히 제 딸과 다른 점이 하나라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눈앞의


무언가는 ‘로젤린’ 그 자체였다. 심지어는 눈빛, 말투, 표정까지 똑 닮아 있었으며, 그것이 흉내를
낸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표출된다는 점에서, 페르탄은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혼동이 되기 시작했다.

94 화.

누군가에게는 로젤린이 태어날 때부터 마인이라 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당연히 로젤린은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준수한 실력을 가진 평범한 기사였을 뿐이었다. 검술 명문가인 바다협곡의 자식을 이길 만한 실력도 없었을뿐더러,
2 황자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들을 족족 잡아낼 만큼 뛰어나지도 못했다. 그 아이는 검은달의 병기들을 상대로
살아 돌아올 만큼, 그들을 모두 가리가리 찢어 버릴 만큼 강한 아이가 아니었다.

페르탄은 제 딸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그것’을 먼저 보기 전에, 그녀가 싸웠던 전투 현장을 먼저 접했다.


조각나 흩어진 살점이 눅눅한 습기 아래 썩어 가는 처참한 모습에, 페르탄은 비로소 그녀가 로젤린이 아님을
완벽하게 자각했다.

죽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페르탄의 생각보다도 오래 살아남았다. 준수한 실력이라고는 해도,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2 황자 리카르디스의 곁에선 준수한 실력 정도로는 부족했다. 로젤린의 죽음은 예견된 일이었다.
언제고 찾아올 수 있는 운명이었기에 전혀 놀랍지 않았다.

“어째서 제가 원래의 로젤린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겨 주시는 겁니까?”

페르탄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누구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이렇게 훤히 뚫려 있는 공간에서 “
제가 로젤린이 아니라는 사실을…….” 같은 말을 대놓고 하면 어쩌자는 건가.
“너를 위한 게 아니다. 자칫 했다가는 붉은수레바퀴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었기에 묻기로 결정한 것이다.”

“슬프지 않으십니까?”

페르탄이 걸음을 멈췄다. 로젤린도 그를 따라서 멈췄다.

“로젤린의 선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 뻔했다. 붉은수레바퀴 성의 사람들. 영지민들. 제 의무조차
저버리고 저 멀리 밤하늘에 떠 있는 달빛을 지키겠다며 떠난 아이다.”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덩치가 커 위협적인 반면, 말투는 잔잔했다.

“그때부터 내 안에서 로젤린은 이미 죽은 자식이었으니.”

페르탄은 이 말을 하기 전까지 많이 망설였다. 죽은 로젤린에게 이런 모진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까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온하게, 정말 남의 일이라는 듯이. 그제야 페르탄은 그녀를
좀 더 편안하게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슬프지 않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

이야기의 맥락을 전혀 읽지 못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확하게 폐부를 찔러 왔다. 페르탄은 거친 수염을 몇 번


쓸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끊어내 놓고 슬퍼하기에는 좀…….”

염치가 없지 않겠나. 로젤린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단순히 고민을 하는 표정이라는 사실을 페르탄은 알 수
있었다. 과거 로젤린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할 때, 지금의 그녀와 똑같았다.

한참 눈동자를 또르륵또르륵 굴려 가던 로젤린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슬프지 않다는 말씀이신 거죠. 정확하게?”

“…….”

전혀 이해를 못했군. 페르탄은 얼굴만 제 딸과 같은 이 미지의 생물이 조금……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단순하게 말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명료하게, 정확한 자신의 감정을.

페르탄이 이를 한번 악문 후에 말했다.

“슬프다는 얘기다.”

입 밖으로 꺼내니 더욱 현실감 있게 들리는 말이었다.

슬펐다. 고통이 뼛속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비록 자신이 로젤린의 손을 놓은 결과라 하더라도, 로젤린이 자신의
손을 놓은 결과라 하더라도.

그의 얼굴에 회한이 담기건 말건, 로젤린은 “아, 역시 그렇습니까?” 같은 말을 하면서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남의 속을 후벼 파 놓고는 저렇게 후련해하다니. 기가 찼다.
페르탄은 그녀를 한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떠냐.”

“아프지 않습니다.”

“리카르디스 전하 곁에서는 더욱 다칠 일이 많겠지.”

“괜찮습니다.”

“네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너 또한 죽을 것이다.”

죽은 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괴생명체를 보는 것치고는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로젤린은 그의 무뚝뚝한 목소리


속에 담긴 염려를 읽었다.

“죽지 않습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한 상냥한 말이 아니었다. 표정과 말투에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아집과 오기로 똘똘 뭉쳐 있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과거와는 다르되, 과거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그녀를
본 순간 페르탄은 홀린 듯 물었다.

“무엇 때문에 리카르디스 전하를 지키고자 하는 거냐.”

페르탄은 생각을 더듬어 머릿속에 그려 내었다. 단발머리의 어렸던 리카르디스부터, 더 과거의 꾀죄죄했던 몰골의
거지 소년의 모습까지.

대체 로젤린과 그 모습을 한 무언가는 리카르디스에게서 뭘 보았기에 지키고자 하는 것일까?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행동으로 일어날 결과만이 근심이었다. 그래서 하지
말라 했다. 그 길을 걷지 말라, 해서는 안 된다 질책했다.

황실을 위한 희생양, 그리고 그 희생양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딸. 그것만 생각하면 내리는 비를 피하지 않고
수백 시간 맞은 듯 손끝이 서늘해졌다. 원망은 갈 곳 없이 떠돌다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그렇게
온몸이 난도질 되고 나서야 궁금해지게 된 것이다.

제 딸은, 로젤린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에 와서는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일지언정.

페르탄은 손등 위로 핏줄이 올라올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팔짱을 끼고 제
발치를 응시하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음, 음…… 흠. 끙……. 새끼 강아지가 간식 보채는 듯
이상한 소리까지 내 가며. 아주 열성적이기 그지없었다.

‘로젤린이…….’

로젤린은 입을 벙긋 열었다 다시 다물었다. 그녀는 ‘로젤린이 부탁했습니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결국 내뱉지


못했다. 관성적으로 새겨 두었을 뿐, 그것이 정답이 아니게 된 지는 오래 되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은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 왔다. 깊은 숲속.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숨을 죽이고, 때로는 안개 속을


부유하는 듯한 감각에 잠겨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가끔 깨어나 죽은 무언가로부터 마력을 섭취하며 존재해
왔다. 하지만 말 그대로 존재했을 뿐, ‘그것’은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육체적인 죽음은
닿지 못하는 영역이었기에.
그런 때에 ‘그것’은 ‘로젤린’과 만났다. 그리고 로젤린이 되었다.

스치는 바람 하나, 내려 쬐는 햇살 한 점에도 로젤린은 전과 다른 감정을 느꼈다. 처음으로 만나는 세계의


모습은 놀랍고, 아름다웠다. 가슴 안쪽 차곡차곡 쌓아 온 기억들은 갈수록 찬란하게 빛났다. 생생한 감정들에
심장이 박동했다. 로젤린은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인간들 속에서 지내 온 짧은 시간은 ‘그것’의 모든 시간의 합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부디 지켜 주세요.

내가 지키겠다.

과거 ‘로젤린’과의 약속이 ‘제가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라는 자신의 맹세로 변한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게 언제부터, 또 왜 그렇게 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냥 제 마음이 그를 지키고 싶은


것인데, 왜 지키고 싶으냐고 물어보니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로젤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페르탄에게 대뜸 물었다.

“그럼 아버지는 왜 붉은수레바퀴의 영지와 일라베니아를 지키려고 하십니까?”

페르탄은 허를 찔린 듯 잠시 수염을 씰룩였다. 남자의 인상이 배는 사나워졌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가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고민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페르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답했다.

“……나에게 소중한 것이라 그렇다.”

“그렇군요.”

로젤린은 빙그레 웃었다.

“저에게도 전하가 소중하기 때문에, 지키겠습니다.”

입 밖으로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확신에 차 있었다. 페르탄은 그녀 안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힘을 느꼈다.


굳건한 의지와 신념. 가슴 안쪽에서 타오르며 사람을 나아가게 만드는 그 힘.

고작 인간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한 존재라면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대체 이 존재는 무엇인가?

바닥을 휘감던 바람이 넓게 천장으로 퍼져 울렸다. 로젤린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바람의 결을 그리듯 흔들렸다.

“너는 대체 무엇인가?”

페르탄의 질문에 이리저리 이동하던 로젤린의 시선이 그의 흉갑에서 멈췄다. 로젤린은 은색 갑주에 비치는 자신을
들여다 보았다.

[너는 대체! 대체, 누구야!]

문득, 달빛이 내리는 창가에서 칼릭스의 칼날 위로 비춰 보았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림자.]

햇살을 받는 여자의 생명력이 약동했다.


[로젤린의 그림자다.]

“로젤린입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 * *

[조만간…… 식사나 한번 같이 하자.]

페르탄이 헤어지며 했던 말은 낯설지 않았다. 황성에 들어온 이후 로젤린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어 온


인사말이었다. 헤어질 때마다 뭘 그렇게 식사를 하자고 하는지. 로젤린은 신나서 “예!” 하고 힘차게 대답을
했더랬다.

그러나 ‘조만간 식사…….’로 시작하는 상투적인 문구가 ‘오늘 만나서 반가웠고,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쯤으로 해석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로젤린은, 그 말을 꺼낸 사람을 일일이 찾아가 언제 식사를 할 거냐며
닦달을 해 댔다.

먹을 것에 대한 그녀의 집념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크나큰 실수였다. 결국 그들은 의례적인 인사말 한번


잘못했다가 불편한 인물과 불편한 식사를 해야만 하는 불편한 상황을 맞이해야 했다.

이후 모든 일을 알게 된 레이몬드가 로젤린에게 그런 인사는 그냥 하는 말이라 가르쳤고, 로젤린은 왜 사람들은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그냥 하냐며 씩씩 성을 냈었다. 어쨌거나 로젤린도 ‘조만간 밥…….’ 운운은 인사나
다름없다고 인식하게 되었는데…….

[붉은수레바퀴라는 이름의 꽃이 있다면 꽃말은 ‘쇠고집’, ‘융통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일


것이다.]

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을 오르고 내리는 가문답게, 페르탄은 그 말이 진심인 모양이었다. 약속이 이뤄진


것은 바로 삼일 뒤였다.

95 화.
고급스러운 식당은 유명세를 자랑이라도 하듯 사람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내부는 음식점이라면 응당
들려야 할, 사람들의 담소 소리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바쁜 웨이터의 발걸음 소리. 그 어떤 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전의 기도 시간이 이 정도로 고요할까.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석상처럼 굳어 꿈쩍도 하지 않고 눈만 분주히


움직였다. 식당 안의 모든 시선이 방금 전 입구를 통과한 세 사람에게 모였다.

검은 머리, 녹색 눈. 거구에 흉흉한 인상! 누군지 모를 수 없었다. 황실의 충실한 번견,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인물들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페르탄.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붉은수레바퀴의, 그 로젤린까지!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라베니아에서 보기 힘든 품종의 고양이가 그들을 뒤따라 총총총 들어왔다. 말할
것도 없이 음식점은 동물 출입 금지였으나, 종업원은 미처 만류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모두들 그러고 있듯이.

보통 권세가 대단한 귀족이라면 식사를 조용히 즐기고 싶다거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한 층을 통째로
예약할 테지만,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그런 섬세함 따위는 없는 남자였다. 밥은 먹는 것. 식당은 밥을 먹는 장소.
그러니 식당에서 밥만 먹으면 되었지 뭐가 달리 필요하겠느냐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자세히 알 리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아니, 왜 다른 층으로 안 가는 거지?


구석 진 곳은 돈도 없고 예법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앉는 자리인데, 왜 저들이 저기에 있지? 혹시 경고인가?
우리가 지금부터 여기서 밥 먹을 거니까 다 꺼지라는 얘기인가? 그런데 식당은 동물 출입 금지 아니야?

사람들의 시선에서 의문을 읽어 낸 칼릭스만 괴로워했다. 그냥…… 보이는 남은 자리가 여기라 앉은 겁니다……
고양이는…… 미안합니다…… 제 말을 듣는 분이 아니셔서…….

칼릭스는 앞에 펼쳐진 광경을 천천히 훑었다. 앞에는 페르탄, 오른쪽에는 로젤린이, 길쭉한 테이블 위에는
고양이 미미가.

‘이델라브힘이시여…….’

칼릭스에게만 가혹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 배경은, 이 시간으로부터 이틀 전. 로젤린이 아버지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갈 거라며 칼릭스에게 자랑한 일로부터 시작됐다.

함께 식사?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 약속 뒤에 모종의 음모 따위가 도사리겠거니


생각해, 칼릭스는 따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음모나 비열함 같은 단어와 거리가 한없이 멀다는 것쯤은 자식으로서 잘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예상
외의 인물 ‘로젤린’이 있으며, ‘죽은 딸의 모습을 한 존재와 식사를 나누는 그 딸의 아버지’라는 예상 밖의
상황으로부터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질질 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외의 문제가 또 있었을 줄이야.

아버지의 행동이 누이에게 미칠 여파를 생각한 건 좋았으나, 두 사람이 외부로 끼칠 영향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칼릭스는 자리로 이동하던 중,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흠칫 놀라며 나이프를 떨어트렸다.


“…….”

아버지와 누이만 문제라고 생각했지. 설마 자신의 존재까지 더해져 위압감을 배가시킬 줄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식당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내부의 공기가 훅 바뀌었다. 악단이 연주를 멈추고, 음식을 먹던 입이 멈추고,
하다못해 공기도 멈춘 것 같았다. 앞에 둔 음식이 차게 식어 가도 칼질 한번 하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칼릭스뿐이었다.

페르탄은 로젤린이 메뉴를 열심히 고민하는 십 분 가량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로젤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탄이 그제야 첫마디를 꺼냈다.

“결정 했느냐.”

“네.”

“결정 했느냐, 칼릭스.”

“……네.”

칼릭스는 지금의 상황에서 뭘 먹든 똑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조건 체할 거라고.

저번에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비스타로 내려간 일은 차치하고, 그저 이 상황 자체가 너무 거북했다. 아버지와


누님의 조합? 거기에 더해 마카롱님까지? 칼릭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환장할 것 같았다.

페르탄이 손을 들자 종업원이 바닥에 구를 듯 다급하게 다가왔다. 나이와 복식을 보건대 평범한 종업원은
아니었다. 이 식당의 주인이거나 총 지배인이지 않을까.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있는 모습이 애잔했다.

로젤린이 메뉴판을 펼치고 가장 상단의 메뉴를 가리켰다.

“양 갈비 스테이크와 단호박 수프 세트를 하시겠습니까?”

“여기부터.”

첫 마디가 심상치 않았다. 나이 든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여, 여기부터?

로젤린이 가장 하단의 메뉴를 손으로 짚었다.

“여기까지 전부.”

종업원이 딸꾹질을 했다. 로젤린은 만족한 듯 눈을 깜빡이며 씩 웃었다.

로젤린이 메뉴판을 덮으려 하자 마카롱이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그녀의 손등을 꾹 눌렀다. 그러고는 양 갈비
스테이크를 툭툭 가리켰다.

“아, 양 갈비 스테이크 하나 더.”

주문을 받는 남자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칼릭스가 급하게 마카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최대한
무해해 보이게.

“우리 미미가…… 굉장히…… 똑똑해서….”


굉장히 똑똑한 미미가 칼릭스의 손을 할퀴었다. 상처가 쓰라렸다. 누구는 하고 싶어서 한 말인 줄 아나…….

곧 음식이 나왔다. 로젤린의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의 주문 덕분에 테이블 두 개를 붙여야 했는데, 놀랍게도
그 두 개의 테이블이 빈틈없이 접시로 가득 채워졌다. 다른 사람들의 음식은 다 식어 먹음직한 빛을 다 잃어버린
반면, 두 개의 테이블 위를 채운 음식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입맛이 없는 칼릭스
마저도 군침이 돌 정도였다.

페르탄이 먼저 스푼을 들었다.

“들자.”

“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칼릭스가 마른세수를 했다. 숨 막혀 뛰쳐나가고 싶었다. 세 사람은 어떤 대화도 없이 음식에만 집중했다.


조용하던 음식점에 이따금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 울렸다.

칼릭스가 음식을 깨작이자 로젤린이 스테이크를 주사위 모양으로 잘라 칼릭스의 입에 들이밀었다.

“왜 안 먹어. 아- 해.”

“……누님, 그러니까 저는…….”

“아.”

칼릭스가 무기력하게 아- 하고 입을 벌리자, 로젤린이 그의 입에 큰 스테이크 조각을 집어넣었다.

“이거도!”

그러고는 구운 아스파라거스도 칼릭스의 입에 잽싸게 넣었다. 그는 입을 우물거리며 그녀를 흘겨보았다. 로젤린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동생의 시선을 피했다.

‘역시나 채소 먹기 싫어서 고기랑 같이 넣어 준 거로군…….’

갈수록 똑똑해진다고 해야 할지, 영악해진다고 해야 할지.

사람들은 로젤린이 움직일 때마다 조용히 술렁였다. 로젤린 경이…… 음식을 많이 시켰어! 로젤린 경이……
스테이크를 동생한테 먹였어! 로젤린의 행동 하나하나에 크게 반응을 하는데, 조만간 그녀가 숨을 쉬는 것도
신기해할 듯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것보다는 스테이크를 소스에 찍어 먹는 고양이가 더 신기하지 않나 싶었다.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페르탄이 불쑥 말을 꺼내 왔다. 칼릭스는 고기 조각을 미처 다 씹지 못한 채 삼켰다. 내 딸도 아닌 무언가와


너는 사이가 퍽 좋아 보이는구나 하는 왠지 모를 질책처럼 느껴졌으나, 로젤린은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네. 사이가 아주 좋습니다.”

당당한 그녀의 대답에 페르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로젤린과 마카롱, 페르탄은 대식가답게 모든 음식을 해치웠다. 칼릭스도 꾸역꾸역 한 접시는 비웠다. 로젤린이
후식으로 나온 푸딩을 먹으며 살살 녹아 가고 있을 때, 페르탄이 다시 말을 꺼냈다.

“잘 먹었느냐.”

“네. 맛있었습니다.”

“그러면 됐다.”

뭐가 됐는데요! 칼릭스는 미처 묻지 못했다. 칼릭스는 제 아버지가 어떤 목적 아래 그녀를 부른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을 묻거나,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있거나, 앞으로 어떻게 하라는 둥의 훈계라던가. 혹은 그녀를 제거하려
하던가.

그런데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채, ‘결정 했느냐’라든지 ‘들자.’,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 잘 먹었으면


됐다.’와 같은 말만 하고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지 않은가. 마치 이게 목적이었다는 듯.

“나는 내일 부로 다시 변경에 내려간다.”

“건국제가 곧 다가오는데, 지나고 가지 않으십니까?”

“느낌이 좋지 않다.”

발타가 한창 공작중이니, 요즘의 국경은 지난 수년간 보다 훨씬 날이 서 있는 상태였다. 제 아버지가 남들보다


감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충분히 불안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황제가 건국제까지 만이라도
황성에 남아 있으라 분명 얘기 했을 텐데, 아주 거침이 없었다. 누가 붉은수레바퀴 아니랄까 봐.

“……몸조심하세요.”

칼릭스는 입술을 긁적이며 다른 곳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로젤린도 칼릭스를 따라 “몸조심하세요.” 하고


얘기했다. 페르탄은 제 아들과 로젤린을 한 번씩 눈에 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릭스.”

“예.”

“네 어머니에게는 내가 말해 두었다.”

“……네.”

로젤린의 일을 말했다는 얘기이리라. 대륙 전역에 제 딸이 마인이라는 얘기가 퍼졌는데 에델바이스가 모를 리


없었다. 로젤린이 죽었고 제 딸의 탈을 쓴 무언가가 제 딸인 양 활동하고 있다는 상세한 얘기를 과연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칼릭스는 제 어머니가 혼절하거나 기절한 것은 아닐까하고 걱정이 몰려왔다.

“갈라·제르타예의 후예다. 네 어머니는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강한 사람이니,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고 안부


편지나 보내 거라.”

“……아버지도 어머니 얼굴이나 보고 내려가시죠. 얼굴은 안 까먹으셨습니까?”

칼릭스가 울컥해서 반격했음에도 페르탄은 전혀 타격받지 않은 듯했다. 코웃음을 치기까지 했다. 그는 겉옷을
걸치고는 마지막으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로젤린과 페르탄은 서로의 눈동자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96 화.

“로젤린 에스터.”

“네.”

그는 로젤린에게 성큼 다가가 그녀의 목걸이를 풀었다. 목걸이 줄에 걸려 있던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반지가


페르탄의 손으로 굴러 들어갔다. 칼릭스가 벌떡 일어섰다. 가문에서 아주 연을 끊겠다는 것인가 싶어 자신도
모르게 행동한 것이었으나, 페르탄은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반지를 주머니에 넣거나 어디에 버리지 않았다.

로젤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붉은수레바퀴는…….”

“네.”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네.”

“나는 나의 일라베니아를 지킬 테니.”

페르탄이 그녀의 손을 잡고는 중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칼릭스는 제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어두운 밤의 고요가 깨질 때였다. 로젤린이 하얀밤


기사단에 무단으로 입단 신청을 하면서부터 붉은수레바퀴 성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로젤린과 페르탄은 며칠,
몇 주, 몇 달을 다퉜다.

제 아버지는 담담하다. 제 누이는 온화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의견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툼은 결코
담담하지도, 온화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렸던 칼릭스는 어두운 밤을 소란하게 만드는 그들의
싸움을 두려워했다.

그때에 로젤린이 했던 말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일라베니아를 지키세요!]


페르탄은 언제나 가르쳤다. 붉은수레바퀴는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어렸던 칼릭스는 일라베니아를 지킨다는 말을
단어 그대로 해석했다. 그러니까 일라베니아 제국, 자신이 속한 나라를 지킨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
아버지와 로젤린의 입에서 나오는 ‘일라베니아’라는 단어는 항상 다양하게 변화했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처럼. 그 단어가 가진 단순한 뜻을 넘어서 더욱 거대해졌다.

[저는 저의 일라베니아를 지키겠습니다.]

그때의 제 누이에게 묻지 못해, 지금은 모른다. 그녀의 일라베니아는 단순히 리카르디스를 뜻하는 것이었을까.
어슴푸레하게 띤 형상만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었다. 대단한 것, 위대한 것, 가장 소중한 것.

“너는 너의 일라베니아를 지켜라.”

칼릭스는 어쩐지 제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리는 것 같다 생각했다. 과거 로젤린이 관계를 끊어 내기 위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지금은 결코 이어질 수 없는 관계의 두 사람을 연결해 주는 것 같았다.

“네.”

로젤린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페르탄은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다시 한 번 꽉 쥐었다.

그리고는 로젤린의 어깨를 툭툭 도닥이고 나서 곧바로 손을 들어 올리더니 푸딩을 주문했다. 칼릭스는 눈, 코,


입을 제각기 구겨서 제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표현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지한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 하여간 분위기 못 맞추는 건 제국 제일이었다.

페르탄은 곧 예쁜 박스에 포장되어 나온 푸딩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로젤린에게도 한 박스 선물한 후였다.

로젤린은 그가 밖에 나설 때까지도 손에 끼워진 반지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투박하고, 예쁘지도 않은 그


반지를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한 손에는 푸딩 박스를 꼭 껴안은 채였다. 칼릭스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참 잘 어울리는 부녀지간이었다.

12

축제 ‘그림자 없는 밤’부터 시작된 줄지은 연례행사에 바쁜 것은 일라베니아뿐 아니었다. 대륙에 위치한 크고


작은 나라의 고위 인사들은 대륙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거대한 제국의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선물을 들고 문을
두드렸다.

여행으로 쌓인 피로를 풀고 하나둘 연회장에 모여들 쯤에는, 아름다운 음악과 눈으로도 즐길 수 있는 음식이
손님들을 반겼다.

매년 보는 고만고만한 얼굴들이라 특별하게 대화를 나눌 것이 없었던 터라,

“잘 지내셨습니까?”
“아, 저는 잘 지냈는데 경은 어떻게 지내셨는지.”

와 같은 지루한 안부 인사를 나누기 일쑤였는데…….

올해의 파티 분위기는 최근 몇 년간의 반복된 지루함이 무색하게 잔뜩 들떠 있는 모양새였다.

그것은 이번 건국제에 이례적인 일이 세 가지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마인 ‘로젤린’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에 관한 얘기는 일라베니아를 벗어나 대륙 구석구석, 커다란


왕국부터 작은 부족 단위의 무리에까지 전해졌다.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설렘을 지니고 홀 입구 쪽을 계속
흘끗거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또 다른 하나는 발타와 비등할 정도로 강한 군사를 보유한 라고슈 왕국에서 아직 사절단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라고슈에서 내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으나, 그 이후의 일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현재의 통치자,
바이페렘 플로에토가 이겼니 졌니, 죽었니 살았니. 정확한 정보가 없어 소문만 무성히 퍼져 나갔다. 일라베니아
측 사람들은 타국의 인사들이 라고슈의 내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면밀히 살폈다.

그리고 그에 이어서 사람들이 주목하는 또 다른 일은, 발타와 관련되어 있었다.

매년 많은 왕족과 귀족이 무거운 몸을 끌고 왔으나, 발타만은 항상 예외였다. 힉살라 아돈이 아파서. 날씨가
좋지 못해서. 발타에 큰 우환이 있어서. 온갖 변명을 대고 발을 들일 줄을 몰랐건만 이번에는 정말로
일라베니아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황성의 수많은 귀족들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온다는 얘기야 들었지만, 또 이런 저런 변명을 하면서 안 올 줄
알았지. 설마 왕위 계승자인 하카브가 직접 행차할 줄이야! 또한 3 왕녀, 간제까지 국경을 건넜다는 소식에
연회장은 한층 더 들썩였다.

아무리 사절단으로 친교를 맺은 직후라고는 하나, 오랜 적대 관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사절단 일로
2 황자 리카르디스가 큰일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이때. 발타는 언제나 하는 변명 ‘검은달과 발타 왕실은
어떠한 연관도 없다’라는 입장을 내세웠으나 그것이 그저 입 발린 소리임을 모르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카브는 스스로 위험한 길에 발을 들인 것이었다. 전의 리카르디스야 누군가가 등 떠밀어 어쩔 수 없이 발타의


사절단으로 가야 했다지만, 하카브는 경우가 달랐다.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지위를 거머쥔 왕자에게 누가
위험을 강요할 수 있을까.

발타의 현 왕인 힉살라 아돈마저도 하카브에게 명령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자의로 일라베니아에 발을


들였다는 것인데, 그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다. 배포가 큰 건가? 그냥 미친 건가?

일라베니아 내에서도 급진적으로 전쟁을 주장하는 귀족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먹잇감이 제 발로 들어온 지금의
상황을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클로에에게 귀족들의 동향을 잘 주시해라 전달했다.

발타의 사절단이 도착한 이튿날, 리카르디스는 하카브가 머물고 있는 성을 방문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무슨 꿍꿍이속인 걸까…….’

그 어떤 누구도 하카브가 순수하게 일라베니아의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전쟁의 준비, 실패했던 리카르디스 납치 계획, 갑자기 나타난 강한 마인의 존재…….
그가 어떤 목적으로 발을 들였는지 모르니, 무얼 방어하고 무얼 공격해야 할지 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전쟁에 유리한 포석을 깔고 가려함인 걸까? 그렇다면 황제의 암살?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긴 했다. 육체가
강화된 발타의 인간 병기들이라면 충분할 테니. 하지만 하카브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발타의 사절단이
일라베니아에 온 그 순간부터 그 누구보다 경계 받는다는 사실을 알 텐데. 무슨 수로?

일라베니아가 그를 포위한 것이 아닌, 그가 적의 중심부에 들어와 심장을 노리는 형국처럼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몸을 곧게 피고 눈을 한번 지그시 감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시야가 좁아진다.


직접 눈으로 보고, 읽어야 한다. 리카르디스는 열린 마차 창을 통해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하카브와
만나는 자리에 그녀를 대동하고 싶지 않았으나,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오직 그녀뿐이었기에.

아. 한숨만 나왔다. 리카르디스를 실은 마차가 부지런히 달렸다.

“아니 이게 누구야. 리카르디스 황자.”

발타 왕성 내에서 봤던 것보다 화려했다. 금을 사용한 섬세한 장신구가 구릿빛 피부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남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를 보이며 사람 좋게 웃었다.

하카브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리카르디스에게 걸어왔다. 리카르디스가 뒷걸음치는 것보다 하카브가 그에게
다가오는 게 빨랐다. 와락. 껴안기고 말았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하카브 왕자. 그간 평안하셨는지.”

“걱정해 주신 덕에, 그렇습니다. 황자는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화려한 보석마저도 황자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리는 듯합니다.”

귓가에서 속삭이던 남자가 리카르디스의 볼에 입술을 꾹 찍었다. 리카르디스는 상한 음식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

“하카브 왕자도 정말…… 여전……하군요.”

리카르디스가 그의 가슴을 밀어내어 하카브의 품에서 벗어났다. 순순히 풀어 주기에 무슨 꿍꿍이인가 했더니,
하카브의 눈은 자신의 어깨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누군가를 찾았다.

하얀 옷을 입은 사내들 사이에서 검은색 머리카락은 유독 눈에 띄었다. 하카브의 검은 눈동자가 로젤린을 보고


멈췄다.

“로젤린 경.”

봄볕의 따사로운 내음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한쪽 치켜 올라갔다. 이 달달한 목소리는
대체?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뵙습니다.”

로젤린은 그에게 묵례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하카브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나의 검은 달! 나의 크레안 티다니온!
외치지 못한 말들이 욕망이 되어 속에서 드글드글 끓었다.
97 화.

하카브의 뜨거운 눈빛을 눈치챈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하카브가 두 팔 벌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로젤린 대신, 앞에 불쑥 나타난 레이몬드를 안게 되었다. 사내들의 단단한 가슴근육이
서로 맞닿았다. 하카브도 레이몬드도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입니다. 왕자 전하! 이렇게 반겨 주시니 기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레이몬드가 그를 와락 껴안았다. 하카브는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레이몬드를 토닥이며 볼에 키스했다. 레이몬드도


하카브의 볼에 쭈와압 키스했다. 그쯤 되면 흡입이라는 표현이 더욱 가까웠다.

하카브가 로젤린에게 가려고 할쯤이면 상급 기사 동료들이 앞으로 나와 그녀 대신 인사를 주고받았다. 다섯 번째,


수염이 까슬한 파르딕트에게 거칠고 긴 입맞춤을 받은 하카브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무기 없는 전투가 소강이 된 후, 남자들이 불쾌해 보이는 얼굴로 제 입과 볼을 슥슥 닦아 댔다. 리카르디스는 그


더러운 공방을 입을 가린 채 관전했다. 꼴 보기 싫었다. 안 좋은 쪽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하카브에게
잠시나마 미간을 찌푸리게 할 정도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좋았는데, 보는 사람마저도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카브는 로젤린을 여러 번 돌아보며 계속해 아쉽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아직 남은 기사만 열 명이라
포기해야 했다.

시녀가 응접실에 손님을 대접할 준비가 끝났노라 알렸다.

응접실에 들어선 로젤린은 잽싸게 주위를 훑었다. 미리 들어와 있던 호위들, 하카브와 같이 방문한 귀족들,
발타에서 같이 온 하인들과 숨 쉬지 않는 사물, 공간을 이루는 벽과 천장, 바닥까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주변을 살피는 로젤린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거나 한마디라도 하면 곧바로 튀어나갈
태세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로젤린은 판단을 마쳤다. 로젤린이 등 뒤로 기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이상 무.]

기사단원들이 시선을 서로 교환했다. 비치는 눈동자들에 의문이 담겨 있었다.

로젤린의 [이상 무] 신호는 다른 자들이 말하는 것보다 폭 넓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표면적인 위협 뿐 아니라, 더 깊고 치명적인 ‘파편’과 인조적으로 만들어진 마인 부대의
기운 또한 감지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그들도 데리고 오지 않았어? 하카브는 대체 무슨 배짱이지?

리카르디스가 자리에 앉자, 하카브가 따라서 맞은편에 앉았다.

“여정은 어떠셨는지.”

“녹음이 푸르고, 하늘은 쾌청하며, 과실이 영그는 아름다운 대지를 보니.”

하카브는 빙그레 웃었다.

황폐한 대륙 위에 자라나는 것은 썩어 가는 시체 냄새뿐이더라. 부모가 아이를 빵 두 덩이에 팔아넘기고, 죽은


마을에는 짐승조차 살지 못하는 지경이던데, 신의 영광을 그러쥐고 있다는, 일라베니아라는 나라가 죽을 날 받아
놓고 골골거리는 반송장이나 다름없으니.

“아, 내가 일라베니아에 왔구나 싶더군요.”

“좋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내리깔며 찻잔을 들었다. 그는 발타 사절단이 여행길에 보아 온 광경이 어떨지 예상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대지는 무슨. 바싹 말라비틀어지고 썩어서 굴러다니는 광경을 보고 나올 만한 감상은 아니었다.

그저 인사를 하고자 의례적인 대화가 오갔을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카브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니
리카르디스는 이상하게 배알이 틀렸다. 눈이 어떻게 됐느냐며 시비 걸고 싶었지만 그런 유치한 짓은 10 살 전에도
해 본 적 없으므로. 그저 생각만으로 그쳐야 했다.

리카르디스는 익숙한 홍차의 향기를 맡고 상념에서 벗어났다. 리엔타의 알리가르테. 그가 피식 웃었다. 우연도
이 정도면 신의 장난이 아닐까.

로젤린이 잠잠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홍차에는 ‘파편’은 없을 것이지만 기분이 묘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카브가 의아하다는 듯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아, 손님을 앞에 두고 제가 실례했군요. 잠시 옛 생각에 빠졌던 터라.”

“무엇이 황자를 웃게 했는지 궁금하군요. 그 미소의 이유가 제가 아니라니 섭섭할 뿐입니다.”

아…… 짜증나, 이 남자. 리카르디스가 속마음을 숨기고 빙그레 웃었다.

“검은달의 ‘파편’을 마실 뻔했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게 이 홍차와 똑같은 종류라.”

“이런, 그다지 재미있는 추억은 아니었군요.”

“그렇습니까?”

리카르디스도 하하 웃으며 잠시 날이 섰던 분위기를 전환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몸을 더욱 곧게 폈다. 지루한


대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온갖 위험에서 살아남은 단원들이, 지금의 대화에서
날카롭고 사나운 기류를 읽지 못할 리 없었다.
“사절단이 돌아가는 길에 습격당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아.”

하카브가 제 가슴을 쓸었다. 남자의 손에서 여러 개의 반지가 반짝반짝 정신 사납게 빛났다.

“제 심장이 멈춘 듯했습니다.”

정말 그대로 멈춰 버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리카르디스는 얼음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사해 보이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황자.”

“걱정해 주신 덕에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게 어디 제 덕입니까. 들어 보니…….”

하카브의 눈이 리카르디스의 뒤편을 향했다. 리카르디스는 돌아보지 않았으나, 그 시선이 닿는 곳에 로젤린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하카브가 로젤린과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대단한 활약이 있었다고. 실례가 안 된다면 듣고 싶습니다. 그녀에게 직접.”

리카르디스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그녀는 지금 제 호위중이라. 함부로 자리를 이탈하면 안 됩니다.”

“아니 잠시 이 앞으로 올 뿐인데…….”

“앞으로 그 훌륭한 얘기를 나누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헛소리 하지 말라며 싹둑 잘라 내는 태도에 하카브는 흠, 하며 턱을 쓸었다.

“이렇게 아쉬울 수가. 그렇다면 다음 기회에.”

대답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시선은 끈질기고, 욕망은 무거웠다.

리카르디스는 그의 눈빛을 본 순간 이유 모를 한기에 둘러싸였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하카브가 일라베니아에


발은 들인 이유가 로젤린의 존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델라브힘의 나라, 일라베니아.

크레안 티다니온의 나라, 발타.

당연한 것이라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마인을 병적일 정도로 긁어모으는 그들에게, 로젤린이란? 억지로 정제하여
만든 마력의 결정으로 인위적인 마인을 만드는 발타라는 나라에게, 로젤린이란? 그 인간 병기들을 손 한 번에
부숴 버리는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하카브에게 로젤린이란……

만약 하카브의 목적이 온전히 로젤린에만 국한된다면? 곤란했다. 차라리 황제를 암살하러 왔다고 말을 듣는 쪽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이 갖은 위험 도사리는 곳에, 일국의 후계자가 로젤린만을 위해 발을 들였다? 제
안위의 안녕과 모든 것을 내려놓을 정도라는 것이다.

생각이 겹쳐질수록 하카브의 욕망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 * *

하카브와 헤어진 후, 리카르디스는 곧바로 발타의 3 왕녀 간제를 만나러 왔다. 그녀는 하카브가 머무는 성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별관에 머물러 있었다. 구릿빛 피부의 전사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다니며 경비를 서고
있었다. 수가 어찌나 많은지 하카브보다 안전할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의 일행이 도착하는 것을 본 시녀가 방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문이 열렸다.

‘곧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스치듯 짧은 만남 뒤에 나누었던 인사말이 떠올랐다. 또한 그녀의 마지막 말까지도.

‘그때까지 몸조심하시기를, 황자 전하.’

상투적인 인사말이었지만, 발타의 고위 인사에게 들은 말이라 그런지 의미심장했었다. ‘내 오라비 하카브가 네가


집에 가는 길에 공격할 건데 몸조심해야 될 거다’ 쯤으로 들렸다. 그러나 앞서 한 ‘곧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인해, ‘잘 살아남아서 다시 만나자’로 해석되기도 했다.

한 사람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또한 3 왕녀 간제에 대한 정보가 굉장히 한정적이고 적은 편이라,


그녀의 생각을 유추해 내는 일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3 왕녀 간제, 스물한 살. 연회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 궁전에서 주로 생활함. 끝. 끝이었다.

발타는 이미 입지를 공고히 다진 후계자가 있었다. 하카브 위 리비타. 그 어떤 세대보다 강하고, 냉혹한
후계자의 아래, 힉살라 아돈의 모든 자식들은 숨죽인 채 지내 왔다. 그것이 간제와 또 다른 자식들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였다. 알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하카브의 눈에 띄는 형제는 어김없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는 했다. 많은 왕자와 왕녀가 있었으나, 성년이 되기
전까지의 생존율이 극악한 관계로 몇 남지 않았다. 그 몇 안 되는 왕족 중 한 명이 3 왕녀 간제였다. 수많은
하카브의 형제자매들과 다른 점을 꼽자면, 그녀가 하카브와 동복남매라는 것이었다.

문이 열렸다. 리카르디스는 시녀의 안내를 따라 방안에 발을 들였다.

“간제 왕녀.”

“어머, 리카르디스 전하. 오셨군요.”

간제는 그가 이 성에 당도했다는 얘기를 미리 전해 들었던 듯했다. 테이블 위에 이미 간단한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그녀가 일어서 리카르디스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방 안의 향기와 그녀의 눈매가 간제를 한층 더 나른하게
보이게 했다.

쪽. 간제가 리카르디스의 볼에 입 맞추고서는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어떤 달빛이 이보다 더 빛날 수 있을는지.”

분명 아까 비슷한 말 들었던 것 같은데…… 리카르디스는 깊은 회의감에 휩싸였다. 별로 닮지 않은 남매라


생각했는데, 입을 여니 똑 닮았다. 리카르디스는 왕녀의 볼에 인사를 돌려줬다.

가벼운 입맞춤을 나누는 광경에 로젤린이 잠시 몸을 굳힌 채 입을 꾹 물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98 화.

발타 식 인사야, 아까 레이몬드와 하카브. 파르딕트와 하카브. 리카르디스와 하카브도 다 했던 것인데. 갑작스레


이상한 감정이 덮쳐 왔다. 먹던 디저트를 뺏긴 것같이 심통이 나기도, 서럽기도 했다. 가슴을 헛헛하게 떠도는
감정에 로젤린은 입 안쪽의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발로 카펫을 밟고 있다가 딴짓 한다고 파르딕트에게 혼나기도
했다.

리카르디스와 간제는 테이블을 끼고 마주 앉았다. 양 쪽 다 호위 인력이 많다 보니 전투 직전의 대치 상태처럼


보였다.

간제는 쯧, 혀를 차고는 고개를 까딱했다. 모르는 이가 보기에도 작작하고 좀 나가 있으라는 얘기처럼 들렸으나,
호위하는 자들은 꿈쩍 할 줄을 몰랐다.

리카르디스가 괜찮다고 만류하려던 차,

“못 볼꼴을 보여 드렸군요, 전하. 오라비의 사람들인지라 제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마인 부대니 뭐니 하며


목을 꼿꼿이 세우고 다니던 놈들인데, 일라베니아에 와서까지도 저러고 있군요. 대신 사과드리지요.”

간제의 발언 때문에 다들 잠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왕녀의 호위인 만큼이나 단순한 전사들이 아닐 거란 생각은
했으나, 하카브가 직접 붙인 사람들인 데다가, 마인 부대?

로젤린이 감지해 내지 못했으니, ‘파편’으로 만들어진 인조적인 마인 부대는 아니었다. 순수한 마인의 경우,
마력을 운용하지 않으면 로젤린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하카브가 믿는 구석이 이것이었나 보다. 순수한 마인으로 이루어진 전사들.

그리고 그 전사들은 간제의 발언에 눈썹을 높게 올리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물론 찰나에 불과했고, 곧 얼굴


표정을 수습했지만 그를 눈치채지 못한 기사단원은 없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그들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리카르디스는 가면같이 웃는 얼굴로 간제를 바라보았다. 이 왕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혀 발타 쪽에 득이 될


발언은 아니었다. 무얼 바라는 걸까. 간제는 주위의 얼어붙은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르르 녹을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걱정 마시지요. 누구를 해하라는 말은 없더이다. 그저 광견병 걸린 미친개처럼 날뛰는 제 입단속을 하라 붙여


놓은 자들입니다. 이놈들 기세등등한 게 꼴 보기 싫었는데, 마침 잘 와 주셨습니다. 전하께서 계시면 쪽도 못 쓸
인간들이니 말입니다. 뭐라 욕 좀 해 주시지요. 들어도 찍소리도 못할 겁니다.”

호위대의 대장처럼 보이는 자가 제 두 눈을 지그시 눌렀다.

리카르디스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당황한 기색을 숨겼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정치판에서 그가 제 진심을


내보이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나, 지금은…….

‘미쳤나?’

그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곱게 자란 왕녀인줄 알았는데, 곱게 자란 미친 왕녀였다.

“……이토록 방문을 환대해 주시니, 기쁘군요. 음……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간제 왕녀. 여정은
어떠셨는지.”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말에 에둘러 답하며 급히 화제를 옮겼다. 간제는 욕해 달라는 말이 진심이었던지 아쉽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곧 차를 홀짝이며 흑갈색의 눈동자를 굴렸다.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곧
이마에 주름을 잡고 답했다.

“발타나 일라베니아나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비슷하더군요. 시체가 오죽 들끓는 게 아니라, 답답한 마차 생활만


했지 뭡니까.”

들어 본 적도 없는 참신한 대답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입을 가리고 풋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들어도 무례한


말이었다. 하지만 간제의 말에 악의가 없음은 진즉에 파악했다. 정말 순수한 감탄과 감상뿐이라 그게 도리어
웃겼다. 잇세리온이 멍한 눈으로 간제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호위단의 단장도 잇세리온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미쳤나? 봄날의 망아지 같은 왕녀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재앙 같은 입이 일라베니아라는 울타리 안에서 더 활개 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간제는 주위 사람들의 얼굴에 서린 경악을 읽었는지 어설프게 웃으며 변명했다. 자신이 말한 것이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미친 모양이었다. 그녀는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당신들의 나라를 모욕할 생각은
없었다는 듯.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비위가 좀 약해서.”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하도 참아 배가 당겨 오기 시작했다. 그녀 뒤에 시시각각


얼굴색을 바꾸는 호위 단장과 간제 왕녀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이 자아내는 이 기묘한 분위기가 어찌나 웃긴지.

호위대의 대장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생각해, 하카브 왕자가 불렀다며 그녀를 방 밖으로 끌어내고자 했다. 간제가
짜증냈다.

“소식을 알리는 사람도 들어오지도 않았고, 네가 나가지도 않았는데 오라버니가 불렀는지 안 불렀는지 어찌
알고그래? 오라버니와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사이더냐? 한 몸이기라도 해? 불쾌하니 썩 떨어져라.”

그녀는 씩씩 성을 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으로는 잔뜩 불만스러워 해도 순순히 따르는 걸 보면, 그녀를
호위하는 남자에게 제법 많은 권한이 있는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멈추고 간제를 염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카브가 그녀를…….’

해친다든가? 여러 정보를 일라베니아 측에 넘긴 상황이니 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하카브에게 혈육의


정 같은 게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다른 형제들의 목은 물론이고, 동복형제 두 명도 망설임 없이 살해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나마 장소가 장소다 보니, 당장에 그녀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 테지만…….

리카르디스의 복잡한 속내를 눈치챈 것인지 일어서 있던 간제가 후후 웃었다.

“걱정 마시지요.”

“…….”

“오라버니는…… 하카브는.”

호위 단장이 또 쩍 입을 벌렸다. 왕자 전하의 이름을 감히! 이 왕녀를 진짜!

“나를 절대 죽이지 않을 테니.”

계속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싸늘한 무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잠깐이었고, 간제는 곧 어깨를 으쓱하며
달라붙었던 무언가를 털어 버렸다. 다시 웃은 그녀는 볼에 손을 가져다 대며 가련한 표정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이번 만남도 짧았군요. 올해에 가장 아쉬운 순간이지 뭡니까. 곧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이 뒤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그는 간제의 말을 가로채는 것으로 배웅을 대신했다.

“그때까지 몸조심하시기를.”

간제가 아하하 웃었다. 간제는 시녀와 호위단에게 쌓여서 곧 밖으로 나서야 했다. 그녀는 제 팔을 붙잡은 호위
단장의 손을 장신구의 뾰족한 부분으로 푹 찔렀다. 호위 단장이 앓는 소리를 냈다.

* * *

연회는 연일 계속 이어졌다. 참석이 의무는 아니지만, 여러 정보와 교류가 오고 가는 장소였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붙어 있는 쪽이 이득이었다. 리카르디스 또한 그런 이유로 매일 연회장에 얼굴을 보여야 했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쌓여감에 따라 그는 점점 지쳐 갔다.

“망해 버려…… 일라베니아…… 흔적도 없이…….”

제국의 황자가 매일 밤 자신의 나라더러 망하라는 말을 내뱉고 풀썩 쓰러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로젤린은
일부러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녀만큼 믿음직한 호위도 없지만, 그녀만큼 불안한 사람도 없었다.

더군다나 로젤린이 벌일 수많은 예상 범위 내의 사건을 제외하고도 불안 요소는 많았다. 로젤린의 이름이 유명한
만큼이나, 그녀를 탐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었다. 축복의 밤에 대한 비밀을 모르더라도, 강한
무기라고 하니 탐나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앞에 로젤린을 미끼로 내놓고 살살 꾀는 방법도 있으나, 미끼가 너무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그 의견은 기각되었다. 파티에서 가끔 만나는 하카브는 리카르디스의 뒤에 있어야 할,
누군가의 부재에 그저 가만히 웃기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참석했다. 돌아다니다 보니 저 멀리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칼릭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칼릭스는 스물일곱 번째 여인과 춤을 추는 리카르디스를 보며 짠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리카르디스가 울컥해할 찰나, 칼릭스의 눈빛이 한층 더 슬퍼졌다. 비 오는 날 강아지를 보는 얼굴이었다. 알고


보니 스물여덟 번째의 여인이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가는 중이었다.

리카르디스의 뒤에 선 잇세리온이 속삭였다.

“힐리사고의 왕녀, 지옐입니다.”

리카르디스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속삭였다.

“이래 보여도 아직 머리는 돌아가고 있다, 잇세리온. 어제 그녀가 나에게 다섯 번 찾아와 여섯 번 춤을 신청하고
내 발을 일곱 번 밟았는데 잊을 수 있을 리가.”

내 상태가 그렇게 심각해 보이나? 리카르디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힐리사고의 왕녀를 맞이했다.

“아름다운 선율에 발길이 절로 흐르는 듯합니다. 리카르디스 전하께서는 그렇지 않으신지요?”

힐리사고의 왕녀가 빙빙 돌려 말하며 빨리 춤을 신청하라 재촉했다. 리카르디스가 떨리는 입가를 애써 억누르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려 할 때였다.

연회장이 소란스러워졌다. 몇 명의 시종이 빠른 걸음으로 제 주인들을 찾아갔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을 찾는 상급


기사 르원을 발견했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일이…… 생겼나 보군.’

리카르디스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옮기자 힐리사고의 왕녀가 작게 혀를 쯧 찼다. 돌아보니 사냥감을 놓친
맹수의 눈빛을 하고 있어 리카르디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르원이 다가와 리카르디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라고슈의 사절단이 막 도착했습니다.”

그 말이 이르는 사실은 명백했다. 라고슈의 내전이, 끝났다.

“생각보다 빨리 정리됐군.”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연회장 내부를 훑었다. 그는 저 멀리에 벽에 기대어 느긋하게 사태를 관전하는 하카브를
발견했다.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입에서 입으로 “라고슈…….”나 “플로에토…….” 같은 단어를 서로 나르고 있으니 그


또한 라고슈의 사절단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럼에도 안색 하나, 행동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깊은 관계에 있는 바이페렘 플로에토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듯 보였다.
99 화.

하카브의 자만이 아니었다. 바이페렘 플로에토의 세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었다. 라고슈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왕족과 귀족을 규합시켜 그녀를 끌어내리기에는 한참 부족할 것이다. 이번
대의 라고슈 왕족은 불의의 사고로 많이 죽어 나가, 그녀 외의 걸출한 인물은 찾기 힘들었다. 어리거나 어리석은
자들뿐이니, 내전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바이페렘, 플로에토가 실각했습니다.”

리카르디스가 굳은 얼굴로 목각 인형처럼 르원을 슥 돌아보았다.

“플로에토가 실각했다고?”

그녀를 끌어낼 만한 인물이 라고슈에 남아 있었던가?

연회장이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다. 커다란 아치 모양의 입구로 라고슈의 새로운 바이페렘이 걸어 들어왔다.


리카르디스는 그 인물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귀족들이 나라를 쥐고 흔들려는 건가. 라고슈도 끝났군.”

저 어린아이가 귀족과 왕족의 각성을 촉구하며 플로에토를 끌어내자 했겠는가. 다 꼭두각시놀음이다.

하카브를 쳐다보니,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제 볼을 느릿하게 쓸고 있었다.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뭐 썩 나쁘지는 않다. 그런 뜻인 듯했다. 내전으로 결속력이 약해진 왕국을 다스리는 꼭두각시 왕 하나 구워
먹지 못하겠느냐 하는 자신감이 보였다.

발타가 나서기 전에 일라베니아가 손을 써야 했다. 북쪽의 거대한 땅덩어리를 지배하는 라고슈. 그들은 앞으로
급격히 변화할 대륙의 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들 라고슈의 어린 왕에게 우르르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몰려드는 인파에 바이페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낯선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싸자 바이페렘은 눈에 띄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카브는 어린 바이페렘이 허둥지둥하는 꼴을 보면서 즐거워했다. 그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다가,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하카브의 시선이 소녀에게서 벗어났다. 그 순간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이목도 입구로 모여들었다.

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흑색의 지팡이가 홀의 바닥을 울렸다. 혼란과 소란을 잠재우는 묵직한 소리였다. 빛이
쏟아지는 입구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고집스러운 인상의 노인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는 라고슈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꽃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어린 바이페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총총
걸어갔다.

리카르디스가 르원을 돌아보았다. 누구냐고 묻는 눈빛에 르원은 어깨만 으쓱했다.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굴렸다. 탁한 보라빛 눈동자, 작은 체구임에도 감히 내려다볼 수 없는 기세. 70 대
중후반의 왕족?

리카르디스는 머릿속으로 라고슈의 왕실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한 지점에 멈춰 섰다.

‘설마……?’

리카르디스가 당혹스러운 낯빛을 숨기기 위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는 곧 시선을 돌려 하카브를 찾았다. 아까
전 느긋하게 발걸음을 움직이던 남자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 있었다. 언제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듯
여유로웠던 남자의 표정이 조금 비틀려 있었다.

그의 주위로 발타의 사절단이 급하게 모여들었다. 정보를 물어 온 자들이 하카브의 귓가에 다급히 속삭이고
있었다. 하카브는 굳은 미소가 걸린 입술을 슥 쓸며 나이 든 여인만 주시했다.

‘곤란한데.’

리카르디스는 멀리서 그의 입 모양을 읽었다. 리카르디스는 하카브의 반응으로 노파의 정체를 확신했다. 연회장이
술렁였다. 나이 든 귀족 몇몇이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바이페렘, 딤라…….”

그녀는 작고 큰 부족으로 이루어진 약소국 라고슈를 규합하여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 올린 장본인이었다.

플로에토 3 대 전의 바이페렘. 딤라의 등장이었다.

백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부족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아주 오래


거슬러가야 했다. 때는, 지도에 라고슈라는 이름이 없던 시절.

대륙 위에 자리 잡은 나라들이 서로 몸집을 불리고, 작은 부족들을 섬멸해 땅을 차지하고자 벌이는 정복 전쟁은


그 당시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러한 흐름에 따라 약한 자들끼리 뭉쳐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키는 일 또한 아주
흔했다.

라고슈도 그렇게 건국된 나라였다. 그 전까지 서로 검을 겨누던 열세 개 부족은 외부의 적으로 인해 빠르게
결속했다.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키고자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그들의 맹세는 검고 단단한 라고슈의 돌에 조각되어 왕성의 최 하단부로 옮겨졌다. 라고슈의 땅을 밟고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서약 위에 살아가고 있음을 명심하길 바라며.

초대 왕을 선출하는 과정은 열세 개 부족의 다수결로 이루어졌다. 결과는 만장일치로, 팔 한쪽이 없는 여자가


왕관을 쓰게 되었다. 라고슈의 건국을 위해 수년 동안 쉴 틈 없이 추운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부족들을 설득하고
협박했던 공로는 시간이 지난다고 빛 바랄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서약이나 다름없었다. 라고슈 왕의
호칭이 ‘영원한 서약’을 뜻하는 ‘바이페렘’으로 불리게 된 이유였다.

라고슈를 지키기로 맹세한 나머지 열두 명의 부족장은 ‘제르타예’라 불리게 되었다. 지하 깊은 곳 영원한


서약의 주위를 밝히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의미했다.

그들은 힘을 모아 다른 나라의 침략을 막아 내고, 서로가 서로를 지켰다. 영원한 서약의 내용 그대로. 그러나
한차례 대륙을 휘감아 몰아쳤던 전운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흩어지게 되었다. 피 냄새 나는 대지 위로 평화가
서서히 깃들기 시작했다.

쟁취한 승리와 평화는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달콤함에 불과했다. 많은 것이 변했으나, 그들이 디디고 있는


땅이 춥고 척박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았다. 싸움은
예견된 것이었다.

분쟁을 외부로 돌리지 못했던 이유는, 대륙의 모든 나라가 휴전협정을 맺은 그때에 다시 침략전쟁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칫 했다가는 다른 나라들의 동맹군에 라고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라고슈 내부. 그들끼리의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승패가 갈림에 따라 하나가
되었던 사람들 또한 갈라졌다. 비록 ‘라고슈’ 라는 이름에 묶여 있었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균열은 점차
선명해졌다.

그러한 분위기는 아주 오래 지속되어 지금으로부터 몇 세대 전까지 이어졌다. 덕분에 약소국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뭉치지 못하니 약하며, 약하니 성장하지 못한다. 악순환의 굴레였다.

그런 때에 딤라가 즉위했다. 그녀는 바이페렘의 칭호를 달자마자 왕실이 몇 대를 걸쳐 쌓아온 부를 조각내어


라고슈의 곳곳에 퍼트렸다. 작은 나라를 건국할 수 있을 정도의 방대한 금액이었다.

모두들 바보 같은 짓이라 했다. 돈을 쥐고 있기에 그 엉망진창인 나라를 통치할 수 있던 것인데, 딤라는 제 힘을


전부 나눠줘 버린 셈이었다.

왕은 백성을 보살피고, 백성은 왕을 존경하며 서로 간의 유대로 나라를 형성한다? 그저 이상뿐인, 헛된


바람들이라며 욕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딤라는 언제나 어떤 이상도 꿈도 가지지 않은 자는 위에 설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순응이라는 말로 눈을 감아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싸움을


피하는 비겁자들이여. 왕은 비겁해서는 안 되고, 결코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녀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막 즉위한 철부지 여왕의 이상론으로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권력자들이 딤라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왕의 말로가 어떻겠느냐. 그것은 비단 라고슈 왕국
내부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인접한 다른 나라들이 라고슈를 넘보기 시작했다.

겔리츠 왕국이 라고슈 왕국의 국경을 무단으로 넘어서 하나의 마을을 섬멸했다. 본격적인 침략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겔리츠 왕국은 이후,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지도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지게
되었다.

서로 물고 뜯기만 하던 부족들이 딤라 아래 빠르게 뭉쳐 일어선 것이다. 언제나 싸움을 달고 사는 전투 민족. 눈


폭풍에서도 살아남은 강한 전사들. 저들끼리 치고받아서 몰랐다 뿐이지, 그 칼날이 제대로 벼려져 외부로 향한
순간 모두가 그들의 위험함을 알게 되었다.

[추운 나라에서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형제들이여.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키겠다는 맹세는 천년의 돌에 새겨져
열 두 개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영원히 비추리라.]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망각했던 서약을 딤라가 일깨웠다. 희미하게 꺼져 가던 제르타예의 불꽃들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물론 오랜 균열을 한 번에 이어 붙일 수는 없었다. 왕실을 경시하거나 더 나아가 반反 라고슈를 지향하는 무리도
더러 생겨나, 겨우 나아가고자 하는 라고슈의 발목을 잡았다. 그들은 온건하게 베풀기만 하는 젊은 바이페렘에게
이 세대를 이끌어갈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겔리츠 왕국과의 전쟁으로 방비가 허술해진 타 부족을
약탈하는 행위가 라고슈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딤라는 땅 위에 흐르는 형제들의 피에 분노했다. 경고는 없었다. 자애로운 군주, 그 모습 뒤에 가려져 있던


흉포한 전사는 형제를 해치는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날뛰던 자들은 그녀의 검 아래 무릎 꿇었다.

이후로도 딤라는 때로는 당근, 때로는 채찍으로 라고슈를 움직이고, 묻혀 있는 자원을 발굴해 타국과 무역교류를
성사시키는 등의 한 사람의 일대기라고 도무지 볼 수 없는 갖은 업적들을 이뤄 냈다.

딤라의 치세 이후 라고슈에 대한 인식은 급격하게 변했다.

‘저들끼리 잡아먹는 무식한 야만인의 나라’에서, ‘자칫하면 잡아먹힐지도 모르니 건드리면 안 되는 야만인의
나라’로. 그 얘기를 들은 딤라는 왕좌 위에서 굴러 떨어져 깔깔깔 웃었다고 한다.

그렇게 일생을 바쳐 나라를 우뚝 세우고 물러났더니…….

손녀, 플로에토가 라고슈에 다른 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국가의 자원을 야금야금 빼돌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만약 딤라가 무덤 안에 있었다고 해도 관 짝을 발로 차고 나올 만한 사태였으니, 지금의 상황에
그녀의 등장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00 화.

여태껏 하카브가 딤라의 존재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녀가 은퇴한 지 수십 년은 지났거니와, 그
이후로는 일절 왕국의 일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설적인 바이페렘. 하지만 지난 시대의 인물이며, 옛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 옛날의 설화가 갑자기 튀어나와
살아 있는 인물이 된 지금의 상황이 당혹스러운 건 하카브 뿐만이 아니었다.

플로에토는 유폐되고, 라고슈는 새로운 바이페렘을 맞이했다. 어린 왕, 관디테는 실각된 플로에토의 조카로
딤라에게는 증손녀가 되는 셈이었다. 딤라는 아직 어린 바이페렘을 보호하기 위해 은거를 마치고 섭정으로서
나섰다. 몇 대 전에 물러간 노쇠한 여왕이었으나, 아직 그녀의 힘은 라고슈 전역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었다.

바이페렘, 아니 이제 섭정이 된 딤라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린 바이페렘이 총총 걸음으로 그녀를 따랐다.
하카브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녀의 핏줄을 이런저런 수작질로 꼬여 내어 라고슈에 혼란을 야기한 자, 하카브. 그에 대한 딤라의 감정이
어떨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암만 거친 라고슈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팡이로 냅다 머리를 내려치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온건히 인사만 오가는 장면은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라고슈의 사절단을 주시했다. 딤라가 하카브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하카브와 발타의 귀족들. 그리고 딤라와 소녀의 뒤를 따르는 라고슈 사절단. 두 무리가 대치했다. 연회장에
라고슈의 싸늘한 북풍이 불어오는 듯했다.

하카브가 웃는 얼굴로 먼저 정적을 깨트렸다.

“이 즐거운 자리에서 라고슈의 새로운 바이페렘을 뵈어 영광입니다. 하카브 위, 리비타. 발타의 첫 번째


아들입니다.”

바이페렘 관디테는 하카브의 반 쯤 되는 키에도 불구하고 그를 내려다보는 듯, 도도하게 턱을 들고 인사를 받았다.

“힉살라의 첫 번째 아들. 얘기는 익히 들었노라. 축복이 가득한 날에 만나 나 또한 기쁘다.”

익히 들었다는 얘기는 결코 좋은 게 아닐 것 같았다. 하카브가 웃으며 딤라에게로 눈을 돌렸다.

“제가 무어라 칭하면 실례가 되지 않을는지요.”

“과거의 이름은 빛 바랐으니, 지금은 섭정관에 족합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섭정관 딤라.”

그녀가 주름이 푹 들어갈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나 또한 왕자와의 만남을 무척이나 고대하였습니다. 기쁨이 아닐 수 없군요.”

리카르디스는 한기가 들어 제 팔을 쓸었다. 그의 옆에서 르원이 제 가슴을 툭툭 치고 있었다. 먹은 것이 체하는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저라면, 저 자리에서 울 겁니다.”

잇세리온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럴싸한 미소를 띠고 있는
하카브도 잇세리온과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한없이 기뻐졌다. 리카르디스는 꽁꽁 얼어 있는
주위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주 꿀맛이었다.

“이런, 하카브 왕자. 표정이 좋지 않은데, 혹 따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었는지요.”

리카르디스도 샴페인을 뿜을 뻔했다. 저렇게 대놓고 말할 줄이야. 하카브는 2 초간의 공백 후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그 2 초간 무슨 생각을 했을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있겠…….”

“언젠가 한번 라고슈의 왕성에 방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왕자.”

딤라가 그의 말을 싹둑 끊었다. 하카브가 하하 웃음을 흘렸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섭정관.”

“플로에토도 왕자를 보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홀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로부터 벗어나 발치와 잔의 끄트머리, 샹들리에 주위를 배회했다.


너무나도 거북했다. 역시나 라고슈. 직진밖에 모르는 야생마 같은 나라였다.

달그락. 딤라의 지팡이가 바닥을 뒹굴었다. 일부러 떨어트린 것인지, 실수인지는 모르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실수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카브가 굳은 낯으로 그녀의 지팡이를 주워 주었다. 딤라는 하카브의 손길이 닿은
부분을 손수건으로 슥슥 닦으며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이런, 직접 주워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하카브 위 리비타.”

“……별 말씀을.”

“이만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 보아야겠습니다. 다음에 만나 또 즐거운 대화를 나누길 바랍니다.”

즐거운 대화… 아……. 누군가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돌아서서 걷다 하카브를 돌아보았다.

“라고슈는 은혜와 원한을 잊지 않습니다. 이 빚은 다음에 갚도록 하지요.”

지금 지팡이를 주워 준 일을 말하는 것인지, 플로에토의 일을 말하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르원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잇세리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 손 좀 주물러 줘. 체한 거 같아.”

잇세리온이 제 동생의 손을 조물거리는 그때까지도 하카브는 가만히 딤라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잠시 후


가볍게 숨을 내뱉은 그가 경직된 미소를 그대로 걸친 채 연회장을 떠났다. 하카브 주위에 있던 발타의 귀족들도
우르르 빠져나갔다.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하지 못할, 회의가 간절해 보였다.

크게 팽창해 터질 것 같던 분위기는 그 분위기를 받치고 있던 한 축이 빠져나감으로써 완화되었다.

딤라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고, 어린 바이페렘을 끌고 다니며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녔다.
한 나라의 왕과 섭정이라기보다는 증손녀와 증조모처럼 보일 뿐이었다.

누구 하나 그들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는 이 상황에서, 리카르디스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테라스에 나가 있다가 막 연회장에 발을 들인 남자였다. 그는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미처 보지 못했으나, 직감적으로 무언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숨죽인 공간의 기류와 사람들의 시선이 흐르는
중심을 금세 파악하고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릭스의 눈동자가 딤라와 어린 바이페렘에게 닿았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군지 알아본 것 같긴 한데 크게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칼릭스는 곧장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라고슈의 사절단이 있는 쪽으로.

당황한 리카르디스는 스쳐지나가는 칼릭스의 손목을 탁 틀어쥐었다. 의문스럽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남자의 표정이 그의 누이와 똑 닮아 있었다. 사고치고는 쳤는지도 모르는 그 표정.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속삭였다. 입술 하나 움직이지 않는 훌륭한 복화술이었다.

“칼릭스 경. 나는 경의 누이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갑작스러운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지금 그대의 행선지에 대해 내가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괜한 걱정이 맞나?”


칼릭스가 본인의 행선지, 딤라를 보고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걱정 마시죠.”

당당해도, 당당해도, 당당을 해도! 이렇게나 당당할 수가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망설이다가 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칼릭스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딤라를 향하고 있었다.

‘대체 뭘 걱정하지 말라는…….’

모두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는 이 정적인 공간 속에서 한 사람만이 여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칼릭스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곧 그가 딤라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몇 대를 대물림 해 오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성정은 유명했다. 휘어질 바에야 부서지는, 제 이득을 위해


달콤한 말 하나 할 줄 모르는, 융통성이라고는 없고 고집스럽고 깐깐한.

그런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후계자가 타국의 유명하고 힘 있는 왕족에게 접근할만한 이유? 감히 추론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 칼릭스는 라고슈의 사절단 앞에 당도했다.

리카르디스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렸다. 그가 사고를 친다고 자신이 수습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로젤린에게 학습된 탓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칼릭스는 먼저 바이페렘 관디테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어린 바이페렘은 칼릭스와 몇 마디 나누더니 그 나이 대의


아이처럼 방긋 웃었다. 아니,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지? 다들 궁금해 슬금슬금 그들을 향해 몇 발짝씩
다가갔다.

칼릭스는 곧 무릎을 꿇고 딤라의 손등에 제 이마를 가볍게 대었다. 라고슈의 아이들이 어른에게 보이는 예의였다.

“갈라·제르타예. 사벡의 큰아들 칼릭스입니다.”

챙그랑.

누군가가 떨어트린 포크가 대리석에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를 울렸다. 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경악했다.

또 다른 증손주가 나타났다! 심지어는 그게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후계자라니!

그, 그러고 보면 붉은수레바퀴 백작부인이 라고슈 출신이었죠? 왕족 방계 가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딤라가


오죽 윗세대 사람입니까. 라고슈에 잡히는 왕족 적당히 붙잡고 물어보면 전부 딤라의 손녀 손자, 아니면 증손녀
증손자라고요. 시끌벅적, 자기들끼리 묻고 답하고 정신이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미간을 좁힌 채 머리를 굴렸다. 잇세리온과 르원도 사태를 깨닫고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당장 섭정관 딤라가 칼릭스의 증조모라는 사실도 기겁하며 놀랄 일이었으나, 그보다 이 성안에 있을 또 다른
증손주가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로젤린. 그녀 또한 붉은수레바퀴의 자식이 아니던가. 딤라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로젤린을 둘러싼 정세가 어떠한
방향으로 흐를지, 휩쓸리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 둬야 했다.

잇세리온은 두통이 이는 듯 머리를 꾹꾹 누르며 얘기했다.


“타국에 있는 혈육을 반기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전하. 그렇게 된다면 딤라 섭정관과 로젤린 경. 두
사람의 관계는 실상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라고슈 왕족들은 대대로 일라베니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쪽의 피가 섞인 증손주를…….”

라고 잇세리온이 말하는 순간 딤라가 무릎을 꿇은 칼릭스의 볼에 진하게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는 주름진 손으로
칼릭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쓰다듬다가 꼬집기도 하고, 다시 반대쪽 볼에 입을 맞추고 활짝 웃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핏줄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살가웠다.

어린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칼릭스는 무척이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딱딱한 얼굴을 부드럽게
녹이며 애정을 온전히 받아 내었다.

“매우 좋아하시네요. 일라베니아의 피가 좀 섞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나 봅니다. 큰 인물답게 큰마음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르원은 여전히 체기가 가시지 않는지 제 명치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101 화.

딤라는 칼릭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삼십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회장에 머물렀지만, 모두 딤라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라고슈의


내전은 종식되었고, 어린 왕의 뒤에는 내가 있다’는 것.

라고슈 사절단과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후계자가 빠져나간 연회는 한층 더 왁자지껄해졌다.

마차를 타고 가는 길. 바이페렘 관디테가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조금 당황했노라.”

“처음으로 일라베니아의 연회에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각국의 주요 인사가 모이는 자리라 중압감이 크셨을
텐데, 아주 의연하셨습니다.”

“음. 낚시대에 달린 미끼의 기분을 알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뜯어 먹히는 줄 알았다.”

관디테가 웃다가 칼릭스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래도 제르타예의 후손을 만나 마음 놓을 수 있었다.”

“분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딤라는 두 증손주의 대화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칼릭스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쓸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네 얼굴에서 사벡이 보이는구나, 칼.”

사벡은 붉은수레바퀴 백작부인, 에델바이스의 본명이었다. 높은 곳에 피는 에델바이스를 뜻하는 라고슈의 명칭,


사벡. 그녀가 일라베니아로 시집올 때에 사벡이 지닌 뜻을 일라베니아에 익숙한 형태로 바꾸었다. 이따금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에델바이스 더러 “사벡, 당신.” 하고 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불렀기에 칼릭스도 잘
알고 있었다.

“……네!”

칼릭스가 붉은수레바퀴 백작을 쏙 빼닮았다는 사실은 제국민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대체 어머니의 흔적을
어디서 찾은 것인지는 몰라도 증조모가 닮았다는데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여기가.”

딤라가 가리키는 곳은 눈이었다.

‘음…….’

칼릭스는 속으로 신음했다. 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 중 특히나 닮은 곳이 눈이었다. 딤라의 시력이 많이 나쁜


듯했다. 눈에 좋다는 음식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중, 딤라가 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거짓말 못하는 성미는 붉은수레바퀴를 닮았느냐. 외관이야 붉은수레바퀴를 찍어 낸 듯하다만, 눈빛이 사벡을
닮았다. 제 가진 만큼의 다정함을 담아 낸 시선이야. 인간을 이루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물려주어
다행이구나.”

칼릭스는 어렸을 적부터 에델바이스에게 딤라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어려워하거나
무서워했지만, 자신은 어릴 때부터 하나도 안 무서웠다고.

아름답고 멋진 왕실보다 조금은 예스럽지만 고즈넉한 딤라의 별장을 가는 게 훨씬 좋아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들렀다고 했다. 딤라는 어린 손녀가 맹랑하게 제 발치에서 뒹굴 거리며 노는 모습에 호탕하게 웃었단다.

요즘도 에델바이스는 주기적으로 딤라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게 딤라가 말하는 다정함일까. 그렇다면 제 누이가
훨씬 닮은 것이리라. 그녀 또한 기사단 일로 바빠도 꼭 편지를 보내 주지 않던가. 먼 사람과 안부를 주고받는
일상적인 행위도 오랜 기간 쌓이고 쌓이면 다정함이 되곤 하니까.

솔직히 자신은 증조모 앞이라 갖은 귀여운 체 하고 있지, 평소의 모습을 보면 그녀도 다정하다는 말은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더러 냉혈한이니,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이니, 제 아버지랑 겉과 속이
똑 닮았느니 말하는 사람들이 딤라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할지 조금 궁금했다.

“한데, 붉은수레바퀴는 어디 갔을까…… 연회장 안에서는 보지 못하였는데.”

딤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굳이 따지자면 칼릭스도 붉은수레바퀴였지만, 지금 그녀가 찾는 붉은수레바퀴란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을 말하는 것이었다. 칼릭스는 창밖의 먼 풍경을 보며 말을 흘렸다.

“그…… 일로 무척이나 바쁘셔서…… 변경의 수비를…….”

“안타깝게 되었구나.”
딤라가 혀를 찼다. 칼릭스는 ‘죽이지 못해서’라는 뒷말을 읽어 내었다.

라고슈는 발타와는 다르지만, 발타만큼이나 폐쇄적인 기질이 있다. 외부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고, 저들끼리 꽁꽁
뭉친다. 그래서 여타 다른 나라처럼 일라베니아 제국 사람과 혼인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딤라가 곱게 키운 에델바이스가 라고슈에 잠시 들린 붉은수레바퀴 백작에게 반했다. 칼릭스는 제 어머니가


대체 아버지의 어디에 반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둘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딤라는 혈압이 올라
몇 번 쓰러질 뻔했다고 한다.

얼굴은 딱딱하게 사납고, 성격도 무뚝뚝하다. 저런 놈은 여자 팔자를 망칠 놈이라 말을 해도 에델바이스는 사랑의


열병을 너무도 혹독하게 앓았다. 고집이라면 어디 가서 지지 않는 딤라가 한풀 꺾어야 할 정도로.

그렇게 두 사람은 혼인하게 되었고, 딤라는 페르탄에게 덕담을 가장한 경고와 협박을 했다.

경고와 협박이 먹힌 것인지 원래 그럴 운명이었는지, 에델바이스는 나름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보냈다.

딤라가 받는 편지에도 번번이 행복하다는 내용만 적혀 있었으나, 일 년에 절반 이상을 다른 지역에 체류하는


남편을 둔 그녀가 외롭지 않을 리 없었다. 딤라는 가슴이 찢어졌다.

페르탄을 죽일 날만 받아 놓고 있던 그녀에게 일라베니아로 넘어온 이번은 좋은 기회였을 텐데, 그는 마침 며칠


전 국경을 지키러 떠난 상태였다.

칼릭스는 저번에 페르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감이 좋지 않다.]

발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그랬던 게 아니었어?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내려간 거야? 심지어 라고슈 사절단에
대한 정보는 황실에서조차 몰랐는데, 단순히 감 하나로 회피했단 말인가? 정말 기가 막혔다.

딤라가 이렇게 성을 내는데도 관디테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분명히 라고슈에서도 욕을 많이 했겠지 싶었다.
칼릭스는 딤라가 제 아버지 욕을 하는 것에 열심히 맞장구 쳤다. 맞습니다. 아버지가 좀…… 그러시는 경향이
있죠.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너무 진심이라서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딤라는 칼릭스의 호응에 마음이 풀렸는지
성난 기색을 누그러트렸다.

“칼.”

“네, 증조할머님.”

“로젤린은 언제쯤 만나 볼 수 있겠니. 일라베니아에서 너희들을 보는 것만이 오로지 내 기쁨인데.”

로젤린을 불러 오겠다 말하려던 칼릭스는 입을 다물었다. 연회장에서 만난 이후 줄곧 딤라를 집안의 어른처럼


대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단순한 누군가의 증조할머니가 아니었다. 넓은 혹한의 땅의 충성을 받는 위대한
바이페렘. 제르타예의 불꽃을 되살린 자. 그리고 발타와의 동맹을 끊어 낸 자.

바라건 바라지 않건, 모두들 그녀를 그렇게 볼 것이다. 힘을 쥐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딤라를 향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염치도 없다 할 것이다. 평생 만나지도 않던 혈육을
보자마자 그걸 이용할 생각부터 해? 솔직히 그런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본인의 미래고
안위고 다 버리고 뛰어든 판에 그 감정을 하나하나 음미할 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러니, 염치 불고하고.’

칼릭스는 눈을 접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누님은 리카르디스 전하의 호위라 함부로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증조할머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월장석 성으로 모셔도 될는지요. 누이도 증조할머님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딤라가 리카르디스에게, 로젤린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월장석 성에 들어갔다는 소식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건, 어떤 거래가 오고가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모두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것이다.

딤라의 낯빛이 바뀌었다. 귀여운 손주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과거 라고슈를 호령했던 바이페렘의 위엄이 언뜻
비쳤다.

“붉은수레바퀴도 확실히 보이긴 한다만…….”

딤라가 칼릭스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역시 사벡을 더 닮았구나. 내가 제 뜻대로 움직이리라는 건방진 생각을 품은 것을 보자니.”

칼릭스는 겸연쩍은 듯 씩 웃고는 나름의 애교를 더했다.

“저는 증조할머니에게 생일 선물을 받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태어난 날이…….”

“한참 남았습니다.”

딤라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웃기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한참 어이없어 한 이후에
칼릭스의 볼을 토닥이며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빤히 보이는 수작으로도 언제나 나를 움직였다는 것이, 사벡의 대단한 점이란다.”

“제가 어머니를 좀 많이 닮았습니다.”

칼릭스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했다.

* * *

월장석 성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칼릭스가 보내 온 서신에 바이페렘 관디테와 섭정관 딤라를 모시고 월장석 성에
방문해도 되겠냐는 내용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칼릭스의 서신을
다시 읽었다.

“누가 남매 아니라고 할까 봐. 칼릭스 경은 정말 로젤린 경을 쏙 빼닮았군.”

“사건 사고가 따른다는 점 말입니까?”

“시야 밖에서는 그 특징이 가속화 된다는 점까지 더해서.”


분명 좋은 기회이긴 했으나, 당황스러운 게 우선이었다. 딤라와 함께 마차를 타고 떠난 칼릭스. 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딤라가 무거운 몸을 일으킨 것일까. 딤라는 자신이 움직였을 때의 풍파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월장석 성에 온다는 얘기는…….

“대체 뭘 한 걸까요. 칼릭스 경은.”

“비스타에서 위명이 자자한 귀염둥이 칼의 진면목이 드러났겠지. 그 남자는 저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강아지인 체 하는 게 특기인 것 같던데.”

“설마 섭정관께서 그걸로 마음을 움직이셨을까요.”

“어떤 거래가 오갔다고 하는 쪽이 더 마음이 섬뜩하지 않겠나? 대체 그녀가 뭘 요구했을 줄 알고?”

“아니요 전하. 저는 칼릭스 경의 애교 쪽이 좀 더 섬뜩합니다.”

“…마음만의 문제라면 충분히 이해는 간다만. 어쨌거나 흠…… 바빠지겠군.”

붉은수레바퀴 후계자의 이름을 달고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 보겠다더니, 생각보다도 도움이 빠르게 왔다.

102 화.

월장석 성 안에서 무슨 얘기가 오고 가는지 알 수 없으니, 다들 상상력을 발휘하며 소문을 크게 부풀릴 것이다.
딤라가 월장석 성을 방문하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리카르디스 2 황자와 라고슈가 동맹을 맺었다는 허황된
얘기들이 나돌아 다니리라.

힘은 힘이 모이는 곳에 모이기 마련이었다. 속이 텅 비어 있는 화려한 보석함에 불과하나 다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한다. 엘피디오에게 붙어 있는 기회주의자들이 흔들릴 것이다.

딤라의 방문이 반가운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딤라의 혈육임이 밝혀진 지금, 로젤린의 가치는 더욱 올라갔다.
그녀를 탐내는 자들이 더욱 군침을 흘리는 문제가 발생했지만 반대로 더더욱 손을 대기는 힘들어졌다. 욕심을
잘못 부렸다간 그 딤라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단 일라베니아의 귀족과 타국의 왕족뿐 아니라, 일라베니아 황실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특히나
발타의 기류가 심상치 않은 지금에는 더더욱.

라고슈의 힘이 어디에 실리느냐에 따라 판도가 뒤집힐 가능성도 있었다. 딤라가 제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그게 그녀의 심기를 거슬러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딤라의 눈치를 봐서라도 황제나
엘피디오마저도 로젤린을 제멋대로 휘두르려 하지 못할 것이다.

적절한 때의, 아주 적절한 도움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씩 웃었다.


언제나 빛나던 월장석 성은 한층 더 빛나기 위해 꽃단장에 들어갔다. 로젤린도 몇 가지 교육을 받았다. 라고슈의
왕실 계보라던가 역사 따위의 거창한 것을 제외하고서, 딤라가 과거 라고슈의 위대한 바이페렘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에델바이스의 할머니가 된다는 것. 딱 그 정도의 표면적인 정보만 일러 주었다.

딤라가 거대한 힘을 쥐고 있는 권력자이고, 도움을 받으면 좋다는 식의 언급은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로젤린을 회유하여 딤라를 포섭하는 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리카르디스가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보다 의욕이 넘친 로젤린이 판을 아주 엎어 버리는 불상사가 굉장히 높은 확률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유가 더
크긴 했다.

애초에 딤라가 월장석 성에 방문하는 목적도 알지 못하는데, 뭘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준비도 없이 전장에


뛰어드는 일은 용기가 아니라 객기였다. 더군다나 상대는 백전노장. 어설픈 수작질은 금방 꿰뚫어 볼 게 뻔했다.
차라리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 딤라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편이 중간은 가는 방법이었다.

약속의 때가 다가왔다. 찬란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리카르디스의 장신구가 번쩍 번쩍 빛났다. 로젤린은 시야를
가득 채우는 빛 무리에 계속 눈을 끔벅거려야만 했다. 리카르디스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슬쩍 웃고 있을 때
마차가 도착했다. 칼릭스가 맨 처음에 내려, 딤라와 관디테를 에스코트했다.

“먼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이페렘 관디테. 일라베니아의 2 황자 리카르디스입니다.”

리카르디스가 살짝 묵례하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짙은 밤색 고수머리의 어린 바이페렘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반겨 주어 고맙다, 2 황자 리카르디스. 북풍의 냉기는 일라베니아에 미처 닿지 못하니,


닿는 걸음마다 피어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어 아주 기뻤다.”

“바이페렘의 기쁨을 위해 지고하신 분이 안배하셨나 봅니다.”

리카르디스는 관디테에서 딤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오는 길은 어떠셨습니까, 섭정관.”

리카르디스의 질문을 들으며 딤라는 그의 뒤에 있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번쩍이는 보석 빛에


정신 못 차리고 눈을 끔벅거리는 중이었다. 딤라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칼릭스와
시선을 맞췄다. 저게 내 증손녀가 맞느냐 묻는 눈빛에 칼릭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표정을 구긴 채,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면서 눈을 깜박이는 누이의 모습이 약간은… 좀…… 많이…… 영특해
보이지는 않았다. 일라베니아와 라고슈의 고위 인사들이 만나는 자리라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해 칼릭스의 마음은
답답해져 갔다. 아니, 평소에는 저렇게까지는 아니고요, 저것보다는 좀 낫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상은
그 말 또한 안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자리를 옮기자고 리카르디스가 말하려던 차, 눈을 감고 있던 로젤린이 불쑥 움직였다. 그녀는 리카르디스를


지나쳐 딤라를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관디테와 딤라의 호위 기사들이 깜짝 놀라며 칼을 반쯤 빼어 들었다.

캉!
반쯤 날을 보였던 검이 다시 검집에 처박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울렸다. 로젤린이 손잡이의 끝을 콱 짓눌러 밟아
검을 뽑으려던 호위의 행동을 저지시킨 것이다.

호위가 당황스러워 하는 사이 로젤린이 딤라를 향해 휙 주먹을 뻗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딤라를 주시한 채,


흉흉한 기세로.

“로젤린!”

“누님!”

악, 꺅 비명 소리가 퍼졌다. 로젤린이 딤라를 공격할 이유는 없었으나,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거기까지 추론할
여유가 없었다.

몇 초가 지나도 늙은 섭정관의 비명 소리라던가, 병장기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그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잇세리온이 한쪽 눈을 살짝 떴다. 로젤린의 주먹이 향한 곳은 딤라의 얼굴이 아니라, 그녀의
얼굴 바로 옆이었다.

모두 숨소리도 못 내고 그녀를 바라봤다. 로젤린이 주먹을 제 앞으로 가지고 와서 쫙 폈다. 손바닥 안에 거대한
벌이 한 마리 죽어 있었다.

“벌입니다.”

눈이 있으면 그 정도는 보인다.

“등검은말벌. 도감에서 봤습니다.”

그건 몰랐다. 이름이 유명해 들어 본 적은 있었다. 일라베니아 내에서도 독이 강하기로 유명한 종이었다.


관디테처럼 어리거나 딤라같이 노쇠한 사람들이 쏘일 경우에는 위험성이 더더욱 높아졌다. 미연에 사건을 방지한
것은 장하지만…….

로젤린은 자신이 밟은 검의 주인에게 사과하고 손잡이를 닦아 주었다. 남자의 표정이 몹시 이상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구석구석까지 세심하게 마무리했다. 뒤에서 관디테가 까치발을 하고 기웃거렸다. 무얼 원하는지
눈치챈 로젤린이 등검은말벌을 소녀에게 보여 주었다. 관디테가 오, 하며 눈을 반짝였다.

“가지시겠습니까?”

어린 바이페렘이 수줍은 듯 대답하지 않고 주머니만 슥 내밀었다. 로젤린이 그 속에 벌레 사체를 곱게 잘 넣어


주자, 시녀들이 뒤에서 기겁했다.

리카르디스에게 다시 돌아오며 손을 탁탁 터는 로젤린은 정말로,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다.

“…….”

다들 이 상황을 어떻게 흘려보내야 할지 몰라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탁탁.

주먹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나 눈 하나 꿈쩍 않던 딤라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주의를 환기했다.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까 리카르디스가 물었던 ‘오는 길은 어떠셨습니까?’ 의 대답인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확실히,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리카르디스와 바이페렘 관디테, 섭정관 딤라와 로젤린, 칼릭스. 그리고 호위들까지 줄줄이 이동했다. 날이 좋아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복도를 걷던 중, 관디테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으나 로젤린이 잽싸게 옷깃을 잡아채서 똑바로 세웠다.
대롱대롱 매달려 목이 졸린 소녀가 기침을 했다.

로젤린이 쩔쩔매며 관디테의 상태를 확인했다. 칼릭스도 당황해서 제 누이와 같이 자세를 낮추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관디테는 이 상황이 웃긴지 줄곧 고수하던 무표정을 지우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관디테의 의견이 어찌되었건, 연이어 발생한 사고에 로젤린은 스타스에게 기둥 뒤로 불려 가 잠시간
혼났다. 먼저 보고하고 움직여라, 왕족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마라, 왕족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라. 둘 다 좋은
뜻에서 했는데 혼만 나서 그녀는 심통이 났다.

월장석 성의 녹음이 푸르게 드리운 중앙 정원. 큰 나무 아래 그늘이 진 곳에 자리 잡은 테이블을 끼고 딤라와


관디테, 리카르디스가 착석했다. 칼릭스는 빙그레 웃으며 관디테에게 말을 꺼냈다.

“바이페렘. 이맘때 쯤 꽃이 만개하는 월장석 성의 정원은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라고슈의 수도 모리엔은 바다 근처에 위치해 라고슈의 다른 지역보다는 기온이 높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꽃을


흔하게 볼 수는 없었다.

관디테가 눈알 굴리며 딤라의 눈치를 봤다. 딤라는 혼자서 아주 다 해 먹지 그러냐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칼릭스를 흘겨보았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눈웃음을 쳤다. 잇세리온이 칼릭스를 보고 입을 가렸다. 저것이
소문의 그 귀염둥이 칼…….

관디테는 로젤린과 칼릭스를 대동하고 정원을 구경하러 떠났다. 두 명의 성인이 어린아이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는 뒷모습을 딤라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달그락. 리카르디스가 내려놓은 잔이 접시에 부딪치며 맑은 소리가
울렸다. 딤라는 그제야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갈라·제르타예의 아이들이 따르는 분을 만나 뵙길 긴긴 시간 고대하였습니다.”

네가 내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리카르디스라는 작자냐. 와 같은 비꼼으로 들은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딱딱하고 사나운 미소였다.

“바이페렘을 비추는 도페·제르타예를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섭정관 딤라. 다시 한 번, 바이페렘 관디테 전하와


함께 먼 걸음을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딤라의 주름진 이마가 꿈틀거렸다. 잠시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시선이 리카르디스를 가늠하고 있었다.

옛 사람들이란 제 찬란했던 과거를 돌이켜 볼 때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일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탓이었을까.

딤라는 일라베니아에 도착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공통된 기류를 읽었다. 그녀를
섭정관이 아닌 과거의 위대한 바이페렘으로 보았다. 현재의 작고 어린 바이페렘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103 화.

그것은 딤라를 띄워 주기 위한 것도 있었으나, 그들 자신 또한 그 대단한 딤라를 만났다는 사실에 크게 흥분해


저지른 실수였다.

[위대한 바이페렘으로 이름을 새긴…….]

으로 시작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딤라는 멍청한 놈들의 머리를 지팡이로 후려치는 대신 인자하게도
말로 설명해 줬다.

[케케묵은 과거일 뿐이니, 지금은 그저 바이페렘을 지키는 도페·제르타예 딤라. 그리 여겨 주시기를.]

그렇게까지 말해도 멍청한 놈들은 아이고 무슨 말씀을 하시냐, 하면서 다시 금칠하기 바쁘더라. 그것을 단순한
겸양의 한 종류로 보았던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황제,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까지도. 딤라는 황제라는 놈이
달고 있는 것이 머리인지 장식물인지, 눈인지 옹이 구멍인지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 그런지 첫째 아들 엘피디오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였고.

그래서 딤라는 리카르디스에게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고 온 상태였다. 낯은 반반하니, 그나마 장식물로서의


가치는 있겠다 생각했는데, 이것 보아라.

깊은 호수 같은 눈동자가 달빛에 반짝이는 윤슬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나마 제정신 박힌 놈을 하나 만난


것이다. 딤라는 조금 흥미가 동했다. 갈라·제르타예의 두 아이들이 따르는 인물이라는 사실 또한 그에 한 몫을
더했다.

딤라는 미소를 거두었다. 그녀의 강퍅해 보이는 인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리카르디스 황자.”

“예, 섭정관,”

“이 늙은 몸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길게 둘러 가는 법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라고슈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이때에 제국의 어떠한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 이렇게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굉장히 단도직입적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생긋 웃었다.

“하나 말씀드리자면, 칼릭스 경을 회유해 섭정관을 모신 오늘의 일 뒤에 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모르는 일이시라?”

리카르디스가 더없이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명령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기껍지 않을 리 없으니. 모르는 일로 하기에는 너무 아깝군요.
차 한잔 하시며 편히 계시다 가시지요. 더 이상 섭정관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리카르디스는 딤라의 잔을 직접 채웠다. 그녀는 차를 따르는 모습이 그렇게까지 우아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두고도 기죽지 않는 이는 몇 되지 않는데, 그런 척 위장하는 게 아니라 정말
대등한 위치에서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걸 배포가 크다 해야 하는지, 아니면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라 봐야 하는지.

딤라는 나뭇잎 그림자 사이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에 그림같이 반짝이는 남자를 바라보다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일라베니아에 머무는 지금까지 사람을 끝없이 마주해 피로하였습니다. 권하신 시간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딤라는 쉬겠다는 말을 한 이후로는 정말 대륙의 유일한 제국, 그 유력한 후계자 중 한 명을 앞에 둔 것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같이 앉아 있으나 대화를 나누지 않은 것은 고사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애초 딤라가
눈을 감고 있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리카르디스도 그녀에게 시선을 떼고는 불어오는 바람결을 제 눈으로 그렸다. 화창하게 좋은 날. 구름이
예쁘게 하늘에 수놓아져 있는 날이었다.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편안히 앉아 있던 딤라가 어느새 주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푸른 정원, 색색의
꽃이 만발해 있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공간. 그 끝에 바이페렘 관디테와 칼릭스. 그리고 로젤린이 보였다.

리카르디스를 향할 때 매섭게 불타오르던 딤라의 눈동자는 한 겨울의 난롯불처럼 따스한 온도로 그들을 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고정했다.

관디테가 무어라 말하자 로젤린이 살짝 웃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리카르디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평소 웃는 모습을 많이 보지 못했던 탓일까. 햇살을 받으며,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웃는 로젤린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주 웃으면 좋을 텐데. 저리 웃으니 얼마나 예뻐.

“리카르디스 황자.”

덜컥, 로젤린의 곁에 있던 정신이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큰 나무 그늘 아래 북쪽을 다스리는 라고슈의


섭정관과 앉아 있던 그 테이블로.

“예, 섭정관.”

리카르디스는 동요했던 마음을 숨기고 침착하게 대답하려 했으나 결국 깜짝 놀라고 말았다. 딤라의 표정이 한껏
구겨져 있었다. 너, 이 자식…… 하고 욕이라도 할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심기가 불편해진 이유가 뭔지 몰라
리카르디스는 당황스러웠다.

딤라는 고개를 휙 돌려 세 증손주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곧 그녀의 얼굴 위에


떠오른 감정은 경악이었다.

“……섭정관? 무슨 문제라도…….”

“사벡의 큰 아이에게 일이 생겨 먼 추운 땅에서 무척이나 마음고생을 하였습니다. 그 마음고생을 끝나게 해 준


황자에게 감사인사도 드릴 겸 온 것이었으나…….”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과 슬쩍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녀가 월장석 성까지 무거운 발걸음을 한 것에 그런 이유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딤라는 여전히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리카르디스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제 보니…… 그럴 필요는 없었는지도 모르겠군요. 본인을 위한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딤라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눈치챘다. 로젤린을 너무 빤히


바라보았던 게 문제였을까. 발뺌이라도 하려 입을 열었으나, 딤라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 보였다.

“……드러났습니까.”

“드러나다뿐이었을까요. 차라리 얼굴에 써 놓고 다니는 쪽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나마 전하의 미모 덕에 시선이


분산될 테니.”

리카르디스는 헛기침을 하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껄끄러운 상황을 외면하고자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는데, 시야에 로젤린이 들어와 더 당혹스러웠다. 하필 고개를 돌려도…….

쪼그려 앉아 관디테와 얘기하던 그녀의 옆모습이 햇빛에 은은하게 빛났다. 눈을 깜박, 깜박하던 그녀가 서서히
얼굴을 돌렸다. 눈이 딱 마주친 순간 리카르디스의 숨이 멎었다. 로젤린이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덜컹,
심장도 멎는 것 같았다.

그녀가 물을 뜨는 것처럼 두 손을 모은 채 쪼르륵 달려왔다. 아니야, 로젤린! 지금은 안 돼! 리카르디스는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딤라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어찌하나 한번 보자는 모양새라
리카르디스는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전하, 섭정관.”

“음, 로젤린 경. 무슨 일로?”

“이걸 보십시오.”

테이블에 다가온 그녀가 모은 두 손을 불쑥 들이밀었다. 리카르디스와 딤라의 시선이 그녀의 손 안쪽을 향했다.
삐약 뺙. 꺅. 작은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하얗고 자그만 새가 나뭇잎을 겹겹이 쌓은 더미 위에 올라와 있었다.

딤라가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라고슈에서는 볼 수 없는 짐승이구나.”

“둥지에서 떨어진 모양입니다. 사람의 냄새가 나면 어미가 버린다고 해서, 나뭇잎으로 일단 감쌌습니다. 둥지로
올려놓기 전에 보여 드리고 싶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로젤린이 뿌듯하다는 듯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옆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딤라의 시선도 까맣게
잊은 채 미소 지었다. 예쁘고 귀여운 것을 보여 주고 싶어 소중하게 두 손 안에 가지고 왔다니. 이 얼마나
귀여운……. 가슴이 울렁거렸다.

“전하를 똑 닮았습니다.”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좋았을 것이다. 리카르디스의 미소가 쩍 굳었다.


“하얗고 부드럽고.”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건장한 남자를 아기 새에 비유하는 그녀 때문에 리카르디스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어졌다.

“귀여워서 지켜 주고 싶지 않습니까?”

리카르디스의 마음은 그 짧은 시간 안에 너덜너덜해졌다. 내가 하얗고 부드럽고 귀여웠군……. 그래서 지켜 주고


싶었나… 그래…….

“그래…… 아주…… 귀엽다……. 로젤린 경, 덕분에 진귀한…….”

크윽…. 리카르디스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꾹 쥐었다.

“……경험을 했어. 어린 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다. 고… 맙다. 로젤린 경. 어, 어미가 찾을지도


모르니 슬슬 돌려 놓는 쪽이 좋겠다. 나무……… 나무 위로 올라갈 때 조심하고.”

“예.”

로젤린이 방긋 웃고는 다시 관디테와 칼릭스에게 달려갔다. 딤라는 안쓰러움과 짜증을 반반 고루 섞은 시선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담은 여자에게서 하얗고 부드럽고 귀엽다는 말을 들은 남자의 심정이 어떤
꼴일지 대충 짐작이 간다는 표정이었다.

“……아무 말도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섭정관.”

“딱히 별말 할 생각은 없었지만, 황자가 은연중에 기대하는 게 있는 모양이라 한마디를 얹자면.”

리카르디스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증손녀와 증조할머니가 돌아가면서 공격하니 정신이 혼미했다.

“결혼 전 사벡에게 물어본 적 있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무어가 그리 마음에 들었느냐 하니.”

그는 칼릭스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미리 들어 놓아 사벡이 붉은수레바퀴 백작 부인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가만히 고개 숙이고 딤라의 말을 경청했다.

“귀엽다 하더군요.”

리카르디스가 얼굴을 손에 묻은 그 상태로 굳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얘기였다. 그 험상궂은 아저씨를 보고


귀엽다는 말이 나오다니 붉은수레바퀴 백작부인도 정말 보통은 아니었다.

104 화.
“갈라·제르타예의 불꽃은 바이페렘 곁이 아니더라도 타오르는 모양이지만, 귀여운 것에 한정되는 모양입니다.”

딤라가 차를 홀짝 마셨다. 아까 전 여유만만하며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사내는 어디가고, 아기 새같이


파들파들 떨고 있는 귀여운 남자만 남아 있었다. 딤라가 낮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이곳으로부터 멀고도 추운 땅에서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 2 황자 리카르디스에 대한 정보를 여럿 들었다.


그러나 많은 정보와 수식어가 고스란히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 위치의 사람이라면 그럴싸한
가면 한두 개쯤은 있기 마련이고, 퍼지는 정보는 보통 그런 단편적인 모습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다.

일라베니아에 머무르는 짧은 기간 동안 몇 번 만나며 그를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증손녀의 도움으로 진짜 모습이


활짝 드러난 셈이었다. 딤라는 아직까지 정신 못 차리는 리카르디스를 보며 웃었다. 적어도 여유만만 해 보이는
얼굴보다는 이쪽이 마음에 들었다.

딤라는 자신의 주름진 손을 보았다. 오래된 시야는 먼지 낀 듯 부옇고, 늙은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은 간헐적으로
떨렸다. 몸 어디 한 곳 성한데 없고,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고장 날 일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삐걱거리다 보면 결국에는 멈추게 되리라.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과거 불 같았던 때보다
성미가 급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리카르디스 황자.”

“……말씀하시지요.”

리카르디스는 손부채질을 하며 얼굴을 식히고 있었다.

“내가 머무르던 별장은 오래 된 무덤이고,”

분주하던 리카르디스의 손이 딱 멈췄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덤을 기어 나온 산송장입니다.”

바람에 꽃잎이 실려와 찻잔에 떨어졌다. 짙고 맑은 홍차에 파문이 잔잔하게 일어났다. 딤라는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노인의 눈빛 속,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그것은 리카르디스에게는 아주 익숙했다.


로젤린에게서 항상 볼 수 있었던 종류였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가만 딤라의 말을 곱씹다 대답했다.

“무덤에서 일어나셔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영혼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딤라는 기침인지 거친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흑단 지팡이의 조각을 손으로 더듬었다.

“나는 산송장. 바이페렘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젖먹이라 불립니다. 라고슈는 상처로 너덜거려 두 살 난 아이처럼
부는 바람에도 울고, 발타의 더러운 들개 놈들은 그 상처의 냄새를 맡고 주위를 빙빙 돌며 군침을 흘리고 있는
지금, 대륙의 아버지는 보아야 할 것을 외면하는 비겁자에 불과해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리카르디스는 당황을 애써 숨겼다. 딤라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차를 마시고, 로젤린을


보고 돌아가리라 생각했는데…….

“라고슈를 어두운 길로 끌고 들어가려는 그 모든 것들을, 무덤으로 데려가는 일이 산송장의 마지막 역할이지


않겠습니까.”

딤라가 지팡이를 꽉 쥐며 저 멀리 바라보았다. 작은 걸음에 발을 맞춰 걸어가는 세 명의 혈육을 담는 눈길이


온화했다.

단순히 플로에토를 실각시키기 위해 오랜 은거 생활을 청산했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딤라의 눈은 라고슈를 벗어나
대륙에 드리워진 전쟁의 기운에 닿았다. 거대한 두 집단의 싸움이다. 그 거대한 흐름 사이에 있는 것들은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일라베니아와 발타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치며, 모두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피와 비명이
휩싸는 거대한 흐름이기에 결코 좋은 방향이라 말 할 수 없었다.

딤라는 지금 분쟁과 전쟁의 한 가운데에 서겠노라는 의사 표명을 했다. 라고슈를 위해 싸우고, 다음 대의


라고슈를 위해 물러섰던 인물은 다시 한 번 라고슈를 위해 몸이 가리가리 찢기는 격류에 몸을 던지고자 일어섰다.

사실 라고슈로서는 문을 걸어 잠그고 둘이 치고받고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며 공멸하기를 바란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딤라는 잘 알고 있었다. 썩은 상처는 도려내지 않으면 새살이 나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왕국의 문을 걸어 잠그는 일은 그저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후대에 미룰 뿐인 비겁한 일이노라고.
그녀는 미래의 라고슈를 위해 힘든 싸움을 감내하겠다 말한 것이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물어도 될는지요, 섭정관. 혹…… 저에게 기대를 거시는 겁니까?”

너무 당혹스러워서 속마음이 그대로 나와 버렸다. 말하면서도 바보 같은 질문이란 건 알았으나, 이미 추한 꼴은


다 보인 후라 그런지 부끄럽지는 않았다.

“기대는 누군가에게 걸 수 있는 종류의 마음이 아닙니다, 황자. 저절로 향하는 마음을 어찌 걸었네, 마네
하겠습니까. 그저 그 본인이 기대를 이끄는 힘이 있어야 하는지라,”

딤라가 검지와 엄지를 아주 조금 띄워 얼굴 앞에 들어 보였다. 짓궂은 표정이었다.

“이만큼 이끌렸다는 얘기입니다. 그 아기 새 같은 귀여움 때문에 말입니다.”

리카르디스는 크윽 신음을 삼켰다. 딤라가 웃었다. 놀리는 맛이 있는 귀여운 황자였다.

아이들이 있는 쪽을 다시 쳐다보니, 관디테의 무릎 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뒹굴 거리고 있었다. 관디테는 너무


좋아서 기절하기 직전 상태처럼 보였다. 칼릭스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가증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미미!”

관디테의 무릎 위에서 고양이가 배를 보이며 뒹굴 거렸다. 소녀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제 감정을
자제하려 노력하며 부드럽게 짐승을 쓰다듬었다. 털 한 가닥 상할까 염려하는 조심스러운 손짓에 고양이 미미가
가르릉 거리며 기분 좋은 듯 울었다.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하던 중, 분수의 가장자리를 도도하게 걸어가던 미미를 만나고부터 관디테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로젤린이 “미미.” 하고 불렀으나, 미미는 그녀의 말을 싹 무시하고 고양이 세수만 했다. 관디테가
애절하게 고양이를 쳐다보는 모습에 칼릭스는 결국 힘겹게 걸음을 옮겨 미미에게 다가가야만 했다.

억지로 데려오려는 것인가? 작은 짐승이라고 해도, 발버둥 치면 어린 바이페렘에게는 위험할 텐데. 관디테의
시종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칼릭스는 고양이의 뒷덜미를 덥석 잡거나 배 아래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리는 등의 행동을 일체 하지도, 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자리에 쪼그려 앉아 짐승과 눈높이를 맞추는 그의 모습을 본 시종들의 표정이 점점 묘하게
바뀌었다.

칼릭스가 쪼그려 앉은 채, 고양이 미미의 귀에다 뭐라 속닥대었다. 미미는 한번 하악질을 하고 두 번 고개를


젓다가, 마지막에는 ‘흠…….’ 하며 고민하는 표정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총총총 도도한
걸음으로 걸어와 관디테의 다리에 제 부드러운 몸을 잔뜩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관디테의 무표정은 산산조각
났다. 소녀의 볼에 발그레한 홍조가 돌았다.

“…….”

소녀를 따르던 시종들만 이 상황에 혼란스러워했다. 지금 칼릭스 경과 고양이 미미 간에 무슨…… 모종의 거래가
오간 거 같은데 아니야? 하는 의문이 잔뜩 담겨 있으나 칼릭스는 그들의 시선을 회피함으로써 그들의 의문도
회피했다.

그러고는 제 누이한테 다가가서 저번에 간 그 음식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 같은데요. 거기에 더해서 일일
노예권이요. 아 진짜……. 하면서 소곤거리는데, 시종들은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관디테는 분수에 앉아 고양이를 본격적으로 쓰다듬었다. 미미는 귀찮을 법도 한데 거래의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걸 다 감당해 내었다.

한참 놀다 돌아가니 리카르디스와 딤라가 가볍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칼릭스는 재빨리 그들의 분위기를 읽었다.
음, 뭔가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딤라도 다른 귀족들을 압박할 때와는 다르게 편안히 있는 듯하고.

리카르디스가 웃으며 관디테를 맞이했다.

“구경은 잘 하셨습니까, 바이페렘.”

“음,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주 마음에 든다.”

“영광입니다.”

“아기 새와 고양이를 보기도 하고, 나무에 달린 열매도 먹었다. 아주 맛이 좋았다.”

잇세리온이 입을 턱 가렸다. 정원 여기저기에 널린 나무의 열매를 드셨다고요 바이페렘? 제대로 씻지도 않고,
깎지도 않고, 접시 위에 예쁘게 장식해서 진상한 걸 드신 게 아니고요?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일국의 왕이
그럴 리 없었다. 로젤린의 소행이 분명했다.

“로젤린 경이 목마를 태워 줘서 내 손으로 직접 큰 열매를 딸 수 있었다.”


부단장 나단이 살짝 뒷목을 잡았다. 하얀밤 기사단원들과 잇세리온이 로젤린을 노려보았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야!

모두의 시선이 로젤린에게 모이자, 관디테가 입을 가리며 푸훗 웃었다.

“너무들 그러지 마라. 이런 것 또한 어릴 때가 아니면 하지 못하는 일 아니겠느냐. 로젤린 경은 나에게 앞으로


오지 못할 어린 시절을 선물해 주었으니, 그 또한 나에게 큰 기쁨이다.”

잇세리온은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관디테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의 얼굴도 한결 편해졌다.


로젤린은 소녀의 뒤에서 제 허리에 손을 올려놓고 기세등등하게 서 있었다.

“그래도, 로젤린 경은 예법을 더 익히는 편이 좋겠다. 남을 존중하고 내가 존중받기 위해 사람들끼리 정해 놓은


규칙이니, 고리타분하다 생각하지 말고 부단히 익히도록 하라. 미숙한 내 눈에도 부족한 점이 많이 보인다.
제국인이 제르타예를 업신여기거나 하찮게 여기길 바라지 않으므로 노력하라.”

아, 역시. 그렇긴 하지요. 잇세리온은 풀이 죽었다. 로젤린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녀에게 혼나며


의기소침해졌다.

105 화.

“예, 바이페렘…….”

이후 딤라와 로젤린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로젤린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어찌나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지.
그리고는 월장석 성에서는 애를 굶기냐고, 애가 이렇게 살도 하나 없이 말라비틀어진 게 안보이냐고 리카르디스를
닦달해 대서 그는 좀 억울했다.

딤라는 정말 평범한 할머니처럼 로젤린을 귀여워했다. 리카르디스는 그 광경에 조금 놀라는 중이었다. 그것은
리카르디스가 딤라를 대단하고 무서운 바이페렘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로젤린에 대한 인식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마인 파문에 휩싸여 있었다. 여러 공으로 인해서 악의가 누그러졌다고는 해도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라고슈에서는 마력과 성력이 가진 의미가 일라베니아와 다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체감하니 느낌이 이상했다. 리카르디스의 의문을 눈치챈, 로젤린의 입에 케이크를 주입하던 딤라가 말했다.

“마력이니 성력이니 하는 것은 제국인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라고슈의 추위는 마력보다 사납고, 봄날의 햇빛은
성력보다 따듯하니, 그저 그런 것 또한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대신전에서 들으면 난리가 날 소리였다. 그 위대한 힘이 어찌 한낱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느냐고. 역시 라고슈의
야만인이라며 펄펄 날 뛸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제 턱선을 손가락으로 훑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걸었다.

“섭정관은 신이 없다 생각하십니까?”

“있으면 대륙이 이 모양 이 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리카르디스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그것도 그렇군요. 섭정관의 말대로라면, 축복의 밤 또한 신의 힘이 아닌 자연의 힘일 텐데. 지금은 어째서


자연이 순환을 멈춘 겁니까?”

“그 말을 황자가 하니…… 조금 웃기기는 하지만.”

뼈 있는 대답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정보를 취합하여 그려낸 그림. 일라베니아 황실에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는
지금의 사태에 큰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진실이라도 되는 양 말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눈썹만 까닥였다.

“그건 제가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흐르던 계곡도 산사태로 인해 길이 끊기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또한 자연의 흐름입니까?”

딤라가 피식 웃었다.

“산사태가 어떻게 일어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지진 때문인지, 누군가가 산을 부숴 놓았는지.”

딤라는 로젤린과 칼릭스에게 용돈을 쥐여 준 후 월장석 성을 떠났다.

13

월장석 성, 리카르디스의 집무실.

“섭정관 딤라의 월장석 성 방문 건으로 로젤린 경에게 많은 시선이 쏠려 있습니다. 무투 대회의 출전이 지금의
상황에 도움이 될지 회의적입니다.”

“이미 로젤린 경의 이름은 알려질 대로 알려졌어요, 나단 경. 이제 와서 숨겨 보았자 더 궁금해 질 뿐이에요.


자물쇠를 달아 놓으면 열고 싶고, 숨겨 놓으면 찾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인걸요.”

클로에가 쿠키를 오독오독 씹으며 말을 덧붙였다.

“황제 폐하처럼 말이에요.”

리카르디스는 피곤함이 묻어 있는 얼굴을 쓸었다. 예상했던 바와 같이, 딤라와 리카르디스의 만남은 큰 화제를
낳았다. 하카브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던 딤라가 일라베니아의 2 황자를 만나러 그의 성까지 친히 행차했다.
단순히 안부만 물어볼 리 없으니 대단한 건이 오갔지 않겠냐는 소문이 돌았다.

여러 나라의 고위 인사들이 모인 일라베니아 황실이 들썩였다. 심지어는 황제, 라이노까지도.

그것이 리카르디스가 피곤한 이유였다. 몇 시간을 금강석 성에 붙잡혀 있다 겨우 풀려난 참이었다.

‘정말이지, 아침부터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닌데…….’

황제는 딤라가 월장석 성을 방문한 이유가 오로지 로젤린을 보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보다 윗세대의
인물이긴 하지만, 딤라의 성정이 어떤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고슈의 핏줄들을 아끼고, 타국을
배척하는.

더군다나 하카브의 일로 라고슈가 큰일을 겪은 시점에서 후계자가 되지도 못한 타국의 황자와 동맹?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래서 리카르디스도 사실을 기반해, 딤라가 로젤린을 만날 겸 최근 발타의 땅에서 큰일을 당할 뻔한 자신을
위로하고자 방문하셨다고 대충 둘러 말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먼 곳을 보며 그녀의 이름을 꺼냈다.

[흠… 로젤린, 로젤린 에스터라…….]

좋은 조짐은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관자놀이를 손마디로 꾹꾹 눌렀다. 골치가 아팠다.

“로젤린 경을 숨기는 것은 임시방편도 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황제의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무언가 찔리는 게
있으니 숨기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리카르디스는 시선을 멀리 두며 중얼 거렸다. 손가락이 딱, 딱, 딱 일정한 박자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를 둘러싼


측근들이 귀를 기울였다.

“황제가 ‘축복의 밤’에 대한 정보를 알면서도 마인인 로젤린 경을 내 곁에 머물게 하는 이유는 내가 그 의식에
대해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겠지. 거기에다 그녀가 붉은수레바퀴라는 사실이 이점으로 작용한
듯해. 황제에게 붉은수레바퀴는 충실한 사냥개. 그리고 로젤린은 그 자식이니. 황제는 그녀 또한 제 손 위에
있다 생각하는 것일지도. 또한 황제의 미약한 신성력으로는 축복의 밤을 부를 만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니
그녀의 존재가 무용지물이지 않나. 그러니 그녀를 그저 검은달의 대항마로 내세우려 내 곁에 뒀던 것이다. 내가
최전선에서 싸우는 인물이니.”

클로에는 깃펜을 들었다. 종이에는 회의 내용이 아니라 꽃이나 하트모양의 낙서 따위로 도배되고 있었다. 그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이었다.

“그간 잠잠했던 이유를 따져 보자면 몇 가지를 더 말할 수 있지만…… 그 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로젤린 경의


존재가 점점 커져 가니 경계심이 드는 모양이야. 좀 달래야 할 필요성이 있겠어.”

“어휴, 미운 47 살.”

클로에가 펜대를 손 위에서 휙휙 돌리며 말하자 나단이 웃음을 꾹 참았다.

“무투 대회가 코앞이로군.”


“그대로 내보내실 생각입니까?”

“폐하께서 오늘 로젤린 경이 무투 대회에 나오는지 물어보더군. 나가야겠지. 준비된 무대에서 예정대로 활약하게
둔다. 마력은 보이지 않지만 무력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부풀려진 소문이 입증되는 순간이며, 일라베니아
황실과 나란히 걸어온 붉은수레바퀴의 충실함이 그녀를 영웅으로 만들 것이다.”

“우승자가 되어 수많은 자가 우러러 볼 때에, 모든 영예와 영광을 황제 폐하에게?”

“생각보다도 그런 빤히 보이는 유치한 게 먹히기도 하는 법이거든. 그리고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것에 끔뻑


죽는 인간이고.”

다들 잘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결승이 끝난 후에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로젤린 경의 교육은…….”

“레이몬드에게 맡기겠어요.”

“그러고 보니 클로에, 결혼 준비로 바쁠 텐데, 오래 잡아 둬 미안하군.”

“어머, 걱정 안하셔도 괜찮답니다. 준비는 레이몬드가 혼자서도 빈틈없이 하고 있어요. 오늘은 제 드레스를
고르러 간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네요.”

그 복잡한 결혼 준비를 혼자서 하고 있다고? 심지어는 웨딩드레스도 혼자 고르러 가는 거야? 남자들이 속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두 눈을 꾹꾹 누르던 리카르디스가 중요한 게 생각났다는 듯 급하게 말을 꺼냈다.

“아, 로젤린 경에게 상대를 죽이지 말라고 얘기해 두는 편이 좋겠군.”

“적당히 하라고 말을 해 두겠습니다.”

스타스가 대답했다.

“내장이라든가, 눈알이라든가, 팔을 뽑는다든가, 머리를 이렇게 저렇게 한다든가. 아무튼 관객들이 잔인하게
느낄 법한 전투 방식은 안된다고도.”

“……적당히 하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 * *

장관이었다. 로젤린과 그녀의 제자들이 대련하는 때가 되면 사람들이 어김없이 우르르 몰려왔다.

클레이모어를 휘두르며 묵직한 일격을 날리는 레티시아, 정석적인 검술이 눈에 띄게 노련해진 에버하르트. 그리고
새로운 수습 기사 헤사는 가볍지만 날카로운, 변칙적인 공격을 사용했다.

같은 인물을 스승으로 두는 제자들은 비슷해지기 마련인데, 로젤린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모두 다른 양상을


보였다. 공통적인 점을 꼽자면, 무서울 정도로 빠른 성장세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막 하급 기사가 된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오랜 기간 하급 기사였던 자들에 비하면 아직 실전이 부족했지만,
실력만큼은 훌륭했다.

레티시아의 거대한 검이 로젤린을 향해 내려앉았다. 그녀의 붉은 갈색 머리가 머리끈을 탈출해 거칠게 흩어졌다.
하급 기사들에게 암암리에 붉은 사자라 불린다고 했던가. 레티시아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챙!

무식한 힘의 대결에 검이 비명을 질렀다. 다른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과연 로젤린을


업고 팔굽혀펴기를 백 개 넘게 하는 탄력적인 근육의 소유자다웠다.

로젤린이 검을 사선으로 쳐 올려 시선을 분산시키며 발로 레티시아의 무릎 관절을 공격했다. 퍽, 공격은 유효할


만큼의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레티시아가 다리를 들어 올려 정강이의 단단한 부분으로 그녀의 매서운 발길질을
막았다.

보통의 대련이라고 하면 검투와 박투를 나누어 진행하고는 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실제의 전투에서 검으로만,
주먹으로만 싸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직접 체감했다. 갖은 암기와 더러운 수를 사용하며 제자들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숱하게 겪은 결과,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초기 고전하던 모습을 탈피해 이제 제법
능숙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레티시아의 움직임을 눈으로 훑던 로젤린이 빙긋 웃었다. 큰 무기를 휘두르는 것치고는 빈틈이 크지 않다.
이정도면 합격선이었다.

106 화.

로젤린이 뒤로 풀쩍 물러서며 대련의 끝을 알렸다.

“하, 하아……. 로젤린 경. 시합 전에 너무 격하게 움직이시…….”

태연한 로젤린의 얼굴을 본 레티시아가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지 않았군요……. 격하게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레티시아는 바닥에 철퍼덕 앉아 에버하르트가 건네주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헤사가 달려와 로젤린에게 시원한
홍차와 달콤한 쿠키를 내밀었다. 트레이 위에 티 매트까지 깔아놓은 완벽한 차림새였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기사들이 소년을 미친 사람 바라보듯 했다.

“로젤린 경! 오늘은 날이 더워 산미가 더해진 과일 차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훌륭합니다. 새콤달콤 맛있습니다.”

“예. 새콤달콤.”

헤사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로젤린을 올려보았다. 무언가를 깊게 갈망하는 눈빛이었다. 로젤린이 헤사의
머리를 슥슥 쓸자, 소년은 그제야 만족한 듯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기는 것이
기분 좋아 예상보다도 시간을 더 크게 할애했다. 헤사는 햇살 아래 조는 동물처럼 눈을 나른하게 깜박였다.

“로젤린 경. 이제 슬슬 가 보셔야 합니다.”

“이동하도록 합시다. 레티시아 경, 에버하르트 경.”

두 사람의 입이 쭉 째졌다. 누군가에게 ‘경’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때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살짝 마카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보다 커다란 제자들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귀여웠다. 로젤린을 필두로 두 명의 하급
기사, 한 명의 수습 기사가 뒤를 따랐다.

무투 대회에서 우승하는 자는 거액의 상금과 명예를 거머쥐었다. 다음 해의 무투 대회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대륙에서 최고로 강한 자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어 다녔으니, 검 좀 다루고 싸움 좀 할 줄 아는 자들에게는 가장
의미 있는 축제라 할 수 있었다.

용병과 평민들의 참가 수가 참가 인원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기사들의 신청 또한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용기의 증명이고 자신감의 표출이며, 공적으로는 자신이 몸담은 기사단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한
하나의 선전 수단이었다.

때문에 하얀밤 기사단에서도 매년 많은 기사들이 참가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하얀밤 기사단에서 무투대회에 참가한 단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참가하라며 몇 명에게 권해
보기도 했으나 모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삶이 지루합니까? 굳이 왜? 무엇을 위해 나가야 합니까? 라는 식이었다. 그 어떤 다른 누구보다도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그녀의 힘을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우승은 로젤린이 따 놓은 당상인데 대체 무슨 영광을 보려고 몇
천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드려 맞아야 하는지 그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젯밤. 파르딕트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 죽여 버려.”라고 했다가 부단장 나단에게 몹시 혼났다. 진짜
죽이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하지만 로젤린도 이제는 그런 말은 적당히 걸러 들을 정도로는 성장했기에, 뼈 한두
개 정도면 되는 건가? 하고 받아들인 상태였다.

타 기사단의 경우, 로젤린을 아니꼽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부풀려진 자극적인 소문들
사이에서 진실을 가려내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었으므로.
그나마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마인이라는 사실 하나뿐인데, 일라베니아의 기사가 고작 마인 한 명에게 겁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하여 무투 대회는 여느 때보다 뜨거웠고, 강한 자들이 여기저기 도사렸다.

로젤린이라는 기사를 시험하고 싶은 자들이 반, 그녀의 강함은 충분히 인지했으나 호기롭게 도전하는 이들이 반.
대기실을 가득 메운 거구의 남자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어떤 긴장감도 보이지 않는 느긋한
태도가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실력에 기반한 자신감인지, 근거 없는 소문을 잡아먹은 자만감인지. 예선전은
비공개로 치러졌기에 아직까지 그녀의 실력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넓은 대기실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잇세리온이었다. 로젤린 혼자 참가자들 사이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하얀 제복도 제복이고, 몇 없는 여자 참가자 중 하나이기도 하고, 머리색도 까맣기 때문인지 유독 눈에 확
띄었다.

“로젤린 경!”

“아, 비서관님.”

설마 무투 대회에 참가한 건가? 매일 책상 앞에서 머리를 굴리는 사람답게, 잇세리온은 주위 남자들의 딱


반쪽이었다.

‘하지만 체구가 강함을 결정하는 건 아니지.’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함이 감돌았다.

“봐드리지는 않습니다.”

“아, 아니, 아니. 저는 참가하지 않습니다! 멀쩡히 있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요. 전하께서 경을 찾으셔서 온
겁니다!”

잇세리온은 등골이 순식간에 서늘해지는 경험을 했다. 로젤린은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라는 말을 하고


대기실을 나갔다. 잇세리온은 다행이라는 그 말이,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이리라 직감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하.”

계단 아래에 있는 리카르디스는 오늘따라 더욱 빛났다. 그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빛나고
있었다. 귀걸이, 목걸이, 반지, 심지어는 입고 있는 옷에도 금사와 은사, 보석으로 치장되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건국일이 가까워 질 즈음이면 황족들의 씀씀이는 헤퍼지고 치장은 화려해졌다. 오랜 기간 동안 대륙을 지배해 온
패왕의 저력을 보이는 것이다. 한낱 쓸데없는 허례허식이었으나 보여 주기식이 중요할 때도 있었다.

리카르디스도 그것을 잘 알았다. 평소에는 황족 반지만 착용하고 다니며, 화려한 것이라고는 제 얼굴뿐인 그도
온갖 장신구로 꾸며야 하는 때가 왔다. 피할 수 없으니 그저 최대한 장신구의 개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할 뿐.

건국제가 있는 달이 오면 월장석 성,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에서는 시녀와 그가 체스를 두는 게 어색한 풍경이


아니었다. 10 개에서 시작해, 시녀가 이기면 장신구 하나 더, 리카르디스가 이기면 장신구를 하나 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치사해도, 치사해도 이 정도로 치사할 수가. 머리 좋기로 유명한 황자와 정규교육만 겨우 받은 하급 귀족 출신


시녀의 체스 게임. 이게 말이 되냔 말이다.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내기였다. 때문에 장신구의 개수는 항상 3
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도 시녀들이 클로에나 잇세리온에게 도움을 요청한 결과였다.

그런데 올해는 이게 무슨 횡재인지. 리카르디스가 치사하고 구질구질하게 체스 게임 운운하지 않고, 가만히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닌가. 시녀들은 눈물을 흘리며 영혼까지 끌어 모아 그를 치장했다.

밝아지는 시녀들의 표정만큼 리카르디스의 표정은 가라앉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아름다우시다, 누가 보석인지
모르겠다는 헛소리들을 들어서 슬슬 열 받고 있었다. 반짝반짝한 것을 좋아하던 누군가를 위한 치장이었는데,
이게 뭐하는 미친 짓인지 공허한 마음이 들쯤이었다.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영혼이라도 빼앗긴 듯한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로젤린의 표정에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녀의 살짝 열린 틈새로 느릿한 숨이 내뱉어졌다. 열에 가득 찬 눈동자였다. 리카르디스는
목을 가다듬으며 달콤한 고뇌와 함께 꿀꺽 침을 삼켰다.

“흠, 음. 로젤린 경, 몸 상태는 어떤가?”

형식적인 질문에 로젤린의 눈빛이 싹 바뀌었다. 구름같이 부드럽고 봄바람처럼 따뜻한 감정을 단 한 번도 담은 적
없다는 듯. 매섭고 사납게. 덕분에 리카르디스도 진정할 수 있었다.

“만전의 상태입니다.”

눈빛이 형형했다. 그 한마디로 전투 상태로 돌입한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다치지 마라. 그대는 이런 쓸데없는 행사로 다쳐도 될 사람이 아니야.”

로젤린은 크게 충격 받았다. 중요한 행사라고 들었는데? 그녀의 생각을 읽어 낸 리카르디스가 입가를 만지며
웃었다.

“그대가 이겨 봤자 좋은 거라고는 고작…… 내 기분?”

“아.”

로젤린은 제 가슴 중앙에 손을 내려놓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럼 무척 중요한 행사로군요.”

리카르디스는 잠시 누구한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곧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리카르디스가 입을 가리고 몇 초간 붉어진 얼굴을 가다듬었다. 로젤린은 그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무투 대회를
성공리에 끝내겠다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전하.”

“그래, 로젤린 경.”

“결승전에서 이긴 다음의 절차에 대해 레이몬드에게 배웠습니다.”

무투 대회의 우승자는 황제에게 직접 검을 하사받는 영광을 얻게 된다. 그런데 아직 32 강전도 치르지 않은


로젤린이 당연하다는 듯이 제 자리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승자의 영예를 전하께 바치고 싶었는데, 계속 황제 폐하께 바치라고 그래서…….”

로젤린이 우물우물 뒷말을 흐렸다.

“꼭 하라고 해서 폐하에게 하기는 할 겁니다만, 정말 그래도 되는 겁니까?”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말하는 요지를 깨달았다. 그가 숨기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영예와 영광을 바친다 어쩌고 하는 의례적인 말들이 마음에 걸린다는 거다. 자신이 충성한 것은 리카르디스,
2 황자이니.

“해도 된다. 그래도 그대는 나의 기사가 아닌가.”

목소리가 잔뜩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로젤린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치지만 마라.”

“다치지 않습니다.”

“빨리 돌아와라.”

“금방 끝내겠습니다.”

잇세리온이 대기실에 있을 모든 참가자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107 화.

리카르디스는 머뭇거리다 한 발짝 그녀에게 더 다가갔다. 사이로 사람 하나도 못 지나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로젤린이 시선을 위로 올려 리카르디스를 쳐다봤다. 당혹스러운지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고 있었지만 결코 다른
곳을 향하지는 않았다. 속눈썹이 깜박거렸다.

어떤 경계도 의심도 없이 이 거리를 받아들이는 로젤린의 모습에 리카르디스의 가슴 안쪽이 간지러워졌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의 흐르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간질, 간질. 얼굴 표면부터
느껴진 감각이 손끝까지 펴져서 로젤린은 몸을 굳혔다.

리카르디스의 큰 손이 로젤린의 귀와 턱, 목 부분을 덮었다.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목의 살갗을


스쳤다. 닿은 부분이 예민하게 일어나는 것 같았다. 얼굴이 가까워져 로젤린은 눈을 꾹 감았다. 곧 이마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잇세리온이 뒤에서 제 눈을 가렸다.

“이것은 내 가호다.”

따뜻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말랑한 볼을 슥 쓸었다.

“그러니 반드시 승리해라.”

막 볕에 말린 이불에 폭 쌓인 기분이었다. 한참 몽롱한 꿈의 경계선에 걸쳐 있던 로젤린은, 달큼한 냄새에 눈을


번쩍 떴다.

여태껏 리카르디스의 미모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미처 다른 감각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눈을 감고 있자 마치 꿀


같은, 황홀한 디저트 같은 향기가 흘러 들어왔다. 달콤한 향수 냄새가 그의 체취와 섞여 그녀의 본능을 일깨웠다.

로젤린이 코를 킁킁 움직이며 한층 그에게 다가섰다. 목에 다가갈수록 향이 짙었다.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리카르디스가 몸을 움찔 떨었다. 로젤린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부지런하게 냄새를
맡던 그녀가 고개를 확 들어올렸다. 리카르디스는 다시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개를 들던 와중, 그녀의
코가 리카르디스의 턱을 가볍게 스친 탓이었다.

“전하에게서…….”

시선이 딱 닿았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눈동자 속에서 욕망을 읽어냈다.

“맛있는 냄새가 납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이 분위기 지금 뭐야. 나쁘진 않은데 뭔가 좀……. 그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의미 없는 반항은 끝을 맞이했다. 등에 벽이 턱 닿았다.

“부드럽고.”

로젤린의 눈이 나른하게 가늘어졌다. 그녀가 리카르디스의 허리 옆의 벽을 제 손으로 짚었다.

“달콤한.”

리카르디스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아니 이 사람! 왜 이렇게 잘생기고 박력이…….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경? 어디 계십니까?”

바로 그때, 시합 준비를 돕는 사람이 그녀를 찾았다. 한 마리의 맹수와, 그 맹수에게 먹히고 싶어 하는 이상한
먹잇감의 기묘한 대치는 끝을 맞이했다.

로젤린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리카르디스를 올려 보는 눈동자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기고 오겠습니다. 모든 것은 전하를 위해.”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 중이었지. 굳어있던 리카르디스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로젤린을 배웅했다.
잇세리온이 저 멀리 뒤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전하…… 가시밭길을 걸으시는……우리 가엾은…….

* * *

예선전은 이틀 전에 끝났다. 대기실에 모인 사람들은 1 차적으로 걸러진 실력자들뿐이었다. 한 번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남자들의 태도는 거칠고 호기로웠다. 어깨를 툭툭 부딪치며 다닌다거나, 시선이 마주치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는 기 싸움을 했다. 여기저기에서 험악한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음에도, 로젤린은 찬찬히 제
검을 훑어볼 뿐이었다.

“2 조 32 강전 준비해 주십시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

그녀가 일어서자 모든 사람이 쳐다보았다. 로젤린은 그들의 시선을 무심히 떨치고는 대기실을 나섰다.

남자들에게는 영웅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여자들에게는 꿈에서 그리던 멋진 기사님에게 말 한마디라도 건넬 수


있는 기회의 장, 무투 대회. 그 인기는 매년 폭발적이었으나, 올해는 암표 상인이 다섯 배로 늘어날 만큼 열기가
더욱 뜨거웠다.

붉은 수레바퀴의 로젤린!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소문의 그녀! 일라베니아의 마인! 상상만 하던 그녀의 무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삼십 년, 아니 평생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로젤린의 출전으로 무투 대회 관할 행정원들만 죽어 나갔다.

로젤린이 미리 좋은 자리를 구해 놓은 덕에 칼릭스는 느긋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마차가 무투회장 앞에 도착했다.


하인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는 어떤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은 평범한 마차 속의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검은 머리, 녹색 눈동자! 붉은수레바퀴였다.

“어어! 아, 죄송합니다. 어, 어디서 오셨습니까?”

어디서 온 줄 뻔히 알면서 귀찮게 묻기는. 하지만 그 또한 열심히 일하는 중이니 딱히 타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칼릭스는 표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붉은수레바퀴.”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다.”

들뜬 기색으로 친절을 발휘하려던 남자는 제안이 거부당하자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칼릭스는 남자의
태도가 ‘칼릭스’가 아닌, 제 누이 ‘로젤린’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것이라 직감했다.

평민들이 들어가는 입구 쪽을 흘끗 바라보니, 한 중년 남자가 [내 전 재산을 부탁해 로젤린!] 이라고 적힌


반듯한 직사각형의 천 조각을 들고 있었다.
“…….”

뭐, 인기가 대단했다. 비록 삐뚤어진 일확천금의 꿈을 가진 자의 성원이라 할지라도, 평판이 나쁜 것 같진 않아


안심이었다.

‘2-7……2-…….’

계단을 오르며 표에 적힌 자리를 찾던 칼릭스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지정된 자신의 좌석 옆에 낯익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 은색 눈동자. 순한 인상의 얼굴과 작은 체구를 가진 황금정원 자작의 장녀,
클로에였다.

클로에가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가 눈썹 한쪽을 슥 들어 올려 보였다. 의외라기보다는, 왜 이제 왔느냐


하는 타박성 짙은 표정이었다.

“클로에 영애. 평안하셨습니까.”

“덕분에요. 앉으시는 편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칼릭스 경. 뒤에 계신 분이 기다리시네요.”

“아, 이런.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영애.”

우물쭈물하던 여인 한 명이 칼릭스의 사과에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두 손 꼭 쥐어 용기내고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어 보려 했으나, 칼릭스는 이미 자리에 앉은 후였다. 여자가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칼릭스는 자리에 앉은 채 주위를 둘러봤다. 클로에가 있다면 레이몬드도 있을 줄 알았는데. 큰뿔산양의 기사들은
보이는 반면 그는 보이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요즘 굉장히 바쁘답니다. 매년 어김없이 반복되는 축제라 해도 익숙해지지는 않는 모양이에요.”

“수도로 사람이 몰리는 시기이니 말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슬슬 시작하려는 것인지 대회의 진행을 원활하게 도울 병사들이 나와서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축제의 분위기에 취해 시끄럽게 떠들어 대었다. 칼릭스는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반지를 돌리며 손장난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이 만남이 우연이라고 말할 생각이시라면…….”

옆을 슬쩍 보니 클로에가 풋, 웃음을 터트리는 중이었다.

“없네요.”

“제게 무슨 용건이십니까?”

“로젤린 경을 안다고 그 동생까지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만나 뵙고 싶었답니다.”

유명한 용병왕과 황실 제 2 기사단 ‘깊은숲’의 상급 기사가 경기장에 올라 왔다. 종이 세 번 울리며 대회가


시작되었다. 변칙적인 용병들의 검술과 정직하고 파괴력 있는 황실 정통 검술의 격돌은 지루한 대련과 달리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았다. 클로에도 추임새를 넣어 가며 관전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두 남자의 결투를
바라보던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이번 참가자들의 수준이 높다더니, 확실히 볼 만하군요.”


클로에는 한참 어린 남자의 말에 담겨있는 승부욕을 읽어 냈다. 하여간 사내들이란. 그녀는 호선을 그린 입술을
부채 아래로 감췄다.

“용병왕에 금화 한 개.”

클로에의 말에 칼릭스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깊은숲에 걸어 보죠.”

둘 다 말없이 관전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한참 밀리던 용병왕이 갑자기 기세를 바꿔서 미친 듯 무기를 휘둘렀다.
매서운 일격들이 계속 이어지며, 깊은숲의 상급 기사가 검을 놓치고 말았다. 용병왕의 승리였다. 와아아,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승리자 용병왕 페이던! 페이던!

클로에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내밀었다. 칼릭스도 경기장을 주시한 채 주머니를 뒤져 금화 한 개를 그녀의


손바닥에 놓았다.

“누가 봐도 황실 기사의 승산이 높지 않았습니까?”

“그런가요? 참고로 저 용병왕 페이던은 상단 일로 몇 번 만나 본 적 있답니다. 초반에 고전하는 척 해 달라는


부탁을 잘 들어줬지 뭐예요?”

“…….”

“그런 눈빛으로 볼 필요는 없어요. 상대가 강하면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닌가요? 상대가 어떤 검술을 쓰는지,
장점이 무엇인지 단점이 무엇인지. 그 정도는 알 수 있으나 강함의 척도는 숫자와 글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저 역시 도박을 하는 것과 다름없답니다.”

칼릭스의 집요한 눈빛에 클로에가 부채를 펴서 제 얼굴을 슬쩍 가렸다.

“물론 저 상급 기사보다 페이던이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요.”

역시 알았잖아……. 칼릭스의 부루퉁해진 표정을 보고 클로에가 눈웃음을 지었다. 뚱한 얼굴이 로젤린과 아주


판박이였다.

“다음은 강철발굽 백작가와 물보라 기사단의 대결이로군요. 물보라가 이길 거예요.”

“이쯤 되면 점쟁이가 따로 없군요.”

페이던과 패자가 경기장을 내려가고, 두 사람이 올라왔다. 사회자가 그들의 이름을 쩌렁쩌렁 외쳤다.

“강철발굽 백작가의- 충실한 기사! 윌로스 경!”

“황실 제 4 기사단. 물보라의 하급 기사- 핀 경!”

결과는 그녀가 말한 대로였다.


108 화.

“칼릭스 경. 저는 앞으로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할지 알 것 같아요. 물론 모두 최후의 승자는 예상하고 있을


테지만, 그 과정까지 짚어 내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겠어요?”

“좀 힘든 일, 정도로 말할 수 있는 부분입니까?”

“그럼요. 생각보다도 황금정원의 귀는 아주 넓게 열려 있어요. 돈이 있는 곳에 사람이, 사람이 있는 곳에 정보가,


정보가 있는 곳에 돈이. 제 지론이에요.”

상단과 정보 단체를 이끄는 사람다운 말이었다.

“저는 사소하다 말할 수 있는 정보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랍니다. 그 노력이 칼릭스 경께서
놀라워하신……이 대회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했어요. 심지어는 오늘 만나지도 않은 레이몬드의 속옷이
연분홍색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답니다. 대단하지요?”

“아니요. 저는 그 정보, 알고 싶지 않습니다.”

칼릭스가 정색하자 클로에가 살짝 웃었다. 눈꼬리가 처져 더욱 순하게 보였다.

“그런데 왜 몰랐을까요? 칼릭스 경이 그런 어마어마한 행위를 강압적으로 그분에게 몰아붙일 것이라고! 저는


정말 상상도, 예상도, 짐작도 못했어요.”

“……말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마어마한 행위라니. 굉장히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자극적인 문구였다. 물론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2 황자
리카르디스에게 기사의 맹세를 했다고 조목조목 짚어 가며 말할 수 없기에 우회한 표현이겠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껄끄러웠다.

물보라 기사단의 하급 기사가 승리했다.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하인들이 부지런히 치웠다. 클로에는 팔짱을 낀 채
경기장을 내려 보고 있었다.

“저는…… 예상 못한 요소가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상황을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칼릭스 경.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잘 만들어진 배가 한 척이 있어요. 하지만 순항을 결정하는 것은 배의 능력만이 아니죠. 바다가
잔잔하길, 그 속에 송곳처럼 튀어나온 암초가 없길 바라야 해요. 여기서 우리는 그날의 날씨와, 암초의 위치를
습득해 폭풍과 암초를 피해갈 수 있겠죠. 하늘에 맡긴다, 운에 맡긴다. 저는 그런 말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늘에 맡길 때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끝낸 후 뿐이에요. 그리고 생각보다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폭넓고, 깊고, 끝없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클로에는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암초같이 갑자기 튀어나온 칼릭스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피를 보는 것 자체도 불쾌한 듯 보였다.

“말이 길어졌네요. 요컨대, 칼릭스 경이 그분에게 갑작스럽게 밀어붙인…… 어마어마한 그 행위는…….”

“표현을 좀 바꾸면 안 됩니까?”

“어머,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아무튼, 제국의 굵직한 일 정도는 제 노력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칼릭스 경은 그렇지 않았으니,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칼릭스는 그녀가 의문스러워 하는 부분을 충분히 이해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뒤를 따라 걷고 있던 후계자가


갑자기 길을 벗어나다 못해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으니. 솔직히 그 자신도 살짝 미친 짓 같다 생각했다.
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더욱 경악스러웠으리라. 충성 맹세를 했을 때의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주위는 함성 소리로 시끄럽고 먹먹한 가운데 두 사람의 침묵은 그보다도 무거웠다. 한참 뒤 칼릭스가 대답했다.

“그분에게 이미 말씀드렸으며, 또한 그분 또한 이해하셨으리라 믿었습니다만.”

“건너건너 듣는 얘기는 생각보다 제게 큰 믿음을 주지 못하더군요.”

“건너건너 듣는 얘기로 판을 짜시는 분 치고는 약한 모습을 보이시는 군요.”

클로에가 씩 웃었다. 어찌 보면 건방질 수도 있는 말이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경우가 다르니까요. 이것은 키를 쥐고 있는 선장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앵무새 역할을 맡고 있는 저에게도


중요하답니다. 배에 타려는 선원을 정하는 것은 선장이지만, 앵무새도 저 선원이 일을 잘하나 못하나 정도는
궁금할 수 있잖아요.”

참신한 표현이 웃긴지 칼릭스가 슬쩍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클로에가 타박하듯 부채로 그의 어깨를 살짝 쳤다.
탁. 소리는 당연히 묻혔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다들 울부짖는 수준으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로젤린의 등장이었다.

저 멀리 땋은 검은 머리를 한쪽 어깨로 늘어트린 로젤린이 보였다. 건물에서 막 나와 햇빛을 받는 그녀는


노곤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칼릭스는 제 누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클로에가 눈빛으로 대답을 촉구했다. 칼릭스는 주머니를 뒤지며 슬쩍 일어섰다. 로젤린의 등장에 펄펄 날뛰며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 그가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여전히 앉아 있는 클로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칼릭스는 손에 들린 것을 쫙 펼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찾아보니 가판대에서 팔더군요. 몇 개 더 사 놨는데 필요하면 드리도록 하죠.”

클로에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 하며 기가 차다는 듯 숨을 내뱉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웃었다.

[아버지가 나와도 우승은 로젤린]

칼릭스가 체면도 버리고 열심히 천 조각을 흔드는 모습을 본 클로에는 눈물을 닦아 내야만 했다. 이게 그
대답인가. 누이 사랑이 지긋하단 말이렷다. 생긴 것보단 귀여운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무투회장이 흔들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환호성 때문에, 시합은 진행되지 못하고 잠시 미뤄졌다.

* * *

로젤린의 상대는 불화살 용병단의 단원이었다. 용병단의 유명세와 더불어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자였다. 사절단의 일만 아니었더라도 카델, 그가 더 유명했을 정도였다.

로젤린을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거구의 남자는 사나운 인상을 찌푸려 더욱 사납게 만들고 있었다.
수염이 숭숭 나 있는 거친 남자들이 관중석에서 카델의 이름을 연호했다. 저 쥐방울만한 계집에게 본때를 한번
보여 주라며 난동을 피우다가 병사들에게 끌려 나갔다. 한껏 움츠러든 뒷모습이 초라했다.

넓은 경기장 위에 남자의 흉흉한 기세가 가득 찼다. 진행 요원이 진땀을 흘리며 카델의 눈치를 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무기, 허용. 몸싸움, 허용. 암기와 독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승리의 조건은 상대가 경기장을 벗어나는 경우,
상대가 패배를 시인하는 경우, 상대가 사망하는 경우, 상대가 전투 불능이라고 제가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항복을 했음에도 공격을 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에는 탈락과 더불어 조치에 들어갑니다.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로 예를 지켜 간단하게 인사해 주세요.”

“불화살 용병단의 카델.”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두 대전자 사이에 끼어 있는 남자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것은 인사가 아니라 자기소개입니다……. 물론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카델이 껄렁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로젤린에게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디 한번 그 잘난 솜씨 좀 보자고.”

남자의 협박을 멍하니 흘리던 로젤린은 그의 뒤쪽 관중석에서 천 조각을 흔들고 있는 칼릭스를 발견했다.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카델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왜, 왜 날보고 웃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로젤린이 손을 번쩍 들어 붕붕 흔들었다. 칼릭스가 천 조각을 바꿔 들었다.

[사랑해요 로젤린]

칼릭스가 있는 방향의 관중석이 난리가 났다. 날, 날보고 손을 흔드셨어! 날 보고 웃으셨어! 착각이 파도처럼
우르르 일어났다.

카델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는 중이었다. 진행요원이 매우 지친 표정으로
“집중해주세요…… 이제 시합 곧 시작 하겠습니다…….” 하고 말 안 듣는 두 참가자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두 사람이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자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두 사람만이 올라와있는 경기장에 전쟁터와 같은


흉흉한 기운이 가득 찼다. 바람이 칼날을 지나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뎅, 무거운 종소리가 울렸다. 로젤린은 검을 들었다. 카델도 들고 있는 검을 꽉 그러쥐었다.

뎅, 두 번째 종이 울렸다. 눈과 눈이 서로를 포착했다.


뎅. 세 번째 종이 울리며 시합이 시작되었다.

쿠우웅…….

큰 타격음이 종소리의 여운을 뚫고 공간에 울렸다. 사각형의 경기장 밖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일어났다.

“어?”

“지금 무슨 일이…….”

구경꾼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금 경기장을 벗어나 벽에 처박혀 있는 게, 오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불화살 용병단의 카델이 맞나? 바닥에서 한참 떨어진 위쪽에 박혀있던 카델이 스르륵 바닥에 떨어졌다. 처참한
패배자의 모습에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카델이 맞다!

드디어 상황을 이해한 사람들이 입을 쩍 벌렸다. 눈 깜짝할 새 승패가 갈렸다. 바람같이 돌진한 로젤린은 상대가
무기 한번 휘두를 시간을 주지 않았다.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 없는 자비! 저 극악무도함! 남자들이 온갖
괴성과 짐승 소리를 내며 환호했다.

여자들도 비명을 지르며 들고 온 꽃을 경기장 안으로 던졌다. 앞선 경기들 또한 훌륭했으나, 이것은 차원이
달랐다. 피 한 방울 나지 않은 승리는 오직 확연한 실력 차만이 이뤄 낼 수 있는 것이므로.

진행자는 멍한 얼굴로 그녀와 카델을 번갈아 보다가 급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스, 승리자는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에스터!”

우수수 꽃비가 내렸다. 로젤린은 몸을 곧게 펴고서 심장 위에 주먹을 올려놓았다. 기사의 경례에 무투회장은 다시
한 번 터질 듯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병사와 신관, 의사가 카델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뒤로, 로젤린은 경기장을
내려와 대기실로 이동했다.

109 화.

대전자들은 크고 작은 상처를 입기 마련이었다. 신관이 언제나 대기 중이라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 하더라도 몇십


분 동안 생사를 건 격투로 소모된 심력을 채울 수는 없었다. 예선전부터 결승전까지 며칠이나 걸리는 이유였다.

오늘은 16 강전과 8 강전이 이뤄지는 날이었다.

이틀 전 구매했던 표는 그 당일에만 사용 할 수 있기에, 오늘은 새로운 표를 사야했다. 덕분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돈도 돈인데, 구하는 일 자체가 하늘에 별 따기 만큼 어려웠다. 평민뿐 아니라
귀족들에게도.

하지만 몇몇 귀족들과 건국을 축하하러 온 타국의 왕족들은 초대권이 있었기에 자리싸움 따위는 먼 얘기…… 여야
했는데. 싸움은 치열하면 더 치열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닌, ‘
누구 옆에 앉느냐’하는 것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오전에 치러진 16 강전 뒤의 휴식 시간을 즐기고 돌아왔다. 비어 있던 자리가 하나둘 채워질 쯤 그들은
유달리 눈에 띄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앞선 경기에는 없던, 발타의 유력 후계자 하카브 왕자였다.

하카브의 오른쪽에는 그의 동생 간제가 앉아 있으나, 왼쪽 자리는 비어 있는 상태였다. 힐끔힐끔 눈치 보던 작은


왕국, 마람의 왕세자가 그의 곁에 슬그머니 다가갔다. 비어 있는 왼쪽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카브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간제를 향하고 있던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망설이던 왕세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격조 하였습니다, 하카브 왕자.”

하카브는 그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웃었다.

“격조라. 저희가 만난 적 있습니까?”

남자의 얼굴이 발개졌다. 과거 타국에서 만난 적 있으나 그는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자기소개부터 다시 해야


하나 갈등하고 있을 때 하카브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농담입니다. 알세 마람. 왕세자의 얼굴을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마람의 왕세자는 불쾌한 농담에도 불구하고 하카브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색을 지었다. 간제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하카브를 바라보았다. 말 한마디에 쥐락펴락. 아주 가지고 논다 놀아.

그사이 알세 마람은 하카브에게 옆자리에 앉아도 되겠느냐 물었다.

“이런, 왕세자. 미안합니다. 자리를 잡아 놓는 일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쯤 알고 있으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양해해 줄 수 있습니까?”

“아, 그, 그럼요. 하하.”

“어찌나 배려심 깊은지. 연회 때 뵈면 마저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아, 그…….”

“즐거운 시간되시길.”

하카브가 웃는 얼굴로 왕세자를 쫓아냈다. 왕세자는 떠나는 중에도 그를 흘끗흘끗 돌아보았다. 구체적으로 약속을
잡고 싶은 모양인데 하카브가 다시 간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니 방도가 없었다.

이후로도 마람 왕세자가 거의 잡상인 취급을 받고 쫓겨났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한 몇 명의 도전자가 하카브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일 분을 넘기지 못하고 다른 자리로 떠나야 했다.

옆이 소란스러운데도 간제는 팔짱을 낀 채 무투회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카브가 간제의 어깨를 감싸고는
그녀의 머리에 제 머리를 콩 대었다.

“인기가 많은 것도 피곤하구나. 뭘 그리 보니, 간제. 아직 시합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그냥요.”

“그냥 뭐?”

하카브가 그녀를 감싼 어깨에 힘을 줬다. 간제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의 손을 떨쳐 내었다.

“사람들의 머리통을 구경중이에요. 방해하지 마시죠, 오라버니. 거슬려요.”

“머리통? 왜. 따다 주련?”

“알록달록해서 신기하잖아요. 리비타에는 검은색뿐이니.”

“그렇지? 나도 사실 적응이 안 된다.”

하카브는 뭐가 웃긴지 호탕하게 웃고는 그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간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곱게 정리했다.

“간제. 내 옆에 누가 앉을지 맞춰 보겠느냐?”

“바이페렘.”

“똑똑하구나.”

“모르는 쪽이 멍청한 거지요.”

“그러게 말이다. 멍청한 놈들이…… 너무 많아.”

하카브는 흠 숨을 짧게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어 있는 자리를 탐내는 눈빛들이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간제는 그의 웃는 표정의 진정한 뜻을 읽어 냈다. 아까 자신에게 말한 것처럼 머리통을 죄 따 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바이페렘.”

하카브가 아까 하던 말을 이어했다.

“어느 쪽을 말하는 걸까.”

어느 쪽이라? 간제가 말한 ‘바이페렘’은 당연히 딤라였다. 현재의 바이페렘 관디테가 딤라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간제는 지금 제 오라비가 말한 ‘바이페렘’이
딤라가 아닌 관디테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어린애를 기다린다고? 간제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바이페렘 관디테는 말을 할 줄 아는 나이긴 한가요?”

관디테는 다가오는 생일에 11 살이 되는 나이라 했다. 그 얼마 안 되는 나이보다 두어 살 어려보이는 외양이긴


했으나 당연하게도 일고여덟 살도 말은 할 줄 알았다. 간제는 소녀를 갓난쟁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린
소녀가 말을 이해하고 생각해서 제대로 된 답변을 할 만큼 성장했느냐 의문스러워 하는 것이었다. 하카브도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피식 웃었다.

“옹알이는 하던데 말까지는…… 글쎄. 우선 만나 봐야겠지.”

“섭정관이 있으면 말 한마디 붙이는 것도 힘들 텐데요.”

“어제 우연히 일라베니아의 신관들이 라고슈 사절단이 머무는 성에 들렀다는 소식을 들었지. 섭정관의 건강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야. 애석하게도.”

애석하게도. 라는 말을 담는 남자는 여간 즐거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간제는 심사가 조금 뒤틀렸다.

“웃지 마세요, 오라버니. 꼴 보기 싫어요.”

“이놈 간제. 대체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그때 입구에서 한 무리가 나타났다. 시종 몇을 데리고 온 바이페렘 관디테였다. 하카브의 예상대로 딤라는 보이지
않았다.

빈자리를 탐색하는 관디테를 발견한 하카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다가서자 시종들이 관디테에게 한
발짝씩 더 붙었다.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기색을 보이다 시종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시종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런, 바이페렘이 아니십니까. 운명적인 만남이로군요.”

“왕자.”

소녀는 자신보다 근 두 배가 커 보이는 하카브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얼굴에는 경계의 빛이 올라와
있었다.

“혹 괜찮으시다면 제가 자리를 안내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소녀의 시선이 뒤에 있는 시종을 향했다. 그는 결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깜박, 깜박. 관디테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속에서 손쉽게 갈등을 읽어 낼 수 있었다. 하카브의 위험함은 익히 알고 있으나,
정중하게 건네 온 요청을 물리치자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한다, 왕자.”

하카브가 씩 웃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제 옆자리로 관디테를 안내했다. 하카브라는 껄끄러운 인물을


제외하자면, 키가 작은 관디테에게도 잘 보일 만한 좋은 자리였다. 문제는, 큰 의자에 앉으려니 그녀가
낑낑거리며 올라가야할 만한 높이였다는 것이다. 왕의 위엄과 체면이 땅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관디테가
망설이자 하카브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바이페렘.”

그러고는 제 큰 손을 내밀어 그녀의 무릎 위치쯤에 대었다. 누가 보아도 밟고 올라가라는 얘기였다. 관디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내드린다 했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바이페렘. 제 어깨를 잡으시고 올라서면 됩니다.”

무릎을 굽히자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졌다. 소녀가 부끄러운 듯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하카브의 어깨를 잡고 밑에 있는 손을 밟았다. 관디테가 무게를 실어도 그의 손은 미동도 없이 소녀를 받치고
있었다. 하카브는 손을 올려 소녀가 앉는 것을 돕고 나서야 자리에 착석했다.

간제는 웃는 얼굴로 바이페렘에게 인사했다. 관디테도 가볍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하카브는 두 사람이 인사하는
것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로젤린 경을 보러 오셨습니까, 바이페렘?”

관디테는 흠칫 몸을 굳힌 일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도도하게 턱을 들어올렸다.

“일라베니아의 용맹한 전사들을 보러 왔다.”

“그 어느 용맹한 자라 하더라도 혹한을 이겨 낸 라고슈의 전사만 하겠습니까.”

애써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녀가 기쁜 듯 감정을 조금 내보였다. 간제는 환장할 것 같아 관디테를 따라온


시종들을 흘겨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보호자도 없는 저 어린아이를 독사 굴로 데리고 온 건지. 라고슈는
아이들을 강하게 키운다더니, 빈말이 아닌 듯했다.

관디테는 경계를 아주 지우지는 않았지만, 나름 즐겁게 하카브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어려운 말과 정치 용어를
빼고, 자신이 본 라고슈의 눈 덮인 산, 굳어 보석처럼 빛나는 얼음 결정, 해안가에 남아 있는 고래의 뼈 등. 그
놀라운 광경이 얼마나 가슴 깊이 새겨졌는지 어린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 주듯 조곤조곤 풀어 냈다.

하카브의 얘기가 점점 진행될수록 관디테는 동물처럼 바짝 털을 세우고 경계하는 모습을 누그러트렸다.

“테라스로 한번 나갔다가 위에서 얼어붙는 얼음덩어리…… 이름을 들었는데 까먹었군요.”

“고드름이다.”

“예, 고드름이 떨어져서 머리를 맞고 휘청거리다 얼어 있는 바닥을 밟아 미끄러졌지 뭡니까. 아무도 못 본 것이


그나마 위안입니다.”

“아하하!”

소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하카브는 소녀를 따라 웃다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날이 플로에토와 만난 첫 날입니다. 바이페렘.”

관디테의 표정이 딱 굳었다. 유폐된 전 바이페렘의 얘기가 나오니 다시 경계의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110 화.

“저에 대해 많은 말을 들으셨을 겁니다. 위험하다, 나쁘다. 대륙에 피바람을 몰고 오는 자라고. 그 어떤 것도


변명하지 않을 테지만, 제가 구태여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플로에토, 그녀만큼은…….”

하카브의 눈동자는 저 먼 라고슈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진정 라고슈를 위했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이 거대한 대륙에 아버지를 자처하는 일라베니아의
어두운 면을 보고, 그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너무 거대했고, 또 다른 힘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녀가 나라를 팔아먹은 여왕이라는 오명을 감수하고도 저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모두
라고슈를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라고슈의 행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슈의 위대한 뜻을 품고
있으나, 방향이 달랐을 뿐이라,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절자, 배신자. 수많은 오명이 플로에토를
둘러싼 지금이 너무나도 가혹하게 느껴집니다, 바이페렘. 부디.”

하카브가 제 입술을 질근거렸다.

“그녀를 용서하라, 어두운 곳에서 꺼내 달라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플로에토가 왜 저에게 손을


내밀었는지, 한번만 생각을 해 주시길 청합니다. 바이페렘께서 보셨던 라고슈는 어땠습니까……. 대륙은 죽어
가고 있습니다. 막 즉위하신 바이페렘께 이 이야기는 너무 가혹하리란 것을 압니다. 하지만 라고슈의 추운 땅을
밟고 있는 자들은 모두가 형제.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킵니다. 그런 형제들이 하나둘 죽어 가고 비명을 지르고
있지 않습니까. 위대한 바이페렘. 라고슈의 영원한 서약이시여. 그 소리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대사 준비해 왔나? 아주 말이 강같이 흐르네. 간제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괜 채 하카브의 헛소리를 감상했다.


어리다고는 해도 지금의 바이페렘 또한 플로에토가 실각된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에 관련되어 하카브가
위험하다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처음 소녀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라고슈에 대한 얘기로 경계심을 조금 풀고, 금기나 다름없는 화제를 직접 꺼내어 어린 소녀를 흔들었다.
플로에토를 그리는 눈빛에서 모두가 위험하다 손가락질 한 남자의 진실어린-진실 어려 보이는- 모습이 보였다.

하카브의 보기 역한 연극이 진심처럼 보이는 이유는 출중한 연기 실력뿐 아니라, 그가 한 말들이 대부분 사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고슈의 많은 형제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는 것도 현실이고, 일라베니아는 대륙의
아버지로 누릴 것은 누리되 죽어가는 땅을 외면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성력을 가진 사람들을 아득바득 모아 그러쥐고 남은 영광 한 톨 새어 나갈까 전전긍긍하기만 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끼는 것은 비단 라고슈뿐만이 아니었다.

관디테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카브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유효한 모양이었다. 관디테는
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아래를 보던 시선을 하카브에게 옮겼다. 하카브가 애절한 표정으로 애써 미소 지었다.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으셔도 되니, 부디 라고슈의 형제들을 살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두서없는 말로


바이페렘의 마음을 어지럽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시합을 알리는 사람이 나와 소식을 알렸다. 로젤린의 대전자가 기권을 했다는 얘기였다. 그녀가 등장하기만을
바라던 사람들이 일시에 아쉬운 소리를 냈다.
관디테는 로젤린의 경기 소식에도 하카브의 얘기를 반추하는 듯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소녀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카브는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시든 만디라.”

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카브의 표정이 의문스럽다는 듯 바뀌자 소녀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라고슈 높은 곳에서 자라는 만디라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만큼 귀중한 약초다, 왕자. 시든 만디라. 만디라가
시들어 봤자 만디라지. 조금 상하거나 형태가 변하는 걸로 값어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라고슈의 속담 중 하나다”

부연 설명이 있어도 영 이해하기 힘들었다.

“왕자에게 일라베니아는 시든 만디라인가 보군. 하기야 과거의 광영이 줄었을지언정, 쉬이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니. 형세는 비등한 것인가 왕자? 라고슈의 힘이 발타에 실리지는 못해도 일라베니아에 실리면 안 된다라…
….”

하카브의 표정이 설핏 굳어졌다. 옆에 있던 간제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전까지 어린 영양같이 눈을


깜박이던 초식동물이 기세를 싹 바꾸었다. 하카브의 말에 경계를 내보이던, 웃으며 담소를 나누던 모습마저도
전부 가장에 불과한 것 같았다.

“꼭두각시에 불과한 이 몸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이러는지는,”

관디테가 어깨를 으쓱했다.

“대충 알겠다. 섭정관은 나이 들고 라고슈는 아직 혼란하다 이 말인가. 전 바이페렘의 얘기까지 꺼낸 것을


보아하니, 어쩌면 아직 완전히 그 일파를 뿌리 뽑지 못했을 수도 있겠군.”

소녀는 표정 없이 하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젤린 경의 경기가 취소되어 매우 상심할 뻔했으나, 오늘의 외출은 이 몸에게 값졌노라. 왕자가 재밌는 얘기를
들려 준 덕이다.”

같잖지도 않은 연극 한 편 잘 보았다는 어투였다. 간제는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가 제 입을 가렸다. 네 발로


걷던 애완동물이 두 발로 걷는 걸 본 느낌이었다. 관디테가 눈을 비비며 하품했다.

“기대되어 새벽 늦게까지 자지 못해 피곤하다. 왕자, 내려가는 것을 도와다오. 이제 슬슬 이 몸의 낮잠


시간이다.”

하카브는 가만히 소녀를 바라보다가 일어서서 아까와 같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발을 받쳐 주었다. 소녀가 그의
어깨를 잡고, 손을 밟은 후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감사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간제는 당장 쫓아가서
소녀의 볼에 키스하고 싶었다. 간제의 엉덩이가 들썩이던 그 때, 소녀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하카브를 보며 소녀가 생긋 웃었다.

“하카브 위 리비타. 이 빚은 언젠가 갚도록 하겠다.”

아주 가까운 과거에 들어 본 적 있는 말이었다. 하카브는 총총 멀어지는 어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참 후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딤라를 아주 빼다 박았군. 라고슈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정말 정이 안가. 내 아내들이 그립구나.”


간제는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어흐흑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몸을 떨어 대며
웃고 있자 하카브가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놨다.

* * *

첫째 날

32 강전 4 초

둘째 날

16 강전 21 초

8 강전 0 초(부전승)

셋째 날

4 강전 23 초

준결승전 45 초

누가 승자가 될지, 누가 패자가 될지 알지 못해 두근거리며 가슴 졸이던 매해와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였다. 4


초 만에 승리한, 전무후무한 성적의 참가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부전승 제외하면 역대 가장 빠른 승리였다.

32 강전만 해도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첫 경기 이후로 모두 확신하게 되었다. 믿기 힘들던 그 소문들이 진실에


매우 가깝다고. 정말 딱밤으로 암살자를 죽였단 말인가? 정말로 콧김을 불었더니 암살자들이 날아갔단 말인가?
물론 영 아니올시다 싶은 소문들도 여전히 섞여 있었으나, 다들 믿는 기색이 역력했다.

8 강전까지 치러진 두 번째 개방일로부터 이틀 뒤. 다시 무투회장이 열렸다. 오늘도 로젤린은 4 강전과


준결승전에서 멋지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32 강전의 상대, 불화살 용병단의 카델은 신성력은 뛰어난 신관이 붙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틀 동안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그 소식을 들은 로젤린도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다음 경기부터는 조금 더 힘을 풀고
상대하기 시작했다.

21 초, 23 초, 45 초. 모두 1 분은 넘지 못했으나, 로젤린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상대들을 많이 봐줬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45 초의 결투 후, 로젤린은 다시 경례를 했다. 승리 이후에 항상 보이던 모습이었다. 몇몇 승리자처럼


물구나무를 선다든지, 한쪽 눈을 감으며 키스를 날린다든지 하는 요란한 행위를 하지 않았으나 그 어떤 모습보다
강렬하게 관중들에게 새겨졌다.

어린아이들이 그녀를 흉내 내어 주먹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얼굴은 잔뜩 상기되고 눈동자는 투명하게 반짝였다.


아이들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단순하지만 굉장히 올곧다. 강하고, 멋지고, 정의로운. 좋은 수식어가
잔뜩 붙어있는 자만이 쟁취해 낼 수 있는 자리였다. 동경의 대상이란 것이 대개 그러하듯이.
꽃비 속에서 경례하던 로젤린의 모습은 칼릭스가 봐도 설렐 정도였다. 개국 이래로 이렇게 멋진 기사가 있었나?
아마 없었을 것이다. 칼릭스는 흡족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경우는 뭐랄까…….

칼릭스는 말을 잃어버렸다. 다음에 커서 로젤린 경과 결혼하고 말겠다는 소녀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였다. 아니 그


소녀의 어머니가 “신분 차이가 너무 커서 안 될 거야.”라고 얘기한 다음부터였던가.

아무튼 단순히 신분 차이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어서인지, 칼릭스의 얼굴은 혼란스러운 감정에 물들어
있었다. 울지도 자리배치웃지도 못하는 이상한 표정을 본 클로에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오늘도 그제와 똑같은 자리 배치였다.

“미래의 매형이 매우 아리땁네요, 칼릭스 경.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게 흠이 될까요?”

“……제국…….”

“제국 법상 동성혼은 안 된다는 고리타분한 말은 말아요.”

칼릭스는 진절머리 난다는 식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레이몬드와 클로에가 어떻게 만나 어떻게 사귀게 된 것인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것 같은데…….

클로에는 [남편이 나와도 우승은 로젤린] 이라 적혀 있는 천 조각을 들고서는 흥겨운 축제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111 화.

“사귀자고 먼저 말한 사람도 레이몬드고, 먼저 청혼한 사람도 레이몬드예요.”

“혹시 사람 마음을 읽는 재주라도 있습니까?”

“어머? 설마요. 정말 재밌는 분이라니깐.”

말을 말자. 칼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선을 옮겼다. 경기장을 내려와 대기실로 이동하는 로젤린이
보였다. 가까운 관중석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자리 싸움에 져서 무력하게 밀려나
있었다. 승리자들은 그 남자 군단의 반이나 될까 싶은 가느다란 아가씨들이었다. 다들 손수건과 꽃다발 따위를
로젤린에게 내밀고자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친 상태였다.
“로젤린 경! 여기 한번만 봐 주세요!”

“경! 제 손수건을 받아 주세요!”

“로젤린 경!”

여자들에게서 전운이 감돌았다. 칼릭스는 그쪽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마치 맹수들의 격돌 같았다. 그리고
난간은 맹수들의 거친 싸움을 버텨 낼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삐걱 소리와 함께 난간 한 쪽이 우그러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허리를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두었던 여자 두 명이 비명을 질렀다. 치마가 걸려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가느다란 몸뚱이가 바닥을 향했다. 칼릭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갖은 환호와 소란 속에서 로젤린은 난간이 비틀리는 소리를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다지 높지 않지만 인간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약한 생물이었다. 염려의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던 터라, 사고가 일어남과 동시에 움직일 수
있었다.

꺄악, 꺅. 소리가 채 울려 퍼지기도 전에 로젤린은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미끄러지는 듯 난간 앞에 도달한 로젤린의 위로 여자 두 명이 떨어졌다. 한 명은 왼쪽 팔로 받고, 한


명은 오른쪽 팔로 감싸 안았다. 눈을 질끈 감은 여자들의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렸다. 굉장히 놀란 듯했다.

‘음. 좋아. 잘 받아 냈어.’

로젤린은 내심 흡족했다. 일순 크게 비명 소리가 울렸던 사고 현장이 조용해졌다. 여자들이 눈을 떴다.

“악! 로, 로젤린 경!”

“꺄악!”

로젤린의 팔과 어깨에 걸쳐진 여자와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가 앞선 비명보다 높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다시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다.

봤어? 와……. 여자 두 명을 그냥 깃털처럼 드는구만! 바람과도 같은 빠르기! 남자들이 제 빈약한 근육을


만지작거렸다.

로젤린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여자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초점을 잃어 갔다. 좋은 향기…… 부드럽고…… 멋있어…


….

그들의 눈빛에서 어떤 욕망을 느낀 로젤린이 흠칫 몸을 굳혔다. 곧 안전하게 바닥에 도착한 여자들이 달콤한
한숨을 내뱉었다.

“난간에 기대면 위험합니다.”

난간에 붙어 있는 문구를 그대로 읊은 것에 불과했으나, 여자들은 크게 감명 받은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두 번 다시는 난간에 기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한 사람들 같았다.

로젤린은 한 명의 치마가 찢어진 것을 발견했다.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다치지는 않았지만, 깊게


찢어져 허벅지가 보일 정도였다.
“옷이 찢어졌습니다.”

“어, 어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다리로 향했다. 당황한 여자가 가려 보려 했지만, 크게 찢겨 나간 조각이 있어
어려움을 겪는 중이었다. 로젤린이 제복 겉옷을 벗으며 그녀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로젤린이, 그 유명한 기사가 자신의 허리에다 제복을 묶어 주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로젤린의 얇은 셔츠 깃이 여자의 볼을 간지럽혔다. 칼릭스는 멀리서 여자의 눈을 보고 말았다. 아, 안 돼.

로젤린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찢겨진 부분이 가장 잘 가려지는 위치를 찾아 냈다. 하얀 제복이 여자의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로젤린 경. 이 보답을 어찌 해야 할지…….”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경…….”

여인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수습 기사들이 떠오르는 맑은 눈망울들이었다. 로젤린은


미소를 지으며 여자들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안 돼요 누님! 그만, 그만하세요! 칼릭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은
로젤린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무사하신 걸로 됐습니다.”

로젤린은 살짝 묵례한 후 돌아섰다. 여자들은 아쉬워하며 멀어지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때, 몇 걸음 가던


그녀가 멈춰서 고개를 살짝 틀었다. 옆 눈으로 여자들을 흘끗 다시 바라본 로젤린이 말을 이었다.

“옷은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여인들과 로젤린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결 좋은 검은 머리가 휘날렸다. 난간 위의


여자들이 들고 있던 꽃송이에서 꽃잎이 날아왔다.

미친, 바람까지 왜 저래. 칼릭스는 절망했다. 심각하게 멋있었다. 심지어는 제 누이의 목소리가 제법 낮은
편이라는 것이 이 상황에 힘을 더하고 있었다.

난간 안쪽에서 지켜보던 아가씨들의 눈빛도 몽롱해졌다. 어두운 건물 안쪽으로 사라져 가는 로젤린의 뒷모습을,
그들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강하고 상냥한 기사님의 향기는…… 달콤했다. 로젤린이 실제로 경기 전에 달콤한
과자를 많이 먹고 왔기 때문이었으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 * *

결승 상대는 황실 제 1 기사단 ‘얼음창’의 부단장, 마르틴으로 결정되었다. 얼음창 기사단은 가장 강하고 가장


충성심이 깊은 자들이 있는 황제의 최정예 무력 집단이었다. 그들은 가진 충성심만큼이나 황제로부터 많은 영광을
하사받고는 했다. 이런 무투 대회에서 승리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매년 많은 기사들이 무투 대회에 출전하고는 했지만, 얼음창 기사단에서 참가자가 나온 적은 없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심지어는 그냥 단원도 아니고 부단장의 직위에 오른 자였다. 얼음창의 이름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영예로웠으며, 부단장쯤 되는 사람이면 무투 대회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욱 많을 수도 있었다. 출전의
이유가 모호했다.

32 강전, 1 분 12 초.

16 강전, 7 분 45 초.

8 강전, 6 분 22 초.

4 강전, (부전승)

준 결승전, 9 분 59 초.

얼음창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경기 내용이 훌륭하다는 점에서 마르틴의 이름이 로젤린과 함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모두 십 분을 넘기지 않고, 심지어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길면
한 시간 넘게도 싸우는 것이 무투 대회의 일반적인 풍경이었건만, 얼음창의 위명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준비가 끝났다. 앞선 패자들의 붉은 흔적이 심란하게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마르틴은 찝찝한 마음으로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로젤린이 보였다.

2 황자의 방패이자 창, 검, 화살, 뭐 이거저거 혼자서 다 해 먹는 주인공이 저기 있었다. 마르틴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억눌렀다.

성력은 숱하게 접할 수 있었으나, 마력은 그렇지 않았으니. 검 좀 다루고 강하다는 말 좀 듣는 기사들이 몸을


들썩이며 하얀밤 기사단에 접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르틴도 그 수많은 기사들 중 한 명이었다. 로젤린과 검을 맞대고, 대련도 하고 결투도 해 보고 싶었다. 얼마나
강한가. 정말로 딱밤으로 암살자의 머리를 날렸는가! 마력은 얼마나 강하고 불길한 힘인가. 보고 싶었다.
기사단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리고 권력 없는 자들의 출세 관문이나 다름없는 무투회장에 발을 들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물론 무투 대회 이전에, 하얀밤 기사단에 공동 훈련 계획서를 찔러 넣기도 했었다. 하지만 하얀밤의 기사단장,


스타스는 얼음보다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는 따로 일정이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대련만 한번 해 보겠다는데
무척이나 깐깐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 마르틴은 그 어느 때보다 흥분했다. 높은 자리에서 관람중인 황제의
존재도 잊을 정도였다. 진행자가 다가오다 선뜩한 기운에 발을 잠시 주춤거렸다. 참가자 마르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온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무기, 허용. 몸싸움, 허용. 암기와 독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승리의 조건은 상대가 경기장을 벗어나는 경우,
상대가 미리 패배를 시인하는 경우, 상대가 사망하는 경우, 상대가 전투 불능이라고 제가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항복을 했음에도 공격을 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에는 탈락입니다. 미리 주의해 주세요. 서로 예를 지켜
간단하게 인사해 주세요."

마르틴은 제복에 슥슥 손을 문질러 닦은 후 로젤린에게 악수를 청했다.

“제국 1 기사단, 얼음창 소속 부단장 마르틴이다.”

“하얀밤의 상급 기사 로젤린입니다.”

맞잡은 손이 작고 가느다래 놀랐다. 이 손으로, 이 체구로 어떻게 그런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이지? 근육의


구조가 다른가? 진행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끼어들려 했지만 마르틴이 말을 먼저 꺼냈다.

“로젤린 경.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나?”

“예?”

“나는 경이 모든 경기에서 힘을 온전히 내보인 적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습니다.”

마르틴이 화색을 띠었다.

“봐주는 것 없이. 최선을 다해, 전력으로 나를 상대해 주게.”

로젤린은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관중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앉아 있는 그


어디쯤이었다. 그녀는 곧 스타스를 찾아내었다. 그는 갑자기 닿은 시선에도 당황하지 않고 고개부터 저었다. 먼
경기장에서 무슨 대화 내용이 오갔는지도 모르면서, 뭐든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듯 보였다.

“안된다는데요.”

“누가! 아, 누구인지는 대충 알겠군. 아니 어째서!”

“제가 최선을 다하면 상대방이 죽는다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마르틴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등골이 오싹했다. 교란을 위한 거짓말이나 허세가


아님은 금방 알 수 있었다.

112 화.
“기사단장님이 절대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스타스 경이 매우 현명했군. 알겠다.”

두 사람이 몇 발짝 멀어졌다. 진행자는 참가자 두 명이 대화를 나누는 내내 옆에서 벌벌 떨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댕, 댕, 댕. 세 번의 종이 울렸다. 충돌은 없었다. 불어온 바람에 흙먼지만 일어났다. 마르틴과 로젤린이 대치


상태로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모두들 침만 삼켰다.

로젤린이 자세를 낮췄다. 격돌 전, 마르틴은 그녀의 기세를 읽고 몸 앞에 검을 세워 방어 했다. 캉! 맑고 높은


소리가 울렸다. 로젤린의 검을 막은 마르틴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거대한 짐승에게 치인 것 같은 궤도였다.

마르틴은 금속 가루가 탁탁 튀어 오르며 빛을 받는 모습을 목격했다.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는 가운데 그녀의


인영만 다른 시간을 걷는 듯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촤아악, 마르틴의 부츠가 바닥을 긁었다. 잽싸게 검을 바닥에 박아 넣은 덕에 경기장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한 발자국 뒤에 경기장의 끝이 있었다. 경험이 빛을 발했다.

검을 놓치지 않은 것이 용했다. 아직까지도 충격에 손과 검이 징징 떨렸다. 이것이 그녀의 힘? 대단했다.


굉장하다! 마르틴이 웃었다. 그가 쏜살같이 대전자를 향했다. 로젤린도 한걸음 나아갔다.

챙!

두 번째 충돌이었다. 마르틴이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재빨랐다. 로젤린이


평가해도 그 정도였으니, 인간으로 친다면 최상급이었다.

왼쪽, 오른쪽, 허리, 심장, 다리. 굵은 혈관이 있는 지점을 날카롭게 베어 내려 했으나 그 어떤 공격도 그녀를
스치지 못했다.

45 초. 로젤린의 대전자 중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르틴은 방금 그 시간을 넘어섰다.


공방은 생각보다도 지속되었다. 적당히 하라는 스타스의 경고를 잊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검을 나누고 있는 이
시간이 순수하게 즐거웠다. 마르틴도 비슷한 마음인 듯했다.

근육의 질은 훌륭하고, 체격이 너무 크지 않아 검도 재빨랐다. 남성의 이점을 챙겨 일격, 일격이 가볍지만도


않았다. 로젤린은 최선을 다해 겨루고 있지는 않았으나, 수습 기사들과의 대련처럼 완전 봐주는 것도 아니라 좀
신이 났다.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마르틴의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그 잠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검의 간격 안쪽, 마르틴의


품이었다. 그의 눈이 커졌다. 로젤린은 남자의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며 목에 검을 가져다 대었다.
순식간이었다.

“항복하시겠습니까?”

마르틴의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고작 오 분도 안 되는 새에 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일 정도였다.


마르틴은 씩 웃더니,

“한번만 봐주지 않겠나?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데.”

라고 했다.
어, 의외의 반응인걸. 보통 이러면 졌다고 하던데.

“알겠습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거리를 벌렸다. 진행자가 승리자를 외치려다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어? 보통
이쯤에는 졌다고 하던데? 자기들끼리 알아서 봐달라고 하고, 알아서 봐준 다음에 2 차전을 준비하는 지금의
상황을 대체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까. 관중석도 술렁였다.

두 사람이 다시 검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얼떨떨한 기색을 지우지는 못했으나 곧 빠져들어 관전했다.

마르틴은 몇 번이나 한번만 더 봐달라고 했으며, 로젤린은 몇 번이나 그 제안을 승낙했다. 심지어는 검을 제외한
박투도 실행되었고, 달리기 시합과 팔씨름까지 경기장 내에서 이루어졌는데 진행자의 얼굴이 볼 만했다. 딱히
팔씨름을 하지 말라 규정되어 있지 않아 말릴 수가 없었다.

결승전, 우승자 로젤린 (하얀밤 기사단 소속)

대전 시간, 1 시간 13 분 29 초 (대전자 마르틴이 허벅지 씨름 후, 근육 경련으로 항복)

* * *

리카르디스는 힐끔 눈알만 굴려 옆에 앉아 있는 황제의 얼굴을 살폈다. 유례없이 이상한 결승전을 목격한 황제의
표정은……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허벅지 씨름은 그래도 좀 버티는 것 같더니, 아깝게 되었다.”

나쁘지 않다 못해 굉장히 즐기기까지 한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눈웃음 지으며 황제의 말에 수긍했다.

“로젤린 경이야 마력이라는 수단으로 신체를 강화한다 치더라도, 마르틴 경은 정말 훌륭하군요. 역시 폐하의
호위 기사답습니다.”

기분 좋은 듯 허허 웃는 황제를 보며 리카르디스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얼음창의 부단장이 무투 대회에


나오면 어쩌자는 건지…….

얼음창은 황제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집단이었다. 로젤린이 승리하는 경우 황제의 심사가 크게 뒤틀릴 가능성도
있었다. 다행히 경기 내용이 이상하게 튀는 덕에 기분 나쁘고 말고 할 상황이 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리카르디스, 엘피디오마저도 넋을 빼놓고 관전했다. 반복 달리기 시합을 할 때에는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사람들 다 모여 있는데, 경기가 이게 뭡니까. 황실의 권위가 떨어지겠습니다.”

입 벌리고 볼 때는 언제고, 엘피디오가 정신 차리고 공격을 시작했다. 황제의 제일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하하, 비약이 심하시군요 형님. 일라베니아 황실의 권위가 고작 기사 두 명 때문에 흔들리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마르틴 경의 이름을 연호하는 수많은 자들을요. 더군다나 무투 대회에서 만나는
참가자들끼리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기도 합니다만, 두 사람은 검으로 얘기하고 땀으로 우정을
쌓았습니다. 건국제의 흥을 돋운다는 그 취지에 적합한 경기가 아니었습니까, 폐하?”

“그렇지, 그렇지. 다들 즐거워하니 되었다.”

엘피디오가 그게 뭔 개소리야. 라는 눈빛으로 리카르디스를 흘겨보았다. 입에서 흐르는 게 말인지 유수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사르르 웃었다. 엘피디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피디오와 리카르디스가 기싸움 하는 광경은 낯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황자와 황녀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디에즈는 어린 황녀들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로젤린 경은 팔굽혀펴기를 몇 개 쯤 더 하실 수


있을까요, 오라버니? 백 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 정말요. 정말 대단하네요. 혹시 저를 목마 태워 주실
수도 있을까요? 저 요즘 무거워졌는데. 로젤린 경은 힘이 세니까 되지 않을까? 나눠받는 말들이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하인들이 분주히 경기장을 치웠다. 곧 우승자를 치하하기 위해 황제가 나설 차례였다.

“감개무량합니다 폐하. 황실의 기사가 우승하는 것이야 자주 있던 일이었으나, 이번은 더욱 그 승리가 크게


다가오는 듯합니다. 크레안 티다니온의 힘을 지닌 자가 승리하였으나, 그녀는 붉은수레바퀴. 일라베니아와 황제
폐하의 충실한 기사입니다.”

리카르디스의 큰 재주 중 하나였다. 헛소리, 빤한 아부를 굉장히 진정성 있게 들리게 하는 능력. 클로에는 “


전하의 호소력은 얼굴에서 나와요. 정말로.”라고 말했는데, 본인은 긴가민가 하는 기색이었다.

황제는 리카르디스의 말에 완전 취해 버린 듯했다.

“마인을 품으시는 폐하의 자비로우심이 진정 하늘에 닿으셨는지요? 만백성이 칭송하며 우러러볼 위대한
업적입니다.”

황제는 감동한 얼굴로 잔을 들었다. 리카르디스도 생긋 웃으며 그를 따라 잔을 들었다. 챙. 유리가 울리는


소리가 청명하고 즐거웠다. 슬쩍 돌아보니 라헤안시가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막고 있었다.

‘형 비위도 참 좋네…….’라고 말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황제가 안 보는 사이


청포도 한 알을 뜯어 그에게 콱 던졌다. 라헤안시가 재주 좋게 입으로 받아먹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황제만 경기장에 내려가야 했지만, 과하게 흡족해 버린 탓인지 리카르디스도 같이 대동했다.
웃음소리가 호탕했다. 횃불로 밝혀진 몇 개의 복도를 지나쳤다. 넓게 트인 공간으로 나오자마자 햇빛이 쏟아져
눈이 부셨다. 황제는 양옆에 일렬로 서 있는 병사들과, 얼음창 기사단을 지나쳐 경기장 중앙에 있는 로젤린에게
다가갔다.

로젤린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따라 관중석에 있던 자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정적이 감돌았다.

하늘에 가장 가까운 자. 일라베니아의 통치자. 대륙의 주인. 황제의 등장이었다. 그 누구도 황제의 허락 없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것이 한 시간이건, 하루건 간에.

정적이 깔린 경배에 황제의 눈빛이 변했다. 부글부글 끓는 욕망이 느껴졌다.


가장 좋은 걸 먹고, 가장 좋을 것을 입고, 말 한마디로 사람들의 목숨을 좌우하는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자는
배부를 줄을 몰랐다. 언제나 목말라했다. 그 끝 모를 갈증이야 말로 그를 황제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황제 라이노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자의 위에 서 있겠다는 음습한 욕망은 아름다운 권좌와 함께 대물림
되었으므로.

리카르디스가 볼 때에는 이성적인 척하는 반 미치광이였다. 가장 고상한 척하는 미친놈이 권좌에 앉아 있다.
하지만 권좌에 앉았던 자들은 다 그놈이 그놈이니. 그렇다면 전후 관계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미친놈들이 권좌에
앉은 게 아니라, 권좌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보는 쪽이 더 타당할지도 몰랐다.

신의 이름으로 빛나는 그 자리가 정녕?

“고개를 들라.”

근엄한 목소리에 로젤린이 고개를 들었다. 황제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던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설핏 굳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딱딱하고 날카로웠다.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이 예민해진 것이 확실하게
티가 났다. 긴장이라도 한 걸까? 그 로젤린이?

황제는 사나운 그녀의 인상에 놀랐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은 사이, 로젤린의 눈동자가
또르륵 굴러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괜찮다고 말해
줄 수 없으니 웃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113 화.

‘로젤린. 우승 축하한다.’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지만 로젤린은 알아들은 듯했다.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얼굴 표정이 스르륵 풀리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황제 라이노는 그나마 덜 사나워진 로젤린의 얼굴을 보고 그제야 말을 편안하게
걸었다.

형식적인 대화가 오고갔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황제 폐하를……


훌륭한 경기였다. 건국의 달을 맞이한…….

경기장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검을 하늘로 치켜들자 관중들이 환호했다. 꽃과 꽃잎이 휘날리는 가운데 황제가
로젤린에게 검을 하사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두 손으로 검을 받아들였다.
“이델라브힘의 아래, 가장 높이 계신 위대한 분. 황제 폐하께 이 자리를 바칠 수 기회가 오다니…….”

[이쯤에서 목멘 듯이 목소리를 좀 떨어 주면 돼.]

[목멘 목소리는 뭐야.]

[……목을…… 조른 것 같은 목소리?]

목멘 목소리가 졸지에 목을 맨 목소리로 둔갑해 버렸다. 잇세리온이 옆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레이몬드를


쳐다봤다. 둘은 열심히 토론했다. 마지막에는 목 아래를 꾹 눌렀을 때 답답한 그 느낌 정도면 될 것 같다고
합의를 봤다.

“붉은수레바퀴의 오랜 이름에도, 또한 보잘 것 없는 로젤린이라는 이름에도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쯤에서는 눈물을 약간 글썽인다.]

[눈물이 안 나면.]

[눈 오래 뜨고 있으면…… 될…… 걸?]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빨개지는 정도까지는 해냈다. 황제는 흐뭇하게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저에게.”

[말을 한번 더듬는다.]

[공적인 자리에서 왜 실수를?]

[……그런 약은 수가 필요할 때도 있단다, 로젤린…….]

“죽음의 위기가 저를 휘두를 지라도, 기꺼이 감내하겠습니다. 그 모든 것이 오늘을 위한 초석이었다면. 수 천


번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또 다시. 몇 번이고. 죽음을 넘어서라도.”

[<입술을 파르르 떤다> 별표.]

“아름다운 일라베니아. 영광의 일라베니아. 그 울타리와 방패.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가장 험난한 곳에서
가장 빛나고 날카로운 황제 폐하의 검이 될 자의 이름입니다.”

[<눈을 한번 꾹 감았다가 뜬다. 강렬한 눈빛> 밑줄 쫙.]

[강렬한 눈빛은 어떻게 하는 거야.]

[그래, 그거야! 잘하네]

그때 당시 로젤린은 그냥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타고난 강렬한 눈빛에 황제는 깊은 감명을 받은 기색이었다. 모두가 칭송한 강한 무기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건 황제는 흡족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턱수염을
쓰다듬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붉은수레바퀴로구나!”
로젤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하늘 높이 치켜 세웠다.

“일라베니아의 영광을,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로젤린의 목소리가 넓은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단단하고 힘이 넘치지만, 은은한 부드러움이 날카로움을
상쇄시켰다. 관중들이 그 목소리에 홀린 듯 일어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맞춰 같이 외쳤다.

일라베니아의 영광을,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꽃이 끊이지 않고 뿌려졌다.

그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바람을 타고 울려 퍼졌다.

삐이익---

리카르디스와 로젤린, 그리고 하얀밤 기사단원들에게는 익숙한 소리였다. 사람들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마구
헤매었다. 사람들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휙휙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관중들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어, 저기!”

독수리다! 누군가가 말하자 관중석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경기장 위로 높게 날아다니던 독수리가 원을 그리며


관중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묘기를 보였다. 와아아! 비명인지 환호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경기장 내부를 멋지게 휘젓던 독수리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하강했다.

그 독수리 또한 로젤린만큼이나 유명인사라, 얼음창 기사단원들도 크게 경계하지 않고 구경했다. 독수리는 중앙에


와서 느릿하게 날갯짓했다. 휘잉. 휘잉. 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눈을 빛내던 거대한 맹금류가 로젤린이
팔을 내밀자 천천히 내려앉았다. 황제가 혼이 쏙 나간 얼굴로 독수리와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이 폐하의 곁에 머무시니 일라베니아는 영원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리카르디스는 눈치챘다. 로젤린도 은근 당황하고 있었다. 아마 마카롱의 깜짝 이벤트인


모양인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제 주인이랑 똑같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전율이 일 정도의 광경이었다. 이델라브힘의 사자, 독수리. 선명한
햇빛 아래 그의 영광을 노래하던 때에 독수리가 나타났다. 마치 하늘 높은 곳의 이델라브힘이 땅 아래를 굽어
살피는 것만 같았다.

일라베니아가 영원하리라는 승리자의 의례적인 말이 무한한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독수리의 날갯짓을 본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일라베니아의 영광을,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신의 이름과 나라의 영광을 드높이는 말이었다. 그네들이 불길하다 박해하던 마인의 입에서 나온 말임에도 모두
열기에 취해 있었다. 정말 망각이라도 한 듯이. 그 어떤 승리의 순간보다 무투회장은 크게 진동했다. 웅웅,
공간을 울리는 수백의 목소리는 사람들 마음 안쪽 깊은 곳의 무언가를 타오르게 했다. 황제 또한 분위기에
심취하여 군중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외울 듯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이 거대한 공간, 군중의 목소리에 휩쓸린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한 걸음 떨어진 채 바라보았다.
미소 띤 얼굴은 그 아래의 생각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대충 마무리는 되었나.’


황제는 계속해서 몸집을 불리고 손 댈 수 없을 만큼 커져 가는 로젤린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젤린이 보여 주기식이라 할지라도 무릎을 꿇은 채 충성을 맹세했으며, 그 장면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대게 사람들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황제도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소나기처럼 내리는 꽃잎들 사이로 로젤린과 리카르디스는 눈이 마주쳤다.

로젤린은 군중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황제를 흘끗 곁눈질로 훔쳐봤다. 그러고는 하사받은 검을 슬쩍 가리키고,
리카르디스를 콕 집어 가리키더니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대충 자신에게 영광을 바치겠다는 말일 것이다. 눈에 안
띄려 작고 소심하게 행동하는 걸 보니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왜 그렇게 웃는 건지 이해
못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마지막에는 빙그레 웃었다.

함성 소리는 끊이지 않고 울렸다. 마카롱이 다시 날아올라 회장을 휘저었다. 로젤린은 비행 궤적을 눈으로
그리다가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황제가 걸어왔던 통로. 그늘진 내부는 밖의 환희가 닿지 않는 듯 차가워
보였다.

그 속에 태양 같은 머리색을 가지고도 어둠에 완전히 녹아든 남자가 서 있었다. 로젤린은 그가 누군지 잠시


알아보지 못했다. 얼음장같이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익숙한 남자가 낯설었다.

사랑스러운 디에즈, 상냥한 디에즈. 모두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과 장면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좋은 날,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아름다운 이 순간에? 어째서?

“영광의 일라베니아!”

사람들이 환성과 꽃잎이 널리 퍼질수록 디에즈의 얼굴은 무섭게 구겨졌다. 칼날같이 서늘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태양처럼 뜨겁게 일렁이던 황금색 눈동자가 눈물에 차갑게 굳어 가는 듯 보였다.

어째서? 멀리 있어서 묻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옆에 있었다고 한들 묻지 못했을 것이다. 디에즈 전하, 당신은 왜
그런 표정으로, 그런 눈빛으로 그렇게 비참하다는 듯 울고 있습니까?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디에즈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음에 놀라지도, 피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저
로젤린과 빤히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 * *

로젤린은 꽃비가 내리는 공간을 벗어났다.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는 어두웠다.

그녀는 방금 목격했던 장면을 몇 번이고 반추했다. 환하게 웃는 디에즈의 모습과 눈물을 흘리던 지금의 모습까지.
속이 쓰려 왔다.

디에즈의 눈동자는 그의 친부, 제국의 황제 라이노와 환성이 가득 차 있던 공간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황제의 얼굴이 다르게 보이기라도, 그 공간의 환성이 다르게 들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로젤린은 곰곰이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자신 또한 황제와 대면했을 당시 알 수 없는 껄끄러움을


느꼈다. 막연한 거부감. 일라베니아 황성을 처음 봤던 순간에 느꼈던 기분과 비슷한 것 같았다. 황제가
리카르디스의 적이라는, 로젤린이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이유만으로는 부족한 감정이었다.

그녀의 감정은 주로 명확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 화가 나면 화가 나고, 리카르디스가 예쁠 때는


벅차오른다. 그랬기에 로젤린은 자신이 대단히 이성적이라 판단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알지도 못하고,
크게 겪어 본 적도 없는 감정이 제 집 마냥 속에 들어와 있으니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복잡해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헤허헉!”

저 멀리 보이는 대기실에서부터 복도 끝까지 시끌벅적한 소리가 퍼졌다. 웃음소리와 괴성이 섞인 흥겨운 소리였다.
생각에 깊이 빠져 잠시 인지하지 못했던 듯했다. 로젤린은 어두운 복도를 후다닥 달려 방문을 열었다. 빛이 확
쏟아졌다.

“로젤린 경!”

칼릭스, 레이몬드, 파르딕트, 르원, 슈텐, 네스터, 바스티안, 클로드.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 헤사까지.
하얀밤 기사단원 중 리카르디스의 호위를 맡은 사람만 빼고 다 와 있는 것 같았다. 넓은 대기실이 거구의
기사들로 꽉 찼다.

114 화.

“로젤린! 요 예쁜 것! 역시 내 제자야!”

레이몬드가 그녀의 등과 무릎 뒤에 팔을 넣어 번쩍 안아 올리고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재밌어.”

발이 붕 뜨는 감각이 즐거웠다. 로젤린이 재밌다고 하자 레이몬드가 “그럼 한 번 더!” 하고 뱅글뱅글 돌렸다.


다들 로젤린의 발에 맞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이거나 도망쳤다. 미처 피하지 못한 피해자들이 레이몬드를 욕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 헤사는 로젤린에게 단련된 탓인지 갑작스러운 공격을 능숙하게 피했다. 과연 내 제자들.
틈을 타 로젤린이 흐뭇해했다.

“로젤린 경!”

여기저기에서 그녀를 불렀다. 축하한다! 축하합니다! 경기 멋있었다! 등을 퍽퍽 두드리는 섬세하지 못한 손길이


쏟아졌다.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헹가래를 했다가, 볼을 꼬집기도 하고. 정신이 아주 쏙 빠질 정도였다.
로젤린의 머리 위로 샴페인이 쏟아졌다. 범인은 파르딕트였다. 좋다고 웃고 있던 그는 레이몬드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 헤사와 칼릭스도 매섭게 파르딕트를 노려봤다. 수건을 들고 와서 로젤린의 머리를 닦았지만 곧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

장난기 넘치는 기사들이 마구 술을 뿌려 대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젖고 바보처럼 으허허 웃어 댔다. 다 큰


남자들이 취해서 휘청거렸다. 로젤린이 오기도 전에 일차적으로 술판이 벌어진 탓이었다.

“마르틴 경도 강하지만 역시 로젤린 경이지.”

기분이 좋아진 로젤린이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맞습니다. 제가 제일 강합니다.”

그녀가 하면 잘난 척도 아니었다. 잇세리온이 잠시 들어왔다가 술 냄새 나는 방 안의 풍경을 보고 질색했다.

“이 미친 인간들!”

다들 우헤헤헤 웃는 꼴이 제정신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잇세리온은 급하게 돌아 나가려 했지만, 곧 산만 한


기사들에게 붙잡혀 억지로 샴페인 마사지를 받아야만 했다. 잇세리온의 친 동생인 르원이 주도적으로 했기에
모두들 마음 놓고 부었다. 로젤린도 소심하게 한 컵 분량을 계량해서 동참했다.

“로젤린.”

“응.”

“잘했어. 멋있었어.”

레이몬드가 바보처럼 웃었다. 로젤린은 그로부터 꽃목걸이와 샴페인 한 병을 받았다. 목걸이도 걸고, 샴페인도
터트렸다. 뻥! 소리가 나며 거품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로젤린이 그 샴페인을 제 머리 위에 뿌리며 눈을 감았다.
뜨겁던 머리가 식어 갔다.

황제에게 하사받은 검이 바닥을 뒹굴고 술에 흠뻑 젖었다. 취한 남자들이 온갖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는 화려한


검집을 밟고 차고 다녔다. 로젤린도 신경 쓰지 않고 테이블 위에 적당히 걸터앉았다.

흥이 오른 남자들이 윗옷을 벗었다.

“넌 안 돼.”

레이몬드가 경고했다. 칼릭스도 문득 불안한지 그녀의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웠다. 로젤린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기사들은 어느새 자리를 준비해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로젤린과 마르틴의 경기에 영향을 받은 듯했다.
파르딕트가 잇세리온을 이겼다. 고래와 토끼의 싸움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제가 이겼군요, 수석 비서관님!”

“당연히 그러시겠지!”

억지로 팔씨름을 다섯 번을 더 해야만 했던 잇세리온의 말이었다. 로젤린이 아하하 웃으면서 손뼉을 짝짝 쳤다.
잇세리온은 로젤린에게 팔씨름 신청을 받고 다시 버럭 화냈다.
“제가 그걸 하겠습니까?!”

로젤린은 이 상황이 웃겨서 까르륵하며 반쯤 넘어갔다.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본 상급 기사들이 잇세리온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질척거리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다.

어느새 고양이 한 마리가 대기실에 들어와 바닥에 흘려진 샴페인을 할짝거렸다. 눈이 가늘어진 것을 보니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다른 기사들 모르게 한 병을 슬쩍 숨겨 두었다.

그때, 누군가가 대기실의 문을 두드렸다. 모두 웃고 즐기는 와중에도 경계를 놓지 않고 있었기에 작은 소리를


포착해 내었다. 상체 탈의 후 근육을 자랑하던 파르딕트가 문을 열었다.

“억!”

그러고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의 거구로 가려져 열린 문 너머에 누가 있는지 볼 수 없었으나 무언가를 직감할 수


있게 하는 반응이었다. 남자들이 벗었던 것보다 빠른 속도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런……. 좋은 때를 방해하였구나.”

오랜 세월을 보내 거칠어진 목소리였다. 기사들은 방문자의 정체를 깨닫고 미친 듯이 몸단장을 했다.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파르딕트면 족했다.

로젤린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폴짝 내려왔다. 파르딕트는 여전히 상체를 탈의한 상태로 굳어 있었다. 로젤린이
그의 등짝을 찰싹 쳤다.

“비켜, 파르파르.”

그래도 비키지 않아서 쭉 밀어내야 했다. 로젤린은 그제야 마주친 딤라와 관디테를 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바이페렘! 섭정관!”

입을 가리고 웃고 있던 관디테가 얼굴 표정을 겨우 가다듬고 턱 끝을 살짝 들었다.

“우승을 축하한다 로젤린 경. 멋진 모습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노라.”

“감사합니다, 바이페렘.”

딤라가 쯧 혀를 차면서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왜 이렇게 젖었니. 찬기 들면 어쩌려고. 일라베니아의 축하 행사는 그다지 내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로젤린에게 샴페인을 끼얹은 기사들이 쥐죽은 듯 침묵만 지켰다. 칼릭스가 웃음소리를 내며 문가로 다가왔다.

“섭정관. 일라베니아의 풍습이 이러한 것은 아닙니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하얀밤 기사단 특유의 행사가
아닐는지.”

아니, 저, 저 인간이? 잇세리온이 뒤에서 원망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딤라와 관디테, 로젤린과 칼릭스는 자리를 옮겨 한적한 복도 중앙에 멈춰 섰다. 딤라는 그새 구해 온 천으로
그녀를 둘둘 말았다. 로젤린은 전혀 춥지 않았지만 가만히 있기로 했다.
“일라베니아에 머무르는 마지막 날에 좋은 모습을 보고 갈 수 있어 다행이구나.”

칼릭스와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똑같은 남매의 표정에 관디테가 웃었다.

“일라베니아를 떠나십니까?”

“그래. 더 빨리 떠나야 했지만, 갈라·제르타예의 아이가 큰 무대에서 활약한다는데, 그것은 보고 가야겠다 싶어


오늘까지 미루었지.”

이 시기에 일라베니아에 들리는 이유는 대개 건국제를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무투 대회는 고작 시작에
불과하며, 건국일은 한참 남아 있는 상태였다.

“플로에토를 끌어내었다고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니 말이다. 바이페렘께서 발타의 왕자가 아직 라고슈 내에


세력을 남겨 둔 느낌이라 말씀하시기도 했고. 그 얘기가 아니더라도 남의 축제가 아닌 나의 상처를 돌봐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니.”

“아직 여독이 쌓여 있으실 텐데……. 긴 여행길이 귀한 분의 몸에 부담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칼릭스가 걱정스레 딤라와 관디테를 바라보았다.

“신관들을 부지런히 불러 여기저기를 손보았단다. 엄살을 피웠더니 멈추지 못하고 성력을 퍼붓다가 한 놈은
쓰러지기까지 했지 뭐냐. 덕분에 몸도 기분도 좋아졌구나.”

딤라는 악당같이 웃었다. 아, 며칠 성에서 나오지 않으시더니, 다음 여정을 위한 준비였던 것인가. 칼릭스는
안심도 되고, 웃기기도 해서 웃음을 흘렸다.

딤라가 로젤린의 손을 잡았다. 손 가죽이 두텁고 굳은살이 잔뜩 박혀 있었다.

“훌륭한 전사의 손이야.”

“네. 오늘도 멋있게 이겼습니다.”

로젤린이 입꼬리를 쭉 늘려 웃었다. 제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이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10 살 먹은


관디테는 혼자 밖에 내보낼 수 있으나, 로젤린은 절대 혼자 내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일정을 바꿔야 하나 싶을
정도의 불안함은, 로젤린 전에 만나고 온 리카르디스를 떠올리고 나서야 가라앉게 되었다.

하얀 아기 새 때문에 잠깐 흐트러졌던 남자의 본 모습은 라고슈의 고요하게 눈 내리는 밤처럼 위험했다. 애초


리카르디스라는 이름을 들은 것 또한, 로젤린과 관련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외가의 힘이 강하지 못했으나 본인의 능력만으로 1 황자 엘피디오와 비등한 세력을 거느리게 된 2 황자 리카르디스.
명석한 머리, 시류를 읽는 눈과 귀, 처세술,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담함, 죽음에서 번번이 살아 돌아온
운까지.

여러 가지가 뒷받침 되었으나 지금 리카르디스의 위치는 그러한 능력만으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른 집념과 악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현재 대륙에서 존재하는 사람 중 가장 성력이 강한 것
또한 그의 무기일 뿐,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얼굴 뒤에는 칼날처럼 위험하고 날카로운 이면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날카로움이 나타나는 것은
오직 위험이 다가왔을 때, 또한 자신의 사람들을 지킬 때뿐이라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런 사내가 로젤린을 귀하게 여기는 모습을 두 눈 똑똑히 보았으니, 로젤린의 위험이 리카르디스로 인한
것일지라도 어딘가 마음이 든든해지기는 했다.

“수많은 위험과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이 손으로 해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예.”

딤라는 남은 한쪽 손으로 칼릭스의 손도 잡았다.

“칼릭스. 로젤린. 갈라·제르타예의 아이들아.”

“예, 할머님.”

“예.”

“제르타예는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어떠한 짙은 어둠도 밝히고, 세차게 불어오는 눈 폭풍 속에서도


영원하며, 흔들리고 작아질지언정 결국에는 다시 불타오른다. 너희들은 따뜻한 곳에서 자라났으나, 품고 있는
것은 다르지 않다 믿는다.”

딤라가 잡은 두 사람의 손에 힘을 주었다. 주름진 손, 굽은 어깨. 작은 노인이었건만, 손아귀 힘에 손끝이 저릴


정도였다.

“이것이 내 유언이다.”

115 화.

칼릭스는 눈을 크게 떴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으며 몸을 바르게 세웠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대륙의 정세가 어지러운 가운데, 자신과 제 누이가 라고슈에 가는 일도, 또한 그녀가 다시 일라베니아에
방문하는 일도. 너무 멀어 희미해 보이는 미래였다. 그리고 그 긴 흐름 속에 딤라는 풍화되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로젤린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보였다. 그녀는 잠자코 있다가 무릎을 꿇었다. 칼릭스도 그녀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두 남매의 이마가 꽉 잡은 딤라의 손에 닿았다. 딤라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가 남매의 볼에 한 번씩
키스를 했다.

“따뜻하게 입고 다니거라. 이것도 유언이다.”


“예.”

“……예.”

“밥은 세 그릇씩 다 비우고, 고기도 잘 챙겨 먹어야 한다. 이것도 유언이다.”

“예, 잘 먹습니다!”

“…….”

라고슈의 사절단이 떠났다는 얘기는 금세 퍼졌다. 남의 축제에 찾아와 놓고 즐기지도, 축하하지도 않고 떠난


그들에게 불만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축제의 주인공인 황제가 조용한 데다가, 내전이
종식되었다고는 해도 혼란은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중심을 잡아 줄 인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좀 늦게 방문해서 건국일에 맞추면 되는 게 아니었나? 하는 의문점도 물론 제기 되었다. 설마


딤라가 일라베니아의 건국일을 축하해 줄 마음이 없었던 것일까? 물어보지 않았고 답을 들어 보지 않았으니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정신이 없었던 거겠지. 아니면 급하게 라고슈에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건가? 말은 무수했다.

물론 딤라는 부러 건국일을 피해서 온 게 맞았다. 누구 좋으라고.

14

뜨끈한 입술의 감촉이 볼 위에 오래 머물렀다. 실제로는 이 초 가량이었으나 엘피디오는 그에 배가 넘는 시간이라


느꼈다. 참아 보려 해도 얼굴이 와락 구겨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마치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이 찧은 사람
같은, 짜증과 고통이 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하카브는 그런 얼굴을 보고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얀 이가 가지런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서 오시지요, 하카브 왕자.”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엘피디오 황자.”

리카르디스보다도 생생한 반응이라 재밌었다. 엘피디오의 석영 성. 그 화려한 응접실에 두 나라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들이 마주 보고 앉았다.

“무투 대회는 어떠셨습니까?”

“말로만 듣던 일라베니아의 무투 대회를 본다는 생각에 설레어 잠도 설쳤습니다. 과연 부족한 수면이 불만스럽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경기들이었습니다.”
하카브의 반짝이는 눈은 엘피디오의 너머를 보고 있었다. 경기의 내용을 반추하는 것 같았다. 엘피디오가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마지막 결승전만 아니라면 훌륭한 경기가 많았다. 로젤린의
존재 때문에 참가자들 대다수가 검증된 강자들이었고, 자연스럽게 무투 대회의 수준이 올라가게 된 것이다.

결승전 후, 황제에게 검을 하사 받는 로젤린의 모습은 무척이나 멋졌다. 엘피디오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하늘을
가르며 나타난 독수리가 경기장을 둥글게 휘젓고 바람을 일으켰다. 이델라브힘의 현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위엄 어린 등장이었다. 기분 좋아진 황제가 술에 취해 늘어져 있던 모습을 생각하니 뒷목이 뻣뻣해졌다.
리카르디스의 손 안에서 놀아나는 한심한 인간 같으니…….

엘피디오의 눈이 사나워졌다. 하카브는 조용히 분노를 곱씹고 있는 엘피디오를 바라보았다. 눈과 얼굴에 욕망이
비쳤다. 욕망 또한 생각의 일부. 이렇게 생각을 내보이는 자가 쉽지 않을 리 없다. 하카브가 이를 보이며
시원하게 웃었다.

“로젤린 경의 무위는 말로만 전해 들었습니다. 눈으로 보니 더욱 대단하더군요. 일라베니아 제국의 미래가


환하게 빛나는 걸 본 것 같았습니다.”

아니 이 미친놈이? 지금 이 자리에 다른 누가 있다고 이렇게 금칠 중인거지? 엘피디오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먼저 얘기를 꺼내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이쪽이 아쉽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엘피디오는
기어코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말 그대로 아쉬운 쪽은 하카브가 아니라 엘피디오였다.

“발타의 사절단 일로 큰 사고를 당한 내…… 동생. 리카르디스가 최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어 형으로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근심이 뿌리 뽑힌 것은 아니라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군요. 검은달이 언제쯤
다시 뜰는지…….”

그러고는 먼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하카브 쪽으로 옮겼다. 하카브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호탕하게 웃던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미소였다.

“검은달이라…… 그들도 피해가 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강대한 마인이 일라베니아에 있으리라곤 예상도 못한 것
같더군요. 하하, 같은 일라베니아 사람들도 몰랐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만요. 그래도 그렇게 철저하게 숨긴 덕에,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난 듯합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엘피디오가 이를 갈았다. 네 정보가 부족한 탓이 아니냐. 네 옆집에 마인이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뭐 했느냐
타박을 받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이델라브힘께서 도우셨지요. 그러나 습격대를 물리쳤다고는 해도, 검은달은 건재하지 않습니까. 치밀하고
끈질긴 집단이니 고작 한 번의 실패로 물러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국의 황자에게 해악을 끼치려는 크나큰 일을 벌인 자들인 것을요. 그게 실패로 돌아간 이상, 당분간은 정황을
살펴보려는 것이 아닐까요. 대륙의 모든 눈과 귀가 검은달을 주목하고 있을 테니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제 살만
깎아 먹는 꼴이 되리란 걸 알겠지요. 그들의 우두머리도 머리를 달고 있으니 말입니다.”

너는 머리가 없구나. 엘피디오는 뒷목을 잡을 뻔했다.

“……그렇겠지요. 그래도 이 시기에는 타국의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만큼 더 위험해지지 않을까, 괜히


염려되어서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기회! 하하. 좋은 말입니다.”

일라베니아까지 기어 들어왔으면 뭐라도 해 보라는 말에 엉뚱한 반응이 나왔다. 엘피디오가 미간을 좁혔다.
미쳤나, 갑자기 왜 저래?

