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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사이 고백 금지-1 화(1/127)

작품 내 등장하는 학교 및 교과 과정은 실제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01


두근두근. 심장이 낯선 울림으로 가득 찼다. 유원은 저에게 음담패설을 한 놈에게 그대로
달려들어 주먹을 날리는 현규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닥에는 현규진이 딱 한 모금 마신
초코 우유 팩이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야, 너 뭐라 그랬어.”
“내가 언제 정유원 먹고 싶댔어?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한….”
“주먹이나 처먹던가.”
‘먹고 싶다.’는 말을 묘하게 이용해 기분 나쁜 말을 한 놈의 얼굴에 다시 주먹을 꽂는 현규진을
보던 유원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다시 위로 올라간 팔을 잡았다. 뭐냐는 듯 돌아보는
얼굴에는 화가 가득했다. 평소에 둘이 있을 땐 절대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만해, 여기서 더 하면 괜히 너만 혼나.”
“괜찮아졌어?”
“…응?”
“너 기분 좀 괜찮아졌냐고. 안 괜찮으면 몇 대 더 갈기고.”
제 기분에 초점을 맞춘 채 묻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은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 말을 해야
하는데 자꾸 심장이 두근대고 손과 발에서 힘이 빠졌다. 유원은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도
모른 채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졌어.”
“그럼 됐어.”
그 대답을 들은 뒤에야 현규진은 더 맞을까 봐 무서워 몸을 옹송그리는 놈 위에서 일어났다.
물론 한 번 더 주먹을 치켜들어 치는 시늉을 하며 위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씨발. 한 모금도 안 마셨는데.”
빨대를 꽂자마자 지랄을 해서 마시지도 못하고 바닥에 내던진 초코 우유 팩을 내려다본
현규진이 그대로 콱 발을 들어 짓밟았다. 사방으로 튀는 우유에 주변에서 구경하던 애들과
여전히 바닥에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있던 놈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규진은 제
뒤쪽으로 선 유원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조금 전 살기 어린 눈으로
주먹질을 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아, 진짜 존나 빡치네. 그냥 확 입을 찢어 버릴걸.”
그런 말을 들은 저보다 더 화가 나서는 씩씩대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은 이상하게 콩닥대는
심장 위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제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현규진과 같은 화가 아니었다.
물론 성적인 뉘앙스까지 담아 놀리는 말을 들을 때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고 화가 나지만,
제가 뭔가 액션을 취하기 전에 달려들어 저 대신 열렬히 화를 내 주는 현규진이 있어 화가
뭉쳐 단단해지기 전에 흐물흐물 풀어져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오늘은 화가 나기도 전에 낯선
감정 하나가 마음을 확 치고 지나가 화가 자리 잡을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저 새끼가 나 없을 때도 저딴 개소리한 적 있어?”
“내가 뭐 먹는 거 보면 그냥 계속 맛있겠다고 그랬어.”
“아, 진짜 죽일까.”
몸을 홱 돌려 다시 중앙 현관으로 들어가려는 현규진을 잡은 유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몇 입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손에만 쥐고 있던 쭈쭈바를 내밀었다.
“이거 먹어.”
“넌.”
“안 먹고 싶어졌어.”
“많이 놀란 거 아냐? 씨, 점심 먹은 거 체하면 어쩌지. 보건실 가자.”
“그럴 정도는 아니야.”
“조심해서 나쁠 거 없잖아. 너 지금 좀 아파 보여. 얼굴이 좀 빨간데.”
귀와 얼굴 같은 곳이 좀 화끈화끈한 느낌이 나기는 하는데 눈에 보일 만큼 빨개졌다니 너무
창피했다. 유원은 제가 두 입 정도 먹었던 쭈쭈바 튜브를 입에 아무렇지도 않게 문 채 손으로
이마를 짚어 열을 체크하는 현규진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원래도 큰 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왠지 더 커 보이고, 또 더 잘생겨 보였다.
“열은 없는 거 같은데 귀랑 목이 왜 이렇게 빨갛지. 컨디션 안 좋아?”
“…괜찮은데…. 나 안 아파.”
“안 되겠다. 일단 가서 좀 누워 있자.”
“아니, 진짜 안 아픈데….”
“너 진짜 빨갛다니까. 그러다 쓰러져. 5 교시 체육이잖아. 한 시간 쉬어.”
과잉보호에 지나친 걱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이 멍해 현규진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유원은 잠자코 현규진에게 끌려 다시 중앙 현관 안으로 들어가 익숙한 길을 따라
보건실로 향했다. 그동안 괜찮은 줄 알고 있다가 갑자기 쓰러져 크게 다칠 뻔한 일들이 몇
번이나 있었기에 현규진이 과하게 걱정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선생 없네.”
“점심 드시러 가셨겠지.”
“들어가자.”
비어 있는 보건 교사 자리를 보고 혀를 한 번 쯧 찬 현규진이 유원의 손목을 잡은 채 수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아픈 인간이 없는 건지 수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나 진짜 누워 있을 정도로 이상하진 않아. 진짜야.”
“근데 귀는 왜 그렇게 빨개.”
“…추워서?”
“아깐 덥다며. 안 춥고 덥대서 아이스크림 사 준 거 아냐. 이게 거짓말만 늘어서.”
귀가 빨개진 이유에 대해 솔직하게 설명할 수가 없어 대충 둘러댄 게 하필이면 현규진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유원은 한숨을 포옥 내쉬며 그냥 잠자코 슬리퍼를 벗고 침대 위로
올랐다.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어도 되나 싶게 뛰는 걸 보면 현규진의 말대로 조용히 쉬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체한 것 같으면 말해. 혼자 참지 말고.”
“알았어.”
보조 의자를 가지고 와 침대 옆에 놓고 앉는 현규진을 흘끗 본 유원이 이불을 끌어올려 입술
위까지 올렸다.
“넌 체육 나가야지.”
“아직 시간 있어. 그리고 너 째면 나도 째는 거지.”
“넌 안 아프잖아.”
“난 마음이 아파.”
“으….”
질색한 유원이 그대로 현규진에게서 등을 돌려 벽을 보고 누웠다. 저는 농담으로라도 저런
오글오글한 말이 안 나오던데 도대체 현규진은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
싶었다.
“정유원 싸가지 없게 등 돌리는 거 봐라.”
장난스럽고 가벼운, 하지만 아주 듣기 좋은 울림을 머금은 목소리가 등 뒤로 닿았다. 몸을
돌리느라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이불이 어깨를 덮으며 올라왔다. 유원은 이불을 올려 주는
보이지 않는 그 손길에도 두근거림을 느꼈다.
진짜 왜 이러지. 왜 자꾸 심장이 빨리 뛰지? 유원은 자는 척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다시 떠
하얀 보건실 벽을 바라보았다. 제가 왜 이러는 건지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이러는지 차근차근
생각을 해 보고 싶은데 등 뒤에 현규진이 있어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
저를 안정시켜 재우기라도 하듯 이불 위를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그냥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또 익숙한 손길에 편안함을 느끼다가 잠들었을 텐데 오늘은 아니었다.
생각이 뭔가 맺히려다가 흐트러지고 또 뭔가 모양을 만들며 뭉치다가 흐트러지는 것을
반복했다.
유원은 결국, 5 교시 수업 준비 종이 칠 때까지 그 무엇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저 평소와 다른
마음을 끌어안고 자는 척을 했다.
“…….”
여전히 이어지는 토닥임과 함께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렸다. 아마 한 손으로
게임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같은 사탕 모양을 맞춰 깨는 게임류를 주로 하는 유원과 달리
현규진은 전투 게임을 즐겨 했다. 아마 지금도 신나게 한 손으로 뭔가를 깨부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
평소와 다르게 뭔가 낯선 감정을 머금은 채 내내 긴장해 그런지 명치 끝이 조금 답답했다.
작게 앓는 소리를 내자마자 휴대폰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고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너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속이 좀 답답해….”
“체했나 보네. 아, 그 새끼 그냥 죽일걸. 간만에 씨발, 너 밥도 잘 먹고 그랬는데.”
“심한 건 아냐. 그냥 좀 약 먹고 자면 괜찮을 것 같아. 선생님 오시면 약 받아서 먹을 테니까 넌
얼른 가.”
“가긴 어딜 가.”
“수업 들어야지.”
누가 봐도 가기 싫은 얼굴로 삐딱하게 서 있는 현규진을 올려다본 유원이 손가락 하나로
허벅지를 꾹 눌러 밀었다. 물론 현규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 왜 자꾸 못 보내서 난리야.”
“저번에 선생님이 그랬잖아. 난 아파서 봐주는데 넌 빠지는 거 봐줄 이유 없다고.”
“지가 안 봐주면 뭐 어쩔 건데.”
“억지 부리지 말고 얼른.”
교복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불량스럽게 꽂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던 현규진이 졌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아파서 누워 있는 애를 괜히 이런 걸로 더 신경 쓰이게 할
필요는 없었다. 또 제가 가서 유원이 보건실에 있다는 사실을 체육한테 알려야 하기에 일단
운동장으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엄마, 아빠한테는 말하지 마. 안 그래도 바쁜데 괜히 걱정해.”
“알았어.”
“얼른 가. 늦어서 혼나지 말고.”
“선생 왔나 보다. 나가면서 말할 테니까 약 먹고 자고 있어.”
“으응. 이따 봐. 빠이.”
수면실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돌아본 현규진이 침대에 누워 손을 흔드는 유원을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잠깐이라도 떨어질 때면 늘 저렇게 손을 흔들며 빠이, 빠빠이 같은 인사를
하곤 하는데 매번 들을 때마다 괜히 귀여워 웃음이 났다. 제가 아는 다른 그 어떤 놈도 이런
귀여운 인사를 안 해서 더 그랬다.
머리를 한 번 가볍게 눌렀다가 놓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현규진이 수면실을 나섰다. 유원은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밖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몸에 들어간 힘을 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으로 들어온 보건 선생님이 유원에게 미지근한 물과 약을 줬다. 작은 알약
하나를 삼킨 유원은 다시 고요한 수면실 안으로 누워 커튼 사이로 들어와 침대 위 한 곳을
밝히고 있는 빛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혼자 남게 되자 이제야 생각이 깊게 맺혔다.
‘괜찮아졌어?’
현규진이 돌아보면서 제 기분을 물었을 때 왜인지 모르게 심장이 쿵 떨어졌었다. 그리고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울림으로 쿵쿵 아주 빠르게 뛰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2 화(2/127)

02


몸이 약한 편이라 남을 따라 조금만 많이 움직여도 금세 숨이 차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며 눈앞이 하얗게 되곤 하지만, 지긋지긋할 만큼 많이 겪어온 그 느낌과는 분명 달랐다.
멍해지는 것도 똑같고 심장이 마구 뛰는 것도 똑같은데… 그게 싫지 않았다.
유원은 빛이 묻은 손을 들어 아까 그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근두근 거리는 심장 위를
꾸욱 눌렀다. 나 왜 이러지, 진짜? 아까 놀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진짜 현규진 때문에 이러는
거야?
“…….”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기억이라는 게 존재하는 때부터 늘 함께였던 소꿉친구 현규진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뛴다는 건 역시 말이 되지 않았다. 여태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쭉 함께 보내면서
이렇게 두근댔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또 아까처럼 저를 놀리고 괴롭히는 애에게 달려들어 주먹질 하는 걸 보는 것도 처음이 아니라
더 이해가 가질 않았다. 도대체 이 두근거림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머릿속에 차오르는
생각조차도 유원의 마음을 간질였다.
현규진이 앉아 있던 의자를 가만히 보던 유원은 수업 시작종에 몸을 일으켜 커튼을 걷었다.
그리고 창을 열어 바로 앞 운동장을 내다 보았다.
5 교시가 체육 수업이라 나온 몇 개 반 중에 어렵지 않게 제 반을 찾은 유원은 그중에서도 머리
하나는 더 커서 가장 눈에 뜨이는 현규진을 대번에 발견했다. 거리가 좀 있어 표정까지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체육복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푹 꽂고 삐딱하게 서 있는 걸 보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두 눈에 현규진을 담는 순간 또다시 마음이 울렁였다. 내내 마음이 조였다가 풀어지고 또
두근거린 이유가 정말 현규진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라도 주는 것처럼.
시원한 바람이 유원의 앞머리를 흩트렸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보면 또 빨개진 모양이었다.
유원은 이상하리만치 멋대로 두근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 채 내내 긴 햇살이 늘어지는
운동장 위 현규진을 눈에 담았다.
크고 삐딱하고 따뜻한 제 친구를.
***
5 교시가 시작한 지 20 분 정도 지나자 체육 선생의 감시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20 분
동안은 체육 진도를 나간다고 공을 들고 각종 지랄을 하다가 알아서 연습을 시킨 뒤부터는
본인도 귀찮아졌는지 스탠드에 앉아 한 놈을 잡고 농땡이를 피웠다. 현규진은 들고 있던 공을
김준재에게 넘기고 슬쩍 체육 선생 쪽 눈치를 봤다.
“야, 체육이 나 찾으면 뒤졌다 그래.”
“멍유한테 가게?”
“어.”
“좀 쉬게 내버려 둬. 멍유도 너 진짜 존나 지겨울 듯.”
“씨발, 아닌데. 정유원은 나 존나 사랑해.”
“…아, 존나 미친.”
유치한 대꾸에 고개를 저은 김준재가 현규진에게 공을 던졌다. 타격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여유롭게 받은 현규진이 다시 조금 힘을 실어 김준재에게 돌려주곤 유유히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겨우 20 분 조금 넘게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좀 과할 만큼 걱정이 됐다. 약 먹는 걸 못 보고
나와서 그런 것도 있고, 다른 때는 아프면 하얗게 질리기만 하는데 아까는 귀도 그렇고
목덜미도 그렇고 평소랑 다르게 빨갛기까지 해서 더 마음이 쓰였다.
오늘은 왜 빨개지기까지 했지. 알레르기인가. 아, 아무 일도 아니면 좋겠는데.
수업 중이라 조용한 학교 안으로 들어가 보건실로 향하는 걸음에는 막힘이 없었다. 현규진은
보건실 문을 대충 한 번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 시간에 온 게 이상한지 저를 보고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보건 교사를 보고 씩 웃었다.
“어디 다쳤어?”
“아니요.”
“그럼 유원이 걱정돼서 수업도 하다 말고 온 거야?”
“어차피 자유시간이에요.”
“누가 말려.”
전에는 아무리 걱정이 돼도 수업을 빠지거나 중간에 나와서 이렇게 오면 안 된다고 혼이 난
적도 있지만, 현규진에게는 그게 통하지 않았다. 제가 제 시간을 어떻게 쓰든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현규진은 포기한 듯 들어가 보라고 손짓하는 보건 교사에게 인사하곤
조용히 수면실 안으로 들어갔다.
“…….”
수면실 가장 안쪽 침대 위에는 유원이 잠들어 있었다. 더워서 연 건지 창이 열려 있는 걸 본
현규진이 가만히 창을 닫고 커튼을 쳐 주었다. 고른 숨소리가 나는 걸 보면 그래도 탈이
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목 끝까지 채웠던 체육복 지퍼를 반쯤 내린 현규진이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게임을 할까 하다가 별로 끌리지 않아 괜히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자 메인에 ‘역시 이해연!
이번에도 통했다! <커리어> 시청률 4 화 만에 26.8% 전체 1 위!’라는 기사가 떠 있었다.
누구나 다 알 만큼 유명한 이름이지만, 현규진은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한 의미로 이 이름을
알고 있었다. 평소라면 관심도 가지지 않을 기사까지 대충 훑어본 현규진의 시선이 다시 잠든
유원에게로 향했다. 자기가 아픈 걸 엄마,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라던 유원의 말이 떠올랐다.
포털 사이트 메인을 장식한 이해연은 모두가 아는 아주 유명한 국민 배우이자 유원의
엄마였다. 그리고 현규진에게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주 봐온 이모였다.
두 번째 엄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까운 친구 엄마가 매번 다른 사람이 되어 TV 에
나오는 걸 볼 때마다 조금 신기하긴 했다. 그렇다고 드라마를 꼬박꼬박 챙겨 보진 않지만,
그래도 4 화 만에 26.8%라는 시청률이 얼마나 높은 수치인지는 알고 있었다.
“으음…. 어? 언제 왔어? 벌써 5 교시 끝났어?”
“아니. 체육 원래 뒤에 다 수업 날리고 자유시간 주잖아.”
“그러다 걸리면 혼나.”
“혼내면 그냥 혼나면 돼. 그게 무섭냐. 너 아픈 게 더 무섭지. 약은 먹었어?”
“응. 이제 괜찮아졌어.”
휴대폰을 대충 주머니에 넣은 현규진이 침대 위에 놓인 유원의 손을 잡았다. 아주 따뜻하진
않지만, 그래도 차갑지는 않은 걸 보니 확실히 체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
제 손을 주무르는 현규진을 보며 다시 목덜미로 열이 오르는 걸 느낀 유원이 슬쩍 손을 빼냈다.
멀리 있는 현규진을 보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는데 눈앞에 있는 애를 보며 닿기까지 하니 정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오늘 과외 할 수 있겠어?”
“응. 멀쩡해. 너 숙제 다 했어?”
“아니.”
너무나 당당하게 안 했다 말하는 현규진을 어이없다는 듯 본 유원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매번 안 하기도 힘들 텐데 참 일관성은 있었다.
“넌 과외 왜 해? 숙제도 안 하면서.”
“너 하니까.”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수롭잖은 어조였지만, 유원은 생각지도 못한 현규진의 대답에
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걸 마주해야만 했다. 확실히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아, 이모 기사 크게 났더라.”
휴대폰을 집어 든 현규진이 유원에게 포털 메인에 뜬 기사를 보여 주었다. 솔직히 화제를
돌리려는 이유도 있었다. 돈도 내고 선생님이 시간도 들여 해 주는 수업인데 성실히 잘 들어야
한다고 유원에게 혼나기 직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엄마, 사진 예쁘게 잘 나왔다.”
“촬영 언제 끝나신대?”
“촬영을 좀 늦게 시작해서 이제 8 화 촬영 중인가 봐. 24 부작인데 이제 8 화니까…. 몇 달은 더
걸리겠지?”
한동안 유원을 지금보다 더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한 현규진이 누워 있다가 일어나 살짝
흐트러진 앞머리를 만져 주었다.
“…….”
저보다 훨씬 더 큰 손이 다가와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에 유원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칠댔다.
너무 가까워 손에 초점이 잘 맞지 않는데도 심장은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처럼 막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 가자.”
“아직 한 10 분 남았는데.”
“나 우유 마시고 싶어. 바나나 우유.”
“가자, 매점.”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에 발을 넣은 유원이 자리를 정리했다. 뒷머리가 흐트러졌는지 만져
주는 현규진의 손길에도 자꾸 입술이 마르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유원은 보건실을 나서 매점에 가는 내내 현규진을 의식했다. 현규진이 체육복 지퍼를 내리는
소리나 슬리퍼를 끄는 소리까지도 전부 전과 다르게 귀에 들어와 머릿속이 복작거렸다.
“수업 중에 어떻게 둘이 같이 와? 땡땡이 쳤어?”
“음, 비슷해요. 체육 자유시간이거든요.”
매점 아주머니의 살가운 목소리에 대꾸한 현규진이 바나나우유와 유원이 좋아하는 레몬 맛
캐러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제가 아까 마시려다가 미친놈 때문에 마시지 못한 초코우유도
다시 계산했다.
“그렇게 붙어 다니면 싸우지 않아?”
“안 싸워요. 제가 정유원한테 다 져서.”
“정말? 그건 유원이 말도 들어 봐야지.”
바나나우유에 가느다란 빨대까지 꽂아 유원에게 내민 현규진이 가볍게 웃으며 유원의 대답을
기다렸다.
유원은 빨대를 입에 문 채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현규진이 저에게 다 져
준다는 말에 반박을 해야 한단 생각 같은 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음,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애초에 싸울 일도 거의 없어요. 현규진이 장난만 안 치면.”
쪼로록 바나나우유를 마시며 대답하는 유원을 귀엽다는 듯 보던 매점 아주머니가 햄버거
모양 젤리를 유원에게 하나 주고, 하나 더 들어 현규진에게도 주었다.
“감사합니다아.”
웃으며 인사한 유원이 매점을 나섰다. 현규진은 그 뒤를 따라나서며 햄버거 모양 젤리를
유원의 주머니에 레몬 맛 캐러멜과 함께 넣어 주었다. 저는 물컹한 젤리 식감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유원은 젤리라면 뭐든 다 아주 좋아했다. 책상 서랍 안에 맛별로 모양별로 전부
구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친구 사이 고백 금지-4 화(3/127)

04


“자는 사람 일어나. 집에도 안 가고 잘래?”
종례를 하러 온 담임이 교탁을 손으로 탁탁 치자 엎드려 있던 애들이 몸을 세웠다. 유원은
고개를 돌려 마찬가지로 몸을 세워 앉는 현규진을 보다가 다시 앞을 바라봤다.
과외 숙제를 하라 그랬더니 그새를 못 참고 담배를 피우러 가고, 수업 다 끝날 때까지는
엎드려 자기만 하고…. 참 걱정이었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어느새 종례가 끝난 건지 여기저기에서 의자 밀리는 소리가
요란히 들렸다. 유원은 가방을 책상 위로 올려 숙제할 게 있는 교과서를 챙겼다. 그리고
샤프와 펜, 지우개를 필통에 넣고 지퍼를 닫는 순간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는 느낌이 났다.
머리는 현규진이 왔다는 걸 습관적으로 아는데 몸은 그걸 바로 감지하지 못했다. 등을
문지르며 움직인 손이 어깨 끝을 쥐고 귓가에서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유원은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아, 자도 자도 피곤해.”
머리 위로 현규진의 머리가 닿고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유원의 어깨가
확 움츠러드는 동시에 손에 있던 필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놀랐어?”
현규진의 목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책상 위로 진
그림자와 교복 재킷 위로 닿았는데도 확연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 온기 같은 것들이 유원을
혼란하게 했다.
유원은 이 상황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실체가 있는 반응인지, 있다면 도대체 현규진의
무엇 때문에 제가 이러는 건지 알고 싶어 고개를 돌렸다.
“정유원. 괜찮아?”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쳤다. 유원의 심장은 붙잡을 기회도 주지 않고 수직
낙하했다. 그리고 떨어진 그 곳에서 마구 뛰며 멋대로 굴었다. 너무 제멋대로라 이걸 어떻게
달래야 할지 막막할 정도였다.
두근두근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도 없는 거센 울림이었다. 유원은 너무 가까워 초점이
뭉그러지는 걸 느끼며 멍하니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와 꽤 긴 속눈썹, 여전히 어깨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힘, 현규진의
그늘.
1 초, 2 초, 3 초. 딱 3 초였다.
“뭘 그렇게 놀라.”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한 현규진의 몸이 그대로 떨어졌다. 기다란 몸을 숙여 필통을 주워 가방
안에 넣은 현규진이 멍한 유원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멍유원 또 멍때리네. 놀란 거야, 멍때리는 거야.”
“노, 놀랐잖아. 갑자기….”
허둥지둥하느라 가방을 닫았다가 다시 연 유원이 어쩔 줄을 모르며 다시 지퍼를 잠갔다.
책상을 짚고 삐딱하게 선 채 그런 유원을 보고 있던 현규진이 귀엽다는 듯 웃곤 유원의
가방끈을 당겨 제 한쪽 어깨에 멨다.
“가자.”
“내가 들게, 줘.”
“너 또 얼굴이 좀 빨개. 열나는 거 같은데.”
걱정이 잔뜩 묻은 얼굴로 제 이마를 짚는 현규진의 손길에 유원은 몹시 당황했다. 제가 전에
없이 허둥대고 놀라고 빨개진 이유가 전부 현규진 때문이라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그냥 좀…. 더워, 더워서 그래.”
“아깐 춥다며. 막 더웠다 추웠다 그래? 와, 이거 몸살각인데. 일단 가자.”
너무나 자연스럽게 제 가방과 자기 가방 두 개를 한 쪽 어깨에 멘 채 교실을 나서는 현규진을
멍하니 보던 유원이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현규진의 쓰다듬은 등과 움켜쥐었던
어깨 끝에 열이 나는 것만 같았다.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쳤던 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다 아팠다.
아…. 정말 갑자기 왜 이러지.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유원은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점심시간 때 잠깐 그러다 말 거라고 생각했는데 몇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이상 반응이
이어지고 있었다.
“최해영 여친한테 톡으로 까였대.”
“톡으로 헤어지자 그런 거야?”
“어.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톡으로 까이냐. 울고불고 난리.”
“최해영이 울었어? 상상이 안 가.”
“상상 안 하는 게 나아. 지지야, 지지.”
어린애를 대하듯 말하는 현규진을 보며 숨과 함께 작게 웃은 유원이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걸을 때마다 제가 모래를 밟는 소리는 잘 안 들리는데 현규진이 바스락바스락 모래 밟는
소리는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까 매점에 갈 때 슬리퍼 끄는 소리가 크게 들렸던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최해영 이번에 헤어진 애가 저번에 그 햄버거 먹을 때 본 그 여자애야?”
“햄버거 먹을 때? 아, 그 여름방학 때?”
“응.”
“아니, 걘 진작 끝났지.”
“그럼 헤어지고 다른 애 또 만나서 사귀다가 또 헤어진 거야?”
“어, 그 새끼도 진짜 정상 아냐.”
남이 어떤 식으로 연애를 하든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빨리 만나 사귀고 또
빨리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을 쉽게 만나 사귀고 또 쉽게 헤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게 조금
신기하기는 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울지.”
“그 마음 일주일도 안 갈걸.”
“어…. 저기 최해영.”
아파트 단지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커다란 쇼핑몰 1 층 카페 앞에 최해영이 어떤 여자애와
함께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찬 현규진이 인사도 하지 않고 유원과 그 앞을 지났다.
“저거 완전 미친 새끼네.”
욕을 하는 현규진을 보며 웃은 유원이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아빠’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네, 아빠. 저 유원이에요.”
-응, 우리 강아지. 학교 끝났어?
“네, 끝나고 지금 집에 가는 중이에요. 아빠는? 촬영장이에요?
-응, 원래라면 지금 찍고 있어야 하는데 촬영이 몇 시간 밀렸어. 새벽에나 끝날 것 같아. 끝나도
여기 세트랑 집이 멀어서 2 호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서 알려 주려고. 혼자 잘 수 있겠어?
“그럼요. 전 괜찮아요.”
유원의 아빠, 정기준은 배우 이해연의 매니저였다. 스물다섯인 이해연과 처음 만나 늘 함께
다니다가 사랑에 빠졌고, 연애 5 년 만에 결혼을 했다. 그 후에 작은 소속사를 차려 독립한
정기준을 따라 이해연이 소속사를 옮기며 그 영향으로 꽤 이름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정기준의 소속사에 몸을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준 액터스’는 탄탄한 기획사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내로라하는 많은 배우를 배출했다.
그렇게 규모가 커진 기획사를 운영하면서도 유원의 아빠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배우이자
아내인 이해연의 매니저 일을 여전히 자처했다. 그래서 유원의 엄마가 작품에 들어갈 때면
촬영 기간 내내 거의 집이 비었다. 처음에는 갑자기 가족이 다 빠져나가고 혼자 커다란 집에
남게 된 것 같아 무섭기도 하고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익숙해진 일이었다.
-규진이랑 같이 있지? 과외 하는 날인가?
“네, 맞아요.”
-같이 저녁 맛있게 먹고, 혼자 있기 무서우면 규진이 자고 가라 그래.
“네에, 그럴게요.”
-어, 아빠 이제 가 봐야겠다. 이따 밤에 또 전화할게. 사랑해, 아들.
“저도요, 아빠.”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넣은 유원이 다시 제 어깨 위로 턱 얹히는 팔에 숨을 들이마신 채
내쉬지 못했다. 팔이 무겁기도 하고, 또… 어깨를 만지작대는 손이 너무 뜨겁게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 못 들어오신대?”
“응…. 촬영이 딜레이 됐나 봐. 새벽에나 끝날 것 같은데 거기서 여기가 좀 멀고, 며칠은 그쪽
세트에서 촬영해야 해서 그 근처에 집 구한 데가 있는데 거기로 가실 건가 봐.”
“아, 그럼 또 내가 자고 가야겠네.”
“됐거든.”
“튕긴다, 또.”
어깨를 꽉 쥐는 손에 그만 숨이 떨려 버렸다. 유원은 목덜미가 확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현규진의 팔을 벗어났다. 열이 오른 뺨과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상해진 제 상태를 들킬까 봐 평소보다 더 빠르게 걸어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땐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유원은 가빠진 숨을 내쉬며 아파트 출입 카드를 기계에 댔다. 빨리
현규진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오늘은 너무 기분이 이상해서 혼자 오래 있으면서 생각을,
이 이상한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정리하고 싶었다.
“저녁 뭐 먹을까.”
하지만 오늘은 그 무엇도 유원을 도와주지 않았다. 혼자 있고픈데 하필 과외를 하는 날이라
현규진과 함께 저녁도 먹어야 하고, 과외가 끝날 때까지 얼굴을 봐야 했다. 늘 해 온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너무 신경이 쓰였다.
“멍멍.”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왜, 이모부도 너 강아지라 부르시잖아.”
“아빠랑 너랑 같아?”
“달라서 난 멍멍이라고 하잖아. 그러게 사람 말하는데 누가 자꾸 멍때리래.”
정말 강아지를 쓰다듬듯 머리를 흩트리는 현규진의 손을 잡아 내리고 아프지 않게 때린
유원이 119 동 안으로 들어갔다. 현규진도 그런 유원을 따라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라
유원이 사는 6 층과 제가 사는 12 층을 차례로 눌렀다.
“옷 갈아입고 갈게. 저녁 뭐 먹을지 생각하고 있어.”
“응.”
6 층에서 내리기 전 현규진에게 가방을 받은 유원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빠이.”
빠르면 10 분, 늦어도 30 분 안에는 다시 볼 텐데 손까지 흔들며 인사하는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똑같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어, 빠이.”
닫히는 문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유원은 얼른 시선을 돌려 도어록 캡을 열고 비밀번호 여섯
자리를 눌렀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숫자가 하나씩 올라가는 걸 본 뒤에야 긴장한 듯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이 흐늘흐늘해졌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5 화(4/127)

05


겨우 문을 열고 들어간 유원은 운동화를 벗고 거실 옆 복도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평소에는
집이 굉장히 조용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오늘은 조용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생각할 게 아주아주 많은 날이라 이런 날은 딱 이렇게 조용한 집에 혼자 있는 게
제격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렇게 마음이 복작복작한 날, 현규진이 자고 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늘 부모님이 촬영 일정으로 집을 비울 때면 현규진의 집에 가서 지내거나 현규진이
여기로 와서 함께 있곤 했기에 이상할 일도 아니지만, 오늘은 꼭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어떻게든 꼭.
“…….”
일단은 현규진 생각부터 그만하자. 두 주먹을 쥐고 다짐한 유원이 방으로 가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저녁 메뉴를 생각해 두라 했으니 그것부터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녁 메뉴, 저녁 메뉴…. 벗은 교복 정리를 하고, 손을 씻으면서도 저녁은 뭘 먹으면 좋을지
떠올려 봤지만 딱히 이게 진짜 먹고 싶다! 하는 게 없어 정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어려운 게 많지? 유원은 냉장고에서 작은 생수 한 병을 꺼내 소파에 앉았다.
음식 이름만 계속 생각하다 보니 이제 더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몰라, 포기. 쿠션을 안고 소파
뒤로 머리를 젖혀 눈을 감고 얼마간 있으니 도어록 캡이 올라갔다가 바로 다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곧 울리는 벨에 유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까만 후드티를 입고, 후드까지 머리에 뒤집어쓴 현규진이 서 있었다.
“이거 이거 처음부터 다시 다 가르쳐야겠네. 너 내가 누군지 물어보고 문 열랬지.”
“넌 거 알아서 연 거야.”
“어떻게 아는데.”
저를 지나쳐 부엌 쪽으로 익숙하게 걸어 들어가는 현규진을 따라 걸음을 옮긴 유원이 식탁에
놓이는 밀폐 용기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갈비찜이 잔뜩 들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배도 별로 고프지 않았는데 갈비찜을 보는 순간 배고픈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너 주려고 했대.”
“이모 최고.”
바로 휴대폰을 꺼내 현규진의 엄마에게 전화를 건 유원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잘 먹겠다는
말까지 조곤조곤 전했다.
그런 유원을 보며 익숙하게 싱크대 아래 칸을 열어 냄비를 꺼낸 현규진은 갈비찜을
쏟아부었다. 저한테는 없는데 제 부모님과 대화하는 정유원은 늘 웃음과 애교가 넘쳤다.
“네에, 이모. 주말에 놀러 갈게요.”
살가운 걸 좋아하는 엄마는 지금쯤 또 유원에게 녹아 흐물흐물해졌을 것이었다.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냄비를 올린 현규진이 자연스럽게 냉장고 옆쪽에 있는 문을 열고 팬트리 룸으로
들어가 즉석밥 두 개를 들고나왔다.
“엄마 뭐래? 좋아 죽지?”
“좋아 죽지가 뭐야. 이모가 토요일에 고기 먹는다고 오라셔.”
“뭐야, 그건 나도 아직 못 들은 얘긴데.”
“내가 이모 아들이잖아.”
“제발 집 바꿔 살자.”
전자레인지에 즉석밥을 넣은 현규진이 끓기 시작하는 갈비찜을 느릿하게 저었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서 급격하게 허기가 졌다.
“여기가 너희 집 같아. 내가 놀러 온 사람 같고.”
“그 구분 없어진 지 오래되지 않았냐.”
현규진의 말처럼 두 가족은 이제 거의 한 가족이나 다름이 없었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같은 지역에 살면서 학교를 같이 다니긴 했지만, 이렇게 같은 아파트에까지 살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중학교 들어갈 때쯤 새로 지은 아파트, 그것도 같은 동으로 이사를 오며 두 집안의
경계는 급속하게 더 허물어졌다.
시간이 있을 때는 주말마다 모여 시간을 보냈고, 그게 아니더라도 서로를 챙기고 살피며 진짜
가족보다도 더 막역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고 동창으로 시작한 엄마의 인연 덕분에
현규진과 정유원도 태어날 때부터 친구가 되어 지금까지 쭉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 맞다. 아까 벨 누를 때 안 물어보고도 나인 거 어떻게 알았는데. 내가 올 거라는 거 알고
있어서 당연히 나라 생각한 거 아냐?”
“아냐. 네가 비밀번호 누르려고 캡 올렸다가 닫고 벨 눌렀잖아. 나 시험하려고.”
“뭐야, 예리한데?”
“나 원래 그런 거 엄청 잘 알아. 눈치도 빠르고.”
“그래서 바바리 맨도 따라갔지?”
“그건! 진짜 그때 그 아저씨가 도움이 필요해 보였어. 길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듣고 제발
사거리까지만 같이 가 달라는데 그걸 어떻게 거절해….”
현규진이 크고 오목한 그릇을 꺼내 갈비찜을 듬뿍 담아 식탁 위로 놓는 동안 억울한 얼굴의
유원이 즉석밥을 밥공기에 옮겨 담았다.
“한여름에 혼자 바바리 입고 있는 건 안 이상했고?”
“…안 그래도 물어봤어. 안 덥냐고. 그랬는데 여름감기가 심하게 걸렸다고 하잖아….”
“감기는 씨발, 딱 봐도 눈깔이 맛이 갔던데.”
“그래서 그 뒤부터는 조심하잖아….”
“더 조심해, 더. 나인 거 알아도 누군지 꼭 물어보고 열어. 미친 새끼들은 그것까지 다 알고
따라 한다니까. 아니면 얼굴이라도 확인해. 이 얼굴은 아무도 못 따라 하니까.”
수저를 꺼내 식탁 위로 놓은 유원이 여전히 조금 억울해 입술을 조금 내민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제가 바바리 입은 남자와 함께 가는 것을 현규진이 보고 따라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 변태한테 무슨 짓을 당했을지 모르는 일이라 사실 그 얘기가 나오면 할 말이
없기는 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저한테 다가와 갑자기 몸을 밀착하고, 흥분한 것처럼 바바리 단추를
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으, 진짜 싫어. 유원은 그 잔상을 떨치려 얼른 고개를 저었다.
“잘 먹을게.”
대답을 하는 대신 씩 웃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은 발끝을 오므렸다. 매일 보는 얼굴이고,
오늘도 종일 내내 본 얼굴인데 새삼스럽게 왜 더 잘생겨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낯설어 계속 발끝을 오므렸다가 펴는 것을 반복한 유원이 갈비찜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진짜 맛있다…. 이모가 만든 갈비찜 진짜 최고야.”
“많이 먹어.”
유원은 아주 맛있게 제 몫의 밥을 전부 비우고, 냉장고에 있는 꽁꽁 언 아이스크림을 꺼내
식탁에 올려 놓았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적당히 녹으면 현규진과 반씩 나눠 먹으면 될 것
같았다.
“그래놀라 새로 산 거 진짜 맛있다? 아이스크림에 올려서 꿀 좀 뿌리면 진짜 진짜 맛있어. 내가
설거지하고 만들어 줄게. 앉아 있어.”
그래놀라 통과 스틱으로 된 꿀까지 테이블에 놓은 유원이 팔을 걷었다. 현규진 덕분에 맛있게
저녁을 먹기도 했고, 또 여기는 제집이니 당연히 제가 설거지를 할 생각이었다.
“설거지 내가 할게.”
“아냐, 네가 저녁도 해 줬잖아.”
“엄마가 한 거지. 난 데우기만 했고. 내가 할게, 그냥. 나 설거지 빨리 잘하잖아.”
“엄마가 알면 나 혼나. 너만 부려 먹는다고.”
“이모 모르게 하면 되잖아. 나와, 빨리.”
“아니, 그냥 내가….”
마른 수세미를 든 유원은 갑자기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낯설면서도 묘한 압박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까만 후드티에 고개를 들자 저를 내려다보는
현규진과 눈이 마주쳤다. 유원은 순간 숨도 쉬지 못한 채 정신없이 제 얼굴 위로 시선을
떨어뜨리는 현규진을 눈에 담았다.
“플레이어 정유원, 수세미 획득 실패. 설거지 자격 박탈. 식탁으로 쫓겨납니다.”
게임에 나오는 안내문처럼 고저 없이 말한 현규진은 너무나도 쉽게 유원에 손에 들린
수세미를 빼앗았다. 그리고 멍한 유원의 눈앞에 수세미를 내려 흔들었다.
“뭐, 뭐야…. 이리 줘.”
“너 귀 왜 이래?”
“…내, 내 귀가 왜?”
“존나 빨개. 또 더워? 집 안 더운데.”
“옷이 너무 두꺼운가….”
유원은 빨개진 귀를 손으로 가린 채 화장실로 도망쳤다. 문을 잠그고 차가운 물을 튼 유원이
거울로 제 귀 상태를 확인했다. 귀는 물론이고 목덜미와 얼굴까지 전부 발긋하게 달아오른 게
누가 봐도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씨이….”
왜 자꾸 빨개지는 거야…. 현규진 얼굴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면서. 걔랑 닿을 때마다,
가까이 있게 될 때마다 내내 이럴 거야? 유원은 얼른 물에 손을 적셔 빨개진 귀에 가져다 댔다.
이런다고 빨개진 귀가 바로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아
반복적으로 뜨거운 귀를 차가운 손으로 감싸고 또 감쌌다.
왜 자꾸 빨개지는 거야…. 현규진 얼굴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면서. 걔랑 닿을 때마다,
가까이 있게 될 때마다 내내 이럴 거야? 유원은 얼른 물에 손을 적셔 빨개진 귀에 가져다 댔다.
이런다고 빨개진 귀가 바로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아
반복적으로 뜨거운 귀를 차가운 손으로 감싸고 또 감쌌다.
너무 차가워져 얼얼한 귀를 수건으로 닦은 유원이 바로 나가지 않고 욕조에 걸터앉아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나가서 또 현규진을 보면서 뚝딱뚝딱 로봇처럼 행동하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분명 오늘 점심때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편한 친구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된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침착하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규진이잖아. 기억도 나지 않을 때부터 친구였던 애한테 지금
왜 이러는 거야. 찬 기운이 남은 손으로 두 뺨을 탁탁 두드린 유원이 천천히 깊은숨을
내쉬었다. 다짐하는 것과 다르게 여전히 멋대로 두근두근한 마음을 애써 외면한 채.
친구 사이 고백 금지-6 화(5/127)

06


과외 선생 이준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명문대로 통하는 한국대학교 2 학년에 재학 중인
남자였다.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기도 하고, 또 시간이 남으면 대학 생활에서 재미있었던 일
같은 것을 말해 주기도 해서 유원은 과외 하는 시간이 꽤 좋았다.
“너희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더니 틀려도 똑같은 걸 틀리네. 오답도 똑같이 체크한 거 알아?
둘 다 2 번이라고 해 놨어. 더 대박은 풀이 과정인데…. 와, 여기 똑같은 데에서 실수했어.”
점심시간 이후 내내 현규진을 혼자 의식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렇게 틀린 문제가 같다는
것으로 엮이는 것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유원은 흘끗 무표정한 현규진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
문제지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심장이 또 콩닥콩닥 뛰었다.
“음, 이거 말고는 다 맞았어. 둘 다 잘했어. 틀린 거 풀이 과정 다시 짚어 줄게. 자, 여기까지는
응용 잘했어. 그랬는데 여기서 둘이 똑같이 간과한 게 생겼는데….”
상세한 설명에 어디에서 어떤 실수를 했는지 이해한 유원이 오답 노트에 제가 틀린 부분을
정리해 적었다. 그리고 이준서가 풀어 보라고 내 준 비슷한 문제를 풀었다.
“아, 잘했어. 이번엔 둘 다 맞았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면 되겠다. 아직 10 분 남았는데 뭐
궁금한 거 있어?”
“선생님 저번 주에 과외 끝나고 소개팅한다고 하셨잖아요. 어떠셨어요?”
“아, 그거. 잘 진행 중. 오늘 끝나고 또 만나기로 했어. 오늘 만나면 세 번째 만나는 건데 이따
고백하려고.”
고백이라는 말에 유원이 의자를 앞으로 더 끌어 책상에 몸을 밀착해 이준서를 바라보았다.
눈이 반짝반짝한 유원을 보고 웃은 이준서가 프린트물을 정리해 파일에 넣었다.
“그렇게 여러 번 만나면… 고백해야겠다는 느낌이 와요?”
“응. 한 번만 얘기해 봐도 느낌이 와. 아, 이건 진짜 좋다 싶은 그런 느낌?”
“우와…. 어떤 점이 제일 좋으셨어요?”
“음, 대화가 잘 통한다는 거? 별 주제가 없어도 그냥 계속 대화가 이어지는 게 좋더라. 또 나도
먹는 거 좋아하는데 상대도 먹는 거 좋아해서 그 얘기만 해도 한 시간 훌쩍 가고.”
“와아…. 그럼 선생님 오늘 애인 생기시는 거네요?”
“내가 갑자기 미친 짓만 안 하면 그럴 것 같긴 한데…. 모르지. 주영이한테는 그냥 맛집 다니는
친구 같을지도.”
“에이…. 잘 되실 거예요. 파이팅!”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하는 유원을 보며 귀엽다는 듯 웃은 이준서가 손을 뻗었다. 턱을 괸
채 둘의 핑퐁핑퐁 이어지는 대화를 듣고 있던 현규진의 시선이 이준서의 손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고마워. 잘 되면 다음 과외는 밖에서 하자. 맛있는 거 사 줄게.”
“와, 좋아요!”
유원의 머리를 헝클이며 쓰다듬은 이준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헤 웃은 유원이 방에서
나가는 이준서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현규진은 가장 마지막에 방에서 나가며 제 앞에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아까 준 거 두 장 다음 수업 때까지 풀어 둬. 모르는 건 체크해 놓고. 규진이도 꼭 풀고. 오늘
반이라도 풀어 둔 거 정말 잘했어. 다음에는 꼭 다 풀어 놓자.”
“네.”
누가 봐도 안 풀 것처럼 대답하는 현규진을 보고 웃은 이준서가 현관을 나섰다.
“안녕히 가세요.”
“응, 유원이랑 규진이 다음에 보자.”
이준서를 따라 현관을 나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번 더 인사하고 들어오는 유원을 본
현규진이 문제지가 든 파일을 부엌에 있는 식탁으로 놓고 소파로 가 앉았다.
“매번 생각한 건데 좀 오버 아냐?”
“뭐가?”
“집에서 인사 했으면 됐지 굳이 나가서 엘리베이터 타는 것까지 봐야 돼?”
“좀 그렇잖아. 그래도 우리 집에 왔다가 가시는 건데 현관까진 나가야지.”
“정유원, 너 이준서 좋아하냐?”
냉장고에서 초코 우유를 두 개 꺼내 거실로 가던 유원의 걸음이 멈추었다. 지금 제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었다.
“뭐?”
“너 나 집에 갈 땐 네 방에서 손 흔들면서 빠이하고 땡이잖아.”
“너랑 선생님이랑 같아?”
“아, 그러니까 이준서 좋아하냐고. 이준서랑 있으면 말도 많아지고, 또 아까 머리 만져 주니까
존나 좋아하던데.”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시비인가 싶었다. 유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초코우유를
현규진에게 건넸다. 불퉁한 얼굴로 받은 현규진이 빨대를 꽂으며 유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비 걸지 말고 얼른 집에 가.”
“대답 안 하고 말 돌리네?”
“대답할 가치가 없잖아. 그리고 선생님한테 이준서가 뭐야.”
“이준서를 이준서라 그러지 그럼 뭐라 그러냐. 그리고 안 좋아하면 안 좋아한다고 하면 되잖아.
간단한데.”
아니, 오늘 왜 이래, 진짜? 집요한 면이 있다는 걸 오래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것에 고집과 억지를 동시에 부리는 건 또 간만이라 너무 어이가 없었다. 현규진의
말대로 그냥 안 좋아한다고 말하면 끝날지 모르지만, 그 질문 자체가 어이가 없고, 종일
자기를 생각하느라 마음이 복잡한 제 속도 모르고 저런 헛소리나 해 대는 게 짜증 나 순순히
대답해 주고 싶지 않았다.
“됐어, 됐어. 나 학원 숙제해야 하니까 넌 알아서 집에 가.”
“대답할 때까지 안 갈래.”
“…진짜 오늘 왜 이래?”
“너야말로. 아, 난 할 것도 없고 좀 자야지.”
후드를 다시 뒤집어쓰더니 소파에 드러눕는 현규진을 본 유원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는 듯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저렇게 억지를 부리면서 고집스럽게
굴 때는 제풀에 지쳐 집에 갈 때까지 방치하는 게 답이었다. 어릴 땐 원하는 대로 해 줬지만,
이제 저도 어른에 가까워진 열여덟 살이고, 현규진 다루는 것쯤에는 도가 텄기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유원, 너 이준서 좋아하냐?’
책상에 앉아 내일까지 풀어야 하는 문제지를 꺼냈는데 문제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조금 전
현규진이 내뱉은 말도 안 되는 소리만 귓가에 맴돌았다. 유원은 샤프 꼭지로 말캉한 입술을
누르다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물론 과외 선생님이 여러모로 멋있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좋은 대학을 다니면서 이것저것
자기 계발도 적극적으로 하고, 과외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도 성적도 좋고, 이제는 연애까지
성공 직전이라는데 어떻게 멋있지 않겠는가. 이준서는 현재 유원의 가장 가까운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현규진이 말한 뉘앙스는 동경 쪽이 아니라 변태 바바리 맨 같은 쪽이었다. 연애 한번
해 본 적이 없어도 그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
내가 뭐 선생님이랑 말을 많이 하면 뭘 얼마나 많이 했다고. 가끔 수업 일찍 끝나면 5 분, 10 분
대학 생활 이야기를 듣거나 선생님한테 있었던 일들 중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게 전부인데 뭐
그걸로 저런 시비를 거나 싶었다.
아니, 그리고 또 내가 머리 쓰다듬는 걸 뭐 얼마나 좋아했다고.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게 전분데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유원은 괜히 현규진을 생각하니 또
화끈화끈한 귀를 만지작대다가 책상에 엎드렸다.
‘안 좋아하면 안 좋아한다고 하면 되잖아.’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은 왜 하고, 그런 대답은 왜 듣고 싶은데. 내가 뭐 여자 친구 있는 사람
혼자 짝사랑이라도 할까 봐? 그게 아니면…. 혹시 질투하나? 내가 선생님한테만 친절하게
대하고 자기한테는 덜 친절하게 굴어서? 친구끼리도 너무 친하면 독점욕 같은 거 생기고
그런다던데…. 그런 건가? 막 내가 자기랑만 친했으면 좋겠나?
“…….”
그냥 생각만 했을 뿐인데 얼굴로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유원은 갑자기 더워지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서 일어나 창을 열었다. 차가운 11 월의 밤바람이 뜨거운 유원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만약 현규진이 친구끼리도 질투를 하고 독점욕 같은 걸 느끼는
타입이었다면 김준재나 최해영 같은 노는 애들과 어울려 다닐 리가 없었다. 또 드문 일이지만,
저와 싸우고 나면 일주일, 열흘 씩 서로 말을 안 하고도 지냈는데 질투는 무슨. 저와 현규진은
그냥 평범한, 정말 지극히 평범한 친구였다. 제가 몸이 약해 현규진이 그걸 챙겨 주느라
유난스럽게 보일 뿐이지 그 안에 든 마음이나 생각은 다른 평범한 친구 사이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현규진 생각 좀 그만해. 지워 내려는 생각 위로 다시 현규진의 얼굴이
덧그려졌다. 유원은 긴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뺨을 대고 엎드려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아주
고집불통이니 아직 소파에 누워 시위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채 소파에 드러눕던 현규진을 떠올리자 아까 싱크대에서 눈이 마주쳤던 게
떠올랐다. 또 그걸 떠올리니 학교에서 그보다 더 가깝게 얼굴이 마주했던 것도 연이어
머릿속을 채웠다.
“…….”
원래도 그런 후드나 윈드브레이커 같은 걸 자주 입는데 오늘따라 괜히 더 잘 어울려 보이고
잘생겨 보여 자꾸만 생각나고 또 생각났다. 아까 그건 처음 보는 옷인데…. 옷 새로 샀다더니
아까 그걸 산 건가. 잘 어울리던데…. 어떻게 뭘 입어도 저렇게 잘생겼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승전현규진으로 이어지는 생각에 너무 막막해 눈을 감은 유원이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 진짜 왜 이러지…. 몇 번이나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명쾌한 답은
없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7 화(6/127)

07


으슬으슬한 기운에 어깨를 움찔한 유원이 눈을 떴다. 현규진 생각을 하다가 책상에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직도 열려 있는 창을 닫은 유원은 팔을 문지르며 방을 나섰다. 따뜻한
코코아라도 한 잔 타서 마시며 얼른 숙제를 해야겠다 생각하며 냉장고로 가다가 거실 소파에
누운 시커멓고 큰 물체를 보며 깜짝 놀랐다. 아, 맞다. 현규진.
“너 아직도 안 갔어?”
원래도 한 고집하지만, 진짜 오늘은 엄청났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시멜로가 뜬
코코아 위로 현규진이 뒤덮였다. 유원은 부엌으로 가던 걸음을 돌려 소파로 가 눈을 감고 있는
현규진을 흔들었다.
“늦었어. 얼른 가. 가서 자.”
“대답하면 갈게.”
“와…. 그걸 꼭 들어야 알아?”
“어. 들어야 알지.”
오기고 뭐고 반쯤 포기한 채 현규진의 얼굴이 있는 쪽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은 유원이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을 흘끗 바라보았다. 고집불통이라 질리는 와중에도 잘생겼다는 생각이 드는
제 머리를 어떻게 하고 싶었다. 괜히 두근두근한 제 심장도 같이.
책상에서 잠들기 전까지 현규진 생각만 하고, 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생각하고, 그런
저를 보며 위기감을 느끼며 걱정을 그렇게 했으면서 언제 그랬었냐는 듯 얼굴을 보자마자
잘생겼단 생각이나 하고 있는 제가 한심했다. 진짜 나 어떡하지.
“안 좋아해.”
그냥 져 주면 안 돼! 하는 마음까지 완전히 버린 유원은 그냥 현규진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을 해
주었다. 물론 그게 저의 진심이기도 했다.
“내가 선생님을 왜 좋아해.”
그제야 현규진의 눈이 뜨였다. 잠시 천장을 보던 현규진이 몸을 돌려 누우며 유원을
바라보았다. 한층 누그러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은 숨이 섞인 웃음을
보였다.
“무슨 말만 하면 웃어 주잖아.”
“그건 기본 예의지. 네가 안 웃어 주니까 나라도 웃는 거잖아.”
“여기저기 만져도 가만히 있고.”
“이상하게 말하지 마. 어딜 만졌는데…. 누가 그런 걸 만졌다고 해.”
유원은 진심으로 현규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만졌다.’라는
말은 너무 불순하게만 들려서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그러니까 어디.”
정말 궁금해서 되묻자 손이 다가왔다. 유원은 저에게 다가오는 현규진의 손을 보며 긴장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부질없는 일이었지만.
“여기.”
기다란 손가락이 다가와 왼쪽 뺨을 아프지 않게 눌렀다. 그리고 옆으로 가 오른쪽 뺨에도
닿았다.
“여기도.”
“…….”
“그리고 또 여기.”
접혀 있던 손가락이 전부 펴져 머리를 덮는 느낌에 유원은 순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농담을 하거나 뭐 문제를 잘 풀었을 때 선생님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 준 기억이 났다. 볼…
볼은 언제 만졌더라. 아, 깜빡 잊고 숙제를 안 했을 때 혼내듯 한 번, 정말 딱 한 번 아프지 않게
볼을 꼬집혔던 기억이 있었다. 왜 제가 현규진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고 해석하지 못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애초에 그 행동을 중요하게 생각해 기억에 남긴 적도 없고, 또 그 행동을
만진다고 표현할 수 있단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너는 왜 만지는데.”
“친구잖아.”
“…….”
“난 그래도 돼.”
친구라는 말 때문인지 뺨에 다시 살짝 닿는 손끝 때문인지 유원의 마음이 울렁였다. 친구가
맞는데, 저도 너무나 잘 아는 새삼스러운 사실인데 지금 마구 흔들리는 마음은 친구의 것이
아니었다. 아닌 것만 같았다. 유원은 마구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도 모르고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잘 아는 현규진이 맞는데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
간지럽다고, 손이 닿는 곳마다 너무 뜨겁다고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유원은 멍하니 눈을 맞춘 채 제 뺨을 건드리다가 귓가에 닿는 손가락을
느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귓가를 스친 손이 내려가 목덜미에 닿았다.
손끝이 피부를 문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착각일까? 유원은 조금 더 아래로
움직여 후드티 안쪽으로 침범하는 손가락의 느낌에 아랫배가 확 조이는 걸 느꼈다.
“잘 참네.”
“…응?”
“안 간지러워? 너 간지럼 잘 타잖아.”
“아…. 가, 간지러워. 그러니까 그만하고 얼른 가.”
바닥에서 일어난 유원이 목덜미를 만지작대며 일어나는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배 속은
간지럽고, 목덜미와 몸 여기저기는 뜨겁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따뜻한 코코아가 아니라
얼음을 잔뜩 넣은 콜라를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자고 갈까?”
“아니야, 안 그래도 돼…. 나 그냥 숙제 하다가 자면 돼.”
“다 컸네, 정유원. 작년까지만 해도 제발 자고 가라고 매달리더니.”
“내가 언제.”
“새벽에 전화해서 운 적도 있잖아. 옷장 옆에 귀신이 있어. 이불 밖으로 못 나가겠어. 빨리 와.”
우는 소리를 따라 하며 놀리는 현규진의 등을 밀어 현관까지 간 유원이 문을 여는 기다란 등을
보다가 슬리퍼를 신고 문밖으로 같이 나섰다.
“왜?”
1 층에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문을 닫은 유원은 괜히 슬리퍼를 신은 발끝을 세워
바닥을 콕콕 찍었다.
“너도 이렇게 배웅해 달라며….”
“내가 언제. 나랑 이준서랑 왜 차별하냐는 거지.”
“그게 그거지. 아무튼 너한테도 이렇게 했으니까 이제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현규진이 어깨를 으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렸다. 유원은 밝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현규진에게 손을 하나 꺼내 흔들었다.
“들어가. 혼자 있기 싫으면 톡하고.”
“응, 빠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유원은 문이 완전히 닫히는 순간까지 마주한
시선에 괜히 부끄러워져 그대로 다리를 구부려 앉았다. 화끈대는 얼굴을 무릎 위로 파묻고
뜨거운 귀를 두 손으로 감싸 덮자 요란하게 울리는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나 진짜 미쳤나 봐. 왜 이러지…. 이제는 눈만 마주쳐도 이렇게 전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리는데
진짜 어떡하지…. 긴 숨을 내쉰 유원이 무릎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12 층에 멈춘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제 마음도 현규진을 따라 12 층까지 올라간 모양이었다.
이렇게 숨이 찬 걸 보면.
“…….”
언제 내려올래…. 유원은 현규진을 따라간 제 마음이 저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12
층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가 1 층으로 내려가고, 다시 10 층, 14 층, 5 층으로 향할
때까지도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
학원 숙제를 하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노곤한 기분으로 코코아를 마시고 양치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기분이 멍했다. 유원은 다 마신 코코아 컵을 닦아 두곤 다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 느껴 본 적이 없던 이상한 두근거림과 긴장감에 시달리다 보니 오늘따라 더
피곤했다.
[규진 : 자?]
[규진 : 혼자 있기 괜찮아?]
[규진 : 갈까?]
침대 옆 스탠드를 켜고 침대 위로 오른 유원은 쿠션을 안은 채 톡을 확인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현규진이 하는 모든 걱정과 챙김이 이상해 보일 것이었다. 어린애한테나 할
걱정을 늘 하고 있으니까. 열여덟이나 된 남고생이 부모님 안 계신 집에서 혼자 좀 있는 걸
누가 크게 걱정하겠는가.
하지만 현규진의 걱정에는 사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까 저를 놀린 것처럼 제가 몇
번 갑자기 너무 무서워져 현규진에게 와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었고, 현규진과 다툰 다음 날,
몸살감기에 걸려 혼자 있기 무섭고 무척 아픈데도 꾹꾹 참고 있다가 크게 앓아누워 보름이나
학교를 가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그날 이후 현규진은 제가 집에 혼자 있는 것을 극도로
걱정하며 늘 살피곤 했다.
[괜찮아 이제 자려구]
[너무 졸려]
다람쥐가 자는 이모티콘을 보내자 조금 뒤에 그와 비슷한 곰돌이가 자는 이모티콘이
돌아왔다. 커다란 현규진과는 참 안 어울리는 귀여운 이모티콘이라 입술 위로 웃음이 묻었다.
그래, 현규진은 이런 존재였다. 언제 떠올려도 편하고, 든든하고 기분 좋은 친구. 18 년을
살아오면서 제가 부모님만큼이나, 어쩌면 때로는 그 이상으로 의지하고 함께해 온 그런 친구.
그러니 제가 오늘 겪은 두근거림이나 설렘, 떨림 그런 것들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친구’
라는 이름에는 어울리지도 않고 붙어서도 안 되는 말들이니까.
제가 기분 나쁜 일을 당하면 저보다 먼저 나서서 화를 내 주고, 그런 중에도 혹시 제가 다칠까
저를 뒤로 숨겨 보호해 주는 현규진에게 고마워서 그랬을 것이었다. 늘 겪은 일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고마워서. 그래, 그래서 그 고마움이 떨림이나 두근거림 같은 것으로 내내 마음에
머물렀던 게 틀림없었다.
그래, 그거네. 스탠드 불빛을 약하게 낮춘 유원이 침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내려 누웠다.
그리고 현규진이 보낸 누워서 자는 곰돌이 이모티콘을 보며 키득댔다.
자고 일어나면 이 모든 일들이 하나의 해프닝으로 지나갈 것이었다. 그래야만 하고. 유원은
휴대폰을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 두고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막상 혼자 자려고 하니
갑자기 언젠가 들은 귀신 이야기가 마구 떠올랐지만, 눈을 꼭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푹
자고 일어나면 다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을 내일 아침을 기대하며.
친구 사이 고백 금지-8 화(7/127)

08


방으로 오는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유원은 이불을 꼭 쥔 채 방 앞에서 멈춰 서는
발소리에 눈을 더 꼭 감았다. 부모님이 돌아오신 걸까? 아니면 도둑?
달칵, 문손잡이가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유원은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떠 저에게
다가오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어둡지만, 유원은 아른아른한 그 모습만 봐도 저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현규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정유원, 자?’
안 와도 된다니까 왜 왔냐고, 놀랐다고 말을 하려는데 현규진의 목소리가 더 빨리 흘러나왔다.
유원은 가까이 다가온 현규진이 침대로 오르는 것을 몰래 보다가 자는 척 눈을 감았다.
한쪽 무릎을 꿇어 침대로 올라온 현규진은 다리를 벌려 유원의 몸 반대편에 다른 쪽 무릎을
꿇어 내렸다.
‘더 만지고 싶어서 왔어.’
목소리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유원은 눈을 떠 제 몸을 사이에 둔 채 무릎을 꿇고 상체를
세우고 있던 현규진이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이게 꿈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현실의 현규진이 이럴 리는 없을 테니까.
말려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현규진이
저에게 쏟아지듯 내려와 몸을 밀착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어떡하지, 나 왜 이런 꿈을 꾸지…. 깨야 하는데, 더, 더 놔두면 안 될 것 같은데…. 자면서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솔직히 이다음에 현규진이 어떻게 할지 조금,
아주 조금 궁금한 마음도 분명히 존재했다.
‘괜찮아. 집에 아무도 없잖아.’
집에 아무도 없는 것과 지금 이 상황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꿈이라 그런 건지 그 말 하나에
안도가 됐다.
‘아까 왜 가만 있었어?’
손가락이 뺨을 문지르며 내려갔다. 유원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꼭 한 번도 말을
해 본 적 없는 것만 같았다.
‘좋았어?’
아까 어땠었지. 현규진의 손이 여기저기 닿았을 때 기분이 어땠더라…. 솔직히 잘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떨리고 긴장이 돼서 그저 멍하니 그 상황을 마주하고 있었던 기억만 났다.
귓가를 만지작대던 손은 이제 베개가 있는 쪽으로 들어가 목덜미를 만지고 있었다. 유원은
목덜미를 따라 옷 안으로 파고드는 손길을 느꼈다. 꿈인 걸 아는데도 등줄기가 오싹하고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티셔츠 안으로 들어간 손끝이 등 쪽으로 더 내려가다가 움직여 어깨를 만졌다. 손이 너무
뜨거워서 몸에 닿을 때마다 다리가 오므라들고 허리가 움칠 튀었다.
‘하….’
‘잠깐만….’
겨우 내뱉은 말은 하지 말란 것도 아니고 좋단 것도 아닌 애매한 말이었다. 유원은 제 말도
듣지 않는 것 같은 현규진을 올려다보며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꿈에서 깰 수 있는지.
‘왜.’
왜? 보통 이런 상황에서 ‘왜?’라는 대답을 하나? 아, 보통 상황이 아니라 그냥 아무 말이나 막
나오는 건가. 뻔뻔하게 옷 안으로 손을 넣어 어깨나 목덜미를 만지던 현규진의 손이 빠져나와
이번에는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허리를 쥐는 느낌에 놀란 유원이 몸을 크게 비틀었다. 그
순간 눈이 확 뜨였다.
“…….”
어둑한 천장이 보였다. 유원은 얼른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살폈다. 현규진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몸에 들어가 있던 힘이 빠졌다.
어떻게 현규진을 상대로 그런 꿈을 꿀 수가 있지…. 와, 진짜 나 미쳤나 봐.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닌데도 어쩐지 조금 가쁜 것 같은 숨을 내쉰 유원이 일렁이는 아랫배의 느낌에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18 년 지기가 나오는 야한 꿈을 꾸고, 또 그 꿈에 흥분을 하다니 정말 너무 창피해
죽고 싶었다.
열이 올라 반쯤 선 게 느껴졌지만, 유원은 모르는 척 몸을 돌려 벽을 본 채 누웠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불을 다시 잘 당겨 덮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절대… 절대 손대지 않을 생각이었다. 꿈은 제 의지와 상관이 없어도 자위는 제 의지로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규진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아무 일도 없었어. 여기까지 다 꿈이야. 내가 현규진을 상대로 이럴 리가 없잖아. 유원은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외면한 채 눈을 더 꼭 감았다. 부디 아침이 되면 이
죄책감 가득한 모든 시간이 꿈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져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피곤한 얼굴로 학교 갈 준비를 한 유원이 시리얼을 한 입 떠 입에 넣었다. 결국 새벽 내내 잠을
설쳤다. 잠이 들만 하면 또 그런 꿈을 꿀까 무서워 긴장을 하는 바람에 뒤척이고, 또 들만 하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하다가 아침이 되어 버렸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그냥 일어나 씻은 유원은 아까부터 졸려 멍해진 정신으로 느릿느릿
학교 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
졸린 것도 졸린 거지만, 사실 지금 가장 무서운 것은 조금 뒤에 현규진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꿉친구를 상대로 그런 꿈을 꾸고 바로 얼굴을 봐야 한다니…. 이건 정말 너무했다.
잠을 못 자 지끈지끈한 머리를 느끼며 눅눅해진 시리얼을 한 입 더 입에 넣은 유원이 식탁
위로 엎드렸다. 그렇게 좋아하는 초콜릿 링 모양 시리얼도 오늘은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만큼 유원은 아주아주 심각했다.
하지만 유원이 심각하다고 해서 시간이 멈춰 주는 것은 아니었다. 나가야 할 시간은 어김없이
돌아왔고 유원은 백팩을 양 어깨에 멘 채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가 10 층을 지나 내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버튼을 누르려던 유원은 그냥 가만히 하나씩 떨어지는 숫자를 보고만 있었다.
제가 누르지 않아도 6 층에 당연히 멈출 거라는 걸 아는 이유였다.
6 층입니다.
유원의 예상대로 엘리베이터는 6 층에 멈췄다. 그리고 열리는 문 안에는 당연히 현규진이
있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집을 나선 유원은 현규진을 보는 순간 움찔해 버렸다.
“안 타?”
“응? 아, 타야지.”
문이 닫히지 않게 버튼을 누르고 있는 현규진을 보며 걸음을 옮긴 유원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어제 그건 꿈이고, 지금 이건 현실이었다. 아무 힘도 없는 꿈 같은 것
때문에 저의 현실을 망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유원은 어깨에 걸린 가방끈을 두 손으로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는데, 혼자. 뭘 그렇게 끄덕거려.”
목소리가 귀 근처에서 울렸다. 깜짝 놀란 유원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어깨 위로 턱을
올리려 다가오던 현규진과 코끝이 문질렸다.
깜짝 놀란 유원이 몸을 확 떼었다. 마찬가지로 놀란 현규진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아, 깜짝이야.”
“뭐, 뭐야! 놀랐잖아.”
“갑자기 돌아봐서 그런 거 아냐.”
“네가 귀에… 귀에 대고 이상하게 말하니까 그런 거잖아.”
“그러게 누가 혼자 중얼거리래.”
운이 좋아 코가 닿았지 조금만, 정말 조금만 각도가 달랐어도 입술이 닿을 수 있었을 큰
사고였다. 유원은 더 대꾸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공동 현관을
빠져나갔다.
“야, 그게 삐질 일이야?”
“안 삐졌어. 그냥 학교 가는 거지.”
“뽀뽀한 것도 아닌데 뭘 그래. 그리고 뭐 뽀뽀였으면 어때서. 너 어릴 땐 나한테 맨날
뽀뽀했잖아.”
“그건…!”
반박하려 다시 뒤를 살피며 고개를 돌린 유원은 씩 웃는 현규진을 보며 반박할 의지를 잃었다.
그리고 현규진의 말이 사실이라 딱히 할 말이 없기도 했다. 집에서 엄마와 아빠가 좋아하면
뽀뽀하는 거라고 가르친 덕분에 유원은 현규진에게도 정말 많이 뽀뽀를 하곤 했다. 현규진이
과자를 나눠 줘도 고맙다고 뽀뽀하고, 같이 노는 게 재미 있어도 뽀뽀했다. 나중에 엄마한테
뽀뽀의 의미가 뭔지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들은 뒤에야 뽀뽀하는 것을 멈췄다.
“아무튼… 아까처럼 막 갑자기 그러지 마. 어제 학교에서도 그래서 놀랐잖아….”
“학교에서?”
“…종례 끝나고.”
“기억 안 나는데.”
현규진은 기억도 못 하는 일을 저 혼자 이렇게 신경 쓰고, 불편해하다니…. 어쩐지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또 앞으로 이건 어떻게 되는 건지 알기라도 하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그 무엇도 투명하게 보이는 게 없어 너무 답답했다.
“알았어. 조심할게. 무섭게 왜 그래. 아, 가방 줘.”
됐다고 하기도 전에 가방은 현규진의 어깨 위로 걸렸다. 가방끈이 사라진 자리에는 팔이
놓였고, 어깨 아래로는 손이 늘어졌다. 흘끗 현규진의 달랑이는 손을 본 유원이 또 입술
안쪽을 꾸욱 깨물었다. 어제 이 손이 제 얼굴과 목덜미 같은 곳을 만졌었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
티셔츠 안으로 들어가 허리를 꽉 쥔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것 때문에 괜히 이상한 일이
생겨 그 감각을 가라앉히느라 정말 한참을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유원은 장난스럽게 제 볼을
짓주무르는 현규진의 손등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알았어, 알았어.”
볼을 주무르던 손을 뗀 현규진이 이번에는 유원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하지 마, 나 키 작아져.”
“원래 작잖아.”
“네가 어릴 때부터 자꾸 눌러서 그런 거야.”
“멍때리다 못 큰 거지. 키 커야 할 순간에도 멍때리다 타이밍 놓친 거.”
“씨이….”
“성질 부리는 거 봐라. 무서워.”
제 머리를 누르고 있는 현규진의 손을 잡아 내린 유원이 눌린 머리카락을 슥슥 정리했다.
그럴수록 더 흐트러져 민들레 꽃씨처럼 된 유원을 보며 현규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너 머리로 날아가게 생겼어.”
다시 현규진의 손이 머리 위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장난기가 빠진 다정한 손길이 이어졌다.
유원은 제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정리해 주는 것에 몰두한 현규진의 얼굴을 몰래 눈에
담았다.
“…….”
차가운 아침 바람에 앞머리가 흔들리는 소리도, 늘 티셔츠 위에 걸쳐 입어 단추 몇 개가 풀려
있는 교복 셔츠도, 오늘따라 더 짙게 나는 좋은 향도 전부 다 떨림의 이유였다. 그동안은 단 한
번도 어떤 의미를 담아 본 적이 없는 아주 사소하고 당연한 것들이 어제부터 두 눈에 보이고
두 귀에 들리며 모든 것에 의미를 담기 시작했다.
나 진짜 어떡하지?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과 함께. 유원은 정말이지 울고 싶어졌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9 화(8/127)

09


학원 숙제를 하고 있는데 앞자리 의자가 드르륵 끌렸다. 유원은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앉은
김준재와 최해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같은 반이고 현규진 때문에 그래도 자주 이야기를
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제 친구라기 보다는 ‘현규진의 친구들’이라는 생각이 더 강한
애들이었다.
“현규진 교무실 잡혀갔어.”
“왜?”
“피어싱 걸려서.”
“아…. 아침엔 안 했던데.”
“하자마자 바로 걸렸어. 진짜 일 분 만에. 존나 웃겨, 진짜.”
애가 혼나러 교무실에 잡혀갔는데 웃고 있는 둘을 보던 유원이 다시 문제를 읽고 답을
체크했다. 현규진 없이 이 둘이랑만 같이 있어 본 적이 거의 없어 솔직히 좀 어색했다.
“너 현이랑 유치원 친구랬나?”
“아니, 그 전부터 알았다던데. 태교도 같이 했대.”
“뭐야. 현만 태교 효과 없었던 거네. 같은 태교를 했으면 둘이 비슷해야 하는 거 아냐?”
마지막 문제 답을 체크한 유원은 문제집을 덮고 다시 김준재를 바라보았다. 주변에서 이쪽을
흘끗흘끗 보는 느낌이 났다. 아무래도 좀 노는 축에 드는 애들과 그렇지 않은 제가 있으니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현규진이랑 나랑 비슷한 거 많아.”
“그래? 존나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그래? 그렇게 보여?”
“어. 성격부터 존나 다르잖아. 너 같은 애가 어떻게 현 같은 애랑 계속 다니는지가 궁금한데.”
“현규진 착하잖아.”
제 대답에 잠시 멍해진 최해영과 김준재를 번갈아 본 유원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까부터 왜 웃는지 도대체 뭘 궁금해 하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현규진이 착해? 아, 하긴. 너한텐 잘하니까. 그러니까 왜 너한텐 잘하는 거야? 멍유 너 막
학교에선 공부하고 집에 가면 현규진 묶어 놓고 패고 그러냐?”
“아, 씨발. 미친아. 개웃겨. 존나 상상 안 돼.”
유원은 현규진이 장난기가 많지만, 꽤 따뜻하고 다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규진을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전교에 저 하나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김준재나 최해영보다 더 껄렁하고 까칠하며, 무서운 애로 보일 것이었다. 제법
노는 애들로 통하는 김준재와 최해영도 중요한 순간에 현규진에게는 대들지 못하니까.
그 뿐만이 아니라 진짜 폭력을 휘두르고 깡패처럼 구는 그런 애들도 현규진은 건드리지
않았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있었던 그 ‘체육 창고 사건’ 때문이었다.
그 사건의 시작은 아주 심플했다. 질이 안 좋은 2 학년 선배들에게 고개 숙여 정중하게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현규진은 학교가 끝난 뒤 체육 창고로 불려 갔다. 그렇게 다대일로
맞서는 상황이 되면 당연히 고개를 숙일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현규진은 내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서 있었고, 예상대로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선배들은 현규진이 어릴 때부터 운동 배우는 것을 좋아해 태권도에 검도, 복싱,
주짓수까지 섭렵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저 껄렁이며 힘으로 제압하려고 주먹이나
휘두르는 양아치를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말이기도 했다.
그날 현규진은 딱 두 명을 가뿐히 제압하고 그다음을 기다렸는데 아무도 달려들지 않아 그냥
유유히 창고를 나왔다고 했다. 그 뒤로 현규진은 그들 사이에서 또라이로 통했고, 그 어떤
시비에도 휘말리지 않았다.
그런 현규진을 유일하게 때릴 수 있고, 혼낼 수 있고, 밀어낼 수 있는 사람이 유원이었다.
유원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도 특별할 일도 아니지만, 유원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는 참
신기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멍유, 너 오늘 학원 가지.”
“응. 어떻게 알았어?”
“너 학원 가는 날에만 현규진 우리 부르잖아. 학원 끝날 시간까지 게임 하자고. 네 대타야,
우린.”
두 사람이 낄낄대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담배 냄새가 났다. 아무래도 둘이, 아니 현규진까지
같이 담배를 피우고 오다가 선생님한테 걸려 현규진만 잡혀간 모양이었다.
“야, 근데 너 손도 존나 작다. 펼쳐 봐.”
손 안 작은데…. 유원은 대꾸를 따로 하는 것도 귀찮아 그냥 잠자코 손을 들어 펼쳤다. 그런
유원의 손에 자기 손을 쫙 펼쳐 댄 김준재가 최해영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존나 가늘어.”
의미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지루해질 때쯤 앞문으로 현규진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유원은
이쪽을 보자마자 얼굴을 굳히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현규진을 보며 손가락을 오므렸다.
“씨발, 뭐 하냐.”
오자마자 김준재가 앉은 의자 다리를 확 찬 현규진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유원은 평소 저에게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아 사실 볼 일이 많이 없는 현규진의 예민하고 짜증이
묻은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분명히 저한테도 화가 나고 짜증 날 때가 있을 텐데
현규진은 저에게 저런 얼굴을 한 적이 정말 한 번도 없었다.
“정유원한테 뭔 개소리 했어. 손은 왜 잡는데.”
“…아니, 잡긴 뭘 잡아. 그냥 손 존나 작아서 대 본 건데.”
현규진의 눈치를 본 최해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김준재를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유원은 저에게 어떻게 좀 해 보라는 듯 눈짓을 하고 가는 최해영을 보다가 여전히 그 둘을
노려보고 있는 현규진의 손목을 잡아 흔들었다.
“피어싱 걸렸다며.”
김준재가 앉아 있던 의자를 다시 끌어 유원을 보고 앉은 현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그 냉랭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선생님한테 잡혀 혼나 억울한 표정만 가득했다.
“많이 혼났어?”
“그냥 좀. 한 달 뒤에 뭐 막힌 거 검사 받으래.”
“어떡해.”
“한 달 뒤에 기억도 못할걸. 뭐 언제 자기가 한 말 기억한 적 있냐. 아니, 근데 저 새끼들이
너한테 뭐라 그랬어? 왜 와서 지랄들이야?”
“그냥 너 교무실 간 거 알려 줬어.”
“저 새끼들이 말 걸면 무시해. 지지야, 지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가 어울려 다니는 친구를 보고 손을 내젓는 현규진을 보며 웃은
유원이 턱을 괸 채 눈을 맞췄다.
“네 친구들이 지지면 너도 지지게.”
“야, 날 어디 비교해. 난 아니지.”
“끼리끼리 노는 거랬어.”
“그럼 나랑 노는 너는?”
“그러니까 김준재나 나나 너나 다 똑같다는 거지.”
나름 명확하게 정리한 유원이 현규진의 귀로 시선을 옮겼다. 귓불 뚫은 자국을 볼 때마다 계속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야 뚫어 본 적도 없고 또 앞으로도 뚫을 생각이 없어 알지
못하겠지만. 유원은 무심코 손을 뻗어 현규진의 귓불을 살짝 쥐고 피어싱 자국 위를 문질렀다.
“안 아파?”
“…어우…. 잠깐만.”
유원에게 느껴질 정도로 움찔한 현규진이 얼른 제 귀를 손으로 덮었다. 유원은 갑작스러운
현규진의 행동에 가만히 답을 기다렸다.
“자기야, 이런 건 둘만 있을 때 하기로 했잖아.”
“…미쳤어?”
“귀 만지니까 이상해.”
“귀 만지는 게 왜 이상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유원은 저에게 다가오는 현규진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앞을 지난
온기가 곧 귓불에서 느껴졌다.
통통하고 보드라운 귓불을 짓누르고 손끝으로 비비는 느낌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하얀 양말
속 발끝이 움츠러들고 허리가 저절로 빳빳하게 곧추섰다.
“안 이상해?”
“괜…찮은데, 난….”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시선을 돌린 유원이 현규진의 손목을 잡아 뒤로 살짝 끌었다. 다음
수업 선생님이 올 때도 됐지만, 현규진과 더는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얼른 자리로 보내고
싶은 무언의 종용이었다.
“네, 네. 꺼져 드릴게요.”
유원의 머리 위를 크고 따뜻한 손으로 꾹 한 번 누른 현규진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자리로
돌아갔다. 옆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또 유독 크게 들렸다. 유원은 그보다도 더 크게 울리는
심장 박동에 심호흡하며 현규진의 손이 닿았던 귀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
현규진이 귓불을 문질렀을 때의 그 찌릿찌릿함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었다. 제가 현규진의
귀를 만졌을 때 현규진도 이런 느낌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너무 이상했다. 유원은
손 끝에 남은 말랑하던 현규진의 귓불 느낌과 제 귓불에 남은 온기를 동시에 느끼며 살짝
벌어져 있던 허벅지를 꽉 오므렸다.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인데 왜 잠을 설친 어젯밤이 떠오르는 걸까. 유원은 제 몸 위로 올라
내려다보며 웃던 현규진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얼른 고개를 세게 저었다. 이렇게 알 수 없는
일이 하나 더 늘었다.
***
학교가 끝나자마자 현규진과 나간 유원은 집이 아니라 학원가로 향했다. 집에 들렀다가 가도
되지만, 그러면 시간이 애매해서 편히 저녁을 먹기가 어려워 학원에 가는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현규진과 학원가에서 저녁을 먹곤 했다.
아무래도 밖에서 너무 오래 걸리지 않는 메뉴로 정해야 하다 보니 대부분 먹는 것은 햄버거나
피자, 분식이었다. 유원은 햄버거 포장지를 벗기며 제 입 앞으로 다가온 기다란 감자튀김을
물었다.
갓 튀겨 나온 감자튀김은 역시 너무 맛있었다. 유원은 다시 자연스럽게 현규진 쪽으로 입을
벌렸다. 안 그래도 다시 주려고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고 있던 현규진이 웃으며 기다란 것을
유원의 입에 물려 주었다.
“맛있다.”
“많이 먹어.”
“너도.”
치킨 패티가 든 햄버거를 한 입 먹은 유원이 맛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똑같이 한 입을
먹은 현규진의 햄버거를 바라보았다. 햄버거 크기도 다르고 두께도 다르고 또 한 입의 크기도
달라 웃음이 났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0 화(9/127)

10


하기야 현규진은 키가 거의 190cm 에 가까우니 제가 먹는 평범한 햄버거 하나로는 배가 차지
않을 것이었다. 어릴 때도 다른 애들보다 키가 크긴 했지만, 현규진은 중학교 들어가서 정말
무서운 기세로 자라기 시작했다. 유원 역시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진짜
만날 때마다 키가 커져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때 현규진은 우유를 하루에 2 리터씩 마시고,
먹고 또 먹어도 배가 고프다면서 밥을 기본 세 공기씩 먹곤 했다. 그리고 그때 먹은 것들은
전부 다 고스란히 키로 갔다.
“오늘은 왜 하나만 먹어?”
“키 더 클까 봐 무서워서.”
“뭐야….”
“세 개씩 먹어라, 정유원. 그래야 더 크지.”
장난스럽게 씩 웃은 현규진이 치킨 너겟을 하나 들어 입에 넣었다. 현규진이 햄버거 하나를
깔끔하게 해치울 동안 겨우 반을 먹은 유원은 천천히 꼭꼭 씹으며 작게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작은 한 입에도 볼록해진 볼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오늘도 김준재랑 최해영 만나?”
“응? 어, 뭐. 시간 때울 겸.”
“나 학원 갈 때만 네가 만나는 게 기분 나쁠 수도 있을 것 같아.”
유원은 아까 김준재와 최해영이 자기들은 저의 대타라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웃으면서
장난처럼 말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장난을 가장해 말한 진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새끼들이 뭐라 그래?”
“아니, 그냥…. 시간 때우려고 만난다니까….”
“뭐 그런 것까지 걱정해. 그 새끼들도 다 시간 때우려고 서로서로 이용하면서 만나는 거야.
최해영도 게임 하다가 여친 전화 오면 가. 김준재도 다른 애가 술 마시자 그러면 가고.”
“술도 마셔?”
“가끔.”
“너도?”
“아니. 난 좀 그런 게 있어. 어차피 술은 대학 가면 존나 마시게 될 텐데 굳이 지금 몰래 마실
필요가 있나 싶어.”
턱을 괸 채 너겟을 하나 들어 소스를 찍은 현규진이 유원의 입에 물려 주었다. 한입에 안 먹고
두 번에 나눠 먹는다는 것을 알기에 바로 놓지 않고 반을 베어 물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은
반을 또 소스에 콕 찍었다.
“담배는? 너 그러다가 진짜 폐 다 썩어.”
“그래도 요즘 많이 줄였어. 전엔 하루에 한 갑씩 피웠는데 요즘은 한 갑 사면 일주일도 더 가.
어쩔 땐 열흘도 간다?”
남은 너겟 반쪽을 유원의 입에 마저 넣어 준 현규진이 씩 웃었다. 이제야 제 몫의 햄버거를 다
먹고 포장지를 얌전히 접는 유원이 귀여웠다. 저런 동생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부르다아….”
마지막으로 감자튀김 몇 개를 더 먹은 유원이 의자 뒤로 몸을 기대고 앉았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인스턴트나 이런 패스트푸드 먹는 것을 금지 당하고 살아 그런지 학원 가는 날 먹는
자극적인 음식은 유원에게는 일종의 일탈과도 같았다. 부모님이 바쁘시고 이젠 제법 다 커서
더는 집에 관리 선생님을 두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여전히 체력도 약하고, 남들보다 더 쉽게 앓아눕긴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는 건강이
많이 좋아져 이런 일탈도 즐길 수가 있었다. 유원은 남은 너겟 하나를 마저 입에 넣는
현규진을 보며 웃음 지었다. 저와는 달리 시원시원하게 뭐든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학원 끝날 때까지 이제 안 기다려도 돼. 아홉 시면 뭐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고…. 가는 길도
다 큰길이라 사람도 많고, 환하고 혼자 갈 수 있어.”
“넌 변태 자석이라 안 돼.”
“자석까지는 아니다, 솔직히.”
“그 정도면 자석이지. 그때 씨발, 그 누구야. 권진고 변태 새끼도 학원에서 너한테 껄떡댔잖아.
딸치는 거 보기만 해 달랐대며. 그때도 내가 너 나올 시간 지났는데 안 나와서 올라갔다가 딱
본 거 아냐.”
중학교 2 학년 때, 그러니까 유원이 지금보다 더 작고 더 몸이 약해 비리비리할 때, 유원은
정말이지 온갖 변태의 표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래보다 예쁘고 귀여운데다가
하얗고 보들보들해 보이는 유원을 좋아해 어떻게 한번 해 보려는 것들이 생겨났고, 현규진은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들러붙는 변태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정말 온갖 뭐 같은 꼴을 다 봤었다. 특히 유원을 보고 거기를 세운 채로 저한테
처맞는 놈들을 보는 게 가장 기분이 더러웠다. 제 소중한 친구가 그런 정신병자 새끼들의
욕망의 대상이 됐다는 게 싫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현규진은 강박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유원을 따라다녔다. 언제
어디서 변태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라 유원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 다니며 늘
주위를 살폈다. 공부하러 가는 학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또 유원의 옆에 또라이로 알려진 제가 늘 있다는 게 여기저기 알려지면서
변태 출몰 횟수는 전보다 줄었으나 여전히 유원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놈들은 여기저기
존재한다는 걸 현규진은 알고 있었다.
유원의 체육복이 자주 없어지고, 유원이 마시고 올려 둔 음료수 캔이나 먹던 빵 같은 것도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아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요즘은 자주 안 그러잖아.”
“내가 가는 게 싫어?”
“미안해서 그러지. 몇 년이나 계속 나 학원 끝날 때까지 기다리니까.”
“내가 뭐 문밖에서 서서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게임 하다가 가는 건데 뭐. 집에 가서 있다가
운동도 할 겸 가기도 하고. 그게 뭐 힘드냐. 괜한 소리 말고 가자. 시간 거의 다 됐어.”
일어나면서 동시에 트레이 두 개를 들고 일어난 현규진이 빠르게 정리하고 유원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저도 같은 반에서 학원 수업을 들으면 주변을 살피기 더 편하긴 하겠지만,
전에 이 학원을 다니다가 유원에게 지랄하는 놈과 대판 싸우고 관둔 이후로 다시 등록하고
싶지 않아 버티는 중이었다. 어차피 유원도 이 학원은 올해까지만 다니고 3 학년 땐 저와 같이
하는 과외를 늘리거나 다른 학원을 알아본다고 했으니 딱 2 개월만 더 하면 이 쓰레기 같은
학원 변태를 마주하는 것도 끝이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응, 이따 봐. 빠이.”
학원 입구 앞에서 인사한 유원이 안으로 들어갔다. 귀여운 인사에 씩 웃은 현규진이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유원의 학원 근처 피시방에 아까부터 가서 자리를 잡아
둔 김준재와 최해영의 톡이 100 개 넘게 쌓여 있었다. 영양가 없는 톡을 굳이 읽고 싶지는
않았다. 그대로 휴대폰을 교복 재킷 주머니에 넣은 현규진이 유원의 학원 옆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스피드존 PC 방’이라 적힌 3 층 버튼을 눌렀다.
***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건물 뒤쪽 으슥한 골목 바닥에는 담배꽁초가 나뒹굴었다. 담배
연기를 뱉는 김준재와 최해영을 보며 라이터만 딸깍대던 현규진이 공사 중이라 이것저것
쌓여 있는 나무 판자들 위에 걸터앉았다.
“너 없어? 줘?”
“있어.”
“페브리즈 없어서 안 피우냐? 멍유한테 혼날까 봐?”
“어.”
“진짜 멍유는 뭘까. 걔가 무서워?”
“무섭지. 정유원 진짜 화나면 눈도 못 마주쳐.”
유원이 정말 정색을 하고 화를 내는 일은 손에 꼽지만, 한 5 년에 한 번씩 제가 잘못해서 그런
상황이 올 때가 있었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고등학교에 입학해 1 년 10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딱 세 번 그런 일이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전부 다 저였다.
그럴 때마다 현규진은 매일 유원에게 빌었다.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또 사과를 하다가 애교를
부리면 결국 유원도 스르르 화를 풀고 웃어 주었다. 인생의 역경이 있었냐는 질문을 받으면
아마 현규진은 그 세 번의 일을 떠올릴 것이었다.
“그래? 안 그래 보이는데.”
“진짜 존나 무서워. 나한테 기대도 뭣도 없다는 눈으로 보는데…. 아, 진짜 그때 그 심장 확
떨어지는 기분 그거…. 아, 너무 싫어.”
“눈깔 똑바로 뜨라고 하면 되잖아.”
“돌았어?”
유원에게 늘 바르고 고운 말만 쓰는 건 아니지만, 장난 칠 때를 제외하고 저렇게 선을 넘는
비속어를 쓸 수는 없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정유원에게 쓴단 말인가. 현규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정력을 여친한테 쓰라고. 멍유한테 하는 거 반의반만 해도 감동해 쓰러질 듯. 아, 너 진수지
디엠 씹었어?”
“뭔 디엠.”
“인스타 디엠 보냈는데 씹혔다고 난리던데.”
“진수지가 누군데. 그리고 나 인스타 안 해.”
“헐, 너 진수지 몰라? 전에 오성여고 애들 봤잖아. 그때 그… 방학 때 멍유 가족끼리 여행
갔다고 했을 때. 민지훈 집에서.”
진수지, 오성여고, 민지훈 집. 뭐 하나 또렷하게 기억나는 게 없는데 유원이 가족끼리 여행을
갔던 그 여름의 어느 날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현규진은 그 기억을 토대로 하나하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민지훈 부모님이 여행을 가셔서 집이 며칠 빈다는 말에 할 것도 없고 무료해 그냥 그 집에
놀러 갔던 기억이 났다. 원래라면 정유원 집과 함께 여행을 갔겠지만, 그때 아빠의 출장으로
두 가족의 여행이 무산되어 혼자 며칠을 보내야 해 무척 심심했던 참이었다.
김재준, 최해영과 함께 민지훈 집에 가서 세상 영양가 없는 개소리나 지껄이면서 시간을
죽이는데 뭔 여자애들이 여럿 왔었다. 여자애들이 온 뒤부터 분위기가 시끄러워지며 술판이
벌어졌고, 애들이 다 취했다. 그리고 저는 그 사이에서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유원과
계속 톡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났다. 사진첩엔 그때 유원이 저녁으로 먹었다면서 찍어 보낸
갈비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1 화(10/127)

11


“아, 그때 너희끼리 술 마셨잖아. 난 좀 있다가 집에 갔는데.”
“그때 존나 예쁜 애 하나 왔던 거 기억 안 나? 걔가 진수지잖아. 둘이 말하는 거 내가 봤는데.”
“몰라. 뭐 아이디 알려 달라 그랬나. 그게 단데.”
“야, 너 인스타 들어가 봐.”
“앱 삭제했는데.”
“아, 좀 다시 깔아 봐. 디엠 뭐라고 보냈는지 존나 궁금해.”
주위로 몰려드는 놈들을 흘끗 본 현규진이 인스타그램을 다운 받았다. SNS 따위 귀찮아
하지도 않고, 할 마음도 없는데 하도 하라고 지랄을 해서 올해 초에 다운을 받아 계정을
유원과 함께 만들고 딱 사진 한 장만 올린 다음 바로 로그아웃을 했다. 그 뒤로는 6 개월이
넘도록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다.
“아이디 뭐더라.”
“기다려 봐. 나 너 팔로우해서 있어.”
김준재가 얼른 제 계정에 들어가 현규진의 인스타 아이디를 찾아 보여 주었다. 현규진은 그걸
보고 아이디를 입력했다. 얼마나 만들기 싫었는지 아이디부터 대충 지은 티가 났다.
“아, 됐다.”
6 개월 만에 계정에 접속한 현규진은 딱 한 장 올린 사진을 확인했다. 유원과 학기 초에 같이
네 컷 사진을 찍은 것 중 한 컷을 찍어 올렸는데 뭔가 댓글이 많이 달려 있었다.
“와, 댓글 이천 개, 씨발. 아이돌이세요?”
“사진 하나에 팔로우 3 만명 뭔데. 알고리즘 제대로 탔나 보네. 야, 미친아. 디엠 248 개 뭐냐.”
현규진은 사진 아래에 달린 댓글을 무표정한 얼굴로 슥슥 대충 올려 확인했다. 잘생겼다는
댓글이나 둘이 사귀냐는 댓글이 대부분이었고, 나머지는 자기 친구를 태그해서 보게 하려고
하는 건지 친구 아이디를 적어 둔 것들이었다.
“야, 빨리 위에 그거 눌러.”
김준재가 시키는 대로 위쪽에 있는 뭔가를 누르자 확인하지 않은 쪽지 같은 것들이 나타났다.
계속 뭘 보라고는 하는데 귀찮아 그냥 휴대폰을 넘겨 주자 김준재와 최해영이 현규진의
디엠을 확인하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진수지 아이디 이거 맞지.”
“맞아, 빨리. 와, 씨.”
“야, 진수지가 둘이 보고 싶다는데? 미쳤다.”
“이거 아래는 신태리네. 전에 봐서 반가웠다는데? 야, 너 신태리랑 언제 봤냐?”
“언제 보낸 거야…. 17 주 전?”
두 사람이 하는 얘기에 아무런 관심도 생기지 않아 괜히 바닥만 발로 문지르던 현규진이
휴대폰을 뺏어 딱 한 명 있는 팔로잉 목록을 눌렀다. 그리고 프로필에 브이를 그리고 있는
사진을 해 둔 유원의 계정을 눌렀다. 유원도 마찬가지로 저와 같이 찍은 네 컷 사진 중 한 컷을
올린 게 전부였다.
“럽스타세요?”
“정유원한테도 디엠 같은 거 왔겠지.”
“당연히 왔겠지. 야, 근데 진수지한테 답 안 보내?”
“왜 보내야 되는데. 아, 시간 다 됐다. 간다.”
“미친, 그럴 거면 계정 나한테 팔던가. 아님 효소라도 팔아. 돈 존나 벌걸. 먹으면 키 큰다 그래.”
가운뎃손가락을 유유히 들었다가 내린 현규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런 현규진을 보며 김준재와 최해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사람으로서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우정이었다.
***
학원 앞으로 간 지 5 분도 채 되지 않아 유원이 나왔다.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들어가더니 나올
때도 저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자연스럽게 가방을
가져가 한쪽 어깨에 걸쳤다. 집에 가면서 뭐 따뜻한 거라도 마시고 갈까 물으려는데 학원에서
나온 낯선 얼굴이 유원의 팔을 잡는 게 보였다. 현규진의 시선이 그 손에 가 닿았다.
“정유원, 오답노트 이따 찍어서 톡으로 보낼게.”
“응, 고마워. 다음 주에 봐. 빠이.”
처음 보는 애한테 손까지 흔들며 빠이 타령을 하는 거 보니 제가 모르는 사이에 학원에서
친해진 애가 있는 모양이었다. 현규진은 뒤에서 짝다리를 짚고 고개까지 삐딱하게 기울인 채
인사를 나누는 현장을 바라보았다.
“누구야?”
“아, 윤성이.”
“윤성이가 누군데.”
“오늘 새로 온 애야. 1 반. 저번 주에 전학 왔대.”
“존나 친해 보이던데.”
“그냥 오늘 같이 앉아서 쉬는 시간에 얘기하다 친해졌어. 윤성이는 나 학교에서 몇 번 봤대.”
‘그냥’, ‘친해졌어.’, ‘윤성이는.’, ‘몇 번 봤대.’ 문장을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말들이 다 마음에 안
든다고 느끼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현규진은 대수롭잖게 말하는 유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봤는데.”
“지나가다 봤겠지.”
“야, 그냥 그렇게 대충 말할 일이 아냐. 저 새끼도 변태라 기회 만들려고 보고 있다가 접근한 거
아냐?”
“…그건 너무 갔다.”
“조심해서 나쁠 거 없어.”
“얘기해 보니까 착하던데….”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윤성인지 뭔지를 계속 좋게 말하는 유원을 보며 조금 짜증이 난 현규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흔치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왜 그러는데….”
“뭘.”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내가 뭘.”
“애다, 애. 유치원 다닐 때랑 똑같아. 하나도 안 컸어.”
그때도 현규진은 저에게 다른 친구가 생기면 툴툴대며 서운한 티를 냈었다. 물론 저도
현규진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기면 꼭 친구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툴툴대며 내색한 적은 없었다.
“나 존나 컸거든.”
“키만 크면 뭐 해. 하는 짓이 똑같은데.”
“내가 하는 짓이 똑같다는 건 너도 하는 짓이 똑같단 거야. 네가 똑같으니까 나도 똑같은
거지.”
“저번 주에 전학 온 애가 우리 학원 다녀서 그냥 같이 앉아 수업 듣고 내가 정리하다 놓친 게
있어서 그거 찍어서 보내 주기로 했어. 여기서 화날 일이 뭐가 있어?”
머릿속에는 내내 ‘빠이.’가 맴돌았지만, 현규진은 소리 내지 않았다. 솔직히 제 전용 인사도
아니고, 그냥 잘 가라고 인사한 것뿐인데 그게 뭔가 기분이 나빴다고 할 수는 없는 거니까.
제가 굉장히 유치한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현규진도 알고 있었다.
“…….”
“…….”
둘 사이에 흔치도 않고 또 편치도 않은 침묵이 조금 더 이어졌다. 유원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
평소보다 느릿느릿 걷던 현규진이 학원가 끝 쪽에 있는 버블티 가게를 보고 유원의 팔을 톡
건드렸다.
버블티 같은 거에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던 유원은 자꾸 저를 한 번 보고 가게를
한 번 보는 현규진을 보다가 그만 웃어 버렸다.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가 키오스크로 타로 버블 밀크티 하나와 얼그레이 버블 밀크티를
주문하고 가게 가장 안쪽 자리로 향했다. 집에 가는 길에 들르면 늘 둘이 앉는 지정석 같은
곳이었다.
진동벨이 울리는 것을 기다리다가 얼른 음료를 가지고 온 현규진이 두꺼운 빨대까지 포장을
벗겨 꽂아 주었다. 유원은 얼른 연한 보라색의 타로 밀크티를 한 모금 쭉 빨아들였다.
동글동글하고 쫀득쫀득한 버블이 빨대를 타고 올라와 유원을 즐겁게 했다.
“너무 맛있어….”
쫀득한 버블을 잘도 먹는 유원을 보던 현규진이 뭔가 생각난 듯 손을 내밀었다.
“나 폰 좀.”
유원은 왜인지 묻지도 않고 휴대폰을 현규진의 손 위에 올려 주었다. 현규진은 페이스
아이디로 잠금을 풀고 유원의 인스타그램 앱을 찾아 접속했다. 저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들어가지 않아 로그인이 풀린 것을 보니 웃음이 났다.
“너 인스타 아이디 기억나?”
“음…. 몰라? 전에 너랑 만든 뒤로 안 들어갔는데…. 그건 왜?”
“아까 누가 뭐 보냈다 그래서 존나 오랜만에 들어갔더니 쓰레기 같은 게 많이 와 있더라고.
너도 그럴 것 같아서.”
“쓰레기?”
“어. 광고도 있고, 뭐 만나자고 지랄하는 것도 있고.”
제 휴대폰으로 인스타에 들어가 유원의 계정을 찾아 아이디를 보고 적은 현규진이 유원에게
다시 휴대폰을 내밀었다.
“비번.”
예의상 묻긴 했지만, 아마 비밀번호는 dbdnjsl0630 일 것이었다. 영어는 유워니, 0630 은 생일.
역시 예상대로 열심히 치는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다시 휴대폰을 받아 계정을 확인했다.
역시 예상대로 유원에게도 백 개가 넘는 디엠이 와 있었다. 사진에서 입고 있는 교복을 보고
학교를 알아봐서 말을 거는 경우가 제일 많고, 그다음으로 많은 건 뭐 같은 희롱 디엠이었다.
꼴리게 생겼다느니 옆에는 애인이냐느니 지랄을 하는 놈들도 있고, 귀여운 게 딱
취향이라면서 연락처를 남긴 새끼들도 있었다. 사진이 온 것도 있어 클릭했다가 누군가의
성기 사진과 마주한 현규진은 저도 모르게 크게 욕을 내뱉었다.
“아, 이 씨발!”
“왜?”
“…아니, 정신병자 새끼가 더러운 사진 보내서. 지워도 되지?”
“응. 어차피 안 하니까….”
차마 유원에게는 어떤 사진이 왔다는 설명도 할 수가 없었다. 제 눈 하나 버렸으면 됐지 안
그래도 심약한 애 마음까지 뒤흔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현규진은 그 계정을 신고 후 차단까지
한 다음 디엠을 지웠다. 그런 다음 다른 디엠까지 일일이 다 삭제한 현규진이 다시 로그아웃을
한 다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그때 만들고 같이 사진 올린 뒤로 안 했는데 누가 나한테 뭘 보냈어? 모르는 사람이 보낸
거야?”
“어. 네 사진 보고 마음에 든다고.”
“아…. 그런 말을 보내는구나. 너도 아까 그런 거 봤어?”
“어. 뭐 진주희? 장수미? 뭐 그런 애가 나한테 디엠 보냈는데 내가 씹었다고 아주 여기저기
말하고 다닌대서.”
“아는 애야?”
친구 사이 고백 금지-12 화(11/127)

12


당도를 높게 하지 않아 고소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신 현규진이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는 식감
한번 더럽다고 느껴졌던 버블이 유원 덕분에 지금은 그래도 꽤 괜찮아졌다.
“전에 애들 집에 놀러 간 적 있는데 그때 새끼들이 여자애들을 불렀더라고.”
“…언제?”
“너 풀빌라 갔을 때.”
“아….”
“그때 잠깐 본 앤데 그 뒤로 나한테 계속 디엠 보냈었나 봐.”
“…뭐라고?”
친구 사이에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기에 이런 것까지 꼬치꼬치 묻는 건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유원은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만나자고 보냈던데. 주말에 밥 먹자고. 자기 번호랑.”
“아….”
현규진이 인기 많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걸 유원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그동안 현규진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을 제가 직접 본 것만 해도 두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였다.
게다가 무슨 무슨 데이가 되면 현규진의 자리와 사물함은 온통 선물이 넘쳤고, 한 번은 과외를
하러 온 대학생 선생님도 현규진에게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일이 알려져 집이 발칵
뒤집혔고, 그 뒤부터는 남자 선생님만 집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해프닝이 생길 정도로 현규진은 정말 인기가 많았다. 지금도 몇 군데 테이블에서
흘끗흘끗 시선이 닿아오는 게 느껴질 만큼 아주 많이. 유원은 아까만큼 맛있게 느껴지지 않는
버블티를 쪼로록 빨아들였다. 멀쩡하던 마음이 갑자기 꽉 조여들었다.
“그래서… 만나기로 했어?”
“아니? 왜 만나?”
“안 만날 거야?”
“어.”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이 꾹꾹 깨물고 있던 빨대 끝을 놓아주었다.
“왜. 만났으면 좋겠어?”
“그건 네 마음이지…. 네가 좋으면 만나는 거고….”
“좋은 것까지 갈 것도 없어. 얼굴도 기억 안 나는데.”
턱을 괸 채 음료를 마시는 현규진을 슬쩍 본 유원이 반쯤 남은 연보라색 음료를 다시 쪼록
마셨다. 버블티는 어느새 다시 무척 달아져 있었다.
***
주말까지 이어지는 촬영으로 부모님은 집에 오지 않았다. 유원은 토요일 저녁에 현규진의
집에 가 다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고기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몇 번 씹지 않아도
꿀떡꿀떡 잘 넘어갈 정도였다. 고기를 먹고 나서는 따뜻한 맑은국에 밥을 조금 말아 먹기까지
했다. 그다음에는 디저트로 현규진의 엄마가 직접 구운 사과파이를 먹었고, 과일까지 먹은
뒤에야 집을 나올 수 있었다.
“엄마, 나 정유원 집에서 잘게.”
혼자 있는 게 무서울 때가 됐다며 저를 따라나서는 현규진을 흘끗 본 유원이 몰래 심장 위를
꾹 눌렀다. 혼자 있어 무서운 것보다 요즘은 현규진과 함께 있어 심장이 멋대로 요동치는 게
더 신경이 쓰였다.
“나 혼자 있어도 돼.”
“집에 있으면 엄마가 잔소리 해. 그리고 너 슬슬 무서울 때 됐어.”
유원의 목덜미를 떡 주무르듯 주무른 현규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도어록 캡을 올리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
손이 떨어져 나갔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은 피부 위를 손으로 감싼 유원이 심호흡했다.
어쩐지 순탄하지 못한 밤이 될 것 같았다.
“게임 할까. 아님 넷플?”
“넷플 요즘 뭐 재밌는 거 있어?”
“야한 거 볼래?”
“…너 집에 가.”
“알았어, 알았어. 하여튼 유교보이. 다큐 보자, 다큐. 저거 귀엽네. 반려동물의 숨겨진
슈퍼파워.”
동물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트는 척하던 현규진이 볼 만한 시리즈물을 찾아 버튼을 눌렀다.
유원은 그런 현규진을 보다가 옆에 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괜히 왔다 갔다 바삐 집 안을
돌아다녔다.
“아, 너 이모 나오는 드라마 봤어?”
“아니, 아직.”
“그거 보자, 그럼. 여기 있네.”
“응, 그거 보자.”
“빨리 와. 뭘 그렇게 왔다 갔다 해.”
“…배불러서. 너무 많이 먹었어.”
“우리 엄마 너 먹이는 재미로 사는 거 알지. 오늘도 너 먹을 때마다 좋아서 난리 났잖아.”
드디어 소파로 가 앉으면서 현규진의 무릎을 아프지 않게 때린 유원이 쿠션을 들어
끌어안았다.
“이모한테 말 좀 예쁘게 해.”
“여기도 잔소리, 저기도 잔소리.”
장난스럽게 한숨을 크게 내쉰 현규진이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오프닝 영상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와, 이모 슈트 진짜 멋있다.”
“엄마 보고 싶다….”
마음 안에 꼭꼭 숨겨 놨던 말이 입술 사이로 흘렀다. 현규진은 물끄러미 화면을 보고 있는
유원을 흘끗 보다가 슬쩍 몸을 기울여 유원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장난스럽게 누웠다.
“누워서 볼래.”
“왜… 왜 나한테 눕는데….”
“정유원 허벅지가 편하니까.”
갑자기 제 허벅지를 베고 눕는 현규진에 당황한 유원이 몸을 움직였다. 제 다리에 머리를 댄
채 누워 드라마를 보거나 만화책을 보는 게 처음도 아니고 익숙한 일이지만, 그것도 지금보다
더 어릴 때의 이야기였다.
중학교 들어가고부터는 이렇게 제 다리를 베고 누운 적이 없어 너무 갑작스럽고 또…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유원은 엄마를 그리워하던 마음도 잊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누워 화면을
보고 있는 현규진을 내려다보았다.
“…….”
순간의 이상한 느낌이라고 치부했던 떨림은 며칠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그
영역을 넓혔다. 처음에는 가까이 얼굴이 왔을 때만 떨리더니 그다음에는 현규진의 손이 몸에
닿기만 하면 떨리고, 이제는 현규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몇 달도 아니고 단 며칠 만에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걸까? 쿠션을 손끝으로 꽉 쥔 채 유원은
현규진의 얼굴만 몰래몰래 눈에 담았다. 그토록 보고 싶은 엄마가 화면 안을 채우고 있는데도
시선은 자꾸만 현규진에게 닿았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시선이 내려가고,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모든 촉각이 제 다리를 베고 누운 현규진을 향해 몰려들었다.
“…일어나…. 불편하잖아.”
“싫어. 편하고 좋아.”
기다란 다리를 불편하게 구부린 채 겨우 누워 있으면서도 억지를 부리는 게 어이가 없긴
하지만, 사실… 싫지는 않았다.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또 제가 외로움을 타는 것 같을
때마다 이렇게 같이 자려 하고 일부러 더 치댄다는 것을 알기에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너는 편해도 나는 불편해.”
“그러니까 힘 빼고 편하게 있으면 되잖아. 다리에 힘 빼.”
현규진의 손이 무릎을 쥐는 순간 유원은 다리를 타고 찌릿한 감각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아랫배가 울렁이고 등줄기는 오싹했다. 그것도 모른 채 힘을 빼라며 무릎을 매만지는
손길이 이어졌다. 소파 아래로 떨어져 있는 하얀 양말 속 발끝이 하얗게 질려 움츠러들었다.
“…간지러워. 하, 하지 마.”
“너 무릎뼈 되게 작다.”
따뜻하고 큰 손이 무릎뼈를 매만지다가 크기를 확인이라도 하듯 손끝으로 쥔 순간 유원은
현규진을 밀어 내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느릿하게 상체를 세워 앉은 현규진이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가는 유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는데.”
“…씻으러. 씻고… 편하게 보다가 잘래….”
“그래, 그게 낫겠다. 먼저 씻어. 너 나올 때까지 게임 해야지.”
도망치듯 방으로 가는 복도 쪽으로 간 유원이 갈아입을 옷을 아무렇게나 챙겨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하아….”
숨이 찰 일이 전혀 없는데 이상하게 숨이 찼다. 유원은 문을 잠그자마자 그대로 다리를 구부려
앉아 두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
그러다가 조금 전 현규진이 매만진 무릎이 떠올라 살짝 고개를 들어 톡 뼈가 튀어나온 무릎을
눈에 담았다. 수백번은 너무 적고, 수천번…. 아니, 어쩌면 수만번까지도 닿았을 손이었다.
이상한 짓도 아니고 그냥 무릎을 잡았을 뿐이고. 그런데 어떻게 친구를 상대로 이럴 수가 있는
걸까.
며칠 전 현규진의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처럼 다리 사이가 달아올라 있었다. 무릎을 감싼
손바닥이 움직이는 걸 느낀 순간부터 꼿꼿하게 서 있던 허리가 뒤틀리고 손 끝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 현규진이 제 다리에 머리를 댄 그 순간부터였을지도 몰랐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 어떻게 이래.
그 밤에는 혼자였다지만, 이번에는 현규진의 앞에서 이렇게 되어 버렸다. 현규진이 알게 될까
봐 무서워 일단 씻는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치긴 했는데 그 과정이 너무 어색하게 보였을 것
같아 걱정이었다.
“…….”
무릎을 들고 온 옷으로 덮어 버린 유원은 그 옷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아랫배가 울렁이고
발끝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현규진의 얼굴이 떠올라
곤란했다.
어쩔 줄을 모른 채 그저 몸만 웅크리고 한참을 앉아 있던 유원은 겨우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은
몸과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몸을 씻고 싶었다. 옷을 벗은 유원이 샤워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몸을 따라 흘러내렸다. 현규진이 쥐었던 어깨를 지나 조금 전까지 베고 있었던
허벅지를 스치고 뒤덮었던 무릎을 타고 흐르는 순간 유원은 다시 몸을 움츠렸다.
“…어떡해.”
참고 또 참아 진정했던 것은 모두 허사로 돌아가 버렸다. 뽀얀 수증기가 샤워실을 불투명하게
물들여 유원의 죄책감을 조금 가려 주었다. 유원은 견디기 힘든 죄책감을 품은 채 제 몸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 아래에서 떨리는 손을 움직였다.
죄책감에 손이 닿는 순간 이제껏 한 번도 터져 본 적 없는 숨이 입술 사이에서 흘렀다. 어설픈
손놀림과 길고 날씬한 종아리를 따라 흘러 복숭아뼈를 어루만진 채 흐르는 물줄기, 배수구
안으로 빨려들어 가는 깊고 짙은 죄책감.
물의 온도보다 높은 숨이 터질수록 유원의 주위가 더욱 뿌옇게 흐려졌다. 현규진에게 절대
닿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친구 사이 고백 금지-13 화(12/127)

13


드라마 내용이 어땠는지 엄마가 연기를 어떻게 했는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유원은 드라마를 보는 내내 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현규진에게서 나는 싱그러운
바디워시 냄새와 샴푸 냄새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현규진이 제집에서 자면서 저와 같은 샴푸와 바디워시를 쓰는 게 처음도 아닌데 오늘따라 더
신경이 쓰였다. 제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욕실에서 현규진이 씻었다는 것도 죄책감이 들어
미칠 것 같고, 또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더 최악은 자려고 누웠는데 침대 아래쪽에서 현규진의 움직임이 들린다는 것이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이불과 스치는 소리가 나서 도저히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바닥 불편해서 잠 안 오지? 올라와서 자. 나 엄마 방이나 게스트룸 가서 자면 돼.”
“야, 그럼 굳이 너희 집에서 자는 의미가 없잖아. 집도 존나 넓은데 그렇게 떨어져 자면 뭔
의미가 있어.”
“…그럼 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까 네가 올라와서 자.”
“그럴까.”
아무리 좋은 토퍼를 깔아도 역시 침대보다는 불편해 잠이 잘 오지 않던 차에 잘 됐다 싶어
몸을 일으킨 현규진이 베개만 들고 유원의 옆으로 올랐다. 그리고 당연히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유원의 어깨를 잡아 그대로 눕혔다.
“그냥 자. 침대도 큰데.”
“…안 돼.”
“안 될 건 뭐야. 자기야, 우리 원래 한 침대 썼잖아.”
“으…. 이상한 말 그만하고 비켜…. 내려가게.”
기어이 몸을 일으켜 내려가려는 유원에게 졌다는 듯 현규진이 다시 몸을 확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 천장을 본 채 누웠다.
“자기 실망이야.”
“…시끄러워. 얼른 자.”
“정유원 싸가지 없어.”
“알아.”
“장난인데 그것도 알아?”
“그건 몰라.”
침대 아래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가볍고 싱그러운 웃음소리를 따라 유원의 마음이
나붓거렸다.
마음이 자꾸만 목소리가 들리는 침대 아래로 멋대로 내려갔다. 유원은 그 마음을 다잡으려
일부러 벽 쪽으로 최대한 붙어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눈을 감았다.
“나 진짜 잔다.”
“…….”
“정유원, 자?”
“…….”
“잘 자.”
등 뒤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올라와서 자게 둘 걸 그랬나…. 금세 후회가
밀려들었다. 유원은 이불 안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고요한 방, 스탠드 불빛도 없이 내리깔린 어둠, 여전히 온몸에 달라붙은 죄책감.
“…….”
등 뒤의 현규진.
긴 숨이 흘렀다. 친구를 향한 죄책감과 이유 모를 두근거림, 벽이 아니라 현규진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충동을 짓누른 아주 긴 숨이.
그렇게 유원의 아주 긴 새벽이 시작되었다.
***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겨우 잠든 유원은 늦잠을 잤다. 몇 시인지도 모르고 조용한 방 안에서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침대 아래에서 자고 있는 현규진이었다. 깜짝 놀란 유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
분명히 벽에 최대한 붙어 잤는데 저는 지금 조금만 더 가면 침대에서 떨어질 것 같은 위치에
누워 있었다.
안 떨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뒤로 몸을 무르려던 유원은 곤히 잠들어 있는
현규진을 잠시 눈에 담았다. 저와 마주 본 자세로 누워 자고 있어 깊게 잠든 얼굴이 전부
보였다.
“…….”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잘생겼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그런 얼굴이었다. 장난만 좀 덜 치면
좋을 텐데. 잘 때는 장난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을 보며 웃은 유원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눈
위를 가린 앞머리를 넘겨 주었다.
지금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파드득 깨닫고 손을 거둔 것과 거의 동시에 현규진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자는 척을 해야 하는데 너무 놀라 눈을 감는 것도 잊었다.
“몇 시야?”
“…어? 아, 몰라. 잠깐만.”
침대 안쪽에 있는 휴대폰을 보려고 몸을 돌리자마자 몸이 밀렸다. 유원은 저를 안으로 밀고
침대 위로 올라오는 현규진을 보며 놀라 입술을 달싹였다.
“바닥 불편해….”
얼결에 현규진과 같이 침대에 눕게 된 유원은 벽 쪽으로 붙으며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을
확인했다.
“열두 시 넘었어?”
“…아니, 열 시 좀 넘었어.”
“아침이네…. 더 자자.”
“넌… 더 자.”
“너도 누워. 할 것도 없잖아.”
잠이 묻은 눈을 겨우 떠서 유원을 눕히고 이불을 대충 올려 덮어 준 현규진이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유원은 제 몸 위에 얹힌 이불과 현규진의 팔을 보며 잠시 숨도 쉬지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
겨우 정신을 차리고 슬쩍 현규진의 팔부터 치운 유원은 이불까지 걷어 내고 몸을 세워 앉았다.
얼굴을 보는 것도 사실 마음이 편치 않은데 속도 모르고 자꾸 달라붙어 곤란하게 하는 게 미워
앞머리를 살짝 잡아당기자 눈썹이 찌그러졌다. 그 반응에 푸스스 웃어 버린 유원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두 무릎을 모아 세워 얼굴을 반쯤 묻은 채 겨우 눈만 내밀어 곤히 잠든 얼굴을 보던 유원은 두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쿵쿵 세게 뛰는 심장에 무척 당황했다.
자고 나면 오늘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올 거라고, 친구에게 들면 안 될 것 같은 알 수 없는 감정
따위 말끔히 사라질 거라고 그렇게 자기 전에 바라고 또 바랐는데 오늘도 역시 제자리였다.
“…….”
어떡해, 규진아. 나 진짜 이상해. 두 눈에 현규진을 담으면 담을수록 빨리 뛰는 심장이 벅찼다.
결국, 유원은 현규진의 손길이 여전히 남아 있는 무릎 위로 완전히 얼굴을 파묻었다.
설레면서도 곤란하고, 평화로우면서도 마음은 소란한 일요일이었다.
***
유원의 성화에 못 이겨 과외 숙제를 하던 현규진은 누군가가 유원을 부르는 소리에 눈동자만
움직여 소리의 위치를 확인했다.
웬 낯선 얼굴이 앞문에 서서 유원을 보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곧 머릿속으로 금요일 밤 학원이 떠올랐다. 윤성인가 뭔가 하는 바로 그
놈이었다.
“어, 윤성아! 들어와.”
앞문 쪽에 닿아 있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여 윤성에게 들어오라 손짓하는 유원에게 닿았다.
볼이 동글동글하게 보이는 걸 보니 웃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도 모르는 뭔 윤성은 그대로 교실에 들어와 유원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유원에게 뭔가
내밀었다. 노트와 딸기 우유였다. 현규진은 아주 노골적으로 턱을 괸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뭔 대화를 나누는지는 잘 들리지 않지만, 윤성인가 뭔가가 말을 하면 유원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동그란 뒤통수가 계속 끄덕끄덕 움직이는데 괜한 짜증이 솟구쳤다.
웃으며 뭐라 말한 윤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원에게 손을 한 번 흔들었다. 유원도 그런
윤성에게 손을 여러 번 흔드는 게 보였다. 들은 건 아니지만, 분명 ‘빠이.’라고 말했을 것 같아
그것도 좀 짜증이 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현규진이 유원의 자리로 향했다.
“학원?”
“아…. 응. 정리 노트 빌려줬어.”
“이건.”
책상 위에 놓인 딸기 우유를 삐딱하게 툭 친 현규진이 옆 책상으로 걸터앉았다.
“매점 갔다가 나 주려고 샀대.”
“왜?”
“그냥 내가 단 거 좋아한다고 한 게 생각나서.”
“별 얘기를 다 했네.”
마지막 말은 중얼대듯 혼잣말처럼 말한 현규진이 딸기 우유를 노려보며 물었다.
“쟨 성이 뭐야?”
“이…. 이윤성.”
“그거 지금 마실 거야?”
“아니이…. 이따가. 지금은 별로 안 마시고 싶어.”
“그럼 내가 마시고 이따 사 줄게. 목말라.”
뭔가 묘하게 시비를 거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데 또 그렇다고 단정 짓기에는
선을 넘지는 않아 멀쩡해 보이는 현규진을 본 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 딸기 우유 안 좋아하잖아.”
“좋아해. 오늘부터.”
딸기 우유를 따서 뾰족하게 입 대는 곳을 만든 현규진이 유원 보란 듯이 벌컥벌컥 우유를
마셨다. 그리고 빈 우유갑을 들고 몸을 바로 세웠다.
“3 교시 끝나고 매점.”
“…응.”
교실 뒤쪽으로 간 현규진이 우유갑을 콱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초코우유는 꽤 좋아하는
편이고 바나나우유 같은 것도 나쁘진 않은데 유독 딸기우유는 인공적인 맛이라 느껴져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감상은 오늘도 여전했다. 들척지근한 맛이 남아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머릿속에 담배가 떠올랐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했다. 하지만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 피우러
가기가 애매했다. 그거 하나 때문에 수업을 쨌다가는 유원에게 어마어마한 잔소리를 듣게 될
것이었다. 뭐 그거야 들으면 되는 거긴 하지만, 진짜 싫은 건 유원이 저에게 실망하는
것이었다.
“…….”
교복 안주머니에 든 담배와 라이터를 손으로 만지작대다가 그냥 손만 뺀 현규진이 다시
유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책상을 짚고 선 채 고개를 기울여 저를 올려다보는 유원과 눈을
맞췄다.
“사탕 같은 거 없어?”
잠시 생각하던 유원이 교복 재킷 주머니에서 하나씩 먹고 반쯤 남은 캐러멜 스틱을 꺼냈다.
직사각형의 노란 캐러멜을 하나 꺼내 저도 모르게 포장까지 벗긴 유원이 알맹이를 현규진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릴 때부터 자주 해 온 습관이 참
무서웠다. 유원은 캐러멜을 받아 먹기 위해 벌어지는 현규진의 입술과 그 안으로 들어가는
노란 캐러멜, 그리고 손 끝에 아주 살짝 스치듯 닿은 입술을 느낀 뒤에야 습관적 행동을
후회했다. 손 끝에 세상의 모든 열기가 달라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유원은 얼른 손을 내려
허벅지 아래로 숨겼다.
“땡큐.”
유원의 손에 들린 노란 캐러멜 껍질을 가져간 현규진이 다시 교실 뒤로 가 처박힌 딸기우유
위로 버렸다. 팔랑팔랑 떨어진 노란 종이가 우유갑 위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입 안으로 새콤한 레몬 맛이 번졌다. 이윤성이 준 불쾌한 맛을 완전히 뒤덮으며.
친구 사이 고백 금지-14 화(13/127)

14


수업 끝나는 종과 함께 교과서를 닫은 유원이 얼른 복도 쪽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엎드려
자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이 또 엎드려 자다가 쫓겨난 현규진을 찾는 눈동자가 바빴다. 키가
워낙 크니 어디에 서 있든 창밖으로 보여야 하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원이 뒷문으로 나가 복도를 살펴보았지만, 역시 현규진은 없었다.
어디 갔지…. 유원은 휴대폰을 꺼내 현규진과의 톡방을 눌러 어디인지 물었다. 묻자마자
메시지 앞에 적혀 있던 1 이 없어지고 현규진의 답이 올라왔다.
[어디야?]
[규진 : 구름다리 앞]
[규진 : 내려와 매점 가게]
현규진의 답을 보며 계단 쪽으로 몸을 튼 유원이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 가서 서 있으라고
했는데 언제 아래로 내려간 건가 싶었다. 저렇게 말을 안 들으니 노는 애 취급을 받고, 무섭고
싸움박질이나 하고 다니는 애로 오해를 받는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억울하지도 않은가….
유원은 휴대폰을 교복 재킷 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내려갔다.
매점에 가는 애들이 유원의 옆을 위협적으로 지나 마구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유원은 난간을
꼭 쥐었다. 예전에 한 번 계단에서 어지러워 구른 이후로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더욱
조심하게 됐다.
난간을 잡고 코너를 돌자 다시 펼쳐지는 계단 아래로 현규진이 보였다. 그냥 거기 있어도
되는데 굳이 제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올라오는 현규진을 향해 걸음을 뗀 순간 누군가가
유원의 몸을 세게 치고 지났다.
“아…!”
난간을 잡고는 있었지만, 갑자기 뒤에서 가해진 충격에 몸이 기울었다. 엄청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안도가 됐다. 어느새 제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는 현규진을 봤기
때문이었다.
기울어진 몸이 현규진의 품에 닿았다. 순간 가해진 상당한 충격에도 현규진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유원의 등을 단단히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유원이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며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 제 품 안으로 가두듯 눌렀다.
유원은 몸과 몸이 밀착하는 느낌과 팔이 등을 강하게 압박하는 느낌에 숨도 쉬지 못한 채
있다가 겨우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떨어져야 하는데 현규진이 놓아주지 않아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야, 이 씨발. 똑바로 안 다녀? 얘 계단에서 구를 뻔했잖아. 왜 사람을 치고 다녀, 어? 돌았어?”
“아…. 미, 미안….”
“미안? 존나 칠 거 이미 다 치고 가 놓고 미안? 내가 못 잡았으면 정유원 넘어졌을 텐데 그때도
그냥 아, 미안. 이 지랄할래?”
현규진이 누군지도 모르는 애한테 계속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다. 말려야 하는데 여전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맞닿은 몸에서 열이 나는 것만 같았다. 어깨에 입술이 눌리는 것도, 숨을 쉴
때마다 현규진의 익숙하면서도 너무 좋은… 체향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너무나 곤란했다.
“…….”
단단하고 따뜻했다. 유원은 현규진의 어깨 위로 아예 얼굴을 파묻었다.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빠르게 뛰었다. 이렇게
틈도 없이 붙어 있다가는 다 들켜 버릴 것만 같았다. 제 마음을.
마음이… 뭔데? 유원은 저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뭘 들켜 버린다는
거야? 심장이 왜 뛰는데?
“눈깔 그냥 확…!”
근처에 있던 최해영과 김준재가 상황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다가와 현규진을 말렸다.
최해영은 이름 모를 애한테 얼른 꺼지라 말하며 자리를 피하게 했고, 김준재는 그만 하라면서
현규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뭘 그만해. 내가 뭘 어쨌는데. 정유원 다쳤으면 네가 대신 책임질 거야?”
“멍유 너 때문에 숨 먼저 막혀 죽겠다. 목 조르냐?”
그제야 제가 유원을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세게 품에 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현규진이
얼른 팔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몸을 숙여 발그레해진 유원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으응…. 괜찮아.”
“다친 데 없어? 발목 삐끗하거나 뭐 팔이 아프다거나. 움직여 봐.”
현규진의 말에 양쪽 팔을 흔들어 보인 유원이 발도 하나씩 들어 멀쩡히 움직이는 걸 보여
주었다. 그제야 안도한 현규진이 유원의 양팔을 꽉 쥔 채 이마를 어깨 위로 눌렀다.
“…씨, 진짜 큰일 날 뻔했네.”
“미안해, 많이 놀랐지.”
“네가 왜 미안해. 치고 간 새끼가 미친 새끼지. 아, 씹. 그냥 보내는 게 아닌데.”
이미 도망치고 없는 놈이 있던 자리를 홱 돌아보자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애들이 하나둘
현규진의 눈치를 보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
유원의 시선은 여전히 현규진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저를 대신해 화가 잔뜩 나 있는데 또
마주하는 눈에는 걱정이 가득한 현규진을 멍하니 눈에 담으면서 혼란한 마음의 소리를
느끼는 것, 지금 유원이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아직도 등에 현규진의 팔이 단단히 감겨 있는 기분이었다. 몸과 몸이 정확히 마주하던 느낌과
기울어지는 저를 향해 손을 내밀던 현규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목덜미와 교복에서 나던
좋은 냄새도 코 끝에 맴돌고, 제 목덜미를 감싼 채 누르던 뜨거운 손의 느낌도 너무나
선명했다.
조금 전 현규진이 저를 안은 것은 ‘사고’였다. 다칠 뻔한 상황을 막기 위해 저를 보호하며 안은
것이지 거기에는 다른 그 어떤 의미도 들어 있지 않다는 걸 유원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는데 왜 제 마음은 전혀 다른 쪽으로 기울어지는 걸까. 친구가 다칠 뻔해서 잡아 주는
상황과 두근거림은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가 18 년 소꿉친구 현규진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제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유원은 여전히
콩닥대는 심장을 외면하지 못한 채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얼굴이 빨간데?”
그건…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래. 입 안에 고인 말이 입술을 간질였다. 하지만 그 말을 차마
소리 낼 수는 없어 그냥 고개를 저었다.
“진짜 괜찮아.”
넘어질 뻔한 건 괜찮은데 너랑 닿은 건 하나도 안 괜찮아. 어떡해, 규진아. 나 자꾸 널 보면 떨려.
네가 닿을 때마다 심장이 이상해. 평소에 네가 하던 행동, 말, 표정이 다 새롭게 보여. 눈도 못
맞추겠고, 네가 웃으면 자꾸 손끝이 간지러워.
어떡해? 나… 너 좋아하나 봐.
***
현규진이 또 꿈에 나왔다. 계단에서 넘어질 뻔한 일, 그러니까 현규진에게 안긴 날로부터 벌써
열흘째였다. 어떻게 매일 친구가 나오는 꿈을 꿀 수 있는 걸까. 유원은 자는 게 무서워졌다.
하지만 그게 무섭다고 해서 아예 잠을 안 자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버티고 버티다가
까무룩 잠이 들면 어김없이 현규진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제 얼굴이나 목덜미를 만졌고, 그다음 날에는 입술을 만졌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는
입술을 귀와 목덜미에 짓눌렀다. 안 된다고 강하게 생각할수록 현규진은 더욱 선명해졌다.
지나친 의식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 같다고 생각은 하지만, 의식하지 않는 법을 알지
못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나타난 현규진은 이제 익숙하게 유원의 침대 위로 올라와 몸을 덮었다.
유원은 잠에서 깨고 싶었고, 또 깨고 싶지 않기도 했다. 현규진과 이런 짓을 하는 게 죄책감이
들면서도 꿈인데 뭐 어떤가 하는 대담한, 발랑 까진 생각이 들기도 해서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꿈은 유원의 의지로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깨고 싶다고 해서 쉽게 깰 수
없고, 깨고 싶지 않다고 해서 끝도 없이 이어지지도 않았다.
‘정유원, 저번에 씻으러 들어갔을 때 왜 그렇게 오래 걸렸어?’
제 귀를 만지작대며 현규진이 물었다. 유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꿈속의 저는 아주 가끔 대답만
할 뿐 말수가 무척 적었다.
‘한 시간도 더 걸린 거 알아?’
‘…그랬어?’
‘어. 하도 안 나와서 가 봤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거야.’
꿈인데도 그 소리에 심장이 확 내려앉았다. 유원은 하얗게 질린 채 제 어깨를 짓누른 채
내려다보고 웃는 현규진과 눈을 맞췄다.
‘하고 싶으면 말을 하지.’
‘아냐…. 그런 거 아닌데….’
‘뭐가 아냐, 유원아.’
‘진짜 그런 거….’
현규진의 얼굴이 내려왔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마주친 시선은 서로를 온전히 담지 못했다.
지나치게 가까워 온전히 전체를 볼 수가 없었다.
‘너 나 좋아하잖아.’
숨이 탁 터지며 눈이 뜨였다. 유원은 거세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입에 고인 숨을 내뱉었다.
잠이 달아난 자리에 현규진의 목소리가 잔상처럼 남아 웅웅댔다.
‘너 나 좋아하잖아.’
제가 현규진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자각을 한 뒤로 꿈에 나온 현규진은 계속 유원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듯 같은 말을 했다.
너 나 좋아하잖아.
그 말을 상기할 때마다 유원은 태어나서 좋아한다는 말을 처음 떠올려 본 사람처럼 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꿈속에서 현규진이 말한 좋아한다는 그 말은 18 년 소꿉친구에게 붙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사귀어 본 적도 없고, 흔히들 말하는 짝사랑, 첫사랑 같은 것도 해 본 적이 없어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꿈속에서 제가 현규진과 하는 것들이, 좋아한다는 그 말이 절대 ‘친구’와
나눌 수 없는 거라는 건 알았다. 아마 심장이 쿵 내려앉고 현규진을 보면 두근두근 마구 뛰던
그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5 화(14/127)

15


하지만 유원은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제가 현규진을 좋아해서, 친구와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고 싶은 의미로 좋아해서 그러는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절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피하고 또 피하면서 제가 요즘 왜 이러는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다 생각하다가 결국은 마주해
버린 답에 유원은 할 말을 잃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눈가가 뜨거웠다. 꿈이니까, 어차피
현실이 아닌 꿈의 이야기니까 그냥 잊으면 그만이겠지만, 이미 현실에서도 외면하던 답과
마주해 버려 불이 켜진 마음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 오직 그곳에만 불이 켜져
그쪽을 자꾸만 바라보게 됐다.
“…….”
현규진이 좋아?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던진 질문에 두근거림이 번졌다. ‘아니.’라는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도.
귓가에 닿는 손길에 멍해지고,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워 무릎을 쥐던 손길에 흥분해 버린
뿌연 이유가 선명해졌다. 품에 안겼을 때 확 끼쳤던 좋은 향도 유원의 생각을 더 설레게
물들였다. 처음으로 혼자 쾌감과 마주한 날,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수증기가 걷히고 마주한
샤워부스 밖은 너무나 낯설고 무서웠다. 현규진을 ‘좋아한다.’와 ‘좋아하지 않는다.’로
길이라도 갈려 있으면 뿌옇게 흐려진 ‘좋아하지 않는다.’ 길로 가 보기라도 할 텐데 눈앞에
보이는 길은 단 한 개였다.
현규진을 ‘좋아한다.’
아침마다 늘 12 층에서 내려와 6 층에 알아서 멈추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보이는 웃음,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데 늘 학원 끝날 시간에 문 옆에 기대어 서서 저를 기다리는 기다란
그림자, 다투고 삐져도 집에 홱 가지 않고 늘 제 옆에서 풀릴 때까지 있다가 먼저 말을 거는
용기. 제가 아플 때마다 곁을 지키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던 따뜻함.
유원은 현규진을 떠올렸다. 따뜻하고 다정한 저의 친구를. 당장 내일 아침 어떻게 얼굴을 봐야
할지 모를 저의….
“…….”
친구를 친구가 아닌 마음으로 좋아해도 친구일 수 있는 걸까? 현규진이 이런 저를 알면 어떤
얼굴을 할까. 무척 황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신생아 때부터 쭉
함께 지내며 모든 걸 같이 공유한 제가 그런 발긋한 꿈을 꾸고, 손길 하나에 몸까지 이상해져
혼자 그런 짓까지 했다는 걸 알게 되면 저를 혐오할지도 몰랐다.
어떡해…. 어떡하지.
설렘과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불안하고 무서웠다. 유원은 갑작스럽게
시작된 첫사랑에 어쩔 줄을 몰랐다.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어디서부터 마음을 들여다봐야
하는지 또 정리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지금 유원이 아는 것은 자꾸 현규진의 꿈을
꾸고, 현규진의 모든 행동에 전과 달리 두근거리는 이유가 현규진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는 것. 단지 그거 하나였다.
과할 만큼 쏟아지는 여러 생각이 벅찼다. 머리가 아프고 몸까지 지쳤다. 며칠이나 잠을 설쳐
체력은 더 빠르게 고갈되었다. 유원은 지쳐 눈을 감았다.
현실보다 더 발랑 까진 현규진이 유원의 팔을 잡아 제 영역으로 당겼다. 유원은 다시 현규진의
아래였다. 아침이 될 때까지 쭉.
***
현규진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유원은 평소보다 조금 더 생각이 많아졌다. 틈만
나면 멍해지며 굉장히 추상적인 ‘좋아한다.’는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좋아한다는 건 뭘까? 단순해 보이는 질문에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좋아한다는
게 뭐지? 설레는 거? 떨리는 거? 손이 닿으면 어깨가 나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 끝에 유원은 가장 어렵고 말문이 막히는 질문과 마주했다.
그래서 난 현규진과 뭘 하고 싶은 거지?
“…….”
그러게…. 현규진을 좋아하는 건 알았는데 그래서 난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정말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무엇 하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유원은 바나나우유 마시는 것도
잊은 채 가느다란 빨대를 입에 물고 또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좋아하면 뭘 하더라….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별로 어려운 질문도 아닌 것 같은데
배점이 높은 수학 문제보다도 어려웠다. 수학 문제는 공식을 외우기만 하면 어떻게 풀
방법이라도 짐작해 볼 수 있지만, 현규진을 좋아하는 이 마음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
멍유원이라 불리는 게 억울하지 않을 만큼 멍하니 앉아 있던 유원은 갑자기 벨이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과외를 하는 날이라 현규진과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멍때리는 사이 현규진이 온 모양이었다. 유원은 얼른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엄마가 떡볶이 사 와서 가져왔어.”
“떡볶이?”
“응. 너 좋아하는 거. 그 학원가 맥도날드 건물 지하, 거기.”
떡볶이가 든 종이봉투를 흔든 현규진이 안으로 들어가 부엌으로 향했다. 유원은 요즘 제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현규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현규진의 앞에서는 생각을 조금 멈추고
싶은데 그것도 잘되지 않았다. 당사자가 눈앞에 있어 그런 걸까? 오히려 더 맺히는 것들이
많아졌다.
“핫도그부터 먹을래?”
“…….”
“멍유원 씨. 핫도그 드시겠어요?”
“…….”
“멍멍아. 밥 먹자.”
그제야 눈을 맞추는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따뜻한 핫도그를 꺼내 케첩을 뿌려 주었다.
멍멍이라고 불러서 삐진 것처럼 입술을 쪼끔 내밀고 있던 유원이 조심스럽게 핫도그를 받아
호오 불었다.
“그러게 누가 멍때리래. 너 내 말 두 번 씹었어.”
“그래도 멍멍이가 뭐야.”
“귀엽잖아. 난 좋은데.”
큰 의미가 담기지 않은 말이라는 걸 아는데도 현규진의 좋다는 말에 유원의 심장이 마구
흔들리고 떨렸다. 유원은 작은 입을 벌려 입보다 커 한입에 넣을 수 없는 핫도그 귀퉁이를
겨우 한 입 베어 물었다.
“…너도 먹어. 내가 할게.”
먹지는 못하고 떡볶이 포장을 뜯고, 튀김까지 담고 있는 현규진을 보던 유원이 봉투 안에 든
핫도그를 꺼내 케첩을 뿌려 현규진에게 내밀었다.
“아.”
먹여 준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두 손으로는 뭔가를 하며 입을 벌리는 현규진이 귀여웠다.
유원은 답도 없이 덜커덩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 채 핫도그를 한입 먹여 주었다. 저와 달리
현규진은 크게 한입을 쉽게 베어 물었다.
“아, 맛있다. 배고파서 그런가.”
포장을 다 뜯어 먹기 좋게 세팅한 현규진이 다시 유원 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입을 벌렸다.
이제 두 손이 자유로우니 그냥 핫도그를 주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유원은 저도 모르게
현규진의 입으로 핫도그를 넣어 주었다.
“이제 네가 먹어….”
“왜, 나 먹여 주는 거 좋아하는 것 같은데. 계속해도 돼.”
장난기 다분한 목소리에 슬쩍 흘겨본 유원은 현규진의 손을 잡아 핫도그 막대를 쥐여 주었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찌릿함이 느껴졌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저 혼자만 느낀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이유였다.
“…….”
핫도그 끄트머리를 다시 한입 더 베어 물며 제가 겨우 두 입을 먹는 동안 핫도그 반 이상을
해치운 현규진을 흘끗 바라보았다. 또다시 머릿속으로 궁극적인 질문이 둥실 떠올랐다.
현규진이 좋아?
“…….”
좋아…. 거기까지는 답이 쉽게 나왔다.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친 결과였다. 그걸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현규진을 향한 감정으로 뭉그러져 버린 결과이기도 했다.
그럼 네가 좋아하는 현규진이랑 뭘 하고 싶어?
“…….”
난…. 난 현규진이랑…. 유원의 시선이 어느새 핫도그 하나를 먹어 치운 현규진에게 깊게
닿았다.
좋아하면 뭘 하고 싶지? 보통은 제가 좋아하는 상대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을 것이었다.
친해지고 싶을 거고, 말을 한 번이라도 더 섞고 싶을 거고… 상대의 눈에 들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유원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현규진과는 이미 더 가까울 수 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또 저와 현규진이 친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친하기도 했다. 말을 섞을 노력 따위
하지 않아도 너무나 쉽게 대화를 할 수 있고, 이렇게 둘이 밥을 먹을 수도 있었다. 친구 이상의
감정이 생기기 전에도 이미 다 하고 있는 일들이라는 말이었다.
또… 좋아하면 뭘 하지. 제 앞으로 쑥 다가오는 포크에 놀란 유원이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현규진과 눈을 맞췄다.
“…….”
입매가 시원하게 올라가며 미소가 번졌다. 언제나 곧게 닿는 시선은 흔들림이 없고, 그
눈동자는 따뜻했다. 좋았다…. 그 웃음이, 그 시선이… 그 따뜻함이.
현규진이 좋았다. 친구와는 다른 마음으로. 다시 낯설고 새삼스러운 질문이 떠올라 다가왔다.
현규진이랑 뭘 하고 싶어?
꿈처럼 닿고 싶어…. 더 가까이 앉았으면 좋겠어. 머리를 쓰다듬다가 목을 만져 줬으면 좋겠고
….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묵직하게, 움직이기 어렵게… 내 위에서…….
“정유원. 유원아.”
현규진의 목소리가 파고들며 초점이 맞아 세상이 또렷해졌다. 유원은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현규진을 보며 떨림이 묻은 입술을 겨우 벌렸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6 화(15/127)

16


“…응?”
“몸 안 좋아? 힘들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열 있나 보자.”
커다란 손이 이마를 뒤덮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지며 아랫배가 울렁였다. 살짝 떨어져 있던
허벅지가 오므라들며 틈도 없이 붙고, 하얀 양말 속 발끝은 움츠러들었다.
“열은 없는데.”
“…나 안 아파. 그냥 좀 다른 생각 하느라….”
“자기, 너무해. 날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나 하고.”
떡볶이를 꽂은 포크를 유원에게 쥐여 준 현규진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그 익숙한 웃음에도
마음이 철렁했다. 현규진이 친구로 보이지가 않았다.
“…….”
꿈처럼 하려면, 그게 이상한 행동으로 보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규진이 저를
만지고 안아도 되는 사이…. 그게 당연한 사이. 절대 친구라는 답이 나올 수 없는 그런.
“…….”
친구끼리는 할 수 없고, 그럼 어떤 사이여야 할 수 있지? 그 답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해 본 적이 없어도 누구나 낼 수 있는 답이니까.
…사귀는 사이. 그러니까….
친구라는 이름을 지운 자리에 드러난 선명한 답에 유원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저는 현규진과 연애하고 싶은 것 같았다.
***
연애…. 이응이 두 개나 들어가 동글동글하고, 그래서 더 간지러운 말을 차마 소리 내지 못한
채 입 안에서만 몰래 굴려 본 유원이 책상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유원아. 오늘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
“아…. 죄송합니다아…. 집중할게요.”
“집중을 안 하니까 틀릴 이유가 없는 문제를 틀렸잖아. 이거 봐. 여기까지 멀쩡하게 공식
대입해서 다 잘했는데 여기 숫자 하나 잘못 적어서 엉뚱한 답이 나왔잖아. 몰라서 틀리는 건
억울하지나 않지. 이렇게 다 해 놓고 기본적인 거에서 실수해서 3 점 깎이면 진짜 억울하거든.
문제 풀 땐 집중하자.”
“네에….”
시무룩해진 유원이 풀이 과정을 살펴보고 다시 제대로 풀어 답을 체크했다. 현규진과 그렇고
그런… 차마 말로 할 수도 없는 짓들을 하고 싶고, 그걸 하려면 사귀어야만 한다는 걸 깨달은
뒤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여기 현규진과 함께 앉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이거 여태까지 모의고사에서 매번 나오는 문제만 추린 건데 다음
시간까지 풀어 놔. 다음엔 이거 채점하고, 응용한 문제들로 시험 볼 거야.”
문제지를 받아 파일에 넣은 유원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혹시 제가 타일러서 그런가 싶어
유원을 본 이준서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질문 없어? 연애 얘기 물어도 되는데. 솔직히 물어줬으면 좋겠을 만큼 할 말 많거든.”
“네? 연애요?”
머릿속에 있던 말이 갑자기 소리로 들리는 것에 깜짝 놀란 유원이 고개를 확 들어 이준서를
바라보았다. 그에 더 놀란 이준서가 현규진을 한 번 보고 다시 유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유원아,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정신이 완전히 다른 데 가 있네.”
“아…. 죄송해요.”
“뭘 그렇게 놀라. 어, 설마 유원이 너 연애해?”
“네? 저요? 아니요…! 저 연애 절대 안 해요.”
“부정 세게 하는 거 보니까 맞는 것 같은데? 아니면 뭐 연애하고 싶어? 좋아하는 애 있구나.”
“좋아하는 애도 없어요. 정말 없어요. 저 여태까지 누구 좋아해 본 적 한 번도, 진짜 한 번도
없는데….”
그 말에 놀란 이준서가 흥미롭다는 듯 유원을 바라보았다. 열여덟이면 보통 한 번쯤은
누군가를 좋아한 경험이 있는 경우가 많기에 아예 경험이 없다는 유원이 신기했다.
“정말? 한 번도? 그냥 하는 말 아니고 진짜?”
“네…. 진짜 없어요.”
“신기하네.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유원이 너 좋단 사람도 없었어?”
“…고백 받아 본 적은 몇 번 있어요.”
“아, 역시.”
머릿속으로 ‘고백’이라 말할 수 있는 것들을 받은 기억이 스쳤다. 두 번은 여자애한테 받았고,
네 번은 남자애한테 받은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게다가 그 남자애 세 명은 현규진이 난리를
쳐서 내쫓아 버렸다. 정말 말 그대로 난리가 났었다.
물론 그렇게 난리를 칠 만도 했었다. 한 명은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갑자기 덥석 저를 안으려
했고, 두 명은 일단 더 조용한 곳으로 가자며 강제로 손목을 잡아 끌었으니까.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학원 앞에 꽃다발을 사 들고 와서 저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아무래도 꼭,
무조건 단둘이 보자고 불러내는 게 이상하다며 기어이 따라와 숨어 있던 현규진이
아니었다면 더 곤란한 일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고백한 애들 중에 마음에 드는 애 없었어?”
“…네에.”
“누굴 좋아해 본 적 없으면 유원이 네가 고백해 본 적도 없겠네?”
“네, 없어요.”
“눈 엄청 높구나?”
“그런 건 아니에요. 막 엄청 높거나… 까다롭고 그런 건 아닌데…. 뭔가 갑자기 확! 좋아지는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서….”
사실 얼마 전 현규진에게서 그런 감정을 느꼈지만, 유원은 그 사실을 꼭꼭 숨겼다. 지금 제
옆에 현규진이 있다는 걸 상기하고 또 상기하면서.
“아, 좀 운명적인… 그런 거 좋아하는구나?”
“그런 거 좋아하면 좀… 너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선생님은 그런 적 없으셨어요?”
“나도 그런 적 있어. 주변에도 보면 그냥 같이 다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확 좋아져서 사귀는
애들도 많고, 우연히 같이 친구의 친구로 만나게 됐는데 느낌 와서 만나는 경우도 많아.”
같이 다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확 좋아져서…. 유원은 이준서가 지금 제 마음을 그대로 읽고
있는 것만 같아 잠시 당황했다. 아무래도 얼른 이 이야기를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전에는
5 분 정도 남는 자투리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재밌고 좋았는데 오늘따라 너무
불편하고 곤란했다.
“규진이는? 규진이도 유원이처럼 운명적인 거 좋아해?”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전 눈이 높아서요.”
현규진의 대답에 방 안으로 이준서의 웃음소리가 번졌다. 유원은 그동안 현규진에게 고백한
여자애들의 얼굴을 몇 명 떠올려 보았다. 하나같이 다 예쁜 걸로 유명한 애들이었다. 개중에는
유명 기획사에서 아이돌로 데뷔를 한 애도 있었다.
“하긴 그 얼굴이면 눈 높을 만하다. 부럽다.”
그렇게 눈이 높은 현규진이 저를, 그것도 오랜 친구이기도 하고 같은 성별이기까지 한 저를
좋아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과 혼자만 머금고
있는 감정이 자꾸만 뒤섞여 마음을 따끔따끔하게 찔렀다.
“아, 이제 가야겠다. 숙제 잘해 놔. 유원이는 뭐 항상 잘해 두니까 하던 대로 하면 되고,
규진이도 요즘 하는 대로 그렇게 하면 돼.”
드디어 불편한 주제의 이야기가 끝나는 모양이었다. 가방을 들고 일어나는 이준서와 함께
일어난 유원이 방을 나가 현관에서 꾸벅 인사했다. 수업을 들은 시간보다 연애 이야기를 나눈
그 짧은 시간이 더 힘들어 진이 다 빠진 느낌이었다.
“오늘 진짜 왜 그래? 계속 다른 생각 하네. 너 무슨 일 있어?”
“응? 아니…. 일은 무슨. 그런 거 없어. 내가 무슨 일 있을 게 뭐가 있어….”
제가 현규진에게 가지게 된 마음 딱 하나를 제외하고, 현규진은 저에 대해 무엇이든 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저보다도 더 저를 잘 알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 철저히 숨겨야 하고, 절대 티를
내면 안 됐다.
“이모 오늘도 안 들어오셔?”
“열한 시쯤 오신다고 했어.”
“그때까지 있다가 갈까?”
평소라면 그러라고 했겠지만, 오늘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기도 하고, 그 복잡한 원인인
현규진과 함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있을 여력이 없었다.
“아니야. 몇 시간 안 남았는데 뭐…. 너도 가서 편히 쉬어.”
“요즘엔 자꾸 가라고만 하는 거 같아. 다 큰 척하네, 정유원.”
어린애를 대하듯 고개를 기울여 유원의 머리를 한 번 꾹 누른 현규진이 문제지 파일을 대충
들고 현관으로 나갔다. 유원도 그 뒤를 따라 문을 나서 엘리베이터에 타는 현규진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빠이.”
“응, 빠빠이.”
유원의 인사를 따라 하는 것으로 부족해 한술 더 떠서 애교스럽게 말한 현규진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유원은 다시 고요한 집으로 돌아와 흐늘흐늘 방으로 가 침대에
누웠다.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맺히는 현규진을 내내 떠올리다 보니 얼굴로 열이 몰렸다.
유원은 일어나 창을 열고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쨍할 만큼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얼굴과
과열된 생각을 식혀 주어 조금, 아주 조금 그래도 편안해졌다.
“…….”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규진과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도대체 어떻게 하게 된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곰곰 생각을 해 봐도 명확한 무언가의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긴 어떻게 좋아하게 된
건지도 알 수가 없는데 다른 거라고 해서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유원은 포근한 향이 나는
쿠션을 끌어안은 채 어둠 속에서 현규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현규진이랑 사귀면…. 만약에, 진짜 만약에 사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유원은 동그랗게
떠오르는 생각과 마주했다. 혼자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몽실몽실 떠올랐으나
이미 시작된 것을 멈출 방법은 없었다.
“…….”
사귀게 됐다는 건 서로 좋아하니까 그렇게 됐다는 걸 거고…. 아…. 어떡해. 현규진도 날
좋아한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해. 딱 한 걸음 앞으로 갔을 뿐인데도 유원은 어쩔 줄을
몰랐다. 너무 어색하고 또 곤란한데 손끝이 찌릿한 기분이 들어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다.
진정이 된 것은 한참 뒤였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7 화(16/127)