하카브는 기회! 기회. 중얼거리며 무릎을 치기도 했다. 찰랑이는 금빛 장신구가 그의 눈동자에 비쳤다. 욕망이
일렁였다. 엘피디오가 의문을 가질 정도의 적나라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황자.”

하카브는 엘피디오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탁자 언저리에 맴돌았다. 하카브가 느릿하게 제 턱을


쓸었다.

“저는 기회를 얻으러 온 겁니다.”

하카브의 눈이 먼 곳을 그리고 있었다. 경기 모습을 그리던 때와 마찬가지로.

* * *

“아름다우세요.”

거울 속의 로젤린이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헤사가 작은 거울을 들고 와 뒷모습도 비쳐 주었다. 머리카락이 머리


뒤통수에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사이사이 땋은 머리들이 같이 묶여 있는 게 멋스러웠다.

오늘의 머리도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도 제 머리에 철썩 맞지 않을 것이다. 로젤린이 흡족함에
고개를 끄덕이자 헤사도 웃으며 끄덕였다.

헤사가 온 이후로 로젤린의 머리 모양은 다양해졌다. 땋기도 하고, 가르마를 바꾸기도 하고, 반 묶음을 해
보기도 하고, 뜨거운 인두를 들고 와 머리를 펴기도 했다. 여기저기 다니며 시녀들에게 배웠다고 한다. 업무며,
검술이며, 성에서의 생활이며 배울 것이 한두 개가 아닌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었는지.

피로한 소년의 얼굴에서 삶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소년은 우와 우와 소리를 내며 즐거워하는 로젤린의
모습을 보고 피곤함도 싹 잊은 듯이 행복하게 웃었다.

지켜보던 레티시아가 감탄했다.

“나보다 솜씨가 훌륭해.”

“손재주가 있는 편이라서요.”

레티시아가 손을 내밀자 해사가 짝 소리 나게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선임 두 명과 헤사는 처음보다 사이가 많이


가까워졌다. 하급 기사가 된 두 명은 괜한 텃세 따위를 부리지 않으며 동생처럼 그를 대했다. 로젤린 이외의
사람에게는 벽을 세우던 헤사도 점차 딱딱함을 허물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에버하르트와는 티격태격하지만,
처음에 비하면 귀여운 장난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하 웃던 레티시아가 무섭게 표정을 바꿨다. 손에는 소매에 가려져 있던 뭉툭한 나무 단검이 들려 있었다.
순식간에 로젤린의 목덜미를 향해 나무 단검이 쇄도했다.

로젤린은 고개만 까딱해서 뒤에서 오는 공격을 피했다.


레티시아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내려찍었다. 어깨 쪽이었다. 로젤린은 휙 몸을 돌려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바깥쪽으로 크게 돌렸다.

“악!”

근육의 뒤틀림을 따라 레티시아의 몸이 자연스레 돌아갔다. 그녀는 로젤린에게 완전하게 등을 보이는 모습이
되었다. 로젤린은 레티시아의 손에서 떨어진 나무 단검을 낚아채, 그녀의 목에 바짝 갖다 대었다.

레티시아가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렸다.

“졌습니다.”

풀려난 레티시아가 노골적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했다.

“거울 앞에 있는데 공격하면 어떻게 합니까. 다 보이는데.”

“설마 거울을 앞에 두고 공격하겠냐는 허를 찔러 보려 했습니다만…….”

“안 하는 게 좋겠군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로젤린은 그녀를 거울 앞에 앉혀, 위치가 뒤바뀐 상태로 아까의 상황을 재현했다.

“이렇게 하면 보이니까.”

로젤린이 레티시아의 뒤로 숨었다. 거울에 얼굴은 비치지만 몸이 가려져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최소한 이 상태로 찔러야 효과가 있을 거고.”

그녀가 나무 단검으로 레티시아의 공격을 그대로 흉내 냈다.

“팔이 움직이는 게 보여 경계하게 됩니다. 그러니 오른손보다는, 왼손으로.”

왼손이 은밀하게 레티시아의 목 뒤를 찔렀다. 거울로 보아도 완전한 사각이었다.

“그리고 레티시아 경은 말을 끝낸 후에 공격을 하셨는데 좋지 않습니다. 웃음이 끊기는 지점, 말이 끊기는


지점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 딱 좋으니, 기왕이면 말을 하는 도중 시도하는 편이 성공률이 높을 겁니다.”

116 화.
“아…… 부족했습니다.”

“또한, 몸이 움직이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미묘한 변화를 예상하고 조절하면 좋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헤사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건 검술 훈련이라기보다는…… 마치 암살 훈련?

로젤린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하급 기사로 승급하자마자 훈련 내용을 조금 바꾸었다. 로젤린의 습격을 막는


훈련은 그대로 두되, 그들 또한 로젤린을 공격하는 것으로.

정공법으로 상대가 될 리 없었기에 로젤린이 방심한 틈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두 하급 기사의
몸짓은 미묘하게 암살자를 닮아 가는 중이었다.

아는 것이 힘이라 했던가. 정확하게 아는 만큼 보이기 시작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아, 빈틈.”이라던가 “지금이면 죽일 수 있어.” 따위를 중얼거리며 사람들을 공격하기 쉬운 최적의
상황과 때를 깨우쳐 갔다. 무고한 하인 몇 명과 기사들이 깜짝깜짝 놀라는 상황이 발생한 후, 두 사람은 무심코
말을 흘리지 않도록 노력하게 되었다.

헤사 또한 제 선임자들이 그러했듯, 하루에도 몇 번씩 습격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는 로젤린뿐만 아니라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에게도. 하지만 헤사는 예전의 아기 사슴 같던 그들보다는 훨씬 훌륭한 야생의 감을 가지고
있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의 공격은 10 에 8 을 막고, 로젤린의 습격도 높은 수준으로 알아챘다. 막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긴 했지만.

헤사에게 부족한 부분은 정통 검술이었다. 로젤린은 자신도 처음에는 그랬다며 그를 위로했다. 기초 검술을
레이몬드에게 배웠다고 하니, 옆에 있던 레이몬드가 제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라 했다. 마침 지나가던 큰뿔산양
후작이 자신은 선대 후작에게 배웠다고 해서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그저 기초에 불과한 검술이 몇 대째 내려오는 가문의 대단한 비법처럼 탈바꿈되었다. 헤사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선대 큰뿔산양 후작님께 누가 안 되도록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후작이 흐뭇해하며 헤사의 머리를
쓰다듬고 갔다.

이상하게 제 가문이 엮여 버린 레이몬드는 로젤린과 함께 헤사를 열심히 가르쳤다. 덕분에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몇 번 더 암살 훈련인지 뭔지를 반복하던 로젤린과 레티시아는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이 있어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훈련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헤사도 덩달아 놀라
로젤린이 챙겨 가야 할 간식 바구니를 잽싸게 챙겼다.

“다녀오세요, 로젤린 경. 레티시아 경.”

소년은 마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시끌벅적하던 공간이 조용해졌다.
헤사는 뻑뻑한 눈을 몇 번 비비고, 여기저기 굳어 있는 몸을 풀기 위해 팔을 위로 쭉 늘렸다. 새벽 늦게까지
공부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정을 몇 주간 반복하다보니 피로가 축적된 듯했다.

‘아!’
주방에 잼을 졸여 둔다 올려놓고는 깜박했다! 헤사는 황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헤사는 빠르게 업무를 익혔다. 로젤린에게 맡겨진 일부터 시작해,
그녀의 머리 모양을 어떻게 다양하게 예쁘게 할 것인가에 이르는 소소한 일까지.

꽉꽉 짜인 하루 24 시간 중 뺄 수 있는 시간은 수면 시간뿐이었으니, 최근 줄어든 잠과 반대로 실수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저번에는 레이몬드가 로젤린에게 선물한 찻잔을 깨트리기도 했고,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려 그녀의
상심한 표정을 보기도 했다.

이번 잼을 졸일 때에도 로젤린이 뒤에서 서성이면서 기대하는 티를 팍팍 냈는데, 이것마저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젤린이 울상을 지으며 탄 밑 부분은 그대로 두고 위의 잼을 떠먹으려는 장면이 연상되기 시작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헤사는 잠시 멈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발타에서 온 사절단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여기는
손님들이 머무는 성과 한참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마력이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무거운 족쇄가 끊긴 것처럼 가벼워져, 바닥을 딛는
간격이 넓어지고 빨라졌다. 돌아서 가야 하는 길도 벽을 타고 훌쩍 넘었다.

바닥에 착지해 앞으로 뛰어나가는 그 순간. 헤사는 바로 뒤에서 덮칠 듯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었으나 그보다도 뒤에 있던 사람이 헤사를 찍어 누르는 것이 먼저였다.

퍽!

얼굴이 바닥에 세게 부딪혀 머리가 울렸다. 입이 가려지고 뒷목을 잡힌 채 짓눌렸다.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식은땀부터 흘렀다. 떨고 있던 헤사는 낮은 웃음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잡고 있는 사람이 내뱉는
것은 아니었다.

저벅. 누군가가 가까이 걸어왔다. 얼굴 위로 남자의 그림자가 크게 드리웠다. 헤사는 자갈 위를 기어가는


개미로부터 시선을 옮겼다. 코앞에 신발이 보였다. 일라베니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 아니었다.

“이런, 놀랐나 보구나.”

자상한 목소리였다.

“풀어주어라, 아순.”

등 뒤에서 압박하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헤사는 덜덜 떨며 바닥을 딛고 상체를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황금빛의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남자가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멀리서나마 본 적 있는
인물이었다. 발타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 위 리비타.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악!”

하카브가 헤사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불쑥 일으키자 소년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남자가 자상하게 웃어


보였다.

“얼굴이 조금 상했구나. 괜찮느냐.”


“…예.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칠게 다뤄 미안하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도 놀라서 말이지. 일라베니아에서 마인을 보게 될 줄이야.”

하카브는 헤사가 친한 동생이라도 되는 듯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볼에 묻은 흙을 털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헤사는 당황해서 눈을 깜박깜박 거리기만 했다. 발타의 왕자 하카브가 맞기는 한 것 같은데. 나쁜 놈, 죽일 놈,
무서운 놈이라는 평가와 대비되는 행동을 코앞에서 보고 있으니 긴가민가했다.

“어린아이가 고생 많이 했겠구나, 이곳은 마인들에게 사나운 곳이니 말이다.”

사탕이라도 주며 꾀어낼 것 같은 상냥한 말에 헤사는…….

‘무슨 헛짓거리지?’

전혀 넘어가지는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보다 웃으며 접근하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헤사는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소년의 경계를 읽은 하카브가 씩 웃었다.

“우선적으로 할 얘기부터 해 볼까……. 헤사 군.”

알려 준 적 없던 이름이 낯선 이의 입에서 나왔다. 헤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 * *

오늘은 수도에 있는 큰뿔산양 후작의 저택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창문을 열어 두니 마차 안으로 바람이 솔솔 새어
들어왔다. 로젤린은 창문 턱에 팔을 건 채 밖을 구경했다.

기분 좋아 콧노래를 부르니 레이몬드가 엉망진창인 가사를 붙여 노래했다. 사슴 고기 스튜, 버터크림 샌드위치,


과일 소스 스테이크, 어쩌고저쩌고. 음식의 이름을 나열했을 뿐인 노래는 부르는 사람의 실력 덕분에
훌륭하기까지 했다. 마차는 엉터리 노래에 맞춰 춤을 추듯 덜컹이며 달렸다.

큰뿔산양의 저택은 웅장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고풍스러운 감은 있어도 세심하게 관리되어 도리어 그게
멋스러웠다. 그 앞에 펼쳐진 정원에는 분수와 화단이 촌스럽지 않게 조화를 이루며 방문객을 반기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수도에 있는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저택을 떠올렸다. 정말 구색만 맞춘, 큰 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큰뿔산양 저택이 예뻐 부러웠다. 레이몬드는 로젤린이 구경하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아니 신나서
그녀를 끌고 다니며 설명했다.

중앙에 큰뿔산양 동상이 하나 있는데, 뿔 한쪽만 새것이었다. 이거 내가 어릴 적에 타다가 부러트려서 이 부분만


새로 해서 붙였잖아. 하고 레이몬드가 낄낄거렸다. 로젤린도 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레티시아는 그녀가
묻기도 전에 “안 됩니다.” 하고 정색했다. 레이몬드도 그녀의 의중을 깨닫고 나서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미련이 남은 듯 큰뿔산양 동상을 주시하는 로젤린은 두 남녀에게 질질 끌려갔다.

집사와 하녀장, 하녀와 하인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큰뿔산양 후작가는 손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역사가 깊은 후작가에 어울리는 점잖은 태도였다.


펑!

레티시아는 감탄하다가 갑자기 터진 굉음에 비명을 질렀다.

“악!”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색색의 꽃잎과 종이 조각이 2 층에서 떨어져 내렸다. 레티시아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꽃비를 아연하게 쳐다보다 다시 시선을 1 층으로 옮겨 왔다.

아까까지 점잖게 두 손을 앞에서 모으고 있던 하녀와 하인들이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악기를 들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철컥철컥 박자를 쪼개는 금속 악기도 있었다. 사용인들은 몸을 들썩이고 머리를 휘둘러 가며 격렬하게
연주했다. 광란의 음악 연주회 한가운데 로젤린과 레티시아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저 위의 계단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내려왔다. 레이몬드와 꼭 닮은 남자였다.

노래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복식을 한 여자와 남자들이 화음을 쌓으며 등장했다. 눈
감는 것 하나, 팔을 뻗는 동작 하나하나가 똑같은 것으로 그들의 직업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남자는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와 로젤린에게 화관을 걸었다. 노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레티시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레, 레이몬드 부관님.”

레티시아가 애타게 상사를 찾았다. 당신의 집이니 당신이 좀 어떻게 해 보라는 간절한 뜻이 담겨 있었다. 종이
조각과 꽃잎으로 시야가 어지럽고, 가득 찬 악기 소리가 시끄러워 정신없었다. 한참 둘러보던 레티시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게 찾아 헤매었던 레이몬드는 하인들 사이에 끼어서 신나게 연주 중이었다. 레티시아의 시선을 느낀
레이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듯했다.

“아, 우리 형.”

전혀 알아채지 못했구나. 레티시아는 탄식했다. 누군지 궁금했던 게 아니라, 아니. 누구라고? 우리 형?

117 화.

레티시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연극배우나 가수가 입을 법한 의상은 화려하다 못해 요란할


정도였다. 노래 실력도 상당히 뛰어난 편이라, 레티시아는 그가 이 환영 행사를 위해 고용된 가수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남자가 큰뿔산양 후작의 장남, 아렌트였다니. 레티시아는 말문을 잃어버렸다. 한 가문의 후계자가 왜,
저러고 있어……?

아렌트는 레티시아를 발견하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꽃을 그대로 잡았다. 그러고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시, 싫어. 레티시아가 어색하게 웃는 낯으로 슬그머니 물러났으나, 금세 따라잡히고 말았다.
아렌트는 기어코 레티시아의 귓가에 꽃을 꽂아 주고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아까까지만 해도 눈만 깜박이고 있던 로젤린도 손뼉을 치며 즐기고 있었다. 적응력이 경이로웠다. 레티시아는


존경의 눈으로 제 스승을 바라보았다. 아렌트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계단에서 내려왔던 여자들이 로젤린을
둘러싸며 춤을 췄다. 장신구의 짤랑이는 소리가 화음에 녹아들었다. 로젤린이 웃으며 그녀들과 함께 춤을 췄다.

“로젤린 경……!”

과연 무예의 기재! 반복된 춤사위를 그새 외우고 완벽하게 추고 계신다. 헤사가 봤으면 눈물을 흘리며 마음속에
저장했을 광경이었다. 저택의 입구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무대는 끝을 향해 달렸다.

레이몬드는 기분이 고양된 것인지 무릎을 꿇고 이로 만돌린을 연주했다. 훌륭한 솜씨라서 더 어이없었다. 금속
악기가 차르르르 울리며 노래가 끝났다.

“환영합니다, 손님!”

다들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로젤린은 머리에 꽃잎을 덕지덕지 단 채로 박수쳤다.

“감사합니다.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웃었다. 레티시아만 빼고. 아렌트가 으하하 웃으며 다시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서들 오게, 어서들 와! 오랜만의 손님이라 다들 신났지 뭔가!”

“갑작스런 방문에도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얼, 손님은 언제나 반갑지. 오랜만이로군, 로젤린 경. 요만할 때 봤던 것 같은데 말이야.”

아렌트가 제 가슴께에 가상의 선을 그으며 얘기했다. 지금의 로젤린 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수준이었다. 아마


레이몬드의 수습 기사일 적에 봤던 모양이었다.

후에 레이몬드가 말해 줘서 알게 된 사실은, 둘 다 리카르디스의 아래에 있다 보니 제법 자주 만났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로젤린이 사냥 대회에서 사고를 당하기 바로 전에도 만났다고 했다. 불과 몇 개월이 지났을 뿐이고, 십
대 후반 들어 성장이 멈췄으니 아렌트가 말한 ‘요만한 때’가 마지막일 리 없었다.

아마 그의 기준에서 작달막한 소녀가 쪼르르 돌아다니며 열심히 검을 휘두르던 모습이 인상 깊었던 것이리라
레이몬드는 추측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로젤린과 언제 만나든 번번이 “로젤린 경. 많이 컸군. 요만했었는데.”
하면서 손녀 보는 할아버지같이 굴었다고 했다.

그걸 모르는 로젤린은 ‘로젤린’이 요만할 때에 그와 만났겠거니 생각하며 아렌트의 인사를 받았다. 그의 짙은


나무 색 눈동자에 호의의 빛이 담겨져 있었다. 아렌트는 레티시아에게 아까 자신의 순발력이 어땠냐며 물었다.
“손님이 한 명 더 오는 걸 몰라서 화관을 하나만 준비했지 뭔가! 내가 아까 떨어지는 꽃을 공중에서 잡았을 때,
크으… 좀 멋지지 않았나?”

“……네.”

“뭘 좀 아는 친구로군, 으하하!”

아렌트가 다시 한 번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레티시아는 체한 것 같은 표정을 하면서도 웃었다.

레티시아는 그때서야 떠올렸다. 그녀의 가문인 서리나팔이 변두리의 작은 영지라 미처 접점이 없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큰뿔산양 후작가의 유별난 가풍은 유명했다. 흥도 많고 음악도 좋아하는 집안이라 주기적으로 공연을
펼치는 것은 예사였다.

레티시아는 이곳이 큰뿔산양 영지의 성이 아님에 감사했다. 만약 그곳에 방문했다면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달 동안 여행길에 올랐던 손님을 붙잡고 장장 세 시간의 축하 공연을 펼쳤다던가. 오싹했다.

하얀밤 기사단 내에서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레이몬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노래 부르던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잠시 사라졌던 아렌트가 화려한 무대의상을 벗고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왔다.

“형, 어디가려고?”

“황성에. 아버지가 점심 전까지 오랬는데 손님이 온대서 기다렸지 뭐냐, 으하하!”

“으하하학, 완전 지각이네!”

안부터 밖까지 아주 쏙 빼닮아 있었다. 두 사람은 정말 누가 봐도 형제였다. 하인과 하녀들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 조각과 꽃을 치웠다. 작은 조각들이라 여기저기 구석구석에 박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안 뿌리면 되잖아.’

레티시아는 잠시 머리를 쓸다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넘겨 버렸다. 귓가에 꽂힌 한 송이 꽃은, 고민하다가


제복 상의의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넓은 응접실에는 이미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을 가진 자그마한 여성, 황금정원의


클로에였다. 레이몬드는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볼에 입 맞췄다. 기사단 내에서도 장신인 레이몬드의 품에
클로에가 쏙 들어갔다.

“내 부드러운 우유푸딩.”

“내 달콤한 허니버터캔디.”

“……”

레티시아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상사의 연애는 눈앞에서 보고 싶은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로젤린은 처음 보는


농도 짙은 애정 표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얼마나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레티시아가 그녀의 눈을 가려야
할 정도였다. 클로에는 레이몬드에게 반쯤 안긴 상태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어서와요. 집안이 어수선한 상황이라 손님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네요. 무례를 용서해요.”

레티시아는 오싹했다. 그 대단한 환대 공연이 제대로 맞이한 게 아니었다니. 로젤린이 가볍게 묵례했다.

“아닙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로에 양.”

“감사합니다, 영애.”

클로에가 눈을 접으며 생긋 웃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로젤린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적막에 의문이
들 때쯤 클로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아픈 곳은 없나요?”

“예.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아까보다 더 환하게 미소 짓는 클로에의 표정에서 로젤린은 그녀가 자신에 대해 쌓아


왔던 걱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른가시나무 백작 성에 있을 당시에 치료에 쓰였던 귀한 약초들은 전부 클로에가 보내 준 것이었다.


입에 쓰고 맛도 없어 슬쩍 버리고 싶었으나, 약과 함께 동봉된 편지를 읽고서는 꾸역꾸역 삼켜야만 했다. 예쁘고
단정한 필체. 조곤조곤 안부를 묻는 평범한 내용에서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클로에에 대한 기억이 전무하다시피 했더라도.

그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마치 그 편지의 필체와 내용을 그대로 형상화 한 것 같았다.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인사를 나누는 사이 테이블 위에 보기도 좋고 맛도 좋아 보이는 다과가 푸짐하게 차려졌다. 레이몬드는 결혼


준비로 자리를 떠야만 했다. 결혼식이 코앞임에도 일주일에 한번 꼴로 보는 약혼녀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레이몬드는 풀죽은 강아지처럼 계속 뒤를 돌아봤다. 결국 클로에가 일어서서 뽀뽀도 해 주고 엉덩이도
두드려 줘야 했다. 레이몬드는 그제야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로젤린은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레티시아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봐도
괜찮은 건가 이거.

클로에가 레이몬드를 보내고 자리에 앉았다. 로젤린은 쿠키를 먹지 않고 들고만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먹고 싶은 마음이 어디 가지는 않았기에 손에 들린 쿠키 개수가 점점 늘어났다.

“클로에 양, 하나만 여쭤 보아도 됩니까?”

“어머, 그럼요.”

“방금 전에 레이몬드 경과 입을 맞춘 것은 어째서인지.”

클로에는 다시 “네?” 하고 되묻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이니까요.”

“사랑하는 사이에는 그렇게 입을 맞춥니까?”

역시 못 보게 했어야 했는데! 레티시아는 로젤린과 클로에를 번갈아 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한 일이에요. 키스는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거든요.”

로젤린이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클로에는 매끄럽게 대응했다. 어린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상냥함이 비쳤다. 로젤린은 크게 충격 받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마에 하는 입맞춤도 비슷한 겁니까?”

클로에는 눈을 빛내며 상체를 살짝 숙였다. 거리상으로 많이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으나 느낌상으로 더 좋은


청중의 태도가 되었다.

“이마에 하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어요. 누가 경의 이마에 키스했나요?”

레티시아가 로젤린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눈동자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로, 로젤린 경…… 대체 누, 누가…….”

클로에는 눈짓으로 레티시아에게 타박을 줬다. 그래 가지고는 잘도 말하겠다는 식이었다.

로젤린은 방 안의 분위기를 대충 눈치챘다. 하카브 왕자가 볼에 뽀뽀했던 때에도 다들 무척 화내지 않았던가.


지금도 약간 그런 게 아닐까? 대놓고 말하면 혼나거나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로젤린이 머뭇거리자 클로에가
인자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재촉하거나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아 로젤린의 마음도 조금씩 풀려 나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음도 이상하게 친숙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가진 고민을 죄다 말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118 화.

‘로젤린’이 레이몬드의 수습 기사였던 시절. 그녀는 좀처럼 하얀밤 기사단에 융화되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녀
자체로는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이 받쳐 주지 않으니 상황은 나날이 악화될 뿐이었다.

몇몇 교류를 나눴던 친구들은 1 황자 파에 속해 있는 가문의 영애들이었기에 진즉에 소식이 끊겼다. 하얀밤


기사단에 입단하는 일을 반대했던 집안에 기댈 수도 없었다.

상관인 레이몬드는 로젤린을 살갑게 챙겨 주었으나, 약한 것이 용납되지 않는 무력 집단에서 로젤린은 제 방황을


온전히 내보일 수 없었다. 그런 때에 만났던 것이 클로에였다.

그녀는 로젤린의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레이몬드가 바깥의 스승이라면, 클로에는 내부를 정리하며 차곡차곡 쌓는
법을 알려 줬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근 몇 년 동안은 서로의 위치에서 바쁘게 일한 덕분에 일 년에 한두 번도
보지 못했다.

그때로부터 시간도 많이 흘렀고, 지금의 로젤린은 그 기억마저도 희미했으나, 감정만은 남아 있었다. 그녀에
대한 신뢰. 호의.

로젤린은 입가를 더듬거리다가 얘기를 꺼냈다. 여러 번 눈치를 보며, 몇 번 말을 멈추긴 했지만 대화는
느릿하게라도 이어졌다. 한번 물꼬가 트이니 순식간이었다.

클로에의 얼굴에는 평온한 미소가 올라와 있었지만, 손은 스스로의 허벅지를 쥐어뜯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사절단이 일라베니아로 돌아올 때의 전투 전, 이마에 입을 맞추시며 축복을 내려주셨고, 최근에


무투 대회 전에도 한 번 더 이마에 입 맞추셨다. 다른 기사들한테 그러는 모습을 못 봤는데, 이게 이상한 거냐?
가 긴 말의 요지였다.

레티시아의 손에서 떨리는 찻잔이 잔 받침대와 부딪쳐 달그락달그락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클로에는 웃음을 꾹
참고 시선을 내렸다. 이 순간만은 레티시아를 타박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전하…….’

그 대단한 얼굴로 하는 것이 고작 소꿉놀이란 말인가. 하기야 상대가 이렇게 백지 같은 상태이니.

“전하께서 경을 매우 아끼시나 보네요.”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기쁜 말이었던 듯했다.

“전하께서는 종종 그렇게 기사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시곤 해요.”

뻥이다.

“무운을 빌고 축복을 하는 거죠. 그래도 모두에게 하는 것은 아니고 정말, 전하께서 믿고 의지하는 기사에게만
하는 거라 자주 못 봤을 뿐이에요.”

뻥이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었다.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자신을 의지했다니! 로젤린은 들뜬 기색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클로에는 웃음을 꾹 눌렀다.

“그거 아나요, 경?”

“예?”

“전하께서 경에게 하듯이, 경도 전하께 해도 되는 거예요. 그거.”

“그렇습니까?”

그럴 리가! 레티시아가 입을 떡 벌렸다. 클로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손바닥을 가볍게 제 볼에 대었다.


저렇게 순수한 얼굴로 눈 하나 깜박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다니. 레티시아는 섣불리 끼어들지도 못하고
초조해했다.
“마찬가지로 전하의 무운을 비는 거예요.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기사가 무운을 빌어 주니, 얼마나
든든하시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아, 그렇군요.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그럼요. 좋아서 뒤로 넘어가실 거예요.”

정말로 넘어가겠지. 로젤린은 대단한 정보를 들었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는 웃음을
터트렸다.

* * *

로젤린은 제복 상의를 벗었다.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팔을 벌려 주시겠어요?”

응접실 한가운데에 서서 허수아비처럼 팔을 들고 있자, 자그마한 여자들이 달라붙어 줄자로 여기저기 치수를 쟀다.

“정말. 사내들의 무심함이란.”

클로에는 소파에 앉아 고개를 저었다.

“무도회가 코앞인데 드레스가 아직이라니.”

“전에 맞춰 둔 게 있어서 그걸…….”

“입고 가려고 했다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요. 내 웨딩드레스를 선물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할 것 같으니


말이에요.”

로젤린이 입을 다물었다.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뺏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 클로에가 로젤린을 큰뿔산양 후작저에 초대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건국제의 무도회가 목전인데
드레스를 준비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어서. 붉은수레바퀴 백작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칼릭스까지 챙기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날카로운 척하면서 맹한 구석이 있는 게 제 누이랑 판박이였다.

로젤린의 어머니인 에델바이스는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다. 새로운 드레스를 달에 한 번씩 보낼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핑크색과 연노랑색의, 막 사교계에 데뷔하는 열여섯 살 영애들이 입을 법한 스타일의
드레스는 거짓말로도 로젤린에게 어울린다 말할 수 없었다. 클로에라면 그것을 입을 바에 벗고 가는 게 낫다
생각했다.

심지어는 명성이 널리 퍼지고, 무투 대회에서 우승해 다시 한 번 ‘로젤린’이라는 이름을 알린 이때.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 쏠린 이때. 건국제 무도회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이때에 하필 그런 드레스들을 입고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여성의 상체 모양의 목각 토르소에는 로젤린이 들고 온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소유하고 있는 드레스를 몇 벌


가지고 오라기에, 레티시아가 챙겨 온 것이었다. 에델바이스가 샀던 그 드레스였다. 클로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뭐지, 이것은? 악몽?

“부인, 제발…….”

드레스샵을 운영하는 남작 부인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할수록 예쁘다는 인식이 아직까지 윗세대에는 있어서 그런지, 프릴과 리본을 선호하시는 경향이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은 심각하네요, 이것은…….”

로젤린의 드레스를 당장이라도 불살라 버리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이걸 입고 무도회에 가셨으면 두고두고, 자자손손대대 얘깃거리가 되었을 겁니다. 로젤린 경.”

“좋은 겁니까?”

남작 부인이 작은 눈을 부릅떴다.

“아니요!”

반응이 굉장히 격했다.

“아닙니다!”

“네…….”

격정적인 반응에 로젤린이 그녀의 눈치를 봤다. 에델바이스가 보낸 옷 중 가장 빛나고 화려한, 그녀의 심미안으로
보기에 예쁜 드레스였는데…….

로젤린과 레티시아는 뭐가 문제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았다. 클로에는 가슴이 답답했다. 하여간 기사란
족속들은 검밖에 없다. 여자건 남자건 정말.

남작 부인은 방에 늘여 놓은 옷감과 토르소들을 치웠다. 치수는 쟀고, 입을 사람도 직접 봤으니 이제부터는


그녀의 영역이었다.

“밤을 새워야 할 것 같네요.”

초췌한 얼굴이었다. 로젤린은 괜히 미안해져서 그녀에게 쿠키를 건넸다. 남작 부인은 쿠키를 씹어 넘기며
응접실을 나섰다.

저녁 식사를 한 후, 로젤린은 클로에에게 이것저것 교육받았다. 드레스를 입었을 때의 주의 점, 행동, 예법 등.


알고는 있지만 놓치기 쉬운 세세한 부분까지. 1 부터 10 까지 모두 주입해야하나 걱정했으나, 다행히도 로젤린이
어느 정도 예법을 기억하고 있어 시간이 단축되었다.

덕분에 남은 시간이 생겼다. 클로에가 부채를 꺼냈다.

“부채 사용법을 배워 보겠어요.”

수강생 두 명이 와 소리를 내며 박수를 쳤다.

“귀족 여성들을 부채로 말을 대신하기도 하죠. 혹시 알고 있는 게 있나요, 로젤린 경, 레티시아 경?”


로젤린은 인상을 쓰며 한참을 고심했다. 그녀는 곧 예비로 건네받은 부채를 오른쪽 뺨에 톡 대었다. 일반적으로
말을 긍정하는 뜻으로 쓰이는 행동이었다.

“훌륭해요. 부채를 접어 오른쪽 뺨에 살짝 대면, 네. 왼쪽은 아니요. 라는 뜻이에요. 가장 기본이 되는


동작이죠.”

레티시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냥 말하면 안 되는 거야? 대체 왜……?

로젤린은 가르쳐 주는 것을 빠르게 흡수했다. 어찌나 다양하고 많은 부채 언어가 있는지, 레티시아가 질려서
고개를 절로 저을 정도였다.

클로에가 부채를 활짝 펴, 코와 입을 가렸다.

“이 동작은 이성에게 사용할 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당신에게 마음을 여는 중입니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최근에 다른 뜻이 하나 더 생겼더군요.”

클로에는 그 상태 그대로 살짝 인상만 썼다. 일그러진 눈썹이 보였다.

“이건 ‘내가 당신을 한 대 치고 싶으니 기다리세요.’라는 뜻이에요. 당신이 나에게 매우 무례한 행동을 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둘러…… 말하는 건 아니구나. 대놓고 말하는 거죠. 아까와 비슷하지만 표정 하나로 뜻이 조금
달라졌지요?”

로젤린은 곧 부채를 펼쳐 클로에와 같은 동작을 했다. 날카로운 눈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클로에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로젤린 경. ‘제가 당신에게 마음을 열게 기다려 주세요.’를 해 보시겠어요?”

로젤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나운 눈매의 단점이었다. ‘내가 널 죽이러 갈 테니 목 씻고 기다려라.’라고밖에 안보였다.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생각해 보니까 요즘에는 잘 쓰는 표현이 아니네요. 그냥 쓰지 말도록 해요.”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뉘엿뉘엿해질 때까지 로젤린은 부채를 왼손으로도 들었다가, 돌렸다가, 반쯤
펼쳤다가, 빠르게 부치기도 하고. 다양하게 사용했다.

“오늘 수고했어요. 로젤린 경, 레티시아 경.”

“네…….”

“네…….”

둘 다 잔뜩 지쳐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큰 기사 두 명이 풀죽은 모습에 클로에가 웃었다.

“아차, 그리고.”

클로에가 부채를 반쯤 접어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이건 키스해 주세요. 라는 뜻이에요. 이번 무도회에서 써 볼 일이 있으면 좋겠네요.”

풀죽었던 레티시아가 부활해서 기함했다. 로젤린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설레는 몸짓이었다.
로젤린이 ‘키스해 주세요’를 연습하는 것을 본 레티시아가 그녀의 손에서 부채를 뺏었다. 클로에가 호호 웃으며
그들을 구경했다.

119 화.

큰뿔산양 후작 저에서 돌아올 쯤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클로에에게 선물로 받은 부채를 이리저리
가지고 놀고 있으려니 어느새 저 너머에 월장석 성이 보였다. 레티시아는 거리에 살 것이 있다며 아까 전에
헤어진 터라,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로젤린뿐이었다.

그녀는 기숙사로 향하다가 건물 앞에서 쪼그려 앉아 있는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헤사였다. 로젤린이 가까이
다가가도 무릎을 끌어안은 채 바닥만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깊게 생각해서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평소에도 고양잇과 맹수들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다녀 기척이 전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부러 무게를 실어 소리를 내자, 헤사가 천둥소리라도 들은 듯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로젤린 경.”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헤사는 땅을 짚고 일어섰다. 어린 얼굴에 고뇌가 잔뜩 담겨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그게. 별일은 아닌데요…….”

언제나 자신을 향하던 시선은 마주칠 줄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다. 왼쪽, 오른쪽, 어두운 수풀을 향했다가,
다시 바닥. 로젤린은 자세를 낮춰 헤사와 눈을 맞췄다.

“무슨 일입니까.”

헤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낮에 잃어버린 물건이 있는데 혹시…… 같이 찾으러 가 주실 수 있나요?”

굉장히 중요한 물건인 것 같았다. 로젤린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사는 월장석 성에서 벗어나 한참을 걸었다. 목적지는 성 밖에 위치한 화려한 정원이었다. 등불이 비추는
장식물과 분수대는 낮의 햇살을 받을 때보다도 더욱 아름다웠다. 로젤린이 호오 소리를 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까지 나왔었군요. 뭘 잃어버렸습니까?”

헤사의 눈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레이몬드에게 선물 받은 자신의 잔을 깨트렸을 때, 또한


서류를 분실했을 때.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소년은 발치만 바라본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지금처럼.

대체 뭘 잃어버렸기에! 로젤린의 마음에도 슬쩍 걱정이 자리 잡을 때였다. 헤사에게서 돌연 마력의 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헤사?”

무언가에 대한 방어도, 공격도 없었다, 어떤 행위를 위한 것이 아닌, 목적성 없는 마력은 로젤린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물건을 잃어버렸다더니 갑자기 마력은 왜 사용하는 것일까?

그 순간 로젤린은 정원 저 멀리 여기저기 흩어진 사람들의 기척이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여기. 헤사와 그녀가 있는 분수대 앞으로.

헤사가 고개를 휙 들어 로젤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눈망울 한가득 눈물을 채우고
있던 모습과 달랐다. 눈썹을 찌푸리고는 있지만 울고 있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얘기를 들어 주세요 로젤린 경. 그분은 분명 일라베니아의, 2 황자 전하의 적이기는 하지만…….”

로젤린은 거기까지 얘기를 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벅저벅. 사방에 포진한 사람들이 가까워졌다. 로젤린은
그들의 정체를 눈치챘다. 뜬금없이 소년의 몸을 휘감은 마력. 그것을 기점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빤하지 않은가.
마인이라는 뜻이었으며, 로젤린이 알기로 자신과 헤사를 제외한 수많은 마인들의 정체라면…….

“로젤린.”

하카브의 호위들밖에 없었다. 남자는 열에 달뜬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로젤린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구릿빛의 사내가 두 사람만 있던 장소로 발을 들였다. 그와 동시에 분수대를 둘러싼 미로 정원의 수풀 벽 바로
너머에 수십 명의 사내들이 포진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카브가 헤사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로젤린은 그제야 헤사가 자신을 이곳에 부른 배경에 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젤린 경을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대로 말씀드리면 오지 않으실 것 같아서…….”

입술을 짓이기는 행동에서 소년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던 갈등을 읽을 수 있었다. 로젤린은 한숨을 푹 쉰
다음에 헤사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딱!

소리는 가볍지 않았다. 헤사가 이마를 붙잡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있던
소년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먼저 기숙사에 가 있으세요. 나는 조금 있다 갈 테니.”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던 헤사는 이마를 누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정원을 빠져나가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로젤린이 앞에 있는 하카브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볼 수 있었던 건 그림자 진 그녀의
뒷모습뿐이었다.

헤사의 기척이 멀어졌다. 그녀를 대단한 명화라도 되는 듯 황홀한 눈빛으로 감상하던 하카브가 움직였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 오랜만이다, 로젤린.”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뵙습니다.”

하카브가 눈을 떼지 않은 채 다가왔다. 뭘 할지 알 것 같았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질 쯤,


로젤린은 한 걸음 물러섰다. 하카브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인사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하기 싫습니다.”

“그사이 교육을 했나 보군. 치사한 사람들 같으니.”

“일라베니아에서는 친밀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불필요한 접촉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 친밀한 사이가 되면 불필요한 접촉을 해도 괜찮은 건가?”

로젤린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마도.”

하카브가 눈을 휘며 웃었다. 그거 희소식이군. 남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특별한 용건이 없으시다면, 이만 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아니. 특별한 용건이 있어. 로젤린.”

하카브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로젤린은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거슬려 표정 없이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우선 자세를 바꿀까. 그대의 목이 고생하는 중이니. 이렇게.”

하카브가 몸을 숙이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까의 상황과 완전히 반전되었다. 이제는 하카브가 로젤린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되었다. 로젤린은 답지 않게 당황했다. 음, 이거 좀, 느낌이 이상하다. 남자가 살살
눈웃음을 쳤다.

“어때.”

“매우 불편합니다.”

“목이?”

“아뇨. 전하의 행동이 저를 불편하게 합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참 딱 부러지게 교육 잘 시켰군. 그냥 즐기도록 해, 로젤린. 나를 그 위치에서 보는 사람은
힉살라 아돈뿐이다. 병을 앓고 계시니 얼마 뒤에는 아무도 없을 테고.”

로젤린은 열심히 고민하다가 알맞은 답변을 찾아냈다.

“유감입니다.”

하카브가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로젤린. 그 사실은 나를 기쁘게 한다.”

“아, 네. 기쁘시겠습니다.”

하카브가 잠시 자신의 눈을 덮고 어깨를 들썩였다. 시간이 흐른 후, 드러난 흑갈색 눈동자는 등불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약간 물기 어린 걸 보니 조금 운 것 같기도 했다.

“그래. 기쁘다. 곧 모두가 나를 이렇게 올려다봐야 한다는 것이, 치가 떨릴 만큼 기뻐. 하지만 로젤린.”

하카브가 대뜸 로젤린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제 얼굴 쪽으로 가까이 끌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는 기행까지
벌였다. 하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막을 틈도 없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나 나를 그 위치에서 볼 수 있어. 발타의 힉살라가 영원히 그대의 발아래에서 그대를
경배하며, 사랑을 바칠 것이다.”

“아니오? 딱히 원하지 않습니다.”

단조롭던 대답에 변화가 생겼다. 아니? 뭔 소리신지? 라고 황당해하는 표정까지. 아니라는 대답이야 대충
유추했더라도 상대방이 이렇게 헛소리를 들은 듯한 반응을 하니, 하카브도 약간은 상처받았다.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게 아니야. 길은 많을수록 좋으니, 그저 내 제안을 기억해 두기만 해. 분명 그대는


언젠가 일라베니아에…….”

남자가 잠시 머뭇거렸다. 말을 고르는 중인 듯했다.

“……많이 실망하게 될 테니.”

하카브는 조금 더 파괴적이고 적나라한 단어들은 물러 두었다. 현재 일라베니아 황실 소속의 기사에게 일라베니아


욕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때가 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니 기억해. 발타에서도 한번 말했었지. 리비타의 문은 그대에게 열려 있다.”

로젤린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을 걸고 있었다. 하카브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제가 리비타에 가면 문을 열어 주신다고.”

하카브가 쿡쿡 웃었다.

“청혼하는 거야. 내가 그대에게.”


청혼? 혼인 전에 남자가 여자에게, 혹은 여자가 남자에게 상대의 허락을 구하는 행위가 아니던가. 하카브와
자신의 결혼? 상상도 가지 않을 뿐더러 살짝 불쾌하기까지 했다. 로젤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싫다 말하려 했지만
하카브가 말을 덧붙이는 게 빨랐다.

“나는 내 말에 부정하는 답을 듣고 싶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로젤린. 그러니 그대에게…… ‘좋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한 제안을 하도록 하지. 그대는 권력이나 재물에 욕심이 있는 부류가 아닌 것 같으니……
좋아.”

하카브는 말하는 중간중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로젤린은 그 만행에도 개의치 않고, 그의 뒷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대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때부터, 발타는 일라베니아의 2 황자 리카르디스의 우군이 된다.”

쿵! 머리를 세게 한대 맞은 것 같았다. 하카브는 적이었고, 그녀는 어지간해서는 적을 앞에 두고 제 속내를


내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경악스러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내용의 중대함을 체감한 것이다.

“기한은 그대가 원하는 때까지. 평생을 바란다면 평생을 바쳐 엘피디오로부터, 또한 황제로부터 그를 보호한다.
‘그때’와 같은 입 발린 동맹이 아니야 로젤린. 이건 정말…… 나로서도 큰 결심이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군.
또한 내가 이런 말을 꺼낼 정도로…….”

하카브가 로젤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꾹, 한번 누르고 떨어진 입술은 다시 그녀의 손마디에 닿아 더듬듯
천천히 내려왔다.

“그대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도.”

120 화.

손톱 끝까지 그의 입술이 닿았다. 목 뒤로 돋은 소름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카브는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것으로 일단 용건은 끝.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대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딤라에, 리카르디스에. 하여간 얼마나 꽁꽁 숨겨 두던지. 치사하게 말이야. 하카브는 짐짓 인상을 쓰며 제


노고를 더 설명하려다, 빙그레 웃는 것으로 그 말을 대신하기로 했다.
언제나 무심하게 다른 사물을 바라보던 시선이 변했다. 로젤린의 평정이 무너진 것이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간절히 바라보는 그 모습에 하카브는 가슴 한쪽이 묵직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이거…… 생각보다도 기분 좋은걸.’

그는 자신이 매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발타 왕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펜던트였다.

“자아, 이건 맹세의 증표로 주도록 할까.”

하카브의 한쪽 손이 그녀의 제복 단추를 풀어 냈다. 로젤린은 깜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곧바로 분수대에


막혔다. 남자는 멀어졌던 만큼 다시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제복 안, 셔츠의 단추까지 두세 개 풀어 냈다. 목이
드러나자 하카브가 직접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로젤린은 입을 다문 채 그의 행동을 묵인했다. 하카브가 이를
보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맡아 두도록 하지.”

“아…….”

로젤린의 셔츠 안쪽 걸려 있던 싸구려 목걸이가 그의 손에 들어갔다. 축제 때, 리카르디스의 눈동자 색과


비슷해서 샀던 펜던트였다. 망설이는 사이 하카브는 그녀의 목걸이를 자신의 소매 안쪽에 쑥 넣었다.

돌려 달라 말하지 못했다. 로젤린이 어색하게 제 쇄골 아래 늘어진 차가운 금속을 만지고 있자, 달 아래의 검은
남자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의 목을 훑었다.

“잘 어울리는군. 아름답다 로젤린.”

한마디를 더 덧붙이려던 하카브의 뒤로 또 다른 구릿빛 피부의 사내가 나타났다.

“전하.”

하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도 눈치챘다. 평범하게 정원을 산책하러 온 사람들이 입구에 발을 들여 놓은
듯했다. 아쉬워하던 하카브가 수풀 벽에 나 있는 꽃 한 송이를 뽑아 그녀의 귀에 꽂았다.

“좋은 답을 기다리겠다.”

연신 끈적거리며 달라붙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남자는 미련없이 발길을 돌렸다.

주위를 둘러쌌던 하카브의 호위들이 넓게 퍼지며 정원을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로젤린은 하카브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멍했다. 벌어진 셔츠와 제복 단추를 다시 꼭꼭 여몄다. 목걸이를 걸어
주던 차가운 손끝의 감촉이 떠올랐다. 뱀같이 느릿하게 피부 위를 흐르던 손길. 로젤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원의 입구에서는 아까 전, 큰뿔산양 후작 저에서 돌아왔을 때에 보았던 광경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나무
아래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소년의 그림자가 작달막했다. 로젤린은 코로 숨을 후 내쉬었다. 헤사가
후다닥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검은달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헤사?”

“예? 절대로 아닙니다!”


눈동자, 심장 박동, 얼굴 근육의 미세한 반응은 헤사의 말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로젤린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왕자 전하께서 뭐라 했습니까.”

“……경께서는 2 황자 전하와 황실을 지키기 위해 한 몸 바칠 테지만, 과연 황실도 그러하겠느냐고요. 몇 세대


전만 해도 마인 사냥을 주도 했던 나라의 성질이 과연 시간이 흐른다고 변하리라 믿느냐고…….”

[군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일라베니아의 마인이 얼마나 가혹한 취급을 받는지. 나는 일라베니아와 2 황자의
적이긴 하나, 결코 그녀의 적은 아니다. 쉽게 믿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안다. 하지만 잘 생각해라. 2 황자의
입지는 단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또한 허상에 불과하지. 황제는 사지로 제 아들을 몇 번이나 집어넣은
사람이다. 중요한 건 그런 위험한 길을 걷는 리카르디스의 뒤에 로젤린이 있다는 것. 여차하면 그를 대신해 죽을
각오로 말이야. 내 말 이해하나? 그의 곁에 있으면 아무리 강한 마인이라 해도 반드시 죽는다는 얘기다.]

로젤린은 다소 기형적일 정도로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자라 왔다. 황실을 지킨다. 리카르디스를 지킨다.
그 반짝이는 사명을 황실은 단순한 화살 받이로 이용할 뿐인데, 어찌 내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른 길도 있노라 알려 주고 싶을 뿐이라고.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숨겨 두어 만날 방도가 없는데
어찌하겠느냐. 네가 진정 로젤린을 좋아하고 따른다면, 그녀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그녀를 위한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겠느냐. 반듯하게 생긴 남자가 구구절절하고 애절하게 말했었다.

입 발린 소리라 생각하면서도 끝까지 무시하지 못했던 이유는, 하카브가 짚은 점들을 헤사 또한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로젤린은 나라의 영웅처럼 받아들여지지만 그 또한 한순간에 뒤바뀔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었다. 일라베니아의 마인. 그 위치가 어떤지 헤사는 뼈저릴 정도로 잘 알았다. 그래서 그 수작질에 동조하게
되었는데…….

무섭게 표정을 굳히고 쳐다보는 로젤린을 보노라니, 시간을 되돌려 했던 짓을 취소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와, 왕자 전하께서…… 무어라 하시던가요……?”

로젤린이 그의 양 어깨를 꽉 쥐었다.

“헤사. 나를 걱정한 건 좋지만, 하얀밤 기사단의 모두는 리카르디스 전하를 위해 존재합니다. 이번 일은 헤사의
본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말의 끝이 흐려졌다.

하얀밤 기사단은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 2 황자 리카르디스를 지킨다.

그렇다면 하카브의 위험성을 아예 배제 하는 것을 넘어, 그의 힘을 리카르디스에게 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하얀밤 기사단의 상급기사 로젤린. 붉은 수레바퀴의 로젤린. 리카르디스를 지키는 자신은…….

왜 그 제안에 대답을 하지 못했을까. 왜 리카르디스의 얼굴만 떠올랐던 걸까.

헤사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제 어깨를 꽉 쥐고 있는 로젤린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하고 멋있는,


바닥만 바라보는 자신과 달리 언제나 앞을 보는 로젤린. 그런 그녀가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헤사는 결국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로젤린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후회
따위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잘못했어요…… 로젤린 경.”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소년의 물기 젖은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로젤린은 끝내 위로하지


못했다.

* * *

유난히도 밝고 선명한 밤이었다. 하늘이 맑게 개어 별빛 달빛이 고스란히 쏟아졌다. 리카르디스는 클로에에게


받은 서류를 뒤적였다. 주전파 귀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카브가 일라베니아에 와
있는 지금의 좋은 기회를 그들이 그저 손 놓고 있을 리 없었다. 어느 뒷골목으로 돈이 흘러 들어갔다는 걸 보니
암살이라도 할 요량인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성질을 못 이기고 서류를 집어 던졌다. 죽이지도 못하고 벌집만 들쑤시는 꼴이 될 것이 빤한데, 이
멍청한 자식들이……. 하카브가 머물고 있는 성에 호위 병력을 더 붙여야 하나? 리카르디스가 욕을 뇌까렸다.
멍청한 놈들 때문에 두 배로 고생하게 생긴 셈이었다.

‘아니 리카르디스 황자, 저를 위해……?’

따위로 시작할 감사 인사를 하카브에게 들을 생각만 해도 혈압이 올랐다.

리카르디스는 성질내며 와인 잔을 크게 기울였다. 몇 번 더 행동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병이 비어 있었다.


취기가 도니 그제야 피로가 몰려왔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고 일어났다.

침대로 향하던 그의 발길이 테라스에서 우뚝 멈췄다. 리카르디스는 창을 열고 나가 나무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로젤린이 보이지 않았다. 저녁쯤 성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리카르디스는 한참 더 밖을 바라보다가 몽롱한 기운에 눈이 스르륵 감기려 하자 그때야 발길을 돌렸다. 푹신한
침대에 폭 빠진 몸이 무거웠다. 리카르디스는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방에 발을 들인 것은 그가 깊게 잠든 후였다. 방 안에 새근새근 평온한 숨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로젤린은 발소리를 죽이고 그의 곁에 다가갔다. 그림자에 어두워진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남자를 훑었다. 감고 있는 눈. 달빛에도 아름답게 반짝이는 긴 속눈썹. 하얀 피부. 평소와는 다른 편안한 차림새.
흐트러진 셔츠 자락, 그리고 그 사이의…….

로젤린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녀의 손이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느슨하게 풀려 있는 셔츠 안쪽,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로젤린이 조심스럽게 그의 셔츠 자락을 벌렸다. 숨어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잎을 닮은 푸른색.
누군가의 눈동자를 닮은 펜던트였다.

그걸 보는 순간 로젤린은 제 가슴이 덜컥 멈춘다고 생각했다. 손이 떨렸다.

[잘 어울려, 아름답다.]

제 목덜미를 만지던 구릿빛 사내가 한 말이었다. 로젤린은 남자가 만졌던 부분을 지우듯 따라 더듬었다. 서늘한
금속이 만져졌다. 하카브가 청혼을 하며 준 목걸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벽에 걸린 거울이 보였다. 창백해
보이는 하얀 피부 위로 금색의 화려한 장신구가 걸려 있었다.
[그대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때부터, 발타는 일라베니아의 2 황자 리카르디스의 우군이 된다. 기한은 그대가
원하는 때까지. 평생을 바란다면 평생을 바쳐 엘피디오로부터, 또한 황제로부터 그를 보호한다.]

로젤린은 어느 정도 자신의 강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강하다고 하는 인간들보다도, 그런 인간들의 합보다도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로젤린은 사절단 일을 겪으며 자신의 힘만으로는 리카르디스를 지키지 못하는 때가
오리란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개인의 무력으로는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을뿐더러, 리카르디스를
둘러싼 위협은 단순한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종류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할 수 있는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던 이때에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생겼다. 거대한 집단과의 동맹이


체결되는 것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말 한마디. 좋다는 말 한마디면 될 텐데.

121 화.

로젤린은 제 갈등의 이유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머리를 굴렸다.

‘나는…… 전하를…….’

침대 끝이 살짝 내려앉았다. 로젤린이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키고 싶어.’

리카르디스가 몸을 뒤척이더니 반대로 누웠다. 이제는 등밖에 보이지 않았다. 로젤린은 뭔가 울컥 서러워졌다.

‘나는 전하의…….’

구름이 달을 가렸다. 어두운 방 안이 더욱 까맣게 잠겼다. 로젤린이 눈을 감았다.

‘곁에 있고 싶어.’

그녀 안에 새롭게 움튼 욕망이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지는 명백했다.

아직 새벽이 걸려 있을 때 리카르디스는 깨어났다. 술을 먹고 자서 그런지 눈을 뜨고도 꿈을 꾸는 듯 멍했다.


한기가 들었다. 리카르디스는 품에 있는 따뜻한 무언가를 끌어안았다. 제 두 팔 안에 폭 들어오는 따뜻한 것이
압박이 괴로운 듯 “으응…….” 하고 소리를 냈다.
“아…… 미안…….”

“네…….”

리카르디스가 팔에 힘을 풀고 안고 있는 무언가를 토닥였다. 손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감겼다.

……부드러워?

번쩍 눈을 뜬 리카르디스는 한가득 펼쳐져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향연에 소리 없이 경악했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자신의 왼팔을 베고, 오른팔에 꼭 안겨 자고 있는 로젤린이 보였다.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

리카르디스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내가 끌어안은 게, 로, 로젤린. 뭐, 그대가. 왜, 여기에. 아니 이불은


어디?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아니, 아니. 왜 로젤린이 여기에? 꿈속을 헤매다 깨어났더니 더 이상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눈동자를 마구 굴리며 당황스러워 했다.

바람소리도 읽는 예민함은 어디다 버리고 온 것인지. 로젤린은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숙면하고 있었다. 눈꺼풀이
떨리는 걸 보면 자그마한 자극에 일어날 것같이 보이긴 했지만…….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등을 어린아이 어르듯 가볍게 쓸어내렸다. 안 그래도 피곤한 사람인데 잠을 깨울 수 없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 가면서. 리카르디스의 손길에 로젤린의 찌푸려진 미간이 서서히 이완되었다.
입꼬리를 움찔거리던 그는 곧 아까와 비슷할 정도로 경악하게 되었다.

로젤린이 꿈틀대며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허리에 그녀의 팔이 턱 얹어졌다. 그는 헉 소리를 겨우 참아 냈다.


비극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셔츠가 어제보다 더 벌어져 있는 탓에, 그녀의 이마가 쇄골
바로 아래 가슴에 찰싹 붙었다. 자고 있어 그런지 몸이 따끈따끈했다.

……맞닿은 피부의 온도가 당황스러웠다. 색 색, 숨이 맨 살결을 간지럽혔다. 리카르디스는 가슴부터 시작된


감각이 제 온몸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머리 끝까지 간질, 간질. 버틸 수 없을 만큼 등골이 오싹거렸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하늘에서 땅을 비추는 위대한 이델라브힘이시여. 성스러운 빛으로 어린 백성들을 이롭게 하시고…….’

리카르디스는 성서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암기했다. 그가 아는 것 중 가장 가슴을 차갑게 만들게 하는


문구들이었다. 다행히 소용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과 그녀 사이에 끼어 있는 이불을 조심스럽게 들어 로젤린에게 덮어 주었다. 로젤린이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우물거리더니 씩 웃었다. 포근해서 기분 좋은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괴로워하다가 다시 성서를
외웠다. 아니 왜 저렇게 귀여운 거야.

둥그스름한 이마, 시원시원하게 쭉 뻗은 눈꼬리, 긴 속눈썹, 곧은 콧날, 먹는 꿈을 꾸는지 연신 오물거리는


입까지.

주위를 경계하며 암살자들을 척척 잡아내고 위험이란 위험은 다가오기도 전에 차단해 버리는 대단한 호위 기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기척마저 읽어 내는 그녀가 제 품 안에서 완전히 늘어져서 자고 있었다. 누군가의 무방비한 모습에
가슴이 설레는 날이 올 줄이야. 한 시간이면 한 시간, 여덟 시간이면 여덟 시간 내내 로젤린의 자는 모습만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제 슬슬 잇세리온이 일어날 때라는 것이었다.

리카르디스가 팔을 슬쩍 들었다. 그래도 로젤린은 깨어나지 않았다. 자신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고른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딱딱한 팔베개를 사용하는 사람치고는 굉장히 편안해 보였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억누르고
있던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새벽과 아침 사이의 희미한 햇살에도 문양의 굴곡을 따라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는 금색의 펜던트. 로젤린의
셔츠 안쪽에서 빼꼼 모습을 드러낸 펜던트의 문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리카르디스가 모를 리 없었다. 따스하게
데워지고 있던 가슴 안쪽의 온도가 순식간에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현 힉살라, 아돈의 직계 혈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고귀함의 증표는 일라베니아에 발을 들인 발타인 중 하카브


왕자와 간제 왕녀만이 지니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하카브의 검은 눈동자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욕망이 떠올랐다.

‘하카브 위 리비타…….’

여유만만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리카르디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왕가의 표식을 줬으니, 단순히 내 부하로 오라는 둥의 시시한 얘기가 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 마력이 수준
이상이라고 하면 신분의 고하는 막론하고 왕실과 혼인으로 엮어 버리는 것이 그네들이 하는 일이었으니. 하카브가
무슨 말을 했을 지는 빤했다. 제 열네 번째인가 열다섯 번째 부인이 되라는 그런 얘기였을 테다.

그런 헛소리를 로젤린이 ‘아, 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고 받은 목걸이를 고이 걸고 있을 리 없었다. 분명


뭔가 혹할만한 제안이 있었을 텐데.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침이라 그런지 볼과 입술이 부어 통통해져 있었다. 그
모습에서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양 볼에 음식을 잔뜩 욱여넣은 채 씹고 있는 광경을 연상했다. 냠냠. 때를 맞춘
듯 로젤린이 또 꿈속의 무언가를 먹었다. 그녀의 입속에 머리카락 한 올이 무서운 기세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
손으로 슥 빼내 줬다.

‘……설마 먹을 거라던가.’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로젤린이 거기까지는 아니…… 겠지. 리카르디스는 미심쩍은 믿음을 기반으로 미심쩍게
확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뭘까. 로젤린이 왜 하카브에게 받은 목걸이를 걸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걸고 있는 것인지…….

그때, 스르륵하고 로젤린의 눈이 열렸다.

아침 햇살을 받는 눈동자가 투명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풀잎 위에 고여 있는 새벽이슬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로젤린의 표정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잠에 취해 있는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로젤린은 자신이 뭘 베고 있는지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서 리카르디스의 반대쪽으로 한 바퀴 굴렀다. 하지만
침대가 넓었기 때문에 굴러 봐야 침대 위였다. 로젤린은 엎드린 채 눈을 크게 뜨고 깜빡깜빡 거리기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옆으로 누워 턱을 괴고는 그녀와 눈을 맞췄다. 눈매를 휘며 환하게 웃으니 로젤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은 잘 잤나, 로젤린 경?”

“어, 아. 저는……그, 전하의 등을 보다가 잠시 앉아 있었는데…….”

횡설수설하며 이불을 꼭 쥐고 있는 그녀를 보니 이 와중에도 정말 웃음이 나오긴 했다. 로젤린은 당황하다가, 제


목에서 흐르는 목걸이의 감촉을 느끼고는 펜던트를 잡아 얼른 옷 안으로 숨겼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뭔지 알고 있군.’

로젤린이 셔츠 단추를 잽싸게 잠그고는 힐끗, 옆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을 즈음의
리카르디스는 선량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걸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나갔던 일은 잘 마무리 되었고?”

로젤린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거짓말이라고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별일 없이?”

목이 떨어져 나갈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을 바랐던 대답에 긍정만 돌아올 뿐이라, 리카르디스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거 다행이군.”

목걸이를 숨기는 손길은 다급하고, 시선은 흔들렸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불안을 똑똑히 읽어 내었다. 로젤린의
마음을 뒤흔들 만한 일은 몇 가지 없을 것이다. 먹을 것, 가족, 친구…… 그리고 ‘2 황자 리카르디스 황자’의
안위까지.

리카르디스는 그중에서 분명 ‘2 황자 리카르디스’가 하카브의 제안에 관련되어 있을 거라 예감했다. 그녀를


흔들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교만이 아니었다.

과거 ‘로젤린’의 영향 때문인지 지금의 그녀 또한 호위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집착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같던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배우고 성장했으나,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 일관된 태도 덕에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로젤린 안에 얼마나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의논을 하고 싶었다면 진즉에 말했을 것이다. 입을 딱 다물고 목걸이를 숨기고 있는 지금은 리카르디스도
인내해야만 했다. 가뜩이나 하카브의 수작질로 흔들리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불안을 내보이는 것은 결코 좋은
수단이라 할 수 없었다. 그가 애써 평정을 유지하는 이유였다.

리카르디스의 눈동자는 셔츠를 꼭 쥐고 있는 로젤린의 하얀 손을 계속해 담고 있었다. 소중한 물건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그저 숨기기 위해 쥐고 있을 뿐이란 걸 알고 있었으나,
머리와 가슴이 각기 따로 사고했다.

차갑게 돌아가는 이성 아래 속은 활활 불타올랐다. 타고 남은 것은 검은 재였다. 거뭇거뭇한 감정의 흔적들로


속이 새카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황성에 들어 온지 십오 년. 수많은 사건을 거치고 울고 웃던 그에게 처음으로 낯선 감정이 생겼다. 눈동자가


바다 속 깊은 곳의 빛을 띠었다. 그것은 하카브가 로젤린을 볼 때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122 화.

껄끄러운 침묵에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봤다.

“기숙사에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턱을 괴고 있는 리카르디스가 생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로젤린의 허리에 큰 손이 닿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대로


힘을 줘 로젤린을 자신의 쪽으로 쭈욱 끌어당겼다. 시트가 두 사람 사이에서 구겨졌다. 로젤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코 앞까지 끌려갔다. 어, 약하고 여린 우리 전하께서 힘이 생각보다 세다! 라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로젤린.”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더 끌어당겼다. 몸이 맞닿아 꾹 눌리자, 그녀가 뻣뻣하게 굳었다. 경직된 초록색
눈동자에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비쳤다. 실크처럼 흘러내리는 은색 머리카락이 한 가닥, 한 가닥 아침 햇살에
빛났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내려 깔며 웃었다. 로젤린의 숨이 멎었다. 미모에 넋을 잃고 있어 미처 몰랐는데,
거리가 좀…… 많이 가까운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자각한 로젤린이 깜짝 놀라 한쪽 손으로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더 이상은 다가오지 말라는 듯이.
셔츠 자락이 벌려져 있는 탓에 손바닥에 탄탄한 가슴이 그대로 닿았다. 로젤린은 더 당황해 버렸다. 피부가
부드럽다 못해 매끄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가, 자신이 왜 그 가슴에 손을 대었는지
깨닫고는 다시 밀었다. 그리고는 다시 당황해서는 떼었다가, 아차 맞다 하고 또 꾸욱 밀었다.

뭘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는 건지. 리카르디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로젤린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전하 뭔가 좀…….”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만류, 그녀의 당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이마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허억,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이, 이상한 것 같…….”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좋은 아침이야, 로젤린 경.”

공기 속으로 녹아내릴 듯 아련한 미소였다. 하늘을 덮은 먹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한줄기 햇빛이 드리운 자연
광경보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얼굴이었다. 로젤린은 그의 믿을 수 없는 외모에 쩍 굳어 버렸다. 그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하카브 위 리비타. 그 야심찬 남자가 ‘리카르디스’를 패로 걸었다니. 대항마로 세울 수 있는 것 역시 ‘


리카르디스’밖에 없지 않겠는가.

* * *

월장석 성의 시녀장, 한나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예, 전하?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부쩍 귀가 어두워진 터라…….”

“아니,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똑바로 들은 것 같다.”

“그러니까, 오늘…… 봄 햇살에도 스러질 것같이 연약해 보이지만, 그 속에 가시와 짙은 향을 품고 있는 장미


같은 치명적인 느낌으로 치장해 달라 말씀하신 것이…….”

“정확하다. 그 느낌으로.”

시녀장은 리카르디스의 이상한 명령에 제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전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시녀장도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옆에 있던 잇세리온이 두 사람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한나는 속으로 그를 응원했다. 치장은 무슨. 얼굴에
뭐 하나 바르는 것도 질색하시는 분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저러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잇세리온
비서관도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전하께서는 이미 희미한 봄 햇살에도 스러질 것같이 연약하지만, 가시와 짙은 향을 품고 있는 장미 같은 느낌을


지니고 계신걸요. 금강석을 깎아서 금강석을 만들어 달라는 말과 진배없습니다.”

“…….”

그의 뒤에서 상급 기사 르원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형제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툴툴거렸다.

“이것 봐, 한나. 잇세리온은 말이 통하지를 않아.”

확실하게, 말도 뜻도 통하지 않았다. 한나는 방 안에 모여 있는 시녀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리카르디스가 말한 내용을 다시 반추했다. 따스한 봄 햇살. 그 연약한 무형의 기운에도 스러질 만큼 연약하게.
애처롭게. 하지만 그 속에 짙은 향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치명적인 장미…….

척 봐도 연애다. 월장석 성에서 일했던 10 년의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주인의 연애 기류!


한나는 전율했다. 드디어, 월장석 성에도 봄이 오는가!

한나가 조금만 기다려 달라 말하고는 황급하게 시녀를 모두 끌고 나갔다. 보물 창고를 털어올 기세였다. 시녀들이
빠진 방 안은 적막이 감돌았다.
르원이 제 턱을 긁적이다가 슬그머니 리카르디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잇세리온과 르원 형제도 무슨 일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설마…… 연애하시나? 월장석 성에도 꽃이 피는 거야? 은근슬쩍 물어보려던 순간,
리카르디스가 그를 먼저 불렀다.

“르원.”

“어…… 예?”

“어제 로젤린 경이 누구와 만나 무슨 대화를 했는지.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알아 와.”

꽃은 무슨. 자라난 꽃도 칼로 베어 낼 것 같은 차가운 눈이었다.

“또한, 오늘 누구를 만나 무슨 대화를 하는지까지도.”

팔짱을 끼고 저 너머를 날카롭게 응시하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글쎄…… 장미의 치명적 어쩌고에 가깝긴 했지만
봄 햇살에 아련하게 흩어지는 어쩌고는 아닌 것 같았다.

“또.”

로젤린 경. 대체 무슨 짓을 했나. 르원이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헤사라 했던가.”

“헤사가 누굽니까?”

“로젤린 경의 새로운 수습 기사. 불러와라. 그녀 모르게.”

르원은 머릿속으로 명령을 다시 되새겼다. 로젤린 경이 어제 한 일. 로젤린 경이 오늘 할 일. 로젤린 경의 생활


전반을 돕는 수습 기사.

“레이몬드 경도.”

심지어는 보호자까지.

‘진짜 무슨 짓을 한 건지…….’

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섰다. 잔뜩 들뜬 걸음으로 돌아오는 시녀장 한나의 모습을 보고 그는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나의 기대대로 연애가 조금은 섞여 있을 수도 있지만, 연애 초기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분위기보다는 끈적끈적하고 각종 술수가 난무하는 치정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한나가 과연 그걸
바랐을는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길이 없어도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걷던 사람 같지 않았다. 로젤린은 비틀거렸다. 취객이나 배고픈 강아지처럼


비실거리는 걸음은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멈췄다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멍하니 있다가 기숙사
건물을 지나치기도 했다. 목적지를 지나쳤다는 것도 이십분 후에야 알았다. 그러다 보니 기숙사 방의 문고리를
잡은 것은 리카르디스의 방에서 나오고 정확히 한 시간 사십구 분 후였다.

달칵.

텅 빈 것이나 다름없는 정돈된 방 안. 거대한 침대 아래에 헤사가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본인의 방에서
안자고 왜 바닥에서…….

‘아…… 맞다.’

두 눈이 퉁퉁 부은 소년을 본 순간, 로젤린은 여태껏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렸다. 하카브가 건넨 목걸이, 그와


함께 받은 제안, 심지어는 하카브의 존재까지. 아침의 리카르디스가 너무 충격적인 탓이었다.

로젤린은 시트를 끌어 헤사에게 살포시 덮어 주었다. 침대 위로 옮겨 주고 싶었으나, 소년은 두 선임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예민한 야생의 감을 가지고 있었다. 건드리는 그 순간 깨어날 것이 분명했다.

로젤린은 바닥에서 자는 소년을 빤히 바라보며 어젯밤을 떠올렸다.

[……그대가 나에게 오는 그 순간부터…….]

[좋은 아침이야 로젤린 경.]

하카브의 제안 위로 리카르디스의 해사한 웃음이 번졌다. 뭘 고민을 해 보려 해도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목걸이가 신경 쓰여 한번 꺼내 보아도, 아까 닿았던 리카르디스의 단단한 가슴이, 이번에는 진짜로 고민 좀 하자
싶어도, 자신을 끌어당기던 큰 손과 이마에 짙게 눌러진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까지!

온 머릿속이 리카르디스였다. 로젤린은 제 허벅지를 꾹 눌러 보았다.

‘뭔가 이것보다…… 탄력 있고 피부 결은 부드러운데 단단하고…….’

탄탄한 가슴의 감촉이 선연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눌러 보고 싶었다.

[보면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맞아, 막 얼굴이 화끈하면서 눈도 못 마주치겠고.]

[진짜 아름다우시지.]

언젠가 동료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당시에도 공감했던 말이었으나, 지금은 정말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얼굴이 화끈하고 눈도 못 마주칠 것 같았다. 여태껏 그를 어떻게 보아 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로젤린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옷 안쪽에서 금속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아, 맞다.’

하카브. 또 까먹고 있었다. 로젤린은 이번에는 집중해서 잠깐 그의 제안을 다시 돌이켜 보았다. 혼인하면
리카르디스를 건드리지 않을 뿐더러 지켜 주기까지 하겠다. 혼인…… 혼인이라.

[이델라브힘께서 왜 사람을 이렇게 많이 만드셨는지 아십니까, 누님?]

[……어…… 음….]
[혼자서는 그릇된 행동이나 결정을 내릴 때가 많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불완전하고, 때문에 종종 실수를
저지르고는 합니다. 그걸 서로서로 도우며 보완하라 신께서 저희들을 함께 세상의 빛을 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누님, 어떤 일이 있다면 고민만 하지 마시고 믿을 만한 사람들과 함께 그 생각을 나눠 보는 게 어떨까요.
사람 머리 하나보다는 사람 머리 둘, 둘보다는 셋이 나은 법이죠.]

물론, 칼릭스가 말한 내용은 성전에 서술 된 바 없으므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는 제 누이가 발타에서


단독으로 위험한 행동을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죄다 알게 되었고, 기겁했다. 한 번 더 강하게 경고할 필요성이
있었다. 거대한 세계를 이루는 신을 끌어들여야 하는 정도의 규모로.

덕분에 인상 깊게 새겨져 있었다. 골머리를 앓고 있으려니 칼릭스의 조언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고민해서 무얼 하겠나. 답이 나오지를 않는데.

마카롱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어제부터 통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찾기 위해 로젤린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123 화.

“정략혼이라. 뭐 흔한 일 아닙니까.”

“귀족 세계에서는 뭐…… 그렇지.”

상급 기사 카일로와 파르딕트가 나란히 팔굽혀펴기를 하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파르딕트의


등에 걸터앉고, 카일로의 등에 발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하나, 하면 내려가고. 하나, 하면 올라왔다. 몸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재밌었다.

“카일로 경은 혼인하셨습니까?”

“하나, 아직이지만 약혼녀는 있습니다. 정략 관계이긴 하지만…… 뭐 나름 사이는 좋습니다.”

“파르파르는?”

“하나, 애가 셋이다.”

“정략혼?”

“참나, 이 얼굴을 봐.”


음. 정략혼이군. 연애를 할 수 있을 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십 번째 팔굽혀펴기를 한 카일로가 팔을 편 채로
멈추고는 피식 웃었다.

“연애에서 결혼까지 성공했다고 하얀밤 기사단 내에서는 유명합니다.”

로젤린은 헉하고 제 입을 가로막았다.

“징그럽게 쫓아다니고 추하게 매달렸다고. 부인께서 얼마나 노고가 크셨을지…….”

파르딕트가 벌떡 일어서 카일로를 덮쳤다. 두 사람 위에 앉아 있던 로젤린이 튕겨나갔다. 그녀는 그대로 뒤


구르기를 하고는 편안하게 앉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앉기 위해 구른 사람 같았다. 로젤린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두 남자의 싸움을 구경했다.

막 연무장에 발을 들인 레이몬드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로젤린, 바닥에 앉으면 옷 더러워지잖아.”

보자마자 잔소리였다. 로젤린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내어 깔고 앉았다. 레이몬드는 그제야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두 남자의 싸움을 관전하고 있는데, 시선이 따가웠다. 나무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는
흘끗흘끗 내려다보는 레이몬드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침 레이몬드가 온 김에 물어볼까? 로젤린이 생각할 즈음 그가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내뱉었다.

“혹시! 나에게 무슨 할 말 없니, 로젤린!? 그냥, 뭐 사소한 고민거리라던가, 음. 그런 거 있잖아? 사소한


자신의 미래라던가…… 하는 그런…….”

로젤린은 기다렸다는 듯 레이몬드에게 털어놓았다. 물론 그녀도 하얀밤 기사단에 하카브가 어떤 존재인지 쯤은


알고 있던 터라, 조금 둘러 말하긴 했다.

귀족 세계에서 흔하다는 정략혼. 조건과 조건만 맞으면 결혼하지 않나. 본인의 목적과, 그 조건이 맞아
떨어진다면 하는 쪽이 나은 것일까? 목적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정략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너무 철없는 일이겠지? 다들 하는 건데 너무 껄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겠지? 딱 그 정도.

레이몬드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애써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볼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중이었다.

“로젤린 무슨 소리야. 요즘 세상에 고리타분하게 정략혼이라니.”

“요즘도 많이 하잖아.”

“당연히 하는 사람들이야 있지. 가문의 세를 불리거나 동맹을 위한 수단으로. 사랑 없이. 그저 조건만 보고!
하지만 로젤린, 결혼은 신성한 거란다!”

레이몬드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일생에 한 번뿐인,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앞으로 하나의 길을 걸어가리라 약조하는 그 기회를 단순히 조건만
보고 결혼한다고? 심지어는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데? 그건 팔려 가는 거야. 결혼이 아니라!”

“맞아, 맞아. 사랑이 전부가 아니겠어.”

어느새 싸움을 끝낸 파르딕트가 레이몬드를 옹호했고, 그의 뒤에서 카일로가 툴툴거렸다.


“연애결혼한다고 정략결혼하는 사람 너무 무시하시네.”

레이몬드가 잠시 카일로를 이끌고 저 멀리에 있는 큰 나무 뒤로 쏙 들어갔다. 뭔가 비밀스러운 얘기를 할 것 같아


청각을 강화해 가면서까지 귀를 쫑긋 세웠으나, 어떤 작은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신호로 얘기하고 있는
듯했다.

레이몬드와 다시 돌아온 카일로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정략혼은 쓰레기입니다, 로젤린 경. 두 번 다시 제 앞에서 그런 끔찍한 단어는 입에도 담지 마시죠. 소름


돋습니다.”

“…….”

뭔가 아까랑 말이 좀 다른 것 같았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뭡니까. 그걸 제안하는 놈들도 똑같이 쓰레기입니다. 저희


아버지처럼.”

“어우, 그건 좀……. 말이 심하시네요, 카일로 경……. 아무튼, 카일로 경도 이렇게 말하잖아 로젤린. 내가
뭐라 했어!”

“……바닥에 그냥 앉지 마라?”

“아니, 아니 뭐…… 그것도 맞긴 한데.”

레이몬드가 그녀의 두 어깨를 꽉 쥐었다. 로젤린은 어젯밤 자신이 헤사의 어깨를 잡고 훈계하던 때를 떠올렸다.
친구 레이몬드에게서 과거, 동경했던 상급 기사 레이몬드 경의 얼굴이 보였다.

“로젤린 에스터. 넌 네가 가진 힘에 비해 소극적으로 구는 경향이 있어. 네가 그 조건을 이뤄 내지 못할 것


같아서 상대방의 손에 너의 목적을 쥐여 주려는 거야? 똑똑한 녀석이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어. 우리가 검을
들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지키려고?”

“기사의 귀감이라 눈물이 나올 뻔했네. 그것도 맞아. 하지만 본디 검은 무기야 로젤린. 적을 베고 찌른다. 싸워
이기기 위한 무기. 너는 그 무기를 쥘 자격을 지닌 기사고, 그렇다면 휘둘러야지. 싸워서 쟁취해 내야지.
지레짐작 두려워하지 말아.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패배를 시인하는 만큼 기사에게 굴욕적인 일이 어디겠어.
너는 강한 아이잖아.”

로젤린의 질문은 그저 ‘정략혼’에 관련되어 있었으며, 자신이 그 대상이라고는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다.


레이몬드가 말한 내용에는 그런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지만 로젤린은 미처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레이몬드와 카일로가 휴 하고 그녀 몰래 한숨을 쉬었다.

파르딕트는 계속해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중이었다. 거, 참. 부단장 부관은 입으로 되는감. 하며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레이몬드가 그의 발을 퍽 찼다. 세 명의 남자가 다시 다투기 시작해, 로젤린은 그 모습을 잠시간
지켜보다가 연무장을 떠났다.
푸른 하늘 저 너머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돌고 있었다. 로젤린은 기사단장 스타스, 부단장 나단, 상급 기사 슈텐,
하급 기사 바스티안, 클로에와 네스터외에도 정원사와 주방장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눈 덕에 여러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다.

정략혼의 기원이라든가 정략혼의 폐해. 수많은 실패 사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카브의 욕과 레이몬드와
클로에의 연애담까지.

로젤린보다 인간관계와 정략혼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조언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로젤린은 단추를 풀었다. 옷 안쪽에서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장신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젤린은 그것을
바라보다 이내 끌렀다. 손으로 만지작거리니 잘그락하는 소리가 났다. 저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에, 그녀는 목걸이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니 어느새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이 보였다. 그녀는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하루 종일 정략혼과 하카브에


대한 욕을 듣고 있을 때에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좋은 아침이야, 로젤린.]

상상 속의 리카르디스가 문 너머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마음이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차가운 문고리가 체온으로 데워질 때까지 가만히 잡고 있었다.

후, 크게 숨을 내뱉은 로젤린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어?’

뭐지? 또 내가 상상을 하고 있는 건가?

석양빛이 하얀 커튼에 투과되어 어스레 떠도는 집무실 안에 꽃이 잔뜩 장식되어 있는 탓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촛대에서 피어오르는 불꽃들이 문이 열림과 동시에 흔들흔들 춤을 췄던 탓일까? 아니면 그렇게 장식된 공간 속,
갖은 장신구로 치장한 남자가 오늘따라 더욱 청초해 보인 까닭이었을까? 로젤린은 몇 초간 움직이지 못하고 그를
바라만 보았다.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서류를 보고 있던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로젤린.”

남자가 눈을 휘며 웃자 눈가가 반짝였다. 로젤린의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아, 아니…… 왜 이렇게 오늘…


… 비, 빛나시는 거지? 혼란스러운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실제로 리카르디스는 평소보다 빛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향유, 갖은 장신구, 화장까지. 솜씨 좋은 시녀장의 손길을 거친 리카르디스는 그야말로…….

‘요정?’

요정의 왕 같았다. 같은 현실에 있다고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리카르디스의 탄탄한 몸을 감싼 옷은 여느


때보다 노출이 심한 스타일이었고, 심지어는 옷감 자체도 하늘하늘하게 얇아 보였다. 그가 몸을 살짝 숙이자
헐렁한 옷이 가슴과 복근을 드러냈다. 날렵하게 꽉 짜인 근육의 결이 탄력 있어 보였다.

로젤린의 시선은 흘러, 부츠나 구두를 신지 않은 리카르디스의 맨발로 향했다. 사람의 발이 이렇게나 예쁜
기관이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크고 발가락도 길쭉하고, 뼈대도 곧고 예쁜 데다가, 그 위를 가로지르는
핏줄까지도 예뻤다. 바깥 복사뼈에서 다리로 올라가는 선도 어찌나 선명하고 아름다운지. 로젤린은 살짝 분홍색
빛이 도는 그의 복사뼈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로젤린? 무슨 문제라도 있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있던 로젤린은 이제야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위


기사들은 물론이고 잇세리온마저 없었다. 꽃과 촛불로 장식되어 야릇한 분위기가 풍기는 방 안을 휘휘 둘러보고
있으니 리카르디스가 말을 이었다.

“아, 오늘은 다들 급한 일이 있어서…… 나 혼자…… 있었다.”

124 화.

로젤린이 입을 떡 벌렸다. 이상한 사람들이 아닌가! 호위 기사가 급한 일이 있다고 자리를 비워? 카일로 경……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잇세리온 비서관님도 너무했다.

눈을 내리깔며 말을 흐리는 남자의 미소에는 어딘가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방과 이 성까지
모두 리카르디스의 것이었으나, 이 거대한 공간에 그만 홀로 남은 듯 외로워 보였다. 로젤린의 가슴 한가득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 차올랐다. 노을 지는 하늘보다도 어딘가 마음 한쪽을 시리게 만드는…….

리카르디스는 목덜미를 쓸다가 그녀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그대가 와 주어 기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는 리카르디스에게서 새벽의 차가운 비를 이겨 내고 마침내 꽃을 피워 낸 은방울꽃 같은


청초한 아름다움이 비쳤다. 로젤린은 벅차오르는 감동에 손을 잘게 떨었다.

겨우 정신 차린 그녀가 머뭇거리며 원래 호위하는 자리로 걸어가려 하자,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리카르디스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리 와. 아무도 없는데 뒤에 있지 말고.”

그러고는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로젤린은 다른 사람, 기사단장, 기사단장 부관, 부단장, 부단장 부관,
수석 비서관에게 들키면 크게 혼날 걸 알면서도 기어코 그의 옆자리에 앉고야 말았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돌연 생긋 웃었다. 심장이 발밑으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커튼 틈으로 선명한 붉은 빛이 들어왔다. 테이블 위의 유리잔에 반사된 노을이 그의 볼에 한 점 묻어


총천연색으로 빛났다. 로젤린은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배가 고프지는 않고? 슬슬 그대가 올 때인 거 같아 미리 준비해 뒀다.”

테이블 위에는 스테이크와 갓 구워 아직 따끈한 식전 빵과 수프,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와 각종 과일이 꽃과 촛불


사이에 펼쳐져 있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그걸 권할 때서야 음식의 존재를 눈치챘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지만 그녀는 손을 뻗지
못했다. 가슴 안쪽을 꽉 채운 감정들로 인해 배가 부르기까지 한 것 같았다. 로젤린이 망설이고 있으니
리카르디스가 포도 한 알을 떼어 그녀의 입안에 쏙 넣어 주었다.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그가 생긋 웃었다.

로젤린은 난생 처음으로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넣고, 씹고, 삼키는 행동만을 반복했다. 먹는 모습이
관찰당하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리카르디스가 흐뭇하다는 듯 웃는 모습에 신경이 쏠려 그랬던
것일지도. 로젤린은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체한다’라는 감각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로젤린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컥컥거리며 불편해하자 리카르디스가 옆에 두었던 서류를 들었다.

“편하게 들어.”

그가 씩 웃으며 손을 뻗어 로젤린의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훔쳐 내었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로젤린이 굳어 있는


사이, 리카르디스는 다리를 꼬고 소파에 등을 느긋하게 기대었다. 서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진지했다.

스테이크 한 점, 그를 한 번 흘끗. 빵 한입, 그를 한 번 흘끗. 열심히 일하는 로젤린의 입보다도 그녀의 눈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가 쳐다보고 있을 때에는 한 없이 부담스러웠는데, 시선이 떨어지니 이상하게 아쉬웠다.
그래도 음식을 편안하게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다. 이제야 맛이 좀 느껴지기 시작해, 로젤린은 먹는 일에
금세 집중했다. 과일 한 조각 남기지 않고서야 식사가 끝났다.

로젤린은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손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아 손바닥을 마주해 삭삭 비볐다. 리카르디스는


소파의 등에 팔을 걸치고 살짝 고개를 틀어 나른한 눈빛으로 서류를 읽어 내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일정한 속도로 오르내렸다.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쩐지 터질 것 같고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로젤린은 오늘 여러 동료와 지인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또한 그 얘기들로 결심했지만 아직까지
확신을 가지지 못한 자신의 마음에 대해, 그에게 말해야겠다 생각했던 것까지도.

로젤린이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전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혹시 지금 바쁘…….”

“바쁘지 않다. 전혀.”

리카르디스가 기다렸다는 듯, 서류를 읽던 그 표정 그 자세 그대로 손에 들려 있는 종이를 휙 뒤로 던졌다.


공중을 펄럭거리며 날던 종이 몇 장이 바닥에 착지했다.

“저 서류는…….”

“내 일기다.”

“아, 일기요.”

진지하게 읽어 내던 그의 표정이 이해가 갔다. 업무만큼은 아니지만 일기도 중요했다. 칼릭스와 레이몬드가
꼬박꼬박 쓰라고 해서, 로젤린도 벌써 책 한 권 분량을 거의 다 채운 상태였다. 덕분에 나날이 글씨체도
예뻐지고 어휘력도 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유려한 글씨체 또한 일기로 단련이 된 것이 아닐까.
“그래, 무슨 일이지 로젤린?”

리카르디스가 깍지를 끼어 꼰 다리 위에 올려 두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하카브 왕자한테 청혼을 받았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상냥한 표정을 유지 중이었다.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음……. 뭐라 하면서? 최대한 자세히 듣고 싶은데.”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나 나를 그 위치에서 볼 수 있어. 발타의 힉살라가 영원히 그대의 발 아래에서 그대를
경배하며, 사랑을 바칠 것이다.’라고 한 다음에 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게 아니야.
길은 많을수록 좋으니, 그저 내 제안을 기억해 두기만 해. 분명 그대는 언젠가 일라베니아에 많이 실망하게 될
테니.’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코웃음을 쳤다. 싸늘하게 냉소하는 표정이 평소의 그와 같았다.

“알만 하군. 로젤린, 놀라운 사실 하나 알려 줄까? 나는 일라베니아가 무슨 짓을 해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대가 있어야 실망도 있는 법이거든. 황실에 들어온 이래로 기대라는 것은 가져 본 적도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어. 도리어 하카브가 그대가 일라베니아에 실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얘기를 꺼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그래도 됩니까?”

일라베니아의 황자 전하이신데?

“안 될 게 뭐가 있나. 생겨 먹기를 지긋지긋하게 생겨 먹은 곳인데. 그래. 그리고 또 무어라 하던가.”

“‘그러니 기억해. 발타에서도 한번 말했었지. 리비타의 문은 그대에게 열려 있다.’ 하고 청혼하는 거라며 다시


일러 주셨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제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욕했다. 이 개 같은 자식. 어린애한테 사탕 주면서 꼬시는 것도 아니고


…….

“그랬군. 그것 참 불쾌했겠어.”

“예. 많이 불쾌했는데 참았습니다.”

빠른 대답에 리카르디스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로젤린이 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었다. 금색의
펜던트. 오늘 아침만 해도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것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로젤린의 시선도 금색의 장신구를 떠돌았다. 잠시간 침묵이 깔렸다.

“전하.”

“그래.”

“제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하카브 전하가 전하의 우군이 되어 준다 했습니다. 엘피디오 전하로부터, 황제
폐하로부터. 보호해 주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짧은 순간이 조급했다. 실상 새벽부터
계속된 기다림이기 때문이었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 그녀가 뱉은 대답은 ‘하겠다’도
아니고 ‘하지 않겠다’도 아니었다.

“전하, 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전하를 지킬 겁니다. 하지만 저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때가 올 거라……


생각합니다.”

로젤린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금속이 흐르듯 움직였다. 자그락, 자그락. 불쾌한 소리였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는 말하지 못한다.”

“사람은 너무 쉽게 다치고 죽습니다.”

“그 또한 잘 알고 있다.”

로젤린은 꾹꾹 눌러 참고 있던 한마디를, 참고 참다가 내뱉었다.

“그게 두렵습니다.”

그녀는 제 손에 들린 목걸이를 가만 응시했다. 거절하겠다 결심을 해서 풀어 내기까지 했음에도, 하카브의 제안은


아직 그녀의 손 위에 있었다.

연약하고 위태로운 리카르디스를 보니 문득 불안해졌다. 옆에서 꼭 붙어서 지켜야겠다는 결심과, 자신이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뒤섞였다. 많은 사람들이 조언했고, 그에 따라 다짐을 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가슴 안쪽 깊은 곳부터 느껴지는 한기는 손끝을 차갑게 만들었다.

“로젤린.”

리카르디스가 아래서부터 로젤린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리카르디스의 손 위에 로젤린의 손이, 그리고 그 위에


하카브의 목걸이가 올려져 있었다. 닿은 곳부터 따스해졌다.

“어제 좋은 아침이라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이 오늘은 없을 수도 있다. 하나둘 사라져 가고,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기억했던 사람들도, 그 다음날에는 없다. 결국 내일에 남을 것은 나뿐이다. 괴로움의 몫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혼자 짊어져야만 하겠지. 죽음마저 반갑게 느껴지는 고통이다. 그걸 알기에 나는 그대의
두려움을 이해한다. 그 감정만이 나를 이루는 전부이기 때문에.”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로젤린’. 그녀의 끊어진 기억 속 리카르디스는


누군가가 떠나는 모습만을 보아 왔다. 그가 피눈물을 흘리던 때부터 사망자 명단을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때까지. 로젤린은 언제나 리카르디스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이해’가 더욱 처절하게 와
닿았다.

“우리에게 잃는다는 것은 가깝고 또 익숙하다. 겪은 적 있기에 그게 얼마나 아픈지도 잘 알아. 그래서 피하고
싶고 두렵다. 그렇지?”

로젤린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125 화.

“로젤린. 나는 사람은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리카르디스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손목뼈를 문질렀다.

“로젤린.”

“……예.”

“로젤린 에스터.”

“예.”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예.”

“가장 날카롭고 가장 빛나는.”

어딘가 익숙한 말이었다. 로젤린은 기시감의 정체를 떠올려 내었다. 자신이 무투 대회에서 우승했을 적,
황제에게 했던 입 발린 문구였다. 로젤린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하카브의 목걸이에서 벗어난 시선은 그보다도
빛나는 사람을 담았다.

“나의 검.”

리카르디스가 웃었다. 로젤린은 그를 멍하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예. 전하.”

리카르디스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아프지는 않지만 아주 단단하게. 로젤린은 저항하지 않고 그의 힘에


따라 손을 움직였다. 펼쳐진 손은 점점 웅크려졌다. 그녀의 손 안에 있던 하카브의 목걸이가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대는 나를 위해 강해져라.”

그리고 기어코, 로젤린의 손은 온전히 무언가를 잡아 낸 모양새가 되었다. 더 이상 찬란한 금색으로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던 목걸이는 보이지 않았다. 부러질 듯 연약해 보였던 남자는 한 꺼풀 무언가를 벗어던진 것
같았다. 흔들리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결코 무르지
않았다.

“나는 그대를 위해 강해지겠다.”


리카르디스의 말로 작게 웅크리고 있던 그녀의 다짐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로젤린의 안에 가득 차 있던 우울이
울컥울컥 밀려 나왔다. 눈가가 살짝 젖었다.

리카르디스를 잃는 상상만 해도 사고를 멎게 만드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카브의 제안에 갈등한 이유였다.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과거 ‘로젤린’으로부터의 학습. 가슴 안쪽을 할퀴어 그 상처마다 뜨거운 쇳물을 들이붓는 듯 녹아내리며


타오르는 감정. 두 번은 버텨 낼 수 없을 거라, 어리숙한 그녀의 사고보다 그녀의 본능이 먼저 깨달았다. 제안을
거절하겠다 결정했지만, 하카브의 목걸이를 손이 닿는 곳, 언제고 다시 꺼낼 수 있는 위치에 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까득…….

그녀의 손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금속과 금속이 비벼지다 못해 강한 압력에 서로 쓸릴 때 나는 비명 소리였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쥐고 있는 로젤린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떨림이 그녀의 혼란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꽉 쥐어져 있는 주먹에 뼈가 도드라졌다. 서로가 서로의 틈에 들어가던
장신구가 한계까지 응축되었다.

탕!

쇳더미 위로 쇠가 떨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공간을 파도처럼 덮쳤다가 사라졌다. 귀에 이명이 일 정도로 강력한
소리였다. 그녀의 손에서 후드득 목걸이의 잔해가 떨어졌다. 반쯤 구겨진 펜던트와 부속물들이 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붉은 노을에 반짝거리며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로젤린이 주먹을 쥔 채, 그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예, 전하.”

15

문을 열자마자 보게 된 광경에 칼릭스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알몸의 남자가 방 안을 배회 중이었다.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이지? 칼릭스는 누가 볼까 두려워 얼른 들어가 문을 잠갔다.

알몸의 남자와 단둘이 있기 위해 서두르는 자신의 모습을 문득 돌이켜 본 칼릭스의 얼굴에 회의감이 짙게 드리웠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레이몬드만큼이나 장신인 잿빛 머리의 남자는 태평하게 돌아다니다가 와인장을 발견하고는 화색을 지었다.

“오, 비싸 보이는 게 많은데.”

남자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와인장에 진열된 것 중


가장 비싼 와인이었다.

남자가 손날로 병의 목을 퍽 소리 나게 쳤다. 윗부분이 칼날로 잘린 것처럼 예리한 단면을 보이며 떨어져 나갔다.
유리 조각이 들어가는 걸 염려한 것인지 단면을 후후 불던 남자가 와인을 들이켜고는 크으, 아저씨 같은 소리를
냈다.

아끼는 와인이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음에도 칼릭스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어이없어서.

“……마카롱 님. 언제 오셨습니까?”

“아까. 빨리빨리 좀 다니자.”

마카롱이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편해 보였으나 꼴 보기 싫었다. 알몸이다 보니 유독 중심이 눈에 띄었다.

“옷을…… 드릴까요?”

입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은 “아니. 곧 날아가야 해서 귀찮고.”라는 마카롱의 대답에 무산되었다. 정말
보기 싫었다. 칼릭스는 그를 최대한 외면한 채 테이블로 걸어가며 말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물건이 도착했거든요.”

칼릭스가 서랍을 뒤적여 가죽으로 감싼 물건을 조심스럽게 탁자에 올려놓았다. 마카롱은 와인 병을 대충 소파에
던지고 그것을 냉큼 집었다.

“그거 맞네.”

칼릭스는 소파에 번지는 붉은 자국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파편’입니다.”

사냥 대회 당시 검은달의 암살자들이 사용했던 무기로, 예전에 로젤린에게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협조로 얻어 낸 암기는 붉은수레바퀴 영지 내에 있는 성에 줄곧 보관 중이었다.

몇 주 전, 마카롱이 ‘파편’을 구할 수 있는 방도가 없겠냐며, 없어도 구하라는 말도 안 되는 주문만 하지


않았더라도 세상에 나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파편’의 위험성이 가장 대두되었던 사절단이 돌아왔을 때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왜 지금 ‘파편’을 구해 달라고 한 것일까. 그에 대한 의문은 금세 풀렸다. 황성에 또다시
위험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발타의 사절단이라는.

마카롱은 성급한 손놀림으로 끈을 풀어 감싸진 가죽을 벗겨 내었다. 그러자 녹슬어 있는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카롱의 감각은 평범한 인간들은 결코 보지 못할 무형의 기운을 읽어 내었다. 단검에서 검고 붉은 것이 일렁였다.

마카롱의 눈이 가늘어졌다. 발타에서 보았던, 인간들의 몸에 심어져 있던 검붉은 기운. 거칠게 박동하며 사납게
날뛰는 마력. 이것을 마력이라 불러도 되는 것일까? 씨앗은 같으나 발아 과정과 꽃의 종류가 다르다. 인간들도
참 대단하네.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대?

마카롱이 단검을 얼굴 가까이 들었다. 칼릭스가 몸을 움츠리자 사납게 생긴 남자가 그를 비웃었다.

“쫄지 마라.”

“……네.”

“고분고분한 게 귀여운 맛이 있었네. 알았으면 진즉에 친절하게 대해 주는 거였는데. 아주 쪼금.”


“볼일이나 보시죠, 좀!”

마카롱이 낄낄 웃었다. 그는 단검을 들고 샅샅이 훑었다. 남아 있는 ‘파편’의 양은 아주 적었으나, 이


정도로도 인간에게는 치명적이라 했다.

‘흠…….’

잠시간 고민하던 마카롱이 단검으로 제 손등을 그었다.

“마카롱 님!”

칼릭스가 악 소리를 지르며 마카롱의 손을 거칠게 잡아챘다. 하지만 이미 상처를 통해 ‘파편’이 스며든 후였다.

“미쳤습니까?”

“이놈의 자식이?”

마카롱이 칼릭스를 퍽 쳤다. 칼릭스는 옆구리를 붙잡고 인상을 썼다. 힘은 왜 이렇게 센 거야?

“나한테 안 통하는 거 빤히 알면서 그러니. 오,”

마카롱이 손등을 보며 실실 웃었다. 좀 미친 사람 같았다.

“‘파편’이 주제도 모르고 사납게 날뛰고 있어.”

칼릭스는 초조한 표정으로 마카롱의 상처와 얼굴을 번갈아 봤다. 로젤린이 ‘파편’을 결국 이겨 냈으나, 며칠간
생사를 오갈 정도로 마독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릭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마카롱은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칼릭스의 혈압이 올랐다.

마카롱은 눈을 감고 몸 안을 들여다보았다. ‘파편’은 인간의 신체를 흉내 낸 겉껍질을 헤집고 날카롭게 내부로


파고들었다. 검붉은 마력이 혈관처럼 몸 안에 퍼졌다. 파고든 신체를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며 지배하려던 ‘파
편’은 곧 짙고 깊은 암흑 속에 발길을 멈췄다.

검은 바다가 ‘파편’을 도리어 뒤덮기 시작했다. 퍼졌던 길을 따라 빠른 속도로.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춤추던 ‘파편’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하나의 촛불까지 남김없이 집어삼킨 마카롱이 눈을 떴다. 바로 앞에서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칼릭스가 보였다. 마카롱이 씩 웃었다.

“별거 아닌데?”

칼릭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종족은 정말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다.

“인간들은 고작 이런 거로 난리가 나는구나…… 가엾어라…….”

마카롱이 애처로운 눈빛을 가장하며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손등의 상처도 언제 있었냐고 말하는 양 말끔했다.
칼릭스는 제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에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다행이긴…… 했는데…….

“약해 빠져 가지고서는…… 세상에, 애벌레랑 다를 게 뭔지…….”

열 받았다. 칼릭스는 마카롱을 매섭게 노려보았고, 마카롱은 기분 나쁘게 히죽댔다.

마카롱은 펄떡펄떡 날뛰는 칼릭스와 놀아 준 후, 테이블 위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녹슨 암기. 자신에게는 하등


쓸모도 소용도 없는 것.

일정량 흡수하긴 했으나 아직 ‘파편’은 잔존하고 있었다. 마카롱은 잠시 그것을 보다가 일어섰다. 시야 정면에
마카롱의 신체가 한가득 들어와 칼릭스는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마카롱을 바라볼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의 형체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창백한 피부색에서 갈색으로, 검은색으로 검게 물들며 무너졌다.

칼릭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찰나의 시간이 지났다. 자리에는 검은 그림자 같은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흐르는 듯, 무너지는 듯, 흩어지는 듯, 연기같이, 밤하늘을 한 줌 떠 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칼릭스는 잠시 말을 잃었다. 온전한 ‘그것’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것’은 바람에 흐르는 구름처럼 느리게
움직이며, 탁자에 있는 암기를 완전하게 덮쳤다.

칼릭스는 마카롱의 의도를 알아챘다. 약해 빠졌다고 놀리긴 했으나, ‘파편’이 인간에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은
마카롱도 잘 알고 있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온전히 흡수하려는 것이 아닐까.

검은 안개 안에서 무언가가 물결치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주저하며 손을 뻗었다. 마카롱의 표면에 닿은 손바닥에
간지러운 무언가가 스쳤다. 칼릭스는 용기를 내서 손을 더 깊이 넣었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밀도
높은 공기 같기도 하고, 미세한 모래 입자 같기도 했다.

이게 마력인가? 칼릭스는 몸을 떨었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보지 못할 종류의, 힘의 응집체. 경이로운 광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검은 안개 뒤로 촛불이 아른하게 비췄다.

검은 하늘의 별같이 빛났다. 아름다웠다.

126 화.

마카롱은 곧 황성으로 돌아왔다. 고고한 하얀 성들이 하늘로 뻗어 있는 일라베니아 황실 성은 미관상 보기에는


좋았다. 객관적인 평가였다. 그게 주관적인 평가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마카롱은 이 장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보고 있기만 해도 짜증나고, 어딘가 껄끄러웠다. 자주 밖을 떠돈다고 해도,
그 껄끄러운 장소를 집이라도 되는 양 꼭 돌아가는 이유는 오로지 로젤린 때문이었다.

수풀 사이에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붉은 잡초를 보고는, 색이 예뻐 먹고 싶다며 고민하던 로젤린이 떠올랐다. 그


모습만 생각하면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독수리는 밤하늘을 날다가 에휴 한숨을 쉬었다.

로젤린의 방. 큰 창을 뒤덮는 그림자는 곧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네발짐승으로 변했다. 마카롱은 앞발을


할짝거리고 세수를 했다.

커다란 침대에서 뒹굴고 있으니 헤사가 들어왔다. 시트를 갈고 고양이 미미를 실컷 만진 소년이 뿌듯한 얼굴로
방을 떠났다. 후에 로젤린이 돌아왔다. 미미를 발견한 로젤린이 침대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고양이의 보드라운
배에 얼굴을 묻었다.

“어디 갔었어.”

“아, 칼릭스한테.”

“뭐 했는데?”

“뭐 좀 먹고 왔어.”

‘파편’이라는 이름의 무언가를.

로젤린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고양이를 보았다. 나를 두고 혼자 뭘 먹고 왔다고? 딱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었다.


고양이가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어린애는 먹는 거 아냐.”

“나 다 컸어. 스물세 살.”

“이게 어디서 먹히지도 않는 공갈을 쳐. 통할 사람한테 하자.”

로젤린이 칫 하고는 다시 마카롱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마카롱이 골골대고 있자 로젤린이 아차 하며 일어섰다.


다급하게 찬장에서 꺼낸 물건은 샴페인이었다. 그녀가 무투 대회에서 우승했을 당시 기사들이 마시던 종류였다.

마카롱이 반색하며 잽싸게 인간 여자 모습으로 의태했다. 두 사람이 부어라 마셔라 하는 사이 커다란 샴페인이
금세 동났다. 취하지 않는 두 사람은 입맛만 다셨다. 취하는 기분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상큼한 과실 향을
맡으니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로젤린은 정말 취한 인간처럼 좀 들떠 보이는 기색이었다. 왜 기분 좋아 보이냐 물었더니,

“전하가…… 진짜…… 너무 아름다워.”

라는 답변이 돌아와 마카롱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은 마카롱의 심심한 반응에 열성적으로
리카르디스의 어디가 아름다운지 설명했다. 반짝거리는 눈가가, 오뚝한 콧날과 각진 턱선이, 탄탄한 가슴이,
복사뼈가!

“…….”

마카롱은 복사뼈가 어떻게 생기면 아름다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젤린은 옷을 갈아입고서는 창문을 통해
나갔다. 또다시 리카르디스에게 간다고 했다.

고요한 방이 밤에 잠겼다. 로젤린이 나간 창을 가만히 바라보던 인간 마카롱은 다시 고양이로 돌아갔다.

고양이는 소파에서 테이블로 풀쩍 뛰었다. 달큼한 과일의 잔향에 꼬리가 절로 살랑거렸다. 마카롱은 쓰러져 있는
샴페인 입구를 할짝거렸다. 이상하게 잠이 몰려왔다. 정말 취하기라도 한 것일까.

한 마리의 고양이가 탁자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 * *

아아아악!

비명 소리에 깨어난 마카롱은 자신이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를 감싼 공기에 피 냄새가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가슴 안쪽이 무서울 정도로 박동하고, 온몸이 당장 흩어질 것처럼 떨렸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부드러운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나는 지금 도망치고 있다!

귓가에 여러 명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도망쳐야 해! 숨어야만 해.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깊은 곳으로! 이


다급한 뜀박질은 그 목소리를 따른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누가 쫓아와서? 뭐가 무서워서!

뒤를 돌아보았다. 밤중에도 환하게 빛나는 백색의 성이 보였다. 헛구역질이 나서 잠시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머리를 숙이자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그런데 뭐지, 이 피 냄새는. 어디서, 어디서 계속 피 냄새가…….

얼굴 위로 흐르는 게 눈물인지 피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숨어야 해. 도망쳐야…… 더 깊은 곳으로……. 그런데 손에 묻은 피는 누구의 것이었더라. 머리가 멍했다. 생각


위로 목소리가 덧대어졌다. 누구도 찾지 못할 곳으로…….

아아악,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금속 무기의 날카로운 소리가 가슴을 두드리고 헤집었다.

아이들이 엉엉 운다. 그 소리에 가슴이 저며 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디 있지? 둘러보아도 아이들은 없었다.
어둑한 숲길이었다.

빨리 가자. 빨리 도망가자. 더 멀리.

아, 피가.

자꾸만 피 냄새가.

* * *

밤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환한 풍경이 창밖에 펼쳐져 있었다. 밤하늘의 별보다 많은 수의 등불이 하얀
성을 둘러싸고 빛나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으나, 다른 나라에서 방문한 귀족들은
번번이 놀라운 광경에 입을 모아 찬사했다. 밤에도 영광으로 빛나는 일라베니아!

“아름다워.”
하카브 또한 하늘까지 닿을 것 같은 등불의 향연에 크게 감명 깊어 했다. 소파에 편안하게 드러누워 보는 창은
마치 한 편의 명화라 보아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로 인해 이따금 빛이
흔들거렸기에, 살아 있는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위명이 헛되지 않는군. ‘축복의 밤’이라……. 어둠을 몰아내는 영광은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어.
디에즈, 그대도 구경하지 그래. 매년 보는 거라 감흥이 없나?”

디에즈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술을 따르고, 삼키고, 테이블에 놓고, 다시 따르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말술인 건
알고 있지만 혼자서 두 병을 넘게 마셨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다니. 술 한 잔도 못 마실 것처럼 생겨
놓고서는.

“디에즈. 오늘따라 수심이 깊어 보여.”

“골치 아픈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왕자부터 시작해서.”

디에즈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 봤다.

“농담도 잘하긴.”

“진담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청혼을…… 하…… 설마 로젤린 경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으실 테고.”

“생각보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녀 뒤에 있는 인물들이 워낙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기대는 살짝 접고


있다.”

“살짝이요?”

“한…… 이 정도.”

하카브가 테이블 위에 있는 냅킨을 살짝 접었다. 모서리를 새끼손톱만 한 정도로. 디에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하카브가 피식 웃으며 포도를 집어 먹었다.

“시작이 반이라지 않나.”

디에즈는 뭐라 말하려다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하 한숨을 쉬었다. 항상 번듯하게 펴져 있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감정이 드러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보였다.

순간, 디에즈의 눈빛이 변했다. 부드러운 눈매에 날카로운 빛이 서렸다. 그의 시선이 창문이 있는 방향으로
흘렀다.

“밤손님이로군요. 왕자의 피를 취하고 싶은.”

“이런. 며칠은 더 두고 볼 줄 알았더니. 성격 급한 사람들일세.”

디에즈는 테이블 위에 켜져 있던 초를 후, 하고 불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방 안에 있던 불을 전부 소등했다.


방 안이 금세 어둠에 잠겼다. 디에즈와 하카브의 호위들이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도록 기다렸다.

창문 밖에서 금속음이 연쇄적으로 울렸다. 창을 통해 내려다보니 복도에서 흰색 제복을 입은 자들과 어두운 회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싸우는 중이었다.

“안타깝게도 멍청하기까지 해서 호위들에게 걸린 것 같은데…….”


하카브가 웃었다.

“최근에 리카르디스 황자가 성 주위의 병력을 늘려 줬거든. 나를 위해.”

“리카르디스가 서류를 던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그거 무척이나 보고 싶은걸.”

하카브가 정말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쨍그랑!

그때, 창문이 깨지며 파편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디에즈가 서 있는 창이 아닌, 테라스 쪽이었다.
생각보다는 아주 멍청한 건 아닌가. 양동 작전이라…….

디에즈가 창의 커튼을 쳤다. 방 안은 한층 어두워졌다. 암살자들은 어둑한 내부에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초


하나 켜지지 않은 방 안은 커튼 너머로 비치는 희미한 등불의 빛으로 어렴풋이 형체만 알아볼 정도였다.

방 안에 서 있던 하카브의 호위들이 검을 빼 들었다. 순수한 마인들로 이루어진 호위 부대였다. 디에즈가


암살자들을 향해 걸어가며 호위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나서지 마세요.”

하카브가 포도 한 알을 더 입에 넣으며 웅얼거렸다. 어쩐지 웃음기가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아순. 디에즈 황자 전하께서 나서지 말라 하신다.”

두 명의 침입자가 자세를 낮추고 빠르게 달려왔다. 어설픈 위협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법 훈련된 암살자인
듯했다. 하지만 검은달의 암살자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라 봐도 무방했다.

침입자의 검이 사선을 그었다. 무심한 눈으로 그 공격을 바라보던 디에즈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등에
부딪친 무기가 부서져 날아갔다. 암살자가 주춤 물러서며 당황했다.

쉬익.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디에즈의 손이 남자의 목을 틀어쥐었다. 컥, 커헉. 비명은 짧았다. 순식간에 목이


뒤틀린 한 남자의 인영이 허물어졌다.

다른 암살자는 디에즈를 지나쳐 하카브를 향해 달렸다. 디에즈는 뒤에서 그의 머리채를 잡아 탁자를 향해 찍어


내렸다. 탁자가 부서지며 과일이 사방으로 날았다.

디에즈가 부서진 나무 조각을 집고는 암살자의 머리에 천천히 집어넣었다. 단단한 두개골의 저항은 그의 힘 앞에
의미 없이 무너졌다. 파삭, 뼈와 근육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피가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와인이 튀고 피가 흐른 그 와중에도 디에즈의 옷은 더러워지지 않았다. 디에즈는 거울 옆에 장식되어 있던 화병의


꽃을 뽑아 바닥에 버렸다. 화병 안에 남은 물이 찰랑거렸다. 그는 그대로 자신의 손에 물을 부어 전투의 흔적을
씻어 냈다.

디에즈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의 전투도 소강상태인 듯했다. 흰 대리석 위로 피가 너절하게 뿌려져 있었다.
창문 유리에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린 그의 모습이 비쳤다. 디에즈는 다시 손으로 꾹꾹 눌러 미간의 주름을 폈다.

디에즈는 유리에 비친 모습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성 여기저기를 빛내고 있는 등불이 보였다. 밤하늘 별보다
밝고 환한 빛무리가 은하수같이 수없이 이어져 있었다.

아름다웠다. 영광의 일라베니아.

그는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환하게 빛나는 하얀 밤 속에서 기어코 어둠을 찾아내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

127 화.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야간 경비를 맡았다. 발타의 왕자 하카브와 왕녀 간제가 머무는 성이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그놈이 뭐가 예쁘다고 밤을 새워 경비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 직접 기사단장
스타스에게 항의했다가 혼났다. 전쟁이 일어나면 책임질 수 있느냐는데, 확실히 그건 두 사람이 책임지기 힘든
사안이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경비하겠습니다. 기사단장 스타스는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 손에 쿠키를 쥐여
주고 내보냈다. 두 명은 기사단장실을 나오며 묘한 표정을 했다.

“…….”

“……지금 우리를 로젤린 경 취급하신 것 같은데?”

요즘 다들 간식을 가지고 다니더라니, 묘하게 신경 쓰였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이것을 칭찬 간식이라


명명했다. 어쨌거나, 기껏 받았으니 맛있게 먹는 게 도리였다.

레티시아는 마카다미아 쿠키였고 에버하르트는 치즈 블럭이 박힌 쿠키였다. 반반 나눠서 사이좋게 나눠 먹다가


헤사를 만나 입안에 넣어 주었다. 짐을 잔뜩 들고 있는 헤사는 볼을 다람쥐처럼 빵빵하게 채우고는 갈 길을
떠났다.

하카브가 머무는 성에 온 두 사람은 물보라 기사단의 하급 기사 두 명과 교대했다. 다양한 기사단에서 차출된


기사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다.

시간만큼 제멋대로인 게 없었다. 어찌나 밤이 긴지. 똑같은 여섯 시간이라 하더라도 낮보다 밤이 훨씬 길게


느껴졌다. 모두가 만든 정적이 지루했다. 심심한 두 사람은 가위바위보와 끝말잇기를 했다. 에버하르트가
헤사에게 배워 온 실뜨기 놀이도 했다.

늦은 밤까지도 성의 시녀들이 돌아다녔다. 비슷한 처지라 가볍게 인사하고 스쳐 지나갔다. 시녀들이 꺅꺅 소리를
내며 에버하르트를 몰래 훔쳐봤다. 에버하르트는 멋진 척하며 어깨를 쭉 펴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어 눈을 가늘게 떴다.

“봤어, 레티시아?”

“어…… 네 멍청한 모습…….”

에버하르트가 씩씩댔다. 최근 키가 훌쩍 커서 비등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촉새 같고 바보 같은데. 이런 남자의 뭘


보고 좋아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레티시아. 너는 어떤 남자가 좋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남자.”

에버하르트가 풀 죽었다. 그런데 순간, 그의 분위기가 변했다. 전투 직전의 날카로움이 에버하르트의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이상을 눈치챈 레티시아가 시야를 넓게 했다. 무언가 거슬렸다.

“레티시아.”

“알아.”

벌레 우는 소리가 멎었다. 무언가에 놀란 새 두 마리가 갑자기 날아올라 두 사람의 위를 가로질렀다.

“3 번 주요 호위 지점!”

에버하르트가 소리를 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무에서 암살자 다섯 명이 쏟아졌다. 기사들을 피해


들어갈 수 없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는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티시아가 왁 소리를 터트렸다. 일정 거리를 두고 경비 중인 다른 병사와 기사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3 번 주요 호위 지점, 남자, 다섯! 아니.”

레티시아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내부로 두 명 침입!”

그녀가 말을 마치는 그 순간 암살자가 짧은 검을 내질렀다. 레티시아는 스으 숨을 들이마시며 바닥에 발을 디뎠다.

쿵!

그녀의 허벅지가 단단하게 압축되었다. 온몸에서 전달된 팽팽한 힘이 그녀의 검에 실렸다. 돌도 부숴 버릴 듯한


파괴력이 남자의 무기와 함께 팔을 잘라 내었다. 레티시아의 살벌한 얼굴 위로 피가 튀었다.

“아아악!”

레티시아는 팔이 잘린 남자를 발로 차 넘어뜨리고 에버하르트에게 암기를 던지려는 암살자의 머리채를 잡아서 벽에


찧었다. 한 사람을 빠르게 무력화 한 에버하르트가 눈짓으로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레티시아가 이를 갈았다. 첫 실전을 감히, 하카브를 호위하는 것에 쓰게 만든 이, 쓸모없는 자식들…….

감정이 실린 묵직한 공격들이 암살자들에게 쏟아졌다.

후웅!

그녀가 휘두르는 검에서 예사롭지 않은 소리가 났다. 레티시아의 검격에 암살자들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흩어졌다.

암기 따위가 날아와도 귀신같이 알아채 쳐 내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했다. 황실 기사 특유의 탄탄한
기초도 빛을 발해,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른 호위 인력이 그들을 도우러 올 무렵에는 이미 정리가 끝나 있었다.

에버하르트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암살자를 발로 차는 태도가 자연스러웠다.


지원하러 온 기사들이 움칠 몸을 떨었다. 같은 하급 기사인데 묘하게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레티시아는 그 새에 살아 있는 암살자 두 명을 포박해 놓았다. 그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지원하러 온 기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 많으십니다. 처음 뵙는 분들이군요. 하얀밤 기사단의 하급 기사 레티시아입니다.”

피가 묻어 있는 얼굴로, 피가 묻어 있는 손을 내미는 것치곤 태평한 태도였다.

* * *

황성이 왈칵 뒤집혔다. 타국의 왕족이 간밤에 암살 위협을 받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불의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2 황자 리카르디스가 황실 기사단의 협력을 받아 미리 호위 병력을 늘려 둔 덕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암살자를 잡아 낸 것도 하얀밤 기사단의 하급 기사 두 명이었으니, 리카르디스의 평가가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은 당연했다.

암살자들은 그 자리에서 사살된 것이 다섯. 두 명은 생포했으나 고문하던 중 혀를 깨물고 자결했다.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발타의 후계자를 죽이고 싶어 하는 자가 있다는 암시만 남긴 사건이었다.

하카브 왕자는 제 안위가 달린 문제임에도 넉넉한 태도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일라베니아의 건국일을
모두가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가 아니던가. 그러니 모두가 기뻐할 만한 결과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짧게
언급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그가 강대국의 압력 때문에 속없이 구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날카롭게 갈린 무기가
검집에 들어가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완성되지 못한 검은 검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가 모든 일에 대비책을
세워 뒀음을 알 수 있었다.

암살자를 간밤에 보낼 정도로 하카브의 죽음을 간절히 원하던 자들도 몸을 웅크렸다. 그들이 건들고 있는 게
벌집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아챈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그걸 이제야 알아 처먹었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등신 같은 작자들이라고도 했다. 분명 인간이라면
그런 생각을 못할 것이니, 절지동물의 형상일 것이며, 그것도 머리가 없을 게 분명하다고 악담했다.

하카브는 자신이 머무는 곳을 찾은 리카르디스를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감격, 감동, 환희. 자신의
호위 인력을 빼서라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겁니까? 라고 묻는 듯한 눈이었다.

“리카르디스 황자, 저를 위해…….”

진정성 있게 떨리는 하카브의 목소리에 리카르디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안에서 들끓는 욕설이 행여나
빠져나올세라, 아주 꼭꼭.

하카브가 갖은 수작질로 로젤린을 흔들어 놓은 직후라 감정이 더욱 악화된 시점에서 하카브에게 감사 인사를 듣고
있으려니 절로 열이 뻗쳤다. 하카브가 일라베니아에서 나쁜 일을 당하면 안 된다는 것쯤이야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암살자들의 성공을 은근히 바라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카브는 국경을 넘은 우정에 감격하며 리카르디스를 끌어안았다. 심지어는 양쪽 볼에 키스하기까지.


리카르디스는 제 25 년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살의가 넘친 적이 있던가 다시 삶을 돌이켜 보았다.

물론 하카브를 마주하고 있는 얼굴은 변함없이 근사했다. 하카브가 같이 식사라도 하자며 리카르디스의 손을


부드럽게 쓸었다. 리카르디스는 생긋 웃었다.

“제국에 온 손님이 큰일을 당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일라베니아의 축제를 위해 나쁜 일을 덮어 주신 배려는


감사하나,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재정비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 때문에 처리할 일이 있어 급히 돌아가
봐야 합니다, 왕자. 식사 초대는 다음에 부탁드리지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마음 잘 추스르시고 다음번에도 웃는
모습으로 반겨 주시길 바랍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힘써 주셨는데……. 너무 제 생각만 했군요. 물론입니다, 황자.”

하카브가 리카르디스의 두 손을 꽉 쥔 채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잘생기고 아름다운


리카르디스의 얼굴. 냉철함이 언뜻 비치는 그의 행동에서는 어떤 파문도 읽어 낼 수 없었다.

하카브는 사절단 이후 리카르디스를 줄곧 주시해 왔다. 깊게 파고들지 않아도,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단단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행동으로부터 고스란히 드러났다. 단순히 부하를 위하는 것치고는 과할 정도였다.

그것이 잘 갈고 닦아 날카로운 검을 아끼는 마음인지 다른 종류의 마음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는 어쨌거나.

그러니 로젤린을 결혼이라는 수단으로 뺏어 오려 했다면 이렇게 웃고 있지만은 못할 텐데. 정말 그녀에게서 어떤


말도 듣지 못한 것일까?

‘이런…… 정말 기대를 해 봐도 되는 것인지.’

하카브의 미소가 짙어졌다. 로젤린도 로젤린이지만 이 남자가 흔들리는 모습도 보고 싶었는데. 조금은 아쉬웠다.

그때 리카르디스가 아차,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품을 뒤지더니 곱게 자수가 놓인 주머니를 하나 꺼내었다.

“소란에 잃어버리신 것 같더군요, 왕자. 제 기사가 주워 온 물건입니다.”

하카브가 리카르디스의 손에서 주머니를 건네받았다. 한 겹의 천 안쪽에서 잘그락잘그락 굴러다니는 작은 금속의


더미가 느껴졌다. 하카브는 그것의 정체를 눈치챘다.
‘이거 참. 정말…….’

주머니 입구를 열어서 보니, 예상했던 대로 자신의 목걸이였다. 로젤린에게 줬던 청혼의 증표가 처참하게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하카브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흘렸다.

128 화.

“오, 이럴 수가.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황자. 주워 준 기사가
누구입니까?”

“상급 기사 레이몬드 경입니다.”

“레이몬드라면…….”

“저번 방문 때 왕자와 첫 번째로 인사를 나눈 자입니다.”

아, 그 남자. 발타식 인사를 나눌 때 입을 꼴 보기 싫게 쭉 내밀며 제 볼에 침질한 남자였다. 로젤린에게 준


목걸이를 다른 사람이 어딘가에서 주웠을 리 없었으나, 뭐라 추궁할 수도 없었다. 하카브는 가볍게 코로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짓는 것으로 감정을 정리했다. 아쉽긴 해도 로젤린이 그렇게 쉽게 넘어오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쪽도 쉽게 포기할 마음은 없지만.’

한두 번 차인 정도로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이기는 하지만, 청혼하며 줬던 물건을 부숴서 다른 남자의 손에


들려 보내다니. 아주 약간 상처받기는 했다. 하카브가 생긋 웃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때마침…….”

그는 말을 꺼내며 소매를 뒤적였다. 그의 손에 푸른색의 싸구려 펜던트가 딸려 나왔다. 그걸 보는 순간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한층 싸늘하게 굳었다.

“저 또한 ‘레이몬드’ 경의 분실물을 가지고 있었군요. 돌려줄 때를 찾아 다행입니다. 레이몬드 경에게 제 말과


함께 전해 주실 수 있을는지요. 발타 왕실의 문양이 새겨진 중요한 물건을 되찾아 주어 고맙다. 보답하고 싶으니
언제고 찾아와 달라고요.”

하카브가 리카르디스의 손에 펜던트를 꼭 쥐여 주며 가까이에서 눈을 맞췄다.


“부디.”

클로에는 주인이 없는 집무실에서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인기척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을 보니 성의 주인이


귀환한 모양이었다. 한데 그 발소리가 누구에게 쫓기는 듯, 혹은 무언가를 쫓아가는 듯 급박하기 그지없었다.

쾅!

문이 열렸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 쪽을 쳐다보았다. 라고슈 최북단의 공기가 저렇게도 냉혹할까.


시종 대신 제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리카르디스의 얼굴에 싸늘함이 감돌았다. 문을 먼저 열려고 하던 시종이
무안한 손을 허공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성난 기색으로 단추 세 개를 쭉 풀었다. 열린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이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내쉬는 리카르디스의 행동에서 분을 삭이려는 노력이 비쳤다. 하지만 곧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다시 씩씩. 그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뒤따라 들어온 잇세리온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리카르디스의 주위를 맴돌았다. 리카르디스는 한쪽 손은 허리에


얹고, 한쪽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오 분 정도 시간을 보낸 후 입을 열었다.

“잇세리온.”

“예, 전하.”

뿌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제발 하카브도 지금 나만큼 열 받았을 거라 말해라.”

잇세리온은 여유작작한 미소를 띠고 있던 하카브의 얼굴을 떠올렸다. 잡기를 집어 던지지 않는 것이 용해 보이는


리카르디스보다 훨씬 평온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잇세리온은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타국에 발을 들여 로젤린 경에게 접근했으나, 그 야망이 코앞에서 부서지다 못해 산산조각이 난
채로, 현재 로젤린 경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리카르디스 전하에게 그 부서진 야망을 건네받은 하카브가! 훨씬
더 상심하고 속이 쓰라린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전하! 부서진 목걸이를 건네는 전하의 미소가 얼마나
근사했는지, 저라면 얄미워서 아주 바닥을 굴렀을 겁니다!”

잇세리온이 필사적으로 항변하자 리카르디스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후우……. 숨결


하나하나에도 분노가 뚝뚝 떨어졌다.

“좋아, 그럭저럭 기분이…….”

돌연 기세를 바꾼 리카르디스가 소파에 있던 쿠션을 낚아채듯 잡아 벽으로 집어 던졌다. 부드러운 섬유가 그런


파괴적인 소리를 낼 수 있을 줄이야. 클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어쨌거나 잇세리온의 필사적인 항변에도
불구하고 리카르디스의 기분은 좋아지지 않은 듯 보였다. 그 와중에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벽에다 던진 그의
인내심이 대단할 뿐이었다.

클로에는 분노에 제 몸을 맡기고 활활 불타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가만히 지켜보며 홍차를 저었다. 우유가 섞여
금세 탁해졌다. 각설탕을 네 개 넣을 무렵에는 리카르디스도 간신히 무언가를 집어던지지 않게 되었다.

“추한 모습을 보였군. 그래, 무슨 일이지 클로에?”


다리를 꼬며 소파에 기대는 리카르디스는 평소와 달리 야성미가 넘쳤다. 클로에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서류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하카브 암살 건에 발을 들인 귀족 목록을 알아 오라고 하셨잖아요, 전하.”

“그래, 그 쓸모없는 인간들. 가만히나 있던가,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머저리 같은
작자들. 뭘 하나 해도 그런 식이겠지. 불쌍한 인생들이로군.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외딴곳에 홀로 쓸쓸하게
죽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평소보다 더 독기 어린 비난이었다.

“그거 말고도 좋은 소식을 들고 왔으니 그만 화 푸세요.”

“좋은 소식이라. 그대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니. 그건 좀 기대되는군.”

리카르디스는 별다른 감흥 없이 말을 내뱉었다가, 클로에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유순한
인상으로도 음흉함은 가려지지 않았다. 뭔가 기분이 싸했다.

“하지 마.”

리카르디스의 말에도 클로에는 예의 그,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였다.

“로젤린 경의 드레스가 완성되었는데, 세상에. 정말 너무너무…… 너어무 예뻐요.”

리카르디스의 손이 움찔했다. 클로에가 그 모습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파트너가 없는 것 같던데…… 로젤린 경에게.”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하지그래.”

클로에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전부 말했는걸요? 좋은 소식.”

싱긋 웃은 클로에가 가볍게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방을 나서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돌연 다시
리카르디스를 돌아보았다.

“아차.”

리카르디스가 찻잔을 초조하게 만지다가 그녀의 뒷말에 몸을 떨었다. 홍차가 흘러넘쳤다. 클로에와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딱 부딪쳤다. 눈매가 능글맞게 휘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로젤린 경의 드레스가 공교롭게도 하얀색이었던 것 같기도…….”

리카르디스가 두 손을 들었다. 귓가가 절로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건국일을 맞이한 무도회에 하얀색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황족, 또한 황족의 파트너뿐이었다. 애초 그녀의 드레스를 제작할 때 황족의 파트너가 되리란
사실을 감안했다는 것이었다.

“그만 괴롭히고 나가 봐.”


“네에, 아 맞다. 네스터 경도 파트너가 없다지요? 로젤린 경의 일정을 물은 뒤 꽃집에 갔다던데요? 어쩜,
낭만적이기도 해라.”

“젠장,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리카르디스가 빠르게 클로에를 지나쳤다.

“네스터 경은 꽃다발을 들고 가는데 전하는 그냥 가세요? 빈손으로?”

클로에의 말에 그가 급하게 멈춰서 거울 속 모습을 한번 확인했다.

“괜찮다. 나는 얼굴이 있으니.”

“네에?”

그는 어이없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웃었다.

“귀엽기도 하시지.”

잇세리온이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황급히 리카르디스를 따라 나갔다.

* * *

바다협곡의 네스터는 잠시 제 목적을 잃고 자리에 서 있었다. 주위의 구경꾼들이 그러하듯, 똑같이.

헤사가 달리는 힘을 이용해 그대로 나무를 밟고 올랐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가뿐한 몸놀림이었다. 두세
걸음 만에 사람의 키보다 높이 올라간 소년이 나무에 쿵, 발을 굴렀다. 위로 자란 나뭇가지를 디딤돌 삼은
것이라, 그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향했다. 몸에 추를 달고 있는 듯 묵직한 공격과 함께였다. 자그마한 인영이
회전하며 공중에 날카롭게 검을 그었다.

로젤린은 발을 살짝 움직여 반걸음 물러서는 것만으로도 공격을 피해 냈다. 소년의 목검이 공중을 가르고 바닥에
박혔다. 헤사는 검을 그대로 손에서 놓아 버리고는 앞으로 굴렀다. 그리고 허리와 엉덩이가 바닥에 닿기 전,
어깨와 팔로 몸을 튕겨 내었다. 로젤린을 향한 발차기가 칼날처럼 예리했다.

턱, 로젤린이 매서운 발차기를 손으로 막아 냈다. 소년이 공중제비로 폴짝폴짝 물러났다. 구경꾼들은 감탄하는
소리를 차마 막지 못하고 흘려 버렸다. 네스터도 본 목적을 잊고 손뼉을 쳤다.

사람들의 소리에 헤사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수습 기사, 하급 기사 할 것 없이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집중하느라 구경꾼들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헤사가 어색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매일
로젤린의 머리카락으로 공예를 하는 솜씨는 다 어딘가에 버리고 온 듯이.

로젤린이 한층 더 밝아진 얼굴로 다가온 헤사의 머리를 살살 쓸어 주었다. 바람이 불며 소년의 머리를 더욱
흐트러트렸다. 헤사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머리카락과 로젤린의 손길이 간지러워 눈을 감았다.

[헤사, 좋은 아침입니다.]

하카브에게 이용당했던 이틀 뒤의 아침. 로젤린이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를 건네며 헤사를 맞이했다. 헤사는
문가에 가만히 서 있다 눈물을 흘렸다. 주적이자 타국의 왕족의 말에 혹해서 제 직속상관을 속이는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르고도, 소년은 어떤 벌도 받지 않았다. 로젤린은 물론이고 일라베니아 2 황자이자 하얀밤 기사단의
주인인 리카르디스에게도.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 언제나 소년에게 이뤄졌던 공식이 파괴되자 남은 것은 혼란뿐이었다. 로젤린이 더 이상 제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지 않을 거란 사실은 둘째 치고서, 버림받을지 말지의 기로에서 벌벌 떨고 있었는데
…….

로젤린은 흔들렸던 모습을 완전히 떨쳐 내고서 무뚝뚝한 인사를 하고 있었다. 헤사가 눈물만 뚝뚝 흘리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기도 했다. 벅벅, 마치 창문을 닦아 내는 듯한 거친 손놀림이었지만 그게 너무나도
반가웠다.

129 화.

이후, 로젤린이 잼은 어디 있느냐 물었고, 헤사는…….

[발타의 하카브 왕자 전하께서 저를 오래 붙잡고 있으셔서, 태웠습니다. 전부 왕자 전하 때문입니다.]

하고 사실에 기반하여 죄를 떠맡겼다. 로젤린은 분노하며 하카브에 대한 적의를 한층 더 불살랐다.

헤사의 실수는 하카브와 로젤린, 리카르디스와 리카르디스의 명령을 받은 르원, 잇세리온. 몇몇의 주요 인물들만
알고 있었다. 얘기가 퍼졌다고 가정했을 시, 혼란이 야기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헤사를 수습 기사로 계속 둘
생각이면 함구하는 것이 좋다며 리카르디스가 조언한 결과였다. 헤사는 언젠가 그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떨어지는 무게를 이용해서 힘을 더하는 건 좋았지만, 동작이 너무 큽니다.”

“네.”

“공격이 빗나가도 바로 발차기를 하는 건 좋았습니다. 보통 아래에서 발차기가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하니까요.”

헤사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로젤린도 마주 웃어 주었다. 오늘의 간식에 대해 얘기하던 헤사가 순식간에 낯빛을
바꿨다. 로젤린의 저 뒤에서 거대한 꽃다발을 끌어안고 달려오는 남자 때문이었다.

“로젤린 경.”

바다협곡의 네스터였다. 헤사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치켜뜨는 것으로 불만스러운 마음을 표현했다.
‘지긋지긋한 인간 같으니…….’

소년은 ‘상급 기사’가 얼마나 바쁜지 잘 알고 있었다. 거의 매일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로젤린을 찾아올
정도의 시간도 없을뿐더러, 다른 기사의 일정을 이렇게 세세하게 알 정도로 할 일이 없지 않다는 얘기였다.

“네스터 경.”

네스터는 아까의 헤사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대련 잘 보았습니다. 언제나 대단하십니다. 이 수습생도 나날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아주 훌륭한 기사로
성장하겠군요. 로젤린 경의 수습 기사가 되다니, 참 운 좋은 녀석입니다. 부러워…….”

이 사람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고 있잖아. 네스터가 하하 웃으며 헤사의 머리를 슥슥 쓸었다. 머리를
짓누를 듯한 거친 손놀림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네스터 경?”

“아, 그렇지.”

남자의 볼에 다시 홍조가 돌았다. 꼴 보기 싫었다. 헤사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다.

“이, 이걸. 로젤린 경.”

네스터가 보석과 레이스, 리본이 주렁주렁 달린 꽃다발을 내밀었다. 지금 저걸 꽃집에서부터 훈련장까지 들고


왔단 말이지. 좀 웃겼겠는걸. 헤사가 속으로 냉소했다.

“건국제 무도회에 가실 때 파트너가 없으시다면…….”

“있습니다.”

헤사가 냉큼 끼어들었다. 네스터가 소년에게 눈을 부라렸다.

“로젤린 경께서는 파트너가 있습니다, 네스터 경. 안타깝게도 기회는 다음. 콜록콜록…….”

생을 기약해 보심이. 뒷말은 억지로 내뱉은 기침 소리와 섞였으나 네스터는 분위기상으로 대충 알아들었다.
네스터가 뭐라 말하기 전, 헤사는 그가 로젤린에게 내밀고 있던 꽃다발을 채 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태도라,
마치 네스터가 헤사에게 꽃다발을 바치고자 얼굴을 붉히고 있던 것처럼 되어 버렸다.

네스터는 제 빈손을 쳐다보며 이 어이없는 기분을 소년에게 피력하고자 했다. 헤사가 그의 눈빛을 읽고 태연하게
말했다.

“아, 실례했습니다. 네스터 경. 하지만 로젤린 경께서는 곧 호위 임무로 본성에 가셔야 하니, 제가 대신 잘
가져다 놓겠습니다.”

로젤린 경의 방이 아닌 어딘가에. 네스터는 이 들리지 않는 뒷말도 읽어 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쥐방울만한 게…….

로젤린은 헤사가 언급한 제 파트너가 누구인지 열심히 유추하는 중이었다. 딱히 들은 기억은 없지만, 헤사가
있다고 했으니 있는 것이리라.
네스터는 파트너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파트너가 누구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알 리 없으니 대답할 수도 없었다. 로젤린이 헤사를 바라보았다. 헤사는 방긋 웃는 얼굴 뒤로 당황스러워했다.


침묵이 길어질 즈음, 헤사는 저 멀리 걸어오는 빛나는 남자를 목격했다.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헤사의 뇌리에 한줄기 섬광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전하입니다!”

소년이 소리쳤다. 그리고 멀리서 걸어오던 전하, 리카르디스는 깜짝 놀랐다. 헤사가 확정하듯 다시 한번 말했다.

“전하께서 로젤린 경의 파트너로 무도회에 가실 겁니다!”

“바로 그거야!”

리카르디스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헤사의 말을 받았다. 리카르디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자신이 말을


내뱉고도 좀 얼떨떨해했다. 헤사도 당황스러운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있었다.

네스터는 한 남자와 한 소년의 미묘한 기류를 읽었다. 뭐가 좀 이상한데……?

리카르디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경례하려 하자 리카르디스가 가벼운 손짓으로 만류했다. 그는 마치


전력으로 달려오기라도 한 듯,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땀이 그의 턱을 따라 흘러내렸다.

리카르디스는 건국의 달을 맞이해 한층 더 화려해진 상태였다. 아름다운 예복, 귀걸이, 목걸이, 반지. 갖은
장신구와 더불어 본래 가지고 있던 잘난 얼굴까지.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아름다움에 모두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햇살이 비친 땀 구슬이 영롱했다. 내리깐 눈동자를 덮은 속눈썹이


다이아몬드의 균열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건조한 입술을 혀가 느릿하게 쓸고 지나갔다. 붉은 입안에서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헤사는 제 나이에 이런 장면을 보면 안 될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상급 기사인 로젤린은 훌륭한 23


살로서 똑바로 리카르디스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손을 잘게 떨고 있는 상태였다. 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아름다움의 허용치를 넘어 버린 게 아닐까. 헤사가 막연하게 추측해 보았다.

어느 정도 그 가설이 맞는 것 같긴 했다. 로젤린이 떨리는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파르딕트에게 배운 ‘


최고’라는 표현이었다.

“오늘따라 더욱더 눈이 부십니다, 전하!”

로젤린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격정적인 표현이었다. 마치 세기의 미술 작품이라도 보는 듯한 희열이 서려 있으니,


리카르디스도 머쓱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유혹을 흩뿌리고 있긴 했으나, 제 외모에 관해 아주 무지하진 않았다.

기분이 미묘했다. 그 목석 같던 자에게서 저런 반응을 이끌어 낼 정도라니. 요즘따라 부쩍 외모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긴 하는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고…… 마음이 복잡했다.

“제가 전하와 무도회에 갑니까?”

로젤린의 물음에는 설렘이 묻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 곧은 시선에 양심이 찔리는 것을 느꼈으나,


“듣지 못했나, 그대? 클로에가 전해 줬다고 들었다만.”

굉장히 매끄러운 연기를 펼쳤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깜박하며 헤사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헤사가 남몰래 웃었다.
은혜 갚을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와서 다행이었다.

* * *

언제나 손님이 끊이지 않는 월장석 성이 레이몬드와 클로에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사람들로 한층 더


복잡해졌다.

큰뿔산양과 황금정원. 그 외에도 수많은 가문이 참석해 성이 북적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모르는 얼굴은
없었다. 경사스러운 날인 만큼 모두 웃는 얼굴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구름 한 점 떠 있지 않은 아주 좋은 날이다. 이델라브힘의 가호가 미치는 것 같으니, 두 사람이 아주 오래오래


잘 살지 않겠느냐. 가벼운 다과와 함께 시작된 의례적인 대화들은 곧 미묘하게 흘러갔다. 만나기에 힘들던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 오랜만이오. 건국의 달에는 처음인가. 건국의 달이라고 하니 하는 말입니다만, 이번에 하카브 왕자가 오지
않았습니까. 하는 식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주제가 무겁게 변했다. 예복을 입은 신부도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왕자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니, 움직임이 제한되는구만. 엘피디오 전하와는 자주 만나는 것 같긴
합디다.”

“굳이 따지자면 엘피디오 전하께서 하카브 왕자가 있는 성에 자주 드나드는 것이죠. 하카브는 그다지 그들의
동맹을 중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아요.”

방 안에 모여 있는 중년 남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카브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1 황자 파에 속하는 귀족들과의 만남을 추진한다든가, 여기저기 다니며
분탕질을 친다든가 하는 행위가 일절 없었다는 얘기였다. 굵직한 행사에 얼굴을 비추긴 했으나 건국제에 참석한
타국의 귀족들이 으레 보이곤 하는 행보와 다름없었다.

적지에 발을 들일 정도의 거대한 음모나 목표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강한 마인, 로젤린에게 한번 접근하려
했다지마는, 그 이후로는 접촉하려는 시도도 없다고 하지 않나. 또한 그들로서는 일국의 후계자가 단순히
로젤린만을 위해 갖은 위험을 감수한다는 가정을 도무지 떠올려 낼 수 없었기에 의문은 계속해 커져 가는 중이었다.
대체 무얼 원하는 것일까.

물론, 보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는 클로에는 하카브가 정말 로젤린 한 명만을 위해 일라베니아에 발을 들였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표면적으로 발타가 마력을 귀하게 다루는 나라이긴 했으나, 마력은 단순히 강한 무기의 역할만을 맡고 있지는
않았다. 축복의 밤. 죽어 가는 땅 밑에 잠들어 있는 씨앗을 키워 꽃을 피워 내는 강력한 힘의 한 축이 아니던가.
만약 비밀을 알고 있다면 로젤린을 단순한 ‘강한 마인 한 명’이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라베니아 고위 인사의 암살 같은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크게 눈에 띄는 구석이


없다 할지라도. 클로에가 팔짱을 끼고 발을 까닥였다.

“감시의 눈이 줄어드는 때를 기다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무엇이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카브 왕자 쪽으로 빠진 호위를 유지하는 게 좋겠어요.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당분간 수고를 더 해 줘야 할 것
같네요. 부탁드려요, 나단 경.”

나단은 퀭한 눈으로 초콜릿을 섭취했다. 당이 부족한 기분이었다. 클로에가 생긋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모두 무운을 빌어요.”

130 화.

“클로에 영애, 그대 또한.”

“무운을 빕니다.”

피곤해 보이는 중년 남자들이 동시에 초콜릿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다들 당분에 목말라 하는 모습이었다.
큰뿔산양가의 하녀장이 급한 발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왔다.

“영애, 준비를 서두르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머, 저도 모르게 그만. 입고 있는 게 웨딩드레스인지 수의인지도 분간 못 할 만큼 정신없어서 말이에요.”

클로에의 농담에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껄껄 웃었다. 하녀장만 크게 숨을 들이쉬며 기함했다.

“영애! 그런 무서운 농담을 하시다니!”

하녀장의 무서운 눈빛에 남자들이 분주히 얼굴 근육을 단속했다. 웃겼는데. 확실히 신부 입에서 수의라는 단어는
문제가 있나? 웃겼는데.

그들은 날카로운 눈살에 못 이겨 모두 응접실을 나갔다. 하녀장은 거울 앞의 클로에를 부지런히 단장했다.


클로에는 거울 속 제 모습을 들여다보면서도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신경 쓸 일이 끊이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여자가 피곤한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똑똑. 열려 있음에도 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클로에는 고개를 돌려 예의 있는 방문자를 확인했다.
“클로에 양.”

“로젤린 경.”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로젤린의 손에는 하얗고 작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여기저기 흔하게 볼 수 있고,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잡초와 형, 동생 하는 정도의 취급을 받는 꽃이었다.

리쉬. 클로에가 웃음을 흘렸다. 언젠가 로젤린의 소문을 수집하고 다닐 때가 생각났다. 그녀가 동생 칼릭스와
같이 꿀을 쪽쪽 빨고 다녔던 그 꽃. 반가움에 손이 먼저 나갔다.

“리쉬네요. 고마워요.”

로젤린이 부드럽게 웃었다.

“맛있습니다.”

클로에는 웃음을 터트렸다. 맛있었구나. 그런데 자세히 보고 있으려니 줄기 하나하나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고
들쭉날쭉했다. 하얀 레이스로 감싸긴 했으나 어정쩡하고 리본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느 꽃집이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지?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어, 어이구우! 이렇게 귀한걸!”

클로에가 급하게 꽃다발을 쓰다듬자, 로젤린이 뿌듯해했다. 로젤린은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키며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을 설명했다. 레이스는 어머니가 보내 주신 드레스에서 뜯었다. 리본은 저번에 레이몬드가 준 마카롱
포장지에 있던 건데 예쁘다. 리쉬 꽃은 월장석 성 정원에서 잘라 왔다. 정원사 아저씨한테 혼났지만 제일 활짝
핀 걸로 골랐다. 리본 묶는 건 헤사가 가르쳐 줬다. 로젤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얘기했다.

이 작은 꽃다발에 그렇게 긴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는. 클로에는 그녀의 말을 깊게 집중해서 들었다. 황금정원,


하카브, 1 황자, 발타 어쩌고를 잠시나마 잊을 정도로.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탓에 클로에의 머리카락이 살짝 흘러내렸다. 로젤린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굉장히 반짝반짝하고 예쁩니다.”

“어머, 그래요?”

클로에가 꽃다발을 품에 안으며 웃었다. 로젤린이 그녀의 은색 눈동자를 더 깊게 들여다봤다.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그런가요? 내가 기분이 좋았던가? 클로에는 잠시 생각했다. 우중충한 남자들과 골머리 썩는 말들을 했을 때만


해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나쁠 것도 없었지만.

클로에는 리쉬 꽃다발을 얼굴 가까이에 가져다 대었다. 약한 향기가 풋풋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집무실이었던


공간이 신부 대기실로 바뀌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결혼을 하는 날이었지.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말에, 그런가요? 라는 말 대신.
“그래요. 좋은 날이라.”

그렇게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좋은 날이라서. 그 말에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 * *

이델라브힘께서는 그 빛 아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합니다! 사랑은 깨지기도, 변하기도


하지만 결혼은 결코, 깨지지 않습니다. 죽음이 그대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위대한 이델라브힘께서 두 사람의
언약을 가호하시니, 사랑이 흔들린다 하더라도 맹세는 영원할 것입니다.

[여자 친구]

[남자 친구]

작위, 나이 따위로 분류되어. 이름이 상하 관계로 쓰이는 삭막한 관계는 더 이상 그만.

[신부] [신랑]

함께 발맞춰 걸어가겠다는 여러분의 다짐과 함께, 부부의 이름은 왼쪽, 오른쪽. 사이좋게, 나란히 놓이게 됩니다.
결혼하세요.

결혼은 인생의 중대한 행사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 하더라도, 그 순서를 되짚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신부와 신랑은 웨딩드레스와 정장을 입기 전, 하얀색의 예복을 먼저 입습니다. 호수에 해가 가장 빛나게 떠오를
때, 신부와 신랑은 호수에 들어갑니다. 이델라브힘의 축복 아래 사랑을 맹세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호수라고? 깊지 않으냐고요? 물론 깊습니다. 아니, 깊다니! 그럼 안 위험하냐고요? 당연히 위험합니다.


어릴 적 부모님들이 여러분에게 수영을 필수적으로 익히게 했던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야 수영과
결혼의 상관관계를 유추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있겠지만, 다 큰 여러분은 다 알 수 있을 테죠. 결혼식을
장례식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물에 빠지는 사고가 빈번했습니다. 죽는 사고도 가끔 발생하고요. 물론 익사뿐만 아니라,


마수가 결혼식에 난입한 사고까지 종합한 결과입니다. 여러 가지 위험을 배제하고자 최근에는 인공 호수를
제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안심하세요.

그래도 배우자가 될 분이 자연 호수를 고집하는 경우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수영은 배워
두는 편이 좋겠군요.

신부와 신랑이 헤엄치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는 가정을 하고 다시 결혼식 얘기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호수에
들어갑니다. 호숫가의 얕은 부분도 좋고, 깊은 중앙도 좋습니다. 해가 가장 높이 떠오르고 이델라브힘의 광휘가
비출 때, 두 사람은 맹세합니다. 주고받아야 하는 언약문은 그다지 짧은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긴 편도
아니니, 꼭 외워 두도록 합시다.

신의 이름 아래 하는 언약은 결혼식의 과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언약문은 무려 일라베니아의


역사와 함께한 글귀라고 합니다. 몇백 년 동안 대대로 물려 온 언약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영광의
일라베니아! 축복의 이델라브힘!
신관이 두 사람의 언약을 이델라브힘께 전달하면, 호수 밖으로 걸어 나오면 됩니다. 호수를 둘러싼 많은 하객들이
손뼉을 치며 축복하고 있을 겁니다. 신부는 젖은 예복을 벗고 웨딩드레스로, 신랑은 정장으로 갈아입으세요.
이제부터는 인간들의 축제이니! 서류에 대충 사인하고 나면 이제부터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물론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해서 배우자의 죽음을 앞당기려 하는 분도 있습니다. 부디 여러분은 그러지 않길


바랍니다.

* * *

“이 약 파는 것 같은 책자는 뭐지?”

리카르디스는 총 세 장으로 구성된 작은 책자를 뒤적였다.

“최근 인공 호수를 대여하는 방식으로 결혼식을 주도하는 어떤 상단의…… 상단주가 작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클로에 양이 결혼 준비하면서 받은 것인데 심심할 때 보면 아주 재밌다네요. 참고로 상단주는 세 번째 부인을
맞이했다는군요.”

리카르디스는 코웃음을 쳤다.

“배우자의 죽음을 앞당겨 맹세를 갈라 버리자는 내용이 더욱 와닿는군.”

월장석 성 내에 있는 호숫가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큰뿔산양, 푸른등불, 바다협곡, 고래무덤, 가을안개. 여러 가문과 더불어 몇몇 황족들까지. 상단을 이끄는
클로에는 물론이거니와, 레이몬드가 워낙 발이 넓은 덕이었다. 친분이 있는 몇몇만 초대했음에도 월장석 성의
후원이 가득 찼다.

리카르디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식을 먹고 담소를 나누는 화기애애한 사람들, 그 한구석에 이질적인 분위기의
무리가 있었다.

우중충한 남자들이 한 테이블을 끼고 인상을 찌푸린 채, 카드를 뒤적이고 있었다. 파르딕트와 큰뿔산양 후작가의
후계자 아렌트, 몇몇 익숙한 고위 귀족들이 보였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갈색 머리의 낯선 여자였다.
그녀가 패를 펼치자마자 사방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시시덕거리며 금화를 쓸어 모았다. 누가 봐도
도박판이 아닌가.

돈이 다 떨어졌는지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리카르디스는 그 남자에게 가려져 있던, 그 누구보다
카드 게임을 즐기는 중인 4 황자이자 현 대신관 라헤안시를 발견했다.

“왔다! 왔어! 으헤헤!”

아주 집안 망신은 혼자 다 시키고 있었다.

“다 받고, 칩 몽땅 들어갑니다! 쫄리면 패 덮으시든가, 으헤헤헤!”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의기양양하던 라헤안시는, 정확히 십 초 뒤에, 아까 전의 여자에게
모든 돈을 내어 줘야만 했다. 라헤안시가 훌쩍훌쩍 울자 따라온 신관들이 양산을 펼쳐서 그를 가리고자 노력했다.
대신관이라는 인간이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꼴이 수치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양산에 신전 표식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어 그들의 노력은 도루묵이 되었다.

여자는 담배 피우는 남자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금화들이 전부 그녀 앞에 쌓였다.

그녀가 다시 미친 듯이 판돈을 올렸다. 좋은 패를 잡았구나 싶어 모두들 카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항복했다.


결과적으로 여자는 그 판을 먹지 못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그녀를 끌고 갔기 때문이다.

여자가 떠난 도박판. 라헤안시가 그녀의 패를 뒤집어 봤다.

“투, 투 페어?”

고작 투 페어로 올 인을 한다고? 무시무시한 블러핑의 대가였다. 모두들 떠난 그녀의 자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만의 세상이 형성된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131 화.

디에즈는 5 황녀 레이비아와 7 황녀 체리트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의 가슴과 허리쯤에


오는 작은 황녀들이 디저트를 먹겠다고 디에즈를 잡아끌었다. 디에즈는 무력하게 끌려갔다.

지방 영지에만 있던 황금정원 자작도 보였다. 서른 넘게 결혼하지 않는 장녀에 대한 걱정을 훌훌 털어 버린


표정이었다. 식은 시작도 안 했건만, 누가 제 딸의 결혼식이 아니랄까 봐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그의 퉁퉁한
배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황금정원 자작 부인이 남편의 흥건해진 배를 보고 깔깔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하얀 예복을 입고 있었다. 결혼식에서 하얀색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신랑과 신부, 그리고 신관.

두 사람의 영원한 맹세를 이델라브힘께 전달할 신관 역할은 리카르디스가 맡게 되었다. 그의 휘하에 있는 두


신하가 맺는 혼인인 만큼이나 리카르디스가 먼저 주례를 자처했다.
클로에는 좀 불만스러워했다. 신부가 주인공인 결혼식에 리카르디스가 더 예뻐서 눈에 띈다는 이유였다. 물론
리카르디스는 농담인 줄 알고 넘어갔다.

정오를 알리는 종이 공기를 진동시키며 오랫동안 귀에 머물렀다. 식이 시작할 때였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푸른 월계수 나무 한 그루가 심어진 호숫가로 발을 옮겼다. 라헤안시가 쪼르륵 뒤따라와 그에게 성전을
건넸다.

“내 거 써, 형. 무려 대신관님의 성전이라고. 특별히 형에게만 빌려줄게”

그가 꼴 보기 싫을 정도로 으스댔다. 리카르디스는 받은 성전을 곧바로 라헤안시의 뒤에 서 있던 신관에게


돌려줬다.

“잇세리온, 내 것을.”

“예, 전하.”

어디서 도박하고 온 손으로 과자 기름 묻어 있는 성전을 건네주고 있는 건지. 두 사람의 앞날에 흙탕물을 끼얹고
싶어 작정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라헤안시는 축 처져 하객들 사이로 돌아갔다.

모두 호숫가로 모였다. 성에서부터 호수까지 하얀 천이 길을 인도하고 주위는 꽃으로 잔뜩 장식되어 있었다.

신부와 신랑이 손을 잡고 나올 때였다. 성의 문이 열렸다.

“……?”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을 신랑과 신부는 어디 갔는지, 날카로운 인상을 더욱 구기고 있는 로젤린만 보였다.
햇살에 눈이 부셔 찌푸리고 있는 것은 알겠지만, 순간적으로 움찔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도
흠칫했을 정도였다.

로젤린의 손에는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그녀가 들러리 역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은
친분이 있는 어린아이들이 귀엽게 차려입고 신부와 신랑이 가는 앞길에 꽃을 뿌렸다. 때문에, 이렇게 건장한
데다가 무표정한 들러리는 하객들로서도 최초였다.

로젤린의 코가 잠시 움찔거렸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만 눈치챘다. 먹고 싶은 걸 참고 있구나.


훌륭하다 로젤린.

로젤린이 발걸음을 옮기며 꽃을 뿌렸다. 던지는 솜씨가 좋아 가벼운 꽃잎들이 사방으로 잘 흩어졌다. 그녀의 뒤로
새하얀 예복을 입은 신랑과 신부가 등장했다. 두 사람이 로젤린의 뒤를 따라 호수를 향해 걸었다.

클로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반면에 레이몬드는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덜덜 떨리는 다리로 인해 그의


예복이 마구 흔들렸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벅지를 꼬집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파르딕트는 어허헉 웃으면서 저 꼴을 보라며 비웃다가 나단에게 눈총을 받고는 곧 제 입을 단속했다.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찬송가였다. 인간의 모든 생, 모든 일은 신이 주관하므로.

부서지는 햇살이 찬란하게 두 사람을 축복했다. 신부의 볼이 과일처럼 싱그러웠다. 레이몬드는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표정을 일그러트리다가 종국에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8 년 짝사랑, 4 년 연애 기간의 결실이
눈앞에 보이니,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클로에는 아이고 못살아. 하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띠고 제 예비
남편을 바라보았다.
콧물 줄줄 흘리며 우는 레이몬드의 모습을 본 파르딕트는 바닥에 엎어져서 울듯이 웃었다. 나단이 참지 못하고
그의 등을 매섭게 때렸다.

두 사람이 발을 멈춘 호숫가 옆에는 리쉬가 몇 송이 피어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일라베니아 건국력 589 년, 달은 기울고 이델라브힘의 광휘가 떠올랐으니, 호수로 찾아온 두 사람을 축복할
때이다.”

그의 말에 답하듯 레이몬드와 클로에가 잠시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그의 빛 아래에 한 날, 한 시. 언약을 맺고자 하는 자는 누구인가.”

클로에가 싱긋 웃었다.

“이델라브힘의 딸. 일라베니아의 딸. 황금정원의 첫 번째 딸. 사람과 사람의 유대로써 황금의 꽃을 피우는 자.


클로에 일립소가 영원한 사랑을 찾아왔습니다.”

레이몬드는 아직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붉어진 눈가를 슥슥 쓸던 레이몬드가 씩씩하게 입을 열었다.

“이델라브힘의 아들. 일라베니아의 아들. 큰뿔산양의 두 번째 아들. 위대한 안디 산맥의 절벽을 건너뛰는
용맹함을 지닌 갈색산양. 레이몬드 안디가 영원한 사랑을 맺고자 합니다.”

스스스, 바람이 불어 월계수의 잎을 스쳤다. 호수가 푸른 하늘과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았다.

* * *

로젤린은 처음 본 결혼식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호수에 들어간 두 사람이 서로 언약문을 주고받고,


마지막에 리카르디스의 성력이 두 사람을 비췄다.

호수의 표면에는 태양과 리카르디스의 성력이 아른아른하게 겹치며 마치 두 개의 태양이 하나가 되는 듯한 광경이
그려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가 봐도 어딘가 엄숙하고 마음속에 깃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황금정원 자작은
위험할 정도로 울다가, 부인이 건네주는 초콜릿을 먹었다.

짧은 예식이 끝났다.

흠뻑 젖었던 클로에와 레이몬드는 웨딩드레스와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잔잔한 찬송가도 축제에서 들릴 법한


신나는 음률로 바뀌었다. 두 사람의 언약을 지켜볼 때의 조용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어디 가기라도 한 듯이 모두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고 떠들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폭탄주를 제조해서 레이몬드에게 다가갔다. 짓궂은 표정의 기사들은 그에게 채 다가가기도
전에 새 신부에게 막혔다.

“어머. 세상에. 우리 허니버터캔디가 들어가서 헤엄쳐도 될 만한 어마어마한 양이네요.”

기사들이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몬드의 별명이 허니버터캔디라는 것은 알고 싶은 정보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고래무덤의 남자들은 대단한 말술이라지요. 찔끔찔끔 마시는 치졸한 짓은 안 한다고.”


“잘 아시는군요, 부인! 고래무덤의 남자들은 정말 고래처럼 들이마시지요!”

파르딕트가 껄껄 웃었다. 클로에는 반짝이는 눈으로 올려 보며 수줍게 웃었다.

“보고 싶네요.”

“예?”

“고래처럼 마신다면서요? 보고 싶어요. 제가 고래는 본 적이 없어서.”

어라. 뭔가 좀 이상한데. 그렇게 생각했으나 파르딕트는 자신이 들고 온 폭탄주를 단숨에 들이켜야만 했다. 새
신부가 보고 싶다는데, 싫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독주가 많이 들어가 있었던 탓에, 파르딕트는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어느 구석에서 쓰러져 있어야 했다. 음식에 정신이 팔려 있던 로젤린이 밟고 지나가도
일어나지 못했다.

하객들은 결혼식의 유물 같은 새 신랑 괴롭히기를 할 수 없었다. 웃는 얼굴 뒤로 무시 못 할 압력을 내뿜는


다람쥐 같은 새 신부 때문이었다. 허니버터캔디는 우유푸딩 옆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레이몬드.”

“전하!”

요즘 통 볼 수 없던 얼굴이었다. 레이몬드는 디에즈를 보고 반색했다. 주위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못했다.


디에즈가 리카르디스와 반하는 여러 세력과 얽혀 있음을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레이몬드도 하얀밤
기사단의 부단장 부관으로서,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디에즈가 단독으로 하카브와의 접선을 했다는 정보를 들은 순간부터, 레이몬드는 완벽하게 그를 적으로 인식했다.
수년 동안 그래 왔듯이 환한 미소를 보인 것은 실수에 가까운 일이었다. 등을 돌렸다 하더라도 오랜 친구를 보니
반가움이 앞섰다. 레이몬드는 이리저리 휩쓸리는 제 어수룩함이 씁쓸해, 어색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결혼.”

“바쁘실 텐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합니까.”

디에즈가 멀리서 하객들과 얘기를 나누는 클로에를 한번 보더니 다시 레이몬드에게 시선을 옮겼다.

“오랜 염원 아니었습니까. 앞으로 행복만 가득하길 이델라브힘께 간절히 빌겠습니다.”

디에즈는 두 손으로 레이몬드의 손을 꽉 붙잡았다. 손길이 따스했다. 금색 눈동자는 반짝거리고 미소는 녹아내릴
듯 부드러웠다. 오랜 친우의 경사를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레이몬드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입가가 어색하게 떨리는 것 같아 신경 쓰였다. 그는 우헤헤 소리를 내며 바보처럼 웃었다.

“그렇습니다. 내 오랜 염원! 진짜 행복해서 죽을 것 같네요.”

“벌써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밤까지는 살아 있어야죠.”

디에즈가 천사 같은 얼굴로 엉큼한 농담을 했다. 레이몬드는 그의 옆구리를 제 팔꿈치로 쿡 찌르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디에즈는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다며 황족 상해죄로 체포하겠다고 정색했다. 가엾게 여겨서 오늘 밤은
넘기게 해 준단다. 두 남자가 되지도 않는 농담을 하면서 낄낄거렸다.

이 평화는 한때에 불과했다. 폭풍이 오기 전야. 그 고요함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란 것은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정세가 흐르며 격류와 같은 것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다.
디에즈 또한.

레이몬드는 직감했다. 가까운 미래에 자신과 디에즈가 함께 있다면, 그 장소가 어디건 간에 필히 전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위기이리라고.

레이몬드가 디에즈를 와락 안았다. 디에즈는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잔잔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레이몬드는 그를 숨 막힐 정도로 꾹 안았다.

이, 바보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하고 등을 후려칠 수 있는 때로부터는 너무 멀어졌기 때문에.

132 화.

사나운 눈초리들이 주위를 배회했다. 칼릭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입 크기의 음식을 집어 먹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붉은수레바퀴의 입에 들어가는 것은 진흙도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가장 끈질긴 눈빛을 보내는 젊은 귀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딱 마주쳤다. 바다협곡 백작의
삼남인가 사남인가 하는 자였다. 남자는 일순 움찔했으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제 편이라는 것을 깨닫고
가슴을 폈다.

칼릭스는 입안에 있는 음식을 씹으며,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납고 집요한 시선에 남자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끈기 없기는.’

칼릭스는 지나가던 시종의 트레이에서 잔을 집었다. 서늘한 온도가 느껴졌다. 유리잔 하나까지 차갑게 해 두는
세심함이 돋보였다. 물 자국 하나 없는 표면에 수많은 사람들이 비쳤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남자들의 얼굴이
차가운 온도에 녹아들었다. 칼릭스는 태연하게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월장석 성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감당해야 하는 문제들이었다. 큰뿔산양과 황금정원의 행사였으니, 당연히 하객의
98%는 2 황자 파였다. 중립도 간간이 보였으나 1 황자 파에 속하는 가문은 자신뿐이었다.
“우리 로젤린…….”

옆에 있는 자그마한 여자가 우는 시늉을 했다.

“동생이 친구가 없는 걸 알고 있을까?”

“오늘은 시비 안 걸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짙은 갈색 머리를 예쁘게 틀어 올린 마카롱이 눈을 크게 뜨고 깜박였다.

“이건 시비가 아니라 진실인걸……?”

약속을 지킬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쯤은 대충 알 수 있었다. 칼릭스는 나오는 한숨을 와인과 함께 넘겼다.

오늘 아침, 칼릭스는 결혼식에 갈 준비로 분주했다. 레이몬드로부터 받은 초대장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나? 라고 생각하고 있을, 아, 그냥 의례적으로 보낸 거겠거니 하며 건조하게


초대장을 무시하고 있을, 한때는 내 수습 기사였던 로젤린의 동생, 칼릭스 경에게 진심을 담아 초대합니다.』

라는 구구절절한 장문으로 수신인란이 꽉 차 있었다. 때마침 마카롱이 맞은편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던 터라,
청첩장의 내용을 읽어 줬더니 덜컥 자신도 가겠다는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 칼릭스는 경악 어린 표정으로 편지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싫습니다.]

라고 했지만 물론 통할 리 없었다.

밖에서는 누구에게도 시비 걸지 말기, 존댓말 하기 등. 여러 가지를 약속하고 데리고 왔으나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 상황이었다. 차라리 쥐나 독수리 모습이면 편할 텐데 그마저도 싫단다. 요즘 마카롱이 빈번하게 인간
모습으로 출몰하는 것과 같은 이유인가 추측만 했다.

왜 요즘따라 인간형으로 많이 다니십니까? 칼릭스의 물음에, 마카롱은 글쎄, 하고는 이상하게 웃었다. 눈썹은
찌푸려져 있고 입꼬리만 올라가 있어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인간 같은 표정이었다.

회상은 짧았다. 칼릭스는 잔 밑에 찰랑거리는 와인을 마저 삼켰다. 마카롱이 자신의 둥그런 뺨에 가느다란 손을
가져다 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자기 동생이 친구가 없는 헛헛한 마음을 술로 채우는 것을 로젤린은 알고 있을까……?”

짜증난다. 칼릭스가 부루퉁한 얼굴을 하니 주위의 시선이 한층 나빠졌다. 저, 저. 이 경삿날에 저 표정 좀


보라지! 소곤거리는 소리가 주위의 소음에 묻히지 않고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누구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아까 칼릭스가 살짝 웃었을 때는 “웃어?” 하고 정색했던 사람이었다. 뭐 대체 어쩌라는 건지.

가끔은 되지도 않는 수작질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어깨를 부딪친다든가, 와인을 뿌린다든가 하는 식의 상투적인
괴롭힘들. 하지만 대부분 시도에만 그쳤다.

칼릭스에게 다가오던 많은 남자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지나쳤다. 굵직굵직한 선을 가진 붉은수레바퀴


백작보다야 날렵하지만, 그의 이목구비를 빼다 박은 탓이었다.
태평한 한낮의 결혼식을 노을 지는 전쟁터로 만드는 사나운 눈매였다. 꽉 다물린 입술과 서늘한 표정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칼릭스는 제 외모의 효용성을 잘 알기에, 숱한 적의 속에서도 여유롭게
돌아다녔다.

‘호오…….’

마카롱이 속으로 감탄했다. 그 로젤린의 동생인 데다가 제 누이를 대하는 태도가 흐물흐물해서 맹탕인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딱딱하다. 마카롱은 음식을 집어 먹고는 손에 묻은 소스를 날름 핥았다.
칼릭스는 익숙하다는 듯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손을 닦았다.

“칼릭스. 나, 간다.”

“예. 예? 어디를!”

목소리가 다급했다. 사고 치려는 로젤린을 만류하는 목소리였다. 이 자식이 날 뭐로 보고. 마카롱은 조금


울컥했다.

“성 구경.”

“새삼스럽게요? 매일 보시잖습니까.”

“인간 모습으로는 처음이라.”

칼릭스는 곧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지만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뭐.”

“이거 들고 가세요.”

칼릭스가 제 손에서 주섬주섬 반지를 빼냈다. 붉은수레바퀴의 가문이 새겨져 있는 반지였다.

“이거 중요한 거잖아. 후계자 반지 아냐?”

“혹시 사고를 치거나, 사람을 치면 이것을 보여 주시면 됩니다.”

“오, 다 처리해 줄 거야?”

“대신 뭐든 치기 전에 이걸 보고 좀 참으세요.”

“그게 본론이겠구만.”

“노력이 가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마카롱이 피식 웃고 칼릭스의 손에서 반지를 받아들였다. 귀여운 맛이 있는 놈이었다.

“누가 괴롭히면 울면서 이 누나를 찾아와라. 놈을 반으로 갈라 주지.”

“…가세요…….”
“가로로도 가능하고 세로도 가능하다.”

“아, 좀 가시라고.”

이 자식이? 마카롱이 칼릭스의 발을 세게 밟았다. 칼릭스는 잠시 무릎을 꿇은 채 발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마카롱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 * *

마카롱은 길에서 벗어나 풀숲을 통해 이동했다. 독수리의 모습으로 황성을 전체적으로 둘러봤기에 구조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숲이 마카롱이 입은 드레스를 붙잡았다. 마카롱은 거친 손놀림으로 옷자락을 잡아챘다. 밑단의
레이스가 투둑 뜯겨 나갔다. 몇 걸음도 못가서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마카롱은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인간 모습으로 있는 이상 감내해야 하는 문제였다.

땋아 올린 머리는 풀린 지 오래고, 드레스 밑자락에는 풀물이 들었다. 칼릭스가 보면 한소리 할 몰골이었다.

마카롱은 풀숲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그대로 계속 갔다가는 신전에 도착할 무렵에는 거지꼴이 되어 있으리라.
얼마 걷다 보니 정돈된 거리가 보였다. 마카롱은 무성하게 자란 잎사귀들을 헤치고 깔끔하게 정리된 길에 발을
디뎠다.

“…….”

그러고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눈이 딱 마주쳤다. 마침 말을 타고 가던 남자와.

타는 듯한 붉은 머리. 관록이 느껴지는 흉터를 손 여기저기 달고 있으나 결코 흉악해 보이지 않는 외모를 가진


남자!

고양이 미미의 호감을 한 몸에 받는 미중년.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 스타스였다.

그는 레이몬드의 결혼식에 짧게 얼굴을 비춘 후,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고 다니는 중이었다. 급한 일은 있으나,


그렇다고 그게 이런 수상한 여자를 무시할 만한 이유는 되지 못했다. 스타스가 풀숲에서 막 튀어나온 초췌한 꼴의
여자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마카롱은 어색하게 웃었다. 스타스의 눈썹이 눈과 가까이 붙었다. 완전 의심하고 있었다.

젠장, 고양이 미미라면 서류를 찢어도 애교 한 번으로 넘길 수 있을 텐데. 기사단장 스타스는 인간들에게는 가차
없는 자였다. 마카롱은 어정쩡하게 풀숲에 걸쳐 두었던 한쪽 다리를 마저 넘어오게 했다.

그녀가 태연한 손놀림으로 드레스와 머리에 붙은 풀잎을 제거하는 중에도 스타스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 상당히 집요하다. 고양이 미미한테 뽀뽀해 달라고 끈덕지게 조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마카롱은 생글 웃으며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님이시지요? 아까 결혼식에서 멀리서나마 뵈었답니다.”


“레이몬드 경의 결혼식에 참석하셨소?”

무게 잡아 봤자 고양이 미미의 집사일 뿐. 마카롱은 속으로 흥, 코웃음 쳤다.

“어머, 실례했어요. 부족하지만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님께서 파트너 자리를 내어 주셨답니다.”

“……칼릭스 경과는?”

“붉은수레바퀴의 저택에서 칼릭스 도련님의 일을 돕고 있습니다.”

하녀라는 얘기였다. 파트너로 하녀를 대동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칼릭스가 워낙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다 보니, 아주 이상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고 보니 보지는 못했지만,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여자 파트너와 같이 결혼식에 왔다는 얘기는 건너 들었다. 스타스가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자 마카롱이
잽싸게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제가 혹여 실례 하거든, 이것을 보여 드리라고 칼릭스 도련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반지였다. 직계 가족들만 지닐 자격이 있는 물건이라, 아무에게나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총애받는 하녀인지도 몰랐다.

“나이가 드니 의심만 느는군. 미안하게 되었소.”

“아니에요.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할 뿐입니다.”

“그런데 왜 풀숲을…….”

마카롱이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황성은 처음이라, 대신전에 가 보려 했습니다만, 워낙 넓은 터라 길을 잘 몰라…….”

스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델라브힘의 열렬한 신자인가…….’

마카롱은 스타스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거 되게 꼬치꼬치 캐묻네……


이제 의심이 풀렸으면 가 봐라, 예쁜이.

“그랬군.”

“그랬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길을 모르지 않소. 데려다드리리다.”

마카롱은 식은땀을 흘렸다.


133 화.

“어머,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어찌 기사단장님의 일정에 끼어드는 무례를 범하겠어요.”

“마침 일이 끝나 돌아가던 참이었으니, 거절하지 않아도 되오.”

스타스는 허허 웃으며 말 아래로 내려왔다.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짓고는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마카롱은 제 말이 다 무시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이 남자 이런 남자였지. 고양이 미미에게도 기어코


프릴 달린 옷을 입히고야 말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마카롱은 스타스의 손을 잡고 발걸이를 구두로 밟았다.

“실례.”

곧 허리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몸이 순식간에 위로 쑥 들렸다. 스타스는 마른 짚단 인형 들 듯이 마카롱을


들어 안장 위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날랜 몸놀림으로 마카롱의 뒤에 가볍게 안착했다. 마카롱은 포기했다.
그래. 햇살도 좋으니 잘생긴 남자랑 데이트나 하지 뭐.

스타스가 가볍게 발로 신호하자 말이 걷기 시작했다. 마카롱이 와아 소리를 냈다. 손 한번 휘두르면 죽어 버릴


동물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인간의 형태로 말을 탄 것은 처음이다 보니 신기했다.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에
스타스가 흐뭇하게 웃었다. 참 천진난만한 아가씨로군.

“그러고 보니, 이름을 듣지 못했군.”

“어머, 제가 말씀을 안 드렸던가요?”

마카롱은 살짝 그를 올려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미미라고 불러 주세요.”

남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마카롱은 속으로 깔깔 웃었다.

“……아버지께서 미미라는 이름을…… 지어 주신 건가……?”

스타스는 이 아가씨의 이름이 제 고양이와 똑같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대체 어떤 이상한 부모가 애완동물
내지는 어린아이의 인형 같은 이름을 딸에게 붙였는가에 대해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카롱은 호호 웃었다.

“설마요.”

농담이었나?

“어머니께서 지어 주셨죠.”

“음…….”

스타스가 깊게 침음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로 바뀌었지만 큰 차이를 못 느꼈다.

“그리고 미미는 별명이에요. 본명은 미레이미. 줄여서 미미랍니다.”

“그것 참…… 대단히…….”

이상한걸……. 스타스는 뒷말을 삼켰다.

“대단히 귀엽지요?”

“그건 그렇군……. 대단히 귀여운 이름이지.”

스타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스의 거대한 밤색 말이 투레질했다. 마카롱은 꺅, 하는 소리와
함께 스타스의 가슴에 바싹 붙었다. 스타스가 하하 웃으며 마카롱의 어깨를 도닥였다.

마카롱은 스타스가 자신을 ‘이 나이 대의 아가씨들은 참 풋풋하군.’ 하고 조카를 보는 시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풋풋한 아가씨, 마카롱은 ‘참 귀여운 인간이야. 가슴이 탄탄하군.’ 따위의 생각을 했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다그닥, 다그닥.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말발굽 소리가 이십 분 정도 울렸을 때였을까. 거대한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장엄한 하얀색 건물이 빛나고 있었다. 마카롱은 잠시 숨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황제의 방패이자, 수족. 권력의 근원이며, 권좌의 역사를 쌓아 온 모든 일의 시작점.
대신전이었다.

스타스는 친절하게도 자질구레한 수속까지 처리해 줬다. 일라베니아 전역에 위치한 평범한 신전과 달리 대신전은
평민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마카롱은 더럽게 치사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찌 되었건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반지를 가지고 있기도 했거니와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이 데려온 손님이니만큼 대신전의 신관도 그녀를 환영했다.

스타스는 미레이미 양을 잘 안내해 달라고 수습 신관에게 부탁했다. 마카롱은 다시 “미미라고 불러 주세요.”


라고 했으나 스타스는 못 들은 척했다. 그는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급하게 말을 재촉했다. 일이 끝나서
돌아가는 길이라더니 무척 바빠 보였다.

떠나는 스타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카롱은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딜 보아도 순수한 하얀색뿐.
공간은 저가 가진 크기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비어 보이고, 서늘했다.

눈을 천천히 깜박이던 여자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옆에 있는 수습 신관이 방문자의 달라진 분위기에 잠시
흠칫 몸을 떨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환대에 감사드려요.”

표정이 무뚝뚝한 것에 비해 예의범절은 훌륭했다. 풀물이 들어 있는 드레스 자락이 신경 쓰였으나, 신관은


앞장서서 안내했다.

마카롱은 신관을 뒤따라 걸으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높은 천장, 거대한 기둥. 빼곡하게 새하얀 색으로
채워진 공간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박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울
뿐이었다.

천장에 가까운 곳에 줄지어 있는 석상들이 마카롱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자애롭고 위엄 어린 모습.


독수리로 이 공간에 들어왔다면 이런 감상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바닥에 발을 딱 붙여 사는 두 발 동물의 눈높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말 신이라도 올려다보는 듯한 이 압박감이


…….

익숙하다.

단순한 기시감이라고 보기에는 선명했다. 마카롱의 눈이 뚜렷하게 너른 공간을 훑었다.

[칼릭스, 나 간다.]

[예. 예? 어디를!]

[성 구경.]

[새삼스럽게요? 매일 보시잖습니까.]

[인간 모습으로는 처음이라.]

문득 칼릭스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눈썹을 일그러트리던 그의 얼굴. 인간 모습으로 처음이라? 그것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라도 있는지 묻는 듯했다. 마카롱은 피식 웃었다. 물었다면 ‘그렇다’고 기꺼이 대답해 줬을 것이다.

과거에도 종종 인간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가 있었으나 그때와 달랐다. 단순한 흉내 내기가 아닌, 잠자고
있던 세포가 하나하나 깨어나 감각을 채우는 듯했다. 살아 있는 인간을 먹은 적도 없건만.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그 몇 번의 의문 끝에 마카롱은 스스로 답을 찾아내었다.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인간의 모습이 특별해지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노라, 마카롱은 깨달았다.

꿈속에서의 자신은 인간이었다. 비쩍 곯은 팔다리로 어둑한 풀숲을 달리고 있었다. 살과 피로 이루어진 여타


동물들과 달리 마카롱은 물질에서 온전히 멀어질 수 있는 몸이었다. 또한, 마음만 먹는다면 탄력 있는 근육을
가진 강한 동물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괴리감이 들었다.

꿈속에서의 바싹 마른 팔다리는 생김새와 달리 묵직했다. 마치 무거운 돌덩이를 꽉 매어 놓은 듯 무겁고 물속에서


움직이듯 느리고 부자연스러웠다. 흐느적거리며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한 줌도 되지 않는 가느다란 기관을 지탱할 만한 최소한의 힘조차 없음이 분명했다. 달리는 도중 몇 번이고


넘어졌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라 숨쉬기 버거웠다. 목 끝에 단 숨과 피 맛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그 악몽 속에서 마카롱은 하얀색의 거대한 건물을 보았다. 그곳에서 벗어나려 했다. 일라베니아 황성을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역해진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생김새가 달랐다.

그곳이 어딜까 막연하게 추측만 하던 중, 오늘 도박판에서 어느 남자를 보고 알게 되었다. 들고 있던 전 재산은


물론이고,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자신에게 털린, 개털 같은 연분홍색 머리를 가지고 있던 남자.

제 이름을 도박왕 라헤라고 부르라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고위 귀족이 아닐까 생각했다. 도박왕 라헤를 따라왔던
두 명의 남자는 연패하는 그가 부끄러웠는지, 양산으로 가리며 도박왕 라헤의 모습을 외부로부터 차단하고자 했다.

그때 마카롱은 양산에 그려진 어떤 문양을 보게 되었다. 꿈에서 본 건물에 새겨져 있던 것과 같았다.

[도박왕 라헤님.]

[네, 독수리 기사님.]

[뒤에 계신 분들의 양산에…….]

도박왕 라헤는 뒤를 돌아보고 아차 했다. 양산에 떡하니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심지어는 위아래 양옆, 네
개씩이나.

[아이고 답답하게 이 사람들아, 그걸 고대로 들고 오면 어떻게 하나! 신전에서 나왔다고 차라리 소리를
지르시게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남자 두 명이 싸늘한 눈으로 도박왕 라헤를 바라보았다. 도박왕 라헤는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입을 합 다물었다. 앞에서 난리가 났건 어쨌건. 마카롱은 도박왕 라헤가 내뱉은 말을 되새길 뿐이었다.

신전? 꿈속에서 본 것은 황실의 성이 아니라, 신전이었나.

바로 이곳.

마카롱은 어린 수습 신관의 뒤를 따라갔다. 여기는 기도실, 이곳에는 이델라브힘의 동상이 있으며…… 소녀가
조잘조잘 얘기하는 내용은 의미 없이 마카롱을 스쳐 지나갔다. 마카롱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신전 여기저기를
눈에 담았다.

수습 신관은 대신전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그녀를 보고 남몰래 웃었다. 눈을 떼지
못하고, 놀라워한다. 하지만 그들이 놀라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황실의 성보다도
더욱 웅장하게 느껴질 것이다. 신전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수성까지 더해진 덕이었으나,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 못할 사실이었다.

수습 신관은 한층 더 밝은 목소리로 방문자를 안내했다.

뎅-

종이 울렸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종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웅장한 소리를 공간에 가득 퍼트렸다. 신전 내부를
울림통으로 삼아 종소리는 노래처럼 흘렀다. 수습 신관은 더욱 뿌듯해졌다. 대신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내부에서
종소리를 듣고 더욱 놀라고는 했다. 밖에서 듣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높은 곳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뚫려 있는 공간을 통해 대신전 내부로 들어오고, 바람 소리와 함께 동그란 공간을
웅웅 울렸다. 천상의 노랫소리가 이러할까 싶다며 다들 말하곤 했다. 마음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소리였다.

134 화.

“운이 좋으시군요, 때를 맞추지 않으면 듣기 힘든 것인데……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가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도 있으시지요.”

두 손을 모은 소녀가 뒤를 돌아봤다. 이 벅찬 마음을 방문자와 공유하고 싶었다.

“미레이미님?”

신관은 당황했다. 여자가 울고 있었다.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에서 차가운 눈물이 끝없이 떨어졌다. 눈썹은 잔뜩
일그러져 있고 입으로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방문자는 공간에 잔류한 소리를 눈으로 좇듯 넓은 공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턱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물기 젖은 눈동자에 아름다운 대신전의 풍경이 비쳤다.

“저, 정말.”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화난 아이가 문을 닫듯, 거칠게 짓눌렀다. 그 사이로 나오는 게 피가 아니라 눈물인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소녀는 허둥지둥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아름다운 소리네요.”

비틀거리던 마카롱이 하얀 대리석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서 있는 힘조차 잃어버린 것 같았다.

“꿈결에서 들은 것만 같은…….”

마카롱은 제 드레스 자락에 얼굴을 묻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눈물이 끝없이 그녀의 손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신관은 자신의 예상보다 더 감격스러워하는 방문자의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눈알만 도르륵 굴리던 신관은 얼마
후 자리에서 벗어났다. 대신전을 방문한 손님이 감동의 여운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소녀는 멀어지면서도 마카롱을 흘끗, 흘끗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
자세로 울고 있을 뿐이었다.

텅 빈 공간이 조용했다. 마카롱은 천천히 일어나 비척거리며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눈가에 덧칠해 놓았던 화장이
짙게 흘러내렸다.

쾅!

새하얀 벽을 강타한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여린 손등 위로 뼈가 날카롭게 서며, 핏줄이 불뚝불뚝 올라왔다.

종소리가 이명처럼 들러붙었다. 신전 내부를 가득 채우던 소리는 공간을 빠져나간 지 오래였으나, 마카롱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요란하게 울리는 중이었다. 뎅, 뎅, 뎅. 세 번의 종소리가 수없이, 끝없이, 꿈과 현실의
경계를 깨 버리기라도 하는 듯.

사나운 충동이 가득 차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오랜 꿈에서 도망쳤던 공간에 발을 들이니, 보다 뚜렷한 분노가
막연한 두려움을 짓눌렀다.

속에서 뜨겁고 날카로운 것들이 치밀어 올랐다. 몸 안의 근육 하나하나가 당장에라도 터질 듯 수축했다. 견고한
벽에 그녀의 손톱이 하나둘 박혔다. 툭, 투둑…… 벽에 거미줄처럼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마카롱은 꺾이는 복도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어린 수습 신관들이
기도 시간에 맞춰 이동하는 소리였다.

그녀의 손에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났다. 관자놀이와 목에 핏줄이 섰다. 눈빛은 흐릿해지며 기이한 안광이
떠올랐다. 하얀 피부는 점점 짙어지며 질겨지며, 두터워졌다. 손이 전부 짐승의 가죽으로 뒤덮였을 무렵에는
사람의 머리만 한 크기로 커져 있었다.

거칠게 호흡하는 마카롱의 입가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들과는 판이했다. 자세를
낮추고, 숨과 기척을 죽여야만 사냥의 성공률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제어가 되지 않았다. 마치
마수라도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마구 울렸다. 죽여, 죽여!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죽여 버려! 목소리가 익숙했다. 자신의
것이었다. 떨쳐 내 보려 머리를 흔들었지만, 머릿속, 손끝 발끝까지 가득 들어찬 저주 같은 언어들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카롱은 벽에 붙어 기다렸다. 저들의 머리를 잘라 내면 이 고통에서 해방이 될까. 그녀는 제 몸을 벅벅 긁었다.


할퀴는 것에 가까웠다. 목이며 가슴이며 얼굴이며. 가리지 않았다. 피부 아래 그녀의 몸을 활활 태우는 분노가
끝없이 돌아다녔다. 괴로웠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옷매무새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톱에 치맛자락이 걸렸다. 둔탁한 송곳니처럼
생긴 손톱은 천 조각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옷자락 안쪽에 숨겨 놓았던 주머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땡그랑, 땡그랑! 수십 개의 금화가 쏟아졌다. 도박왕 라헤와 큰뿔돼지 장남으로부터 얻어 낸 금화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며 영롱한 소리를 냈다. 햇빛에 반사되는 금화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반짝 반짝, 벽을 장식하는
빛무리가 찬란하게 공간을 메웠다.

탁.

그때, 금화가 떨어지는 맑고 높은 소리를 뚫고 둔탁한 음이 들려왔다. 마카롱은 멍하니 제 발치를 바라보았다.
수수한 은색 반지가 떨어져 있었다.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문양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반지였다.
마카롱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짐승의 것과 흡사했던 손은 어느새 다시 그녀의 외관에 어울리는
생김새가 되어 있었다. 평범한 인간의 피부에 닿는 금속의 감촉이 차가웠다. 그 온도가 마카롱을 서서히 식혔다.

“아, 진짜?”

어린 수습 신관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에 마카롱은 화들짝 몸을 떨며 반지를 꽉 쥐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퉁이만 돌면 곧바로 마주칠 것이다. 마카롱은 황급히 발길을 돌려 장소를 벗어났다.

“이델라브힘이시여! 어린 종의 믿음을 이렇게 보상해 주십니까!”

“인생 역전!”

금화를 발견한 어린아이들이 기쁨의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분실물이지만 한 개 정도는 어떻게 슬쩍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아이들이 까르륵 웃었다. 아이들이 웃는다. 그리운 소리였다.

발걸음을 재촉할수록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꽉 쥐고 있는 주먹 위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마카롱은 쫓기는


사람처럼 신전복도를 내달렸다.

그렇게 한참 지났을 즈음, 어둡던 시야에 눈이 부실 정도의 환한 빛이 번졌다. 마카롱은 그때야 멈춰섰다.
그녀는 쏟아지는 햇빛을 보고서야 자신이 신전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복도를 달렸던 과정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햇살에 더욱 하얗게 빛나는 백색의 신전이…….

마카롱은 나무에 기대어 엉엉 울었다.

흰색의 성들이 하늘 높게 솟아 있고,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리고는 했던. 새가 지저귀며 영광을 노래하고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아름다운 이곳.

어두운 숲길을 달려 도망가던 꿈속의 인간은 오랜 시간, 먼 거리를 돌고 돌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결코, 벗어나지 못할. 반드시 만나게 될.

운명이다. 운명이었다.

* * *

로젤린은 오랜만에 침대에 누웠다. 요즘 따라 밤을 새우는 일이 부쩍 버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이 피로가


‘로젤린’의 육체에 서서히 정착해 가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했다. 보다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

로젤린은 제 몸이 침대에 쑥 빨려 든다고 생각했다. 팔다리가 무거운 가운데 침대가 말랑말랑하고 산뜻하게 몸을
받쳐 줬다. 피곤함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피로한 때야말로 느낄 수 있는 아늑함이었다.

그녀는 코를 킁킁거렸다. 시트에서 포근한 볕 냄새가 났다. 로젤린은 곧 잠들었다.

꿈을 꿨다. 불안하게 요동치기도 했고, 목이 메도록 울기도 했는데…….

잠들었던 로젤린은 인기척에 눈을 떴다. 짧았던 꿈은 깨어나는 순간 산화했다.


눈앞에는 갈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있었다. 바닥에 앉아 있던 그녀와 침대에 누워 있는 로젤린의 눈높이가 딱
맞았다.

“마카롱…….”

로젤린은 완전히 잠에 깨지 못해 말을 뭉개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방 안은 어두웠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카롱은 로젤린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쓸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로젤린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불이 목 끝까지 덮이는 걸 느꼈지만 로젤린은 눈을 뜨지 못했다. 피곤했다. 감은 눈 위로 시선이 쏟아졌다.


마카롱이 그녀의 가슴 위를 도닥였다. 손이 따뜻했다.

그러고 보니 짧은 꿈 중 기억나는 게 있다. 추운 곳이었다. 습기가 가득 차고 언제나 추웠다. 로젤린이 눈을


감은 채 우물거리며 말했다. 잠에 잔뜩 흐려져 있었다.

“추웠는데…….”

로젤린을 토닥거리던 손이 딱 멈췄다.

“이제 따뜻해.”

로젤린이 히죽 웃었다. 따뜻하다. 아늑하다. 코끝에는 꽃향기가, 시트의 햇살 냄새가. 마카롱의 풀잎 냄새가
난다. 그것들이 둥실둥실, 자신을 좋은 꿈으로 데려다줄 것 같았다.

로젤린은 자신에게 닿아 있는 손이 잘게 떨리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마카롱은 해가 뜰 때까지 한참을, 오랫동안


가만히 그녀 앞에 앉아 있었다.

16

“끄에엑!”

밖에서 추한 비명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리카르디스는 얕은 잠에서 깨어나 뻑뻑해진 눈을 깜박였다. 방 안은


아직 어두웠다. 커튼 틈 사이로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요즘 잠잠하더라니, 다시 시작인 건가?

리카르디스는 몸을 일으켰다. 영 창의성 없는 작자들이었다. 밤과 새벽 사이. 완벽한 어둠은 사람들이 마땅히


경계하기에, 그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하는 때. 고요함에 조금의 어수선함이 더해지는 시간.

이 푸르스름한 시간을 노린 자들이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않다니. 끈질기다고 해야 하는지 끈기가 있다고 해야 하는지.

밖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리든 말든 리카르디스는 차분한 손길로 이불을 정돈했다. 무슨 소란이건 간에
로젤린의 선에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암살자들에게는 자비가 없는 기사였다.

새벽 내내 말라붙은 입안이 깔깔했다. 리카르디스는 물을 마시며 테라스로 향했다. 암살자는 굳이 안 봐도


그만이나, 로젤린에게 그만하고 올라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해야겠다. 자신에게는 이른 아침이지만 아마 로젤린은
간식으로 생각하고 총 네 끼를 챙겨 먹을 것이다.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혼자서 이러고 있으니 좀 미친 사람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커튼을 치고 테라스의 문을 열자 새벽 공기가 서늘했다. 로젤린, 적당히 하고 경비대에 넘겨…….

리카르디스는 기함했다. 로젤린의 아래에 제압되어 있는 저 남자는.

‘저 연분홍색 개털은!’

리카르디스는 급하게 난간에 몸을 실었다.

“로젤린! 죽이면 안 된다!”

135 화.

“히이익!”

남자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죽음의 문턱 어딘가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리카르디스의 말을 통해
깨닫게 된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부루퉁한 표정을 했다. 딱히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곧 경비를 맡던 기사와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새벽을 틈타 리카르디스의 방 안에 몰래 침입하려 했던 자의


이름은 라헤안시. 신분은 대신관이었다.

“잘 아실 만한 분께서…….”

스타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면이 팔리는 듯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속된 말로 쪽팔렸다. 곧 두 명의 신관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들은 면구스러워 하며 고개를 연신
숙였다.

보호자로 호출된 신관들은 저희 대신관님께서…… 로 시작하는 구구절절한 문구와 익숙한 사죄의 표정으로
스타스의 기분을 빠르게 풀었다. 능숙한 솜씨였다. 어떻게 단련되었는지 알 것 같았던 터라, 리카르디스는
측은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소란은 빠르게 종식되었다. 칼을 빼 들고 무섭게 달려온 기사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고 돌아갔다.


리카르디스는 테라스 위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기 전, 손을 까딱하는
것으로 불청객의 입장을 허락했다.

라헤안시는 로젤린의 안내를 받아 월장석 성에 정식으로 발을 들였다. 로젤린은 뒤에서 쏟아지는 끈질긴 시선에
흘끗 돌아보았다. 눈높이가 비슷해서 그런지 눈이 딱 맞았다. 라헤안시는 싱글벙글 웃으며 로젤린을 보고 있었다.

“자네가 그 유명한 로젤린 경인고?”

“예.”

라헤안시는 조금 당황했다. 보통은 ‘그’, ‘유명한’ 따위의 수식어가 제 이름과 붙어 있으면 “아닙니다.
헛된 위명이지요.”와 같은 겸손한 반응을 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겸손을 기대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지만, 너무
당당한 대답이었던 터라 라헤안시도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녀는 로젤린도 맞고 유명한 것도
맞다.

“새벽부터 미안허이. 몰래 리카르디스 황자 전하만 뵙고 가려고 했는데 일이 어찌 이렇게 커져 버렸누.”

“몰래 벽을 타고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정식으로 방문 절차를 밟으시면 됩니다.”

음, 매우 정석적이다. 그걸 몰라서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깜짝 놀라게 해 주려 했던 게지. 내가 도리어 깜짝 놀랐지만 말이네. 자네 대체 어디 있었던 겐가? 이 몸이


분명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주위에 누가 있는지 확인을 했었는데.”

“나무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수풀 밑으로 기어오시더군요.”

라헤안시의 뒤에서 걷고 있던 신관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추한 꼴을 또 보이셨다니…….

로젤린은 라헤안시가 월장석 성의 담을 넘을 때부터 쭉 보고 있었다. 살금살금 수풀 밑으로 기어오던 라헤안시가


지렁이를 손으로 눌러 터트리는 모습도. 이후에 비명을 지르려다가 주위를 의식하고 급하게 입을 가렸으나,
안타깝게도 지렁이를 터트린 쪽의 손이라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았다.

“상상도 못했느니. 대단히 훌륭한 기사로구나!”

“그렇습니다.”

라헤안시가 껄껄 웃었다. 딱딱하고 정석적인 기사의 태도를 고수하면서도 가끔씩 묘한 면이 보인다. 재밌는
기사였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리카르디스의 방 앞이었다. 소란에 깨어난 잇세리온이 퀭한 눈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머리가 눌려 엉망이었다.

로젤린이 잇세리온에게 “머리 모양이 이상합니다.”라고 지적했다. 잇세리온은 힘없이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로젤린은 그의 머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어쩐지 새 같아 보인다고도 했다. 잇세리온은 알겠으니 제발
들어가라며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수면 시간이 짧아 화낼 힘도 없는 듯 보였다. 라헤안시는 소동의 주범으로서
제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을 느꼈다.

리카르디스는 편한 옷을 입고 탁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한쪽 손에 서류를 들고 읽어 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람이 좀 인간미가 있어야지. 방금 일어난 것이 명백한 차림새임에도 얼굴이나 눈이 부어 있는 기색조차 없었다.

콧날은 여전히 우뚝하고 얼굴선은 여전히 날렵하다. 서류를 읽는 눈이 잠에 조금 잠겨 있었으나 도리어 그것이
나른한 분위기를 형성해 평소와 다른 아름다움을 비출 뿐이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새벽빛이 방 안을
어슴푸레하게 떠도는 가운데 남자의 은발이 반짝였다. 참 그림 같은 광경이다. 라헤안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
이복형의 눈부신 자태를 감상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리카르디스 황자 전…….”

하. 라는 말이 나오기 전 리카르디스가 성질내며 라헤안시에게 서류를 집어 던졌다. 라헤안시는 볼썽사납게 몸을


구기고 팔로 얼굴을 가렸다. 로젤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형!”

“형 같은 소리가 나와 지금? 사람들 다 깨워 놓고 이게 무슨 민폐냐! 내가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어!”

신관 두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래서, 이 새벽부터.”

리카르디스의 푸른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찾아올 아주 급한 이유가.”

그의 턱 근육이 움찔거렸다.

“있겠지. 라헤안시.”

라헤안시는 그 살기 넘치는 모습에 잠시 흠칫했다가 고개를 급히 끄덕였다.

“그러엄!”

“앉아.”

“어! 알았어, 형!”

대답이 재빨랐다. 라헤안시는 리카르디스의 맞은편에 덥석 앉았다. 두 신관들이 다시 신전으로 돌아간 뒤.


테이블에는 간단한 다과가 차려졌다. 라헤안시가 반색하며 쿠키를 집었다.

“아, 이 맛 그리웠어. 월장석 성 주방장이 솜씨가 좋단 말이지.”

서두가 불길했다. 역시 그냥 놀러 온 거 같은데. 리카르디스의 눈이 뾰족해졌다. 라헤안시가 볼 가득 쿠키를


넣은 채 입을 열었다. 과자 부스러기가 후두두 떨어졌다.

“아, 별일은 아니고.”

이 자식이 진짜? 리카르디스가 울컥하자 라헤안시가 희희덕대며 말을 이었다.

“신관이 살해당했어.”

별일이었다.

“황실 내의 숲에서 시체로 발견됐는데 짐승의 소행이라 하더라고. 크게 번질 일은 아니야. 오늘의 보고 끝!”
별일이라면 별일이고 별일이 아니라면 아니었다. 신관이 죽은 일이야 중대사일 수 있지만, 굳이 이 새벽에 월장석
성까지 와서 얘기할 건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팔짱을 끼고 빤히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뭔가 덧붙여야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라헤안시가 히죽 웃었다.

“하여간 눈치 빠르다니깐.”

“빨리 말해.”

“아 뭐, 진짜 별거는 아니고. 내가 보기에는 이번 사건에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싶어서.”

리카르디스는 찻잔을 느릿하게 만지며 그가 말했던 내용을 반추했다. 신관이 죽었다. 황실 안의 숲에서
발견되었다. 짐승의 소행이다. 확실히 미심쩍었다. 어지간하면 대신전 안에서만 생활하는 자가 황실 숲까지 간
것도 이상하고, 그곳에 사람을 해칠 만한 맹수가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시체를 봤어. 아주 난도질이 되어 있었는데, 아, 생각하니까 또 속이 울렁거려.”

라헤안시가 입을 가렸다. 리카르디스는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짐승이라고 하기에는 신체 일부가 사라진 곳이 없어. 딱히 먹을 생각도 없었는데 사냥을 했다? 뭐 영역


침범이나 여러 가지 가능성도 있지만, 시체가 너무 걸레짝이야.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어. 원한이 가득 찬 살인
사건의 시체 같은 꼴이었다고. 그렇다고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또 무리가 있어. 손톱자국이나 힘이나. 뭐 여러
가지 정황상. 그래도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는데 시체를 발견한 후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짐승의 소행이다! 땅땅.
결론이 났어. 뭐 그거야 당연한 일이긴 한데…….”

그의 말대로 당연한 일이었다. 건국의 달에 들어선 이때. 심지어는 발타의 왕자와 왕녀가 일라베니아에 있는 이때.
신관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단순한 한 사람의 불행을 넘어서, 일라베니아의 명성에 금을 가게 할 수도 있었다.
일라베니아가 단순한 대륙의 패왕이 아닌, 신의 영광을 업고 있는 신성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신관이 온전히 칼로 난도질당했다 하더라도, 짐승의 소행이다. 안타까운 사고였다. 그렇게 공표할
판이니, 짐승인지 사람인지 범인의 모습이 흐릿하다면, 일라베니아가 내릴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냥 참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어서.”

라헤안시가 차를 후르르릅 소리 내며 마셨다. 저놈. 대신관 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예법을 깡그리 잊어


먹은 것인지. 리카르디스가 그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때를 기가 막히게 맞추지 않았어? 그 짐승인지 인간인지 하는 거 말이야.”

라헤안시가 히죽히죽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찻잔을 들었다. 약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리카르디스는 그 속에서 신관이 살해당하는 여러


과정을 그려 보았다. 신관은 으악, 으아악 소리를 내며 몇 번이고 죽었다. 한번은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가진
짐승. 한 번은 검을 들고 살의를 비치는 인간.

그는 두 종의 범인 후보와 지금의 시기를 맞춰 보았다. 라헤안시가 말했듯, 시기가 공교롭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으나 보다 높은 가능성 쪽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마치 이 사건이 유야무야 묻힐 것을 알기라도 한, 무언가가
저지른 일이 아닌가 하고.

“뭐 신전 쪽에서 사건을 덮겠다니 내가 더 할 건 없지만. 그냥 알아 두라고. 이 황실 어디 한구석에 위험한 게


있다는 거잖아? 이 아우가 형님이 걱정돼서 새벽부터 달려왔는데 뽀뽀는 해 주지 못할망정 화부터 내다니! 못됐어!
이그, 심술쟁이!”

“나가.”

“죄, 죄송합니다, 형님…… 아침만 먹고 가게 해 주세요……. 신전 밥 더럽게 맛없는 거 다 아시면서…….”

라헤안시는 당장 쫓겨나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먹을거리를 입에 욱여넣었다.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라헤안시가 냠냠 쩝쩝하며 추잡스러운 소리를 냈으나 혼내지 않았다.

생각이 깊어졌다. 그가 한 말이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황실 어느 한구석. 위험한 무언가가 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라헤안시를 부럽다는 듯 쳐다보던 그녀는, 닿는 시선을 눈치채고 그와 눈을


맞췄다. 가만 바라보기만 하자 로젤린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리카르디스는 눈썹을 찌푸린 채 애써 미소 지었다.

136 화.

사냥 대회 하루 전. 리카르디스는 대회가 개최되는 장소에 미리 도착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간이 천막들이


줄지어 있고, 손님들이 걷기 편하시라 융단까지 깔려 있었다. 산이라기보다는 나무가 많은 정원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내일 대회가 개최되면 갖은 음식이 올라갈 테이블 또한 미리 정리되어 있었다.

로젤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숲 안에 생겨난 거대한 파티 홀을 감상했다. 사냥 대회를 위해 고용된 용병들과


하인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
일원들밖에 없었다.

그들이 하루 일찍 미리 도착한 이유는…….

“마음에 차지 않는다. 다른 곳.”

산을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말 위에 앉아, 길을 안내하는 용병에게 도도하게 명령했다. 몇 번이나


마음에 차지 않는다, 좁다, 넓다, 나무가 너무 많다, 사람의 왕래가 잦다 해 가며 퇴짜를 놓기만 열두 번째.
지금으로 열세 번째가 되었음에도 용병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연신 숙여 댈 뿐이었다.
용병단 ‘올가미’는 사냥 대회를 위해 산을 정리하는 역할로 고용된 수많은 용병단 중 하나였다. 황실에서
고용되었다 해도 높으신 분에게 직접 의뢰를 받는 게 아니라, 그 높은 분의 아랫사람의 아랫사람의 하인에게
전달받을 뿐이었는데, 이게 웬걸.

눈앞에는 역대 최고의 신성력을 지닌, 어떤 위험한 전쟁에서도 승리만을 이끄셨다는, 만민을 두루 살피시는,
눈부신 아름다움에 삼천 명을 실명시킨 전적이 있다는! 그 설원의 월계수, 2 황자 리카르디스 전하가 계시지
않은가.

올가미 용병단의 단장은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리카르디스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 발언을


가슴에 꼭꼭 새겼다. 가언으로 삼을 것 같은 비장한 얼굴이었다. 리카르디스가 한 의뢰 내용, ‘숲 속’, ‘사냥
대회 당일 날 참가자들이 발길을 하지 않을 만한 곳, 몸을 움직일 만한 공터’, ‘길이 복잡하지 않아 잘 익힐 수
있을 것’의 조건을 충족하는 장소를 왜 찾아 달라고 했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두 시간 정도를 돌아다닌 후, 단장은 고객의 요구에 응하는 적합한 장소를 찾았다. 리카르디스의 “좋군.” 한
마디에 단장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리카르디스는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물리고 로젤린과 장소를 둘러보았다. 따라오던 마카롱이 나뭇가지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일 꼭 이곳에 와야 해, 로젤린 경. 기억할 수 있겠나?”

로젤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지나온 장소를 반추했다. 나무, 돌, 지형, 수풀의 모양. 하나하나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네.”

“절대 이 장소를 벗어나면 안 된다.”

“예. 그런데 왜 벗어나면 안 됩니까?”

“위험한 것이 그대를 쫓고 있다는 소식을 칼릭스 경에게 들었다. 내가 그자라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무기를 들고 다니는 것이 당연한 공간이니 말이야. 게다가 언제나 동료들과 함께 있던 그대가 혼자 떨어져
행동하는 만큼, 내일은 그자에게 좋은 기회가 될 테지.”

로젤린은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나를 쫓고 있다던 위험한 것. 나도 압니다.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그것’의 정체를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는지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을 얼버무릴
뿐이었다.

“아, 그거, 위험하죠. 압니다.”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다. 정보를 제한하자니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 얼굴조차 모른다고 들었다. 기다리다 보면 모습을 드러내겠지.”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돌은 불가피하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라, 경.”

“마음의 준비…… 말입니까?”


“이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누구일 줄 알고? 내가 무기라도 빼고 달려들면 어쩌려고 그러나. 레이몬드면?
칼릭스면? 얌전히 맞아 주고 있을 건가?”

로젤린이 숨을 헉 들이켜며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충격적이고 상처받은 듯,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리카르디스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웃었다.

“만약이라는 거지. 누군지 모르지 않나. 그러니 내일 숲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그대와 얼마나 친밀했건, 그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건. 절대 믿어서는 안 돼.”

“예…….”

“사건이 일어나리란 걸 예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상황의 우위를 점하기는 힘들지. 그게 장소를 정한 이유다.”

로젤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장소?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는 목적이 아니었나?

“지금 당장의 위험은 피할 수도 있다. 경이 사냥 대회에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니. 하지만 그러면 문제는 더
심각해지겠지. 얼굴도, 정체도 모르는 자가 언제 어디서 그대를 노릴지 모르게 되지 않겠나. 일라베니아의
정세는 현재 몹시나 불안하고, 지금보다 상황은 점점 나빠질 가능성이 많아. 위험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으려는
이유다. 최악을 피해야 하기에 차악을 선택해야만 해.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로젤린, 경이지만…… 미끼도
경이다. 위험이 없을 수 없어.”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다. 그래서 안전장치가 필요해.”

로젤린이 고개를 기울이자 리카르디스는 대답하는 대신 그녀 뒤쪽, 굵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마카롱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로젤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카롱도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저 멀리에 있는 터라 보이지도


않았고, 마른 나무만 늘어져 있는 이 장소에는 리카르디스, 로젤린, 마카롱밖에 없었다.

“마카롱 경.”

로젤린이 고개를 홱 하니 돌려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로젤린을 계속 따라다닌다면 그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황실에 있었던 만큼,
로젤린을 따라다니는 독수리는 저와 같은 존재라고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로젤린 경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이번 사냥 대회에서 그자의 꼬리라도 잡아야 해. 그러니 로젤린이 혼자 다닌다는 점이 내일의 일에 전제되어야
한다.”

로젤린이 입을 떡 벌렸다. 억, 헉. 같은 존재라고 알고 있을 가능성? 말에 담긴 내용보다, 그걸 말하는 사람이


리카르디스라 경악스러웠다. 독수리는 미동 없이 가만히 리카르디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애 다 죽어 간 다음에야 건지러 가라고?”

“이번을 놓치면 위험은 더욱 커진다.”


“본인이 쫄려서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어도, 그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겠지?”

“상황은 최악을 상정해야 한다. 상대는 과거의 로젤린을 한번 죽였던 사람. 그대 또한 그자의 능력을 모르지
않나. 그대들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자의 능력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한계치까지 올린 것뿐이다.”

로젤린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리카르디스와 마카롱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대화가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전하는 왜 마카롱이 말하는데 놀라지 않는 거지? 마카롱은 정체가 들켰는데 왜 저렇게
태연해? 어, 어…….

“로젤린 경.”

“예! 로젤린입니다!”

로젤린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마력을 쓰지 않으면 감지할 수 없는 게 맞나? 그대들끼리도?”

“예, 그렇습니다.”

“청각을 강화한다던가, 감각을 예민하게 하는 것에도 마력을 사용해야 하고?”

“……예. 그렇지만 안 써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잘 들립니다.”

“그렇다면 그자도 경의 뒤를 따르며 별다르게 마력을 운용하지는 못하겠군. 그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끼고서 곰곰이 고민했다. 물론 내일 반드시 일이 일어나리란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 또한 없었다. 무슨 일이든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것을 대비해야만 했다. 때문에
위험인물이 로젤린을 뒤따른다는 가정 아래 계획은 세워졌다.

로젤린은 내일, 사냥 대회가 시작하면 이곳으로 온다. 동족이라는 독수리가 보이지 않음에 의문을 가지고 의심할
수는 있으나, 그녀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리카르디스가 용병단 ‘올가미’에게
한 의뢰는 모두 두 가지였다.

‘조건에 부합하는 장소를 찾아낼 것’, ‘사냥 대회가 시작되면 이 장소로 오는 길목 길목에 포진해 있을 것.’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해도 일반적인 인간보다 감각이 훨씬 예민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러니 뒤를
쫓아서는 안 된다. 그저 사냥 대회의 진행을 위해 산 여기저기 퍼져 있는 용병들 중 하나로 보이게끔 한다.