17


좋아해서 사귀게 됐으니까 분명 친구로 지낼 때와는 뭔가 다를 것이었다. 뭐가 다른지는 안 해
봐서 잘 모르겠지만, 손을 잡을 수도 있을 거고, 제가 꿈에서 현규진과 하는 것들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침대에 누워 단순히 만화책을 보거나 하는 게 아니라… 현규진이 제 위로
올라와서 몸을 덮은 채 눕기도 하고, 얼굴을 만지기도 하고, 또 뽀뽀를….
꿈에서 현규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던 것을 떠올린 유원이 다시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래도 정말 제가 미친 모양이었다. 소꿉친구를 좋아해 버리기나 하고, 저한테 전혀 그런
마음이 없을 친구를 상대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하다니.
…생각하지 말자. 이제 정말 생각하지 말자…. 강제로 생각을 접으려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생각은 점점 더 커졌다. 결국, 유원은 또다시 커다란 현규진의 생각에 퐁당 빠진 채 한참이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제 생각을 엿보기라도 하듯 창밖에서 들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과
마주한 채.
***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데다가 새벽까지 창까지 열고 잔 유원은 으슬으슬 몸살기를 매단
채 집을 나섰다. 입맛이 없어도 시리얼이라도 먹어야 한단 생각을 하긴 했지만, 도저히 무엇도
넘길 수가 없어 아침은 그냥 건너뛰었다.
교복 셔츠 위에 조끼, 카디건을 입은 다음에 교복 재킷은 물론이고 코트까지 입었는데도
한기가 드는 걸 보면 확실히 몸이 안 좋기는 한 모양이었다. 유원은 집에 두고 온 몸살
감기약을 떠올렸다. 빈 속에 먹으면 안 될 것 같아 시리얼을 먹고 먹으려고 식탁에 뒀는데
시리얼을 먹지 않아 그것까지 잊고 그냥 나와 버렸다. 1 층으로 이미 내려가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 숫자판을 본 유원이 벽에 머리를 기댄 채 한숨지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유원은 아파트 공동 현관 계단 난간에 걸터앉은 현규진을 보며
멈칫했다. 얼굴이 보이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쭉 뻗은 긴 다리만 봐도 현규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현규진을 인식한 순간 머릿속이 다시 엉망으로 꼬였다. 현규진을 좋아한다는 것을
인식한 이후 그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엉망으로 들쑤셔졌다. 유원은 최대한 마음을
짓누르며 심호흡했다.
“…….”
침착하게 굴자. 인사도 그냥 평범하게 하고 어색하게 굴지 말고…. 그냥 예전처럼 평범하게, 응
…. 평범하게. 절대! 티 내지 말고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은 유원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숨을 후우…. 뱉고 입구로 다가갔다. 그 기척에
현규진이 상체를 기울여 안쪽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기다리니까 색다르게 반갑지.”
씩 웃는 입매가 시원했다. 감기 때문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뒤엉킨 제 감정 때문인지
손끝까지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유원은 괜히 발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먼저 간 줄 알았는데….”
“아빠가 차에 짐 좀 같이 실어 달래서 같이 들고 내려왔어.”
“아….”
현관 계단을 한 계단 내려간 유원이 여전히 발 끝에 시선을 둔 채 가만히 입만 열었다.
“가자….”
“고개 들어 봐.”
“…왜.”
“얼른.”
갑자기 고개를 들라는 말에 쭈뼛대며 턱을 든 유원이 찬찬히 제 얼굴을 살피는 현규진과 잠시
눈을 맞추다가 눈동자를 데구루루 옆으로 굴렸다. 눈을 맞출 자신이 없었다.
“감기 걸렸네?”
확신을 가진 일을 말할 때 현규진은 늘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곤 했다. 그럼 저는 그냥 확인만 해
주면 되는 것이었다. 응, 나 감기 걸렸어. 하고. 제가 말하지 않아도 저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현규진이 좋았다.
“아직 심하진 않은데 몸이 좀 아파.”
“언제부터 아팠어.”
“오늘 아침….”
작게 혀를 차는 현규진을 보던 유원은 얼굴로 다가오는 커다란 손에 입술 안쪽을 꾸욱
깨물었다. 곧 기분 좋게 느껴지는 온도의 손이 이마를 완전히 뒤덮었다.
“열 나. 학교 갈 수 있겠어?”
“응. 괜찮아. 못 갈 정도는 아니야. 보건실 가서 약만 하나 먹으면 돼. 아침에 약 꺼내 놨는데
까먹고 식탁에 두고 왔어.”
“얼른 가자, 그럼.”
제 가방을 가져가 어깨에 메는 현규진을 본 유원이 무거운 발을 들어 옮겼다. 늘 아프던
환절기는 잘 넘겼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기어이 아파 버리고야 말았다. 누구 탓도 아닌 저
때문이기에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어제보다 더 추워졌나 봐….”
“추워?”
“쪼끔.”
“잠깐만.”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는 현규진을 본 유원이 으슬으슬한
기운에 다시 팔을 문질렀다. 옷을 잔뜩 두껍게 입었는데도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고
몽롱해졌다.
“이거.”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등장한 현규진의 손에는 꿀유자차와 생수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유원은
곧 제 손으로 옮겨온 따뜻한 꿀유자차 컵을 꼬옥 쥐었다.
“그건 가면서 마시고, 일단 약부터 먹어.”
한 쪽 어깨에 메고 있는 두 개의 가방 중 까만 백팩을 앞으로 가져와 지퍼를 연 현규진이 안쪽
포켓에서 약을 꺼냈다. 놀란 유원의 입술이 퐁 벌어졌다.
“…너 약 아직도 가지고 다녀?”
“당연하지. 이 정도는 기본 아냐? 말만 해. 감기약, 소화제, 진통제 다 있어.”
하얀 알약 두 개가 유원의 손바닥에 놓였다. 그리고 뚜껑 열린 생수도 입 앞으로 다가왔다.
유원은 알약을 한 번에 모두 입에 넣고 물과 함께 삼켰다. 하나는 넘어갔는데 하나는 넘어가지
않고 조금 녹아 쓴 맛이 났다. 유원은 기겁하며 얼른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남은 약을 삼켰다.
“…약 녹았어….”
“한 번에 삼키면 정유원이 아니지.”
쓴 맛이 입에 남아 괴로운데 놀리며 웃는 현규진의 팔을 아프지 않게 때린 유원이 유자차를
호오 불어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향긋하고 달콤한 유자차를 마시니 좀 살 것 같았다.
“…고마워.”
“고마우면 오늘 잘 넘겨 보자. 열흘 씩 아프지 말고.”
“으응….”
“힘들면 보건실 가서 좀 자고.”
“…알았어. 근데 이거 맛있다.”
“집에 갈 때 또 사 줄게.”
걱정이 담긴 눈으로 보는 현규진에 마음이 따끔거렸다. 유자차가 달콤한 건지 마음에
스며드는 현규진의 걱정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정말 심각하게
아프긴 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제정신 아닌 생각을 태연하게 하는 것 보면.
제 가방까지 어깨에 걸친 현규진을 가만히 보던 유원은 코끝이 찡해지는 것에 놀라 얼른
유자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사람이 아프면 마음이 약해진다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아파서
저를 생각해 주는 친구의 마음에, 그래…. 친구의 배려에 이렇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보면.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꿈과 현실, 두통과 설렘.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마구 뒤섞여 자꾸만
유원을 힘들게 했다.
“…….”
괜히 훌쩍인 유원이 놀라서 보는 현규진에게 고개를 저어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지 못하게 나란히 옆에서 걸었다. 한 번씩 닿는 시선에 옆얼굴이 홧홧했다.
아파서. 그래 아파서 그런 거야. 현규진 말대로 열이 나서. 정말이지 그 핑계라도 댈 수 있어
다행인 순간이었다.
***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있는 유원의 뒷모습을 본 현규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쉬는 시간이면
몰라도 수업 시간에 생전 엎드려 자는 애가 아닌데 저렇게 엎드린 걸 보면 상태가 안 좋아진
모양이었다. 수업이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10 분. 현규진은 수업 끝나는 종이 칠 때까지
내내 교탁에 선 선생 머리 위쪽으로 있는 시계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다음 시간에는 쪽지 시험 볼 거니까 복습 철저히 해 와.”
시험이라는 말에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흘렀다. 그 반응이 좋은지 웃고 나가는 선생을 흘끗 본
현규진이 곧바로 유원에게 향했다.
“정유원, 많이 아파?”
“…머리가 좀 아파서….”
겨우 고개를 든 유원의 얼굴을 본 현규진이 안 되겠다는 듯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냥
이렇게 엎드려 있는다고 괜찮아질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현규진에게 끌려 3 교시가 끝나고 보건실로 간 유원은 보건 선생님이 준 약을 하나 더
먹고 수면실 가장 끝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여분의 이불을 세 겹이나 더 덮은 채 눈을 감았다.
“집에 갈래?”
“…한 시간만 더 있어 보고….”
“왜 아프고 그래. 미안하게.”
“네가 왜 미안해….”
“며칠 차가운 거 많이 먹였잖아. 그럼 안 되는데.”
“그거 때문에 그런 거 아냐….”
가물가물한 정신에 자꾸 말이 길게 늘어졌다. 뭐라 더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열이 올라 몽롱한 머릿속으로 현규진이 아침에 사 준 따뜻한 유자차가 떠올랐다. 또
마시고 싶다…. 맛있었는데…. 향긋한 유자향을 떠올리며 안 그래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몸을
추욱 늘어뜨린 유원이 그대로 잠들었다.
***
4 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자 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현규진이 교실을 빠져나가 기다란 다리를
옮겨 계단을 여러 칸씩 내려갔다. 다들 급식실로 몰려가서 보건실이 있는 1 층 복도 끝은
굉장히 조용했다.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건 선생님과 인사한 현규진이 수면실로 들어갔다. 입구 쪽 빈
침대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두꺼운 이불 뭉치가 보였다. 귀여울 상황이 아닌데 이불 뭉치
바깥으로 삐죽 나온 작은 머리가 귀여워 보였다. 현규진은 벽 쪽에 놓인 의자를 당겨 이불에
말린 정유원 김밥 옆으로 털썩 앉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8 화(17/127)

18


“좀 괜찮아졌어?”
이마를 짚어 본 현규진이 인상을 썼다. 아까 보건실에 와서 짚어 봤을 땐 이렇게 뜨겁진
않았는데 그새 열이 잔뜩 올라 지금은 이마가 꽤 뜨거웠다. 이불을 이렇게 여러 겹 두르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정유원, 일어나 봐. 집에 가자.”
“으음….”
땀이 난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겨 주니 유원의 몸이 움찔댔다. 힘이 하나도 없이
겨우 올라가는 얇은 눈꺼풀과 그 끝에 매달린 기다란 속눈썹을 보며 안쓰러움을 느낀
현규진이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맞췄다.
“조퇴하자. 집에 가서 편히 자. 학교에 있을 상황 아냐.”
“으응….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아. 머리 아파. 네가 막 두 명으로 보여.”
“내가 둘이면 정유원 완전 좋겠네. 하나는 가방 들고, 하나는 아예 업고 갈 거 아냐.”
현규진은 유원의 몸에 둘둘 말린 이불을 벗겨 내고 겨우 몸을 일으켜 앉는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해 평소에도 다른 애들 만큼의 좋은 컨디션이 잘 나오지 않는데
아프기까지 하니 얼굴만 봐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 잡아.”
침대 아래에 놓인 슬리퍼에 발을 넣은 유원이 두 발로 서서 현규진을 붙잡았다.
“잠깐만…. 이불 좀 개고.”
“내가 할게.”
유원을 의자에 앉힌 현규진이 침대 위에 흐트러진 이불들을 펼쳐 하나씩 접어 발치에 놓았다.
석 장을 모두 개서 놓고, 베개까지 올려 둔 뒤에야 유원을 다시 일으켜 수면실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유원아. 좀 어때?”
“더 아파져서 조퇴하려구요….”
“그래, 그러는 게 낫겠다.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쉬어.”
“네에…. 감사합니다아…. 안녕히 계세요….”
보건 선생님에게 꾸벅 인사한 유원은 현규진과 함께 보건실을 나섰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갑자기 보건실 밖 서늘한 기운을 마주해 그런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조퇴하고 병원 들렀다가 가자. 빨리 조퇴하고 가면 점심시간 전에 갈 수 있어.”
“으응….”
고개를 끄덕인 유원이 긴 복도를 지나 교무실로 들어갔다. 다행히 담임이 자리에 있어 어렵지
않게 조퇴증을 받을 수 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창백한 유원의
얼굴을 본 담임이 깜짝 놀라 조퇴를 권한 이유였다.
“유원아, 가서 잘 쉬고 혹시 내일도 아프면 얘기해,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아….”
“혼자 갈 수 있겠어? 많이 아파 보이는데.”
“규진이가 같이 가 주기로 했어요.”
“아, 그래서 규진이도 온 거구나. 이제야 맘이 좀 놓인다. 규진아. 이리 와 봐. 왜 모른 척하고
뒤에 그러고 있어.”
담임의 말처럼 다른 용무로 교무실에 온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 있던 현규진은 어쩔 수 없이
가까이 다가가 슬쩍 웃음을 지었다. 교무실에서는 이제 제 본모습을 다 알고 있어 더 이상 이
웃음에 속아 주지 않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조건 신뢰할 수밖에 없는 면접, 상견례
프리패스용 미소였다.
“외출증 써 줄 테니까 유원이 잘 데려다주고 점심시간 끝날 때까지는 들어와. 오늘 좋은
일하네.”
“아, 네.”
잠자코 외출증을 받아 든 현규진이 유원을 부축하고 교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얼른 교실로 가
유원의 가방을 챙겨 어깨에 걸쳤다. 조금 서둘러 가면 병원 점심시간 직전에
아슬아슬하게나마 진료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자.”
“너 점심은?”
“이따 매점 가면 돼.”
“미안….”
“아플 때만 착해지네.”
유원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일부러 장난스럽게 대꾸한 현규진이 작게 웃었다. 평소에도 순해
빠진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뻘짓을 하거나 싸가지 없게 굴면 조곤조곤 잔소리도 하고,
혼을 내기도 하는데 지금은 그 약간의 기개마저 전부 빠져나가고 완전히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안 그래도 하얀 애가 더 하얗게 질려서는 비실비실한 걸 보는 건 역시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현규진은 어릴 때부터 유원이 아픈 걸 볼 때면 이러다가 정유원이 녹아 없어질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안 그래도 쪼끄만 애가 견디기 힘들 만큼 뜨거워져 일어나지도 못하는 게 너무 무섭고
슬펐다. 그래서 잠이 오는데도 눈을 비비며 참고 그 곁을 지켰다. 유원이 녹아 사라지지
않도록 손을 꼭 잡은 채.
몸이 훌쩍 큰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아프고 나면 열기에 녹아 정유원이
더 작아지는 건 아닐까. 녹으면 안 될 텐데.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여전히 생각은 그때
멈춰 있었다. 더 우스운 건 여전히 꽤 진지한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현규진은 힘없이 걸음을
옮기는 유원을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지었다. 부디 제 친구가 아픔에 녹지 않기를 바라며.
점심시간 직전 아슬아슬하게 병원에 도착한 유원은 몸살감기 같다는 말과 함께 처방전을
받았다. 상가 1 층에 있는 약국에서 약을 사는 동안 편의점에 들렀다 온 현규진의 손에는
뭔가가 잔뜩 든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유원은 바스락대는 소리를 들으며 집까지 함께
걸었다. 아파트 단지 인근에 있는 상가라 집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에 올라 6 층을 누르고, 내린 다음에는 제집 비밀번호까지 당연하게
누르는 현규진을 보자 아픈 중에도 웃음이 흘렀다. 사르르 웃는 유원을 흘끗 내려다본
현규진이 조금 간지러운 것 같은 손끝을 허벅지 위로 문질렀다.
“왜, 문 여는 것만 봐도 잘생겨서 막 너도 모르게 웃음이 나?”
“…뭐래. 그냥 네가 너무 네 집처럼 비밀번호 누르는 게 웃겨서.”
“너도 우리 집 비번 알잖아.”
“응, 837295. 이모 생신, 이모부 생신, 네 생일.”
“와, 뭐야. 난 너희 집 비번 의미는 모르는데. 927664 가 뭐야?”
“나도 몰라. 그냥 엄마가 아무거나 눌러서 정한 거래. 의미 두면 유추하기 쉽다고.”
우리도 바꾸자 그럴까…. 중얼거린 현규진이 유원을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앉히고 가방을
의자에 놓았다. 둘 다 전혀 무겁지는 않은데 부축을 하며 조심조심 걷다 보니 평소보다 더
긴장해 어깨가 뻐근했다.
“옷 갈아입어.”
“…….”
“왜?”
“나가야 갈아입지….”
“자기 진짜 너무 내외한다. 우리 사이에.”
“시끄럽고 빨리 나가….”
“네, 네.”
현규진이 방을 나가고 문이 완전히 닫힌 뒤에야 유원은 옷을 갈아입었다. 추운 기운이 전혀
없는 집에서 입기에는 두꺼운 겨울 맨투맨에 잠옷 바지를 입자 몸에서 긴장이 좀 풀렸다.
학교가 아니라 맘껏 아파도 되는 내 집, 내 방이라는 걸 체감한 이유였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
맘껏 아프면 안 되긴 하지만.
옷을 갈아입고 느릿느릿 교복을 정리하고 있는데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났다. 유원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현규진이 다가오는 소리에.
“다 입었어?”
“응.”
대답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유원은 현규진이 내미는 유자차 컵을 얼결에 받아 들었다.
편의점에서 뭘 샀나 했는데 아침에 제가 맛있다고 한 유자차를 산 모양이었다.
“맛있다며. 그리고 아프면 이런 거 마셔야 돼. 밖에 열 개 있으니까 이따 또 물만 끓여서 마셔.”
“열 개나 샀어?”
“마시고 싶을 때마다 마시라고. 그리고 죽 배달 올 거거든. 그건 내가 받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먹는 건 혼자 먹어야겠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현규진을 멍하니 올려보던 유원이 유자차를 호오 불어 한
모금 머금었다. 다시 마셔도 아침에 마셨던 것처럼 향긋하고 달콤해 너무너무 좋았다.
“죽은 언제 샀어?”
“편의점 옆이 죽집이잖아. 배달해 달랬어. 배민보다 그게 더 빨라.”
말을 하지 않아도 척하면 척, 저를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 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그 감정은 자라오며 늘 현규진에게 느낀 감정이었다. 하지만 열여덟의 11 월에는
전에 느낀 적 없던 감정이 하나 더 자리했다.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고, 또…. 두근거렸다. 유원은
괜히 유자자 컵 가장자리를 이로 꾹꾹 물며 현규진을 흘끗댔다.
“…고마워.”
“얼른 마시기나 해.”
씩 웃은 현규진이 유원의 머리칼을 헝클이며 장난쳤다. 유원은 그냥 가만히 제 머리칼을
가지고 노는 현규진을 보며 유자차를 마시고, 또 가장자리를 꾹꾹 깨물었다. 앞머리가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또 아프지 않게 잡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하도 깨물어 종이컵 가장자리가 우글우글해졌을 때쯤 벨이 울렸다. 유원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는 현규진을 보며 마음 안에 가득 갇혀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가벼운 장난과
묵직한 다정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이 아픈데 마음까지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소란해 얼른 혼자 남고 싶으면서도 이 순간에
혼자가 아니라 현규진과 함께라는 게 큰 위로가 됐다. 도대체 저는 뭘 어쩌고 싶은 걸까.
현규진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 버린 이후 매 순간이 모순의 연속이었다.
“이거 먹어.”
갑자기 불쑥 들어오는 현규진을 보고 놀란 유원이 홱 고개를 들었다. 그런 유원을 내려다보며
현규진은 책상 위로 죽이 놓인 트레이를 놓았다.
“약이랑 물도 같이 가져왔으니까 죽 먹고 약도 꼭 먹어. 그리고 푹 자. 학교 다시 갔다가 끝나면
올게. 죽 반 남은 건 냉장고에 넣어 놨으니까 이따 일어나서 배고프면 데워서 또 먹어.”
“알았어…. 고마워. 잘 먹을게. 넌 점심 못 먹어서 어떡해. 죽 반 남은 거라도 먹지.”
“그럴 시간이 없네. 다 먹고 자. 열 많이 나거나 갑자기 확 아파지면 톡해. 알았지? 혼자 참지
말고. 그러다 큰일 나.”
“응….”
“갈게.”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유원이 다시 제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현규진을 보다가 뭔가 생각난 듯
손목을 잡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9 화(18/127)

19


“과자라도 가져가.”
“정유원 곡식 창고 개방하는 거야?”
“좋아하는 거 있으면 다 가져가도 돼.”
유원은 책상 서랍 가장 아래 칸을 열어 현규진에게 보여 주었다. 현규진이 곡식 창고라고
부르는 그 서랍 안에는 유원이 좋아하는 젤리와 과자, 캐러멜 같은 간식이 가득했다. 건강
때문에 매일 먹거나 자주 먹지는 않지만, 잘 조절해서 컨디션에 따라 하나씩 먹으며
기분전환을 하는 용도로 만든 유원의 보물창고였다.
“창고 주인이 추천해 줘. 맛있는 걸로.”
현규진의 말에 유원은 진지하게 서랍 안을 뒤적였다.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복숭아 맛
젤리와 초코 쿠키, 빨간 끈이 붙은 기다란 치즈 소시지를 두 개 들어 현규진의 교복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아, 이것도.”
마지막으로 동그란 감자 칩이 몇 개씩 들어 있는 것까지 맛별로 넣어 주는 유원을 본 현규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과자 골라 주는 게 진지하고 심각해 보여서 너무 귀여웠다. 저와 같은
나이인데도 유원은 이렇게 어린애 같을 때가 있었다. 물론 저를 혼내거나 지적할 때는 저와
비교도 되지 않게 어른스럽기도 하지만. 현규진은 유원의 그 갭이 귀여워서 좋았다.
“이것도 맛있는데…. 포도 맛 젤리인데 초코 코팅이 돼서….”
“곡식 창고 텅텅 빈다, 비어. 이거면 됐어. 나 주머니 터져.”
그제야 유원의 눈이 볼록해진 현규진의 주머니로 향했다. 제가 먹을 걸 가득 넣어서 정말
주머니가 터질 것처럼 양쪽 다 볼록해져 있었다. 푸스스 웃은 유원이 서랍을 닫고 볼록한
현규진의 주머니를 톡톡 두드렸다.
“이거라도 꼭 먹어. 그리고 5 교시 끝나면 매점 꼭 가고…. 알았지?”
“응, 알았어. 죽 식겠다. 나 갈 테니까 얼른 먹어. 간다!”
집까지 저를 데려다주고 고생만 하다 가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어 자리에서 일어난 유원이
방에서 나가는 현규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왜 나와.”
“그래도 가는 건 봐야지.”
“됐으니까 들어가서 얼른 먹고 자.”
“…….”
“말 듣자.”
“알았어…. 조심해서 가.”
“어. 진짜 간다.”
“빠이….”
“응, 빠이.”
유원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만 기울여 복도를
빠져나가는 현규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멀리서 문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집 안으로 엄청난 적막이 밀려들었다.
“…….”
김이 폴폴 나는 죽 그릇을 든 유원은 전복죽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저를 생각해서
시간이 없고 바쁜 와중에도 죽을 주문했을 현규진을 떠올리니 코끝이 찡해졌다.
이렇게 안 해도 두근두근해 머리가 복잡한데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반칙이지…. 안
좋아하던 사람도 좋아하게 되겠다….
물끄러미 따뜻한 죽을 내려다보던 유원이 살포시 웃음 지었다. 머리와 몸은 아프지만,
현규진의 다정에 마음은 아프지 않고 따뜻하기 만했다.
***
현규진은 종례가 끝나자마자 미리 챙겨 놓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은지 톡을
보내도 답이 없는 걸 보면 약을 먹고 계속 자고 있거나 톡도 보내지 못할 정도로 아프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전자라면 그래도 다행이지만, 후자일 가능성도 0%는 아니기에 마음이 급했다.
“현! 스존 고?”
“오늘 영일고 애들 오기로 했는데.”
피시방에 가자며 다가오는 김준재와 최해영을 본 현규진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스피드존
따위는 현규진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안 가.”
“아, 왜. 오늘 존나 이겨야 되는 날이라고.”
게임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현규진의 청천벽력 같은 불참 소식에 최해영의 얼굴 위로 어둠이
드리워졌다. 김준재는 이제 현규진의 가방을 뺏으려 당기고 있었다.
“지랄 말고 놔.”
“멍유가 애냐. 약 먹고 잘 쉬겠지. 가 봤자 걸리적거리기만 하지. 그냥 좀 쉬게 둬.”
“너 아프면 혼자 존나 둘 테니까 걱정 마.”
가볍게 가방을 빼앗아 다시 어깨에 멘 현규진이 교실을 나섰다. 포기하지 못하고 현규진을
잡으러 나가는 김준재의 팔을 쥔 최해영이 고개를 저었다.
“놔둬라. 애인 아프다는데 보내 줘야지. 우리가 애인을 어떻게 이기냐.”
“진짜 멍유 뭐냐? 최면 건 거 아냐, 저 정도면? 당신은 앞으로 정유원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복종합니다, 뭐 그런 거.”
김준재의 말에 킥킥댄 최해영이 창문으로 다가가 중앙 현관을 나서는 현규진을 향해
소리쳤다.
“애인 간병 잘해라, 미친 놈아!”
위를 올려다보나 싶더니 이내 시선은 뚝 떨어지고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든 손이 한 번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그러고는 평소보다 더 급히, 아예 나중에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
나가는 현규진을 보며 김준재와 최해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유별나디 유별난 우정이었다.
***
아파트 입구에서 카드를 찍고 들어간 현규진은 조금의 여유도 없이 달려 아파트 1 층으로
들어갔다. 급한 마음도 모른 채 꼭대기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돌아선 현규진이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 올랐다. 어릴 때부터 하도 다녀서 이제 6 층 정도는 거뜬히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제집 비밀번호만큼이나 선명한 숫자를 눌러 문을 열자 싸한 공기가 돌았다. 분명 집에 있을
텐데 지나치게 적막한 걸 보니 역시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급한 마음에 유원의 방으로 가
조용히 문을 연 현규진이 방 안으로 고개만 살짝 넣어 침대 위를 살폈다. 방이 어둡지만,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가 가장 약하게 켜져 있어 정유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얀 이불이 또 돌돌 두툼하게 말려 있는 걸 보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문을 더 열고
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대충 바닥으로 놓은 현규진은 보건실에서보다 더 두꺼운 김밥이 된
유원에게 다가갔다.
“…….”
곤히 잠들어 있긴 한데 숨소리가 평소보다 더 컸다. 아픈 티가 나는 숨소리에 미간을 살짝
찡그린 현규진이 책상 위에 놓인 물병과 약봉지, 그리고 빈 유자차 컵을 바라보았다. 하여튼
단 거 좋아한다니까. 맛있다고 한 모금씩 홀짝대던 유원을 떠올린 현규진의 입매가 조금
부드럽게 풀렸다.
마지막으로 열이 있는지 이마를 짚어 보려다가 멈칫한 현규진은 화장실로 가 부드러운 향이
나는 핸드워시로 손을 씻었다. 그런 다음에야 다시 방으로 돌아가 유원의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 차가운 물로 손을 씻어 그런지 유원의 이마가 몹시 뜨겁게 느껴졌다.
“으음….”
“많이 아파?”
벽을 보고 있던 유원이 몸을 돌려 현규진이 있는 쪽을 보며 누웠다. 그리고 이마에서 떨어져
나가는 현규진의 손을 쥐어 뺨에 대었다. 얼굴에 시원한 게 닿는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시원해….”
“인간 물수건이 따로 없지, 아주.”
시원해서 좋은지 손을 잡아 아예 뺨을 대고 비비는 유원을 내려다보며 웃은 현규진이 다른
손도 들어 얼굴 여기저기를 만져 주었다. 유원이 시원함을 느끼는 만큼 현규진은 뜨거움을
느꼈다. 꼭 갓 찐 떡을 주무르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뜨겁고 말랑했다.
“아깐 열 이 정도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이랬어?”
“몰라아…. 아까랑 똑같은 거 같은데….”
“내 손이 차가워서 그런가. 머리 아프거나 그러진 않고?”
“응…. 괜찮아. 너 점심은 먹었어?”
“어. 곡식 창고 탈탈 털어 준 것도 먹고 매점도 털었어.”
“잘했어…. 나 나으면 피자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녹음한다?”
아파서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유원의 머리를 쓸어 넘겨 준 현규진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열과 뒤섞여 어느새 미지근해진 손으로 볼을 아프지 않게 조몰락거렸다.
“이제 안 시원해….”
“뭐야, 차가울 땐 잡고 난리더니 이제 안 차갑다고 바로 버리네. 와, 정유원 인성.”
옅게 웃은 유원이 미지근한 현규진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그게 못내 안쓰러워 침대에
걸터앉아 가만히 보던 현규진은 안 되겠다는 듯 휴대폰을 꺼냈다.
“이모한테 말했어? 아프다고?”
“아니이…. 엄마 오늘 바쁜 날이야. 드라마 촬영도 있고, 인터뷰도 두 개나 있고….”
“아무리 바빠도 너 아픈 건 아셔야지, 이모도.”
“엄마 신경 쓰는 거 싫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 유원의 부모님에게 연락해 유원이 얼마나 아픈지 알리고 싶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멋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한숨을 쉰 현규진은 잠시 휴대폰을 물끄러미 보다가
자신의 엄마에게 톡을 전송했다.
[엄마 정유원 아파]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 왔다. 현규진은 제 손에 얼굴을 기댄 채 다시 잠든 유원을 보며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유원이 어디가 아파. 감기 걸렸어?
“응, 몸살감기. 아까 점심시간에 조퇴했어.”
-어머, 조퇴할 정도로 아팠어? 그럼 아까 말을 하지.
“병원도 갔다 왔고 자고 나면 좀 나아질 줄 알았지. 근데 지금 끝나고 와 보니까 아까보다 열이
더 나는 것 같아서. 이모랑 이모부는 오늘 바쁜 날인가 봐.”
걱정 가득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규진은 갑자기 분주해진 엄마의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답을 기다렸다.
-엄마가 유원이 좋아하는 게살수프 끓여 갈 테니까 유원이 잘 보고 있어. 열 많이 나면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팔이랑 다리, 몸 좀 닦아 주고.
“알았어.”
-심하게 아픈 것 같으면 전화해. 응급실 가게.
“네.”
전화를 끊고 유원이 잡고 있는 손을 살살 빼낸 현규진이 다시 이마를 덮어 열을 재 보았다.
여태까지의 경험에 미루어 이러다 진짜 큰일이 나겠다 싶은 정도의 고열은 아니지만, 엄마
말대로 조금이라도 열이 내릴 수 있게 해 줄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현규진은 일단 이불을
걷어 내고 꽤 두꺼운 맨투맨 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보았다. 열이 나는데 두꺼운 옷, 이불까지
덮고 있어 그런지 땀이 나 팔이 촉촉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20 화(19/127)

20


일단 교복 재킷을 벗어 유원의 책상 의자 뒤로 대충 걸친 현규진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욕실로 향했다. 유원의 집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집에서는 늘 어릴 때부터
유원에게서 나는 포근한 비누 향 같은 냄새가 났다. 욕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 수건을 하나 꺼내 미지근한 물에 적신 현규진이 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꽉 짜서 들곤 다시
방으로 향했다. 이불을 걷어 내 추운지 유원이 쿠션을 안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정유원 똑바로 누워 봐.”
일단 좀 얇은 옷으로 갈아입히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 현규진은 곧 그다음 절차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려면 지금 입고 있는 맨투맨을 벗겨야 한다는 건데 그건 좀 자신이 없었다.
“…….”
유원이 맨투맨 안에 뭘 받쳐 입었는지 보기 위해 슬쩍 아랫단을 들어 올린 현규진이 곧바로
보이는 배에 놀라 옷을 곱게 내려 주었다. 옷을 갈아입히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아무리 오랫동안 모든 걸 공유하면서 가까이 지낸 친구라고 해도 지켜야 할 건 분명히
존재하니까.
일단 맨투맨 소매만 걷어 촉촉한 팔을 물수건으로 닦아 준 현규진이 헐렁한 잠옷 바지도 발목
위로 올렸다. 길고 가느다란 종아리를 마찬가지로 양쪽 다 닦고 나니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옷을 들어 올리고 배나 그런 곳도 닦아 줬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서 수건을 든 손이 방황했다.
“…….”
괜히 유원의 팔이나 계속 닦던 현규진은 같은 곳을 계속 문질러 붉어진 피부에 놀라 얼른
수건을 떼었다. 파르르 떨리던 유원의 얇은 눈꺼풀이 느릿하게 올라가며 눈동자가 마주한
것도 그때였다.
“또….”
“응?”
“또 나왔어….”
“뭐가?”
“너….”
“나?”
“어떻게 매일 매일 나와….”
맥락 파악을 바로 하긴 어렵지만, 대충 들어 보니 꿈에 제가 나온 모양이었다. 그것도 꽤 자주.
현규진은 미지근한 기운이 날아가고 차가워진 물수건을 책상 위로 놓고 달래듯 유원의
손목을 쥐었다.
“너 내 꿈 꿔?”
“내가 꾸는 거 아니거든…. 그냥 네가 나오는 거지이….”
열과 잠기운에 혼몽해져 자꾸만 유원의 말끝이 늘어졌다. 자주 듣던 거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오늘따라 그 늘어지는 말끝이 현규진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누가 내 꿈 꾸래. 돈 내고 꿔라.”
침대에 걸터앉은 현규진이 장난 치듯 유원의 부드러운 볼을 손가락으로 아프지 않게 톡
건드렸다. 유원은 눈을 감은 채 또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그럼 너 진짜 부자 될걸…. 매일 매일 나와서….”
“와, 매일? 매일 나랑 꿈에서 뭐 하는데.”
“네가 막….”
그냥 큰 의미까지는 없는 대화였다. 유원이 제 꿈을 꾼다는 게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니까
놀리듯 시작한 스몰토크, 딱 그 정도였다.
“어, 내가 막?”
“자꾸 만져….”
하지만 유원의 입에서 흐른 말을 듣는 순간 그냥 아무 말이나 주고받는 가벼운 대화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만져? 뭘?”
“얼굴….”
“아, 얼굴….”
“목, 팔….”
얼굴로 끝나지 않는 것에 당황한 현규진이 가만히 유원을 바라보았다. 뭐 얼굴이나 목, 팔은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자주 손이 닿는 곳이니 이상할 게 없기는 했다. 그걸 ‘만졌다.’라고
표현한다면 좀 이상해지긴 하지만.
“허리….”
“…허리?”
그런데 허리는 좀 말이 달랐다. 얼굴은 그냥 장난치듯 볼을 잡아서 늘릴 때 닿는 거고, 목은
그냥 목덜미를 잡거나 주무를 때, 팔은 뭐 언제든 잡아야 할 때 자주 닿는 곳이니 이상할 게
없지만, 허리? 허리는… 딱히 닿을 이유가 없었다. 유원이 넘어지려고 해서 뭐 잡거나 그런
특수 상황을 제외하고는 제가 유원의 허리를 ‘만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친구의 허리를
만진다는 말부터가 굉장히 이상하게 들렸다.
“옷 안에 자꾸 손도….”
“뭐?”
제가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건가 싶어 더 캐물으려는 순간 벨이 울렸다. 현규진은 미적미적
침대에서 일어나 유원의 방을 나섰다.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자 보온병을 든 엄마가 보였다.
“유원이는 좀 어때?”
“많이 아픈가 봐. 이상한 소리 하는 거 보면.”
“열 많이 나면 그럴 수 있어. 우리 유원이 가여워서 어떡해. 얼른 저녁부터 먹여야겠다.”
부엌으로 간 현규진의 엄마가 죽 그릇을 꺼내 커다란 보온병에 담아온 게살수프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아파서 입맛이 없을 때도 이건 잘 먹는다는 것을 알기에 유원이 아플 때면
늘 현규진의 엄마는 손수 게살수프를 만들어 주곤 했다.
거기에 마시기 좋은 온도의 보리차까지 트레이 위에 놓은 현규진의 엄마가 유원의 방으로
향했다.
“유원아. 이모 왔어.”
“…이모오….”
“가여워라, 우리 유원이.”
책상 위에 음식 트레이를 놓은 현규진 엄마가 침대에 앉아 몸을 일으키는 유원을 잡아 주었다.
“우리 유원이 좋아하는 게살수프 만들어 왔어. 이거 먹고 약 먹자. 물도 많이 마시고.”
“감사해요, 이모….”
“유원아. 잘 먹고 얼른 낫자. 알았지?”
“네에….”
수프를 호오…. 불어 한 숟가락 뜬 유원이 입에 넣었다. 뭔가를 먹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어릴 때부터 아플 때마다 먹어 온 게살수프 냄새를 맡으니 작은 식욕이 생겼다.
“어때, 먹혀?”
“네, 맛있어요. 이모.”
“다행이다. 해연이, 아니. 엄마한테는 연락했어?”
“엄마, 아빠 오늘 스케줄 엄청 많은 날이라고 하셔서 그냥 말씀 안 드렸어요. 심하게 아픈 것도
아니고….”
침대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에게 한 걸음 떨어져 책상에 가볍게 걸터앉은 현규진이
수프를 조금씩 먹는 유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엄마가 갑자기 와서 대화가 더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아까 분명히 이상한 말을 했었다. 제가 꿈에서 자꾸 유원을 만지는데 그게 얼굴, 목,
팔 정도가 아니라 허리 같은 곳을 만지기도 하고, 그걸 넘어 옷 안에 자꾸 손도 넣는다는 그런
말을.
‘옷 안에 자꾸 손도….’
작았지만, 분명히 들은 짧은 말이 머릿속을 마구 돌아다녔다. 도대체 정유원은 어떤 꿈을 꾸는
걸까? 그리고 저는 정유원의 꿈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걸까? 현규진은 알고 싶었다.
“…….”
유원이 열에 달뜬 상태로 한 말이니 그걸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말 그대로
그냥 나온 말일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여태까지 그런 종류, 그런 방향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기에 자꾸 신경이 쓰이긴 했다.
네가 어제 꿈에서 이상한 짓거리를 해서 웃겼다는 식의 이야기는 가볍게 나눌 수 있지만, 매일
꿈에 나온다거나 꿈에서 나를 만졌다는 식의 이야기는 보통의 친구끼리 나눌 이야기가
아니니까.
“규진아. 넌 집에 가서 저녁 먹어. 여긴 엄마가 있을게.”
“아니에요. 이모도 가서 저녁 드세요. 저 약 먹고 잘 거라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엄마, 아빠
자정이면 오실 거예요.”
“그래도 아픈데 어떻게 혼자 있어.”
“더 아파지면 연락드릴게요.”
그래도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려던 현규진의 엄마, 최소희는 유원의 말을
따르겠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눈에는 아직 어린애처럼 보여 걱정이 되지만, 다
컸다면 다 큰 유원의 말을 우선적으로 존중하고 들어주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이유였다.
“더 안 좋아지면 혼자 참지 말고 꼭 이모나 규진이한테 연락해. 알았지? 힘들면 말 안 해도
되니까 전화라도 걸어. 그럼 바로 올게.”
“네, 그럴게요.”
옅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유원의 머리칼을 쓰다듬은 현규진의 엄마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원을 뚫어져라 보며 생각에 잠긴 현규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자. 유원이 푹 쉬게.”
“얘 혼자 두고?”
유원이 말한 꿈에 대해 생각하느라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놓친 현규진이 엄마에게 끌려 방
밖으로 나갔다.
“혼자 쉬게 둬. 안 좋아지면 전화한다고 했어.”
“쟤 전화 안 해. 엄마는 아직도 몰라? 혼자 미련하게 참으면 참았지.”
“그게 미련한 거야? 유원이가 착해서 그런 거지. 일단 조용히 쉬게 가. 엄마가 이따 또 와 볼
거니까.”
“아, 나 정유원한테 할 말 있어.”
“아픈 애한테 할 말은 무슨 할 말. 나중에 해. 내일.”
그러니까 내가 왜 그 꿈에서 그렇게 나왔는지 물어야 한다고. 뒷말은 한 글자도 소리 내지
못한 현규진이 어쩔 수 없이 현관으로 나가 운동화에 대충 발을 넣었다. 아무래도 일단 집에
있다가 운동 핑계를 대고 집을 나와야 할 것 같았다.
***
유원은 또 꿈에 시달렸다. 몸이 아파 꼼짝도 할 수 없는데도 현규진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꿈속 현규진은 늘 생각하지만 정말 너무… 멋대로였다. 발랑 까지기는 얼마나 까졌는지
처음보다 더 거침없이 여기저기에 손을 대곤 했다.
익숙해졌다는 말은 조금 그렇지만, 매일, 그것도 밤마다 서너 번씩 겪는 일에 익숙해진 유원은
이제 현규진이 나타나 제 몸 위로 올라도 전처럼 크게 놀라지 않았다. 제가 거부한다고 해서
꿈을 꾸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포기이기도 하고, 또 현실에서는 겪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의 ‘그다음’에 대한 궁금함이기도 했다.
꿈은 나쁜 게 아니란 생각과 함께 죄책감은 조금 흐릿해지고 다음 단계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꿈이 아니면 알 수 없으니까. 유원은 어쩌면 현규진보다 제가 더 발랑
까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21 화(20/127)

21


뺨을 만진 손이 귓가로 향했다. 귓불을 매만지다가 아래로 내려가 목덜미를 가볍게 쥐기도
하고, 어깨를 쓰다듬던 손이 팔을 타고 내려갔다. 티셔츠 아래로 들어가는 손도 이젠 거침이
없었다. 유원은 저와 끈질기게 눈을 맞추는 현규진을 올려다보며 두 팔을 뻗었다. 어디에서
나오는 용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규진의 몸이 제 몸을 짓누르며 내려왔다. 느릿하게 기울어진 얼굴이 함께 내려와 입술
앞으로 다가왔다. 닿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입술 위로 뜨거움이 내려앉았다. 뜨겁고
말랑하고… 또 부드러웠다.
‘내일 내 얼굴 어떻게 보려고 이래.’
생각지도 못한 말이 울린 순간 유원의 눈이 확 뜨였다. 입 안에 고여 있던 숨이 탁 터지며
흐트러졌다.
“하아….”
꿈에서 현규진과 닿은 입술이 너무 뜨거웠다. 유원은 아파서 땀이 난 것 외에도 다른 이유로
축축한 느낌이 나는 바지 안을 느꼈다. 아…. 정말 미친 게 틀림 없었다. 감당하기가 어려워
눈을 깊게 감고 심호흡한 유원이 이불을 걷었다. 빨리 이 축축하고 죄책감 가득한 느낌을 씻어
내고 싶었다.
“유원아, 자니?”
침대 바깥으로 나가려는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살짝 열렸다. 유원은 얼른 이불을 다시
다리 위로 당겨 덮었다.
“엄마….”
“일어나 있었어? 엄마가 너무 늦었지. 아프다면서…. 집에 오는 길에 소희 연락 받았어. 왜
엄마한테 말 안 했어.”
“많이 아픈 것도 아니고, 엄마 바쁜데 괜히 걱정할까 봐….”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우리 아들 아프면 엄마가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엄마니까. 우리
강아지 아픈 거 엄마가 모르면 돼?”
“알았어. 앞으로는 다 얘기할게.”
“꼭 얘기해 줘. 촬영이 아무리 바빠도 우리 유원이가 엄마한테는 제일 중요하니까.”
엄마 품으로 안긴 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다 얘기해도 딱 하나 말하지 못할 비밀이
담긴 이불 속이 걱정되고 찔려서 자꾸 마음이 따끔따끔했다.
“아빠는요?”
“오실 거야. 우리 아들 걱정돼서 주차하기도 전에 먼저 내려서 올라왔어.”
그때 멀리서 방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곧 걱정 가득한 얼굴로 방에 들어온 유원의
아빠가 침대 위로 걸터앉아 반대쪽에서 유원을 안았다. 유원은 이불 속 끈적끈적한 느낌을
애써 외면한 채 엄마, 아빠를 함께 끌어안았다.
약간의 두통과 멍함, 그리고 엄마, 아빠를 봐서 기쁜 마음과 편치 않은 죄책감이 모두 뒤섞인
감정이 심장을 꾹 눌렀다. 아주 무겁게.
***
아침에 일어나니 열이 모두 내려 있었다. 유원은 체온계에 뜬 36.7 도를 보고 편한 마음으로
학교 갈 준비를 했다.
간만에 엄마의 촬영도 그 외 스케줄도 모두 없는 날이라 다 같이 아침을 먹었다. 아빠가
만들어 준 오믈렛을 맛있게 먹은 유원은 학교 잘 다녀오라는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그게 기분이 좋아 문을 나서면서도 괜히 한 번 더 현관을 돌아보았다.
문을 나서자 12 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유원은 어김없이 6 층에 멈춰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에 선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장 먼저 입술이 눈에 들어와
곤란한 마음에 얼른 시선을 내리깔며 안으로 올랐다.
“어디 보자.”
문이 닫히기도 전에 현규진이 몸을 유원 쪽으로 확 틀며 다가왔다. 순간 놀란 유원이
뒷걸음쳤다. 그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다가온 현규진이 유원을 엘리베이터 벽에 가두듯
세우고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덮어 보았다.
“열 내렸네?”
“응…. 다 내렸어.”
“이 정도면 음, 36.7 도네.”
“와, 그걸 어떻게 알아? 진짜 36.7 도였어.”
“내 손이 체온계야. 하도 어릴 때부터 열 체크했더니 이젠 자동이야, 자동. 삑, 36.7 도
정상입니다.”
씩 웃는 현규진을 보니 또 심장이 울렁였다. 유원은 조금 어색한 마음으로 따라 미소 짓곤
얼른 현규진의 그늘을 벗어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어제 너 괜찮은지 한 번 더 가 보려고 했는데 엄마한테 걸렸어. 나 가 봤자 너 잠만 제대로 못
잔다고 가지 말라는 거야. 아니, 내가 너 자는 거나 방해할 인간이냐고.”
“음…. 맞잖아.”
“와, 너무하네.”
진심으로 서운한 얼굴을 하는 현규진을 보고 웃은 유원이 팔을 잡아 살살 흔들었다.
“장난이야.”
“…….”
“삐지지 마아…. 진짜 장난이야…. 어제 네가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다 알아.”
“고생은 뭔 고생. 너도 나 아프면 그렇게 할 거잖아. 당연한 거야.”
“화 풀렸어?”
“화 안 났어. 나도 장난이야. 삐진 척한 건데.”
입매를 늘려 시원하게 웃은 현규진이 유원의 가방을 어깨에서 빼내 제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습관처럼 유원의 뒷머리를 헝클이듯 쓰다듬다가 마지막으로 스르륵 내려와 목덜미를 두어 번
주물렀다. 유원의 발끝이 운동화 안에서 움츠러들었다.
“아, 맞다. 정유원. 어제도 내 꿈 꿨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순간 유원의 심장이 그대로 확 떨어졌다. 유원은 표정 관리도 하지
못한 채 놀란 눈으로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뭐?”
“너 내 꿈 꾼다며, 요즘.”
“…내가?”
“어. 네가 어제 그랬잖아. 매일 꿈에 나 나온다며.”
유원은 열심히 어제 일을 떠올리려 애썼다. 언제, 도대체 언제 현규진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건 다 떠오르는데 현규진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는지, 도대체 뭘 얼마나, 어떻게 말했는지도 당연히 알 수
없었다.
“내가… 내가 그랬나? 나 왜 그런 말 한 기억이… 안 나지?”
“잠결이긴 했어. 나랑 말한 것도 꿈이라 생각하는 거 같던데.”
현규진은 대수롭잖게 말하지만, 유원은 쉽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제 꿈에
현규진이 어떤 모습으로 나와서 어떤 짓을 저와 하는지 현규진은 모르지만,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뭐라 그랬어? 그냥… 네 꿈꾼 적 있다고?”
“응. 매일 나온다고.”
“…또?”
“그게 다야.”
“아….”
유원은 그제야 안도했다. 제가 그래도 그 이상의 것은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꿈에서
자꾸 여기저기를 만지고, 야한 짓을 한다고 이야기했으면 절대 현규진이 이렇게 평이한
말투로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할 것이었다.
“…열이 너무 많이 나서 그랬나. 막 열 많이 나면… 꿈인지 현실인지 가끔 분간이 잘 안될 때가
있거든. 어제 그랬나 보네….”
“그럴 것 같았어. 근데 뭘 그렇게 사색이 돼. 꿈 좀 꾸면 어때서. 나도 너 꿈에 잘 나와.”
“…어떻게 나오는데?”
“그냥. 어디 같이 가기도 하고, 평범하지 뭐. 아, 전에 밤새 사막 같이 걸은 적 있었다.”
“아….”
유원은 죄책감에 마른 입술을 감쳐물었다.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 다행이기는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런 일이 또 생기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기도 하고, 또 그게
아니더라도 더는 제 친구를 친구가 아닌 것 같은 시선으로 보면서 친구와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꿈을 꾸고 싶지 않았다. 저와 현규진 모두에게 떳떳하고 당당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꿈을 꾸더라도 현규진이 말하는 것처럼 ‘평범한’ 꿈을 꿀 수 있던 때로.
그러려면…. 우선 제 마음이 예전과 같아져야 했다. 친구를 보고 설레는 마음이 들어서도 안
되고 두근거림을 느껴서도 안 됐다. 어깨에 손 좀 닿는다고 움칠거리고 친구가 저를 걱정하며
사다 준 유자차를 마시면서 속이 울렁울렁한 느낌이 드는 일도 이제는 없어야 했다.
정리. 그래, 정리를 하면 될 것이었다. 이런 마음이 든 게 오래된 것도 아니니까. 18 년 동안
느낀 친구 감정을 한 달도 안 된 설익은 감정 따위가 이길 수는 없었다.
“멍유원, 또 멍때린다.”
“멍때린 거 아니라… 생각한 거야.”
“무슨 생각? 내 생각?”
현규진이 상체를 기울여 눈을 맞춘 채 싱긋 웃었다. 눈치도 없는 심장이 어김없이 두근거렸다.
감정을 정리할 수 있다는 유원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
현규진을 보고 더는 두근거림을 느끼지 않을 거라는 강한 다짐은 처참히 실패했다.
두근거림이나 떨림, 그리고 손이 닿을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한 그 느낌은 제 의지로 컨트롤
되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당연히 꿈도 유원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의식을 하면 할수록 꿈속 스킨십은 더욱
짙어졌다. 이제 몸을 붙이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고, 밤새 입술을 댄 채 쪽,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하기까지 했다. 처음 딱 한 번 뽀뽀할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유원도 입술을 조금
내밀어 같이 쪽, 쪽 입을 맞춘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좋았다.
밤새 간지럽고 축축한 기분으로 꿈을 꾸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자책하고, 현규진을 보면
마음을 졸이는 날이 이어졌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다가 보름을 넘긴 날,
유원은 몰래 속옷을 빨다가 욕실에서 엉엉 울었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소꿉친구를 상대로
야한 꿈이나 꾸면서 속옷을 빠는 현실이 너무 속상했다.
공부에도 집중이 되지 않고, 뭘 먹어도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살도 조금 빠졌다. 무슨
일이 있는지 부모님은 걱정을 하고, 현규진도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자꾸 무슨 일이 있는지
묻고 아픈지 묻는 현규진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너무 심해졌다.
유원은 이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22 화(21/127)

22


현규진이 좋았다. 18 년 친구였던 시간을 지나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얼굴을 볼
때마다 꿈에서만 하는 그 당당하지 못한 일들이 떠오르고, 진짜 닿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말이 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현규진이 저를 그런 감정으로 좋아할
리도 없고, 또 아주 작은 0.1%의 가능성을 위해 견고한 친구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다. 유원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미 제대로 마주한 것에 이어 인정까지 해 버린 감정,
현규진을 좋아하는 마음을 혼자만의 해프닝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유원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다시 현규진이 친구로 보이도록 마음을 바꿔야 하는데…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 번도 누군가를 연애 감정으로 좋아해
본 적이 없어 너무너무 어려웠다. 한 번이라도 짝사랑을 해 본 적이 있다면 그 마음이 어떻게
사그라드는지도 알 수 있었을 텐데… 방향도, 방법도 알 수가 없었다. 유원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날마다 커지는 마음만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현규진을 보는 게 괴로운데 또 너무 좋았다. 어깨를 감싸는 팔도, 머리를 쓰다듬다가 목덜미를
주무르는 손도, 제 키에 맞춰 상체를 숙여 눈을 맞추면서 웃는 그 얼굴도… 전부 좋았다. 그게
너무 좋고 설레서 현규진과 있을 때는 마음이 조금도 눌리지 않았다.
그래서 유원은 최대한 현규진을 보지 않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소 극단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두 눈에 현규진을 담기만 해도 콩닥콩닥대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당연히 아니었다. 같은 아파트, 같은 반, 늘 등하교를 같이 하는 데다가
매점에 점심에 늘 붙어 다니다 보니 현규진을 보지 않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덜
괴롭기 위해, 친구를 되찾기 위해 더 노력해야 만했다.
“오늘은 집에 같이 못 가.”
“왜?”
“윤성이 집에서 학원 숙제 같이 하다가 학원 가기로 했어….”
“갑자기? 그런 말 없었잖아.”
“…어, 그 오늘까지 해야 하는 숙제가 어려워서…. 좀 물어보려고.”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 현규진의 눈치를 보던 유원이 얼른 책가방을 들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윤성이 집도 우리 아파트 가는 쪽이라 같이 가면 되니까 끝나고도 안 와도 돼.”
“…….”
“…힘들잖아.”
대답은 안 하고 주머니에 손을 푹 꽂은 채 삐딱하게 서서는 저를 빤히 보기만 하는 현규진과
어색하게 눈을 맞추던 유원이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앞문에는
이윤성이 와 있었다.
“유원아!”
“어, 어! 왔어? 가자….”
유원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는 현규진에게 손을 들어 한 번 흔들었다. 그리고 얼른 뒤돌아
앞문을 나섰다. 이런 적, 그러니까 현규진을 두고 다른 누군가와 집에 가는 게 처음이라
심장이 막 빨리 뛰었다. 해냈다는 느낌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현규진을 두고 혼자 나온 게
미안하고 신경이 쓰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싸웠어?”
“어?”
“현규진? 맞지, 네 친구. 되게 유명하더라. 무섭다던데.”
“아, 아닌데…. 규진이 착해. 무섭다고 하는 건 그 사람들이 오해하는 거야. 뭔가 잘못을 하니까
무섭게 보이는 거지. 규진이 아무한테나 화내고 막 그런 애 아니야. 얼마나 착한데.”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말하는 유원을 보던 이윤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제가 너무
현규진 편을 든 것 같아 부끄러워진 유원이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부디 학교를 벗어났을
땐 머릿속과 마음 안에 가득 찬 현규진이 조금이라도 흐릿해지기를 바라며.
***
창가에 서서 운동장을 내다보는 현규진의 옆으로 김준재와 최해영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함께 창밖을 보다가 유원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놀란 눈으로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저기 멍유 아냐?”
“맞아.”
“불륜 현장 목격이야, 이거?”
“지랄은 하지 마시고.”
“아니, 옆에 누군데?”
“이윤성.”
“이윤성이 누구야. 야, 최해영, 너 이윤성 알아?”
발이 넓은 데다가 한 번 보면 거의 모든 사람을 기억하는 편인 최해영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아, 1 반에 전학 온 애.”
“전학 온 애가 왜 멍유랑 가?”
다시 질문이 현규진에게 닿았다. 현규진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면서도 뭐 할 말이 많은지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본 채 이야기를 나누는 유원을 보다가 불편한 숨을 내쉬었다.
“같은 학원 다녀.”
“그래? 멍유가 결국 배운 놈한테 갔구나….”
그냥 농담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김준재의 말이 뭐 같이 들려 견딜 수가 없었다. 현규진은
그대로 홱 몸을 돌려 자리로 가 대충 가방을 신경질적으로 끌어 한 쪽 어깨에 걸치고 교실을
나갔다. 기분이 너무 좆같았다.
***
이윤성의 집에서 좋아하는 허니콤보를 저녁으로 먹고, 숙제해 간 게 다 맞아 학원에서 칭찬을
받으면서도 유원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자꾸 아무 말도 없이 저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현규진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유였다.
솔직히 이런 사소한 것에 하나하나 자꾸 마음을 쓰는 제가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주
아주 친한 소꿉친구가 있다고 해도 그 친구랑만, 한 명하고만 평생 같이 다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다른 일이 있으면 다른 친구와 시간을 보낼 수도 있는 건데 도대체 왜 저는
자꾸 현규진을 신경 쓰고 있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현규진은 너 학원 끝날 때마다 오던데 너 데리러 오는 거야?”
“아…. 이상해 보이지. 그게 좀 사정이 있어.”
“아니, 뭐 이상해 보이는 건 아닌데 신기해서. 보통 그렇게까진 잘 안 하니까.”
“응…. 그렇지.”
어색하게 웃은 유원이 가방을 챙겨 이윤성과 함께 1 층으로 내려갔다. 내내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는 현규진을 생각하며 학원 건물을 나서는데 이윤성이 팔을 툭툭 쳤다.
“저기 현규진.”
“…….”
안 와도 된다고 했는데 문 옆, 그러니까 늘 현규진이 저를 기다리고 서 있는 그 곳에는
어김없이 현규진이 있었다. 집에 갔다 왔는지 교복 차림이 아니라 까만 후드티에 까만 조거
팬츠를 입은 채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 갈게. 학교에서 볼 수 있음 보자.”
“응…. 잘 가.”
손을 흔들어 인사한 유원이 현규진에게 다가갔다. 삐딱하게 기대어 선 채 휴대폰을 보고 있던
현규진이 눈동자만 치켜떠 다가온 유원을 바라보았다.
“화낼 거야?”
“…….”
“화낼 거냐고. 오지 말랬는데 와서.”
“…그래애….”
“일단 가방 주고 화내, 그럼.”
학원 문제집까지 들어 평소보다 무거운 유원의 가방을 가져가 어깨에 멘 현규진이 먼저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끄러미 기다란 뒷모습을 보던 유원도 얼른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화내, 빨리.”
“…안 내.”
“왜.”
“화 안 났으니까….”
조곤조곤 말하는 유원을 흘끗 본 현규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서운한 마음이 다
풀렸다는 걸 알려 주고 싶지 않아 짐짓 뚱한 척을 유지했다.
“저녁은 뭐 먹었어.”
“허니콤보.”
“나랑 먹는 거 아니라 맛없었겠네.”
“맞아, 쪼끔 덜 맛있었어.”
솔직하게 말한 유원이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제가 선 옆으로 현규진의 두 발이 나란히 선
것만 봐도 이젠 발끝이 움츠러들었다. 정말 큰일이었다.
“앞으로 계속 그럴 거야?”
“응?”
“학원 가는 날은 저 새끼 집에 갈 거냐고.”
“왜 새끼라 그래. 윤성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맘에 안 들어.”
“왜?”
“몰라.”
평소라면 그게 뭐냐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유치하게 구는 현규진에게 뭐라 말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기에 유원은 말을 아꼈다. 친구를 좋아하게 돼서 그 마음을 접으려고 일부러
피하는 바보 같은 방법이나 쓰는 제가 누굴 유치하다 할 수 있겠는가. 현규진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면서 제 마음도 편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돈을 주고서라도
사고 싶을 지경이었다.
“매번은 아니어도…. 가끔은 그럴 수도 있어. 같이 공부하고 학원 가니까 좋기도 하고.”
“나도 내년에 학원 다닐까.”
보도블록 위로 현규진의 운동화 밑창이 문질렸다. 유원은 그 발을 보며 아랫입술을 꾹꾹
물었다.
“…너 학원 답답하다고 싫어하잖아.”
“뭐 그땐 공부하기 싫으니까 그랬겠지. 어차피 겨울방학 때부터는 공부 하기 싫어도 하긴 해야
하니까.”
“갑자기 왜 공부가 하고 싶어졌어?”
“대학 가야지. 나 방학 때부터는 진짜 공부하려고 그랬어. 어차피 할 거 같이 하면 좋잖아. 그럼
굳이 저 새끼…. 아니, 이윤성 집에 안 가도 되고.”
안 그래도 거의 종일 얼굴을 봐야 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학원까지 같이 다녔다가는
마음이 줄줄 녹아 버릴 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부를 같이 하고 싶다는 현규진에게 그건 안
된단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내년이 되려면 조금이지만 시간이 남아 있고, 또
그때쯤이면 제가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다시 현규진을 친구로 여기고 있을 가능성도
분명 있는 거니까. 다시 친구의 마음만 되찾으면 같이 공부하는 게 좋고 당연해질 텐데 미리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23 화(22/127)

23


“같이 공부하면 나도 좋지. 학원도 같이 다니고.”
“정말?”
“응.”
“내년엔 다른 학원 다닐 거지? 여긴 나 못 다녀.”
“응, 올해까지만 여기 다니고 내년엔 옮기려고.”
“거기선 사고 안 칠게.”
“약속.”
“어, 존나 약속.”
“…그게 뭐야.”
어이없는 약속 표현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마음처럼 웃은 유원이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같이 이렇게 걷는 게 떨리고 두근대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또 가장 편하기도 했다. 제가
그 어떤 경우에도 안심할 수 있고 믿는 사람이니까.
“오늘은 집에 있다가 온 거야?”
“집에 있다가 스존 잠깐 들렀어. 한 시간 정도?”
“오늘은 담배 냄새 안 나는 것 같아서.”
“나 거의 끊었어. 와, 그러고 보니까 오늘 한 대도 안 피웠네.”
엘리베이터에 탄 유원은 제 쪽으로 몸을 돌려 서서 고개를 기울이는 현규진에 놀라 순간 뒤로
확 몸을 물렸다. 그래봤자 벽에 막혀 제대로 피할 수 없었지만.
“맡아 봐. 안 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안 날걸. 일부러 아까 스존에서도 입구 쪽에 앉았거든.
원래 앉던 자리 옆이 흡연실이라. 우리 미자인 거 사장이 다 알아서 거기서는 피우지도
못하는데 괜히 문 열릴 때마다 냄새만 교복에 다 배서 괜히 씨발, 오해만 받고.”
그냥 팔 정도만 내밀어도 될걸 아예 상체를 숙여 가까이 들이미는 현규진을 보던 유원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살짝 앞으로 기울여 어깨 쪽에 코를 살짝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현규진
말대로 오늘은 담배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고, 늘 현규진 방에서 나는 좋은 향이 났다.
“안 나지?”
“으응…. 진짜 안 나네.”
“칭찬해 줘.”
“뭐 칭찬까지….”
“안 해 주면 나 또….”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눈동자 안에 장난기가 어렸다가 잠시 진지해졌다. 유원은 떨림을
가까스로 억누른 채 현규진과 눈을 맞췄다. 여기서 눈을 맞추지 못하고 피하면 이상해
보인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이유였다.
“또… 뭐?”
“꿈에 나온다?”
장난스러운 말투에도 유원의 심장은 버티지 못했다. 눈동자가 마구 흔들려 버렸고, 웃으며
가볍게 대꾸할 타이밍도 놓쳐 버렸다. 그 위기 속 딱 하나 다행인 게 있다면 제가 6 층에
산다는 것이었다. 유원은 6 층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친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얼른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제가 제대로 걷고 있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내일 나갈래? 토요일이잖아.”
“아…. 글쎄…. 내, 내일 보고….”
“어, 그럼 내일 정하자. 간다.”
“…응, 빠이….”
“빠이.”
오늘도 제 말투를 따라 인사하는 현규진 앞으로 닫히는 문을 끝까지 보던 유원은 어색하게
들고 있던 손을 내리며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안 해 주면 나 또 꿈에 나온다?’
그냥 당연히 놀리려고 한 말일 텐데 제 마음이 장난이 아니라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마 현규진도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을 것
같았다. 요즘의 저는 분명히 전과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까.
“…….”
현규진을 피해 이윤성의 집까지 간 것도 전부 쓸모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 앞으로도 현규진을
피하고, 또 적당한 거리를 두는 건 쉽지 않을 것이었다. 다시 긴 한숨을 쉰 유원이 비밀번호를
누르려 캡을 올렸을 때 진동이 울렸다. 유원은 얼른 휴대폰을 확인했다.
[규진 : 지금 내려가니까 잠깐 나와]
[규진 : 가방 내가 가져옴ㅋㅋ]
아…. 유원은 그제야 두 어깨가 너무 가벼운 것을 깨달았다. 현규진을 피해 급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느라 가방 받는 것을 잊은 것이었다.
곧 12 층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다. 현규진이 저에게 오고 있었다.
그저 가방을 주러 오는 것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원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아직도 코 끝에
현규진에게서 나던 좋은 냄새가 남아 있었다.
6 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다시 현규진이 눈앞에 나타났다. 유원은 묵직한 가방을 받아 들고
현규진에게 고개를 내려 보라는 듯 손짓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수그린 현규진의
머리 위로 유원의 손이 닿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쓰다듬는 손길에 현규진은 지금 유원이
저를 칭찬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뭔데. 칭찬한 거야?”
“…응. 그러니까 너….”
현규진이 한 말을 그냥 농담처럼 넘기고 싶었다. 사실은 그렇게 크게 동요한 게 아니라고 나도
장난으로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고…. 보여 주고 싶었다. 유원은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용기
조각을 여기저기에서 겨우 몇 조각 모아 소심하게 뭉쳤다.
“…내 꿈에 나오지 마.”
어떡해…. 나오지 말라고 대답했어. 괜히 저릿한 손끝을 허벅지 위로 문지르다가 꾹 누른
유원은 저를 가만히 보는 현규진과 슬쩍 눈을 맞췄다. 그냥 물끄러미 유원을 내내 보기만 하던
현규진이 웃음을 터뜨린 건 6 층에 멈춰 서 있던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소리가 날
때쯤이었다.
“미치겠네, 진짜. 존나 귀엽다, 귀여워.”
유원의 볼을 양쪽에서 잡아 귀엽다는 듯 늘린 현규진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멈추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나 진짜 간다. 너 진짜 내 꿈 그만 꿔라. 꿀 거면 허락 꼭 받고. 아니면 꾸고 감상문 써서
제출해.”
“시끄러워. 얼른 가.”
“싸가지 없어서 어떡해, 정유원.”
씩 웃은 현규진이 이번에는 계단으로 향했다. 유원은 다시 한번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얼른
비밀번호를 눌러 집으로 들어갔다.
“…….”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책가방을 현관에 아무렇게나 놓고 현규진의 손이 닿았던 양쪽 뺨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눈앞으로 씩 웃는 현규진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어떡하지, 진짜…. 유원은 울고 싶어졌다. 어떤
방법으로도 절대 머릿속에서 나가지 않는 현규진이 너무… 좋았다.
***
[규진 : 일어남?]
[아직 침대에서 뒹굴뒹굴]
[규진 : 뭐야 게으르네]
[넌 뭐 하는데?]
[규진 : 나 운동하러 왔지]
현규진은 늘 주말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주짓수나 복싱 같은 것을 하러
가곤 했다. 이번 주에는 이른 시간부터 운동을 하러 간 모양이었다. 유원은 여분의 베개를
끌어안은 채 이어 도착하는 메시지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규진 : 열두 시쯤 끝날 것 같은데 나올래?]
[규진 : 점심 먹게]
원래라면 그러겠다고 답을 했겠지만, 오늘은 쉽게 그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답 보내는 것을
망설이던 유원이 겨우 글자를 만들어 냈다.
[오늘은 그냥 계속 뒹굴뒹굴 할래]
[미안해]
[규진 : 뭐가 미안해]
[규진 : 그럼 몇 시간 더 해야겠다 끝나고 톡할게]
운동하는 강아지 이모티콘을 보낸 유원이 휴대폰을 내려 두고 눈을 감았다. 또 밤새 꿈에
시달려 그런지 눈만 감으면 잠이 솔솔 밀려들었다.
너무 졸려…. 푹 자고 싶어. 빛이 차단되어 어둡고, 아무도 없어 조용한 방 안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울렸다.
***
유원은 눈을 감은 채 현규진을 향해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쪽, 쪽…. 간지러운 소리가
한참이나 울렸지만, 현규진은 뽀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유원도 그런 현규진을 말리지
않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내내 입술을 마주했다.
머리칼을 쓰다듬고, 뺨을 만지다가 팔을 문지르는 손길이 좋았다. 가볍게 눌리던 입술이 조금
더 꾸욱 눌릴 때면 유원은 ‘그다음’을 기대했다. 하지만 벌써 몇 번이나 뽀뽀하는 꿈을
꿨는데도 꿈속 현규진은 뽀뽀만 할 뿐 그다음의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
지잉…. 진동에 놀라 잠에서 깬 유원은 현규진에게서 와 있는 여러 개의 톡을 차례로 확인했다.
벌써 두 시가 넘어 있었다. 현규진은 지금까지 운동을 하고 이제야 집에 가는 모양이었다.
[규진 : 이제 집에 가는 중. 몸 푸니까 살 것 같네]
[규진 : 오늘 대련 세 번 했는데 내가 다 이김]
[규진 : 자?]
[지금 일어났어]
[규진 : 몸 안 좋아?]
[아니 그냥 계속 졸려서…. 사실 지금도 졸려]
[규진 : 신생아세요?ㅋㅋ 피곤했나 보네 그럴 땐 계속 자야 돼]
계속 자야 한다는 말을 보기만 해도 정말 눈이 스르륵 감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현실의
현규진을 보다가 눈을 감는 순간 두 손이 어깨를 눌렀다. 유원은 두 팔로 가까워진 현규진을
끌어안았다. 죄책감과 뒤섞인 약한 쾌감이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맴돌며 유원을 붕 뜨게
만들었다.
꿈 안의 현규진이 웃었다. 멍하니 그 얼굴을 올려다보던 유원의 눈이 감겼다. 쪽, 쪽…. 다시
울리는 간지러운 소리 안에서 유원의 토요일 오후가 흘렀다.
***
멍하니 앉아 현규진과 꿈에서 내내 뽀뽀했던 것을 떠올린 유원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집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으니 계속 현규진 생각만 나고, 귓가에 밤새 꿈에서 나눈 뽀뽀
소리가 쪽, 쪽 울리는 것만 같아 너무 힘들었다.
학원 숙제를 하긴 해야 하기에 문제집과 노트, 필통, 이어폰, 지갑만 가방에 간단히 챙긴
유원이 집을 나섰다. 어디 카페라도 가서 기분 전환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 학원가 쪽으로 간 유원은 평소에 현규진과 잘 가지 않는 큰 프랜차이즈
카페로 가서 창가 쪽 빈 자리에 앉았다. 구석 자리도 있지만, 어둑한 곳에 있으면 괜히 더
기분이 가라앉을 것 같아 일부러 밝은 자리를 골랐다. 가방을 두고 카운터로 가 망고 요거트
스무디를 주문한 유원은 동그란 진동벨을 들고 멍하니 기다리다가 음료를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24 화(23/127)

24


필요한 것들을 다 꺼내고 가방을 맞은 편 의자에 놓은 유원이 스무디를 한 모금 마셨다.
평소에도 제가 많이 좋아하는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망고 요거트 스무디를 마시니 그래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역시 조용한 집, 그것도 방 안에만 내내 누워 있던 게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유원은 이어폰을 꽂고 평소 좋아하는 신나는 노래들이 담긴 플레이 리스트를 재생했다.
창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과 달착지근한 음료수, 그리고 좋아하는 노래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이제 예전처럼 기분이 좋아지기만 기다리면 될 것 같았다.
“…….”
현규진은 뭐 하려나…. 저도 모르게 현규진을 떠올리던 유원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내내 현규진 생각에만 갇혀 있는 게 곤란해 집 밖으로 나온 건데 또 현규진 생각이라니.
뺨까지 탁탁 두드린 유원이 풀어야 할 문제로 시선을 고정했다.
스무디를 반쯤 마시고, 숙제를 절반쯤 끝냈을 때쯤 진동이 울렸다. 유원은 화면에 뜬 ‘규진’
이름을 보며 조금 긴장했다.
[규진 : 나 운동 끝나고 집 가는데 나올래?
[규진 : 나도 오늘 집에 아무도 없는데 같이 저녁 먹자]
이미 밖이니까 여기로 오라고 말을 하면 되는데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유원은 몇 번이나
메시지를 적었다가 지우고 또 적었다가 지우는 것을 반복했다. 밤마다 하는 짓이 있어 얼굴을
보는 게 너무 민망한데 그렇다고 해서 영영 얼굴을 안 보고 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너무
난감했다.
어쩌지…. 배가 안 고프다고 적었다가 지우고, 카페에 있으니까 이쪽으로 오라고 적었다가
지우고 시간은 하릴없이 흘러 현규진의 첫 메시지가 온 지 5 분이나 지나 버렸다. 유원은
입술을 꾹꾹 물며 이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메시지만 보고 있었다.
[규진 : 너 거기서 뭐 해?]
그때 위에 적힌 메시지와는 맥락이 다른 말이 화면에 떴다. 그리고 곧 창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유원이 고개를 들어 창밖에 선 현규진을 눈에 담았다. 평소 현규진과 잘
가지 않는 쪽에 있는 카페라 일부러 여기로 온 건데 생각해 보니 이쪽 길 끝에 현규진이
다니는 주짓수 도장이 있다는 게 이제야 떠올랐다.
들어간다? 현규진의 입 모양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현규진이 곧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가방을 들어 다리 위로 올리며 앉는 현규진을 본 유원이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서 뭐 해? 학원 숙제?”
유원의 앞에 놓인 문제집을 대충 본 현규진의 시선이 다시 유원의 얼굴로 향했다. 정확히는
유원이 들고 있는 휴대폰에 한 번 닿았다가 얼굴로 움직였다.
“집에서는 집중이 안 돼서…. 넌 또 운동하고 온 거야? 어제도 오래 했잖아.”
“할 수 있을 때 많이 하려고. 몸 제대로 푸니까 너무 좋기도 하고. 근데 너 왜 톡 씹어.”
“어…. 그게… 씹은 게 아니라….”
제가 뭐 어려운 말을 보낸 것도 아니고 같이 저녁을 먹자는 평범하고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을 보냈을 뿐인데 대답을 망설이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뭔데.”
“…….”
혹시 제가 이상한 말이라도 보냈나 싶어 톡을 다시 확인한 현규진이 유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랑 저녁 먹기 싫어?”
“그게 아니라….”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요즘 들어 전보다 더 자주 멍을 때리고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아
무슨 일이 있나 싶은데 물어보면 또 아니라고 하니 왜 그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예전이라면 바로바로 오케이 사인이 왔을 일들 앞에서 머뭇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머뭇대지 않던 일에 머뭇대는 유원을 보며 서운함을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싫으면 싫다고 하지. 뭘 그렇게 고민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규진을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올려다본 유원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그 이야기를 꺼내면 처음부터 제가 왜 이러는지 다 이야기를
해야 설명이 될 것 같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 상황 자체를 모면하면서 현규진과
아무렇지 않은 척 저녁을 먹을 용기 또한 당연히 없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현규진의 손만
봐도 제 얼굴을 만지던 촉감이 떠오르는데 어떻게 태연한 척을 할 수 있겠는가.
그대로 홱 돌아 카페를 나서는 현규진을 따라 유원의 시선이 움직였다. 바깥으로 나가 제가
앉아 있는 자리 옆을 지나는 현규진의 얼굴이 쌀쌀맞았다. 제가 곤란하다고 해서 현규진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되는 건데 너무 큰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유원은 얼른 가방에 제 짐을
넣고, 음료를 정리한 뒤에 카페를 나섰다. 보폭이 크고 걸음이 빠른 현규진은 이미 꽤 멀리
가서 작게 보였다. 유원은 그런 현규진을 향해 달렸다.
몸이 약해 운동과는 담을 쌓은 데다가 겨우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체력 정도만
가진 유원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금세 지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만큼 이런 속도로 달린다고
지치지 않을 텐데 너무 빨리 지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유원은 아까보다는 가까워진
현규진을 향해 다시 달려갔다. 다행히 횡단보도가 있어 멈춘 덕분에 쓰러질 것 같은 상황이
오기 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하아….”
겨우 현규진의 팔을 잡은 유원이 저를 돌아보는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야!”
유원이 지금 여기에 온 것도 놀랄 일인데 갑자기 쓰러질 것처럼 몸이 확 내려가는 것에 더
놀란 현규진이 얼른 두 손으로 유원을 잡아 제대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조용한 상가 건물로 들어가 비상구 계단에 앉히고 저도 그 앞에 기다란 다리를 구부려 앉았다.
해가 져 가는 애매한 시간이라 아직 불이 켜지지 않는 어스름한 비상구 안으로 유원의 숨
고르는 소리가 울렸다.
“…하아, 하으….”
평소 유원에게 맞춰 걸을 때나 속도를 조절하지 그냥 혼자 걸을 때는 보폭도 넓고, 걷는
속도도 빠른 편이라 빨리 걷는 편이 아닌 유원이 저를 카페에서부터 달려와 따라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체육 수업을 하는 것도 무리가 돼서 간단한 체조, 스트레칭이나
정말 운동량이 그리 많지 않은 간단한 수업 외에는 참여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며 살아온 것을
알기에 이렇게 말도 못하도록 숨이 찬 유원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속상한 마음에 힘들 걸 알면서 왜 그렇게 뛰어왔냐고 화를 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현규진은
그냥 가만히 유원의 앞에 불편하게 다리를 구부려 앉은 채 등을 쓸어 주었다. 엉망으로 터지는
숨과 그게 벅차 눈물까지 맺힌 유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내내 아주 조용히.
“좀 괜찮아졌어?”
어지러움과 울렁이는 속, 그리고 찢어질 것처럼 아픈 심장께를 누르고 있던 유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깐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었는데 앉아서 숨을 고르고 조금 쉬고 나니 이제야
현규진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응.
“전화를 하지. 기다리라고.”
타박이 아니라 걱정이 잔뜩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에 유원의 마음이 한 번 더 일렁였다. 숨이
찬 것과는 전혀 다른… 아주 섬세하고 발끝이 움츠러드는 요동이었다.
“…그런 생각 못 했어. 얼른 너한테 갈 생각만 들어서….”
“…….”
“…아까… 미안해. 저녁 같이 먹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내가 괜히 요즘 생각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까….”
“됐어.”
“…….”
“아깐 존나 서운했는데 너 이러고 온 거 보니까 다 풀렸어. 아, 씨. 이런 걸로 풀리면 존나
개새끼 같은데 아무튼 풀렸어.”
헐떡일 때 눈물이 번져 축축해 보이는 유원의 눈가를 살살 양쪽 손으로 문질러 닦아 준
현규진이 식은땀에 젖은 머리칼도 잘 만져 주었다.
유원은 제 얼굴과 머리칼에 닿는 현규진의 손길을 느끼며 가만히 그 얼굴, 입술에 시선을
두었다. 어젯밤 제 꿈에 나와서 밤새도록 간지러운 소리가 나게 뽀뽀해서 그런지 자꾸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시선을 느낀 현규진의 눈동자도 느릿하게 움직여 유원의 얼굴로 닿았다. 입술에 닿았던
시선이 조금 움직이자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
“…….”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마주한 시선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져 타이밍을 놓쳐 버린 탓에 정적이
맴돌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시선도 피하지 않는 유원이 이상하면서도… 먼저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도 이상한 걸까. 현규진은 저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오는
유원을 보며 손끝이 찌릿거리는 걸 느꼈다.
유원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꼭… 키스라도 할 것처럼. 정유원과 키스. 정말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를 동시에 떠올리면서도 현규진은 그 어떤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다. 무척
낯선데도 피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고, 가까워지는 유원의 얼굴이 예쁘다는 생각만
들었다. 변태 새끼들을 족치다가 저도 변태가 된 건 아닐까. 짧은 순간 별생각이 다 들었다.
“…….”
“…….”
조금 더 유원의 얼굴이 저에게 다가왔다고 느낀 순간 위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숨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던 곳에 갑자기 등장한 소음은 두 사람의 정신을 확 들게
하기 충분했다. 가까워지는 것 같던 얼굴이 다시 확 뒤로 멀어지고 유원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25 화(24/127)

25


“이, 이제! 진짜 괜찮아졌어…. 얼른 가자…. 저녁 뭐 먹을까?”
허둥댄 유원이 비상구 문을 열고 먼저 나가 서늘한 저녁 바람과 마주했다. 바깥 공기까지
마주하니 정말 정신이 확 들었다.
미쳤어, 진짜…. 방금 뭘 하려고 한 거야? 설마 현규진도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뭐라고
생각했을까.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을까? 그냥, 그냥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힘들어서 좀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 것뿐이라고 생각하려나?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유원은 곧 제 뒤로 나와 백팩을 가져가 어깨에 메는 현규진을 돌아보았다.
“저녁 고기 먹고 갈까? 전에 시험 끝나고 갈비 먹은 데 어때? 그때 맛있었잖아.”
“아…. 응. 거기 가자…. 갈비 얘기하니까 갑자기 배고파졌어.”
현규진과 다시 횡단보도에 선 유원이 몰래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를 게 없고, 딱히
조금 전 일에 대해 묻지도 않는 걸 보니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말, 정말
너무너무 다행이었다. 유원은 몰래 긴 숨을 내쉬곤 손을 맞잡고 손끝을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세차게 뛰는 현규진을 향한 마음을 짓누르듯.
***
현규진에게 뽀뽀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정말 얼굴을 조금 가까이 기울여 다가간 만행을
저지른 날, 유원은 제가 먼저 현규진의 몸 위로 올라타 얼굴과 입술에 뽀뽀를 퍼붓는 꿈을
꿨다. 평소와는 완전히 반대 상황이 된 것이었다.
이대로는 정말 안 되겠다고 생각한 유원은 평소보다 이르게 집을 나섰다. 현규진에게는 먼저
학교에 간다고 짧은 톡을 남겨 둔 채였다.
어제는 현규진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수로 끝이 났지만, 다음에는 더 티가 나는 충동적
행동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만약 어제 그 문 여닫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저는 그대로 더 다가가 진짜 현규진에게 뽀뽀했을 것이었다. 그랬다면…. 정말 그렇게 저질러
버렸다면 현규진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무슨 짓이냐고 화를 냈을 것이었다. 미쳤냐고, 더럽다고 저를 밀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18 년
친구 사이는 그 뽀뽀 한 번으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겠지.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들을
떠올리며 유원이 어깨를 떨었다. 문소리를 내 준 사람을 찾아 고맙다고 사례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규진 : ?]
[규진 : 뭔 학교를 벌써 가?]
[규진 : 뭔데]
학교에 거의 도착했을 때 톡이 연이어 도착했다. 유원은 적당히 둘러댈 말도 찾지 못한 채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걸음을 옮겼다.
어제와 같은 상황이었다. 같이 저녁을 먹자는 현규진의 톡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머뭇대던 바로 그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바보처럼 굴다가 결국 현규진에게 들켰고, 더 말도
안 되는 상황까지 일으키고야 말았던 것을 떠올린 유원이 고개를 젓곤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학원 숙제가 많아서]
[집에서는 자꾸 졸리고 집중이 안 돼]
학원 숙제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 집에서 집중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게 이유 전부가
아니라는 게 큰 문제기는 하지만.
[규진 : 그럼 일찍 가자고 하지]
[마음이 급해서…. 미안]
[규진 : 미안할 건 없고]
[규진 : 이따 봐]
그래도 무사히 마무리 된 톡을 본 유원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하나씩
현규진과 안전거리를 벌려 생활하다 보면 같이 뭔가를 하는 일도 줄어들 거고, 자연스럽게 제
마음도 정리될 것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두근두근한 일 자체가 줄어들 테니까.
“…….”
할 수 있어. 다시 친구로 돌아갈 수 있어. 유원은 결연한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고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
같은 반인 현규진을 피해 다니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냥 적당히 친한 친구라면
그나마 좀 나았을 텐데 늘 저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살피는 현규진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았다.
제가 행동이라도 빠르면 괜찮을 텐데 빠릿빠릿하게 행동을 한다고 하는데도 현규진의 행동이
워낙 빨라 피하기도 전에 실패하는 일이 많았다. 매점에 같이 가는 일을 피하려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붙잡혀 같이 계단을 내려가게 된다거나 따로 집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가방을
들고 나가다가도 현규진에게 잡혀 함께 집에 가게 되는 그런 일들이 자꾸만 벌어졌다.
현규진과 함께 다니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늘 그랬던 것처럼 어울리면서도
유원은 제대로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어깨를 감싸는 팔과 쭈쭈바 꼭지를 꺾어 주는 손끝, 제가 다 마신 캔을 우그러뜨려
쓰레기통으로 던지는 손이나 느슨하게 풀려 있는 넥타이, 다 풀린 교복 셔츠 안에 받쳐 입은
하얀 티셔츠, 귓불 위에 놓인 작은 피어스 같은 것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와 매분, 매초가
불편했다.
마음을 접어야 하는데 자꾸만 더 좋아져서, 그동안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다 떨림의 이유로 변하는 게 느껴져서 너무너무 이 상황이 어려웠다.
“…저기 오늘은 같이 저녁 못 먹을 것 같아. 집에서 먹고 과외 시작 전에 와….”
“왜?”
“학원 친구가 저녁 사 준다고 해서 같이 먹기로 했어….”
“학원 친구? 누구. 이윤성?”
“아니…. 다른 학교 친구 있어.”
“그러니까 누구.”
“넌 모르는 애야…. 나도 과외 시작 전까지는 갈 거니까 그때 봐. 나 먼저 갈게. 빠이.”
손을 어색하게 흔들어 인사한 유원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면서 교실을 빠져나갔다.
등 뒤로 현규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
학원 친구가 저녁을 사 준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레벨 테스트를 받을 때
박승준이라는 애를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그게 고맙다고 밥을 산다고 해서 오늘 사라고 했을
뿐이었다. 물론 현규진과 마음 졸이며 저녁을 먹는 것을 피하려 오늘로 정하긴 했지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물끄러미
저를 내려다보던 현규진의 얼굴이 떠올라서 더 그랬다. 유원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최대한
흐트러뜨리려 애쓰며 붐비는 운동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규진과 함께가 아니라 혼자
옮기는 걸음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
박승준과 함께 먹은 떡볶이는 생각보다 맛있었다. 여러 토핑이 잔뜩 올라가 이것저것 먹는
재미도 있고, 많이 맵지 않아 매운 것을 거의 못 먹는 유원도 꽤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먹으면서 서로 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같은 중학교를 나와 아는 애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레벨 테스트 공부를 어쩌다 같이 하기 전까지는 그리 친하지
않았는데 밥을 먹고, 디저트까지 같이 먹고 나니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친해진 느낌이 나서
좋았다. 적어도 학원가에서 만나 떡볶이 가게에 같이 들어갈 때의 그 어색함은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박승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계속 현규진이 떠올랐다. 떡볶이가
맛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현규진과 같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같이 카페에 가서 주문을
할 때도 제가 좋아하는 망고 요거트 스무디를 알아서 주문해 주는 현규진이 떠올라 잠시
멍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혼자 집으로 향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학원가에서 집으로 가는 이 길은 대부분,
정말 백 번 중에 한 두 번을 제외하고는 늘 현규진과 함께 다닌 길이었다. 즐비한 가로등
아래로 같이 걸음을 옮기며 버블티를 마시기도 하고, 길에서 파는 붕어빵이나 와플을 먹기도
했었다.
“…….”
결국 또 현규진 생각에 빠진 저를 마주한 유원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렇게 다른 애랑
저녁을 먹고 잠시 현규진과 마주하지 않는 게 효과가 있기는 한 걸까?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아파트가 보였다. 유원은 길을 건너 단지 안으로 들어가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고 아파트 공동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과외 시작 15 분 전이니 집에 가서 일단 옷을 갈아입고, 양치질을 한 다음에 주스를 세 컵
따르고, 아빠가 사다 둔 쿠키 같은 것을 준비하면 대충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조금 더 빨리
집에 올걸 그랬다는 생각과 함께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내린 유원이 비상계단 입구에
기대어 서 있는 현규진과 마주했다.
“빨리빨리 다녀라.”
“…여기서 뭐 해?”
“너 기다리는데.”
“…들어가 있지.”
“아무도 없는데 들어가서 뭐 해.”
유원은 저릿한 손끝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현규진이 움직여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나서
자꾸 등 뒤로 신경이 쏠렸다.
“…난 옷 갈아입고 올게.”
현관으로 들어선 유원이 슬쩍 현규진을 돌아보았다. 눈을 마주할 자신은 없어 현규진의
손가락에 시선을 맞춘 채였다.
“뭐 먹었냐, 저녁.”
“…떡볶이. 학원가에 새로 생긴 데 있잖아. 저번에 본 거기. 토핑 올릴 거 많더라. 다음에 같이
….”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했단 생각에 입을 다문 유원이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저를 따라 이쪽으로 현규진이 오고 있어 문을 닫지도 못하고 서 있던 유원은 방 앞까지 다가와
멈춰 서는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같이 뭐.”
“…….”
“시작했으면 말을 똑바로 해야지. 왜 자꾸 흐려. 요즘 자꾸 그런다?”
“…다음에 같이 가자고.”
얼굴 위로 뚝 떨어지는 시선에 문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원은 대답 없이 밖에서
문손잡이를 잡아 당겨 문을 닫아 주는 현규진을 보다가 이내 닫혀 버린 문을 바라보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26 화(25/127)

26


“얼른 옷 갈아입어. 시간 없어.”
닫힌 문밖에서 현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혀 안을 볼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유원은
어쩐지 현규진이 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가방을 내려놓고 교복 재킷을 벗어 의자 뒤로 걸어 둔 유원이 카디건 단추를 풀었다. 그다음
넥타이를 풀고, 교복 셔츠 단추를 톡, 톡…. 하나씩 풀 때마다 자꾸 시선이 닫힌 문 쪽으로
향했다. 유원은 교복 셔츠를 어깨 뒤로 넘겨 팔을 빼곤 안에 입은 얇은 티셔츠 위로 맨투맨을
입었다. 그리고 괜히 문 쪽을 보면서 얼른 바지도 갈아입었다.
흐트러진 교복을 대충 모아 의자 팔걸이에 걸쳐 둔 유원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현규진은 여전히 문 앞 복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쭈뼛대며 나온 유원이 그 앞을 지나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살짝 닫고 물을 세게 튼 다음 입에 고인 긴 숨을 내쉬었다.
“…….”
심장이 뻐근할 만큼 빠르게 뛰었다. 차라리 현규진과 같이 평범하게 저녁을 먹었으면 이렇게
숨 막히는 느낌은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지만.
과외가 없었다면 최대한 천천히 씻고 나가겠지만,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유원은 얼른
양치질을 하고 손까지 깨끗하게 씻은 다음, 마지막으로 얼굴을 한 번 살피고 욕실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현규진은 그 복도, 그 벽에 기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선생님 오실 때 됐네. 넌… 뭐 마실래? 주스? 커피?”
말수가 그리 많은 편도 아니면서 저와 있을 때는 말을 저보다 더 많이 하는 현규진이 조용하니
분위기가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유원은 부엌으로 향하며 괜히 가벼운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다. 하지만 현규진은 그에 답하지 않았다.
“…….”
유원은 긴장되고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컵에 따랐다. 둘이 있는데도
집이 얼마나 조용한지 주스 따르는 소리가 무척 크게 들렸다.
“정유원. 너….”
낮은 현규진의 목소리가 울린 순간 벨도 함께 울렸다. 유원은 얼른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평소처럼 웃으며 인사하는 이준서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유원이
과외를 하는 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등 뒤로 현규진이 따라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유원은
진심으로 이 과외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시간을 멈추거나 점프하는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며 또다시
현규진과 단둘이 마주한 유원은 남은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꼴깍 마셨다.
“정유원 너 진짜 무슨 일 있어? 요즘 왜 그래.”
“…내가 뭐?”
“뻑하면 학교 먼저 간다고 톡 하나 남기고 가 버리고, 밥 먹을 때도 잘 먹지도 못하고, 잠깐
다른 데 보기만 해도 없어지고.”
“학교는… 학원 숙제가 많아서….”
“숙제 타령 언제까지 할 건데. 학원 뭐 갑자기 며칠 전부터 다녔어? 학기 초부터 다녔잖아.
내가 너 학원 숙제 어떻게 하는지 패턴 모를까 봐? 그래, 뭐. 다 좋아. 그렇다 치자. 그럼 왜 나
피해 다니는데?”
직접적으로 흐르는 말에 놀란 유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름 자연스럽게 한다고 했는데 역시
다 티가 난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게 현규진의 입장에서는 무척 기분이 나쁠 일이라는
걸 알기에 그 어떤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는 게 더 맞았다.
“…내가 요즘… 좀…. 말했잖아. 집중도 안 되고… 잠도 자꾸 깨고, 다른 생각이 자꾸 나서….”
“…….”
“좀 마음이… 이상해….”
이게 최대치였다. 제발 왜 이상한지 묻지 않아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유원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바보처럼 눈동자가 뜨거워졌다.
“뭐…. 고 3 되는 거 걱정돼서 그래?”
“…응?”
“그 과외 선생이 말한 것처럼 대학 생각에 압박 받고 그러는 거냐고.”
“…….”
“야, 아무리 그래도 밥도 잘 못 먹고 그럼 돼? 뭐 난 공부 놔버린 거 같아서 그런 얘기 할 마음도
안 생겨?”
저를 걱정하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은 죄책감을 느꼈다. 꿈에서 친구와 이런 저런 일을 할 때
느낀 죄책감과는 또 조금 다른 결이긴 하지만, 그래도 최근 현규진을 보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 설렘과 죄책감이라는 게 참 어이가 없고, 그조차도 죄책감이 들었다.
“나도 내년부턴 너랑 학원 다닐 거라고 했잖아. 나 대학도 갈 거라니까? 맘 잡고 공부도 할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런 얘기 해도 된다고.”
“…….”
“뭐 학원 같이 다니는 그 새끼들은 뭐가 많이 다르냐? 어차피 그게 그거지.”
제 어깨를 부드럽게 쥐는 손길에 양말 속 발끝이 또다시 안으로 말렸다. 더없는 죄책감이
밀려들어 유원의 마음을 헝클였다. 저를 걱정하는 현규진을 보는 게 너무 미안하면서도
떨려서 말을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내일도 일찍 갈 거야?”
“…아니이….”
“그럼 나 원래 가는 시간에 내려온다.”
“…….”
“어?”
“…응.”
“갈게. 쉬어. 나오지 말고.”
유원의 뺨을 간지럽게 톡 두드린 현규진이 현관으로 향했다. 유원은 가만히 거기 서서
멀어지는 발소리 끝에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입 안에 갇혀 있던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이렇게 넘어갔지만,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제가 또 거리를 두는 게 느껴지면
그때도 현규진은 애써 저를 이해해 줄까?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올 수밖에 없는 머지않은 그날을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댔다.
느릿느릿 방으로 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눈을 감자 꿈속에서 늘 저와 웃기만 하는 현규진이
어둠 속으로 아른거렸다. 그 생각만으로도 허벅지가 꽉 오므라들고 몸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유원은 조금 전 제 어깨를 쥐고 부드럽게 주무르던 현규진의 손길을 떠올리며 손을 다리
사이로 내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제가 머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죄책감과 마주하는 날인 모양이었다.
***
정유원이 이상해졌다. 현규진은 최근 유원을 보며 그렇게 결론 내렸다. 너무 성의 없는
결론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정유원이 이상해졌다는 말만큼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왜냐면 정말 정유원이 이상해졌으니까.
첫 번째로 저를 보는 눈이 이상해졌다. 일단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마주한다고 해도
아주 잠시 버티다가 이내 시선을 돌리거나 내리까는 일이 많아졌다. 물론 뭐 말하는 내내
서로의 눈만 보지는 않지만, 전에 비해 어쩐지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때가 아주 많아진
느낌이었다.
두 번째로는 유원이 이상하게 저를 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이윤성이라는 애
집에 가서 숙제를 한다고 하질 않나, 갑자기 생전 만나지도 않던 학원 친구와 저녁을
먹는다면서 교실을 나가 버렸다. 또 토요일에는 피곤해서 종일 잔다 그러고, 일요일에는
그놈의 학원 숙제를 한다면서 아주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주말에는 절대 저와 만나지
않겠다는 굳은 목표를 세운 사람처럼 굴었다.
물론 친하다고 해서 주말에도 꼭 얼굴을 보고 뭔가를 같이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18 년,
그러니까 기억이 나든 안 나든 태어날 때부터 친구로 묶여 함께해 온 시간들을 떠올려 보면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쉬어도 늘 같이 쉬었고, 저녁까지 늘어지게 자다가 일어나 같이 저녁 겸 야식을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나 당연했기에 유원의 이런 갑작스러운 일탈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고 3 이 되는 게 걱정이 되고, 대학 압박이 강해졌다고 해도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저를 피한다고 해서 성적이 오르고 대학을 잘 가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 번째로는 제가 닿을 때마다 유원이 크게 놀란다는 것이었다. 위에 두 가지는 제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는 거지만, 이건 양보할 수가 없었다. 이거
하나만 봐도 유원은 분명히 달라지고 무척 이상해졌다.
단순히 어깨에 팔을 걸치거나 제가 몸을 수그리기만 해도 유원은 흠칫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서곤 했다. 제가 그 어떤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니고, 뭔가 잘못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유원은 자꾸만 어깨를 움츠리고 제 눈을 잘 보지 못했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황도 몇 가지가 있었다. 전에 학원이 끝나고 같이 집으로 갈 때,
담배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시켜 주려고 그냥 몸을 숙였을 뿐인데 뒤로 확 물러서는
유원을 보며 솔직히 조금 당황했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서운한 마음도 있었다. 갑자기
유원과의 사이가 멀어진 것만 같아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무거웠다.
또 언제였더라. 제가 어깨를 잡기만 해도 흠칫 놀라고, 얼굴이라도 가까이 마주할 때면 유원은
티가 나게 확 몸을 뒤로 물렸다.
네 번째로 이상한 것은 꿈. 유원이 제 꿈을 꾼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장난이라
생각했는데 유원이 열에 달뜬 채 했던 그 마지막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제가 매일
꿈에 나오는 것도 모자라서 자꾸 저를 만지는데 그게 허리라는 것도 떠올라 미치겠고, 엄마가
오는 바람에 끊겼던 그 말도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27 화(26/127)

27


‘옷 안에 자꾸 손도….’
어딘가를 만진다는 맥락으로 봤을 때 이어질 말은 아마도 옷 안에 자꾸 손도… 넣는다. 이것
외에는 나올 수 있는 말이 없었다.
“…….”
유원에게 제가 거기까지 들었다는 걸 말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그다음에는 제가 꿈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지나치게 당황하는 유원의 사정이 궁금해서.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너도 멍유 닮아 가냐? 자꾸 멍만 때리고.”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김준재와 최해영 쪽으로 시선을 옮긴 현규진이 벌떡 일어나
둘에게 다가갔다. 영문을 몰라 의자에 앉은 채 올려다보는 김준재를 무심하게 깔아 본
현규진은 그대로 손을 뻗어 김준재의 머리칼을 두어 번 쓰다듬고 목덜미를 주물렀다. 마치
유원에게 하는 것처럼.
미술실 안으로 정적이 맴돌았다. 김준재는 할 말을 잃은 채 현규진을 올려다보았고, 최해영은
담뱃재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멍하니 상황을 목도했다.
“…뭐냐?”
“어때.”
“미쳤어?”
“어떠냐고.”
담배를 대충 미술실 의자에 비벼 끈 김준재가 꽁초를 던지곤 자리에서 일어나 현규진의 손이
닿았던 목덜미를 벅벅 문질렀다.
“아, 미친! 와, 존나 소름 끼쳐. 돌았냐? 나 멍유 아니거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김준재를 보던 현규진이 이번에는 최해영에게 다가갔다. 최해영은
김준재처럼 봉변을 당하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져 손을 앞으로 휘휘 저었다.
“아, 왜 그러는데 갑자기. 돌았어?”
“그래. 보통 이러지. 이게 맞지.”
“뭐?”
최해영에게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의자에 걸터앉은 현규진이 기다란 다리를 꼰 채 생각에
잠겼다.
“야. 너 내 어깨 잡아 봐.”
“아, 왜! 진짜 돌았냐?”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말로 물어.”
“눈으로 봐야 더 정확히 알 거 아냐.”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다가온 최해영이 현규진의 어깨를 살짝, 아주 살짝 잡았다. 현규진은 그
손이 닿자마자 유원이 저에게 그런 것처럼 어깨를 움찔대며 몸을 피했다.
“이런 건 뭐야? 손 닿으면 이렇게 구는 거. 넌 많이 해 봐서 알 거 아냐.”
“아, 이런 거였어? 처음부터 그런 쪽이라고 말을 하지.”
잘 아는 분야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만만해진 최해영이 현규진의 옆쪽 의자로 올라 앉았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3 년 전 내 첫 연애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꺼지고 물어본 것만 말해.”
“아, 존나 바라는 거 개많네. 뭐긴 뭐야. 무섭거나 꼴리거나 둘 중 하나지.”
떨려서 그런 건가? 정도의 답을 떠올리고 있던 현규진은 그보다 더 자극적인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무섭거나 또는 꼴리거나. 둘 다 유원이 저에게 느낄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같은 침대에 누워 거의 뒤엉키다시피 있던 적도 많았다. 유원의
허벅지에 누워 만화책을 보기도 했고, 유원 역시 제 배에 머리를 대고 누워 만화책을 보다가
잠이 들곤 했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깨에 팔을 두르는 것, 목덜미를 주무르는 일은 그냥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의 행동 중 하나였다.
유원이 아플 때 말한 것처럼 만약 제가 허리를 갑자기 만진다거나 하면 당연히 깜짝 놀라고
피하겠지만, 어릴 때부터 서로 자연스럽게 해 온 행동으로 몸을 움츠린다거나 피하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
귀와 얼굴, 목덜미가 빨개지기도 했다. 아…. 그러네. 현규진은 저와 닿거나 가까워질 때마다
여기저기 빨개졌던 유원을 떠올렸다. 그땐 열이 나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아파서 그런 게 아닌 것 같았다.
“왜. 누가 너한테 그래?”
“어. 전엔 안 그랬는데 그것도 갑자기.”
“무슨 사인데. 썸?”
왜 제가 말하는 건 전부 썸이나 연애 쪽으로 답이 나오는 걸까. 현규진은 그냥 가볍게 고개를
젓고 입을 다물었다. 연애라면 질리도록 하는 최해영에게 그럴듯한 답을 들었는데도 쉽게
수긍이 가지는 않았다.
무서워서 그런 거라고 가정을 해 봐도 이해는 가지 않았다. 갑자기 유원이 왜 저를 무서워한단
말인가. 유원은 단 한 번도 저를 무서워한 적이 없었다. 제가 유원을 무서워하면 했지,
단언컨대 유원은 저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럴 일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의 답은….
꼴려서. 그냥 가끔 들을 때면 별생각이 들지 않는 말이었는데 유원과 같이 붙이니 말이 너무
천박하고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감히 씨발, 유원에게 저딴 말을 붙인 최해영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그래도 기왕 떠올린 거 생각을 좀 더 해 보자면…. 사실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제
손이 닿는다고 유원이 꼴릴 일, 그러니까 흥분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여태까지 수도 없이
많은 순간을 닿으며 지냈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최근 한 달 정도를 제외하고는 정말
한 번도, 잠시도 그렇게 어색해지고 제 눈치를 보며 몸을 움츠린 적이 없었단 말이었다.
그랬는데 도대체 왜…. 왜?
갑자기 제 손이 닿는 게 싫어지기라도 한 걸까. 제가 담배를 피워서? 담배 냄새가 나서?
손에서도 담배 냄새가 날까 봐? 아니, 만약 그런 이유라면 유원은 저에게 말을 했을 것이었다.
약하디 약하고 순하디 순하지만, 그래도 유원은 해야 할 말은 꼭 하는 성격이었다. 약함 속
존재하는 유원의 강단을 현규진은 아주 좋아했다. 아닌 건 아니라고, 싫으면 싫다고, 잘못한
건 잘못한 거라고 소리 낼 줄 아는 그 단단함이.
도대체 정유원은 왜 제가 싫어진 걸까.
제 손이 닿으면 몸을 움츠리는 정유원. 매일 제 꿈을 꾼다고 말했으면서 별것 아닌 것처럼 그
말을 넘겨 버린 정유원. 저와 둘이 있는 걸 자꾸 피하는 정유원. 제가 가까워지면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빨개지는 정유원. 도대체 왜, 왜 나를 싫어하게 된….
싫어해?
손이 닿는 게 싫어서 움츠리고, 제가 싫어서 매일 제 꿈을 꾸고, 저와 갑자기 같이 있는 게
싫어져서 피하고, 눈을 맞추는 게 싫어 얼굴이 빨개져? 정말 싫어서? 싫은데 왜 꿈을 자꾸….
“아….”
아니지. 아닐 수도 있잖아.
답이 나올 듯 말 듯 답답하게 생각을 감싸고 있던 불투명한 벽이 부서졌다.
싫어서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온갖 부정적인 이유만 떠올리다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그동안
제가 대수롭지 않게 보고 넘긴 유원의 모든 것들이 떠올랐다.
눈이 마주치면 떨리던 눈동자나 부축하고 어깨를 감싸 안으면 살짝 안기듯 더 다가오던 몸,
버블티를 받아올 때 음료가 아니라 제 얼굴에만 내내 닿던 시선과 고요한 비상계단에서 한참
눈을 마주하다가 제 얼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던 유원의 얼굴….
“…그러네. 피할 수밖에 없네.”
“뭐라는 거야, 갑자기.”
“아니야.”
몸을 미끄러뜨려 의자에 기댄 현규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그 얼굴을, 그 행동을 보고도 아무것도 몰랐다니.
김준재와 최해영의 물음이 이어졌지만, 현규진은 무엇도 대답하지 않은 채 내내 유원을
떠올렸다. 지금도 저를 피해 선택한 이윤성과 아마도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저의 친구를.
***
현규진은 유원을 일단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 확신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유원이 갑자기 저를 싫어하게 됐다는 걸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유원이 갑자기 저를 친구와
다른 감정으로 좋아하게 돼서 이러는 거라는 추측에 완전히 힘을 싣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18 년을, 정말 기억이 남는 모든 삶의 순간을 함께 지냈는데 갑자기 저를 좋아하게
됐다는 것도 말이 잘되지 않는 이유였다.
하지만 굳이 그 둘을 놓고 보자면 역시 갑자기 싫어하게 됐다는 쪽보다는 좋아하게 됐다는
쪽이 더 가능성이 컸다. 뭐 저의 과대망상일 수도 있지만.
어떤 엔딩을 보든 일단은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그래야 이다음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싫어서 그러는 거라면 유원이 편하도록 거리를 같이 두면 될 일이고, 만약 좋아서 그러는
거라면….
“…….”
그건 바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현규진은 비어 있는 유원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빌어먹을 학원 숙제 타령을 하면서 반을 나갔으니 아마 지금도 이윤성인지 뭔지랑 같이 있을
것이었다.
아니, 그 새끼가 없으면 뭐 숙제를 못 하나? 이윤성인지 뭔지가 선생이야? 둘이 같이 안 하면
뭐 문제가 안 풀려? 왜 꼭 그 새끼랑 같이 뭘 해야 하는데?
빈 자리를 보며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으로 떠올린 현규진이 한숨지었다. 솔직히
이윤성한테 친구를 뺏긴 느낌이 들어 싫었다. 유원이 갑자기 거리를 벌리는 것도 싫고, 혼자
학교에 가 버리는 것도 싫었다.
저는 모르는 애라면서 이름도 안 알려 주고 학원 친구랑 떡볶이를 먹는 것도 싫고,
데면데면하게 구는 것도 싫었다. 처음에는 다 이윤성 때문이고 뭐 같은 학원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건 다 정유원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규진은 알고 싶었다. 갑자기 유원의
태도가 눈에 확 뜨일 정도로 바뀐 이유를.
그 끝이 18 년 우정이 끝나는 거든 저의 과대망상이든, 정말 그게 뭐든 답을 볼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유원의 행동을 조금 더 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현규진은 오늘도 서운함을
누르고, 빌어먹을 그 학원 숙제 핑계를 얌전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저에게 찾아올 속 시원한 해결의 순간을 위해.
친구 사이 고백 금지-28 화(27/127)

28


“멍유가 진짜 바람이 단단히 났네. 가정으로 돌아올 수준이 아니라 이혼각인데?”
“닥쳐라.”
“아냐, 근데 또 생각해 보면 이게 정상인 것 같기도 하고.”
“뭐가.”
현규진의 책상 앞쪽으로 걸터앉은 김준재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아니, 보통은 이게 맞잖아. 너희가 이상한 거고.”
“그러니까 뭐가. 우리가 뭐가 이상한데.”
“다 이상하지. 무조건 학교 같이 다니고, 집에 같이 가고, 매점도 걔랑 가고, 아프면 보건실에
같이 처박혀 있고, 밥도 걔랑 꼭 먹어야 하고.”
“그게 왜 이상한데.”
“그럼 안 이상하냐? 그리고 제일 이상한 건 그거, 그 학원 끝나면 데리러 가는 거.”
김준재와 최해영을 차치하더라도 여태까지 알고 지내던 애들은 모두 저에게 유별나고 또
유난이라는 말을 했었다. 현규진은 그때마다 그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냥 단순히 저와 유원을 놀리려고 하는 말이라 생각했었다.
“그게 뭐가 이상해. 정유원 변태 잘 꼬이는 거 알잖아. 학원에서도 당할 뻔한 적 있다고. 그걸
다 아는데 당연한 거 아냐? 넌 최해영이 그러면 안 그럴 거냐?”
“안 그럴 건데. 뭐 걱정이야 되겠지. 괜찮은지 안부 정도는 물어도 어떻게 매번 계속 내내 그
시간 맞춰서 걜 데리러 가고 데려다줘? 애인한테도 그렇겐 못 하겠다.”
애인한테도 못 할 것 같단 말에 현규진은 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 것까지는 갈 것도 없이
그냥 유원을 생각하면 당연히, 정말 너무도 당연히 그렇게 하고 싶어 해 왔던 일인데 그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상해 보인다니….
“괜히 하는 말 아니고 진짜 그게 이상해 보여?”
“야, 간단하잖아. 너 내가 변태 꼬이면 집까지 데려다주고 그럴 수 있어? 우리 집에서 자고?”
“돌았냐? 경찰 불러.”
“아, 그래. 그 반응이 찐텐 아니냐고.”
현규진은 조금 전 제 대답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유원에게
하는 제 행동이 뭔가 특별한 게 맞는 모양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고, 또 그러는 게 좋아서
자진해 한 일일 뿐인데 그게 정유원 한정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니.
“난 그래서 작년에 너희 첨 봤을 때 진짜 사귀는 줄 알았어. 존나 게이인가 싶었는데 또 그건
아닌 것 같고…. 아, 진짜 나 혼자 존나 고민했다.”
원래 친구를 보호하고 싶고, 지켜주고 싶고 좀 그럴 수 있나? 현규진은 새로운 시점으로
바라보게 된 저와 유원의 관계를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앞에서 뭐라 떠드는 김준재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야, 하나만 더.”
“뭐.”
“넌 최해영 귀여울 때 있냐?”
“예를 들어도 씨발. 그럼 넌 나 귀여울 때 있냐?”
“꺼져.”
“마찬가지다, 미친놈아.”
아, 정유원은 존나 귀여운데. 귀여워서 자꾸 놀리고 싶고, 볼도 꼬집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데.
아, 뭐지.
나 정유원 좋아하나…?
유원이 저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이게 다 뭔가 싶었다. 머리칼을
막 문지르고 일어난 현규진이 백팩을 들어 아무렇게나 어깨에 걸쳤다.
아무래도 속 시원한 해결의 순간이 오려면 일단 제 복잡한 머릿속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았다.
***
종례가 끝나고 유원은 슬쩍 현규진을 돌아보았다. 이제 현규진도 저와 적당한 시간만 같이
보내는 것에 익숙해졌는지 제가 어디를 간다고 해도 자세한 걸 묻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유원은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정말 현규진과 ‘거리’가 생긴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동시에 느꼈다.
안전거리 유지를 위해 거리를 벌리려 노력했고, 진짜 벌어지는 가장 원하는 결과를
마주했는데 씁쓸함을 느끼는 게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자꾸 밀려드는 묘한 감정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 마음은 언제 정리가 되는 걸까…. 빨리 정리가 돼서 예전처럼 현규진을 편한
마음으로 보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같이 떡볶이도 먹으러 가고, 학원 끝나고 집에 가며
버블티도 마시고 싶었다. 과외를 하는 날이면 같이 맛있는 걸 시켜 먹거나 만들어 먹기도 하고.
그런 사소한 것들을 할 수 있는 일상이 뭉그러진 것 같아 속상했다.
“멍유. 요즘 대놓고 바람 피우더라?”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유원은 교탁에 엎드리듯 상체를 기울여 대고 있는
최해영과 눈이 마주쳤다.
“현규진이랑 왜 이혼했어?”
“…그런 거 아니야.”
“뭐 그런 게 아냐. 대놓고 불륜 쩔던데.”
진짜 유원이 바람이라도 난 것처럼 진지하게 말하는 최해영을 보다가 웃음이 터진 김준재가
발길질을 했다. 그에 최해영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시끄러운지 교실 밖을 지나던
애들도 전부 교실 안을 들여다볼 정도였다.
“너 근데 진짜 현 왜 피하냐?”
왜 피하냐는 직접적인 물음에 유원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피하고 있는 게 맞긴 하지만, 그걸
타인에게 직접 들으니 너무 무섭고 큰 죄책감이 들었다.
“…피하는 게 아니라… 요즘 좀 학원 숙제도 많고… 그래서….
“현규진 요즘 진짜 존나 빡쳐 보여.”
최해영의 말 하나하나에 자꾸만 심장이 울렁였다. 유원은 겨우 가방 안에 필통을 넣고 지퍼를
닫았다.
“너 데리러 가야 학원 끝날 때까지 스존도 가는데 걔 요즘 오지도 않는다고.”
“…게임 안 해?”
“어, 안 해.”
“…그럼 뭐 하는데?”
“네가 모르는 걸 우리가 알겠냐. 집에 처박혀서 톡도 존나 씹어.”
그러고 보니 요즘 현규진이 뭘 하는지 아는 게 없었다. 당연히 김준재, 최해영과 좋아하는
게임을 하거나 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라니 신경이 쓰였다.
“암튼 멍유 너 때문에 요즘 현 상태 존나 안 좋으니까 어떻게 좀 해 봐. 뭐 말만 해도 지랄하고
난리라고.”
“…….”
“멍유 너만 믿는다? 얼른 가정으로 돌아와.”
저에게 비는 것처럼 두 손을 모아 댄 최해영과 김준재를 보던 유원이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당연히 둘과 어울릴 거라 생각했던 현규진은 언제 간 건지 교실에 없었다.
“…….”
요즘 어디 가는지 누구랑 뭘 하는지 전혀 묻지 않는 것도 진짜 크게 화가 나서 그런 건가….
그럼 그 성격에 말을 했을 텐데….
제가 현규진을 좋아한다는 사실. 딱 그거 하나만 빼면 여태까지 서로에게 정말 모든 이야기를
다 했었다. 특히 사이가 안 좋아질 수 있는 나쁜 습관이나 태도 같은 것은 바로바로 이야기를
해서 고쳤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원만한 사이를 이어올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 제가 현규진의 태도에 대해 말을 하긴 했지만, 현규진도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혼자 감정을 간직해 곪게 하지 말고 최대한 빨리 말해서 같이 해결할
방법을 찾으라는 조언도 해 주었고,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하는 건 폐를 끼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오히려 편하게 해 주는 일이라는 말도 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제가 다른 친구와 친해지면 존나 서운하다면서 툴툴대고 직접 다 말을 했고,
그 외에도 저에게 느끼는 섭섭한 점이 있으면 마음에 꽁하니 담아 두지 않고 바로바로 말해
너무도 투명하게 그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현규진도 저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게 이런
거였나? 유원은 익숙한 학원가로 향하며 계속 한숨만 폭 내쉬었다. 이번 주에는 내내 저녁도
빵 하나로 때운 채 학원 자습실에서 수업 전까지 자습을 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
현규진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또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휴대폰을 꺼내 현규진과의 톡방으로 들어간 유원은 뭔가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가장 최근
메시지를 눈에 담았다.
[규진 : 좀 자다가 과외 시작 전에 갈게]
[규진 : 저녁 알아서 먹어]
제가 시작한 일인데 급격하게 되돌리기 어려울 만큼 어긋나고 있는 것 같아 자꾸 마음이
쓰였다. 이러다가 완전히 친구일 때의 마음을 회복하고 나서도 다시 친구가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유원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학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녁 먹었어?
집이야?
이따 버블티 마시러 갈까?
몇 가지 말을 적었다가 지웠다가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한 채.
***
체육 시간은 유원에게 가장 심심한 시간이었다. 특히 오늘처럼 역동적인 것을 배울 때는 더
그랬다. 딱히 아프지도 않고,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는데도 학기 초에 한 번 수업을 하다가
정신을 잃은 뒤부터 유원은 체육 시간 때마다 이렇게 스탠드에 앉아 다른 애들이 움직이는 걸
보고 있어야 했다. 준비 체조 정도는 함께하게 해 주지만, 혹시라도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다가 큰일이라도 날까 싶어 체육 선생님은 몹시 몸을 사렸다.
특히 유원의 엄마가 그 유명한 여배우 이해연이라는 것을 알아서 더 그랬다. 유명인 자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제가 주목을 받는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아는 이유였다.
남자 체육복 중에 제일 작은 사이즈인데도 헐렁한 체육복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유원이
소매를 늘려 손등을 덮었다. 그늘진 스탠드에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어 그런지 유독 더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
다른 학년 수업도 같이 있어 운동장 여기저기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유원의 시선은 단 한 곳,
현규진에게만 닿았다.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워낙 키가
커서 잘 보이는 것도 있지만, 글쎄…. 그게 이유의 전부는 확실히 아니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29 화(28/127)

29


오늘 아침에는 같이 학교에 가긴 했지만, 전처럼 편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그냥 같이 걸어
학교에 간 게 전부였다. 농담 같은 가벼운 이야기도 없었고, 당연히 웃음도 없었다.
점점 이렇게 지내다가 3 학년 때 다른 반이라도 되면…. 그땐 정말 한때 알고 지내던 그런
친구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길고 긴 시간을 같이 지내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현규진
만큼은 변치 않고 영원히 친구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는데, 그게 이렇게 흔들리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물론 그걸 흔들기 시작한 게 저라서 더 그랬다.
다리를 스탠드 위로 올려 세워 그 위로 얼굴을 파묻은 유원이 요즘 부쩍 늘어난 한숨을 휴우….
내쉬었다.
“뭔 한숨을 그렇게 쉬냐?”
목덜미로 번지는 뜨겁고 부드러운 느낌에 놀란 유원이 확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선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온 건지 현규진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흔들리는 눈동자로 현규진을 담던 유원의 시선이 이내 얼굴 근처에 있는 손에 닿았다. 방금 제
목덜미를 쥐었을 그 손을 본 순간 운동화 안에서 발끝이 또 움츠러들었다.
“듣고도 말 씹는 거 봐. 진짜 정유원 싸가지 없어.”
유원의 옆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털썩 앉은 현규진이 손을 들어 조금 전에 했던 것처럼 다시
목덜미를 쥐었다. 장난스러운 말과 행동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유원은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커다란 손이 목을 부드럽게 감싸고, 기다란
손가락이 턱까지 스친 순간 아랫배가 확 울렁였다. 유원은 저도 모르게 현규진의 손을 떼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스탠드를 벗어났다. 누가 봐도 도망치는 모습이었다.
“야, 정유원!”
뒤에서 현규진이 따라오는 느낌에 당황한 유원은 중앙 현관 안으로 들어가 아무도 없는
복도를 따라 뛰었다. 그리고 1 층 끝에 있는 교사용 화장실로 들어갔다.
“…….”
어떤 상황인지 또 지금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친구의 손길에 이상한 반응을 해 버린 제 모습을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유원은 비어 있는 화장실 칸을 보다가 제일 끝에 있는 곳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게 진짜.”
하지만 문을 잠그기 전 다시 문이 확 열렸다. 유원은 문을 잡고 선 현규진을 보며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런 유원의 행동에 기가 막힌다는 듯 현규진이 허…. 짧은 숨을 뱉었다.
“정유원 너 뭐 하냐?”
“…그게….”
“왜 도망가?”
“그게 아니라….”
“피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 도망까지 가?”
현규진이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게 말을 해야 하는데 자꾸 말이 꼬이고 또 머릿속도 꼬였다.
사실 할 수 있는 말도 거의 없었다. 네가 목덜미를 쥐는 손에 아랫배가 울렁거려 무서웠다고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잘됐어, 차라리. 까놓고 얘기 좀 하자.”
“…나중에, 좀 나중에 하면 안 돼?”
“응, 안 돼. 또 튀려고?”
“아니야, 안 그래….”
“내가 지금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뭐가 아니야. 너 방금 나 보자마자 튀었잖아.”
상황이 너무너무 곤란했다. 현규진이 이렇게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데 저는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말도 현규진의 오해를 풀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아닌데 왜 그래?”
“…….”
“또 입 다문다. 내가 진짜 혼자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 여태까지 우리가 별거 아닌 일로 몇 번
싸운 적은 있어도 이렇게 네가 날 일방적으로 피한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진짜 감도 못
잡겠거든? 생각나는 거라고는 다 말도 안 되는 거라 진짜 내가, 씨발.”
교실이 없어 원래도 조용한데 수업 중이라 오가는 사람까지 없어 더욱 조용한 화장실과
복도로 현규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최대한 진정을 하면서 말하고 싶은데 마음 안에 고여 있던
것을 터뜨리고 나니 쉽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웬만하면 참고 기다리려고 했어. 이유가 있겠지, 때가 되면 말해 주겠지, 했는데 좀 전에
그거 뭔데. 왜 자꾸….”
문을 잡은 채 말하던 현규진이 고개를 돌려 닫힌 화장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희미하지만 분명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올 정도면 화장실을 쓰려고 오는 게 분명했다. 현규진은
청소 도구가 든 반대쪽 칸 안으로 보이는 ‘수리 중’ 입간판을 꺼내 문 앞에 놓고 유원이 있는 칸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뭐 하는….”
“쉿. 누구 와.”
교사용 화장실에 그것도 수업을 하는 시간에 둘이 있는 걸 보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현규진은 비좁은 칸 안에서 유원과 마주 선 채 문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곧 예상대로 화장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
“…….”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노래를 흥얼대는 소리가 울리고 세면대 수도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유원은 밖에 있는 선생님에게 이 상황을 들키는 것보다 현규진과 몸이
닿을 것처럼 가까이 서 있는 이 상황이 더 곤란했다.
목덜미를 잡은 것만으로도 울렁이던 배 속으로 다시 묘한 감각이 맺혔다. 바로 눈앞에 있는
현규진의 어깨와 시선을 조금만 들어도 보이는 목울대, 소리가 나는 쪽 벽을 보고 있는 예민한
표정 같은 것들이 자꾸만 유원을 괴롭혔다. 게다가 현규진한테서 너무… 좋은 향이 났다.
체육복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목덜미 쪽에서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유원은 어색하게 내리고 있던 손을 앞으로 해 긴 체육복 상의를 괜히 더 늘려 앞을 가렸다.
현규진과 너무 오랜만에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어 그런지 자꾸만 아랫배로 묘한 감각이
고였다. 이대로라면 현규진의 꿈을 꾼 다음처럼 죄책감이 드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
“…….”
진동 소리가 문밖에서 들리고 곧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체육 선생이라는 걸 눈치챈 순간
둘의 눈이 마주했다. 더욱 숨을 죽인 채 밖에서 들리는 체육 선생의 사적이고 의미 없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서 있었다.
날이 그리 덥지도 않은데 좁은 곳에 긴장한 채로 갇혀 있어 그런지 자꾸 여기저기에서 열이
올랐다. 답답한 마음에 손을 들어 체육복 상의 앞쪽을 잡아 한 번 펄럭인 현규진의 시선이
왜인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유원의 손으로 뚝 떨어졌다. 체육복을 괜히 왜 띄워서 아래로
늘리고 있는 건지 한 번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러는….”
체육 선생의 목소리에 묻혀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소곤댄 현규진이 체육복
상의를 늘리고 있는 유원의 손을 잡았다.
“…….”
“…….”
유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현규진은 그제야 유원의 손에서 시선을 올려 잔뜩 빨개진 얼굴을
눈에 담았다. 손처럼 떨리는 눈동자와 새빨개진 얼굴과 귀, 목덜미를 보니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았다.
다시 관계 개선을 좀 해 보려고 먼저 다가가 살갑게 구는데 갑자기 홱 일어나 가 버리는
유원을 보며 서운함이 폭발해 따지느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유원이 갑자기 저를 피하고 멀리하는 이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라는 것. 저를 존나게 싫어하게
됐거나 또는… 좋아하게 됐거나. 그걸 알기 위해 며칠 인내심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참고
있었는데 이 중요한 순간에 그걸 잊고 성질만 부리고 있었다니 참 한심한 일이었다.
“…….”
“…….”
체육 선생의 통화가 길어졌다. 어차피 자유시간을 주고 들어와 저도 농땡이를 피우고 있을
테니 운동장에서 사라진 저와 유원을 딱히 신경 쓰지 않을 것이었다. 아마 사라진 줄도 모를
거고.
만약 안다고 해도 지금 현규진에게 중요한 것은 그딴 게 아니었다. 눈앞에 처음 보는 모습의
유원이 있는데 지금 체육 선생 따위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현규진은 조금 더 유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가아….”
뒤로 몸을 더 물려 벽에 몸을 기댄 유원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현규진의 어깨를 밀었다.
현규진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유원을 저와 벽 사이에 가두었다. 그리고 유원이 놓친 체육복
옷자락을 잡아 살짝 들어 올렸다.
“이거 진짜 존나 그냥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
“너….”
“…….”
“섰어?”
귓가에 울리는 말에 놀란 유원이 현규진의 어깨를 조금 세게 힘주어 밀었다. 기꺼이 뒤로
밀려나 준 현규진이 드디어 화장실을 나가는 발소리에 긴 숨을 내쉬었다. 이제 유원은 아예
다리를 구부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나가자. 나가서 얘기해.”
“…너 가.”
“싫어. 할 말 있어. 그리고 너도 나한테 할 말 있잖아.”
“빨리… 나가….”
울먹임이 묻은 목소리에 현규진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문을 열고 칸 안에서 나갔다. 발에
치이는 수리 중 입간판도 다시 창고 안으로 넣은 뒤 세면대 쪽으로 가서 아예 화장실 문
자체를 잠갔다. 아무래도 유원이 나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
아,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고 묻지 말걸. 미친 새끼야. 묻긴 왜 물어. 정유원 놀랐을 거 아냐.
여태까지 그런 얘긴 한 번도 한 적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정말 매일 늘 붙어 다니면서도 유원과 이런 쪽, 그러니까 성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김준재나 최해영 같은 애들과 있을 때는 제가 말을 꺼내지 않아도 그런 얘기가
늘 나오고는 하는데 유원과 있을 때는 글쎄…. 그런 생각 자체가 든 적이 없었다.
유원을 그런 쪽으로 보는 변태 새끼들을 하도 봐서 그게 얼마나 더럽고 징그러운 일인지
알아서 그런 걸까. 현규진은 괜히 차가운 물을 틀어 열이 나는 것 같은 손끝을 적셨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냥 체육복 옷자락을 만졌을 뿐인데 손가락 끝이 너무 뜨거웠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30 화(29/127)

30


“…….”
수도꼭지에 매달린 물방울이 뚝, 뚝 떨어지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크게 들렸다. 이런 소리를
살면서 들어 본 적이 있었나? 현규진은 닫힌 화장실 문에 기대어 선 채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수업이 끝나려면 15 분 정도 남아 있었다. 게다가 바로 점심시간이니 체육 시간을 정유원
기다리는 것에 다 쓴다고 해도 대화할 시간은 충분했다.
“…….”
오늘따라 시간이 정말 느리게 흘렀다. 5 분쯤 지난 것 같아 시간을 확인하면 겨우 30 초가 지나
있고, 이번에는 정말 5 분이 지난 것 같아 시계를 보면 1 분이 지나 있었다. 그렇게 일 년쯤
기다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때 화장실 안쪽에서 사부작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가가 빨간 유원이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좀 전에 그 말은….”
“그… 그 얘기 하지 마…. 너 그 얘기 또 하면… 너랑 영원히 말 안 할 거야.”
아…. 귀 또 빨개졌다. 유원의 빨개진 귀를 보며 현규진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담은 채였다.
“좀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밥부터 먹고 얘기할래?”
“…밥 안 먹고 싶어. 너 먹고 와….”
“나도 배 안 고파. 그럼 얘기부터 해.”
“…난 너랑 할 얘기….”
“없을 리가?”
유원을 보며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여 말한 현규진이 안 되겠다는 듯 유원의 손목을 아프지
않게 쥐었다.
“…왜….”
“튈까 봐 그런다, 왜.”
“…안 그래.”
“뭘 안 그래. 아까 보니까 잘만 튀던데. 수갑이라고 생각해. 가자. 화장실에서 뭐냐, 이게.”
손목을 쥔 채 잠갔던 화장실 문을 연 현규진이 복도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 수업이 끝나기
전이라 복도는 아주 조용했다.
“…어디 가는데?”
“미술실.”
“너 담배 피우는 거기?”
“어.”
저를 끌고 가면서도 급히 움직이지 않고 계단을 천천히 오르는 현규진의 뒷모습을 본 유원이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현규진에게 절대 보이면 안 될 모습을 보여서 너무 창피해 도망치고
싶은데 저를 데리고 가는 손이 너무 다정해 뿌리칠 수가 없었다. 유원은 잠자코 한 계단, 한
계단 걸음을 옮겼다. 현규진의 배려를 듬뿍 받으며.
조용한 미술실에 들어가 문을 닫기가 무섭게 수업 끝나는 종이 울렸다. 유원은 창틀 끝 쪽에
놓인 섬유 탈취제를 보며 숨을 쉬듯 작게 웃었다. 가끔 현규진한테서 갓 빨래를 한 것 같은
섬유유연제 향이 날 때가 있는데 저걸 뿌려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이제 말해.”
“…뭐얼….”
“진짜 요즘 왜 그러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데 솔직히 여기까지 온 이상 그건 힘들 것
같았다. 유원은 갈아신지도 못한 운동화 앞코로 미술실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지랄 같은 학원 핑계 대면서 피하고, 데리러 오지도 말라 그러고. 하다 하다 이젠 대놓고
눈앞에서 튀어 놓고 정말 나한테 할 말 없어?”
“…다음에… 정말 다음에 말하면 안 될까?”
“안 돼. 시간 안 줄래. 너 어차피 빠져나갈 변명 생각할 거잖아.”
뒤로 슬쩍 한 걸음 물러서는 유원의 손목을 놀라서 잡은 현규진이 앞으로 더 가까이 당겨
세웠다. 그리고 유원을 가두듯 다리를 오므렸다.
“…하, 하지 마….”
“그러게 누가 튀래.”
“……이거 놔줘….”
현규진에게 잡힌 손목을 살살 흔들어 봤지만, 현규진은 놓아주지 않았다. 현규진의 다리
사이에 서서 손목까지 잡힌 상황을 정확히 마주한 순간 또 유원의 몸 여기저기로 열이 올랐다.
유원은 얼른 고개를 숙여 뜨겁게 느껴지는 얼굴을 숨겼다.
“…빨리 놔….”
유원의 낯선 모습을 보며 현규진은 확신했다. 그동안 유원이 갑자기 저를 낯설게 대한 이유를.
솔직히 아까 화장실에서부터 확신하긴 했지만, 그때가 90%였다면 지금은 100%였다.
“나 봐 봐.”
“…싫어.”
“봐 보라니까.”
슬쩍 고개를 들던 유원이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푹 숙이던 그때 현규진의
손가락이 유원의 턱에 닿았다. 순간 온몸이 찌릿찌릿한 느낌이 났다. 유원은 깜짝 놀라
현규진에게서 성큼 뒤로 물러섰다. 바보같이 굴다가 다 들켜 버린 것 같았다.
“설마설마 했는데.”
“…….”
“정유원, 나 좋아하네?”
‘혹시 좋아해?’, ‘좋아하는 거야?’, ‘좋아하는구나.’ 이어질 여러 말을 상상했지만, 현규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유원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너무나도 확신을 담은 그 말에 유원은
기본으로 한 번은 하려고 했던 아니라는 반박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정말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열흘도 넘게 지금 나만 보면 티 나게 피하고 손만 닿아도 튕겨 나가고 귓속말 한 번 했다고
목까지 빨개지는데 어떻게 몰라?”
“…미안.”
“뭐가.”
“…기분 나쁠 거 아냐. 황당하고….”
미술실 책상에 걸터앉은 현규진이 책상 위로 쌓인 먼지를 손끝으로 쓸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원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현규진의 처분만 기다렸다.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고,
가족끼리 만나 논 건 셀 수도 없이 많고, 또 커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릴 땐 같이 씻고, 같이
잔 적도 많은데 갑자기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걸 현규진도 쉽게 용납하긴 어려울
것이었다.
정이 떨어졌을지도 모르고, 혐오스러워서 더는 친구 사이도 유지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유원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당하지 못한 이 마음을 최대한 잘 정리하려 노력했던 건데
제가 제대로 하지 못해 결국,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 오고야 말았다. 유원은 정말이지 눈앞에
벌어진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
절교하자 그러면 어쩌지. 엄마, 아빠가 규진이는 왜 요즘 안 보이냐고 하면 뭐라고 말하지,
학교에서도 같은 반이라 매일 볼 텐데 얼굴을 어떻게 보지….
지금이라도 사실은 아니라고 장난이라고 말을 해 볼까? 아니야, 나 그런 연기 진짜 못해서
오히려 상황만 더 악화될 거야…. 어쩌지, 어떡하지. 기분 나쁘다고 하면, 또 절교하자고 하면….
“맞아. 기분 나빴지. 네가 나 피해 다녀서.”
“…….”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숙제 핑계 대면서 이윤성이랑 다녀서. 내가 모르는 새끼랑 떡볶이 먹고
다니고, 과외 하는 날도 과외 시작 바로 전에 오라 그러고.”
“…….”
“내 얼굴도 잘 안 보고, 손만 닿아도 놀라고. 너 같으면 기분 안 나쁘겠어?”
“…미안해….”
그리고 네가 나 좋아하는 것도 기분 나빠. 유원은 이어질 말을 미리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정말 그 말을 들었을 때 너무 크게 놀라지 않도록 어차피 들을 말이라고, 당연한 거라고
다독여지지 않는 마음을 애써 다독이려 애썼다. 물론 아플 만큼 뛰는 심장은 그런 유원의 말을
조금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
“…….”
잠시 맴도는 정적은 현규진이 들떠 멋대로 두근대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일부러 만든
것이었다. 유원이 저를 좋아한다는 걸 확인까지 받고 나자 기분이 좋아 미칠 것 같았다. 18 년
소꿉친구가 저를 좋아한다는데,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좋아한다는데 당황스러움이나
어색함보다도 미칠 듯 좋다는 감정이 가장 먼저 들었다.
글쎄, 이게 이럴 수 있나 싶은데 그냥 좋았다. 좋아 죽을 것 같았다. 뭐에서 이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제가 세상을 다 제패한 것만 같았다. 정유원이 저를 좋아하다니. 서운하게
했던 그 모든 행동이 다 저를 좋아해서 한 행동이었다니. 감당하기 힘들 만큼 마음이
벅차올랐다. 현규진은 제 대답을 기다리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유원을 보며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나 피하고 그런 건 기분 존나 나빴는데…. 나 좋아한다는 건 기분 안 나쁜데?”
“…정말?”
“어. 정유원, 이리 와 봐.”
생각지도 못한 답에 유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현규진이 그런 유원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
현규진과 거리를 조금 두고 떨어져 있던 유원은 저에게 손짓하는 현규진을 보다가 슬쩍
앞으로 다가갔다. 조금 더 오라는 손짓에 한 걸음 더, 그래도 더 오라는 고갯짓에 한 걸음 더
다가간 유원은 결국, 현규진의 기다란 다리 사이에 다시 갇혔다.
“나 말고 다른 새끼들이랑은 밥 먹고, 집 가고, 웃고 다 하면서 나만 피해서 진짜 개빡쳤거든,
나.”
“…….”
“빡쳐서 진짜 잠도 안 왔어.”
“…미안….”
“너 말고 그 새끼들한테 빡쳤다고. 특히 이윤성 그 새끼가 너 뺏어간 것 같아서 진짜…. 욕해도
돼?”
안 된다고 고개를 젓는 유원을 보며 푸스스 웃음을 터뜨린 현규진이 손을 들어 저를
내려다보는 유원의 말간 뺨을 아프지 않게 잡고 살살 흔들었다.
“너 없으니까 다 재미없더라. 짜증만 나고.”
“…….”
“나도 너 좋아하나?”
“…….”
“네가 나 좋아한다니까 기분 존나 좋아. 너랑 키스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거 좋아하는 거
맞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아니, 사실 생각은 해 봤지만, 현규진과 현실에서 할 거라고는 감히
생각한 적 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의 귀가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상한,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나는, 난! 그런 생각까진… 안 했거든….”
“그래? 그럼 어디까지 생각했는데. 사귀는 건 생각해 봤어?”
자세히 어떤 행동들을 한다는 건 생각해 본 적 없지만, 현규진과 사귈 수 있을까? 정도의
생각은 해 본 적이 있기에 유원은 잠자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유원을 보며 웃은
현규진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유원과 더욱 깊이 눈을 맞췄다.
“그럼 사귈까?”
친구 사이 고백 금지-31 화(30/127)

31


마음이 덜컹 흔들렸다. 유원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멍때리면 어떡해.”
그런 유원의 볼을 아프지 않게 손끝으로 누른 현규진이 웃었다. 저를 보고 웃는 얼굴이 너무
좋은데도 유원은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왜?”
“…친구잖아.”
“그럼 계속 그냥 친구 할까?”
이번에는 마음이 쿵 떨어졌다. 제가 그토록 원하던 말을 현규진이 해 주고 있는데 하나도 좋지
않고 안도가 되지도 않았다.
“그건 또 별로야?”
“…….”
“그럼 어떻게 할까.”
다정한 목소리가 혼란한 마음을 아주 부드럽게 이끌었다. 고개를 든 충동적인 선택의 대답이
입술 안쪽을 간질였다.
“원래 이런 건 한 번에 대답하기 어려운 거니까 한 번 더 물어볼게.”
“…어떻게 알아?”
“응?”
“…난 하나도 모르겠는데…. 넌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 해 본 적 있어?”
“너랑 하고 있잖아, 지금.”
덜컹 흔들리고, 쿵 떨어진 심장은 이제 현규진을 담은 채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유원은 다시
제 얼굴을 만지는 현규진을 보며 멍해졌다.
“나까지 멍때리면 안 되니까 정신 존나 똑바로 차리려고 나도 지금 노력 중인데.”
“…….”
“나 다시 묻는다?”
“…….”
“사귈래, 아니면 그냥 계속 친구 할래?”
“…….”
“사귈까?”
생각해야 할 게 아주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턱대고 고개를 끄덕일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동안 제가 고민하던 것들이 머릿속으로 다 몰려왔는데도 단 하나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유원에게 선명한 것은 단 하나, 눈앞에 있는
현규진 뿐이었다.
유원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나 처음이었다. 이렇게 충동적인 결정을 한 것은.
“그럼 우리 이제 지금부터 사귀는 거다?”
이렇게 쉬워도 되나? 의문이 들긴 했지만, 잠시였다. 뺨을 톡 손끝으로 건드리며 웃는
현규진을 보는 순간 불안이나 의심 같은 것은 전부 사라지고 오로지 현규진만 남았다.
유원은 좋았다. 뺨을 만져 주면서 웃는 현규진이, 제 손가락 사이로 기다란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눈을 맞추는 현규진이.
“소리 내서 말해 줘. 나도 듣고 싶어.”
“…….”
“유원아, 나 좋아해?”
“…응…. 좋아해….”
그 대답과 함께, 현규진의 웃음과 함께 18 년 동안 이어 온 친구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하지만
아쉬움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 18 년보다 더 반짝이는 1 일이 존재하니까.
그렇게 친구 사이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
유원의 옆자리를 다시 현규진이 차지하게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현규진은
늦게라도 급식실에 가 유원과 점심을 먹었다.
마음의 짐을 덜어서 그런지 유원도 함박스테이크에 밥을 아주 잘 먹었다. 현규진은 먹는
동안에도 내내 유원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함박스테이크가 무슨 맛이었는지 전혀 기억도
나지 않고, 다 먹고 매점에 들러 산 초코우유도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눈에 보이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밥을 오물오물 다람쥐처럼 귀엽게 먹던 유원의 얼굴과
바나나우유에 빨대를 꽂아 조금씩 빨아 마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노란색 양치컵과 칫솔을
들고 화장실로 가는 뒷모습, 페이퍼 타월로 물이 묻은 입술을 꾹꾹 누르는 손 같은 게 자꾸
눈에 들어왔다. 원래도 귀엽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사귀기로 한 다음에 봐서 그런지 더 귀엽고,
더 예뻐 보였다.
“…왜 계속 봐?”
“예뻐서 보는데?”
“…미쳤나 봐…. 하지 마.”
“귀 빨개지면서 하지 말라 그러면 그 말 누가 믿어.”
씩 웃은 현규진이 교실로 가는 유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유원은 여전히 어깨를 움찔댔다.
하지만 현규진은 더 이상 그걸 서운해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 유원이
움찔대는지 이제는 그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어…. 오늘 과외 취소됐어.”
톡을 확인하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도 휴대폰을 확인했다. 과외 선생과 저, 그리고 유원이 있는
톡방에 감기가 너무 심해서 오늘 과외를 취소해야 할 것 같으니 부모님께 말씀을 드려 달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네]
한 글자만 쳐서 올렸더니 뭔가를 잔뜩 적고 있던 유원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왜?”
“쉬세요, 정도라도 더 써.”
그냥 과외가 취소됐다는 것만 확인하면 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유원의 말을 듣기로 한
현규진은 군소리 없이 유원이 시킨 대로 글자를 더 적었다.
[쉬세요]
제가 세 글자를 더 적는 동안에도 유원은 뭔가를 적고 있었다. 현규진은 아예 복도에 멈춰
서서 글자를 치는 유원의 뒤에 선 채 어깨에 턱을 올리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요즘 감기가 독하다는데 주말까지 푹 쉬시고 얼른 나으세요, 선생님! 부모님께는 다음에
보충수업 하는 걸로 말씀 잘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몇 줄이나 친 뒤에야 보내는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다시 유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파서 빠지는지 노느라 빠지는지 알 게 뭐야.”
“선생님 그럴 분 아니잖아.”
“사람 다 똑같다.”
어깨에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들어 아프지 않게 유원의 말랑한 볼을 떡 주무르듯 주무른
현규진이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맞췄다.
“이윤성도 이런 적 있어?”
“이런… 적?”
“너 만진 적 있냐고.”
“없어.”
“정말?”
“응. 당연히 없지. 이런 건… 예전부터 너만 하지, 다른 애들은 안 그러잖아.”
“당연히 나만 해야지. 다른 새끼들은 다 변태라 안 돼.”
제법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현규진을 보며 웃은 유원이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로 가려는
유원의 손끝을 슬쩍 잡은 현규진이 저를 돌아보는 얼굴을 보며 웃음 지었다.
“오늘 과외도 안 하는데 밖에서 놀다 들어갈까?”
잠시 그 얼굴을 보던 유원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데면데면한 사이도 개선이
되었고, 무려 사귀는 사이까지 됐으니 현규진과 둘이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다. 아까
미술실에서 다 하지 못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싶고, 또 듣고 싶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유원의 손끝을 잡고 살살 흔들던 현규진이 앞문으로 5 교시 수업 선생이
들어오는 걸 보며 놓아주었다. 유원은 얼른 자리로 가 앉아 5 교시 교과서를 꺼냈다. 그리고
선생님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같은 줄 맨 뒤에 앉아 있는 현규진과 눈을 맞췄다.
현규진이 웃었다. 유원은 그 웃음을 눈동자에 가득 머금은 채 다시 앞을 보고 앉아 교과서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교과서 위로 현규진의 웃음이 떨어져 아롱거렸다. 5 교시 내내 유원의
마음을 이리저리 간지럽게 흔들며.
***
종례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현규진은 저에게 달라붙는 최해영과 김준재를 가볍게
무시하고 유원에게 다가갔다. 그런 현규진을 따라간 최해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야, 불륜 종료?”
“지랄이 버릇이고 개소리가 습관이지, 아주.”
“체육 땡땡이치고 둘이 어디 가서 한판 뜸? 그냥 존나 다시 러브러브 모드 됐네?”
“우리 원래 사이 좋았는데. 그치, 자기야.”
책가방을 챙기는 유원에게로 커다란 몸을 숙여 애교스럽게 말하는 현규진을 보며 김준재와
최해영이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작게 웃은 유원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싸우고 그런 거 아니야. 전에도 아니라고 그랬잖아.”
“아닌데, 분명 둘이…. 헐, 그럼 현, 너 다시 멍유 학원 픽업하겠네?”
단순하게 현규진이 다시 게임을 할 거라는 기대감이 부풀어 하던 말도 다 잊고 우는 시늉을 한
최해영이 몸을 숙여 유원에게 굽실댔다.
“멍유 님, 가시는 길 편하게….”
“됐고. 나 게임 할 시간 없어.”
유원과 최해영 사이를 딱 끊은 현규진이 유원의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같이 앞문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최해영의 절규 같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딴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현규진은 난간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는 유원의 걸음 속도에 맞춰 천천히 함께 발을 옮겼다.
“저녁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학원가 입구 안쪽에 돈가스 가게 생겼던데 거기 가 볼래? 치즈돈가스가 맛있대.
학원에서 애들이 하는 말 들었어.”
“응, 거기 가자. 맛있겠네.”
“거기 카레도 주는데 그것도 맛있대.”
“카레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래도 맛있다니까 궁금해.”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카레가 궁금하다면서 웃는 유원을 보니 심장이 간지러웠다. 현규진은
부들부들한 유원의 머리칼을 만지며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저녁 먹고 잠깐 학원 들르면 안 돼?”
“학원은 갑자기 왜. 그 학원 소리 듣기만 해도 빡치네.”
“자습실에 이어폰 두고 왔어. 그것만 들고나오면 돼.”
“알았어.”
학교가 끝나면서 붐비기 시작한 학원가로 간 두 사람은 유원이 말한 돈가스 가게에 들어갔다.
유원은 가장 유명하다는 치즈돈가스를, 현규진은 유원이 마지막까지 고민한 기본 돈가스를
주문했다.
먼저 나온 사이다를 몇 모금 마시고 있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이 나왔다. 치즈가 쭉
늘어나는 돈가스 두 개 집은 유원이 현규진의 돈가스 접시 위로 올려 주었다. 현규진도 기본
돈가스를 유원에게 나누어 주었다.
딱 반반씩 나누어 놓고 거의 동시에 치즈돈가스를 한 입 먹었다. 치즈가 길게 늘어나고 아주
부드러워 너무너무 맛있어 동시에 크게 뜨인 눈이 마주쳤다. 그게 웃겨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32 화(31/127)

32


같이 조금씩 나온 카레도 소문대로 정말 맛있어 조금도 남기지 않고 전부 먹었다. 다음에 또
와도 되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가게를 나설 때쯤에는 벌써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학원은 돈가스 가게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익숙한 건물로 다가간 유원이 현규진의 팔을 한번
잡았다가 놓았다.
“얼른 갔다 올게.”
“천천히 갔다 와. 서두르다가 넘어진다.”
“응!”
그 잠깐 가면서도 손을 흔들어 인사한 유원이 얼른 학원 안으로 들어갔다. 현규진은 서두를 거
없다고 했지만, 유원은 마음이 급했다. 얼른 이어폰을 찾고 현규진과 놀고 싶었다. 그동안
열심히 내내 피해 다니느라 제대로 얘기를 하지도 못했고, 당연히 시간을 같이 보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거창한 걸 하지 않아도 그냥 현규진과 상큼한 걸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재밌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비어 있는 자습실에 들어가 제가 어제 앉았던 자리로 가자 서랍에 그대로 이어폰이
들어 있었다. 아, 다행이다. 유원은 이어폰이 담긴 케이스를 얼른 교복 재킷 주머니에 넣고
조용히 다시 나왔다.
빨리 가야지, 빨리. 그래도 넘어지면 안 되니까 천천히. 천천히 빨리. 정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저를 마주한 유원이 계단에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여러모로 이상하고, 또
이상한 만큼 기분이 좋은 날이니 그냥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이상한 것으로 치자면 18 년 지기 현규진과 제가 너무나 쉽게 사귀게 됐다는 게 최고니까.
계단을 내려가 문 쪽으로 가까이 간 유원은 현규진 주변으로 다른 교복을 입은 여자애들 몇
명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아까 올라갈 때만 해도 없었는데 그 잠깐 사이에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교복을 보아하니 근처에 있는 여고 애들인 것
같았다.
“인스타 정말 안 하는 거야? 저번에 디엠 보냈는데.”
앞에 선 예쁘장한 여자애가 물었지만, 현규진은 그냥 벽에 기대어 선 채 휴대폰만 시선을
내리깔아 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최해영 알지? 전에 최해영 폰에서 사진 봤어. 우리 다음 주에 모일 건데 올래? 아니면 따로
만나도 되고.”
최해영 이름이 나오자 현규진의 시선이 조금 들렸다. 그 순간 어떤 기대에 찬 눈을 한
여자애를 그냥 한 번 정말 보기만 한 현규진이 고개를 돌려 유원을 바라보았다.
“어? 언제 왔어.”
눈이 마주치자마자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듯 성큼성큼 헤치고 나온 현규진이 유원을 보며
웃었다.
“…누구야?”
“몰라. 짜증 나게 말 걸고 지랄.”
다 들리게 말하는 현규진에 놀란 유원이 슬쩍 여자애들의 눈치를 보았다. 당연히 기분이 상한
여자애들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고, 그러거나 말거나 현규진은 유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어폰은 찾았어?”
“응, 다행히 서랍에 있었어.”
“이리 줘. 무겁게 그런 거 드는 거 아냐.”
씩 웃은 현규진이 유원의 손에 들린 이어폰 케이스를 가져가 백팩 앞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유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제 어디 갈까.”
“아이스크림 와플 먹으러 안 갈래?”
“와플?”
“응…. 그때 승준이가 거기 진짜 맛있다고 가자 그랬는데 다음에 가자 그러고 안 갔었거든.”
익숙하지 않은 이름에 뚱한 얼굴을 한 현규진이 유원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는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걸 만져야만 했다.
“왜 안 갔는데. 가고 싶었을 거 아냐. 그런 거 좋아하잖아.”
“…너랑 가고 싶어서. 너도 와플 좋아하잖아.”
아, 어떡하지. 얘랑 친구로 어떻게 지냈지. 현규진은 불긋해진 유원의 얼굴과 귀를 보며
심호흡했다. 저랑 가고 싶었다는 그 말 하나에 그동안의 모든 설움이 다 사라졌다.
“나랑 가고 싶었어?”
“…응.”
“그럼 가야지. 어딘데?”
“버블티 가게 뒤쪽 골목으로 좀 가면 있대. 우리가 그쪽에는 갈 일이 없어서 못 봤나 봐. 거기
츄러스도 맛있다더라.”
“츄러스도 먹자, 그럼.”
좋은지 웃는 유원을 보며 따라 웃은 현규진이 볼을 만지작대던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유원과 사귀게 된 것은 아직 조금 얼떨떨하기도 하고, 실감이 확 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시 이렇게 관계가 회복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더는 그 학원 것들한테 유원을 뺏기지
않아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어, 저긴가 봐. 와플 그려져 있어.”
평소 잘 다니는 버블티 가게 뒤쪽으로 가자 정말 와플 그림이 그려진 간판이 보였다. 현규진은
생각보다 꽤 넓은 매장 안으로 들어가 유원과 이야기하기 좋은 구석 쪽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유원이 궁금해하는 아이스크림 와플과 츄러스, 따뜻한 레몬티를 주문했다. 너무
차가운 것만 잔뜩 먹이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유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딸기 맛, 바닐라 맛,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 세 스쿱이 올라간
와플과 츄러스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현규진은 디저트 사진을 찍는 유원을 사진으로 남겼다.
원래도 귀여웠지만, 오늘은 심각할 만큼 계속 귀엽단 생각이 들었다.
“이거 진짜 맛있다아…. 너도 얼른 먹어 봐.”
와플을 칼로 작게 잘라 딸기 맛 아이스크림과 함께 먹은 유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반응이
귀여워 웃은 현규진이 뻔뻔하게 입을 아 벌렸다. 새삼스러운 행동은 아니고 가끔 하는
장난인데 유원이 기분 좋을 때면 정말 먹을 것을 들어 입에 넣어 주고는 했었다.
열 번 중에 일곱 번 정도는 빈 포크만 입에 넣어 주거나 티슈를 뭉쳐 넣으려고 하는데 오늘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열심히 와플을 입에 넣기 좋은 크기로 잘라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얹는 유원을 보며 웃은 현규진이 다시 입을 벌려 따뜻하고 시원하고 달콤한 것을 받아 먹었다.
그리고 기대감에 빛나는 눈을 보며 웃었다.
“진짜 맛있다. 다음에 또 오자.”
“맛있지. 츄러스도 먹어 볼래.”
기다란 츄러스도 들어 괜히 한 번 호오 분 유원이 끄트머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그것도 맛있는지 현규진의 입술 앞으로도 내밀었다. 현규진도 입을 벌려 조금 전 유원이 먹은
부분 위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유원의 반응처럼 따뜻하고 달콤한 츄러스는 정말 맛있었다.
“이것도 맛있네. 자주 와도 되겠다.”
“응, 학원 끝나고 집에 갈 때 이거 먹으면서 가도 되겠다. 그치.”
“응. 많이 먹어.”
또 한 입을 베어 문 유원이 다시 현규진에게도 한 입 먹여 주었다. 한 입씩 사이 좋게 나눠 먹는
유원의 행동에 맞춰 현규진은 잠자코 입을 벌렸다. 츄러스가 맛있어서 계속 먹는 것도 있지만,
다시 찾은 이 소소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너무 좋아 그냥 유원이 하자는 대로 다 하고 싶었다.
조금 남은 끄트머리는 유원의 입으로 넣어 준 현규진이 입술에 묻은 설탕을 손끝으로 살살
닦았다. 그리고 그 설탕이 옮겨 묻은 엄지를 쪽 빨았다. 그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에 유원의
얼굴이 눈에 뜨이게 빨개졌다.
“나 궁금한 거 진짜 많아.”
“…….”
“물어보면 다 얘기해 줄 거야?”
“…응.”
“뭐부터 물어보지. 음….”
포크를 들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인 유원의 손가락 끝을 살짝 쥔 현규진이 손톱 위를 살살
문질렀다. 유원의 시선이 그 손 위로 닿았다가 다시 와플 위로 닿았다. 눈 깜빡이는 횟수가
늘어나고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흐르는 숨의 온도도 조금 높아졌다.
“언제 알았어? 나 좋아한다는 거.”
“아…. 음…. 갑자기 널 보면 막 너무 떨리는 거야. 넌 평소랑 똑같은데 나는 똑같지가 않은 거지
…. 네가 조금만 가까이 와도 막 너무 부끄럽고… 갑자기 그래서…. 생각해 보다가 알았어. 그게
언제냐면…. 음, 나 아파서 조퇴했을 때쯤?”
“아…. 그때. 내 꿈 꾼다고 했던 것도 그럼 나 좋아해서 그런 거야?”
꿈 이야기가 나오자 유원의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현규진은 그 구부려진 손끝을 펼쳐 다시 제
손안에 가두었다. 다시는 숨거나 도망갈 수 없도록.
“…어느 날부터 막… 네가 꿈에 매일 나오는 거야. 어떻게 매일매일 나올 수 있나 싶은데 진짜
매일 나와서…. 내가 널 좋아해서 나온 거겠지?”
“꿈에서 나랑 야한 거 했어?”
손가락을 완전히 손에 가둔 현규진은 이제 손끝으로 톡 불거진 유원의 손목뼈를 만지고
있었다. 하얀 양말 속 움츠러든 유원의 발 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 건 나중에 물어볼까?”
“…응.”
“알았어. 그럼 다른 거.”
다른 걸 묻는단 말에 눈에 뜨이게 안도하며 심호흡하는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유원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아무도 없기도 하고, 뭐 누가 있다고 해도 뭐
어떤가 싶었다.
“다시 손 줘.”
자리를 옮기느라 빠져나간 손을 잡으려 손가락을 펼치자 얌전히 유원의 손이 놓였다.
현규진은 손을 오므려 온기를 가두었다.
“내가 왜 좋아졌어?”
“…그게 나도 잘 모르겠긴 한데….”
“뭐야, 이유 없어?”
“그때 매점 앞에서… 이우준이 나한테 이상한 말 해서 네가 싸웠었잖아.”
현규진은 이우준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워낙 임팩트도 없는 미친 새끼라 얼굴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응. 그랬지.”
“그때 내가 그만하라고 하니까 네가 날 보면서… 기분 괜찮아졌냐고 물었거든.”
“응. 기억 나.”
“…그 말을 듣는데 심장이 쿵… 했어.”
아, 미친. 심장이 쿵 했대. 현규진은 앓는 소리를 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33 화(32/127)

33


친구로 지낸 18 년, 기억이 나는 약 12, 13 년 동안 유원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왜
없었나 이상할 정도로 정말 연애 쪽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게 아니어도 할 게
많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처음이었다. 유원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건. 그런데 그 상대가 저라니…. 현실 같지가
않은데 또 현실인 걸 마음은 인식하고 있는지 너무 기분이 좋아 돌아버릴 것 같았다.
“왜 그랬을까? 네가 내 기분 물어본 게 처음도 아니었는데…. 꼭 너한테는 내 기분이 제일
중요한 것처럼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맞아.”
“응?”
“나한테는 네 기분이 제일 중요해.”
아…. 또…. 유원은 다시 심장이 부드럽게 쿵 떨어지는 걸 느꼈다. ‘부드럽게’와 ‘쿵’이
공존한다는 게 이상하기는 하지만, 지금 마음은 그랬다.
“개수작 부리려고 하는 말 아니고 진짜 나한테는 그래.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렇게 됐어. 네가 기분 좋으면 나도 좋고, 안 좋으면 나도 안 좋고. 아프면
속상하고, 웃으면 나도 웃고 싶고.”
“…정말?”
“응.”
“…기분 좋아.”
“정말?”
“응.”
유원을 따라 장난스럽게 물은 현규진이 저와 같은 대답을 들려주는 또렷한 얼굴을 보며
웃었다.
“난 그냥 친하면 다 이런 건 줄 알았거든. 그냥 친한 것도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으니까
당연히 남들도 이런 친구면 다 이럴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래.”
“…….”
“그냥 놀리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라는 거야.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너한테 하는 거
하나도 다른 애한텐 못 하겠더라.”
“어떤 거?”
“음, 이렇게 얼굴 만지는 것도 그렇고, 학교 갈 때, 집에 갈 때 무조건 같이 가는 것도 그렇고,
아프면 밤새 옆에 있는 것도 그렇고.”
손목뼈를 매만지던 손을 들어 보들보들한 유원의 뺨을 문지른 현규진이 제 손길을 따라
불긋해지는 얼굴에 미소 지었다.
“넌 그런 생각 안 해 봤어?”
현규진의 질문에 유원은 곰곰 제가 현규진에게 하는 행동들을 떠올려 보았다. 현규진이
저에게 하는 것처럼 얼굴을 만진다거나 그런 행동을 자주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른
친구들에게 하는 것보다 현규진과는 스킨십을 더 많이 하는 편이기는 했다. 팔을 잡거나
스스럼 없이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눕기도 하고, 또 너무도 당연하게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뒤에서 허리를 안기도 하고. 그런 행동을 다른 애들한테 할 수 있을까?
아니, 할 수 없었다. 할 마음도 없고,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게 무척 이상하게 느껴졌다.
현규진과는 그 무엇도 이상하지 않았던 행동들이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느껴지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러네…. 다른 애들한텐 못할 것 같아.”
“예를 들면 어떤 거?”
“이렇게 손 잡는 것도 그렇고, 매일 매일 학교 같이 가는 것도 그렇고…. 학원 앞에서 기다리는
것도 다른 애가 그러면 무섭고 싫어.”
“존나 무섭지. 전에 그 꽃 들고 기다리던 새끼 생각나네. 아, 진짜 짜증 나.”
유원을 사랑한다며 꽃을 들고 기다리던 그 뭐 같은 낯짝만 떠올려도 빡쳐 죽을 것만 같았다.
현규진은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크게 떠 한 입 먹으며 열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화내지 마. 너랑 다니는 거 알고 이제 안 그러잖아.”
“전보다 덜하긴 한데 아직도 체육복 없어지잖아. 저번엔 마시다가 놔둔 우유도 없어지고.”
“조심하면 되지.”
“그런 생각을 하면 나랑 같이 다녀야지. 그렇게 피해 다녀?”
아프지 않게 유원의 코를 잡고 흔들었다가 놓은 현규진이 턱을 괴고 뚱한 얼굴로 유원과 눈을
맞췄다.
조금 곤란한 얼굴로 현규진의 눈치를 보던 유원이 아이스크림을 넘어 이 가게를 다 녹일 수도
있을 만큼 따뜻하게 사르르 웃었다.
“친구까지 깨지면 안 되니까….”
“나 좋아졌다고 하면 내가 욕할 것 같았어?”
“…응. 꺼지라고 할까 봐.”
“와, 날 얼마나 쓰레기로 보고 있는 거야? 내가 설마 너한테 그딴 소릴 할까.”
“그만큼 놀랄 일이잖아. 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하고….”
금세 시무룩해져 살짝 숙어진 유원의 고개를 따라 현규진의 고개도 기울었다. 익숙하고
장난스러우면서도 따뜻한 시선이 유원의 얼굴을 매만지고 이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원은
가만히 그 다정한 시선을 마주했다.
“걱정 많이 했어?”
“응….”
“무섭기도 하고?”
“…응. 엄청 많이.”
“피해 다니는 것도 힘들었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귀엽고 안쓰러웠다. 당장이라도 턱 아래를 쪼물쪼물 만지면서
귀여워하고 싶은 것을 참은 현규진이 손가락 끝을 아프지 않도록 약하게 눌렀다.
“그럼 그… 나 도장 갔다 올 때 카페에서 만난 것도 나 피해서 거기 갔다가 우연히 만난 거야?”
“아…. 응, 맞아. 그때 나 진짜 놀랐어.”
“학교 아침 일찍 간 것도 나랑 안 가려고 그런 거고?”
“…미안해….”
“이제야 다 이해가 되네. 이상하다 했어. 무슨 학원 숙제를 아침에도 하고, 저녁에도 하고
주말에도 하나 했어. 다행이다. 내가 싫어져서 그런 거 아니라.”
현규진의 말에 미안한 듯 시선을 살짝 내리고 있던 유원의 고개가 들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거든. 내가 존나 싫어졌거나 아님 내가 좋아졌거나.”
“내가 널 왜 싫어해, 갑자기….”
“내가 또 뭐 잘못해서 너한테 완전 아웃 당한 줄 알았지.”
“진짜 미안해…. 그런 생각까지 하게 하고…. 그럴 줄 몰랐어. 그냥 그러려니 할 줄 알았어.
그러는 동안 내가 빨리 마음 다 정리하고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됐어.”
조금 풀이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상황이 정리되면서 긴장이 풀린 것 같기도 한 유원은 얌전히
말을 이었다. 현규진은 조곤조곤한 그 목소리도, 실시간으로 조금씩 체력이 떨어져
피곤해지는 게 보이는 유원도 너무 좋아 가만히 눈앞의 얼굴과 목소리에 시선과 귀를
기울였다.
“정리가 안 됐어?”
“응…. 난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빨리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렇잖아. 우린 18 년이나
친구였고, 내가 이상한 마음을 느낀 건 겨우 며칠인데…. 다시 친구로 돌아가는 거 진짜 쉬울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어려웠어?”
“너무너무. 모의고사보다도 어렵고, 학원 레벨테스트보다도 어렵고….”
아, 진짜 미친 거 아냐. 모의고사보다도 어렵고, 레벨테스트보다도 어렵다니. 비유가 꼭 유원
같아서 머릿속이 다 홧홧했다. 진지하게 말하는 애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너무너무 귀여워
자꾸 여기저기 짓주무르고 싶어 손끝이 다 간지러웠다.
“그랬구나. 갑자기 왜 그렇게 살이 빠지나 했더니 마음고생해서 그런 거였네.”
“입맛도 없고, 뭐 먹는 것도 귀찮고 해서 잘 안 먹었거든.”
“그랬어?”
“응….”
“이제 맛있는 거 같이 또 많이 먹자. 빠진 만큼 다시 채워야지. 손목 더 가늘어진 것 봐.
부지런히 먹자.”
“응, 이제 괜찮아졌어. 아까 돈가스도 진짜 맛있었고, 와플이랑 츄러스도 다 맛있고…. 나 입맛
다 돌아왔나 봐.”
뿌듯한 듯 웃으니 말랑말랑한 볼이 위로 올라가 반짝거렸다. 아, 심장 아파. 현규진이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유원의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댔다. 제가 머리를 대자마자 유원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누, 누가 봐….”
“보긴 누가 봐. 아무도 없는데. 그리고 보면 뭐. 긴장 풀어. 너 어깨 엄청 딱딱해.”
“…어떻게 푸는지 몰라.”
“힘 빼 봐. 숨 들이마셨다가 후우…. 따라 해 봐. 숨 들이마시고.”
여전히 어깨에 머리를 댄 채 옆에서 들려오는 숨 들이마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 현규진이
웃었다. 하여튼 정유원 진짜 존나 귀엽다니까.
“자, 이제 뱉어야지. 후우.”
“후우….”
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딱딱하게 힘이 들어갔던 어깨가 조금 편안해졌다. 그대로 잘 것처럼
눈을 감으려던 현규진은 유원의 허벅지 위에 어색하게 놓인 손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가느다란 손가락을 톡 건드렸다. 아주 살짝 건드렸는데도 어깨까지 움찔 튀었다. 꼭
놀이기구를 탄 것 같았다.
“…….”
“…….”
살짝 건드리기만 하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아 이번에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를 얽자 다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현규진은 잠자코 조금 더 단단히 손가락을 얽으며 유원의
손을 잡았다. 처음 잡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숨쉬기가 불편해졌다. 친구로 잡는 게 아니라
그런 걸까.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유원과 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다 해 보고 싶었다.
얽힌 손가락을 당겨 장난을 치자 주춤하던 유원의 손가락도 느릿하게 움직였다. 제 쪽으로
당기는 움직임에 기꺼이 끌려갔다가 조금 힘을 주어 버티니 유원의 손가락에도 살짝 더 힘이
들어갔다. 당기고 또 당겨질 때마다 손가락이 마주 문질리며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
한참이나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던 현규진이 그대로 유원의 손을 덥석 잡아 제 손안으로
가두었다. 모든 움직임이 멎고 하얗고 상대적으로 작은 손은 현규진의 손에 뒤덮인 채
사라졌다.
“진짜 누가 보면 어떡해….”
“보면 보는 거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면서도 손가락을 오므려 제 손을 마주 쥐는 유원을 보며 웃은
현규진이 어깨 위로 얼굴을 비볐다.
“솔직히 너 내 얼굴에 떨렸지. 너무 잘생겨서.”
친구 사이 고백 금지-34 화(33/127)

34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냐. 괜히 또 뺀다.”
“네 얼굴은 내 취향 아니야.”
“평생 들은 말 중에 진짜 제일 어이없어.”
진짜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고개를 든 현규진이 유원과 눈을 맞췄다. 그런 현규진을 물끄러미
별 변화 없는 얼굴로 보던 유원이 결국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이야.”
“아, 뭐야.”
“얼굴 취향인 게 그렇게 중요해?”
“당연히 중요하지. 난 너 예뻐서 더 좋은데.”
“…이, 이상한 말 하지 마…. 예쁘긴 뭐가 예뻐.”
“친구일 때도 예뻤어, 넌.”
다정한 말과 따뜻한 웃음, 상냥한 체온과 더는 불편하지 않은 두근거림. 유원은 손가락을 더
오므려 현규진의 손을 마주 쥔 채 제 두 눈에 비치는 그 웃음을 따라 입술을 움직였다.
“나도 사실… 네 얼굴 좋아….”
“진짜?”
“…응.”
얼른 고개를 슬쩍 기울여 유원에게 애교를 부린 현규진이 씩 웃었다.
“네 취향이야?”
유원은 대답하기 부끄러워 끄덕임으로 답을 대신했다. 부디 현규진에게 답이 잘 전해지기를
바라며.
“오늘부터 진짜 얼굴 관리 더 빡세게 해야지.”
웃음과 함께 금세 얼굴로 장난기가 번졌다. 유원은 계속 웃기만 했다. 그냥 자꾸 너무 좋아서
웃음이 났다.
현규진이 좋았다. 갓 구운 와플보다도 더 폭신하고, 설탕이 잔뜩 묻은 츄러스보다도 달콤하고,
새콤달콤한 레몬티보다도 따뜻한 현규진이.
***
학원가에서 집으로 가는 길을 같이 몇 번이나 갔는지 셀 수도 없지만, 오늘은 그 길이 아주
특별하게 느껴졌다. 밤바람이 제법 서늘한데도 달큰하게만 느껴져 신기했다. 얼마 전 혼자
집에 갈 땐 주변은 잘 보이지도 않고 내내 현규진 생각만 했었는데 신기하게도 현규진과 함께
있으니 함께 있는 이 순간의 작은 것들까지 전부 다 특별하게 느껴지며 눈에 들어왔다.
“사람도 없는데 손 잡고 가도 돼?”
괜히 조용한 주변을 한번 본 유원이 먼저 손을 움직여 현규진의 손가락을 살짝 쥐었다. 아무도
없으니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차가운 밤공기 안에서도 현규진의 손은 참 따뜻했다.
손가락만 살짝 닿았는데도 느낄 수 있었다.
“아, 뭔가 이상해.”
“뭐가? 손 잡지 말까? 아직 좀… 어색하긴 하지이….”
“그게 아니라.”
슬그머니 떨어지는 손을 따라간 현규진이 다시 유원의 손을 제 손안에 가두어 쥐었다.
“방금 손 닿았을 때 기분이 꼭…. 그 전에 네가 내 귀 만졌을 때랑 비슷해서.”
“귀 만졌을 때?”
“어. 피어싱 자리 만졌잖아.”
“아….”
“그때 기분 이상했거든. 막 몸 어딘가가 간지러운데 어디가 간지러운지는 모르겠고.”
가만히 현규진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유원이 고개를 들어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현규진과
눈을 맞췄다.
“나도 네가 갑자기 가까이 오면 그랬어. 손끝도 간지럽고, 발끝도 간지럽고….”
“아, 맞아. 나도.”
“배도 막 울렁울렁….”
배 이야기까지 하던 유원이 조금 부끄러워져 입을 슬쩍 다물었다. 이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야 밀려들었다. 배가 울렁인 다음 따라오는 느낌이 어떤 건지,
또 뭘 하고 싶어지는지 여러 번 겪어 너무나 잘 아는 이유였다. 현규진 앞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바보같이 말을 해 버려 귀가 다 화끈거렸다.
“나도 그랬어. 네가 귀 만졌을 때.”
“…….”
“그땐 좀 이상하다 생각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꼴린 거 맞나 봐.”
꼴린 거…? 유원은 제법 생소한 단어를 한 번 더 곱씹어 보았다. 꼴린 거. 꼴린…. 꼴…. 아무리
그쪽으로 무지하다지만, 그래도 다른 애들이 가끔 쓰는 그 말 정도는 유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미쳤어, 진짜. 내가 말, 말한 건 지금 네가 말하는 그, 그런
거랑은 완전히 달라. 난 꼴…. 그런 거 아니야.”
“알았어. 아니야, 아니야. 우리 정유원은 그딴 저질스러운 말 알지도 못해. 암, 당연히 모르지.”
“…알긴 알아.”
가로등 아래에서 붉어진 유원의 귀 끝을 본 현규진이 고개를 젖힌 채 하늘을 보고 심호흡했다.
정말이지 유원이 귀여워 딱 죽을 것 같았다.
“그런 말 어디서 들었어? 나 너한테 그런 말은 한 기억이 없는데.”
“애들이 가끔 쓰잖아. 최해영도 쓰고, 김준재가 쓰는 거 들은 적도 있어. 그… 너 꼴리는 대로
하라거나….”
“와, 진짜 안 어울려. 네가 그런 말 하는 거.”
“아무튼 난…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니야. 진짜 아니야. 진짜, 진짜.”
“알았어. 존나 아니야.”
귀가 빨개진 채로 저렇게 강한 부정을 해 대는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현규진은
그냥 유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주기로 했다. 유원의 말이니까. 유원이 아니라면 아닌
거였다.
“아, 벌써 다 왔네.”
평소처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지만, 평소와는 분명히 다른 분위기 때문인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아파트 앞이었다. 현규진은 여전히 잡고 있는 유원의 손을 느릿느릿 흔들며
공동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유원은 슬쩍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조금
어색하게 걸음을 옮겨 아주머니의 뒤로 가 섰다. 현규진도 잠자코 그런 유원의 옆에 서서 슬쩍
팔을 밀었다.
1 층입니다.
곧 1 층으로 내려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아주머니가 먼저 그 안으로 올라 13 층 버튼을
눌렀다. 바로 위층 집이라 알 만도 하지만, 워낙 각 세대 분리가 잘 되어 있고 한 층에 집 하나만
있는 단독적인 구조의 아파트라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주머니의 뒤를 이어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유원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 다정한
목소리에 아주머니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현규진도 그런 유원을 따라 대충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아주머니가 선 쪽에서 조금 떨어진 반대쪽 구석으로 유원을 가두듯 세웠다. 그리고
6 층 버튼만 눌렀다.
“…….”
“…….”
고개를 들어 착실하게 숫자가 올라가는 걸 보며 슬쩍 손을 움직인 현규진이 아파트
공동현관을 들어설 때까지도 잡고 있던 유원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에 놀란 유원이 얼른 손을
빼내 뒤로 숨겼다.
하지 마…. 소리는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말을 전하는 게 또 너무 귀여웠다. 싫어, 할 거야.
똑같이 입 모양으로 고집스레 말을 전하고 뒤로 숨은 유원의 손을 다시 잡았을 때 6 층에
다다랐다.
“…안녕히 가세요.”
“네, 잘 가요.”
얼굴이 빨개진 유원이 얼른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런 유원을 따라 내린 현규진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유원의 백팩을 내렸다.
“자고 갈까? 오늘 이모 촬영 날이라던데, 엄마 말로는.”
“…그렇긴 한데…. 다음에.”
“왜. 또 피하는 거야?”
“아니야, 피하는 게 아니라…오늘 너무 일이 많았잖아. 하나하나 혼자 생각해 보고 싶어서…. 너
있으면 그런 생각 하나도 못 하니까.”
“나 있으면 왜 생각 못 하는데?”
장난스럽기도 한데 답을 분명히 기다리는 질문이었다. 유원은 제 대답을 기다리며 선
현규진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현규진을 좋아하는 마음을 소리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런지 이런 간단한 대답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현규진과 사귀기로 한지 아직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너랑 있으면 자꾸 네 생각만 하게 돼.”
“그럼 좋은 거 아냐? 잘생긴 내 생각만 하면.”
상체가 숙어지며 고개도 느릿하게 기울어져 내려왔다. 유원은 얼굴 가까이 훅 다가오는
현규진과 눈을 맞추며 두 손으로 어깨를 잡아서 더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왜 밀어, 서운하게.”
“아, 안전…거리야. 너도 지켜….”
유원의 입에서 나오는 안전거리라는 말을 곱씹은 현규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랑 사고 날까 봐 무서워?”
“…아직! 적응이 안 돼서 그래. 시간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긴. 아직 우리 사귄 지 하루도 안 지났으니까. 알았어. 들어가.”
고개를 끄덕인 유원이 뒤돌아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자 현관으로 들어가 집 안쪽에
가방을 놓아 준 현규진이 다시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었다.
“내일부터는 원래 학교 가던 시간에 갈 거지?”
“응.”
“내일 봐.”
“응. 톡… 할게.”
“그냥 이러고 가면 되나? 사귀면 헤어질 때 뽀뽀 같은 거 하고 그러던데.”
“지, 진짜 미쳤어?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얼른, 얼른 가. 빠이!”
얼굴은 물론이고 손까지 뜨겁게 확 열이 오르는 느낌에 얼른 인사한 유원이 문을 닫았다. 닫힌
문밖에서 또 현규진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나 갈게.”
…진짜 미쳤나 봐. 너무 부끄러워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현규진이 가는 소리를
조금 더 듣고 싶어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유원은 엘리베이터에 타 버튼을 누르는
소리를 다 들은 뒤에야 현관을 벗어날 수 있었다.
“…….”
무거운 가방을 들고 방으로 간 유원은 멍하니 갈아입을 옷을 꺼내 바로 욕실로 가서 샤워했다.
포근한 향이 나는 바디워시로 거품을 잔뜩 내서 씻고 나와 우유에 꿀을 조금 넣어 따뜻하게
데워 마시자 몸에 남아 있던 긴장이 완전히 풀리는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큰 집에 혼자 있을 때면 허전하다는 기분도 들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혼자여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35 화(34/127)

35


따뜻하고 달콤한 우유를 마시며 방으로 간 유원은 진동이 연달아 울리는 휴대폰을 들어
침대로 올랐다.
[규진 : 잘 준비 끝]
[규진 : 아직 잘 시간 아니긴 하지만]
[규진 : 자기는?]
[자꾸 이상하게 부르지 마]
[규진 : 너무해]
[나도 씻고 나왔어]
[규진 : 꿀우유 마시지?]
정말 놀란 유원이 마시던 우유 컵을 내려놓고 얼른 사진을 찍어 현규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떻게 알았어?]
[규진 : 날 추워지면 자주 마시잖아]
[규진 : 안 봐도 다 알아]
[규진 : 정유원에 대한 건 뭐든 다 알지]
[규진 : ㅋㅋ좀 무섭나?]
다른 사람이 저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말하면 조금 무서울 것도 같은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현규진이라 조금도, 정말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좋았다.
유원은 답을 고민했다.
안 무서워.
안 무섭고 좋아.
하나도 안 무서워.
너라서 괜찮아.
여러 말을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지우는 사이 몇 분이 지나 버렸다. 제가 아무 말도 안 해서
그런지 현규진도 더 이상 뭔가를 올리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져 뭐라도 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진동이 울렸다. 유원은 화면에 뜬 ‘규진’이라는 이름을 보며 심호흡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갑자기 답 없어서.
“아…. 뭐라고 보낼지 고민했어.”
-고민까지 했어? 왜. 진짜 무서운데 무섭다고 하면 내가 상처받을까 봐?
수화기 너머에서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규진이 침대에 누워 있다가 자세를 바꾼
모양이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유원도 이불을 끌어올려 다리 위로 덮었다.
“아니야, 그런 거. 하나도 안 무서워. 네가 왜 무서워. 난 너 무서웠던 적 한 번도 없어.”
-그럼 그렇게 보내면 되지, 뭘 그렇게 고민해.
“이게 말로 하는 건… 괜찮은데 톡으로 보내면 괜히 더 진지해 보이고 좀… 그래. 이상하단
말이야.”
-아, 그거 뭔지 알아. 아무튼 뭔 일 있나 해서 걸었어. 끊을 테니까 이제 혼자 생각할 거 해. 방해
안 할게. 아침까지.
괜히 이불 끄트머리를 만지작댄 유원이 쿠션까지 가져와 품에 안았다. 그리고 겨우 작게
목소리를 끌어냈다. 지금 제가 낼 수 있는 용기의 크기 만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5 분만 더 할래?”
-응?
“생각은… 그다음에 해도 되니까… 딱 10 분만 더 얘기하자.”
-1 초 사이에 5 분이 늘어난 것 같은데.
“…원래 15 분이라고 했는데 5 분 줄인 거거든.”
너무 부끄러워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유원은 커다란 쿠션 위로
아예 얼굴을 파묻었다.
-알았어. 30 분만 더 하자.
“…응.”
통화를 5 분 만큼 더 할 용기를 내서 말했지만, 현규진은 저에게 30 분을 돌려주었다. 유원은
고개를 조금 들어 쿠션에 입술을 묻은 채 수화기 안에서 들려오는 현규진의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꿀우유는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따뜻하고 다정한 밤이었다.
***
평소보다 30 분 일찍 일어난 현규진이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원래도 학교 갈 때
머리를 만지긴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심각했다.
“방이 이게 뭐야.”
햄치즈 샌드위치를 만들어 방으로 가지고 온 현규진의 엄마가 침대 위에 잔뜩 놓인 티셔츠에
놀란 얼굴을 했다.
“우리 규진이가 무슨 바람이 들어서 아침부터 이렇게 멋을 낼까.”
“엄마, 나 머리 어때.”
“예뻐. 예쁘긴 한데 진짜 무슨 멋을 그렇게 내. 티셔츠도 몇 개를 꺼낸 거야. 그냥 다 흰 티셔츠
똑같은 거 아냐?”
“완전 달라. 레터링 너무 큰 건 촌스러워. 로고 플레이도 좀. 아, 옷 좀 사야겠어.”
“엄마가 옷 사다 줘?”
“내가 가서 살래. 아, 이거 샌드위치 정유원도 좋아하는데.”
“유원이 거 챙겨놨어.”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면서 웃은 현규진이 주스만 한 컵을 비우고 제 몫의 샌드위치와 부엌
식탁에 놓인 유원의 샌드위치를 챙겨 집을 나섰다.
“먹고 가지.”
“정유원이랑 같이 먹을래.”
“규진아, 너 여친 생겼어? 멋 부리는 게 수상한데.”
여자 친구는 아니고 남자 친구가 생기긴 했는데. 입 안에 고인 말을 그냥 삼킨 현규진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라 6 층으로 내려갔다.
“정유원. 나.”
벨을 누르고 조금 기다리자 발소리가 들렸다. 현규진은 문으로 다가오는 이 소리가 좋았다.
친구일 때도 좋았고, 지금도 좋았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사이로 보이는 유원을 보는 것도
좋았다. 왜 좋은지 모르겠는데 그냥 좋아서 유원의 집에 올 때마다 웃게 됐다.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엄마가 샌드위치 줘서 같이 먹고 가려고.”
“와, 맛있겠다.”
유원 몫의 샌드위치 종이 포장을 벗겨 먹기 좋게 접은 현규진이 흘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유원에게 건네주었다.
“잘 먹을게.”
햄과 치즈, 그리고 양상추, 토마토까지 든 도톰한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문 유원의 볼이
빵빵해졌다.
“진짜 맛있다아…. 사 먹는 것보다 이모가 만든 샌드위치가 더 맛있어.”
평소 입이 짧은 유원이 이렇게 뭔가를 맛있게 먹을 때마다 현규진은 무척 흐뭇해졌다.
쓸데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문득 궁금했다. 유원이 먹는 걸 보며 제가 이렇게 흐뭇하면 도대체
이모와 이모부는 얼마나 흐뭇한 걸까.
“어, 머리 오늘은 좀 다르네?”
샌드위치를 작게 한 입 더 베어 문 유원이 현규진의 머리를 보며 오물오물 입을 움직였다.
“예쁘다. 잘 어울려.”
어떤지 묻기도 전에 나온 칭찬에 현규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잘 어울려? 나 잘생겼어?
장난치듯 여러 말을 하고 싶었는데 정작 유원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고 나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침부터 더 잘 보이고 싶어 노력한 보람이 넘쳤다.
“예뻐?”
“응, 예뻐.”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아주 살살 만져 본 유원이 웃었다. 잘생겼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예쁘다는 말은 현규진에게 무척 낯선 말이었다.
“머리만 예뻐?”
유원에게 더 칭찬 받고 싶었다. 예쁘다는 말도 더 듣고 싶고, 저를 보고 웃는 것도 더 많이 보고
싶었다. 수도 없이 봐 온 얼굴인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고 또 떨렸다.
“…얼굴도 예뻐.”
아, 미쳤다. 진짜. 어떡하지. 정유원 진짜 존나 너무 예쁜데. 진짜 막 반짝반짝한데.
“네가 더 예뻐.”
“…….”
“왜. 예쁘단 말 싫어?”
“…그게 아니라….”
“응. 그게 아니라?”
“…우리 진짜 사귀는 거 맞구나 싶어서.”
식탁 위로 팔을 올려 턱을 괸 현규진이 가만히 유원의 목소리에 온 촉각을 다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뭐 어제만 사귀고 오늘은 안 사귀는 줄 알았어?”
“어제 네가 사귀자고 하는 꿈을 꿔서…. 아침에 일어나니까 좀 헷갈렸어.”
“그게 꿈이면 오늘부터 또 마음고생해야 하는데 괜찮겠어?”
아…. 마음고생. 유원은 한동안 축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내내 떨리고 설레어 너무 힘들었던
저의 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는 건 싫었다.
“안 괜찮아. 싫어….”
“응, 나도.”
“…….”
“너 또 나 버리고 다른 새끼들이랑 다닐 거 아냐. 그 꼴 어떻게 또 봐. 싫어.”
생각만 해도 싫은지 찌그러지는 현규진의 미간을 손끝으로 꾹 누른 유원이 다시 샌드위치를
한입 더 먹었다.
“나랑 밥 먹고, 나랑만 매점 가고, 나랑만 집에 같이 가. 학원도 계속 데려다줄 거고, 또 끝날 때
가서 같이 집에 갈 거야. 주말에도 나랑 놀아. 너 공부하면 나도 공부할게. 카페 갈 거면 나랑
같이 가고, 또….”
“그건 그냥 하루 종일 뭐든 다 너랑 같이 하는 거 아니야?”
“맞아. 다 나랑 같이 해.”
식탁 위에 놓인 유원의 빈손을 잡은 현규진이 손끝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현규진의 입술
사이로 물리는 손가락을 멍하니 보던 유원이 얼른 손가락을 접어 빼냈다.
“넌 손에서도 존나 좋은 냄새 나. 네 방에서 나는 그 냄새. 이불에서도 나는데, 이거.”
제 손에서 빠져나간 유원의 손을 부드럽게 다시 잡아 쥔 현규진이 손목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아주 포근하고 따뜻한 냄새가 났다. 어릴 때는 유원에게서 구름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하얗고 폭신폭신해 보이는 구름을 보면 늘 유원이 떠올랐으니까.
“이것도 다 내 거야, 이제. 다른 새끼들이 아는 거 싫어. 나만 맡을래.”
손바닥에 한 번, 그리고 손목에 한 번 짧게 입 맞추는 현규진을 멍하니 보던 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현규진이 아니면 누구와도 이런 느낌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나도 다른 사람이 아는 거 싫어.”
“…….”
“너만 알았으면 좋겠어.”
유원의 손목에 닿아 있던 현규진의 입술이 톡 튀어나온 뼈 위로 닿았다. 입술로 짓눌렀다가
벌려 아프지 않게 깨물자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아침부터 예쁘기 피곤하지.”
“…또 이상한 소리.”
“그런 말 듣기 싫으면 예쁘질 말아야지.”
다시 쪽 소리가 나게 손목에 입 맞춘 현규진이 유원의 발긋해진 뺨을 매만졌다. 부끄러워
달아오른 뺨과 귀, 샌드위치를 먹을 때마다 움직이는 입, 그리고 한 번씩 흘끗흘끗 저를
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놀라 아래로 뚝 떨어지는 시선까지 그 무엇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떡하지, 진짜. 너무 좋은데. 예쁘게 불거진 유원의 손목뼈 위를 살살 문지르며 현규진이
웃었다. 단언컨대 최고의 아침이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36 화(35/127)

36


수업 시간에 대부분 엎드려 자던 현규진은 오늘 한 번도 엎드리지 않았다. 수업을 듣는 유원의
뒷모습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냥 턱을 괴고 가만히 숙였다 들었다 하다가 옆으로 기울이기도
하고, 고개를 조금 돌리면 보이는 보송보송한 볼을 보다 보면 수업 시간이 훅 지나갔다.
잠도 안 오고 정신이 너무 또렷해서 이상할 지경이었다. 현규진 얼굴을 이렇게 오래 자세히
보는 게 처음이라며 몇몇 선생이 농담이랍시고 말을 건넸지만, 그딴 건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계속 유원을 눈에 담는 것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18 년 소꿉친구가 애인이 됐다는 걸 떠올리면 이게 이렇게 쉽게 친구에서 애인이 될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한데 사실 그것에 대한 고찰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기분이 좋기 만한 일을 굳이 더 깊게 생각해 들쑤시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현규진은 그저
지금 자신의 감정, 정유원을 독차지한 것 같아 잔뜩 고양된 감정 하나에만 초점을 맞췄다.
“이제 나 안 피해도 돼서 좋지.”
“응. 마음이 편해졌어. 어제까지만 해도 너 보면 너무 미안했는데….”
“자기 너무 매몰찼어.”
“…….”
자기라는 말에 손끝이 간지러워진 유원이 교문을 나서며 현규진을 슬쩍 바라보았다. 전에도
가끔 장난처럼 이렇게 부른 적이 있지만, 현규진을 좋아하게 된 뒤로 자기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쿵 떨어지고 지금처럼 손끝이 간지러워 마음이 이상했다.
“왜?”
“넌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잘하나 싶어서.”
“무슨 말?”
“그… 자기…. 그런 거.”
“아, 왜 못 해. 하면 하는 거지. 너도 해 봐.”
“…난 못 해.”
제법 단호히 고개를 저은 유원이 생각만 해도 화끈화끈한 귓가를 손으로 덮었다.
“아, 왜. 해 줘. 우리 이제 그렇게 불러도 되는 사이잖아.”
“…….”
“응? 자기야.”
“…미, 미쳤나 봐.”
“욕만 잘해, 정유원. 아주 욕쟁이야.”
시무룩한 척하는 현규진을 흘끗 다시 본 유원이 입술을 달싹였다. 진짜 기분이 가라앉은 것도
아니고 그런 척을 하는 거라는 걸 다 알면서도 저는 또 속아 줄 수밖에 없었다.
“…자….”
“한 글자만 더.”
“…으…. 난 못 하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팔을 문지르는 유원을 본 현규진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온갖
달착지근한 걸 다 뭉쳐놓은 것처럼 생겨서는 간지러운 말 하나 못해 어쩔 줄 모르는 게 너무
귀여웠다.
“안 해도 돼.”
“삐졌어?”
“그딴 걸로 왜 삐져. 그런 거 하나도 안 중요하니까 걱정하지 마.”
유원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고 목덜미까지 부드럽게 주무른 현규진이 얼굴에 닿는 11 월의
차갑지만, 기분 좋은 바람과 유원의 시선을 마주하며 입매를 시원하게 늘려 웃었다.
이상하리만치 들뜬 마음이 펑 터질 것만 같았다.
***
유원이 학원에 들어가는 걸 본 현규진은 김준재와 최해영이 있는 단톡방 알림을 끄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부모님이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라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텅 비어 오히려 좋은 집으로 들어가 교복 셔츠를 벗고, 바지만 편한 조거 팬츠로 갈아입은
현규진이 침대로 뛰어들어 엎드렸다.
혹시라도 잠이 들면 안 되니 유원의 학원 끝나는 시간 30 분 전에 알람까지 맞춘 다음
현규진은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것들을 하나씩 검색했다.
‘친구랑 연애’라고 검색을 하자 뭔가가 굉장히 많이 떴다. 대충 제목만 보며 아래로 내려가던
현규진은 제가 가장 궁금한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제목을 눈에 담았다.
‘친구와의 연애. 달라져야 할 것과 달라지면 안 될 것들.’
아니, 나만 궁금해하는 게 아니구나. 현규진은 제목을 눌러 누군가가 적어 둔 글을 느릿하게
눈으로 훑어 내렸다.
친구라는 것은 이미 서로를 향한 호감을 기본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관계이다. 그렇기에 그
호감이 방향을 조금만 바꾸어도 당신은 친구와 연인이 될 가능성과 마주하게 된다.
“…….”
어쩐지 유원이 마음속 일기장에 혼자 몰래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유원이 쓴 것도 아니고, 유원에게 직접 듣는 것도 아니지만, 유원이 저에게 가지고 있던
호감의 방향이 조금 바뀌어 저를 친구가 아닌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심장이 막 조여들고 기분이 무척 이상해졌다.
저를 보고 떨리기 시작했을 때 유원의 눈에 비친 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순간을 보지
못한 게 무척 아쉬웠다. 분명, 분명히 무척 예뻤을 테니까.
“아….”
아니, 잘 생각해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날 그 매점 앞에서 유원에게 개소리를 하는
놈을 패다가 유원이 그만하라고 말려 돌아봤을 때 그 얼굴이 분명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괜찮아졌냐는 제 물음에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였을까. 유원의 마음속에
있던 감정이 방향을 튼 순간이.
‘…괜찮아졌어.’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유원을 떠올린 현규진이 베개 위로 열이 오르는 얼굴을 파묻었다. 아,
진짜 미칠 것만 같았다. 자꾸 마음이 들뜨고 손끝이 막 저릿했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고
싶었다.
“아!”
또 생각났다. 그때 갑자기 정유원 빨개져서 아픈 줄 알고 보건실 데려가 눕혔었는데. 평소에
아프면 하얗게 질리던 애가 귀도 빨갛고 목덜미도 빨갛고 얼굴까지 불그레해서 아주 많이
놀라 제대로 경기가 난 모양이라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그게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진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현규진은 온몸이 다 저릿저릿한 것을 느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괜히 방 안을 돌아다녔다. 더운 것 같아 창을 활짝 열고 심호흡을 하다가 그것으로도 부족해
부엌으로 가 콜라 한 캔을 따 단숨에 반을 비웠다.
“…….”
전과 달라 조금 이상할 때도 있었지만, 대수롭잖게 여겼던 유원의 행동들이 다 저와 관련이
있었던 거라니…. 와, 어떡하지. 소파로 가 몸을 확 파묻으며 앉은 현규진이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을 때 반드시 달라져야 할 것! 눈앞의 사람은 더 이상 내 ‘친구’가
아니라는 의식. 그 의식이 변하면 친구니까 가능했던 것들이 불가능해지고, 친구여서
불가능했던 것들이 가능해진다.
조금 더 포스트에 쓰인 글을 읽어 내려가던 현규진이 이전 페이지로 돌아갔다. 있는 척
장황하게 늘어만 놓고 알맹이는 없는 글 따위를 읽으면서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몇 개 더 글을 읽어 봤지만, 마찬가지로 그냥 다 아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친구일 때 하던
행동을 버리고, 상대가 연인이라는 걸 자각한 채로 행동을 해야 한다는 두루뭉술한 말만
잔뜩이라 그냥 휴대폰을 대충 옆으로 던지고 가만히 꺼져 있는 커다란 TV 화면을 응시한
현규진이 자연스럽게 유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
친구일 때랑 사귈 때랑 뭐가 달라져야 하지? 군더더기가 붙지 않은 가장 원초적인 물음이
머릿속을 채웠다. 지금은 뭐가 달라졌지?
정유원이 날 좋아하는 걸 알게 된 게 달라졌고, 어디로 데리고 가거나 보호해야 하는 이유가
아니어도 손을 잡고 싶으면 잡을 수 있는 게 달라졌고, 또….
곰곰 생각을 해 보지만 사실 아주 크게 많이 달라진 건 아직 없었다. 이제 사귄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니까.
그럼 앞으로 뭐가 더 달라져야 하지? 그래도 사귀는데 학교 같이 다니고, 밥 같이 먹고, 주말에
놀고 그런 것만 해도 되나? 그럼 친구일 때랑 너무 다 똑같은 거 아닌가?
“…….”
친구일 땐 할 수 없는데 사귀면 할 수 있는 거…. 사귀니까, 사귀는 사이에만 할 수 있는 거…. 손
잡고, 그다음은?
그다음. 그 세 글자가 맺히는 순간 입술이 바짝 마르고 가만히 앉아 있기가 또 어려워졌다.
현규진은 괜히 소파 끝에 예쁘게 놓인 커다란 쿠션을 들어 품에 안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사귀니까 그… 안아 줘도 되나? 정유원 안았던 적이 있었나? 현규진은 쿠션을 거의 터뜨릴
것처럼 꽉 안은 채 머리를 굴렸다.
“아….”
정유원을 안아야지! 하고 안은 건 당연히 아니지만, 몇 번 그런 적이 있기는 했다. 아픈 유원을
품에 안아 기대게 한 채로 차가 오기를 기다렸던 적이 있었고, 정말 추웠던 날 유원이
너무너무 추워해서 제 겉옷을 하나 더 입혀 주고 안아 줬던 적이 있었다. 또… 저번에 미친
새끼가 계단에서 유원을 치고 가서 굴러떨어질 뻔한 애를 안 듯이 잡았던 것도 떠올랐다.
그때 기분이 어땠더라. 떠올리려 노력해 보지만, 워낙 그때 상황들이 대부분 다 급하고 제가
유원을 보호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어서 그런지 마음이 급하고, 긴장 됐던 것 외에는 잘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게다가 여태까지 누구를 사귀어 본 경험도 전무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지금 제가
생각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포털에 검색 따위를 다 해 봤겠는가.
“…….”
안는다. 유원을 안는다. 제가 지금 쿠션을 안고 있는 것처럼 유원을 안으면….
“…아, 씨발.”
미쳤다. 생각만으로도 죽을 것 같아 쿠션을 옆으로 놓은 현규진이 입고 있는 셔츠 앞을 잡아
펄럭였다. 그냥 가만히 있는데 자꾸 유원만 생각하면 체온이 올랐다. 거기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것은 덤이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37 화(36/127)

37


무슨 일이 없는데 그냥 안아 줘도 되나? 헤어지기 전에 오늘 한번 안아 줘 볼까? 또 으….
하면서 밀면 어쩌지. 그건 좀 속상할 것 같은데. 만약에 성공하면, 그다음은? 높은 천장으로
유원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말갛고 말랑하고, 온순해 보이는 그 얼굴이.
…미쳤다. 진짜. 나 정유원이랑 진짜 키스하는 거야?
현규진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
수업이 끝나 가방을 챙긴 유원이 이윤성과 함께 복도를 걸어가 1 층으로 내려갔다.
“현규진이랑 화해했어? 오늘은 왔네?”
“응? 아…. 응. 싸운 건 아니긴 한데….”
“잘됐다. 너 엄청 신경 썼잖아.”
“…내가?”
“응. 싸운 건 아니라면서 현규진 얘기만 나오면 울 것처럼.”
내가 그랬나…. 나름 의연하게 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제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멋쩍어
괜히 머리를 만진 유원이 이윤성에게 사과했다.
“미안, 나 때문에 불편했지.”
“아니야. 둘이 엄청 친해 보였는데 왜 갑자기 그렇게 됐나 걱정이었는데 화해해서 다행이야.
미안하라고 한 말 아니라 진짜 다행이라 한 말이야.”
“고마워.”
“고맙긴. 그럼 나 먼저 간다? 학교에서 봐.”
“응, 빠이.”
손을 흔들어 인사한 유원이 기다란 현규진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심호흡했다.
이제 더는 이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현규진을 보면 한 번씩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긴장이 되곤 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후우…. 현규진이 알려 준 것처럼 몸에 들어간 긴장의 힘을 빼기 위해
따라 한 유원이 건물을 나섰다.
“어, 오늘은 좀 일찍 끝났네?”
“응. 5 분 일찍 끝났어. 아까 애들이 오늘은 다 빨리 와서 5 분 먼저 시작했거든.”
“5 분 더 빨리 보고 좋은데.”
씩 웃는 현규진을 올려다보며 웃은 유원이 오늘따라 더 짙게 확 끼치는 좋은 향에 현규진
쪽으로 얼굴을 더 가까이 기울였다. 평소에 현규진에게서 나는 그 좋은 향이 두 배쯤 더 짙게
나고 있었다.
“씻고 왔어?”
“어? 아…. 어…. 그… 땀이 좀 나서….”
오늘 유원을 집에 데려다주고 헤어지기 전에 안아 주겠다는 생각으로 샤워를 하고, 유원이
평소 좋아하는 제 바디워시 향과 같은 향의 향수까지 살짝 뿌렸는데 너무 티가 난 모양이었다.
현규진은 괜히 얼버무리며 미소 지었다.
“좋은 냄새 나서. 너랑 이 바디워시 향 진짜 잘 어울려. 그거 기억 나? 너 이거 중학교 들어갔을
땐가부터 쓰기 시작한 건데 그때 너한테 나는 냄새가 너무너무 좋아서 나도 이거 따라 샀잖아.
그런데 나한테서 나는 냄새는 너한테서 나는 냄새만큼 안 좋은 거야. 진짜 슬펐는데.”
“그래서 너 진짜 반쯤 울면서 나한테 네가 쓰던 거 줬잖아. 세 번 밖에 안 썼어…. 하면서.”
지금보다 키도 더 작고 훨씬 더 어린 티가 나던 유원과 포근한 우디 향은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때 잔뜩 실망해 눈물을 꾹 참고 저에게 바디워시와 바디로션까지 주던 유원을
떠올린 현규진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정유원 진짜 웃겨.”
“그땐 진짜 너한테 나는 냄새가 어른 냄새처럼 느껴졌거든.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좀 어른스럽긴 하지.”
“다른 건 아니고 딱 냄새만.”
“자기, 너무 단호하다.”
자기 소리에 또 움찔대는 유원을 슬쩍 본 현규진이 인적이 드문 골목에 다다랐을 때 또 손을
내려 손끝을 건드렸다. 잠시 머뭇대던 유원의 손가락이 제 손끝을 마주 건드리다가 감기는 게
느껴졌다.
“토요일에 나 옷 사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응. 같이 가.”
“커플티 사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란 유원의 입술이 퐁 벌어졌다. 뭔가 현규진과 커플티라는 말이
너무너무 안 어울리고, 또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어 그런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입고 다닐 수 있어? 다른 사람이 보면 다 아는 거 아냐?”
“어차피 뭐 학교에 입고 가도 다 교복 안에 입을 텐데 상관 없지 않아? 나나 보이게 입지, 넌
체육복 갈아입을 때 빼고는 셔츠 풀고 입지도 않잖아.”
“아…. 그럼 잘 모르겠다.”
“응. 커플 운동화도 살까? 유행하는 거 사면 똑같은 거 신어도 뭐 이상하게 생각 안 할 거 아냐.”
굉장히 들떠 보이는 현규진을 보다가 웃음 지은 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뭐든 다 같이 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아, 배 안 고파?”
“조금 고파. 넌?”
“나도.”
“우리 집에서 라면 먹을까?”
“라면 좋지. 어, 근데 그거….”
“응?”
“그 라면 먹고 가라는 거 좀 그렇고 그런 말이던데.”
손을 잡은 채 슬쩍 어깨를 미는 현규진을 보며 잠시 생각하던 유원의 귀가 새빨개졌다. 그
말을 써 본 적도 없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적도 없어서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는데
현규진의 말을 듣고 보니 드라마나 예능 같은 데에서 종종 집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는 묘한
의미로 쓰는 게 떠올라 귓가가 홧홧해졌다.
“그, 그건! 집에 들어와 본 적 없는 사람한테… 유효한 말이지. 넌… 우리 집 비밀번호도
알잖아.”
“그거랑 그거는 또 다르지. 우리 상황이 달라졌는데.”
“…라면 혼자 먹을래. 넌 집에 가서 먹어.”
“내가 끓인 라면 먹고 싶으면서.”
잡고 있는 손을 장난스럽게 흔들다가 들어 올린 현규진이 유원의 손등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했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유원은 분명히 그 간지럽고 달착지근한 소리를 들었다. 또
손등에 닿는 부드럽고, 뜨겁고… 말랑한 느낌까지 너무나 선명해서 손끝이 저릿하고 고개가
자꾸만 앞으로 기울어졌다. 너무 부끄러워서 현규진을 바라보기조차 어려웠다.
“나랑 먹을 거지? 맞으면 잡고 있는 손을 흔들어 주세요.”
제 말을 듣더니 살살 손을 흔드는 유원이 지나치게 귀여웠다. 현규진은 앓는 소리를 작게 내며
고개를 기울여 유원의 머리 위로 제 머리를 댄 채 살살 비볐다.
유원을 안기 전에 생각지 못한 라면이라는 관문이 추가되기는 했지만,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맛있는 걸 든든히 먹고 나면 마음도 더 넓어지고 기분도 좋아지는 법이니까. 으….
소리를 내며 밀지 않고 저를 받아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좋아, 일단 라면부터 맛있게 끓여서 우리 유원이 배부터 채워 줘야지. 현규진의 눈동자가
결연히 빛났다.
라면은 정말 맛있었다. 면발이 꼬들꼬들하면서도 쫄깃하고, 국물은 너무 짜지도 싱겁지도
않아 마지막 입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원래 혼자 라면 세 개도 먹을 수 있지만, 밤이기도 하고 외모 관리에 몸 관리도 해야 하니 제
몫으로 두 개, 유원의 몫으로 한 개, 도합 세 개만 끓여 말끔히 그릇을 비운 현규진이 싱크대에
섰다.
당연히 유원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왔지만, 현규진은 끝까지 우기고 우겨 싱크대를 차지했다.
여태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유원에게 설거지를 맡길 생각이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
그리고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라면이 중간에 끼어들어 지금 샤워를 하고, 향수까지 뿌린
모든 과정이 다 허사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직 좋은 향이 나기는 하지만, 분명 라면
냄새도 저에게 뱄을 것이었다.
이런 상태로 유원을 안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제가 생각한 분위기는 이게 아니었다는 걸
설거지하면서 깨닫게 됐다. 현규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유원을 안는 건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제 가야겠다. 혼자 안 무섭겠어?”
“무서우면 자고 갈 거야?”
완전히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보는 현규진의 등을 손으로 꾹 눌러 현관 쪽으로 살짝 민
유원이 웃었다.
“뭐야, 좋다 말았네.”
“넌 우리 집에서 자는 게 좋아?”
“너희 집에서 자는 게 좋은 게 아니라 너랑 자는 게 좋은 건데.”
“그게 달라?”
“당연히 다르지. 여기가 아니어도 된단 건데.”
“그게 왜 좋은데?”
현관으로 나가 운동화에 발을 넣은 현규진이 현관문을 나서며 저를 따라 나오는 유원을
돌아보았다.
“마음이 놓여서.”
“…….”
“지금이야 컸으니까 마음대로 드나들지만, 어릴 땐 나도 우리 엄마 허락을 받아야 너희 집에
갈 수 있었잖아. 학교를 못 갈 정도로 아프다니까 걱정되는데 엄마는 내가 너 귀찮게 할까 봐
못 가게 하고…. 진짜 답답했어. 그런데 같이 있으면 내가 내 눈으로 바로 볼 수 있잖아.”
생각보다 훨씬 더 진지한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혔다. 고맙기도 하고 감동이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한 감정이 뒤섞여 입술 안쪽을 톡톡 두드렸다. 유원은 현규진이 입고 있는 헐렁한
후드티 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어떡해.”
“왜?”
“…네가 더 좋아졌어.”
갑자기 훅 들어오는 유원의 고백에 현규진 역시 할 말을 잃었다. 유원에게 그동안 아주 많은
말을 들었지만,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심장이 막 울렁이고 얼굴로 열이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기분이 좋은 정유원, 기분이 나쁜 정유원, 아픈 정유원, 기분이 좋지도 싫지도 않은데 맛있는
것을 먹어 점점 행복해지는 정유원까지 나름 세세한 모습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모습, 그러니까 연애하는 정유원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저와 연애하는 정유원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숨은
어떻게 쉬는 거였더라. 이게 맞나. 이렇게 의식해서 들이마시고 내쉬는 게 맞는 건가? 진짜
미칠 것 같았다.
“야…. 갑자기 그러면….”
“…….”
“…나야말로 진짜 어떡하냐.”
“…….”
“…존나 떨려.”
친구 사이 고백 금지-38 화(37/127)

38


계획이고 뭐고 마음속에, 또 머릿속에 쌓여 있던 것들이 모조리 다 허물어지며 사라졌다. 저를
배웅하려고 슬리퍼를 신고 따라 나온 유원이, 저에게 좋다 말하는 유원이 이렇게 귀엽고
예쁜데 계획 따위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는 떨림을 안은 채 현규진이 유원에게 성큼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두 팔 안에 유원을 가둔 채 가득 품에 끌어안았다.
아, 저질렀다. 품에 따뜻함이 잔뜩 들어차는 것을 느낀 순간 온기에 녹은 버터처럼 흐물대는
머릿속으로 빛이 반짝 켜졌다. 이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온 것이었다.
“…….”
밀어 버리면 어쩌지. 으…. 하면서 싫다고 하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놔주고 장난인 척할까?
아니, 이런 걸 장난이라고 하면 믿어 주기는 하나? 변태도 아니고 애초에 누가 이런 걸
장난으로…….
유원에게 거부 당할까 두려워 갑자기 부정적인 쪽으로 핑핑 돌던 머릿속이 한 번 더 정지했다.
“…….”
“…….”
유원의 두 팔이 스르륵 움직여 현규진의 허리에 둘렸다. 제가 유원을 안은 것처럼 유원도 저를
안고 있었다. 뒤로 밀리지 않고 앞으로 더 당겨져 품이 꽉 맞물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뭔가 멋있게 말을 하고 싶은데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저를 마주 안고
있는 유원이 너무 좋았다. 떠오르는 건 그게 전부였다. 정유원이 좋다는 것.
조용하고, 조금은 서늘하게 느껴지는 문 앞, 알 수 없는 층으로 느릿하게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소리가 한 번씩 들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서로의 숨소리만 작게 울리는 공간에서
맞닿은 유원은 참 따뜻했다. 머리칼과 귓가, 목덜미에서 나는 포근한 향에 얼굴을 파묻고
잠들고 싶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현규진은 조금 더 몸을 수그려 유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원이 움찔댔지만,
현규진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어 유원을 더 꽉 품에 안았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곤란했다.
“…….”
“…….”
한참이나 맞닿아 있던 몸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를 때쯤이 되어서야 살짝 떨어졌다.
몸에서 온기가 전부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아쉽게 떨어지는 유원의 얼굴을 보던 현규진의
시선이 새빨개진 귀여운 귀 끝에 닿았다.
“…갈게, 이제.”
“으응…. 빠이….”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은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키스라는
건 하고 싶은 때가 있는 건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 건지, 혼자 타이밍을 모르고 넘어가면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하고 또 나름 걱정도 했었는데 전부 헛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을까. 이렇게 예뻐 죽을 것만 같은데. 뒤로 물러나는 방법은
모르겠고, 계속 다가가고만 싶은데.
“…어, 톡 할게.”
하지만 오늘은 유원을 더 놀라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무리 계획과 지성이 다 무너진
미친놈의 상태가 되었다지만, 그래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 한다는 것쯤은 판단할 수
있었다. 현규진은 아쉬움이 묻은 발을 겨우 돌려 엘리베이터에 타 12 층으로 올랐다.
“…….”
와, 진짜 미쳤다. 친구로 좋아하던 게 갑자기 이렇게 확 다른 방향으로 좋아질 수도 있는
거구나. 아니, 나 원래 정유원 좋아했나?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미친놈처럼 좋아질 수가
있나?
연달아 밀려드는 질문에 그 어떤 답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들어가자 엄마,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유원을 데리러 갔다가 라면까지 먹고 온 사이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유원이랑 있다가 왔어?”
“응.”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어? 몰라…? 더워서 그런가.”
“밖에 쌀쌀하던데. 밖에서 오는 거 아냐?”
“아…. 배고프다 그래서 라면 먹고 왔어.”
“유원이 자꾸 그런 거 먹이지 마. 어릴 때보다 많이 건강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유원이는 그런
인스턴트 먹으면 안 돼. 너도 좀 줄이고.”
또 잔소리. 말대꾸를 했다가는 더 길어질 거라는 걸 알기에 대충 착실히 알겠다고 대답한
현규진이 방으로 들어갔다.
“…….”
문을 닫고 닫힌 문에 등을 기대자 조금 전 품에 가득 차 있던 유원이 떠올랐다. 턱이 딱 제 어깨
정도에 닿아서는 말 그대로 정말 폭… 포옥 안기는데 진짜 그때의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포근하고 따뜻하고 또… 달착지근했다. 맛을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달착지근하다는 감상이
나올 수 있냐 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저는 달콤함을 분명히 느꼈다. 도파민이 막 쏟아져
나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너무 좋아서 머리가 다 멍했다.
아까 유원을 학원에 데려다주고 이 방에 들어와서 친구와 연인의 차이 이딴 영양가 없는 걸 볼
땐 걱정과 긴장감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좋았다. 정말 너무 좋기만 했다. 현규진은
그대로 침대에 앉아 몸을 뒤로 기울였다.
“…….”
진짜 미쳤다. 이렇게 좋아도 되나. 까만 방,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천장으로 유원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어떡해. 네가 더 좋아졌어.’
아, 정유원 미쳤어, 진짜. 귓가에서 맴도는 달착지근한 목소리에 몸을 돌린 현규진이 베개를
당겨 품에 꽉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정유원이 저를 좋아한다니 이보다 엄청난 일이 또 있을까. 마음이 미친 듯이 부풀었다. 어떻게
좋아하게 됐는지 또 사귄 지 얼마나 됐는지 따위는 이제 현규진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유원이 웃고, 다정한 말을 하고, 저에게 닿을 때마다 유원에게서 옮겨온 작은
첫사랑의 불씨는 너무나 쉽게 그 몸집을 키웠다.
현규진의 온 마음을 새카맣게 태우고도 꺼지지 않을 만큼 아주 크게.
***
유원과 키스했다. 꿈에서. 문 앞에서 끌어안고 있었던 것처럼 꿈에서도 내내 안고 있다가
마지막에 제가 먼저 키스했다.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마주하자 유원의 입술이 벌어지는
느낌이 났고, 그대로 정신없이 키스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키스한 건 기억이 나는데 그때 느낌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엉망이 되어 있던 속옷으로 미루어 짐작해서는 미치게 좋았던
모양인데 실제 경험이 없어 그런지 그 생생함이 꿈에서 깬 다음으로 연결이 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정말 이상한 상황이라는 말이었다. 꿈에서 키스를 한 건 기억이 나고, 제 몸이
일으킨 반응은 있는데 느낌은 떠오르지 않고, 괜히 현실의 유원만 보기 더 민망해진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아침부터 왜 자꾸 눈치 봐?”
“…어? 내가?”
“응. 아침부터 계속 그러잖아. 뭐 할 말 있어?”
“내가… 그랬나? 아닌데….”
얼버무리는 것 같은 현규진을 보며 의심하듯 눈을 가늘게 뜬 유원이 손가락으로 허리를 살짝
찔렀다.
몸을 움찔한 현규진이 유원의 손에 들린 빈 초코우유 팩을 가져가 쓰레기통에 버렸다. 살짝
스친 손이 차가운 거 보니 이제 학교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뭐 잘못한 거 있지.”
“아니야. 나 잘못한 거 없는데. 그럴 게 뭐가 있어. 어제 너랑 라면 먹고 바로 집에….”
끌어안았던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말이 나오자 저를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현규진은 부끄러워하는 유원을 보며 또 마음 안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또 닿고
싶었다. 어제처럼 안고 계속 있고 싶기도 하고, 또 꿈처럼… 키스하고 싶기도 했다.
“…….”
마음에서 열이 나 그런지 눈과 머리까지 다 뜨겁고, 손끝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시간을
확인한 현규진이 5 교시가 되려면 아직 15 분이 남은 걸 확인하고 유원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가자.”
“벌써 들어가게?”
“어. 시간 얼마 없어.”
“아직 15 분 남았는데….”
현규진에게 잡힌 유원은 교실이 있는 쪽 건물이 아니라 급식실이 있는 쪽 건물로 들어가는
현규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교실을 다 옮겨 이제 이쪽 건물은 동아리 활동이나
특별활동 같은 것을 할 때만 써서 대부분의 교실이 다 비어 있었다.
급한 사람처럼 빈 교실들을 살핀 현규진이 그 끝에 있는 ‘상담실’이라 적힌 문패를 보고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아 문이 쉽게 열렸다. 현규진은 먼저 몸을 반쯤
넣어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유원도 안으로 부드럽게 당겨 들였다. 그리고 문을 닫은 다음
잠그기까지 했다.
“여긴… 왜?”
“또 안아도 돼?”
“…어?”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놀랐지만, 유원은 이내 허락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도 어제
현규진과 친구가 아닌 의미로 한참이나 닿아 있은 뒤로 내내 또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저만 그런 생각을 계속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는데 이렇게 안달이 난 것 같은
현규진을 보니 솔직히… 좋았다.
허락과 동시에 몸이 뒤로 밀렸다. 현규진이 갑자기 달려든 이유였다. 그 커다란 키와 단단한
몸에 들어간 기본적인 힘 자체가 저와는 달랐다. 하지만 조금 놀라기만 했을 뿐 조금도
아프지는 않았다. 뒤로 밀렸다고 해서 문에 부딪치거나 한 것도 없었다. 그저 새벽까지
뒤척이게 한 그 기분 좋은 냄새가 밀려들어 좋았고, 단단한 두 팔이 저를 꽉 끌어안고 있다는
게 좋을 뿐이었다.
“혹시 아파? 내가 너무 세게 안았나 해서.”
“…안 아파.”
“그럼 다행이고.”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현규진의 숨이 와르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키도 엄청 크고, 힘도
무척 세고, 또 싸움도 잘해 무서울 것 하나 없이 보이는 현규진이 저를 안은 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구는 게 귀여웠다. 저도 처음이지만, 현규진도 처음일 거라 아마 제가 헤매고
당황하는 것처럼 현규진 역시 헤매고 있을 것이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39 화(38/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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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은 가만히 팔을 들어 어제처럼 현규진의 허리를 꼬옥 마주 안았다. 현규진이 너무 많이
헤매지 않도록, 잘 찾아왔다는 걸 알려 주기라도 하듯.
“나 어제 너랑 키스하는 꿈 꿨어.”
목덜미에서 억눌린 소리가 들렸다. 분명 입술이 눌려 불분명한 소리인데 유원은 너무나 잘
알아들어 버렸다. 순간 놀란 유원이 현규진의 어깨를 밀어냈다.
“…이상한 소리… 하면 갈 거야.”
“왜 밀어. 이리 와.”
다시 유원에게 다가간 현규진이 두 팔 안에 유원을 가두었다. 다시 품 안이 가득 차며 따뜻한
기운이 번졌다. 따사로운 햇살과 포근해 보이는 구름 냄새를 합치면 이런 따뜻한 냄새가 나지
않을까. 유원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코끝을 스치는 느낌에 웃은 현규진이 더 고개를 숙여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야.”
“…또….”
“나 너랑 키스하고 싶었나?”
“…….”
“근데 웃긴 게 분명히 하긴 했거든. 근데 진짜 안 해 봐서 그런지 그 느낌이 기억 안 나. 기분이
좋긴 존나 좋았던 것 같은데.”
그 말을 하는 현규진의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아프지는 않지만, 옴짝달싹도 못 하게 된
상황에 팔을 팡팡 치자 다시 팔에서 힘이 살짝 빠지는 게 느껴졌다. 놓아주지는 않고 힘만
조금 빼는 현규진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솔직히 그래서 좋았다.
유원은 현규진의 어깨에 턱을 걸친 채 입술만 꾹꾹 깨물었다. 안고 있는 건 부끄럽지만,
그래도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되는 건 참 다행이었다. 열이 막 오르고 잔뜩 부끄러워 지금
엄청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한 번도 안 해 봤어?”
“뭔 소리야. 당연하지. 너도 안 해 봤잖아.”
매일 꿈에 현규진이 나오던 때를 떠올린 유원이 작게 웃었다. 날마다 밤이 새도록 쪽, 쪽
입술을 대었다가 떼었다가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뭐야. 넌 해 봤어?”
유원의 대답을 기다리던 현규진이 몸을 떼어 냈다. 현규진과 잔뜩 뽀뽀했던 꿈을 떠올리느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유원이 아…. 소리를 내며 현규진과 눈을 맞췄다. 이렇게 진지한 얼굴을
할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현규진은 무척 진지했다. 그 얼굴이 귀엽기도 하고 또 더 잘생겨
보여 괜히 장난을 치고 싶을 정도였다.
“왜 대답 안 하는데. 너 진짜 키스 해 봤어? 언제? 누구랑? 너 누구랑 사귄 적도 없잖아.”
“응, 사귄 적 없지.”
“뭐야. 그럼 안 사귀는데 나 몰래 키스는 했어?”
몰래 키스를 하다니. 말이 너무 이상해 웃음이 났다. 웃는 저를 점점 더 심각하게 보는
현규진을 보던 유원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럼 키스를 너 몰래 하지…. 너한테 나 키스할 거라고 말하고 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와, 그러니까 진짜 하긴 했단 거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니면 왜 아니라고 아까 말 안 했는데. 와…. 그렇게 매일 같이 다녔는데,
씨발.”
아, 욕한다…. 유원은 짜증이 잔뜩 묻어 예민해진 현규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와중에도 예민한 얼굴이 너무 잘생겨 보였다.
“…누구랑 했는데. 여자? 남자? 누가 먼저 했어. 어디서…. 아, 아니다. 말하지 마. 알기 싫어.
짜증 나.”
장난이라고, 나도 꿈에서 너랑 했다고 말을 제대로 하려는데 점심시간 끝나는 종이 크게
울렸다. 속상해 보이기까지 하는 현규진의 얼굴을 살피던 유원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세상이 다 무너질 것 같은 낮은 숨소리가 울렸다.
“…가자.”
“장난이야…. 나 안 했어.”
“…알았어.”
안 했다고 말을 했는데도 전혀 안 믿는 것 같은 현규진을 보며 유원의 마음으로 걱정이 조금
물들었다. 이게 아닌데…?
교실로 가는 중에도 어쩐지 좀 처진 것 같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것만 빼면 현규진은
그대로였다. 계단을 오를 때 제 뒤에서 보호하듯 오르는 것도 그대로고, 혹시라도 누가 복도를
뛰어가면 저에게 충돌할까 싶어 팔을 들어 옆을 미리 가려 보호하기도 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아까 그거 다….”
장난이라고 다시 한번 말하려는데 선생님이 들어와 교탁을 두드렸다. 유원은 어쩔 수 없이
자리로 가 앉아 교과서를 꺼냈다. 선생이 수업 준비를 하는 동안 슬쩍 뒤를 돌아보니 당연히
보여야 할 현규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며칠 엎드리지 않고 수업을 듣더니 팩 엎드린 걸
보면 아무래도 진짜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
아니라는 말도 안 믿는데 어떻게 풀어 주지…. 다시 몸을 앞으로 돌린 유원이 샤프 꼭지로
입술을 꾹 누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
엎드려 있지 말고 일어나라는 말을 세 번이나 무시한 현규진은 아예 깊은 잠에 빠져 자고 있던
최해영과 함께 교실에서 쫓겨났다. 복도에 조금 서 있는 척하다가 잘됐다 싶어 함께 시선을
교환한 다음 선생이 다른 곳을 보는 사이 계단을 올라 미술실로 들어갔다.
최해영은 들어가자마자 자연스럽게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현규진도 담배를
절실하게 피우고 싶었으나 유원이 싫어할 것 같아 그냥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아무렇게나
의자에 앉기만 했다.
“왜 또 죽상인데. 멍유랑 또 헤어졌냐?”
“야, 원래 사귀면 별것도 아닌 일에 막 기분이 존나 좋기도 하고, 또 존나 나쁘기도 하고
그러냐?”
“당연하지. 연애할 때 감정 기복 존나 미침. 아침에 걔 톡 보면 진짜 기분 개좋았다가 걔가 다른
놈이랑 웃는 거 보면 기분 바로 잡침. 그걸 하루 종일 반복하다가 대가리 깨진다니까. 연애도
아무나 할 거 같지? 그거 성질 더러우면 못 해. 예를 들면 너 같은 놈.”
“지랄 마라. 씨발, 너도 하는데 내가 왜 못하는데.”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가 내린 현규진이 고개를 확 뒤로 젖혀 먼지가 떠다니는 천장을
별 의미 없이 눈에 담았다.
“왜, 너 누구 생겼어?”
“아니.”
“근데 그런 건 왜 묻는데.”
“그냥. 아는 새끼가 연애한다더니 병신처럼 굴어서. 기분 좋아 쪼개더니 갑자기 기분 꼬라박은
티 존나 내고.”
“그런 티 존나 날 정도면 처음 하나 보네. 찌질하니까 그런 거 티 내지. 지 좆대로 굴다가
차이지.”
저라고 말을 안 했으니 최해영이 저에게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묘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현규진은 자꾸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욕을 애써 삼킨 채 한숨을 내뱉었다.
“…….”
키스라니. 정유원이 키스를 해 봤다니. 도대체 누구일까. 누구랑 도대체 언제 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은데 자꾸 생각이 나고, 진짜 알고 싶지 않아 생각을
지우려는데 계속 머릿속이 고장 난 것처럼 그 생각만 났다.
애초에 유원은 저와 늘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냈다. 뭐 24 시간 내내 매일 같이 있었던 건
아니니 100% 확신할 수는 없는 거지만, 그래도…. 그래도 정유원이 그런 발랑 까진 일을 하고
다니는 동안 제가 전혀 몰랐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장난이야. 나 안 했어….’
마지막에 장난이라고 하긴 했지만, 곧바로 아니라고 말을 하지 않아 그런지 자꾸 마음이
쓰였다.
물론 유원이 진짜 다른 누군가와 키스를 했다고 해서 싫어지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도…. 조금 서운했다. 아니, 사실은 조금 많이.
사귀고 있던 때도 아니고 그냥 친구였을 때니까 제 친구의 연애사를 다 알 수도 없는 거고, 알
필요도 없는 거지만, 그래도…. 아니, 진짜 그래도. 현규진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는데. 너야말로 요즘 왜 그러냐?”
“내가 뭘.”
“아니, 어제…. 아니지, 아까 밥 먹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 존나 좋더니 왜 갑자기 죽상인데.”
“야, 넌 김준재가 자기 키스한 얘기 너한테 하면 어떨 것 같냐.”
“죽여 버리지, 그걸 놔둠? 아, 개소름. 내가 그 새끼가 뭘 하든 그런 걸 왜 알아야 하는데. 거의
김준재 어릴 때 먹은 분유 이름 아는 거랑 비슷할 정도의 티엠아이 아님?”
팔을 벅벅 긁으며 진심으로 불쾌하다는 얼굴을 하는 최해영을 보며 현규진이 다시 긴 숨을
내쉬었다. 그래, 저 반응이 정상적인 반응일지도 몰랐다.
제가 아는 대부분의 놈들은 제 친구의 사생활, 특히 연애사에 대해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부분 친구를 대하는 것과 여친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 다르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이유였다.
물론 저는 지금 상황이 좀 다르긴 했다. 유원과 저는 이제 친구가 아니니까. 그럼 친구였을 때
알게 됐다면 이렇게 마음이 이상하지 않았을까?
“…….”
아니, 그래도 이상하고 기분이 안 좋았을 것 같았다. 유원이니까. 최해영이 누구와 키스를 하든
아무 상관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지만, 정유원은 달랐다. 유원에 대해 모르는 게 있다는 게
너무 충격이었다.
[김준재 : 야 문학이 너네 튀었다고 개빡침]
[죽었다 그래]
[최해영 : 현 죽어서 내가 데리고 병원 갔다 그래]
대충 치고 휴대폰을 넣은 현규진이 창가로 가 탈취제를 멀리서 한 번 뿌렸다. 제가 피우지는
않았지만, 최해영 때문에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 기본적인 절차는 거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자.”
“끝나려면 아직 10 분 남았는데?”
“지금 가서 대충 서 있어야 한 소리 듣고 끝나지. 안 그러면 교무실까지 가야 돼.”
“아, 짜증 나. 지가 존나 졸리게 수업하는 게 문제지.”
꽁초를 버린 최해영이 탈취제를 들어 서너 번 칙칙 온몸에 뿌렸다. 현규진은 저에게까지 닿는
인위적이고 짙은 비누 향에 인상을 썼다. 저에게서도 이런 향이 난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좀
싫었다. 아무래도 저는 제가 쓰는 향수를 가지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와 어울리기도
하고, 또 유원이 그 향을 무척 좋아하기도 하니까.
친구 사이 고백 금지-40 화(39/127)

40


“…….”
기분은 여전히 조금 가라앉아 있지만, 그래도 유원이 보고 싶었다. 오늘 저녁은 뭐 먹이지.
그동안 인스턴트나 튀김, 자극적인 걸 너무 같이 먹어서 오늘은 밥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집에 함박스테이크 있던데 그거 가져다가 정유원이랑 먹어야겠다…. 저녁 메뉴까지 떠올린
현규진이 최해영과 함께 미술실을 나서 계단을 내려갔다.
***
현규진에게서 짙은 비누 향이 났다. 유원은 지난번에 미술실에 갔다가 본 섬유 탈취제를
떠올렸다.
“담배 피웠어?”
“아니. 난 안 피웠어. 최해영만.”
“그런데 왜 뿌렸어?”
“…최해영이 피운 냄새도 지우려고. 안 좋아하잖아, 담배 냄새.”
제 말에 대답을 하긴 하지만, 여전히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유원은 횡단보도
앞에 서서 슬쩍 눈치를 보았다. 다시 제대로 내가 장난 친 거라고 말을 할까 하다가 조금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밖에서 걸으며 하는 것보다 단둘이 있을 때 조금 진지하게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오늘은 과외를 하는 날이니 같이 저녁을 먹게 될 거고, 과외를 하기 전까지 내내 둘이서만
있을 수 있었다. 그때 장난이었다고 말하면서 마음을 제대로 풀어 주면 좋을 것 같았다.
“옷 갈아입고 갈게.”
“응. 빠이.”
집까지 다 와서 헤어질 때까지도 현규진의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 빨리 풀어
줘야겠다. 유원은 얼른 집으로 가서 깨끗하게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늘 잘
정돈이 되어 있는 방도 괜히 한 번 더 살폈다.
“…….”
다른 거 입을 걸 그랬나…. 거울을 보며 아이보리색 후드티를 이리저리 살핀 유원이 다시
서랍을 열었다. 아무래도 후드티보다는 헐렁한 니트를 입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집업을 걸칠까.
평소에 잘 해 보지 않은 고민에 빠져 서랍 안을 눈으로 계속 바라만 보던 유원은 갑자기
울리는 벨 소리에 놀라 얼른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또, 또.”
“누구세요?”
“학습효과 꽝이야.”
누군지 묻고 열라는 말을 기억하고는 있지만, 이 시간에 바로 이렇게 올 사람이 현규진
뿐이라는 걸 알기에 자꾸 묻지 않고 바로 문을 열게 됐다.
“다음부터는 진짜 물어보고 열게.”
“진짜.”
“응, 진짜. 근데 그건 뭐야?”
“함박스테이크. 엄마가 너랑 먹으라고 만들었대.”
“와, 맛있겠다.”
“이거 먹고 나 과외 숙제 뭐 하나만 봐 줘. 공식 대입 다 했는데 죽어도 그 답이 안 나와.”
평소에 이런 이야기, 그러니까 공부 관련해서 뭘 묻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어 그런지 질문
자체가 낯설기도 했지만, 그래도 공부를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 좋았다. 유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규진이 공부했어? 장하네.”
“…엄마처럼 말하냐.”
“그 말 들으니까 저절로 이렇게 말이 나오네.”
칭찬하듯 현규진의 등허리를 토닥토닥한 유원이 즉석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두 개 넣었다.
일단 밥을 먹고, 다 치운 다음 현규진이 물어보는 문제를 같이 푼 그다음에 제가 하려고 했던
말을 하면 될 것 같았다. 기분부터 풀어 줘야 하는데 왜 이렇게 점점 뒤로 밀리는 것 같지….
유원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
결국, 문제 풀이는 과외 선생님이 해 주었다. 틀리라고 꼬아 둔 부분이 두 곳이나 있어
헷갈리기 쉽다는 풀이를 듣고 나니 이제야 틀리지 않고 응용한 다른 문제들도 잘 풀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이제 과정을 다 알게 되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진짜 문제는 이 문제를 푸느라
현규진에게 키스해 봤다는 게 장난이라는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한 것이었다.
두어 번 풀어서 안 풀릴 때 그냥 포기하고 선생님한테 물어보자고 한 뒤에 말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될 때까지 풀어 보려고 하다가 그 시간을 다 써 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이준서가
벨을 누른 뒤였다.
“…….”
턱을 괸 채 눈만 내리깔아 문제지를 보고 있는 현규진을 흘끗 본 유원이 괜히 샤프 꼭지로
입술만 꾹꾹 눌렀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얼른 과외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빨리 현규진과 단둘이 있고 싶었다.
“다음 수업부터는 기말고사 같이 준비 시작할 거니까 학교에서 배우는 것 중에 모르겠는 거
있으면 다 체크해 둬. 이번에 기말고사 보고 나면 그다음은 바로 3 학년 3 월 모의고사인 거
알지? 모의고사 몇 번 보고 나면 수능이니까 같이 진짜 열심히 준비해 보자.”
아직 3 학년이 되려면 시간이 좀 남은 것 같은데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니 어쩐지 조금 긴장이
됐다. 모의고사 몇 번 보고 나면 수능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이건 3 년 치 모의고사 문제들 중에서 기출 빈도 높은 문제만 추린 거야.
학교 시험에도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는 것만 골랐으니까 다음 시간까지 풀어 놓기.”
다소 많은 문제에 시무룩해진 유원을 보고 웃은 이준서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턱을 괴고 그쪽을 보고 있던 현규진의 표정이 누가 봐도 기분 나쁜 것을 알 수 있게
구겨졌다.
“그럼 다음 주에 보자. 주말에 공부하면서 뭐 모르는 거 있으면 톡하고.”
“네, 안녕히 가세요.”
현관에서 꾸벅 인사한 유원이 곧 닫히는 문에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얼른 현규진을
돌아보았다. 기분 나쁜 티가 역력한 얼굴을 보니 저러다 선생님한테도 들키지 싶어
곤란하면서도 또 그냥 귀엽게 느껴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준서 돈 거 아냐, 진짜? 왜 자꾸 너한테 손대지? 진짜 손모가지 부러져야 정신 차리나.”
“무섭게도 말한다.”
“짜증 나. 저 새끼가 너 만지는 거 싫다고. 전에도 싫었는데 지금은 진짜… 씨발, 진짜 싫어.”
적당히 조절할 수 있게 감정이 흐르는 게 아니라 막고 또 막아도 넘쳐흘러 감당도 할 수 없을
만큼 콸콸 솟구쳐 나오는 게 느껴졌다.
“알아. 나도 나 유치한 거 아는데 그래도 싫은 걸 어쩌라고.”
“…….”
“갈게.”
유원에게 이런 유치하고 한심한 꼴만 계속 보이느니 차라리 집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일단 가서 좀 씻으면서 짜증부터 녹여 전부 흘려보내고 싶었다.
“그럼! 다음부터 네가 내 자리에 앉아….”
“…….”
“내가 네 자리에 앉을게. 그럼 그럴 일 없을 거야. 선생님 팔이 막 늘어나진 않을 거 아냐….”
꽤 괜찮은 생각이었다. 유원의 말대로 제가 지금 유원이 앉는 자리에 앉고 유원이 제가 앉는
곳에 앉으면 이준서의 손이 유원에게는 절대 닿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굳이
유원의 얼굴이나 머리를 만지려고 다가오지 않는 이상. 뭐 그렇게까지 한다면 그땐 정말
손모가지를 비틀어 버리면 그만이니 일단 유원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돼?”
“그럼 당연히 되지. 난 어디 앉든 상관없어. 그리고….”
“…….”
“…나도 네 기분이 제일 중요해. 그러니까 기분 풀어. 응?”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고개를 기울여 저를 보면서 미소 짓는 유원을 보자마자 언제 짜증이
났었나 싶게 마음이 다 풀려 버렸다.
“…풀렸어.”
“정말?”
“어.”
현규진의 커다란 손이 그대로 유원의 머리 위로 놓였다. 이준서가 쓰다듬었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다정한 감정을 실은 채 몇 번 쓰다듬은 뒤에야 만족스럽다는 듯 손을
내릴 수 있었다.
“갈게. 쉬어.”
“…정말 풀린 거 맞아?”
“응. 풀렸는데 전부.”
“근데 왜….”
거기서 딱 끊긴 유원의 말을 현규진은 잠자코 기다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궁금해
얼른 듣고 싶기도 하지만, 머뭇머뭇 제 눈치를 한 번씩 보는 것도 귀여워서 계속 저 얼굴을
보고 있고 싶기도 했다.
“…그냥 가?”
“…….”
머리가 핑 돌았다. 눈앞이 막 흔들리고 배 속이 울렁였다. 손끝이 차가운 것 같기도 하고,
뜨거운 것 같기도 한 데다가 열이 확 오르는 게 느껴져 곤란하기도 했다. 현규진은 주춤주춤
저에게 먼저 한 걸음 더 다가와 가까이 선 유원을 보다가 허물어지듯 몸을 내려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을 가득 끌어안았다.
“…진짜 돌겠네. 그냥 안 가면 뭐.”
현규진의 어깨에 입술을 꾹 누른 채 웃은 유원이 가만히 팔을 들어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
순간 몸에 힘이 확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 키스 안 해 봤어. 네가 놀라는 게 귀여워서 그냥 좀 장난친 거야.”
“…진짜?”
“응. 내가 그런 걸 누구랑 해…. 맨날 너랑 같이 있었잖아.”
“…하려면 뭐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몇 시간씩 걸리는 일도 아닌데.”
“그런 생각 해 본 적도 없거든.”
긴장한 것처럼 굳어 있던 현규진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꼭 안도한 것 같은
느낌이라 유원도 덩달아 현규진의 기분이 풀린 것을 느끼고 안도할 수 있었다.
“아, 뽀뽀는 해 봤다.”
“누구랑?”
또 흥분해서 몸을 떼고 보는 현규진을 올려보다가 웃은 유원이 다시 허리를 마주 안고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너랑.”
“…….”
“볼에다 한 건 어릴 때 매일 했으니까 너도 알 거고…. 입에다가는…. 꿈에서만 했어.”
“…….”
“사귀기 전에… 자꾸 그런 꿈 꿔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자는 것도 무섭고. 너 보기도 좀
그렇고.”
친구 사이 고백 금지-41 화(40/127)

41


목소리도 조용조용 간지럽고, 그 포근한 목소리가 머금고 있는 내용도 간질간질해 가만히 서
있기가 다 힘들 정도였다. 보들보들한 유원의 머리칼을 만지며 현규진은 또 키스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는데 유원과 키스하고 싶었다. 예뻐 죽겠다는 게
머릿속에 맺히는 순간 그 생각이 감각으로 변해 온몸으로 번지는 것만 같았다.
“싫었어?”
“응?”
“나랑 하는 게 싫어서 힘들었던 거야?”
살짝 몸을 뗀 현규진이 시선을 부드럽게 떨어뜨렸다. 화 같은 것은 아주 조금도 묻지 않은
무척 다정한 시선이었다.
“…싫진 않았어. 처음엔 이런 꿈 꿔도 되나 싶어서 죄책감 들었는데… 솔직히 나중엔 기분
좋았어. 뭐든 처음이 어렵다는 게 맞나 봐. 그런 거에도 익숙해질 줄은 몰랐는데 진짜… 그것도
익숙해진다?”
신기한 이야기를 하듯 말하는 유원을 보며 소리 내어 웃은 현규진이 고개를 확 기울여 가까이
다가갔다.
“얼마나 익숙해졌나 볼까, 그럼.”
“…….”
기세 좋게 말하긴 했으나 정말 입술을 마주 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싫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떨려 너무 어려웠다.
심장이 두 동강이 나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긴장되고 떨려서 기절하는 사람도 있단 말을
어디서 봤을 때 그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걸 체감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진 않았다. 현규진은 그대로 고개를 더 기울여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유원의 입술에 아주 살짝 제 입술을 눌렀다.
…아, 씨발. 미쳤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입술이 느껴지는 순간 몸에서 힘과 피가 다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끝이 찌릿찌릿하고 아랫배가 이상했다. 단순한 울렁임을 지나
아랫배와 이어진 아래까지 막… 묘한 느낌이 전해졌다.
“…….”
“…….”
살짝 눌렸던 입술이 떨어지면서 아주 약하고 간지러운 소리가 울렸다. 현규진은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유원을 보다가 손을 들어 뺨을 톡 건드렸다. 그제야 유원의 눈이 스르르 뜨였다.
꿈과 현실은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달랐다. 꿈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았다. 조심스럽게
닿는 것도 좋고, 또 살짝 눌리는 순간 느껴지는 현규진의 떨림도 유원을 설레게 했다.
“…어때?”
“…난 좋은데…. 넌?”
“존나 좋아. 더 해도 돼?”
“…응.”
유원의 허락에도 뭔가 조금 망설이던 현규진이 슬쩍 작게 물었다.
“혀는?”
“혀?”
“넣어도 되나 해서.”
“그, 그건 아직 안 돼.”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현규진이 다시 고개를 기울여 내렸다.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에 눈을 꾹 감자
어둠이 드리워졌다. 곧 조금 전처럼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이 입술 위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떨어질 때 쪽…. 하는 귀여운 소리가 나서 마음이 이리저리 마구 흔들렸다.
쪽, 쪽…. 입술이 몇 번이고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눈앞에 드리워진 어둠도 흔들렸다. 문득
이 간질간질하고 다정한 순간을 어둠 속에 가두고 싶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유원은 살짝 눈을
떠 저에게 내려오는 현규진의 얼굴을 두 눈 가득 담았다.
그대로 쏟아진 현규진이 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따뜻함으로 물들었다. 한 번은 쪽, 짧게, 그리고
그다음은 쪼옥…. 조금 길게 눌렸다가 떨어지는 느낌이 좋아 이번에는 유원도 살짝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
“…….”
“…….”
생각보다, 조금 전보다 더 빨리 닿은 입술에 현규진의 감겨 있던 눈이 뜨였다. 그냥 눈을 감고
있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시선이 순식간에 얽혀들었다. 이렇게 좋은 건
처음이라 더 좋은 게 있을지 궁금한 마음이 자꾸 들었다. 현규진이 조금 전 저와 한 약속을
어겨도 좋을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한 걸까. 점점 입술이 닿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가볍게 닿았던 입술이
조금 더 길게, 또 조금 더 깊게 맞물리는 느낌이 날 때마다 양말 속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며칠
전까지 친구였던 현규진과 제집 현관 앞에 서서 서로를 안은 채 이런 일을 하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말랑말랑 따뜻하던 입술은 이제 뜨겁다고 느껴질 정도의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등과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더 들어가고,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유원은 현규진의 무게에 밀려 자꾸
뒷걸음쳤다.
“잠…깐….”
그 짧은 말도 한 번에 흐르지 못할 만큼 닿아오는 입술이 급했다. 유원은 현관 중문으로 밀린
채 점점 몸을 붙이며 압박하는 현규진을 받아들였다. 잠깐씩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입술
위에서 섞이는 숨이 무척 뜨거웠다.
쪽, 쪽…. 간지러운 소리가 두어 번 더 흐르다가 이번에는 고개가 더 기울어졌다. 다물려 있던
현규진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쥐고 있던 현규진의 옷자락을 더 세게 쥔 유원도
따라서 입술을 벌리려는 그 순간.
삑, 삑삑, 삑삑, 삑.
도어록 캡 올라가는 소리와 함께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원은 놀란 눈으로 저를 보는 현규진과 시선을 마주하다가 얼른 어깨를 밀어냈다.
몸이 떨어지자마자 현관문이 열리고 엄마, 아빠가 안으로 들어왔다.
“유원아, 엄마 왔, 어? 규진이 있었네?”
“보고 싶었어요, 이모.”
씩 웃은 현규진이 성큼 다가가 저에게 팔을 벌리는 유원의 엄마를 가볍게 안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등을 두드리는 유원의 아빠와도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이모 요즘 시청률 장난 아니던데요? 반응도 엄청 좋고.”
“그래서 힘든데 겨우 버티고 있어. 원톱이다 보니까 대사가 너무 많은 거 있지. 전엔 많아도
거뜬했는데 요즘은 가끔 힘에 부쳐. 늙었나 봐.”
“에이, 우리 이모 지금도 너무 예쁘신데.”
“어유, 우리 규진이는 언제 봐도 예쁘네. 용돈 줘야겠다.”
“아니에요. 저 엄마한테 혼나요.”
“우리 규진이는 내 아들이기도 하잖아. 아들 용돈 주는데 혼내는 게 말이 돼?”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현규진에게 주며 웃는 엄마의 눈치를 보던 유원이 괜히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머리칼도 손으로 정리했다. 얼굴이 빨갛지는 않을지 또 입술이
아직도 화끈화끈한데 그게 겉으로도 티가 나지 않을지 걱정이 되어 화기애애한 분위기
안에서도 웃을 수가 없었다.
“자, 우리 아들도 용돈.”
“아…. 아직 많이 남았는데….”
“허투루 안 쓰는 거 아니까 주는 거야. 비상금이라고 생각하고 필요할 때 써. 규진이랑 맛있는
것도 사 먹고.”
현규진과 끌어안고 있었던 것을 들킨 것도 아닌데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댔다. 유원은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 애써 웃으며 눈치를 보았다.
“이모, 이모부. 그럼 전 가 볼게요. 쉬세요.”
“우리 유원이 챙겨 줘서 너무 고마워. 이번 작품만 끝나면 한동안 또 쉴 거니까 고 3 되기 전에
여행도 가고 그러자.”
“저야 무조건 좋죠.”
유원의 엄마, 아빠 마음을 완전히 녹이고 또 든든하게 하는 웃음을 지은 현규진이 현관으로
나가 운동화에 대충 발을 넣었다. 그리고 어쩔 줄 모르겠으면서 애써 의연한 척하고 있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톡할게.”
“…으응. 빠이.”
현규진은 마지막까지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도록 아주 나이스해 보이는 웃음을 머금은 채
유원의 집을 나섰다.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완전히 혼자 남게 된 뒤에야 당황과 난처함, 불안함
따위가 뭉친 숨이 탁 터져 나왔다.
“…와, 씨. 타이밍.”
스릴 미쳤다.
심장이 막 거세게 뛰었다. 현관 근처에 있어서 그 들어오는 소리를 바로 들었으니 얼른
떨어지는 기지를 발휘했지, 만약 거실 소파나 공부방 같은 데에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채로
있었으면 꼼짝없이 들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저도 이렇게 놀라 심장이 쿵쿵대는데 아마 유원은 더 그럴 것이었다. 아까 제가 최대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으려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도 유원은 하얗게 질린 채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리고 있던 게 떠올랐다. 현규진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유원에게 톡을
보냈다.
[아 진짜 놀랐어]
[멍유원 : 아직도 심장이 막 아파 너무 놀라서]
[많이 아파?]
[멍유원 :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멍유원 : 다음부터는 집에서 하지 말자]
[멍유원 : 너무 무서워]
하지 말자는 말과 무섭다는 말이 먼저 들어와 스릴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찌릿함이 심장으로
번졌다. 하지만 뒤늦게 보인 ‘다음부터는’이라는 말이 현규진의 마음을 또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다음이 있다는 건 유원도 좋았다는 거고, 저와 또 닿을 생각이 있다는 거니까.
[응 조심하자]
[좀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 난 좋았어]
넌? 너도 좋았어? 넌 어땠어? 여러 말을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좀 너무 강요하나 싶어
지우는 사이 메시지가 올라왔다.
[멍유원 : 나도]
[멍유원 : 좋았어]
12 층에 내려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문 옆에 기대어 선 채 휴대폰을 본 현규진이 웃음 지었다.
분명 딱딱한 화면을 두드리고 있는데 꼭 말랑말랑한 유원의 입술을 만지는 것처럼 폭신하게
느껴졌다.
[멍유원 : 너무너무]
그리고 조금의 텀을 두고 하나 더 올라온 유원의 마지막 메시지로 간질간질한 마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팡 터졌다.
“…….”
아, 존나 귀여워, 진짜. 기다란 다리를 구부려 앉은 현규진이 손끝을 깨물며 포근한 향이 나는
것 같은 화면을 내내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유원이 너무 좋아서 진짜 죽을 것 같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42 화(41/127)

42


토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고 유원과 백화점에 간 현규진은 우선 점심을
먹었다. 얼마 전 유원이 다른 놈과 가서 먹은 그 즉석 떡볶이 매장이 백화점에도 있어 거기에
가 떡볶이에 튀김, 라면 사리에 볶음밥까지 든든하게 다 먹은 다음 제가 좋아하는 스포츠
브랜드 매장을 돌았다.
학교 다닐 때 교복 안에 받쳐 입을 요란하지 않은 흰색 티셔츠 몇 장과 새로 나온
윈드브레이커까지 산 현규진은 유원과 제가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이자 요즘 제일 핫한
매장으로 들어가 요즘 인기인 운동화를 집어 들었다.
“이거 블랙 사이즈 있어요? 285mm 랑 260mm.”
“타이밍 너무 좋게 오셨어요. 아시겠지만, 나오자마자 바로 전국 매장 품절이었잖아요. 딱 30
분 전에 진짜 사이즈 별로 딱 두 개씩 들어왔거든요. 이거 저희 매장에만 들어온 거라 오늘
안에 다 나갈 텐데 진짜 잘 오셨어요.”
사고 싶게 장사 잘하네. 혼자 생각한 현규진이 유원에게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하얀 운동화에
까만 색으로 라인이 들어간 심플한 디자인이지만, 요즘 연예인부터 각종 인플루언서까지 다
신고 다녀 리셀 가격이 다섯 배까지도 뛰는 그런 모델이었다. 아예 전국 품절이라 매장에서
샘플도 다 치웠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 매장에는 놓여 있어 혹시나 해
물어봤는데 그러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이거 예쁘지. 사 줄게.”
“아냐, 내가 살게.”
“싫어. 사 줄래. 선물.”
샘플로 285mm 와 260mm 사이즈를 가지고 온 직원의 안내에 따라 신어 보니 불편하지 않게
딱 맞았다. 현규진은 제 발 옆에 있으니 귀엽게 작아 보이는 유원의 발을 보며 웃음 지었다.
그리고 새 제품을 가지러 직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유원과 발을 나란히 붙이고 사진도 찍었다.
“톡 프사 이걸로 바꿀까.”
“안 돼, 그러다가 누가 알아.”
“어떻게 알아. 발만 보고.”
“갑자기 우리가 이거 같이 신고 다니면 누가 알 수도 있잖아.”
“그런가. 그래도 사귀는 건 모를 거 아냐.”
“조심해서 나쁠 거 없잖아. 어제 일도 그렇고….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아.”
결론적으로 안 들켰으면 된 거 아닌가? 뭘 어떻게 그걸 조심해야 하지? 잠시 생각하던
현규진이 웃으며 박스 두 개를 가지고 오는 직원과 함께 카운터로 가 운동화를 계산했다.
“다리 안 아파? 카페 갈까.”
“응, 가자. 다리는 안 아픈데 조금 목말라.”
“저 위에 망고 빙수 있던데 거기 갈래? 그런 거 좋아하잖아. 망고 주스도 팔고 그러던데.”
“응! 맛있겠다, 빙수.”
망고 빙수 하나에 또 밝게 웃는 유원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은 현규진이 유원을 먼저
에스컬레이터에 태우고 그 뒤로 따라 올랐다.
“아, 저기 자리 있다.”
운 좋게 일어나 나가는 사람의 구석 자리를 잡은 현규진은 유원을 앉히고 카운터로 가 망고
빙수 하나와 망고 주스 한 잔, 그리고 제가 마실 탄산수 한 병을 샀다. 그리고 왔다 갔다 하느니
바로 받아 자리로 좋을 것 같아 픽업 데스크 쪽에 서서 내내 유원이 혼자 앉아 있는 자리를
살폈다.
그 짧은 사이에 뭐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무척 적다는 건 알지만, 계속 습관처럼 유원을
볼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이건 중학교 들어간 이후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변태로부터
유원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동시에 생긴.
가만히 유원을 보고 있자니 손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현규진은 얼른 노란 것들이 가득 담긴
트레이를 들고 자리로 향했다.
“이건 내가 사려고 했는데…. 얼마야?”
“됐어.”
“되긴 뭐가 돼. 운동화도 사 줬잖아. 이건 내가 사고 싶어.”
“이모가 어제 용돈도 많이 줬잖아.”
“그래도….”
“그럼 다음에 버블티 사 줘.”
현규진이 주는 스푼을 받은 유원이 망고와 우유 얼음을 같이 떠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같이 공부할까? 과외 숙제 같이 하자. 내일 내가 점심도 사고, 버블티도 사 줄게.”
“응. 그럼 내일은 우리 집에서 할까? 공부하고 저녁에 나가서 운동하자.”
“운동 싫은데….”
“힘든 거 말고 산책. 체력 길러야지. 공부도 체력이 좋아야 된다던데.”
“맞아. 나도 진짜 체력 기르긴 해야 하는데….”
“일단 한 시간씩 걷자.”
“응, 좋아. 근데 이거 진짜 맛있다. 먹어 봐.”
망고를 하나 더 입에 넣은 유원이 현규진 앞으로 빙수를 살짝 밀어 주었다. 현규진은 먹여
달라는 듯 입을 작게 아 벌렸다. 그런 현규진을 보고 웃은 유원이 망고와 얼음을 적당히 떠서
입에 넣어 주었다.
“음, 맛있네. 이거 네가 좋아하는 거 맞지. 애플망고.”
“응, 맞아. 망고 진짜 많이 들었다. 주스도 맛있어.”
굵은 빨대를 입에 물고 쪼로록 주스를 빨아들이던 유원의 시선이 현규진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저를 보고 있던 누군가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홱 돌리더니 맞은 편에 앉은 사람과
수군대기 시작했다.
착각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쩐지 조금 전 제가 현규진에게 빙수를 먹여 준 것을 보고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유원은 괜히 주변을 한 번 보며 위축됐다.
“왜 그래?”
“아니야. 그냥. 여기 사람 진짜 많다.”
“그러게. 겨울에도 다 빙수 먹네. 뭐 우리도 먹고 있지만.”
씩 웃은 현규진이 탄산수를 한 모금 마셨다. 유원도 따라 미소 지으며 다시 현규진의 어깨
너머를 흘끗 바라보았다. 아까 저와 눈이 마주쳤던 사람은 그냥 평범하게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와 현규진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역시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유원은 그제야 안도하며 망고 주스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안도를 느낀 머리와 달리 걱정에 쿵쿵 뛰는 마음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가라앉지 않았다.
***
저녁 시간이 다 되었을 때쯤에야 집에 도착해 6 층에서 내린 유원은 바로 올라가지 않고 저를
따라 내리는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잠깐만 나랑 더 있다가 가. 5 분, 아니, 10 분만 더.”
손에 들린 몇 개의 쇼핑백을 유원의 집 앞 문으로 놓은 현규진이 그대로 유원을 끌어안았다.
어제 헤어진 직후부터 내내 이렇게 하고 싶어 온몸이 다 저릿저릿했다.
“나 진짜 아침부터 참았어.”
“…….”
“밖에서 이럴 수도 없고.”
“…여기도 밖이거든.”
“그래도 여긴 우리 둘밖에 없잖아.”
혹시라도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저만 들을 수 있도록 소곤대는 낮은 목소리가 무척 기분
좋았다. 유원은 귓가로 흘러드는 현규진의 목소리에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부모님이 있는 집 앞에서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솔직히 어제 현규진과 헤어진 뒤에 내내
이렇게 안고 뽀뽀했던 것을 떠올렸기에 밀어낼 수가 없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집에 이모 계시지.”
“응…. 같이 저녁 먹기로 했어.”
“…더 하고 싶은데.”
몸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게 느껴지고, 몸이 더 꽉 마주 붙는 게 느껴질수록
유원의 머릿속도 열기에 녹아내렸다. 현규진이 뭘 더 하고 싶어 하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었다. 저도 똑같은 걸 하고 싶으니까.
“…엄마… 오늘 밤 촬영이래. 여덟 시쯤 가실 거야. 내일 아침에 들어오실 텐데….”
“…….”
“아홉 시쯤… 올래?”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뭐라고 말을 하고 있긴 한데 머릿속이 너무 뜨겁고
멍해서 몸이 붕 뜨는 기분만 들어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가 힘들었다.
“그럼 오늘 같이 자는 거지?”
“…가, 같이? 아직, 그런 건… 좀….”
웅얼웅얼 말을 흐리는 유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현규진이 살짝 몸을 떼고 눈을 맞췄다.
얼굴은 물론이고 귀와 목까지 빨개진 걸 보니 방금 제가 한 말을 아주아주 야한 쪽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혼자 자기 무서울 것 같아서 한 말인데, 왜? 그동안 우리 같이 많이 잤잖아.”
짐짓 모른 척을 하며 태연자약하게 말하자 유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제야 제가 어떤 오해를
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 아….”
말로 이루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진 유원이 바닥에 놓인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왜, 뭔데. 뭘 생각했길래 그런 건 좀 그렇다 그래? 우리 같이 자는 게 그런 거 말고 뭐 또 있어?”
“없어…. 나도 네가 말한… 그거 말한 거야.”
“그래? 아닌 것 같은데.”
다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현규진이 얄미워 어깨를 슬쩍 민 유원이 현규진의 쇼핑백도
들어 품에 안겨 주었다.
“…얼른 가.”
“난 야한 생각 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쫓겨나네. 아, 억울해.”
“나도! 그런 생각 안 했어.”
“응, 하지 말고 이따 아홉 시에 해. 나랑 있을 때.”
유원의 귓가에 소곤댄 현규진이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안으로 올랐다. 그러고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빠이 해 줘, 얼른. 나 정유원이 빠이 안 해 주면 못 가잖아, 이제.”
“…빠이.”
“응, 빠이. 이따 봐.”
닫히는 문을 확실히 본 다음에야 유원은 긴 숨을 뱉어 냈다. 전혀 야하거나 그런 쪽으로 들을
말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현규진이 저를 갑자기 안았을 때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 뿐이었다. 어제처럼, 꿈이
아닌 현실에서 또 잔뜩 뽀뽀하고 싶다는 것. 엄마, 아빠가 아침까지 분명히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단둘이 마음 편하게 붙어 있고 싶다는 생각 뿐이라 그 연장선으로 이상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미쳤어, 진짜.”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손을 들어 뺨을 탁탁 두드린 유원이 심호흡과 함께 문을 열었다. 얼른
현규진과 마주할 아홉 시가 오기를 바라며.
친구 사이 고백 금지-43 화(42/127)

43


[최해영 : ㅅㅈㄱ?]
[김준재 : 밥만먹고감]
[최해영 : 현규진 읽씹금지]
[ㄴ]
스피드존에 가자고 보낸 톡을 대충 본 현규진이 성의 없는 답을 하나 보냈다.
[최해영 : 아 왜]
[김준재 : 빼지말고와]
[최해영 : 라면쏜다]
[김준재 : 닭강정도]
[ㄴ]
다시 안 간다는 의사 표시를 세상에서 가장 간단히 한 뒤 침대 위에 꺼내 둔 티셔츠와 잘 때
입는 편한 바지에 유원이 좋아하는 그 향수를 한 번 멀리서 뿌렸다. 지금 뿌려 놔야 이따 입고
유원의 집에 갔을 때 아주아주 은은하게 잔향만 남기 때문에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했다.
[최해영 : 할것도없잖아]
[많은데]
[김준재 : 설마 또 멍유?]
[바빠]
다시 단톡방 알림이 오지 않게 끈 현규진이 쌓이는 숫자를 보다가 아예 화면도 꺼 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게임 따위가 아니었다.
“…아.”
유원의 집에 가서 자는 게 처음도 아닌데 갑자기 미친 듯이 떨렸다. 유원이 잠시 오해했던
것처럼 막 그 정도의 야한 뭔가를 하러 가는 건 아니지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단둘이
어제처럼 입술을 마주 대는 정도는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현규진은 아까 집에 들어온 뒤부터 내내 한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방 안을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
가서 뭐부터 하지. 가자마자 안고 그러면 좀 그러니까 일단 이모 나오는 드라마를 볼까. 뒤에
거 다 밀렸는데. 아냐, 괜히 이모 나오는 거 보면 이모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서 분위기 다
깨질 것 같은데. 미드 봐야겠다. 아는 사람 하나도 안 나오는 걸로.
일단 뭐든 보다가…. 아, 그냥 가만히 보기만 하면 어색하려나. 뭐 먹을 거라도 가지고 갈까.
먹을 게 뭐 있지. 편의점 털어야 하나….
속으로 열심히 생각하던 현규진이 방을 나서 복도를 걸어 나가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
가까워질수록 아주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났다.
“엄마, 나 오늘 정유원 집에서 잘 거야.”
“유원이 괴롭히려고, 또.”
“아니야. 이모 오늘 밤 촬영이라 없다고 정유원이 오랬어. 무섭다고.”
“그래? 그럼 가야지. 안 그래도 유원이 주려고 쿠키랑 이것저것 굽는 중인데 이따 가지고 가.
몇 시에 가는데?”
“아홉 시.”
“시간 충분하네. 잊어버리지 말고 가지고 가. 통에 넣어 둘 테니까.”
그럼 먹을 건 됐고…. 현규진은 한 시간쯤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빨리 가서 같이 있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갔다.
정유원도 그럴까. 내가 이러는 것처럼 정유원도 나랑 같이 있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까?
기다린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
말 하나만 해도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고 더듬더듬 속을 다 들키면서 한 번씩 생각지도 못한
큰 용기를 내어 대담하게 성큼 다가오는 유원이 떠올랐다. 제 허리를 마주 안는 두 팔이나
안아 주고 가라는 듯 그냥 갈 거냐고 묻는 말간 얼굴, 제 어깨에 얼굴을 비비는 움직임까지
아주 저를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게 틀림 없었다.
아, 진짜 정유원 보고 싶다. 침대에 누워 시간을 죽이려던 현규진은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럽지만, 아주 예쁘게 만진 머리가 망가질까 싶어 그냥 책상 의자에 앉아 무의미하게
빙글빙글 의자를 좌우로 돌렸다.
오른쪽으로 한 번 돌면 1 초, 그리고 왼쪽으로 한 번 돌면 또 1 초. 방에 들어와 확인했던
시간에서 겨우 2 분이 지난 것을 확인한 현규진이 긴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로 엎드렸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8 시 55 분이 되어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 채로.
***
됐다, 미친! 옷까지 갈아입고 초조하게 8 시 54 분까지 기다린 현규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 엄마의 오븐에서 나온 맛있는 이것저것이 담긴 틴케이스를
들고 집을 나섰다.
이제 8 시 56 분. 유원과의 거리는 단 6 층. 1 층에서 느릿느릿 이제 막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괜히 발을 한 번 구른 현규진이 참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처음에는 두 칸, 그리고 8 층 정도에 다다랐을 때는 한 번에 계단 반을 뛰어내려 6 층으로
향했다. 만약 유원이 봤다면 위험하다고 오랫동안 잔소리를 할 짓이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8 시 58 분. 흐트러진 것 같은 앞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짧게 숨을 고른 현규진이 벨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 쪽으로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로 문이 열리려나
싶었는데 안에서 목소리가 먼저 문밖으로 나왔다.
“누구세요?”
아, 씨. 물어보라고 했더니 이제 진짜 물어보네. 푸스스 웃은 현규진이 문 쪽으로 얼굴을
기울였다.
“정유원 애인.”
“…저 애인 없는데요.”
“아, 정말요? 그럼 아까 백화점에서 커플 신발 같이 사고, 망고 빙수 먹고, 문 앞에서 안고 있던
사람은 누구예요? 아, 그리고 어제 집에서 키스할 뻔했던 사람은….”
덜컥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손잡이가 아래로 내려갔다. 씩 웃은 현규진이 뒤로 한
걸음 느긋하게 물러서 살짝 열리는 문 사이로 보이는 유원과 눈을 맞췄다.
“애인 맞지?”
그런 표현이 부끄러운지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데구루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러면서도
들어오라는 듯 문을 더 열어 주는 유원이 예뻐 마음이 요란했다. 꼭 마음에서 월드컵 결승이
열리고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넌 어떻게… 막 그런 말을 그렇게 잘해? 안 어색해?”
“뭐가 어색해. 애인을 애인이라 그러지, 그럼 뭐라 그래. 아, 이거 엄마가 너 먹으라고 만들어
줬어.”
“쿠키?”
“그것도 있고 너 좋아하는 거 다 있을걸.”
곰돌이가 그려진 동그란 틴케이스를 소중히 받은 유원이 얼른 식탁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정말 제가 좋아하는 쿠키와 마들렌, 휘낭시에 같은 것들이 예쁘게 담겨 있었다.
“진짜 맛있겠다아…. 하나 먹을래.”
기분이 좋은지 말끝이 길게 늘어나는 게 귀여워 웃은 현규진이 한입에 쏙 들어갈 만한 크기의
초콜릿 칩 쿠키를 들어 유원의 입에 넣어 주었다. 자기가 먹겠다고 안 하고 입을 아 벌리는 게
예뻐 심장이 다 뻐근했다.
“너무 맛있어.”
“나 쿠키에 밀린 거야?”
현규진이 고개를 기울여 얼굴 앞으로 다가오자 특유의 기분 좋은 향이 훅 끼쳤다. 입 안에
맴도는 달착지근한 쿠키 맛이 잘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심장이 빠르게 마구 뛰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마들렌을 하나 먹고 싶었는데 현규진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생각도
사라지고 온통 머릿속이 전부 현규진으로 가득 차 버렸다.
유원은 가만히 현규진과 눈을 맞추다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려 눈앞에 있는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도 되는데.”
현규진의 입술이 부드럽게 열려 움직였다. 유원은 작게 벌어졌다가 닫히고, 오므려졌다가
다시 풀리는 입술을 보며 식탁을 짚은 채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부끄러운 일을 하려는 것도 알고, 현규진과 사귀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짓을
하면 안 될 것 같기도 한데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틴케이스 속 쿠키를
봤을 때보다 더 두근거렸다.
“…….”
할까…. 하고 싶은데. 해도 된다고 했잖아.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얼굴을 기울이면 닿을 수
있었다. 닿을 때 느낌이 어떤지, 또 기분이 어떤지 이미 알아 버렸기에 또, 또 닿고 싶었다.
그 마지막 용기를 내기가 어려워 한 번 더 머뭇대는 순간 현규진의 고개가 조금 더 기울었다.
닿지 못한 채 살짝 떨어져 있던 입술이 떨림을 머금은 채 살짝 눌렸다.
마음 안으로 더운 바람이 불었다. 현규진이 오면 뭘 해야 할지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떠올리고
있던 게 있었는데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친구일 땐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더라. 질문은
계속 생겨나는데 역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
“…….”
어정쩡하게 식탁을 짚은 채 서서 입술 떨어지는 느낌에 눈을 뜬 유원이 얼른 몸을 바로 세우고
괜히 틴케이스를 뚜껑을 열었다가 닫는 것을 반복하며 허둥댔다.
“뭐… 뭐 마실래? 아, 그… 딸기 바나나주스 마시고 싶은데…. 나갈까? 산책도 하고…. 주스도 사
오자….”
“나중에 마시면 안 돼?”
“…응?”
“나가기 싫어.”
단호한 거절이었지만, 서운하기는커녕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딸기 바나나주스는 이 상황을 최대한 좋게 흐트러뜨리기 위한 핑계였다. 사실 유원도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키스하고 싶어.”
두근두근 아주 빠르게 뛰던 심장이 기어이 쿵쿵 거세게 뛰다가 확 떨어졌다. 조금도 돌리지
않고 정확하게 직설적으로 흘러나와 닿은 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말… 하지 마…. 기분 이상해.”
셀 수도 없이 많은 일을 친구로 함께하면서는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사귀기로 하기는 했지만, 이래도 되나 싶은 작은 죄책감이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어 더 그랬다. 하지만 정말 웃긴 것은 꼭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조마조마하면서도 하기 싫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키스를 해 본 적도 없고, 키스라는 것에 대해서 평소에 단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솔직히 하고 싶었다. 얼마나 좋은지, 어떤 기분이 드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래도
해 보고 싶었다. 현규진과.
친구 사이 고백 금지-44 화(43/127)

44


“싫어? 싫으면….”
“싫은 게 아니라….”
“…….”
“…이건 정말… 친구랑은 못 하는… 아니, 안 하는 거잖아.”
현규진은 유원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사귀고는 있다지만, 저와 유원은 여전히 친구 같을 때가
많았다. 사귀는 사이보다 스킨십을 하는 친구 같은 말도 안 되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한
그런 느낌이었다. 유원도 그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도 저와 함께 친구라는 관계에 살짝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키스는 달랐다. 뽀뽀야 아주 드문 경우여도 친구끼리 할 수 있다고 넘어가 줄 수
있지만, 키스는 아니었다. ‘친구’는 키스할 수 없었다. 완전히 친구에 담그고 있던 발을 빼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어야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두려움이 들 수밖에 없었다.
키스하고 나면 정말 친구 사이는 끝이니까.
저라고 그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규진은 지금, 이 순간 크고 단단한 우정이 아니라 이제
시작해 우정보다 크기는 작지만, 그래서 더 애틋하고 품에 안고 싶은 새로운 감정을 택하고
싶었다.
사랑…이라는 간지럽고 소리로 만들기 어색한 말을 하기는 어렵지만.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 아는데.”
“…….”
“그래도.”
“…….”
“그래도 하고 싶어.”
다시 고개를 기울여 내린 현규진이 가볍게 유원의 입술에 입 맞췄다. 유원도 저와 같은
기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처럼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더 닿고 싶어서
안달이 나 죽을 것 같은 그런 똑같은 마음이기를 원했다.
“…….”
“…….”
견디지 못하고 다시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대었다가 뗀 현규진이 정말 미칠 것 같은 기분으로
고개를 기울였을 때 유원이 식탁 옆으로 살짝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두 팔로 현규진의 허리를
안았다.
조금 전처럼 마주 닿은 입술 위로 열기가 녹아 번졌다. 다시 살짝 떼려는 순간 유원의 입술이
벌어지는 느낌이 났다. 그 허락과 같은 움직임에 몸이 다 저릿했다. 유원과 마찬가지로 잔뜩
긴장해 벌벌 떨리는 손으로 유원의 머리를 쓰다듬고 목덜미를 매만져 준 현규진의 고개가
조금 더 기울어지며 입술이 벌어졌다.
더운 숨이 입술 안쪽에서 뒤섞였다. 입술보다 뜨겁고, 또 입술보다 말랑한 혀끝이 닿아 눌리는
순간 머릿속이 완전히 흐무러졌다. 유원에게서 나는 포근한 향과 혀 끝에 남아 있는
달착지근한 쿠키 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뭘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건지, 맞는 건지 하나도 아는 게 없고, 또 알 수도 없지만, 현규진은 그냥
이렇게 친구일 때는 알지 못하던 유원의 따뜻한 곳을 알게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아니, 좋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이걸 어떻게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처음이라 그저 혀를 마주 댄 채 문지르는 게 키스의 전부였지만, 그냥 문질리기만 해도, 아니….
혀끝이 닿기만 해도 등줄기가 오싹했다. 현규진은 조금 더 고개를 기울여 더욱 깊게 입술을
맞물렸다.
“으음….”
살짝 벌어진 입술이 서로의 입술을 물었다가 놓을 때마다 벌어져 이어진 사이로 온기가
넘나들었다. 현규진의 커다란 몸에 밀려 조금씩 뒷걸음치던 유원은 거실 어딘가로까지 밀려
벽에 닿았다.
그렇게 몸이 움직이면 잠시 입술이 떨어질 법도 한데 현규진은 절대 유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유원도 현규진의 허리에 감은 팔을 풀지 않았다. 마주 닿은 몸은 서로의 당김으로
조금도 느슨해질 수 없었다.
숨을 쉬는 방법도 모른 채 겨우 조금씩만 숨을 쉬며 현규진과 혀를 비비던 유원은 한계점에
다다라서야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내내 저를 안고만 있던 유원이 처음으로 보인 행동에 현규진은 머금고 있던 입술을 살짝 떼어
냈다. 숨을 쉴 공간이 생기자마자 유원의 입술 사이에서 제대로 쉬지 못해 고여 있던 숨이
엉망으로 흘렀다.
“하아… 하으….”
“…하…. 괜찮아?”
“…숨, 숨이 잘… 하아….”
그제야 현규진은 유원이 다른 사람보다 더 쉽게 숨이 찬다는 걸 떠올렸다. 체력도 워낙 약하고,
폐활량도 보통 사람만큼 좋지 않아 조금만 무리해도 이렇게 숨이 차고, 심하면 앓기까지
하는데 그걸 잊고 있었다니 정말 제가 미친 모양이었다. 눈물까지 맺혀 숨을 고르는 유원에게
몸을 숙인 현규진이 뺨을 부드럽게 만져 주었다.
“너무 빠르게 쉬지 말고 조금만 천천히. 크게 우선 한 번 들이 마셔 봐.”
현규진의 말에 따라 깊게 숨을 들이마신 유원이 천천히 길게 숨을 내쉬었다. 숨이 마구 떨려
길게 들이마시는 게 쉽지 않았으나 그래도 저와 눈을 맞춘 채 단단히 저만을 보고 있는
현규진을 보며 몇 번 숨을 고르자 가슴에 맺혀 있던 통증이 점점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 괜찮아.”
“미안해. 그 생각을 못 했어. 아, 진짜 미친놈인가.”
“괜찮아.”
“힘들었지. 머리를 그냥 확 갈기지 그랬어.”
“…좋아서….”
“…….”
“…힘든 것보다… 좋은 게 더 커서… 나도 더 하고 싶었어.”
이제 겨우 막 숨을 고른 애한테 또 숨도 못 쉴 만큼 키스하고 싶어진 현규진은 그대로 유원의
턱을 쥐고 다시 입술을 마주했다. 한 번 열린 입술이 다시 열리는 건 처음보다 쉬웠고, 한 번
넘은 선을 다시 넘는 건 이제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았다.
친구일 때는 몰랐던 영역을 하나씩 알아가는 건 참 두근대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 번의
경험으로 그다음이 더 능숙해지는 걸 느끼는 것도 참 설레는 과정이었다. 현규진은 유원이
헐떡헐떡 숨이 차지 않을 만큼만 입술을 붙이고 있다가 살짝 떼고, 또 충분히 숨을 머금으면
다시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몹시 어설프게 겨우 문질리기만 하던 혀도 두 번째에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혀가 문질릴 때마다 머릿속에서 설탕 가루 같은 게 팍 터지고, 생크림 같은 것이
녹아 줄줄 흘러 내리는 느낌이 드는 건 여전히 똑같지만.
“키스하면 원래 이런가. 진짜 존나 좋아 죽을 것 같아.”
“…나도 좋아.”
“안 힘들었어?”
“…응. 하나도.”
“우리 이제 진짜 친구 끝났어. 다시 친구 못 해. 이런 짓까지 했는데 어떻게 친구를 해.”
현규진의 입술이 이번에는 유원의 귓가에 닿았다. 잔뜩 달아오른 귀에 입술을 댄 현규진이
오직 유원만 들을 수 있게 낮은 목소리로 소곤댔다.
“친구보다 키스가 좋아.”
기분 좋은 목소리가 몸 안으로 파고들며 순간 몸이 오싹오싹했다. 따뜻함이 필요해 힘이 빠진
팔을 들어 올린 유원이 현규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완전히 몸을 감싸는 품은 따뜻하고
다정하며 또 아주 넓었다.
친구와 할 수 있는 것의 선을 넘어 버린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이제 진짜 친구가 끝났다는
말은 유원의 심장을 다른 의미로 쿵쿵 뛰게 했다. 다시 친구를 할 수 없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기분 좋은 설렘과 입술에 남은 온기가 생각을 뒤흔들어 거기에서 더 나아갈 수는 없었다.
좋은 향이 잔뜩 나는 현규진의 어깨 위로 고개를 기울인 유원이 따뜻함 위로 뺨을 비볐다.
그래, 그냥 기분 좋아서 한 말 하나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유원은 잠시
머릿속을 뒤흔든 현규진의 말을 흩트린 채 눈을 감았다.
저와 거의 모든 것의 처음을 함께한 첫 친구이자 첫 애인인 현규진의 두 팔 안에서.
***
씻고 나와 보송보송해진 현규진에게 다가간 유원은 어깨 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았다. 제 방에서 나는 향이 현규진에게서 나는 게 새삼스럽게 너무 좋아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
서로 셀 수 없을 만큼 서로의 집에서 자면서 서로의 바디워시를 써서 같은 향기가 날 때가
많았는데 오늘따라 새삼스레 그게 더 좋았다. 유원은 침대에 걸터앉은 현규진의 앞에 서서
저와 같은 샴푸 향이 나는 머리칼에도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제 다리 사이에 서서 저를 내려다보고 자꾸 몸을 기울이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은 느릿하게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에 당황한 유원이 슬쩍 현규진을 밀어냈지만,
현규진은 절대 팔을 풀지도, 또 얼굴을 떼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슴 쪽에 턱을 댄 채 유원을
올려다보며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침대에서 같이 자도 돼?”
“…같이?”
“응. 나 또 바닥에서 자?”
“…….”
“바닥에서 자면 키스하기 힘들잖아. 자꾸 하고 싶은데 그럴 때마다 침대 올라가서 하고 또
내려와서 눕고, 그러다가 또 하고 싶어지면 또 올라가서 하고.”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유였으나 현규진은 진심이었고, 첫 키스 이후 내내 입술과 입 안에
현규진이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유원의 마음을 뒤흔들기에도 충분했다. 유원은
결국 가만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현규진이 그대로 유원의 허리를 안은
채 침대 위로 이끌었다.
“…벌써… 자게?”
“아니, 키스하고 싶어서.”
“그거 알아? 너 아까 온 뒤로 우리 지금까지 계속… 그것만 한 거….”
“그래? 별로 많이 안 한 것 같은데.”
정말 잘 모르겠다는 듯 대답한 현규진이 침대 헤드 쪽으로 슬금슬금 도망가는 유원을 따라
몸을 기울였다.
“왜 도망가?”
“…뭔가 침대에서 이러니까 이상해.”
“정유원 진짜 나만 보면 야한 생각 하나 보네.”
“그런 거 아니거든. 이상한 소리 하면 방에서 나가라고 할 거야.”
“진짜 억울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계속 혼나고.”
침대 헤드에 아예 등이 닿을 때까지 도망간 유원은 가까이 다가오는 현규진을 보며 괜한
긴장감에 쿠션을 집어 안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45 화(44/127)

45


“이건 또 왜.”
“아….”
현규진의 손에 들려 간단히 옆으로 아웃되는 쿠션을 보던 유원이 어느새 쿠션 자리까지
다가온 온기를 마주했다.
“쿠션 말고 나 안아 줘, 응? 나 있는데 왜 쿠션 같은 걸 안아.”
천연덕스럽게 흐르는 유치한 질투에 살짝 드리워졌던 긴장감이 풀리며 웃음이 맺혔다.
유원은 바로 제 앞까지 다가온 현규진과 눈을 맞추며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넌 진짜 연애 백 번은 해 본 것 같아.”
“백 번은 심했다.”
“너한테 고백한 사람이랑 다 만났으면 진짜 백 번 되지 않을까?”
“하긴. 유치원 다닐 때 병아리반 여자애들이랑 토끼반 여자애들이 다 사귀자 그랬으니까 그런
거 다 합치면 진짜 백 명 될지도.”
부드러운 향이 나는 현규진의 머리칼을 쓸어 준 유원이 조금 더 다가오는 얼굴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곧 입술 위로 콩닥대는 마음처럼 열이 오른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왜 그렇게 떨어. 나 보면 그렇게 막 떨려?”
“…응. 많이.”
고개를 끄덕이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이 웃음 지었다. 말은 안 하고 웃기만 하는 현규진에
유원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왜?”
“진짜 존나 예뻐서.”
“…너 내려가서 자….”
“아, 왜. 예뻐서 예쁘다는데 왜 쫓아내. 예쁘질 말던가.”
귀가 새빨개지는 유원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다시 쪽 소리가 나게 뽀뽀한 현규진이 허리에
팔을 감아 안으며 침대 위로 눕혔다.
“다리 접고 앉아 있으니까 아파.”
순식간에 제 몸을 뒤덮듯 오르는 현규진을 보며 놀란 유원이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아 더
납작하게 몸 내리는 것을 저지했다.
“…….”
“…….”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흐릿해지는 선을 바라보던 유원의 두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더
가까이 내려와 몸이 붙자 발끝이 움츠러들었다. 이렇게 정신 없이 몰아쳐도 되나 싶기는 한데
우습게도 이 자세가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매일 밤 꿈에서 이렇게 현규진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보낸 이유였다. 어쩌면 현규진보다 더 속도가 빠른 사람은 저일지도 몰랐다.
“…음….”
“숨 막혀?”
조심스럽게 맞물린 채 입 안에서 뒤섞이던 온기가 떨어졌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는
현규진과 눈을 맞춘 유원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숨 막히면 내가… 막힌다고 아까처럼 어깨 두드릴게.”
“힘든데 참을까 봐 그러지.”
“안 그럴게.”
제 건강 걱정을 할 때의 현규진은 늘 이렇게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진지한
얼굴이 되곤 했다. 진지해지면 예민한 느낌이 뒤섞여 조금 차가워 보인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그 얼굴이 너무 잘생겨 보였다. 유원은 마음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웃음기 하나 없는 현규진의 얼굴을 살살 손끝으로 눌렀다.
“내가 진짜 조심하긴 할 건데 혹시라도 막 돌아서 너 힘든 것도 모르고 해 대면 머리든 뺨이든
갈겨 버려. 알았지?”
유원의 손을 잡아 제 뺨을 치는 시늉을 한 현규진이 웃는 얼굴 위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농담 아니거든.”
“알아. 아는데…. 네가 안 그럴 것도 알아.”
“아, 몰라. 그럴 수도 있어. 너랑 혀 닿는 소리만 엄청 크게 나고 다른 소리는 잘 안 들려서.”
“…그런 건 속으로 생각해.”
“왜. 그것도 부끄러워? 왜 그렇게 부끄러운 게 많아. 내가 그렇게 좋아?”
입술이 닿은 채로 현규진의 입매가 길어졌다. 가볍게 입술만 마주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은
어느새 웃음기를 잃은 채 조금 진지해져 있었다. 유원은 다시 쿵 마음이 내려앉는 소리를
들으며 그와 동시에 내려와 입술을 마주 대는 현규진을 향해 입술을 벌렸다.
응, 좋아해. 소리로 내기 조금 부끄러운 대답을 떨림으로 대신 전하며.
***
얼마나 오래 키스했는지 입술이 부은 느낌이 났다. 유원은 침대에 누운 채 손으로 만져도 크게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입술을 꾹꾹 눌렀다.
“아파?”
목이 말라 방을 나가려는 유원 대신 부엌에서 마실 것을 가지고 온 현규진이 또 걱정이 담긴
눈으로 유원을 살폈다.
“부은 느낌 나서. 나 이상하지.”
“음, 어디 보자.”
유원의 요청대로 얼음을 넣은 탄산수를 준 현규진이 얼굴을 여기저기 살폈다.
“안 이상하고 예쁜데.”
“또….”
“아니, 진짜 예쁜데 어떡해. 그리고 예쁘단 말 나한테 처음 듣는 것도 아니잖아. 이모, 이모부도
너만 보면 예쁘다 그러고, 우리 엄마, 아빠도 너만 보면 예쁘다 그러는데 왜 나한테만 그래.”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이….”
“뭐가 다른데.”
유원이 충분히 마시고 남은 탄산수를 한 모금 마시고 얼음까지 와그작 깨 먹은 현규진이
대답을 기다렸다.
“어른들이 그러는 건 좀 넓은 의미잖아. 진짜 얼굴이 예뻐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는 짓이
예쁘다는 걸 수도 있고, 착하다는 말을 그렇게 하기도 하고. 그런데 넌….”
“응, 난.”
“……자꾸 얼굴 보면서 그러니까 기분이 이상해.”
현규진의 시선이 제가 지금까지 내내 머금고 있어 살짝 부어오른 유원의 입술에 닿았다가
불그레해진 뺨에 닿았다. 부끄러움은 많아서 또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이불자락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게 귀여워 말문이 다 막혔다.
“기분이 어떻게 이상한데?”
“…속이 막 울렁울렁해.”
“이윤성이 너한테 예쁘다고 해도 그럴 것 같아?”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유원은 가만히 현규진의 질문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저에게
예쁘다고 말하는 이윤성을 떠올리는 자체가 쉽지 않아 애를 먹었다.
“잘 상상이 안 돼. 그리고 여기서 윤성이 얘기가 왜 나와. 나보다 네가 더 윤성이 생각 많이
하는 것 같아.”
“뭐 그런 무서운 말을 하냐.”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제법 유원의 대답이 마음에 들어 씩 웃은 현규진이 얼음
하나를 더 와그작 씹어 먹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껐다. 그리고 어둠이 완전히 방을 뒤덮지
못하게 아주 약하게 스탠드를 켠 다음 다시 침대에 올랐다. 이제 자정이 넘었으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하다가 유원을 재우면 될 것 같았다.
“질문 취소. 그딴 건 앞으로도 상상하지 마.”
이불을 들어 안으로 들어간 현규진이 유원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유원 혼자 있을 땐 작단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던 침대가 현규진이 눕자마자 아담한 사이즈의 침대처럼 느껴졌다.
“좁아서 불편하진 않아?”
“난 안 불편한데 넌? 침대 좁지…. 혼자 쓸 땐 침대가 이렇게 작은지 몰랐어.”
“내가 큰 거지. 나도 안 불편하니까 걱정하지 마. 절대 내려갈 생각 없으니까.”
안쪽 자리에 누워 괜히 한 손으로 쿠션을 만지작대던 유원이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려 저를 보고 있는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 이후로 이렇게 같은 침대에 누워 자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또 꽉 찬 느낌의 침대에 안정감이 들기도 했다.
“근데 내가 찾아봤는데…. 우린 좀 너무 빠른 거 맞는 것 같아.”
“뭐가?”
“…보통 사귀고 좀 지나야… 키스하고 그러던데….”
“그건 모르는 사람이랑 사귀니까 그런 거 아닌가. 서로 알아야 할 게 많을 거 아냐.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도 파악해야 하고. 그러니까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지.”
“아…. 그런가? 우리는 그런 거 서로 다 아니까….”
“어. 우린 다 알잖아. 남들 며칠, 몇 달 걸릴 거 우린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그 시간이 빠진
거지.”
충분히 일리가 있는 현규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원이 아예 현규진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이불이 사부작대는 소리와 그 이불 안에 함께 누워 서로를 보고 누운 이 안락함이 참
좋았다.
“왜 이렇게 똑똑해? 진짜 연애 백 번은 해 본 것 같아.”
“나 원래 머리 좋아. 딱 시험 전에만 벼락치기 하는데도 성적 잘 나오잖아.”
“…하긴.”
“뭐든 또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음….”
뭘 물어보면 좋을지 고민하던 유원의 머릿속으로 이제 진짜 친구는 끝났다던 현규진의 말이
떠올랐다.
“친구끼리는 안 하는 걸 우린 했잖아….”
“응. 했지. 그것도 많이.”
조금 부어 평소보다 통통해 보이는 유원의 입술을 손끝으로 장난스럽게 톡톡 건드린
현규진이 웃었다. 어둠 속 빛이 모자라 그런지 현규진의 웃음이 다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유원은 하려던 말도 잊은 채 잠시 멍하니 그 웃음에 시선을 멈추었다.
“정유원 멍때리다 질문 까먹었지.”
“…응? 아….”
정말 말하던 걸 잊어 곰곰 떠올리던 유원은 바로 그 내용을 기억해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기억 났어! 어…. 그러니까 친구끼리 안 하는 걸 우린 이미 해 버렸잖아. 그래서 네가 아까…
우린 이제 친구 진짜 끝났다고 한 거고.”
“응, 그랬지.”
“…그럼 우린 이제 진짜… 친구는 영원히 다시 못 되는 거야?”
“자기야. 벌써 나한테 싫증 난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아까 그 말이 자꾸 생각나서. 머리로는 무슨 말인지 다 이해도 하고,
진지하게 한 말 아니라는 거 아는데…. 친구가 이제 진짜 완전히 끝나 버린 것 같아서 그런가?
마음이 이상해.”
현규진은 이불 위로 나온 유원의 어깨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원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 장난스럽게 대답하면서 대충 넘기고 싶지 않아 진지하게 생각을
잇고 또 이었다.
“친구는 끝났지만, 우리는 안 끝났잖아.”
“…….”
“그리고 그 이름이 사라졌다고 해서 우리가 친구로 지낸 시간이 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친구 사이 고백 금지-46 화(4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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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친구일 땐 친구가 좋았으니까 그렇게 지낸 거고, 지금은 사귀고
싶으니까 사귀는 거고. 사실 친구는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알아 버렸을 때부터 끝난 거지.
친구를 키스하고 싶은 마음으로 좋아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이미 친구가 아니었던
거야.”
현규진의 말이 맞았다. 현규진과 친구였을 때는 한 번도 연인들이 하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이 맺힐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왜? 그게 당연한
거니까.
물론 잘생겼다고 생각한 적도 많고, 저에게는 참 다정하고 좋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현규진은 참 ‘좋은 친구’였다.
그 당연한, 너무 당연해서 우정을 우정이라고 굳이 명명하지 않는 그 자연스러운 시간 안에서
갑자기 현규진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그 시선을 통한 생각이 달라졌을 때, 이미 친구라는
이름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친구와 키스하는 꿈을 꾸는 해프닝은 일어날 수 있어도 그 꿈에 몽정을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 또 해프닝을 해프닝으로 넘길 수 없다는 걸 알아 버린 그 순간부터 이미 이전에
견고히 존재하던 ‘당연한 친구 사이’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게 싫거나 슬픈 건 아니었다. 친구 대신 다른 이름이 생겼으니까. 그런데 만약에,
정말 만약에 새로 생긴 관계가 끝나 버린다면?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
아니,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었다. 이미 친구끼리는 하지 않는, 할 수 없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것들을 해 버렸으니까. 물론 가끔 연예인들의 이별 기사 같은 것을 보면 좋은 동료로,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다는 말도 보이기는 하지만, 그냥 좋게 헤어졌다는 것을 알리려고 포장하듯
하는 말 같기도 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혼자 생각하지 말고 나도 알려 줘.”
“그게….”
기분 좋아 보이는 현규진의 얼굴을 보자 생각이 뚝 끊겼다.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사귄 지 며칠 되지도 않았고, 또 지금 이렇게 현규진과 함께 있는 게 좋기 만한데
일어나지도 않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생각하면서 걱정하고 고민하고 있다니.
순식간에 밀려들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던 생각을 밀어낸 유원이 손을 들어 현규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냥. 좋아서.”
“내가?”
“…응.”
“혹시 입술 부어서 아파?”
“아니, 안 아파. 또 할래….”
이불이 들리는 느낌과 함께 현규진의 상체가 들렸다. 유원은 다시 제 위로 몸을 기울여
쏟아지는 현규진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이윽고 다시 맞물린 입술 안으로 걱정 따위 없는
따뜻함이 밀려들었다.
***
조용하고 따뜻한 느낌 안으로 뭔가 목소리가 들렸다. 뭐지…. 유원은 다시 귀를 기울였다.
“이럴 때 보면 아직도 애기들이라니까.”
엄마 목소린데….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겨우 엄마 목소리라는 걸 떠올린 순간 잠이 묻어 있던
유원의 눈이 확 뜨였다. 엄마 목소리?
놀라 몸을 일으킨 유원은 저를 보고 누운 채 몸 위로 팔을 두르듯 얹고 자는 현규진을 보다가
하얗게 질려 문 쪽에 선 엄마와 아빠를 바라보았다.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심장이 확
떨어지고 미친 듯이 뛰었다. 등줄기가 오싹한 느낌과 동시에 식은땀이 나는 느낌도 들었다.
“…어, 엄마. 언제 오셨어요.”
“좀 전에. 그런데 규진이는 불편하게 왜 여기서 이렇게 웅크리고 자. 게스트룸 침대 큰데.”
“아…. 그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 침대에서 몸을 딱 붙이고 자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게 수습이 될까 싶었다.
“그런데 너무 귀엽다, 너희.”
“…….”
“몸만 컸지. 어쩜 이렇게 아직도 애기야. 어릴 땐 너희 늘 이렇게 같이 자겠다고 난리였는데.”
“……어제는… 자기 전까지 얘기하다가….”
“침대 바꿔 줄까? 규진이 키에 맞춰서 좀 큰 걸로 사자. 그래야 누워서 얘기라도 편하게 하지.
여태 그 생각을 못 했네. 둘이 놀다가 갑자기 게스트룸 가서 자는 것도 이상하고.”
그때 깊게 잠들어 있던 현규진도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유원은 이불 안으로 손을 넣어
현규진의 손가락을 잡아 살짝 흔들었다. 빨리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였다. 상황을 모르고 저를
끌어안거나 또 키스라도 하려고 한다면…. 그 뒤에 어떻게 될지 차마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 이모….”
“우리 규진이 자는 거 진짜 오랜만에 본다. 아유, 귀여워. 너희는 어쩜 이렇게 몸만 컸니. 침대
작아서 불편했지. 이모가 침대 큰 걸로 바꿔 둘게.”
“괜찮아요. 저 때문에 안 그러셔도 돼요.”
“안 그래도 이 침대 유원이 중학생 때 산 거라 바꿔 주려고 했거든. 좀 크게 바꾸면 우리 규진이
놀러 왔을 때 편하게 같이 여기 누워서 뭐 볼 수도 있고, 그러다 잠들면 편히 잘 수도 있고
좋잖아.”
이제야 정신을 제대로 차린 현규진이 상황 파악을 하고 평소 페이스대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저야 너무 좋죠. 역시 전 이모 아들이라니까.”
“어쩜 이렇게 예뻐. 규진아, 너도 같이 브런치 먹으러 가자. 소희랑 영준이는 오늘 점심 약속
있다던데, 혼자 먹어야 할 거 아냐. 아니면 규진이도 뭐 약속 있어?”
“아니요. 없어요. 저도 데려가 주시면 저야 좋죠.”
“데려가 주다니. 당연히 같이 가야지.”
씩 웃은 현규진이 침대에서 내려와 어제 입고 왔던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아직 이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하얗게 질려 있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아마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는
것을 그대로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님께 보여 지금 많이 놀랐을 것이었다. 괜찮다고 달래 주고
싶은데 유원의 부모님 앞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저 그럼 집에 가서 준비하고 올게요. 몇 시까지 올까요.”
“거기가 차로 30 분 정도 걸리니까 10 시 반쯤 출발하면 좋을 것 같아.”
“네.”
방에서 나가는 유원의 부모님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현규진이 마지막에 유원을 돌아보았다.
“이따 봐.”
“…응. 빠이.”
유원은 방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겨우 숨을 뱉어 냈다. 자다가 엄마 목소리를 듣고,
현규진에게 거의 안겨 자고 있던 것을 보인 것을 안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심장이 아플 만큼
빨리 뛰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들켰다고는 할 수 없었다. 현규진과 나쁜 짓을 한 건 아니니까. 그리고 아주 어릴 때부터 저와
현규진이 이렇게 같이 자는 것을 많이 보였기 때문에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제가 걱정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유원은 이불을 얼굴 위로 뒤덮은 채 다시 누워
어렵게 흐르는 숨을 가다듬었다.
엄마, 아빠가 아침에 온다는 걸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고 다 알고 있었는데 현규진과 새벽 두
시까지 딱 붙어 이야기를 하다가 키스를 하고, 또 이야기를 하다가 키스를 하며 전부 잊어
버렸다. 깨끗하게 싹.
미쳤어, 진짜. 겨우 진정이 된 숨을 포옥 내쉰 유원이 이불 속 옅은 어둠 안에서 현규진이
있었던 쪽으로 돌아 누웠다.
현규진과 내내 나눈 달착지근한 감정에 폭 빠져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 저를 탓하는
이 순간에도 현규진이 보고 싶었다.
“…….”
유원은 현규진이 누워 있던 베개 쪽으로 몸을 조금 더 움직여 얼굴을 댔다. 베개에서, 그
자리에서 현규진 냄새가 났다. 제가 밤새 그 품에서 맡았던 포근하고, 기분 좋은 냄새가.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조금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손끝이 저릿하고, 아랫배가
간지러워졌다. 유원은 몸을 웅크린 채 아랫배를 두 팔로 가리고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당황스러운 아침이었다.
***
조수석에 탄 엄마와 운전석에 탄 아빠, 그리고 제 옆에 탄 현규진을 차례로 본 유원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이라면 이 조합으로 뭔가를 하러 가는 게 어색하지도 않고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졌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침에 심장 철렁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저와 현규진은 지금 친구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 부모님은 여전히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모님께 그리 큰
비밀을 만들어 본 적이 없어 그런지 이 상황이 자꾸 불편하게 다가왔다.
“우리 규진이 태어나는 것도 내가 다 봤는데 언제 이렇게 컸을까. 키가 몇이야?”
“얼마 전에 쟀을 때 188.6cm 나왔어요.”
“어쩜 그렇게 커. 얼굴도 너무 잘생기고. 규진아, 배우 할 생각 없어? 이모가 오래 이 일 하다
보니까 얼굴만 보면 딱 느낌이 오는데 우리 규진이는 진짜 카메라 너무 잘 받을 얼굴이야.”
“저도 얼굴 생각하면 연예인 해야 할 것 같은데 왜 그 쪽으로 관심이 안 생기나 모르겠어요.”
현규진의 말에 차 안으로 웃음이 번졌다. 저와 같은 상황을 똑같이 겪고도 아무렇지 않게
전처럼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는 현규진을 물끄러미 본 유원이 새끼손가락 끝에 뭔가 닿는
느낌에 놀라 시선을 내렸다.
“연예계가 너무 큰 인재를 잃었네.”
“그러게요. 근데 만약에 제가 하고 싶다고 해도 엄마가 반대할 걸요.”
“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위에서는 대화가 오고 가지만, 앞좌석에서 굳이 신경을 쓰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의자 위로는 새끼손가락이 느릿하게 얽혔다. 유원이 한 마디 정도 얽힌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빼냈지만, 현규진은 떨어지기 싫다는 듯 다시 손가락을 깊게 얽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47 화(46/127)