그 사이에 마카롱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올가미’ 용병단의 단장과 얘기해 두었다. 그들과 함께
신입 용병 단원인 척 숲속에서 대기한다. 마카롱은 기다리다, 용병 단원들로부터 누군가가 로젤린을 쫓아갔다는
정보를 듣고 움직인다.

하지만 단순히 로젤린이라는 유명 인사와 대화하고 싶은 사람일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마카롱이 움직이는 때는 마력을 느낀 후여야만 한다. 마력을 사용한 것이 추적자이든 로젤린이든 간에 그만큼
상황은 위험하다는 뜻일 테니.

용병 단원들은 마카롱이 떠나고 이십 분 후. 마카롱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지정된 이 장소로 이동한다. 만약


싸움이 벌어진 상황이고, 마카롱과 로젤린이 합세한 싸움에서 그 시간 동안 결판이 나지 않는다면 상대의 무력은
상상 이상이라는 얘기였다.
용병 단원들은 강하지 않으나, 인원이 많다. 그에 배가 되는 눈이 있다. 정체 모를 것은 제 목적과 본 모습을
숨기는 상황이고, 일반인들의 눈은 마카롱과 로젤린의 힘보다 그것을 강력하게 제재할 무기가 되리라.

간단히 계획을 설명해 주었더니 로젤린이 연신 눈치를 보며 말을 더듬었다.

“마, 마카롱은 그냥 착한 독수리…….”

인간으로 변한다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전하. 마카롱은 평범한 독수리입니다.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따위를 말하고 싶었던 듯 보였다.

“그래그래, 착한 독수리지만, 내일만 잠깐 인간으로 변해 있으면 된다. 그 다음 날부터는 다시 착한 독수리를


하도록 하자.”

리카르디스가 다정하게 웃으며 로젤린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읍, 어버버……. 당혹스러워하는 로젤린과 달리
마카롱은 코웃음만 지었다.

137 화.

“내 눈을 벗어난 그 짧은 사이 죽으면 어쩌려고.”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했지 않나. 그자의 능력이 미지수이긴 하지만, 로젤린 경이 강한 것 또한 사실이니.


마력을 감지하고 그대가 도착하기까지의 몇 분. 그걸 로젤린 경이 감당해 주리라…….”

“믿어?”

“믿는다.”

로젤린은 숨죽인 채 마카롱과 리카르디스의 대화를 들었다. 시간이 지났다.

“너는 내게 뭘 바라는 거지? 그자를 만났을 때 내가 뭘 하길 바라? 쫓아내기를? 생포해서 네 앞에 끌고 오기를?


아니면…….”

리카르디스는 마카롱이 그자를 죽이기를 바라느냐? 라고 묻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끝이 흐려진 질문


속에는 적의가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다. 단순히 자신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을 넘어서 있는 것이라, 리카르디스는
의아했다.
마카롱은 그자를 모르지 않던가?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마치 아는 사람이나 소중한 존재라도 되는
듯, 둥글게 감싸고도는 모양새였다.

“로젤린이 무사하기를 바란다. 그대가 바라듯이.”

리카르디스의 대답은 누군가를 해치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누군가가 어떻게 되든지, 로젤린만 무사하다면 그걸로 족했다. 맹금류의 따끔한 눈빛이
누그러졌다. 마카롱이 나뭇가지 위에서 날개를 펄럭였다. 하늘을 메울 듯 거대한 날개였다. 마카롱이 움직이자
바람이 불어왔다.

“손을 빌려주겠어.”

“감사를 표한다.”

“네게 감사를 받을 이유는 없지. 가는 길이 같았을 뿐이니까.”

“가는 길이 같음에 감사한다.”

“그 또한, 가 봐야 알 문제겠지만.”

마카롱이 크게 날갯짓하며 높이 떠올랐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리카르디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몇 초 뒤


주위를 둘러봤지만 마카롱은 사라진 후였다. 거대한 날개가 사라진 공백이 눈에 띄었다. 리카르디스는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잠시간 눈에 담다, 고개를 돌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자신의 목 뒤가 바짝 굳는 것 같다고 느꼈다. 혼란스러웠다.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자신을 쳐다보는


리카르디스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로젤린이 깊은 추론을 못한다고 해도,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명확하게 알 수
있게 이야기했다.

[상대는 과거의 로젤린을 한 번 죽였던 사람.]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죽었음을 안다! 그것은 지금의 자신이 과거 ‘로젤린’과 완벽한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는 말이었다. 마카롱에 대한 다양한 정보는 사실 그녀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마력을 사용하고,
변이가 가능하고, 무엇이건 간에! 들켰다. 들통 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젤린, 그녀는 자신이 굉장히 치밀하게 행동했노라 자부했다. 그는 알 도리도 방법도
없었으리라. 대체 어떻게? 언제부터? 혼란스러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로젤린은 뒷걸음질 쳤다. 생각해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본능에 가까웠다. 이 자리에서 도망을 쳐야만 할 것
같은, 벗어나고 싶은 그런 느낌에 발이 먼저 슬금슬금 움직였다. 리카르디스도 그녀의 수상한 기색을 눈치챘다.
눈으로 재빠르게 도주 경로를 훑는데, 모르는 게 이상했다. 리카르디스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쫙 피며
만류했다.

“잠깐, 로젤린 경. 로젤린. 나와 얘기 좀 하지.”

그가 애써 웃으며 목소리를 한껏 누그러트렸지만, 로젤린은 덫에 걸린 쥐 같은 표정을 고수하며 여전히 발을


꼼질꼼질 뒤로 옮겼다.

“로젤린!”
사실상 그녀가 마음을 먹는다면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리카르디스도 그녀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세 걸음,
눈치 보며 물러서던 로젤린이 기세를 확 바꿔 뒤돌아 도망쳤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드러난 숲. 몸을 숨길 곳이
별로 없다 하더라도 빠른 속도로 내달리니 벌써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기함하며 그녀를 쫓았다.

지금, 내가, 이, 나이에, 나 잡아 봐라 놀이를, 전심전력으로!

리카르디스는 언제나 암살 위협을 달고 살았던 몸이라 상급 기사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받고는 했다. 최선을 다해
도망치는 로젤린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쫓아갈 수 있는 배경에는 그의 체력과 순발력, 운동 능력이 고루고루
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체력, 순발력, 운동 능력이 죄 인간의 기준을 훌쩍 넘어선 이가 상대이다 보니, 한계가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거친 숲을 내달리는 로젤린은 실로 한 마리의 야생동물 같았다. 이대로는 그녀와 대화는 고사하고
한마디 꺼내는 것조차 힘들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의 예상 그대로, 잠시 눈을 깜박한 사이 그녀의 인영은 숲에 스며들어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리카르디스는 관성적으로 달리다가 얼마 후 멈춰 섰다.

‘그래…… 쉬운 여자가 아니란 것쯤은 알았지만…….’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물리적으로.

리카르디스는 눈을 번쩍 떴다. 로젤린. 로젤린 에스터. 네가 가 봤자 어딜 가겠어. 내 주위 반경 내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을 벗어나지 않은 그 어디쯤이겠지!

“윽!”

리카르디스는 어디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갑작스럽게 신음하며 나무에 팔을 걸쳐 기대었다. 그는 헉헉, 숨을


급하게 몰아쉬다 마른기침을 했다. 그리고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며 스르륵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가 보아도
심장 어디가 아파서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사람 같았다. 거기에 더해 송골송골 배어 나온 땀이 그 병색을 더욱
짙게 만들고 있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빠르게 사라졌던 만큼, 그보다 더 빠르게.

“전하!”

나무 위에서 로젤린이 훌쩍 나타났다. 나뭇가지를 잡아 한 바퀴 돌고 바닥에 착지하는 모습이 넋 빼놓고 볼


정도로 멋졌다. 박수라도 치고 싶었지만 리카르디스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연기를 계속
펼치는 중이었다. 로젤린이 후다닥 달려와 리카르디스의 어깨를 짚었다.

“시, 신관을!”

로젤린은 일라베니아에서 가장 신성력이 강한 사람이 리카르디스라는 사실을 잠깐 잊은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제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잡았다. 리카르디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산책은 잘 다녀왔나, 로젤린 경?”

서슬 퍼런 음색에 로젤린이 화들짝 몸을 떨었다.

“저를 속이신 겁니까?!”


그 아기 고양이 같은 순진한 얼굴로! 로젤린의 얼굴에 배신감이 잔뜩 퍼져 있었다.

“속이긴 누가 속여. 경이 걱정할까 봐 애써 통증을 누르는 중이야.”

리카르디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성의하게 말했다. 모로 보나 거짓말이었지만 로젤린은 의심의 눈빛을 지우고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두 손으로 더럭 잡았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얼굴이 가까웠다. 키 차이 때문에 항상 그녀를 내려다봤으나, 지금은 로젤린이 무릎을 꿇은 리카르디스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찌푸려진 눈썹에서 걱정이 아른아른 비쳤다. 너무 진지한 표정이라 이제 와 거짓말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마음이?”

빤한 개소리에도 로젤린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마음이 아픈 건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 거지? 리카르디스의 의문은 곧 풀렸다. 로젤린이 두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춘 후, 그의 가슴 왼쪽에 귀를 대었다. 리카르디스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뭘 확인하는지 물어도 되나?”

“평균 심장박동수를 확인하는 겁니다. 제가 헤아리는 시간은 시계와 0.5 초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기 때문에,
급한 대로. 말하지 마시고 가만히 있어 주십시오.”

그런 재주도 있었단 말이지. 하여간 여러모로 대단했다. 보통은 손목에 손을 대고 확인하겠지만, 거기까지는
배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얌전히 있었다.

가슴에 얼굴을 바짝 붙인 로젤린은 집중하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검은 속눈썹이 길었다. 리카르디스는 손을


움직여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 했다.

“심장이 이상합니다, 전하! 너무 빠르게 뜁니다!”

로젤린이 눈을 사납게 부릅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카르디스는 흠칫 놀라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던 손을 선회해


급하게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래, 그렇겠지.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겠지. 빠르게 뛰는 중이니까.”

“많이 아프십니까?”

“죽을 것 같지만 죽지는 않으니 걱정 말아. 그저 심각하게 연약해서 세심한 주의와 관심, 많은 사랑을 필요로 할
뿐이다. 외로우면 남몰래 울고는 하지. 그런데 그런 날 두고 도망쳐? 호위 기사가 호위 대상을 놓고 도망쳐?
내가 숲 어딘가에서 쓰러져서 쓸쓸하게 혼자 죽건 말건 나 몰라라 하면서?”

“아, 아니 저는 그게 아니라…….”

로젤린이 뾰족한 것으로 찔린 듯한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눈치를 봤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도망가는
중이었다는 사실과 왜 도망을 가려 했는지에 대해 모두 떠올린 기색이었다.
“그…… 전하께서…….”

로젤린은 우물쭈물하며 말을 흐리더니 입술을 매만졌다. 리카르디스는 침착하게 그녀가 말을 잇길 기다렸다.

“다 안다고 그러시니까, 그러면 제가 로젤린인데 로젤린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

단호한 대답에 로젤린은 덜컥 겁을 먹었다. 그녀는 깊고 황량한 숲을 떠돌 시절, 자신이 마주쳤던 인간들이 보인
반응을 기억하고 있었다. 괴물, 귀신! 비명을 지르고 도망쳤다. 코앞에 둔 죽음보다 자신을 두려워했다.
로젤린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알고 있지’라고 대답을 내뱉은 입술에서 시선을 올려 리카르디스를 조심스레 살폈다. 침착하게
감정을 가다듬은 남자의 표정은 평소보다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하고 있으나
그것이 도리어 두려웠다.

138 화.

리카르디스에게 비치는 제 모습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한순간에 시간을 돌아가, 형태 없이 그림자처럼 어둠에
스며들던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로젤린은 급하게 시선을 그의 발치로 떨구었다. 리카르디스가 자신을 혐오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상상만 해도
몸이 떨려 왔다. 손끝이 딱딱하게 굳더니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로젤린.”

하, 한숨을 내쉬는 남자의 행동에 로젤린은 눈물이 울컥 나왔다. 그녀를 보던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로젤린이 본능적으로 몸을 물렸으나 그의 손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로젤린 에스터.”

뭔가 화를 꾹 누르는 목소리였다.

“예…….”
“내가 왜 그대에게, 내가 그런…… 정보들을 알고 있노라 얘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알 수 없었다. 로젤린은 계속해서 그의 눈을 쳐다보지 않고 코와 입가에만 제 시선을 두었다. 언제든 도망갈 수


있도록 퇴로도 확인했다. 그녀가 숲속을 훑는 것을 눈치챈 리카르디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이 정말.”

리카르디스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줘 그대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로젤린의 몸이 닿자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허리에 제 두 손을 감았다. 로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도망갈 생각 말고 날 봐. 지쳐서 더 이상은 쫓아갈 수 없으니. 말했지, 연약하다고. 이번에야말로 정말 쓰러질


수도 있다.”

뿌리치자면야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다. 로젤린이 가만히 그의 품에 있는 이유는, 리카르디스가 먼저 손을 뻗어


오는 지금의 상황에 크게 안도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에서 어떤 모진 말이 나오고, 경악스러운 말이
떨어진다 해도 감수할 수 있을 만한. 안도감.

그의 목에서 달콤한 향수 냄새가 났다. 품이 단단하고 따뜻했다. 몸이 노곤노곤 흐물흐물하게 녹을 만큼이나.

리카르디스는 경직된 몸을 서서히 이완시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대의 비밀을 알고 있다 알리지 않았던 것은, 불필요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비밀은 중대했고, 그 중대한
건에 대해 그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는 전혀 몰랐어. 그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조차 하지 못해. 물론
좋게 흘러갈 수도 있지. 그러나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이것이 그대의 치부라면? 그대가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었다면?”

리카르디스는 잠시 한숨을 쉰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로젤린.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모든 상황을…… 최악을 상정한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불필요하게
그대를 상처 입히고 휘두르는 일이 될까 봐. 지금처럼.”

로젤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할 줄 몰라 말하지 않았다?

어떤 일에 있어 상대방의 입장에만 신경을 기울이는 그 행위가, 사납고 따가울 리 없었다. 부드럽고 따스했다.
로젤린은 그의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한 번 더 확인받고 싶었다. 불안함에 꼬인 실타래는 이미
슬금슬금 풀려, 종국에는 완전히 풀어질 것을 알면서도 한 번 더.

“제가 왜 상처 입지 않기 바라십니까?”

로젤린의 손이 그의 팔에 살포시 닿았다. 이번에는 리카르디스의 몸이 살짝 굳었다. 그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휘었다.

“당연한 걸 묻고 그래.”

남자가 씩 웃고 대답했다.

“내가 그대를 좋아하니까 그렇지.”

로젤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몇 초 후. 로젤린은 환하게 웃었다.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듯, 행복하게.

리카르디스는 도주로를 훑던 그녀의 눈빛, 필사적인 달음박질, 흔들리는 시선에서 그녀가 가진 불안의 크기를 알
수 있었다. 꽝꽝 얼어 있고 꾹꾹 뭉쳐 있는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건만. 자신의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에 로젤린은 쌓아 뒀던 불안한 감정들을 모두 해소한 듯 보였다.

그녀가 가진 불안이 적은 것이 아니라, 지금의 말을 크고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에


마음 한편이 어딘가 아려 왔으나…….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전하께서 저를 좋아하신다고!”

리카르디스는 찝찝한 표정으로 로젤린을 보았다. 이 사람, 분명 이성 간의 감정은 배제한, 사람 대 사람의


호감으로 받아들였겠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니깐. 참 경도, 그것도 몰랐나?”

“아닙니다. 어쩐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뭐 대단한 업적이라도 이뤄 낸 듯 의기양양하게 히히 웃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래 뭐. 이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 * *

“검은색인데, 약간 불투명합니다. 크기는 한 이 정도 됩니다.”

이제는 숨길 것도 없겠다. 로젤린은 신나서 예전 ‘그것’일 때의 모습을 설명해 줬다. 바닥에서부터 제


허리까지 둥근 모양을 손으로 그려 가며 아주 열성적이었다.

“아주 귀여울 것 같군. 그 모습으로는 이제 변하지 못하는 건가?”

“예.”

“아쉬운걸,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 마카롱은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못하지는 않겠지만 안 하겠지.”

리카르디스는 잠시간의 만남으로도, 마카롱의 성격을 많이 파악했다. 적의가 넘쳐흘렀다. 그것은 다년간 숱하게
느꼈던 살의는 아니었으나, 꼬장꼬장 늙은 귀족들이 그를 바라볼 때의 시선과 비슷하기는 했다. 아니꼬워,
죽겠다. 라는 표정이었다.

어찌 되었건 호의적인 감정은 전혀 아니었기에, 그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는 마카롱의 모습이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로젤린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지 시무룩한 기색을 띠었다.

한참 말없이 있던 그녀가 갑자기 소매를 급하게 걷었다. 로젤린의 하얀 손에 힘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헉, 숨을 삼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그녀의 피부가 점점 짙어지고 질겨졌다. 가죽이 뒤덮이더니
다시 그 위를 단단한 비닐이 덮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합쳐지며 네 개의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변했다.

리카르디스는 깜짝 놀랐지만, 티 내지 않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거 아주 멋있군!”

닿는 감촉도 감촉이고, 온도도 서늘해서 더욱 오싹했다. 말로 듣는 것과 보는 것, 느끼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아쉽다는 말에 뭐라도 보여 주자는 갸륵한 마음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변이를 마치자마자 손부터 잡고 봤다.

“이야, 이거 참…… 멋있어. 아주…… 뾰족뾰족해.”

여전히 칭찬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로젤린은 방긋 웃으며 기뻐했다.

“이거 한번 휘두르면 사람 몸도 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검은달 놈들의 시체가 다들 그 모양이었던 거군.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검고
거대한 손을 만지작거렸다. 차갑고 단단한 비늘, 날카로운 손톱. 보다 보니 윤기가 잘잘 흐르는 게 아주
멋스러웠다. 집중해서 만지고 있자 로젤린이 신나서 눈 색도 바꿨다가, 동공도 맹수의 것처럼 길게 바꿨다가,
키를 조금 키웠다가, 줄였다가. 얼굴 골격도 조금 바꿔 가며 열심히 자랑했다.

“정말…… 굉장해.”

모든 것이 상상 이상이라, 그 말 이외의 것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로젤린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리카르디스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평소 같으면 얼굴을 붉혔을 자신의 행동도 미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열중해서 만졌다. 역시 이 얼굴이 제일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물었다.

“로젤린.”

“예.”

“음…… 그대는, 예전 로젤린 경의 기억을 일부이긴 하지만 가지고 있는 듯한데, 내 추측이 맞나?”

“예, 시간이 갈수록 로젤린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고는 합니다. 전하께서 저에게 막 성질냈던 것도 압니다.”

그, 참. 쓸모없는 것을 떠올리고 그래! 리카르디스는 울컥했다.

“그건, 미안하지만…… 아니, 나는 그대에게 성질을 내지 않았어! 그녀에게 냈었지! 물론, 그것도…… 잘한
것은 아니야. 미안하게 되었어. 아무튼!”

말하다 보니 뭔가 좀 미묘했다. 과거 ‘로젤린’의 기억이 있는 탓일까. 로젤린이 그녀와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는 것같이 느껴졌다.

“로젤린이 그대 안에 얼마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모든 기억이 떠오르면…… 어떻게 되나. 그러니까, 지금의
그대는 음…… 없어지는 건가?”

리카르디스는 평소와 달리 느릿하게, 또 잠시 말을 멈추기까지 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로젤린은 그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했다.

“제가 케이크라면.”

굉장한 도입부였다.

“로젤린은 밀가루 정도일까…… 생각합니다.”

굉장한 표현력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감탄했다.

“제가 케이크라면, 로젤린이 케이크의 몇 조각을 차지하고, 제가 그 나머지를 차지하는 식이 아니고, 밀가루에
버터와 우유, 달걀을 더하고 이스트도 넣은 후 오븐에서 구워 내고 생크림을 바르고 제철 과일을 올린 상태가
저입니다. 원료가 그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밀가루가 케이크와 동일한 존재이지는 않으니, 케이크는 케이크,
그저 주된 재료가 밀가루일 뿐입니다. 그런 느낌인데, 아시겠습니까?”

“무시무시한 표현력이었다. 내 기사가 문학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 알았군.”

로젤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과연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어마어마했다는 듯 뿌듯해하고 있어 리카르디스는 웃었다.

“그러면 모든 상황에 대응하는 그대의 사고는 그대의 것이긴 하나, 그녀의 생각과 기억에 기반한다는 것이겠군.”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로젤린을 보고 있으나, 한순간 과거의 그녀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 지금의 온전한 그대에게 묻건대. 로젤린 경의 마지막은. 그녀의 마지막과 생각은 어떠했나?”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로젤린의 마지막?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갔다.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전하를 지키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가. 끝까지 미련한 사람이었군.”

로젤린은 순간 울컥했다. 미련하다니, ‘로젤린’한테!

그러나 인상을 찌푸리며 애써 미소를 짓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보자니,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허공을 바라보며 후, 한숨을 쉬다가 한참 뒤에야 로젤린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대는 지금…… 밀가루야.”

139 화.
“저는 인간입니다.”

“아니, 그대가 로젤린을 밀가루라 칭하지 않았나.”

아, 그런 의미였나.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나는 지금 눈앞의 그대를 케이크의 재료인 밀가루라고, 딱 지금만 그렇게 그대를 생각하겠다.”

“예.”

잘 모르겠지만 전하가 그렇다니 그런 것이리라.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예, 전하.”

리카르디스는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거의 그대에게 보낸다.”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의 두 손을 잡았다.

“모든 것에, 감사한다.”

그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괴롭지는 않지만, 안정적으로 조여 오는 악력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로젤린은
넋 빼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국의 황자. 리카르디스가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무 이상한
광경이었다.

리카르디스가 한참 후 고개를 들었다. 복잡 미묘한 표정이던 리카르디스가 말을 망설이다 입 밖으로 겨우


내뱉었다.

“그녀라면 내 말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로젤린?”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로젤린이기도 하니까 제 생각을 말해도 됩니까?”

“그래도 된다.”

“네, 가슴이 덜컥하고…….”

로젤린의 말에 리카르디스는 눈썹을 찌푸린 채 애써 웃었다.

“어디가 아프신가 생각했습니다.”

아, 얘가 어디가 아파서 갑자기…….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던데……. 따위의 반응이라는 것이었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을 내팽개쳤다. 애수에 잠겼던 얼굴에 독기가 올라왔다.

“슬퍼하거나 눈물 펑펑 흘리는 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정말 이 여자들 내가 진심을 담아 말하는데, 담백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성질났는지 씩씩거리며 뒤돌아 갔다.

“난 미치지 않았지만! 아무튼, 고맙다!”

로젤린은 돌아선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사실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로젤린의 감각은 시간을 거슬러 갔다. 그의 등을 보던 오랜 나날들이 떠올랐다. ‘로젤린’의 기억이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해 어렸던 때부터, 위태로웠던 때. 눈이 부시게 아름답던 날. 비참하게 울던 날까지. 로젤린의


시간 시간마다 리카르디스의 모습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 모든 풍경에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색이 다시 덧칠해지는 기분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가슴 시리게 행복하고, 벅차오르게 슬펐다. 흘러가 버린 시간 속에 개화한 감정들은 빛무리처럼
흩어졌다.

이미 지나가 의미 없다 할 수도 있으나, 그래도 이렇게 가슴 안쪽을 잔뜩 부풀게 할 정도로 가득 메운


반짝반짝하고 아름다운 것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로젤린은 잘 모르겠다 생각했다.

저 멀리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진 두
사람을 찾는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로젤린은 웃으며 그의 곁에 섰다.

* * *

날이 밝았다. 비어 있던 공간에 사람들이 채워지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했다. 여러 황족들과 귀족들, 타국의
손님들. 기사단과 병사, 하인들. 넓은 산이 터져 나갈 정도로 복작복작했다.

몇몇 귀족들은 몇 개월 전, 검은달의 암살자들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침투했던 그때를 잠깐 상기했다. 위치,
장소, 시기. 연관성을 가진 요소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저 ‘사냥 대회’라는 이름에 막연히 불안감을 가지게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때의 사건이 일어났던 국경 지대가 아니었다. 무려 대륙의 아버지. 일라베니아의 수도 티가드가
아니던가. 불길한 마의 힘을 믿고 설치는 자들이 함부로 발을 들일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발타와 거리가 먼
만큼이나 다들 안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산은 이미 몇 주 전부터 통제에 들어갔다. 사냥꾼과 용병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위험 요소를


처리했다. 수상한 인물은 물론이요, 눈을 피해 숨어 있던 마수들도 모두 그들의 눈을 피해 가지 못했다.
우스갯소리로 일라베니아 황실 다음으로 안전한 곳이 이 산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리카르디스는 귀부인들이 양산을 들고 돌아다니는 광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한 달 내에 행사가 이렇게


많은지. 지긋지긋했다.

“웃으셔야 합니다, 전하.”

잇세리온이 리카르디스의 뒤에서 조용히 타박했다. 인형 복화술을 하듯 입술 모양에는 변화가 없었다.


“지금 굉장히 의미심장한 표정인 건 아십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고 갑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웃고 있는 건 좀 바보 같아 보이지 않겠나?”

“다들 바보처럼 웃고 있습니다. 숲에 숨으려면 나무가 되셔야지요.”

그의 말대로, 다들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황제가 있는 거대한 막사를 의식해서인지, 정말로 이 사냥 대회가


즐거워서인지.

지나가던 귀족 무리가 리카르디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카르디스는 급하게 잇세리온과 마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사람 참!”

“어허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전하!”

이 상황에 녹아들기에 어색함 없는 바보 같은 웃음소리였다. 귀족들은 리카르디스를 바라보다가 저들끼리 다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딱 멈췄다.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하얀색 예복을 입고 있는 신관 무리가 눈에 띄었다. 혹시 모를 부상 때문에 대신전에서 차출된 자들이었다.


라헤안시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자 주위에 있던 어린 신관들이 급하게 그를 잡았지만, 다 같이 우르르
넘어지고 말았다.

다들 못 본 척하거나 몰래 웃고 있는 가운데,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또다시 굳어졌다. 잇세리온은 제 이마를 턱


짚었다.

황실의 숲속. 신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사건이 떠올랐다. 위험한 것이 가까이서 도사리는 가운데 아직 정체도
모른다니. 로젤린의 힘, 마카롱의 존재. 자신의 성력까지. 어지간하면 큰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상대방이 베일에 가려져 있으니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날카롭게 주위를 훑다가 로젤린을 발견했다. 그녀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나무에 어깨 한쪽을
기대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햇살의 나른함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의식도 못 하고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바로 그겁니다 전하!”

뒤에서 잇세리온이 소곤거렸다. 천 년 동안 얼어 있던 얼음도 녹여 버릴 만큼 따스한 미소라며 금칠을 했지만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에게 신경이 쏠려 있는 터라 듣지 못했다.

하얀밤 기사단에서는 로젤린과 슈텐, 클로드가 대표로 사냥 대회에 출전했다. 저 멀리 클로드와 슈텐은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하느라 바쁜데 그녀만 태평했다. 대신 손이 남는 단원들이 로젤린의 검 상태를 확인하고,
화살도 확인하고, 수통이랑 비상식량을 준비했다. 레이몬드가 로젤린의 허리띠에 보조 가방을 단단하게 매는 사이,
네스터가 로젤린의 군마 ‘초콜릿’의 등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

다들 사이가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리카르디스는 애써 그 유난의 광경을 넘겼다. 기사 단원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모습을 본 로젤린이 슬그머니 보조 가방에서 육포를 꺼내었다. 큰 육포 조각을 한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그녀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입에 잘 맞는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로젤린은 감고 있는 눈으로도 리카르디스의 기척을 읽어 냈는지 대뜸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놀라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맛있나?”

로젤린이 눈을 반짝 떴다. 그녀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얼굴에 띠고는 육포를 하나 꺼내서 리카르디스에게
들이밀었다. 리카르디스는 손으로 건네받지 않고 곧바로 입으로 육포를 잡아챘다. 쫀득하고, 부드럽고, 적당히
짭짤하고 맛있었다. 보조 식량으로 배분되는 육포보다 상등품인 듯했다.

“맛있는걸.”

로젤린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해풍에 말린 최상품입니다. 바싹 마른 듯 보이지만, 식감은 쫀득쫀득하고, 말린 고기의 진한 육향과 짭짤함이


일품입니다. 세 번의 말리는 과정 중, 마지막에 꿀과 과즙을 바른다고 하는데요, 그 덕에 은은한 단맛이
감돕니다. 이것이 육포의 전반적인 맛을 아우르며 배가시키는 것 같습니다.”

“…….”

그냥 ‘맛있습니다’ 정도의 답변을 예상했던 터라 좀 당황스러웠다. 어제부터 느낀 사실이지만, 요즘따라


로젤린의 어휘력이 부쩍 늘었다. 생각해 보니 그저 음식 관련으로만 국한된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다. 맛있다니 됐군.

물론 로젤린은 나단에게 불려 가 근무 중에는 군것질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다. 예전 같으면 고분고분했을


그녀가 반항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금식이 원칙인 것은 주의가 흐트러지기 때문이 아닙니까, 부단장님? 저는 먹으면서도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씨알도 안 먹혔을뿐더러 더 혼났다.

“사실…… 전하도 드셨습니다.”

물귀신 작전도 통하지 않고 매우 혼났다.

* * *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막사를 둘러보며 위험 요소를 확인하고 있던 때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

“올가미 용병단의 쥬렌즈라 합니다. 전하.”

한쪽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는 눈빛에 아니꼬워 죽겠다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가 만약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리카르디스는 이 잿빛 머리의 남자가 마카롱이라는 사실을 분명 알아챘으리라 생각했다.
“별로 안 친한 사람들은 쥬쥬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렇게 불러 주시죠.”

“……친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제가 워낙 싸가지가 없어서.”

140 화.

여성체의 이름은 뭐라 했더라. 미미였나. 잘은 모르겠지만, 요즘 어린 영애들 사이에서 미미니 쥬쥬니 하는


이름의 인형이 유행한다던데. 미묘하게 입에 담기에 껄끄러운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로젤린도 독수리에게 ‘
마카롱’, 자신이 선물한 군마에게는 ‘초콜릿’이라는 이름을 붙였었다.

‘혹시 이 종족, 이름 짓기는 영 꽝이라던가?’

리카르디스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어서라.”

“가암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목소리 같지 않았다. 잇세리온은 뒷목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고, 주위의 호위들도 로젤린을 제외하고는
눈빛이 매서워져 있었다.

“제가 수줍음이 많습니다. 전하.”

“그런가. 그것 참 놀라운 정보인데.”

“낯도 많이 가려서 말입니다. 호위를 물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전하.”

스타스가 남자를 쳐다보며 싸늘하게 말을 끊었다.

로젤린에 대한 정체는 하얀밤 기사단 내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강한 마인. 세간에 알려진 것과 동일했다. ‘
그녀의 뒤를 위험한 자가 쫓고 있다.’, ‘그를 대비하기 위해 부른 사람이다.’쯤으로 마카롱을 알고 있기에,
경계가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되, 될 것 같은데.”
로젤린이 소심하게 의견을 냈지만 묻혔다.

“내가 부른 손님이다. 로젤린 경만 남고, 모두 나가 있어.”

스타스는 가만히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타스는 경례하고 단원을 이끌고 막사를
나섰다. 사람들이 없어지자 마카롱과 로젤린이 동시에 바깥을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잘은 몰라도 사람들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판단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충분히 물러난 것인지 두 사람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곧 마카롱은 한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실은 불량한 자세로 팔짱을 꼈다.

“거 되게 귀한 몸이시군요, 전하. 제 얼굴을 모르시니 잠깐 비추고 가려 했습니다만 이거 무서워서 두 번


찾아오겠습니까?”

“보통의 평민이나 용병은 황자를 독대한다고 찾아오지 않으니 그대를 수상쩍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
어쨌거나. 인상적인 첫 만남이었다. 쥬렌즈.”

“친근하게 왜 이름을 부르고 그러십니까. 쥬쥬라고 불러 주시죠.”

리카르디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마카롱의 말을 외면했다. 곧 죽어도 쥬쥬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겠다는


결연함이 언뜻, 눈에 비친 것 같기도 했다. 마카롱은 옆에서 제 입에 육포를 넣어 주는 로젤린의 머리를 슥슥
쓸었다.

“서로 깊은 얘기는 할 만큼 한 것 같고. 사냥 대회도 다가오니 굳이 얼굴을 맞대고 있을 필요는 없겠죠. 이


잘생긴 얼굴 잘 봐 두시죠. 기간 한정이기는 하지만 아군이기는 하니까 헷갈리지 마시고.”

“확실하게 익혔다.”

잘생긴 얼굴을 운운한 건, 분명 진심이겠지.

“계획이랄 것도 없지만. 어제 한 말은 모두 기억하나?”

마카롱이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전하.”

말이 짧아졌다.

“그 계획이랄 것도 없는 그, 계획에…… 전하가 나름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한데…….”

“확신이란 것은 태어나서 가져 본 적이 없다. 그저 여러 가지 정황을 살피며 최악의 상황을 준비할 뿐.”

“어떤 최악이 올 줄 알아야 준비를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전하는 지금. 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그렇게 여기고 그에 맞춰 대비를 한 거겠지.”

“따지자면, 그러하다.”

마카롱이 삐뚜름한 미소를 띠었다.

“너는 그놈의, 나의, 로젤린의 뭘 알고 있어?”

존대고 뭐고. 증발해 버렸다. 리카르디스는 개의치 않고 짧은 고민 후 대답했다.


“마력에 근원을 둔 존재. 여러 형태로 변이가 가능하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로젤린과
그대가 다른 것은 살아 있는 생물을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의 차이. 그 때문에 로젤린 경은 완전한 변이가
불가능하다. 그자는 어떤 부류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내가 틀리게 알고 있는 부분이라도?”

“꼴을 보아하니 칼릭스랑 얘기 좀 했겠구나 싶고, 그놈이 먼저 얘기할 리는 없으니 그쪽에서 어느 정도 가설을
세우고 애를 탈탈 턴 모양인데…….”

맞다. 리카르디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카롱이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너는 네가 알고, 모르는 세 명의 사람이 각자 나에 대해 뭘 아느냐 하면, 당신들은 포유류로, 두 발로 걷는


생물이고, 평균 악력은 얼마고, 지능이 높아 먹이사슬의 상단에 위치한…… 따위를 말할 생각인가 봐?”

리카르디스는 잠깐 머뭇거렸다. 어떻게 우리의 정체를 알았느냐, 우리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그게 궁금한 게
아니었던가? 저 존재들을 아우르는, 그들을 관통하는? 생물학적 정보가 아닌?

“그러니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지.”

마카롱이 로젤린의 어깨를 감싸 안고 등을 돌렸다. 리카르디스가 그를 잡으려 할 찰나 마카롱이 얼굴만 살짝 뒤로


돌려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지금으로서는 딱히 별다른 수가 없는 건 알고 있지만, 시비 걸고 싶었어.”

쓸데없이 솔직했다. 이것도 종족의 특성인가? 어이가 없어진 리카르디스는 힘없이 대답했다. 시비 걸고
싶었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래.”

* * *

황제 라이노가 사냥 대회를 맞이해 연설했다. 다들 바보같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선수들의 출전 준비가 끝났다.

사냥 대회는 총 여섯 시간으로, 그 사이 동물을 가장 많이 잡은 자가 우승하게 된다. 각 동물마다 점수가 있으며,


당연히 잡기 힘든 개체에 더 높은 점수가 붙었다. 이미 산에는 각종 동물을 풀어 둔 상태였으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위험한 맹수는 배제해 놓았다.

로젤린은 짙은 흑색 털을 가진 말의 고삐를 쥐고 공터로 나왔다. 사절단 이후,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선물한,


‘초콜릿’이었다. 로젤린이 초콜릿의 허리를 토닥였다. 리카르디스도 그녀에게 다가가며 초콜릿의 목덜미를 슥슥
쓸었다.

“내가 어제 했던 말. 모두 기억하지 로젤린?”

“네. 이기지 말 것.”

리카르디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은 화창하고 따스한 날 덕분인지 평소보다 더 나른해
보였고, 그 태도는 전투태세와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둘 생각이 전혀,
조금도, 생각에도, 꿈에도 없는 듯했다.
무투 대회에 이어 사냥 대회까지 석권하면 그녀의 이름이야 드높여지겠지만, 다소 귀찮은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황제의 질투라던가. 낯이 화끈해져서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할 말이지만, 실제로 가능성이
농후했다.

때문에 사냥 대회의 1 등은 티 나지 않게 얼음창 기사단에 넘기기로 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치지 말 것.”

“다쳐 오면 감봉할 거야.”

리카르디스의 말에 로젤린이 씩씩 분노를 표출했다. 다친 건 난데, 왜 내 월급이 깎여야 해!

“삼 개월 동안.”

물론 농담이었지만 로젤린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삼 개월 동안 감봉이 되었을 시,


칼릭스에게 줄 용돈을 제외하고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을 추정하고서는 절망했다. 쥐, 쥐꼬리……
중얼거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게 아닌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 몰래 웃었다.

“그러니 다치지 말고.”

“네. 반드시!”

로젤린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했다. 이렇게 결연한 표정은 본 적도 없었다. 발타에서 일라베니아로 오는 길,


자신을 지킨다 말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볼에 떨어진 속눈썹을 떼어 주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웃고 있던 눈이 진지하게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개가 더 남았지? 기억하나 경?”

“네. 누구도 믿지 말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작고 낮게 속삭였다. 가까이 있는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소리였다.

“그리고 절대로…….”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 것. 말을 미처 내뱉기 전, 익숙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전하.”

자주 듣진 않았지만,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특색 있는 목소리라 잊지 못했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이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간제였다. 발타 일행이 도착한 첫날 이후 보지 못했던 발타의 3 왕녀가 사냥 대회에 대뜸
나타났다. 그녀는 호위 및 감시 역할을 하는 발타의 전사들을 대동한 채로 리카르디스에게 다가왔다. 만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리카르디스는 좀 놀랐다. 발타의 사절단이 처음 도착한 날 이후로 보이지 않기에, 솔직히 죽었거나 어디 한구석
잘못됐을 줄 알았는데, 멀쩡해 보였다.

“같은 황실 내에 있으면서도 퍽 오랜만인 듯싶습니다.”

간제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로젤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다음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할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반복된 학습의 결과였다. 로젤린의
예상대로, 간제는 눈을 스르륵 감으며 리카르디스의 볼로 향했다. 로젤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눈치채기도 전에 로젤린은 바람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억.”

리카르디스는 강력한 힘을 가진 무언가에게 갑작스레 뒤로 끌려갔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기사단장 스타스에게


내팽개치고 그가 있던 위치에 자리 잡았다. 간제는 다가오던 힘을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로젤린의 볼에 입을
맞추게 되었다. 쪽.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머나.”

간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카르디스는 스타스의 품에 반쯤 안긴 채로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 불쾌할 법도 한데, 간제는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연신 싱글거렸다. 로젤린도 고개를 숙여 간제의 볼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경쾌했다.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손으로 각자의 입을 가렸다. 이거 왠지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인 것 같은데…….

“발타의 세 번째 딸을 뵙습니다.”

간제는 코앞에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손은 여전히 로젤린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141 화.

“로젤린 경. 이렇게 가까이서 볼 거라고는…… 세상에, 피부 좋은 것 좀 봐.”

간제가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로젤린이 저지른 일은 무례하다 걸고넘어질 수 있었으나, 간제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누구에게 키스하든지 인사를 하겠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되었다는 태도였다.

리카르디스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여전히 찰싹 붙어 있는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상황인지 감도 안


잡혔다.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나는 경이 참 친근합니다. 제 오라비가 숨 쉬는 것보다 경의 얘기를 많이 해서 그런


걸까요?”
간제의 뒤에서 호위가 자신의 눈을 덮고 가만히 분을 삭이고 있었다. 고생이 많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사냥 대회에 출전한다지요?”

“예.”

“좋은 성적 거두길 바랍니다. 몸조심하시고요.”

“맹수는 전부 처리를 해 두었다 전달받았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제 오라비가 탐낼 만도…….”

“어허허험!”

간제의 호위가 급하게 목을 풀었다.

“제 오라비, 하카브 왕자가 로젤린 경을 탐내는 이유를 알겠지 뭡니까!”

하지만 간제는 전혀 그를 생각해 주지 않았다. 한 번 더 반복하다 못해 강조하기까지. 호위는 안색이 새파래져서


하얀밤 기사단의 눈치를 봤다. 단원들의 표정이 서늘하고 날카롭게 변했다.

간제가 빙그레 웃으며 로젤린을 꼭 껴안았다. 로젤린도 엉거주춤하게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귓가에 숨소리가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조심해야 할 것은…… 맹수뿐만이 아닙니다, 경”

서로의 숨결이 닿을 거리에 로젤린과 간제는 서로 눈을 맞췄다. 간제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곧 로젤린에게서
떨어진 간제가 리카르디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전하, 저에게 배정된 막사가 글쎄, 병장기를 모아 두는 곳 바로 옆이지 뭡니까! 우당탕 쿠당탕 아주 시끄러워
죽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환에 리카르디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막사를 옮겨 달라 한번 부탁해 보겠습니다.”

“세상에, 참 자상하십니다.”

간제가 두 손을 모으며 생긋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마지막으로 로젤린을 돌아봤다. 눈빛에 담겨 있는 걱정을


읽었는지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했던 말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안심하고 돌아섰다.

리카르디스는 간제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사냥 대회를 위해 모인 사람들의 이목이
그들을 향해 쏠렸다. 정확히는 간제와 간제의 호위 전사들을 향하는 것이었다. 구릿빛 피부, 검은 머리카락,
기묘하게 휘어 있는 무기의 형태. 하나하나가 일라베니아인에게는 위협적이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줄지은 막사마다 부지런해지기 시작했다. 늘어져 있던 기사들이 눈빛을 달리하고 탈출로를 점검했다. 숲에서
술래잡기하던 라헤안시를 잡아와 다들 제 막사로 데려가고자 했다. 웃고 즐기던 것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맑은 웅덩이에 떨어진 미꾸라지 한 마리. 간제는 그 모습을 쭉 둘러보며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기가 차서 허, 숨을 내뱉었다. 하카브도 없는 이 자리에 왜 나타났나 했더니.

간제는 자기 자신과 발타인들을 ‘사냥 대회’라는 곳에 떨어트려, 그때의 상황을 상기시켰다. 검은달의 암살
부대가 일라베니아의 땅을 침범했던, 그날.

그러니 이것은 경고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내가 이곳에 있으며, 내 오라비인 하카브 왕자 또한 일라베니아의
중심부에 있다. 검은달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있으니. 경계하라, 조심하라.

단순히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리카르디스는 어쩐지 간제가 일라베니아
측을 일깨우기 위해 이 장소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살짝 뒤를 돌아봤다. 상급 기사들의 눈빛이 예리해져 있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 이것 참, 대단한


미꾸라지가 아닌가.

바보 같은 웃음소리가 사라진 정적인 공간 속에서 리카르디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뵈어 참 좋군요.”

간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숨넘어갈 정도로 웃어 댔다.

* * *

부우우, 사냥 대회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수십 필의 말이 한순간에 내달렸다. 로젤린의 뒷모습이
숲속에 푹 파묻혔다. 검은 머리카락이 한 올도 보이지 않게 되자,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막사로 돌아갔다.

사냥 대회는 총 여섯 시간. 기사들이 돌아오기까지는 모두 자신에게 배당된 막사에 쉬거나, 연회장을 통째로
옮겨온 것 같은 저 밖에서,

“하하하!”

“호호호!”

저렇게 또 웃고 있어야 했다. 리카르디스는 당연히 전자를 택했다. 신경 쓸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바보처럼 웃을 여력 따위는 없었다.

밖에서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던 간제가 막사로 들어가자 또 흥겹게 즐기는 소리가 가득해졌다. 물론 경계야
늦추지는 않겠으나, 그녀 한 명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얘기였다. 누가 봐도 인위적인 저
웃음소리들은 아마 간제, 그녀 한 명만을 위한 연극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도 나름 손님이라면 손님인 셈. 리카르디스는 제 정신력과 시간을 소모해 간제를 파티에 데려가
에스코트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간제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쉬고 있겠습니다. 조금 뒤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참, 그녀는 말하는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했다. 그 얘기를 같이 듣고 있던 스타스는 막사에 물 샐 틈 없게 호위를


배치해 놓았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고 드러누웠다. 준비된 간이침대에는 사냥 대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짐승의 털가죽이 올라와
있었다. 짐승의 누린내가 아닌, 향긋한 목재나 풀 냄새가 났다. 로젤린이 생각났다.

한참 누워 생각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음악이 뚝, 끊겼다.

“꺄아악!”

막사로 기사들이 들어옴과 동시에 비명 소리가 울렸다. 르원. 부단장 나단, 레이몬드, 상급 기사 카일로,
파르딕트.

그들은 리카르디스를 등지고 사방을 경계하는 태세로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눈빛에 비하면 그다지 태도가 다급해 보이진 않았다. 아주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는 건가? 부단장 나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형 마수가 침입했습니다. 곧 정리될 테지만, 만약을 대비해 안을 지키겠습니다.”

“인명 피해는?”

“아직까진 없습니다. 간제 왕녀 덕분에 막사와 파티장을 둘러싼 호위 병력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던 터라.”

크르르…….

짐승이 위협하는 소리가 들렸다. 챙, 챙.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리카르디스는 보이지 않는 막사 밖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검을 든 수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도, 온몸을 난자당하면서도 두려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까지도 인간들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고 싶어 할 뿐이었다. 제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모든
생물의 근원적인 부분이 결여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침대 위에 앉아 가슴 한구석을 서늘하게 만드는 소리가 그치길 기다렸다.

리카르디스는 막사를 나왔다. 상황은 정리된 후였다. 귀부인들이 남편의 품에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군중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대가리가 잘려 있는 늑대 한
마리였다.

“늑대?”

분명 마수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여기저기 붉은 빛의 피를 뿌리고 쓰러져 있는 마수는 산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늑대의 생김새와 같았다.

마수는 일반적인 동물의 크기를 훌쩍 뛰어넘었다. 또는 눈이 하나라든가, 입이 크다든가, 주둥이가 길다든가, 팔


한쪽이 뒤틀려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기형적인 부분이 눈에 띄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이 늑대 형태의
마수에게서는 그런 점을 볼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말에서 그 의문을 알아챈 스타스가 곧바로 대답했다.

“마수입니다. 흰자위가 빨갛고, 이상할 정도로 공격적이며, 갑옷을 일그러트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흠.”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끼고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잇세리온.”

“예, 전하.”

“세터 아카데미의 교수 데미안이 말했던 것 기억하나?”

뜬금없는 물음에도 잇세리온은 곧바로 대답했다.

“마수는 동물이 진화를 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 학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면 인간이 진화하면 마인이냐며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상하게 그가 했던 주장이
떠오르는군. 정말 그냥…….”

평범한 동물 같은데. 리카르디스가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평범한 동물이라면 이렇게 위협적인 무기가 가득한 곳에 홀로 쳐들어오지도 않고, 갑옷을 일그러트리는
힘을 지니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 기괴한 야수는 그저, 죽을 때까지 눈앞의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는 일그러진
목적성을 지닌 돌연변이에 불과했다.

스타스가 마수의 사체 위에 제 망토를 덮었다. 그 끔찍한 참상에 눈을 돌리고 있던 자들,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웃고 떠들던 자들까지. 짧은 사건이 마무리되었음을 깨닫고 자리를 떴다.

리카르디스는 조금 더 자리를 지켰다. 수레에 마수의 사체가 실려 나갔다. 뚝뚝 흐르는 피가 수레바퀴를 붉게


물들였다. 그는 뒤를 돌아 막사를 향했다.

막사를 지키던 레이몬드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누구인지 듣지 않았다 하더라도 알 수 있었으리라. 그 소동에도
얼굴 한번 안 비춘 인물일 것이 빤하지 않은가. 그렇다 하더라도 마치 제 막사인 양 편안하게 앉아 있는 간제의
모습을 보니 황당하기는 했다.

142 화.
“왕녀.”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간제는 의자에 앉아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잇세리온이 뒤에서 소곤거렸다.

“호위를 다 떼어 놓고 왔습니다.”

그 호위들을? 간제가 입만 열면 피곤하다는 듯 눈을 꾹꾹 눌러 대던 그자들을? 그들은 결코 간제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기보다는, 그녀의 입에서 퍼질 얘기들을 단속해야 하는 자들이므로.
반드시.

“주위가 소란스러운데 혼자 다니시는군요, 왕녀.”

간제가 빙그레 웃었다.

“다들 제 막사에서 곤히 자고 있을 겁니다.”

“……왕녀를 두고?”

“시끄럽게 쫑알대기에 재워 버렸습니다.”

막사를 나서던 스타스와 레이몬드가 멈춰 섰다.

“어떤 방법과 어떤 의도로 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자들이 있으면 못 할 얘기가 많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방법은,”

간제가 생긋 웃으며 옷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스타스가 리카르디스의 앞을 막아섰다. 간제가 반대쪽 손을 들어


보였다.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품에서 길쭉하고 가느다란 무언가가 나왔다.

“환각과 수면 작용을 하는 약재와 독을 적당히 배합한 향입니다. 제가 만들었지만, 효과가 아주 좋은데, 혹


필요하시다면…….”

“음…… 아니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진 않군요.”

리카르디스는 눈짓으로 기사들의 경계 태세를 물린 후에 그녀 앞에 앉았다. 간제는 발타에서부터 쭉 그에게 말을


걸어 왔다. 행동으로, 말로. 얘기하자, 얘기를 나누자. 당신과 나. 둘이서. 언제나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끈질기고 거침없는 행보가 단순히 개인과 개인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라베니아 대 발타? 이름뿐인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자가, 하카브라는 왕을 두고서 감히?

눈이 마주쳤다. 간제가 눈꼬리를 아래로 떨어트리며 생긋 웃었다.

“리카르디스 전하.”

“안 합니다.”
간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건 좀 당황스럽군요.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아시고? 마저 들어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싫습니다. 혼인 얘기를 하려던 것 아닙니까.”

간제가 와 하고 감탄하며 마구 박수쳤다.

“저희 왕실에 미래를 읽는다는 명목으로 한자리 꿰차고 있는 늙은이가 있는데 말입니다. 훨씬 솜씨가
좋으십니다.”

“그거 영광이군요.”

리카르디스가 깍지를 낀 채로 느릿하게 손마디를 훑었다. 간제가 휴 숨을 내뱉었다.

“참 아쉽습니다. 발타의 귀한 아가씨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미모의 주인공을 남편으로 꿰찰 기회라


생각했는데요.”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눈이 높군요, 왕녀. 미안하지만 나도 눈이 높습니다.”

간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잠시 후 깔깔 웃었다. 리카르디스도 어딘가 미묘해 보이는 미소를 입에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 번 찔러 봤는데, 진짜였을 줄이야.

그녀가 단순히 자신에게 첫눈에 반해서 이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척 봐도, 누가 보아도 그녀는
하카브의 눈에 어긋나 있는 존재였다.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혈육의 정?

하카브는 그렇게 달콤한 말이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러고도 제 오라비의
눈에서 멀어질 일만 골라 했다. 죽지 않았다고는 하나 다소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

간제는 어쩌면, 혼인이란 이름의 동맹을 맺고자 이 자리에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하카브의
계산속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함부로 덜컥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건이 아니었다.

“발타에서는 사람의 말을 세 번까지는 들어 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시간이, 상황이 달라지며 무언가 변할지도
모르니, 심사숙고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남은 두 번의 기회는, 저 또한 물러 두겠습니다. 무언가 변하는 게
있을 때까지.”

세 번의 기회라. 그에게도 나쁘지는 않은 제안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므로.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리카르디스도 같이 일어났다.

“막사까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왕녀. 마수가 처리되었다고는 하나, 한 마리가 아닐 수도 있으니.”

“세상에…… 지금 일 분 전에 찬 여자를 데려다주겠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기에 왜 호위를 전부 재우고 그럽니까.”

간제가 입을 쭉 빼고 툴툴거렸다. 막사의 천을 잇세리온이 걷으려고 하던 차, 간제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리카르디스도 따라 멈춰선 후 그녀를 바라보았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전하?”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까닥였다. 뭐든 빨리하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수라 하시니 생각나서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마수가 언제 생겨났다고 생각하십니까?”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언제 생겼느냐? 뭐, 이델라브힘이 세상을 비춘 그 날부터니, 대충…… 몇천…


… 몇만…… 모르겠다. 리카르디스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오래됐겠지 뭐. 무뚝뚝한 대답에서 그 뜻을 읽어 낸 간제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일라베니아와 발타에서 아는 내용이 조금 다르더군요. 그저 여흥으로 들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희


문헌상으로는 대략 삼백여 년 정도? 그때부터 마수가 나타났노라 이릅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말을 찬찬히 되새겼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역사의 보고다. 어릴 적부터 갖은 교육을
받았으나, 그런 비슷한 얘기라고는 한 톨도 본 적 없었다.

마수는 동물, 식물과 같이 그저 세상과 함께 탄생한 무언가가 아니던가? 그런데 고작 몇백 년 전에 갑작스레


생겨난 것이라는 얘기가,

“아.”

당혹스러웠다. 리카르디스가 제 입을 가렸다.

‘시기가…….’

시기가 맞아떨어진다. 축복의 밤이 사라진 때와.

[그러면 형. 마력을 강하게 타고나는 핏줄은? 지금 어디 있을까?]

설원의 월계수. 그 반쪽이 되는 마인 가문. 그들이 사라진 때와.

우연일 리 없다.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며 하나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어 있는
곳이 많아 그 조각에 어떤 그림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형상이 어슴푸레 그려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잘게 손을 떨었다.

머릿속에 붉은 수레바퀴가 굴러간다. 마수의 피에 흠뻑 젖은 바퀴가 융단을 더럽혔다. 생을 위함이 아닌 누군가의


죽음을 위해 존재하는 돌연변이. 목에 칼날을 박고도 분노를 터트리던 ‘그것’의 포효가 생생했다.

* * *

282 년. 막 싹이 움터 오는 봄. 아직은 쌀쌀하던 때.

들판에 어린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강한 힘으로 사지를 뽑아 낸 비참한 모습으로, 심장이 사라진 채였다.

282 년, 첫 번째 꽃망울이 터지던 날.


전의 사건과 비슷한 형태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 또한, 인간이 한 것이라 믿겨지지 않는 잔인한 모습이었다.
그 시체가 짐승의 소행이 아니라 판단한 이유는, 발톱이나 이빨의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283 년, 햇살이 가장 강하게 내리쬐는 계절.

지방 영지의 작은 마을 하나가 몰살당했다. 또한, 앞선 사건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범인은 그 마을에 살던
마인이었다. 크레안 티다니온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사람들을 죽였노라 증언했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전역 동시다발적으로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하얀 밤과 검은 달을 부르는 위대한 힘 중 하나. 마력을 가진 자들이 갑자기 미쳐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사람들은 서서히 마인을 피하기 시작했다.

284 년, 붉은 낙엽이 바닥에 깔린 때.

황실 역사서에 정식으로, 마인이 인간을 잡아먹었다는 얘기가 기록되었다.

284 년, 밀이 고개를 숙이는 때.

마인들이 일으키는 끔찍한 사건들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황실 또한 더 이상 이 모든 일을 좌시할 생각이 없다며


성기사들을 전면에 내세운 사냥을 시작했다. 온 대륙, 온 영지에서 사람의 살 타는 냄새가 가득했다. 몇몇 강한
마인이 황실로 잡혀가는 걸 봤다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확실치 않았다.

286 년, 하얀 눈으로 뒤덮인 날.

남루한 차림의 마인 한 명이 거리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마인이 저지른 모든 끔찍한 살인 사건들은 황실의
음모라는 얼토당토않은 거짓을 전파했다. 남자는 순찰하던 병사에 의해 즉결 처형당했다. 그 마인이 왜 도망가지
않고 사람 많은 거리를 뛰어다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력을 타고 흐르는 광기가 도진 것이리라.

287 년, 축복의 밤.

일라베니아에 불길한 그림자를 몰고 온 마인들의 존재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는 마인이 없으면
하얀 밤이 찾아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했으나, 올해에 뜬 하얀 밤의 빛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셨다. 마인, 그
불길한 것들이 빛을 가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이델라브힘의 광휘가 내리쬐는 아름다운 나라.

일라베니아여, 영원하라.

17

그림자가 드리워진 숲속은 밖보다 차가운 공기가 머물렀다. 로젤린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감이 예민하게 다듬어지자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의 정경까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말발굽이 땅을 울렸다. 미미한 진동에 다람쥐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새 수십 마리가 하늘로 날아갔다. 토끼와 사슴이 무언가에 쫓겨 겅중겅중 도망쳤다.

잡아, 저기! 저기에 숨어 있다! 남자들이 소리치고, 화살이 빠르게 날아갔다. 환호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반복되며 울렸다. 정복자들의 거침없는 발걸음. 그 아래 우드득, 수풀의 나뭇가지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까지.

귓가를 울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로젤린은 인상을 잔뜩 쓰고 초콜릿의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풀을 뜯고 있던 초콜릿이 투레질을 하더니 천천히 움직였다.

이동할수록 사람들의 기척과 소리가 사라져 갔다. 로젤린은 초콜릿의 목을 끌어안고 찰싹 붙었다. 부드러운
갈기가 그녀의 볼을 간지럽혔다. 불편했던지 초콜릿이 거친 숨소리를 냈다. 그녀는 눈앞에 여우 새끼가 지나가도,
토끼가 달아나도 쫓아가지 않았다.

143 화.

한참 커다란 짐승 위에서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귓가로 짹짹 소리가 커졌다. 산새들이 복슬복슬한 그녀의 머리


위에 앉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가져다 두기도 했다. 로젤린이 몸을 일으키자 산새들이 후다닥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햇빛이 들어오는 양이 많아졌다. 로젤린은 곧고 길게 자란 나무들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성한 나뭇잎이 지붕처럼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는데, 지금은 마른 나뭇잎이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모양새였다.

오래되고 깊은 숲이었다. 산새들이 자신을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할 정도의 긴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런데 묘하다.

사라지지 않는 기척이 하나 느껴졌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멀어지지도, 다가오지도 않는 걸음 소리가 자신을


쫓아왔다. 로젤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숲의 초입에서야 사람들이 많으니 의문의 추적자, 그 존재 자체도 확정 지을 수 없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모를 수가 없었다.

리카르디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위험한 자가 쫓고 있다. 위험해. 누구도 믿지 마. 그 수 없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로젤린은 오랜 시간 자신을 추적해 온 자가 그다지 위협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제 존재를 숨기려고
한다든가, 걸음 소리를 죽이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아서일까. 그저 거리를 두고 같이 산책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가 뒤에 서 있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할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살의를 비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온 신경이 보이지도 않는 방향에 쏠리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리카르디스와 마카롱에게 돌아가면서
위험하다는 말을 삼백 번쯤 들은 지금에야, 바짝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의문의 추적자는 멈추지 않았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 갔다. 저벅저벅.
부츠에 흙 자갈이 마찰 되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로젤린은 보조 가방에서 해풍에 말린 쫄깃 달콤한 육포를 꺼냈다. 씹으며 기다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로젤린과 한 공간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녀가 뒤돌아보면 어떤 장애물도 없이 온전히 마주 볼 수 있는 거리.

열세 걸음.

남자는 멈추지 않고 똑바로 걸어왔다.

여덟 걸음.

로젤린은 육포를 우물거리며 허리에 매인 검의 손잡이를 꽉 그러쥐었다.

세 걸음.

“떽끼.”

언젠가 많이 들었던 타박의 말에, 로젤린은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 목소리가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 못써요.”

남자가 로젤린을 그대로 지나쳐 초콜릿의 주둥이를 찰싹 때렸다. 초콜릿이 황당하다는 듯 그를 노려봤다.
로젤린도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위험…… 인물?

“디에즈 전하?”

“아, 로젤린. 억.”

초콜릿이 성이 났는지 디에즈의 복부를 주둥이로 꾹꾹 밀었다. 명치 부근이 눌린 그가 아픈 소리를 냈다.


로젤린이 고삐를 틀어쥐어 짐승의 행동을 제지했다. 위험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도리어 초콜릿이 그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디에즈가 어색하게 웃으며 초콜릿의 얼굴을 슥슥 쓸었다. 초콜릿이 고개를 팩 돌렸다.

“갑자기 초콜릿은 왜 때리십니까?”

로젤린은 부루퉁한 목소리로 지금의 심정을 드러냈다. 남의 귀한 집 자식을 왜 때리나. 디에즈가 손을 저으며
급하게 해명했다.

“아니, 로젤린 경. 로젤린. 지금 동물 학대범을 보는 눈빛인 건 알고 있나요?”

“예. 사람의 진정한 모습은 동물과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하.”

“아닙니다!”
디에즈는 무척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곧 그는 다급한 몸놀림으로 초콜릿이 고개를 파묻고 있던 수풀에서
무언가를 한 움큼 뜯었다.

“독초입니다. 신경을 마비시키는 것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죠. 효과? 이런 때 쓰는 말이 맞던가…… 아무튼,


초식 동물들이 좋아하는 풀과 비슷하게 생겨서 그런지, 어린 짐승들이 종종 먹고 죽는 경우가 있다더군요. 위험할
뻔했습니다."

로젤린이 화들짝 놀라 안장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초콜릿의 입을 쩍 벌리고 샅샅이 훑었다. 곧 풀려난 짐승이 큰
콧구멍으로 씩씩 숨을 내쉬며 분노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로젤린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의를 차리는 게 아니라, 정말 고마웠다.

“별말을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제법 도움이 되었죠?”

“네.”

“그러면 나중에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디에즈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로젤린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수락했음에도
디에즈는 웃지 못했다. 웃기는커녕 심란해 보였다.

“……저 로젤린. 지금 할 말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소원이나 부탁을 들어달라는 둥, 계약을 하자는 둥 하면


알겠다고 바로 대답하면 안 됩니다. 누가 계약서 내밀면 바로 사인하지 말고, 칼릭스 경이나 레이몬드한테 들고
가서…….”

“전하.”

디에즈가 아차,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얘기가 다른 곳으로 새고 있었다. 그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하하…… 농담입니다.”

전혀 농담 아니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대충 넘어갔다.

“제게 부탁할 일이 있으십니까?”

“언제나 많았죠.”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라 로젤린이 이거냐 저거냐, 갖은 추측을 하며 물어도 디에즈는 하하 웃을 뿐이었다.


로젤린은 혹시 비밀스러운 것을 부탁하려면 다시 생각하라 했다. 요즘 비밀을 털어놓을 상대가 많아진 터라,
이상하게 입이 가벼워진다며.

그녀가 하는 말을 듣던 디에즈가 바람 빠지는 듯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로젤린. 이제 말을 굉장히 잘 하네요.”

“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동화책도 많이 보고.”

“대단하네요, 그 짧은 시간 안에.”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디에즈가 치켜세워 주는 말에 없던 제 노고가 툭툭 튀어나왔다. 모름지기 힘들게
얻은 것이 더 귀해 보이지 않던가.

“그래도 사교계에 녹아들기에는 좀 힘든 수준이라고 합니다. 더 열심히 할 겁니다.”

“괜찮아요, 앞으로 일이 년이면 될 거예요. 기억도 서서히 돌아올 테니까요.”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고 질긴 나뭇가지가 로젤린의 후드를 잡아챘다. 그녀가 주춤거리자 디에즈가
단검을 꺼냈다. 로젤린은 잠시 몸을 굳히고 그를 주시했다.

위험해 로젤린. 누구도 믿지 마. 리카르디스가 속삭였다. 그러나 디에즈의 단검은 미련 없이 그녀의 후드를 잡고
있는 가지를 끊어 낼 뿐이었다.

“저도 그랬거든요.”

아, 그가 실어증에 걸렸을 때를 말하는 것인가. 로젤린은 고개를 까닥이며 디에즈에게 감사를 표했다.

두 사람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걸었다. 인간들의 발길이 닿아 생긴 좁은 길마저 사라지니, 완전한 숲속이었다.

“마수라도 나올 것 같은 풍경이네요.”

디에즈가 흘리듯 내뱉은 말을 들은 로젤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거의 그녀, ‘그것’이 지내던 숲과 비슷해
보였다. 죽어 가는 땅 위에 간신히 숨만 붙이고 있거나, 아니면 죽은 채 우뚝 서 있거나. 안쪽으로 들어올수록
초록색 잎은 보기 힘들어졌다. 디에즈는 담담한 얼굴로 숲의 풍경을 훑었다.

대륙은 서서히 죽어 가고 있으나, 일라베니아는 아직 나무가 자라며, 과실이 맺혔다. 일라베니아가 쥐고 흔드는
신의 힘. 성력의 진면모였다. 치유력은 인간, 동물, 식물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힘이 죽어 있는
대지에까지 영향을 주라고, 축복의 밤이 순리대로 찾아오던 그때에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땅이 죽어 가고 황폐해져 가자, 어떻게든 황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성수를 뿌리던 행위가 탁월한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비록 몇 년, 몇 개월 정도의 가시적인 조치에 불과했을지라도.

로젤린에게 보통의 숲이란, 이렇게 죽음에 반쯤 걸쳐진 풍경이었다. 인간이 되고 한참이 지난 후. 역사를 배우고
나서야 이 모든 것이 어딘가 어긋나 버린, 잘못된 결과라고 알게 되었다.

로젤린은 마른 잎 하나 달고 있지 않은, 비어 버린 숲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땅이라지만


그녀는 다르게 느꼈다. 평생을 지내 오던 곳이 이러했으니, 인간으로 치면 고향의 정경과 쏙 빼닮은 곳에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편안했다. 로젤린이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며 나뭇가지를 스치는 햇빛을 받았다.

“아, 로젤린. 그러고 보니 축하 인사가 늦었네요. 무투 대회 우승.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로젤린이 빙긋 웃었다. 무투 대회 이후로 다들 우승을 축하해 줘서 어깨가 으쓱했다. 많이 들었지만, 칭찬의


말은 언제나 반가웠다.
“정말 멋있었어요.”

“그렇습니다. 제가 정말 멋있었습니다.”

디에즈가 맞아요. 정말 멋있었어요. 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미묘하게 놀리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디에즈도 싱글벙글이었고, 로젤린도 기분이 좋은 터라 마주 보고 방긋 미소지었다.

“우승했을 때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어마어마한 우승 상금이 비로소 제 것이 되어 기뻤습니다. 제 것이 될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그 순간 확정이 난


것이니까요.”

“음…… 그래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일원이자, 2 황자 리카르디스의 호위 기사가 그 영예로운 자리에서 돈을 먼저


떠올렸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해 디에즈는 당황스러웠다. 로젤린이야 월급의 90%를 먹는 것으로 소진했고, 그 90%
의 지출도 최대한 절약한 거라는 점에서 우승 상금은 매우 반가운 소득이었다.

우승 상금을 받고 비싼 치즈 한 덩어리를 사서 주방장에게 맡겨 놓았다며, 매끼 치즈 요리가 나와서 좋다고,


아직까지는 안 물린다고 로젤린이 조잘조잘 얘기했다. 나머지는 수도에 있는 음식점을 순회하기 위해 아껴
놓았단다. 그런 얘기를 하던 로젤린이 아, 하고 본래 이야기 흐름을 찾아 돌아왔다.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기뻐하시겠다.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제가 우승하면 기분이 좋으실 거라 하셨거든요.”

144 화.

디에즈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 눈은 여전히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딱딱하게 굳어 버린 표정 때문인지 어딘가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로젤린은 형님을 참 좋아하나 봅니다.”

“예쁘니까요.”

디에즈의 얼굴에 걸려 있던 어색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고
눈동자를 슬슬 굴렸다. 학술지를 읽을 때의 표정 같았다. 고민, 고찰, 고심. 리카르디스 전하가 예쁘다는 말이
그렇게 고민할 거리인가?
“아!”

디에즈는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탄성과 함께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더 예쁩니까, 형님이 더 예쁩니까.”

로젤린은 최근, 스스로 기민한 눈치를 가지게 되었다 자신했다. 이런 경우에 다른 사람을 칭찬하면, 앞에 있는
사람이 기분이 상할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도 있긴 합니다만 누님…….]

언젠가의 칼릭스가 했던 얘기였다.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으리라!

“디에즈 전하가 더 예쁩니다.”

디에즈는 환하게 얼굴을 폈다.

“그럼, 제가 더 좋습니까?”

예쁘면 좋다. 그렇다면 더 예쁜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니냐. 디에즈는 완벽한 논리에 입각한 주장을 펼쳤다.
로젤린은 침울해졌다. 역시 거짓말은 할 게 못 된다.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누님!]

동생의 말은 항상 옳았다. 하얀 거짓말도 결국은 거짓말인 것을…….

로젤린은 머뭇거렸다. 그녀가 지키는 침묵이 대답이 되었다.

디에즈가 코로 숨을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표정과 눈빛이라, 로젤린은 질책을 받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혼나는 기분.

“거짓말에는 재능이 없군요, 로젤린. 저와는 달리.”

디에즈는 그 말을 끝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그는 곧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로젤린이 머뭇거리다 그의 뒤를 따랐다.

같이 걸을 때면 항상 보폭을 맞추던 남자는 제 기분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멀어졌다. 성큼성큼. 필사적으로


발걸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산책이라도 하는 태도인데도 다리 길이가 길어서 그런지 벌써 저만치
멀어졌다.

로젤린은 여기저기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밟으며 열심히 디에즈를 쫓았다. 사박사박, 사뿐사뿐하게 걷는 소리가
뒤따라오자 디에즈의 속도가 느려졌다. 로젤린도 그에 맞춰서 차분하게 걸었다.

디에즈는 입가를 쓸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한걸음 뒤에서 의기소침한 얼굴로 따라오는 로젤린이 그려졌다.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풀렸다. 두 사람은 그 미묘한 기류를 유지한 채 몇 분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때, 로젤린의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디에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로젤린이 마른 수풀을 뒤적이고 있었다.

벼락에 쪼개진 고목, 메마른 땅, 바싹 마른 나뭇가지들이 늘어진 이곳은 황량한 무덤이나 다름없으리라. 온통
칙칙하고 보기만 해도 머리가 쭈뼛 서는 풍경 안에 하얀 꽃 하나가 피어 있었다. 디에즈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죽어 버린 땅에서도 피어나는가. 대단한 생명력이었다. 지긋지긋하게도.

로젤린은 그 흰 꽃을 부드럽게 뜯어냈다. 아주 소중하고, 연약한 것을 보살피는 손길이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망토 위로 흘러내리고, 내리깐 속눈썹이 깜박거렸다. 로젤린이 살짝 미소지었다.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디에즈는 넋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꽃의 이파리 하나하나를 곱게 다루는 모습을 보고, 그는 깨달았다. 저것은 선물이었다. 저 색을 닮은,
누군가를 위한.

숨이 막히는 기분에 디에즈는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멈춰 버렸나 했더니 심장박동은 어느 때보다 컸다. 고장
난 듯 불규칙적으로 두근…… 두근, 쿵쿵하고 울렸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황금색 눈동자가 석양에
물들어 있었다. 디에즈의 눈과 머리카락에서 붉은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 형님을 좋아하네요.”

이번 그의 말은 로젤린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렇군요. 납득하며 체념하는 기색이 비치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하지만 로젤린은 굳이 그의 말에 답을 붙였다.

“예.”

디에즈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오랜 시간을.

“로젤린.”

“예, 전하.”

“부탁이 있어요.”

부탁? 아까 군마 초콜릿을 구해 준 답례를 말하는 것일까. 디에즈의 표정은 아까의 차가움과 딱딱함이
온데간데없이 부드럽게 변했다. 평소에 보던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왜…….

부드러운 목소리에, 주위를 포근하게 만드는 그 미소에 로젤린은 이상하게 한기가 느껴진다 생각했다. 솜털이
쭈뼛 서며,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누구도 믿지 말 것.]

본능이 위험하다 말했다. 로젤린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던 제 행동을 멈췄다. 디에즈가 위험? 그가 위험하다?
자신에게? 로젤린은 짧은 시간 자신을 휘감고 간 본능의 경고에 살짝 혼란스러워졌다.

디에즈는 곤란한 상황에 있을 때마다 자신을 구해 줬다. 단둘이 있던 때도 많았다. 만약 그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이보다 좋은 기회가 있었으리라. 예를 들면, 축제 ‘그림자 없는 밤’에서 나쁜 사람들이 모이는
뒷골목에서라던가.

생각해 보면 해 볼수록 디에즈는 아닌 것 같았다. 피어오르는 불안감, 불씨는 너무 작았고, 그 조금의 가능성을
가리는 신뢰는 보다 짙고 커다랬다. 로젤린은 천천히 끄덕였다.

“어떤 부탁입니까?”

디에즈가 두 팔을 크게 벌렸다.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요.”

로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상상할 수 있는 그 너머에서 튀어나온 내용이라 당혹스러웠다.

“갑자기요?”

디에즈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이런 말은, 언제 어떤 상황에 꺼내도 이상할걸요.”

확실히. 그렇다. 과거 로젤린부터 몇 년 친하게 지내 온 사이라지만 제국의 5 황자와 2 황자의 호위 기사가


포옹할 만한 상황이란,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내 나름의 끝맺음을 하고 싶어서요.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전하가 저를 안는 일이 무언가를 끝맺는데 도움이 됩니까?”

“그럼요. 그래서 하는 부탁이에요.”

본인이 그렇다는데 ‘전하가 저를 안는 일로 전하 나름의 끝맺음을 하실 수 없으십니다.’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언가 목에 턱 걸린 듯, 껄끄러워 로젤린은 침을 크게 한번 삼켰다.

로젤린, 위험한 것이 있어. 조심해. 누구도 믿어서는 안 돼. 리카르디스의 말을 잊을 리 없으나…….

“역시…… 좀 그렇죠? 미안해요,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해서.”

디에즈가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거친 손놀림에 당황이 묻어 있었다.

“그냥 한번 안아 보고 싶었어요. 내가…… 오랫동안.”

그가 로젤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로젤린을 좋아했거든요.”

넓은 숲 공간 어디에도 퍼져 나가지 못하고, 둘 사이에서만 오고 가는 주문 같은 작은 말소리였다.


리카르디스와도 쌓은 적 없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유대감이 그녀의 발을 이끌었다.

어두운 밤, 더러운 골목을 손잡고 빠져나올 때. 말하지 않아도 모든 감각을 공유하는 것 같던. 그가 보여 왔던,
그와 그녀가 쌓아 왔던 시간 그 이상의 유대. 마치 본능 같은, 오랜 기억 너머에 새겨져 있는 것.

로젤린은 주춤거리다 디에즈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한걸음 딛자 디에즈가 환하게 웃었다. 그 속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동글동글 부드럽고, 예쁜 색채가 가득한 좋은 감정들뿐이었다.

로젤린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거리가 가까워졌다. 디에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녹아내릴 듯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의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물속에 담겨 있는 듯 일렁였다.

발과 발끝이 닿을 거리. 로젤린은 그를 올려다봤다. 디에즈가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뾰족뾰족하게 서 있던 이상한 경계가 누그러졌다. 누구도 믿지 말 것.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했던, 중요한 말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로젤린은 열려 있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감싸 안았다. 좋은 향기가 났다. 향유가 아닌 사람의 살
냄새와 바싹 마른 천 냄새였다.

툭, 그녀의 이마가 자신에게 닿을 때부터 줄곧 굳어 있던 디에즈가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로젤린은 곧 답답할


정도로 그에게 끌어 안겼다. 괴롭지는 않았다.

디에즈는 로젤린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고는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는 떨고 있었다. 추워 보이기도,


아파 보이기도 했다. 언제나 웃고 있던 그의 모습과는 달랐다.

문득 무투 대회의 마지막 날. 그때의 그가 생각났다.

회장의 중간에서 황제가 자신에게 검을 하사하고, 관중들이 환호를 지르는 위로 독수리가 날개를 펄럭이던 그때.
찬란하게 햇살이 내리쬐던 날의 디에즈의 얼굴.

꽉 껴안고 있어 지금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어쩐지 디에즈가 그런 얼굴을, 그런 표정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왜 울었던 걸까? 묻는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묻는 것도 좀 이상한
느낌이라, 로젤린은 곰곰이 그때를 돌이켜 생각했다.

그날의 뜨겁게 작열하던 햇살은 똑똑히 기억한다. 널찍하게 뚫린 공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함성까지도.

[영광의 일라베니아! 이델라브힘의 축복이 있으니 영원하리라!]

아름다운 황금색 눈동자 속에서 들끓던 분노를 똑똑히 보았다. 그것을 가리는 완벽한 가면. 디에즈가 어떤 식으로
웃는지 기억났다. 지금처럼, 아주 다정하게.

순간 소름이 일었다. 안겨 있던 로젤린이 몸을 확 뒤틀었다.

“컥!”

로젤린이 왈칵 비명을 토했다. 디에즈의 품에 선명한 붉은 피가 쏟아졌다. 로젤린의 손이 그의 망토를 세게


그러쥐었다. 힘줄이 굵게 돋아 올라왔다. 손끝이 저릿하고 머리가 삐쭉 서는 고통이었다.

145 화.

로젤린은 목구멍 끝에서부터 느껴지는 핏물을 느끼고 상황을 겨우 인지했다. 공격당했다. 등 뒤의 완벽한
사각으로부터. 숲의 가지를 치던 용도로 줄곧 들고 있던 단검일 것이다. 몸을 뒤튼 덕에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스치고 바로 옆에 꽂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큰 타격을 입었으리라.

“아악!”

로젤린은 재차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일격이 빗겨 나간 것을 눈치챈 디에즈가 박혀 있는 단검을 그대로 비틀어
내부를 헤집었기 때문이었다. 뼈와 근육이 벌어지는 고통은 신경을 예민하게, 머리를 무디게 만들었다.

어떤 살의도 느끼지 못했다. 어떤 낌새도 읽을 수 없었다. 사람의 심장. 기관의 중심부를 향한 공격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온화하고 어떠한 의도도 없었기에, 한순간 디에즈가 실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로젤린은 깨달았다. 등을 할퀸 고통으로부터, 죽어 가는 숲의 향기로부터,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 이것은 아주 익숙한 감각이었고, 아주 강렬했다. 깊게 새겨져 있었다.

디에즈. 그였다.

로젤린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어두운 숲. ‘로젤린’의 뒤를 쫓던 자. 그녀의 죽음을 바라던 자. 한


번 더 제 죽음을 바라는 자. 냉혹한 손톱을 가진.

또 다른 ‘그것’.

디에즈. 디에즈의 그림자.

* * *

천막이 바람에 천천히 나부꼈다. 틈새로 어두운 숲이 비쳤다. 빗소리를 뚫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똑똑히
닿았다. 눅눅한 공기를 폐 깊숙한 곳까지 보내는, 그 경악 어린 숨소리!

디에즈는 잠시도 주춤하지 않고 튀어 나갔다. 공기는 천 한 장을 경계로 온도가 바뀌었다. 휘이이, 칼바람이
불었다. 비가 머리와 얼굴 위로 쏟아졌다. 망토를 휘날리며 도망치는 불청객이 보였다.

쿵, 쿵, 쿵!

크게 발을 몇 번 구른 것만으로도 디에즈는 그 사람을 손쉽게 따라잡았다. 디에즈는 망설임 없이 커다란 짐승의


손을 휘둘렀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손톱 아래 부드러운 살과 근육이 찢겨 나갔다. 어마어마한 힘에 불청객은 말에
치인 것처럼 붕 날아 앞으로 몇 바퀴를 굴렀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사람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디지? 어디부터 봤을까. 아까 전 천막 밖을 나갔던 구릿빛 피부의 사내들도 보았을까? 이 손도? 인간의 것이라
믿기지 않는, 이 기괴한 몰골의 손도?

실수. 다른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습격 전 접선한 검은달의 암살자들이 이번만큼은 리카르디스도 칼날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리카르디스가 쉬운 상대가 아니란 사실도 알고, 모든 일에 완벽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그 이야기 또한 그저


그러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이란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막연했던 끝이 조금이나마 보이는 것 같았다.

하, 숨을 쉬고 감회에 잠기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접근을 허용했던 방심은 그 때문이었다.


대가는 참혹할 것이다. 천천히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질 테니. 상처 입고도 어린 영양처럼 어두운 숲을 헤치고
도망가는 저, 저 인간을 잡지 못하면!

디에즈는 힘차게 내달렸다. 벌어져 있던 거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젖은 흙과 나무, 피의 냄새. 그 사이를 뚫고,
디에즈는 익숙한 이의 향기를 맡았다.

햇살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었다. 아, 당신만은 아니길 바랐건만. 비 오는 밤.


어두운 숲. 달빛 한 점 들지 않는 이곳에서, 피 흘리는 자가 당신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방심의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 * *

바람이 단검을 스쳐 지나가자 피 냄새가 났다. 디에즈는 그것에서 문득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사실 일 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으니 오래전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녀, 진짜 로젤린이 죽은 것이 오래된 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필사의 힘으로 디에즈의 품에서 벗어난 로젤린이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힘겹게 숨을 골랐다. 그녀는
비틀거리다가 컥컥 소리를 내며 피를 토했다. 깊은 상처의 여파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디에즈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내가 ‘로젤린’을 죽였지. 피 냄새를 맡은 후에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걸 또다시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디에즈는
웃음을 흘렸다.

로젤린은 검을 바닥에 꽂아 몸을 지탱했다. 디에즈가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인간이라면 치명상. 피 냄새의 농도만으로도 그 상처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나에게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디에즈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생각은 사실 대단한 믿음을 기반으로 해야만 싹을 틔울 수 있지 않던가?

디에즈는 사냥 대회 출발 전,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의 볼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하던 말을 모조리 들었다.

[누구도 믿지 말 것.]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믿지 말라 했음에도, 로젤린은 자신을 믿었다. 그것이 못내 기쁘기도……


허무하기도…….

로젤린은 울었다. 고통의 자극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이었다. 그녀가 숨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로젤린을, 죽인 건…….”

그녀의 질문은 확신에 차 있었다. 과거 ‘로젤린’을 죽인 자가 자신이라는 걸 눈치챈 듯했다. 확실히, 가끔


계기가 주어지면 기억은 한순간에 피어오르기도 했으니. 그녀도 그런 것이리라.

“저예요, 로젤린.”
젖은 녹색 눈동자가 안쓰러웠다.

“내가 당신을. 내가 당신의 등을 헤집고, 절벽으로, 죽음으로 내몰았어요.”

“왜, 그러셨…… 습니까.”

디에즈는 그녀의 질문을 되새겼다. 왜? 그 말에 이상하게 답하기 힘들었다.

“나는…….”

목이 잠겼다. 서서히 숨구멍이 조이는 기분이라 디에즈는 제 목을 감싸고 있던 옷을 신경질적으로 풀어헤쳤다.

“난, 로젤린.”

하지만 그러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이 무슨 얼간이 같은 작태인지. 디에즈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파삭, 파사삭.

서로 마주 보고만 있던 그때, 말라비틀어진 나뭇잎과 앙상한 가지를 지나치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보다도 선명한 것은, 마치 심장박동처럼 뛰는 거대한 마력이었다. 무시무시한 압력을 내뿜으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디에즈는 그 누군가의 존재를 확정했다. 로젤린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맹금류의 왕이리라.

디에즈는 그곳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단검을 보았다. 검신을 뒤덮은
피는 아직까지도 뚝뚝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그 붉은 빛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일깨웠다.

[그러니까, 뭐랄까. 내 나름의 끝맺음을 하고 싶어서요.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끝맺음.

디에즈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안에서 마력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디에즈가 움직였다. 저벅, 저벅. 그녀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녀에게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로젤린은 디에즈를 올려다보았다. 미소 한 점, 감정 한 점 읽어 낼 수 없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디에즈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로젤린은 이를 악물고 바닥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력이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그녀를


휘감고, 폭발하듯 순식간에 공간을 메웠다.

자신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로젤린이 휘청이며 피를 토했다. 그녀가 큰 빈틈을 보였으나, 검날은 로젤린을 조금도
스치지 못했다. 디에즈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로젤린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사나운 기운을 생생하게 느꼈다. 온 산을 뒤덮는 강력한 어둠. 마력을 가진
생물이라면 숨죽이고 고개를 조아려야 할 것 같은 이, 거대한 힘. 디에즈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멈칫한 찰나의 순간. 숲속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던 소리가 막 당도했다. 얼기설기 얽힌 나뭇가지들을 뚫고
무언가가 날아왔다. 디에즈는 빠르게 방어 태세를 취했다.

쿵!

무언가가 터지듯,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그의 몸이 튕겨 나갔다.


촤아악, 로젤린의 앞을 가로막는 남자의 부츠가 흙바닥을 긁었다. 크게 밀려났던 디에즈도 몸의 균형을 잡았다.

로젤린이 제 앞에 등을 돌리고 선 남자를 힘겹게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불며 잿빛 머리가 흩날렸다. 마카롱이었다.


로젤린은 간신히 지탱하고 서 있던 몸에 힘을 풀고 풀썩 주저앉았다.

“물 마셔.”

마카롱이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건네준 성수를 기억해 내고 떨리는 손길로 수통을 열어
마셨다. 큰 효과는 없으나 아주 조금씩 피가 멎는 것 같긴 했다.

그녀가 수통을 다 비워 내는 그 순간까지도 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따금 바람이


지나가며 스산한 소리를 낼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들 사이의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두 남자도 로젤린도 아닌 무리를 이룬 발소리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카롱의 시선이 흘끗 그 방향을 향했다가 다시
디에즈에게 돌아갔다.

디에즈가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세 사람의 침묵으로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이 뚝 끊겼다. 다시 무언가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 마카롱이 몸을 굳히며 그를 경계했다. 하지만 충돌은 없었다.

디에즈가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마치 누군가에게 공격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사람 같았다. 마카롱이 주춤


한 발짝 내딛었지만, 앞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로젤린은 그들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마카롱과 디에즈. 두 사람의 만남이 이번이 처음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절단에 있었을 때 독수리의 모습으로 지나쳤기야 했을 테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뭐랄까. 잘 아는
사이 같았다.

146 화.

생각은 길지 못했다. 왈칵 피를 토하는 순간 고통이 온몸을 지배했다. 로젤린은 바닥을 보고 피를 뱉어 내다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흐려진 시야에 점점 멀어지는 디에즈의 등이 보였다.

다시 한번 로젤린이 아픈 기침을 토해 내자, 마카롱이 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몇 분 뒤, 올가미 용병단의 단원들이 도착했다. 남자들이 경계 태세로 주위를 훑다가 반쯤 쓰러져 있는 로젤린을
보고 기겁하는 소리를 냈다.

“로젤린 경! 아니 쥬, 쥬쥬 씨 이게 무슨…….”

“알 거 없잖아. 손대지 마.”

마카롱이 로젤린을 안아 들었다. 로젤린은 흐르는 눈물을 그의 옷에 비벼 닦아 냈다.

“이제 좀 자.”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로젤린은 수면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디에즈는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경악 어린 목소리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아까 전 그가 있던 곳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시끄러워 두통이 일 지경이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디에즈는 천천히 걸어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멀어졌다. 자연히 발걸음은 깊은 숲속을 향했다. 바람이 기묘하게
많이 부는 곳이라 했더니,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절벽이 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바람이 불어왔다. 디에즈는
그곳에 로젤린을 찌른 단검을 떨어트렸다. 피 냄새가 실려 와 어지러웠다.

로젤린은 자신이 떠나는 그 순간까지 눈동자에 의문을 담고 있었다. 어째서 당신은 로젤린의 죽음을 바랐는가?
그녀를 왜 죽였어? 왜 나를 또다시 죽이려 해?

답을 해 주지 못한 것은 방해자가 등장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는 도무지 알지


못했다.

로젤린 당신은 알 것이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근접한 거리의 사냥감을 결코 놓칠 리 없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그녀가 절벽 아래에 떨어졌다는 것.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로젤린. 그대만은 알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는 기어코 죽이지도 못해, 벼랑으로 그녀를 몰았던. 제 계획,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위험을 뒤로한 채 떨어지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던. 내가 왜 또다시. 너를 어떻게.

숨이 막혔다. 손등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바라보고 나서야 눈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

최초의 장면은 철창 안에 죽어 있는 사람들로 시작한다.

황금을 녹인 듯한 금발과 금안의 소년은 침대에 앉아 화려하게 치장된 방 안을 쭉 훑었다. 장식물, 바닥을 덮은
카펫, 창문을 가린 커튼,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장식물들의 생김새는 그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성적인 소년은 별달리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없었던지, 애완동물이었던 자신, ‘에파’에게 이 공간을 답답하다
항상 말하곤 했다. 그때는 질릴 정도로 화려한 방 안이라는 감상뿐이었으나.
확실히, 지금 이 ‘디에즈’의 황금색 눈동자로 본 방 안은 인형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시녀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띠고서는 수발을 들었다.

호숫가 근처에서 사라진 황자가 몇 시간 뒤에 쓰러진 채로 발견된 사건 자체는 차치하고, 그 이후 말을 아주


잃어버린 병증을 앓고 있는 일은 최근 백옥 성의 가장 큰 근심거리였다.

아끼던 애완동물 에파가 사라졌는데, 그 때문이라느니. 뇌 쪽의 어떤 문제가 있는 거라느니. 말은 많지만 이렇다


할 해결 방법은 없는 상태로, 사고 전 방실방실 방긋방긋 잘 웃던 황자 전하께서 입을 조가비처럼 딱 다물고는
무표정하게 있으니 시녀들 또한 말수가 적어지기 시작했다.

시녀들이 음식을 나르자 내내 무표정하던 디에즈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는 포크를 어설프게 쥐고는 닭
가슴살이 올라간 샐러드를 야무지게 찍어서 먹었다. 세 종류의 버섯이 들어간 수프도 후후 불면서 잘 떠먹고,
빵도 예쁘게 찢어서 잘 씹었다.

이틀 전 막 의식을 차린 사람치고는, 게다가 그 이전에 짧은 입으로 시녀들을 고생시켰던 장본인치고는 굉장한


식사량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잘 드시는 황자 전하가 기특하고 고마워 눈물짓기만 했다. 잘 먹어야 낫는다 하지 않던가.
그게 육체적인 문제 외에도 효험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디에즈는 시녀들에게 다 먹은 접시를 두 손으로 건네주는 방식으로, 더 달라는 뜻을 표했다. 시녀들이


흐물흐물해진 얼굴로 제 주인을 바라보고는 얼른 주방으로 달려갔다. 디에즈는 입에 묻은 음식 부스러기를 혀로
핥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먹는 것, 입는 것, 말하는 것. 행동 하나하나까지 전부 어긋났음에도, 지금의 디에즈와 사고 전의 ‘디에즈’가


별개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아주 자그마한 이질감. 뭔가 좀……? 고작 그 정도.
의심까지 미치지도 못하고 흘러가 버린 것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그 와중 단 한 사람이 바늘 같은 이질감을 눈치챘다. 작지만, 날카롭고 뾰족하다. 박혀 있으니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과거 ‘디에즈’가 어머니라 부르던 인간이었다. 겉가죽을 뒤집어쓸 수 있는 괴물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면서, 제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을까. 절절한 피의 연결 고리가 끊긴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녀라면 반드시 알아챌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소국 힐리사고 왕국, 그중에서도 권세가 대단치 못한 집안의 장녀였다. 일라베니아 황제의 반려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나, 아름다웠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조건이 충족된 셈이었다.

황제의 부인이라고 하면. 나라의 어머니나 다름없다 하지 않나? 나는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데?
평범하게 비슷한 직위의 귀족과 결혼해서 애 둘 셋 낳고, 평범하게 가정을 지키다가…….

물론, 그녀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황제의 계획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혼인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어린 나이. 득세하지 못한 귀족 가문의 여인이 상상한 미래는 이렇지는 않았다. 그녀가 현실 감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너무 괴상하게 흘러간 탓에, 그녀는 황실에서 지내는 모든 나날을 힘겨워 했다.
어디든 기대고자 했지만, 그 어디에도 기댈 곳은 없었다. 그녀의 외가 또한 그녀를 팔아넘긴 장사치에 불과했다.

그녀를 원해서, 어린 나이에 타지로 끌고 온 황제 또한 전혀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했다. 황제는 향수병에 걸려


하루 종일 우울해하는 여자를 달랠 만큼 자상하지도 못했고, 그런 귀찮은 일을 도맡을 만큼 그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어려서 풋풋하고, 예쁘니 보기 좋다. 딱 그 정도의 관심. 그 정도의 애정. 그것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런 배경에서 디에즈가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엘피디오가 얼마나 강력했건 간에, 아들인 이상
황태자 후보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조용하던 백옥 성에 사람들이 드나들며 축하하고, 황제도
아들이라는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를 칭찬했다. 갖은 빛나는 것과 많은 이들이 탐내는 것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그녀는 찾아냈다. 이 어둡고 무서운, 거대한 미로 같은 공간에서 유일하게 잡게 된 실. 미로의 출구를 알려 주는


가느다란 실이 제가 낳은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금발의 사내아이는 아름다울뿐더러, 명석했다. 기대는 그만큼 높아졌다. 자랄수록 엘피디오의 세가 급격히
불어나며, 현 황제의 자리까지 위협하는 위치에 올랐음에도 그녀는 디에즈가 다음 대의 황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덕분에 디에즈는 그녀의 집요한 눈길 아래에서 자라났다. 입는 것, 먹는 것, 배우는 것. 지내는 공간, 온전히
그만의 것이었어야 할 시간. 그의 모든 생각까지.

그런 것은 입에 대면 안 돼, 디에즈. 황제 폐하는 붉은색을 싫어하셔, 디에즈. 아침에는 6 시에 일어나서, 7


시까지 아침을 먹고, 9 시까지 역사학을 공부해야 해. 12 시까지는 성전을 읽고, 1 시까지는 점심을……
황족으로서의 몸가짐을……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준비를…… 모두 너를 위해서야.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서인지, 혹은 원래 그가 그런 성정이었는지. 디에즈는 유약했다. 휩쓸리고, 순응했다.


디에즈는 자주 답답함을 느꼈지만, 그녀를 위해 웃었다.

약해 빠진 것. 과거 ‘디에즈’에 대한 평가였다. 한때 ‘디에즈’의 애완동물이었을 때에도 그렇게 느끼긴


했으나, 이따금 그의 생각이 떠오를 때면 평가는 더욱 신랄해졌다.

“디에즈.”

아, 또 왔다. 의심의 눈초리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방을 들어서는 그의 어미. 아니, 어머니.

디에즈는 눈을 휘며 생긋 웃었다. 거울을 보고 연습한 결과였다. 과거 ‘디에즈’의 모습과 똑 닮아 있음에도,


그녀의 낯빛은 더욱 창백해졌다. 눈빛이 불쾌했다.

입는 것, 먹는 것, 배우는 것. 지내는 공간, 시간. 모든 생각까지. 전부 그녀의 뜻대로 한다고 해도 자신이


디에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으리라.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사랑일까. 징그럽기 그지없었다.

그날 밤 백옥 성이 불타올랐다. 디에즈가 쓰러진 채 발견된 것은 삼일 전. 좋지 않은 사건을 최대한 숨기고자


하는 황실의 특성상, 그가 쓰러졌다는 얘기를 아는 것은 백옥 성의 사람들뿐이었다.

그렇게 5 황자 디에즈가 화재 전에 쓰러졌었고, 깨어났을 때 말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백옥 성과 함께 검게


타올라 사라졌다.

너울거리는 불빛이 어두운 하늘을 비췄다. 디에즈는 열기가 닿는 곳에서 탁탁 튀어 오르는 불티들을 손으로 콕콕
찔렀다. 뜨거웠다.

콰르르 소리와 함께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디에즈가 한걸음 물러서자마자 그 자리로 무거운 조각들이 떨어졌다.
디에즈는 걸음을 돌려, 처음 시작한 장소로 향했다. ‘디에즈’가 사라지고, 지금의 자신으로 변한 호숫가. 그는
꽃이 예쁘게 핀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147 화.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도망가지 못하게 치명상을 입혀 두었으니 빠져나오지는 못한다.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성을 잡아먹은 연기가 하늘을 가렸다. 디에즈는 과거 ‘디에즈’가 하듯


풀피리를 삐삐 불었다. 그만큼 솜씨가 훌륭하지는 못했다.

그는 조각나 알 수 없는 기억을 찾아 이곳에 왔다. 코를 찌르는 선명한 피 비린내. 어두운 공간, 춥고 습한,
불쾌한 냄새가 나는 곳. 이름 한번 불러 보지 못한 아이들. 사람들의 비명 소리. 하얗고 뾰족한 성. 울리는
아름다운 종소리.

속을 헤집어 할퀴는 그 기억들 사이, 이상한 게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그것은 그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과거
‘디에즈’의 기억이었다.

어떤 소녀의 모습이었다.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를 단발로 댕강 잘라 고개를 숙이면 하얀 목덜미가 보이는, 그런


소녀.

그녀는 햇살 아래 몸을 곧게 세우고 똑바로 앞을 응시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디에즈’의 기억은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 아래, 얼마나 강한 힘이 자리 잡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가슴에 소중한 걸 품고 혼자 발을 내딛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뭐가 그렇게 예쁜지, 뭐가 그렇게 빛나는지. 왜 생각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지는지. 기억 없이 감정만 물려받은 지금의 디에즈는 황당할 뿐이었다.

그렇게 철창 안, 죽어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한 기억에 이따금 검은 머리 소녀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화가 났다가 기뻤다가, 울고 웃는 나날을 보내게 되리라고는, 풀피리를 삐이 삐이 부는 지금의 디에즈는 알 수
없었다.

디에즈가 기억 속 소녀와 대면하게 된 것은 삼 년이 지난 후였다.

백옥 성 화재 사건 이후, 충격에 실어증이 걸린 5 황자는 별장으로 내려가 오랜 기간 요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실상은 몸의 주인으로부터 기억을 물려받는 과정과 인간의 언어, 황실의 예법을 익힐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삼 년이 지나 성장한 디에즈는 예전의 상냥한 미소를 되찾았다. 모두가 그의 귀환을 반겼다. 그중 2 황자


리카르디스의 호위 기사인 레이몬드도 끼어 있었다.

어릴 적부터의 오랜 인연이었다. 애완동물일 적에도 몇 번 본 적 있었다. 귀찮게 들러붙으며 쓰다듬었던 인간이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 게다가 멍청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감이 좋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질감을 느낀다 하더라도, 부모와 동생, 제 수발을 들던 사용인들까지 죄 불타
죽고 혼자만 살아남은 큰 사건을 겪었다면, 심경의 변화가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음험한 속을 하는지도 모르고 레이몬드는 눈물까지 흘려 가며 그를 끌어안았다. 디에즈는 당황했다.


황족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아니었나? 예법 책에서 그렇게 봤는데?

다 크다 못해 근육이 꽉 압축되어 있는 거대한 남자가 자신을 안고서는…… 운다.

디에즈는 환장할 것 같았다. 지금 어. 코를 훌쩍거렸는데. 어깨에 묻은 건 아니겠지? 찝찝했다. 그렇게 껴


안겨서 싱숭생숭한 마음에 당황하는 와중, 로젤린을 만났다. 레이몬드가 기억하냐고 물었다. 제 수습 기사였는데
이번에 정식으로 하급 기사가 되었단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로젤린 에스터.

가벼운 미소도 없는 딱딱한 얼굴이 낯설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화가 나 있는 듯했다. 언제나 웃고 있던 기억


속의 모습과 달랐다. 그 미소가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웃었는데. 뭔가 애타는 마음이
들어 불쾌해졌다. 허약해 빠진 모자란 놈이 별 잡스러운 걸 남기고 가서, 괜히 속을 들쑤시고 있었다.

그녀의 진짜 첫인상이 별로였건 어쨌건, 세 명은 자주 만났다. 아마 레이몬드는 제 마음에 쏙 드는 친구 1 과 2 가


친해지길 바랐던 것 같았다. 세 번째 만났을 때야 비로소, 디에즈는 로젤린의 그 불만스럽고 화난 것 같은
표정이 기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걸 알게 된 후에야 그녀가 조금 보였다.

가끔 건네는 말은 차분했다. 목소리가 좋았다. 바람이 일지 않는 호수의 표면같이 확 튀거나 낮게 가라앉지 않고


조곤조곤했다. 로젤린은 사람의 눈을 빤히 쳐다보는 습관이 있었다. 녹색 눈동자는 햇빛을 강하게 받으면
노란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검은 머리는 결 좋게 빛났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걸음걸이가 사뿐사뿐했다.

내리깐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아래를 향하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였다.

시선이 부딪쳤다.

훔쳐보고 있다가 딱 걸렸다. 황실 도서관. 아동용 동화책 뽑아 놓고도 테이블에 엎어져 자고 있는 레이몬드를
제외하고, 두 사람은 이것저것 쌓아 놓고 읽던 중이었다.

그러나 디에즈는 책 대신 로젤린이라는 대상을 열심히 탐구했다. 책을 넘기는 손이 멈춘 지 오래고, 시선도


적나라하기 그지없어 로젤린도 모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디에즈는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자신이 그녀를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로젤린은 사람의 눈을 피하지 않고, 가만가만 그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묵직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고, 디에즈도
똑바로 쏟아지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났다. 침묵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크어억…… 쯔…… 어…….”

레이몬드의 비강 그 어디쯤에서 괴상한 소리가 울렸다. 코를 고는 건지 잠꼬대를 하는 건지 통 알 수 없는 소리.


로젤린의 시선이 레이몬드를 향했다. 그녀는 자신이 민망하다는 듯, 이상하고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곁눈질로
디에즈를 흘끗 쳐다봤다.

내 상사이자 당신의 친구가 바보라서, 민망하죠? 동의를 구하는 눈빛에 디에즈가 피식 웃었다. 레이몬드가 바보
같아서 절로 나온 웃음이었다. 로젤린도 소리 없이 웃었다. 처음 보는 미소였다.

아, 그 웃음이. 소리 없이 온 공간을 메운 포근하고 반짝거리는 것이. 춤을 추듯 너울거렸다.

삼 년의 세월이었다. 제 것이 아닌 기억이 섞이기 시작한 그때의 날로부터. 일 년, 삼백육십 오 일. 하루,


스물네 시간, 한 시간이 육십 분, 일 분은 육십 초. 시간 시간마다 피비린내 나는 공간에 갇혀 버린 자신을,
그녀가 햇살 아래로 이끌고는 했다.

어린 당신은 햇살 아래에서 얼마나 많이 웃었던가. 그 삼 년 동안. 그 헤아릴 수 없는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만났던가.

손이 떨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끔찍한 장면. 그게


사실은 중요하지 않지 않을까? 로젤린이 웃는 모습을 보니, 그래.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그저
말하고 싶었다.

로젤린 나는, 그 삼 년 동안. 그 안에 훨씬 많이 흐른 시간 속에서 너를 오랫동안 보고 싶었다고.

많은 얘기를 나누고,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것을 기억에 새기고, 그 기억에 새롭게 행복해하고
싶었다. 고통의 시간은 너무 길지 않았나. 그것을 끝내기 위해서 나는 여기에 온 것인가?

이상하게 눈이 시린 기분이라 디에즈는 눈을 비비며 시선을 떨궜다. 로젤린을 훔쳐보느라 넘기지도 못하고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죄는 단순히 반인륜적인 사건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이델라브힘을 등지고…….]

숨이 턱 막혔다. 디에즈는 다급한 손길로 책을 넘겼다. 그 순간만큼은 로젤린이 생각나지 않았다.

[축복으로써 감싸 안고자 한 일라베니아를 배신한 후안무치한 마인들의 행태에 어린 백성들은 분노하였으니…….]

단순한 글자를 넘은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니야, 무슨 말을. 당신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악을 쓰고 싶을 만큼 이 책은 그의 기억과 다른 얘기를 했다.

디에즈는 제 머리를 꽉 눌렀다.

장면은…….

철창 안, 죽어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 속을 할퀴던 고통이 무엇인지. 어슴푸레한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몸이 떨렸다.
누가 목을 조르듯 답답했다. 디에즈는 그 상황에서도 완벽하게 평범한 ‘디에즈’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으므로,
로젤린은 그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도서관의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로젤린. 나는 어쩌면 좋을까. 로젤린 제발 나를…….

[……시간이 흐른다 하더라도 그 죄가 사라지랴.]

* * *

“푸헤히흐흑!”

경망스러운 웃음소리에 한층 더 열 받았다. 대신관 라헤안시를 모시는 신관 베르움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봐라 봐라, 자알 봐라. 거봐라. 딱 봐라! 어린 애들이나 하는 놀이나 한다고 날 무시했지! 넌 뭐냐 베르움!
그깟 어린 애들 놀이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꼬라지 좀 보라지! 으허, 으후허허헉! 내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 이놈아!”

막사 안에서 심심하다고 찡찡거리며 떼를 쓰기에 압수해 뒀던 카드를 줬더니, 혼자서 카드 게임 하면 무슨


재미냐고 자신을 꾀어낸 것이 대략 한 시간 전.

룰을 외워도 눈치가 귀신 같은 대신관이 좋은 패를 쏙쏙 빼 가니 이십 년 세월 이델라브힘께 기도하며 심신을


수양한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빡쳤다.

오랜 수련을 거친 신관의 성미를 황량한 가시나무 숲으로 만드는 오락거리를 어린 아이들의 놀이라 말했다니.
미쳤지, 내가 미쳤지. 이딴 걸 어떻게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졌지! 나한테 졌지! 계속 지고, 지겹지도 않은지 또 졌지! 이야, 이 정도면 진짜 쉽지 않거든, 한 번쯤 이길
법도 한데 말이다!”

베르움이 뚱하게 카드 패를 담요에 던지자 라헤안시가 손을 그에게 내밀고 까딱거렸다. 돈놀이하는 인간이 빚
받으러 온 듯 당당한 태도였다.

“뭡니까, 대신관님.”

“졌으니 뭐든 내놓아. 스물여섯 판 진 값.”

“이 무슨 날강도……? 그런 말 없었잖습니까!”

“신성한 도…… 아니 놀이판에서 아무것도 걸지 않다니, 놀이의 신이 노할 것이다!”

당신 방금, 도박이라고 말하려고 했지. 그리고 유일신 이델라브힘을 믿는, 그것도 무려 대신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놀이의 신 따위를 운운하다니. 대체 이 인간 누가 대신관 시켜 준 거야?
148 화.

“신관이 사재 가지는 거 보셨습니까!”

“그러면 옷이라도 내놔!”

베르움과 라헤안시가 아옹다옹 다투는 사이, 그들이 있는 막사 안으로 무언가가 타오르는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라헤안시가 코를 킁킁 움직였다.

“사냥 대회가 끝날 때가 되었는가 보다.”

사냥 대회의 끝을 알리는 연기가 하늘 높게 올라가고 있을 광경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베르움은 충격받았다.


카드 게임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대회가 끝날 시간이라고? 다섯 시간 정도가
통째로 사라진 셈이었다.

이, 무서운, 사람을 현혹하는…… 악의 놀이 같으니!

“베르움.”

“예, 대신관님.”

“무슨 일 없는가 알아보고 오너라.”

“무슨 일을 말씀하십니까?”

“보통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는 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인데, 끝날 때까지 조용해서 심심하단 말이다.”

간이침대에 누워서 뒹굴뒹굴하는 라헤안시를 보느니, 어수선한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베르움은 미련 없이 일어났다. 라헤안시는 이렇게 뜬금없이 얘기를 꺼낼 사람…… 이었기 때문에 그는 정말
아무런 쓸모없는 정보까지 모아 갔다.

“물보라 기사단의 할 경이 다람쥐를 잡으려 했는데 너무 귀엽게 생겨서 미처 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우를 잡으려 했더니, 기르다 방생했는지 배를 보이고 애교를 부려서 또 놓아주었다 합니다. 어떻게 어떻게
너구리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근처에서 새끼 너구리 두 마리를 발견한 것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다 우울증 같은
게 생긴 모양입니다. 신관은 몸의 상처는 치료해 주지만, 마음의 상처에는 효과가 없다고 하니 시무룩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참 여린 기사님이 아닌지.”

라헤안시의 눈이 살짝 열려 있는 막사의 천. 그 틈새로 비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노을 위로 거뭇한


연기가 퍼져 가는 중이었다.

베르움이 담요 위에 널브러진 카드를 뒤적거리는 모습을 본 라헤안시가 반색하며 잽싸게 일어섰다. 베르움이
간신히 체면을 차리며 흐, 흠 한 판뿐입니다. 하며 새침 떨자 라헤안시가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헤안시가 패를 섞는 장면을 바라보던 베르움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한 시간 전에 황성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급한 용무가 있으셨다고.”

도박으로 밥벌이하는 듯한 화려한 손놀림으로 패를 섞던 라헤안시의 손이 잠시 멈췄다.

“흠…… 사고는 아니고 사건인가.”

베르움은 라헤안시가 패를 섞으며 어떤 수작질을 부리고 있지 않은지, 열심히 감시하는 중이라 그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지금 살짝…… 밑에서 패를 꺼내신 거 아닌가요.”

“그럴 리가 있남! 거 사람 농담도 잘해!”

사냥 대회는 큰 소란 없이 마무리되었다. 우승자는 얼음창 기사단의 부단장, 마르틴이었다. 황제는 매우


기뻐하며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마르틴은 황제가 하사하는 금은보화는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누군가를 찾았다.

마르틴은 곧 사냥 대회를 관리하는 행정관에게서 로젤린의 점수를 비밀리에 입수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의
기록은 하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점수로 치면 작은 동물(+5) 네 마리를 잡은 정도였다. 로젤린의 솜씨라고
보기에는 영 허술했다.

마르틴은 이에 대해 묻고자 로젤린을 찾았으나, 사냥 대회의 폐회식이 끝나고도 그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 * *

어두운 밤. 로젤린은 눈을 떴다. 비틀거리며 상체만 일으켜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지금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푹신한 침대, 화려하지만 정돈된 방 안. 여기저기 리카르디스의 문양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아하니 월장석 성 내에 있는 수많은 방 중 하나인 듯했다.

열린 창문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커튼을 흔들었다. 그때마다 날 밝은 밤의 달빛이 새어 들었다.

다친 상처 부위가 저릿하게 쑤셨다. 헤집어진 내부는 아직까지 아물지 않았으나, 많이 호전 된 상태이긴 했다.
최근 자신의 재생은 완벽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이렇게 치명적인 상처라면 속도는 더욱 늦어졌다. 아직 완벽하게
성력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라 하더라도 그 손길이 닿았노라 짐작할 수 있었다.

로젤린은 몇 가지 장면을 떠올렸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죽은 숲으로 들어가던 디에즈. 그리고 그를 끝까지


지켜보던 마카롱.

남자 모습의 마카롱은 단단한 벽같이 서 있었다. 그의 뒤에 있던 자신에게 오는 위험을 모두 막아 내기도 하지만,


디에즈를 향하는 위험 또한 막아 낼 것 같았다.

이후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은 리카르디스의 찌푸려진 얼굴이었다. 드문드문 흔들리는 마차와 분을 삭이는 숨소리,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직까지 심장에 칼이 박힌 것처럼 서늘했다. 로젤린은 제
가슴께에 손을 대고 후 숨을 천천히 들이쉬다 내뱉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로젤린의 고개가 우뚝 고정되었다. 구석의 소파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커튼이 바람이
흔들렸다. 조명같이 환한 달빛이 창문에서부터 소파까지 길을 만들 듯 비췄다.

남자의 깍지 낀 손과, 긴 은발이 희게 빛났다. 리카르디스였다. 그가 소파에 앉아 가만히 숨죽인 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닿지 않아 어둠에 잠겨 있는 리카르디스의 눈과 로젤린의 눈이 딱 마주쳤다.

“전하.”

로젤린이 일어나려 하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다시 엉덩이를 침대에 붙였다. 리카르디스는 깍지
낀 채 가만히 제 손 마디만 쓸고 있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로젤린은 불안해졌다.

“왜…….”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숙이며 제 이마를 짚었다. 그는 아픈 로젤린보다 괴로워
보였다. 떨리는 손 위로 뼈가 곧게 돋고 혈관이 선명하게 올라와 있었다. 무언가를 꽉 쥔 것처럼, 무언가를 꾹
참는 사람처럼 보였다.

“왜 다친 거야, 로젤린.”

이상한 질문이었다. 어쩌다 다쳤느냐, 어떻게 다쳤느냐가 아니라, 왜 다쳤느냐? 답을 하자니 애매했다.
로젤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내에서 최선의 답변을 했다.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

“디에즈 전하께서 저를 찌르셨습니다. 예전 로젤린을 죽인 것도 그분이셨고, 또 저와 같은…….”

“아니, 아니!”

리카르디스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가 주먹 쥔 손으로 제 이마를 짓누르듯 꾹 눌렀다.

“그건, 전혀 중요치 않아.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다, 로젤린!”

로젤린은 흠칫 몸을 떨었다. 사나운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오래 전 기억을 더듬자면 이런 모습이 있을지도


모르나, 요즘의 그는 항상 눈을 마주치면 웃었다. 딱딱한 표정이 누그러지며 입가가 예쁜 호선을 그렸다.

둘만 남았을 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로젤린’ 하고 부르기도 했다. 그녀는 리카르디스가 자신에게만


예외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언젠가부터 알고 있었고, 그것이 기뻤다. 그 모든 행동이 스며들 듯 익숙해지고 있던
때였다.

기뻤던 만큼이나 지금의 리카르디스가 낯설고 무서웠다. 자신을 해칠 것 같아 무서운 게 아니라, 그저 그가


자신을 보고 웃지 않는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철렁였다.

리카르디스가 바닥을 향하던 고개를 들었다. 날카롭고 뾰족뾰족하고 아프고 사나운 감정들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이 보였다. 로젤린은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화를 내시는 거지. 몸이 위축된 만큼 사고도 위축되기 시작했다.

“다치지 말라 했다.”
“그, 저는.”

서늘하게 끊어 내는 듯한 목소리에 로젤린은 몸을 떨었다. 리카르디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침대로 걸음을 옮길수록, 달빛이 그를 비추는 범위가 늘어났다. 허리, 가슴, 턱.

“누구도 믿지 말라,”

얼굴까지.

“그렇게 말했었잖아.”

달빛이 비친 아름다운 얼굴 위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누구도 믿지 마. 리카르디스가 수없이 얘기했던 것들. 절대 다치지 마. 그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말 안에 담길


수 없는 커다란 걱정들까지.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믿지 말라 했음에도 믿었다. 다치지 말라 했음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말과


걱정이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느끼지 않았을까. 아무 의미도 없던 것처럼.

“등에서부터 찔린 상처였다. 이것은 디에즈, 그자가 강했기에, 그대가 싸워 패배했기에 입은 상처가 아니란 걸
안다. 방심이다. 그를 믿은 것이다. 등을 내줄 만큼이나.”

“저는…… 전하, 그게. 디에즈 전하가, 디에즈 전하께서 저를, 구해 주시고, 또, 길을 안내해 주시고,
초콜릿도 구해 주셔서, 부, 부탁이 있다고, 한 번만…….”

로젤린은 횡설수설 말하며 침대 시트를 매만졌다. 목적 없이 떠도는, 떨리는 손에서 그녀의 마음이 드러났다.
그녀는 초조했다.

리카르디스는 말을 힘겹게 내뱉었고, 한 마디, 한 글자가 더해질 때마다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평소 그가
자신을 혼낼 때 미간에 주름을 가볍게 잡고는 안 돼, 로젤린. 하지 말라 했잖아. 하고 타이르듯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믿지 말라고 했어! 그날에, 그대의 뒤를 쫓는 자가 칼릭스 경이라 해도, 레이몬드 경이라 해도! 나라고
해도 믿지 말라 했어!”

앞에서 무섭게 다그치는 리카르디스의 모습이 흐려졌다. 로젤린은 고인 눈물을 소매로 급하게 닦았다. 그녀의
눈가가 발개진 것을 보고도 리카르디스는 질책을 멈추지 않았다.

“마카롱의 말대로, 나는 그대를 전부 알지도 못하고, 디에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서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감히 예측하겠나. 변수가 많고 확실하지
못한 기반 위에 쌓인 계획에는 빈틈이 많을 수밖에 없었어! 위험해, 위험한 것이 당연해!”

리카르디스는 소리치는 도중 무언가를 참아 내듯 입술을 꾹 깨물기도 했고 다른 곳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대를 보낸 이유는, 내가, 내가 그대를 믿었기 때문이야. 내가 한 말을, 그대가 들어주리라.
그 약속을 지켜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야! 로젤린. 로젤린 경! 어찌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149 화.

그가 침대 위에 거칠게 두 손을 내려놓으며 헐떡였다. 로젤린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차마 그에게 손도 대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숙이고 잠깐의 시간을 보냈다. 로젤린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에 리카르디스가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아직도 꿈을 꾼다. 그대가 내 품에 안겨 있었다 로젤린. 그대는 먼지 쌓인 오두막에서 내 눈을 바라보다 감아.


그리고 다시 눈을 뜨지 못해. 피 냄새는 짙고, 감정은 가슴에 칼로 새긴 듯 선명하다. 대륙의 모든 이가
칭송하는 내 성력은 그대에게 닿지 못하니 그대의 피를 닦아 줄 더러운 천조각보다 못한 존재고, 어딜 보아도
구원은 없다.”

피 냄새가 났다. 로젤린이 눈물을 닦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리카르디스가 쥐고 있는 시트에 붉은색이 배어
나왔다. 손바닥에 손톱이 강하게 파고든 탓이었다. 로젤린이 기겁해서 그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전하! 손에서 피가!”

로젤린이 손을 뻗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뿌리쳤다. 로젤린은 디에즈에게 찔린 곳보다 더 깊은


안쪽에서 오는 듯한 시린 통증을 느꼈다. 가슴 안쪽이 시큰거렸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해서 침대 시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그대는 나를 마주하다 눈을 감았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처였다. 괜찮을 거라
생각해야만 했다. 비록 그대가 하루하루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을지언정. 모든 상처가 보통의 사람들과 다름없이
그대에게 새겨지리란 사실을 알고 있을지언정. 괜찮다. 괜찮을 거다. 강한 사람이니까. 언제나 다시 내게
돌아왔으니까. 이번에도…… 이번에도 괜찮을 거라…….”

리카르디스는 한참 가만히 있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을 할 수 있어. 어떻게 내가…….”

그는 눈을 꾹 누르더니 몸을 일으켰다. 감정을 쏟아 내는 동안 가려져 있던 눈이 비로소 보였다. 로젤린은


조급한 마음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렇게까지 서늘해 보이리라고는, 로젤린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처음 그와 마주했던 때가 차라리 더 정겨울 지경이었다. 서운함이 넘쳐 눈물샘을 자극했다.

“로젤린 경.”

로젤린이 울먹거리고 있자,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부드럽게 당겼다. 로젤린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리카르디스가 무릎으로 침대를 짚은 채, 그녀를 받아 내었다. 로젤린의 얼굴에 리카르디스의 가슴이 닿았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와 등을 감싸 오는 크고 따뜻한 손을 느꼈다. 맺혀 있던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등을 감싼 리카르디스의 손에서 따듯한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성력이었다. 몇 분간 말없이 성력을 붓기만 하던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품에서 떨어트렸다.

“내일부터는 라헤안시 대신관을 보내겠다. 쉬어라.”

그는 싸늘한 말과 함께 돌아섰다. 로젤린은 어, 아. 변명도 해명도 못하고 그의 등을 바라만 봤다.

쿵. 문이 닫혔다. 로젤린은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방 안을 둘러보았다.

차가운 온도가 내려앉은 방 안은 어딘가 중요한 것이 빠진 듯 비어 보여 홀로 남은 사람을 쓸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로젤린은 침대에 멍하니 앉아 울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로젤린은 누군가가 부드럽게 건드리는 손길에 잠시 정신을 차렸다. 불편하게 엎드려 웅크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똑바로 누워 있었다. 로젤린은 부은 눈을 비비며 올려다보았다. 마카롱이었다.

로젤린이 안도감인지 불안함인지 모를 것에 훌쩍훌쩍 울자, 그가 가만히 내려다보다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그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이 이상하게 서러워 로젤린은 계속 울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일어나 보니
아침이었다. 마카롱은 없었다.

* * *

이 세상에 대신관을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라헤안시는 그 몇 안 되는 사람 때문에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어찌나 말도 많고 불만도 많은지. 이동하는 내내 종알종알, 투덜투덜. 라헤안시와 함께 마차 안에 있는 신관


베르움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베르움, 못된 놈. 나쁜 놈! 지독한 노옴!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덜컥 간다고 말을 해! 내가 바쁜 걸 빤히 아는


놈이 그러느냐?”

“예, 사냥 대회에서 뭘 그리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피곤하시다고 열여섯 시간을 꼬박 주무신 것은 압니다.


그렇게 살다간 몸에 곰팡이 핍니다, 대신관님. 제발 일 좀 하세요.”

“아, 싫다. 싫다고! 형님의 호출이야. 잘은 모르겠지만…… 혼난다! 그 건인지, 두 달 전에 그건지, 아니면
어제 했던 그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엄청 혼날 거라고!”

“형님이 아니라, 황자 전하라 부르셔야 합니다, 대신관님. 신관의 법도를 따르셔야죠. 그리고, 그 건은 뭐고,
두 달 전에 그거는 뭐고, 어제 했던 그거는 뭡니까!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시는 겁니까!”

라헤안시는 베르움의 말이 안 들리는 듯 제 불만만 쏟아 내다, 창밖에 보이는 월장석 성이 점점 가까워지자


울상을 지었다. 종국에는 마차 바닥에 드러누워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싫다, 싫다고, 마차 돌려! 온갖 난리를
피우는 통에 베르움은 마음을 경건히 하기 위해 기도를 올렸다. 사람은 때리면, 안되지. 안 되는 거였지.
이델라브힘이시여.

두 사람은 잇세리온의 안내를 받아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우리 혀엉!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어서 불렀어? 형의 귀염둥이 라헤안시가 왔어!”

라헤안시는 애써 방긋 웃으며 활기차게 들어갔다. 웃는 얼굴에는 침을 못 뱉는다는데.

“왜 이렇게 늦어!”

늦어! 도 아니었다. 늦어어! 호통에 가까운 발성이었다. 방에 발을 들이자마자, 리카르디스가 서류를 집어


던지며 반기는 통에 라헤안시는 잽싸게 구석에 찌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웃는 얼굴에 침 잘 뱉는 우리 형이
있었지.

“이 자식, 네가 하는 게 뭐가 있어서 이렇게 늦어! 부른 게 언제인데! 사냥 대회에서 한 것도 없으면서


피곤하다고 밥 먹고 간식 먹고 침대에서 뒹굴거리기나 했겠지! 이 굼벵이 같은 놈!”

리카르디스가 탁자를 짚은 채 씩씩거렸다. 라헤안시는 억울했다. 자신이 한 잘못이 수두룩한데, 고작 이런


것으로 혼나다니. 이건 단순한 분풀이다! 그는 리카르디스가 모종의 이유로 화가 났으며, 자신은 그 희생양일
뿐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리카르디스가 반대쪽 손에 있던 서류를 탁상에 거칠게 던져 놓았다. 철썩 소리에 라헤안시가 움찔 몸을 떨었다.

“라헤안시!”

“예! 형님!”

“잇세리온을 따라가라. 안내해 줄 거다.”

허리에 손을 얹은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 쪽을 대충 가리켰다.

“저, 형님. 업무의 자세한 내용을 좀 말해 주시면…… 네, 감사하겠습니다.”

“내 기사 중 한 명이 다쳤다. 치료해라. 네가 사용할 수 있는 한계까지 쏟아부어.”

라헤안시는 뜨악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력 다 쓰면 엄청 힘들어지는 거 알잖아! 한 일주일은 비실비실하게 지내야 한다고! 형이랑 교대로 하면


되잖아. 어? 잠깐 뭔가 이상한데. 형이 있었잖아, 내가 왜 해? 형이 치료해!”

리카르디스는 대답 없이 가만히 탁자의 모서리를 보고 있었다. 매일 보는 탁자에서 새롭게 무언가를 발견한 것도


아니고, 잠시간 골똘히 상념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입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욕설을 참아 내는
표정이었다. 리카르디스의 목과 관자놀이에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라헤안시가 재빠르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잇세리온이 라헤안시 옆에 쪼그려 앉더니 그에게
귓속말했다.

“저라면…… 그냥 하겠다고 할 텐데요.”


이런, 멍청하군. 안타깝기도 하지…… 라는 말이 어울리는 어조였다. 더군다나 리카르디스가 황실 일원이 되기
전부터 보필했던 사람의 말이 아닌가. 신뢰감이 마구 상승함에 따라 소름이 돋았다. 조금 더 버텼다가는 어떤
더러운 꼴을 볼지 몰라!

“만백성을 빛으로 이롭게 하는 것이 나의 기쁨일지니!”

라헤안시는 횡설수설하며 잇세리온의 등을 밀어 방을 얼른 나섰다.

집무실에서 한참 멀어진 후에야 라헤안시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다. 요즘 들어
제법 말랑해졌던 제 이복형의 성질 머리가 다시 원상 복구 되다 못해 더 나아가 가시나무처럼 변하지 않았나.

라헤안시는 눈을 굴려 가며 고민하다가 잇세리온에게 질문을 던졌다.

“로젤린 경이 다쳤나?”

잇세리온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기밀입니다만 곧 보실 테니. 네. 맞습니다, 대신관님.”

“그거 참 흥미롭구만. 내가 또 비밀, 기밀. 이런 거에 끔뻑 죽는 인간일세.”

“……기밀입니다. 월장석 성에서 나가시면서 전부 잊어 주시길 바랍니다.”

“거어참.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러나! 그런데 왜 형님께서 로젤린 경을 치료하지 않고?”

“………기밀입니다.”

“싸웠나? 또 저 더러운 성격 못 이기고 성냈나?”

잇세리온은 도착할 때까지 묵비권을 행사했다. 월장석 내에서도 한참 깊게 들어가야 하는 곳. 잇세리온이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문을 연 남자의 존재는 예상 밖이었으나, 이곳에 있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붉은수레바퀴 가문 특유의 짙은 검은 머리, 아름다운 녹색 눈, 날카로운 눈매. 칼릭스 에스터였다.

“이델라브힘의 눈부신 은총을, 라헤안시 대신관님. 귀한 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헤안시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었는데, 제 형은 자신을 너무 막 대했다.

“이델라브힘의 눈부신 은총을. 흐흠, 칼릭스 경. 마땅히 와야 하는 자리였네.”

거드름을 피우는 태도에 잇세리온이 기가 찬다는 듯 눈길을 주고는 돌아서 나갔다. 방 안에는 한 명이 더 있었다.
큰뿔산양의 레이몬드로, 접시에 토끼 모양으로 자른 사과를 예쁘게 장식해 두고 있었다. 기사도 칼 쓰는 직업이라
그런지, 엄청 섬세했다. 라헤안시는 내심 와 하고 감탄했다.

“로젤린, 이것 봐. 이건 나, 이건 칼릭스 경, 이건 우리 로젤린이야. 두 번째로 예쁘고 귀엽지. 제일 예쁜 건


우리 부인이야.”

그는 토끼 사과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다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옆에서 붙어 보살피는
태도가 범상치 않았다.
150 화.

‘……8 살짜리 소녀에게도 저러지는 않을 텐데.’

경악하고 있는 라헤안시의 눈길 아래, 칼릭스가 그녀의 침대로 다가갔다.

“세상에! 드넓은 초원을 뛰어다닐 것 같은 씩씩한 모습이 누님을 똑 닮았네요.”

라헤안시가 칼릭스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저 사람이 정말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맞아? 그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후계자? 라헤안시는 이 년 전, 침대 밑에 두었던 상한 케이크를 먹었을 때의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게
뭐지? 자신만 배제된 채 형성된 이 기류는 대체 무어야?

두 남자의 어르고 달래고,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연극에도 당사자인 로젤린은 시무룩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의 말을 잘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로젤린은 라헤안시를 보고 힘없이 고개만
까딱거렸다. 다쳤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다쳐도 보통 다친 게 아닌 것 같았다. 기운이 쏙 빠져 있지 않은가.

“어디이 보자, 보자. 어디를 다쳤는고?”

로젤린은 힘없이 꾸물거리며 뒤돌아 앉았다. 대충 등 어딘가가 다쳤다는 얘기인 듯했다. 자세한 위치는 칼릭스가
가르쳐 줬다. 라헤안시는 그녀의 등에 손을 올리고 성력을 불어 넣었다.

‘어?’

뭔가 이상했다. 스며들어야 하는 성력이 반 이상은 그냥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잘못 느낀 건가 싶어 다시 해


봐도 결과는 같았다. 라헤안시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자 지켜보던 칼릭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대신관님?”

있다면 없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할 것 같았다. 세상을 뜨면 문제를 느낄 수도 없게 되겠지? 그렇게도 말할 것


같았다. 라헤안시는 흠칫 떨었다.

“아, 아니. 그게 성력이 잘…… 안, 안 먹혀서?”

“마인이지 않습니까. 원래 그렇습니다.”

“쓰으…… 그냥 좀 이상하구나 싶었…….”


“마인 치료해 보셨습니까?”

“그건…….”

“마인을 치료하신 적 없는 분이, 지금의 현상에 대해 이상하다, 평범하지 않다 경솔하게 판단을 내리시는 것은
환자의 마음을 몹시 불안하게 만드는 일인 듯합니다. 환자의 건강을 위해 이 자리에 계신 것이 아닙니까. 높은
지위와 그에 따른 능력을 가지신 분이니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하셔야지요.”

사나운 질책에 라헤안시는 위축되었다. 심지어 키는 훌쩍 크고, 인상 더럽기로 유명한 가문의 후계자가 무섭게
표정을 굳히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이몬드도 불쑥 끼어들었다.

“잘 안 먹히면 그만큼 더 열심히 쓰셔야죠 대신관님. 뭐 하십니까?”

“어?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좀 그냥 이상해서 잠시…….”

“보십시오. 얼굴이 반쪽이 됐습니다! 애가 이렇게 다 아파서 죽어 가는데, 대신관님은 단순한 자신의 호기심에
환자를 외면하시는 겁니까! 그러고도 라헤안시 대신관님께서 진정 어린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이델라브힘의 종이
맞습니까!”

마치 공주님을 둘러싼, 맹견과 충견 같았다. 라헤안시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성력을 열심히 부었다. 내가, 여길,
다시 오면, 성을 갈겠다! 다짐했으나 생각해 보니 성은 이미 갈아 치운 이후였다.

성력으로 치료하는 중에도 두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춥냐, 덥냐, 아프냐. 안 아프냐. 이거 좀 먹어 봐라. 왜
입맛이 없느냐, 다른 음식을 가져오면 먹겠느냐. 아주 난리였다. 라헤안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봤다. 대체 제 형이 뭘 어떻게 했기에 이 사달이 났는지 감도 안 잡혔다.

성력을 한 방울까지 짜내어 쓰고 베르움에게 반쯤 업혀 돌아가는 길. 라헤안시는 리카르디스에게 다시 소환당했다.


죽을래, 죽을 거야! 날 좀 내버려 둬! 이 미친 집구석! 발악해도 힘이 없어서 베르움에게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차도는.”

리카르디스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팔걸이에 몸을 지탱한 채 이마를 짚고 있었다. 아까보다 버럭 수치는
줄어들었으나, 폭풍 전 고요처럼 느껴질 뿐이라 무서운 건 매한가지였다.

“나쁘지는 않던데? 형이 손을 좀 쓴 것 같더라. 성력을 다 터니까 거의 아물었어. 마인이라 회복력이 좋은 건가?


그렇다 해도 아직까지 큰 움직임은 피해야겠지만.”

“기분은 괜찮아 보이더냐.”

“……어, 좀…… 안 좋던데.”

리카르디스가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치우고 그와 눈을 맞췄다.

“어디가 어떻게.”

“어, 그게. 약간 시무룩하고, 옆에서 칼릭스 경이랑 레이몬드 경이 보기 역한 애교를 부려도 반응이 없고,
입맛도 없다고 그러고……?”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너, 라헤안시. 대신관이라는 작자가, 아픈 사람이 있는데 성력만 쓰고 나오면 그만이냐. 사람이 사람에게 있어,
행할 수 있는 수단이 고작 성력뿐이냐는 말이야. 입은 뒀다 어디에 쓰려고 그러나, 어? 옆에서 좀 달래고,
뭐라도 먹여야 할 것 아니야! 사람이 그렇게 말라비틀어져서 반쪽인데!”

반쪽 운운하는 거 혹시 월장석 성에서 유행하는 말일까.

‘이놈의 성…….’

라헤안시는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맹견, 충견 다음에는 광견이라니. 최악이었다. 라헤안시는
이십 분을 더 혼나고 나서야 월장석 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서럽게 눈물을
찔끔거렸다.

“당분간은 월장석 성 쪽으로는 침도 뱉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이 지나도, 월장석 성 쪽이 아니더라도 침을 뱉으시면 안 됩니다. 대신관으로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셔야죠.”

환장할 것 같아 라헤안시는 몸서리쳤다. 석양이 지고 있는 풍경을 구경하던 베르움이 마차 의자에 늘어져 있는


라헤안시에게 물었다.

“로젤린 경의 치료는, 잘 되었습니까?”

방 밖에서 대기하기는 했으나, 잇세리온과 라헤안시의 대화를 들은 터라 베르움도 치료 대상이 로젤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엄, 이 몸이 누구더냐.”

“마인의 치료는 특별한 게 없습니까? 저는 마인에게 성력을 써 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뭐, 보통의 신관은 마인을 치료할 일이 없긴 하지.”

라헤안시는 뭐가 웃긴지 혼자 낄낄거리다가 팔베개를 하고 그를 쳐다봤다.

“나는 예전에도 몇 명 치료해 봤느니라. 마인도 이델라브힘의 빛 아래 살아가는 생명들 아니더냐. 다 똑같다.”

“아, 그렇습니까?”

베르움은 고개를 끄덕이다 불신의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이 인간이 성 밖으로 나가는 꼴을 못 봤는데 언제
마인을 치료해 봤대? 그 눈빛을 읽은 라헤안시가 창밖으로 제 모자를 던졌다. 베르움이 잔뜩 성내며 마차를
멈추고 주우러 갔다.

* * *

리카르디스는 끈질긴 눈빛에 결국 항복하고,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 누이와 똑 닮은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남의 집무실에 쳐들어와서, 삼십 분째 나를 바라보는 행위를 뭐라고 해석하면 좋겠나, 칼릭스 경.”

“글쎄요. 반했나 보지요.”

“로젤린 경의 일로 시위하는 것은, 딱 이십 분까지만 봐주겠다. 십 분 초과한 것은, 내일 치 시위 분량에서 깎을


것이다. 이제 나가. 그대의 열렬한 눈빛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으니!”

“아, 제 누이와 무슨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무슨 일입니까?”

연기가 제법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약간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약간의 문제라니요, 다 낫고도 당분간 호위 임무에서 제외되어야 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가 아닙니까!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저도 이제 전하의 충성스러운 기사인데 이렇게 숨기시려니 섭섭하기
그지없습니다.”

“경,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나?”

“원래 사람들은 악에 받치면 뭐든 해내는 법이더군요.”

리카르디스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다른 자라고 하면 그냥 제 성질 다 내보이며 쫓아내기라도 하겠건만, 로젤린과


똑 닮은, 그녀가 아끼는 동생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한참 후, 홍차의
김이 한풀 식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삐졌다.”

칼릭스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 누이가요?”

“내가.”

잇세리온과 칼릭스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내가 삐졌어!”

제국의 2 황자 리카르디스. 아름답고, 고상하고, 영특하고…… 좋은 수식어란 수식어를 다 갖다 붙여도 안타깝지


않다는 평을 받는 인물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조금 값싸 보이는 감이 있는 단어였다.

“화가 많이 나셨단 말씀이십니까?”

“아니, 화난 것과 삐진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나는 지금 매우 삐진 상태야! 무척이나 토라졌지. 앞에서


사탕을 줬다 뺐다를 다섯 번 반복하고 결국 사탕을 받지 못한 여덟 살 어린애보다 심기가 불편해, 알겠나?
그러니 사람 속 좀 그만 긁지 경. 그대 이전에도 레이몬드 경이 호위하는 내내 어미 잃은 새끼의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다 갔으니!”

칼릭스는 기가 막혀서 잠시 말을 잃어버렸다. 화가 났다고 하면, 아직까지 그러느냐며 그를 쪼잔한 남자로라도


만들 수 있겠건만, 본인이 나서서 삐졌다고 해 버리니 공격할 수단이 없어졌다. 애초에 삐졌다는 말 안에
쪼잔함이 가득 들어 있는 느낌이 아닌가. 본인도 잘 알고 있으면서 사용하는 거 같았다.
“예전부터 제 누이와 디에즈 전하가 오죽 막역한 사이였습니까.”

“그렇게까지 막역한 사이는 아니다.”

“……예, 뭐…… 아무튼 그 기억도 기억이거니와, 누님은 잘 해 주고 다정한 사람이면 한없이 약해지는
분이시니까요. 더불어 눈치는 못 챘어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같은 종족으로서의 유대감 따위를 가졌겠지요. 누님이
방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디에즈 전하의 탈을 쓴 그것이 누이의 약점을 속속들이 파악해서
파고들었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전하.”

“당연한 말을 하고 그러나. 찌른 놈이 잘못했지 찔린 사람이 잘못했겠나? 말해 입 아프다. 로젤린 경은 그저


피해자일 뿐이란 걸 알아. 내 말이 절대적인 신의 뜻도 아니고, 좀 안 들으면 어때서. 무시해도 상관없다.
세상에 완벽이란 없다. 그녀에게도 허점은 있을 수밖에 없어. 그녀의 흔들림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저…….”

찌른 놈은 놈이고 찔린 사람은 사람이었다.

“속상한 것이다. 그녀가 언제나 다치는 일에. 나는 그릇이 소스 그릇만도 못한 인간이라, 그 속상함이 이렇게
쪼잔하고 치졸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뿐이다. 다친 사람 붙잡고 울면서 화내는 인간이 정상이겠나? 미친놈이
따로 없지.”

정말 굉장한 자기 객관화였다. 칼릭스는 자신이 공격할 것도 없이, 자폭하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바보처럼


바라보았다.

151 화.

“……울면서 화내셨군요.”

“……그건 몰랐나 보군. 어쨌거나. 안 그래도 작은 소스 그릇이 넘쳐서 찰랑거리는데 흔들지 마라. 더 넘치는 건
그렇다 쳐도 열 받는다.”

칼릭스는 제 소매 깃을 만지며 피식 웃었다.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카르디스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들어오라 했다. 얼굴을 내민 것은 클로에였다. 칼릭스가 일어서서 인사했다.

“클로에 양. 아, 실례했습니다. 부인.”


그녀가 생긋 웃었다.

“아직 저도 익숙하지는 않네요. 오랜만이에요, 칼릭스 경.”

“무슨 일인가.”

리카르디스는 칼릭스와의 대화로 여전히 심통이 나 있어, 툴툴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클로에가 애처로운 표정을
하며 두 손 모아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 세상에. 로젤린 경에게 화내셨다면서요. 다친 사람에게 어쩜 너무 하시지!”

“이 지긋지긋한……! 뭐, 비밀이란 게 없는 공간인가 여기는? 다들 황실에 들어오면 눈도 귀도 입도 없는 셈


치라던 공공연한 얘기는 월장석 성 내에서만은 통용되지 않는 건가?”

“부부는 일심동체 아니겠어요, 전하.”

“레이몬드 경을 불러와! 감봉할 테니!”

“남편 하나 먹여 살릴 정도로는 벌어서 괜찮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세요, 전하.”

클로에가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정말로 피곤해 보였다. 단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방금


클로에가 내려 둔 초콜릿 쿠키를 마구 집어 먹었다.

“일단 본론으로 넘어가서, 디에즈 전하와 하카브 왕자에게서는 수상한 움직임을 읽을 수 없었어요. 그저 파티에
얼굴을 비추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는 하지만 했던 말 하고 또 하는 흔히 파티장에서 쓰이는 의례적인 문장의
반복일 뿐이었습니다. 두 사람 간의 접촉도 크게 두드러지지 않아 뭐라 수상하다 꼬집을 수는 없었지만…….”

클로에가 제 턱에 검지를 대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발타 내부에서는 열심히 대규모 전쟁 준비 중이니, 그게 도리어 수상해지는 것이죠. 일라베니아 황실 쪽에서도
발타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대비를 하고 있답니다.”

리카르디스는 다리를 꼰 채 까닥였다. 대규모 전쟁. 그걸 준비하면서 적국에 와 있는 머저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여기 있다. 일라베니아의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온 발타의 왕자 하카브. 그래서 이상했다. 일라베니아의
중심부를 쳐서 제국을 와해시키겠다는 계획이라면 소수 정예로 이끌어야 하며, 수상한 낌새를 주지 않고
방심시켜야 한다. 그들 나라에서 열심히 물자와 사람을 모아 가며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미를 마구
표출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전쟁을 위한 전쟁일 리 없으니, 일라베니아를


먹겠다는 목적은 유효한 것 같은데, 수단이 영 이상해서 그마저도 수상쩍었다. 내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니,
너희들도 열심히 전쟁을 준비하라고 판을 깔아주는 느낌이었다.

“엘피디오는?”

“사절단에서 무사 귀환하신 전하께 치이고, 폐하께 치이고, 하카브에게 치여서 상심이 커 보이시더군요. 그래서
요즘은…….”

클로에의 시선이 칼릭스로 향했다. 리카르디스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칼릭스는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딤라 섭정관의 친애를 한 몸에 받고 계시는 칼릭스 경에게 구애하시는 중이에요.”

“그쪽은 사람이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서 다행이군. 그래서 칼릭스 경. 내 형님이 뭐라 구애하던가?”

“요즘 따라 잘생겨졌답니다.”

실제로 엘피디오가 칼릭스에게 한 말이었다.

“이런, 경에게 반했나 본데.”

아까의 복수가 돌아왔다. 칼릭스는 분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리카르디스가 씩 웃었다.

“그래, 뭐…… 상황은 대충 알겠다. 하카브는 하카브대로 여전히 수상하고, 발타는 발타대로 전쟁 준비 중이라는
것. 바뀐 게 있다면…….”

리카르디스가 흘끗 클로에를 보며 말을 흐렸다. 칼릭스는 그 뒤 내용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의 수족인


클로에에게 마저 말할 수 없는 정보는 명확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한 얘기였다.

설원의 월계수 5 황자, 디에즈 레예 일라베니아.

언제부터 지금의 ‘디에즈’였는지는 명확했다. 백옥 성이 불타올라, 혼자만 살아남았던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칼릭스로부터 정보를 들어 알고 있었다. 마카롱은 사체의 기억을 읽은 적이 없다고 했다. 오직


로젤린만이, 과거 ‘로젤린’의 기억을 기반해 자라나고 있었다. 두 존재 간의 차이는 명확했다. 살아 있는 것을
먹었느냐 아니냐.

그렇다면 삼 년간의 요양 끝에 돌아와 완벽하게 예전의 미소를 되찾은 그는 더 이상 검은 덩어리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리라. 그러니 더욱 알 수 없었다. 착하고, 상냥한 디에즈. 그 ‘디에즈’를 기반으로 해서 자라난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검은달과 손잡고 자신을 죽이려 한 배경에는 ‘디에즈’가 있는지, 디에즈가 있는 것인지. 확실한 것은, 몸의
주인이 머무르던 백옥 성을 태워 그 친지를 다 죽여 버리는 잔혹성이, 여전히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친우의
심장에 칼을 꽂는, 그 냉정함이.

리카르디스는 지금의 디에즈가 엘피디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싹 지웠다. 도리어 엘피디오가 그의
손에서 놀아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기세등등한 꼬락서니를 보노라면, 본인이 디에즈의 뜻대로 흘러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으나.

리카르디스는 골치 아픈 듯 고개를 저었다.

* * *

하얀밤 기사단의 상급 기사 카일로는 의자에 앉아 잠시 졸다가 불온한 기운에 눈을 떴다. 창문에 한쪽 발을 올린


로젤린과 눈이 마주쳤다. 카일로가 얼씨구,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로젤린이 슬그머니 발을 내렸다.
“전하의 명령이니, 엉덩이 도로 침대에 붙이길 권하는 바입니다, 로젤린 경. 또다시 명령 불복종으로 근신
기간을 늘리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카일로는 로젤린이 탈출하려고 한 창문의 틀에 팔짱을 낀 채 기대었다. 로젤린은 두 발짝 물러서며 구시렁거렸다.


빛나는 눈을 보아하니, 완벽하게 포기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카일로는 기가 찬다는 듯 그녀를 흘겨보았다.

명령 불복종으로 한 달간 호위 임무에서 제외된 사람이, 또다시 전하의 명령에 불복해? 가만히 방 안에만
있으라는 얘기는 기억을 못하는 건지, 안 하고 싶은 건지.

로젤린이 다친 날로부터 사 일이 흘렀다. 겉보기에 멀쩡해 보일지언정, 상처가 속까지 완벽하게 아물었으리란
보장은 할 수 없어 큰 움직임은 지양해야 했다. 더군다나 아직까지 디에즈의 일도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라 근신
겸, 보호 겸, 감금은 나름 합당한 구석이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삐짐이 치졸하게 발현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잠깐만 나갔다 오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걸 하지 말라는 거였는데. 그리고 멀쩡한 문 두고 왜 창문으로 나가려는 겁니까. 여기가 몇


층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경?”

“문 앞에는 두 명이 경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 그러니까 하급 기사 두 명보다는 상급 기사 한 명이 상대하기가 더 낫다. 이 말이렷다. 카일로는 왠지 좀


울컥해 버렸다.

“전하께서 왜 저를 이번 경비 임무에 쓰시는 줄 아십니까?”

“적당히 고르신 게 아닐까요. 한가해 보였다던가.”

“생각보다 막말을 잘하시는 군요, 로젤린 경. 아닙니다. 제 입이 5 쿠퍼짜리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전하께서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레이몬드 경은 로젤린 경이 눈물 한번 글썽이면 입을 다물 사람이지만, 저는 제 숨소리가
잔잔하게 가라앉아 완벽하게 수면 상태로 빠진 것같이 되었을 때,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창문으로 다가가
밖으로 나가려는 경의 표정이 얼마나 비장했는지, 미주알고주알, 일장연설하며 고자질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입니다. 그렇게 제가 다 털어놓았을 때 전하께서 어찌 반응하시겠습니까. 요즘 하루에도 스무 번씩 소설에
나오는 귀한 집 망나니처럼 패악을 부리시는, 전하께옵서!”

로젤린은 찔끔했다. 리카르디스가 마지막으로 돌아서던 밤을 잊을 수 없었다. 화내며 울던 모습이 눈을 뜨든,


감든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만약 카일로가 다 일러바친다면 그 모습을 다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 밥을 잘 드시는지, 잠은 잘 주무시는지, 나쁜 놈은 배회하지 않는지.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다. 몰래 한 번만 보고 오려고 했는데, 푸른등불의 카일로…… 이 남자…… 거슬린다…….

“……그, 눈빛? 뭡니까. 약간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는데요.”

로젤린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읽은 카일로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곧 태세를 바꿔 더욱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그녀를 혼냈다.

“힘으로 누르시겠습니까? 때리고 제압하시겠습니까? 저는 한낱 인간. 로젤린 경이 한 대 패면 리코타 치즈처럼


흩어져 버릴 물렁물렁한 인간이니 어디 맘껏 해 보시죠! 산산조각 나서 흩어질 테지만, 마치 짚단 인형처럼!”

두 팔을 쫙 벌리며 제 나약함을 피력하는 기세가 대단해서 로젤린도 한풀 꺾였다. 정말로 산산조각 나서


흩어질지도 몰라. 진실에 기반한 협박이다 보니 잘 먹혔다.

카일로가 흥 콧방귀를 끼고는 침대로 돌아가라고 턱짓을 까딱했다. 여유로운 그의 모습에 로젤린은 울컥했다.
그녀는 어지간하면 이래도 저래도 좋은 사람이었으나, 사람을 놀리고 약 올리는 카일로의 행태에는 배겨 낼 수
없이 성이 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성나 있는 로젤린의 눈앞에서 카일로가 병문안 온 클로에가 선물하고 간 초코
쿠키를 날름 집어 먹었다.

“이, 이익!”

로젤린은 입을 쩍 벌리고 경악스러워하다가 결국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팼다. 다행히 힘 조절을 한 탓에 카일로는


리코타 치즈 및 짚단 인형이 되지 않았고, 아파하면서도 낄낄 웃을 뿐이었다. 여동생이 두 명이라더니, 어떻게
살아 있지. 이걸 어떻게 안 죽이고 살려 뒀지! 로젤린은 두 여동생의 마음을 절절히 이해했다.

152 화.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카일로가 제 팔뚝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들어오시죠.”

“내 방입니다! 들어오세요.”

카일로를 퍽 밀치고 로젤린이 다시 잽싸게 대답했다. 카일로가 얄밉게 웃었다. 살의가 솟구쳤다.

“교대 시간입니다.”

들어온 것은 상급 기사, 바다협곡의 네스터였다.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꽃다발 하나, 과일 바구니 하나, 케이크와
샌드위치 바구니 하나를 든 채였다. 로젤린은 반색했고, 카일로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네스터 경. 경비 임무에서 제외되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 이상할 정도로 극구 반대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아, 파르딕트 경이 담이 왔다고 그래서요. 제가 3 번 대리로!”

네스터는 로젤린을 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로젤린도 환하게 웃으며 그의 팔에 걸린 음식 바구니부터 받아 내었다.

‘……레이몬드가 문제가 아니겠는데?’


저쪽은 활짝 열린 문이잖아. 열리다 못해 지나가면 꽃가루 뿌리면서 축하해 주는 문이라고. 이렇게 못 미더울
수가. 카일로는 찝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경비가 뭔지는 알고 있습니까, 경?”

“하하, 농담도.”

농담 아니었다. 카일로는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밖으로 나가는 것도 전부 막으라 신신당부하며, 음식


바구니에서 케이크 하나를 꺼내 들고 도망가듯 퇴근했다. 로젤린이 그 뒤를 광분해서 쫓아갔다. 돌아온 로젤린의
입가와 손에 크림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승리자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단장님이나 전하께 카일로 경 좀 해고해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진짜 이상한 사람입니다!”

카일로야 그녀의 반응이 재밌어서 놀리는 것이었으나, 네스터가 보기에는 정말 정다울 뿐이었다. 그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사이가…… 좋으시군요…….”

“안 좋습니다!”

진노한 그녀를 달랜 것은 네스터가 들고 온 음식들이었다. 그녀는 먹으면서도 가끔 씩씩거렸지만 곧 평안을


되찾았다. 푸딩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으며, 쌉싸름한 캐러멜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분노도 사르르 녹았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좋아졌…… 다 나았습니다! 이제 나가도 될 것 같습니다!”

로젤린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다 나았다고 하면 이 감금을 멈추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었으나, 네스터는 눈을
마주치자 얼굴을 붉게 물들일 뿐이었다. 그의 수줍음에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리라 예상한 로젤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이 남자, 눈치 없어. 평가가 더 떨어졌다.

“안 피곤하십니까, 네스터 경.”

“예,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 짬짬이 자 두어서, 아침까지도 쌩쌩하게 버틸 수 있습니다! 잠이 오지


않으신다면 제가 옆에 있으니 걱정 마시죠!”

눈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로젤린은 분노했다. 때려치워, 다 때려쳐!

“나갈 겁니다.”

“예?”

“나갈 거라고.”

네스터가 당황해서 창문 앞을 가로막았다. 로젤린이 그를 번쩍 들어 침대에 던졌다. 네스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아무에게도 안 들키면 문제없지 않습니까. 남자들이 대범하지를 못해서. 짜증나,
진짜.”

“엇, 로젤린 경!”


로젤린은 투덜거리면서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그 뒤로 네스터의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로젤린은 벽을 타고, 풀쩍 뛰어내리며 높은 곳에서부터 빠르게 내려왔다. 마침 퇴근하던, 머리가 산발이
된 카일로가 벽을 타고 사삭 내려오는 로젤린을 목격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던 길을 마저 떠났다.

* * *

빛이 부서지는 샹들리에, 아름다운 대리석 위에서 사람들이 춤을 췄다. 음악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끈적하게 흐르며 파티의 흥을 돋우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밝은 파티 홀과 대조되는 어둠이 내려앉은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 있었다. 그가 샴페인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연한 노란빛의 샴페인 속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뽀글뽀글, 터지는 기포 너머로 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물에 빠진 듯 일렁이던 인영이 점점 커졌다.
음악을 뚫고 뚜벅뚜벅, 걷는 소리가 날 즈음, 리카르디스는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비어 버린 잔 너머로 디에즈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빛을 등지고, 그가 막 테라스에 발을


들였다.

“형님.”

“디에즈.”

“같은 황실 내에 있으면서도 너무 오래 못 뵌 것 같아서요.”

오 일 전 있었던 사냥 대회에서 잠깐 인사한 이후로 처음이니, ‘너무 오래’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황실


사람들끼리야 한두 달 못 보는 것쯤이야 일상이었다. 갖은 행사들로 인해 하루 걸러 하루 보고 있는 요즘이
도리어 이상했다.

리카르디스는 사냥 대회 후 사 일 동안 월장석 성내에서 벗어나지 않다가 오늘에야 파티에 참석했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찾아오는 디에즈의 행동에서, 그 짧은 기간을 보다 길게 느꼈다는 말로부터 디에즈가 자신을 오래
기다렸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 오늘 다쳤던 악단의 수석 연주자가 돌아왔습니다. 알고 계셨나요, 형님? 그래서 그런지 평소보다…….”

디에즈가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제가 듣기에는 다 그게 그거라서요. 다 똑같이 좋은데, 강철발굽 백작은 수석 연주자가


없는 음악을 들으면 영혼이 다치는 것 같다고 그러더군요. 맞장구를 치기는 했는데 이거야 원. 어릴 때부터 음악
쪽으로는 영 안 되더라니.”

리카르디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관찰했다. 온갖 분노를 표출하고 싶은 반면, 평소와 다름없이 상냥하게 말을
걸어 오는 그 저의를 알 수 없어 몸이 바짝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제 정체를 다 들켰음을 알 텐데도
바뀐 구석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디에즈는 그저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반 박자 늦게 흥얼, 흥얼. 되새기듯 콧노래를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디에즈가 지나가는 시종의 트레이에서 샴페인 두 잔을 들어서는 한 잔을 리카르디스에게 건넸다. 리카르디스가
디에즈의 손에서 잔을 건네받아 꼴깍 마셨다.

“그러고 보니, 로젤린 경은요? 요즘 도통 보이지 않네요. 사냥 대회 이후로 보지 못했는데…… 어디 다치기라도


했나요?”

심장이었다. 진정 살의를 가져야만 내지를 수 있는 일격이었다. 그 행위를 직접 저지른 사람이 내뱉는 말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평온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어떤 죄책감도, 그로 인해 제 비밀이 알려질까
전전긍긍하는 조바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 초조함을 숨길 수 있나? 어디 하나 모난 듯 툭 튀어나와야 정상이건만, 마치 그 모든 일이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지금에서야 그의 미소는 뒤틀려 기괴해 보일 뿐이었다.

“타국의 인사가 많이 돌아다니는 기간이니.”

로젤린을 향한 눈과 귀가 많은 기간. 일부러 월장석 성 내부에만 두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녀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라면 곧이곧대로 들을 얘기였으나, 디에즈는 그 말이 거짓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렇군요, 사냥 대회 때 잠깐 마주쳤는데, 아직 못 다한 얘기가 많아서요. 조만간 한번 만나러 가려고요.”

달각, 샴페인을 다 비워 낸 디에즈가 잔을 테라스 난간 위에 올려 두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싱긋 웃었다.

“안부 전해 주세요, 형님.”

디에즈가 등을 돌려 파티홀로 걸어 나갔다. 걸음을 멈춘 그가 다른 방향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등 돌린 얼굴을


볼 수 있을 리 없으나, 섬뜩한 예기가 느껴졌다. 곧 디에즈의 멈췄던 발이 움직였다. 춤추는 인파 속 그가
녹아들었다.

테라스 안쪽의 양옆, 바깥쪽, 테라스 아래에 포진해 있던 기사들도 손잡이를 놓고 경계를 풀었다.

리카르디스는 잠시 테라스를 벗어나 밝은 공간 끄트머리에 발을 들였다. 디에즈가 잠시 멈춰 바라보았던 방향을


보니, 엘피디오와 대화하며 웃고 있는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그의 목적이 단순히 황제의 자리에 머문다 생각했다. 그를 단순한 ‘디에즈’라고 여겼을 때.

하지만 하루아침에 그는 디에즈를 벗어나 가늠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목적이 무엇일까. 검은달과 손잡고,
자신을 죽이려 하며, 황실에서 숨죽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생각을 알지 못하니 목적 또한 불분명해졌다. 리카르디스는 파티 홀을 벗어났다.

* * *

“좋아, 리카르디스. 귀찮지만 딱 한 번 얘기해 줄 테니 잘 들어. 하나. 나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 그리고


둘. 지금 몇 시인지 알고 있나 모르겠네. 이런 시간에 숙녀를 찾는 신사가 대체 어디 있어. 마지막으로 세 번째.
최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손님이 너무 자주 와서 피곤해.”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가 더러운 담요 위에 누운 채 얘기했다. 리카르디스는 감탄했다. 누가 왔다는 소리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챘을까. 매번 있는 일이지만 볼 때마다 신기했다.

“그래서, 그 구구절절하고 긴 말을 요약하면?”

“꺼지라는 거지.”

지하 감옥 깊은 곳,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철창. 과거 검은달의 간부였던 케틀린은 리카르디스를


잡상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을 휘휘 저어 내쫓으려 했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 몇 개가 없었다. 붕대 위로
핏자국이 보이는 걸 보니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찾아온 그 ‘손님’ 중 한 명의 짓이리라.

“손가락은 어디 갖다 팔았기에 그 모양이지?”

“말하는 본새 하고는. 내 손가락은 네 형이 훔쳐 갔어. 아주 날강도라니까.”

“수준 없는 형이라 미안하게 됐군.”

케틀린은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리카르디스는 철창에 등을 기댔다. 그녀를 찾아온 목적은 뚜렷하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로서는 상상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그 미지의 힘. 그 힘이 마지막 톱니바퀴가 되어 거대한 흐름을
이끌고 있었다.

153 화.

무언가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확실하나, 어떤 방향으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지는 감을 잡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발걸음이 이곳으로 향했다. 누가 뭐라 해도 검은달에서 간부씩이나 되던 이가 아니던가.

디에즈와 그녀의 존재는 마력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완벽하게 다른 존재였으나, 그들의 행보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숨을 죽이고 일라베니아에 칼을 겨눈다. 오랜 시간을, 인내한다.

“케틀린.”

“부르지 마, 정들어.”

“너는…… 일라베니아의 마인으로서, 일라베니아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지?”

케틀린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어릴 때는 똑똑했는데…….”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투라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좋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만, 그대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케틀린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욕을 들으면 기뻐하는 그런 부류였나……. 흠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인간미 있어 보이긴 하는데, 약간의
부작용이 따르네. 미안한데 좀 멀리 떨어져.”

이 여자가 정말…….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대답이나 해, 값은 치르고 갈 테니.”

케틀린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으나 나름 흥미가 동했다. 케틀린이


이곳에 갇힌 수년의 시간 동안 그녀의 심정이나 왜 사건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은달의 간부에게 누가 ‘암살을 시도하려 했던 이유가 뭔가요? 어떤 심정에 저지른 것이죠?’
따위를 누가 묻겠는가. 동료는 또 누가 있나, 다른 2 차 계획이 있나, 검은달의 권력 구조는? 우두머리의 이름은?
규모는? 필요한 정보만 얻기 원했을 뿐이었다.

검은달과 일라베니아의 이러한 대치 구조는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달이


일라베니아를 싫어하는 건 당연하다. 일라베니아도 그러하다. 그 당연한 일에 굳이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덕에 리카르디스가 처음이었다. 의외로 순순하게 대답해 준 것은, 그녀의 변덕에 가까웠다.

“일라베니아인이, 타국의 그 폐쇄적인 집단의 간부가 되었다는 의미를, 너는 알까.”

리카르디스는 케틀린의 질문이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다 느껴 입을 다문 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하 감옥에 갇혀 본 적은?”

그녀의 하얗게 비어 버린 눈이 좁은 감옥을 훑었다.

“하루만 있어도 끔찍한 공간에 수년을 갇혀 있으면서, 그러면서도 제 일신의 안녕 따위 상관없이, 제 몸이 닿을


미래는 산산조각 나는 것뿐이리라 예감하면서도 결코 누그러지지 않는, 악의의 크기는 어느 정도라 생각해?”

“너의 분노는 황실만을 향하는 것인가?”

“리카르디스. 아니란 걸 알고 있구나.”

알고 있었다. 검은달은 황실뿐 아니라, 국경에 근접한 영지나 마을을 몰살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죄 없는 이들 또한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무슨 죄가 있었을까? 이델라브힘의 빛을 가리고 불길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기라도 했나. 개소리하지 말고.
아니란 걸 알잖아. 나는 똑같이 되돌려 주려 할 뿐이야. 왜, 그러면 안 되는 건가? 내가 용서해야 할 것 같아?
나도 똑같은 죄를 저질렀으니까? 아, 이델라브힘께서는 어찌나 자애로우신지. 뭐든 용서하라 하시네. 네가
얼마나 괴로웠건, 힘들었건, 피부가 화염에 지져지는 고통과, 숨을 말라붙게 하는 까만 연기 속에 죽어 가더라도,
용서해. 뭘 하려 해 봤자 내가 그 나쁜 사람과 같이 나쁘게 될 뿐이며, 용서야말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찾아
주신다고. 용서해. 용서하라 그래.”

웃음을 머금고 얘기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내 빛 아래의 모든 이들이 내 자식이다. 이델라브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 그렇게도 적혀 있었지. 그래. 나


또한 이델라브힘의 자식이다. 그렇다면 용서해. 내 모든 것을. 너희들이 얼마나 괴롭건, 힘들건! 산채로 피부가
녹아내리는 고통을 느끼더라도! 그리 불타 죽은 시체마저 희롱당하는 것을 네 아이들이 본다 해도! 용서해! 나를
용서해! 너희들이 그렇게 말했으니!”

그녀는 격분해 철창에 쾅 달라붙었다. 손을 뻗어 리카르디스를 잡으려 했지만, 그는 한 발짝 멀어진 상태였다.


멀리 떨어져 있던 병사들이 달려왔다. 창대 끝으로 밀려난 여자가 넘어졌다.

리카르디스가 만류하자 병사들이 주춤주춤 물러서며 그의 눈치를 봤다. 그녀는 바닥을 짚고서 콜록거렸다.
케틀린의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자는 중얼거렸다. 안광이 기이하게 밝았다.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죽인다. 갓난아이를 죽이고, 노인도 죽이겠다. 칼로 찔러 죽이고 찢어서 죽일 것이다.
굶겨서 죽이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뜯어내어 고통에 발버둥 치게 하다 죽이고, 산 채로 땅에 묻고, 물에 빠트리고,
불에 태우겠다. 너희들이 오랜 세월 망각하던 고통을, 뼈에 하나하나 새겨지도록.”

여자가 기어와 철창을 잡고 힘겹게 일어섰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도록.”

그녀가 덜덜 떨며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철창에 손을 뻗었다. 하얀 빛이 그녀의 다친 손을 떠돌았다. 따듯한


기운이 느껴지자 케틀린이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더러운 것에 닿은 듯 연신 제 손을 옷자락에 닦았다.
아프지도 않은지 거친 손놀림이었다.

“질문의 값을 치른다 했다. 두면 썩어 들어 팔까지 잘라 내야 할 것이다.”

케틀린이 깔깔, 감옥이 떠나가라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병사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들은, 네놈들의 주인에게 일러라. 황실에 병신 천치 머저리가 있다고! 이거 하나 못 죽이는 걸 보니 다들


똑같은 수준이겠지마는!”

그녀는 키득대며 웃다가 리카르디스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찌 되었건. 고맙게 되었다 리카르디스. 감옥 생활은 지루해서, 이따금 자극제가 필요하기 마련이거든.
그걸로 값을 치렀다 해 주마.”

리카르디스는 별다르게 말을 잇지 못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정말로, 이들에 대해 잘 몰랐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검은달과 일라베니아의 싸움은 그저 사상과 사상의 차이라 여겼다. 그러나 별개의 문제로 마인에게 이뤄진 모든
일들은 일라베니아의 업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검은달과 마인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있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일라베니아가 만들었다. 누구는 업보라 부르고 누구는 운명이라 부를 것이었다. 덮쳐 오는
악의는 사납다. 과거 일라베니아가 그들에게 그랬듯이.

리카르디스는 다시 병사들을 저 멀리 물렸다. 그리고 얘기했다.


“그대는 그대의 일을 해라. 원한을 만든 자를 모두 죽여라. 칼로 찌르고, 산 채로 불에 태워라.”

“새로워. 오늘따라 유독 그렇단 말이지. 일라베니아의 황자가 할 만한 말은 아니지만…… 음, 어쨌거나 마음에


드는데.”

“마음에 든다니, 그거 기쁜 얘기로군. 하지만 나는 그 원한이 닿지 않아야 할, 모든 것을 지키겠다. 그것이


일라베니아의 황자가 할 일이므로.”

리카르디스는 이 감옥에서는 보일 리 없는 밤하늘을 떠올렸다. 둥그런 달. 세상을 비추는, 또 하나의 빛이었다.

“신이 도와주시겠지.”

그가 몸을 돌려 떠나자 뒤에서 케틀린이 철창을 쿵쿵 쳤다.

“하여간 지긋지긋한 신성 제국 놈들! 허구한 날 신 타령이야!”

리카르디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크게 말했다.

“이델라브힘이라 말 안 했다! 내 신이던 네 신이던, 누구에게든 도와 달라 빌어 봐야지!”

“얼굴값 하네. 어디서 양다리를 걸쳐!”

“상관없어! 나는 무신론자거든!”

케틀린의 귓가로 그가 계단을 따라 뚜벅뚜벅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휭하니 가 버렸다. 남은 케틀린은 어안이
벙벙한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예쁜이가 오늘따라 아주 새로웠다.

리카르디스가 감옥에서 나오자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르원이 잽싸게 뒤를 따랐다.

“뭐라 합니까. 또 예쁘다 했습니까?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르원. 내가 그대에게 칼을 주겠다. 상대는 어린아이다. 한 달이라면 몇 명이나 죽일 수 있겠나.”

“……글쎄요. 일 분에 한 명이면 한 시간에 육십 명 아닙니까. 일정이 너무 가혹하니, 반절로 줄여서 삼십


명이라고 치면 일주일에 대략 삼천 명 정도 죽일 수 있을까요? 쉬엄쉬엄해야 하니 한 달에 대략…… 만 명? 제법
죽일 수 있겠군요.”

리카르디스가 걸음을 뚝 멈춰 뒤돌아 그와 눈을 맞췄다.

“한 달에 만 명이라…… 그렇다면 전장에서 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시간은?”

르원이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하루면 충분하겠군요.”

“그렇겠지.”

리카르디스는 다시 월장석 성을 향해 걸었다.

그렇다. 디에즈는 인간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의 악의가 황실뿐 아닌,
이델라브힘의 빛 아래에 서 있는 모든 것을 향하고 있다면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디에즈는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이 가장 사람들을 많이 죽였나. 역사가 증명했다. 전염병의 창궐과 전쟁이다.
그러나 신성력이 있는 한, 전염병은 크게 힘을 쓰지 못하고 수그러들 터. 그리하여 남은 것이 전쟁이란 말이었다.
규모가 크면 클수록 죽는 사상자는 늘어난다.

리카르디스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게 하카브가 일라베니아 내에 있을 때


일어날 리는 없으니, 그가 돌아간 후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전쟁은 단순히 일라베니아의 황좌로 걸어오는 길을
여는 수단이 될 뿐 아니라, 그 길 아래 깔린 시체들마저 목적으로 두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었다. 지하 감옥 깊은 곳에서 저주를 퍼붓는 여자의 소리처럼 날카롭게 귀를 울렸다.

[죽어서도, 눈 감지 못하도록!]

154 화.

리카르디스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돌아오자마자 서류부터 처리하려 드는 그의 뒤에서 잇세리온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전하, 침실에 들지 않으신지 벌써 삼 일째입니다.”

어지간하면 무시하겠건만, 잇세리온이 너무 서럽게 울었다.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쓰러질 것 같은 건 잇세리온 쪽이었다. 더불어 르원도 허리에 팔을 얹고는 짐짓 혼내는 태도로 그를 대했다.

“제가 어릴 적부터 누누이 말씀드렸지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안 그래도 없는 피곤 있는 피곤 다


끌어안고 사시는 분이 수면도 제대로 취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지켜보는 저희들 마음도 이해를 해
주셔야지요.”

“알았다. 알았다.”

두 형제의 공격에 리카르디스는 두 손 들어 항복했다. 아무래도 예전 겨울석류 자작가에서 지낼 때 자신을 길러


준 이들이다 보니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두통이 지끈거려 와인을 마시고 소파에서 잠시 눈을 감을까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잇세리온이 침대가 주인 얼굴 잊어버리겠다고, 매일매일 새 시트로 갈며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아냐며
대성통곡을 하는 통에, 오늘은 침실로 들어야겠다 마음먹었다. 아니, 시트를 가는 건 시녀의 몫이 아니던가.
거짓말 같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물을 받아 두었으니, 씻고 침실로 드시지요.”

리카르디스는 잇세리온의 시중을 받아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거대한 욕조에는 장미


꽃잎이 빽빽하게 떠 있었다. 이거 하지 말라니까 진짜…… 다음 날 장미 향 엄청 난다니깐…….

뜨겁지 않은 온도가 기분 좋았다. 리카르디스는 물을 퍼서 세수했다. 온기가 몸에 스며들어 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는 눈을 감고 욕조에 기대어 머리를 뒤로 젖혔다. 따듯한 습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디에즈와 케틀린. 능구렁이 같은 귀족들과 신경전을 벌였던 피곤한 하루였다. 눈을 감아 까만 시야 위로 로젤린이


떠올랐다. 울던 모습이 마지막이라 신경 쓰였다. 잘 지내고 있을지.

“으아악! 이런, 씨……!”

리카르디스는 눈을 떴다가 높은 천장에 팔다리를 쫙 벌려 매달려 있는 로젤린과 눈이 딱 마주쳤다. 기겁해서 욕할


뻔했다. 로젤린이 슬그머니 그의 경악 어린 시선을 피했다. 리카르디스가 얼굴을 붉히며 제 가슴을 가렸다.

아랫부분이야 장미 꽃잎으로 다 가려져 있어도, 잠깐, 들어 올 때부터 봤을 거 아냐. 리카르디스가 서슬 퍼런


음색으로 물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봤나.”

로젤린이 매달린 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모기만 한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안 봤을 리가 있나! 리카르디스가 분개하려던 차, 밖에서 르원이 급하게 그를


부르며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전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리카르디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아무 일도 아니다. 잠깐 미끄러졌을 뿐이다.”

“예. 아, 전하 어떤 와인을 드시겠다 하셨지요?”

암호였다. 여기서 페르벨강이라고 했다가는 르원이 떠난 척, 했다가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올 것이다.

“더거.”

“……다른 걸 드시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더거. 더거 17 년산! 나는 더거 17 년산이 좋다! 맛도 좋고 향도 좋아! 떫은 게 딱 내 취향이야!”


이상 무. 이상 무! 이상 없다고! 리카르디스가 성내자 르원이 물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리카르디스가 후, 한숨
쉬고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내려와. 그 뜻을 읽은 로젤린이 머뭇거리며 이동했다.

반들반들, 매끄러운 벽에 습기가 맺혀 있는데도 차근차근 잘 내려왔다. 그러다 거의 다 와서는 삐끗하고


미끄러졌다. 리카르디스가 기겁하며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의 품에 로젤린이 떨어졌다. 출렁, 욕조 안의 물이
흔들리며 장미꽃이 춤을 췄다.

눈이 딱 마주쳤다. 멀리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여기저기 그을음이 묻어 꼬질꼬질했다. 대체 어딜 통해 온 건지


감도 안 잡혔다. 꼬질꼬질한 로젤린이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안고 고민하다가 찝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옷, 젖었나?”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엉덩이와 등 부분이 축축했다.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푹 쉬고는 그녀를 욕조 안에
내려놓았다. 안 젖었다면 밖으로 바로 건져 내면 될 테지만, 젖은 채로 오래 밖에 있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
것인가.

로젤린은 따듯한 온기와 향긋한 냄새가 마음에 드는지, 손으로 살짝 물을 휘저었다. 장미 꽃잎이 울렁거리며 퍼져
나갔다.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러다간, 보인다! 그가 급하게 그녀의 손을 딱 잡았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로젤린 경. 방 밖으로 걸음 하나 벗어나지 말라 했을 텐데.”

싸늘한 목소리에 로젤린은 그날의 뒷모습을 덜컥 떠올렸다. 어떤 감정, 애정 한 줌 읽어 낼 수 없는 사무적인


목소리. 언제나 아름답던 푸른 눈동자가 시리게 차가웠다. 지금처럼. 로젤린은 고개를 푹 떨궜다.

“고개를 숙이지 마라.”

“예?”

리카르디스가 황급하게 말했다. 아니 이 사람이, 아래를 보면 어떻게 해! 장미꽃이 아무리 빽빽하게 떠다녀도
그렇지!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로젤린은 울컥했다. 고개도 내 마음대로 못 숙이나!

“……그렇게 숙이면…… 아무튼 깊은 사정이 있다. 나를 계속 봐라.”

로젤린은 다시 눈동자를 굴려 리카르디스를 쳐다보았다. 잔뜩 축 처진 시선이 닿자, 리카르디스는 한층 더


당황했다. 물에 빠진 유리구슬처럼 빛나는 눈을 보니, 가슴 안쪽이 덜컥 내려앉는 듯해서,

“아니다, 저쪽. 약간 왼쪽에 저 문양 보이나, 경. 저걸 보고 있어라.”

똥개 훈련 시키듯 계속 말을 번복해 댈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은 의기소침해서 하라는 대로 그의 왼쪽 뒤,


화려하게 새겨진 문양에 눈을 고정했다. 서로에게 시선이 미묘하게 어긋난 채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로젤린이
문양의 개수를 세며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전하께서…… 무탈하신지 걱정이 되어서…….”

한풀 꺾이다 못해 흩어져 사라질 것 같은 목소리에 리카르디스의 마음이 흔들렸다. 몸도 마음도 건강했던 사람이,
지금은 몸도 마음도 약해져 있지 않은가. 너무 화냈나? 사람이 좀 너무 화내긴 했지.

지금도 비록 명령을 어겼지만, 대화를 하겠다고 온 사람한테 너무 박하게 대한 게 아닌가 하고, 리카르디스의
단단한 마음이 서서히 풀려 가고 있었다.

“전하께서 주무실 때까지 숨어 있다가, 잠깐만 지켜보다 나가려 했습니다….”

“……세간에서 그런 그대의 행위를 뭐라 부르는지 아나, 경?”

“충정……?”

“범죄라 부른다. 하지 마. 오늘은 미수에 그쳤으니 봐주겠다.”

참고로, 리카르디스의 잠든 얼굴을 지켜보고 싶어 했던 사람은 로젤린뿐만이 아니었다. 몇 년 전, 하루에도 수십


통씩 리카르디스에게 연서를 보냈던 귀한 집 아가씨로, 그녀와 로젤린의 공통점은 둘 다 실패했다는 점이고,
차이점이라면 잡혀갔느냐 잡혀가지 않았느냐로 갈렸다.

로젤린은 ‘범죄라 부른다’라는 말에 곁눈질로 리카르디스를 흘끗흘끗 바라보았다. 뭔가, 못 다한 말이 있는 듯,


사고 치고 눈치 보는 강아지처럼! 불길함이 엄습했다.

“……그, 봐주시는 건…… 오늘만? 입니까?”

이 사람이 진짜…… 리카르디스가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거에 쌓아 온 행적을 신경 쓰고 있는 게 너무


빤히 보였다. 대체 몇 번이나 자는 얼굴을 보고 갔다는 얘기일까.

“그대 진짜…….”

“전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잇세리온이 밖에서 말을 걸어왔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는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마주 봤다. 리카르디스가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니. 무슨 일이냐!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는 걸 매우 싫어한다 정말로!”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사춘기 소년 같은 대답을 내뱉었다는 사실에 치욕스러워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너무나 진지한 목소리라 차마 싫다는 둥, 하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로젤린은 왼쪽으로 가지도 오른쪽으로
향하지도 못한 채 허둥지둥 당황하는 중이었다. 로젤린이 결의 어린 표정을 하더니 리카르디스에게 소곤거리며
말했다.

“지금은 미끄러워 벽에 매달릴 수 없습니다! 대신 욕조 안에 들어가면 한 시간 정도는 잠수할 수 있으므로! 맡겨


주십시오!”

“……그거 굉장한데.”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녀의 능력에 감탄이 나왔다. 로젤린이 실제로 욕조로 잠수할 듯 머리를 물에 박으려
하자 리카르디스만 기겁했다. 아니, 들어가면은! 안되지! 들어가면, 안된다고!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채 겨우 제지했다. 난장판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잇세리온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이 헉 숨을 들이쉬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를 악 물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로젤린의 등에 단단한 온기가 닿았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몸을 돌린 채, 그대로 밀착해서
끌어안았다.

잇세리온이 욕실에 발을 들였을 때는 출렁거리는 붉은 장미꽃잎들 한가운데, 리카르디스가 등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앞에 로젤린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 로젤린이 전부 한 줄로 나란히 있었기에 잇세리온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저, 등을


꼿꼿이 펴고 앉아 있는 리카르디스의 자세가 어찌나 척추 건강에 좋을 것 같은지, 감탄할 뿐이었다.

“무슨 일인가 잇세리온. 이 근처는 물기로 젖어 있으니, 들어오지 말고 거기에서 편하게 얘기하도록 해.”

배려심이 철철 넘쳤다. 로젤린은 욕조에 입까지 담그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물에 퍼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하나로 모아 그녀에게 넘겨줬다. 로젤린도 제 머리카락을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꽉 쥐었다.

155 화.

잇세리온은 리카르디스의 넓은 등을 보며 아련한 감상에 잠겼다. 그렇게 어리고 작은 아이였는데…….

“그게 언제였지요. 전하께서 겨울석류 자작가에 오신 지가…….”

잠깐. 지금…… 지금 그걸 하는 거야? 지금? 갑자기? 리카르디스는 당황스러웠다. 잇세리온은 작고 어렸던


리카르디스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 하나하나의 형용사에 어울리는 추억들을 꺼내어
말했다. 본디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었으나, 잇세리온은 그 미화된 추억을 더 갈고닦아 아름답게 포장하는
사람이었다.

그때 자신을 형아라 부르던 리카르디스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르원을 실은 짐마차 백 개가 있어도 바꾸지
않았을 것이라며 행복해했다. 그 아름다운 추억의 나날들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잇세리온을 뒤로,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시선을 슬쩍 내려 로젤린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는 잇세리온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전하에게 그런 과거가! 잇세리온 비서관님을 형아라고 불렀대! 사탕이 녹아 없어지는 게 아까워서 먹다가 남겨
뒀대! 선물 받은 망아지가 너무 좋아서 마구간에 가서 몰래 자다가 들켰대!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이 귀담아듣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리카르디스는 괴로워했다.

누구는 가슴 졸이며 한 사람을 숨기고 있건만, 다른 누구는 즐겨도 너무 즐기고 있었다. 얄미웠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로젤린은 꼬집히면서도 즐거운지 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제 손길이
닿은 곳의 그을음이 닦여지는 것을 보고, 물기 젖은 손으로 그녀를 대충 세수시켰다. 어휴 꼬질꼬질.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잇세리온의 말이 끊겼다. 리카르디스는 황급하게 해명했다.

“감동적인 얘기였다.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그렇지요. 그렇게 어리고 약한 분이셨는데. 언제 이렇게 자라셨는지…… 감개무량합니다.”

잇세리온이 일장 연설하던 추억들이 다 흘러간 가운데, 약하다는 말이 남아 리카르디스를 웃게 했다.

“그래. 많이도 약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잇세리온이 그의 등을 가만 바라보다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최근 리카르디스가 병적일 정도로 일에 매달리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 필사적임에 잇세리온은 언제나 가슴을 졸였다. 열중한다는 것은, 온 신경과 마음을
다 쏟는다는 것이었다. 지치지 않을 리 없다. 잇세리온은 그가 조금이나마 편해지길 바랐다.

“전하. 전하께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셨고, 그만큼의 결과를 얻으셨습니다.”

“잃는 것도 많았다.”

“손에 쥔 것을 보셔야 합니다.”

“잃은 것에 비하면 미약할 것이다.”

“앞을 보지 않으시면, 나아가실 수 없으십니다.”

“나아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여겼다.”

전하……. 잇세리온의 약한 목소리가 욕실을 떠돌았다. 리카르디스는 가만히 숨죽이고 안겨 있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흰 셔츠가 젖어 살결이 비쳤다. 그녀의 등에 아프게 새겨진 흉터가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손으로
그녀의 흉터를 덧그렸다. 로젤린의 몸이 흠칫 떨렸다.

“내가 불안해 보였나, 잇세리온.”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러리란 것도 안다. 나를 옆에서 가장 오래 지켜봐 온 사람이지 않나. 그때 눈물 콧물 흘리던 어린아이가,


지금까지도 눈물 콧물 흘리고 있으니 어지간히 답답한 게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어쩌겠나. 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약한 사람인 것을.”

“전하…….”
“애달프다는 듯 부르지 마라. 객관적 사실을 짚었을 뿐이다.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쌓여
있는 껍데기에 배불러 하다가는 엘피디오 꼴이 나겠지. 그 본인은 행복함을 만끽하고 있으니 상관은 없겠다마는.”

리카르디스는 잇세리온이 바람 빠지는 듯 웃는 소리를 들었다. 품 안에 따뜻한 것이 가득 안겨 있었다. 안도감이


몰려왔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았다.

“가혹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잇세리온. 단 한 순간도 안주할 수 없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하물며 그
엘피디오도 칼릭스 경에게 집적거리고 있지 않나. 그러니 걱정 마라. 내가 약하다는 걸 아는 것은, 나아갈
방향을 아는 것이다. 발버둥 치는 모습이 괴로워 보일지언정, 그건 나아가리라 내가 마음먹었다는 것이니.”

“가시는 길에 언제나 함께하겠습니다, 전하.”

툭하면 울고 통곡하는 잇세리온이 담담하게 얘기했다.

“고맙다.”

물론 이 말에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실신할 것처럼 우는 잇세리온을 르원이 데리고 나갔다.

욕실에는 맺힌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등에 손을 대고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로젤린이 무릎을 끌어안은 채, 장미꽃잎을 가리가리 찢고 있었다.

“……저도, 가시는 길에 언제나 함께 있겠습니다.”

리카르디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말 안 듣는 사람은 안 데려간다.”

“예?”

“말 안 듣는 아이는 내가 전쟁터에서 구를 때 평온하게 성안에서 하녀들의 수발을 받으며 케이크와 호화로운


음식도 먹고 저녁에는 푹신한 깃털 베개를 베고 숙면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로젤린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틀었다. 짚을 곳이 없었는지 장미 꽃잎 사이로 나와 있는 리카르디스의 무릎에 제


손을 지탱했다. 순식간이라 리카르디스는 딱히 막지도 못했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웠다. 갑자기 훅 들어온 공격에 리카르디스가 숨을 들이켠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눈썹을 찌푸린 채 애절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그녀의 손을 찰싹 치며, 제 무릎을 수면 아래로 잽싸게 숨겼다.

“내 몸에 손…… 끝 하나 대지 마라. 진짜, 농담 아니다. 이 위험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리고 거리가 너무


가깝다. 떨어져라. 더. 더. 마음에 차지 않는다. 더. 좋아. 딱 적절하다.”

로젤린이 엉금엉금 기어, 욕조의 반대편 끝에 도달하자 리카르디스는 앓던 이 빠진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로젤린은 아까의 항변이 끝나지 않았는지 그 멀리서 제 의견을 피력했다.

“말 잘 듣겠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 안 하겠습니다. 정말로요.”

하지 말라, 안된다고 말한 그 수많은 나날이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정말 신빙성이라고는 없고,


신뢰라고는 가지 않았다.

로젤린은 그 신빙성 없는 말 이후, 계속해서 자신을 왜 그가 가는 길에 데리고 가야 하는가에 대한 장점을 말했다.


강하고, 암살자 잘 잡고, 사냥 잘하고, 길 잘 찾고,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열성적으로 말하는 모습이 웃겼다. 피와 독, 비명과 저주가 가득한 길이 뭐가 좋다고 함께 가려고 저러는지.
저가 좋아하는 갖은 맛있는 것과 평온한 일상을 두고 어디라고 가려고 하는지.

기분이 싱숭생숭해져 리카르디스는 미묘한 미소를 걸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케틀린에게서 갖은 저주를 받고


왔기 때문일까. 그녀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종류의 분노를 가지고 있는 디에즈와 로젤린이 같은 존재이기 때문일까.

이 맹목. 이 충성. 호의적인 감정들.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굳어져 선명한 것들. 그런 것들이 로젤린을
가득 채우고 있음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내가 그대에게 화를 낸 것은.”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그대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하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멀리서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를 똑바로 마주했다.

“내가 화를 낸 것은 그대가 다칠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약해 그대를 지킬 힘이 없어서야.


답답하고 화가 났다. 자신을 향해야 마땅한 분노를 그대에게 터트렸다. 잘못한 것은, 내 쪽이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로젤린 경. 내가 너무 치졸했다. 스스로를 탓하지 못해, 그 화살을 그대에게 돌렸어.”

로젤린이 눈을 깜박거리며 제 입술을 매만졌다. 녹색 눈동자를 굴리며 마구 고민하던 그녀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모두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화나지 않으신 게 맞습니까?”

그런 계산이었던 듯했다. 자신을 향했던 부조리한 분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칼날이 도사리는 한 가운데, 폭풍의 눈, 기름 머금은 장작에 곧 떨어질 불꽃의 존재를 알면서도. 뭐가 웃기다고
이렇게 실없이 웃음이 나오는지. 리카르디스는 아하하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는 그대가 나야겠지.”

“아, 저는 치졸하지 않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용서했다면서 사람 공격할 건 다 공격하고 있었다.

“……그래, 그 대범함을…… 본받도록 노력하겠다. 어찌 되었건, 미안하다는 말로 될 일은 아니지.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해라. 뭐든 들어주겠다.”
뭐든 들어주겠다. 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눈빛이 흡사 맹수처럼 변했다. 리카르디스는 내뱉자마자 제
말을 철회하고 싶어졌다. 덫에 걸린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아냐, 그건……. 그건 혼나……. 대체 뭘 말하려고 했던 거야!


리카르디스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로젤린이 마음을 정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던가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일은…… 아니다, 사람이 한 입으로는 두말할 수 없지.
뭐가 필요하나, 경.”

입꼬리가 씰룩 씰룩 떨렸지만, 리카르디스는 각오했다. 넓은 욕탕,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뚫고, 그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 안 됩니까?”

156 화.

리카르디스는 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소원이었다. 그는 멍하니 그녀의 이름을 흘렸다.

“로젤린.”

“예.”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눈썹 끝이 아래로 처지는 모양에서 그녀의 감정을 읽어 냈다. 리카르디스는 시선을
방황하며 손마디로 제 입술을 쓸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언젠가부터 그녀를 로젤린이라 불렀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야 ‘로젤린 경’이라 불렀으나, 단둘이 있을 때는 높은 비율로 그녀의 이름만.

이번 일로 자신이 화를 내며 ‘로젤린 경’이라 불린 일이 서운했던 것이리라. 고작 이름 한번 불렸을 뿐인데


로젤린은 행복하게 웃었다. 케이크 한 판을 받았을 때보다, 새로 보는 음식이 가득 채워진 만찬장을 볼 때보다도.

리카르디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음식보다 나은 취급을 받았다는 일에 그렇게 기뻐했다는 사실은 조금


나중에 자각했지만, 지금은 얼굴에 열이 올라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마지막이 우는 모습이라 그랬던 걸까. 욕실에 있는 내내 의기소침하게 눈치 보는 모습만 봐서 그랬을까. 로젤린이


웃는 모습이…….
방황하던 시선이 맞았다. 리카르디스는 당황했다. 따뜻한 온도, 장미 향기가 어지러울 정도로 코끝을 맴돌았다.
욕조 안에 오래 있어서인지 그녀의 피부가 불그스레하게 변해 있었다. 장미 꽃잎이 그녀의 흰 셔츠와 머리카락에
달라붙었다. 흐릿한 수증기가 그녀의 모습을 아른아른하게 만들었다. 아까 전 그녀를 안고 있었을 때의 감각이
손끝에 새겨지듯 떠올랐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귓가가 홧홧해지며, 지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했다. 혈액순환이
원활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큰일 난다. 진짜 큰일 나. 비록 그녀가 자신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하더라도! 리카르디스는 눈을 질끈 감고 악 소리쳤다.

“페르벨강! 젠장!”

쾅!

욕실의 벽 한쪽에서 르원이 튀어나왔다. 그 빠른 등장에서 르원이 미리 비밀 통로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로젤린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갑자기 튀어나온 르원을 바라보았다.

인상을 흉흉하게 하고 검을 뽑은 르원이 입을 다물고 욕실 내부를 훑었다. 그는 이내 미묘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른 욕조, 장미 꽃잎, 남자와 여자. 그리고 호위 기사까지. 아니, 명백히 한 명의 존재가
이질적이잖아. 대체 왜 부르신 거야.

“페르벨강을 드시고 싶으시단 말씀이십니까? 24 시간 중 하필 지금 이때에? 잠시도 미룰 수 없을 만큼이나?”

“아니, 새 옷을 들고 와! 로젤린 경이 입을 것으로!”

리카르디스는 붉어진 얼굴로 성질냈다. 르원은 그제야 대충 상황을 눈치챘다. 장미꽃잎이 큰일을 하고 있구나.

* * *

로젤린은 젖은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깜빡 졸다 눈을 뜨니 리카르디스가 앞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로젤린이 생긋 웃으며 그를 반겼다. 화가 풀렸다던 리카르디스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간을 확 좁혔다. 그가 아직 덜 마른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너 어디 한번 죽어 봐라? 뭐 그런 건가?”

리카르디스의 말은 로젤린을 향하지 않았고, 그녀도 그걸 알 수 있었다. 그의 뒤에서 르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

“평소에 나에게 불만이 많았나 본데. 때를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오는 걸 보니.”

“에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로젤린은 그들의 종잡을 수 없는 대화를 잠자코 듣던 중,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제 몸을 향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헐렁하지만 문제없는데.

“급해 보이기에 일단 집히는 대로 들고 온 겁니다! 이 밤중에 여성복을 무슨 수로 구합니까. 시녀들의 옷도 맞지


않을 것이 빤한 데다가 로젤린 경이 전하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근신 기간에 몰래 빠져나온 걸 들키면 안 되니,
경의 옷을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리카르디스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욕실 안에서는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는데, 역시 이


옷이 문제인가! 로젤린은 급한 마음에 벌떡 일어서며 자신의 옷자락을 잡았다.

“벗겠습니다!”

“아니!”

“안 돼, 경!”

리카르디스와 르원이 소리 높여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로젤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알만 굴렸다.

르원이 리카르디스에게 소근거렸다. 거, 보십시오. 눈치 보지 않습니까. 이런 씨, 여성복도 구비 해 두지 않고


뭐 하나 대체. 아니? 이 전하께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여성복이 필요한 나날을 보낸 적이나 있으십니까?

멀리 떨어져서 소곤거리며 다투고 있었지만, 로젤린은 모든 대화를 한 음절 한 음절 똑똑히 들었다. 역시 이


옷이 문제인가 본데…… 혹시 여성복을 구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던 걸까! 역시 우리 전하. 배려심이 남다르시다!
로젤린은 다시 나서서 의견을 피력했다.

“치마는 불편해서, 바지가 좋습니다. 좀 헐렁헐렁하지만 잘 묶어 뒀습니다!”

“그렇군…….”

리카르디스는 자신은 매우 불편하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 그리고 전하의 냄새가 나서 전 좋습니다.”

리카르디스의 숨이 잠깐 멈췄다. 르원이 웃음기를 누르기 위해 입가를 꾹 눌렀다.

“괜찮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르원!”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전하.”

르원이 음흉한 미소를 걸고 리카르디스를 쳐다보았다. 리카르디스가 소파 위의 쿠션을 그에게 던졌다. 르원이
슬쩍 피하고는 문을 열었다. 그는 마침 문밖에 딱 달라붙어 염탐 중이던 잇세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이 형이 왜 이래, 진짜. 촌스럽게.”

“이 자식, 르원. 너는 너무 방임주의야!”

잇세리온은 방 안에 있겠다고 힘으로 밀고 들어오려 했으나, 르원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질질 끌려가며


반항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작아졌다. 그리고 뚝. 끊겼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리카르디스는 문 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이걸 어쩌면…….

“전하?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문제, 많았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만 살짝 돌려 그녀를 염탐했다. 흰 셔츠는 그녀의 허벅지까지 내려올 정도로
크고 헐렁했던 터라, 셔츠를 입었다기보다 파묻혀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릴 지경이었다. 그에 더해 바지 밑단을 몇
번 접어 올려 가느다란 발목이 보이고 있었다. 로젤린이 입고 있는 옷이 전부 자신의 것이라는 점에서 가슴
안쪽부터 기묘한 열감이 피어올랐다. 달콤한 향이 묘한 분위기의 형성에 힘을 싣고 있었다.

‘……달콤한 향?’

리카르디스는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고급스러운 향초 여러 개로 장식된 테이블에는 푸짐한 안주와 와인, 잔이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럴 시간이 있었어?’

자리를 깔다 못해 조명해 놓은 느낌에 도리어 무언가가 한풀 꺾였다. 좀 우습기도 했다. 리카르디스는


욕실에서부터 계속되었던 당황을 걷어 내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리카르디스는 기왕 차려 놓은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그가 병을 들자 로젤린이 눈을 빛내며 바라보았다.

“마실 생각도 하지 마. 환자가 어딜.”

“……다 나았습니다.”

“어림도 없다.”

리카르디스는 딱 잘라 말하며 포크로 소시지를 찍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로젤린은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을 펴고선 행복하게 받아먹었다.

저녁을 훌쩍 넘긴 시간의 와인 안주라 하면, 치즈나 과일같이 간단한 목록이 주를 이뤄야 할 테지만, 테이블
위는 만찬장을 축소한 듯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로젤린의 기호에 맞춘 것이 분명했다. 르원, 그 남자. 정말로
치밀했다. 누가 잇세리온 동생 아니라고 할까 봐.

며칠간 칼릭스, 레이몬드를 통해 로젤린이 제대로 밥을 먹지 않았노라 보고를 받았던 참이라, 그녀가 음식에
무서운 열정을 불태우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눈길을 주는 접시를 그녀의 앞에 밀어
놓았다. 로젤린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리카르디스는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 두 잔. 비워지는 잔의
수만큼 취기가 돌았다.

로젤린이 상급 기사 카일로를 해임하라며 청탁을 넣고 있을 때, 밖에서 음악 소리가 실려 왔다. 어디에서든


연회가 계속되고 있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로젤린이 쫑긋 귀를 세우며 노래를 듣더니 화색을 지었다.

“아는 노래입니다.”

“유명한 곡이다.”

“춤을 출 때 항상 이 곡으로 연습합니다.”

“춤도 출 줄…… 알겠군. 곧 무도회니.”

“예, 종류에 따라 다 익혀 두었습니다. 예법 선생님이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에게 붙여 준 예법 선생은 가을안개 백작, 스타스 단장의 첫째 누이로, 그의 성미와 똑 닮아 있어 무엇이든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정말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는 얘기이리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어떤 춤도 출 줄 몰라 그녀가 경악하며 찾아왔었는데. 정말 여러모로 재주가 대단했다.

“대신, 파트너가 못한다거나, 보다 뛰어나거나, 합이 잘 맞지 않는다거나, 여러 가지 경우가 있기에 직접 맞춰


봐야 한다고 했는데…….”

로젤린이 말을 흐리며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안되면 다른 동료 기사들에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네스터 경이 해 준다고는 했었는데요.”

“지금 맞춰 보지.”

리카르디스가 냉큼 자리에서 일어섰다.

달빛이 강하게 새어 드는 테라스 앞. 리카르디스는 하얗게 빛나는 로젤린의 얼굴을 보며 왼손을 들었다. 로젤린이
그의 손에 제 손을 겹치며, 춤을 추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를 취했다.

리카르디스는 티 나지 않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마주 닿은 손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등과 허리를


감싼 오른손이 더욱 문제였다. 손에 헐렁한 셔츠가 감기더니 가느다란 허리가 천 한 겹을 두고 닿았다.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잠시 시간을 보내야 했다.

157 화.

그의 경직은 곧 풀리게 되었다. 로젤린이 흥얼거림과 동시에 리카르디스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아니
세상에.

‘무슨…….’

춤을 추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완벽하다 못해 소름 끼칠 정도로 춤을 잘 췄다. 리카르디스는 한 걸음


떨어져 달빛 아래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다 생각했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리카르디스는 실수로 그녀의 발을 밟고 말았다.

로젤린은 잠시 움찔했지만 물 흐르듯 다음 동작으로 넘어갔다. 리카르디스는 괜히 멋쩍어 흠흠 하는 소리를 냈다.

“……안 아프나?”
“깃털 같습니다.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수치스러웠다. 깃털 같을 리가! 180 을 넘는 근육덩어리 깃털이 어디 있어! 슬쩍 발밑을 보니, 심지어 그녀는
맨발이었다.

“신발은 어디 두었나.”

“젖어서 르원 경이 뺏어 갔습니다. 실내화는 춤을 추기에 적합하지 않은 모양과 형태이기에, 벗었습니다.


방해됩니다.”

대체 춤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깊은 건지. 리카르디스는 잠시 춤을 중단하고 신발을 벗었다. 또 그녀의 발을


밟는 불상사가 있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그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었다.리카르디스는 살짝살짝 스치는 온기에 흠칫 몸을 떨었다. 맨손을 잡는 건 그래도 괜찮았는데,
닿을 리 없는 맨발, 그 살갗이 서로 부드럽게 스치니 온 감각이 발로 쏠리는 것 같았다. 로젤린도 간지러운지
웃었다.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의 손을 잡아 올려 그녀를 한 바퀴 돌렸다. 머리카락과 셔츠가 나풀거렸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이 동작을 재밌어 하는 것 같다 생각해서 그녀를 두세 바퀴 더 돌렸다. 웃음소리가 커졌다.

“전하, 무도회에서 실수 하셔도 됩니다. 제가 리드하겠습니다.”

힘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모습이 상상이 가서 리카르디스는 차마 웃지 못했다. 춤 연습을 좀 해 둬야 할


듯했다. 로젤린이 무도회에 한가득 펼쳐질 음식을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꿈과 희망이 넘쳐 나는 공간이었던가 그곳이? 빛나고 아름다운 선율 속 사람들이 웃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행복한 자는 몇 되지 않을 것이 빤했다. 그녀는 그 극소수에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으나
…… 리카르디스는 머릿속으로 남들과 똑같이, 웃고 있을 한 남자를 떠올렸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손을 꽉 잡은 후, 자리에 멈춰 섰다. 로젤린도 그의 행동에 거스르지 않고 멈췄다.

“로젤린.”

“예, 전하.”

“무도회를 기대하는 중 미안하다만…… 좀 지켜 줘야겠다.”

“네, 걱정 마십시오!”

로젤린이 씩씩하게 대답하자, 리카르디스가 쓰게 웃었다.

“나 말고.”

로젤린의 눈이 확장되었다.

“황제 폐하.”

그녀가 입을 떡 벌렸다. 시, 싫…… 싫은……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좀 위험한 상황인 듯하다. 황제 폐하가 죽든 말든 나랑 아무 상관이 없고, 사실 빨리 죽었으면 좋을 것 같은


인물 중 한 명이지만, 지금은 곤란해. 지금 폐하가 돌아가셨다간 일라베니아는 십중팔구 내전이 터지고 그 틈을
타서 발타가 쳐들어올 거다. 아니면 엘피디오 그 멍청한 놈이 발타를 끌어들여서 나를 치려고 하거나.”

로젤린이 마구 손짓하며 무언가를 설명하려 했다. 안될 것 같은 이유를 꺼내고 싶은데 그다지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까만 해도 기분 좋다는 듯 미소를 걸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입가의 호선이 뒤집혀져서 안쓰러웠다.

“평생 그러라는 게 아니라, 무도회 때에만. 황제 폐하를 둘러싼 호위는 우습게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성기사를 포함해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들 오십여 명이 곁을 항상 지킨다. 일상적으로 금강석 성내에 있을 때
죽이는 건 힘들 테니, 그 호위망이 얕아졌을 때. 다가오는 건국제의 무도회가 적기라 보고 있다. 사실 그대뿐
아니라, 하얀밤 기사단을 포함해 여러 가문이 폐하를 지키고 있을 거라, 그대가 나서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아, 그 정도라면…….”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춤을 출 시간이 있을까요?”

“근처에서 황제 폐하를 예의 주시하면서 잠깐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전하, 춤을 출 때는 그렇게 신경을 분산시켜서는 안 됩니다. 온전히 음악과 파트너, 자신의 몸이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를 조절해야 하는 일종의…… 예술인 것이죠.”

아주 예술인이 다 되어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웃었다.

“그러면 못 추겠군. 아쉽게 되었어.”

“……그렇지만 저는 희대의 천재라는 말을 들었던 사람인 만큼, 폐하를 지켜보며 춤을 출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수식어를 달고 있었는지는 또 처음 알았군. 어찌되었건 유능해, 역시 내 기사야.”

로젤린이 은근히 기뻐하다가 아, 하고 주의를 환기했다.

“그런데 누가 폐하를 노립니까?”

리카르디스는 입을 다문 채 그녀를 눈에 담고만 있었다. 로젤린은 그의 침묵을 의아해하며 바라보다, 들리지 않는


답을 알게 되었다.

* * *

거대하고 묵직한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칼릭스는 제 탁자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우기
전부터 손님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탁, 창틀에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방 안을 가득 메운 날짐승의 그림자가 인간의 형태로 바뀌었다.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커튼을 뜯어내서 대충


몸에 둘렀다. 터벅터벅 지친 발걸음으로 걸어온 남자가 소파에 드러누웠다.

“마카롱…… 님…….”
칼릭스는 마카롱이 누운 맞은편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의 입술은 말을 내뱉지 못하고 달싹거리기만 했다.
마카롱이 죽은 듯 눈 감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왜, 자신만만하게 지키네, 죽이네 할 때는 언제고 네 누이 찌른 놈을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게 고이 돌려


보냈느냐, 따지고 욕이라도 해 보려고?”

“……해도 됩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칼릭스는 제 얼굴을 쓸다가 턱을 만졌다.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난처한 상황에
어찌할 바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욕을 해도 되는 상황입니까? 저는 그곳에 있지 않았으니까요.”

기실 그에 대한 원망이 아주 없을 수 없었으나, 그 사건의 당사자, 로젤린조차 하지 않는 원망을 자신이 무슨


수로? 게다가 제 누이를 다치게 한 5 황자 디에즈를 고이 보내 준 자가, 마카롱이었다.

마카롱. 로젤린의 혈육이라도 되는 마냥 사사건건 트집 잡고 드잡이질해 대던 그였다. 그 모습이 거짓이 아님을


안다. 마카롱이 얼마나 능숙하게 연기를 펼치는지는 알고 있으나, 로젤린과 자신의 앞에서 보이는 행동과 말이
꾸며 낸 거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정말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영역.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으리라. 칼릭스는 그런 생각에 남은 원망도
털어 낼 수 있었다.

“그래도 되는 상황이었으면, 원망하고 욕하고, 아니면 안 하려고?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되는 게 아닐 텐데.”

“제 착각이 아니면, 욕을 먹고 싶어 하시는 듯 보이는데. 제가 인상이 이래 보여도 욕하는 재주는 없습니다.


누이가 고운 말 바른말을 쓰라 했거든요. 대신 고운 말로 비꼬기는 잘하는데, 그거라도 어떻게 해 드리자면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마카롱이 눈을 감은 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디 해 보던가.”

“싫습니다. 욕은 못하지만, 심성이 삐뚤어져서 남이 해 달라는 걸 해 주는 성질 머리가 아닙니다.”

“……이게 이제 기어오르네…….”

칼릭스도 그제야 굳은 표정을 피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있는 포도를 한 알씩 뜯어 관성적으로


입으로 넣고 있자니, 마카롱이 느릿느릿한 말투로 다시 말을 꺼냈다.

“로젤린은.”

“그 정도의 신성력이 닿으면 죽은 자도 살아날 겁니다.”

“꼴에 능력은 있어 가지고.”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 ‘꼴에 능력이 있다는 사람’이 리카르디스를 가리키고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신분이고 사람이고 가리지 않는 저 시비. 저 적의. 며칠 행방불명된 사이 많은 심경의 변화를 거친 것처럼
보였지만, 그 기질은 어디 가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대체, 며칠 동안 어디서 뭘 하셨습니까. 누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시 마카롱이 자신을 떠날지, 혹시 디에즈처럼 자신을 미워하게 된 건지. 물어볼
당사자도 없으니 답도 얻을 수 없어 애먼 속만 끓였더랬다. 마카롱은 가만히 누운 채로 지친 듯 말을 흘렸다.
칼릭스는 귀 기울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를…….”

“예.”

“나를 찾는 여행을…….”

“……… 말씀해 주기 싫으시면, 그렇다고 말을 하시면 될 텐데요.”

마카롱이 소파 위를 뒹굴며 낄낄댔다. 넓다고는 해도 소파 위. 그렇게 격하게 굴러 댔으니 안 떨어질 수가


없었다. 쿵. 떨어진 마카롱은 일어서려다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다시 얌전히 누웠다. 테이블이 흔들리며
포도를 담아 놓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져 쨍그랑 소리를 냈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칼릭스는 어이없어서 눈만 깜박였다. 떨어진 건 좀 고소했는데, 저렇게 미동


없이 누워 있으니 시체같이 보여 섬뜩했다.

“……아프십니까?”

“겁나게 마음이 아프다…… 저 달은 내 마음을 알까…….”

중년의 남성이 술 마시고 주정 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칼릭스가 짜증 부리지 못했던 이유는, 살짝 보이는
그의 옆모습에서 무언가를 읽어 냈기 때문이었다. 마카롱은 엎드린 그대로 계속 중얼거렸다.

“이해를 도와주자면…….”

“예.”

“진짜 로젤린. 지금 가짜 말고.”

“……가짜, 아니거든요.”

“우쭈쭈, 우리 애기 삐졌니.”

달래는 말투가 성의라고는 없었다.


158 화.

“과거의 누이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제 누이이기는 하거든요.”

“그래그래, 아주 우애가 두터워 보기 좋다. 아무튼, 상상해 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너희 어머니가 네 누이의 심장에 칼을 꽂고 있는 거지.”

상상만으로도 기가 막혔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 감히 상상도, 가정도 할 수 없었다.

“너라면 그걸 봤을 때 어쩔 것 같냐.”

“…말리…… 겠지요.”

“그리고?”

그리고? 칼릭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뭘 어떻게 할까. 왜 죽이려 했느냐 물어봐? 어머니와 대치하고, 싸워?
자신은 뭘, 어떻게 해야…… 혼란스러워하는 칼릭스의 귓가로 나직한 목소리가 꽂혔다.

“그런 거야.”

그런 거였다. 칼릭스는 마카롱이 말하고자 한 바를 이해했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조차. 마카롱은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였던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후 칼릭스는 다른 점을 조명했다. 마카롱이 그들의 상황을 다른 무엇도 아닌 로젤린, 에델바이스, 칼릭스


혈연관계인 세 사람에 비유했다는 사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졌다. 마카롱에게 디에즈, 그의 존재란 무엇인가.

디에즈가 드러낼 때까지 마카롱은 그의 정체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 마력으로 이루어진 그 존재들.
그 종족끼리 공유하는 어떤 깊은 관계와 감정이 있다고 봐야 마땅했다. 로젤린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의가 어디서
왔는지도 대충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5 황자는 왜 누이를 찔렀나.’

깊은 곳에 잠재된 본능 같은 호의를 짓눌러 뭉개 버리고, 비틀어 쳐내 버릴 강한 악의가 작용했으리라. 하지만


칼릭스는 그 악의가 로젤린에게 직접적으로 향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의 칼날이 로젤린의 심장을
가르려 했다 하더라도.

그럴 이유도 없었을뿐더러, 제 누이의 말대로 죽이고자 했다면 기회는 많았다. 이보다도 더 좋은 기회들이.
그것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벼랑 끝까지 몰리고 나서야 터트렸다. 칼릭스는 디에즈가 로젤린을 해친 일련의
과정에서 망설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해쳐야 했는가? 왜 반드시 해야만 했는가. 방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동안 우정을 쌓아 온 로젤린이 아닌, 언제고 그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2 황자의 충실한 기사,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녀가 방해가 되었던 것이리라.
디에즈의 알수 없는 분노는 리카르디스를 향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기야, 검은달과 손잡고 리카르디스를
죽이고자 수십 수백 번 암살 시도를 한 사람은 엘피디오지만 그 뒤에 디에즈가 있었으니. 리카르디스를 죽이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은 디에즈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디에즈는 왜 리카르디스를 죽이고자 하는가? 그 악의는 어디서?

칼릭스가 아는 한, 리카르디스와 디에즈 간의 큰 갈등은 없었다. 그렇다면 과거의 ‘디에즈’가 아닌, 지금의
디에즈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더욱 깊고 오래된 시간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 왔던.

생각해 보니 마카롱도 인간이고 황실이고 기분 나빠서 한 공기 마시고 살 바에 차라리 벼랑에서 뛰어내려 죽겠다는
말을, 독수리의 모습으로 간간이 하고는 했다. 종이 달라 본능적으로 나오는 거부감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마카롱도 디에즈와 같은 감정을 깊숙한 곳에 품고 있는 게 아닐까? 그저 본인의 성정이 유난스럽게 신경질적인 줄
알았는데…….

“뭘 봐. 콩만 한 게 확 씨…….”

이렇게.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뭔가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다면 마카롱 또한 그 악의에
잠식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나? 디에즈가 그랬듯, 제 누이의 가슴에 칼을 꽂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나?
로젤린의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마카롱님.”

마카롱이 발을 까딱이며 계속하라는 뜻을 전했다.

“제가, 마카롱님에게…… 검을 들지 않아도, 됩니까?”

마카롱이 으하하 하며 웃었다. 웃음이 끊기는 마디마디마다 몸을 꿈틀꿈틀 떨어 대는데 약간 미친 사람 같았다.

“아, 웃긴 놈일세. 들라고 하면 들고, 들지 말라 하면 들지 않을 거냐?”

칼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 마카롱이 말했다.

“아까 내가 너의 이해를 돕는다 하고 말했잖아.”

칼릭스는 마카롱의 말을 다시 돌이켜 생각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어머니가 로젤린을
찌르고 있었다. 그랬을 때 나는 어쩔 것인가.

‘아…….’

칼릭스는 마카롱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 상황에 처한 사람을 다름 아닌 칼릭스, 자신에게 빗대지


않았던가. 사고를 못할 만큼 당황하다, 굳어 버렸다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런 나는 결국 어쩌겠어.”

로젤린을 지키기 위해서 뭐든 할 것이다.

“그런 거야.”
그런 거였다. 칼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나.

“기왕 감사할 거면 머리 숙여 절하는 쪽이 좋다. 한참 위에서 네 정수리를 보는 기분이 각별할 것 같아서.”

진짜 이 사람…… 성격적으로는 맞지 않는다. 칼릭스는 어처구니없어서 웃었다.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창문 너머에서 실려 오는 소리였다.

까득, 까득…… 까드득…….

손톱 같은 날카로운 것이 단단한 무언가를 스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칼릭스는 팔에 돋은 닭살을 슥슥 쓸며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았다. 마카롱도 몸을 돌려 눕고는 머리를 슬쩍 들었다.

까득…….

칼릭스의 목덜미에 소름이 잔뜩 돋은 그때, 열린 창문 틈으로 사람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칼릭스는 악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창문틀을 꽉 부여잡은 몇 초 후, 검은 인영이 칼릭스의 시야로 쑥 솟아났다. 어두운 밤이


배경이기도 했거니와, 그 인간 같지 않은 움직임에 칼릭스는 정말 식겁했다. 두 눈을 질끈 감지 않은 것은, 어떤
두려운 검날이라 할지라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는 가문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머리가 산발이 된 로젤린과 칼릭스의 눈이 딱 맞았다.

“……누님?”

슬그머니 칼릭스의 눈치를 살피던 로젤린은 바닥에 누워 있는 마카롱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마카롱!”

로젤린이 창문을 훌쩍 넘어 우다다 달려왔다. 헐렁한 셔츠와 바지 차림새에 두 남자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어떻게
봐도 남자의 옷이었다.

“너, 이…….”

“누님, 그 옷…….”

두 사람이 말을 채 끝내기 전에 로젤린이 마카롱 위로 풀썩 엎어지며 그를 안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꼭꼭.


마카롱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어디 갔었어.”

로젤린의 볼이 남자의 가슴에 꾹 눌렸다. 덕분에 한쪽 눈이 작아졌다. 마카롱이 그녀를 슬쩍 내려 보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모자란 자식이 귀엽다더니…….’

마카롱이 투박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쓸었다.

“몸은 어때.”
“완전 좋아.”

“기분은 어때.”

“진짜 좋아.”

로젤린이 히히 웃었다. 마카롱이 눈썹을 찌푸린 채 슬쩍 미소 지었다.

“로젤린.”

“응.”

마카롱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지켜 줄게.”

로젤린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눈물이 왈칵 날 뻔했다.

* * *

누구지?

“어서 와라, 라헤.”

이 녹아내릴 듯 다정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

“저번에는 수고가 많았다. 덕분에 로젤린 경이 크게 호전되었어.”

눈을 휘며 웃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그 어떤 화공도 그려 내지 못할 고고한 아름다움이 은은히 번지고 있었다.

‘이……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야!’

저번 방문 때만 해도,

[이 자식, 네가 하는 게 뭐가 있어서 이렇게 늦어! 부른 게 언제인데! 사냥 대회에서 한 것도 없으면서


피곤하다고 밥 먹고 간식 먹고 침대에서 뒹굴거리기나 했겠지! 이 굼벵이 같은 놈!]

이라는 말로 환영 인사를 대신했던 인간이! 라헤, 저번에는 수고가 많았…… 따위의 치하와 함께 상냥한
목소리와 미소로 자신을 반기다니. 라헤안시는 코를 씰룩거리며 경직된 미소를 지었다.

“예에 형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이 아우가 아주 기쁩니다……. 가, 갑작스럽게 방문하겠다 연락을 드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귀한 손님이 왔는데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얘기하자. 뭐라도 들겠니?”

라헤안시의 팔에 소름 돋았다. 이 형이 어디서 뭘 잘못 주워 먹었나 싶은 생각과 상반되게 말은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에헤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라헤안시는 연신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리카르디스가 손수 안내해 준 소파에 마주 앉았다. 테이블에는 금세


다과가 차려졌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내리깔고 온화한 표정으로 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햇살이 반짝반짝 떠도는
가운데 느슨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는 그의 분위기는 갓 구운 식빵 안쪽보다도 보드랍고 따스했다.

로젤린을 치료했다고 살갑게 대할 거였으면, 그 당일 날 이 소름 돋는 광경을 목도했으리라.

그는 직감적으로 리카르디스와 로젤린 사이에 불고 있던 냉랭한 겨울바람이 지나갔음을 깨달았다. 라헤안시는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남의 연애사에 끼어서 내가 이 무슨 못 볼꼴을…….

“라헤.”

“예, 형님!”

기합이 바짝 들어 있는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가 ‘녀석, 참 귀엽기도 하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급한 일이 있다면서.”

“아차.”

라헤안시는 비로소 본래 목적을 자각했다.

“또 신전 선에서 덮일 사건이라 형한테까지는 소식이 안 들어갈 거 같아서.”

달그락.

리카르디스가 찻잔을 내려놓고,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켜 앞으로 숙이자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또’라…….”

159 화.

사냥 대회 전, 황실의 숲에서 난도질된 신관의 시체가 발견되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또 무슨


일이 발생했다? 이 시기에? 우연일 리 없었다.
“또 시체라도 발견되었나?”

리카르디스의 말투가 평소처럼 돌아왔다. 라헤안시는 숨이 탁 트이는 후련한 기분에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 이번 신관은 목이 잘렸어! 머리는 아직 발견 못했어!”

대신관이 신관이 살해당했다는 말을 너무나도 해맑게 했다. 리카르디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눈이 탁자


언저리를 떠돌았다. 리카르디스가 아래를 내려다본 채 탁자를 손가락으로 탁, 탁, 탁 두드렸다.

“대신전에서 사라진 신관은 있었고?”

“응, 어제 바로 사라졌다네, 대충 사망 추정 시간이 나왔는데 그때랑 비슷하다 하더라고. 보니까 뭐로 쑤셨는지


배가 뚫려서 너덜거리고 팔다리 여기저기 부러져 있고, 어우. 머리는 대체 어디 갔는지 찾을 수도 없고.”

“신관이 연쇄적으로 살해당하고 있는데 이걸 덮어?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건국일이 코앞인걸. 폐하께서 이 시기에 나쁜 얘기가 도는 걸 두고 볼 위인인감 어디.”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그놈의 권위는 더럽게 귀중히 여기는 작자였다.

신관이 또 죽었다. 리카르디스는 두 신관 살인 사건의 배경에 디에즈나 검은달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디에즈는
혹은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단순한 원한이라면 고작 두 명의 피해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필요에
의해서? 5 황자의 탈을 쓰고 있는 강한 무언가와 검은달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고작 신관 두 명의 죽음으로 이뤄
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와사삭, 와작.

경박하게 쿠키를 씹는 소리에 리카르디스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라헤안시가 시시덕거리면서 잇세리온이랑 얘기


중이었다.

“형님이 먼저 로젤린 경에게 사과했나?”

“…….”

정확히는 라헤안시 혼자 떠들고 있었고 잇세리온은 묵비권을 행사 중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인상이 험악해지기
시작하자 라헤안시가 아차 하며 눈치를 다시 살살 봤다.

“헤헤, 형, 소식 잘 물어 왔지?”

“……그래 뭐, 고생했다.”

두 사람은 조금 더 얘기를 나눴다. 베르움이 밤새도록 카드 게임을 연구하고 있다는 둥, 버려진 정원을 공사할
예정이었는데, 도자기를 들고 있는 여인의 석상이 부서져 있어서 어린 신관들이 술렁거리고 있다는 둥. 하카브
왕자가 대신전에 들러서 구경하고 갔는데, 진짜 잘생겼다는 둥, 아니 그래도 형이 훨씬 더 잘생겼으니까 걱정
말라는 둥. 9 할 정도가 라헤안시의 쓰잘머리 없는 잡담이었다.

로젤린 경의 머릿결이 좋아서 부러운데, 비법이 뭔지 알려 달라는 얘기가 나왔을 때, 리카르디스의 눈썹의 위치가
살짝 높아졌다. 그가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로젤린 경을 치료했을 때.”


“으응?”

“별다른 점은 못 느꼈고?”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마인이잖아. 성력을 쓸 때 특별한 점은 못 느꼈냐고.”

“아, 뭐 약간 성력이 새는 듯이 이상하더라, 마인이라 그런가 봐!”

리카르디스가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그래? 마인이라 그렇다고?”

라헤안시의 등 뒤로 식은땀을 뻘뻘 흘렀다. 이 형이 미쳤나, 숨기고 있던 거 아녔어?

“그으…… 렇지 않을까요.”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종착지는 맞은편 소파였다. 리카르디스가 라헤안시의 옆에


붙어 앉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라헤안시가 몸을 굳히며 눈만 굴렸다.

“내 동생, 라헤안시…….”

서두가 불길했다. 이 형이 진짜 왜, 왜, 왜 이래.

“아직 이리저리 재 보는 모양이구나. 그렇게 빼다간 정작 손을 얹어야 할 때를 놓친다.”

리카르디스의 손이 라헤안시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었다. 라헤안시가 끽, 하며 목 졸리는 소리를 냈다. 흘끗


옆으로 돌아간 라헤안시의 눈동자가 리카르디스와 딱 맞부딪쳤다. 역광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형형했다.

“목숨을 걸어 보기 좋은 때가 아니더냐. 이 전란의 한 가운데. 도박사가 손 놓고 있으려고?”

리카르디스가 씩 웃었다.

“로젤린 경에 대해 특별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으면 다시 찾아오거라. 이제 나가. 일해야 된다.”

말을 마친 리카르디스가 일어서서 집무 탁자로 돌아갔다. 라헤안시는 뻣뻣하게 굳어 집무실을 나섰다. 정문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베르움이 열어 주는 마차 문을 유령같이 지나쳤다. 안에 들어와 털썩 앉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라헤안시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으흐헤히호……. 무서운 형님일세…….”

자신이 로젤린의 이상을 알아챌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니. 라헤안시가 아는 리카르디스는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와 같은 도박을 즐기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분명 로젤린이 일반적인 마인과 다르다는 얘기를
자신이 발설하지 않으리라, 확신을 가진 것이다.

라헤안시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좀 반골같이 굴기는 했지.’


거기에다가 뭔 사건만 터지면 쪼르르 달려가서 이르고 있었으니. 자신의 마음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을 향해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손쉽게 알아챌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 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정보일 뿐, 어떻게 다뤄야 할지는 미지수였다. 섣부르게 터트렸다가는 얻는
것도 없이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라헤안시가 그 결과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걱정하는 일은 ‘죽기밖에’가 아니라
‘얻는 것도 없이’였다.

하지만 제 형, 리카르디스의 말대로 사건은 급격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큰 것과 큰 것이 부딪쳐 그사이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라헤안시는 곧 그 소용돌이에 뛰어들 때가 오리란 걸 알았다.

싱숭생숭한 기분을 달래고 있는데 옆에서 베르움이 울컥 화를 냈다. 요즘 카드 게임에서 자주 지더니 성미가
까다로워졌다.

“또 혼나셨습니까 대신관님? 제발 행실 좀 똑바로 하세요! 제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니 이놈이! 오늘은 아무 짓도 안 했거든? 편들어 주는 건 내 양심상 바라지도 않는다만, 누명을 씌우지는
말아야지!”

라헤안시는 창밖으로 제 신발을 던졌다. 베르움이 잔뜩 성질 낸 후, 시시각각 멀어지는 신발을 주우러 갔다.

18

짝짝짝짝짝…….

방 안을 울리는 박수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라리티아 남작 부인과 그녀의 하인들, 큰뿔산양 후작가의 하녀들,
그리고 클로에까지. 모두 감명 깊은 표정으로 박수쳤다. 그 옆에서 레티시아도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는 영원히
끊이지 않을 듯한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이 어찌나 완벽한 작품이란 말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곳 없는!

“아름다우십니다, 로젤린 경. 정말로요.”

“고맙습니다, 레티시아 경.”

클로에는 지난날의 악몽을 잠깐 떠올렸는지 눈물을 글썽이더니 손수건으로 톡톡 눈물을 훔쳐 냈다.

“로젤린 경, 한 번만 제자리에서 돌아 볼래요?”

로젤린이 빙그르르 돌았다. 하얗게 빛나는 드레스 자락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클로에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남작 부인, 정말….”

“예, 제 인생의 역작입니다! 제 모든 기술과 인력을 동원한!”

로젤린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구경했다. 과거 로젤린의 어머니, 에델바이스가 사 준 드레스도 소매와
치맛자락이 풍성하고 반짝반짝해서 예쁘긴 했지만, 그녀의 안목으로도 지금의 드레스가 자신에게 훨씬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치마를 둥글게 부풀린 일반적인 드레스가 아니었다. 몸의 선을 따라 딱 달라붙어 내려오는 드레스 라인은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었으나 엉덩이 아래를 기점으로 뒤편으로 넓게 퍼졌다. 흰색의 천에는 레이스와 자수를
덧대었고, 반짝거리는 보석도 촘촘히 일정한 간격으로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드레스의 상체 부분은 몸 안쪽을 감싼 불투명한 흰색 천 위로 레이스가 겹쳐져 있는 형태였다. 덕분에 가슴을


덮은 하얀색 천으로부터 하얀 꽃과 식물이 퍼져 나가며 자라나는 것같이 보였다. 그 레이스는 어깨와 쇄골을 넓게
드러내며, 팔을 꽉 감싸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겹쳐진 천이 없이 레이스로만 덮은 팔과 가슴 윗부분은
로젤린의 살결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로젤린이 신은 신발 또한 하얀색에 보석으로 촘촘히 장식되어 있었다. 또한, 대체 보석이 몇 개가 달린 것인지


모를 화려한 귀걸이를 장착한 상태였다.

“귀가 엄청 무겁습니다. 무기로 써도 될 것 같은데요.”

로젤린은 여차하면 귀걸이를 던져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클로에가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케이크!”

“예?”

“그 귀걸이 한 쌍이면 케이크 860 개 정도를 살 수 있어요, 로젤린 경!”

로젤린이 입을 떡 벌렸다.

“저, 저는 대체 귀에 뭘 걸고 있는 겁니까?”

860 개의 케이크?

“로젤린 경도 참. 귀걸이를 걸고 있잖아요? 참고로 옷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니까요. 먹다가 묻히고,
누구 패서 피 묻히면 안 되는 거 아시죠? 피는 잘 빠지지도 않아요.”

“먹지 않습니다. 싸우지 않습니다!”

“어쩜, 착하기도 하지.”

엄청난 결의가 느껴졌다. 클로에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움직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굳어 있었다. 목각 인형에다가 드레스를 입혀 둔 것 같았다. 클로에가 호호 웃었다.

“무도회 드레스가 아니라 예복 같네요. 하얀색이라 그런가.”

건국제 무도회에서 흰색이 허용되는 것은 오직 황족의 피를 이은 자들과 그들의 파트너뿐이었다. 수백 중에 오십


명도 안 되는 숫자. 모르긴 몰라도 많은 자들의 이목이 쏠릴 게 분명했다. 그것은 비단 그녀가 입은 드레스의
색뿐 아닌 많은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고 있을 테다.

“약간의 문제를 꼽자면…….”

지금 로젤린은 갓 태어난 동물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네 발로 기어 다닐


것 같았다. 클로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엉덩이 넣고.”

클로에가 뒤로 쭉 빠져 있는 로젤린의 엉덩이를 밀었다.

“가슴 펴고. 턱은 살짝 아래로.”

클로에는 계속해서 로젤린의 턱을 고정시킨 채 그녀의 날개 뼈 중앙을 부드럽게 눌렀다. 평소에 보던 로젤린의
곧바른 자세였다.

“음, 좋아. 이렇게 다녀야 해요, 알겠죠 로젤린 경? 엉덩이 빼면 혼나요.”

클로에가 가볍게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쳤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똑, 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클로에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참을성도 없으셔라. 로젤린 경,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마중 나오신 것 같아요.”

160 화.

로젤린은 조심조심 움직이다가 그녀의 말에 화색을 지었다. 로젤린이 급하게 거울을 보고 머리를 정리했다.

“저, 어디 이상한 곳은 없습니까?”

“그럼요.”

“예쁩니까?”

클로에가 새끼 고양이 바라보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쩜…… 귀엽기도 하지.

“세상에서 제일.”

클로에가 단언하는 말에 로젤린의 자신감이 상승했다. 라리티아 남작 부인도, 그녀의 하녀들도, 레티시아도,
클로에도, 모두 깜짝 놀라며 칭찬해 주지 않았나.
로젤린,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오늘의 자신은 매우 심각하게 예뻤다. 이 정도면 전하께서 깜짝 놀랄 것이다!
로젤린이 마음의 준비를 끝낸 모습을 보고 클로에가 손짓했다. 문이 열렸다.

* * *

성을 둘러싼 경비는 어느 때보다 삼엄했다. 병장기가 철컥, 덜그럭 소리를 울리는 바깥과 달리, 벽 하나를 두고
안쪽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춤을 추기도 하고, 술잔을 부딪치기도 했다. 황실 내에서 가장 넓은 파티 홀은
과장을 보태어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얀밤 기사단 내, 무도회에 입장 가능한 단원들은 모두 참석한 상태였다. 음악이 흐르는 공간 속 웃고 있는


그들은 연회를 즐기는 듯 보였으나, 그 누구의 눈에서도 방심을 읽어 낼 수는 없었다. 어떤 감미로운 음악도,
맛있는 음식도 기사들의 경계를 늦추지는 못했다.

아직 황제와 디에즈, 하카브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은 목적 없이 돌아다니며 아는 얼굴과
인사를 나눴다.

“인기가 좋으십니다, 단장님.”

파르딕트가 음식 접시를 들고 스타스에게 접근했다. 인기가 좋다는 말을 하면서도 시기나 질투 같은 감정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스타스에게 연이어 춤을 신청한 여자들이 스물이나 갓 넘었을까 싶은 어린 영애들이라 그런
듯했다. 스타스가 그의 말을 듣고 픽 웃었다.

“그러는 경은 인기가 없군.”

스타스도 파르딕트가 춤을 신청하고 거절당하는 장면을 몇 번 목격했다. 파르딕트가 껄껄 웃었다.

“수도 아가씨들의 취향은 아닌가 보죠. 알루웨에는 제가 한번 뜨면 난리가 납니다.”

“자네 가문 영지라고 날조하지 말게.”

“날조라니요, 제가 단장님을 한번 고래무덤에 초대해야겠습니다.”

툴툴거리던 파르딕트가 지나가던 시종의 트레이 위에 놓인 유리잔을 잡았다. 스타스가 그의 발을 꾹 밟았다.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빛에서 ‘우리가 놀러 왔나?’라는 뜻을 읽어 내고 파르딕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귀족과 왕족이 드나드는 문은 1 층, 황족과 그 파트너가 입장하는 곳은 2 층으로
연회장 안의 계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2 층 문이 열리면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든,
대화하든, 음식을 먹든, 밀회를 나누든 상관없이 그곳으로 눈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빛이 부서져 내리는 가운데 하얀 옷을 입고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오는 황족들의 자태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건 고귀함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2 층의 육중한 문이 열렸다.

“설원의 월계수,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 전하 듭십니다!”


“강철발굽, 테레지아 브레헤 백작 영애 듭십니다!”

엘피디오였다. 인성과 상반되는 외모인 만큼이나 하얀 예복이 잘 어울렸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려오는
아가씨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고고한 자태를 선보였다. 스타스는 직감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동요하게 만든 것이
황족의 입장이 아닌, 그 옆의 아가씨로 인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파르딕트도 그 여자를 보고 커헉, 하는 소리를
냈다.

“강철발굽의 미친 개망나니가 언제 풀려났습니까?”

스타스가 깜짝 놀라 그의 발을 다시 꾹 밟았다.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소리 낮추게.”

“아차, 아차. 예.”

강철발굽의 미친 개망나니, 테레지아. 과거 리카르디스에게 하루에 청혼서 스무 장을 보내고, 그의 뒤를 몰래


염탐하고, 그의 자는 모습을 보기 위해 높은 나무에 올라가는 등……의 화려한 전적을 가진 아가씨였다.

이후, 참다못한 그녀의 아버지 강철발굽 백작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라 별장에 처박았다더라, 그 별장에서
하루에 몇십 장씩 성전만 필사하고 있다더라, 소문만 무성하게 있었는데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테레지아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요조숙녀인 양 사랑스럽게 웃으며 엘피디오와 나란히 발맞춰 내려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엘피디오를 둘러쌌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만큼의 세력이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때였다. 엘피디오는
기분 좋다는 듯 웃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갖은 공을 세웠더라도, 지지 기반이 단단하니 불안감이 가시는
모양이었다.

“정말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그건, 정말 그렇군.”

외적으로 보기에는 둘 다 잘생기고 예쁘니 흠잡을 구석 없지만, 외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흠잡을 구석밖에 없다는
게 정말 잘 어울렸다. 강철발굽 백작이 노심초사하는 표정으로 제 딸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아직까지 그녀의
특이한 기질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타스는 돌아다니는 르원을 손짓해 불렀다.

“경계 대상이 하나 더 늘었다. 예의 주시하라.”

“예. 단원들에게 전달해 두겠습니다.”

르원에게 그 경계 대상이 누구라 꼬집어 말하지 않았음에도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스타스는 거대한 커튼이
물결치는 뒤에서 르원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 전하께서는 아직…… 모습을 안 보이시는군.”

그의 귓가로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튼에 가려져 있는 스타스를 보지 못했기에, 그를 지척에
두고 그의 주인을 욕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마인 하나를 등에 업고는 기세등등하지 않소. 이러다간 폐하가 건국일을 선포하고 난 다음에야 연극의
주인공처럼 나타날는지도.”
“이번 파트너도 붉은수레바퀴라 합디다.”

“내, 참. 리카르디스 전하도 전하거니와, 붉은수레바퀴의 딸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있으면 물어라도 볼 것인데 허구한 날 변방에만 박혀 있으니 원!”

“어렸을 때부터 그 집 딸이 유난스럽지 않았습니까. 출신이고 뭐고 간에 얼굴이 반반하니 홀랑 넘어갔겠지요.


정신 머리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

“…….”

남자들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그들은 그들의 진영에 붉은수레바퀴의 딸보다 유난스럽고, 미천한 출신이고 뭐고
간에 반반한 얼굴에 홀랑 넘어간, 정신머리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또 다른 영애의 존재를 자각한
모양이었다. 남자들이 심기 불편한 듯 크, 크흠 하며 애써 강철발굽의 테레지아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일라베니아를 끌어갈 유력한 후보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자들이 웃는 낯으로 엘피디오에게 접근했다. 스타스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새기듯 바라보았다. 음악이 두 번 정도 바뀌었을 때였을까.

여기저기, 왼쪽, 오른쪽, 뒤쪽. 서로를 향하거나 아슬하게 빗겨 나간 시선들이 서서히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의 이목이 살짝 위를 향해 있었기에, 스타스는 리카르디스가 무도회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전하 듭십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백작 영애 듭십니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멍하니 위층을 바라보았다.

“……천사?”

아까 전에 천한 출신, 얼굴만 반반…… 운운했던 자의 목소리였다. 확 뒤바뀐 그의 태도를 그저 웃어넘길 수


없었던 이유는, 스타스가 그 남자와 비슷한 감상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치장하는 걸 지독히도 싫어해 건국일마다 단출한 차림새로 나타났던 리카르디스 또한 아름답고 손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의 고고한 한 송이의 꽃 같았으나……. 체스 게임의 승패로 장신구를 더하고 빼는 구질구질한 나날을 탈피한,
시녀들의 혼이 담긴 치장의 저력은 가히 치명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아, 아름다워!”

사실 건국제에 황족들이 입는 하얀색 예복은 매년 특별할 것 없이 비슷한 형태였다. 다른 이들처럼 색으로 승부할
수 없으니, 화려한 형태를 덧대고, 금실, 은실을 사용한 화려한 자수를 덧대고, 또 두르고.

촌스럽다거나 예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과하다고 느낄 만한 부분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는 아주 적당히, 과하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단정하여 어딘가 금욕적으로 느껴지는 옷의
형태! 색은 고고하고, 형태는 단아하고, 장신구는 화려하게 띄워 주고, 그 모든 아름다움의 마침표는, 얼굴로!

어린 아가씨들이 눈물지었다. 다들 문이 열림과 동시에 환각을 보았다. 리카르디스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그런
환각이었다. 오늘따라 더욱 결 좋게 빛나는 은발, 몸의 선을 따라붙는 복식은 섬세한 자수로 인해 더욱 그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여러 개의 반지와 치장한 장신구들이 도리어 모자라 보일 정도의, 저 얼굴. 저, 몸. 완벽하다. 신이 빚은
피조물 중 가장 완벽한 형태!

리카르디스가 살짝 뒤를 돌며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다들 그 후광에 가려 그의 파트너를 깜빡 잊고 있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이 공간 안에 리카르디스를 모르는 자는 있어도 로젤린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타국의


귀족들은 그녀를 소문으로만 들었다. 마인이고 되게 강하고 뭐, 검은달을 작신 밟아 주었고, 1 황자 파에 속하는
가문임에도 자신의 신념으로 2 황자에게 충성을 바치고. 그 희한한 행보만큼이나 그녀의 외적인 부분도 많이 퍼져
있는 상태였다.

좋게 봐 줘도 평범한 수준이라는 평가였다. 매섭고, 날카롭게 쭉 찢어진 눈매도 눈매고, 체구도 아담한
맛이라고는 없이 길쭉하고 튼튼하고 탄탄하니 여기저기 보이는 어린 아가씨처럼 아기자기하고 풍성한 솜사탕 같은
드레스가 어울릴 리가 없었다.

‘음…….’

어?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아니 예상과는 달랐다.

리카르디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계단 하나하나를 내려오는 발걸음은 사뿐사뿐 가벼우면서도 경박하지 않았다. 여러


조명이 비춘 피부는 진주처럼 은은하게 반짝이며 빛나는 가운데,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입술은 과하게 붉지 않아
자연스러웠다.

계단의 뒤로 로젤린의 하얀 드레스 자락이 스르륵 끌렸다. 몸의 선에 딱 달라붙다가 엉덩이 아래부터 퍼지는
드레스는 인어의 꼬리처럼 우아하게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살랑였다.

굴곡진 검은 머리를 한쪽 어깨로 늘어트려 날카로운 눈매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매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잘 벼려진 칼같이, 맹수의 눈과 같이 어딘가 장엄한 기세가 느껴졌다. 어깨는 바르게 펴져 있고, 곧은
자세는 기품이 어려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는 그녀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더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 탄성을 터트렸다. 고작 스물 조금 넘은 여자에게서 받을 만한 느낌이 아니었다. 어느 나라 여왕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으리라.

161 화.
로젤린을 평가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의식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녀는 개별적으로 떨어트려
놓고 생각해 보자면 전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으나, 붙여 놓고 보니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남자 혼자
멀대같이 크거나, 여자가 난쟁이처럼 보일 정도의 부자연스러운 키 차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둘의 조화에 한 몫
더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점보다도 이따금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미소 짓는 두 사람의 사소한 행동에서 분위기가 녹아들며
맞춰지고 있었다. 같지 않아 겹쳐질 수는 없으나, 한 그림의 퍼즐같이 맞아떨어지기는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조화가 제법 묘해서 그런지,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이 계단을 내려오고도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다.

리카르디스의 눈동자는 로젤린만 담고 있었다. 환한 조명 아래 로젤린은 말 그대로 반짝, 반짝. 빛나는 중이었다.
그녀는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풍경이 휙휙 달라졌다.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멋진지. 넋을 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그 끈질긴 시선에 로젤린이 고개를 돌려 의문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딱, 두 시선이 맞아 떨어졌다. 로젤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아까까지 검날같이 주위를 겨누던 예리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딘가 멍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리카르디스는 무형의 기운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그녀의 허리에 제 손을 두었다. 로젤린이 멍한 표정을 천천히
누그러트리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빛을 받는 눈가가 반짝였다. 리카르디스는 손에 난 땀을 자신의 옷에 슥
문질러 닦았다.

처음 봤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바보처럼 굳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멈춘 시간 속에 그녀의 머리카락,


눈, 눈썹, 얼굴에 있는 솜털부터 옷의 차림새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보이는 반면 머리는 점차 혼몽해졌다. 문이
열리고, 아름답게 꾸민 로젤린을 본 후 아무 말도 못한 채 일 분이 그냥 흘러 가 버렸다.

문이 열렸을 때만 해도 눈을 반짝이며 무언가 기대를 품고 있던 로젤린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침울해졌다.


자신이 바보처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실망한 듯 보였다.

그녀가 비 오는 날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본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시간이 이미 너무 흘러 버렸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건만, 놓쳐 버린 것이다.

오죽하면 클로에가, 상단에 큰 타격을 입어도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는 그 클로에가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지금, 파트너가 몇 시간 동안 씻고, 향유로 문지르고, 닦고, 만지고, 바르고, 입는 개고생을 하고 나타났는데,
예쁘다는 말 한마디가 없어? 그러고도 전하가 남자입니까? 그러고도 사람이야! 하고 윽박지르고 싶어 하는
살벌한 얼굴이었다.

이후 리카르디스가 진심을 다해 예쁘다고 칭찬했음에도 로젤린은 그다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그대가 제일 예뻐!]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진짜야, 내가 본…….]
[전하가 더 예쁘십니다…….]

확실히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자면 여지없이 그렇다 해야 할 테지만, 리카르디스는 곧이곧대로 ‘그건 그렇지’
라는 대답을 할 정도의 인간 말종은 아니었다. 그는 로젤린의 말에 부정한 후, 최선을 다해, “저기 사람들이 왜
쳐다보는지 아나? 경이 너무 예뻐서다.”라던가, “오늘따라 하늘의 별이 흐드러졌다. 경이 너무 눈부셔서 별인
줄 알고 마중 나왔나 보다.” 따위의 10 세 미만 소녀들에게도 먹히지 않을 법한 개수작을 부렸다.

로젤린은 그 내용보다 리카르디스의 필사적인 자세가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마음을 풀고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하지만 예쁘다는 말 자체를 받아들인 건 아닌 듯해, 리카르디스는 내내 마음이 쓰였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연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 이곳을 쳐다보는 젊은 남자들을 향했다. 그들의 눈동자는
정확히 로젤린을 담고 있었다. 흥미, 혹은 호감이 느껴지는 눈빛.

리카르디스가 가볍게 제 볼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저 놈팡이들이 나중에 로젤린에게 접근해 손에 입 맞추며 아름다우시다 개수작질을 하겠지.’

애써 걸고 있는 온화한 표정 위로 살벌한 기세가 비쳤다. 심지어는 로젤린이 예쁘다는 말을 듣고 기뻐할 거라


생각하니 오장육부가 뒤틀려 밤에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자신이 ‘아름답다’ 라고 한 말은 의례적인 칭찬이라
받아들였으면서! 물론 거기에 제 잘못이 있으니 그녀를 원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쏟아지는 시선과 감탄에 로젤린이 으쓱하는 걸 본 리카르디스는 혈압이 올라서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안된다.
이대로는 안 돼. 진짜. 내가 제일 먼저 기쁘게 해 줄 거야. 다가오는 놈은 죽인다.

잠시간 머릿속으로 모의 살인을 했던 리카르디스가 제정신을 되찾고는 이를 으득 갈았다. 남을 탓할 게 아니었다.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더해서 못할망정, 할 말은 해야지.’

나란히 발맞춰 걷던 중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불렀다.

“로젤린.”

눈이 마주쳤다. 리카르디스는 마음속 깊숙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담아,

“오늘 그대가 매우 아름다워,”

하고 그녀의 허리에 얹은 손에 힘을 줬다.

“내 마음이 설렌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13 살 소년도 자신보다는 말을 잘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허접한


칭찬 문구에, 로젤린은 전에 없는 반응을 보였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슬쩍 아래로 내렸다. 속눈썹이 깜빡거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지금 망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로젤린이 수줍어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로젤린은 수줍어하는 게 맞았다.

로젤린은 여태껏 리카르디스가 한 ‘예쁘다’, ‘아름답다’는 말은 죄다 그의 내면에 가득 쌓여 있는 상냥함의


발로라 생각했다. 하얀 거짓말.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머리를 헝클어트릴 정도로 고민한 다음에 나오는 말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것은 둔한 로젤린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칭찬이 더해질수록 리카르디스 전하는 참
상냥하시구나 하는 생각만 강화되어 가던 중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연회장. 로젤린은 여지없이 자신이 할 일을 수행했다. 위험 요소가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느라
신경은 잔뜩 곤두서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누군가의 끈질긴 시선을 빠르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집요한 눈길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조명이 눈부셔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사이
리카르디스가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대리석에 반사된 빛무리가 넘실거리는 공간 속에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아름다운 리카르디스였으나, 환한 조명 아래의 그는 정말 벽에 그려진 그림이 튀어나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부드러운 눈빛과 표정이 로젤린의 마음 어딘가를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허리에 올라와 있는 단단한 손의
감촉에 몸 안쪽부터 떨려 왔다. 여전히 눈을 떼지 않고, 리카르디스는 말했다.

[오늘 그대가 매우 아름다워 내 마음이 설렌다.]

설렌다! 로젤린은 그제야 제 몸 안쪽을 잘게 떨게 만드는, 마음 어딘가가 간지러워 계속 웃음을 배어나게 만드는
이 이상한 마음이 ‘설렌다’라는 말에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데 이런 마음을 리카르디스가 먼저 말했다. 설렌다고. 놀라운 일이었다. 리카르디스 전하도 설레고 있었다니!

가슴을 뜨겁게 만들던 열은 점점 부풀며 머리로 올라갔다. 고개를 툭 떨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기묘한 열로 인해
머리가 무거워졌기 때문이었다. 전에 없던 감정의 자각과 함께 유례없는 반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수줍어하는’ 반응에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진심을 알아챘다 하더라도
‘아, 그렇지요? 저도 오늘 제가 굉장히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반응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갔다니.

이, 위대한 도약, 인류의 발전은 언제나 한 발짝 먼저 걷는 사람으로부터……. 리카르디스는 마음속으로


횡설수설했다.

“저도.”

작은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가 움찔해서 머릿속에서 방방 뛰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몰아내었다. 역시 ‘저도 제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는 빠지지 않는 것인가.

“저도 전하께서 매우 아름다우셔서, 계속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로젤린이 흘끗 위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에 있던 작은 리카르디스가 폭사했다.

그는 입을 턱 가리고 잠깐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애써 가라앉히려 해도 달아오르는


얼굴은 막을 길 없었다. 그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이 괴로워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전쟁, 발타.”

난데없이 속삭이는 말에 로젤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엘피디오, 디에즈.”

한 단어, 한 단어 내뱉을수록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점점 원상 복구 되었다. 너무 좋은 마음을 너무 싫은


마음으로 억누른다는 극단적인 방법이긴 했으나 효과는 좋아 보였다.

“하카브.”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은 리카르디스는 완벽하고도 멋진, 아름답고 여유로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눈동자에 의문의 빛을 띠고 바라보는 로젤린을 보고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굽힌 팔을 슬쩍 내밀었다.

“가실까요, 레이디.”

로젤린이 방긋 웃으며 그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162 화.

사람들 사이를 거닐던 로젤린은 스타스를 발견하고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음식 냄새에 취한 듯 몽롱하던
눈동자의 빛이 예리해져 있었다. 수백 명의 사람이 있는 너른 홀을 훑어본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푸른등불 공작, 큰뿔산양 후작, 바다협곡 백작, 황금정원 자작 등, 리카르디스의 아래에 있는 가문 이외에도
줄지어 그에게 인사하러 다가왔다. 그때마다 로젤린은 한걸음 앞에 나서서 다가온 사람을 위아래로 훑었다.
심장박동과 눈동자,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어떤 수작을 부리려 하지 않은지 판별하기 위함이었다.

“실례합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느릿하게 쳐다보는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덫에
걸린 쥐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로젤린이 가볍게 숨을 쉬며 눈을 깜박이고, 한 걸음 물러서면 그때는 통과라는
뜻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파트너로 참석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호위를 데리고 온 건지, 파트너를 데리고
온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외양이 많이 달라졌다 생각했으나, 로젤린은 여기서도 여전히 로젤린이었다.

로젤린은 잠시 부단장 나단에게 불려 가 또 혼났다. 리카르디스 전하를 뵙고자 하는 사람마다 예비 범죄자 취급을
해 가며 위아래로 훑어보면 어쩌냐고 펄펄 날뛰었다. 로젤린은 멍한 얼굴로 나단의 잔소리를 흘렸다. 귀담아듣지
않는 방법을 터득한 모양이었다.
로젤린이 혼나는 사이 리카르디스는 저 멀리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엘피디오에게 시선을 두었다. 눈이
마주치자 엘피디오가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것인지, 미간의 주름이 평소보다 약했다.

리카르디스는 혼나고 돌아온 로젤린과 함께 그에게 다가갔다. 속이라도 긁어 놓을 요량이었으나, 엘피디오가


불쾌하다는 듯 발걸음을 돌려 떠난 탓에 아쉽게도 다음의 기회로 미뤄야 했다. 르원이 리카르디스의 뒤에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야, 엘피디오 전하께서도 나름 성장하신 것 같군요. 예전 같으면 앞뒤 안 가리고 전하께 시비를 걸었을
텐데요. 그러다 도리어 혈압이 오르셨겠지만.”

“형님이 약해진 모습을 보니 가슴 한쪽이 아릿해지는군. 놀리는 맛이 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연회가 계속되는 중에도 엘피디오는 리카르디스만 보면 다른 곳으로 자리를 피했다. 급한 용무가 있다는 듯
가장했으나, 다른 사람들조차도 엘피디오가 리카르디스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두 형제간의
관계라면 같은 성 안에 있는 것도 힘든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냐며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평소의 리카르디스였다면 엘피디오를 주의 깊게 살폈을 테지만, 지금은 보다 중요한 건에 신경이 쏠려 있는


상태였다.

일라베니아의 또 다른 유력 후계자인 리카르디스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일은 당연했다. 때문에 연회장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전부 예비 암살자 내지는 적으로 규정하며 곁을 지키던 로젤린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문다든가, 음식 테이블 쪽을 원수라도 되는 양
쳐다보다가 눈물을 찔끔 흘린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보는 사람의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슬퍼한 통에,
리카르디스는 결국 그녀를 보내 줘야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왼쪽은 레이몬드, 오른쪽은 파르딕트, 뒤쪽은 슈텐으로 평균 키 192cm 의 거대한 벽으로
둘러싼 후에야 마음껏 먹고 오라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불안해하던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스타스와 나단, 카일로 포함한 호위들에게 보호받는 모습을 보고 걸음을
옮겼다. 도도하지만 재빠른 발걸음이 얼른 먹고 돌아오겠다는 의지를 표출하고 있었다.

그렇게 떨어진 지 십오 분.

‘고작 십오 분 만에.’

로젤린을 둘러싼 192cm 의 벽들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음식 테이블에서 이게 맛있네, 저게
맛있네 하며 희희덕거리던 네 명의 기사들에게 화려하게 치장한 아가씨들이 돌입했기 때문이었다.

돌도 부수는 악력을 지닌 기사들이 자그마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식은땀을 흘리는 꼴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진귀한 광경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여자 무리를 끌고 왔던 장본인은 얘기를 나누는 시늉만 하고는, 로젤린을
쏙 빼앗아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몬드와 슈텐, 파르딕트은 여자들에게 신경 쓰느라 동료 기사 한 명이 사라진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멀리서


그 광경을 목격한 리카르디스만 혈압이 올라 잠시 관자놀이를 누른 채 눈을 감아야 했다.

그는 당장 로젤린에게 걸어가려 했지만, 주위를 둘러싼 손님들로 인해 결국 분한 듯 입술을 짓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굶길 것을, 이라는 잔인한 생각이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스쳤다.
로젤린을 빼돌린 남자는 연회장의 수많은 발코니 중 한 곳에 당도하고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붉은 커튼이 닫힌 듯,
열린 듯 애매하게 반쯤 걸쳐진 곳이었다. 남자는 가볍게 커튼을 젖히며 발을 들이려다가 안쪽의 선객을 보고
멈칫했다. 커튼을 다 닫지 못할 정도로 무언가에 심취해 있던, 한 몸처럼 붙어 있던 남녀가 입술을 부딪친 그
상태로 눈을 크게 떴다.

[키스는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거든요.]

로젤린은 예전에 클로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여자와 남자는 몸으로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이다!
로젤린은 흥미롭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적나라한 시선에 몸으로 사랑의 대화를 나누던 자들은
당황했다. 커튼을 열어젖힌 남자만 태연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이런 실례.”

남자는 짧은 사과 후에 붉은 커튼을 꼭꼭 닫아 주고, 로젤린을 데리고 다른 발코니로 향했다. 두 번째로 도착한


곳은 텅 비어있었다.

남자는 붉은 커튼을 묶고 있는 끈을 풀지 않았다. 보통 커튼을 치는 경우는, 비밀스러운 대담과 몸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기 위한 용도였으므로 끈을 푸는 그 순간 갖은 소문이 퍼질게 분명했다. 로젤린은
거기까지는 몰랐지만, 굳이 그의 행동에 의문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아치 모양의 경계가 연회장 안쪽의 광경을 고스란히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발코니는 안쪽보다도 조용하고
어두웠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로젤린이 연회장으로부터 눈길을 돌린 순간, 그녀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밝은 금발을 뒤로 넘겨, 잘생긴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눈빛은 그윽하고 코도 오뚝했다. 총체적으로
평하자면 미남이라 말할 수 있었으나, 어딘가 오만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남자가 돌연 싱긋 웃었다. 웃으니 인상이 달라져, 쿠키 한 개 정도는 그냥 줄 수 있을 법한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렇다 해도 낯선 사람은 항시 경계하라는 얘기를 달고 살았던 덕에 로젤린은 의심스럽다는 듯 탐색의
눈으로 남자를 주시했다.

“리카르디스 전하에 대한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토론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제 얘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빨리 돌아가 봐야 합니다.”

“급하시군요, 우선 숨 좀 돌리죠.”

남자가 음료가 담긴 잔을 로젤린에게 건넸다.

“나를 기억합니까, 로젤린 양?”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었다. 로젤린은 잔을 받은 후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어릴 적에는 자주 만났었지. 로젤린 양도 나를 오라비라 부르며 잘 따랐고 말입니다.”

존대에 애매하게 반말이 섞여 있어, 어찌 보면 무례할 수 있으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남자가 잔을 들고 있지


않은 로젤린의 반대쪽 손을 부드럽게 잡아 올려 그 위에 입술을 꾹 찍었다. 그가 손등에 입을 붙인 채 말했다.
“기억이 없다니, 이게 우리의 첫 만남이 되겠군. 사자갈기의 드윗. 드윗 아르페커가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인사드립니다.”

사자갈기라고 하면…….

사자갈기 공작가. 엘피디오의 어머니이자 일라베니아의 황후인 트리파의 가문이었다. 누구와 비슷하게 생겼다
했더니, 드윗의 얼굴에서 엘피디오가 언뜻 보였다. 같은 금발이라도 엘피디오와 디에즈보다, 엘피디오와 드윗이
더 형제 같아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드윗이 디에즈보다 성격이 더 나빠 보이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교육받았던 일라베니아 고위 귀족에 대한 정보 속에서 ‘드윗’이라는 이름을 떠올려 냈다. 사자갈기
공작가의 차남. 그러나 출중한 능력으로 장남을 꺾고 후계 위를 공고히 함.

그러니 자신을 드윗이라 소개한 이 남자가 사자갈기 공작가의 차기 공작이라는 소리였다. 엘피디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가문의 후계자.

어렸을 적 만났다는 말은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가기 전의 얘기일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의미가 없다 못해, 좋지 않게까지 변질될 수 있는 과거의 인연.

이 남자는 왜 자신을 부른 것일까. 로젤린의 눈은 드윗의 입에서 ‘사자갈기’라는 이름이 나올 때부터 경계의
빛을 담고 있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아르페커 백작님.”

남자는 자신의 작위를 로젤린이 알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하지만 칼릭스에게 갖은 교육을 받은 로젤린으로서는 제국의 단 4 개밖에 없는 공작 가문, 심지어는 엘피디오


세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문의 후계자 작위를 모를 수가 없었다. 초상화가 없어서 얼굴을 못
알아봤다지만.

“기억상실이라더니 익히는 속도가 빠르군요. 로젤린 양은 예전부터 머리가 좋았죠. 그런데 아르페커 백작님이라니.
로젤린 양에게 그렇게 불리니 기분이 굉장히 미묘한데요. 그냥 예전처럼 편안하게 오라버니라 부르면 됩니다.”

“예, 오라버니.”

“…….”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아니. 계속 그렇게 부르면 될 것 같아서.”

드윗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 이거, 기분 묘한데, 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정말 아름답군요, 로젤린 양. 오늘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어여쁜 숙녀가 되다니. 어릴 때


칼릭스 경을 괴롭히던 남자 애들의 발을 몰래 걸곤 하던 말괄량이였는데.”

로젤린은 지금 누군가가 칼릭스를 괴롭힌다면 발을 몰래 거는 것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때 로젤린 양이 나보고 혼인해 달라며 쫓아다녔던 건 기억합니까? 이렇게 예뻐질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확
결혼해 버렸을 텐데.”
“예?”

로젤린은 진심으로 놀랐다. 하지만 드윗은 씩 웃으면서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163 화.

“이거야 원, 빌려준 적 없는 100 골드도 받아 낼 수 있겠는데.”

로젤린은 그제야 그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젤린의 눈이 날카롭고 뾰족하게 바뀌자 드윗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날 너무 딱딱하게 대하니 그냥 농담 한 번 해 봤습니다. 아무리 오랜만에 만났다고 해도, 황성 경비병처럼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얼굴이라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상처받아요.”

그는 연극배우같이 호탕하게 웃더니, 이내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젤린은 한껏 분위기 잡은 드윗의 촉촉한
눈빛을 무표정한 얼굴로 멀뚱히 지켜보았다. 딱히 할 말도 없던 터라, 입마저 딱 다물고 있자, 그의 반듯한
얼굴에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드윗이 쳇 하는 소리를 잇새로 내뱉었다.

“기억을 잃는다고 기본 성격이나 성향이 바뀌지는 않는 모양이군. 황성 경비병을 꼬시는 쪽이 더 빠를 것 같은데,


이거.”

드윗은 멋들어진 미소를 지우고 불량한 자세로 난간에 슬쩍 기대었다. 거리가 몹시 가까우나 정중하던 아까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로젤린은 드윗의 바뀐 태도보다, 그가 내뱉은 말이 신경 쓰여 되물었다.

“저를 꼬시고 계셨던 겁니까?”

주위에 남자들이 많은 직업의 특성상, 로젤린은 ‘꼬신다’는 은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고상함으로 무장하고 있는 기사들은 이상하게 여자 문제가 엮이면 고상함을 벗다 못해 천둥벌거숭이처럼 구는
경향이 있었고, 덕분에 저렴해 보이는 어휘도 몇몇 개 익힌 상태였다.

드윗은 허탈해 보이는 웃음을 내보였다.

“인사한답시고 손등에 입술을 오 초 정도 붙이고 있으면 대부분은 알아채던데……. 더군다나 그 가까운 거리에서
갖은 교태를 부리며 웃고 집적거리면…….”

어쩐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입술이 손등에 닿아 있는 시간이 3.7 초 정도 길더라니!


“왠지 허무해지기 시작했어. 솔직히 어디 가서 빠지는 얼굴은 아니라서요, 내가 가까이서 근사한 미소를 보낼 때
두근거리지 않을 여자는 없을 텐데. 얼굴 한번 빨개지지 않다니. 로젤린 양의 심장은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거
아닙니까? 리카르디스 전하 곁에 너무 오래 있었나. 월장석 성의 여성 관계자들은 전부 시집을 늦게 가거나 못
갈 겁니다.”

뭔가 좀 재수 없었다.

“본인의 능력이 부족한 거 아닙니까?”

“내가 부족한 게 아니라,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꽉 차다 못해 흘러넘쳐 애먼 여자들의 눈을 이상하게 만들어 놓은


탓입니다. 저기에도, 리카르디스 전하께 홀린 여자가 한 명 있군요.”

드윗의 말에 로젤린은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 안쪽, 저 멀리에 리카르디스가 보였다. 그리고 그 리카르디스에게
푸른빛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다가가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다. 주의해야 하는 인물이 추가되었다며 아까 나단에게서 정보를 받았었다.


강철발굽의 테레지아. 과거 수많은 사건을 일으킨 문제아였다. 리카르디스를 향한 그 경악스럽고도 집요한 수많은
사건이 한 사람이 일으킨 일이었다니. 로젤린의 눈빛이 사납게 바뀌었다. 로젤린이 한 발짝 내디딘 순간, 드윗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워어, 진정해요 로젤린 양. 지금 어떤 얼굴인지는 아십니까? 누구 한 대 칠 것 같은 표정인데. 지금 본인이


얼마나 유명 인사인 줄 모르는 모양이군요. 눈에 띄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테레지아라도,
이렇게 사람 눈이 많은 곳에서는 잡혀갈 정도의 일은 저지르지 못할 테니 안심해도 될 겁니다.”

확실히, 과한 경계 때문에 나단에게 혼난 지 삼십 분도 흐르지 않았다. 지금 달려가서 테레지아를 떼어 내고


구속하려 한다면 이번에는 나단이 정말 뒤 목 잡고 쓰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저 호위만 하고 싶을 뿐인데
왜 이렇게 눈에 띈단 말인가! 하여간 유명한 것도 너무 피곤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계속해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는 평소와 같이 웃고 있었지만, 테레지아로부터 한걸음


물러서는 본능까지는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테레지아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하자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지탱했다. 리카르디스의 품 안에 테레지아가 폭 안겼다.

로젤린은 순간 속에서 확 하고 솟아오르는 불길에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손이 우악스럽게
부채를 쥐었다. 대가 휘더니 파작,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테레지아가 리카르디스의 팔뚝을 은근히 더듬고 있었다. 로젤린의
얼굴에 살기가 비쳤다. 그녀는 테레지아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부채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이로
부채의 끝을 잘근잘근 물고 싶은 걸 참고 있던 로젤린은 무언가가 자신의 허리를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젤린이 낯선 감각에 제 허리를 쳐다보았다. 아까까지 어깨 위에 있던 드윗의 손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로젤린의 고개가 드윗을 향했다. 드윗이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하지만 눈에는 열을 담고 그녀를
응시했다.

“설마 지금 그 은밀한 신호를…… 실수라고 말하지는 않겠죠, 로젤린 양.”

“예? 무얼 말하는 겁니까?”


드윗이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하게 실수였나 본데…….” 하고 중얼거렸다.

“여성들이 쓰는 부채의 사용법을 배운 적 있습니까?”

부채의 사용법? 여러 형태와 여러 움직임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 로젤린은 자신의 부채가 어떤 모양으로,
어디에 가 있는지 확인했다.

“…….”

로젤린은 반 정도 펼쳐진 상태로 입술에 닿아 있는 부채를 조심스레 내리고는 드윗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의
얼굴에 퍼져 있는 흐린 미소에 로젤린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방금, 자신이 했던 행동이 무얼 뜻하는지는
클로에에게 이미 배워 알고 있었다.

‘키스해 주세요’ 였다. 그 ‘키스’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행위라는 사실과 더불어, 어딘가 야시시한
느낌이라는 것을 로젤린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렇게 초면의 사람과 나눌 만한 행위도 아니었고,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확실하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로젤린은 고개를 슬쩍 숙이고 웅얼거렸다.

“실수였습니다. 제가 기억상실이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글쎄요, 그렇게까지 잘 아는 건 아니라서.”

“신사분이니 숙녀의 실수는 모른 척 넘어가셔야죠.”

드윗이 피식 웃었다.

“확실하게 나를 모르는 군요, 로젤린 양.”

그의 손가락이 로젤린의 턱 끝에 닿더니, 아래를 향한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딱히 그 흐름에 거스르지


않았던 로젤린은 드윗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과거에 로젤린 양이 내게 한 말이 있습니다. ‘드윗 영식께선 신사는 못 되시겠군요’라고.”

드윗은 고개를 숙여 그녀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 있는 신사를 찾으셨나. 아가씨.”

로젤린은 그의 어깨를 슬그머니 밀며 묘한 기류를 깨트렸다.

“제가 오라버니라고 안 불렀나 봅니다.”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백작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 ‘로젤린’에게서 그런 얘기를 듣다니. 대체 드윗 이 남자, 무슨 짓을 했던 걸까. 로젤린이 께름칙하다는 듯


쳐다보는 눈빛에도 드윗은 연신 혀를 차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벌레 쳐다보듯 하던 로젤린 양이 순수한 표정으로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기회를 놓치다니. 멍청한 짓을 했어.
이래서 사람은 한때의 욕망에 몸을 맡기면 안 된다고 그러는 건가.”

“사이가 별로 안 좋았습니까?”
“로젤린 양은 내 자유로운 행동을 그다지 곱게 보는 부류가 아니었고, 나는 형처럼 나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던 로젤린 양을…… 내심 돌이나 한 달간 건조한 바게트라고 생각했던 부류였지.”

로젤린은 갓 구운 바게트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사이가 안 좋았군요.”

“그렇다고 지금 나쁠 필요는 없지. 안 그렇습니까 로젤린 양? 나는 지금의 로젤린 양이 제법 마음에 들거든.


약간…… 뭔가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어쩐지 욕하는 것 같아 기분 나빴다. 로젤린의 그런 마음도 모르고 드윗이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로젤린은 조금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꼬시지 마시죠.”

“아,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그만. 아무튼, 나도 예전처럼 물불 안 가리던 때보다는 얌전해졌고, 로젤린 양도
예전보다는 유해졌지 않습니까. 오늘을 기회로 만나면 인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같이 놀러
나가기도 하고, 로젤린 양은 저를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그렇게 지내죠.”

“싫습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데. 특별한 이유라도?”

“개인적으로는 백작님이 좀 웃기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자갈기는 전하와 반목하고 있으니, 저 또한 반목할
수밖에요.”

드윗이 씩 웃었다.

“로젤린 양이 잘못 알고 있는 점은, 사자갈기는 리카르디스 전하와 반목하는 게 아니라, 엘피디오 전하를 지지할
뿐이라는 것이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같은 말이면 똑같이 말하면 되지, 왜 부러 입 아프게 다르게 말합니까. 들어 본 적 있을 텐데, 로젤린 양?”

드윗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자 갈기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용맹한 사람이 아니다.”

로젤린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또 이렇게 거리가 가까워진 것인지. 정말 틈을 줄 수 없는 남자였다.


로젤린이 부채로 그의 입을 툭 막고는 되물었다.

“그럼 누가 붙잡습니까?”

“동료들이 사자 대가리 앞에서 죽어 가고 있는 동안, 덜덜 떨면서 숨어 있다가 배부른 사자가 잠자고 있을 때야


슬그머니 창을 쥐고 오는.”

그가 웃었다. 부채에 가려져 입이 보이진 않았으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비겁한 기회주의자.”
164 화.

그 말을 마친 드윗이 몸을 뒤로 물리며 로젤린과 거리를 벌렸다. 그래 봤자 겨우 한 발짝 떨어졌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대화거리가 좁은 사람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사자갈기가 대외적으로 내세운 건 용맹함이 맞으니 아무 데서나 ‘사자갈기는 비겁한
기회주의자’ 이런 말 하면 큰일 납니다, 로젤린 경.”

“그러면 말을 해도 되는 곳이 있습니까?”

“로젤린 양이 이 말을 전해 주고 싶은 사람에게 하면 될 것 같군요. 뜬금없이 엘피디오 전하께 말하고 싶은


기분만 되지 않는다면.”

로젤린은 누구에게 말을 해도 좋나 혼란스러워했으나, 드윗이 말하고 있는 바는 명확했다. 엘피디오 세력의


주축이나 다름없는 사자갈기의 후계자가 자신의 가문을 비겁한 기회주의자라 칭했다. 완벽한 엘피디오의 편이
아니며, 흐름이 뒤바뀌면 자신 또한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니 자신의 주인 또한 바뀔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것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모로 보나 엘피디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얘기가 아니니, 그의 주적인 리카르디스에게 이르라는 말이겠지만,


로젤린은 아직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드러난 로젤린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녀가 부르르 떨자,
그것을 추워서 나온 행동이라 착각한 드윗이 겉옷을 벗으려 했다.

턱.

드윗은 손목을 감싼 단단한 악력에 순간 악, 비명이라도 지를 뻔했다. 홱 고개를 돌려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한
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둠 속에서도 인간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을 발하는 남자가 눈을 빛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남자의 가슴이 높게 올라왔다가 다시 푹 가라앉았다. 급히 뛰어와 숨이 찬다기보다는, 속에 들끓는 화를
진화시키려 차가운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는 것처럼 보였다.

달빛에 더욱 희게 빛나는 은발이 하얀 옷 위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제국의 2 황자,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였다.
“……드윗 아르페커…….”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드윗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크게 움직였다.

리카르디스는 엘피디오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그에 비하면 한없이 정중하고 점잖은, 그야말로 ‘황실의
고귀함’이란 단어를 인간으로 형상화한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인식이 박혀 있던 터라, 드윗은 지금
리카르디스가 ‘……이 새끼…….’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환청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드윗이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웃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2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리카르디스는 대답 없이 싸늘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드윗은 자신이 뭘 잘못했나 돌이켜 생각했다.

만약 리카르디스가 자신과 로젤린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았다면?

로젤린의 ‘키스해 주세요’부터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이 집적거리는 모습까지 모두 보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각도 상 키스를 했다 착각했을 수도 있지만, 다 큰 성인 여자 남자가 밤의 연회에서 끈적한 기류를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끼는 부하가 타 세력의 간부쯤 되는 인간과 노닥거리는 꼴이 보기 싫었던 탓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연회 한


도중에, 집요한 테레지아를 포함한 그를 찾는 많은 사람들을 다 두고 왔다고? 뭔가 좀 이상했다.

드윗은 리카르디스의 등 뒤로 연회장을 확인했다. 아까까지 리카르디스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인사마저 제대로 하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까, 이 발코니에서
일어난 일을 보자마자 체면이고 사람들의 이목이고 뭐고 간에 무작정 왔다는 얘기였다.

그제야 드윗은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맹수 같은 눈빛이 보통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만약 시선으로 찌를 수 있었다면 난도질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설마…….’

드윗이 당황스러운 감정을 얼굴에 내보이자,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천천히 그의 손을 풀어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여자, 당황스러워하는 남자, 화내는 남자.

누가 봐도 순진한 아내를 꼬여 낸 불한당을 족치러 온 남편…… 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별다른 거사도
치르지 않았건만 익숙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다니. 드윗은 속으로 한탄했다. 그가 아픈 손목을 어루만지며 살짝
묵례했다.

“로젤린 양에게 볼일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저는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로젤린은 그 순간까지도 뭐가 뭔지 몰라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드윗은 도망치듯 발코니를 떠나다 조금


멀어졌다 싶을 때 뒤돌아보았다. 리카르디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가 커튼을 묶고 있던 끈을 돌아보지도 않고
끌렀다.

스르륵. 그게 끝이었다.

드윗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신의 가슴을 한바탕 휩쓸고 간 위기와 허망한 감정을 곱씹었다. ‘그’ 리카르디스
전하가, ‘그’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을?
드윗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다가 저 멀리에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아가씨들을 보고는 근사한
미소를 걸친 채 걸음을 옮겼다.

스르륵.

붉은 커튼이 연회장에서 나오는 빛을 가렸다. 음악 소리가 바로 옆의 큰 공간에서부터 흘러나와 잔잔하게


들려오고 있음에도, 어두워진 발코니는 완전히 연회장에서 떨어져 나온 별개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로젤린은 들뜬 기색으로 리카르디스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드윗과의 얘기가 끝나면 곧장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빨리 만나게 되어 몹시나 기뻤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그런 로젤린과 달리 그렇게 기뻐 보이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그의 턱 근육이 느릿하게 꿈틀거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

“사자갈기놈이 억지로 한 건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예? 뭘 억지로 합니까?”

“설마, 그게 뭔지도 모르는 건. 저, 개 같은.”

리카르디스는 이를 갈면서 지금은 붉은 커튼으로 가려진, 드윗이 사라진 발코니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까
물러간 드윗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올 기세였다. 하지만 리카르디스가 그의 머리채 대신 쥐어 잡은 것은 자신의
머리였다. 정돈된 머리를 헤집는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서 있었다. 잘 보니 살짝 떨리고 있기까지 했다.

리카르디스는 다른 곳을 보며 분을 삭이다가 다시 로젤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로젤린의 입가에


고정되었다. 그녀는 눈만 깜박거렸다. 억지로 뭘 해? 드윗이 뭘 했더라?

리카르디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단단한 손마디가 로젤린의 입술을 부드럽게 스쳤다. 리카르디스는
그에 그치지 않고 엄지손가락으로 화장이라도 하듯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로젤린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리카르디스의 손이 닿은 입술부터 시작해 가슴 안쪽 깊은 곳까지 솜뭉치가


굴러가는 듯한 간지러움이 번졌다.

그녀는 이상하게 리카르디스의 눈을 쳐다보기 힘들어서 그의 손이 원수라도 되는 양 뚫어지라 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가 말없이 정적을 지키고 있었기에, 결국은 고개를 조금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푸른
눈동자가 발코니 밖 정원을 은은히 밝히고 있는 등불로 인해 일렁이고 있었다.

“……입술 화장이 지워졌군.”

아까 음식을 먹을 때, 크림이 입에 묻어서 혀로 삭삭 핥았더니 조금 지워졌더랬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세상에, 몹시 야성적이고 멋있었다. 로젤린의 가슴이 설레었다.

리카르디스가 난간에 있는 샴페인 잔을 들어 손수건을 살짝 적셨다. 그러고는 로젤린의 입술을 벅벅 닦았다. 아플


정도로 쓸렸다. 로젤린이 얼굴을 찡그리자 리카르디스가 손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하…….” 하고
깊은숨을 쉬었다.
“백작이 그대와…… 합의되지 않은 행위를 억지로 한 것이라면, 법으로 처벌 가능하다. 내가 증인이니. 결투
재판을 하겠나? 실수인 척하고 죽여도 된다. 내가 무마해 주겠다.”

로젤린은 더욱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백작님은 저에게 합의되지 않은 행위를 억지로 한 적은 없으십니다.”

그러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더욱 사나워졌다.

“그럼 합의된 사항이란 말인가? 그대가 허락했다고? 그러고 보니 입가에 부채를 먼저 가져다 댄 건, 젠장.
로젤린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고? 그래, 그대도 이제 스물세 살, 다음 달 생일이 지나면 스물네 살!
어엿한 성인이라는 걸 내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그래도 상대는 가려야지 사자갈기의 드윗? 드윗 아르페커? 그
자유분방한 하반신을 가진 몹쓸 망종…… 아니, 나와 반하는 세력의 남자와?”

로젤린은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그를 달래기 위해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백작님은 전하와 반목하는 것이 아니라 엘피디오 전하를 지지할 뿐이라고 합니다.”

로젤린은 아까 드윗에게 들었던 말을 훌륭하게 써먹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리카르디스의 눈에 불이 붙었다.

“로젤린 에스터!”

로젤린은 그제야 분위기를 읽고 입을 합 다물었다. 정확하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가 말한 내용을 반추했다. 합의된 사항. 입가에 부채를 먼저…….

이거다.

입에 부채를!

‘혹시 입을 맞췄다 생각하시는 건가?’

로젤린은 답을 유추해 냈다. 확실히, 다른 세력의 유력한 가문 후계자와 자신이 입을 맞추다니, 간자라
의심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의 분노는 그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었으나, 로젤린은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165 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전하. 저는 백작님이 리카르디스 전하에 대한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토론을 하자고 해서
……. 아차, 백작님이 말하고 싶은 사람한테 사자갈기는 용맹하지 않다는 얘기를 전해도 좋다고 했는데요, 제가
전하께 말씀 드리고 싶다고 말했었던가요?”

리카르디스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화를 풀기는커녕, 돋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로젤린은


동작을 크게 하며 어떻게든 설명을 이어 가려 했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입가에 부채를 가져다 대었는데, 백작님이…….”

로젤린이 아까와 같이 부채를 입에 가져다 댄 순간,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목을 콱 잡았다. 그가 한 발짝 더


다가서며 그녀를 당겼다. 리카르디스의 구두가 로젤린의 두 발 사이로 틈새를 비집듯 들어갔다. 몸이 닿는 가까운
거리. 그의 얼굴에 내려앉은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목소리는 음산했다. 로젤린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지 대답을 빨리
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키스해 주세요……!”

로젤린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어두워진 푸른 눈동자 속에서 불티가 튀는 것 같더니, 손목을 틀어쥔 그의


손아귀 힘이 세졌다. 로젤린이 의문을 가지고 리카르디스를 올려다본 순간, 얼굴이 가까워졌다. 로젤린은 숨을
헉 삼켰다. 코끝이 닿았다. 그 가까운 거리에서 리카르디스가 이를 갈았다.

“알고 있었어?”

베일 듯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로젤린이 덜컥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순간,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뒤 머리를


감쌌다. 곧 차가운 손끝이 로젤린의 뒤 목과 귓불에 닿았다. 마찰 되는 살갗의 온도가 로젤린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이후 닿은 것은, 차갑고 시린 목소리가 아니라, 싸늘해진 누군가의 입술이었다. 로젤린의 입술이 거칠게
짓눌렸다.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읍!”

로젤린은 놀라서 짧은 비명을 질렀다. 입술이 닿은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더 나아가, 입술 위를 뜨겁고 축축한
무언가가 느릿하게 가로질렀다.

“으읍!”

로젤린은 벌레를 발견한 6 살배기 어린아이가 입을 가리고 경악하는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놀랍고, 간지럽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머릿속을 잔뜩 채웠다.

“저, 전하! 잠시, 만요!”

로젤린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숨 가쁜 애원을 했다. 리카르디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 무표정한 얼굴 속, 미동 없이 자신을 포착한 눈을 보고 부르르 떨었다.
로젤린이 한걸음 물러서자 리카르디스가 한걸음 따라붙었다. 몇 번 반복된 짧은 술래잡기는 로젤린의 등이 벽에
닿고서야 끝났다.

로젤린은 눈동자를 굴리며 여전히 당황하는 중이었고, 리카르디스는 벽에 자신의 구두코가 닿을 정도로, 그녀와
바싹 붙어서 섰다. 몸이 틈새 없이 딱 달라붙었다. 로젤린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그녀의 온기와 심장
소리가 리카르디스를 부드럽게 짓눌렀다. 그는 가만히 로젤린을 가만히 응시하다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로젤린의 몸이 흠칫 떨렸다.

로젤린의 엉덩이 위, 허리 부근에 올라와 있던 커다란 손이 스르륵 움직이며 그녀의 날개뼈 아래까지 지그시 쓸어
올렸다. 몇 겹의 천 위로 닿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의 손가락이 로젤린의 척추를 따라 들어간 부분을 부드럽게
덧그렸다.

로젤린은 하, 아. 숨을 불규칙적으로 내뱉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닿은 부위부터 오싹오싹한 감각이 퍼졌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로젤린은 차마 리카르디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의 목과
턱선만 바라보았다. 턱이 움직였다. 시야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싫으면 밀어내.”

정수리에 무언가가 가볍게 내려앉더니 쪽, 소리가 울렸다. 로젤린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훽 들어 올렸다.


리카르디스는 어딘가 날카로워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분명 밀어내라 했어.”

로젤린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어떤 행위가 덮쳐 올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걸 맨 정신으로 견디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로젤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앞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를 들었다.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학습이 아니라 본능이었나?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았다.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입술과 입술이 몇 번씩이나 부드럽게 맞닿기만 했다. 그의 차가운 입술이 열 오른
로젤린의 온도와 융화될 때까지,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입가와 입술에 끈질기게 입 맞췄다. 서서히 로젤린의
움츠러든 어깨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경직된 몸이 서서히 이완되고 있음을 느끼고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살짝 깨물고, 그 자리를 핥고, 빨아 올리고, 딱 다물린 입술의 틈새를 정성스럽게.

츱, 츱, 물기 젖은 소리가 울리자 로젤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가 아, 한숨인지 소리인지 모를 것을 내며


입을 벌리자 뜨거운 혀가 소리를 짓누르며 들어왔다.

저, 전하의 혀, 혀, 혀가. 들어와서는 입안 여기저기를! 앞니 뒤를! 송곳니와 천장을! 내 혀를 이렇게 저렇게!

그녀의 감탄은 곧 감각에 침식당했다. 팽팽한 이성이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몸을 꽉 결박한 기분 좋은 압박과
자신의 뒤 목을 감싼 리카르디스의 차가운 손끝, 입안을 뜨거운 온도로 채우는 그 모든 감각이 생생했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등을 감싸 안았다.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하던 리카르디스의


예복이 로젤린의 손길로 인해 흐트러지며 구겨졌다. 리카르디스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드러난 살결 위를 흐르며
간지럽혔다. 그의 체취와 섞인 향수 냄새가 그녀를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아, 기분 좋아. 로젤린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간지러움에 익숙해지자,


봄날 햇살을 맞듯이 온몸이 노곤해졌다.
리카르디스의 심장 소리가 귀가 아닌 몸으로부터 전해졌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예복 아래 단단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온기와 맥박, 그의 숨이 그녀를 가득 감싸 안고 있었다. 로젤린은 생각했다. 내가
아이스크림이었다면, 녹아 버렸을 거야. 손가락 하나 남기지 않고,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흐물흐물하게.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숨을 들이마시다 그의 입안에서 향긋한 과실 향이 감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여태껏은 너무 놀라서 미처 몰랐던 듯했다. 자신이 마신 것과 같은 종류의 샴페인이 분명했다. 같은 맛이었다.
그런데 그 질 좋은 샴페인을 마시는 것보다, 리카르디스의 향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입을 붙이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입가를 핥더니 입술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그 후로도 핥고, 빨고, 문지르고. 한참을
지분거리던 그가 숨을 가볍게 몰아쉬다 머리를 살짝 뒤로 물렸다.

리카르디스 시선이 로젤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촉촉하고 붉어진 눈가, 젖어 있는 입술을 훑어 내렸다.
리카르디스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로젤린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리카르디스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와…… 저, 전하. 정말…… 좋은 냄새가…….”

리카르디스가 어이없다는 듯 노려보다 그녀의 입술을 왕하고 깨물었다. 입술로 잡아채듯 한 것이라 아프지는
않았다.

“냄새만 좋나?”

“예?”

리카르디스는 자존심 상해 보이는 낯으로 이를 갈며 말을 씹어 내뱉었다.

“기분은 안 좋았냐고. 이왕 한 거, 알아야 할 건 알아야겠다. 어느 쪽이 더 기분 좋았지? 누가 한 키스가 더


좋았나! 나야, 드윗 아르페커야! 내가 잘생겼나, 그놈이 잘생겼나! 솔직히 재력으로 보나 얼굴로 보나 내가
낫지 않나? 그대의 취향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를 하루 24 시간 중 12 시간 이상을 보면서 어떻게 다른
남자를 눈에 담을 수 있는 거지? 솔직히, 내가, 좀 잘생겼어야 말이지!”

분통을 터트리는 리카르디스는 평소라면 못할 말을 마구 쏟아 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품에 딱 달라붙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코앞에서 리카르디스가 입술을 짓이기듯 씹고 있었다.

아까까지 부드럽게 닿던 입술이었는데, 그렇게 아프게 눌리는 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로젤린이 그의 입술을


쓸었다. 리카르디스가 흠칫, 몸을 굳혔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 로젤린의 손을 피했다.

“……겨우 참고 있으니 자극하지 말고, 대답부터 하지 그러나.”

리카르디스가 곁눈질로 그녀를 재촉했다. 로젤린은 약간 어색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훨씬 잘생기셨고…….”

리카르디스가 흥, 하며 콧방귀를 꼈다. 당연히 그렇겠지라는 자신감이 엿보였지만, 드윗처럼 재수 없지 않았다.


물고기는 물 밖에서 살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절대적인 이치였기 때문이었다. 물고기는, 물에 산다. 리카르디스는,
잘생겼다.

로젤린은 어딘가 심통 나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키스는 백작님과는 안 했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혀를…… 그러니까 입만 맞췄나?”

“아니요, 백작님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을 가까이 하긴 했지만, 제가 부채 사용을 잘못했다는 걸


아시고 그냥 얘기만 나눴습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십 초 정도 그녀의 말을 잠자코 해석하기만 했다. 곧 ‘안 했다’의 의미를


혀뿐 아닌 입술도 부딪치지 않았다는 ‘안 했다’로 알게 된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리카르디스는 화들짝 놀라며 로젤린을 꽉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마치 자신이 왜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한 발짝 뒷걸음질한 리카르디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쥐구멍을 포함한 숨을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절망 가득한 얼굴을 큰 손으로 뒤덮어 가렸다. 시간이 흐른 후,
리카르디스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청해라.”

“예?”

“결투 재판을 신청해라. 실수로 죽여도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지. 신청해라. 그리고 날 죽여. 심장은 여기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가린 그대로, 다른 쪽 손으로 주먹을 쥐어 제 심장을 퍽 쳤다. 극단적이기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로젤린은 그새 부어 열감까지 느껴지는 입술을 매만졌다.

로젤린은 아까 리카르디스가 했던 말 중, 합의 어쩌고 하는 대목을 떠올려 냈다. 그러니까, 지금의 키스는


억지로 한 것이라 잘못했다 말하는 것이 아닐까.

로젤린은 섬세한 레이스의 문양을 매만지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

“……….”

“싫으면 밀어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저는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충성 맹세를 했다고 배려해 줄 필요 없다. 나는 그대가 이런 행위에 대한 통념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맞을 거고. 그런 약삭빠른 계산이었던 것이지. 나는 잘생겼고, 솔직히 그대도 나한테 호감이 좀 있지 않나.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잘생겼으니까, 그대가 잘 모르는 행위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거부하지 않을 거라는 그런
계산을…… 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은연중에 했을 거다. 금수보다 못한 머저리에게는 죽음이 차라리 자비로울
터. 죽여라.”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다가서며 그의 팔에 살포시 손을 올려 두었다. 아까 전, 강철발굽의 테레지아가 그를


더듬었던 곳이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손으로 내내 가리고 있던 눈을 드러내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복잡


미묘하고, 죄의식이 가득 들어찬 눈빛이란 걸 로젤린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또다시 심장의 위치를 알려 주고
찌르라고 말할 것 같았다.

그 말이 나오기 전, 로젤린이 천진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제가 정말 싫어했다면, 전하께서는 계속 키스하지 못하셨을 거란 걸, 잘 아실 텐데요.”

리카르디스는 다른 사람이 로젤린에게 입맞춤을 강요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입술이 닿기도 전에 머리가 반파되어
있는 결말밖에 나지 않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현실적인 위로였다.

“……그건…… 정말 그렇군.”

로젤린은 계속해서 찡그려져 있는 그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다급해 몇 마디 더 내뱉었다.

“기분 좋았습니다.”

리카르디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166 화.

“제 귀 뒤를 이상하게 만지면서 입천장을 핥아 주실 때 정말 기분 좋았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더니 난간 위로 푹 엎어졌다. 로젤린이 그의 곁에 다가가 섰다.

“전하?”

“……이건…… 수치도 모르는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좋다고 그 말을 되새기며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서 나온
자괴감의 발로이니……. 그대는 상냥함으로 더 이상 나를 찌르지 마라……. 시궁쥐에게 햇살은 너무 눈부시다…
….”

키스를 한 사람은 죽어 가고, 당한 사람은 그를 위로하는 이상한 광경이 수분 이어졌다. 리카르디스는 한참


후에야 마음을 조금 다잡고 몸을 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

“예.”
“방금, 그, 걸. 내가 한, 입, 입. 마, 앚…… 이입…….”

“키스요.”

“……………그래. 그것.”

로젤린의 입에서 키스라는 말이 나오자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가 자신의 입을 가리고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 행위는 상대방의 허락이 떨어져야지만 할 수 있는……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들끼리의 교감이다. 그대가, 기,


기분이, 큭……. 기분이 좋았다는 것과는 별개로, 맨 처음 그 행위를 할 때 그대의 의지나 생각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강요한 것은 명백한 무례야. 나는 그대에게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저질렀어. 이건 정말…
….”

리카르디스가 이를 갈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다 로젤린. 그대의 용서를 고맙게 받을 수 없는 것은 내가 이 무례에 대해 그대보다 조금 더 잘 알기


때문이야. 만약,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가해자가 나라고 할지라도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이 세상에서
존재를 없애 버려라. 그대와 같은 공기를 마실 만한 가치가 없는 쓰레기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까 전부터 극단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한탄하며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로젤린은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전하께서 반복해 사과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하, 저도 키스에 대해서는
무지하지 않습니다. 클로에 양에게 배운 적 있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클로에? 대체 그녀가 무얼 어떻게?

“키스는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하신 거 아닙니까?”

리카르디스가 입을 턱 가렸다. 곧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 상태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머리가 좋군.”

난데없는 칭찬에도 로젤린은 뿌듯했다. 난간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서 있던 리카르디스가 똑바로 몸을 일으켰다.
바람이 불었다. 그의 머리가 넓게 퍼지며 달빛에 빛났다. 아름다운 꽃이 휘날리는 것 같았다. 로젤린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대의 완벽한 지식에 경탄하며 양심 없이 묻겠는데, 로젤린.”

“예, 전하.”

“내가, 그대에게.”

리카르디스가 눈을 내리깔며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긴 속눈썹이 떨렸다.

“입을 맞춰도 되겠나?”

로젤린은 갑작스럽게 울리기 시작한 심장 소리에 깜짝 놀랐다. 자신의 심장이 이렇게나 세차게 뛸 수 있었는지는
또 몰랐다. 리카르디스에게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컸다. 피가 빠르게 도는 느낌이 들더니, 귀 끝에 열이
몰렸다. 로젤린은 괜히 손장난을 하다가 예, 하고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리카르디스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가 이마에 쪽 소리 나게 키스하더니 볼에도 입을 맞췄다. 닿는 부위마다


열이 번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코와 코가 스쳤다. 로젤린이 간지러워 웃음을 터트리자 리카르디스가 코앞에서
빙그레 웃었다.

그 다정한, 온기가 느껴지는 시선과 표정에 로젤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가슴이 저며 오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로젤린이 내내 그의 아름다움에


찬탄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더 이상 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어,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따뜻한 입술이 망설임 없이 그녀의 입가에 살포시
닿았다. 정중하고, 부드럽고, 아주 연약한 것이 부서질까 염려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키스는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 것만 같았다.

짧은 키스가 계속되며, 로젤린은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쪽쪽,
키스는, 사랑한다는 말의, 쪽, 다른 표현. 사랑한다는 말이야, 쪽.

부러 쪽 하고 내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로젤린이 흠칫흠칫 반응했기에, 리카르디스는 더욱 적극적으로 소리를


냈다. 로젤린은 아까처럼 제 혼을 쏙 빼놓던 혀 놀림을 기대했다가, 새가 쪼는 새 모이가 된 기분을 느끼게 되어
약간 억울했다. 눈을 살짝 치켜뜨자, 리카르디스가 시선을 맞춘 채 입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로젤린의 볼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뭐지, 사랑한다는 표현인데 왜 이렇게 몸 둘 바 모르는 기분이 되어 버리고
마는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장난기 넘치게 미소 짓고 있는 아름다운 남자를 보자니 눈도 시리고,
가슴도 시리고, 그에 반해 얼굴과 몸은 뜨겁게 달아오를 뿐이었다.

로젤린이 바라보자 리카르디스가 제 가슴에 올라와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 입 맞췄다. 손끝, 손마디, 손바닥에
도장이라도 찍듯이.

리카르디스는 가만히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붙이고 있다가 다시 얼굴을 확 붉혔다.

“그대는 정말…….”

그러고는 그녀의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듯 묻었다.

“……예뻐.”

웅얼거리는 소리가 손바닥에서 울렸다. 뒤 목에 소름이 돋아 로젤린은 부르르 떨었다.

“너무 예뻐.”

살짝 젖어 있는 목소리였다. 작게 속삭이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로젤린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통과했다.


로젤린은 잘게 떨다가 손 위에 있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졌다.

리카르디스가 붉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로젤린은 눈을 굴리며 망설이다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리카르디스처럼 혀를 막 이렇게 저렇게…… 하는 그건 몇 번 더 하고 배워 봐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똑똑.

그때,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리카르디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로젤린도 닫힌 붉은 커튼을
바라보았다. 커튼에서 그런 딱딱한 소리가 날 리 없으니, 누군가가 발코니 문가를 두드렸다고 봐야 했다.

리카르디스가 황급하게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살짝 촉촉한 입가를 문질러 닦고, 드레스 자락을
정리했다. 분주한 손놀림과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무슨 일인가.”

“……손님들이, 찾으시기에.”

레이몬드였다. 단란한 분위기를 깽판 친 놈의 정체를 눈치챈 리카르디스가 흠칫하고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보호자가 밖에 있었을 줄이야.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이제, 그만, 하시고, 나오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울음을 삼키는 비통한 목소리였다. 내용은 정중했으나 말투는 그만 좀 쪽쪽 대고 나오라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혹시 울고 있나, 레이몬드 경?”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델라브힘의, 영광이 눈부신, 이, 좋은…… 날에요…….”

저 피눈물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레이몬드는 안쪽에서 일어난 분홍빛 기류를 읽어 낸 게
틀림없었다. 리카르디스는 화끈해진 얼굴을 손 부채질로 식혔다.

그는 조금 후, 뻔뻔한 낯을 가장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로젤린 경의 입술 화장이 지워져서 그런데, 시녀를 좀 불러오지 그러나.”

“크흐흑…….”

역시 울고 있었다. 조금 미안했다. 금이야 옥이야 길러 온 고명 딸 비슷한 존재인 로젤린을 자신이 덥석 삼킨 게


아닌가. 누가 그러게 정신 팔려서 로젤린을 놓치라고 했나.

레이몬드가 터덜터덜 걸어가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때, 익숙한 음이 두 사람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가 달빛 아래에서 춤을 췄을 때 작게


들려오던 그 노래였다. 로젤린이 눈을 번쩍이더니,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한쪽은 제 등에, 한쪽은 마주 잡은 채로 자세를 잡았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크게 뜨자 로젤린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춤을 출 수 있을지 모릅니다. 솔직히 연회장 내부에는 맛있는 것이 너무 많기에.


저에게 춤이냐 먹을 거냐 하면, 아무리 배부른 상태라고 해도 춤을 선택할 가능성이 너무 낮습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스스로를 참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발은 음악에 따라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어어 하다가, 그녀의 움직임에 이끌려 같이 춤을 췄다.
공간에 흘러 들어오는 작은 음악 소리와 함께 풀벌레가 울었다. 달빛과 정원의 등불에 로젤린의 드레스가
반짝반짝 빛나며, 연회장이 무색할 정도의 아름다운 빛을 어두운 공간에 그려 냈다.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이 두 사람을 스쳤다. 로젤린은 뱅글뱅글 도는 동작을 하며 여지없이 웃다가, 리카르디스의
눈에 비친 달빛을 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하늘은 거대하고 선명한 달빛을 그려 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언젠가 본 적 있는 환한


달빛이었다.

* * *

여성용 화장품을 가지고 온 레이몬드가 발코니의 문가를 두드렸다.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그새 마음을 많이 정리한 듯이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그러나 들어온 직후, 화장이 말끔하게 지워진 로젤린의
입술을 본 레이몬드는 큭, 하는 신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손을 덜덜 떨면서도 완벽하게 로젤린의 화장을 고쳤다.

“전하께서는…… 배가 부르시겠습니다…….”

애 입술을 아주 그냥………. 리카르디스는 레이몬드가 눈물과 함께 삼킨 뒷말을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양심이


아주 조금은 찔렸기에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밤하늘에 떠 있는 별 개수만 헤아렸다.

167 화.

레이몬드가 로젤린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연회장의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아직, 1 군에 속하는 위험 인물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발타 사절단 대다수가 입장했습니다.


철저하게 확인한 바, 무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숨겨 오려고 한다면 피부나 몸 아래에 박는 수단도 있음이
입증되었기에 어지간하면 접촉은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발타 쪽 인사가 다가오면 ‘아, 빈혈이…….’ 같은
대사를 하시고 로젤린 경의 품에 쓰러지시면 됩니다. 곧바로 다른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아까 엘피디오를 비웃는 게 아니었는데. 알겠다, 아무튼 그 강철발굽의 장녀는?”

“테레지아 양을 말씀하십니까? 왜 이름으로 안 부르시고.”

“내가 그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서. 악운을 부르는 주문이라고 할까. 그런
느낌이다.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겠다 다짐했었는데, 아까 만났을 때 너무 당황해서 실수로 불러 버렸어.
오늘은 반드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무슨 상황에든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게 대비하라.”

레이몬드가 연민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얼마나 시달리셨으면…….

“로젤린 경의 이름을 말하면 이상하게 좋은 일이 생긴다.”

“그렇습니까?”

“그렇다. 내 행운의 주문 같은 거지.”

그 짧은 틈 사이 로젤린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일을 잊지 않는 리카르디스의 모습을 보고 레이몬드는 흐린 눈을


하고 먼 산을 쳐다봤다.

세 사람은 발코니에서 나와 연회장에 발을 들였다. 잠시간 사라졌던 리카르디스가 나오자 눈을 번쩍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로젤린은 발코니에서 있었던 일로 이상하게 들떴던 마음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리눌렀다. 그녀의
감각이 다시 예리하게 주위를 경계했다. 화색이 돌던 얼굴은 차갑게 식고, 눈빛은 날카롭게 세워졌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가리고 볼을 살짝 붉혔다. 그의 입에서 작은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귀여워…….”

“…….”

레이몬드는 옆에서 기가 차는 중이었다. 아니, 누구 한 놈만 걸려라. 뼈를 마디마디 역으로 꺾어 버리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데, 귀엽다니. 모로 보나 귀여운 것보다는 멋있는 쪽에 가깝지 않나. 눈에 대체 뭐가 씌었기에?

“……이제는 거침이 없으시군요, 전하…….”

리카르디스가 흠칫 놀라더니 레이몬드를 째려보았다.

“그런 건 적당히 모른 척하는 거다. 딸 빼앗겼다고 언제까지 툴툴거릴 생각인가, 좀생이처럼. 이 제국에 나만큼
괜찮은 남자가 있을 것 같나.”

“그, 그건…… 그렇긴 합니다.”

객관적 사실이라도 스스로 하기는 힘든 말이었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두 남자의 시선이 다시 로젤린에게 쏠렸다. 그녀는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부채를 펴 살랑살랑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반갑습니다’, 혹은 ‘안녕하세요’ 쯤 되는 행동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가 사자갈기의 드윗을 보게 되었다. 그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드윗, 아르페커와는…… 무슨 대화를 그리 길게 나눴나, 로젤린 경.”

로젤린이 고개를 올리며 그와 눈을 맞췄다.

“아, 아르페커 백작님이 말하고 싶은 사람에게 말하라 했습니다. ‘로젤린 양이 잘못 알고 있는 점은, 사자갈기는
리카르디스 전하와 반목하는 게 아니라, 엘피디오 전하를 지지할 뿐이라는 것이지.’라고.”

리카르디스가 살짝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까 전에 로젤린이 했던 말이 아닌가. 덕분에 더욱 머리에 열이


올랐었다.

“그게 그거 아닌가.”

“제가 그렇게 말했더니, 백작님이 ‘같은 말이면 똑같이 말하면 되지, 왜 부러 입 아프게 다르게 말합니까. 들어
본 적 있을 텐데, 로젤린 양? 사자 갈기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용맹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기에 제가 ‘
그럼 누가 붙잡습니까?’ 물었더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일러바치는 내용을 듣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점점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는


제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렸다. 저 멀리에 여자들에게 파묻혀 있는 사자갈기의 드윗이
보였다. 로젤린은 계속해서 대화 내용을 읊었다.

“동료들이 사자 대가리 앞에서 죽어 가고 있는 동안, 덜덜 떨면서 숨어 있다가 배부른 사자가 잠자고 있을 때야


슬그머니 창을 쥐고 오는.”

리카르디스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그녀와 함께 말했다.

“비겁한 기회주의자.”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로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을 아십니까?”

“……사자갈기 가문을 비하하고 싶을 때 쓰는 욕이나 다름없는…… 아니, 욕이다. 흠, 그걸 제 입으로 꺼내다니…


….”

대화를 같이 듣고 있던 레이몬드가 머리를 헤집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생각이 없을 수도 있다만, 저래 보여도 형을 꺾고 후계 자리를 잡은 놈이다. 내가 최근 이뤄 낸 것이


엘피디오에게 위협적으로 보일지언정, 위험하지 않아. 사자갈기는 그걸 충분히 알 수 있는 가문이지. 그런데
갑자기 나에게 손을 내민다?”

단순히 수작 부리는 것으로 보기에는, 상대의 덩치가 컸다. 그런 잡스러운 수작질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거란 말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에 자존심이 무슨 문제겠느냐만, 리카르디스가 본 귀족들은, 특히 대귀족, 중앙


귀족이라 불리는 그들에게는 죽는 것보다 자존심이 중요할 때도 많았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접근이 불쾌했다.
개인적인 감정이 섞여 있음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순간 적절한 도움이 왔다. 어느새 다가온 클로에가 레이몬드와 팔짱을 끼며 작게 속삭였다.

“원래도 아주 간섭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최근 들어 황후 폐하께서 사자갈기 가문을 쥐고 흔드는 게 좀


심해졌지요. 가문의 돈은 내 거, 내 거도 내 거. 이런 식이다 보니, 사자갈기 내에서는 불만이 좀 쌓였다
하더군요. 뭐 황후 폐하의 아버지인 선대 공작이야 딸을 밀어주고 싶겠지만, 그는 늙은 사자이고, 젊은 사자는
혈기가 좀 넘치는 모양이네요. 얘기를 한 번 들어 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수도 있어요.”

리카르디스가 로젤린과 엮인 드윗에 대해 껄끄러움을 온 표정으로 나타내자 클로에가 빙그레 웃었다.

“품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적당히 얘기를 들어 주는 척하고, 드윗이 2 황자와 접촉했다, 엘피디오 전하 측에
알려서 배반자로 낙인찍히게 한 다음에, 울며 겨자 먹기로 재산과 정보를 토해 내게 하는 수단으로 그냥 이용만
해도 되니까요. 영 내키지 않으시면 그렇게 쓰고 버리셔도 되지 않겠어요?”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저런 흉악한 말을 하다니. 정말…… 훌륭했다. 리카르디스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어.”

레이몬드가 기겁해서 두 사람의 음모를 말렸다. 우선 얘기나 들어 보죠, 얘기나!

리카르디스는 클로에의 흉악한 획책에 흐뭇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피디오가 저 멀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또다시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뎅…….

그때,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가 너른 연회장을 한가득 메웠다. 대신전의 종이 황제가 등장할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설원의 월계수,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황제 폐하 듭십니다!”

모두의 이목이 계단 위를 향했다.

쿠구궁…….

무거운 문이 열렸다. 하얀 예복을 입은 금발의 미중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은 엘피디오의 어머니, 황후


트리파가 정답게 그의 팔에 손을 얹고 발을 맞추고 있었다.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모두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곧바로 계단을 내려오지 않고 가만히 서서 아래에 선 사람들을 응시했다. 제국민들과 건국일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타국의 인사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온화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을 기점으로 많은 이들의 눈이 바빠졌다. 황제의 호위인 얼음창 기사단, 그리고 위험한
인물이 도사리고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는 하얀밤 기사단원들까지.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며 사방을 경계했다.

한데 아직까지도 하카브는 물론이거니와 디에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주위를 주시했다. 로젤린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천천히 파티 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반응하지 않았으니, 인조적인 마인이나 마력, ‘파편’의 위험은 없다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잘못 판단한 건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더 바랄 게 없으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황제는 고개를 숙인 자들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사람들이 몇 발자국씩 물러나며 길을 만들었다. 그가 흐뭇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황제는 계단의 정 반대편에 위치한 황좌로 이동했다. 이 너른 파티 홀에 있는 단 두 개의 의자에 황제와 황후가


착석했다. 그가 인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고개를 들라.”

그가 등장하고 십 여분 후에야 모두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황제는 이 자리를 찾은 모든 이에게 이델라브힘의 축복이 가득하기 바란다는 의례적인 인사로 포문을 열었다.
나라가 건국되었다는 하나의 주제로 매년 얘기하다 보니 특별함이 있을 리 없었다. 고만고만한 문구의 반복들.
어쩐지 작년에도 들었던 것 같고, 재작년에도, 한 십여 년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 얘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다들 애써 감명 깊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저마다 딴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리카르디스도


황제가 거들먹거리며 떠들어 대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그의 주위로 펼쳐진 상황에만 집중했다.

사람들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황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믿겨지지 않는 고요함. 한 사람의 목소리만이 우뚝 선 이 공간 속에……

“어?”

어느 귀족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황제 라이노와 주위 모든 사람의 매서운 눈빛이 그를 향했다. 그러나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에 당황하지 않고, 어느 한 곳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남자가 바라보는 곳을 향했다. 별이 총총한 어두운 밤을 명화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줄지은
창문들. 그 지극히 평범한 광경 속, 이상한 것이 보였다.

“불이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저 멀리, 다른 성이 불타고 있었다. 성의 어느 한구석 작게 발화한 것이 아니라, 성 자체를


땔감 삼아 활활 타오르는 불빛은 연회장 내부의 조명이 무색할 정도였다. 여태껏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밤하늘에는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168 화.

삐익!

기사단장 스타스가 손가락을 물어 휘파람을 불었다. 흩어져 있던 하얀밤 기사단원이 리카르디스를 둘러쌌다.
로젤린도 빠르게 전투태세로 돌입해 그를 등지고 다른 사람들의 동향을 살폈다. 스타스의 경고에 정신을 차린
얼음창 기사단도 잽싸게 황제와 황비를 보호했다.

저 멀리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하나, 황제가 등장하는 시간에 맞춰 일어난 불? 사고라 보기에는 공교로웠다. 만약
누군가가 발견했다면 진작에 소화 작업에 들어갔어야 했다. 말인즉슨, 성의 경비가 뚫렸다는 것.

리카르디스는 한순간에 성을 잃게 된 주인을 바라보았다. 엘피디오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침착해 보이긴 했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리카르디스가 황제를 보며 르원에게 물었다.

“하카브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디에즈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대체 무얼 원하는 건가. 리카르디스는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디에즈. 원한을 가진 자. 발타와 손을 잡고


전쟁을 준비하는 자. 황제의 목을 노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황제는 불타는 성으로부터 한참 멀어져 있다.

리카르디스는 하늘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저것은 단순한 속임수다. 이미 위험은 불타는 석영
성을 벗어나 이 홀에 숨죽이고 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화려하게 일을 벌일수록 황제의 보호는 더더욱 강해진다.

“2 황자 전하!”

얼음창 기사단이 하얀밤 기사단에 협력을 요청했다. 황족들을 모아 같이 보호하려는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황제에게 걸음을 옮기면서 계속 머리를 굴렸다. 이러한 사태에는 보통 황족들을 같이 보호하고는 했다. 디에즈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상황을 바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황족들을 한곳에 모을 필요성?
어째서?

엘피디오는 잽싸게 보호의 원 안에 들어가 있었다. 어린 황녀들도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가 있었다.

[이번 신관은 목이 잘렸어! 머리는 아직 발견 못했어!]


머리가 없는 신관의 시체.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그걸, 얼굴이 없는 그 시체를!’

어떻게 신관의 옷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신관이라 확정할 수 있단 말인가!

[얼굴 가죽을 뒤집어썼더군요.]

단서를 따라 사고가 흘렀다. 그는 자연스레 로젤린의 호위 첫날을 떠올렸다. 익숙한 시종의 얼굴을 하고,
날카로운 비수를 속에 숨기고 있던 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들어 황제를 쳐다봤다. 얼음창 기사단이 사람들을 바라보며 단단한 경계를 세우고 있으나,
위험은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이 아닌, 뒤에 있었다. 황제의 옆에!

리카르디스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이며, 한 발짝 내디딘 그 순간.

옆에 있던 로젤린이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그녀는 석영 성이 불타는 것을 기점으로 마력을 몸에 둘러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 둔 채였다. 시각, 청각,


후각. 눈으로, 피부로, 귀로 와 닿는 모든 정보를 그녀는 초에도 수백 개씩 읽어 냈다. 그러던 중,
리카르디스가 황족들이 보호받는 무리로 이동하던 순간 그녀는 느꼈다.

사취. 시체의 썩는 냄새였다. 진한 향수의 냄새가 억누르고 있으나, 로젤린을 그 아래 가려져 있는 역한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리카르디스가 황제가 위험 바로 코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시간에
이루어졌다.

로젤린은 구두를 벗어 던지고, 리카르디스를 보호하던 무리에서 확 달려 나왔다. 저 멀리에서 리카르디스에게


급히 다가오던 레이몬드가 무엇을 눈치채고는, 자리를 잡고 두 손을 모았다.

“로젤린!”

그녀의 발이 레이몬드의 손을 꾸욱 밟았다. 레이몬드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확 튕겨 올렸다. 로젤린이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았다.

휘익, 로젤린이 공중에서 빙글 빠르게 돌았다. 무언가가 빛을 받아 반짝이며 날아갔다. 얼음창 기사단은
갑작스레 황족을 향해 공격해 온 그녀를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챙그랑.

로젤린의 귀걸이와 누군가의 손에서 떨어진 비수가 대리석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로젤린은 얼음창
기사단의 어깨를 밟고 한 번 더 뛴 다음 황족들이 모인 곳에 있던 남자를 덮쳤다.

“꺄악!”

황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를 제압했다.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얼음창
기사단이 로젤린을 막기 위해 무기를 뽑았으나,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한명씩 맡아 그들의 팔이나 관절을 꺾으며
필사적으로 방해했다.
“이게 무슨, 불경한!”

“스타스 경, 이게 무슨 짓이오!”

당장에라도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베어 넘길 듯 이를 갈던 남자들은 정확하게 오 초 뒤,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1 황자,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의 손을 완벽하게 제압한 로젤린이 그의 얼굴, 턱 뒤를 더듬더니 콱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얼굴 가죽이 짝 소리와 함께 벗겨지며, 코와 골격이 뭉개진 흉한 얼굴이 드러났다.

꺄아아악!

황후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엘피디오가 들고 있던 단검에 찔릴 뻔한 황제는 아직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뒤늦게 자리에 도착했다. 수백 쌍의 경악 어린 시선이 모인 곳. 리카르디스는 얼빠져 정신 못


차리는 얼음창 기사단을 보고 버럭 소리쳤다.

“폐하를 보호하라, 사람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 쓴 암살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엘피디오가 왜 다가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로젤린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가까이에 접근하면, 그녀가 반드시 알아챘을 것이기에. 대체 언제부터 낯선 자가 ‘엘피디오’의 가죽을 쓰고
있었나?

리카르디스는 곰곰이 돌이켜 생각하다가 디에즈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가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때의 황제는 엘피디오와 얘기 중이었다. 어쩌면, 디에즈는 황제가 아닌 엘피디오를 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로젤린의 밑에 깔려 제압당해 있던, 엘피디오의 얼굴 가죽이 벗겨진 남자가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위대한 밤, 크레안 티다니온께 이 광영을 바칠 것이다!”

남자가 이를 콱 물었다. 입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로젤린이 암살자의 머리를 콱 잡아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찍었지만, 이미 그가 무언가를 뱉어 낸 후였다. 남자의 입에서 튄 거뭇한 액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5 황녀 레이비아의 드러난 다리에 한 방울 투둑, 튀었다.

황녀 레이비아가 덜덜 떨다가 제 다리를 쓰다듬었다. 한 방울 피부에 닿은 액체로부터 살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파편’은 아니었으나, 극악한 독인 듯했다. 레이비아가 다리를 붙잡고 아악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꺄악!”

그걸 기점으로 연회장은 더 큰 혼란에 휩싸였다. 우왕좌왕하는 군중 속에 섞여 있던 발타의 고위 인사들이 일시에


비수를 꺼내 들고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자, 남자, 아이, 노인 가릴 것 없고 목표도 없이 머리를 잡아서 목을 찌르고, 도망치는 등을 가로지르고,


심장에, 눈에, 배에, 치명적인 일격이 박혔다. 연회장에 피 냄새가 자욱하게 퍼졌다.

하얀밤 기사단은 더욱 결집해 리카르디스를 둘러쌌다. 그들에게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리카르디스의


목숨이었다. 모든 단원들이 연회장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어떤 위험이 있을지 예상하지 못하는 지금 가뜩이나
부족한 인력을 나눌 수 없었다.

로젤린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피 흘리고 비명 지르는 사람들을 바라만 봐야 했다. 하나, 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춤을 추던 사람들이 무력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그 위를 살아 있는 자들이 살고자 무심히 밟고
지나갔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어느 어린아이의 심장에 길쭉한 암기가 박혔다. 소년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심장에서부터 피가 뿜어져
나왔다. 공중에 흩뿌려지는 핏방울들을 본 순간, 로젤린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방울방울, 조명을
받아 빛나는 핏방울에 사람들의 절규가 비쳤다.

로젤린은 어쩐지, 이 장면이 굉장히 익숙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몸이 떨려 왔다. 숨이 턱 막혔다. 아이의 몸이
서서히 기울어지며 대리석에 가까워졌다.

쿵!

소년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지며 큰 소리를 냈다. 비명이 가득 찬 난장판 속, 그 작은 소리가 들릴 리 없으나,
로젤린은 머릿속에 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걸 기점으로 로젤린은 깨어났다. 헉,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까지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 사태를 주도하던 남자들은 점차 제압되었다. 연회장을 지키던 기사,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검을 내려놓고 왔으나, 본디 무기를 들고 있는 시간이 훨씬 긴 자들이 전면적으로 나섰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큰뿔산양 후작, 크레이튼. 큰뿔산양의 아렌트, 바다협곡의 자식들, 강철발굽 백작,
사자갈기 공작가의 후계자를 포함한 일라베니아의 귀족들과, 타국의 사람들도 몇 나서서 남자들을 제압했다. 그중
회색 머리칼을 가진 낯선 시종이 나선 이들 중 가장 많은 머릿수를 처리했다.

하지만 사상자는 이미 너무 많이 발생한 후였다.

“으으으…….”

“아파…… 살려 주세요…….”

사람들이 여기저기 쓰러진 채 피 흘리고 있었다. 제압되어 있는 검은 피부의 남자들이 마구 웃었다.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남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일라베니아 력 589 년 건국일을 맞이해, 선물을 보낸다!”

호위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황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진실을 숨기는 비겁자여, 우리는 피로써 시작을 알린다. 피로 쌓아 올린 권좌가 무너질 때가 되었다! 이미
너희들의 손으로 인해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던 그것이, 이델라브힘의 빛과 함께 스러져 갈 때가 되었다! 보아라,
위대한 밤, 크레안 티다니온의 빛이 떠오르리니!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너에게 보낸다! 네 혈육의
피로써, 시작을 알린다!”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바닥에 머리를 툭 떨궜다. 바닥으로 피가 번졌다. 제압당해 있던 모든 발타인들 또한


일시에 숨이 끊겼다. 사람들은 숨죽인 채 연회장의 벽에 붙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가 남기고 간 정적은 끈적하고 무거웠다. 리카르디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석영 성을 불태우는 불꽃은 더욱
커져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169 화.

케틀린은 인상을 구깃구깃하게 만들고는 보이지 않는 어두운 허공을 훑었다.

그녀는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일라베니아 황성의 지하 감옥은 악명 높기로


유명했고, 그만큼 감옥에 머무는 일 분, 일 초는 고통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괴로운 나날뿐이었으나, 건국일이
되자 그 어느 때보다도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건 지하 감옥을 지키는 병사들이, 건국일이랍시고 이델라브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 대기 때문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연회장을 가득 채운 음식들은 그날그날 바로 소비될 만한 양이 아니었고, 남은 음식은 자연스럽게


시종이나 시녀, 이런 말단 병사들의 앞까지 돌아왔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포식하는 기간. 귀족 나으리들이 먹는
고급스럽고 맛있는 걸 먹으니 절로 흥도 나고, 근무수칙에는 어긋나지만, 수통에 담아 온 술을 같이 마시니 더
신나고. 그래서 흥얼흥얼 지하 감옥을 가득 울리게 노래를 불러 대는 것이다.

그걸 더욱 괴롭게 만드는 요소는 가장 큰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병사 두 명 중 한 명은 음치고, 나머지 한 명은


박치라는 점이었다. 사람을 감동하게 만드는 훌륭한 가희가 부른다고 해도 짜증 날 판국이었던 터라, 케틀린은
누워서 감상하다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아, 못 들어 주겠네, 진짜……. 입 닥쳐 얼간이들아!”

술 취한 병사들이 노래를 멈추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 건방진…….”

철컹.

케틀린은 병사들이 벽에 비스듬히 세워 두었던 창을 드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도 온몸이 성하지 못하게 두드려
맞으리라. 그래도 그녀는 저들의 돼지 멱따는 소리를 멈춘 것만 해도 기뻤다.

“이런, 혼잣말을 한다는 게 그만.”

말투는 내가 실수를 했다는 듯 고분고분했으나, 그녀의 가운데 손가락이 기상 넘치게 그들을 향해 세워져 있었다.
일라베니아 거리에서 통용되는 욕으로, 해석을 하자면 네…… 를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남자들이 허리춤을 더듬어 열쇠를 다급히 찾는 소리가 들렸다. 케틀린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곧 익숙한
고통이 찾아오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표정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병사들이 열쇠를 구멍에 철컥 끼워 넣었다.

“오늘 그 고약한 성질 머리를 고쳐 주마,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건방진 것 같으니!”

남자가 황소처럼 씩씩거렸다.

쾅!

그때, 큰 소리가 감옥 안을 울렸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벽에 충돌한 것 같은 소리였다. 병사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상은 없었다. 위층에서 난 소리가 아닐까. 수감자가 사고를 쳐서 혼쭐을 낸 것인가?

으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이 계단 통로를 타고 실려 왔다. 병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황급히 케틀린이 갇힌 감옥의
철창문을 다시 걸어 잠갔다. 평소 같았으면 네놈들이 그러면 그렇지, 여자 하나 못 이겨서 꽁무니 빼고
도망친다고 욕설이라도 해 주었을 케틀린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하얗게 변해 버린 눈이 천장 그 어디쯤을 훑었다. 남자들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마력이었다. 몇 개의


벽 너머, 한참 높은 위에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았으나…….

거리, 위치. 모든 것을 혼동하게 만드는 이 거대한 마력의 기운이란! 케틀린의 등골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최하층을 지킬 네 명의 병사를 제외한 나머지 남자들이 모두 위층으로 올라갔다. 케틀린은 철창은 잡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금속음과 비명은 끊이지 않았다. 감옥 안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익숙한 소음과


상황이었으나, 소름 끼칠 정도로 강한 마력의 기운이 그녀의 감각에 섞여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어 냈다.

마력은 가까워졌다. 한 층, 한 층 더 아래. 천천히 움직이는 마력은 여유롭다기보다는, 사냥감을 진득이


주시하는 뱀의 움직임같이 느껴졌다. 케틀린은 오랜만에 초조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 거대한 마력보다 한 발짝 먼저, 소리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돌계단을 지그시 누르며
다가오는 느긋한 발걸음 소리였다.

동향을 살피며 숨죽이던 최하층의 수감자들과 남은 병사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십 초 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냄새나고 더러운걸.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군.”

여유작작하게 감옥의 풍경을 품평하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케틀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십여 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으나, 잊을 리 없었다.
하카브였다. 병사들도 얼굴을 알아봤는지 창을 들고 그에게 돌진했다.

“아악!”

하카브가 부나방 같은 병사들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병사들은 하카브를 둘러싼


호위들에게 공격받아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용감한 것과 무식한 건 종이 한 장 차이라더니. 그렇지 않나, 아순.”

“예, 전하. 정말 용감하군요.”

“……그래.”

지하 감옥의 왕처럼 떵떵거리던 병사들의 몰락에, 수감자들이 환호하며 철창에 달라붙었다.

“이봐, 나, 나를 꺼내 줘!”

“죽여주는데! 진짜 죽였으니까!”

“잘생겼네…….”

고문과 오랜 감금으로 약간 미쳐 버렸는지 독특한 감상평이 많았다. 하카브는 그들의 감상평에 씨익 웃고는
케틀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이다 키티. 살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케틀린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키티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저 인간이 진짜.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녀는 하카브가 자신을 구하는 목적으로 일라베니아에 발을 들였을 거라고, 새끼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모든 인간은 쓰기 쉬운 도구와 다름없다는 사실은 정말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 이번 건국제에 흥미로운 게 있어서 보러 왔지. 겸사겸사 네가 살아 있는지도 확인해 보기도 하고. 그런데
왜 시선이 약간 빗겨 나간…… 아, 눈이 안 보이나?”

“한 오 년 전쯤부터요. 아니, 그렇다고 일라베니아에 직접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걸 또 아틸라크가 보고만


있던가요. 배를 두른 지방이 머리에도 꽉 차 버리기라도 했나 보죠?”

“말리고 싶어 하기는 하던데, 얘기는 못 꺼내던걸. 모두가 자네 같은 줄 아나, 이 사람아. 어디 보자……


열쇠가…….”

하카브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죽지 않고 바닥을 기어 다니던 병사가 컥컥 거리더니 열쇠를 꺼내 집어삼켰다.


하카브가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매만졌다.

“키티. 병사가 열쇠를 삼킨 것 같은데.”

“가르면 되잖아요.”

“더럽잖나.”
“옆에 애들은 뒀다가 수프 끓여 드시려고 그러시나. 원래도 직접 뭐 하시지도 않는 분이 왜 그러신대.”

“아니, 내가 직접 하려고 했다. 대충 십…… 년쯤 감옥에 갇혀 있던 내 사람을 구하는 감동적인, 그런


상황이니까.”

전혀 감동적이지 않았다. 애초에 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일라베니아에 발을 들인 것도 아니면서 감동은 무슨 감동.


케틀린이 철창을 잡고 흔드는 시늉을 했다. 대 마인용으로 설치된 두꺼운 강철이 깊게 박혀 있었다. 약해진
몸이 아닌 평범한 육체로 마력을 운용했다 하더라도 부수지 못했을 것이라 의미 없는 시도였다.

하카브의 호위들이 철창을 향해 발길질했다. 소리만 요란했고 꿈쩍하지 않았다.

“약해 빠진 놈들만 골라 데리고 다니시네요.”

“그 약해 빠진 놈 중에 아순이 있단다.”

“……개중 좀 힘찬 발길질 소리가 있더라니, 아순 너였구나? 오랜만이다, 세상에.”

하카브의 호위, 아순이 앞이 보이지 않는 케틀린에게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상황인지


모르겠어서 하카브는 하하 웃었다.

“전하, 빨리 꺼내 주세요.”

“알았다, 알았어. 하여간 성격 급하기는. 애들보고 침 좀 닦아서 가져오라 하마.”

십 년 이상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 보고 할 말은 아니었다. 케틀린은 어이없어서 별다른 말을 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쿵!

위층에서 또 소리가 크게 울렸다. 케틀린이 깜짝 놀라 위를 바라보자 하카브가 반색했다.

“아, 역시 느껴지나?”

“못 느끼는 게 이상하죠. 대체 저…… 저건 뭔가요?”

“떽. 키티. 저거라니. 그러면 못쓴다.”

케틀린은 눈이 멀어 하카브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나, 잔뜩 들떠 있는 목소리에서 그의 표정을 연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분은 누구시죠?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마력의 크기라서 좀 놀랐네요.”

“저…… 사람은.”

하카브가 말을 끌었다. 케틀린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나의 검은 달이다.”

어우……. 케틀린은 닭살 돋은 팔을 슥슥 쓸었다. 예전에도 시 같은 걸 좋아하더니, 그 기호는 여전한 듯했다.

그러나 케틀린은 ‘검은 달’이라는 이름을 하카브가 얼마나 귀중히 여기는지 잘 알았다. 으레 발타라는 나라가
마력을 숭배하기를 저를 낳은 어미보다, 제 목숨을 구한 은인보다, 수천 명을 살리고 죽은 위인보다 대단하다
여겼으나, 하카브는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띌 정도로 마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력을 타고나는 자가 많은 발타 왕조에서, 미숙아로 다름없이 취급받는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난 설움이 표출된
것일까? 느끼지 못하는, 알지 못하는 힘을 숭배하는 그의 모습은 솔직히 케틀린이 보기에는 좀 우스운 감이
있었다. 동경, 갈망. 글쎄 그 끈적한 욕망을 표현하면 좋을지.

그런 하카브가 천천히 다가오는 위협적인 마인을 검은 달이라 칭했다. 그의 검은 달. 그의 크레안 티다니온.

통로에서 다시 한번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하카브처럼 보란 듯 느긋하지도 않고, 일라베니아 황실 한가운데에서


사고를 친 사람처럼 다급하지도 않았다. 그저 일상생활에서 들을 수 있을 법한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에 케틀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거대한 기운, 무서운 살육자, 피 냄새를 몰고 오는 사람의 행동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속을 완벽하게


가리는 위장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아 괴리감이 들었다.

발걸음 소리가 같은 공간안에 울렸다. 케틀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바짝 서 있는 긴장 속에서 하카브가 사랑에


빠진 듯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디에즈.”

170 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케틀린은 하카브의 말로 인해 그 거대한 마력을 지닌 사람이, 디에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케틀린은 경악했다. 그녀가 아는 디에즈라고는 일라베니아의 5 황자 디에즈밖에 없었다. 디에즈?
그가 마인이었다고?

“이런, 그대의 손이 더러워졌군. 내 옷에 닦아도 된다.”

찰싹 소리가 났다. 디에즈가 집적거리는 하카브의 손을 쳐 낸 모양이었다.

뚜벅, 뚜벅.

계속되는 하카브의 질척임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남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디에즈가 철창을 잡았다.


철컹. 그녀를 가두고 있는 검은 쇠가 울었다. 그의 눈이 천장과 벽 깊숙이 파고든 철창의 끝을 가늠해 보고
있었다.

철컹! 한 번 더 세게 흔들렸다. 하카브는 디에즈가 그녀를 꺼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지금 그가


철창을 흔들고 있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이 최하층으로 오면서 디에즈가 수없이 반복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갇혀 있는 마인들의 해방. 그자가 어떤 죄를 저질렀건 마인이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마침 하카브의 호위가 병사의 시체 안에서 열쇠를 꺼내어 왔다. 하카브가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 더 닦거라. 아, 디에즈 여기에 열쇠가…….”

쾅!

손짓하며 호위를 닦달하는 하카브의 말 위로, 귀가 먹먹하게 멀어 버릴 정도의 굉음이 덮쳤다. 하카브는 놀라지
않고 그를 돌아보았다.

마력으로 강화된 일격이 철창을 타격했다. 하지만 우수수, 천장에서 흙먼지와 돌가루가 떨어질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쾅!

디에즈가 다시 한번 철창을 세차게 두드렸다. 철창으로부터 전해지는 진동이 벽을 울렸다.

쾅!

절대 부서질 것 같지 않던 철창이, 휘어지기 시작했다.

쾅!

철창이 닿아 있는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으로부터 작은 돌조각이 떨어졌다.

디에즈가 잠시 동작을 멈췄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큰소리가 잦아들었음에도 투두둑, 도르륵. 돌이


굴러떨어졌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뱉었다.

쾅!

캉, 콰드득, 끼이익. 소리가 연쇄적으로 울렸다. 서서히 휘어지던 철창이 완전히 구겨졌다.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한 돌벽이 검고 긴 강철을 뱉어 냈다. 갈라진 틈새에서 조각난 돌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케틀린은 보이지 않는 광경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수년간 그녀를 가로막던 거대한 철창이 무너진 모습은 본 적
없어 쉬이 그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에, 그들이 쌓아 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그 소리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케틀린은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더듬더듬. 가슴팍부터 올라간 그녀의 손이 디에즈의 얼굴에 닿았다.
케틀린은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남자의 눈물을 닦았다.

그들은 성을 빠져나왔다. 케틀린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십여 년간 갇혀 있으면 감옥이라고 해도, 정이 드는 건가? 뭐가 그리 아쉬워서 그래.”


케틀린은 팔짱을 낀 채 입맛을 다셨다.

“엘피디오를 놓고 온 게 아쉬워서요. 갚아 줄 것이 많은데. 아이고.”

오래 갇혀 있던 탓에 근육이 약해졌는지 케틀린은 좀처럼 균형을 잡지 못했다. 말 위에 앉은 그녀가 휘청이자,


뒤에 앉은 하카브의 호위가 그녀를 지탱했다.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던 하카브가 이런, 하면서 혀를 찼다.

“어쩌면 좋나. 미안하게 되었다 키티. 네 몫인 걸 몰랐어.”

“네? 죽이셨어요?”

“내가 한 건 아니지만, 죽기는 했지. 디에즈가 갑자기 찔러서 깜짝 놀랐지 뭐냐.”

하카브는 그때를 잠시 반추했다.

엘피디오와 디에즈, 그리고 자신까지 같이 있던 때였다.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던 중, 어쩌다 ‘로젤린’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하카브가 계속해 로젤린에 대해 탐욕을 드러내자, 엘피디오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난리도 아니었다. 자신의
사람도 아니건만, 발타의 후계자가 황실의 ‘것’을 눈독 들이니 경계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로젤린 경이야, 충실한 황실의 기사지요. 이번 무투 대회도 황실에 대한 충정을 내세우기 위해 참가한 것이니
말입니다. 다양한 경험을 위해 지금은 리카르디스의 밑에서 수행하고 있으나 이제 그녀도 슬슬 방황을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엘피디오의 말을 들은 하카브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엘피디오는 얼굴을 붉히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이건 비밀입니다만, 왕자에게만 특별히 말해 드리죠. 지금쯤이면 붉은수레바퀴 백작에게 제 인장이 찍힌


청혼서가 도착했을 겁니다.]

하카브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자 그는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로젤린 경은 리카르디스 황자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하, 그거야 어린 시절의 소꿉장난 아니겠습니까.]

그때쯤, 옆에 가만히 인형처럼 앉아 있던 디에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몰랐군요, 엘피디오 황자께서 로젤린 경을 마음에 두셨을 줄이야.]

[순진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카브 왕자. 우리들의 위치에서는 마음에 두고, 두지 않고가 중요한 부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필요 하느냐’, ‘필요하지 않으냐’인 것이죠.]

그리고 눈 깜짝할 새였다. 엘피디오는 제 배에 박힌 날카로운 손톱을 보고 나서야 통증을 느낀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는 기절했다.

하카브는 기절할 만큼 좋아서 넘어갈 뻔했다. 아름다운 흰색 털의, 야수의 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림자! 디에즈가 로젤린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때만 떠올리면 극도의 흥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케틀린에게 설명하는 지금도 하카브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도는 중이었다.

“뒤처리에 고생을 제법 했지. 그래, 그건 중요하지 않다, 키티 들어 봐라. 내가 꼭 일러 주고 싶었다. 그때


디에즈가 ‘그림자’인 걸 처음 알았는데 말이다.”

“그림자? 발타 전승의 그거요? 진짜로 있는 거였어요?”

“그래, 그래. 디에즈가 그거였다. 진즉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무튼, 그때 디에즈가 얼마나 아름다웠냐면…
….”

뭐, 엘피디오를 난도질하는 하얀 야수의 손이 소름 끼칠 만큼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렸다는 둥. 엘피디오를 죽일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는 둥. 덕분에 황제에게 큰 선물을 보낼 수 있었으니, 이
또한 디에즈의 덕이 아니겠냐는 둥. 케틀린은 그다지 알고 싶지 않던 정보들은 대충 흘려들었다.

그림자. 케틀린은 그 거대한 마력의 정체를 깨우쳤다. 과연, 하카브 왕자가 ‘나의 검은 달’ 운운을 할 법한
일이었다.

몇 대를 거슬러 간, 위대한 영혼 힉살라의 왕비. 유일하게 여자로서, 평민 출신으로서 문헌이 이름을 남긴


갈라타. 미모나 학식이 뛰어나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말도 더듬고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천치라는 평을 받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힉살라의 왕비 중 가장 높은 지위를 얻게 된 경위에는, 그녀가 아주 강한 마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게 된 때로부터 강한 마인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 때에 그녀가 나타났다. 발타의 어떤 이도 견줄 수 없는, 거대하고도 압도적인 마력. 힉살라는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출 정도로 총애했다고 전해졌다. 바로 그 시기부터, 발타의 문헌에 비밀스러운 서류가 추가되기 시작했다.

형태를 따라 ‘그림자’라 불리는 존재들에 관한 것이었다. 마력을 숭배하는 발타에게 그 존재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위대한 것이었다.

케틀린 또한 검은달의 간부가 되고 나서 그 문헌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직접 본 적


없으니 아무래도 전적으로 믿기 힘들었는데…….

디에즈의 마력을 코앞에서 느끼고 나니, 그 말을 믿지 않는 쪽이 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엘피디오는 좀 괴로워했나요?”

“가죽을 벗길 때는 좀 아파 보이던걸. 그때까지 살아 있었거든.”

“듣던 중 다행이네요.”

“거기에다가 신관 옷을 입혀서 버려 둔 덕에 황족 대우를 받지 못하고 화장됐으니, 마음 풀어라, 키티.”

시체를 불에 태우는 방식은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신관들이나 하는 장례였다. 황족들만이 묻히는 영광의 땅을


버젓이 두고서, 태워져 재 한 줌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은 황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디에즈가 급작스럽게 일으킨 사건을 뒤처리하는 상황에서도 그런 장난질까지 치다니.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이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엘피디오를 향한 감정은 소소하지만 차곡차곡 쌓아 제법 몸집을 불린
상태였다. 그가 겪었다는, 나름의 고난 정도로는 맞바꿀 수 없었다.

몇 년간 당해 왔던 일에 더하고, 곱한 것에 곱절을 돌려주려고 했는데. 어쨌거나 죽인 사람이 디에즈인 데다가


산 채로 얼굴 가죽이 벗겨졌다니 그나마 그걸 위안거리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케틀린이 코를 킁킁거렸다. 아까부터 느끼기는 했지만, 거리가 멀어졌는데도 타는 냄새가 자욱했다.

“뭘 이렇게 태우셨어요?”

그녀는 가까이에 있는 불이, 또한 그 불에서 나는 연기가 얼마나 숨 막힐 듯 밀도 높은지 잘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탄 냄새가 지나가는 바람 표면에 얇게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다. 먼 곳에서 거대한 불이 났으리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엘피디오의 석영 성. 주인이 없어서 기름칠하는 것이 수월했다더구나.”

“진즉에 말씀해 주시지. 기분 좋아졌어요.”

하카브랑 케틀린이 마주 보고 웃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코로 전해지는


붉은 빛과 검은 연기의 향이 그녀를 들뜨게 했다. 하카브도 그녀를 따라 불타는 석영 성을 바라보았다. 수도
거리 구석구석에 보일 만한 거대한 화재였다.

“역시 신호는 화려한 쪽이 좋구나. 눈에 잘 띄니 말이다. 슬슬 그쪽도 시작할 것 같은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아악!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성이 불타는 광경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군중 중 누군가였다. 어떤 덩치 큰 남자가 침을 질질 흘리며


다른 사람의 등에 식칼을 박고 있었다. 흰자는 실핏줄이 터져 붉게 변해 있고, 몸 여기저기에 근육과 핏줄이
울룩불룩 움직였다. 남자는 이성을 잃은 듯 날뛰었다. 그 남자보다 덩치가 큰 사내들이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믿기지 않는 힘으로 다른 이들을 떨쳐 냈다.

171 화.

거리가 소란스러워졌다. 남자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케틀린은 마수처럼 날뛰는
사람들에게서 피어오르는 마력의 기운을 읽었다. 이 근처뿐 아니라, 수도 저 멀리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가고
있었다. 마치 구름에 가려졌던 무수한 별이, 바람이 지나며 제 모습을 일시에 드러내는 것처럼.
케틀린이 말 위에 앉아 씩 웃었다.

“제법 장관인데요.”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의 말에 하카브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연회장을 휘저어 놓은 발타인들 또한, 마독 ‘파편’은 아니지만, 독을 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통에


신음하며 피를 토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다행히도 건국일을 맞아 다수의 신관들이 연회장에 있었던 터라 사태는
빠르게 진정되었다.

리카르디스는 혼란스러운 연회장 내부를 정리하는 것에 앞서, 하얀밤 기사단을 모았다.

“하카브를 쫓는다. 빠져나가기 전에 반드시 놈을 죽여야 해.”

엘피디오가 죽었다. 모두의 예상을 넘어선 파란이 일게 될 것이다. 발타와의 전쟁 이전에 일라베니아 내부에서
무언가가 먼저 터져 나올 수도 있었다. 갖은 준비를 한 상대를 두고 최선의 대비를 할 수 없는 전쟁의 끝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발타 쪽에도 일라베니아와 걸맞은 혼란을 선물해야 하리라.

하카브는 발타의 힉살라, 아돈을 대신해 왕실을 통제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사라질 경우, 발타의 움직임에는
당분간 제동이 걸리게 될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놀란 황제고, 기절한 황후고 뭐고 간에 제일 먼저 하카브를
쫓으려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다들 그의 의중을 알아채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막 도착한 성 기사들과 밖에 경비를 서던 병사들의 무기를 잠시 빌렸다. 빌려주는 사람들과
합의가 되지는 않았으나, 급한 상황이라 하나하나 설명할 틈이 없었다. 로젤린은 얼음창 기사단의 부단장
마르틴에게 검을 뺏어 왔다.

로젤린은 긴 드레스 자락을 찌익 찢었다. 들쭉날쭉하게 찢어진 드레스는 그녀의 무릎 위에서 살랑거렸다.
시종들이 급하게 말을 몇 마리 데리고 왔다.

다들 번듯하게 차려입은 모양새로 말에 올라탔다. 하, 이랴! 급하게 말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성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수도를 둘러싼 성벽에는 동, 서, 남, 북. 총 네 개의 문이 있다. 그들이 어디로 향했을지는 알지 못했다. 곧


비상종이 울리게 되면, 여기저기 횃불이 밝혀짐과 동시에 네 개의 문은 전부 닫힐 것이다. 닫힌 문을 뚫고 갈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들키지 않고 도망갈 구멍이 따로 있는 것일까.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남쪽 문, 가장 경비가 강한 곳은 피할 것이다. 서쪽, 상인들이 많은 거리.


그 속에 섞이려고 하는가? 목격자가 많으니 피할 수도. 북쪽, 멀리 돌아가야 하는 길을 선택할 가능성은 낮지
않을까?

삐이익----
먼저 살펴보러 떠났던 마카롱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삐익, 삑 삑, 깩!
독수리가 무언가 조잘조잘 얘기하자 로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마카롱이 수상한 무리는 각각 서쪽과 동쪽으로 흩어졌다고 말해 줬다. 둘 중 어느 쪽인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로젤린은 이상하게 서쪽이 신경 쓰였다. 서쪽 거리는 로젤린이 축제 날 길을 잃고 들어갔던
암흑가가 있던 곳이었다. 디에즈를 만났던 곳.

그때 길을 잃어버렸다는 디에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었으나, 그 또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말을 붙여 몰았다.

“전하! 서쪽 아란페디스 거리의, 나쁜 사람들이 모이는 골목을 아십니까? 축제 날에 검은 뱀이 그려진 가면을 쓴


디에즈 전하와 만난 적 있습니다.”

로젤린의 말을 들은 하얀밤 기사단원 모두가 고삐를 틀어 방향을 바꾸었다. 로젤린도 재빨리 그들을 따랐다.
아란페디스의 검은 독사. 일라베니아의 암흑가 큰손 중 가장 유명한 자였다. 디에즈가 그의 표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뒤에서 파르딕트가 분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그때 길 잃어버렸을 때 만난 거야? 그걸 지금 말해?

“로젤린 너 진짜!”

“……아니, 전…… 그때는… 잘못했습니다.”

잘못한 것은 빨리 인정해야 했다. 눈치 보던 로젤린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자 씩씩 화내려던 하얀밤 기사 단원들이 일시에 숨을 죽였다.

그녀는 서쪽 거리뿐 아닌, 수도 비스타 전역에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마력을 느꼈다. 마수에서나 느낄
수 있는 기운이 이질적이었다. 검은달의 인조 마인 부대일까 생각해 보았으나, 그보다도 더 이성을 잃고 날뛰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수도에 있었다면, 분명 그들의 존재를 알아챘을 것이다. 이것은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석영 성의 화재를 신호로, 검은 독사가 마수의 결정을 무작위로 사람들에게 심고 다닌 결과였다. 마수의 결정은
마치 잠자고 있는 씨앗 같아 아주 가까이에서도 미약한 마력을 느끼는 정도였으나, 그것이 사람의 몸을 토양 삼아
자라나기 시작하면 폭발하듯 기운이 터져 나왔다.

로젤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펼쳐질 상황이 대충 예상되었다.

“서쪽 거리를 마수의 결정과 같은 종류의 마력이 뒤덮었습니다. 수, 스물…… 아니, 스물다섯. 서른셋. 일곱,
계속 늘어납니다. 여기저기에서 날뜁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확인했습니다. 거리에 많은 피해가
예상됩니다!”

리카르디스가 이를 으득 갈았다.

“순순히 잡혀 주지는 않겠다는 건가…… 르원!”

그가 소리치자 무리에 있던 르원이 빠져나와 다른 곳을 향했다.

“치안대에 상황을 알리고 지원 요청하겠습니다! 로젤린 경!”


“맡겨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로젤린도 무리에서 확 튀어 나갔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곧, 무리가 향하는 정면에서 얼룩무늬의 소 한 마리가 미친 듯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머리로 들이받고, 짓밟아 뭉개는 소의 입에서 게거품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소의 다리와 머리에서 굵은
혈관과 근육이 울룩불룩 크게 부풀어 올랐다. 금방에라도 온몸이 터질 것 같은 기괴한 형상이었다.

큰 거리로 가기 전의 좁은 길이라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와 동료들을 뒤로하고 뛰쳐나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충돌하기 몇 초 전, 로젤린은 고삐를 쥐고 말 위에 섰다.

“로젤린!”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로젤린을 목격한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로젤린이 고양잇과의 동물처럼
유연하게 착지하고는 앞으로 한 바퀴 굴렀다. 그녀의 시야가 휙휙 바뀌었다. 빠르게 달려오는 소, 바닥, 하늘.

그리고 다시 코앞에는 흰자위가 붉은 짐승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쿵! 로젤린이 한쪽 발을 박아 넣듯 디뎠다. 그녀의 몸 안 구석구석을, 짐승이 가진 것보다 훨씬 강하고 거대한


마력이 순식간에 타고 돌았다.

쾅!

살과 근육이 있는 두 생물이 부딪쳤다고 믿기지 않는 딱딱한 굉음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로젤린의 맨발이 바닥에
박혀 드드득 밀려났다. 그러나 고작 한 걸음 반 정도의 거리.

소의 난폭한 질주로 시끄러웠던 거리가 순식간에 잠들었다. 짐승이 앞발을 들며 일어서려 했으나 로젤린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을 굴러다니는 부서진 나무 각목을 발로 차서 올려 빠르게 잡아챘다. 짐승의
단말마를 끝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피를 닦고 있는 로젤린의 뒤로, 타고 온 말이 말발굽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그녀가 가뿐한 몸놀림으로 등자를


밟고 올라탔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멍하니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일행은 리카르디스를 에워싸고 달렸다. 독수리는 기사단의 한참 위에서 로젤린과 나란히 비행 중이었다. 거리는
엉망이었다. 사람들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비명을 질렀다. 아까까지 누군가의 얼굴을 핥던 짐승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익숙한 피 냄새를 뚫고 거리를 빠르게 지나쳤다.

로젤린은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길 중, 가장 마력의 기운이 적게 느껴지는 곳을 판별해 달렸다. 위험한 상황이


오면 로젤린이 훌쩍 말에서 뛰어 벽을 밟고 누군가를 덮치고는 했다. 그러고 재빨리 다시 뛰어서 말 위에 앉는
묘기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삐이익---

마카롱이 길게 울었다. 무언가가 보인다는 신호였다. 로젤린이 눈을 변형시키며 한계까지 시력을 강화했다. 저
멀리, 말에 타고 있는 무리가 보였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사람들의 혼란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느긋한 걸음이 무언가를 예감하게 했다.

로젤린이 이를 악물고 박차를 가했다. 그 순간, 그 일행 중 가장 뒤에 있던 누군가가 말의 고삐를 쥐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천천히 후드를 벗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황금색 머리카락이 까만 하늘 아래에서도 밝게 빛났다.

로젤린이 표정을 굳히며 자리에서 멈춰 섰다. 고작 스무 걸음 남짓한 거리였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곧 도착했다.

“디에즈……전하.”

로젤린이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불타오르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고, 사람들의 비명 때문에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디에즈는 그녀의 말에 반응하듯,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했어요, 로젤린. 무사해 보여 다행입니다.”

언제나 했던 인사말과 함께였다. 로젤린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를 주시했다. 하늘을 떠돌던 마카롱이 어느 지붕
위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하얀밤 기사단의 부단장 나단이 분을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단원들도 모두 검을 뽑았다.


로젤린도 망설이지 않았다. 디에즈는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로젤린의 모습에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내가 먼저 한 짓이지만 겪어 보니 생각보다 더 유쾌하지 못한 일이로군요. 어쨌거나…… 검은 치우는 쪽이 좋을


겁니다. 로젤린, 당신도.”

172 화.

“제법 화려하게 일을 저질렀더구나, 디에즈. 하카브 왕자는 어디 있지?”

리카르디스가 제 할 말만 하자 디에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었다.

“먼저 빠져나갔습니다. 저는 기다릴 사람이 있어서.”

디에즈는 그 말을 하며 로젤린은 찬찬히 훑었다. 리카르디스의 인상이 굳어졌다. 디에즈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
자신의 뒤로 흘끗 시선을 주었다. 그의 뒤에 있던 보라색 머리칼의 여자가 디에즈의 눈짓을 보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디에즈가 그걸 받아 하얀밤 기사단원들 쪽으로 던졌다.

모두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디에즈가 재밌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위험한 건 아닙니다.”

그의 말대로, 위험한 건 아니었다. 반짝이는 작은 구두였다. 어린 영애들이 신을 법한…….

리카르디스는 잠시 무언갈 생각하다가 이를 갈며 분노했다.

“디에즈 레예 일라베니아! 네가 지금……!”

“연회장에 체리트가 없던 걸 알고 계셨던 것 같군요. 덕분에 얘기가 빨라지겠어요.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 형님.
형님은 그 선에서 넘어오지 마시고…….”

디에즈의 말대로, 리카르디스는 건국일을 맞이한 연회에 체리트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다. 어린 7 황녀는
디에즈를 잘 따랐고, 그는 그것을 잘 이용한 모양이었다.

“로젤린, 당신과는 못 다한 얘기가 있어서. 잠깐 같이 걸을까요?”

“헛소리 하지 마라, 디에즈!”

“체리트를 데리고 갈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적당히 거지 소굴에 던져 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을 먹는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도는 곳인데요.”

리카르디스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디에즈를 처단하고 하카브를 쫓아야만 했다. 목숨의 무게는 결코 같지
않다는 사실을 리카르디스는 잘 알았다. 체리트를 살리는 것, 하카브를 죽이는 것.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명백했다.

하카브가 살아 돌아가게 된다면 분란과 전쟁은 가속화될 것이다. 어떤 때보다 하카브를 둘러싼 방어가 얕은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알고 있다. 잘 알고 있지만…….

리카르디스는 한번 어린 동생을 잃어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디에즈는 어쩌면 그런 약점을 파악하고 체리트를


인질로 데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체리트를 구하기 위해서는 로젤린을 홀로 보내야 했다. 그녀가 디에즈에게 어떤 일을 당했던가. 그가
로젤린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던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녀의 등을 헤집었다. 날카로운 검으로 그녀의 심장을
노렸다.

계속 된 시도는 점점 치명적이게 변하고 있었으니. 이번은 정말로 위험할지도 몰랐다.

체리트를 구하고자 하면 하카브와 로젤린을 놓친다. 로젤린과 하카브를 손에 쥐기 위해서는 체리트가 죽는다.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는 잘 알고 있음에도 리카르디스는 망설였다.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시체가 얼마나 차가운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여린 살결 위의 상처들은, 성력을


아무리 붓는다고 해도 낫지 않으리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마지막 모습만 가슴에 박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으리란 걸,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손이 검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리카르디스가 검을 뽑는 그 순간부터


전투는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말인즉슨, 인질의 안위는 더 이상 보장할 수 없다는 것.
하카브를, 죽여야 한다. 더 많은 희생이 발생하기 전에, 죽여야만, 반드시! 검 손잡이를 잡은 남자의 손이 덜덜
떨렸다.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솟았다. 몸 안의 피가 싸늘하게 식으며 손끝부터 굳어 갔다. 그때,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들고 나서야, 자신이 계속해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로젤린의 시선이 맞닿았다. 로젤린이 경직된 리카르디스의 손을 꽉 쥔 채,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전하. 걱정 마세요.”

여기저기 거리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화재로 인해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울음소리와 비명은 점점 커졌다.
주변이 소란하고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요란하게 울려 대는 가운데. 그녀 혼자 달빛 아래에서 고요하게 서
있었다.

삐이익----

밤하늘에 묻혀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독수리가 울었다.

로젤린이 하늘을 한번 보더니, 리카르디스와 기사 단원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두운 밤,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불꽃이 담겼다.

“황녀 전하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언제나 초연했던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것은, 리카르디스가 가진 것과 비슷한 종류의 분노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 또한 누군가를 잃은 적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어린 황녀 세티스티아의 시체를 안고 하루하고도 반나절간 부서진 마차 안에서 울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는 그녀의 눈을 보고서야 떠올려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리카르디스는 차마 로젤린을 붙잡을 수 없었다.

* * *

서쪽 성벽 문은 닫혀 있었다. 하카브는 어떻게 나간 것인지, 또 디에즈는 어떻게 나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곧


풀리게 되었다. 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디에즈와 같이 있는 보라색 머리칼의 여자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벌컥 문을 열어 줬다. 큰 정문이 아닌 병사들이 다니는 작은 문이긴 했으나, 그 또한 성벽 밖과 연결된
길이었기에 큰 차이는 없었다.

“오늘 비상종 울린 거 알고 계시죠? 이거 함부로 열어 드리면 안 되는데…….”

여자는 씩 웃으며 그들에게 묵직한 주머니를 던져 줬다. 평소에도 그래 왔다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후드를
뒤집어쓴 로젤린은 히죽히죽 웃는 병사들의 얼굴을 외워 뒀다. 이 나쁜 사람들.

두껍고 높은 성벽을 지나자 공기는 확 달라졌다. 고요하고 어두웠다. 로젤린은 말의 갈기를 쓸며 앞서 걷는


그들을 따랐다.

디에즈의 일행은 검은독사라 불리는 여인 한 명과 일라베니아인으로 보이는 사람 넷, 발타인으로 보이는 사람 넷.


도합 열 명의 소규모 무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하카브는 어디 있을까. 로젤린이 곰곰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감각에도 걸리지 않는 걸 보니 멀리 있는
모양이었다.

삐이익, 마카롱이 낮게 날며 울었다. 삑, 깩, 뺙, 깨르르륵…… 뭐라고 시끄럽게 우는데, 욕이었다. 디에즈를


향한 것이었다. 디에즈는 대충 알아들었는지 눈썹을 휘며 웃었다. 언제나 보여 줬던 그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으나,
로젤린은 이번은 경계를 놓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찔렀기 때문이 아니라, 납치한 소녀의 구두를 무성의하게 바닥으로 던졌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누르고 얘기했다.

“황녀 전하께서는요.”

“하카브 왕자와 함께 있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게 귀하게 여겨 달라 했으니. 걱정 마세요.”

“하카브 왕자는 어디 있습니까.”

“먼저 떠나라 했으니, 저보다 앞에 있겠죠.”

“나에게 무얼 원합니까.”

“그냥 얘기나 할까 싶어서요.”

그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쏟아지는 밝은 밤이었다.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디에즈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다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해야만 하는 얘기가 있어서. 그래서.”

얘기를 하자고, 해야만 하는 얘기가 있다고 해 놓고서는 디에즈는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느새 좁은 숲길이었다. 나뭇잎이 하늘을 얼기설기 가리기 시작하자 무리의 위에서 날던 독수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나무 위를 토도도 뛰어다니는 다람쥐가 그들을 줄기차게 쫓아왔다. 숲길을 천천히 가로지르던
디에즈가 말의 고삐를 쥐었다. 말이 제자리에 멈춰 서며 투레질을 했다.

나뭇잎 사이로 달빛이 떨어졌다. 디에즈는 그 아래에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조금 더 뒤로 빗겨 나가


있었다.

로젤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전 지나온 성벽, 거리들, 여기저기
불씨를 틔운 화재와 중앙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하얀 성까지.

그의 눈동자에 비쳐 황금색으로 덧칠해진 풍경은 아름다웠다.

“내가 이 말을 앞서 하지 않았던 것은…….”

디에즈의 흐릿했던 시선이 로젤린에게 닿았다.

“그래도 당신이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리카르디스의 옆에서 검을 들고 있을 것이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로젤린이기 때문에.”

토도도도, 다람쥐가 근처 나무에 자리를 잡았다. 디에즈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이건, 그래요. 내가 하려던 말은 아니지만,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로젤린. 당신이 형님을 따르고
지키고자 하는 건, 그녀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까요? 그 오래된 기억에, 고작 조각난 기억에. 나의 것도 아닌
기억에 매달리는 건 왜, 어째서.”

잔잔했던 남자의 목소리는 갈수록 분노에 차 흔들렸다. 한 자, 한 자. 그의 감정이 꾸역꾸역 들어가 있어 그녀도
잘 느낄 수 있었다. 조각난 기억, 나의 것도 아닌 기억? 로젤린은 과거 ‘로젤린’과 자신을 애써 분리하려 하지
않았기에 디에즈의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알을 깨고 나온 짐승이 처음 본 무언가를 따르는 각인일까요? 이전에도 그래 왔으니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그저 관성적인 행동에 불과할까요. 정말로 당신이 하는 모든 사고, 관념. 그 모든 것이 당신만의 의지로
이뤄지고 있는 게 맞습니까? 그 속에 당신이 있기는 해요?”

디에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다그쳤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하는 행동은 로젤린의 기억뿐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있는 것이라고.
리카르디스를 지키고, 그를 위해 검을 드는 행동까지 모두.

디에즈는 대충 답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분노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큰 숨소리를 내는 짐승의 위에 앉아, 힘을 빼고 앉아 있는 디에즈는 어쩐지 살아 있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녹아서, 부서져서 달빛과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로젤린.”

그가 작게 속삭였다.

“로젤린…….”

173 화.
“나쁜 장난을 즐기는군요, 황자.”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어 왔다. 디에즈는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방해꾼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이 책 내용이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빠르게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하는 것이 아이들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하카브가 책장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런 부류의 아이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황자는 그런 아이들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군요.”

하카브는 제 턱 아래에 겨우 오는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태양 빛을 한껏 받은 황금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쁜 짓을 하다가 들켰다는 자각이 있는 것 같음에도, 행동거지는 여전히 느긋했다.
디에즈는 또 다른 책을 뽑아서 눈으로 대충 훑고 있었다.

일라베니아 제국의 5 황자, 설원의 월계수 디에즈.

파티 홀에서 몰래 빠져나가기에 뒤를 밟았더니, 도서관. 심지어는 타국의 인사에게는 열람권이 없는 구역까지


들어가는 게 아닌가.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하카브 왕자. 어린아이의 실수나 장난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나이가 아닌 줄로
압니다만, 어찌 이런 금지 구역까지 오셨는지.”

책을 읽는지 넘기는 것인지 모를 빠른 속도였다. 디에즈는 다시 책을 덮고 끼워 두었다. 하카브가 제 턱을 쓸며


웃었다. 확실히 발타의 1 왕자와 제국의 5 황자가 대화를 나누기에는 부적합한 장소였다. 일라베니아도 발타도
아닌 라고슈 왕성 내 위치한 도서관. 그 금지 구역 안쪽이었으니.

“서로의 허물은 묻어 두는 걸로 하시겠습니까, 황자?”

“그렇게 하죠.”

디에즈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파티 홀에서 생글생글 사랑스럽게 웃던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전부 다


연극인 모양이었다.

태양 빛을 받는 황금보다 찬란하다는 둥, 디저트 위를 흐르는 벌꿀보다 달콤하다는 둥, 디에즈 황자가 눈길을


주는 곳에는 그곳이 라고슈라 하더라도 꽃이 필 것이라는 둥의 찬사를 받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툭툭 내뱉는 말투, 타국의 고위 인사를 앞에 두고 눈길도 주지 않는 태도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게 그의


평가와 대비되었다.

“한…… 안 가십니까?”

한가하십니까? 로 들렸다.

하카브는 그가 펼쳤다가 꽂는 책의 제목들을 쭉 훑었다. 죄다 역사 관련이었다. 그것도 일라베니아와 관련된.

하카브는 머리를 굴렸다. 일라베니아 내에 역사서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제국의 황자라 어지간한 책은 다 볼 수


있을 텐데, 굳이 타국의 도서관, 금지 구역까지 왔다는 것은…….
‘이것 참.’

하카브는 있는지 없는지 존재조차 몰랐던 디에즈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고 열심히 책을
읽었다가 끼우기를 반복하는 소년의 어깨 위로 제 손을 뻗어 책장을 짚었다. 디에즈는 졸지에 그와 책장 사이에
갇히게 되어 버렸다. 디에즈가 고운 얼굴을 확 찌푸렸다.

“발타에도 재밌는 책들이 많습니다, 황자.”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디에즈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하카브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디에즈는
편하게 책장에 등을 기대며 그와 마주 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싱글벙글하며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저는 그런 걸 좋아합니다.”

“말해 보시지요.”

“미신, 속설.”

“좋군요. 저도 그런 걸 좋아합니다.”

“말도 안 되는, 현실에 있을 수도 없는 소설.”

“주로 사람들은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고는 하더군요.”

“터무니없는 것.”

몇 개의 촛불로 밝혀진 도서관 내부는 어두웠다. 그 속에 황금빛의 황자만이 고요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다에 잠긴 보물 상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

하카브가 웃었다. 그쪽 핏줄은 어지간하면 바보거나 멍청이뿐인데, 황실의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머리가 비상했다.
일라베니아에 쓸 만한 인물은 리카르디스뿐인 줄 알았더니…….

“재미있군요, 황자. 마침 제가 그런 이야기를 압니다. 일라베니아의 사람이 듣기에는 한없이 허황하고


터무니없는 소설일 테지요. 흥미가 있으십니까?”

“저희가 있는 곳이 어딘지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흥미가 없었으면 금지 구역까지 왔겠냐. 숨겨져 있는 말을 알아듣고 하카브가 웃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려 드린다면, 황자는 저에게 뭘 줄 수 있습니까?”

디에즈가 무표정한 얼굴로 눈만 깜박이더니 그의 말에 답했다.

“일라베니아.”

하카브가 피식 웃었다. 제국의 5 황자가 주겠다는 대가치고는 크기가 너무 크다. 그래도 당찬 기세 하나와 내용
자체는 썩 마음에 드는 터라, 그 값을 후하게 치기로 했다.
* * *

발타로 귀화한 일라베니아 병사로부터의 증언이다. 정리된 문서는 소실되어, 그 당시 증언을 그대로 속기한
내용밖에 남아 있지 않다. 다른 병사들의 증언과 대조해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수감자들은 식사 시간, 용변이나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 것. 수칙 첫


번째입니다.]

[특별히 수칙으로 정해졌던 이유가 있을까요?]

[그게, 그런 겁니다. 너희들이 날고 기어 봐야 다 우리의 관리하에 있다. 그런 거를 보여 주는 거기도 하고요.


아무리 녹슬어 있다지만 대단한 무기였던 만큼, 철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거죠.]

[그랬군요. 이해가 갑니다. 또 다른 수칙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어요?]

[수칙 두 번째는, 함부로 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병사들의 이목을 피해 불온한 대화가 오고 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몇 년 전에는 기침 소리로 신호를 주고받은 적도 있었기 때문에, 숨 쉬는 것 하나하나도 주의 깊게
살피고, 처벌했습니다. 허튼 생각을 못하도록요.]

[오, 물론이죠. 그런데 어린 수감자들은 그걸 이해하기 좀 어려워했을 것 같은데, 그 경우는 어떻게 했죠?]

[어…… 그러니까…….]

(10 세 미만 어린 수감자들에게도 똑같이 체벌이 적용되었음을 확인함. 지속적인 학대.)

[대답하기 어려우면 넘어가셔도 됩니다. 다른 걸 얘기해 볼까요?]

[네, 네네. 아, 그리고 식사는 아침에 한 번으로 제한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아예 굶는 날이 있고요.]

[일반 범죄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나요?]

[아니요. 사람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수감자들은 아침, 저녁으로 식사를 배급하고, 특별 수감자들보다
양도 많습니다. 특별 수감자들은…… 아시잖습니까.]

[그렇죠. 마인이니까요.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겠어요.]

[맞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특별 수감소가 창설된 초창기만 해도 어휴, 밥을 제대로 먹이니까 철창 뚫고 아주


날아다녔다 합니다. 십 년 전만 해도 그런 사고가 빈번했다니, 점점 양이 줄어든 거죠.]

(……중략)

[감옥 내에서 태어난 애들도 많습니다. 근 이십 년 정도 됐으니까, 어린 애들은 뭐 다 감옥 출신이라 봐야죠.


일단 네 살 정도까지는 어미랑 같이 두고, 입이 트일 무렵이면 떼어 놨습니다. 아이들을 아이들끼리 따로 모아
둡니다. 여차하면 인질이 될 수 있게요. 아무튼, 그렇게 태어난 애들은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어요?]

[감옥에서 부모가 살갑게 이름을 붙여 주겠습니까, 누구야 하면서 안아 줄 수나 있습니까. 부를 필요도 없고,
불릴 이유도 없으니 이름도 없었죠. 병사들이 부를 때는 그냥 야, 너. 하거나 창대 끝으로 툭툭 치거나 했죠.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고, 상부 지침이라. 예, 상부 지침.]

[네, 상부 지침. 하하.]

[어렸을 때부터 들은 게 없다 보니 열 몇 살 되는 애들도 제대로 말을 못해요. 필요한 단어 몇몇 개 빼고는


모르죠. 그러다 보니 사고 능력도 떨어지더라고요. 멍청하고 행동이 더뎌요. 먹을 거밖에 모르고 그냥. 멍하니
있다가 자고, 하라는 거하고. 그런 식이죠. 그런데 사실, 그게 좀 편해요. 어른들이랑 달리 다루기
편리하니까요. 아, 제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 다른 병사들이 그렇다 하더라고요.]

(……중략)

[대신전 특별 수감소 내에 근무하면서 불편했던 점이 뭐가 있었나요?]

[지하 깊은 곳이다 보니까 습하고 춥습니다. 곰팡이도 잔뜩 펴 있어요. 일주일만 근무해도 다들 기관지에 무리가
와서요, 어우. 다들 배정되기 싫어했죠. 그런데 월급날 되면 그런 것도 사실 뭐 버틸 만했어요.]

[힘들었겠어요.]

[힘들죠, 정말 힘듭니다. 아무리 마인이라 해도 그런 환경이다 보니 나이 들거나 어린 수감자들은 못


버티더라고요. 몇 주에 한번 꼴로 시체가 생겨요. 그런데 그 시체를 어쩌겠어요. 치워야 되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감옥 안에 눈알이 희번득한 놈들이 있어요. 아주 오금이 저려요. 이건 뭐 철창 열자마자 폭동이
일어나겠다 싶죠. 실제로도 몇 번 시도가 있었고요. 그렇다 보니 상부에서 어지간하면 철창문 열지 말라 공문이
내려왔거든요. 철창문 안 열고 어떻게 시체를 치우겠냐고요. 환장합니다. 갈고리로 시체 끌어내서 안쪽에서
조각낸 다음에 꺼내야 해요. 냄새도 더 지독하고 처리 과정도 더 귀찮아도 어쩌겠어요. 아주 인간 백정된
기분이라니까요.]

(중략)

[이제 사건 당일 날에 대해 말해 주시겠어요?]

[제가 저녁-새벽 교대 조거든요. 갑옷 챙겨 입고, 장비하는데 뭐 밖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헐레벌떡 뛰어갔더니
특별 수감소 문이 열렸다고 그러지, 마인들은 도망갔다 그러지, 신관들은 살해당했다고 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더라고요. 여기저기 불타고 있어서 불도 꺼야겠고. 쫓아도 가야겠고 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알고
보니까 도망가고 시간이 제법 흐른 후였습니다. 목격자고 뭐고 다 죽이고 가서 몇 시간 동안이나 몰랐던 거예요.
아무 죄 없는 어린 수습 신관들까지 죽였다는데, 아주 잔인한 놈들이지 않습니까?]
174 화.

[그렇군요.]

[저는 일단 감옥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잡을 수 있으니까. 과거 마인 사냥을 할 때는 마인을


앞세워서 마인을 추적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서로를 감지할 수 있는 게 서로뿐이니까요.]

[네.]

[아무튼 그렇게 내려갔더니, 감옥 철창이 전부 열려 있지는 않은 거예요! 그게 다 특별 수감소 방침 덕분이죠.


감옥 열쇠를 모두 들고 있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 상부에 신청해서 허가받고 받아 오고…… 절차가 아주
복잡합니다. 운 좋게 열쇠 몇 개를 구했지만, 전부 구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 보이더군요. 철창이 다른 감옥에
비해서 두껍고 튼튼하다 보니, 약해진 몸으로는 부수지 못했던 것 같고요. 아무튼, 이거 됐다 싶어서 살펴보는데
세상에…… 갇혀 있는 수감자들이 다 죽어 있지 뭡니까. 병사들이 죽였을 리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놈들이
도망가면서 데리고 가지 못한 제 부모, 형제, 자매, 친구, 자식. 다 죽이고 간 겁니다. 얼마나 오싹하던지.
짐승도 그렇게는 안 할 겁니다.]

* * *

시간을 오래 거슬러 가야 하는 이야기이다. 축복의 밤이 매년 잊지 않고 찾아오던 그 시대.

이미 일어난 일이니,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황제는 축복의 밤을


불러오는 영광이 반으로 나뉘는 것을 탐탁잖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권력자 밑에는 언제나 머리를 굴려 수를
쓰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니. 그때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으리라.

황실은 먹음직한 미끼를 걸어 두고 몇몇 마인을 사주했다. 권력이나 물리적인 협박으로 찍어 누르는 방식 또한


서슴지 않았다. 대륙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끔찍한 살인 사건의 배후에는 황실이 있었으나,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돌을 던져야 하는 대상을 사건을 일으킨 몇몇 마인이 아닌, 그 힘을 가진
자들 전체로 확장한 것이다. 그들이 가진 힘이 온건하지 못하고 다소 위험성을 동반하고 있는 사실 또한 그
커다란 일의 배경이 되었다.
그중 강한 마력을 타고나는 혈족이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황제와 영광을 나눠 가지던 자들이었다. 몇 세대
걸쳐 쌓아 온 우정이 한순간에 꺾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들은, 보호라는 이름을 앞세운 황제의
거짓된 약속에 속아 넘어갔다.

사건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사람들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황실 깊은 곳에 숨어 있으라. 오랜 우정이 그대들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마인에 대한 원성은 잦아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인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마인을 향한
거부감은 더더욱 날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때가 무르익고서야 황실이 전면적으로 개입했다. 수천이 넘는
황실의 병력이 대대적으로 움직였다. 평화롭던 대륙에 피 냄새가 퍼졌다. 누구는 사냥이라 했고, 누구는
학살이라 했고, 누구는 정화라고 했다.

마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죽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했다. 대륙에서 마력이라는 힘과 마인이라는 존재는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황실의 대신전, 그 깊숙한 곳. 강한 마인들은 감금되어 오랜 시간을 보냈다.

몇몇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중, 달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다른 신생아들보다 가볍고
작았다. 산모가 제대로 먹지 못했던 탓이 컸다.

그 아이가 태어남과 동시에 감옥 안의 모든 마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아이의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엄청난 마력의
기운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역사가 일렀다. 몇 세대에 걸쳐 강력한 왕이 태어난다. 마력을 타고나는 그들의 핏줄에서도 유독 강하고,
응축된 마력을 타고나는 자라 했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가 이 상황을 타개해 주리라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강한 마력과 함께 운명을 거머쥐고 있다는 왕의 탄생이 기쁘고, 또 슬퍼서.

아이는 자랐다. 이름도, 어떤 보살핌도 없이.

어린 마인들을 모아 두는 몇 개의 옥방 중 하나. 작은 방 한 개 분량의 감옥 안에는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누우면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할 정도였다. 낮에는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다.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매질을
당하거나 물세례를 맞았다. 저녁에는 다닥다닥 붙어서 잠을 잤다.

아이는 유독 약해서 자주 앓았다. 다른 아이들이 더러운 천 조각 따위를 아이에게 덮어 주곤 했다. 아이의


사고는 마음껏 저 바깥의 공기를 맡으며 뛰어다니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더뎠으나, 더러운 천 조각의
온기로부터 배우지 못한 애정을 느끼기도 했다.

감옥 안은 춥고 습했다. 곰팡이가 펴 있고,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아이가 보아 온 공간은 변함없이 이랬던 터라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그저 언제나 배고플 뿐이었다. 아이가 쥐나 벌레를 입에 넣으려고 하면, 아이보다 두어
살 많은 또 다른 아이가 서둘러 뺏었다.

아이가 열 살이 되었다. 언제나 조용했던 감옥이 시끄러워졌다. 무섭게 매질하고, 걷어차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피가 고여 아이들이 있는 곳까지 흘렀다. 아이들은 갑작스런 상황에도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오랜 기간 학습되어 온 효과로, 그저 벌벌 떨며 굳어 있을 뿐이었다.

철창문 몇몇 개가 열렸고, 수감되어 있던 마인들이 감옥 안의 병사들을 모두 죽였다. 그들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었다. 탈옥.

아이가 있는 옥방의 철창문도 열렸다. 어느 여자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는 두려움에 찰싹 매달렸다.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데, 소리를 내면 안 되는데, 혼날 텐데, 아플 텐데. 배가 고프고 괴롭게 되는데.

어른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울고 있었다. 그 무섭던 병사들을 죽이면서도 울었고, 열리지 않는 다른 방


앞에서 철창을 두드리며 울었다. 태어난 이후로 접해 보지 못했던 큰 소음과 소란. 아이는 혼란스러웠다.

어른들은 탈출하지 못한 마인들이 사냥개가 되어 자신들을 추적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또한, 도망친 자들을
잡건, 놓치건 간에 이미 탈옥은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지내 왔던 것보다 더더욱 괴로운 나날이 그들에게 펼쳐질
거란 사실 또한 잘 알았다. 그들이 창을 들고 가족의, 연인의, 친구의, 자식의 심장을 꿰뚫은 이유였다.

여자에게 안겨 계단을 오르던 아이는 뒤에서 퍼지는 비명에 몸을 떨었다. 병사들은 진작에 다 처리했으니,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백했다. 하지만 아이의 사고 능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 그저 퍼지는 비명과
울음소리에 가슴이 덜컹. 절로 눈물이 날 뿐이었다.

아이는 곧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는 지하를 벗어났다.

휘이이, 바람이 불었다.

둥그렇고 새하얀 무언가가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까만 천장에는 빛나는 조각들이 무수히 박혀 있다. 처음 보는
세계였다. 아이는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동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근육이 퇴화한 탓에 넘어지는 일이 잦았다. 그들은 산 길목에서
상단을 급습해 마차를 얻었다. 야생동물을 사냥하거나 과일을 채집해 먹을 걸 구했다. 아이는 처음 맛보는 달콤한
과일을 허겁지겁 삼키다가 배앓이를 하기도 했다.

수일이 흘렀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쳤다. 간악한 마인들이 탈옥했다는 방문이 여기저기 붙었다. 포위망은 점점
좁아졌다. 필사적으로 도망가고 있으나 목적지는 없었다. 그들은 그저 그 어둡고 추운 공간에서 보다 멀어지길
바랐다.

그들은 산 깊숙이 들어갔다. 한두 명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흔적이 남았다. 저 멀리 사냥개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른들은 넘어지는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손으로 잡아끌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이 되었다. 검은 숲, 검은 나무 사이사이로 횃불이 빛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하늘 위에서 별과 달빛이


찬란하게 내리쬐었다.

사람들은 울었다. 절망하고 화를 냈다. 하지만 종국에는 허름하고 녹슨 날붙이를 꽉 쥐었다. 스르릉, 날카로운
금속음이 아이의 마음을 무섭게 다그쳤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불빛들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날에는, 영영 하늘의 빛을 잃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어둡고 무서운 공간 안에 다시 갇히게 될 것이다.

아이는 두려웠다. 두근, 두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작은 몸 안에서 마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다가오는
병사들이 소리쳤다. 저기에 있다! 저것들을 당장……! 화살이 날아와 아이의 옆에 있던 소년의 머리에 꽂혔다.

아이의 눈동자에 공중에 흩뿌려지는 핏방울이 비쳤다.

그들의 역사가 이른다.

몇 세대에 걸쳐 한 번씩, 강한 마력과 함께 운명을 거머쥔 왕이 탄생한다.


[아… 아, 아아아악!]

몸이 찢어지는 고통에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의 여린 몸은 그 거대한 힘을 감당해 내지 못했다. 육체가 파괴되기 시작했다. 비명이 울린 숲속. 마인들이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하나, 둘 떨어트렸다. 그들이 덜덜 떨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이에게 동조해 마력이 널뛰며 폭주했다. 모두의 안에 흐르는 마력이 몸집을 키우며 부풀어 올랐다. 사람들이
괴롭다는 듯 몸을 뒤틀며 피를 토했다. 오랜 세월 시든 육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세포 하나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아파, 괴로워, 무서워, 죽여! 도망쳐야 해, 복수를, 더 깊은 곳으로, 부디 누구라도! 기억이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가리가리 찢겨 나갔다.

바닥에 작게 웅크려 제 몸을 할퀴고 있던 아이가 눈을 번쩍 떴다.

펑!

그와 동시에 무형의 기운이 터지듯 퍼졌다. 나뭇가지가 꺾이고, 작은 돌들이 바깥으로 밀려났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던 병사들은 갑자기 세차게 불어온 바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밀려날 정도의 강풍이었다.

한차례 무언가가 휩쓸고 간 숲이 조용해졌다.

바닥을 기어 다니고, 풀숲에 숨어 찌르르 울던 벌레와 산새, 굴 속에 있는 작은 짐승과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맹수들이 숨을 죽이고 새로운 종의 탄생을 맞이했다.

사람들이 괴롭게 울부짖던 자리에는 수십 구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서 검은


덩어리들이 뭉글거리며 작게 흔들, 흔들거렸다. 뒤가 비쳐 보이는 그것들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나무의
그림자? 움직이는 검은 바위? 숲의 귀신? 어떤 이름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들은 어둠을 헤치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피해 더욱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남은 기억의 잔재가 그들을
이끌었다. 더 깊게, 더 깊은 곳으로.

병사들이 원했던 것은 살아 있던 마인이었으므로, 시체는 필요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체는 그대로


버려졌다. 그들의 시체 위로 햇살과 달빛이 지나기를 며칠. 그들의 시체는 순환의 법칙에 따라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다. 검은 덩어리들이 벗어 놓고 간 광기 어린 감정의 파편 또한, 남김없이.

이후, 그 산에 서식하는 짐승들의 공격성이 매우 높아져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마치 인간이


원수라도 되는 양, 수년간 차곡차곡 쌓아 온 원한이라도 있는 양. 거칠고, 매섭게 인간들을 공격했다.

그 사나운 맹수들은 마인의 광기를 닮았다 해서 마수라는 이름으로 묶여 살아가게 되었으나, 검고 불투명한, 연기
같은 그것들은 흔적도 없이 그림자 속에 녹아들어 이따금 그림자나, 귀신, ‘그것’ 따위로 불릴 뿐이었다.

사람들의 입을 오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그렇게 시작한다.

아, 내가 숲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를 봤는데 말이야…….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

터무니없어,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이야기이다.

ㅡ 2 부 완결.

175 화.

그림자 없는 밤 3 부 <아키하바라 도서관>

19

새벽이 지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황실의 석영 성을 포함해 수도 거리를 뒤덮었던 크고 작은 화재들은


사람들의 손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나, 마침 내린 단비로 끝을 맞이했다.

잿빛 하늘 위로 검은 연기가 퍼졌다.

“여기, 누가 제발 도와주세요!”

아주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은 고삐를 잡아 멈췄다. 병사들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리를 감지하지는 못했으나, 로젤린과 함께 있던 몇 시간의 경험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구조 요청입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수도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인들의 난동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치안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에,
황실 기사들 일부가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을 도왔다. 그중에는 로젤린도 있었다.

물론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연회장의 사건을 주도한 범인은 모두 수도를 떠났지만,
그렇다고 그게 모든 위험이 없어졌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전에 없던 단호한 태도로
로젤린에게 치안대의 지원을 명령했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구하라고.

로젤린은 밤새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아침 해가 뜰 무렵, 이성을 잃은 사람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해 불길도 잡혀 갔으나,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죽은 사람이 수백이고, 다친 사람은 그의 배가
넘었다. 화재와 괴인들의 난동으로 건물은 부서지고 무너졌다. 간밤보다 훨씬 조용해진 아침이라 해도 로젤린의
귀에는 갖은 신음과 비명, 울음소리가 점철되어 있을 뿐이었다.

로젤린이 걸음을 옮기자 병사 몇이 그녀의 뒤를 졸졸 따랐다. 무너진 건물 앞에서 사람들이 엉엉 울고 있었다.


로젤린은 축축하게 젖어 있는 머리를 뒤로 넘기고 말에서 내렸다. 누군가가 그녀를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로젤린 경, 로젤린 경! 제발!

로젤린은 한숨을 후 쉬고는 무너진 벽에 다가섰다. 귀를 기울이자 안에서 약한 신음이 들렸다. 생존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거뭇하게 물든 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장정 다섯이 모여도 들지 못하고, 밀어도
움직이지 못하던 거대한 건물의 잔해가 가볍게 들렸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로젤린 경!”


유명한 로젤린의 활약을 밤새 지켜본 탓인지, 앳된 병사의 눈에는 존경의 빛이 초롱초롱하게 담겨 있었다.

로젤린은 쫄딱 젖은 채, 미처 성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반쯤 부서진 건물의 지붕 아래에서 비만 겨우 피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초인적인 체력을 지닌 그녀라고 해도 지칠 만큼 고된 일정이었다. 고작 몇 시간 사이에 이렇게
많은 사건이 벌어질 줄이야.

로젤린은 나무 상자 위에 앉아 고개만 끄덕였다. 병사들은 그녀에게 몇 마디 더 붙이고 싶었지만, 상대가 너무


지쳐 보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미련 가득한 목소리로 경례한 후 발길을 돌렸다.

“어? 이게 여기도 있네요. 꽁지 빠져라 도망치는 와중에 이럴 정신은 어디 있었답니까?”

돌아서는 어린 병사가 툴툴대며 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웠다. 쓰러진 과일 바구니 밑에 있던 종이는 여태껏 내리는
비에도 귀퉁이만 젖어 있었다.

“협력자가 있는 거 아니겠냐? 마인이겠지. 하여간 더러운 놈들 같으니.”

뒤돌아선 남자들의 뒷모습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남자의 악관절이 느리게 꿈틀거렸다. 더러운 놈들.
한 번 더 욕설을 내뱉었다. 로젤린은 종이에 베인 듯 섬뜩한 기분에 잠시 몸을 굳혔다.

“그게 뭡니까?”

로젤린의 질문에 병사들이 화색을 지으며 뒤돌아보았다. 진득하게 붙어 오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깨졌다.

“예! 이게 무엇이냐면!”

“제가 주웠습니다! 예, 로젤린 경! 여기 있습니다! 한번 보시죠, 발타 그놈들이 얼마나 뻔뻔한지 황성과 거리에
그 사달을 내놓는 것도 모자라 일라베니아를 모욕했지 뭡니까!”

남자들이 다시 우르르 몰려왔다. 로젤린은 자리에 앉은 채 살짝 눅눅해진 종이를 건네받았다.

발타 욕을 한껏 퍼붓던 남자들은 지나가던 상관에게 걸려 모조리 끌려가야 했다. 한시가 급한 와중에 놀고 앉았어?
하지만 그런 그들의 상관도 로젤린에게 다가와 수줍게 경례하고서야 만족스러운 듯 떠나갔다.

홀로 남은 로젤린은 종이를 펼쳐 내용을 살폈다. 갖은 욕설과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법을 빼고 요약하자면, 축복의
밤이 떠오르던 먼 옛날. 일라베니아가 홀로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마인을 음해하였다는 것.

또한 축복의 밤을 위해서는 성력뿐만 아니라 마력도 필요했기에 마인들을 황실의 감옥에 오랜 세월 감금하고
이용했다는 것이었다. 운 좋게 도망친 마인들이 모두 죽어 버리게 된 탓에 더 이상 축복의 밤을 부를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일라베니아는 대륙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진실을 숨긴 비겁자 일라베니아여!
거짓된 영광을 내려놓고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

로젤린은 마지막 문장에 시선을 오래 두다 중얼거렸다.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

멍하니 보고 있던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가 돌연 사라졌다. 로젤린은 갑작스럽게 사라진 종이의 행방을
따라 고개를 올렸다.
그녀의 앞엔 마찬가지로 빗물에 축축하게 젖어 있는 인간 남자 형태의 마카롱이 보였다. 그는 어디서 주워 입은
것인지, 꽃이 수놓아진 연 분홍색 여성용 상의에 몸에 달라붙는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다. 복식의 조화에 큰
관심이 없는 로젤린의 눈에도 괴악한 옷차림새였다.

마카롱이 한쪽 손을 허리에 놓고 삐딱하게 서서는 종이의 내용을 읽었다. 중간중간 감탄사를 넣던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보면 지들이 당한 줄 알겠어.”

그러고는 종이를 두 번 접어 주머니 안에 쏙 넣었다.

“왜 뺏어가.”

로젤린이 마카롱의 허벅지를 찰싹 쳤다. 비에 젖은 가죽 바지에서 아주 찰진 소리가 났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기막힌 소리가? 로젤린이 가죽 바지를 만지작거리며 탐냈다.

마카롱이 자신의 옷자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벅벅 닦았다.

“이게 진흙에서 뒹군 곰이야, 거지야. 분간을 할 수 없어. 꼬질꼬질, 드러워 죽겠네. 어디 가서 나 안다고
얘기하지 마, 창피하니까.”

곰도 아니고 거지도 아니었다. 보통 평범한 선택지를 넣어 주지 않던가? 로젤린의 눈에 불만스러운 빛이 한껏


담겼다. 마카롱은 피식 웃고는 바닥에서 뒹구는 사과 두 개를 집어 내리는 빗물에 씻었다. 그러고 휙,
로젤린에게 사과 하나를 던졌다.

아삭, 사과를 한입 베어 먹은 마카롱이 반쯤 부서진 문가에 기대었다. 비 내리는 바깥 풍경만 보고 있는 걸 보니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키 큰 남자가 반쯤 가린 좁은 문틈 사이의 풍경을 응시했다.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핏물과 잿물이
뒤섞인 바닥은 엉망이었다. 로젤린은 그 장면을 멍하니 흘리며 사과를 손등에서 팔꿈치까지 굴렸다. 팔꿈치에서
툭 튕긴 사과는 다시 로젤린의 손으로 들어왔다. 빗줄기가 만드는 일정한 크기의 소음이 예민해진 신경을
가라앉혔다.

로젤린은 사과를 두 손으로 잡아 아삭아삭 씹었다. 입안 가득 상큼한 과즙이 퍼졌다. 로젤린은 그제야 자신이
굉장히 허기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천천히 사과를 씹으며 멍하니 상념에 잠겼다.

디에즈와 헤어지고 돌아오던 때였다. 어둠 속에서 아름다운 성이 불타고, 고개를 들어 보면 시릴 정도로 하얀


달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선명한 기시감이 들었다.

[……영영 모른 척할 수는 없어요, 로젤린. 이미 물은 흐르기 시작했고, 당신은 그걸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아주 오랜 옛날의 기억일지도 몰랐다.

* * *

황실은 싸늘한 정적에 잠겼다. 제국의 장자가 죽고, 귀족들이 살해당했으며, 그 주범은 유유자적하게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슬퍼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연회장 안에는 많은 신관이 있었으나, 쓰러진 모두를 살려 내지는 못했다. 발타의 비수는
급소를 스쳐 지나가는 법이 없었고,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아무리 리카르디스라고 해도 죽은 자를 살려 내는
기적을 일으키진 못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에 수도는 아직 혼란스러웠다. 그 탓이었을까. 적아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도 더러
생겨났다.

그날.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만이 ‘디에즈’라는 제국의 배반자를 발견하는 성과를 이룩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하카브도, 3 왕녀 간제나 고위 귀족 중 그 누구도, 하다못해 디에즈도 잡지 못한 채 돌아왔다.
그나마 납치되었다 알려진 체리트 황녀를 찾아내긴 했지만…….

체리트는 디에즈가 주장했던 것처럼 위험하고 먼 곳에 있던 것이 아닌, 황실 숲에서 고이 잠자고 있었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황실 숲에 대체 왜 있는지 모를 아기자기한 침대 위에서 편안하게 쿨쿨. 동화책 한 장을 떼어다 현실에
가져온 듯한 장면에 사람들은 많이 당혹스러워했다. 디에즈 황자는 애초에 그녀를 데리고 가지도 않았고, 해칠
생각도 없던 것이다.

체리트 황녀를 구한 일이 험난한 산과 강을 건너, 암살자들과 전투 끝에 이뤄 낸 것이 아니라 그런지, ‘체리트


황녀 전하 구출’ 건은 대수롭지 않은 취급을 받게 되었다. 로젤린은 사람들에게 ‘디에즈와 하카브를 놓친 자’
일 뿐이었다. 그 말이 ‘디에즈와 하카브를 놓아준 자’라고 바뀌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장 하카브에게 터트리지 못한 많은 이들의 분노가 로젤린에게 쏠렸다. 연일 계속되는 회의에서는 조금 멀리


있는 전쟁보다 가까이 있는 로젤린의 죄를 명백히 밝혀내기를 더 바랐고, 열 받은 리카르디스가 여러 번 테이블을
뒤엎었음에도 사태는 진정될 줄 몰랐다.

계속해서 감추는 걸 보니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게 아니냐. 떳떳하면 나와서 해명하라는 말만 되풀이될 뿐이라


리카르디스는 여러 조건을 걸고 딱 한 번 회의실에 그녀를 대동하기로 결정했다.

176 화.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로젤린은 잠결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무언가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킨 로젤린은 벽에
걸린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꿈은 길고도 짧았다. 코끝을 스치는 퀴퀴한 냄새. 어두컴컴한 공간, 저 멀리에서 보이는 희미한 횃불의 빛.
끈적한 철창, 곰팡이와 이끼가 낀 바닥과 벽의 온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덜덜 떨 수밖에 없던 그때의
감정과 모든 감각이 선명했다.

눈을 뜨니 머리는 혼몽했고, 잠에서 덜 깬 몸은 축축 늘어져 현실이 도리어 꿈같이 느껴졌다. 로젤린은 눈물도
닦지 않고서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코를 훌쩍이고 있는 사이, 멀리서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똑똑, 문을 두드린 소년이 정중하게 “들어가겠습니다.” 얘기하고는 문을 열었다.

아무리 깊게 잠들어도 타인의 기척을 예민하게 읽어 내는 로젤린은 언제나 헤사가 깨우기 전에 일어났다. 그래서
헤사는 오늘도 어김없이 “먼저 일어나 계셨네요.”라는 말로 아침 인사를 대신 할 예정이었는데…….

로젤린과 눈이 마주친 헤사는 그 자리에서 바로 얼어붙어 십 초 정도 숨을 쉬지 못했다. 너무 충격받아 눈알도 못


굴리던 소년은 멍하니 다가가 그녀의 입에 아침 사과 한 조각을 물려 주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고, 로젤린은
눈물을 그쳤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유령처럼 방 안을 떠돌아다니며 몸에 익은 청소만 관성적으로 하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모,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당도 높은 사과…….”라며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걸 보니 몹시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시트를 끌어당겨 아직 덜 마른 눈물을 문질렀다. 헤사가 가져온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하고, 헤사가 챙겨
준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몸단장을 끝내고 나니 헤사가 머리를 정리해 묶어 줬다. 소년은 아직까지도 흘끗흘끗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로젤린은 헤사의 시선을 뒤로한 채 거울을 바라보았다. 엉망이던 아까와 달리, 평소 같은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꿈속에서부터 계속 들러붙어 있던 감정만은 계속해서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헛소리하면 그냥 무시해.”

리카르디스가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이게 최선이란 걸 알고 있으나, 로젤린을 물어뜯을 준비가 끝난 승냥이
굴로 직접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이 마뜩잖은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쯧, 혀를 차고는 노망난 영감들 같으니,
라고 악담했다가 아차 하고 로젤린의 눈치를 살폈다. 로젤린은 기분이 저조한 와중에도 그를 보며 살짝 웃을 수
있었다.

“어떤 말이 헛소리입니까?”

“일부러 놓아준 게 아니냐. 이런 거.”

“아, 정말 헛소리네요. 알겠습니다, 그냥 무시하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시선이 쏟아졌다. 로젤린은 자신에게 와서 박히는
날카로운 눈빛들을 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앉으며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노려보듯 둘러보았다.

“오늘은 부디 그 돌림노래 같은 지겨운 얘기에서 벗어나 성과를 얻고 돌아갔으면 좋겠군. 어제의 약속을 잊지
않길 바란다. 강압적이고 난폭한 어투, 여러 명이 질문을 겹치며 추궁하는 식의 발언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
기사는 죄인이 아니고, 순수하게 그대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해, 바쁜 와중에 친히 걸음 한 것이란 걸
유념해라.”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질문은 리카르디스가 대충 이러한 경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하고 짚어 준 예상 질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디에즈 전하가 로젤린 경 당신만 독대하길 바라지 않았나, 무슨 얘기를 했나, 체리트 전하의 위치를 들었으면
디에즈 전하를 제압해도 되는 게 아니었나, 그 후 하카브를 쫓으면 되는 일 아니었나, 설마 모종의 거래를 하고
놓아준 거 아니냐. 등등.

시선은 찌를 듯 예리하고, 어조는 칼날 같았다.

로젤린은 세간에 떠도는 악의 어린 소문들이 그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 중이었다. 사람들은 당시의
상황을 보지도, 알지도 못했으니까. 그래서 설명하면 될 문제라 여겼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이 수많은 시선 가운데 자신은 이미 죄인이었다. 로젤린은 그들이
바라는 대답이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써 눌러두었던, 꿈속에서부터 이어받은 감정이 널뛰기
시작했다.

머리끝에서부터 무언가가 퍼져 나갔다. 검고, 약하고, 작은 것들이 온몸을 뒤덮어, 몸 위를 기어 다니고,


살갗을 물어뜯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불쾌한 감각에 로젤린의 얼굴이 점점 싸늘해졌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그녀 때문에 회장이 술렁였다.

“……경?”

걱정하는 리카르디스의 목소리에 로젤린은 정신을 차렸다. 간신히 감정을 가다듬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디에즈 전하와는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마지막에 황녀 전하의 위치만을 가르쳐 주며, ‘파편’을 먹여
두었다고 했다. 일라베니아 황실에 내가 아는 또 다른 마인이 없기에, 우선적으로 황녀 전하의 치료를 위해
돌아온 거다.

로젤린은 무미건조하게 응답했다.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은 누군가가 펄펄 날뛰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그냥 수면제를 복용한 것으로 판명 나지 않았소!”

“디에즈 전하께서 ‘파편’을 먹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주할 시간을 벌어야 하니 거짓말을 하셨겠죠.”

또 다른 남자가 질문했다.

“하카브 왕자가 일라베니아에서 가장 관심을 둔 인물이 경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소?”

원하는 대답이 빤하게 보였다. 로젤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살짝 흘렸다. 그녀의 실소에 회장이 다시 한번
싸늘해졌다. 로젤린은 개의치 않고 그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다 하더군요.”

“공적인 자리 이외에 접촉이 있었나?”

“없습니다.”

재빠른 대답이었다. 눈 하나 깜박 안 하는 태연한 거짓말에 리카르디스는 내심 감탄했다.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거짓말도 잘했다.

가만히 이 토론을 지켜보던 젊은 귀족이 질문했다.

“일부러 놓아주신 것은 아닙니까, 로젤린 경?”

로젤린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남자의 질문을 헛소리라고 판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도망갈 수도 있던 디에즈 전하께서 굳이 경을 기다렸다가, 다른 사람들을 떼어 놓고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적인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는 얘기를, 경의 입으로만 전해 들었지요.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혼자였고, 디에즈 전하며, 발타의 그 어떤 누구도 잡아 두지 못했습니다. 구한 것은 애초에
위험하지도 않았던 황녀 전하뿐.”

회의실에 모여 있는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의문을 품지 않으려야 품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결백을 증명할 만한 사람이나 물건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로젤린은 눈을 한번 감고, 숨을 내뱉었다. 무언가를 꾹 누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곧 눈을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는 결백합니다.”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 말밖에 할 줄 모르시는 것도 아닐 테고.”

이쯤, 리카르디스가 손을 들고 만류하려 했으나, 로젤린이 대답한 게 먼저였다.

“그렇다면 제가 결백하지 않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공간에 잠시간 정적이 일었다. 로젤린을 공격하던 남자는 잠시간 입꼬리만 씰룩였다.

“모든 정황이…….”

“어떻게 정황만으로 사람을 죄인이라 확정 지으려 합니까. 저의 결백이 저의 증언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처럼,
저의 죄 또한, 정황만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로젤린이 짧게 혀를 찼다.

“증거부터 가져오시고 이 논쟁을 계속하든가 말든가 하시죠.”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던 귀족들의 눈이 커졌다. 그건 리카르디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내 기사가 저렇게 말을
잘해? 순간 과거 ‘로젤린’을 보는 것만 같았다.

“로젤린 경…… 그대가 말하는 요지는 알겠네만, 무례하군.”

로젤린은 나이가 지긋한 귀족을 바라본 후, 정면으로 시선을 옮기고는 몸을 곧게 세웠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가 설원의 월계수 앞에서 진실된 맹세를 하고자 합니다.”

난데없는 충성 맹세에 귀족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남들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로젤린은 다른 사람들도 익히 따라 말할 수 있을 법한 서약문을 줄줄 외웠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검이 되겠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약자를


보호하고 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영광된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두 번째 월계수의 기사가 되어 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로젤린은 가슴에 두었던 주먹을 다시 등 뒤로 하고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한 번씩 쭉 마주 보았다.

“그렇게 제 목숨을 걸고 맹세했습니다.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제 목숨을 받으셨습니다. 단순한 정황, 제가


마인이라는 이유에서 생겨난 얄팍한 의심 정도로 폄하 당할 만큼 가벼운 맹세가 아닙니다.”

“아니, 그 맹세야…….”

로젤린이 그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못 알아먹은 귀족 한 명이 반박하려 반쯤 몸을 일으켰다. 해 봤자, 맹세 그거야


어기면 그만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이리라. 리카르디스가 느릿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설마 맹세쯤이야 어기면 그만 아니냐는 발언을 하려던 것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겠군. 그쪽이야 맹세를 밥 먹듯
어기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기사들은 그렇지 않은 터라.”

남자는 정말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는지 입을 합 다물었다. 리카르디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을


울렸다.

“그 의심은 목숨을 걸고 맹세한 로젤린 경에 대한 무례이고, 또한 그녀의 목숨을 받은 나에 대한 무례다. 이


자리에 로젤린 경이 참석한 것은, 요즘의 불안 속에서 그 정황이 한편으로 나쁘게 받아들여지리란 사실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절하게 해명이 아닌 설명을 하러 왔지. 로젤린 경은 검은달의 암살자를 제압하며
검은 달을 가르겠다는 맹세를 증명했고, 그대들이 충격받아 따뜻한 침대에서 요양하는 동안 밤새도록 거리를
뛰어다니며 백성들을 구해 약한 자를 보호하겠다는 맹세 역시 증명했다. 티가드의 수많은 백성이 로젤린 경을
칭송하는 소리는 듣지 못한 건지 듣기 싫은 건지 모르겠군.”

177 화.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사건 당일, 그 혼란한 와중에 자신더러 거리의 상황을 수습하라고 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지금 눈치챘다. 홀로 디에즈를 따라갔고, 누구도 잡아 오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런
파문이 일어나리라, 리카르디스는 그때부터 예상했던 것이다.

“백성들은 무지하기에 속은 거고, 그대들은 배운 게 많아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면 배운


사람답게, 정황만으로는 죄를 입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빠른 시일 내에 깨닫고 증거부터 들고 와라. ‘그런
행동을 했으니 그런 것이나 다름없다.’ 따위의 어린아이 떼쓰는 말은 말도록.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때에, 이런
쓰잘머리 없는 건수로 시간을 얼마나 허비하려는 셈이지? 발타 측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걸 보니 그대들은 죄다
간자인가?”

“저, 전하!”

귀족들이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대충 가늠이 가는가 보군. 지금 나와 내 기사가 딱 그런 마음이니 잘 되새기길 바란다.


자, 슬슬 마무리 지어 볼까. 그대들은 의문이 있었고, 로젤린 경은 충실히 답했다. 이제부터는 그대들도 신중히
질문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리카르디스의 푸른 눈이 시리게 빛났다. 남자들은 입가를 가리며 서로 시선만 주고받았다. 싸늘한 정적 속에


회의는 생산성 없는 말이 몇 번 더 오고 가다가 마무리되었다.

회장이 텅 비었다. 로젤린은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리카르디스의 눈을 애써 피했다. 그가 왜 쳐다보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예민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변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디에즈와 대화를 나누고, 그가 준 작은 조각을 흡수한 후부터였다.

변화의 이유를 알고 있는 자신도 당황스러운데 리카르디스는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싶었다. 그에게라도 디에즈와
나눈 대화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결국은 또 말하지 못했다.

[……후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홀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로젤린은 모호한 말로 후일을 기약했었다. 리카르디스는 ‘알겠다’고만 답했다.
그것이 더욱 미안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 한 로젤린은 결국 한숨만 토해 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약자를 보호하고 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눈부셨던 과거의 맹세가 서서히 빛바래고 있음을 무슨 수로 그에게 말한단 말인가.

* * *

마침 교대 시간이었던 터라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생각에 잠겨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데, 여기저기에서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졌다. 수군수군, 저들끼리 얘기하며 로젤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를 타고 흐르는 부정함이 어딜 가겠어? 남자들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더러운 것들 같으니.]

지하 감옥의 병사가 침을 퉤 하고 뱉는 소리가 겹쳐 울렸다.

탁.

로젤린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크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위협하지
않았음에도, 남자들은 그녀의 시선이 닿자마자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며 흩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주위에 수군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머리는 싸늘하게 식어 가는 반면, 심장은 빠르게 박동하며 가열되고 있었다. 화가 났다. 당장 어딘가에 터트려
버리고 싶을 정도로.

로젤린은 한참 자리에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탁, 탁. 기사답게 규칙적이고 정돈된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나요, 로젤린?]

디에즈가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 한 점 없어 공기마저 멈춘 것 같던 순간이었다.

[저는 알고 있어요.]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나쁜 짓’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말하는 디에즈의 표정은 평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숨쉬기 버겁고, 못 견디게 고통스러워 보였다.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기억하지 못할 뿐. 하지만 사절단 이후로 조금씩 떠올릴 수 있었겠죠. 그때의
전투로 우리가 잃어버렸던 분노의 파편을 받아들였으니까요.]

로젤린은 디에즈가 말하는 잃어버렸던 분노가 마독 ‘파편’, 정확히는 파편에 섞여 있는 마수의 마력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파편을 흡수한 후부터 이상한 꿈을 꾸거나, 황실에 대한 거부감이 짙어졌음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가라앉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주 자그마한 계기면 충분합니다.]

그 말을 하고서 디에즈가 꺼내 든 것은 과거 마카롱이 발타에서 훔쳐 왔던 것보다 큰 마수의 결정이었다. 달빛을


받은 검붉은 결정의 빛이 스산하게 일렁였다.
[이건 당신이 잠시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는 것에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흡수하지 않는다고…… 영영 모른
척할 수는 없어요, 로젤린. 이미 물은 흐르기 시작했고, 당신은 그걸 막을 수 없을 겁니다.]

디에즈는 로젤린의 발치에 결정을 던졌다. 그녀의 시선이 결정을 따라 이동했다. 시야 밖에서 디에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걸 알게 된다고 당신의 다짐이 달라지리라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하고 망설이겠죠. 이따금
이게 옳은 건지, 이대로도 괜찮은 건지. 고민하게 될 겁니다. 그렇길 되기 바랍니다. 부디. 그 망설임이 당신의
발목을 잡아,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멈춰 서게 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디에즈는 다람쥐가 떨어트린 돌멩이에 한 대 맞고서도 평온한 표정으로 떠났다. 마카롱은 모든 광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디에즈가 준 결정을 회수하려 하지도 않았고,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로젤린은 풀잎 사이로 빛나는 결정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시간이 지나, 꿈에서 흘린 눈물이 차고 넘쳐 현실에서 흐르기까지 일주일도 필요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결정의
힘뿐만 아닌 다른 요소도 작용하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과 어둠 속 불타는 하얀 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비추는 아름다운 하얀 달까지.

과거와 비슷한 상황들은 로젤린이 잊고 있던 기억을 깨우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모든 기억을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이따금 흔들고는 했던 격렬한 감정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변할 것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한데 자신을 둘러싼 이 눈빛들이, 적의가, 불합리한 분노가, 거짓을 진실이라 믿는 자들의 모든 행동이.

‘짜증 나.’

로젤린은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나.’

사람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계속 달렸다. 이 자리에서 벗어난다 해도 결국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지 않으리란 사실은 알았지만, 어디라도 좋으니 달아나고 싶었다.

사람들이 시선이 닿지 않을 곳, 숨을 수 있는 곳.

로젤린은 단숨에 달려, 벽을 타고 창문을 통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헤사가 미리 따뜻하게 데워 놓은 방


안의 공기가 훅하고 그녀를 감싸 안았다. 로젤린은 눈을 찡그리며 침대 위에 풀썩 엎어졌다.

“……누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고개만 반대로 휙 돌렸다. 테이블을 끼고 칼릭스와 인간 여자 형태의
마카롱, 미미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미미는 술병을 테이블 위에 놓고서는 칼릭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희 누나 사춘기가 이제야 왔나 보다. 늦되네.”

칼릭스는 낄낄거리는 미미를 노려보았다.

“…….”
참 신기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화가 나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는데…….

로젤린은 침대에서 일어나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미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미는 술을 마시고 크하, 하는 걸걸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뭘
보고 있냐.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당장 터질 것 같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미미가 들고 있던 술병을 빼앗았다. 달콤한 과실 향이 목 뒤로 넘어가자, 영영 사라질 것 같지 않던


찝찝함이 조금 덜어진 기분이었다. 로젤린은 술병째로 홀짝홀짝 마시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더럭 얘기를
꺼냈다.

“재밌는 얘기 해 줘.”

미미는 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이었고, 칼릭스는 눈동자를 굴리며 당혹스러운 감정을 표출하는
중이었다.

“빨리.”

로젤린이 탁자를 탁탁 치며 재촉하자 미미가 합세했다.

“그래, 네 누나가 재밌는 얘기 해 보라잖아.”

칼릭스는 초조한지 팔짱을 낀 채 다리를 떨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머뭇거리며 재밌는 얘기를 시작했다.

“음, 일주일 전에 알터가 눈에 커다란 멍을 달고서 집무실로 들어오더군요. 부상의 이유를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아서 묻지 않았는데, 알터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하면서 막무가내로 얘기를 시작하지 뭡니까.”

알터와 그의 여동생 일리야는 평소같이 말다툼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졌다고 한다. 결국 몸싸움으로 번졌고,
윗사람으로서의 아량이고 뭐고 간에 진심으로 상대하려 했는데 처참하게 패배했단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동생에게 지고, 분해서 울었다는 알터의 얘기가 너무나 재밌는지 칼릭스는 말하는 중간중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감흥도 없고 재미도 없었다. 마치 보고서를 읽는 느낌이었다. 미미의 얼굴에는 싸늘함이 감돌았고,


로젤린은 어느 부분에서 웃어야 하는지 몰라 가만히 술병 입구를 물고 있기만 했다. 정적이 길어지자 칼릭스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저는, 재밌다고 생각했는데요.”

미미는 그 회심의 재밌는 얘기를 반추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놀리지도 못할 만큼 처참했다.”

178 화.

로젤린은 칼릭스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자 칼릭스가 이것 보라는 표정으로 미미를 흘겼다. 미미가 콧방귀를 뀌었다.

“저거는 너의 재밌는 얘기와 아무 상관 없이 그냥 기분 좋아서 웃은 거야. 원래 순한 애들은 가만히 있다가 혼자


웃고 그래.”

“무슨 소리십니까. 제가 얘기하자마자 누님께서 바로 웃으셨는데요.”


로젤린이 흐흐 웃었다.

“웃기다.”

“보세요.”

“또 얘기해 줘.”

“잘 논다.”

칼릭스는 또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여러 재밌는 얘기들을 했다. 하나같이 재밌지도 웃기지도 않은 것들뿐이었으나,
최선을 다하여 ‘재밌고 유쾌한 이야기’를 떠올리기 위해 고뇌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저번에 아버지와 함께 갔던 음식점 있지 않습니까.”

“응.”

“저희가 앉았던 자리가 관광 명소처럼 되었다더군요. 이 자리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앉았던 자리, 이 메뉴는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한 번 더 시킨 메뉴. 이런 식으로요.”

별거 아닌 이야기에 로젤린이 까르륵 넘어가자 미미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하게 뭘 잘못 먹었나 본데.”

“무슨 소리십니까. 제 화술이 뛰어난 것을요.”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에도 로젤린은 술 취한 사람처럼 헤헤거리기만 했다. 그런 그녀를 잠시간 바라보던
칼릭스가 손을 뻗었다. 굳은살과 흉터가 눈에 띄는 손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든 아이의 요람을 흔드는 바람이 이러할까.

“무슨 일 있으세요?”

로젤린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상하게 화가 나서.”

로젤린이 오리 입처럼 입술을 쭉 뺐다. 칼릭스가 잔잔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누님께서 왜 화가 나셨을까요?”

어린아이 어르는 듯한 말투에 미미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계속 나한테 뭐라 그러고.”

“나쁜 사람들이네요.”

“손가락질했어. 재수 없어.”

“교양 없는 인간들이로군요.”
“그걸 반대로 꺾어야지 그대로 두냐.”

로젤린은 짜증과 분노를 되짚어 가며 객관적으로 자기 상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사람들이 욕하고, 손가락질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재단하고. 여러 이유가 있으나…….

“그러니까, 내가 예전에는 모르던 걸 알게 되었는데.”

“네.”

“그걸 알게 된 이후로부터 모든 게 달라진 기분이야.”

“음, 그랬군요.”

“그래서 좀 혼란스럽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녀는 다시금 디에즈의 말을 떠올렸다.

[모든 걸 알게 된다고 당신의 다짐이 달라지리라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하고 망설이겠죠. 이따금
이게 옳은 건지,]

“무엇이 옳은 건지.”

[이대로도 괜찮은 건지.]

“이대로도 괜찮은 건지…….”

머리가 복잡했다. 가슴을 죄는 듯한 끈적한 분노와 불안함이 신경을 바늘처럼 가늘고 뾰족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일라베니아는 자신에게 너무나도 잔혹했다. 그리고 제 가족과 친구들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도
무자비하게 굴었다. 그것이 불합리하고 지탄받을 일이라는 것은 그때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에서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지금 이 자리. 일라베니아의 황성에 있었다. 일라베니아의 기사로서.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나는 일라베니아의 강인한 울타리.

일라베니아는 나에게 죄를 저질렀고, 나는 일라베니아를 증오한다.

자신과 자신의 생각과 관념이 충돌하자 맹세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괴롭다고, 도무지 견딜 수 없다고 하면 그대로 놓아줄 것만 같았다.

리카르디스의 곁을 떠날 수 없으나, 일라베니아의 과거를 묻어만 둘 수도 없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칼릭스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

“응.”

“제가 누님의 모든 사정과 생각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고, 또한 제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만.”
“응.”

“새로 마주한 사실은 이따금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어요.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누님. 그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 누님에게 가장 중요하느냐……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로젤린이 눈만 깜박이자 칼릭스가 살짝 웃었다. 음, 전혀 못 알아들으셨군. 하는 미소였다. 그리고 로젤린은


정확하게 못 알아들은 게 맞았다.

“가볍게 예를 들어 보자면…… 누님께서 맛있게 드시던 스테이크는 사실, 콩으로 만든 겁니다.”

로젤린은 너무 충격받아서 술병을 놓칠 뻔했다.

“어디까지나 예시입니다. 아무튼, 누님. 만약 모든 고기가 콩으로 만들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기분이 어떨 것


같으세요?”

“너, 너무 혼란스러워.”

“그렇죠. 세상에나. 고기인 줄 알았는데, 콩이었다니.”

미미가 피식 웃었다.

“저렇게 얘기를 재밌게 하는 아이였는데, 아까는 왜 그랬담.”

“……안 바쁘십니까, 마카롱 님?”

“전혀?”

칼릭스가 미간을 좁힌 채 계속 얘기했다.

“……그래서 누님은 굉장히 혼란스럽고, 속아 왔던 세월에 분노하게 되겠죠.”

아니, 콩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만 누님은 곧 깨닫게 됩니다.”

칼릭스가 깍지를 끼고 거기에다 턱을 괴었다. 칼릭스를 따라 로젤린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맛만 좋으면 그만 아닐까?”

로젤린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콩 맛이 나는 고기보다, 고기 맛이 나는 콩이 더 좋지 않을까?”

“그러네?”

“그렇지요. 누님은 어떤 영양학적 정보보다, 맛을 중요시했던 겁니다.”

로젤린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도 감탄했다. 정말 맞춤형 설명이라며. 칼릭스는 은근 뿌듯해하며 말을
이었다.

“누님께서 앞으로도 접하게 될 수많은 사실들은, 기존의 관념을 완전히 흔들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모든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칼릭스가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조심스레 덮었다.

“일라베니아의 유명한 시인이 사람의 생을 항해에 빗대었습니다. 긴 여행입니다, 누님. 때로 는 거친 파도에,


풍랑에, 폭풍에 배는 방향을 잃고 헤맬 수도 있어요. 그렇게 배가 흔들릴 때에 무거운 닻이 있다면 중심을 잡아
떠밀려 가지 않을 것이고, 나침반이 있다면 길을 잃어도 다시 목적지를 향해 나갈 수도 있겠죠.”

로젤린은 칼릭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슴푸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누님이 느끼는 혼란 속에 닻이 될 만한 중심과 나침반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걸 잘 생각해 보세요.”

나의 중심.

* * *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대신전의 넓은 제단을 둘러싸고,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의 1 황자,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의 장례가 치러지는 날이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의 중앙에는 하얀 대리석이 원형으로 깔려 있으며, 중앙으로 갈수록 층계가 높아지는
형식이었다. 낮은 단을 세 번 올라서야 도달할 수 있는 중앙에는 사람들의 허벅지쯤 되는 높이의 제단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제단 위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하얀 석관이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하얀 꽃에 둘러싸인 채 평안하게 눈을 감고 있어야 할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석관의 뚜껑이 조금의 틈도
없이 굳게 닫혀 있기 때문이었으나,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령 석관이
열려 있다 하더라도, 엘피디오의 시신을 볼 수 없으리란 사실을.

하카브가 도망치고 리카르디스와 황녀 체리트의 증언으로 5 황자 디에즈가 제국을 배반했음이 알려졌다. 발타와의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황후 트리파는 제 아들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것에만
혈안이었다.

엘피디오의 시신이 불태워졌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나, 황후는 거짓된 정보라 일축하고는 많은 인원을 동원해
황실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들인 시간과 인력이 무색하리만큼 어떤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시체가
소각되었다는 소문의 신빙성이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후는 수색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것이 엘피디오의 장례가 늦어진 이유였다. 만약 황제가 수색 중단과 장례식의 준비를 명령하지 않았다면,
황후는 한 달이건, 일 년이건 재가 되어 사라진 엘피디오를 찾았을 것이다.

엘피디오의 신체라고 할 만한 것은 암살자에게서 벗겨 낸 얼굴 가죽뿐이었다. 한 사람이 누워도 널찍한 관 안에는


머리 가죽과 황실 인장이 찍힌 반지만이 들어가게 되었다.

땅에 있을 때 이델라브힘의 빛을 널리 퍼트려 어린 백성들을 보살폈던 위대한 영혼은 드디어 육체를 벗어 던졌으니,


하늘로 가는 길은 영광뿐일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축복받은 영혼은 이델라브힘께 돌아가
영광스러운 신의 나라에 머물게 된다. 때문에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이는 건 아직 그러한 관념을 모르는
아이들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제단 위에 올라가 있는 황후는 언제나 보여 왔던 고고한 태도를 내려놓고서는 머리를 풀어헤친 몰골로
석관 위에 엎어져 있었다. 석관을 쓰다듬다가, 손톱으로 긁어내리다가, 머리를 박고는 숨이 멎을 듯 울었다.

“아, 아아…… 폐하 제발. 엘피디오를 이렇게 보내시다니요! 전하의 첫 아이가 아닙니까! 어떻게 고작 가죽 한
장만을 남기고 영광된 빛의 길로 떠나라 하십니까! 눈이 없어 길을 보지 못하고 발이 없어 걷지도 못할 텐데,
엘피디오를, 어, 어떻게…… 폐하 제발. 조금만 더 찾으면 될지도 모릅니다. 발타의 간악한 것들이
일라베니아의 황자를 끝까지 욕보이려 하는 수작일 뿐이니 제발, 폐하!”

아이 잃은 부모의 마음을 다들 감히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 차마 그녀를 석관에서 떼어 내지 못했다. 석관 위로


붉은 피가 번졌다. 손톱이 너덜너덜하게 들린 트리파의 손에서 나오고 있었다. 황제는 딱딱해 보이는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대신관에게 눈짓했다.

나이가 지긋한 대신관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황후를 보고는 그대로 장례식을 시작했다. 성스럽고 서글픈 노래에
대신관의 축복이 한 구절 한 구절 더해졌다. 트리파의 울음소리는 영광스러워야 할 장례식을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다.

179 화.

죽음은 시작이 아닌 끝일 뿐이다. 육체를 벗어 던져 무게가 없는 영혼은 그저 떠돌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본


적 없으면서 어떻게 신의 세계를 입에 담나.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녀의 눈물과 울음소리가 애써
포장해 두었던 죽음을 발가벗겨 사람들 앞에 집어 던졌다.

수백이 가득 차 있는 공간은 마치 대신관과 황후 트리파, 그리고 엘피디오의 석관만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투둑,
투두둑. 잘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모두의 숨소리마저 가렸다.

다음 대의 황제가 되었을 제국의 1 황자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 그의 초라한 끝이 모두의 입안을 쓰게


만들었다.

그것은 리카르디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복잡한 마음을 무표정한 얼굴 아래 숨기고, 시체 없는 장례식이


거행되는 내내 자리를 지켰다. 트리파가 혼절해서 누군가에게 안겨 나가는 것도, 마지막에 석관 위에 대신관의
성수가 뿌려지는 모습도, 그 석관이 땅에 묻히는 것까지 모두. 장송곡이 멈추며 식의 끝을 알렸다.

리카르디스는 잎을 툭툭 두드리는 빗줄기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물방울이 속눈썹에 맺혔다가 떨어져 나갔다.
흐릿했던 인영이 또렷해졌다. 로젤린이었다.

구름이 뒤덮은 잿빛 공간 속, 비에 젖은 창백한 얼굴이 빛을 잃어 더 어두워진 검은 머리카락에 조금씩 가려져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석관이 묻힌 자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나 보는 얼굴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왜일까. 왜 낯선 걸까. 그 이유를 생각하던 리카르디스는 곧 깨달았다.
로젤린은 타인의 시선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언제 어디서나 시선이 오는 방향을 바라보았기에, 리카르디스의
기억 속 로젤린은 언제나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처럼 상념에 잠겨 이런 적나라한 시선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로젤린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 속에서 어떤 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 또한 참으로 낯선


일이었다.

그 순간 로젤린의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이더니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눈이 마주쳤다. 멍한 표정으로


그녀가 얘기했다.

“장례식은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합니다.”

주위의 동료 기사들이 로젤린을 갓난쟁이 보듯 바라보았다. 파르딕트는 고래무덤의 영지에서는 하루에도 두세


놈씩 죽어 간다며, 자랑인지 뭔지 모를 말을 했다. 로젤린이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한때 암살까지 생각했던 인물의 죽음이지만 그렇게 기쁘지는 않네요.”

레이몬드가 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 동시에 기사단원 전원과 기사단장 스타스, 그리고 리카르디스까지
황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장례식이 끝난 지 오래라 남은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하얀 무리에서 안도의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로젤린이 입이 막힌 채 수화로 얘기했다.

[시도한 적 없음]

[여러 차례 반복해 생각만]

[적을 은밀히 죽일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들키게 되리라 예상함]

[……라는 친구의 조언]

리카르디스와 스타스는 진심으로 그 친구에게 고마워했다. 스타스는 그 친구가 자신이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는,
올가미 용병단의 임시 단원 쥬쥬라는 사실을 듣고 나서는 미묘한 반응을 보이긴 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더 굉장한 발언을 하기 전에 돌아가기로 했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은 빗속을 나란히 걸었다. 그녀는 가끔 뒤돌아보았다. 엘피디오의 관을 보는 듯했다.


리카르디스도 로젤린을 따라 뒤돌았다. 장면은 먹구름 때문에 어두컴컴했으나, 안개가 낀 탓인지 희뿌연 빛이
감돌았다.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 로젤린이 물어 왔다.

“전하도 기쁘지 않으세요?”

“음…….”

그가 곤란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엘피디오가 죽기만을 바라 왔지만…….”

세티스티아가 죽고, 이후 밀리아도 제 딸을 따라가듯 목숨을 잃었다. 세티스티아의 죽음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엘피디오의 공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증오한다는 말로는 엘피디오와 자신의 관계를
다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 그렇게 기쁘지는 않군. 이건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아. 한 사람의 죽음에 인도적으로 슬픈 감정이
들어서는 아니야. 나는 그대와 달리 선한 사람이 아니거든.”

“전혀 슬프지 않습니다, 저도.”

“……슬프지 않다고 선하지 않은 건 아니지. 이런저런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까.”

리카르디스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무튼. 이런…… 찝찝한 감정을 오래 가지고 있는 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청소를 해야겠어.”
“청소……?”

장난스럽게 코를 찡긋한 리카르디스가 미소 지었다.

“기분이 찝찝할 때는 청소를 해야지.”

그가 살짝 눈짓하자 뒤따라오던 잇세리온이 빠르게 다가섰다.

“별관 어디…… 지하에 박아 뒀던가.”

“예, 전하? 무얼 말씀하십니까.”

“초상화.”

몇 년 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또 다른 황태자 후보, 리카르디스의 존재 덕분에 황제는 평안한
나날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너그러워진 상태에서 리카르디스의 생일이 찾아왔다. 소원이
있으면 들어주겠다는 황제의 말에 리카르디스는 오직 엘피디오를 괴롭히겠다는 일념 하나로 부탁했다.

언제나 형을 가지고 싶었는데, 엘피디오 형님이 있어 너무 기쁘다. 둘이서 사이좋게 있는 모습의 초상화를 가지고
싶다. 내 일생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 될 것이다!

물론 본인에게도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리란 예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그 나이 대의


어린아이들에 비해 다양한 종류의 고통에 익숙했고, 어린애 한 명 골리기 위해 그쯤은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소원은 곧 엘피디오의 석영 성으로 전달되었다. 엘피디오가 뭔 미친 개소리냐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고 했다. 그 소식이 그해 리카르디스의 가장 기쁜 선물이 되었다. 엘피디오의 반항은 황제의 강압적인
명령에 끝을 맞이했고, 자존심이 있어 그맘때 즈음 입지 않게 되었던 반바지까지 예쁘게 차려입고 나와야만 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초상화에는, 꽃으로 꾸며진 하얀 그네 의자에 아름다운 소년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있는 정다운 모습이 새겨지게 되었다. 보이는 곳에 걸어 두자니 흉물스럽고, 버리자니 언젠가는 써먹을
수 있을 거 같아 별관 지하 어디에 처박아 두었었다. 돌연 그 흉물스러운 존재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엘피디오의 석관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던 황후 트리파의 모습을 본 이후부터였다. 엘피디오는 자기도취에 빠진
인간이었다. 소설 속 영웅같이 근육이 울룩불룩한 모습의 동상을 세우고, 잔뜩 미화된 자신의 초상화를 성 복도에
쭉 늘여 놓고 감상하곤 했다.

그 많은 엘피디오의 초상들이 이번 사건으로 모두 불탔다. 성인식을 치른 엘피디오의 초상화는 황실에서도


보관하고 있었으나, 어릴 적의 모습을 담은 것은 전부 없어진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가지고 있는 초상화는 대륙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엘피디오의 흔적 중 하나가 된 셈이었다.