47


“저 성질 더럽다고 그런 거 하면 매일 기사 뜰 거래요.”
다시 차 안으로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 작은 소란 안에서 현규진이 느릿하게 유원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
“…….”
손가락 사이사이가 서로의 것으로 문질리며 빠듯하게 꽉… 물렸다가 느릿하게 빠지는 느낌에
유원의 발끝이 움츠러들었다. 괜히 허벅지가 꽉 조이고, 아랫배가 또 간지러웠다. 그렇게 많이
했으면서 또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더는 현규진이 닿을 수 없도록 손을 들어
다리 위로 올린 유원이 다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
그 어느 때보다도 소란한 심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식물로 굉장히 예쁘게 꾸며 둔 가게 안으로 부모님을 따라 들어간 유원은 따로 마련된 방
안내를 받다가 들어가지 않고 슬쩍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고개를 끄덕이는 엄마를 보고 웃은 유원이 제 뒤에 선 현규진을 지나쳐 화장실 표시가 있는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 좀 씻고 오겠다고 이어 말한 현규진도 유원의 뒤를 따라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화장실 문을 연 유원은 여덟 칸이나 있는 크고 또 굉장히 쾌적한 화장실 안을 살폈다.
문이 다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안에는 지금 저와 현규진 둘 뿐인 게 확실했다. 유원은
그대로 제 뒤에 서 있는 현규진의 손을 잡고 가장 안쪽 칸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
달칵. 문 잠기는 소리와 함께 유원의 정신이 반쯤 돌아왔다. 유원은 제가 잡고 있는
잠금장치를 한 번 내려다보고 뒤돌아 기분 좋은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유원아.”
그리고 현규진이 제 이름을 부르는 것에 나머지 정신 반도 돌아왔다. 유원은 완전히 또렷해진
두 눈으로 이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와 같이 브런치를 먹으러 온 곳에서 제가
현규진을 끌고 화장실로 와 칸 안에 데리고 들어와 문을 잠근 것이었다.
지금 당장 키스하고 싶다는 그 충동 때문에.
“나 여기 왜 데려왔어?”
“…….”
“뭐 하려고.”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밖으로 새어 나가서 좋을 게 없다는 일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작고
낮게 흐르는 현규진의 목소리에 등줄기를 타고 오싹함이 흘렀다.
“그게….”
“응?”
현규진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여기서 시간을 너무 끌면 안 되는데 상황 판단이 가능해진
정신으로 현규진을 마주하니 너무 부끄러워 그 어떤 말도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빨리 안 나가면 이모랑 이모부가 이상하게 생각할걸.”
“…….”
“찾으러 올지도 몰라.”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여러 감정이 마구 뒤섞여 유원을 곤란하게 했다. 현규진과 닿고
싶은데 말을 할 수는 없고, 부모님한테 이상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데 또 현규진과 닿지도 못한
채 이대로 나가고 싶진 않았다.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유원은 몸을 숙여 저와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현규진의 얼굴을 보다가 그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가볍게, 아주 가볍게 눌렀다가 떼었다.
딱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랑 키스하고 싶어?”
“…너 때문이잖아. 네가, 네가 손 만져서….”
“맞아. 다 나 때문이야. 넌 잘못 없어.”
그대로 현규진이 밀려들었다. 다급히 입술이 맞물리며 유원의 몸이 문으로 밀렸다. 유원은
그토록 원하던 열기가 가득 차는 느낌에 눈을 감으며 현규진의 허리를 두 팔로 가득
끌어안았다.
입술을 머금다가 혀가 닿으면 어깨가 움칠 튀었다. 그대로 깊게 얽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머금었다. 현규진이 유원의 숨을 앗아 가면서 아랫배가 울렁이는 감각을 전해 줄
때마다 감긴 유원의 얇은 눈꺼풀 끝에 매달린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떡하지…. 너무 좋아. 겨우 돌아온 줄 알았던 정신이 또 아득해졌다. 유원은 여기가 어디인지
또 밖에서 누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지 전부 잊은 채 오직 현규진에게 온 마음을 몰두했다.
“하아….”
“하…. 갑자기 나 넘어져 다쳐서 먼저 간다 그러면 안 되나. 더 하고 싶은데.”
“그러다 일 커져. 그런 거짓말은 하면 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부드럽게 입술이 마주했다. 유원은 다시 눈을 감은 채 혀를 살살
움직였다. 그래도 현규진과 계속 키스를 많이 해서 그런지 처음보다 아주 쪼끔 키스하는 게
편해진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기분은 좋지만, 숨을 쉬기가 너무 힘들고, 혀를 움직이는 것조차
너무너무 어색하고 기분이 이상해 잘 움직이지 못했는데 이젠 조금이라도 더 같이 나누는
느낌이라 기분이 더 좋았다.
“…이제, 이제 가야….”
말이 흐르면 또 맞물리고, 또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맞물렸다. 저도 현규진과 둘이 더 있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원은 저를 문과 몸 사이에 가두는 것처럼
팔로 막고 있는 현규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더 늦으면 엄마, 아빠가 진짜 이상하게 생각해.”
“무서워?”
“…조금. 넌 안 무서워?”
“별로.”
저를 향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든 것을 본 현규진이 유원의 몸을 가두고
있던 팔을 내리고 몸을 떼었다. 유원이 뭘 걱정하는지 또 뭘 무서워하는지 잘 알기에 제가 더
걱정을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가자. 이따 집에 가면 우리 집 가는 거 알지? 같이 과외 숙제하기로 했잖아.”
“응. 알아.”
“그때 또 해도 돼?”
“…숙제… 다 하면….”
“존나 빨리 끝내야지.”
씩 웃은 현규진이 문밖으로 귀를 기울이다가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에 가만히 문을
열어 바깥을 살폈다. 그리고 유원 먼저 내보낸 다음 저도 칸 안에서 나와 나란히 서서 손을
씻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하면 뭐라 그러지?”
“너랑 맞담 하느라 늦었다고 해야지.”
“미쳤나 봐.”
“키스하느라 늦었다고 하는 것보단 낫잖아.”
“둘 다 안 돼.”
“안 되는 게 너무 많네.”
장난스럽게 웃은 현규진이 페이퍼타월을 뽑아 물에 젖은 유원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느릿하게 손가락 사이까지 물기를 닦아 주었다. 페이퍼타월이 완전히 흠뻑 젖은 뒤에야 손이
떨어졌다. 유원은 손가락 사이사이에 남은 것 같은 현규진의 손길을 느끼며 괜히 손을
만지작거렸다.
“가자.”
그리고 함께 화장실을 나섰다. 다시 친구의 모습이 되어.
커틀러리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유원은 초콜릿이 묻은 바나나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제 부모님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두
시간 동안이나 쭉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질 수 있도록 웃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현규진이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둘이 뭐든 같이 하는 거 볼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좋은지 몰라. 내가 소희랑 그런
사이잖아. 어릴 때부터 쭉 언제든 의지할 수 있고, 기쁜 일 생기면 가장 먼저 생각 나는 그런
친구.”
친구. 유원은 엄마가 말하는 친구라는 말을 곱씹었다. 그럴 의도는 아니지만, 엄마, 아빠를
속이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살아 보니까 그런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더라. 그래서 난 우리 규진이랑 유원이가
나랑 소희처럼 그렇게 평생 서로에게 든든한 너무 좋은 친구가 됐으면 좋겠어. 물론 지금도
그러고 있지만.”
평생 서로에게 든든한 좋은 친구. 늘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친구라는 말이 오늘따라 조금
어렵게 들렸다.
“나중에 물론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결혼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자주 만나서 다 같이 한
가족처럼 지내면 너무 좋잖아.”
“네. 맞아요. 평생 같이 지내면 좋죠.”
현규진은 그냥 지나는 이야기를 하듯 너무나 잘 대답을 하고 웃지만, 유원은 자꾸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까지 친구 사이는 별 문제 없이 무탈하게 잘 이어져 왔고, 제가 현규진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 없었더라면 앞으로도 쭉 10 년이고 20 년이고 지금처럼 변함 없이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평생’ 이어질 가능성이 큰 친구 사이는 제가
현규진을 좋아하게 되며 끝이 났다. 제가 우정을 끝내 버린 것이었다.
“…….”
친구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의미로 보통의 연애를 하는 사람들처럼 그런 의미로
좋아해도 평생 함께할 수 있을까? 사귀는 사람들은 왜 싸울까? 서로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그리고 어떻게 헤어질 수 있을까? 좋아하는 마음이 갑자기 확 식을 수도 있는 걸까?
현규진이랑 헤어지게 되면 어쩌지?
예전에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생각이었다. 친구와는 헤어짐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유학을 간다거나 가까이 살다가 멀리 이사를 간다거나 해도 친구 사이 자체가
끝나는 것은 아니니 ‘끝’에 대해 생각을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연애는 분명 뭔가 다르게 다가왔다. 만약 연애할 때 현규진과 싸우게 된다면 뭐 때문에
싸우게 될지, 친구가 아니라 사귀는 사이일 때는 어떻게 화해를 해야 하는지, 만약에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하는 마음이 평범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 하나 아는 게 없어서 더 그랬다.
“유원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생각이 잔뜩 고인 머릿속으로 아빠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조금 놀란 유원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어날지 아닐지도 알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자꾸 걱정하는 습관을 버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그게 현규진과 저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유원의 옅은 한숨이 다시 입술 근처로 흘렀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48 화(47/127)

48


오후 두 시쯤 집으로 돌아와 과외 숙제와 학원 숙제를 챙긴 유원은 현규진의 집으로 올라갔다.
저를 무척 반겨 주고 좋아해 주는 이모와 이모부가 안 계셔서 아쉬웠지만, 또 현규진과 단둘이
집에 있다는 게 좋기도 했다.
“오늘은 운동하러 안 가?”
“응. 오늘은 안 가려고. 몸 풀고 싶을 때 가는 거라 매주 꼬박꼬박 안 가도 돼.”
“다음에 나도 구경 가도 돼?”
“그럼. 내가 다 이기는 거 보여 줄게.”
씩 웃은 현규진이 과외 숙제 프린트물을 꺼냈다. 이걸 다 풀어야 한다니 골치가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다 풀고 나면 유원과 또 기분이 달착지근해지는 시간을 맘껏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의욕이 생겨났다.
“나 지금부터 집중할 거니까 정유원 방해 금지.”
“난 여태까지 공부할 때 너 방해한 적 없거든. 맨날 네가 했지.”
“두 시간 안에 이거 다 풀고 노는 게 목표니까 너도 나랑 속도 맞춰. 그래야 너 좋아하는 거
존나 하지.”
“나 좋아하는 거?”
“키스.”
장난기 가득한 현규진의 눈을 본 유원이 샤프로 아프지 않게 손가락을 톡 건드렸다.
유원의 약한 힘이 닿았다가 떨어진 자리가 간지러웠다. 이럴 때조차 아프게 때리지 못하고
그냥 살짝 건드리기만 하는 착하고 마음 약한 유원이 너무 귀엽고 예뻐 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저 때문에 유원도 공부를 하지 못하게 되어 또 평일에
내내 바쁘게 지낼 게 분명했다. 고개를 저어 마음을 다잡은 현규진이 의지를 담아 샤프를
쥐었다.
“지금 두 시 반이니까 네 시 반까지 집중.”
“알았어.”
“두 시간이나 못 하는데 한 번만 하고 시작할까.”
자리에 앉은 채로 현규진이 상체만 유원이 있는 쪽으로 기울였다. 현규진의 기다란 책상에
나란히 앉아 있던 유원이 살짝 빨개진 얼굴을 현규진 쪽으로 움직였다.
쪽, 쪽쪽…. 간지러운 소리가 세 번 울리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 유원의 귀가 새빨갰다. 그
귀를 건드리고 싶어 손끝이 다 간지러웠지만, 현규진은 샤프를 더 꽉 쥐며 충동을 짓눌렀다.
지금 건드리면 공부고 뭐고 진짜 다 집어치우게 될 것 같은 이유였다. 문제나 풀자, 문제나.
억지로 숫자가 가득한 문제에 시선을 고정했다.
사각사각. 샤프심이 종이에 문질리며 닳는 소리만 나는 방 안에서 유원은 슬쩍 정말 문제 푸는
것에 몰두해 있는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얼굴로 문제지만 내려다보고 있는 옆얼굴이 너무 잘생겨 그냥 한번 보고 다시 문제를
풀려고 했던 유원의 시선이 계속 붙잡혔다.
“…….”
진짜 잘생겼다…. 어떻게 저렇게 전부 다 잘생겼지. 웃어도 잘생기고, 무표정해도 잘생기고,
싸울 때도 잘생기고, 키스할 때도 잘생기고….
유원은 키스할 때 저에게 다가오던 현규진의 얼굴을 멍하니 떠올렸다. 다른 사람은 모르고
오직 저만 아는 그 얼굴을 떠올리느라 제가 아예 대놓고 보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
장난스럽다가도 키스하려고 다가올 때면 눈동자가 무척 진지해지는 게 보였다. 미소를 짓고
있어도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고, 아주 가까워져 눈에 전부 들어오지 않을 만큼 가까이 왔을 땐
입술에 닿은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과 코끝에 닿는 설레는 향이 현규진의 존재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 줬다.
현규진의 눈에는 제가 어떻게 보일까? 키스할 때 매번 딱딱하게 굳어서 눈만 감는데 바보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이제 유원은 샤프 꼭지를 입술 사이에 문 채 고민에 빠져 있었다. 현규진이 턱을 괸 채 저를
똑같이 마주 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할 만큼 깊은 고민이었다.
“유원아. 나 잘생겼지.”
“…응.”
대답과 동시에 멍하던 시야가 걷혔다. 유원은 빤히 저를 보고 있는 현규진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깜짝 놀라 뒤로 몸을 물렸다.
“뭐야, 정유원. 방해 안 한다며.”
“내, 내가 언제 방해했어.”
“그렇게 계속 키스하고 싶어서 어떡해, 유원아. 큰일 났다. 너 이제. 나 없으면 못 사는 거
아냐?”
“…나 그런 말! 한 적 없거든.”
“그럼 왜 그렇게 봤어. 맞는데 뭐.”
“아니야….”
“알았어. 한 번만 하고 하자. 그래도 벌써 한 시간 지났으니까.”
솔직히 키스 생각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라 끝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저에게
다가오는 현규진을 밀어낼 마음도 들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제가 어떻게 현규진을 밀어낼 수
있겠는가. 이렇게 닿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도 숨이 가빠질 것만 같은데.
무릎과 무릎 사이로 현규진의 무릎이 파고들었다. 느릿하게 다리가 맞물리며 의자에 앉은
채로도 거리가 꽤 가까워졌다. 유원은 긴장감에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진지해진 눈동자를 한 현규진의 얼굴이 다가왔다. 유원은 눈을
감지 않고 저에게 다가오는 현규진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지는 입술과 급함이
느껴지는 파고듦에 손에서 힘이 빠졌다. 혀가 깊게 뒤엉킨 것은 손가락 사이에 있던 샤프가
책상 위로 아무렇게나 떨어졌을 때였다.
진짜 이렇게 좋아서 어떡하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닿는 게 좋을 수가 있지. 유원은 저도
모르게 두 무릎을 오므려 제 다리 사이에 들어와 있는 현규진의 다리를 꽉 조였다. 그럴수록
키스가 깊어졌지만, 유원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 숨 쉬어.”
깊게 이어지다가도 유원이 헐떡인다 싶으면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유원은 현규진과 코끝이
간질간질 닿았다가 떨어지고, 또 살짝 스치기도 하는 걸 느끼며 흐트러진 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중에도 마치 제가 얼른 숨을 고르기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현규진의 시선은 저에게만
닿아 있었다.
그게 좋았다. 너무너무.
숨이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았을 때 다시 급히 현규진이 찾아들었다. 그 힘에 바퀴가 달린
의자가 아닌데도 뒤로 확 밀렸다. 그런 유원을 따라 아예 의자에서 일어난 현규진이 유원이
앉은 의자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은 채 상체를 깊게 숙여 키스를 이어 갔다.
“으음….”
커다란 몸을 숙이고 있는 게 불편할 텐데도 멈추지 않는 현규진의 얼굴을 쓰다듬던 유원이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히 올 땐 아무도 없었는데 지금은 뭔가 움직이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이모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유원은 얼른 현규진의 어깨를 밀었다.
“이모, 이모 오셨나 봐.”
“여기 있는 것도 아니잖아.”
다시 확 다가오는 얼굴에 놀란 유원이 두 손으로 현규진의 입을 막았다.
“아, 왜.”
불만스럽다는 듯 인상을 쓴 현규진이 뭐라 뭐라 말을 했지만, 유원은 넘어가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이모 방에 오실지도 모르잖아.”
“안 와. 와도 노크하지.”
“노크 소리 못 들을 수도 있어.”
“나 진짜 죽을 거 같아서 그래. 못 참겠어.”
그 말에 흔들린 유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틈을 타 손을 잡아 부드럽게 내린 현규진이
다시 입술을 마주했다. 그때 다가오는 발소리와 함께 노크 소리가 방 안으로 울렸다.
“유원이 왔어?”
깜짝 놀란 유원이 그대로 현규진을 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이모…!”
“현관에 같은 신발이 두 개 있는데 규진이 것보다 작아서 유원이 왔나 했는데 진짜네.
브런치는 맛있었어?”
“네에…. 다음에는 이모랑 이모부도 같이 꼭 가요.”
“응, 그래. 같이 가자.”
유원의 등을 두드리던 현규진의 엄마가 마실 것 하나 없는 책상을 보고는 혀를 쯧 찼다.
“주스라도 마시면서 하지. 공부하고 있어. 과일이랑 마실 거 가져다줄게. 그리고 유원이
저녁도 먹고 가. 유원이 좋아하는 오븐 치킨 해 줄게. 파스타랑.”
“와아, 너무 좋아요. 안 그래도 오븐 치킨 생각 났었거든요.”
“그랬어? 말하지. 앞으로는 더 자주 만들어 줄게.”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유원을 보던 현규진의 엄마가 먹을 것을 가지러 다시 방을 나가
부엌으로 향했다. 방문이 닫히는 것을 본 유원은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머릿속이 다 멍했다.
“들킬 뻔했잖아. 내가 이모 올 것 같다고 하지 말랬지….”
“안 들켰잖아.”
“안 들켰으면 다 된 거야? 앞으로는 진짜… 어디에서든 다른 사람 있을 땐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건 좀 말이 안 되는데.”
자리에 앉은 현규진이 따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유원은 가만히 이어질 현규진의 말을
기다렸다.
“그렇잖아. 그럼 학교에서도 안 되는 거고, 집에서도 엄마, 아빠 없을 때가 몇 번이나 있다고.”
“우리 엄마, 아빠 없을 때는 꽤 되잖아….”
“이모 쉬실 때는? 우리가 아직 뭐 독립할 상황도 아니고, 단둘이 있을 시간이 별로 없잖아.”
“그래도 이렇게 불안한 것보다는 낫잖아. 조심하자는 거야. 너도 조금만 더 조심해 줬으면
좋겠어서 한 말이고.”
“나도 나름 조심하고 있어.”
“좀 전에 그게 조심한 거야? 내가 밖에서 소리 난다고 하는데도 계속하려고 하고.”
“그래서 나도 노크 소리 날 때 그만했어. 네가 밀어서 그만한 게 아니라 나도 그때….”
다시 노크 소리가 울렸다. 혹시라도 밖으로 들릴까 싶어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말하던
현규진은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곧 책상 위로 과일과 주스, 쿠키 같은 것들이 놓였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라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다시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49 화(48/127)

49


“…….”
“…….”
다툼까지는 아니지만, 기분 좋은 쪽의 대화는 아니었기에 먼저 다시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어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현규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문제지를 보며 아무렇게나 놓인
샤프를 들고 애꿎은 샤프심만 뚝, 뚝 눌러 뭉갰다.
겨우 쥐어 짜내듯 집중력을 모아 문제를 몇 개 더 풀었을 때 유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현규진이 나가려는 유원의 손을 잡아 세웠다.
“어디 가. 집에 가?”
“…물 마시고 싶어서.”
“아….”
안도와 함께 손에 들어가 있던 힘이 스르륵 풀렸다. 유원은 다시 의자에 앉는 현규진을 보다가
방을 나섰다.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벌써부터 하던 이모와 이모부가 유원을 보고 웃었다.
유원은 정수기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그 대화
안에서 유원은 현규진을 떠올렸다.
싸운 것까진 아니지만, 친구일 땐 이런 걱정을 할 일이 전혀 없었기에 조금 난감하긴 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될 일’, 그것도 스킨십을 친구와 할 일이 없으니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무척 낮았다. 하지만 사귀게 된 뒤로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걱정과 불안이
생겨났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은 현규진과 사귀는 것에 있어 마음이 완전히 편하지는 않았다.
현규진을 보면 벌써 다 적응을 한 것 같아 보이는데 저만 너무 주변 신경을 쓰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현규진이 너무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저녁 여섯 시쯤 먹을 건데 괜찮지?”
“네. 그때 나올게요.”
“응. 너무 무리하진 말고 놀면서 해. 고 3 되기 전에는 한 번씩 그래도 돼.”
“네에, 그럴게요. 이모.”
웃으며 대답한 유원이 물컵을 들고 다시 현규진의 방으로 가는 복도에 들어섰다. 다시
현규진과 마주할 생각을 하니 조금 긴장이 됐다. 딱히 누가 사과를 할 일도 아니라 더 그랬다.
“…….”
마음을 다잡고 방으로 들어간 유원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 다시 문제지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제가 풀던 문제 아래, 숫자들로 가득한 풀이 과정 끝 쪽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조심할게]
[미안해]
[화내지 마]
[무서워ㅠㅠ]
짧은 네 문장을 본 유원의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이렇게 사과할 일도 아니고 화가 난 것도
아닌데 이런 말을 들으니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또… 먼저 이 어색함을 깨기 위해 다가와 준
현규진에게 고맙기도 했다.
“…화 안 났어.”
“정말?”
“응. 그냥 내가 걱정이 많아서 그래. 알잖아. 나 겁쟁인 거.”
“귀신만 무서워하는 줄 알았더니.”
저에게 닿는 시선에 몸을 돌려 앉아 현규진과 마주한 유원이 옅게 맺힌 미소를 따라 웃음
지었다.
“난 너 화난 것 같을 때가 제일 무서워.”
제가 현규진을 정말 많이 좋아하기는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무섭다고 하는 현규진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걸 보면.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 부모님이 알아서, 아니. 들킨다고 해야 하나. 뭐 그래서 좋을 거
없으니까.”
“사귀는 걸 절대 알리고 싶지 않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알지? 알려도 좀 나중에 졸업하고….
시간 좀 지나면 알리고 싶어.”
“알아.”
책상 위로 손을 뻗어 유원의 손끝을 톡 건드린 현규진이 조금 더 가까이 움직여 손가락을
얽었다.
“조심할 테니까 어디든 둘이 있을 땐 하게 해 줘.”
“…….”
“어떻게 집에 아무도 없을 때만 해. 응?”
“…….”
“그리고 너무 걱정 많이 하지 말고. 우린 친구일 때 보인 게 많아서 괜찮아. 나 믿어.”
현규진의 말도 사실 일리는 있었다. 아직 학생이라 돈이 있어도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곳에
매일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뽀뽀나 키스를 하려고 특정 장소에 가서 그때만 하는 것도 좀
이상하긴 했다. 무엇보다도 유원 역시 현규진과 닿는 게 좋았기에 제 손가락을 살살 만지면서
허락을 구하는 현규진의 말에 넘어가 줄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뭐 중요한 일이라도 이뤄 낸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좋아하는 현규진을 보며 소리 내어 웃은
유원이 다시 현규진 쪽으로 의자를 조금 더 가까이 붙여 앉았다.
“이렇게 바로?”
가까워지자마자 몸을 바투 붙이며 키스할 것처럼 구는 현규진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은
유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문제 마저 다 풀어야지.”
“그럼 한 번만 해 줘. 쪽.”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질 때 나는 소리를 내며 웃는 현규진을 거절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유원은 숨과 입술이 닿아 간질간질한 손바닥을 스르르 내리고, 그 자리로
얼굴을 기울였다.
쪽….
현규진이 소리 낸 것처럼 간지러운 소리가 울렸다. 오직 둘만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게.
하지만 그 작은 소리가 주는 두근거림은 지나칠 정도로 컸다. 서로의 마음을 채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함께 있는 이 공간마저도 좋아한다는 마음으로 가득 찰 만큼.
불안함을 마음 한쪽 구석으로 밀어 보이지 않게 한 유원이 두 눈에 가득 찬 현규진을 보며
웃었다.
***
유원의 체육복이 또 없어졌다. 다음 교시가 체육이라 책상 위에 두고 잠깐, 정말 2 분 정도
자리를 비웠는데 그사이에 감쪽같이 체육복이 사라져 버렸다. 유원은 당황했고, 현규진은
화가 나 욕을 내뱉었다. 체육복 따위가 없어진 게 문제가 아니라 그걸 가지고 간 새끼가 그
체육복으로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이 되기 때문이었다.
“어떤 새낀지 씨발, 잡히기만 하면 진짜 아가리에 체육복 물리고 죽여 버려야지.”
“…체육복 없는 애가 가져갔나?”
“그래도 문제지. 도둑이나 변태나 진짜 다 좆같은데 변태가 더 짜증 나. 아, 진짜.”
너무 화가 나서 머리가 다 지끈거릴 정도였다. 현규진은 당황해 망연히 빈 책상을 보고 있는
유원의 팔을 부드럽게 쥐었다.
“내 거 입어.”
“너도 입어야지.”
“난 그냥 벌 받으면 되니까 너 입어. 그래봤자 운동장 몇 바퀴 뛰는 거라 힘들지도 않아.”
“아니야. 난 거의 앉아만 있으니까 내가 선생님께 말씀 드릴게.”
“수업 안 듣는다고 이제 자기 무시하는 거냐고 지랄할걸. 괜히 혼나지 말고 내 거 입어. 종 칠
때 돼서 빌리기도 애매하잖아. 얼른 가자.”
유원을 데리고 교실을 나선 현규진이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수업 시작할 때가 되어
조용한 화장실 가장 안쪽으로 들어간 현규진은 유원에게 체육복을 안겨 주었다.
다시 한번 괜찮다고 말하려던 유원은 현규진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그냥 칸 안으로
들어갔다. 저를 걱정해서 체육복까지 안겨 준 현규진의 마음을 거절하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교복을 벗고 체육복을 입은 유원은 너무 커서 완전히 몸을 감싸며 추욱 늘어지는 옷을 보며
웃었다. 품도 크고 소매도 길고, 바지 길이도 길어 바닥에 끌리지 않게 조심해야만 했다.
“다 입었어?”
“그냥 혼나는 게 나을 것 같아. 너무 커서… 이러고 나가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은데….”
“…아, 미친.”
현규진은 문을 열고 나오는 유원을 보며 머리 위로 울려 퍼지는 수업 시작종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제 체육복이 유원에게 엄청 클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직접 입은 걸 보니 체육복이 큰 것보다도 더 문제가 있었다.
“…존나 귀엽다, 진짜.”
제 체육복을 입은 유원이 진짜 너무 귀엽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정유원이 다른 사람 것도
아니고, 제 체육복을 입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손끝이 다 저릿했다.
“…왜 그래?”
“…….”
“…현규진.”
“그냥 째자.”
“응?”
“내가 책임지고 수습 다 할게.”
“뭘?”
“진짜 미안한데 지금 그거 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서. 이따, 이따 말할게. 진짜 미안.”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말도 안 한 채 칸 안으로 들어오는 현규진에게 밀려 유원이 뒷걸음쳤다.
수업 시작종이 쳐서 서둘러 나가야 하는데 왜 오히려 안으로 들어오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빨리 나가야 돼. 종 쳤잖아.”
“알아, 아는데 못 나가겠어.”
“왜?”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유원의 말간 얼굴만 봐도 눈앞이 핑 돌
지경이었다. 현규진은 자꾸 초점이 나가 어지러운 느낌을 없애려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제 대답을 기다리는 유원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쥐었다.
“왜긴….”
지금 너랑 안 닿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 그대로 상체를 숙인 현규진이 유원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기분 좋게 몸을 압박하는 현규진의 힘에 유원의 머릿속에 갈등이 일었다. 여태까지 아파서
조퇴를 하거나 할 때 외에는 이런 식으로 수업을 빠져 본 적도 없고,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단단하게 생각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주위로 어차피 체육 시간이고, 체육복도 너무 큰데다가 수습만 잘 된다면 그냥
이대로 딱 한 번만 현규진의 말을 따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낯선 합리화도 고개를 빼꼼
들었다. 유원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하면 안 될 일을 진지하게 고민까지 하고 있다니.
그렇지만… 저도 현규진과 이렇게 붙어 있는 게 너무 좋아 자꾸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졌다.
그냥 모른 척 끌려가고 싶었다. 제 얼굴을 쥐고 있는 따뜻한 손, 단단히 마주한 몸에 실린 힘,
이리저리 얽힌 느낌이 나는 다리와 조금만 움직여도 손등을 완전히 덮으며 내려오는 소매의
느낌까지. 솔직히 무엇 하나 좋지 않은 게 없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50 화(49/127)

50


“…하아…. 진짜….”
“하….”
“진짜… 책임질 수 있어?”
“어. 내가 다 책임질게.”
혼날까 봐 긴장한 얼굴로 바다가 웃음이 번지는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유원의 마음도
따라 스르르 풀어졌다. 눈동자와 머릿속, 그리고 마음 가득 오직 현규진만 보였다. 유원은
체육복 긴 소매가 흘러내려 손등을 다 덮은 두 팔을 들어 현규진의 목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럼…. 해도… 돼.”
“해도 돼?”
“…응.”
옅은 웃음이 묻은 얼굴로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하는 현규진을 올려다보던 유원이
묘하게 고이는 초조함에 안달이 났다. 어떻게 안달이 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현규진이
더 해 주지 않아 애가 탄다는 표현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을 정도였다.
“너도 나랑 하고 싶은 거 맞지, 유원아.”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려고 평소보다 한 톤은 더 낮아진 목소리가 그대로
심장으로 파고들어 유원의 마음을 마구 헤집었다. 어떻게 아닐 수가 있을까.
“…그런 건 내가 너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왜 그런 걸 물어.”
“…….”
“…그런 당연한 걸….”
“…….”
“…아프지도 않은데 수업 안 듣는 거 처음이라 나 지금 너무 무섭고, 걱정돼. 그러니까… 빨리
해 줘…. 너랑 하면… 아무 생각도 안 나고 기분….”
좋아…. 현규진의 입술 위에서, 그리고 느릿하게 문질리는 혀 위에서 소곤소곤 작게
속삭여지던 유원의 마지막 말이 굴러갔다. 그리고 이내 서로에게 몰두해 다른 생각은 무엇도
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열기에 녹아 입 속 어딘가로 녹아 흡수되었다.
현규진의 두 팔이 온 몸을 가득, 꽉 끌어안았다. 힘이 강해 조금 아파 어깨를 톡톡 두드리니
살짝 힘이 빠졌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전부 알아듣는 게 귀엽고 좋아 키스하던 유원이
웃음 지었다.
“…하…. 왜?”
“아니야, 좋아서.”
고개를 저은 유원이 다시 제 앞에 있는 현규진의 입술에 먼저 제 입술을 눌렀다. 다시
따뜻함과 함께 숨이 뒤섞였다.
***
체력이 약한 유원은 긴 키스 한 번에도 힘이 빠지곤 했다. 어릴 때부터 늘 조금만 활동을 많이
해도 기진한 느낌이 들었으니 그게 이상할 일도 아니지만, 키스를 잔뜩 해서 기운이 빠지는
것은 여태까지 유원이 느껴 온 것과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이런 기분이라면
기운이 계속 빠져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도 깜짝 놀라곤 했다.
“자, 마셔.”
유원은 현규진이 준 바나나우유의 가느다란 빨대를 입에 물고 노란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으로 번지는 달착지근한 바나나 향이 좋아 안 그래도 좋은 기분이 조금 더 좋아졌다.
“괜찮아?”
“응? 응, 나 괜찮아. 안 아픈데….”
“힘들어 보여서.”
“아니야, 나 안 힘들어. 기분 좋아.”
저를 걱정스럽게 보는 현규진의 시선에 웃어 보인 유원이 다시 바나나우유를 한 모금 넘기고,
흘러내리는 소매를 손등 위로 올렸다.
“접어 줄게.”
걷어도 흘러내리고, 또 걷어 올려도 흘러내려 체육복에 폭 빠진 것 같은 유원을 보며 웃은
현규진이 의자를 당겨 앉아 긴 소매를 두 번 크게 접어 올렸다.
“나 방학 때 운동 가르쳐 줘.”
“운동? 운동은 갑자기 왜. 싫어하잖아.”
“체력 좀 기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혼자 하려니까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우리
아파트 안에 피트니스 큰 거 있잖아. 거기 가서 PT 받아 볼까?”
“나랑 해, 나랑. 내가 알려 줄게. 일단 걷는 것부터 하자. 두껍게 입고 한 시간씩 같이 걷자.
산책도 할 겸. 더 추워지면 거기 피트니스 가서 같이 걷고.”
양쪽 소매를 잘 접어 올리고, 바짓단까지 접어 준 현규진이 빨대를 입에 문 유원을 보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애들이랑 담배 피울 때 가는 미술실보다 더 작아 안락한 느낌까지 드는
상담실에 유원과 둘이 있으니 마음이 자꾸 몽글몽글해졌다.
“갑자기 체력은 왜?”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너무 자주 아프고, 조금만 무리해도 열부터 나잖아.
분명히 괜찮은 것 같았는데 갑자기 기절하기도 하고.”
“그래도 큰 병은 아니라니까 다행이지. 앞으로 더 괜찮아질 거야.”
“응…. 작년에 쓰러졌을 때 병원에서도 너무 무리하지만 않으면 진짜 가벼운 운동은 시작해
봐도 좋을 것 같다고 했거든. 그땐 해야 한다는 거 알긴 했는데…. 갑자기 운동하고 그랬을 때
막 어지럽기도 하고, 딱 한 번 밖에 나가서 걸었는데 감기 너무 심하게 걸려서 고생하고
그러니까… 다시 하기가 무서웠어.”
현규진도 작년 유원에게 있었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실신성 어지럼증이 가끔
와서 무리를 하거나 컨디션이 엄청나게 좋지 않을 때 유원은 한 번씩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과
함께 쓰러지고는 했다. 작년에는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그대로 쓰러진 유원을 안아 들고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갔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철렁했다.
반나절쯤 병원에 있다가 퇴원한 유원은 병원의 권유에 따라 어렵지 않고, 아주 기초적인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체력이 약하고 면역력도 그리 좋지 않은 유원은 정말 운동을 딱
한 번 하고, 일주일을 앓았다.
그 이후 현규진도 최근까지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꺼내지 않았다. 열이 펄펄
끓어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는 유원을 보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우리 일요일에 걸었었잖아. 너랑 같이 그냥 운동 아니라 산책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하니까 별로 힘들지도 않고, 재미도 있고… 좋았거든.”
“그랬어?”
“응….”
“이제 자주 같이 하자.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 나야 너랑 더 오래 같이 있고 좋지.”
씩 웃은 현규진이 기특하다는 듯 유원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이 좋아 유원은
가만히 잠시 따뜻함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만 해도 지금보다는 더 괜찮아지겠지?”
“그럼. 당연하지.”
“진짜 그랬으면 좋겠다아…. 그래서 너랑 뭐든 더 많이 같이 하고 싶어.”
“…….”
“지금은 나 때문에 못 하는 게 너무 많잖아. 뭐 조금만 해도 열 나고 아프니까…. 가족끼리 같이
여행 가도 나 때문에 쉬러 가는 데만 가야 하고.”
착하고 속이 깊은 성격이라 여태까지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깊게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현규진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냥
다 괜찮다는 말을 원하고 유원이 꺼낸 말이 아니라는 걸 아는 이유였다.
“나랑 같이 천천히 하자. 그리고 내가 지금 너한테 무슨 말을 할 건데, 이건 달래려고 하는 말
아니고, 또 네 맘 편해지라고 하는 말도 아니야. 그냥 있는 말 그대로 들었으면 좋겠어.”
“…응. 그럴게.”
“여태까지 너 신경 쓰고, 챙기면서 귀찮거나 싫었던 적 한 번도 없었어. 힘들었던 적도 없고.”
“…….”
“그리고 여행도 그래. 너도 같이 갈 수 있는 게 중요한 거지. 다른 게 뭐가 중요해.”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한 얼굴을 보니 심장이 또 사정없이 떨렸다. 유원은 손을 들어 저를
바라보고 있는 현규진의 뺨을 살짝 감싸 쥐었다.
“어른 같아.”
“이제 알았어? 나 원래 존나 어른이야. 키만 봐도 다 컸잖아.”
“키 얘기는 금지야.”
“왜. 더 크고 싶었어?”
“나도 너만큼 클 줄 알았는데….”
“꿈이 너무 컸네.”
혹시라도 분위기가 불편해질까 싶어 장난기가 묻은 웃음을 지은 현규진이 보들보들한 유원의
뺨을 양손으로 쥐고 쪼옥 큰 소리가 나게 뽀뽀했다.
“난 너 쪼끄매서 더 좋은데. 귀엽잖아. 작은 김에 좀 더 작지 그랬어. 손바닥에 올리고 다니게.”
“으…. 소름.”
“남 진심을 그렇게 받으면 돼?”
“몰라아…. 오글거려.”
“응? 돼, 안 돼. 대답해 봐. 정유원. 돼, 안 돼.”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간지럼을 태우려는 현규진을 피해 자리에서 일어난 유원이 상담실
안쪽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저를 따라 들어오는 현규진을 향해 손을 들어 앞을 막았다.
“대답 안 하고 왜 도망가는데.”
“간지럽히려고 했잖아.”
“아닌데.”
“맞잖아, 허리 막….”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성큼 한 걸음 다가오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은 하고 있던 말을 잊었다.
코 끝에 닿는 공기가 조금 서늘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뒤로 한 걸음을 더 옮기자 지금은 쓰지
않아 녹이 슬고 손만 대도 삐거덕 소리가 나는 캐비닛에 등이 닿았다.
“허리 막 뭐.”
“아….”
유원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아 어린애를 안 듯 들어 올린 현규진이 어렵지 않게 책상 위로
앉혔다. 그리고 무릎을 잡아 다리를 벌리게 하곤 그 사이로 들어가 섰다.
“내 옷 입은 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기분 존나 이상해.”
“…어떻게 이상한데?”
“몰라. 그냥 이상해. 네가 좀 야하게 보이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순식간에 귓가가 화끈거렸다. 유원은 제 다리 사이에 서 있는 현규진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현규진은 정말 조금도, 단 1cm 도 밀리지 않았다.
“…변태.”
“난 변태여도 돼.”
“왜?”
“네가 날 좋아하니까.”
좋아한다는 말은 참 신기한 말이었다. 그냥 그 말 하나로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유원은 현규진의 말에 온 정신을 빼앗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도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해 줘. 유원아.”
상체를 숙여 유원의 몸 양옆으로 팔을 내려 책상을 짚은 현규진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저에게 쏟아질 고백을 기다리며.
“…좋아해.”
친구 사이 고백 금지-51 화(50/127)

51


작지만, 따뜻하고 오로지 저에게만 닿는 목소리에 심장이 확 조여들었다. 저를 좋아하는
유원을 느낄 때마다 진짜 너무 좋아서 머리가 어떻게 돼 버릴 것만 같았다. 기분이 너무 붕
떠서 자칫 잘못하면 사고를 칠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날 귀찮아 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
“그런 말이 어딨어.”
“그래도…. 쉬운 일 아니라는 거 알아. 앞으로 정말 운동도 하고, 밥도 잘 먹을 거야. 걱정할 일
없게 할게.”
“알았어. 뭐든 다 같이 해.”
“응….”
눈이 접히도록 예쁘게 웃는 유원을 눈에 가득 담은 현규진이 숙이고 있던 몸을 세웠다. 입술로
찾아들 수 있을 만큼만 다시 기울여 다가가자 유원의 두 팔이 자연스럽게 허리로 감겼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술이 닿자마자 서로를 향해 벌어지는 입술 안으로 더운 숨이
뒤섞였다. 닿고, 또 닿아도 좋기 만한 마음을 누르기 어려워 유원은 부드럽게 혀를 마주
비볐다.
몇 분 남지 않은 달착지근한 첫 일탈 안에서.
***
현규진에게 제 마음을 들키기 전에도 좋아하는 마음이 나날이 커지고, 머릿속과 온 마음을
가득 채웠었는데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나날이 저의 모든 부분에서
현규진이 커지고 있었다.
유원은 숙제 채점을 하는 과외 선생님을 보며 책상 아래로는 현규진이 먼저 뻗어와 다리에
얹은 손을 만졌다. 다른 한 팔은 책상 위에 올려 턱을 괸 채 아무 일도 없는 듯 과외 선생님을
보고 있는 현규진을 보면 마음에 자꾸 열이 올랐다.
“…….”
“…….”
손가락을 장난스럽게 만지면 현규진의 손가락이 확 접히며 제 손가락을 가두었다. 그럴
때마다 유원의 입술에 미소가 옅게 번졌다. 별것도 아닌 손장난이 이렇게 기분 좋을 수 있다니
…. 유치하단 생각도 조금 들고, 선생님 앞에서 이런 장난을 몰래 치고 있다는 게 불안하기도
했지만, 손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와, 여기 뒤에 일부러 어려운 거 모아 뒀는데 다 맞았어. 자잘한 실수만 안 하면 이제 진짜
걱정할 거 없겠다. 특히 뒤에 이 문제들은 문제를 두어 번 꼬고 공식도 두 번이나 사용해야
해서 틀리기 쉬운데 정말 너무 잘 풀었어. 아, 이 맛에 과외 하지.”
감동했다는 듯 우는 시늉을 한 이준서의 시선이 문제지에서 떨어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책상
아래에서 얽혀 있던 손가락이 스르르 풀렸다.
“그런데 둘이 자리가 바뀌었네?”
“네. 요즘 제가 정유원 보다 공부 더 열심히 해서요.”
“아, 그래? 하긴. 규진이 진짜 많이 달라졌어. 전에는 숙제도 안 하고, 집중도 안 했는데 요즘은
너무 잘하고 있어.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자.”
“네, 뭐….”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현규진의 손가락을 톡 건드린 유원이 이상하게 대답하지 말라며 눈치를
줬다. 현규진은 어쩔 수 없이 선생을 향해 평소 어른들 앞에서 사기 칠 때 잘 짓는 세상
프리패스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본색을 들키지 않는 이상 그 어디에도 통하는 그 웃음은 과외
선생에게도 당연히 잘 통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해낼 수 있고, 처음부터 정말 잘할 애라는 걸 알고 있었다며 칭찬을 쏟아
내는 선생을 보며 현규진은 책상 아래로 팔을 하나 늘어뜨렸다. 그리고 유원의 허벅지 위에
놓인 손 위를 다시 덮었다.
“다음 주에 기말 끝나니까 토요일에 시간 괜찮으면 학교 쪽으로 올래? 학교 구경 시켜 줄게.
점심도 맛있는 거 사 주고. 학교 주변에 맛집 많거든.”
“정말 가도 돼요?”
“그럼. 유원이는 시간 되는 것 같고. 규진이는?”
“저도 되는데요.”
“좋아, 그럼 10 시 반까지 와. 학교 앞이나 역 쪽에서 내가 기다릴게.”
사실 현규진은 유원과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주말에 굳이 일주일에 두 번이나 보는 이준서를 또
봐야 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좋아하는 유원을 보니 싫은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겠는가. 귀여운 애가 하고 싶다는데 다 하게 해 줘야지.
“네.”
결국, 가겠다고 대답한 현규진은 좋아서 박수까지 짝짝 치는 유원을 보며 숨을 쉬듯 웃었다.
과외가 끝나고 냉장고에서 초코우유 두 팩을 꺼낸 유원은 제 손을 잡고 방으로 데려가는
현규진을 따라 바삐 걸음을 옮겼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마주 닿는 입술에 웃음이 났다. 왜 웃냐고 묻는 현규진의 머리칼을
달래듯 쓰다듬으며 한참을 닫힌 문에 기대어 서서 키스한 뒤에야 초코우유를 마실 수 있었다.
“다음 주 토요일 진짜 재밌겠다. 그치.”
“그렇게 좋아?”
“응. 한국대는 처음 가 보는 거잖아.”
몸이 약해 어릴 때부터 사람이 많은 곳이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제대로 가 보지 못한
유원은 이렇게 새로운 곳에 갈 기회가 생길 때마다 무척 설레고 좋았다.
“난 너랑 둘이 있는 게 더 좋은데.”
“그건 나도 그런데…. 한국대는 전부터 선생님이 놀러 오라고 하시기도 했고….”
“진짜 나랑 둘이 있는 게 더 좋아?”
“그럼. 당연하지.”
“그럼 오늘 나 자고 갈까.”
유원을 침대 위로 이끌어 함께 누운 현규진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불쌍한 눈빛을 했다.
누구라도 이 눈을 보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현규진에게 걸고, 넘겨 줄 그런 눈이었다.
“안 돼…. 열두 시쯤 엄마, 아빠 와.”
“오시면 뭐 어때서. 저번에도 같은 침대에서 잘 때 안 들켰잖아.”
“그래도… 좀 그래. 게스트룸 가서 잘 거면 자고 가고.”
“내가 너희 집에서 자고 싶어서 자고 간다는 거 아니잖아. 무슨 게스트룸이야. 내가 손님이야?
그럼 너도 게스트룸에서 자.”
“…조심하겠다고 약속했잖아.”
“조심해. 하는데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는 현규진을 따라 앉은 유원이 흐트러진 머리를 괜히 매만졌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것도 지금은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 이해가 안 돼. 전에는 같이
자는 거 이상한 일 아니었잖아.”
“전에는 내 침대에서 같이 안 잤으니까….”
“그래, 다 커서 같은 침대에 붙어 자는 거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 다른 사람한테는. 근데 우린
좀 특수성이 있잖아. 우린 기억도 안 날 때부터 친구였고, 내가 너랑 같이 자는 게 적어도 우리
엄마, 아빠랑 이모, 이모부한텐 이상한 일도 아니고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특수성.”
현규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전부 맞는 말이었다. 워낙 두 집이 친해서 저와
현규진도 남들보다 더 가까이 지냈고, 거기에 제가 몸이 약하기까지 해서 관계는 더욱
단단해지고 두터워졌다. 며칠을 붙어 있든 문을 잠그고 방 안에서 나오지 않든 부모님들은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원은 그래서 더 몸을 사리게 됐다. 친구일 때와 같은 행동을 하고는 있지만, ‘관계’가
달라지며 그 안에 들어 있는 의미가 달라졌고, 또 그 사소하고 평범한, 특별할 게 없던
행동들이 이제는 너무나 큰 설렘과 떨림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게 티가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가만히 보면 나만 너랑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런 말이 어딨어. 나도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이렇게 둘이 있는 것도 좋고, 나도 너 자고
갔으면 좋겠어.”
“그런데.”
“…관계가 달라졌으니까 같은 행동이어도 그 안에 들어간 의미는 다 달라졌다고 생각해.
전에는… 손 잡을 일이 생겨도 아무 느낌이 없었지만, 지금은 손만 잡아도….”
“…….”
“……엄청 떨린단 말이야.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도… 전엔 그냥 네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거
…. 그게 전부였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키스도 하고, 안기도 하고…. 전이랑은 다르잖아. 그게
어떻게 똑같아….”
책상 위에 놓인 초코우유 팩을 노려보고 있던 현규진의 날카로운 눈매가 점점 부드럽게
풀렸다. 서운했던 감정 위로 저와 손만 잡아도 떨린다는 유원의 말이 흘러내려 그 한심한
감정을 다 녹여 버렸다.
…씨발, 떨린대. 정유원 존나 귀여워, 진짜. 한숨만 나오던 머릿속이 다시 부드러운 유원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키스……. 그거… 하다 보면 다른 소리 진짜 하나도 안 들린단 말이야….”
“…그건 인정.”
“…….”
“아, 모르겠다. 진짜. 뭐가 이렇게 어려운데.”
침대에 걸터앉은 채 상체를 뒤로 기울인 현규진이 저를 내려다보는 유원과 눈을 맞췄다.
“머리로는 다 이해해. 이해하는데 그냥 너랑 더 같이 있고 싶어. 그래서 그래. 이유는 그거
하나야.”
“…….”
“친구일 땐 이런 고민 해 본 적이 없었는데.”
“…….”
“그냥 더 놀고 싶으면 더 놀고, 놀다 늦어지면 당연히 자고 가고. 그게 당연한 거였잖아. 이젠
그게 당연한 게 아니게 됐다는 게 이상해.”
진지함이 묻은 말에 유원의 심장이 확 수축했다. 너무나 당연히 하던 것들에 제약이 생기며
현규진이 혹시라도 친구 사이가 깨져 버린 것을 후회라도 할까 싶어 마음이 불안으로 짙게
물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네가 싫다는 건 최대한 안 할 거야. 차이기 싫어.”
몸에 반동을 줘 상체를 일으켜 앉은 현규진이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유원의 머리칼을 부드러운 손길로 흩트렸다.
“갈게. 공부할 거지? 방해 안 할 테니까 자기 전에 톡해.”
방을 나서는 기다란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유원은 얼른 그 뒤를 따라 현관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는 현규진의 옷자락을 소심하게 당겼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52 화(51/127)

52


“규진아…. 잠깐만.”
기꺼이 그 당김에 멈춰선 현규진이 반쯤 열었던 현관문을 닫고 유원을 향해 돌아섰다. 현관
천장에 있는 센서가 두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반짝 빛을 주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붙잡을 거면 그렇게 잡지 말고.”
“…….”
“안아 줘.”
현규진의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빛이 다시 머리 위로 쏟아졌다. 유원은 안아 달라고 팔을
벌린 현규진에게 다가가 두 팔 가득 현규진을 끌어안았다.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 그래도 나 너 진짜 좋아해. 엄청 엄청 많이.”
유독 맥을 못 추는 무더운 여름날 햇볕에 녹아 버리기 직전에 마주한 그늘 만큼, 좋아하는
것들로 잔뜩 채운 달콤한 서랍을 전부 줄 수 있을 만큼, 몸이 약하고 자주 아파서 행운 같은
너와 만날 수 있었던 거라면 주저 없이 다음에도 건강하지 않은 삶을 선택할 만큼.
“응, 나도 좋아해. 정유원.”
“…….”
“엄청 엄청 많이.”
머리칼 위에 한 번, 그리고 귓가에 한 번 따뜻함이 놓였다. 유원도 좋은 향이 나는 현규진의
어깨 위에 살짝 입술을 눌렀다. 단단히 몸에 감긴 팔이 더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유원은
현규진도 지금 제가 느끼는 안도를 느낄 수 있도록 조금 더 힘을 주어 더 가득 현규진을
끌어안았다.
“나 한 시간만 더 있다가 갈까?”
“응….”
“공부 마저 안 해도 돼?”
“내일 할래….”
씩 웃은 현규진이 유원의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깊게 입술을 눌렀다가 떼었다. 그리고
그대로 어깨에 걸치듯 저보다 작은 몸을 안아 들었다.
“떨어질 것 같아…. 내릴래, 응?”
“내가 널 왜 떨어뜨려.”
조금 전 혼자 걸어 나온 복도로 다시 들어선 현규진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저를 엄청 엄청
좋아하는 유원과 보낼 빈틈없는 한 시간을 고대하며.
***
유원은 아까부터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 채 맞은편에 앉은 현규진의 손과 얼굴을 한 번씩 몰래
눈에 담았다. 보고 싶다거나 막 봐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닌데도 자꾸만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
막바지에 다다른 기말고사 준비를 위해 과외나 학원이 끝난 다음 자정이 조금 넘을 때까지
같이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시험이 며칠 남지 않아 공부에만 집중을 해도 모자랄
상황에 책보다 현규진의 얼굴이나 손끝, 드리워진 속눈썹, 문제가 막힐 때 구겨지는 미간 같은
것들이 더 눈에 들어와 몹시 곤란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곤란한 것은 눈에만 들어오는 게 아니라 자꾸 그 손이 저에게 닿았으면
좋겠고, 눈동자가 저를 봐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
키스하고 싶다…. 멍하니 떠올리던 유원의 어깨가 움찔댔다.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깨닫자마자 몸 여기저기가 화끈거렸다.
“왜 그래?”
“…응? 뭐, 뭐가?”
“좀 빨간데.”
“…그래? 좀 더워서 그런가? 방 너무 덥지? 창 좀 열까?”
평소답지 않게 허둥지둥하는 유원을 보던 현규진이 고개를 저었다.
“너한텐 좀 더운 게 나아. 지금 창 열면 감기 걸려.”
“…그런가?”
입술을 꾹꾹 깨문 유원이 문제지를 한 장 들어 부채처럼 흔들었다. 팔랑팔랑 얇은 종이가
흔들릴 때마다 하찮을 만큼 아주 약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그렇게 더워? 방 괜찮은데. 뭐야. 열나는 거 아냐?”
평온하던 얼굴 위로 금세 걱정의 빛이 물들었다. 의자를 끌고 더 가까이 다가와 이마를 짚어
보는 현규진을 멍하니 보던 유원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여 입술에 살짝 뽀뽀했다.
“아….”
“뭐야. 이쪽이었어? 말을 하지.”
“아니이…. 그게 아니라….”
“나도 존나 하고 싶었어, 유원아.”
흐읍…. 뭐라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의자가 뒤로 확 밀리며 입술이 맞물렸다. 침대에 막혀 더 갈
곳이 없게 되자 의자는 멈췄지만, 현규진은 멈추지 않았다.
집에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자꾸만 두드렸다. 온다고 해도 노크를 할 거고, 아마
피곤해 잠들었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머릿속을 두드리는
건 그런 불안감 속에서도 이 키스가 너무 기분이 좋다는 사실이었다.
유원은 밀어낼 생각으로 쥐고 있던 현규진의 어깨를 부드럽게 만지다가 두 손을 올려 저에게
몰두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유원아, 하…. 좋아? 나랑 키스하고 싶었어? 응?”
“응, 하고… 음, 싶었어….”
말을 하는 사이사이로 현규진의 키스가 쏟아졌다. 안달이 난 것처럼 구는 현규진이 귀엽기도
하고 또 조급한 태도에 저도 덩달아 숨이 차올랐다. 유원은 다시 깊게 마주 물리는 입술에
집중하며 한참이나 혀를 마주 비볐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뒤였다.
***
기말고사가 사흘 앞으로 다가오자 교실 안 분위기도 무척 진지해졌다. 고 3 이 되기 전 마지막
시험이기도 하고, 지금부터 공부 습관을 제대로 잡아야 고 3 이 되어서 그나마 덜 고생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하도 들어 그런지 최대한 집중해 임해 보려는 게 눈에 보였다.
유원도 평소보다 더 공부에 몰두해 보려 했지만, 자꾸 현규진과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집중이 흐트러졌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과외 선생님 학교에 놀러 가기도 할 거고, 또 곧 방학이라 지금보다
현규진과 더 자유롭게 붙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 며칠을 참지 못해 시험 준비를
제대로 못 한다는 건 아주 큰 문제였다.
사흘 동안 진짜 열심히 계획대로만 하면 후회는 없을 것 같은데 이대로는 오늘도 조금
공부하는 척을 하다가 결국, 현규진과 달라붙어 간질간질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게 뻔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으니까.
“기말고사 이제 딱 3 일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그 3 일이 짧아 보여도 정말 엄청난 걸
바꿀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거 내가 굳이 자세히 말 안 해도 다들 알 거라고 생각해. 고지가
눈앞에 보이니까 이제 전력 질주 해 보자. 오늘도 다들 고생했어.”
담임의 말과 함께 종례가 끝나자 여기저기에서 의자 뒤로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원도 다
챙긴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규진과 함께 교실을 나섰다.
오늘은 학원가에 있는 유명한 우동집에서 우동과 사이드 메뉴를 시켜 먹기로 했다. 조금만
늦어도 웨이팅이 엄청 길어지는 집이라 부지런히 걸어 15 분 안에 도착해야 안정적으로 먹을
수 있었다. 유원은 현규진과 함께 평소보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빠져나갔다.
서둘러 간 보람이 있게 마지막 남은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유원은 따끈한 우동 국물을
먼저 한 번 먹고 쫄깃한 면을 입에 넣었다.
“맛있다. 추울 땐 매일 여기 우동 생각 나.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아.”
“그럼 겨울마다 오면 되지. 같이 오자.”
“응, 그러자.”
우동 면을 커다란 숟가락에 얹어 국물과 함께 먹은 유원이 사람으로 꽉 차 벅적벅적한 주변을
보다가 현규진에게 시선을 옮겼다.
“나 오늘은 학원 끝나고 자습실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오려고….”
“갑자기 왜? 집에서 안 하고.”
“그게…. 집에서는 집중이 잘 안되는 것 같아서. 너랑 하는 건 너무 좋은데 자꾸 다른 생각만
나고….”
“집에서 하는 게 문젠 거야, 나랑 하는 게 문젠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문제야.”
먹는 것도 멈추고 유원을 보고 있던 현규진의 고개가 느릿하게 기울었다.
“네가 왜.”
“…너랑 자꾸 놀고 싶단 생각만 들고… 문제 하나 풀다가도 자꾸 너만 보게 되고…. 내가 집중을
못 해서 그래.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야.”
작게 말을 하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누가 들을까 봐 옆을 살피는 유원이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현규진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먹고 나가서 얘기해. 일단 먹자.”
갑자기 혼자 공부를 하겠다니 조금 서운하긴 하지만 뭐 이해하지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현규진은 최대한 유원과 속도를 맞추어 제 몫의 우동과 사이드를 먹었다. 기분이 막 미치게
좋은 건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다고 썩 나쁘지도 않았다.
저랑 자꾸 놀고 싶어서 공부에 집중이 안 된다는 게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무척 설레는
말이니까. 그냥 좋게 생각하려 했다. 기말고사까지 남은 시간은 단 3 일이고, 시험을 보는
며칠까지 포함해도 일주일인데 그 시간 동안 아예 못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개인플레이로
공부를 하자는 건데 충분히 들어줄 수 있었다. 연애도 중요하지만, 시험도 중요하고, 또 저는
마음이 아주 넓은 애인이니까.
“뭘 그렇게 눈치를 봐. 못 할 말 한 것도 아닌데.”
“…같이 하다가 갑자기 혼자 한다고 하니까 너 기분 나쁠 것 같아서.”
“뭐 괜찮아. 나 보면 꼴려서 안 보는 게 낫겠단 거잖아.”
“…그, 그런 정도는 아니거든.”
“아무튼 비슷하잖아.”
결국, 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아주 또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조금 극단적인
표현이라 그렇지 현규진을 보면 아랫배가 울렁이기도 하고, 어쩔 땐 확 당기기도 했으니까.
“뭐…. 알았어. 공부가 안된다는데 어쩔 수 없지. 아, 좀 덜 잘생길걸. 그랬으면 우리 정유원 좀
덜 꼴렸을 텐데.”
씩 웃은 현규진이 유원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흩트렸다. 유원은 그 손길과 함께 제 마음도 마구
헤집어지는 걸 느끼며 흐물흐물해지지 않으려 애썼다. 분명 현규진은 제 머리칼만 만지고
있는데 꼭 온몸에 손이 닿은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간지럽다는 말로는 표현이 채 되지 않는
그런 기분이었다.
“나도 할래.”
친구 사이 고백 금지-53 화(52/127)

53


유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규진이 상체를 수그려 유원에게 머리를 가까이 대 주었다.
유원에게 잘 보이려고 아침에 만진 듯 안 만진 듯 더욱 잘생겨 보일 수 있게 만진 머리지만,
유원의 손에 망가지는 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기꺼운 듯 웃으며 다가오는 현규진을 보며 따라 웃은 유원이 잘생긴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어린애를 귀여워하듯 문질렀다.
“현규진, 귀여워.”
“전에 엄마가 뭔 연애 프로 보길래 옆에서 봤는데 거기서 그러더라. 상대가 귀여워 보이면
끝이래. 그냥 인생 그 사람한테 꼬라박는 거. 못 벗어나는 거지.”
“꼬라박긴 왜 꼬라박아. 많이 좋아해서 귀여워 보이는 건데.”
“내가 그렇게 귀여워?”
“응, 귀여워.”
머리칼을 살살 망가지지 않게 쓰다듬던 유원이 귓불에 있는 작고 까만 피어스를 매만졌다.
언제 봐도 현규진과 참 잘 어울렸다. 이것 때문에 더 날티가 나서 껄렁한 애로 오해를 받기는
하지만.
“오늘은 피어싱 안 걸렸네? 까매서 더 잘 보일 것 같은데.”
“주기적으로 쿨타임 차야 지랄하지 평소엔 그냥 빼라, 이러고 말아. 아까도 담임이 규진아, 귀.
그러고 말던데. 아…. 근데 잠깐만.”
피어스와 귀를 같이 살살 굴리는 손길에 아랫배로 감각이 뚝 떨어져 번졌다. 현규진은 몹시
곤란한 얼굴로 잘 웃지도 못한 채 겨우 몸을 바로 세웠다. 다리 사이로 묘한 느낌이 번지는 걸
보니 빨리 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어, 너도 귀 빨개졌어.”
“네가 야하게 만져서 그래.”
“그냥 나도… 너 하는 것처럼 한 건데….”
“나 진짜 궁금해.”
“뭐가?”
“네가 진짜 작정하고 만지면 어떨지. 그냥 만져도 이런데, 씨발, 작정하면 어떻단 거야.”
“작정하고 만지는 게 뭐야? 이런 거야?”
고개를 갸웃 기울인 유원이 손을 들어 현규진의 등줄기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현규진은 그
손길에도 착실하게 반응했다. 점점 바지 안이 답답해지고 있어 괴로웠다. 한 번만 더 손이
닿으면 유원을 데리고 충동적으로 어디든 들어가 일을 칠 것 같았다.
“…그 학원 자습실 안에서 뭐 마실 수 있댔나?”
“응, 마시는 것만. 먹는 건 안 되고.”
“…스무디 사 줄 테니까 얼른 들어가서 공부해. 할 거 많을 거 아냐.”
“넌 바로 집에 갈 거야?”
“어…. 갑자기 좀 급한 일이 생각나서.”
“급한 일? 뭔데? 집에 무슨 일 있어?”
“아냐, 그런 일 아니고, 그냥 좀…. 나중에 말해 줄게. 나중에.”
얼버무린 현규진이 유원의 학원 건물 바로 옆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망고 요거트 스무디를 한
잔 사서 유원에게 쥐여 주었다.
“이따 몇 시까지 할 건데?”
“자습실 열두 시에 끝나거든. 그때까지는 하려고.”
“알았어. 그때 올게.”
“너무….”
늦은 시간이니 힘들게 안 와도 된다고 말하려던 유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안 와도 된다고 해도 현규진은 늘 저를 걱정하니 데리러 온다고 할 것이었다. 그럴
거면 그냥 가만히 기쁘게 고마운 마음으로 호의를 받아들이는 게 현규진에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응. 알았어. 나가기 30 분 전에 톡할게.”
“응. 이따 봐.”
“이따 봐. 빠이.”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들어가는 유원을 끝까지 보던 현규진은 유원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을 때 뒤돌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유원과 함께라면 10 분 정도 걸릴 거리를 5 분도 되지
않아 도착했고, 거기에서부터 집까지는 쉬지 않고 달렸다.
달리면서 묘한 감각이 맺혀 있는 몸이 조금 진정되기를 바랐지만, 몸은 현규진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저 반복적으로 제 귀와 등을 만지던 유원의 손길을 상기 시켜 줄 뿐이었다.
“규진아, 왔어? 어머, 뭐가 그렇게 급해?”
“나 잠깐만, 뭐 빨리 해야 돼서. 다 하고 나올 거니까 들어오지 마.”
엄마와 제대로 인사를 하지도 못하고 방으로 달려간 현규진이 들어가자마자 가방을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며칠 전 유원이 제집에 와서 공부할 때
춥다고 티셔츠 위에 입었던 제 후드를 꺼내 얼굴을 파묻었다.
“…하. 씨발.”
짙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히 유원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현규진은 입과 코를 파묻고
유원의 여릿하고 포근한 냄새를 깊게 들이마시며 손을 움직였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머릿속으로 유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를 가만히 바라보는 말간 얼굴, 눈을 접으며 웃는 얼굴,
가끔씩 규진아, 이름 부르면서 올려다보는 하얀….
“아….”
의자가 뒤로 밀리는 것과 함께 고개가 젖혀졌다. 더운 숨이 후드티 위로 뭉그러져 유원의
따뜻한 향과 뒤섞였다. 긴 숨을 내쉬며 현규진이 그대로 책상에 엎드렸다. 책상 아래로 늘어진
축축한 손끝이 느릿하게 떨렸다.
귓불에 아직도 유원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어떤 의도라고는 조금도 없는
손길이었지만, 저는 혼자 잔뜩 의미를 담아 버렸다. 피어스 위를 부드럽게 만지던 그 느낌만
떠올려도 다시 아랫배가 저릿해졌다.
마음이면 마음, 머리면 머리, 몸이면 몸 다 뒤흔들어 놓고 혼자 공부하겠다고 가 버리기나
하고. 야속한 정유원. 매정한 정유원.
“…….”
진짜 존나 예쁜 정유원.
열기를 머금은 달아오른 숨이 다시 길게 쏟아졌다. 이미 가득 찬 유원의 생각 위로 또 유원의
얼굴을 덧그리며. 현규진은 다시 축축한 손을 움직였다. 여전히 유원의 체향으로 가득한
후드에 입과 코를 파묻은 채.
***
따로 또 같이 열심히 준비한 덕분에 꽤 만족스럽게 기말고사를 마칠 수 있었다. 마킹만
실수하지 않았다면 저번보다 성적이 더 오를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현규진도 저와 비슷하게 시험을 잘 봤다는 것이었다. 제가 혼자 공부하는 동안 현규진은 뭘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어 조금 걱정이었는데 그래도 벼락치기를 제대로 잘한 모양이었다.
기분 좋게 시험을 마친 덕분에 과외 선생님과의 약속도 무척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유원은 설레는 마음으로 토요일 아침, 집에서 출발하기 전 이준서에게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현관을 나섰다. 늦게 집에 들어와 자고 있던 엄마가 눈을 거의 감은 채 나와
그런 유원을 배웅해 주었다.
한국대 앞까지 태워다 준다는 아빠의 말을 조심스럽게 거절한 유원은 집을 나서 들뜬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빠 차를 타고 가면 당연히 편하고 좋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현규진과 둘이서만 움직이고 싶었다.
“일찍 나왔네?”
공동 현관 계단 난간에 걸터앉은 현규진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간 유원이 눈을 맞춘 채 웃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둘이서만 가는 건 처음이라 어젯밤부터 계속 마음이 설레고 들떠 자꾸
웃음이 났다.
“그렇게 좋아? 새벽까지 잠도 못 잘 만큼?”
시험이 끝나자마자 새벽에 애들과 게임을 하고 있던 현규진은 두 시가 조금 넘은 생각지도
못한 늦은 시간에 갑자기 유원에게 톡이 와 깜짝 놀랐었다. 열두 시 반쯤 분명히 잔다고 빠이,
인사까지 나누었는데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하고 있어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놀라
바로 전화를 걸었고, 귀여운 대답을 들었다.
‘빨리 놀고 싶어서 잠이 안 와…. 어떡해.’
집, 학교, 학원 또 집, 학교, 학원만 매일 다니다가 갑자기 집 근처 백화점 정도도 아니고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간다니 엄청 설레는 모양이었다. 현규진은 제가
갑자기 게임에서 손을 떼 난리가 난 최해영과 김준재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헤드셋을 벗어
대충 던지곤 침대로 가 누웠다. 그리고 유원이 잠들 때까지 소곤소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시 전 친구보다 애인이 우선이라 생각하며.
“응, 너무 좋아. 우리 둘이서만 이렇게 멀리 가는 거 처음이잖아. 어딜 가든 엄마, 아빠가
데려다줘서.”
꼭 어린애가 소풍 가는 것처럼 들뜬 얼굴을 보니 귀여워 웃음이 절로 났다. 느릿하게 일어난
현규진이 유원의 코트를 앞으로 잘 여며 주었다.
“춥진 않아?”
“응. 안에 후드 두꺼운 거 입었어. 그리고 이 코트도 따뜻한 거라 괜찮아. 하나도 안 추워.”
“예뻐. 잘 어울려. 오늘 가서 대학 합격하고 오는 거 아냐?”
“응?”
“얼굴 천재 전형 이런 거 없나.”
소리 내어 웃은 유원이 빨리 가자는 것처럼 현규진의 팔을 잡았다.
“그럼 너부터 합격이지.”
“아, 나야 당연히 제일 먼저 합격하지.”
매서울 정도는 아니지만, 12 월의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도 번지는 웃음은 따뜻했다.
유원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 횡단보도 앞에 서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뭐 타고 가? 버스는 우리 학교 앞에 있는 정거장에서 타면 되는데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리나 봐. 지하철은 한 번 갈아타면 되고 40 분 정도 걸린대. 뭐가 더 좋을까?”
“그걸 다 찾아봤어?”
“응, 잠이 안 와서…. 그리고 안 찾고 나오면 괜히 밖에서 헤매다가 늦을까 봐. 선생님
기다리시는데 늦으면 안 되잖아.”
기특하다는 듯 볼을 아프지 않게 조물조물한 현규진이 도로를 바라보았다.
“택시 타고 가도 되는데. 지하철은 아직 힘들지 않겠어? 버스도 한 시간 넘게 타면 멀미하지
않을까.”
현규진이 뭘 걱정하는지, 또 왜 이렇게까지 걱정을 하는지 유원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겨울에 몸이 좋지 않을 때 지하철을 탔다가 답답한 공간 속 더운 공기와 흔들림 때문에 심하게
멀미를 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벌써 몇 년 전 일이고, 지금은 그때보다 더
건강해졌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3 화(53/127)

03


“맛있겠다.”
햄버거 상자 모양의 플라스틱을 연 유원은 진짜 햄버거를 먹는 것처럼 젤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거 진짜 햄버거 맛 나냐?”
“아니, 그냥 맛있는 젤리 맛.”
“뭐야, 사기네. 맛도 햄버거 맛 나야지.”
“그럼 맛없지.”
세 번에 나누어 햄버거 젤리를 먹은 유원이 바나나우유도 한 모금 더 쪼록 빨아들였다. 젤리가
달아서 그런지 바나나우유 맛이 잘 느껴지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달착지근한
것들을 먹으니 확실히 기분이 더 좋아졌다.
구름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기 전 자연스럽게 제 뒤로 자리를 잡는 현규진을 흘끗 본 유원이
걸음을 옮겼다. 전에 한 번 심하게 감기에 걸렸던 날, 계단을 오르다가 어지러워 굴러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현규진은 늘 계단을 오를 때면 이렇게 제 뒤에서 오르곤 했다.
언제든 제가 넘어지면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평소에는 참 세심하다고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 뿐이었는데 오늘은 제 뒤에 현규진이 있다는
생각만 해도 손끝이 막 저릿하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유원은 뻐근하기까지 한 심장 위를
손바닥으로 몰래 꾹 눌렀다.
아직 아무도 없는 교실로 들어간 유원은 세 번째 줄에 있는 자리에 앉아 6 교시 교과서를
꺼냈다. 그리고 오늘 저녁 과외 시간까지 풀어야 하는 문제지를 꺼냈다.
“너도 얼른 가서 풀어.”
“귀찮아.”
“돈 아깝잖아. 시간도 아깝고.”
“아, 몰라. 뭐 거기까지 가.”
“그럼 그냥 다음 달부터는 나 혼자 할게. 너 과외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괜히 나 때문에
억지로 할 거 없어. 내가 이모한테 말씀 드릴게. 넌 다음 달부터 안 한다고….”
“아, 협박 존나 잘한다, 진짜. 푼다, 풀어. 풀면 되잖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현규진이 유원과 같은 줄 맨 끝 쪽 자리로 돌아갔다. 유원과 옆이나
바로 뒤에 앉고 싶었으나 워낙 키가 크고 덩치도 큰지라 너무 앞에 앉는 것보다는 뒤쪽에 앉는
게 좋겠다는 담임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가장 뒤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길어 앉은키가 뒷사람에게 방해가 될 만큼 크진 않다고 어필해 봤지만, 담임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현규진은 담임을 싫어했다.
사실 과외 같은 거 안 해도 그만이고, 숙제 따위는 더 안 해도 그만이지만, 이상하게 유원의
말에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그냥 가운뎃손가락이나 쳐들고 내가
시간을 버리든 돈을 버리든 뭘 버리든 지랄하지 말라는 말로 상황 종료를 했을 텐데 유원의
말은 그냥 듣는 척이라도 하게 됐다.
당연히 지랄이니 뭐니 그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 저 작고 톡 치면 넘어질 것처럼 약한
애한테 그딴 거친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현규진에게 정유원은 제 모든 것을 걸고 보호해야
하는 존재였다.
“아, 존나 피곤하네.”
과외 선생이 준 문제지를 꺼내자마자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현규진은 한 손으로 삐딱하게
머리를 괸 채 문제를 풀었다. 풀기가 싫어서 그렇지 또 막상 풀면 누구보다 잘 해내는지라
문제를 푸는 자체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냥 하기가 싫을 뿐이었다.
“뭐하냐? 갑자기 공부하냐?”
체육이 끝나고 들어온 김준재가 현규진의 어깨를 짚은 채 숫자가 거칠게 날아다니는
문제지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과외라.”
“찐따 다 됐네. 과외라고 숙제 꼬박꼬박 하고.”
“너 지금 정유원한테 찐따라 그랬냐?”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닌데 이상하게 해석한 현규진에 당황한 김준재가 괜히 책상을 탁
두드렸다. 현규진은 정유원에 관한 거라면 그게 농담이든 실언이든 진심이든 다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유별나고 유난스러우며 아주 징글징글할 정도의 우정이었다.
“너 말이야, 너. 멍유는 원래 성실하고 바르고 착한 분이시고, 넌 안 그러다 갑자기 뭔
바람이냐고.”
“안 하면 과외 같이 안 한다잖아.”
“멍유가?”
“어.”
“그럼 잘 된 거 아냐? 하기 싫다며.”
“꺼져라.”
하기 싫어 죽겠다는 얼굴로 개발새발 숫자를 갈겨쓰는 현규진을 대단하다는 듯 본 김준재가
교복 재킷 안주머니 쪽을 밖에서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 손길에 안에 든 담뱃갑이
부스럭댔다.
“…….”
담배를 피우고 오자는 의미를 바로 알아들은 현규진은 여전히 조용히 앉아 문제를 풀고 있는
유원의 뒷모습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데려가고 싶지만, 유원은 제가 담배 피우는 것을 싫어했다. 제가 담배 피운
것을 알게 될 때마다 끊으라고 잔소리를 해 대고 폐가 썩어 문드러진 사진을 검색해 보여 주곤
했다. 몇 번 긴 잔소리에 당한 이후로 현규진은 유원 몰래 담배를 피웠다.
몰래 교실을 빠져나가 한 층을 오른 현규진은 공사 중이라 아무도 쓰지 않는 층 맨 끝에 있는
미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담배 냄새가 확 끼쳤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건지
최해영이 체육복을 입은 채 울적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야, 창 닫으라고. 전에 과학실에서 창밖으로 연기 나는 거 보고 걸렸던 거 벌써 잊었냐?
여기도 들킬래?”
“창 닫으면 옷에 냄새 존나 배. 안 그래도 엄마가 존나 의심하는데.”
“아직 안 걸린 게 기적이다, 새끼야. 존나 골초 새끼.”
최해영이 현규진을 보며 손을 흐느적흐느적 흔들었다. 아까 체육 시간에 안 보이는 것 같더니
5 교시를 째고 계속 여기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거 상태가 왜 저래?”
“아, 내가 말 안 했나. 어제 너 멍유 데리러 간다고 가고 나서 존나 대박이었어.”
웃으며 말하는 김준재를 보고 인상을 쓴 최해영이 창틀에 있던 탈취제를 집어 던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받은 김준재가 킥킥대며 최해영 쪽으로 탈취제를 칙 뿌렸다.
“저 새끼 어제 유하은한테 카톡으로 까였잖아.”
“아, 병신아! 하지 말라고!”
“아, 뭐. 아무렇지도 않다며. 안 그래도 질려서 네가 까려던 참이었다며.”
어제 애들과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유원의 학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먼저 갔더니 그 뒤에
저런 웃긴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눈과 얼굴이 퉁퉁 부은 최해영을 본
현규진이 능숙하게 연기를 뱉어 냈다.
“그래서 5 교시 째고 울었냐?”
“아, 울긴 누가 울어.”
“얼굴이나 보고 우겨.”
최해영의 얼굴을 보고 몸까지 반 접어 가며 웃던 김준재가 저를 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는
최해영을 피해 도망쳤다.
하여튼 시끄러운 새끼들. 현규진은 담배가 반쯤 타들어 갈 때까지 미술실 안을 돌고 돌며
유치하게 다투는 최해영과 김준재를 보다가 담배 지진 자국이 많은 창틀에 불을 비벼 껐다.
“야, 현! 네가 이 새끼한테 장기 연애 팁 좀 알려 줘라. 얼마나 쓰레기같이 굴면 하나 같이 두
달을 못 넘기냐.”
“너 이 씨발, 잡히면 오늘 진짜 죽인다.”
“현이 멍유한테 하는 거 따라만 해도 너 반년은 넘긴다니까? 보고 배워.”
지금은 미술실로 쓰지 않아 한쪽으로 몰아둔 책상 위까지 올라간 김준재가 최해영을 약
올리며 몸을 흔들었다. 그런 김준재를 보며 화를 내다가 제풀에 지친 최해영이 다른 커다란
미술실 책상 위로 드러누웠다. 곧 미술실 안으로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렸다.
“최해영 울어? 야, 김준재 이 미친 새끼야. 왜 애를 울리고 지랄이야. 작작 해야지.”
“헐, 야, 진짜 울어? 야, 왜 울어. 장난이지, 당연히.”
김준재가 놀라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벌떡 일어난 최해영이 김준재의 목에 팔을 둘러 조였다.
미술실 안으로 김준재의 비명이 울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은 현규진이 탈취제를 체육복에 칙칙 뿌렸다. 곧 인공적인 섬유유연제
냄새가 주위를 물들였다. 개인적으로 이 짙은 비누 냄새보다는 담배 냄새가 낫단 주의지만,
유원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간다는 말도 안 하고 혼자 미술실을 나선 현규진은 계단을 내려가 교실 뒷문으로 들어갔다.
등장 만으로도 위압감이 확 느껴질 만큼 커다란 현규진을 본 몇몇이 떠들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문제를 풀고 있는 유원의 뒷모습을 보던
현규진이 자리에 앉아 풀다 만 문제지를 바라보았다.
“아….”
제가 풀어야 할 다음 문제 번호 옆에 담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자리를 잠깐 비운 걸 보고
유원이 와서 그려 놓고 간 모양이었다. 기다란 담배 끝에서는 꼬불꼬불한 연기가 나고 있고,
그 위에는 엑스자가 쳐져 있었다. 하여튼 쪼끄만 게 귀여운 짓은 혼자 다 했다. 휴대폰을 꺼낸
현규진이 그 그림을 사진으로 찍었다.
제 자리에 앉아 이걸 그렸을 거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났다. 현규진은 저를 돌아보는 느낌에
고개를 들어 추궁하듯 보는 눈과 앙다문 입술을 보며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눈을
가늘게 떠 의심하던 유원이 다시 홱 앞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가서 아니라고, 왜 자꾸 나
의심하냐고 애교나 떨어 줄까 하는데 선생이 앞문으로 들어왔다. 일어나려다가 만 현규진은
유원의 동글동글하고 단정한 뒤통수를 보며 작게 웃음 지었다.
이제 막 시작한 6 교시가 얼른 끝나면 좋겠다 생각하며.
친구 사이 고백 금지-54 화(54/127)

54


“버스 타면 안 돼? 나 버스는 괜찮을 것 같은데…. 창밖도 보이고, 창문도 열 수 있으니까
답답하지도 않고.”
유원은 열심히 버스를 타고 가고 싶다는 마음을 어필했다. 물론 반대한다면 현규진의 결정에
따르겠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한 번은 더 말해 보고 싶었다.
“음….”
“…규진이 너는 택시 타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
“난 뭐든 상관 없는데 너 걱정돼서 그러지. 정말 버스 괜찮겠어?”
“응!”
“그럼 버스 타고 가자. 대신 중간에 힘들거나 하면 꼭 말해. 혼자 참지 말고.”
고개를 크게 끄덕인 유원이 보다 가벼워진 걸음을 옮겼다. 차갑지만, 맑은 날씨도 너무 좋고,
기분도 너무 좋아서 마음이 자꾸만 둥둥 떠올랐다. 분명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은 반짝이는
예감과 함께.
사람이 별로 없는 버스에 오른 유원은 비어 있는 뒤쪽 자리로 가 창가에 먼저 앉았다. 그리고
제 옆으로 앉는 현규진을 보며 목소리를 작게 해 말했다.
“토요일이라 그런가? 사람 별로 없다.”
“왜 그렇게 작게 말해.”
“이런 데에서는 원래 조용히 말하는 거야.”
마치 어린애한테 예의범절을 가르치듯 말하는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반쯤 열려 있는
버스 창문을 닫았다. 답답하지 않아 좋긴 하겠지만, 빠르게 달리는 버스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바람은 유원에게 너무 강하고 차가웠다.
“어, 선생님 톡 왔어.”
코트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울리는 것에 휴대폰을 꺼낸 현규진은 출발은 했는지 뭘 타고
오는지 어디에서 내리는지 구체적으로 묻는 메시지를 무표정하게 눈으로만 훑었다.
[멍유원 : 저희 버스 타고 가고 있어요!]
[멍유원 : 한국대 정문도 있고 한국대학교도 있는데 어디서 내릴까요?]
[ㄱㅇ : 한국대 정문에서 내리면 돼]
[ㄱㅇ : 그 앞에 있을게 조심해서 와]
[멍유원 : 네! 이따 뵐게요!]
유원이 말을 칠 때마다 그 말도 기분이 좋아 통통 튀는 것만 같았다. 현규진은 웃음이 묻은
유원의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 통통 튀는 게 느껴지는지 한번 머금어 보고 싶었다.
“키스하고 싶어.”
“…여기서는 안 돼.”
“그럼 언제 돼?”
“……이따 집에 가면.”
“저녁에나 갈 거 아냐. 그때까지 참아?”
얼른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유원이 거리가 좀 있는 곳에 앉은 사람의 뒷모습을 한 번 보고
다시 현규진에게 시선을 옮겼다.
“참아야지, 당연히. 오늘은 선생님이랑 계속 같이 다닐 거 아냐….”
“그럼 저녁에 둘이 있을 땐 많이 해도 돼?”
“……응.”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유원의 귀 끝과 보송해 보이는 볼이 불그스름했다. 저 때문에
붉은 색으로 물든 그 곳에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유원의
말대로 여기는 그런 걸 하면 안 되는 곳이니까. 유원에게 미움 받을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멀미 날 것 같진 않아?”
“응. 안 그래. 괜찮아. 나오니까 좋아.”
“앞으로 한 번씩 버스 타고 어디 갈까? 고 3 되면 자주 가긴 힘들 테니까 방학 때 몇 번이라도.
수능 끝나고는 더 자주 가고.”
“정말? 생각만 해도 좋아. 나랑 같이 가 줄 거야?”
“당연하지. 나 없이는 아무 데도 못 가, 너.”
일부러 더 집착하듯 무시무시하게 말하는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유원은 내내 웃기만 했다.
창 안으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 잔뜩 기분 좋은 얼굴로 많이 이야기하고, 웃는 유원을 보니
걱정으로 긴장하고 있던 현규진의 마음도 점점 말랑하게 풀어졌다.
“선생님이랑 학교 구경하고 점심 먹은 다음에 헤어지겠지?”
“그렇겠지? 뭐 저녁까지 과외랑 계속 뭐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우리 다른 데도 가면 안 돼? 거기서 두 정거장만 가면 얼마 전에 오픈한 엄청 큰
백화점이 있는데 거기 쿠키 아이스크림이 맛있대. 유명한 식당도 많이 들어오고…. 거기 진짜
맛있는 덮밥 집이 있나 봐.”
잠이 오지 않을 때 한국대까지 가는 교통편만 알아본 게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것들까지 전부
찾아본 모양이었다. 평소에 말이 없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길게 계속 뭔가를 하고
싶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유원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동안 아파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고, 학교도 겨우 다니던 때가 많아
바깥에서 하는 것에 동경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가자. 나도 거기 가 보고 싶었어. 거기 스포츠 매장이 진짜 크다고 그래서.”
“정말? 잘 됐다. 같이 가 보자.”
아무래도 제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면서 과한 걱정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고작 새로 생긴
쇼핑몰에 간다는 말 하나로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냥 유원이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하루를
보내도 좋을 것 같았다.
“어. 가서 옷도 좀 보고, 쿠키 아이스크림? 그것도 먹고, 저녁은 덮밥 먹거나 아니면 가서 보고
더 맛있는 거 있으면 다른 거 먹어도 되고.”
“응, 선생님이랑 점심 뭐 먹을지 아직 모르니까 저녁은 이따 가서 보고 고르자.”
“어. 저녁 맛있는 거 먹고…. 음….”
휴대폰을 꺼내 유원이 말한 쇼핑몰을 검색한 현규진이 지하에 최대 규모로 있다는 서점과
영화관, 게임 센터 같은 것을 눈에 담으며 스크롤을 내렸다.
“뭐 할 거 많네. 하나하나 다 보고, 다 해 보고 밤까지 놀다가 가자.”
“진짜 그래도 돼? 나도 밖에서 밤까지 놀아 보고 싶었는데 오늘 할 수 있겠다.”
하고 싶은 거라고 해 봤자 쿠키 아이스크림을 먹고, 유명한 덮밥 집에서 저녁을 먹고,
이것저것 구경을 하면서 남들처럼 늦은 시간까지 놀고 싶다는 게 전부인데 너무 무리하면
아플 수 있다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로 해 보지도 않고
반대하며 유원의 들뜬 마음을 짓누르고 싶지 않았다.
“아, 근데 그렇게 늦게 집에 가면 키스는 언제 해.”
버스 앞쪽, 기사석 근처에 앉은 사람에게까지 들릴 정도의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깜짝
놀란 유원이 현규진의 입을 손바닥으로 꾹 눌러 막았다가 뗐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오늘은 참고 정유원 소원 들어준다. 빡세게 다닐 건데 괜찮겠어?”
“응! 괜찮아.”
유원의 얼굴과 어깨를 물들이고 있던 빛이 현규진의 다리 위까지 길게 늘어졌다. 현규진은
기꺼이 그 빛 안으로 몸을 기울여 유원의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댔다.
네가 괜찮으면 나도 다 괜찮아. 너만 좋으면, 그래서 네가 웃으면.
라디오 소리와 도로의 소음이 파고들어 뒤섞여 시끄럽고, 자꾸 흔들려 편하지도 않지만,
유원과 함께라 좋은 버스가 달리기 시작했다. 살며시 파고들어 어느새 모든 것을 부드럽게
뒤덮는 햇살과 함께, 유원의 웃음과 함께.
***
학교에서 본 이준서는 평소와는 꽤 다른 느낌이었다. 선생이라는 호칭보다 형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이라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유원은 이준서를 따라 학교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크고 멋있기로 유명한 도서관도 구경하고,
와플이 맛있다는 가게에서 사과잼과 생크림이 발린 와플을 현규진과 반 나누어 먹기도 했다.
오르막길을 오를 땐 숨이 차 헐떡이기도 하고, 또 계단이 많을 때는 잠시 중간에 서서 숨을
고르기도 했지만, 즐거웠다. 그런 것쯤은 모두 다 괜찮을 만큼.
“점심은 뭘 좋아할지 잘 몰라서 세 군데 정도 생각해 뒀는데 골라 볼래? 첫 번째는 타코.
또띠아에 이것저것 넣어서 먹는 건데 여기도 유명해. 두 번째는 피자. 체인점도 없고, 딱 여기
하나 있는데 전국구 맛집이야. 그리고 마지막은 분식. 분식 사 주긴 좀 그런데 한국대
분식이라고 들어 본 적 있지 않아? 여기도 맛있는 걸로 유명해. 너희는 뭐가 제일 좋아?”
의견을 묻는 이준서를 보던 유원이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현규진은 빠르게 머릿속에서
피자와 분식을 걸러 냈다. 피자야 언제든 먹을 수 있고, 분식은 유원에게 너무 자극적이기
때문이었다. 떡볶이나 튀김, 핫도그 같은 걸 좋아하긴 하지만, 자주 먹어 좋을 게 없었다.
“타코가 괜찮을 것 같은데, 넌?”
“나도 타코 좋아. 선생님, 타코 먹으러 가요. 저희도 그거 좋아하거든요.”
혹시 몰라 예약을 해 놨다며 이준서가 앞장서 걸었다.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유원은
주변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직접 학교에 와 보고 나니 1 년 동안 정말 열심히 해서 꼭 이
학교에 입학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현규진과 이런 길을 같이 걸어 학교에 가고, 또 아까 본 그 큰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도 하다가
와플을 먹기도 하며 같이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집에서는 거리가 조금 있으니 같이 학교 근처에서 살아도 좋지 않을까? 현규진과 단둘이서만
지내는 건 어떤 느낌일까? 매일매일 심장이 터질 것 같으면 어쩌지. 살짝 스치는 팔에도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헤어질 필요 없이 같이 살게 된다면…. 손끝이 멍해지는 느낌에
괜히 허벅지 위로 꾹 누른 유원이 심호흡했다.
“저기야. 벌써 사람들 줄 서 있다. 예약하길 잘했네.”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이준서의 목소리에 유원은 정신을 차리고 가게 앞으로 늘어선 사람들을
보았다. 정말 유명한 집인지 이제 11 시 반이 조금 넘었는데도 열 팀이 넘게 줄을 서 있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55 화(55/127)

55


“들어가자.”
가게 안으로 들어가 이준서가 이름을 말하자 직원이 창가 쪽 넓은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유원은 창가 안쪽으로 앉아 앞에 놓인 메뉴를 살펴보았다. 오래 걸어 그런지 평소보다 더
허기가 져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 이 플래터가 4 인용이니까 그거 하나랑 사이드 하나 더 시키면 양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두 사람의 끄덕임을 본 이준서가 4 인용 플래터와 칠리 나초, 그리고 음료 석 잔을 주문했다.
“학교 와 보니까 어때? 막 공부 열심히 하고 싶다는 생각 들지 않아?”
“네, 저 아까 와플 먹을 때 이 학교 다니고 싶다는 생각 들었어요.”
“와플이 너무 맛있어서?”
웃는 유원을 보고 소리 내어 웃은 이준서가 여전히 평소처럼 별다른 말이 없는 현규진에게
시선을 옮겼다.
“규진이는 어땠어?”
“좋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가고 싶다고 해서 다 갈 수 있는 데가 아니라는 거잖아요.”
“음, 맞아. 공부 안 하면 절대 합격 못 하지. 그런데 너희는 지금보다 조금만 더 집중해서
열심히 내년에 공부하면 올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래서 오라 그런 거야. 동기부여가 될까 해서.
둘이 같이 입학해서 다니면 좋잖아. 자취도 하고.”
대학 이야기에도 별로 집중을 하지 않고 먼저 나온 콜라 빨대만 입술 사이에 물고 괜히 혀로
건드리던 현규진이 자취라는 말에 시선을 옮겼다.
“자취하면 좋아요?”
“음,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지. 장점은 나 혼자 시간을 가지기 좋다는 거? 또 자유로운 것도
장점이고…. 학교 가까운 거야 뭐 당연히 좋고…. 단점이라면 자유롭다 보니까 게을러지기
쉽다는 거? 끼니도 해서 먹는 게 귀찮아서 자꾸 배달 음식에 의존하고, 밖에서 대충 해결하게
되는 것도 사실 큰 단점 중 하나고.”
“누구랑 같이 살아 본 적은 없으세요?”
“규진이가 자취에 관심이 있었구나. 뭔가 물어봐 주니까 좋은데? 음, 같이 살아 본 적 있지. 막
입학했을 땐 돈이 좀 모자라서 친구랑 같이 살았었어. 1 년 정도.”
친구랑 같이 산 적까지 있다는 말에 현규진의 눈동자가 더욱 흥미로 물들었다. 이준서의 자취
따위는 사실 조금도 궁금하지 않지만, ‘친구와 함께 살아 본 경험담’은 솔직히 좀 궁금했다.
“사실 그때가 진짜 좋았지. 뭐 배달 시켜 먹어도 둘이 먹으니 재미라도 있고, 주말엔 뭐 만들어
먹을 때도 있고.”
아, 왜 먹는 거 궁금하댔나. 계속 먹는 것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하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런 상황에 그걸 대놓고 티 낼 수는 없어 답답했다.
“같이 살면 싸우진 않아요?”
“싸우지. 엄청. 뭐랄까…. 서로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고나 할까.”
“진짜 모습이요?”
“응. 왜 친하다고 해도….”
이제야 좀 유의미한 답이 나오려는 것 같은데 앞으로 나초와 플래터가 놓여 말이 끊겼다. 순간
확 입 안으로 튀어나와 고인 욕을 소리로까지 내지 않고 삼킨 현규진이 또띠아에 고기와 소스,
야채 같은 것을 가득 넣는 이준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몰랐는데 먹는 걸 꽤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아, 어디까지 얘기했지?”
“진짜 모습을 서로 알게 된다는 데까지요.”
“아…. 어어, 같이 사는 거랑 그냥 붙어서 친하게 지내기만 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거든. 왜 진짜
잘 맞는지 알려면 여행 같이 가 봐야 한다고 하잖아. 그게 여행 가서 같은 방에서 잘 때 그 사람
평소 습관, 생활 태도 같은 게 다 나와서 그런 거거든. 우리도 처음에 한 두 달 정도는 자주
싸웠어.”
평소 습관이랑 생활 태도? 현규진은 유원의 평소 모습을 떠올렸다. 그냥 평소에도 조용하고,
깔끔해서 딱히 같이 지낸다고 해도 새롭게 알게 되어 놀라거나 화가 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넌 왜 안 먹어. 이거 먹어.”
먹는 것도 잊고 계속 이준서의 답을 기다리는데 얼굴 앞으로 예쁘게 돌돌 만 타코가 다가왔다.
현규진은 유원이 만들어 준 것을 받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유원이 줘서 그런지 무척
맛있었다.
“두 달 동안 뭐 때문에 싸우셨는데요?”
“그냥 사소한 거. 예를 들면 난 빨래가 다 되면 바로 널어야 하는데 그 친구는 몇 시간 뒤에
널고, 또 나는 자기 전에 청소기나 밀대라도 밀고 자는 게 좋은데 그 친구는 아침에 했으면
됐다는 주의고.”
“그냥 그런 건 한 명이 맞춰 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현규진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 그런 걸 가지고 싸우는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만약 유원이
하루에 열 번 청소하는 걸 원한다면 그냥 열 번 청소를 하면 되는 거니까.
“맞춰 주는 것도 물론 있지. 그런데 어떻게 전부 다 맞추기만 하겠어. 내가 그 친구랑 제일 안
맞았던 건 수면 패턴이었는데 그 집이 좁았거든. 그래서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도 옆방에서
새벽에 얘기를 하면 다 들렸어. 난 열두 시 좀 넘으면 자야 다음 날이 편한데 걘 그때 제일
활성화가 돼서 헤드셋 끼고 게임을 하는데…. 그 소리 때문에 계속 깨서 진짜 많이 싸웠지.”
이준서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현규진은 확신이 생겼다. 유원과 단둘이만 살아도 절대
싸우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유원이 가니까 당연히 따라온 정도의 의미만 있던 대학 탐방은
현규진의 이 확신과 함께 가치가 올라갔다. 이 정도 수확을 얻었으면 그냥 한 번은 와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유원, 맛있어?”
“응. 맛있어. 너도 얼른 먹어. 이거는 여기 이 하얀 소스 넣어야 맛있고, 저 위에 고기는 바비큐
소스 넣어야 맛있어.”
아까 직원이 소스 어쩌고 설명을 할 때 제대로 안 들었는데 유원은 제대로 듣고 그걸 다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현규진은 제 얼굴만 한 타코를 들고 끝에서부터 한 입씩 베어 물어
천천히 먹는 유원을 보며 웃었다. 타코 귀엽게 먹기 대회 같은 게 있다면 유원이 세계 1 등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오물오물 먹는 게 귀여웠다.
같이 살게 되면 정유원이 하고 싶은 거에 다 맞춰서 절대 싸울 일 없게 해야지. 아직 먼 나중의
일이고 뭐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냥 유원과는 쭉 지금처럼 매일 얼굴을 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살 것 같았다.
만약 사귀지 않고 여전히 친구로 지내고 있다고 해도 그건 변함이 없을 것이었다. 근거가
뭐냐고 하면 ‘그냥’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강한 느낌이 왔다. 유원과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아주아주 강한 촉이.
그걸 확인하게 해 줬으니 오늘은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이준서에게 나름의 친절을 베풀
생각이었다. 현규진은 저를 보고 많이 먹으라 말하는 이준서와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
점심을 먹고 들른 곳은 가게 근처에 있는 꽤 큰 카페였다. 모던한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들어
현규진은 카운터 쪽에 서서 주변을 보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이준서!”
고개를 기울여 이준서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 둘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준서와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현규진은 반사적으로 유원의 팔을 잡아 제 몸 뒤쪽으로 세웠다.
“오늘 과외 하는 애들 만난다며.”
“어, 맞아. 여기 내가 과외 하는 규진이랑 유원이.”
현규진은 저를 올려다보는 두 남자를 시선을 내리깔아 느릿하게 살폈다. 이준서와 비슷한
키에 비슷한 인상, 비슷한 차림을 한 남자들은 놀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기들이
상상하고 있던 ‘과외 하는 애들’의 모습이 아니라 놀란 모양이었다.
“와, 너는 무슨 과외를 학생 얼굴 보고 구하냐? 진짜 고등학생이야? 무슨 키가 이렇게 커? 키가
몇이에요?”
“188cm 이요.”
“와, 존나 크…. 아니, 진짜 크다. 첨 봐, 이렇게 큰 거.”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던 두 남자의 눈이 몸이 반쯤 겹친 채 현규진의 뒤에 서 있는 유원에게
닿았다. 현규진은 몹시 불쾌해졌다.
“…안녕하세요….”
“와, 진짜 예쁘게 생겼다고 해야 하나? 그런 말 좀 그런가?”
아, 짜증 나. 이대로 유원을 데리고 카페를 나가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누른 채 현규진은
이준서를 바라보았다.
“아, 규진이랑 유원이 뭐 마실래?”
유원이 청포도 에이드 고르는 것을 보던 현규진도 똑같은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유원을
데리고 먼저 카운터를 벗어나 카페 안쪽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지금 한 시 반이니까 두시 반쯤 출발하면 되겠다.”
“응. 그럼 될 것 같아.”
“컨디션 어때. 괜찮아? 오늘 벌써 많이 걸었는데.”
“괜찮아. 하나도 안 힘들어.”
“그럼 다행이고.”
대답을 하며 카운터 쪽을 본 현규진은 아까 그 두 남자와 함께 다가오는 이준서를 보며 인상을
썼다. 여기 같이 앉자는 개소리만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규진아, 유원아. 여긴 나랑 같은 과 동기들인데 같이 앉아도 될까? 이 친구들도 너희랑 같이
얘기하고 싶다고 해서.”
“아…. 네,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유원을 본 현규진이 제 맞은편에 앉는 이준서와 이름 모를 인간,
그리고 유원의 옆쪽 테이블 사이드에 앉는 인간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이렇게 신경을 쓰고
경계를 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들과 합석을 한다는 그 자체로 별로
유쾌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유원의 옆쪽으로 앉은 놈은 눈빛이 이상해 보여 더 신경이 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료와 케이크 같은 것들이 놓이자 본격적으로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이준서는 좋게 보려고 해도 좋게 볼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현규진은 잠시나마
친절을 베풀어야겠다고 생각했던 마음을 철회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56 화(56/127)

56


“와, 근데 진짜 요즘 애들은 얼굴이 다 이래? 너희 왜 아이돌 안 해? 제안 엄청 오지 않아?”
별로 대답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현규진을 바라본 유원이 차가운 컵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웃음
지었다.
“규진이는 그런 제안 진짜 많이 받았어요. 아이돌 하자고 한 데도 많았고, 연기 하자는 데도
많고….”
“내가 캐스팅하러 다니는 사람이어도 매일 기다렸다가 매달리지. 넌? 너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아…. 저는 막 그런 정도는 아니었어요.”
“에이, 뭐가 아냐. 근데 너 진짜 예쁘게 생겼다. 그런 말 많이 듣지. 뭔 남자애 피부가 이래. 너
같은 애 있으면 남자랑도 만나 볼 만할 것 같은데?”
저 새끼가 미쳤나. 불쾌함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현규진의 날카로운 시선이 남자에게 닿았다.
이준서도 무척 곤란한 얼굴로 얼른 유원의 옆쪽으로 앉은 동기를 말렸다.
“야, 넌 그걸 농담이라고.”
“아, 미안, 미안. 진짜 그냥 농담인데 분위기 뭐야? 왜 이렇게들 생각이 닫혀 있어.”
투명한 에이드 잔을 쥔 현규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대로 들어 올려 아직도 나불대고
있는 새끼의 대가리를 깨고 싶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몇 번이나 내리친 뒤였다. 이준서가 한
번 더 그만하라고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제가 나서서 일을 쳤을 것이었다.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한답시고 이준서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밝은
목소리로 자기 고등학교 다닐 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재미도 없고, 그 어떤 영양가도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그때 연애만 안 했어도 아이비리그 가는 건데. 연애를 쉬지 않고 해서 한국대 왔잖아.”
저딴 게 재밌나. 조금도 웃음이 나지 않았지만, 유원이 잔뜩 기대한 외출을 망칠 수는 없었다.
현규진은 마인드 컨트롤을 하려 애썼다.
“너희도 얼굴 보니까 이건 뭐 답정이긴 한데 둘 다 당연히 사귀는 사람 있지?”
청포도 에이드 안에 있는 포도 알갱이를 빨대 끝으로 짓누르던 현규진이 눈동자만 치켜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씹고 싶은데 저 때문에 분위기를 망치면 안 된단 생각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게 통탄할 지경이었다.
“네.”
“아니요….”
사귀는 사람이 있어 있다고 짧게 대답한 순간 옆에서 유원의 대답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현규진은 저의 긍정과 동시에 터진 유원의 부정에 고개를 돌려 유원을 바라보았다.
“…….”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모두에게 알리면서 티를 내고 사귀는 건 아니니까. 그냥 남이
물었을 때 아니라고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니라고, 사귀는 사람이 없다는
대답을 들은 순간 확 끼친 서운함까지 모른 척을 하기는 힘들었다.
“진짜 없어? 왜? 눈 너무 높은 거 아냐?”
대답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다가 에이드를 마시는 유원을 흘끗 본 현규진이 이준서를
바라보았다. 이준서의 표정이 별로 안 좋은 것을 보니 제 동기들의 수준이 쪽팔려 무척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아, 규진이랑 유원이 여기서 두 시쯤 출발해야 한다고 했지? 시간 다 됐는데 나가자.”
“엥, 벌써?”
애써 수습하는 이준서의 마음도 모른 채 두 명의 미친 새끼들이 열심히 지랄하는걸 보던
현규진이 제 앞에 있는 에이드와 유원의 앞에 놓인 것을 트레이 위로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응.”
현규진은 그대로 성큼성큼 카운터 쪽으로 가 거의 다 남은 음료를 액체 버리는 곳에 쏟고,
빨대를 쓰레기통 안으로 처박았다. 마음 같아서는 빈 트레이로 아까 그 두 새끼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었다.
“후우….”
참자, 그래. 씨발. 참아. 병신들이 한 말에 뭘 화를 내. 에너지 아깝게. 잊어버려. 어차피 다시 볼
일도 없잖아.
그리고…. 정유원이 사귀는 사람 없다고 대답한 것도 그냥 잊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라며.
그럼 그냥 넘겨. 그딴 걸로 일일이 서운해하지 마.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트레이까지 내린 현규진은 그제야 제가 있는 쪽으로 다가온 유원의
팔을 부드럽게 잡고 카페를 나섰다. 이준서가 그런 둘의 뒤를 따라 나와 잔뜩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기분 나빴지. 진짜 미안해. 아, 저 정도로 구는 애들은 아니었는데…. 내 잘못이야. 미안해.
이러려고 놀러 오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네, 뭐…. 저희는 먼저 갈게요.”
“어! 택시 타고 가. 내가 택시 잡아 줄게. 돈은 걱정하지 말고.”
“안 해요, 그런 걱정.”
“…어?”
“집에 갈 거 아니라 알아서 갈게요. 그럼.”
대충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현규진이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저보다 더 열심히 인사하는
유원을 안쪽에 먼저 태우고 옆으로 올랐다.
유원이 가고 싶다고 했던 쇼핑몰 이름을 말하자 택시가 출발했다. 거지 같은 새끼들이
득실대는 곳에서 멀어지고 나니 그제야 숨통이 조금 트였다.
“…선생님 친구분들은 선생님이랑 엄청 다르다. 그치.”
“친구분들은 무슨. 그렇게 불러 줄 필요도 없는 새끼들이야. 뭘 재밌어 하는지 보면 그 사람
수준이 보인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아.”
“어차피 이제 다시 볼 일 없는 분들이니까 기분 풀어. 응?”
“넌 괜찮아?”
“…….”
또 그 질문이었다. 넌 괜찮아? 유원은 제 기분이 어떤지 그 하나에만 몰두한 것 같은 현규진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괜찮아. 저런 말 때문에 하루 망치기 싫어. 아직 오늘 많이 남았잖아.”
“…아까….”
왜 사귀는 사람 없다 그랬어? 있다고 해도 그게 나인 줄 아무도 몰랐을 텐데 왜 굳이 숨겼어?
유치한 질문이 입술을 마구 두드렸다.
저는 유원이 좋아서 미치겠는 마음을 누르기가 너무 어려웠다. 당연히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마음으로는 유원이 너무 좋아서 여기저기 다 저랑 사귄다고, 저렇게 사랑스럽고 예쁜
정유원이 저를, 저만을 좋아한다고 자랑하고 싶고 소리치고 싶었다.
좋아하니까. 얼굴을 보고 목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아플 만큼 조이도록 좋아하니까. 그런데
유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순간에도 그렇게 철저하게 숨기는 걸 보면. 물론 그 하나로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 묻는 말에 ‘아니요.’라고 대답하던
유원의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한심하고 유치한 감정 소모라는 것을 아는데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까… 뭐?”
“…아…. 아까 기분 많이 나빴을 것 같아서.”
“조금…. 잘 아는 사이에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거잖아. 재미 하나도 없어….”
입술이 삐죽 나온 얼굴을 보니 또 귀여워 마음이 흔들렸다. 서운했다고 투정을 부리고 싶기도
하고, 아까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묻고 싶기도 한데 멋있게 보이고픈 마음에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현규진은 그냥 저도 모르겠는 마음을 동그랗게 뭉쳐 마음 안쪽 구석으로 세게 눌러 놓았다.
그냥 이대로 심장 벽과 한 몸이 되어 조금 더 마음이 단단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유치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유원에게 진짜 멋진 모습만 보일 수 있도록.
***
유원이 먹고 싶다고 한 쿠키 아이스크림은 무척 맛있었다. 현규진이 좋아하는 스포츠
브랜드에는 마침 사고 싶었던 옷들이 있어 구매했고, 인기 많은 덮밥집도 별로 기다리지 않고
쉽게 들어갔다. 시그니처 메뉴라는 스테이크 덮밥 역시 왜 사람들이 극찬하는지 이해가 갈
만큼 맛있었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고, 또 유명한 각종 브랜드가 전부 입점해 사람이 많아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유원은 즐거운 얼굴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저도 이 안에
속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무척 기뻤다. 체력 배터리가 방전되기 직전이라는 걸 알면서도 집에
가자는 이야기가 조금도 나오지 않을 만큼.
“좀 쉬자. 다리 아파.”
현규진은 그런 유원의 상태를 시시각각 살폈다. 여기까지 와서 너무 걱정만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티를 내진 않아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유원의 낯빛과 표정, 걸음 속도를 체크했다.
그리고 한 번씩 얼굴을 만지며 열이 나나 확인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제가 걱정할 만큼 힘들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점점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 하는 걸
보면 많이 지치기는 한 것 같았다.
많이 움직이는 자체로도 무리가 되어 이런 긴 외출, 그것도 종일 많이 걸어야 하는 자발적
외출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는 유원에게 오늘 하루는 즐거운 만큼 꽤 힘들기도 할 것이었다.
그래서 현규진은 다리가 아프다는 이유를 만들어 서점 옆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앉아 있어. 내가 마실 거 사 올게. 뭐 마실래?”
“스무디 마시고 싶은데 오늘 단걸 너무 많이 먹어서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쓴맛 안 나는 차
종류로 하나 골라 주라. 차가운 거.”
“알았어. 정유원 다 컸네. 차 마실 줄도 알고.”
씩 웃은 현규진이 쇼핑백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는 유원을 한 번 더 살피고 카운터로 향했다.
지친 게 보여서 안쓰럽기도 한데 그래서 더 말랑말랑해 보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문제가 좀 있는 걸까. 카모마일 두 잔을 주문하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현규진은 흘끗 습관적으로 유원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원은 휴대폰을 보면서 뭔가를 적고 있었다. 톡을 보내는 모양이라 생각한 현규진이 바로
나오는 카모마일 두 잔을 들고 자리로 다시 향했다. 그때까지도 유원은 뭔가를 보내고 있었다.
“이모?”
“아, 아니…. 아까 그… 선생님 친구분.”
친구 사이 고백 금지-57 화(57/127)

57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뻔뻔하고 역겨운 낯짝에 현규진은 잠시 빠르게 요동치는 마음을
짓누르려 애썼다. 일단 전혀 생각하지 못한 대답이라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당연히 표정 관리도 되지 않았다.
“그 새끼가 너한테 연락을 왜 해? 아니, 네 번호는 어떻게 알고.”
“아까… 자리 정리하고 나갈 때 번호 알려 달라고 하셔서….”
“그래서 번호 알려 줬다고?”
“도움 줄 것도 많을 거라고 하시고, 선생님 그 다른 친구분도… 막 연락하고 지내는 형 한 명 더
있으면 좋은 거라고 하셔서….”
물론 기꺼운 마음으로 번호를 알려 준 건 아닐 것이었다. 어떻게 그랬겠는가. 병신 같은
소리가 난무하고, 당장 죽어도 모자랄 개소리가 전부인 상황이었는데.
알지만,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화가 났다. 다시는 상대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놈을
유원이 상대하고 있다는 게.
“…그래서 뭐라는데.”
“오늘 얘기 많이 못해서 아쉽다고….”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아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현규진은 제가 화를 짓누르는 상황에도 쉴 새
없이 울리는 진동에 신경질적으로 눈을 떠 시선을 내리깔았다.
“…….”
유원의 앞에 놓인 휴대폰이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 드르륵, 테이블을 긁고 진동할 때마다
메시지 알림이 하나씩 늘어나는 게 보였다. 내용을 보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로도 좆같았다.
“뭐라는지 봐.”
“아냐, 나중에 봐도 돼.”
“뭘 나중에 봐. 나중에 언제 볼 건데. 너 혼자 있을 때?”
“왜 화를 내….”
“지금 화 안 나게 생겼어? 쓰레기 같은 새끼가 너한테 연락하는데? 네가 네 손으로 번호 다
주고 왔다는데?”
그러는 중에도 계속해서 진동이 울렸다. 정말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현규진은 마지막
인내심을 모아 담아 꾹꾹 눌렀다.
“봐, 빨리.”
현규진의 말에 유원은 이름도 모를 남자에게서 온 톡들을 보다가 현규진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유원에게 휴대폰을 받아 줄지어 있는 남자의 일방적인 톡을 하나하나 눈에 담은 현규진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백진석 : ㅎㅇ~ 나 아까 준서랑 만났던 형]
[안녕하세요]
[백진석 : 얘기 더 많이 하고 싶었는데 얼마 못해서 아쉽내]
[백진석 : 집?]
[아니요 저 아직 밖이에요]
[백진석 : 아까 그 친구랑?]
[네]
[백진석 : 그럼 이따 새벽쯤 전화할래?]
딱 한 번, 그것도 몇 분 보지도 않은 과외 선생의 친구가 갑자기 새벽에 전화를 하자는데 그걸
어떻게 정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현규진의 얼굴이 점점 더 분노로 굳었다.
[백진석 : 아님 낼 만날래?]
[백진석 : 오빠가 알려 줄게 많을것 같은대]
[백진석 : 아니아니 오빠 아니라 형. 내가 여자랑만 톡해서 실수햇네~ 일단 통화부터 하자
시간 언제되?]
절대 실수가 아닐 오빠 소리에 맞춤법이 엉망인 메시지만 봐도 저절로 그 거지 같은 얼굴이
떠올라 무척 괴로웠다. 현규진은 의자에 등을 기대 앉은 채 지나치게 화가 나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답을 보냈다.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사고를 칠 수 있을 것 같은 상태라 스스로도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려 애썼다.
[내일 친구랑 같이 나가도 돼요?]
보내자마자 메시지를 읽는 그 속도에도 토할 것 같았다. 현규진은 제 맞은편에 가만히 앉아
있는 유원을 한번 확인하고 다시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백진석 : 아까 걔?]
[네]
[백진석 : 그 친구는 우리가 별로 맘에 안드는 것 같던대 그냥 혼자 나와]
[어디로?]
[백진석 : 한국대역으로 와 역근처에서 나 자취하거든 집이 편하잖아ㅎ]
말을 하면 할수록 투명하게 보이는 더러운 속내에 현규진이 긴 숨을 내쉬었다. 예뻐서 남자도
만날 수 있겠네 뭐네 지랄하다가 갑자기 연락해서 단둘이 집에서 갑자기 만나자는데 그
의미가 뭐겠는가. 투명하다 못해 썩은 내가 아주 진동을 했다.
[그냥 친구랑 같이 갈게요]
[백진석 : 아니 난 둘이 얘기하는게 좋을 것 같은대]
[백진석 : 혼자와]
[친구는 안 돼요?]
[백진석 : ㅇㅇ혼자]
[아 친구랑 가면 안 되는구나]
[씨발 몰랐네?]
[백진석 : ?]
[백진석 : 유원아?]
존나 빡치네. 진짜. 어떻게든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려 애쓰는데 곧 다시 진동이 길게 울렸다.
이번에는 전화였다. 저장이 되어 있지 않은 낯선 번호지만, 현규진은 그게 백진석의
전화번호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 새끼 같은데 내가 받을게.”
“응….”
유원의 앞으로 그제야 카모마일 티 한 잔을 놓아 준 현규진이 얼음을 으드득 깨물어 조각냈다.
그리고 계속해 걸려 오는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유원아, 방금 뭐야? 친구랑… 못 나오게 해서… 화났어?
“네.”
짧게 대답해 그런지 통화를 하고 있는 상대가 유원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현규진은 뭔가 조금 이상하고 한층 더 역겹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너 욕도 원래 그렇게 잘해? 얼굴만 보면… 하…. 안 그럴 것 같은데…. 욕도
잘하는구나. 반전 매력 너무 좋은데.
말 중간중간이 좀 늘어지고, 굳이 숨을 쉬지 않아도 되는 타이밍에 평범한 숨보다 거친 숨이
뒤섞였다. 안 봐도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눈앞에 다 그려졌다. 이 씨발 새끼들은 항상
이랬다. 이걸 유원이 듣고 있지 않아 다행이고, 또 이 새끼가 진짜 유원의 목소리로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있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야. 너 이거 녹음되는 거 아냐?”
그제야 헉헉대던 소리가 멈췄다. 이제야 유원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야. 변태 새끼 존나 많이 봤지만, 너 같은 쓰레기 새끼는 또 처음이다. 야, 나이 처먹고 그러고
싶냐?”
-너, 너 뭐야.
“뭐긴 뭐야. 야, 자꾸 왜 난 두고 오래? 내가 너 개새끼로 보는 건 꼴에 눈치챘나 봐?”
당황한 건지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현규진은 전화가 끊어졌나 확인하려 화면을 한 번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둘만 만나? 새벽에 전화를 해? 또 뭐야. 아, 집이 편하니까 집에 가자고? 야, 이 씨발 개새끼야.
너 학교에 이거 뿌려 줄까, 어?”
-내가, 내가 뭘 어쨌다고 난리야. 뭔가 오해한 모양인데 난 그냥 도움 주려고….
“그러니까 그 도움 왜 나한테는 못 주는데. 새벽에 전화로 도움 줄 일이 뭐가 있어?”
-그래, 뭐. 오해한다 치고. 그러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유원이만 나오라는 게 뭐 잘못이야?
“어, 잘못이야. 정유원이 어딜 가든 나도 무조건 가는데 몰랐어?”
-그러니까 뭔데 그러냐고. 뭐 애인이라도 되냐?
“그래, 애인이다, 왜. 쟤 나랑 사귀니까 연락하지 마, 병신 새끼야.”
전화를 끊고 차단한 현규진이 톡에서도 백진석을 차단했다. 그리고 백진석이 보낸 톡을
캡쳐해서 제 톡으로 보냈다. 이것과 통화 녹음을 전부 이준서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이준서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백진석은 이준서의 지인이니 이준서도 그 수준과 만행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차단 다 했어.”
할 일을 다 마친 현규진은 휴대폰을 유원의 앞으로 놓아 주었다. 여전히 화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분노의 방향이 유원을 향할 이유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과외 선생의 친구가
번호를 알려 달라는데 싫다고 딱 잘라 말하기는 아마 어려웠을 것이었다. 저보다 나이도 많고,
이준서와도 엮인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이딴 개소리를 할 줄도 몰랐을 거고.
“사귄다고 하면 어떡해….”
“뭐?”
“진짜 그런 줄 알면 안 되잖아….”
유원의 이 걱정도 그냥 그래, 그런 걱정할 수 있지, 가볍게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늘 걱정이
많고, 또 저와 관계가 변하면서 유독 더 조심에 조심을 기하려는 애니까.
하지만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서운하고 억울하고 조금 전에 느낀 감정과는 조금 다른 결의
화가 났다.
“진짜 그런 줄 알면 뭐가 안 되는데.”
“…….”
“좀 알면 안 돼?”
현규진도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런 얘기를 해 봤자 나아질 건 없고 오히려 상황이
악화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기어코 내뱉어 버리는 건 빌어먹을 성질머리
때문이었다.
“주변 눈치 보는 것까지는 뭐 그럴 수 있다 생각하겠는데 저딴 새끼 눈치까지 봐야 돼?”
“그게 아니라… 저 사람이 선생님한테 말할 수도 있으니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 걱정은 되는데 눈앞에 있는 나 기분 안 좋은 건 보이지도 않지.”
“규진아….”
“내가 쪽팔려? 그래서 그래?”
그만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미 너무 많이 말해 버렸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멈춰지지 않았다. 정유원이 좋아 미치겠어 늘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저와 달리
숨기려 들고, 자꾸 움츠리고, 제가 아니라 주변만 보는 유원에게 서운해 눈물이 다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안 그래…. 그런 생각 안 해.”
“아닌데 왜 그렇게….”
목소리가 크지도 않은데 주변에서 흘끗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주고받는 어투 때문에 혹시
싸우는 건가 싶어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있는 이런 곳에서 더 이러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았다.
“…가자, 일단.”
“…….”
제 옷과 유원이 산 노트와 펜, 귀여워 하길래 사 준 하얀 토끼 모양 쿠션이 든 쇼핑백 여러 개를
한 손에 든 현규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원도 그 뒤를 따라 일어나 얼음이 조금 녹은
카모마일 티를 한 모금 마시고 정리대로 가 남은 것을 정리했다. 자꾸 같은 이유로 현규진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속상하게 해 저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58 화(58/127)

58


“…….”
“…….”
쇼핑몰 밖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 각자 앉은 쪽에 있는 창밖을 가만히 보며 갈 뿐이었다.
유원은 한 번씩 현규진을 살폈다. 볼 때마다 창밖을 보고 있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자꾸만 보게 됐다. 미안하기도 하고, 또 자꾸 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이
불안하기도 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창밖을 봤다가 다시 옆을 보면 현규진이
사라지고 없을 것만 같았다.
한산한 밤의 도로를 30 여 분 달린 택시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 두 사람의 집이 있는 동
앞에 멈춰 섰다. 카드로 계산을 한 현규진이 먼저 내리고, 그 뒤를 따라 유원이 내렸다.
공동 현관을 지나 1 층에 서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서도 그 어떤 말도 흐르지 않았다. 유원은 3
층을 막 지나가는 것을 보다가 현규진을 슬쩍 돌아보았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마음이 급했다.
“…나 너랑 사귀는 거… 창피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랬으면 아예 사귀질 않지….
좋아하지도 않고.”
“솔직히 나만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다소 충격적인 말과 함께 6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유원은 내리는 것도 잊은 채
가만히 현규진과 눈을 맞췄다. 그대로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12 층을 향해 올랐다.
그때까지도 유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나만 좋아하고, 나만 안달 나서 미친놈처럼 굴고, 넌 내가 그렇게 구니까 달래듯 어쩔 수 없이
받아 주고.”
“그런 말이 어딨어. 먼저 좋아한 것도 나고….”
“그건 이제 별로 의미가 없어. 시작은 네가 먼저였어도 지금은 내가 더 클 수도 있는 거니까.
먼저 좋아했다고 더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먼저 식을 수도 있는 거고.”
12 층에 멈춰 문이 열렸다가 또 닫힌 엘리베이터가 운행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현규진은 다시
6 층 버튼을 눌렀다.
“내가 쪽팔려서 그런 게 아니면 내가 불안해서 그래?”
“…….”
“조심한다는 내 말 안 믿어져? 못 믿겠어? 기어이 이모, 이모부 앞에서 너랑 사귀는 티 내고 다
들켜서 난리 나게 할 것 같아?”
“…그 정도는 아니지만, 조마조마하기는 해.”
다시 6 층에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현규진이 먼저 내렸다. 유원도 그 뒤를 따라 내려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한 문 앞에 마주 섰다. 뭔가 말을 하려던 현규진은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얘기하면 안에도 들릴걸. 이모 있을 거 아냐.”
“…추가 촬영이 생겨서 아까 나간다고 톡 왔었어. 내일 아침에 오신대. 들어갈래?”
“어. 들어가자.”
비밀번호를 누르는 유원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현규진이 심호흡했다. 그냥 넘어가면
되는데, 정유원은 정말 걱정이 많구나, 내가 더 조심해야겠다, 생각하면 되는데 그게 잘
안돼서 미칠 것 같았다. 유치하게 굴기도 싫고, 이렇게 싸우는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도
싫은데 좋아서, 유원이 너무 좋아서 자꾸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현관에 들어가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현규진이 눈으로 아무도 없어 불이 꺼진 집
안을 확인한 다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이런 거야. 이런 얘기를 할 때 부모님이 들을 수 있으니
장소를 가리고, 한 번 더 확인을 하는 거. 난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 아는데 전에도 말했지만, 갑자기 몸 사리면서 친구일 때도 그냥
편하게 하던 말, 행동 다 차단 당하고, 그것까지 눈치 보는 건 싫어.”
“…….”
“아까 그 새끼한테 너랑 사귄다고 한 거? 그게 왜. 여태까지도 그런 말 많이 했잖아. 학원
앞에서 꽃 들고 너랑 결혼하고 싶다고 기다리던 놈한테도 이미 너 나랑 결혼했다고 말한 적도
있고, 학교에서도 애들이 사귀냐 그러면 그냥 사귄다고 말한 적도 많아. 그걸 진지하게 여긴
사람이 누가 있었어?”
“그때는 그 대답이 나한테도 장난처럼 들렸으니까….”
현관 센서가 반짝 유원의 대답과 함께 켜졌다. 현규진은 들고 있던 쇼핑백을 현관에 내려 두고
서서 유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았어. 깊게 생각할 필요 없는 그냥 장난이니까.”
“…….”
“그런데 지금은… 장난이 아니잖아. 진짜잖아. 그게 진짜라는 게 다른 사람한테도 다 보일 것
같단 말이야. 내가 너 좋아하는 게… 다 보일 것 같아. 난 전에도 너한테 안 들키려고 진짜
열심히 숨겼는데… 네가 너무 쉽게 알아 버렸잖아. 내 얼굴만 봐도 어떤 생각 하는지 다
보인다며….”
“그래. 그거 다 이해해. 하는데 그렇게 다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냐는 거야. 아까도 사귀는 사람
있는지 물었는데 넌 바로 없다고 했잖아. 있다고 말한다고 그게 나라는 걸 아는 것도 아닌데.”
유치하고 한심하고 멋있어 보이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머리를 치고 지났지만, 현규진은 그냥
마음에 있던 말을 유원에게 전했다. 혼자 이렇게 쌓고, 그 위에 또 뭔가를 쌓다 보면 나중에는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위태롭게 쌓여 언제 무너질지 늘 두려워하게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쌓아 둔 게 무너져도 다치지 않고 간단히 수습할 수 있지만, 오랫동안 높이 쌓인 것은
무너지는 순간 모두가 크게 다치고, 폐허가 되는 법이었다. 현규진은 유원이 늘 가득 차 있는
저의 마음이 폐허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미안해.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어. 사귀는 사람 있다고 하면 캐물을 것 같기도 하고….”
“그때 내가 애인 있다고 대답해서 그것도 조마조마했어?”
“…조금.”
“너라는 거 다른 사람들이 알 리도 없는데도?”
“…응. 다른 사람은 모르는데 나는… 난 거 아니까….”
다시금 정적이 찾아들었다. 유원의 말과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그걸 다
받아들이고 따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저와 유원의 새로운 관계를 흔들
수 있는 일이라 더 그랬다.
“하…. 그러니까 그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조심한다고 했잖아.
너 나랑 만나는 거 들켜서 곤란한 일 없게 한다니까.”
“그러려면 솔직히 난… 지금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
“여기서 더?”
“…응.”
“말해 봐. 뭘 더 조심해야 하는지.”
“아까 같은 경우에도 난… 그냥 그런 질문엔 오래 대화가 이어질 여지를 안 주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 있다고 하면 계속 그 주제로 대화가 이어지잖아. 누군지 알고 싶어 할 거고…. 그렇게
하나씩 말하다 보면 너라는 거… 알게 될 수도 있는 거고….”
처음이었다. 유원과 이렇게 안 맞는 부분이 있다는 걸 느낀 것은. 물론 그동안 자잘하게
취향이 다른 것은 존재했다. 먹는 거나 옷을 입는 스타일 같은 것은 분명 취향이 다르지만,
그것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옷이야 각자 입고 싶은 대로 입으면 되고 서로의 스타일을 바꾸려고만 안 하면 되니 싸울 일이
없었고, 먹는 것 또한 서로의 취향을 고려하여 한 번씩 상대에게 맞춰 고르거나 하면 되니
갈등의 기역도 나올 일이 없었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는데 연애를 하고 나니 정말 한 번도 보고 들은 적이 없는 유원의 새로운
모습이 계속 나타났다.
원래 알던 것보다 훨씬 더 예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뭐에 부끄러워하고, 또 뭐에 기분이
좋아지는지 알게 될 때는 좋았는데 그 반대 상황을 마주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알 수가
없었다.
예의범절과 사회 통념을 중요시하고, 자유분방한, 소위 말하는 발랑 까진 스타일은 절대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걱정을 하고, 숨기려 할 줄은 몰랐기에 속이 좀
답답했다. 그래서 싫다는 건 아니지만, 생각이 통할 듯하다가 확 엇갈리고, 또 같은 생각인데
결론이 다르게 나니 이럴 수가 있나 싶기도 했다.
“아니, 그건 너무 앞선 걱정 아냐? 어렵게 생각하지 마. 난 그냥 남들은 모르지만, 네 인정
하나로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고. 그냥 그 얘기 하는 거야. 너한테 확인 받고 싶다고, 난.”
“…….”
“아, 모르겠어. 존나 말할수록 씨발, 너무 유치해서…. 너한테 욕하는 거 아냐. 내가 너무 지금
유치해서 그래. 나도 내가 짜증 나는데 넌 더 하겠지.”
“…안 그래.”
“그럼 다행이고.”
고개를 수그려 마른세수를 한 현규진이 다시 깊게 숨을 내쉬었다. 종일 걸어 지친 애를 현관에
세워 두고 뭘 하는 건가 싶었다. 어차피 생각이 달라 이런 말 몇 마디로 잘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다 알면서.
“너에 대해선 진짜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진짜 모르는 것투성이야.”
“…….”
“너랑 연애는 처음이라 그런가.”
“…….”
“네 말 더 생각해 볼게. 쉬어. 간다.”
현규진이 몸을 돌려 문을 열자 센서가 움직임을 감지하고 다시 반짝 불이 켜졌다. 유원은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현규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요즘은 진짜 모르는
것투성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
사실 저도 그랬다. 현규진에 대해서는 이모와 이모부보다도 더 많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현규진은 처음 보는 현규진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또 어떻게 해야 마음을 가득 채워 줄
수 있을지 바로바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함께 놀러도 가 보고, 싸워도 보고, 나란히 몸살감기에 걸려 입원도 해 보고, 학원을 빼먹고
놀다가 혼나 보기도 했지만, 연애는 처음이라 낯선 것투성이였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59 화(59/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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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말도 잘 통하고 무슨 문제가 있어도 조금만 이야기를 나누면 하나로 의견이 통일되어
의견이 갈리는 걸로 심각해질 일이 없었기에 계속 비슷한 일로 상처가 나고 약을 바르고, 다
나을 때쯤 또 긁혀 덧나 피가 나는 일이 반복되는 지금 이 상황이 참 어려웠다.
휴우….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내쉰 유원의 시선이 현관 바닥에 놓인 쇼핑백으로 향했다.
현규진이 두고 간 것들이었다.
“…….”
나란히 놓인 쇼핑백 앞으로 쪼그려 앉아 현규진이 사 준 하얀 토끼 모양 쿠션을 꺼낸 유원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입술 안쪽을 꾹꾹 깨물었다.
‘이것 봐. 쿠션 엄청 귀엽지.’
‘사 줄까? 나 없을 때 나라고 생각하고 안고 자.’
웃으면서 그 말을 할 때도 현규진의 마음 안에는 서운함이 차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저를 위해, 그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조금도 티를 내지 않고 있었을 현규진을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유원은 훌쩍이며 뜨거워진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미안하고, 속상했다. 또 너무 어렵고 낯설었다.
현규진과의 첫 연애는.
***
아, 그냥 참을걸. 말하지 말걸. 그딴 소리는 왜 했는데. 침대에 누워 어두운 천장만 보고 있던
현규진이 확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걸 싸웠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유원과 그렇게 대화를
종료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때부터 두 시간이나 지난 지금까지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퉜으니 당연한 거지만, 그것보다 가장 큰 감정은 바로 후회였다. 그러지 말걸. 그 말은 뺄걸.
너무 유치해 보였을 것 같은데. 그때 정유원이 나를 어떤 얼굴로 봤더라? 오만 것들을 다
떠올리며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던 현규진은 다시 몸을 뒤로 기울였다.
“…하.”
솔직히 연애가 이렇게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좋아하면, 서로 좋아하기
만하면 무탈하게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사랑싸움 같은 것도 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씨. 나한테 질렸으면 어떡하지. 최해영 톡으로 까였다고 비웃었는데 나도 내일 톡으로
까이는 거 아냐?
엿같아서 너랑 더 못 사귀겠어. 빠이.
유원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만, 이 상황이 너무나 충격적이라 극단적인 예시를 떠올린
현규진이 길게 앓는 소리를 내며 축 늘어졌다.
“…….”
전에는 유원에게 서운한 게 없었다.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내내 귀엽고, 착하고 순해서 제
장난도 다 받아 주고, 잘 웃는 유원이 좋았다. 물론 가끔 잔소리를 할 때도 있긴 하지만, 그건
제가 잘못한 게 맞아 억울하지도 않고, 서운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정말 왜 지금은 자꾸 서운함이 생기는 걸까? 그때보다 덜 좋아하게 된 것도 아니고
더, 정말 더 좋아하게 됐는데 도대체 왜.
물론 유원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저를 보면 귀가 빨개지고,
손을 잡기만 해도 어깨를 움칠대는 유원을 알기에 그런 오해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왜? 도대체 뭐가 문젠데. 남한테 막 티를 내 주기를 바라는 건가. 아닌데. 나도 조심하면서
정유원 마음 편하게 해 주고 싶은데.
“…….”
조심은 하지만, 그래도 저만 알 수 있도록 은밀하게 사인이라도 주기를 내심 바라다가 안 해
주니까 삐진 건가, 나?
와, 그건 좀 너무 유치한데. 기다란 몸을 돌려 벽을 보고 누운 현규진이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도 그렇게 유치하고 간단한 감정은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제가 서운함을 느끼는 부분은 유원의 거리감이었다. 묘하게 어떤 선을 그어 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서운함이 밀려들고, 불안함이 치솟았다.
서운한 건 이해하겠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기까지 하지…. 현규진은 불안정하게 뛰는 심장
위를 손으로 덮었다. 자꾸 유원이 집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대로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정유원이라는 사람이 아예 사라지고 없을 것 같단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
그제야 현규진은 제가 ‘왜’ 도대체 ‘뭐 때문에’ 불안한지 깨달았다.
저는 유원과의 이 관계가 흐지부지될까 불안한 것이었다. 저와 유원만 아는 이 꼭꼭 숨겨진
관계가 끝나면 정말 없었던 일처럼 모든 게 사라질까 봐 자꾸만 유원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다.
저를 좋아하는지,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저에게 저를 좋아하는 그 마음을 잔뜩 보여
줄 수 있는지 묻고 싶고, 알고 싶었다.
그렇게 유원이 저와의 연애를 인정하고 제 앞에서라도 잔뜩 티 내는 걸 보고 싶은 것이었다.
유원을 좋아하니까. 아주 많이.
“…….”
너무 좋아서 생각만 해도 보고 싶어 죽을 것 같고, 비어 있는 손안에 체온이 들어차고,
키스하고 싶어 홱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유원도 저처럼 이렇게 초조하고, 제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나기를 바랐다.
저만, 오직 저만 떠올리면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다 써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그러는 것처럼.
“…….”
너무 집착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유원은 아주아주 어릴 때부터 제
거였으니까. 친구일 때도 저와 모든 것을 함께하며 지냈으니 앞으로는 더 그러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걸 원한다고 계속 유원에게 말할 뿐이고. 그게 잘못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아무 의미 없이 이불 어딘가를 바라보던 현규진의 시선 끝으로 유원이 그려졌다. 저를 향해
웃고, 길게 키스하면 열이 올라 쌕쌕 달아오른 숨을 내뱉고, 또 살살 저와 혀를 마주 문지르는
유원이.
아, 씨….
아랫배가 확 조여들었다. 고민하다가 갑자기 이래도 되나. 저릿해진 손끝과 묘한 감각으로 확
조이는 아랫배에 역시나 죄책감을 느낀 현규진이 억지로 커다란 몸을 구겨 웅크리며 눈을
감았다.
***
일요일에는 별다른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학교에 가는 날이면 그걸 핑계로 얼굴을 보고
말이라도 걸기가 쉬웠을 텐데 그럴 핑계가 없으니 먼저 연락을 하는 게 쉽지 않았다.
18 년을 알고 지내도 데면데면해지는 건 순간이라는 게 참 무서웠다. 유원은 저를 배웅하러
나온 부모님에게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막 8 층을 지나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언제나처럼 6
층에 멈춰 섰다.
“…….”
열린 문 안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현규진이 있었다. 아침에 보면 제대로 인사도 하고,
어색하지 않게 굴려고 연습도 했는데 눈도 제대로 마주보기가 어려웠다. 유원은 어색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라 현규진의 옆에 섰다.
“목도리 하지. 오늘부터 확 더 춥다던데.”
“…아…. 꺼내놨는데 까먹었어.”
“내일은 해.”
“…응.”
목도리 이야기가 끝나자 다시 어색함이 찾아들었다. 유원은 몰래 현규진을 훔쳐보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별다른 얘기를 나누지 않은 채 적요 속에서 학교로 향했다.
마음이 답답했다.
학교에 도착해서도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유원은 자리에 앉아 학원 숙제를 했고,
현규진은 그대로 엎드려 3 교시까지 내리 잤다. 일요일 내내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리면서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먼저 연락을 해 볼까 싶어 메시지를 적었다 지웠다 몇백 번을 하느라
잠을 설쳐 몹시 피곤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자다가 4 교시에는 턱을 괸 채 유원의 뒷모습만 내내 관찰했다. 평소라면
그냥 아무렇지 않은 듯 안 보고 싶었냐고, 그러고 보니까 우리 싸우느라 토요일에 키스도 못
했다고 장난스럽게 말하며 풀었을 텐데 그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사실 아침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눈이 마주치면 바로 웃으면서 분위기를 풀려고 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조금 긴장이 되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 결국, 못 참고 일요일에 몇 번이나
유원을 떠올리며 혼자 했던 것도 떠올라 묘한 죄책감 때문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한마디로 망한 것이었다.
“현! 밥 먹으러 안 가냐?”
“얘 상태 왜 이러냐?”
“맛이 갔는데. 이럴 땐 멍유 불러야지. 멍유! 네 애인 상태 존나 이상함.”
씨발, 진짜 돌았나. 하지 말라고 김준재를 저지하려는 현규진의 손보다 김준재의 입이 더
빨랐다. 현규진은 자리에서 돌아보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멍유, 얘 왜 이래?”
자리에서 일어난 유원이 현규진의 책상 쪽으로 다가왔다. 현규진은 삐딱하게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허리를 똑바로 펴 앉았다. 언젠가 유원이 자세가 바른 사람을 보면 멋있다고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였다.
“가자, 밥 먹으러….”
“어? 어…. 어. 가자.”
유원의 입술 사이에서 먼저 흐른 말에 현규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말할 땐 존나 듣는 척도 안 하더니 지 애인이 말하니까 바로 일어나는 거 봐라.”
“야, 친구랑 애인이 같냐. 좋게 그냥 봐줘.”
김준재와 최해영의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장난스럽고, 큰 의미 따위 없는 말에도 심장이
덜컥였다. 혹시 이런 말도 유원은 불편한 게 아닐까 신경이 쓰였다.
“오늘 뭐 나오냐?”
“오늘 돼지갈비 떡찜, 칠리 탕수육, 유부장국, 키위 드레싱 사과 샐러드, 스틱 피자.”
“아, 오늘 급식 존나 먹겠네.”
“늦게 가면 다 털려.”
김준재와 최해영의 대화를 들으며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는 유원의 옆으로 온 현규진이
조심스럽게 팔을 잡았다. 제가 혹시라도 계단에서 넘어질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기에 유원은 고마움을 느끼며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60 화(60/127)

60


대부분 좋아하는 맛있는 메뉴만 잔뜩 나오는 날이라 김준재의 말대로 급식실이 무척 붐볐다.
유원은 급식을 받아 비어 있는 창가 쪽 식탁에 가 앉았다. 분명 다른 때에 비해 더 맛있어
보이는 메뉴였지만, 입맛이 막 돌지는 않았다. 현규진과 문제를 풀어 내야 뭐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낼모레 방학인데 뭐 할 거냐? 보드 타러 가자.”
“하, 준재야. 정신 좀 차려라. 우리 이제 고 3 이야. 보드 타고 재수학원 들어갈래?”
“야, 미친. 어제 엄마가 너랑 똑같은 말 했어. 억양도 똑같아. 개소름.”
팔을 막 문지르는 김준재를 보고 살짝 미소 지은 유원이 저와 현규진에게 번갈아 닿는 시선에
슬쩍 시선을 피했다.
“둘이 싸웠어?”
나오지 않기를 바랐던 질문이 나온 순간 입 안에 넣은 사과 조각이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다.
이럴 땐 싸웠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안 싸웠다고 하는 게 맞나? 유원은 치열하게 고민했다.
“아니.”
그때 현규진의 대답이 짧게 흘러나왔다. 안 싸웠다는 대답인데 싸운 게 맞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하는 어투였다. 이번에는 밥을 조금 들어 입에 넣은 유원이 겨우 국물만 조금 떠 넘겼다.
“야, 안 싸운 것 같은데 넌 왜 그러냐?”
“뭐가. 존나 싸운 것 같은데.”
“밥이나 드세요.”
눈치도 없이 계속 아는 척을 하는 김준재의 팔을 팔꿈치로 찌른 최해영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멍유 넌 방학 때 뭐 해? 역시 공부?”
“아마도? 방학 끝나면 거의 바로 모의고사잖아. 이번 방학부터 준비 제대로 해 보려고….
그렇다고 뭐 매일 공부만 하진 않겠지만.”
“와, 그럼 현규진도 방학 때 존나 공부만 하겠네. 너랑 일정 똑같을 거 아냐.”
조금 고개를 돌려 현규진을 본 유원이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쉽게 생각하고 쉽게 대답하는
방법을 아예 잊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 찾지 마라. 너희는 알아서 살길 찾아.”
“존나 치사하네. 멍유, 우리도 같이 하면 안 되냐?”
“꺼져라. 정유원 내 거야.”
현규진의 대답에 김준재는 야유하고, 최해영은 젓가락을 집어던질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유원은 귀와 목덜미가 새빨개졌다.
김준재와 최해영처럼 저 말을 농담으로 받아야 하는데 농담처럼 생각하지 못하고 심장이
마구 뛰는 제가 문제였다. 유원은 겨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냥 평소처럼 웃기만 했다.
전에는 그랬으니까. 친구일 때는 이런 장난에 그냥 같이 웃고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흘려보냈으니까.
그래, 전처럼. 친구일 때처럼. 화끈화끈한 귀를 애써 무시한 채 유원은 다시 밥을 입에 넣었다.
***
학교가 끝날 때까지 현규진과는 내내 풀리지 않는 묘한 어색함과 함께 지냈다. 현규진은 수업
때마다 엎드려 자거나 삐딱하게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 그 주변을
지나다니는 애들은 혹시라도 현규진을 건드릴까 봐 평소보다 더 조심해 걸음을 옮겼다.
종례가 끝나고 가방을 챙긴 유원은 먼저 현규진에게 다가갔다. 알고 지내는 동안 싸운 적이
손에 꼽아 다툰 다음날 먼저 말을 걸고 다가가는 건 정말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그런 일이 있으면 100% 현규진이 먼저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 왔기에 더 그랬다.
먼저 말을 거는 게 어색하기도 하고, 조마조마하기도 하지만, 유원은 용기를 냈다. 더는
현규진과 어색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또 사과를 하고 싶었다. 평소 심각한 일도
그리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여 고민을 없애 주는 현규진의 성격과 달리 이번에는 저 때문에
많이 기분이 상한 것 같아 더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꼭 미안하다고 제대로 말한 다음 제가 얼마나 현규진을 좋아하는지 말해 주고 싶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제 감정 만큼은 현규진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 안에
가득했다. 작은 주먹을 말아쥐어 스스로 다시 한번 용기를 충전한 유원이 조심조심
현규진에게 다가갔다.
“…규진아. 시간 괜찮아? 나 할 말 있는데….”
보통 제가 학원에 가는 날은 늘 같이 저녁을 먹으니 당연히 시간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 물은 유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규진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가자. 가방 줘.”
괜찮다고 하려다가 이번에도 잠자코 현규진의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유원은 현규진이
가방 가져가는 것을 가만히 놔두었다. 그리고 먼저 교실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함께 계단을
올랐다.
오늘은 현규진이 늘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최대한 현규진의 기분을 풀어 주는 것에 중심을 둘
생각이었다. 좋아한다는 말도 잔뜩 하고, 학교라 조심해야 하긴 하지만, 안아 주고 싶었다.
현규진의 기분이 좋아질 수만 있다면, 웃는 걸 볼 수 있다면 조금 부끄럽고 걱정이 돼도 이런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어둑한 복도 위로 발소리가 겹쳐 울렸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열린 미술실 안으로 들어가자
곧 다시 문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유원은 해 질 녘의 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현규진의
손을 잡아 당겼다. 손안에 갇힌 현규진의 손가락이 움찔대는 게 느껴졌다.
가방 두 개를 내려 놓고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이 깊었다. 유원은 작게 호흡을 가다듬고 용기를
묻힌 입술을 열었다.
“토요일 일은… 미안해. 네 입장에서는 기분 나빴을 것 같아. 사귀고 있는데… 내가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너무 쉽게 아니라고 해 버린 거니까. 내가 괜찮다고 너도 괜찮은 건 아닌데 그
생각까지 못했어.”
“…….”
“내가 미안해. 규진아, 화 풀어 주라. 응?”
제 손을 잡고 말하는 유원을 본 현규진이 녹아내리듯 몸을 숙여 품에 쏙 들어오는 몸을 가득
끌어안았다. 이런 순간에도 너무 귀엽다는 생각만 드니 진짜 이제 저는 진짜 정유원이 아니면
안 되게 된 모양이었다.
“화는 그날 다 풀렸어. 집에 가서 혼자 생각해 보니까 너무 유치해서 쪽팔리더라. 내가 더
미안해. 유치하게 굴어서. 오늘도 아침에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 그
뒤로는 계속 쪽팔려서 말도 못 걸고. 너한테 진짜 존나 멋있게 보이고 싶은데, 어렵다, 진짜.”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속상했지. 그리고 나도… 너 진짜 좋아해. 거짓말 아니야.”
어깨 위에서 들리는 듣기 좋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현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좋아해. 서운한 것도 네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건데… 그래도 속 좁게 굴어서 미안해.”
기분이 다 풀린 것 같은 현규진의 등을 안고 쓸어 준 유원이 그제야 웃음 지었다. 토요일
밤부터 조금 전까지 내내 마음이 쓰이고 속상했는데 이제야 살 것 같았다.
“기분 풀려서 다행이야. 저녁 맛있는 거 먹자. 내가 사 줄게.”
“뭐 먹을까. 너 아까 점심도 거의 못 먹었잖아. 배고프지.”
“아, 점심…. 잘 안 넘어가서….”
밥이 잘 안 넘어갔다는 말을 듣자마자 제가 급식실에서 김준재와 최해영에게 정유원은 내
거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솔직히 아까 그 말은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한 것도 있지만,
일부러 한 말이기도 했다. 친구일 때도 그런 농담은 아무렇지도 않게 했었으니까. 그런 말을
해도 다른 사람들이 믿지도 않고, 그냥 장난으로, 농담으로 여기고 넘어간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 유치하게도 오기를 부린 것이었다.
“나 때문에?”
“나 원래 뭐 신경 쓰이는 일 있으면 해결하기 전까지는 잘 뭐 못 먹잖아. 너랑 어색한 것도 신경
쓰이고….”
“응, 또?”
눈을 맞추자 유원이 고개를 저었다. 분명 할 말이 있는데 안 하는 모양새였다. 현규진은 잠시
고민했다. 내용물이 뭔지 모르는 상자의 포장 끈 끄트머리를 잡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용물은
아주 좋거나 또는 아주 나쁘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컸다. 50 대 50 의 확률이라면 이
상자를 여는 게 맞을까? 그냥 예쁘게 포장이 된 채로 놔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열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규진은 그대로 포장 끈을 당겼다. 이것도 역시
빌어먹을 성질머리에서 비롯된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방금 막 다시 예쁘게 묶은 리본이
풀어지며 상자 뚜껑이 열렸다.
“내가 너 내 거라고 한 것 때문에 그런 거지.”
“아…. 좀 놀라긴 했는데 괜찮았어. 네 말대로 친구였을 땐 그런 얘기 많이 했으니까…. 애들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하고 넘어갔고. 그런데 그거… 일부러 말한 거지?”
“응. 보여 주고 싶어서. 네가 걱정하는 일 안 일어난다는 거. 오히려 우리가 어색하게 굴고,
전이랑 다르게 부자연스럽게 구는 게 더 이상해 보인다는 것도 네가 알았으면 좋겠기도 하고.”
“알려 주는 건 좋은데 그걸 꼭 그렇게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해…. 전에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너랑 사귄 뒤로 같은 상황이어도 전이랑 좀 다르게 느껴진다고 내가 말 다 했잖아
….”
닿아 있던 몸이 틈을 벌리며 떨어졌다. 서로의 온기가 닿아 있던 곳으로 닿는 미술실의 서늘한
공기는 유난히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럼 뭘 어떡할까. 그냥 밖에서는 학교 같이 가고, 점심 같이 먹고 또 끝나면 집에 가는 정도만
할까? 남들 눈치채면 안 되니까?”
“…솔직히 이제 밖에서는 그게 맞는 거 아니야? 관계가 달라졌으면 행동도 변하는 게 맞는
거잖아. 친구가 아니니까 이제 그런 장난은 더 조심해야지.”
“또 제자리네. 도돌이표야. 뭐 계속 말할 필요가 있을까. 진짜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본 거 맞아?”
동시에 한숨이 흘렀다. 화해해서 기뻤던 몇 분 전의 온기는 꿈 같았다. 창틀에 놓인 탈취제를
응시하던 유원이 다시 현규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넌? 내가 신경 쓰인다고, 눈치 보인다고 말했는데 그걸 알면서도 또 그런 거잖아. 난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잘 안 넘어가진다고 얘기 다 했는데도.”
“나도 유치하다고 생각해. 오기 부린 것도 맞아. 그런데 오죽하면 그랬을까 생각은 안 들어?
내가 그렇게 해도, 좀 편해져도 아무 일도 안 생긴다는 거 보면서도 너는 왜 계속 선만 긋는데.”
“이게 선 긋는 걸로 보여?”
“어. 솔직히 그렇게 보여. 남들이랑 있을 때랑 둘이 있을 때 온도 차가 너무 나잖아. 혹시 날
키스할 수 있는 친구, 뭐 그런 걸로 생각하는 거 아냐?”
“…뭐?”
친구 사이 고백 금지-61 화(61/127)

61


유원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현규진은 멈춰야 한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하지만 한
번 넘친 말은 기어이 조금 더 흘러 마지노선을 넘었다.
“밖에서는 친구로 지내다가 아무도 없는 네 방에서 붙어먹을 때만 내가 필요한 거 아니냐고.”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내뱉는다고 다 말이 아니라는 것도 이런
식으로 심하게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현규진은 다 알았다.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방에서만 하라며. 집에 아무도 없을 때.”
“그걸… 붙어먹는다고 말해? 내가 너랑 붙어먹었어?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화를 낼 줄 알았지만, 막상 정말 화가 난 유원의 조금 예민해진 얼굴을 보니 어김없이 심장이
확 떨어졌다. 현규진은 이 느낌이 정말 싫었다. 다시는 상대해 줄 것 같지 않고, 완전히 질려
버린 것 같은 눈동자, 그야말로 버려지는 순간. 그리고 가장 최악은 이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상황을 제가 다 자초했다는 것이었다. 버려질 수밖에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버려질까 무서워
하다니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더 사랑받고 싶다는 말을 어떻게 이따위로 할 수가 있는 걸까.
“너 한 번씩 그렇게 말 함부로 하는 거 진짜 싫어.”
“싫어?”
“응, 싫어. 그런 말 하는 너까지 싫어져.”
유원의 입에서 나오는 싫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눈동자가 확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네가 싫다고 말하는 유원을 보는 건 처음이라 마음이 엉망이었다.
“그렇게 싫은데 왜 만나.”
“…그러게. 싫으면 안 만나는 게 맞지. 이제 안 만나면 되겠다.”
현규진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유원을 보던 현규진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끝내자고?”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그냥 한 마디면, 내 말이 너무 심했다는 말 하나면 생각보다
쉽게 상황이 정리될 수도 있었다. 일단 화를 가라앉히고, 조금 둘 다 진정을 하고 마구 내뱉은
말을 사과하면….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말이 멋대로 나갔다.
“헤어지잔 거야?”
“…….”
“대답해, 확실하게.”
“그…래…! 자꾸 싸우기만 하는데 이렇게 만나는 게… 의미가 있어?”
머리를 아무렇게나 확 쓸어올린 현규진이 서 있던 자리에서 반 바퀴 돌아 양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대고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이라도 조금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는 걸
아는데 머리와 달리 경솔한 마음은 그동안 유원 앞에서 본 적도 없던 자존심을 자꾸 찾고
있었다.
“그래, 없지. 없으니까! 네 말대로 해. 끝내. 헤어져.”
너무나 쉽게 시작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또 너무나 쉽게 끝이 나 버렸다. 유원은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것을 꾹 참고 겨우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더 할 말 있어?”
“없어.”
“그래, 그럼. 빠….”
습관적으로 빠이! 라고 인사를 할 뻔한 유원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책상 위에 놓인 제 가방을
들고 미술실을 나섰다. 현규진에게서 뒤돌아서자마자 꾹 참고 있던 눈물이 차올랐다.
속상했다. 이 상황이. 말과는 달리 서로 이해하지 못해 날이 선 말을 주고받으며 상처를 준
것도 속상하지만, 그냥 이렇게 너무 쉽게, 둘 다 욱해서 치밀고 나온 그깟 말 몇 마디 때문에
모든 게 끝나 버렸다는 사실이 가장 충격이었다.
“…씨이….”
미술실 앞에 선 유원은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속상하고 또 속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창피해서 여기를 벗어나기라도 하고 싶은데 내내 뭉쳐 있던 불안함과 서운함, 당황스러움과
충격 같은 감정들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와 어쩔 줄을 몰랐다. 태어나 이렇게 어렵고 속상하고
울고 싶은 감정은 처음이었다.
시작이 너무 쉬워서 끝도 이렇게 쉬운 걸까. 현규진의 말처럼 저는 내내 엉뚱한 것을
불안해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불안을 없애려고 바동대다가 아예 전부 다 잃은 것을 보면.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엉엉 우는 소리가 울렸다. 유원은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닦지도 못했다. 그저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낯선
감정이 콸콸 쏟아지는 걸 마주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야.”
유원이 우는 소리에 놀라 미술실에서 나온 현규진이 정말 엉엉 울고 있는 유원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봐 왔지만, 이렇게 소리 내어 펑펑 우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정유원, 잠깐만. 너 이러다가 과호흡 와.”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울음을 터뜨려 버린 유원의 숨소리가 확실히 조금 이상했다. 울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점점 숨소리가 불안정해지는 게 느껴졌다. 코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입으로 쉬다 보니 금세 헐떡이는 소리가 복도로 울렸다.
“숨 그렇게 쉬지 말고, 천천히 쉬어. 나 보고.”
“신경, 흐윽, 신경 쓰지 말고 가아….”
“뭐?”
“우리, 하으,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하아….”
순간 현규진은 머리가 확 도는 것을 느꼈다. 저도 유원처럼 엉엉 울 수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문제는 눈물은 나지 않고 자꾸 화만 난다는 것이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우리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헤어, 졌잖아….”
“너랑 나랑 18 년을 알았어. 그 시간 어디를 봐도 다 너야. 같은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다 같이 다니면서 너랑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그런데 우리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 그런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친구 사이는 이제… 하아, 다 끝났다면서…. 내가, 내가 너, 좋아하게 될 때… 다 끝난 거라고…
그랬잖아.”
“그건! 아…. 씨발, 진짜 돌겠네.”
“그러니까 이제… 나 신경 쓰지 마. 끝났잖아. 친구도…. 사귀는 것도, 전부 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겨우 말을 잇는 유원을 보던 현규진이 알았다는 듯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데 제가 뭘 더 할 수 있나 싶었다. 지금까지 들은 그 어떤
말보다도 아무 사이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가라는 그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래. 알았어. 너 알아서 해. 아무 사이도 아닌 난 그냥 지나갈 테니까 무슨 사이 되는 새끼
불러.”
그대로 홱 몸을 돌린 현규진이 계단을 내려갔다. 아까 이 계단을 오를 때만 해도 이런 파국
엔딩이 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진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유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마구 떠다니며 여기저기 부딪쳐 상처를 냈다. 어떻게, 정말 어떻게
저와 유원이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걸 같이 하다 못 해 연애까지 하고
헤어져 보기까지 했는데 아무 사이가 아니라니. 그 말이 너무 서운하고 아파 마음이
너덜너덜했다.
주머니에 손을 푹 꽂은 채 1 층까지 내려간 현규진은 거침없이 운동장을 걸어 나갔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그냥 저는 남처럼 가 버릴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제
더는 그 어떤 관계의 이름도 남지 않은 제가 아니라 ‘친구’라는 관계로 이어진 이윤성이나
다른 새끼들의 도움을 받으면 될 테니까.
“…씨발.”
치미는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이 엿 같은 상황을 욕한 현규진이 교문을 나서며 휴대폰을
꺼냈다. 김준재와 최해영을 만나 그동안 안 피운 담배나 몇 갑 피울 생각이었다. 이제
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더는 없었다. 제 폐가 썩든 말든 이제 정유원도 더는 저를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저도 멋대로 굴 생각이었다.
“…….”
하지만 두 발은 교문을 벗어나지 못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학교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돌겠네, 진짜. 머리가 지끈거렸다. 중요한 것을 잊고 밖에 나온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냄비에
물을 끓인 채 불을 끄지 않고 나왔다는 걸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 집에 돌아가지 않을 확률은
몇 퍼센트나 될까. 아마 백이면 백 전부 집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게 안 된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보내서 그 불을 끌 게 분명했다. 그걸 끄지 않으면 불이 나고 집이 다 타 버릴 것을
아니까.
엉엉 어린애처럼 울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유원의 얼굴이 현규진의 뒷덜미를 잡아
다시 학교 안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우는 걸 보는 건 정말 처음이었다. 진짜 어린애일 때도
그렇게 운 적이 없고, 아파도, 다쳐도 애처럼 운 적이 없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가 놓은 현규진은 결국 다시 몸을 돌려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화가 난 건 화가 난 거고 일단 정유원부터 살려야 할 것 같았다. 어떤 상황이든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유원이니까. 서로 이해하지 못해 싸웠다고 해도 그건 달라질 수가 없었다.
중앙 현관으로 들어가 두세 칸씩 계단을 올라 다시 미술실이 있는 층까지 오른 현규진은 울다
지쳐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유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처럼 엉엉 울지는 않지만, 아직도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고, 두 뺨은 흠뻑 젖어 있었다. 당연히 숨 쉬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현규진은 그 앞으로 다가가 다리를 구부려 앉았다.
“숨 천천히 쉬어. 입으로 쉬지 말고.”
손을 뻗은 현규진이 유원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은 채 눈을 맞췄다. 손바닥 위로 유원의 입술이
벌어지고 뜨거운 숨이 흘러나와 뭉그러지는 게 느껴졌지만, 손을 떼지 않았다.
“천천히. 나 따라서 숨 쉬어. 하나, 둘…. 다시, 하나…, 둘.”
이러다 과호흡이 심하게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현규진은 천천히 유원이 숨 쉬는 것을
도왔다. 느릿하게 숨 쉬는 것을 반복할수록 불안정하게 흐트러지던 숨소리가 점점 안정을
찾았다. 그제야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뗀 현규진이 다리를 펴 몸을 일으키며 유원에게 숨으로
젖지 않은 쪽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집에 가게.”
제 손을 물끄러미 보기만 하고 잡지는 않는 걸 보니 유원도 자존심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저도 이렇게 마음이 무너지고 자존심이 상하고 속상한데 유원도 저와 똑같은
마음일 것이었다.
“아무 사이 아니어도 아파 보이는 사람 도와줄 수는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냥 잡고 일어나.
안 일어나면 내가 알아서 일으킨다.”
“…….”
“안아 들고 가?”
강제로 안아 들 것처럼 몸을 숙이자 유원의 손이 올라왔다. 현규진은 가만히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제 손가락 쥐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좀 웃기지만,
정유원은 손도 존나 예뻤다.
며칠 전만 해도 저 손이 제 얼굴도 만지고, 등도 두드리고 귀도 만졌는데 진짜 이게 다 무슨
일일까. 한숨을 내쉰 현규진이 유원의 손을 쥔 채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리고
휘청이는 몸을 제 쪽으로 당겨 몸을 한 팔로 끌어안았다.
“…나, 나 혼자 설 수 있어….”
현규진의 시선이 빨개진 유원의 귀 끝으로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상하게도 그 빨개진 귀에
안도를 느끼며 몸을 감고 있던 팔을 스르륵 풀었다.
“네가 잡아, 그럼.”
“…….”
“안고 가?”
머뭇대며 올라온 유원의 손이 현규진의 옷자락을 쥐었다. 현규진은 그대로 유원의 팔 아래에
손을 넣어 등을 단단히 감싸 부축했다. 유원이 고개를 들자 특유의 그 포근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계단 조심해.”
“…….”
한 계단, 한 계단 함께 발이 움직였다. 싸워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서로
큰 소리를 내고, 자존심을 세우면서 다툰 것은 처음이라 무척 어색하고, 곤란했다. 뭘 어떻게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을 만큼.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입을 다문 채 천천히 한
계단씩 걸음을 옮기는 것뿐이었다.
유원의 젖은 숨이 닿았던 손바닥이 화끈거리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한 채.
친구 사이 고백 금지-62 화(62/127)

62


조용한 계단을 지나 중앙 현관으로 간 현규진은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피해 유원을
조금 더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기온이 낮다 보니 학교 안도 춥지만, 밖에 있는 것보다는
나아 문을 닫고 얼른 휴대폰을 꺼내 택시 앱을 켰다.
승차 위치를 중앙 현관 앞으로 옮겨 찍고 호출을 하자 3 분 후 도착이라는 안내와 함께 택시가
지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다시 어색한 침묵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절대 지고 싶지 않은 것처럼 반박에 반박을
거듭하면서 싸웠던 사람들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조용하고, 어색한 시간이었다.
“…놔도 돼. 이제 괜찮아졌어.”
여전히 얼굴에 핏기도 없고 아파 보이지만, 그래도 제가 놓는다고 바로 주저앉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현규진은 단단히 부축하고 있던 팔에서 힘을 빼며 느릿하게 유원의
몸을 놓아주었다.
“학원 갈 건 아니지.”
“…응. 오늘은 못 갈 것 같아.”
“이모는.”
“…촬영.”
“언제 오시는데.”
“내일….”
혼자 있을 수 있어? 그 말을 하고 싶어 빌드업을 다 해 놓고 결국, 묻고 싶은 건 묻지 못한 채
문밖만 바라보았다. 아, 3 분 지난 것 같은데 택시는 언제 와. 정유원 다리 아플 텐데. 날은 또 왜
이렇게 추운데. 정유원 목도리도 안 해서 추울 텐데. 3 분 걸린다더니 씨발, 왜 아직도 3 분인데.
정유원 빨리 집에 가서 쉬어야….
신경질적으로 계속 새로고침을 눌러 움직이지 않는 택시를 보던 현규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저도 모르게 모든 생각을 다 기승전정유원으로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이유였다.
아, 나 진짜 미쳤네. 정유원 빼면 생각을 못 하나. 고개를 저은 현규진이 다시 새로고침을 하자
이제야 택시가 학교 정문 쪽으로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1 분 후 도착이라고
드디어 시간이 바뀌었다. 현규진은 교문 안으로 들어오는 택시를 보다가 추운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는 유원을 흘끗 바라보았다.
“가자.”
“…응.”
몇 초라도 괜히 빨리 나가 추운 곳에 있을 필요는 없기에 택시가 중앙 현관 앞에 완전히
멈춰선 다음에야 유원을 데리고 나간 현규진은 얼른 택시에 유원과 함께 올랐다. 주말까지만
해도 이렇게 춥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기온이 더 확 낮아져 잠깐만 바깥 공기를 마주해도
정신이 확 들 만큼 공기가 쨍했다.
“…….”
“…….”
집까지 가는 10 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정말 숨 막힐 것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현규진은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창밖만 고집스럽게 응시했다. 아까처럼 서운함이 막 솟구치면서 화가
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이 다 없던 일이 된 것도 아니고, 해결이 된
것도 아니라 그 어떤 말과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작은 말 하나, 행동 하나가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까도 이랬어야지, 미친 새끼야. 다 저지르고 나서 이러면 뭔 소용이냐. 자책을 하며 차가운
창으로 머리를 쿵 찧자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유원이 저를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정적도 여전하고, 어색함도 그대로였다.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6 층에 다다를 때까지도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현규진은 유원을 잡은 채 비밀번호를 대신 누르고 문을 열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저녁은? 뭐 먹을 거 있어?”
“…있을 거야. 가방 줘.”
“아….”
어깨에 걸치고 있던 유원의 가방을 준 현규진이 어색하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간다.”
“…응.”
웃음도 없고 빠이도 없는 삭막한 분위기 안에서 현규진은 문을 닫아 주었다. 잠금장치 잠기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도 미친놈처럼 마구 꼬이기 시작했다.
18 년을 친구로 지내고, 또 한 달은 애인으로까지 지냈는데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어 버렸다는 걸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유원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어 온 마음을 다 줬고, 애인이 될 때도 저에게 닿은 유원의
마음을 확 당겨 잡아 관계를 변화시켰다. 거기에서 멈췄어야 하는데 멈추지를 못하고
급발진을 해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는 것에도 큰 기여를 했다 생각하니 헛웃음이 다 나왔다.
그래, 씨발. 언젠가는 주둥아리 때문에 망할 줄 알았다.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고 그냥 존나
빡친다고 줄줄이 내뱉다가 아주 된통 당해 인생 조질 줄 알았어. 12 층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누른 현규진이 엘리베이터 벽에 쾅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은은하게 고여 있다가 갑자기 확
터지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뒷머리를 몇 번 벽에 찧었다.
“하….”
한숨과 함께 아우터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혹시 유원이 보낸 건가 싶어 얼른 휴대폰을
꺼낸 현규진은 화면에 뜬 최해영 이름을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최해영 : 현 ㅇㄷ? 우리 집 안 오실? 엄빠 출장 동시에 감]
[최해영 : 대박 ㅇㅈ? 김준재랑 민지훈도 오기로 함]
[최해영 : 민지가 술 털어온대]
[30 분]
[최해영 : ㅇㅋ]
메시지를 물끄러미 보던 현규진은 낮게 한숨을 내뱉으며 한 손으로 대충 30 분 걸린다는 답을
보냈다. 집에 가서 실연의 아픔이나 떠올리며 비실대느니 시끌시끌한 놈들 사이에서
개소리나 듣고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
“전복죽 포장 나왔습니다.”
죽이 든 종이가방을 받은 현규진이 고개를 한 번 숙여 인사하고 죽집을 나섰다. 최해영의 집에
가다 말고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죽집이었고, 전복죽을
주문한 뒤였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편의점에서 산 꿀유자차가 든 비닐봉지도 들려 있었다.
부스럭대는 비닐봉지 안으로 보이는 노란 유자차 컵들 위로 낮은 한숨이 번졌다. 병 주고 약
주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제 더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을 듣고
이런 걸 사고 있는 제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현규진은 죽과 유자차를 들고 다시 아파트로 가 초조한 마음으로 6 층에 올랐다. 유원에게
톡을 보내서 죽을 가지고 들어가라고 구구절절 말하기도 좀 쪽팔리고, 이런 상황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식탁에 이걸 놓고 오기도 좀 그래서 몹시 곤란했다.
“……돌겠네.”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던 현규진은 결국, 죽이 든 봉투와 유자차가 든 봉지를 문고리에 걸었다.
그리고 벨을 누른 다음 빠르게, 하지만 소리가 최대한 나지 않도록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이
나이 먹고 하는 짓이 벨튀라니….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만약 유원이 자서 소리를 듣지 못해 한참 뒤에야 발견해 먹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미 제 손을
떠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전처럼 직접 들고 들어가 죽 먹는 걸 볼 수도 없고,
유자차가 맛있다면서 웃는 얼굴을 보며 좋아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한심하지만, 지금은
벨튀밖에 답이 없었다.
“…….”
몰라, 이제. 못 먹어도 어쩔 수 없지. 생각까지 얼려 버릴 만큼 찬 공기 안으로 뛰어든 현규진이
그대로 달렸다. 유원을 등 뒤에 둔 채.
***
하얀 토끼 쿠션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있던 유원이 몽롱한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벨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습관적으로 너무나 익숙한 얼굴을 떠올리다가 현관에 도착해서야 다른
사람은 다 와도 현규진은 여기 오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금세 울상이 된 얼굴로 유원은 문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다가 손을 뗐다. 묻지도 않고 함부로
문을 열지 말라던 현규진의 말이 떠오른 이유였다.
“누구세요?”
묻고 조금 기다렸지만,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유원은 다시 조금 더 소리를 크게
해 물었다. 누구세요? 하지만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제야 살짝 문을 연 유원은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조금 더 문을 활짝 열었다. 누가
장난을 친 건가 싶기도 하지만, 아파트 분위기만 봐도 그런 장난을 칠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조금 의아하긴 했다. 여태까지 그런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라 더 이상했다.
잘못 들었나? 제가 잘못 들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긴 했다. 머리가 멍하니 아프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 또 쪼끔 훌쩍 대느라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다 하다 이제 환청을 다 듣네. 힘이 없는 손으로 다시 문을 닫으려는 순간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원은 고개를 조금 내밀어 소리가 나는 쪽을 내려다보았다.
“어…?”
문고리에 종이봉투와 비닐봉지가 걸려 있었다. 그것만 보고는 감을 잡지 못하던 유원은
봉지를 들어 올려 안에 보이는 유자차 컵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가득 차는 얼굴에 다시 울상이
되었다.
바보 같아, 정말…. 죽 봉투와 유자차 컵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와 식탁에 앉아 두 개로
나뉘어 담긴 죽 용기 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고소한 냄새도 좋지만, 먹기 좋을 만큼
충분히 따뜻한 기운이 손에 닿는 게 가장 좋았다. 죽 용기를 두 손으로 잡고 따뜻해 하던
유원은 숟가락을 가지고 와 식기 전에 죽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냄새만큼이나 고소하고
아주 맛있었다.
삐딱하기도 하고, 한 번 화가 나면 따지고 우기고 화를 낼 때가 있긴 해도 현규진은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서로 이해를 조금도 하지 못한 채로 마구 말을 내뱉어 지금은 친구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애매하게 이름을 잃은 사이가 됐지만, 그래도 유원은 현규진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좀 미울 뿐.
“…….”
아마 현규진도 제가 미울 것이었다. 아주 많이. 금세 시무룩해져 단맛이 필요해진 유원이 죽을
한 입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끓였다. 그리고 팔팔 끓는 물을 유자차 컵에 부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 유자차가 마시기 좋은 온도로 식을 때까지 죽 반 통을 천천히 비운 유원은
향긋한 유자차를 호오 불어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하고 아주 따뜻했다.
제가 기억하는 현규진의 체온과 웃음처럼.
“…….”
부엌 안으로 다시 작은 훌쩍임 소리가 울렸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63 화(63/127)

63


집에서 양주 두 병을 몰래 가지고 온 민지훈이 양쪽에 술병을 들고 흉측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김준재도 그런 민지훈을 따라 해괴한 춤을 추며 분위기를 띄웠다.
저녁 겸 안주라며 뭘 얼마나 많이 시켰는지 배달이 5 분에 하나씩 오고, 어디서 꺼내 온 건지
제사상 같은 기다란 상 위에는 벌써 배달 음식이 가득 차 있었다. 치킨, 피자, 회에 마라탕까지
꽉 찬 상 위로 또 봉투 하나가 놓였다.
“몇 개를 시킨 거야.”
“아, 입이 몇 갠데 이 정도는 시켜야지. 김준재랑 나는 안주 없으면 많이 못 마신단 말이야.
여기 야곱 존나 맛있어.”
야채 곱창까지 포장을 열어 상에 둔 최해영이 동그랗고 큰 얼음과 투명한 잔을 네 개 가져와
상 위에 놓았다. 현규진은 소파에 누운 채 좋아 죽겠다는 듯 아주 입이 찢어지는 최해영과
김준재, 민지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기했다. 저는 완전히 기분이 작살나 이러고
있는데 누군가는 신나서 춤을 추고 있다는 게.
“야, 근데 쟨 아까부터 왜 저래.”
“몰라. 오자마자 드러눕던데.”
“누구한테 까였나.”
“현이 누구한테 까일 얼굴…. 아, 멍유 때문이다. 둘이 싸움.”
“왜?”
“몰라. 점심 먹을 때도 분위기 개 안 좋았어.”
다 들리게 말하면서 둘이 소곤대는 척하는 민지훈과 최해영을 어이없단 듯 본 현규진이
기다란 다리를 들어 등을 밀었다. 그에 놀란 척을 한 민지훈이 손바닥을 펴 입을 가렸다.
“들렸냐? 실수. 야, 그러고 있지 말고 빨리 이리 와. 존나 마시자. 기분도 엿 같은데.”
여기까지 와서 그냥 누워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만 하고 있는 것도 별로였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현규진이 소파를 등받이 삼아 바닥으로 앉아 기다란 다리를 펼쳤다.
“야, 근데 너 진짜 이거 가져와도 안 혼나냐?”
“혼나지. 혼나는데 인생 뭐 있냐. 그냥 혼나고 마는 거지.”
“아, 씨. 진짜 넌 병신인데 존나 멋있는 병신이야. 인정.”
“그게 뭔데, 미친아.”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소리가 잠시도 비지 않았다. 현규진은 제 앞에도 놓인 투명한 컵을 들어
건배하곤 양주를 한 모금 마셨다. 딱히 막 술을 마시고 싶다거나 마시는 게 멋있어 보인다는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오늘은 맛이나 보고 싶었다. 기분이 안 좋기도 하고, 그냥 유원이
싫어하는 짓을 해 버리고 싶기도 하니까.
“야, 왜 그거만 마셔.”
“정유원이 싫어해.”
“와, 나 지금 소름 존나 끼쳤어. 저거 진짜 멍유가 현 최면 걸어서 조종하는 거 맞다니까. 그게
아닌데 저럴 수가 없다고. 친구가 아니라 그 뭐냐, 그 주인님과 노예 뭐 그런 거야. 지금.”
놀리듯 말을 하긴 하지만, 딱히 놀라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태껏 두 사람이 얼마나
유별난 우정으로 같이 보냈는지 너무나 잘 아는 이유였다. 현규진은 정말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분위기의 친구들을 보며 또 유원을 떠올렸다.
“…….”
아마 여기서 제가 유원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질
것이었다. 평소에도 그런 말을 장난처럼 한 적이 많으니까. 하지만 유원을 데려와 보는 앞에서
키스를 하면 웃음기가 사라질 것이었다.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니까.
제가 조금 경솔한 것도 맞고 유원이 너무 좋은 마음에 정신을 못 차리고 날뛴 것도 맞지만,
그래도 저라고 아무런 생각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 같은 남자끼리 사귀는 게 알려져 좋을 게
없다는 것도 알고, 학교는 물론 부모님 귀에 들어가 플러스 될 게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저도 생각이라는 게 있는데.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걸 편하게 한다고 해도 그냥 평소처럼 어깨를 감싸고 머리를 기대고,
점심시간에 둘이서만 사라져 시간을 보내는 정도였다. 진짜 의심을 받을 정도의 스킨십을 한
적도 없고, 여태까지 애들 앞에서 보인 적이 없는 수위의 뭔가를 한 적도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유원의 눈에는 제가 정말 생각도 없이 날뛰는 미친놈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사고를 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늘 불안해 했겠지. 소파로 등을 기댄 현규진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거실의 새하얀 조명 빛이 유원의 뺨 위로 뚝뚝 떨어지던 눈물처럼 얼굴
위로 뚝 떨어졌다.
“야, 나 백유진이랑 토요일에 만나기로 함.”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담긴 민지훈의 목소리에 닭다리를 뜯고 있던 김준재가 먹던 것을
접시로 던지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미친 거 아냐. 백유진이 왜 널 만나는데.”
“같은 학원 다니거든.”
“너 학원 다니냐?”
“어. 백유진 다닌다고 해서 한 달 전부터 다니는데 너도 찌질하게 인스타 탐방하지 말고 학원
다녀. 공부하는 이미지도 생기고 좋다니까. 백유진이 인스타 아이디 묻더니 먼저 팔로하고,
토요일에 밥 먹자 그래서 그러자고 했지.”
“백유진 학원이 아니라 병원 다녀야 하는 거 아냐?”
김준재의 말에 웃은 최해영이 자기 여자친구 이야기까지 시작하며 완전히 분위기가 연애
쪽으로 치우쳤다. 현규진은 술이 아니라 콜라를 마시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저의 연애,
그것도 오늘 끝나 버린 연애를 떠올렸다. 말할 수도 없고, 떨칠 수도 없어 정말이지 모든
면에서 고통이었다.
“야, 근데 지금 존나 웃긴 건 하루에 한 명씩 갈아치우게 생긴 현규진이 모쏠이란 거야. 진짜 왜
그럴까. 내가 저 얼굴이면 진짜 골라서 만날 텐데.”
“이게 원래 좀 지나치게 존잘이어도 오히려 상대가 부담 쩔어서 못 다가온다니까. 우리처럼
적당해야 돼. 가유불금 모르냐?”
“병신아, 과유불급. 뭐 불금이세요? 학원 돈 아깝게 왜 다니냐. 백유진한테 곧 톡으로
덮집회의하느라 바쁘다 그러고 존나 까일 듯.”
쪽팔린 줄도 모르고 그마저도 좋다고 웃고 있는 민지훈을 보던 현규진이 유원과의 톡방에
들어가 마지막에 적힌 메시지를 눈에 담았다.
[멍유원 : 어제 산 옷 집 앞에 뒀어]
[땡큐]
들어오지 왜 옷만 두고 갔어, 어제는 내가 미안, 산책이라도 나갈래? 답하고 싶은 게 많은데
이상한 자존심에 겨우 땡큐 두 글자만 쓴 그날의 제가 떠올랐다. 그때 용기를 조금 더 냈으면,
어쩌면 헤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내뱉으며 서운한 마음만
앞세웠던 몇 시간 전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했다.
“현, 말해 봐. 오늘 우리 제대로 상담을 하자. 연애 못 하는 금쪽이 처방 해 줘야지.”
“그걸 왜 꼭 해야 되는데.”
“왜긴 왜야. 존나 좋으니까 하지. 진짜 개좋다니까? 네가 안 해 봐서 모르나 본데 진짜 연애
존나 좋아.”
모르긴 씨발. 존나 너무 좋아서 미친놈처럼 집착하고 날뛰다가 이 꼴 났는데. 현규진이 콜라를
한 모금 더 마시자 민지훈이 턱을 괸 채 양주가 든 컵을 앞으로 밀어 주었다.
“멍유가 싫어하는 거 알겠는데 여기 멍유 없잖아. 마셔, 마셔.”
그래, 정유원도 없고, 이따 만나지도 않을 거고 앞으로 나한테 아는 척도 안 할지도 모르는데.
부추김에 넘어가 술을 한 모금 더 넘긴 현규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연애하면 뭐 하냐. 어차피 헤어질 텐데.”
“뭐 그렇게 극단적이야. 난 우리 혜주랑 안 헤어질 건데. 결혼할 거야.”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아니, 근데 그렇잖아. 만나기도 전에 어차피 헤어질 거 왜 만나냐 그러면 어차피 배고파질 거
밥은 왜 먹음? 어차피 또 졸려질 텐데 잠은 왜 잠.”
“싸우면 끝이잖아.”
“싸우면 풀면 되지.”
저와 유원의 이야기를 아예 안 하고 뭔가 설명하려니 상황을 말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잠시
고민하던 현규진이 답답한 마음에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최해영을 바라보았다. 최해영은
연애하는 거에 인생을 바치고, 연애가 세상 최고의 가치라 생각해 쉬지 않고 연애를 하니 이런
이야기는 최해영에게 꺼내는 게 가장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아까 여기 오다가 길에서 존나 싸우는 걸 봤거든? 진짜 대판 싸우더라고. 막 넌 날
이해를 하네, 못 하네 하면서. 진짜 개싸워서 절대 안 풀릴 것 같던데.”
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지나가다 본 것처럼 살짝 던지자 역시나 최해영이 재밌다는 듯, 할
말이 많다는 듯 집중하며 자세까지 고쳐 앉는 게 보였다.
“아, 그런 거 존잼인데.”
재밌는 구경 놓쳤다고 낄낄대는 최해영과 김준재를 보며 울컥한 현규진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담뱃갑을 들어 둘에게 던졌다. 지금 친구도 애인도 다 사라져 미치겠는 일생일대의
심각한 일인데 재밌는 일이라니. 머리가 터질 만큼 짜증이 났다.
“아, 왜!”
“…존나 재미 없었어. 싸우다 깨지는 거 같던데 그게 재밌냐?”
“깨지든 뒤지든 뭐든 내 알 바임? 나만 안 헤어지면 되지.”
…씨발 새끼들. 홧김에 술을 다시 한 모금 더 마신 현규진이 슬슬 열이 오르는 손끝을 차가운
잔에 눌렀다. 꼭 유원을 만질 때 같았다. 손끝까지 열이 오르고 멍한 느낌이 나는 게 딱 그
느낌이었다.
“근데 싸우는 것도 다시 붙을 수 있는 싸움이 있고, 그냥 완전 파국 엔딩이 있는데 이해를 하네
못 하네 소리 나왔으면 좀 파국인데.”
최해영의 말이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연애를 쉬지 않고 해 대는 놈이 진지하게 말하니 조금
신경이 쓰였다. 현규진은 작은 희망을 담아 슬쩍 묻고 싶은 것을 물었다.
“…왜. 다시 만날 수도 있잖아.”
“이해를 못 하는데 어떻게 만나.”
“갑자기 이해하게 될 수도 있지.”
“그럴 거면 진작 이해해서 안 싸웠겠지?”
…씨발. 할 말이 없어진 현규진은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솔직히 맛있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왜 마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빡치면 술 생각이 나고, 슬퍼도 술 생각이 나고,
기뻐도 술 생각이 난다는 말들이 많으니 그냥 저도 마셨다. 빡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니까.
다 마시고 얼음만 남은 컵을 놓자 다시 양주가 반쯤 찰랑 채워졌다. 현규진은 홧김에 그 술을
단숨에 비웠다.
“야, 미침? 그걸 원샷하게? 너 그러다 죽어.”
“됐고. 넌 그렇게 싸워서 깨지고 다시 붙은 적 없냐?”
“나? 있지. 한 두 번? 근데 둘 다 똑같은 이유로 싸우고 또 깨짐. 깨붙은 하는 거 아냐. 멘탈만
탈탈 털림.”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은 답답하고, 알게 모르게 스크래치가 났다. 꼭 저와 유원은 다시 붙을
수 없다는 말로 들려 속이 상했다. 찬바람이라도 맞고 정신을 차려야겠다 생각한 현규진이
담뱃갑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막막한 마음에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바로 앞에 있는 상가
뒤쪽으로 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고 라이터를 꺼냈다.
“…….”
술 마실 때도 정유원 생각이 나더니 몰래몰래 잘만 피우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려니까 또
유원의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그랬었다. 그게 무슨 일이든, 어떤
상황이든 늘 유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너 진짜 그러다가 폐 다 썩는다?’
폐 아니라 지금 내 속 썩는 건 어쩔 건데, 진짜. 입에 물기만 했던 담배를 우그러뜨려
담배꽁초가 널려 있는 바닥에 버린 현규진이 기다란 다리를 구부려 앉았다. 갑자기 머리가 막
어지러웠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64 화(64/127)

64


죽은 먹었으려나. 아직 발견도 못 했으면 어쩌지. 내가 준 거 알고 안 먹고 버린 건 아니겠지.
그럴 애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유원 생각 위로 또 정유원이 쌓이고, 그 위로 또 정유원이
쏟아졌다. 며칠 전이었으면 저를 온통 뒤덮는 그 무게가 기꺼워 두 팔을 잔뜩 벌려 더
깔아뭉개 달라고 변태 같은 소리를 했겠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과할까…? 말이 너무 심했다고. 화가 나서 그런 거라고. 널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니까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똑같은 이유로 싸우고 또 깨짐. 깨붙은 하는 거 아냐. 멘탈만 탈탈 털림.’
최해영의 말이 유원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와 현규진을 일으켜 세웠다. 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같은 이유로 계속 싸우게 된다는 걸 이미 한 번 겪었으니까.
지금 이 상태로 어떻게 화해를 한다 해도 또 똑같은 말을 하면서 다투게 될 가능성이 컸다.
아니, 그럼 정말 이대로 끝이라고?
구겨져 바닥으로 떨어진 담배를 발로 짓이긴 현규진이 상가 뒤쪽 끝으로 갔다가 뒤돌아 다시
입구 쪽으로 오고, 또 뒤돌아 끝까지 가며 의미 없는 걸음을 옮겼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안개가 자욱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가 맑아지는 것을 반복했다.
현규진은 괜히 눈을 슥슥 비볐다.
솔직히 헤어지거나 끝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 상황에 따라 마음이 딱 잘릴 거라 생각했다.
오죽하면, 정말 오죽하면 그런 말을 소리 냈을까 싶었는데 막상 그 상황에 있어 보니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는지 알게 됐다. 마음이 잘리기는커녕 피자치즈처럼 늘어지고,
기분은 슬펐다가 화가 났다가 아주 난리였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유원이 궁금하고, 걱정되고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보고 싶었다.
“…….”
다시 긴 숨과 함께 현규진의 커다란 몸이 아래로 쑥 내려갔다. 다리를 구부려 앉아 고개를
숙이자 시야에 잔뜩 들어찬 어둠 안으로 또 유원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저를 보고 웃고,
가까이 다가가면 부끄러워 눈을 질끈 감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던 얼굴이.
지나치게 찬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뺨과 귀를 날카롭게 스쳤다. 아플 만큼 차가운 공기에 몸을
일으킨 현규진은 최해영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잊고 익숙한 제집 쪽으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시야는 흐릿하고, 머릿속은 멍했다.
“으, 추워.”
그런 와중에도 현규진은 바랐다. 저를 에워싼 이 차가운 공기가 부디 유원의 창은 넘지 않기를.
유원의 밤이 따뜻하기를.
***
책상 쪽을 보고 누워 잠도 오지 않는데 눈을 감고 있던 유원은 뒤척이며 몸을 반대로 돌렸다.
자려고 노력을 해 봐도 역시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뜨자 하얀 토끼 쿠션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유원은 물끄러미 그 쿠션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등을 돌렸다.
“…….”
키스하는 친구가 하고 싶은 거냐고? 붙어먹을 때만 필요한 거 아니냐고? 나쁜 놈. 어떻게
화난다고 그런 말을 해.
가끔, 그러니까 한 2, 3 년에 한 번씩 사소한 이유로 다투다가 서로 화가 나면 하지 말아야 할,
서로에게 상처를 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홧김에 해 버리는 그런 말을 하게 될 때가 있었다.
물론 현규진만 그러는 게 아니라 저도 그랬다. 아까도 정말 싫다느니 헤어지자느니, 아무
사이도 아니라느니 별 얘기를 다 했던 걸 떠올리면 머릿속이 화끈거렸다.
저도 잘한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현규진의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것까진 아니지만,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좋아한다고 나름 말도
많이 하고, 표현도 했다고 생각했는데 현규진에게는 제가 스킨십만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진짜 그렇게 말을 해. 진짜 싫…. 미워, 현규진.
한숨을 길게 내쉰 유원이 다시 몸을 돌려 벽 쪽을 보고 누웠다. 현규진이 사 준 쿠션을 보고
있자니 우리가 왜 아무 사이도 아니냐면서 서운해하던 현규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잔뜩 서운하고 화가 난 얼굴로 가 버렸으면서 다시 돌아와 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죽과
유자차까지 사다 준 마음은 도대체 뭘까? 10 년도 넘게 이어진 습관 같은 건 아닐까. 유원은
토끼 쿠션을 이불 안으로 넣고 머리맡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윤성 : 많이 아파?]
[이윤성 : 애들도 걱정해]
[이제 괜찮아 아까는 좀 아팠는데 지금은 괜찮아졌어]
[오늘 숙제 많아?]
[이윤성 : 고 3 대비 문제집 줘서 받아놨어 내일 학교에서 줄게]
[고마워]
답을 보내는데 위에서 새로운 알림 하나가 내려왔다. 최해영과 김준재 이름이 번갈아 뜨는
알림을 보던 유원이 지금 막 만들어진 단톡방으로 들어갔다. 최해영님이 김준재님과
규진님을 초대했다는 문구가 보였다. 참 이상한 조합의 단톡방이었다.
[최해영 : 멍유 ㅇㄷ?]
[김준재 : 현이랑 있어? 얘 술 먹다 튀었어]
[최해영 : 담배 핀다고 나가더니 사라짐]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대충 파악하자면 현규진이 지금까지 최해영, 김준재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담배를 피운다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굳이 알고 싶지 않고, 이젠 알
필요 없는 소식이긴 해도 현규진이 갑자기 사라져서 어디로 갔는지 조금 궁금하긴 했다.
[나랑 같이 안 있어]
[최해영 : ?]
[김준재 : ??그럼 어디감]
[김준재 : 현 취했을 텐데]
[최해영 : 두 잔 ㅈㄴ 빠르게 마시고 나가서 안 온다고]
[최해영 : 안 마셔봐서 빡 취할텐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을 조금 열자 뺨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었다. 추운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라 깜짝 놀란 유원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다시 단톡방을
확인했다.
[최해영 : 어디 길바닥에서 쓰러져 자는 거 아님?]
[김준재 : 그럼 죽어]
이런 날씨에 밖에서 잠을 잔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유원은 얼른 두꺼운 후드 집업을 티셔츠 위에 걸치고 집을 나섰다. 일단은 현규진의 집에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으, 추워.”
문을 열고 나오기만 해도 어깨가 다 움츠러들 만큼 공기가 찼다. 유원은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라 12 층을 눌렀다.
“…….”
그런데 내가 왜 내가 현규진이 집에 있는지 확인하러 가고 있지…. 이러면 안 되는 사이 아닌가,
이제…. 다시 집으로 그냥 내려갈까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아파 주저앉아 있던 저를 그냥
두고 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던 현규진의 얼굴이 떠올라 결국, 12 층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문 앞에 선 채 심호흡을 한 유원이 벨을 눌렀다. 제발 이모가 나오기를 바라며. 하지만 유원의
바람과는 달리 세 번이나 벨이 울리도록 이모는 나오지 않았다. 아, 어디 가셨지. 엄지
끄트머리를 깨물며 닫힌 문만 보던 유원은 어쩔 수 없이 캡을 위로 올리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서로의 집에 음식을 나누어 주러, 또는 청소를 하러, 그 외 여러 일들로 자유롭게 드나든 지
오래라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는 게 이상하진 않았지만, 현규진과 다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현규진의 상태를 확인하러 이렇게까지 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유원은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와 함께 살짝 문을 열어 현관을 확인했다.
“…어?”
현관에는 전에 백화점에서 제 것과 같이 샀던 그 운동화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아까
학교에서도 이걸 신은 걸 본 기억이 나긴 하는데 이것 만으로는 확실히 현규진이 집에 있다고
100%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다시 집에서 나갈 때 다른 신발을 신었을 수도 있는 거니까.
현관만 보고는 알 수가 없어 유원은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가 현규진의 방으로 향했다.
들어가서 바로 우측으로 꺾어 복도를 지나자 현규진의 방문이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술 냄새.”
방 안으로 고개를 넣으니 옅지만, 분명한 술 냄새가 났다. 현규진과 어울리지 않는 낯선
냄새에 유원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
침대 가까이 간 유원은 손을 뻗어 책상 끝 쪽에 놓인 스탠드를 켰다. 약한 불빛이 켜지는 순간
엎드려 자고 있는 현규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현규진을 찾은 안도의 긴 숨이 입술
사이에서 흘렀다.
오늘 아주 미운 짓 다 하려고 작정했지. 현규진이 엎드려 자고 있는 침대 옆쪽으로 걸터앉은
유원이 후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여전히 현규진의 생존을 걱정하고 있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집에서 자는 거 봤어]
[걱정하지 마]
[김준재 : ㅁㅊ]
[최해영 : 아 ㅈㄴ 어이없어]
[최해영 : 현 데리고 사느라 멍유가 고생이 많다]
[김준재 : 이혼해도 ㅇㅈ]
[김준재 : 암튼 알려줘서 ㄱㅅㄱㅅ]
이혼…까진 아니지만, 그 비슷한 걸 하긴 했는데…. 안도와는 거리가 먼 감정이 섞인 한숨을
다시 내쉰 유원이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집에 와서 자고 있는 걸
봤으니 제가 할 일은 이제 끝이었다. 오늘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좀 더 챙겨 주거나
잔소리라도 했을 텐데 오늘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
이불도 안 덮고 자는데 그냥 이불 정도만 좀 올려 주고 갈까? 인도적인 차원에서 딱 그 정도만
할 마음을 먹은 유원이 현규진 몸 아래 깔린 이불을 끙끙대며 꺼냈다. 원래도 키가 엄청 커서
저 혼자 감당하기는 무거운데 술에 취해 완전히 힘이 풀려 있다 보니 평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더워.”
겨우 이불 하나 덮어 줬을 뿐인데 힘을 너무 많이 쓰고 몸을 너무 많이 써서 땀이 다 났다.
유원은 잔뜩 지쳐 침대에 걸터앉은 채 손부채질을 했다.
“정유원….”
“깜짝이야.”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유원은 엎드린 채 저를 보고 있는 현규진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아래로 확 떨어졌다.
“…술, 진짜 맛 없더라.”
“…….”
“깨붙은 안 된다고 자꾸….”
“뭐가 안 된다고? 깨… 뭐?”
“자고 갈 거야? 내 방은 침대 커서 게스트룸 안 가도 돼.”
연관성이 하나도 없는 말을 하는 현규진의 말을 가만히 듣던 유원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그냥 취해서 하는 말인 모양이었다.
“너 취했어?”
“응, 나도 좋아해.”
친구 사이 고백 금지-65 화(65/127)

65


침대 위에 놓인 손 위로 따뜻함이 번졌다. 심장이 확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제 손 위를 덮은
현규진의 커다란 손을 본 유원이 깜짝 놀라 빼내려 했지만, 현규진은 아예 손가락까지 단단히
얽어 깍지를 낀 채 놓아주지 않았다.
“…놔. 집에 갈 거야.”
“죽은 먹었어?”
“…….”
취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게 아닌가? 유원은 살짝 고개를 돌려 현규진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아 얼굴만 보고는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먹었어.”
“착해.”
맞잡은 손을 흔든 현규진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유원은 느릿하게
손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까지가 진짜 정신으로 하는 말이고 어디까지가 취해서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 추운 날 길에 누워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스탠드 불을 다시 꺼 주고 혹시라도 이모가 와서 현규진을 보고 혼내지 않도록 방문까지 닫아
준 유원은 조용히 집을 나섰다. 현규진처럼 잘 놀고 세게 보이는 애들은 술도 처음부터 잘
마실 줄 알았는데 그건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두 잔에 저렇게 취했다는 걸 보면.
저렇게 술 마시면 다음 날 속 쓰리지 않으려나. 보통 그럴 땐 꿀물 같은 거 마시지 않나….
집으로 돌아간 유원은 후드를 벗으려다가 제 방 책상 위에 놓인 유자차 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꿀유자차라 저기도 꿀이 들긴 들었는데…. 저런 거 마셔도 되나? 잠시 생각하던 유원이 고개를
저으며 후드를 벗었다. 제가 거기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이제 친구도 아니고,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런 걸 왜 신경 쓴단 말인가. 유원은 생각을 떨치려 애쓰며 욕실로 들어가
다시 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응, 나도 좋아해.’
손가락 사이로 문질리며 들어오던 뜨거운 느낌과 함께 현규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의미를 담아 하는 말도 아니고, 그냥 술주정일 뿐인데 도대체 왜 그걸 자꾸 생각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원은 다시 토끼 쿠션을 이불 안으로 넣어 숨기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빨리 잠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등으로 퍼지는 아픔에 눈을 뜬 현규진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선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아침부터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야. 영문은 알 수 없고, 맞은 등은 아팠다.
“아, 왜.”
“아, 왜? 너 술 마셨지, 어제.”
술? 머릿속으로 민지훈이 술병을 들고 춤추던 것이 떠올랐다. 연애 이야기 같은 걸 하다가
짜증 나서 밖으로 나갔던 기억은 나는데 그다음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 그냥 두 잔.”
“그냥 두 잔? 너 진짜 이렇게 막 나갈 거야? 담배 피우더니 이제 술까지 마시고 다녀? 그 나쁜
걸 그 나이부터 꼭 해야겠어?”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은 현규진이 베개 옆으로 아무렇게나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제
모인 애들끼리 있는 단톡방에 메시지가 백 개도 넘게 쌓여 있었다. 다들 도대체 어딜 간 건지
묻고 떠들다가 나중에는 살아는 있는 거냐면서 저를 걱정하고 있었다. 대충 스크롤을
내리다가 다시 목록으로 간 현규진은 처음 보는 단톡방으로 들어갔다.
[최해영 : 멍유 ㅇㄷ?]
[김준재 : 현이랑 있어? 얘 술 먹다 튀었어]
[최해영 : 담배 핀다고 나가더니 사라짐]
[멍유원 : 나랑 같이 안 있어]
단톡방에 유원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현규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현규진의 엄마가 다시 어깨를 찰싹 때렸다. 아플 수밖에 없는 소리가 났지만,
현규진은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멍유원 : 집에서 자는 거 봤어]
[멍유원 : 걱정하지 마]
미친…. 뭐야. 정유원이 우리 집에 왔던 거야? 나 이러고 자는 꼴을 봤다고? 너무 충격적이라
말이 나오질 않았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휴대폰에서 눈을 뗀 현규진이 옷장 문을 확 열어 문
안쪽에 붙은 거울로 얼굴을 살폈다. 최악이란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지만, 머리도 헝클어져
있고, 술을 마셔서 그런지 좀 피곤해 보이는 게 평소보다는 확실히 상태가 별로였다.
“아, 미친.”
“그래, 미친 짓인 건 알아?”
안 그래도 헝클어진 머리를 꽉 쥐었다가 놓은 현규진의 시선이 이번에는 책상 위로 향했다.
“…엄마. 저거 엄마가 둔 거야?”
책상 위에는 제가 편의점을 털어 유원에게 잔뜩 사다 준 유자차 컵이 하나 놓여 있었다.
현규진은 제발, 제발 아니기를 바랐다. 제발 엄마가 준 거기를. 제발, 유원이 왔던 게 아니기를
제가 집에 있다는 것도 엄마가 알려 준 것이기를.
“아니. 내가 둔 거 아닌데. 뭐 예쁘다고 저런 걸 줘.”
“…엄마 어제 집에 없었어? 나 들어오는 거 못 봤어?”
“엄마 어제 쿠킹 클래스 저녁에 가는 날이잖아. 열 시쯤 들어와서 보니까 세상에…. 방에서 술
냄새는 나지, 불러도 일어나지도 않지. 정말 내가 속이 상해서…. 규진아. 다른 건 몰라도 술,
담배는 하지 마. 응? 엄마가 너 하고 싶은 거 뭐든 다 해도 된다고 하잖아. 그런데 이건 하지 마.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엄마의 잔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현규진은 심각한 얼굴로 책상에 놓인 유자차 컵을
집었다. 유원이 여기 왔었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이대로 그냥 확 유자차에 빠져 죽고 싶었다.
지난 밤 기억을 해 보려고 해도 무엇 하나 생각 나는 게 없어 더 그랬다.
“…와. 엄마, 이게 말이 돼? 나 진짜 어제 딱 두 잔 마셨어. 그리고 집에 왔다니까. 그냥 기분이
너무 안 좋아서 마신 건데… 나 기억이 안 난다?”
“뭐?”
“이게 그… 필름 끊겼다는 건가? 아니, 어제 그걸 마시고 답답해서 그 집 나온 건 기억이 나는데
…. 그다음이 기억 안 나. 정유원이 왔던 거 같은데… 와, 어떻게 기억이 하나도 안 나지.”
“그게 지금 엄마한테 물을 말이야? 어휴, 유원이가 보고 뭐라 그랬을 거야…. 창피해서 어쩜
좋아.”
“아니, 지금 엄마 창피한 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정신 차려! 얼른 씻고 학교 갈 준비 해. 한 번만 더 이래 봐, 아주. 그땐 정말 혼나.”
헝클어진 머리를 감싸 쥐며 침대에 앉은 현규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냥 얌전히 잠만
잤으면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뭔가 더 큰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어제 정유원한테 내뱉은 말보다 더 심한 개소리를 하진 않았겠지? 아냐, 그것보다 심한
개소리가 또 어디 있다고….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하고.
“…아, 씨.”
아닐 거라고 생각을 하다가도 자꾸만 불안해졌다. 혹시 모를 일이지 않는가. 술에 취해 진짜
개가 돼서 헛소리를 지껄였을지.
오란다고 최해영의 집에 가고, 마시란다고 술을 마신 제가 미친놈이었다. 누굴 탓할 것도 없고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문제였다. 엄마의 등짝 스매싱보다 더 나중에 울리는 알람을 끈
현규진이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왜 오늘 방학 아니지. 학교 가서 정유원 얼굴 어떻게 보지? 일생일대 최악의 아침이었다.
***
혹시 몰라 1 층에서 조금 유원을 기다리던 현규진은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완전히 지각을 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학교로 향했다. 저와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을 테니 먼저 학교에
갔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또 진짜 먼저 간 걸 확인 받고 나니 좀 막막했다.
교문 앞에는 계주할 때 쓰는 배턴을 손에 들고 지각 30 초 전이라 외치면서 공포감을 조성하는
체육 선생이 있었다. 30 초가 12 초가 됐을 때 선생을 지나 학교로 들어가자 곧 유원을 본다는
생각에 조금 긴장이 됐다.
현규진은 내내 떨리는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 교실 뒷문 안으로 슬쩍 고개를 기울여 자리에
앉아 있는 유원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대로 조용히 들어가서 맨 뒤에 있는 제 자리에
아무런 소란도 없이 앉으려는데 눈을 크게 뜬 김준재와 눈이 마주쳤다.
“야, 너 어제 진짜 뭐야.”
눈치도 없는 김준재는 유원에게까지 다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최해영까지 거들어
도대체 어제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것에 현규진은 유원의 뒷모습만 흘끗흘끗 바라보았다.
“야, 조용히 안 해?”
“뭐냐고, 진짜. 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지. 진짜 길바닥에서 죽은 줄 알았잖아.”
“아니, 일단 좀 닥치라고.”
“진짜 경찰서 신고할 뻔한 건 아냐. 멍유 아니었으면 진짜….”
“씨발. 입 좀…!”
스르륵 유원의 몸이 옆으로 돌아가며 고개가 움직였다. 현규진은 저를 돌아보는 유원과 눈을
맞춘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아주 가만히 3 초 정도 바라보던 유원이 다시
앞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현규진의 시선은 여전히 그 동그란 뒤통수에 붙박여 있었다.
“아, 안 마신다 그럴 때 주지 말걸. 진짜 내가 너 그냥 원샷 때릴 때 뭔 일 난다 했다.”
입 좀 다물라고 그렇게 말을 하는데도 계속 쫑알대는 최해영과 김준재를 어이없단 눈으로
번갈아 본 현규진이 아무렇게나 책상에 엎드렸다. 정색하고 화를 내면서 좀 닥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상황에서 그냥 그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방금 존나 한심한 눈으로 본 거 맞지. 아니, 화가 난 눈인가. 가지가지 한다는 그런 눈?
부정적인 쪽으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 유원의 눈빛을 떠올리자 한숨이 저절로 흘렀다. 상황
개선을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말을 걸어도 모자랄 판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 꼴을 보이고,
그 상황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다니 정말 이건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아, 쪽팔려. 그냥 어제 길바닥에서 자다가 콱 뒤졌어야 되는 건데. 아니면 아침에 유자차에 코
박고 죽을걸. 극단적으로 생각한 현규진이 다시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일단 오늘은
너무 쪽팔리니 그냥 이대로 잠이나 종일 자다가 집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4 교시 끝나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일어난 현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돌아 저를 향해
다가오는 유원을 보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머리가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점심 알아서 먹을게.”
현규진은 제 책상 옆으로 선 유원을 올려다보다가 별다른 말도 해 보지 못하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대로 유원이 제 책상을 지나 뒷문으로 나가는 걸 본 뒤에야 숨을 쉬지 못하고
있던 것을 깨닫고 갇혀 있던 숨을 겨우 내뱉었다.
아…. 완전 정 떨어진 거 같은데. 어제 싸우고 집에 갈 때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술
마시고 진짜 개지랄 떤 거 아냐? 현규진은 조금이라도 지난 밤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정말 조금도, 단 하나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66 화(66/127)

66


“뭐야? 멍유 어디 감?”
눈치도 없이 다가온 김준재가 혼자 나가는 유원을 보며 궁금하단 듯 물었다.
“어제 안 풀었어? 너 술 먹고 멍유 팬 건 아니지.”
“어제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봐.”
“설명할 게 없는데…. 우리도 몰라. 너 그 독한 거 원샷하고 나간 것까진 기억나지. 담배 들고
나갔잖아.”
“어.”
“그럼 네가 그 뒤를 설명해야지. 전화도 안 받고 톡도 다 씹고 우리 진짜 너 찾으러 나갈
뻔했다니까.”
제가 궁금한 건 알 길이 없고 계속 같은 말만 반복되는 이 상황이 진심으로 짜증이 나 죽겠는
와중에 앞문으로 민지훈까지 들어오는 게 보였다. 현규진의 예상대로 민지훈 역시 김준재와
최해영이 한 말을 그대로 한 번 더 뱉어 냈다.
“아니, 그러니까 정유원이 진짜 우리 집에 온 건 맞다 이거지.”
“어! 정유원이 우리 톡 보고 너 집에 있는지 보러 간 거야.”
“그걸 왜 정유원한테 말하는데.”
“신고를 하더라도 집은 확인해야 할 거 아냐. 그러니까 누가 취해서 집에 가랬냐.”
돌겠네, 진짜. 머리가 아파 창가로 가 창을 활짝 연 현규진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가운
바람을 온 얼굴에 맞았다.
“야, 밥 안 먹어?”
“안 먹어. 너네나 가서 먹어.”
“난 술 마시면 다음날 식욕 존나 돌아. 밥 세 그릇씩 먹는다니까. 너 안 먹을 거면 가서 네 거
받아서 나 줘. 지금 배 존나 고파.”
“귀찮게 굴지 말고 좀 꺼져.”
“그러지 말고 일단 가자니까. 가서 밥 먹으면서 멍유랑 풀어. 멍유는 너 걱정돼서 집까지
달려가 생사 확인도 해 줬는데 왜 그러냐.”
밥 생각은 없지만, 사실 유원이 밥을 먹으러 간 게 맞는지는 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런 걸
확인하는 게 좀 변태 같다 생각이 들기는 해도 궁금하고 걱정되는 마음을 컨트롤 할 길은
없었다. 현규진은 계속 배가 고프다 말하는 놈을 지긋지긋하단 눈으로 보며 함께 교실을
나섰다.
“어, 와, 씨발. 진수지다.”
구름다리를 건너던 최해영이 입을 틀어막았다. 진수지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김준재와
민지훈이 최해영의 옆으로 가 휴대폰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아, 미친. 개웃겨. 진수지가 최해영한테 디엠 보냈는데 현 네 번호 알려 줄 수 있냐고 보냈어.
아, 존나 웃겨. 최해영 존나 설레면서 봤는데 아, 번호 셔틀.”
“아, 너 인스타 좀 하라고 그냥. 진짜 내가 번호 셔틀까지 해야겠냐?”
최해영을 가리키며 눈물까지 흘리고 웃는 김준재와 민지훈을 흘끗 본 현규진이 급식실로
가는 계단을 내려갔다.
“진수지가 뭔데.”
“전에도 말해 주지 않았냐? 민지 집에서 술 마실 때 얼굴 쩔던 애라고. 그 얼굴이 기억 안
나기도 힘든데.”
“기억해야 할 이유라도?”
대수롭잖게 대답한 현규진이 급식실 안으로 들어가 와글와글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원을
찾으려 시선을 옮겼다. 진수지고 뭐고 지금 현규진에게 중요한 건 역시 유원이었다.
“아, 미쳤네. 야, 원래 와꾸 좀 치는 놈들은 이렇게 간절함이 없냐? 얼굴 활용 안 할 거면 나
달라고.”
“꺼져.”
내 얼굴 정유원이 좋아해서 안 돼. 소리 내고 싶은 말을 삼키고 다시 애들이 바글바글한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너 진짜 안 먹게?”
“어. 컨디션 별로야. 커피나 마실래.”
“그럼 진짜 너 받아서 나 줘. 배 존나 고파.”
“아, 밥 타령 존나 하네. 그래, 처먹어라, 처먹어. 존나 처먹어.”
현규진은 식판을 들어 최해영의 몫으로 밥과 반찬을 받아 비어 있는 자리 쪽으로 가면서도
유원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밥을 먹으러 왔다면 분명 어디인가에는 있을 텐데 이상하게
잘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순간 유원이 아니라 이윤성과 눈이 마주쳤다.
“…….”
놀란 것 같은 눈에서 시선을 바로 떼어 그 맞은편으로 시선을 옮기자 제가 찾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완전히 뒷모습만 보이는데도 현규진은 그게
유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밥을 먹느라 고개가 식판 쪽으로 살짝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움직임이 귀엽기 때문이었다. 남들한테 이렇게 말하면 그게 뭐냐고 이상한 취급을 받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귀여운 걸 귀엽다 그러지.
알아서 먹는다고 할 때 이윤성이랑 먹을 거라는 예상은 했었다. 그 빌어먹을 학원에서 같이
내내 수업을 들으며 꽤 친해졌으니까. 하지만 예상만 한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건 기분이
아주 많이 달랐다. 그나마 조금 위안 삼을 게 있다면 엄청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둘이 밥을 먹는데 이윤성은 계속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고, 유원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않은 채 밥만 먹고 있었다.
뭐야, 저거 매너가 왜 저래. 밥 먹는데 존나 폰만 보고 있네. 정유원 외롭게 하고 지랄이야. 저럴
거면 왜 같이 먹는데. 나한테 넘겨, 씨발. 밥 타령을 그렇게 하더니 벌써 자리에 앉아 밥을
퍼먹고 있는 최해영의 옆으로 식판을 내려놓은 현규진의 시선이 다시 유원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부자연스러운 상황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여전히 휴대폰만 보고 있는 이윤성, 식판 외에는 시선을 주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지 않는 정유원. 그리고 그런 유원의 옆에 앉아 몸을 밀착하는 하나의 얼굴.
“저 씨발 새끼가.”
현규진은 그 얼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우준. 유원을 보면서 자꾸 먹고 싶다 말하면서
지랄해 전에 매점 앞에서 두들겨 패 준 놈이었다. 유원이 저에게 두근거림을 느꼈다던 바로
그날 있었던 일이라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야, 어디 가?”
유원의 옆에 그 미친 새끼가 있다는 걸 보자마자 이미 현규진의 발은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식탁 하나를 지나고 또 하나를 지나 이우준 등 뒤까지 간 현규진은 여전히 휴대폰을 든 채
놀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이윤성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 입에 댔다. 눈치는 있는지
이윤성은 입을 닫고 제가 왔다는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현규진은 제가 뒤에 선 줄도 모르고 계속 유원에게 뭐라 말하는 이우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유원은 이우준 쪽을 보지 않고 식판만 내려다보고 있어서 제가 여기 왔다는
걸 알지 못했다.
“오늘은 왜 현규진 그 새끼 안 끼고 왔냐고. 그거 대답하기가 그렇게 힘들어? 헤어졌어?”
말을 할 때마다 유원 쪽으로 몸을 기울여 어깨를 대는 이우준을 보며 현규진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너 걔랑 잤지.”
잤냐고 물을 땐 어깨가 조금 더 문질렸다. 주머니에 두 손을 푹 꽂고 서 있던 현규진이
짝다리를 풀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풀어 주머니에 넣었다.
손목을 느릿하게 돌려 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몇 번이나 했어? 네가 아래야? 나도 너한테….”
그대로 이우준의 식판을 집어 들어 머리를 후려갈긴 현규진이 놀라서 돌아보는 놈의 멱살을
잡아 바닥으로 집어던지며 올라탔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겁에 질려 올려다보는 얼굴을
보니 그때 제대로 죽여 버리지 못한 게 후회가 됐다.
“아니, 네가 아래야.”
그대로 주먹이 얼굴로 날아들었다. 싸움이 난 것에 밥을 먹던 애들이 모두 몰려들어 그야말로
급식실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조마조마하게 보고 있던 최해영과 김준재, 민지훈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던지고 달려와 현규진을 말리려 했지만, 체격에 밀리고 그 엄청난 힘에 밀려
완벽히 떼어 놓을 수 없었다.
“정유원한테 지랄하지 말라고 했지. 한 번만 더 아는 척하면 죽여 버린다고 했어, 안 했어. 내
말이 우스워?”
퍽,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유원은 멍하니 이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이윤성에게 학원
교재도 받을 겸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갑자기 이우준이 와서 그냥 무시하고 있던
중이었다. 대충 들리는 말이 너무 지저분하고 저질이라 뭐라 대꾸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이유였다. 현규진이 있었으면 정말 난리가 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 난리가
벌어진 것이었다.
“멍유, 뭐해! 빨리 현규진 좀 말려 봐! 네 말은 듣잖아!”
“…….”
“멍유! 정유원!”
멍한 머릿속으로 최해영의 큰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제야 흐릿한 시야가 선명하게 걷히고,
막이 씌워진 것 같던 귀가 맑아졌다. 유원은 아직도 주먹질을 하고 있는 살기등등한
현규진에게 얼른 다가가 팔을 잡았다.
“현규진! 그만 해!”
저를 돌아보는 눈이 이상했다. 정말 반쯤 돌아 있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주먹을
치켜드는 현규진을 보고 놀란 유원이 뒤에서 현규진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만 해, 응? 그만 해…. 그러다 진짜 큰일 나.”
“…….”
“부탁이야. 규진아, 제발….”
유원의 애원과 함께 치켜 올라갔던 현규진의 주먹이 스르륵 풀리며 내려왔다. 그제야
최해영과 김준재, 민지훈도 안도하며 식탁을 짚은 채 긴 숨을 내쉬었다.
그때 현규진이 잠시 방심했다고 생각한 건지 이우준이 아래에서 주먹을 날렸다. 현규진은
이우준의 주먹이 저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가만히 한 대 맞아 주었다. 이우준이
무조건 잘못했다지만, 이런 상황에서 저만 얼굴이 너무 깨끗해도 좋을 게 없고, 또 저도
어딘가에서 피 조금은 터져 줘야 유원의 걱정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얌전히 얼굴을 가져다
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입 안이 터지는 느낌이 났다. 으, 씨발. 피 맛은 언제나 최악이었다.
일부러 한 대 맞은 거긴 해도 기분이 더러운 건 더러운 거였다. 그냥 어떻게 되든 확 더 조져
버릴까 고민하던 현규진은 여전히 제 허리를 꼭 안은 채 뒤로 당기고 있는 유원을 떠올리며
충동을 짓눌렀다. 여기서 더 주먹을 휘두르면 그땐 이우준이 무슨 잘못을 얼마나 했든 무조건
제가 더 잘못한 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기다란 몸을 세운 현규진의 앞으로 화가 난 얼굴을 한 학생부장이 달려와 당장 둘 다 교무실로
따라오라며 엄한 목소리를 냈다. 현규진은 바닥에서 비척비척 일어나는 이우준을 깔아
보다가 느릿하게 제 배 위로 단단히 얽혀 있는 유원의 손을 잡아 느슨히 풀었다. 그리고
멍하니 서 있는 이윤성을 바라보았다.
“야.”
“…어?”
“정유원 좀 보건실 데려다줘. 얘 놀라면 안 돼.”
“어…. 어어!”
하얗게 질려서 덜덜 떠는 유원의 손을 한 번 가만히 잡았다가 놓은 현규진이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급식실을 빠져나갔다. 이 일은 저의 일이지 유원의 일이 아니었다. 이 싸움에
조금이라도 유원이 결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유원이 때려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제가 기분이 더러워 저지른 짓이니 저 때문에 유원까지 교무실을 들락거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미친놈이냐? 그렇게 패게? 와, 진짜 이우준 디지는 줄 알았네.”
“그랬으면 좋았지.”
“싸패냐? 걔 디지면 걔만 디지는 게 아니라 너도 인생 조지고 디지는 거야. 그건 모르냐?”
“몰라.”
“멍유만 괜히 옥바라지 할 뻔했네.”
“씨발, 정유원이 그딴 걸 왜 해. 돌았어?”
“눈물 난다, 눈물 나. 멍유 옥바라지 안 시킨다고 정색하는 거 봐라. 이거 진짜 존나 찐사네.”
옆에서 지껄이는 아무 영양가도 없는 말들을 무시하고 교무실로 들어가자 화가 잔뜩 난
얼굴의 학생부장과 담임이 현규진을 맞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67 화(67/127)

67


“뭘 멀뚱히 보고 있어? 얼른 상담실로 들어가! 아까 제대로 못 봐서 누군가 했더니 또 너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학생부장이 현규진의 등을 교무실 안쪽에 있는 상담실로 밀었다. 아, 왜
밀고 지랄이야. 혀를 찬 현규진이 슬리퍼를 끌며 상담실로 들어가 누가 봐도 저한테 처맞은
티가 나는 이우준 옆으로 삐딱하게 섰다.
“똑바로 안 서? 너희들이 애야? 싸울 거면 어디 가서 둘이 싸우던가. 애들 다 밥 먹는 시간에
급식실에서 그게 무슨 짓들이야? 어?”
눈앞으로 학생부장인 체육이 늘 들고 다니는 빨간 배턴이 휙휙 이리저리 움직였다. 현규진은
조금 찢어진 입 안쪽을 혀로 문지르며 뻔하디 뻔한 잔소리를 모두 들었다.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애 얼굴이 이게 뭐야. 현규진. 말해 봐. 왜 이랬어. 뭐 얼마나
뭐 때문에 화가 나서 이렇게 패? 네가 깡패야? 학교 그만 다니고 어디 조직 들어가고 싶어?”
“…….”
“말해. 뭐 때문에 그랬어.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이 새끼가 정유원을 희롱했다고, 입만 열면 더러운 소리를 해 대서 참을 수가 없었다는 대답이
나와야 하지만, 현규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가 그 대답을 하는 순간 유원까지
교무실로 불려와 진위를 가려야 할 거고 그 과정에서 이우준이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 다시
말해야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저 때문에 유원이 다시 그딴 말을 상기하게 되는 건
싫었다. 남한테 까발려지는 건 더 싫고.
“이거 말 안 하네. 이우준, 네가 말해. 왜 싸웠어.”
“모르겠어요. 그냥 밥 먹고 있는데 갑자기 식판으로 내리치더니 멱살 잡고 막….”
“아니, 갑자기 이유도 없이 그랬다는 게 말이 돼? 현규진, 진짜 말 안 할 거야?”
뒷짐을 지고 선 채 입만 꾹 다문 현규진의 눈앞으로 다시 배턴이 쑥 다가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규진은 제 옆에 선 이우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유를 몰라? 그냥 밥 먹고 있는데
갑자기 식판으로 내려쳤어? 그 눈빛을 읽었는지 이우준이 움찔 옆으로 조금 간격을 벌려 섰다.
“현규진, 눈 똑바로 안 떠?”
“솔직히 전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는데요.”
“이 자식 봐라. 그러니까 이유를 말해 보라는 거 아냐.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이유가.”
“…….”
“어우, 답답해. 속 터져 죽겠네. 너 말 안 하면 이거 일 커져. 어떻게 커지는지는 말 안 해도 알
거고.”
아무리 말을 해도 잠자코 눈만 내리깔고 있는 현규진을 보며 학생부장과 담임이 답답함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현규진은 담임이 문을 여는 사이로 보이는 유원의
얼굴에 인상을 썼다.
“선생님,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응, 유원아. 무슨 일이야? 그런데 선생님 지금 먼저 좀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데 나중에
들으면 안 될까 아니면 혹시 규진이 일로 왔어?”
“네…. 현규진이 저 때문에 싸운 거라서요.”
유원의 말에 상담실 안으로 잠시 정적이 번졌다. 현규진은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이 난리에
뛰어든 유원이 걱정되어 시름에 잠겼고, 이우준은 제가 한 짓이 들킬까 봐 전전긍긍했다.
“일단 들어와. 어, 뒤에 윤성이는 같이 온 거야?”
담임이 이윤성의 명찰을 확인하는 것에 유원은 이윤성이 제 옆으로 올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아…. 저도 아까 유원이랑 같이 밥 먹으면서 상황을 다 봐서요.”
“아, 그래? 둘이 얼른 들어와.”
문이 닫히자 다시 상담실 안으로 모두에게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유원은 저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보다가 현규진과 잠시 눈을 맞췄다.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젓는 게 보였지만,
유원은 대답하지 않고 담임을 바라보았다.
“제가 아까 윤성이랑 둘이 밥을 먹고 있었는데 이우준이 갑자기 옆으로 오더니 계속 이상한
말을 했어요. 규진이가 그걸 듣고 화가 나서 그런 거예요.”
“이상한 말? 우준이가 뭐라고 그랬는데?”
이건 진짜 말하지 말라는 것 같은 현규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유원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전부터 저만 보면 자꾸 먹고 싶다 그러고, 만져 보고 싶다 그랬는데…. 오늘은 현규진이랑
잤냐고까지 말해서….”
유원의 차분한 목소리에 경악스러운 얼굴이 된 학생부장과 담임이 이우준을 바라보았다.
이우준은 여기저기 피가 터져 흉측한 몰골로 두 손을 들어 마구 휘저었다.
“아니에요! 먹고 싶다 그런 건 정유원이 아이스크림 같은 걸 먹고 있으니까 맛있겠다고, 먹고
싶다 그런 거고, 만져 보고 싶다 그런 적은 있지도 않아요. 그리고 아까도 그냥 같이 밥 먹고
싶어서 옆에서 앉아 먹은 거지 저 그런 소리 하지도 않았는데 저 새끼가 갑자기 와서는!”
“야, 진짜 뒤지고 싶냐?”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늘어놓는 이우준에게 다시 달려들려는 현규진의 앞으로 빨간 배턴이
확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만 못 해? 이것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지금 뭐 하는 거야!”
저런 미친 새끼한테 유원이 들은 희롱의 내용까지 타인에게 알리게 되어 무척 기분이 나빠진
현규진이 머리를 감싸 쥔 채 뒤돌아 벽을 보고 심호흡을 했다. 정말 빡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저… 제가 아까 그거 다 찍었거든요.”
이윤성의 목소리에 벽을 보고 있던 현규진이 다시 몸을 홱 돌렸다. 그걸 다 찍었다고? 유원을
두고 계속 폰만 보고 있어 매너가 왜 저런가 싶었는데 동영상을 찍고 있었던 거라니…. 이제야
그 부자연스럽던 모습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뭐? 넌 그걸 갑자기 왜 찍었는데.”
“아…. 아빠가 경찰이신데 그런 일이 있으면 증거를 최대한 남겨 두는 게 좋다고 하신 게
생각나서요. 유원이한테 계속 이상한 말만 하길래 혹시 나중에 필요할까 싶어서….
“틀어 봐.”
증거가 남아 이우준이 제대로 엿 되는 건 괜찮은 일이지만, 이렇게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유원이 희롱 당하는 걸 보는 건 싫었다. 그걸 말리려 현규진이 한 걸음 다가간 순간 유원의
손이 다가와 그런 현규진의 팔을 잡아 만류했다.
“…가만히 있어.”
“그래도….”
이번에는 제발 그러지 말라는 듯한 시선이 닿았다. 현규진은 그대로 멈춰 선 채 이우준이
유원에게 쏟아 낸 엄청난 개소리를 모두 들었다. 제가 들은 건 정말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어마어마한 분노가 또 머리를 치고 올랐다.
무려 8 분이 넘는 이우준의 음담패설 희롱 영상을 본 학생부장과 담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우준은 좆됐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우준, 너 지금 이게 다 뭐야? 어떻게 이런 말을 유원이한테 해?”
“이거 아주 큰일 날 놈이네.”
제 밑바닥까지 전부 다 까발려지자 어쩔 줄을 몰라 덜덜 떨던 이우준이 학생부장에게
다가갔다. 학생부장이 배턴을 앞으로 내밀어 더 다가오지 말란 듯 방어하는 걸 본 현규진이
작게 숨을 뱉으며 웃었다.
“저 부모님한텐 연락 가면 안 되거든요. 저 진짜 엄마, 아빠한테 맞아 죽어요. 다신, 다신 안
그럴게요. 네? 저 사과도 하고, 교내, 그 봉사도 할게요. 저 진짜 집에 연락만 안 해 주시면 안
돼요? 저 진짜 죽어요, 선생님….”
“누가 죽을 짓 하랬나.”
다 들으라는 듯 중얼대는 현규진 쪽으로 몸을 돌린 이우준이 그대로 현규진의 교복 재킷을
잡고 다급히 매달렸다.
“내가, 내가 진짜 잘못했어. 안 그럴게. 진짜야. 한 번만 봐주라. 어? 한 번만.”
“저번에도 봐줬는데 이번에 또 봐 달라고? 내가 왜? 아들이 학교 가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부모님도 이제 아셔야지.”
“진짜야, 진짜 안 그럴게! 정유원 앞에 보이지도 않을게!”
“그건 당연한 거고.”
아예 현규진의 교복 자락을 쥔 채 무릎까지 꿇은 이우준이 애원했다. 시선만 내리깔아 제가
터뜨린 얼굴을 혐오스럽단 듯 보던 현규진은 그대로 그 손에 잡힌 옷자락을 빼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정유원! 내가 진짜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나도 너랑 친해지고 싶은데… 현규진이 자꾸 뭐라
하니까…. 내가 너 좋아해서….”
저와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으니 이제 유원을 설득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좋아해서 그랬다는
개소리를 늘어놓는 이우준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운 현규진이 치정극을 보고 있는
것처럼 넋이 나간 학생부장을 바라보았다.
“뭐 부모님 모시고 올까요? 전 상관 없는데요.”
“어? 어….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다 알았으니까 너희 셋은 교실로 가 있어. 이우준 넌 남고!”
“아니, 해결된 게 없는데 가긴 뭘….”
따지려는 현규진을 또다시 만류한 유원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얼른 손목을 잡아 교무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복도에는 먼저 나간 이윤성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원은
현규진의 손목을 잡은 채 이윤성과 마주 섰다.
“윤성아, 오늘 고마워. 덕분에 일 안 커지고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맛있는 거 살게.
그걸로 모자라겠지만….”
“고맙긴. 도움이 될까 해서 찍은 건데 도움 됐다면 다행이야.”
둘이 대화하는 것을 들으며 유원에게 잡힌 손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현규진은 곧 저에게
닿는 유원의 시선을 보다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고 이윤성과 눈을 맞췄다.
“…뭐…. 땡큐.”
“아냐, 대단한 일도 아닌데. 그런데 현규진 너 아까 진짜 쩔더라.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진짜 쩔었어. 싸움 진짜 잘하더라.”
새끼가 좀… 보는 눈이 있네? 이윤성의 말에 으쓱한 현규진이 저를 또 가만히 올려다보는
유원의 시선에 웃음기를 지우고 반성하듯 눈을 내리 깔았다.
“어, 종칠 때 됐다. 나 가 볼게. 학원에서 보자.”
“응. 빠이.”
다투기만 하느라 한동안 제대로 듣지 못한 빠이를 이윤성이 듣고 있다는 게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늘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다. 이윤성의 빠른 판단으로 이우준이 미친
변태 새끼라는 걸 선생들한테도 알릴 수 있게 되긴 했으니까.
“…….”
“…….”
유유히 멀어지는 이윤성을 보던 현규진은 여전히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유원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이우준도 꺼지고 이윤성도 갔으니 이젠 제 차례였다. 그렇게까지 싸우면
어쩌냐고 혼낼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잡고 있는 손목을 놓고 가 버릴 것 같기도 했다. 현규진은
가만히 아주 약한 힘이 들어간 손가락 사이에 갇힌 채 유원의 처분을 기다렸다.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몇 초가 지났을 때 유원이 걸음을 옮겼다. 현규진은 유원에게 잡힌
손목에 안도하며 얌전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교실로 갈 거라는 예상을 깨고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잠자코 따라 걸음을 옮겼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68 화(68/127)

68


“…어디 가?”
“보건실.”
“아….”
“다쳤잖아.”
다쳤다고 할 정도는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현규진은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유원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 발로 찰 이유는 없었다. 안 그래도 어제 있었던 나열하기도
힘든 많은 일들 때문에 지금 무척 데면데면해진 상황에서 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제발 보건 선생이 자리를 비우고 없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간
보건실은 현규진의 바람처럼 정말 비어 있었다. 회의 중이니 급한 용무는 연락을 하라고 적힌
안내판을 가볍게 무시하고 머뭇대는 유원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안 계신가 봐. 이따 다시 오자.”
“온 김에 그냥 바르고 가지 뭐. 대충 연고 바르면 돼.”
책상 옆 서랍 위에 잘 정리된 기본 구급키트 안에서 상처용 연고를 꺼낸 현규진이 유원에게
내밀었다.
“이거 아냐?”
연고를 받은 유원은 연고에 적힌 상처가 덧나지 않는다는 문구를 보며 뚜껑을 열었다.
“…앉아.”
“발라 줄 거야?”
“싫으면 네가….”
“안 싫어!”
“…….”
“나 무서워서 상처 못 봐. 나 그런 공포증 있어.”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원은 잠자코 면봉을 하나 꺼내 연고를 적당히 짰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제 눈높이보다 낮은 곳에 있는 현규진을 향해 몸을 수그렸다.
“…….”
“…….”
현규진의 시선이 제 얼굴로 가만히 닿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시선을 움직여도
눈이 마주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유원은 눈을 맞추지 않으려 노력한 채 현규진의 입가
상처에만 시선을 주었다. 많이 찢어지지 않아 다행이긴 했으나 그래도 면봉이 닿을 때마다
인상을 쓰는 걸 보니 그 고통이 저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 어깨가 움찔움찔했다.
“아파?”
“응. 많이.”
“어떡해애….”
많이 아프다는 말은 과장이었으나 유원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조금이지만, 그래도 살이
찢어졌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또 입 안쪽도 다쳤을 가능성이 컸다. 살살
공들여 약을 바르던 유원은 저도 모르게 상처 위를 호오… 불었다.
“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현규진과 눈이 마주친 뒤였다. 유원은 정신없이 얽혀드는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못했다. 제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싶기도 하고, 다가오는 현규진의 얼굴을
알면서도 그 역시 피할 수가 없었다. 키스하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맞닿은 입술이 뜨거웠다. 뜨거움을 느끼자마자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보다 뜨거운 감각이
파고들었다. 숙이고 있는 몸만 바로 세우면 떨어질 수 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솔직히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음….”
면봉과 연고를 쥔 손끝이 저릿했다. 양말 속 발끝이 움츠러들고 자꾸만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키스에 기분이 멍해지고 좋아지는 것과 별개로 현규진과 이럴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도
간헐적으로 머릿속을 건드렸다. 유원은 가까스로 저를 향해 고개를 들어 키스하는 현규진의
어깨를 밀었다.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지며 초옥… 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하아….”
달아오른 숨이 입술 사이를 스친 순간 커다란 손이 다가와 다시 뒷머리를 눌렀다.
맞물리자마자 벌어지는 입술 사이에서 조금 더 깊게 감각이 얽혀들었다. 조용한 보건실
안으로 숨이 뒤섞이는 소리와 서로가 서로를 머금는 소리가 울렸다. 깊게 맞물렸다가
뒤엉키고, 살살 끝이 마주 문질리는 느낌과 동시에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유원은 점점 더 몸으로 이상한 감각이 번지는 걸 느끼며 다시 현규진의 어깨를 형편없이 약한
힘으로 밀었다. 순순히 밀려나 주는 현규진에게서 몸을 조금 더 뗀 유원이 뒤돌아 젖은 입술
위를 손등으로 꾹 눌렀다.
“…….”
“…….”
흐트러져 나오는 숨을 최대한 조용히 고른 뒤 유원은 티슈를 한 장 뽑아 연고가 이리저리 번진
현규진의 입가를 닦아 주고 연고의 끈적한 느낌이 나는 제 입가를 닦아 냈다. 문질린 혀끝에서
연고 맛이 났다.
사고. 그래, 이건 사고였다. 현규진의 상처 위를 저도 모르게 호오 분 것은 제가 낸 사고.
달려들어 키스한 것은 현규진이 낸 사고. 그냥 그렇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았다.
“…약 다시 발라 줄게.”
목소리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유원은 입술을 살짝 감쳐문 채 현규진의 입가에 다시 살살
연고를 발라 주었다. 노골적으로 빤히 닿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눈은 마주하지 않았다.
“…….”
“…….”
현규진은 제 얼굴 바로 앞까지 와서 눈 한 번 마주해 주지 않는 작고 하얀 얼굴을 눈에 담았다.
입술에서 심장이 뛰고 있었다. 만족스러울 만큼 머금지 못해 자꾸 안달이 나고 이대로 보건
선생 책상에 유원을 눕히고 싶단 충동이 자꾸만 들었다.
세상에 연고가 이렇게 맛있는 건 줄 처음 알았다. 입술이 맞물려 문질릴 때 묻은 연고가
조금씩 번지고, 입 안으로까지 들어와 혀끝에서 문질리는데도 정말 맛있기만 했다. 현규진은
조금 전 유원과 나눈 짧은 키스를 떠올리며 다시 그 예쁜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머리카락 색처럼 부드러운 색의 눈썹과 저를 보지 않아 반쯤 내려간 눈꺼풀, 그 끝에 매달린
기다란 속눈썹. 키스하려고 고개를 기울이면 꼭 문질리는 오뚝하지만, 날카롭지는 않은 예쁜
코, 손이 닿아도 부드럽고, 입술이 닿아도 부드러워 자꾸만 뭐든 대고 싶어지는 보들보들한 뺨.
그리고….
“…자꾸 피 나.”
제가 입술을 벌리면 따라 벌리고, 아랫입술을 물면 따라 물고, 더운 숨을 머금어 삼키던 입술.
아직도 입 안에는 유원의 숨이 묻어 있고, 혀끝에는 유원의 체온이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원을 보기만 해도 계속 키스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안 봐 주는데.”
“…뭘….”
“나.”
“…보고 있잖아.”
“나랑 눈 마주치기 싫어? 내가 또 키스할까 봐?”
눈동자를 위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참 어려웠다. 유원은 입술 안쪽을 꾹 깨문 채
아주 살짝 시선을 들어 올렸다. 좋아하는 사람과 눈 마주치는 게 참 어려운 일이라는 건
현규진을 좋아하게 되면서 알게 된 것들 중 하나였다.
“…….”
“…….”
다시 마주한 시선이 또 정신없이 뒤섞였다. 그대로 유원의 목덜미를 감싸 쥐어 조금 더 제가
있는 쪽으로 당기고픈 충동이 일었다. 분명 보건실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가 더 강한데 그
사이를 파고들어 다가오는 유원의 구름 같고, 햇살 같은 향이 더 짙게 느껴졌다. 키스하고
싶었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유원의 두 손이 제 얼굴을 매만지다가 목에 감길 때까지.
“…….”
“…….”
유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리 위에 놓여 있던 현규진의 손이 면봉을 든 유원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톡 튀어나온 손목뼈를 손끝으로 누른 채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문지르니 어깨가 움찔 튀는 게 느껴졌다.
“더 해도….”
더 키스해도 되냐고 묻는 순간 양호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그 소리와 함께 수그리고 있던
유원의 몸이 곧추섰다. 현규진은 제 손아귀 안에서 빠져나가는 가느다란 손목을 보며
한숨지었다. 필요할 땐 없고, 들어오지 않아야 할 땐 들어오는 보건 선생이 짜증 나 죽을 것만
같았다. 물론 아까는 보건실에 없어 고맙다고 느끼긴 했지만. 생각은 늘 기분에 따라 휙휙
바뀌었다.
“…서, 선생님 안 계셔서 제가… 약 대신 발라 줬어요.”
“어머, 찢어졌네. 규진아, 싸웠어? 싸워도 한 번도 다친 적 없더니 오늘은 무슨 일이야.”
불쌍하게 보이려고 일부러 한 대 맞기까지 했는데 선생님이 다 망쳤어요. 입술 안쪽까지
올라온 말을 한숨과 함께 흐트러뜨린 현규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게요. 이제 무슨 일인지.”
“밴드 붙여 줄게.”
“그거 있으면 불편해서요. 필요할 것 같으면 올게요.”
고개만 까딱 숙여 인사한 현규진이 보건실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던 유원이 보건 선생님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저한테 주세요.”
싱긋 웃은 보건 선생이 유원의 손 위로 입가에 붙여도 될 만큼 작은 밴드를 두 개 놓아 주었다.
“감사합니다아….”
꾸벅 인사하고 보건실을 나서 계단 쪽으로 가자 현규진이 먼저 올라가지 않고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먼저 올라가.”
왜 먼저 오르라고 하는지 알기에 유원은 잠자코 먼저 계단을 올랐다. 제가 세 계단 정도
오르자 그제야 뒤에서 현규진이 따라 걸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정유원.”
“…응?”
“괜찮아?”
유원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음 계단으로 향했다. 현규진은 그런 유원의 뒤쪽을
단단히 지킨 채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건 내가 너한테 물어야 하는 거 아냐? 다친 건 너잖아.”
“다친 게 대수냐. 이건 그냥 약 좀 바르면 낫는데 그딴 개소리 들은 건 오래가잖아. 몇 년이
가기도 하고, 평생 생각날 수도 있고.”
“…그런 거 오래 생각 안 해. 아까 걔가 뭐라고 했는지도 사실 잘 기억 안 나. 다른 생각하고
있었거든.”
“무슨 생각.”
교실이 있는 층까지 딱 열 계단을 앞둔 곳에서 유원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밥알을 바라보며 한 생각이 전부 현규진이기 때문이었다. 차마 그걸 소리 낼
용기가 없었다.
“…그냥 오늘은… 밥을 너무 많이 주셨네, 계란말이 모양이 예쁘네…. 뭐 그런 거….”
“거짓말 한다. 내 생각 했으면서.”
“아, 아니거든?”
“목 빨개졌어. 뻥치는 연습이나 하고 쳐라. 거짓말 존나 못해, 진짜.”
손을 뒤로 해 목을 손바닥으로 덮은 유원이 마지막 세 계단을 단숨에 올라 교실 뒷문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현규진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가 이미 수업 중인 선생에게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하곤 자리에 앉았다. 평소 시간 엄수에 꽤 까다로운 선생인데 아무 말도 안 하는 걸 보면
담임에게 어느 정도 사정을 들은 모양이었다.
많이 다친 건 아니지만, 찢어진 입가가 쓰리고 홧홧했다. 그래도 유원에게 손목을 잡혀
보건실까지 끌려가기도 하고, 저를 걱정하면서 약 발라 주는 것도 보고, 조금이지만 말도 섞은
데다가… 키스까지 했으니 변태 새끼한테 한 대 맞은 건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어차피 일부러 맞은 거기도 하고.
이제 이렇게 말을 다시 섞긴 했으니 과외 시간을 노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까는 보건
선생이 방해를 해서 사과하는 것에 실패했지만, 오늘 과외 시간은 절대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과외 하기 전에도 단둘이 있을 시간이 충분하고, 만약 그게 안 된다고 해도
수업이 끝난 다음에 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충분하니 제대로 사과를 하고,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을 취소하게 한 다음에 차근차근 관계를 다시 풀어나가고 싶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계획에 고개를 끄덕인 현규진이 턱을 괸 채 책상을 정리 하느라 고개를
숙였다가 들고, 또 숙였다가 살짝 기울이는 유원의 뒤통수를 가득 눈에 담았다. 계단을 오를
때 빨개지던 목덜미가 떠올라 저도 덩달아 귓가가 뜨거워졌다. 현규진은 귀 만큼이나 열이
오른 손으로 귀를 덮은 채 엎드렸다. 보건실에서 가까이 마주한 유원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아른거렸다.
역시… 정유원이 좋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69 화(69/127)

69


[ㄱㅇ : 발목 골절로 갑자기 입원을 하게 됐어]
[ㄱㅇ : 내일 수술하고 2 주는 입원, 또 2 주는 재활해야 한다고 해서 방학 동안 과외 못할 것
같아]
[ㄱㅇ : 너희 정말 중요한 시기인데 미안해서 어쩌지ㅠㅠ]
아니, 미친 거 아냐? 갑자기 멀쩡하던 다리가 왜 부러지는데. 현규진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톡을 확인했다. 다리 부러진 게 아니라 방학 때 놀려고 판 짜는 거 아냐? 그 불신을
깨부수기라도 하듯 화면으로 깁스를 한 다리 사진이 떴다.
“아, 씨….”
하여튼 도움이 안 됐다. 처음으로 과외 할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과외를 못 하게 됐다니.
그것도 방학 내내. 이게 도대체 말이 되나 싶었다. 온 세상이 저와 유원을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게 만들려고 기를 쓰는 것만 같았다.
“…아….”
진짜 존나 망했네. 유원의 집에 가려고 집에 오자마자 향수까지 미리 뿌려 놓고 만반의 준비를
다 했는데 이준서 때문에 정말 되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 가기 전이라 다행일지도 몰랐다.
유원과 같이 있을 때 이 소식을 들었으면 어색하게 일어나 쭈뼛대며 집을 나왔어야 할 테니까.
“아, 짜증 나.”
다시 방으로 들어가 후드를 벗고 반팔 티셔츠만 입은 채 침대로 드러누웠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이게 아닌데. 몸을 돌려 벽을 보고 누워서는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유원이 과외 선생을 걱정하면서 쓴 메시지들이 줄줄이 떠오르고 있었다.
[멍유원 : 어떡해요ㅠㅠ 놀라셨겠어요]
[멍유원 : 선생님 괜찮아지시는 게 제일 중요한 거니까 저희는 걱정하지 마세요]
[멍유원 : 알아서 잘하고 있을게요]
…나도 그냥 아까 한 대 맞는 게 아니라 팔 하나 부러뜨릴 걸 그랬나. 그랬으면 정유원이 내
걱정도 이렇게 해 줬을 텐데. 지금쯤 같이 있었을지도.
한심한 생각을 하던 현규진이 휴대폰을 침대 위로 엎으려다가 유원의 잔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대충 메시지를 적었다. 완치 기원. 이 정도면 되지 않나. 전송을 누르려다가
찜찜한 마음에 글자를 지우고 완치 기원 네 글자를 좀 더 길게 늘였다.
[수술 잘 받으세요]
[ㄱㅇ : 유원아 규진아 너무 고맙고 미안해ㅠㅠ 얼른 회복해서 3 월부터는 정말 열심히 할게]
[ㄱㅇ : 부모님들께는 내가 따로 연락 드릴게]
[ㄱㅇ : 방학 동안에 예상문제 1000 제 챌린지 하려고 만들어둔 문제지 지금 메일로 보내줄게]
유원과 계속 대화를 나누는 걸 물끄러미 보던 현규진이 침대 위로 휴대폰을 엎었다. 계속
진동이 울리지만,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유원과 얼굴을 볼 수 있고, 얘기할 수
있던 기회가 사라진 지금 그 어떤 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잠깐 가도 되냐고 물어볼까. 할 말이 있다고 할까? 아니, 사과하고 싶다고 하면 그래도
들어 주지 않으려나. 정유원은 착하니까. 아냐, 이미 내뱉은 말 사과하면 다냐고 할지도 몰라.
그럼 어쩌지. 집이 아니라 밖에서 보자고 할까. 망고 스무디 같은 거 마시면서 말하면 그래도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기분이 풀리지 않을까?
‘그런 말 하는 너까지 싫어져.’
제가 싫어졌다고 말하던 유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하다가 마음을 마구 헤집었다.
현규진은 이불을 들어 얼굴을 꽉 눌렀다가 다시 천장을 보고 누웠다.
망고는 무슨 망고. 겨우 그런 걸로 풀 수 있는 마음도 아니고, 회복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유원의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다면 망고 요거트 스무디 하나에 작은
희망이라도 걸고 싶을 만큼 간절하기도 했다. 현규진은 조용해진 휴대폰을 들어 저와 유원이
있는 톡방으로 들어갔다.
“…….”
보낼까, 말까. 잠깐 보자고 해? 아, 집에 가기까지 했는데 잘 안 풀리면 그땐 어쩔 건데. 아….
그냥 아까 몇 대 더 맞을걸. 그랬으면 아프다는 핑계라도 대서 얼굴 볼 텐데. 아니, 과외는 왜
진짜 이 타이밍에…!
생각이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연락해 볼까? 거절하면 어쩌지? 과외는 왜 다리가
부러져서! 그래도 연락해 볼까? 꺼지라 그러면 어떡하지? 아니, 과외는 왜 지금 이 타이밍에
다리가…. 영양가 없는 생각의 세 꼭짓점을 따라 반복해 왔다 갔다 하던 현규진이 모르겠다는
듯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아, 정유원, 정유원, 정유원.
어느새 루프를 돌던 생각의 세 꼭짓점에는 모두 유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이우준의 일은 생각보다 아주 조용히 해결되었다. 현규진을 처벌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유원은 이우준과 있던 일을 없던 일로 처리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부모님이 이런
일로 학교에 오가는 게 싫기도 하고, 일이 커져 현규진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도 원치 않는
이유였다. 제가 이우준의 일을 덮고, 이우준이 현규진과의 싸움을 없던 일로 덮으면 끝날
일이라는 걸 알기에 그냥 그렇게 해결하기를 원했고, 선생님들도 일을 키워 좋을 게 없기에
유원의 제안을 반색하며 받아들였다.
현규진만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유원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유원이
저를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라는 걸 아는 이유였다.
“그런 새끼는 그냥 넘어가 주면 안 된다니까. 또 그럴 놈이야. 그냥 넘어가 주니까 다음에도
이러면 되겠다 해서 또 할 새끼라니까.”
“그럼 그때 문제 삼으면 돼.”
“너 기분 나쁜 걸 왜 그냥 넘겨.”
“…솔직히 그런 말 듣는 게 기분 나쁘긴 하지만, 어제 말했잖아. 기억 잘 안 난다고. 진짜야. 안
들으려고 다른 생각 하기도 했고, 네가 갑자기 이우준 때릴 때 너무 놀라서 그나마 들은 것도
다 까먹었어.”
정말 기억이 안 난다는 유원의 얼굴을 보며 현규진이 몸을 숙여 두 무릎을 손으로 짚었다.
그런 더러운 말을 기억 못 하는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유원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냥
넘어가 준 게 싫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나 때문에 그런 거잖아. 혹시라도 나 학폭위 열릴까 봐.”
“…….”
“그 새끼가 눈 돌아 물귀신처럼 굴까 봐서.”
“맞아…. 그런 것도 있어. 그러니까 앞으로 나 때문에 싸우지 마…. 너 다치는 것도 싫고, 일
커지면 이모랑 이모부도 걱정하실 텐데 그것도 죄송해서 싫어.”
“지금 나랑 완전히 다 끝내려고 그러는 거야?”
현규진은 알고 싶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되려고 이렇게 말하는 건지 아니면 그 어떤 여지가
남아 있는 건지. 유원이 보이는 걱정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직접 듣고 싶었다.
원래 이런 식으로 물으려 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물을 기회를 마주하기 어려울 것
같아 자꾸만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네가 그런 말 듣든 말든 상관하지 말라는 그런 뜻 맞아?”
“…그런 뜻 아냐.”
“그럼.”
“…….”
“…다른 데로 갈까? 여긴 학교라 좀 그렇잖아.”
지금 말하면 유원이 거절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현규진은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유원은 거절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을 세게 쥐며
속으로 기쁨에 백텀블링을 한 현규진이 자연스럽게 유원의 가방을 제가 들었다. 방학식이라
공부할 걸 가져오지 않아 무겁지 않았지만, 그래도 뭐든 제가 드는 게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가방 줘어…. 오늘은 무겁지도 않잖아.”
“넌 가방 드는 거 안 어울려.”
“…….”
“진짜야. 아, 어디로 갈까. 상담실? 아니, 카페 갈까?”
“…상담실 가자. 카페는 다른 사람들 있어서 좀 그렇잖아.”
“아…. 그렇지. 가자.”
조용한 교실을 나서 그보다 더 조용한 복도를 지나 아무도 없는 구름다리를 건널 때까지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현규진은 유원이 저와의 대화를 피하지 않았다는 그 작은
희망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역시 저는 성큼성큼 빠르게 혼자 걷는 것보다 유원의 속도에 맞춰
느릿느릿 걷는 게 더 좋았다.
“들어가.”
상담실 문 안으로 들어가는 유원을 따라 들어가 문을 닫자 며칠 사이 쌓인 먼지가 폴폴
흩날렸다. 유원에게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근처 먼지를 손으로 휘저어 분산시킨 현규진이 의자
위 먼지를 제 가방으로 털어 유원을 앉혔다.
“그…. 아까 하던 얘기 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뭔데?”
유원이 앉은 의자 맞은편 책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현규진이 다리 위에 놓인 손을 맞잡아
만지작댔다. 긴장될 때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아는 유원의 시선이 얽힌 손가락에 닿았다가 다시
현규진의 얼굴로 닿았다.
“…그때 그 미술실에서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 서운하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데
미안해. 사과하고 싶었어.”
“아…. 그땐 나도 잘한 거 없어.”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정 떨어질 만해. 네가 너무 좋아서 내가 진짜 미친놈처럼…. 아, 진짜
제정신이 아니라.”
현규진의 마음이 뒤섞인 노골적인 말에 유원의 귀 끝이 달아올랐다. 끝이라는 말을 해도 끝이
나지 않고,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을 소리 내도 쉽게 아무 사이가 아니게 되지 않는
현규진을 내내 떠올리며 느낀 것은 역시 좋아하는 마음을 더 꼭꼭 숨길 걸 그랬다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여전히 좋은 친구였을 테니까.
“우리가 친구였을 땐 이런 걸로 싸운 적 없었잖아. 싸워 봤자 그냥 장난치다가 싸우는 게
전부였고.”
지금보다 훨씬 더 전에 유원과 다퉜던 것을 떠올린 현규진의 입술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싸운 이유가 다 나냐. 내가 장난치다가 너 화나서 싸우고, 몰래 담배 피운 거 들켜서
혼나다가 싸우고.”
“그땐 네가 장난쳐서 잠깐 화가 나긴 해도 그게 막 속상하진 않았어. 네가 밤에 갑자기
아이스크림 들고 와서 웃으면 다 괜찮아지고, 왜 싸웠는지 기억도 안 났는데 이번에는 그때랑
좀 달라.”
“…….”
“속상하고 무서워. 친구였을 땐 조금 싸워도 금방 풀 수 있었고, 싸우고 나서도 여전히
친구였는데 이젠 아니잖아.”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은데 현규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와 유원의 관계가 변하면서
어떤 행동의 결과 역시 전과 달라졌다는 걸 저도 여실히 느낀 이유였다.
“내가 너 안 좋아했으면, 안 들켰으면 우리 이럴 일도 없었을 텐데…. 미안해.”
“그걸 왜 사과해.”
“…내가 그때 잘 숨겼으면 우리 아직도 친구일 거 아냐. 이런 일로 싸울 일도 없고.”
시무룩해져 시선은 내리깔리고 입술은 살짝 나온 유원을 보며 현규진은 폭발할 것 같은
서운함과 유원의 얼굴이 귀여워 안아 주고 싶다는 충동을 동시에 느꼈다.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을 같이 머금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런 생각 할 필요가 없는 게 어차피 그때로 돌아가도 정유원 너 그거 못 숨겨. 너 연기 못
하잖아. 거짓말도 잘 못 하고. 그리고 너 좋아하면 좋아하는 티 얼굴에 다 나거든. 숨기긴 뭘
숨겨. 어릴 때도 나한테 막 규지니랑 같이 노는 거 너무너무 좋아, 하면서 매일 나한테 하루
종일 뽀뽀하고 그랬잖아. 숨기긴 뭘 숨기는데. 너 못 숨겨.”
“가, 갑자기! 어릴 때 뽀뽀한 얘기가 여기서 왜, 왜 나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잘 숨겼으면 아직도 친구일 거라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유원은 어이가 없어져 조금 멍한 얼굴로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현규진이 말을 너무 잘해서
지금까지도 말로 이겨 본 적이 없긴 하지만, 오늘은 좀 심했다. 완벽한 패배가 눈앞에 벌써
보였다. 제가 연기를 못 하는 것도 맞고, 어릴 때 현규진이랑 노는 게 너무 좋아서 매일매일
같이 다니며 뽀뽀했던 것도 맞아서 말문이 너무 쉽게 막혔다.
커서도 그랬지만, 어릴 땐 정말 현규진이랑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같이 놀 생각에
좋아서 잠자기 전에도 현규진을 생각하고,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단 생각으로 잠들었다.
그렇게 잠들어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자마자 현규진의 집에 가서 게임을 하기도 하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현규진을 보기만 해도 좋아서 인사와 함께 뽀뽀한 것도 사실이고, 놀다가 너무 재밌고 좋으면
또 뽀뽀를 하고, 헤어질 땐 내일 또 같이 놀자고 뽀뽀를…. 유원은 옅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였다. 현규진이 뽀뽀 얘기를 자꾸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만큼 많이 하긴 했기에 할
말이 없었다.
“맞잖아. 아니야? 너 지금도 솔직히 못 숨기거든.”
“내, 내가 뭐얼….”
“너 아직도 나 좋아하잖아.”
친구 사이 고백 금지-70 화(70/127)

70


아예 새빨개진 유원의 귀와 뺨을 본 현규진이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제가 이런 말들을
해서 이 대화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마음 안에 있는 말을 유원에게 전하고
싶었다. 적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내 답답해하면서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야?”
“…….”
“난 맞아.”
“…….”
“몰랐는데 끝낸다고 그게 바로 딱 끝나는 게 아니더라고. 싸운 건 싸운 거고,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그게 다르더라.”
유원은 제가 느낀 것을 그대로, 정말 신기할 만큼 그대로 말하는 현규진을 보며 손끝을
매만졌다. 밉긴 하지만, 싫은 것까진 아니고, 화가 나서 보고 싶지 않은데 침대에 누워 자기
전에 생각해 보면 또 사실 조금은 보고 싶은 그런 마음을 현규진도 느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간지러웠다.
“…나도 그래. 너 안 싫어. 그런데… 다시 만나는 건 무서워.”
“또 싸울까 봐?”
“응…. 한 번 해 봤잖아. 또 싸우고, 또 싸우면 어떡해. 그럴 일 없이 그냥 예전처럼 다시 편하게
지내면 좋겠어.”
“어떻게 이제 와서 편하게 지내. 우리 어제도 키스했어. 그리고 난 지금도 너 보면 키스하고
싶어. 그런데 어떻게 편해져. 우리 이제 친구 못 해. 그때도 나 그냥 한 말 아니야. 친구끼리 안
하는 걸 해 버렸는데 어떻게 예전처럼 지내.”
“노력하면 될 수도 있잖아.”
“될 수야 있지. 그런데 그거 진심 아닐 텐데 그래도 괜찮아? 난 너 보면 키스하고 싶을 거고,
안고 싶을 거고, 같이 자고 싶을 텐데 겉으로만 우리 친구야, 하면 돼?”
“왜 해 보지도 않고….”
절대 닿지 않는 직선을 그리면서 앞으로 달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미술실에서 대화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 또 속이 답답했다.
“…봐, 우리 또 이해 못 하잖아. 넌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고 난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으니까. 사귀니까 자꾸 이런 문제만 생겨서 너무 어려워.”
“…….”
“또 싸우기 전에 그만하는 게 나아…. 한 번 더 싸우면 그땐 진짜 이렇게 얘기도 못 하게 될 수도
있어….”
유원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현규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건 다 제가 져도 되고, 유원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데 왜 이런 문제에는 자꾸 제 주장을 하게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일단 유원의 말을 듣고 그다음에 천천히 풀어가도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성급하게 자꾸 앞서 나가 유원을 칭칭 감아 제 팔 안에 가두고 싶어 했다.
와, 나 뭐지. 진짜 연애하면서 존나 집착하고 막 구속하는 타입인가. 한숨이 절로 흘렀다.
현규진은 지끈대며 아픈 머리에 이마를 한 번 손으로 짚었다가 힘없이 손을 내려뜨렸다.
머릿속으로 깨졌다가 붙는, 깨붙은 하는 게 아니라던 최해영의 말이 소용돌이쳤다.
“알았어. 생각해 볼게.”
“…응.”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어색하고 어쩔 줄 모르겠는 정적이 또 있을까.
현규진은 몸을 일으키며 유원을 바라보았다.
“갈까.”
“응…. 가자.”
“집엔 같이 가도 되지. 같은 아파트 사는데 굳이 따로 가는 것도 웃기잖아.”
“그럼…. 당연히 되지.”
나란히 걸어 상담실을 나가 복도를 걷고, 학교를 나서 어느새 조용해진 운동장을 걸으면서도
입술만 달싹일 뿐 어색한 분위기를 깨 줄 말은 누구에게서도 나오지 않았다. 교문을
나서면서까지도 어색하기 만한 분위기에 결국 현규진이 말을 툭 던졌다.
“근데 이윤성 걔도 좀 또라이다. 거기서 그걸 다 찍고 있냐.”
“…나도 그거 찍었을 줄은 몰랐어.”
“걔 아까 막 나 좋아하는 것처럼 보던데. 존나 쩐다고 난리였잖아.”
“아까 교무실 갈 때도 나한테 그 얘기 했었어. 너랑 친해지고 싶대.”
“보는 눈은 있네.”
아, 씨. 또 뭐라 그러지. 이윤성으로 그나마 이어지던 대화가 한순간 뚝 끊기자 처음보다 더
미칠 것 같은 정적이 이어졌다.
“아, 근데 과외는 뭐 하다 그런 거래?”
“그건 잘 모르겠어. 나도 따로 톡한 거 없어서….”
“뭐야. 여태까진 그런 적 있어?”
“응?”
“과외랑 따로 톡한 적 있냐고.”
“응….”
“왜? 단톡 있는데 왜 둘이 톡하는데.”
“그냥 숙제하다가 모르는 거 있을 때 여쭤봤는데….”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선생이니까. 과외 선생. 별것 아닌 일에도 자꾸만 질투하고 예민해져
이러는 게 꼴사나웠다. 나 진짜 왜 이러지. 현규진은 어느새 길 건너에 보이는 익숙한 아파트
입구를 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아, 오늘 너 학원 가는 날이네.”
“응….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아, 이제 관두는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이 괜히 피어싱 위를 꾹꾹 눌렀다. 과외도 못 하게 되고
학원까지 그만두니 이제 유원을 어떻게 봐야 하나 싶었다.
“그럼 일단 오늘은 학원 간단 거지? 같이 가.”
“아니야. 밝을 때 가는데…. 괜찮아.
“알았어. 그럼 끝날 때 갈게.”
“오늘은 안 와도 돼, 진짜. 마지막이잖아.”
“마지막이니까 가야지. 이우준 그 새끼 일도 있고 맘 안 편해. 나 없이 너 혼자 다니는 거
보자마자 그 새끼가 그런 거 아냐.”
길을 건너 단지 안으로 들어가 공동 현관을 지날 때까지 현규진은 아주 소소한 이야깃거리를
계속 던졌다. 과외 선생이 뭘 하다 다리가 부러졌을지 추측을 하기도 하고, 내일부터 날이
미친 듯 추워진다니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말도 했지만, 정작 같이 공부를 하자거나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이따 봐.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갈게.”
“…응. 빠이.”
아, 빠이래. 씨발, 드디어 나한테도 다시 빠이 해 줬다. 현규진은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곤 혼자 남게 되자 벽에 이마를 박았다. 도대체 그 ‘빠이.’가 뭐라고 이렇게
감격스러운 건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 진짜 존나 귀여워. 너무 예뻐. 친구? 친구는 뭔 친구. 절대 못 해. 안 해. 현규진은 보건실에서
제 입가 상처를 호오 불고 놀라 저를 바라보던 유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가가는 저를 말리지
않던 것도, 입술이 깊게 마주 물려 혀가 비벼질 때마다 혀끝으로 번지던 연고 맛도 전부 다
너무 좋아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기분이 좋아지면 목에서 나는 그 연약한 울림을 이미 알아
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친구를 한단 말인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유원의 마음을 되돌려야 했다. 어떻게든. 3 학년 때 같은 반이 된다는 보장도 없으니
방학 동안 반드시 유원과 제 사이에 생긴 거리를 없애야만 했다. 거리가 있는 채로 다른
반까지 된다면 그건 정말 최악이었다.
유원에게 애교를 부리며 비비적대서 마음을 풀어 줬던 다수의 경험을 떠올린 현규진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학이라는 화해의 골든 타임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
밤새 기온이 뚝 떨어져 한파가 올 거라더니 확실히 공기가 미친 듯 차가워져 있었다. 캡모자를
썼는데도 추워 후드를 뒤집어쓴 채 패딩 안으로 두 손을 넣고 숨을 쉬자 입김이 꼭 담배
연기처럼 흐트러졌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이런 게 담배 연기로 보이는 걸 보니 진짜
담배를 끊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정유원이 잔소리하는 이유가 있다니까. 학원 건물 안으로 줬던 시선을 길 쪽으로 돌리자
쭈뼛대며 저에게 다가오는 여자애들이 보였다. 교복을 보아하니 고등학생은 아닌 것 같고
중학생인 것 같았다. 현규진은 귀찮다는 듯 시선을 대놓고 피했다.
“저기… 이 오빠 맞죠?”
눈앞으로 휴대폰이 확 다가왔다. 현규진은 무성의하게 눈동자만 깔아 화면에 뜬 저와 유원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제 인스타를 보고 저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거봐, 내가 맞다고 했잖아. 어떡해.”
발까지 구르면서 좋아하는 둘을 번갈아 보던 현규진이 다시 학원 건물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잘생긴 게 당연히 좋긴 하지만, 이럴 땐 좀 피곤했다.
“실물이 진짜 훨씬 더 존잘이에요. 오빠 키 몇이에요? 진짜 커요.”
“제 친구가 오빠 학교 다니는데 오빠 여친 없다면서요.”
애들한테 꺼지라 그러면 좀 그런가. 고민하던 현규진이 참다못해 꺼지라는 말을 내뱉으려던
순간 유원이 내려오는 게 보였다. 현규진은 아직도 안 가고 서 있는 애들한테서 완전히 등을
돌려 유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옆에 이윤성이 있었지만, 도움을 받은 게 있어 전만큼 꼴 보기
싫지는 않았다.
“어! 오빠랑 같이 사진 찍은 오빠다!”
“야, 좀 가라. 빡치게 하지 말고.”
유원까지 언급하는 것에 짜증을 낸 현규진이 몸을 홱 돌려 유원이 나오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유원은 아이보리색 두꺼운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었다. 추운 걸 대비한 게 기특하기도 하고,
또 얼굴보다 큰 목도리에 코 아래까지 폭 파묻힌 게 지나치게 귀엽기도 했다.
“어, 규진아!”
규진아? 이윤성 선 넘네. 내가 네 친구냐고 한 소리 하려다가 유원이 싫어할 것 같아 관둔
현규진은 대충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리고 유원의 가방을 가져가 자연스럽게 제 어깨에 멨다.
“뒤에 누구야?”
“뒤에? 아, 미친. 아직도 안 갔네.”
현규진은 저와 유원을 보고 설레발을 치는 애들에게 꺼지라는 듯 휘휘 손짓을 하곤 이윤성을
바라보았다. 이제 학원 앞에서 이윤성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야, 가라.”
마지막 인사치고는 퉁명스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제가 이윤성에게 빠이 따위의
인사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윤성아, 나 갈게. 조심해서 가.”
“응. 톡 할게.”
톡을 한다고? 하긴, 씨발. 하겠지. 현규진은 못마땅한 눈으로 둘의 인사를 관람했다. 둘은
톡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저와 유원이 평소에 나누던 평범하고 일상적인, 또 장난스러운
그런 것들을 이제 이윤성과 할 수도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우리도 가자.”
괜히 툴툴대고 싶지 않아 애꿎은 바닥만 툭툭 치고 있는데 유원이 뒤돌았다. 유원이 ‘우리’
라고 묶어 말하는 건 저뿐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전처럼 가만히 있어도 당연히 가장 친하고,
또 당연히 서로의 모든 순간을 다 알 수 있던 때와 상황이 조금 달라져서 그런지 별것도 아닌
사소한 부분에 자꾸 집착하게 됐다.
아직도 안 가고 인스타는 왜 안 하냐느니 맞팔이라도 해 주면 안 되냐느니 묻는 애들에게 손을
다시 휘휘 저어 떨어뜨린 현규진이 유원의 등을 자연스럽게 감싸 길 안쪽으로 세웠다.
성큼성큼 걸어 거리를 벌린 뒤에야 중학생들이 떨어져 나갔다.
“춥진 않아? 장갑은 왜 없어? 안 가져왔어?”
“아…. 응. 신발장에 두고 깜빡했어.”
“정유원답네.”
패딩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낸 현규진이 유원의 손에 하나씩 끼워 주었다. 기껏 챙겨 나와서
신발장 위에 두거나 나오기 전에 물을 마실 때 식탁에 두고 나오는 일이 많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현규진의 겨울 아우터 주머니에는 늘 유원의 장갑이 들어 있었다. 다 꺼내면 아마 열
개도 넘을 것이었다.
“…이걸 또 가져왔어?”
“나 패딩이랑 코트 주머니마다 네 장갑 다 들어 있는 거 알잖아.”
덤덤히 말하는 현규진의 옆얼굴을 몰래 본 유원이 도톰한 목도리 위로 조금 더 입술을
파묻었다. 바람이 이렇게 차가운데 얼굴 여기저기가 화끈대는 게 너무나 잘 느껴져 이상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71 화(71/127)

71


“내일부터 미친 추위라더니 진짜 개추워졌네.”
“…그러게. 아까 학원 갈 땐 이 정도 아니었는데.”
아, 무슨 말을 하지. 주머니에 푹 손을 꽂은 채 걷던 현규진은 말없이 앞으로 걷기만 하는
유원을 흘끗 살폈다.
“과외도 못 온다 그러고 학원도 관뒀는데 공부는 어떻게 하게? 집에서 할 거야?”
“아…. 아직 잘 모르겠어. 일단 선생님이 주신 문제 풀면서 생각해 보려고. 고 3 땐 어차피 너무
학원이나 과외 의지해서 하는 것보단… 혼자 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냥 혼자 공부하는 습관
들여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지.”
혼자 공부하는 습관을 들인다는데 거기 대고 같이 하자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아 현규진은
그냥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다음에 할 수 있는 말을 고민했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버블티를
마시자고 하기도 그렇고 뭘 먹고 가자고 하기도 분위기가 어색해 좀 그랬다.
“이윤성은 여친 없대?”
“없는 것 같던데….”
“아, 그래.”
그리고 또 정적. 현규진은 분위기 전환을 포기했다. 유원과 어느 쪽으로든 확실히 풀기
전까지는 예전의 그 뭘 해도 아무렇지도 않고 너무나 편안하던 분위기를 회복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좋아하는 애도 없대?”
“그건 모르지…. 그런 얘기 잘 안 해.”
“그래?”
아, 이 타이밍이다. 현규진은 횡단보도에 선 채 유원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럼 뭔 얘기 하는데?”
“응?”
“아니, 보통 그런 얘기 하잖아. 좋아하는 애가 있다거나 뭐 누가 예쁘다거나…. 아님 뭐 누가
누구랑 사귀다가 깨졌다거나. 최해영이랑 김준재는 하루 종일 그딴 얘기만 하던데. 민지훈도
그렇고.”
“아…. 그런 얘기까지 할 만큼 친하지는 않은 것 같아.”
유원의 입에서 나온 그 정도로 친하진 않단 말에 현규진은 몹시 안도했다. 어쩌면 유원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뭐가?”
“어?”
“뭐가 다행이야?”
“내가 지금 다행이라 그랬어?”
“응….”
아, 속으로 말한 줄 알았는데. 현규진은 그냥 실언한 것처럼 웃어 넘겼다. 다행히 유원도
그것에 대해 더는 묻지 않았다.
추위 속을 10 분도 넘게 걷다 보니 점점 뺨과 귀가 아파질 정도라 조금 걸음을 빨리했다.
현규진은 엘리베이터 불빛 아래 빨개진 유원의 귀 끝을 내려다보았다. 혀 끝을 대 맛을 보고
싶단 생각이 불쑥 들었다. 어쩐지 딸기 맛이 날 것만 같았다.
“…….”
미친, 변태를 하도 봐서 나도 옮았나. 미친 거 아냐? 얼른 고개를 젓고 6 층에 따라 내리자 문
앞에 선 유원이 쭈뼛쭈뼛 그런 현규진과 눈을 맞췄다.
“마지막 날까지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
“새삼스럽게 뭔 그런 인사를 해.”
“진짜 고마워서 그래. 말이 쉽지…. 매번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거 쉬운 일 아니잖아.”
“…뭐…. 나한텐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 당연한 일이었지.”
유원의 진심 어린 인사에 부끄러워진 현규진이 괜히 귀를 만지다가 뺨을 긁적였다. 괜히
손끝과 눈가, 심장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음…. 방학 잘 보내. 규진아.”
이런 건 방학 동안 볼 일이 없을 때 하는 말 아닌가. 방학 잘 보내. 개학하고 보자. 고개를 갸웃
기울인 현규진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좀 예민함을 없애고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이제 방학이니까 방학 잘 보내라고 하는 좋은 말을 굳이 다른 쪽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응, 너도. 어….”
원래라면 당연히 내일 보자고 하거나 톡을 한다고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여태까지 늘 봐 왔던 것과는 조금 다른 특수한 상황이었다. 다시 합치느냐 친구가 되느냐 둘
다 되지 않고 끝나느냐 세 갈래 입구에 선 이상 쉽게 친구처럼 대할 수도 없고, 사귀는
사이처럼 대할 수도 없었다. 현규진은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버벅대다가 겨우 적절한 말을
찾아 인사했다.
“다음에 보자.”
“응…. 다음에 봐. 빠이.”
“어, 빠이.”
유원의 인사를 따라 하며 엘리베이터에 오른 현규진이 닫히는 문 사이로 끝까지 유원의
모습을 보다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고개를 젖혔다.
아, 너무 애매하게 인사했는데. 다음이 언제가 될 줄 알고. 내일이 될 수도 있지만, 일주일 뒤가
될 수도 있잖아. 이러다 개학하고 보는 거 아냐?
에이, 설마. 너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 숨 같은 웃음이 입술 사이로 샜다. 아, 추워. 얼른 씻고
오늘은 잠이나 자야겠다. 정유원 꿈 꿔야지. 다시 작게 번지는 웃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12
층에 멈췄다.
***
그 겨울, 그러니까 열여덟의 겨울은 현규진에게 있어 아주 최악의 시간이었다. 하루하루
어떻게 지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과외도 하지 않고, 유원이 학원도 다니지 않는
데다가 방학이라 학교까지 가지 않으니 유원을 ‘자연스럽게’ 볼 이유가 사라졌다.
이유가 있어야만 보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방학을 맞아 버리니 유원을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필요해졌다. 그냥 너무나 당연하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거나 아무
이유 없이 이따 너희 집 갈게, 라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하루하루 지나면 지날수록 연락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고, 고 3 이 되기 전 얼굴을 비춰야
한다고 명절에 외가, 친가 여기저기 끌려다니다 보니 금방 2 월이었다. 한 달이나 유원과
연락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세상은 너무나 멀쩡히 돌아갔다. 제가 정유원과 얼굴을
한 달이나 보지 못했는데도 그냥 너무나 평범하게 아침이 오고, 또 낮이 되고 해가 졌다.
현규진은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 아빠도 종일 집에만 있는 사람들이 아니니 제가 유원을 내내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집에만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매일 도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귀찮다는데도 저를 데리러 집
앞까지 온 놈들에게 끌려 게임을 하러 가는 그 시간을 당연히 유원과 함께 보낸다고 생각했다.
가끔씩 유원이가 통 집에 놀러 오지 않는다면서 서운함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현규진은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몰라, 엄마. 나도 정유원 얼굴 못 본 지 한 달이 넘었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잘 지내?
뭐 하고 지내?
어떻게 톡 한 번을 안 하냐
넌 나 안 보고 싶어?
밤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조금 짙어지는 감정에 파묻혀 유원에게 이런저런 메시지를 적어
보기도 했지만, 전송을 하지는 못했다. 그냥 다 너무 우습기 때문이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 톡도 안 보낸 건 저도 마찬가지인데 유원에게 서운함을 내비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음…. 방학 잘 보내. 규진아.’
역시 그때 좀 말이 이상하더라니…. 방학 동안 안 볼 것처럼 인사하는 느낌이었는데 제 촉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뭔데, 진짜. 내가 그렇게 보기 싫어? 방학 내내 연락 뚝 끊고 완전히
정리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유원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냥 쭉 친구였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같이 방학을 보내면서 하루가 너무 짧아 아쉽고 너무 웃어 배가 아픈 완벽한 시간을
쌓았을 텐데 지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친구가 애인이 되더니 이젠 그 애인이 구 베스트 프렌드가 된 것도 모자라 구남친까지 되다니?
드라마 주인공도 이 정도의 이별 후유증은 안 겪을 것이었다. 현규진은 크고 기다란 몸을
구겨 누운 채 유원의 향이 다 사라지고 없는 후드티를 끌어안은 채 얼굴을 파묻었다.
이대로 잠들면 꿈에 유원이 나올 것이었다. 유원을 보지 못한 지 정확히 보름이 되던 날부터
금단현상처럼 잠만 자면 유원의 꿈을 꾸곤 했다. 그 꿈에서 현규진은 유원과 밤새 뒤엉켰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야하고 난잡하게.
정말이지 인생 최대의 고비였다.
***
‘다음에 보자.’에 그 ‘다음’이 진짜 내일도 모레도 일주일 뒤도 아닌 두 달 뒤인 새 학기 첫날
복도인 것을 알았더라면 현규진은 절대 그런 인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절대로.
유원을 다시 본 것은 3 학년이 시작된 새 학기 첫날, 학교 복도였다. 다른 반이 되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복도에서 그냥 뻔한 다른 애들과 스치는 것처럼 유원을 마주하니
기분이 무척 이상했다.
여태까지 유원과 친구로 지내면서 이렇게 긴 시간 얼굴을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길어 봤자
며칠이었고,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종일 톡을 해서 같이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매일을
보냈다. 그래왔기에 일 단위도 아니고 달 단위로, 그것도 한 달도 아닌 두 달이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건 정말이지… 엄청난 일이었다.
보고 싶다는 감정으로 시작해 아, 됐어. 나도 연락 안 해! 시기를 거쳐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덤덤해졌다고 생각한 마음은 유원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진짜
성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남기 위해 제 마음이 괜찮은 척 페이크를 쳤던
모양이었다.
정유원은 여전히 작고 예쁘고 귀여웠다. 안 그래도 마른 애가 조금 더 야윈 걸 보니 감기나
몸살에 걸려 한참 앓은 모양이었다. 또 새 학기라고 머리를 다듬어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더 단정해져 있었다.
“…….”
“…….”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어떤 인사를 건네야 할지 머리 안에 맺히는 게 없었다. 현규진은 곤란한
얼굴로 유원을 내려다보았다. 마찬가지로 저를 놀란 듯 올려다보는 유원은 무척 곤란해
보였다. 반갑기도 하지만, 어쩐지 이렇게까지 된 상황이 좀 화가 났다. 현규진은 짧게 숨을
내쉬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오랜만이네.”
“…응. 잘 지냈어?”
“정유원, 넌 지금 나한테….”
잘 지냈는지 묻고 싶냐고 말하려는데 유원의 반에서 나오는 이윤성이 보였다. 현규진은 하도
기가 막혀 괜히 고개를 들어 3 학년 3 반이라는 걸 다시 확인까지 했다.
“뭐야, 둘이 같은 반이야?”
“어! 규진아, 오랜만이다. 넌 1 반이라며!”
환한 얼굴로 다가와 두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이윤성을 불만스럽게 바라본 현규진이 이내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뭐 둘이 같은 반이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니
괜히 그걸 가지고 짜증을 낼 필요는 없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 보지만, 쉽지 않았다. 솔직히
존나 짜증이 나 미칠 것 같았다. 이윤성을 끄집어내 제 반으로 보내고 제가 유원의 반으로
가고 싶었다. 짜증이 아니라 질투려나. 꼴사나운 짓인 걸 알아도 멈출 방법은 없었다.
“그러게. 존나 오랜만이다. 정유원이랑 같은 반인가 보네.”
“아, 응! 너도 같은 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나 엿먹이는 건가? 마냥 해맑은 이윤성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가 들끓었다. 하지만
그딴 걸 가지고 유원 앞에서 못나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규진은 들끓는 화를 짓누르며
다시 짧게 숨을 내쉬었다.
“어. 그래, 뭐.”
복도 끝에서 이번엔 저와 같은 반이 된 최해영이 오는 게 보였다. 뭐냐는 듯 신나는 얼굴로
달려오는 최해영을 본 현규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멍유! 존나 오랜만이다! 너 방학 때 뭐 했어? 어디 유학 갔었어? 네가 현규진 버려 준 덕분에
우리 진짜 길드 황금기 보냈잖아.”
“그게 자랑이냐? 개소리 말고 가.”
굳이 안 해도 되는 말을 해 대는 최해영의 가방끈을 뒤에서 당긴 현규진이 제 반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이렇게라도 유원의 얼굴을 봐서 좋긴 하지만, 학교는 방해꾼들이 너무 많았다.
“야, 근데 너 멍유랑 진짜 뭔데. 왜 싸웠어.”
“뭘 싸워.”
“방학 동안에 너네 쌩깐 거 맞잖아.”
“아닌데.”
“뭐가 아냐. 너 방학 때마다 정유원이랑 놀러 가, 정유원이랑 약속, 정유원 아파, 정유원이랑 옷
사러 가, 정유원, 정유원 타령 존나 했잖아. 그런데 이번엔 너 멍유 타령 한 번도 안 했어.
우리가 멍유 얘기하면 다 씹고. 방금도 둘이 존나 어색해 보이던데?”
“아니라고. 아니라면 아닌 줄 알고 좀 닥쳐.”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최해영이 현규진의 옆쪽 빈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은
채 계속 의심스럽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빤히 그 얼굴을 보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가 내린
현규진이 한숨과 함께 책상에 엎드렸다. 사실 어제도 정유원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어느 경지에 다다른 것처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안 보면 안 보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이것저것 찾다가 나 혼자 붙들고 매달린다고 인연이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누군가의 강의까지 10 초씩 뒤로 넘기며 들었다.
저와 친구도 애인도 그 무엇도 하기 싫다고 한다면 저도 더는 붙잡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
혼자 매달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까.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을 하며 왔는데 아니, 다
개소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혼자 붙들고 매달린다고 이어지는 게 아니라고? 좆까. 한 명이라도 붙들어야 이어질 확률이
높지, 씨발. 현규진은 역시 이름 모를 인간들의 경험에 의거한 강의 같은 건 다 믿고 걸러야
한다 생각하며 몸을 바로 세워 앉았다.
과외 선생도 다음 주 화요일부터 다시 온다고 했고, 이렇게 개학까지 했으니 이건 기회였다.
방학이라는 골든 타임을 장렬하게 놓친 저에게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 불편하든 어색하든
좋든 싫든 어쨌든 서로 얼굴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들어온 이상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1 월 말부터 저를 다시 본 유원이 제 얼굴과 몸을 보고 놓친 걸 후회하도록 미친 듯 운동도
하고 팩도 하며 관리했는데 역시 그러길 잘한 것 같았다. 유원은 제 얼굴에 약하니까. 같은
반이 아닌 건 좀 아쉽지만, 잘 노리면 분명 유원과 지금보다 더 가까워질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뭐가 좋으려나…. 턱을 괸 현규진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담임을 보며
유원을 떠올렸다.
60 여 일 동안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적힌 복잡한 일기 위로 정유원이 적혔다. 조금 전 본 5 분
동안의 정유원이 60 일의 고민을 모두 뒤덮어 버렸다. 여전히 예쁘고, 여전히 귀엽고, 또
여전히… 제가 좋아하는 정유원이.
그래서 현규진은 포기할 수 없었다. 유원과의 ‘무언가’를.
설령 그게 친구라 할 지라도.
친구 사이 고백 금지-72 화(72/127)

72


유원에게도 열여덟의 겨울은 인생 최대의 시련이자 고비였다. 과외를 하지 않으니 현규진과
볼 일이 없고, 또 제가 학원까지 가지 않으니 저를 데리러 오는 일도 사라져 현규진의 얼굴을
볼 기회 자체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방학을 한 날,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인사를 나누던 그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만
하다가 겨우 한 말이 방학 잘 보내라는 말이었다. 하면서도 너무 다시 안 볼 사람처럼
인사했나 싶었는데 역시 그게 현규진에게도 이별의 메시지처럼 닿은 모양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그래도 20 일 정도는 어떻게 버텼는데 3 주에 접어드는 날부터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너무 고민하다가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몸이 반응을
해 버린 것이었다. 보름이 넘도록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집에 틀어박혀 공부를 하다가 잠들고
또 공부를 하다가 잠들었다. 그러다가 새벽에 매일 깨서 현규진이 선물해 준 토끼 쿠션을 안고
훌쩍이다가 또 잠들다 보면 아침이었다. 그렇게 푹 잠도 못 자고 최악의 컨디션으로 지내다
보니 입맛도 없어지고 살도 빠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드라마가 너무 대박이 나서 엄마와 아빠는 촬영이 모두 끝나고도 쏟아져
들어오는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무척 바빴다. 다행히 현규진과 만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챌
일이 없었고, 2 월이 돼서는 엄마, 아빠와 2 주 정도 제주도에 있는 별장에 가서 쉬고 오느라 또
현규진과 데면데면해졌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아슬아슬하고 축 처진 기분으로 지내다가 마지막으로 본지 약 두 달이 지난
오늘 3 월 2 일. 학교에서 그것도 복도에서 현규진과 맞닥뜨린 것이었다.
“현규진은 더 잘생겨진 것 같아.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현규진 무슨 운동 같은 거 해?”
“응. 도장 다녀. 주짓수도 하고 다른 것도 하고.”
“아, 역시. 교복 입은 것부터 달라. 전에 싸울 때도 보니까 진짜 장난 아니던데 그런 거 많이
배웠구나.”
계속 현규진 이야기를 하는 이윤성을 보던 유원이 조금 전 복도에서 본 현규진을 떠올렸다.
이윤성의 말대로 더 잘생겨진 것 같았다. 괜히 키도 더 크게 느껴지고 방학 전보다 아주 조금
더 마른 것 같은 얼굴도 어쩐지 예민하게 느껴졌다. 그게 현규진 특유의 무표정할 때 차가워
보이는 느낌을 더 잘 살려 줘서 아까 눈이 마주치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같은 반 됐으면 좋았을 텐데….”
“나보다 네가 더 아쉬워하는 것 같아.”
“같은 반 되면 친해지기 더 쉬우니까…. 뭔가 규진이는 나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아…. 아니야. 낯가려서 그래. 어릴 때부터 그랬거든. 유치원에서도 다른 애들이 친하게
지내자고 오면 나보다 키도 크면서 내 뒤로 숨을 때도 있고 그랬어.”
“진짜? 귀여웠겠다.”
“응, 너무너무. 지금도 귀여울 때 많은데 어릴 땐 더 많았어.”
“지금도 귀여워? 어디가?”
진심으로 잘 모르겠단 듯 보는 이윤성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인 유원이 장난처럼 얼버무렸다.
다른 애들은 현규진의 귀여운 모습을 알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밖에서는 현규진이 그런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으니까. 대부분 저와 같이 있을 때, 그것도 잠들기 전이나 딱 달라붙어 있을 때
애교를 부리곤 해서 현규진의 그런 귀여운 모습은 저만 아는 장면들이었다.
“그런데 규진이랑 싸운 거 맞지?”
“응?”
“방학 때도 규진이랑 안 만나는 것 같아서 싸웠나 했는데…. 오늘도 분위기가 좀 그렇던데.”
“아…. 아니야. 안 싸웠어.”
늘 붙어 다니고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다가 데면데면한 모습을 보이니 당연히 다른 사람
눈에는 싸운 것으로 보일 것이었다. 유원은 이번에도 얼른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지만,
이윤성은 계속 현규진에 대한 것을 유원에게 물었다. 그게 조금 불편하고 어색하며…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
현규진 화났겠지? 아까 표정 보니까 그런 것 같던데…. 유원의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이 흘렀다. 오랜만에 봐서 좋은데, 또 너무 오랜만에 봐서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불안불안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떨렸다. 저를 보는 그 시선에, 제 앞에 선 그 커다란 모습에, 삐딱하게 기울어지는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에.
“…….”
어떡해…. 나 아직도 현규진 좋아하나 봐. 더는 낯설지 않은 두근거림이 빠르게 온 마음을
물들였다.
***
아침에 마주친 이후로 종일 한 번도 현규진을 마주치지 않았다. 여태까지 다른 반이 됐던 적이
그래도 꽤 있었는데 이렇게 종일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은 처음이라 유원은 괜히 복도를 다닐
때도, 점심을 먹을 때도 주변을 기웃기웃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현규진을 볼 수 없었다.
집에 갈 때도 이윤성과 함께 교문까지 나와 횡단보도에서 헤어졌다. 집 방향이 완전 반대인
이유였다. 혼자 남아 횡단보도 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는데 진이 쭉 빠졌다. 두 달 동안 못 본
현규진을 마주친 아침의 그 순간이 종일 유원의 머릿속과 마음을 마구 헤집었다. 가만히
있어도 설렜다가 움츠러들기도 하고, 또 화가 났을 것 같아 불안하면서도 오랜만에 본 얼굴이
너무 좋아 크고 부드러운 생각이 퐁퐁 솟기도 했다.
“…….”
아침에는 너무 놀라서 바보처럼 말도 잘 못 했는데 내일 만나게 되면 나도 꼭 인사해야지.
방학 동안 연락 못한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연락할 타이밍을 놓치고 나니 먼저 말을
걸기가 어색하고 부끄러워 그랬던 거라고도 얘기해야지…. 그럼 현규진도 뭔가 말해 주지
않을까.
터덜터덜 횡단보도를 건넌 유원이 조금 더 걸어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노력하면
현규진과 전처럼 편해질 수 있을까? 평생 편해지지 않으면 어쩌지?
멍하니 익숙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겨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간 유원은 꼭대기 층에 선
엘리베이터를 보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꼭 이렇게 지친 날에는 엘리베이터도 꼭대기에 가
있곤 했다. 머피의 법칙 뭐 그런 게 정말 있는 걸까. 유원은 숫자가 하나씩 떨어지는 걸 보다가
벽으로 기대어 섰다.
오늘은 가서 씻고 바로 자야지. 내일 아침까지 진짜 한 번도 안 깨고 자야지. 어젠 현규진
생각하면서 너무 여러 번 깼어. 피곤해…. 졸려, 오늘은 푹 잘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
줄줄이 이어지는 생각 안으로 발소리가 파고들었다. 돌아보지도 않았는데도 이상한 촉이
곤두섰다. 유원은 제 뒤에서 멈춰 선 발소리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워 슬쩍 반쯤 몸을
돌려 뒤에 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
“…….”
제일 먼저 보이는 건 가슴팍. 그다음에 인식한 것은 저와 같은 교복이라는 것. 유원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현규진과 눈을 맞췄다.
순간 세상이 빙글 돌았다. 눈이 마주친 채 흐르는 그 몇 초가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오늘
아침 잠깐 마주친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런지 조금 전 다짐이 무색하게도 인사는커녕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1 층입니다.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원은 슬쩍 옆으로 비켜 섰다. 현규진의
시선이 제 움직임을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타, 타고 가.”
“…….”
“난 계단으로 가면 돼.”
“…….”
“간다아…. 빠이….”
갑자기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유원 자신도 알지 못했다. 먼저 와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갑자기 계단으로 가면 된다 말하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게 너무
창피해 얼른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아무 말도 없이 내려다보고만
있는 현규진의 곁을 슬금슬금 지나 도망치려는 순간 유원의 몸이 뒤로 확 기울었다.
“아…!”
그대로 뒷덜미를 잡힌 유원은 현규진에게 끌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구석에
처박히듯 서서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과 그만큼 큰 현규진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현규진이 저를 엘리베이터에 처박은 것이었다.
“계단 같은 소리 하네. 3 층부터는 기어 올라가려고?”
“…그 정도는 아니거든.”
“엘리베이터 좀 같이 탄다고 뭐 어떻게 돼? 아니면 뭐 나랑 이제 엘리베이터도 같이 타기
싫어?”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어.”
시무룩해져 폭 내려가는 고개를 보니 또 조금 전에 들은 어이없는 말은 지워지고 머리꼭지가
귀엽단 생각이 들었다. 아, 병이다. 병. 정유원이 귀여워 죽겠는 병.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현규진이 손끝으로 유원의 턱 아래를 톡 건드렸다. 빨개지는 귀 끝과
움칠대는 어깨가 현규진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러게 누가 두 달 동안 쌩까래?”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까….”
“야, 그럴 땐 너도 안 했잖아. 이래야지.”
“…넌 왜 안 했어?”
“나도 그냥 어쩌다 보니까.”
현규진은 슬쩍 손을 뻗어 불이 들어와 있는 6 층 버튼을 다시 눌러 취소했다. 그것도 모른 채
손만 꼼지락대는 유원을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원이 조금만 움직여도 두 달
동안 그렇게 맡고 싶었던 그 포근한 향이 코 끝에 닿아왔다. 짜증을 낼 수도 없고,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냥 끌어안고 싶은 마음만 커져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웠다.
마음이 내 몸보다 커질 수도 있는 거구나. 저를 집어삼킨 마음에 숨 쉬는 게 다 벅찼다.
현규진은 그 기꺼운 벅참과 마주한 채 12 층에 다다랐다는 안내에 흘끗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어, 왜 6 층에 안 섰지?”
“그러게.”
내리지 않고 문을 닫은 현규진이 6 층 버튼을 다시 눌렀다. 그리고 여전히 구석에 갇혀 어쩔 줄
모르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내가 너 괴롭히는 줄 알겠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몸을 치우듯 옆으로 움직여 유원과 거리를 조금 벌려 섰다. 옆에서 유원의
숨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작고 가느다란… 입 안에 머금고 싶은 아주 약한… 소리였다.
아…. 정유원 만지고 싶다. 두 손으로 찹쌀떡 주무르듯 그냥 조물조물 만지다가 안았으면
좋겠네. 정유원 냄새 맡고 싶어. 키스 길게 해서 헐떡거리는 거 보고 싶어. 꽉 안아서 그냥
터뜨려 버리고 싶어, 씨발. 그럼 나한테 그대로 다 스며들 텐데. 점점 변태 같은 쪽으로 흐르는
생각을 멈춘 현규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유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 열려 있는 문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자 시선이 깊게
얽혔다. 그 시선의 맞물림 하나로도 어느 정도 욕구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키스만큼이나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잘 지냈냐고 물었지. 나 잘 못 지냈어. 너 때문에. 넌? 정유원 넌 잘 지냈어?”
생각하지 못한 말에 조금 멍해진 유원이 가만히 눈을 맞추다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저의 지난
방학은 잘 지냈다는 말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시간이었다. 현규진이 없다는 사실 하나로
평생 느낀 적이 없는 감정들 속에 파묻혀 살았으니까.
“…아니.”
“다행이다.”
“…….”
“그럼 됐어. 들어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버튼에서 손을 떼자 문이 닫혔다. 현규진은 잘 못 지냈다고 고개를 젓던
유원을 떠올리며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솔직히 좋아하는 애가 잘 지내기를 바라는 게 맞는
거지만, 저처럼 유원도 못 지냈다는 말을 들으니 안도가 되고 마음이 놓였다. 못됐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좋았어. 아직 나 못 잊은 건 확실하네. 눈도 제대로 못 보고 턱 건드리니까 귀 빨개지고. 한층
마음이 가벼워져 집으로 들어간 현규진이 가방을 대충 의자로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정유원
생각으로 가득 찬 방에 갇혀 지옥 같은 날을 보냈던 방이 천국처럼 보였다. 역시 만 번의
생각보다 한 번 눈으로 보는 정유원이 더 좋았다. 현규진은 유원의 턱을 살짝 건드렸던 손끝을
얼굴 위로 들어 들여다보았다.
“…….”
살짝 닿았을 때 묻은 체온이 아직도 손 끝에 남아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하던 피부를 떠올리니
허벅지 안쪽에 힘이 들어갔다.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손을 얼굴 위로 내렸다. 이런 짓까지
하는 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이렇게라도 닿고 싶었다. 유원의 체온이 혀끝으로 옮겨 갔다.
그대로 흘러내린 따뜻함과 코 끝에 맴도는 포근한 향이 아랫배 안에서 뒤섞였다. 유원을
생각하며 시도 때도 없이 이러는 제가 쪽팔려 베개를 들어 얼굴을 가린 현규진이 열이 오른
손으로 교복 바지 버클을 풀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73 화(73/127)

73


엄마, 아빠의 침실에서 웃음소리가 흘렀다. 곧 문이 열리고 말끔하게 차려입은 아빠가 아직
잠옷 가운 차림인 엄마를 뒤에서 안은 채 걸어 나왔다. 사랑이 가득한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번갈아 본 유원이 주스를 마시며 웃음 지었다.
“유원아, 네 아빠 좀 어떻게 해 봐. 출근하기 싫다고 이런다.”
“자기는 너무 매몰차. 가지 말라고 한마디만 해 달라는데 끝까지 안 해 주고.”
“대표님이 출근을 안 하시면 돼요?”
잔소리를 하면서도 엄마의 눈빛은 참 따뜻했다. 유원은 남은 주스를 한 모금 마저 마시고 물을
부어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아. 아빠도 얼른 출근하세요.”
“아, 가기 싫다. 우리 강아지도 학교 가기 싫지. 아빠가 오늘 태워다 줄게. 규진이도 내려오라고
그래.”
“아….”
갑자기 현규진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조금 당황한 유원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갔다. 바로
연락을 하지도 않고 머뭇대는 유원을 본 엄마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유원아, 규진이랑 혹시 싸웠어? 방학 때도 그렇고 통 규진이가 안 보이네.”
“…아…. 안 싸웠어요.”
“그래? 아님 다행이지만, 혹시나 해서. 요즘 집에도 안 오고, 소희네 놀러 가도 규진이 매일
운동 갔다고만 하던데. 소희도 걱정하더라. 규진이가 너 안 만나는 것 같다고.”
“아, 그게…. 어, 과외 선생님도 안 오시고… 학교도 안 가고 하니까….”
사실 이게 충분한 답이 될 수 없다는 걸 유원도 알고 있었다. 현규진과 저는 ‘이유’가 있어야만
만나는 사이가 아니니까. 학교를 안 가면 더 자주 만나 아예 며칠 내내 같이 있는 모습만
보이다가 갑자기 이런 변명을 하는 건 사실상 싸웠다는 걸 강조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사실 쪼끔 그랬는데… 이제 괜찮아졌어요. 어제 얘기도 하고….”
“그랬어? 아, 너무 다행이다. 엄마랑 소희 이모는 둘이 이러다가 계속 안 보면 어쩌나 해서
너무 마음 졸였거든. 이제 정말 다 잘 푼 거지?”
“네에, 이제 다 괜찮아졌어요. 아, 늦겠다…. 저 그냥 걸어갈게요. 다녀오겠습니다!”
진짜 학교에 가야 할 시간도 맞지만, 이대로 엄마, 아빠와 더 있다가는 현규진과 제대로
어색해진 것까지 들키게 될 것 같아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유원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심장이 쿵쾅쿵쾅 불안하게 뛰었다.
***
1 교시부터 이어진 약한 두통에 3 교시가 끝나고 보건실에 간 유원은 두통약 한 알을 받아
물과 함께 삼켰다. 한 모금 정도 남은 물을 마저 마시고, 종이컵을 버리는데 커피를 내리던
보건 선생님이 유원을 바라보았다.
“유원아. 왜 오늘은 혼자야?”
“…네?”
“규진이랑 늘 같이 왔잖아. 2 년 내내 거의 매번 같이 오더니 오늘은 혼자 와서.”
“아….”
“싸웠어?”
“아니요. 그냥…. 다른 반이 돼서…. 같이 가자고 하기가 좀 그래서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현규진과 싸웠냐는 말을 또 듣고 나니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유원은 얼른 꾸벅 숙여 인사하고 보건실을 나섰다.
사실 보건 선생님의 말씀이 맞았다. 보건실에 갈 때는 늘 현규진과 함께였다. 약을 먹거나
수면실에 누워 쉬다가 나와 이 복도를 함께 걸어 중앙 계단을 올라 교실로 가곤 했다. 그렇게
매번 같이 다니다가 갑자기 혼자 다니는 걸 보고 궁금증이 생기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
계단이 오늘따라 높아 보였다. 유원은 물끄러미 현규진이 없는 계단을 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는데 눈앞으로 빨간 배턴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아침에 교문에서 본
학생 부장의 얼굴을 떠올린 유원이 고개를 들어 휘파람을 불며 내려오는 학생 부장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냐. 어, 깡패는 어쩌고 혼자야?”
“네에?”
“키 큰 깡패 있잖아. 네 껌딱지. 걔 이름 뭐야. 그… 규진? 아, 현규진.”
“아….”
“아침에도 따로 오던데 뭐야, 싸웠어?”
“…아, 아니요. 어쩌다 보니까….”
“에이, 아니긴. 아닌데 갑자기 따로 다녀? 싸웠는데, 뭐.”
안 속는다는 듯 웃으면서 내려가는 학생 부장을 뒤돌아본 유원이 다시 계단을 올랐다. 아침에
부모님의 질문을 시작으로 오늘 저를 보는 사람들마다 현규진과 싸웠는지 묻고 있었다.
아침에 혼자 오는 저를 보고 이윤성이 조심스럽게 진짜 싸운 게 아니냐면서 물었고, 자판기
앞에서 만난 민지훈이 왜 싸웠냐고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 거기에 보건 선생님과 학생
부장까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도 왜 현규진과 다니지 않는지 물으니 솔직히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3 학년 교실이 있는 복도로 오른 유원은 반으로 들어가기 전 괜히 현규진의 반 복도를
살피다가 그쪽으로 향했다. 열려 있는 뒷문 쪽으로 살짝, 아주아주 살짝 눈만 내밀고 안을
보니 창가에 있는 줄 가장 뒷자리에 앉아 있는 현규진이 보였다. 그 앞에는 최해영과 김준재가
앉아 있었다.
“…….”
현규진 자리는 저기구나. 1 분단 제일 뒷자리. 커튼이 걷힌 창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책상은 물론이고 창가 자리에 앉은 현규진의 얼굴과 몸으로도 빛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런데도 현규진은 찡그림 하나 없이 주머니에 손을 푹 꽂고 앉아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최해영과 김준재는 계속 웃고 떠드는데 현규진은 꼭 그 애들과 다른 세상에 머무는 것처럼
조용했다. 그저 창밖에서 바람이 들어오면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리고, 얼굴 위에 놓인 빛의
모양이 바뀌는 게 움직임의 전부였다. 유원은 제가 몰래 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잠시 넋을
잃고 그 옆얼굴을 눈에 가득 담았다. 빛이 묻은 현규진을 보고 있으니 제 마음도 빛으로
물드는 것만 같았다. 따뜻해서 좋은데 또 너무 환해서 두 눈을 질끈 감고 싶기도 했다.
유원은 이 마음을 알고 있었다. 현규진을 좋아하는 마음. 너무 좋은데, 정말 너무너무 좋은데,
너무 좋아서 두 눈을 감아 모른 척을 하고 싶은 이상한 마음. 네가 빛이라 그런 걸까? 너무
환하고 뜨거워서 네 앞에 두 발로 오래 서 있으면 어지러워져. 내가 조금 더 건강했다면
괜찮았을까?
“현규진 보는 거야?”
“…응.”
“왜 몰래 봐. 싸운 거 아니라더니 존나 맞네.”
“…어?”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원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한 민지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졌다.
“들어가서 당당히 봐.”
“아니, 나 이제….”
“현규진! 네 자기 오셨다.”
뒤에서 어깨를 잡고 교실 안으로 미는 힘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밀리고 밀려 어쩔 수 없이
교실 안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에서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 안에는 당연히 현규진의 시선도
있었다.
의자 뒤에 기대고 있던 현규진의 몸이 바로 세워지고 주머니에 꽂혀 있던 손이 빠져나왔다.
놀란 얼굴을 보니 부끄러워 귓가가 화끈거렸다.
“들어오지도 못하고 애타게 너 보고 있어서 데려왔어. 안 싸웠다더니 존나 싸운 거 맞잖아.
아닌데 멍유가 왜 몰래 너 보고 있냐.”
현규진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당황한 유원의 얼굴을 보며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저까지 유원을 더 창피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별일도 아니란 듯 자리에서
유유히 일어난 현규진이 유원의 어깨 위에 놓인 민지훈의 손을 툭 쳐서 치우고 팔을 둘렀다.
“뭘 몰래 봐. 정유원 내가 오래서 온 건데. 달라는 거 이거 맞지?”
서랍 안에서 과외 선생이 준 답지 프린트한 것을 꺼낸 현규진이 유원에게 자연스럽게
건네주었다. 유원은 얼결에 그 파일을 받아 들고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아, 뭐야. 존나 노잼.”
재밌다가 말았다는 듯 금세 흥미를 잃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애들을 흘끗 본 현규진이
유원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교실을 빠져나왔다.
“나 몰래 봤어?”
“…응….”
유원은 그냥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고 변명도 하고
싶고,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고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렇게 도움까지 받은 이상
구차해지고 싶지 않았다.
“왜. 부르지.”
“…그냥 네 자리는 어딘지 궁금하기도 하고….”
씨발, 어떡하지. 키스하고 싶은데. 유원의 마른 어깨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쥔 현규진이 살살
손가락을 움직여 어깨뼈를 매만졌다. 제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제 품 쪽으로 움츠러드는
유원이 귀여워 자꾸만 키스하고픈 충동이 일었다.
이대로 화장실로 데려가서 칸 안에 넣고 키스하면 욕 먹겠지. 아, 그건 좀 너무 쓰레기 같은데.
유원과 닿을 수 없는 혀로 괜히 윗니 뒤쪽을 두드린 현규진이 어깨뼈 만지던 손을 들어
습관처럼 유원의 귓불을 손 끝으로 굴렸다.
“흣….”
아주 작은 소리였다. 다른 누구한테 절대 들릴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가 유원의 숨 사이에
뒤섞여 흘렀다. 그 순간 다른 때보다 어깨가 더 확 움찔대며 몸 전체가 튀는 느낌이 났다.
현규진은 조금 전 제가 들은 소리를 확인이라도 하듯 시선을 내렸다. 제가 잡고 있는 귀와
연결된 모든 곳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울 것 같은데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는 유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 더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현규진은 그대로 유원의 손을 잡고 바로 앞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대에 누가
있는 것에 잠시 손을 놓고 머뭇대다가 그 애가 나가자마자 다시 유원의 손을 잡고 아무
칸으로나 들어가 문을 잠갔다. 입술은 잠금장치 걸리는 소리와 거의 비슷하게 맞물렸다.
입술이 맞물릴 수 있는 높이를 향해 완전히 숙어진 몸이 유원의 몸을 뒤덮으며 눌렀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도 없고 이런 걸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판단력을 머금고 있는 모든 것이 동시에 힘을 잃었고, 두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도 없게 모든 불이 꺼져 버렸다. 현규진은 저와 유원의 머리 위로 쏟아진 어둠 안에서 성큼
다가가 유원을 두 손으로 쥐었다. 어둠 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하….”
“하아…. 으음….”
현규진은 또 제 몸 전체가 심장이 되는 경험을 했다. 마음이 저를 집어삼키다 못해 완전히
없애 버렸다. 제 옷자락을 쥔 채 조금도 저를 밀지 않고 입술을 벌려 제가 주는 숨을 삼키는
유원을 가지고 싶었다. 사람을 가지는 방법을 누군가 알려 주면 좋겠는데 그건 아무도 알려
주지 않을 것 같아 애가 탔다.
제가 완전히 졌다. 친구여도 좋고, 무엇이든 좋았다. 유원의 옆에 있고 싶었다. 제가 내뱉은
말이 그물이 되어 저를 완전히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키스하는 친구. 씨발, 그래.
키스하는 친구라도 되고 싶었다.
수업 시작하는 종이 울렸다. 옷자락을 쥐고 있던 유원의 손이 올라와 어깨를 살짝 밀었다.
아니, 싫어. 떨어지기 싫어. 살짝 떨어진 입술 위로 붙는 유원의 달콤한 숨이 맛있어 다시 열이
오른 입술을 머금자 그 사이로 말캉한 혀가 마주 문질렸다. 아, 진짜 돌겠다. 존나 좋아. 왜
이렇게 맛있지.
“…그, 그만….”
입술 위로 닿는 목소리가 뜨거웠다. 뭐 같은 4 교시를 안 들어갈 수는 없으니 여기까지만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는 빠져도 되지만, 유원은 빠지면 안 된다는 것도.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입술과 몸을 마지막 인내심을 끌어모아 딱 한 걸음 뒤로 떨어뜨린 현규진이 유원의
옷매무새를 만져 주었다.
“가자.”
유원만 들을 수 있게 거의 입 모양으로만 말한 현규진이 조용한 바깥에 귀를 기울이다가 슬쩍
문을 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일부러 먼저 나가 세면대 쪽으로 서 있으니 조금 뒤
유원이 나왔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숨이 유원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렀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현규진은 화장실을 나서기 전 문을 닫은 채 한 손으로 유원의 목덜미를 감싸 쥔 채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한 번 쪼옥 소리가 나게 머금었다. 그리고 거기서 더 일을 치기 전에 화장실을
나섰다.
목까지 다시 발그레 달아오른 유원은 제 교실 앞문으로 들어가는 4 교시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고 놀라 얼른 교실로 달려갔다.
“하….”
조용한 복도에서 유원의 뒷모습을 보던 현규진의 고개가 느릿하게 기울었다. 유원이 잔뜩
묻어 있는 입술에 아직도 정신이 멍했다. 젖은 아랫입술에 남은 유원의 위로 손끝을 댄
현규진이 다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정유원이 보고 싶었다. 두 눈이 가득 차게 담아도 조금의 어색함도 없던 사이가 되고 싶었다.
유원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드디어 결심이 제대로 섰다.
“…….”
유원아. 난 너랑 다시 친구가 될 거야. 전처럼 너와 모든 걸 같이 하는 친구가. 그렇게 네 모든
시간 안으로 들어가서 널 가질 거야. 네가 고개를 들어 어디를 봐도 나만 보이도록 만들 거야.
내가 아니면 안 되게, 네가 가진 두려움과 걱정이 나를 향한 마음에 눌려 다시는 고개도 들지
못하게.
네가 더는 친구로 만족하지 못하게.
친구 사이 고백 금지-74 화(74/127)