황후는 야심 있는 여자였다. 엘피디오가 죽었으나 그의 동생 3 황자 틸렌드가 있다. 그녀는 또다시 틸렌드를


내세워 자신을 어떻게든 황실에서 솎아 내려 할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선물을 보낸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아무리 황후의 모습에서 어머니, 밀리아의 모습을 보았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엘피디오 때문에 밀리아가 그렇게 되었는데. 수년간의 고통은 고작 엘피디오의 죽음 정도로 해소될 만큼 작은
크기가 아니었다. 당연히 원한은 남아 있었다.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엘피디오는 이젠…….


“……초상화를 수정해라. 덧칠해서 나 하나 지우는 것쯤은 화공에게 일도 아니겠지. 엘피디오만 남긴 다음에 황후
폐하께 전달해 드리도록 해라.”

잇세리온이 헉, 숨을 들이켰다. 리카르디스에게는 말 못 했지만, 어렸던 리카르디스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가끔 지하실에 들러 보고는 했는데! 그, 그걸 지우고 엘피디오 전하만 남겨서 보내라고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대신하여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니, 그 이전에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전하,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스럽지만,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전하의 선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실 만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렇겠지.”

그간 서로 죽이고 못 살던 적대 관계의 2 황자가 제 아들이 죽자마자 초상화를 보내왔다. 이건 위로를 가장한


조롱이요, 가슴에 난 상처를 다시 헤집는 고도의 전략이다! 황후의 성정 문제가 아니라, 황실은 그것보다 더한
일도 일어나는 곳이었다. 선물 하나도 곱게 해석할 수가 없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라 더욱. 상대가 자신이라
더더욱.

그럼에도 보내려는 이유는 리카르디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보내기에는 수많은 것이


필요하다. 초상화는 필요한 그 한 조각쯤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순수한 선의로만 보낸다고 말할 수 없으니, 황후 폐하께서 나쁘게 해석한다고 해도 별다른


변명은 못하겠어.”

동정이고 연민이었다. 그것에 엘피디오를 향한 원망이 얽혀 엉망진창이었다. 이 감정은 머리를 어지럽히다,


가슴에서 떠돌다, 시간이 지나면 발밑에 끈적하게 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의 발을 잡아끌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하지만 필요할 거다. 폐하께도, 나에게도.”

그렇기에 두고 가야 했다. 쓸데없는 것에 발목을 잡혀 자리에 멈춰 설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돌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가 나누는 대화가 무슨 뜻인지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180 화.

리카르디스는 어떤 장면을 상상했다. 현재와 같은 시간과 공간이었으나 그곳에 로젤린이란 존재는 없었다. ‘만
약’으로 시작하는 의미 없는 가정 속의 장면은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자신은 혼자였다. 죽은 엘피디오의 관을 보며 혼자 끈적한 감정을 곱씹고 휘둘린다.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없으니
멈춰 있기만 한다. 버릴 필요를 못 느끼니 끌어안고 있다. 점점 가라앉다가, 가라앉다가. 결국 그렇게 끝맺는
이야기였다. 한 명이 있는 세상과 한 명이 없는 세상은 그렇게 달랐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응시했다.
로젤린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고 있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리카르디스가 손을 뻗어 로젤린의 위로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았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담았다.

“가지고 갈 건 가지고 가야지. 그건 더 이상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으니까.”


며칠 뒤, 리카르디스의 선물이 황후 트리파의 성에 도착했다. 잇세리온은 아마도 초상화가 부서진 상태로 반환될
것이며,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는다면 암살자까지도 같이 딸려 오리라 예상해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월장석 성에 도착한 것은 황후의 인장이 찍힌 편지 한 장뿐이었다. 고맙다는 한마디만 쓰여 있었다.

* * *

몇 세대가 지나는 긴 시간 동안 아슬아슬하게 지켜지던 균형이 무너졌다. 발타는 ‘검은달’이라는 광신도 집단


이름 뒤에 숨어 일라베니아를 자극하고, 일라베니아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발타를 압박했다. 지지부진하게 작은
전투들이 줄곧 이어지기는 했으나, 이걸 두 나라 간의 전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말 그대로 사소한
분쟁에 불과했다.

그렇게 수백 년간 무너지지 않았던 균형을 깨트린 쪽이 발타라는 사실은 일라베니아의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결코 전쟁을 먼저 시작하지 못할 겁니다. 국력의 차이는 명백하며, 하카브 왕자도 그걸 모를 만큼


아둔한 자가 아닙니다. 지는 싸움이 취향이라면 또 모를 일이지만 하하.’라고 호언장담한 것이 무색하다 못해
머쓱해지기까지 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발타의 수상쩍은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것도 아니며, 생각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머저리들만 수뇌부에 앉아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발타가 하는 전쟁 준비를 수십 수백 년간 계속된 무력시위의 일환이라 여겼다. 왕실이
건재하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연극일 뿐이라고.

더군다나 두 나라 간의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파편’과 인조적인 마인 부대 정도로 그 틈을 메울 수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발톱을 드러낸 발타의 일격 하나하나가 매섭기 그지없었다.

건국제 무도회의 참사 이후, 일라베니아는 병력을 대대적으로 움직여 하카브의 뒤를 쫓았지만 결국은 잡지 못했다.
어떻게 확보했는지 모를 도주로와 어떻게 심어 놨는지 모를 첩자들 등.

여러 가지 활약이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무도회를 기점으로 국경 지역에 크고 작은 전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일라베니아의 권력자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위험에 대비해야만 했다.

전투가 잦던 국경 지역은 발타의 공세에 빠르게 대응했으나, 평소와 달리 승리로 가는 길은 버거웠다. 발타의
병력이 예상했던 수와 힘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어디에 숨겨서 대체 어떻게 키운 건지도 모를 훈련된 병력이었다.

한 가지 더 경악스러운 사실은, ‘파편’과 인위적으로 만든 마인 부대는 아직 투입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세 개로 나누어진 남부 국경 관문을 맡은 국경 사령관들의 활약으로 어떻게든 막아 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뿐이었다면 좋으련만, 국경뿐 아니라 수도 티가드도 피해가 막심했다. 국경 관문처럼 대규모의 병력과
마주하지는 않았으나, 병사보다 암살자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소규모 집단의 행패로 주요 인물 몇몇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중에 일라베니아 제국 군사 조직의 우두머리, 총사령관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대체 이게 무슨, 개…… 계시 같은 말인지. 하하.”

무슨 개 같은 소릴 하냐는 말을 가까스로 바꾼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황실에서 온 전령에게 보일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황실 전령을 대함에
적당해 보이는 태도는 그린듯한 미소 하나뿐이었다. 마른가시나무 기사단장, 렉시드는 세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눈만 굴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든 해 보라…… 렉시드, 들었니? 어떻게든 해 보래.”

세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차갑게 웃고는 다시 파이프를 물었다. 후, 그녀의 입에서 연기가 퍼져 나왔다.
세실이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사건이 일어난 지가 언제고, 발타 놈들이 여기저기 쳐들어와서 깽판 놓은 지가 언제인데. 이 사태에 대한


해결 방법이랍시고 전령을 보낸 게 병력을 보내며 권한을 위임할 테니 집결하여 연계하라. 이게 아니라. 그냥
어떻게든 해 봐라? 잘 막아 봐라? 믿는다, 힘내라?”

“아, 아니 마른가시나무 백작! 말을 꼬아서 듣지 마시오. 현재 황실은 엘피디오 황자 전하와 총사령관까지 변을


당하시어, 병력을 재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놈이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텐데? 그나마 없는 쪽이 개소리가
덜해서 일이 빨리 진행되기는 하겠네. 그리고 엘피디오 황자 전하께서 돌아가신 건 제국의 백성으로 함께 눈물
흘릴 일이기는 하다만, 발타 놈들이 쳐들어오고 있잖아? 무얼 먼저 처리해야 하겠다는 감이 오지 않나? 살아
있는 사람들도 다 같이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지.”

“중앙 상비군은 일라베니아를 지킵니다, 백작! 발타의 공세가 지난 수십 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사나움을 내
모르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아직 그 마인 부대의 움직임을 못 읽어 내지 않았소. 그 부대가 수도로 침투하는
가정을 아주 배제할 수 없음을 알 거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중앙의 병력을 분산시키란 말이오! 변경 주둔군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병력이 있지 않소. 계속 지원 요청을 하는 것은 백작의 무능을 나타내는 일밖에 되지
않으니, 잘 생각하고 발언하기를 바라오.”

세실이 눈을 접어 웃었다.

“말 잘했군, 남작. 그래, 아직 마인 부대는 물론이거니와 그 지독한 독마저도 투입되지 않은 상황이지. 이 말이


뭘 뜻하냐면, 전쟁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다는 거야. 일라베니아나 발타나 서로 충분히 여력을 남겨 둔
상황이지. 하지만 이쪽은 하카브가 수도에서 분탕질을 치는 바람에, 위쪽 분들이 너무 불안해하시네? 중앙에서
병력을 많이 빼 주지 못하겠다네? 이게 뭐냐면, 병력의 분산이에요. 왜 분산시키겠냐고, 상대적으로 국경의
방어벽을 얇게 하려는 수작질이 아니겠느냔 말이야. 왜 방어벽이 얇으면 좋을까? 뚫기 쉬울 테니까!”

그녀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진동에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소음을 만들어 내자 남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렇게 일라베니아 제국 전체 병력의 삼 할 정도가 주둔하고 있는 관문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남은


병력으로 막아 낼 수 있을까? 다들 하카브가 사고 치고 간 것 때문에 무서워서 머리가 잠시 굳은 모양이라 내가
좋게 좋게 말로 지원 요청하면서, 여기 뚫리면 네놈들도 다 뒤진 목숨이다. 친절하게 알려 준 것 아닌가.”

세실이 파이프를 한번 물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가 후우, 연기를 내뱉자 남자가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세실이 줄줄 얘기할 동안 얼빠진 듯 입만 벌리고 있던 검은파도 남작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황제 폐하께서 보낸 엄중한 명령에 감히……! 이 무례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소! 사태가
끝나고 나서도 인간 백정 짓으로 가까스로 유지하던 지위를 달고 있을지는 내 확답해 드리진 못하겠소.”

세실은 생긋 웃으며 소파에 편하게 몸을 기대었다.

“눈치라고는 없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엉덩이 차 버리기 전에 얼른 밖으로 꺼지라는 내 뜻은 읽은 건가 남작?


잘 가시게, 배웅을 꼭 받고 싶다고 해도 그다지 해 주고 싶지는 않아.”

검은파도 남작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다가 크게 콧방귀를 뀌고서는 발걸음을 돌렸다.

쾅!

세게 문이 닫히고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세실은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었다.

“피곤해라…….”

“와인을 준비하겠습니다.”

“전시인데 무슨 소리야 라고 하고 싶지만, 한 잔만 딱 마실까?”

“한 잔 정도는 전시에 마시기 딱 좋은 수준이죠.”

렉시드가 문가에 서 있던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세실은 눈을 감은 채 아차, 하고 말을 이었다.

“렉시드. 황제 폐하의 전령이 언제 온다고 했지?”

방금 전에 16 세 사춘기 남자아이처럼 씩씩대며 나간 남자가 황제의 전령임을 모르고 한 얘기는 아니었다.


뜬금없을 법한 발언에도 렉시드는 조금의 의문도 갖지 않은 듯 보였다. 그가 와인 한 병을 하인들에게 건네받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 당도하기 전에 실종되었다더군요. 요즘 시국이 보통 흉흉해야 말이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실이 눈을 감은 채 씨익 웃었다. 그녀는 오지 않은 황실 전령의 짐에서 황실의 문양이 찍힌 또 다른 서신을


발견했다. 수신자는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이었다. 전선에서 한 몸 불사르는 공을 치하함과 동시에, 이제
그만 좀 수도로 올라오라고 징징거리는 내용이 고급스럽게 적혀 있었다.

“아니 이 늙은이가…… 나는 알아서 잘 싸워 보라더니?”

세실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 황제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쪽은 투견이고, 저쪽은
충견이니. 국경 지역에서 허무하게 죽을 인물은 대체 가능하지만,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구르라고 하면 구르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 사람은 구하기 힘들 것이다.

위험한 순간에 써먹게 옆에 데리고 있으려는 모양인데, 내용을 살펴보자니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꿈적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복은 죽음으로 여기던 인간이 몇 번이나 계속된 것 같은 권고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뭐…… 전달할 필요는 없겠군. 몇 번 동일한 내용을 받은 모양이니.”

세실은 테이블 위의 촛불에 서신을 가져다 대었다. 닿은 부분이 검게 물들어 가더니 순식간에 불이 번졌다. 아직
너울거리는 불꽃을 품은 재가 테이블 위로 투둑 떨어졌다.

181 화.

* * *
쩍!

벼락이 돌을 쪼개는 듯한 소리였다. 손바닥이 뺨을 스친 것만으로 이런 소리가 날 수 있을 거라고는. 통증에


볼을 부여잡는 와중에도 호위대의 대장, 둔은 감탄했다.

“건방진 놈! 이거 놓아라!”

“악!”

지금 막 간제가 또 다른 호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남자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간제의 팔을 한쪽씩 잡고 있는 호위들은 오랜 여행에도 지치지 않았으나,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주인의 패악에는
몹시나 고단해 보였다.

간제는 성난 들소보다 무섭게 씩씩댔다. 힘도 들소에 뒤지지 않는 것 같았다. 간제를 둘러싼 마인 호위대는
쩔쩔매며 그녀를 억류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다치지 않게끔 간제를 제압하는 일이란 정말 너무 힘든 일이었다. 3
왕녀 간제 또한 그들과 같은 마인이었기에. 심지어는, 마력의 양으로 따지면 간제 쪽이 우세했다.

둔은 안되겠다 싶어 뒤에서 그녀를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팔까지 끌어안겨 옴짝달싹할 수 없…… 어야 했는데.
간제가 발꿈치로 호위의 발가락을 무참하게 내리찍었다.

“아악!”

둔의 품에서 빠져나온 간제가 몸을 회전시키며 그의 명치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둔은 그대로 기절했다. 거친


몸싸움으로 산발이 된 간제는 눈을 형형히 빛내며 다음 사냥감을 물색했다. 호위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간제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룩불룩 솟았다. 기절한 호위대장 둔을 대신하여 부대장이 나섰다.

“왕자 전하의 명령이셨습니다. 일라베니아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어떤 위험과 돌발 상황이 있을지 모르는 터라,
왕녀 전하께서 큰 충격을 받을까 걱정하셔…….”

부대장의 얼굴에 화병이 직격 했다. 쨍그랑! 조각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부대장은 얼굴에 달라붙은 화병
조각과 코피를 쓱쓱 닦으며 말을 이었다.

“부득이하게 그런 결정을 내리셨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간제는 이를 갈았다. 지금 호위가 말하는 ‘부득이하게 내린 그런 결정’은 일라베니아를 빠져나오는 내내


골칫덩이를 수면제로 재워 놓는다는 계획이었다. 확실히 자신이 깨어 있었다면, [여기에 발타의 1 왕자 하카브 위
리비타가 있습니다]라고 적힌 깃발을 만들어 흔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강제로 재워 둬?

간제가 긴 수면에서 막 깨어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호위가 급하게 그녀의 입에 수면제를 들이부었다. 몽롱한
상태의 간제는 남자의 다급한 숨소리에 이변을 깨닫고 호위의 얼굴에 수면제를 냅다 뱉어 냈다. 순간적인 기지로
남자의 소중한 급소를 까 버린 후, 사투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이었다.

뭉텅 썰려 나간 시간이 아까워서 열 받는 것은 차치하고, 호위 놈들이 괘씸해서 간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성질냈다. 호위들은 이제 그녀를 재우는 일은 포기한 듯 보였다.
간제는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구, 건물의 구조, 새겨진 문양. 발타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여기저기 막힌 길이 많았을 텐데 재주 좋게 일라베니아를 벗어난 모양이었다. 발타의 수도,
리비타의 궁은 아니었다. 문양 양식이 달랐다.

“오라버니는.”

“……회의 중이십니다. 방해하지 말라 명하셨으니, 우선 허기를 달래고 계시면 저희가…….”

회의 중? 방해하지 말라 하였어? 간제의 눈이 번쩍 빛났다. 주위의 호위들이 간제의 말에 답한 남자를 퍽 쳤다.


이 멍청한 놈이!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불을 질러서라도 방해할 인간인데……!

간제가 움직이자마자 만류의 손길이 사방에서 뻗쳐 왔다. 간제는 바닥을 굴러 회피하고서는, 창문을 열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왕녀 전하!”

“아악! 전하! 아, 내가 진짜!”

“저 개망나니가!”

간제는 바로 아래층의 돌출된 지붕에 착지한 후에 바로 옆 난간에 매달렸다. 호위들이 따라 뛰어내리려 했다.
그녀는 콧방귀를 뀐 다음에 아래층 창문으로 쏙 들어갔다.

쨍그랑!

수놓아진 커튼이 불룩 솟으며 간제가 나타났다. 그녀는 유리창 조각이 쏟아진 바닥에 구르며 벌떡 일어섰다. 방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눈만 크게 뜨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간제를 바라보았다.

간제는 툭툭 옷을 털며 유리 조각을 털어 내었다.

“눈 뜬 모습은 오랜만이구나, 간제. 건강해 보여 이 오라비도 마음이 놓인다.”

제일 상석에 있던 하카브만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온 건지 모르겠구나. 너의 유능함 덕분일까, 호위들의 무능함 때문일까. 말해


주련?”

품에 숨긴 비수 같은 위험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간제는 머리를 탈탈 털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말했다.

“호위들이 무능했지요. 긴 시간 동안 잠만 자서 비실거리는 연약한 왕녀 하나 못 막을 정도면 알 만하지 않습니까?


죄 갈아엎고 새로 뽑아 주시지요. 기왕이면 잘생긴 놈들로요.”

간제는 맨발로 저벅저벅 방을 가로질러 빈 의자에 앉았다. 옆자리의 중년 남자가 의자를 반대쪽으로 슬쩍 옮겼다.
리비타 왕실의 유명한, 목숨 내놓고 사는 미친 왕녀. 엮이면 피곤할 게 불 보듯 빤했다.

“그래서 여기는 어딘가요.”

“제가 대신 대답하도록 하지요, 왕녀 전하.”

간제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소녀와 소년이 보였다. 그녀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발타는 왕실 ‘위’ 가문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큰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중 쌍둥이 남매가 가주를 맡은
가문이라면 ‘싱’ 외에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싱.”

간제가 먼저 정체를 유추해 내자 소녀가 빙긋 웃었다.

“남라 싱, 바유 싱.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소녀는 말 못하는 소년의 몫까지 말했다. 사랑스러운 외모의 두 남매가 같이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간제는
일어난 이래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싱은 금속이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검, 활, 갑옷과 각종 고문 기구까지 만들어 내는 전쟁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가문이었다. 하카브가 일라베니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싱에 들렸다는 것은 아마도…….

간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테이블을 두고 하카브, 남라 싱, 바유 싱. 그리고 재상


아틸라크와 수년 전에 잡혀갔다던 검은달의 간부, 케틀린이 있었다. 또한, 여기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도 다수 보았다. 그들은 간제의 시선이 닿자 무릎을 꿇고 예의를 갖췄다.

“차호트 람가,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단단한 근육이 눈에 띄는 장신의 여인과,

“브네학스 아문.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준수한 미남자와,

“코코 사르체.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흉악하게 생긴 거인과,

“완달 타탄,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까지.

싱을 포함한 람가, 아문, 사르체, 타탄.

발타를 이끌어 가는 다섯 가문의 가주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어디 소풍 나갈 계획을 짜기 위해 모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간제는 환장할 것 같은 기분에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 리카르디스 전하. 피차 힘든 싸움이 될 테니 알아서 잘 살아 남아 봅시다…….’

하카브는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의 한 점을 빤히 바라보다 돌연 씩 웃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 * *

전운이 감돌았다. 시녀들은 연회 준비를 할 때처럼 항상 지쳐 있었고, 기사들은 실전 같은 대련과 훈련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징집, 군의 편제가 마무리되어 언제든지 출진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황실은 아직까지 침묵하는 중이었다. 나라와 나라의 운명을 건 거대한 전투를 대비한 대군은 그대로 묶여
있고, 고작 일만여 명의 병력을 국경에 지원했을 뿐이었다. 없는 것보단 낫긴 한데, 크게 도움이 되는 정도는
아닌, 생색내기 좋은 딱 그 정도. 분통이 터진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한 자, 한 자 분노를 채운 서신을 보낸 일도
이해가 갔다.

여유로워 보이는 황실의 움직임에 백성들은 안도했다. 별일이 아닌가 보다. 괜찮나 보다. 발타 놈들이 해 봤자지.
그런 식이었다.

황제가 정확하게 노린 바였다. 일라베니아는 누대에 걸쳐 서서히 몰락하는 중이었다. 축복의 밤으로 풍요로웠던
대륙은 메말라서 성수를 들이부어도 잠깐의 곡식을 허용할 뿐이었다. 황금의 땅이라 불리던 일라베니아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절대적이던 권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불만을 가진 자들이 늘어난 시점에서, 황실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음이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면 문제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먼저 터질 가능성도 있었다. 황제가 염려하는
부분이었다.

황실의 핏줄을 죽이고 일라베니아 한복판에서 간악한 짓거리를 저지른 발타에게 죗값을 묻는 것은, 잠시 요동치는
민심을 다스리고 난 이후일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로젤린이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흔들거리던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지나가는 카일로에게 딱딱한 열매를 뜯어 던졌다. 갑자기 봉변당한 카일로가 분노하며
펄쩍펄쩍 뛰었다. 로젤린이 히죽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고압적이고도 오만한 미소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카일로와 다투는 모습은 평소와 다르지 않지만, 그전에 멍하니 허공을
훑던 그녀는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부터였다. 로젤린은 이따금 하던 행동을 멈추고 상념에 잠겼다. 생각은 깊어졌고, 말하는 것도
전보다 능숙해졌다. 어리숙한 사고가 서서히 깨어나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최근 그녀에게서 과거 ‘로젤
린’의 모습을 몇 번씩이나 느끼곤 했다.

변화는 가만히 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큰 파문이 그녀를 흔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182 화.

[……후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지가 벌써 얼마던가. 로젤린이 잊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최근 리카르디스는 그녀 앞에


설 때면 초조함을 감추는 것에 급급했다.

똑똑똑.

누군가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최근 월장석 성에서 일하게 된 시녀였다. 갈색
머리와 잿빛 눈동자를 지닌 자그마한 여자의 이름은 미레이미, 일명 ‘미미’였다. 올가미 용병단의 쥬쥬와는
남매 관계라는 ‘설정’이란다.

미미는 황실 시녀가 되기 위한 조건 중 그 어떤 것도 충족하지 못했지만, 월장석 성을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든든한 뒷배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물론 그 뒷배는 성의 주인 리카르디스였다.

“전하,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잇세리온이 있어서인지, 미미는 시비도 걸지 않고 분주히 다과를 차리기만 했다. 정상적으로 일하는 미미를
보자니 과거 생활 청산하고 열심히 살아가려는 무법자를 보는 듯해 리카르디스는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어, 그런데 보다 보니 뭔가 좀 이상했다. 리카르디스가 눈썹을 까딱, 하고는 의심의 빛을 담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디저트의 개수가 좀 많은 듯싶은데.”

“어머? 전하께서 아까 디저트를 많이 드시고 싶으시다 하셨잖아요?”

미미가 뺨에 손을 대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팔자(八)로 휜 눈썹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셨잖아요?”

얼마 가지 않아 온건한 협박이 들어왔다. 역시나, 그 성격이 가 봤자 어디를 가겠나. 과거 청산은 무슨…….

“……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원래도 바빴던 잇세리온을 내보내는 일은 손쉬웠다. 잇세리온이 나간 후의 미미는 제국의 황자가 아직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량한 자세로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한껏 양껏 담아 온 디저트를 냠냠 먹기 시작했다.
역시나 본인 몫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어색하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전하 앞에 있는 접시, 그거는 전하 거, 이거, 이거, 이거는 로젤린 거. 나중에 먹여. 그리고 나머지는 다 내
거. 이야, 전하 이름 대니까 주방장이 혼을 쏟아부어서 만들던데. 앞으로도 종종 해도 되나?”

“……들키지만 말고.”

월장석 성내에서 주인의 이름을 사칭해 디저트를 빼돌리는 간 큰 시녀가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하겠지만.

“아이고, 그럼요, 그럼요. 우리 전하께서는 마음도 넓으시지.”

미미는 입에 크림을 묻히고 낄낄거렸다. 그러더니 아차, 하고는 제 치맛자락을 뒤졌다. 보기 좀 그런 광경이라
리카르디스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알고는 있겠지? 여자 남자 이전에, 품위의 문제야.”

“나도 격식을 아는 사람이니까, 걱정은 마시죠, 전하.”

한참 치마 안쪽을 뒤적거리던 미미가 “아, 찾았다.” 하고는 무언가를 불쑥 꺼냈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미의 손에는 접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가 종이를 툭 하고 그의 앞에 던졌다.
종이가 들어 있던 장소도 장소고, 건네준 사람이 그녀이기에 의심을 지울 수 없어, 리카르디스는 찝찝한 감정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이게, 뭐지……?”

격식을 아는 사람, 미미가 포크를 쪽 빨며 씩 웃었다.

“내 마음.”

엉덩이 부근 치맛자락 안쪽에서 나온 그녀의 마음. 정말 너무 찝찝했다. 리카르디스는 손가락을 집게처럼 해서


접힌 종이를 폈다. 젖었다 마른 것인지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으나,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미미는 종이를 읽어 내리는 푸른 눈동자를 지켜봤다. 무표정한 얼굴, 날카로운 눈빛. 하지만 그 눈동자가 종이의
끝자락에 닿았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아마 그 종이의 존재에 대해,
혹은 종이에 적힌 내용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리카르디스는 종이를 다시 두 번 접어 모서리를 잡고는, 반대쪽 손바닥에 툭툭하고 쳤다. 그의 시선은 바깥 창의


어딘가와 상념 깊은 곳을 지나 마침내 미미에게 다시 닿았다.

“혹시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이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 인가?”

목소리에 어떠한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미는 시간을 잘 맞춰 적당히 우러난 차를 마시고, 입안 가득 감도는
향을 즐긴 다음에야 대답했다.

“겸사겸사 그것도 전해 주고 싶긴 했지.”

리카르디스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과거 설원의 월계수처럼 강한 힘을 타고나는 마인 가문이 있었다. 제국의 음해를 받은 그들은 오랜 세월


감금당해 있다가 탈옥한다. 그러나 일라베니아의 땅을 채 벗어나기 전에 죽는다. 그날로부터 축복의 밤은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내가 따로 신전 관계자에게서 알아낸 것과 발타에서 몇 천 장 흩뿌리고 간 이
종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대략적인 정보지.”

“세상에나 어떻게 그런 일이? 무섭기도 해라.”

미미가 심드렁한 말투와 표정으로 답했다.

“그리고 그 이후, 마수라 불리는 흉포한 존재들이 생겨났다. 산과 들, 숲.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과 마을.
어디고 나타나서 목숨을 앗아 가는 마수는 일라베니아를 떨게 만들었지. 개체 수가 많이 줄어든 지금까지도
말이야.”

발타에서 검붉은 보석을 가지고 올 때까지만 해도 정확하게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으나, 최근 마수의 몸에서
생성되는 결정이라 판명되었다. 또한 로젤린의 증언으로 마독 ‘파편’, 인조적인 마인 부대가 지닌 마력과
결정의 마력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까지도 알게 된 상황이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던 마수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진화해서 일라베니아의 목을 죄어 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수는 어디에서 왔는가?

“사라진 마인 가문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의문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사라진 즈음, 공교롭게도
축복의 밤 또한 자취를 감추었어. 그들이 아니더라도 강한 마인은 또 태어났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들이 죽은,
혹은 사라진 이후부터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강한 마인이 죽고 다음 세대에 남은 것은, 또 다른 강한 마인이 아닌 마수였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라 볼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축복의 밤이 오래 찾아오지 않은 폐해로 마수가


생겨났을까?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은 기간이 이렇게 길어진 것은 처음이니 무엇도 확신할 수 없기는 했다.

그러나, 만약 단순히 그 이유로 마수가 생겨났다면, 강한 마인은 왜 태어나지 않았는가? 대륙을 소생시키는 그
강한 힘이 어딘가에 있다면, 일라베니아가 아닌 그 누군가의 눈에라도 띄어야 말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리카르디스는 잠시 멈칫하고는 미미를 바라보았다. 강한 힘을 지니고, 다른 생물의 형태를


흉내 내며, 오랜 세월을 살아온……….

리카르디스는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맛있어 전하? 취향이 독특하시네.”

그는 미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깍지를 낀 채 엄지로 턱을 꾹 누른 리카르디스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되는 허황한 소설을 가슴에 품은 남자가 마카롱을 응시했다.

“어디 있을까. 그들은, 그들의 힘은.”

정적이 인 공간 속에 바람이 불었다. 마카롱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었다. 다소 불량한 자세였다. 그녀가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바로 여기에.”

그러고는 다시 그와 눈을 맞췄다. 그녀가 팔을 쭉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리카르디스의 뒤쪽이었다. 그는


자신의 뒤, 창밖에 있을 누군가를 떠올렸다.

“저기에.”

그리고 귀를 후비며 무성의하게 말했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든가, 없든가 하겠지.”

미미의 얼굴이 곧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너……무 심각하게 놀라는 거 아닌가?”

정말, 너무 놀랐다. 리카르디스는 마카롱이 답변을 마치자마자 손을 내려놓다가 생크림 케이크를 깍지 낀 손으로
박살 내고 포크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떨어트린 포크를 어마어마한 반사 신경으로 발로 찼다가 튕겨 오른 포크에
코를 맞았다. 마카롱은 정말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 꼴을 로젤린이 봤어야 했는데.”

통탄하는 어조였다. 놀리는 의도가 느껴졌지만 리카르디스는 미처 신경 쓰지도 못했다. 머리에서 생각을 담당하는
기관만 슬쩍 빼서 얼음물에 담가 놓은 것 같았다. 동면에 들어간 물고기의 사고가 이러하리라.

리카르디스는 얼얼한 코를 쓱 문질렀다. 그 과정에서 손으로 으깬 케이크의 잔해가 묻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마카롱은 콧잔등 위에 생크림을 묻히고 있는 그를 보고 놀리기 위해 열었던 입을 그대로 닫았다.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아픈 사람은 놀리는 거 아니니까.

“……그대가 정말…….”

대화의 간격이 길어지며 침묵이 지루해질 찰나, 리카르디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일라베니아 황실의 손에 의해 사라지게 된 그 마인 중 한 명이라는 건가?”


답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다시 답을 말해야 한다니 귀찮기 짝이 없었다. 마카롱은 상황이 특수한 만큼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일 테니. 마카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혹시 그때의 기억은……?”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마카롱은 날카롭게 미소 지으며 턱을 살짝 들었다.

“모두 알지는 못해도, 알 만큼은 알아.”

“……대체, 어떻게……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리카르디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갈색 머리 여자의 본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육신이 없는 검은 그림자 같은 형태, 죽은 것을 흡수하며 의태 하는 능력을 지닌, 인간과는 다른 모습. 동물과


식물, 사람까지. 생명을 가진 것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따라 진화하거나, 퇴화를 반복하며 생을 이어 갔다.

어쩌면 그들의 모습 또한 그러한 흐름의 하나가 아닐까. 그러나 그 흐름이 부자연스럽다는 게 문제였다. 모든
진화와 퇴화는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나곤 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축복의 밤이 사라진 시기와 마수가 생겨난 시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존재가 무엇이라 해도 변화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일 텐데.

183 화.

마카롱은 창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탁자 언저리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이 모습은.”

마카롱이 머리를 헤집으며 멈췄던 말을 꺼냈다.

“걔가 한 거야.”

“……로젤린이?”

리카르디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로젤린이 했다? 무얼 했다는 말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요즘 어린놈들은 모르겠지만, 나 때는 말이야 마인들 사이에 그런 말이 있었어요. 몇 세대에 걸쳐 아주 강한


힘을 가진 마인이 탄생한다고. 강한 힘은 필연적으로 운명을 이끄는 힘이 있어서 개인의 삶뿐 아니라 나라,
세계까지도 영향을 미친다고. 뭐, 너희처럼 폐하, 전하, 죽으라면 죽고 살라고 명하시면 살겠어요, 그러지는
않았지만 우리들끼리 그 존재를 왕이라 부르고는 했지.”

“왕이라…….”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은 그런 것이었다. 강한 힘을 지니고 운명을 이끄는 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일이 일어났던 시기에 몇 세대에 한 번씩 태어난다는 ‘왕’이, 로젤린이 있었고,


죽음의 위기 앞에서 우리를 결코 죽음에 닿을 수 없는 영역으로 이끌었지. 고통을 느끼는 육신과 오래 쌓인
분노의 기억,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모든 것을 죄다 버려 버리고서.”

리카르디스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머릿속으로 그려 보려고 해도 단 한 번도 본 적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광경이라 힘들었다.

“솔직히 나도 그 ‘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잘 몰랐어. ‘마력 엄청 많은 사람’을 왕이라 말하는 건 줄 알았지.
운명이니 뭐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어찌 믿을 수 있겠어. 그래서 그때야 처음 알게 된 거지. 운명을
이끈다는 왕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한참 후에 떴다. 감정을 가다듬은 듯 눈동자는 고요했다.

“우리는 몇백 년의 시간을 지나 다시 원점에 돌아왔다. 이걸 운명이라 부르지 않으면 뭐라 부를 수 있을까.”

리카르디스는 석고상같이 표정 없는 얼굴로 마카롱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터져 나오는


정보는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가 입술만 달싹달싹 움직이는 사이 마카롱이 다시 먼저 운을 뗐다.

“전하도 알다시피 내가 이렇게까지 친절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느냐면, 상황이
아주 드럽게 흘러가고 있어서야.”

“……그건, 부정할 수가 없군.”

“나는 로젤린이 피 흘리기 바라지 않아. 두 번 다시는. 그 아이를 해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어.


이번만큼은 안돼.”

크게 격앙되지 않은 잔잔한 말투에는 칼날같이 단단하고 예리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로젤린이 전쟁에 못 나가도록 묶어서 감금시키지는 않을 거야. 내가 로젤린을 지키고 싶은 건 단순히
몸의 안녕뿐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 아이는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까. 지금 이 상황의 문제점은 단
하나.”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있던 마카롱이 다시 소파 등받이에 푹 누웠다.

“……로젤린은 과거의 기억이 거의 없었어. 디에즈나 나처럼 일라베니아 놈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갈아 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지. 기억한다고 해도 그저 그때 있었던 상황에 대한 명확하지 않은 감정의 조각
정도가 아닐까.”

마카롱은 잠시 숨을 고르고 얘기했다.

“좀 어렸거든.”

그 말의 뜻을 이해하는 순간 리카르디스는 충격받아 한동안 눈도 깜박일 수 없었다. 그는 마카롱이 말하는 오랜


과거 속 로젤린의 모습을, 현재와 겹쳐서 상상했다.

검은 머리에 녹색 눈. 강인하고 담대한 기사의 모습은 ‘좀 어렸거든’이라는 마카롱의 말을 듣는 순간 산산조각


났다. 가슴 깊은 곳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얼마나 어렸나. 그때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상황을 인지하기보다 단순히 그때의 감정만을 새겨
뒀을 정도.

어리둥절해한다. 먹을 것을 좋아한다. 감정이 앞선다. 마카롱, 디에즈와 달리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더디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말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 말한다.

어린아이였다. 리카르디스는 비로소 그녀에게 어울리는 껍데기가 지금보다 한참 작은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의 변화라는 거대한 흐름. 하지만 그것은 위대한 업적이 아닌 한 어린아이가 벼랑에 몰린 결과였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아이는 숨죽이고, 도망쳤다. 그러나 위태로워진 마지막 순간에는 시간을 빠르게 돌려,
그들에게 덧씌워진 죽음이라는 운명을 벗어나게 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에게 들은 것과 칼릭스에게 들은 정보를 떠올려 ‘그것’의 모습을 그렸다. 죽음이 없어


두려움이 없는, 육체가 없어 고통이 없는, 기억이 없어 분노가 없는 ‘그것’들.

그 모든 형태에 아이의 희망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때는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존재에 껄끄러움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었으나, 지금 남은 건 연민뿐이었다. 불쌍하고, 너무 불쌍해서 목 안쪽이 고통스러웠다.

구름이 지나가는지 방 안은 잠시 어둑해졌다. 리카르디스는 입을 세게 누른 채로 미동도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서는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카롱은 희미하게 웃었다.

“디에즈가 로젤린을 불러내서 했던 말은 내가 하지 못한 과거의 이야기야. 왜냐고 묻지 마라. 그냥 입이 안


떨어지는 거니까. 전하 같으면, 잘 살고 있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과거에 너는 더럽게 불행했어. 원수의
핏줄들이 코앞에 있는데 왜 당장 찔러 죽이지 않아? 하고 닦달할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좀…… 그래. 아까
말했지. 내가 지키고 싶은 건 로젤린의 몸의 안녕뿐이 아니라고. 디에즈 그 개자식도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한 걸 보면 나랑 비슷한 마음이었겠지.”

괜히 들쑤셔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는 얘기였다. 리카르디스도 공감할 수 있었다. 과거의 그 일 자체가 상처가
될 뿐 아니라, 과거의 일과 ‘로젤린’의 기억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로젤린은 기로에 서서 선택을 해야
할 것이고, 그것은 로젤린을 매우 힘들게 할 테다.

“나는, 로젤린이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어. 이번에야말로.”

“……그래.”

리카르디스는 마카롱이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긴 이야기를 들려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 아이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익히 보아 온 것이었다.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뭐든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의 얼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로젤린의 행복과 걔가 생각하는 스스로의 행복은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을지도 몰라. 그럴
경우에 우선되어야 할 건, 당연하게 본인의 의사야. 그리고 로젤린은 자신이 가진 기억과 발타 놈들이 뿌리고 간
종잇조각과 디에즈의 말로 어느 정도 과거를 깨우친 상태지. 그러고도, 지금 그 아이는 여기 있는 거야. 전하의
옆에. 고민은 좀 하는 것 같다만.”

마카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 테이블에 성큼 발을 얹어 다가오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툭 찔렀다.

“로젤린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전하니까, 전하가 직접 한번 물어봐. 어떻게 하고 싶은지. 이후에 로젤린이
남아 있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맹수용 쇠사슬을 준비해야겠지.”

농담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다.

“내가 내 욕심에 로젤린 경을 잡아 두고자 눈물 콧물 흘리면서 곁에 있어 달라, 지켜 달라 조르면 어쩌려고.”

마카롱이 훗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쭉 켰다.

“그거 볼만하겠는데, 구경해도 되나?”


네가 잘도 그러겠구나, 하는 말투였다. 리카르디스라는 사람이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저 믿음은 어디서? 미미가 황당해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이봐요, 전하.”

“왜 그러나.”

“로젤린이 행복해지길 바라?”

뜬금없는 질문에 리카르디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이 행복해지길 바라냐니. 그런 건 당연히……


리카르디스는 대답을 하려다 입술만 짓이겼다.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리카르디스가 시선을 아래로 한 채 조용히
있자 미미가 웃었다.

“나도 그래.”

리카르디스가 울컥 솟은 감정을 가다듬는 사이, 미미는 볼일 다 마쳤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 못다 먹은


디저트를 섭렵했다. 냠냠 쩝쩝하는 소리에 들쑥날쑥하던 감정이 잔잔해졌다. 리카르디스는 마른세수를 하고
미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뭘 쳐다보냐고 한번 성질내다가, 자신이 그리는 행복한 미래에 대해 짤막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로젤린이 좋은 거 먹고, 좋은 옷 입고, 햇살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예쁘게 생긴 잡초도 한번 뜯어 먹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지기도 하고-물론 떨어지지 않겠지만, 이라는 사족이 붙었다- 어쩌다 다치기도 할
테지만, 시간은 상처가 나을 만큼 그 아이에게 허락될 것이라고.

마카롱이 그리는 미래에는 오직 로젤린뿐, 마카롱은 없었다. 그 사실과 더불어 그녀가 말하는 소소하고도 원대한
행복의 내용에 리카르디스는 꾹 참고 있던 눈물을 한 방울 흘리고야 말았다.

물론 그 눈물을 본 미미는 깔깔거리며 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 * *

페르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높은 방벽 위로 흙먼지와 피 냄새가 섞인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새벽 별이


지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이 전선에 부관보다 빨리 일어나시는 분은 사령관님이 유일하실 겁니다.”

페르탄은 머리를 묶으며 다가오는 부관, 진을 보았다.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한 걸 보니, 페르탄이 어디에 있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허탕을 친 모양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안 주무셨습니까?”

부관 진은 에휴 한숨을 쉬며 품에서 수첩을 꺼내어 무언가를 쓱싹쓱싹 적었다. 가끔 그녀가 하는 행동이었지만,


무얼 하는 건가 궁금해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묘하게 시선이 갔다.

184 화.

“그런데, 그건 뭔가. 가끔 내 앞에서만 꺼내서 적던데.”


진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 부인께 이를 목록을 적고 있습니다. 평소 사령관님께서 사랑의 편지를 보낼 때마다 끼워서 보내고는 하지요.
부인의 말은 들으실 것 같아서. 오늘은 또 ‘전투의 피로가 쌓였음에도 주무시지 않고 홀로 돌아다니심’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꽤 고전하실 겁니다. 소상히 일러 드릴 예정이라.”

어쩐지 답신이 올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머리 감고 잘 말리시는 게 좋다, 고기만 말고 채소도 드셔라,
혼자 돌아다니시지 마시고 호위를 대동하시라 같은 염려뿐이더라니. 페르탄이 피식 웃자 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죽을병에 걸리셨군요.”

아니, 죽을병에 걸리신 겁니까? 도 아니고 확정이었다. 죽을병에 걸린 게 틀림없다! 보좌관의 단언에 페르탄은
한 번 더 웃었다. 진은 소스라치게 한 번 더 놀라며 그에게 다가갔다.

“모시면서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뵈지 못했는데요. 국경 사령관 부관 배, 사령관님을 웃겨라 장기 자랑


대회에서도 안 웃으셨잖습니까. 바르디의 그 재주를 보고도 싸늘한 표정이셨는데.”

진은 초조해 보였다. 페르탄도 그녀의 불안을 이해했다. 수년간 무뚝뚝하게 명령 내릴 줄만 알던 상관이


시시껄렁한 농담에 웃고 있었으니. 페르탄은 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고는 성벽 너머, 푸른 새벽을
깨트리는 아침 해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그의 검은 머리를 흩트렸다.

“느낌이 좋지 않다.”

전쟁에 거칠어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은 페르탄이 말하는 ‘느낌’이 얼마나 적중률이 높은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도 전황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페르탄의 불안을 이해했다.

발타의 병력은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그러나 발타와 일라베니아를 가로지르는 관문의 주둔군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방심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위기감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마독과 인조적인 마인들이 아직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훌륭한 무기들을 내보이지
않는다? 분명 꿍꿍이가 있었다. 여러 상황을 가정했으나, 관문 주둔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밀려드는
발타군을 막아 내는 것뿐이었다.

진이 손톱을 잘근잘근 물자 페르탄이 그녀에게 사탕을 건네었다.

“저는 초콜릿이 좋습니다, 사령관님.”

페르탄이 품을 뒤져 사탕을 초콜릿으로 바꿔 줬다. 진은 초콜릿을 입안에서 녹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성벽 너머를


살피는 남자는 기류를 온몸으로 읽어 내리는 듯했다. 그녀는 페르탄이 말하는 ‘감’이 이런 느낌이라 생각했다.
가슴 안쪽이 술렁였다.

성벽 아래의 병사들이 페르탄을 발견하고 경례했다. 페르탄은 인사를 받아 준 후 품 안에서 초콜릿과 사탕을
꺼내어 성벽 아래로 후두둑 떨어트렸다. 병사들이 망토를 펼쳐서 재빠르게 받아 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그런지 이제는 받아 내는 일도 능숙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의 짤막한 평화였다.

* * *

일라베니아와 발타를 가로지르는 세 개의 관문에서 시시각각 도착하는 파발이 일렀다.


승리하였노라.

승리하였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었다.

사람들은 불안을 떨치고서는 노래를 불렀다. 어떤 짙은 어둠도 빛으로 떨쳐 낼지니, 영광의 일라베니아!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일라베니아의 국기를 흔들었다. 잠시 잠잠했던 주점에도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환한 햇살 아래 웃음소리가 퍼졌다. 스타스는 고삐를 쥐어 걸음을 멈추고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옆에 있던
르원이 의문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단장님.”

스타스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주위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문제가…….”

뻥! 샴페인의 코르크가 날아가며 소음을 냈다.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바닥에 술을 질질 흘려 댔다. 그걸 목격한
스타스의 표정이 더욱 모호해졌다.

“있군. 확실하게.”

르원도 눈썹을 까딱였다. 그 문제가 뭔지 알 만하다는 표정이었다.

“축포를 터트리기는 좀, 많이 이르군요.”

“동감일세. 이만 가지.”

스타스가 말을 재촉했다. 르원은 그 뒤를 따르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거리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화재의


흔적에서 아직 탄 냄새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스타스의 뒤를 따랐다.

월장석 성에 도착한 르원은 여러 보고서를 들고 리카르디스의 집무실 문부터 두드렸다.

“들어와!”

분노가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르원이 알기로 그가 이렇게 감정을 격하게 드러낼 만한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무슨 일이 또 일어난 것이리라.

르원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최근 전선에서 올라오는 모든 보고를 분석하는 일 때문에 집무실 안은 엉망이었다.


그 중앙에 어딘가 초췌해 보이지만, 그것마저도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리카르디스가 소파에 늘어져 누워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 없을 때에도 어지간하면 딱딱한 자세를 고수하는 그답지 않았다.

리카르디스와 달리 그냥 초췌해 보일 뿐인 잇세리온은 퀭한 눈으로 차를 따르고 있었다. 르원은 리카르디스의


곁에 다가가 그의 다리를 주물렀다.

“저 없다고 또 안 주무셨지요.”

하여간 나 없으면 잠도 못 잔다니까. 르원이 투덜거리자 리카르디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종아리를 꾹꾹


눌러 주는 것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부부간에 으윽…… 할 것 같은 그런 말은 말지. 지금은 뭐라 할 기력도 없으니.”

“무슨 일입니까, 이번에는 또?”

리카르디스가 팔로 눈을 가리고 손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고풍스러운 문양에 금박을 입힌
초대장이 놓여 있었다. 르원은 리카르디스의 다리를 꾹꾹 마사지하며 나머지 한쪽 손으로 초대장을 펼쳤다.
짤막한 문구들을 다 읽은 르원이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여기나 저기나, 시기가 많이 이르군요.”

그 짧은 사이 잠들었는지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몽롱했다.

“뭐가 또 일렀기에?”

“사람들이 거리에서 축포를 터트리고 노래를 부르고…….”

으으윽, 그만…… 리카르디스는 악몽이라도 꾸는 듯 신음했다. 르원은 한껏 안쓰러움을 담아 그를 뒤집고는


머리부터 시작해 여기저기 뭉친 근육을 풀었다. 맞은편에는 잇세리온이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르원은 대단한 마사지 기술로 리카르디스를 재워 버린 후 다시 방을 나섰다. 내일 밤, 황실 주최의 연회가


열린다. 이런 뒤숭숭한 시기에 연회가 웬 말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런 때에만 열리는 연회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승전연이었다. 때때로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열리기도 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정말
승리에 심취해서 벌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너무 일러…….”

* * *

엘피디오의 죽음은 비극이었다. 하지만 귀족은 그 비극으로 일어날 손익 계산이 더더욱 중요한 부류였다. 몇
년간의 치열한 싸움을 벌인 1 황자와 2 황자의 싸움은 리카르디스의 승리로 끝났다. 누구라 공표되지는 않았으나,
그가 황태자였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일라베니아의 황제가 될 자!

최근 전선에서의 거듭된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전쟁에 관련된 그 누구보다 리카르디스가 조명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를 탐탁지 않게 보던 무리조차도 접근해 리카르디스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의 태도는 예전과 같았다. 특별하게 승리에 심취해 있지도, 전에 없이 거만하지도, 조금의
방심도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 위에 걸고 있는 웃음은 상대방을 한 발짝 물러서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태도는 정중하지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이제 모두를 포용하고
끌고 가야 하는 한 나라의 후계자가 혼자서 전쟁이라도 치르는 기세였으니.

리카르디스는 귀족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는 구석으로 가서 파트너로 온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과 이런저런
음식에 손을 댈 뿐이었다.

“아, 이건 처음 먹어 봅니다.”

“일라베니아의 북부에서 간간이 잡히는 귀한 새의 알이다. 귀족들 중에서도 못 먹어 본 사람이 제법 있을 정도지.


많이 먹어 둬.”
부드럽고 농후한데, 거슬림 없이 조화롭게 톡 쏘는 향채 덕분에 입안이 즐거운 요리였다. 로젤린은 마음에 드는지
리카르디스가 밀어 주는 족족 접시를 비워 냈다. 르원이 그의 뒤에서 몰래 속삭였다.

“안 놀아 준다고 원성이 자자합니다, 전하.”

“그거 내 알 바는 아니군.”

“벌써 황제가 된 줄 아는 거 아니냐는데요. 황제가 되면 안 놀아 줘도 되는가 봅니다.”

르원의 시시한 농담에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때마침 종이 뎅 울렸다. 황제의 등장이었다. 설원의 월계수,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황제 폐하 듭십니다! 시종이 소리 높여 그의 행차를 알렸다. 모두가 고개를 숙였으나,
그중 리카르디스만 가만히 서 있었다.

황제는 평소보다 수척해 보였다. 장례식 이후 그는 며칠간 금강석 성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일 거라, 리카르디스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정도의 감상이겠지 싶었다.

제 지위를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아들을 견제하기 위한 꼭두각시 인형.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다음 황좌를 물려줄
뛰어난 아들이 죽고, 꼭두각시 인형이 살아남았다. 꼭두각시 인형은 충실하며, 훌륭했다. 그 누구도 황가의
핏줄이 아님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누구도 그 이외의 황태자 후보는 찾지 못할 정도로.

그러한 상황에서 엘피디오의 장례식 이후로 후계자를 공표해야 된다는 귀족들의 발언이 늘어났다. 슬픔은 기쁜
일로 잊힐 테니, 훌륭한 인재가 다음 세대의 일라베니아를 이끌어나가리란 희망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얘기였다.

185 화.

물론, 리카르디스에게 아부하기 위해 한마디라도 더 얹는 쪽이 훨씬 많기는 했다. 하지만 황제는 아직 시국이


불안정하니 그럴 때가 아니라며 결정을 미뤘다.

리카르디스는 발타와 전쟁이 정말 끝나고 평화로운 바람이 일라베니아 전역을 스치고 흐른다 하더라도, 황제가
말한 ‘그럴 때’가 찾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천한 평민을 황태자로? 그것은 커다란 치욕일
것이다.

그렇다고 뜬금없이 머저리라고 공공연하게 알려진 3 황자 틸렌드에게 황태자 위를 줄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왜 모든 조건이 충족된 2 황자가 아닌 3 황자에게? 그 의심의 씨앗이 생겨나는 것 자체가
황제에게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것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면 그중 어느 줄기는 진실에 도달할 수도 있었다.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는 엘피디오의 대항마! 나약한 황제는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평민을 데리고 와
방패를 삼았다!’

이 사실은 리카르디스에게도 약점이지만, 제 체면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황제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허물이고 치부였다. 꼭두각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니, 이제 불태우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연회장에 발을 들인 황제는 무릎을 꿇은 군중 속, 꼿꼿이 서 있는 리카르디스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제서야 리카르디스가 눈을 살짝 내리깔며 무릎을 꿇었다. 교본에 나올 법한, 우아하고도 기품이 넘치는
예의였다.

황제는 예상한 바와 같이 시시껄렁한 소리를 했다. 만약 중앙 상비군까지 전면적으로 나서게 되었다면,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을 것이다.
식료품이 동나고, 쿠퍼 한 개짜리 빵을 쿠퍼 열 개는 줘야 살 수 있을 것이며, 신경이 예민해진 자들끼리 잦은
다툼이 일어나 거리의 민심이 흉흉해질 것이 아닌가. 불온한 분자들이 검을 들고 일어서면 백성들의 안전은 더
이상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병력을 지원해 준 다음부터 전선에서는 연승하고 있지 않나. 그
정도로 충분했다는 거다.

대충 요약하자면 그쯤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참, 잘나셨어. 라는 감상뿐이었으나 귀족들 중에서는 감화된 사람도


더러 있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맞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었다. 불안해진 민심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른다.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은 날붙이뿐만이 아니기에 그들을 안정시키는 것은 필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발타였다. 심지어 이번에는 일라베니아의 중심부에 사건을 터트리는 만행을 저지르며 큰 전쟁을
예고했는데, 그 대비는 미숙했다. 다행히도 전력이 우세해서 이기고는 있는 모양이지만, 리카르디스가 보기에
위태롭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리카르디스는 옆에 서 있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또 많은 상념이 담긴 듯한 눈으로 황제를 보고 있었다.


가슴 깊이 똬리를 틀고 있는 불쾌감을 애써 누르는 표정이었다.

[그러니 전하가 얘기해.]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품고 있던 미미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리카르디스는 가볍게 숨을 고르며 로젤린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로젤린.”

싸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의 로젤린이 고개를 돌려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순식간에
이완되었다. 리카르디스는 내심 흡족했다. 이상한 거 보지 말고 좋고 예쁜 거 보고 마음 풀라는 뜻에 부른
것인데, 효과가 아주 좋았다.

그런데 그 순간, 로젤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녀의 시선이 리카르디스에게서 벗어나 바깥쪽을 향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가 바라본 방향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무슨 일이 터진 것일까. 이놈의 연회는 허구 한날, 하여간. 속으로 욕지거리를 한 리카르디스가 스타스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기 전부터 로젤린의 경계를 눈치챈 그들이 거리를 빠르게 좁혀 리카르디스에게 다가왔다.

의문이 깊어 갈 무렵, 아치 모양의 거대한 문으로 한 남자가 헐떡이며 들어왔다. 변경 주둔군의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런 연회에 입고 오기에는 부적절한 차림새였다. 심지어는 여기저기 먼지가 묻어 더러워져 있었다.
귀족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몇 걸음 걷다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예의를 차린 것일 수도 있으나, 지쳐서 쓰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니다.”

호흡이 거칠고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쨍그랑!

소리를 따라 시선이 모였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한 걸음 물러나게 하며 자신이 그 앞으로 섰다. 그가 밟고


선 바닥에는 그녀가 떨어트린 유리잔의 파편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로젤린, 괜찮아.”

하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기묘한 정적에 리카르디스는 살짝 고개를 돌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그 순간 숨을 가다듬은 남자가 연회장이 떠나가라 외쳤다.

“붉은수레바퀴 백작님께서 전사하셨습니다!”

* * *

땅을 까맣게 덮는 대군이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통일되어 있는 잘 훈련된 병력, 질 좋아 보이는 무기와 수백


개가 넘는 공성 무기. 진은 말도 잇지 못하고 차츰 가까워지는 발타의 대군을 바라보기만 했다.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깃발에는 발타를 이끌어 가는 다섯 개의 가문 중 하나, ‘람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발타의 수도를 거점으로 한 대귀족 가문이었다.

진은 곧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벽 위에 올라와 있는 병사들 또한 그 어마어마한 압력에 굳어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무기를 붙들고 있기만 한 병사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다녔다.

“정신 차려 이 새끼들아!”

활 제대로 들어! 기름 들고 와, 준비해! 진은 급하게 달려 성벽의 중앙, 페르탄이 있는 곳까지 금세 도달했다.


페르탄은 다른 사람들의 동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와 같은 눈빛으로 점점 전진하는 대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 헉. 사령관님. 봉화를 올리고 증원을 요청하겠습니다.”

이 정도 되는 대군이 나타났다면 총공세라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관문까지 공격할 여력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수도나 중부의 지원은 너무 늦을 테니 우선적으로 남부에 있는 병력을 끌어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지원 병력이 오기 전까지 버틸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기헤란 산맥와 맞닿아 있는 남부 관문의 봉화가 불타올랐다. 발타의 궁수가 쏘아 올린 화살이 때를 알리며,
전쟁은 시작되었다.

공성전 1 일 차.

산맥과 이어지는 거대한 관문은 견고했다. 그러나 발타 측에서 사용한 공성 무기가 성벽을 넘으며 큰 피해를
낳았다. 불에 타는 거대한 구체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서는 방벽과 관문 내의 각종 구조물을 산산조각 냈다.
그것만으로도 피해는 막심했으나, 잘 꺼지지 않는 끈적한 화염과 사람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독이 은밀하게 퍼졌다.

밤이 지나고 새벽의 여명이 떠올랐다. 햇살 아래 세 줄기의 봉연이 보였다. 다른 관문에서 보낸 신호였다. 세


줄기의 봉화는 ‘적군 국경 근접’을 뜻했다. 지원군의 발이 묶였음을 알 수 있었다.

공성전 5 일 차.

대군이 총력을 벌였다. 발타군이 마침내 성벽 위로 올라왔다. 앞선 며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수라장이
펼쳐졌다.
진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거대한 발타의 병사에게는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남자의 발길질에
진은 몸을 구부리며 헛구역질했다. 투구가 나가떨어지자 어깨를 스치는 길이의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음험하게 웃는 병사가 그녀의 머리채를 쥐어 들었다. 피와 침,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보고 병사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계집 아냐. 일라베니아는 내보낼 사내가 없어서 고추 없는 것들도 내보내나?”

사내의 조롱을 듣던 진이 눈을 번쩍였다.

“……대머리, 너. 발타 놈이 아니군.”

진은 사내의 말투에 발타가 아닌 왕국 마람쪽의 사투리가 섞여 있음을 눈치챘다. 아까까지 히죽거리던 남자의
낯빛이 변했다.

진은 단검으로 잡힌 머리카락을 끊어 내고 앞으로 굴렀다. 그리고는 그렇게 자부심 넘쳐 보이는 고추에 냅다 검을


내질렀다. 남자가 끄아악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진의 단검이 남자의 목젖 깊숙이 박혔다.

기헤란 남부 관문. 페르탄이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성장시킨 기사와 병사는 마인이라는 초인적인 힘에도
굴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처참한 전투였으나 결국은 승리를 쟁취해내었다. 그 선두에는 어느새 얼굴에
하나 더 큰 흉터를 새긴 페르탄이 있었다.

진은 자신이 마주한 병사에게서 얻은 정보를 그에게 전달했다. 마람 왕국의 개입이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에도
페르탄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 또한 알고 있던 정보인 듯했다. 발타 측의 병사들이 조롱을 퍼부을 때마다
항상 성벽 위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더라니. 내용을 듣기는커녕 그 속에서 필요한 정보만 쏙쏙 빼먹고 있던
것이다. 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공성전 8 일 차.

전투의 피로가 팔다리를 무겁게 했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동료들의 시체가 마음을 짓눌렀다. 간절히 바랐건만,
오늘도 해가 뜨고 말았다. 남부의 다른 관문에서 지원 요청을 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남부 영지와
중부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시간을 끈다면 승산은 충분히 있으리라.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자. 진은 붕대를 갈고 방을 나섰다.

진은 어두운 표정으로 무기의 피를 닦아 내는 병사들에게서 피로를 느낄 수 있었다. 땅에는 피와 머리가 잘린


시체가 돌아다니기에, 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관문의 아침은 언제나 연기와 함께 시작했다. 매일 하나의 봉화를 올리며 이상 없음을 알리던 평화로운 때도
있었으나, 최근은 다섯 줄기의 봉화를 피워야만 했다. 다섯 줄기의 봉화는 적과 교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186 화.

이 기헤란 관문은 물론이고, 며칠 전 적의 접근을 알렸던 바르비트 관문 또한 매일 다섯 줄기의 봉화를 올렸다.


봉화의 개수만큼이나 위험도는 점점 커졌으나, 진정한 위험은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하늘이 연기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있을 때야말로, 위험이 닥쳤다 말할 수 있었다. 관문이 제


기능을 잃고, 관문과 거리가 떨어져 있는 봉화대까지 함락당하지 않고서야, 어떠한 신호도 보이지 않을 리 없으니.

진은 멍하니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불안한 소리가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허리에 찬 검이 한없이 무르고 약해 보였다. 꺾여서 쓰러져 일어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남부 관문은 총 세 개. 그중 봉화가 올라오지 않은 바르비트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앙 관문이 무너졌고,


그곳 통해 발타의 군대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을 테다. 또한, 배후에 적을 남겨 둘 리 없으니, 곧 이 관문까지
물밀 듯 밀려오리라. 버틴다 해도 승산은 없고, 남은 것은 오로지 패배뿐이었다.

진은 페르탄을 찾았다. 시야가 흐려져 힘들었다. 멀리서 거구의 검은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페르탄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모두에게 깃든 두려움이 그에게는 조금도 닿아 있지 않았다. 병사들은 기헤란 남부 관문의
사령관만을 바라보았다.

진은 페르탄이 자신의 어깨를 탁, 하고 붙잡는 손길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고개를 들었다. 페르탄은 며칠 전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다 확신했던 때와 같은 미소를 걸고 있었다. 진은 어쩌면 그는 그때부터 이러한 상황까지
예측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령관의 낮은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관문은 곧 함락당할 것이다.”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 사령관마저 완전히 손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절망스러운 듯했다. 관문이
뚫리면 그때부터 펼쳐질 광경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으리라. 죄 없는 백성들이 죽어 나갈 것이고, 그중에는
병사들의 가족들도 있었다.

“병력을 둘로 나눈다.”

바닥만 바라보며 울던 병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사령관의 말은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내 부관 진에게 임무를 맡긴다. 말을 탈 줄 아는 자, 부상 당하지 않은 자들을 위주로 차출하여, 관문을 벗어나


가까운 영지민들을 피신. 중부 관문까지 도달한 후, 그곳의 병력과 연계하여 전선을 재구축하라.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진도 눈물을 닦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하나의 단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두 눈이 빛났다.

“그리고 남는 자들은 분견대가 영지민을 피신시키고, 이동할 때의 시간을 벌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 자, 검을
뽑아라! 의미 없는 개죽음은 아닐 것이다. 그대들의 시체가 쌓여 저들을 가로막을지니!”

페르탄이 거칠게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검 끝에 아침 해가 걸려 있었다.

“그 끝까지 내가 함께할 것이다!”

힘이 담긴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진은 기겁했다. 후퇴 후 전선을 재구축할 사람이 사령관이 아니면 또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런 그가 지금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기사, 보병, 창병, 궁병, 부상자 할
것 없이 울음을 그치고 무기를 뽑았다. 진은 페르탄에게 한걸음 급하게 다가섰다.

“사령관님!”

진이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페르탄은 그녀의 반박이 들리지 않는 듯 방벽 위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그녀가
뒤를 따르며 항변했다. 사령관의 부재 시, 병력은 혼란에 빠진다. 황실에서도 사령관님의 귀환을 바라지 않더냐.

하지만 페르탄은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은 듯 위로 올라갔다. 시체가 쌓여 있는 땅이 보였다. 페르탄이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해 누구보다 많은 피를 보았다, 진.”

“그리하여 훌륭하게 지켜 내셨습니다!”

“일라베니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누구보다 죄를 많이 지었다.”

“모두가 그러합니다!”

페르탄은 뒤돌아 성벽 밖, 전장의 반대쪽인 일라베니아를 바라보았다. 저 울퉁불퉁한 산 너머에는 영지가 있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기헤란 관문이 지키고자 하는 땅. 일라베니아.

“붉은수레바퀴는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그것만이 오랜 나의 사명이었으나, 그 원대한 의미를 미처 알지 못해


많이도 헤매었다. 많은 죄를 짓고, 많은 이들을 희생시키며, 그것만이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길이라 생각하여.”

페르탄은 눈을 감았다. 먼 곳을 그리는 것 같았다. 산맥 너머의 가까운 영지, 그리고 멀리 있는 붉은수레바퀴


영지, 에스터까지.

“헤매다, 헤매다, 틀린 길을 멀리 갔다가…….”

진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피 맛이 느껴졌다. 자신이 보았던 페르탄은 언제나 가장


위험한 곳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지켜 낸 위대한 전사였다.

하지만 미처 위로의 말 한마디 내뱉지 못했던 것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후회가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관문을 지키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후회를 품고 있었노라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의 가장
커다란 마음이었다.

“돌아갈 용기도 없어 걷다 보니 여기로구나.”

진은 결국 눈물을 투둑 떨어트렸다. 더 이상 그의 결정을 돌릴 수 없으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페르탄을 지켜보았다. 훌륭한 전사이자, 지휘관, 기헤란 관문의 사령관, 그리고 존경했던 상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진은 무릎을 꿇고 그의 망토에 입을 맞췄다.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일라베니아 력 598 년. 낙엽이 쌓이는 계절.

기헤란 산맥과 맞닿아 있는 남부 관문, 완전 괴멸.

사령관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발타 다섯 가문 중 ‘람가’의 가주와 격돌 후 사망.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다.

병력 만 오천 중, 칠천의 분견대는 근처 영지의 주민들을 피신, 중부의 병력과 연계하여 전선을 재구축.

나머지 팔천의 병력은 장렬히 싸워 이틀의 시간을 버텼으나, 전멸하다.

* * *

[언제나 그리는 사벡에게.]


[아름다운 사벡에게.]

[바람이 스치는 기헤란의 성벽 위에서, 사랑하는 사벡에게.]

십여 장이 넘어가는 편지의 수신자란은 언제나 비슷비슷한 의미로 채워져 있었으나, 형태가 전부 다른 것이


재주라면 재주였다. 편지는 열어 보지 않았다. 결국은 한 사람으로 귀결되는 수신자에게 전달하기 전까지 잘
보관할 뿐이었다.

어머니, 에델바이스에게.

칼릭스는 아버지의 부관이 보낸 편지 뭉치를 막 전해 받은 참이었다. 관문이 무너지고 급히 후퇴하는 중에 이런


걸 챙길 틈이 있었다니.

“…….”

칼릭스는 편지 표면의 마른 핏자국을 손으로 쓸다가 이내 뭉치를 서랍 안으로 집어넣었다.

“……설마 황제 폐하 앞에서도 그 표정이셨습니까?”

금강석 궁,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의 사후 문제로 황제를 짧게 대면한 칼릭스는 나오자마자 알터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도련님께서는 안 웃으면 흉흉해 보이니 선량한, ‘저는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미소를 잃으면 안 된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니 이놈이? 인상을 찌푸린 것도 아니고 그냥 무표정이었는데 시비를 걸어? 칼릭스는 울컥하다가 한숨을 쉬며
말을 돌렸다. 알터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할 기력도 없었다.

작위 계승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게 되었다. 본래는 전대 백작이 살아 있을 때, 황제의 허가와 공증을 받고


이뤄지는 절차였으나, 페르탄이 전선에서 사망한 관계로 필요한 서류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 서류는 죄다 붉은수레바퀴 영지의 성에 잠자고 있었다. 전시이다 보니 특례법으로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더니 황제가 무척 깐깐하게 굴었다. 분명 뭔가 있겠다 싶어서 자세를 낮춰 황제의 기분을 맞춰 준
덕에 이유는 대충 알아내었다.

국경 사령관이던 제 아버지에게 황성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몇 번이나 전달했건만, 듣지 않았단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충성심은 내 익히 알고 있다 어쩌고 하긴 했으나, 결국은 명령에 불복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얘기였다.

칼릭스도 의심을 피해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문제없는 후계자에게 언제까지 작위를 안 물려줄 수도 없으니,
정식 절차대로 진행하는 정도의 시간은 두고 지켜보겠다는 얘기였다. 칼릭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백작 위를 이어받지 않는 이상, 집단에서 큰 발언권을 얻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작위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할 듯했다.

칼릭스는 황성에 온 김에 로젤린을 보러 가기로 했다. 월장석 성에 도착한 칼릭스는 성문 앞에서 기다리던 수습
기사 헤사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이동했다.

“로젤린 경, 칼릭스 경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응.”

안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칼릭스는 열리는 문을 따라 들어갔다. 따사롭고 밝은 창밖과 달리 방 안은


어둑하게 그늘져 있었다. 로젤린은 창가에 서서 막 들어오는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칼.”

“누님.”

헤사가 잽싸게 방을 나갔다. 칼릭스는 분위기 파악이 빠른 소년의 뒷모습을 흘끗 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헤사 군도 많이 컸군요.”

“처음 만났을 때보다 3.7 센티.”

“…….”

그런 구체적인 수치를 바라지는 않았다. 제 누이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수습 기사의 키를 꼬박꼬박 재 볼
만큼 섬세하지는 않으니, 눈대중으로 나온 수치이리라. 그럼에도 지나치게 상세해서 무서웠다.

“칼릭스도 좀 컸어. 1.6 센티.”

칼릭스는 은근히 기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우선 승계 문제와 관련된 얘기를 로젤린에게 들려줬다. 당분간은
발이 묶이겠지만, 최대한 빨리 처리한 후 따라가겠노라고. 칼릭스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내쉬었다.

정적 속에서 두 남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 다 번듯하게 차려입은 것에 비하면 어딘가 퀭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피로에 찌들어 있는 표정이었다.

187 화.

붉은수레바퀴 남매는 요 며칠간 굉장히 바빴다. 애도를 보내오는 수많은 귀족들을 상대해야 하고, 중부에 있는
붉은수레바퀴 령의 문제로 상의도 하고, 황제도 만나야 했고, 승계 문제 등등. 한 사람의 공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쏟아졌다.

칼릭스는 모두가 자신을 일에 잠기게 해서 미처 슬픈 감정을 떠올릴 수도 없게 만들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로젤린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완전히 대고는 고개도 뒤로 꺾었다. 칼릭스는
턱을 괴고는 테이블에 엎드리다시피 했다. 둘 다 완전히 지친 모습이었다. 일이 대충 일단락되자 미뤄 둔 피로가
밀려왔다.

“힘들어.”

“저도요.”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슬펐는데 지금까지 슬픈 걸 까먹고 있었어.”

“……저도요.”

정말 그런 책략이었던 것인가? 칼릭스는 자신이 만약 바쁘지 않았다 하더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제 아버지는 언제나 가장 위험한 곳에 있었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죽음의 위기도 몇 번이나 건넜다.

쇠가 담금질 되며 서서히 단단해지듯, 칼릭스는 어릴 적부터 ‘페르탄의 죽음’에 단단해졌다. 부고가 도착했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아 그런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는 지금도 눈물보다는 한숨만 나왔다.

“비극적인 일이 닥치거든 울기보다 헤쳐 나아갈 방법부터 생각하라 하셨죠. 자식들을 강하게 키우시더니 성공하신
것 같네요.”

칼릭스는 어이가 없어져서 웃으며 얼굴을 마구 쓸었다. 그래도 피로가 걷어지지는 않았다.

“아, 그리고 유산 문제는요 누님.”

“대충 알아. 내 몫은 거의 없지?”

매년 새로 작성하여 공증받는 유서에는 후계 문제를 비롯한 재산 분할에 관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올해분은
확인해 보지 않았으나, 과거에 폐기된 여러 장의 유서는 로젤린이 하얀밤 기사단에 투신한 이후부터 언제나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니 올해도 같은 내용일 것이다.

한때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후계자였던 로젤린. 그녀는 구색을 겨우 갖출 정도의 결혼 지참금을 제외하고서는


어떠한 인적, 물적 재산도 붉은수레바퀴 령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 로젤린이 파악하고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녀의 기억은 아직 불완전했으니까.

“……알고 계셨네요.”

로젤린은 피곤한지 눈을 끔벅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밤 기사단에 입단하겠다고 다툴 때 아버지가 보여 주셨어.”

제 아버지지만 정말 성격 별로였다. 딸이 좀 다른 길을 간다고 바로 유산부터 줄이겠다 협박하다니.

“그때 씩씩 화내면서, 결혼할 생각이 없는데 결혼 지참금을 어디에 쓰냐고, 그딴 돈 아버지나 많이 쓰시라
했지.”

점잖은 두 사람이 제법 격하게 다퉜던 때의 얘기였다.

“그렇게 말하면서 엄청 속상했는데, 나중에 그 유서가 도움이 많이 됐어.”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까?”

“음, 처음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1 황자 파의 첩자라며 의심받았거든. 그런데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딸을 내쳤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그런 의혹이 사라지게 된 거야.”

확실히 세간에 퍼진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제 딸을 첩자로 집어넣기 위해 그런 연극을 벌일 인간은 아니었다. 그가


내쳤다고 하면 내친 것이었다. 로젤린의 충성심을 그런 방식으로 확인했을 줄이야. 칼릭스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애초에 그런 효과를 노리고 유서를 작성하신 게 아닌가? 했던 기억이 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뭡니까 그 삐뚤어진 애정은. 어머니에게는 하루에도 수십 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식들은 좀 강하게 키우는 편이셨으니까. 그래도 그게 정말 나에게 힘이 되긴 했어. ‘돌아갈 수 없으니까 앞만
보고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

“……정말 극단적인 응원이네요.”

로젤린은 살짝 웃고는 고개를 살짝 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햇빛이 부서지는 광경을 보다 말을
이었다.

“그래서 결심이 섰어.”

과거의 일을 말하는 것 같기도, 현재의 다짐을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한 모호한 말이었다.

* * *

일라베니아의 최남단에 설치된 관문으로 형성되어 있던 전선이 밀려났다. 그것은 방벽 밖에서 이뤄지던 전투가
일라베니아 제국의 영지 내에서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기헤란 관문의 사령관이었던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판단으로, 근처 영지의 영지민들을 피신시켰다. 그러나 모든
영지를 챙길 수는 없었다. 발타와 인접해 있던 남부 영지의 대다수는 초토화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지금도 발타의 검은 손길은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또 다른 남부 관문의 사령관인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채고 전황이 완전히 뒤바뀌기 전에
병력을 보존하여 후퇴했다.

그녀의 영지인 비스타는 난공불락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방벽 하나만 세워져 있는 관문과 달리,
비스타에서는 이런저런 전략과 전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덕분에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거친 공세에도 무너지지
않고 발타군 일부의 발을 묶어 둔 채 공방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그런 자세한 소식이 아직 전달되기 전, 남부 관문이 함락당했다는 것만 알고 있는 수도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기병 몇 만, 보병 몇 만, 궁병을 몇…… 아무튼 시급한 상황이니 최대한 중부를 지원하여 일라베니아를 수호하고
더 나아가 발타를 뿌리 뽑을 수 있도록 하라.

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귀족 그 누구도 아닌, 2 황자 리카르디스였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니 황가가 직접


나서는 것이 마땅하며, 승리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리카르디스가 나서면 흔들리는 민심이 안정되지 않겠느냐는
명목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고 리카르디스는 예상했었다. 때문에 험난한 앞길을 생각하며 침울해하지도, 기어코
다시 한번 자신을 사지에 밀어 넣으려는 황제의 태도에 분노하지도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전쟁에 관련된 문제로 며칠 밤낮을 새우다 오늘에야 겨우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서도 서류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글자들이 흔들거렸다. 몽롱하게 흐려지더니, 까무룩.
눈앞이 어두워졌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떴다. 아까와 달리 방 안이 어두웠다. 자신이 잠을 자는 것을 보고 옳다거니 한 잇세리온이


재빠르게 촛불을 끄고 나간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려 했다. 허리 위를 덮은 낯선 온기만
아니더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그는 몸을 살짝 굳히고는 제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검은 물체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형상을 어슴푸레하게 그려 냈다. 오랜만에 보는 로젤린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사후,
로젤린은 하루도 바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장례 문제, 애도의 뜻을 보내오는 귀족들과의 만남, 전쟁을 위한 단련, 리카르디스의 호위 등. 어지간하면


힘들어하지 않는 로젤린이 연무장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조는 모습을 보고 레이몬드가 눈물을 찔끔 흘렸다는
소식을 리카르디스도 들었다.

오늘도 테라스 바깥 나무에서 호위를 하려다가 잠을 버티지 못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불을 끌어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턱을 괴고 한참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녀가 눈을 떴다.

“……로젤린.”

“예.”

“내 호위 기사에서 해임한다고 하면, 그대는 어쩔 생각이지?”

로젤린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몰래 따라가서 지키면 됩니다.”

“몰래 따라와서 지키지 말라고 한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네가 해 봤자 나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이 보였다.

“그때 욕실에서 분명 말을 잘 듣겠다 하지 않았나.”

로젤린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리카르디스는 턱을 괸 채 몸을 모로 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 나는 그대를…… 전장에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아.”

그녀의 눈이 불만스럽게 변했다.

“이건 그대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 개인적인 사정 이외의 이유다. 굳이 따지자면, 그대의 사정
때문이지.”

로젤린이 누운 상태로 팔을 뒤로해 부스럭거리더니 등 쪽 어딘가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아마도 바지의 허리


부분에 끼워 둔 모양이었다. 마카롱도 그러더니, 요즘 묘한 곳에 종이를 보관하는 게 유행인가 싶었다. 로젤린이
꺼낸 종이는 마카롱이 저번에 자신에게 건네준 것과 같은 발타의 공작물이었다.

“이걸 보신 겁니까?”

“그것 전에도 조금은 알고 있었지.”

“어떻게 이게 저랑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아셨습니까? 저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는데요.”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 신기해하는 걸 보니 이상하게 가슴이 찡했다. 귀여워.

“나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일라베니아의 황자 정도 되는 위치다 보니 이런저런 곳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더군.”
로젤린은 펼친 종이의 내용을 다시 읽고 있었다. 아마 그녀의 시선이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쯤에
도달하였다 생각했을 때 리카르디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발타가 얼마나 악랄한 짓을 벌이고 있건 간에, 대외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일라베니아가 과거에 저지른 일과
더불어, 그로 인해 벌어진 대륙의 몰락. 그 죗값을 받아 내겠다는 것이지. 그 명분과 그대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을 흐렸다.

“있음을…… 아, 알고 있나?”

일단 이것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188 화.

“조금은요. 전하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그대가 들고 있는 종이에 나온, 그 박해받은 ‘마인들’중 그대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 그대는 어디까지
알고 있나?”

“기억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감옥 안에서 병사한테 창대 끝으로 맞았던 때에 숨도 못 쉬도록 아팠던 건 상세하게
기억나는데, 대부분은 흐릿합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로젤린은 종이에 정신이 팔렸는지 그의 반응을 미처 보지 못했다.

“황성에서 지내다 보니 과거를 연상할 만한 부분이 많은 터라. 여기는 몇백 년 전이랑 그다지 변한 게 없어서요.
신전도 불에 타기는 했지만 복구한 모양입니다.”

한없이 어려 보였던 그녀가 갑작스레 몇백 년 연상처럼 느껴졌다.

로젤린은 들고 있는 종이를 한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종이에 적혀 있는 일라베니아의 수많은 악행들. 그 한


단어, 한 문장에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리라. 리카르디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대가 나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따라간다고 한들, 나는 일라베니아 황가의 아들이다. 그대는 결국


일라베니아를 위해 싸우게 되는 것이다. 그대를 아프게 했던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얘기야. 그리고
싸워야 하는 상대 중에는 죄 없는 병사들과…… 디에즈가 있겠지.”

리카르디스는 입술을 잘근 문 채, 종이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로젤린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그대는 이 모든 걸 알고 나를 지키겠다 진정 말할 수 있겠나?”

“예.”

대답이 예상보다 너무 빠르고 명확해서 리카르디스는 약간 당황했다.

“음, 아까 전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저는 일라베니아가 아니라 전하를 지키기 위해 참전합니다. 결과적으로


같다고 말씀하셨지만, 저에게는 크게 다릅니다. 그리고 황가의 아들이라고 하셨는데…….”

로젤린이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봤다. 리카르디스가 의아해할 즈음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친, 아들은 아니시니까? 그래서 이번 전쟁에도 황제가 내보내려 하는 것 아닙니까?”

리카르디스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은근슬쩍 ‘황제 폐하’에서 ‘폐하’라는 호칭을 빼 버렸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알고 있었나?”

“예.”

“언제부터?”

“하얀밤 기사단에 입단하겠다고 아버지와 많이 다투던 시기에 들었습니다.”

그 아저씨가…… 리카르디스는 고인이 된 페르탄을 떠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로젤린이 가진 맹목적인


충성심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발타가 내세운 명분이 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셨지만…….”

로젤린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것 또한 실질적으로 발타가 하고 있는 일을 봐야 합니다. 그들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대외적으로 얼마나 타당하건,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

리카르디스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올곧은 사람이었다. 사랑과 자비에 관해 서술된 책에서 볼 법한
대답이었다. 피는 피로 씻기지 않는다. 죄를 죄로 덮어서는 안 된다.

“원한이 있느냐, 없느냐 하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원망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나쁜 짓을 저질렀던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을 테고요.”

“……그렇겠지.”

“엘피디오 전하의 장례식에서 깨달았습니다. 일라베니아 황가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모두 죽인다고 이 원한이
풀리지는 않을 것 같다고. 저는 대체 과거의 죗값을 누구에게, 얼마나 물어야 합니까?”

어려운 얘기였다. 리카르디스는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누굴 미워해라, 누구는 미워하면 안 된다. 그것은 타인이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많이 배웠지만, 아직 모르는 것도 많기에 섣부르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 결정으로 사람들이 다치게
되는 결과가 따라온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생각하고요.”

“……글쎄, 그대는 모르는 게 많다고는 했지만, 굉장히 현명한 것 같은데.”

“아, 그렇습니까?”

로젤린이 씩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이 와중에도 가슴이 설렌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잠시 후, 로젤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 먼 옛날에요.”
동화책의 첫 문장을 읽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아주아주 먼 옛날’은 지독하리만큼 처절한
현실이리란 사실을 리카르디스는 알 수 있었다.

“그래.”

“엄청 아팠습니다. 무섭고 괴로웠고.”

“……그래.”

“도망치고 숨고 싶었습니다. 흐릿하지만 기억이 납니다.”

시선을 멀리 둔 채, 인상을 간간이 찌푸려 가며 말하는 그녀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상기시키는 듯했다.

“그런데 딱 하나 선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나에게 힘이 있었다면,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지키고 싶다.”

리카르디스는 지나온 나날들의 로젤린을 떠올렸다. 언제나 자신의 앞에서 등을 보이며, 검을 빼 들고 있었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반드시 자신을 지켜 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그때의 마지막 기억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은 과거의 괴로웠던 시간보다 훨씬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그,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지낸 긴 시간이 겨울잠을 자는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는 설명도 참 잘하는군.”

리카르디스가 어색하게 칭찬하자 로젤린이 웃었다. 그녀가 곧 말을 이었다.

“그렇게 긴 겨울잠을 자고 눈을 뜨니…… 붉은수레바퀴 성이었습니다.”

또 다른 시작의 첫 장이 펼쳐진 순간이었다.

“벽에 걸려 있는 깃발의 붉은수레바퀴 문양을 보고 기억이 났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하얀밤의 주인을
지킨다.’ 아마 그것이 ‘로젤린’에게 가장 중요한 기억이 아닐까 싶습니다.”

“…….”

로젤린이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제 과거와 현재는 결국 다르지 않습니다. 소중한 걸 지킨다. 어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때에도 기억했습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가진 진정한 힘이 마력이나 육체의 강인함 따위가 아니란 걸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은 그녀의 입으로 구체화 되었다. 지키고 싶다. 그 맹세 자체가 로젤린을 움직이게
하고 어떤 희생도 감내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의 결정이나 다름없었다.

“칼릭스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찾으라 했습니다. 알던 사실이 뒤바뀌고, 상황이 달라져 혼란스러울
때에 그것이 중심을 잡아 줄 수 있을 거라고요. 저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킨다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것이 제 중심입니다.”

로젤린이 말한 대로였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 눈앞의 로젤린과 지금은 없는 ‘로젤린’.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닮아 있었다. 단순히 외모가 같기 때문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것이 로젤린이 다른 이들에게 ‘로젤린’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했다.


이질적이지만, 그녀는 달라지지 않았다. 두 사람을 잇는 연결고리는 그 어떤 것보다 단단했다.

“전하께서는 전쟁과 그로 인한 위험이 제가 감당해 낼 문제가 아니라 하셨지만, 저는 지키고자 하는 것을 위해


검을 들겠습니다. 전하와 하얀밤 기사단, 붉은수레바퀴, 포도밭과 상냥한 사람들, 어린아이들. 비스타의 상인들.
하지만…….”

침대에 바르게 누워 있던 로젤린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시트를 매만지고 있던 리카르디스의 손을 맞잡았다.


로젤린은 갓 태어난 아이가 부모의 손을 살피듯이, 그의 길쭉하고 큰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맞닿는
같은 형태의 온도가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리카르디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저의 힘이 닿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과거에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이번에는 지키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얼 해야 하는지 지금의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제 힘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가볍게 맞닿아만 있던 손이 간절하게 그의 손을 쥐었다.

“전하께서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닿았다. 로젤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피부에 닿았다. 무게가 실리자 깍지 낀 손이 서서히 시트에 닿았다.

“로젤린.”

“예.”

그는 로젤린의 아주 오랜 과거를 눈앞에 그렸다. 어린아이는 바싹 마르고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아득한 긴 시간을 거슬러 가야만 했다. 너무나도 멀어 보여 차마 닿을 수도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오랜 고통은 로젤린과 함께 겨울잠을 자고, 그녀와 함께 깨어나 지금 바로 눈앞에 있었다. 손이 닿는 거리에
그녀가 있었다.

“아주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는.”

로젤린은 아까 ‘아주 먼 옛날에는요’ 하고 자신의 과거를 말하기 위해 운을 띄웠던 것과 리카르디스의 말이


어딘가 비슷하다 느꼈다.

“예.”

“그대는 조금도 아프지 않을 거야. 무섭지도 괴롭지도 않을 테고.”

이마가 맞닿아 있는 채라 숨이 가까웠다. 속살거리며 닿는 숨이 간지러워 로젤린이 살짝 웃었다.

“숨바꼭질과 술래잡기에 재능이 없는 나랑 놀아 주고 있겠지. 아마 십 초에 한 번씩 들키고, 오 초에 한 번씩


잡힐걸.”
그녀가 좀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리카르디스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행복하고 좋은 기억들만 그대에게 남도록 내가, 반드시.”

“예.”

도와 달라는 말에 답에 어울리지 않는, 두서없고 장황한 말이었음에도 로젤린은 환하게 웃었다.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밀리아, 세티스티아, 붉은수레바퀴 백작, 황제, 디에즈, 케틀린.

살아남기 위해 많은 것을 잃어 왔던 투쟁의 시간이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를 하찮은 목숨이라 생각했으나,


오늘에야 살아 있음에 감사할 수 있었다.

189 화.

20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기 바로 하루 전, 황제가 리카르디스를 호출했다. 전장에 보내려는 의도가 명확했으므로,


서로 웃으며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리카르디스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적의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2 황자’의 모습. 임명서를 보고도 눈하나 깜빡 안하며 여유롭게 내용을 읽어 내릴
뿐이었다. 이렇게 되니 괜히 눈치가 보이는 건 황제 쪽이었다. 그는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보다가 목을 가다듬고
급히 얘기를 꺼내었다.

“백성들을 지키는 것은 황가의 의무이니.”

리카르디스가 싱긋 웃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 황가의 일원으로 어찌 손 놓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책임이 막중한 자리이기는 하나,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황제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의중을 파악하려는 눈빛이 그를 맴돌았다. 황제는 잠시 후 허허


웃으며 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일라베니아에 악재가 따르는 상황에서, 황태자 위를 내리는 것이 마땅치 않다 여겼다.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만백성이 널 반길 것인즉. 그때야말로 적기가 아니겠느냐.”

리카르디스는 황제가 겸양이 섞인 대답을 하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니, 제가 어떻게 황태자 위를
받겠느냐…… 따위의. 리카르디스는 대답 대신 내리깐 눈을 들어 올리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폐하. 혹시 기억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황제는 은근한 당황을 내비쳤다.

“무얼 말하느냐.”

“어릴 적, 저의 호위 기사단이 창설을 코앞에 뒀을 때 말입니다. 제가 어리석어 ‘하얀 밤’이 가지는 의미를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해, 그 이름을 달라 청했었지요.”

황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잊을 리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황족들의 호위는 황실 기사단이 번갈아 가며


맡게 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리카르디스의 경우는 특별했다. 특별하게 두각을 드러내며, 엘피디오의 지위를
위협했다. 그래서 특별하게 위험해졌다. 또한, 황제인 자신이 그 소년을 특별하게 필요로 했다. 여러모로
특별했던 셈이다.

암살자 따위의 손에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던 터라, 호위가 더욱 강화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리카르디스의 호위 기사단이 창설을 코앞에 두고 있을 무렵, 리카르디스가 금강석 성을 찾아왔다.

[제 호위 기사단에 ‘하얀밤’의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폐하.]

황제는 정말 너무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미처 화내지도 못했다.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에서, 심지어는 하얀


밤이 찾아오지 않은 지가 삼백여 년이 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 일개 황자의 기사단을 ‘하얀밤’이라 칭하겠다?

이것은 황제의 입장에서는 역모였고,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리카르디스를 황태자로 생각하고 있다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는 허, 허. 경직된 웃음만 내뱉었다. 리카르디스는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의 안전을 위해 특별히 호위 기사단의 창설을 허가해 주셨음을 충분히 인지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영광이긴
하나, 저의 쓰임새를 완전하게 하고 싶으시다면, 폐하. 조금이나마 이 싸움이 비등해 보이도록, 힘을 실어
주시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또한, 대외적으로는 제가 대신관 누구보다 신성력이 뛰어나니 하얀 밤을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하사했다 하신다면, 과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황제는 그때까지도 리카르디스를 데리고 온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한 적이 없었다. 물론 천치가 아닌 이상에야
엘피디오를 저지하기 위한 꼭두각시라는 사실 정도야 알아챘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모든 항목에서 수재 이상의
평가를 받는 그때의 소년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가 자신이 황실에 온 이유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을 꺼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참으로 맹랑했다. 네가 네 아들을 견제하기 위해 날 데리고 왔지 않으냐, 라고 말하고 있었으니.

제 치부를 온전히 내보였다는 당혹스러움이 앞서긴 했으나, 특별 호위 기사단이 창설되어야 할 만큼 위험한 길에


타인을 끌어들였다는 일말의 죄책감이 순간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것이 리카르디스가 ‘하얀밤’의 주인이 된
이유였다. 물론 언젠가 가깝거나 먼 미래에 곧 사라지게 될 이름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던 덕도 컸다.

황제는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렸던 아이는 더 이상 없었다. 청년은 부서지는 햇살 아래에서 선명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세계의 가장 큰 축복, 일라베니아의 가장 큰 영광. 하얀밤이라는 고귀한 이름을 하사해 주신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 이름을 지닌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 아니었겠습니까.”

껄끄러웠다. 그때의 죄책감이 살아나는 듯, 언젠가 사라질 ‘하얀밤 기사단’의 미래가 떠오르는 듯. 황제는
입안에 고여 넘어가지 않는 침을 차와 함께 넘겼다. 리카르디스가 맞은편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발타가 일라베니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할지라도, ‘하얀밤’이 결국은 그 어둠을 걷어 내고 제게


승리를 가져다주리라. 그렇게 생각합니다. 폐하.”

황제의 낯이 굳었다. 리카르디스가 말하는 ‘하얀밤’은 단순히 그의 기사단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황제는
다르게 느꼈다. 그가 축복의 밤을 불러내겠다고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황제는 가슴 속 깊은 곳, 가장 뜨거운 심장 언저리부터 싸늘하게 식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리카르디스는 축복의


밤을 부를 권한뿐 아니라, 축복의 밤을 어떻게 부르는가에 대한 지식 또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나,
불안은 차곡차곡 쌓이기만 했다. 리카르디스가 얼마나 특별한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설마? 설마. 몇 개의 가정이 황제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 몇 개의 가정에서 뻗어 나간 수십 개의
미래 속에서도 황제는 같은 결정을 내렸다. 전쟁에 리카르디스를 내보낸다.

그것은 리카르디스가 발타라는 큰 위협을 걷어 낼 수 있을 만한 능력을 지녔다 믿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반드시


그 장소에 그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

황제가 그린 수십 개의 그 어떤 시간 속에서도 리카르디스는 전장에 있었으며, 또한 수십 번의 죽음을 맞이했다.


반드시 이뤄져야만 할 미래였다. 지금의 리카르디스가 말한 ‘하얀밤’이 의미하는 것이 반역과 관련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순수하게 제 안위만을 바라는 소인배라 할지라도.

황제는 곧 표정을 가다듬고 평소와 같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하다, 리카르디스. 너에게 하얀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이 함께할 것이다.”

전장으로, 가장 위험한 곳으로. 예정된 미래가 안배된 곳으로 떠나,

“무사히 돌아오길 이델라브힘께 빌고 있으마.”

부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를.

“전장에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말을 어찌나 하고 싶어 하던지.”

리카르디스는 다리를 꼰 채 무성의하게 말했다. 방 안에 있는 소파, 의자, 테이블 등 적당히 엉덩이 댈 곳에


여기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분개하거나 탄식했다. 욕도 들렸다.

권력을 쥐고 흔들고 싶어 하는 황제에게 우수한 아들이란 정말 너무나도 위협적일 것이다. 그것이 발타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우수한 아들이라면 더더욱. 리카르디스 휘하 세력의 대다수는 그가 평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나, 그러한 이유로 황제가 그의 죽음을 바란다는 것을 납득하는 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다리를 꼬고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 두었다.

“못난 자식이라 기대에 부응해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괜찮지 않을까요? 폐하께서도 선황께 못난 자식이셨어요.”

클로에가 나긋나긋하게 황제를 욕했다. 남자들이 급하게 입을 가리고 웃음을 삼켰다.

“오늘 모이게 한 이유는, 우리의 적은 발타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기 위해서다. 일라베니아도 적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니, 발 뺄 기회는 지금뿐이다. 여태껏 나를 따라 준 공로로 대가 없이 보내 주겠다.”

그러나 누구도 대답 없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리카르디스가 턱을 살짝 들고는 싱긋 웃었다.

“보통은 이런 분위기에서 손을 들기는 힘들지. 내 노림수가 먹혔군.”

리카르디스의 농담에 사람들이 웃었다. 그때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올렸다. 파르딕트였다.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경은 안 돼. 가려면 목을 두고 가.”

“예? 왜 저는 안 됩니까? 아차, 그게 아니라 질문이 있어서 손을 들었습니다, 전하.”


리카르디스가 순식간에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농이었다. 뭔가.”

파르딕트가 고개를 돌려 한 곳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로젤린이 있는 쪽이었다. 정확히는


로젤린의 옆. 칼릭스에게.

“……칼릭스 경이 왜 여기 있습니까?”

그래, 왜 칼릭스 경이 여기에…… 왜 여기에 있어? 엘피디오가 죽었다고 돌아섰나? 아까부터 신경 쓰였어. 방
안이 작게 속삭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소란 속에서 리카르디스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내 사람이었다.”

“예?”

“예에?”

“언제부터…….”

“몇 개월 전에 나의 인품을 흠모하였노라 고백했었지.”

“…….”

기가 찬다는 칼릭스의 표정에 모두가 리카르디스의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로젤린만 눈을 빛내며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랬어? 우리 전하의 인품을 흠모했어? 언제 충성 맹세를 했어? 묻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궁금해하던 사람들은 칼릭스가 제 누이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다들 그가 제 누이 때문에 왔겠거니 하며 대충


넘어갔다.

190 화.

“그래,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일 출진하기 전에 총사령관 임명식이 있을 것이다. 직위를 받을 사람은 당연히
나고. 전쟁터에서 ‘총사령관’이 암살 명단 제 0 순위라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겸사겸사, 전쟁에서 패한다면 그
책임 또한 물으려고 하는 것이고.”

“효율 좋은 책략이로군요.”

“그렇군. 참 잔머리는 잘 돌아가는군.”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다.

“죽으라고 보내는 곳이다. 전쟁에서 발타의 기세를 눌렀다 싶으면 그때부터 내가 위험해지겠지. 그러나, 내가
참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라 본다. 그 누구든 무슨 수를 썼겠지. 그래서 나는 기꺼이
검을 들고 전장으로 가겠다. 조금이라도 내가 내 운명을 택할 수 있는 길이기에 가겠다. 그 사지 속에 아주 좁은
틈의 활로가 있으리라, 믿는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리카르디스는 한 사람, 한 사람 눈에 담았다. 마지막은


로젤린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었다. 이런저런 서류로 어지러워진 테이블 위에 섬세한
문양이 그려진 서류가 있었다.

[설원의 월계수,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가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를 대 발타의
병력을 이끄는 일라베니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델라브힘의 가호 아래 일라베니아를 수호하고 대륙을 불안에
떨게 한 발타와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라.]

테이블을 짚고 있던 두 손이 꽉 주먹 쥐어졌다. 숨을 깊게 내뱉은 그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반드시 승리한다.”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총사령관,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일라베니아력 589 년에 발발한 대 발타 전을 위해 출진하다.

* * *

햇살과 함께 꽃잎이 내려지는 공간 속, 일라베니아의 국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은 기시감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리카르디스를 포함한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모두 몇 개월 전, 사절단의 자격으로 발타로 떠났던 날을 상기했다.


정말 똑같았다. 수도 거리거리마다 사람들이 꽉 들어찬 장면과 사지에 제 발로 들어 가야 한다는 상황까지도.

달라진 점을 꼽자면, 그때보다 인원수가 많아졌다는 것과 더불어 일라베니아의 대군을 독수리 한 마리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삐이익---

독수리가 한 번씩 창공을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낼 때면 병사들은 번번이 우러러보며 감탄했다. 이델라브힘의
가호가 따른다며 무척이나 좋아한다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사기가 올라갔다.

[미미나 쥬쥬로 따라갈 생각도 하긴 했지. 근데 인간 놈들이랑 부대껴야 할 생각하니까 토 나와서.]

하고 저 독수리가 악담을 했다는 걸 알면 무슨 반응을 할지 조금 궁금했다.

평탄한 여정이 이어졌다. 리카르디스가 총사령관 임명을 받고 “전군, 출진.” 하며 검을 뽑았던 때만 해도 눈에


예기가 감돌던 병사들은 어느새 관성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있었다. 나라에 큰일이 닥쳤으나, 그것은 먼
곳의 일이라 여기는 평온하기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마차 안에서 지도를 펼쳐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돌연 바깥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듯했다.

똑똑.

바깥에서 마차 문을 두드려왔다.

“무슨 일이지?”
“전하, 그…….”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 스타스가 답지 않게 뜸을 들이고 있었다. 그가 짧은 침묵 후에 곧바로 말을 이었다.

“손님께서 전하를 알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전쟁터로 진군하는 와중에 손님이라는 단어를 들은 것이 확실한가?”

스타스는 면목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리카르디스는 창문을 열어 그 ‘손님’의 정체를 확인했다. 병사들을


헤치고 다가오는 분홍색 개털이 보였다. 갑작스럽게 피로가 밀려왔다. 리카르디스는 손으로 눈을 꾹 눌렀다. 두
눈을 다시 뜨고 쳐다봐도 연분홍색 개털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환각이 아니었군.’

라헤안시는 어디서 구한 것인지 늙은 당나귀를 타고 있었다. 당나귀는 무언가를 천천히 씹으며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 위의 라헤안시는 헥헥대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당나귀를 어떻게든 재촉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속도는 전혀 빨라지지 않았고 그냥 꼴 보기 싫은 효과만 더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노새를 탄, 라헤안시의 뒤치다꺼리를 일임하고 있는 신관 베르움이 보였다. 그의 피로하고 아연한


표정은 모든 상념을 재로 만들어 날려 버린 듯했다. 한참 느리게 다가온 라헤안시는 마차 옆에 당도하고 나서야
에휴 하고 흐르는 땀을 닦았다. 늙은 나귀와 어울리지 않는 휘황찬란한 대신관의 복장이었다.

“혀엉!”

“리카르디스 전하라 부르셔야 합니다.”

신관 베르움이 조용히 그를 타박했다.

“형! 이렇게 중요한 걸 두고 가면 어떻게 해!”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술렁였다. 어떤 중요한 걸 두고 갔기에 대신관께서 몸소 당나귀까지 타고 행차한 것이지? 뭘


전해 주러 오신 거지? 그들끼리 의견이 분분했다. 리카르디스만 자신이 두고 온 중요한 것의 정체를 깨닫고 피식
웃었다.

“중요한 거? 그러고 보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걸 두고 왔었군.”

그는 입술을 한번 꾹 깨물었다. 입 밖으로 내뱉기 싫었으나, 앞에서 저렇게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으니
한번은 맞춰 줘야 할 거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창문에 팔을 걸며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내 동생, 라헤안시를.”

라헤안시가 우헤헤 웃었다.

“그래! 날 두고 가면 어떻게 해! 바보, 바보!”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난데없이 펼쳐진 깨가 쏟아지는 형제들의 애정 행각에 괴로운 듯 얼굴을 구겼다.
리카르디스로서도 입 밖으로 내뱉는데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으나, 라헤안시가 코를 먹는 소리까지 내 가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름 보람을 느꼈다.

어쨌거나, 제 목숨 불사하고 따라나선 게 아니던가.


솔직히 있는지 없는지조차 까먹고 있었지만, 그의 합류는 반가웠다. 누가 뭐라 해도 일라베니아에 단 일곱 명밖에
없는 대신관이었다. 그 실체가 어찌 되었건, 존재 자체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라헤.”

늙은 당나귀를 재촉하던 라헤가 그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씩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헤집었다.

“잘 왔다.”

아까와 달리 진심 어린 목소리였다. 그걸 느꼈는지 라헤안시도 바보 같은 웃음을 지우고는, 조금 덜 바보 같은


미소를 띠었다. 가만히 그의 개털을 만지고 있던 리카르디스의 목소리에 곧 의문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허락은 맡고 왔나?”

라헤안시가 몸을 배배 꼬았다. 그의 뒤에서 베르움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은 되었다.

“자식 농사 폭삭 망하셨군, 황제 폐하께서도.”

“대륙이 죽어 가고 있으니 흉년이 들 수밖에.”

라헤가 낄낄 웃었다. 리카르디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결국은 웃고 말았다.

* * *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은 대륙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사건이 있기에 앞서 일라베니아를 떠났던 라고슈의 바이페렘, 관디테에게도 그 소식이 닿았다. 왕좌에 앉은
소녀는 큰 동요를 보이지 않고 과일을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관디테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딤라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몇몇 제르타예들이 염려스러운 기색을 내보이자 관디테가 과일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설마 일라베니아와 발타가 사이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형제들이 있던가?”

“……물론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요즘 발타가 수상쩍게 행동한 걸 모르는 형제도 없을 것이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바이페렘.”

관디테가 과일 한 조각을 다시 입안에 집어넣었다. 가득 퍼지는 새콤한 맛에 말랑말랑한 소녀의 얼굴이 구겨졌다.

“으으…… 아무튼 이것은 예견된 일이었노라. 새삼스럽게 놀라울 것은 없다.”

“걱정되는 부분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이페렘.”

오가는 말을 듣기만 하던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발언했다. 관디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엇이냐.”
“혹시나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전쟁 때문입니까?”

혹한의 땅을 이끌어 가는 열두 명의 제르타예 전원이 회의실에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왕실 아래에 묶여


있다고는 하나, 원래는 제멋대로 살아가는 야생마 같은 사람들이었다. 중요한 행사도 귀찮다고 안 오는 경우가
더러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이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해 불러 모을 수 있는 것은 바이페렘의 고유 권한이었다. 하지만 라고슈의 군신


관계는 복종이 아닌 동맹에 더욱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기에, 바이페렘 또한 제르타예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때
심사숙고해야만 했다.

때문에 이렇게 제르타예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것은 라고슈에 큰일이 날 때뿐이었으며, 제르타예들이 알기로


현재 라고슈 내에는 큰일이 없었다. 일라베니아와 발타가 전쟁을 시작했을 뿐이지.

남자가 지적한 부분 또한 그것이었다. 혹시 그들이 싸우는 판에 끼어들겠다고 말하려고, 우리들을 다 불러


모았느냐? 라는 것이었다. 관디테는 손수건으로 입을 쓱쓱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가 염려한 대로, 그렇다. 나는 오늘 일라베니아와 발타의 전쟁에, 라고슈가 참전하겠노라는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제르타예를 불러 모았다.”

열두 명의 제르타예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참전이라니요, 바이페렘. 그냥 두면 서로 잡아먹다가 공멸하게 되는 최상의 결과가 펼쳐질 텐데요.”

“그리고 그때 나서서 꿀꺽해 버리는 거지.”

“그거 좋은 생각인데, 아. 바이페렘께서는 어느 편으로 참전하시려고 한 겁니까? 발타는 아닐 테고, 설마


일라베니아?”

“웩.”

누군가가 역하다는 듯 혀를 쭉 뺐다.

“차라리 라펜의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말지.”

191 화.

딤라는 제르타예들의 말을 들으며 손으로 눈을 덮었다. 이 자식들을 어쩌면 좋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 명,
두 명,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소리가 불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딤라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딱. 유별나게 큰 소리도 아니었음에도 제르타예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반대.”

딤라가 말하자 다들 손을 우수수 들어 올렸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찬성.”

두 명이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찬성의 이유를 들어 보니 가관이었다. 일라베니아를 돕는 척하다가 뒤통수를


치고 오겠단다. 딤라는 지팡이를 휘두르고 싶어졌다. 그 와중에 단 한 명 만이 손을 들지 않았다. 제일 먼저
발언한 남자였다. 관디테와 딤라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갈라·제르타예. 형제는 왜 어느 쪽도 손을 들지 아니했나?”

“마음 같아서는 반대에 들고 싶었지만, 이런 중대한 사항을 의논도 하지 않으시고 ‘참전하겠다’고 하신 말씀이
신경 쓰여서 말입니다.”

딤라는 일라베니아의 콧대 높은 귀족들과 겸상을 하느니, 말똥 더미 위에 앉아서 식사를 하겠다는 쪽이었다. 그런


딤라가 일라베니아를 지지하는 것에는 필시 이유가 있으리라.

딤라가 갈라·제르타예의 가주를 지팡이로 가리키며 다른 이들을 노려보았다.

“너희들에게는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게 보이느냐?”

“소심함?”

“결정 장애?”

“생각! 생각, 이놈들아!”

딤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소심함과 결정 장애라고 말한 남자와 여자를 두들겨 팼다. 다른 제르타예들이
딤라의 건강을 염려해 말리는 사이, 관디테가 갈라·제르타예를 보며 생긋 웃었다.

“일라베니아에서 귀한 사람을 만났다.”

“그게 누굽니까.”

“일라베니아에 있는 갈라·제르타예의 핏줄들.”

남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주 상냥하고 귀여운 형제들이었노라. 특히 로젤린 경의 경우에는,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하곤
했지.”

갈라·제르타예의 가주, 귈테는 복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동생? 언니가 아니라? 그가 모호한 표정을 하자
관디테가 흐흐 웃었다.

“냉혹한 추위만이 꺼지지 않는 불꽃을 만들어 내리라 생각했으나, 씹다 뱉은 음식물같이 미적지근한 온도를 지닌
일라베니아에서도, 과연 제르타예는 제르타예였다.”

딤라에게 교육받더니 일라베니아에 대한 악담이 장난이 아니었다.

“혹여, 제 핏줄 때문에 일라베니아의 일에 관여하시려는 겁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딤라가 했다.

“아주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만, 가장 중요한 건 제르타예가 누구의 곁에서 타오르고 있느냐 아니겠나.”

“……2 황자 리카르디스를 말씀하십니까.”

“라이노의 첫째 아들놈이 죽어 지금 가장 유력한 다음 대의 황제 후보이기도 하지.”


“그에게서 무얼 보셨습니까?”

그의 말에 딤라는 가만히 지팡이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만 바라보았다.

“부족하기는 하다만, 구름에 가려져 있어도 달은 달이라 희미하게 빛나더구나.”

딤라가 관디테를 바라보자, 소녀가 열두 명의 제르타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영원한 서약으로서, 우리가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결코 잊지 않았다. 나의 모든 결정은
오로지 라고슈만을 위한다. 갈라·제르타예. 일라베니아와 발타가 싸운다고 하지만, 결코 그것은 그 둘만의 일이
아니다.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은 것이 얼마나 지났던가. 그 사이 대륙에는 오물과 쓰레기가 끼어 도무지 쓸
만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쓸어 버릴 것은 쓸어 버리고, 남길 것은 남긴다. 새로운
대륙에서, 새로운 싹이 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이 자라나, 종국에는 라고슈까지 피어날 수 있도록.”

딤라가 뒤이어 말했다.

“일라베니아에서 만난 황자는 그나마 싹수가 있는 놈이었다. 설원의 월계수에서 어떻게 이렇게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놈이 있나 싶을 정도였지. 다음 대의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으나, 라이노 그 소인배가 제 권력 유지해
보겠다고 아들을 전쟁터로 밀어 넣었지.”

제르타예들은 코웃음을 치거나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딤라의 말에 호응했다.

“그놈을 놓치면 아마 100 년 뒤쯤에나 정신 똑바로 박힌 놈이 나올 게다. 일라베니아의 영향력은 대륙 전역에


미친다. 단순한 남의 나라, 옆 나라의 권력 다툼이 아니란 말이다. 또한, 발타 놈들이 일라베니아의 추악한
치부를 들춘 상황이다. 일라베니아는 전례 없이 휘청이고 있어. 이번 전쟁에 대륙의 명운이 달렸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라고슈 왕실이 지원하는 것은 일라베니아가 아닌, 일라베니아의 2 황자 리카르디스가 될 것이다. 그놈과
함께 발타를 쳐 내고, 일라베니아의 썩은 물을 교체한다.”

딤라의 말에 아까까지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제르타예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장난기 어린 모습들은 전부 사라지고,


혹한의 땅을 누비는 강한 전사들만이 남았다.

열두 개의 꺼지지 않는 촛불은 각 영지로 흩어져 병력을 소집하고 전쟁을 위한 준비에 들어섰다.

* * *

일라베니아 중부.

일라베니아 제국군이 오늘 머무르게 될 영지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전쟁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대지는 나무와
풀이 말라붙어 있음에도 황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 닦인 도로와 거리를 돌아다니는 분주한 사람들. 반듯한
건물 굴뚝에서 퍼져 나오는 따스한 연기까지.

추위에 잠든 희끄무레한 땅을 석양이 뒤덮자 황금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로젤린은 부쩍 성장해 다른 군마들보다
몸집이 훌쩍 커진 초콜릿의 위에서 영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인간으로서 처음으로 발돋움을 했던 곳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령, 에스터.

저 멀리 가시같이 삐쭉삐쭉 솟아 있는 성의 첨탑이 보였다. 가슴 안쪽에 성에가 끼는 듯 그리움이 번졌다.

붉은수레바퀴 성에 다가가던 하얀밤 기사단원과 리카르디스를 맞이하러 온 이는 조만간 백작위를 계승할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였다.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총사령관님을 뵙습니다.”

“영광을 그대에게.”

로젤린도 칼릭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안 본 사이 더 말랐는지, 인상이 날렵해져 예민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쩐지 죽은 페르탄이 생각났다. 이 거대한 영지와 수많은 사람들을 책임지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칼릭스가 날카로운 인상을 누그러트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두 남매는 나란히 이동했다. 잘 지냈느냐 안부를 주고받는데, 칼릭스가 모호한 방식으로 말을 끌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용건을 꺼내지 못하고 빙 둘러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로젤린이 참지 못하고 묻자 칼릭스가 끙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칼릭스가 그녀에게 다가서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예전 같으면 무얼? 하고 물었겠으나, 로젤린은 사라진 주어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에델바이스. 로젤린의
어머니. 그녀가 제 딸의 죽음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부고 때문에 많이 힘드신 상황이라…….”

“응.”

칼릭스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전과 같이 누님을 맞이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로즈, 로즈. 상냥하고 부드럽게 웃던 마른 여인이 생각났다.

“응.”

로젤린이 희미하게 웃었다. 칼릭스가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2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상을 치르는 중이라 집 안이 번잡하여


불편함을 드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시는 동안 편안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에델바이스는 백작 부인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으나,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도


말라 있었다. 수척한 낯빛이 그녀를 더 야위어 보이게끔 했다.

“축복을 그대에게, 백작 부인. 환대에 감사하오. 오늘 하루 잠깐 머무르고 갈 예정이지만, 일행이 많아 피해를


끼칠지도 모르겠군.”

“아닌 말씀을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칼릭스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낯빛이 좋지 않은데, 들어가서 쉬는 편이 나을 듯하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에델바이스는 칼릭스에게 손님 안내를 맡기고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발걸음을 멈춰 뒤돌아서서 무언가를 찾던


그녀와 로젤린의 눈이 마주쳤다.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에델바이스는 곧 계단 위로
사라졌다.

성의 모든 방과 연회장, 공간이 넉넉한 곳은 지휘관들과 기사들이 지낼 수 있게 간단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인과 하녀들을 따라 성에 따라온 지휘관들과 기사들이 흩어졌다.

해가 저물었다. 로젤린은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서 목욕하고, 주방장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음식을 섭취한 후
자신의 방에서 잠시 쉬고 있던 중이었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로 방문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로젤린의 허락에 방문이 서서히 열렸다.
에델바이스였다.

“잠시 시간 괜찮니?”

애써 웃고 있는 낯이었다. 로젤린은 가만히 에델바이스를 보다가 그녀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에델바이스는 시선을
떨군 채 한참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얘기는 대충 들었단다.”

그녀는 손톱을 문지르거나 살갗을 비비는 행동을 했다.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에델바이스는 그 말 이후 다시
몇 초간 침묵을 지키다 어이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라고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구나.”

에델바이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로젤린을 훑었다. 머리, 이마, 눈, 코, 입……
발끝까지. 에델바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다.

“잠시, 왼손 좀 줘 보겠니?”

로젤린이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에델바이스는 샅샅이 로젤린의 손을 훑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
끝에 작게 난 점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로젤린에게 다가온 에델바이스가 성급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소매를 걷었다. 팔꿈치 아래에 작은 흉터가 보였다.
그리고 바닥에 풀썩 앉아서는 그녀의 헐렁한 바지를 걷었다. 정강이를 따라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에델바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로젤린은 그녀가 웅크린 채 울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래…….”

흐느끼는 소리가 거칠어졌다.

“한 군데도 다르지 않은데 어떻게 내 아이가 아니야…….”

그녀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로젤린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에델바이스를 부축해서
일으키려 하자, 그녀는 발작하듯 로젤린의 손을 떨쳐 내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가 보였다. 혐오감도,
두려움도 아닌 오직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는 눈이었다.

192 화.

한참 뒤, 에델바이스가 비틀거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어지러운지 마른 손으로 이마를 짚고선 헐떡였다.
로젤린은 말없이 그녀가 숨을 고르길 기다렸다. 에델바이스는 등받이에 눕듯이 기댄 채,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투두둑. 코끝까지 습한 냄새가 나더라니, 비가 내렸다.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에델바이스는 잠에서 깨어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고슈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나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꽃 이름을 붙여 주는 경우가 많단다. 추운 곳이라 꽃을


보기 힘들거든. 어쩌다 한번 보게 되는 날이면 얼마나 놀랍던지. 그 아름다운 색, 앙증맞은 크기. 너무 예쁘고,
너무 소중하지 뭐니. 그래서 내 딸에게도 꽃 이름을 붙여 주고 싶었어. 비록 일라베니아에서는 고리타분하다고
받아들여질지언정.”

로젤린이란 꽃 이름은 없었다. 아마 여러 사정에 부딪혀서 애칭만이라도 꽃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리라. 로젤린은
자신을 로즈, 로즈. 하고 부르는 에델바이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너무 예쁘고, 너무 소중하지 뭐니.]

정말 그런 목소리였다.

“조금 더 멋있는 이름을 지어 줄 걸 그랬나? 로젤린이 제 이름을 싫어했거든.”

에델바이스는 지친 듯 웃음을 내뱉었다. 그녀가 이마를 덮고 있던 손으로 눈을 가렸다.

“가는 길을 응원해 줄 걸 그랬나. 어미라는 사람이 볼 때마다 그렇게 뭐라고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겠지.”

그녀의 손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을 같이 있을 걸 그랬나. 그렇게…….”

에델바이스는 위험해 보일 정도로 떨고 있었다.

“행복하고, 빛났던 모든 시간이 후회로 뒤덮여, 색이 바래어진 기분에 나는 지금…… 너무나도, 비참하구나.”

로젤린은 걸음을 돌려 담요를 가지고 돌아왔다. 에델바이스의 무릎에 담요를 덮자 그녀가 흠칫 놀라서 눈을
가리던 손을 떨어트렸다. 무릎을 꿇고 담요를 정리 중이던 로젤린과 그녀의 눈이 딱 마주쳤다. 에델바이스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는 로젤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착하구나.”

그녀가 물기 어린 얼굴로 웃었다.

“참 착해.”

에델바이스가 손으로 눈가를 훑었다. 다시 방 안이 조용해졌다. 에델바이스가 말을 꺼낸 것은 대략 십 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의 이 고통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에델바이스는 자신의 손을 꼭 마주 쥐었다. 무언가를 참는 사람처럼.

“하지만 나의 잘못 또한, 아니야.”

그녀의 상체가 서서히 기울어졌다. 에델바이스는 마주 쥔 손 위에 이마를 대고서 천천히 말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나는 너를 보는 게 몹시 괴롭구나. 앞으로도 너를 볼 때마다 내 행복했던 지난


시간마저 후회하게 되겠지.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단다.”

숨을 몰아쉬던 에델바이스가 천천히 일어났다. 로젤린도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눈이 마주쳤다.


에델바이스는 지쳐 보였다. 눈동자에는 흐릿하고 혼몽한 빛만 감돌 뿐이었다.

“건강하렴. 전쟁에서도 다치지 말고. 그리고.”

그녀가 로젤린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아주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다시 보자꾸나.”

에델바이스가 힘겹게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 로젤린에게서 멀어졌다. 로젤린은 이것이 그녀가 건넨 마지막
작별 인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델바이스는 자신의 존재를 견딜 수 없이 괴로워했다. 그 사실이 못내 괴로웠다.
자신의 잘못도, 그녀의 잘못도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탓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인.”

에델바이스의 걸음이 뚝 멈췄다. 로젤린이 그녀의 야윈 뒷모습에 대고 고개를 푹 숙였다.

“건강하세요.”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달칵 문이 열리고, 달칵 다시 닫혔다. 방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 * *

로젤린은 익숙한 침대에 파묻혀 가만히 누워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코를 킁킁거리니 내리는 비 냄새가 한껏
들어왔다. 그녀는 원래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소리였다.

한데 지금은 피부에 닿는 끈적한 공기가 짜증 났다. 잠들 즈음이면 톡 소리를 내서 정신을 깨우는 빗소리가
거슬렸다. 내일 또 행군을 해야 하는데, 진흙 때문에 초콜릿이 고생할 생각을 하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런저런 일과 공기 하나까지 트집을 잡아 가며 투덜거리던 로젤린은 자신의 사고가 어느새 아까의 대화로 흐르고
있음을 자각했다. 애써 다른 생각을 해 봐도 결국은 돌아왔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노력할 수도 없는 일이고, 노력한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바뀔 수 없는 일이란, 피치 못한 일이란,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정말 너무나도…….

똑똑.

천장을 쳐다보기만 하던 로젤린은 급히 상념에서 깨어났다. 누가 방 앞을 지나는지도 모를 정도로 생각에 깊게


빠져 있었던 듯했다. 그녀는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누구와 만나 대화할 기분이 아니었다. 다시 눈을
감으려는 찰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

로젤린은 홀린 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목소리의 잔상을 따라 스르륵 움직였다. 손이
문고리에 닿았다.

달칵.

열린 문 틈새로 검은 인영이 보였다. 얼굴을 보지 않았다 해도 누군지 알 수 있을 거라 로젤린은 확신했다. 문을


열자마자 은은하고 청량한 향이 밀려왔다. 리카르디스였다.

“들어가도 될까.”

진군하는 내내 볼 수 없었던 편안한 옷차림새였다. 냉엄한 표정으로 대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그가 은색 갑주를 벗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날카로운 눈빛과 딱 다물린 입술, 힘이 들어가
있는 어깨와 온몸으로 사방을 경계하는 날카로운 기세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분위기. 분위기가 다르구나.
로젤린은 깨달았다.

그녀는 문을 더 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리카르디스는 야심한 시각, 다 큰 아가씨의 방에 들어가도 되냐는
대범한 요청을 한 것치고는 무척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들어올 생각은커녕, 방안을 흘끗흘끗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아차 하고는 발걸음을 옮기긴 했으나, 목을
가다듬는다든가, 손으로 아랫입술을 구깃구깃하게 만진다든가 하는 갖은 쑥스러움을 동반한 채였다.

로젤린은 자신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는 리카르디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공간에 들어온 적 없는 이가
서 있는 광경은 이상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향한 채 멈췄다. 무얼 보나 싶어 로젤린도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떨궜다. 하얀 맨발이 보였다. 리카르디스의 방문에 놀라 슬리퍼를 신는 것도 까먹은 탓이었다. 예전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맨발로 성을 활보했다지만, 지금은 예법에 통달했다 자부하는 로젤린으로서는 참 민망한
일이었다. 발이 절로 꼼지락거렸다.

리카르디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침대 아래에 있는 슬리퍼를 가지고 왔다. 건네받으려고 로젤린이 손을


뻗었으나, 슬리퍼는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더 아래로. 로젤린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리카르디스는 슬리퍼를 쥔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둔한 로젤린이 봐도 그가 뭘 하려는 지 알 수 있었다.


직접 신발을 신겨 주려는 것이었다. 로젤린은 너무 충격받아서 리카르디스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울 뻔했다.
다행히도 그게 더 실례라는 사실을 깨달은 덕에 멈출 수 있었다.

“저, 전하.”

로젤린은 당황하는 제 목소리가 낯설어 더욱 당황해 버렸다. 리카르디스는 기어코 슬리퍼를 신겨 주고서야
일어났다.

“신고 다녀야지. 다치면 어쩌려고.”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가슴팍에 시선을 둔 채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낮은 테이블을 끼고 앉았다. 로젤린은 그제야 리카르디스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작은 트레이에는 투명한 찻주전자와 유리잔, 그리고 찻잎을 담아 두는 나무 상자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차를 드시려는 건가?’

그런데 물이 없었다. 그리고 이 늦은 밤에 갑자기 차를? 뭘까 싶어 바라보고 있자, 리카르디스가 손가락으로


콧잔등을 쓸었다. 민망한 모양이었다.

“차를 마시고 싶은데, 그대가 깨어 있을 것 같아서.”

리카르디스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얘기했다.

“……그냥 그대와 같이 마시고 싶어서 왔는데,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걸 문을 두드리고서야 알았어. 내쫓을
건가?”

약간 불쌍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로젤린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젓자 리카르디스도 마주 웃었다.

“그런데 물이 없군요. 가서 떠올까요?”

“……아니, 이건. 특별한 차라서.”

리카르디스가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대체 얼마나 특별한 차이기에?

리카르디스가 비어 있는 투명한 찻주전자를 들고 벌떡 일어섰다.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우선, 빗물을 받아야 해.”

그러고는 딱딱한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거칠게 열었다.

굳이 빗물을? 이렇게나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니. 로젤린도 자리에서 일어나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창문 밖으로 돌출된 부분에는 꽃 화분 몇 개가 올려져 있었고, 찻주전자는 그 옆에서 같이 비를 맞는 중이었다.

투두독. 조금씩 내리는 빗줄기가 투명한 유리에 달라붙었다. 한 방울이 더 붙으니 무거운지 그제야 스르르 안으로
떨어졌다. 로젤린이 집중해서 바라보는 모습에 리카르디스가 남몰래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리카르디스는 결연한 표정으로 맑은 빗물이 담긴 찻주전자를 든 채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다. 로젤린도 창문을 내리고 리카르디스를 따랐다. 큰 램프 위에서 물은 서서히 온도를 높여 갔다.

로젤린은 흔들리는 불빛을 보다가, 이따금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히고 있었다.

193 화.

“좀, 번거롭지.”

“아뇨. 재밌습니다.”

붉은수레바퀴 성의 하녀들과 하던 소꿉놀이도 생각났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정말로.”

리카르디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나무 상자를 열었다. 짙은 청색의 마른 꽃잎이 담겨 있었다. 그가 조그마한 집게로


꽃을 집어 잔의 중앙에 놓았다. 그러고 유리잔의 표면을 따라 따뜻해진 빗물을 흘렸다. 투명한 물에 짙은 남색
빛을 띠던 꽃의 색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찻물의 색이 몹시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몇 분이 흐른 뒤, 잔에 담긴 물이 아름다운 남색으로 물들자 리카르디스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렸다.

“……잠시 눈 좀 감고 있으면…….”

“예?”

“누, 눈 좀.”

로젤린은 그의 요청에 따라 눈을 감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코끝에 상쾌한 과실 향이 느껴졌다.

‘레몬?’

그렇게 몇 초가 흘렀다. 리카르디스가 음흠흠 큼큼하며 심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 떠도 된다.”

“와…….”

아까까지 푸른 빛에 가까운 남색이었던 꽃차의 색이 선명하고 아름다운 분홍색으로 변해 있었다. 어떻게 색이


달라진 거지?

잠시 의아해하던 로젤린은 과거에 헤사가 말해 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푸른색의 블루멜로우라는 꽃차는


레몬즙을 떨어트리면 분홍색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로젤린이 감탄하며 ‘블루멜로우인가요?’ 하고 묻기 바로
직전, 리카르디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이야.”

“예?”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숙인 채, 이마에 손등을 맞대고는 다시 한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그대의 찻잔에, 행복해지는, 요정의, 마법을, 걸었어.”

“…….”

로젤린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멈췄다. 아니요, 전하. 이것은 블루멜로우라는 꽃차이며, 차


안에 들어 있는 특정 성분이 레몬즙과 만나 분홍색으로 변한 겁니다. 하고 미처 말할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그제야 리카르디스가 진정 이 현상을 마법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가 자신과
에델바이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고, 위로해 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는 것 또한.

칼릭스가 말해 준 것일까. 그래서 걱정이 되었던 걸까. 머릿속으로 찻주전자를 비장하게 들어 올리던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몰래 숨겨 온 레몬즙을 잽싸게 뿌리고 어딘가로 숨겨 놓았을 거라 생각하자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아까까지만 해도 물 아래 잠겨 있는 것 같은 습하고 우울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잠기게 했던 물이 레몬을


만난 블루멜로우의 색처럼 분홍색으로 물드는 듯했다.
로젤린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한 모금 마시자 따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 은은하면서도 시큼한
맛이 너무 웃겨서 로젤린은 블루멜로우 차를 뿜을 뻔했다. 그녀는 자아를 가지고 나서 이렇게까지 깔깔깔 웃고
싶었던 때가 없었다.

속이 간질간질하고, 귀에는 열이 몰리고, 눈물이 날 것 같으면서도 붕 뜨는 기분. 이게 뭘까.

[행복해지는, 요정의, 마법을, 걸었어.]

어쩐지 답을 알 것만 같았다. 로젤린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리카르디스를 또랑또랑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효과가 굉장합니다.”

손등에 이마를 괸 채 자괴감에 빠져 있던 리카르디스가 벌떡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만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래?”

“예. 솔직히 좀,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마시자마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비밀이야.”

그렇게 말한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내부에서 휘몰아치던 수치심을 걷어 냈는지, 한결 가벼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사기를 쳤다는 걸 자각한 리카르디스는 가슴을 펴고 자랑스러워하던 걸 멈추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콧잔등을 쓸며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대가 기분이 좋지 않고, 슬플 때마다 내가 마법을 걸어 줄게.”

로젤린은 손안에 따스한 찻잔을 쥐고 그를 응시했다.

“그대가 행복해지게.”

그저 이 말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한 모금 더 차를 마신 후 빙그레 웃었다.

21

일라베니아 남부, 놋쇠저울 영지.

일라베니아 제국군은 중부 관문에서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휘하에 있던 변경 주둔군과 일부의 병력을 흡수하여
남하했다. 제국군의 목적지는 놋쇠저울 성곽도시로, 발타군이 중부 관문에 도달하기 전 반드시 만나게 되는
곳이었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제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거기다 날씨까지 좋았던 터라 예상했던
날보다 이틀은 더 빠르게 도착했다. 저 멀리 도시를 보호하는 거대한 성곽이 보였다. 전투의 열기와 시끄러운
병장기 소리는 이미 대기를 울리고 있었다.

발타군이 성곽을 에워싼 상태였다. 여기저기 늘어놓은 투석기와 공성 무기들, 하늘 위로 바늘 같은 화살이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성문을 뚫을 듯한 거친 공세였음에도 리카르디스는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함락되지는 않았군.”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뒤따라오는 로젤린에게 향했다. 그녀는 고삐를 쥔 채 말 위에 서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
눈 위에 그늘을 만든 로젤린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남쪽 성벽, 발타의 병사들이 보입니다.”

발타군이 공성 탑이나 사다리를 통하여 아슬아슬한 균형을 무너트렸다는 얘기였다. 몇 배가 되는 놋쇠저울군을


상대하는 발타군의 형국이 불리하긴 했으나, 며칠간 수성에 진이 빠졌던 놋쇠저울 병사들의 사기를 꺾을 수는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바람이 세게 분다 싶더니, 거대한 독수리가 일라베니아 제국군을 향해
날아왔다. 전황을 둘러보기 위해 떠났던 마카롱이었다. 마카롱은 말 위에 서 있는 로젤린을 발견하고 내려왔다.

로젤린이 팔을 내밀자 마카롱이 그 위에 살포시 안착했다. 그녀의 귓가에 대가리를 가까이 한 독수리가 남에게
들리지 않게끔 부리를 작게 열고 닫으며 무언가를 속삭였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밟고 있던 안장에
앉았다. 그리곤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접근해 속삭였다.

“남쪽 성벽 위에 삼천 킬로미터 밖에서 봐도 눈에 띌 정도의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은 얼간이가 있다고 합니다.”

리카르디스는 환장할 것 같아 눈을 감았다.

“영주인가.”

괜히 볼모로 붙잡혀서 몸값을 요구받거나, 성문을 개방하라는 지시를 받으면 곤란하건만. 리카르디스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독수리가 다시 한번 로젤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늙어서 노망난 거 아니냐는 데요.”

“……지금만큼은 마카롱 경의 악담에 동조하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군.”

리카르디스는 재빠르게 지휘를 내렸다. 기동력이 좋은 기병대를 먼저 보내야 할 듯했다.

“중앙군의 기병대와 궁기병대가 먼저 출진한다. 본격적인 섬멸전에 앞서 발타군의 신경을 교란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병대가 궁기병대를 엄호하여, 후방에 있을 고위 지휘관들을 사살하라. 결코, 깊게 파고들지 말라. 그리고
로젤린 경.”

“예, 전하.”

“그대도 같이 출진한다.”

마카롱과 얘기하던 로젤린이 건틀렛을 만지작거리며 먼 전장을 바라보았다.

“명을 받듭니다.”

그녀의 기세가 베일 듯 날카롭게 표출되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등골을 따라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곧 출정 준비가 끝났다. 리카르디스는 기병대의 선두에 자연스럽게 합류해 있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로젤린이 기병대장에게 무어라 말하고는 무리를 벗어났다. 그녀는 다른 어떤 곳도
바라보지 않고 하얀밤 기사단원들과 리카르디스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리카르디스는 말에서 내려 지휘관들과 짧게 논의를 하던 참이었다. 다가오는 로젤린을 발견한 그가 손을 들어
잠깐 회의를 멈췄다. 군마를 타고 있는 그녀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로젤린이 투구를 벗자 가볍게 묶어
둔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흘러내렸다. 그녀가 생긋 웃었다.

“전하.”

이상하게 너무 불안했다. 그냥 인사를 건네기 위해 온 것일 수도 있으나 로젤린과 함께 지내 온 경험이


리카르디스의 위기 경보를 마구 울려 댔다.

“나중에는 말씀을 못 드릴 것 같아서요.”

리카르디스의 마음속에 있던 불안감이 점점 커져 갔다. 심호흡한 그는 로젤린을 올려다보며 차근차근 얘기했다.

“좋다. 나는 지금 강철 같은 마음으로 무슨 말을 들어도 흠 하나 나지 않는,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이 될


준비가,”

로젤린이 고삐를 짧게 쥔 채 몸의 무게중심을 리카르디스 쪽으로 옮겼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되어, 있…….”

지 않았다. 이마에 따스한 감촉이 닿았다. 철컹, 철컹! 와장창! 뒤에서 누군가가 무기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울렸다.

리카르디스가 눈과 입을 크게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후련한 표정으로 다시 똑바로 말 위에 앉았다.

리카르디스는 느리게 상황을 인식했다. 그러니까 로젤린이 지금, 일라베니아 제국군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춘 것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너무 놀라서 강철처럼 굳어 버렸다.

“무운을 빕니다, 전하.”

미소를 날린 로젤린이 투구를 쓰고 고삐를 돌렸다. 얼마나 자연스럽고 멋있는 뒷모습인지. 얼굴이 발개진
리카르디스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굳어만 있었다.

[그거 아나요 경?]

[예?]

[전하께서 경에게 하듯이, 경도 전하께 해도 되는 거예요. 그거.]

[그렇습니까?]

[마찬가지로 전하의 무운을 비는 거예요.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기사가 무운을 빌어 주니, 얼마나
든든하시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아, 그렇군요.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그럼요. 좋아서 뒤로 넘어가실 거예요.]

레티시아는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접근할 때부터 불안한 기운을
느꼈다. 발걸음을 급히 재촉했었으나, 늦어 버린 후였다. 레티시아는 차마 그 광경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손으로
두 눈을 가려야만 했다.

‘이델라브힘이시여…….’

에버하르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굳어 있는 동료 기사들에게 “아, 로젤린 경이 치명적인 기억상실이라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 하고 연극적인 말투로 여유롭게 떠나 버린 당사자를 대신해 열심히 변명하고 다녔다.

194 화.

놋쇠저울 영지에 발타의 선발대가 도착한 건 8 일 전이었다. 총 만 오천 정도의 병력으로, 규모가 크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발걸음마저 맞추는 병사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얼마나 고도로 훈련받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놋쇠저울의 영주, 빌렘은 분견대를 보내어 그들의 후방을 공격했다가 아까운 병력만 줄인 후로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수성에 집중했다.

그러나 산적이나 도둑만 잡아 왔던 영지의 병사들에게는 전쟁이라는 단어는 너무 낯설었다. 더군다나 영지를
지키는 병력의 반은 남부 관문이 무너지기 전 소집령으로 불려 간 상태라 마땅하게 싸울 인원이 없던 것도 그들의
고단함을 한층 더했다. 그나마 성곽이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였기에 겨우 버티고 있는 실정이었다.

영주는 싸울 만한 장정들을 차출하여 무장시켰다. 다행히 물자는 충분했지만, 문제는 물자가 아니었다. 발타군은
지치지도 않는지 밤새 꼬박 공성 무기를 조립했고, 이틀 전부터는 돌과 썩은 동물의 사체, 불타고 있는 기름
단지 등을 날려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영주님, 여기는 위험합니다!”

보좌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쾅!

거대한 돌덩이가 건물을 부수며 굉음을 울렸다.

“아악!”

놋쇠저울의 빌렘이 몸을 웅크리자 호위 기사들이 그를 짓누르듯 감쌌다. 그 위로 부서진 돌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다행히도 큰 피해는 없었다.

8 일째 계속된 공성은 낮밤을 가리지 않았다. 먼저 지치기 시작한 쪽은 민간인이 많이 포함된 놋쇠영지군
측이었다. 경험도 경험이고, 일라베니아의 남부 관문이 허물어지고 적이 이곳까지 당도하였노라는 사실 자체가
그들을 크게 흔들었다. 언제나 승리했던 일라베니아가 이번만큼은 패배할지도 모르겠다고.

사기는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만큼 떨어져 가는 반면,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오늘을 넘기기가 힘들어 보였다.

와아아-

발타군 측에서 함성이 들렸다. 공성 탑이 기어코 성벽에 당도했다. 하단만 고정되어 있는 나무판자가 열리며
성벽에 걸쳐졌다. 곧 방패를 든 구릿빛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석궁대가 일제히 사격했으나 방패에 전부 가로막혔다. 재장전 속도가 늦은 석궁의 특성상 적의 침입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성벽 위 놋쇠저울군과 공성 탑에서 쏟아져 나온 발타군이 무기를 맞부딪쳤다. 챙, 챙. 금속음이
소름 끼치게 가까워져 갔다.

“영주님! 피하셔야 합니다!”

보좌관은 그의 팔을 억세게 잡아 이끌고 성벽 위를 달렸다. 빌렘은 구릿빛 사내들의 손에 하나둘 쓰러져 가는


기사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거 놓아라! 발타군의 지원 병력이 왔어, 이번에는 북문 쪽에서! 어차피 죽을 거라면 명예롭게 죽을 것이다!”

빌렘의 말에 보좌관은 깜짝 놀라 북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거대한 군대가 점차 접근 중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발타의 본대라면 남쪽에서 서서히 북상 중인 게 아닌가? 왜 중부 관문이 있는 북쪽에서? 설마
벌써 함락되었나?

그런 의문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어느 눈 좋은 병사 한 명이 비명을 질렀다.

“일라베니아 제국기입니다!”

아군이었다. 빌렘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눈물을 멈췄다. 귀족 가문의 문양이 아닌, 일라베니아 제국기라면
제국 직속의 군대가 왔다는 얘기였다. 발타의 병사들도 눈치챈 듯 움직임이 뜸해졌다.

“성벽과 성문을 사수하라! 결코 열려서는 안 된다!”

빌렘이 외치자 기사와 병사들이 무기를 꽉 쥐고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전투에 임했다.

일라베니아의 거대한 군대에서 한 덩어리가 떨어져 나왔다. 대략 삼천쯤 될 것 같은 분견대는 본대를 뒤로하고
돌진했다. 북측에서 반 바퀴 빙 돌아 성벽의 남문 방향까지 왔다. 마치, 남쪽 성벽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하늘에서 본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알았을까. 혼란스러운 빌렘의 머리 위로 거대한 독수리의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두두두, 먼 거리에서 달려오고 있음에도 땅이 울렸다. 갑옷을 착용하고 말을 탄 중장기병과 궁기병으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빛을 받는 은색 갑주들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그들의 파괴력은 창 아래에 쓰러지는 발타군의 숫자로
가늠할 수 있었다.

발타의 보병과 일라베니아의 중장기병대가 분전을 치르는 가운데, 선두에 서 있던 기사가 갑작스레 말에서
뛰어올라 보병 셋을 뭉갰다. 이후에 인파에 묻혀 사라진 기사는 십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예상외의 장소에서
튀어나왔다. 바로 남쪽 성벽에 걸쳐진 공성 탑의 가장 높은 곳, 놋쇠저울의 병사들을 공격하는 발타군 바로
뒤에서.

피로 젖은 은색 갑주가 햇살 아래 형형하게 빛났다. 뒤가 소란스러워 잠깐 뒤돌아본 발타의 병사가 짧게 비명을


지르는 추태를 보였다. 놋쇠저울의 영주인 빌렘도 깜짝 놀라며 환호했다.

소란은 찰나에 불과했다. 기사가 성벽 위의 발타군에게 커다란 무언가를 휘둘렀다. 반쯤 부서져 있어서 잘은
모르겠으나, 공성 탑의 층마다 설치되어 있는 투석기의 일부분인 것 같았다. 거대한 나무와 쇳조각은 발타의
병사를 이끌고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그 기사의 활약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성벽에 성큼 올라선 기사는 발타 병사 한 명, 한 명의 뒷덜미를


잡거나, 손목을 잡아 성벽 아래로 던졌다.

그러던 중, 기사가 발타 병사 한 명을 붙잡고는 주춤했다. 병사는 발을 버둥거렸으나 기사의 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기사가 발타군의 투구를 벗기고 얼굴을 잡은 후 요래조래 살폈다. 그러고는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뭔가 좀 이상한 모양이었다. 그 이상한 대치를 보고 있던 놋쇠저울의 병사가 기사의 고민거리를
알아챘는지 재빨리 외쳤다.

“피부가 하얗지만 발타군이 맞습니다!”

“아, 그렇군.”

기사는 망설임 없이 성벽 아래로 발타의 병사를 집어 던졌다. 비명이 멀어져 갔다. 기사는 성벽 위를 한번
찬찬히 둘러보더니, 더 이상 발타군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

“예!”

기사의 한마디에 병사들이 한 구석에 반쯤 엎어져 있던 놋쇠저울의 빌렘을 대령했다. 빌렘은 비틀거리면서도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기사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무섭게 기세를 내뿜으며 싸우는 모습만 봤을 때는 한없이 커
보였는데, 막상 마주 서자 기사의 몸집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사가 투구의 바이저를 철컥 열었다.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입니다.”

빌렘이 입을 떡 벌렸다. 일라베니아 사람 중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마주 인사했다.

“아니! 로젤린 경! 이렇게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저는 놋쇠저울의 빌렘이라고 합니다. 지원 감사드립니다!”

“본대가 곧 도착할 예정이니, 조금만 더 버텨 주시죠. 남쪽 성벽의 활로는 만들고 가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철컥, 다시 바이저가 닫혔다. 빌렘은 허둥지둥하다가 가슴 위에 주먹을 올려놓는 경례로 그녀를 배웅했다.

로젤린은 막 성벽으로 진입하려는 발타의 병사 둘을 떨어트린 후, 성가퀴 위로 올라섰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커다란 전투 도끼를 주워, 공성 탑과 성벽을 연결하고 있는 나무판자를 세게 내려쳤다.

쾅!

소란스러운 전장에서도 유별나게 큰 소리가 울렸다. 단 한 번의 공격에 간이 다리가 부서졌다. 공성 탑에서


건너오려던 자들은 떨어지거나 탑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다.

그녀는 성가퀴를 박차고 떨어져 있는 공성 탑으로 돌진했다.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는 그 호쾌함이란. 빌렘은
옆으로 화살이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로젤린의 전투를 관전했다.

그녀가 들어간 공성 탑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과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 삐걱거리는 나무 소리까지.
나무 우리 안에 맹수와 토끼 여러 마리를 집어넣는다면 저런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쾅!

다시 굉음이 울렸다. 공성 탑의 한 면에서 나뭇조각이 터지며 병사들이 날아갔다. 사람을 투석기에 태워서 날려
보내도 저렇게는 안 될 것 같았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오오…….” 하며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이후로도
왼쪽, 오른쪽, 뒷면 앞면 할 것 없이 무언가가 터져 나갔다.
삐걱, 삐걱. 거대하고 견고한 공성 탑이 포악한 맹수의 움직임에 비명을 질렀다. 공성 탑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더니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단순히 부순다고 저렇게 무너져 내릴 수 없으니, 아마 어떻게
조립되었는지 구조를 파악해서 주요 기둥들을 파괴한 모양이었다.

무너진 잔해를 피해 발타의 병사들이 흩어졌다. 그러나 때는 늦었고, 그들은 재앙을 피할 수 없었다. 군집하여
일정하게 공격하던 이들이 흐트러지며 어수선해졌다.

놋쇠저울의 빌렘은 로젤린이 혹여나 공성 탑의 잔해에 깔린 것이 아닌가 걱정했으나, 거대한 나무 기둥을 들고


휘두르며 병사들을 날려 버리는 그녀의 건재한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로젤린은 배치된 투석기 세 대를 마저 부수고는 발타 기병에게서 말을 탈취한 후 유유자적하게 빠져나갔다.


그녀에게 활을 쏘려던 궁병은 하늘에서 내려온 독수리에게 눈을 쪼이고 비명을 질렀다. 중장기병대에 합류한
그녀는 이후로도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후방이나 공성 무기를 공격하여 발타군을 교란했다. 그사이 일라베니아
제국군의 본대가 도착, 섬멸전은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 * *

대략적인 수습을 마친 후, 놋쇠저울의 빌렘은 일라베니아 제국군의 총사령관을 알현했다. 밤하늘의 달빛보다
빛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

놋쇠저울 백작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리카르디스가 눈동자만 굴려 빌렘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는 고고한 자태가 더해지니 그저 기품이 넘치게 보일 뿐이었다.
놋쇠저울의 빌렘은 그를 대면하고 한 10 초간 멍청하게 서 있다가 감탄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천사……?”

그의 뒤에 있던 보좌관이 잽싸게 말을 이었다.

“……같이 강림하셔서 놋쇠저울을 위기에서 구원하신 대제국 일라베니아의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2 황자 전하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 또 영광일 뿐이라 하십니다.”

195 화.

집무실 안에 있던 하얀밤 기사단원들의 표정이 미심쩍게 변했다. 그런 말 아니지 않았나. 그냥 넋을 놓고 감탄한


것 같은데. 참 순발력 좋은 보좌관이었다. 그리고 놋쇠저울의 빌렘은 그제야 눈앞의 미남자가 일라베니아의
황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납죽 무릎부터 꿇었다.

“전하를 뵈옵니다!”

리카르디스는 손을 가볍게 저으며 인사를 받았다.

“전시이니 필요 없는 예는 생략하도록 하지. 발타와 국경이 먼 것에 비하면 성곽이 잘 축조되어 있었군.


놋쇠저울을 차지한 발타군과 공성전을 치러야 하나 골머리를 앓았는데. 며칠간의 분투, 수고 많았다.”

희끗희끗한 백발이 뒤덮은 흰머리의 노인이 눈물을 철철 흘리며 오열했다. 보좌관이 다시 뒤에서 대답했다.

“대 일라베니아 제국의 위험에 이 늙은 목숨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다 말씀해 주시니, 백성 된 자로서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하십니다.”
참으로 유능한 보좌관이었다. 놋쇠저울의 빌렘은 눈물을 닦다가, 집무실 한구석에서 아옹다옹 작게 다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벽을 보고 서 있는 로젤린과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갈색 머리의 기사가 있었다.

남자도 낯에 익었다. 상업 도시인만큼이나 황금정원 상단과 교류가 잦았고, 관련자인 큰뿔산양 레이몬드도 몇 번
본 적 있었다. 언제나 헤실헤실 웃기만 하던 사내가 무섭게 인상을 굳히고 로젤린을 혼내고 있었다.

“어허, 어디서 고개를 돌려. 벽 똑바로 보고 서야지!”

“아는 목소리라서 한번 돌아본 거거든.”

“그렇겠지, 원래라면 지금이 첫 만남이어야 하겠지만! 뭘 잘했다고 말대꾸야! 똑바로 서 이 녀석!”

로젤린이 툴툴거리며 다시 고개를 돌려 벽을 마주했다. 빌렘이 알쏭달쏭한 얼굴로 리카르디스를 쳐다보며 답을


구했다. 놋쇠저울 영지의 구원자, 발타군의 재앙, 오늘 하루 굉장한 활약을 펼친 그녀가 왜 벽만 보고 서 있는
것인가?

리카르디스는 서류에 무언가를 기입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게. 후방 교란을 위해 보낸 기사가 몇 천 배가 되는 병력 안으로 홀로 돌진한 벌을 받는


것뿐이니.”

저렇게 온건하게……? 아니 저게 무슨 벌이 되는 건가? 빌렘과 보좌관의 표정이 해괴하게 변했다. 리카르디스는


들리지 않는 의문 또한 알아채고서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다.

“호기심이 왕성한 나이라 저렇게 한 곳에 붙여 두는 걸 힘겨워 하더군.”

그 말대로였는지,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작은 거울로 뒤편을 몰래 훔쳐보다가


레이몬드에게 걸려 다시 한번 혼났다. 전장을 누비던 늠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정신 산만한 아이를 교육하는
방법에 치명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한 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빌렘과 보좌관이 물러난 후,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방을 비울 것을 명령했다. 스타스는


꺼림칙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낮에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이마에 입을 맞춘 이후부터 종종 볼 수 있던
얼굴이었다. 스타스가 입을 살짝 가리며 리카르디스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전하, 로젤린 경은…… 아직…….”

아직?

“스물네 살입니다.”

“……놀랍게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리카르디스는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얼굴로 표현했다. 어이없었다.

“경은 내가 마흔쯤 되어 보이고 로젤린 경은 열네 살쯤으로 보이는 것 같은데…… 이래 보여도 두 살 차이야.


오늘의 반성할 일을 좀 더 상세하게 얘기하려는 것뿐이고!”

스타스는 그제야 안심하고 나갔다. 나단과 스타스, 레이몬드, 파르딕트와 르원, 잇세리온에게 둘러싸여 한차례
혼난 그녀는 중앙의 의자에 앉아 의기소침하게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하, 숨을 쉬며 그녀의 맞은편 의자를 끌어 앉았다. 시선이 닿자 로젤린이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뭐라 했었지?”

“깊이 들어가지 말라 하셨습니다…….”

“아니, 그대가 나에게 뭐라 했었냐고.”

“무운을 빕니다?”

“더 전에!”

리카르디스는 식은 차를 단숨에 마시고는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과 잔 받침대가 부딪치며 높은 소리를


냈다.

“뭐, 말을 잘 들어? 잘 들을 테니까 데려가?”

리카르디스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은 로젤린은 더욱 작아졌다.

“그래 놓고서는 전투 첫날에 죄 까먹어? 수천이나 모여 있는 전쟁터에 홀로 돌진해?”

“그것이…….”

리카르디스는 씩씩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혈압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대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거라 크게 기대는 안 했다만, 그래도 첫 전투에서 이러는 건 아니지! 다친


곳은!”

“없습니다!”

버럭버럭 성내고는 있으나, 내용 자체는 상냥했던 터라 로젤린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화가 풀린 것일까?

“없어야지! 홀로 씩씩하게 수천 명 사이로 돌진하는 행동에는 본인이 무사할 거라는 보장이 있어야만 했을
테니까!”

안 풀린 것 같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자신에게 은근히 약하다는 것을 이용하기 위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의 사고와 상식이 점점 돌아오면서 느는 건 처세술뿐이었다.

“그게…… 남쪽 성곽이 생각보다도 수세에 몰려 있었고…… 발타의 병사들이 있는 위치 바로 아래에 성문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마인도 몇몇 있던 터라, 자칫하면 성문이 개방되고, 그러면 본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놋쇠저울 영지에 큰 피해가 생기리라 판단했습니다…… 또한 주요 인물들이 볼모로 잡히는 경우, 본대의 병력에
타격을 입을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 없어서…….”

리카르디스는 터트리던 분노를 잠시 멈췄다. 한참 뒤 그가 물었다.

“……기병대장이 그러던가?”

“아니요, 제가 판단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엄지로 미간을 꾹 눌렀다. 공성 무기들이 성곽을 두드려 대고 있긴 했지만, 놋쇠저울의 성곽이 아주
높고 두껍게 축조되었다는 얘기는 행군 도중 수십 번을 했다. 본대는 몇 십 분 뒤에 곧바로 도착할 예정이고,
새삼스럽게 위기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을 텐데.

로젤린은 과거에 했던 ‘말 잘 듣겠습니다, 진짜로.’의 맹세를 어길 정도로 전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는


얘기였다.

‘……이건 또 예상외로군.’

리카르디스는 분견대를 이끌었던 대장의 보고로 그녀의 걱정이 현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지러운 전장
속에서 그런 판단을 빠르게 내렸다니. 물론 지휘관이나 대장들은 보면 파악했을 테지만, 로젤린에게 그런 전황을
보는 눈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욱 예상외였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눈동자가 자신을 담자마자 시선을 떨궜다.
애처로워 보이는 모습에 리카르디스의 화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물론, 화가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로젤린의 말대로 남쪽 성벽이 위험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녀의 활약으로 많은 희생이 줄어든 것도 맞았다.

하얀밤 기사단은 총사령관 리카르디스의 호위 부대로 어지간하면 직접적인 전투를 벌일 일이 적었다. 그런 이에게
일부러 임무를 주어 보낸 이유는 로젤린의 명성이 좋은 쪽으로 퍼지기를 리카르디스가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바람대로 단 한 번의 전투에 그녀의 이름이 퍼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의 예상보다도 빠른 성과였다. 지금


당장은 놋쇠저울 영지에 국한되나, 곧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바랐던 일이기는 하지만 크게
기뻐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입에 더 오르고 내릴수록, 더욱 빛이 발하는 영웅담일수록, 그 영웅에게 생채기가
하나, 둘 늘어날 가능성이 많았으므로.

영웅으로 내세우자니 그녀가 위험해지고, 그렇다고 옆에만 두자니 활약할 수가 없고, 내보냈더니 덜컥 사고를
치고 있고.

리카르디스는 다리를 꼬고 엄지손가락을 잘근 씹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위가 아파 왔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강해지겠다고 맹세했다지마는, 그건 마음의 문제라 위장 같은 장기에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초조함에 다리를 떨다가 후, 한숨을 쉬었다.

그가 소파에 길쭉하게 누워 눈을 감자 로젤린이 의자에서 내려와 슬금슬금 접근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그림자가 몸 위로 드리우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림자에 작은 솜털이 돋아나 살갗을 약하게 간질이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홱 손을 뻗어 그녀를 낚아채며 몸을 돌렸다. 로젤린이 소파 등받이와 리카르디스의 몸 사이에


갇혔다. 눈을 깜박이는 로젤린이 코앞에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다시 한번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잽싸게 리카르디스를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몸이 닿아 왔다. 리카르디스는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잇새 사이로 분한 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약기는.”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라고 눈치챈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말없이 씩 웃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 *

전투가 끝난 후, 놋쇠저울 도시는 더욱 분주해졌다. 부상자와 사망자의 수습. 군대의 정비. 무너진 성곽과
건물의 보수. 포로의 수용 등. 놋쇠저울 백작은 물론이고, 리카르디스도 하루에 두 시간 정도 짧은 수면을 취할
정도로 바빴다.
그의 일정에 맞춰 움직이던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로부터 짧은 휴가를 받았다. 격렬한 전투가 고단했으리라 그가
판단했기 때문이었으나, 로젤린은 정말 조금도 고단하지 않았기에 휴가를 반납했다.

“쉬고 와.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쉴 수 있을지 모른다.”

“싫습니다.”

말 잘 듣겠다는 얘기는 불타 없어지다 못해 먼지가 되어 바람결에 흩어진 지 오래인 듯했다. 한참을 반항하던
로젤린은 놋쇠저울의 특산물이 염소 치즈라는 얘기를 듣고 급하게 말을 멈췄다. “싫습.”까지 얘기한 그녀가
마지못해 받아들여 준다는 식으로 휴가를 쟁취하고 떠났다.

빤히 보이는 속마음과 어리숙한 영악함이 귀여웠던지라 리카르디스는 짧게 웃으며 떠나는 그녀를 기꺼이 배웅했다.
룰루랄라 길을 가던 로젤린이 레이몬드와 얘기하는 장면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가
아니었지만, 입 모양이 정확하게 ‘염소 치즈’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로젤린을 바라보던 리카르디스는 곧 바쁘게 몰아치는 일에 신경을 빼앗겨 자신만의 짧은 휴식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196 화.

그 시각, 거리로 내려온 로젤린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저기 무너져 있는 건물
사이로 흐르는 악기 소리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아름다웠다. 로젤린은 그 소리를 따라갔다.

어느 공터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옷이 남루한 자, 부유해 보이는 자, 젊고, 늙은 사람. 여자


남자 할 것 없었다. 모두가 눈을 빛내며 중앙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그 수많은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보였다. 그녀가 듣고 홀린 듯
따라왔던 아름다운 음률의 정체였다. 낡은 후드를 쓰고 있었지만, 후드 안으로 보이는 옷감이 재질이라든가 들고
있는 악기의 휘황찬란한 생김새로 높은 신분의 사람인 걸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남자는 조용한 군중 속에서 노래했다. 대중들도 잘 아는 성가였지만, 이델라브힘을 찬양하는 기존의 가사와
달랐다. 신의 가호를 받는 두 번째 월계수가 어둠을 밝힐 것이니 더 이상 밤이 두렵지 아니할 것이라는 희망찬
내용이었다.

로젤린이 아는 한, 두 번째 월계수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리카르디스 단 한 명뿐이었다. 신에게 향하는 영광을


한 사람에게 돌아가게 바꿔 놓은 것이다.

“…….”

사람들을 선동하는 의도가 너무 적나라했다. 리카르디스 측에서 풀어 놓은 사람인가 추측해 보았으나, 만약 이런


얘기가 오고 갔다면 로젤린은 자신이 모르고 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건 리카르디스의 진영조차
모르는 돌발적인 상황이라 봐야 했다. 아까까지 순수하게 노래를 감상하던 로젤린이 날카롭게 눈을 뜨고 남자를
응시했다.

대체 누굴까. 무얼 위해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인가. 만약 리카르디스 전하께 해가 되는 일이라면…….

로젤린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며 살벌해지기 시작할 때 박수 소리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났다.
로젤린의 시야에 남자의 입가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것이 보였다. 그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두 팔을 벌렸다.
마치, 광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포근하게 안아 주려는 것처럼.
“놋쇠저울의 백성들이여.”

“…….”

로젤린이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분명, 이 목소리는…….

“불안해 말거라. 겨울의 밤이 아무리 길다 하여도, 반드시 아침은 올 것이니.”

말투는 늙수그레한데, 목소리만은 젊었다. 로젤린은 남자의 정체를 곧바로 파악했다. 대신관 라헤안시였다.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된 로젤린은 당혹스러움에 잠시 굳어 있었다. 그가 왜 리카르디스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른단
말인가?

놋쇠저울의 영지민들은 그의 정체를 유추하지 못했지만, 한껏 연기하는 라헤안시에게서 풍기는 고귀함과


신비스러움에 한껏 매료된 듯 보였다. 영지민들이 눈물을 글썽였다.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 주신, 귀한 분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어찌 나의 이름이 너희들을 보듬는다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지나가는 이델라브힘의 종. 그분의 축복이,


그분의 의지가, 그분의 발길이 너희들을 향한 것이다.”

돌풍 같은 바람이 세게 불었다. 로젤린은 라헤안시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분주해진 걸 목격했다.


라헤안시에게 가려져 있어 미처 보지 못했던 신관 베르움이었다.

그는 바람에 망토가 펄럭이는 순간 라헤안시의 몸에 연결된 어떤 실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망토의 매듭이 바람에
날린 듯이 자연스럽게 풀리며 가려져 있던 라헤안시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모래바람에 잠깐 눈을 감았던 사람들은 바람이 지난 후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저, 저건!”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낸 라헤안시의 복장, 정확히는 목걸이를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다. 언뜻 단순해 보일 수 있는
장신구였으나 그것의 가치는 재화로 환산할 수 없었다. 일라베니아의 대신관만이 지닐 수 있는 징표이기
때문이었다.

“대신관님이시다!”

“대신관님이셨어!”

“놋쇠저울에 대신관님께서!”

사람들의 감격이 몰아쳤다. 노인들은 눈물까지 흘렸다.

“…….”

로젤린 혼자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며 입술만 만지작거렸다. 라헤안시의 머리카락은


평소와 달리 윤기가 자르르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리카르디스에게 매일 혼날 때 같지 않게 진지하고도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라헤안시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후, 들켰는가…… 이 또한 신의 뜻이라면…….”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묘하게 반발심이 든 로젤린은 무리에서 빠져나와 건물 옆에 자리 잡고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하다. 이 몸은 일라베니아 신성제국의 단 일곱 명뿐인 대신관이노라. 허나, 괘념치 말라. 일곱 명밖에


없는 대신관 중 하나인 나 역시 그저 너희들을 돌보는 이델라브힘의 미천한 종일뿐이니.”

괘념치 말라더니 일라베니아에 대신관이 단 일곱 명뿐이며, 자신은 그중 하나라는 사실을 굉장히 강조하고 싶은
것 같았다. 로젤린의 표정이 께름칙하게 변했다. 라헤안시가 자애로운 미소를 걸고서는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의 노래가 너희들의 위안이 되었다면 좋겠구나.”

“대신관님!”

“당연한 말씀을, 대신관님!”

“대신관님께서 어찌 이렇게 위험한 곳에…….”

라헤안시가 훗 웃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로젤린은 왜인지 모르게 속이 거북해져 인상을 찌푸렸다. 라헤안시의
뒤에 있는 베르움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걱정 말라. 이델라브힘께서 나를 보내셨다.”

라헤안시가 찬찬히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자 모두 손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며칠 전, 나는 꿈속에서 보았노라. 검은 머리 기사가 놋쇠저울에서 승리의 깃발을 높이 치켜드는 모습을.”

사람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예언하셨어! 예언을 하신 거야! 소란이 전염되듯 수많은 군중 속으로 녹아들었다.

“또한, 어두운 길을 걷는 두 번째 월계수의 모습도 보았다.”

아아…… 사람들이 탄식했다.

“죽어 가는 대륙, 죽어 가는 사람들, 독처럼 은밀히 퍼지는 어둠을 걷어 내기 위해 상처 입고 피 흘리는 두 번째


월계수를 보았다.”

남자들은 분을 참지 못해 잇새로 작게 욕을 내뱉고, 노파들은 멈췄던 눈물을 다시 흘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리카르디스가 혼자 어둠을 지고 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둠을 걷어 내고 비로소 진정한 빛에 도달하는 것 또한 보았나니.”

라헤안시가 하늘을 쳐다보며 두 손을 모았다. 그러고 눈을 감으니 완전히 기도를 올리는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러니 불안해 말라. 어둠 속에서 여명이 떠오를 때,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갈 것이다.”

모두가 라헤안시를 따라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거리에 모여 있는 수백 명의 사람이 똑같은 기도를 하니,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라헤안시는 떠나기 전에 아픈 사람들 몇몇을 치료했다.


“너는 무릎이 시큰시큰 아프구나.”

“아니, 어떻게 그것을?”

노인이 깜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들이 다시 한번 수군거렸다. 역시, 예언을 하시는 거야! 예언의
능력이 있으신 게 분명해!

“그리고 허리도 아프구나.”

믿을 수 없는 예지능력을 목도한 노인은 기어코 졸도해 버렸다. 로젤린은 붉은수레바퀴 성의 늙은 하인과


정원사를 떠올렸다. 매일 무릎과 허리, 관절 등이 쑤시고 아프다고 했는데. 보통 저 나이쯤 되면 아픈 게 정상
아니던가?

로젤린은 성에 돌아가 리카르디스 앞에서 라헤안시의 설교-사기 행각-을 재현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벌리고,
하늘을 보며 아련한 표정을 하고, 두 손을 경건하게 모으며 엄숙하게 기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 또한 토씨
하나 안 틀리게.

그 한 편의 연극을 본 하얀밤 기사단 전원이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차마 내뱉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런 가신들을 대신해 리카르디스가 진실을 말했다.

“그 나이쯤 되면 허리와 무릎이 안 아픈 사람이 비정상이지.”

아, 역시나.

“노래와 악기 연주 솜씨가 정말 훌륭했습니다. 제가 들어 본 것 중에 제일 아름답던데요.”

“딴에 그런 재주가 있긴 했지. 이델라브힘도 지금쯤이면 후회하지 않을까. 자신의 종이 그 훌륭한 노래와 악기
연주 솜씨로 뭘 하고 있는지 보면 통탄할 것 같은데.”

얘기를 듣는 내내 무언가를 고심하던 나단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전하께 이득이 될 겁니다.”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만…….”

분란과 전쟁 속에서는 좋지 않은 감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은 간절하게 무언가를 붙잡고 싶어 했다. 그것이 영웅이 만들어지는 배경이었다. 국가나 거대한 집단이
자신이 다스리는 무리의 사기를 고양하거나 그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라헤안시는 지금 그러한 일의 초석을 쌓는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에게 이 상황은 나쁠 것이 없다 뿐 아니라,


이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일이 이뤄지는 배경에 라헤안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적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속이 모호한 아군을 뒤에 둘 수는 없는 법.

리카르디스는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시간을 두고 차차 보려고 했건만, 조금 더 빨리 대화를 나눠


봐야 할 듯했다.

* * *

마차가 자갈 위를 튀어 오르며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반동과 소음에 잠깐 잠들었던 케틀린이 깨어났다.
그녀는 잠시간 눈을 깜박이며 흐릿한 의식을 깨웠다.
‘뭔가 이상한데.’

보통 마차에서 깜빡 졸 때면 고개가 옆이나 뒤로 꺾여 언제나 고생하기 마련인데, 너무나도 편안했다. 케틀린은


그때야 자신이 무언가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자리를 더듬거려 보니 한 손안에 들어오지 않는 단단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한참 주물럭거리고 있자 옆에서 디에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허벅지입니다.”

케틀린은 아차 하고 디에즈의 허벅지에 있던 손과 디에즈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떼어 냈다. 혹시 몰라


소매로 입가도 문질렀다.

197 화.

“생각보다 허벅지가 단단하신데, 무슨 단련이라도 하셨나요?”

케틀린은 디에즈가 작게 웃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맞은편에 건너가 앉았다. 꾸벅꾸벅 조는


여자를 가엾게 여겨 어깨를 빌려주러 친히 자리를 옮겼던 모양이었다.

“원정길이 고되었나 봅니다. 길이 거칠었는데도 잘 자더군요.”

“베개가 좋아서요.”

능청스러운 케틀린의 대답에 디에즈가 다시 한번 작게 웃었다.

“꺄아악!”

아악, 제발, 살려 주세요! 마차 밖에서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발타군이 날뛰고 있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케틀린은 창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비 냄새가 났다. 그 습한 냄새에 비릿한 냄새가 섞여
악취를 풍겼다. 지하 감옥에 있을 때가 떠올랐다. 케틀린은 가만히 옷을 여몄다.

“춥습니까?”

“비가 와서 그런지 좀 더 쌀쌀하긴 하네요.”

“일라베니아의 겨울은 춥기로 유명하죠.”

디에즈의 말대로 일라베니아의 겨울은 춥고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사실상 대륙의 북단에 위치한 라고슈의 추위가
더욱 혹독할 테지만, 죽는 사람은 일라베니아 쪽이 훨씬 많았다. 케틀린은 아마 일라베니아의 사람들이 따스한
계절의 온도에 추위를 망각했던 탓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왜인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서늘해진 때였다. 케틀린의 어깨 위로 따스하고 포근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그녀는
손을 더듬어 물체의 정체를 파악했다. 담요였다. 쌀쌀하다는 한마디에 디에즈가 둘러 준 모양이었다.

케틀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담요를 만지작거리며 디에즈를 빤히
바라보았다.

참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 속에 맹수가 있다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물론 지금이 모습이 가식이라거나, 거짓된
모습이라고는 생각되지는 않았다. 보통 사람들만 해도 양면적이고 다면적인 구석이 있지 않던가. 하물며 전혀
다른 타인의 기억과 함께 인간의 생을 이어받은 디에즈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것도 디에즈, 그것도 디에즈.

그러나 하카브는 이 상냥한 ‘디에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온화한 성격이 그의 행동에 가끔 제약을 걸고 있는 것 같아. 엘피디오를 죽여 버렸을 때의 모습이 좋은데


말이다.]

[……비록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그 모습의 결과로 봄이 지나고 시작되었어야 할 전쟁이 앞당겨져 따뜻한 나라에
사는 우리 병사들이 개고생 하지만?]

바른말에 뼈아팠던 하카브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못했지만 케틀린의 볼을 쭉 잡아당기는 식의 소심한 복수를
했다.

하카브는 ‘마음에 안 든다’의 발언에 충실하여, 디에즈의 상냥한 모습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처참하게
훼손된 마인 병사들의 시체를 보여 준다든가 하는 방식이 그 일환이었다. 전쟁 중 당연하게 발생하는 피해였으나,
디에즈는 얼굴을 익힌 마인들의 시체를 볼 때마다 고요해 보이는 낯 아래로 분노를 끓였다.

어찌나 절절한 동족애인지. 보는 사람마저 가슴이 미어질 정도였다. 케틀린은 그런 디에즈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했다. 그의 감정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없으나, 지난 시간에 얽매인 자가 과거의 상실에 얼마나 집착적으로
반응하는지는 잘 알았다. 자신 또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하카브는 그런 디에즈의 성향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체를 몰래 난도질한 후 그의 앞에


전시하는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렇게 디에즈가 가만히 마인 시체를 볼 때면, 하카브는 유례없이 시끄러운 입을 닫고 있었다. 케틀린은 하카브가
그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디에즈를 쳐다보며 즐겁다는 듯 미소 짓고 있을 테다.

‘재수 없어.’

케틀린은 기가 찼다. 사랑한다느니, 나의 검은 달이니 어쩌니 할 때는 어쩌고 사람을 그렇게 악랄하게 괴롭히다니.

케틀린은 디에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보아도 근 십 년 전쯤에 보았던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밖에 연상되지 않았다. 하얗고 몰랑몰랑한 금발의 소년. 그래서인지 하카브가 더욱 극악무도하게
느껴졌다.

비명이 가득 찬 거리를 달린 것이 얼마나 지났을까. 케틀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질 나쁜 친구와는 어울리지 마세요.”

부스럭,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디에즈가 다리를 꼰 것 같았다.

“예상외의 말인데요. 그 ‘나쁜 친구’가 일부러 당신을 내게 붙인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개인적인 충고로 봐도
되겠습니까?”

“너무 노골적이었나 보군요.”

“왕자의 못된 머리로 생각하는 게 거기서 거기일 테니.”

신랄한 평가에 케틀린은 깔깔 웃었다. 디에즈는 하카브가 왜 눈이 보이지 않는 마인을 자신 곁에 붙여 놨는지


알고 있던 듯했다.
[눈도 안 보이고 전투도 못 해 쓸모없어졌다고 자책했겠지. 너무 슬퍼 마라, 키티. 개똥도 약에 쓴다고 그러지
않느냐.]

본인이 날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걸 왜 내 생각으로 덮어씌워? 열 받은 그녀의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던
것인지 하카브는 한마디를 덧붙였었다.

[개똥은 좀…… 품위 없어 보이는 단어로군.]

본인의 품위만 생각한 모양이었다. 케틀린은 반박을 포기하기로 했다. 말도 통해야 하는 법이었다.

[디에즈는 굉장히 연약해. 툭 치면 부스러지는 수준이야.]

[……그분이 툭 치면 인간이 부스러지기는 하더군요.]

[섬세하지 못하구나, 키티. 내면적인 이야기야.]

정말로 하카브에게 듣고 싶은 얘기는 아니었다.

[네가 그런 디에즈를 지지해 줬으면 좋겠는데.]

하카브가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케틀린은 자신이 지지해야 하는 부분이, 디에즈의 속에서 가끔 흔들리곤 하는
분노라는 것을 깨달았다. 칼날이 벼려지는 것과 같이 서로가 서로의 망치가 되어 과거를 두드리라는 뜻이리라.
분노가 더욱 뾰족해지고 단단해질 수 있도록.

그러나 케틀린은 하카브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들을 생각이 없어서, 일라베니아의 욕이나 피해자의 가슴 아픈 사연
대신 “오늘의 밥은 뭘까 궁금하네.”라든지, “마차가 별로라서 그런 걸까요. 엉덩이가 네 쪽이 된 기분이네요.”
따위의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기만 했다. 그럼에도 디에즈가 하카브의 속내를 파악하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하카브 왕자가…… 음, 케틀린 양의…….”

디에즈가 말을 흐렸다. 그 망설임에서 케틀린은 그가 하카브의 의중을 깨달은 배경을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마인인 제 어머니와 언니가 화형당하고, 마을 사람들이 불에 탄 시체를 걷어차지 않으면 저도 화형 시켜


버리겠다 협박해서 언니의 머리를 걷어찼더니 머리가 분리되어 굴러갔고, 그걸 보면서 마을 사람들이 깔깔깔
웃었다는 과거의 얘기를 하던가요.”

“……음, 네.”

케틀린은 피식 웃으며 다리를 꼬고 턱을 괴었다.

“검은달 애들 붙잡고 제 과거사를 아느냐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알고 있을 겁니다. 모르는 한 명은 얘기가 나왔을
때 졸았던 놈이겠죠. 가슴 아픈 사연일수록 사람들의 마음에 잘 파고들곤 하니까요. 분노는 집단을 규합하는 좋은
수단이잖아요? 하카브 전하께서 제 과거 얘기를 듣고 잘 써먹을 수 있겠다 싶었는지 굉장히 기뻐하시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몹쓸 인간 같으니. 아무튼, 당사자의 동의 없이 얘기를 들었다고 그렇게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요. 하카브 전하께서는 디에즈님이 신경 쓰길 매우 바랐겠지만.”

“……하카브 왕자는 참…….”


“그 정도로 노골적이면 감탄이 나오죠. 일관적인 분이시라 그거 하나만 마음에 듭니다.”

그 과거 얘기를 들려주고, 계속 붙어 있게 만들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으리라.

‘알아채도 상관없다는 건가.’

하카브가 그걸 감안하지 않을 리 없었다.

[디에즈는 결코 너를 버릴 수 없을 테니까. 불쌍한 키티. 너는 정말…….]

부드럽게 머리를 끌어안으며 웃던 남자가 떠올랐다.

[쓸모 있구나.]

“재수 없어…….”

케틀린이 마차의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하게 말을 흘리자, 디에즈가 흠칫했다. 하지만 케틀린은 별다른 뒷말을
붙이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깜깜한 시야 속에 비명이 둥둥 떠다녔다.

* * *

남부 관문이 함락당한 가장 큰 이유는 발타의 병력이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부관이었던 진의 증언에 따라, 마람 왕국과 너른 땅을 옮겨 다니며 사는 소수부족들의 참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순한 용병일 수도 있으나, 최근 마람과 일라베니아의 교류가 뜸해진 만큼 발타와 친분이 두터워 보이는 것을
보면 전쟁을 위해 세력을 규합했을 수도 있겠다는 가정 또한 버릴 수 없었다.

황실 수뇌부는 이번의 전쟁이 일라베니아와 발타가 아닌, 일라베니아와 대 일라베니아 연합의 전쟁이라 규정짓고
병력의 규모를 늘렸다. 일라베니아뿐만 아니라 라고슈 왕국을 포함한 힐라사고 왕국 등 인접한 주변국에 참전을
요청한 상태였다. 출병하기 전에 전령을 보냈으니, 한두 달 안에는 원군이 오리라 예상하는 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이끄는 제국군은 전쟁에 도움이 될 지리적 이점을 지닌 영지들을 거점으로 움직였다. 앞서 놋쇠저울
영지에서 포획했던 발타군의 지휘관으로부터 발타군이 다섯 개의 큰 덩어리로 나뉘어 일라베니아의 땅에서 각기
전투를 벌이고 있음을 알아냈다. 리카르디스는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지금이 적기라 판단하여, 영주와 성을
함락하려는 그들의 뒤를 치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척후병들이 주둔지로 돌아왔다. 제국군이 향하던 소금바위 영지가 이미 함락당했다는 정보와 함께였다.
일라베니아의 남부는 일라베니아를 노리는 세력과 맞닿아 있기에 다른 지역들보다도 방어가 두터웠다. 아무리
발타군이 강하다고는 하나, 성을 함락하는 속도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빨랐다.

전력이 예상보다 강한 것인가? 조금 더 신중해야 할지도 몰랐다. 리카르디스가 고심하는 사이 또 다른 척후대가


돌아와 보고했다.

발타군이 벌인 대학살에 지레 겁먹은 영주가 냅다 항복해 버렸다는 얘기였다. 적이 강해서가 아니라, 아군이
약해서 빠르게 함락된 것이었다. 접근은 여전히 조심스러워야 할지언정 망설일 필요는 없을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척후병의 보고를 마저 들으며 미간을 좁혔다. 영지로 가는 길목 길목마다 사람들이 창만큼 기다란
꼬챙이에 꿰어 죽어 있다는 대목 때문이었다.

198 화.
“그, 그런 잔인한!”

지휘관들의 낯이 파리해졌다. 영주가 생각 없이 항복할 리 없으니 영지민과 자신의 안전을 요구했을 텐데,
입성하자마자 말을 뒤바꾸고 학살을 벌인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만 있었다. 그의 태연한
반응에 지휘관들이 평정심을 되찾기 시작했다.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던 리카르디스가 입을 열었다.

“……익숙한 방식인데.”

리카르디스는 변경 지역에서 일어나는 전투를 숱하게 겪어 왔다. 그중에는 ‘검은달’의 이름을 뒤집어쓴,
발타와 아무 상관 없다고 우기는 집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막사는 리카르디스의 한마디에 쥐죽은 듯 조용해진 상태였다. 모두가 리카르디스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드디어
딱 다물린 그의 입이 서서히 움직였다.

“적은 머저리일 가능성이 높다.”

“…….”

“…….”

총사령관의 입에서 노골적인 욕이 나오자 지휘관들이 술렁였다.

“힘은 세지만 멍청하고 도발에 잘 걸려서 함정이란 함정에 죄다 걸리고서는 운이 좋아서 어떻게 목숨만 부지하는,
그런 인간이 지휘관일 가능성이 높아.”

아직 싸우지도 않은 적인데 평가가 굉장했다.

“……그, 총사령관께서 적을…… 확신하시는 이유가 있으시다면…….”

“쓸데없이 잔인한 처형, 그리고 과시하는 방법까지. 내가 예전에 맞붙어 본 적 있는 머저리와 흡사하다.
불안해하는 그대들을 위해 신빙성을 더해 주자면, 척후병, 그 꿰어 죽은 시체들 중에는 여자가 없지 않던가.”

기립해 있던 척후병이 눈을 크게 떴다.

“예, 예 맞습니다.”

막사 안이 다시 한번 술렁였다. 리카르디스의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혀를 쯧 찼다.

“머리가 부족하지 힘이 부족한 인간은 아니다. 전면전은 어지간하면 피해야겠군. 함정을 놓고 상대를 밖으로
끌어내야겠다.”

성벽은 무엇보다 전력 차를 크게 줄여 주는 중요한 수단이자 방어벽이었다. 그 안온한 방어벽을 두고 나올 사람이


어디 있을까.

“곳간이 비면 그 무거운 엉덩이도 움직이지 않겠나.”

거대한 병력을 운용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자였다. 먹지 못하면 싸울 수 없다. 싸우지 못하면 지게
된다. 당연한 이치였다. 리카르디스는 지금 식량을 이용해 그들을 바깥으로 끌어내자고 하는 것이었다.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와중 로젤린만 인상이 심각했다. 제국군의 주 전력이자, 마인에 관련된 사항
때문에 그녀도 참석한 상태였다. 하지만 여태껏 발언 없이 조용히 오고 가는 얘기만 듣고 있었는데 지금은 뭔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보급로를 차단할 수는 있으나, 성안에 있는 물자만으로도 몇 달은 충분히 버틸 겁니다. 연합군이 중부 관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 상황에서 그렇게 시간을 끌 수는 없습니다.”

잠깐 멈칫하던 리카르디스가 곧바로 대답했다.

“나와 같은 의견이로군. 그러니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뿐 아니라, 성안의 물자를 동나도록 만들어야겠다.”

“성벽이 높고 두텁습니다. 땅굴을 판다고 해도 제법 시일이 걸릴 겁니다.”

리카르디스는 대화를 나누면서 계속해서 종이에 무언가를 슥슥 적었다.

“성 내부와 이어져 있는 지하 통로가 있다. 싸우기도 전에 영주가 백기를 들었기 때문에, 발타군에 들키지는
않았을 테지.”

막사 안을 가득 메운 지휘관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저희에게 그런 정보는 없습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그대들은!”

리카르디스는 정보의 출처를 묻기 위해 일부러 성질을 버럭 냈다. 지휘관들은 울상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사실 리카르디스로서도 얻기 힘든 정보였다. 막대한 자금과 황금정원이 구축해 둔 정보망이 아니었다면 한 성채의


운명을 좌우하는 비밀 통로의 존재는 알 수 없었으리라. 이번 전쟁을 위해 알아둔 것은 아니었으나, 공교롭게
때가 맞아 빛을 발하게 된 셈이었다.

“확인이 끝난 정보이니 진위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일라베니아의 고위 지휘관들조차 모르는 정보를
발타군이 미리 알아챘을 가능성은 낮으니,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지. 소수의 부대를 편성한다. 임시로 이름을……
굴속에서 활동하는 야행성 동물이 뭐가 있었지?”

“오소리가 있습니다.”

“좋다. ‘오소리’라고 부르겠다. 제국군이 출진하여 성벽 주위를 돌며 주의를 끄는 사이, 오소리가 지하 통로로
이동해, 식량 저장고를 모두 불태운다.”

지휘관들은 리카르디스의 입에서 빠르게 나오는 작전 계획을 허둥지둥 받아 적었다. 로젤린은 회의의 내용을
통째로 외우고 있어 여유롭게 그에게 질문할 수 있었다.

“식량 저장고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소수로 투입되는 만큼 정보의 정확도를 높여야
합니다.”

리카르디스의 뒤에 서 있던 스타스가 놀랍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해석해 보자면, 언제 저렇게


컸을까. 하고 삼촌이 다 큰 조카를 바라보는 복잡 미묘한 얼굴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서류를 뒤적이다 가장 밑에 깔린 커다란 종이를 꺼냈다. 위에는 성과 주요 건물의 설계도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이런 건 대체 언제……?
“시간이 없어서 대충 그렸지만, 구조를 파악하기에는 나쁘지 않을 거다.”

심지어는 손수 그리셨어? 지휘관들의 얼굴에 아연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들의 원래 상사였던 죽은 전 총사령관은
정말 놀고먹을 줄만 아는 전형적인 중앙 귀족이었다. 지휘관들이 안건을 내놓으면 해라, 말아라, 두 대답 중
하나를 할 뿐이었건만.

리카르디스가 갖은 분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나, 중앙 상비군의 지휘관이었던 그들은 그


사실을 체감하기가 힘들었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나기도 전에 알고 있는 정보는 왜 그렇게 많고
유능하기는 또 왜 이렇게 유능한 것인지.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에도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냥 어깨를 가볍게 으쓱할
뿐이었다. 뭐 대수로운 일로 그러냐는 듯.

“예전에 한 번 들른 적 있다. 머무르는 동안 영주가 아주 친절하게 구석구석 안내해 주더군.”

“그, 그걸 다 기억하십니까?”

“한 번 본 걸 왜 기억 못 하나.”

감탄이 나오는 기억력이지만 좀 재수 없었다.

“최근 그 영지를 들른 몇몇 상인과 귀족, 병사들의 증언으로 내가 기억하던 때와 구조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더 궁금한 점은?”

로젤린이 손을 들었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까딱하자 그녀가 곧바로 질문을 건네 왔다.

“지도에 따르면 식량 저장고는 몇 개에 분산되어 있는데, 만약 한 곳에서 방화가 일어난다면, 외성 바깥으로


쏠렸던 발타군의 이목이 다시 내부로 집중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머지 작업에도 차질을 빚지 않을까요.”

“좋은 질문이다. 간단한 장치를 이용해서 시간을 조절해, 비슷한 시점에 발화되게 만들 생각이다. 질 좋은 초 몇
개만 있어도 가능하겠지.”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말하는 계획을 대충 눈치챘다. 미리 식량 위에는 기름을 뿌려 두고, 그 위에 짧게 자른


초를 얹어 두는 것만 해도 오소리들이 움직이는 시간은 벌 수 있으리라.

“본대는 우선 움직이지 않는다. 좌익군의 일부를 떼어 먼저 모습을 드러내도록 할 것이다. 적의 모습이 작아


보일수록 사람들은 방심하기 마련이니.”

회의가 끝난 후, 특수부대 ‘오소리’의 선발이 빠르게 이뤄졌다.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그녀의 수제자이자
몸이 가볍고 날랜 에버하르트와 헤사. 그리고 로젤린이 주의 깊게 살펴본 몇몇을 포함해 총 열 명의 인원으로
결정되었다.

생각한 것보다도 더 소수의 인원인 터라 염려의 말이 나왔으나 로젤린은 열 명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사람이
많으면 방해될 것 같다며, 임무를 성공리에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그걸 말한 사람이 다름 아닌 로젤린이라는 점에서 조금씩 나오던 잡음은 쑥 들어가게 되었다.

헤사는 처음 맡게 된 임무에 흥분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착지한
순간 지나가던 부단장 나단과 눈이 딱 마주쳤다. 나단은 소년의 혈기 어린 모습을 애써 못 본 척하며 넘어갔지만,
소년은 크게 상처를 받아 버렸다. 헤사는 의기소침해서 로젤린이 머무는 막사로 돌아갔다.
“로젤린 경, 헤사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로젤린은 막사 중앙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헤사는 발끝으로 서서 그녀가 무얼 하는지 살폈다. 로젤린은
그녀의 앞에 놓인 길쭉하고 짤막한 수십 개의 초를 응시 중이었다. 초가 완전히 녹아내리며 마지막 불꽃이 바닥에
닿은 순간 로젤린이 중얼거렸다.

“오 분 십 초.”

그녀는 단검을 꺼내어 초를 잘라 불을 붙였다. 헤사는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침만 꼴깍 삼키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한참을 또 그러고 있을 때였을까. 아까 자른 초가 다시 완전히 녹았다. 로젤린이 턱을 괸 채 다시
말했다.

“오 분, 십삼 초.”

소름이 돋았다.

* * *

뿔피리가 대기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적의 출현을 뜻하는 소리였다.

어두운 밤이었으나, 달이 밝고 구름이 없어 훤하게 전경이 보였다. 제법 규모가 있는 병력이 접근 중이었다.


소금바위 성채의 거리 곳곳에서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제국군이 근접하고 있다는 소식은 뒹굴거리던
사르체의 가주, 코코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붉게 물든 얼굴로 껄껄 웃었다.

“항상 약삭빠르던 놈들이 이번에는 한발 늦었군.”

그는 와인을 병 채로 벌컥 들이키고는 몸을 일으켰다.

“일라베니아의 쥐새끼들이 발악하는 꼴을 한번 보러 가야겠구나.”

코코 사르체는 달리듯이 걸음을 재촉해 성벽 위에 올랐다. 총 병력의 수는 비등해 보였다. 하지만 성을 수비하는
측보다 공격하는 측의 병력 소모가 훨씬 심각한 게 일반적이니 제국군이 불리한 형국이라 봐야 했다. 무슨 용기로
저 숫자로 공성전을 치르러 온 것인지 코코는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공성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성
무기들의 숫자도 변변찮았다.

“거참, 대단한 무기를 들고 오셨군. 맞으면 아야 하겠구나. 다들 조심하거라.”

발타의 병사들이 그의 농담을 듣고 와하하 웃었다.

성벽 안쪽에서 투석기로 날려 보낼 돌과 화살이 닿지 않는 범위에서 제국군이 멈춰 섰다. 한참 후 밤공기를


진동시키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 후, 제국군이 움직였다.

199 화.

전투는 양측 모두 사상자가 크게 발생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의미 없는


싸움을 해 댔을 때였을까. 시끄러운 병장기와 함성, 비명을 뚫고 멀리서 종소리가 짧은 간격으로 땡땡땡 울려댔다.

코코 사르체는 이변이 일어났음을 깨닫고 황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라베니아군의 발견과 동시에 잠들었던
성채 도시는 횃불로 밝혀졌었는데, 그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범상치 않은 크기와 밝기의 화재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지 못했던 이유는.

코코는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건물들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누군가가 양동이로 물을 퍼 나르자 불이
꺼지기는커녕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우르릉, 쾅! 마치 벼락에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진화 작업은 아침 해가 뜰 무렵에서야 모두 끝났다. 푸른 아침 하늘 위로 거뭇거뭇한 연기와 탄내가 성채 안에


있는 모두를 휘감듯 퍼져 나갔다.

사르체는 한 통 넘게 마신 와인의 취기가 싹 가시는 느낌을 받았다. 가을의 결실을 모아 두었던 많은 식량들이
죄다 잿더미로 변했다.

* * *

임무는 성공리에 마무리 지었다. 식량 창고뿐 아니라, 가축과 군마, 우물에도 손을 써 놓았다. 다시 지하 통로로
돌아오던 오소리들 중 한 명인 헤사는 가장 후미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벽을 짚고
차근차근 걷고 있었다.

그 상태로 바닥에 툭 튀어나온 구조물이나 돌을 피하는 모습이 보통 멋있는 게 아니었다. 전해지는 진동으로
위쪽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라 했는데, 헤사는 벽을 짚어 보아도 차가운 돌의 온도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소년은 대략 한 시간이 넘는 짧은 임무에서 로젤린이 벌였던 활약상을 떠올리고 새삼스럽게 속으로 감탄했다.
건물과 건물을 이동하는 시간을 계산해 초를 잘라 설치하고, 몇 번이나 마주칠 뻔했던 발타 병사들의 이목을
귀신같이 피하며, 가끔 피치 못한 상황에는 상대가 비명 한 번 지를 시간을 주지 않도록 빠르게 손을 썼다.

오소리들은 일을 처리하는 동안 대장 오소리에게 몇 번씩이나 도움을 받았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돌아오지 못했을
오소리 또한 있었으리라. 아찔했지만 굉장한 경험이었다. 모두가 한 번씩은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헤사도
한 번 더 그녀를 돌아보았다가, 막 눈을 뜬 로젤린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직 전투 중인 걸 보니 들키지는 않았나 보군. 아니면 화재 쪽으로 인원을 분산할 수 없게 전투를 지속하는
것일 수도. 일이 크게 틀어지지는 않았지만 서두르지.”

“예!”

“예!”

오소리들이 입을 모아 힘차게 대답했다. 그 와중에 에버하르트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로젤린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였습니다만, 대장님.”

“뭔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의 ‘멋있고 위엄 있는 대장님 만들기’ 시간을 거친 후 로젤린의 말투는 조금 변한


상태였다.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멋있고 위엄 넘치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가 아차하고 본론으로 돌아왔다.

“들고 계시는 그…… 거대한 자루는 뭡니까.”

로젤린이 흠칫 몸을 떨더니 시선을 피했다.


“전하께서 내리신 밀명이다.”

다른 오소리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에버하르트와 헤사는 조금도 믿지 않았다. 분명 식량 창고에서 가져온


오늘의 수확물이겠지.

“혼납니다. 놓고 가시죠.”

“괘, 괜찮을 텐데.”

로젤린이 작게 아마도, 하고 속삭였다. 멋과 위엄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에버하르트와 헤사, 로젤린이 작게


실랑이를 벌이자 다른 대원들도 이상을 눈치챘다. 로젤린은 후, 한숨을 쉬고는 자루를 뒤적여 종이에 싸여 있는
무언가를 각각 한 덩이씩 내밀었다.

“이건…….”

“훈제한 돼지 뱃살 고기다.”

“…….”

“아까 초에 불붙이면서 슬쩍 먹어 봤는데…….”

뭐? 언제? 오소리들이 식겁했다. 로젤린은 임무에 투입될 때보다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입에서 아주 살살, 녹는다.”

조용한 통로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오소리들은 입에서 아주 살살 녹는 훈제 고기를 먹으며 지하 통로를
걸었다. 병사들에게 배급되는 싸구려 육포나 딱딱한 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기름지고도 부드러운,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는 것 같은 황홀한 맛이었다.

로젤린은 지하 통로의 끝에 오늘의 수확물을 두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식으로 완전 범죄를 꿈꾸었다. 아쉽게도
지하 통로의 끝에서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임무는 대성공이었으나, 사욕을 채운 그녀의 행동은 질타받아 마땅했으므로 부단장 나단이 불같이 화를 냈다.
입과 장갑에 기름을 잔뜩 묻힌 오소리들은 두 손을 등 뒤로 맞잡고 고개를 푹 숙이는 방식으로 나름의 죄책감을
표현했다.

“경은 침도 삼키기 힘든 그 비밀스런 임무 도중에 고기가 넘어가던가!”

“아니요…… 그냥 맛만 조금…….”

분명 입에서 살살 녹는다고 그녀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기억이 있지만, 공범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에버하르트는
로젤린에게서 완전히 제거된 위엄과 멋을 보며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성벽 바깥에서 보일 정도로 화려한 불길이었지.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무리 했으니 경도 그만하지. 식량 창고에
로젤린 경을 보내는데 이 정도도 예상 못했을 것 같나?”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혼나는 모습을 보다가 손을 저으며 대충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는 로젤린의
거대한 자루를 뒤적이며 품목을 하나씩 보았다. 주로 고기였지만, 말린 과일과 술에 절인 과일이 들어간 빵도 몇
개씩이나 있었다.
“……아주 골고루 가지고 왔군. 맛이 섞일까 봐 걱정했나 본데. 이것 봐, 포장을 아주 잘했어, 하하…… 대체
그럴 틈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해보다 포기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어조였다.

“……하, 되었다. 술병은 보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군.”

로젤린이 눈을 질끈 감고는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리카르디스는 덜컥 불안해졌다. 그녀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리카르디스에게 접근해 자루 속을 뒤적였다. 고기와 빵 덩어리에 가려져 있던 가죽 물주머니 열다섯 개가 그녀의
손에 끌려 나왔다. 막사 안의 모두가 침묵했다.

“소리가 나니까 용기를 바꿔서…….”

“…….”

“그게, 이게 굉장히, 귀한 거라…….”

“…….”

철두철미한 식에 대한 욕구는 굉장했지만, 리카르디스도 더이상 로젤린의 편을 들어 주지 못했다.

* * *

도끼와 검, 휘어져 있는 발타식 단검이 교차 되어있는 ‘사르체’의 문양은 가문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발타의 힉살라는 황무지를 떠도는 거친 부족들을 매우 골치 아파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가문이 사르체였다. 강한
부족 몇몇을 발타로 끌어들여 사르체의 이름을 하사해 다른 부족들을 막는 방파제로 이용한 것이었다.

그들은 강하며, 야성적이었고, 용맹한 데다가…… 무식했다. 치명적인 단점이 있긴 했지만, 사르체는 수십 개의
가문이 몰락하는 그 사이에서 발타의 강력한 무기의 한 축이 되어 현재의 다섯 가문중 하나로 정착할 만큼 성장을
이뤘다.

전투, 전쟁광. 그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였다. 심지어는 가주의 선발 또한 적장자가 이어받는
일반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가주에게 결투를 신청해 이긴 자가 그다음 대의 가주가 되는, 누군가가
표현하기로는 ‘야만적’ 이지만, 그들의 말로는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덕분에 가주는 5 년마다 바뀌고는 했는데, 그건 결투를 신청할 수 있는 기간이 5 년에 한 번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과거, 결투 신청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을 당시엔, 사르체의 가주는 일 년 동안에도 여럿 바뀌었다.

발타의 힉살라는 매번 알현하러 오는 가주의 얼굴이 달라짐에, 또한 사관들이 작성하는 당대의 역사서가 쓸데없는
일로 두꺼워지고 권수가 늘어나고 있음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꼈다. 허구한 날 ‘누구와 누가 싸워 누가 이겨서
가주가 되었다.’라든지 ‘가주 누가 결투 후 사망하여, 누가 가주가 되었다’ 등의 전투 기록서 같이 되어 가고
있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힉살라의 명령 아래에 5 년이라는 기간이 정해졌고, 가주는 5 년에 한 번씩 바뀌게 되었다. 물론 가끔 십


년 정도 군림하는 굉장한 전사가 나오곤 했으나, 역대 세 번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적은 숫자였다.

그리고 지금 ‘사르체’의 가주 코코는 새로운 역사를 써 내리고 있는 인물이었다. 십 년도, 십 오 년도 아닌,


십칠 년 동안이나 가주로 사르체를 끌어온, 의심할 수 없는 사르체 최고의 전사. 그것이 코코였다.

“그게 지금 소금바위 성채를 점령한 발타의 장군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코코’는 옛 부족의 언어로 ‘근육’
이라는 뜻이라더군. 누가 지었는지 참. 아무튼, 그 때문인지 무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지. 고작 식량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제 모습을 수치스러워할 거다. 언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보급 물자를 기다리며 굶어 죽기보다
정면 돌파 하는 쪽을 선택하겠지.”

사르체의 가주 코코는 이례적인 인물이었기에, 지휘관들 또한 그에 대한 정보를 대충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성격이라든지, 코코의 뜻이 근육이라는 정보는 미처 몰랐던 터라 각자 놀라워했다.

“요컨대, 그의 용맹함의 근원이기도 한 성격이, 약점이 되기도 한다는 얘기다.”

* * *

코코 사르체가 군의 지휘관들을 모아 얘기했다.

“저 시건방진 제국군 놈들을 처단할 시간이 왔다.”

발타군의 식량 사정은 한계에 달했다. 독을 먹고 죽은 가축과 군마의 고기를 먹어야 할 정도의 비상 상황이었다.
여타 다른 건물과 각자가 들고 있는 군량 등을 모았더니 일주일 정도는 버틸 수 있는 양이 나왔다. 하지만 말
그대로 버틸 수 있을 뿐이었다.

코코 사르체는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기 전에 일찍이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작전 참모가 척후병을 보내어 첩보를
수집해야 한다,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른다고 하도 난리를 쳐서 여태껏 시간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라베니아군은 빤히 보이는 곳에 진지를 틀고는 여기저기 구덩이 파고 말뚝을 박는 둥, 기동력을


앗으려는 빤히 보이는 함정을 파고 있을 뿐이라 첩보를 수집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괜히 시간만 끄는 바람에
배가 고파 예민해진 병사들끼리 다퉈 부상을 입거나 죽었다.

시간을 더 끌었다간 배를 곯아 힘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필패였다.

200 화.

“전면전이다.”

코코 사르체의 얼굴 근육이 흉악하게 꿈틀거렸다. 전술과 전략을 도맡는 지휘관들 몇이 반대했다. 발타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했다.

“헛소리 말아라! 네놈들 때문에 시간만 허비했어!”

사르체와 발타의 본대에서 파견한 전략 지휘관들의 사이는 본래도 좋다 말할 수 없었으나, 최근 더 악화된


상태였다. 말만 하면 전부 반대, 반대. 반대만 해 대니 곱게 보일 리도 없고, 그들이 기다리라고 종용하는
바람에 애꿎은 병사들만 배곯는 상황이 되었다.

“내부에서는 식량을 태우고, 외부에서는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정도의 군대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몰이사냥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저희 쪽에서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지하 통로와 모든 식량
창고의 위치를 알고 있을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제국군 측에서 용맹무쌍한 사르체에 대한 정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고작 그 정도 수 차이로 승리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요.”

“머리 쓴다는 놈들은 죄다 겁쟁이란 말인가! 너의 망설임은 네가 약하기 때문이다! 네가 조그맣기에 상대가 커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식량을 태웠다는 자만감에, 사르체가 우위를 점한 상황을 끌어내렸다는 것에
만족하여 그저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뿐이다!”
“부디, 재고를!”

“닥쳐라!”

코코 사르체는 분을 못 이기고 남자의 목을 콱 틀어쥐었다. 컥, 컥.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그는 그대로 목이


꺾여 절명했다. 공간엔 썰렁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코코 사르체는 시체를 무성의하게 바닥에 툭 떨구었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에 마치 한 마리의 맹수 같은 난폭한


예기가 담겨 있었다.

“사르체는 적을 앞에 두고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 * *

코코 사르체는 해가 뜨기 전, 일라베니아의 병사들이 자고 있을 때 움직이기로 했다. 창고가 불타긴 했지만,


약간의 식량은 남아 있고 굶는다고 해도 일주일은 족히 더 버틸 수 있었다. 더군다나 연합군이 남부를 뒤덮은
만큼 지원이 오기 수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르체군이 구태여 단단한 성벽을 뒤로하고 공격을 감행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그래서 코코는
그 생각의 허점을 찌르기로 했다. 식량 창고 화재 사건으로부터 고작 사 일이 지난 시점에서 먼저 공격하리라고는
일라베니아 측도 결코 생각하지 못할 테니.

코코 사르체도 구겨진 자신감과 공을 세우려는 욕심만 없었더라도 성채 안에서 지원을 기다렸을 것이다.

소금바위 성채 도시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성문과 일라베니아의 진지가. 그리고 동쪽에는 비스듬히 흐르는
강줄기가, 남쪽에는 나무가 무성한 구릉지대가 있었다.

제국군이 큰 실수를 한 것은 성문이 하나라고 그 앞에서만 고집을 피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서쪽의 성문과 정
반대 방향의 동쪽 성벽은 쥐 한 마리가 드나들 만한 출입구도 없으니까. 물론,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는 얘기였다.

동쪽 성벽의 딱 한군데 옴폭 파여 있는 곳이 있었다. 성벽을 이루는 것은 균일한 석재였는데, 안쪽으로부터 총


두께의 반 정도 되는 비율만큼 석재가 빠져 있었다.

음영이 짙어지는 낮에는 그냥 성문이 있구나 하고 착각할 정도로 반듯한 모양이었다. 문을 설치하기 위해 벽을
허물던 와중 전쟁 소식을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큰 돌덩이를 부랴부랴 쑤셔 넣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휘부는 이 우연한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마저 석재를 제거하여 통로를 만든다. 그리고 일라베니아군의 눈을 피해 낮은 하천 지대를 따라 이동, 성의


남쪽에 있는 숲에 몸을 숨긴 다음 일라베니아군의 측면을 친다는 계획이었다. 성벽을 조심스레 허무는 데에만
하루가 걸렸다. 경계병들이 성벽 위에서 제국군의 진지를 감시하는 동안 사르체군은 모든 전투 준비를 끝냈다.

이 밝은 어둠 속, 코코 사르체는 정렬한 병사들을 보며 이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전투의 시작이 되리라


예감했다. 물론 위풍당당했던 처음 모습과 다르게 지대가 낮은 강가를 통해 이동하는 그들의 모습은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이틀 전 왔던 비로 불어났던 강물의 수위는 원래대로 돌아갔지만, 한번 강물이 덮은 길은 아직 마르지 않아


질척했다. 병사들이 발을 디딜 때마다 자리가 움푹움푹 파였다.

“이런, 젠장.”
병사들이 잇새로 욕을 내뱉으며 진군했다. 흙이 고운 지역이다 보니 신발에 진흙이 들러붙는 정도를 넘어서
발목까지 깊게 발을 끌어 들이기까지 했다. 힘이 강한 사르체 군단은 대다수가 중장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검날과 화살을 튕겨 내는 단단한 갑옷은 지금만큼은 행군의 고단함을 더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며칠 동안 하루에
한 끼, 그것도 빵 반쪽과 콩 다섯 알만 먹은 그들의 체력은 처음부터 반 정도 깎여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병사들은 빠르게 지쳐 갔다.

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고난도 끝날 거란 사실을 잘 알았다.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거나 일라베니아군을 작은
소리로 욕하며 방패로 바닥을 찍고, 반쯤은 기어서 강가를 빠져나왔다. 선두에 서 있던 코코 사르체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반쯤 거지꼴을 하고 있는 사르체군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얼마 후, 발타군은 목적지까지 도달했다. 코코는 병사들을 멈춰 세웠다. 모두가 호흡을 노련하게 골랐다. 코코는
거대한 짐승이 웅크린 것처럼 보이는 가파른 구릉지대를 응시했다. 저 너머에 일라베니아군의 진지가 있었다.

일라베니아군은 옆구리를 훤하게 비워 둔 채 열리지 않을 성문만 맹목적으로 쳐다보고 있으리라. 어찌나


어리석은지. 높은 언덕이 자신들의 성벽이라도 되는 양 경계병조차 두지 않았다.

코코가 손짓하자 멈췄던 병사들이 조용히 언덕에 올랐다.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서 일라베니아군의 진지를 내려다
볼 때까지는 조심해야 했다. 전투에 유리한 높은 지대를 확보하고, 허를 찔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이 줄을 맞춰 조용히 언덕을 오르며 콧김을 내뱉었다. 일라베니아군의 공작으로 고생한 며칠간의 원한이
발타의 병사들을 가득 채웠다. 그 누구도 곧 일어날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라베니아군은 사냥감이며,
사르체는 위대한 전사였다. 지쳤던 병사들에게서 끝없는 힘이 솟아났다. 눈이 번쩍이며, 근육은 꿈틀거렸다.

전투 전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연설은 이미 성채 안에서 끝냈다. 뿔피리가 울리면 숨소리마저 죽이고 진군했던
병사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숲에서 쏟아져 내릴 것이다. 갑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검은 잃어버리고
방패는 거꾸로 든 채 허둥지둥할 일라베니아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런데 그 순간.

‘…….’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뚝, 한순간에 코코의 걸음이 멈췄다. 우두머리가 멈춰 서자 병사들 또한 진군을
중단했다. 코코가 느낀 것은 마력이었다. 사르체 군단만 해도 마인이 제법 포함되어 있었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기운이 언덕 위쪽에서 느껴진다는 게 문제였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마력은 크기로 치자면 반딧불 정도 되는 미약한 불빛이었다. 하나 코코가 그걸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은, 그 크기가 아주 아주 아주 거대한 것의 일부라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반딧불이 아닌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야수의 눈동자다. 그걸 깨닫는 순간 오한이 들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기습이 실패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병사들에게 알리려는 순간, 언덕 위의 수풀처럼
보이던 무언가가 흔들렸다.

부우우-

뿔피리 소리가 구석구석 울려 퍼졌다. 발타군이 아닌 일라베니아군의 뿔피리였다. 발타군은 기함하여 방패를 들고
허둥지둥 무기를 뽑았다. 고지대를 선점하기 전에 공격을 당하다니!

숙련된 병사들이 마음을 가다듬기 시작했을 때, 밤하늘에서 반짝거리며 빛나던 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열기에 발타군은 기겁했다. 불화살이었다.
어둠에 잠겼던 수풀은 금세 환해졌다. 언덕에 무엇을 뿌려 두었는지 불이 번지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사르체는
물러나지 않으나, 군대에는 사르체뿐만 아닌 발타 왕실군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우레와 같은 함성, 쏟아지는 불화살, 그리고 허를 찔렸다는 그 사실에 우왕좌왕하던 징집병의 일부가 이탈했다.
코코 사르체는 이를 갈며 소리 높여 명령했다.

“진격하라! 쓸어 버려라!”

서 있던 곳이 불바다로 변했으니 벗어나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용맹한 사르체의 코코는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며 검을 뽑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코코 사르체가 그러한 용맹함을 이번 전쟁에서도
내보일 거라 예상했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도 반드시 진격할 것이라고.

발밑에는 말뚝이 있고, 말뚝을 넘어서면 구덩이가 있었다. 밧줄에 걸려 넘어지면 화살이 와서 꽂히고, 기름
구덩이에 빠지면 불화살이 날아왔다.

간신히 일라베니아군의 앞에 도착한 코코 사르체는 만신창이였다. 이제 발타군은 성채에서 출진한 병력의


반의반도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화상과 부상으로 엉망이었다. 패잔병 같은 몰골의 발타군을 맞이한 것은 후드를
벗어 던진 은색 갑주 무리였다. 일라베니아군이 긴 창을 쥔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코코는 뒤를 돌아 발타군의 병력을 대충 헤아렸다. 궁병은 도망가거나 다 죽어 보이지도 않았고, 남은 것이라고는


무기나 전의를 잃어버린 병사들뿐이었다. 코코 사르체가 붉어진 얼굴로 이를 갈았다.

“이 쓰레기들이…….”

일라베니아군의 중앙, 어둠 속에서 더욱 거대해 보이는 흑마 위의 여자가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한발 앞으로 나섰다.

“코코 사르체?”

“건방진 계집이 감히 이 몸의 이름을!”

“맞나 보군.”

스르릉, 기사의 검이 천천히 검집을 스치며 오싹한 소리를 울렸다. 사르체는 본능적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은백색의 아름다운 검신에 유난히 밝은 달빛이 반사되었다. 빛이 궤적을 그리는 듯, 그녀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비로소 코코는 여자의 눈동자가 빛날 때면 선명한 연녹색을 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 주인께서 널 보자고 하신다.”

여자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201 화.

해는 어제와 다름없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아침이 내리쬐는 대지는 어제와는 전혀 달랐다. 까맣게 타고,
화살에 머리를 꿰뚫리고, 창에 찔리고 검에 베인 시체들이 간밤의 참상을 말하기라도 하는 듯 널려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성벽 위에서 그 광경을 쭉 훑어보는 중이었다.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즌하.”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로젤린이 막 성벽 위를 올라오고 있었다. 양손 가득 빵, 데운 와인, 치즈와 구운 고기,


소시지, 과일을 들고서는 그것도 부족했다 싶었는지 입에는 마찬가지로 먹을 것이 잔뜩 담긴 바구니의 손잡이를
물고 있었다. 그 탓에 발음이 엉망이었다.

“으침잇니다.”

리카르디스는 찌푸린 미간을 풀고서 웃었다. 두 사람은 성가퀴 위에 바구니를 늘어놓고 아침 식사를 했다. 그녀도
간밤에 일어났던 전투로 지쳤는지 별다른 말 없이 열심히 음식을 섭취하기만 했다. 생각해 보니 로젤린은 식사 땐
음식에만 집중하는 사람이긴 했다. 다른 곳으로 눈 돌리지 않고 무언가를 씹으면서, 다음 먹을 것을 탐색하는…
….

그런데 지금은 잼 바른 빵을 씹어 삼키고, 부스러기가 묻은 손을 할짝거리면서도 바구니 위의 음식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시선이 성벽 너머에 있었다. 아까 전 리카르디스가 바라보고 있던 방향이었다. 그도 로젤린을
따라 아직까지 연기가 퍼져 나오는 구릉지대로 시선을 옮겼다.

“로젤린.”

한참 멀리 있는 광경에 시선을 두던 로젤린이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저길 좀 봐.”

그가 가리킨 곳은 로젤린이 보고 있는 곳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저 멀리 흐르는 강물이 보였다. 물결마다 시린


듯이 빛나는 아침 햇살이 금가루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반짝, 반짝.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로젤린이 하염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자 리카르디스는 만족한 듯 웃고는 그녀의 입에 구운 소시지를 넣어 주었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 소시지에!”

독이라도 들었나? 리카르디스가 식겁해서 로젤린이 반을 먹은 소시지의 단면을 살폈다. 살짝 녹아 흐를 것 같은


노란색의 무언가가 보였다.

“치즈가 들어 있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 * *

쉴 틈도 없이 성의 보수와 전략 회의가 시작되었다. 승리에 취한 지휘관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컸다.

“이건 정말 유례없는 대승입니다, 총사령관님!”

“발타의 들개 놈들이 총사령관님의 이름만 들어도 깜짝 놀라 도망갈 겁니다!”

“거기에다가 상대가 그 유명한 사르체라니요!”

긴장 속에서 밤을 새우고 전투를 치렀음에도 지휘관들의 얼굴에서는 피로 한 점 읽어 낼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께름칙한 표정으로 그들이 내뱉은 찬사를 흘려 넘겼다. 원래도 일라베니아의 유일한 후계자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여 갖은 아부를 떨던 사람들이기는 했으나, 진정성이 더해지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리카르디스가 손을 들어 멈추려 했음에도 도무지 들어 먹지를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그린 듯한 대승이었다.


고작 이백여 명의 피해로 사르체군을 완전히 물리쳤다. 소금바위 성채에 남아 있던 경계병은 어떻게 해서든 성을
사수하려 했으나, 사다리를 들고 와 성벽을 넘은 로젤린 이전에 뚫린 동쪽 성벽조차 수습하지 못했다. 사르체의
장군은 생포하였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려던 병사들은 모두 일라베니아의 검 아래에 운명을 맞이했다.

그런 대단한 일이 있었는데도 총사령관의 얼굴은 정말 무심 그 자체였다. 좋은데 티를 안 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어떤 감흥도 없어 보였다. 잠시 흥분한 지휘관들을 둘러보던 리카르디스가 말했다.

“유례가 없는 일이긴 하지.”

“그렇습니다!”

“사르체가 일라베니아에 쳐들어온 적이나 있어야 유례가 있건 말건 할 테니까.”

“…….”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긴 했다.

“너무 들떠 있어서 말해 주겠다. 우리는 대 일라베니아 연합군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그 일부를 격퇴했을
뿐이다. 더군다나 일라베니아의 지형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일라베니아의 제국군이, 이점이 많은 일라베니아의
땅에서 제국군 보다 적은 수의 군대를 물리친 게 그렇게 큰 자랑거리가 되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이제
다 떠들었으면 일들 좀 하지 그러나.”

총사령관의 싸늘한 반응에 지휘관들은 그제야 분위기를 읽고서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했다. 발타군이 남겨 둔
문서와 그 전 성주가 갖고 있었던 문서들이 남아 있었던 덕에 전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또한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대충은 유추할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회의를 가볍게 끝맺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소리 부대와 병사들에게 임무를 맡긴 후,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대동하고 거리를 걸었다. 놋쇠저울 영지와 다르게 공성전을 치르지 않아서 그런지 무너진 건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사람이 극도로 적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다수 여자와 어린아이였다. 장성한 사내들은 위협이 될 수
있으니 본보기 삼아 잔혹하게 죽이고, 병사들의 수발을 들어 줄 노예들이 필요하니 상대적으로 덜 경계해야 하는
사람들만 살려 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모진 일은 피해 갈 수 없었는지 여기저기 멍과 상처를 달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혀를 쯧 찼다.


그가 몸을 웅크린 영지민들을 계속해 바라보자 스타스가 병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공간이 넉넉한 곳에 다친 자들을 모아 치료하고 음식을 배급하라. 영지민들을 위협하거나 희롱하는 자들은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스타스가 말을 끌며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즉결 처형하겠다.”

리카르디스는 스타스의 입에서 나오는 명령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간의 주름을 완화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리카르디스가 도착한 곳은 성채 내의 신전이었다. 놋쇠저울 영지와 다르게 신전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구색을 맞춘 흰색의 돌은 빛이 바랜 데다가 때가 묻어 누리끼리한 회색이고, 신전의 문양 또한 한 축이
닳아 버려 다른 종교같이 변모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완벽한 점은 반쯤 무너져 있다는 것이었다. 발타군이 신나게 망치를 휘두르는 모습이 절로 연상되는
광경이었다. 신전을 가만히 응시하던 리카르디스가 망토를 끌러 바닥에 패대기쳤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깜짝
놀라 리카르디스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주군이 패악을 부리는 모습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감췄다. 스타스는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대동하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었나 잠시 생각했다.

“저 안의 내용물들은 괜찮을 거라 누가 얘기해 주지 않겠나. 참고로 내가 말하는 내용물은 신관이 아니라


기록이다.”

리카르디스의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르원이 떠듬떠듬 대답했다.

“그, 그렇게 낙관적인 대답만을 내놓는 가신은 주군이 바른길을 가도록 못 이끌지 않겠습니까?”

리카르디스가 르원을 노려보다가, 바닥의 돌을 걷어차며 신전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처참한 모습이 세세하게
보이자 더더욱 혈압이 올랐다.

이곳의 가치는 단순히 일라베니아 전역에 세워진 수많은 신전 중 하나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일라베니아, 그
최초의 신전이기 때문이었다. 황실의 대신전보다도 오래되고, 더 많은 세월을 겪어 왔다. 어쩌면 황실보다
축복의 밤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는 장소. 리카르디스가 소금바위 성채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서고 또한 황실처럼 가장 높은 신관 한 명만이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녔기에 예전에 이곳에


들렀던 리카르디스는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었다.

그 때문에 이런저런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슥삭 하려고 성의 비밀 통로도 알아 뒀는데. 발타의 머저리들이


쳐들어온 혼란한 틈을 타서 신전에서 슥삭 하려고 했는데. 그 발타의 멍청이들이 신전을 부숴 둔 상황이었다.
그나마 석조 건물이라 자료가 완전히 소실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만이 희망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기억하는 경로를 따라 지하로 발을 옮겼다. 다행히도 서고로 통하는 문은 조금도 흠집 없이


건재했으나, 이미 열려 있었다. 엄습하는 불안감에 리카르디스는 빠르게 걸어 계단을 내려갔다.

“어, 형? 벌써 회의 다 끝났어?”

라헤안시가 바닥에 앉아 책을 펼친 채 그를 반겼다. 리카르디스가 미간을 좁히자 라헤안시가 손을 휘휘 저으며


급히 말했다.

“곧 가서 일할 거야! 명색이 대신관인데 최초의 신전이 멀쩡한지는 확인해야지!”

리카르디스는 눈짓으로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내보냈다. 그는 사람들이 나간 후에 서고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불에


타거나 파괴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지하 서고로 통하는 문이 평소에는 숨겨져 있었기에 화를 피해 간
모양이었다. 그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라헤안시가 책장에 기대며 눈을 빛냈다.

“그런데 형은 여기에 무슨 일이야? 대신관도 아니고 일개 황자가 이런 곳에 들른 걸 알면 황제 폐하께서


좋아하지는 않으실 텐데.”

느물느물한 미소와 말투였다. 리카르디스는 서고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굉장히 온화해진 상태라 간신히 라헤안시를
때리지 않을 수 있었다.
“왜에? 왜 숨을 그렇게 크게 쉬는 거야? 뭐가 찔리는 구석이 있어? 말과 숨이 턱 막혀?”

리카르디스는 라헤안시의 목을 꾹 눌러 그의 숨을 턱하고 막아 버렸다. 라헤안시가 켁켁거렸다. 리카르디스는


마구 성질내는 라헤안시를 가만히 응시했다.

리카르디스는 라헤안시가 황실에 대해 희미한 반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실의 비호 아래 잘 먹고


잘 살다가, 적당히 대신전에 투신해서 한자리 꿰찬 황실의 핏줄이 황실을 싫어한다? 리카르디스는 그의 반감을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장난기 어린 모습 때문에 속마음을 알기 어려웠다는 사실도 그에 한몫 더했다.

202 화.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다. 라헤안시가 목숨을 걸고 지금 전장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한들 마찬가지였다.


리카르디스는 목숨을 건다는 행위가 얼마나 큰 간절함을 동반하는지 잘 알았다. 그 정도로 간절한 라헤안시의
욕망은 무엇일까.

라헤안시가 스승이었던 윈디트와 각별한 사이란 건 알고 있었으나, 그게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었다.

“라헤.”

리카르디스는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손으로 훑으며 그에게 얘기했다.

“왜에?”

“발타와 전쟁이 끝날 즈음, 황제를 끌어내리겠다.”

라헤안시는 씩씩 화내던 걸 멈추고 리카르디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간 공간을 가득 메웠던 적막이 곧 깨졌다.

“지금 하카브한테 어이없이 한 대 맞았다지만, 쉽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황실은 최근 몇 세대에 걸쳐


귀족들의 세를 누르고 직속의 병력을 차츰차츰 늘려 왔어. 무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아.”

리카르디스는 라헤안시가 자신의 대답을 유도하고 있다고 느꼈다. 리카르디스는 책을 뽑아 들어 라헤안시에게


던졌다. 날아오는 책을 잡아챈 라헤안시가 책의 겉표지를 빤히 보았다.

[신의 나라, 일라베니아]

“일라베니아가 무력으로 세워진 나라더냐?”

리카르디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웃었다. 책을 가만 내려다보던 라헤안시는 그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잠깐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 같았으나, 속에서 무언가를 정리했는지 라헤안시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축복의 밤을 띄우려고?”

“그것 이외에 황제를 끌어내릴 수 있는 수단은 나에게 없지.”

“방법은 내가 자세히 알아. 형도 대충은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아무튼. 최대한 도와줄게.”

이렇게 나올 줄은 알았지만, 그렇다 쳐도 무서울 정도로 순순했다.


“네게 무슨 이득이 있어서?”

라헤안시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들은 반응이었다.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 눈동자를 한참 굴리던 그는 겨우겨우


대답을 짜내듯 말했다.

“만 백성을 빛으로 이롭게 하는 이델라브힘의 종, 대신관이니까. 이해득실을 떠나 올바른 일을 행해야지


않겠어?”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헛소리하지 말라는 뜻을 전하자 라헤안시가 휴 한숨을


쉬었다.

“아, 쫌 넘어가면 안 돼?”

“대신관님께서도 내 협력이 필요하셨던 게 아닌가? 믿음을 줘야 손을 잡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야.”

라헤안시는 입을 쭉 빼고 투덜거리다가 제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이미 손잡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까다로울 줄이야. 아, 대충 알잖아.”

“윈디트?”

“어어. 스승님 복수. 이거 입 밖으로 내뱉기 되게 창피하네.”

하지만 라헤안시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수치심이나 그와 비슷한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손끝은 살짝 떨리고, 얼굴
근육은 경직되어 딱딱했다. 그 눈빛, 표정, 자그마한 몸의 신호까지. 리카르디스는 라헤안시를 덮고 있는 것이
분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난한 자도 사랑하고 토사물에 파묻혀 있는 더러운 거지도 따스하게 안아 줄 수 있고, 병든 자들의 상처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그런 자비로운 신이 있다면…… 나는 그게 반드시 윈디트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가 담담한 말투로 과거를 상기했다.

“그냥 죽은 걸 보면 인간이었던 것 같지만.”

농담인가? 진심이야, 저거? 리카르디스가 모호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라헤안시가 바보처럼 히쭉 웃었다.

“이런 진지한 얘기를 하다 보면 예리하고 냉철한 나의 본모습이 드러난단 말야. 고생하시는 아버지에게 은퇴를
선물로 드릴 때까지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라헤로 있어야 한다구. 그래서 형. 언제 축복의 밤 부를까. 오늘?”

“……전쟁이 끝날 즈음.”

라헤안시가 목이 졸려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했다. 해석해 보자면 대충 끔찍해 죽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렇게 늦게?”

“축복의 밤을 부른 그날로부터 나는 제국의 반역자로 일라베니아 제국군과도 싸워야 하는 신세가 되겠지. 발타


왕국 덕분에 황실의 권위는 땅으로 추락했고, 전쟁에서 이긴다면 황실이 아닌 나의 명성이 드높아지는 결과가
된다. 그즈음이면 내가 축복의 밤을 부른다고 한들, 황제가 나를 반역자라고 명명한다고 한들, 과연 그의 뜻에
따라 손발을 맞춰 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목숨이 달린 문제니 신중해야지.”
“아, 그렇긴 하네.”

리카르디스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 그건 큰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따로 있다.”

“축복의 밤을 어떻게 부르는가?”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보름달이 뜬 밤. 호수. 충분한 양의 성력과 마력을 가진 두 사람. 그리고
일라베니아의 역사보다 오래된 결혼식에 쓰이는 언약문까지.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추측이 크게 틀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것은 라헤안시에게 확인하면 될 문제지만, 그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라헤, 성력은 대체 어떤 힘이냐.”

라헤안시는 기시감을 느꼈다. 몇 달 전, 황실 대신전에서 리카르디스가 마력이 무어냐 물었던 때가 생각났다.


리카르디스의 놀라운 점은 질문을 하면서도 대답을 거의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리카르디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곧 그의 손에서 하얀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성력이었다. 손 안에 담기는


하얀 안개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물.”

라헤안시가 슬쩍 미소 지었다.

“바람.”

리카르디스가 허공에 검지로 원을 그렸다. 그 궤적을 따라 하얀빛이 잔상처럼 둥그렇게 남았다 곧 사라졌다.

“그처럼 순환하는 모종의 힘.”

실로 감탄이 나오는 추리력이었다. 라헤안시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사를 참지 못했다.

“크으으…… 지금 내 안에서 형의 점수가 더 올라갔어. 내 눈이 역시 정확했다니깐.”

리카르디스의 부루퉁한 얼굴을 보고도 라헤안시는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둥의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로 대단했다. 백성들은 물론이고 신의 종이라 일컬어지는 신관들조차도 성력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저 대단한 신의 성스러운 힘. 치유의 빛쯤 되는 개념일까.

라헤안시 또한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스승 윈디트와 교류를 하게 되며 조금 더 깊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 물론 이 또한 누가 입증해 준 적이 없으니 가설일 뿐이긴 했다.

대신관 윈디트는 신의 은총 아래 살아가던 평범한 나날 중 갑작스러운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렇게 대단한
신의 힘이 왜 죽은 자를 살려 내지는 못하는가?

빛과 축복, 생명을 관장하는 전지전능한 이델라브힘. 그의 믿음 아래 살아가는 대신관이 가지기에는 참으로


원초적인 의문이었다. 그녀는 그러한 의문점을 가감 없이 동료 대신관들과 나누었다.
[위대한 이델라브힘께서는 세계의 균형을 이루는 질서이십니다, 대신관 윈디트. 섭리를 거스르는 일을 하실
리가요. 죽은 자가 살아난다면 그건 기적이 아닌 재앙일 것입니다.]

그런 대답을 들었으나 윈디트는 탐구를 끝내지 않았다. 거의 죽을 지경이었던 사람을 살려 내는 것은 섭리에


거스르는 일이 아니던가? 그거나 이거나 한 끗 차이일 뿐인데, 뭐가 다른 것일까. 그런 의문을 품고 살아가던
중이었다.

냄새 나는 낡은 거리에 폐병에 걸린 노인이 있었다. 가래가 끓는 기침을 하고, 피까지 토했다. 그 어떤 중상자도
살려 내는 윈디트의 신성력이 따스하게 노인을 감쌌다.

하지만 노인은 곧 죽음을 맞이했다. 윈디트도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다. 노인과 같이 늙거나 먹지 못해 몸이


약해진 사람들을 살려 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와 같이 죽은 이의 장례를 치러 주던
그녀는 돌연 무언가를 떠올렸다.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물었던 질문이었다.

왜 신성력은 죽은 인간은 되살리지 못하는가?

그 원초적인 의문과 쌓여 온 수많은 죽음이 정답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신성력은 치유력이 아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부의 생명을 빠르게 순환시키는 것이었다. 인간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인간이 가진
본연의 힘. 그리고 그 힘을 이끌어 내는 것이 성력의 역할이었다.

그랬기에 생명력이 없는 죽은 인간은 살려 낼 수 없으며, 생명력이 다 닳아 가는 늙거나 먹지 못해 몸이 약해진


자들은 성력의 빛 아래에서도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윈디트는 다음의 질문을 떠올렸다. 성력이 힘을 순환시킨다면, 그렇다면 마력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축복의 밤은 무엇이냐.”

리카르디스의 질문에 라헤안시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역시나 사고가 비슷하게 흐르는 모양이었다. 라헤안시는
피식 웃은 뒤 대답했다.

“생명이 순환하는 밤.”

“대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명을 잃어 간다. 그렇다면, 대륙을 소생시킬 생명의 힘은 어디에서부터 오나?”

두 사람 다 직접적으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으나, 마지막 조각이 마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라헤안시의 반응으로 자신이 생각했던 추측을 어느 정도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성급하게 책을
넘겼다. 고리타분한 과거의 언어들로 쓰여 있음에도 술술 읽어 내리는 걸 보니 공부를 보통 한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말한 가정 아래, 마력은 특정한 날에 성력이라는 순환의 바람을 타고 민들레 씨앗처럼 전
대륙에 퍼진다. 그렇다면 강한 마력을 담고 있던 자는 어떻게 되나? 그 사람은 무엇을 잃게 되는 거지?”

그의 목소리가 점점 음산해지더니 뚝 끊겼다. 팔락이던 종이의 소리가 멈췄다.

“축복의 밤을 띄운 역대 황제들이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는지는 어린아이용 역사서만 뒤적여 봐도 줄줄이 적혀


있지. 그렇다면 마인들은? 지금, 이 두꺼운 책을 보는데도 마인에 대한 얘기는 한 줄도 적혀 있지를 않아. 이런
쓸모없는 작자들 같으니. 누가 황제가 좋아했던 꽃의 종류를 알고 싶다고!”

203 화.
“어라,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나도 본 적 없는 것 같아.”

라헤안시는 멍청한 소리를 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축복의 밤을 위해서는 마력과 성력이
필요하다는 것만 알았지,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축복의 밤’ 자체가 가장 중요했을
뿐이었다. 라헤안시의 태평한 대답에 리카르디스가 눈에 불을 켜고는 이를 갈며 말했다.

“뭐라고? 어라, 그러고 보니 그러네?”

은빛 늑대가 으르렁 거리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성큼성큼 다가와 라헤안시의 볼을 두 손으로 쭉 늘어트렸다.

“으허어어! 압허!”

“좀 난 놈인 줄 알았더니, 누가 황실 출신 아니라고 할까 봐, 이 성력 우월주의에 찌든 신관 같으니! 마인이


어찌 되었든 다른 사람들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더냐?”

너무 아프게 꼬집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라헤안시는 이제야 리카르디스가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축복의 밤이 지난 후 마인들은 무사한가?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리카르디스가 축복의 밤을 띄우는 일은 없으리라. 라헤안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람이 생각이 좀 짧을 수도 있지, 거 되게 뭐라 하네! 나도 황실에서 난 놈이긴 하지만, 황실과 신전의 주입식
교육을 받아 왔다고! 하나만 가르치기에 알아서 다섯을 알았더니, 열을 모른다고 뭐라 그래!”

“이놈의 자식이 입만 살아서는!”

리카르디스가 라헤안시의 등을 찰싹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라헤안시는 훌쩍거리며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리카르디스는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후 숨을 쉬었다.

“대신전에서 축복의 밤 이후 마인에 대한 처우나, 뭐 비슷한 정보라도 한 줄 읽은 적 없는 거 확실해? 잘 좀


생각해 봐.”

라헤안시가 입을 쭉 빼고 툴툴댔다.

“황실이 그런 걸 남겨 뒀을 것 같아? 본 적 없어. 아, 그래서 여기로 온 거구나. 확실히 최초의 신전이라면


있을지도…….”

“똑똑한 녀석.”

미간에 주름을 잡고서 짜증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고수하던 리카르디스가 돌연 표정을 바꾸며 상냥하게 칭찬했다.
라헤안시는 제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부르르 떨었다.

“손잡은 첫 기념이다 라헤. 특별히 너에게만 일거리를 주지. 축복의 밤에 관련된 마인의 정보가 필요해. 뭐라도
좋으니 찾으렴, 너만 믿는다.”

라헤안시는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좌우로 한 번씩 돌아갔다. 방 안을 가득 메운 책장. 그리고


책장을 가득 메운 책들. 이, 이걸 다 나 혼자? 라헤안시는 등골이 오싹했다.

“베, 베르움!”

치료소에서 병사들을 치료하던 신관 베르움은 갑작스럽게 돋아난 소름에 팔을 쓸었다.


* * *

오소리 부대가 한 번 더 활약해야 했던 이유는 성채 내에 숨어 있는 발타군의 잔존 병력 때문이었다. 물론 오소리


부대 외의 많은 병사들도 수색에 나섰으나, 로젤린이나 헤사만큼 기척을 잘 읽어 내는 이가 없기에 쉬지도 못하고
돌아다녀야만 했다.

수백 수천의 병사가 스물여섯의 잔당을 발견하는 동안, 오소리 부대는 팔십 여덟 명을 잡아냈다. 오소리 부대의
대원, 세이파가 존경의 눈으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우리 대장님 진짜 끝내주네요. 이것 보세요, 대장.”

로젤린이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옷 안에 뭘 집어넣었는지 어깨 양쪽이 불뚝 솟아 있었다.

“제 어깨가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병사들이 대장을 선망의 눈으로 보고 지나갈 때마다 1 센티씩 높아졌지
뭡니까.”

로젤린이 피식 웃었다. 에버하르트는 낄낄거리며 웃다가 두 명의 병사가 로젤린을 예의 그 선망의 눈빛으로 보고


지나가자, 세이파의 어깨에 무언가를 더 집어넣었다.

“두 명이니까 2 센티.”

“역시 에버하르트 경. 뭘 좀 아시네요.”

오소리 부대와 함께 움직이고 있던 레티시아는 두 바보가 보이지 않는 듯, 싸늘한 얼굴이었다. 물론 보았기


때문에 그런 표정일지도 몰랐다.

“슬슬 전부 잡은 것 같긴 합니다.”

반나절 째 수색 중임에도 로젤린은 지치지 않아 보였다.

“마인이라면 소수라 해도 위험해. 조금만 더.”

“예. 세이파, 에버하르트. 집중해라.”

세이파와 에버하르트는 레티시아의 뒷말에 ‘죽고 싶지 않으면’이 생략되었음을 깨닫고 진지한 자세로 복도를
걸었다.

그때 로젤린이 손을 뒤로 해서 짧게 수신호를 보냈다.

[우측, 둘]

몇 걸음 거리 앞에 오른쪽으로 꺾이는 복도가 있었다. 발걸음 소리는 다른 대원들 또한 감지하고 있었지만,


발타의 잔당이라는 사실은 알 수 없었다.

오소리 부대들은 그녀의 수신호를 보고도 소리를 낮추거나 무기를 꺼내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분위기와
걸음걸이로 태연하게 행동했다. 상대가 방심하도록.

곧 갑옷을 입은 병사 두 명이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아,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런데 이번만큼은 로젤린이 착각한 것 같았다. 일라베니아 제국군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었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으며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병사 두 명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쾅!

그때, 한 명이 로젤린의 발길질에 벽에 날아가 처박혔다. 다른 병사 한 명이 검을 꺼내며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


로젤린은 검을 꺼내지도 않고, 무기를 쥔 남자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남자는 믿을 수 없는 강한 힘에 이끌렸다.

콰직. 로젤린의 주먹이 남자의 얼굴을 강타했다. 부상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파괴력 있는 소리였다. 호기롭던
두 명의 잔당이 순식간에 널브러졌다.

오소리의 대원들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쓰러진 병사들을 밧줄로 묶었다.

“그런데 어떻게 구분하시는 겁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냥 일라베니아 병사였는데요.”

“성의 경비를 맡은 황실의 병사들은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걷는 폭과 발소리가 비슷하다. 발타의


병사들도 발소리를 정돈할 수는 있지만, 일라베니아와 갑옷 양식이 달라서 그런지 움직일 때 어색해하는 경향이
있더군. 그래서 쓸데없는 소음이 더 나곤 하지.”

“이야, 정말 대단하십니다.”

맨 처음 로젤린의 발차기에 기절했던 남자가 눈을 떴다. 그가 흠칫하며 움직이려 하자 로젤린이 발을 들어 남자의


허벅지를 꾹 밟았다.

“으아악!”

“뭉개지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

로젤린의 목소리가 살벌하게 남자를 감쌌다.

“이놈은 마인이다. 조심하도록.”

에버하르트와 세이파가 그녀의 말에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파가 뒷골목 건달 같은 자세로 쭈그려
앉더니 단검을 꺼냈다. 그가 웃음기 하나 없이 싸늘한 얼굴로 로젤린에게 말했다.

“괜히 반항하면 귀찮으니, 팔이나 다리를 자르겠습니다.”

옆에서 에버하르트가 검을 꺼냈다.

“다른 놈들도 많아. 귀찮아지기 전에 그냥 여기서 죽이는 게 낫지 않겠나.”

남자가 히익 하는 소리를 냈다. 레티시아는 연기에 나름 재주가 있는 두 바보를 마음속으로 흡족해했다. 로젤린은
지금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해, 그들의 연극을 진짜라 받아들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고민하다가 순수한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무력화한다. 신관을 불러와라. 자르면 바로 지혈해야 하니.”

사로잡힌 남자는 대놓고 껄렁거리는 건달 같은 세이파나 제 목숨을 당장이라도 끊을 것 같은 에버하르트보다


그녀가 더 무서웠다. 레티시아가 기사의 표본같이 경례하며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그 또한 진심이 가득 담겨 있는 말투였던지라 남자는 지레 겁을 먹었다.

“자, 자, 잠시만요!”

식겁한 남자가 소리쳤다.

“살려만 주시면 하라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에버하르트와 세이파는 김샜다는 듯 무기를 집어넣었다. 로젤린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그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남자는 그녀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며 덜덜 떨었다.

로젤린이 팔짱을 풀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서서히 자세를 낮춰 눈높이를 맞췄다. 로젤린의 손이 서서히
가까워지자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가 예상과 달리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심장 위의 따스한 온기뿐이었다. 남자는 그녀가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려 두었음을 깨달았다. 눈을 뜨자 주시하고 있는 맹수 같은 눈이 보였다.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일라베니아군에 직, 간접적으로 피해를 끼칠 생각은?”

빛나는 눈동자가 피부와 근육 아래 아주 깊은 곳까지 샅샅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생각마저 읽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남자는 마인이었기에, 마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능력은 없을 텐데.

하지만 뛰어난 직감이 경고했다. 거짓을 말했다간 죽는다. 남자는 격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추호도 없습니다!”

“정보의 교란을 할 생각인가?”

“그런 짓을 할 바에 목매달고 죽겠습니다!”

“의도적으로 정보를 은폐하겠나?”

“코코 사르체 장군의 속옷 색까지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면 모두!”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중에도 그녀는 손을 심장에서 떼지 않았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한 말이 모두 진실인가?”

“예!”

그 대답을 들은 로젤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심이군.”

오소리 부대는 감격에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정말, 우리 대장 너무 멋있다. 진짜.

로젤린과 오소리 부대는 발타의 마인, 차가를 끌고 가며 지금 필요한 정보를 물었다. 발타군이 일라베니아군을
치기 위해 출병했던 때, 성채 내에 남았던 병력의 수.
차가는 사르체군 내에서 고위직을 맡고 있던 지휘관인 만큼 정확하게 수를 파악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오백인가?”

“예. 장군께서는 뒷자리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안 예쁘다고 싫어하셔서요. 부대는 정확하게 십, 백, 천.


이런 식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레티시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차가의 말을 들으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500 명 중,
일라베니아와 교전하여 사망하거나 붙잡힌 병사가 382 명. 118 명이 남는다. 도망갈 길이 없으니 전부 성채 내에
있다 판단해야 했다.

204 화.

일라베니아군과 오소리 부대의 수색으로 발견한 것이 114 명. 지금의 두 명을 포함하면 116. 두 명이 빈


셈이었다.

“정말 거의 다 잡았던 거로군요.”

세이파는 늦게 셈을 끝마친 후 감탄했다.

“딱 두 명 남았네요.”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차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헉 씨, 두 명이요?”

그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잠시 잊고 있던 중요한 정보를 세이파의 말에 떠올렸다.

“혹시 의료실에 있는 놈들은 잡으셨어요?”

갑작스럽게 사색이 된 차가를 보며 에버하르트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정확하게 모르지. 우리 말고도 다른 병사들도 수색 중이라서.”

“그러면 잡은 인원 중에 외관상 발타인처럼 보이지 않는 이들은요?”

아까 전 감옥에 들렀던 터라 그 건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있었다. 심각해진 분위기에 로젤린의 표정도 굳어졌다.

“없었다. 모두 발타인이었다.”

“남은 두 명, 의료실에 있을 겁니다! 저처럼 발타인으로 보이지 않는 병사들이에요!”

오소리 부대의 발길이 뚝 멈췄다. 차가는 더듬더듬거리면서도 재빠르게 얘기했다.

“죽기 전에 마지막을 불태울 거라며 별 되도 않는 객기를…… 아무튼,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서 고위 지휘관이
들릴 가능성이 있다고, 그때를 노릴 거라…….”

오소리 부대들은 리카르디스의 일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리카르디스는 회의를 마친 후
부상자들을 살필 예정이었다. 차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젤린이 화살 같은 속도로 복도를 내달렸다. 그러다
이것도 아니다 싶었는지, 창을 열고 훌쩍 뛰어내렸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오소리들이 깩 비명을 질렀다.

“로젤린 경!”

높은 건물에서 줄도 없이 그냥 뛰어내리다니! 아무리 상대가 그 로젤린이라지만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레티시아는 로젤린을 따라 뛰어내리려는 헤사의 목덜미를 붙잡은 채로 창 아래를 바라보았다.

공중에서 가볍게 한 바퀴 돈 로젤린이 고양이처럼 착지했다.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녀 때문에


돌아다니던 병사들이 기겁했다.

알지, 그 마음 알지. 레티시아는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굳어 있는 오소리들을 재촉했다.

로젤린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부서진 마차 안에 죽어 가는 어린 소녀의 모습과 리카르디스가 겹쳐졌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한참을 달리자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건물이 보였다. 로젤린은 그 속에서 마력의 기운과 소란스러운 기색을 읽어
냈다. 로젤린은 이를 꽉 물고 훌쩍 뛰었다. 튀어나온 부분을 몇 번 밟아 뛰는 것만으로도 목적지에 도달했다.
손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보게 된 광경은 로젤린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하얀밤 기사단원 아래
어떤 남자가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스타스와 르원이 리카르디스를 보호하듯 가로막고 있었고, 그 앞,
간이침대에 있는 남자가 손이 잘린 채 울부짖고 있었다.

“으아악!”

남자가 괴로움에 몸부림치자 침대 위에 있던 손이 털썩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아무 감흥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갈색 머리의 여자는 로젤린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이였다. 여자는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손장난하던 걸 멈추고 몸을 돌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씩 웃었다.

월장석 성의 시녀, 미미였다.

* * *

전쟁의 수습이 필요했다. 성안에 남아 있을 발타의 병력을 파악하고 확보, 또한 부상자들의 치료, 성채 도시
내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다독이는 일이 그 일환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부상자들을 모아 둔 건물로 향했다. 하얀밤 기사단원이 줄줄이 그를 따랐다. 아직까지는 성안의
안전이 완벽하게 확보가 된 상태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든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주위를
경계해야만 했다. 먼저 기사단원들이 내부를 확인한 후에야 리카르디스가 들어갈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약초의 알싸한 향기와 살이 썩는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신관과 치료사들이 손을 쓰기는 했지만, 한 사람에게 모든 성력을 퍼부을 수 없었기에, 당장의 위기만 넘기도록
조치를 취해 놓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부상자만 해도 수십 명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안에 있는 중상자들을 살피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의 손에서 하얀 빛이 퍼져 나올 때마다 시체


같던 이들이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병사들이 초롱초롱한 존경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스타스가 전략 회의 시간이 되었다며 리카르디스를 재촉했다. 그는 조금만 더


치료하겠다 고집을 부리고는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병사가 누워 있는 침대 곁으로 이동했다.

눈을 감은 남자는 이마부터 머리까지 쭉 찢어져 있었다. 지혈이 될 정도의 신성력은 퍼부었는지 피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낯빛은 아직 파리하고, 의식은 되찾지 못한 듯 소란스러운 병동 안의 분위기에도 눈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른 병사들에게 들어 보니 계속 의식을 되찾지 못해 신원도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무리 계책을 쓰고 계획을
해도 사상자는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조금 가라앉은 낯으로 병사를 바라보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리카르디스가 손을 뻗으려던 찰나, 남자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으으…….”

“정신이 드나 보군.”

리카르디스는 서둘러 치료하기 위해 다시 손을 뻗으려 했다. 그 순간 그는 강한 힘에 뒤로 이끌렸다. 마치


세심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로젤린이 무자비하게 제 목덜미를 잡아챈 것 같은 감각이었다.

병장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며 소란스러워졌다. 리카르디스는 한두 걸음 뒤로 끌려가는 그 찰나에 무슨 일이


일어났노라 직감했다. 리카르디스의 시야에 갈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아아악!”

“전하!”

“잡아!”

소란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리카르디스는 뒤늦게 상황을 인식했다. 가슴 부근의 옷자락이 베여서 팔락이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치료하려던 남자의 손에는 비수가 들린 채였다. 종이 한 장 차이. 만약 조금 늦었다면 심장에
비수가 박혔으리라. 주위에 신관이 많다지만, 그들도 죽은 사람은 살려 낼 수 없었다.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전하는?”

“무사하십니다.”

“한 명 더, 제압했습니다!”

뒤를 바라보니, 슈텐과 파르딕트의 아래 한 남자가 깔려 있었다. 한 사람이 더 있던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다시 자신을 찌르려 했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발버둥 치고 있었으나, 비수를 쥐고 있는 손만큼은 잘려
있었기에 고요히 낡은 시트를 붉게 물들일 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 리카르디스를 뒤로 낚아채고, 암살자의 손목에 단검을 박아 넣어 잽싸게 절단해 버린 실력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 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로젤린일 거라 생각했는데.

“마…… 미미?”

“무사하세요?”

마카롱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잘린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피부에는 붉은 기운 한 점


없었다.

“무사하시네요.”

혼자서 확정을 내린 마카롱이 다시 암살자를 바라보았다. 피 묻은 단검을 손 위에서 빙빙 돌리는 걸 보니 구워


먹을지 삶아 먹을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조용히 리카르디스를 따라다니던 월장석 성의 시녀, 미미의 색다른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잠시 멈춰 있었다. 검을 집어넣지 않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은 이 자리에서 잔당의 존재가 확인되었기뿐만
아니라, 미미의 행동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가 리카르디스를 구해 줬다고는 하지만, 수상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기에.

경계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미미가 갑작스럽게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격하게 숨을 몰아쉬는 로젤린이 창문의 빛을 가리듯 그곳에 있었다. 그녀가 재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훑더니 리카르디스에게 다가왔다.

“전하!”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잘린 옷자락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괜찮다. 이건 그냥 옷만 잘린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얘기하려 했으나 로젤린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잘린 옷자락 사이로 로젤린이 손을 쑥 집어넣었다. 겨울 공기에 싸늘해진 손끝이 열 오른 피부에 닿았다.


리카르디스의 몸이 움칠 떨렸다. 로젤린은 그에 그치지 않고 재빠르게 리카르디스의 맨가슴을 더듬었다. 비명을
삼키고 있던 리카르디스가 결국에는 얼굴을 붉히며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으읏…….”

“어디 다치신 곳은!”

손이 어찌나 재빠른지. 스타스마저 추행 비슷한 장면을 아연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정도였다.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의 손목을 꽉 잡았다.

“다, 다친 곳은 없으니 이만 진정해!”

심장에 비수가 박힐 뻔했던 아까보다 지금이 심장이 더 벌렁거렸다. 스타스는 소란스러워진 공간을 한번 눈으로
훑은 후, 피곤한 듯 눈을 지그시 눌렀다.

“우선…… 자리부터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

리카르디스는 한 손으로 벌어진 옷자락을 붙잡은 채, 빨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다.”

상황이 상황이라, 로젤린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리카르디스의 가슴을 만진 일로 혼나지 않을 수 있었다.

일행은 자리를 옮겨 사람이 없는 조용하고 넓은 방으로 이동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모호한 표정으로 미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평범한 시녀인 줄 알았던 그녀가 그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해 2 황자 리카르디스를 구해
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나 운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추행의 충격과 미미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고 상황을 살폈다. 칼릭스가
너무 보고 싶었다.

205 화.

침묵을 깬 것은 하얀밤의 단장 스타스였다.

“미레이미 양?”

“네.”

“……아주 훌륭한 솜씨를 지녔군.”

“별말씀을.”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덜덜 떨었다. 미미는 그런 리카르디스를 한번 보고 피식 웃었다. 월장석 성의


미미는 상냥하고 햇살 같은 미소를 가진 아담한 아가씨로, 많은 수습 기사와 하급 기사의 마음을 빼앗아 간
장본인이었다.

한데 지금은 싸늘한 미소, 불량한 태도, 수상한 행적까지. 전혀 다른 사람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물론
월장석 성의 모습이 가면임을 알고 있는 리카르디스에게는 지금의 마카롱이 훨씬 더 친숙하긴 했다.

미미의 시선이 리카르디스에게 향했다. 내가 너의 목숨을 구해 주기만 하면 됐지, 다른 것까지 신경 써야 하냐?


라는 표정이었다.

“…….”

리카르디스가 미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로젤린 경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우이며…….”

말을 끌자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의 출처를 밝혀도 된다는 뜻이었다.

“마인이다. 발타와 엮인 지금의 상황에 마력을 감지하는 힘이 필요하리라 판단한 로젤린 경의 추천으로,
비밀스럽게 내 호위를 하던 중이었지.”

완벽하다. 완벽해. 심지어는 반쯤 사실에 기반해서 말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변명은 점수를 매긴다면 100 점
만점에 100 점 정도를 줄 수 있으리라.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몇몇 기사들과 스타스, 나단,
레이몬드와 르원만은 여전히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왜 미리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리카르디스를 향한 질문이었으나, 이번에는 미미가 대답을 가로챘다.

“로젤린 이외의 마인이 2 황자 전하의 곁에 있다. 그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건 없겠죠. 적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그에 대한 대비를 전부 마쳤을 때뿐일 테니. 방심한 적만큼 쉬운 상대는 없습니다.”

미미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스타스는 리카르디스의 뒤에 선 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적의도 경계도
아닌, 탐색의 눈빛이었다. 미미가 그의 시선을 받으며 씨익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간신히 잦아들었던 위염이
도지는 기분을 느꼈다.

“월장석 성내에서 보인 모습과 많이 다르군, 그대는.”

“상황과 장소에 따라 사람들은 옷차림과 자세를 다르게 하곤 하더군요. 세간에서는 그걸…… 예의라 부르던가?”

“지금은 그대가 말하는 예의가 필요 없는 자리라 보는가?”

미미가 차갑게 웃었다.

“예의 있고 실력 없는 자보단, 실력 있고 예의 없는 자가 필요한 곳이 아닐지?”

미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 나는 제법 실력이 있는 편이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카롱은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하고 로젤린을 끌고 자리를 떠났다. 결국 뒤처리는


남은 리카르디스의 몫이었다. 미미의 무례함에 눈살을 찌푸리거나 불만을 표출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마인이라고요? 필요하다는 사실은 부정 못하겠지만, 수상쩍기는 하군요.”

“신원은 확실합니까? 로젤린 경의 친구라는데, 로젤린 경은 솔직히 좀…….”

“허술하지.”

“그렇죠. 발타 쪽과 관련이 없는 게 확실해질 때까지는 접근을 허용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요.”

말이 점점 얹어지는 상황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골치가 아파 잠깐 머리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어깨의 짐을 덜어


준 것은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미미가 말하는 내내 냉철한 표정과 날카로운 시선을 하고 있던 스타스가 입을
열었다.

“크게 경계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나단이 염려스런 표정을 하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스타스가 계속 말을 이었다.

“속 꿍꿍이가 있는 자였다면 그녀가 말하는 예의를 계속 차리고 있었을 테지. 경계를 사면 안 될 테니.”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그리고 로젤린 경이 허술한 구석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전하의 안전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예리한 시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네. 그런 그녀와 사이가 제법 막역해 보이는 걸 보면, 적어도 발타 측의 인물은 아니겠지.”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에게 방심을 불러일으키는 전략도 훌륭하고, 실력은 그보다 더 출중하다.”

계속 이어지는 스타스의 말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약간 뭐가 이상한 느낌인데…….

“큰 도움이 되겠군.”
스타스가 살짝 미소 지었다. 반년에 한 번씩 웃을까 말까 한 얼음 같은 기사단장이, 미미가 상냥한 시녀 가면을
쓰고 있을 때만 해도 언제나 무뚝뚝하게 반응하던 스타스가 미소 짓다니.

‘……취향이 독특한걸.’

스타스의 미소를 지켜보던 리카르디스는 씁쓸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그곳은 너무나 험한 가시밭길일 텐데.

* * *

발타를 이끌어 가는 다섯 가문 중 ‘타탄’의 가주 완달은 마른가시나무 백작에게 유감이 많았다. 물론 그녀에게


유감이 없는 발타인을 찾아보는 게 더 힘들기는 했으나, 타탄은 자신이 그중 제일가는 원한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우선, 완달 타탄이 ‘검은달’의 병사들을 육성하는 직무를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훈련을 마친 검은달의


대원들은 국경 지역에서 갖은 분탕질을 치며 실전을 거치고는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월하게 치고 빠지기가
가능했지만, 국경 사령관으로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임명되며 서서히 뒤틀리기 시작했다.

과거의 국경 사령관은 전대 마른가시나무 백작으로, 현 백작의 큰 오라비였다. 전대와 부모 자식 정도의 나이


차가 나는 어린 여자. 솔직히 완달이 방심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현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의
능력치가 전대 백작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 한몫했다.

전략과 전술, 전장의 기류를 읽는 눈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것은 악독한 집요함이었다. 아주
조그마한 피해라도 입는 즉시 관문은 비상사태에 들어가며, 침입자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어떤 막대한 피해를
입더라도 끝까지 추적한다. 그녀의 집요함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였다.

그리고 한때 그걸 몰랐던 완달 타탄은 잘못된 판단을 내렸고, 그로 인해 다음 대 타탄의 가주가 되었을 아들을
잃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에게 잃었던 목숨의 수와 가치만큼이나 쌓여 온 원한이었다. 그가 마른가시나무 영지에 오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몇 주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완달은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영지를 함락하지 못해
아직까지 비스타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환장할 지경이었다. 물론 성채가 지닌 방어적 이점을 잘 알고 있기에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쉽지 않았다. 장기전으로 접어들게 되면 발타군은 추운 겨울을 맨몸으로 맞아야만 했다.

공성하는 측의 불리함, 원정 온 측의 불리함, 익숙지 못한 기후의 불리함. 그나마 내세울 것은 병력뿐인데


백병전으로 끌고 나가지 못하니 수의 차이도 무색한 상황이었다. 보급로를 차단하고 식량이 동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책이긴 하지만, 대영지인 만큼 물자가 풍부했다.

더군다나 발타를 코앞에 둔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수상쩍은 기류를 보고도 대비를 안 해 뒀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오래된 공방전에 마른가시나무 백작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투항을 요구하는 서신과 함께 전령을 보내 두었다. 그리고 지금 막 전령이 돌아온
참이었다. 조각조각 분리되어, 마차에 실린 채로. 반쯤 부서져 있는 마차에는 전령의 시체뿐 아니라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인장이 찍힌 서신도 함께 있었다. 완달 타탄은 찝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서신을 뜯었다.

[홀로 먼 길 떠난 아들이 그리웠나? 따라가고 싶어 하는 걸 보니, 그 절절한 부성애에 가슴이 아프지 뭐야. 이
가슴 아픈 촌극을 어떻게 지켜만 보겠나. 선물을 동봉한다. 전령의 입 안을 보라.]
완달 타탄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의 얼굴 근육이 경직되어 단단해지며 붉어졌다. 압력에 실핏줄이 터져 그의
흰자위 또한 붉게 변했다. 서신을 내팽개친 완달 타탄이 잘린 전령의 머리통을 들고 입을 우악스럽게 벌렸다.

입안에서 피에 젖은 두 개의 조각이 나왔다. 피와 점액에 끈적거리는 물체를 손수건으로 닦은 완달은 그제야


그것이 뼛조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가락 뼈였다.

완달은 떨리는 손으로 나머지 조각 하나를 닦았다. 피와 세월에 부식된 펜던트의 장식물이었다. 타탄 가문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시체조차 찾지 못했던 완달 타탄의 큰아들이 몇 년이 지나 작은 뼛조각으로 돌아왔다. 완달은 주먹을 꽉 쥐었다.


펜던트의 모서리에 손바닥이 찔려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의 얼굴이 표정 없이 싸늘하게 변했다.

* * *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집무실.

“땅이 울리는구나. 슬슬 준비해야겠는걸.”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가 씩 웃었다. 눈을 질끈 감은 보좌관이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너무 자극한 것은 아닐지요?”

“내가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잖니.”

홀로 간 아들 따라 죽고 싶어서 전장에 기어 나왔냐는 말이요? 잔뜩 찌푸려진 보좌관의 표정을 보고 백작이 깔깔


웃었다.

“타탄이 나를 굉장한 악당 취급을 하잖니. 내 아들의 복수! 내 부하의 복수! 이런 느낌으로 말이야. 굳이
따지자면 쳐들어온 건 저쪽, 나는 그 쳐들어온 걸 막아 내는 피해자의 입장인데…… 그래서 기왕 악당 취급받는
김에?”

“아주 막 나가신 거로군요.”

“너무 지루해. 이대로는 일 년이 가도 타탄은 비스타를 함락하지 못할 테고, 나 또한 마찬가지로 놈을 몰아내지


못하겠지. 다 죽어 가는 노인네지만, 그래 보여도 타탄 가의 가주 직을 맡은 자야. 마인을 육성하는 가문이란
말이다. 그런데 육성한 마인 부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지. 지금 비스타를 둘러싸고 있는 발타군의 저력은
이게 다가 아니야.”

세실이 파이프를 물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곧 연기가 그녀의 입을 빠져나와 퍼졌다.

“뭘 숨기고 있는지 봐야만 하겠어. 아무것도 모른 채 하루하루 오늘을 넘긴 것에 감사하며 지내다 뒤통수 맞는
것은 사절이야.”

그냥 성질 머리가 고약해서 상대방의 속을 박박 긁어 놓은 줄 알았건만, 그런 이면의 뜻이 있었을 줄이야.

206 화.

“그렇게 속을 긁어 놓았는데, 설마 또 돌이나 좀 던지고 마인 몇 명 투입해서 성벽을 오르는 정도로 그치진


않겠지? 어떻게 생각하니, 렉시드.”

세실의 뒤에 서 있던 마른가시나무 기사단의 단장, 렉시드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완달 타탄이 비스타로 오게 된 배경에 아들의 복수가 포함되어 있다면 백작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흘러가리라
봅니다.”

그의 말을 들은 보좌관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확실히 타탄 가문은 발타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요. 굳이 따지자면 본대에 포함되어
중부로 나아가는 측에 포함되어야 했을 텐데, 비스타로 온 걸 보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닌 듯합니다.
게다가 오늘 아들의 뼈까지 받지 않았습니까. 빤히 보이는 도발이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 그거.”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손가락을 튕겼다. 만면에는 장난기 어린 웃음이 가득했다.

“그 뼈, 그냥 전쟁터에 굴러다니던 거야.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뼈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는걸. 아하하!”

“……펜던트는…….”

“그건 진짜고. 시체는 진작에 들개 먹이로 던져 줬지. 나는 귀찮게 남의 시체를 몇 년씩이나 보관하고 있을
위인은 못 돼.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군.”

보좌관은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쾅! 쾅! 쾅!

굉음이 불규칙적으로 울렸다. 성채 내부에 있음에도 진동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기사 한 명이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백작님, 타탄군의 움직이지 않던 좌익군이 접근 중입니다.”

“왔구나.”

베일 듯 날카로운 기세가 담긴 세실의 목소리에 보좌관이 팔을 슥슥 쓸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집무실에서


벗어나, 전장이 보이는 망루로 올라섰다. 성벽 밖에 무리를 이룬 대군이 보였다.

“더럽게 많기도 하지.”

세실은 팔짱을 낀 채 성벽에 금이 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자신의 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버티고
있지만, 조금 삐끗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끝나 버릴 테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적이 승리에 취해 자신의 시체 위에서 술잔을 부딪치고 있으리란 상상만 해도 속이
뒤집혀서 쓰러질 것 같았다.

‘혼자서는 못 죽지.’

위기에 몰린 그녀의 목표는 승리가 아닌 공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 몇 주간의 공방을
치르며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생각했다.

타탄 가문은 여력을 남겨 두고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여력을 남겨 두었는가. 그것도 코앞에 원수를
두고서!

‘마른가시나무 영지에서 소모되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전력?’

참으로 구미가 당기는 단어가 아닌가. 중요한 전력이라니. 세실은 움직이지 않던 타탄군의 좌익이 서서히 성채에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입술에 손가락을 올려 둔 채 피식 웃었다.

“비장한 모습이 꼴사납구나.”

세실이 흘끗 뒤돌아보자 기사단장 렉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력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반 이상이 변질된 마력이군요.”

보좌관이 깜짝 놀라며 렉시드를 바라보았다.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마인뿐. 한데 지금 렉시드가 마력의


존재를 확신했다. 그가 마인이었단 말인가?

세실은 흠, 콧소리를 내며 한쪽 눈을 찡그린 채 멀리 보이는 군대를 손가락으로 가늠해 보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개미같이 보이지만 그것보다는 강한 상대일 테지. 그래도 죽지 않는 건 아니야.”

그녀는 손으로 눈을 한 번 쓸고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건 네놈만이 아니다, 완달 타탄. 내 시체를 네가 밟을지언정, 마른가시나무에 들어온 그
사실만은,”

이를 가는 소리가 섬뜩했다.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다.”

* * *

일라베니아 남부. 대對 일라베니아 연합군, 발타 왕국 진영.

휘장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다. 케틀린은 고급스러운 막사 내부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가 차가운
바람이 흘러 들어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독사의 전령이었다. 밀정인 그녀가 현재 일라베니아 제국의 정보를 보내왔다. 흥미로운 소식이었기에 당장
하카브에게 전달해야 할 듯싶었다. 케틀린은 막사 한구석에서 고집스럽게 서 있는 호위 아순에게 물었다.

“아순, 하카브 전하께서 어디 가신다 하셨니?”

“디에즈 전하와 데이트를 즐기고 오겠다 하셨습니다.”

“오.”

감흥 없는 감탄사를 내뱉은 케틀린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단어 선정을 불쾌하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미처 몰랐는데.”

“전하께서 직접 하신 말입니다.”

더욱 불쾌해졌다. 그때, 마침 막사 밖에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기색이 느껴졌다. 곧 겨울의 찬 공기가 난로로
덥혀진 막사 내부의 공기를 밀어내며 들어왔다. 디에즈와 하카브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따라오지 마시죠. 왕자.”

“대체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군. 그리고 여기는 내 막사이기도 해.”

“제가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날 두고 어디를 가려고.”

데이트하러 나갔다더니, 하카브가 호되게 차인 모양새였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대화 내용이 좀 역했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징그럽게 구는 탓이었다. 케틀린이 휘파람을 불며 두 사람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렸다. 그녀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검은독사의 정보원이 왔다 갔습니다, 전하. 우선 얘기부터 들으시죠.”

디에즈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하카브를 흘겼다가 그에게서 멀어지며 침대 가에 앉았다. 하카브는 그대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딱거렸다.

“일라베니아 중부 관문에 머무를 것이라 생각했던 2 황자 리카르디스가 남부에 있음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중앙군의 일부를 중부 관문에 남기고, 중부 관문까지 후퇴했던 변경 주둔군 중 일부를 흡수해 놋쇠저울,
소금바위를 통과하며 점점 내려가고 있다고 하더군요.”

하카브가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의외였다. 현재 남부는 연합군이 뒤덮은 상황이었다. 리카르디스에게는


사방이 적인 셈이었다.

“몸을 사리지 않는 부류라는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도 모험을 좋아하는군.”

“잠깐, 소금바위는…… 사르체가 맡은 지역이 아닌가요. 설마.”

케틀린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코 사르체가 붙잡혔다고 합니다. 사르체군도 와해되었고요.”

디에즈는 손으로 눈을 덮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카브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그거 골치 아프군. 가볍게 한 얘기 안에 속 깊은 울화가 담겨 있었다.

디에즈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로 다가왔다. 탁자를 짚은 채 지도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손가락으로 경로를 쭉
그렸다.

“사르체까지 물리친 제국군의 목적은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이겠군요. 비스타가 함락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을
어떻게 했을까요. 이건 리카르디스로서도 도박이었을 텐데.”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관문이 무너지기 전에 병력을 보존한 채 후퇴했으니. 거기에다 수성에 유리한 비스타
성채가 있고, 성채의 책임자가 ‘그’ 마른가시나무 백작이니까?”
하카브가 ‘그 마른가시나무 백작이니까?’ 부분을 강조해서 얘기했다. 케틀린이 흐흥 코웃음 치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정말 믿음직스러운 이름이긴 하죠. 완달 님이 고생깨나 하시겠는데.”

“그녀가 버리기 아까운 패이기는 하지만, 남부로 내려올 정도의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까요.”

케틀린은 다 식은 차를 홀짝이며 의견을 얹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지닌 병력만 해도 이만이 훌쩍 넘어가는 데다가, 비스타에는 실력 좋은 용병들이 많이


모이기도 하죠. 또 마인들이 있으니까요. 우리 마인 부대에 대항할 힘이 필요하다 판단한 게 아닐까 싶은데요.”

“판단은 훌륭하다만, 그래도 뭔가 부족한데…….”

하카브는 팔짱을 낀 채 한참을 있다가 돌연 씩 웃었다. 그러고는 지도에서 마른가시나무 백작 령, 비스타를


가리켰다. 그의 손이 스르륵 내려가 이미 허물어 진 국경 관문을 넘어, 발타의 울창한 숲을 넘어, 수도 리비타로
향했다.

디에즈가 눈을 크게 뜨며 하카브를 바라보았다.

“……비어 있는 발타를 치겠다?”

“가정이지만, 아주 가능성이 낮은 건 아닌 것 같군. 리비타 궁에는 아직 힉살라께서 계시니 말이야. 본디


전쟁이란 건 우두머리가 잡히면 끝나게끔 되어 있지.”

하카브의 눈이 생각에 잠긴 듯 어두워졌다. 즐거운 듯 말하는 어조가 스산하게 느껴졌다.

“다 죽어 간다 해도 힉살라는 힉살라. 만약 리카르디스가 리비타를 함락하고, 힉살라의 목숨을 쥐고 흔들게


된다면, 연합군이 와해될 것은 빤하다. 힉살라에 대한 충성심은 가끔 나도 놀랄 정도거든. 리카르디스가 노린
바도 이것이겠지. 이런, 정말…… 위대하시군. 힉살라께서는.”

하카브는 지도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위쪽으로 가면 일라베니아의 수도, 티가드가. 왔던 길로 돌아가면 발타의


수도, 리비타가.

중부 관문은 발타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남부 관문에 비해서 방비가 덜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성벽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어 체계가 잘 잡혀 있었다. 더군다나 연합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병력을
끌어모았을 게 빤하니, 상대하기는 더욱 까다로워졌다. 아무리 연합군이라 하더라도 뚫고 나가려면 시일이 제법
걸릴 것이다.

소수의 병력을 움직여서 일라베니아의 황제를 먼저 잡을까? 아니면 돌아가서 리카르디스와 전면전을 벌여야 하나
고민하던 중, 가만히 그들의 토론을 듣고 있던 케틀린이 끼어들었다.

“아직 말씀 못 드린 부분이 있어요, 전하. 이건 좀 재밌어 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하카브와 디에즈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케틀린이 씩 웃었다.

“현재 일라베니아에서 리카르디스의 입지가 어떤지는 대충 아시겠죠.”


207 화.

“강한 신성력, 아름다운 외모, 명석한 두뇌, 어리고 약한 것들에게 인자한 군주의 면모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일라베니아의 차기 황제 후보?”

케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하나가 더해졌다더군요. 이델라브힘의 사자라고.”

“그러고 보니 그렇게 불리기도 했지. 새삼스러울 건 없군. 실망이야, 키티.”

“그때는 황실이 황실의 일원인 리카르디스를 이용해 권위를 세우려 내세운 것에 가깝죠.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하네요? 리카르디스가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 사이에서 칭송이 자자하게 퍼진다고. 그렇게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한 그의 입지는 현재…… 대충 이델라브힘의 바로 밑쯤이라네요.”

디에즈가 인상을 찌푸렸다.

“검은독사가 과장한 건 아닌지.”

케틀린이 절도 있게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들어 보니 나름 일리가 있어요. 대신관 라헤안시가 리카르디스 곁에 있다고 합니다. 황실에서부터 중부


관문까지. 그리고 중부 관문부터 지금 그들이 밟고 있는 곳까지. 들리는 영지마다, 들리는 마을마다 수작을
부렸다더군요.”

“수작?”

“아, 전령의 표현으로는 ‘예언’이었지만, 제가 들어 보니 한없이 수작에 가까워서요. 표현을 살짝 바꿔


봤어요.”

하카브는 아까 전 잃었던 흥미를 되찾은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서 케틀린을 주시했다.

“아무튼 그 예언 속에는 리카르디스가 놋쇠저울과 소금바위에서도 승리를 거둔다 했고, 그 옆엔 검은 머리의


기사가 함께 서 있을 거라 했습니다. 리카르디스와 그녀가 일라베니아에 드리운 암운을 걷어 내고, 마침내 대륙을
빛으로 물들게 하는 장면을 보았다면서요.”

디에즈는 ‘검은 머리의 기사’라는 부분 때문에 상념에 잠겼다. 빛나는 리카르디스 옆에서 검을 들고 있는
로젤린의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숱하게 보아온 장면이었으니까.

결국 그녀는 그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망설이긴 했을까, 과거를 묻기로 한 것일까. 디에즈의 속이 새까맣게
물들어 갔다. 그의 낯빛 또한 차츰 어두워졌다.

“그렇게 대신관이 씨를 뿌리고, 제국군이 승리를 거두며 싹을 틔운 거겠죠. 공포 속에 잠긴 사람을 구원하는 건


언제나 실체 없는 희망이란 한 줄기 빛이니까요. 일라베니아인들은 실제로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이 신께서 보낸
사자이며, 대륙을 구원할 거라 믿고 있다고 합니다.”

케틀린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하카브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키티. 이건 좀 재밌구나.”


디에즈와 하카브는 왜 이 정보에 ‘재밌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지 눈치챘다. 일라베니아의 수도, 황실의
금강석 성에서 보석으로 치장한 채 벌벌 떨고 있는 그 비겁자가 아니라, 리카르디스가 일라베니아의 진정한
월계수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여태껏 사람들은 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황제인 줄 알았다. 황제가 일라베니아라는 나라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랬기에 하카브도 수도를 향하고 있던 것이었다.

“본래 전쟁이란 건 우두머리만 잡으면 끝나곤 하죠.”

케틀린이 아까 하카브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이것은 발타뿐 아닌 일라베니아에도 통용되는 얘기라고. 어둠에


잠긴 일라베니아 위로 드리운 한 줄기 빛. 그 빛만 없어지면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일찍 만나게 되겠군, 리카르디스.”

달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리카르디스가 기존의 계획대로 중부 관문에 머무르지 않고,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으로 떠난 이유는 제국군이
당도할 그때까지도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버티고 있으리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마른가시나무 성채 도시는 몇 백 년 전 발타 왕국과의 갈등이 심화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남부 관문 중


하나를 대신하는 역할을 했다. 잦은 전투를 치르며 점점 거대해진 마른가시나무 성채 도시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바다같이 넓은 강을 2 면에 끼고 있기에 공격할 수 있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협소하기도 했고, 두텁고 높은 성벽은


세 겹씩이나 되었다. 그리고 넓고 깊은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를
두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연합군의 목적이 마른가시나무 성채를 함락하는 것이 아니기에, 병력의 전체가 그곳에서 시간을 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예상대로 연합군의 본대는 남부를 쓸며 중부 관문으로 나아가는 중이었고,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는 발타군의 일부만이 주둔하고 있을 뿐이었다.

최근까지도 마른가시나무 성채는 건재하며, 완달 타탄은 마른가시나무 성채 도시를 함락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제국군은 연합군의 본대를 비스듬히 빗겨 나가며 빠르게 진군했다. 마른가시나무 영지가 코앞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지휘관들과 회의를 나누며 곧 다가올 거친 전쟁을 대비했다.

로젤린은 오가는 회의 내용을 들으며,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의 모습을 찬찬히 떠올렸다. 지형, 지리, 성벽의
두께와 예상되는 적의 진군로, 그리고 그녀가 보았던 비스타의 높고 낮은 규칙성이라고는 없던 거리의 모습까지.

그때 척후병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곧 척후대의 대장이 지휘부의 막사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리카르디스와 지휘관들은 남자의 굳은 표정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푹 쉰 후 그에게 물었다.

“상황은.”

남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마른가시나무 성채의 성벽이 일부 허물어졌으며, 또한 성채를 둘러싸고 있어야 할…… 발타군의 모습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막사 안이 침묵에 잠겼다. 성채 도시를 둘러싸고 돌과 독을 날려 가며, 사다리를 타고, 해자를 메우고 있어야 할
발타군이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성벽이 무너져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망루와 성벽 위를 돌아다니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먼 거리라 어느 측 병사들인지는…….”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린 채, 곰곰이 생각만 하고 있자 로젤린이 불쑥 끼어들었다.

“좀 더 자세히 상황을 파악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총사령관님.”

“그대가?”

“아뇨. 부탁해 볼까 합니다.”

로젤린이 흘끗 옆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끝에 걸린 마카롱이 횃대에 앉은 채로 꾸엑,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다.


귀찮은 짓 하기 싫은데? 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마카롱 경.”

리카르디스가 마카롱에게 뇌물을 먼저 건넸다. 독수리가 즐겨 먹는 육포였다. 하지만 크고 잘생긴 독수리는 한번


채 씹기도 전에 육포를 퉤 뱉어 버렸다. 로젤린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의 뇌물을 간신히 잡아챘다.

리카르디스는 태연하게, “아, 실수.” 하고는 다른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서 독수리에게 다시 물려 주었다.
이제야 육포를 먹기 시작하는 독수리를 보고 어느 지휘관 한 명이 떨떠름해하며 물었다.

“같은 육포가 아니었습니까?”

“일반 병사들에게 배급되는 육포를 실수로 줬지 뭔가. 이건 상급 지휘관 전용이다. 마카롱 경이 입맛이
까다롭거든.”

그것 참 신통방통한 동물이었다. 로젤린 경과 말도 대충 통한다고 하고. 아주 똑똑했다. 고급 육포를 몇 개 더


얻어먹은 마카롱은 횃대에서 로젤린의 팔로 옮겨 갔다. 로젤린은 막사 밖으로 나와 마카롱을 힘차게 올려 주었다.
거대한 독수리가 날갯짓하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막사 안에서는 여러 회의가 오고 갔다. 우선 정찰을 보낸 마카롱이 돌아와야 자세한 논의가 이뤄질 테지만,
마른가시나무가 함락당했다는 것만은 이견이 없었다. 일부의 병력을 남겨 놓고 타탄군도 이동을 한 것인지, 혹은
그대로 주둔하고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을 거쳐 발타로 진군하려 했던 계획은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지.

로젤린은 마카롱이 뱉어 놓고 간 딱딱한 육포를 씹으며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기를 한참, 저 멀리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바라보자 산꼭대기를 넘어오는 마카롱의 모습이 보였다.

막사 주위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로젤린이 다가가서 팔을 내밀자 제자리에서 몇 번
날갯짓하던 마카롱이 부드럽게 그녀의 팔에 안착했다. 로젤린은 마카롱의 한쪽 다리에 묶여 있는 무언가를
확인하고 곧바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리카르디스는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로젤린과 마카롱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횃대에 마카롱을 옮겨
두자, 마카롱이 한 발을 내밀고 발을 까딱거렸다. 맹금류의 두터운 발목에 주머니가 묶여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손이 조급하게 주머니를 풀어냈다. 탁자 위로 물건이 후드득 쏟아졌다. 하얀 체스 말과 디저트


마카롱이었다. 뜬금없는 조합에 지휘관들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리카르디스도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이 대체
무엇인고 하고 의아해하는 얼굴이었다.

로젤린은 마른가시나무 백작 성에서 먹었던 마카롱의 맛과 독수리 마카롱과 함께 즐겼던 체스 게임을 기억했다.
그녀의 표정이 환해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물론 이것이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아직 성채를 지키고 있다는 증거라고
설명하는 일은, 긴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이동하던 제국군은 마른가시나무 성채가 보이는 거리에서 다시 멈췄다. 여기저기 부서진 수레와 공성
무기들, 발타군의 시체와 군마의 사체, 여기저기 널브러진 무기까지. 치열한 전투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 선했다.

마른가시나무 성채는 척후병이 말했던 대로 한쪽 성벽 가운데가 와르르 무너져 있었다. 총 세 겹이나 되는 성벽을
뚫고 발타군이 기어이 진입했다는 것이었다. 성벽이 저 꼴이 되었는데 수성에 성공하다 못해, 완달 타탄을
몰아내기까지 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8 화.

경계하며 서서히 다가가는데 성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은빛 갑주를 입은 한 무리가 우르르 빠져나왔다. 다가오는
기사단의 위로 삐쭉 솟아 있는 깃발에는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뭉쳐 있던 기사단이
양쪽으로 갈라지자, 중앙에 있던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뒤에는 머리와 왼쪽 눈에 붕대를
둘둘 감은 기사단장 렉시드가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하얀밤 기사단을 대동한 채 제국군보다 앞서 나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그녀의 기사단이 자리에서 멈춰 서더니 말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씩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으며 심장 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리카르디스는 가만히 세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다가갔다. 세실을 직접 일으켜 세운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어깨를 잡은 채 지그시 눈을 맞췄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에게.”

그런 그들의 위로 독수리가 둥글게 날아다니며 길게 울었다. 삐이익. 병사들은 그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밝은 햇살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 * *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리카르디스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로젤린은 안장을 밟고 서서 성채의 내부를
천천히 훑었다. 기억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호기심이 생긴 로젤린이 말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레이몬드가
채 만류하기도 전에 로젤린은 사삭 벽을 타고 올랐다.

“로젤린 경은 건강해 보이는군요.”

그런 로젤린을 목격한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뒤쪽을 쳐다 본
리카르디스는 마치 한 마리의 도마뱀처럼 높은 망루를 오르는 로젤린을 볼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녀야 언제나 건강했지…….”

진즉에 포기한 것 같은 말투였다. 망루에 불쑥 나타난 로젤린 때문에 안에 있던 병사 두 명이 식겁했다. 그녀는


정중하게 사과한 후, 기둥을 잡고 난간 밖으로 몸을 쭉 뺐다. 넓은 마른가시나무 성채가 한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칼릭스와 함께 돌아다녔던 거리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미로?’

마치 거대한 미로 같았다. 있던 건물을 허물고, 건물과 건물을 연결해 벽을 만들고, 거리의 한 중앙에 석재와
흙으로 성벽을 쌓아 올리는 둥.

로젤린은 시선을 돌려 발타군의 유일한 진입로가 되었을 무너진 성벽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발타군이 들어온다. 짧은 화살이 많은 것으로 보아 성벽 위에 석궁 부대가 배치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공격받은 병사들이 쓰러지고 살아남은 자들은 앞으로 이동.

로젤린의 눈동자가 상상 속 발타의 병사들을 따르듯 움직였다. 그리고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제멋대로 변형시킨
거리 때문에 발타군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 끝에는 함정과 각각의 부대가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무언가가 터진
듯한 흔적과 불타서 무너진 가벽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그 길이 인도하는 것이 위험이라는 걸 깨달은 발타의 병사들은 벽을 무너뜨리는 방향을 택했다. 전투 도끼나


메이스 같은 날붙이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무너진 건물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건물 안에도
마찬가지로 함정이 있었고…….

로젤린은 집중해서 전투의 흔적을 읽어 냈다. 결과는 놀라웠다. 성벽 너머가 아닌 직접적인 맞대결을 하는
이상에야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의 피해가 없을 리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얼추 살피는 것만으로도 발타군의 피해가
백작군의 피해를 훨씬 웃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대체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 사는 사람들은 길을 어떻게 찾는 걸까 하고 의문이 들 정도로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거리. 그 거리가 최후의 보루가 되어 성채를 지켜 낸 것이었다.

“타탄의 늙은이는 영…… 감을 못 잡더군요.”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리카르디스는 그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감이라.”

“성벽이 무너지니 마른가시나무가 함락된 줄 알더군요. 그 의기양양한 함성 소리를 들려 드려야 하는데. 얼마나
가관이던지, 혼자 듣기 아까웠습니다. 성이야 무너지면 다시 쌓으면 되고, 건물도 마찬가지죠.”

“완달 타탄은?”

“그가 자랑하는 마인 부대가 오 분의 일로 줄어드니까, 잠깐 제정신으로 돌아온 모양이더군요. 황급하게


철수하고 돌아갔습니다. 물론 제 병사들이 순순히 보내 주지는 않았지만요. 전쟁에서 발생하는 인명 피해의
대다수는 적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갈 때이니 만큼, 으음.”

세실이 눈을 휘며 웃었다.

“손쉬웠지요.”
“마인 부대가 상대하기 쉬운 상대는 아니었을 텐데.”

“피해를 좀 입긴 했지요. 제 기사들도 많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흐트러진 머리를 살짝 뒤로 넘기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숨을 느리게 쉬는 걸 보니 올라오는 감정을


가다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완달 쪽이 조금 더 뼈아플 겁니다. 아까 노망난 영감이 감을 못 잡는다 말씀드렸지요. 그런 겁니다.


자신이 만든 마인 부대는 완벽하다. 강하다. 누구와 싸워도 이긴다…… 멍청하긴.”

세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싸늘하게 웃었다.

“마인도 머리에 화살이 꽂히고 불에 타면 죽습니다. 저들이 크레안 티다니온의 화신 뭐 그쯤인 줄 알고 있는


모양이던데. 그것도 혼자 보기 참 아깝더군요. 그래서 화공에게 그려 두라 했는데, 렉시드?”

렉시드가 준비했다는 듯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불타는 건물 속에서 괴로워하며 빠져나오는 발타 전사 몇몇이
그려져 있었다. 진짜 그려 둘 줄이야. 사람 성격 참 굉장했다.

“다음에 완달이 오거든 선물해 주려고 생각 중입니다. 좋아서 또 뒤로 넘어가겠지요.”

누가 들어도 날조였지만 리카르디스는 아군의 허물을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리카르디스는 마른가시나무


백작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했다. 병력을 추스른 후, 발타의 리비타로 진격. 궁에 있는 힉살라를 붙잡아
연합군의 분열을 야기한다는 내용이었다.

현 연합군에는 발타군과 마람 왕국, 그 외에도 몇몇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람을 포함한 연합군의 대다수가
발타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라는 것을 어떤 사람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발타군이 무너지면, 연합군 전체가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지금쯤이면 하카브도 제국군이 서서히 내려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겠지. 회군할 가능성이 높아.”

“저희도 빨리 움직여야 하겠군요.”

“그래야지. 방해물이 제법 있을 거다. 코코 사르체가 아문과 싱의 일부 병력이 발타에 남아 있다 말하더군.”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웃었다. 눈은 휘고, 입꼬리는 잔뜩 올라가 있었다. 나쁜 짓을


계획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힘을 실어 주겠나? 하카브가 오기 전까지 끝내야 하는 일이라 제법 바빠.”

“재밌어 보이는 일이로군요. 항상 막는 일만 하다가, 합법적으로 쳐들어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저의


사감 이전에 백성으로서의 의무가 갑자기 가슴 깊이 사무치지 뭡니까. 제국의 총사령관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어찌 영광이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퍽이나. 리카르디스가 표정으로 말하자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깔깔 웃었다.

* * *

발타의 수도, 리비타로 진격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숲 너머로 흙먼지가 이는 것이 보였다. 대군이
움직이지 않는 이상 저러한 현상이 일어날 리 없었다.
마른가시나무 성채 도시는 경계 상태로 돌입했다. 얼마 후 팔천여 명 쯤 되어 보이는 병력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른가시나무 성채에 가까이 접근하는 무리의 위로 깃발이 펄럭였다. 누군가가 외쳤다.

“사자갈기다!”

같은 일라베니아군이라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은 경계를 풀었으나, 더욱 날카롭게 경계심을 갈게 된 이들도 있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리카르디스는 집무실로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총사령관님을 뵙습니다.”

준수하게 생긴 남자가 눈웃음 짓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속에서 뭔가 울컥 받치는 기분이 들었다.

“드윗 아르페커.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드윗 아르페커. 건국제 무도회 때에 로젤린에게 집적거렸던 남자였다. 키스했다는 것이 오해라 깨닫기는 했으나
한 번 자라난 악감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자마자 꺼지라는 뜻을 내보였음에도 드윗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착석할 뿐이었다.

“남부에서 험난한 전투를 치르는 총사령관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기 위해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리카르디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시늉을 하자 드윗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총사령관님께서 별다른 수작을 부리지는 않는지 걱정하신 황제 폐하께서!”

“이제야 대화가 통하겠군.”

반쯤 몸을 일으켰던 리카르디스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드윗 아르페커는 엘피디오의 죽음 전에 로젤린에게


접촉하여 변절의 의지를 보인 자였다. 그 이후로 얘기를 한번 나누기는 했으나 영 믿음이 가지 않아서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헤어졌다.

한데 공교롭게도 드윗이 황제의 감시역으로 발탁된 모양이었다. 기막힌 인선이라고 할지, 기가 차는 인선이라고
할지 아직까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대가 도착한 시기로 보아, 아마 놋쇠저울 영지에서 있었던 전투 이후 곧바로 출발한 것 같은데.”

“정확하십니다. 라헤안시 대신관님께서 예언인가 뭔가를 하셨다던데, 그 건으로 황제 폐하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하십니다.”

라헤안시가 들르는 곳마다 사기 친 행각이 황실에 낱낱이 알려진 모양이었다. 오지 않은 시간을 볼 수 있는


영험한 대신관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신의 아들. 신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얘기였다.

209 화.

황제가 불안해하리란 것쯤은 예상했으나 감시역이 파견되는 것이 생각보다도 빨랐다. 리카르디스가 실소를
터트렸다.

“옆에서 지켜보다가 수상한 짓을 하려는 것 같으면 죽이라 하던가?”

“마치 황제 폐하와 저의 밀담을 들으신 것만 같군요. 정확하게 ‘수상한 짓’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리카르디스가 턱을 괴며 드윗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서늘한 미소가 그의 입가를 감돌았다.

“수상한 짓을 아주 적극적으로 할 예정인데…… 어디 한번 죽여 볼 텐가?”

한 3 초 정도 숨을 멈췄던 드윗이 애수 어린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총사령관님의 충성스러운 가신인 저는 그런 무서운 얘기는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보이십니까?”

드윗이 소매를 걷어 팔을 내보였다. 리카르디스가 별 반응이 없자 그도 다시 원래의 태도로 돌아왔다. 손으로


계속 소매를 만지작거리는 걸 보니 좀 민망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어쩌다 여기에 그대가 오게 된 거지? 황제 폐하께서 사자갈기 공작가의 후계자를 전쟁터로 내몰 리가 없을


텐데.”

“자원했습니다.”

천연덕스러운 그의 대답에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술렁였다.

“제국의 황자라는 사람이 발타의 전쟁을 앞세워 몰래 공작질을 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펄펄
날뛰었습니다. 다소 위험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제국의 역사와 함께해 온 사자갈기로서 어떻게 이런 무도한 일을
방관할 수 있겠느냐 하니 황제 폐하께서 무척이나 기뻐하시더군요.”

“……기뻐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도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드윗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푸른등불, 사자갈기, 붉은수레바퀴 등등. 제국의 긴 역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름들입니다. 그 중


사자갈기는 역사서의 한 장 한 장에 등장할 정도로…….”

드윗은 적절한 단어를 고르지 못하겠는지 잠시 고민했다.

“많이 나댔지요.”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 대로였기 때문에.

“보통 이 일 저 일, 할 것 없이 나서는 가문의 운명은 둘 중 하나입니다. 득세하거나, 몰락하거나. 어떻게


어떻게 권력을 얻는다고 해도 그건 한시적인 현상입니다. 계속해서 중앙에서 구르다 보면 반드시 꺾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자갈기는 그 긴 시간 동안 황실과 나란히 발걸음을 했습니다. 이건 단순히 운이 좋다고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전하.”

황실과 엮인 가문의 비밀 같은 것이 나오는 건가. 리카르디스가 드윗의 말에 집중했다.

“사자갈기의 후계자들은 대대로 가라앉을 배를 기가 막히게 알아봅니다.”

“…….”

“척 보면 아, 여기에 걸면 망하겠구나 이게 다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엘피디오나 황제 폐하께 걸면 망할 것 같던가?”


“그게 제가 여기 있는 이유 아니겠습니까.”

리카르디스는 턱을 괸 채 콧방귀를 뀌었다. 드윗이 그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리카르디스는 드윗이 등장하기 전


보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그대의 감이 맞기를 바라야겠군.”

둘러 둘러 말하는 긍정적인 표현에 드윗의 표정이 환해졌다.

22

일라베니아 제국군은 마른가시나무와 사자갈기의 병력을 흡수해 덩치를 불린 뒤, 빠르게 남하했다. 제국군이
향하는 목적지는 ‘싱’으로, 발타의 수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영지였다.

정확한 정보가 없는 터라 싱에 남아 있는 병력이 몇인지, 병력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행히도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자가 한 명 있었다. 소금바위 성채에서 로젤린이 잡아 온 발타군의 지휘관,
차가였다. 그는 자신이 언제 발타의 편이었냐는 양 아는 모든 정보를 술술 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싱만큼은 병력을 보존해 두었다고 들었습니다. 국경과 가까운 영지이다 보니
마른가시나무 성채와 같은 역할을 하거든요. 아, 그리고 요새에 가주 두 명이 다 남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원정군에 포함되기에는 어린 나이라서요.”

국경 다음의 방벽이나 다름없다는 얘기였다. 리카르디스가 차가의 얘기를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연합군이 회군할 가능성이 있는 시점에서 공성전을 치른답시고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었다. 병력을 분산시키기에는
리비타의 방비 또한 만만하지 않았다.

그때 척후병이 들어와 급하게 소식을 알렸다. 먼 거리 밖에서 일만 여명 쯤 되는 병력이 접근 중이며, 싱의


깃발을 들고 있다고 했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웬…… 굴러온 행운이지?

성벽 너머의 적보다 당연히 성벽 밖의 적이 상대하기 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몇 배에 해당하는


적에게 돌진하려 하다니, 용기가 가상한 건지 멍청한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때 차가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지휘부 막사의 이목이 그에게로 모였다.

“제국군 본대를 치러 오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타탄님께서 지원을 요청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른가시나무 성채에서 승패가 갈린 게 며칠 안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장기전으로 접어들기 전에 승부를 내기 위해 지원을 요청하셨다고 하면 얼추 시기가 맞는 것 같은데요.”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라베니아 제국군에 비해 한참 적은 수의 병력으로 전면전을 치르려는 미친


사령관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목적지는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인 듯했다. 애석하게도 도달하지 못할 테지만.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돌려 마른가시나무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대를 보고 싶어 한다는데, 백작.”

“기대에 부응을 해 줘야겠군요.”

세실이 생긋 웃었다.

진지를 구축하고 함정을 만들 만한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싱 측에서는 제국군의 존재를 모른다는 점에서,
일라베니아에게는 더 없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정면에서 제국군 본대가 상대하는 동안 멀리 돌아간 두 개의
별동대, 로젤린이 이끄는 중장기병대와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이끄는 관문 주둔군이 양옆에서 공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혼란스러운 전장 속 거세게 가해지는 심리적 압박은 유일하게 열려 있는 퇴로의 존재를 집중하게 만들 것이다.

“솔직히 나라고 해도 로젤린 경과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양쪽에서 합공하면 항복할 것 같거든.”

그 말을 들은 당사자 두 사람은 농담도 참 잘한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리카르디스는 진심이었다.

* * *

쌍둥이 남매 남라와 바유는 마른가시나무 성채를 공략 중인 완달 타탄을 지원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소년이 손을 움직여 가며 수화로 무어라 얘기했다. 그걸 본 남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바유. 가야 돼. 언제까지 어리다고 뒤에 물러서 있을 수는 없어. 게다가 싸우는 건 우리가 아닌걸.
타탄의 가주에게 군대만 빌려주면 되는 문제야.”

‘그러면 장군들만 가도 되는 거잖아.’

소녀가 씨익 하고 콧김을 뿜었다.

“완달 타탄이 맨날 어리다고 무시하잖아! 허허, 직접 올 줄 알았는데…… 장군 두 명에게 지휘권을 줘서


보내다니. 아직은 검보다 장난감이 좋을 나이긴 하지. 하면서 낮잡아 볼 게 빤하다고! 그냥 우리는 딱 자리를
지키고 있기만 하면 돼. 그리고 성채가 함락되면, 다시 싱으로 돌아오면 되는 거고. 쉽지? 전쟁 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쉬운 임무를 맡고 있는 거야.”

바유의 손가락이 분주하게 글자를 그려 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있을 텐데.’

“참나, 성채에 갇혀서 버티기만 하는 사람이 뭐가 무서워. 타탄군에게 아주 쩔쩔매고 있다던데.”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목소리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누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남라 님 말씀이 맞습니다. 방벽 뒤에 숨어서 크게 짖는 재주밖에 없는 여자입니다. 미친개다, 뭐다 하지만


관문이 무너진 이후로 성채에 콕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 것만 봐도 빤하지 않습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가문 휘하의 장수, 자르파였다. 가문 내에서도 손에 꼽히게 강한 남자였다. 그런 자르파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모습에서 남매는 두려움을 떨칠 만큼의 충분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자르파는 그 유명한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도 ‘소문만 무성하지 별거 아닐 거다’라고 말했던 놈입니다. 어느
정도 걸러 들으셔야겠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된다는 점만큼은 저도 자르파와 의견이 같습니다.”

싱의 또 다른 장수 아만이 웃는 얼굴로 자르파를 공격했다.

“열어 보면 막상 별것 아닌 것들이 많지.”

흥, 자르파가 콧방귀를 뀌었다.

부우우우.

그 순간 뿔피리가 울려 퍼졌다. 군마들이 흥분해 날뛰었다. 마차도 크게 흔들려 소녀와 소년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수백, 수천. 헤아릴 수도 없이 수많은 금속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적습이다!”

갑작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에 남라는 정신 못 차리고 휩쓸려 갔다. 마차 바닥에 쓰러져 덜덜 떨기만 하는 남라를
바유가 꽉 끌어안았다.

“전투 준비!”

“진형을 갖춰라!”

아만과 자르파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제국군이 곧 물밀 듯 밀려왔다. 긴 창을 든 기병대 앞에


발타군의 전열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하지만 수가 적어도 발타군의 정예병들이었다. 전투태세를 제대로 갖추자 전황은 차츰 안정되어 갔다. 전면에
있는 제국군을 막아 내기 위한 최상의 진형이 갖춰졌을 무렵.

부우우.

뿔피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곧 발타군의 비어 있는 양 측면으로 제국군이 쏟아졌다. 싱의 장군, 자르파와


라닉은 시시각각 빠르게 변하는 전황을 파악하고 지휘를 바꿨다.

전면과 양 측면이 틀어 막힌 상황이었다. 후미가 유일하게 비어 있긴 하지만, 이것은 제국군이 일부러 열어 둔


것이었다.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적만큼 쉬운 상대는 없으니까. 한, 두 사람 달아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패배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르파가 소리쳤다.

“살고 싶다면 무기를 들고 싸워라!”

자르파의 눈동자가 바람에 휘날리는 마른가시나무 백작 기에 닿았다. 그 앞에 선 발타의 병사들이 겁을 먹은 듯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마른가시나무군은 그 찰나의 머뭇거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메이스로 머리를 으깨며 웃고
있는 미치광이 같은 몰골이 섬뜩했다.

210 화.

왼쪽 측면부터 사기가 훅훅 깎여 나가는 것이 보였다. 한 번 꺾인 마음을 다시 세우는 것은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자르파는 무엇보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을 흔드는 일이 지금의 전황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라 판단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을 상대하는 측면을 지원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자르파는 뒤에서부터 덮쳐 오는 기운에
우뚝 멈춰 섰다.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마른가시나무군의 반대편에서 쏟아져 오는 수천 기의 중갑기병들이 있는
곳이었다.

정제된 칼날처럼 절도 있고 강력했다. 하지만 그 수천 기의 기병들보다, 선두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존재가 단연


눈에 띄었다.

검은 군마를 탄 기사. 자르파와 라닉은 그 기사가 반드시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일 거라 직감했다. 단순히 그
기사가 보이는 압도적인 힘뿐만이 아닌, 마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기운의 크기 때문이었다.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그녀의 마력은 몸 안을 타고 돌 뿐만 아니라 살기처럼 너울거리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전장에 있는 모든 마인들이 느꼈다. 이 넓은 공간, 소용돌이의 중심은 그녀였다.

자르파와 라닉은 그녀를 쓰러트리지 않는 이상 길이 열리지 않으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 * *

로젤린의 눈이 재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제국군에는 수도 상비군과 변경 주둔군, 그리고 징집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비군, 주둔군과 달리 많은 수를 차지하는 대다수의 병사들은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못했다.
평범한 농민과 상인에게 갑옷과 검을 들려 보낸 것이라 봐야 했다.

그 때문인지 일반 징집병이 많이 포함된 정면은 발타 정예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로젤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이상한걸.’

아무리 정예병이라고는 해도 발타군은 기습을 당한 입장이었다. 거기에다 얼핏 보아도 제국군의 병력이 훨씬


그들을 웃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을 텐데. 그런 와중에 물러서기는커녕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니.

거대한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져 체계적으로 전투를 치르는 발타군. 그것은 그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가
뛰어나다는 것을 이르고 있었다.

로젤린의 머릿속으로 정보가 빠르게 지나쳐 갔다. 싱의 가주는 어리다. 그리고 그 어린 가주를 대신하여 몇몇
장수가 군을 통솔한다. 일라베니아도 지휘관에 대한 의존도가 낮다 말할 수 없으나, 싱의 경우에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장군을 잡아야 한다.’

로젤린은 뒤를 따르는 레티시아에게 명령했다.

“잔챙이들은 두고 돌파한다.”

“돌파한다!”

로젤린은 앞을 막는 병사들을 하나, 둘 쳐 내며 전진했다. 필요한 때를 대비해서 마력을 크게 사용하지 않고


필요한 순간마다 조금씩 운용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인지, 그녀의 마력을 감지한 누군가가 서서히
다가왔다. 그 또한 숨기지 않고 마력을 사용하고 있어 로젤린도 점차 접근하는 자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다.
흙먼지가 이는 전장. 검과 창, 거대한 갑옷을 입은 사람들로 시야가 어지럽혀져 있었으나, 그들은 마주친 순간
서로를 알아보았다.

쾅!

로젤린의 창과 자르파의 도끼가 충돌하며 전장 속 모든 이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소음을 만들어 내었다.
제국군의 장수와 발타군의 장수가 만나자 틈 없이 공간을 메우고 있던 병사들이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발타군과 제국군은 전투를 멈추고 로젤린과 자르파를 지켜보았다. 순식간에 간이 투기장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두
사람의 승패에 따라 오른쪽 측면의 전황이 뒤바뀌게 될 것이다. 갑옷을 착용한 로젤린보다 두 배는 더 큰 거구의
남자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만한 힘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는 게 일라베니아 놈들의 앞잡이라니!”

로젤린은 창을 한 바퀴 휙 돌려 피를 털어 내었다. 창끝이 바닥을 향했다.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겠군.”

“이 자르파, 여기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전의를 불태우던 자르파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끊겼다. 그의 시선이 거대한 흑마 위에 앉아 있는 로젤린의 투구를
향했다. 그림자 진 안쪽에서 그녀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자르파는 로젤린에게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마력을 느꼈다. 여태껏 사용하던 마력은 호수에서 물 한 양동이를
사용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느낄 수 있었다. 기세를 펼치기 시작한 그녀의 진정한 저력은
너무 거대해서 미처 가늠할 수도 없었다.

지진이 땅을 흔들고, 바다 너머 높은 파도가 몰아친다. 리비타의 그 어떤 큰 성보다도 높은 파도가 바로


코앞까지 당도해, 곧 자신을 덮쳐 버리리라.

아득히 높은 곳에서 절대적인 존재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히 쳐다볼 수도, 감히 대적할 수도 없는 기운이었다.
모든 의지가 바스라 흩어졌다.

자르파의 몸이 소름 끼치는 기운에 반응해 떨렸다. 땀이 뚝뚝 떨어지며 그의 눈가에 스며들었다. 눈을 깜박,


감았다 뜬 사이 갑작스럽게 시야가 바뀌었다. 땅과 하늘이 뒤집어졌다.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인가 했더니, 아.

‘머리가 잘렸군.’

자르파의 머리가 흙바닥 위를 굴렀다.

* * *

거대한 감옥 수레 안, 작달막한 쌍둥이가 중앙에 몰려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생각보다도…… 어리군.’

라고슈의 바이페렘보다는 나이가 있어 보이긴 했지만 싱의 가주들도 어리기는 매한가지였다.

“가주가 두 사람이라니. 좋군요. 한 명은 없어도 되겠습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밥이나 먹자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쌍둥이가 동시에 흠칫 몸을 굳혔다.

“처형하라는 것인가?”

리카르디스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자,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눈을 크게 뜨며 답했다.

“세상에, 총사령관님. 교섭 역으로 한 명을 보내자는 얘기였습니다.”

천하의 몹쓸 놈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억울함을 애써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겠군.”

한 명을 남기고 한 명을 싱의 성으로 돌려보낸다. 가주의 권한으로 싱의 성문을 열 수 있으리라.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기사단장 렉시드에게 “피도 눈물도 없으시다니깐.” 하면서 놀리는 어조로 속닥거렸다.

예정에 없던 전투를 치른 제국군은 수습과 재정비를 마친 후 다시 진군했다. 싱의 영지는 전투가 일어났던


곳으로부터 며칠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제국군은 성채가 보이기 전에 멈춰 서서 방어하기 좋은 지형지에
진지를 구축했다. 교섭이 결렬되어 전투가 일어날 가능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한데, 상황은 또다시 묘하게 돌아갔다. 교섭을 위해 먼저 싱의 성채를 찾아갔던 전령과 함께 돌아온 어느 남자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 또한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최근에도 건국제 무도회에서 봤었다.

힐리사고의 왕자였다. 통통한 남자가 무릎 한쪽을 꿇으며 리카르디스의 망토에 입을 맞췄다. 비대한 몸을 가졌던
힐리사고의 왕자는 그 짧은 사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일라베니아 황실이 힐리사고를 쥐어짰다더니, 그간 겪어 온
마음고생이 눈으로 보였다.

어수선해졌던 막사를 정리하고 나서야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현재 싱은 힐리사고군이 점령 중입니다! 병력이 빠진 덕에 쉽게 함락할 수 있었습니다.”

남라와 바유가 병사들을 이끌고 떠난 사이 일어난 일인 듯했다. 참 때를 잘 맞춘 듯했다. 왕자는 사명감에


이글이글 불타는 표정이었다.

“디에즈 황자가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디에즈 황자와 저희 힐리사고와는


어떠한 연도 없음을, 이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입증하겠습니다. 일라베니아의 충실한 손과 발이 되어!”

힐리사고 왕국은 라고슈와 발타 다음으로 큰 대륙의 나라로 일라베니아의 신하 역할을 자처하는 곳이었다. 황제의
말 한마디에 왕실의 후계자를 갈아치우는 일도 빈번할 정도였다.

한데 힐리사고 왕국, 한미한 귀족 가문의 핏줄인 디에즈가 일라베니아의 뒤통수를 치고 발타로 떠났다.
일라베니아와 끈을 하나 대어 놓았다 흡족해하던 힐리사고 왕실 입장에서는 황당하다 못해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으리라.

리카르디스야 디에즈의 속에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알고 있으나,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맹을
요청한 나라들 중 가장 먼저 도착한 것만 봐도 그들의 다급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제국군이 리비타로 향하겠다 언질한 적은 없었지만, 동향을 보고 힉살라를 노린다 깨닫고 싱을 미리 함락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리카르디스는 오랜만에 미소를 보이며 왕자의 지원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왕자는 뛸 듯이 기뻐했다.
“리비타의 독특한 구조 때문에 공성에 시간이 제법 걸릴 겁니다. 왕자가 점령한 싱이 연합군을 막는 방벽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맡겨만 주시지요! 힐리사고의 정예병 2 만이 싱의 요새와 함께 동맹군을 반드시 막아 내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힐리사고군의 합류로 바뀌게 된 전략과 전술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차근차근 원하는 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사실 이런 때야 말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때였다. 승리가 익숙해져 당연해져 갈 때. 전쟁에 ‘
무조건’이라든지 ‘반드시’와 같은 말은 있을 리 없으니.

* * *

“네 두 눈이 날 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몹시 불쾌해.”

“아, 아닙니다.”

“사람을 왜 착각하게 만들어. 행실 똑바로 하고 다녀.”

“예! 죄송합니다!”

스타스는 저 멀리에서 애먼 병사한테 시비 걸고 있는 과거 월장석 시녀, 미레이미를 발견했다. 로젤린이 자리를


비울 때면 항상 리카르디스의 옆에 있는 그녀의 정체는 알음알음 알려졌다.

로젤린 경의 친구다. 마인이다. 리카르디스 전하의 특별 호위다. 성격이 더럽다. 눈을 마주치면 공격당한다.
소문이란 대개 믿을 수 없는 허황한 말로 이루어져 있으나, 미레이미의 경우에는 제법 정확한 경우가 많았다.

예의가 필요 없는 곳이라 벗어던졌다는 그녀는 소위 ‘싸가지’라는 것을 대신 걸친 듯 했다. 표정은 언제나


부루퉁하고, 시선은 날카로웠으며, 태도는 뒷골목 건달같이 불량했다.

하지만 그 모든 태도가 허용될 수 있는 것은, 미미의 실력 덕분이었다. 소금바위 성채에서 리카르디스를 구한


이후, 미미는 세 사람의 암살자를 더 잡아냈다. 마인도 있었고, 마인이 아닌 자도 있었다.

심지어는 살해 시도를 하기도 전에 수상함을 포착하는 능력까지 있었는데, 스타스는 그 모습에서 로젤린을 연상할
수 있었다.

211 화.

“미미 양.”

검지와 중지만 펼쳐 병사의 두 눈과 자신의 눈을 교대로 가리키고 있던 미미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스타스의
얼굴을 확인하고 난 후 싸늘한 표정을 거뒀다. 여전히 무표정에 가깝긴 했지만.

“단장님. 무슨 일 있나요?”

굳이 말하자면 오늘 하루 고단했을 병사를 괴롭히지 말라는 용건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에


스타스는 말을 더듬거리다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다들 쉬고 있는데, 미미 양도 쉬는 게 좋지 않겠나. 저기에서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모닥불에 고구마를 구워


먹던데.”

“누가 포함되어 있을지 빤하군요. 코 밑에 검댕이 묻는 것도 모르고 또 좋다고 먹고 있겠지.”


스타스는 미미의 말투에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로젤린과 친구라 했지만, 그보다 더 친밀해 보였다.
마인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까? 가족처럼 보일 때도 종종 있었다.

“권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제가 가면 단란한 분위기가 깨질 것 같군요. 아직 저를 불편해하는 기사 분들이


있어서 말이죠.”

마카롱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억지로 하하 호호 웃을 마음은 추호도 없어서 사실을 변명처럼 앞세웠다. 한데,
그 말을 들은 스타스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무뚝뚝한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예민한 마카롱은 그의 얼굴 근육이 아주 미세하게 바뀌었음을 포착해 냈다. 최근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다 무너진 마을에서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마른 강아지를 볼 때의 표정이었다.

그 취급이 어이없었던 마카롱이 눈살을 찌푸렸다. 잘생긴 얼굴을 보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뭐라 하려던
참이었다.

“……나는 미미 양이 불편하지 않은데. 같이 좀 걷겠나?”

마카롱은 입을 벌린 채, 몇 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스타스는 좀 쑥스러운 듯 보였다. 권유와 대답의 틈이


벌어질수록 침묵이 더욱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마카롱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 뭐…… 네.”

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삼켰다는 걸 스타스도 눈치챘다. 두 사람은 막사가 세워져 있는 곳을 벗어나 한적한


숲길을 걸었다. 스타스는 마카롱이 어디 한 곳을 뚫어지라 보고 있는 모습에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잘린
손목이 있었다. 낮의 전투가 이뤄졌던 곳이라 아직까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스타스가 슬쩍 걸음을 옮겨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마카롱이 피식 웃었다. 귀여운 짓을 다 한다 싶었다.


암살자들을 두들겨 패고 반죽음 만들던 광경을 봤으면서도 아직 월장석 성의 ‘미미 양’을 대하듯 하지 않은가.

두 사람은 적당한 공터에서 멈췄다. 마카롱이 쓰러진 나무에 앉으려 하자 스타스가 손수건을 꺼내어 깔아 줬다.
갑자기 손수건을 전시하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마카롱은 손수건을 피해 다른 곳에 앉았다. 스타스가 어색하게
손수건을 회수했다.

마카롱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히 많은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마시겠나?”

스타스가 건넨 건 물주머니였다. 마개를 뽑으니 청량한 술 향기가 퍼져 나왔다. 마카롱은 이 물주머니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까 전 고래무덤의 파르딕트가 가지고 있던 술이었다. 몰래 물주머니에 넣어 마시다 기사단장인
스타스에게 딱 걸려서 압수당한 것이었는데, 그게 여기서 나올 줄이야. 마카롱은 주머니를 받으며 입맛을 다셨다.

“군령 위법이라 들었는데.”

“……가끔은 융통성도 필요한 법이니까.”

융통성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이라 신기했다.

“좋은 말이네요, 융통성. 제가 그거 하나는 끝내주거든요.”


그녀의 경우에는 융통성이 있다기보다는 무법자라는 단어가 좀 더 어울렸다. 미미가 술 주머니를 기울여 벌컥벌컥
마셨다. 입가로 술이 흘러내렸다. 스타스가 다시 급하게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제야 손수건이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 셈이었다.

“어허! 좋다. 이거 비싼 거네요. 한 모금 드실래요?”

“……음, 그. 아니. 괜찮네.”

예의상 물어봤던 미미는 시시덕거리며 아주 조금 그를 향해 내밀었던 술 주머니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스타스는 잠시 흐트러졌던 머리를 만지작거리다 본론을 꺼내었다.

“지내는데 특별하게 불편한 점이라도 있나?”

“아뇨 뭐, 다들 잘 해 주고…… 아닌가, 잘 해 주지 까진 않지만, 특별히 나쁠 것도 없어요.”

그녀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게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거기에다가 일라베니아
제국의, 일라베니아 제국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이라니. 마카롱은 로젤린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디에즈와 함께
행동하고 있었을 거라 강하게 확신했다.

마카롱의 대답에 스타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카롱은 그걸 눈치채고 술 주머니를 흔들며 한마디 덧붙였다.

“단장님께서 직접 술을 주시는 건 좋네요.”

“그런가.”

그가 살짝 미소 지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니 볼에 보조개가 파였다. 마카롱이 그의 얼굴을 훑으며 감상했다. 다른


놈들에게 보조개가 달려 있을 때에는 흠이 있는 감자 같아 보였는데, 잘생긴 사람 얼굴에 있으니 완전히 달랐다.

신이 스타스를 만들고 너무 흡족해서 만지작거리다가 생긴 흔적 같았다. 마카롱이 빤히 바라보자 스타스가 제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슥슥 쓸었다.

“음,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미미 양의 입장에서는 제국군을 돕는 일이 힘들었을 것 같아서 말이네.”

마카롱의 진정한 정체는 알지 못하지만, 일라베니아의 마인. 그것만으로도 사실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마카롱은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한번 술을 홀짝였다.

“로젤린 경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그냥…….”

남자가 말을 끌었다. 마카롱이 피식 웃었다.

“뭘요. 전쟁 끝나면 한몫 챙길 건데.”

리카르디스가 일라베니아 황제가 되면 일라베니아를 반 토막 내고 신전을 부수라고 해야지. 안 해 주면 내가 반


토막 내 버려야지, 와 같은 살벌한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스타스는 씁쓸하다는 듯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마카롱이 입맛을 다시며 스타스에게 물었다.

“단장님은 어쩌다 전하를 지키게 된 거죠?”

할 말이 없어서 꺼낸 의미 없는 질문인데 답이 돌아오는 게 늦었다. 마카롱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스타스는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며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생각에 깊이 빠진 표정이었다. 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기사단이 하나 창설될 때에 단장직을 맡게 되는 이는 기존 황실 기사에서 발탁이 되는 게 관례라네. 자격이 되는


이들이 자원하는 식이지. 그런데 리카르디스 전하의 호위 기사단의 단장직은 …… 그러니까, 신생 기사단인
데다가 불확실한 요소가 많았으니…….”

머뭇거리는 스타스를 대신해 마카롱이 말했다.

“아무도 지원 안 했다는 거로군요.”

“……음.”

그때 당시 거대했던 엘피디오의 세력을 등지고 누가 감히 용감하게 나설 수 있겠느냐마는, 정말 한 명도 자원하는


자가 없었다.

“제비뽑기로 해서 단장님이 뽑히신 건가요? 그림이 좀 별로인데.”

스타스가 동의한다는 듯 웃었다.

아직 어렸던 리카르디스는 자신을 보호하러 오는 상급 기사들에게 몇 번 단장직을 권했다. 소년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해 친근하게 대해 주려던 기사들조차도 그 권유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 큰 남자들의 변명을 듣는 소년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알겠다 대답했다고 한다. 자존심이 상하고 불안했을 법도
했는데, 전혀 그런 기색을 읽을 수 없었다고. 스타스는 어린 2 황자가 영특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때의 위험한
상황을 깊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당시 중앙을 무대로 활동하지 않았던 스타스가 리카르디스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황실 도서관에서만
열람할 수 있는 귀중한 서적을 보러 몇 개월 만에 들린 것이었는데, 거기에 리카르디스가 있었다.

책상 위에 두꺼운 책을 잔뜩 쌓아 두고 읽고 있는 은발의 소년을 본 순간, 스타스는 그가 소문의 2 황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카르디스는 여기저기 지나다니는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도 빠르게 책을 넘기며 종이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돌연 리카르디스가 갑작스럽게 손을 움직여 얼굴을 퍽 쳤다. 자세히 보니 코를 틀어막은 것이었다. 그의


손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잠시 그대로 있던 소년이 고개를 젖혔다.

주위를 둘러보니 호위 기사들이 있었지만, 각기 졸거나 다른 짓을 하고 있어서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타스는 짧게 혀를 차고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머리를 젖히시면 안 됩니다.]

머리통에 손을 대는 낯선 이 때문인지 소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적의 없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리카르디스는


스타스의 말을 따라 곧 고개를 숙였다. 스타스는 리카르디스의 목덜미와 뒤통수에 손을 댄 채, 소년의 콧대를
아프지 않게 압박했다. 그러고도 피가 멎지 않아 이십 분을 더 있어야 했다.

[그대는?]

[가을안개 백작, 스타스라고 합니다.]


[고맙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잘 멎지 않아서 조금 당황했는데 덕분에 잘 넘어갔다.]

스타스가 건넨 손수건으로 피를 닦은 소년이 겸연쩍은 듯 웃었다.

[이 손수건은 내가…….]

돌려주겠다 말하려던 것 같았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거기에서 더 말을 잇지 않았다. 호의에 보답하고자 선물을
보내려 한다 해도, 막상 받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으리란 계산이 끝난 모양이었다. 이 황실 누구라도
엘피디오와 황후의 눈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소년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손수건만 만지작거렸다. 언어, 산술, 역사, 문화, 정치, 사상, 철학, 제왕학.
어른들도 펴자마자 덮어 버릴 것 같은 복잡한 책을 읽는 명석한 소년이 그 나이 대의 어린아이로 보였다. 연약한
기대감이 피로 젖은 손수건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손수건은 제가 가까운 시일 내에 돌려받으러 가겠습니다.]

자기 자신도 이해 못할 만큼 충동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스타스는 그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애써


담대하게 가슴을 펴고 있으려던 소년의 입꼬리가 움찔움찔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가슴 깊게 눌러
둔 짐이 덜어진 기분이었다.

그 우연한 만남이 약혼녀를 잃은 슬픔으로 황실 기사단을 떠났던 스타스를 다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전 얼음창 기사단 단장 스타스가 하얀밤 기사단 단장 스타스가 되었다.

212 화.

“아, 알죠, 잘 알죠. 어이구 짠한 거, 이 생각 들면 끝난 거라니까. 못 이겨요.”

미미는 너무나도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우들조차 종종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냐’라든지 ‘목숨 아까운 줄 모른다’라고 얘기했는데. 암암리에


전투용 다람쥐라고 불리는 미미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기분이 모호했다. 강한 사람이 뒷배가 되어 과거의
자신을 옹호해 주는 느낌이었다.

“이제 보니 단장님이 저랑 통하는 데가 있었네. 어휴. 저나 단장님이나 고생 참 많네요.”

그녀의 말이 굉장히 웃겼던 터라 스타스는 잠깐 입을 가리고 웃었다. 미미가 보물처럼 꽉 쥐고 있던 술 주머니를


그에게 내밀었다. 고생 참 많은 동지끼리 한잔하자는 뜻인 듯했다.

스타스는 그녀에게 건네받아 술을 한 모금 마셨다가 순간 도로 내뱉을 뻔했다. 마시자마자 식도가 타들어 가는


착각이 들 정도의 독주였다. 미미에게 돌려주니 그녀가 마저 주머니를 비우고 일어났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요? 피보호자가 눈앞에서 오랫동안 안 보이면 불안하잖아요.”

“그건…… 그렇군.”

정말 통하는 데가 있었다. 스타스는 다시 한번 웃음을 흘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빛이 비추는 길을 따라 그녀와
함께 걸었다.

* * *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졌다.

“올겨울은 비가 많이 내리는군.”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로젤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빛 먹구름에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제국군은 전투가 있던 날로부터 며칠 거리에 떨어져 있는 발타의 강에 도달했다. 계속된 궂은 날씨 때문에 진군


속도가 더뎌져, 예상했던 날보다 며칠 늦어진 상황이었다. 조급해하던 리카르디스는 눈앞에 무너져 있는 다리를
보고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며칠 내내 내린 비로 강의 폭이 넓어지고 유속이 빨라진데다 다리마저 모두 부서져 있었다. 길이 막힌 것이다.


하카브가 동맹군을 이끌고 출정할 당시,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해 다리를 부수고 간 것일까?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국군이 발타의 영토를 침범하리라 예측했다고?’

아니 그렇다 해도 지원군이 지나가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이렇게 무턱대고 저지를 리가…….

싱의 군대는 힐리사고 왕국군이 완전히 격파했다고 들었다. 그중 일부가 살아남았을지도 모르지만, 도망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크고 견고한 다리를 부술 만한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근처 요새의 발타 수비군들이 일라베니아 제국군이 온다는 정보를 접해, 시급하게 부쉈을 수도 있다.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지만 찝찝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리카르디스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강의 물결만을 바라보자, 스타스가 뒤에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강의 하류와 상류에 다리가 하나씩 더 놓여 있습니다. 리비타와 가까운 쪽은 하류입니다.”

리카르디스는 묘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고심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상류로 간다.”

제국군이 떠난 자리. 다리가 부서져 있는 강가에 비밀스러운 암호가 남겨졌다.

[일라베니아 제국군이 상류로 이동.]

배반자의 속삭임은 누군가에게로 닿아 멀리 퍼졌다.

* * *

하루를 더 걷고서야 상류의 다리에 도착했다. 그 무렵에는 비가 그쳐 먹구름 사이로 햇빛이 드문드문 들어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상류의 다리는 무사했다. 부수다가 중단한 것인지 다리 여기저기에 거친 흠집이 나 있었지만, 제 기능을
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문제는 그 다리를 방어하고 있는 수비대가 있다는 점이었다. 다리로 가는 길목에 흙벽을 쌓아 진지를 구축한
상태였다.

넓은 땅이 아닌 좁은 다리 위에서 일어나는 전투였기에 수의 이점으로 찍어 누를 수는 없었다. 어떤 부대를


내보내야 하나 리카르디스가 고심하던 중, 앞서 일부 합류했던 힐리사고 부대의 지휘관이 용맹한 모습을 보여
드리겠다며 나섰다.

거칠고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힐리사고군의 위력은 리카르디스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동맹국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기에, 발타의 수비대와 교전할 상대로 힐리사고의 부대가 발탁되었다.

곧 전투가 시작되었다.

힐리사고군이 발타의 수비대와 교전하는 사이, 제국군의 지휘부는 강을 건널 방법을 모색해 보았다. 하지만
며칠간 내린 비로 수심이 깊어져 있어 다리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제국군은 그대로 발이 묶인 채 전투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발타 수비대의 방어는 견고했다. 한정된 좁은 면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실력이 뛰어난 탓도 있었다. 어느
군대의 정예 병력이라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초조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잘근 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스타스가 손수건을 꺼내어 그의 손을
닦아 주었다. 리카르디스가 겸연쩍은 듯 웃었다.

시간이 점차 흐르며 해가 기울었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은 높은 지대 위에 올라서서 전투의 흐름을 살폈다. 여전히 엎치락뒤치락하며 답보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대로는 오늘이 가기 전까지 다리를 건너지 못할 것 같았다.

“사상자가…… 적은 편이군요.”

잠시간 전장을 바라보던 로젤린이 대뜸 꺼낸 말이었다. 이목이 그녀에게 쏠렸다. 로젤린은 손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며 날카로운 소음이 나는 곳을 주시했다.

전장으로부터 그들이 있는 곳까지는 거리가 제법 멀었다. 눈이 좋다고 해도 전투의 흐름만 대충 보일 뿐,


사상자가 얼마나 발생했느냐 정도의 자세한 사항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말을 더 붙이지 않고 계속해서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공간은 적고, 사람은 많았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니 만큼 전투는 지지부진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사상자가 적은 것은 그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뭔가…….’

눈으로 보는 것, 생각하는 것 그 너머에서 경종이 울렸다. 전투 중이라 예민해져 공연히 불안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말고 잘 살펴야 해, 칼.]

과거 칼릭스에게 했던 말이 돌아와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붉은수레바퀴의 사람들은 감이 좋으니……]

만약 이 위화감이 괜한 것이 아니라면? 로젤린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전장을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전장이


아닌 로젤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로젤린의 눈이 쉼 없이 움직였다.

그때, 힐리사고 기사의 검날이 발타 수비대 누군가의 머리를 가격했다. 이미 헐거워져 있던 것인지 투구가 털썩
벗겨지며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수수해서 인상에 남지 않을 법한 사내였으나, 로젤린은 그가 누구인지
보자마자 기억해 내었다.

수개월 전, 발타의 궁전.

하카브는 연회에서 리카르디스를 이끌고 다니며 많은 이들을 소개했었다. 그때 로젤린이 보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지금과 달리, 회상 속 남자는 웃고 있었다.

[아, 황자. 이쪽은 싱의 대장군, 리마입니다. 싱의 어린 가주들을 대신해 이번 연회에 왔습니다]

며칠 전의 기억이 그 위로 겹쳐졌다. 싱을 함락했다던 힐리사고의 왕자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던 모습이.

[대다수의 병사들은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병사들은 포로로 억류 중입니다. 대장군을 포함한 지휘관들은 모두
처형했습니다.]

싱의 대장군. 리마.

투구가 벗겨진 그의 머리 위로 누군가의 검이 쇄도했다. 찰나의 순간, 검날의 궤도가 틀어지며, 머리가 아닌
단단한 흉갑 위를 의미 없이 스쳤다. 로젤린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전투는 잘 짜인 한 편의 연극에 불과하다!

힐리사고는 애초에 싱의 요새를 함락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처형하고 포로로 잡아 두었다던 싱의 군대가
지금 다리에 있는 수비대일 것이라, 로젤린은 확신했다.

로젤린이 고개를 휙 돌렸다. 갑자기 달라진 그녀의 기세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의 눈빛이 변했다.

“싱의 대장군이 수비대 측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힐리사고는 발타의 동맹입니다!”

힐리사고는 일라베니아의 오랜 친구이자 가신이었다. 백여 년도 더 흐른 시간만큼 쌓인 신뢰가 지금,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로젤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해도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하던 지휘부와 달리 리카르디스는 숨을 한번


크게 쉬는 것으로 정리를 끝낸 듯 보였다.

“드윗 경, 로젤린 경.”

근처에 있던 드윗이 급히 다가왔다.

“좌익군이 먼저 출진한다. 다소 피해가 생기더라도 하나하나 처리하지 말고 돌파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로젤린
경에게는 현장 지휘관으로서 드윗 경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격을 부여하겠다. 선두에 서는
기병대를 이끌어라.”

“명을 받듭니다!”

“예, 전하. 명을 받듭니다.”

상황과 명령이 빠르게 하달되며 그간 잠잠했던 제국군 진영이 소란스러워 시작했다. 곧 좌익군이 움직이며 좁은
바늘구멍 같은 다리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전장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전투가 길어진다 싶더니,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나. 이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싱의 요새에 주둔하고 있을 힐리사고군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뒤를 든든하게 맡아 줄 아군이 한순간에
적으로 변해 버린 것은 단순히 ‘적이 하나 더 늘었다.’ 정도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싱의 요새가 지닌
전략적 이점을 모두 잃어버렸다.

연합군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지금의 제국군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어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류로 온 것이 다행이었다. 그나마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어디 있나!”

세실이 급하게 말을 몰고 다가왔다.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지. 힐리사고가 배반했다.”

213 화.

세실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욕설을 내뱉었다. 리카르디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어제 말한 그것을 쓸 수 있겠나?”

어젯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리카르디스와 짧은 만남을 가졌다. 그녀의 영지 내에 있는 무기 장인이 만들었다는


신무기 때문이었다.

[화약을 이용한 설치용 폭발물?]

[일반적으로 화약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위력이 강할 거라 하더군요. 이것저것을 섞었다고. 그런데 급하게 만든
터라 실험해 볼 틈이 없었습니다. 그 영감이 솜씨는 좋은데 실패도 많이 해서……. 최악은 불발까지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내일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화약과 함께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하라.]

그렇게 말한 것이 정말 딱 하루 전이었다. 세실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뭘 폭파하시려는 겁니까?”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가 강줄기를 따라 손을 뻗었다.

“여기서 조금 더 상류로 올라가면 댐이 있다. 그걸 폭파한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입을 벌렸다. 자신도 과격함 하면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으나, 이건 정말…….

“연합군이 모습을 드러낸 후, 적절한 때가 오면 신호를 보내겠다. 신호는…… 마카롱 경의 울음소리. 지금 당장


병력을 이끌고 이동하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편에서 힐리사고군이 나타났다. 싱의 요새를 차지했다던 왕자의 군대였다. 연합군이 오기
전까지 발을 묶기 위한 병력이리라, 리카르디스는 직감했다.

그리고 그들의 노림수대로 일라베니아 제국군은 다리를 건너지 못한 채, 힐리사고군과 교전해야 했다.

해가 질 무렵, 리카르디스의 불안은 실체화되어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석양빛을 등진 검은 그림자가 하나둘


늘어나더니, 언덕의 능선 위를 빼곡하게 메웠다. 기괴하게 몸을 들썩이는 검은 그림자 무리는 말라 죽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것 같이 보였다.

일라베니아의 거대한 방벽을 무너트리고, 남부를 초토화시킨 발타와 마람의 연합군이었다.

거대한 무리에서 한 남자가 호위를 대동한 채, 전열로 나섰다. 멀리에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하카브, 그
남자였다. 그가 흡, 숨을 들이켜더니 소리를 질렀다.

“로젤린 에스터!”

막 힐리사고 병사를 발로 걷어차 강물에 빠트린 로젤린이 그 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도록 하지. 나에게 와라.”

몇 만 명이 모여 있는 강가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카브의 돌발적인 행동에 일라베니아 제국군과 마찬가지로


연합군 측도 당황하고 있었다.

모두의 이목이 로젤린에게 쏠렸다. 다 같은 갑옷을 입고 있어, 누가 로젤린인지 모르던 이 조차 그녀라고 알 수


있을 정도로.

로젤린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는 창병의 창을 빼앗아 확 던졌을 뿐이었다. 사람 키보다 큰


무기가 화살처럼 쇄도했다.

하카브의 코앞까지 창이 들이닥친 순간이었다.

캉!

높은 쇳소리가 나더니 창이 공중에서 몇 바퀴 회전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추락해 바닥에 꽂혔다. 하카브의 앞을
막아선 자는 디에즈였다. 일라베니아의 배신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왕자, 이상한 짓 하지 마시죠.”

디에즈가 짜증난다는 듯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하카브가 하하 웃으며 답했다.

“발타에서는 사람의 말을 세 번까지는 들어 보라는 속담이 있어, 디에즈. 어쩌면 그녀도 마음이 변했을지도
모르니까 한번 권해 보기나 한 거야.”

“그래서요, 또 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럴 리가. 이번이 딱 세 번째였어.”

디에즈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은 하카브가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일라베니아의 병사들은 들어라! 일라베니아의 중부관문으로 발타와 마람뿐 아니라 힐리사고의 군대까지 진군하고
있다. 너희에게 승산은 없다. 하지만 그대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 그저 일라베니아에 태어났을 뿐인 것을. 하여,
기회를 주겠다.”

그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무기를 내려라. 무릎을 꿇고 복종해라. 그런 자들의 목숨은 내가 가엾게 여겨 거두지 않을 것이다.”


일라베니아의 병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몰린 위기. 돌파구가 없어 보이는 전황. 수많은 적군까지.
여러 요소가 사고를 둔하게 만들고 마음을 흔들었다.

수백 수천 쌍의 눈이 움직이며 서로를 탐색했다. 적군을 앞에 두고 전의를 불태워도 모자랄 판에,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차마 무기를 놓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꽉 쥐고 있지도 못했다.

하카브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는 꽉 짜인 유기체 같던 제국군의 진형이 흐트러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


사이사이를 연결하고 있던 고리가 헐거워지고,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카브가 손을 들어 올린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것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를 대신한다는 사실은
대다수가 알지 못했다. 연합군의 진영에서 화살 한 발이 하늘로 쏘아졌다. 그리고 곧바로 제국군 진영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 뭐야?”

제국군의 측면, 적막을 끊어 낸 날카로운 병장기 소리가 그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하카브의 명령을 받고 숲을
돌아서 간 별동대가 제국군의 방심을 뚫고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마인 병사 몇몇이 강물에서
튀어나와, 진형의 안쪽에 있던 지휘관들을 살해했다.

어수선해졌던 제국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고 잠시 멈춰 있었다. 하카브는 이목이 전방을 벗어난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제국군과 대치 중이던 연합군의 전열이 움직였다. 곧 첫 번째 파동이 제국군을 덮치며 사납게 그들을 흔들었다.
예정된 난장판이 벌어졌다.

이미 전의를 잃었던 자들의 방패는 연약했다.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온 발타의 병사들이 활개 쳤다. 한 명 한 명이
무너지자 전체가 흔들거렸다. 그들을 다잡아 줄 지휘관들은 살해당한 지 오래였다. 지휘 계통이 마비된 곳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후퇴, 후퇴하라!”

미처 검을 놓을 용기마저 없던 이들이 그 말에 잽싸게 도망쳤다. 연합군은 그런 그들의 후미를 짓뭉개며 전진했다.

하카브가 그 장면을 보며 웃었다.

그때 디에즈와 케틀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상에서부터 하늘로 급격하게 치솟는 마력을 느낀 탓이었다.
거대한 독수리가 화살처럼 쏘아지듯 비상하고 있었다. 곧 전장 위를 덮는 울음소리가 울렸다.

삐이익----

* * *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의 궁병 대장이 불화살을 쏘아 올렸다. 불화살은 댐의 앞에 쌓여 있는 화약과 폭발물에


정확하게 꽂혔다.

콰앙!

무언가가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로 일대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폭발로 자욱해졌던 시야가 확보된 후에야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나는 솔직히 신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 렉시드.”

“……예, 백작님.”

“그런데 지금 이 꼴을 보자면 있는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그녀가 머리를 헝클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수레 열 개 분량의 화약과 신무기가 투입되어 폭발을 일으켰음에도
댐은 여전히 건재했다. 연기가 자욱하게 나고 소리만 요란했지,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크레안 티다니온이 발타의 개자식들을 보살피는 것 같단 말이다.”

세실이 이를 으득 갈았다. 댐이 붕괴 되었을 때를 대비해 높은 지대로 올라와 있던 것도 허사가 되어 버렸다.

저 멀리 격전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댐이 무너질 것을 대비해 제국군은 강가에서 많이 벗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기존 계획이 틀어진 이상 정규전을 각오해야 했다.

“본대를 엄호하러 간다.”

“명령을 받듭니다.”

세실은 미련이 이끄는 대로 한 번 더 뒤를 돌아 댐을 바라보았다. 얄미운 댐은 흔들리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혀를 차고 다시 고개를 돌려 이동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이 떠난 뒤, 연기가 걷혔다. 그곳에는 그녀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희미한 균열이 새겨져
있었다.

쩌저적, 갈라지는 틈으로 흙 자갈이 떨어졌다.

* * *

멀리서부터 굉음이 들렸다. 저 멀리에서 범상치 않은 크기의 연기가 뭉게뭉게 퍼지고 있었다. 자주 범람하는
미노가 강의 하천 지대를 위해 설치한 홍수 조절용 댐이 있는 곳이었다.

하카브는 자신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며칠간 내린 비로 수위가 한껏 높아진 상태였기에, 만약


댐이 무너졌다면 강가에서 전투 중인 연합군이 다 쓸려 나갔을 것이다.

다행히도 소리만 요란했지,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단단하게 지어진 댐을 터트리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왜 상류로 왔나 했더니. 이런 걸 준비해 두고 있었군.”

댐이 터지게 되면 연합군이 가장 피해를 많이 볼 테지만, 제국군도 조금이나마 휘말리게 되어 있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려 한 것이다. 그 곱상한 얼굴로 이런 과격한 방식을 선택할 줄이야.

하카브는 강 건너의 리카르디스를 발견했다. 높은 지대로 올라가는 다른 제국군 병사들과 달리 하얀밤 기사단을
포함한 기병대가 강줄기를 따라 상류로 향하고 있었다.

‘댐으로 가는 거로군.’

화약이 실려 있는 수레를 끌고 있는 걸 보아하니 예상이 맞을 것 같았다. 하카브는 빙긋 웃었다.


“호위망이 얕아졌군. 발리스타의 방향을 조절해라. 강줄기를 거슬러가는 제국기 아래. 적의 총사령관이 있다.
그리고 디에즈?”

“뭡니까.”

요즘 한창 반항기를 겪고 있는 터라 대답이 퉁명스러웠다.

“그대가 좀 도와줘야겠어. 하얀밤 기사단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거든.”

디에즈의 눈에 의문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로젤린과 마카롱이 있는 그 하얀밤 기사단의 치명적 약점?

하카브가 씩 웃으며 말했다.

“로젤린 경을 너무 믿는다는 거지.”

214 화.

큰 소리가 난 시점으로부터 몇 십 분이 흘렀음에도 강가의 수위는 높아질 줄을 몰랐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댐을 붕괴시키지 않는 한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없었다. 하카브를 암살하는 방법 또한 생각했으나, 그를


둘러싼 수많은 마인 부대와 디에즈의 존재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휘관들 중 다른 이들에게 2 차 폭파의 임무를 맡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일이 또 틀어진다면 곤란했다.


임무가 실패한다고 가정할 시, 당장에 명령을 내리고 지휘를 바꿀 만한 사람이 임무에 포함되어 있어야만 했다.
총사령관인 리카르디스가 직접 댐으로 향하게 된 이유였다.

천여 명 되는 부대가 본대에서 빠져나와 강가를 따라 이동했다. 뒤에서 발타의 병사들이 끈질기게 따라왔다. 옷을
입고 합류한 마카롱이 나무를 쓰러트리며 뒤에서 달라붙는 발타군의 발을 잠시간 묶었다.

마인 병사, 인조적인 마인들, 그리고 파편까지. 사방이 마력으로 일렁였다. 로젤린은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 ‘
마력’을 위험한 것으로 분류했다. 보지 않는 방향이라 해도 파편과 마인 병사들의 움직임만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덜컹, 둔중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것에 로젤린이 미처 반응하지 못했던 이유는, 후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의 기운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거대한 마력.

디에즈였다. 그가 강대한 마력을 난폭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그걸 느낀 로젤린과 마카롱의 시선이 디에즈에게로
향했다. 그 찰나의 순간, 느슨해진 경계를 뚫고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콰직.

무거운 것이 갑옷을 뚫고, 연약한 살과 근육을 찢는 소리가 끔찍하게도 생생했다.

로젤린은 제 시야 밖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디에즈의 마력이 자신과
마카롱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도.

로젤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리카르디스 옆에 양팔을 쫙 벌린 스타스가 있었다. 검고 뾰족한 무기가 그의
가슴을 꿰뚫은 채였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말발굽에 밟힌 자갈이 튀어 오르고, 먼지가 자욱했다. 공중에 흩뿌려지는 핏방울이
리카르디스의 은색 갑주에 닿았다. 스타스의 투구 안에서 피 끓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인영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급하게 말고삐를 잡아 방향을 틀었던 탓인지, 스타스의 말과 리카르디스의 말이 거세게 충돌했다. 두 사람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아악!”

누군가가 내지른 비명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로젤린은 멍해진 머리로 생각했다. 파르딕트인가, 르원인가. 어쩌면
자신이 내뱉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다시 되돌아왔다.

낙마한 두 사람의 위로 기병 몇 명이 지나갔다. 말발굽에 갑옷이 절걱, 철걱 밟혔다. 가슴 속 깊숙한 곳을


찌르는 것 같은 섬뜩한 소리였다. 로젤린은 급하게 말에서 뛰어내렸다. 흙먼지로 자욱한 바닥에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그들이 쓰러져 있었다.

“전하!”

로젤린은 손을 덜덜 떨었다. 리카르디스가 바닥에, 그리고 그 위에 스타스가 있었다. 스타스의 가슴을 꿰뚫은
검은 쇠가 리카르디스의 흉갑에 닿으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은 미동도 없었다. 주위가 소란해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로젤린의 손을 누가 덥석 잡았다. 급하게 숨을 토해 낸 스타스였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투구를 벗었다.


눈에는 핏줄이 터져 붉었고, 입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단, 단장님.”

스타스가 콜록거리며 피를 토했다. 로젤린은 급하게 수통에 담긴 성수를 먹이려 했지만 그가 고개를 돌려 피했다.
고작 그 정도로 치료되지 않으리란 생각이 미친 탓이었다.

기병대가 후미의 발타군과 교전하는 사이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급하게 주위에 모였다.

“단장님!”

“전하!”

하급 기사들이 눈물을 터트렸다. 애써 눈물을 참는 자들도 많았다. 스타스는 반쯤 기다시피 해서 리카르디스의


위에서 떨어져 나왔다. 부단장 나단이 급하게 리카르디스의 투구를 벗겨 냈다. 피에 엉긴 창백한 은빛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리카르디스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떨어지며 투구 안쪽에 강하게 찍힌 것인지 이마 위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허억…….”

로젤린은 본능적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부서진 마차 안, 피 흘려 가며 죽어 가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그와


겹쳐졌다. 그때의 무력감, 그때의 고통과 그때의 좌절이 지금 겹쳐지며 그녀를 쥐어 터트릴 듯 짓눌렀다.

‘나, 나는 또…….’

미처 속으로도 완성하지 못한 생각에 손이 떨렸다. 시야가 깜깜했다.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칠게 뛰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로젤린이 비틀거리자 상급 기사 카일로가 급하게 그녀를 지탱했다. 나단이 건틀렛을 벗으며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살피고 호흡을 관찰했다.

“잠시 기절하신 것 같지만, 말에서 떨어진 부상이라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 빨리 안전한 곳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나단이 잠깐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사단장과 총사령관이 해를 입은 틈을 타, 발타의 병사들이 화약


수레를 강탈해 물에 집어 처넣은 지 이미 오래였다. 그가 눈을 질끈 감고 일어섰다.

“작전은 폐기, 서둘러 퇴각한다!”

모든 기사단원이 스타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에서 피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나단의 콧수염이 움찔거렸다. 그가 자신의 가슴 위에 주먹을 올려 두며 스타스를 향해 경례했다.

“지금부터는 제가 단을 이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단장님.”

숨죽인 울음소리가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들려왔다. 스타스의 눈동자가 하얀밤 기사단원들 훑더니 쓰러진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그가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마지막으로 쳐다본 것은 그간 멍하니 서서 떨기만 하던
로젤린이었다.

스타스가 발을 끌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로젤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스타스가 피를 다시 한 움큼 토해 냈다. 그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기울었다. 내내


멈춰 있던 로젤린은 그제야 움직여 스타스를 지탱했다. 얇은 얼음 막이 그녀를 두르고 있는 것만 같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힘없이 쓰러지려던 남자가 그녀의 뒤 목을 잡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이마가 세게 쿵 부딪쳤다. 코앞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남자의 붉어진 눈이 보였다. 로젤린은 그 눈에 비친 겁먹은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마라…… 로젤린 에스터.”

고통에 찬 그의 눈에서 눈물과 피가 뒤섞여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금…… 뭘 해, 야 하는…… 지. 생각하고…….”

스타스가 한쪽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꾹 잡았다. 로젤린은 이 다음 어떤 말이 따라올지 알고 있었다. 과거,


스타스에게 들은 적 있는 말이었다.

레이몬드의 수습 기사 시절.

노력하지만 대련에서는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았다. 매일매일 검을 휘둘러 고단해진 몸보다도 정신적인


문제가 더욱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남들은 다 하는 걸 왜 나만 못하나. 왜 이렇게 나만 뒤처지나. 결국은 해낼 수 없는 일인가. 속에서 울리는


메아리는 반복해서 로젤린을 흔들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로젤린은 스타스에게 불려 가 딱 죽지 않을 만큼 굴렀다. 지쳐서 쓰러진 그녀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로젤린은 땀이 맺힌 눈가를 닦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경은 힘이 약한 편이군.]

[……예]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나?]

[예?]

무슨 소린가 싶었다.

[힘이 약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나.]

로젤린은 더듬더듬 얘기했다.

[근육을 키우거나, 아니면 가벼운 검을 추구하며 속도를 높이는 방법을…….]

[그래, 그렇게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경에게 필요한 생각이고, 나머지는 쓸데없는 잡념에 불과하다.]

로젤린은 스타스가 말하는 ‘쓸데없는 잡념’이 여태껏 자신을 흔들어 왔던 고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이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못하겠거든, 생각하지 말고.]

스타스는 그런 로젤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꾀죄죄한 몰골의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로젤린의 등을 털어


준 스타스가 씩 웃었다. 그러곤 그녀의 어깨를 밀며 말했다.

“움직여라, 당장.”

로젤린은 먼 시간에서 돌아와 현재의 스타스를 똑바로 마주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스타스는 제 어깨를 밀고
있었다. 한없이 연약하고 위태로운 손길임에도, 로젤린은 스타스가 그때처럼 자신의 등을 강하게 떠밀어 주고
있다고 느꼈다.

내내 멈춰 있던 로젤린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자


눈앞을 부옇게 만드는 입김이 퍼졌다.

“퇴각한다!”

로젤린은 산길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았다. 낮은 지대에 있는 연합군이 보였다. 마치 거대한 생물처럼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그들의 중심이 강가로 이동한 상태였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아직 연기가 나는
먼 곳을 보았다. 그녀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로젤린, 파르딕트, 레이몬드, 네스터, 슈텐, 레티시아, 에버하르트 경을 포함한 오소리 대가 전하를 보필,
미미 양은 다른 부대에서 로젤린 경의 역할을 맡아 마인 병사들의 이목을 끈다. 합류지는 기억하겠지.]

[예!]
만약의 때를 대비한 명령은 이미 상급 지휘관들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상태였다. 지금 그들은 그러한 일정한
계획에 따라 여러 갈래로 쪼개어져 이동하고 있었다.

그중, 제국기와 하얀밤 기사단의 깃발이 휘날리는 중앙 부대에서 강한 마력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미끼 역의
마카롱이 힘을 쓴 것이었고, 그 노림수대로 대부분의 마인 병사들이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부상 입은 리카르디스를 보필하는 소수의 부대만 옆길로 빠져나와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길을 택하기 위해서였다.

215 화.

리카르디스를 싣고 있던 수레는 도중에 버려야만 했다. 길이 험해지며 썩은 나무뿌리들이 들쑥날쑥하여 통행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에버하르트의 군마에 리카르디스를 맡겼다. 나머지 기사들과 병사들은
주위를 경계하며 빠르게 이동했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지.’

리카르디스와 호위대는 기존의 대피로를 무시하고 다른 길로 달리고 있었다. 호위대의 현 책임자 레이몬드가
입술을 짓이겼다. 다른 누구도 아닌 리카르디스의 호위를 맡은 호위대가 결코 저질러서 안 되는 짓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태어나서 로젤린이 그렇게 강력하게 의견을 주장하는 걸 본 적 없었다.

[댐으로 가자, 레이몬드. 연합군의 본대가 강가의 중앙에 몰려 있어.]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리카르디스 전하의 안위야!]

[우리보다 저들이 지리에 밝을 수밖에 없어. 연합군이 저 수로 수색에 나서면 전하의 안위도 장담하지 못해.
지금이 절호의 기회야, 연합군이 전부 다리를 건너 강가를 벗어나기 전에!]

[폭파시킬 수 없어, 화약이 다 떨어졌다는 걸 알잖아!]

[1 차 시도로 충격을 받았을 거야. 아무렇지 않을 리 없어. 며칠 새 비가 많이 내렸지. 물의 수위는 높아지고,


그걸 담아 두는 댐에도 압력이 높아진 상황이야. 조금의 충격이면 될지도 몰라.]

댐을 폭파한다는 작전은 완전히 폐기한 상황이었음에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레이몬드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잘 도주해 제국군과 합류한다 하더라도 뒤바뀐 전쟁의 판국을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제국군은 뿔뿔이
흩어져 조만간 추적대에게 따라잡혀 처형당하거나 포로로 잡힐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있다 하더라도 이 전쟁은 그
못지않게 머릿수가 중요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만약 댐에서 방류된 물이 연합군을 쓸고 간다면, 시간을 벌 수 있을뿐더러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출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것이 결국 댐으로 향하게 된 이유였다.

“꼬리가 붙었습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로젤린이 멈춰 대응하려 하자 레이몬드가 소리쳤다.

“전력으로 달린다!”

최대한 빨리 댐에 도달해야 했기에, 쓸데없는 교전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레이몬드의 명령에 따라 다들 말을


재촉해 달렸다. 곧 시야에 절벽처럼 보이는 높이의 댐이 들어왔다. 아직까지 연기가 꺼지지 않은 채로, 여기저기
그을려 있는 상태였다.

멈춰 선 호위대 뒤로 적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교롭게도 힐리사고의 왕자가 포함된 힐리사고의 정예병들이었다.
오백여 명쯤 될 뿐인 호위대에 비해, 힐리사고군은 이천에 달하는 숫자였다. 로젤린이라 하더라도 상대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동안 리카르디스의 안전을 장담할 수도 없었다.

힐리사고의 왕자가 한걸음 앞에 나와 거드름을 피웠다.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 내가 리카르디스 전하와 꽤 친하거든.”

일라베니아의 기사들이 이를 갈며 검을 뽑았다. 리카르디스를 직접 보호하는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이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로젤린은 그사이 댐 아래 다리처럼 축조된 구조물에 올랐다. 폭발 때문에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나무판자가 사라져 엉망이었다.

뭐 하는 거야 저거? 누구야? 힐리사고군 측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그녀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였다.

로젤린의 주먹이 댐과 충돌했다.

쾅!

작은 전장에서 일어난 소음을 뒤엎는 굉음이 울렸다. 힐리사고군에 끼어 있던 몇몇 마인 병사들이 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로젤린이 있는 쪽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다!”

“화살을 쏴!”

“먼저 죽여야 한다!”

모두가 죽을 각오로 막아 내고 있었으나, 수의 앞에서는 힘없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포위망이 점차 좁아졌다.


쓰러지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감과 동시에 비명도 늘어났다. 마음이 조급해진 로젤린은 연신 댐의 벽면을
내려쳤다.

쾅!

‘제발.’

쾅!

다시 한번.

쾅!

계속해서. 하지만 댐은 진동할 뿐, 부서지지 않았다. 숨을 토해 낸 로젤린은 한 번 더 댐에 주먹질을 하려다


우뚝 멈췄다. 겨울인 탓에 제 입김이 적나라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호흡이 거칠어.’

로젤린은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파악했다. 호흡은 거칠고, 자세가 흐트러져 있었다.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에 동작만 크고 힘을 싣지 못했다.

로젤린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깊숙하게 몸 안을 타고
돌았다. 맥동이 난폭하게 뛰며 온몸을 둥둥 울렸다.

그것에 아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났다. 가리가리 찢겨 기억도 나지 않던, 과거의 순간이었다.


화살이 쏟아지고, 무기를 든 자들의 위협이 가까워져 갔다.

제발, 제발. 눈물을 흘리며 무력하게 하늘의 달에게 빌기만 했던 감정이 떠올랐다. 제발 그 누구라도 도와주세요.

하지만 구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로젤린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에게서 마력의 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하며 안을 타고 돌았다. 근육이 한계까지 응축되었다. 힐리사고 측의
몇몇 병사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못 박힌 듯이 로젤린만 바라보았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로젤린이 눈을 뜨며 주먹을 휘두른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쾅!

땅이 진동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싸우던 것을 멈췄다.

쩍, 쩌적.

그녀의 주먹을 중심으로 균열이 선명하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빠르게 사방으로 치닫는
균열의 소리와 댐 너머의 물이 세차게 울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뛰어!”

로젤린은 나무를 부러트려 집어 던지며 힐리사고의 병사들을 공격했다. 굉음과 땅의 진동, 로젤린의 공세 때문에
그들이 잠깐 물러선 사이, 호위대는 강가에서 산기슭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제국군을 쫓으려던 힐리사고군이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쩌적, 댐이 갈라지는 게 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댐이 무너진다!”

“퇴, 퇴각하라!”

힐리사고군은 기겁하여 그제야 강줄기에서 벗어나 산비탈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붕괴가 이미 시작된 후였다.
로젤린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댐을 바라보았다.
‘댐이 붕괴되면 물이 쏟아지리라 생각했는데.’

흙이 먼저였다. 토사가 흘러내리며, 그 틈새로 며칠간의 겨울 장마에 가득 들어차 있던 강물이 터져 나왔다.


로젤린은 한달음에 내달려 빠르게 높은 지대로 올라갔다.

그것은 단순한 홍수라 표현할 수 없는 파괴적인 장면이었다. 탁류가 한 마리 거대한 생물처럼 나무, 흙, 돌,
인간.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한때 부드럽게 흐르던 강물은 섬찟하고도 육중한 소음을 내며 땅을 울리고 있었다.

발밑을 흔드는 진동에 놀란 군마가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중에는 리카르디스를 싣고 있는 말도 있었다.
기사들이 다급히 고삐를 쥐려 했으나, 비틀거리던 말은 비스듬히 난 돌멩이를 밟고 말았다. 땅에서 뽑혀 나간
돌멩이가 구르고, 그 위로 군마도 굴렀다.

“안 돼!”

강물 위로 리카르디스의 그림자가 드리운 순간, 로젤린이 재빨리 몸을 던지며 그를 끌어안았다. 물이 가까워지고,


풍덩. 얼음 같은 차가운 온도가 두 사람을 덮쳤다.

“전하!”

“로젤린!”

수면 아래에서 듣는 소리는 너무나 작고 희미했다.

* * *

“……이게, 무슨…….”

언제나 싱글벙글 웃는 낯을 유지하던 하카브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이 사람도 화를 내기는 하네.’

케틀린은 새삼스럽고 당연한 감상에 잠시 휩싸였다 빠져나왔다. 그녀는 아까 전 방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온
방향을 다시 쳐다보았다.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자라면 결코 무시할 수도, 눈을 뗄 수도 없는 힘이었다. 그렇게 시선과 정신을 빼앗긴
사이, 곧바로 무언가가 부서지고 터져 나오는 소리가 연합군이 있는 곳까지 들이닥쳤다.

다행히 케틀린과 하카브는 디에즈와 마인 부대의 도움으로 거센 물길을 피해갈 수 있었으나, 대다수의 병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무거운 갑옷과 무기를 들고 있던 병사들은 헤엄쳐 나오려다가도 가라앉아 버렸다. 숲, 나무, 그
일대의 모든 것이 잠겼다. 강가를 뒤덮었던 연합군의 병력은 반절로 줄어 버렸다. 케틀린은 그런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으나 들려오는 비명과 하카브의 싸늘한 목소리로부터 대충의 상황을 짐작했다.

쾅!

갑작스러운 굉음에 케틀린이 몸을 움츠렸다. 보아하니 하카브가 분에 못 이겨 옆에 있는 나무를 친 모양이었다.


평소 같으면 본인 손만 아플 짓 왜 하냐고 뭐라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케틀린은 나름 목숨 소중한 건 알았다.
더해서, 자신도 그와 마찬가지로 뼈아팠다. 일라베니아를 조각조각 다져 줄 하카브의 군대가 이렇게 허무하게
쓸려 나가다니.

“리카르디스의 목을, 반드시 가져와라.”


조용히 읊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일대를 감돌았다.

23

어두운 밤. 범람한 미노가 강.

강물에 다양한 것이 떠내려왔다. 나무, 배, 사체 등. 빠른 유속을 감당하지 못해 갈가리 찢기거나 부서진 채였다.

땅 깊게 뿌리박은 거대한 나무는 간신히 떠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그때 강물 아래의 둥치에 무언가가 세게 부딪친
듯 나무가 텅, 하고 진동했다. 곧 물속에서 창백하리만치 하얀 손이 솟아났다. 나무 기둥을 몇 번 더듬은 손은
옹이구멍과 굵은 나뭇가지를 이용해 점차 기어 올라왔다.

“하아, 하……!”

곧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리카르디스를 어깨에 걸친 로젤린이었다. 두 사람의 무게가 더해지자 여태껏 잘
버티던 나무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216 화.

“이런, 씨.”

로젤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짧게 욕을 내뱉었다. 뿌리가 뽑히며 기울어지는 순간 로젤린이 나무를 박차고 뛰었다.
강기슭 위로 로젤린과 리카르디스가 얽혀 데굴데굴 굴렀다.

그녀는 몇 번 침을 더 뱉어 낸 후에 급하게 리카르디스의 투구를 벗겨 냈다. 물에 젖은 은색 머리카락이 검은 땅


위로 흘러내렸다. 조금의 미동도 없는 창백한 얼굴은 마치 조각상을 보는 듯했다. 로젤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떨리는 그녀의 손이 리카르디스의 턱 바로 아랫부분의 목을 가볍게 눌렀다.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허, 헉…….”

로젤린은 머리를 한쪽 손으로 잡으며 비틀거렸다.

[로젤린…… 무사해서, 다행이야.]

세티스티아 황녀의 모습이 리카르디스의 위로 끝없이 덧대어졌다. 싸늘해진 살갗의 온도. 도무지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까지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로젤린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리는 누군가가 세게 누르는 것처럼 먹먹하고,
고통스러웠다. 안쪽부터 뜨거워졌다. 그게 코까지 치닫는다 했더니 기어코 피가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로젤린의
손 위로 붉은 자국이 번졌다. 피 냄새를 맡은 그녀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스타스가 피를 흘리던 모습이
로젤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라.]

생각해, 생각해라. 움직여.

로젤린은 이를 악물고 제 허벅지를 퍽 내려쳤다. 굳어 있던 몸이 통증에 꿈틀거렸다. 그녀는 곧바로 리카르디스의


턱을 붙잡아 입을 벌렸다.
‘입안의 이물질 확인, 고개를 뒤로 젖히고…….’

로젤린은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끝없이 되뇌었다. 숨을 불어넣기 위해 입술을 가져다
대었으나, 차갑게 식어 버린 입술의 감촉은 로젤린을 더욱 무섭게 옥죄었다.

‘숨을 불어넣고…….’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에게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압박하는 행동을 몇 번 반복했다. 억겁의 시간 같은 몇 분이


지나고,

콜록, 콜록. 리카르디스가 간헐적으로 몸을 떨며 물을 토해 냈다. 로젤린이 급하게 그의 머리를 옆으로 돌려


물을 뱉는 걸 도왔다.

“전하!”

로젤린은 비명을 지르듯 부르자, 리카르디스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이내 초점 없이 흐릿한 눈동자가
드러나며 로젤린을 담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응시한 채 간절하게 그의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리카르디스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로젤린은 붉어진 눈을 거칠게 문지른 후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숨은 쉰다. 맥동은 느릿하지만,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머리의 부상은 심하지 않았다. 걱정되는 것은
다리. 아무래도 왼쪽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았다. 몸을 더듬어 보니 갈비뼈 쪽에도 이상이 느껴졌다.

낙마하고 급류에 휩쓸려 심장까지 멎었다 겨우 살아난 사람이 겨울의 찬 공기에 그대로 노출된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갑옷을 강물에 던지고 자신의 갑옷도 던져 버렸다. 곧 그를 안아 든 그녀가 어둠 속으로
발을 옮겼다.

로젤린은 버려진 민가를 찾아냈다. 주위를 살핀 그녀는 리카르디스를 안으로 데리고 가 그의 옷을 급하게 벗겨
냈다. 집안에 정체불명의 알 수 없는 천이 있어서 물기를 닦아 내고, 남은 것으로는 그를 감쌌다.

밖을 보니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죽은 나무가 무성하고 어둠이 빛을 가렸으니, 연기가 크게 티 날 것 같지는


않았다. 로젤린은 밖으로 다시 나갔다. 장작을 구하려 했는데, 내리는 비로 나뭇가지들이 다 젖은 상태였다.
그녀는 나무를 부숴 집 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껍질을 벗기고 안쪽을 갉아 내, 마른 부분을 모았다.

사각, 사각. 일정하게 울리는 소리가 로젤린의 흥분을 점차 가라앉혔다.

부싯돌이 젖어 점화되지 않았다. 로젤린은 다소 원시적인 방법으로 불을 붙여야만 했다. 마음이 급해서 몇
번씩이나 실패했으나 결국에는 그녀의 손안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그제야 젖은 옷을 벗었다. 철벅, 철벅. 나무 바닥에
젖은 옷이 달라붙으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머리카락도 하나로 모아 빨래를 짜듯이 하자 후드득 물이 쏟아졌다.
맨살에 와 닿는 서늘한 공기에 로젤린은 팔을 쓸며 부르르 떨었다.

“아!”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 사이로 수통이 보였다. 너무 급해서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로젤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밤 기사단에게 배분된 수통의 내용물은 죄다 성수였다. 그것도 질 높은.
로젤린은 허벅지에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올리고 수통을 기울여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성수는 입안에
고이기만 할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로젤린은 성수를 입에 머금고 리카르디스에게 입을 맞춰 흘려 넣는 일을 몇
번 반복했다.

그래도 안색이 돌아오지 않았다. 로젤린이 다급한 손놀림으로 그의 손과 발을 주물렀다. 살갗을 비비며 아주 짧은
순간 돌았던 온기는 금세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덮고 있는 담요를 들춘 후 안에 쏙 들어갔다. 마력으로 체온을 높이고 싶었으나, 혹시나


주위에 수색대가 있을지도 몰라 사용할 수 없었다.

그저 최대한 밀착해서 끌어안는 수밖에 없었다. 살갗에 와 닿는 그의 차가운 온도가 심장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픈 숨소리가 쌕쌕 울렸다. 그녀는 눈물을 훌쩍이다 그를
더 끌어안았다.

로젤린은 지금에 와서는 아무 의미 없는 가정을 머릿속으로 반복했다. 만약 이렇게 했으면, 이쪽으로 갔으면,
기존의 대피로를 따라 이동했다면. 그랬으면. 그러지 않았다면. 그녀는 끝없이 자신을 혹독하고 매섭게 다그치다
어느 순간 잠들어 버렸다.

쓰라리게 피곤한 밤이었다.

* * *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손 하나 까딱하는 일도 힘든지 몸이 잘게 떨렸다. 머리는 띵하고 부서질 듯


아팠다. 거기에 더해 열이 나는지 정신이 흐릿하기까지.

‘정말…… 완벽한 몸 상태군.’

리카르디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나무 벽의 벌어진 틈을 따라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는…….’

고개를 돌릴 힘도 없어 눈앞에 보이는 시야로만 상황을 판별해야 했다. 눅눅한 습기가 가득 찬 낡은 가옥이었다.
양식으로 보아 발타의 것이었고.

리카르디스는 두통이 인 머리로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 냈다. 앞에서 달리던 스타스가 갑작스럽게 말고삐를 쥐고
틀었다. 그렇게 비스듬히 자신을 가리자마자 스타스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심장에는 검고 뾰족한 철을 박은
채였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

리카르디스는 감기는 눈꺼풀의 움직임에 저항하지 않았다. 시야가 깜깜해지자 그 위로 투구 너머로 마주쳤던
눈동자가 그려졌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급박한 눈. 위험하다 피하셔라. 그뿐이었으리라. 심장에 보기만 해도
끔찍한 쇠를 달고도 그뿐이었으리라.

눈이 뜨거워졌다. 머리와 이마를 뜨겁게 하던 열이 내려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가슴에 통증이 인다 생각했더니, 숨이 턱 막혔다. 리카르디스는 숨을


들이마시지도 내뱉지도 못한 채 괴로워했다. 얼굴이 붉어지며 목에 혈관이 돋아났다. 그렇게 바르작거리며 나무
바닥을 손톱으로 긁고 있을 때였다.
“전하.”

사람의 기척에 놀라서인지 갑작스럽게 숨이 터졌다. 리카르디스는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머리맡에 앉아 있는 로젤린이 보였다.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간질였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다 죽어 가는 소리를 냈다.

“……단추 좀…… 제대로 잠가…….”

로젤린은 막 일어난 듯 허술한 옷차림새였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하얀 피부의 넓은 면적 때문에 리카르디스는


순간 당황해 버렸다.

단추를 대충 잠근 로젤린이 손을 뻗어 왔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얼굴에 와 닿는 차가운 손길에 잠깐


움츠러들었다. 그는 곧 로젤린의 손이 차가운 게 아니라, 자신이 뜨거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젤린의 손바닥은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단단했다. 따뜻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으나 리카르디스는
안온함을 느끼며 볼을 그녀의 손바닥에 가볍게 비비듯 문질렀다. 눈을 감자 통증과 고열 때문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로젤린이 엄지손가락으로 그 눈물을 훔쳐 냈다.

그렇게 한참이 흐른 후, 리카르디스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스타스 경은……?”

로젤린은 멈칫하고 몸을 굳혔다. 그 짧은 반응으로 리카르디스는 모든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의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훌륭한, 황제가…… 되실 겁니다.”

탁한 목소리였다. 로젤린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성인이 되고 처음 같이 술을 마신 날…… 스타스가 그랬지. 대체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로젤린은 자신 또한 리카르디스에게서 빛을 본 사람이었기에, 스타스가 한 말이 단순한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패배보다…… 내 한 사람이 죽은 것이 더 슬프고,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는


……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

“전하…….”

로젤린이 그의 가슴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려 두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외면하듯 그녀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가슴 위에 놓인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고통에 겨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는 강한 힘이었다. 언뜻 간절함이 비쳤다.

217 화.

“원래, 사람은 아프면…… 약해지잖나. 그러니까 오늘만 이렇게 할게……. 내일부터는…… 다시, 할 테니까,
오늘만…….”
딱 오늘 하루만. 중얼거리던 리카르디스는 곧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로젤린은 그가 붙잡은 손을 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잃어 올 때마다 혼자서 아파했을 그가 안타까워 함부로 어떤 행동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그렇게 옆을 오랫동안 지킬 뿐이었다.

짐승들이 질척이는 흙과 땅을 짓밟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눈을 깜박이며 흐릿한 정신을 깨웠다.
리카르디스의 손을 잡고 있다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리카르디스를 살폈다. 손등이 이마에 살짝 맞닿기도 전에 불에 덴 듯 뜨거운 온도가
느껴졌다. 이마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계속해서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로젤린은 이를 꽉
깨물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리카르디스를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파악할 수 없었기에 합류지와의 거리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음식물을 섭취한 지 하루가 다
되어 갔다.

로젤린은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은 작은 가방 속에 있던 말린 과일과 육포를 빗물과 함께 끓였다. 약한 불로 한


시간 정도 끓이자 거무튀튀하고 비린 맛이 가미된 새콤달콤한 과일 죽이 되었다. 리카르디스가 직접 섭취할 수
있는 방안이 없어서 결국은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해야 했다.

의식 없는 리카르디스가 으윽 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좀 미안했다. 리카르디스에게 죽 한 그릇을 다 먹인


후에야 로젤린은 남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대충 배를 채웠다.

‘약이 필요해.’

하지만 집 안에는 지푸라기나 찢긴 천 조각만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삐뚤어진 문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잠시 바깥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로젤린은 까만 재를 찍어 나무 바닥에 글을 남겼다. 적군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닐 시기에 리카르디스를 떠나는


것은 불안했지만,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어 냈다가,
다시 돌아와 리카르디스의 담요를 정리한 후에 문을 닫고 나섰다.

로젤린은 비어 있는 민가 몇 채를 더 조사했다. 평민들조차 들고 가지 않는 쓸모없는 물건들 사이에서 운 좋게도


발타 양식의 여성복을 구할 수 있었다.

폐가에서 나온 로젤린은 구한 물품을 가방에 집어 넣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가 뜬 뒤에 보는 풍경은 밤보다


더욱 삭막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땅이 검고 질척해, 썩어 가는 것만 같았다. 일라베니아에서는 간간이 잡초
같은 리쉬라도 자라나고는 했으나, 이곳은 정말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지였다. 썩은 나무들은 부서지거나 메말라
괴괴한 분위기를 한층 더하고 있었다.

그림자의 위치가 바뀔 만큼 걸었음에도 풍경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일라베니아와 마찬가지로, 그보다도
심하게 발타의 땅은 죽어 가고 있었다.

한참 뒤, 목책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보였다. 로젤린은 벽에 몸을 붙여 은폐하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엿들었다.
‘억양이 독특해.’

로젤린의 눈이 지나다니는 아낙들의 옷차림새를 훑었다. 천 위에 수놓아진 자수는 발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양식보다는 일라베니아와 많이 닮아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발타인보다
연한 피부색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재빠르게 정보를 훑어 결론을 내렸다.

일라베니아와 발타가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고는 하지만, 몇 백 년간 붙어 있는 나라끼리 교류가 없을 리 없었다.


그중 일라베니아인과 가정을 꾸리게 되는 소수의 발타인들이 그들을 배척하는 마을에서 벗어나 새로운 마을을
조성했다고 들었다.

다른 마을과 교류가 적은 탓에 발타 보다는 일라베니아의 억양을 닮아 있었으며, 문화 양식 또한 오묘하게 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딱 로젤린이 보는 지금의 마을처럼.

‘투라르…… 많이 떠내려왔는걸.’

흘끗, 한 번 더 마을을 살펴본 로젤린은 곧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리카르디스가 있는 버려진 민가와도 전혀 상관없이
동떨어진 곳이었다. 로젤린은 눈을 감은 채 주위의 기척을 읽었다. 바람이 황량한 숲속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만
무성했다. 사람은커녕 동물조차 없는 것 같았다.

로젤린은 다시 눈을 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 이거 힘든데.”

중얼중얼 혼잣말로 한탄한 로젤린이 주먹을 꽉 쥐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에 마력이 퍼지기 시작했다. 우득,
우두득. 로젤린에게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고통에 몸을 구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로젤린의 몸에서 무언가가 울룩불룩 움직였다. 체구가 줄어들기
시작하며, 머리 색과 눈동자 색 또한 변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흑색에서, 진한 고동색으로. 페리도트를 닮은
녹색에서, 연한 갈색 빛으로.

“으윽…….”

한참이 지난 후, 무릎을 꿇고 있던 로젤린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자신의 팔다리를 살폈다. 딱 맞던 옷이 헐렁거리며 길이와 품이 남아돌았다. 시야가
달라지니 기분이 묘했다. ‘로젤린’의 모습으로 살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 눈높이가 익숙해졌는지.

팔을 휘둘러 보니 느낌이 달랐다. 힘과 속도가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발타의 여성들은 일라베니아의
사람들보다 키가 작고 아담했다. 원래 모습은 눈에 띌 가능성이 높기에 이 정도의 불편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목과 어깨를 휘휘 돌리며 걸어가던 로젤린이 작은 웅덩이 앞에 멈춰 섰다. ‘로젤린’이라 생각할 수 없는 여자가


그 안에 있었다. 잠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젤린은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마을로 향했다.

혼혈들이 이룬 마을, 투라르.

투라르는 강가에 위치한 또 다른 마을의 이재민들로 한창 북적이는 중이었다.

“제국군 놈들이 댐을 터트렸다지 뭐야!”


“그 개도 안 물어 갈 놈들 같으니!”

“쳐 죽일 놈들!”

로젤린이 터트린 댐의 피해자들이었다. 그녀는 가슴을 콕콕 찌르는 양심을 애써 무시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참 거리를 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한 로젤린은 피곤에 지친 듯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재앙에
지친 이재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터덜터덜 걷던 로젤린이 어느 여자를 붙잡았다.

“안녕하세요. 뭘 좀 여쭤보고 싶은데요.”

완벽한 투라르의 사투리를 구사하며 로젤린이 힘겨운 미소를 띠었다.

* * *

몽롱한 의식 속, 리카르디스는 입술에 무언가가 와 닿는 걸 느꼈다. 입술을 가볍게 문지르던 그것은 사이를
파고들며 입을 부드럽게 열었다. 리카르디스는 끙끙 앓으며 열띤 호흡을 내뱉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 헐떡이자, 누군가가 달래듯 볼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굳은살이 박인 익숙한 살갗의
감촉에 리카르디스는 숨을 쉬며 몸의 긴장을 느슨하게 했다.

그 순간 산뜻한 숨결과 함께 말랑한 무언가가 입에 닿았다. 그게 무엇인지 판별하기도 전에, 지옥 같은 쓴맛이


그의 입안으로 쏟아졌다.

“윽.”

리카르디스는 본능적으로 입안에 들어온 무언가를 뱉으려 했지만, 뒤 목을 감싼 자는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물컹하고 미끄러운 무언가가 혀뿌리를 꽉 누르는 바람에, 결국 쓰고 역한 액체를 꿀꺽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몸을 떨던 리카르디스는 자신을 짓누르는 누군가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달래듯 말을


내뱉었다.

“일어나셨어요? 깨워서 죄송합니다.”

속눈썹과 눈가가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던 터라 시야가 흐렸다. 하지만 검은색 머리카락만큼은 똑바로 보였다.
로젤린, 부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말을 뺏었다.

“아 하세요. 이건 입가심이에요.”

그렇게 말한 로젤린이 숟가락으로 무언가를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썩은 구정물의 맛이리라
생각했는데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진득이 퍼졌다. 리카르디스는 잔뜩 찌푸렸던 인상을 펴며 입을 우물거렸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지만 로젤린이 미소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깜깜한 밤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힘없이 떨리는 손을 들어 이마를 쓸었다. 식은땀이 흥건히


묻어 나오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정신이 또렷했다. 여전히 상태가 좋지는 않아도 당장 기절해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기절하기 전, 제 입안에 들어왔던 썩은 구정물 같은 액체의 정체가 약이 아니었을까
결론을 내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전하?”

리카르디스는 경계하는 기색으로 돌아보았다. 문가에 서 있는 실루엣은 로젤린의 것이 아니었다. 로젤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자였다. 그녀가 성큼성큼 안으로 발을 들였다. 리카르디스는 담요를 움켜쥐며 눈을 흘끗 옆으로
돌렸다. 손이 닿는 거리에 검이 놓여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가 끝끝내 손을 뻗어 검을 쥐지 않은 이유는 처음 보는 여자가 부르는 ‘전하’라는 말에서


왜인지 모를 향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단어, 어조의 문제가 아닌 분위기라고 할지, 혹은 그 호칭을
오랜 세월 입에 담은 만큼 쌓인 시간의 흔적 같은 것이라 해야 할지.

무어라 뾰족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지만, 무척이나 낯익었다. 그게 더 이상했다. 처음 본 사람이 낯익다니.
리카르디스는 미간을 좁힌 채 여자를 바라보았다.

황급히 다가온 여자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이마에 손을 짚어 열을 확인하고, 들어온 외부의 빛으로 안색을
확인하는 둥, 대단히 부산스러웠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여자를 응시했다. 머리 색과 눈 색만 보면 발타인인데,
피부색이 연했다.

‘혼혈인가?’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눈매가 익숙했다.

“괜찮으세요?”

리카르디스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던 여자가 살짝 미소 지었다. 담담하게 웃는
모습도 어쩐지 낯익었다.

218 화.

‘대체 누구지?’

계속해서 의심의 눈으로 보고 있던 차, 여자가 태연하게 담요로 손을 뻗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옷을 전부


벗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와 달리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급하게 여자의 손목을
잡아챘다.

“뭐 하는 짓, 윽…….”

급하게 움직이느라 통증이 생겨 얼굴은 평소보다 사납게 구겨졌다.

여자, 로젤린은 잔뜩 경계하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보고서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목소리가 왜 저렇게
싸늘하지? 우리 전하는 나한테는 안 저러는데…….

“……아.”

로젤린이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는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귓가로 작은 속삭임이 울렸다.

“로젤린입니다.”

“……그게 무슨…….”
리카르디스는 여자를 밀어내려다가 그녀의 생김새를 보고 멈췄다. 전체적으로 작고 동글동글하지만 이목구비가
로젤린과 비슷했다. 로젤린의 동생이라든가, 사촌이라고 말하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곧 몇 달 전 사냥 대회 전날 로젤린이 보여 줬던 신묘한 기술을 떠올렸다. 키를 키우고, 줄이고, 골격을


미세하게 바꾸는 등의.

“로젤린?”

“예. 전하. 로젤린입니다.”

로젤린이 소리를 죽여 작게 말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인 후에,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담요는, 안 돼.”

“……몸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럼 여기까지만.”

리카르디스가 대충 가슴 위까지 선을 그었다. 대체 뭘 보라는 거지? 로젤린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그의 배꼽까지 가상의 선을 그리며 여기까지는 봐야 한다고 했다. 부끄러워할 때가 아니라는 그녀의 엄한
질책에 리카르디스는 결국 배꼽 위로 합의를 봤다.

로젤린이 그의 담요를 성큼 걷어 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이 참혹한 상황을 최대한 외면해


보고자 했다. 하지만 가슴이나 갈비뼈 부근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길을 느낀 후, 어떤 것도 회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서는 다시 눈을 떠야만 했다.

“……지금의 상황은?”

리카르디스의 몸을 만지며 상태를 파악하던 로젤린이 잠시 손을 멈췄다. 그녀는 리카르디스가 어제 기절하기 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늘까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겠다던.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말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과거에
얽매인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속이야 어떻든지.

로젤린도 보고서에 가깝게 사실을 나열하는 식으로 현재의 상황을 서술했다.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가렸다. 한참 후, 그가 거칠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댐이…… 부서졌나?”

“예. 제가.”

로젤린에게서 순식간에 날카로운 기세가 감돌았다. 그 어떤 고통도 감미롭게 만드는 짜릿한 희열이 리카르디스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1 차 폭발로 균열이 가 있던 덕입니다. 댐이 터진 후 바로 물살에 휘말려 버린 터라 연합군의 피해 규모를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병사들이 강가에 있었기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런가.”

“강물이 불어나 며칠은 강을 건너지 못할 겁니다. 당분간은 몸을 회복하시는 것만 생각하세요.”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댐이 붕괴됐다. 연합군은 몇 번의 전투로도 발생하기 어려운 큰 피해를 입었고,
제국군은 도주할 시간을 벌었다. 그렇게 도망친 일라베니아의 병사들은 정해진 합류지에 모일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건만, 가까스로 후일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리카르디스는 마음이 조급해져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이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통증이 일어났다. 머리, 한쪽


다리와 가슴, 갈비뼈 쪽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쉬기도 힘들었다. 이런 때는 성력조차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어떻게 살아 있나 싶을 정도의 몸 상태였다. 로젤린이 약을 구해 오지 않았다면 정말 이델라브힘의
품으로 떠났을지도 몰랐다.

“여기는 어디지?”

“투라르 근처의 버려진 민가입니다.”

“투라르라…….”

리카르디스가 지금의 위치를 대충 머릿속으로 그렸다. 멀긴 하지만 합류지를 찾아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의 몸 상태와 더불어 장소까지 도달하는데 들키지 않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외형이 달라진
로젤린이면 몰라도 자신은 너무 눈에 띄었다.

리카르디스가 생각에 잠긴 사이, 로젤린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허름한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옷,
먹을 것, 지도, 발타식 단검까지.

“이게 다 어디서 났나?”

“투라르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친구 집에 잠시 놀러 갔다 왔다는 식의 가벼운 어조였다. 리카르디스는 갈비뼈와 위 그쯤을 붙잡고 헐떡댔다.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로젤린…….”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아요. 몇 시간 지켜보면서 행동 양식을 익힌 후 움직였어요.”

목소리가 나긋나긋하며, 어조는 독특했다. 잘 모르는 리카르디스가 듣기로도 흉내 내기가 아닌 완벽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로젤린은 계속해서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정체불명의 풀 무더기까지 꺼내자 그제야 가방이 텅 비었다.
리카르디스는 지금 자신의 몰골과 그녀의 차림새를 보았다. 돈이 나올 구석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그 시선을
깨달은 건지 그녀가 머쓱하게 웃었다.

“전하의 검에서 보석만 빼고 버렸는데…… 돌아가면 비슷한 거로 하나 사 드릴게요.”

“……그래.”

전투용이 아닌 예식용 검을 말하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푸른빛의 강옥과 금강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자신의
검을 떠올렸다. 찬란하게 빛을 반사하며 빛나는 보석들은 쉽사리 볼 수 없는 상등품이었다. 너무 눈에 띄는 게
아닐까 하고 리카르디스가 염려하려는 찰나 로젤린이 말을 이었다.
“강옥이 질이 좋고 크기가 크다 보니 출처를 의심받을 것 같아서 몇 조각 내어 일부만 팔았습니다.”

단단한 강옥을 대체 어떻게……? 하고 잠깐 궁금했으나, 대충 힘으로 해결을 보았겠거니 싶었다.

“집안의 가보인데, 치료비를 위해 팔아야겠다고 했더니 눈물을 글썽이더군요.”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로군.”

“눈물을 글썽이며 저에게 사기 쳤습니다. 반 이상을 깎던데요.”

“…….”

“시골 여자가 보석 시세에 너무 밝은 것도 수상할 것 같아, 우선 주는 대로 받았습니다.”

보석의 처분이며, 뒤처리까지 완벽했다. 리카르디스 열 오른 머리로 감탄했다.

“저는 이번 침수 피해가 가장 심한 알락 마을의 생존자입니다. 간신히 홍수를 피해 도망쳤지만, 안타깝게도


남편이 부상당한 상황이죠.”

부상당한 남편? 리카르디스의 눈에 의문이 떠오르자 로젤린이 손으로 그를 콕 가리켰다. 좀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수줍은 가리킴에 리카르디스도 얼굴을 붉혔다.

“남편은 힐리사고의 용병으로, 대륙을 떠돌다가 저를 만나게 되었다는…… 설정입니다.”

“그렇군…….”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연인이나 부부들은 경계를 덜 하더군요. 아무튼, 남편이 많이 다쳤다고 하니 대도시로 나가는 편이 좋을
거라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투라르에는 변변한 치료사가 없다고요. 다행히 한 달에 한 번씩 큰 도시에서 상단이
온다고 하는군요, 그때 삯을 주고 같이 이동해야겠습니다.”

로젤린이 지도를 펼쳐 이동 경로를 그려 냈다. 어느 지점에서 그녀의 손가락이 멈췄다.

“여기서 이동하면 삼 일 거리입니다.”

로젤린이 가리키는 곳은 제국군이 모이기로 한 합류지였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빛내고 있는 로젤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잠들어 있는 짧은 사이 그녀는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지금의 상황을 헤쳐 나갈 방안까지
마련해 왔다.

몇 개의 정보만으로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발타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알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짧은 순간 사람들의 사투리를 익혀 활용하고, 환자를 데리고 발타를 가로지르는 대담한 작전까지.

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그녀는 지식, 경험, 능력.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깨우며 성장해 가고 있었다.
잠시 잠자고 있던 꽃봉오리가 이슬을 맞으며 일시에 개화하는 것처럼. 그것은 굉장히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 * *

계획이 정해진 후 두 사람은 이런저런 준비로 바빴다. ‘한창 알콩달콩할 때의 연인’을 흉내 내어 연습해 보기도
했고, 마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로부터 폐쇄된 길과 영지 등을 알아내며 주변 정세 또한 살폈다.
투라르 인근의 다른 마을에도 다녀온 로젤린이 무언가를 리카르디스에게 보여 줬다. 총사령관 리카르디스의
인상착의가 그려진 종이였다.

“전혀 안 닮았습니다.”

발타 특유의 거친 화풍으로 그려진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는 실물과는 달리 얍삽한 범죄자처럼


표현되어 있었다. 솔직히 그냥 나가도 못 알아볼 것 같긴 하지만, 그림과 함께 기재된 정보가 문제였다.

[은발 머리, 푸른 눈, 큰 체구, 미남]

리카르디스는 잠깐 ‘미남’이라는 단어에 시선을 뒀다가 혼자 겸연쩍어했다. 체구나 미남 같은 경우에는


상대적이었지만, 빛을 받으면 백색처럼 빛나는 은발 머리만큼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확실한 지표였다. 두
사람은 우선 그 확실한 지표부터 없애기로 결정했다.

로젤린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풀 무더기를 찧어서 물과 섞어 끓여 냈다. 뭔가 했더니 옷을 염색하는 염료의


원재료였다. 그녀가 단검을 들고 리카르디스에게 다가왔다.

“머리를 조금 자르셔야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엉덩이 아래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머리카락의 길이는 확실히
범상치 않았다.

219 화.

일라베니아에서 만나는 힐리사고의 귀족들 또한 머리가 긴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왕족과


귀족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였다. 육체노동이 많은 평민과 용병들이 머리를 거추장스럽게 기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리카르디스가 머리를 자르기 위해 단검을 받으려 하자 로젤린이 손을 뒤로 확 뺐다.

“그냥 둘까요?”

“…….”

긴 머리가 취향인가? 마음속 어딘가에 정보를 저장한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들고 있는 단검을 뺏었다. 그러고
머리를 모아 잡아 확 끊어 냈다.

“아악!”

비명을 지른 로젤린이 잘려 나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글썽거렸다. 곧 그녀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리카르디스를 노려보았다.

“아니! 조금이면 되는데, 왜 이렇게까지 많이 자르시는 겁니까!”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성질내는 걸 생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언젠가 한 적이 있었다. 그걸


지금 목격하는 중이라 기분이 굉장히 싱숭생숭했다.

‘대체 내 긴 머리를 얼마나 좋아했던 거지.’

로젤린은 씩씩 성질내면서도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정리했다. 그는 자신이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다고 세 번 정도 사과해야 했다.
머리를 물들이고, 씻고, 말리고 하는 과정을 다섯 번 정도 반복하자, 리카르디스의 머리카락은 어두운 남색 빛이
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일부러 대충 정리해 거칠게 만들었다. 앞머리는 눈을 살짝 살짝 덮을 정도로 길었고,
뒷머리는 그의 목덜미를 가리며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정리 정돈 된 결 좋은 은빛 머리를 늘어트린 황자는 온데간데없고, 칭칭 감고 있는 붕대와 부상이 잘 어울리는


거친 용병의 모습만 남은 상태였다.

로젤린은 그의 색다른 모습에 잠깐 혹해서 빤히 쳐다보았다. 결 좋은 긴 머리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이것


나름대로…… 호오…….

“멋있습니다.”

“……고마워.”

“아니, 정말…….”

로젤린은 뭔가 더 미사여구를 붙이고 싶어 했지만, 결국에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했다.

“진짜…… 잘생겼다.”

그것 외에는 별다르게 표현할 말이 없는 듯했다.

며칠 뒤, 두 사람은 버려진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사실 좀 더 쉬어야 하는 몸 상태였다. 아직 회복 운운할 정도까지도 되지 못했고, 미열이 계속 있어 머리도


둔했다. 하지만 몸이 받은 충격을 다 풀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총사령관의 부재는 적군뿐 아닌
아군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만들어 준 간이 목발을 짚고 혼자 걸어 보았다. 절뚝거리는 데다가, 움직일 때마다 안


아픈 곳이 없긴 했지만, 내내 누워 있던 때를 생각하면 이게 어딘가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걸어서 마을까지
가는 것은 무리였다.

“제가 안아서 옮겨 드리겠습니다.”

“차라리 기어서 갈 거다. 농담 아니니까.”

차마 리카르디스를 기어가게 만들 수는 없었던 로젤린은 아직 수위가 높은 강가 근처에서 부서진 수레와 함께


힐리사고 양식의 검을 구해 왔다.

“음…… 한번 고쳐 볼게요.”

그렇게 말한 로젤린은 부서진 수레를 붙잡고 몇 십 분 동안 뚝딱 뚝딱거렸다. 부서진 부분을 제거, 나무로
비슷하게 부품을 만들고, 마을에서 사 온 끈과 못으로 고정하더니, 기어코 수레를 굴러가게끔 만들었다.
요모조모 능력이 있는 모습이 참 멋있었다.

자신의 코끝에 내려앉은 나무 부스러기를 입으로 숨을 후 불어 제거한 로젤린이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타요, 달링.”
몇 번을 들어도 파괴력이 넘치는 애칭이었다.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다리우. 달링. 그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글자가 단 두 글자로 축약되며 말랑말랑한 분위기를 입게 될 줄은, 그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 로즈.”

거기에 더해, 사랑하는 부인이 끌고 가는 수레에 타야 한다는 죄책감이 그를 몹시 서글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고집 부려 걸어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건 본인이 더 잘 알았다. 리카르디스는 얌전하게 수레 위에 올라탔다.

“로즈. 안 힘들어?”

“하나도요.”

“지금은 당신도 힘이 약하잖아.”

추적당할 위험이 있어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좀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으음…… 달링보다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생각해 준다고 끝을 흐리는 것 같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미 다 내뱉은 후라 말을


흐리는 의미가 없었다.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던 리카르디스는 덜컹이는 수레 위에 얌전히 앉아 있기로 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고 나서야 멀리서 마을의 목책이 보였다. 제일 먼저 세워진 혼혈 마을인 만큼 규모도 상당히
컸다. 로젤린은 수레를 근처에 세워 두고 리카르디스를 부축했다. 느린 걸음으로 마을 입구에 다가가자, 어떤
청년이 껄렁거리며 다가왔다. 창을 들고 있긴 하지만, 병사처럼 보이진 않았다. 마을 자치대의 일원 같은데 뭐가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통행권은?”

로젤린이 깜짝 놀라-는 척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바야, 갑자기 무슨 통행권이에요?”

“아니이, 로즈 너는 그렇다 치고, 저놈은 완전 외부인 아냐? 뭘 믿고 마을로 들여보내 줘? 뭐 힐리사고


용병이라고? 이 비리비리…….”

며칠간 앓은 것 때문에 수척해지긴 했지만, 리카르디스의 몸매는 여전히 탄탄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남자가 말을
재빨리 바꿨다.

“희멀건 해서 검이나 한번 휘둘러 봤을까 싶은 놈이 용병일 리가 있나. 너한테 거짓말 한 거라고, 로즈.”

로젤린은 당황하는 척하며 속으로 살짝 혀를 찼다. 힐리사고의 용병들은 실력 좋고 거칠기로 유명했다.


리카르디스 또한 야성적으로 꾸미긴 했지만, 눈앞의 청년을 만족시키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로젤린과 달리, 리카르디스는 남자가 시비를 거는 진짜 이유를 눈치챘다.

‘저 자식이……?’

호감 있는 여자 앞에서 수컷들이 보이곤 하는 눈빛, 몸짓, 분위기까지. 전형적이어도 이렇게 전형적일 수가


없었다. 로젤린에게 마음이 있는 놈이었다. 때문에, 옆에 있는 자신을 거슬려하는 것이었다. 남자가 로젤린의
어깨를 끌어 리카르디스에게 떼어 놓았다.

‘죽일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녀의 볼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죽이자.’

인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리카르디스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물론 미리 설정해 둔 대로 움직이는 것이긴


했지만, 개인적인 감정도 넘치게 들어갔다.

리카르디스는 남자가 허술하게 들고 있는 창을 그대로 빼앗았다.

“어?”

말 그대로 어? 하는 사이에 창을 빼앗긴 남자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미처 대비하기도 전, 리카르디스는 창을


한 바퀴 돌려 뭉툭한 뒷부분으로 남자의 목을 정확하게 겨눴다. 창과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전문가의 손놀림이었다.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리카르디스의 모습에 방심했던 남자는 당혹스러운 듯 눈만 깜박였다.

리카르디스는 일부러 목소리를 긁으며 거친 소리를 냈다.

“손 떼.”

“이, 이 미친놈이…….”

“목에 구멍 뚫리고 싶으면 계속 잡고 있어 보든지.”

목을 꾹 누르는 창의 감촉에 남자가 콜록 기침하며 뒤로 물러섰다. 로젤린을 안고 있던 손도 자연스럽게 풀렸다.


목책과 창 사이에 갇힌 남자는 눈만 깜박거렸다.

“어머, 달링도 참.”

그때 로젤린이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남자의 목을 뚫을 듯 겨누던 창이 로젤린의 나긋한 접촉에 쑥 내려갔다.

“여기는 힐리사고가 아니라니까요, 달링. 발타에서 이 정도는 그냥 친한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인사예요.”

힐리사고 남자들의 부인은 결코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 ‘손을 대면 안 된다’의 의미는 정말


손끝 하나도 스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제 부인과 어깨가 닿았다며 칼부림을 한 남편이 있을 정도였다.

남자가 흘깃흘깃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힐리사고 놈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왜 다 저 모양이지? 하는


표정이었다. 짙은 남청색 머리카락 사이로 살벌하게 빛나는 눈을 본 남자는 결국 백기를 들고 길을 텄다.

“무, 문제 일으키면 아주, 혼날 줄 알라고!”

남자의 말을 흘러 넘긴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부축을 받아 다시 자리를 옮겼다. 입구를 지나치니 북적이는


거리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일순 집중되는 사람들의 눈길에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눈에 띄는 피부색과 입구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시선을 끈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절뚝이는 불편한 행동 아래 긴장을 삼켰다. 누군가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저 사람…….”

리카르디스는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로즈가 말한 집착이 심한 잘생긴 남편이로군.”

“아, 성격은 별로지만, 로즈한테는 잘해 준다는?”

“어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주 개차반이라고 그냥.”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로젤린에게 반쯤 업혀 가는 그 와중에도 대화 내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가 떴다. 잘했죠? 라고 묻는 것 같은 태도에 리카르디스는 정말 할 말을 잃어버렸다.

“확실히 잘생긴 것 같긴 한데.”

“로즈가 아깝지.”

“맞아. 힐리사고 놈들은 성격이 별로라고.”

리카르디스는 잠시 칼릭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칼릭스가 어떻게 ‘귀염둥이 칼’이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는지의
경위도 잠깐.

“그래도 로즈를 지키다가 다쳤다잖아?”

“그거라도 해야지.”

실상은 로젤린이 지켜 줬다는 점에서 리카르디스는 자괴감에 휩싸여 괴로워해야 했다.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등을 토닥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220 화.

로젤린은 친해진 부인의 집에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며칠 머무르기로 했다. 퉁퉁한 부인이 못마땅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리카르디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가상의 인물 ‘로즈’의 집안에 결혼 허락을 받으러 발을 들인
느낌이었다.

그래도 원래 냉랭한 사람이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로젤린을 대할 때는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으며 로젤린의 볼에 입을 맞추고 그녀를 꼭 껴안기까지 했다. 로젤린도 해사하게 웃으며 여자의 볼에
입을 맞췄다. 누가 보면 십몇 년은 알아 온 친한 이웃 사이인 줄 알 것 같았다.

“잘 지내셨어요?”

“안 본 사이 더 예뻐졌구나, 로즈. 어서 들어오렴. 그리고 그쪽도.”

‘그리고 그쪽도’라는 대목에서 온도가 뚝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어쨌건 간에,
로젤린은 정말 훌륭하게 투라르에 녹아드는 것에 성공한 듯 보였다.
두 사람은 전쟁 때문에 상단이 오는 날이 불규칙해졌다는 불우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상단이 예상보다 늦게
도착할지도 몰랐다. 초조할 만도 한데 로젤린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마을 사람들을 따라 일을
다니며 품삯을 받아 오기까지 했다. 그 돈으로 리카르디스를 입히고, 먹이고, 치료했다. 헌신적인 로젤린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감명 깊어 했다.

로젤린이 대외적으로 활동한 덕에 리카르디스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몸 상태가 약간 호전되었다. 혼자서 움직일 수 있게 된 후 리카르디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집
밖을 나서는 것이었다. 로젤린이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너무 신경 쓰여 도리어 회복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가끔 거리에 출몰하게 된 남자의 시선 끝에는 언제나 로젤린이 있었다. ‘로즈’의 말대로 사교성이고
사회성이고 죄다 가뭄인 남자는 마을 사람들과 말 한번 섞지 않고 오직 부인만 바라보는 집착을 보였다.

오늘도 소문의 그 남자는 나무 상자위에 걸터앉아 마을 아낙들과 어울리는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구경하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콧대가 높고 날렵해. 턱도 남자답고, 몸도 좋아. 역시 용병은 용병인가 봐.”

우호적인 뜻이 담긴 말에 누군가가 재빠르게 반박했다.

“근데 싸가지 없어.”

다들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내가 과일 말린 걸 주니까, 말의 거시기가 쪼그라든 것 같이 생겼군. 이러지 뭐야?”

“힐리사고 놈들이 그렇지. 음담패설을 안 하면 말을 못 하는 놈들이잖아.”

“그런데 어이없는 게 뭔 줄 알아? 저번에도 발타는 인사를 왜 그런 식으로 하냐는 거 있지?”

다른 문화권에 비해 발타의 인사는 다소 친밀해 보이는 감이 있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볼에 입맞춤이라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느끼기로는 파격적이기 그지없는 행위였다.

“발타에서 몇 년을 지냈지만 아직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면서…….”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리카르디스 흉을 보던 중이었다. 마을 아낙들과 빨래를 끝내고 지나가던 로젤린이 그를


발견하고 쪼르륵 달려와 볼에 입을 맞췄다. 남자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굉장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게.”

“무척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러게.”

* * *

상단의 마차가 도착했다. 싣고 온 상품들을 마을에 풀었으니 마차도 가벼워진 참이었다. 어차피 가는 길, 한두
사람 더 태우고 삯을 받을 수 있으면 이득이었기에 상단주와의 교섭은 빠르게 이뤄졌다.

로젤린은 마을 사람들과 헤어지며 눈물을 흘렸다. 남편이 다 낫거든 다시 돌아오겠다며 훌쩍이는데 얼마나 절절한
이별인지, 리카르디스의 가슴이 다 아플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마차는 덜컹거리며 길을
달렸다.

멍하니 풍경을 보는 리카르디스의 입안으로 로젤린이 불쑥 무언가를 집어 넣었다. 우물우물 씹어 보자 부드럽게


녹아들며 고소한 맛이 퍼졌다. 치즈였다. 로젤린이 뿌듯해하며 말했다.

“맛있죠. 오늘 갓 만든 치즈예요. 아주머니가 작별 선물로 주셨어요.”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며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큰 상단이라 그런지 발타
변두리의 마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의심의 눈초리로 응시하는 눈길이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빙긋 웃으며 가까이 있는 그녀의 입에 쪽 입을 맞췄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할


때는 뻔뻔하더니, 막상 당하니 그녀도 얼굴을 붉히기만 했다.

“당신이 먹여 주니까 더 맛있어.”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몸을 돌려 자신의 앞에 앉혔다. 그러면서 그녀의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실력자들이 꽤 있는 것 같아.’

로젤린의 손가락이 리카르디스의 손등 위로 원을 그렸다. 그러고는 깍지를 끼는 척하며 손바닥에 잽싸게 다른


암호를 남겼다.

‘죽이다. 숨기다.’

죽여서 목격자를 없애 버린다는 뜻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마차에 타기 전 확인했던 상단의 인원수를 확인했다.
상단의 사람들만 해도 열 명이 넘었고 용병까지 합해 도합 오십 명은 되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황금정원의
클로에를 통해 상단과 금전의 흐름에 따라 정보가 얼마나 손쉽게 이동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놓치면 곤란해질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다 전력이 되지 못하는 만큼, 로젤린의 발목을 잡게 될 상황
역시 간과할 수 없었다. 들키기 전까지는 최대한 숨겨야 했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볼에 입 맞춘 채 애교 있게
속삭였다.

“아니야, 내가 더 사랑해.”

로젤린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알겠다는 뜻이었다. 훔쳐보던 남자들이 어머 어머, 쟤들 좀 봐,


하면서 좋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의심은 점점 풀렸다. 로젤린이 며칠간 마을 아낙들을 훔쳐보며 눈으로 익힌 발타의 생활
풍습은 흠잡을 곳 없었고, 리카르디스 또한 힐리사고의 사정에 정통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틈날 때마다
붙어서 쪽쪽 거리는 두 사람은 사랑이 넘치는 연인. 그 이외의 단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참 좋을 때다’ 와 같던 반응이, ‘진짜 작작 좀 하지 꼴 보기 싫어 죽겠네’로 변할 때까지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연기를 지속했다.

그렇게 며칠 이동하던 중, 소식이 들려왔다. 일라베니아 제국군과 연합군의 정보였다. 그때 당시 제국군의 뒤를


치러 왔던 연합군이 댐의 붕괴로 반절가량밖에 남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예상보다 큰 연합군의
피해에 내심 놀랐지만, 심각한 표정 아래에 생각을 숨겼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으면 나쁜 소식도 있는 법.

“하카브 왕자께서는 다시 일라베니아로 떠나셨다는군.”


“발타에 남은 잔당들은 어쩌고? 잔당이라고 말할 만큼 적은 규모도 아니라 생각하는데.”

“우리 연합군의 피해가 컸다지만, 일라베니아 놈들도 만만치 않으니까. 총사령관도 실종됐고, 아니 실종이 뭐야.
죽었겠지 뭐. 아무튼, 그런데다가 제국군 놈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고 있는 처지이니 말이야. 그런
오합지졸 군대 정도로 리비타를 함락하기는 무리지. 함락은 무슨. 곧 수색대에게 지근지근 밟힐 걸세.”

남자의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곧 병력이 총집결해서 중부 관문으로 나아갈 거라는군. 이번 해를 넘기기 전에 어쩌면 결판이 날지도


모르겠어.”

중부 관문 다음은 황도였다. 남자의 말대로 중부 관문이 버티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리카르디스는 초조함을
가리기 위해 용병들이 준 싸구려 담배를 물었다. 연기가 입김처럼 번져 나갔다.

* * *

앞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느리게 움직이던 마차가 완전히 멈췄다. 리카르디스는 긴장한 용병들의
태도를 바라보곤 흘끗 로젤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종아리에 매어 둔
단도가 있는 위치였다. 리카르디스도 옆에 풀어 둔 검을 가까이에 두었다.

바깥에서 오고 가는 소리가 길어졌다. 마차 안 다른 자들의 이목이 밖으로 쏠렸을 때, 로젤린이 잽싸게 수화로
무언가를 말했다.

[수색대]

발타의 수색대와 우연히 마주친 것이었다. 철걱, 철걱. 갑주를 입은 병사가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투라르에서 태운 젊은 부부 외에는 전부 저희 상단의 용병들입니다.”

병사의 시선이 로젤린과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그들을 날카롭게 죄였다.

“투라르…… 강가에서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못 걸어갈 거리는 아니군. 거기에다가 힐리사고의 용병이라.
발타에는 언제 처음으로 왔나?”

“3 년 전쯤입니다.”

리카르디스는 마차의 벽에 머리를 기대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3 년이나 발타에 있었는데, 흠. 상단주. 투라르에 들를 때 근처 마을에 힐리사고 용병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


있나? 좁은 곳이라 금세 소문이 퍼질 텐데.”

상단주는 곤란해 보이는 낯으로 수색대의 대장과 리카르디스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리카르디스가
주머니를 뒤적이자 수색대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건 용병들이 피는 싸구려 담배였다.
그가 담배를 물고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여유로운 숨과 연기가 퍼져 나갔다.

“3 년 내내 발타에 있지는 않았죠. 힐리사고와 발타를 돌아다니며 일했습니다. 아름쉬에의 무지개 비늘 상단.
거기에 확인해 보시면 될 겁니다.”

무지개 비늘 상단은 발타를 가장 많이 오가는 힐리사고의 큰 상단 이름이었다. 하지만 당장 확인할 수 없는 이상


수색대의 의심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용병 일은 발타 내에서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부인이 있는데도 제법 떠돌이 생활을 즐기나 보군.”

리카르디스는 귀찮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경계하는 시선이 모여 든 상황.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간 이곳이 전장으로 변할 터였다.

그때 로젤린이 나섰다.

“아, 그게…….”

리카르디스를 향하던 뾰족한 시선들이 로젤린에게 옮겨 갔다.

“이 사람이 힐리사고에도 가정이 있거든요.”

백여 명 넘는 사람들이 있는 길가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남자들의 시선은 아까와 다른 방향으로 싸늘해진


상태였다. 리카르디스는 당황을 숨기기 위해 재빨리 연기를 내뿜어 얼굴을 가렸다. 로젤린이 멋쩍은 듯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웃었다.

“저를 사랑하지만, 힐리사고에 있는 부인도 버릴 수 없다고 그랬어요.”

221 화.

“뭐, 이 미친…….”

“저 개…….”

수색대의 대장이 리카르디스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돌려 따가운 사내들의 시선을
피했다. 로젤린이 두 손을 내저으며 황급하게 말했다.

“아뇨, 이상한 게 아니라…… 그러니까 제가 진정한 운명이지만, 이미 혼인을 해 버렸으니까요. 그 부인도


끝까지 책임을 지려고 하는 거래요. 너무 멋있지 않나요?”

리카르디스는 순식간에 순진한 여자를 꾀어내 두 집 살림하는 천하의 개망나니가 되었다. 수색대의 대장이
들으라는 식으로 혀를 찼다.

“으흐흠, 부인은 남자 보는 눈을 좀 기르셔야겠소!”

수색대가 떠난 뒤, 상단의 사람들의 눈빛도 변했다. 방금 전까지는 싸가지는 좀 없지만, 부인을 아끼는 놈을
보는 시선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개잡놈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중점을 흐리는 훌륭한 화술로 그들의 경계를 벗어났으나, 리카르디스는 속이 쓰렸다. 옆을 바라보니 로젤린이
남몰래 엄지를 척 치켜세우고 있었다. 얄미웠다.

그렇게 따가운 눈총 아래 마차가 굴러가고 있을 때였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품에 기대어 잠을 자는 척했다.


체력이 약한 여성이라면 이즈음 피곤하겠지, 하는 철저한 계산속에 이뤄진 행동이었다.

얼마간 그렇게 있던 로젤린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와 동시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도적이다!”
안 그래도 수색대의 대장이 떠나기 전에 이르고 간 내용이었다. 최근 전쟁 때문에 높아진 세율로 마을을 버리고
어설픈 강도 흉내를 내는 자들이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로젤린은 날아오는 화살을 감지하고 벽에 붙어 있던 리카르디스를 잡아당겼다. 1 초 전까지 그가 등을 기대고


있던 벽면에 화살촉이 비죽 솟아 있었다. 같이 마차를 타고 있던 용병들이 튀어나갔다. 둘만 남자 로젤린이
종아리에 매 둔 단검을 잽싸게 꺼냈다. 그녀가 밖을 슬쩍 보다가 한 발짝 물러섰다. 곧바로 그 자리에 또다시
화살이 꽂혔다.

상단의 사람들보다 도적의 수가 두 배 이상이 많았다. 더군다나 상대는 농기구를 들고 있는 어설픈 산적이 아니라,
무기와 방어구를 갖춘 집단이었다. 전황이 불리했으나 로젤린은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헤어진 수색대 중에
마인이 있다면 마력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는 이르지만, 무리를 벗어나야겠습니다.”

재빨리 판단을 마친 그녀가 마부석에 앉았다. 곧 말 두 필이 이끄는 작은 마차가 홀로 길가를 벗어났다. 전투를
벌이던 용병들이 그 모습을 목격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도적들도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끊임없이
화살을 날려 보냈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아하니 쫓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길가 옆에 난 나무가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도적들이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였다. 로젤린이 말고삐를 잡아 방향을 틀어 보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나무 기둥이 떨어지며 쿵! 하고
땅을 울렸다. 놀란 말이 앞다리를 치켜들고, 나머지 한 마리는 나무에 부딪쳤다. 마차가 기우뚱 기울었다.

발밑이 불안해진 순간 리카르디스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로젤린을 보았다. 그녀가 껴안자마자 마차가 쓰러지며
비탈을 굴렀다.

마차가 비스듬한 면을 따라 뒤집힐 때마다 리카르디스는 온몸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까지 몸이 다 낫지
않은 상황에서 버티기엔 너무 큰 충격이었다. 시야가 초 단위로 바뀌었다. 바닥이 천장에 가 있고 천장을 밟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게 또 순식간에 뒤집혔다.

로젤린은 안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몸이 고통으로 떨리는 것을 느끼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텅, 등이 벽에


부딪치며 튕겼다. 그리고 발이 다른 면에 닿는 순간, 로젤린은 또 다른 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쾅!

뻥 뚫린 틈으로 두 사람의 인영이 얽혀 빠져나왔다. 텅 빈 마차는 계속해서 산비탈 밑으로 굴러가며 부서져
내렸다.

“으윽…….”

리카르디스는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통증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짧은 사이 땀으로 옷이 흠뻑 젖었다.

“달링!”

정신이 혼미해지는 고통 속에서도 뇌리에 똑똑히 박히는 애칭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헐떡이며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았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겨우겨우 로젤린을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흐릿해 그녀가 두세 명으로
흩어져 보였다.

“……괜찮아. 그대는?”
“저는 괜찮지만,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마력을 써 버렸어요. 마차에서 탈출하려다가 그만…….”

명백한 실수였다. 리카르디스의 상태가 악화되는 걸 방지하고자 한 행동이지만, 그 배경에 과거 마차 사고의


기억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방법도 분명히 있을 텐데 순간 머리가 굳어 버리며,
본능만 작용해 버린 것이었다.

“빨리…… 이동하는 게, 좋겠어.”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다 시선을 휙 돌렸다. 보이지도 않는 저 먼 곳에서부터 익숙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험한 말을 내뱉었다.

“젠장.”

리카르디스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얼추 눈치챘다. 그녀가 이를 갈듯 말을 씹어 내뱉었다.

“들켰습니다. 빨리 이동하겠습니다.”

두 사람을 태운 말이 산길을 내달렸다. 리카르디스는 갈비뼈를 붙잡고 애써 신음을 참아 냈다. 거대한 짐승의
발이 땅을 구르는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칼로 찌르는 듯한 선명한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로젤린도 그런 리카르디스의 상태를 눈치챘으나 멈출 수 없었다.

마인의 기운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마차에서 탈출하고 난 후부터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용케
위치를 파악하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두 사람이 탄 말보다 한 사람이 탄 말이 속도가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추격자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근접한 상황이었다.

끈질긴 추격전은 두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고 나서야 멈추게 되었다. 한걸음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찔한 절벽
아래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말이 푸르르 투레질했다.

로젤린은 말에서 내려와 주위를 살폈다. 쫓아온 자의 숫자는 오십여 명. 그중 마인은 다섯쯤 되는 것 같았다.
상대하지 못할 숫자는 아니지만, 리카르디스를 보호하면서 싸워야 했기에 불리했다. 조금만 방심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천천히 숨을 내뱉은 로젤린이 검을 뽑아 끝을 땅으로 향하게 했다. 사각, 무딘 검 끝과 자갈이 맞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바람이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둘러싼 발타의 병사들이 일시에 몸을 굳혔다. 자그마한 여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기운뿐 아닌, 눈으로 보이는 경이로운 광경 때문이었다.

로젤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더니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짙은 갈색에서 완전한 흑색으로, 두피에서
머리끝까지. 그녀는 검을 꽉 쥔 채 몸을 웅크렸다. 바닥에 닿아 있던 검 끝이 땅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등,
어깨, 드러난 팔의 근육이 섬유의 위로도 보일 만큼 역동적으로 꿈틀거렸다.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마력의 기운이 멎었다. 천천히 웅크린 몸을 펴는 그녀는 아까와 달리 키와 체구가 훌쩍 자라 있었다.


갈색빛을 띠던 눈동자 또한 어느새 여름의 이파리처럼 푸릇하게 변한 채였다.

[검은 머리, 하얀 피부, 녹색 눈, 장신]

총사령관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와 함께 실종되었다던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 정보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로젤린이 입을 꾹 다물며 검을 들어 병사들을 향해 겨눴다. 그제야 발타의 병사들은 잠에서 깨어난 듯 일시에
움직였다.

“……?”

로젤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병사들이 검을 뽑거나 공격하려는 의도를 보이지 않고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잠시간 그들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방심하게 하려는 수작인가?

로젤린이 교전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친 상대들을 잽싸게 살해해 버리려 마음을 먹었던 때, 가운데에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까 전 로젤린에게 남자 보는 눈 좀 키우라 했던 수색대의 대장이었다.

“저의 주인께서 귀한 분을 뵙고자 청하니, 부디 모시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 *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로젤린의 눈은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정비된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어 흔들림이 심하지
않았지만, 그것마저도 지금의 그에게는 큰 충격이 되는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마차 바닥에 누운 채 숨을 쌕쌕 토해 내고 있었다. 로젤린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이마를


매만졌다. 아까보다도 체온이 높아져 있었다. 로젤린은 입술을 한번 꾹 깨물고 마차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한번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나절을 달리고 나서 당도한 곳은 발타의 작은 요새 중 하나였다. 수색대의 대장이 신분 패를 보이고 요새의


문을 통과했다. 로젤린은 마차 안에서 검을 빼어 든 채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도 바깥에서 불순한 움직임은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오거든 안전하게 보호하겠노라는 제의를 받았다. 수색대의 대장이 아닌 그의 ‘주인’으로부터의 전언이었다.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카브가 눈에 불을 켜고 리카르디스를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타인이
몰래 리카르디스를 빼돌리고자 한다니.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결국 그 제의를 승낙했다. 쫓아온 추격자들이 우위에 서 있는 상태였음에도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과 ‘주인’이라는 자의 이름이 기묘한 신뢰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멈췄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부축한 채 건물 안으로 이동했다. 미로같이 복잡한 곳이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고, 왼쪽으로, 중앙 길로, 지하로 내려갔다가, 다시 계층을 오르고. 로젤린은 침착하게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 지리를 익혀 두었다.

병사들이 큰 방 앞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천으로 가려진 안쪽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주인님.”

로젤린은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그녀가 다가가자 하녀들이 천을 걷었다. 막 일어서던 여자와


로젤린의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경.”

로젤린이 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수색대의 대장에게 들었던 대로, 간제가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222 화.
“왕녀 전하.”

생글생글 웃던 그녀가 로젤린에게 반쯤 기대다시피 한 남자를 보고는 인상을 굳혔다.

“전하인가요?”

“…….”

“전하로군요. 야라. 그분을 모시고 오렴.”

로젤린은 간제가 안내한 너른 침대에 리카르디스를 눕혔다. 그는 신음을 겨우 삼키고서 간제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분이군요. 왕녀.”

“그런가요? 저는 제가 나름 일관적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했는데요.”

곧 시녀들과 함께 온 남자는 간제만큼이나 놀라운 인물이었다.

“아아니! 로젤……!”

완벽한 문장이 구사되기 전, 간제가 남자의 입을 확 막아 버렸다. 라헤안시는 그제야 자신이 발타 한가운데에서
발타인들이 간절히 죽이고자 하는 사람의 이름을 외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라헤안시가 눈물을 글썽이더니 두 손을 모아 하트를 그렸다. 대충 반갑고 너무나 좋다는 뜻이겠거니 싶었다.
로젤린은 답변을 돌려주는 대신 라헤안시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대로 질질 끌고 간 로젤린이 라헤안시를
던지다시피 침대에 밀어 넣었다.

당혹스러워하던 라헤안시는 침대 위에서 신음을 내뱉는 남자를 발견하고서는 표정을 굳혔다. 머리 길이와 색이
달랐지만 누군지 금세 알아챈 듯했다. 라헤안시가 자세를 잡고선 리카르디스의 몸 위로 손을 얹었다. 그 주위로
하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팔짱을 낀 채,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만히 그의 곁을 지켰다.

거칠던 리카르디스의 숨소리가 점차 고르게 변했다. 상처가 날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손 또한 느슨해졌다. 내내


눈을 감고 있던 리카르디스의 눈꺼풀이 떨리더니, 곧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안에 가장 먼저 담긴 사람은
로젤린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아직 손톱자국이 박혀 있는 손을 그녀에게 뻗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라헤안시의 성력이


거기까지 미친것인지, 그녀의 눈앞에서 벌겋게 드러난 속살이 아물었다.

로젤린의 가슴을 꽉꽉 틀어막고 있던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눈물이 투두둑 흘러내렸다. 그녀는
리카르디스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그 위에 젖은 얼굴을 묻었다.

* * *

리카르디스는 새벽이 찾아올 즈음 눈을 떴다. 옆구리가 따뜻했다. 언제나처럼 로젤린이겠거니 해서 반사적으로


부드럽게 끌어안은 순간, 리카르디스의 후각에 낯선 향이 감지되었다. 그는 초점을 맞추기 위해 눈을 깜박거렸다.
아무리 시야가 흐릿하다지만 검은 머리와 분홍 머리를 구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

이 자식이 왜 여기에서 자고 있어. 울컥하던 마음은 초췌한 라헤안시의 몰골을 본 후 많이 누그러졌다.


리카르디스는 라헤안시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일어났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긴 하지만, 숨쉬기도 힘들던 어제에
비할 수 없는 몸 상태였다.

리카르디스는 손을 까딱거리다가 익숙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리카르디스의 손에서 퍼진 하얀 빛이 그의 몸에


다시 파고들었다.

“……하.”

몸 안에 퍼진 따스한 기운이 남아 있는 통증마저 걷어 갔다. 정말 악몽 같은 나날이었다. 살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리카르디스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고, 다리를 까딱이며 움직였다.

‘로젤린은 어디 있지?’

리카르디스는 침대의 천을 걷고 밖으로 나섰다. 어제는 제대로 보지 못한 방 안의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발타의 궁전에서 볼 수 있을 법한 호화롭고 넓은 방이었다. 그 벽의 정중앙에 요새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리비타에서 멀지 않은 곳이군…….’

리카르디스는 기존의 목적지였던 리비타, 그리고 그 안에 있을 힉살라를 잠시간 떠올렸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이곳에 있었다. 일국의 왕녀가 이 전시 상황에 수도의 궁전에서 벗어나, 적군의 총사령관을 은밀하게 찾아
보호했다. 단순한 일탈이라 말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우선 간제부터 찾아봐야 할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방을 살폈다. 큰 응접실과 연결된 작은 방에 들어가니


문가에 서 있던 호위가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흘끗, 중앙의 침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리카르디스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넓은 침대 위에 있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간제와 로젤린. 두 사람이 사이좋게 손목과 손목을 붉은 천으로


묶어 둔 채로 잠들어 있었다.

“…….”

리카르디스가 간제의 호위에게 눈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호위도 아는 바가 없는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기척에 로젤린이 깨어났다. 그녀는 문가에 있는 리카르디스를 보고 덜컥 몸을 일으켰다. 당연하게도 연결되어


있는 간제가 피해를 입었다.

“악!”

어깨가 빠질 뻔한 간제가 비명을 질렀고, 로젤린은 그때야 그녀의 존재를 깨달았다. 로젤린은 단단히 묶은 끈을
풀 여유조차 없는지, 간제를 한쪽 어깨에 위에 얹고서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잠에 덜 깬 간제가 우으으
하면서 그녀의 어깨 위에 늘어졌다.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리카르디스의 상태를 살폈다.

“저, 전하. 몸 상태는…….”


로젤린의 손이 허공을 배회했다. 다친 곳 중 어디를 먼저 만져야 하나 마음만 앞선 것 같았다. 그 산만한
손놀림에 리카르디스가 웃었다.

“덕분에, 이제는 정말 괜찮아.”

로젤린은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으나, 손을 내리는 척하며 그의 가슴팍 부근을 만지작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괜찮대도.”

곧 방 안의 모든 인원이 일어나 한자리에 모였다. 로젤린, 리카르디스, 간제, 라헤안시까지.

“궁금한 점이 많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물어보시면 기꺼이 답해 드리지요.”

간제의 말에 리카르디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왜 끈으로 손목을 연결한 채 자고 있던 겁니까?”

그것부터 물어볼 줄이야.

“……아, 네. 그건 제가 인질이라서.”

“인질?”

“네, 로젤린 경이 제가 어떻게 왕녀 전하를 믿겠냐며 저를 인질로 삼고 싶다고 해서요. 혹시나 자는 도중


놓칠지도 모르니 손에 끈을 묶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왕녀는 그에 동의하셨습니까?”

“물론이지요.”

인질이 생긋 웃으며 다과를 인질범에게 밀어 주었다. 인질범은 그걸 또 좋다고 먹고 있었다. 희한한 광경이었다.

“사실 로젤린 경이 마음먹으면 묶고 있건 없건 별반 차이는 없을 겁니다. 그냥 마음의 위안만 더할 뿐인 일이니


못할 이유가 없지요. 궁금증은 풀리셨나요?”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러고 자야 했던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간제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느냐가


의문스러웠다. 간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발타에 떨어진 세 명의 일라베니아인은 결코 무사하지 못했다.

그녀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로젤린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그런 불편함까지 감수할 이유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리카르디스는 우선 그 의문을 넣어 둔 채 궁금했던 다음 얘기를 물었다.

“라헤안시 대신관이 왜 여기에 있습니까?”

그건 라헤안시가 대신 설명했다.

“도망치고 있는데 갑자기 저기에서 물이 해일처럼 밀려오잖아! 어쩌다 휘말려서 떠내려갈 뻔했는데, 누가 나를
건져 줬어. 근데 그게 발타의 병사들이지 뭐야. 아, 나는 여기서 죽겠구나 싶었는데, 다른 사람들 몰래
빼돌리더라고! 와, 뭐지? 이제 죽겠구나 싶었거든? 근데 날 구해 준 사람의 상사가 왕녀 전하였지 뭐야!”
라헤안시가 리카르디스의 귓가에 뒤 내용을 속삭였다.

“그래서 뭐지? 이제는 진짜 죽겠구나 싶었는데, 살려 주더라!”

“……그래. 잘됐구나.”

이 빈곤한 어휘력으로 대체 어떻게 설교를 하고 살았던 것일까. 리카르디스는 앞에서 생글 웃고 있는 간제를


바라보며, 가장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왕녀가 바라는 건 뭡니까.”

“순수한 선의라고는 믿지 않으시겠죠.”

“예.”

간제는 흠, 하며 코로 숨을 쉬고는 두 손을 겹친 채 꼬물거렸다. 망설임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저와 제 오라비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얼마나 좋지 않느냐면…….”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마저 말을 이었다.

“많이 안 좋습니다.”

“…….”

말 안 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개인감정을 미뤄 두고서라도 저에게는 하카브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아니, 정확히는 발타예요.”

“발타를 위해서라…… 발타는 지금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왕녀.”

“승리가 과연 발타에 뭘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간제가 상체를 숙이며 턱을 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테이블에 닿아 소리를 냈다. 간제는 그때마다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요소를 꼽았다.

“자부심? 대륙에서 가장 비옥한 일라베니아의 영토? 황성에 쌓인 보석과 황금?”

“대개는 그런 것들을 얻고자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게요, 말하고 보니 승리도 나쁘진 않겠어요.”

간제가 피식 웃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저에게는 자부심보다 전쟁으로 죽어 나가는 많은 발타인의 목숨이 소중하고,
개중 비옥하다고는 하나 마찬가지로 노쇠해 가는 일라베니아의 영토도 그다지 탐나지 않습니다. 보석과 황금.
그것은 빠르게는 수년, 늦게는 백여 년 안에 가치를 잃고 아무 가치 없는 반짝거리기만 하는 돌덩이가 될 겁니다.
그것을 먹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간제가 제 팔찌를 와구 와구 먹는 시늉을 했다.

“전쟁에 이긴다 해도 결국 검게 변해 썩어 가는 땅은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 위에 서 있는 수많은 백성들도


대륙과 함께 서서히 죽어 가겠죠. 물론 저의 부귀영화는 보장될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오래 살지 못하는
생물이니까요. 그 짧은 시간 동안은 대륙이 버텨 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제가 죽은 뒤에는? 백 년 뒤에는?
이백 년 뒤에는요?”

223 화.

간제는 하카브와 마찬가지로 미소로 무장하여 본심을 숨기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과거 일라베니아의
성에서 “하카브는 저를 결코 죽일 수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던 때와 지금만큼은 가면이 벗겨지고 그녀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났다. 결코 변명이나 거짓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진심이 보였다.

“발타에 필요한 것은 승리가 아닌 축복의 밤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하카브가 모든 걸 망쳐 버리려는 미친놈일


뿐입니다. 그리고 리카르디스 전하께서는, 유일하게 필요한 걸 주실 수 있는 분이고요.”

“……그렇군요.”

리카르디스는 간제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는 조금 찝찝한 듯,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런 박애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셨다고요?”

리카르디스가 대답 없이 가만히 다른 곳만 바라보자 간제가 깔깔 웃었다.

“인상과 풍채가 좋은 노인이 했으면 조금 더 설득력이 있을 법했지요, 이해합니다.”

그것보다는 그 말을 꺼낸 게 간제라서 모호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세상 하루만 사는 사람처럼 하카브와


반목하고자 했던 이유가 제 나라를 사랑해서라니. 정말 이런 생각은 실례지만,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간제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부드럽게 리카르디스를 응시했다.

“하지만 제 이상과 전하의 이상은 완전히 같지 않겠죠. 그러니 저는 전하의 온정에 기대어 부탁을 드리진
않겠습니다. 이것은 거래입니다. 제 조건을 말씀드리지요.”

그녀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그러고는 하나를 접으며 얘기했다.