74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충동에 이끌려 키스까지 해 버린 유원이 저를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벌써 이틀째 유원의 머리꼭지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현규진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유원과 다시 친구가 되려면 이 정도의
인내는 꼭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최해영과 함께 매점에 가 이온 음료를 한 병 산 현규진은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묻는 매점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유원이랑 싸웠어? 아까 유원이도 다른 애랑 왔던데. 물어보니까 안 싸웠다곤 하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 저희 안 싸웠어요. 그냥 타이밍이 안 맞아서 따로 온 거예요.”
“2 년을 같이 오다가 따로 오니까 내가 다 서운해서 그래.”
요즘 현규진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역시 ‘유원이랑 싸웠어?’였다. 최해영과 김준재, 민지훈이
하루 종일 그 얘기를 하기도 하지만, 그 새끼들을 빼도 꽤 많은 곳에서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매점 아주머니, 학교 오는 길에 만난 보건실 선생, 교문 지나면서 눈이 마주친 학생 부장,
그리고 엄마, 교무실에서 마주친 2 학년 때 담임과 애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은
윤리까지 저를 보기만 하면 같은 이야기를 물었다.
유원이랑 싸웠어? 정말 아니야? 그런데 왜 같이 안 다녀? 얼른 화해해, 유원이도 아니라곤
하던데 표정이 안 좋더라, 싸운 거 질질 끌면 화해하기 더 힘들어져.
솔직히 썩 듣기 좋은 질문은 아니지만, 질문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저와
유원이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다는 걸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고, 그 정도까진 모르더라도
입학한 뒤부터 늘 유원과 붙어 다녔다는 걸 알기에 갑자기 따로 다니는 저와 유원을 보며
궁금증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테니까.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볼 때마다 의심스럽고 또 장난스러움과 걱정이 섞인 얼굴로 같은
소리를 해 대니 짜증이 슬슬 나긴 했다. 내가 싸우든 말든 뭔 상관이냐고 지랄하고 싶은 걸
참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제가 이런 말을 듣는 것처럼 유원도 똑같이 저와 싸웠냐는
질문 폭격을 받고 있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저는 지금 유원이 그 질문에 몹시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 자리가 여기밖에 없네.”
그래서 일부러 급식실에서 유원과 이윤성을 찾아 옆으로 가서 앉는 최해영과 김준재도
말리지 않았다. 뭐 진짜 셋이 앉을 자리가 거기밖에 없기도 했지만.
“멍유, 현이랑 이혼했다고 우리랑도 모른 척할 거야? 현은 현이고 우리는 우리지.”
유원과 친하면 뭐 얼마나 친했다고 저딴 소리를 뻔뻔하게 하나 싶었다. 현규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밥을 입에 넣었다.
“숙려기간 한 달인 거 알지. 아직 재결합 기회는 있으니까 좀 잘해 봐. 아, 진짜 애새끼들이냐.
그 나이에 싸우고 모른 척하게.”
“야, 지겹지도 않냐. 안 싸웠다는데.”
“아니, 내가 더 지겨워, 지금. 매일 붙어서 쪽쪽 빠는 거 빼고 다 하다가 갑자기 학교도 따로
오고 밥도 따로 먹는데 안 싸웠다는 걸 누가 믿는데.”
병신아, 쪽쪽 빠는 건 왜 빼냐. 그것도 존나 했는데. 왜 세상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하기가 힘든
걸까. 말을 뒤로 삼킨 현규진이 계란말이 하나를 들어 반을 베어 무는 유원을 흘끗 바라보았다.
시무룩한 얼굴을 보니 이제 슬슬 다시 친구로 돌아갈 준비가 된 것 같았다.
현규진은 대충 밥을 먹고 먼저 나가 유원과 제가 즐겨 마시는 초코우유를 사서 유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옆에서 김준재와 최해영이 초코우유 하나로 멍유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 같냐고 개소리를 지껄여 댔지만 그딴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부터 유원과 다시 친구가 될 때까지 제가 집중해야 할 것은 오롯이 유원의 마음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이유였다. 물론 그런 이유를 붙이지 않아도 제 시선이 가는 것은 오직 유원
밖에 없었다. 정유원의 얼굴, 정유원의 마음, 정유원의 기분, 그리고 정유원의 웃음.
유원이 웃는 소리를 들은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현규진은 급식실 출구로 나오는 유원에게 다가가 초코우유를 손에 쥐여 주었다.
“이따 집에 같이 가. 할 말 있어.”
“…어?”
“중요한 말이야.”
갑작스럽게 느껴졌는지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던 유원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지은
현규진이 습관적으로 유원의 머리를 한 번 꾹 손바닥으로 눌렀다. 하지 마, 키 작아져.
자동으로 나와야 할 소리가 나오지 않아 허전했다.
“끝나고 교실로 갈게. 먼저 끝나도 가지 말고 기다려.”
“…응. 이거 고마워.”
“난 요즘 계속 단것만 먹고 싶던데 넌 안 그래?”
“…….”
“난 저번에 좀 모자랐거든. 그래서 그런가….”
초코우유에 빨대를 꽂아 입에 문 현규진이 씩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의미를 알아들은
유원의 손 끝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빨개지면 안 될 것 같은데 목덜미가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따 봐. 먼저 간다.”
“…으응…. 빠이….”
“어, 빠빠이.”
현규진의 인사에 김준재가 입을 막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 최해영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먼저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그 뒤를 따라 웩웩 거리며 오르는 김준재를
무표정하게 본 현규진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유원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그런 유원을 보고 싶지만, 꾹 참고 지금은 앞만 보고 갈 생각이었다. 그래야, 지금
참아야 앞으로 유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아주 멀리까지 갈 수 있을 테니까.
아, 맛있다. 정유원 혀 만큼은 아니지만. 반쯤 남은 초코우유를 쭉 빨아들인 현규진이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
종례를 하거나 말거나 빠지고 화장실로 간 현규진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졌다. 최해영이
사물함에 두는 왁스를 아주 조금 묻혀 유원이 예쁘다고 한 적 있는 머리 모양을 자연스럽게
만든 다음 손을 씻으며 얼굴도 살폈다. 물론 얼굴은 아주 완벽했다.
오늘은 유원과 학교를 나가 맛있는 저녁을 먹고 전에 갔던 그 와플 가게에 갈 생각이었다.
거기가 구석 쪽으로 가면 다른 테이블이 없어 대화하기가 편할 것 같았다. 여태까지 같이 갔던
카페도 하나씩 생각해 봤지만, 다 너무 오픈이 된 공간이라 진지하고 심각한, 그리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화장실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얼굴과 머리 교복, 피어스까지 눈으로 체크한 현규진이
앞문을 나서는 담임의 뒷모습을 보며 뒷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저를 보는 최해영에게
왁스통을 가볍게 던져 주었다.
“오랜만에 전 애인이랑 데이트한다고 머리 만진 거 봐라.”
유원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잔뜩 기분이 좋아 최해영의 말에도 전혀
짜증이 나지 않았다. 씩 웃은 현규진이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가 내리곤 교실을 나섰다.
3 반은 아직 종례 중이었다. 그냥 기다리려고 교실 앞에 가기만 했는데도 키가 워낙 커 교실
안이 훤히 다 보였다. 현규진이 복도로 가자마자 교실 안에서 시선들이 닿아 왔다. 그중에는
유원의 시선도 있었다. 현규진은 저를 바라보는 유원과 눈을 맞추며 웃음 지었다. 조금 놀란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돌리는 게 귀여워 아예 창에 가까이 붙어 보고 싶지만, 참았다. 3 반
담임한테 찍혀 좋을 게 없고, 유원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3 반 담임은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일부러 기다리는 걸 보고 안 끝내 주는 건가 생각이 들
때가 되어서야 종례가 끝났다. 현규진은 앞문으로 나오는 3 반 담임에게 까딱 인사하곤 성큼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 누가 봐도 위압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현규진의 등장에
잠시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물론 그 시선을 받는 당사자의 눈은 딱 한 곳을 향해
있었지만.
“너네 담임 말 존나 많다, 진짜.”
“…너넨 일찍 끝났네?”
“응. 가자.”
유원의 가방을 한 쪽 어깨에 멘 현규진이 뒤쪽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저를 보고
있는 이윤성과 눈이 마주쳤다. 저 새낀 뭘 또 보고 있어. 혹시라도 같이 가자 그럴까 싶어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얼른 유원과 교실을 나섰다.
“저녁 뭐 먹을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배가 막 많이 고프지는 않아서 간단히 먹으면 좋겠어. 사실 저번 주에 크게 체해서 아직
쪼끔 조심하는 중이라….”
“체했었어? 왜. 뭐 먹고.”
“…피자. 그게 갑자기 먹고 싶어서 시켜 먹었는데… 컨디션이 안 좋았나 봐.”
현규진과 함께 피자를 먹으면서 좋았던 것을 떠올리며 바보 같이 우는 바람에 정말 크게
체했었다. 약을 먹고 손을 따고 병원까지 갔는데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사흘이나 고생을 했다.
아직도 너무 자극적인 걸 먹으면 속이 아파 먹는 것을 조심하는 중이었다.
“씨발, 그 밀가루 뭉텅이 다신 먹지 마. 그래서 살 빠진 거네. 그렇게 아파서.”
“…티 나?”
“그럼 안 나냐. 이러다 얼굴 없어지겠다.”
와플과 츄러스를 먹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런 걸 먹어 유원에게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현규진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 너무 헤비하지 않은 게 뭐가 있을지 계단을
내려가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어, 얘들아. 안녕.”
1 층으로 내려가자 어디를 갔다 오는 건지 보건실 쪽으로 가던 보건 선생이 아는 척을 했다.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유원과 달리 까딱 인사한 현규진이 저와 유원을 번갈아 보는
선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드디어 화해한 거야? 너무 잘됐다. 아, 유원아. 머리는 이제 안 아파?”
“아…. 네에, 괜찮아요.”
“규진이가 옆에 있는 거 보니까 왜 내 마음이 다 놓이네. 이제 싸우지 마.”
“…그런 거 아닌데….”
유원의 중얼거림에도 선생은 이미 싸웠다가 화해했다고 강하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뒤로도 보기 좋다느니 든든하다느니 몇 마디를 더 한 선생이 인사를 하며 가던 길로 걸음을
옮겼다. 원래라면 오지랖 존나 부린다고 한마디를 했겠지만, 현규진은 아무 말 없이 중앙
현관을 나서 유원과 함께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조금 전 보건 선생의 오지랖이 저에게
플러스가 되면 됐지, 마이너스가 될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머리 아팠어? 언제.”
“아침에….”
“이제 괜찮아?”
“응. 괜찮아. 약 먹고 괜찮아졌어.”
아, 오늘은 타이밍이 아닌가. 일단 오늘은 집으로 보내고 내일 말하는 게 나은가? 엉겨 붙는
고민 속에서 걸음을 옮기는데 유원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전에 우리 먹었던 그… 와플 먹으러 갈래?”
교문을 나서며 말하는 유원을 내려다본 현규진이 일단 학원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런 거 먹어도 괜찮겠어?”
“응, 괜찮아. 갑자기 와플 먹고 싶어. 가끔 생각났었거든.”
“그럼 거기 가자.”
“응. 그런데… 그 할 말이 뭔지 알려 주면 안 돼?”
“길에서 하긴 좀 그래. 10 분만 참아.”
비스듬히 기울어 저를 내려다보는 따뜻한 시선에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유원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확실히 따뜻한 현규진의 시선과 뒤섞여 무척
온화하게 느껴졌다.
난 널 얼마나 따뜻하게 보는 걸까? 너랑 있으면 모든 계절이 다 따뜻한 것처럼 느껴져. 네가
없어서 지난 겨울이 그렇게 길고 추웠나 봐.
같이 있고 싶어….
매일 매일 잠시도 머리를 떠나지 않던 생각이 부드럽게 녹아 내려와 두통이 말끔히 갠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와플 가게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보통 저녁을 먹은 다음에 많이 찾는 가게라 그런지 아주
조용했다. 진지하게 대화하기에는 오히려 좋은 분위기라 생각한 현규진이 유원과 함께
메뉴를 골랐다.
“딸기 와플 생겼네. 그거 먹을래? 그런 거 좋아하잖아.”
“응, 그거 먹을래.”
“아이스크림 먹는 것보단 낫겠지. 마실 건? 따뜻한 거 마셔.”
“…생딸기 우유 마시면 안 돼? 시즌 메뉴래. 저거 조금만 지나도 없어져서 못 마신단 말이야….
지금이 딱 딸기 많이 나올 때라 제일 맛있어.”
딸기 시즌이라 딸기를 넣은 여러 메뉴가 생겨 메뉴판 옆에 크게 붙어 있었다. 그냥 따뜻한
레몬티를 마시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시즌 메뉴라면서 생딸기 우유를 마셔야만 하는 이유를
열심히 피력하는 유원의 얼굴이 너무 예뻐 저도 모르게 허락하고 말았다. 돼, 뭐든 돼. 그
얼굴로 말하는데 안 되는 게 어딨어. 세상 딸기 다 너 줄게.
친구 사이 고백 금지-75 화(75/127)

75


“…알았어. 주문할게요. 딸기 와플 하나랑 생딸기 우유 하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딸기 바나나
크레페 이렇게 주세요.”
카드로 계산한 현규진이 진동벨을 받아 유원과 함께 카운터에서 조금 걸어 코너를 돌면 있는
구석 중에서도 가장 구석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런 자리라면 사람들이 가게를 가득
채워도 편하게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먹을 것도 없이 조용한 가게 안에 마주 보고 어색하게 앉아 있자니 자꾸 여기저기로 시선이
움직였다. 눈을 서로 마주한다는 답이 나오지 않도록 테이블 모서리를 봤다가 벽을 보고, 또
괜히 벽에 붙은 선반 위에 놓인 디퓨저나 장식용 소품 같은 것을 보고 있으니 진동벨이 울렸다.
현규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딸기 파티가 열린 것 같은 커다란 트레이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어색하게 앉아만 있더니 딸기를 보고서는 웃는 유원이 귀여웠다.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응. 맛있겠다, 잘 먹을게.”
투명한 병에 들어 있는 연한 분홍색 우유를 흔든 유원이 같이 준 컵에 쪼로록 따르자 안에 든
딸기 조각들도 함께 컵으로 떨어졌다. 손등으로 한 방울 튄 분홍색 우유 위로 입술을 가볍게
눌러 초옵 빨아들인 유원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통통한 빨대를 입에 물었다. 곧 빨대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맛있어?”
기대보다도 훨씬 더 달콤하고 맛있어 기분이 좋아진 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현규진에게
컵을 내밀었다.
“진짜 맛있어. 마셔 봐. 딸기랑 같이.”
맛있을 때 그걸 저에게도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는 그 자체로도 충분한데 그 맛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기회까지 주다니 정말이지 유원은 천사였다. 현규진은 저를 보고 있는
유원과 눈을 맞춘 채 굵은 빨대를 물고 한 모금 우유를 머금었다. 우유는 달고, 함께 올라온
딸기 조각은 새콤달콤하니 꽤 맛있었다.
“맛있지.”
“응. 맛있다. 집에 갈 때 사 줄게. 내일 또 마셔.”
현규진에게서 컵을 받은 유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조금 전 현규진이 물었던 빨대를 입술로
눌렀다.
“…….”
말캉한 입술이 눌리는 걸 보던 현규진은 이내 그 빨대가 유원의 입술 사이로 느릿하게 물리는
것을 보며 허벅지 안쪽으로 묘한 감각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요즘의 저는 답이 없었다.
인간과 변태의 중간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정말 큰일이었다.
“아…. 할 말이 뭐야?”
“아, 할 말. 음…. 우리 개학한 지 며칠 됐잖아.”
“응….”
“며칠 동안 내가 제일 많이 들은 말이 너랑 싸웠냐는 말이거든. 보는 사람마다 전부 그 말을
하더라고. 왜 같이 안 다니냐, 왜 싸웠냐, 얼른 화해해라. 아까도 보건이 우리 보자마자
그랬잖아.”
“아….”
무척 동감한다는 듯한 유원의 얼굴을 본 현규진이 짐짓 진지한 얼굴로 의자를 더 앞으로 당겨
마주 보는 거리를 조금 좁혔다.
“넌 아까 말고 그런 말 들은 적 없어?”
“나도… 계속 들어. 엄마, 아빠도 자꾸 묻고, 애들도 묻고…. 선생님들도 나만 보면 왜 너랑 같이
안 다니냐고 하시고….”
“어땠어? 그런 말 들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어려워. 아니라고 하기는 하는데…. 그 대답이랑 보이는
모습이 다르니까 아무도 안 믿고….”
현규진은 완전 공감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연기를 하고 있긴 하지만, 여태까지
거짓말을 한 건 하나도 없었다. 정말 저와 유원이 친하다는 걸 아는 사람들 모두가 같은
질문에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대수롭잖게 넘기는 것도 한두 번이고 이젠 그
질문을 들으면 짜증이 날 지경에 다다른 것도 사실이었다.
“나도 엄마가 너 집에 안 온다고 싸웠냐고 나만 보면 묻고 난리야. 네 걱정도 엄청 하고.”
“…이모 보고 싶다아….”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어떤 쪽으로든 어떤 결론이 나든 얘기를 안 하면 그냥 평생 이렇게
어색하게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지내야 할 것 같더라고. 그래서 방학 동안에도 서로 연락 못
한 거잖아. 갑자기 친구였을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사귀는 건
더더욱 아니고.”
“…….”
“난 그랬는데 넌 아니야?”
“…나도 그래서 그랬어. 뭐라고 보내야 할지 모르겠더라….”
물방울이 맺혀 아래로 흘러내리는 차가운 컵을 손끝으로 문지른 현규진이 와플을 먹기 좋게
잘랐다. 그리고 딸기와 와플, 생크림을 들어 유원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조금 머뭇대던 유원이
이내 입을 벌려 현규진이 주는 것을 받아먹었다.
“…….”
부끄러운지 귀가 조금 빨개진 유원을 보던 현규진이 손을 뻗어 입가에 살짝 묻은 생크림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리고 놀라서 보는 유원과 눈을 맞춘 채 손끝을 쪽 빨았다.
“나 솔직히 너 보면 아직도 꼴려. 두 달을 안 봤는데도 똑같아.”
“… 갑자기….”
“나 진짜 네 생각 하면서 혼자 존나 해.”
“…뭘?”
대답하지 않고 그냥 빤히 보자 아무도 없는데 괜히 주변을 살핀 유원이 목소리를 더 작게 줄여
물었다.
“…그… 그거?”
“응.”
“…미쳤나 봐, 진짜….”
“넌 내 생각 하면서 안 해?”
조금 빨개졌다고 생각한 귀가 새빨개지고 목덜미와 얼굴까지 달아오르는 유원을 본 현규진은
이제 다리를 테이블 옆으로 빼서 꼬았다. 이대로라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화장실에 가서 빼야
할 것만 같았다. 제발 이런 곳 화장실에서 그런 짓을 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며 괜히 차가운
커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뭐야. 하네.”
“…아, 안 해….”
“방학 동안 거짓말 존나 늘었네?”
유원의 시선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솔직히 현규진과 했던 키스와 몸 여기저기 닿던 손길 같은
것을 떠올리면서 혼자 했던 적이 꽤 있기에 아니라는 말을 더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다 없던 일로 하고 예전처럼은 못 돌아가. 나 아직도 너 좋아해. 그리고 너도 나
좋아하고.”
“…….”
“뭐 방학 전이랑 또 똑같은 말 지껄이나 싶을 텐데…. 너나 나나 이렇게 계속 다른 사람한테
싸웠냐는 말이나 듣고 사는 건 불편하고, 특히 엄마, 아빠한테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아?
방학 땐 운이 좋았다고 치고 이제 얼마 못 버텨. 그래서 말인데.”
생딸기 우유병 아래 가라앉은 딸기에 시선을 두고 있던 유원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현규진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면서도 조금 무서웠다.
“졸업할 때까지만 친구인 척하면 어때?”
“친구인 척?”
“응. 학교나 집에서나 다른 사람 볼 땐 전처럼 지내자고. 그럼 싸웠냐는 말 들을 필요도 없고
편할 거 아냐. 엄마, 아빠도 우리 같이 다니는 거 보고, 집에도 가끔 가고 그런 거 보면 안심할
거고.”
친구인 척을 하자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기에 유원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완벽히
예전과 같은 친구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아직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다시 감정 소모가 심한
사귀는 사이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이 상황에서 나온 말이 친구인 척을 하자는 거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방향이라 옳은 건지 그른 건지 판단도 서질 않았다.
“…척을 하자는 건 진짜 친구는 아니라는 거잖아.”
“음, 그렇지? 근데 뭐 모르잖아. 그렇게 친구인 척하면서 지내다 보면 다시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진짜 친구….”
고민에 빠진 유원의 얼굴을 보던 현규진은 이제 거의 다 왔다고 느꼈다. 조금만, 정말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다시 유원과 매일 편하게 만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연기하면서 불편하게 지내자는 건 아냐. 말이 친구인 척이지 우리 그런 거
자연스럽잖아.”
“…그건 그렇지이….”
“이제 공부도 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러면서 스트레스 받을 수도 없는 거고…. 친구인
척이라는 말이 좀 그러면…. 음, 임시 친구?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해도 되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이제 진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현규진은 고개를 기울이며
유원과 깊게 시선을 얽었다.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다가 정말 친구로 돌아가면 좋은 거잖아.”
“만약에…. 안 되면?”
“그땐 뭐 어쩔 수 없지. 졸업하면 나 독립할 거거든. 우리가 같은 대학을 가든 못 가든 같은
아파트에서 떨어지고 하면…. 지금처럼 매일 보고 그럴 일도 없을 거라 뭐 그땐 지금만큼
불편하진 않을 거야.”
“…….”
“그러니까 졸업할 때까지만 다시 친구로 지내자.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현규진의 말은 꽤 일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저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다시 친구가 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그렇게 이상한 제안도 아니었다. 결국, 착한 현규진이 저를 위해 자신의
입장을 숙이고 들어온 것이었다.
친구와 연인. 각자 가지고 싶은 이름이 달라 팽팽히 당겨진 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을 것
같은 끈을 잡은 채 현규진이 제 앞으로 다가와 제가 원하는 친구라는 이름을 다시 소리 내 준
것 만으로도 유원은 현규진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물론 진짜 예전처럼 친구가 되는 게 아니라 아직은 ‘친구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그래도 현규진이 먼저 굽히고 배려하면서 내민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진짜 현규진과
친구가 되고픈 마음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들켜 버린 것처럼 아직도 저 얼굴을 보면 쿵쿵
빠르게 뛰는 마음에 이끌려서이기도 했다.
현규진과 더는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당겨 주는 쪽으로 다가가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게 어느
쪽이든 같이 있을 수 있는 방향을 선택하고 싶었다.
지금은 3 월. 졸업은 내년 2 월. 11 개월 동안 친구로 지내다 보면 그 끝에 어떤 답이든
확실하게 나오지 않을까? 유원은 풀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풀리지 않던 문제의 풀이 과정을
흔적도 남지 않게 모두 지웠다. 그리고 다시 꼼꼼하게 문제를 눈에 담았다. 모든 답은 문제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또 상기했다.
문제는 현규진을 좋아하는 마음. 그 안에 답이 있었다. 이번에는 진짜 답을 마주하고 싶었다.
유원은 가만히 제 답을 기다리는 현규진과 눈을 맞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자. 나도 너랑… 어색한 채로 계속 지내는 거 싫어. 사람들이 계속 싸웠냐고 묻는
것도 싫고….”
“…….”
“완전히 전처럼은 안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잘 지내고 싶어. 먼저 얘기해 줘서 고마워. 난
그런 생각도 못 했는데….”
“나 완전 똑똑하지.”
테이블 위로 손을 느릿하게 뻗은 현규진이 유원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가볍게 쥐고는
장난치듯 살살 흔들었다. 손가락이 문질릴 때마다 마른 어깨가 움칠대는 게 느껴졌지만,
현규진은 모른 척 웃음 지었다.
응, 이렇게 다시 친구부터 시작하는 거야. 어깨를 끌어안아도 이상할 게 없고, 집을 드나드는
게 당연하고, 혹시라도 아프면 너는 당연히 나를 찾고, 나는 당연히 너를 지키는. 그리고 하나
더. 키스까지 할 수 있는 그런 친구부터.
현규진이 드디어 다시 제 손안에 들어온 유원의 포근함을 마주하며 웃음 지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76 화(76/127)

76


와플을 다 먹고 얘기를 조금 더 하다가 나왔는데도 이제 7 시 반이라 집에 들어가기는
아쉬웠다. 아까보다 훨씬 더 편안해 보이는 유원의 얼굴을 본 현규진이 힘을 거의 다 뺀 채
몸으로 유원의 어깨를 밀었다. 힘을 조금만 줘도 유원이 옆으로 확 밀려난다는 걸 알고 있는
행동이었다.
“집에 가기 싫어.”
“응?”
“아직 여덟 시도 안 됐는데 집에 갈 거야?”
“…어디 갈 데도 없잖아.”
“왜 없어. 어디든 가면 되지. 가서 얘기 좀 더 하자. 우리 아직 할 말 많아.”
“음, 그럼 우리 집 갈래? 엄마 제주도 화보 촬영 있어서 아빠랑 가셨거든. 집에 아무도 없어.”
아, 유원아. 진작 말했어야지. 속으로 외친 현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집으로 가자는 걸
보니 확실히 제가 아까보다 더 편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저와 그렇게 다시 친구가 되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을 하면 조금 막막하기도 하지만, 뭐 어쨌든 유원과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현규진은 일단 무척 만족스러웠다.
“응. 가자.”
씩 웃은 현규진이 즐겁게 걸음을 옮겼다.
***
아, 미친. 정유원 냄새.
유원의 방문이 열리자마자 확 다가오는 포근한 향에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저
냄새를 조금이라도 더 맡고 싶어 유원이 입었던 후드에 얼굴을 파묻고 방학 내내 혼자 했던
짓거리를 떠올리니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
교복 재킷을 벗는 유원의 뒤에 서서 보니 하얗고 보송보송한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현규진은 시선으로 느릿하게 목덜미를 문지르며 예쁜 뼈 모양을 따라 뻗은 어깨와 곧은 등,
마른 허리까지 전부 눈에 담았다. 뒤에서 끌어안고 목과 어깨 여기저기에 얼굴을 마구 비비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규진아. 배 안 고파? 나 때문에 너도 저녁 제대로 못 먹었잖아. 와플도 많이 안 먹고….”
“음, 좀 고프긴 한데. 간단히 치킨 먹을래?”
“응, 치킨 먹자. 난 배 별로 안 고파서 먹어도 쪼끔만 먹을 거라 너 먹고 싶은 걸로 시키자.”
“허니 순살 먹지 뭐.”
“그건 내가 좋아하는 거잖아.”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좋아하는 거야.”
의자를 좌우로 느릿하게 돌리며 휴대폰을 보는 현규진에게 멍하니 유원의 시선이 닿았다.
현규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할 때마다 유원은 아주 긴 감정의 떨림에 시달렸다.
지금도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이라고는 할 수 없는 설렘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맞닥뜨린 다정함이라 더 그랬다.
“그, 그럼 내가 주문할게.”
“앱 켠 김에 내가 할게.”
“아냐, 아까 와플도 네가 사 줬잖아.”
“키 큰 사람이 사 주면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먹는 거야.”
“그게 뭐야. 말도 안 돼.”
“집에 제로 있어?”
“응. 콜라 안 시켜도 돼. 다 있어. 아니, 내가 시킬게.”
“내일 매점 털어 줘.”
유원이 좋아하고, 또 저도 이제는 꽤 좋아하게 된 달콤한 치킨을 주문한 현규진이 휴대폰을
내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저를 집, 그것도 방까지 들인 것을 아주
조금 후회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뭐 그래도 저는 나갈 생각이 없었다. 얼마나 힘들게
들어온 방인데 순순히 나가 준단 말인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정유원. 들어 봐. 난 이제 우리가 진짜 안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뭐 우리가 친구일 때
그렇게 크게 싸운 적은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그때랑은 좀 다르니까.”
“…응.”
“그러려면 서로 조심할 건 더 조심하고, 싫어하는 건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뭐 그런 거
있으면 말해. 이런 건 안 했으면 좋겠다, 그런 거.”
“…음….”
현규진이 안 했으면 좋겠는 거…. 하면 싸울 수도 있는 거? 곰곰 생각해 보았지만, 바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유원은 턱을 괸 채 저를 보는 현규진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 아직…. 생각나면 말할게. 너는 뭐 없어?”
“음, 너무 예쁘지 말기?”
“…그게 뭐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진지하게 말해.”
“존나 억울하네. 나 지금 진지하거든. 네가 매일 예쁘니까 내가 마음을 접을 수가 없다고.”
“…그, 그럼! 너도 잘생기지 마….”
“그건 제 의지가 아니라 좀 어렵겠는데요. 타고 태어난 걸 어떡해.”
씩 웃는 현규진을 불만스럽게 보던 유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좀 얄미웠다.
“아, 그리고 학교에선 친구인 척 제대로 해야 하니까 학교도 당연히 같이 가는 거고, 점심도
같이 먹어야 돼. 전처럼 매점도 같이 가고, 끝나면 당연히 집에 같이 가고.”
“응. 알았어…. 그런데 윤성이랑도 밥은 같이 먹으면 안 돼? 갑자기 같이 안 먹기도 좀 그렇고….
미안해서.”
“뭐…. 알았어. 나도 최해영이랑 김준재 들러붙을 때 있으니까.”
이윤성까지 같이 봐야 한다는 게 싫긴 해도 유원에게 미움 받지 않고 원활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려면 이 정도는 제가 참아야만 했다. 현규진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책상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응, 뭔데?”
“무슨 일이 있든 나 피하지 말기.”
“…….”
“피하지 좀 마. 나 속상해.”
현규진이 직접적으로 감정을 확 자극하는 말을 할 때마다 유원의 마음은 쉽게 흐무러졌다. 꼭
심장이 조금만 힘을 주어 쥐어도 뭉그러져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흐르는 복숭아로 변하는 것
같았다.
“응?”
“…….”
“유원아.”
거기에 이렇게 고개를 기울이면서 눈까지 맞추고 애교스럽게 되물으면 유원은 그게 뭐든
현규진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안 그럴게. 나도 방학 때 후회했어. 안 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답답한 거 이제 나도 싫어.”
“뭐야. 정유원 다 컸네?”
의자를 앞으로 끌고 가 유원이 앉은 쪽으로 갑자기 다가간 현규진이 손을 뻗었다. 유원은
갑자기 제 얼굴로 다가오는 커다란 손을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어?”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얼굴을 감싸 쥐는 순간 심장이 확 조여들었다. 기다랗고 단단한
손가락이 부드럽게 피부를 스치고 지나 귀까지 문질리자 발끝도 움츠러들고 아랫배도 마구
울렁였다. 아무래도 이렇게 갑자기 얼굴을 쥐거나 만지는 것도 금지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가, 갑자기….”
손을 내리려 손목을 쥐자 제가 얼마나 떨고 있는지가 그대로 보였다. 유원은 덜덜 떨리는 제
손이 부끄러워 얼른 손을 내려 숨겼다. 의연하고 싶은데 그게 너무 어려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쉽지 않고, 떨리지 않는 척을 하는 것도 어려워 자꾸 바보처럼 굴게 됐다. 이런 것도
못하는데 현규진과 친구인 척은 할 수 있을까?
“…….”
“…….”
시선이 마주하자마자 뒤엉켰다. 이건 뒤엉킨다는 말 외에는 다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기다란 손가락이 이젠 제 귀를 매만지고 있었다.
“키스해도 돼?”
“그…런 거… 하면 안 되잖아….”
“허락해 주면 되잖아.”
“…그래도….”
거절하지 못하는 애매한 말에 현규진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침대에 앉아 있는 유원의
무릎 사이를 벌리며 현규진의 무릎 하나가 파고들었다. 이상한 감각에 다리를 오므리자 다리
사이로 들어온 다리를 가두는 꼴이 되어 더욱 묘한 감각이 맴돌았다.
“친구는 내일부터 해, 응?”
이제 현규진의 숨이 입술 위로 닿았다. 무언가의 한계에 다다른 순간의 느낌을 유원은 알고
있었다. 너무 어지러워 쓰러지기 직전의 느낌과 비슷했다. 어지럽고… 머리가 터질 것만 같고
… 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나를 붙잡는 곳으로 몸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바로 그 느낌.
유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다급히 숨이 뒤섞이며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아, 어떡해…. 기분 좋아.
몸 위를 묵직하게 누르며 쏟아지는 온기가 좋았다. 숨을 겨우 쉴 때마다 현규진의 좋은 냄새가
나고 입 안에는 며칠 동안 내내 떠올리고 또 떠올렸던 감각이 번지고 있었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굴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그걸 행동까지 하는 건 너무 어려웠다.
어떻게 이 기분 좋은 감각을 밀어낼 수 있을까.
유원은 눈을 감은 채 입 안에 들어온 현규진의 혀를 마주 비볐다. 친구 실격이란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또 내일부터 하자고 했으니 오늘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따라붙었다.
“으음….”
몸이 침대 아래로 푹 꺼지는 것만 같았다. 현규진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채 두 달 동안
고립되다시피 했던 방 안에 현규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일렁였다. 토끼 쿠션은 널
대신하지 못했어. 친구에게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이 온기가 되어 혀끝으로 옮겨 갔다. 그 말을
받기라도 하듯 부드럽게 빨아들이는 느낌에 긴장해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어깨가 편히 침대
위로 놓였다.
어떻게 온몸을 이렇게 짓누르고 있는데 하나도 답답하지 않은 걸까. 언제부터 이런 걸 바라고
있던 거지? 뺨과 귀, 머리칼을 만지는 손가락의 느낌과 입 안을 부드럽게 헤집는 혀의 느낌이
동시에 느껴질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목에서 자꾸 앓는 소리가 나고 입술과 혀가 닿고
문질리는 소리가 방 안으로 퍼지는데도 부끄러움보다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현규진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이 올라가 목을 끌어안았다. 더욱 깊게 입술이 맞물리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뒤엉켜 어지러움마저 느껴진 순간 벨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자, 잠깐만… 벨, 치킨….”
“응, 안 먹을래.”
“그게 아니라….”
다시 맞물려 입 안으로 번지는 뜨거움에 아찔함까지 느낀 유원이 눈을 감은 채 잔뜩 기분 좋은
감각을 마주했다. 꼭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했다. 이래도 되나, 안 되는데, 그래도 기분 좋은데
어떡하지, 그냥 할까…. 아냐, 아무리 친구는 내일부터 한다고 해도 이건 좀…. 정신을
차렸다가도 혀가 마주 문질릴 때면 괜찮을 것 같다는 합리화를 자꾸 하게 됐다. 정말 이제
모르겠단 다소 무책임한 생각까지 다다랐을 때쯤 허리 위로 뭔가가 닿는 느낌이 났다.
간지럽고 뜨거우며… 또 부드러우면서도… 기분이 몹시 이상해지는 느낌이었다. 현규진 손
기분 좋아….
잠깐…. 손? 깨닫기가 무섭게 조금 더 파고든 현규진의 손이 유원의 허리를 꽉 쥐었다. 그에
놀란 유원이 얼른 현규진의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진짜 제 셔츠 안으로
들어가 있는 손을 보고 놀라 빼냈다.
“하아…. 너어….”
잔뜩 경계하는 눈을 한 유원을 보며 반쯤 정신을 차린 현규진의 머릿속으로 경고음이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아, 좆됐다. 참았어야지, 미친아.
친구 사이 고백 금지-77 화(77/127)

77


자제를 해도 모자랄 판에 돌았나, 진짜. 현규진은 어떤 말로 이 상황을 극복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다가 그냥 솔직히 사과하기로 했다. 부디 저의 진심이 통하기를 바라며.
“…어, 그게…. 미안. 나도 모르게 그랬어. 아, 습관인가…. 왜 거기로 손이 들어갔지.”
“습관…?”
“어?”
“…어디서 습관 될 만큼 했나 봐.”
“…어? 아니, 그게….”
“…내려가. 일어날래.”
“어? 아…. 어….”
바보 같이 계속 어? 소리만 내던 현규진은 얌전히 유원의 몸 위에서 내려와 침대 옆으로 섰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제가 빼내고 들춰 흐트러진 교복 셔츠가
단정해지는 걸 보고 있자니 묘한 고양감과 죄책감이 동시에 들었다. 현규진은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는 유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치킨 온 것 같아서.”
“아…. 맞다. 치킨 시켰지. 내가 가지고 올게.”
성큼성큼 유원을 앞서가 문밖에 놓인 종이봉투를 들고 온 현규진이 흘끔흘끔 눈치를 보며
식탁 위로 치킨 박스를 꺼냈다. 무표정, 아니 조금 뚱한 얼굴로 접시와 포크, 콜라를 가지고
오는 유원이 귀여워 죽겠으면서도 혼날 걸 생각하니 조금 무서웠다.
“자기야, 화났어?”
갑자기 훅 들어오는 자기야 공격에 움찔한 유원이 밉지 않게 현규진을 흘겨보며 식탁에
앉았다.
“그렇게 부르지 마.”
“친구일 때 자기라고 더 많이 불렀는데 왜.”
치킨 한 조각을 들어 유원의 접시 위로 올려 준 현규진이 콜라 캔도 열어 컵에 따라 주었다.
“앞으로 아까처럼 막… 얼굴이랑 귀랑… 만지지 마. 네가 귀만 만지면 자꾸 이렇게 되는 것 같아.
며칠 전에도 그렇고….”
“알았어. 오케이.”
“그리고…. 키스도 하면 안 돼, 이제. 친구랑 키스하는 건 말 안 되잖아.”
“저 질문 있는데요.”
“응.”
포크를 손과 함께 든 현규진이 발언권을 얻어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네가 나한테 하면 해도 돼? 네가 해 달라고 막 그러거나. 허락 받으면 해도 되는 거야?”
“내, 내가 왜 그런 말을 해. 나, 안 그럴 건데….”
“알았어. 알았는데 네가 먼저 하자 그러면 한다?”
“…맘대로 해. 난 안 그럴 거니까아….”
안 그럴 수 있나 보자, 진짜. 나랑 키스하는 거 좋아하면서. 혀 문질문질해 주면 좋아서 숨소리
달착지근해지는 거 내가 다 아는데.
“그리고 또… 음…. 우리 그랬던 거… 말 안 하기.”
“그랬던 거?”
“…잠깐… 사귄 거…. 그거 자꾸 얘기하면… 친구 되기 힘들 것 같아.”
“예를 들면?”
“…으음…. 예를 들면…. 치킨 먹으면서 막… 그때 우리 치킨 기다리다 키스했잖아, 이런 얘기 안
하는 거?”
“저 질문.”
또다시 발언권을 얻은 현규진이 포크를 들어 올린 채 짐짓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어릴 때 네가 나한테 뽀뽀하고 그런 건 사귀기 전에 있던 일이니까 말해도 되지?”
“그건!”
“응, 그건?”
“…해도 돼.”
“오케이.”
콜라를 한 모금 마신 현규진이 치킨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아예 휴대폰에 있는 메모 앱을
열어 유원이 하지 말라고 한 것과 제가 유원에게 말했던 것을 쭉 나열해 적으니 제법 그럴싸한
계약 조항처럼 보였다.
- 현규진은 정유원 귀를 만지지 않는다. (정유원이 키스하고 싶어져서 안 됨) - 현규진은
정유원에게 키스하지 않는다. (단, 정유원이 달려들면 해도 됨) - 연애했을 때 있었던 일
언급하지 않기. (정유원이 아직 나 좋아하는 거 상기하게 돼서 안 됨) - 무슨 일이 생겨도
정유원은 현규진을 피하지 않는다. (피하면 규지니 슬퍼)
하나하나 보면 저에게 좀 막막한 조항들이 많긴 하지만, 뭐 이 정도는 예상했던 거라 큰
타격은 없었다. 어차피 유원이 저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게 시선과 행동에 모두
묻어날 거고, 유원의 곁에서 그 마음만 느낄 수 있으면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돼?”
메모 앱에 적은 것을 보여 주자 하나하나 확인하던 유원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약간 얼굴이
빨개졌다.
“괄호 안에 이건 뭐야? 지워, 얼른.”
“왜, 맞잖아.”
“하나도 안 맞아. 빨리 지워.”
“아, 내 폰에 내가 뭐라고 적든. 정유원, 사랑해 적은 것도 아닌데.”
치킨을 한 입 먹다 말고 멍해진 유원을 본 현규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제 말
하나하나에 흔들리고 반응하고 신경 쓰면서 친구는 무슨 친구.
“너… 그런 말도 다 전에 있었던 일 말하는 거 안에 다 들어가는 거야.”
“무슨 말. 정유원, 사랑해?”
“…응.”
“그게 왜 거기 들어가는 거야. 사귈 때 사랑한다고 한 적 없는데. 사귀기 전엔 많이 했어도.”
“네가 언제 나한테…. 아….”
반박을 하려는데 머릿속으로 스치는 말들이 분명히 있었다. 뭔가 잘못을 하거나 부탁을 할 때
그리고 제가 숙제 같은 것을 보여 줬을 때 현규진이 저에게 사랑한다고 장난스럽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거랑 이건 다르지이….”
“뭐가 달라?”
“기분이 달라.”
“그럼 이건 돼, 안 돼. 나 치킨 하나 먹여 줘 봐. 아.”
들고 있던 포크를 놓은 현규진이 유원의 자리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여 입을 벌렸다. 뭘
하려고 그러나 싶어 경계하듯 바라보던 유원이 치킨 하나를 포크로 찍어 현규진의 입에 넣어
주었다.
“역시 자기 밖에 없다, 사랑해. 이런 건 돼, 안 돼?”
“당연히! 안 돼.”
“뭐 안 되는 게 이렇게 많아. 그럼 자기야 이건 하게 해 줘. 이건 전부터 한 거잖아. 인정할 건
해야지.”
“…알았어. 대신… 이상한 뉘앙스로 말하는 건 안 돼.”
“난 태어나서 여태까지 이상한 말을 해 본 적이 없거든.”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한 유원이 치킨 반 조각을 입에 넣었다.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게
귀여워 볼록한 볼을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참아야 했다. 유원의 볼을 만지는 대신
치킨을 하나 더 입에 넣은 현규진이 메모 앱에 한 줄을 더 추가했다.
자기야 소리는 해도 됨. (정유원이 완전 허락해 줌)
제가 뭐라고 적는지 궁금한 얼굴로 들여다보는 유원이 지나치게 귀여웠다. 아, 이건 좀 심한데.
유원의 앞으로 휴대폰을 돌려 놓은 현규진이 가만히 유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 이것도….”
“이거 뭐. 이것도 싫으면 귀엽질 말던가.”
“…이상한 말 금지.”
“귀엽다는 게 이상한 말이야?”
“이상하지이…. 너 최해영 귀엽다고 생각한 적 있어?”
“자기야, 나 욕할 뻔했어.”
“…김준재는?”
“이거 뭐 인내심 테스트 그런 거야?”
최해영과 김준재를 귀엽다고 생각하다니…. 도대체 이게 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다.
그런 예시를 듣기만 해도 먹던 치킨을 다 던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거봐. 다른 애들한텐 그런 생각 안 하는데… 나한테는 한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상한
거지.”
“아니, 그게 왜 이상한 거야. 너만 귀여우니까 너한테만 귀엽다고 그러지. 난 세상에 귀여운 게
너밖에 없어.”
“…진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아, 억울하네, 진짜. 이거 지금 갑자기 생각한 게 아니라 원래 그랬거든? 아니, 자기가 귀엽게
생기질 말던가. 귀엽게 생겨 놓고 나한테 귀여워 하지 말라 그러면 진짜 나만 억울하지.”
귀엽다는 얘기를 계속 듣다 보니 정말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유원은 그냥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것도 그냥 현규진이 하고 싶은 대로 둘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알았어. 머리 만지는 건 해도 돼.”
허락을 받아낸 현규진이 웃으며 유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맞춰 쿵쿵
뛰는 심장 소리에 유원은 1 초 만에 허락한 걸 후회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어
그냥 가만히 심장박동을 숨기려 애썼다.
“또 뭐 추가할 거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난 저거 잘 지킬 거 같은데 넌 잘 안 지킬 것 같아….”
“와, 또 억울하게 한다. 어떻게 하면 믿을래? 어기면 뭐 벌금 내면 돼? 하나 어길 때마다 10 만
원씩 입금하기. 오케이?”
“음…. 좋아.”
어차피 돈 존나 많아서 괜찮아. 현규진은 제 마음이 보이지 않도록 숨기며 진지하게 휴대폰
화면을 두드렸다. 그런 현규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유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하듯
물었다.
“돈 많다고 그냥 막 하고 돈 주면 안 돼. 세 번 고의로 그러면 아웃이야.”
뭐야, 어떻게 알았어. 제 속을 그대로 읽은 유원을 놀랍다는 듯 보던 현규진이 얼른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들킨 건 어떻게 보면 저한테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현규진은 그냥 이 상황 자체가 좋았다. 제가 유원에 대해 다 아는 만큼 유원도 저를 잘
알고 있기에 나온 말이라는 걸 아는 이유였다.
제가 할 행동이나 말, 그리고 생각까지고 유원이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좋아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아, 꼴리는데…. 제 머릿속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유원의 시선이
온몸을 오싹하게 했다. 이런 작은 생각까지 들여다본 유원이 제 온몸을 채우다 못해 줄줄
흐르는 이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마 다 보이는데 필사적으로 안 보이는 척을
하고 있겠지.
“얼른 약속해.”
귀엽게도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유원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건 현규진이
조여드는 손가락의 느낌과 동시에 꽉 조이는 아랫배의 울렁임을 느끼며 입술 안쪽 점막을 꽉
깨물었다.
“안 되겠다. 하나 추가하자, 진짜. 정유원 귀엽지 말기.”
고개를 저은 현규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두드렸다. 갑자기 또 왜 그러나 싶어 몸을
앞으로 내밀어 고개를 기울인 유원이 제 눈앞으로 다가오는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확인했다.
정유원 귀엽지 말기 (꼴려서 위에 안 한다고 한 거 싹 다 존나 하고 싶어짐)
역시나 괄호 안에 길게 써 둔 말을 보고 당황한 유원이 얼른 문장을 삭제했다. 톡톡, 톡톡톡
딜리트 키를 눌러 글자를 지우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은 잔뜩 억울한 얼굴을 했다.
“뭐야. 자긴 하지 말라는 거 많으면서 나는 왜 못 쓰게 해.”
“넌 너무 말도 안 되는 것만 말하니까.”
“내가 또 봐준다. 내가 정유원 안 봐주면 누가 봐주냐. 그럼 앞으로 뭐 추가할 거 있으면
여기다가 추가하는 걸로 하고. 메모 이거 너랑 공유할게. 내가 공유하면 네 메모에도 이거 떠.”
“정말? 신기해.”
“공유했으니까 네 폰 봐 봐.”
얼른 휴대폰 기본 메모 앱에 들어가니 정말 현규진이 조금 전 적은 문구가 적힌 페이지가 생겨
있었다. 신기한 듯 이것저것 만져 보다가 고개를 드니 어느새 현규진이 옆으로 와 가까이 앉아
있었다.
“…왜?”
“이거 내일부터 하는 거 맞지?”
“응…. 네가 내일부터 하자면서, 친구우….”
“응. 내일부터. 그럼 오늘은 이거 안 지켜도 되는 거잖아.”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밀어 놓은 현규진이 얼굴 공격이라도 하듯 턱을 괸 채 싱긋 웃었다. 봐,
유원아. 나 잘생겼지. 너 내 얼굴 좋아하잖아. 너도 나랑 하고 싶지.
친구 사이 고백 금지-78 화(78/127)

78


“안 지키고… 뭐 할 건데….”
“키스?”
“…그건… 많이 했잖아…. 아까도 하고, 그때 학교에서도 하고….”
“무슨 소리야. 난 너 볼 때마다 하고 싶거든.”
“그런…! 말도 금지야.”
“내일부터 지킬게, 내일부터.”
유원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앉은 현규진이 곤란한 듯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는 유원의 뺨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말랑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워 아예 감싸 쥐고 싶어졌다.
“아, 귀 만지지 말라는 게 이런 거 말하는 거야?”
유원의 한쪽 뺨을 커다란 손이 감싸자 손가락이 그대로 귀를 뒤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귀 끝을
넣기도 하고, 마디를 구부려 귓가를 톡 건드리니 뺨부터 귀, 목덜미가 빨개지는 게 보였다.
“이렇게만 안 만지면 돼? 아니면 이것도?”
뺨을 감싼 손을 떼고 엄지와 검지로 귓불을 쥐고 살짝 문지른 순간 유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둘 다….”
대놓고 부리는 수작에도 그게 수작인 줄 모르고 순순히 대답해 주는 유원은 꼭 천사 같았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현규진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눈을 맞췄다.
“네가 해 볼래? 키스.”
“…내가?”
“이제 내일부터는 못 할 거 아냐. 마지막 기회야.”
“…그렇다고 꼭… 할 필요는 없잖아.”
“기회 날린 거 생각날 텐데. 아쉬워서 너 운다, 이제.”
“안 울어. 그렇게 하고 싶으면… 막… 옷 안에 손 넣는 게 습관 될 만큼… 많이 해 본 그 사람이랑
가서 해.”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아까처럼 조금 뚱해진 유원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현규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아까 제가 교복 셔츠 안으로 손을 넣으면서 했던
말을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유원, 질투하네?”
“…아니야. 질투는 아니고….”
“응, 질투는 아니고.”
“…그냥 기분 나빠.”
아, 씨발. 진짜 귀여워 죽겠네. 역시 정유원과 친구라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반드시
다시는 친구의 치읓도 나오지 않게 만들고야 말겠다 다짐한 현규진이 유원의 손을 잡아
손등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했다.
“그거 그냥 말이 이상하게 나온 거야. 내가 너 아니고 그런 걸 누구랑 또 해.”
“…….”
“방학 때 꿈에 너 존나 나왔거든.”
“…….”
“그때마다 내가 너한테 그렇게 했어. 손 막 바지 안까지….”
“아, 알았으니까…! 말하지 마….”
숨길 수도 없게 새빨개진 유원을 보고 식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웃은 현규진이 다시 고개를
들어 그 예쁜 얼굴을 가득 눈에 담았다. 유원을 보지 못하는 찰나 조차 너무 시간이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눈은 왜 깜빡여야 하지. 잠은 왜 자야 하고. 우리는 왜 떨어져 살지? 그냥 같이
태어나서 쭉 같이 살걸.
“아무튼 마지막 기회야. 이러다 진짜 친구 되면 그땐 못 해.”
“…이건 궁금해서 묻는 건데….”
“응.”
“…진짜 친구로 다시 돌아가면 널 봐도 안 떨리겠지?”
유원의 눈이 어쩐지 조금 속상해 보였다. 더는 떨리지 않게 되는 날을 기대하고 희망하는 눈이
아니라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가 됐다. 저는 누구보다 유원이 저와 친구가 되지
못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니까. 태어나 처음으로 유원의 반대쪽에 선 기분은 몹시 이상했다.
현규진은 가만히 유원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넣어 쥐었다.
“응. 이렇게 손 잡아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전에는 그랬잖아.”
“…….”
“전에 나 좋아하기 전에 내가 손 잡으면 어땠어?”
“…따뜻했어.”
아무 느낌도 없었어, 하나도 안 떨렸어,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 예상한 대답과 너무도
다른 결의 답이었다.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해. 어떤 순간에도 내가 예상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하고 따뜻해서. 널 보고 있으면 나도 널 따라 따뜻해지거든.
“머리 만지면?”
“기분 좋아. 꼭… 늦잠 자고 일어났을 때 같아.”
천천히 유원이 머리칼을 쓰다듬던 현규진이 조금 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가 머리를 쓰다듬을 때 이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기에 그 말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또 간지러웠다. 두 눈으로 목소리를 그리고, 두 귀 안으로 들어간 말을
마음에 꽉 가둔 채 아주 깊은 곳까지 살펴보고 싶었다.
“늦잠 자고 일어나면 많이 잤는데도 더 자고 싶잖아. 몸에 힘도 잘 안 들어가고…. 그런
기분이야. 더 자고 싶어져.”
“그럼 얼굴 만지면 무슨 생각했어?”
“얜 내 얼굴이 무슨 떡인 줄 아나.”
마찬가지로 간질간질한 답이 이어질 거라 예상했는데 갑자기 튀어나오는 귀여운 진심에
그대로 웃음이 터졌다. 현규진은 식탁에 엎드린 채 어깨까지 들썩이며 한참을 웃었다. 아, 진짜
너무 귀여워서 눈물이 다 났다.
“그래, 떡인 줄 알았다. 찹쌀떡인 줄 알았는데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너 때문에 진지한 분위기 다 깨졌어.”
“뭐야, 왜 나 때문이야. 너 때문이지. 잘 나가다가 갑자기 떡 소리한 게 누군데.”
“네가 물어봤잖아.”
“아직 안 물어 봤는데.”
“으….”
말장난을 치며 볼을 깨물 것처럼 윗니 아랫니를 딱 소리가 나게 붙이자 유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유원의 얼굴을 잡은 현규진이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기울여
찹쌀떡처럼 보들보들한 볼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떡 맞는데? 맛있어.”
“변태 같은 소리 하지 마.”
“야…. 그래도 변태는 좀 너무했다. 내가 찐 변태 잡으려고 진짜 존나 얼마나 힘들었는데….
나한테 변태라고.”
상처 받은 척 몸을 뒤로 물린 현규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운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던 유원이
살짝 고개를 기울여 그 얼굴을 살폈다.
“…삐졌어?”
“응.”
“그럼… 변태는 취소….”
“…이미 다 들었는데 취소한다고 되나.”
“…어떻게 해야 풀려?”
“뽀뽀.”
말하고도 혼날 것 같아 슬쩍 유원의 눈치를 본 현규진이 장난이라는 걸 밝히려 고개를 든 순간
유원이 가까워졌다.
어?
초옥…. 입술 위로 닿는 간지러운 따뜻함이 먼저, 그리고 그다음이 귓가에 울리는 달착지근한
소리였다. 그리고 눈앞에는 온통 분홍색인 유원이 있었다.
아…. 어떡하지.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앞까지 새하얗게 변했다가 점점 색을 찾았다.
제 안에 있는 것들이 전부 유원에게 빨려드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좋아질 수가 있는 걸까.
내일부터 친구로 곁에 있어야 하는데 진짜 어떻게 하지.
나를 이루는 모든 게 다 널 좋아한다고 이렇게 소리치는데 어떡해, 유원아.
“…이제 됐지….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한 거야. 그리고 그래야 네가 화 풀린다니까….”
“정유원.”
“…….”
“너 진짜 존나 예뻐.”
“…….”
“내가 다시 네 진짜 친구가 돼도 이건 안 변할 거야.”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어떻게든 한 번 더 유원과 깊게 닿고 싶어 안달이 났었는데 이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겨 버렸다. 현규진은 조금 전 유원이 했던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
유원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부드럽게 눌렀다가 떼었다. 혀가 문질리지 않아도 충분히
따뜻하고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
“나 변태 맞아. 그러니까 미안해할 거 없어. 삐진 척 쇼한 거야.”
“씨이….”
“와, 씨, 씨, 욕하는 것 봐. 깡패다, 깡패. 그 핑계로 뽀뽀도 잘해 놓고, 왜.”
“너 얼른 이제 집에 가.”
“싫어. 배고파. 이거 다 먹고 갈래.”
치킨을 한 조각 들어 입에 넣은 현규진이 씩 웃었다. 뚱한 얼굴로 보던 유원도 절대 이길 수
없는 그 장난스럽고 잘생긴 얼굴에 푸스스 웃어 버렸다.
친구가 되기 하루 전. 아직도 너무너무 많이 좋아하는 현규진.
유원은 많이 웃고 또 내내 저를 바라보는 그 얼굴을 가득 눈과 마음에 담았다. 불쑥 한 번씩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은 조금 김이 빠진 콜라 안으로 숨긴 채.
***
시리얼을 먹은 현규진이 양치를 하고 나와 테이블 위 바구니에 놓인 엄마가 직접 만든 쿠키를
몇 개 집어 들었다.
“엄마, 나 이거 가져갈게. 정유원 주려고.”
“어머, 너 유원이랑 화해했어? 유원이랑 드디어 학교 같이 가는 거야?”
“안 싸웠다니까.”
“너무 잘됐다. 뭘 얼마나 잘못해서 유원이가 그렇게 화났던 거야? 사과는 제대로 했어?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똑바로 사과해. 원래 친할수록 분명하게 사과할 건 하고, 잘못한 건
인정을 하고 다시는 같은 일 안 저질러야 관계가 오래가는 거야.”
아예 제가 잘못해서 그동안 사이가 벌어졌을 거라고 확신을 하며 잔소리를 줄줄 늘어놓는
엄마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현규진이 교복 재킷 주머니에 포장된 쿠키를 넣고 현관으로
나섰다. 이럴 때 보면 제 엄마인지 정유원 엄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당연히 내가 잘못했을 거라 생각해?”
“그럼 유원이가 잘못했겠어? 그 착하고 바른 애가?”
“네네, 저만 못되고 삐뚤어졌습니다. 삐뚤어진 김에 그냥 제대로 탈선 루트 타야겠다.”
“현규진.”
“엄마, 빠이.”
제대로 혼날 것 같아 씩 웃으면서 유원처럼 인사한 현규진이 집을 나섰다. 하여튼 엄마는 저만
보면 잔소리였다. 잔소리 쩔게 하기 이런 강의를 들으러 다니는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좀 웃겨 숨을 쉬듯 웃은 현규진이 휴대폰 전면 카메라를 켜 제
얼굴과 머리를 살폈다.
얼굴이야 늘 합격, 머리도 합격. 자기 전에 푸시업 백 개를 하고 자서 몸도 딴딴하니 모든
면에서 합격 딱지가 주어졌다. 정유원도 이걸 다 알아 주면 좋을 텐데.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운 현규진이 6 층에 멈춰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보이는 유원을 보며 웃음 지었다.
“와, 학교 가는 정유원 존나 오랜만.”
“하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엘리베이터에 타는 유원을 귀여워 죽겠다는 듯 보던 현규진이 1 층
버튼을 누르고 가방을 가져가 어깨에 걸쳤다.
“선물.”
교복 재킷 주머니를 탁탁 두드리자 유원의 손이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곧 바스락대는
소리와 함께 초코칩이 잔뜩 든 쿠키가 밖으로 나왔다.
“와아, 이모 쿠키. 진짜 오랜만이다.”
“나보다 쿠키가 더 반갑지.”
“당연하지이. 넌 어제도 봤잖아.”
“꿈에서는 안 봤어?”
커다란 몸을 구부려 얼굴을 가까이 대는 현규진을 보며 움찔한 유원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쿠키 포장지를 열었다.
“…그런 말도 금지.”
“아니, 뭐 말을 하지 말래. 친구끼리 꿈도 꿀 수 있지. 너 전에 계속 맘대로 내 꿈 꾸고
그랬잖아.”
“너… 방금 그 말도 예전에 있던 일 간접 언급이나 마찬가지야. 경고야, 옐로카드.”
“아침부터 개억울하다, 진짜.”
과장을 조금 보태 얼굴 만한 초콜릿 쿠키를 반만 꺼내 들고 오도독 먹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유원을 따라 내린 현규진이 억울함을 계속 토로했지만, 유원은 받아 주지 않았다. 그저
달콤하고 맛있는 쿠키를 조금씩 먹으며 학교를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야, 귀여우면 다냐.”
“…경고 두 개.”
“와. 진짜 무슨 말을 못 하게 하네. 그래, 안 한다. 안 해. 내가 너랑 말하면 사람이 아니다.”
현규진은 정말 교문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말하고 싶어 죽겠는데 유원이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참고 또 참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유원은 계속
쿠키만 먹었다. 현규진은 다른 쪽 주머니에 든 쿠키를 손으로 쥐며 그냥 확 부셔 버릴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냥 놔두었다. 유원이 좋아하는 건 그게 뭐든 망가뜨릴 수 없으니까.
“이야, 화해했나 보네? 정유원이가 마음이 참 넓네. 깡패 또 받아주고.”
빨간 배턴을 들고 스트레칭을 하던 학생 부장이 나란히 교문을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고
오지랖을 부렸다. 목까지 올라온 너나 잘하라는 말을 삼킨 현규진이 유원과 함께 운동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원의 쿠키는 이제 아주 작아져 있었다.
끝까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계단을 올라 유원의 교실 앞에서 걸음이 멈추었다. 현규진은
마지막 쿠키 한 입을 입에 넣은 유원을 보다가 입술에 조금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 주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손가락을 딱 붙인 손을 들어 그 끝에 뽀뽀했다. 그리고 제
뽀뽀가 묻은 손끝을 유원의 뺨에 꾹 눌렀다가 떼었다. 놀란 유원이 얼른 현규진의 뽀뽀가 옮은
뺨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너, 너어…. 또 어겼어.”
“내가 뭘. 손 뽀뽀 금지는 없었는데.”
“키스… 안 하는 거 안에 그것도 다 들은 거지이…. 너 진짜 다 어겼어. 그리고 나랑 말 안 한다며
…. 말하면 사람 아니라면서.”
유원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현규진이 가방을 내려 유원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그리고 얼굴을 확
가까이 들이밀며 소곤댔다.
“나 사람 아냐. 이 얼굴이 어떻게 사람.”
씩 웃은 현규진이 제 뽀뽀가 묻은 뺨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유원에게 손을 흔들며 뒷걸음쳤다.
“간다, 2 교시 끝나고 매점.”
도망치는 현규진을 보고 한숨을 폭 내쉰 유원이 교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휴대폰이 진동했다. 유원은 화면에 뜬 은행 앱 알림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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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사이 고백 금지-79 화(79/127)

79


점심을 먹으러 가려고 교실을 나선 유원은 복도에 서 있는 현규진과 먼저 눈이 마주쳤다.
현규진은 몹시 짜증이 난 상태였다.
“미친놈들 조심해. 진짜 저 새끼들 왜 저러냐. 아, 쪽팔리게.”
고개를 젓는 현규진의 옆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웃고 있는 최해영이 보이고 또 김준재가
보였다. 두 사람은 손에 뭔가 들고 있었다. 유원의 시선도 그 손에 들린 종이로 향했다.
A4 용지 다섯 장 정도를 조악하게 이어 붙인 종이 위에는 ★경★현규진♥정유원 부부 재결합!
★축★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최해영과 김준재가 양쪽에서 종이를 잡고 우는 시늉을
하는 것도 모자라 민지훈이 매점에서 파는 사탕 꽃다발을 들고 와서 유원에게 내밀었다.
이윤성까지 섭외한 건지 옆에 서서 박수를 치고 있는 걸 본 현규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유원 대신 사탕 꽃다발을 받아 민지훈의 얼굴로 던지려다가 그 안에 든 사탕이 유원이
좋아하는 맛이라 그냥 유원에게 주었다.
“자, 기념 촬영이 있겠습니다. 플래카드 드신 친구분들 우리 소중한 부부님 뒤로 가서 서
주실게요.”
“지랄을 해라.”
현규진이 뭐라 하든 A4 용지를 팔랑이며 온 최해영과 김준재가 두 사람의 뒤로 섰다. 하지만
현규진의 키가 너무 커 그 머리 위로 종이를 올릴 수 없어 성질을 부렸다.
“아, 키 존나 커서 안 보이잖아. 이거 너네가 들어.”
“돌았냐? 그딴 걸 들게?”
버티는 현규진과 성의를 봐서 들어 달라는 애들의 대립을 보던 유원이 슬쩍 현규진의 교복
재킷 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그 작은 흔들림에도 유원을 느낀 현규진은 얼른 몸을 돌려 저를
찾는 부름에 응했다.
“그냥 사진 얼른 찍고 밥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배고파? 알았어.”
유원에게는 조금도 인상을 쓰지 않고 말하는 현규진을 보며 최해영이 혀를 찼다. 그 소리를
향해 홱 몸을 돌린 현규진이 정말 아무리 봐도 조악하기 그지없는 종이 나부랭이를 빼앗아
유원과 나누어 들었다.
“자자, 부부님 여기 보시고요. 네, 아주 좋습니다.”
“씨발, 빨리 안 찍어?”
“아, 우리 사장님 성격 너무 안 좋으시다. 같이 살기 쉽지 않으시겠어요.”
“그만 살게 해 줄까?”
“네네, 찍습니다.”
조금 더 지체하고 놀렸다가는 진짜 아작이 날 것 같아 몸을 사린 민지훈이 찰칵찰칵 사진을 두
장 찍었다. 현규진은 정말 금방이라도 저를 죽일 것처럼 보고 있는데 화면 속 유원은 이것도
사진이라고 손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자그마해서는 현규진이 힘을 조금만 실어 밀어도
날아가게 생겼는데 도대체 어떻게 현규진을 조련하는 건지 정말 궁금했다.
“야, 이제 됐지.”
들고 있던 종이를 완전히 구겨 최해영의 품으로 던진 현규진이 유원의 어깨를 감쌌다. 유원이
놀라는 게 느껴졌지만, 팔을 풀지는 않았다. 손가락이 닿은 어깨 끝에서 저를 향한 유원의
마음이 느껴졌다.
두근두근. 이 떨림은 내 손끝으로 옮겨간 내 심장의 소리일까. 아니면 네 어깨로 옮겨간 네
심장의 울림일까. 그 어느 쪽이어도 기분 좋은 대답을 머금은 질문이 현규진의 머리를
두드렸다.
***
“뭔데.”
“뭐 어떻게 화해한 건데. 어떻게 하루 만에 이래? 무릎 꿇었냐.”
“멍유 완전히 화 풀린 거 보면 머리 박은 거 아님?”
방학 내내 언급도 안 하고, 새 학기 시작한 다음에도 데면데면하게 굴다가 갑자기 전처럼
지내는 걸 보니 아무래도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현규진은 미친놈들처럼 제 앞에서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최해영, 김준재, 민지훈의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야, 좀 꺼져라. 씨발. 면상 치우라고. 점심시간 5 분 남았는데 반으로 안 가냐?”
“안 가도 되니까 말해 봐. 멍유가 조폭 사서 협박했냐?”
“생각하는 수준 봐라.”
혀를 차고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려 앉는 현규진을 따라 고개를 들이민 최해영이 볼멘소리를
냈다.
“아니, 이해가 안 가니까 그런 거잖아. 분명히 멍유 존나 화난 얼굴이었다고. 현규진 따위 절대
다시 상대도 안 할 그런 얼굴이었는데.”
“정유원이 나 존나 사랑해서 그래.”
친구들은 현규진이 사랑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때마다 진짜 못 견디겠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걸 알기에 현규진은 오늘도 한마디로 모여 있는 놈들을
해산시켰다. 뭐 물론 그게 진짜 이유이기도 하고.
“물은 내가 병신이지.”
“그걸 이제 알았냐. 꺼지세요.”
김준재와 민지훈이 속이 안 좋다는 듯 배를 부여잡고 교실을 나섰다. 최해영도 오버해서
비틀대며 본인의 자리로 향했다. 그제야 조용해져 만족스러운 숨을 내쉰 현규진이 휴대폰을
꺼내 유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보고 싶어]
진짜 보고 싶어서 보낸 것도 있고 괜히 놀라 두근두근하게 만들고 싶어 보낸 것도 있었다.
원래라면 늦지 않게 답이 올 텐데 읽은 다음에 답이 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걸 보니 또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는 모양이었다. 귀가 빨개졌을 유원을 떠올리니 몸에서 여유라는 것이
전부 빠져나갔다.
[멍유원 : 좀 전까지 봤잖아]
[다른 반이라 빡쳐]
[난 너 계속 보고 있어야 좋은데]
[정유원 뒤통수 동글동글]
[정유원 선생 볼 때 볼 말랑말랑]
[멍유원 : 메모 확인]
유원이 당황할 말만 줄줄이 보내고 있는데 생각하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현규진은 톡을 나가
메모 앱을 열어 유원과 공유한 문서로 들어갔다.
“아…. 미친. 존나 귀엽네, 진짜.”
하면 안 되는 것들을 쭉 적어 둔 아래로 새로운 한 줄이 추가 되어 있었다.
친구 사이에 보편적으로 안 하는 말들은 하지 않는다. (예: 보고 싶어, 계속 보고 있어야 좋아
등등 현규진이 하는 말 대부분)
공유 기능을 알려 줬더니만 저 보라고 이렇게 적어 둔 걸 보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현규진은 그리 익숙하지 않은 감정을 끌어안은 채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책상 위로 비스듬히
엎드려 유원이 적어 둔 문장 아래로 뭔가를 적었다.
친구가 보고 싶을 수도 있지
친구 얼굴 계속 보고 싶을 수도 있고
친구가 너무 좋을 수도 있고
친구를 너무 사랑할 수도 있지 않나. 생각은 거기까지 미쳤지만, 이번엔 옐로카드가 아니라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을 당할 것 같아 거기까지는 적지 않았다.
회의 이따 다시 해
처음부터 진짜 꼼꼼하게 다시 다 정할 거야
빠이
유원이 적은 메시지를 보고 아예 얼굴을 팔에 파묻고 엎드려 웃은 현규진이 손끝으로 ‘빠이’
라는 글자 위를 살살 문질렀다. 꼭 말랑말랑한 유원의 볼을 짓주무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야 개이득이지. 나랑 같이 시간 오래오래 보내 주면.
응 이따 봐

교실 안으로 선생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슬쩍 고개를 들어 교탁에 서는 선생을 본 현규진의
시선이 휴대폰 화면 위로 떨어졌다.
아, 진짜 정유원 너무 좋아. 어쩌지.
현규진은 내내 유원이 적은 문장들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어떤 얼굴로 적었을지 알 것 같아
손끝이 저릿했다가 또 이걸 직접 적었을 걸 생각하니 귀여워 심장이 다 조여들었다. 아,
정유원. 정유원. 진짜 존나 좋아 뒤지겠네.
책상 위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함께 조금의 지루함도 없이 5 교시가 흘렀다. 제 모든 것을
채운 정유원, 그 이름과 함께.
***
종례를 마치자마자 유원의 반으로 간 현규진은 저와 비슷하게 끝나 나오는 유원에게
인사하고 가방을 가져와 어깨에 걸쳤다. 같이 맛있는 저녁을 먹으려고 전에 유원과 종종 갔던
갈비 정식을 파는 가게 예약도 해 놓고 그걸 먹고 갈 카페까지 다 알아봐 두었다. 유원이 나올
때 교실에서 같이 나온 이윤성이 저도 끼고 싶다는 눈으로 저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현규진은
아주 쉽게 그 눈빛을 무시한 채 고개를 기울여 유원의 얼굴만 두 눈 가득 담았다.
“전에 우리 갔던 석갈비집 예약해 놨어. 너 그거 좋아하잖아.”
“아, 거기 맛있는데.”
“그거 먹고 딸기빙수 먹자. 거기 옆에 유명한 데 생겼대서 거기도 예약함.”
“딸기빙수 맛있겠다아.”
생각만 해도 좋은지 미소 짓는 유원의 말랑말랑해 보이는 볼을 보던 현규진이 계단 쪽으로
가며 살짝 꼬집었다.
“사진 보니까 떡도 주던데 떡 모자라면 이거 먹으면 되겠다.”
“너어…. 또.”
“왜. 진짜 먹을 수도 있잖아.”
진짜 깨물 것처럼 다가오는 현규진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은 유원이 하지 말라는 듯 현규진의
볼을 잡은 채 흔들었다.
“누가 친구 볼을 잡고 막 흔들어. 너무 야한데?”
“미쳤나 봐, 진짜. 입만 열면 이상한 소리 해.”
“좋아서 그래.”
“…그런 말도 사실 하면 안 돼. 이따 진짜 자세하게 하나하나 다시 다 쓸 거야.”
“아니, 좋은 게 왜. 넌 안 좋아? 난 좋은데. 너랑 다시 말도 하고, 학교도 같이 다니고, 저녁
먹으러도 다시 같이 가는 거.”
“…그건… 나도 좋아….”
“솔직하니까 좋잖아.”
칭찬하듯 유원의 머리칼을 쓰다듬은 현규진이 계단을 내려가며 유원에게 집중했다.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을 땐 최대한 장난을 자제하고 유원을 살펴야 했다.
“아무튼…. 이따 다 다시 쓸 거야. 그리고 아까 메모에 막…. 쪽… 이런 것도 썼던데 다음부터는
안 봐줄 거야.”
“아, 진짜 빡빡하시다.”
현규진은 운동장으로 걸음을 옮기며 휴대폰을 꺼내 톡에 연결이 되어 있는 은행으로 들어가
숫자를 톡톡 찍었다. 그리고 보내는 사람 이름을 바꿨다. 비밀번호 여섯자리까지 누르고 나니
유원이 휴대폰을 꺼내 진동을 확인했다.
[입금] 온라인뽀뽀비 100,000 원
어이가 없는 것 반, 솔직히 조금 웃긴 것 반이 뒤섞인 웃음이 작게 터졌다. 유원은 휴대폰을
들어 현규진의 눈앞에서 붕붕 흔들었다.
“이게 뭐야…. 내가 너 이럴 줄 알았어. 돈 많다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어겼다고 하면 돈 보내
버리고…. 이러면 어제 서로 안 하기로 한 거 정한 이유가 없잖아. 우리 이러면… 친구 되기도
힘들어.”
“나 엄청 참는데.”
“뭘….”
“생각해 봐. 어차피 벌금 내면 되니까 다 어겨야지! 하는 거면 이런 거 어기겠어? 키스 한 시간
씩 열 번 하고 백만 원 써 버리지.”
조금 과장된 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현규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벌금을 낼 거면 제대로
조항을 어기고 내는 게 나은 일인데 딱히 그 큼직한 조항을 완전히 어기는 일은 하지 않고
있었다. 키스를 한다거나 귀 같은 곳을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진다거나 하는 그런 걸 안 하는
것만으로도 쪼끔 대견하긴 했다.
“뭐어…. 그렇긴 하네.”
“그렇다니까. 나 지금 엄청 노력하는 중이거든. 그러니까 혼만 내지 말고 나 좀 예쁘게 봐 줘.
너 원래 나 예뻐 죽었잖아.”
커다란 애가 몸을 숙여서 예뻐해 달라고 애교를 부리는데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현규진의 얼굴과 애교에 자꾸 넘어가면 안 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이걸 그냥 모른 척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현규진을 알고 지내온 모든 시간 동안 내내 이 애교에 녹는 삶을 살아 그런지
어쩔 수가 없었다.
“…예쁜 짓 하면.”
손을 든 유원이 현규진의 뺨을 살짝 톡톡 두드렸다. 그 간지러운 스킨십에 힘을 얻은 현규진이
횡단보도 불 바뀌기를 기다리며 선 유원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고 어깨 위로 턱을 올렸다.
“이러면 나 예뻐?”
친구 사이 고백 금지-80 화(80/127)

80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고 두 팔이 허리를 스치며 다가와 꽉 한 번 안았다가 스르르
풀리는 느낌에 유원의 몸이 뻣뻣해졌다. 고개를 숙이자 배 위에 겹쳐 있는 현규진의 커다란
손이 보였다. 손가락끼리 꽉 마주 물려 있던 손가락과 등 뒤로 닿는 따뜻함에 달아오른 숨이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흘렀다.
“아, 이거 아닌가 보네.”
유원이 뭐라 반응을 보이기 전에 먼저 현규진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배 위에 맞물려 있던
손가락도 풀리고 등 뒤로 닿던 온기도 멀어졌다. 유원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서서
그저 장난기가 묻은 얼굴로 웃는 현규진과 눈을 맞췄다. 평소, 그러니까 제가 현규진과 아주
긴 시간 함께 지내며 마주한 그 일상과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혼자 이상한 건 저
하나 뿐이었다.
침착해야 해. 그냥 현규진은 예전에 하던 대로 하는 거잖아.
심호흡한 유원이 횡단보도를 건너며 흘끗 현규진의 얼굴을 살폈다. 현규진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유원은 화끈화끈한 귀를 손바닥으로 덮은 채 현규진 몰래 몇 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것을 반복했다. 얼른 이 달아오른 마음을 숨길 수 있게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아…. 아빠랑 학원 두 군데 알아봤는데 모레 같이 가 볼래? 내일은 과외라 시간 없을 것 같고
….”
“아, 학원. 응. 같이 다니기로 했잖아. 나 끼워 주는 거 맞지?”
“무슨 말이 그래. 같이 다니는 거지. 끼워 주고 안 끼워 주고 그런 게 어디 있어.”
“혹시 뭐 이윤성 학원 옮기거나 그러는 건 아니지?”
“윤성이는 다른 학원 이미 다니는데 뭐. 거기 마음에 든다던데.”
“그래? 존나 잘됐다. 걔 좀… 뭔가 싫던데. 계속 쳐다보고. 뭐 같이하자 그러고.”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나한테도 네 얘기 많이 해.”
“질투 안 나?”
저 앞으로 보이는 백화점을 향해 걷던 유원이 질투라는 말에 작게 웃음 지었다. 솔직히 이런
일에 질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다 같이 친해지면 좋지, 뭐.”
“그러다 나 뺏긴다?”
“또 이상한 소리.”
“아, 정유원 자신감 쩐다, 진짜. 당연히 자기 거라 이거지. 뺏길 일이 없다 이거야. 근거 있는
자신감. 인정.”
현규진의 팔을 아프지 않게 때린 유원이 어느새 가까워진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현규진이 예약했다는 석갈비 집은 쇼핑몰 꼭대기에 있는 아주
인기가 많은 식당이었다. 맛있게 구운 갈비를 뜨거운 돌판에 올려 솥밥과 함께 주는데 아주
맛있어 고기가 먹고 싶을 때면 현규진과 들르곤 했다. 한동안 연락도 안 하고 지내느라 여기를
같이 가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예약했는데요.”
“예약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현규진이요.”
“아, 현규진 님. 두 분 예약 맞으시죠? 안내해 드릴게요.”
유원은 예약자 확인을 하는 현규진의 얼굴을 몰래 바라보았다. 저와 얘기할 때와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 현규진은 참 많이 달랐다. 별로 살가워 보이지도 않고, 또 다정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 차이를 느낄 때마다 때때로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좋았다. 저만을 위한 다정함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자리 마음에 들어?”
“응. 좋아.”
매장 안을 깔끔하게 나누어 각자 오붓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자리 배치를 해 둔 데다가 한쪽
벽면이 다 창으로 되어 있어 답답하지 않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유원은 늘 현규진과 함께
먹던 돌판구이 2 인 정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먼저 나온 제로 콜라를 컵에 쪼르륵 따랐다.
“학원 말이야. 너는 평일이랑 주말 언제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음…. 주말까지 가는 거 싫긴 한데 뭐 고 3 이 그런 거 싫어해도 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평일엔
과외도 하니까 좀 애매하지 않나.”
“응, 나도 그럴 것 같아. 평일엔 과외 하루 늘려서 월, 수, 금 이런 식으로 하고 주말에는 이틀
학원 집중하는 거 어때? 학원 수업 시간이랑 다 정리해 놨는데 집에 가서 보내 줄게.”
“막 스파르타 집중반 이런 거 아냐? 새벽에 갔다가 새벽에 끝나는.”
현규진의 말에 웃은 유원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도 있긴 한데 그렇게 하면 너무 힘들 것 같고 오히려 거부감 생길 것 같아서 오전 네
시간, 오후 네 시간 정도? 학교랑 비슷한 걸로만 골랐어. 혼자 공부할 시간도 필요하니까.”
아, 미친. 주말까지 학원에서 오전 네 시간, 오후 네 시간.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불탔다. 하지만
유원과 붙어 있을 수 있고, 또 고 3 이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하면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다섯 시쯤 끝나면 같이 저녁도 먹을 수 있고, 또 밤에는 좀 쉬거나 같이 공부할 수도 있잖아.”
“난 너 좋으면 다 좋아.”
“그래도 같이 다니는 건데 너도 좋아야지.”
“좋아.”
손을 뻗은 현규진이 식탁 위에 놓인 유원의 검지 끝을 톡 건드렸다. 그 작은 닿음에도 놀라
손가락을 오므리는 유원을 보니 마음 안에서도 탄산이 톡톡 터졌다.
“정유원, 표정 봐. 손끝 건드리지 말기 이런 것도 넣을 기세.”
“정답이야.”
“치사해.”
“치사해도… 어쩔 수 없어. 네가 그러면….”
어? 빨개진다. 괜히 식기를 손끝으로 건드리는 유원의 손끝과 목, 귀가 불그레 했다. 딸기
철이라 찹쌀떡 안에도 딸기를 넣었는지 제가 좋아하는 말랑말랑한 볼도 딸기 즙이 흘러나온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도 떨린단 말이야….”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콜라 안에서 탄산 뽀글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느껴질 만큼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 작은 소리는 현규진의 마음으로 들어가 아주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귀여워
죽겠는 마음도 그 말과 뭉쳐 더 깊은 감정이 되고, 늘 머금고 있는 장난기조차도 단단한
감정이 되었다. 말하면 안 되는 걸 아는데 말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벌금 따위가
아니라 말하면 죽는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어도 기꺼운 마음으로 소리 냈을 것이었다.
“나도.”
“…….”
“나도 좋아해.”
마음이 부풀었다. 네가 좋아. 너무 좋아서 가만히 있는 것조차 너무 힘들어. 누구의 마음인지
주어가 필요 없는 똑같은 감정이 서로의 손끝까지 온기를 실어 보냈다.
여전히 좋아해.
모른 척해야 하지만, 사실은 가장 알고 싶은 마음을 확인한 달콤한 안도를 머금은 채.
***
학원은 주말 집중반으로 정해 등록했다. 토요일, 일요일 아침 8 시부터 오후 5 시까지
점심시간 한 시간을 제외하고 각각 50 분씩 여러 과목을 공부하는 반이었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만 있다고 들어갈 수 있는 반이 아니긴 했지만, 학원에서는 두 사람의 여러 조건을 종합해
보고 흔쾌히 입원을 허락했다.
월, 수, 금은 과외, 주말은 학원. 그리고 화, 목은 혼자 공부하는 것으로 정리를 했다. 말이 혼자
공부지 그것도 누군가의 집에서 같이 한다고 하면 완벽하게 일주일 내내 유원과 붙어 있을 수
있었다. 현규진은 꽉 찬 일주일의 계획에 몹시 만족했다. 저와 유원의 일상이 완벽히 일치하는
이유였다.
다리를 이제 쓸 수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좀 천천히 걷고 절룩이는 과외 선생도 다시 과외를
시작했다. 진짜 미안했다면서 방학 동안 풀어 둔 문제들을 보면서 3 월 모의고사 준비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고 3 이 되고 나서 보는 첫 모의고사이다 보니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본인의 체력보다 조금 더 써서 공부하는 유원이 걱정돼 현규진은 내내 그 옆을
지켰다. 공부를 하느라 그런 건데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으니 그냥 곁에서 영양가 좋은 걸
먹이고 혹시 아프진 않은지 컨디션 체크를 하며 나름의 방법으로 유원을 지켰다.
“오늘 공부 자습실에서 할 거야?”
“응. 집에 가니까 자꾸 침대 보여서 눕고 싶고 게을러져. 넌?”
“나도 하고 가야지. 아, 속은 괜찮아?”
“괜찮아. 신경성인가 봐. 요즘 좀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가…. 많이 아픈 건 아냐.”
“저녁 속 편한 걸로 먹자.”
“나 그거 먹고 싶어…. 백화점 지하에 파는 그 아보카도 김밥.”
머릿속으로 전에 몇 번 같이 먹은 적 있는 아보카도와 게살 마요 같은 것이 든 김밥을 떠올린
현규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얼른 가서 사 올게.”
“아니야. 너무 멀잖아. 갈 거면 같이 가서 먹고 오자.”
“거기 사람도 많아서 지하에 앉아 먹기 애매해. 택시 타고 가면 금방 갔다 와. 컨디션도 안
좋은데 교실에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어….”
고개를 든 현규진이 유원의 자리에서 두 개 대각선 뒷자리에 앉아 있는 이윤성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주자마자 어김없이 마주치는 눈에 묘한 짜증이 피었다. 저거 진짜 나 좋아하는 거 아냐?
언젠가부터 계속 저를 보고 있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꽤 컸다. 그게 아니면 훔쳐보는 게
좋은 변태거나.
“야. 너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어? 어….”
“나 김밥 사러 갈 건데 너도 먹을래? 그… 아보카도랑 게살이랑 뭐 그런 거 든 롤이랑 비슷한 거.
먹을 거면 네 것도 사 오고.”
“…정말? 나도 같이 먹어도 돼?”
“어어. 대신 나 갔다 올 동안 유원이랑 같이 좀 있어. 혹시 속 많이 아프다 하면 나한테
전화하고.”
“나 네 번호 모르는데….”
아, 그러네. 존나 알려 주기 싫은데. 아주 잠시 고민하던 현규진이 어느새 제 옆에 와서 서 있는
이윤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폰.”
그리고 손 위로 놓이는 휴대폰에 제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제 휴대폰에도
이윤성의 번호 흔적이 남았다.
“갔다 올게.”
“응. 혼자 가기 그러면 내가 같이… 갈까?”
유원에게 한 말을 스틸해서 대신 대답하는 것도 어이없는데 부여해 준 역할을 그새 잊고
헛소리를 해 대는 걸 듣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었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정유원 옆에 붙어나
있으라고 세게 말할까 고민하던 현규진이 다시 한번 인내심을 발휘했다.
“정유원 아프니까 좀 보고 있어. 부탁… 좀 하자?”
“응, 내가 유원이 잘 보고 있을게. 조심히 갔다 와.”
뭐래, 씨발. 왜 지가 인사하는데. 현규진은 아무 미련도 없이 이윤성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 앉아 저를 보고 있는 유원의 머리를 한 번 장난스럽게 꾹 눌렀다.
“하지 마아, 키 작아져.”
“하지 마. 키 작아져.”
유원이 하는 말을 똑같이 동시에 소리 낸 현규진이 웃으며 두 손으로 유원의 얼굴을 감쌌다가
놓았다. 그리고 이윤성에게 스틸 당한 인사를 유원에게 다시 건넸다.
“얼른 갔다 올게.”
“응. 빠이.”
“어, 빠빠이.”
씩 웃은 현규진이 교실을 나섰다. 얼른 유원이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게 해 주고 싶단 생각에
마음이 몹시 급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만, 현규진에게 그 말은 별로 큰 가르침을 주지 못했다. 급한데
왜 돌아가란 말인가. 급하면 빨리 가야지. 긴 계단을 거의 두 번에 나눠 내려가며 택시 앱을
열어 백화점 이름을 목적지에 적었다. 쉽게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가기에는 기본
요금 안 거리이고, 걸어가기에는 좀 애매하게 너무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다가 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 시간이라 더 그런 것 같았다.
2 분 거리에 있는 택시를 호출한다는 문구의 시간이 3 분으로 변하고, 나중에 8 분까지 가더니
결국, 호출할 택시가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현규진은 교문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계속 호출을
하거나 길에서 기다리면 택시를 잡을 수 있기는 하겠지만, 만약 8 분 거리에서 온다고 가정을
하면 빨리 와도 8 분이고 여태까지 당한 걸 봤을 때 10 분 이상 기다려야 택시를 탈 수 있다는
건데 그럴 거면 그냥 뛰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우두커니 택시가 잡히기를, 택시가 오기를 기다릴 시간에도 유원은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더는 머뭇댈 이유가 사라졌다. 현규진은 그대로 휴대폰을 꽉 쥔 채 백화점을 향해
달렸다.
저를 기다릴 정유원. 딱 하나이자 저의 전부인 이유를 위해.
친구 사이 고백 금지-81 화(81/127)

81


현규진을 기다리며 과외 숙제인 모의고사 기출 문제를 풀던 유원은 제 옆으로 와 앉아 학원
숙제를 하는 이윤성을 바라보았다. 꼼꼼하게 여러 색 펜으로 정리하는 걸 보니 감탄이 다
나왔다.
“윤성이 넌 진짜 정리 잘한다. 나중에 다시 봐도 하나도 안 헷갈릴 것 같아.”
“아…. 이렇게 해 둬야 나중에 기억이 나서. 다른 애들은 그냥 적어만 놔도 어떤 맥락으로 적어
둔 건지 기억이 난다는데 난 그게 기억이 안 나더라구.”
“나도 잘 기억 안 나. 갑자기 이런 말은 왜 적어 놨지? 싶고.”
“맞아. 전에 그래서 낙서인 줄 알고 지운 적도 있었어. 그런데 복습하다 보니 내가 포인트를
적어 둔 게 맞더라고.”
이윤성의 말에 웃은 유원이 저도 그런 경험이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유원을 본
이윤성이 아예 유원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근데 규진이는 원래 친해지면 저렇게 다 잘해 줘?”
“응?”
“그렇잖아. 네가 먹고 싶어 한다고 혼자 그거 사러 가기까지 하고. 보통 안 그러잖아.”
“아…. 규진이가 티를 잘 안 내서 그렇지 원래 엄청 다정해. 속도 깊고…. 그리고 내가 어릴
때부터 자주 아프고 한 거 아니까 걱정이 많아서 더 그래.”
“좋겠다….”
“뭐가?”
“규진이랑 친해서.”
직접적으로 쏟아져 나온 말에 유원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좋다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위로를 해야 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규진이가 좀… 친해지기 어렵지? 한 번 친해지면 깊게 친해질 수 있는데… 처음에 조금
친해지기가 어려워.”
“친해지게 도와주면 안 돼?”
“응? 아…. 그게 사실 내가 도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래도 점심도 같이 먹고 가끔 이렇게
저녁도 같이 먹고 하니까 친해질 수 있을 거야.”
“미안, 내가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해서.”
“아니야. 내가 도움 될 게 없어서 미안하지이….”
이윤성의 웃는 얼굴을 보니 괜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 현규진이
이윤성을 그리 호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크게 친해질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잘 아는 이유였다. 그렇다고 그걸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시 몸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유원은 작게 숨을 내쉬곤 아직
풀지 않은 다음 문제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머릿속엔 얼른 현규진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
15 분 정도를 쉬지 않고 달려 백화점에 도착한 현규진은 가쁜 숨을 고르고 지하 식품 코너로
내려갔다. 오늘처럼 그동안 운동을 빡세게 해 두길 잘했다고 생각한 날이 없었다. 아예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유원을 위해 이 정도 달려온 정도는 참을 만해 다행이었다.
눈에 익은 매대를 지나 여러 김밥과 롤을 파는 매대로 가 유원이 먹고 싶어 한 아보카도
김밥과 또 같이 좋아하는 새우튀김 롤, 이따 배고플 때 먹을 수 있는 참치마요 삼각김밥까지
맛있어 보이는 걸 몇 개 더 담아 계산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김에 유원이 좋아하는 병에 든
밀크티까지 산 현규진이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 층으로 올랐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택시가 잘 잡히지 않는 데다가 길이 꽉 막혀 있는 걸 보니 택시를 탈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현규진은 그대로 다시 학교를 향해 달렸다. 가는 길은 오는 길보다 더
쉬웠다. 유원에게서 멀어지는 길이 아니라 가까워지는 길이니까.
***
자습 때 풀 문제를 남겨 두고 이윤성과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교실 문이 열렸다.
유원은 쇼핑백 두 개를 들고 들어오는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이윤성과 단둘이 있는 게 불편한
건 아니지만, 역시 현규진과 있을 때처럼 마음이 편하고 좋진 않았다. 유원은 현규진의 등장에
깊은 안도를 느꼈다.
“왔어? 땀 좀 봐. 왜 이렇게 땀이 났어? 택시 안 탔어?”
“안 잡혀서 그냥 뛰어갔다 왔어.”
“그럼 그냥 다시 올라오지….”
“왔다 갔다 30 분이면 되는데 뭐.”
제가 앉아 있던 자리에 이윤성이 앉은 걸 본 현규진이 다른 쪽 옆으로 앉아 책상 위로 사 온
것들을 꺼냈다. 밀크티도 하나 꺼내 유원에게 먼저 주고 그래도 같이 먹을 걸 아는데 유원
것만 사기 뭐 해서 같이 산 이윤성의 몫도 전해 주었다.
“너도 밀크티 좋아해? 취향 안 맞으면 마시지 말고.”
“아냐, 나도 좋아해. 고마워, 규진아.”
“좋아하면 다행이고.”
현규진의 의례적인 군더더기 없는 말을 따라 이윤성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유원은 현규진을
바라보는 윤성의 반짝반짝한 눈을 보며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너 좋아하는 거 여러 개 샀어. 많이 먹어. 이윤성 너도 많이 먹어.”
별로 이런 인사를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유원에게 혼날
것을 알기에 현규진은 가장 의례적인 말을 골라 소리 냈다. 물론 그 안에는 아무런 의미도
담겨 있지 않았다.
“땀부터 닦아야겠다. 잠깐마안….”
몸을 기울여 가방 안에서 작은 휴대용 티슈를 꺼낸 유원이 한 장을 빼내 현규진에게 건넸다.
하지만 현규진은 손이 없는 것처럼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닦아 줘.”
“…너어….”
“응?”
이윤성의 눈치를 살짝 본 유원이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막고자 잠자코 현규진의 이마에
난 땀을 닦아 주었다. 티슈가 이마에 닿으면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고, 왼뺨에 닿으면 왼쪽으로,
오른뺨에 닿으면 오른쪽으로 따라 움직이는 게 귀여웠다.
“뛰었더니 진짜 존나 덥다.”
“다음부터는 그럴 때 가지 말고 그냥 올라와. 알았지?”
“네, 여보.”
“이상하게…! 대답하지 마.”
“응, 자기야. 얼른 먹어.”
젓가락으로 아보카도 김밥을 하나 들어 유원의 입에 넣어 준 현규진이 마음 가득 차오르는
만족감에 웃었다. 볼 한쪽이 꽉 차서 빵빵해진 채 꼭꼭 씹는 얼굴이 귀여워 딱 죽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창밖으로 뛰어내려 백화점까지 열 번 왕복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만큼 행복했다.
“맛있어?”
“응, 진짜 맛있어.”
볼이 빵빵해 ‘웅.’처럼 발음되는 게 귀여워 그냥 계속 얼굴만 보고 있게 됐다. 아예 턱을 괴고
유원의 얼굴을 감상할까 하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유원이 고개를 저었다. 눈치가 빠른
현규진은 옆에 이윤성도 있으니 적당히 하라는 의미라는 것을 빠르게 알아차리고 롤 하나를
들어 입에 넣었다.
“이윤성. 너도 입에 맞아?”
“응. 맛있다. 내 것까지 사다 줘서 고마워. 다음에는… 내가 저녁 살게.”
“어? 어… 뭐…. 그러던가.”
화색이 도는 이윤성의 얼굴을 본 현규진은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듯 저를 보고 있는 유원과
눈을 맞추며 눈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 현규진의 생각을 읽은 유원이 얼른 김밥 하나를
현규진의 입에 넣어 말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유원이 양껏 먹고 남은 것을 싹 먹어 치운 현규진은 뒷정리를 하고 먼저 간다고 교실을 나가는
이윤성에게 대충 인사했다. 그리고 유원과 함께 양치질을 하고 와 자습실로 향했다. 드디어
유원과 단둘이 있을 수 있어 좋았다. 고작 자습실까지 가는 단 5 분의 행복이지만, 그래도
좋았다.
“윤성이한테도 좀 잘해 줘. 아까 너무 나한테만 말하고 그래서… 좀 미안했어.”
“여기서 어떻게 뭘 더 잘해? 나 진짜 존나 잘해 줬는데 오늘. 밥 사다 줬지, 같이 먹었지,
밀크티도 사다 줘, 많이 먹으라고 말도 해, 잘 가라고 인사도 해. 진짜 쩔었는데.”
“그냥…. 나한테 하는 것처럼 좀 더 잘해 줘.”
“너한테 하는 것처럼? 그게 지금….”
말이 돼? 나오려는 말을 멈춘 현규진이 그냥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조금
궁금했다. 제가 유원에게 보이는 이 모든 말과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했을 때 유원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하고 제가 다른 사람에게 유원에게 하는 것처럼 할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제가 만약 다른 사람한테도 유원에게 하듯 대하면 유원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드디어
사교성이 생겼다고 좋아할까? 아니면 질투해 주려나. 정유원의 제대로 된 질투…. 상상을 해
보려고 해도 정확하게 맺히는 모습이 없었다. 살짝 질투 같은 모습을 보인 적은 있지만,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 유원은 그동안 제가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어릴 때는 제가 다른 애랑 논다고 엉엉 울기도 하고 저한테 집착하더니 크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이 사라졌다. 현규진은 가끔 유원이 어릴 때처럼 저를 독차지하고 싶어 안달이 나
엉엉 우는 걸 보고 싶었다. 물론 그러지 않을 걸 알고 있기에 그저 망상의 영역에만 둘
뿐이었다.
“그리고 아까 힘들었지. 말이 쉽지. 거길 뛰어서 왔다 갔다 하는 거 진짜 힘들었을 텐데….”
“칭찬해 줘, 그럼.”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본 유원이 현규진을 보며 얼굴을 내려 보라는 듯 손짓했다. 그에
기대에 가득 차 상체를 숙인 현규진이 눈을 맞췄다.
“진짜 고마워.”
머리 위로 유원의 손이 닿았다. 안 해 줄 것을 알면서도 내심 뽀뽀나 키스를 기대했는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도 그만큼이나 좋았다. 횡단보도를 건너 달리고 또 달려
백화점까지 갔던 그 순간 차오른 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정유원 넌 알까. 난 널
위해서라면 15 분이 아니라 150 분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다는 것을.
“힘들게 내려왔는데 뽀뽀 한 번 해 주라, 그냥. 쿨하게. 정유원 한다면 하잖아.”
“…얼른 다시 올라가. 감동 끝.”
“와, 차갑다, 차가워. 올라가라시니 올라갑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숙이고 있던 몸을 세운 현규진이 고개를 기울여 유원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살짝 제 머리로
밀었다. 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더니 제 마음을 어김없이 녹이며 사르르 웃는 얼굴이 예뻐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존나 예쁘다니까.
자습실로 향하는 걸음 뒤로 기다란 봄의 노을이 따라붙었다. 함께 걷는 길이 어둡지 않도록.
***
3 월 모의고사는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열심히 준비를 한 덕분에 꽤 괜찮은 결과를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꾸준히 해 온 게 도움이 됐다며 과외 선생도 칭찬을 했고, 학원 담임도 괜찮은
반응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현규진은 제가 유원과 거의 비슷한 성적을 받았다는 게 좋았다.
이대로 쭉 유원과 같은 등급을 받아 꼭 같은 대학에 가고야 말 생각이었다.
유원과 다른 대학을 다닌다는 생각만 해도 두통이 생기고 속이 답답했다. 이 일대에 있는 변태
새끼들을 처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전국 변태들이 모여 유원을 넘본다 생각하면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유원의 곁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저 혼자만 물고 빨려면 유원을
따라 공부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로 파이팅 넘치게 4 교시 자습 시간 내내 과외 선생이 준 고난도의 문제를 집중해
풀던 현규진은 수업 끝나는 종이 친 줄도 모르고 계속 문제 푸는 것에 열중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뭐야, 현. 이렇게 우릴 떠나는 거야? 존나 배신 쩌네.”
“난 너희 떠난 지 오래됐는데. 난 정유원이랑 한국대로 떠난다. 각자도생 하세요.”
“이제 대놓고 사귀는 티 존나 내네.”
“사귀기는 씨발, 우리 결혼했어.”
“…와, 진짜 존나 세다. 할 말이 없다. 유 윈.”
마지막 문제 답을 체크한 현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질려 버린 얼굴을 한 최해영, 김준재와
함께 뒷문을 나섰다. 제가 조금 늦게 나온 탓에 이미 유원이 제 교실 쪽으로 와 있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예뻐 단정한 머리를 한 번 장난스럽게 꾹 눌렀다. 그리고 저한테 하는
것처럼 이윤성에게도 잘해 주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나 옆에 있는 이윤성의 머리도 똑같이
손으로 장난기를 담아 눌러 보았다. 이윤성의 눈이 먼저 커지고, 그다음 유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82 화(82/127)

82


“배고프겠다. 얼른 가자.”
조금 놀란 것 같은 얼굴로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 유원이 현규진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현규진은 그런 유원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았다. 유원에게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한테도 할
수 있나 싶어 그냥 해 본 건데 정말… 너무 힘들었다. 유원을 제외하고 다른 놈들은 현규진에게
그냥 다 똑같은 남자 새끼들이기 때문이었다.
제가 그동안 유원에게 뭔가를 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거나 막 잘해 줘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행동한 게 아니었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물론 유원의 마음이 저한테 붙어
있도록 일부러 불쌍한 척을 조금 하거나 그러긴 했지만, 여태까지 유원에게 한 모든 행동은
진심에서 우러난 조금도 계산이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었다는 걸 마주하게 됐다.
머리를 꾹 누르고, 뺨을 만지고, 치댄 모든 일들이 다 계산되지 않은, 정말 유원이 너무 귀여워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는 걸 단 한 번의 손놀림으로 알게 되었다.
제가 정말 얼마나 유원을 좋아하는지도 새삼 다시 깨닫게 되는 아주 엄청난 경험이기도 했다.
“야, 김준재. 오늘 메뉴 뭐냐?”
“3 월 셋째 주 금요일 메뉴는요. 랍스터 볶음밥, 우삼겹 떡볶이, 감자샐러드, 딸기 크로플,
생딸기주스입니다.”
“모고 끝났다고 특식 쩌네.”
“우린 그래도 매일 특식이나 마찬가지야. 어제 전국 급식 잘 나오는 학교라고 인스타 올라온
거 봤는데 우리 학교 있었어.”
“뭐 인정. 밥 먹으러 학교 올 만해. 밥 존나 많이 먹어야지.”
급식실로 들어간 최해영이 식판을 들어 뒤로 넘겼다. 빠르게 뒤로 넘어간 식판은 가장 뒤에 선
이윤성에게 닿았다. 하필 그 앞에 선 현규진은 수저까지 들어 이윤성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윤성의 팔을 잡아 유원의 앞쪽으로 끼워 넣었다. 제 뒤에 서서 흘끗흘끗 보는 게 거슬리기도
하고, 뒤에서 걸리적대는 게 싫기 때문이기도 했다.
딱히 친절이라기 보다는 제 편의를 위한 행동이었다. 걸리적대도 안 보이는 곳보다 눈앞에서
걸리적대는 게 나으니까. 하지만 그걸 배려라고 생각했는지 이윤성이 잔뜩 고마운 얼굴로
저를 돌아보았다. 현규진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그러고는
식판을 든 채 저를 올려다보는 유원의 얼굴로 시선을 똑 떨어뜨렸다.
“오늘 너 좋아하는 거 다 나오네. 많이 먹어. 천천히.”
“응…. 너도.”
“어. 요즘 갑자기 공부 빡세게 해서 그런가. 먹어도 먹어도 계속 배고파. 어제도 자려는데
배고파서 잠이 안 오더라니까. 라면 두 개만 딱 먹을까 했는데 참았어.”
“그냥 먹지이….”
“이 얼굴이랑 이 몸이 그냥 나오는 게 아냐. 가슴 만져 볼래? 단단한데.”
“…아, 안 만질 거야….”
식판을 들어 유원과 제 얼굴을 가린 현규진이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소곤댔다.
“나중에 만지고 싶다고 울지나 마.”
“으…. 진짜 변태 같아.”
“이게 이제 틈만 나면 변태라 그러네.”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주무르자 유원의 오른쪽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머리칼이 끝나는 곳 아래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가 붉어졌다. 현규진은 식판으로 입을
가린 채 마른 입술을 축였다. 급식실에 있어 그런지 먹고 싶은 게 자꾸 생겼다.
아, 저기 뽀뽀하고 싶다. 정유원 목에서 기분 좋은 냄새 나는데…. 빨개진 목이랑 귀랑 볼이랑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뽀뽀해 주면 정유원도 좋아할 텐데. 그러다 키스하면 말랑해진 혀가….
“…….”
조금만 더 생각했다가는 점심은커녕 쪽팔리게 화장실에 처박혀야 할 것 같았다. 분홍색이 된
목덜미만 눈으로 봐도 아랫배가 확 조이는데 입술을 대면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했다.
현규진은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억지로 들어 뗀 다음 식판 가득 채워지는 밥과 반찬을
바라보았다.
여긴 학교다. 먹어야 할 건 밥이고, 정유원은 친구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다. 정유원은 먹을
것이 아니라 내 친구다. 주문처럼 외고 나니 아주 조금 마음에 공간이 생겼다. 겨우 돌아온
이성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였다.
밥을 먹고 나와 유원과 매점에서 디저트로 초코우유를 사서 나오는데 갑자기 이윤성이
눈앞으로 다가와 이온 음료를 내밀었다. 현규진은 반사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규진아. 저기 나 뭐 물어볼 게 있는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
얼결에 이윤성이 준 음료를 받은 현규진이 유원을 바라보았다. 유원은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돼, 절대 가지 마, 다른 사람이랑 왜 둘이 얘기를 해? 그런 말을 해 주면
좋을 텐데 천사 같은 정유원이 그럴 리 없었다.
“뭐 따로 어디 가서 할 말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가면서 해.”
자연스럽게 저에게 말을 하는 이윤성과 나란히 걷던 현규진은 얼른 고개를 돌려 제 뒤쪽으로
선 유원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제 옆으로 데려왔다.
“왜 뒤에서 혼자 와.”
“얘기하는 데 방해될까 봐.”
“존나 서운하게 할래?”
“…미안.”
“미안할 건 없고.”
유원의 머리칼을 쓰다듬은 현규진이 다시 이윤성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갑자기 저한테 뭐 물어볼 게 있나 싶었다.
“말해.”
“유원이한테 들었는데 규진이 너 도장 다닌다면서? 운동도 여러 개 하고.”
“어.”
“나도 그런 도장 다니면서 매일 운동 좀 해 보고 싶거든. 헬스는 지루하고 재미 없어서 별로고
…. 내가 어릴 때 아빠 따라서 운동을 그래도 좀 배운 적이 있어서 도장 다니면서 기초부터 해
보고 싶은데 좀 도와줄 수 있어? 뭘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아, 뭐. 특별할 건 없는데. 그냥 뭘 할지 정하는 게 제일 우선인데 난 영상 여러 개 보면서 해
보고 싶은 거, 재밌을 것 같은 거 몇 개를 뽑아서….”
초코우유를 마시며 현규진의 옆에서 걷던 유원은 저를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보면서 대화하는 현규진을 흘끗 바라보았다. 자주 본 적이 없는 모습이라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저와 같이 있는데 저를 보고 있지 않은 게 낯설다니…. 제가
생각하고도 우스워 고개를 저어 생각을 흩트렸다.
저렇게 얘기도 편하게 나누고 만났을 때 저한테 하는 것처럼 이윤성의 머리도 꾹 누르는 걸
보니 며칠 사이에 두 사람이 꽤 친해진 것 같았다. 운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그런
걸까? 아무튼 친해질 매개가 있어 다행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과는 반대로 어쩐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유원은 시무룩한 얼굴로
마지막 초코우유 한 모금을 쪼록 빨아들였다. 교실로 가서 이걸 버리고 양치질을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불쑥 손이 다가와 빈 우유 팩을 가져갔다. 여전히 이윤성에게 어떤
영상을 봐야 좋은지 말하고 있으면서 저를 챙기는 걸 잊지 않는 현규진이 신기했다. 제가
조금만 뒤처져도 걷는 속도가 줄어들고 손을 움직여 제 손목이나 손가락을 잡곤 했다. 유원은
현규진의 그런 면이 좋았다. 늘 저를 향해 있는 신경이. 부정할 수 없었다.
“이게 또 보는 거랑 하는 건 존나 달라서 도장 하루 가서 하나하나 깔짝깔짝해 봐도 좋고. 나도
그러다가 주짓수가 젤 재밌어서 이것만 하는 거라. 뭐 또 언제 바뀔지 모르지만.”
“아…. 고마워. 나도 오늘 영상부터 좀 찾아봐야겠다. 혹시 또 뭐 모르는 거 생기면 물어봐도
돼?”
“그러던지. 근데 뭐 나도 그냥 취미로 하는 거라 더 말해 줄 것도 없어.”
대화가 끝나자마자 유원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 현규진이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얼굴을 살피다가 어깨 위로 팔을 두르고 말랑한 볼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너야말로 운동 가볍게라도 해야 좋은데. 매일 조금씩 걷자고 한 거 전에 말만 하고 못
했잖아.”
“지금부터 하면 되지, 뭐어…. 시간 날 때 한 시간씩 산책하자. 이제 따뜻해질 거라 산책하기
좋을 것 같아.”
“그럴까. 그럼 일단 몇 달 해 보자. 힘든 날은 하지 말고 컨디션 괜찮은 날만.”
“응. 좋아.”
“대답을 왜 그렇게 귀엽게 해? 볼은 왜 이렇게 따끈따끈하고. 호빵이세요?”
“호빵 먹고 싶다아….”
“편의점에 아직 있을걸. 집에 갈 때 사 가자.”
운동으로 시작해 호빵으로 끝난 대화가 어딘가 이상하면서도 늘 있는 익숙한 일이라 그저
즐거웠다. 갑자기 호빵이 먹고 싶다니. 태어나 처음으로 호빵이라는 말이 다 귀엽게 느껴졌다.
“나 칫솔 가지고 나올게. 화장실 앞에서 만나.”
“어, 거기서 만나.”
어떻게 정유원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다 저렇게 귀엽지? 호빵에 이어 화장실까지 귀엽다고
여긴 현규진이 교실 뒤쪽 사물함으로 가는 유원의 뒷모습을 보다가 제 반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기, 규진아. 이거 한 번만 봐 주라. 이건 얼마나 배워야 이 정도로 할 수 있어?”
불쑥 나타난 이윤성을 보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선 현규진이 다가오는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화면 안에는 주짓수 대련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상체를 수그려 이윤성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현규진이 잠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한 6 개월은 해야지. 그런데 체력 기르고 그럴 목적이면 이건 별로야. 그냥 난 스트레스 풀고
재밌어서 하는 거지. 체력 기를 거면 그냥 뛰어. 그게 제일 나아. 이거 괜히 지금 잘못 배우면
괜히 다치기나 해. 나도 올해는 안 하려고.”
“체력도 체력인데 나도 너처럼 세지고 싶어서….”
그제야 현규진은 이윤성이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깨달았다. 제가 그때 이우진을 조지는 걸
보면서 멋있다고 그러더니 저처럼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여태까지 왜 이윤성이 저와
친해지고 싶다고 계속 말하고, 자꾸 저를 보면서 맴돌았는지 좀 이해가 됐다.
“뭐 그러려면 이게 좋긴 한데 진짜 다치기 쉬워서 추천은 안 해. 다른 걸로 체력 존나 기르고
졸업하고 취미로 살살 해 보던가. 왜. 너도 변태 팰 일 있냐?”
“아…. 그건 아닌데 너 싸움 잘하는 거 보니까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음….”
가만히 이윤성을 보던 현규진이 조금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휴대폰이 이윤성 쪽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는데도 딱히 큰 변화는 없었다.
현규진은 비로소 안도했다. 이윤성은 제 주먹질을 좋아하지, 저를 그렇고 그런 쪽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확인했다. 아주 속이 다 후련했다.
“이따 한… 열 시쯤? 도장으로 오던지. 관장님 소개해 줄게. 거기 뭐 여러 가지 다 하고, 그냥
몸만 만들어 주는 것도 하니까 얘기해 봐.”
“어, 정말? 나 때문에 일부러 그러는 거면 안 그래도 되는데….”
“아니, 나 짐 빼러 가는 건데.”
“아, 그럼 다행이고…. 그럼 거기 어딘지 알려 주면 내가 이따 열 시까지 갈게.”
“난 그냥 관장님 소개만 하고 빠진다?”
“어어! 그거면 충분해. 진짜, 와, 진짜 고마워. 엄청 막막했는데.”
웃는 이윤성을 별 감흥 없는 눈으로 본 현규진이 느껴지는 시선에 흘끗 뒤를 바라보았다. 분명
뭔가 시선이 느껴졌는데 예상했던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현규진은 포털
사이트에서 도장 주소를 찾아 이윤성의 톡으로 전달하고 반으로 향했다.
***
칫솔을 움직이는 유원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유원의 옆에 서서 기계적으로 양치질을
하던 현규진이 거울로 그런 멍한 유원의 얼굴을 살폈다. 역시 정유원은 멍유원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야, 혀 매울 텐데.”
“…….”
“여보.”
뭔 생각을 하는지 두 번을 말해도 듣지 못하는 것에 입을 먼저 헹군 현규진이 손에 묻은 물을
대충 털고 유원의 귀 안으로 후우 바람을 불었다. 그제야 깜짝 놀란 유원이 어깨를 확
움츠리며 현규진의 숨이 들어간 귀를 손으로 막았다.
“무슨 일 있어? 갑자기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응? 그냥….”
“멍때리는 스킬이 점점 늘어.”
너무 오래 치약을 머금고 있어 혀끝이 무척 매웠다. 물이 무척 차가운데도 별로 차갑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릿했다. 물을 잠그고 고개를 들자 현규진이 입술에 묻은 물기를 손으로
문질러 닦아 주었다. 입술은 차갑고 현규진의 손은 따뜻해 그 손길이 무척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대로 얼굴을 파묻고 싶을 만큼.
“인간 수건.”
“…….”
“왜, 수건도 금지야?”
“아니, 그냥…. 손 뜨거워서. 손난로 같아.”
“어디 대 줄까. 옷 안에 붙이고 다닐래?”
“으…. 방금 소름 끼쳤어.”
“이 정도면 내일 정유원 인성 논란 기사 난다, 진짜.”
숨을 쉬듯 웃은 현규진이 유원의 반까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유원은 저와 나란히 움직이는
현규진의 발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제 얼굴로 닿는 시선이
따뜻해 심장이 움찔거렸다.
“좀 전에….”
윤성이랑 무슨 얘기 했어? 묻고 싶은데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유원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자꾸 복도에 나란히 붙어 서 있던 현규진과
이윤성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이윤성을 향해 기울던 현규진의 얼굴도.
“…….”
그냥 얘기하다 보면 그럴 수 있는 일인데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이윤성을 바라보던 현규진을
보다가 뒤로 고개를 돌리는 것에 얼른 교실로 숨어 버린 것도 바보 같고, 현규진의 얼굴이
이윤성에게 다가가던 장면을 계속 머리에 담고 있는 마음도, 그때 이후로 갑자기 기분이 조금
안 좋아진 것도 전부 다 너무너무 이상했다.
왜 이렇게 갑자기 기분이 안 좋지….
알 것 같은데 알면 안 될 것 같아 외면한 마음이 넘실댔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83 화(83/127)

83


현규진이랑 이윤성이랑 친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난데…. 윤성이한테 좀 더 잘해 주라고
한 것도 나고…. 두 사람이 통하는 게 생겨서 같이 얘기할 수 있게 돼서 분명히 좋았는데….
현규진이 최해영이나 김준재, 민지훈 같은 애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볼 때는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냥 늘 티격태격하는 분위기라 그런 것도 있고, 현규진이 그
애들을 대하는 것과 저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달라 그런 것도 있었다.
유쾌한 분위기가 이어지기는 하지만, 그 애들과 있을 때 현규진은 대부분 조금 거칠었다. 딱히
크게 배려를 하지도 않고, 돌려 말하지도 않으며 다정함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보들보들한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는데 조금 전에 복도에서 본 현규진의 뒷모습은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몸을 수그려 이야기를 듣고 뭔가를 함께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높이를 맞추듯 상체를 숙인 채
윤성과 눈을 맞췄고, 얼굴을 가까이 기울이기도 했다. 뭔가 이유를 담은 행동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현규진의 얼굴이 기울어질 때, 그래서 둘의 시선이 마주 닿았을 때 유원은 전혀
상관도 없는 저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
이상해, 진짜….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 고개를 저은 유원이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끼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뭔데.”
“응?”
“불어, 얼른.”
“뭐얼.”
“뭐 있는데, 얼굴 보니까.”
“아무것도 없어. 뭐 있을 시간도 없었잖아. 바로 그냥 칫솔만 가지고 나온 건데….”
“그렇긴 한데….”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얼굴을 살피는 현규진의 몸을 잡아 돌려세운 유원이 등을 살짝
밀었다. 물론 그 정도 힘으로 현규진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얼른 가서 과외 숙제 해. 아직 남았다며. 나도 조금 남아서 이제 할 거야.”
“아…. 맞다. 존나 하기 싫어.”
“그럼 하지 마.”
“…하지 말라니까 존나 무섭다, 진짜. 하면 되잖아. 간다, 이따 봐.”
“이따 봐, 빠이.”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반으로 들어온 유원이 가만히 자리에 앉아 과외 숙제를 꺼내 펼쳤다.
샤프와 지우개도 꺼내 아까 풀던 문제를 다시 읽는데 자꾸 종이 위로 현규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몸을 숙여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그 얼굴이.
“…….”
어쩐지 그동안 현규진이 제가 다른 누군가와 조금 친해져 같이 다니는 걸 볼 때마다 대놓고
서운하다 말하고, 그래도 가장 친한 건 자신이라는 걸 확인 받고 싶어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현규진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뭐 이런 걸로 이런 생각이 드나 싶어 한심하다가도 자꾸 생각이
나서 유치해지는 마음을 현규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생각하니 그것도 마음 안으로 쌓여
울렁임을 더했다.
이상해…. 고작 이상하다는 표현 밖에 할 수 없는 게 더 이상할 만큼. 이상하다는 상자에 갇혀
버린 느낌에 고개를 저은 유원이 다시 문제를 읽으려 애썼다.
하지만 종례가 끝나고 다시 현규진을 볼 때까지 내내 이상의 상자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
현규진의 엄마가 끓여 준 갈비탕으로 든든하게 저녁을 먹느라 먹지 못한 호빵은 과외가
끝나고 하나씩 나눠 먹었다. 뜨거운 야채 호빵을 반으로 겨우 쪼개 호오 불어 아주 조금씩
먹는 유원을 보던 현규진이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나 도장 가야겠다.”
“도장? 이 밤에?”
“락커 비우러. 주말에 갈까 했는데 내일 뭐 락커 교체한다고 오늘까지 비우래서. 이윤성도
잠깐 보고.”
혹시 모를 부상을 염려해 수능 끝날 때까지는 주짓수를 안 하기로 마음먹은 현규진이 락커를
비우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뒤에 나온 윤성의 이름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거라 유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윤성이?”
“어, 뭐 거기 관심이 많은가 봐. 아, 얼른 가야겠다. 이따 톡할게.”
“…아…. 응. 빠이.”
호빵 반쪽을 손에 든 채 현규진을 배웅한 유원은 터덜터덜 방으로 가 호빵을 책상에 놓고
침대에 누웠다. 운동이 둘의 공통 주제가 되어 잘 통하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이
밤에 만날 일이 뭐가 있나 싶었다.
“…….”
마지막으로 도장 가서 윤성이 운동이라도 알려 주려고 그러나…? 그런 게 아니면 왜 도장에서
만나지? 따로 만날 만큼이나 친해진 건가?
현규진과 이윤성. 모두 저의 친구지만, 그 두 사람만 밖에서 따로 만난다는 게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데면데면한 사이였다가도 잘 맞는 것 하나만 생기면 급격하게 확 친해질 수 있는 게
친구라는 걸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또 학교에서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마음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부분에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조금, 아주
쪼끔… 서운하기도 했다.
도대체 왜, 어떤 포인트에서 무려 서운함을 느끼는 걸까. 두 사람이 저 없이 둘이 만나서?
현규진이 설명을 다 해 주지 않고 그대로 가 버려서? 둘이 만나기로 한 사실을 이제야 알아서?
전부 아닌 것 같으면서도 또 전부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유원은 속 좁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최대한 덤덤하려 노력했다.
“…….”
아냐. 뭐가 서운해. 윤성이가 현규진이랑 친해지고 싶어 했는데 잘됐지, 뭐. 어차피 자주
보는데 현규진이 윤성이한테도 다정하게 대해 주면 같이 다 잘 지내고 좋은 거잖아.
뭔지 모를 답답한 마음에 벽을 보고 누운 유원이 토끼 쿠션을 세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냥
다 잘 지내면 좋은 일인데, 분명히 좋은 일인데 기분이 하나도 좋지 않았다. 정말 조금도.
결국, 유원은 호빵도 더 먹지 못하고, 공부도 하지 못한 채 현규진의 연락만을 기다렸다. 참
길고, 속상하고, 자책만 잔뜩 하게 되는 밤이었다.
지이잉…. 진동 소리에 눈을 뜬 유원이 반짝이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누워 있다가 잠깐 잠이 든
모양이었다. 톡이 왔나 싶었는데 새까만 화면에는 ‘규진’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유원은
얼른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잤어?
“응…. 어떻게 알았어?”
-목소리 듣고. 너 자다 깬 목소리가 좀 뭐랄까…. 음. 전엔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는데
방금 듣고 나니까 딱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겠어.
“어떤데?”
-야해.
“…또 이상한 소리. 경고 하나 추가.”
-야하지를 말던가.
몸을 더 웅크린 유원이 괜히 이불자락을 매만졌다. 어느새 이불 바깥으로 나온 토끼 쿠션이
유원을 보고 있었다. 꼭 현규진이 저를 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마구 일렁였다. 귀에는
현규진의 목소리가 눈앞에는 현규진이 사 준 토끼 쿠션이 있고, 머리와 마음 안에도 온통
현규진이 가득했다.
현규진, 현규진 또 현규진…. 도저히 피할 수도 모른 척을 할 수도 없었다. 꼭 제 모든 것이 다
현규진으로 변해 버린 것만 같았다. 너무 많이 생각해서, 조금도 쉬지 않고 떠올려서…
너무너무… 좋아해서.
-잠깐 나올래? 오다 보니까 공원에 벌써 벚꽃 피었더라.
“벌써?”
-응. 같이 잠깐 걸을까? 공기가 달달해서 숨 쉴 때마다 네 생각 나.
난 너 때문에… 숨을 어떻게 쉬는 건지도 다 잊은 것 같아.
다정한 목소리가 닿는 귓가로 달착지근한 봄바람이 흘러드는 것만 같았다. 유원은 입술을
살짝 벌려 호흡했다. 숨쉬기가 벅찼다.
어떡해. 규진아.
너랑 친구로 지내는 거 너무너무 어려워.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은 유원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공원에 핀 벚꽃도 보고 싶고,
달달한 공기도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규진이 보고 싶었다.
-피곤하면 그냥 잘래?
“아니이…. 나갈게. 어디야?”
-단지 입구. 내려와.
“응, 금방 갈게.”
전화를 끊은 유원이 얼른 조금 두꺼운 후드를 티셔츠 위에 입었다. 그리고 욕실로 가서 자느라
조금 헝클어진 머리를 만졌다. 거울을 보고 옷도 단정히 만지고 마지막으로 얼굴까지 살핀
다음에야 서둘러 집을 나섰다. 현규진과 떨어진 지 한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랜만에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1 층으로 내려가니 현규진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쪽 어깨에 커다란 더플백을 멘 채 선 기다란
뒷모습을 보니 심장이 쿵쿵 큰 울림을 그리며 뛰기 시작했다.
“올라가서 가방 두고 오지….”
“아, 귀찮아서. 그냥 여기 두고 가게.”
비상구 계단 쪽 문을 열어 구석에 가방을 내려 둔 현규진이 씩 웃었다. 어둡기도 하고 또 늦은
시간이라 누가 저걸 볼 것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그런 유원의 표정을
읽은 현규진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비상구 문을 닫았다.
“가져가도 뭐 가져간 사람이 손해일걸. 수건이랑 뭐… 운동복, 여분 속옷 그런 게 전부라. 걱정
안 해도 돼. 아, 시원하고 좋다. 하나도 안 춥지. 아니다, 좀 추운가?”
밖으로 나간 유원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현규진 말대로 하나도 춥지
않고 딱 적당하게 시원했다.
“안 추워. 딱 좋아.”
제 어깨에 팔을 걸친 채 걷는 현규진과 나란히 걸음을 옮기자니 잠들기 직전까지 머리를
채우고 있던 궁금증이 입술 안쪽을 톡톡 두드렸다. 윤성이랑은 도장에서 왜 만난 거야? 무슨
이야기 했어? 계속 같이 있다가 온 거야?
그냥… 궁금할 수 있는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나란히 줄을 세워 떠올리니 하나같이 너무
집착하는 것처럼 보여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윤성이는 만났어?”
“아, 어. 뭐 운동 배울 생각이 있나 보더라고. 관장님 소개해 준다고 오랬더니 와서 얘기 좀
하고 왔어. 걘 아직 거기 있을걸.”
“아…. 소개해 주려고 만난 거구나….”
저도 모르게 안도감이 잔뜩 묻은 투로 말한 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혼자 별생각을
다 하면서 속을 끓였던 게 너무 바보 같을 정도로 사소한 일이라 조금 머쓱했다.
유원에 관한 것이라면 목소리 떨림 하나, 숨소리 하나까지 다 아는 현규진이 그걸 눈치채지 못
할 리가 없었다. 장난기가 묻은 웃음을 지은 현규진이 유원의 어깨를 톡톡톡 두드렸다.
“내가 이윤성 만나는 거 싫었어?”
“…그게 왜 싫어….”
“그럼 나 이윤성 따로 또 만나도 돼?”
“따로?”
“응.”
유원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누가 봐도 저와 이윤성이 따로 만나는 게 싫은 얼굴이었다.
현규진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유원이 좋았다. 저를 좋아하는 마음을 들켰을 그때처럼
지금도 질투해 버린 마음을 조금도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눈동자에 묻히고 있었다.
“…둘이서만?”
“응.”
“뭐어…. 그럴 이유가 있으면… 그래도 되지.”
“이유 딱히 없는데.”
“…….”
“우리도 이유 있어서 만나는 거 아니잖아. 만나는 게 당연한 거지.”
현규진의 말이 전부 맞아 아무 말도 못 하던 유원은 말도 안 되는 감정들이 뒤엉킨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조금 진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쉽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바보 같은
대답이 자꾸만 톡 튀어나올 것 같아 너무 무서웠다.
“저기 봐. 꽃 피었어.”
풀려고 노력할수록 엉켜 버리는 실타래가 된 마음을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그때 달달한
공기가 달라붙었다. 현규진의 손끝으로 꽃이 피어 있었다. 유원은 처음으로 이 계절이
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현규진이 가르쳐 준 계절이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84 화(84/127)

84


‘공기가 달달해서 숨 쉴 때마다 네 생각 나.’
향긋한 봄밤의 공기를 머금으며 제 생각을 했을 현규진이 사랑스러웠다. 친구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봄이라는 걸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라 그런지 쉽게 진정되지 않는 머릿속처럼 마음도 마구 들떠 붕 떠올랐다.
현규진이 저에게 준 떨림을 저도 주고 싶었다.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늘어나는 것처럼
현규진도 그러기를 바랐다. 봄밤은 사람을 싱숭생숭 들뜨게 했다.
“…….”
걸을 때마다 살짝 스치는 손을 내려다본 유원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쏟아진 숨의
빈자리에 채운 용기를 믿고 현규진의 손가락 끝을 쥐었다.
갑자기 떨어진 꽃잎을 잡은 것 같은 행운에 놀란 현규진의 어깨가 움칠 튀었다가 이내 꽃잎을
손안으로 부드럽게 가두었다.
“…아까 학교에서… 칫솔 가지고 교실 나가다가 너랑 윤성이랑 같이 있는 거 봤어.”
“같이 있는 거? 아, 맞아. 걔가 뭐 주짓수 영상 보여 줬어. 야, 놀랐잖아. 뭐 그걸 불륜 현장
습격한 것처럼 진지하게 말해.”
“네가 윤성이랑 붙어 서 있고, 얼굴도 막… 가까이 하고 그런 거 보니까 기분이 좀 이상했어.”
어쩐지 아까 뭔가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더니만 그게 유원의 시선이었던 모양이었다. 제가
이윤성의 마음을 판단하려고 잠시 테스트했던 상황을 보고 놀라 숨어 있었을 유원을
떠올리니 너무 귀여우면서도 가여워 마음이 다 아팠다.
“어떻게 이상했어?”
“좀….”
현규진은 유원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유원처럼 향긋하고 또 달착지근한 봄밤을
누릴 뿐이었다.
“…안 해도 되는 생각이 계속 드는데 다 너무 유치한 생각이라 이게 뭔가 싶고…. 그런 생각
하는 자체로 너랑 윤성이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어떤 생각 들었는지 말해 줘.”
“…싫어. 진짜 이상한 생각이란 말이야.”
“그래도 말해 줘. 그래야 나도 네 맘을 알지. 난 다 말하잖아. 기분 좋은 거, 나쁜 거, 떨리는 거,
화나는 거.”
“…….”
“말 안 해도 네 맘 내가 다 알긴 하지만, 그래도 너한테 듣고 싶을 때도 있거든. 그게 지금이고.”
조용하고 어둑한 공원 안으로 나긋한 음성이 울렸다. 유원은 현규진의 따뜻한 목소리와 손을
느끼며 다시 한번 용기를 마음 안으로 모았다.
“네가…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하는 걸 처음 봐서… 이상했어. 나한테 하는 건 너무 당연하고,
익숙했는데…. 윤성이한테 몸 숙여서 얼굴 가까이 하고… 그런 거 보니까….”
“…….”
“…기분이… 안 좋아졌어….”
현규진은 유원의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말아 쥔 채 제 입을 눌렀다.
유원은 지금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말하고 있지만, 그건 고백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저와
이윤성이 같이 있는 걸 보면서 기분이 안 좋아졌다는데 저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아 보이고 멍을 때리고 또 먼저 제 손까지 잡은 이유가 질투였다니….
입을 틀어막지 않으면 너무 좋아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그랬어?”
“…응. 그러다가 집에 와서 같이 저녁 먹고, 과외도 하고…. 호빵 먹고 그래서 괜찮아졌었는데….
네가 도장 간다고 했잖아.”
“응.”
“윤성이 잠깐 만난다고 해서… 좀 놀랐어. 따로 만날 만큼 친해진 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너 가고 또 기분 안 좋아져서 누워 있다가 깜빡 잔 거야….”
아…. 존나 귀엽네, 진짜. 돌겠다, 진짜. 정유원 어떡하지. 그냥 내 통장 다 주고 밤새 물고 빨아
버릴까.
“아, 그래서 아까 자다 깬 거구나. 나 때문에 속상해서 누워 있다가.”
“…응….”
아, 미친. 못 참겠는데 어쩌지. 현규진은 나무가 우거져 있는 하늘을 보며 심호흡했다. 겨우
용기를 내서 말하는 애를 보며 변태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거듭된 몇 번의 심호흡으로
벅차올라 미칠 것 같은 마음을 겨우 조금 짓누른 현규진이 유원을 내려다보았다.
“이윤성이랑은 아까 말한 그게 다야. 내가 그때 이우진 조지는 거 보고 거기 꽂혀서 나처럼
자기도 세지고 싶대. 그래서 뭔 운동하는지 묻고, 뭐 주짓수 이 정도 하려면 얼마나 배워야
하냐고 영상 보여 줘서 본 게 전부야.”
“…그랬구나….”
“응, 그래서 도장에서 관장님 소개해 주고 난 정리 바로 해서 온 거고. 끝. 진짜 뭐 더 없어.”
앞을 보거나 바닥 쪽을 보면서 걷던 유원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벚꽃이 아직 피지 않은
푸릇한 나무 아래를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싱그럽고 푸릇했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유원의
머리칼처럼, 저를 올려다보는 다정한 눈동자처럼.
“이제 다른 애랑 말 안 할게.”
“그렇게까지 하라는 건 아니야….”
“왜. 내가 다른 사람이랑 말하는 거 싫다며. 너랑만 말하고 너랑만 다닐게. 얼굴도 너한테만
주고. 잘생긴 얼굴 네 건데 다른 놈이 봐서 서운했지. 자, 네 거 실컷 봐.”
상체를 숙인 현규진이 불쑥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조금 놀란 유원이 몸을 살짝 뒤로
뺐다가 이내 눈앞에 있는 현규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진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잘생긴 얼굴이 제 거라는 말도, 저와만 말하고,
저와만 다닌다는 말도… 솔직히 좋았다.
“…전에 내가 그랬잖아. 윤성이한테도 나한테 하는 것처럼 잘해 주라고….”
“아, 어. 그랬지.”
“……그럼 머리 꾹… 누른 것도 그래서 그런 거야?”
“음…. 솔직히 궁금했어. 내가 다른 사람한테도 너한테 하는 것처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래서 생각난 김에 해 본 건데 별 느낌 없더라. 너한테 하는 건 재밌는데 다른 애한테 하니까
뭐 그냥 머리 누른 느낌이 다였어.”
유원의 손을 쥐고 있는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제가 이윤성의 머리를 누른 것까지
마음에 담고 있다가 묻는 유원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그럼 앞으로는… 안 할 거야?”
“응. 안 할 거야. 네가 신경 쓰는 것도 알았고, 나도 뭐든 너한테 하는 것만 좋다는 거
알았으니까.”
맞잡은 손이 앞뒤로 살살 흔들렸다. 속상한 기색이 사라진 유원의 얼굴을 본 현규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정유원, 그냥 이제 다시 넘어와. 질투 존나 할 만큼 나 좋아하면서 친구는 씨발, 뭔 친구.”
“그건…! 널 좋아하는 거 하나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럼 뭐가 필요한데. 나랑 연애하고 나랑 결혼할 건데 거기에 나 좋아하는 마음 외에 또 뭐가
필요해. 나 좋아하면 다 되는 거지.”
“가, 갑자기…! 결혼은 무슨 결혼…. 이상한 말 좀 진짜 하지 마아….”
“나 좋아하면서 결혼은 그럼 뭐 다른 사람이랑 하려고? 정유원 양아치네.”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 현규진의 손등을 아프지 않게 때린 유원이 괜히 더워진 기분에
비어 있는 손으로 손부채질을 했다. 여기저기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머리 위로 빛이
쏟아지는 시간이 아닌데도 이렇게 더운 걸 보면 분명 얼굴이며 몸이며 잔뜩 빨개졌을 것
같았다.
“아무튼 난 너 아니면 연애도 안 할 거고 결혼도 안 할 거고 누구 좋아하지도 않을 거니까
알아서 해. 네가 다 책임져.”
“무슨 책임….”
“얼굴 존나 예뻐서 내 눈 높여 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거 아니어도 나랑 키스한 게 몇 번인데
당연히 져야 하는 거 아냐? 넌 나 말고 다른 사람 좋아할 수 있어?”
다른 사람? 여태까지 제대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현규진을 좋아하기 이전에
누군가를 좋아했던 적도 없었고, 지금 제 손을 잡고 있는 현규진을 좋아하게 된 다음에는 온통
세상이 다 현규진이라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일이 없었다.
“만약에 도저히 나랑 다시 못 사귀겠다는 결론이 났어. 그래서 졸업하고 완전히 갈라졌어.
그럼 넌 다른 사람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
“난 못 할 것 같거든. 뭐 지금은 널 좋아하니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널
좋아하고 보니까 그동안 우리 같이 지낸 그 시간도 다 우리가 사귄 시간처럼 생각이 돼서
그런가…. 솔직히 장기 연애 중인 기분이야.”
“…….”
“그런데 너 말고 다른 사람을 어떻게 좋아해. 아직 너도 다 못 좋아해 봤는데.”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현규진. 스스로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지 질문을 던질 때와는
마음의 울림부터가 달랐다. 막연한 상상과는 달리 심장이 쿵 내려앉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축축한 감정이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졌다.
다른 사람과 눈을 맞추고, 다른 사람에게 웃어 주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몸을 숙이고… 다른 사람에게 저에게 보이는 모든 다정함을 주며 키스하는 현규진.
“…….”
현규진의 대답을 들었지만,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된 현규진의 모습
뿐이었다. 필요 없는 상상인 것을 알면서도 바보 같은 저의 두려움이 이 관계를 망치고
현규진이 다시 한번 준 기회를 놓치게 될까 봐 무서웠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눈앞에
현규진만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손이 아니라 마음을 쥐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싫어….”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백 번을 묻고 천 번을 물어도 답은 하나였다. 현규진이
아니면 싫다는 것.
“…좋아해 본 적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어…. 그리고 네가… 네가아….”
똑바로 잘 전하려 했는데 자꾸 마음도 목소리도 떨렸다. 상상만으로도 속상한 장면들을
지우려 애쓰며 유원이 울음을 삼켰다. 울고 싶지 않고, 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안 했는데
자꾸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곤란했다.
“다른 사람 좋아하는 것도… 싫어….”
겨우 내뱉은 말의 소리는 형편없이 작고 또 몹시 흔들렸다. 친구를 좋아하게 될 때 용기도
가득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저는 여전히 소심하고 또 겁이 많았다. 그러면서 바라는 건 많아서
현규진의 관심과 시선이 저에게만 닿기를 바라고, 현규진이 저만 좋아한다는 말을 해 줄
때마다 안도를 하기도 했다. 유원은 제가 몹시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자기야, 울어?”
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고 놀란 현규진이 얼른 유원을 데리고 벤치로 가 앉혔다.
그리고 저는 유원의 앞으로 다리를 구부려 앉았다. 고개를 숙인 채 울던 유원의 젖은 속눈썹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였다.
“왜 울어, 자기야. 내가 다른 사람 만나는 거 상상했어?”
슬픈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게 귀여워 앓는 소리가 저절로 흘렀다. 어떻게 정유원은 우는
것도 저렇게 존나 예쁘지. 달래 주기 싫게. 잠시 멍하니 눈물만 뚝뚝 흘리는 예쁜 얼굴을
감상하던 현규진이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유원의 젖은 뺨을 손으로 문질러 닦아
주었다.
“울지 마, 속상해. 나 다른 사람 안 만나. 네가 나 책임질 때까지 시위할 거야. 너 다른 사람 못
좋아하게 존나 다 막을 거고 깽판 칠 거야. 그게 슬퍼서 우는 거면 더 울고.”
훌쩍인 유원이 제 얼굴을 감싼 현규진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장난스러운 말투지만,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묻어 있지 않았다.
“…….”
“…….”
1 초, 2 초, 3 초…. 떨어지지 않고 검질기게 달라붙는 시선 안에서 현규진은 바로 지금이
유원의 마음을 들을 타이밍이라 생각했다.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직접 듣고 싶었다. 이제
제가 바라는 곳까지 거의 다 왔다는 것을.
작게 다시 맺힌 눈물이 현규진의 엄지 끝을 적시며 스며들었다. 여전히 떨어지지 않은 시선을
붙든 채 마음을 흘렸다.
“유원아. 내가 좋아?”
친구 사이 고백 금지-85 화(85/127)

85


그리고 1 초, 2 초… 또 3 초. 유원의 고개가 움직였다. 현규진이 가장 원하는 대답을 머금은 채.
“…응…. 좋아.”
“나랑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는 거 맞지.”
“응….”
“내가 정말 너랑 다시 친구 하고 싶어서 친구 하자 그런 거 아니라는 것도 알고.”
유원이 다시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봄밤의 달착지근한 공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났다.
원래도 온순했지만, 더욱 온순해진 유원이 제가 하는 모든 말에 대답해 주는 걸 보고 있으니
안달이 났다. 당장이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고 싶을 만큼 마음이 벅차올랐다. 장난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말이지만, 이제 겨우 열아홉인 제가 소리 내면 유원이 장난으로
받아들일까 봐 소리 낼 수 없는 감정이 자꾸만 현규진의 마음을 애태웠다.
“너도 내가 바라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 맞지?”
“…응….”
“생각 끝나면 꼭 말해 줘. 말하는 게 어려우면 신호라도 줘. 그럼 내가 다 알아서 눈치챌게.”
“그럴게….”
“그럼 됐어. 그거면 돼.”
다시 흘러넘칠 것처럼 부풀어 맺히는 유원의 눈물을 본 현규진이 눈가를 톡 건드려
떨어뜨렸다. 그리고 뺨에 묻은 눈물을 부드럽게 매만져 닦았다.
“왜 또 울어.”
“…자꾸 기다리게 하고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기다리는 거 하나도 안 힘들고,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알아서 하나도 안 속상해.”
“…….”
“너 못 볼 땐 이게 뭔가 싶었는데 이젠 너 보잖아. 정유원이 나 좋아한다는데 내가 뭐가 속상해.
안 그래. 정 미안하면 뽀뽀 한 번 쿨하게….”
장난스러움을 한껏 담아 소리 내던 말이 그대로 막혔다. 현규진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입술을 꾹 누르는 유원을 놀란 듯 바라보았다.
잠깐 아주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혀가 섞이지 않았다 뿐이지 입술이 맞물린 채
몇 초나 진득하게 있다가 떨어졌다. 쪼옥…. 입술이 떨어지면서 나는 끈적하면서도 간지러운
소리에 멍해진 현규진의 몸이 그대로 기울었다.
“괜찮아?”
바닥에 주저앉은 채 놀라 제 팔을 잡는 유원을 올려다보던 현규진이 씩 웃었다. 정말 유원이
제가 있는 쪽으로 아주 많이 온 게 느껴졌다. 닿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고 또 어떻게 다가가야
붙잡을 수 있을지 더는 고민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가까워진 게 느껴져 미칠 듯 좋았다.
“응. 정유원이 나 좋아해서 다 괜찮아.”
“…그게 뭐야….”
“뭐긴 뭐야. 정유원이 좋아하는 나지. 나 일으켜 줘. 오래 쭈그리고 있었더니 다리 아파.”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은 유원이 제 앞으로 다가온 현규진의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물론
저는 잡기만 했을 뿐 현규진 혼자 힘으로 일어난 것에 가까웠지만.
“벌써 열한 시가 넘었네. 가자, 집에.”
“응, 가자.”
“나오길 잘했지.”
“응….”
“다음 주면 꽃 다 피겠다. 그때 또 오자.”
“응,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잡아 줄지 잡아
주지 않을지 결과를 기다리며 펼친 손 위로 유원의 시선이 닿았다. 곧 손가락 사이로 보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다시 손바닥 안으로 떨어진 꽃잎을 쥐며 현규진이 미소
지었다. 연속된 행운, 쏟아진 고백, 좁혀진 거리.
결코 잊을 수 없는 열아홉의 봄밤이었다.
***
담배 연기가 미술실 안으로 퍼졌다. 창을 연 현규진이 담배를 물고 있는 김준재, 최해영에게서
멀리 떨어져 유원이 준 막대사탕을 입에 물었다. 담배를 완전히 끊으려니 요즘 자꾸 단 것이
당겼다. 아침에 학교에 오면서 카운터 뒤쪽에 있는 담배 진열대를 바라보고 있었더니
막대사탕을 다섯 개나 사서 제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제일 맛있는 맛으로 고른 거니까 담배가
피우고 싶을 때 사탕을 먹으라는 유원의 말에 현규진은 종일 다양한 과일 맛을 맛보는
중이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하나만 피워. 어차피 우리 때문에 냄새 다 밸 텐데 피우나 안 피우나 그게
그거지.”
“유원이한테 혼나.”
“멍유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안 피웠다고 해.”
“나 거짓말 못 하는데?”
“와씨, 너 거짓말 잘하잖아. 그저께도 자서 게임 안 한다더니 멍유랑 같이 있던 거 다 들켰죠?
멍유가 현규진이랑 같이 치킨 먹었다고 다 불었죠?”
“나 정유원한테만 거짓말 못 하는데?”
막대사탕을 한쪽 볼에 문 채 씩 웃는 현규진을 보며 한숨을 내쉰 최해영이 창틀로 올라 앉았다.
그런 최해영을 미는 시늉을 하다가 발로 차인 김준재가 낄낄대며 웃었다.
“모고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씨발, 벌써 중간고사냐.”
“벌써 5 월이야. 시간 가는 속도 돌음.”
“나 내일부터 하복 입으려고. 존나 더워.”
“올여름 개더울 거래. 어제 뉴스에서 그러더라.”
“너 뉴스도 보냐?”
“넌 안 보냐? 저 새끼 지구온난화도 모를 듯.”
쓸데없는 말을 잘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보다가 한심함을 느낀 현규진은 유원과의 톡방에
들어갔다. 담임이 시킨 일이 있어 점심을 먹고 올라오자마자 교무실로 가 버린 유원을
기다리다가 여기로 같이 오긴 했는데 그냥 교무실에 가서 일하는 유원을 보고 있는 게 훨씬 더
즐거울 것 같았다.
[아직 안 끝났어?]
톡을 보내도 바로 보지 않는 걸 보니 아직도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왜 애한테 일을
시키고 지랄이야. 선생이면 자기 일은 자기가 하지. 존나 짜증 나네. 레몬 맛 사탕을 우두둑
깨문 현규진이 하얀 막대를 뒤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그거 모르는 게 사람이냐?”
“아, 그러니까 알면 말해 보라고. 지구온난화가 뭔데.”
“지구 따뜻해지는 거, 새끼야!”
“이유가 뭔데?”
“와, 존나 병신 취급하네.”
소음도 소음 나름이지 정말 유치해서 들어줄 수가 없었다. 따분한 얼굴로 딸기 맛 사탕 껍질을
깐 현규진이 다시 막대사탕을 굴리며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어…. 읽었다.”
읽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책상에서 내려와 대충 바지를 털었다. 의자와 바지에 묻어 있던
먼지가 이리저리 빛 속으로 산란했다.
“야, 현! 세상에 씨발, 지구온난화 모르는 사람이 있냐?”
“있든 없든 뭐 씨발, 그딴 걸로 싸우고 지랄인데.”
놈들이 앉아 있는 창틀로 가 탈취제를 뿌린 현규진이 최해영과 김준재 얼굴 쪽에도 한 번씩 칙,
칙 액체를 뿌렸다. 그에 눈을 감고 입에 들어간 것을 뱉은 두 사람이 또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현, 저거 몰라. 몰라서 이러는 거야.”
“아는데? 정유원이 존나 따뜻해서 생기는 거잖아. 그거.”
손에서 울리는 작은 진동에 현규진의 시선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에 할
말과 반응까지 잃은 최해영과 김준재가 손에서 담배가 타들어 가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런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멍유원 : 나 끝나서 지금 나왔어]
[멍유원 : 어디야? 혹시 담배?]
[자기야 날 뭐로 보고]
[지금 내려가]
이미 마음이 미술실을 빠져나가 계단을 내려가는 느낌에 고개를 든 현규진이 아직도 질린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시선을 무시한 채 뒤돌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미술실을 나서자마자 계단을 몇 칸씩 뛰어 내려갔지만, 들떠 날뛰는 마음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현규진은 3 학년 교실이 있는 층으로 내려가자마자 제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는
유원을 발견했다. 눈으로 보기만 했는데도 코끝에서 포근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아…. 나 보고 손 흔든다. 존나 귀여워. 넘쳐흐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달려간 현규진이
유원에게 달라붙어 머리를 대고 비볐다.
“너네 담임은 뭔데 자꾸 너한테 일 시켜?”
“자료 정리하는 건데 전에 내가 교무실 갔다가 도와드렸잖아.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하면 따로
설명하고 그럴 거 없이 편하니까….”
“편한 건 담임이나 편하지.”
커다란 현규진이 치대자 자꾸 몸이 옆으로 밀렸다. 잠시 비틀댄 유원이 진정하라는 듯
현규진의 등을 두드리곤 고개를 기울여 어깨에 코를 가까이 댔다.
“담배 냄새 나는데….”
“나 진짜 안 피웠어. 안 피운 지 지금 한 달 됐는데. 이거 다 최해영이랑 김준재 그 새끼들이
피운 냄새야.”
“음…. 뭐어, 알았어. 믿을게.”
“뭐야, 안 믿는 얼굴인데. 자기야, 나 진짜 억울해. 피우고 의심 받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아냐, 믿어.”
유원의 얼굴을 본 현규진이 얼른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15 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시간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현규진은 얼른 유원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확인하러 가자.”
그 말을 끝으로 유원을 데리고 한 층 계단을 오른 현규진이 비어 있는 동아리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오래 비워 둬서 불도 켜지지 않아 어둑한 안쪽으로 들어가 커튼을 조금 걷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얼굴이 잘 보일 정도로만 빛을 허용한 현규진이 그 옆으로 유원을
세우고 몸을 숙였다. 키스할 것처럼 가까워진 얼굴에 유원의 숨이 흐트러져 현규진의 입술
위로 닿았다. 그 민트 향이 좋아 현규진이 씩 웃었다.
“확인해 봐.”
어떻게 확인을 해 보라는 건지 잘 몰라 빨개진 귀를 한 채 바라만 보던 유원이 살짝 얼굴을
앞으로 가져가 현규진의 입술 가까이에 코를 댔다. 담배 냄새가 아니라 달착지근한 과일 향이
나는 걸로 봐서는 제가 아침에 사 준 사탕을 먹은 모양이었다.
“…안 피운 것 같아….”
“에이, 그렇게 냄새만 맡아서는 모르지.”
“…그럼?”
싱긋 웃은 현규진의 입술이 벌어지며 그 사이로 혀끝이 나왔다가 들어갔다.
“담배 맛 나나 안 나나 보면 되잖아.”
“…누가 그렇게 확인을 해….”
“정유원이 하겠지, 이제.”
“…….”
“싫어?”
수작이라는 것도 알고 이런 거에 넘어가 주면 안 된다는 것도 아는데 싫은지 묻는 것에 싫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게 가장 곤란했다.
“…그럼 한 번만.”
“응. 한 번만.”
몸이 밀착했다. 짙은 섬유유연제 향이 현규진과 어울리지 않았다. 거기에서 신경을 거두자
눈앞에 입술에 초점이 맞았다. 느릿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살짝 나온 혀끝을 멍하니 보며
다가가 살짝 그 끝을 머금었다. 말캉하고 뜨거운 혀에서는 딸기 맛이 났다. 담배 맛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확인했어?”
“…응…. 담배 맛 안 나….”
“그럼 무슨 맛 나?”
“…사탕 맛.”
“무슨 맛 먹었게.”
“무슨 맛 먹었게.”
현규진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숨이 입술 위로 닿고, 등줄기가 오싹했다. 딸기 맛이라는 이미
알고 있는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묘한 기대감이 이미 머리 끝까지 차올라 유원의 발끝을
간지럽혔다. 이러다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쯤 현규진의 목소리가 다시
입술을 건드리며 울렸다.
“한 번 더 먹어 볼래?”
친구 사이 고백 금지-86 화(86/127)