“축복의 밤을 부를 것.”

리카르디스는 잠깐 그 부분에서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려 했으나, 결국은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하기를


선택했다. 간제의 손가락이 하나 더 접혔다.

“전쟁으로 일어난 어떠한 피해도 발타에게 묻지 말 것.”

간제가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무언가를 꽉 움켜진 듯한 모양의 손 뒤에서 간제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3 왕녀 간제를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

그녀가 입을 닫자 방 안은 조용해졌다.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간제를 응시했다.


“조건이 추상적이군요, 조금 더 자세히 들어 볼까요.”

“축복의 밤은 말씀드렸으니 넘어가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 ‘전쟁으로 일어난 어떠한 피해도 발타에 묻지 말


것.’부터 얘기해 볼까요?”

간제가 아까 그 말을 하며 접었던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하필이면 중지라서 기분이 모호해졌다.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으셨음을 인지합니다. 하지만 이건 정말…….”

그녀가 중지를 곧게 세우더니 제 손가락을 보며 열렬하게 외쳤다.

“하카브 그 미친 인간! 그놈 하나가 사두마차의 말 네 필이 되어 끌고 간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죄를 물으려면


그놈 하나에게 물으세요!”

대단한 기세에 리카르디스와 라헤안시가 움찔거렸다. 간제는 씩씩거리던 걸 진정하고 다시 침착하게 얘기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셨지요. 발타는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하지만 제가 ‘2 황자 리카르디스를 살린다’라는


선택으로 그 예정된 운명이 틀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합당한 값으로 두 번째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간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발타가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시 일라베니아의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그 미래를
비튼 값으로 발타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이득일 수 있었다.

“이해했습니다.”

간제가 휴 하며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3 왕녀 간제를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 이 세 번째 조건은 두 번째 조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저라고 해도 무턱대고 이 전쟁을 일으킨 주범에서 발타를 쏙 빼 달라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질타를 받을 인물을 내세워야겠죠. 저는 그걸 하카브로 할 생각입니다. 발타
왕실은 하카브와 아무 상관 없다! 이런 느낌으로, 평소에 왕실이 검은달에 대해 변명할 때처럼요.”

“그 말을 왕녀의 입에서 들으니 굉장히 기분 이상하군요.”

“그러게요, 저도 말하면서 좀 기분이 이상했네요. 아무튼…… 하카브가 쥐고 있는 주도권을 뺏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힉살라뿐이지 않겠습니까?”

간제가 흘끔거리며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뭡니까, 그 눈빛은.”

세 번째 조건은 분명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3 왕녀 간제를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 인데 이야기가 묘한 곳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설마 저보고 힉살라를 설득해 달라든지, 혹은 반역 일으키는 걸 도와서 왕녀를 힉살라로 만들어 달라든지 하는
것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아니긴 하지만 힉살라께서도 제 말보다는 리카르디스 전하의 말을 좀 더 귀 기울여 들으실 것 같다는 점에서
그 의견도 나쁘진 않네요.”
“나쁩니다.”

“아, 네.”

지금 자신은 발타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있었다. 어떤 권력, 무력도 동원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빤히 알면서
무얼 도와달라고 하는 것일까. 가진 것이라고는 신성력밖에 없는데.

‘아.’

그 순간 한 가지 가설이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힉살라의 치료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눈치가 빠르시군요, 전하.”

발타의 힉살라를 대신해 하카브가 왕실을 통제하기 시작한 건 올해로 7 년쯤 되었다. 그동안 힉살라는 내내 투병
중이라 알려지긴 했으나, 공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실상은 그가 죽은 사람일 것이라는 음모론까지 돌
정도였다.

리카르디스도 그 음모론을 믿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카브의 행태는 나날이 갈수록 도를 지나쳤고, 만약


힉살라가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면 그런 그를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몇 년째 의식이 없으십니다. 독에 중독된 상태지요.”

“……발타 내에도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자들이 있을 텐데요.”

“전부 하카브의 사람들입니다.”

치료하지 않고 일부러 놔둔다는 얘기였다.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자초지종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손마디로
턱을 쓸었다.

“……제가 리비타로 가야 한다는 얘기인 것 같군요.”

간제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말을 망설였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국의 총사령관이 발타의 궁전으로? 호랑이의 아가리에 핏물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들고 가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전하께서 위험한 일에 처하지 않으리라 장담 드리긴 어렵습니다. 리비타의 궁전에는 하카브의 사람들이 깔려
있는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저도 제 나름의 세력을 구축해 뒀답니다.”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간제가 진실을 토해 냈다.

“아주 조금이지만요. 그래도 전하를 눈에 띄지 않게 이곳까지 모시고 올 정도는 되는데.”

“……위험을 감수할 만하다 인정합니다. 순식간에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기회니까요. 하지만, 치료가 끝난
힉살라께서 간제 왕녀와 같은 뜻이리라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일라베니아 황성에 발타의 깃발을 꽂기
직전인 이 상황을, 발타의 힉살라가 기껍게 여기지 않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간제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제 오라비와 힉살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대화할 여지가 있었다면 그렇게 과격하게 재워
두지는 않았겠죠.”

“사이가 안 좋은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간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오라비가 적법한 후계자들을 죄다 죽여 버렸거든요.”

“후계 다툼이야 어느 세대고 일어나는 일일 텐데요. 이제는 그가 적법한 후계자 아닙니까.”

“아뇨, 힉살라께서는 하카브의 존재 자체를 몹시 견딜 수 없어 하십니다. 마력이 없는 자는 인간 취급을 안


하셔서.”

리카르디스가 ‘뭔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답군.’이라고 생각하자마자 간제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지금 그 아빠에 그 아들이라 생각하셨죠.”

“설마 그럴 리가요.”

리카르디스가 생긋 웃었다. 간제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힉살라가 계시는 한, 마인이 아닌 하카브는 결코 왕태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게 놈이 아직 왕자라고 불리는


이유죠.”

그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로젤린이 입을 열었다.

“왕녀 전하.”

“예, 로젤린 경.”

“늦었지만, 위태로운 상황에서 구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머, 별말씀을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저는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리비타의 궁전으로 가시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습니다.”

간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리카르디스는 당황을 숨기고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표정으로 간제를 응시할 뿐이었다.

“계획은 확실하지 않고 변수는 많으며, 깨어난 힉살라께서 하카브 왕자를 후계자로 여기지 않을 거라는 말 또한
추측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불확실한 가능성만 보고 제국의 총사령관께서 위험을 감수하실 수는 없습니다.”

한마디 한마디를 더하는 로젤린의 표정이 점점 싸늘해졌다. 간제는 그런 로젤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름
평화롭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방 안에 있는 호위들이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말은 하기 싫었지만, 로젤린 경은 지금의 상황을 자각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는 발타의 한가운데이며, 너희들은 적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간제의 말대로 이곳의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간제의 협박에 응수했다.
“왕녀 전하께서도 현실을 아셔야겠습니다. 어제 인질이 되어 달란 말이 농담처럼 들렸나 봅니다.”

아무리 마인이라고 해도 로젤린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고, 그 점은 이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간제는 로젤린이 손을 뻗었을 때 닿는 거리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위협이라는 걸
지금 와서 자각했다. 숨 막힐 정도로 밀도 높은 압박감이 공간을 메웠다.

그렇게 소리 없이 시선만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저, 저어…….”

라헤안시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며 살짝 손을 들었다. 굳은 표정의 두 여자가 동시에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라헤안시는 소스라쳤다. 이 두 사람의 대화에 두 번 끼어드느니 차라리 죽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쪼그라든 위엄을 도닥인 후에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총사령관님이 아니더라도 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면 되는 거 아닙니까?”

224 화.

모두가 그 말뜻을 이해했다. 라헤안시, 그가 리카르디스를 대신해서 리비타로 가겠다는 얘기였다. 세 명의


얼굴을 번갈아 본 라헤안시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쟤도 있었네’ 같은 반응인데…… 이거 생각보다 상처가 되네요.”

간제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곧 그녀의 눈이 라헤안시를 향했다.

“몇 년 동안 중독된 중상자를 치료할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여도 대신관 중에서도 네 손가락 안에 듭니다.”

일곱 명 중에 네 번째? 애매하지 않나? 그런 기색을 느낀 라헤안시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일라베니아에서 리카르디스 전하를 제외하고 네 번째!”

그렇게 말하니 생각보다는 괜찮게 들렸다. 버럭 성질냈던 라헤안시가 큼큼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저도 총사령관께서 리비타에 가는 것은 아니라 봅니다. 연합군이 중부 관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흩어진 제국군을 규합하여 연합군을 막을 수 있는 건 리카르디스 전하밖에 없습니다. 위험성과 계획의 불확실성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리비타의 궁전을 넘어 힉살라의 방에 침입한 뒤, 치료를 끝내고 제국군과 합류해 중부 관문으로 간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게 분명했다. 간제는 라헤안시가 말한 대로 리카르디스에게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간제 왕녀께서 말하신 부분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인 만큼.”

“대신관님께서?”

“예, 제가 가지요. 그사이 총사령관께서는 제국군을 이끌고 연합군을 막아 주시길 바랍니다.”

예상했던 내용이지만 충격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제 위험을 남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았다. 혀


한쪽에 혓바늘이 돋은 것 같은 껄끄러움과 불편함에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차츰 가라앉았다.
“……위험할 거다. 라헤.”

라헤안시는 리카르디스가 사용한 제 애칭에서 그의 걱정을 읽었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형이라니깐.’

라헤안시는 씩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형, 걱정 마.”

“네가 나라면 걱정을…….”

라헤안시가 낄낄거렸다.

“신에게 빌기만 한다고 상황은 바뀌지 않으니 움직여야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신관이라는 인간이 말하기에는 부적절한 감이 있으나, 그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라헤안시가 꽉


주먹을 쥐었다. 긴장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터트리기 전에 잔뜩 힘을 응축하듯 견고해진 모양새였다.

라헤안시가 주먹을 불쑥 리카르디스에게 내밀었다. 리카르디스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주먹을 맞대었다.


라헤안시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렸다.

“우리 지금 되게 멋있지 않았어? 역사서에 기록되면 ‘발타. 위험의 한가운데에서도 우애로 얽힌 맹세가
일어났노니…….’ 이런 식으로…….”

“그럼 대화를 마무리 지어 볼까요, 왕녀.”

리카르디스가 무시하자 라헤안시가 툴툴거렸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간제를 향한 후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발타에서는 사람의 말을 세 번까지는 들어 보라고 했던가요. 그 말대로 되었군요.”

간제는 막 엎어질 뻔한 거래가 간신히 이뤄졌음에 감격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간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으며 크게 외쳤다.

“우리 힘을 모아 하카브 그 개자식을 죽여 봅시다!”

“……그래요. 좋은 생각입니다.”

* * *

계약이 성사되긴 했으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축복의 밤이 지난 이후 마인이 어떻게 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로젤린과 간제가 둘만의 작은 연회를


흥청망청 즐기는 사이, 리카르디스는 라헤안시에게 그 건에 관해 물어보았다.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최초의
신전에서 가져온 역사서들을 탐독했다는데, 소득이 전무 했단다. 리카르디스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손에 손을 잡고 하카브 개자식을 죽여 보자고 동의한 게 언제인데, 말을 번복해야 한다니. 리카르디스는 깔깔


웃고 있는 간제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예?”

“먼저 얘기를 못 한 점은 양해해 주길 바랍니다. 왕녀가 무슨 말을 꺼낼 줄 알고 대뜸 그 얘기부터 하겠습니까.


미안하지만, 로젤린 경의 안전이 확실시되기 전까지 축복의 밤을 부르는 의식은 미뤄야겠습니다.”

“……그.”

간제가 급히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리카르디스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나에게는 그녀의 안전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 건은 협의의 여지가 없습니다.”

잠시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있던 간제가 손으로 입을 턱 가렸다. 실망한 것인가 싶었는데, 눈빛이 기묘하게


초롱초롱했다. 자세히 보니 어깨도 들썩거리는 중이었다. 엎어진 계약을 대하는 태도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의아함에 입을 떼려고 할 찰나, 간제가 옆자리에 있는 로젤린의 손목을 덥석 잡아 끌어당겼다.


로젤린의 귓가에서 간제가 속삭였다.

“세상에, 로젤린 경. 저 얼음 같은 분을 어떤 매력으로 함락시킨 건지요? 비법 좀 전수해 주시죠!”

로젤린의 볼이 불그스레하게 변했다.

“……힘?”

속삭이는 내용이 다소 컸던 터라 모두 다 들었다. 리카르디스는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간제를 불렀다.

“왕녀.”

간제는 손으로 부채질하며 얼굴까지 오른 열을 식히고 있었다.

“너를 구할 수만 있다면 나는 세상도 버릴 수 있어. 이런 말을 살아서 듣게 될 줄이야. 조금 설레고 많이


낯간지럽네요.”

대화가 많이 왜곡된 상태였다.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피로감을 나타냈다. 간제가 깔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진지하셔서 깜짝 놀랐지 뭡니까.”

“……저에게 중요한 부분이라 말했을 텐데요.”

“예, 그렇죠. 그런데 그게…….”

말을 끌던 간제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띠며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저는 알고 있거든요.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세 명의 일라베니아인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왕실 서고에 있는 터라 당장 확인시켜 드릴 수는 없지만, 발타에 그 정보가 있습니다. 마인의 안전에


대해서까지 생각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정말 세심하고…….”
피곤한 성격이었다.

“세심하시네요.”

간제는 애써 포장을 마쳤다. 리카르디스는 조급한 표정으로 간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의식이 마인에게 안전하다는 말입니까?”

“음, 안전하냐, 안전하지 않냐를 묻는다면 안전하다고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대륙을 소생하는 거대한 힘의
주축이니 만큼, 후에 변화가 있긴 합니다.”

“변화라 하신다면?”

“마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더군요. 그냥, 평범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릇은 무사하되, 그 안에 있는 거대한 힘만 빠져나간다는 얘기였다. 간제가 말한 얘기는 제법 신빙성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최악을 가정해 둔 상태였다. 죽을지도 모른다. 살아도 죽느니만 못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에 비하면 마력을 잃는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건 제 입장일 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곧장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살짝 미소


지었다.

“제 목숨까지 바치겠다 맹세했습니다, 전하.”

곧고 다정한 시선이었다. 어딜 가고, 어느 아름다운 광경을 보아도 그녀의 눈동자만큼 귀한 가치를 지닌 것은


없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손을 말아 쥐고 로젤린을 보며 마주 웃었다.

그쯤, 짙은 연애 농도 속에 가쁘게 호흡하던 간제가 라헤안시를 끌고 방을 나섰다.

* * *

힐리사고 왕국이 일라베니아의 동맹이 아닌 발타의 연합군에 속해 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이 대륙에 널리 퍼졌다.
경악할 일이었다. 힐리사고가 일라베니아를 배신하다니.

이것은 일라베니아가 발타와 손을 잡았다는 것만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대륙의 아버지, 축복의 밤을
부르는 영원한 영광. 일라베니아를 호시탐탐 노리던 발타와 결탁을 하다니. 대륙의 많은 권력자들이 힐리사고를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힐리사고 왕국이 정식으로 소명하며 기류는 점차 뒤바뀌기 시작했다. 유일 제국이라는 일라베니아의 이름
아래 그들이 얼마나 횡포를 저질러 왔는가? 권리만을 누리고자 하고 그에 따르는 의무는 수백 년간 저버리며
대륙을 도탄에 빠트리지 않았나.

또한, 힐리사고 왕국은 ‘대륙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모두 일라베니아 때문’이라는 발타의 말에 힘을


실었다. 그들의 역사서에 잠자고 있던 빛바랜 증거를 내세우며.

그 역사서에는 아주 오랜 옛날의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축복의 밤을 부르는 것은 성력과 마력을 가진 두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발타가 전쟁을 선포하며 널리 알린 바 있으나, 일라베니아를 언제나 음해하고자 했던
세력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만한 나라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일라베니아의 친구였던 힐리사고가 전면적으로 나서며 증거까지 내세우자 상황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축복의 밤을 위해서는 성력뿐 아닌 마력도 필요하다.

그 점을 이해하는 순간 일라베니아의 피로 물든 역사가 다시금 조명되었다. 마인을 죽이고 불에 태우고, 사냥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입을 오가며 한층 더 잔인하게 부각되었다.

일라베니아가 진정 제 욕심만 챙기려다 대륙을 죽음으로 물들였단 말인가?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이에 대해 사실무근, 조작된 증거라 일축했다.

그렇게 힐리사고의 참전으로 외부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하는 가운데, 내부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발타와
힐리사고가 연달아 일라베니아에 손가락질하며 어이없는 증거 따위를 드밀어도 콧방귀만 뀌던 병사들의 낯이
어두워졌다. 지원을 보내기로 한 국가들 측에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시간을 미루는 것은 물론, 발타 연합군
측으로 돌아선 국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225 화.

아무리 강철 같은 믿음이 있어도, 외부에서 흔들리니 내부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탈영병이 속출하고, 황실
직속 지휘관에 반발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황도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어느 기관 하나도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엉망진창이 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전시라는 말이 어울리는 아수라장이었다.

간제가 최근의 정세를 막 전해 준 참이었다. 일라베니아고 대륙이고 엉망진창이라는 얘기를 듣는 라헤안시의


표정은 정말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간제가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자 라헤안시가 꺄르륵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일라베니아의 추잡한 민낯이 드러난 걸 보니 너무 기분 좋아서!”

간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라헤안시를 한 번 보더니 리카르디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일라베니아가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노라는 나쁜 소식을 전달했건만 반응이 남달랐던 탓이었다.

“……어느 집안이든 문제는 있나 봅니다.”

엉망인 집안 꼴을 들킨 기분이라 낯이 화끈했다. 리카르디스는 괜히 얼굴을 한번 쓸었다. 이어서 간제가 연합군에


관한 짧은 정보를 말했다.

“연합군의 일부가 남아 일라베니아군을 추적 중이라고 합니다. 리카르디스 전하와 로젤린 경도 아주 열렬히 찾고


싶어 하더군요. 시체라도 가지고 오라나 뭐라나.”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귀한 물건을 보는 표정이었다.

“제가 먼저 찾은 줄도 모르고 개고생하고 있겠지요. 멍청하기는.”

이쪽도 정말 집안 꼴 장난 아니었다.

* * *

화톳불 위에서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어 갔다. 지글지글, 표면에서 끓던 기름이 뚝뚝 떨어졌다. 고소한 냄새가
연기와 함께 모락모락 퍼지기 시작했다.

“…….”

하지만 오랜 시간 굶주린 남자들은 식욕이라는 본능마저 잃어버린 듯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망토
아래로 흙과 먼지, 피로 더럽혀진 하얀밤 기사단의 갑주가 빛났다. 백여 명이 넘게 모여 있는 숲속은 바람
지나가는 소리만 이따금 씩 날 뿐, 고요했다.

그때, 구석에 몸을 말고 있던 남자가 주먹으로 바닥을 퍽퍽 쳐 대기 시작했다.

“멍청한 새끼…….”

눈가가 발개져 있었다. 맨주먹으로 흙바닥을 치고 있던 터라, 금세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에버하르트, 그만.”

옆에서 레티시아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에버하르트는 손목을 비틀어 빼내고서는 계속해서 의미 없는
자학을 반복했다. 레티시아는 이마를 쓸며 한숨을 쉬었다.

에버하르트의 머릿속에서 급류에 휩쓸리는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모습이 계속 반복되는 중이었다. 그 당시


에버하르트는 그들의 바로 옆에 있었다. 하지만 땅의 진동과 갑작스러운 댐의 붕괴에 허둥지둥해서 미처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그들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는데.

에버하르트는 이번에야말로 부숴 버리겠다는 듯 주먹을 높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바닥으로 채 향하기도 전에


손목이 붙들렸다. 에버하르트가 눈에 불을 켜며 홱 고개를 돌렸다.

“이거 놓, 어? 미, 미미 양?”

“이게 어디서 눈을 부라려?”

마카롱이 검지와 중지로 에버하르트의 두 눈을 콕 찔렀다. 그가 으악 하며 눈을 감싸고 쓰러졌다. 그녀가


무성의하게 에버하르트의 손목을 팩 내팽개쳤다. 쯧, 혀를 차는 모양새가 불량했다. 에버하르트가 잠시간 눈을
잡고 흑흑 우는 사이에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급하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미미 양!”

“미미 양,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하얀밤 기사단원들과 같이 움직이는 미미는 이따금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가 불쑥불쑥 나타나고는 했다. 지금도
제법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다들 걱정하던 참이었다.

“알아서 뭐 하게.”

마카롱이 뜨거운 고기를 맨손으로 덥석 집어 먹으며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고기를 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흙과 먼지, 피로 더러워진 갑주. 산발이 된 머리, 우울한 표정의 인간들밖에 없었다.

그나마 나단이나 그의 부관 레이몬드, 몇몇의 상급 기사 등. 무리를 이끄는 수뇌부들은 당장 닥친 일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으나, 그런 그들조차 우울함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누가 봐도 패잔병 무리였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마카롱 또한, 로젤린이 급류에 휩쓸렸다는 얘기를 듣고는 한번 미쳐 날뛰긴 했었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로젤린의 신체 능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마카롱이었다.

몇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재해 속에서 로젤린은 살아남았을 거라고 마카롱은 확신했다. 리카르디스는 어떻게
되었을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카롱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는 빨간 두 눈을 끔벅이고 있는 에버하르트의 입에 고기를 쑤셔 넣었다.

“헛짓거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라.”

에버하르트는 울먹울먹한 눈으로 고기를 꾸역꾸역 씹었다.

‘내가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왜 당장 로젤린을 찾으러 가지 않을까.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질질 짜는 놈의 입에 고기까지 물려 주는 자신의


행태가 어이없었다. 뭐 하냐, 나?

탈출 욕구가 머리끝까지 치솟을 즈음이면, 번번이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붉은 머리가 잘 어울리던 남자였다. 스타스.

실핏줄이 터져 눈에서 피가 흘렀다. 가슴이 꿰뚫린 고통 속에서도 단 한 순간도 눈을 돌리지 않고 떠나는 하얀밤
기사단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스쳐 지나가는 자신의 손을 꽉 잡았다.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서 어떻게
그런 힘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스타스는 턱을 덜덜 떨며 겨우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목 끝까지 피가 가득 찼는지


피만 연신 토해 냈다. 시시각각 눈빛이 흐릿해졌다. 스타스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가 뭘 말하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알았어요.]

그렇게 마카롱이 대답하자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뭐가 좋다고 웃고 있는지. 타박하기도 전에 스타스는 고개를
떨궜다.

무릎을 꿇고 그대로 굳어 버린 스타스의 모습에 마카롱은 그가 들려 준 얘기를 떠올렸다. 어린 소년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던 그때의 이야기. 마치 그때의 시작이 생각나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그는 시작처럼 끝났다.

그 이후부터 그냥 두면 수색대고 연합군이고 뭐고 다 걸려서 금세 죽어 버릴 인간들을 나단과 함께 어르고 달래며,


엉덩이도 걷어차서 끌고 온 것이 마카롱이었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쳐 가지고 알겠다고 대답했구나. 마카롱은 짙은 회의감에 휩싸여 자리에 털썩 앉았다. 주위를 정찰하러
잠시 떠났던 나단이 그 즈음 돌아왔다.

“미미 양. 걱정했다네.”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남자를 바라보며 마카롱은 다시금 제 처지가 서글퍼졌다. 하얀밤 기사단 내에
있을수록 자신이 멍청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카롱은 손에 묻은 기름을 에버하르트의 옷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수색대가 강에서 전하의 갑옷을 발견했다더군요.”

어느 가게의 스튜가 맛있다던데, 하는 말투였다. 그 때문에 단원들은 그 얘기를 듣고도 잠시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곧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이 헉 숨을 들이켰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실종 이후 처음 듣는 첫
소식이었다. 단원들의 한걸음 뒤에서 마카롱을 바라보던 나단이 부하들을 퍽 밀치고 가까이 다가왔다.
“갑옷?”

“네, 갑옷만.”

마카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날카롭고 예민해 보이던 표정을 고수하던 남자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그가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델라브힘이시여…….”

마카롱은 그 감동적인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볼 사람이 아니었다.

“어이없네요. 전하를 건진 사람은 따로 있을 텐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옆집 아저씨가 받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역시 로젤린 경이로군.”

마카롱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갑옷을 발견했다고? 시체는 없었다는 거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 정보가
반드시 리카르디스가 무사할 거라는 보증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일말의 희망을 자라나게 할 수는 있었다.

한 명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울기 시작하자 옆에 놈도, 그 앞에 놈도 울기 시작했다. 에버하르트는 입안에


고기를 구겨 넣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기름과 함께 침이 질질 새어 나오는데 정말 더러웠다. 그가 마카롱의
망토를 붙잡고 히끅 히끅 울었다.

‘단장님, 대체 이런 것들을 데리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마카롱은 환장할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 * *

사르체군의 상급 지휘관이자 마인이었던 차가. 로젤린에게 붙잡힌 후 살아남기 위해 그 누구보다 제 나라를


열심히 팔아먹었던 남자. 그 또한 덮쳐 오는 홍수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휩쓸렸다. 댐이 무너질 당시 멀리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에 압도되어 몸이 굳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살아남았다. 차가는 뿔뿔이 흩어진 발타의 병사들과 함께 근처의 요새로 잠시 몸을 의탁했다. 이런저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상급 지휘관인 만큼 차가는 발타의 요새에서도 환영받았다.

“역시…… 나는, 신에게 사랑받는 남자야.”

운이, 너무 좋아. 말도 안 되게 좋아. 소금바위 영지에서 사르체군의 9 할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살아남고,


홍수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거기에다가…….’

그 무시무시한 사람에게서도 벗어났다. 차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녹색 눈동자를 떠올리고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가는 상념에서 벗어나 거울 앞에서 꽃단장했다. 귀한 분이 불렀다는 소식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용사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듣고 싶은지도 모른다. 곧 시녀가 안내를 위해서 방문했다. 차가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를 뒤따랐다.

226 화.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문을 열고, 시녀들이 몇 겹으로 쳐 있던 천을 걷어 냈다. 그 안에 있던 사람의 얼굴을


보기도 전, 차가는 황급히 무릎을 꿇어 예를 갖췄다.

“사르체군의 천인장 차가가 고귀한 발타의 따님을 뵈옵니다!”

“고개를 들어라.”

3 왕녀 간제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래, 일라베니아군에 잡혀 있었다고 들었다.”

“예, 전하!”

“총사령관과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도 보았느냐?”

“예!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호오, 그렇구나.”

간제가 눈짓하자 옆에 서 있던 시녀가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너를 부른 이유는, 따로 임무를 내리기 위함이다. 내 친구들이 먼 길을 가야 하는데, 안전하게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말이야.”

차가는 옆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방에 들어갔던 시녀가 막 나오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 뒤,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중 한명과 눈이 마주친 차가가 숨을 들이켰다.

“헉!”

차가는 제 심장이 멈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저, 저, 저, 저, 저분이 왜…… 여기에?’

차가의 눈동자가 쉼 없이 흔들리며 간제를 향했다.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느긋하게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반응이 왜 그럴까. 혹시, 아는 얼굴이기라도 한가?”

“예에……?”

차가는 너무 당황해서 되묻고 말았다.

“아는, 얼굴이냐고.”

간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 물었는데?”

간제는 두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음이 분명해보였다. 차가는 모든 판단을 끝냈다.

“왕녀 전하의 손님을 제가 알 리가 있겠습니까! 가시는 곳이 어디든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차가가 머리를 바닥에 쿵 박았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가느스름해지자, 간제가 싱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원래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눈치가 빠르다는 거죠. 별다른 설명을 할 필요
없으니 얼마나 편합니까?”

이제는 대놓고 얘기하는군. 차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별로 믿음직스럽진 않군요. 누구보다 빠르게 배신할 것 같아서.”

그때 로젤린이 나섰다.

“괜찮습니다. 배신…….”

로젤린이 말을 끌며 몇 걸음 더 걸어 차가에게 다가섰다. 차가가 몸을 떨며 그녀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못 할 테니까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였다. 그렇겠지. 못 하겠지. 차가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 그럼요, 그럼요. 또 사르체군에서 신용하면 차가라고 입 모아 말합니다.”

차가는 침을 삼키며 로젤린을 올려다보았다. 댐이 붕괴되기 직전, 멀리서 퍼져 나오던 마력의 파동이 떠올라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발타는 마력을 접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그중에서도 마인이 특히 많은 집단에 속해 있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차가는 마력이 강한 축에 속했는데, 그런 그보다도 두 배 정도 되는 마력을 소유한 자도 있었고, 결정으로
인조적인 마인이 된 자들도 수두룩했다.

그러나 차가는 단 한 번도 그런 마력을 접해 보지 못했다. 고요하게 온 세상을 뒤덮는, 티 한 점 없는 검은 바다


같은 마력은.

태초의 세계에는 어떠한 것도 없이 빛과 어둠뿐이었다 전해졌다. 차가는 어쩌면 그 태초의 어둠이 로젤린이라는
사람이 지닌 마력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 *

전쟁이 일어났던 초기만 해도 일라베니아의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국의 장자가 사망한 일과
전쟁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 휩쓸려 불안해했을 뿐이었다. 일라베니아는 절대적인 강자며 지배자였다.
신의 안배 아래 쓰디쓴 고난이 곧 달콤한 승리로 바뀌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단단한 믿음은 남부 관문이 무너지며 한번 흔들리고, 남하했던 제국군의 패배와 총사령관 리카르디스의
실종으로 크게 한 번 더 흔들렸다. 그리고 지금, 중부 관문에서 보일 정도로 근접한 까만 대군의 모습으로
기어코 산산조각 나 무너지게 되었다.

겨울철의 싸늘한 바람이 일라베니아 제국군과 연합군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방벽 위에 선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손을 떨었다.

중부 관문은 일라베니아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대와 수도를 지키는 방벽이었다. 그런 만큼 방비 또한 단단했지만,


문제는 그 중부 관문에 있는 병사들이었다. 평화로운 세대에 변변찮은 전투를 겪어 봤을 리도 만무했고, 발타라는
악명 높은 세력을 마주할 일은 더더욱 없었다. 제국군의 병사들은 눈앞을 빼곡히 메운 연합군 한 명 한 명을
옛이야기에 나오는 괴물처럼 느끼며 두려움에 떨었다.

병력과 물자, 지휘관만큼이나 전쟁에서 중요한 것이 기세와 흐름이었다. 지금 이 공간의 흐름은 연합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일라베니아군이 뾰족한 수를 쓰지 않는 한 이것은 뒤집기 힘들었다.

중부 관문의 사령관인 푸른등불 공작은 방벽 가장 높은 곳에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겨울 안개 너머의 연합군이


가까워지며 점점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델라브힘이시여…….’

신을 불렀으나 대답은 없었다. 밝은 햇살이 내리쬐던 평화로운 대지는 안개에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 *

“잠깐 정지.”

연합군의 수색대는 반대 방향에서 오던 50 여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무리를 멈춰 세웠다.

수색대의 대장이 무리를 쭉 훑었다. 발타인으로 보이는 병사들 사이에 흰 피부를 가진 이들이 몇몇 보였다. 다른
나라의 용병들이 있으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제국군이 발타의 깊숙한 곳까지 침범한 상황이다 보니 주의 깊게
살펴야만 했다.

무리의 책임자처럼 보이는 이가 일행을 한번 돌아보고 나섰다. 그 또한 하얀 피부의 사람이라 수색대 대장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껄렁껄렁하게 걸어온 남자가 입을 열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건성건성 건네는 인사에 수색대 대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주머니를 뒤져서 신분 패를
내밀었다.

사르체군의 천인대장임을 증명하는 패였다. 수색대의 대장은 뒤늦게나마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 차가는
귀찮은 듯 손을 저으며 인사를 물렸다. 그리고 곧이어 왕실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꺼냈다. 수색대의 대장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바쁜 분을 붙잡고 제가 실례를 하하…….”

“뭐 실례까지야. 요즘 제국놈들 때문에 수색대도 정신없을 테니 우리는 여기까지만 하고 넘어갑시다.”

한 명 한 명의 신분을 확인해야 하는 원래의 절차를 넘기라는 얘기였다. 사실 그건 수색대에게도 반가운 말이었다.


지나다니는,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신분 패를 확인하는 작업은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 수색대의
대장은 반가운 마음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이 근방에서 제국군 놈들이 날뛴다고 하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거 나쁜 놈들일세,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말이야.”


“그렇게 말입니다.”

하하 껄껄 웃던 수색대의 대장은 다시 바쁘게 길을 떠났다. 차가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끝났습니다, 경.”

짐마차에 고개를 빼꼼 들이민 차가가 작게 속삭였다. 그림자 진 안쪽, 로젤린이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검을 손질하던 중이었는지,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번쩍였다. 차가는 자기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여차하면 뛰어나와서 내 목이든 남의 목이든 뎅겅뎅겅 잘랐겠지.’

차가와 수색대 대장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수색대의 병사들은 흩어져서 무리를 살폈다. 이 짐마차 까지도.

그때 몰래 흘린 식은땀으로 차가의 등은 이미 축축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긴장감 넘치던 상황이 무색하게


수색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떠났다. 로젤린의 머리색이 검은 빛이 아닌, 연한 갈색 빛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합류하게 될지도 모르는 동료들을 의식해 머리색만 변형한 상태였다. 허술한 변장이었기에 그녀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스쳐 지나가는 이목을 피할 정도는 되는 듯 했다.

로젤린은 무심하게 차가를 쳐다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출발하라는 얘기였다. 왜 말을 하지 않나 했더니, 검푸른
머리의 사내가 그녀의 무릎을 벤 채 잠들어 있었다. 힐리사고의 용병으로 위장하고 있는 리카르디스였다.

차가는 존경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맹수를 앞에 두고서 잠을 자다니. 심지어 맹수에게 머리라는
급소를 온전히 맡긴 채로! 저쯤 되어야 일라베니아의 총사령관을 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차가는 부르르 떨며
소리 없이 부하들을 재촉했다.

곧 덜컹거리기 시작한 마차는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그 진동에 리카르디스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더 주무세요.”

자신이 잠들었던 것도 몰랐던 리카르디스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졸았다 하면 로젤린이 즉시 제 허벅지를


대령해 대는 터라 이번만 해도 네 번째인데 도통 익숙해지질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분한 듯 입술을 물었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은 지도를 펼쳐 두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정해 둔 발타 내의 합류지들을 살폈다. 현재의


위치와 합류지의 거리는 손가락 두 마디에 불과했음에도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시간이 너무 흘렀군.”

연합군이 중부 관문으로 나아가고 있는 촉박한 상황이었다. 제국군의 원래 목적은 힉살라를 잡아 연합군을


분열시키는 것이었으나, 힐리사고의 참전으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연합군을 막아 줄 방패가 없는 지금
공성전을 치르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었다.

남은 제국군마저 다 잃을 수는 없었기에, 남은 길은 하나였다. 발타 내 흩어진 병력을 모아 중부 관문에 있는


제국군과 합류하는 것. 그리고 지휘관들은 그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니 합류지에서 이미 떠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데 아까 전, 마주친 수색대의 대장이 근처에 제국군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 경고했다. 합류지에 미처
도착하지 못한 병력인지, 아니면…….
“전하를 찾기 위해 일부의 병력이 남은 게 아닐까 싶은데요.”

로젤린도 비슷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227 화.

해가 지고 일행은 야영 준비를 하기 위해 산 중턱에서 멈춰 섰다. 로젤린은 잠시간 메마른 숲의 정경을 눈에


담다가 불을 피울 장작을 줍기 시작했다.

“멀리 가지 마.”

리카르디스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녀에게 말했다. 로젤린이 건성으로 “네.” 대답하며 더 깊이 들어가려


하자 그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나 무서우니까.”

“아, 네!”

그 말 이후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뒤에서 차가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마른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고서 복귀하던 로젤린이 자리에서 멈춰 섰다. 바람이 뒤에서부터 불어왔다.

‘피 냄새.’

로젤린의 눈이 번쩍였다. 장작을 내려놓은 그녀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리카르디스와 대부분의 병사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차가를 비롯한 마인들은 일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모였다.

“너머에서 피 냄새가 난다.”

병사들이 코를 킁킁거렸다.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니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주위를 경계해라. 잠깐 살펴보고 오겠다.”

로젤린이 흘끗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도를 응시한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곧 차가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스라치게 놀란 차가는 고개부터 끄덕였다. 뭘 시킬지는 몰라도 무조건 알겠다는 얘기였다.

“믿겠다.”

차가는 그 믿음을 배반했을 시의 일을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배웅했다.

로젤린은 빠르게 숲을 내달렸다. 피 냄새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얼마쯤 야영지에서 벗어났을 무렵. 저
멀리에 서 있는 인영이 로젤린의 시야에 들어왔다. 잠시 멈칫하던 인영이 로젤린의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발타 병사의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 도망간 걸 보면 일라베니아 측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잡아 놓고 얘기하자.’

로젤린은 침착하게, 그리고 발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굵은 나무뿌리가 많은 곳이라 성큼성큼 뿌리를 건너며
뛰어야만 했다. 그렇게 힘차게 발을 구른 그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발목을 휘감았다. 강한 힘에 이끌린
로젤린이 비틀거렸다. 휙, 채찍을 휘두르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눈 깜짝할 새에 시야가 뒤집혔다.

“…….”

함정이었다. 로젤린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몇 초 정도 뒤집혀 대롱거리기만 했다. 무력과 기민한 감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자존심이 몹시 상해 버렸다.

하지만 로젤린은 발목을 휘감은 올가미를 끊어 내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함정에 걸린 이후 도망가던 사람이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자신이 약자처럼 보이는 지금의 이 모습이 목표로 가는 빠른 길이리란 걸 직감했다.

로젤린의 예측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조용하던 숲속에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겹쳐졌다. 하나, 다섯,
십, 오십, 백…….

곧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익숙한 듯이 대형을 갖추며 그녀를 에워쌌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병사의 몸놀림이었다. 그중 한 명이 둥그런 원을 그리고 있는 무리에서 벗어나 로젤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흘러내린 로젤린의 긴 머리카락을 보고 남자가 흐음, 하는 콧소리를 냈다.

“이런, 아가씨였을 줄이야. 험하게 다룬 걸 사과드리겠습니다.”

산듯한 듯,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

로젤린은 뒤집힌 채로 몸을 굽혀 다리를 잡았다. 단검으로 밧줄을 끊어 내려 하자 남자가 태연하게 만류했다.

“머리부터 떨어지면 많이 아플 텐데.”

로젤린은 콧방귀를 뀌고서는 밧줄을 끊어 냈다. 높은 나무에서 추락하는 그녀의 몸이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남자가 감탄하며 검을 뽑았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걸 보니, 혹시 마인인가? 계급이 높으면 좋겠는데. 사냥도 이제 지쳐서 말입니다.”

로젤린을 둘러싼 남자들이 일시에 검을 빼 들고 간격을 좁혀 왔다. 로젤린은 피식 웃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묶었다.

“사냥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죠.”

로젤린의 목소리를 들은 남자가 “어?”하는 소리를 냈다.

“마인도 맞고 계급도 높거든요.”

남자가 머리를 덮고 있는 후드를 젖혔다. 눈이 휘둥그레 변해 있었다. 그다지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만, 반가운
마음이 솟았다.

“오랜만입니다.”

사자갈기의 드윗이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산의 중턱에 위치한 큰 동굴 안.

로젤린과 리카르디스가 포함된 발타 부대와 일라베니아 제국군이 한자리에 모였다. 드윗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리카르디스의 망토에 입을 맞췄다.

“살아계시리라 믿었습니다.”

“나도 그대가 끈질기게 살아남았을 거라 생각했지.”

장난기 어린 말투에 드윗이 살짝 웃었다. 리카르디스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드윗을 일으켜 세웠다.

“그대도 이제 나에게 반가운 얼굴이 되어 가는군.”

드윗이 감동이 일렁이는 촉촉한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포옹하려는 듯한 드윗의 행동에 리카르디스가 곧바로
정색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야.”

“아, 네.”

간제 휘하의 발타 병사들과 사자갈기군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저녁 준비를 끝냈다. 그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로젤린과 리카르디스, 드윗만 대화를 나눴다.

“누군가가 함정에 걸렸을 때만 해도 이거 월척이구나 싶었는데, 생각보다도 대어였지 뭡니까.”

“함정에 걸렸다고? 로젤린 경이?”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로젤린은 다 먹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물고기 꼬치를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던진


후 드윗을 노려보았다.

“살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들은 저라고 해도 감지하기가 힘듭니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얼굴을 팩 돌려 버렸다. 잔뜩 뿔난 듯한 모양새였다.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삼켰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예상대로 제국군의 대부분은 발타를 빠져나간 상태였다. 연합군의 수색대가 눈에 불을 켠
상황이라 힘들 법도 한데, 무사히 국경을 건넜다는 소식에 리카르디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수고가 많았습니다. 여기저기 병력을 흩트려서 치고 빠지는 솜씨가 어찌나 대단한지.
덕분에 이목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습니다.”

그렇게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시선을 끄는 사이 제국군은 발타에서 탈출, 일부의 병력만이 남아 리카르디스를
수색하고 있었다. 사자갈기군과 하얀밤 기사단, 오소리 부대 외의 두 개의 부대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저의 빛나는 충성심이 나침반이 되어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래.”
리카르디스가 감흥 없이 대답하자 싱거운 소리만 하던 드윗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전하를 찾아낸 포상 같은 것은 없습니까?”

“발타 측에 내 위치를 찌르면 포상 비슷한 게 나올 텐데, 한번 시도해 보든지.”

드윗은 실망한 얼굴로 배급된 스튜를 푹푹 퍼먹었다.

밤늦게까지 드윗과 정보를 나누며 얘기하던 리카르디스가 눈을 깜박깜박하며 졸기 시작했다. 드윗이 무어라
말하려 하자 리카르디스의 옆에 앉아 있던 로젤린이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로젤린은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기울여, 다섯 번째로 제 허벅지에 눕혔다. 그녀가 손짓하자 저 멀리서 쉬고
있던 발타 병사가 달려와 모포를 건넸다.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미노가 강 전투로 몸이 많이 상하셔서.”

“지금은 괜찮으신 겁니까?”

“치료는 했지만 떨어진 체력이 돌아올 만큼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따금
피곤해하시더군요.”

로젤린이 그의 검푸른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었다. 드윗은 그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적국의 땅. 도망자. 싸늘한 온도, 더러운 동굴. 그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이곳에 있었다. 안락함,
평온한 숨소리, 화톳불의 색이 담긴 따뜻한 시선, 거친 담요에서 일어난 민들레 씨 같은 보푸라기들, 그리고 그
위를 다정하게 덮고 있는 부드러운 손길까지.

드윗은 둘 사이에 일국의 총사령관과 호위 기사 사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애틋함이 녹아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로젤린이 어떤 행동을 더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보면 안 될 것 같은 광경이었다.

드윗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시선을 돌렸다. 조용히 있던 로젤린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갖고 싶은 게 있습니까?”

리카르디스를 대하는 것과 조금도 닮아 있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였다.

“예?”

“포상을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갖고 싶은 게 있나 싶어서요.”

정중한 말투에는 의심의 빛이 섞여 있었다. 농담처럼 꺼낸 말 속에서 어떤 진의를 파악했던 모양이었다. 드윗은
흠, 하며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특별하게 갖고 싶은 건 없지만, 주시겠다고 하면 마다할 성격은 아니라.”

그가 평소처럼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보통은 무언가를 얻고자 전장에 뛰어들곤 하지 않습니까? 나도 그런 겁니다.”

드윗은 턱을 괸 채 다른 한 손으로 돌멩이를 만지작거렸다. 곧 그가 돌을 던졌다 받았다 하는 손장난을 시작했다.


“나름 험하게 자랐다 자부하고 있지만, 요즘만큼 험하게 굴러 본 적이 없어요. 전쟁이라. 막연하게 떠올린
상상보다 조금 더 지긋지긋하군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도, 우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것 같지 뭡니까.”

“위로는 못하지만 들어는 드리겠습니다.”

“경답군요.”

피식 웃은 그가 낙하하는 돌멩이를 탁 낚아채었다. 돌을 꽉 붙잡자 주먹을 단단하게 쥐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드윗이 타오르는 불티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고생했는데, 원하는 것은 모두 얻어 가야죠. 그래야 수지가 맞겠어요.”

“…….”

가느스름한 로젤린의 눈초리를 목격한 드윗이 아차하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상한 거 아닙니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의미심장하긴 했는데, 진짜 아니에요.”

“그렇다고 하죠. 뭐.”

그 의심의 눈초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228 화.

무언가가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가 무자비하게 부러지고, 나무들이 콰직 콰직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장애물이 있건 말건, 일직선이었다. 그 집요하고 악착스러운 행동에서 뚜렷한 목적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적의, 살의.

하얀밤 기사 단원들은 소리를 감지한 후 신호를 나누는 것만으로 모든 준비 태세를 마쳤다. 모두의 눈이
날카로워진 채 가까워져 가는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길가에 가깝게 난 아름드리나무가 박살 나며 날아가는 것으로 그것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은 털, 세


개의 눈. 일반 곰보다 몸집이 큰 마수였다. 흰자위가 붉은 것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마수라고 판단할 수 있는
외향이었다.

크와악, 귀가 멎을 듯한 소리를 터트린 마수가 전열의 파르딕트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앞발을 세차게 휘둘렀으나, 두터운 앞발은 방패에 채 닿기도 전에 막혔다. 곰의 앞발을 막아 낸 자는 그 몸집의
반의반의 반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작은 여자였다.

“미미 양!”

뒤에서 나단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마인이라지만 저렇게 흉포한 마수 앞에서는…….

“이 자식이 건방지게 손을 들어?”

마카롱이 곰의 명치에 주먹을 내질렀다. 나무에 머리를 부딪칠 때도 개의치 않던 곰이 움찔하며 몸을 웅크렸다.
잠시간 고통에 입을 다물고 있던 곰이 마카롱을 희번덕거리며 보았다.

“확 씨.”
마카롱은 곧바로 주먹으로 곰의 머리를 내리치며 응징했다. 곰이 허우적거리며 앞발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마수가
물기 어린 눈을 마구 굴려 댔다.

‘눈치를 보고 있는 건가?’

강아지가 주인에게 혼났을 때 보이는 표정과 흡사했다. 귀가 처지고 자세를 낮춘 채로 눈알만 데굴데굴. 한참
흔들리던 붉은 눈동자는 마카롱에게서 벗어나 그녀의 뒤에 있는 하얀밤 기사단에게로 고정되었다. 마수의
콧잔등이 다시 구겨졌다.

크르릉……. 마수가 공격성을 띤 그 순간, 마카롱이 검집으로 곰의 코를 강하게 내려쳤다. 다시 한번 마수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이게 좋은 성격 다 버려 놓네…….”

그녀가 곰의 엉덩이를 퍽 걷어찼다.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안 가?”

마카롱이 다시 때리려는 듯 시늉하자 마수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힐끔힐끔 아쉬운 듯 인간들을 바라볼 때마다
마카롱이 발로 땅을 구르며 으르렁거렸다. 기회를 엿보던 마수는 그 위협에 꼬리를 내리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나단은 얼떨떨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수가 인간을 두고 돌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높은 공격성을 가진 마수와의 조우는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의 결말밖에 없었다. 무력으로
위협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사람들이 마수를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한 건가?”

“네? 아아…….”

마카롱은 공성 무기 같은 크기의 마수와 마주쳐 놓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소매를 툭툭 털고 있었다.

“쟤네가 다른 건 몰라도 마력을 느끼면 조금 주춤거리더라고요. 어? 이거 공격해도 되나? 이런 식으로.”

“오, 그렇군. 위협적으로 느끼는 건가.”

나단은 혼자 학구열에 불타는 듯했다. 흥분에 떨리는 남자의 콧수염을 바라보며 미미가 피식 웃었다.

“글쎄요.”

예전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마수, 그 존재 자체에 대해서. 그것들은 대게 무엇을 공격하거나
누구를 잡아먹는 것으로 일생을 바쳤다. 그래서 그것들을 메우고 있는 것이 오직 분노뿐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파편’을 통해서 과거의 기억을 일부분 되찾은 후, 마수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되었다.
과거의 자신이, 친구와 부모가, 연인이, 사랑스럽다 여긴 어린아이가 잃어버린 파편이었다.

마수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 공격성을 드러내지만, 마력을 가진 것에 한해서는 달라진다. 그것들 또한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것보다는 동족애라든지?”
나단이 자리를 떠났기에 마카롱이 중얼거리는 말은 그에게 닿지 못했다. 마카롱은 방금 만난 마수의 존재로,
아득한 옛날을 떠올렸다. 여태껏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미레이미’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적이었다. 약초를 캐던 중, 마수가 나타났다. 그때 당시도 갑작스럽게 나타나
으르렁거리는 건방진 짐승을 가만히 놔둘 만한 성질머리가 아니었다. 언제든지 한 대 패 버리려고 마력을 사용한
순간, 늑대가 갑작스럽게 위협을 멈추고 자세를 낮췄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킁킁 냄새를
맡던 늑대가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왔다.

마카롱은 그렇게 가까이서 마수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실핏줄이 터진 마수의 눈에서는 피와 눈물이 섞여
흐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붉은 눈을 순하게 깜박거렸다.

마카롱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늑대의 대가리를 쓰다듬었다. 피가 엉겨 질척해진 털의 감촉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다른 동물들보다도 뜨거웠다. 고통과 분노에 타들어 가는 그것들을 보며 마카롱은 본능적으로 연민을
느꼈었다.

불쌍하다. 정말 너무 불쌍해. 이렇게 평생을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죽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기억났다. 지금의 마카롱은 그때와 달리 실소했다. 그 생각이 지금에 와서 고스란히
돌아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그때 불쌍하게 여긴, 고통에 피눈물을 흘리는 기괴한 짐승은 과거의 잃어버린 제 친구였으며, 부모였고,
연인이고, 마지막까지 품에 안고 있던 어린아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었다.

“…….”

마카롱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직까지도 그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분노였다. 과거의 분노는
너무나도 깊게 새겨져 세월이 흐른다고 퇴색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직 로젤린을 지키기 위해 잠시간 뚜껑을
닫아 뒀을 뿐이었다.

‘이 분노는 온당하다. 나는 분노할 자격이 있어. 하지만…….’

마카롱은 멀어져 가는 마수의 뒷모습을 보았다. 닿았던 뜨거운 체온이 기억났다. 피부가 갈라져 드러나고, 뼈는
기괴하게 튀어나와 있으며, 눈은 왜 하나 더 달고 있는 것인지. 잘 보이지도 않는 것 같은데.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플 것 같았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로젤린을 떠올릴 때면 항상 하던 생각이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분노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끝없는 괴로움에서 홀로 발버둥 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분노는 온당하며, 나와 우리는 분노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해서 너를 괴롭게 하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그걸 보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마카롱은 발타 왕실에서 보았던, 수북이 쌓인 마수의 결정을 떠올렸다. 지금은 인간의 몸에 이식되어 다시금
자라나고 있을 과거의 싹이자 ‘우리’의 일부. 모든 것이 흘러가는 동안 그것만 시간을 멈춘 채 굳어 있었다.
마카롱, 그녀와 디에즈처럼.

‘디에즈.’
마카롱은 그와 자신은 결코 이 분노를 잊지 못하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우리를 마지막으로 하자.’

마카롱은 지금 간절하게 원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누군가의 분노를 녹여 흘려보내고 싶었다. 과거의 그들이 더
이상 괴롭지 않도록. 방법은 모르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떻게든 그것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 주고 싶었다.

본래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으로.

‘……그런데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지?’

마카롱은 인상을 쓴 채 심각한 생각에 잠겼다. 우선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운다. 시간이 지나면 썩거나 벌레,
짐승에게 먹힐 것이다. 그리고 그 시체를 먹은 벌레나 짐승도 죽을 것이고, 땅으로 흩어지거나 물에 섞이거나…
….

‘뭐가 이렇게 복잡해.’

마카롱은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어디로든 가겠지 싶었다. 그리고 그곳은 수백 년 동안 분노에 휩싸여 있던
지금보다는 훨씬 좋을 것이다.

멀어지는 마수가 보였다. 씁쓸해하던 마카롱은 곰이 이를 드러내며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노려보는 걸 보고 손을


위협적으로 들어 올렸다. 움찔한 짐승이 다시 바쁘게 제 갈 길을 갔다.

그때 바라보는 방향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마카롱은 먼지가 들어갈까 싶어 눈을 살짝 감았다. 사사삭,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의 곰탱이가 그새를 못 참고? 울컥한 마카롱이 검집을 들 찰나
익숙한 향이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싱그러운 풀잎의 냄새였다.

눈을 뜨자 검은 인영이 팔다리를 쫙 펼친 채 나무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받아 볼 테면 받아 보라는 기개 넘치는


모습에 마카롱이 기겁해서 팔을 벌렸다. 그 인영의 뒤에서 해가 쨍하게 비쳐 얼굴이 안 보였지만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쿵, 소리가 무섭게 몸을 묵직하게 무언가가 눌렀다. 아까 전 떨어질 때에는 거미처럼 쫙 다리를 벌리고 있던
인간이 닿자마자 등과 다리를 꼭꼭 옭아맸다.

“마카롱…….”

남들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속삭임이었다. 마카롱은 그녀를 꾹 안았다.

“다녀왔어.”

* * *

마카롱을 덮친 갈색 머리의 여자가 로젤린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 들썩였다. 레이몬드와


에버하르트, 헤사는 통곡했으며 레티시아를 포함한 몇몇 기사들도 눈물을 보였다.

곧이어 그녀가 걸어온 경로에서 나타난 발타의 병사들을 보고 모두 경계 태세를 갖췄다.

“다들 건강해 보이는군.”


후드를 젖히며 태연하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리카르디스였다. 다시 대 통곡의 장이 벌어졌다. 머리 길이와 색이
달라서 ‘어? 저 잘생긴 얼굴은? 어디선 본 것 같은데?’ 하고 주춤거리는 시간이 3 초 정도 걸리긴 했지만.

무릎을 꿇고선 오열하는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보고 리카르디스도 잠깐 울컥한 듯 미간을 좁혔다.

“다들 목청도 참 좋지. 동네 사람들 다 뛰쳐나와서 보겠네.”

마카롱이 툭 내뱉은 말 때문에 다들 울음을 끅끅 삼켜야만 했다.

이후 로젤린은 씻지 않아 냄새나는 사내들에게 돌아가면서 안겼다. 위험을 감수하고 리카르디스를 구해 내고


끝끝내 살려 낸 점. 지금까지 안전하게 그를 보호한 점. 로젤린의 활약상은 일일이 말하기가 입 아플 정도였다.
하지만 그 공로보다도 그녀를 살아서 본 것이 반가워서 하는 행동이었다. 로젤린도 그걸 아는지 코를 막긴 했지만,
동료들에게 얌전히 안겼다.

229 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산 길목에 간이 막사가 세워졌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 하얀밤의 상급기사들, 마카롱,
사자갈기의 드윗까지 그 안을 채웠다.

리카르디스는 짤막하게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강에서 떠내려 와 작은 마을에 도착했고, 합류지로


이동하려던 와중 간제가 심어 놓은 병력과 마주했던 일. 간제와 라헤안시를 만나고 나눴던 내용까지.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흘끗흘끗 보며 놀라워했다. 리비타를 점령해 힉살라를 볼모로 붙잡으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으며, 전투에서는 패배해 병력과 사기를 잃었다. 뿔뿔이 흩어진 패잔병들은 근근이 목숨만 붙은 상태로
공격받는 중부 관문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일라베니아에 승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한 리카르디스는 우연히 간제를 만나 동맹을 맺었다. 무려 하카브를 몰아내고자 하는 동맹.
이 어둡고 끝없는 절망 속에 한 줄기 빛이 아닐 수 없었다.

“발타인들 역시 축복의 밤을 신성시 여긴다. 검은달이 뜨는 신성한 밤에는 피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첫
번째 율법이라고 하더군.”

“그 말은…….”

“전쟁이 일시적으로 멈추게 되겠지.”

발타뿐 아니라, 일라베니아를 공격하는 연합군의 대다수가 공격을 멈출 것이다. 그들은 축복의 밤을 볼모로
대륙을 쥐고 흔들던 일라베니아를 규탄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축복의 밤이 뜨게 된다면 명분이
사라지는 셈이었다.

사실 그것보다도 몇 백 년 만에 하늘을 메운 하얀 밤과 찬란하게 빛나는 검은 달을 보고 태연하게 전쟁할 만한


정신은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리카르디스의 추측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여태껏 말하지 않았던 축복의 밤에 대한 정보를 말했다. 황제를 의식해 몇몇 수하들을 제외하고서는
알지 못했던 정보였다.

“보름달이 뜬 밤. 마력과 성력을 지닌 두 사람, 결혼식에 쓰이는 언약문?”

몇몇 기사들이 리카르디스의 입에서 나온 정보를 중얼중얼 되뇌었다. 축복의 밤에 성력뿐 아닌 마력이 필요하다는
대목에서는 놀라는 자도 있었으나 고개를 끄덕이는 자도 있었다. 발타가 내세운 주장을 허투루 듣지 않은
것이었다. 일라베니아에 대한 믿음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거…… 결혼하는 기분 나겠는데요. 수면에 비치는 게 달이 아니라 해였다면 더더욱 비슷해졌겠군요.”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발타는 결혼식을 저녁에 치르곤 하지. 일라베니아가 의식을 숨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밤을 낮으로 바꿔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눈을 굴리던 리카르디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이 보름달이 뜨는 날이긴 한데…….”

사람들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리카르디스는 노을이 깔리기 시작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낀 하늘은
평소보다 둔하고 탁해 보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될 것 같군.”

필요한 것은 보름달뿐이 아닌, 수면 위에 비치는 ‘보름달’ 이었다. 구름이 가리게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보름달은 구름에 갇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이 지날 때까지 리카르디스는 잠들지
못하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어스름 해가 뜰 때까지도 하늘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을 뿐이었다.

24

발타 왕실은 현재 고단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 쓸모없는 놈!”

발타의 궁전에 어울리지 않는 하얀 피부의 남자가 버럭 성질을 냈다. 그의 손에는 막 건네받은 융단이 들려
있었다.

“귓구멍이 막힌 거니, 아니면 내 말을 무시하는 거니?”

시종장은 허리도 펴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개만 조아렸다.

“내가 어떤 호랑이를 수놓으라 했었지?”

시종장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귀, 귀여운 호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자가 눈에 불을 켜며 시종장에게 융단을 집어 던졌다. 그의 얼굴에 부딪친 융단이 촤르륵 펼쳐졌다. 한 중앙에
통통하고 어린 호랑이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뭐니 이게. 이게 어딜 봐서 귀여운 호랑이야! 이 큰 대가리를 좀 봐, 수컷이 틀림없어!


당장에라도 뛰쳐나와 날 물어 죽일 것만 같은걸! 이 세상에 귀여운 수컷이라고는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모를 리도 없으니, 내가 전하의 사랑을 받는다고 질시하는 것이야? 아니면, 내가 외인이라고 이런 하찮은
부탁마저 업신여기는 것이냐!”
금사로 수놓은 호랑이 융단이 하찮은 부탁에 들어가다니. 시종장은 이를 악물었다. 남자가 리비타의 궁에서
왕비라도 된 양, 시종들을 손끝으로 부리게 된 것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잠시간 궁을 떠났던 간제가 데리고 온 남자였다. 현재 일라베니아 남부는 발타의 영역이나 다름없었고, 그 안의
모든 자원 또한 발타의 것이었다. 그것이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일라베니아 노예들이 생겨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것이 리비타의 궁까지 얼굴을 들이밀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간제 왕녀가 장난감을 데리고 왔구나 싶었을 뿐이었다.

발타 왕실은 남자의 출신 때문에 그가 간자일 가능성도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하지만 남자는 일반적인 간자가
보일 법한 얌전하고 눈에 띄지 않는 행동 따위를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물이 뜨겁다, 차갑다. 다시 해
와라. 입맛에 안 맞는다. 지금 내 것만 요리를 이따위로 하는 거냐.

보물 창고를 개방해라. 왕녀 전하께서 나 다 준다고 하셨는데 네깟 것들이 왜 난리냐. 하지만 이걸로도 부족하니
보석상을 불러라. 열 손가락에 전부 금강석 반지를 끼고 싶다. 향유는 이걸로 해라. 어, 근데 생각보다 향이
역하다. 내가 이걸 선택하겠다고 말했을 때 왜 안 말렸냐, 등등.

까탈스럽기는 얼마나 까탈스럽고 지랄 맞기는 얼마나 지랄 맞는지. 수려한 외모의 사내는 매일매일 다채로운
패악을 부려 댔다.

오늘도 시종장은 귀여운 호랑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남자에게 잔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간제의 총애가
사라지거든 리비타 궁에서 곧바로 사라질 인물이라고는 하나, 살의가 솟구쳤다.

그때, 간제가 방 안에 들어왔다. 까칠하게 시종장을 갈구던 남자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달고서는 그녀에게
달려갔다.

“전하아!”

남자가 그녀의 목을 감싸 안으며 매달렸다. 왕실의 핏줄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간제는 가뿐하게 남자를 안아
올렸다.

“아니, 타타라. 무슨 일이지? 또 누가 너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눈물로 가리려 한 것이냐.”

남자는 훌쩍이며 간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은 맹렬하게 시종을 가리키고 있었다.

“흐흑, 저는…… 그저 전하께서 귀여운 것도 좋아하시고 호랑이도 좋아하시니까, 귀여운 호랑이를 수놓은
융단으로 방을 장식하여 기쁨을 드리고 싶었을 뿐인데…… 저 치가 저렇게 흉측하고 무서운 것을 가져왔지 뭡니까.
저는 너무 무서워서 그만 정신을 잃을 것만 같습니다!”

맨날 보는 광경임에도 시종과 시녀들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간제는 남자를 안아 올린 채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눈이 바닥에 펼쳐진 융단을 향했다. 귀여운 새끼 호랑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간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귀하게 여기는 아이라 했을 텐데, 감히 네놈들이 눈물짓게 만들어?”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이게 어딜 봐서 귀여운 호랑이냐! 대가리가 큰 것을 보니 수컷이 틀림없어. 아주 무시무시해! 이 세상 귀여운


수컷은 우리 타타라밖에 없는데, 아직도 그걸 몰라?”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간제는 마구 성을 내며 사람들을 물렸다. 방 안이 텅 비게 되자 두 사람이 눈을


맞췄다. 간제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촉촉한 눈동자로 미모를 잔뜩 뽐내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눈은 나른해졌고, 얼굴 근육도
느슨해지며 의욕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인상이 되었다. 밝은 금발만 분홍빛이었다면, 여느 때와 다름없는
라헤안시의 모습이었다.

간제가 흐트러진 옷을 펴며 그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이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요즘 제가 잘 먹어서 몸무게가 좀 늘었는데.”

“뭘 그 정도로. 우리 타타라는 깃털만큼 가벼운걸요.”

두 남녀가 마주 보며 낄낄 깔깔 웃었다.

힉살라를 치료하고자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을 구하면 뭘 할까. 현재 리비타의 궁은 하카브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거기에다가 간제는 하카브에게 숨기지 않고 반감을 드러냈기에 리비타 궁의 경계 대상 1
호로서 언제나 삼엄한 경계를 받았다.

그녀가 가지고 나가고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이라면 바늘 하나 실 한 올 까지 확인받는 상황에서 인간을 몰래 숨겨


들어갈 만한 방도는 없었다. 라헤안시가 이렇게 전면적으로 나선 이유였다.

하카브는 간제가 소유한 것에 한정해서 매우 넉넉한 태도를 보였다. 어차피 제 손안의 동생이며, 동생의 장난감
하나 못 사 주겠냐는 느낌에 가까웠다. 간제는 그 점을 이용해, 자신의 소유물인 애완 인간 ‘타타라’를 보란
듯이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다.

일국의 왕녀가 망측하게 남자 애인, 그것도 지금 전쟁을 치르는 타국의 인간을 옆에 둔다는 사실에 많은 인사들이
기함했다. 하지만 간제가 저질렀던 일은 대부분 기함할 일이었기에, 저 인간이 또 하던 짓 하는구나,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자들이 많았다.

“이래서 평소 행실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의심이 아닌 경멸의 시선을 보면서 간제가 뿌듯하다는 듯 얘기했는데, 나름 내놓은 자식에 속하는 라헤안시도
그때만큼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230 화.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경계는 생각보다도 빠르게 느슨해졌다. 제 오라비가 없는 틈을 타서 간제가 세력을
키우려거나 수상쩍은 행동을 보이지 않았던 탓도 있으나, 라헤안시의 탁월한 연기 솜씨가 그에 한몫을 크게
더했다. 며칠 전 리비타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간자라 의심받았던 라헤안시는 왕녀의 총애를 받아 겁 없이
날뛰는 애완 인간 정도로 입지가 굳어지고 있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조만간 아틸라크가 근처 요새로 중요한 회동을 하기 위해 궁을 나선다고 하는군요.”

재상 아틸라크는 하카브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라헤안시의 그 대단한 연기에도 여전히
의심의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있는 이상 힉살라의 궁에 발을 들여 놓는 것조차
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한데 마침 딱 좋게 아틸라크가 궁을 비우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뿔뿔이 흩어진 제국군 중,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병력이라 생각되는 군대가 여기저기 활개를 치고 다닌 탓이었다. 끝을 보는 그녀의 성정은 발타에서도
유명했다. 문제가 심화되기 전에 처리하기 위해서 현 발타의 책임자가 나서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궁을 비워 둘 수는 없는 법. 또 다른 책임자가 아틸라크의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간제가


가장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리비타에서 가장 가까운 요새에 브네학스가 있습니다. 그를 부를 겁니다.”

타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서 깊은 가문 ‘아문’의 가주의 이름이었다.

“아틸라크는 차라리 귀엽다 싶을 정도로, 궁의 경비에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입니다. 지긋지긋하죠.
평생에 제대로 된 일탈 한번 해 본 적 없는 저마저도 그를 보면 주눅이 들 정도라고 할까요.”

많이 혼났나 싶었다. 라헤안시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면 더욱 상황이 나빠지는 게 아닐까? 그 의문은 곧바로
간제의 말로 증명이 되었다.

“무척 곤란한 상황이 되기는 할 겁니다. 그가 오는 즉시 귀여운 타타라는 지하로 끌려가서 온갖 고문을 받으며
추궁당할 예정이라서요. 이 시국에 일라베니아인이라니 너무 수상하잖습니까.”

“저기, 저만 일방적으로 곤란해지는 것 같은데요!”

귀여운 타타라가 기겁했다. 간제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물론 끌려가기 전에 수를 쓸 겁니다.”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간제는 뒷말을 삼켰다. 그 미심쩍은 표정으로 라헤안시는 제 운명을 깨달아 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곧 헤어지게 될 제 열 손가락에 안녕을 고했다.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서러운 기세였던
터라 간제가 급히 그를 위로했다.

“제가 아틸라크 대신 브네학스를 바랐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맹점입니다.”

라헤안시가 울먹울먹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간제는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같이 딱딱한 남자를 떠올렸다. 브네학스 아문. 원칙주의자, 번견. 여러 단어로
그를 나타낼 수 있으나 발타에서는 ‘아문’이라는 가문 자체가 그러한 뜻으로 통용되었다. 힉살라에 살고
힉살라에 죽는다. 일라베니아로 치자면 붉은수레바퀴쯤 될 것이고, 실상은 그보다 더 심했다.

그것이 하카브가 아직까지 브네학스 아문의 충성을 받아 내지 못한 이유였다. 힉살라가 버젓이 살아 있기 때문에.

간제가 기대고자 하는 부분 또한 그것이었다. 몇 배로 삼엄해진 경비 속에서 유일하게 힉살라의 방으로 갈


지름길이 될지도 몰랐다. 그 눈부신 충성심!

‘설마 지금 발타가 우세한 상황이라고 마음을 바꾸지는 않았겠지?’

평소에는 영감탱이들보다 고지식하고 꼬장꼬장하다고 욕했지만, 부디 그의 마음이 평소처럼 꼬장꼬장하기를,


간제는 간절히 바랐다.

* * *
발타로 남하했던 제국군과 리카르디스의 수색을 위해 남았던 일부 병력 또한 몇 번의 교전 끝에 무사히 탈출했다.
일라베니아의 땅을 밟았으나, 이곳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제국군은 은밀하게 움직이며 산길같이 인적이
드문 곳을 통해 이동했다.

리카르디스는 높은 지대에서 불탄 마을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바람이 불자 검은 재가 마을을 한 번 휘감고


지나갔다. 전쟁 이후 숱하게 보아 왔지만, 날이 추워진 탓인지 더욱 황폐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시야를 까맣게 물들이는 잿빛 바람에서 눈을 떼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완만한 산길이 지친 병사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지리도 익숙해 진군에 어려움은 없었다. 가끔 툭툭
튀어나오는 마수들만 뺀다면. 다행히도 마력을 아주 잘 감지하는 몇몇 인물이 있었기에 조금의 피해도 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로젤린은 마카롱에게 배운 대로 여우 마수를 한 대 쥐어 패고 으름장을 놓은 다음에 다시 산으로 돌려보냈다.


그녀는 다시 군에 합류하기 위해 터덜터덜 걸어가다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앙상하게 마른 나무와 거대한 절벽,
산짐승들이 지나가며 만들어진 숲길의 정경이 낯익었다. 과거 형체 없이 떠돌던 시절에 지냈던 곳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마의 산’이라 불리는 마수들의 서식지이자, ‘로젤린’과 만난 장소이기도 했다.

숲의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녀의 얼굴 위로 붉은 석양이 드리웠다.

산을 벗어나기 전에 밤이 찾아왔다. 산에서 많은 인력이 머물 만한 곳은 몇 군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사냥 대회 때와 동일한 장소에 야영지가 세워졌다. 병사들이 부지런히 야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로젤린은 야영지에서 벗어나 걸음을 옮겼다.

과거 사냥 대회 때, 디에즈의 막사가 있었던 곳을 지나치고, 쫓기며 달렸던 풀숲을 지나, 그녀는 이내 익숙한
장소에 도달했다. 석양빛이 섞인 밤하늘 아래의 절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로젤린은 몇 걸음을 더 옮겨
절벽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섰다.

앙상한 나무조차 없는 절벽 끝에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누군가가 등을 떠미는 듯했다. 로젤린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새 까마득해진 숲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디에즈가 그 어둠 속에서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았다.

망상 속 디에즈의 날카로운 발톱이 재차 자신의 등에 와 닿기 전, 로젤린은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아래에서부터


그녀를 밀어 올리는 바람이 불었다. 섬뜩한 부유감과 함께 머리가 흐트러져 휘날렸다. 그녀는 가만히 몸을 맡긴
채 추락하다, 튀어나온 나무뿌리와 돌출된 곳을 밟고서 가볍게 착지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수십 개가 모여 있는 장소였다. 로젤린은 정상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두워진 황량한


공간 속, 무리 지은 바위의 모습은 거대한 짐승들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젤린은 바위 위에 앉았다. 이곳은 추락한 ‘로젤린’이 죽어 가고 있던 장소였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아래는 과거의 자신이 있던 자리였다. 과거 ‘그것’으로 ‘로젤린’을 바라보던 기억과 ‘로젤린’이 자신을
바라보던 기억이 뒤섞여 있었다. 묘한 상념에 잠길 찰나, 로젤린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

어, 뭔가 좀…… 익숙한데. 여길 전에도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로젤린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과거 ‘그것’으로 지냈던 산이니만큼 당연히 익숙하겠지만,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기시감은 공간을 새삼스럽게 조명했다.
‘나는…… 이곳을 본 적이 있어.’

로젤린은 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군, 여기는…….’

일라베니아 대신전의 지하 감옥에 갇혔던 마인들은 오랜 시도 끝에 마침내 탈옥에 성공했다. 지나가던 마차를
탈취하기도 했고, 작은 동물을 사냥하거나 마을에서 음식을 훔쳐 먹으며 다른 나라로 달아나고자 했으나, 결국
국경지대와 가까운 어느 산에서 인간의 생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아주 짧게 로젤린을 스쳤던 기시감은 반복해서 돌아올 때마다 더욱 선명하게 덧칠해졌다. 그녀는 조각나 완전하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며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과거, 달빛마저 가릴 정도로 무성했던 나뭇잎은 겨울이 아니더라도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성인 남자 다섯이 둘러
안으려 해도 길이가 부족한 거대한 나무는 어느 마수가 부순 것인지 밑동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몸을 숨겼던, 서로가 기대듯 자란 이상한 모양의 나무와 바위에 난 커다란 흠집, 굴러떨어졌던 가파른
단층 지대. 무너진 절벽의 바위들이 엉겨 있는 이 장소만은 수백 년이 지났으나 기억과 같이 자리에 있었다.

로젤린은 앉은 채로 풍경을 바라보며, 이따금 바람이 숲을 스치며 내는 괴괴한 소리를 감상했다.

바스락, 로젤린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어두운 숲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사람이었다. 점점 다가오던 사람은 나무 그림자에서 벗어나 이내 달빛이 닿는 바위 무덤까지 도달했다.

“마카롱.”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지 않은 마카롱이었다. 그녀는 로젤린과 마찬가지로 한동안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네가 바위 무덤에 있을 거라 하던데.”

“응, 여기.”

“이름 한번…….”

잘 어울리네, 무덤이라니. 마카롱이 어이없다는 듯 감탄했다. 두 사람은 잠시간 머무르다 장소를 떠났다.
마카롱이 하얀밤 기사단원들과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 줬기 때문이었다.

“네가 눈앞에 없으면 불안하대.”

여태껏 저지른 화려한 전적이 있어서 로젤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두운 숲에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홀로 달빛을 받는 것 같은 바위 무덤의 풍경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보통 무덤을 떠올리면 삭막하고,
황량한 느낌이 드니 이상한 건 아닌가 싶었다.

“죽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무덤에 왜 꽃을 들고 가나 했거든. 삭막해 보이니까 좀 화사한 거로


중화하려고 그랬나 봐.”

“그런가.”

“다음에 꽃 들고 같이 올래?”
“그래. 다음번에는 샌드위치랑 케이크도 들고.”

소풍 같고 좋겠다. 붉은수레바퀴 성에 있을 때는 몇 번 갔었는데. 두 사람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231 화.

발타로 남하한 제국군의 패배, 총사령관의 부재, 초토화된 일라베니아 남부의 상황까지. 거듭된 악재 속에서도
제국군은 중부 관문을 지켜 내는 중이었다. 수비하는 측이 유리한 전쟁의 특성상, 버티기만 하면 지친 발타에게서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으리란 계산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힐리사고를 포함한 크고 작은 왕국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위태로운 것은
중부 관문뿐만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필연적으로 중부 관문에 결집해 있던 병력 또한 분산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부 관문의 방어벽이 줄어들게 된 그때, 여태껏 보이지 않던 발타의 무기, ‘파편’과 마인 부대까지 투입되어
전장을 휘젓기 시작했다.

바람 앞의 촛불. 그 말로도 이 위태로움을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일라베니아 중부 관문.

“백작, 그대가 데리고 온 무리에 대해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중부 관문의 사령관인 푸른등불 공작이 부담스럽게 얼굴을 가깝게 들이대며 질문했다. 그의 어깨 위에서는 화려한
색의 커다란 앵무새가 후미약 울면서 칼릭스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칼릭스는 몸을 뒤로 빼며 대답했다.

“다 알면서 그러시는군요.”

“……정말 그들이 마인이다?”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후계자가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되어 중부 관문으로 오게 된 지는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그를 가장 먼저 부를 정도로, 칼릭스는 그 짧은 기간 동안 ‘
붉은수레바퀴 백작’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 왔다. 심지어 어제 마독 ‘파편’이 투입된 전장에서도.

갑작스럽게 픽픽 쓰러져 가는 병사들과 어깨에 화살을 맞고 사망한 지휘관의 모습에서 모두가 ‘파편’의 존재를
눈치챘다. 지휘관을 잃은 자들과 그 위력을 실감해 겁먹은 병사들의 동요에 전장이 어수선해졌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데리고 온 용병 군단들이 나서서 중독자들을 살핀 것은 그때였다.

신성력도 통하지 않는 파편에 치료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는데, 놀랍게도 부상자들의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곧이어 신관들의 치료를 받은 병사들은 당장 전투에 투입되어도 될 정도로 빠르게 회복했다. 파편의
중독자가 빠르게는 수분, 늦게는 수십 분 안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파편은 마력과 독이 섞인 물질. 치료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력을 분리해 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는 반드시
마인의 힘이 필요하며, 이는 로젤린의 증언으로 입증된 바 있었다. 이후 체내에 남은 독을 따로 치료하는 작업이
필요하지만 평범한 독이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평범한 해독 약으로 살아난 지금의 부상자들처럼.

푸른등불 공작과 중부 관문의 지휘관들은 그제야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움직이지 않던 부대의 진의를 깨달았다.
그들 모두가 마인이었다.
일라베니아의 지휘관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이 모두 마인이라는 점은 간과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연합군의 세작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여태껏 숨긴 걸 보니 뭔가 좀
수상하다 등등.

그러한 논의와 의심이 오고 갔다는 얘기를 칼릭스도 막 전해 들은 참이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등불


공작이 찾아왔고, 지금의 이 상황이 되었다.

푸른등불 공작은 중부 관문의 사령관으로서 사기고 전의고 다 잃어버린 병사들을 이끌고 여태껏 버틸 만큼
유능했으나, 무척 깐깐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그의 뾰족한 질책에 지휘관들은 애처로울 정도로 메말라 갔다.
제 몫을 넘치게 하는 칼릭스는 메말라 가는 지휘관들 옆에서 푸른등불 공작과 잔을 부딪치며 여유로운 티타임을
가졌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인 듯 보였다.

“마인들을 대체 어디서 데리고 온 건가, 백작?”

“데리고 온 게 아니라, 그들이 직접 온 겁니다. 저는 제의를 했고, 그들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어, 백작의 사람이라…… 위험한 말을 하는군. 지휘관들이 백작의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며 아우성치는 소리를
그대도 들었을 텐데.”

칼릭스는 푸른등불 공작의 날카로운 시선을 차분히 응시하며 대답했다.

“이유를 모르진 않습니다. 마인에 대한 일라베니아인의 불신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며, 중부 관문 지휘관들은 제


사람들을 모르지 않습니까. 이해는 합니다만…… 그런 의심과 불신이 지금의 상황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요.”

푸른등불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애초에 마력을 숭배하는 발타와 싸우는 이 공간에, 마인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제가 그들을 믿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보다 그들을 모르는 이들이 못 믿겠다 밀어내려고 하는군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들을 신뢰하겠습니까. 어떤 증거와 어떤 증언이 있어야만 믿겠습니까.”

푸른등불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칼릭스가 그의 침묵 아래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이 마인인 이상,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 아닙니까.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이 저는 많이 답답하군요.


현시점의 중부 관문에 필요한 건 그런 편협한 불신보다는 마인들의 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마인이 아니라 크레안 티다니온이라도 손을 잡아야 할 판국에 어떤 인사가 답답하게 믿음 운운하고
있습니까. 혼자서 전쟁이 아니라 소꿉놀이라도 할 모양이지요.”

쯧, 혀를 찬 칼릭스는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정중히 푸른등불 공작에게 사과했다. 가만히 칼릭스의 얘기를
듣기만 하던 푸른등불 공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지금 상당히…….”

칼릭스는 방금 전 자신이 보인 건방진 태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그는 입을 다물고


있기만 했다.

“멋있군.”

“…….”
칼릭스는 귀를 의심했다.

“멋있어! 멋있어!”

공작의 어깨에 앉은 앵무새가 그의 말을 반복했다. 아까까지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던 까칠한 중부 관문의
사령관은 어디에도 없었다. 푸른등불 공작은 몹시 인자한 미소를 띤 채로 칼릭스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뭐지, 이 반응은? 생각지도 못한 공작의 모습에 칼릭스는 얼떨떨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투도 잘해, 지휘도 잘해, 말도 잘하고, 숨겨 둔 한 수도 있고, 나랑 생각도 잘 통하는군. 백작, 나는


유능한 사람을 매우 좋아한다네. 아니, 사랑하지.”

“사랑해! 칼릭스 사랑해!”

중년 남자와 두 눈이 붉은 앵무새가 자아내는 악몽 같은 하모니가 칼릭스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필요도 없고 쓸모도 없고 머리도 없는 놈들이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말게. 그냥 어린놈이 잘나가는 꼴 보는 거 배


아프다고 괜히 시비 거는 것이니. 백작은 하고 싶은 대로 하게나. 내가 다 막아 줄 테니.”

칼릭스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그는 마인들을 이 전쟁에 끌어들이며 약속했다. 쓰고 버리는 도구처럼 이용하지
않겠노라고.

“안 그래도 적은 수라, 충원이 어려워 전투로 소비할 수 없습니다. 신관과 같이 움직이게 하며 파편과 마인의
움직임을 읽고 대응하는 정도에만 그쳐도 되겠습니까?”

다른 지휘관이었다면 수가 적건 많건 간에 힘도 세고 전투도 잘할 테니 마인들을 최전방으로 내보내야 한다며 입에


게거품을 물 게 분명했다. 하지만 푸른등불 공작은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걸친 채 칼릭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기만 했다.

“옳은 말이군. 전적으로 동의하네.”

반응이 제법 좋았다. 여기서 좀 더 가, 말아? 칼릭스는 짧은 고민을 마치고 애수 어린 표정으로 시선을 떨궜다.

“……저를 믿고 따르는 이들입니다. 다른 지휘관들에게 부당한 명령을 받을까 봐 걱정이 되어 잠도 잘 못 자고……


그러다 보니 요즘 머리가 좀 굳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쓰나. 백작은 내 직속의 군으로 따로 빼서, 다른 이들의 협조 요청을 가장한 명령은 들어가지 않게 해
두겠네.”

얻을 것도 다 얻었겠다, 칼릭스는 순한 양의 탈을 벗어던지고 포식한 맹수의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실망 시켜 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말이 그거라고 말했던가?”

푸른등불 공작이 흐뭇하게 웃고는 막사를 나갔다.

“아니 이게 누구야.”

방금 전의 따스한 봄날 같은 목소리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른등불


공작이 막사 밖으로 나가자마자 누군가와 조우한 모양이었다.

“푸른등불 제 2 군 흑수리대 부장이 아닌가? 잘 자고 잘 처먹었는지 얼굴이 아주 반질반질하군. 깐 달걀인 줄로만


알았네. 나라면 입에 물 한 방울도 못 넣었을 텐데, 큰 사람이라 그런지 그 정도 실수는 대범하게 넘기는군.
뻔뻔한 건가? 허허. 농이 아닐세. 순수한 나의 진심이야.”

어제의 전투에서 실수를 저지른 지휘관인 듯했다. 앵무새가 뒤따라서 싸늘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뻔뻔하기 짝이 없네!”

뭐야, 인간이 말하는 줄 알았잖아. 칼릭스는 식겁했다. 잠시간 서류를 살피던 칼릭스는 똑똑, 막사의 입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곧 소리 죽인 인기척이 막사 안에 고요히 스며들었다.

“백작님.”

뒤를 돌아보자 최근 익숙해진 얼굴이 보였다.

“길레드.”

남자가 순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뒷골목의 불법 투기장에서 칼릭스와 만났던 허수아비
길레드였다. 그는 평소와 달리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걱정하던 차, 칼릭스는 그 표정이
어디서 왔는지 깨달았다.

“……방금 전의 대화를 들었나?”

“……엿들으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네.”

칼릭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저는 제안했고, 그들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들을 믿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일입니다.]

등등. 손을 잡은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당사자한테 들키니 어쩐지 부끄러웠다. 손을


꼼지락거리던 길레드가 입을 열었다. 감격 어린 말투였다.

“정말 다정하시군요, 백작님…….”

232 화.

칼릭스는 얼굴이 홧홧해지는 기분을 느껴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에 발린 소리는 쉽게 믿지 않는 게 좋아.”

칼릭스는 그 말을 내뱉자마자 아차 했다. 괜히 본심을 숨기기 위해서 새침 떠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염려했던 바와 같이, 길레드는 퉁명스러운 말을 들은 사람답지 않게 연신 싱글벙글거렸다. 칼릭스는
수치스러움을 가까스로 숨기고 물었다.

“됐고. 용건은?”
“아,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네요. 동부 전선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곧 전령이 올 테지만,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동부 전선이라고 하면 지금 중부 관문보다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는 곳이었다. 칼릭스는 진지하게 듣다가 묘한


표정으로 길레드를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미리 알았나?”

“최근 저희들 일로 시끄러운 것 같기에, 몰래 몇 명이 잠입해서 엿듣고 있었거든요. 제법 험한 얘기까지


오갔더라고요. 명령만 하시면 처리하겠다는데요.”

칼릭스는 얼마간 잠잠했던 두통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기분을 느꼈다. 마인? 마인의 공통점인가?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 이래? 다 이런 사고뭉치들이야?

길레드의 성정이 유해서 가끔 잊어버렸지만, 그는 가장 험하고 거칠기로 유명한 지역, 그것도 뒷골목에서 오랜
시간 구른 사람이었다. 법보다는 불법이 조금 더 가까운, 그런 사람.

칼릭스는 뒤 목을 살짝 붙잡고 앞으로 그런 짓을 하면 돌려보낼 거라 무섭게 윽박질렀다. 길레드는 순순하게


알겠다고 대답은 했으나, 그냥 대답만 잘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곧 알게 될 부분이니만큼 칼릭스는
길레드가 알아 온 정보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반가운 소식이자 놀라운 소식이었다.

“연합군이 퇴각했다고 합니다. 1 차 전선 밖까지.”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인데.”

칼릭스는 팔짱을 꼈다. 전선이 무너진 후, 부랴부랴 급하게 형성한 2 차 전선까지 뚫리기 직전이었는데,
연합군을 퇴각시켰다? 심지어 1 차 전선 밖까지?

동부 전선을 맡은 지휘관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외부의 도움이 있지 않은 이상 구명할 길이 없었다.

‘외부의 도움?’

칼릭스가 번쩍 고개를 들어 다시 길레드와 눈을 맞췄다.

“설마…….”

“맞습니다. 연합군의 후미에서 아군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남하했던 병력이 대다수 돌아온 걸로 아는데. 그러면…… 많아도 팔천 정도겠군.”

길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칼릭스에게 서신을 넘겨주었다. 그곳에는 보다 자세한 전황이 서술되어 있었다.
엿듣기만 한 게 아니라 서류도 빼돌렸단 말이지…… 칼릭스는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떨치고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종이에는 동부에 있는 병력과 대치 중이던 연합군의 수. 그리고 뒤에서 나타난 제국군의 병력과 당시의 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이 서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원군이 왔다고 해도 제국군 쪽이 열세라는 판단밖에 들지
않았다.

칼릭스의 눈이 보고서를 빠르게 훑었다. 빠른 판단, 지리와 지형을 활용한 책략, 훌륭한 지휘관의…… 몇몇
단어가 그의 눈에 담겼다.
발타의 땅으로 남하했던 제국군은 누구보다도 뼈아픈 패배를 겪은 자들이었다. 드높은 사기는 짓뭉개진 지
오래였으며, 우두머리를 잃고 나서는 뿔뿔이 흩어지기까지 했다. 말이 좋아 원군이지, 실상은 도망쳐 온 패잔병
무리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들을 이끌고 동부 전선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단순한 지휘 능력뿐 아니라, 병력을 규합할 수 있을
정도의 권력과 신임을 받는 자가 있다는 얘기였다. 칼릭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동부 전선의 승리도 중요했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승리 뒤에 누가 있느냐’였다. 어쩌면, 그 사람은…….

칼릭스와 중부 관문에 있는 눈치 빠른 지휘관들이 동부 전선 쪽으로 급히 사람을 보냈다. 얼마 뒤, 다시 돌아온


정보원들이 리카르디스의 가신 몇몇에게만 은밀히 서신을 전달했다. 칼릭스 또한 서신과 함께 책 한 권을 받았다.
어린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이었다. 어릴 적, 로젤린이 칼릭스에게 읽어 줬던 책이었다. 종이 사이에 하얀 꽃,
리쉬가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었다.

칼릭스는 그날 밤 그 동화책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었으며, 보고하러 소리 없이 들어왔던 길레드는 ‘귀염둥이


칼’의 진면목을 깨닫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 * *

동부 전선의 승리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당장에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던 상황이었기에 승리의 가치는 더욱더
값지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 기적 같은 승리가 이룩해 낸 것은 동부 전선에 있는 연합군의
일시적인 후퇴일 뿐이었다. 연합군은 건재했고, 일라베니아는 여전히 위태로웠다.

한데 그 승리를 기점으로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연합군 측으로 흐르던 기류가 완전히 뒤바뀐 것은
아니었으나, 전쟁의 판도가 잠시나마 주춤거리게 되었다. 동부 전선의 연합군 대다수를 구성하는 룩세인 왕국이
갑작스럽게 전선에서 발을 빼며 연합군이 와해되었기 때문이었다.

룩세인 왕국. 성채, 마이라.

마이라에서는 금보다 물이 비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성채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커다란 우물이
마이라의 유일한 수원이었으며, 물을 뜰 수 있는 시간 또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거리는 멀고, 하루에 한
번, 새벽에만 나갈 수 있었다. 그런 구조적 특성과 시간적 제한이 더해지니 물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상 시간의 제한은 잘 지켜지지 않는 편이었다. 하루에 한 번 새벽에만 성문이 열린다는 법이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평화로운 성채에서는 그 언제든 ‘새벽’이었다. 아침밥 먹고 난 이후도 ‘새벽’. 점심 먹고
오후 티타임을 즐긴 이후에도 ‘새벽’. 술 먹고 기절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일어난 누군가에게는 그때가 ‘새
벽’이었다. 자유롭다면 자유롭고 나태하다면 한없이 나태한 것이 장점이자 단점인 곳이었다.

마이라 성채에서는 여인들이 낮잠을 자는 병사들을 지나쳐 직접 성문을 열고 나가 물을 뜨고 오는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이 방만한 행위가 수십 년 동안 관례처럼 이어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새벽 별이 빛나는 이른 아침. 성문 앞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 여인들은 눈도 다 뜨지 못한 채 투덜거렸다. 다소


느슨했던 병사들이 시간을 칼같이 지키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의 무대가 룩세인 왕국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대륙에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룩세인 왕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성과 요새가 불온한 무리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잦아졌다며 왕실에서 공문이 내려오기도 한 참이었다.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끼기긱, 성문 옆의 작은 문이 개방되고 여인들이 줄지어 성채를 나섰다. 병사들은 우물로 걸어가는 여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잡담을 나누었다.

“미젤 요새도 함락당했다면서? 완전히 전소되었다던데. 그런 걸 보면 다른 나라가 침략한 건 아닌 것 같지?”

미젤 요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으로, 만약 룩세인 왕국을 침략할 셈이라면 태우는 것이 아니라 점령한 채
사용해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 사실을 이해하는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으로 병력이 빠지니까 도적 떼가 기승을 부리는 거지.”

“중앙에 남아 있던 기사단이 직접 뒤를 쫓고 있대. 곧 잡히지 않겠어?”

시시한 잡담을 나누던 남자들은 곧 주사위 도박에 푹 빠졌다. 위에서 쪼아대는 통에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서
고생하고 있지만, 전쟁이고 위험이고 사실 먼 나라의 얘기였다. 직접 겪지 못했으니 체감할 수도 없었고, 그런
만큼 태도가 갑자기 바뀔 리도 없었다.

그렇게 병사들이 주사위 도박에 푹 빠진 때에, 물을 길은 여자들이 돌아왔다. 병사들은 의자 대용으로 쓰던 나무


상자에서 일어나 귀환하는 주민을 맞이했다. 딴 돈과 잃은 돈 때문에 정신이 없던 터라 그 사이에 몇몇의 새로운
인물이 끼어 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눈썰미 좋은 병사 한 명만은 이질감을 느끼고 어느 여인을 주시했다. 여인 또한 그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험악한 인상의 병사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나, 날씨가 참 좋네요.”

여자는 대답 대신 눈을 휘며 싱긋 웃기만 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지나가고 난 뒤, 병사가 멍청하게 말을 흘렸다.

“아름다운 사람이로군…….”

마이라 성채 내부. 구석진 곳에 이방인 여덟 명이 옹기종기 모였다.

“날씨가 참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름다운 사람아, 얘기 좀 해 봐.”

“오,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니.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렴, 하늘에게도 너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
줘야지. 태양이 널 질투할까 봐 그러니?”

아까 전 병사에게 안부 인사를 들었던 여자가 무리의 가운데에서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고 있었다.

“아무런 제재 없이 성문을 통과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네놈들도 비슷한 상황이거든?”

“아니지 완전 달라. 내가 손 키스를 날려도 꿈쩍도 안 했을걸. 너는 그냥 웃기만 했잖아.”

“아니야, 웃기도 전에 말을 걸었다고. 숨만 쉬었는데 홀린 거야, 그건.”

“살아만 있는데 홀리다니. 크으, 역시 우리의 투표 1 위.”

여인으로 치장한 한 남자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혼자 벽에 기대어 조용히 상황을 관람하던 여자가 웃으며
서서히 움직였다.

“내 눈에는 너희들 모두가 어여뻐 보인단다.”

누가 너희들을 마른가시나무군의 병사들이라 생각하겠니? 세실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주 전.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은 리카르디스로부터 여러 정보를 얻은 채 룩세인 왕국 영토에 발을 들였다.

오랫동안 평화에 물들어 병사들의 경계심이 느슨한 것을 제외하면 마이라 성채는 정석적인 공성전으로는 함락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몇 차례 성채와 요새를 함락한 마른가시나무군을 뒤쫓아 룩세인 왕국군이 움직이고 있어서
시간도 길게 끌 수 없었다.

세실은 리카르디스에게 들었던 마이라 성채의 특징을 다시금 복기해 내었다. 하루에 한 번, 특수하게 열리는
시간대가 있다. 아침에 물을 뜨러 나오는 것은 모두 여자뿐.

‘섞여 들어가야겠군.’

그게 지금 세실을 제외한 일곱 명의 남자들이 여장을 하고 있는 이유였다.

233 화.

맨 처음, 세실이 직접 작전에 참여할 의사를 밝히자, 마른가시나무 기사단의 단장인 렉시드가 의욕을 내보였다.
하지만 눈이 멀어 버린 자도 남자라고 알 수 있을 만큼 사내의 특징이 뚜렷했던 터라 그의 의견은 기각당하고
말았다.

그 후, 마른가시나무군 내에서 체구가 작고 예쁘장한 병사를 골라내는 것에만 하루가 걸렸다. 그렇게 수백, 수천
명의 투표와 토너먼트를 반복해서 뽑힌 다른 의미의 정예병 일곱 명은 여인들 무리에 이질감 없이 녹아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탓에 도리어 눈에 띄어 버리긴 했지만, 잠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슬슬 움직일까.”

낄낄 껄껄 웃던 여장 남자들이 세실의 말에 눈을 빛냈다.

정확하게 한 시간 뒤, 성문이 열렸다. 기사단장 렉시드는 군의 일부를 이끌고 성채에 발을 들였다. 얼굴


여기저기에 피가 튄 얼굴로 웃고 있는 세실이 그를 반겼다. 지휘관의 머리를 잡아 쥐고서 단검을 목에 들이밀고
있는 사람치고는, 참으로 여유로워 보이는 낯이었다. 그녀가 주문처럼 낮고 느릿하게 말했다.

“취할 것은 취하고, 모두 불태워라.”

세실에게 붙잡힌 마이라 성채의 지휘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왕국의 군대가 불타는 마이라
성채를 발견했을 무렵에는, 침략자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일개 마을 따위가 아닌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마이라 성채가 함락당한 후, 룩세인 왕국은 태도를 바꿔 더욱


본격적으로 나섰다. 불순한 분자들을 뿌리 뽑고자 대대적으로 병력을 운용하고 수색망을 펼쳤다.

하지만 이름 모를 집단은 그런 룩세인 왕국을 비웃기라도 하듯, 덜미를 잡을 즈음이면 귀신같이 도망쳤다. 어떻게
타국의 군대가 지리를 이만큼이나 잘 알 수 있겠느냐. 이것은 내부의 소행이다. 어쩌면 병력이 빠진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키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룩세인 왕국군은 일라베니아의 동부 전선을 채 넘어서기 전에 급하게 군대를 물려야 했다. 구색
맞추기용으로 조금 남겨 둔 병력으로는 동부 전선에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그 덕분에 여유가 생긴 동부
전선의 병력이 다시 중부 관문으로 이동, 휘청이던 일라베니아 제국의 숨통이 조금 트였다.

리카르디스는 막 그 소식을 전해 받은 참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일을 잘해 줬군.”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겠죠.”

사자갈기의 드윗이 눈을 감고 있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을 그녀를 잠깐 떠올려 보는 듯 했다.

그 누구도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을 일라베니아 제국군이라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일라베니아의 갑옷을
벗어서가 아니라, 그저 누가 봐도 훌륭한 산적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의
병사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모습과 그들은 너무나도 달랐다.

마른가시나무군을 목격한 룩세인 왕국 사람들은 그들의 전투 방식과 악행을 보고 범죄자 집단일 거라 확신했다.
실제로도 마른가시나무군에는 범죄자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으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그렇게 의심군에서 벗어난 그들은 리카르디스가 알려 준 경로를 통해 이동하며 빠르게 주변 왕국을 휘저었다.
때로는 몇 백 정도의 소부대, 때로는 몇 천의 강력한 군대의 규모로. 잠입, 뇌물, 변장 등. 다양한 편법을
이용한 마른가시나무군은 성과 요새를 단숨에 함락시켰다.

그들이 그렇게 타국을 휘젓는 동안 덜미를 잡히지 않은 배경에는 리카르디스의 지식, 거기에서 더 나아가
황금정원이 있었다. 일라베니아에서부터 뻗어 나간 대상단 황금정원은 타국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황금정원의 클로에가 리카르디스를 만나면서부터 그 성질은 조금 더 정보기관에 가깝게 변모했고, 금전과 물품이
움직이는 길을 따라 수많은 정보가 수년간 차곡차곡 쌓였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알기 어려운 뒷길과 산길, 이맘때쯤이면 물이 빠져 길을 드러내는 계곡, 각 왕국의 병력과 주요
성채에 머무는 주둔 병력 등등.

준비가 갖춰져 있다고는 하나 급조된 계획들이었다. 변수는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었음에도 왕국이 빠르게 꼬리를
마는 꼴을 보면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평소와 같이 잘 처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붉은수레바퀴와 마른가시나무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전하?]

리카르디스는 생각나는 게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하지만 세실은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다.

[둘 다 황제의 개라고 불린다는 거죠. 표정을 보니까 알고 계신 모양인데요.]

[……본인 앞에서 하기는 참 힘든 말이라.]

[그러게요. 제 앞에서 떠드는 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군요.]

목숨이 서너 개쯤 되지 않는 이상, 그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겨울바람에 조금 거칠어져 있었다.

[뭐, 아무튼. 둘 다 황제의 개이긴 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붉은수레바퀴가 번견이라면, 마른가시나무는


사냥개에 가깝거든요.]

세실이 씩 웃었다.

[그리고 보통 사냥개는 목줄이 풀리고 나서야 일을 더 잘하는 법이지요. 염려 마십시오, 전하. 저도 이대로 끝낼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 호언장담대로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일을 잘 처리해 줬다. 덕분에 당장에라도 뚫릴 것 같던 방어선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일 터였다.

리카르디스는 대충 날을 헤아려 보았다. 보름달이 뜰 때까지 이 주 가량이 더 남아 있었다. 만약 구름이 달을


가려 버리면, 다음 시기까지 버텨야 할 수도 있었다.

‘……할 수 있을까.’

리카르디스는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어떻게든 해야지.”

어떻게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은 자기 자신을 다독이려는 듯 몇 번이고 울렸다.

* * *

시종장은 서늘한 인상의 사내를 보자마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 도착할 것이라는 얘기는 전달받았지만, 그게
12 시 종이 울리고 다음 날이 된 지 1 분쯤 지난 지금을 이르는 것이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아문의 가주를 뵙습니다. 모, 모실 준비가 미흡하여 송구…….”

당황한 시종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인사는 남자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흩어졌다.

“소란 피우지 말아라. 환대를 받고자 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삼엄해야 할 리비타 궁의 경비가 미흡한
것은 송구할 만한 일이긴 하지. 대체 책임자가 무얼 했기에 경비가 이렇게 방만하게 구는 것인가. 힉살라의 밤을
방해할 종자들이 날뛰지 않는 게 이상하다. 그렇게 될 시 면구스러워 리비타의 궁전에서 내내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것 같으니 당장 경비대의 책임자를 불러라. 내 친히 문책하도록 하겠다.”

시종장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하카브의 옆에 붙어 아첨하며, 아랫것들을 쥐어짜고 제 배 불리기 바쁜


재상 아틸라크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경비대장을 부르러 가려던 시종장은 궁전 한쪽에서 황급하게 움직이는 시종과 시녀들을 발견하고 잠깐 발을 멈췄다.
브네학스 또한 이 밤의 고요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눈으로 베어 버릴 듯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시종장은
기겁해서 그들을 불렀다.

“이, 이 무슨 소란이냐!”

테이블, 의자, 찻주전자 등을 분주하게 옮기던 시종들은 시종장 뒤의 브네학스를 보고 헉 숨을 들이켰다. 시종과
시녀가 우물쭈물하며 답하지 못하자 브네학스가 시종장의 어깨를 밀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인가.”

시종 중 한 명이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말에 답했다.

“그, 그것이. 간제 왕녀 전하께서 밤놀이를 가신다 하여…… 소란을 피워 송구합니다…….”

잠시간 시종을 빤히 내려다본 브네학스는 하,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내해라. 경비 임무를 소홀히 하는 병사들이 이 어둠 속에서 왕실의 귀한 핏줄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으니, 내가 직접 뵈어야만 하겠다.”
브네학스는 새파랗게 변해 버린 시종과 시녀들의 낯을 보며 의문을 가졌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간제
왕녀와 엮이면 문제가 없었던 적이 더 드물긴 했지만서도.

시녀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장소는 리비타 궁전의 정원 중 호수가 크게 자리한 곳이었다. 시녀와 시종들이 간단한
다과와 담요 등을 나르는 중이었고, 호수 근처에서는…….

“아하하, 전하!”

한 남자와 여자가 나 잡아 봐라 놀이를 하고 있었다. 브네학스는 잠깐 제 눈을 의심하고 밤하늘을 한번


올려다봤다. 달도 선명하게 뜬 이 오밤중에? 나 잡아 봐라?

“이런 앙큼 상큼한 귀염둥이 같으니! 잡으면 혼내 줄 테야!”

“…….”

브네학스는 순간 할 말을 잃어 입을 여닫는 행위만 반복했다. 사뿐한 달음박질은 일 분 여간 지속되었다. 간제가


남자를 뒤에서 잡아 끌어안았다. 달리던 힘을 이기지 못한 두 사람이 풀밭을 굴렀다. 꺄르륵,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브네학스는 이마에 잠시 손을 가져다 대었다. 골치가 아파 왔다.

간제는 자신을 몸으로 덮치듯 누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그의 턱을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타타라, 잡히면 내가 어쩐다고 했지?”

남자가 촉촉한 목소리로 답했다.

“혼내…… 주세요…… 전하.”

브네학스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성큼성큼 두 사람에게 걸어간 그는 간제 왕녀의 위에 겹쳐 올라간 남자의


옷을 붙잡았다. 한 손으로 성인 남자를 번쩍 들어 올린 브네학스가 이를 갈며 말했다.

“무엄하다. 감히 왕실의 핏줄을 욕보이다니.”

남자는 조이는 옷자락 때문에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켁켁 거리는 소리만 냈다. 브네학스를 발견한 간제는 자세를
바꿔, 풀밭에 모로 누운 채 턱을 괴었다.

“이게 누구야. 아문의 가주가 아닌가. 내일 온다 들었는데, 아니지. 종이 울렸으니 내일이 되긴 했군. 시간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지킨다니까.”

234 화.

“브네학스 아문이 고귀한 발타의 따님을 뵈옵니다. 상황이 이러하여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그 전에 그 손부터 놓아라.”

브네학스는 간제를 응시한 채, 손에 힘만 풀었다. 풀려난 남자가 재빠르게 간제의 뒤에 숨었다. 그가 눈물을
글썽였다.

“전하, 저 난폭한 이는 대체 누구죠? 타타라는 너무너무 무서워요.”

“일라베니아인이군.”
타타라, 라고 불린 남자의 억양을 확인한 브네학스는 그의 출신을 확신했다. 브네학스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웃지도 못했다. 리비타 궁전에서 일라베니아인? 그것도 이런 전시에? 그의 눈동자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브네학스는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찌하여, 이 상황에 대해 보고 받지 못한 건가.”

대답은 다른 곳에서 왔다.

“아문. 애꿎은 사람 잡지 말게. 다른 곳에 원인이 있음을 알 텐데.”

간제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재상 아틸라크와 브네학스 아문은 앙숙이었다. 브네학스는 리비타의 주인을 두고
제 입맛대로 행동하는 아틸라크가 마음에 찰 리 없고, 아틸라크는 사사건건 옳은 말만 해 대는 브네학스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타타라’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점 또한 그 일환이었다.

아틸라크는 자신이 문제없다 판단한 애완 인간 건에 대해 브네학스가 민감하게 굴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수상한 인물을 들이냐며, 브네학스가 제 속도 뒤집고, 궁도 뒤집을 미래가 빤히 보였으니,
아틸라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자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겠습니다.”

“나는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겠어서 말이야. 이만 물러가라.”

“상황의 엄중함을 헤아려 주십시오, 전하.”

“물러가라 하였다.”

숨도 쉬지 않는 듯 빠르게 말을 주고받은 남녀는 가만히 서로를 응시했다. 곧 브네학스가 뒤따라온 수하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데려가라.”

무게를 한껏 잡고 있던 간제가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아, 저 개싸가지.”

병사 두 명이 흉흉한 기세로 타타라에게 접근했다. 타타라는 히익 높은 비명 소리를 내며 간제의 등에 찰싹


붙었다. 다가오는 병사들을 살벌한 눈으로 바라보던 간제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만!”

병사들이 주춤거렸다. 간제가 미간을 찌푸린 채 웃었다.

“브네학스 아문.”

“하명하십시오.”

하명은 개뿔. 입만 살아서는, 쯧. 간제가 다 들리게끔 그를 욕했다.

“죄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첩자가 아닌 내 손님이다. 신체적 상해를 입히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정성껏 대우해야
할 것이다. 감히 내 귀여운 타타라를 개처럼 끌고 가서 죄인 취급할 생각은 아니겠지.”
“……이해했습니다.”

“우리 타타라는 나랑 놀 때 빼고는 바닥을 밟지 않는다. 귀한 아이거든. 그러니,”

간제가 웃으며 브네학스를 검지로 콕 가리켰다. 브네학스는 간제의 눈동자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이겨 보겠다는
열정이 불타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대가 직접, 안아서 곱게 옮겨라.”

간제의 심술궂은 말에 타타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브네학스는 잠시간 가만히 간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명령을 받듭니다.”

아주 자그마한 미동도 없는 브네학스의 표정에 간제는 패배를 직감하고 씩씩 성난 숨을 내쉬었다. 브네학스는


타타라를 향해 척척 걸어갔다. 타타라는 숨도 못 쉬고 눈만 뎅그러니 뜬 채로 굳어 있었다. 한 발, 두 발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히, 히익.’

엉덩이 걸음으로 조금 물러선 것으로는 브네학스를 피할 수 없었다. 타타라는 결국 공주님처럼 브네학스의 너른


품에 안기게 되었다. 타타라가 얼굴을 구깃구깃 일그러트렸다.

“모시겠습니다.”

브네학스는 제 머리통에 과자를 집어 던지는 간제의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돌아 걸어갔다. 브네학스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한 궁전 복도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무섭도록 일정한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 타타라가 머쓱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 귀하게 자라서…….”

브네학스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간제와 하하호호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수상한 것 이전에 좀
이상한 인간인 것 같았다.

“하지만 타타라는 깃털만큼 가벼우니까요, 괜찮으시죠?”

“…….”

리비타 궁전, 지하 감옥 안.

곱게 안아서 모신 간제의 애완 인간 ‘타타라’는 지하 감옥에 어울리지 않는 호화로운 소파에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편히 있으라고 예의상 말했다지만, 편해도 정말 너무 편해 보였다.

브네학스는 여유로워 보이는 남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고생 한 점 묻지 않은 백옥 같은 피부, 햇살


같은 눈부신 백금발, 수려한 외모까지. 겉보기는 그럴싸했으나, 간제는 이성에 크게 관심을 가지는 부류가
아니었다. 간제와 짝짜꿍이 잘 맞는 이 수상쩍은 인간이 어떤 경로로 굴러들어 왔을까. 브네학스의 눈이 빛났다.

“출신은?”

“일라베니아요.”
“일라베니아 어디.”

“지금 발타의 노예상이 어디서 제일 활발하게 활동하는지 아세요?”

“남부.”

타타라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검지로 브네학스를 콕 가리켰다. 대충 ‘바로 그거예요.’ 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


몸짓이었다. 문 옆에 선 병사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허,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들과 달리 브네학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둥의 사소한 반응도 없었다. 말없이 허리춤의 단도를 꺼내 들었을 뿐이었다. 타타라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 간제 전하께서 나에게 상해를 입히지 말고 귀하게 대하라…… 아악!”

브네학스는 타타라가 말하는 도중 그의 손을 잡아 테이블에 고정하고, 단도로 내리찍었다.

쾅!

얼마나 세차게 내리찍었는지, 테이블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타타라가 밭은 숨을 뱉어 냈다. 단도는 중지와 검지
사이에 정확하게 꽂혀 있었다. 브네학스가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상한 정황이 발견되었다. 이후 끈질기게 추궁한 끝에 일라베니아 황실과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하여, 정보를
얻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노라…….”

브네학스가 무뚝뚝한 얼굴로 테이블에서 단도를 뽑아내었다.

“그렇게 전하께 전달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브네학스는 꽉 쥐고 있던 타타라의 손목을 그대로 잡아당겼다. 그가 소파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테이블로 끌려왔다.
단도를 한 바퀴 돌린 브네학스가 타타라의 목덜미 아래에 단검을 댔다.

“일라베니아와 달리 발타의 고문은 세분화되어 있다. 산 채로 해부되어 본 적 있나?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하게


될 것이다. 순순하게 입을 열면,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 주겠다.”

브네학스는 남자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가득 찬 것을 보았다.

“저, 저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냥 전하의 사랑을 받아서 좀 겁대가리가 없어지긴 했는데, 지금 다시 생기기
시작했거든요? 아, 맞아…… 겁대가리란 이런 거였지…… 하고 기억나기 시작했다고요!”

브네학스는 말없이 단도를 그의 목에 더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감각이 닿자 타타라가 끼엑 소리를 내며
진저리쳤다.

“신분 증명할 수 있어요!”

“어떻게.”

“그, 그게…….”

남자가 문 양옆에 서 있는 병사 두 명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 나가라고 하세요.”


브네학스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의중을 파악하려 했다.

“옷을 벗어야 보이는 건데, 제가 부끄럼을 많이 타서…….”

“…….”

브네학스는 순간 말을 잃어버렸고, 병사들의 표정도 애매하게 변했다. 타타라가 앙칼지게 병사들을 다그쳤다.

“왕녀 전하의 총애를 받는 내 몸을 그렇게 보고 싶은 거야? 이 미모가 아무리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야, 징그러운 털보들 같으니!”

귀밑 수염, 턱수염이 풍성한 털보들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브네학스는 하, 한숨을 쉬며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 털보들이 씩씩거리며 방에서 퇴장했다. 브네학스는 병사들이 나간 곳을 바라보다가 다시
타타라와 눈을 맞췄다.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 줄지 기대해 보지.”

타타라가 작은 소리로 꿍얼거렸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브네학스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멀어지던 단검에 제 목을 들이댄 타타라 때문이었다. 하얀 살갗 위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언제나 날카롭게 벼려 놓은 단검이라, 생각보다도 깊게 상처가 생긴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그
상태로 짧은 시간 대치했다. 타타라는 목에 큰 상처가 난 사람 같지 않게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흐르던 피가 이내 테이블 위로 툭툭 떨어졌다. 끈적한 피가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타타라가 아래를 흘끗


쳐다봤다.

“오, 씨. 이, 이게 왜 이렇게 많이 흘러.”

담담하게 웃고 있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호들갑이었다.

“이, 이거 흉 지면 어떻게 하죠.”

그걸 나한테 물어봐도 뭐…… 브네학스는 타타라가 허둥지둥하는 꼴을 관람했다. 뭘 보여 준다더니,


바보짓이었나 싶었다. 그렇게 심드렁하게 마음이 식어 가던 때였다.

브네학스는 눈을 크게 떴다. 목의 상처를 감싼 타타라의 손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길고 깊은 상처가 빛 아래에 빠르게 아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종래에는 목 부근의
핏자국만 아니었다면 방금 전의 상황을 예측할 수도 없을 만큼 말끔하게 사라졌다.

브네학스도 신성력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신성 제국이라는 점 때문에 신성력이 일라베니아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곤 했으나, 사실 치유의 힘을 지닌 이들은 일라베니아뿐만이 아니라 대륙 여기저기에서 태어났다. 발타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력을 숭배한다고 해도 늙고, 병들어 죽는 것에 예민한 권력자들이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리비타 궁전에 속한 치유사들 중에서도 이렇게 순식간에 상처를 아물게 하는 자는 없었다. 귀족 가문에
의탁하여 지내는 치유사들은 작은 생채기 정도만 회복하는 정도도 허다했다. 그것은 일라베니아의 신관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특수한 사람들만 빼면 한적한 영지의 신관 같은 경우에는 큰 힘을 지니지 못했다.
이 정도의 힘을 쓸 수 있는 자는 대륙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이리라, 브네학스는 확신했다.

“……너는…….”

타타라는 손수건을 꺼내 붉게 젖어 있는 손과 목, 테이블, 단도 등을 닦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난로에서 은은하게 불타오르는 장작 위로 손수건을 던졌다. 뒤돌아선 남자가 브네학스와 눈을 맞췄다.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은 피곤한 듯 나른해져 있었고, 연극이라도 하는 것같이 풍부하던 표정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일라베니아에 단 일곱뿐인 대신관, 라헤안시. 발타의 힉살라를 치료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노니. 그대,
아문의 가주 브네학스는 필시 나에게 예를 갖춰야만 할 것이다.”

브네학스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타타라, 라헤안시는 도도하게 연기 중이었다가


난데없는 웃음소리에 잠깐 몸을 굳혔다.

“좋아, 이건…… 기대 이상이로군.”

라헤안시는 그것 보라는 듯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었다.

235 화.

대지가 새하얀 색으로 뒤덮이며, 완연한 겨울이 찾아왔다.

제국군은 원래 목적이었던 중부 관문으로 다시 이동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몇 날 며칠 쉬지도 못하고 이동한 후,


곧바로 동부 전선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른 탓인지, 아니면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 때문인지 행군 속도는
평소보다도 처져 있는 상태였다. 연합군 측 또한 비슷한 상황이라는 점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어김없이 밤이 찾아왔다. 병사들이 주위의 눈과 말라비틀어진 초목을 정리하고 야영을 준비했다. 리카르디스는
막사에서 벗어나 부지런히 움직이는 병사들을 보았다. 제국에서 발타 왕국으로, 그리고 끈질긴 추적을 떨쳐 내고
다시 제국으로 돌아와 격렬한 전투까지. 쉴 틈 없이 혹독한 시간을 보내 온 병사들은 몹시 지쳐 있었다. 중부
관문에 도달한다고 해도 큰 전력이 되기는 힘들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클로에에게 전달받은 서신을 통해 각지의 현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사망자와


부상자의 수, 황실에서 파견된 지원군의 규모, 늘어나는 연합군 측의 병력과 파괴되거나 함락당한 일라베니아의
주요 거점들까지. 길게 서술했으나 결국에는 중부 관문 또한 이미 한계에 달했다는 사실을 이르고 있을 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후 한숨을 쉬었다. 그를 알아본 병사들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신관님! 날도 추운데 안에 들어가 계시지…….”

리카르디스가 빙긋 웃는 것으로 병사의 말에 답했다. 제국군의 총사령관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실종 상태였다. 이


군을 이끄는 것은 대외적으로 사자갈기의 드윗이었으며, 리카르디스는 그의 옆에서 이따금 조언-명령-을 건네는
신비스러운 고위 신관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실제로 신관들이 하는 일, 부상자를 치료하는 데에 힘을 많이 쓰기도
했더니 알아보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늘어난 상황이었다.

병사들은 평소 같으면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을 리카르디스의 옆구리에 몰래 꿍쳐 둔 꿀이나 말린 과일 등을 끼워


주었다. 리카르디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로젤린에게 그대로 넘겨줘야겠다 싶었다.
얼음낚시를 하러 간다고 잠시 자리를 비운 그녀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던 리카르디스는 헐레벌떡 달려오는 정찰병의
모습을 보고 곧바로 지휘부 막사로 귀환했다.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리카르디스는 정찰병 사이에 있는 낯선 제복의 병사를 발견했다. 부러진 화살이 아직 꽂혀
있었으며 여기저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지탱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지친
모양새였다. 리카르디스를 발견한 정찰병들이 반색했다.

“신관님!”

리카르디스는 가까이 다가가 남자의 상태를 자세히 확인했다. 부르튼 얼굴과 갈라진 입술, 여기저기 얼굴에 난
생채기, 어깨에 꽂힌 부러진 화살 등. 명백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우선, 치료부터 하도록 하지요. 안쪽으로.”

병사 두 명에게 걸쳐져 막사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망토가 휘날렸다.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따뜻한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사내는 잠시 기절했다. 리카르디스는 그 틈을 타서 치료사들과 함께 남자를
보살폈다. 때마침 로젤린이 돌아왔다.

“혹시 아는 얼굴인가?”

작게 속삭이는 리카르디스의 말에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날이 선 기세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붉은말 남작의 장남, 데런입니다.”

붉은말은 붉은수레바퀴의 가신으로서 주인이 없는 빈 백작령을 지키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붉은수레바퀴령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정찰병들은 붉은말의 데런이 향하던 곳이 지금의 사자갈기군 진영이 아닌, 중부 관문 측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지원 요청이로군.”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쓸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단순한 도적의 소행일 수도 있으나, 지원이 필요할 정도로 큰
전투라면 연합군과 충돌했다고 보는 쪽이 더 확률이 높았다. 영토가 광대한 만큼 일라베니아에는 빈틈이 많았다.
수십, 수백 개의 방어선, 험준한 산길 등. 그 빈틈을 뚫은 병력이 기어코 중부에 침입했다는 것이다.

치료사가 막 데런의 어깨에서 화살을 뽑아냈다. 화살을 받은 로젤린이 수통을 열어 피가 엉겨 있는 화살촉을 씻어


냈다. 그녀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금속이 비쳤다.

“발타의 화살입니다. 연합군이 길을 돌아온 모양이로군요.”

그 말을 듣는 즉시 사자갈기의 드윗이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드윗이 소리 높여


외쳤다.

“중부 관문에 서신을 보낸다. 미처 감지하지 못한 연합군이 붉은수레바퀴령에서 공방전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휘관 사자갈기 드윗은 이 사태를 엄중하다 판단하여, 사자갈기군과 제국군을 이끌고 곧바로
붉은수레바퀴령으로 진군하겠다. 부디,”

중부 관문에 얼마쯤 뒤면 당도할 예정이라 알렸는데, 그 일정이 뒤틀어지게 되었다. 합류할 지원군만 기다리고
있던 중부 관문으로서도 큰 출혈이었다.

막사 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무운을 빈다.”
붉은말의 데런은 이동하기 직전 깨어났다. 곁에 서 있던 로젤린을 발견한 그는, 그녀의 머리 색이 갈색이건,
코와 입을 가린 상태이건 신경도 쓰지 않고 눈물부터 펑펑 흘렸다.

“아가씨! 죽여 주십시오!”

로젤린이 황급하게 데런의 입을 막았다.

“잘 봐, 나는…… 경의 아가씨가 아닐 거야.”

“……?”

로젤린도 아직까지는 실종되었다 알려져 있었기에, 사자갈기군의 기사 중 한 명으로 위장 중인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데런은 잠시간 로젤린의 말을 해석하며 눈알을 굴리다가 “우리 아가씨 맞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로젤린이 멋쩍어 하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막사의 모두를 둘러보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사람은 좋은데 눈치가 조금 부족해서…….”

로젤린의 입에서 나오니 무척 이상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데런과 얘기를 나눈 결과, 확률 높은 가설이 진실임을 확인했다. 소수의 부대로 방어 병력에 들키지 않게 잘게
쪼개져서 국경을 넘은 연합군이 붉은수레바퀴령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이었다. 외성을 넘은 그들은 백작령의
사람들을 학살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현재 내성 안으로 피신하여, 고군분투 중이라 했다.

붉은말의 데런은 목숨을 걸고 빠져나와 중부 관문에 지원을 요청하러 가는 길이었다. 추격대가 따라붙어 부하도
다 잃고 본인도 부상을 입었지만,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 중부 관문으로 가던 중 사자갈기군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전대 백작 부인께서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영지민들에게 미리 일러 둔 덕에 피해는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병력의 차이가 커서 얼마나 더 버틸는지…….”

데런의 목울대가 꿀렁거리며 세차게 움직였다. 어쩌면 지금쯤 함락되었을지도 모르겠노라는 말을 삼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땅을 짓밟고자 하는 병력은 대략 육천여 명으로, 현재 사자갈기군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수였다.


그 사이에 마인이 있다면 수의 차이는 무색해질 테지만, 성 내부의 병력이 있으니 전투는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함락된 상황에서는 뾰족이 대응할 수단이 없다는 얘기였다. 반드시 함락되기 전에
도착해야만 했다.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붉은수레바퀴령의 상황을 알고 있는 것도, 연합군과 대치할 정도의 병력을 지니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이 사자갈기군뿐이었다. 병사들 또한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지친 발걸음을 애써
이끌고 빠른 속도로 진군했다.

사자갈기의 드윗, 로젤린과 데런, 오소리 부대를 포함한 기병대 천기는 무리에서 벗어나 한발 빠르게 이동했다.
로젤린은 무리의 선두에서 달렸다. 하아, 하아. 급하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눈앞에서 하얗게 번졌다.

[아가씨, 오늘 날씨가 좋지요?]


로젤린은 자신을 보면 환하게 웃어 주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싱그러운 풀잎과 향긋한 과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 위로 번지는 저녁때의 굴뚝 연기. 거리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로즈, 아가.]

‘로젤린’을 사랑한 누군가까지도.

[붉은수레바퀴는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어릴 적 로젤린에게 일라베니아란 오로지 붉은수레바퀴령, 에스터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세계의 전부,
그녀가 아는 가장 아름답고 포근한, 그녀가 사랑하는 곳이었다.

좌절에 쓰러지거나 흔들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로젤린은 홀로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달리자, 말이 지쳐
쓰러지면 내 발로 달려가자. 그녀는 고삐를 세게 그러쥐었다.

* * *

헤사는 달리는 말 위에서 웩 속을 게워 내었다. 로젤린이 걱정스레 뒤돌아보자 몇 달 새 부쩍 자란 소년이 망토로


입을 슥 닦고는 걱정 말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창백한 얼굴 때문에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헤사가 아직 어려 고된 일정을 감당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지친 말을 쉬게 할 때를 제외하고서는 먹고 마시는


것도 전부 말 위에서, 밤에도 편히 쉬지 못하고 화톳불 근처에서 찌그러져 자야만 했으니, 괜찮은 사람이 더
드문 시점이었다.

그렇게 삼 일을 달린 결과, 로젤린은 드디어 붉은수레바퀴령의 경계를 밟았다. 땅은 여기저기 불타고, 건물들은
이미 반쯤 무너진 상태였다. 군마들이 땅을 진동시키자 와르르 잔해가 쏟아져 내렸다. 흙먼지가 뽀얗게 떠오르며
내리는 눈과 뒤섞였다.

한때 전투와 살육으로 시끄러웠을 장소는 고요했다. 거리에는 영지민과 연합군 병사의 시체, 병장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위에 뒤덮인 눈의 두께로 사건 발생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지원군이
오기 훨씬 전에 전투는 이미 끝난 것이다.

멍하니 거리를 보던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성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과거의
어리고 작은 소녀가 말했다.

로젤린은 전쟁에 나가 본 적 있어? 무섭네. 사람이 너무 쉽게 죽는 것 같아 무서워.

숨이 턱 막혀 왔다.

236 화.

로젤린은 성을 향해 내달렸다. 성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남자들이 보였다. 입은 옷과 갑옷의 양식으로


붉은수레바퀴 백작령의 병사나 제국군의 병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 로젤린의 속 깊은 곳에서 뜨겁고 날카로운 감정이 끓었다. 하늘하늘 내려오는 눈송이가
로젤린의 피부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녀는 창대를 우그러트릴 듯 강하게 쥐고서 등자에 무게를
지탱한 채 몸을 일으켰다.

지휘관처럼 보이던 이를 향해 투창하려던 로젤린의 손이 우뚝 멈췄다. 시야에 이상이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복장, 그리고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의 문양.

로젤린은 잠시 얼어 창을 쥔 채 그대로 달리기만 했다. 로젤린에게서 힘이 빠진 걸 느낀 군마가 발걸음을 늦췄다.


그사이 옆에서 달리던 붉은말의 데런이 뛰쳐나갔다.

“감히 붉은수레바퀴 백작령에 발을 들이고도-!”

로젤린은 그 비통해하는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아, 잠깐만. 말할 틈도 없었다. 로젤린은 급히 손을 뻗어


데런의 망토를 쥐었다. 그가 켁 소리 내며 뒤로 이끌렸다. 데런을 옆의 건초 더미에 던진 로젤린이 곧바로 손을
들어 올려 뒤따라오던 기병대를 멈춰 세웠다.

기병대의 돌진으로 거리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다. 그 희뿌연 공간 안에 두 무리가 대치했다. 사자갈기의 드윗이
무리에서 빠져나와 로젤린에게 다가갔다.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로즈 경,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로젤린은 그의 말에 답하며 말에서 내려섰다.

“적이 아닙니다.”

성문 쪽에 있던 거구의 남자가 귀를 후비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휘날리는 깃발에 새겨진 문양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로젤린이 가장 잘 알았다.

“셍고· 제르타예. 라고슈의…… 지원군입니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남자를 향해 다가간 로젤린이 두 팔을 쫙 벌려 그를 안았다.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로젤린의 등을 살살 두드려 주었다. 그러면서도 뭐지?
내가 지금 뭘 하는 거고, 이 사람은 왜 이러는 거지? 하는 표정은 계속 지워지지 않았다.

건초 더미에서 겨우 빠져나온 데런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달려왔다. 로젤린은 그제야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 * *

로젤린은 성안의 뜰, 정원 가릴 것 없이 모닥불을 피워 돼지나 말 등을 통째로 구워 먹고 있는 라고슈의 병사들을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을 데런이 대신 했다.

“그 연기가…… 이 연기였군요…….”

성이 불타는 줄 알았지, 설마 음식을 하는 연기였을 줄이야.

성문에서 만난 셍고·제르타예는 부족의 일원 중 한 명이 아닌, 셍고의 수장이었다. 그는 라고슈 지원군의


사령관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있었던 일을 대략 설명해 주었다. 붉은수레바퀴령을 지나쳐 중부 관문으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발타 개후레잡놈들이 어슬렁거리는 걸 보고 그냥 콧바람 한번 뀌었더니 다 뒤져 버렸다는, 그런…….

“상황 파악에 크게 도움이 되는 설명은 아니네요. 그렇죠, 아가씨?”

쓸데없이 솔직한 데런이 뒤에서 로젤린에게 속삭였다. 로젤린도 동의하는 바였다.

익숙한 정원과 복도를 지나쳐, 커다란 홀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따뜻한 온기가 퍼져 나왔다. 여기저기
의자나 카펫 위에 적당히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이 문이 열리는 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그중 상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화한 갈색 눈동자를 지닌 중년 남자는 로젤린이 아는
누군가를 많이 닮아 있었다. 에델바이스의 아버지이자, 갈라·제르타예의 수장인 귈테였다.

드윗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라베니아 제국, 사자갈기군의 사령관 드윗이라 합니다.”

“라고슈 지원군의 책임자, 갈라·제르타예의 귈테다.”

대뜸 반말부터 하는 귈테의 첫인사에도 드윗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라고슈의 꺼지지 않는 불꽃에 대한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오늘에서야 더욱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위기에 큰 도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성은…… 내 딸아이가 있는 곳이지. 누구에게도 감사 받을 일은 아닌 것 같군. 다름 아닌 일라베니아의 땅


한복판에서 내 딸이 위험했다는 점에서, 미안해야 하는 것 같긴 하고.”

드윗이 웃는 얼굴로 슬쩍 뒤를 돌아 로젤린과 눈을 맞췄다. 이,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라고슈 산産


딱딱한 얼음 인간이 경의 할아버지인 것 같은데, 정말 곤란하네요. 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때, 문이 급하게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일 정도로 숨을 크게 몰아쉬는


에델바이스였다. 로젤린은 빠르게 그녀를 훑었다.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을 보니 남아 있던 한 줄의 긴장마저
풀리는 게 느껴졌다.

드윗이 에델바이스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부인, 오랜만에 뵙습니…….”

“드윗 경!”

“예?”

“피곤한 분을 붙잡고 이러는 게 실례라는 건 알지만…….”

에델바이스는 떨리는 손으로 제 볼을 쓸고 있었다. 전투의 여파로 아직 불안한 것일까. 로젤린은 투구 속에서
눈알만 도르륵 굴렸다.

“사벡.”

귈테가 점잖게 에델바이스를 만류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드윗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발타에 남하할 당시 사자갈기군이 총사령관님 휘하에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예에, 그렇습니다.”

“호, 혹시…….”

에델바이스는 이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드윗은 에델바이스가 총사령관과 함께 실종된 그녀의 딸에 대해 묻고


싶어 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로젤린의 생존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부인, 진정하시고, 편히 앉으신 후에 물어보시지요.”

“그래요. 그래야죠.”

에델바이스는 애써 진정하려는 듯 차분히 숄을 매만졌으나, 숨은 여전히 거칠었고 눈동자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돌연 멈춰 섰다. 드윗에게 가려져 있던 로젤린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드윗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로젤린이 투구를 벗고 있었나 싶었는데, 하다못해 바이저도 열려 있지 않아


눈조차 보기 힘든 상태였다. 투시 능력이 있지 않은 이상 로젤린을 알아볼 길은 없었다.

에델바이스는 잘게 몸을 떨며 로젤린에게 다가갔다. 한동안 투구를 빤히 바라만 보던 그녀가 천천히 로젤린의


손을 맞잡았다. 에델바이스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손이 차군요.”

로젤린의 손등 위로 에델바이스의 눈물이 뚝 떨어졌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모두…….”

에델바이스는 떨어트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쉬다 가세요.”

* * *

하루하고도 반나절 후, 사자갈기군의 본대가 붉은수레바퀴령에 당도했다.

사정을 전해 들은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고 숨을 푹 내쉬었다. 눈앞이 깜깜했건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우군 덕분에


한차례의 위기를 또 넘기게 되었다.

라고슈 왕실은 일라베니아, 정확히는 2 황자 리카르디스를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었다. 그 지원이 여태껏


일라베니아에 도착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이 라고슈를 벗어나기도 전에 인접한 주변 국가, 미테이트 왕국과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때가 공교로웠다. 리카르디스는 라고슈를 향한 도발 행위에 발타의 입김이 들어가 있으리라
판단했다. 제 힘이 되지 못할 거라면, 일라베니아도 쓰지 못하게 만들려는 하카브의 수작임이 분명했다.

최근까지도 지원 병력이 계속 북부에 묶여 있다는 얘기를 전달받았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병력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리카르디스는 라고슈의 지원군을 전력에 포함시키지 않은 채 모든 계획과 전략을 수립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령에 그들이 나타난 것은 그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갈라·제르타예의 수장인 귈테는 태연하게,

“지도에서 미테이트 왕국을 지우고 오느라 조금 늦어 버렸군.”

하고 말해서, 데런의 탄성을 자아냈다.

“아가씨의 할아버지 완전 멋있어요.”

로젤린은 제 옆에서 소곤거리는 데런의 말에 동의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규모가 작은 왕국이라곤
하지만, 그 짧은 새에 전쟁을 종식시키고 오다니. 그 단편적인 부분만으로도 라고슈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원군에는 총 여덟 개의 제르타예 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각각 부족의 수장이나, 수장 대리 격의 핏줄들이


테이블에 한 자리씩 차지한 채, 사자갈기의 드윗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귈테.”

“뭔가, 셍고.”

“누구보다 열심히 싸워 놓고 여기까지 와서 하긴 좀 그런 말인데.”

모두의 이목이 턱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를 향했다.

“2 황자가 죽었다면서, 우리는 왜 여기 있나? 우리가 지원하기로 한 건 2 황자 아니었나?”

“어, 그러게.”

“오, 그러게. 웬일로 맞는 말을 하시는데 삼촌이.”

젊은 남자와 여자가 심드렁하게 턱을 괸 채 대꾸했다.

“아무 가치 없는 놈들을 위해 피를 흘릴 셈인가? 그냥 사벡만 데리고 가자고.”

사자갈기의 드윗은 벽면에 서 있는 신관 차림새의 리카르디스를 한 번 몰래 훔쳐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리카르디스가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반대로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살아계시면 그 지원은 유효하다 보아도 무방한지요?”

사자갈기의 드윗이 생글생글 웃었다. 제르타예 중 한 명이 재수 없다는 듯 침을 퉤 뱉었다. 귈테는 무표정한


얼굴로 데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붉은수레바퀴령에 발을 들인 군의 최고 지휘관이라 소개를 한 사람이 왜 계속하여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는 눈빛을 하는가 하고.”

“이런, 들켰습니까.”

“제국인과의 말장난을 즐겨 하는 편이 아니다.”

드윗은 대답하는 대신 웃는 얼굴로 일어나 의자에서 한 걸음 비켜섰다. 제르타예들은 뭐야, 뭔데 하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벽 한쪽에 서 있던 리카르디스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후드까지 눌러쓴 신관이 정적인 공간에서
홀로 움직이자 시선이 모였다.

237 화.

리카르디스는 빈자리에 앉은 후,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후드를 젖혔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사르륵 흐트러졌다.
오, 미남 하는 소리가 테이블 어딘가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쪽의 사정으로, 첫 만남이 불투명했던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제국의 총사령관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가 라고슈의 지원에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귈테와 달리 다른 이들은 전혀 예상조차 못 했는지 입을 떡 벌렸다. 그중 한 명이 어어, 하는 소리를 냈다.


건국제 때 딤라와 관디테를 호위했던 할잉겐·제르타예의 수장이었다. 유일하게 리카르디스를 본 적 있는 이에게
이목이 몰렸다.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귈테가 다시 리카르디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 형제들이 경망스럽게 입을 놀린 점을 사죄드립니다.”

2 황자 죽은 거 아냐? 2 황자 죽었으니까 돌아가자! 옳소 옳소! 했던 이들이 입을 합 다물고 귈테의 눈치를


살폈다.

“크레안 티다니온의 밤이 찾아오면 이델라브힘의 욕도 한다 하니 말이야. 그 점은 신경 쓰지 않으니 군장도


괘념치 말게.”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얘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몇 번의 승리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현재의 전황을 크게 뒤집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일라베니아의 패배를


예감한 나라들이 한 발 걸쳐 보고자 연합군과 동맹을 맺고 지원군을 보내어, 지금 이 순간에도 적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지. 라고슈 지원군 사만이 더해진다 하더라도 수의 차이가 커. 물론 전장 한두 군데의
전황을 좌지우지할 수는 있을 테지만, 이 전체적인 전쟁의 흐름 자체를 뒤엎을 수는 없으리란 사실만은 명확한
상황.”

리카르디스는 현재 제국군이 처한 상황을 기탄없이 서술했다. 지나치게 솔직해 제르타예들이 당혹스러워할


정도였다.

“희망적으로 상황을 관측해 보아도 언제 무너지느냐의 차이이며, 만약 일라베니아가 무너질 경우 지원했던


라고슈마저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음…….”

제르타예들은 음, 정말 맞는 말인 거 같아. 지금이라도 발을 빼는 게 낫지 않나…… 하고 리카르디스의 말에


설득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이목이 그를 향했다.

“2 주를 버틴다면 승산이 있다.”

“2 주라…….”

리카르디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초저녁, 아직 다 차오르지 못한 달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2 주 후, 연합군 병력의 반 이상은 일라베니아에서 발을 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라베니아와 라고슈 측의


병력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되겠지.”

리카르디스는 2 주 후에 일어날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다. 내부의 몇몇 가신들만 알고 있는 정보였으나,


지원군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었다. 제르타예들이 눈을 크게 뜨고 끔벅거렸다. 뭔가 준비를
잘한 것 같으면서도, 운도 무척이나 필요하고, 한마디로…… 도박이 아닌가?

리카르디스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제르타예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나?”


귈테는 그 질문을 듣고도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라고슈에서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귈테가 제르타예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찬성.”

그가 던진 한마디에 제르타예 전원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는군요.”

“매우 합리적인 방법이로군.”

귈테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리카르디스도 그를 따라 피식 웃었다.

“2 주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버틸 수 있겠나?”

다리를 꼬거나, 뒤로 한껏 누워 있거나, 옆 사람에게 반쯤 기대는 둥. 자유분방하게 앉아 있던 제르타예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어두워진 공간 속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러기 위해 왔습니다.”

귈테가 말했다.

“그러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회의가 끝났다. 하녀와 하인들이 드나들며 서류와 지도가 널브러져 있던 테이블 위를 음식
접시로 채우기 시작했다.

셍고·제르타예는 앞에 음식 접시가 놓이자마자 손을 뻗었다. 곧바로 옆에 앉은 귈테가 손등을 찰싹 쳐 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불만스러워하는 눈빛을 잠시간 주고받다가 리카르디스를 흘끗 바라보았다. 동맹국의 총사령관이
있는데 그게 먼저 입으로 들어가냐, 아 그러면 배고파 죽겠는데 어떻게 하냐. 라는 대화가 들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예법과 자신의 존재까지 신경 쓸 필요 없으니 편히 먹으라고 말했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제르타예들은 아직 식사 준비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음식에 무섭게 달려들었다. 리카르디스는 식에 대한 욕구가
뛰어난 그들을 바라보며 무심코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가 아차 했다.

‘로젤린!’

그는 회의에 집중하느라 잠깐 잊고 말았던 자신의 호위 기사를 급하게 찾았다. 로젤린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 채
고요히 서 있었다. 투구로 가려진 안쪽에서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쓸쓸해 보였다.

“…….”

정체를 밝히지 않은 탓에 자리에 앉지도, 함부로 음식에 손대지도 못하고 있던 것이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한껏
아래로 휘었다. 불쌍하고 귀여웠다.
하인들이 음식 접시를 다 나르고, 식사 준비를 끝낸 후 나가자마자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불렀다.

“로젤린 경. 이리로.”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자신을 ‘로젤린 경’이라고 부른 시점에서 투구를 벗어 던진 상태였다. 그리고 후다닥
달려가 리카르디스의 옆에 서서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리카르디스는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겨우 단속하고
제르타예들을 둘러보았다. 귈테와 생고·제르타예의 수장이 로젤린이라는 이름에 반응해 식사를 중단한 채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잠깐 위장 중인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이다. 그대들에게는 각별한 이가 되겠군.”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에게 흘끗 눈짓했다. 인사할 기회가 드디어 만들어졌다. 로젤린은 배고픔의 고통을 간신히
견뎌 내는 중이었다. 아무리 식욕에 눈이 돌아갔어도, 할아버지를 앞에 두고 음식에 먼저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지켜야 할 순서가 있으니 우선 그 순서부터 빠르게 진행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다시 후다닥 달려간 로젤린이 귈테의 앞에 무릎 꿇고 그의 손등에 제 이마를 대었다.

“갈라·제르타예. 사벡의 장녀 로젤린입니다!”

로젤린의 식욕 때문에 감동적이었어야 할 만남이 5 초 만에 얼렁뚱땅 지나가게 되었다. 귈테는 어안이 벙벙한지
가만히 바라만 보다가, 자신을 간절히 올려다보는 로젤린의 눈에서 욕망을 읽어 내곤 그녀를 곧바로 일으켰다.

“……많이 컸구나. 일단 허기질 테니 식사하며 천천히 얘기를 나누자꾸나.”

“네, 할아버지!”

로젤린이 씩씩하게 대답하고 귈테가 내어준 자리에 앉았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할아버지!’라고 말하는 순간
귈테의 턱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무척 좋아하는데 간신히 참아 내는 모양새였다.

제르타예들 사이에서도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맨손으로 고기를 뜯고 있던 제르타예도, 독한 술을 들이마시던


제르타예도, 노릇노릇 잘 구워진 돼지 귀를 잘라먹던 제르타예도 벌떡 일어나 로젤린의 주위에 바글바글
모여들었다.

“사벡의 딸이라고? 살아 있었구나! 얼른 사벡을 불러와!”

“아이고, 애가 배가 많이 고팠나 보네. 이것도 먹어.”

“갈라 놈을 아주 쏙 뺐구만.”

“사벡이 몸이 연약해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애는 예쁘게 잘 낳아 놨네.”

“아이고 이 비쩍 마른 거 봐라. 아주 그냥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겠어. 잘 좀 먹어야겠다.”

각각 사촌이나, 삼촌, 이모, 할아버지뻘의 사람들이 호들갑을 떠는 통에 가장 가까운 혈족인 귈테는 저 뒤로


밀려나야 했다.

회의장에서 내내 험악한 기운을 풍기던 이들이 엄마 아빠의 재롱을 보는 아기마냥 방싯방싯 웃는, 나름 진귀한
풍경이 펼쳐졌다.

로젤린은 그 한가운데에서 행복하게 식사했다. 음식 접시가 그녀 앞에 잔뜩 쌓였고, 잠깐 입안이 비는 것 같으면


누군가가 고기를 입안에 꽉 차도록 넣어 주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에게 진정한 천국이란 저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테이블의 다섯 번째 자리.

그렇게 로젤린이 행복에 겨워할 때, 회의 시간 내내 식사와 잠자리를 준비하느라 바빴던 에델바이스가 들어왔다.
손님들에게 음식이 입에는 좀 맞느냐 묻기 위해 왔던 그녀는 로젤린을 둘러싼 소란을 보고 잠깐 멈춰 섰다.

에델바이스가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보며 민망해했다. 제국의 총사령관이 있건 말건 자기들끼리 연회를 벌이고


있지 않은가.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제 핏줄들이 원체…….”

에델바이스는 말을 골랐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그녀를 도와 좋게 포장해 주었다.

“정이 깊고 가족을 많이 아낀다더니, 참 보기 좋군.”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리카르디스를 지나친 에델바이스는 서서 떠드는 제르타예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짚으며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리카르디스를 포함한 일라베니아인들은 전혀 듣지 못했다.

곧장 무리가 해산되었다.

“저거, 저거 성격 안 죽은 거봐라…….”

“결혼하고는 좀 괜찮아졌나 했는데…….”

제자리를 찾아가는 제르타예들이 몸을 달달 떨고 있었다. 뭔가 협박이라도 받은 듯한 모양새였다. 정숙하고 기품


있는 붉은수레바퀴 전대 백작 부인이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저 야생마들이……?

리카르디스는 무리의 한 중앙에 있던 로젤린도 달달 떨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후에 물어보았지만, 로젤린은 제 목을 베어도 결코 말하지 않겠다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 어머니 되는 자의
품위를 지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고 리카르디스는 생각했다.

238 화.

주책바가지 사촌, 삼촌, 이모, 작은 할아버지 등등을 쫓아낸 에델바이스가 로젤린의 왼쪽에 앉았다.
리카르디스는 저번에 붉은수레바퀴령에 들렸을 적, 로젤린이 보였던 반응을 기억하고 있었다.

에델바이스와 정확하게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잘 알았다.


로젤린도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던 아까보다 지금이 불편한지 먹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진 상태였다.

에델바이스는 그런 로젤린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음식 접시를 그녀 앞에 밀어 주었다. 농후한 소스가


뿌려져 있는 소고기 요리로, 로젤린이 선호하는 계통의 맛이었다. 과거 단순하고 기본적인 맛을 추구했던 ‘
로젤린’에 비해, 지금의 로젤린은 크림, 소스, 향신료 등.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미각을 한계까지 이끌어
내는, 한마디로 입안이 화려해지는 맛을 좋아했다.

그러니 에델바이스가 주고자 한 음식을 받는 사람은 과거의 제 딸이 아닌, 현재의 로젤린이었다. 로젤린도 그를
깨달았는지 잠시 멍하니 음식 접시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곧 부지런히 입을 움직여 접시를 비워 냈다.
에델바이스는 그런 로젤린의 옆에서 계속해서 음식 접시를 밀어 주기를 반복했다. 지금의 그녀가 좋아할 법한
요리들로만.

그것은 참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광경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조심스레 그들을 훔쳐보았다. 딸을 잃어버린 여인은
속 끓는 슬픔과 고통, 미련을 여전히 떨쳐 버리지 못했다. 복잡한 상념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 있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에델바이스는 한걸음 내디뎌 나아가기로 마음먹은 듯 보였다. 과거의 로젤린을 잊는 게 아니라, 지금의
로젤린과 과거의 그녀를 완전히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라, 그저 현실에 눈 돌리지 않고, ‘로젤린’의
기억과 흔적을 지닌 지금의 로젤린을 오롯이 마주 보는 것. 그것에 가슴이 더욱 헤집어져 상처가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참 강인한 사람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모녀의 해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왁자지껄한 식사 시간이 끝났다. 에델바이스도 성의 주인으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로젤린이 분주하게 제 품을 뒤지며 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그러고 꺼낸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소라 껍데기였다.

“……이, 이거, 발타에서 빠져나올 때, 바닷가를 지나쳤거든요.”

로젤린은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에델바이스는 그녀의 손 위에 놓인 소라 껍데기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귀를 대면 파도 소리가 들린다고 좋아하셨던 게 기억나서.”

연신 눈치를 보던 로젤린이 귀밑을 긁적이며 말을 흐렸다.

“그래서 가지고 왔는데…….”

갈라·제르타예는 바다 근처에 터를 두고 있었다. 사나운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라 온 에델바이스는 따뜻한


내륙 지방의 생활에 오랫동안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따금 바닷가에 있는 별장에 머무르기도 했고, 바닷가를
떠날 적이면 항상 큼지막한 소라 껍데기를 들고 와 밤마다 듣곤 했다.

그걸 기억했던 로젤린은 우연히 지나가게 된 바닷가에서 소라 껍데기를 주워 보관했다가 혹시나 싶어 건네 본


것이었다. 에델바이스는 로젤린이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역시 괜한 짓이었나?
하는 마음에 로젤린이 다시 껍데기를 집어넣으려 했을 때였다.

“라고슈의 바람은…… 매섭단다.”

에델바이스가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칼날 같은 바람이 바다 위를 스칠 때면, 검은 해변에 하얀 포말이 부서져 흩어지고, 절벽 끝까지 파도가


치달았지. 라고슈에서 지낼 때는 몰랐는데, 떠나고 나니 계속해서 그 소리가 그리웠어. 사랑했던 거지. 그래서
그립고, 그리워서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갈 수 없어서…….”

에델바이스는 로젤린이 건네준 소라 껍데기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녀가 귓가에 껍데기를 가져다 대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거 아니? 소라 껍데기 소리와 내가 기억하는 파도 소리는 무척 달라.”

에델바이스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괜찮아. 볼 수 없다고, 듣지 못한다고 해서 라고슈의 바다가 사라진 건 아니잖니. 나는 그걸 잘 알고


있거든.”

에델바이스가 다시 눈을 뜨고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로젤린의 눈동자 속에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담겼다.

“그 소리는 내 안에 있어. 내가 기억해. 그러니 나는 괜찮을 거야.”

에델바이스가 소라 껍데기를 꼭 끌어안았다. 제르타예들은 에델바이스의 말에서 묻어나는 라고슈에 대한 그리움에


가슴이 아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눈치 없이 지켜보고 있는 일라베니아 사람들을 전부
내보내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드윗의 망토를 잡아채 끌고 나갔다.

리카르디스는 닫히는 문틈으로 에델바이스의 얼굴을 봤다. 그녀의 입이 움직였다.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안에 있어. 그러니 너와 나는 괜찮을 거야.

그 말을 들은 로젤린의 눈이 휘었다. 그녀가 행복하다는 듯 웃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 * *

하카브는 잠든 디에즈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깔린 막사 안. 공기조차 멈춘 것 같은 정적이 그의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에 흔들린 촛불이 그림자를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그림의 한 장면이라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도무지, 살아 있는 생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디에즈는 며칠간을 잠들지 않다가 한 시간 정도의 짧은 잠으로도 피로를 푸는 둥. 인간으로서는


따라갈 수도 없는 일정을 소화해 내었다. 그때와 비교하니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지금의 모습이 참으로 낯설었다.
하카브는 그 변화의 시발점이 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누군가는 죽음이라고 부르던 로젤린의 실종이었다.

잠이 늘었다. 멍하니 있다가도 사소한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어린아이처럼 손을 물어뜯기도 했다. 가끔은
악몽을 꾼 듯 급하게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불안해 보였다. 이는 지금 전쟁을 겪는 사람 중 열에 여덟은
보이는 모습이었다. 특별할 게 없었으나, 대상이 디에즈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그는 오랜 역사를 가진 왕실의 숭배 대상이자, 인간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였다. 너무나도


보잘것없어, 미지의 흐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휘둘리기만 하는 평범한 인간과는 궤가 달랐다.

하지만 이렇게 디에즈가 병든 닭처럼 꾸벅거리는 모습을 볼 때면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상처 입은 짐승들은 잠이
많아진다. 하카브는 어릴 적 많은 동물을 길렀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약초를 뜯어 먹는 것도 아니고, 상처에
약을 바르는 것도 아니고. 이런 미련한 수면 행위가 대체 무엇에 도움이 되는 걸까.

일종의 기도와 같은 행위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뤄지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하고 나면 제 마음의 위안이 되는.
하지만 하카브는 디에즈가 이 긴 잠 끝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로젤린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나? 그러나 디에즈는 로젤린을 죽이고자 했다. 칼로 찔렀으나 실패했다며 싸늘한
얼굴로 얘기했었다. 그래 놓고서는 이제 와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굴다니. 그런 양가적인 감정을
가진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 아닌가? 하카브는 팔짱을 낀 채 그를 의문스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검은 달이 뜨지 않은지 몇 백 년이 지났던가. 마력이 없는 자들도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신성한 밤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하카브는 조급해졌다. 대체 그 힘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기에 한 나라가 이다지도 광적으로 매달리게
되었단 말인가.

의문이 짙어졌을 때, 디에즈를 만나게 되었다. 하늘에 뜬 ‘검은 달’처럼 확실하게 증명 가능한 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력. 인간을 초월한 존재. 디에즈는 그야말로 검은 달이었다. 그래서 하카브는 한때, 정말 신이라도
만난 마냥 들떠 있었다.

“흠.”

하카브는 잠든 디에즈의 볼을 쓸었다. 따스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익숙했다.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이었다.


디에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곧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훔쳐보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는데, 자는 사람을 만지진 마시죠.”

눈을 뜨자마자 인상을 찌푸린 디에즈가 하카브의 손을 틱 치워 냈다. 사춘기 동생 같아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니 진짜 사춘기였던 간제는 웃음이 나올 만한 정도의 소소한 규모로 일을 치진 않았기에, 하카브는 금세 자신의
생각을 반성했다.

“귀엽게 논다는 식으로 웃는 거 보기 싫으니까 나가세요.”

아무리 봐도 간제와 비슷해지고 있는 게 맞았다. 둘이 별로 붙여 놓은 적도 없는데. 뭐야, 문제는 나인가?


나였어? 하카브가 태어나 처음으로 반성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막사의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어, 어. 안 됩니다.”

“어허, 이 사람이. 안 되긴 뭐가 안 돼.”

다투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이 힘차게 펄럭였다. 이렇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들어올 인물이라고는 하카브가 아는
내에서는 한 명뿐이었다.

“디에즈님!”

장신의 여자가 성큼 막사 안에 발을 들였다가 하카브를 보고 오, 하는 소리를 냈다.

“아, 이런…… 전하도 계셨네요.”

그녀는 발타의 다섯 가문 중 하나인 ‘람가’의 가주로, 연합군 본대에서 굵직한 전투를 치러 온 전사였다.
마인이라 그런지 디에즈의 마력을 한번 느끼고 난 이후로는 어미 새 따라다니듯 그만 졸졸 따라다니는데,
하카브는 그녀를 괘씸하게 여겨야 하는지, 아니면 내 편끼리 사이좋게 지내니 기뻐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차호트.”

디에즈는 하카브를 대할 때와 달리, 온화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하카브 전하가 없을 때 얘기하려고 했는데, 에이 공쳤네.”

“내가 없다고 생각하고 해.”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지금부터 전하는 안 계신 겁니다.”

차호트 람가는 디에즈가 누워 있는 침상에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넓은 막사 안에 침대 주위로만 인구밀도가


높아졌다. 디에즈는 이 관심이 불편한지 어색하게 담요를 만지작거렸다.

239 화.

“검은독사로부터 서신이 왔습니다. 산맥을 통해서 일라베니아에 침투하기로 한 애들이 무사히 성공해서
붉은수레바퀴령까지 닿았는데, 그게 글쎄.”

차호트가 연극적이게 눈을 크게 뜨며 말을 멈췄다. 그리고 뒷말을 기다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씩 웃었다.


얘기할까 말까? 해 줄까 말까? 놀리는 기색이 역력해 하카브가 그녀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인내심 되게 없으시다니까.”

차호트가 껄껄 웃고 말을 이었다.

“실패했답니다. 라고슈 측에서 원군이 왔다네요.”

“근데 그 얘기를 왜 나 없을 때 하려고 하나.”

“전하께서 얼마나 성질내실지 디에즈 님이랑 내기하려고 했거든요. 원래 키티랑 하는데, 지금 없더라고요. 원래
사람들은 누구 욕할 때 단합이 제일 잘되잖아요. 디에즈 님이랑 친분도 쌓을 겸 몰래 욕하려고 그랬는데 왜 눈치
없이 끼어 드셔서 제대로 욕도 못 하게 합니까, 거.”

“대놓고 욕하고 있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없는 셈 치람서요. 한 입으로 두말하시면 쓰나요.”

하카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말로 못 이기는 유일한 인물이 차호트였다.

“흠, 어쨌거나…… 정말 잘 버티는군. 이번에는 기대를 제법 걸었는데 말이야. 실망이 커.”

하카브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말을 흘렸다.

“우리 애들이 좀 연약해야죠. 어떤 미친놈이 겨울에 전쟁을 해요.”

차호트 람가는 아차, 하고는 디에즈를 바라보았다. 그가 목덜미를 쓸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맞다. 디에즈 님 때문이었지. 이건 말 안 한 걸로 칩시다.”

발타에서 자유분방하기로는 간제보다 더한 인물이라 그런지, 디에즈도 하카브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곧 전령이 도착해 서신을 전달했다. 차호트가 말했던 불발된 계획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하카브가 턱을 쓸며
웃었다.

“내가 너무 안일했나?”

대답은 없었다. 하카브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안일했군.”

차호트는 술병을 꺼내서 꿀꺽꿀꺽 마시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라베니아 유람은 이제 끝내도록 하자.”

서늘한 목소리가 땅을 기는 듯 낮게 울렸다.

“라고슈의 병력이 더해진 중부 관문은 더욱 단단해지겠지. 그렇다면 우리도 그에 맞춰 더욱 강하게 문을 두드려야


할 테니. 이르라. 일라베니아 전역에 퍼진 연합군 병력 모두 중부 관문으로 집결하라고. 총력전이다.”

차호트가 입가로 흐른 술을 닦으며 씩 웃었다. 곧 일어선 그녀가 그의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고귀한 주인의 명을 받듭니다.”

이제야 좀 재밌어지겠네. 바깥으로 나가는 차호트의 발걸음이 룰루랄라 가벼웠다. 하카브가 어이없다는 듯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길레드!”

칼릭스가 화내며 소리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허수아비 길레드가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무슨 일?”

순진무구하고도 태평한 대답에 칼릭스는 잠깐 이마를 부여잡고 씨근덕댔다.

“내가 올해 가장 많이 부른 인물이 누님에서 네 이름으로 바뀌기 직전이라는 건 알고 있나?”

“요즘 저를 자주 부르시긴 했죠.”

객관적인 사실만을 짚고 있을 뿐이란 걸 알아도 머리에 열이 올랐다. 칼릭스가 이를 갈며 말을 씹어 내뱉었다.

“이, 사고뭉치들은 대체 어디 있어.”

그 말에 길레드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또 누가 무슨 일을…… 저질렀나요?”

“저지르다마다!”

칼릭스와 계약한 마인들은 대략 사백여 명이었다. 이번 전쟁의 규모로 따지자면 결코 큰 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파편과 적군 측 마인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감지해 큰 타격을 입기 전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는
역할로,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전력이었다.

칼릭스는 병력을 독자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 ‘마인’에 대한 좋지 못한 인식으로 벌어질 나쁜


일로부터 그들을 보호 중이었다. 그런데.
이놈의 마인들. 이, 사고뭉치들. 칼릭스는 눈물이 날 것 같아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하…….”

로젤린도 사고하면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이들은 수가 많은 만큼 어떻게 조절할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식량 저장고에 몰래 들어가서 술 먹고 놀다가 실수로 화재 사고를 일으켰더군.”

로젤린이었다면 깔끔하게 흔적을 지워서 나왔으리라. 화재 같은 실수 따위를 저지를 리 없었다. 우리 누님이 그런


쪽으로는 철저하지. 흥하고 콧방귀를 뀐 칼릭스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몰래
훔쳐 먹어도 된다는 건 아닐 텐데. 철저하지 못한 사고뭉치와 철저한 사고뭉치를 둘 다 겪어 보니 가치관에
혼란이 왔다.

“다행히도 책임자가 근처에서 순찰을 돌던 중이라 바로 진화했다지만 자칫하면 일이 커질 뻔했어!”

길레드는 눈알만 도르륵 굴려 대고 있었다.

“사고 수습하겠다고 책임자들한테 먹인 뇌물만 얼만 줄 알고 있기나 해! 돈이 아까운 게 아니야. 애들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느냐 하고 부패한 권력자가 제 새끼 두둔할 때 내뱉는
뻔뻔한 말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몹시 화가 나! 그렇게 하려던 건 아닌데 당황한 나머지 절로 튀어나왔어!”

사건이 정식으로 보고되면 얘기가 퍼지기 쉽고, 얘기가 쉽게 퍼지면 그만큼 마인에 대한 인식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최악은 푸른등불 공작이 마인 부대에 대한 권리를 거두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마인들을
보호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워진다. 이래저래 뇌물이 최선이었다지만, 백작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이런
불법적인 일에 엮이다니. 하늘에서 보고 계실 아버지가 통탄할 일이었다.

“죄, 죄송…….”

“어제부터 안 보이는 놈들이 다섯 정도 되는 거 같아. 분명 그놈들이겠지. 에렌, 딘, 체이시, 시온, 벨벳


이놈의 자식들! 빨리 찾아서 내 앞에 대령해!”

“이름을 다 외우셨습니까?”

몇 백 명이나 되는데?

“사고 치는 놈들은 고만고만하게 정해져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백 명 이상은 외운 상태야. 그만큼 돌아가면서
사고를 잘 쳤다는 얘기지…… 길레드!”

칼릭스는 차분하게 얘기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마지막은 큰소리를 냈다. 길레드는 그가 뒤 목 잡고 쓰러지기 전에


재빨리 바깥으로 나섰다.

길레드가 나가자마자, 곧바로 알터가 들어왔다. 이 겨울철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더워서 저러나 싶었는데,
안색은 새파랬다. 최근 알터가 이런 식으로 들어왔을 때는 마인들이 사고 쳤을 때밖에 없었다.

“아, 제발.”

칼릭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니 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푸른등불 공작에게 했던 말을 당장에 철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칼릭스가 불안감에 다리를 떨자 알터가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흔들었다.

“이번에는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닐지도 몰라요!”

알터는 새파랗게 질린 그 얼굴 그대로 횡설수설했다.

“들키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되니까!”

“…….”

아마 아닐 텐데, 그거. 있던 일이 없게 되지는 않을 텐데.

“다행히 목격자는 없거든요!”

“…….”

참 다행이죠? 하고 울먹이는 알터를 보며 칼릭스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님이 보고 싶어.”

테이블 위로 엎어진 칼릭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심 어린 말에 알터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렇게 칼릭스는
한참을 눈을 감은 채 테이블에 볼을 대고 있었다. 조용한 공간에서 홀로 사색을 즐기려 했건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으하하, 으헤헤, 꺄르륵 웃어 대는 병사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칼릭스가 알기론, 붉은수레바퀴 진영의
병사들은 지휘관의 막사 앞에서 저런 크기의 목소리를 낼 만큼 간이 크지 않았다.

칼릭스는 힘겹게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간이 투기장을 만들어 싸움박질하는 어른 사고뭉치들이 보였다.

“백작님! 어디에 거실래요!”

붉은수레바퀴 산하 특별 마인 부대, 원숭이 대의 대장이 내깃돈 장부를 열심히 작성하며 칼릭스를 향해 소리쳤다.
대장이라는 인간이 대원들을 단속하지는 못할망정, 부추기고 판을 키우고 있다니. 하지만 칼릭스에게는 더 이상
그들을 교육할 힘이 없었다. 허술한 투기장 안의 선수를 확인한 칼릭스가 체념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어금니에게.”

어금니는 어금니 대의 대장을 이르는 말이었다. 칼릭스는 품에서 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동전이 꺼내어,
엄지손톱 위에 놓고 튕겼다. 반짝이는 금속은 원숭이 대 대장의 손으로 쏙 들어갔다. 그녀가 끄악 비명을 질렀다.

“부자!”

그녀가 귀한 성물이라도 대하는 마냥, 두 손으로 금화를 들어 올렸다.

“부자님이 오셨다아, 이 거지새끼들아!”

“부자 최고!”

“백작님을 찬양하라!”

원숭이와 어금니가 칼릭스의 허벅지 아래에 어깨를 받치고 그를 띄웠다. 두 사람의 어깨에 칼릭스가 앉게 된
셈이었다. 칼릭스는 팔짱을 낀 채 초연한 표정으로 그들이 둥개둥개 우리 부자 백작님을 부르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칼릭스는 잠시 높아진 눈높이에서 붉은수레바퀴 진영을 한번 훑어보았다. 막사 뒤에서 뭔가 암거래를 하는 것


같은 인간, 간이 투기장을 만든 인간, 지나가는 병사의 주머니를 슬쩍하고 있는 인간, 말 앞에 뛰어들어 자해
공갈을 하는 인간까지.

“들키지만 않으면 없는 일이라.”

참 좋은 말이었다. 모든 걸 포기한 칼릭스가 까마귀 대 대장에게 뺏은 싸구려 와인을 마시며 투기장의 판돈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백작님!”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더니 칼릭스의 코앞에서 넘어져 데구루루 굴렀다. 식량 창고 방화 사건의 범인이리라
예상되는 5 인조의 대장 격인 에렌이었다. 칼릭스는 오늘 있었던 화재 사건에 대해 물어보려다가, 사색이 된 그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암거래를 하던 사람도, 간이 투기장에서 싸우던 사람도, 응원하며 깔깔 웃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입을 다문 채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아주, 감이
더러웠다.

240 화.

“모, 몰래 엿들었는데요.”

제국군 중앙 진영에서 또 뭔가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평소 같으면 하지 말라고 설교라도 했을 테지만, 칼릭스는
그의 입에서 나오려는 말을 재촉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인내심을 쓰고 있었다.

“중부 관문으로 오던 사자갈기군으로부터 서신이 왔어요. 연합군이 붉은수레바퀴령을 침략해서 예정된 합류를
틀어, 에스터를 지원하러 간다고 했어요.”

어렵고 난해한 단어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칼릭스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 오랜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붉은수레바퀴령, 연합군, 사자갈기. 예정된 합류를 틀어, 에스터를 지원…….

칼릭스는 입안을 감도는 피 맛에 정신을 차렸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이로 짓씹은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손수건으로 피를 꾹 누른 채 고개를 들었다. 중앙 본대에서 파견된 전령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결과적으로 칼릭스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다음 날에 있을 전투를 대비하여 마인들에게 빨리 잠자리에


들라고 다그치기만 했다.

“안 가도 괜찮을까요?”

“……붉은수레바퀴령을 침범한 병력은 사자갈기의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 보고되었다. 내가


간다고 해도 이미 전투가 다 끝난 뒤라 별다른 도움도 되지 못할 뿐더러, 도리어 중부 관문에 큰 빈틈을 만들게
될 뿐이지.”
어금니 대 대장이 구시렁거렸다.

“그래도…… 백작령에는 전대 백작 부인께서 계신 것 아닙니까?”

칼릭스는 가만히 바닥을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킨 후에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는 호락호락하게 성을 넘겨주실 만한 분이 아니고, 붉은수레바퀴령에 머무르는 가신들의 병력 또한


있다. 난 그들을 믿는다.”

칼릭스의 말은 어떤 바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믿는다. 무사할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내 할 일을 해야지. 이곳을…….”

피곤한 듯, 지친 듯한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작아졌다. 종래에는 뚝 끊겼다. 복잡한 상념들이 칼릭스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는 것으로 일순 드러났던 감정을 모두 지워 버렸다.

“쉬어라.”

그렇게 말한 칼릭스는 겨울철 싸늘한 공기에 하얀 입김을 뿜으며 돌아섰다. 마인 부대의 각 대장들은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뒤를 지켜보았다. 칼릭스가 머무르는 막사의 불은 그날 밤이 지새도록 꺼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부터 마인들이 사고를 치는 빈도수가 확연하게 줄었다. 뒷골목에서 자란 사람들이 대다수라, 법과


규칙이 뚜렷한 장소에 적응하느라 마찰을 빚는 줄 알았더니. 조절하자면 조절할 수 있었잖아?

‘이 인간들이?’

칼릭스는 살짝 울컥했지만, 생각해 보니 이게 어딘가 싶었다. 생각과 온 신경이 붉은수레바퀴령으로 쏠려 있는 그


가운데에서도 마인들의 조신해진 행동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묘하게 잠잠해진 며칠이
흘렀다.

칼릭스는 둔영지를 걷던 도중, 하늘에서 검은 그림자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한 발짝 물러섰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간은 원숭이 대의 대장이었다. 칼릭스는 3 층에서도 곧잘 뛰어내리는 누이를 혈육으로 둔 자로서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백자악님!”

“원숭이, 다른 사람들이 놀라니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건 좀 자제하도록 하고. 그래, 무슨 일인가.”

짐승이 엎드린 자세로 착지한 여자가 헤엑 헤엑 숨을 몰아쉬었다. 급하게 건물 위를 달려온 모양이었다.

“몰래 엿들었는데요!”

“……그래.”

그렇겠지.

“사자갈기군이 앞서 보낸 전령이 지금 도착했어요! 중부 관문으로 오고 있답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령은


무사하대요! 백작 부인께서도 무탈하시고, 영지도 큰 피해 없이 전투가 마무리되었대요!”

원숭이가 다다다 쏟아 낸 말을 듣고 여기저기에서 마인들이 튀어나왔다.


“뭐? 무사해?”

“백작님! 무사하시대요!”

저번에 연합군이 붉은수레바퀴령에 침략했다는 소식을 훔쳐 듣고 미리 알려 준 에렌도 굴러 나와 허엉 울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면 제 고향인 줄 알 것 같았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겼다. 칼릭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풋 웃음을 터트렸다.

곧 마인들이 급조한 악기들을 들고 와 엉망진창으로 연주했다. 원숭이와 어금니는 몸을 들썩이다가 흥에 못 이겨


또다시 칼릭스를 어깨에 태웠다. 춤추며 노래를 부르기를 몇 십 분째, 칼릭스는 두 사람의 머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원숭이, 어금니. 이제 그만 내려 줘. 나는 본대에 가 봐야 할 것 같으니.”

연회를 벌이는 무리 바깥에서 본대로부터 도착한 전령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성이고 있는 게 칼릭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높은 곳의 이점이었다.

“백작님께서 본대에 가야 한답신다아!”

그들은 인간 가마 고객의 바람을 훌륭하게 하나만 접수하여, 그대로 중부 관문 제국군 본대 둔영지까지 이동했다.
둥둥, 짤랑짤랑, 뿌우우 갖은 소음을 내는 무리를 본 제국군 병사들이 질린 표정으로 길을 텄다.

푸른등불 공작은 난데없이 들리는 소음에 막사를 나왔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칼릭스가 뒷골목 깡패
같은 이들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었다.

“이게 뭔…….”

수다쟁이 앵무새도 이 진귀한 장면을 구경하느라 잠시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였다.

칼릭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인간 가마에서 내려 푸른등불 공작에게 다가갔다. 설명을 요구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도
칼릭스는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 미소 지을 뿐이었다.

* * *

중부 관문 제국군 둔영지에 사자갈기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운 점은 사자갈기군뿐 아니라, 라고슈의 지원


병력도 더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칼릭스는 건물 밖을 서성이다가 하얀밤 기사단에 끼어 있는 미레이미를 발견하고 화색을 지었다. 그 얼굴을


목격한 미미는 이를 두고두고 놀렸다. 길 잃어버린 어린애가 엄마를 찾은 표정이었다면서.

낄낄 웃은 미미는 전신 갑주를 입고 있는 어떤 기사를 가리킨 후, 수평으로 큰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원을


와구 와구 퍼먹는 시늉을 더 했다.

‘큰…… 접시…… 많이 먹어? 누님?’

칼릭스의 눈이 반짝이자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후드를 뒤집어쓴 어떤 신관을 가리킨 후, 자신의
얼굴도 한번 콕 찍고는 엄지를 두 개 추켜올렸다.

‘얼굴이…… 무척이나 최고야? 리카르디스 전하?’


이번에도 정답일 것 같았다. 칼릭스는 참았던 길고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부 전선의 승리와 선물 받은
동화책. 그 사이에 끼어 있던 리쉬 한 송이로 로젤린이 무사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계속 불안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총사령관의 실종에 사기는 낮아진 상태였다. 다행히 동부 전선과 여기저기에서 승전보가 울려 퍼지며 조금
회복되었다지만,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얘기를 알리는 것만큼의 효과는 없을 게 분명했다. 그걸 감안하고도 생존
사실을 숨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칼릭스는 계속해서 한 명에게 가려는 시선을 애써 떼어 내고 건물로 발을 들였다.

중부 관문의 지휘관들은 라고슈의 지원 병력과 제국군의 일부가 도착한 현 상황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계산을 마친 후에는 여전히 상황을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평소의 피로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자갈기군과 하얀밤 기사단, 일부의 남부 관문 병력과 라고슈의 지원군은 논의 후 적합한 곳에 배치되었다.


푸른등불 공작은 몇몇 사람들만 남기고 지휘부를 해산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푸른등불 공작, 황금정원 자작,
큰뿔산양 후작 등등. 전부 리카르디스에게 충성을 바친 이들뿐이었다.

하급 지휘관들이 주르륵 나가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꽂혔다. 드윗의 뒤에 서 있던, 후드를 눌러쓴
신관에게로. 얼굴을 반쯤 가린 신관이 턱을 쓸다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나란 걸 아는 거지?”

“코와 입만으로도…… 전하 같으셔서.”

황금정원 자작은 ‘코와 입만으로도 충분히 잘생기셔서’라는 말을 둘러말했다. 후드를 젖힌 리카르디스가 씩


웃었다. 벽에 기대어 선 신관 앞에 방 안의 사람들이 일시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일어나라. 모두 수고가 많았다.”

푸른등불 공작은 평소의 냉철하고 까칠한 모습은 어디로 지워 버렸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콧수염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공작이 고개를 숙이자 리카르디스가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살아 계실 거라 믿었습니다.”

“못난 주인을 만나 고생이 많아.”

다들 훌쩍이느라 아니라는 대답을 못 했다. 정말 못난 주인을 만나 고생이 많은 자들이 되어 버렸다.


리카르디스는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의자에 앉았다. 모두 그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라고슈의 지원 덕에 위기를 넘겼다. 차후 보답에 관해 논의해야 할 테지만, 타국의 병력이라고 해서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게 우선 되어야겠지.”

“명을 받듭니다.”

“바다협곡과 고래무덤이 해상에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라고슈의 해군 또한 합류할
예정이라고 하니, 해안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로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연갈색 나무 조각은 일라베니아의 병력을, 검은 나무 조각은
연합군의 병력을 뜻하는 모형이었다. 압도적으로 검은색의 수가 불어나 있었다. 멀리 떨어진 나무 조각들조차
모두 중부 관문을 향했다. 병력의 집결. 총력전이 펼쳐질 양상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연합군의 병력이 중부 관문으로 모이고 있는 상황이다. 하카브도 더 이상 시간을 끌기에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으니 말이야. 발타를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도 견제해야 하고, 금전적으로도, 병사들의
체력적인 면으로도 시간을 끌면 피차 좋을 게 없으니까.”

241 화.

리카르디스는 턱을 괸 채 연합군 본대를 뜻하는 검고 큰 나무 조각을 응시했다.

“앞으로의 전투는 더욱 치열해지겠지. 이미 한계나 다름없는 병사들은 하루에도 수천씩 죽어 나갈 것이며,


미래가 없어 보이는 전쟁에서 희망을 찾지 못해, 일어날 수 있음에도 쓰러지는 이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비관적인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탁자에 앉은 이들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쓰러지거든 일으켜 세워라. 거짓말을 하든, 돈을 쓰든, 그들의 어머니와 자식의 이름을 불러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희망을 붙들어 둬라. 2 주. 단 2 주다.”

리카르디스는 잠깐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아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리카르디스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방 안의 모두를 지나친 눈동자는 단 한 사람만을 담았다. 로젤린을 응시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검은 달이 세상을 비추고 있을 것이다.”

수백 년간 잃어버렸던 ‘축복의 밤’을 말하는 사람답지 않은 담담한 말투였다.

* * *

“저기요.”

라헤안시가 짜증스레 말을 내뱉으며 옆에 서 있는 사람을 흘겨보았다. 내내 팔짱을 낀 채로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던 브네학스였다.

“성력 한 번 쬐면 힉살라께서 뿅 하고 일어나실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죠.”

반듯한 브네학스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뭐, 뿅이라니? 감히 힉살라께 뿅? 이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멀찍이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간제가 간식을 먹으며 그 신경전에 끼어들었다.

“뭐, 치유의 힘을 가진 자들이 리비타의 궁에도 있긴 합니다만, 애초에 마인은 건강하고 다쳐도 빨리 나으니까
성력을 접해 볼 기회가 적긴 하지요. 아문은 마인 중에서도 강한 축이라 감기도 걸려 본 적 없을걸요.”

“어쩐지. 며칠 동안 고생에 절어 밤마다 시체처럼 늘어지는 나를 무능하다는 식으로 쳐다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라헤안시가 표독스럽게 브네학스를 노려보았다.

“힉살라께서 쓰러진 게 몇 년 전인지는 일라베니아인인 나도 알거든요? 마인인 힉살라를 중독시켜 의식불명


상태까지 만들려면 쓰러지기 훨씬 전부터 작업에 들어갔을 거고! 근 십 년 이상 중독 상태였던 사람이 하루 이틀
치료받는다고 괜찮아질 줄 아는 게 양심 없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요, 전하!”

“저 사람이 좀 그런 경향이 있죠. 앞뒤로 꽉꽉 막혀 가지고서는, 쯧. 우리 타타라가 이렇게 힘들게 쥐어짜 내고


있는데.”

두 사람의 공격에도 브네학스는 눈썹 한 번 움직이지 않았다.

“무척 자신만만해하기에, 하루면 일어나실 줄 알았지요. 일라베니아의 단 일곱뿐인 대신관도 사실 별 볼 일 없나


보군요.”

라헤안시가 미간을 찌푸렸다.

“참나, 몇 달은 더 이렇게 성력으로 치료받으셔야 할 겁니다. 해독 약도 계속 드셔야 하고요. 만약 5 일 정도로


힉살라를 ‘꿈틀’이라도 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신…….”

그 순간 힉살라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간제를 제외한 두 남자 모두 목격했다.

“악!”

짧은 비명을 지른 라헤안시가 자신의 팔을 마구 쓸었다. 유능함이 도가 지나쳐 소름 끼쳤다. 알고 보니 내가 신?


라헤안시는 정신력으로 마지막 한 방울의 성력까지 쥐어짜 내기 시작했다. 하얀빛은 여태껏 보았던 것보다 환하게
빛났다.

갑작스럽게 두 남자가 산만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간제도 이상을 깨닫고 일어났다. 몇 년의 세월 동안 노인처럼
변모한 힉살라의 주름진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라헤안시가 땀을 뻘뻘 흘리며 간제에게 말했다.

“왕녀 전하! 힉살라의 손을 잡으시고 계속 말을 걸어 주세요. 의식이 깨어 계실지도 모르니까!”

간제가 두 손으로 힉살라의 손을 꽉 붙잡았다.

“위대한 힉살라시여. 하카브 위 리비타가 힉살라를 중독 시켜 의식을 잃게 만든 다음 궁전의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과를 위조해서요. 진짜를 찾기만 하면 곧바로 노친네를 죽이겠다던데. 오라비가 말하는 그 노친네가
아마도 힉살라인 게 아닐까? 하고 이 간제는 짐작만 하고 있답니다.”

‘과’는 힉살라의 징표로, 힉살라의 이름 아래 펼쳐지는 모든 문서에 찍히게 되는 도장이었다. 발타의 역사와
함께한 과가 없으면 힉살라의 자리에 오른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힘을 얻지 못해 허수아비처럼 세월만 보내게 될
뿐이었다.

“힉살라께서 뒤 목 잡고 다시 쓰러지시겠네, 아주 그냥!”

아버지,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흐흑, 어서 깨어나세요. 이런 것쯤을 바랐던 라헤안시가 기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크, 크윽…….”

수년 동안 잠들어 있던 힉살라가 눈을 번쩍 떴다.


“힉살라시여!”

브네학스가 탄성을 터트렸다. 리비타의 주인이 깨어난 것에 감격한 그와 달리, 라헤안시는 힉살라가 조금
가여웠다. 의식을 차리자마자 듣는 내용이 저딴 거였으니, 혈압이 오를 만도 하지.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매일매일 쥐어짜 내는 성력도 이제 한계였다. 오늘까지만 치료하고, 며칠


지난 뒤에야 다시 힘을 쓸 예정이었는데 힉살라가 깨어난 것이었다. 의식을 유지할 정도로 회복시켜 놓아야만
했다.

몇 십 분 후. 비틀거리는 라헤안시를 브네학스가 부축했다. 땀이 비처럼 쏟아지는 것도 옷소매로 다정히 닦아


주었다. 다정한 행동이 몹시나 역했지만 라헤안시에게는 그를 떨쳐 낼 힘이 없었다.

힉살라는 긴 수면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얼굴 근육이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으나, 브네학스와
간제의 얼굴을 알아보는 걸 보니 회복되는 건 시간문제인 듯했다.

“네가…… 아문의 가주가 되었느냐.”

“그러하옵니다.”

힉살라가 이를 갈았다.

“어린, 아이였는데…… 세월이…… 많이도 흘렀구나.”

브네학스는 답지 않게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우선 식사를 먼저 하시는 편이 좋지 않겠냐며 간제에게


의견을 구했다. 간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 좋은 고기를 올려야겠노라 진지하게 미친 소리를 하고 있어서
라헤안시는 지친 와중에도 힘겹게 말을 꺼내야만 했다.

이 무식하게 튼튼한 마인들, 십여 년간 잠들어 있던 노인의 위장을 기름칠하며 학대하려고 하다니.

“무조건, 소화가 잘되는, 아기들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두 남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걸 먹고 우리 아빠가 힘이 날까? 힉살라께 감히 그딴 걸 먹일 수는 없지 않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오랫동안 잠들어 계셔서 자극적인 음식이나 소화하기 어려운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힉살라께서는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이니, 제발, 음식은 소화하는데 힘이 필요한 종류가 아니라, 알아서 소화되는
거로, 하라고…….”

말의 끝은 짜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두 남녀는 자신들이 모르는 분야인 만큼 라헤안시의 말을 존중하기로 했다.

브네학스가 분주하게 방을 나선 사이, 간제는 힉살라의 곁에 앉아서 여전히 혈압이 오를 만한 과거의 일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분하게 서술했다. 하카브가 궁전을 장악하고 나서 힉살라의 세력부터 먼저 잘라 내었다던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어린 황자도 결국 암살당했다던가 하는 하카브의 악행과 관련된 얘기였다. 그게 잘 먹힌
것인지 힉살라는 연신 부들부들 몸을 떨어 댔다.

과거에서부터 흐른 얘기가 현재를 따라잡았다. 대륙에 발발한 전쟁과 간제, 그녀 자신이 오로지 힉살라에 대한
애정 하나로만 위험을 감수하고 대신관을 리비타 궁전으로 데려온 것, 브네학스의 협조와 힉살라가 눈을 떴다는
얘기까지.

“네가 수고가 많았구나, 제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어찌 수고라 할 수 있을까요? 간제가 바라는 것은 힉살라께서 무사히 깨어나시길, 그리고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딱 두 가지뿐이었답니다. 저에게는 이제 힉살라밖에 안 계신걸요.”

라헤안시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게 통하나 했는데, 어린 시절의 간제만을 기억하는 힉살라는
진심으로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간제는 그를 깨운 진짜 용건을 말하지 않았다. 예상 밖이었다. 진짜 과는 어디 있냐. 전쟁을 방관하려는 건


아니지? 당장에 하카브를 불러들이자. 등을 당장에 말할 줄 알았는데.

‘음…….’

저 간제가 숙일 만한 인물이라니. 아들에게 배신당해 십여 년간 잠들어 있던 불쌍한 노인이 아니라, 힉살라는


힉살라란 말이었다. 은연중 그를 불쌍하게 여겼던 라헤안시는 제 생각을 잽싸게 철회했다.

힉살라의 명령 아래,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몸을 회복하여 운신할 수 있기 전까지 조심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힉살라의 방 안에는 소수의 시종과 브네학스, 간제와 간제의 사람들, 라헤안시만이 드나들었다. 그럼에도
고요하게 불기 시작한 태풍을 눈치챈 것인지 리비타의 궁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힉살라가 깨어나고 며칠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잠들어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과를
찾아와 명령을 내린다든가, 군대를 물리려고 한다든가 하는 행동은 물론이고 그와 비슷한 의지도 엿볼 수 없었다.

라헤안시는 그런 그를 매일 치료했다. 라헤안시의 헌신적인 보살핌에 힉살라는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리비타


궁전의 치료사, 일라베니아로 따지면 신관인 자들이 힉살라를 얼마나 방치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라헤안시는 힉살라의 방으로 걸어가던 중 간제와 마주쳤다. 그녀는 라헤안시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묻고 싶은 부분이 어떤 건지 안다는 듯이.

“움직일 생각을 안 하시네요. 하카브가 일라베니아를 자빠뜨리기 일보 직전이라 말했는데도요.”

라헤안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씨익 웃었다.

“우리의 신뢰는 깨지지 않겠지요. 전하? 나름 목숨으로 맺어진 인연인데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제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는 있답니다. 생각보다도


노친네가 완고해서 그렇지.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었는데도 여전하네요.”

“이해는 합니다.”

어느 나라건 그런 경향이 있으나, 발타는 자식을 소유물처럼 여기는 경향이 조금 더 강했다. 간제가 위험을
감수해 빛나는 공을 세웠다지만, 부모인 힉살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라고 인식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무언가를 바란다면 그때부터 의심을 받을 게 빤했다.

242 화.

이런저런 사정이 엮여 있는 간제로서는 힉살라를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라헤안시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군요.”

“면목 없습니다.”

“책망하려 한 말이 아닙니다, 그저.”

라헤안시는 걸음을 옮기며 말을 끝맺었다.

“오늘로 끝내야만 하겠습니다.”

힉살라는 앉아서 식사 중이었다. 놀랍게도 고기를 먹고 있었다.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 미친 마인들
같으니. 라헤안시는 질색하는 얼굴로 힉살라를 잠깐 바라보았다가, 그의 시선이 닿자마자 생긋 웃었다.

“오, 대신관. 왔는가.”

“몸은 좀 어떠십니까.”

“덕분에 두통도 많이 가라앉았다네. 힘도 점점 돌아와서 이제는 걸어 다녀도 될 정도야.”

힉살라가 껄껄 웃었다.

“체력이 정말 대단하시군요. 그러면 오늘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라헤안시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힉살라의 심장 부근에 성력을 흘려보냈다.

“손 떨림도 많이 가셨군요. 추이를 조금 더 지켜봐야겠습니다만, 약을 꼬박꼬박 복용하면서 치료를 받으면 금방


쾌차하시겠습니다.”

힉살라는 시체 같은 몰골을 벗어던졌다. 흰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이 자랐으며, 늘어졌던 얼굴 피부도


다시 젊어지기 시작했다. 술에 의존하는 사람들처럼 손을 떨던 것도 자세히 봐야만 눈치챌 정도였다. 라헤안시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생긋 웃었다.

“이제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세우셔도 되겠습니다.”

힉살라는 호탕하게 웃으며 라헤안시의 눈을 마주 응시했다.

“이 늙은 몸에게 무슨 힘이 있겠나.”

간제는 한쪽 벽면에 서서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여태껏 그녀가 꺼내지 못했던 본론이, 갑작스럽게
시작되고 있었다.

“과는 어디 있습니까?”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간제는 살짝 당황했다. 저렇게 대뜸 과가 어디 있냐고 묻기부터 할 줄이야. 흘끗 힉살라를


바라보니, 잔뜩 얼굴이 굳은 채였다.

“나를 치료해 준 은인이라고는 하나, 외부인이 감히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말이다. 이번만은 넘어가겠다.


그러니,”

“제가 만약 힉살라였다면 말입니다.”


라헤안시는 힉살라의 말을 뚝 잘라먹고 제 말을 시작했다. 힉살라의 얼굴도 구깃, 브네학스 아문의 얼굴도
구깃구깃해졌다.

“이 상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군요.”

라헤안시가 타타라였을 때에 보이던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힉살라의 얼굴에는 어느덧 호랑이 같은 맹수의
기질이 떠올라 있었다.

“아들에게 배신당해 수년의 세월을 잠들었고, 그사이 재상과 발타의 다섯 가문 중 네 개의 가문이 넘어가고,
궁인들 또한 하카브의 손아귀에 있다고 하고. 여기서 과연, 아문의 가주와 하카브 왕자 전하의 동복동생인 간제
왕녀 전하의 충성심은…… 순수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라헤안시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졌다.

“이것 또한 내가 숨겨 둔 과를 찾기 위한 아들놈의 농간은 아닐까?”

“아주 재밌는 말을 하는군, 대신관.”

힉살라는 얼굴을 흉흉하게 일그러트린 채 웃고 있었다. 라헤안시가 손바닥을 마주쳐 짝 소리를 냈다.

“이것이 힉살라의 발에 채워진 하나의 족쇄입니다. 그리고 상황을 끌면 끌수록, 나라의 위기에 적진
한가운데까지 들어올 정도로 애국심이 대단한 저 ‘대신관’이 그 위급함에 합당한 가격을 제시하리라. 이게
힉살라의 다른 발에 채워진 나머지 족쇄 하나입니다. 두 개의 족쇄 때문에 한 걸음도 앞으로 걷지 못하시는군요,
제가 깨워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럴 거면 오지 말 걸 그랬나 봅니다.”

방 안은 싸늘하다 못해 시린 정적이 내려앉았다. 침 한 번 삼키기 힘든 분위기 속, 매서운 눈으로 라헤안시를


노려보던 힉살라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리비타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배짱이 대단하군.”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할 뿐이죠.”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쓸데없이 웃음을 흘렸다.

“멀리서 온 손님이 급한 모양이니, 슬슬 탁 터놓고 얘기를 해 볼까. 우선 한 가지 말하자면, 대신관이 말한 그


첫 번째 족쇄는 오늘로 풀렸소. 며칠간 지켜보고 일도 시켜 봤는데 너무 순수한 충성심뿐이라 내가 다 미안할
정도였지. 알고는 있었지만 아문가의 아이들은 대대로 참 거짓말을 못 하는군.”

구석에 서 있는 브네학스 아문은 기뻐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하나가 남은 셈이지. ‘적진 한가운데까지 들어올 정도로 애국심이 대단한 저 대신관이 그 위급함에
합당한 가격을 제시하리라.’라고 말했던가? 그래, 대신관은 내게 감히 실례를 저지를 만큼 퍽 다급해 보이긴
하는군.”

힉살라가 제 무릎을 탁 치고 라헤안시와 눈을 맞췄다.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씩 올라갔다.

“그에 합당한 가격은 얼마인가?”

“얼마를 바라십니까?”
힉살라는 흐음, 하며 말을 끌더니, 둥그런 모양의 전통 과자를 하나를 집었다. 그러고 반을 뚝 잘라
라헤안시에게 내밀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깔끔한 걸 좋아했었지. 딱 이만큼만 받겠다.”

이 아저씨가 미쳤나…… 라헤안시는 속마음을 숨긴 채, 그가 내민 과자의 반대편을 잡고, 뚝 끊었다. 순식간에


1/4 쪽이 되었다. 힉살라의 풍성한 수염이 꿈틀 움직였다.

“일라베니아가 함락될 시, 발타가 얻을 수 있는 가치는 일라베니아의 전체가 아닙니다. 그 점을 확실히


하셔야겠습니다. 연합군에 포함된 다섯 개의 왕국, 크고 작은 소부족까지. 그 수만큼 조각나 분배되겠죠. 물론
공로가 큰 발타가 가장 많이 얻을 테지만, 그게 일라베니아의 반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선 이렇게 하고.”

하고? 힉살라의 의문스러운 눈빛 아래, 라헤안시가 과자를 다시 얌 베어 물었다. 순식간에 1/8 개가 되었다.

“이만큼이 적당하겠군요.”

이번에는 힉살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베어 문 건, 힉살라의 목숨 값입니다. 설마 힉살라의 목숨에 그 정도 가치도 없으려구요.”

그 정도가 안 된다고 하면 제 가치를 깎아 먹게 생긴 셈이었다. 힉살라가 무어라 불만을 터트릴 기색을 보이자
라헤안시가 과자를 앞니로 살짝 갉아 먹었다. 이 미친놈이? 힉살라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욕심이 과하십니다.”

“욕심이 과하다……? 가만히 있으면 대신관이 말한 대로 제국의 커다란 부분이 발타의 것이 될 터인데?”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더욱 커지고 부강, 부유해진 발타에.”

라헤안시가 힉살라를 바라보며 히쭉 웃었다.

“힉살라께서 계시겠습니까?”

챙,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라헤안시는 제 목에 와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끼며 흐흐 웃었다.

“어찌 예상을 벗어나지 않아. 은근 쉬운 사람인 거 알까 모르겠네.”

라헤안시는 자신을 싸늘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브네학스 아문을 보고도 웃기만 했다. 힉살라는 브네학스를
만류하지 않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만약 이 싸움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면,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실 텐데요. 하카브 전하에게
이번 전쟁의 승리는 단순히 ‘얻어 들이는 재화가 많아진다.’에 그치지 않습니다.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으로서
동맹국의 신임을 받고 세력을 더욱 불리게 될 겁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힉살라는 병을 오래 앓아 이지가
흐려져 있다 알려질 것이며, 그렇다면 가짜 과가 진짜 과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라헤안시는 태연한 얼굴로 목에 난 생채기를 치료했다. 힉살라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굳어 있었다.

“하카브 전하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는 현시점에서 많아 보이지 않는군요. 그가 일개 왕자의 신분일 때라든가,
혹은 왕자 전하가 전쟁에 정신이 팔려 힉살라의 움직임을 읽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을 때라든가. 세상에, 그러면
……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라헤안시가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는 듯 시늉했다.

“저만큼이나 힉살라께서도 꽤나 급해 보이십니다.”

그 말대로였다. 간제에게 모든 상황을 전해 들은 힉살라는 라헤안시와 같은 생각을 했다. 지금이 하카브를


끌어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만약 연합군이 승리하게 될 경우, 발타에 이득이 돌아올지언정, 세력을 불린
하카브로 인해 자신은 끌어내려지게 될 것이다.

많은 권력자들이 그러하듯, 힉살라 또한 나라의 부강보다 자신의 안위가 먼저 앞서는 자였다. 그러니 반드시
전쟁이 끝나기 전에, 힉살라의 명령으로 군대를 돌려 하카브를 패배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일라베니아의 패배와 연합군의 승리로 얻게 될 이득 또한 아까웠다. 발타의 오랜 적인 일라베니아의


패배가 어찌 달콤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방법은 없는가?

자신도 조급한 상황이지만, 나라를 잃게 생긴 대신관만큼은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힉살라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기다렸다. 라헤안시가 서서히 고조되는 감정에 휘둘리게끔. 지금 보니 휘둘리기는커녕, 의도를 빤히 다
읽고 있어 소용없는 짓이 되어 버린 것 같긴 했지만.

황실의 핏줄이라는 대신관은 생각보다도 머리 회전이 빠른 듯싶었다. 힉살라는 이 거래를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이득이 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갖은 경우의 수가 그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힉살라가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라헤안시는 잠깐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무얼 쳐다보는지 한참을 그렇게
있던 그가 다시 힉살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힉살라시여.”

“말하라.”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

“죽은 땅이 살아나는 기적이 펼쳐질 것입니다. 사상과 이념, 종교. 각자의 이유로 다투던 모든 이들이 검을 놓고
환희에 가득 차 노래를 부를 겁니다.”

힉살라는 그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이 무얼 뜻하는지 깨달았다.

243 화.

“축복의 밤은 하얀 밤뿐 아닌 검은 달이 함께합니다. 성력뿐 아닌 마력도 필요합니다. 인간이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신의 깊은 뜻을 알리기 위한 화합의 장일지도 모릅니다. 세계는 오랫동안 멈춘 채, 그 사실을 망각하여
고통받았습니다. 검과 검이 맞부딪쳐 결코 얻을 수 없는 것도 있음을 쇠퇴하고 있는 지금의 일라베니아가
증명합니다.”

라헤안시에게서는 일견 장난스러워 보이고, 상대를 흔들려던 정치꾼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진중한
눈빛과 태도, 차분히 이어 가는 담담한 말투는 성서를 읽는 듯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한번 말을 끊은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역사에 새겨질 새로운 세상의 첫발이 코앞에 있습니다. 부디 손을 맞잡고, 멈춰 있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새 시대를 함께 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힉살라는 잠시 숨을 멈춘 채 눈만 깜빡이며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말하는 걸 보니 정말 대신관이 맞기는 한가


보군. 며칠간 보아 온 가벼운 언동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흠…….’

힉살라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만 보았다. 한참 후 힉살라가 씩 웃었다.

“집단의 우두머리를 움직일 수 있는 게 무엇인 줄 아는가, 대신관?”

뜬금없는 질문에 라헤안시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집단의 우두머리를 움직일 수 있는 것?

“돈?”

역시 좀, 지나치게 솔직한 인간이긴 한 것 같았다. 힉살라는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조금 더 둘러서, 이득이라고 말하겠네. 마을의 장만 해도 어떤 것이 마을에 도움이 될까, 어떤 게 이득일까


생각하는데 말이야, 그게 일국의 왕이라 하면 어떻겠나.”

“더…… 많은 돈?”

“……그래, 뭐…… 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아무튼, 아까 전까지 그 작은 과자 조각 정도의 이득으로는 움직일


마음이 안 들었네만.”

라헤안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전의 대신관이 한 말이 추를 기울이게 했네.”

힉살라가 씩 웃으며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세상이라.”

껄껄 웃던 힉살라가 라헤안시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좋다고 하는 행동이었지만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라헤안시는


눈물을 글썽이며 어깨를 잡았다.

“우두머리들이 돈 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뭐냐면 완장일세. 직위, 완장. 이런 거에 환장을 해. 돈과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는데 크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지. 대륙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고통을 끝낸 선구자. 이는 돈으로도
주고 살 수 없는 값진 이름이 될 터.”

“아, 그러면…….”

돈은 안 받는 거로? 라는 말을 하기 전에 힉살라가 정색했다.

“그래도 받을 건 받아야지.”

“아, 예…….”

힉살라가 손을 내밀었다. 라헤안시는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손을 맞잡고 함께 새 시대를 열어 보자 하지 않았나.”

라헤안시는 흐흐 웃으며 일어나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서 과는 어디 있습니까?”

“…….”

이놈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힉살라의 눈에 불신이 스며들었다.

“새 시대가 찾아오지도 못하고 수렁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란 말입니다!”

“뭐…… 알겠네.”

얼른 얼른! 재촉하는 라헤안시를 힉살라가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라헤안시는 막연하게 과라는 것이 어느 깊숙한
금고나, 그가 믿는 가신 중 한 명이 맡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무려 그 하카브가 수년을 찾아 헤매고, 수백의
인간을 고문하고 죽였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한 귀물이었다.

그게 있어야만 일이 진행될 수 있어서 빨리 내놓으라는 것도 있었지만, 단순히 그게 어디에 있기에 하카브의 눈을


피해 간 걸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다.

힉살라는 그런 호기심 충만한 라헤안시의 눈을 들여다보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보니 애가 따로 없었다.

“여기 있네.”

그러고 힉살라가 툭 친 것은 제 다리였다. 라헤안시가 고개를 기울였다. 간제와 브네학스도 응? 하고


의문스러워했다. 다시 한번 힉살라가 다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에.”

힉살라의 다리. 허벅지 안쪽에 있다는 말이었다. 세 명이 숨을 크게 들이켜며 기겁하는 때에, 힉살라가 잠깐
멈칫하더니 중얼거렸다.

“……오른쪽인가?”

“…….”

수년간 잠들어 있던 탓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제 다리를 주물럭거리더니 역시 왼쪽이로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간제는 기가 막혀서 웃었다. 그러니 하카브가 그 고생을 해도 못 찾을 수밖에.

“시간을 끈 것은 대신관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려던 것도 있었지만.”

역시나 그랬군. 라헤안시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칼을 대어도 괜찮을 만큼 몸을 회복하려고 기다리는 것도 있었지.”

힉살라가 침상 위에 허리를 곧게 펴고 똑바로 앉았다.

“이제 준비가 끝났군.”


25

이틀 동안 비가 세차게 퍼부었다. 굵은 빗줄기는 시야를 흐릿하게 하고 체온을 빼앗아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수십 일간 중부 관문 일대를 울리던 금속음이 일시적으로 멎었다. 일라베니아 제국군은 이 틈을 타서
관문을 보수하고 무기를 점검, 비로 망가질 무기 위에 가죽을 덮어 보호하는 둥 쉴 새 없이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날이 밝았다. 새벽까지도 흐릿하던 하늘은 아침이 될 무렵 맑게 개어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을 쏟아 냈다.


리카르디스는 이른 아침에 중부 관문의 방벽 위로 올라섰다. 연합군 진영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가 싸늘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주 작정했나 보군.”

중부 관문을 포위하듯 둘러싼 연합군의 수가 전쟁이 중단된 이틀 사이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일반적으로 중부 관문은 일라베니아의 수도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세렘 관문만을 뜻했다. 국경
지대 못지않게 훈련된 병사들이 상주하며, 삼엄하고 까다로운 검문으로 일라베니아를 위협하는 요소를 걸러 내는
곳이었다.

하지만 전쟁 시에는 세렘 관문에서 떨어진, 구석진 곳에 있는 바르제 방벽까지 통틀어서 중부 관문이라 말하곤
했다. 보통 때에는 커다란 벽에 불과하지만, 파괴한다면 어쨌거나 지나갈 수 있는 문이 생기는 것이었으니.

제국군은 두 개의 ‘문’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였다. 이따금 투입되는 마인과 ‘파편’, 수적
우위로 찍어 누르려는 연합군의 매서운 공세에도 세렘 관문은 힘겹게나마 버텨 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일주일 전, 바르제 방벽이 무너졌다. 지휘관이 재빠르게 대응한 덕에 적을 방벽 뒤로 허용하지는 않았으나,
보수할 틈도 없이 적군이 매일매일 밀려들며, 위기가 지속되었다. 막아 내기 위해서는 병사들이 무너진 벽
바깥으로 나와 기존 바르제 방벽의 역할을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연합군이 가진 수와 힘의 이점을 눌러 주는 수단인 방벽이 사라지니 급격하게 전황이 기울었다. 최근 제국군 측


사상자의 8 할이 바르제 방벽에서 발생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국군이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이 시점에서, 사자갈기군과 라고슈가 바르제 쪽의 전장에 합류하기로 결정되었다.

무너진 바르제 방벽 앞의 제국군 진영.

아침 해가 완전히 뜨기도 전, 연합군과 제국군은 너른 전장을 두고 대치하는 중이었다. 방벽이 무너진 이후


계속된 사투에 지친 제국군 병사들은 줄지 않는 적군의 수를 보며 질린 표정을 하거나, 겁을 먹은 듯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병사들을 이끄는 지휘관들조차 마찬가지였다.

그런 중이라 선두에서 말을 탄 채 팔짱을 끼고 육포를 씹는 이의 무심한 태도가 더욱 눈에 띄었다. 사자갈기군의


‘로즈 경’으로 위장한 로젤린이었다. 그녀는 소속인 사자갈기 기사단과 함께 움직이지 않고, ‘장미’라는
이름의 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전장에 나와 있었다.

“대장.”

고개를 돌리자 말 위에 앉아 한쪽 발을 안장에 얹은 불량한 자세의 쥬쥬와 눈이 마주쳤다. 로젤린이 품에서


육포를 꺼내 그에게 건네었다.

“뭐, 그걸 달라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마카롱이 입으로 육포를 가로채고는 질겅질겅 씹었다.

로젤린의 옆에 강한 여자 마인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이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널리 퍼져 있는 시점이었다.


‘로즈 경’ 옆에 미미가 있다면 정체를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탄로 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고려한
마카롱이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미미가 안 되면, 쥬쥬로 옆에 있으면 되지!

그렇게 미레이미가 사라졌다. 죽음을 넘어, 동고동락해 온 미미가 사라지자 하얀밤 기사단의 거의 모든 인원이
그녀를 찾아 댔다.

아,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마카롱은 귀찮아 죽을 뻔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대충 변명했다. 미미의


엄마가 미미를 애타게 찾으셔서 가 봤다는, 전장에서 이탈하는 이유치고는 참신하기도, 어이없기도 한 내용이었다.

[엄마가…… 있었어?]

[……엄마도 없을 것 같았나 봐? 뭐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으려고.]

쥬쥬는 기가 막혀서 농담같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실상 정답에 가까웠다. 자유분방하고 강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인, 미레이미는 가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인상을 주고는 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은근 실례했다는
걸 깨닫고 그 자리에 없는 미미에게 미안해했다. 그리고 곧바로 쥬쥬를 바라보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

어디서 한번 본 것 같기는 한데? 라는 말에 쥬쥬는 “걔 오라비요” 하고 대답해서 다시 한번 많은 사람들을


기함하게 만들었다. 껄렁껄렁, 불량하고 위아래를 모르는 쥬쥬의 모습은 하얀밤 기사단에게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두 사람, 남매 맞구나.

그런 이상한 연결 고리로 혈연을 입증한 쥬쥬는 부관으로서 로젤린의 옆에 서게 되었다. 대체로 부관이 맡는 일은
하지 않고, 찾을 때마다 없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부관이긴 했다.

244 화.

오늘도 내내 보이지 않던 쥬쥬는, 지금 막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육포부터 뜯고 있었다. 그가 귀에 손을 가져다


대며 무심히 말했다.

“어디서 소리 들리지 않냐.”

“무슨 소리?”

“장미대의 겁쟁이들이 다리를 달달 떠는 소리.”

로젤린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쥬쥬의 말대로 장미대의 병사들이 겁먹은 강아지처럼 눈동자를 굴리며 떨고
있었다. 추위가 아닌, 순수한 공포심 때문이었다.

“대장으로서 안심시켜 줘야 하지 않겠어?”

로젤린이 픽 웃었다.

“날 못 미더워 해서,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할걸.”


병사들은 자신이 어떤 군에 소속되는지에 굉장히 민감했다. 어떤 지휘관을 만나느냐에 따라 승리와 패배가, 더
나아가 죽고 사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무명의 기사가 오천의 대를 이끄는 지휘관을 맡게 되었다. 무척이나 뛰어난 무장이자
지휘관이다. 라는 짧은 설명을 듣긴 했지만, 단순히 들은 말로 한 사람을 파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귀족
나으리라 그냥 한자리 꿰찼겠거니 하는 시선들이 만연했다.

“사람들은 보지 못하면 믿지도 못해.”

전방의 연합군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뜬 로젤린의 속눈썹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살에 반짝거렸다.

“그러니 보여 줘야지.”

미소 지은 로젤린이 투구를 꾹 눌러썼다. 마카롱이 한 손으로 그녀의 삐뚤어진 투구를 똑바로 고쳐 주었다.

제국군. 좌익 만 오천, 중앙 이만 오천, 우익 이만.

연합군. 좌익 삼만 오천, 중앙 사만, 우익 삼만.

장미대가 포함된 제국군의 좌익은 연합군의 우익과 마주 보고 있었다. 만 오천 대 삼만.

전장에서의 수 차이가 얼마나 유의미한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기 이전에,
덩치를 불린 적의 모습에서 위압감을 느끼는 것이 먼저였다. 제국군 병사들의 눈동자 속에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게 고요함 속에서 대치하기를 얼마, 연합군 진영에서 한 장수가 말을 탄 채 걸어 나왔다.

“저 개 같은 놈.”

찰진 욕설이 정적을 뚫고 로젤린의 귀에 박혔다. 장미대의 천인 대장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발타나 마람 쪽의 장수들은 대다수가 마인이잖습니까. 일대일로 붙으면 반드시 이길 거라는 걸 아니까, 매일


아침마다 저렇게 승부를 걸어옵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면 겁쟁이라는 둥, 사내가 맞냐는 둥
도발을 해 대서 그것 때문에 전 대장도…….”

과연, 그만한 수의 병력을 이끄는 장이 왜 없나 했더니. 로젤린이 코로 흠 숨을 쉬었다.

“안 나가면 안 되나?”

아르고의 얼굴에 불신이 어렸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사람이 우리 대의 대장이어도 괜찮은 건가?
하고 미심쩍어하는 모양새였다.

“조롱을 듣고 감내하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거기에다가 만약 해치울 수만 있다면 적의 지휘관을 대군을
뚫지 않고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거니까요.”

로젤린을 다시 고개를 돌려 전장을 바라보았다. 제국군과 연합군이 대치 중인 한 가운데. 연합군의 장수 한 명이


창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발타의 장군 자릿이 제국의 장수에게 일대일 대결을 신청하오!”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국군 병사들이 술렁이며 동요했다. 일주일째 계속된 일대일 대결로 목숨을
잃은 제국군 측의 기사만 해도 벌써 다섯이었다.

장군 자릿이 다시 소리쳤다.

“이 자릿과 대결할 만한 인물이 일라베니아에는 없는가 보오?”

껄껄껄 호탕한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장미대의 병사들이 욕설을 얹었다. 아, 재수 없어. 속 깊이 우러나온
누군가의 진심에 로젤린이 피식 웃었다. 로젤린은 등자에 발을 걸친 채, 말의 옆구리를 살짝 두드렸다. 군마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 어?”

“대장?”

대장이 왜 나가? 장미대의 병사들이 기겁했다. 대장을 잃은 지 얼마 되었다고, 또!

5 일 동안 지휘관 다섯을 잃고 난 후, 제국군 측도 연합군의 도발에 더 이상 넘어가지 말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그녀가? 장미대가 어수선해졌다. 부관인 쥬쥬만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전장의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자릿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곧 중앙에 도달한 그녀가 말을 멈춰


세웠다. 전장에 모인 수만의 이목이 단 두 명에게 집중되었다.

“일라베니아 제국, 장미대의 대장 로즈가 자릿 장군의 승부를 받아들이겠다.”

자릿이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력을 등한시하는 일라베니아의 특성상 고위 관직을 마인이 맡고
있을 리 없으니, 그냥 평범한 인간일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여자라니. 이전에 죽였던 지휘관들이
한주먹거리라면, 그녀는 반주먹거리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릿은 다른 나라에 있는 ‘기사도’ 어쩌고를 떠올리며 한번 선심을 썼다.

“돌아갈 기회를 한번 드리겠소.”

그녀는 재깍 돌아서 가려고 하지도 않았고, 아주 조금 분해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대답 없이


석상처럼 가만히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서로 응시하기를 한참, 그녀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박장대소가
아니라 가볍게 코웃음을 친 것이었다.

“나도 장군에게 돌아갈 기회를 한번 주도록 하지.”

아까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왔다. 자릿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은혜가 원수로 돌아왔군. 부디 후회하지 마시게.”

“쓸데없이 말이 많군.”

추위에 붉게 튼 자릿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두 사람은 말 위에서 무기를 꽉 그러쥔 채 마주 보았다. 로젤린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자릿을 주시했다.


남자의 호흡이 거칠었다. 쉭쉭 숨을 쉬느라 코가 벌렁거렸다. 무기를 쥔 손등 위로 핏줄이 돋았다.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을 목격한 로젤린은 자릿이 움직이는 때를 포착했다.

자릿이 달리는 것과 동시에 로젤린도 움직였다. 백 보, 팔십 보, 오십 보.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남자가 비쳤다. 그가 창을 들어 올렸다. 로젤린은 가상의 선을 그어 창의
궤도를 추측했다.

‘오른쪽 어깨를 꿰뚫겠다?’

로젤린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까 전의 도발 때문에 한 번에 죽이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런 자릿과 달리


로젤린은 그를 깔끔하게 처리할 생각이었다. 잔뜩 주눅이 든 제국군의 사기를 끌어 올릴 만큼,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했다. 도발을 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흥분한 적을 상대하는 것만큼 손쉬운 일은 없으니까.

로젤린은 창을 들어 올렸다.

삼십 보, 열다섯 보, 일곱, 셋, 하나.

쾅!