86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다시 얼굴이 다가왔다. 유원은 잠자코 현규진과 눈을
맞추며 뜨겁고 말캉한 것의 맛을 보았다. 한 번으로 떨어질 줄 알았던 입술이 조금 더 깊게
맞물렸을 때 유원의 눈이 감겼다.
아랫배가 간지럽고 발끝이 움츠러들었다. 잔뜩 키스하고 싶었다. 부끄러움도 모른 채 그런
생각이 머릿속으로 번졌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물론 있었지만,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잔뜩 뒤엉킬 거라고 생각했던 혀는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마주 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달큰한 숨이 입술 위에서 뒤섞였다. 유원은 젖은 입술과 멍한 눈으로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아…. 미안.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어기게 되네.”
“…아냐…. 나도 뭐어….”
“그래서 정답은?”
“…딸기?”
“맞았어. 어떻게 알았어? 맛있었어?”
맞닿아 있던 몸이 떨어지며 장난기가 묻은 현규진의 목소리도 멀어졌다. 유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 현규진과 공원에서 깊은
마음을 확인한 뒤로 자꾸 마음이 쉽게 흐무러지곤 했다. 솔직히 지금도… 그냥 키스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더 컸다. 물론 그러면 안 되는 걸 알기는 하지만.
언제 15 분이나 지난 건지 점심시간 끝나는 종이 울렸다. 유원은 섬유유연제 향과 딸기 향이
폴폴 나는 현규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술 안쪽을 아무렇게나 꾹꾹 물었다. 자꾸 아쉽고,
모자라게 느껴지고…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웠다.
정신 차리자, 정신. 괜히 머리를 만져 정돈하며 심호흡한 유원이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냈다.
[입금] 지구야미안해 100,000 원
벌금인 건 알겠는데 입금명을 이해하지 못해 한참이나 들여다봤지만, 역시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지구? 유원은 현규진과 함께 동아리실을 나서며 휴대폰을 보여 주었다.
“지구한테 갑자기 왜 미안해?”
“안 그래도 너 너무 따끈따끈해서 지구온난화 오는데 내가 너 더 뜨겁게 해서.”
이상한 말 좀 그만하라는 말도 안 나오는 그런 말이라 웃음이 먼저 터졌다. 유원은 계단을
내려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보처럼 웃음이 계속 숨처럼 터져
나왔다.
“진짜 어이없어.”
“난 사실만 말한 건데.”
열을 가해 말랑해지다 못해 녹은 것처럼 부드러운 유원의 볼을 아프지 않게 늘렸다가 놓은
현규진이 마지막으로 머리를 꾹 눌렀다.
“어, 정유원 이제 내가 머리 누르면 좋아하네. 키 작아져, 하지 마! 안 하고.”
“…안 좋아했어. 하지 마, 키 더 작아져.”
“다 들켰어. 좋아하는 거. 나 이제 카운트다운한다?”
유원의 교실 앞문 쪽으로 비스듬히 기대 선 현규진이 시원하게 입매를 늘려 웃었다.
“카운트다운?”
“다시 정유원 거 될 날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서.”
“어, 얼른 너네 교실로 가.”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며칠이면 돼? 보름? 열흘?”
“오천 일! 얼른 가! 빠이.”
앞문으로 쏙 들어가 문을 닫는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슬쩍 앞문을 열고 자리에 가 막
앉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여보, 이따 봐. 5 교시 끝나고 올게.”
불긋해진 얼굴로 잔소리를 하기 전에 문을 닫고 교실로 가는 현규진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벨 울리는 소리에 문을 열자 현규진이 서 있었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씩
웃은 현규진이 턱을 잡아 들었다. 다정하지 않은 손길이었다.
‘아까 모자랐지? 다 알아.’
성큼 다가온 현규진이 단숨에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집어삼켰다. 조금의 배려도 없이 저를 집
안으로 밀고 가던 현규진은 아예 허리를 확 안아 올렸다. 유원은 그대로 현규진에게 매달린 채
혀를 마주 비볐다. 솔직히 모자랐던 것도 사실이고 내내 떠올렸던 것도 사실이라 이 침범이
기꺼웠다.
조용한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몸을 포개고 누워 숨이 막힐 만큼 깊게 키스하면서도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기분이 좋다는
생각만 들었다. 배려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현규진이 좋았다.
‘더 해 줄까?’
혼몽해질 만큼 밀어 붙이던 현규진의 입술이 떨어졌다. 유원은 헐떡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씩 웃은 현규진이 다시 깊게 입술을 물며 이번에는 티셔츠 아래로 손을 넣었다.
그래도 유원은 가만히 있었다.
허리를 쥐어도 말리지 않고, 벗겨져도 밀어내지 않고 현규진을 가득 끌어안았다. 한 번씩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밀려들어 머뭇대면 현규진이 그걸 막으면서 방해하지
못하도록 유원의 두 손목을 결박하듯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눌렀다. 평소에 볼 수 없는 다소
강압적인 손길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때 얼굴을 어딘가에 파묻고 있던 현규진이 고개를
들어 유원을 내려다보았다.
‘정유원, 변태 다 됐네?’
감겨 있던 눈이 확 뜨였다. 새벽까지 학원 숙제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유원은 두
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간을 확인한 뒤 한숨지었다.
“…아….”
진짜 미쳤나 봐. 학교에서 현규진이 담배를 피웠는지 안 피웠는지 확인을 한 뒤부터 내내 이런
상태였다. 몸이 흥분해 있거나 정신이 흥분해 있는 상태. 때로는 지금처럼 둘 다 달아올라
이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꿀 때도 있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 내내 몸 여기저기가 간질간질한 느낌을 참고 버티던 유원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던 것을 실패하고 결국, 혼자 해 버렸다. 내내 현규진을 떠올리며 해 버린 행위에
자책하고 다시 씻은 다음 잠들었지만, 그건 시작일 뿐 결코 끝이 아니었다.
현규진을 볼 때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모르겠는데 혼자 있을 때도 내내 머릿속에는
그 생각 뿐이었다. 딸기 사탕 향과 맛이 나던 그 말캉한 느낌도 계속 떠오르고 전처럼 잔뜩
뒤엉키지 못하고 떨어질 때의 그 아쉬움도 떠올라 마음이 마구 들쑤셔졌다. 유원은 몇 문제
남은 숙제를 덮고 책상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정말이지 이제 변태는 저인 것 같았다.
***
봄비 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비가 오면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아져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온 유원은 현규진이 사 준 꿀유자차를 마시며 중간고사 준비에 매진했다. 휴식기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바쁜 엄마와 아빠는 오늘도 집을 비워 내내 혼자였다.
집에 혼자 있던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 딱히 무섭거나 외로움을 느끼진 않지만, 비가
오는 날은 조금 말이 달랐다. 유원은 창을 두드리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고개를 들어 새카만 창밖을 바라보았다. 괜히 싸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오늘따라 집이
더욱 고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그때 창밖으로 번개가 번쩍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이 쪼개질 것 같은 천둥소리가 울렸다.
천둥소리를 무서워 할 나이는 아닌데 오늘따라 괜히 조금 무서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너무
고요해 빗소리가 집 안까지 침투한 것 같은 적막한 분위기가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현규진한테 와 달라고 할까…. 아냐, 시험 3 일 전이라 오늘부터는 각자 공부하기로 했는데….
괜히 제가 현규진의 공부를 방해할까 싶어 고개를 저은 유원이 다시 학원에서 뽑아 준 예상
문제에 집중하려 고개를 숙였다. 그때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 화면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규진 : 너랑 같이하다가 혼자 하려니까 집중 안 돼]
[규진 : 분리불안 미쳤다]
[규진 : 오늘만 같이하면 안 돼?]
[규진 : ㅅㅂ 천둥 존나 무서워]
꼭 제 마음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현규진이라면 다 알고 보냈을 것이었다. 제가 비
오는 날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것도 창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를 무서워한다는 것도, 오늘
집에 혼자 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으니까.
“…….”
괜찮다고 해야 하는데 괜찮지가 않아서 적을 수가 없었다. 무서울 만큼 집을 뒤덮은 적막
안으로 불쑥 다가온 다정함에 매달리고 싶었다. 그날 공원에서 현규진과 마주한 이후 마음이
숨겨지지 않기 시작했다.
[빨리 와]
[나도 무서워]
무르익어 가만히 있어도 얼굴 위로 흔적이 남는 감정과 비를 맞아 흐무러진 마음 안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진심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딱 3 분 후 현규진이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자 습한 공기와 함께
현규진의 냄새가 온몸으로 달라붙었다. 흐물흐물해진 마음 모서리를 뚫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감정은 쉽게 자신의 주인을 알아보고 빠르게 기울기 시작했다.
“날씨 왜 이래. 장마 온 줄.”
“그러게. 비 진짜 많이 와.”
집 안으로 들어온 현규진이 자연스럽게 유원의 목덜미를 한 번 주물렀다. 모든 감각이
목덜미로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과외 방에서 하자. 거기가 더 편하잖아.”
“엉.”
자연스럽게 과외를 하는 방으로 들어가는 현규진을 본 유원이 얼른 제 방으로 가 공부하던
것을 챙겼다. 뭐 간식이라도 먹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복도를 나서는데 집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큰 천둥소리와 함께 집 안의 불이 모두 꺼졌다.
“…어?”
온통 새까매진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선 유원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여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새카만 어둠 안으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너무 커 두려움이
불쑥 치고 올라와 사고를 방해했다.
“아, 뭐야. 정전된 거야? 정유원, 어딨어?”
당황해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는 유원의 앞으로 걸음 소리가 들렸다. 유원은
겨우 입을 열어 현규진을 불렀다.
“규진아…. 나 여기이….”
“아, 진짜 정전 뭔데. 존나 놀랐네.”
휴대폰을 꺼내 손전등 버튼을 누른 현규진이 유원의 방 복도 쪽을 비추었다. 그리고 제가 비춘
빛의 길 안에 오도카니 서 있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비가 아주 많이 올 때면 늘 축
늘어져 맥을 못 추던 것을 알기에 오늘도 걱정이 되어 왔는데 정말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을 때 정전이 됐으면 정말 많이 무서워했을 테니까.
“그러게 내가 너 혼자 다니면 안 된다고 했지. 위험하게 왜 방에 혼자 가.”
분위기를 풀려 장난스럽게 말한 현규진이 유원의 어깨를 감싸 안고 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지금 공부방으로 가 봤자 아무것도 못 하고 책상에 덩그러니 앉아 있어야 할 테니 차라리
방으로 가는 게 더 나았다.
“공부 좀 하려고 왔더니 진짜 도와주질 않네. 미친 거 아냐?”
방으로 들어간 현규진은 유원이 든 파일과 필통을 가져가 책상에 놓고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저도 그 옆으로 앉아 손전등을 켠 채 엄마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엄마 : 정전돼서 놀랐지? 관리실 전화했더니 우리 동 전체가 정전이래 바로 살피고 있다니까
곧 들어올 거야]
[알았어 나 여기서 자고 갈게]
[엄마 : 그래 유원이 잘 챙겨]
[넵]
엄마에게 정보를 얻은 현규진이 유원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비에 어둠까지 취약한 것들을
한 번에 마주한 유원은 조금 불안해 보였다.
“비 많이 와서 정전됐나 봐. 엄마가 연락해 봤는데 금방 다시 들어올 거래.”
“응…. 갑자기 불 다 꺼져서 놀랐어.”
“나도. 확 다 꺼지니까 진짜 하나도 안 보여서 나오다가 씨발, 책상에 다리 찧었잖아. 존나
아파.”
“어디 찧었어? 괜찮아?”
그 와중에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유원을 보고 씩 웃은 현규진이 그대로 유원의 허리를 잡아
침대 안쪽으로 밀어 넣어 눕혔다. 그리고 저도 그 옆으로 벌러덩 누웠다.
“왜, 왜… 누워, 갑자기이….”
“불 들어올 때까지 할 것도 없잖아.”
손전등까지 끄자 방 안으로 어둠이 찾아들었다. 유원은 다시 불을 켜 주면 안 되는지 물으려다
그냥 묻지 않고 입술을 닫았다. 분명히 무척 무섭고 불안한 어둠이었는데 지금은 별로 무섭지
않기 때문이었다. 창을 마구 때리는 빗방울 소리도 더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가족은 돌아오지 않았고, 거기다가 정전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더해졌는데도 불안하기는커녕 정말 그냥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현규진이 제 옆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게 달라진 것이었다.
“…….”
톡. 창을 두드린 빗방울이 그대로 유원의 마음 안으로 들어와 흘렀다. 그리고 또 톡, 토독.
세차게 현규진이 쏟아져 내렸다.
어둠 속으로 불이 반짝 켜졌다. 휴대폰 불빛에 비친 현규진의 얼굴을 본 순간 온통 현규진으로
젖은 유원의 마음 안에도 반짝… 빛이 움텄다. 그 순간 유원은 깨달았다.
현규진과 다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친구 사이 고백 금지-87 화(87/127)

87


끝이 날까 봐 두렵고, 또 멀어질까 봐 겁이 났다. 너무 좋아하니까, 또 너무 소중하니까. 모든
시간을 함께하며 온 눈동자를 가득 물들인 현규진과 싸우는 게 너무나 무서웠다.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어 더 그랬다.
장난으로 넘어갈 수 없고, 그냥 푸스스 웃어 넘길 수 없을 만큼 다투고 혼자 남았을 때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가 헤어지면 정말 끝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때부터 늘 불안했다. 그때
유원이 떠올린 것이 친구였다. 다시 친구가 되면 그렇게만 된다면 전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현규진이 친구인 척을 하자고 했을 때, 그러다가 진짜 다시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을 해 줬을 때 기뻤다. 정말 저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제안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친구인 척을 하다 보면, 그렇게 전처럼 같이 어울리다 보면 어느 순간 정말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이제 유원은 알아 버렸다. 사실 저 역시 현규진과 친구가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현규진과 친구인 척을 하기로 한 그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친구였던 적이
없다는 것도.
애초에 친구끼리는 하면 안 되는 일 같은 것을 메모에 정리할 일이 없다는 것도, 키스를 한
다음에 벌금을 받는 것 역시 친구 사이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까지… 지금 다 깨달아
버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나 제 마음이 현규진을 친구로 보고 있지 않았다는 것도 마주해
버렸다. 담배를 피웠는지 확인하려 혀에서 무슨 맛이 나는지 맛을 보고, 그렇게 짧게 닿았다가
떨어진 것이 아쉬워 자책 가득한 몇 번의 밤을 보내는 게 어떻게 친구일 수 있을까.
현규진은 저의 친구였지만, 지금은 친구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친구일 수 없었다. 흠뻑 젖은
마음으로 유원은 너무나 당연한데 여태껏 억누르고 있던 감정과 마주했다. 흐무러진 마음은
이제 현규진의 손안에서 줄줄 액체가 되어 사라졌다. 무르익은 마음은 더는 숨을 곳이 없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얼굴을 비추던 빛이 다시 꺼지고 어둠 속에서 현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부작사부작 이불
흐트러지는 소리와 함께 제 쪽으로 돌아눕는 현규진을 향해 유원도 몸을 돌렸다.
“비 존나 많이 온다, 진짜. 아까 혼자 안 무서웠어?”
“…쪼끔 무서웠어.”
“나 부르지.”
“오늘부터 혼자 공부하기로 했잖아. 너도 할 거 많은 거 아는데 괜히 방해될까 봐.”
“또 방해…. 정유원. 잘 들어.”
새카만 어둠 속으로 현규진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머리칼에 닿는 손이 꼭 우산 같았다.
제가 흠뻑 젖는 것을 막아 주는.
“어떤 경우에도 네가 나한테 방해가 되는 일 같은 건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
“그런 말 하지 마.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네가 그런 말 하면 진짜 좀… 마음이 그래. 네가 정말
나한테 거리 두는 것 같아서 기분 이상해.”
“…그런 의미는 아닌데…. 미안해. 안 그럴게.”
“그렇다고 또 미안해할 것도 없어. 그냥 그렇다고. 알아 주기만 하면 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제가 하는 말 하나에 불안함을 느끼고 서운함을 느끼는 현규진이
너무나 잘 느껴졌다. 유원은 어둠의 힘을 빌려 현규진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머리를 기울여
놓았다.
“…자고 갈래?”
“어두워서 집에 가기 힘들겠지? 정전이라 엘리베이터도 멈췄을 거 아냐. 이 밤에 계단도 존나
어두울 거고.”
“응….”
“나 어디서 자? 게스트룸?”
“…아니. 여기.”
현규진의 몸이 조금 더 밀착되는 게 느껴졌다. 유원은 피하지 않았다.
“바닥?”
“…내려가고 싶으면 내려가서 자도 돼.”
“안 내려가고 싶으면 안 내려가도 되고?”
“…응.”
“…와, 씨. 진짜 카운트다운해야겠다. 3, 2, 1….”
냅다 3 초 카운트다운을 하는 현규진의 목소리에 작게 웃은 유원이 슬쩍 현규진의 팔을
밀었다. 조금 밀리는 듯하던 현규진은 밀린 것보다 몇 배는 더 밀착해 왔다.
“그 정도는 아니거든….”
“아니야? 침대까지 허락했으면 다 넘어왔는데.”
“내려갈래?”
“와, 협박하는 거 봐라. 양아치다, 양아치. 알았어. 불 켜질 때까지 그냥 좀 자자.”
“그러다 못 깨면?”
“그냥 아침까지 자는 거지.”
“…음, 그럼 나 양치 다시 해야 돼. 아까 양치하고 뭐 또 먹었단 말이야.”
“뭐 먹었는데.”
네가 사 준 유자차를 마셨다고 말하려던 유원의 머릿속으로 해 보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너무
하고 싶은데 솔직히 그런 말을 할 용기는 없어 입술만 열었다가 닫고, 또 열었다가 닫는 것을
반복했다.
“응?”
되묻는 소리가 들렸을 때까지도 머뭇대던 유원은 조금 무모할지도 모르고 소리 낸 걸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 말을 작게 소리 냈다.
“…맞혀 볼래?”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둠에 눈이 익기는 했지만, 정확히 보이지 않는 현규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려던 그때 얼굴
가까이 현규진이 다가오는 느낌이 났다. 현규진의 상체가 살짝 들리는 게 어둠 속에서 보였다.
곧 얼굴 위로 어둠이 쏟아졌다.
내려온 입술은 먼저 유원의 뺨에 닿았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입가에 닿았고, 세 번째에야
입술에 정확히 닿았다. 따끈따끈하고 말랑한 입술이 눌리다가 그 사이로 더 뜨거운 것이
문질렸다. 유원은 현규진이 그랬던 것처럼 혀를 입술 사이로 빼꼼 내밀었다. 정말 맛을 보듯
머금고 떨어진 현규진의 낮은 목소리가 얼굴 위로 떨어졌다.
“정답, 유자차.”
“맞았어.”
“정유원 어디서 이런 것만 배워서, 어?”
“…너한테 배웠잖아.”
“누굴 죽이려고.”
“…몰라. 졸려…. 그냥 잘래. 무서워서 화장실 못 가겠어.”
“정유원 너 진짜 야하다. 진짜 미쳤어. 큰일이다, 진짜. 앞으로 어떡할래.”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감탄하는 것 같기도 한 현규진의 목소리에 얼굴이 화끈대는 걸
느낀 유원이 팔을 아프지 않게 때리곤 눈을 감았다. 곧 따뜻함이 온몸을 감쌌다. 현규진의
따뜻한 냄새가 나는 품으로 얼굴을 묻으니 빗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현규진이
쏟아지는 마음은 여전히 축축했다. 앞으로도 내내 마를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잘 자, 정유원.”
“…응. 너도 잘 자.”
온전한 온기 속에서 잠이 들려는 순간 어렴풋이 방 바깥에서 전기가 다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야 하나? 아니면 그냥 잘까.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유원은 저의
안락한 어둠 속에서 그대로 잠이 드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어떤 후회도 없었다.
***
중간고사 기간 내내 오던 비는 마지막 날 반짝 그쳤다. 안 그래도 시험의 압박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데 날씨까지 궂어 우중충하던 교실 안으로 드디어 웃음소리가 번졌다.
현규진과 같이 푼 예상 문제를 살짝 응용한 문제가 많이 나와 꽤 만족할 만한 성적을 얻은
유원은 이제야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시험 기간 내내 머리도 아프고 컨디션도 안
좋아 걱정이었는데 무사히 시험을 마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오늘 뭐 할 거야? 시험도 끝났는데.”
“집에 가서 오늘은 좀 자려고. 며칠 잘 못 잤더니 몸이 안 좋아서. 윤성이 넌 뭐 할 거야?”
“난 도장 가서 운동하려고! 나 근육 좀 생긴 것 같지 않아? 여기 만져 봐. 좀 단단해졌다?”
근육 자랑을 하는 모양으로 팔을 들어 올린 이윤성을 보고 웃은 유원이 만져 보라는 곳 위로
살짝 손끝을 댔다. 확실히 보통 살보다 단단한 느낌이 났다.
“진짜 단단해진 것 같아. 운동이 그렇게 재밌어?”
“응! 거기 도장 진짜 좋더라. 관장님도 친절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다 좋아. 운동도 잘 알려 주고.
수능 끝날 때까진 체력 키우는 정도만 운동하고 끝난 다음에 몸 만들려고. 나도 규진이처럼
싸움 잘하고 싶어.”
“싸움 잘하는 거 별로야. 안 싸우는 게 좋지이….”
“그래도 전에 규진이가 이우진 확 잡아서 바닥으로 누를 때 진짜 쩔었어. 와, 진짜 남잔데도 막
고백하고 싶은 기분?”
현규진 찬양에 정신이 없는 이윤성을 보며 웃은 유원이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에 현규진이 없는 걸 보니 아직 그 반 종례가 안 끝난 모양이었다. 유원은 자연스럽게
현규진의 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교실 앞으로 가서 살짝 열린 뒷문 안을 들여다보니 이미 책상 바깥으로 다리를 빼고 앉아 있는
현규진이 보였다. 교복은 어쨌는지 위에는 체육복을 입고 있고, 한쪽 어깨에 가방도 메고
있었다. 끝나자마자 교실 밖으로 뛰어나올 완벽한 준비를 하고 있는 현규진이 귀여웠다.
“귀여워….”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유원이 옆으로 비켜 서려는 순간 현규진의 고개가 움직였다. 겨우
10cm 정도 되는 틈으로 눈이 마주치고, 현규진이 미소 지었다. 순간 유원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어지러움과 함께 한계에 다다랐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현규진이 좋아서
이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끌어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직 그걸 실제로 행하지 않는
자제력이 남아 정말 다행이었다.
“…….”
현규진의 입술이 뽀뽀하는 것처럼 앞으로 나왔다가 들어갔다. 저를 보고 고개를 기울이기도
하고 웃음을 숨기지도 않았다.
“규진이가 유원이랑 얼른 집에 가고 싶은 것 같으니까 종례는 여기까지.”
문 안에서 들리는 현규진 반 담임 선생님 목소리에 놀란 유원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창문으로 보이지도 않을 위치에 있고, 조금 열린 문 안으로도 안 보일 텐데 제가 온 걸 어떻게
아신 건가 싶었다.
누군가가 환호를 하고 탄성을 내지르며 잠시 교실 안이 소란해졌다. 반장의 인사와 함께
소란이 잦아들고 현규진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현규진이 나오는 동시에 앞문으로도
최해영과 김준재를 비롯한 몇몇 애들이 쑥 나왔다.
“와, 멍유 찐으로 있네.”
“담임이 주례 보면 되겠네.”
놀리는 소리에 괜히 볼을 만진 유원이 곧 제 눈앞을 확 가리는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저딴 거 보지 마. 지지야, 지지. 오늘 종례 일찍 끝났네?”
“응, 시험 끝난 날이라 빨리 가서 하루 쉬라고 딱 인사만 하고 끝났어.”
“그래서 나 기다린 거야?”
당연한 걸 묻는 현규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유원이 웃음이 만연한 현규진의 얼굴을 살폈다.
어느 부분에서 기분이 저렇게 좋아진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네가 나 기다려 주니까 왜 이렇게 좋지. 진짜 존나 좋은데?”
“전에도 기다린 적 있잖아.”
“응, 있는데 오늘은 더 좋아. 미치겠어, 진짜. 키스하고 싶어.”
마지막 말은 속삭이며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른 애들이 많은 곳에서 말하는
현규진에 놀란 유원이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그런 말 하지 마. 누가 들어.”
“들으면 뭐.”
“혼나, 진짜.”
“몰라. 혼나도 기분 존나 좋아.”
계속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보니 어쩔 수 없이 따라 웃음이 나왔다. 유원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함께 복도를 벗어났다.
“오늘은 집에서 쉴 거지?”
“응…. 너무 피곤하고 컨디션도 별로 안 좋아서 자고 싶어.”
“점심 맛있는 거 먹고 자.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음, 뭐 삼계탕 같은 거 먹을래? 아니면
엄마한테 게살수프 해 달라 그럴까? 전복찜이나.”
“음…. 전복 얘기 들으니까 그 전복 솥밥 먹고 싶어.”
“아, 거기 배달 되잖아. 그거 먹자, 그럼. 점심 먹고 나랑 뽀뽀 좀 하다가 푹 자.”
은근슬쩍 사심을 담은 과정에 고개를 저은 유원이 횡단보도에 멈춰 서며 현규진의 어깨를
밀었다. 과장되게 밀려나 준 현규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 정유원 뽀뽀로 만족 못하지. 키스하자, 그래.”
“조용히 해.”
“와, 친구가 말하는데 조용히 하래. 정유원 인성 나날이 양아치.”
유원의 머리를 깨물 것처럼 장난치는 얼굴 위로 쏟아지던 빛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간만에
햇살이 쏟아진다 싶더니 어김없이 어둑해지는 하늘에 유원은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비 온단 말 없었는데….”
“그러니까.”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 바뀌기를 기다리며 현규진은 휴대폰 날씨 앱에 들어갔다. 분명히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해와 구름 정도만 그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우산이 나와 있었다.
“아, 미친. 비 또 온대. 장마도 아닌데 돌았나.”
“쏟아질 것 같아…. 우산도 없는데.”
“그러게. 오기 전에 빨리 가자.”
“어…. 비 온다아….”
투둑, 투두둑, 툭. 빗방울이 보도블록 위로 떨어졌다. 눈이 비를 인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뺨과 머리 위로도 차가운 빗방울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늘 가지고 다니던 우산을 하필 아침에
빼놓고 와서 당장 유원의 머리 위를 막아 줄 것이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현규진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 두 개를 바닥에 내려 두곤 입고 있던 체육복 상의를 벗었다.
“왜?”
“너 비 다 맞으면 큰일 나. 안 그래도 컨디션 안 좋은데.”
가방 안에 교복 셔츠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너무 얇아서 머리 위를 덮으나 마나일 것이었다.
그대로 커다란 체육복 상의를 유원의 머리 위로 덮은 현규진이 하얀 반팔 티 위로 두 가방끈을
다시 걸쳤다. 유원의 시선이 빗방울에 젖기 시작하는 현규진의 어깨에 닿았다가 저를
내려다보는 두 눈에 닿았다.
“뛸 수 있지?”
예고 없는 빗줄기 안에서 현규진이 웃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88 화(88/127)

88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 안에서 발을 옮길 때마다 찰박찰박 물이 튀었다. 운동화가 젖고,
양말까지 젖는 느낌이 났지만, 달리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유원은 제 손을 단단히 잡고
뛰는 현규진의 뒷모습을 보며 부단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갑자기 비가 많이 쏟아져 여기저기 흠뻑 젖어 버렸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 유원은 머리 위를 덮고 있던 축축해진 현규진의 체육복을 내렸다. 그래도
체육복 덕분에 유원의 머리나 얼굴, 어깨는 비교적 멀쩡한 편이었다. 그에 반해 현규진은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아, 진짜 비 존나 오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걸음을 옮긴 현규진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유원은 얼른 6 층을
누르고 현규진을 돌아보았다. 흠뻑 젖은 하얀 티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속이 다 비쳤다.
“정유원 변태.”
몸에 달라붙은 티를 떼며 현규진이 놀리듯 웃었다. 얼른 시선을 피한 유원이 현규진의 손목을
잡고 6 층에서 내렸다.
“…좀 닦고 가.”
유원은 얼른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저도 모르게 엄마, 아빠가 집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관에는 유원의 바람대로 엄마, 아빠의 흔적이 없었다.
현규진이 젖은 운동화를 벗을 때까지 기다린 유원은 축축한 손으로 현규진의 손목을 쥔 채
방이 있는 쪽 욕실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젖은 양말 때문에 바닥으로 두 개의
발자국이 찍혔다.
욕실로 들어간 유원은 타일 위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얼른 마른 수건을 들어
현규진의 얼굴과 젖은 머리칼부터 닦아 주었다. 현규진의 시선이 피할 수도 없게 얼굴 위로
꽂혔다. 유원은 동요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미 동요하다 못해 현규진으로 가득 찬 마음이
찰랑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짐짓 태연한 척을 했다. 이렇게 정적인 척하지 않으면 사고를 쳐
버릴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난 됐으니까 너부터. 감기 걸려.”
손에 들려 있던 수건이 현규진의 손으로 옮겨 갔다. 수건이 다정할 리도 없고 달콤할 리도
없는데 너무도 다정히, 달콤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부드러움으로 얼굴에 닿았다.
“안 되겠다. 얼른 따뜻한 물로 씻고 나와. 너 이러다 감기 걸리면 진짜 큰일 나.”
“…네가 더 많이 젖었잖아….”
“그게 뭐. 나 젖은 게 뭐가 중요해.”
유원은 멍하니 저를 닦아 주는 현규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비를 맞아 부풀어 크기를 키운
감정은 이제 더는 심장 안에 갇혀 있을 수 없었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너.”
“…….”
“나한테는 너만 중요해.”
태연한 척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동요하지 않는 척도 할 수 없고, 현규진과 친구 사이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견디지 못하고 무언가라도 소리 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입을 벌리자
좁은 공간을 참지 못하고 흘러나온 열병 같은 감정이 현규진을 향했다. 마음이 너무 뜨거워 이
감정을 전하지 않으면 몸까지 다 타 버릴 것만 같았다.
“…규진아….”
“응.”
터져 나오기 시작한 감정 때문인지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소 제
목소리랑 너무 다른 것 같았다. 유원은 제가 소리 낸 이름을 따라 고개를 숙여 다가오는
현규진을 멍하니 두 눈 가득 담았다.
“…카운트다운… 이제 해도 돼….”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현규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안에서 일렁이는 눈동자에 유원은
완전히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이제 더는, 정말 더는 단 몇 분도… 아니, 몇 초도 참기가
힘들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오천 일?”
제가 말했던 것을 기억하며 소리 내는 현규진을 보면서도 유원은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너무
떨리고, 또 너무… 너무 현규진과 닿고 싶어서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오천 일이라니…. 단
5 분도 기다릴 수 없었다. 유원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음, 열흘?”
또 고개를 젓자 현규진의 얼굴이 다시 느릿하게 내려왔다.
“열흘도 아니야? 그럼 한 3 일?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일부러 다 알면서 이러는 게 분명했다. 제가 그동안 본의 아니게 애를 태운 것도 있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한 것도 알지만, 저는 닿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그걸 다 알면서 일부러
거리를 벌리고 있는 현규진을 보니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울려고 그래, 자기야.”
“…규진아, 빨리이….”
“하루?”
“…싫어…. 너 원래 하던 대로, 응?”
기어이 눈물이 넘치는 느낌이 났다. 빗물에 젖었던 얼굴 위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본 현규진의
눈동자가 보다 깊어졌다.
“그럼 3 초 뒤에 나 다시 네 거 되는 거야?”
“…응.”
“나 진짜 한다, 카운트다운? 3, 2….”
그 마지막 1 초를 참지 못하고 유원의 발꿈치가 들렸다. 입 안으로 흐르는 마지막 1 초는 아주
달콤했다. 유원은 입술을 급히 마주 무는 현규진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깊게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지며 눈이 깊게 마주쳤다.
다시 한번, 3, 2, 1.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다가가 서로를 가득 끌어안고 입술을 마주했다.
감정으로 젖어 마음은 온통 축축하고, 그 안에 품은 열기에 모든 것이 따뜻했다.
코끝으로 확 끼치는 비 냄새와 그토록 좋아하는 너의 냄새.
그렇게 현규진과 정유원의 친구 사이가 끝났다.
유원은 뒷걸음쳤다. 눈을 감고 저에게 쏟아져 내리는 현규진의 키스를 마주한 채. 여전히 젖어
있는 양말은 뒤로 대담하게 발을 내디딜 때마다 조금씩 미끌리며 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평소라면 어둑하고 미끄러운 복도를 뒷걸음쳐 간다는 게 무서웠겠지만, 지금은 평소와 달리
현규진이 제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유원은 넘어질 일이 전혀 없다는 안도와 함께
현규진이 정한 방향대로 발을 움직였다.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자 유원 특유의 포근한 냄새가 확 온몸으로 달라붙었다. 현규진은 더
흥분하며 유원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파고들었다. 무척 깊고, 다소 거친 키스였지만,
유원은 현규진을 조금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내 바라던 감각을 마주해 무척 기꺼웠다.
그동안 이렇게 거칠고, 숨이 막히는… 키스를 원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변태가
된 것 같아 무척 부끄러웠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잘 정돈된 침대 위로 눕혀진 유원은
곧 제 몸 위를 누르며 올라오는 현규진을 꽉 끌어안았다. 온몸을 내리누르는 무게가 너무
좋았다.
“아, 침대 다 젖겠다.”
누우면서 떨어진 입술 사이로 현규진의 열기가 묻은 목소리가 흘렀다. 젖은 티셔츠와 교복
셔츠가 닿아 있는 곳이 무척 뜨겁게 느껴졌다. 유원은 떨어지려는 현규진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
“이러다 진짜 너 감기 걸려.”
“……그래도… 괜찮아.”
“난 안 괜찮아. 너 아프면 속상해.”
“…떨어지기 싫어….”
몸을 반쯤 세운 현규진의 시선과 마음이 그대로 제 아래 있는 유원에게 뚝 떨어졌다.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저렇게 예쁜 얼굴로 여기저기 잔뜩 젖어서 저에게 고백을 하고, 떨어지기
싫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녹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앞으로 계속 안 떨어질 건데?”
“그래도…. 앞으로는 앞으로고 지금은… 지금이잖아.”
“그건 그래. 음, 그럼 키스 한 번만 더 하고 옷 갈아입을까?”
“…응.”
“알았어.”
살짝만 손으로 건드려도 손 끝에 달라붙어 늘어날 정도로 말랑말랑해진 유원은 지나치게
귀여웠다. 이렇게 온순하고 귀여워도 되나 싶을 만큼 정도가 지나쳐 현규진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유원의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몸을 잔뜩 감싸 안은 채 원하는 만큼 잔뜩 입술을 마주하자
허리로 팔이 감겨 오는 느낌이 났다. 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안달이 난 정유원이라니…. 이제
더 바랄 게 없었다.
너무 숨이 막히지 않게 입술을 마주 문 채로 간질간질 혀끝을 비비자 어깨를 움찔대는 게
느껴졌다. 그 반응이 너무 좋아 그냥 가볍게 끝낼 수가 없었다. 현규진은 젖은 몸을 다시 포갠
채 유원의 입 안을 깊게 파고들었다. 젖은 소리가 목에서 짧게 울리다가 조금 길게 늘어질
때쯤 숨이 헐떡이기 시작했다.
“이제, 하…. 옷 갈아입자.”
한참 맞물려 있던 입술을 뗀 현규진이 잔뜩 데워진 숨으로 유원을 달랬다. 제 아래 누워
헐떡대면서도 계속 아쉬운 얼굴을 하는 유원을 보고 있자니 아랫배로 열기가 고였다. 아니,
사실 아까 유원이 엘리베이터에서 젖은 제 티셔츠를 볼 때부터 시작된 열기였다.
그때 맺힌 열기는 멍한 유원의 시선을 보며 점점 커져 카운트다운을 해도 된다고 귀엽게
말하는 순간 하나의 형태가 되어 몸과 머리를 가득 채웠다. 유원을 미친 듯이 괴롭히고 싶기도
하고, 또 세상 가장 소중하게 보호하고 싶기도 했다.
양립하기 어려운 감정의 저울질에 현규진은 일단 유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보다 선한 생각을
따르기로 했다. 이럴 땐 조금 아쉬워도 착한 의견을 따르는 게 후회가 없었다.
“이제 얼른 씻고 와.”
“…넌? 너도 옷 갈아입어야지. 감기 걸려.”
“네 옷 안 맞는데. 내가 전에 두고 간 옷 있나? 바지는 없던 것 같기도 하고.”
“아, 아빠 옷 줄게. 아빠 옷은 크잖아.”
“아, 그럼 이모부 옷 빌려야겠다.”
“잠깐마안.”
떨어지기 싫다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서는 뒷모습이 또 너무 귀여웠다. 현규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유원 때문에 젖은 이불을 들어 올려 코 아래 대었다. 비 냄새와 섞인 포근한
향에 정말 설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조급해하지 않아도 됐다. 이 포근한 냄새가 전부 저의 것이 됐으니까. 제
것이었다가 아니게 돼서 정말 미칠 것 같았는데 이제 정말 다시 제 손에 들어왔다.
다시는, 정말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현규진은 방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급한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웃음 지었다. 정유원은 발소리도 귀여웠다.
“이거 맞지 않을까? 아빠 옷 중에 큰 건데….”
큰 티셔츠를 쫙 펼친 채 다가온 유원이 현규진의 몸 앞으로 옷을 대 보았다.
“맞을 것 같아. 팔에 그건 뭐야, 바지?”
“응, 아빠 가끔 밤에 산책하러 가실 때 입는 건데 엄청 편하대. 너한텐 좀 짧긴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벗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아니면 내가 얼른 씻고 너희 집 가서 옷 가지고 올까?”
“힘들게 뭘 그래. 그거 입을게, 그냥. 안 맞으면 벗고 있지 뭐. 이제 벗고 있어도 되잖아. 친구도
아닌데.”
“…친구 아닌 거랑… 옷 벗고 있는 게 무슨 상관이야….”
장난스럽게 웃은 현규진이 몸을 일으켜 책상 위에 있는 스탠드를 켰다. 방 전체를 환하게 만들
만큼 밝지는 않지만, 유원의 얼굴을 온전히 두 눈에 담을 정도는 됐다. 빛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저를 온전히 밝히는 저만의 빛은 제 눈앞에 있으니까.
친구 사이 고백 금지-89 화(89/127)

89


“얼른 씻고 오세요. 너 진짜 그러다 감기 걸리면 나 슬퍼. 규진이 슬퍼도 돼?”
“…으….”
“반응 봐라. 정유원, 예쁘면 다야? 어? 예쁘면 막 반응 그렇게 막 해도 돼?”
볼을 주무르는 현규진을 올려다본 유원이 아까보다 조금 마르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젖어
있는 현규진의 티셔츠를 살짝 앞으로 당겼다가 놓았다.
“…난 저기 엄마, 아빠 방 욕실 쓸 테니까… 넌 내 방 옆에 거기서 씻어. 뭐 하러 따로따로 씻어.
감기가 나만 걸리는 것도 아니고…. 너도 이러고 계속 있으면 감기 걸려.”
“방금 진짜 존나 야한 말한 거 알지.”
“…내가?”
“응. 뭐 하러 따로 씻냐며. 아, 진짜 정유원 변태. 그래서 자꾸 안 씻고 버텼구나. 같이 씻고
싶어서. 알았어, 알았어.”
진짜 같이 씻으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다가오는 현규진의 가슴팍을 살짝 민 유원이 얼른
뒤돌아 서랍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속옷을 꺼내 티셔츠와 바지
사이에 숨겼다.
“씻고 올게! 너도 바로 씻어.”
도망치듯 방을 나서는 유원의 뒷모습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유원이 가져다준 옷을 챙겼다. 왜
유원의 부모님이 유원을 아직도 강아지라고 부르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저도 세상에
있는 모든 귀여운 이름을 다 유원에게 붙여 주고 싶었다.
씻으러 바로 나가려던 현규진은 그 전에 저녁 먹을 걸 주문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든든하게 저녁을 먹이고, 따뜻한 것까지 마시게 한 다음 아주 포근하게 재울
생각이었다. 안 그러면 정말 크게 앓을 가능성이 컸다. 시험 기간 내내 받은 스트레스에
비까지 맞았으니 무조건 과하게 챙기고 살펴야 했다.
“…음.”
전복 솥밥에 전복 추가, 그리고 유원이 좋아하는 부드러운 계란찜과 타르타르소스에 찍어
먹는 커다란 새우튀김까지 넉넉히 주문한 현규진이 배달앱에 뜨는 ‘38 분 후 도착’이라는
문구를 확인했다. 이 정도면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바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정말 씻으러 가야겠다 생각하며 침대에서 한 걸음을 움직였을 때 유원의 몸이 반쯤 다시
방 안으로 쏙 들어왔다. 현규진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런 유원을 살폈다. 씻으러 간다더니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있잖아….”
“응, 왜. 어디 아파? 안 좋아? 어지러워서 못 서 있겠어?”
“…아니이…. 물어볼 게 있어서….”
“물어볼 거? 뭔데?”
문틀을 쥔 채 잠시 머뭇대던 유원이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현규진은 그 예쁜 입술 사이에서 나올 말에 집중했다.
“…우리 다시 사귀는 거 맞지?”
아, 존나 귀여워, 씨발. 혹시 어디가 아파서 그런 건가 걱정했던 마음이 허물어지며 몸에
들어갔던 힘도 쭉 빠졌다. 생각지도 못한 사랑스러운 물음에 씩 웃은 현규진이 성큼성큼
유원에게 다가갔다. 커다란 몸이 내려가 예쁜 말이 묻은 입술을 깊게 물었다가 놓았다.
“응. 사귀는 거 맞아. 정유원 내 거. 난 누구 거?”
“…내 거…. 나 그러엄… 진짜로 씻고 올게.”
평소라면 이런 간지러운 물음에 대답을 안 해 줬을 텐데 고분고분히 답을 돌려주는 유원이
너무나 좋았다. 저만큼이나 유원도 지금 무척 행복해하고 있다는 게 보여서 더 그랬다.
좋아 미치겠는 마음을 숨길 길이 없어 유원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대고 비비적댄 현규진이
속삭였다.
“나도 너 씻는 동안 빨리 씻을게. 씻고 봐. 나 보고 싶어도 좀만 참고.”
“알았어…. 씻고 만나.”
“아…. 존나 예뻐….”
어떻게 사람이 씻고 만나자는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정유원은 사람이 아니라 요정이 아닐까?
아니면 천사? 현규진은 반짝거리고 귀여운 생각을 하며 유원의 뺨에 쪽, 쪽 몇 번이고 입
맞췄다.
“응, 씻고 꼭 만나.”
어린애한테 대답하듯 말하는 현규진을 보고 웃은 유원이 다시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
코너를 돌아 쏙 사라지는 유원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현규진도 갈아입을 옷을 들고
방을 나가면 바로 있는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는 재결합의 벅찬 순간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물기에 젖은 수건이 떨어져 있었다.
‘규진아. …카운트다운… 이제 해도 돼….’
생각하지도 못한 카운트다운 이야기를 유원에게 들었을 때 정말 너무 놀라 제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카운트다운을 한다고 장난스럽게 3 초를 세면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귀가 빨개져 말하던 정유원을 기억하고 있어 더 그랬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안달이 나서 원래 하던 대로 딱 3 초만 세라고 보채고, 그 3 초도 못
참아 먼저 키스하는 정유원이라니…. 아, 미친. 현규진은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들어 세면대
옆으로 올리고, 몸에 달라붙은 티셔츠를 벗었다.
전만큼 운동을 빡세게 하지는 못해서 막 화가 나 있는 근육의 느낌은 아니지만, 매일 밤 씻기
전에 간단히 할 수 있는 운동을 하는 덕분에 유원에게 보이기 부끄럽지 않은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까 티셔츠 안으로 비치는 제 몸을 바라보던 유원의 시선을 떠올린 현규진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짓누르며 옷을 마저 벗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을 맞으니 으슬으슬했던 몸이 풀리며 편안해졌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비 좀
맞았다고 춥지는 않지만, 체온을 빼앗겨 그런지 선득한 느낌이 났는데 이제야 좀 소나기의 찬
기운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얼굴을 따뜻한 물로 문지른 현규진이 바디워시를
펌핑했다.
“…….”
유원이 쓰는 바디워시 향이 샤워부스 안으로 가득 퍼지는 순간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가 반쯤 섰다. 아, 저도 정말 정상은 아니었다. 유원에게 나는
향기만 맡아도 이렇게 되다니. 꼭 유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기분이라 숨을 쉴
때마다 머릿속이 과한 자극으로 찌릿거렸다.
“아….”
당장이라도 손을 대고 싶었지만, 여긴 제집이 아니라 유원의 집이고, 유원이 쓰는 욕실이었다.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고 해도 다시 만나게 되자마자 유원의 욕실에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뭐 어떠냐 할 수도 있지만, 그냥 현규진의 마음은 그랬다.
집에 가서 하자, 집에 가서. 내 방에서. 열기를 가라앉히려 눈을 감은 현규진이 억지로
최해영과 김준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얼마 전 저와 유원을 놀리면서 누더기 같은 종이를 들고
혀를 내밀면서 까불던 얼굴을 떠올리니 놀랍게도 흥분이 확 가라앉았다.
“…씨발.”
기분까지 더러워진다는 게 흠이긴 했지만, 그래도 유원의 집에서 자위를 하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존나 간만에 도움 되는 일 좀 했네.
최해영과 김준재가 들으면 기함할 생각을 하며 현규진이 작게 웃었다.
***
몽글몽글한 거품이 두 손을 뒤덮은 걸 본 유원이 웃음 지었다. 웃을 일이 아닌데도 그냥 너무
기분이 좋아서 씻는 내내 웃음이 났다.
너무 좋아서 더는 버틸 수 없는 마음이 밀어낸 용기를 소리 낼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비
맞는 건 정말 싫지만, 집에 가는 길에 마주한 오늘의 소나기는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그 비가
내리지 않았어도 제가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언젠가는 냈겠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컸다. 다시 한번 소나기에게 감사를 전한
유원은 현규진으로 흠뻑 젖은 마음이 아주아주 무겁게 몸을 채우고 있는 느낌에 온 감각을
기울였다.
“…….”
아, 어떡해…. 자꾸 생각나.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팔을 벌려 끌어안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정신없이 뒤섞이던 숨과 비벼지던 혀끝…. 아직도 숨을 쉴 때마다 코끝에서 키스할 때의 비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옷은 차갑게 젖어 있는데 그 안에 있는 몸은 뜨겁게 느껴지고, 옷보다 더 축축하게 젖은 혀가
비벼질 때마다 울컥 마음이 더 젖어 들었다. 정말 너무너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사귀는 거 맞아. 정유원 내 거.’
내 거. 다소 유치할 수 있는 그 말이 왜 이렇게 좋은 걸까. 유원은 몸에 잔뜩 묻은 거품이 다
사그라지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현규진의 입술이 소리 내던 ‘내 거’라는 말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아무래도 저는 현규진이 저를 소유한 것처럼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않는 자기, 여보라는 호칭도 솔직히… 싫지 않았다. 처음에는 좀 어색하기도
하고 여보라는 말은 좀 너무 간지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좋았다.
“…….”
또 키스하고 싶다아…. 여기저기가 잔뜩 젖어 평소보다 습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깊게 마주한
키스가 자꾸 떠올랐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너무너무 힘든데 또 그만큼 좋았다. 제 몸을
짓누르던 무게도 좋고, 거칠어진 숨을 마구 쏟아 내는 현규진의 얼굴도 좋았다.
“…….”
몸이 배배 꼬이는 느낌에 정신을 차린 유원이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왜 자꾸 다소
강압적인 현규진을 떠올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변태가 되어 버린 기분에 부끄러워진
유원은 얼른 몸에 묻은 거품을 모두 씻어 내렸다. 부디 조금이라도 저의 이 부끄러운 생각이
함께 씻겨져 내려가기를 바라면서.
씻자마자 옷을 입고 방으로 달려간 유원은 머리를 수건으로 문지르고 있는 현규진에게
다가갔다. 씻고 나온 현규진에게서 제가 쓰는 바디워시 냄새가 폴폴 났다.
“머리 왜 안 말리고 나왔어. 감기 걸리게. 앉아 봐. 내가 말려 줄게.”
따뜻한 물로 씻고 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저를 봐서 그런 건지 유원의 뺨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뭔가 잔뜩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얼굴이 예뻐 시선을 떼지 못한 현규진이 참지
못하고 그대로 유원을 꽉 끌어안았다.
“아…. 진짜 돌겠다. 너한테 진짜… 아, 진짜 존나 좋은 냄새 나.”
갓 씻고 나온 유원은 평소보다 더 따뜻하고 말랑했다. 갓 찐 떡을 끌어안으면 이런 느낌이려나.
현규진은 제 허리를 마주 끌어안는 느낌에 짧은 숨을 터뜨리며 유원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젖은 머리칼 안으로 파고들고, 다른 한 손은 헐렁한 티셔츠 안으로
살짝 들어가 그새 보송해진 허리를 눌렀다.
“내가 진짜 많이 좋아해, 정유원.”
“…나도…. 나도 많이 많이 좋아해.”
다시 사귀기로 한 다음에 듣는 좋아한다는 고백은 현규진의 마음을 완전히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정말 이제는 더 바랄 게 없었다. 정유원이, 그토록 좋아하는 정유원이 다시 제 거가
됐는데 뭘 더 바란단 말인가. 현규진은 유원의 목덜미에 쪽쪽 소리가 나게 몇 번이나 입
맞추다가 어깨로 이어지는 부분을 조금 깊게 빨아들였다.
“아….”
“아, 미안. 아파?”
“아니…. 아픈 건 아닌데 기분이 이상해서.”
살갗을 빨아들였으니 기분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현규진은 그리 세게
빨아들이지 않았는데도 불긋하게 자국이 남은 유원의 하얀 피부를 보며 달아오른 숨을 탁
내뱉었다.
이대로 여기저기 다 이렇게 물어서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누가 봐도 정유원이 제 거라는 걸
알 수 있도록. 과한 생각인 걸 알지만, 그래도 유원을 더, 더 잔뜩 가지고 싶었다. 더 바라는 게
없기는 씨발, 뭐가 없어. 몇 초 전 생각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뭐… 했어?”
“어? 아…. 그게….”
너무 예뻐서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기는 했는데 어쩐지 유원이 알면 싫어할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하게 뛰었다. 현규진은 유원의 방 옷장 문을 열어 거기 붙어 있는 거울로
목과 어깨의 중간 부분에 남은 불긋한 흔적을 보여 주었다.
“…미안. 이제 안 그럴게.”
“왜 그렇게 눈치를 봐. 괜찮아.”
“괜찮아? 정말?”
“응…. 뽀뽀한 자국 남은 것 같아서… 좋아.”
친구 사이 고백 금지-90 화(90/127)

90


생각지도 못한 유원의 반응에 현규진의 몸이 녹아내리듯 아래로 기울어졌다. 뒤에서 허리를
부드럽게 안은 채 제가 남긴 자국 위로 몇 번 더 쪽, 쪽 뽀뽀한 현규진이 마지막으로 유원의
뺨에 깊게 입술을 묻었다.
“그럼… 다음에 또 남겨도 돼?”
“…응.”
거울 안에서 마주친 눈동자에 마음이 일렁였다. 현규진은 못 참겠다는 듯 닥치는 대로 유원의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했다. 그게 간지러워진 유원이 결국, 소리 내어 웃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배 위로 맞물린 손을 풀고 품을 벗어나자 다시 현규진의 두 팔이 유원의 허리를 조금 전보다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순간 유원의 마음도 확 울렁였다.
몸을 끌어안은 힘이 너무 강해 이대로 현규진의 몸과 합쳐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진동
소리가 들렸다. 유원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현규진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스르륵, 허리에 감겨 있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휴대폰이 놓인 책상 쪽으로 가는 현규진을
거울로 본 유원이 욕실을 가득 채웠던 뽀얀 수증기 같은 숨을 내쉬었다. 숨이 닿은 옷장
거울이 잠시 뿌옇게 흐려졌다가 느릿하게 돌아왔다.
“아, 저녁 시킨 거 거의 다 왔나 봐.”
“아…. 얼른 먹을 준비… 해야겠다. 내가 하고 있을게.”
숨을 고른 유원이 방을 나섰다.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어도 되나 싶을 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쿵, 쿵 요란한 울림을 마주한 채 유원은 심장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어지러울 만큼
또렷한 설렘과 흥분이 싫지 않았다.
덜어 먹을 그릇을 꺼내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현규진이 묵직해 보이는
종이봉투를 들고 식탁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비 오나 봐. 문 열었더니 비 오는 소리 나더라.”
“오늘도… 자고 갈래?”
솥밥이 든 뜨거운 용기를 꺼내 식탁에 놓던 현규진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유원과 시선을
마주했다. 거절할 마음이 없기도 하지만, 정말이지 누구라도 이 얼굴을 보면 절대 거절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정말 그 누구에게도 유원에게 이런 말을 들을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평생 이 말의 주인은 저였다.
“나야 좋은데 나 있으면 너 푹 못 잘까 봐.”
“너 있어서 못 잔 적 없어. 얘기도 더 하고 싶고… 그냥 오늘은 계속 같이 있고 싶어.”
“같이 있고 싶으면 같이 있어야지.”
“…너도 그래?”
“당연하지. 난 너랑 같이 살고 싶은데.”
먹음직스러운 전복 솥밥과 간장 소스를 유원의 앞으로 놓아 준 현규진이 제 것도 대충 뚜껑을
열어 앞으로 놓았다.
“배고프겠다. 얼른 먹어. 잘 먹고 자야 포동포동해지지.”
“너도 맛있게 먹어.”
“응.”
간장 소스를 덜어 밥을 조금 비빈 현규진이 크게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역시 언제
먹어도 맛있어 만족감이 컸다.
“맛있다아….”
시험 기간 동안에는 스트레스를 받아 입맛이 별로 없었는데 오늘은 시험도 끝나고 또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 밥이 아주 맛있었다. 유원은 혹시라도 현규진과 함께
먹는 이 맛있는 저녁 때문에 체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새우튀김도 진짜 빠삭빠삭해. 비도 오고 배달인데도 하나도 안 눅눅한 거 신기해.”
“그러게. 소스도 맛있고.”
“응, 여기 소스가 제일 맛있어.”
한 입만 베어 물어도 한쪽 볼을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 큰 새우튀김을 베어 문 유원이
맛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유원을 보는 현규진의 눈에서 다정함이 뚝뚝 떨어졌다.
“뭔가 너랑 이렇게 편하게 밥 먹는 거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
“그동안은 불편했어?”
“…막 엄청 불편해서 못 먹겠다, 이런 건 아닌데 그냥 널 보면 생각이 너무너무 많아졌었거든.
친구기는 친군데… 하는 행동은 절대 친구가 아닌 것 같고…. 이래도 되나 싶은데 또… 하면 안
될 것 같은 거… 또 하고 싶어서 죄책감도 들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거 뭐? 키스?”
“…응….”
결정적인 순간에 솔직한 유원은 정말이지 너무나 귀여웠다. 현규진은 새우튀김을 한 입 더
베어 무는 유원의 볼을 손끝으로 살살 문질렀다.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거 맞지? 나랑 다시 사귀는 거.”
“음…. 솔직히 생각 많이 못했는데… 그냥 네가 너무 좋았어. 너무너무… 진짜 너무너무 좋은데
더 생각할 필요 없잖아. 그거 하나면 되지. 다른 건 하나도 안 중요해….”
“…키스해도 돼?”
“바, 밥 먹다가 무슨 키스야…. 안 돼.”
“안 하면 죽을 것 같은데? 나 진짜 튀김이고 지랄이고 다 됐고, 너 먹고 싶어.”
젓가락을 아예 놔 버린 현규진을 보고 웃은 유원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리고 정말
얼굴 앞으로 기울어져 다가온 현규진의 얼굴을 잡고 입술을 다문 채 쪽 소리 나게 뽀뽀했다.
“…일단은 이만큼만.”
“더 죽겠는데.”
“얼른 밥 먹어. 너 그거 다 안 먹으면… 이따가도 안 할 거야.”
“내가 양아치랑 사귄다, 얼굴에 홀렸지. 협박 존나 무서워, 진짜.”
무섭지도 않으면서 무서운 척하는 현규진을 보고 웃은 유원이 밥을 호오 불어 입에 넣었다.
“솔직히 지금은 존나 좋은데 앞으로 또 우리 싸울 일 생길 수도 있어. 서운한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네가 그 걱정을 제일 많이 하는 것도 알아. 그러다가 또 홧김에 같은 실수 반복하면…
그땐 정말 끝이 날 가능성이 크니까.”
“…응. 끝나면 이제 우리 진짜 못 볼 것 같아서.”
“보기 좀 그럴 수 있지. 두 번이나 깨졌는데 다시 친구하기도 좀 그렇고.”
고개를 끄덕이는 유원을 보며 콜라를 한 모금 마신 현규진이 싱긋 웃었다.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금세 분위기가 처지고 시무룩해졌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조금도 막막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린 이미 한 번 겪어 봤잖아. 겪어 봤으니까 같은 상황이 오게 하지도 않을 거고,
만약에 와도 전처럼 굴진 않을 거야.”
“…….”
“나한테 제일 무서운 건 우리가 싸우는 것도 아니고, 잠깐 서운해서 하루 이틀 말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네가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 거라는 걸 난 이제 아니까.”
“…….”
“그리고 우리 양아치도 알고.”
유원의 볼을 톡 건드린 현규진이 웃었다. 그에 유원도 따라 웃음 지었다. 이 따뜻한 시선과
웃음 없이 어떻게 그 차가운 계절을 버텼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맛있게 밥을 먹은 다음에는 식탁 정리를 했다. 현규진이 절대로 허락해 주지 않아 다 씻은
플라스틱 용기를 정리함에 넣고, 물을 끓이는 정도가 하는 일의 전부였지만. 유원은 팔팔 끓은
물을 꿀유자차 컵 두 개에 차례대로 부었다.
“거실에서 마실까?”
“그래.”
먼저 거실로 간 유원이 닫혀 있는 커튼을 활짝 열었다. 어둑한 창밖으로 비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 오는 것도 맞아서 젖는 것도 진짜 싫었는데 이제 괜찮아졌어. 아깐… 그렇게 젖었는데도
기분 하나도 안 나빴거든.”
“그럼 정유원 앞으로 비만 오면 내 생각 하겠네.”
“응.”
고개를 끄덕이는 유원의 얼굴에 감탄한 현규진이 침음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저는 전생에
지구를 구했을 게 분명했다.
“아, 우리 또 그런 거 정할까. 정말 이거 하나 만큼은 안 해 줬으면 좋겠다거나… 뭐 지켰으면
좋겠는 거.”
“정해도 넌 안 지킬 거잖아.”
“와, 날 이렇게까지 양아치로 본다고?”
“다시 친구 하기로 하고… 정한 것도 너는 거의 안 지켰잖아.”
“솔직히 내가 안 지켜서 좋았잖아. 정유원 존나 내숭.”
내숭이라는 말에 현규진의 팔을 민 유원이 제가 민 것보다 더 확 다가와 붙는 온기에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현규진은 가만히 유원의 웃음을 바라보다가 커다란 몸을 구겨 저보다 작은
품으로 안겨들었다. 안기 벅찰 텐데도 유원은 늘 저를 밀지 않고 안을 수 있는 만큼 가득 안아
주었다. 그게 너무 좋았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 그런데 딱 하나만 하지 마….”
“뭔데? 담배? 술?
“…그만하자는 말….”
“…….”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현규진의 고개가 들렸다. 유원은 얼른 다시 머리를 눌러 품에 안고
살살 머리칼과 뺨을 쓰다듬었다. 단단히 허리를 안으며 파고드는 현규진의 따뜻함이 좋아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 이제 너랑 헤어지기 싫어. 너만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당연히 나도 안 할 거야…. 전에
그런 말 너한테 하고… 진짜 많이 후회했거든.”
“…….”
“…네가 다시 친구인 척하자고 했을 때… 말은 척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나랑 다시
친구 해 주는 너한테 정말 고마웠어. 너랑 그렇게 친구로 다시 지낼 수 있는 것도 정말 좋았고
…. 그런데 한계가 있더라.”
유원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이야기를 이렇게 품에 안긴 채 다정한 손길까지 받으며 들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현규진은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유원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어 뺨을 비볐다.
“난 이미 알잖아…. 규진이 너랑 사귀는 게 어떤 건지. 네가 날… 좋아해 주는 게 어떤 기분인지.
또… 친구라서 할 수 없는 게 뭔지도 알고…. 아는데, 정말 다 아는데… 정말 하면 안 되는데
네가 키스할 때마다 너무 좋은 거야….”
“정유원, 야해.”
“진지하게 들어. 나 지금 장난으로 말하는 거 아니거드은….”
“나도 장난 아니거드은.”
“따라 하지 마아.”
“따라 하지 마아.”
등을 찰싹 맞은 다음에야 현규진의 입이 다물렸다. 약간 따끔한 느낌에도 웃음 지은 현규진이
유원의 품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어디까지 말했는지 까먹었잖아….”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나랑 키스할 때마다 너무 좋아서 결혼하고 싶었다는 것까지 했어.”
“아! 맞아. 결혼은 빼고.”
“너무해.”
“그건 담배 완전히 끊으면 생각해 볼게.”
“담배가 뭐야?”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다시 유원의 웃음소리가 거실 안으로 울렸다. 현규진은 양쪽 귀를 가득
채운 심장박동과 웃음소리에 잔뜩 행복해졌다.
“아무튼 난 이제 정말… 헤어지기 싫어. 규진이 너랑 친구로 다시 지내는 건 진짜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고.”
“나도 그래. 끝내자고만 하지 마. 내가 바라는 것도 그거 하나야. 나머진 내가 다 잘할 수 있어.
헤어지고 싶은 마음 절대 안 들게 잘할게.”
“…사실 그때도 너랑 진짜 헤어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
“알아. 나도 그랬어. 말 뱉을 때부터 후회했어.”
잠시 머릿속으로 평소와 다르게 날이 선 감정을 앞세운 말들을 소리 냈던 그날이 펼쳐졌다. 코
끝에 닿는 포근한 향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억이었다.
“뭐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그땐 나도 너무 불안하고, 불안하다 보니까 예민해지고
그랬던 것 같아. 난 네가 너무 좋아서 미치겠는데 유원이 넌 늘 침착해 보이니까 자꾸 너한테
확인 받고 싶었어.”
“…….”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닌데 그땐 꼭 내가 좋아하는 만큼 너도 겉으로 보여 줘야 하고
표현해야 하고, 나랑 하는 모든 걸 밀어내지 않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컸어. 그러다 보니까 별
말도 안 되는 자존심이나 세우고….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어. 이제 안 그래.”
“…….”
“나도 알잖아. 네가 없는 게 얼마나 슬픈지.”
품 안에서 울리는 낮은 목소리가 몸 안으로 흡수되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확 조여들어 아픈
것을 느끼며 유원이 기분 좋은 샴푸 향이 나는 현규진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방학 때 나 울었어. 자기야.”
“…정말?”
“응. 네가 꿈에 나와서.”
“…….”
“꿈에서 볼 땐 좋은데 깨 보면 네가 없는 거야. 그냥 넌 이제 내 꿈에만 있게 된 것 같아서 너무
슬프더라.”
“…나도 울었어. 매일 매일.”
끝에 울음이 맺힌 목소리에 고개를 든 현규진이 유원을 당겨 품에 안았다. 꽉 안고 싶어 아예
다리 위로 올려 앉히는데도 제가 이끄는 대로 올라와 앉는 유원이 몹시 사랑스러웠다. 마음과
마음을 맞붙이고 등과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꽉 몸을 붙이자 온몸으로 서로의 감정이 섞여
들었다.
“그런데… 꿈에서 나랑 뭐 했어?”
“꿈은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거 알지.”
“응.”
“내가 꾸고 싶다고 꾸고, 꾸기 싫다고 못 꾸는 것도 당연한 거고.”
그냥 대답을 하면 되는데 갑자기 뭔가 확인을 받는 것처럼 묻는 현규진을 가만히 보며 유원이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지? 갑자기 그건 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꿈에서 너 나랑 키스한 적 있어, 없어.”
“…있어.”
“그보다 더한 건?”
“……가끔?”
“그럼 변태야, 아니야.”
“내가 꾸고 싶어서 꾼 것도 아닌데 당연히 변태 아니지이.”
“오케이.”
그제야 싱긋 웃은 현규진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유원은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앞으로
움직여 현규진의 입술에 귀를 가까이 대었다.
“방문 열었더니 네가 막 옷 다 벗고 누워서 나한테 막 빨리 해 달라고….”
차마 다 듣지 못한 유원이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현규진의 어깨를 밀었다.
“미쳤어, 진짜. 이 변태야.”
“뭐야. 방금 꿈에서 그러는 건 변태 아니라며.”
“몰라. 넌 변태야. 앞으로 내 꿈 꾸지 마.”
다리 위에서 내려가 방으로 도망치듯 가는 유원의 뒷모습을 보던 현규진이 벌떡 일어나 그
뒤를 따라 움직이자 유원이 작게 소리를 질렀다.
“오지 마, 변태.”
“누가 누구보고 변태래. 아까 비 맞아서 티 다 젖었을 때 내 몸 존나 본 거 다 아는데. 그게
변태지.”
“그, 그건 그냥 보여서 본 거지이….”
“나도 꿈에 네가 나와서 꾼 거거든. 이리 와, 빨리.”
“싫어, 저리 가.”
“싫은데? 절대 안 가.”
조금 더 빠르게 달려가 방으로 쏙 숨은 유원을 뒤에서 확 끌어안고 침대로 누운 현규진이
온몸으로 단단히 제 안에 가두며 눈을 마주했다. 다소 과격한 장난에 살짝 차오른 숨이 입술
바깥으로 흘렀다.
“나 진짜 가?”
마음에도 없는 것을 묻자 흐트러진 앞머리를 만져 주던 유원이 고개를 저었다.
“가지 마아….”
“…….”
“아무 데도.”
마주한 웃음이 뒤섞였다. 살짝 달아오른 서로의 숨을 머금으며 두 팔로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마주 안았다.
더없이 완벽한 열아홉의 사랑이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91 화(91/127)

91


지루한 장마도 너무 더워 축축 늘어지는 여름도 단 하나의 불쾌한 기억이 없이 지났다. 싸우게
되면 헤어질 위험이 높아지니 절대 싸울 일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감정에 초점을 맞추니 싸울 일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습한 날에는 습한 키스를 나누고, 무더운 날에는 또 땀이 흐르는 것도 잊은 채 달라붙어
여름에만 나눌 수 있는 키스를 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비가 와서 좋았고, 37 도까지 올라
조금만 움직여도 더운 날은 여름이라서 좋았다.
냉동고에서 꺼내 한 입 먹기가 무섭게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릴 만큼 더운 날이 조금 지나자 고
3 교실에는 갖가지 불안과 긴장감이 맴돌았다. 수능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학원 주말 수업도 ‘수능 집중반’으로 이름이 바뀌며 조금 더 타이트하게 진행되었다. 원래
끝나는 시간보다 두 시간 더 늘려 수업을 해서 몹시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딱 두 달, 여덟
번의 주말만 지나면 수능이라는 생각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아…. 망고 마시고 싶었는데.”
“망고가 다 떨어졌을 건 뭐야.”
“어쩔 수 없지이…. 어? 너 책상에 뭐 있는데?”
학원 근처에서 먹고 싶었던 분식으로 저녁을 먹고 돌아오던 중 카페에 들렀지만, 유원이
좋아하는 망고 요거트 스무디에는 품절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망고 스무디 외에는 딱히
마시고 싶은 게 없어 그냥 돌아왔는데 현규진의 책상 위에 딱 봐도 누군가의 고백 선물처럼
보이는 상자가 놓여 있었다.
유원은 그게 누구의 선물인지 알 것 같았다. 여름방학 때 주말반에 새로 들어온 애가 한 명
있는데 첫 수업 때부터 현규진에게 말을 걸고, 같이 밥을 먹자고 하면서 엄청난 관심을 표했다.
물론 현규진은 그 어떤 관심을 주지 않고 있긴 하지만, 그 애, 서희나의 대시는 학원을 다니는
모든 애들이 다 알고, 선생님들까지 알 만큼 끝이 없었다.
“뭐야, 이건.”
무표정한 얼굴을 한 현규진이 상자를 열자 애들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반 애들 중에 최해영의
다른 학교 친구라는 애는 최해영에게 보내 줘야겠다면서 현규진의 언박싱 영상을 찍기도
했다. 유원은 최해영의 친구들도 정말 거의 다 최해영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야, 씨발. 찍지 마.”
“아, 왜. 최해가 재밌는 거 있으면 찍어 보내랬어.”
“존나 씨발, 최해영 따까리 새끼.”
상자 안에는 예쁘게 포장한 초콜릿과 쿠키, 에너지바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현규진은
관심도 없다는 얼굴로 가장 위에 있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
편지 내용은 빤했다. 처음 볼 때부터 좋았고, 지금은 더 많이 좋아하고 있으니 한 번 진지하게
저를 생각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아래에도 뭔가 내용이 더 있었으나 더 읽을 이유를 찾지 못해
편지는 더 읽지 않았다.
고백을 하고 도망간 건지 서희나의 자리는 아주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현규진은 그 비어 있는
책상 위에 선물 상자를 올려 두고 편지는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편지까지 다시 상자
안에 두면 분명 다른 놈들이 그 내용을 보고 까불 게 분명해 그런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이고 뭐 크게 신경 쓸 일도 아니라 대수롭잖게 자리에 앉아 마지막 두 시간
수업을 준비하는데 진동이 울렸다.
[최해영 : 넌ㅅㅂ 학원에서도 고백 파티냐]
[김준재 : 뭐야 현 또 고백 받음?]
[최해영 : (동영상)]
하여튼 씨발, 쓸데없는 공유는 존나 빠른 새끼들. 최해영과 같이 한 번 만나 논 적 있는 놈의
자리를 보자 두 손을 번쩍 들고 약을 올리는 게 보였다. 꼭 최해영이 복제되어 여기저기 있는
기분에 몹시 피곤해진 현규진이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아까부터 학원 교재에만 시선을
주고 있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고승재 저 미친 새끼가 최해영한테 아까 그 언박싱 영상 벌써 보냈나 봐. 최해영은 뭔 친구
새끼도 다 지 복제품 같냐. 아, 존나 피곤.”
“그러게, 나도 아까 그 생각 했어. 최해영 친구들은 다 최해영 같아.”
솔직히 현규진이 고백을 받을 때마다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제 애인이 다른 사람에게도
인기가 많아 계속 누군가의 플러팅을 받고, 적극적인 고백을 받는데 그게 어떻게 매번 좋기만
하겠는가. 다른 사람의 눈에도 현규진이 사귀고 싶을 만큼 잘생기게 보이고, 또 멋있게
보인다는 말이기에 요즘은 현규진이 고백을 받으면 전보다 더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이상해졌다.
“자기야, 기분 안 좋아?”
“…쪼끔.”
하지만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현규진에게 왜 좋지 않은지 전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냥 혼자 삼키고 말았을 사소한 것도 현규진이 듣고 싶어 할 때면
솔직히 보여 주었다.
“나 저런 거 백 번 받아도 아무 느낌도 없는 거 알잖아. 신경도 안 쓰여.”
“알아…. 아는데 그냥 좀 그래…. 너 잘생긴 거 나만 알고 싶은데…. 남들도 다 아는 거잖아….”
“알면 뭐 해. 이 얼굴 다 자기 건데.”
다른 곳에 들리지 않도록 소곤소곤 말을 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닿는 귓가와 얼굴이
간지러웠다. 유원은 다정한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려 현규진과 눈 맞췄다. 이런 상황에서도
잘생긴 얼굴을 보니 살짝 뭉쳐 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졌다. 슬쩍 샤프를 쥔 손을 움직여
현규진의 새끼손가락을 톡 건드린 유원이 소곤댔다.
“…빨리 수업 끝났으면 좋겠다아….”
“나도.”
유원이 든 샤프를 가지고 간 현규진이 노트 귀퉁이에 작게 글자 하나를 적었다.

짧은데 모든 의미를 담은 한 글자를 본 유원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남은 두 시간은
현규진의 마음이 담긴 이 낙서 하나로 충분히 행복하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도 낮에는 덥지만, 그래도 9 월 중순이 되며 밤에는 아주 조금 더운 기운이 조금 빠진 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에 탄 유원은 그대로 현규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곧 머리칼 위로 쪽
소리가 울렸다.
같이 학원을 다니니 주말에도 내내 붙어 있어 좋긴 하지만, 공부를 하느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같이 지낼 시간이 거의 없는 게 조금 서운했다. 오늘은 집에 엄마, 아빠도
있어서 잔뜩 키스를 하기도 어려워 더 그랬다. 유원은 저를 따라 6 층에서 내리는 현규진을
올려다보다가 닫힌 현관문을 슬쩍 바라보았다.
“…저기로 가자.”
갑자기 이 시간에 엄마, 아빠가 집에서 나올 확률은 무척 낮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유원은 현규진의 손을 잡고 비상계단 층계참으로 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현규진의 팔이 몸을 감싸 안았다. 유원도 얼른 두 팔로 가득 현규진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이 시간을 종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랐다.
“헤어지기 싫어.”
“나도….”
“학원이고 수능이고 진짜 지랄 같은데 내가 왜 참는지 알아?”
“왜?”
“너랑 같은 대학 가서 너랑 둘이 살려고.”
귓가에 소곤대며 뺨 여기저기에 뽀뽀하는 현규진의 느낌에 웃은 유원이 어깨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나도 그러고 싶다고 대답을 하려는데 입술이 맞물렸다. 유원은 눈을 감은 채
어두운 비상구 안에서 입을 벌렸다. 능숙하게 들어온 혀가 여기저기 살짝씩 두드릴 때마다
어깨가 움칠 튀었다.
“으음….”
조금 더 깊어진 키스에 숨이 헐떡거릴 때쯤 몸에서도 힘이 쭉 빠졌다. 저절로 풀린 팔이
허리에서 떨어진 순간 현규진의 바지 주머니 쪽을 스쳤다. 바스락대는 소리에 흐트러진 숨을
내쉬던 유원의 시선이 그쪽으로 떨어졌다.
“안에 뭐 들었어?”
“응?”
유원의 말에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은 현규진은 대수롭잖게 잡히는 것을 꺼냈다. 반으로 대충
접힌 편지 봉투를 본 다음에야 제가 아까 서희나의 고백 편지를 주머니에 대충 넣었던 걸
떠올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상당히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 되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거 아까 그 편지 아니야?”
“어…. 맞아. 맞는데 오해하면 안 돼, 자기야.”
“오해 안 해….”
“정말? 아, 역시. 그래, 이게 오해할 일이 아니야.”
“…그냥 가지고 싶을 수도 있지.”
“…어?”
잠시 할 말을 잃은 현규진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곤 어느새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가고 있는
유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가지고 싶어서 가져온 게 아니라 아까 걔가 준 거 걔 책상에 그대로 두고 왔잖아. 이거까지
안에 두면 백퍼 다른 새끼들이 편지 보고 지랄할까 봐. 따로 버리려고 가져온 거야.”
“…알았어.”
최해영이 편지 내용을 알게 되는 순간 저를 볼 때마다 그걸 낭독할 걸 알기에 피곤해질 일을
미리 차단한 것뿐인데 이런 오해를 받을 줄은 몰랐기에 무척 난감했다. 현규진은 조금 뚱해져
입술이 앞으로 나온 유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아예 기울여 눈을 맞췄다.
“유원아, 진짜 아니야…. 알지? 응?”
“…알아.”
“아는데 왜 내 얼굴 안 봐 줘, 응?”
그제야 고개를 든 유원이 완전히 눈을 맞췄다. 학원에서 나오자마자 편지부터 처리를 해야
했는데 유원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얼굴을 보느라 편지의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제 불찰이었다.
“…그런 거 아닌 거 아는데 그래도 기분이 별로야.”
“자기야. 그런데 나 좀 억울해. 솔직히 누가 나한테 고백하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내가
하라고 그런 것도 아니고, 받아 주거나 뭐 받는 걸 내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알아. 네 잘못 아닌 거…. 아는데…. 음….”
잠시 뭔가 곰곰 생각하던 유원이 닫힌 현관문을 괜히 한 번 다시 살피고는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춰 말했다.
“…넌 내가 누구한테 고백 받고, 걔가 준 편지를 집까지 가져온 걸 보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아?”
다른 새끼가 써 준 러브레터를 집까지 가지고 온 정유원이라니. 생각만으로도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 편지가 유원의 손에 닿은 것도 싫고, 주머니 안에 간직되어 있었다는 것도
싫었다. 그제야 현규진은 유원의 마음을 전부 이해했다. 지금 저에게 도움이 되려면 난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해야 하는데 도저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존나 빡칠 것 같아. 그런데 그게 너한테 단순히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어, 이해는 가는데
그냥 그 상황 자체가 존나 싫을 것 같아.”
“…나도 그래. 꼭… 네가 다른 사람 마음 여기까지 가져온 기분이야.”
울 것 같은 얼굴에 말문이 막힌 사이 유원이 현규진의 어깨에서 가방을 벗겨 냈다.
“…내일 아침에 봐아…. 빠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빠이와 함께 유원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규진은 멍하니 닫힌 문을
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직 손안에 있는 편지를 확 구겼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여기까지
가져온 기분이라니…. 진짜 그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더 마음이 쓰였다.
“아….”
미치겠네. 진짜. 현규진의 긴 한숨이 울렸다.
***
씻고 책상에 앉아 과외 숙제를 살피던 유원의 입술이 앞으로 또 살짝 튀어나왔다. 현규진과
그대로 헤어진 게 마음에 걸렸다. 뭐 싸웠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 인사한 게
아니라 자꾸 한숨만 흘렀다.
내가 너무 속이 좁았나…. 그 정도는 사실 이해할 수 있는 거잖아. 고백을 받고 싶어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받아 준 것도 아닌데 뭐. 그래…. 뭐, 편지 거기 두고 왔으면 애들이 다 봤을 거고,
서희나만 창피 당했을 거야. 그래, 현규진이 잘 배려한 거지 뭐어….
“…….”
계속 잘한 일이라고 그냥 그렇게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도 마음이 조여들었다.
너무너무 잘생긴 애랑 사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구나…. 결국은 눈앞이 다 현규진의 얼굴로
가득 찼다.
“…휴우.”
답답해. 망고 스무디 마시고 싶다아…. 아까 마시고 싶을 때 마시지 못해서 더 그 생각이 났다.
시원하고 달콤한 걸 한 모금 마시면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이 시간에 한 잔만
배달을 하기도 애매하고, 그렇게까지 해서 마시고 싶을 정도는 아니라 그냥 참기로 했다.
얼른 문제나 더 풀고 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순간 휴대폰이 드르륵 책상 위에서 움직였다.
유원은 얼른 현규진에게서 온 톡을 확인했다.
[규진 : 저 망고인데요]
[규진 : 지금 문밖이거든요]
[규진 : 저 좀 얼른 마셔 주세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한 번 더 위에서부터 읽는데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아까 마시고
싶었는데 마시지 못했던 망고 요거트 스무디가 캐리어 안에 들어 있었다.
[규진 : 망고 녹기 10 초 전]
[규진 : 10]
[규진 : 9]
[규진 : 8]
[규진 : 3]
갑자기 8 에서 3 으로 바뀌는 숫자에 얼른 책상에서 일어난 유원이 방을 나서 현관으로 향했다.
방에 있는 부모님에게 들리지 않게 몰래몰래 문을 열자 눈앞으로 사진에서 본 종이 캐리어가
쑥 다가왔다. 그 뒤에는 현규진이 있었다.
“…어디서 샀어?”
“아, 나 다니던 도장 있는 쪽에 이거 있거든. 거기 갔다 왔어.”
현규진은 학원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아까 헤어진 다음에 집에 가지 않고 망고 스무디를
사러 도장 앞까지 갔다 온 모양이었다.
“…나 주려고 일부러 갔다 온 거야?”
“응. 그래야 우리 정유원 얼굴 한 번 더 보지.”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뒤섞여 울먹이는 유원을 본 현규진이 씩 웃었다. 그리고 빨대
포장을 벗겨 입구에 꽂고, 손이 시리지 않도록 두 개 가져온 컵 홀더를 겹쳐 컵에 씌워
유원에게 쥐여 주었다.
“그거 마시는 동안 나랑 데이트 할래?”
친구 사이 고백 금지-92 화(92/127)

92


데이트…. 간지러운 표현에 심장 위로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부끄러움을 감추려 달콤한
스무디를 한 모금 마신 유원이 컵을 쥐지 않은 손을 들어 현규진에게 내밀었다. 현규진이
원하는 것이 지금 제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다.
예전이라면 이렇게 아파트 안에서 손을 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텐데 그냥 다 괜찮다고
마음을 먹으니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루 종일 공부하고… 피곤했을 텐데…. 고마워. 맛있다아.”
저를 올려다보며 웃는 유원의 얼굴을 두 눈 가득 담은 현규진이 고개를 기울여 쪽 소리 나게
입술에 뽀뽀했다. 달착지근한 망고 향이 폴폴 나는 게 귀여워 바보처럼 웃음이 났다.
이 얼굴이 보고 싶어서, 어떻게든 이 피곤한 일요일 밤을 웃으면서 마무리하게 해 주고 싶어서
24 시간 하는 곳을 찾아 다녀왔는데 그러길 정말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아까 편지는 미안해.”
“…아니야. 네가 잘한 거지 뭐. 고백한 사람 창피하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키스하다가 그거 보게 한 건 진짜 별로였잖아.”
“그건 쪼끔 그랬어.”
“이제 안 그럴게. 누가 고백하려고 하면 도망쳐 버릴게. 책상 위에 뭐 있으면 자리 바꿔
버리고.”
진지하게 말하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이 소리 내어 웃었다. 여름의 기운이 가시기 시작한
밤공기 사이로 흐르는 웃음 하나에 다시 숨이 탁 막혔다. 이대로 유원의 온기에 질식해도 좋을
것 같았다.
“화 풀어 줘, 응?”
“화 안 났어…. 화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널 좋아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서 그랬어.”
“좋아하든 말든 난 그런 거 진짜 신경 하나도 안 써. 알잖아. 나한테 중요한 마음은 우리 자기
마음 하나 밖에 없는 거. 알지?”
“알지이….”
“잘생겨서 미안.”
스무디를 한 모금 쪼록 빨아 올리던 유원이 웃음을 터뜨리며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잘생긴 게 사실이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상한 소리가 아니니
이상한 말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미친 게 아니고 정확히 자기 얼굴을 파악하고 있으니
미쳤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손을 들어 잘생긴 현규진의 뺨을 만져 주었다.
“귀여워.”
“존나 귀여운 게 누구보고 귀엽대.”
유원의 말랑한 볼을 늘렸다가 놓은 현규진이 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차가 오는지 한
번 더 살피고 걸음을 옮겼다.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라 그냥 이렇게 유원과 밤에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아, 네가 여태까지 보낸 돈 있잖아. 그거 다시 줄게. 나 하나도 안 썼어.”
“내가 잘못해서 준 건데 다시 왜 줘. 너 가져.”
“어떻게 그래…. 거의 백만 원이야.”
공원으로 들어서며 유원은 제가 마시던 스무디를 현규진에게 내밀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제가 물고 있던 빨대를 물고 한 모금을 마시는 현규진이 좋았다.
“음, 그럼 수능 끝나고 방학하면 그 돈으로 놀러 가자, 둘이.”
“둘이서만?”
“응.”
“멀리?”
“응. 버스, 기차, 비행기 말만 해. 다 태워 줄게.”
말을 듣자마자 활짝 웃은 유원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현규진과 단둘이 가는 여행이라니
생각만 해도 너무너무 좋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늘처럼 하자. 뭐 싸웠다고 하긴 좀 그렇지만…. 싸울 때 마음 오래 가지고
있지 말고 오늘처럼 다 말하고 풀자.”
“응. 싸워도… 피하지 말자. 그럼 금방 풀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먼저 다시 와 줘서 고마워.”
“전에는 무조건 싸울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아까 이거 사 오면서
생각해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유원이 들고 있는 망고 스무디를 손끝으로 톡 건드린 현규진이 저를 올려다보는 말간 얼굴에
웃음 지었다.
“싸운다고 다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 하는 생각. 이렇게 풀면
되는데.”
“맞아…. 전에는 싸우는 게 제일 무서웠는데 이제 그런 건 하나도 안 무서워.”
“그럼 뭐가 무서워? 귀신?”
두 손을 유원의 얼굴 앞으로 들어 귀신이 달려드는 시늉을 한 현규진이 다시 제 품으로 반쯤
안기다시피 포개진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네가 없는 거.”
“…….”
“이제 진짜 떨어지기 싫어…. 네가 전에 말한 분리 불안? 그거 나도 생겼나 봐, 어떡해. 그거 병
아니야?”
“병이지. 현규진 병. 심각한 현규진 중독입니다.”
어깨를 감싸지 않고 있는 손을 들어 유원의 이마를 짚어 보고, 청진기를 대듯 심장 부근
여기저기를 짚어 보던 현규진의 손이 한 곳에 멈추었다.
머리칼을 기분 좋게 헤집는 바람과 그 바람에 사그락대는 나뭇잎 아래에서 눈이 마주쳤다.
현규진은 무척 빠르게 뛰는 유원의 심장을 쥐듯 그 위로 따뜻한 손바닥을 대었다.
“뭐야, 정유원. 나 사랑하네?”
현규진은 언제나 저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정확하게. 이번에도 확신을 잔뜩
담고 있는 목소리에 웃으며 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많이 많이.”
가로등 아래로 기다란 그림자가 기울어졌다. 그리고 이내 간지러운 소리가 초가을의
공원으로 울렸다.
사랑을 소리 낸 그날의 키스는 망고 맛이었다.
***
수능 날은 역대 최저 기온을 기록했다. 유원은 현규진과 같은 시험장으로 배치되었다.
눈사람처럼 꽁꽁 싸매고 간 유원은 현규진과 복도에서 헤어지기 전 가볍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수능 한 달 전부터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같이 노력한 덕분에 둘 다 컨디션이
아주 좋았다.
그렇게 그리 많이 긴장하지 않고, 좋은 컨디션으로 본 수능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유원은
가고 싶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커트라인 안에 무사히 들어 기뻤고, 현규진은 유원과 성적이
거의 비슷해 무척 기뻤다.
12 월 초에 수능 성적표를 받고 같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 사살 받은
다음부터는 더욱 바빠졌다. 입시 설명회를 가기도 하고, 선생님들과 내내 상의를 해서 12 월
말 정시 원서 접수를 마쳤다. 제대로 접수가 됐는지 또 빠뜨린 것은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을
한 다음에야 긴장이 풀려 유원과 15 시간을 내리 잤다.
현규진이 자다 깨서 눈을 뜨면 유원이 자고 있고, 유원이 눈을 뜨면 현규진이 자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잠든 얼굴을 보다가 다시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하루를 거의 꼬박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무척 멍했다. 유원은 여전히 잠들어 있는
현규진을 살짝 흔들었다. 느릿하게 눈을 뜬 현규진이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천장을
보고 누웠다.
“아…. 이제 좀 살겠다.”
“우리 어제 저녁도 안 먹었어…. 배고파아….”
“아, 그러네. 어제 우리 점심은 먹었나? 우리 자기 침 먹은 생각밖에 안 나서….”
더 말을 하지 못하게 토끼 쿠션을 들어 현규진의 얼굴 위에 올려둔 유원이 침대 바깥으로 나가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아홉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어떡해, 늦었어. 빨리 일어나아, 열두 시 기차라며. 빨리 준비하고 나가야 돼. 여기서
서울역까지 거의 한 시간 걸린단 말이야. 버스 타고 가면 역 앞에 바로 내리기는 하는데… 조금
돌아가서 55 분 정도 걸리고, 지하철 타고 가면 한 번 갈아타긴 하는데 40 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어. 뭐 타고 갈까?”
조금의 막힘도 없이 설명하는 유원을 경이롭다는 듯 바라본 현규진이 침대에서 몸을 세워
앉았다. 여행 가는 게 너무 좋아서 매일 이걸 찾아보고 외웠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막
울렁였다.
“여보 버스 타는 거 좋아하잖아. 빨리 준비하고 나가서 버스 타고 가자.”
“응. 좋아. 나 저쪽 욕실에서 씻을게. 넌 이쪽 써.”
“여보, 가기 전에 뽀뽀.”
“뽀뽀.”
가볍게 쪽, 쪽 입술이 마주했다가 떨어졌다. 잔뜩 들뜬 뒷모습으로 방을 빠져나가는 유원이
귀여워 웃던 현규진이 두 팔을 위로 쭉 뻗어 몸을 풀었다.
이모가 연말 시상식 참석으로 바쁘고 집에 들어오지 않은 덕분에 유원과 같이 늘어지게 잘 수
있었다. 오늘도 연기 대상에 참석을 하느라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올 것 같다면서 유원이
외롭지 않게 함께 여행 가는 것을 무척 반가워 했던 얼굴이 떠올랐다. 역시 세상이 저희의
연애를 모두 돕는 기분이었다.
“아….”
빨리 씻어야지. 꾸물럭거린다고 혼나기 전에. 미리 가져다 둔 갈아입을 옷과 속옷을 챙긴
현규진이 얼른 방을 나섰다.
***
둘이 떠나는 첫 여행의 종착지는 부산이었다. 처음에는 다른 곳을 갈까 생각도 했지만, 보호자
없이 미성년자끼리는 투숙이 불가하다는 대답을 하도 들어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부산에 회원제로 운영되는 유명 리조트가 있는데 유원의 부모님이 그 리조트의 회원권을
가지고 있었다.
숙박 예약을 하는 게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원의 엄마가 객실 예약을 해 주었고, 다행히
이성이 아닌 동성이라 미성년자이지만, 보호자 없이 숙박이 가능하다는 대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첫 여행지는 부산이 되었다. 좀 멀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울보다 조금 더 따뜻한 곳에서 유원과 십 대의 마지막 날을 보낼 수 있다 생각하니 마냥
좋기만 했다.
유원이 좋아하는 버스를 타고 서울역에 가서 무사히 KTX 에 탔다. 단둘이 이렇게 멀리까지
가는 건 처음이라 유원은 내내 들뜬 얼굴로 웃었다. 열차가 출발한다고 웃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 반이면 가는 게 너무 신기하다며 또 웃었다. 그게 너무 귀여워 현규진은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유원의 웃음을 마주한 채 닳아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머리칼과
뺨을 매만졌다.
그렇게 도착한 부산은 날씨가 아주 좋았다. 겨울이니 당연히 춥긴 하지만, 그래도 서울보다는
기온이 높아 유원이 추위에 너무 심하게 떨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부산역을 배경으로 서서 귀엽게 손으로 브이를 그리는 유원의 사진을 찍어 준 다음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30 분 정도 달리는 동안 현규진은 서울로 가면 바로 운전 면허부터
따야겠다고 생각했다.
운전을 배워 차를 사면 아무래도 유원을 보다 편하게 여기저기 데리고 다닐 수 있을 것이었다.
꼭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어느 밤, 또 어느 주말 같이 드라이브를 갈 수도 있을 거고, 날씨가
궂은 날, 유원이 아픈 날 편히 다닐 수 있으니 역시 차는 필수일 것 같았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는 무척 넓고 좋았다. 리조트 안에서만 놀아도 무척 즐겁게 놀 수 있을
만큼 모든 게 쾌적하고 완벽했다. 특히 방 컨디션과 뷰가 너무 좋아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와아…. 여기 방 진짜 좋다아. 침대에서 바다도 보여.”
“아, 센스 없게 침대 트윈이네.”
창에 붙어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를 감탄하며 보던 유원이 침대를 돌아보았다. 두 명이 편히
누워 자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침대가 현규진의 말처럼 두 개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하나만… 쓰면 되지….”
저에게 닿는 시선에 얼른 다시 몸을 돌린 유원이 탁 트인 바다를 잔뜩 눈에 담았다. 무척
푸르고 반짝여 꼭 그걸 보는 눈과 마음에도 푸른 물이 드는 것만 같았다.
“자기야, 정말 하나만 쓸 거야?”
“…뭐어…. 이따 잘 때 피곤해서 따로 자는 게 좋으면 따로 써도 되고….”
“무슨 소리야. 피곤하면 더 같이 자야지. 나 없으면 못 자잖아, 우리 정유원.”
“못 자는 정도는 아니야.”
“맞을 텐데.”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유원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깨물고 목덜미에 입을 맞춘 현규진이
불긋해진 귀에 입술을 붙였다.
“그럼 우리 이따 키스 다음도 하는 거야?”
귓속으로 파고드는 목소리는 무척 낮고 또 무척… 야했다. 제가 혼자 야하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묘한 기대감을 부추기는 목소리였다. 현규진이 원하는 대로 그냥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고 싶어졌다.
“…이따… 언제? 바, 밤에… 연기 대상 봐야 하는데에…. 오늘 엄마 시상자로 나오잖아….”
“그거 끝나고.”
“……새해 카, 카운트다운도 봐야지….”
“그건 대상 발표 전에 하잖아. 그것도 끝나고.”
“…새해 해돋이….”
“그거 전에.”
현규진이 말하는 것이 뭔지 유원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동안 현규진과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키스를 하면서 그보다 더 오래 닿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또
키스를 하다가 현규진의 손이 허리 쪽으로 들어오기라도 할 때면 그 손길이 기분 좋아 더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꿈에서는… 더 야한 짓도 했었고.
“…….”
제 귀와 목, 뺨에 쪽쪽 뽀뽀하는 현규진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어깨 위에서 가볍게 입술이
맞물렸다가 떨어졌다. 그 순간 꽉 조여든 심장이 뭔지 모를 감각으로 울렁였다.
“…하고 싶으면 해도 돼.”
“나만 하고 싶어서 하는 거면 안 해도 돼. 나중에 너도 하고 싶을 때 그때 하자.”
혹시 기분이 안 좋아졌을까 싶어 몸을 돌려 마주 선 유원이 꼼꼼히 현규진의 얼굴을 살폈다.
현규진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쥐고 유심히 관찰하는 유원을 보며 미소 지었다. 왜 이렇게
보는 건지는 몰라도 그냥 저를 붙잡고 시선을 떼지 않는 이 순간이 너무나 좋았다.
“그런 거 아니야….”
“응?”
저를 너무나 배려하는 현규진과 마주한 유원의 마음 안으로 또 용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너만 하고 싶은 거 아니라고….”
“…….”
“나도 너랑… 하고 싶어…. 키스 다음….”
친구 사이 고백 금지-93 화(9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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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아닌 고백에 얼굴로 열이 오르는 느낌이 났다. 유원은 아무 말도 없이 저를 내려다보기만
하는 현규진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고민 중이야.”
“무슨 고민?”
“…지금 그냥 해 버릴까.”
“지…금은 안 돼. 여기까지 왔는데… 밖에도 나가야지.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러게 누가 그렇게 꼴리게 말하래?”
노골적인 단어에 현규진의 팔을 민 유원이 침대 위에 풀어 놓았던 목도리를 집어 들었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정말 바로 뭔가를 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싫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얼른 나가자. 나 배고파….”
“배고파? 그럼 안 되지. 가자.
배고프다는 말에 즉각 반응해 나갈 채비를 하는 현규진이 사랑스러웠다. 유원은 슬금슬금
그런 현규진에게 다가가 허리를 꼬옥 먼저 안아 주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단단하게
허리에 감기는 팔 역시 너무나 좋았다.
“이러면 마음 바뀌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유원은 현규진이 저와 함께 나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19 년 동안
봐 온 현규진은 그런 사람이니까.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정유원, 조련 미쳤다. 이러면서 나가자 그러면 어떡해. 잔인해, 자기야. 나 진짜 나가기
싫어졌어.”
“이상한 소리만 하지 말고 얼른 좋아한다고 해 줘….”
“존나 좋아해. 진짜 좋아서 뒤질 것 같아.”
현규진스러운 고백에 웃은 유원이 허리를 토닥였다. 그리고 살짝 몸을 뗀 다음 현규진의 목에
풀린 채 늘어져 있는 목도리를 살살 잡아 당겼다. 그에 당연하다는 듯 현규진이 고개를 내렸다.
유원의 발꿈치가 들리고 곧 방 안으로 쪽, 쪽 간지러운 소리가 몇 번 울렸다.
“나가자, 이제.”
“응.”
장갑까지 끼는 유원을 귀엽단 듯 바라보던 현규진이 손을 내밀었다. 장갑 때문에 둔해진 손을
잡고 흔들자 유원의 웃음과 함께 먼저 찾아온 봄이 방 안으로 물들었다. 그 웃음을 보며
현규진은 생각했다.
웃는 정유원을 볼 수만 있다면 ‘키스 다음’을 부산 구경과 연기 대상 같은 것 뒤로 미루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유원과의 특정한 무언가가 아니라
함께하는 그 모든 것이니까.
***
부산에 대해 미리 공부를 해 온 유원 덕분에 요즘 부산에서 핫한 곳들을 아주 야무지게 구경할
수 있었다.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서 달착지근한 것들도 잔뜩 먹고, 저녁에 먹을 군것질거리도
샀다.
저녁으로는 현규진의 아빠가 추천한 킹크랩 집에 가서 먹고 또 먹어도 끝나지 않을 만큼 큰
킹크랩을 먹었다. 먹기 좋게 다 잘려 나와 힘들게 도구를 쓰지 않고도 쏙쏙 살을 잘 먹을 수
있어 좋았다. 현규진은 하얀 킹크랩 살을 아주 맛있게 먹는 유원을 보며 내내 부산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 나서는 바닷가 근처에 있는 루프탑 카페에 가서 따뜻한 것을 마셨다.
밤바람이 차가워 루프탑에 오래 있지 못하고 잠깐 나가서 사진만 찍고 들어왔지만, 그래도
창가에 앉아 밤바다를 보며 있으니 집이 아니라 여행을 온 기분이 물씬 나서 좋았다. 달빛과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유원을 보는 것만으로도 현규진에게
이 여행은 모두 완성되었다.
“모래사장 걸어 보고 싶어.”
“음…. 오늘 밖에 너무 오래 있어서 찬바람 더 쐬면 안 될 것 같은데.”
“괜찮아. 나 하나도 안 아파. 힘들지도 않고….”
“잠깐만.”
휴대폰 날씨 앱에 들어간 현규진이 제가 있는 곳의 기온을 살폈다. 영하가 아니라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긴 했다. 내내 공부를 하느라 실내 생활을 주로 했고, 수능 본
이후에도 축난 몸을 회복하고, 이것저것 바빠 밖에 오래 있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내일도 시간 있으니까 내일 걷자. 내일이 기온이 더 높아. 새해에 걷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어때?”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며 입술에 묻은 것을 혀끝으로 문지른 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내일 집에 안 가도 돼서 좋다아…. 그치. 하루만 자고 가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
“그러게. 2 박 3 일로 오길 잘했다. 나랑 계속 안 떨어지고 같이 있을 생각하니까 좋지.”
고개를 끄덕인 유원이 핫초코 위에서 반쯤 녹은 마시멜로를 입에 넣었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것이 입 안에서 녹아내려 기분이 더 달콤해졌다.
“응, 집에 안 가고 오늘이랑 내일은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는 거니까…. 그동안은 같이 잘 때 빼곤
밤에 헤어졌잖아.”
“나 집에 가는 거 싫었어?”
“쪼끔….”
“쪼끔?”
“…많이. 너랑 있는 건 좀 이상해. 열 시간을 같이 있었는데도 헤어지면 바로 너무 허전해져.”
아…. 진짜 정유원 어떡하지. 마시멜로로 만들어서 입에 넣고 싶다. 아니, 내가 마시멜로 돼서
정유원 안에 들어가서 살고 싶다, 씨발. 현규진은 앞에 놓인 음료를 마시는 것도 잊고 맞은
편에 앉아 꼼질대는 유원을 잔뜩 눈에 담았다.
“이거 그냥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니라 진짜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우리 대학 다 같은 데
썼잖아. 미치지 않은 이상 같이 붙을 거고.”
“응.”
“붙으면 같이 살래?”
반쯤 남은 핫초코를 호오 불어 한 모금 마신 유원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 움직임
하나에도 현규진은 긴장했다.
“그러기로 한 거 아니었어?”
“…어?”
“전에도 우리 몇 번 얘기했잖아. 같은 대학 가면 같이 살자고. 나도 그러자고 대답했는데….”
“아…. 장난치는 걸로 들었을 것 같기도 해서. 뭔가 매번 진지하게 말한 게 아니라 막
뽀뽀하다가 존나 좋아서 말하고 그래서 혹시 장난인 줄 알까 봐.”
“난 장난 아닌 거 알았는데에….”
생각해 보면 정말 같이 살자는 말을 이렇게 진지하게 미래 계획을 세우듯 말한 기억이 없었다.
대부분 유원이 좋아 죽겠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말을 쏟아 냈었다. 저는 더없는
진심이었지만, 늘 유원은 웃기만 해서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여 줬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어?”
“장난으로 같이 살자는 말을 어떻게 해. 같이 사는 건 진짜 중요한 거잖아. 좋다고 다 같이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그리고 그 말 할 때 너… 하나도 장난스럽지 않았어. 그리고 나도 좋으니까 그러자고 한 거야.
너니까.”
유원은 부드럽지만, 내면이 무척 단단한 사람이었다. 몸이 약하고, 보이는 모습이 말랑말랑
귀여워도 유원을 이루고 있는 중심은 아주 단단하고 곧았다. 한 번씩 이런 단단한 마음이
머금고 있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사랑을 보여 줄 때마다 현규진은 정말 너무 좋아 울고
싶어졌다. 유원은 저를 유일하게 웃게 만들고, 또 울게 만드는 존재였다.
“…유원아. 우리 이제 들어갈까.”
왜냐고 묻지 않는 걸 보니 제 마음을 그대로 읽은 모양이었다. 씩 웃은 현규진이 소리를 죽여
입 모양으로만 유원에게 말했다.
키스하고 싶어.
유원의 귀 끝이 빨개졌다.
***
발을 옮기자 폭신한 무언가가 밟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키스할 생각에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달아올라 몹시 더워져 풀어 버린 목도리였다. 유원은 바닥에 떨어진 목도리를 보다가 그대로
입술을 잡아먹혔다. 고개가 기울어지는 순간 다시는 떨어지지 못할 것처럼 맞물린 입술
사이로 혀가 문질렸다.
“들, 어 가서….”
말이 자꾸만 뚝, 뚝 끊겼다. 유원은 다시 깊게 파고드는 현규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래,
어디에서 하면 어때. 이미 방 안에 들어왔는데 굳이 더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단 생각이
들었다.
현규진의 뜨거운 숨이 닿을 때마다 내내 눈에 담았던 윤슬이 떠올랐다. 달빛에 반짝이는 그
잔물결처럼 마음 안으로 따뜻한 감정이 마구 퍼져 나갔다.
숨을 쉬기 힘들어질 때까지 현규진의 뺨을 매만지며 문에 기댄 채 키스하던 유원은 제가
헐떡인다는 것을 알고 먼저 입술을 떼어 주는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
안에도 아까 본 윤슬이 있었다.
“…하…. 괜찮아?”
“응…. 하아, 괜찮아.”
괜찮다고는 하지만, 분명 쉽게 가라앉지 않을 만큼 숨이 가빠져 있다는 걸 현규진이 모를 리
없었다. 현규진은 가만히 유원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숨이 평온해질 때까지 머리칼과
등을 쓸어 주며 달래 주었다.
“어…! 지금 몇 시야?”
“열 시 좀 넘었어.”
“연기 대상 봐야 하는데! 시작했겠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는 유원을 본 현규진이 숨과 함께 웃음을 흩트리며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야하게 키스하다가 갑자기 연기 대상을 보겠다니. 물론 봐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보는 거긴 하지만, 그조차도 정유원다워서 귀여웠다.
“이모 대상 시상하시겠네. 작년에 대상 받으셔서.”
“응, 아직 그래도 시간 남아서 다행이다아….”
“대상은 열두 시 넘어야 발표하지 않아?”
“보통 그럴걸. 그 전에 얼른 씻어야겠다.”
“스무 살까지 두 시간 남았는데 그 기념으로 같이 씻을까?”
“전혀 아무 상관도 없잖아. 나 먼저 씻고 올게.”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후다닥 들어가는 유원을 보던 현규진이 따분한 얼굴로 배우들이
줄줄이 나오는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누가 나와도 재미가 없고 아무런 흥미도 들지 않았다.
아, 정유원 언제 나오지. 정유원 보고 싶다. 정유원 만지고 싶다. 정유원 놀리고 싶다. 정유원
냄새 맡고 싶다.
“…….”
가만히 있으면 뭐 하나 싶어 침대 옆으로 내려가 엎드린 현규진이 능숙하게 푸시업을 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눈앞에 유원이 아른거렸다.
조금도 쉬지 않고 유원만 떠올리던 현규진은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오는 말간 유원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막 씻고 나와 물기를 머금은 유원은 평소보다 더 말랑하고 촉촉해 보였다.
“정유원, 왜 이렇게 예뻐?”
허리를 안으려다가 땀을 묻히고 싶지 않아 그냥 조금 떨어진 채 뺨에 쪽쪽 뽀뽀하자 유원이 두
팔을 벌려 그런 현규진을 한 번 꼬옥 안았다가 놓았다. 아, 진짜 미치겠다. 그냥 정전으로 TV 고
뭐고 다 꺼지면 안 되나.
이루어질 리 없는 생각을 하던 현규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얼른 씻고 나와 침대에서 유원을 안고 조금도 떨어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도 씻고 올게. 자기야.”
“응. 씻고 만나.”
씻고 나가면 진짜 계속 붙어 있어야지. 절대 안 놔줘야지. 연기 대상이고 뭐고 정유원이
키스하고 싶어 매달리게 만들어야지.
씻는 내내 즐거운 상상이 끊이지 않았다.
씻고 머리까지 전부 말리고 나간 현규진은 침대에 앉아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가서 본 화면에는 최근 몇 년 동안 내내 부동의 인기 1 위를 기록
중인 배우 서정원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괜히 질투가 나 그 뒤로 슬금슬금 올라가 유원의
허리를 꽉 끌어안자 간지러운지 웃음소리가 울렸다.
“뚫어지겠다. 서정원 좋아해?”
“그냥 오늘 대상 후보라고 인터뷰해서 보는 거야.”
아무것도 못 받고 꺼져라. 속으로 서정원을 욕한 현규진이 유원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TV
속 서정원에게 닿아 있던 눈동자가 저에게 닿을 때까지 여기저기를 만지던 현규진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자정까지 단 30 분이 남아 있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94 화(9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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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저거만 볼 거야? 이모 아직 안 나오잖아.”
“그럼 다른 거 볼까? 아까 보니까 가요대상도 하던데.”
“아니, 그런 거 말고 날 봐야지. 자기야, 저거보다 내 얼굴이 더 재밌을 텐데?”
현규진의 말에 리모컨을 놓은 유원이 몸을 돌려 앉았다. 드디어 저를 제대로 봐 주는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팔을 벌렸다.
그래, 이거지. 말랑하고 따뜻한 유원을 끌어안자 그제야 다시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일부러 모른 척했지. 나 봐 달라는 거 다 알면서.”
“…그거… 할까 봐….”
“그거?”
“…키스 다음….”
“아, 마음의 준비 아직 안 됐어?”
“쪼끔 했어….”
“왜 쪼끔만 했어. 많이 하지.”
“어느 정도 준비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세상에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긴 할까? 제법 심각해 보이는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살짝 유원이 입고 있는 티셔츠 자락을 들어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발긋하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모르는 걸 보니 아랫배가 확 울렁였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너무 걱정되고 하기 불편하면 안 해도 돼. 그거 하려고 온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걱정을 해.”
“…알아. 아는데….”
“응.”
“……넌 그러면… 여기서 나랑 그거 할 생각 쪼끔도 안 했어?”
현규진은 잠시 고민했다. 솔직하게 100%로 말하느냐 50% 정도로만 말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100% 다 말하면 징그럽다고 도망가 버릴
것 같고, 50%로 축소를 시키자니 양심에 찔렸다.
“1 부터 100 중에 숫자 하나만 말해 봐.”
“음…. 100.”
“정유원 존나 한 방이 있네. 솔직히 말하면 생각 당연히 했지. 어떻게 안 했겠어. 난 예전부터…
그런 생각 존나 많이 했어. 심할 땐 너 볼 때마다 하고, 그 생각 하면서 혼자 하기도 하고, 잠만
자면 진짜 꿈에 네가 나와서 그랬다니까.”
“…언제부터? 그 예전이 언제야?”
“으음….”
진심으로 고민하는 현규진을 기다리던 유원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괜찮아. 그냥 말해도 돼.”
“…너 집에 갈 것 같은데.”
“안 그래. 너 변탠 거 다 아는데 뭐어….”
“그냥 욕을 하세요.”
유원의 볼을 아프지 않게 양쪽에서 잡아 흔든 현규진이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을 더 잘생겨
보이는 각도로 기울여 유원을 바라보았다. 움찔대는 걸 보니 얼굴 공격 효과가 확실히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처음 뽀뽀했을 때부터.”
“…진짜 변태.”
“뭐야, 말하래서 말했더니 욕만 먹네. 내가 변태 아니면 정유원 너도 손해야.”
“내가 왜. 변태 아니면 좋은 거지.”
“…그래. 변태는 잘 테니까 서정원이나 실컷 보다 자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현규진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옆쪽 침대로 옮겨 가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곧 등 뒤로 사부작사부작 이불을 지나 저에게 다가오는 유원의 소리가 들렸다.
현규진은 턱까지 올라온 이불을 눈까지 덮었다.
“…화났어?”
살살 이불 위로 제 팔을 잡고 흔드는 느낌이 나자마자 이래도 되나 싶게 마음이 다 풀려
버렸다. 사실 뭐 화가 나거나 진짜 서운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 뭉쳤던
마음조차 전부 유원의 볼처럼 말랑말랑해져 버렸다.
“규진아….”
“…….”
“…자기야, 이불 그렇게 덮고 있으면 숨 막혀. 내려도 돼?”
미친, 자기야. 자기도 아니고 자기야. 현규진은 제 얼굴 위로 덮인 이불을 살짝 내리는 유원과
눈을 마주했다. 저를 보자마자 예쁘게도 웃는데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대로 유원을 침대에 눕히고 올라탄 현규진이 얼굴을 내려 입술을 머금었다. 말랑하고
달착지근한 입술이 닿자마자 저를 향해 벌어지는 게 좋았다. 진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자극이었다.
TV 에서 이제 새해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술 사이에서
한참이나 오가는 열기 안으로 파고든 그 소식에 현규진은 입술을 떼고 파르르 떨리는 유원의
눈꺼풀을 내려다보았다.
“…왜…? 더, 더 하고 싶어…. 더 할래, 응?”
숨을 할딱이면서도 더 하고 싶다고 말하는 유원에게 다가가 다시 입술을 머금은 현규진은
카운트다운을 하겠다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유원을 놓아주지 않았다. 긴 키스였지만, 머금고
또 머금어도 내내 모자랐다.
“하…. 이제 카운트다운 한다는데? 안 볼 거야?”
다시 입술이 떨어지자 잔뜩 데워진 숨을 내쉰 유원의 눈동자가 잠시 갈등하며 흔들렸다.
<이제 새해까지 단 10 초 남았습니다! 다 같이 외쳐 볼까요? 10, 9, 8, 7…!>
유원의 선택은 카운트다운이 아닌 현규진이었다. 그대로 현규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쥔
유원이 가만히 제가 있는 아래로 이끌었다. 기꺼이 내려간 현규진이 다시 입술을 부드럽게
물었을 때 창밖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새해를 맞이하여 바닷가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1 월 1 일 새해가 밝았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올
한해에도 저희 SBC 는 시청자 여러분께 많은 즐거움을….>
흠뻑 젖은 숨이 다시 입술 위로 번졌다. 끈적하게 맞물려 있던 입술을 뗀 현규진이 한참이나
이어진 키스에 조금 멍해진 유원을 보며 웃음 지었다.
“이제 우리 뭐든 다 해도 되겠다. 그치.”
“하아….”
“새해 복 많이 받고, 나도 받아, 이제.”
달큰한 목소리와 함께 다시 현규진의 고개가 기울어져 내려갔다. 유원은 저에게 쏟아지는
현규진을 끌어안으며 다시 깊게 혀를 섞었다. 혀 끝을 비벼 주다가 쪽, 쪽 빠는 소리가
울리도록 깊게 혀를 얽어 빨아들이는 느낌에 허리가 움찔 떨리고, 발끝이 움츠러들었다.
어느새 현규진의 손은 티셔츠 안으로 들어가 허리를 만지고 있었다.
“아…. 응, 이상해….”
“뭐가. 내가 여기 만지는 거?”
부드러운 피부를 쓸며 조금 더 손을 깊숙하게 옷 안으로 넣자 유원이 몸을 크게 떨었다.
이렇게 깊은 곳까지 누군가의 손이 들어온 적은 처음이라 몹시 낯설면서도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하지 말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영예의 대상 발표 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대상 시상은 작년도 대상 수상자이신 배우
이해연 님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익숙한 이름을 들은 순간 두 사람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현규진은 유원의 옷 안으로 손을
넣은 채 고개만 돌려 커다란 TV 화면 안에 보이는 이모를 눈에 담았다. 꼭 저를 잡으러 이모가
여기 이 방 안까지 온 기분이었다.
“…이모 나왔는데.”
그 말에 현규진의 어깨 너머로 슬쩍 화면을 본 유원이 확 피어오르는 부끄러움과 얕은
죄책감에 시선을 피했다. 엄마가 예약해 준 방에서 엄마가 나오는 TV 화면을 보면서 현규진과
몸을 포개고 있는 이 상황이 그동안 겪은 그 어떤 상황보다도 너무 부끄러워 차마 엄마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안 봐?”
“…못 보겠어…. 꼭 엄마가 여기 있는 것 같아.”
“나도 방금 그 생각했는데. 이모가 나 죽이려고 온 줄.”
그제야 웃음을 머금은 유원이 현규진의 얼굴을 잡아 쪽, 쪽 가볍게 입술을 마주 댔다. 그런
유원을 보며 현규진은 조금 더 깊숙하게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쯤 넣었으면 이제
손끝에 걸리는 게 있을 것 같아 손가락을 뻗자 예상대로 톡 튀어나온 것이 손 끝에 걸렸다.
“흣…. 거, 거긴 왜 만져….”
“원래 만지는 거야. 봐도 돼?”
부끄러워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키스 다음’이 이렇게 부끄럽고 심장이 터져 버릴
일의 연속일 줄은 몰랐던 유원은 마구 흔들리는 눈으로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부끄럽고 두근거려서 여기서 그만두고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다음에 이어질 것들을
마주하고 싶기도 했다.
<작년에 제가 상을 받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합니다. 작년 한 해 동안 과분한 사랑을 받아….>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 또 어떤 감정을 마주하게 될지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조금도
재촉하지 않고 저를 기다려 주는 현규진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불쑥 또 용기가 생겼다.
<영원히 잊지 못할 설렘을 느끼실 올해의 대상, 그 영광스러운 상을 받으실 주인공을
호명하도록 하겠습니다. SBC 연기대상….>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가 흐릿하게 들리는 것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TV 를
이제 꺼야 할 것 같았다. 엄마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제 현규진과 단둘이서만 머물고
싶었다.
<영예의 대상, 수상자는…. 정말 많은 사랑을 받은 드라마죠. 저도 정말 매주 몰입해 봤습니다.
의 서정원!>
마지막으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과 동시에 티셔츠가
위로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유원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현규진과 눈을 맞췄다. 어느새 셔츠는
가슴이 다 드러날 정도까지 올라가 있었다.
“여기 아까보다 딱딱해졌어.”
손끝을 대고만 있었는데도 단단해진 유원의 유두를 집은 현규진이 살짝 비틀었다. 열이 올라
뜨거워진 손가락이 유두를 비트는 느낌에 어깨를 움츠린 유원의 허리가 움찔 튀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너무 야해 아래로 감각이 몰려들었다. 현규진은 집요하게 유원의 유두를
손끝으로 비비며 그 야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응, 이상해, 기분….”
“싫은 기분이야?”
“…그런 건 아닌데에…. 배 속이 이상해….”
“나도 그래. 존나 미치겠어.”
“…이제 TV 끄면 안 돼? 다른 사람 목소리 들리는 거 싫어.”
“알았어.”
리모컨이 옆 침대 위에 있는 것을 본 현규진이 몸을 기울여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저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기쁨을 전부 전하고 싶다 말하는 서정원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보며 전원을 껐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아까 욕실에 갈 때 미리 챙겨 놓았던 것이 주머니에 잘
있나 확인했다.
“불도 끌까?”
“…다 끄지는 말고, 여기 옆에는 켜 두자. 그래야 얼굴 보이지.”
“응. 그럼 침대 옆에만 켜고 다른 데는 끌게.”
“응….”
부끄럽다면서 제 얼굴을 보고 싶어 하고, 또 제가 올 때까지 배와 가슴을 드러낸 채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유원이 좋아 미칠 것만 같았다. 얼른 다시 납작한 가슴 위 솟아 있는 것을 만져
주고 싶어 손가락 끝이 간지러웠다. 현규진은 괜히 엄지와 검지를 붙인 채 꼭 유두를 비비는
것처럼 손끝을 비볐다.
딱 좋은 분위기가 잡히게 침대 근처의 은은한 조명만 하나 켜고 나머지 불을 다 끈 현규진이
다시 유원의 몸 위로 올랐다. 서두르면 멋이 없어 보일까 봐 여유롭게 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됐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정유원 앞에서 제가 어떻게 여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잠시 떨어져
있었는데도 몸이 식기는커녕 만지고 싶어 안달이 나고, 혀를 빨아 주고 싶어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그거… 어떻게 하는지 알아?”
“알긴 알아. 찾아봤어.”
현규진은 얼마 전에 몇 시간 동안 집중해 ‘그 과정’에 대해 찾아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수능을
보기 전까지는 서로 너무 흥분하지 않도록 자제를 하니 그럴 일이 없었지만, 수능이 끝난
뒤에는 고삐가 풀려 일을 치지 않으면 죽을 것 정도로 흥분을 하게 된 일이 한 번 있었다. 그때
완전히 발기한 제 것을 느낀 유원이 너무 깜짝 놀라는 것을 보고 혼신의 힘을 다해 상황을
갈무리했었다.
그대로 밀고 나가기에는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유원에게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유원과 그냥 상황에 휩쓸려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하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현규진은 공부를 했다. 남자와 남자가 어떻게 섹스할 수 있는지 그게
가능하려면 뭐가 필요한지 열심히 찾아본 끝에 만일의 상황, 그러니까 유원과 진짜 할 상황을
대비해 젤과 콘돔도 미리 사 놨다.
‘사무용품’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이름으로 배달이 온 콘돔을 받았을 땐 현규진도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제가 콘돔을 산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이걸 유원과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진짜 너무 떨려 죽을 것만 같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95 화(95/127)

95


콘돔 씌우는 걸 헤매거나 버벅거려서 쪽팔린 일을 겪고 싶지 않아 미리 시착도 해 보았지만,
제일 큰 XL 사이즈를 샀음에도 발기한 성기에 제대로 씌울 수가 없었다. 아파서 도저히 더
씌울 수가 없겠다는 판단이 섰을 때 현규진은 콘돔을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고 다시
검색을 해 크기로 유명하다는 다양한 XXL 사이즈의 콘돔을 구매했다.
그렇게 다시 도착한 여러 개의 콘돔 중 딱 하나가 현규진도 쓸 수 있을 만큼 크기가 컸다.
무사히 콘돔 씌우는 연습에 성공한 현규진은 그 남은 콘돔 상자를 서랍 안 깊숙한 곳에 넣었다.
그리고 지금 그 상자는 현규진의 바지 오른쪽 주머니 안에 있었다.
“…다행이다아…. 나도 찾아보긴 했는데 보다 보니까 좀 무서워서 쪼끔밖에 못 봤거든.”
“너 그때 찾아봤지. 나랑 잘 뻔한 날.”
“…응.”
“나도 그때 찾아봤어. 진짜 곧 하겠다 싶어서.”
씩 웃은 현규진이 몸을 납작하게 내렸다. 몸과 몸이 맞닿는 것만으로도 다리 사이로 열이
몰렸다.
“아무 소리도 안 나니까… 자꾸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다른 사람 소리가 사라지고 오롯이 현규진만 마주할 수 있게 된 건 무척 좋은 일이지만, 적막
안으로 고요히 움직이는 현규진의 눈을 마주하고, 이불이나 옷에 손이 스치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심장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태어나 이렇게까지 긴장이 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말 안 해도 되게 키스할까.”
“…응.”
유원의 뺨을 부드럽게 문지른 현규진이 고개를 기울여 깊게 입술을 머금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말캉한 혀가 문질리며 비벼질 때마다 간헐적으로 울리는 앓는 소리가
귀여웠다. 현규진은 부드럽게 빨아 주던 혀를 놓고 유원의 입술 사이에 제 혀를 물려 주었다.
곧 유원이 맛있는 것을 빨아먹는 것처럼 현규진의 혀를 촙, 초옵 소리가 나게 빨았다.
“…으응….”
손을 내려 여전히 드러나 있는 허리를 지나 다시 살짝 말랑해진 유두를 쥐어 비트는 순간
유원의 목에서 조금 큰 신음이 울렸다. 느낌이 이상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좋은
쪽의 감각이 맺혀 그러는 건지 궁금해졌다. 현규진은 엄지와 검지를 움직여 유원의 유두를
비볐다. 금세 단단해진 유두와 함께 유원의 허리가 살짝 비틀렸다.
“왜, 자꾸…. 응, 거기만….”
조금 전보다 목소리가 조금 더 부드럽게 풀려 있는 목소리에 어느 정도 힘을 얻은 현규진이
그대로 고개를 내렸다.
“…뭐, 뭐 해? 흣….”
손으로 비비던 유두 위로 현규진의 혀가 스치는 걸 본 유원의 눈이 질끈 감겼다. 뜨겁고
말캉한 것이 다시 그 위를 누르고 스치며 지났다. 축축한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어쩔 줄을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거길, 왜…. 으응, 간지러워….”
“간지러워?”
완전히 솟은 유원의 유두를 입 안에 넣은 현규진이 느릿하게 혀를 움직였다. 혀를 조금 내밀어
핥는 것과 아예 입 안에서 굴리는 것은 느낌이 무척 달랐다. 그리고 유원의 반응도 분명
달라졌다.
“하읏….”
입 안에 가두고 혀로 굴리다가 쪽 소리가 나게 빨아들이는 순간 유원의 허리가 조금 더 크게
비틀렸다. 점점 숨소리가 달콤해지는 걸 보면 기분이 나쁜 건 아닌 것 같았다.
한참을 입 안에서 굴리다가 고개를 드니 손등으로 입을 막은 채 울먹이는 유원이 보였다. 혹시
싫었나? 현규진은 얼른 위로 올라가 입을 막고 있는 손을 부드럽게 떼고 눈을 맞췄다.
“왜 그래. 싫었어?”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서….”
“아…. 그게 왜 이상한 소리야. 하나도 안 이상해. 그래서 입 막고 있었어?”
크지 않은 움직임으로 온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원을 사랑스럽단 듯 내려다본 현규진이
뺨에 깊게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싫은 거 아니면 계속… 해도 돼?”
“…응….”
“다른 쪽도 빨아 줄게.”
다른 쪽 유두 위로 얼굴을 내리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의 귀가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조용한
방 안으로 혀가 가슴을 문지르고 빠는 소리가 울리는 게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또
간지러우면서도 한 번씩 허리가 비틀리는 묘한 느낌이 퍼지는 게 기분 좋기도 했다.
유원은 맛있을 리 없는 것을 맛있는 것처럼 혀로 굴리고 빠는 현규진을 보다가 손을 들어
천천히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손이 닿는 순간 가슴을 빠는 소리가 더 크게 방 안으로 울렸다.
“아…. 으응….”
아, 또…. 혼자 성기를 만질 때 느끼는 묘한 감각이 허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 감각은 아랫배에
뜨겁고 고여 유원을 들쑤시다가 더 아래로 내려가 퍼졌다. 현규진이 한 번 더 축축한 소리가
나게 유두를 빨았을 때 유원은 다리 사이로 기분 좋은 감각이 확 번지는 것을 느꼈다.
“…흐읏….”
허리가 들썩였지만, 누르고 있는 현규진의 몸이 너무 단단하고 무거워 살짝 비틀리기만 했다.
그 움직임에 살짝 몸을 떼고 손을 아래로 내린 현규진이 유원의 다리 사이를 만져 보았다.
“섰네?”
“…하아….”
“다행이다.”
“뭐가?”
“좋았단 거잖아. 내가 해 주는 게.”
바지 위로 반쯤 선 유원의 것을 손으로 감싸고 부드럽게 주무르자 금세 더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내 완전히 단단해진 것을 쥔 현규진이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유원의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를 퍼부었다.
“아래 세우고 이렇게 귀여우면 어떡해.”
“…이상한 소리… 응, 하지 마아….”
“부끄러우면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 그러더라. 그것도 귀여워.”
성기를 매만지던 현규진의 손이 바지 안으로 느릿하게 파고들었다. 납작한 아랫배를
쓰다듬다가 바지 밴딩 안으로 손가락을 조금 넣고, 살살 밀어 넣어 안까지 들어가니 속옷이
조금 젖은 게 느껴졌다. 현규진은 젖은 것 같은 부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으응….”
“여기 젖었어. 정유원 존나 야해. 어, 더 젖는다.”
“그런, 아…. 말… 소리 내서, 응…. 하지, 마….”
젖은 곳을 손끝으로 막듯 문지르자 뭔가가 더 나오는 게 느껴졌다. 눈을 감은 채 젖은 숨을
뱉는 유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현규진이 집요하게 손을 움직였다. 성기 끝만, 그것도
젖어서 달라붙은 속옷 위로 문질러 대는 자극을 유원이 참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흐읏, 응…. 자꾸 왜 거기마안….”
기분 좋을 때, 기분 안 좋을 때, 배고플 때, 졸릴 때, 부끄러울 때, 키스를 더 하고 싶을 때를
비롯해 제가 모르는 얼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현규진은 유원의 새로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잔뜩 느끼는 얼굴. 이런 얼굴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키스에 몸이 달아 눈을 감고 있을
때와는 또 달랐다. 눈물이 나와서 속눈썹은 푹 젖어 있고, 살짝 벌어져 있는 입술 사이에서는
더운 숨과 뒤섞인 동그랗고 달착지근한 소리가 흘렀다.
말간 얼굴은 연한 분홍색으로 달아올라 있고, 한 번씩 눈을 떠서 흥분한 것 같기도 하고
겁먹은 것 같기도 한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는데… 너무 예뻤다. 어떻게 이런 애가 내 애인이지?
손에 쥐고, 맛을 보고, 체온을 마주하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을 만큼 유원은 비현실적이었다.
“벗길게.”
대답을 듣기도 전에 유원의 헐렁한 바지를 허벅지 아래까지 내린 현규진이 속옷 앞 조금
짙어진 부분을 눈에 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야하고 자극적이었다.
“아, 진짜 계속 이런 말만 하기 싫은데, 씨발. 진짜 존나 야해.”
“…너도… 너도 같이 벗으면 안 돼?”
“되지, 왜 안 돼.”
유원의 바지를 발목에서 빼내 다른 침대 쪽으로 휙 던진 현규진이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저를
올려다보는 유원과 눈을 맞추며 아까부터 조금 덥게 느껴지던 티셔츠를 벗었다. 벗으라더니
막상 벗고 나니 슬쩍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유원이 귀여워 자꾸 웃음이 났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다 벗어?”
“아니…! 그, 그 정도면 됐어….”
“나 보는 거 부끄러워? 왜 내 얼굴 안 봐 줘.”
다시 몸을 내려 유원의 뺨에 쪽, 쪽 뽀뽀한 현규진이 속옷 안으로 손가락을 슬쩍 들이밀었다.
유원은 속옷 안도 다른 곳처럼 무척 부드러웠다.
“아…….”
저 때문에 흥분해 아래를 세운 유원을 보니 머릿속에 있는 올바른 무언가, 그러니까 바르고자
노력하며 세워 둔 모든 것들이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현규진은 신음하느라 다물리지 않는
유원의 입술을 핥으며 단숨에 손을 쑥 마저 넣었다.
“흐읏!”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성기를 직접 쥐고 흔드는 것에 유원이 울먹였다.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도 만지게 한 적도 없는 곳을 현규진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흥분이 됐다. 바지
위로 만져 주거나 속옷 앞을 문질러 주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극이었다.
현규진이 제 속옷을 내리는데도 말리기는커녕 계속 더 만져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나 들
만큼 너무 기분이 좋았다.
“아… 으응, 흣, 잠, 까안…. 아, 너무….”
“유원아, 좋아?”
“너무, 응, 빨라, 아…!”
유원의 허리가 위로 크게 들썩였다. 그와 동시에 하얀 액이 터져 나왔다. 현규진은 손이 젖는
것도 모른 채 계속 유원의 것을 쓸어 주었다.
“하아…. 하으, 응….”
유원은 허리를 잘게 계속 떨며 순식간에 몸을 휩쓸고 간 쾌감의 여운을 느꼈다. 사정하고 난
다음에도 계속 같은 곳을 만져 주는 손길이 좋아 허벅지 안쪽이 움찔거렸다.
“…나도 못 참겠어….”
혼잣말을 뇌까린 현규진이 다시 상체를 세워 앉아 유원의 것을 위아래로 쓸어 주며 다른
손으로 제 바지 앞을 내려 성기를 꺼냈다.
“…하…. 이거 봐. 유원아. 너 만지기만 했는데 이렇게 됐어.”
반사적으로 현규진의 손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내린 유원의 눈이 위협적일 만큼 커다래진
성기에 닿았다. 순간 놀란 유원이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현규진의 것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흥분한 현규진 위에 앉아 엉덩이에 닿는 것을 느꼈을 때 무척 클 것 같다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제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크고 무서웠다. 저런 게 몸에 들어갈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생각과 함께 걱정이 번졌다.
“하읏….”
하지만 그 걱정은 새로운 자극과 함께 날아갔다. 유원은 현규진의 잔뜩 단단해진 것이 제 것에
닿아 문질리는 것을 느끼며 시트를 붙들었다. 분명 조금 전에 사정을 했는데도 제 것은 다시
열이 올라 있었다. 현규진이 허리를 움직여 아래가 정확히 닿아 문질릴 때마다 발끝이
움츠러들며 시트를 긁었다.
“아…. 읏, 유원아. 나도 만져 줘.”
“…하아….”
만져 달라는 낮은 목소리와 흥분에 젖은 현규진의 눈은 유원을 무엇이든 하고 싶게 만들었다.
부끄럽지만, 그게 현규진과 닿지 못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유원은 시트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움직여 아래로 내렸다.
떨리는 손가락이 살짝 현규진의 성기에 닿았다가 이내 펼쳐졌다. 다섯 손가락을 오므리며 쥔
현규진의 것은 생각보다 더 뜨겁고… 단단했다. 유원은 현규진이 제 것을 만져 준 것처럼
부드럽게 손을 움직여 기둥을 손바닥으로 쓸어 주었다.
“…아, 잠깐, 읏…!”
현규진은 유원의 손이 성기를 감싸 쥐고 매만지자마자 사정했다. 그 손가락이 제 성기에 닿고,
쥐는 것을 눈에 담는 순간 더 버티기 힘든 감각이 아랫배를 마구 두드리며 쏟아졌다.
평소 자위를 해도 이렇게까지 빨리 끝난 적이 없어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유원이 저에게 닿는
그 첫 느낌은 정말이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강한 자극이었다.
제 손길에 흥분한 유원을 눈에 담고, 손끝과 혀끝으로 머금으며 쌓인 쾌감 위로 직접 유원이
닿은 순간의 분출은 그야말로 불가항력이었다.
현규진은 제 진한 정액이 잔뜩 쏟아진 유원의 배와 가슴, 그리고 여전히 제 성기를 감싸고
있는 손을 보며 쉽게 가시지 않는 여운에 몸을 떨었다. 유원의 얼굴만 봐도 한 번 더 쌀 수 있을
것 같았다.
“규진아…. 기분 좋았어?”
“하…. 어…. 존나 좋았어. 지금도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 아, 어떡하지, 나 진짜 너 때문에 죽을
것 같아. 또라이 됐어, 진짜. 어떻게 손만 닿았는데 쌀 수가 있지.”
“…그, 그런 건 속으로 생각해….”
“너도 알 건 알아야지. 애인이 얼마나 미친 놈인지 알아야 너도 대처를 할 거 아냐, 응?”
웃음이 머문 입술로 다시 유원의 입술을 머금은 현규진이 깊게 혀를 섞었다. 서로의 손이
닿자마자 사이좋게 한 번씩 사정을 하고 나니 그래도 처음 옷을 벗을 때보다 부끄러운 마음이
조금 줄어들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96 화(96/127)

96


“근데 넌… 하…. 여기도 예쁘게 생겼다. 원래 다 그런가? 얼굴 따라가는 거야?”
“…그, 그런 걸 왜 나한테 물어…. 나도 몰라….”
제 어깨를 미는 유원에게 기꺼이 밀려나 준 현규진이 침대를 벗어났다. 유원은 조금 놀란
눈으로 침대에서 나가 어디론가 가는 현규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라고 민 거 아닌데….”
“응?”
“이제… 안 할 거야?”
“어떻게 안 해. 나 또 섰어. 너 보기만 해도 자꾸 서. 어떡해.”
가방 안쪽에서 젤이 든 튜브를 꺼낸 현규진이 다시 침대로 다가갔다. 제가 관두고 가 버린 줄
알고 울상이 된 유원을 보니 마음이 확 조여들었다. 어떻게 유원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울컥울컥 뜨거운 감정을 담은 물이 심장 밖으로 넘쳐흘렀다.
“…간 줄 알았잖아….”
“내가 너만 두고 어딜 가. 절대 안 가. 놀라게 해서 미안. 여보, 뽀뽀.”
“뽀뽀.”
쪽, 입술에 뽀뽀하더니 두 팔을 벌려 먼저 저를 끌어안는 유원에게 안긴 현규진이 목덜미와 뺨,
귓가에 차례로 입술을 비볐다. 저와 떨어지기 싫어 울먹이는 정유원에게 안기는 삶이라니….
좋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뭐 가지고 온 거야?”
“아, 이거 젤.”
“…젤?”
살짝 몸을 뗀 현규진이 유원에게 젤을 건네주었다. 심플한 외관에 잠시 젤을 살펴보던 유원이
젤의 용도를 깨닫고는 입술 안쪽을 꾸욱 깨물었다. 하지만 귀가 빨개지는 건 숨기지 못했다.
“…이런 것도 가져온 줄 몰랐어.”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나 진짜 이거 하려고 여행 가자고 한 거 아냐. 순서가 달라.
섹스하려고 이걸 다 챙기고 여행을 가자 그런 게 아니라 여행을 가서 혹시 할 수도 있으니까
챙긴 거야.”
“알아. 너 그런 애 아닌 거. 그럴 거였으면… 전에 했겠지. 그때도… 아까처럼 엄청 커졌었잖아.
그런데 내가 놀라는 거 보고… 안 한 거 다 알아.”
“알아 줘서 다행이다. 혹시 오해할까 봐 걱정했어.”
조금 부끄러워진 유원은 슬쩍 손에 들고 있던 젤을 다시 현규진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불자락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럼… 그것도 가져왔어?”
“그거? 뭐?”
“…그거…. 키읔으로 시작하는 거…. 영어로는 C….”
“갑자기 이렇게 초성 퀴즈를…. 아! 정답 콘돔!”
“…응…. 그거어….”
“아, 씨. 진짜 정유원. 존나 귀여워서 어떡해. 콘돔을 콘돔이라 말 못 하고, 응? 왜 못해. 그게
그렇게 부끄러워?”
주머니에서 까만 콘돔 상자를 꺼낸 현규진이 유원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부끄러움에 불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그 철저한 준비성이 귀여워 웃은 유원이 콘돔 상자 앞에 쓰인 XXL 이라는
것을 보고 숨을 짧게 뱉었다.
“…앞에 그거 설마 사이즈야?”
“응. 아, 나 진짜 이거 종류별로 존나 산 거 알아? 처음에는 그냥 제일 크다고 한 거 샀는데 안
맞는 거야. 들어가지도 않아. 늘려도 조여서 개아프고. 그래서 서치해 보고 큰 걸로 유명한 거
다 사서 이거 하나 건짐.”
“써 보기까지 했어?”
“어, 뭔가 싸한 거야. 혹시 안 맞으면 이거 사이즈 때문에 분위기 다 조질 것 같은 느낌? 그럴 순
없으니까. 나 잘했지.”
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저와 달리 이렇게 꼼꼼하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많은 걸 준비한 현규진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이거 젤은 뭐 제일 좋다고 하는 걸로 사긴 했는데 안 써 봐서 몰라.”
뚜껑을 연 현규진이 입구에 붙은 작은 은박 실을 떼어 내고 내용물을 손에 덜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너무 짙지 않은 파우더리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향 좋다아.”
“그러게. 네 냄새랑 비슷하네. 누워 봐. 아래 풀어 줄게.”
다시 유원을 눕힌 현규진은 맞닿아 있는 유원의 두 무릎을 잡아 양쪽으로 벌렸다. 순간 놀란
유원이 벌리지 않으려 힘을 줘 봤지만, 이미 다리는 속수무책으로 벌어진 다음이었다.
“…어떡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아래를 다리까지 벌린 채 훤히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 어떤
생각이나 말, 행동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유원은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넌 진짜 안 예쁜 데가 없네.”
미리 공부한 대로 젤을 듬뿍 짠 손가락을 유원의 다물린 입구 위에 바른 현규진이 축축한
손가락 끝으로 그 위를 눌렀다. 이 안으로 제 것이 들어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든 순간 손가락이
한 마디쯤 들어갔다.
“아…. 아파….”
“많이 아파? 못 참겠어?”
“…그럴 정도는 아닌데…. 안에 뭔가 들어온 느낌이 나서… 흣, 아…. 더 들어왔어….”
“응, 내가 더 넣었어.”
유원의 안은 뜨겁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따뜻했다. 낯선 감각에 동요하는 유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마디를 더 넣자 숨과 뒤섞인 신음이 또 터졌다.
“다… 들어간 거야?”
“아니, 아직.”
눈물이 맺힌 유원을 보며 조금 더 손가락을 밀어 넣은 현규진이 기어코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미간을 구겼다. 손가락 하나에도 우는데 이거의 몇 배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제 것을 유원이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못 참겠으면 말해. 너무 아픈데 참으면서 할 필요 없으니까. 알았지?”
“으응…. 지금은 괜찮아졌어….”
“움직일게.”
가장 기다란 중지를 끝까지 넣은 현규진이 반쯤 손가락을 뺐다가 다시 안으로 넣었다. 꽉
다물린 안을 벌리고 들어간 기분도 묘한데 제가 움직일 때마다 유원의 안이 제 손가락을 더 꽉
무는 느낌이 나서 자꾸만 더 흥분이 됐다.
현규진은 유원의 안을 느릿하게 드나들며 조금씩 아래를 풀어 주었다. 젤을 듬뿍 발랐는데도
안까지 바르다 보니 조금 모자란 느낌이 나 튜브를 들어 반쯤 빠져나온 손 위로 더 쭉
내용물을 짰다.
“…으응…. 차가워….”
열기가 가득해 잔뜩 달아오른 아래로 차가운 젤이 닿자 유원의 허리가 움찔거렸다. 그래도 맨
처음보다는 살짝 더 드나들기 편해진 안으로 차가운 젤이 묻은 손가락을 더 깊숙하게 넣어
휘저었다. 체온이 올라 더 뜨거워진 안에서 젤이 녹아 물처럼 흘러 손을 적셨다.
“…돌겠네.”
유원의 안을 잔뜩 적시고 나온 젤 녹은 물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현규진이 안 되겠다는 듯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제대로 유원의 위로 올라 몸을 포갰다.
“키스하고 싶어.”
저에게 가해지는 자극이라고는 헐떡이는 유원을 보는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숨이 차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꼭 도장에서 대련을 쉬지 않고 다섯 번은 한 느낌이었다.
키스라는 말에 유원의 두 팔이 올라왔다. 현규진은 제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벌리는 유원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내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넣었다. 말캉한 혀끝이 너무나 당연히
문질리는 기분 좋은 느낌과 함께 다시 유원의 다리 사이로 손을 내렸다.
“…으응….”
저처럼 흥분한 성기 아래쪽을 만지다가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할 것 같아 손을 내리니 말랑한
무언가가 손끝에 닿았다. 그 위를 아주 약하게 힘을 주어 누르자 유원의 다리가 오므라들었다.
현규진은 깊게 혀를 얽으며 조금 더 집요하게 그 위, 유원의 회음부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아…. 흣, 으응….”
성기를 만져 주는 것처럼 직접적인 쾌감이 확 배 속에 고이는 것은 아니지만, 현규진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간지러웠다. 유원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려 현규진의
몸을 꽉 조였다. 어느새 현규진의 머리는 다시 가슴 쪽으로 내려가 있었다.
“…하으, 응, 또….”
아까 한참이나 만지고 입 안에 넣고 빨아 주었던 유두가 다시 현규진의 입술 사이로 빨려들어
가는 것을 본 유원의 고개가 젖혀졌다. 뜨거운 것이 유두를 뒤덮어 누르다가 쪼옥 빨아들일
때마다 몸에 힘이 확 들어갔다가 또 확 빠지는 것을 반복했다.
“하아…. 아, 흣!”
유두가 빨리는 순간 다시 몸 안으로 무언가 들어오는 느낌이 났다. 처음 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기다란 것이 몸을 뚫고 들어와 움직이는 느낌은 여전히 낯설었다. 제가 좋아하는
현규진의 크고 저보다 마디가 굵은… 그 손가락이 제 몸 안에 들어와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아래에 더 힘이 들어갔다.
“하나 더 넣을게.”
유두를 문 채 조금 뭉그러진 발음으로 말하는 현규진의 머리를 쓰다듬은 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고 부끄럽고… 조금 무섭기도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을 만큼.
“…아….”
몸 안으로 더 굵은 것이 들어왔다. 손가락 하나일 땐 그래도 괜찮았는데 두 개가 들어오자
조금 벅찬 느낌이 들었다. 단단한데 젤 때문인지 미끌미끌한 손가락이 안을 문지르면서
드나들었다. 빠지는 건가 싶다가 안으로 확 들어오고, 또 빠져나가나 싶다가 확… 들어올
때마다 허벅지 안쪽에 고인 감각이 자꾸만 유원을 당겼다.
“흐읏, 아….”
처음에는 마냥 조심스럽던 현규진도 두 손가락이 제법 수월하게 드나드는 걸 느낀
다음부터는 좀 더 대담하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거의 빠져나왔다가 푹 깊은 곳으로 찌르고
들어갈 때마다 유원의 입술 사이에서 잔뜩 달아오른 숨이 터져 나오는 게 좋았다. 현규진은 그
숨 사이로 혀를 넣어 혀끝을 할짝댔다. 힘이 실린 손가락은 어느새 유원의 안을 조금 더 깊은
곳까지 자극하고 있었다.
“아…! 너무, 응…. 처, 천천히….”
“응, 천천히.”
조금 느릿하게 내벽을 문지르며 들어간 두 손끝이 유원의 깊은 곳을 꾸욱 눌렀다. 순간 유원의
허리와 허벅지 안쪽이 팽팽하게 펴지며 크게 몸이 떨렸다. 단순히 안으로 드나들던 때와는
느낌이 분명 달랐다. 그 다른 움직임을 느낀 현규진이 유원을 내려다보았다.
“여기 좋았어?”
눈을 맞춘 채 손가락을 빼지 않고 같은 곳을 긁듯 누르자 달착지근한 신음이 조금 길게 흘렀다.
눈물까지 고여 흘러내리는 얼굴은 정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예뻐 조금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젤 때문에 축축해진 안을 꾸욱 누를 때마다 유원은 자꾸 울었다. 현규진은 유원의 눈물 위에
입술을 대고 부드럽게 전부 머금었다. 눈꼬리를 할짝였을 때 유원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키스해 줘….”
유원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댄 현규진이 손가락을 빼지 않고 박은 채 잘게 흔들었다. 제 입
안으로 유원의 달아오른 숨이 마구 흘러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몸을 감듯 밀착한 유원의 두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가 꽉 조이는 순간 현규진도 손가락을 반쯤 뺐다가 조금 더 힘을 주어
안으로 파고들며 혀끝을 핥아 주었다.
“하으읏!”
그대로 유원의 성기 끝에서 말간 것이 잔뜩 터져 나왔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 여기저기에
입 맞춘 현규진이 파우더 향이 나는 손가락을 빼내고 정액에 엉망이 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
눈도 뜨지 못한 채 헐떡이며 몸을 잘게 떠는 유원을 보기만 해도 사정감이 밀려들었다.
현규진은 홀린 것처럼 몸을 내려 유원의 유두 주변에 튄 정액을 혀로 핥았다.
“으응…. 아, 또오….”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몸으로 번지는 묘한 감각에 유원이 고개를 저었다. 자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기분 좋은 감각과 마주하며 두 번이나 연달아 사정을 하고 나니 체력이 반 이상 뚝
떨어진 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가해지는 자극이 싫지 않았다. 싫기는커녕 유두 위가 아니라
주변만 핥는 느낌에 애가 탈 지경이었다. 유원은 턱을 내려 바짝 솟은 유두 옆만 핥고 있는
현규진을 보다가 살짝 몸을 비틀었다. 그에 현규진의 혀가 유두 위를 핥고 지났다.
“…아…. 좋아….”
친구 사이 고백 금지-97 화(97/127)