일대에 굉음이 퍼져 나갔다. 두 장수는 한 번의 충돌 이후로 엇갈린 채,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각자 반대편
진영으로 나아갔다. 양 측의 병사들이 침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거리가 멀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직까지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로젤린은 천천히 방향을 틀어 뒤에 있는 자릿을 보았다. 터벅, 터벅. 군마가 걸어가는 그 작은 흔들림에 자릿이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패배한 남자의 추락에 흙먼지가 부옇게 일어났다.

“우아아악!”

“미쳤나 봐!”

“멋있어!”

제국군 측에서 비명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연합군은 숨죽인 채 동요했다. 어깨를 노리는 창을 비스듬히 흘린
후, 투구 아래의 목을 찌른 것. 딱 한 합만에 결판이 났다. 일대일 대결을 하더라도 이렇게 빨리 승부가 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작게는 몇 분에서 많게는 한 시간 가까이까지 길어지는 경우도 허다한데, 단 한순간에
승패가 갈린 것이다.

로젤린은 방금 전까지 결투를 한 사람답지 않게 덤덤한 모습으로 제국군 진영에 복귀했다. 장미대 병사들이
감격에 겨워하며 덜덜 떨고 있었다.

“대장!”

“대장! 완전 멋있습니다!”

꺄악 꺄악 소리치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귀여워 로젤린이 슬쩍 웃었다. 연합군 측은 자릿의 시신을 수습하고
동요하고 있는 병사들을 다독였다.

유능하고 강한 장수 한 명이 죽었지만, 수의 차이가 좁혀진 것은 아니었다. 로젤린은 잠시 들떴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 * *
해가 저물었다. 사상자만 수천에 달하는 오늘의 혈전도 마무리되었다.

무시무시한 양의 마력을 운용하는 로젤린, 쥬쥬와 일라베니아인보다 두 배가량 체구가 큰 라고슈 지원군의 힘이
합해진 돌파력은 연합군이라 해도 막아 내기 힘들었다.

제 1 선, 2 선, 예비 보병대까지 돌파한 장미대는 연합군의 본진을 향해 그대로 달려갔다. 그 중앙에 있던


연합군의 지휘관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허둥지둥하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단신으로 뚫고 들어온 장미대
대장에 의해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황망히 있는 병사들을 두고 탈출한 로젤린과 장미대는 빙 둘러 아직 교전 중인 연합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정면의 제국군과 치열하게 전투 중이던 연합군의 병사들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지휘관이 막 살해당한
탓이었다.

장미대는 이후로도 연합군 장수의 목 두엇을 따고, 밀리는 제국군을 지원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혼란한 전장
속에서 어디가 중심인지, 어디가 위기에 처했는지 판별하는 눈은 연합군의 지휘관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개인으로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전쟁은 집단과 집단의 싸움이었다. 장미대가 부단히 노력하긴 했으나,
사상자는 비슷하게 발생했다. 같은 수라면 제국군의 피해가 훨씬 큰 셈이었다.

로젤린은 전장에 널브러진, 아직 수습조차 하지 못한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사이사이에 얼굴이 낯익은 시신 몇


구가 있었다. 장미대의 병사였다.

로젤린은 하아 숨을 내쉬었다. 어두운 공간에 그녀의 숨이 하얗게 번져 나갔다. 그녀는 잠시간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둔영지로 돌아갔다. 피에 젖은 땅도 잠드는 시간이 찾아왔다.

245 화.

중부 세렘 관문. 제국군 진영.

푸른등불 공작을 포함한 제국군의 상급 지휘관들은 인상을 찌푸린 채 테이블 위의 서류를 훑었다. 한참 동안
계속된 침묵을 뚫고 푸른등불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음, 생각보다 피해가 크지 않았지만, 그건 연합군이 소극적으로 나온 탓도 있는 것 같군.”

비 때문에 이틀간 전쟁이 중단되었다. 그사이 양측은 내부를 점검하고 여태껏 치러 왔던 전쟁을 분석, 새롭게
전략을 수립했다. 서로 상대편이 어떤 대비책을 준비했는지 모르니만큼, 경계하며 움직임을 살핀 것이었다.

“내일부터는 사상자가 더 많이 발생할 것이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지휘관들이 더욱 힘을


써야겠네.”

지휘관들이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가 나쁘지 않게 마무리되었지만, 중부 관문이 곧 무너질 거라며 자포자기한 이들도 많더군. 그건
병사만을 이르는 얘기는 아닐세. 이런 말을 하긴 싫었지만, 지휘관들은 아래 사람들을 잘 단속하시게.”

혹여 연합군 측과 결탁하는 인사가 없는지 감시하라는 뜻이었다.

“사령관님!”
병사 한 명이 헐레벌떡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빛모래 남작이 매수되어 연합군을 들이려 했다…… 는데요?”

어미가 이상했다. 했습니다! 도 아니고, 들였습니다! 도 아니고, 들이려 했다는데요?

“뭐? 빛…… 뭔 남작?”

테이블을 쾅 치고 일어난 푸른등불 공작은 버럭 성질부터 낸 후, 빛모래 남작이 어디 소속인지 기억을 뒤졌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신관이 작게 속삭였다.

“쌍둥이 망루의 책임자로군.”

푸른둥불 공작은 신관으로 위장하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휙 하고 바라보았다가 다시 경계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어찌 되었나!”

“다, 다행히 잡았…… 긴 합니다만…… 그게, 잡은 사람이…….”

병사가 눈치를 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모두의 시선이 눈동자의 방향을 따라갔다. 팔짱을 낀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그 자리에 있었다. 갑자기 주목된 시선에도 태연한 태도였다.

“내 부하들인가?”

병사가 대답 대신 막사 입구의 천을 흘끗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들이 밖에 있는 모양이었다.

“당사자의 얘기를 들어 보지.”

푸른등불 공작이 상황을 대충 정리했다.

곧 여자 용병과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청년이 막사에 발을 들였다. 칼릭스는 제 휘하의 사람들이 일에 엮였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마음속에 작성해 두었던 목록을 떠올려 보았다. 일을 칠 만한 인간들의 이름을 적어 둔
것이었는데, 그 목록에서도 최상단에 이름을 올린 자들이었다.

원숭이 대의 대장과 사고뭉치 에렌이 칼릭스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

이 껄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용케도 저런다 싶었다. 칼릭스는 목소리에 조금 짜증을 담아 병사에게 얘기했다.

“내 부하들을 포박해 놓은 이유를 들어야만 하겠는데?”

살벌해지기 시작한 칼릭스의 표정을 본 병사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저희가 소란을 듣고 갔을 때는 이미 빛모래 남작과 연합군 병사들이 죽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이쪽의 두 명뿐이었고요. 소속을 확인해 보니 붉은수레바퀴라 하여…….”

“그런데.”

“그런데…… 붉은수레바퀴 측의 병력이 그 시간에 망루에 있는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어서 말입니다. 본인들도
입을 열지 않아……”.

칼릭스는 그제야 자초지종을 알아챘다. 목격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연합군 병사들을 들이고 애꿎은
남작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인지, 아니면 정말 순수한 협조자인지 알 길이 없다는 얘기였다.

만약 이것이 이들이 처음 저지른 사고였다면 칼릭스도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크고


작게 사고 치는 인간들 사이에서 단련된 칼릭스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이것들이 또 명령을 개무시하고
여기저기 몰래 듣고 다녔구나 싶어서 약간 열 받을 뿐이었다.

“내가 순찰을 명했다.”

“백작, 그대가?”

놀란 듯 되묻는 푸른등불 후작의 말에 칼릭스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최근 빛모래 남작을 한번 본 적 있습니다.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의 불안이 단순히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과는 다른 듯하여 주시하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아군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만연하여 좋을 것이 없으니, 직접적인 조사 이전에 몰래 붙여 놨던 참입니다. 비밀스러운 임무라 제 수하들이
말을 아낀 모양입니다. 어쨌거나 제 독단으로 벌인 일이니, 이에 대한 책임은 제가 물겠습니다.”

푸른등불 후작은 잠시 굳어 있다가 칼릭스를 꼭 껴안았다. 하급 지휘관들을 단속하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터진


일이었다. 만약 칼릭스가 아니었다면 일이 나도 아주 크게 났을 것이다.

“대체, 백작은 어디 있다가 지금에서야 내 앞에 나타난 건가?”

“……글쎄요.”

칼릭스는 알 만하다는 듯 웃고 있는 리카르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이 연극의 전말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사고뭉치 하면 빠지지 않는 인물의 곁에서 오래 고통받은 탓인지 눈치가 아주 비상했다.

원숭이와 에렌도 칼릭스가 대뜸 내뱉는 말에도 당황해하지 않고, 연극의 신빙성을 높이는 순진무구하고
청렴결백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것들.’

칼릭스만 속으로 차오르는 열을 식히느라 바빴다.

사건의 개요를 간략하게 전해 들은 푸른등불 후작이 수색을 명령했다. 병사들은 빛모래 남작의 막사를 갈아엎듯이
뒤졌고, 곧 간이침대의 밑, 땅 아래에 묻힌 금화 주머니를 찾아내었다. 연합군 측이 다른 망루의 책임자들에게도
접선해 오지는 않았는지 확인이 필요한 때였다.

지휘관들이 바삐 막사를 나섰다. 칼릭스도 원숭이, 에렌과 함께 붉은수레바퀴 진영으로 복귀했다.

“길레드!”

분노에 찬 칼릭스의 목소리를 들은 길레드가 자다 말고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길레드는 칼릭스의 양손에 뒷덜미가
잡혀 있는 원숭이와 에렌을 발견하고 절망했다.

“그래도 나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나 보고 말해!”

칼릭스는 제 막사에 두 사람을 던지듯 집어넣고 의자에 앉았다. 원숭이와 에렌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헤헤 웃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제국군에 도움을 줬으니 이건 괜찮겠지 하는 계산이 깔려 있는 웃음이었다. 칼릭스는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대체 거기에, 왜 있었나.”

“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에렌이 해맑게 말을 이어 갔다. 칼릭스가 임기응변으로 남작의 수상함을 포착했다고 말한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어느 날 밤, 둔영지를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남작이 금속음이 나는 커다란 주머니를 옮기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후 빈틈을 타서 그의 막사 안에 침입한 두 사람은 땅에 묻어 둔 주머니를 발견, 속에 있는 것이 금화와
보석이라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오호라, 전쟁터 한복판에 이런 거금을 몰래 숨겨 두다니.]

[냄새가 나는데요, 누님.]

[그건 그렇고 숨기는 장소에 참신함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심하네요. 제 동생도 다섯 살 이후로는 침대 밑에 안 숨기던데.]

원숭이와 에렌은 몇 개를 슬쩍하고 난 뒤, 다시 주머니를 묻어 두고 남작의 뒤를 밟았다. 그렇게 쫓아다니던 중,


바로 오늘 일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주머니를 통째로 훔치진 않았군.”

놀랍게도. 라는 말은 뺐다.

“아이참, 우리도 양심이란 게 있어요, 백작님.”

에렌이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칼릭스는 양심은 그런데 쓰는 단어가 아니라 정정해 주고 싶은 마음에 잠깐
사로잡혔다. 끄덕거리며 에렌의 말에 동조하던 원숭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증거가 필요할 거 아녜요.”

그런 머리는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왜 죄다 죽여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자칫 잘못하면 너희들이 몰릴 뻔했어.”

“그게, 놈이 제법 신망이 있더라고요. 살아서 입 터는 쪽이 좀 더 위험할 것 같아서.”

남작이 살아 있을 경우, 자신들이 죄를 뒤집어쓸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는 얘기였다. 망루의 책임자가 버젓이
있는데, 뜬금없이 다른 진영에 있는 병사들을 걸고 넘어지는 게 얼마나 황당한 말이겠느냐마는, 애초 마인들은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죄야 벗겨질 것이다. 하지만 결백이 입증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는 불 보듯 빤했다.

칼릭스는 원숭이의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화가 식은 듯 보이자 한쪽 구석에 두 사람의 보호자로 서


있던 길레드도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칼릭스는 다리를 떨며 다른 곳을 응시한 채 말했다.

“우선, 이번 일은 위험을 감수하고 노력해 줘 고맙다. 덕분에 위기를 넘겼군. 하지만 네 입으로 말했다시피,
자칫 잘못하면 너희가 위험할 뻔했어. 차라리 내게 와서 말해. 알아서 처리할 테니.”

“바빠 보이셔서.”

“……말해.”

칼릭스가 이를 으득 갈았다. 원숭이와 에렌, 길레드까지 고개를 급하게 끄덕였다. 칼릭스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그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

“예엡!”

“네!”

“아이고, 그럼요.”

다들 참 해맑았다.

“왜 일라베니아를 위해 싸우기로 마음먹었나?”

사실 진작에 물었어야 할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칼릭스는 일개 평민으로는 가지기 힘든 액수의 돈과 전쟁 후


붉은수레바퀴령에서 마인임을 숨기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그들은 승낙했다.
마인들이 전장에 와 있는 것도 그 제안의 가치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계약 내에 있는 일뿐만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보 빼돌리기와
기밀 훔쳐 듣기, 수상한 인물과 배반자 제거하기 등, 하나같이 불법적인 느낌이 가득한 일들이었지만. 어쨌거나
노력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칼릭스는 그런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에 일라베니아에 희생당했다던 강한 마인 가문뿐 아니라, 그
힘이 엮인 모든 이들이 일라베니아의 이름 아래 억압받았다.

이딴 나라 망해 버리라지.

그런 마음을 먹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246 화.

세 사람은 칼릭스의 질문을 듣고 잠깐 입을 다문 채 고민했다. 눈치 보던 에렌이 가장 먼저 답했다.

“저는…… 아저씨들이랑 누나들이 한다고 그래서요.”

“……그래.”

자라나는 새 나라의 청년이 지나치게 순수해서, 전쟁이 끝나는 대로 교육시켜야 할 것 같았다. 단순명료한 에렌과
달리 원숭이와 길레드는 긴 시간을 고심했다. 그들의 복잡한 심상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길레드가
입을 열었다.

“음, 과거의 일과 지속되어 온 핍박으로 대다수의 마인들이 발타나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지요.”

“그렇지.”

“그러면 이곳에 남아 있는 이들은 왜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친지를 두고 떠날 수 없었나?”

“뭐, 사실 이유야 다양하겠죠. 마인이라고 서로의 마음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각자의 삶과 생각이 있으니까요.
더군다나 몇 세대 위의 일을 제가 어떻게 짐작하겠습니까? 떠나지 못했을 수도, 떠나지 않았을 수도. 하지만
이따금 현세대의 마인들과 얘기를 해 보면 항상 그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칼릭스는 길레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누가 도와줬다.”

잠시간 뜸을 들인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숨겨 줬다.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 줬다.”

“…….”

“살려 줬다.”

길레드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참 후에 그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마인을 증오하고 핍박했기에 이러한 기조가 형성된 것이긴 하죠. 하지만, 이따금
도움도 받았다는 겁니다. 저희를 밀어내는 손이 백 명의 것이라면, 그래도 한두 명 정도는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있었어요. 그게 별 게 아니라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저희들은 그 한두 명을 평생 잊지 못해요.”

길레드가 시선을 아래로 한 채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래서 저는 이따금, 못 견디게 일라베니아인이 증오스러울 때면 제 손을 잡아 준 사람을 떠올리곤 합니다.”

길레드가 칼릭스와 눈을 맞추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쩌면 우리가 일라베니아의 땅에 태어난 것도, 아주 오래전 마인 사냥을 당했던 이들을 숨겨 주고, 도와주고,
살려 준 일라베니아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요. 물론 속 편한 자기 위로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야, 허수아비. 참 속 편하게 살았구나.”

원숭이가 감동적인 분위기에 초를 쳤다. 바닥을 뒹굴거리던 그녀가 바로 앉아 옷을 툭툭 털면 말했다.

“저는 뭐, 허수아비같이 심각하게 인류애가 넘치는 부류가 아니긴 하지만 동감하는 부분도 있네요.”

“나두 나두.”
에렌이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내 손을 잡아 준 백 명 중 한 명. 저는 딱 그 사람만 챙겨요. 마인들은 은혜와 원수를 두 배로 갚는다는 말


아시죠.”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우리는 결코, 손을 잡아 준 사람을 배신하지 않아요.”

항상 으헤헤 소리를 내며 웃던 사람 같지 않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여기 있어요. 과거의 나를 도와준 일라베니아의 사람들과 일라베니아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백작님을
위해서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칼릭스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을 느꼈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았던가?”

“물론 처음부터는 안 잡고 있었죠. 사고 수습하시는 모습이 좀 짠했을 뿐이지.”

칼릭스는 약간 울컥했다. 원숭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아까 전에 우리가 남작 나부랭이 죽였다는 말 듣고 뭐라고 생각하셨어요?”

“또 시작이다?”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진짜 죄송한데, 그거 말고요.”

“손을 좀 과하게 썼지만, 잘했다?”

원숭이가 다시 바닥을 구르며 낄낄 웃었다.

“우리가 막사 안에 들어갔을 때 다른 지휘관들 표정이 어땠는지 모르죠? 다들 우리를 의심하고 있었다고요.”

“그건 몰랐군.”

“내 나이가 몇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연합군의 세작인지 아닌지 판별할 시간도 정보도 없으면서,
믿으셨잖아요. 말씀드렸죠. 저는, 우리는, 손을 잡아 준 사람을 결코 배신하지 않아요.”

원숭이가 씩 웃었다. 에렌과 길레드의 눈이 어둠에 가라앉은 채, 진지하게 칼릭스만을 응시했다. 그건 아주


기묘한 방식의 감정의 전달이었다.

* * *

전쟁이 재개된 후로부터 삼 일이 지났다. 매일매일 크고 작은 승리와 패배가 생겨났으나 그것이 중부 관문의
함락이나 연합군의 패퇴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인적, 물적 자원은 빠르게 소모시키며 서로의 몸집을
조금씩 깎아 내는 양상이었다.

연합군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반쯤 무너진 바르제 방벽을 둘러싼 공방전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제국군의 끈질긴 방어에는 라고슈 지원군의 합류가 큰 역할을 했다. 단순히 병력 4 만이 더해졌다는 것뿐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전사라는 점에서 그들의 전략적 가치는 본래의 수를 훨씬 웃돌았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르제 방벽의 새로운 지휘관이었다.

비가 오기 전과 비가 온 후, 제국군의 움직임이 완전히 달라졌다. 모자란 머릿수를 메우는 뛰어난 전술은 여태껏
까다롭다고 생각한 전 지휘관의 능력을 무색하게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연합군 사령관이 전략을 짜면, 마치 그걸 옆에서 본 듯이 대응했다. 일방적으로 패를 다 까 놓고 하는 카드 게임


같았다.

그 전략 아래 라고슈의 지원군이 기세와 힘으로 전장을 지배했고, 발타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강한 마인 두 명을


필두로 한 좌군의 장미대는 단순한 무력뿐 아니라 전략에 포함되었다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둥. 당최 예상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며 연합군의 골치를 아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장에서 장미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 무시무시한 돌파력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묘한 움직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라베니아 제국, 장미대의 대장 로즈가 발타의 장수에게 일대일 결투를 청한다.”

“…….”

매일 아침 벌어지는 결투에서 그녀의 이름이 울려 퍼지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전장의 중앙에 홀로 나온 로즈 경을 보며 연합군 측은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할 때는


좋았는데, 당해 보니 보통 성가신 게 아니었다.

마인들이 지닌 마력의 양은 사실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승패는 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마력을 운용하느냐,


얼만큼이나 단련하고 힘을 길렀느냐에 따라 갈라졌다. 하지만 상대는 보통 마인이 아니었다. 뛰어난 모든
능력치가 빛바래 보일 정도로 범상치 않은 양의 마력을 지닌 자였다.

연합군의 마인들이 일반인을 조금 사나운 강아지쯤으로 여겼다면, 장미대 대장 로즈의 앞에서 마인들은 온순한
토끼쯤 되었다. 싸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약자를 상대로 힘을 자랑하며 낄낄거렸던 건 애초에 연합군이
먼저였다.

“연합군 측에서는 나를 상대할 장수가 없나! 아픈 게 무서울 정도로 연약하면 집 안에나 박혀 있을 것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추한 꼴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

“제국군의 기사들은 불리한 조건의 승부에도 응하여 명예롭게 결투를 벌였다. 그 사실을 잊지 마라. 아, 혹시
명예의 뜻을 모르는 것인가?”

연합군 장수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였다.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그 비어 버린 머리에 내가 친히 명예가 무엇인지 주입해 줄 테니, 무섭거든 친구 손을


잡고 나와도 좋다.”

몸놀림만큼이나 날래고 치명적인 로즈 경의 도발은 아직까지 호기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장수들을 번번이 결투의
장으로 불러들였다. 뼈아픈 역지사지였다. 제국군이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연합군은 매일 아침마다 한 명의
장수를 잃고 전쟁을 시작했다.
그렇게 바르제 방벽에서 로즈 경이나 장미대가 연합군 장수의 목이든, 작은 승리든 성과를 일궈 내면 그 업적은
중앙의 세렘 관문까지 빠르게 퍼졌다. 무서운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를 했다는 소식만으로도 병사들은 지친 몸을
일으켰다.

연합군 장군 누구의 죽음, 어느 전장에서 연합군의 패배, 제국군 병사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다양한 승리만 얽어
보면 연합군은 곧 꼬리를 말고 도망갈 것 같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전과 같으며 간신히 버텨 내고 있을 뿐이었다.

병력이 충분해서 교대하며 쉴 수 있는 연합군의 형편에 비해, 제국군 병사들은 하루도 쉬지 못하고 다치면 다친
대로, 팔이 없으면 팔이 없는 대로 매일 전장에 나서야 했다. 연일 발생하는 사상자가 수습할 수도 없을 만큼
늘어 갔다. 날이 추워 전염병이 돌지 않는 것만이 위안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서류를 읽다가 휴 한숨을 내쉬었다. 인조 마인 부대와 파편도 본격적으로 투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정도라니. 아무리 전략을 짜내도 전쟁은 결국 머릿수 싸움이었다. 로젤린은 누구보다 강하지만, 그녀 혼자
수만의 대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심란한 마음에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레 발길이 향한 곳은 로젤린이
잠들어 있는 그의 침상이었다. 침대 가에 앉은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피부 위로 검붉은
핏자국이 여기저기 말라붙어 있고, 머리카락에는 재 따위가 엉긴 채였다. 이런 집요한 시선에도 로젤린은 눈을
뜨지 않았다. 무척 지쳐 보였다.

로젤린은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전장 속에서 병력을 이끌며, 놀라운 활약으로써 제국군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쉼 없이 쌓아 온 업적은 그 어떤 훌륭한 장수라고 한들 감히 대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로젤린의 행보를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대단하다는 한마디로 넘길 수 없었다.

그는 로젤린이 이 전쟁에서 더 이상 피 흘리지 않기를 바랐다. 일라베니아의 업보로 일어난 전쟁에 일라베니아의
희생자가 나선 꼴이었으니.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눈에는 이보다 황당한 일이 없었다.

그대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며 만류하려던 참에, 로젤린이 그의 팔에 손을 살며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싸우겠습니다.]

단호하고 진지한 눈동자는 리카르디스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로젤린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 어떤 것도 할 수 없어서


달빛 아래 검은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흩어져 버린 과거와 달리, 로젤린은 지금 검을 들고 죽이는 것이 아닌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고자 했다. 그녀의 신념을 단순히 ‘지친 너를 보기 힘들다.’라는 이유로 꺾어 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로젤린이 이렇게 지쳐 있는 모습을 보게 될 때면, 하지 못한 말을 담아 둔 입이 달싹이며 열리려 했다.


전장에 나가지 마. 오늘 낮에 중앙 돌파하는 작전은 너무 위험했어. 이것 봐,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무리하면 어떻게 하나. 그렇게. 그렇게 자꾸만.

로젤린이 눈을 떴다. 그녀가 초점을 맞추듯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로젤린의 눈동자에
비치는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달라졌다.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풀리고, 경직되어 있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로젤린.”

“예.”
매일 다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로젤린, 여기서 그만…….

“오늘도 수고 많았어.”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듯 꼭 쥐었다. 로젤린이 배시시 웃었다.

247 화.

해안을 지키는 고래무덤과 바다협곡 측에서 대어를 낚았다는 소식이 도달하기가 무섭게, 그 대어가 중부 관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눈 쌓인 중부 관문의 공터. 그곳에 마차 한 대가 들어섰다. 시간이 흘러도 마차의 문은 열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안쪽에서 대기하던 리카르디스는 급한 마음에 직접 아래로 내려갔다.

푸른등불 공작과도 친분이 깊어 보이는 고위 신관의 등장에, 마차 주위의 병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그를
맞이했다. 그들의 인사를 받은 리카르디스가 병사들에게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께서는 뭘 하고 계십니까?”

도착한 게 언제인데 아직까지 미적거리고 올라올 생각을 안 하느냐는 뜻이었다. 병사들이 대답하기 전, 마차
안쪽에서 우렁찬 코골이 소리가 들려왔다.

“주,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요.”

리카르디스는 마차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추하게 침까지 흘리면서 잠든 남자가 보였다. 피부가 거칠고
눈 밑이 퀭했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보여 그 추한 모습을 보고도 리카르디스의 가슴이 아주 약간 찡해졌다.

컥, 숨 막힌 돼지 소리를 낸 남자가 잠에서 깨어난 듯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문가에 서 있던


리카르디스와 그의 눈이 딱 마주쳤다. 라헤안시가 눈물을 글썽였다.

“전쟁 끝나면 은퇴할 거야.”

대신관은 종신직이었다.

리비타로 떠났던 대신관 라헤안시가 귀환했다는 소식에 리카르디스의 가신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리카르디스는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상태의 남동생을 억지로 끌고 가서 세수시킨 후 방으로 밀어 넣었다. 라헤안시는 조금
전의 몰골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고아한 태도로 가신들에게 인사한 후 자리에 착석했다. 모두의 이목이 쏠렸을 때
라헤안시의 입이 열렸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리카르디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보통 이런 경우 나쁜 소식이 핵심이고 좋은 소식은 마음의 위안이 되는 것뿐이던데.”

라헤안시가 리카르디스의 눈을 슥 피했다. 대충 예상이 맞는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 시점에서 기대를


버렸다. 그가 한숨을 내뱉었다.
“좋은 소식은?”

“우선, 거래가 성립되었습니다.”

힉살라에게서 협조를 이끌어 내었다는 좋은 소식을 누를 정도의 나쁜 소식? 불안이 점점 고조되었다.

“……나쁜 소식은.”

“힉살라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협조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적진 한가운데에서 애완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열성적으로 수행하고, 고문하겠다, 죽이겠다 협박해 대는 인간과


교섭을 마치고, 죽어 가는 힉살라를 깨워, 원하는 답까지 얻어 내었다. 남은 것은 힉살라의 과가 찍힌 명령서를
들고 왕실 직속 군대와 중부 관문으로 떠나는 일뿐이었다.

그때, 하카브의 오른팔, 재상 아틸라크가 움직였다. 힉살라의 궁에 자주 드나드는 브네학스를 경계하던 그는


은밀한 경로로 힉살라가 깨어났음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힉살라가 대대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발타에 남아 있는
하카브의 병력을 모아서 궁을 장악하려 했다. 하카브와 사전에 얘기를 나눈 듯한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발타의 수도 리비타를 두고 내전이 벌어졌다. 라헤안시는 무력 충돌이 심화되기 바로 직전에 브네학스의 도움으로
궁전에서 빠져나와, 해상을 통해 일라베니아로 도착할 수 있었다.

“힉살라께서 너무 오래 잠들어 계신 탓인지, 생각보다도 하카브의 세력이 거대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중부 관문으로 오겠다 말은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군요. 발타의 협조가 없는 상황도 염두에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라헤안시는 평소와 달리 장난기 어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그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알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동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줬다.

“말이 늦었구나. 무사히 돌아와 다행이다.”

라헤안시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크게 확률이 높은 계획이 아니었기에, 전략을 짤 때에도 발타의 협조를
배제시켜 놓기는 했었다. 그럼에도 작게 붙잡고 있던 기대마저 놓아 버려야 하니, 아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해야 하는 일은 명백했다. 미약한 희망을 기다리며 언제나처럼 하루하루를 버텨 내는 것뿐이었다.

* * *

로젤린이 바르제 방벽 공방전을 지원한 첫날부터 ‘제국군에 강한 마인 기사가 있다.’는 얘기가 연합군 측에 널리
퍼졌다. 디에즈는 그걸 들은 순간부터 로젤린을 염두에 두었다.

매일매일 ‘강한 마인 기사’에 관한 정보가 덧대어졌다. 압도적인 마력 양, 비교할 수 없는 무력, 비정상적인


활약상. 그 모든 정보가 가리키고 있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살아 있다.

“잠깐 전장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몇 날 며칠 막사 생활만 하던 디에즈가 대뜸 꺼낸 말이었다. 하카브가 ‘왜?’라든지, ‘가서 뭘 하려고’ 같은


질문을 할까 봐 긴장하던 디에즈는 하카브의 대답에 김이 샜다.

“날도 추운데 너무 얇게 입은 건 아닌가?”

하카브가 자신이 착용하고 있던 모피 목도리를 디에즈에게 둘러 주었다. 답답함에 그가 눈살을 찌푸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듭까지 예쁘게 묶었다.

“그쪽이 가장 험하니까, 조심하고.”

중부 관문을 둘러싼 여러 전장 중 어디에 간다 말한 것도 아닌데, 하카브는 디에즈가 가고자 하는 곳을


예상이라도 하는 듯 굴었다. 물론, 정답이긴 했다. 손을 흔들어 주는 하카브를 뒤로 하고, 디에즈는 막사를
나섰다.

무너진 바르제 방벽 앞. 연합군 진영.

디에즈는 연합군 진영에서 저 멀리, 수만과 수만의 군대가 격돌하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숨 막힐 정도로 밀도
높은 마력이 전장을 뒤덮고 있었다.

‘로젤린.’

그녀였다. 디에즈는 인파에 뒤섞여 보이지도 않는 로젤린의 행방을 눈으로 좇았다.

[어때, 디에즈. 기쁜가?]

로젤린의 생존을 확신했을 즈음 하카브가 디에즈에게 건넨 말이었다. 디에즈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카브는 알
만하다는 식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디에즈의 분노를 샀다.

디에즈는 오래전 금기를 어긴 대가로 생에 끝점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로젤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의 신체와 융화되어 가며 점차 나약해지리라. 더 이상은 도망치지도, 숨지도 못한다.

거대한 해일 같았다. 미노가 강의 강물이 몰아치는 양상이 그러했다. 신의 천벌처럼 보이던 그 급류 속에


휘말렸다니. 살아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 보기는 했으나, 죽었을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디에즈는 로젤린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경계가 아닌, 기대와 가까운 감정이었다.

로젤린을 죽이고자 그녀의 심장에 단검을 박아 넣었던 그때에 모든 것을 버렸다 생각했는데. 마음은 버린다고
버려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나. 디에즈는 혼자 실소했다.

예상은 했지만, 로젤린은 살아 있었다. 이 살벌할 정도의 짙은 마력이 그녀가 아니라면 그게 더 문제였다.
로젤린의 존재를 느끼자마자 생각과 목적, 감정이 각기 날뛰며 또다시 디에즈를 흔들었다. 슬프고, 원망스럽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고, 기쁘다.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로젤린을 좇고 있었다. 디에즈는 이를 꾹 물고 애써 눈을 돌려 그녀가 아닌 전장을 넓게


바라보았다. 잘리고, 찔리고, 부서지고, 꺾인 시체들이 널브러진 채였다. 간절히 바란 일라베니아의 죽음이
여기에 있었다.

기쁘거나 통쾌하지는 않았다. 성취감 같은 감정과도 달랐다. 그저,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디에즈는 말에 올라타 격전이 벌어지는 전장으로 돌진했다. 마력의 묵직한 압박감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디에즈는 마력을 온몸에 두른 채, 덤벼 오는 제국군 병사들을 베어 내며 전진했다.

얼마나 그렇게 검을 휘둘렀을까. 불어오는 바람이 아래로 처져 있던 깃발들을 휘날리게 했다.

‘장미.’

디에즈는 그중 장미가 그려진 깃발을 찾아냈다. 그리고 수천, 수만 명이 싸우고 있는 어지러운 공간 속, 그 깃발


아래에 있는 어느 기사까지도. 마력의 중심이었다.

디에즈는 돌격해 오는 병사의 목을 맨손으로 꺾으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렸다. 휙, 옆에서 날아온 무언가가 디에즈를 세게 강타했다. 디에즈는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거칠게 돌진해 온 것은 물체가 아닌 갑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낙마한 디에즈를 덮치듯 몸에 올라탄 남자가
디에즈의 투구를 벗겨 냈다. 좁았던 시야가 단숨에 넓어졌다.

“오랜만이다?”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인상을 찌푸린 채 사납게 웃고 있었다. 디에즈는 곧 얼굴이 옆으로 돌아갈 정도로 강하게
얻어맞았다. 입 안쪽이 터지며 피가 흘렀다. 주먹이 아니라 망치로 맞은 듯했다.

남자의 정체는 잘 알고 있었다. 로젤린의 곁을 떠도는 독수리의 다른 형태였다. 사냥 대회 날, 로젤린을 찌른


직후 만나 봤기에 낯이 익었다. 마카롱인가 뭔가 하는 우습지도 않은 이름을 지녔었지.

디에즈가 비죽 웃자 마카롱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으르렁거리던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려던 차, 용감한 발타의
기병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이게 어른이 대화하는데 어딜 끼어들어.”

마카롱이 바닥의 돌을 주워 손가락으로 튕겨 냈다. 화살처럼 날아간 뾰족한 돌이 군마의 눈에 박혔다. 발작하듯
날뛰는 군마의 움직임에 버티지 못한 기병이 나가떨어졌다. 안타깝게도 목이 부러져 즉사했다.

1 초 만에 사람 한 명을 죽인 마카롱은 방금 전의 일이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용건을 이어 갔다.

“가서 뭘 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못 보내 주겠네. 우리 애가 좀 심약해야 말이지.”

그 심약한 애는 연합군 장수의 목을 꿰뚫고 있었다.

248 화.

디에즈는 입안에 고인 피를 마카롱의 얼굴에 뱉어 내며 단검을 잽싸게 빼 들었다. 무방비한 목으로 향하던 일격은,
마카롱이 디에즈의 손목을 붙잡으며 허무하게 끝났다. 마카롱이 날카로운 단검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뭐 하냐.”

디에즈의 손목을 죽 당긴 마카롱이 단검을 그대로 제 목에 박아 넣었다.

“인간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까먹었냐? 설마 내가 이런 걸로 죽겠니, 어휴 모자란 놈.”

목에 칼을 꽂은 채 다정하게 말한 남자가 다시 디에즈의 얼굴에 주먹을 쾅 내리꽂았다. 그의 머리가 바닥에 세게


부딪쳤다.

마카롱은 디에즈가 정신 못 차리는 사이 덤벼드는 발타의 병사의 목을 꺾고, 베고, 찌르고, 집어던졌다.
시체들을 방어벽처럼 만든 후, 다시 디에즈에게 돌아온 마카롱이 그의 멱살을 잡고 다시 뺨을 짝 때렸다.
디에즈의 입가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사냥 대회 때, 찔린 로젤린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호전적이고 격정적인


반응이었다.

“여기까지는 내 분풀이.”

마카롱이 제 목에 박혀 있는 단검을 쑥 빼내어, 디에즈의 목에다가 가져다 대었다. 디에즈는 미동 없이 남자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단검이 치켜 올라갔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디에즈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단검은 목이
아닌, 그의 어깨에 꽂혔다. 차가운 날붙이가 살과 근육을 가르고 깊숙이 박혔다. 디에즈가 이를 악물며
몸서리쳤다.

“이거는 저번에 걔 찌른 값.”

마카롱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련 없이 디에즈의 위에서 일어났다. 디에즈가 이를 갈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이 정도로는…… 죽지 않아.”

“살려 줄 테니 곱게 꺼져. 애한테 접근하는 모습 보이면 그때는 진짜 뒤진다.”

디에즈의 눈에 의문이 스쳤다.

“왜, 나를…… 살려 두는 거야. 일라베니아에 붙은 네가, 감히 나를 동정이라도 하는 건가?”

“개소리하지 말자. 안 그래도 피곤한 사람이야, 나.”

마카롱은 잠시간 디에즈를 바라보며, 부나방처럼 날아드는 병사 몇을 처리한 다음 대답했다.

“네가 비록, 멍청한 개자식에 앞뒤 분간 못 하고 날뛰는 머저리라고 해도…….”

욕이 신랄한 걸 보니 악감정은 제대로 쌓여 있는 듯했다.

“봐야 할 게 있으니까.”

“봐야, 한다니?”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

그렇게 말한 마카롱이 디에즈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일 초 전에 살아 있으라고 말하더니, 정작 공격은 내장이


터질 듯이 강력했다. 마카롱은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한참을 시체처럼 누워 있던 디에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단검도 뽑아 바닥에 버렸다. 어깨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혼란한 전장 속을 걸었다.

연합군 진영으로 걸어가던 디에즈는 다시금 살벌하게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기운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인파에 파묻혀 로젤린은 보이지 않았다. 대지를 뒤덮어 버린 시체만이 디에즈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고자 하는 것은, 봐야 하는 것은 오직 이뿐이었다. 그 이외에 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연합군, 발타 진영.

“아이고, 디에즈 님! 누가 이랬어요!”

차호트가 디에즈의 얼굴을 붙잡고 끄악 비명 질렀다. 디에즈는 고개를 살짝 트는 것으로 그녀의 손에서 벗어났다.

디에즈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의 힘을 믿고 잘 놀다 오라고 말했던 하카브가 머쓱해질 정도였다. 어깨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얼굴에는 새카만 멍이 들어 있었다. 대체 뭐로 쥐어 터져야 멍이 붉거나 파랗지 않고 저런
색이 되는 걸까.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 자식입니까?”

하카브가 미묘한 표정으로 차호트의 질문에 대신 답했다.

“그녀의 옆에 붙어 있는 다른 동족인 듯싶은데. 로젤린 경은 디에즈를 이렇게…… 찢어진 천 조각처럼


너덜너덜하게 만들지 않고 깔끔하게 보내 주려고 할 것 같거든.”

디에즈는 어깨의 피를 지혈하며 말을 돌렸다.

“차호트는 세렘 관문에 있던 게 아닌가요. 왜 이쪽에 왔습니까.”

“아, 내일부터 바르제 방벽 쪽을 지원할 거라서요.”

차호트가 손가락에 침을 묻혀 디에즈의 멍 위로 살살 문질렀다. 디에즈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디에즈 님께서 전장에 계시는 동안 여기도 일이 많았어요. 식량 창고가 불탔다고 알리는 전령이 도착했거든요.
어쩐지 보급이 늦더라니.”

“……음.”

흔히들, 전쟁은 식량의 싸움이라 말하곤 했다. 보급이 끊기면 수만의 병력이 굶주리게 되며, 이는 당연히 전쟁의
승패로 이어졌다. 디에즈가 미간을 좁혔다.

“식량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대충…….”

멀리서 대화를 듣기만 하던 케틀린이 대답했다.

“한 사 일 정도면 사이좋게 굶어 죽을 수 있어요.”

그녀의 냉소적인 대답에 차호트가 낄낄 웃었다.

“아, 키티 말 너무 재밌게 한다. 쟤가 저렇게 웃겨요.”

도무지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디에즈는 피가 흐르는 입술을 매만지기만 했다. 차호트가 다시 손가락에 침을
묻혀 디에즈의 멍든 피부 위로 살살 펴 바르며 말을 이었다.
“뭐 중부 관문 안쪽에는 식량이 있겠죠. 군량 건이 아니더라도 슬슬 이쪽에 올 예정이었는데 겸사겸사
잘됐네요.”

그녀가 씨익 웃었다.

“디에즈 님의 복수도 할 겸.”

“마음은 고맙지만 접근하기도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겁니다. 나름 안면 있는 사이라고 봐준 거라서요,


이게.”

“앗차, 맞다. 디에즈 님이 나보다 강했지. 그럼 복수는 빼고 갑시다.”

“……좋은 생각이네요.”

디에즈가 하카브에게 손수건을 받아 들여 차호트가 묻힌 침을 닦아 냈다.

* * *

늦은 시간, 갑작스럽게 회의가 열렸다.

“세렘 관문에 있던 차호트 람가가 바르제 방벽으로 이동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피곤한 얼굴의 리카르디스가 푸른등불 후작에게 서류를 받아 들며 읽어 내렸다.

“수는 대략 삼만. 라고슈 지원군이 더해진 이점이, 이로써 완전히 없어졌군.”

리카르디스는 무력으로 득세한 발타의 가문 중 람가를 가장 경계했다.

사르체는 전투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전투광,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는 걸 아니 함정을 파 놓고 유인하면 된다.
아문은 발타 왕실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날카로운 검. 이쪽은 융통성이 없어서 예상외의 상황을 만들어
발을 묶을 수 있다.

하지만 람가는 그런 단점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힘이 있고, 기술도 있다. 일정한 규칙에 속해 있다가도
자유롭게 움직일 줄 알아 전략의 짜임새를 폭넓게 한다. 물러서도 되는 싸움과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을 안다.

그나마 단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제 흥미가 가지 않으면 나태하게 군다는 점이었다. 하카브의 명령이라 해도


건성으로 일하는 경우가 빈번하단다. 물론 딱 책잡히지 않을 정도의 수준을 지켜서 벌을 받은 적은 손에 꼽는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얻게 된 패배와 실패가 많아, 람가보다 사르체가 강하다 받아들여지고는 했다. 하지만 람가가
마음먹고 나선 전장에서는 언제나 승리의 뿔피리가 울려 퍼졌다.

“세렘 관문 공방전에서는 람가의 진가가 나오지 않았겠지만, 백병전이 벌어지는 바르제에서는 무엇보다 위험한
수가 될 터. 병력을 보강하여 장미대를 중심으로 배치를 새롭게 한다.”

말인즉슨 밤샐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람가의 가주가 나선 전투는 몇 되지 않았다. 전술을 어떤 식으로 세워야
할지 한참 고민하던 중, 전령이 급하게 소식을 알렸다. 이번만큼은 반가운 일이었다.

“차호트 람가가 바르제 방벽 쪽에 온 이유가 있었군.”

리카르디스가 오랜만에 웃었다. 피곤해하던 지휘관들의 얼굴에도 지금만큼은 화색이 돌았다. 연합군의 보급선에
문제가 생겼다.

그들은 점령한 일라베니아의 성채를 병참 기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발타와 각 나라로부터 오는 식량, 그리고
일라베니아 영토 내에서 수탈한 것들까지 보관하며, 일정한 주기마다 중부 관문으로 보급품을 지원하던
참이었는데…….

그중 가장 거대한 병참 기지가 활활 불타 버렸다는 소식이었다.

“이것 참.”

리카르디스는 웃으며 턱을 쓸었다.

“이번에도 완달 타탄의 패배인가.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정말 한번 물면 놓지 않는군. 다들 그녀가 적이 아님을


감사하게 여기게.”

지휘관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이 병참 기지를 기습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현 시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룩세인 왕국에서의 연락을 마지막으로 행방이 묘연해졌던 마른가시나무
백작군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병참 기지의 책임자는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서의 패배로 일시적으로 직위가
강등된 완달 타탄이었다. 그때의 패배에 이어 또 다시 세실에게 당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혹시 몰라서 연합군이 점령한 병참 기지의 정보를 넘겨 뒀을 뿐인데, 역시나 백작이야.”

“…….”

지휘관들이 모호한 표정으로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보았다. 적이 되지 않아서 다행인 건 리카르디스라는 인물에도
해당되는 말인 듯해서.

“이것은 앞으로의 전장에서 호재이자 악재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식량 부족은 전투력의 저하와 무리의 분열을 야기한다. 연합군은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중부관문을 넘어서려
더욱 필사적으로 공세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나올지 대충은 알겠군. 하지만, 이건…….”

리카르디스는 지도 위, 바르제 방벽 앞의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 어떤 전장보다 가장 많은 나무 조각이 대치하고


있었다.

“……힘들겠어.”

그 한마디에 모두가 앞길의 험난함을 예감했다.

* * *

날이 밝았다. 더욱 불어난 연합군의 병력 사이로 람가 가문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로젤린은 오늘도 전투에 앞서 일대일 대결을 신청했다. 혹여 람가의 가주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했으나,
로젤린의 원색적인 도발에 걸려든 것은 하급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코코 사르체였다면 누구보다 가장 먼저 뛰쳐나왔겠지. 하지만 람가는 승산 없는 싸움에는 몸을 사릴 줄 아는


부류거든.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어젯밤 리카르디스가 말했던 부분이라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좀 아쉬웠다. 하급 지휘관을 처리한 후, 발걸음을
돌려 본대로 귀환하려던 로젤린은 돌연 뒤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기운에 말고삐를 잡아채 자리에 멈춰 섰다.

249 화.

그녀는 고개만 살짝 틀어 연합군 진영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수백 명의 마인이 마력을 쓰기에 공격이라도
감행하나 싶었는데, 별다른 소란 없이 잠잠할 뿐이었다. 뭐지?

로젤린은 계속해서 느껴지는 마력이 거슬려서 걷다가 뒤돌아보는 행위를 반복했다. 본대에 돌아갈 때까지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그녀와 달리, 마카롱은 상황을 파악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침 마카롱과 가까이 있던
리카르디스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뭐, 오늘 새로운 장수가 여기 왔다고? 걔가 총지휘관이고?”

“그래. 람가의 가주, 차호트다.”

“저거 아주 또라이네.”

마카롱은 눈가를 간지럽히는 앞머리를 쓸어 넘긴 채 고정했다. 시선은 여전히 연합군 측 진영을 향하고 있었다.

“갑자기 마력을 쓰더라고. 한 이백 명 정도가 뭉쳐서.”

“아, 그래서 로즈 경이 저렇게.”

뼈다귀를 어디에 묻어 두고 온 강아지 마냥……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뒷말을 간신히
생략했다.

“이것들이 뭔 개수작하나 싶었는데, 잘 보니까 우리 대장한테 신호를 보내는 거였구만.”

신호? 리카르디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선전포고?”

“아니.”

마인들은 여전히 마력을 운용한 채,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군대 사이에서 규칙성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좌우 대칭의 완만한 곡선, 두 개의 봉우리와 뾰족하게 만나는
하나의 점까지.

“하트.”

리카르디스의 입가가 씰룩였다. 뭔 소리를 하느냐고 묻고 싶은 듯 보였다. 마카롱은 그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기


전에 마저 말을 이었다.

“마인들로 하트를 그리고 있다고. 우리 대장님의 결투가 마음에 쏙 들었나 봐.”

“…….”
리카르디스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곧 로젤린이 본대로 귀환했다. 람가군의 마인들이 마력을 쓰고 있다며, 왜 저러냐고 투덜거리는 그녀에게
리카르디스는 들은 대로 그 의미를 일러 줬다. 잠깐 다시 뒤를 돌아본 로젤린이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하트 모양이었던 듯했다.

“그런데 왜……?”

로젤린이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를 포함한 다른 어떤 누구도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사이
연합군에서도 오늘 사망한 하급 지휘관의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을 끝냈다.

양 측의 군대가 대치한 채 투기를 발산했다. 묘한 점은 마치 입을 맞춘 듯이 각각 좌익, 중앙, 우익군을 두고서


거대한 한 개의 군대가 본대의 뒤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연합군 진영에서는 람가군이, 제국군 진영에서는
규모가 늘어난 장미대가 예비대의 역할로 물러나 있었다. 서로 주력부대가 빠진 셈이었다.

여태껏 이 전장에서 활약했던 연합군의 마인들은 본대에 포함되지 않고 따로 움직이며, 제국군의 측면을 기습
공격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그 때문에 로젤린의 장미대 또한 좌익군 소속이라는 틀을 벗어나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전투를 치른 것이었다.

지금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이 방식이 효율적이라는 것은 이미 검증되었고, 막 바르제에 등장한 람가의


마인 군대가 어느 쪽을 향할지 알 수 없으니 따로 빼내어, 그 움직임을 읽은 후 출진할 예정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삼만이나 되는 병력이, 심지어는 최고 지휘관이 지휘하는 군대가 중앙이 아닌 예비 병력으로 빠져


있는 것은 리카르디스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뿔피리가 울리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수만과 수만의 덩어리가 충돌하자 뿌연 흙먼지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람가군과 장미대만이 격전지에서 동떨어진 채 서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람가군의 군마들이 투레질하며 앞발을
들어 올리는 즉시, 장미대도 나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세 시간이 지나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제 정체를 아는 지휘관들을 우선으로 급히 소집했다.

“우리가 한참 잘못 생각했던 모양이야. 연합군 측이 식량 문제로 전전긍긍하여 제국군의 주력부대부터 파훼하려


들 거라 여겼건만.”

그가 하, 숨을 내뱉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람가의 목적은 장미대가 아닌 제국군 그 자체였군.”

로젤린도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여태껏 연합군의 장수들은 장미대를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제국군의 방어벽을 두텁게 하는 눈에 띄는 요소였으니까. 그래서 람가군 또한 장미대를 처리하기 위해
투입되었다고 생각했다.

“람가의 군대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장미대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양측의 주력부대가 참전하지 않는
것이지만, 전체적인 머릿수는 저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병사들의 체력 또한 비할 바가 못 돼. 이런 식의
소모전으로는 우리의 한계만 빠르게 드러나겠지.”

장미대라는 무기를 봉쇄한 채, 제국군의 머릿수를 깎아 내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수가 줄어들게 된다면 장미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연합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한번 차고는 지도를 빠르게 살폈다.

“세렘 관문에 지원을 요청한다.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연합군은 바르제 방벽을 통과하는 방법을 택한 것
같군. 예비 병력을 모두 이쪽으로 돌려야겠다.”

그의 말에 잇세리온이 부지런하게 무언가를 써 내리고 바깥으로 나섰다. 펄럭이는 천막 밖으로 하늘에 걸려 있는


해가 보였다.

까만 어둠 속에서는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도 힘들뿐더러 상대측의 움직임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기습


외에는 큰 효용을 볼 수 없고, 도리어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으니 해가 지면 병사들을 쉬게 하고, 재정비하여
다음 날을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으로써는 밤이 되기까지 어떻게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지금 당장 마인 군대의 위협이 사라진 전장에 새롭게 전술을 전달하고 그에 맞춰 대응하도록


명령했다. 람가의 군대를 경계하던 제국군도 조금 더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연합군이 우세했다. 어림잡아 추산한 제국군의 사상자는 어제의 두 배에 달하는 수였다.

드디어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전투를 마무리 짓고 서로의 진영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 이게…….”

제국군의 지휘관이 질린 듯 말을 더듬었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누구도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해가 산 뒤로 넘어가고, 하늘은 검게 물드는데, 짓눌리며 부서지는 두 무리의
격전은 식을 줄을 몰랐다.

리카르디스는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차호트 람가. 그녀가 제국군의 지휘관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밤하늘 아래에서 더욱 거세게 제국군을 도륙했다.

* * *

하카브는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의 전장을 바라보며 웃었다.

“리카르디스가 보고 싶군.”

느끼한 말을 내뱉은 남자가 재빨리 말을 이어붙였다.

“오해하지 말아, 디에즈. 리카르디스 황자가 보고 싶다기보다는, 지금쯤 당황하고 있을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얘기야.”

디에즈와 케틀린이 얼굴을 구겼다. 하카브는 두 사람의 반응에도 그저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전장을 바라보았다.

모든 연합군이 중부 관문 앞으로 결집하여 전보다 거세게 공세를 펼치는 중이었으나, 일라베니아는 끈질기게도
버텼다. 종횡무진 전장을 휘젓는 장미대와 라고슈 지원군을 필두로 한 제국군은 이따금 예상할 수 없는 전략에
따라 움직이며 이 상황을 버텨 내는 것 이상의 힘을 보이기도 했다.

거센 저항에 연합군의 사기가 늘어지기 시작했다. 점차 추워지는 날씨가 병사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식량 창고마저 마른가시나무 백작에게 털렸다. 그전에도 결코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이제는
마른가시나무라는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그렇게 악재가 겹친 상황에 차호트 람가가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식량이 다 떨어지기 전에 중부 관문을 무너트리면 되죠, 뭐.]

[그러니까, 우리가 그걸 못 해서 아직 이러고 있는 거다, 차호트.]

차호트는 펼쳐진 지도 위, 제국군과 연합군을 의미하는 나무 조각을 달각달각 움직였다.

[지금 우리 군의 병력이 이쪽에 많이 집중되어 있잖습니까.]

그녀가 가리킨 곳은 세렘 관문이었다. 거대하고 두꺼운 관문을 공략하는 전투는 일반적인 전투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전력을 요구했기에, 반 이상의 병력이 세렘 관문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그걸 여기로.]

차호트가 세렘 관문의 병력을 바르제 방벽 앞, 장미대가 있는 전장으로 옮겼다. 다른 곳에 비해 바르제 방벽


측의 전장은 상대적으로 공간이 협소한 편이었다. 많은 수가 있다 해도 한꺼번에 공세는 불가능하고 예비
병력으로 놀게 두는 수밖에 없었던 터라 전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일정한 수준의 수만 유지하고 있었다.
차호트도 그 점을 모르지 않았다.

[사실 장미대와 라고슈 지원군만 아니면 바르제 방벽은 뚫려도 진즉에 뚫렸을 거잖아요. 그 둘만 발을 묶어 두면
일이 수월해지겠죠.]

[어떻게?]

[제가 다른 전장에 있는 마인 애들까지 전부 모아서 데리고 갈게요. 수가 많을수록 그쪽도 맞춰서 편제할 거고.]

차호트가 나무 조각 몇 개에 서투른 솜씨로 장미 문양을 그려 넣고는 제국군 중앙군 뒤에 놓아두었다.

[내가 마인들을 데리고 있다는 걸 아는 제국군 측에서 어중이떠중이에 머릿수만 믿은 군대를 붙일 리는 없잖아요?
결국 장미대와 라고슈 지원군이 나를 견제하려 들 겁니다. 내가 움직이면 그들도 움직일 거고, 내가 안 움직이면
그들도 못 움직이겠죠. 치열하게 눈치 싸움이나 해 볼까 합니다.]

차호트가 무슨 소리를 하나 가만히 듣던 하카브가 그녀의 의중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모든 마인을 람가의 깃발 아래 소집한다. 그 파괴력 넘치는 군단을 막기 위해 장미대를 포함한 정예병이 꾸려질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람가는 움직이지 않을 테니, 장미대와 제국군의 정예병 또한 발이 묶이게 된다.

전장에서 가장 위협적인 요소가 사라지게 된 셈이었다. 장미대와 라고슈 지원군을 제외한 나머지는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수로써 찍어 누른다면 이 전쟁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날 수도 있었다.

250 화.

[가끔 보면 굉장히 머리가 좋은 것 같아.]

[실례되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시는 점이 전하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차호트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전쟁은 머릿수면 머릿수, 식량이면 식량, 장수면 장수. 상대보다 뛰어난 것으로 찍어 눌러야죠. 지금 연합군이
내세울 수 있는 거라곤 머릿수 하나 아닙니까.]

그녀는 말하면서도 나무 조각을 계속 바르제 방벽 쪽으로 옮겼다. 하카브도 람가의 문양이 새겨진 나무 조각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장미대가 발이 묶이면 그렇게까지 많은 병사가 필요하진 않을 텐데?]

[필요합니다. 오래 싸울 예정이라.]

[오래?]

차호트의 눈에 타오르는 촛불이 비쳤다. 그녀가 악동처럼 개구 진 미소를 지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차호트가 연합군의 나무 조각 두 개와 제국군의 나무 조각 두 개를 치웠다.

[그 다음 날의 아침과 밤까지.]

그녀가 또다시 양측의 말을 몇 개씩 제거했다. 제국군 측은 장미대와 작은 나무 조각 몇 개밖에 남지 않은 반면,


연합군은 여전히 큰 나무 조각들이 줄지어 있었다.

[잠도 못 자고, 물도 못 마시고, 밥도 못 먹고. 그렇게 몇 시간, 몇 십 시간,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연합군 또한 피해가 클 테지만, 시간이 촉박한 이상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과격한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확실히,
이런 방식으로 전투를 지속한다면 제국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

[길어도 며칠입니다, 전하. 그 안에 무너트려 보겠습니다.]

하카브는 미소로써 그녀의 제안을 승낙했다.

어제 나눴던 얘기가 오늘 실현되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카브는 어두워진 전장 너머, 바르제 방벽을
바라보았다. 실종된 일라베니아의 총사령관,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그는 아마도 중부 관문, 그것도
장미대가 있는 바르제 방벽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라고슈의 지원군이 합류한 날로부터 갑자기 바뀐 전투 방식은 영리하고도 효율적이었으며, 허를 찌르는 한 수가


있었다. 그리고 여태껏 들어 본 적 없는 마인 기사 ‘로즈 경’이 이름 모를 지휘관의 검이 되어 전장을 휘저었다.

로즈 경이 로젤린이라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하카브는 리카르디스 또한 살아 있으며, 그가 지금 중부 관문의


전투를 지휘하는 책임자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총사령관이 왜 아직까지 자신의 생존 사실을 알리지 않는가?

우두머리의 부재는 무리의 전체적 사기를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사항이었다. 분명 그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기에,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의 수를 떠올려도 지금의 전황을 뒤집을 만한 수단은 없었다.

없다, 없는데.

‘리카르디스.’
계속해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죽지 않는, 끈질기게 살아남는, 반드시 무언가를 준비해 두는. 주도면밀한
리카르디스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일말의 경계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로써 끝이었다.

하카브는 차호트 람가의 계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제국군 진영을 바라보았다. 둥그런 달이 어두워진 전장을
비추고 있었다.

* * *

예상치 못한 야간전에 제국군의 지휘관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이런 식으로 밤낮없이 전투를 지속했다간 내일
아침이면 전부 지쳐 검을 들 힘마저 잃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부우우-

몇 시간 동안 들리지 않던 출진의 뿔피리가 울렸다. 제국군의 지휘관들은 아침과 낮 내내 람가군만을 경계하던


장미대가 움직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돌진하는 기세는 여태껏 터트리지 못했던 투기를 한 번에 발산이라도 하는
듯 자못 사나웠다.

갑작스러운 장미대의 출진에 대다수의 지휘관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리카르디스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

“차호트 람가가 움직였나 보군.”

로젤린이 이동하는 마인 부대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구름이 많아 달빛마저 희미한 공간 속에 벌어진
난전을 지켜보았다. 찢어지는 괴성들만 무성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횃불이나 이따금 빛을 반사하는 갑옷
정도였다.

장미대와 연합군이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인과 거인이 무기를 맞부딪친 듯한 굉음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를
악물었다.

‘로젤린.’

이 어둠 속에서 그녀가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초조함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시각.

돌진한 로젤린은 벌써 장수의 목을 둘 베어 내었다. 발타군의 지휘관들은 대개 마인이었고, 이런 어둠 속에서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는 지표가 되어 로젤린을 이끌었다. 그녀는 저 멀리에서 기운을 발산하는 인조 마인 군단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차호트 람가 또한 로젤린의 접근을 알아채고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 제국군을 학살했다. 직접 부딪치는
상황을 피하고 제국군의 수를 줄이는 것에 주력하려는 속셈이었다. 로젤린은 앞을 가로막는 연합군 병사들을
흉폭하게 베어 넘겼다. 하지만 적이 아무리 쓰러져도, 람가군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적이 너무 많아.’

로젤린은 뒤를 돌아 어둠 속에 위축된 사자갈기군과 라고슈 지원병들을 확인했다. 화살과 날카로운 창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튀어나왔다. 평범한 공격에도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더 이상 파고들 수 없었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전멸할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후욱,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전장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대한 구름이 달을 가렸다. 희미하던 달빛조차 어둠에
잠겨 버렸다.

“딱 좋네.”

로젤린의 바로 옆에 있던 마카롱이 한 말이었다. 로젤린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자, 쥬쥬가 연합군 병사 한 명의


머리를 잡아서 멀리 날려 버리고는 투구를 벗어 던졌다.

“기왕 안 보이는 거 우리도 써먹어야지.”

찰나의 순간에 쥬쥬에게서 짙은 마력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형체가 삽시간에 흐물거렸다. 야행성 동물의
눈을 빌리고 있는 로젤린만이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대충 날뛰고 온다.”

말에서 풀쩍 뛰어내린 마카롱의 모습이 어둠과 인파에 가려졌다. 곧 지상에서부터 무언가가 화살처럼 쏘아지듯
하늘로 날아올랐다.

삐이익, 전장 위로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퍼졌다. 독수리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스칠 정도의 아슬아슬한 높이에서


비행하며 군대를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장미대와 교전 중인 연합군이었다.

바람 소리에 접근하는 기척을 숨긴 독수리는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형태를 허물어 다른 모습으로 변이했다. 검고
거대한, 탄력 있는 근육을 가진 흑표범이 하늘에서부터 비스듬히 쇄도했다. 연합군의 병사는 코앞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에 잠시 몸을 굳혔다.

콰직, 무언가가 뜯겨 나갔다.

“으아아악!”

어둠 속을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는 전장에서 들리는 그 어떤 비명보다 고통에 차 있었다. 주위의 병사들이 고개를
휘휘 둘러보았으나, 흑표범은 이미 어둠 속에 녹아든 상태였다. 빛나는 두 눈만이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의
궤적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흑표범은 온몸으로 돌진하고, 물어뜯으며 전열을 흐트러트렸다. 땅에 발돋움한 흑표범이 병사의 방패를 밟고
뛰어오르며 다시 독수리로 화했다. 그것은 크게 날갯짓하며 조금 더 중앙부로 이동했다. 하늘에서부터 무언가가
연합군의 한복판에 뚝 떨어졌다. 이번엔 흑표범이 아닌 거대한 곰이었다.

크와아아! 맹수의 울부짖는 소리가 전장을 쩌렁하게 울렸다. 거대한 곰이 앞발을 휘두르자 병사 다섯이 갑옷 채로
찢겨 나가며 절명했다.

“으아악!”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 공격당하는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질러 댔다. 무작정 도망가는 사람,
사태를 깨닫지 못해 전방의 제국군 병사에게만 집중하는 사람, 혼란의 원인을 처리하기 위해 무리를 거슬러 가는
사람들까지. 일정했던 연합군의 흐름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집단이 개인이 되며, 연합군의 치밀했던 대열이
성기게 변모했다.

로젤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뭉쳐 연합군을 돌파했다. 뜨거운 핏방울이 그녀의 투구에 선을 그리듯 튀었다.
* * *

아침 해가 붉게 물든 대지를 비췄다.

로젤린은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백? 이백? 셀 수도 없었다. 적어도 오백 이상은 베어 넘긴 듯했다. 여린 살과


근육을 가르는 감각도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갑옷은 온통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고, 피가 끈적하게 엉겨 붙은
무기는 날카로움을 잃었다.

밤새 분전했으나, 연합군과 제국군의 병력 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제국군이 연합군의 부대를 궤멸시켜도 병력을
다시 투입해, 수적 우위를 철저하게 지키며 제국군을 압박했다.

허억, 헉. 장미대의 병사들이 말라붙은 숨소리를 냈다. 호흡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오로지 정신력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날이 밝아 올 무렵. 로젤린은 장미대와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던 람가군과 드디어 격돌했다. 하지만 마력이라는
신체 강화 수단을 지닌, 훈련받은 병사들의 집합은 로젤린이 부딪친 그 어떤 적보다도 강력했다.

파편까지 사용하는 마인 군대의 거친 공세에 해치운 적보다 쓰러진 아군이 훨씬 많아졌다. 로젤린은 단신으로
돌파하여 차호트 람가를 잡고자 했으나, 두텁고 견고한 벽은 허물어도 허물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후 장미대의 측면을 연합군이 공격해 왔다. 장미대가 측면의 공격에 고전하는 사이, 람가군은 유유히 자리를
벗어나 또다시 제국군의 약한 부분을 파쇄해 나갔다.

차호트 람가는 현장에서 전략을 곧바로 수정하고 다른 군대와 협공하는 등의 움직임으로 전장의 전체적인 흐름을
장악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이 흐름을 끊어 내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차호트 람가를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했다.

‘지금은 무리야.’

병사들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람가의 군대를 뚫고 차호트 람가에게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힘도,
수도 부족했다.

바로 그때, 제국군 진영에서부터 뿔피리 소리가 퍼져 나왔다.

부우우-

로젤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오천 정도의 병력이 전장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끌어 모은


최후의 증원군인 듯했다. 놀라운 점은, 그들의 위로 붉은수레바퀴 기가 펄럭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251 화.

로젤린은 전장을 급하게 이탈해서 붉은수레바퀴 깃발을 건 무리에 다가갔다. 가장 선두의 기사가 바이저를 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로젤린은 그 눈동자를 본 순간 흥분으로 들떠 있던 정신이 차분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입니다. 군을 구성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군요. 늦지는 않았을지요.”


“장미대의 로즈입니다. 적절한 때에 오셨습니다.”

주위 사람을 의식하며 딱딱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으나, 칼릭스의 눈만큼은 둥글게 휘어 로젤린을 반가워하고
있었다.

“겁나 늦으신 것 같은데.”

마카롱의 타박에 그의 눈이 곧바로 원상 복귀했다.

두 사람은 바닥에 지도를 펼치고 차호트 람가를 제거하기 위해 모의했다. 훈련된 병사들로 이루어진 람가군의
벽은 견고했다. 정석적인 방법으로 싸운다면 반드시 패배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기습 같은
예상외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람가군은 다른 장소에서 전투를 치르는 중에도 계속해서 장미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기습이 통할 리
없으니, 여태껏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붉은수레바퀴군이 그 역할을 맡는 수밖에 없었다.

장미대가 정석적으로 람가군을 상대하는 사이, 붉은수레바퀴군이 람가군의 측면으로 돌격한다. 측면의 방비는
다소 허술하니 그 틈을 뚫고 중앙부의 차호트까지 도달하라는 것이 이번 작전의 표면적인 내용이었다.

붉은수레바퀴군에는 마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리고 전투를 할 수 없는 마인들을 빼고 남은 수는 대략 삼백여


명. 적은 수였지만 지금의 싸움에서는 크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준비가 끝나고, 장미대가 다시 전장으로 돌진했다. 이동하던 람가군이 장미대와 충돌했다. 삼만 대 일만.
수적으로도, 힘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장미대의 병사들은 람가군의 주의를 이끌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투했다.

시간이 흐르고, 람가군의 이목이 장미대만을 향했을 때, 붉은수레바퀴군이 람가군의 측면을 쳤다. 차호트 람가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함성과 충돌음에 고개를 틀어 옆을 바라보았다.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깃발을 확인한 그녀가
슬쩍 웃었다.

“붉은수레바퀴라, 아버지의 복수라도 하러 왔나.”

차호트가 휙 휘파람을 불었다.

“딸과 아들의 협공이라니. 이거 악당이 된 기분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차호트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워 버린 것은,


지금 막 돌격해 온 붉은수레바퀴군이었다. 정확히는, 붉은수레바퀴군에서 느껴지는 마인들의 존재.

창처럼 뾰족하게 힘을 응축한 형태로 돌격하는 그들의 행보에, 람가군의 측면이 침입을 허용했다. 차호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이마를 긁적였다.

“아, 되게 놀랐네.”

뜬금없이 제국군 측에서 마인 집단이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마인의 씨가 말랐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일라베니아에서.

하지만 그런 당황도 아주 잠시였다. 측면의 병사들이 차호트와 마찬가지로 평정을 되찾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붉은수레바퀴군이 뚫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람가군이 그들을 포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차호트가 쯧쯧 혀를
찼다.

‘시도는 좋았지만, 아쉽게 됐어.’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모두가 강한 게 아니었다. 일라베니아의 마인들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평범한 인간들보다
낫다 정도였다. 힘만 세고 기술이 없거나, 마력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몰라 헛되게 소비할 뿐. 그에 비해
발타군의 마인들은 대다수가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은 전사였다.

마인들을 이만큼 모은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쉽게 뚫을 수 있을 리가. 차호트가 흐뭇하게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공성전에서 완달 타탄이 괜한 복수심에 불타 인조 마인 부대의 반을 날려 먹지만 않았어도,


사실 전쟁은 쉽게 끝났을 것이다. 차호트는 그 점을 상기할 때마다 입안이 썼지만, 소문의 그 로젤린 경이 힘도
제대로 못 쓰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으로 기분을 달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것부터 먹어 치우자. 붉은수레바퀴군을 뭉개 버려라.”

부관에게 명령을 내린 차호트는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라 예상되는 기사의 전투를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는
놀랍게도 제법 잘 싸우고 있었다. 무기를 흘리고 베어 나가는 행위가 마치 손가락을 움직이는 듯이 자연스럽고
능숙했다. 그건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검을 휘둘러 왔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검 실력도 유전인가.’

차호트는 남부 관문에서 붉은수레바퀴의 페르탄에게 베였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평범한 인간이라고 방심한
대가가 흉터로 새겨져 있는 곳이었다.

차호트는 혀로 거친 입술을 한번 핥고는 활을 들었다. 팽팽한 시위에 손가락을 걸어 당기자 활이 부러질 듯


휘었다. 화살촉 너머로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보였다. 차호트가 씩 웃었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되지.”

활시위를 놓으려는 순간. 뒷덜미와 가슴 안쪽을 물들이는 오한이 돌연 차호트를 덮쳐 왔다. 많은 전투를 치러 온
전사로서의 감각이 인지에 앞서 차호트에게 경계를 보내고 있었다.

차호트는 빠르게 눈을 굴렸다. 앞뒤 양옆. 말 그대로 사방이 다 막혀 있는 이 상황에서 오한이 느껴질 정도의
위험이라니? 설마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왔단 말인가?

사고의 흐름에 따라 차호트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아주 느릿하게 흐르는 찰나의 시간 속, 그녀가 밟고 선
땅이 새카맣게 뒤덮이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였다.

‘새?’

차호트는 생각과 동시에 활을 하늘로 겨누었다. 위험을 감지한 본능이 몸을 먼저 움직이게 한 것이었다. 그림자를
드리운 무언가의 정체를 목도한 순간, 그녀의 숨이 일순간 멈췄다. 예상을 까마득하게 벗어난 광경이었다.

위를 스쳐 지나가는 독수리 아래로, 한 사람이 빠르게 낙하하고 있었다. 차호트는 다급히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떨어지는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그 사람, 로젤린은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만으로 차호트의 공격을
무산시켰다.

“위다!”
차호트가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마인들이 차호트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로젤린이 떨어지는 게
먼저였다.

쾅!

굉음과 함께 차호트가 군마를 탄 채 쓰러졌다.

흙먼지가 일었다. 차호트는 엎어진 채 콜록거렸다. 머리가 세게 부딪쳤는지 어지러워 일어설 수 없었다.
흔들거리는 시야에 공격을 막기 위해 내밀었던 검이 산산조각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위로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이건, 누구의 피……?

그 생각을 끝맺기가 무섭게 차호트가 왈칵 피를 토해 내었다. 그녀는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를 더듬었다가
깨달았다. 갑옷 채로 심장이 꿰뚫려 있었다.

“하, 이…… 이런…….”

차호트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땅에 착지한 후 먼지를 툭툭 털고 있는 로젤린이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장미대가 미끼. 붉은수레바퀴가 주공 부대라고 생각했건만, 붉은수레바퀴가 미끼역이었던 것이다. 마인들과 측면


돌파를 감행한 붉은수레바퀴군에 주의를 뺏긴 사이, 로젤린이 단신으로 날아와 공격하는 계획이었던 듯했다.
하늘에서 떨어질 적군을 어떻게 예상하라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차호트가 입가로 침과 피를 주르륵 흘리며 웃었다.

“……나의, 완패다.”

기이한 웃음소리를 내던 차호트의 숨이 완전히 멎었다. 햇살 아래에서도 그녀의 눈동자는 빛바래어 흐릿해져
있었다. 가장 강했고, 가장 까다로웠던 적의 죽음이었다.

아군 진영의 한복판에서 지휘관이 살해당했다. 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로젤린에게 다가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로젤린의 압도적인 무력과 마력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강림한 신의 사도와 같이 느껴졌다. 기세에 눌린 연합군의
병사들이 그녀의 주위에서 주춤주춤 물러섰다.

로젤린은 독수리가 던져 주는 장미대의 깃발을 낚아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장미대의 로즈가 차호트 람가를 죽였다!”

그에 호응하듯 전장 여기저기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장미대의 로즈가 차호트 람가를 죽였다!”

“차호트 람가가 죽었다!”

차호트 람가의 가치는 단순한 장군 한 명, 지휘관 한 명 정도에 그치지 않았던 듯했다. 술렁이던 람가군의
병사들이 이내 눈물을 떨어트렸다. 존경하는 무인이자 주인이었던 이의 허무한 죽음에 그들은 전의를
불태우기보다는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로젤린은 죽은 차호트 람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 부근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흘러나온 목걸이에 반지가
걸려 있었다. 로젤린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그녀는 거칠게 목걸이를 뜯어 내었다. 여기저기 흠집 난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반지가 손바닥 안에서 도르륵
굴렀다. 로젤린은 그걸 손에 꾹 쥔 후, 품에 곱게 넣었다.

“후…….”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땀을 식혔다.

* * *

우두머리를 잃어버린 람가군은 전만큼의 위력을 보이지 못했다. 그들이 싸우는 전장은 물론이고, 람가군의
활약으로 덕을 보던 연합군까지 주춤하게 되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장에 직접 가신다니요! 너무 위험합니다!”

푸른등불 공작이 기겁하며 만류했다. 리카르디스는 분주히 준비하며 르원에게 갑옷을 가져오라 일렀다.

“정보와 명령을 주고받는 시간이 너무 늦어. 전장에서 바로바로 전략을 수정하고 지시를 내릴 사람이 필요하다.
밤사이 연합군의 공세에 제국군이 찢긴 상태라 이대로는 저녁까지 버티기 힘들어. 차호트 람가가 죽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열세인 상황이고, 조만간 하카브가 나서게 되면 그들의 동요 또한 가라 앉을 테니 지금이 아니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이 없다. 그러니 불필요한 입 싸움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리카르디스는 사슬 갑옷을 안에 착용하고 다시 신관 로브를 뒤집어썼다.

“걱정 말게, 공작. 드윗 경도 데리고 갈 거거든. 그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날 지켜 주겠지.”

푸른등불 공작과 같이 리카르디스를 말리기 위해 손을 엉거주춤하게 들어 올렸던 사자갈기의 드윗은 갑작스러운


호명에 놀라 굳었다. 예? 갑자기 저요? 드윗은 뭔가 묻고 싶었지만 푸른등불 공작이 눈에 불을 켜며 쳐다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게!”

“보통 그런 다짐은 당사자가 말해야 하는 부분 아닙니까?”

252 화.

곧 준비가 끝났다. 리카르디스는 하얀밤 기사단원들과 예비 보병대, 군대가 귀환하지 않아 하루 동안 푹 쉰


신관들과 군의관 모두를 이끌고 직접 출진했다. 대외적으로는 사자갈기의 드윗이 이끌게 되는 부대였다.

리카르디스는 밤사이 뿔뿔이 흩어져 연합군 사이에 고립된 아군들을 모아 차츰 전열을 가다듬어 갔다.
리카르디스의 의도를 읽은 장미대가 적절하게 전장을 휘저으며 연합군을 교란했다. 마치 리카르디스의 움직임을
예상이라도 한 듯 보였다.

작전이 다소 무모한 감이 있다 생각한 사자갈기의 드윗은 로젤린의 도움으로 차근차근 정리되는 상황에 감탄했다.

“로젤린 경도 대단하군요. 미리 말해 두신 겁니까?”


리카르디스는 저 멀리서 파괴적으로 돌진하는 장미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과거에 로젤린 경과 체스 게임을 많이 했었거든. 그만큼 나에 대해 잘 알기도 하겠지.”

세티스티아가 살아 있을 적, 셋이서 종종 어울리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리카르디스는 상념을 털고 거대한


소용돌이 같은 연합군의 흐름을 끊어 내기 위해 집중했다.

리카르디스는 어지러운 전장 속에서 침착하게 병사들을 통제하며, 방어에 주력하는 방진을 점점 넓혀 갔다.
병사들로 벽을 친 안쪽에는 신관과 보급 부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관문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이었다. 지친 병사들은 목을 축이고 배를 채웠다. 밀려드는 부상자에게 신관과 군의관들이 달라붙었다.

수백 명의 부상자가 있는 공간에 리카르디스가 발을 들였다. 그가 숨을 후 쉬고 손을 뻗었다.

‘농도는 옅게. 범위는 넓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치료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당분간 싸울 수 있는 정도로만, 체력을 조금 회복할 수 있는


정도로만 끝내야 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고 힘을 퍼트렸다.

하얀 안개 같은 빛이 방진 안을 가득 메우는 듯이 퍼져 나갔다. 반딧불이처럼 보이는 작은 빛 덩어리가 그 사이를


춤추듯 돌아다녔다. 빛무리에 휩싸인 병사들의 자잘한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친 몸에 활기가 도는
것을 느끼고 입을 벌렸다. 언젠가부터 등장한 고위 신관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수백 명에게 한꺼번에
성력을 쓸 정도였다니.

저쪽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며 성수를 퍼 나르는 대신관 라헤안시조차도 이 정도의 성력을 가지지는 못 했을 텐데.
차기 대신관 후보인가? 병사들이 술렁였다.

곧 빛무리가 사라졌다. 눈을 뜬 리카르디스가 부상자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거무죽죽한 안색이 아까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음, 이 정도인가. 고개를 끄덕인 그가 멍청하게 뒤에 서 있는 신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됩니다.”

참 쉬운 일 아니냐는 듯 말한 리카르디스는 다른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총총 자리를 떠났다.

연합군, 발타 진영.

하카브는 막 들어온 소식에 미간을 좁혔다. 디에즈의 얼굴도 차갑게 굳어졌다.

“차호트가, 흠…… 이건 또 예상외인데.”

차호트는 전쟁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 장수와 장수가 맞붙는 것이 아닌, 집단과 집단의 격돌이라는
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개인의 명예나 자존심 따위를 내세우며 이기지도 못할 싸움에 괜히 덤비는, 코코 사르체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한데 지금의 상황은 차호트가 코코 사르체처럼 행동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체계적인 훈련으로 탄생한 람가군의 방어벽은 그 무엇보다도 강했다. 로젤린이 마인들의 벽을 뚫고 차호트에게
접근할 방법은 없었다. 차호트가 로젤린에게 일대일로 붙어 보자며 덤비지 않는 이상에야.

전령이 사건의 전말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것이…… 장미대의 대장이 하늘을 날아서, 가주를 덮쳤다고 합니다.”

하카브와 디에즈는 비슷한 표정을 했다.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하늘을 날았다고.”

“독수리의 발을 잡고 날아, 가주님 위로 도달하여 떨어지면서…….”

디에즈가 손을 들어 올려 병사의 말을 중단했다. 갑옷을 착용한, 단련된 기사의 무게는 100kg 을 상회했다.
그런 사람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는 괴물 같은 독수리라고는 디에즈가 아는 내에서 딱 하나뿐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디에즈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한참 뒤에 말을 내뱉었다.

“이건 차호트가 운이 나빴군요. 상대가 너무 안 좋았어요.”

차호트 람가는 발타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무장이었다. 전장을 보는 눈도 있고 부하들의 신임도 한 몸에 받는


훌륭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여러 상황을 가정하여 대비했겠지만, 차호트로서도 로젤린이 독수리의 힘을 빌려
하늘에서 날아올 거라는 상상을 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단순히 운이 나빴다는 말 외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녀의 불운함은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것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야. 전체적인 전황은 여전히 연합군이
우세하다. 흔들리는 것들을 바로 잡아야겠어. 기껏 차호트가 제국군의 병력을 그만큼 깎아 놨는데, 오늘 안에
중부 관문을 넘어서지 못하면 미안하지.”

“어떻게 하시려고요?”

“람가군과 연합군을 한 번에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달리 있겠나.”

하카브가 웃고는 병사에게 준비를 하라 일렀다. 뒤돌아선 그가 디에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겠느냐는


물음에, 디에즈는 하카브의 손을 잡는 대신 무기를 점검했다.

어제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는 그날의 밤과 오늘의 새벽을 지나, 해가 저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중이었다. 장장
삼십여 시간 동안 벌어진 격전은 양측의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시험하듯 몰아쳤다.

계속해서 새로운 전력을 투입하는 연합군과 달리 제국군은 한정된 병력 내에서 긴 시간을 버텨 내야만 했고, 아침
해가 뜰 무렵 한계가 드러났다. 힘겹게 전투를 치르던 제국군의 한 축이 무너지며 전황이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차호트 람가가 장미대 대장 로즈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는 소식이 퍼지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연합군은
혼란에 휩싸였고, 제국군은 그 틈을 타서 신관과 치료사들을 파견하여 병사들을 보조했다. 로젤린의 시기적절한
활약과 리카르디스의 빠른 판단 덕분에 제국군은 이 전투를 더 이어 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눈에 띄게 전투력을 상실했던 연합군도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하카브를 바르제 방벽 전장의 지휘관으로 맞이하며
반격에 나섰다. 반드시 오늘 안에 중부 관문을 넘어서고야 말겠다는 듯, 아주 매섭게.

촤악, 검날이 목을 베어 갈랐다. 터져 나온 피가 투구 안쪽까지 침범했다. 칼릭스는 붉은색으로 흐려진 시야를


걷어 내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그 잠깐 멈칫한 사이 마인 병사 한 명이 칼릭스의 사각에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뒤늦게나마 반응했으나, 적은 이미 코앞에 와 있었다.
쾅!

충돌음이 한차례 주위를 휩쓸었다. 마지막까지 적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던 칼릭스는 자신에게 달려들던 병사가
나가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어금니대의 대장이 달려와 몸통 박치기를 한 것이었다. 연합군의 병사가 마차에
치인 듯 어딘가로 날아가 박히자 붉은수레바퀴군의 마인들이 칼릭스를 감싸듯 보호했다.

“내 금덩어리!”

“백작님 죽으면 우리 계약서도 죽는 거야!”

아직 농담할 힘이 남아 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뿐이었다. 투구를 벗은 칼릭스는 눈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인들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것에 비해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다른 제국군보다
뒤늦게 전장에 투입되었지만, 다른 그 어떤 곳보다도 험난하고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는 전장의 최전방에서 수
시간 전투를 치른 탓이었다.

칼릭스와 칼릭스의 마인대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슬슬 허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넘어지고, 무기를 놓치고, 평소
같으면 손쉽게 막아 냈을 일격에 피해를 입는 둥.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원초적인 행동조차도 버거워했다.
그야말로 정신력과 고집 하나로 버텨 내고 있는 시점이었다.

칼릭스는 자신을 감싸듯 포진해 있는 마인들이 일시에 행동을 멈춘 것을 알아챘다. 어딘가로 향하는 그들의
시선이 칼릭스의 눈길을 이끌었다. 연합군 측의 인조 마인 부대가 있는 곳이었다.

수많은 적군 사이에서 단 한 명의 병사가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서로를 짓뭉개는 전장 속, 한


연합군의 병사만이 멀거니 서 있었다. 그는 무기조차 들고 있지 않았다. 덜덜 몸을 떨던 남자는 제 몸을 감싸
안으려는 듯 옹송그렸다. 곧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귀를 날카롭게 스치는 비명이 인간의 본능을 건드렸다.

이건…… 위험하다.

칼릭스는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비명을 지른 인조 마인 병사가 경련하듯 몸을 떨더니 얼굴을 벅벅 긁기 시작했다. 온 얼굴의 피부를 찢어 버릴 듯


강하게 문지르던 남자가 성급하고 서투른 손놀림으로 투구를 벗어 던졌다.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목과 얼굴의
피부 위로는 굵은 혈관이 올라와 불룩거리며 움직이고, 실핏줄이 터진 눈에서는 피와 눈물이 섞여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자는 아프지도 않은지 벌어진 살갗 위로 손톱을 세워 몇 번씩이나 목을 긁어 댔다. 그가 침을 주르륵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의 고통스러운 소리였다. 그즈음 칼릭스의 마인대가 한 발짝씩 물러났다. 미처 의식하지도
못한 행동처럼 보였다.

칼릭스는 그들을 한번 살핀 후, 다시금 아까의 병사를 바라보았다. 잠깐 눈길을 뗀 사이, 남자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드득, 까드득. 뼈가 자라고, 근육이 팽창하며 찌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체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눈에 띌 정도의 기괴한 변화에 그의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병사는 일 분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완전히 변이했다. 흰자위는 완전히 붉게 되었고, 이마의 한쪽 뼈가 뿔처럼


튀어나왔다.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송곳니가 길게 자라 그 사이로 침을 줄줄 흘려 댔다.

소란스러웠던 전장이 마치 멈춘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싸움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기괴한 생명체는
성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잠자는 맹수가 깨어날까 두려운 사람들처럼.

철걱.

정적을 뚫는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제국군 병사가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바닥에 떨어진 병장기를 걷어차고 만
것이었다. ‘그것’의 근육이 갑작스러운 금속음에 반응하듯 꿈틀거렸다.

크아아아!

그때부터 멈췄던 전장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그것’이 괴이하게 울부짖으며 팔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손톱에 제국군 병사들이 가리가리 찢겨 날아갔다. 기괴한 모습의 외형과 갑옷을 입은 사람을 두 동강 내 버리는
믿을 수 없는 힘에서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변이한 ‘그것’의 정의를 내렸다.

“마, 마수다…….”

253 화.

대치 중이었던 제국군의 병사들은, 그것의 손톱에 아군이 가리가리 찢겨 나가자 모든 투지를 상실했다. 남은 것은
오로지 도망가야겠다는 본능뿐이었다.

“으아악!”

“괴, 괴물이야!”

뒤돌아선 제국군은 너무나도 무력하게 짓밟혔다. 통째로 머리를 뜯어내어 씹어 버리고, 몸으로 깔아뭉개며
들이받고, 팔다리를 잡아 뜯어 버리는 그것의 방식은 연합군 측의 병사들조차 겁을 먹을 정도였다.

칼릭스는 혼란의 현장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주위의 마인들은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어 있었다.


칼릭스는 저 괴물의 문제가 단순한 외형이 아닌, 그를 변화시킨 마력 자체라 직감했다. 마인들의 눈에는 대체
저것이 무엇으로 보이는 것일까.

인조 마인의 마력을 마주한 몇몇 마인들이 말했었다. 마수와 같은 종류의 힘이며, 한시도 쉬지 않고 터져 나갈


듯 날뛴다고.

[마수의 몸속에 있는 걸 인간한테 이식했다고요?]

토 나오는데요. 어금니대의 대장이 정말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윤리적으로?]

[그것도 그건데…… 뭔가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저도 마수는 몇 번 본 적 있어서 아는데요, 그게 막


함부로 인간 몸에 쑤셔 넣고 할 만한 게 못 되는 것 같아서요. 일반적인 마력이 아니에요. 아니 그걸 어떻게
인간한테 집어넣을 생각을 했지? 삶이 지루하대요? 색다르고 짜릿한 걸 원한 겁니까?]

[난들 아나.]

[참나, 발타 놈들도 제정신 아닌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어금니는 마수들의 불길한 마력을 반추하며 계속 중얼거렸다. 정말로 그걸? 그 무서운 걸 어떻게…… 그의
혼잣말은 칼릭스는 감지할 수 없는 마수의 마력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해 줬다.

어떻게, 그걸.

어금니의 예상대로, 마수의 힘은 일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던 듯했다.

‘이것도 하카브의 계산에 들어가 있었나?’

그에 대한 답은 곧바로 얻을 수 있었다. 마수의 주위, 몇 분 전까지 동료였던 인조 마인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칼릭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예상 밖의 상황이라는 거군. 그렇다면 왜 지금…….’

상황을 되짚어 보던 칼릭스는 왜 병사가 저런 불운을 맞이해야만 했는지 깨달았다.

이틀간의 전투가 그들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음이 분명했다. 마수의 힘이 장기간 전투에 지친 육체와 정신력을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순간 오한이 칼릭스를 덮쳤다.

수백이 넘는 인조 마인들. 이들이 전부 불이 붙지 않은 폭발물이었다. 이는 어떻게 막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재해나 다름없었다.

“모두-!”

퇴각 명령을 내리려던 칼릭스는 인간들을 뭉개며 전진하는 마수의 앞에 덜덜 떨며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사고뭉치 에렌이었다. 전쟁터에 발을 들이기는 너무 이르다 생각해 떼어 놓고 왔건만, 몰래 숨어 온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에렌!”

에렌은 굳어만 있었다. 아예 소리를 듣지도 못한 것 같았다. 도망치는 병사들을 거스른 칼릭스는 마수가 에렌을
짓뭉개기 전에 당도했다.

후욱, 피비린내와 역한 냄새가 섞인 뜨거운 숨결이 불어왔다.

마수는 바로 코앞에 있었다. 칼릭스는 에렌을 밀쳐 내며 검을 들어 대항하려 했다. 하지만 시야를 가득 메운


거대한 마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칼릭스는 직감했다.

‘안 돼.’
어떤 방법을 써도 막아 내지 못할 것이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마수가 크게 팔을 휘둘렀다. 칼릭스는 몸을 숙여 공격을 피했다. 마수의 발아래에 활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칼릭스는 날 듯이 앞으로 구르며 활을 집었다.

마수가 사라진 목표물을 찾는 것 보다, 그 시야 한참 아래에서 칼릭스가 자세를 잡는 게 먼저였다. 화살을


시위에 건 칼릭스가 휘파람을 휙 불었다. 괴물의 얼굴이 아래를 향하는 순간 화살이 마수의 눈에 박혔다.

“크아아악!”

마수가 고통스러워하며 팔을 붕붕 휘둘렀다. 화살을 쏘자마자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칼릭스는 마수가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창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움직임이 단순해졌군.’

칼릭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며 창 하나를 던졌다. 일부러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방패에 맞췄던 터라 소리가
크게 났다. 마수의 주의가 그곳으로 향했다.

칼릭스는 바닥을 미끄러지듯 들어가며 마수의 심장에 창을 박아 넣었다. 두터운 근육을 뚫고 심장까지 닿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꿰뚫린 심장은 상처가 난 즉시 몸 안을 거칠게 도는 마력에 의해 수복되기 시작했다.

창을 비틀어 확실하게 타격을 주려 했던 칼릭스는 다시금 발악하듯 팔을 휘두른 마수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칼릭스가 나가떨어졌다.

“커억!”

바닥을 구른 칼릭스는 속이 뒤집어지는 통증에 일어서지 못했다.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이 정도라니. 물소가
들이받은 것만 같았다. 칼릭스는 잠시간 숨을 쉬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피와 침이 섞여 그의 턱을 따라
흘러내렸다.

흔들리고 부예진 시야로 심장에 창을 꽂은 마수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음에도 칼릭스는 움직이지 못했다.

끝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발걸음 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곧 누군가의 발이
칼릭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갑옷이나 부츠 따위가 아닌, 맨발이었다.

칼릭스는 힘겹게 올려다보았다. 바지만 걸친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보였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독수리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마카롱이었다.

“마, 마카롱 님…….”

칼릭스가 헐떡이며 그를 불렀다. 마카롱은 흘끗 칼릭스를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마수를 마주했다.

칼릭스는 역광으로 그림자가 드리운 남자의 표정이 평소와 다른 것을 눈치챘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은
분노를 곱씹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눈물을 간신히 참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의 턱 근육이 경직되어 움직였다.

“……그 쓰레기 같은 것들이, 감히…….”


끓다 못해 녹아 버린 분노가 얽혀 있는 목소리였다.

마카롱은 눈앞의 괴물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었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분노는 인조 마인들을 만들어 낸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다.

마카롱의 팔에 핏줄이 올라오더니 손톱이 날카로워졌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달려들었던
괴물의 최후는 허무할 정도였다. 마카롱이 괴물의 어깨에 손을 쑤셔 넣자마자 그 큰 몸이 털썩 쓰러졌다. 심장에
창을 박고도 날뛰었던, 그것이.

마카롱의 손에는 검붉은 결정이 들려 있었다. 피로 젖은 보석은 석양빛을 받아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인조


마인의 근원인 마수의 결정이었다.

마카롱이 피가 묻은 손으로 제 얼굴을 닦아 냈다. 속눈썹에 고인 핏방울이 투두둑 흘러내렸다. 눈에서 볼을 지나,
턱으로. 마카롱의 얼굴에 붉은 궤적을 남긴 피가 눈물처럼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쯤에는 원숭이가 달려와 에렌의 등짝을 때리고, 어금니와 까마귀대의 대장이 다가와 칼릭스를 부축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마카롱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칼릭스도 그를 부르지 못했다.

* * *

상황이 점점 악화되었다. 아까 전의 일이 우연이 아니라는 듯, 인조 마인들 중 폭주하는 인원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급격한 변이를 버티지 못한 인조 마인들의 기괴한 형태와 그보다 더 놀라운 무력에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급급했다. 힘을 합쳐 그것들을 죽여 보고자 한 시도도 있었지만, 생명을 깎아 가며 타오르는 힘
앞에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으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에 디에즈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감각과 차가운 시선이 전장을 훑었다. 갑작스럽게 마수의
기운이 증폭하더니, 기묘한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수의 결정을 버텨 내지 못하는 실패작들의 모습이었다. 몸을 지배하려는 마수의 마력을 통제할 수 있는


정예병들만 모은 군대였건만, 그들조차 실패작이었단 말인가?

디에즈에게 상황을 전달받은 하카브는 인조 마인들이 완전히 변이하기 전에 제국군의 중앙으로 몰아넣었다.
연합군에 피해가 오기 전에 먼저 패를 버린 것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제국군 사이에서 위기에 몰린 인조 마인들이
하나둘 비명을 지르며 변이하기 시작했다.

디에즈의 예민한 감각에 전장 여기저기에서 피어오르는 마수의 마력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마른 들판에 불이
옮겨붙는 듯한 빠른 속도였다.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 인조 마인들은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울부짖었다. 위협적인 모습의 일면에는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또한 공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몸을 뒤틀고, 눈물을 흘리며, 제국군을 찢어발겼다.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고 일라베니아로 나아가는 변이자들에게는 아주 뚜렷한 목적이 있는 듯 보였다.

디에즈는 그것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들의 몸 안쪽에서 사납게 요동치는 감정이 마력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괴롭다. 고통스러워, 온몸이 찢겨 나가는 것 같아. 반드시, 너희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너른 하늘 아래의 전장을 메운 감정이라고는 오직 그뿐이었다. 그 분노가 디에즈가 가지고 있는, 같은 종류의
감정을 일깨웠다. 우리의 분노, 우리의 목적. 우리가 바라는 것.

디에즈는 거친 감정의 격류에 몸을 맡겼다. 그는 과거의 파편들과 함께 인간들을 짓밟으며 천천히 나아갔다.

디에즈는 날아오는 무기를 건틀렛으로 쳐 내고, 맨손으로 병사의 목을 잡아 뜯었다. 눈알에 피가 튀어도 눈
깜짝하지 않았다. 중부 관문과 그 너머를 향하는 집요한 시선에는 똘똘 뭉친 집념이 느껴졌다.

무너져, 무너져라.

쿵, 쿵. 거인들의 진군이 땅을 흔들었다. 디에즈는 다시금 누군가의 목에 검을 꽂아 넣으며 한걸음 더 앞으로


걸었다. 이제는 무너져라. 끝없이 속으로 그 말을 되뇌며.

254 화.

무서운 맹공격이 이어졌다.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죽음조차 불사하는 발타의 병사들은 괴이한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변이자들 때문에 혼란에 잠긴 제국군에게 영리한 타격을 가하며 마지막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제국군은 차츰 밀리고 밀려, 이내 바르제 방벽 바로 앞까지 밀려났다. 경계 없이 잘게 흩어져 뒤섞인 두 세력은


별다른 전략도 없이 개싸움을 벌였다.

허억, 헉. 자신이 내뱉는 숨소리가 귀에서 울리는 듯 선명하고 크게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힘겹게 연합군의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앞으로 넘어질 뻔한 그녀를 에버하르트가 겨우 지탱했다.

괴물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승리를 목전에 둔 연합군의 병사들은 장시간의 전투를 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제국군을 밀어붙였다.

하늘 끝까지 오른 사기는 감히 그 누구도 꺾지 못할 만큼 견고해 보였다. 제국군도 그런 그들을 힘겹게 막아


내고는 있으나, 해치운 적보다도 덤벼드는 적의 수가 훨씬 많았다. 모래성 위로 거대한 파도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했다.

레티시아는 바싹 말라 거칠어진 입술을 혀로 훑었다.

‘목말라.’

그녀는 달려드는 병사의 검을 쳐 내며 멍하니 생각했다.

‘쉬고 싶어.’

허억, 숨을 크게 들이쉬자 차가운 공기가 목구멍 안쪽에 쩍쩍 달라붙었다. 감각이 하나씩 무뎌졌다. 코를 찌르던
역겨운 피 냄새가 사라졌다. 여기저기 찔리고 베인 상처들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눈으로 전장을 보면서도
이것이 무슨 광경인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이 몽롱했다.

‘이게 뭘까. 대체.’

레티시아는 무뎌진 상념 아래 또 병사 한 명을 베어 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또 한 명.

‘뭘 위해서, 우리는…….’

한계에 몰린 정신이 발목을 붙들려 했지만, 숨을 쉬는 것처럼 훈련해 왔던 지난날의 본능이 레티시아의 몸을
이끌었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 살짝 고개를 틀어 피하고, 상대의 움직임을 읽어 내 공격을 예측하고,
막아 내고, 죽이고, 피하고, 죽였다.

삐걱거리는 몸은 꿈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주저앉고 싶었다.

언제까지 이 고통이 지속되는 걸까. 레티시아의 몸이 휘청였다. 무릎이 꺾였다.

[레티시아.]

이 전쟁통에 어울리지 않는 담담한 여자의 목소리가 레티시아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곧…….]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레티시아가
다리에 힘을 주고 쓰러지는 몸을 겨우 지탱했다.

덜그럭. 금속음이 가까이서 나기에 바라보니, 발 위로 검이 떨어져 있었다. 정신을 잃은 찰나 떨어트린 것이었다.
주울 힘조차 없었다. 레티시아는 비틀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인상을 쓰고 달려드는 살육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상대를 찢어발길 듯한 사나운 악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눈앞에 있는 적들이 아닌, 사각에서 오는 본능의 경고를 감지했다. 날카롭게 회전하는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였다. 자신을 향하지 않았으나, 옆에는…….

지쳐 있던 레티시아는 한쪽 발로 땅을 디디며 몸을 회전시켰다. 빠르게 손을 뻗는 것은 그녀가 소리를 감지한 그


순간 이뤄진 일이었다.

캉!

에버하르트를 향해 날아가던 도끼의 궤적에, 레티시아의 손이 불쑥 나타났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며 높은


소리를 울렸다.

“레티시아!”

에버하르트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악!”

레티시아는 흐릿한 감각을 난폭하게 비집고 들어오는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작은 도끼가 건틀렛을 뚫고 살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레티시아는 덜덜 떨었다. 이보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적은 있지만, 이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좁은 혈관과
신경을 가시 줄기가 파헤치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레티시아는 헐떡거리며 헛구역질했다.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반응에서 이것이 단순한 부상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가 급하게 그녀의 건틀렛을 벗겨 냈다. 피부 바로 아래 혈관들이 튀어나올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파편’
이었다.

“누가……!”

에버하르트는 황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쇠와 독이 날아다니는, 그저 살의만 가득한 공간이었다. 레티시아를


치료할 만한 그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에버하르트는 쓰러진 레티시아를 질질 끌고 가며 후퇴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검을 드는 것조차 힘들어했던 사람


같지 않은 괴력이었다.

“허, 윽…….”

핏줄이 터진 레티시아의 눈이 붉게 변했다. 눈물이 줄줄 흐르고 한계를 넘은 고통이 온몸을 마비시켰다. 짐처럼
끌려가던 레티시아는 주위에서 픽픽 쓰러지는 병사들을 바라보면서도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에 비친
광경을 멍하니 되새길 뿐이었다.

‘…….’

그러고 보니 이렇게 누워서 하늘을 바라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레티시아는 멍한 머리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차호트 람가가 죽은 후, 해가 질 무렵이었다. 로젤린은 장미대를 이끌 권한을 다른 지휘관에게 넘기고
전장을 떠나려 했다.

그때, 돌아선 로젤린이 하늘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레티시아.]

그녀가 뭐라고 말했더라?

[곧…….]

로젤린의 입이 움직였다.

[밤이 온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던가. 붉은 석양빛은 사라지고 밤의 장막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놋쇠저울과 소금바위,
마른가시나무, 발타와 동부 전선, 붉은수레바퀴령까지의 길고 험난한 여정과 모래성 같은 중부 관문을 지키며
필사적으로 버텨 낸 2 주의 시간. 그 간절한 기다림의 끝이 찾아왔다.

별이 빛나는 까만 밤하늘이 레티시아의 눈동자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훅, 바람이 불었다. 무너진 방벽 위의 깃발을 흩날리게 하고, 에버하르트의 눈물을 얼어붙게 만들며, 땅에 닿아
있는 레티시아의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이 일대 모두를 휩쓸 듯 몰아치는 거대한 돌풍이었다.

밤바다를 표류하는 배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던 구름이 떠밀렸다. 어두웠던 땅 아래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하얀 보름달에서 눈이 시릴 정도의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빛과 함께, 조용한 변화가
피어올랐다.

중부 관문을 향해 나아가던 디에즈가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세상을 뒤덮기


시작한 거대한 고요가, 노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선명하고 생생했다. 믿을 수 없이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깊은 바다였고, 태고의 숲이었으며, 수억
개의 별이 흐르는 강을 품은 밤하늘이었다. 모든 것을 잠기게 하는 거대한 생명의 힘. 디에즈는 이 힘을 느껴 본
적 있었다.

“……로젤린.”

디에즈가 조용하게 속삭였다. 수백 년 전, 세상의 법칙을 순식간에 뒤틀며 새로운 종을 탄생시켰던, 어린 왕이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그 힘은 그때처럼 다시금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때처럼 고통스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전장 위로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디에즈는 자기도 모르게 검을 떨어트린 채,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라베니아를 향하던 과거의 분노가
로젤린의 힘에 이끌리듯 변화하고 있었다. 수백 년의 원념, 마수의 결정은 어떤 보석보다 단단했고, 그
무엇으로도 깨트릴 수 없었다. 디에즈는 최소한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

디에즈의 눈앞에 있던 변이자 한 명이 갑작스럽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털썩, 육중한 무언가가 땅에
충돌하는 소리가 하나둘 늘어났다. 변이자들이 기절하듯 쓰러졌다.

무엇으로도 깨지지 않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흘러내린 그것은 이내 땅으로 녹아내렸다. 바람에 섞여
불어오며, 치달았다. 달빛 아래 찬란히 비산했다.

오로지 마력을 가진 이들만이 느낄 수 있었다. 눈이 시큰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 감각의 세계에 그려졌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에는, 일라베니아를 향하던 과거의 원념들이 모두 녹아, 멈춰 쓰러져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디에즈의 손이 잘게 떨렸다. 우리가 바라던 결말은 이게 아니지 않았나? 일라베니아는?
일라베니아의 죽음은…….

디에즈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종래에 그의 시선은 전장이 아닌 제 발아래를 향했다. 그곳에는 피 묻은
자신의 검이 있었다. 한 번 떨어트렸지만,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손이 닿는 그곳에 여전히 있었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디에즈는 허리를 숙여 검을 집었다. 꽝꽝 얼어 딱딱해진 땅이 손마디에 닿았다.

그 순간, 검을 집은 손가락 사이를 무언가가 간지럽혔다. 아주 부드럽고, 작은 무언가였다. 디에즈는 피 묻은


손으로 검을 치웠다. 그 아래 가려져 있던 푸른 새싹이 드러났다.

한겨울, 군데군데 눈이 덮여 있는 검은 땅 위에서 누가 새싹을 보리라 생각했을까. 디에즈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적조차 까먹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은 환각임이 아님을 알리듯 얼어붙은 땅을 깨고 자라나더니
꽃망울을 맺었다. 곧 터지듯 개화한 하얀 꽃송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흔한 잡초였다.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불모지에서도 끈질기게 꽃을 피워 내는, 리쉬.

가장 먼저 피고, 가장 나중에 진다. 지금의 세대에는 퇴색되어 버린 지난날 ‘축복의 밤’의 상징이었다.

디에즈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발아래로 녹색과 흰색의 연약한 생명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하나, 셋, 일곱,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나 무성하게. 널브러진 무기와 시체의 옆에 자라난 꽃은 피가 굳어
검어진 땅을 온통 하얗게 뒤덮었다.

어느새인가부터 금속음이 들리지 않았다. 마력을 가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도 멈춰 서 있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만이 공간을 울렸다.

디에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달이 검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전설로 치부했던 ‘축복의 밤’이었다.

깜박.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방금 전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게


물든 세상에 떠 있는 검은 달이 빛을 쏟아 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어두웠다가, 그 무엇보다도 밝게 빛났다.
그것이 검은 것인지 하얀 것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보아 왔던,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뒤집혔다. 빛과
그림자의 법칙을 모르는 누군가가 그려 놓은 명화 속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255 화.

사람들은 몸을 떨며 숨조차 멈췄다. 모두가 하늘을, 꽃이 핀 땅을 바라보았다.

그 정적인 공간 속. 갑작스럽게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수만의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의
행방을 찾았다.

무너진 성벽 위에 한 남자가 있었다. 피와 재, 진흙과 오물, 시체가 늘어선 광경에 그는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대신관의 의복과 금박을 입힌 화려한 하프까지.

제국군의 병사들은 남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대신관 라헤안시였다. 그의 손가락이 유려하게 흘렀다.

비현실적인 신의 세계 속. 사람들은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세간에 떠돌기 시작했던 ‘예언’을 상기했다.

이델라브힘의 사자, 독수리의 가호를 받는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와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어둠을 걷어
내고 대륙을 빛으로 물들일 것이라는 내용의.

삐이이익---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창공을 찢으며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독수리가 하얀 밤과
검은 달빛을 가로지르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도무지 현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독수리는 검은 달에서부터 날아와 사람들의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쳤다. 이내 그것이 도달한 곳은 전장 옆의 높은


언덕이었다.

검은 달 아래의 언덕 위. 두 사람이 있었다. 백마를 타고 있는 남자와 흑마를 타고 있는 여자였다. 여자가 팔을


들어 올리자 독수리가 천천히 날갯짓하며 그 위로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한순간도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긴긴밤의 끝을 알리는 빛이 찾아와.”

위대한 예언을 한 대신관이 엄숙하게 말했다.

“대륙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 낼 것이다.”

발타의 병사들은 신성한 검은 달 아래 더 이상 검을 들지 못하고 떨어트렸다.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 * *
로젤린은 조용한 공간을 눈에 새기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멍하니 말을 꺼내었다.

“조용하네요.”

로젤린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상상해 본 적 있습니다. 제 오랜 고통의 끝은 어떻게 찾아올지.”

리카르디스는 조용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저에게는 너무나도 버거웠고, 무서웠고, 거대해서…… 그래서,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무너질까, 댐이


무너지는 듯 사나울까…….”

로젤린이 다시 눈을 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수천, 수만의 인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마치


그림책의 한 페이지를 찢어 그 자리에 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런 거였네요.”

로젤린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전장에 내리깔린 정적을 음미하기라도 하는 듯이.

“이렇게 고요한 거였어요.”

언덕 아래에서부터 밀어 올리는 바람이 불어왔다. 로젤린의 머리카락이 넓게 흩날렸다. 그 뒤로 검고 거대한 달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 * *

늦은 밤부터는 부슬비가 내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검은 달빛이 수십, 수백 갈래로 쪼개져 비산하는
광경은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오랫동안 기억할 광경이었다.

새벽이 될 무렵 온 세상을 환상처럼 물들였던 축복의 밤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이슬이 맺혀 있는 푸른 잎과 하얀


꽃송이들뿐이었다.

중부 관문, 연합군 진영.

각국의 사령관들이 모이는 대회의가 열렸다. 연이은 승리에 취해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낭패가 서려 있었다.

“전쟁을 재개하겠다, 이 말입니까?”

당혹스러운 목소리였다. 이에 하카브는 그 말이 더 당혹스럽다는 듯 말을 비꼬았다.

“그러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라도 할까요? 대체 무어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이유를 모르리라 생각하진 않는데.”

“일라베니아의 총사령관이 죽음에서 살아 돌아와 그의 호위 기사와 축복의 밤을 부른 것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테고.”
정확하게 그 이유 때문이었던 터라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죽지 않았으니 신의 가호로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고, 부를 만한 능력이 있으니 부른 것뿐입니다.


축복의 밤을 띄우는 자가 신의 자식이 아님이 낱낱이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흔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몇 백
년간 지속되어 왔던 일라베니아의 농간에 다시 놀아날 셈입니까. 지레 겁먹고 돌아가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여태껏 들인 공과 피해는 홀로 감수하셔야 될 줄로 압니다.”

이렇게 겁을 줬음에도 아니라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심한 인간 같으니. 하카브가 혀를 찼다.

신성 제국 일라베니아를 규탄하는 전쟁이었다. 때문에 이델라브힘에 대한 믿음도 조금은 흔들렸지만, 오랫동안


사람들이 믿어 왔던 신앙 자체가 퇴색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아직까지 신의 존재를 믿는 이들의 눈앞에, 신의
세계가 열리는 밤이 찾아온 것이었다.

사람들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이 정말 신이 보낸 사자가 아닐까?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실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리카르디스.’

하카브는 그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정말 거하게 뒤통수를 맞았다.

생명이 순환하는 밤이라 하였던가. 그 말과 같았다.

죽었던 땅이 살아나는 기적 속에서 마독 ‘파편’과 인조 마인에게 심어져 있던 마수의 힘이 모두 사라졌다. 인조


마인들은 모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변이를 거쳤던 이들은 모두 사망했으며, 변이하지 않은 인조 마인들은 모두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연합군은 전의와 무기.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두 가지를 잃었다. 제국군보다 우세한 병력만큼은 지켜 내야
했다. 코앞이었다. 일라베니아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딱 한 발짝만 더 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연합군의 사령관들도 그 때문에 당장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어물쩍거리는 것이었다. 두렵긴 한데, 아깝기도
하니까. 온전히 줏대를 세우지도, 완전히 휩쓸려 나가지도 못하는 개만도 못한 종자들 같으니. 하카브는 속에서
분노를 끓였다.

선동이 어느 정도 유효했던 것인지 하카브의 의견에 옹호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났다. 일라베니아를 배신했던
힐리사고도 입장이 입장인 터라, 전쟁을 재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축복의 밤이 떴을지언정 전쟁은 끝난 게 아니오!”

맞는 말이었다. 축복의 밤으로 일라베니아의 죄의 증거가 사라졌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과거의 죄마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일라베니아가 있는 한 영원히 새겨져 있을 낙인이었다. 그러니 일라베니아의 횡포 아래
고통받았던 연합군이 전쟁을 지속할 명분은 여전히 있는 셈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이를 모르지는 않을 텐데. 고작 이런 내부 분열과 시간 벌기 용도로 축복의 밤을 띄운 것이란


말인가? 하카브는 팔짱을 낀 채 고심했다. 덜컥 의심이 들기 시작하니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니, 뭔가가 더 있을 텐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리카르디스였다. 분명 무언가를 더 준비해 뒀을 것이다. 축복의 밤을 계기로 이


전황을 뒤집어 버릴 수 있는.
그리고 발아래, 차가운 땅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목까지 올라온 불안이 하카브의 숨을 꾹 조일 때. 그것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총사령관님!”

발타의 병사가 막사의 천을 헐레벌떡 지나쳐 들어왔다. 하카브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그는 말을 듣기도 전에
일어나 병사를 밀치고 성큼성큼 걸었다.

막사의 입구를 나서자 쨍한 햇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하카브는 손을 들어 올려 그늘을 만들며 눈을 찡그렸다.
빛에 차츰 익숙해진 눈이 낯익은 이의 얼굴을 담아 냈다.

“하카브 위 리비타.”

발타 왕국의 3 왕녀, 간제 위 리비타. 그녀가 전쟁터가 아닌 궁전이 어울릴 법한 정복 차림새로 연합군의 주둔지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하카브의 시선이 간제에게서 벗어나, 그녀의 곁에 서 있는 브네학스 아문과 포위하듯 둘러싼 발타의 병사들에게
닿았다.

하카브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간제는 일국의 왕녀다운 위엄 있는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지고한 신분으로 백성을 겁박하여 불법적인 실험을 자행한 죄, 탐욕에 눈이 멀어 피를 나눈 형제, 자매를
살해한 죄, 과를 위조하여 지엄한 리비타의 법도를 어지럽힌 죄, 힉살라를 음독하여 시해하려 한 죄. 수백 년간
지속된 평화 협정을 깨어 대륙을 도탄에 빠트린 죄.”

사람들이 헉 숨을 들이켰다. 하카브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비릿하게 웃었다.

“죽음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무거운 죄로다. 간제 위 리비타가 지고한 힉살라의 명령을 받들어 이 자리에
왔노니.”

간제가 손을 뻗었다.

“죄인을 포박하라.”

하카브의 친위대조차 하카브를 감싸지 못했다. 힉살라의 명령 하에만 움직이는 아문의 가주가 간제와 함께하고
있었으며, 과의 문장이 찍힌 서신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이에 하카브가 끌고 온 발타의 병력도 간제의 휘하에
흡수된 상태였다. 친위대 몇 천 명 정도로는 그 수에 대항할 수 없었다.

하카브는 덤덤한 얼굴로 반쯤 허물어진 바르제 방벽을 바라보았다.

‘한 발.’

그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고작 한 발짝 남았는데.’

거친 남자들의 손이 무자비하게 하카브를 붙잡아 무릎을 꿇렸다. 간제는 그런 하카브의 모습을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 * *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하카브가 공식적으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이후, 남은 연합군은 더욱 거센 혼란에 휩싸였다.

발타의 새로운 사령관, 간제 위 리비타가 이번 전쟁에서 손을 떼겠다 공표했을 뿐 아니라, 발타의 수족이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마람 왕국 또한 병력을 물리겠다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병력의 25 정도가 뭉텅 떨어져 나간
셈이었다. 연합군으로서도 위기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분열이 심화 되었다. 발타와 마람까지 빠진 지금, 중부 관문 공략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 더 나아가
중부 관문을 넘어설 수는 있을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심지어는 식량조차 부족한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다른 병참 기지로부터 오고는 있어 굶어 죽지까지는 않을 테지만,


그 사이에 연합군의 사기가 얼마나 떨어지고 또 얼마나 분열될지는 빤한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너무나도 아까운 것이다. 지금의 이 상황이.

256 화.

코앞에는 금이 간 중부 관문이 있었다. 그 뒤는 황금이 묻힌 일라베니아의 보고였다.

전쟁에는 나라가 휘청할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갔다. 연합군에 포함된 수 개의 나라들 또한 적지 않은 비용을


소모하며 이 자리에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용한 지금은 선뜻
발걸음을 돌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얻는 것은 둘째 치고, 손실만 잔뜩 떠안고 끝내게 되는 셈이었으니.

발타와 마람의 병력이 사라진 이후 가장 강경한 주전파가 된 힐리사고의 사령관은 그 점을 끝없이 주지시키며
타국의 사령관들을 설득했다.

“축복의 밤만 아니었더라도 바르제 방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틀간의 전투로 제국군이 입은 피해는 몇 시간
정도의 유예로 수복될 만한 것이 아니고, 발타와 마람군이 빠졌으나 여전히 연합군의 수가 우세합니다. 다 이긴
전쟁이라 이 말입니다. 헛된 신의 위명에 겁먹지 마십시오.“

각국의 사령관들은 힐리사고의 주장에 힘을 입어 손을 모아 다시금 힘을 내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대화를 마치 듣기라도 한 것처럼, 리카르디스가 움직였다.

오호라, 헛된 신의 위명에는 겁먹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겁먹을 만한 걸 어디 한번 찾아볼까. 하는 듯이.

회의 이후. 흩어져 각자의 진영에 도착한 연합군의 사령관들은 본 적 없는 새로운 모양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받았다.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일라베니아 황실이 반란으로 인해 전복되었다는 것이었다.

“뭐, 이, 미친.”

미노가 강 전투로 사망한 힐리사고의 첫째 왕자를 대신하여 전장에 나와 있는 둘째 왕자는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 * *

마인을 학대하는 풍습을 거슬러 올라간 역사에는 일라베니아의 치부가 새겨져 있었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아니다,
사실무근이다, 증거 있냐, 발뺌했지만 발타와 힐리사고를 포함한 대륙의 여기저기에 그들의 만행에 대한 단서가
조금씩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단서일 뿐, 정확한 증거가 되지 못했다. 수백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목격자나
확인 가능한 증거가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일라베니아 황실이 여태껏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황실의 입장과 다르게 반응하는 자들도 있었다. 탐욕스러운 황실 아래 굶주렸던 수많은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일라베니아 황제가 ‘신의 아들인 내가, 이델라브힘의 뜻을 받들어 너희들을
굽어살피겠다.’ 하며 너희들도 영광된 신성 제국 아래 살아가는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라-세금을 많이 내라-
고 얘기했던 그 긴 세월들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실제로 신의 힘은 짧은 축복이나 성수만으로 죽은 땅을 되살려 과실을


맺게 하고, 메말라 가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황실이 백성을 먹여 살린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밥상을 엎다 못해 밥그릇까지 깨 버린 상황이었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이델라브힘을 맹신하는 마음 아래 묻어 두었던 황실에 대한 불신이 불어오는 바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가 아는 귀한 분께서 그러시더군요.”

여자는 닫힌 커튼을 살짝 열어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둑한 바깥에서 횃불의 무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와아아,
함성과 무언가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 황실에 대해 욕설을 지껄이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 앉아 있는 퉁퉁한 귀족 남자가 마른 목을 축이려 침을 삼켰다. 테이블에 찻잔이 있음에도 그 존재 자체를


잊고 있는 듯 보였다.

여자는 아까의 말을 이어서 했다.

“월계수 나무를 시들게 하려면 어찌하면 좋겠나, 클로에?”

황금정원의 클로에. 백작위를 계승받은 레이몬드의 부인이자, 리카르디스의 가신인 그녀는 황제파 중에서도
세력이 거대한 어느 귀족과 마주하는 중이었다.

“이파리를 뜯어 낼까. 굵은 가지를 쳐 낼까. 그것도 아니면 굵은 기둥을 잘라 버릴까. 하지만, 밑동만 남는다
하더라도 긴 세월 뒤에는 다시 가지를 뻗고 푸른 이파리로 그늘을 드리우겠지. 어쩌면 좋을까. 그대라면 어떻게
하겠나?”

“……백작 부인.”

클로에는 뒤를 돌아 남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가 상냥하게 웃었다.

“그래서 저는 ‘뿌리가 밑에서 받쳐 주지 않으면, 그 나무가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 말씀을 올렸었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작 각하?”

남자는 클로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았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설원 위에서도 푸른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월계수라 했다. 그리고 평민들은 그 뿌리라 말했다. 근간이라는 뜻이었으나, 흙바닥 밑에 묻힌 하찮은 존재라
여겨지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기사의 직위를 얻은 평민들을 ‘뿌리’라 부르는 것 또한 그 일환이었다.

남자는 지금만큼 ‘뿌리’의 존재를 뼈저리게 실감했던 적이 없었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클로에를 노려보았다.
클로에가 사뿐히 걸어와 공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의미 없는 대화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각하. 유예 기간은 충분했던 걸로 압니다. 이제 선택해
주셔야겠습니다.”

클로에가 내놓은 선택지란 딱 두 개뿐이었다. 그 선택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위험은 따라오게 되어 있었다.
공작은 고개를 숙여 손등에 이마를 댄 채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황실은 전쟁을 치르며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신에게서 받은 절대적인 권력과 나라를 다스리는 거대한 무력을
잃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명으로 점철된 역사뿐이었다.

황실은 백성을 버렸고, 백성도 황실을 버렸다. 나라의 틀을 유지할 수 있는 수백 년의 유대감은 산산조각 나
뾰족뾰족한 형태로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공작도 그를 모르지는 않았으나 반란이 실패하게 될 시의 위험성이
너무 높았다. 그 결말은 단두대뿐일 테니.

남자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달그락. 클로에가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무척 신중하시군요.”

온화한 목소리였으나 질질 끌어서 짜증 난다는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이것이 결정하시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클로에가 뒤에 있는 남자에게 손짓해 무언가를 가져오게 했다. 잘 접혀 있는 손수건 뭉치였다. 공작의 얼굴에
의문의 빛이 어렸다. 하지만 클로에가 손수건을 테이블 위로 하나하나 펼쳐서 나열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공작의
얼굴에는 의문이 아닌 경악이 대신 떠올랐다.

황제파와 죽은 1 황자 엘피디오파에 속한 귀족 가문들의 문양이 자수 된 손수건이었다. 이런 상황이니만큼 단순히


친분을 과시하고자 늘여 놓은 것이 아니었다. 이는 변절의 의지를 보인 자들이 내민 계약서였다. 한 장, 두 장,
세 장. 다섯 장, 열 장. 손수건이 계속해서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공작은 말을 잇지 못하고 아연하게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총 스물네 장의 손수건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클로에는 태연하게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하고는 다시 남자를 마주했다. 그녀가 느긋하게 찻잔을 집어 들어
공중에서 기울였다. 주르륵 아래로 흘러내린 찻물이 그녀의 치마 끝자락을 물들였다.

“어머, 차를 흘려 버렸네요.”

의도적으로 행동해 놓고 클로에는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가렸다. 공작은 이를 악물고 있다가, 한참


후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돌려주지 않으셔도 좋소.”

클로에가 눈을 접어 생긋 웃었다.

“감사드립니다, 각하”
* * *

리카르디스도 전쟁이 발발한 처음부터 반란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황실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이 공고히 쌓여
있던 그때 반란을 저질렀다간 고꾸라지게 되는 것은 도리어 리카르디스 쪽이었을 것이다.

한데 전쟁이 진행되는 일련의 흐름이 일라베니아를, 정확히는 일라베니아의 황실을 거세게 흔들었다.
리카르디스는 발타에서 간제와 동맹을 맺은 이후, 자신이 일평생 겨뤄 왔던 황실에서의 사투와 이번 전쟁을 한
번에 끌어내릴 방법을 찾았다.

몇 주 전, 동부전선.

[축복의 밤을 기점으로 연합군이 분열될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려는 자들도 있을 테고, 이 땅에 축복을 불러온
새로운 신의 아들에게 검을 겨눠도 되는가? 고민하는 자도 있을 것이고, 그와 상관없이 일라베니아를
무너트리겠다는 열성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자도 있겠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함께 나아가던 이들이 각자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전쟁은 일시적으로 멈추게 되어 있다.]

‘축복의 밤’을 중부 관문을 보호하는 방벽으로 쓰겠다는 리카르디스의 계획을 들은 클로에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나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델라브힘을 믿는 나라들은 물론이고, 크레안 티다니온의 영향을 깊게 받는 발타와 마람 또한 하늘에 뜬 검은


달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축복의 밤이 뜨면 전쟁은 잠시간 중단된다. 그건 추측이 아닌 확신이었다. 하지만
그건 중부 관문이 함락되는 시간을 늦추는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축복의 밤을 띄운다고 해도, 일라베니아가 과거에 저지른 죄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인들을 살해하여 이
땅을 불모지로 만든 것도 모자라, 그 사실을 은폐하고 수백 년간 대륙을 기만한, 그 죄가.

클로에의 얼굴에 의문스러운 빛이 띠자 리카르디스가 생긋 웃었다.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이.

[일라베니아를 무너트린다.]

클로에는 잠깐 숨을 멈추고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나는 그 폐허 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

클로에는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가렸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무언가를 계산한 클로에는 눈이 뻑뻑해질 즈음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될 거 같네요.]

257 화.

[그렇지?]

태연한 리카르디스의 태도에 클로에는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일라베니아’를 무너트리는 일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을 테지만, ‘일라베니아 황실’은 방법에 따라 아주 짧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황제가 있는 황실을 점거하는 그 행위 하나만으로 가능한 것이었으니.

힘을 잃고 추문에 휩싸여 있는 일라베니아가 뭐가 예쁘다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싸고 있겠나. 연합군에게


명분만 줄 뿐인데. 필요 없으면 버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물론 여러 문제가 있긴 하지. 상비군과 황제파의 귀족들이 수도에 남아 있는 상황이니. 그러니 일이 있기


전까지, 그대가 해야 할 일이 많아.]

수도라는 공간으로 한정 짓는다면 리카르디스 휘하의 세력보다 황제의 세력이 아직 더 강했다. 황제의 수족을
잘라 내고, 포섭하는 일이 반란의 시작이 될 것이다.

평화로운 일라베니아였다면 불가능했을 테지만, 지금은 전란의 한가운데였다. 일라베니아 제국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황실에 절개를 지킬 이들은 많지 않았다.

[명분은 많으니 적당히 아무거나 갖다 붙여도 말이 되겠군요.]

[이래서 사람은 죄를 짓고 살면 안 된다니까.]

리카르디스가 냉소적인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대신관 라헤안시가 일라베니아의 죄를 입증할 것이다. 그를 통해 일라베니아를 둘러싼 추문이 진실임을 확인한 2
황자 리카르디스가 일라베니아의 땅 위를 살아가는 백성들을 위해 반기를 들었다는 것쯤으로 해 두지. 비록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미는 용서 못 할 죄를 저지르는 것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노라 하고 말이야.]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그 큰 죄는 살아가시면서 차차 갚아 나가는 거로 하세요.]

클로에가 눈을 초롱거리며 두 손을 맞잡았다. 리카르디스는 몇몇 서류들을 클로에에게 밀어 주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하얀 밤하늘에 뜬 검은 달은 일라베니아가 가지고 있던 한 줌의 권력마저 앗아 가며, 일라베니아의 권력자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겠지. 그때가 적기가 아니겠나.]

[옳은 말씀입니다. 폐하.]

빠른 호칭 변화에 리카르디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축복의 밤으로 전쟁이 일시적으로 멈췄을 때, 황실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음을 선포한다.]

클로에가 서류에 무언가를 사각사각 적어 내렸다.

[이 나라는 더 이상 일라베니아가 아니다.]

일라베니아는 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내부에서부터 무너졌는데.

[그대들은 지금 누구를 향해 검을 겨누는가?]

연합군이 말하는 ‘일라베니아에 죗값을 물게 하겠다.’는 명분이, 사라지게 된 셈이었다. 몇 시간 만에


일라베니아가 새로운 왕국으로 바뀌었다. 연합군이 짓밟고자 하는 땅이 더 이상 일라베니아가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힐리사고의 왕자는 서신을 받고 너무 화가 나서 몇 초간 말도 잇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왕자는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이런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대처가 정말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데 놀랍게도, 통했다. 그것도 아주 잘.

비슷한 시각, 리카르디스의 서신을 받은 연합군의 세력 중 이탈하겠다 말하는 이들이 갑작스럽게 늘어났다.
힐리사고의 왕자는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아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단체로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 짜고 치는 연극을
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 또한, 한 장의 서신을 더 받게 된 순간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서신 위에는 힐리사고와 이웃한 왕국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갑작스럽게 이들에게서 연락이 올 이유를 찾지 못해
힐리사고의 왕자는 혼란스러웠다.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이 나라에서 왜 나에게? 그는 황급히 서신을 열어
펼쳤다.

첫마디는 단조로운 인사말이었다. 차근차근 글자를 읽어 내리던 남자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때의 평화 협정을…….]

“젠장!”

평화 협정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왕자는 서신을 쭉 찢어 버렸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바닥에 내팽개치고


발로 질근질근 밟아 버렸다.

평화 협정이란 과거, 서로가 서로의 재화를 탐했던 전란의 시대를 거치며 만들어진 약속이었다. 그때의 일로
대륙의 인구가 반이 줄었으며, 불태워진 대지는 황폐해지고 썩은 시체들로 전염병이 도는 등. 축복의 밤이
소실되지 않았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보다도 더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방지하고자 대륙의 모든 나라가 서명한 평화 협정에는 타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각 나라의 맹세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는 자가 있거든 그를 제외한 모든 다른 나라들이 힘을 합쳐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방금 전 서신이 말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힐리사고의 왕자님, 대륙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일라베니아를 단죄하고자 하는 대의를 위해 전쟁에 나선다고
하셨죠. 그런데 일라베니아가 망했다는데 왜 안 돌아오십니까? 혹시, 일라베니아를 단죄하는 것보다 전쟁으로
얻을 이득에 더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시겠죠? 저희 왕국이 설마 침략자랑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고 있었던
겁니까? 세상에, 너무 무서워서 다른 나라랑 손잡고 힐리사고를 없애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라는 뜻이었다.

많은 나라가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저 방관하는 나라도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힐리사고가 ‘침략자’라는


인식이 찍히게 둘 수는 없었다. 이는 또 다른 전쟁의 명분이 될 수 있으므로, 일라베니아를 침략함으로써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보다 훨씬 중했다.

왜 연합군에서 군대가 하나둘 이탈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도 비슷한 내용의 서신을 받았으리라. 왕자가
이를 갈았다.
‘어? 그런데 뭐가 좀……?’

많이 이상했다. 축복의 밤이 뜬 지 얼마나 지났다고 먼 거리에 있는 왕국에서 벌써 이런 서신이 온단 말인가?


축복의 밤이 뜨고, 일라베니아 황실이 몰락하고,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고. 그 사실을 알리는 것만 해도 몇 주가
걸려야 정상인데. 다른 나라에서 그 사실을 알고 연합군에 경고를 보내기까지 하다니. 미리 준비해 두지 않고서야.

“…….”

준비해 뒀군.

왕자의 시야에 아까 그가 찢어발긴 서신이 들어왔다. 작은 조각에 글자가 빼꼭하게 새겨져 있었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신의 품 안에서 평안하시길.]

왕자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 * *

전후 처리와 새롭게 체결될 협정을 위해 각국의 사령관들이 중부 관문에 모였다.

정복과 적대 행위의 금지, 평화 관계의 회복 등. 본래라면 배상청구권에 대한 의논이 필요했을 테지만, 애초에
새로운 나라의 탄생으로 끝난 전쟁이니만큼, 일라베니아의 입장으로 침략자들에게 요구할 권리도 없었다. 하지만
승자와 패자가 없는 싸움이었기에 모두가 크고 작은 피해를 떠안는 셈이었다.

각국의 대표들이 약속이 새겨진 종이 위로 인장을 찍으며 전쟁의 종결을 알렸다.

전 일라베니아 제국, 현 리쉬에 왕국의 중부 관문.

관문의 감옥 안에는 중요한 인물 몇몇이 갇혀 있었다. 디에즈와 검은달의 간부 케틀린, 그리고 평화 협정을
체결한 이후 발타로부터 처분을 양도받은 발타의 왕자, 하카브가 각각 다른 층에 수감되어 병사 수백 명의 삼엄한
감시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일라베니아 출신인 디에즈와 케틀린은 당연히 신생 왕국 리쉬에의 권한이었지만 하카브는 발타의 왕자였다.
그것도 힉살라를 시해하려고 했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

하지만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물을 사람이 필요했다. 간제와 동맹을 맺었을 당시, 그녀는 전쟁을 일으킨
주범에서 발타를 빼는 대신 하카브의 이름을 써 넣으라 했다. 그때의 약조와 더불어 라헤안시가 힉살라에게
끈덕지게 군 덕에 그 권한은 리쉬에 왕국의 몫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라헤안시의 말로는 “하카브 왕자도 우리 몫으로 안 떨어질 거면 거래 안 해! 집어치워!”라는 식의 흥정이


오갔다는데 정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오늘 그들 중 한 명을 만나기 위해 감옥에 발을 들였다.

지하 감옥의 최하층. 그 중앙에 몇 겹의 굵은 쇠사슬과 거대한 족쇄로 결박되어 있는 남자가 보였다. 찬란하게
빛나던 금색 머리카락은 재와 먼지, 피가 엉겨 탁하게 변해 있었다.

“…….”
리카르디스는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서로 검을 겨누던 사이지만, 이런 장소에서 그를 마주하자 착잡한
마음부터 올라왔다.

“디에즈 레예 일라베니아.”

리카르디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 디에즈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텅 빈 눈동자에는 어둑한 지하


감옥과 이따금 흔들리는 횃불만이 비쳤다.

리카르디스는 디에즈가 이 지하 감옥으로 오게 된 과정에 대해 상세히 들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리카르디스는 알고 있었다. 디에즈는 인간의 힘을 훨씬 뛰어넘은 존재였다. 그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강요할 시, 얼마나 많은 피해가 발생할지 예측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디에즈는 어떤 반항도
없이 아주 순순히 잡혔다고 했다. 일라베니아에 대한 증오 하나로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던 화려한 전적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디에즈는 수감된 이후로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잠을 자지도, 심지어는 음식이나 물을 섭취하지도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보고를 듣고 지금 막 디에즈를 찾아온 참이었다.

그가 이렇게 지하 감옥 안에서 얌전히 지내는 데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걸 알아내기 위해.

하지만 지친 표정과 인형같이 무감각해 보이는 얼굴에서는 그 어떤 숨겨 둔 진실도 찾을 수 없었다. 숨만 쉬는


시체 같았다. 웃는 얼굴 아래 선연한 분노를 끓이던 사내는 어디에도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디에즈가 단순히 일라베니아라는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왕조를 무너트리고 새로 세운다는 단순한 논리 하나로 디에즈가 납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지금 이 지하 감옥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을 떠올렸다. 하얀 밤, 그 위로 뜬 검은 달. 빗방울에


비쳐 반사되는 달빛과 그 아래 피어난 꽃송이까지.

그 광경을 바라보던 로젤린의 얼굴을 기억했다. 여정의 끝을 맞이한 모험자는 비로소 검을 놓고 꽃향기가 실려 온
바람을 음미하고 있었다.

어쩌면 디에즈에게도 축복의 밤이 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로젤린과는 다른 형태일지라도.

258 화.

리카르디스는 말없이 돌아섰다. 뚜벅, 뚜벅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적막만 남은 공간에 하얀 눈송이가 둥실둥실 떠다녔다. 리카르디스의 망토 끝자락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눈송이는
나풀나풀 날아, 이내 철창 안까지 굴러갔다. 디에즈의 눈동자에 그것이 비쳤다.

눈이 아니었다. 축복의 밤과 함께 피어난 리쉬의 꽃잎이었다. 디에즈는 결박된 상태로 불편하게 고개를 숙여
바닥에 있는 눈과 꽃, 바람의 잔향을 들이마셨다. 그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리카르디스는 감옥을 올라가던 중, 하카브의 감옥 앞에 있는 간제를 발견했다. 철창을 잡고 무어라 말하고


있었는데, 거리가 멀고 워낙 작게 속삭이는 터라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노려보는 하카브의 표정으로 보아
뭔가 속이 뒤집어지는 소리를 했겠거니 예상할 수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간제가 뒤를 돌아보았다. 리카르디스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방긋 웃었다.


두 사람은 서로 지하 감옥에서 뭘 했는지 묻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산책길을 걷는 것처럼 나란히 감옥을
벗어났다.

리카르디스와 간제는 중부 관문의 방벽 위까지 올라갔다. 아직 춥다 못해 시린 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바람의 방향을 따라 아직 시체가 널려 있는 전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며칠 전과 다른 점은 그


시체들 사이사이로 하얀 꽃들이 무성하게 피어 있다는 점이었다. 추위에 금세 져 버리긴 했으나, 축복의 밤으로
살아난 대지는 끝없이 생명을 피워 내며 새로운 세계의 태동을 알리고 있었다.

“‘리쉬에’라…… 재밌는 이름이네요”

한참 전장을 바라만 보던 간제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리쉬에는 지금 지천에 널려 있는 리쉬의 정식 명칭이었다. 귀한 꽃이나 약초, 나무가 아닌 한낱 잡초의 이름을


붙였으니 이상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초대 황제의 이름을 딴 나라의 결말이 안 좋더군요.”

“아, 일라베니아요. 좀 안 좋게 끝나긴 했죠.”

두 사람이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원래 인간들이 하는 일은 전부 엉망이니까, 자연에 맡겨 보자는 마음으로 지었습니다.”

“아하.”

리카르디스는 국가 전복 계획을 세웠을 당시, 클로에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래서, 나라 이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리카르디스는 유례없이 당황했다. 그런 것도 내가 해야 해? 라고 묻는 듯 바라보자 클로에가 그럼 제가


하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를 마주 보았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긴급 소집되었다. 다 큰 성인들이 끙끙거리며 이런저런 이름을 추천했다. 불탄 월계수부터


시작해서 각종 지역 지방의 이름, 리카르디스의 이름까지 전부 끌려 나왔지만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었다.

자포자기한 리카르디스는 대충 로젤린이 좋아할 만한 음식 이름으로 하자는 의견을 냈다가, 로젤린에게


진지해지라는 충고를 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마땅한 것이 없나 뒤지게 된 식물도감에서 보게 된 이름이었다.

리쉬, 정식 명칭 리쉬에.

현재는 잡초에 불과하지만, 과거에는 축복의 밤의 상징이었다. 죽은 대지에서도 끈질기게 생명을 피워 내는 하얀


꽃, 리쉬에.

그 그림의 아래 짤막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리며 피어난다.]


리카르디스는 이보다 좋은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삐이익---

독수리의 울음소리에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들어 너른 전장을 바라보았다. 검은 땅 위를 하얀 꽃잎이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겨울도 이제 끝나려는가 봅니다.”

26

덮쳐 오는 어둠에 몸을 웅크렸던 사람들은 다시금 비추기 시작한 햇빛 아래에서 활짝 웃었다. 며칠 전까지 중부


관문이 무너지겠네, 일라베니아 망하겠네, 결국 우리는 죽겠네 하며 죽상을 지었던 일라베니아의 지휘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치렀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맑고 밝은 기운이 중부 관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곧 중부 관문 회의장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라베니아의 총사령관, 이제는 새로운 왕국


리쉬에의 국왕이 된 리카르디스였다. 그는 방 안에서 축배를 드는 지휘관들을 보자마자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

하하, 허허 하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점차 줄어들더니 곧 방 안에 정적이 깔렸다. 지휘관들이 시무룩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전쟁이 끝나면 무너진 건물과 피해가 알아서 복구되는 것이었나? 축복의 밤이 그런 기적까지 일궈 냈던 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

“검을 든 자들의 싸움은 끝이 났지만, 펜을 든 자들의 싸움은 지금부터다.”

지휘관들은 쌓여 가는 서류와 리카르디스의 닦달에 웃음을 완전히 잃어버리다 못해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그렇게 리카르디스의 보이지 않는 채찍질에 펜잡이들이 데굴데굴 구르는 사이, 칼잡이들도 방 안에서 뒹굴뒹굴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수십 일간의 대장정. 그간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 병사들은 지쳐 쓰러져 먹고 자기만
했다.

로젤린도 전쟁 종결 강화 조약에 모든 국가의 인장이 찍힌 이후, 내리 이틀 동안 잤다. 열여덟 시간이 지난


시점에 그녀의 생사가 걱정되었던 칼릭스가 로젤린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숨을 쉬는지 확인하고 갔다.

그렇게 헤사가 입에 무언가를 넣어 주고, 리카르디스가 찾아와서 따뜻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기를 몇 차례.
끙끙 앓아 가면서 수십 시간 잠만 자던 로젤린이 깨어났다. 어둑한 밤이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퉁퉁, 캉캉. 무언가를 두드려 대고, 쨍그랑, 뭘 깨트리고 와하하 하는 웃음소리까지.
로젤린은 침대에 앉아서 몇 분간 그 요란스러운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전쟁 중의 중부 관문과 전혀 다른 분위기가 차츰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적막과 날이 서 있는 예민함만이 감돌았던


그때가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로젤린은 후드를 대충 뒤집어쓰고 방을 나섰다.

왕국군 주둔지는 아직 일대를 지키는 병사들로 복작복작했다. 모두 이 장소가 주점이라도 되는 양, 웃고 떠들고


바닥에 반쯤 누워서 굴러다녔다.
“마셔라!”

“먹고 죽자!”

기껏 살아난 병사들이 죽자고 소리치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방벽은 무너지고, 땅에는 아직 화살이 꽂혀
있고, 상처도 다 낫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탁, 무언가가 풀리며 마음이 둥실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잡고 있지 않으면 날아갈 만큼이나 가벼워졌다.
이제야 무언가가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로젤린은 동동 뜬 마음을 안고 걸음을 옮겼다.

“어이, 거기 아가씨.”

로젤린은 뒤를 돌아 자신을 부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추운 날에 얇은 셔츠와 바지 한 장만 걸친 잿빛 머리의


남자가 건들건들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가 말랑말랑한 빵 한 덩이를 툭 던졌다. 로젤린은 여유롭게 그걸 받아
뜯어 먹었다.

“몸은 좀 어때.”

고대부터 내려오는 문헌에는 축복의 밤 이후, 마력을 가진 자는 대륙을 소생하는 대가로 힘을 완전히 잃는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로젤린은 여전히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 마인 정도에 불과하지만, 문헌과는 다른
결과였다. 아마도 본래 가지고 있던 마력의 양이 상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로젤린과 마카롱은 추측했다.

축복의 밤 이후 로젤린은 유달리 피곤해했다. 전 같으면 며칠 밤을 새우고도 쌩쌩했을 로젤린이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조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그녀가 큰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그런 외부적인 요소로만 판별하는
사람들조차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마카롱이 얼마나 그녀의 변화를 뚜렷하게 느꼈을지는 빤했다.

그 때문인지 마카롱은 축복의 밤 이후 대략 한 시간 간격으로 몸은 괜찮냐는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심지어 잘


때에는 깨워서 묻기까지 했다.

마카롱이 안부를 집요하게 묻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로젤린의 마력 양이 변화했다는 이유뿐
아니라, 그녀가 변이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금기를 저지른 로젤린은 완전한 ‘그것’으로는 돌아가지 못했지만, 부분적으로 변이하여 일상생활에서 다양하게
사용했다. 손이 미끄러워 잼 뚜껑이 안 열릴 때 손바닥 가죽을 빳빳하게 변이한다든지, 편지 봉투를 열 때
페이퍼 나이프가 없어서 손톱을 날카롭게 한다든지 등의 용례가 그러했다. 한데 축복의 밤의 의식에 마력을
쏟아부은 후, 그 변이 능력조차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나, 로젤린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도리어 마카롱이 깜짝 놀라 그녀를 중병 걸린


환자 취급하여 한 시간에 한 번꼴로 몸은 괜찮냐 묻고 있는 상황이었다.

“괜찮아.”

로젤린이 그새 습관이 된 대답을 내뱉자 마카롱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붙잡았다. 볼이 눌려 입이 부리처럼
나왔다. 그가 로젤린의 볼을 밀가루 반죽이라도 되는 양 조몰락거렸다.

“이거 봐, 말랑말랑한 거. 곰한테 한 대 맞으면 아주 다치기라도 하겠어?”

다치는 게 보통 아닌가 싶었다. 로젤린이 실없이 웃자 마카롱이 곧바로 타박했다.


“웃어? 이게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네.”

“알거든. 예전에 금기 어겼을 때도 한 번 겪어 봤어.”

로젤린은 금기를 저지르고 난 후, ‘그것’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자각했던 때의 당황했던 제 감정을
반추했다. 물론 지금도 불안한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가 훨씬 무서웠어.”

“나도 너의 과감함이 무섭다.”

마카롱이 계속 볼을 눌렀다 놨다하며 손장난했다. 로젤린은 천천히 어물거리며 말했다.

“근데 이제 진짜 갠차나. 아, 좀 누루지 마.”

로젤린은 마카롱의 손에 잡힌 채로 눈만 굴려 그의 뒤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하얀밤 기사단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로젤린의 눈에 겨울날에도 따스하게 빛나는 횃불의 온기가 녹아들었다. 로젤린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전쟁이 끝났잖아.”

“그래서요.”

“이제 그 힘은 나에게 크게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259 화.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마카롱은 인상을 찌푸린 채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어떤 감정이 아주 짧은 순간 머무르다 스쳐 지나갔다. 그게 무엇일지 결론을 내리기 전, 마카롱이 붙잡고
있는 로젤린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그가 흐응 하는 소리를 냈다.

“뭐…… 그럴지도 모르지.”

마카롱이 손을 뻗어 로젤린의 머리를 마구 헤집듯 쓰다듬었다. 으어, 아으. 로젤린은 마카롱이 쓰다듬는 대로
휘둘리다가,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머리카락과 마카롱의 손으로 시야가 가려져 살짝 미소 짓고
있는 입매만 얼핏 볼 수 있었다.

마카롱은 로젤린의 머리를 새집으로 만들고 곧바로 뒤돌아섰다. 로젤린이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있는 곳에 같이
가자 청했지만, 그는 할 일이 있다며 거절했다.

마카롱은 빛나는 건물에서 멀어지며 점점 어둠 속으로 파묻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던 로젤린의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은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목적지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껄껄껄!”

“하하하!”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바깥과 다르지 않았다. 도리어 추운 바깥이 아니라 그런지 웃통을 훌렁 벗은 채
춤을 추고 난리도 아니었다.
구석에는 라고슈 부족의 수장들과 라헤안시, 그리고 라헤안시의 뒤처리 담당인 베르움이 카드 게임을 벌이는
중이었다. 라헤안시와 베르움은 그들보다 체구가 두 배는 큰 제르타예들을 상대로 당당하게 사기를 치며 도박판을
흔들고 있었다.

“이건 사기야!”

“아까 내가 버린 패인데!”

젊은 제르타예 두 남녀가 악 소리치자 베르움이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잘못 보신 게 아닐지요? 본인의 실력 부족을 사기라 일축하다니. 신께서 지켜보시는데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신께서 지켜보시는데 손장난하고도 저렇게 떳떳하다니. 베르움이 누구의 영향을 받아 타락했는지 너무 투명했다.

셍고·제르타예의 수장이 로젤린의 할아버지인 귈테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우리가 2 황자한테 뭐 받기로 했었지? 그거 조금만 걸어도 되나, 귈테?”

귀를 의심하던 귈테가 곧 셍고의 수장을 경멸하는 듯 바라보았다. 패가망신이 코앞으로 다가온 셍고·제르타예와
라고슈 지원군 일가의 고뇌는 전혀 닿지 않는 듯, 방의 중앙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탁자 위에서 레이몬드가 만돌린을 연주하고 그의 형인 아렌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로젤린을 발견한
레이몬드가 화색을 지으며 탁자 위의 무언가를 발로 걷어찼다.

로젤린은 날아오는 물체를 덥석 잡았다. 속을 판 동그란 나무 안에 조각을 넣어 소리 나게 만든 악기였다.


로젤린이 관성적으로 잘각잘각 흔들자 레이몬드가 어깨를 들썩이며 열정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 즐겨야 해!”

“빨리 마셔!”

이제 보니 리카르디스가 없는 틈을 타서 연회를 벌인 모양이었다.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레티시아가 로젤린을


반기며 그녀의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말린 무화과였다. 레티시아를 졸졸 따라다니던 에버하르트도 로젤린의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호두였다. 헤사도 쪼르륵 다가와 치즈를 넣어 주었다.

상급자한테 인사를 하기도 전에 입에 먹을 것부터 넣다니. 이 사람들도 취했군. 로젤린은 별말 없이 냠냠 씹었다.


어, 이거 나름 맛의 조화가 괜찮은데…….

로젤린이 고심하며 맛을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모두가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노는 공간에, 누군가가 막 발을


들였다. 머리까지 덮은 신관 로브를 입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로젤린은 그가 리카르디스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조용히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위장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입가가 씰룩였다.

“저, 이…… 씨…….”

욕을 하려던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발견하고 황급하게 말을 순화했다.

“부상 입었다는 작자들이 술을 퍼먹고…… 저렇게 심하게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라, 아니지 기분이
아니지! 그러면 안 되지. 부상자 막사에서도 비슷한 꼴을 봤더니 속이 다 뒤집어져! 기껏 살려 놨더니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 해!”

일을 안 하고 있는 것보다 부상자들이 날뛰는 모습이 더 열 받는 모양이었다. 로젤린도 아까 전 들렀던 부상자


병동에서 이와 비슷한 풍경을 봤던 터라 그저 웃고 넘기지 못했다. 아픈 인간들이 술 먹고 춤추고 쉬지도 않고
놀고 있으니, 치료사와 신관들이 뒤 목 잡고 넘어갈 수밖에.

살짝 미소 지은 로젤린은 흔들던 악기를 리카르디스에게 넘겼다. 리카르디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본능적으로


악기를 흔들기 시작했다. 따각 따각, 소리와 박자가 흥겹게 쪼개어졌다.

“좋은 날이잖습니까. 보다가 영 안 될 것 같다 싶으면 재우겠습니다.”

“……어떻게? 아니야. 대답하지 않아도 돼. 대충 알 것 같으니.”

분명 무력이 수반되어 있겠지, 그 행위에는.

하, 한숨을 쉰 리카르디스는 테이블 위로 올라가 춤추기 시작한 에버하르트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미소와 해괴망측한 몸놀림들이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리카르디스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미간이 여전히 찌푸려져 있긴 했지만.

“그래, 뭐…… 좋은 날이니까.”

악기를 다시 로젤린에게 넘긴 리카르디스는 벽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는 하프를 집어 들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가 연주하는 승리의 찬가와 리카르디스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이 섞이며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냈다.
레이몬드는 몹시 기뻐하며 새롭게 나타난 연주자를 칭찬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제법인걸!”

그의 상관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꺄르륵거리면서 노는 어른들의 흥을 별말 없이 돋워 주었다. 그의 옆에서


로젤린도 악기를 흔들었다. 차카차카, 잘각잘각. 사람들의 웃음에 그녀가 만든 소리가 녹아들었다.

* * *

리카르디스의 보이지 않는 채찍질 아래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칼릭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릭스는 전투의
피로를 다 풀지도 못한 채 리카르디스와 푸른등불 공작의 수족이 되어 다양한 일을 빠르게 처리해 냈고, 그런
그를 몹시 탐내는 푸른등불 공작의 시선을 내내 견뎌야만 했다.

겨우 일을 끝마친 칼릭스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는 참에 길레드와 마주쳤다. 그에게 인사하려던
칼릭스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길레드의 눈빛이 마치 석 달간 쫓은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길레드가 손가락을 물고 삑 휘파람을 불었다. 칼릭스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곧 여기저기에서


붉은수레바퀴군의 마인들이 하나 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포위하듯 둘러싼 마인들이 칼릭스에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오늘도 잘생겼다…… 내 금은보화.”

까마귀대의 대장이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꼭 내 집이 가지고 싶었지. 방이 두 개 딸린 거로.”


어금니대의 대장도 칼릭스의 주위를 서성이며 흐뭇한 미소를 보냈다. 높은 난간 위에서 원숭이가 그의 말을
받았다.

“한 삼십 년은 놀고먹기만 해도 되겠지?”

황홀함에 젖어 얘기하는 여자의 눈은 칼릭스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칼릭스는 울컥했다. 자신은 까마귀의
금은보화도, 방이 두 개 딸린 어금니의 집도 아니었으며, 삼십 년의 방탕한 삶을 보증하는 원숭이의 무언가도
아니었다.

전쟁이 끝났다. 완벽한 승리도 아니지만, 최악의 패배 또한 아니었다. 모두가 기뻐하던 때에 유독 기뻐하던
이들이 있었으니, 꿀이 흐르는 붉은수레바퀴 영지에서의 삶과 자유…… 와 많은 돈을 약속받은 마인 부대의
일원들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흐뭇했던 마인들은 틈만 나면 칼릭스의 주위를 서성이며 탐난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저어 백작님…….”

울컥해서 뭐라 하려던 칼릭스는 뒤에서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몰래 출진해서
단단히 혼난 에렌과 그의 친구 네 명, 칼릭스가 사고뭉치 단이라고 부르는 이들이었다.

어른들의 탐욕이 넘치는 얼굴과 달리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청년과 소녀들은 초조한 듯, 불안한 듯 칼릭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말 가족들 다 데리고 가서 붉은수레바퀴에서 살아도 되나요?”

딱딱해지다 못해 얼어 버린 칼릭스의 마음이 살살 녹아 버렸다.

“……물론이지.”

까마귀와 원숭이, 어금니가 뒤에서 어? 하며 의문스러워했다.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를 대할
때랑 반응이 다른데…….

그러면 같겠냐.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반박한 칼릭스는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는 사고뭉치 단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 주었다.
그들은 단순히 붉은수레바퀴령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기뻐하는 게 아니었다.

붉은수레바퀴군의 마인대는 파편과 인조 마인 등이 포진한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서 싸운 특별한 공로를 인정받아


작위를 하사받을 예정이었다. 조만간 계약에 명시된 대로 칼릭스에게 보상도 받을 것이고.

마인들이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일라베니아와 마인에 대한 과거의 비밀이 밝혀지며 사라졌다. 여태껏
마인을 핍박하던 악습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야 없으나, 차츰 변화해 나갈 것이다. 리쉬에 왕실이 그런 흐름을
주도해 나갈 것이며, 이들은 점차 발길이 닿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원하는 곳에, 그 어디든 갈 수 있으리라.
그런 마인들이 붉은수레바퀴령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에렌이 기뻐하는 이유는 그저 ‘마인’이 필요해서 계약을 하자 말했던 칼릭스가 더 이상 마인이 필요해지지 않은
시점에도 전과 다름없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사람들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태도가
달라지곤 하니까. 마인들은 약자의 입장으로서 그런 이들을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칼릭스는 어른 마인들 또한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의 주위를 떠돌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말하는 본새가 기분
나빠서 사납게 대했을 뿐이었다.

260 화.

칼릭스는 흘끗 옆을 보았다. 에렌이 그의 눈치를 보며 반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완벽히 행복한 미소를
짓기에는 아직 안심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전후 처리로 바빠서 마인대를 별로
신경 써 주지 못했더니 자기들끼리 별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피곤한 정신을 애써 한편에 물러 두었다.

‘쉬기는 글렀군.’

방으로 향하던 칼릭스가 방향을 틀자 마인들이 어딜 가냐며 조르륵 따라왔다.

“술이나 한잔하려고. 따라오든가 말든가.”

어른 마인들이 활짝 웃으며 또 인간 가마를 태우려고 들었다. 칼릭스는 필사의 힘으로 싸워 자신의 두 다리로
걸을 권리를 얻어 냈다.

그렇게 이동하던 중, 마인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멈춰 섰다. 한곳을 바라보는 그들의 행동에서 칼릭스는 기시감을
느꼈다. 전장에서 마력을 감지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동료 마인들도 널린 이곳에서 단순히 작은 마력에
이들이 이렇게 반응할 리 없었다.

칼릭스는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원인을 알게 되었다.

중부 관문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디에즈가 탈옥했다.

뒤늦게 마인들이 나섰지만, 그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반쯤 폐허가 된 감옥 안. 남은 것은 부수지 못한


쇠사슬에 결박되어 있는 한쪽 팔뿐이었다.

여러모로 위험한 인물이기에 추적은 불가피했다. 추적대를 따로 구성하려던 차, 사자갈기의 드윗이 나서서
디에즈를 쫓겠다 말했다. 리카르디스는 그 의견을 수용하여, 사자갈기군에게 디에즈의 추적 임무를 맡겼다. 수백
마리의 사냥개가 밤을 찢는 울음소리를 냈다.

* * *

수 개 국이 연합한 군대가 국경을 침범하고 최후의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중부 관문까지 밀고 들어왔다는 얘기에


일라베니아의 백성들은 절망했었다. 그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일라베니아의 땅을 짓밟았던가. 그 피로 물든
발자국이 걸어온 길처럼, 자신들의 운명 또한 그렇게 지리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던 때였다.

하얀 밤하늘에 검은 달이 떴다. 사람들은 쏟아지는 아름다운 검은 달빛과 겨울의 추위 속에서 피어나는 강인한
생명력을 목도했다. 전설처럼 전해져 왔던 ‘축복의 밤’이 수천, 수만을 넘어선 대륙 모든 이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축복의 밤이 전쟁에 어떤 효과를 끼칠지 그때는 모르는 일이었으나, 모두가 그 빛에서 희망을 느꼈다.

오로지 황실만이 검은 달빛에 분노했다. 일라베니아가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황실은 2 황자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더 집중했다.
황제의 명령에 군대가 소집되어 ‘반역자’ 리카르디스를 처단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황성을
둘러싼 짧은 교전이 발생했다. 그리고 채 하루가 넘어가기도 전에 일라베니아 황실이 전복되었다. 내부에서
황제를 지키는 가문 중 가장 힘이 강한 ‘사자갈기’의 배신 때문이었다.

모래성을 만드는 것보다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왕조가 탄생했으며, 그로 인해 전쟁이 막을 내렸다. 연합군이


중부 관문을 무너트릴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 게 얼마 전이었는데, 갑자기 일라베니아 황실이 전복되고,
백성들은 국적이 바뀌었다.

급격한 흐름에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했지만, 백성들을 아끼고 위하는 리카르디스가 새로운 왕국의 통치자가 되어
침략자들을 몰아내었다는 사실에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다. 타국과의 분쟁을 틈타 황위를 노린 저열한 반역 행위라며. 하지만 1 황자


엘피디오도 사망한 지금,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황제가 되었을 리카르디스가 단순히 권력 욕심으로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도리어 사람들은 리카르디스가 패륜아라는 오명을 감수하고서라도 반역을 저지를 수밖에 없게끔 상황을 몰고 간
일라베니아 황실의 죄와 황제의 무능을 손가락질했다.

한 명은 일라베니아의 백성들을 살려 보겠다고 적진의 깊숙한 한가운데까지 침투할 정도로 위험을 무릅쓴 반면에,
그 아비라는 작자는 편안한 황성 안에 박혀 있다가 일라베니아가 위험하다는 소리에 수도를 버리고 도주하려 했다.

그때부터 월계수의 가치는 사라진 것이었다.

수도 티가드의 성문이 열렸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의 상징인 깃발이 보이자 사람들은 손을 번쩍 치켜들고
고함을 고래고래 질러 댔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가슴 벅차도록 희망찬 기쁨을 안고 웃고, 울고, 노래했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이들의 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기만 했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그 어느 곳보다 출입이 까다로운 수도 티가드의 성벽과 황성의 문을 지났다.
일라베니아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기사와 병사들을 마주했으나, 그들은 어떤 방해도 하지 않았다. 반역자
리카르디스가 아닌 새로운 왕을 맞이하는 자세로 경의를 표하며 무릎을 꿇을 뿐이었다.

일라베니아 황제의 상징인 금강석 성에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도달했다. 압도적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거대한 성이 리카르디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천천히 숨을 쉬며 그 모습을 훑었다.

아주 오래전, 리카르디스는 이 성과 성의 주인이 주는 압박감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지도 못하고 한참


이 앞을 서성였었다. 모든 것이 버거웠을 때였다. 이후 계단을 서슴없이 오를 때에도 압박감은 언제나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그것을 누를 만큼 성장했을 뿐이었다.

한데 지금은 어떻게 된 일인지. 언제나 무거웠던 어깨가 아주 가벼웠다. 눈앞에 보이는 금강석 성의 모습이
평소와 달라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계단에는 아직 거뭇거뭇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정렬된 조각상은 부서지고, 유리창은 깨져 있고, 나무는 불탄
채 스산한 분위기를 조성 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금강석’이라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던 빛은 바래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금강석 성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자세를 곧게 한 채 화려한 계단의 양쪽 가에 섰다. 엄숙하게 적막을 지키며, 전방만을
주시하는 그들의 뒤에는 계단을 장식하는 조각상들이 깨지고 부서져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잠시 후,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것은 한걸음 뒤에 있는 로젤린뿐이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나란히 겹쳐졌다. 리카르디스는 그 소리를 곱씹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리카르디스!”

곧 뒤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3 황자 틸렌드의 목소리였다. 헝클어진 머리, 흐트러진 옷차림새, 불콰한
얼굴까지. 누가 봐도 취객 같은 남자가 금강석 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리카르디스에 대한
욕과 저주를 끊임없이 내뱉었다.

틸렌드가 계단에 접근하려 하자 병사들이 황급히 나섰다. 틸렌드는 붙잡히기도 전에 다가오는 병사들의 얼굴에
주먹질하며 패악을 부렸다.

“더럽고 뻔뻔한 놈 같으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틸렌드는 리카르디스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 순간 미동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일시에 검을 빼 들었다.

틸렌드는 화들짝 놀라며 계단에서 급히 발을 떼어 내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검을 그에게 겨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세워서 자신의 얼굴 앞에 두었을 뿐이었다. 틸렌드는 스스로의 추태에 얼굴을 붉혔다.

리카르디스는 틸렌드가 벌이는 소란이 들리지도 않는 듯,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나아갔다.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기이한 적막함이 기사들을 석상처럼 보이게끔 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다시 한번 일시에 움직였다. 철컥, 백여 명이 넘는 기사들이 만들어 낸 소음이 소름 끼칠


정도로 하나로 맞물렸다. 그들은 검 끝을 바닥으로 향하게 하며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기사의 예였다.

적에게는 날카로운 검을, 주인에게는 경배를.

틸렌드는 자신을 이 공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이들의 무덤덤한 태도에 울컥했으나, 두 번은 계단에


발을 올리지 못했다. 리카르디스의 뒤를 따르던 검은 머리의 기사가 고개만 살짝 틀어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틸렌드는 기사들이 들고 있는 검보다도 선명한 무형의 위협을 느꼈다. 검은 머리가 하얀 계단을
불태우는 검은 연기처럼 흩날렸다. 그리고 바람이 잦아들자, 아까 전 마주했던 녹색 눈동자는 다시 주인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반역이자 즉위 의례의 짧은 과정. 이 계단을 오르는 리카르디스를 다시 한번 방해하는 순간 무사하지 못하리란


것을 틸렌드는 직감했다.

리카르디스는 늘어선 수백 개의 계단을 올라 질릴 정도로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된 거대한 문 앞에 도달했다.


그는 한참 그것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문을 열어라.”

리카르디스의 명령에 나단과 르원이 양 문을 밀었다.

쿠구궁…….
일라베니아가 쌓아 온 역사만큼이나 두텁고 무거운 문이 밀렸다. 안쪽의 텅 빈 공간이 문이 열리는 소리를
동굴처럼 울려 퍼지게 했다.

환한 샹들리에 아래, 언제나 오색찬란한 빛이 부서져 내리던 공간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벽면의 촛불 몇몇 개와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햇살만이 내부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빛과 어둠의 선명한 경계에 발을 들였다. 적막한 공간에 그의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십 개의 테이블이 있었으나 성한 걸 찾아보기 힘들었다. 서로 밀리고


깔려, 부서지고 엎어진 채였다. 그 아래에는 잔과 접시의 파편이 흩어져 있었고, 빛나는 대리석 바닥에는
음식물이 말라붙어 지저분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쓰레기처럼 바닥에 뒹굴고 있는 일라베니아 제국기와 잘 벼려진 검에 닿았다. 내내 실감이
나지 않던 황권 교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던 순간이었다.

바람이 깨진 유리창을 스치고 들어오며 황량하고 스산한 소리를 냈다. 차가운 공기의 흐름에 따라 리카르디스의
눈이 다시금 공간을 훑었다.

폐허가 된 제국의 심장부. 그 아름다웠던 공간이 이다지도 초라하게 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리카르디스는


눈으로 보면서도 이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이 장면을 아주 오래 기억하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261 화.

리카르디스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구깃구깃 주름이 가 있는 붉은 융단이 그의 길을 안내하듯 펼쳐져 있었다.


어지럽혀진 길을 가로지른 두 사람이 멈춰 섰다. 일라베니아 황제의 상징인 금색 황좌, 그리고 그 위에 앉은
초췌한 한 남자의 앞에서.

평소 같으면 황제를 호위하고 있을 얼음창의 기사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백 명이 있어도 여유로운 넓은


공간에는 오직 세 사람의 숨결만이 녹아들었다.

황제,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언제나 위엄 어린 태도를 하고 있던 남자는 어깨에 무거운 무언가를 지고 있는 사람처럼 몸을 구부정하게 하고


앉아 있었다. 수염은 정돈되지 않아 지저분했고, 옷매무새 또한 엉망이었다. 누가 그를 황제라고 볼 수 있을까.
리카르디스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마주했다.

황좌에 앉아 있으나, 그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었다. 팔, 다리, 손가락, 발가락까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걸


잘린 채 숨만 붙어 있는 셈이었다.

반역을 이끌었던 클로에는 성공리에 일을 마무리 지은 후, 황제를 다른 이들처럼 감옥에 집어넣지 않았다. 황제의
수족들만 철저하게 쳐내 버린 채 그저 가만히 두었다.

매일 차려지는 음식, 언제나 지내 왔던 아름다운 성에서의 생활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내일을 보장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리카르디스의 귀환까지 약속된 유예일 뿐이란 걸 라이노는 잘 알았다. 호화로운 우리에 갇힌 돼지나
다름없었다. 이럴 바에 차라리 감옥에 갇히는 것이 나았으리라.

하지만 그것마저도 할 수 없었다. 라이노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시간이 되면 아무도 없는 금강석


성의 황좌에 앉아 있는 것 외에는.
그렇게 홀로 텅 빈 공간에 앉아 있기를 며칠째. 드디어 방문자가 나타났다. 라이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황좌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이 어두운 공간 속에서도 홀로 빛에 휘감겨 있었다. 황좌의 바로 뒤, 상단부의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빛이 정확하게 그를 비췄다. 먼지조차 춤을 추는 듯 너울거리며 리카르디스의 곁을 떠돌았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그래서 라이노는 여상한 얼굴로 말을 꺼내는 리카르디스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고, 한참 뒤에야 ‘그간 평안
…….’이라는 황당한 말을 인식하고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

리카르디스가 순수한 기쁨을 담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어린 소년의 천진한 미소 같았다.

이보다 더한 치욕은 없었다. 최하층 계급의 천한 평민 하나가 이렇게 기고만장하게 굴 수 있는 것은 리카르디스가


입에 담은 ‘아버지’라는 말 때문이었다. 자신이 준 이름, 자신이 준 권력, 자신이 준 그 허울 좋은 ‘아들’
이라는 이름 덕분에.

과거의 실수를 상기시키는 리카르디스의 말에 라이노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라이노의 손이 숨겨 둔


단검의 손잡이에 닿았다.

미처 그걸 잡지 못했던 것은, 빛에 휩싸인 리카르디스 뒤의 그림자, 그 속에서 누군가가 한걸음 걸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빛의 영역에 누군가의 부츠가 불쑥 나타나며 라이노의 긴장을 깨트렸다.

라이노는 시선을 올려 리카르디스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빛에 익숙해진 시야는 단숨에 사람의


얼굴을 읽어 내지 못했다. 하지만 빛나고 있는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라이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림자에 몸을 숨긴 맹수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라이노는 부들부들 떨며 다시 황좌의 팔걸이에 손을 올려야만


했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리카르디스는 찰나에 스치고 간 긴장감을 다 읽어 내린 듯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그가 다시 운을 뗐다.

“갖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버지. 이 땅을 훌륭하게 지키고 돌아온 아들에게 물론 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가 눈을 접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황금 월계관을 주시지요.”

황제의 상징인, 황금으로 만든 월계관은 지금도 라이노의 머리 위에 얹어져 있었다. 라이노는 결국 수치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기절했다. 라이노의 머리가 기울자 그 위의 황금 월계관이 툭 떨어졌다. 붉은 융단과 몇 개의
단층을 도르륵 구른 왕관이 리카르디스의 발치에 부딪힌 후 멈췄다.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

리카르디스가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속을 더 뒤집어 놓을 생각이었는데 라이노가 너무 빨리 기절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툴툴거리면서 황금 월계관을 집어 들었다.

“내 즉위 의례에서 직접 나한테 씌워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고. 물론 이걸 쓸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로젤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리카르디스는 문 바깥에 있는 기사들을 불러 황제를 데리고 가라고 명령했다. 기사들이 물러간 뒤에는 다시 두
사람만이 남았다.

리카르디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층을 훌쩍 올라 비어 있는 황좌 위에 앉았다.

“여기까지 십오 년.”

리카르디스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길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는 남자의 얼굴에는 형언하지 못할 여러 감정들이 녹아들어 있었다. 로젤린은 그런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울고, 괴로워하고. 또 울고, 고통스러워하며,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가던 소년과 청년과 남자를,
로젤린은 기억했다. 그를 묶어 두던 과거의 상념, 거칠고 따갑기만 하던 감정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뒤에서 쏟아지는 빛 아래, 리카르디스는 잠든 숲속의 나무처럼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다. 오랫동안 이런 순간이
찾아오길 바랐었다. 로젤린은 기꺼운 마음에 웃었다.

로젤린이 단층 위로 발을 올렸다. 융단 위로 차분하게 내려앉는 로젤린의 발걸음 소리에 리카르디스가 눈을 떴다.

리카르디스의 앞에 선 로젤린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천천히 그의 망토를 집어


입 맞췄다. 리카르디스는 픽 웃으며 황금 월계관을 던져 버리고 그녀의 얼굴을 잡고서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맞닿은 순간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탕, 탕, 데구르르…… 수백 년의 역사가 쌓인 제국의 황금 월계관이 깨진 유리와 함께 먼지 속을 뒹굴었다.

* * *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해야 할 일은 왜 그렇게 많고,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지. 단순히 황위를
물려받은 것이 아닌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킨 시점부터 예견된 일이었지만 리카르디스는 지금이 중부 관문 전쟁
때보다 고되다고 생각할 정도로 힘겨워했다.

리카르디스는 오늘도 밤을 지새우는 중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리카르디스는 미간의 주름을 펴고
들어오라 명령했다.

로젤린이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리카르디스는 온 피로가 다 녹아내리는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폐하,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저건 새로운 일감이 추가되었다는 소리였다. 리카르디스는 아쉬움에 혀를 차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이 총총


다가가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리카르디스가 아는 인장이 찍혀 있는 서신이었다.

황후, 트리파. 1 황자 엘피디오와 3 황자 틸렌드의 어머니이자 일라베니아 제국의 어머니인 트리파의 문양이었다.
“…….”

리카르디스는 곧바로 서신을 뜯어 보았다. 만남을 요청하는 의례적인 문구 하나만 적혀 있었다.

“이걸 지금?”

“예,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말인즉슨, 지금 만나자는 얘기였다. 달과 별빛이 반짝거리다 못해 조금 있으면 해가 뜰 시간에.

리카르디스는 황성으로 귀환한 이후, 황후와 만나기 위해 그녀의 성으로 여러 번 서신을 보내었다. 하지만 황후가
번번이 아프다, 몸이 좋지 않다며 거절한 통에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성의 없는 핑계로 거절할 때는 언제고 이런 야심한 시각에? 이상하다 못해 수상할 정도였다. 로젤린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선 만남을 미루시고, 내일 뵙는 게 어떨지요.”

“변덕스러운 분이라 내일은 또 아프실 수도 있어서 말이지.”

리카르디스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몇 번 두드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 뵈러 가야겠군.”

황후가 기거하는 진주성.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은 그 앞에서 의외의 인물과 만났다. 남자는 리카르디스가 진주성에 방문할 예정이란 걸 알고
있었는지 당황하지 않고 정중하게 예의를 차렸다.

“사자갈기의 드윗이 주인을 뵙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태양보다 찬란하게 빛나시는군요.”

리카르디스는 드윗의 아첨을 한 귀로 흘리며, 미심쩍다는 듯 그를 응시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인사하던


드윗은 눈만 흘끗 굴려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눈을 내리까는 걸 보니 뭔가가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디에즈의 추적을 맡았던 사자갈기군의 지휘관, 드윗이 어떤 보고도 없이 갑자기 황성에 나타나다니. 심지어는
황후의 성 앞에.

리카르디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 자식 수상한데? 라는 의미가 얼굴에 여실히 드러났다. 드윗은


우물쭈물하다가 살짝 윙크했다. 한 번만 넘어가 달라는 애교 비슷한 무언가인 모양인데 그저 불쾌하기만 했다.

“……일단 그대와는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

“예, 이 충성스러운 가신은 폐하께서 부르신다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눈꺼풀 간수를 잘하라. 한 번 더 하기만 해 봐.”

“……예.”

진주성의 시종장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안내에 따라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조용한 성을
가로질렀다.

진주성의 응접실. 문이 열렸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예상외의 사태를 대비했지만, 안쪽에 있는 것은 한 명의


여인뿐이었다.

황후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기척을 느꼈음에도 창밖의 어두운 밤 풍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눈짓으로 단원들을 물렸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를 제외한 단원들이 응접실을 나가고, 문이 닫혔다.

262 화.

황후는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조금 야위어 있었다. 하지만 황제 라이노나 그녀의 아들 틸렌드 같지 않게


여전히 고고하고 품위 있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참으로 그녀다웠다. 리카르디스는 주인이 반겨 주지
않았지만 천연덕스럽게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한참 후, 황후의 입이 열렸다.

“나를 보고자 했더군요.”

“예.”

굳이 따지자면 이번에는 황후가 먼저 요청한 것이지만, 리카르디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축복의 밤이 하늘을 물들인 그날. 반역이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황제의 곁에 있던 사자갈기 가문이 변절했다.
클로에가 규합한 집단이 황실을 점거하는 과정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도 사자갈기 가문이었다. 바깥에서
두드리는 힘은 안쪽에서 문을 여는 힘만 못했다.

실상 황실을 점거하는 일이 시간문제였다 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며 단기간에 계획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은 황후의 공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황후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길 뿐 아니라,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단순히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고 생각해서 배를 옮겨 탔다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황후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황후의 마른 입술이 달싹거렸다.

“나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허황된 거짓말을 내뱉거나 지켜 왔던 비밀을 말하는
둥, 실수를 저지르니 말입니다.”

황후는 잔에 담긴 와인을 천천히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어두운 공간 아래 침잠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축복의 밤이 뜬 그날에. 술에 취해 휘청거리시며, 그 천한 고아가, 감히


은혜도 모르고 주인을 물어뜯는다 하시면서요. 리카르디스 그 천한 것이. 그 더러운 것이.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추하게 바닥에 굴러 넘어지면서, 그렇게.”

여태껏 창밖, 테이블, 와인 잔과 손끝만을 향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리카르디스를 겨냥하듯 주시했다.
리카르디스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녀를 마주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냉철한 모습만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리카르디스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후 대답했다.


“술이 과하셨던 게 아닐까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시다니.”

굳은 얼굴로 있던 황후가 후 코웃음을 쳤다. 이 짧은 대화로 리카르디스는 황후를 만나고자 했던 목적을 충족했다.
황후는 왜 황제를 배신했는가?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의 아들, ‘2 황자 리카르디스’가 열 살 무렵 황실에 입성한 이후로 엘피디오는 크게


방황했다. 유일무이한 지위, 드높은 자존심에 금이 가고 그로 인해 점점 비틀리기 시작했다. 엘피디오라는
인물이 원체 그릇이 작기는 했으나, 대개 유년기의 일이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하듯, 그도 그랬다. 어쩌면 황후는
황제에게 그 말을 듣고 계속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리카르디스가 없었다면. 그만 없었다면 엘피디오가 리카르디스에 대항하기 위해 디에즈를 통해 검은달과 손잡고,


그런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황후의 분노는 언제나 리카르디스를 향하고 있었지만, 모든 걸 알고 난 후, 그녀의 화살은 황제에게 돌아갔다.
황후는 황제가 내뱉은 ‘천한 고아, 평민.’이라는 말만 듣고 깨달은 것이었다. 뛰어난 아들에게 황위를 뺏길까
두려워, ‘리카르디스’라는 도구를 만들어 낸 저의를.

황후는 사람을 찔러 죽인 칼이 아니라, 칼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분노했다. 그리고 그 흐름이 일라베니아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리카르디스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황후도 와인만 홀짝일 뿐,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 다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의 일은 오늘로써 끝났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할 일을 하세요.”

황후가 왜 갑자기 만나고자 한 것인지 지금의 말로 어렴풋하게 유추할 수 있었다. 뭔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진주성 밖에서 만난 사자갈기 드윗의 얼굴을 떠올렸다.

황후가 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리카르디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술에 취해 떠드는 건 이만하면 될 것 같군요.”

황후는 다시 고개를 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뒤 벽면에는 한 장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엘피디오의 장례식 이후,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주었던 어린
시절 엘피디오의 그림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잠시 그걸 눈에 담다가 방을 떠났다.

성 밖으로 나오자마자 다시 사자갈기의 드윗과 마주쳤다. 진주성에서 리카르디스가 나오길 기다린 듯했지만, 정작
드윗의 얼굴에는 그 기다림이 영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생긋 웃으며 턱짓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드윗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걸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월장석 성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 안. 드윗은 앞에 앉은 로젤린과 인상을 찌푸린 채 다리를 꼬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번갈아 보며 바쁘게 눈치를 살폈다. 그가 모호하게 웃으며 상황을 넘기려는 수작을 보이자마자
리카르디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전선에서 돌아오자마자 내가 아닌 전 왕조의 황후를 뵈러 간 것을 뭐라고 해석하면 좋을까. 로젤린 경?”

로젤린은 말없이 검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드윗은 초조해하다가 그 나름의 멋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황후 폐하가 아닌, 가까운 친척 어른을 보러 간 거라고 생각하시면…….”

로젤린이 단검을 빼 들어 손수건으로 삭삭 닦았다. 개소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음.”

곤란한 듯 눈썹을 일그러트린 드윗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거래가 있었습니다.”

로젤린은 과거, 발타의 동굴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가지고 싶은 게 있습니까?]

[보통은 무언가를 얻고자 전장에 뛰어들곤 하지 않습니까? 나도 그런 겁니다.]

기억 속 드윗은 돌멩이를 던졌다 받았다 하며 손장난하고 있었다.

[나름 험하게 자랐다 자부하고 있지만, 요즘만큼 험하게 굴러 본 적이 없어요. 전쟁이라. 막연하게 떠올린
상상보다 조금 더 지긋지긋하군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도, 우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것 같지 뭡니까.]

[위로는 못 하지만 들어는 드리겠습니다.]

[경답군요.]

피식 웃은 그가 낙하하는 돌멩이를 탁 낚아채었다. 돌을 꽉 붙잡자 주먹을 단단하게 쥐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드윗이 타오르는 불티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고생했는데, 원하는 것은 모두 얻어 가야죠. 그래야 수지가 맞겠어요.]

의미심장한 말을 마지막으로 로젤린은 다시 현실의 젊은 사자와 마주했다. 로젤린은 비로소 드윗이 했던 그때의
말을 이해했다.

두 사람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던 드윗이 살짝 눈웃음 지었다.

“황후 폐하께서 그렇게 모정이 강하실 줄이야.”

그 말이 엘피디오의 복수. 즉 디에즈의 죽음을 뜻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드윗의 귀환이 목적
달성의 여부와 맞물려 있으리란 것 또한.

“그 대가로 뭘 얻었나.”

“황후 폐하께서는 사자갈기 공작가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계십니다.”

드윗이 말을 좋게 해서 그렇지, 사자갈기는 황후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그 전권을 모두 사랑스러운 조카인 저에게 주시기로 했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 라는 눈빛으로 드윗을 보았다. 그 뜻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는지 드윗이


어색하게 웃었다.
“폐하를 따르는 충심 하나만은 진실 됨을…….”

“됐고.”

“……예.”

“그대가 여기 있다는 것은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거겠지.”

리카르디스의 말에 로젤린은 잠시 숨을 멈추고 드윗을 바라보았다. 드윗이 가볍게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예.”

* * *

달칵.

로젤린은 방문을 닫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

대체 어떻게 온 거지? 마차에서 내린 건 기억나는데 방까지 도착하는 과정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방 안을 훑었다. 촛불과 벽난로가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었다. 로젤린은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들으며 문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똑똑.

로젤린이 방으로 돌아온 기척을 느낀 헤사가 방문을 두드렸다. 뭐 필요한 게 있느냐 물어보려던 소년은 로젤린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고서는 곧바로 다시 나가, 와인에 과일과 계피, 향신료 등을 넣고 끓여 왔다. 배고플 때의
표정과 비슷해서 착각한 것이었다.

“밤에 너무 드시면 안 좋으니까 따뜻하게 이거 한 잔만 마시고 주무세요.”

로젤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픈 그녀를 측은하게 여긴 헤사가 견과류 몇 알을 더 챙겨 주고 떠났다.

로젤린은 따뜻한 와인을 테이블에 두고서 침대에 엎어지듯 누웠다. 푹신하고 아늑한 침대가 오늘따라 다르게
느껴졌다. 밤공기가 눅눅하게 달라붙은 이불이 차가워서 그런지도 몰랐다.

그렇게 무리한 활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피로했다. 뻑뻑한 눈을 문지르던 로젤린은 몸을 구부정하게 만
채 덮쳐 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이불은 계속해서 차가웠다. 이쯤이면 따뜻해질 때도 되었을 텐데. 차가워.
추워.

깜박깜박하는 눈이 흔들리는 불빛을 담아내다 이내 닫혔다. 완전한 암흑 속이었다.

탁탁탁.

누군가가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어둡고 추운 공간을 내달리며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은 너무나도 멀리 있고, 길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복잡한 미로 같았다. 힘없이 떨리는 다리로 한두 걸음
나아갔더니, 소리가 바로 바짝 따라붙었다.

탁탁탁탁탁탁탁.
심장이 크게 부풀었다가 씨앗만큼 쪼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뒷덜미의 솜털이 삐쭉 서며 머리끝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다리가 떨리고 눈물이 울컥 나왔다. 무서워서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손에서 압력이 느껴졌다. 로젤린은 자신이 누군가와 손을 꼭 잡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챘다.

[괜찮아. 손 놓지 마.]

아플 정도로 꽉 쥔 손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절대 놓으면 안 돼.]

263 화.

헐떡이는, 절박한 숨이 섞인 목소리가 지금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한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로젤린은 결국 주저앉았다. 소리는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로젤린이 넘어질 때마다 일으켰고, 짐처럼 질질 끌고 가다시피 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놓지마, 안 돼. 꽉 잡고 있어.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반복했다. 눈물이 계속 흘러넘쳐 시야가 성에 낀 유리창같이 흐렸다.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두운 공간이 빛나기 시작했다. 저 멀리 보이던 희미한 불빛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축제의 등불이었다.

두 사람의 걸음이 느려졌다. 더 이상 쫓기는 듯 다급하지 않았고, 아프게 쥐고 있던 손도 그저 따스하고


부드럽게 맞닿아 있을 뿐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틀어 뒤를 돌았다.

[걱정 마요.]

디에즈, 그가 따스하고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우리를 쫓아오지 않고, 그 누구도 당신을 위협할 수 없으니.]

축제의 등불이 환하게 빛났다. 눈부신 빛에 시야가 이지러지며, 디에즈의 얼굴을 다시 흐리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보았던, 알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이 그 위로 겹쳐졌다. 그가 말했다.

괜찮아. 지켜 줄게, 내가.

로젤린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아주 오랜 과거의 기억이었다.

로젤린은 부스스한 몰골로 꿈에서 깨어났다. 벽난로의 장작불이 어느새 꺼져 있었다. 어둑해진 방 안의 모습
때문인지 공기가 더욱 쌀쌀하게 느껴졌다. 로젤린은 담요를 두르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입안이 깔깔했다. 로젤린은 테이블에 있던 잔을 집었다. 따뜻하게 데웠던 와인은
식어 버렸지만, 목을 축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로젤린은 달콤한 와인을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르스름한 새벽이 찾아오고 있었다.

디에즈가 죽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의 산에서. 사냥 대회가 있던 장소이자, ‘로젤린’이 죽은 장소이자, 더 과거에는


마인들이 형체를 잃고 흩어졌던, 바로 그곳.

드윗은 디에즈가 오로지 그 장소에 도달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바위가 쌓여 있는 절벽
아래에서,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고. 다가오는 검날을 보면서도 눈을 감을 뿐이었다고. 그렇게 죽었다고 한다.

* * *

고래무덤의 파르딕트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다소 불량스러운 태도로 걸어왔다.

“오늘만을 기다렸지.”

하얀밤 기사단의 연무장. 그 중앙에서 로젤린과 파르딕트가 대치했다. 바쁜 일정에 수염도 제대로 깎지 못해 한층
험상궂어진 파르딕트가 목검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악당처럼 웃었다.

“지난날의 굴욕.”

로젤린은 거구의 해적 앞에서도 태연하게 레이몬드가 건네준 쿠키를 오독오독 씹었다.

“지난날의 치욕!”

로젤린이 뒤돌아서 레이몬드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가 로젤린에게 목도리를 둘러 주며, 쿠키 주머니를 하나


더 건네었다.

“왜 이렇게 춥게 입고 다녀.”

“안 추워.”

“이제 좀 약해졌다며.”

“그래도 파르파르보다 강해.”

“아니 이 인간들이?”

파르딕트가 씩씩 성내며 로젤린을 닦달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쿠키를 한 움큼 집어 먹고는 목검을 들었다.
대치하던 두 사람은 푸른등불의 카일로가 휘파람을 부는 소리와 함께 격돌했다.

따악! 목검과 목검이 부딪쳤다. 로젤린은 파르딕트의 목검을 자신의 목검으로 밀며 발을 굴렀다. 닿아 있는
접점을 중심으로 빙글 회전한 그녀가 파르딕트의 등을 훌쩍 뛰어넘었다.

서로의 등이 마주한 상태였다. 파르딕트가 등 뒤에 있는 로젤린을 공격하기 위해 오른발을 축으로 돌며 검을


휘둘렀으나, 로젤린은 보이지 않는 등 뒤의 기류를 읽었다. 왼발을 축으로, 파르딕트의 움직임에 거울처럼
반사되듯이 움직인 로젤린이 목검을 뒤로 뻗어 그의 목에 툭 대었다.

대결이 끝났다.
파르딕트가 바닥에 목검을 매섭게 내팽개쳤다.

“약해졌다며!”

“그래도 파르파르보다는 강하지.”

로젤린이 뻐기는 소리에 그는 크윽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이후로도


파르딕트와 두 번 더 결투하고, 카일로, 네스터, 레이몬드와 슈텐, 르원 등. 제국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검사들과 검을 부딪치며 한껏 약해진 자신의 힘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쳤다.

로젤린은 후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았다. 고작 이 정도 움직인 것 가지고 숨이 차다니. 보통의 사람들은 원래


이런 건가?

“파르파르.”

“왜.”

“다들 이렇게 약하게 살고 있었던 거야?”

“…….”

“정말 대단하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악의라고는 한 점도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진심이었다. 로젤린은 팔을 주물럭거리면서 하, 너무 약한데.


이래서야…… 어쩌고저쩌고 계속 중얼거렸다.

본인의 기준에는 미달이라고 하지만 로젤린은 여전히 하얀밤 기사단 내에서 최강자의 자리를 지킬 정도로 강했다.
파르딕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정말 재수 없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의 앙탈을 건성으로 넘긴 로젤린은 연무장을 벗어나 아직 겨울에 있는 성을 거닐었다.

낮은 나무의 가지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로젤린은 공연히 그걸 손으로 쓸어 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손에
녹아들며, 축축하게 엉겨 붙었다. 후두둑, 하얀 눈덩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더기로 떨어져 내렸으나, 발이
닿는 모든 곳에서 푸릇하게 자라나는 새싹들은 미처 다 덮지 못했다. 어느새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었다.

작은 웃음소리가 로젤린의 귓가를 지나갔다. 월장석 성의 어린 시녀들이 참새 떼처럼 모여서 종종 이동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노래 같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러 사건을 겪으며 침묵에 잠겨 있던 황성에도 따스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휙, 무언가가 날아오는 소리에 로젤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차가운 흰 덩어리가 그녀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돌아본 곳에는 월장석 성의 시녀, 미미가 인상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맞으라고 던졌는데.”

“알았어. 다시 해.”

마카롱이 다시 눈을 뭉쳐 로젤린의 얼굴에 퍽 던졌다. 얼마나 옹골차게 뭉쳤던지 온기에 녹아 버릴 눈 덩어리가


제법 매서웠다. 로젤린이 불만스럽게 바라보자 마카롱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까 월장석 애들이랑 눈싸움이라는 걸 했거든.”

시녀들이랑 놀다 온 모양이었다.

“근데 내가 던진 눈에 맞은 애들마다 우는 바람에 쫓겨났어. 나약한 것들 같으니. 야생이었으면 첫 번째로


죽었겠지.”

로젤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딜 웃고 있어. 너는 두 번째야.”

마카롱도 픽 웃으며 로젤린의 얼굴에 묻어 있는 눈 조각을 털어 줬다. 마카롱은 눈을 찡긋찡긋 감았다 뜨는


로젤린을 코앞에서 응시했다.

“몸은 좀 어때.”

한동안 듣지 못했던 ‘몸은 좀 어때’였다. 지겨울 정도로 들었던 질문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로젤린은
마카롱의 그림자 진 얼굴에서 무언가를 예감했다.

전쟁이 끝났다. 한때 모두를 휩쓸어 가 버릴 폭풍처럼 불어 왔던 위험이 사라졌다. 검은 언제나 날카롭게 벼려져
있을지언정, 검집 안에서 잠자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이다.

[이제 나에게 그 힘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겨울은 가고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모두가 완연하게 그 따스함을 느끼며 웃고, 떠들고, 행복해했으나 마카롱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무뚝뚝했고, 여전히 시답잖은 시비를 걸고 다니며, 여전히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

오로지 마카롱만이 이 공간에서 이질적으로 떠 있었다. 모두에게 전쟁의 종결은 새로운 시작이 되었으나,
마카롱은 아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전쟁에 자신의 목적을 둔 적 없었다. 마카롱이 바라보는 곳은 이
자리보다는 조금 더 멀고, 이보다 더 희미했다. 닿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로젤린은 마카롱을 바라보며 언제나와 같은 대답을 했다. 하지만 조금 더 진심을 담아서.

“괜찮아.”

마카롱이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로젤린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한번 말했다.

“나 이제 괜찮아.”

마카롱이 입가를 쓸어내리며 웃었다.

“눈치가 조금 빨라졌네.”

일라베니아 황실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마카롱과 이 공간은 공존할 수 없었다. 보다 뚜렷한 기억을 가진 자로서,
마지막 남은 분노의 파편으로서. 그녀는 단순히 로젤린이라는 동족을 위해 유예를 가졌을 뿐이었다.

“금기를 저지른 동족의 끝을 봐 주겠다 했었지.”


로젤린은 처음 그녀와 만났던 날을 상기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로젤린은 ‘끝’이라는 것이 막연히 죽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새로운 시작은 끝과 맞물려 있었을지도 몰랐다.

마카롱이 자신의 머리에 묶인 리본을 풀어 내렸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마카롱이 활짝 웃었다.
처음 보는 환한 미소였다. 로젤린의 눈가가 붉게 변하며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마카롱의 손이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가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번에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어. 저번의 그 바보보다는 조금 나을지도.”

과거 만났던 동족은 토끼가 되어 사냥꾼에게 잡혀 죽었다고 했다. 지금 그거랑 비교한 거야? 사냥꾼의 고기가 된
것보다 조금 더 나은 처지였어, 나? 로젤린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코를 훌쩍이는 로젤린을 보고
마카롱이 웃었다.

“아니. 제법 괜찮아.”

마카롱이 땅을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곧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리며 로젤린과 눈을 맞췄다.

“괜찮아 보여.”

마카롱의 말은 희미하게 느껴지는 평화에, 앞으로도 괜찮으리라는 로젤린의 마음에 확신을 더했다. 그녀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로젤린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한참 작은 여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로젤린은 부디 마카롱이 원하는 곳에 닿기를 바랐다. 그곳이 어디든지. 얼마나 멀든지. 마카롱에게는 아주 긴긴
시간이 있을 테니.

264 화.

마카롱은 평소와 같이 여기저기 시비 걸면서, 맛있는 걸 많이 먹고 다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떠난 흔적도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긴 여행을 떠날 때 무언가, 옷이나 빗 따위의 사소한 물건이라도 챙기곤
하지 않던가. 그런 빈자리의 흔적이 생겨야 마땅함에도, 마카롱이 떠나기 전과 후의 광경은 조금도 다른 게
없었다. 생각해 보니 마카롱은 자신만의 물건이랄 게 딱히 없었다. 처음부터 떠나기 쉽도록 이별을 염두에 두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편지하라고 했는데, 안 하겠지. 로젤린은 입을 쭉 빼고 툴툴거리다가 서랍을 열었다. 마카롱이 좋아하는


샴페인을 가득 채워 둔 칸이었다.

“어…….”

질서정연하게 줄 맞춰 놓았는데, 병 하나가 빠져 있었다. 마카롱이 가지고 간 것 같았다. 로젤린은 샴페인 한


병을 덜렁 들고 떠나는 마카롱을 상상하고서, 잠시 웃다가 울었다.

로젤린은 부은 눈으로 하루 일과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지나가는 기사 단원들마다 그녀의 퉁퉁 부은 눈을 보고


걱정했고, 카일로는 히죽거리며 로젤린을 놀리다가 한 대 맞았다.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니 평소보다 더 어수선했다. 로젤린은 다시 출근길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단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별의 슬픔을 곱씹느라 미처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 로젤린…… 경?”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한껏 부은 눈을 보고 흠칫했다. 하지만 로젤린이 입을 조가비처럼 딱 다물고 그 의문을


해소시켜 줄 의사가 없음을 표시하자, 머뭇거리며 말을 마저 이었다.

“음…… 대신전의 기둥이 갑자기 부서졌다는군.”

“…….”

로젤린은 오십 년이 지나도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던 슬픔의 늪에서 단숨에 빠져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신전의 기둥이 부서져?

로젤린의 몸이 눈에 띄게 굳자, 리카르디스가 눈매를 좁게 만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짐작이 가는 부분이라도……?”

“그, 그럴 리가요.”

로젤린은 애써 딴청을 피웠다. 누가 했는지 너무 빤했다. 보아하니 리카르디스도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 개가 무너졌는데 그게 중요한 위치에 있는 기둥들이라서 그런지 붕괴 위험이 있다고 해. 보수하는 도중에


인명 피해가 발생될 우려가 있어서, 철거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나? 꼬장꼬장한 귀족들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라고 생각하자마자 리카르디스가 말했다.

“의견을 모았지.”

힘과 권력, 신성력에 정당성까지 지니고 이 땅 위를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국왕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이 시점에 많지 않았다. 분명 신전을 철거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네 집을 철거해
버리고 싶다는 말을 고상하게 바꿔서 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언제였지. 마카롱 경이 대신전을 두 쪽으로 갈라 달라고 했었는데.”

사레가 들린 로젤린이 급하게 기침했다.

“기둥이 부서지지 않았어도 조만간 어떻게든 처리할 예정이었으니, 잘됐지 뭔가.”

“아, 그렇습니까? 정말 잘됐네요. 누가 한 건지는 몰라도 사람들의 일거리를 줄여 준 게 아니겠습니까?”

로젤린이 부은 눈으로 방긋 웃으며 대답하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 * *

“조금만 더 가면 나와요, 로젤린 경.”

로젤린은 헤사가 안내하려는 곳이 대충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최근에 헤사가 기숙사 옆 공터 부지의 땅을


골라서 작은 텃밭을 만드는 걸 본 적 있었다. 며칠 전 씨앗을 사서 심었다는 얘기도 들었던 참이었다. 싹이 나서
자랑하고 싶은 것인가?
그런데 뭔가를 자랑하려는 사람치고는 과하게 비장했다. 용건이 미궁으로 빠질 즈음, 텃밭이 나왔다. 로젤린은
눈을 의심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었는데?

간이 울타리를 쳐 놓은 텃밭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냥 수풀도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허브와 딸기 잎이 엉켜 있는 것이었다. 작게 열매도 맺혀 있었다.

헤사가 풀의 허리쯤을 짚으며 말했다.

“어제까지는 키가 이랬는데요. 오늘은 보시다시피…….”

로젤린은 입을 벌리고 텃밭을 구경했다. 식물의 성장 속도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이 정도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뭘 길러 본 적이 없으니까, 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전부 싹을 틔우더라고요. 무척 기뻤는데…


….”

헤사가 아까의 비장한 얼굴로 텃밭을 보고 있었다. 백 명의 적이 있는 전장에 홀로 돌진하기 전의 표정이었다.

“자라는 것도 정도껏이지, 솔직히 지금은 무서울 정도예요. 내일이면 나무만큼 커서 제 방 창문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요.”

소년이 저주받은 나무에 관한 괴담이 그러했노라 고백했다. 그 수심 어린 얼굴을 보고 로젤린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헤사는 그녀를 따라 살짝 미소 짓고는 허브 몇 장을 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아직 쌀쌀해서 따뜻한 레몬 허브티를 만들려고요.”

헤사가 만든 레몬 허브티는 당도와 산도, 향이 아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로젤린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
중 하나였다. 로젤린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 뿌듯해하는 소년이 흙 묻은 손으로 코밑을 슥 훔쳤다.

“내일이면 딸기를 드실 수 있을지도 몰라요.”

감명 깊은 얘기였다. 로젤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박수쳤다. 그게 웃겼는지 헤사가 꺄르륵 하고 뒤로


넘어갔다. 로젤린도 웃으며 소년의 코 밑에 묻은 흙을 닦아 주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성장은 헤사의 텃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대륙, 하늘 아래의 모든 영역에 푸른 잎이
돋아나고 열매가 영글었다. 아직까지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축복의 밤을 보았던 모든 이들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을 칭송했다. 의식에 대한 진실이 풀리긴 했으나, 그
진실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이 이 땅에 다시금 생명을 불러일으킨 업적을 퇴색시키진 못했다.

각국의 사절단은 아직 전쟁의 상처가 낫지도 않은 시점에 리쉬에 왕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오늘 저녁에 있을
리카르디스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왕성과 왕성을 둘러싼 거리는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가 만연했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과 행복이 가득했다.

몇몇 사람들만 빼고.

“집어치워!”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보게 된 것은 서류를 집어던지며 성질내는 리카르디스였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쨍알 쨍알 시끄러운 노친네들이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들고 있어!”

평신관 복장의 누군가가 리카르디스가 집어 던진 종이를 황급히 줍고 있었다.

“비리에 착복에,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먹으며 진실을 은폐하기까지 한 기생충들! 목숨 붙여 준 걸 감사히


여기지는 못 할 망정 어디서 뚫린 입이라고 하라 마라, 말이 나오나!”

“그, 그게 아니오라, 폐하. 대신관께서는…….”

“권력 남용? 신께서 주신 권력을 함부로 쥐고 흔들 셈이냐고? 정확하다고 전해 줘라. 권력을 쥐고 흔들 이날만을
위해 살아왔다고. 그게 내 열 살적부터의 꿈이었지.”

어?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리카르디스의 커다란 포부를 들은 신관은 모호하고 애매한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당장 내 집무실에서 발을 떼지 않으면 권력 남용의 실사례를 몸으로 체감하게 될 터이니.”

“이델라브힘의 품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국왕 폐하!”

신관이 잽싸게 빠져나갔다. 씩씩 성내던 리카르디스는 문가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로젤린을 보고 몸을


굳혔다.

“…….”

두 사람은 말없이 눈만 깜박였다. 리카르디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잠시만 나갔다가 들어와.”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말대로 다시 나갔다가 5 초 후에 들어갔다. 아까와 달리 그는 평온해 보이는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흐트러졌던 머리도 어느새 정리되어 있고, 성난 숨도 쏙 들어간 상태였다.

“오늘 날씨가 참 좋군, 로젤린.”

앞서 있었던 일을 모두 잊으라는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로젤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루 이틀 보는 모습도


아닌데 새삼……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리카르디스가 뾰족하게 물었다.

“뭘 새삼스럽게 그러냐고 생각했지.”

로젤린이 눈에 띄게 흠칫했다. 리카르디스가 깍지 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괴로워했다.

“나도 그대에게는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어.”

로젤린의 가슴이 설레어 찌르르 울릴 찰나,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다시 음산해졌다.

“그런데 그것들이 먼저 나를…….”

리카르디스가 울컥 올라온 화를 가다듬었다. 바쁜 일정에 즉위식까지 겹쳐서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실상 바쁜 건


리카르디스뿐 아니라, 리카르디스를 보필하는 모든 하급자들의 운명이었다. 때문에 로젤린도 밀려드는 일에
파묻혀 하루 종일 서류 작업을 하고, 밤을 새우고, 그 와중에 만남을 요청하는 이들과 식사하고, 일을 처리하고
…….

그렇게 살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바빠서 식사도 대충 때운 적이 많았다. 오늘도 테이블 위에 차려진 식사는
서류 작업을 하면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종류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걸 보는 로젤린의 표정이 울적하게
변했다.

바깥에서는 하하 호호 웃음과 노래, 음식들이 깔려 있는 축제인데 왜…… 로젤린이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눈물이라도 떨굴 듯 서글픈 표정을 짓자, 리카르디스는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가자.”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펜을 집어 던지며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왔다.

“거리 축제가 그렇게 호화롭다지. 즉위식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돌아오면 되겠지.”

265 화.

로젤린의 얼굴에 점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축제에 가서 이것저것 먹을 수 있는 것도 좋지만,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일탈 그 자체가 설레었다.

물론, 두 사람만의 일탈이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쭉 공기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같이 집무실 안에 있던 호위


기사, 푸른등불의 카일로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나단에게 그대로 일러바쳤기 때문이었다.

5 쿠퍼짜리도 안 되는 입 같으니. 로젤린이 카일로를 노려보았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은 나단과 잇세리온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후에야 짧은 일탈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하얀밤 기사단원 몇 십 명을 포함해서. 리카르디스는 불만스러워했지만, 일국의 왕이 호위도 없이 거리에 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단, 르원, 레이몬드, 파르딕트, 슈텐, 네스터, 클로드, 바스티안, 레티시아, 에버하르트, 헤사. 외에도
기사들 중 실력이 좋은 몇몇을 더하여, 평민들의 옷으로 환복한 후에 성을 나섰다.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가 보니, 평민들의 옷을 입고도 너무나도
고상한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보였다. 말을 타고 가면서 봐도 귀족이었다. 결국 과거에 썼던 방법이 차용되었다.

“나단 경. 경의 어머니는 그대를 뭐라 부르셨나?”

“다니입니다.”

“…….”

레몬, 파르파르, 루루, 슈슈…… 다니까지. 귀엽고 상큼하고 사랑스러운 애칭의 시커먼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도련님은 착잡한 표정을 떨치지 못했다.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가시지요, 도련님.”
걸걸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정말 아니었는데.”

한숨 쉰 도련님을 중심으로 몇 개의 조가 나누어져 이동했다.

다가오는 봄 축제 날과 리카르디스의 즉위식이 맞물린 거리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로젤린은 그


속에서 놀라운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검은색과 은색 머리칼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림자 없는 밤의 축제 때처럼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던, 흔하지 않은 머리 색의 보유자 두 명이 의문스러운


눈길로 계속 거리를 훑었다. 레이몬드가 흐흐 웃으며 옆에서 설명을 붙였다.

“폐하와 로젤린 경의 영향으로 최근 검은색이랑 하얀색 가발이 유행하는 중이잖아. 로즈 네 가발도 정말


예쁘네.”

레몬이 능청스러운 연기를 하며 로젤린의 망토를 젖혔다. 그녀를 따라 리카르디스도 소심하게 망토를 끌어 내렸다.
그의 남다른 미모에 잠깐 시선이 집중되긴 했으나, 이곳은 축제의 한가운데였다. 모두가 웃고 떠들고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는 이 땅에 축복을 불러온 누군가의 위대한 업적 덕분에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로젤린은 재빠른 동작으로 주위를 훑었다. 고초를 겪으며 황폐해졌던 수도 거리는 수복되기도 전에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벽의 균열을 따라서 저렇게 그림을 그리다니! 깨진 유리창 파편에 색을 칠해서 줄에 매달아
조명에 반사되게 하다니!

사람들의 창의력과 어떻게든 축제를 즐기겠다는 집념이 놀라웠다. 어쩌면 평소보다도 볼 게 많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둘러보는 것도 잠시. 로젤린은 거리를 꽉 메운 음식 냄새에 정신을 빼앗겼다.

고기만 있는 대왕 꼬지, 허브 로스트 치킨, 치즈에 꿀을 곁들인 디저트, 돼지고기 스테이크, 따뜻한 스튜, 머랭
쿠키, 눈에 시럽을 뿌린 빙수.

로젤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짜 맞춘 듯이 먹을 걸 볼 때마다 두 개씩 사서 하나는 본인의 입에, 하나는 로젤린에게


건네주었다. 로젤린은 마다하는 법 없이 열심히 받아먹었다.

방긋방긋 웃던 로젤린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헤사는 그것이 맛있음의 한계치를 넘으면 나오는 로젤린의
진짜 반응이란 걸 알고 있었다. 축제 한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냉철하고 싸늘한 걸 보니, 정말
심각하게 맛있는 모양이었다. 헤사도 로젤린을 따라서 대왕 꼬지를 사 먹고 양념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파악하려 노력했다.

로젤린은 누구의 손이 다가오기에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설탕에 졸인 과일 위로 크림을 끼얹은 것이었다.


로젤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짧은 행복을 음미했다. 로젤린에게 행복을 선사한 리카르디스는 음식이 다가오면
입부터 벌리고 보는 로젤린의 행동에 착잡해하고 있었다.

아기 새와 동급이로군…….

중얼거리는 소리는 로젤린이 미처 듣지 못했다.

리카르디스를 호위하던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위험 요소가 많지 않다는 걸 알고 풀어졌다. 저들끼리 뭘 사 먹거나


기념품을 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한다든지, 축제를 양껏 즐기고 있었다.

로젤린은 자신을 바라보며 뭔가를 말하려는 파르딕트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파르딕트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채
나오기도 전에, 뒤에서 튀어나온 르원이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결국 듣지 못했지만 대충 저기에 맛있는 거 있다,
내지는 어떤 대회가 있으니 같이 참가하자쯤 되겠지 싶었다.

르원이 씩씩대면서 눈치 좀 챙기라고 파르딕트를 혼냈다. 눈치를 챙겨? 무슨 뜻인가 생각하던 로젤린은 곧
깨달았다. 르원이 리카르디스와 자신의 사이를 배려해 주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이 정도 눈치는 있지. 로젤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리카르디스가 2 차로 넣어 주는 딸기 디저트에 아기 새처럼


다시 입을 벌렸다. 한 명은 본인의 기민한 눈치를 자랑스러워하고, 한 명은 착잡해하고 있을 뿐이라 르원의
배려는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로젤린은 이것저것을 먹고 다니던 중, 거리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척 봐도 돈깨나 있겠다 싶은 중년


남자의 주머니를 털고 있는 소매치기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의 거리에서 만난 마인 소년이었다.
소년은 그사이 훌쩍 자라 어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는 짓은 그대로였지만.

그 순간 청년과 로젤린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돈주머니를 쥔 채 굳어 버렸다.

로젤린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청년은 꺼냈던 돈주머니를 주인의 품에 잽싸게 넣은 후, 로젤린을 바라보며 두
손을 삭삭 비볐다. 로젤린은 코웃음을 치고 청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후, 제 앞도 한번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로 딱 와라. 라는 뜻이 전달되었는지 청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가 터덜터덜 천천히 걸어 로젤린의 앞에


섰다. 고개는 푹 숙이고 있는 채였다.

“……붉은수레바퀴 백작님한테는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되나요? 오늘은 사고 안 치기로 했는데…… 아, 결국은


미수에 그쳤으니까 사고는 아닌 건가?”

붉은수레바퀴군, 그 휘하의 마인대에 있는 에렌이었다. 이것저것 많이 받아서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왜


소매치기를? 로젤린의 의문을 읽은 것인지 에렌이 배시시 웃었다.

“허술하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헤헤…… 수도 사람들은 위기감이 좀 떨어지네요.”

뒷골목의 논리에 찌들은 청년의 말에 로젤린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마 딱 밤을 맞고 눈물을 줄줄 흘린 에렌은


리카르디스에게 용돈을 받고 신나서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떠났다. 로젤린의 시선이 청년의 뒤를 따라붙었다.

작위를 받기 위해 붉은수레바퀴군의 마인대가 전원 수도에 오고 있다는 소식은 미리 들었으나, 우연히 만날 줄은


몰랐다. 로젤린은 거리를 둘러보았다. 이제 보니 여기저기에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좁은 골목에서 수도의 연약한 건달에게 삥을 뜯다가 치안대에게 걸려서 잡혀 가는 까마귀라든지, 간이 투기장에서


승부 조작하다 걸려서 치안대에게 잡혀 가는 길레드와 원숭이라든지…….

“…….”

리카르디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목도했던 난장판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듯했다.

“저건…… 칼릭스 경이 알아서 하겠지.”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그 말을 하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느꼈다. 내가 처리해야 하는 사고뭉치는 한


명이라 다행이야,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리카르디스는 정확하게 그 뜻으로 쳐다본 게 맞았다. 하지만
전적이 있어서 로젤린도 뭐라 반박하진 못했다.

팡!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뚱하던 로젤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순식간에 리카르디스의 멱살을 잡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오감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주위에서 흐흐 껄껄 웃던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어느새 눈빛을 다르게 하고
로젤린과 리카르디스의 주위를 포위하듯 섰다.

하지만 그들에게 닿은 것은 화살이나 검, 적이나 암살자 따위가 아니었다. 로젤린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얀색
종이와 하얀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로젤린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로 여린 잎이 나긋이
내려앉았다.

코끝에 화약 냄새가 희미하게 스쳤다. 아마도 화약을 사용해서 꽃잎을 퍼트리는 장치를 한 모양이었다. 주로
전장에서 사용되는 화약을 축제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공중에 터져 나온
하얀 눈송이 같은 것들을 보았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던 터라,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와아 떠들며 하늘을 보고 있었다. 예쁘다.


신기하다. 깜짝 놀랐어! 어린아이들이 겅중겅중 뛰며 흩날리는 꽃잎을 잡으려 했다.

굳어 있던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사람들의 웃는 소리에 머쓱하게 경계 태세를 풀었다. 자기들이 생각해도 좀 바보


같았는지 서로 눈치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정신 차린 로젤린은 자신이 아직까지 리카르디스를 품에 꽉 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가 훨씬 큰


리카르디스가 반쯤 구겨져서 자신의 품에 파묻혀 있었다. 눈만 깜박깜박 감았다 뜨는 걸 보니 그도 놀란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대로 똑바로 일어나 반대로 로젤린을 자신의 품에 넣었다. 두 눈이 마주친 사람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그녀가 웃자 리카르디스도 따라 웃었다.

“아, 재밌다. 매일 매일 오늘 같았으면 좋겠어요.”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