97


저도 모르게 흐른 말에 놀랄 틈도 없이 유두가 다시 현규진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노골적인
소리와 함께 유두가 빨리고, 혀에 짓뭉개질 때마다 눈물이 자꾸 흘렀다. 두 번의 사정으로
힘이 빠졌는데도 성기에 감각이 고이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유원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는 현규진의 머리칼을 매만지다가
손이 가슴 위가 아니라 훨씬 더 아래까지 내려간 것을 느끼고 고개를 내렸다. 현규진의 얼굴은
이제 가슴 위가 아니라 제 다리 사이에 있었다.
“…하아…. 올라와…. 응?”
“여기도 빨고 싶어.”
조금 전 유두에 닿던 혀가 나와 성기 끝을 건드리는 걸 본 유원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까지 자극적인 장면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손으로 아래를 만지는 것과
혀가 닿는 것은 느낌이 너무나 달랐다.
“으응…. 아, 거기… 흣, 더러워….”
“너한테 더러운 데가 어디 있어. 그런 거 없어.”
“하지 마아…. 하읏…!”
사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말간 것이 흘렀다. 유원은 아랫배가 확 뭉쳤다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흐무러졌다. 그냥 가만히 현규진이 해 주는 것을 받고만 있었을 뿐인데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괜찮아?”
“…힘들어….”
“머리 아프거나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그런 건 없어…. 아프진 않아. 이렇게 계속… 몇 번이나 한 게… 처음이라….”
“기분은 어때?”
“…좋아…. 네가 너무… 따뜻해….”
평소에도 따뜻하지만, 흥분해 열이 올라 오늘은 정말 커다란 핫팩을 끌어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정말 큰 핫팩이라 생각한 유원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왜?”
“그냐앙…. 좋아서.”
“좋단 말을 뭐 그렇게 존나 귀엽게 해.”
유원이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아무래 대성공인 것 같았다. 안 해 봐서 그동안 몰랐던 것
뿐이지 아무래도 제가 섹스에 소질이 있는 모양이었다.
손만으로도 벌써 몇 번을 가게 했으니 이제 넣으면 아주 난리가 날 것이었다. 정유원 좋아서
막 매일 하고 싶어 하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매일 해야지.
‘이다음’에 대한 기대와 흥분이 일렁이는 눈으로 씩 웃은 현규진이 콘돔 박스에서 콘돔을 하나
꺼내 포장을 뜯었다. 볼록한 끝을 잡고 비틀어 공기를 뺀 다음 집에서 했던 것처럼 잔뜩
발기한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멋있게 한 번에 잘하고 싶은데 솔직히 마음처럼 잘되지 않았다. 유원을 잔뜩 물고 빨면서 아플
만큼 잔뜩 서 버린 것에 씌우면서도 내내 빨리 어떻게든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한
마음에 좀 서둘러 확 당기자 그대로 콘돔이 찢어졌다.
“아, 씨….”
“왜? 어…. 찢어졌어?”
“…어.”
아, 존나 망했다. 이게 무슨 개망신인가 싶었다. 현규진은 찢어진 것을 아무렇게나 치우고
새것을 다시 꺼내 급히 포장지를 이로 확 찢었다. 그리고 너덜너덜한 것을 꺼냈다. 이번에는
제가 이로 물어 찢어 버린 모양이었다.
“…씨발.”
인상을 잔뜩 쓴 채 다시 새것을 꺼내려는데 유원이 현규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까만 비닐을
대신 잘 찢어 현규진에게 주었다. 유원의 손에 들린 콘돔 비닐만 봐도 아랫배가 울렁였다.
현규진은 다시 콘돔 끝을 눌러 공기를 빼고 이번에는 찢어지지 않게 잘 콘돔을 씌웠다. 유원이
보고 있어 그런지 아래에 더 힘이 들어갔다.
“…어…. 커진다아….
“네가 보고 있어서 그렇잖아. 아…. 목소리만 들어도 진짜 쌀 것 같아.”
변태라고 놀리듯 말하려던 유원은 아까 제가 놀려서 삐졌던 현규진을 떠올리며 꿀꺽 말을
삼켰다. 현규진이 변태라면 제가 보는 것만으로도 잔뜩 흥분된다는 그 말이 기꺼운 저도
변태일 테니까.
“…후우, 눕힐게.”
사정의 위기를 넘긴 현규진이 유원을 다시 침대에 다정히 눕혔다. 그리고 손에 젤을 다시 잔뜩
짜서 처음보다 많이 풀린 유원의 입구 안을 손가락으로 다시 부드럽게 헤집었다.
“젤은… 응, 차가운데…. 네 손은 뜨거워….”
“이상해?”
“…좋아….”
“진짜 존나 예뻐, 정유원.”
유원의 입술에 쪽 뽀뽀한 현규진이 싱긋 웃었다. 콘돔 때문에 버벅인 걸 빼면 그래도 배운
대로 아주 잘해 온 편이었다. 이제 잘 넣기만 하면 됐다. 현규진은 손가락을 빼내고 잔뜩
단단한 제 성기를 쥔 채 끝을 유원의 입구에 비볐다.
“…으응….”
“하…. 아, 씨. 존나 좋아.”
젤로 질척한 입구 위가 문질릴 때마다 축축한 소리가 났다. 유원의 신음이 길게 울릴 때쯤
현규진은 성기 끝을 유원의 입구 위로 꾹 눌렀다. 말랑한 느낌과 함께 조금 더 힘을 실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흣, 아, 아파…. 흐윽, 규진아, 아파아….”
“…아직, 아…. 안 들어갔는데. 많이 아파?”
“다, 다 들어간 거 아니야?”
“어? 아직 끝도… 하…. 안 들어갔어. 조금만 더 넣어 볼게. 힘 조금만 빼 봐, 유원아.”
“힘을, 흣, 어떻게… 아…. 아파….”
손을 들어 올려 볼록 솟은 유원의 유두를 가볍게 쥔 현규진이 손가락을 움직여 비볐다.
두려움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허리에서 아주 조금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살짝 더 힘을 주자 귀두가 확 안으로 들어갔다. 손가락 두 개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가 안으로 파고드는 느낌에 놀란 유원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 세상에 이런
아픔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아파, 흐윽…. 너무, 아아…. 흣!”
“아, 잠깐, 아…. 너무, 너무 조여서 아, 나도 아파, 아, 뺄게. 뺄 테니까 잠깐, 힘 조금만… 읏, 아….”
쉴 새 없이 흐르는 유원의 눈물을 보니 이대로는 힘들 것 같았다. 끄트머리만 겨우 들어간
것을 빼려는데 안 그래도 잔뜩 입구가 좁은 데다가 유원의 몸에 힘이 들어가 더 확 조이는
아래에 성기가 잘 빠지지 않았다. 현규진은 아래가 끊어질 것 같은 느낌에 짧은 숨을 뱉어
냈다. 약한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곳으로 압박이 강하게 느껴지니 저절로 미간이
찌그러졌다.
“아, 유원아…. 윽, 힘 조금만….”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지 이대로 조금만 더 있어도 유원이 아파 기절하거나 제 아래가
끊어지거나 둘 중 하나는 사달이 날 것 같았다. 현규진은 그대로 몸을 납작하게 내려 유원의
몸을 덮었다. 그 과정에서 빠져도 모자랄 성기가 조금 더 안으로 파고들었다.
저를 꼬옥 붙든 채 제대로 소리 내서 울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면서 아픔을 참으려는 유원을
보니 정말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현규진은 눈물이 묻은 유원의 입술을 핥다가 마주 물고
혀 끝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흐읏…. 응….”
살살 혀 끝을 조금 더 문지르자 그제야 유원의 몸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씩 빠졌다.
현규진은 반도 들어가지 못한 성기를 그대로 유원의 안에서 빼냈다. 넣기 위해서가 아니라
빼기 위해서 얼마나 긴장하고 노력했는지 식은땀으로 몸이 다 축축했다.
“…후우…. 유원아, 괜찮아? 아직도 많이 아파?”
“아래가 막, 흐윽…. 뜨겁고 아파…. 뭐 넣은 거야? 진짜 네 거 맞아? 너무 아픈데….”
이런 질문을 듣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현규진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올리곤
고개를 끄덕이며 안에 넣은 것이 제 성기가 맞음을 확인해 주었다.
“내 거 맞아…. 나도 존나 이 정도로 커질 줄은 몰랐어. 혼자 할 땐 이렇게까지 된 적 없어서.”
“왜 그렇게 커? 키가 커서 그런가…?”
“키 크다고 다 큰 건 아냐. 그냥 내가 큰 거지. 자기야. 눈 아프겠다. 지금도 아까처럼 아파?”
“이제… 좀 괜찮아졌어….”
너무 많이 울어 진이 빠진 것 같은 얼굴을 보니 그동안 유원이 아파 고생했던 모습들이 머리를
치고 지났다.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유원은 원래 몸이 무척 약하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갑자기 ‘섹스’에만 초점이 맞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잔뜩 들었다.
현규진은 유원의 얼굴을 꼼꼼히 여기저기 만지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안해. 아팠지.”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미안해, 못 참아서….”
“그게 왜 미안한 거야. 당연한 거지. 너 아픈 거 나도 싫어.”
“다시 해 볼까? 젤 더 많이 쓰면 괜찮을 수도 있잖아….”
“음…. 젤 가지곤 안 될 것 같아. 이게 젤 문제가 아니라 넌 존나 좁고, 난 존나 큰 게 문제야.”
더 설명을 하지 않아도 유원 역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직접 그 좁은 곳으로 엄청난
아픔이 몰아치는 걸 겪었는데 어떻게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을까. 유원은 그래도 제가 참지
못해 마지막을 망친 것 같아 너무 미안해졌다.
“그래도 다시 해 보자…. 내가 더 참아 볼게. 두 번째니까 아까보다 더 잘할 수도 있잖아.”
솔직히 그냥 개쓰레기처럼 다리 사이의 사정만을 따라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시 유원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하지만 눈물에 푹 젖은 유원의 속눈썹과 아직도 눈을
깜빡이면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며 그럴 수는 없었다. 저는 개쓰레기가 아니니까.
좋아하는 사람의 상황이 아니라 당장 어떤 식으로든 자극을 달라는 성기의 상황을 따라 일을
결정하는 미친 새끼가 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우선은 유원이었다.
“다시 하는 것도 하는 건데 일단 뚝. 이러다 열 나겠다. 뚝 하자. 응? 뭐야, 열 나는 거 같은데?”
뺨에 묻은 눈물을 닦으려 손을 댄 현규진이 아까보다 더 뜨거워진 느낌에 놀라 얼른 이마를
짚어 보았다. 흥분해서 몸이 따끈따끈해진 것과는 조금 다른 쪽의 열이었다.
“나 괜찮아…. 해도 돼.”
“오늘 안 하면 큰일 나는 것도 아니잖아. 앞으로 우리 계속할 수 있는데? 이러다 너 아프면 나
속상해. 다음에 해도 되는 거니까 무리 안 해도 돼.”
혹시라도 유원이 아플까 싶어 걱정에 파묻힌 현규진은 얼른 속옷만 올려 입고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수건을 꺼내 뜨겁다 싶은 물에 적셔 물기를 없앤 다음 다시 유원에게 가 몸 여기저기를 닦아
주었다. 제 정액과 유원의 정액이 잔뜩 묻은 배와 가슴도 닦고, 다리 사이도 꼼꼼하게 정리해
주었다.
힘이 없는 중에도 부끄러운지 유원의 다리가 오므라들었지만, 현규진은 아주 조금의 힘을
주어 다시 다리를 벌리곤 찝찝함이 남지 않도록 부드럽게 손을 움직였다.
“…….”
아…. 부었네. 마지막으로 제가 들어갔다가 나온 곳에 잔뜩 묻은 젤을 닦아 주려고 보니 입구가
부어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꼼꼼히 아주 살살 젤을 닦은 다음 챙겨 온 보송한 티셔츠를 입혀
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힘이 빠진 몸을 안아 들어 체액에 젖지 않은 침대로 눕히고 포근한 이불을
덮어 주자 유원이 흐무러졌다.
벗고 있어도 전혀 추운 기운이 하나도 없을 만큼 방이 따뜻한데도 유원은 추운지 이불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현규진은 옷장 안에서 여분의 이불을 하나 더 가지고 와 유원의 위로 펼쳐
올렸다. 유원의 떨림이 그제야 멈췄다.
그다음 젖은 수건을 욕실에서 대충 빨아 놓고 빠르게 샤워를 하며 대충 성기를 흔들어
사정했다. 물과 섞여 수챗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말간 액을 보는 현규진의 눈동자가 탁했다.
유원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아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빨리 씻고 나가니 그사이에 유원은 잠들어
있었다. 현규진은 바닥 여기저기에 떨어진 제대로 쓰지는 못하고 찢어진 콘돔 두 개와
마지막에 그냥 벗겨 버렸던 콘돔을 휴지 안에 뭉쳐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울다 지쳐 잠든
유원의 옆으로 올라 앉았다.
멍하기도 하고 탁하기도 한 눈동자가 괜히 어딘가 벽을 향해 있다가 잠든 유원에게 닿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스러운 유원을 담는 순간 다시 눈동자에 따뜻한 기운과 사랑이 담겼다.
자, 이제 고찰할 시간이었다. 현규진은 가만히 오늘 있었던 모든 꿈같은 일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마지막에 유원이 너무 아파하면서 펑펑 운 것을 빼면 어느 순간을 떠올려도
행복하기 만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원래 처음에는 이렇게 잘 나가다가 끝에서 망할 수 있는
건가? 분명 좋았는데. 분위기도 좋고, 유원이도 몇 번이나 가 버리고 진짜 존나 좋았는데. 아래
충분히 풀어야 한다고 해서 젤도 엄청 써서 손가락으로 다 풀어 줬는데.
“…….”
풀고 또 풀어도 정유원의 아래는 너무 좁고, 내 건 존나 크고 계속 씨발, 커지고. 기다린다고
작아지는 것도 아니고 정유원 거기도 계속 좁을 텐데 어떡하지. 둘 다 불가능하면 영원히 못
넣는 건가? 내가 어떻게 넣어도 유원이는 계속 아플 거 아냐.
“…….”
이것도 적응이라는 걸 할 수 있나? 오늘은 한 5cm 넣었으니까 다음에는 10cm…. 뭐 이렇게
하다 보면 나중에는 다 들어갈 수도 있나? 아, 씨. 할 때마다 뭐 자로 잴 수도 없고.
머리를 마구 헝클인 현규진이 뭐라도 찾아볼까 싶어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검색창을 보는
순간 끝도 없이 막막해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적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이유였다.
남자 애인과 처음 섹스를 했는데 좆이 너무 커서 다 넣을 수가 없을 때. 뭐 이딴 걸 검색하느니
그냥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현규진은 절망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98 화(98/127)

98


물론 유원과 끝까지 못 했다고 해서 뭐 진짜 엄청 슬프거나 속상한 건 아니었다. 시행착오야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거고, 완벽하게 삽입을 해야만 섹스인 건 아니니까. 몸을 만지고,
여기저기 맛을 본 것만으로도 넘치게 기분이 좋았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규진은 유원이 아픈 게 싫었다. 제가 기분이 좋자고 유원이 아픈 걸 참는
게 맞나? 그 생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규진은 제가 있는 쪽을 보고 누워 잠이 든
유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말라 보송보송해진 얼굴을 보니 이제야 좀 안도가 됐다.
그래, 정유원이 제 애인이고, 저를 사랑하고, 저와 닿는 것을 좋아하는데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침대에 기대고 앉아 있던 몸을 스르륵 내려 누운 현규진이 유원 쪽으로 몸을 가까이 가져갔다.
머리를 품으로 대자 꼭 안아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원이 잠결에 팔을 들어 현규진의 몸
위로 올렸다.
“꿈에서는 아프지 마. 울지도 말고.”
잠에서 깨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소곤거린 현규진이 여전히 따뜻하고 포근한 유원의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열아홉의 잔상이 아직 선명하게 남은 새벽이 고른 두 숨소리 위로 내려앉았다.
***
아침에 부스스 눈을 뜬 유원은 제 품에 안겨 잠이 들어 있는 현규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
베개가 있는 데도 베지 않고 굳이 품에 안겨 자고 있는 현규진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그 위로 쪽 뽀뽀하자 현규진이 움찔거렸다. 유원은
손을 떼고 잠시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에서 깨는 건가 싶더니 다시
깊게 잠이 드는 모습마저 귀여웠다.
유원은 자연스럽게 지난밤을 떠올렸다. 하다 만 것을 다시 해 보고 싶었는데 제가 열이 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어 버린 걸 떠올리니 조금 속상함이 맺혔다.
반드시 어제 끝까지 다 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잔뜩 기분이 좋기도 했고, 오롯이
둘만 있을 수 있는 그 순간을 저 때문에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게다가 저는 몇 번이나 사정을 했지만, 현규진은 아니었다. 저만 잔뜩 기분 좋게 해 주고, 정작
본인은 제대로 하지도 못 한 것이었다. 유원은 미안한 얼굴로 잠든 현규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
쪼끔 더 어떻게든 참아 볼걸. 세상에 못 참을 일이 어디 있다고…. 남들이 그렇게 열심히 많이
하는 거 보면 다 할 수 있다는 걸 텐데….
솔직히 이걸 버틸 수 있나? 싶을 만큼 아프기는 했었다. 웬만하면 그 분위기를 이어 가고 싶어
꾹 참았을 텐데 입만 열면 아프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아팠다. 태어나 그렇게 아픈
경험은 처음일 정도였다.
하지만 유원은 이 말을 절대 현규진에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현규진은 제가 아픈 걸
걱정하고 싫어하니까. 제가 이 정도로 아팠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분명 다시는 저를 아프게 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었다.
‘유원아, 기분 좋아?’
제 몸 여기저기를 머금다가 고개를 들어 묻던 현규진의 목소리와 그때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리 사이와 가슴 위, 그리고 열기가 존재하는 모든 곳이 다 녹아 버릴 만큼
뜨겁고 기분이 좋았다. 그런 쾌감 안으로 불쑥 파고드는 제 기분을 묻는 현규진의 목소리는…
단순히 몸에서 느껴지는 쾌감 그 이상의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현규진의 어떤 질문에도 다
사랑한다는 대답을 하고 싶을 만큼.
현규진은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으니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유원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현규진을 기분 좋게 해 주고 싶었다. 잠이 들어 버리는 바람에 현규진과 이야기도 더
못 나누고,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기억하지도 못한다는 게 정말 너무 아쉽고 속상했다. 이럴
때마다 몸이 약한 게 너무너무 싫었다.
“음….”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자 현규진의 잠이 가득 묻은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유원은 고개를
숙여 보들보들한 머리칼 위로 쪽 뽀뽀했다.
“여기도.”
다시 눈을 감은 현규진이 품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유원은 아침인데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에 새삼 감탄하며 입술 위로 쪽, 쪽 두 번 입술을 마주했다.
“졸려….”
“더 자.”
“몇 시야?”
“잠깐마안….”
휴대폰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현규진 너머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시계를 본 유원이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누워 현규진의 뺨을 매만졌다.
“아홉 시 쪼끔 넘었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피곤할 텐데.”
“그냥 눈이 떠졌어. 내가 어제 너보다 먼저 잤잖아. 네가 수건으로 나 닦아 준 건 기억 나는데
그 뒤에는 기억이 안 나. 바로 잤나 봐.”
“응. 나 씻고 나와서 보니까 잠들었더라.”
“내가 분명히 너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생각은 했거든? 그런데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어
…. 얘기 더 하고 싶었는데에….”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다시 눈을 뜬 현규진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커튼이
닫혀 있어 방이 어둡지만, 어제 스탠드를 끄지 않고 잠든 덕분에 여리여리한 불빛 안에서
유원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늘 더 하면 되지. 우리 내일 저녁에 가잖아, 집에. 이따 나가서 점심도 맛있는 거 먹고,
바다도 보자. 또 너 좋아하는 케이크도 먹으러 가고…. 하루 종일 얘기도 많이 하고.”
“아, 오늘 밤에 바닷가 산책도 꼭 해야 해.”
“응, 산책도 하고.”
아침이라 무척 낮고 잠이 묻어 나른한 현규진의 목소리는 정말 너무나 듣기 좋았다. 라디오
진행을 해도 정말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아서 자꾸자꾸 목소리가 듣고 싶어 말을
시키게 됐다.
“…밤에….”
“응. 또 뭐 할까.”
“……어제 한 거… 또 할까?”
현규진은 순간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조금 더 자고 싶어 감고 있던 눈이 말도 안 될
만큼 가볍게 뜨였다. 놀란 눈을 한 현규진이 고개를 들어 조금 부끄러운 듯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어제… 나 때문에 못 했잖아…. 넌 제대로 기분 좋지도 못 하고….”
“그런 말이 어딨어. 나 완전 기분 좋았는데. 정유원 여기도 빨고, 응? 여기도 빨았잖아.”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은 현규진이 유원의 유두를 손끝으로 톡 건드리고 내려가 다리 사이도
톡 건드렸다. 그에 얼굴이 빨개진 유원이 현규진의 손을 잡아 결박하듯 내렸다. 그냥 손을
가볍게 드는 것만으로도 빼낼 수 있을 정도의 하찮은 힘이었으나 현규진은 얌전히 유원에게
잡혀 주었다.
“…난 어제 여러 번 했는데… 넌 한 번 밖에 못 했잖아…. 나만 기분 좋았던 것 같아서….”
“나 잘 때 그런 생각 하고 있었어? 존나 귀엽다, 진짜. 그럼 지금 만져 줘. 아침이라 섰는데 네가
자꾸 네 얼굴이랑 머리 만져서 더 섰어.”
씩 웃은 현규진이 유원의 손을 잡아 제 드로어즈 위로 댔다. 유원은 그제야 저와 현규진 둘 다
바지를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다리가 얽혀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저는 티셔츠만 한 장 입고 그 외엔 입은 게 없고, 현규진은 속옷 외에는
입은 게 없었다.
“…아침에 매일… 이렇게 커져?”
현규진의 손에 이끌려 드로어즈 위를 가볍게 쥔 유원이 어제처럼 단단하게 서 있는 성기를
살살 문질렀다. 속옷 위로 쥐었는데도 열기가 느껴졌다.
“평소엔 이 정도는 아니야. 그냥 다들 그러는 정도. 오늘은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고.”
“내가 뭐얼….”
“나 막 야하게 만졌잖아. 아침부터 얼굴은 존나 예뻐선.”
“야하게 안 만졌어. 네가 야하게 받아들인 거지.”
“야하니까 야하게 받아들이지. 아…. 지금도 존나 음, 야하게 만지잖아. 안에 손 넣어서 만져
주면 안 돼?”
듣기만 해도 너무 야해 어쩔 줄을 모르겠는 기분이 된 유원이 잠시 머뭇대다가 손을 현규진의
드로어즈 안으로 넣었다. 손가락 끝이 조금 안으로 들어갈 때부터 눈을 감은 채 눈썹을
찌그러뜨리는 현규진의 얼굴을 보니 더 기분 좋게 해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움을 앞선 그 마음은 유원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유원은 잔뜩 커진 성기를 쥔 채
어설프게 매만지다가 단단한 기둥을 쓸어내렸다. 그럴 때마다 현규진의 숨소리가 가빠지고
낮은 신음이 흘렀다. 유원은 그 얼굴에서 멍하니 눈을 떼지 못했다.
“…규진아 좋아?”
“어…. 아, 좀 더 세게… 읏, 해도 돼.”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쓰는 것도 너무 잘생겨 계속, 정말 그 얼굴을 계속 볼 수밖에 없었다.
유원은 조금 더 힘을 주어 현규진의 성기를 쓸어 주었다.
“…하…. 윽, 유원아….”
“…….”
어떡해…. 내 이름 불렀어. 제 이름이 나온 현규진의 벌어진 입술을 멍하니 보다가 너무너무
부끄러워진 유원은 얼른 고개를 내려 현규진의 어깨 위로 얼굴을 숨겼다. 손에 다 차지 않을
만큼 큰 성기도 너무 뜨겁고, 기분 좋아 보이는 현규진을 가득 담았던 눈동자도 너무 뜨거웠다.
“아…. 유원아. 얼굴 봐 줘. 응? 나 봐 줘.”
“…못 보겠어….”
“키스해 줘. 응?”
손을 제 속옷 안에 넣어 만지는 잔뜩 야한 짓을 하고 있으면서 고개 들어 제 얼굴 보는 게
부끄럽다는 유원이 너무나 귀여웠다. 현규진은 달래듯 유원에게 키스를 졸랐다. 혀 끝을
문지르고 빨아 주는 걸 좋아하니 이건 들어줄 것 같았다.
“…….”
그리고 역시 현규진의 예상대로 유원의 고개가 들렸다. 키스 진짜 좋아한다니까. 사정 직전의
흥분에 달뜬 현규진이 제 얼굴 쪽으로 다가오는 유원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유원에게
먹히기 위해 입술을 벌렸다. 곧 소심하게 살짝 들어온 혀끝이 제 혀를 건드리는 게 느껴졌다.
“읏…! 아….”
혀가 문질리는 것만으로도 쾌감이 몇 배로 확 솟구쳤다. 사정할 것 같은 감각에 거칠어진 숨을
내쉰 현규진이 손을 들어 유원의 머리를 부드럽게 눌렀다. 그대로 입술이 깊게 맞물리며
깊숙한 곳에서 혀가 뒤섞였다. 부드럽고 아침에도 달콤한 유원의 혀를 빨며 현규진은
사정했다. 머리 끝까지 확 치고 올랐다가 온몸으로 스며들어 마구잡이로 불이 켜져 존재감을
드러내는 쾌감에 잘게 몸이 몇 번 더 움찔댔다.
“으응….”
사정을 했어도 위에서 맞물린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현규진은 잔뜩 사랑스럽다는 듯 혀를
얽다가 일부러 쪽, 쪼옥 소리가 나게 빨아 주었다. 움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제 속옷 안에
손을 넣은 채 성기를 쥐고 있는 유원의 손을 느낄 때마다 다시 설 것 같아 미칠 것만 같았다.
유원도 거의 허락한 거나 마찬가진데 그냥 이대로 외출이고 뭐고 몇 시간 공을 들여 어제
끝까지 못한 걸 다시 시도해 볼까 싶었다. 솔직히 유원의 손에 사정까지 하고 나니 그러고픈
마음이 무척 컸다.
“하아…. 규진아 좋았어?”
거의 90% 그쪽으로 마음이 기운 순간 유원과 눈이 마주쳤다. 흐트러진 숨을 내쉬며 저를
바라보는 얼굴 위로 내내 이 여행을 기다리고, 기차를 타러 간다고 신나 하고, 바다를 걷고
싶다면서 웃던 모습이 스쳤다.
이대로 지난 밤처럼 몸을 겹치면 물론 기분이야 좋겠지만, 외출을 하기는 어려워질 것이었다.
한다고 해도 저녁 때나 일어나 겨우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정도일 거고, 만약 유원의 체력이
회복이 잘 안되면 그냥 룸서비스를 시키거나 배달 음식을 주문해 먹어야 할 게 분명했다.
당연히 그 몸으로 밤에 바닷가를 걷는 것도 쉽지 않을 게 뻔하고.
루프탑 카페에서 반짝반짝한 야경을 보며 사진을 찍고, 딸기가 잔뜩 든 시즌 디저트를
먹으면서 맛있다고 웃던 유원을 떠올린 현규진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 좋았어.”
“다행이다….”
“우리 이제 얼른 씻고 나갈까? 나가서 점심 맛있는 거 먹자.”
90%까지 섹스 쪽으로 기울었던 마음이 눈앞에 맺힌 유원의 웃음 하나에 다시 외출 쪽으로 확
움직였다. 우는 것도 예쁘지만, 그래도 웃는 게 더 좋으니까. 현규진은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저를 따라 침대에서 내려오는 유원을 품에 안고 욕실로 향했다. 가는 내내
간지러운 뽀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99 화(99/127)

99


점심으로는 부산에서 유명하다는 피자 가게에 가서 피자를 먹었다. 치즈를 주욱 함께
늘리면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페퍼로니와 올리브로 접시에 사람 얼굴 모양을 만들어 네
얼굴이라 놀리는 다소 유치한 장난을 치며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피자를 먹은 다음에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눈동자에 바닷물이 넘실댈 만큼 오래 바다를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사소하고 가벼운 내용이었지만, 따뜻한 음료와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
그리고 안락한 오후의 소소한 대화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저녁을 먹기 진전에는 백화점에 들러 커플 운동화와 운동복을 두 벌씩 샀다. 대학에 가서 같이
살게 되면 이걸 입고 밤마다 산책을 가자는 이야기를 하며 고른 운동복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저녁으로는 현규진의 아빠 찬스로 VIP 예약을 미리 할 수 있었던 유명한 소갈비
집에서 아주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호오 불어 천천히 아주 잘 먹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은
내내 고기를 구워 유원의 앞으로 놓아 주었다. 유원은 산더미처럼 쌓인 고기를 집어 계속
현규진의 입에 넣어 주기도 하고, 앞접시에 놓아 주기도 했다.
갈비와 국수사리까지 아주 배부르게 먹고 나오자 바깥은 아주 캄캄해져 있었다. 현규진은
바닷가 쪽으로 가 입구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가 마실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과
유원이 마실 따뜻한 밀크티를 주문했다.
종일 바다를 그렇게 보고도 창밖으로 보이는 반짝이는 밤바다를 보고 있는 유원의 얼굴이
바다보다도 더 반짝였다. 현규진은 음료가 나올 때까지 그 옆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문득
그냥 이 순간 자체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밀크티. 조심해. 홀더 두 개 하긴 했는데 그래도 뜨거울 수 있어.”
“괜찮은 것 같아. 안 뜨겁고 따뜻해.”
현규진을 올려다보며 웃은 유원이 카페 바깥으로 나가 현규진이 나올 수 있게 문을 잡아
주었다. 서울보다 따뜻하면서 바다 냄새가 묻은 물기 어린 밤바람이 유원의 뺨을 스쳤다.
유원은 또 바다를 돌아보았다.
“바다가 그렇게 좋아?”
“응. 자주 못 보니까 볼 수 있을 때 더 많이 봐 두고 싶어. 1 년에 한 번도 보기 어렵잖아.”
“서울 가면 운전 면허부터 따서 차 살 거야. 차 있으면 언제든 갈 수 있잖아. 바다 매일도 볼 수
있어. 자주 놀러 가자.”
“아, 맞다아…. 이제 면허 딸 수 있구나. 우리 같이 배우러 다닐까?”
“응, 그러자.”
밀크티를 호오 불어 한 모금 마신 유원이 단단한 아스팔트에서 모래사장으로 걸음을 옮기며
미소 지었다. 걸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고 걷는 게 쉽지 않은데도 그저 좋았다.
“아, 미친. 벌써 신발 안에 모래 들어갔어.”
“나도. 그래도… 너무 좋다아…. 별로 춥지도 않고, 날씨도 좋고, 조용하고, 너도 있고.”
유원을 행복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어 좋았다. 너무 좋다는 말을 할 만큼, 계속
웃으며 저를 바라볼 만큼 행복한 유원을 볼 수 있어 저 역시 행복했다.
“여름에 또 올까? 그땐 사람 엄청 많겠지?”
“많아도 좋을 것 같아. 지금은 사람이 없어서 좋으니까 그땐 사람이 많아서 좋을 거야.”
“넌 진짜 존나 천사야.”
“존나 천사가 뭐야아.”
현규진의 말투에 작게 소리 내어 웃은 유원이 고개를 돌렸다. 아까는 내내 바다를 보더니
모래사장을 걸은 뒤부터 바다 쪽이 아니라 내내 저를 보고 있는 유원을 눈에 담으며 현규진이
손을 내밀었다.
“손.”
“소온.”
제 손 위에 놓이는 작고 따뜻한 손을 꼭 쥔 현규진이 한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여전히 걸을
때마다 운동화 안으로 모래가 조금씩 들어가 사그락대지만, 유원과 손을 잡고 걷는 순간 그
감상도 조금은 좋은 쪽으로 바뀌었다. 현규진은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손가락을 단단히 얽어
꽉 쥔 손을 앞뒤로 천천히 흔들었다.
팔 움직임에 속도가 붙어 조금 더 크게 앞뒤로 움직이던 팔이 뒤로 한 바퀴를 돌았을 때 조금
큰 웃음이 터졌다. 별것 아닌 장난도 그냥 너무나 즐거웠다. 귓가에 달라붙는 유원의
웃음소리가 너무 좋아 별생각 없던 바다가 너무 좋아질 만큼 이 순간이 소중했다.
두어 번 팔을 붕붕 돌리며 장난을 친 현규진이 몸을 숙여 웃음을 터뜨리는 유원의 입술에 쪽
입 맞췄다. 조금 놀라 바라보던 유원도 이내 쪽 간지러운 소리를 돌려주었다. 마지막 소리는
바다가 담긴 밤바람에 실려 바다 위로 흩어졌다.
“난 어릴 때도 너 웃는 거 보는 게 좋았어. 아직도 기억 나. 태권도 다닐 때였는데 그날 내가
엄청 잘해서 관장이 사탕을 여러 개 줬었어. 너 주고 싶어서 태권도 차에서 내리자마자 너희
집에 갔는데 네가 사탕이 아니라 내가 도복 입은 거 보고 멋있다고 웃었어. 지금처럼.”
“음, 기억 날 것 같기도 하고….”
“나 너희 집에 일부러 도복 입고 간 적도 있었어. 네가 또 웃는 거 보고 싶어서.”
“정말?”
“응. 근데 너 진짜 볼 때마다 멋있다고, 잘 어울린다고 웃어 줬다? 아, 그리고 사실 태권도
중간에 좀 재미 없어져서 그만두고 싶었는데 그럼 너한테 해 줄 얘기가 없어지니까 그냥 참고
끝까지 다녔어.”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에 조금 놀란 유원이 현규진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현규진이
태권도에 다닐 때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 텐데 그 어린 나이에 저를 위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너무 고맙기도 했다.
“다른 건 다 같이 할 수 있는데 운동은 같이 못 했잖아. 태권도 가서 뭐 하는지 말해 주면
좋아하고, 열나고 약 먹어서 졸린 눈으로 끝까지 다 듣고 그런 거 보면서 그냥 내가 너 대신
움직이고 힘들고 활동적인 건 다 하면서 너한테 다 제대로 말해 주고 알려 주고 싶었던 것
같아.”
“…나 진짜 그때 네가 그런 얘기 해 주는 거 너무너무 좋았거든. 나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고,
그래서 알 수가 없는 건데 네가 재밌게 말 다 해 주니까…. 매일 너 태권도 끝나고 오는 것만
기다렸어. 매일 사탕도 주고 좋았는데.”
“날 기다린 거야, 사탕 기다린 거야?”
“둘 다.”
웃을 때 눈이 접히는 게 사랑스러워 가만히 바라보던 현규진이 다시 고개를 기울여 뺨에 입
맞췄다. 간지럽고 기분 좋은 뽀뽀에 유원이 또 웃었다.
“하다 보니까 운동이 재밌어져서 합기도도 배우고, 주짓수까지 해 본 건데 뭐…. 결론적으로
변태 퇴치는 존나 확실히 할 수 있게 됐으니까 잘 배웠다 싶어.”
“갑자기 거기서 변태가 왜 나와.”
“왜 나오긴. 아까 낮에 피자 먹을 때도 주문 받던 새끼가 계속 너만 보면서 주문 받고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너한테만 묻고 그런 거 못 봤어?”
“그냥 친절했던 거 아니야?”
“아니야. 왜 나한텐 불친절한데, 그럼. 내가 야리니까 수작 못 부린 거지 내가 잠깐만 자리
비웠어도 그 새끼 너한테 수작 걸었을걸.”
“설마아.”
그럴 리 없다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이 뇌가 짜릿할 만큼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들였다.
유원은 제 얼굴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었다. 누구든 보면 예쁘다 생각하고,
연예인인지 묻는 얼굴을 가졌으면서 겸손해도 너무 겸손했다.
“이상하게 씨발, 남자 새끼들이 유치원 다닐 땐 네 인형 뺏어서 울리고, 초등학교 다닐 땐 네
일기장 가져다가 어제 자기랑 결혼했다고 일기를 써놓더니 중학교 가자마자 진짜 변태
게이지 존나 올라서 대놓고 입만 열면 개소리 해 대는데 진짜… 아오.”
“진짜 다 싫어….”
“그러다 고등학교 들어가니까 더 업그레이드됐잖아. 꽃 들고 기다리고, 체육복 훔쳐 가고,
자기 집에 일단 가기만 하자고 끌고 가다 나한테 걸리고. 존나 병신 새끼들이 눈만 존나
높아서 씨발, 내 건데.”
“그러니까아…. 네 건데.”
아…. 씨발, 내 거래. 그 와중에 존나 귀엽네. 평소에는 저런 말에 으…. 소리를 냈을 텐데 다시
사귀고 난 뒤부터 확실히 유원이 많이 말랑말랑해진 게 느껴졌다. 여보라고 불러도 하지 말란
소리를 하지 않고, 이제 자기는 너무 당연한 호칭처럼 자리를 잡았다. 저만큼 유원도 저와
간지러운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대학 가면 이제 전국구야. 전국 변태가 몰려들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니까… 이상하잖아. 좀비 같아.”
“좀비가 나아. 변태보다.”
“음…. 그럴 것 같긴 해. 나도 좀비가 나아.”
남이 듣기에는 다소 유치하고 영양가 없는 대화로 들릴 수도 있지만, 현규진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또 귀엽기 만한 대화였다. 진지하게 좀비와 변태 중에 뭐가 더 나은지 고민하는
유원의 얼굴을 안 본 사람은 이 순간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마 알지 못할 것이었다. 즉, 저만
누릴 수 있고, 담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말이었다. 씨발, 존나 좋아! 당장 미친 놈처럼 바다에
뛰어들고 싶을 만큼 좋았다.
“아, 진짜 이렇게 걸으니까 좋다. 힘들진 않아? 오늘 많이 걸었잖아. 다리 아프면 말해. 참지
말고.”
“괜찮아. 너무너무 좋아. 다리 하나도 안 아파.”
바닷바람에 나붓대는 부드러운 유원의 머리칼 위로 입 맞춘 현규진이 이제는 하나도
거슬리지 않게 된 운동화 안에 모래가 들어간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우린 진짜 옛날얘기만 해도 한 달은 놀 거야.”
“일 년도 놀걸?”
“하긴 우리가 같이한 게 진짜 많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쌓일 거 아냐.”
“응. 지금 이것도 쌓이고 있는 거겠지?”
“그럼.”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힘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마음이었다.
“너랑 같이 유치원생도 되고,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도 됐는데…. 이젠 같이 어른도 됐네.”
“…….”
“이제 하루 째라 어른이라고 하긴 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된 건 된 거니까. 다음에 또 같이
뭐 될까, 우리.”
“뭐든 좋아.”
유원의 목에 감긴 목도리가 밤바람에 나부꼈다. 바다가 빛나고 유원이 빛났다. 사랑은 그 빛
안에 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유원의 눈동자에 갑자기 파도 소리가 멀어지고 어둠조차
흐릿해졌다.
“너랑 같이 있으면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아.”
유원이 웃었다. 그 얼굴 위로 도복을 입은 저를 보며 웃던 어린 유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도 똑같이 정유원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 하나 뿐인 저와 그런 저를 보고
웃는 정유원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사랑의 모습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대로인 것도 분명히 존재했다. 결코 변하지 않을 것들이
그동안 쌓아온 모든 시간 안에 반짝이고 있다는 것을 현규진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분명 그 반짝임이 되어 서로의 마음과 웃음 안에 머물 거라는 것도.
조금도 춥지 않았던 부산의 밤바다, 종종 밤인 것을 잊게 할 만큼 밝은 유원의 웃음,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내내 꽉 잡고 다닌 손.
현규진은 이 순간을 사랑했다. 저의 모든 곳에 스며들 정유원의 순간을.
친구 사이 고백 금지-100 화(100/127)

100


마음을 가득 채운 여행을 다녀온 후, 유원은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는 일이 있어도 마냥 좋은
기분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고작 이틀을 같은 침대에서 꼭 끌어안고 잤을 뿐인데
현규진이 없는 침대가 허전하게 느껴질 만큼 좋아하는 감정이 온몸에 가득했다. 유원은 매일
자기 전에 현규진과 꼭 같은 대학에 붙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함을 담아 빌었다.
현규진과 함께 운전 면허를 따고, 매일 여기저기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기도 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불쑥 다른 대학을 가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같은 학교에서 현규진을 볼 수 없으면 너무 속상할 것만 같았다. 또
혹시라도 위치가 완전히 다르거나 너무 먼 곳에 붙어 버리면 같이 사는 것도 어려워질 수
있기에 더 그랬다.
당연히 붙을 거라 말하는 현규진과 달리 ‘만약’을 생각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유원은 합격자 발표일에 노트북 앞에 앉아 수험 번호를 입력하는 칸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제발, 제발…. 등 뒤에 선 엄마, 아빠가 분명히 합격했을 거라고 말을 하면서도 손을
덜덜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더 떨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차분히 숨을 고르고 수험번호와 생년월일을 입력한 유원은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화면에 뜨는 ‘축하합니다!’라는 글자와 마주했다. 합격했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엄마, 아빠의 환호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우리 강아지 너무 축하해!”
“우리 유원이, 우리 강아지 이제 대학생이네. 이렇게 예쁜 강아지가 언제 커서 벌써 스무
살이야.”
양쪽에서 저를 끌어안는 따뜻함과 행복한 축하에 웃은 유원이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제가 행복해지려면 아직 관문 하나를 더 통과해야만
했다. 현규진의 합격.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 유원은 마음껏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때 벨이 울렸다. 휴대폰 벨이 아니라 현관 벨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유원은 현규진을
떠올렸다. 현규진일 것만 같았다. 막연한 예감에 자리에서 일어난 유원이 방을 달려나가 얼른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 내내 보고 싶었던 현규진의 얼굴을 두 눈 가득 담았다.
“…어떻게 됐어?”
“붙었어!”
“정말?”
“어! 합격!”
눈앞으로 휴대폰이 다가왔다. 화면에는 조금 전 노트북으로 본 그 화면이 떠 있었다. 응시자
현규진, 그리고 합격. 완벽한 결과에 유원이 그대로 현규진에게 달려들어 목을 가득
끌어안았다.
“여보도 붙었지?”
“응, 응…. 나도 붙었어.”
기쁜 마음으로 유원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귓가에 쪽 뽀뽀한 현규진이 입술을 떼고 정말 몇 초
지나지 않아 현관으로 나오는 유원의 부모님을 보며 놀랐다. 순간 너무 기쁘고 좋아 이모와
이모부가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다행히 여보라고 부르고 뽀뽀한 것을 보진 못하신 것 같은데 유원이 저를 끌어안은 느낌이 꽤
깊어 조금 눈치가 보이긴 했다. 물론 전혀 그런 쪽으로는 생각 안 하고 계신 것 같기는 하지만.
“규진아, 붙었어?”
“네. 저도 붙었어요. 유원이랑 같은 대학.”
“세상에, 너무 잘됐다. 제발 우리 규진이도 같은 대학 붙게 해 달라고 이모가 매일 기도했거든.
기도한 보람이 있네. 너무 축하해. 우리 규진이 걸음마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스물이라니…. 너희가 같은 대학까지 가게 돼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이모에게 웃어 보이며 유원의 등을 토닥인 현규진이 귓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자기 존나 대담해졌네.”
목에 감겨 있던 팔에서 힘이 스르륵 빠지는 게 느껴졌다. 현규진은 빨개진 채 떨어지는 유원을
귀엽고 재밌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모와 이모부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는 사람이 보면 이미 관계를 들키고도 남았을 얼굴을 한 유원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그동안 혹시라도 같이 합격을 하지 못할까 봐 잔뜩 걱정하던 것을 알기에 더
그랬다.
“어머, 규진아. 너 슬리퍼가 그게 뭐야.”
“네?”
놀란 목소리로 말하는 이모를 본 현규진의 시선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슬리퍼를 한쪽만 신고
다른 한쪽은 맨발인 게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합격 확인을 하자마자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슬리퍼도 제대로 신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상한 걸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니
…. 유원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더는 그 어떤 걱정도 필요 없는, 오직 행복만이 가득한 웃음이.
***
대학에 붙고 나자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같은 서울 안에 있어서 지금 집에서도
충분히 통학을 하려면 할 수 있는 거리기는 하지만, 둘이 같이 살고픈 이유 하나로 현규진은
학교 근처에서 유원과 같이 살고 싶다고 부모님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허락을
받아 냈다.
혼자 사는 게 아니라 유원과 ‘함께’ 산다는 것에 부모님은 걱정을 덜었다. 현규진이 혼자
살면서 담배와 술을 가까이하고, 만신창이가 될 가능성을 유원이 확 낮춰 준다는 이유였다.
현규진은 저를 못 믿고 유원만 믿는 부모님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참았다. 유원과
함께 살 수만 있다면 망나니 취급을 받아도 괜찮았다.
유원 역시 현규진과 함께 산다는 이유로 부모님께 쉽게 허락을 받았다. 그동안 현규진이
얼마나 유원에게 잘했는지 알고, 함께 지내면 큰 의지가 되고 또 의미 있는 대학 생활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걸 알기에 유원의 부모님은 염려보다는 격려를 해 주었다.
같은 대학, 같은 집, 앞으로 더욱 떨어질 일이 없게 되어 너무나 좋기 만한 마음을 머금은 채
맞이한 졸업식 날은 무척 추웠다. 마지막이 될 교복을 입고 유원은 현규진과 함께 학교로
향했다. 너무 추운 날이라 아빠가 차로 태워다 준다고 했지만, 마지막이니 추위를 뚫고 학교에
가는 것도 다 추억이다 싶어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물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을 때쯤 그냥
차를 탈 걸 그랬다고 현규진과 눈을 맞춘 채 후회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코끝이 빨개진 채
서로를 놀리고 웃으면서 함께 학교로 향하는 길은 몹시 즐거웠다. 추위마저도 기꺼울 만큼.
문이 열릴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강당에서 식순을 따라 박수를 치던 유원은
길어지는 교장 선생님의 축사에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개를 뒤쪽으로 돌리니 남들보다
정말 머리 하나는 더 크게 삐죽 솟아 있는 현규진이 보였다. 제 시선을 느낀 건지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시선이 움직였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장난기가 번지는 걸 보니 손끝이 다 찌릿했다.
유원은 씩 웃는 현규진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어 큰일이었다.
졸업가에 이어 교가까지 부르고 나자 졸업식이 끝났다. 교실로 돌아가기 전 강당에서 가족과
만나 사진을 찍는 친구들 사이로 유원도 부모님과 마주했다. 품에 가득 안아야 할 만큼
화사하고 예쁜 꽃다발을 주며 엄마가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 강아지 언제 이렇게 컸어? 엄마가 일한다고 요즘에는 몇 번 안아 보지도 못했는데 언제
이렇게 다 컸어, 응? 이렇게 건강히 또 무사히 졸업해 줘서 너무 고마워. 엄마가 앞으로 더
잘할게. 안아 보자, 우리 유원이.”
꽃다발을 잠시 아빠에게 주고 울먹이는 엄마와 꼬옥 끌어안은 유원이 천천히 엄마의 등을
쓸어 주었다. 주위에서 이쪽으로 닿는 여러 개의 시선이 느껴졌다. 우는 엄마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지 않게 하려고 꽃다발을 들어 교묘히 얼굴 쪽을 가려 주는 아빠를 보며
유원이 웃음 지었다.
“해연아, 왜 울고 그래. 이 좋은 날.”
“우리 유원이가, 너무 빨리 커서…. 너무 슬퍼, 소희야.”
놀란 눈으로 다가오는 현규진의 엄마가 얼른 손수건을 꺼냈다. 유원은 몸을 떼고 눈물을 닦는
엄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다가 뒤에서 허리를 살짝 콕 찌르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현규진이 바로 뒤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교실 같이 가.”
“응….”
뒤로 손을 해 슬쩍 손끝을 만졌다가 놓고는 함께 교실로 향했다. 이제 반으로 가서 졸업장과
앨범을 받고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면 정말 끝이었다.
“난 모여서 같이 점심 먹는 줄 알았는데 점심 아니라 저녁이라며?”
“아, 응. 아빠가 저녁에 좋은 데 예약했다고 그랬어.”
“무려 졸업 파티! 한다고 무조건 다섯 시 반에 출발해야 하니까 절대 늦으면 안 된다고 나만
보면 엄마가 계속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해서 진짜 확 늦을까 생각 중.”
“이모한테 왜 그래. 네가 말 안 들어서 그러시는 거지.”
“뭐야, 내 편을 들어야지. 애인이 그래도 돼? 응? 정유원, 왜 엄마 편드는데.”
서운함을 장난스럽게 토로하며 유원의 어깨를 깨문 현규진이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희고
예쁜 목덜미에 잠시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부산에 다녀온 뒤 내내 부모님이 집에 계시기도
하고,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바쁘기도 해서 유원과 그렇고 그런 것 근처에도 갈 기회가 없었다.
부모님의 눈을 피해 방에서 키스를 하거나 잠깐 외출하셨을 때 몸을 겹친 채 좀 깊은 키스를
한 적은 있지만, 그보다 더한 무언가를 하지는 못했다. 몰랐을 땐 몰랐으니까 괜찮았지만, 이미
‘키스 다음’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겪어 버린 이상 자꾸 키스보다 더한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아…. 목에 자국 남기고 싶다. 옷 안에 손 넣고 싶다. 정유원 가는 얼굴 또 보고 싶다.
부산에서의 마지막 밤에도 사실 바닷가를 너무 오래 걸은 게 문제였는지 둘 다 씻자마자 잠이
들어 버리는 바람에 다시 넣는 시도를 하기는커녕 그대로 아침을 맞아 버렸었다. 열 시까지
늦잠을 잔뜩 자고 일어났을 때의 그 개운함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짜증이 치밀었다. 아, 물론
유원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무조건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 여행의 마지막 밤을 조금 더
의미 있게 보내지 못하고, 잠 따위로 날렸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왜?”
“어?”
“갑자기 무슨 생각해?”
너랑 또 하고 싶단 생각. 맺히는 건 있는데 소리를 내기는 좀 그래서 씩 웃은 현규진이 유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교실 앞 복도에서 여러 반 애들이 뒤섞여 사진을 찍고 웃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현규진이 뭔가 생각난 듯 유원을 내려다보았다.
“끝나고 나랑 어디 좀 가.”
“어디?”
“사진 찍으러.”
“사진?”
“응. 오늘 지나면 이제 교복 입을 일 없을 거 아냐. 사진 찍자, 같이.”
갑자기 왜 사진을 찍자는 건가 싶었지만, 같이 사진을 찍어 남기는 건 좋은 일이기에 유원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교실 앞문 앞에서 현규진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이따 봐,
빠이. 간만에 듣는 인사가 너무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 된 현규진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어 제 교실로 향했다.
***
졸업식이 완전히 끝나고 현규진과 함께 온 곳은 학원가에 있는 포토 부스였다. 날도 워낙
추운데다가 사람이 많을 시간이 아니라 포토 부스는 아주 조용했다. 여러 대 있는 기계들 중
하나를 선택해 유원과 함께 들어간 현규진은 교복 위에 걸친 두꺼운 겉옷과 가방을 벗어
뒤쪽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유원의 목도리와 겉옷도 벗겨 주었다. 다행히 가게 안은 덥다고
느껴질 만큼 따뜻했다.
“이거 찍는다는 거였어? 귀여워.”
“나 귀여워?”
“응. 귀여워.”
“내가 그렇게 좋아서 어떡해, 정유원.”
“몰라…. 큰일 났어.”
제 말에 장단을 맞추는 유원이 귀여워 참지 못한 현규진이 그대로 얼굴을 잡아 고개를
기울였다. 깊게 입술을 마주 문 채 혀를 섞다가 끝만 문지르자 금세 앓는 소리가 울렸다. 사진
찍으러 왔다가 아래가 설 것만 같았다. 현규진은 아주 힘들게 떨어지고 싶지 않은 입술을 겨우
떼어 냈다.
“하아….”
평소에 비하면 무척 짧은 키스였지만, 따뜻한 곳에서 말랑해진 혀를 문지르고 나니 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유원은 조금 멍해진 눈으로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부산 여행 이후 ‘키스 다음’을 또 하고 싶은 것은 유원도 마찬가지였다. 여행 마지막 날
밤에 다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숙소에 갔었는데 그만 너무 피곤해 잠이 들어 버렸다.
그 뒤로는 지금까지 약 한 달 반이 지나도록 갑자기 엄마, 아빠도 거의 매일 집에 있고,
현규진의 집에도 이모가 거의 늘 있어 키스 다음의 무언가를 할 수가 없었다.
부산에서처럼 가득 품에 끌어안은 채 잠을 잘 수도 없고, 숨이 찰 때까지 키스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아 조금만 키스를 해도 금세 아랫배가 울렁이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
하지만 상황이 안 되니까 이 모든 걸 참을 수밖에 없었다. 현규진도 늘 키스를 하다가 멈추고,
혹시라도 몸이 닿아 아래가 단단해지면 서둘러 몸을 떼곤 했다. 유원은 얼른 단둘이서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꾸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유원은
현규진과 또 닿고 싶었다.
“야한 생각 하는 멍유원, 여기 봐.”
“그런…! 생각 안 했어.”
“그럼 내 생각 했어?”
“…응.”
“야한 생각 맞네.”
“아니거드은.”
입술이 앞으로 조금 나온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고개를 기울여 제 입술을 다시 마주 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도록 쪼옥 소리가 나게 눌러 주었다. 발그레 달아오른 뺨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았다.
“아, 더워. 난방 존나 하네. 이제 찍는다?”
“…응.”
바깥 날씨와는 맞지 않게 소맷자락을 걷어붙인 현규진이 화면에 나온 촬영 버튼을 눌렀다.
포즈를 준비할 5 초의 시간 동안 몸을 밀착하고 함께 화면을 바라보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가만히 서 있는 유원과 달리 현규진은 손을 들어 유원의 머리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크게 브이 자를 그리며 유원의 턱 아래로 대었다. 그 장난기 가득한 손목을 유원이
붙잡아 저지한 순간 사진이 찍혔다.
“정유원 웃는 거 봐. 존나 귀여워, 진짜.”
“진지하게 찍어. 장난 치지 말고.”
“증명사진도 아닌데 왜. 다음, 다음.”
“어떻게 찍을 건지 알려 줘야지. 나 이런 거 잘 모른단 말이야.”
“난 다 정했는데.”
다시 5 초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현규진이 목덜미와 어깨가 이어진 부분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턱을 쥐더니 눈가에 뽀뽀했다. 목덜미와 턱, 눈가에 닿은
느낌이 간지러워 현규진의 입술이 닿은 쪽 눈을 찡긋한 순간 또 화면이 반짝이며 기록된
순간을 보여 주었다.
“이건 무조건 셀렉해야지.”
유원은 화면 안에 있는 웃고 있는 저와 즐거워 보이는 현규진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평소라면
이런 뽀뽀하는 사진은 혹시 누가 보게 될까 봐 무서워 선택하지 말자고 했을 텐데 그냥 오늘은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진짜 열아홉이 끝나는 것 같은 오늘의 이 순간이 그대로 담긴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현규진이 왜 여기까지 와서 사진을 찍자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규진아.”
“응? 왜. 이번엔 네가 키스할래? 야하게 찍어 볼까.”
“으…. 그런 거 아니거든.”
손을 젓는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뺨에 깊게 입 맞추고 눈을 맞췄다.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현규진을 본 다음에야 다시 유원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이거 자주 찍자고….”
너랑 나누는 순간을 두 눈으로 언제든 꺼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열아홉의 마지막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눈에 담을 수 있게 된 것처럼. 스무 살의 봄도, 비가 오는 어느 날도, 그냥 아무
일도 없는… 그래서 평범한 어느 순간도 보고 싶어. 언제든, 보고 싶을 때마다.
“응. 보일 때마다 찍자.”
씩 웃은 현규진이 다시 화면을 누르자 5 초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저를 가득 끌어안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은 활짝 웃었다.
이 순간의 기록을 언제 꺼내 봐도 오늘의 제가 너무너무나 행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친구 사이 고백 금지-101 화(101/127)

101


아주 많은 집을 보고, 또 조건을 꼼꼼히 따져서 얻은 학교 근처의 집은 둘이 살기에 여유롭고,
주변 교통도 좋은 데다가 상권까지 좋아 아주 만족스러웠다.
무조건 방은 기본적으로 세 개는 돼야 한다는 부모님의 의견을 현규진은 아주 얌전히 따랐다.
집이야 넓어서 나쁠 게 없고, 또 방이 세 개면 하나씩 공부를 하거나 짐을 정리하는 용으로
쓰고 남은 하나는 침실로 쓰면 딱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뭐 가끔 부모님이 오시면 왜 각자 방에는 침대가 없고, 다른 방 하나에만 침대가 있냐고 묻긴
하겠지만, 그게 무서워서 유원과 다른 방을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매일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유원을 안고 잘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아서 기자회견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비어 있는 집이라 이사도 여유롭게 할 수 있었다. 정말 둘이서 살 수 있겠냐면서 부모님의
걱정이 끊이지 않았지만, 현규진은 아주 조금의 짜증이나 성질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부모님에게 신뢰를 얻으려 노력했다.
“아, 다음 주 언제 와. 시간 잘 가더니 갑자기 멈췄어. 하루 존나 느리게 가. 왜 아직도 6 일이나
남았는데.”
“그러게…. 집 정리하고 그럴 땐 시간 진짜 빨리 갔는데…. 그래도 모레는 오티고 끝나면 바로
주말이니까 금방 지나갈 거야.”
“존나 가기 싫어.”
“오티?”
“어. 다 모여서 재미없는 소리 해 대는 거 진짜 별론데.”
“그래도 안 가면 좀 그렇잖아.”
“너랑 같은 과도 아니고.”
현규진이 왜 오티에 가기 싫어하는지 그 말을 듣고 나니 조금은 이해가 갔다. 같은 학교
안에는 있을 수 있지만, 과가 달라 내내 붙어 있을 수 없다는 게 그렇게도 싫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얘기가 나오기만 하면 인상을 쓰는 것을
보면.
유원은 풀이 죽어 침대에 엎드려 있는 현규진을 보며 손을 뻗어 구겨진 미간 위를 손끝으로 꾹
눌러 펴 주었다.
“그래도 같은 학교 된 게 어디야. 완전히 다른 학교인 것보다는 좋잖아. 수업 끝나면 만날 수도
있고…. 같이 가고, 또 기다렸다가 같이 집에 갈 수도 있고.”
“그건 그런데…. 아, 진짜 존나 걱정되네.”
“뭐가 그렇게 걱정인데, 응? 말해 봐. 내가 진지하게 들어 볼게. 걱정할 일인지 아닌지.”
아예 침대 위로 올라가 현규진의 등 위에 엎드린 유원이 시무룩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귀
끝을 장난스럽게 깨물었다. 순간 엎드려 있던 현규진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몸 위에서 미끄러진 유원이 그대로 침대 아래까지 떨어지려는 찰나 현규진이 얼른
유원의 허리를 꽉 안아 제 쪽으로 당겼다.
“아, 미안해. 괜찮아? 안 다쳤어?”
“응, 괜찮아. 놀랐어? 미안해.”
“아냐, 아냐. 네가 잘못해서 그런 거 아니고, 어….”
유원이 귀를 깨무는 순간 그동안 죽어라 참고 있었던 감각들이 살아나며 미친놈처럼
섹스하고 싶어졌다는 말을 유원에게 할 수는 없었다. 부산 여행을 다녀온 이후 유원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을 너무 진지하게 끌고 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제가 평소와 다르게
너무 놀라는 걸 보고 유원도 많이 놀랐을 테니 되도록 장난스럽게, 별일이 아닌 것처럼
지나가고 싶었다. 현규진은 씩 웃으며 유원의 귓불을 짧은 손톱 끝으로 살짝 눌렀다.
“나 진짜 귀 존나 약한가 봐.”
“약해?”
“응. 전에 네가 피어싱 만질 때도 설 것 같았는데 깨무는 건 더 하네.”
“아….”
장난스러운 웃음이 머문 현규진의 얼굴을 보며 유원의 귀 끝이 새빨개졌다. 현규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이해해 버린 탓이었다.
“밖에 엄마만 없어도 그냥 확 하는 건데.”
씩 웃은 현규진이 빨개진 유원의 귓불을 꾹꾹 누르다가 그보다 연한 색의 뺨을 살살 쓸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현규진은 최대한 침착하게 일어나 유원의 뺨에 쪽 뽀뽀하고는 얼른 방을 나섰다. 방문을 닫고
욕실로 들어갈 때까지 현규진의 행동에는 그 어떤 군더더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재빠르고
아주 정확했다.
“…뒤지는 줄 알았네.”
욕실 문을 잠근 현규진은 누가 봐도 흥분한 것을 알 만큼 불룩해진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바지와 속옷을 조금 내렸다. 유원이 귀를 깨문 것만으로 서 버린 아래를 한 손으로 흔들며
다른 한 손으로는 세면대 물을 세게 틀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귀 끝에 닿던 유원의 숨과
스치던 이의 단단한 느낌이 머릿속을 긁으며 떠올랐다.
“아…. 후우….”
제 등 위로 올라가 몸을 누른 순간 확 끼치던 포근한 향과 팔에 닿던 손가락의 느낌이
감각으로 변해 맺히는 순간 현규진은 사정했다. 핏줄이 불거진 팔이 떨리며 세면대를 짚은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하….”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시 순식간에 밀려드는 허무함이 곧 현규진을 감쌌다. 콸콸 쏟아지는
차가운 물로 몇 번이나 거품을 내 손을 씻고 물기를 닦으면서도 묘한 허무함에 사로잡혀 있던
현규진은 뺨을 탁탁 두드리며 정신을 차렸다.
네가 지금 자위나 할 때냐. 정유원이 이제 진짜 전국구 변태 집합소로 들어가게 생겼는데.
정신 차려라, 어?
천천히 심호흡한 현규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끔한 얼굴로 욕실을 나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제 침대에 앉아 저를 기다리고 있는 유원의 얼굴을 보니 조금 전 다짐이 무색하게도
다시 마음이 마구 흐트러졌다.
하고 싶다. 존나 하고 싶다. 서랍에 콘돔도 있는데.
“…….”
거실에 엄마가 있기는 하지만, 조용히 조금만 하면 괜찮지 않을까. 넣지는 않고 유원을 조금
만지고 여기저기 빠는 정도라도 하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정도는 유원이도 좋아하지
않을까. 아냐…. 그러다 보면 끝까지 하고 싶어질 텐데 그땐 어쩌려고. 또 애 펑펑 우는 거 볼래?
“거기서 뭐 해, 이리 와.”
“…….”
“규진아.”
“…….”
“자기야.”
“…어? 아…. 어! 자기, 여기.”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현규진이 잽싸게 다가가 유원에게 안겨들었다. 품에 다
안아지지도 않을 만큼 큰 현규진을 안은 채 유원이 귀엽다는 듯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말해 봐. 뭐가 걱정되는지.”
“걱정되는 거 존나 많지. 내가 계속 옆에 있을 수가 없는 것도 걱정이고,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랑 다 친해질 것 같은 것도 걱정이고, 너 존나 예쁜 것도 걱정이고.”
“…다 안 해도 될 걱정 같은데?”
유원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던 현규진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몸을 일으켜 앉아 눈을
맞췄다.
“그게 왜 걱정할 게 아닌데.”
“다른 과니까 계속 같이 있을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걱정한다고 달라질 게
없고, 내가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다 친해질 것 같단 것도… 뭐….”
“…….”
“같은 과 사람이랑은 당연히 친해질 수밖에 없잖아…. 너도 그럴 거고.”
“난 안 그럴 건데.”
“…그럼 수업도 혼자 듣고, 나 없으면 계속 혼자 있을 거야?”
“어.”
당연하단 듯 고개를 끄덕이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이 작게 웃었다. 가끔 이럴 때 보면 정말
키만 컸지, 저와만 놀라고, 다른 애들이랑은 친해지지 말라고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엉엉
서러워 울어 버리던 어릴 때의 현규진과 똑같았다.
“그럼 나도 혼자 다닐까? 네가 그러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
“…….”
현규진의 머릿속으로 제가 없을 때 혼자 학교를 다니는 유원의 모습이 맺혔다. 혼자 수업을
듣고, 또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카페에 앉아 있는 유원을 떠올리니 또 그건 싫었다. 차라리
이윤성처럼 좀 믿을 수 있는 제 심복 같은 놈 하나가 같은 과에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적어도 바바리맨한테 길 안내를 한다고 혼자 가게 두진 않을 테니까.
“그래, 뭐. 혼자 다니는 것보단 하나 옆에 있는 게 낫긴 하지. 근데 나보다 잘생긴 새끼는 안 돼.”
“그런 사람이 어딨어.”
“진짜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이.”
유원의 말에 기분이 다시 좋아진 현규진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유원은 기다렸단 듯 품으로
쏙 들어가 파고들었다.
“그런데… 그런 걱정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냐?”
“응?”
“여태까지 인기 너무 많아서 고생한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매일 고백 받고, 길 다니면 너
알아보고 말 걸고…. 대학 가도 그럴 거 아냐아. 넌 혼자 다니고 싶어도 절대 혼자 못 다닐걸. 다
너랑 다니고 싶어 해서.”
“그게 존나 무슨 의미가 있어. 고백 천 번 받아도 난 우리 여보 건데. 알아보면 뭐 어쩔 거야. 난
우리 여보 건데. 나랑 다니고 싶어 하면 뭐. 난 우리 여보랑만 다닐 건데.”
같은 패턴으로 말을 하는 사이사이 쪽쪽 간지러운 소리가 뒤섞였다. 결국, 웃어 버린 유원이
입술을 모아 다가오는 현규진의 입술에 같이 쪽쪽 뽀뽀했다.
“오티 가면 다 너만 볼걸?”
“괜찮아. 난 정유원만 볼 거니까. 그리고 너 보는 것보단 나 보는 게 나아. 너 보면 그 새끼들 눈
다 뽑아 버릴 거야.”
“징그러워.”
“뭐가 징그러워. 그만큼 사랑한다는 건데 감동해야지.”
“몰라, 상상돼. 으…. 징그러워.”
“또 으, 거린다.”
고개를 젓는 유원을 침대에 눕힌 현규진이 그대로 몸을 짓누르며 올라탔다. 혹시 밖으로
소리가 들릴까 싶어 이불까지 뒤집어쓰자 장난기는 쉽게 사라지고 금세 어둠 속으로 열망이
맺혔다.
그대로 현규진의 고개가 내려갔다. 자연스럽게 목으로 팔이 감기는 것과 동시에 사실은 아까
만났을 때부터 내내 바랐던 것처럼 입술이 맞물렸다.
같이 살기까지 D-6. 더는 숨어서 키스하지 않아도 되는 날까지도 D-6. 현규진은 진심으로
바랐다. 6 년 같은 6 일이 6 초처럼 지나가기를.
***
과외 선생과 함께 한 번 학교를 와 보긴 했지만, 그냥 구경을 하러 온 것과 신입생으로 온 것은
느낌이 아주 달랐다. 잔뜩 긴장해 몸을 가로지른 메신저백 끈을 계속 잡고 있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은 가볍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저기래. 대강당….”
“춥다, 얼른 가자.”
‘대강당’이라 쓰인 커다란 건물로 들어가자 과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든 사람들이 홀 입구에 서
있었다. 유원은 어쩐지 잔뜩 긴장되는 마음에 슬쩍 현규진의 옷자락을 쥐었다.
“…어떡해.”
“가서 얼굴로 다 휘어잡아 버려.”
“그게 뭐야아.”
“걱정할 거 없다고. 예쁘지, 귀엽지, 착하지. 누가 널 싫어해.”
뽀뽀해 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현규진이 유원의 뺨을 살살 문지르며 씩 웃었다. 덜덜
떨면서도 제 웃음을 보고 마주 웃는 유원이 너무나 좋았다.
“경영학과 저기 있다. 난 이쪽, 경제학부.”
“…난 그럼 저쪽으로 갈게.”
“응. 이따 끝나고 봐. 들어가서 자리에 앉으면 톡할게.”
“…응. 나도 톡할게, 빠이.”
“빠빠이.”
현규진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경영학과 신입생을 찾는 쪽으로 가는 유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유원의 깍듯한 인사를 받은 여자가 웃으면서 함께 강당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본
뒤에야 무표정하게 경제학부 쪽으로 가서 대충 꾸벅 인사를 했다.
순간 주변이 조용해지면서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졌으나 늘 있는 일이라 전혀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현규진은 자꾸 제 얼굴을 힐끔거리며 안으로 따라오라는 선배로 추정되는 사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경제학부는 이쪽 구역에 편히 앉으면 돼요. 너무 반가워요. 아까 딱 보는데 연예인인 줄
알았어요. 그런 말 많이 듣죠.”
“아, 네. 뭐…. 가끔요.”
대충 대답을 하며 현규진은 눈으로 강당 안을 스캔했다. 너무 넓어 한 번에 유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조금 더 빠르게 또 정확하게 하나하나 얼굴을 살피면서 눈동자를 움직였다. 제
옆으로 어느새 다가온 같은 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지만, 그쪽을 신경 쓸 여력 따위는
없었다. 정유원, 어디 앉았지…. 정유원, 정유원.
“아…!”
저기 있다. 현규진의 시선이 저와 꽤 거리가 있는 대각선 앞쪽으로 닿았다. 긴장해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은 유원의 주변으로 남자 새끼들이 여럿 서 있는 게 보였다. 유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개를 들어 눈만 데구루루 굴리고 있었다.
씨이발.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전국구 변태 모임 시작됐네. 귀여워도 좀 적당히 귀여워야지.
그 순간 유원이 누군가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달리지도 않은 강아지 꼬리가 마구 붕붕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예쁘고 살가운 웃음이었다.
“…….”
아니, 왜 웃는데. 저 새끼들 얼굴 존나 재미없는데 왜 웃어 주는데. 대충 사회생활용으로 웃는
것도 아니고 왜 예쁘게 웃는데, 진짜. 짜증이 치밀었다.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하….”
현규진의 험난한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02 화(102/127)

102


[여보 : 여보 나 없이 즐거워?]
[여보 : 내가 없어도 행복해?]
[여보 : 난 슬픈데]
[여보 : 얼굴로 휘어잡으랬다고 1 분 만에 잡으면 어떡해]
갑자기 쏟아지는 톡을 본 유원은 저장 이름이 ‘여보’로 바뀌어 있는 것에 놀라 휴대폰 밝기를
슬쩍 줄였다. 제가 애인이 있는 걸 사람들이 아는 건 상관이 없지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와서 ‘여보’와 톡을 나누고 있었다는 걸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오늘 아침에도 ‘규진’으로 저장이 되어 있었던 게 기억 나는 걸 보면 아까 지하철 안에서
이름을 바꾼 모양이었다. 하여튼 빨라. 그리고 귀여워. 제 앞에 서서 각자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흘끗 본 유원이 빠르게 답을 보냈다.
[자리 어디야?]
[여보 : 왼쪽]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다시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여보 : 거기서 왼쪽으로 45 도 대각선]
대충 각도를 찾아 시선을 움직이자 꽤 떨어진 곳에 현규진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분명 멀리
있는데도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다.
“…….”
통로 쪽에 앉아 있는 현규진의 옆으로 사람들이 네 명 서 있었다. 세 명은 여자고 한 명은
남자였다. 그리고 현규진의 옆쪽으로 앉은 사람과 앞에 앉은 사람, 통로를 지나 아예 다른
구역에 앉은 사람까지 모두 현규진을 보고 있었다.
당연히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모두의 시선 중심에 있는 현규진을 보니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현규진 내 건데…. 보이는 모든 곳에 제 이름이라도 쓰고픈 기분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현규진이 휴대폰을 든 손을 위로 살짝 올렸다. 올라가는 손과 함께 입매가
시원하게 올라가는 게 보였다. 웃는 현규진을 따라 입꼬리를 올리자마자 현규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도 제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깜짝 놀란 유원은 얼른 몸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여보 : 보고 싶어]
[좀 전에 봤잖아]
[여보 : 매몰차 서운해]
글자에서 현규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화면을 보고 작게 웃은 유원이
슬쩍 주변을 살피다가 휴대폰을 들어 저만 보이도록 눈앞 가까이 댔다. 그리고 톡톡 답을
적었다.
[뽀뽀]
두 글자를 치고 슬쩍 다시 뒤를 돌아보자 현규진이 진짜 뽀뽀를 하는 것처럼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넣는 게 보였다. 그게 너무 귀엽고 좋아 자꾸 바보처럼 웃음이 났다. 아마 남들이
보면 혼자 실실 웃는 이상한 사람인 줄 알 것이었다.
[쪽]
차마 똑같이 뽀뽀를 보내 줄 용기까진 없어 메시지로 보내자 곰돌이가 뽀뽀하는 귀여운
이모티콘이 화면에 떴다. 왜 현규진이 보고 싶다는 말을 썼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저도
현규진이 보고 싶었다.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수 있고, 두 눈 안에 가득 들어찰 수 있는
곳에 있는 현규진이 필요했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준비로 분주한 단상 위를 보며 유원이 긴 숨을 내쉬었다.
***
오리엔테이션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대학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여러 가지 정보까지
얻을 수 있어 집중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졸업생 중 유명한 연예인이 와서 특강을 하기도
하고, 가수가 축하 무대를 하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큰 스케일의 오리엔테이션에 유원은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강당에서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 자리를 안내해 주던 과 선배들이 학교 바로 근처에 있는
‘우라노스’라는 가게에서 뒤풀이를 할 거라고 알려 주었다. 어떻게 가면 되는지 자세히 알려
주기도 하고, 지금 단체로 갈 사람은 가자고 통솔을 하기도 해서 유원은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과 함께 움직였다.
“과 사람들 다 괜찮은 것 같아요.”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아까 제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눈을 맞추며
어색하게 웃었다. 먼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 준 게 고마워 유원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 친절하시고… 좋아 보여요.”
“어…. 스무 살 맞죠. 맞을 것 같긴 한데… 혹시 한 살 나이가 더 많다거나….”
“스무 살 맞아요.”
“아! 그럼 말 놓을까? 동갑인데.”
“아…. 응.”
분명 어색함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말을 놓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유원은 무슨 말을
할까 하다가 아직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을 깨닫고 슬쩍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정유원이야.”
“아! 맞다, 이름. 난 원지호. 아까 계속 말 걸고 싶었는데 너무 열심히 보길래 못 걸었어.”
“아…. 그랬어? 말 걸어 줘서 고마워.”
“근데 너 뭐 연예인 준비 같은 거 해? 그 아이돌 연습생 그런 거 아냐?”
갑자기 물어오는 내용이 조금 민망해 유원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은 들을 때마다 너무
부끄러워 눈을 똑바로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아…. 아니야.”
“아니, 아까 들어와서 너 딱 봤는데 얼굴 엄청 작고… 어, 이런 말 해도 되나? 진짜 예쁘게
생겨서 연예인인 줄 알았어. 사람들도 막 네 앞에 다 있고.”
“아….”
현규진이나 가족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이제 제법 익숙해져 아무렇지도 않지만, 처음
본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너무나 부끄러웠다. 도망갈 수 있으면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을
만큼.
“아, 미안. 기분 나빴어?”
“아니, 그게 아니라….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고맙다고 하는 것도 좀
이상한 것 같고….”
“하긴 그럴 수 있겠다. 그냥 쉽게 생각해. 그만큼 네 얼굴 쩐다는 거니까.”
씩 웃으면서 길게 늘어나는 입매를 보자 현규진의 얼굴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원지호에게
웃어 보인 유원이 사람들 사이에서 현규진을 찾으려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였다. 키가 워낙
크고 누구와 있어도 튀는 얼굴이라 어디 있든 바로 찾을 수밖에 없는데 이상하게 잘 보이지
않았다.
벌써 나갔나? 강당 출구 쪽으로 가며 부단히 주위를 살피는 유원의 어깨 위로 온기가 스몄다.
익숙한 좋은 향이 스치는 순간 유원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토록 애타게 찾던 얼굴이 바로
뒤에 있었다.
“나만 두고 어디 가.”
“뒤풀이 간다고 해서. 넌 어디로 가?”
“어디라더라, 뭔… 타노스? 뭐 그런 건데.”
“혹시 우라….”
그때 갑자기 뒤를 돌아본 원지호가 현규진을 보며 ‘우라노스?’를 외쳤다. 안 그래도 유원과
계속 얘기를 하고, 눈을 맞추고, 웃으면서 난리를 치는 걸 뒤에서 계속 보고 온 터라 이미지가
안 좋았는데 유원의 말을 막고 갑자기 끼어드는 것까지 더해져서 완전 이미지 최악이었다.
현규진은 시선을 내리깔아 유원보다는 반뼘 정도 크고 저보다는 한참 작은 낯선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성질대로 삐딱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놀란 유원이 얼른 현규진의 팔을 뒤에서 잡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저었다. 입학도 하기 전에 누군가와 안 좋은 관계로 엮일 필요는 없다고
열심히 눈으로 말해 주었다.
“아, 지호야. 이쪽은 내 친구 현규진. 나랑 같은 고등학교 다녔어. 어…. 우리 과는 아니고…
경제학과.”
지호야? 이쪽은 내 친구? 현규진? 저건 지호고 나는 현규진? 물론 상황이 그렇게 됐다는 건
알지만, 방금 본 놈을 다정하게 성까지 떼고 이름만 부르는 걸 보니 심장 안에서 열이 끓었다.
“아, 반가워! 난 원지호. 와, 너도 진짜 얼굴 장난 아니다…. 너네 학교 애들 얼굴 다 이래?”
함께 강당에서부터 교문까지 걸어가며 현규진이 파악한 원지호는 일단 굉장히 말이 많았다.
강당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말을 쉬지 않았다. 이윤성은 그래도 비교적
조용한 편이라 나쁘지 않았는데 원지호는 정말 안 될 것 같았다. 왜 하필 이런 놈이 정유원
옆에 붙은 걸까. 현규진은 탄식했다.
“둘이 다니면 1 초에 한 번씩 번호 따이겠다. 아, 인스타 하지? 아이디 뭐야?”
“계정은 있는데 하진 않아서….”
“그래? 왜 안 해? 그냥 셀카만 몇 장 올려도 팔로우 장난 아닐 것 같은데.”
“그냥 사진을 잘 안 찍기도 하고 그런 거 관리를 잘 못 해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현규진의 시선이 휴대폰을 들고 있는 원지호의 손가락에 닿았다.
정확히는 네 번째 손가락에 자리 잡은 반지에 닿은 시선이 반짝였다.
“커플링?”
떠들기 좋아하는 놈이니 슬쩍 건드려 주면 알아서 술술 떠들 것 같았다. 그리고 현규진의
예상대로 앞뒤 다 자르고 딱 ‘커플링?’ 한마디 던진 것에 원지호는 잔뜩 들뜬 얼굴로 손을 들어
반지를 보여 주었다.
“어! 오늘이 736 일 째야. 커플링은 500 일 기념으로 선물한 거고. 아, 민하도 여기 붙었어. 미대.
그림 진짜 잘 그려.”
커플링이 맞는지 물었을 뿐인데 아주 쓸모없는 정보까지 술술 말하는 원지호를 보며
현규진은 미소 지었다. 합격. 그렇게 좋아서 죽고 못 사는 애인이 있다니…. 유원과 함께
다니기 가장 좋은 최적의 조건을 갖춘 인재였다.
“뒤풀이 같은 데에서 해서 다행이다, 그치.”
원지호가 잠시 휴대폰을 보는 사이 유원은 슬쩍 현규진에게 소곤댔다. 몸을 숙여 유원에게
귀를 대 주던 현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술 줘도 마시지 마. 너 갑자기 체온 오르면 안 좋아. 아, 술 미리 마셔 볼걸. 그 생각을 못 했네.”
“안 마실게. 우리 다음에 같이 술 마셔 보자. 조금씩만.”
“응. 나랑 같이 마셔. 오늘은 적당히 놀다가 이따 상황 봐서 빠져나가자.”
고개를 끄덕인 유원이 슬쩍 현규진의 손가락 끝을 쥐고 흔들었다. 흔들리는 손과 함께 마음이
통째로 마구 일렁였다. 아직 피지도 않은 벚꽃이 눈앞으로 흩날리는 것 같았다.
현규진은 먼저 우라노스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파악했다. 생각보다 내부가 무척 넓었다. 두 큰
과를 모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경제학과는 왼쪽, 경영학과는 오른쪽. 절반을 나누어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이따 끝나고 봐. 너도 술 많이 마시지 마.”
“알았어. 맛있는 거 많이 먹어.”
“응, 너도 많이 먹어. 나 갈게. 빠이.”
경영학과 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가는 유원을 보던 현규진이 그 뒤를 따라가려는 원지호의
팔을 잡아 구석으로 데려갔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원지호가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뭐 할 말 있어?”
꽤 진지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소곤대듯 말하는 원지호를 보며 헛웃음을 터뜨린 현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 게 좀 있어서. 어…. 정유원 술 마시면 안 되거든. 요즘…. 어, 먹는 약이 있는데 그게 술
마시면 진짜 큰일 나. 근데 그런 거 말해 봤자 그냥 막 마시라 그러면 끝 아냐. 분위기상 안 마실
수도 없을 거고.”
“그치.”
“내가 막아 주면 좋은데 알다시피 다른 과라 바로 자리를 비우기가 그래.”
“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 내가 유원이 술 못 마시게 하면 되는 거지? 나 술 잘 마시니까 내가 다
마시면 돼. 우리 집안이 다 말술이거든.”
그런 것까지 알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말이 통해 다행이었다. 현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믿는다는 듯 힘이 실리지 않은 손으로 원지호의 등을 한 번 쳤다. 그에 원지호도
결연히 고개를 끄덕이곤 경영학과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
경제학과 최대 관심사는 역시 현규진이었다. 시작할 때부터 모두의 시선이 현규진에게
모였고, 모두가 현규진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키가 몇인지, 연예인 제안을 받아 본 적이 있는지, 고등학교 다닐 때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묻던 사람들은 촘촘한 빌드업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친은 있어?”
“네.”
여친은 아니고 남친이지만. 0.1 초 만에 바로 나오는 대답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내쉬는 소리도 들리고, 술을 마시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규진의 관심은 경영학과 구역에 가 있었다. 다행히 제가 앉은 자리에서 유원의 자리가
보여서 멀리서나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바르게 앉아 웃으면서 이 사람 저 사람과 얘기를
하고 있는 걸 보니 술을 마신 것 같진 않았다.
“…이런, 씨….”
제 시선을 눈치챈 원지호가 저를 보며 잘하고 있다는 듯 눈을 찡긋 감았다가 뜨며 엄지를
치켜드는 게 보였다. 눈치를 채고 저를 봐 줘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만 보고 있고, 안 봐도 될
놈은 저를 보고 눈을 찡긋대고….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래도 뭐 옆에 딱 지키고 앉아 대신 술을 마시고 있는 건 맞는지 원지호의 앞에만 500ml
맥주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근데 그 얼굴에 공부까지 잘하면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능력 몰빵이네, 진짜.”
다시 제 얼굴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에서 쏟아졌다. 현규진은 따분하다는 듯 대충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며 맥주를 마셨다. 전에 최해영 집에서 술을 마시고 완전 필름이
끊겼던 기억이 나서 아주 천천히, 한 모금 씩 마시며 테스트 중이었다.
그렇게 맥주 500ml 를 마셨는데 어지럽지도 않고 멀쩡한 걸 보면 단순히 술을 마셔서가
아니라 도수가 높은 양주를 갑자기 연달아 마신 게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여친 만난 지는 얼마나 됐어? 이런 거 묻는 건 좀 실롄가?”
어. 존나 실례지. 현규진은 거의 입술 바깥으로 나온 말을 억지로 삼켰다. 시작도 전에 관계를
다 엉망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는 걸 아는 이유였다.
아, 나 존나 철들었다, 진짜. 현규진은 주로 어른에게 보이는 상견례 프리 패스용 웃음을
지으며 그들이 원하는 답을 차례로 들려주었다. 최대한 간단히, 또 최대한 무성의하게. 하지만
그 근사한 얼굴과 웃음이 무성의한 대답을 아주 나이스하게 포장해 주었다.
그렇게 쏟아지는 질문이 잠시 끊겼을 때 현규진은 다시 유원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유원의 손에 지금 제가 잡고 있는 맥주잔이 들려 있었다. 옆에 있던 원지호는 어딜 간 건지
보이지 않고, 유원만 곤란한 듯 웃고 있었다.
유원의 맞은편에 앉은 누군가가 빨리 마시라는 듯 손짓을 하며 웃었다. 곧 경영학과
테이블에서 ‘마셔라! 마셔라!’ 커다란 구호와 함께 박수 소리가 울렸다. 아, 씨. 안 되는데. 저
미친 새끼들이. 현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은 순간….
그대로 유원이 든 맥주잔이 기울어졌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03 화(103/127)

103


“…아, 씨…. 안 되는데.”
유원이 맥주를 마시자 주변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아니, 애가 술을 마시는 게 좋은가?
현규진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유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른 이 악귀 소굴에서 유원을 데리고
나가야만 했다.
유원의 맞은편에 앉은 이름 모를 미친놈이 500ml 맥주를 더 권하는 게 보였다. 저게 미쳤나.
현규진은 진동을 느꼈는지 주머니에 손을 넣는 유원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유원이
전화를 받았다.
-응, 규진아.
아니, 마시자마자 취할 수가 있나? ‘규진아.’가 아니라 ‘규지나아….’ 쪽으로 들리는 발음이
귀여우면서도 너무 빨리 취한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일어나.”
-응?
“전화 받고 온다고 하고 일단 밖으로 나와.”
제 말을 들은 유원이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현규진은 문 쪽으로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저 전화 조옴… 받고 오겠습니다아….
말이 길게 늘어지는 게 제 착각이 아니라 진짜였다는 걸 깨달은 현규진이 인상을 썼다. 이미
취한 게 분명했다. 하긴. 방금 마신 게 첫 잔이 아닐 수도 있었다. 제가 보지 못한 사이에 도대체
몇 잔을 마신 건지 알 수가 없어 속이 탔다.
현규진은 문 쪽으로 오는 유원의 팔을 부드럽게 쥐고 바깥으로 나갔다. 사람이 많아 무더울
정도인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시원해 혼탁했던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너 술 마셨지.”
“으응….”
“마시지 말라니까.”
“자꾸 마셔야 한다고 주시는데 어떡해…. 나만 안 마실 수가 없었어….”
“벌써 취한 거 같은데? 너 몇 잔 마셨어?”
현규진의 질문에 손을 든 유원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브이 모양을 그렸다.
“뭐야, 한 잔이 아냐?”
“두우 잔.”
제가 보기 전에도 이미 술을 한 잔 마셨었다니 기가 막혀 말문이 다 막혔다. 현규진은 조금
멍해 보이는 유원을 데리고 가게 뒤편으로 갔다가 담배를 피우는 선배들을 마주하곤 그
반대쪽 빈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 춥겠다. 잠깐 있어. 옷 가져올게.”
겉옷을 안에 두고 니트만 입은 채라 이대로 조금 더 세워 두면 분명 감기에 걸릴 게 뻔했다.
현규진은 얼른 가게 안으로 달려가 제 두꺼운 코트를 들고나와 다시 유원에게 향했다. 그리고
어깨 위로 코트를 덮어 주었다.
“아니, 진짜 한 잔도 아니고 두 잔이나 마셨어? 너 방금 마신 것도 존나 원샷 하던데 그 전 잔도
그랬어?”
“으응…. 내가 술 마시는 걸 못 본 것 같다고… 두 잔은 마셔야 한다고 해서….”
“어떤 새끼가 그래. 그 너 바로 맞은편 걔?”
“응. 엄청 웃긴 형….”
“면상이 웃기긴 하더라. 너 괜찮아? 열 나거나 막 속 울렁이거나 그런 건 없어?”
유원의 이마를 짚었다가 배를 만졌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핀 현규진이 저를 물끄러미
보는 유원과 눈을 맞췄다.
“어디 안 좋아? 물 마실래? 물 좀 가져다줄까.”
“…뽀뽀하고 싶어….”
“…와. 나 지금 존나 설렜어.”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핀 현규진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유원의 어깨에 걸쳐진 코트를 들어
머리 위로 씌웠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가볍게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마주 댔다.
코트가 만든 비밀스러운 공간 안으로 쪽…. 간지러운 소리가 울렸다.
아, 돌겠네. 이러려고 나온 건 아닌데. 한 번 입술이 닿고 나니 한 번으로 깔끔하게 끝내기가
너무 어려웠다. 현규진은 코트 자락을 당겨 유원의 얼굴을 더 확실히 가리고는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달라붙듯 입술이 맞물렸다. 자연스럽게 열린 입술 사이로 서로의 혀끝을
문지르다가 가볍게 물고 축축한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입술 안에서 뒤섞이는 젖은 숨이 너무
야해 또 다리 사이로 감각이 고였다. 어깨를 움찔한 현규진이 느릿하게 유원의 혀를 한 번 더
쪼옥 빨며 입술을 떼어 냈다.
“하아….”
“술 마시니까 우리 자기 존나 대담…. 어, 정유원. 괜찮아?”
눈을 감은 채 쌕쌕 숨을 고르던 유원의 눈이 뜨였다. 키스하기 전보다 조금 더 멍해지고 취해
보이는 눈을 본 현규진은 이제 집에 갈 시간이 됐음을 느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원지호가
어느 정도 시간을 끌어 준 덕분에 뒤풀이가 시작된 지 두 시간 정도는 흘렀다는 것이었다.
시작하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빠져나가기 어려웠을 텐데 두 시간 정도 지났으니 뭐
이젠 적당히 눈치만 잘 살피면 큰 문제 없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어가서 네 옷이랑 가방 가지고 나올 테니까 여기 있어.”
“또 할래….”
“키스 또 하고 싶어?”
“응….”
…술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현규진은 저에게 먼저 달라붙고, 먼저 스킨십을 원하는
적극적인 유원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빨리 바꾸냐고 지탄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유원이 대놓고 뽀뽀를 하고 싶다는데
제가 어떻게 버틸 수가 있겠는가.
“…알았어. 그럼 한 번만 더. 이거 하면 집에 가야 돼.”
“응, 알았어.”
취해서는 눈이 다 풀렸으면서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견딜 수 없이 귀여웠다.
현규진은 다시 유원의 머리 위에 덮인 코트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술이 닿기도 전에
열리는 게 너무 야해 야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몸의 모든 곳이 다 뻐근했다.
“이제 옷 가져올 테니까 여기…. 아니다, 가게 앞에 있어. 가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애를 혼자 어두컴컴한 골목에 세워 두는 게 싫어 손을 잡은
현규진이 가게 앞으로 데려와 밖에 있는 대기석에 앉혔다. 머리 위에 씌웠던 코트를 내려
어깨를 다시 감싸 주고 앉아 있으라고 당부를 하는데 문이 열리며 원지호의 얼굴이 밖으로
슬쩍 나왔다.
“어! 여기 있었네?”
“뭐? 여기 있었네? 야, 내가 얘 술 못 마시게 해 달라고 했지.”
“아, 유원이 그사이에 술 마셨어? 미안. 진짜 미안! 민하한테 전화 와서 잠깐 나갈 수밖에
없었어. 들어와 보니까 유원이도 없고 너도 없어서….”
“그걸 지금…. 하…. 됐고, 들어가서 옷 가지고 나올 때까지 유원이 좀 봐 줘. 얘 취했어.”
“어어, 알았어!”
유원의 옆에 앉는 원지호를 본 다음에야 현규진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예상대로
시간이 좀 지나니 적당히 취기들이 올라 과 상관없이 친한 사람들끼리 뒤섞여 있었다. 저에게
혼자 사는지 묻던 선배와 유원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인간이 경제학과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것만 봐도 대충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현규진은 그 틈을 타 제 가방과 유원의 겉옷, 가방을 챙겨 다시 문을 나섰다. 원지호는 제가
시킨 대로 가만히 유원의 옆에 앉아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이제 집에….”
꾸벅꾸벅 졸 듯 앞으로 기울어지던 유원의 고개가 이번에는 옆으로 기울었다. 원지호의 어깨
위로 머리가 내려앉으려는 순간 현규진의 손이 유원의 얼굴을 받쳤다.
“정유원, 정신 차려 봐.”
“왜 정유워언… 이라고 해? 자기라고….”
“자고 싶다고? 졸려? 어, 그래! 가자, 얼른.”
술에 취하면 정말 대담해지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현규진은 목소리를 조금 높여 유원의 ‘자기’
위를 덮었다. 다행히 원지호는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택시 타고 갈 거지?”
“어, 그래야지.”
“내가 택시 잡아 줄게!”
바로 앞 큰길로 바로 나가는 원지호를 보며 현규진은 유원을 일으켜 세워 저에게 기대게 했다.
반쯤 눈이 감겨서는 제 손에 이끌리는 대로 일어서고, 또 당기면 품에 폭 파묻히는 게
사랑스러웠다. 현규진은 유원이 춥지 않게 감싸 안 듯 팔로 단단히 잡은 채 원지호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곧, 택시가 앞으로 와 섰다.
“진짜 미안. 그사이에 유원이한테 술 먹일 줄은 몰랐어.”
“아냐. 뭐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보자.”
“어! 조심히 들어가!”
유원을 먼저 안쪽에 앉힌 현규진이 저도 택시에 올라 문을 닫았다. 밖에서 원지호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서 어쩔 수 없이 한 번 손을 들어 답을 해 주었다.
아파트 이름을 말하고 등을 뒤로 기대자 유원의 머리가 창 쪽으로 스르르 기울어졌다.
현규진은 얼른 유원을 제 어깨 쪽으로 데려왔다. 술을 마셔도 사라지지 않는 포근한 향이 어깨
위에서 번지는 것을 느낀 뒤에야 비로소 안도가 됐다.
“하아….”
긴 숨이 흘렀다. 간만에 많은 사람, 그것도 온통 낯선 사람들과 같이 있어서 그런지 무척
피곤했다. 저에게 기댄 유원의 머리 위로 제 머리를 살짝 기댄 현규진이 눈을 감았다.
아파트 바로 앞에 선 택시에서 내려 6 층으로 오른 현규진은 벨을 눌렀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모와 이모부가 스케줄이 있어 집을 비운 모양이었다.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며 능숙하게 유원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에게 폭 안겨 있는 유원의 신발을 벗길 여유가 없어 일단 그냥 그대로 안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복도를 지나 방문을 열자 아래가 확 반응할 수밖에 없는 유원의 냄새가 확
온몸을 덮었다.
미쳤다, 진짜. 잠시 어지러움을 느낀 현규진이 그대로 유원을 침대에 눕히고 운동화를 벗겼다.
그다음 코트를 벗기고, 답답할 것 같아 니트도 벗겨 주었다. 편한 티셔츠로 갈아입혀 주려고
침대에 앉아 셔츠 단추를 하나씩 푸는데 손끝으로 묘한 긴장감이 어렸다.
“…….”
정신 차려라, 씨발. 옷 갈아입혀 주려고 단추 푸는데 왜 긴장하고 지랄이냐. 돌았어?
스스로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현규진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든 좋아하는 사람의 옷을 벗기려 단추를 푸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부산 여행 이후 쌓인 게 너무 많아서 더 그랬다. 혼자 아무리 해결을 하려고 해도
죽어도 해결이 되지 않는 지점의 쾌감을 알아 버려 너무 괴로웠다.
“…….”
셔츠 마지막 단추를 풀고 옆으로 벌리자 뽀얀 몸이 눈에 들어찼다. 빨리 티셔츠를 가져와서
입혀 줘야 한다는 생각은 드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현규진은 찬찬히 유원의 몸을 잔뜩
눈에 담았다.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은데 진짜 시선을 어떻게 돌리는지도 모르겠고, 몸을
어떻게 일으켜야 하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고 싶다. 존나 하고 싶다.
충동적인 생각과 함께 입 안에서 혀 끝이 느릿하게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유원의 가슴을
집요하게 괴롭힐 때 보인 움직임이었다.
“…….”
…하긴 뭘 해. 돌았냐. 술 취해서 자는 애한테 그딴 생각을 하고 싶냐. 미친 새끼, 개새끼. 유원을
만지고 싶어 죽겠는 두 손을 들어 짝 소리가 나게 제 뺨을 치며 감싼 현규진이 번쩍 드는
정신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원의 의자 위에 잘 접혀 놓여 있는 잘 때 입는
티셔츠와 바지를 가져왔다.
“옷 입고 자자.”
셔츠를 완전히 벗기려 누워 있는 몸을 일으켜 세워 앉히자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현규진은
유원을 품에 안다시피 한 채 셔츠를 완전히 몸에서 벗겨 냈다.
“으음…. 집이야?”
“응, 집이야. 속은 괜찮아?”
“규진이 냄새….”
묻는 말에는 대답 안 하고 다른 소리를 하는데 그 다른 소리가 너무 듣기 좋았다. 현규진은 제
목으로 스르륵 감기는 유원의 팔을 느끼며 바지만 입고 있는 유원의 몸을 마주 끌어안았다.
“술 냄새 나지, 나한테.”
“아니이…. 좋은 냄새….”
“술 취해서 자기 몸이 따끈따끈해. 이러다 열 나는 거 아냐? 난 열이 제일 무서워, 진짜.”
“뽀뽀….”
“…돌겠네.”
꿀유자차라도 한 잔 먹이고 푹 재워야 할 것 같은데 자꾸 안겨들고, 뽀뽀를 졸라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제가 술 취한 애를 건드는 쓰레기인지 아닌지 세상이 저를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04 화(104/127)

104


“일단 옷 입고 하자, 뽀뽀.”
목에 걸린 팔을 풀자 힘없이 침대에 앉은 유원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현규진은 얼른
티셔츠를 유원에 목에 끼우고 팔도 하나씩 넣어 주었다.
“뽀뽀 안 해 준다고 누가 그렇게 입 내밀고 있어. 존나 귀엽거든? 너 진짜 술 마시지 마. 다른
놈한테도 이럴 거 아냐? 어? 미친, 진짜 다른 새끼한테도 뽀뽀해 달라고 그러는 거 아냐?”
“…….”
“눈 좀 봐. 양아치다, 양아치. 무서워.”
말을 알아듣긴 한 건지 조금 화가 난 듯 바라보는 눈도 마냥 예뻐 자꾸 웃음이 났다. 현규진은
토라진 것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유원의 입술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다른 새끼한테도 이러실 거냐고요.”
“안 그래.”
“안 그래? 확실해? 나 누군지 알아?”
“알아…. 현규진.”
“오, 아네?”
“내 거….”
술이라는 게 정말 그렇게 나쁜 게 아닌 걸지도 모른다는 간사한 생각이 또 머릿속을 툭 치고
지났다. 이렇게 표현을 많이 하는 정유원이라니…. 현규진은 고개를 기울여 유원의
아랫입술을 쪼옥 빨아들였다.
“더어….”
“뽀뽀 더 하고 싶어?”
“음…. 키스….”
“한 번만 더 말해 봐. 키스 발음이 왜 그렇게 야해?”
“키스….”
이제 진짜 한계였다. 현규진은 그대로 유원을 눕히고 몸 위로 올라타 깊게 입술을 머금었다.
내내 엉키고 싶었던 만큼 혀가 뒤엉키며 질척한 소리가 울렸다.
“으응…. 좋아….”
“기분 좋아?”
“좋아….”
혀와 입술이 눌려 있어 부정확하게 조금 뭉그러진 발음마저도 흥분을 고조시켰다. 다시 잔뜩
뜨거워 말랑말랑해진 혀를 옭아매며 깊게 파고들자 유원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 왜. 왜 웃어. 집중 안 하지.”
“좋아서 그래애…. 너무 좋아. 빨리 같이 살고 싶어.”
“나도. 나도 얼른 같이 살고 싶어. 뭔 하루가 이렇게 기냐. 6 일이 6 천 일 같았는데 존나 6 만 일
됐어.”
쪽쪽 입술을 모아 몇 번 더 뽀뽀한 현규진이 슬쩍 몸을 떼자 곧바로 유원이 옷자락을 당겼다.
“어디 가?”
“부엌에. 전에 사 준 유자차 아직 있지. 그거 마시고 자.”
“가지 마아….”
“아니, 물만 끓이면 돼. 3 분.”
“싫어….”
싫다고 고개를 젓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은 침대 벗어나는 것을 쉽게 포기했다. 어딜 가지도 못
하게 하고, 계속 뽀뽀에 키스에 요구하는 정유원이라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아니라 제
생일인 것 같았다.
“알았어. 그럼 같이 자자.”
“응….”
“이리 와.”
팔을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 유원이 폭 안겼다. 현규진은 그런 유원을 안고 침대에 누워
발밑으로 구겨진 이불을 끌어올려 덮었다. 한 손으로 품에 안긴 유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꺼내 엄마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유원이 집에서 자고 감]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남기고 대충 휴대폰을 머리맡으로 놓은 현규진은 완전히 얽힌 다리와
밀착한 몸에 조금 난감해졌다. 요즘의 저는 정상적인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유원이 이렇게
저에게 깊게 안겨 있으면 자꾸 해서는 안 될 쪽의 상상을 하곤 했다. 유원의 다리를 활짝 벌려
잡곤 퍽퍽 박고 싶다거나 허리를 쥔 채 깊은 곳까지 확 파고들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돌겠네.”
몸을 조금 떼어 내려고 해 봐도 조금의 틈만 생기면 다시 유원이 몸을 붙여 왔다. 현규진은 제
목으로 닿는 유원의 숨과 허리를 안은 팔, 맞닿은 아래와 얽힌 다리의 느낌에 발기했다. 이건
고문이었다.
“…정유원, 자?”
아무 대답도 없이 고른 숨소리만 들리는 걸 보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침이 되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아무 해결도 되지 않은 채 내내 이대로 있을 자신이 없었다. 현규진은 느릿하게 얽힌
다리를 풀고, 유원을 살짝 떨어뜨렸다. 아래가 유원의 몸에 눌리지만 않아도 일단 살 것
같았다.
“후우….”
몸을 조금 떼어 내기만 했는데도 더워 땀이 났다. 여기서 같이 잘 땐 자더라도 일단 좀 옷을
벗고 싶었다. 티셔츠 한 장이면 충분할 만큼 방이 따뜻해 옷을 껴입고 있는 게 너무 답답했다.
일단 옷을 벗을 수 있을 정도로 조금 더 틈을 벌렸다. 현규진은 얼른 허리를 세워 앉아 티셔츠
한 장만 빼고 위에 입은 옷을 모두 벗어 유원의 의자 쪽으로 던져두었다. 이제야 좀 숨이
쉬어졌다.
잘 때 입는 바지가 유원의 서랍장 어디엔가 있었던 것 같아 침대를 벗어나려는 순간 유원의
눈이 뜨였다. 꼭 몰래 도망치려다가 들킨 것 같은 모양새라 자꾸 변명 같은 말이 입가로
모였다. 현규진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가려는 거 아냐. 바지, 바지 갈아입으려고.”
“…넌 나랑 자기 싫어?”
“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아니라….”
“자꾸 가려고만 하고…. 뽀뽀도 조금만 해 주고…. 자꾸 정유원이라 그러고….”
“아니라니까. 바지를…. 아니, 뽀뽀는, 그게 아니라…. 아니, 여보.”
울먹인 유원이 그대로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그게 그렇게도 서러웠는지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바지고 뭐고 다시 침대에 오른 현규진이 뒤에서 유원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했다. 발기고 뭐고 지금 그딴 게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야, 화났어? 나 진짜 가려고 그런 거 아닌데. 방이 더워서 옷 갈아입고 자려고 그런 거야.”
“…….”
“내가 우리 여보 두고 어딜 가. 응? 여보 진짜 술 마시면 안 되겠다. 다른 놈한테도 가지 말라
그럴까 봐 존나 겁나네?”
“…….”
“그리고 뽀뽀는 내가 사정이 좀 있어. 내 사정 알면 놀랄걸. 그리고 정유원이라고 안 할게.
사귀는데 씨발, 누가 성을 붙여 불러.”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은 채 배 위를 토닥여도 마음을 풀어 주지 않자 현규진은 슬쩍 손을
유원의 티셔츠 안으로 넣었다. 보들보들하고 따뜻한 배를 야한 손길로 문지르다가 가슴
쪽으로 장난스럽게 올리자 유원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제 손길이 만든 그 작은
변화로도 현규진의 다리 사이는 이제 터질 것만 같았다.
“유원아.”
“…으응….”
귓불에 입술을 대고 목소리를 흘려 넣자 유원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현규진은 몸을 완전히 꽉
밀착한 채 터지기 직전인 앞을 조금씩 비볐다. 직접 만지는 것도 아니고 옷 위로 문질리는 게
전부인데도 오싹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하….”
배를 만지던 손을 내려 다리 사이를 짚어 보니 유원의 다리 사이도 저처럼 흥분해 있는 게
느껴졌다. 현규진은 그대로 유원의 바지 버클을 풀어 조금 내리고 단숨에 속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만지는 건 또 꽤 간만이라 쥐는 것만으로도 몸이 움칠 튀었다.
“너 여기, 아…. 왜 이래.”
“으응…. 아, 네가…. 네가아….”
“내가 뭐.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화내다가 이렇게 돼도 돼?”
“…흐읏…. 좋아….”
단단해진 것을 부드럽게 쓸어 줄 때마다 유원의 몸이 잘게 떨렸다. 물기 어린 신음에 귀를
기울이며 현규진은 유원의 어깨 위로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제 바지 버클을
풀어 억압되어 있는 성기를 꺼냈다.
“아….”
속옷을 내리자마자 위협적으로 튀어나온 성기가 바로 유원의 속옷 위로 문질렸다.
“아…. 유원아, 정유원….”
현규진은 유원의 성기를 더 빠르게 만져 주며 저를 돌아보려는 얼굴 쪽으로 다가가 혀끝을
비볐다. 입술 바깥으로 나온 혀끝이 문질릴 때마다 유원이 잔뜩 느끼며 몸을 잘게 들썩였다.
“…하…. 씨발, 돌겠네.”
머리가 확 도는 느낌이 났다. 눈앞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고, 오직 쾌감 만이 다음 행동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애가 탔다. 현규진은 그대로 유원을 바로 눕히고 바지와 속옷을 완전히
벗겨 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벌어진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으니 그동안 유원을 위해
참아온 게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적나라한 충동이 세게 머리를 치고 지났다.
“…….”
흥분한 숨을 내쉴 때마다 제멋대로 굴고 싶은 충동이 커졌다. 머리는 이대로 섹스를 해도
된다는 온갖 합리화를 해 대기 시작하고, 가만히 있어도 지나치게 흥분해 올라붙은 성기는
이제 괴로울 지경이었다.
99%의 해 버리라는 충동의 외침 속 단 1%의 올곧은 만류가 있었다. 단 1%, 저를 올곧게 하는
이름은 정유원이었다. 다른 설명도 무엇도 필요 없는 이름. 정유원.
제가 여태까지 매번 찾아온 충동을 짓누르고 참아 내고, 어떻게든 그런 부담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최대한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쓴 이유이기도 했다.
정유원이니까. 내가 아무렇게나 막 대하면 안 되는, 가장 소중하고, 가장 예쁘고, 가장 약하고,
또 가장….
사랑하는.
충동과 흥분 안으로 그 1%를 떠올리는 순간, 1%는 100%가 되었다. 유원으로 물드는 느낌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괴로울 만큼 발기한 성기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지만.
현규진은 삽입을 하는 대신 유원의 다리를 모아 들고 그 사이에 잔뜩 단단해진 제 성기를
끼웠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허벅지 안쪽과 유원의 성기에 비벼지는 느낌이 났다.
“아…. 후우, 읏….”
“하아…. 하으, 으응…. 할 것… 흣, 같아….”
몸을 뒤로 뺐다가 힘 조절을 하지 않고 앞으로 움직일 때마다 몸과 몸이 닿으며 퍽, 퍽 소리가
났다. 성기끼리 문질리고 부딪을 때마다 유원의 허리가 움찔댔다. 눈도 뜨지 못한 채 신음하는
유원을 내려다보던 현규진이 못 참겠다는 듯 다리를 내리고 그 사이로 몸을 움직였다.
몸을 납작하게 엎드려 아예 성기를 짓누른 채 비비자 자극이 더 강하게 왔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조용한 방 안으로 유원의 신음과 헐떡임, 현규진의 밭은 숨소리가 울렸다.
“하으읏!”
고개를 내려 혀끝을 쪼옥 빨아 준 순간 유원의 허리가 크게 움찔댔다. 배와 가슴으로 흩뿌려진
정액 위로 고개를 내린 현규진이 혀를 조금 내밀어 뽀얀 것을 핥았다. 무슨 맛이라고 표현은
하기 어렵지만, 유원의 안에서 나온 거라 생각하니 꽤 맛있게 느껴졌다.
“이제 나도… 후우…. 할 거니까 나 봐 줘. 눈 떼지 마. 내 얼굴 봐.”
“…하아…. 하으….”
조금 열린 입술 사이에서 흐트러진 숨이 마구 흘렀다. 그 숨을 두 눈으로 바라보고, 몸
여기저기에 묻히며 현규진은 유원의 몸 양옆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걸리적거리는 티셔츠 자락을 들어 입술로 물었다.
눈동자만 내리깔아 제 아래에 있는 잔뜩 흐트러진 유원을 보며 현규진은 사정 직전의 성기를
흔들었다. 마르고 하얀 배 위에는 조금 전 사정한 정액이 묻어 있고, 구겨진 티셔츠는
가슴까지 올라가 있었다. 저 때문에 달아오른 얼굴과 엉망으로 흐트러진 숨…. 저를
올려다보는 눈. 정유원, 씨발, 정유원….
기둥을 훑다가 끝을 건드린 순간 공교롭게도 유원의 입술 사이로 혀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꼭
그 혀끝이 제 성기 끝을 건드린 것만 같은 느낌에 미칠 것 같은 감각이 몰려들었다.
“읏…!”
쾌감이 터져 나오는 순간 온몸이 다 벌벌 떨렸다. 눈을 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쾌감에
옴짝달싹도 못 하던 현규진이 눈을 떠 제 아래에 있는 유원을 내려다보았다.
“…하… 후우….”
유원의 배와 가슴은 물론이고 얼굴까지 제 정액이 튀어 있었다. 눈에도 들어간 건지 유원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깜짝 놀란 현규진이 얼른 몸을 기울여 티슈를 몇 장 뽑아 눈가에 묻은
것부터 닦아 주었다. 그제야 눈을 뜬 유원이 불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팔을 벌렸다.
“이제 진짜 잘까?”
“으응….”
땀이 나 조금 끈적해진 몸이어도 상관없었다. 그대로 유원을 가득 끌어안은 현규진이 다시
단단히 얽히는 다리를 느끼며 몸을 포갰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몸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보송하게 말라 가는 목덜미 위에 코를 비빈 현규진이
미소 지었다.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05 화(105/127)

105


눈을 뜬 유원은 눈앞에 보이는 벽과 토끼 쿠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곧 몸 위에 얹혀 있는
팔이 보이고, 등 뒤에 딱 붙은 몸이 느껴졌다.
누구의 팔인지 모를 수는 없지만, 잠시 왜 이 팔이 지금 저를 안고 자고 있는지 또렷하게
맺히지 않아 조금 당황스러웠다.
“…….”
토끼 쿠션에 이불, 그리고 벽지만 봐도 여기는 분명 제 방이 맞았다. 유원은 잠이 전부 달아난
눈을 깜빡이며 살짝 뒤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현규진이 눈에 들어왔다. 나 왜 규진이한테서 등 돌리고 잤지?
조금 전 맞닥뜨린 당황스러움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며 유원은 조용조용 몸을
돌려 잠든 현규진을 마주 보았다.
“…….”
어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뒤풀이를 하면서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났다. 혹시 필름이
끊긴 건가? 생각도 해 봤지만, 그런 것치고는 그다음이 거의 다 생각이 났다. 집에 어떻게
왔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집에 와서 현규진과 야한 일을 한 건 너무나도 선명했다.
뒤에서 몸을 만져 주다가 허벅지를 모아서 막 그 사이에… 문지르다가 나중에는 몸을 꽉 눌러
주면서 비볐고, 마지막에는….
“…….”
티셔츠 자락을 입에 문 채 자위하던 현규진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미쳤나 봐, 진짜….
부끄러워진 유원이 이불 안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야해
부끄러운데 그렇게 닿을 때마다 현규진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계속 더 좋아져서 큰일이었다.
그때 머릿속을 채운 야한 생각을 깨며 알람이 울렸다. 유원은 현규진의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얼른 알람을 껐다. 알람 이름을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피곤하다.’라고 적어 둔
게 웃겨서 웃고 있으니 현규진이 부스스 눈을 떴다.
“잘 잤어?”
“응. 푹 잤어.”
“속은 괜찮아? 머리 아프거나… 그런 건 없어?”
깨자마자 제 걱정부터 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유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규진의 뺨을 문질렀다.
“괜찮아. 멀쩡해. 나 술 잘 마시나 봐.”
“미안한데 올해 들은 말 중에 존나 제일 웃겨.”
“씨이…. 난 필름도 안 끊기고 어제 일 다 기억 나. 속도 안 아프고, 머리도 안 아프고, 지금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서 어제 막 나만 보면 뽀뽀해 달라고 집착하셨어요? 아, 진짜 어제 무섭더라. 아니, 내가
일어나려고만 하면 집착하면서 막 어디 가냐 그러고, 가지 말라 그러고, 와…. 진짜 정유원
집착, 와.”
유원은 진짜 제가 어제 그랬는지 곰곰 떠올려 보았다. 어제 일이 다 기억 난다고 당당하게
말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자잘자잘한 것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건 기억이 안 나고,
야한 짓 한 것만 떠오른다 그러면 또 놀림을 받을 것 같아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타노스인지 우라노스인지 거기 앞에서도 뽀뽀해 달라고 그랬잖아. 그리고 그 원지호 옆에
있는데 내가 정유원이라 불렀다고 막 왜 자기라고 안 부르고 정유원이라 그러냐고 대놓고
말하고.”
“…내가?”
“뭐야, 기억 안 나네. 자기야, 내가 진짜 얼마나 식겁했는데.”
“…그래서? 지호가 알았어?”
“아니. 못 듣게 내가 잘 수습했어. 정유원, 너 진짜 앞으로 술 마시지 마. 마시려면 나 있을 때
마셔. 무슨 술주정이 그렇게 살살 녹아?”
유원은 가만히 현규진의 말을 듣다가 시무룩해졌다. 가만히 들어 보니 저를 놀리려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저 때문에 현규진이 고생했겠다 싶어 무척 미안해졌다.
“미안해…. 나 때문에 힘들었겠다.”
“힘들긴 뭐가 힘들어. 우리 정유원 술 마시면 애교 많아지고, 존나 박력 쩌는 거 알게 돼서 난
좋은데.”
“…나 안 이상했어? 막 정 떨어질 행동 같은 거 하거나….”
“넌 늘 존나 예뻐서 문제야. 그리고 정 떨어질 건 안 하고…. 꼴리는 짓은 좀 하더라.
“음…. 그럼 다행인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이 아프지 않게 엉덩이를 팡 두드렸다.
“아직 다행 아냐. 나한테만 그러는 건지 다른 놈한테도 똑같이 그러는 건지 확인을 못 했잖아.”
“너한테만 그러겠지….”
“너 어제 원지호 어깨에 기대려고 하는 거 내가 다 봤거든.”
“잘못 본 거야….”
“존나 잘 봤는데요.”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유원의 따뜻한 허리와 등을 만져 준 현규진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왜 벌써 일어나?”
“이모 언제 오실지 모르잖아. 어제도 솔직히 좀 불안했어. 어제 보니까 방문도 열고 했더라고.”
“아….”
그 말에 걱정이 되기 보다 현규진과 몸이 문질릴 때의 그 기분 좋은 감각이 살아나는 걸 보니
정말 제가 이상해진 것 같았다. 이불 위로 입술을 꾹 묻은 유원이 생각을 떨치려 애썼다.
“씻고 아침 먹자. 배고프다. 뭐 먹을까.”
“음…. 라면.”
“아, 우리 술꾼 해장해야지. 나 이쪽에서 먼저 씻는다?”
“알았어. 나 일으켜 줘….”
누워서 두 손을 쭉 뻗은 유원이 웃음 지었다. 곧 두 손을 감싸 쥔 현규진이 저를 당겼다. 그 힘에
끌려간 유원이 가장 바라던 품으로 안착했다. 귓가로 울리는 현규진의 웃음소리가 좋아
유원도 소리 내어 웃었다.
그제야 모든 게 좋기 만한 두 사람의 하루가 시작됐다.
***
이사를 하는 날은 날이 반짝 풀려 꽤 따뜻했다. 가구도 미리 다 들여놓고 청소도 싹 해놔서 더
준비할 것은 많이 없었다. 자잘하게 필요한 생필품이나 먹을 것 같은 것은 알아서 채우겠다고
강력하게 선언을 한 덕분에 부모님은 점심만 먹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셨다.
꼼꼼히 집을 둘러보던 유원은 휴대폰 메모 앱에 들어가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일단은
냉장고를 채우는 게 급선무라 마트에 가야 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식탁에 앉아 시리얼, 우유, 라면, 즉석밥, 밀키트 같은, 당장 며칠 해 먹기
편한 것들을 차례로 적었다.
그리고 걸어서 10 분 정도 거리에 있는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같이 카트를 끌고 메모한 것을
보며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담는 것만으로도 무척 설레고 재미있었다.
“우리 지금 존나 부부 같아. 여보, 딸기 먹고 싶댔지.”
유원이 좋아하는 딸기가 든 팩을 두 개 들어 카트에 넣은 현규진이 씩 웃었다.
“…애기가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열 살쯤 된 애가 과일을 보다가 ‘여보’라는 호칭에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유원은 현규진을 말렸고, 현규진은 뭐가 문제냐는 듯 아이를 보며 씩 웃었다.
“왜, 부부 첨 봐?”
“…형이랑 이 형이랑 결혼했어요? 여보는 결혼해야 하는 건데….”
“응. 결혼했어.”
“진짜요?”
“응. 신혼부부야.”
점점 더 놀라는 아이의 얼굴을 본 유원이 얼른 현규진의 팔을 잡아 카트와 함께 끌고 다른
쪽으로 향했다. 뒤에서 ‘엄마, 저 형이랑 옆에 형이랑 결혼했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원은
더 빨리 걸음을 옮겼다.
“미쳤나 봐, 진짜.”
“왜. 애도 알 건 알아야지.”
“못 살아….”
“시리얼 이거랑… 또 뭐 살까. 이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끔한 얼굴로 담백한 시리얼과 달콤한 초콜릿 맛 시리얼을 드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어느새 카트 안은 이런 저런 먹을 것들로 꽉
차 있었다.
계산을 마친 뒤 묵직하게 세 봉지나 나온 것을 혼자 든 현규진은 계속 달라고 손을 내미는
유원을 보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내가 혼자 들 수 있는데 왜 자꾸 달래.”
“무겁잖아, 너도….”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이거 들고 너도 업고 갈 수 있는데.”
“…앞으로는 그냥 다 집으로 배달시킬래. 너만 힘든 거 나도 싫단 말이야. 그렇게 무거운 거
계속 혼자 들다 보면 너도 어깨 아파지고, 허리도 아파질 수 있고, 또….”
횡단보도를 건너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는 잔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현규진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손에 든 것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여전히 잔소리를 하는
유원에게 달려들었다.
“손목 인대라도 늘어나면 그것도 진짜 고생이야. 인대는 한 번 늘어나면 평생 고생을….”
잔소리를 이렇게 귀엽게 하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유원을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가둔 채
현규진은 입술을 머금고 입 안에 고인 저를 위한 소리를 모두 혀로 핥아 제 입 안으로
가져왔다. 키스를 좋아해서 갑자기 이렇게 밀어붙여도 얌전히 입술을 벌리며 혀를 살살
움직이는 게 너무 자극적이었다.
“하아…. 가, 갑자기 뭐야아….”
“하…. 갑자기 해서 더 좋았나 본데. 귀 빨개진 거 보니까.”
씩 웃은 현규진이 9 층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을 보며 유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귀와 목이 잔뜩 빨개진 유원이 먼저 내려 함께 사는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6309052#
유원의 생일인 6 월 30 일과 현규진의 생일인 9 월 5 일을 조합하고, 혹시 누가 유추하기
쉬울까 싶어 같이 살게 된 2 월이라는 숫자까지 조합한 것이었다.
“늘 누르던 집 비밀번호 아니라 우리가 만든 비밀번호 누르니까 뭔가 이상해…. 앞으로는 이게
더 익숙해지겠지?”
“그럼. 우리 앞으로 평생 같이 살 건데.”
“평생….”
유원은 ‘평생’이라는 말을 곱씹어 보았다. 끝을 알 수 없는 막연한 말이기도 하지만, 끝이 없어
마음이 안정되는 말이기도 했다.
현관에서 운동화를 벗으며 유원의 뺨에 쪽 뽀뽀한 현규진이 바로 저에게 돌아오는 유원의
뽀뽀를 받으며 씩 웃었다.
“오다 보니까 공원 있던데 이따 저녁 먹고 가 볼까?”
“응. 산책하러 가자.”
크게 고개를 끄덕인 유원이 다시 다가오는 현규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쪽쪽 연달아 입을
맞췄다.
‘평생’ 행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저녁을 먹고 산책도 하고 주변도 볼 겸 나와 한 시간도 넘게 걷다 보니 금방 또 출출해졌다. 집
가는 길에 있는 치킨 집에 들어가 허니 콤보를 포장으로 주문하고, 시간을 때우러 괜히 옆에
있는 커다란 편의점에 들어갔다.
“아…! 아까 마트에서 젤리 안 샀다. 뭔가 까먹은 것 같았는데 젤리였어.”
“아, 정유원 곡식 창고 다시 꽉꽉 채워야지.”
“저기 젤리 엄청 많아.”
젤리가 유행인지 아주 종류별로 수십 개도 더 되는 젤리 봉지가 편의점 한쪽 매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현규진은 반짝반짝한 눈으로 신중하게 젤리를 고르는 유원을 보며 뒤로 몸을
붙였다.
“뭘 그렇게 고민해.”
“이거 우리 동네에는 없던 건데 여긴 있다? 이거 복숭아 맛도 여기서 처음 봐.”
“다 사 버려. 여기부터 저기까지 싹 다.”
“안 돼…. 너무 많이 사면 너무 많이 먹게 돼서 딱 세 개만 살 거야.”
나름 결연히 말하는 유원의 허리를 뒤에서 살짝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추자 놀란 얼굴을 한
유원이 고개를 돌려 혼내듯 바라보았다.
“알았어, 알았어. 공공 장소에서는 선 안 넘기.”
유원의 눈이 하는 말을 알아서 읊은 현규진이 허리에 감았던 팔을 풀고 주변 매대를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편의점이 커서 그런지 정유원 곡식 창고를 가득가득 채울 과자나 젤리 같은
것도 많고, 음료 같은 것도 종류가 아주 많았다.
뭘 더 사갈까. 아까 웬만한 건 다 샀는데…. 맥주 세일하는데 사 볼까. 정유원 술 마시면 또
그러는지 보긴 해야 하는데. 이따 계산하기 전에 사야겠다.
세계 맥주가 잔뜩 든 매대를 구경하다가 칫솔, 치약 같은 것들이 걸린 쪽 매대로 간 현규진의
시선이 한 곳으로 가 닿았다.
베이비오일. ‘오일’이라는 글자를 보니 문득 콘돔과 젤을 살 때 같이 판매하던 오일이
떠올랐다. 오일보다는 젤이 더 낫지 않을까 해서 젤을 골랐는데 전에 그 난리를 겪고 나니
젤보다 미끄럽고 잘 마르지 않는 오일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
하나 사 봐?
괜한 긴장감에 현규진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06 화(106/127)

106


아니, 갑자기 베이비오일은 좀 오버하는 건가. 아니…. 그래도 혹시…. 진짜 혹시…. 둘이 사는
첫날인데 이따 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아냐, 미친. 사긴 뭘 사냐. 전에 정유원 거기 부은 거 다
봤으면서 오일이 사고 싶냐, 쓰레기 새끼야.
고개를 젓고 매대를 벗어난 현규진은 결국 다시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베이비오일을 집어 들었다. 그럴 일은 없을 가능성이 크지만, 제가 정신만 잘 챙기고 좆이
아니라 양심을 세우면 그럴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정말… 만일, 만에 하나 첫날밤 분위기가
잡혀 섹스를 하게 된다면 그래도 저번보다는 나아야 하니까. 5cm 들어갔던 걸 10cm 라도
넣으려면 이게 꼭 필요할 것 같았다.
“…….”
이게 뭐냐고, 왜 사냐고 물어보면 뭐라 그러지. 아, 왜 하필 베이비오일이야. 다른 거 없나.
엄마가 쓰던 호호바오일을 떠올린 현규진이 매대를 신중하게 살폈지만, 다른 류의 오일은
보이지 않았다.
“규진아.”
“어? 아…. 어! 젤리 다 골랐어?”
“응. 이거랑 이거.”
복숭아 맛 젤리와 계란후라이 모양의 젤리, 그리고 가장 기본인 곰돌이 젤리를 고른 유원이
봉지를 들어 보였다.
“진짜 딱 세 개만 사게? 후회 안 하겠어? 아까 포도 맛도 처음 보는 거라며.”
“…그럼 하나만 더 살까? 딱 하나만.”
“응. 딱 하나만 더 사자.”
고개를 끄덕인 유원이 얼른 포도 맛 젤리가 가득 든 봉지를 하나 더 들고 와 현규진에게 보여
주었다.
“잘했어. 그래도 많이 절제했네. 정유원 다 컸다. 젤리도 절제해서 네 개만 사고.”
“맛있겠다아…. 아, 우리 제로 콜라 사자. 아까 무거워서 못 샀잖아.”
“응. 저기 뭐 새로 나온 거 많더라.”
음료가 잔뜩 있는 곳으로 가 제로 콜라 두 병과 유원이 좋아하는 오렌지 주스 한 병, 맥주 네
캔을 안은 현규진이 카운터로 가며 달착지근한 감자칩과 짭짤한 감자칩을 함께 집었다. 전부
유원이 좋아해서 저도 좋아하게 된 것들이었다.
과자 봉지 뒤쪽으로 베이비오일을 슬쩍 숨긴 현규진은 지갑을 꺼냈다. 유원이 잠시 다른 곳을
봐 주면 좋겠는데 그 바람은 통하지 않았다. 점원이 과자 봉지를 들어 올린 순간 유원의
시선이 정확하게 그쪽, 누워 있는 베이비오일로 닿았다. 현규진은 절망감과 마주한 채
계산했다. 그리고 묵직한 봉지를 받아 편의점을 나섰다.
“베이비오일은 왜 샀어?”
묻지 않으면 좋았겠지만, 솔직히 저라도 유원이 갑자기 소주를 사면 그건 왜 산 거냐고 물었을
것이었다. 그만큼 저와 베이비오일이 매치가 되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 좀 요즘 건조해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솔직히 베이비오일의 용도로 아주 알맞은 모범적인 답이기는
했다. 현규진은 제 대답을 듣고 웃는 유원을 보며 치킨 집으로 향했다.
“너랑 베이비오일 뭔가 잘 안 어울려.”
“알아. 아는데 저거 밖에 안 팔아.”
“귀여워. 규진이 애기네.”
현규진의 얼굴을 귀엽다는 듯 손바닥으로 눌러 문지르며 유원이 웃었다.
“언제부터 애기였어? 집에서도 베이비오일 썼어?”
“놀릴 거면 뽀뽀해 주고 놀려.”
몸을 숙이자 유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뺨과 입술에 한 번씩 뽀뽀를 하고 떨어졌다.
“작정하고 놀리려고 뽀뽀하는 거 봐.”
“그런 거 아냐. 그냥… 네가 그런 거 사는 거 처음 봐서 그래. 네 방에서도 오일 같은 거 한 번도
못 봤는데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이 봉지를 고쳐 들었다. 유원이 못 본 게 당연했다.
그런 게 방에 있던 적이 없으니까. 건조하면 로션이나 크림을 발랐지, 딱히 오일을, 그것도
베이비오일을 바른 적은 없었다. 당연히 살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근데 베이비오일 쓰면 애기야? 이거 어른들도 많이 써.”
“그냥 오일도 아니고 베이비오일이잖아. 쓰면 애기지. 너도 이제 애기야.”
“아직 안 썼거든. 쓰면 그때 놀려라.”
유원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인 현규진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 생각보다 빨리 나온 치킨을
받아 나왔다.
“치킨 내가 들게.”
“이건 무겁지도 않은데 뭐. 손 잡아 줘.”
한 손으로 편의점 봉지와 치킨 봉투를 함께 든 현규진이 손을 내밀었다. 나눠 드는 것에
미련이 남았는지 계속 치킨 봉투를 보는 눈앞으로 손을 들어 흔드니 그제야 제 손을 봐 주었다.
“너 자꾸 그러면 치킨도 배달만 시키고 편의점도 너 몰래 나 혼자 가서 무거운 거 다 살 거야.”
“자기야. 자긴 이제 나 없이 편의점 못 가. 그런 생각을 어떻게 했지? 꿈 존나 크네, 우리 자기.”
“너 잘 때 가면 되지.”
“너 없으면 못 자, 이제. 너 몰래 나가려고 일어나면 나도 바로 깸.”
장난스럽게 보다가 고개를 기울여 씩 웃는 현규진의 얼굴을 본 유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푸스스 웃어버렸다. 저 얼굴은 정말이지 당할 수가 없었다.
“빨리 손 잡아 줘. 손 너무 허전해.”
유원은 저를 향해 다가오는 현규진의 손을 꼬옥 쥐었다. 겨울이라는 이름을 머금고 있는
밤바람이 괴롭힌 손은 꽤 차가웠다. 얼른 두 손으로 꼬옥 쥐고 주물러 주자 밤공기 위로
현규진의 하얀 숨이 덧그려졌다.
“이제 됐으니까 주머니에 손 넣어. 손 시리겠다.”
“안 시려. 네 손 잡고 있는데 손이 왜 시려.”
유원이 희게 웃었다. 겨우내 몇 번 본 눈송이 같기도 하고, 겨울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밝고 따뜻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빛 같기도 했다.
“아무튼… 말이 샜는데 너 혼자 무겁지 마. 나도 너랑 나눌 수 있어, 뭐든.”
“알아. 알지. 다음에 진짜 무거우면 그땐 같이 들자고 할게. 이 정도는 진짜 괜찮아서 그래.
화난 거 아니지?”
“안 났어.”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직은 누르는 게 서툰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도, 꽤 오랫동안 드나들었던 서로의 집과는 너무
다른 거실에서 치킨을 먹는 것도 적응이 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저
좋았다. 늦은 시간이 돼도 떨어지지 않아 좋고, 부모님이 들어올까 봐 눈치를 보며 뽀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았다.
“아, 넷플에 오늘 뭐 재밌는 거 올라왔다던데 그거 보자.”
“씻고 볼까. 아니면 보다가 자기 전에 씻을까.”
“음…. 씻고 보자. 보다가 아마 졸려질걸. 그때 씻으러 일어나는 거 귀찮잖아.”
조곤조곤 말하는 게 귀여울 일인가 싶은데 그냥 유원은 입을 움직이며 뭔가 말을 만들어 내는
그 자체로도 너무 귀여웠다. 현규진은 유원의 말을 네 번이나 방해하며 중간중간 쪽쪽
뽀뽀했다.
“먼저 씻을래?”
“응. 나 먼저 씻을게. 얼른 씻고 나올 테니까 심심해도 쪼끔만 참아.”
“안 심심하게 같이 씻으면 되겠다.”
“…아직 안 돼.”
“왜. 이미 다 봤잖아, 우리.”
“그거랑! 씻는 건… 달라. 나 씻고 올게.”
갑자기 부끄러워진 얼굴로 방에 쏙 들어가는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오자마자 치킨을 먹느라 넣지 않은 음료수를 냉장고에 넣고, 과자와 젤리를
꺼내다 보니 봉지 안에는 베이비오일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
일단 샀으니 이걸 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나 싶다가도 너무 아파 엉엉 울던 유원을 떠올리면
그냥 제 온몸에나 처발라야 하나 싶었다. 씨발, 이게 왜 눈에 보여서. 그쪽으로 가지 말고 그냥
정유원이랑 계속 같이 있을걸.
약한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베이비오일은 제 손에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쉰 현규진이
분홍색 뚜껑을 열어 향을 맡아 보았다. 정말 아기들한테 날 것 같은 파우더리한 향이 확
끼쳤다.
“…….”
오일을 손끝에 조금 덜어 문지르니 미끌미끌한 느낌이 났다. 아…. 이걸 정유원 다리 사이에
바르고, 손가락에 묻혀서 안에 들어가면….
유원의 안은 무척 뜨겁고 좁았었다. 손가락이 파고드는 것도 수월하지 않을 만큼. 한참이나
안을 넓히면서 풀어 줘야 겨우 손가락 하나를 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좁은 안에 이걸
묻혀 넣으면… 그래도 좀 낫지 않을까. 괜히 손가락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어깨를 떤 현규진이
얼른 오일 뚜껑을 닫아 식탁 위로 놓았다. 오일을 보고 만졌을 뿐인데 또 아래가 설 것 같았다.
아…. 정유원 만지고 싶다.
경험하지 않고 상상만 했을 때는 쉽게 그래도 가라앉힐 수 있었는데 직접 경험을 하고 나니
자꾸 더 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제 손이 닿던 피부를 알고, 온몸에 달라붙었던 체온을
너무나 구체적으로 알게 되어 더 괴로웠다. 현규진은 멍하니 제 아래에서 신음하며 울고,
매달리던 유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규진아, 나 너무 아파….’
하지만 곧바로 울던 유원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갑자기 만일을 대비해 오일을 사고, 또 이대로
이 밤을 보내도 되는지 생각하고 있는 제가 너무 한심하고 쓰레기 같았다. 현규진은 고개를
저으며 오일에서 멀리 떨어졌다. 아무래도 숨이 차 죽기 직전까지 운동이나 해서 시도 때도
없이 힘이 들어가는 아래를 다스려야 할 것 같았다.
따뜻한 물로 씻고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유원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일 것 같았다. 부산 여행 이후 부모님과 함께 있느라 키스조차 편하게 하고 싶은
만큼 한 적이 거의 없었고, 아주 가끔 키스 다음을 하긴 했지만…. 며칠 전에 했던 것처럼
아래를 서로 만져 주거나 대고 누른 채 문지른 게 전부였다.
물론 그것도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유원은 현규진과 더 오래 닿고 싶었다. 여행
가서 마주했던 그 뜨거운 현규진을 또 마주하고 싶었다. 거울을 보던 유원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판판한 가슴 위로 닿았다.
“…….”
가슴에 있는 것을 혀끝으로 건드리다가 쪽쪽 소리가 나게 빨아들이고, 나중에는 아예 입
안으로 넣고 잔뜩 머금던 모습을 생각하자 아랫배가 울렁였다. 한참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눈동자만 움직여 저를 올려다보는데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 얼굴마저 너무 잘생겨서 심장이
쿵 떨어지곤 했다.
또 하고 싶다아….
아팠던 것도 알고, 다시 한다고 해서 갑자기 아프지 않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도 알지만, 또
아프더라도 현규진과 또 몸을 가득 마주하고 싶었다. 몸 여기저기가 닿아 따뜻하고, 나중에는
뜨겁기까지 한 그 느낌이 너무나 좋았으니까.
눈이 마주칠 때마다 키스를 하는 것도 좋고, 평소에는 옷 위로 닿던 손이 피부를 문지르며
여기저기 조심스럽게 만지는 그 느낌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
원래 이런 건가…? 한 번 하고 나면 또 하고 싶고, 배가 막 울렁울렁하고? 이러다가 매일 하고
싶으면 어쩌지….
물기 닦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유원이 머리카락 끝에서 가슴 위로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에 정신을 차렸다. 별생각을 다 한다 싶어 민망한 마음에 귀가 새빨개졌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유원은 다시 현규진을 떠올리며 멍해졌다.
“…….”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일 것 같았다. 함께 사는 첫날인데다가 저와 현규진의 허락 없이는 이제
이 집에 아무도 들어올 수가 없으니까.
물론 쪼끔 겁이 나긴 했다.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종류의 아픔을 떠올리면 솔직히 무서웠다.
하지만… 그래도 현규진이니까 다 괜찮았다. 제가 기분 좋은 것처럼 현규진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면 오늘은 조금 더 꾹 참아 볼 생각이었다.
어떡해, 떨려…. 젖은 머리를 보송하게 말리며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한 유원이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을 잘 만지고 옷도 단정히 매만졌다.
아무리 정리를 해도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은 가라앉지 않아 문제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욕실을 나서자 상의를 벗고 방으로 들어오는 현규진이 보였다. 운동을 한 건지 얼굴이며
드러난 몸이며 땀에 잔뜩 젖어 있었다.
“…….”
그 모습에서 유원은 또 현규진과 닿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제 위에 올라타 내려다보던
현규진도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땀에 젖은 몸이 닿을 때마다 피부가 붙었다가 떨어지고,
젖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넘기면 자연스럽게 흐트러지며 다시 내려오는데 그 머리가 헝클어진
얼굴이 너무 잘생겨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운동했어?”
“응. 간단히 푸시업. 아, 덥다. 얼른 씻고 올게. 젤리 먹고 있어.”
씩 웃은 현규진이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유원은 너무 애처럼 보였나 싶어 아까
편의점에서 젤리 산 것을 조금 후회했다. 젤리 말고 다크 초콜릿 같은 것만 딱 하나 살걸.
어쩐지 조금 시무룩해진 유원이 부엌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인 젤리를 보다가 그중 복숭아 맛
젤리 포장을 뜯었다. 그 와중에도 젤리는 새콤달콤 아주 맛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젤리가
맛있고, 자꾸 먹고 싶다는 게 조금은 싫었다. 유원은 한숨과 함께 젤리를 들고 침실로
터덜터덜 들어갔다.
가만히 침대에 앉아 기계적으로 젤리를 입에 넣으며 현규진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달칵, 욕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슬리퍼 끄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 가득하던 현규진이 두 눈에
들어찼다. 보기만 해도 너무너무 좋아서 숨 쉬는 게 다 벅찰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왜 이렇게 조용해.”
침대 위에 놓인 뜯어진 젤리 봉지를 보고 웃은 현규진이 가까이 다가와 유원을 끌어안았다.
TV 도 안 켜고 조용한 방에서 젤리에 몰두하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 귀여워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날 지경이었다.
“젤리 먹고 있었어?”
“너 기다리고 있었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현규진의 심장이 미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07 화(107/127)

107


유원은 가끔 말문이 막히고, 숨 쉬는 것을 잊게 하는 말을 하곤 했다. 너무 좋아서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어떤 고백을 해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 괴롭기까지 한 그런 순간과
마주할 때면 정말이지 울고 싶을 정도였다. 현규진은 지금 그런 순간과 또다시 마주한 채
기어이 터져 버린 심장이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리 와.”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을 올린 채 팔을 벌리자 몸을 기울인 유원이 그대로 안겨들었다. 유원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꽉 안고 있다가 가볍게 눕힌 현규진이 단숨에 위를 점령하며 올라탔다.
내내 떨어지지 않는 시선 안으로 그냥 확 들어가고 싶다 생각한 순간 입술이 맞물렸다. 눈을
감는 유원과 달리 현규진은 눈을 뜬 채 혀를 섞으며 아주 가까운 곳에서 유원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얼굴만 봐도 설 것 같아 무척 곤란했다.
아…. 씨, 이러면 안 되는데. 둘이 살자마자 섹스하려고 수작이나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좀
그런데. 키스만 하자, 키스만. 딱 키스만 기분 좋게 하고 얘기 많이 하다가 푹 재우자. 내일모레
개강인데 애 아프게 하면 안 되지. 컨디션 조절해야지. 그래, 정유원 괴롭히지 말자. 아프게
하지 말자. 아래 세우지 말자. 변태 새끼야.
“…으응….”
굳게 다짐을 했지만, 깊게 혀가 얽히고 끝만 살짝살짝 문질릴 때마다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조금 전 제가 쓴 바디워시 향이 그대로 폴폴 나는 유원의 따끈따끈한 몸을 마주하고 있으니
말랑말랑한 모든 곳을 다 머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원의 복숭아 향이 나는 혀를 쪼옥
빨아들인 현규진이 뺨과 목덜미 여기저기에 깊게 입술을 묻었다가 슬쩍 몸을 떼어 냈다.
“하…. 어, 내일은 뭐 할까? 학교 다니기 시작하면 정신 없을 텐데.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아니면 차 보러 갈래? 몇 대 봐 둔 게 있긴 한데 직접 보러 가자.”
달아오른 긴 숨을 내쉰 유원이 더 하지 않고 옆으로 가는 현규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키스하다 말고 갑자기 차를 보러 가자며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 게 이상했다.
왜… 더 안 하지?
유원은 곰곰 생각에 잠겼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뭔가 현규진이 이 상황을 피하고 싶어
갑자기 저런 말을 꺼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같이 타고 다닐 건데 네 맘에도 들면 좋잖아. 너한테 편한 것도 중요하고.”
“…….”
“정유원 가고 멍유가 왔네.”
멍하니 생각에 잠긴 유원을 보고 웃은 현규진이 몸을 딱 붙인 채 머리 아래로 팔을 넣어
팔베개를 해 주었다.
“아…. 응, 차 보러 가자.”
“점심 맛있는 거 먹고 천천히 가자. 아침에 늦잠도 푹 자고.”
“응. 좋아…. 그러자.”
“그럼 점심은….”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보기로 해서 그거 보고 난 다음에 하려고 그러는 건가…? 고개를 갸웃한
유원은 현규진의 몸에서 나는 따뜻한 바디워시 향에 이끌려 그쪽으로 얼굴을 조금 더
기울였다. 그리고 현규진의 목덜미 쪽에 코끝을 살짝 댔다. 순간 현규진의 말이 뚝 끊겼다.
“같은 걸로 씻었는데 나한테 나는 냄새랑 너한테 나는 냄새가 달라.”
손목을 들어 향을 맡은 유원이 다시 현규진의 목덜미 쪽으로 다가가 숨을 들이마셨다.
“너한테 나는 냄새가 더 좋아.”
“…….”
“진짜 달라. 너도 맡아 봐.”
제 코 앞으로 손목을 대 주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은 무척 곤란해졌다. 진짜 죽을 것만 같았다.
아직도 목덜미에 유원의 숨과 살짝 문질린 코끝의 느낌이 남아 있었다. 저도 유원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손목이 아니라 목덜미에서, 아니…. 옷 안에서, 다리 사이에서.
씨발, 진짜 돌겠다. 가까스로 충동을 짓누른 현규진이 유원의 손목에 코를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디워시 향 따위가 가릴 수 없는 정유원 특유의 포근한 향이 여리여리하게
몸속으로 흘러든 순간 아랫배가 확 울렁였다. 그 감각이 바로 다리 사이로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 하고 싶다. 정유원 옷 안에 손 넣고 싶다. 젖꼭지 계속 만지고 빨아서 우는 거 보고 싶다,
미친.
유원의 유두를 입 안에 넣고 혀로 굴릴 때의 그 묘한 감각이 혀끝에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요
며칠 간의 습관처럼 입 안에서 혀끝을 굴린 현규진이 완전히 서 버린 아래를 느끼며
부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 나 잠깐만.”
“어디 가?”
“…어? 나 화장실. 잠깐만.”
가서 혼자 해결을 하고 나오면 그래도 좀 나을 것이었다. 순수하고 평화로운, 함께 살
앞으로의 미래 같은 밝은 이야기를 하면서 밤을 보내려면 불순한 저의 이 마음부터 어떻게
해야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얼른 해결을 하러 가려는데 그대로 손목이 잡혔다. 현규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저를 두 손으로 붙잡고 있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혼자… 하러 가는 거야?”
“어?”
그제야 현규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봐도 이상함이 느껴질 정도로 부피를 키운 것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아…. 그게.”
“…혼자 하는 게… 더 좋아?”
“어?”
“…내가… 너무 못 해서… 나랑 하는 건 별로야?”
현규진은 지금 제가 듣고 있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혼자 하는 게 더
좋냐니? 어제 너무 못 해서 별로냐니? 아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상황을 파악하려 머리를
굴리던 현규진은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유원을 보며 얼른 다시 침대로 올랐다.
“아니, 그게 다 무슨 말이야. 진짜 내가 태어나 들은 말 중에 지금 제일 어이없어. 너랑 하는 게
왜 별로야. 어떻게 별로야. 말이 돼? 왜 그런 생각을 해.”
“…괜히 내 생각 해서 그렇게 좋게 말 안 해 줘도 돼.”
“돌겠네. 아니야, 너랑 하는 게 별로면 여긴 왜 이런데.”
유원의 손을 잡은 현규진이 제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그리고 완전히 발기해 단단해진 성기
위로 대었다. 놀란 유원이 얼른 손을 떼었다.
“가, 갑자기… 뭐야….”
“이거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
“네가 내 냄새만 맡아도 이렇게, 아니지. 네가 뭘 안 해도 너만 보면 이래. 너랑 한 다음부터
계속 그 생각만 나. 생각 안 하려고 해도 시간만 나면 자꾸 생각나. 존나 변태 같은데 그냥 계속
생각나서 돌겠어.”
“…그런데 왜… 안 해?”
그제야 현규진은 나름 욕구를 누르고 눌러 유원을 배려하려 했던 제 행동이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 이 사랑스러운 애를 불안하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너 아픈 거 싫어서.”
“…참을 수 있다고 했잖아.”
“아파도 참고 버티는 거 보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데.”
“…….”
“너 아파서 울어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고작 약 챙겨 주고, 집에 데려다주고, 옆에 있어 주는
것밖에 없어서 속상했어. 그런데 나 때문에 아픈 걸 내가 어떻게 봐. 내가 안 하면 너 안
아프잖아.”
제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현규진이 신경을 엄청 쓸 거라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진심을 마주한 유원의 마음도 꽉 조여들었다.
유원은 장난기가 하나도 묻지 않은 더없이 진지한 현규진의 오직 저만을 생각해 주는 눈을
마주 하다가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리고 두 팔 가득 저의 따뜻함을 끌어안았다.
“난 네가 나랑 같이 있어 줘서 너무너무 좋았어. 항상 같이 있어 줬잖아. 고작 그것밖에 못
했다고 생각 하지 마. 아무도 못 해 주는 건데… 네가 해 줬잖아.”
“…….”
“…그리고….”
말을 하려다가 말고 조금 머뭇대던 유원이 현규진의 어깨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별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숨기기라도 해야 말을 할 용기가 생길 것 같은 이유였다.
“…그때처럼 아픈 건…. 괜찮아. 너랑 하는 거니까… 나 진짜… 참을 수 있어….”
아, 돌겠다. 현규진은 안 그래도 잔뜩 단단해진 아래로 더 감각이 확 쏠리는 것을 느꼈다. 이런
진지한 순간에 이런 느낌을 받다니 진짜 저도 답이 없는 새끼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유원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정유원이 저랑 또 섹스하고 싶다고, 아파도 괜찮다고 말하는데
그걸 어떻게 참을 수 있단 말인가.
“진짜 조금 들어가도 그렇게 아파했는데 다 들어가면 기절할까 봐 무서워서 그래.”
“안 할게, 기절.”
“그게 네 마음대로 돼?”
몸을 살짝 떼고 절대 기절 안 한다고 고개를 젓는 유원을 보며 웃어 버린 현규진이 보들보들한
뺨을 살살 문지르다가 아프지 않게 짓주물렀다. 그냥 이 찹쌀떡을 확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었다.
“이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너만 계속 생각한 거 아냐. 나도… 너랑 그…거 하고…. 계속
생각나서 쪼끔 힘들었어.”
“힘들었어?”
“…응…. 엄마, 아빠 있어서 못 하는데…. 너만 보면 자꾸 키스도 하고 싶고, 키스 다음도… 하고
싶어져서….”
“아…. 나랑 존나 뒹굴고 싶은데 못 해서 힘들었구나.”
“그, 그 정도는 아니야.”
“네 맘 다 알았어, 이제. 진작 말을 하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난 엄마, 아빠 있어서
참은 거 아닌데. 있어도 하려면 다 할 수 있었어.”
일부러 더 노골적이고 얼굴이 화끈댈 정도로 표현한 현규진이 다시 유원을 눕히고 몸 위로
올랐다. 저는 안 하느라 힘들고, 유원은 저와 못 해서 힘들었다는데 더 이상 제가 참을 이유가
없었다.
“잠깐만.”
시작하기 전에 뭔가 떠올린 현규진은 침대를 벗어나 부엌으로 가 아무렇게나 둔 베이비오일
병을 바지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침대 옆 서랍에 있는 콘돔 박스를
꺼냈다.
“난 오늘 건전하게 앞으로 같이 어떻게 살지 얘기하려고 했는데 정유원 진짜 야해서 어떡해.
오늘만 기다렸지, 너.”
“아니야.”
“맞는데, 뭘.”
“그런 거 아니….”
아니라고 말을 강하게 하려는데 가까이 내려온 현규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부정을 해야 할
모든 이유가 사라졌다. 아닌 게 아니니까. 현규진과 이렇게 단둘이 밤새도록 있어도 조금도
이상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을 날을 손꼽아 기다린 것도 전부 사실이니까.
응, 기다렸어. 힘을 잃은 부정 따위는 입술에 묻을 자격이 없었다. 유원은 두 팔을 벌려
현규진을 끌어안았다. 사실 나도 존나 기다렸어. 시원하게 늘어나는 입매를 보며 따라 미소
짓자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하얀 발가락이 안으로 굽은 채 시트를 긁다가 이내 쫙 펴졌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눈앞이
다 새까맣고 또 새하얗게 변했다. 사정을 했음에도 현규진은 가슴에 파묻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종종 상상하던 그 감각이 쉬지 않고 몰려올 때마다 유원은 하릴없이 신음하며 고개를
젖혔다가 이불자락을 쥐기도 하며 울었다.
“하으, 응…. 흐읏, 나…. 으응, 나 했어….”
“응, 알아.”
혀로 유두 주위를 핥던 것을 멈추고 그 위로 말이 쏟아졌다. 이가 유두를 스치는 순간 유원의
허리가 잘게 떨렸다. 현규진은 일부러 이로 유원의 유두를 깨물며 한 번씩 혀로 그 끝만 찔러
주었다. 그럴 때마다 울음 섞인 신음이 길게, 아주 야하게 늘어졌다.
“으응…!”
사정한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힘이 들어간 유원의 성기 끝에서 말간 것이 또 흘러내렸다.
사정하는 순간에도 집요하게 유원의 유두를 자극한 현규진이 그대로 혀로 가슴과 배를
문지르며 내려왔다. 그리고 완전히 힘이 빠지지 않은 반쯤 선 성기를 쥐고 끝에 묻은 말간
것을 혀로 할짝였다. 유원의 것이라 생각하니 뭐든 다 머금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걸, 하으…. 왜 먹어….”
“너한테서 나온 거잖아. 다 내 거야.”
혀로 건드릴 때마다 끝으로 맺히는 것을 몇 번이나 쪼옥 빨아들인 현규진이 안 되겠다는 듯
티셔츠를 벗어 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고 여전히 바지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베이비오일을
꺼냈다.
“그건 왜…?”
“사실 나도 혹시나 해서 산 거야. 만약에 하게 되면 젤보다는 이게 더 낫지 않을까 해서.”
전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보는 유원을 내려다보며 현규진이 분홍색 뚜껑을 열어 손바닥에
오일을 쭉 짰다. 파우더 향이 짙게 나는 투명한 오일이 현규진의 손 위로 주르륵 흘러 고였다.
현규진은 얼른 오일이 묻은 손을 내려 유원의 다물린 입구 위를 비볐다. 그것만으로도 긴장한
유원의 몸이 움찔거렸다.
“넣을게.”
“으응….”
“베이비오일 쓰면 애기라 그랬지.”
“…아… 흐읏….”
“정유원 애기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08 화(108/127)

108


오일에 절여질 만큼 흠뻑 젖은 손가락으로 유원이 입구를 조금 더 비비다가 손끝에 힘을 주자
중지 한 마디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현규진은 얼른 유원의 얼굴을 살폈다.
“아프면….”
“…아…. 그래도 할 거야….”
“고집 봐라.”
“너도 나랑 하고 싶잖아….”
“말이라고 해.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내 머릿속 진짜 존나 쓰레기야.”
시간이 좀 지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한 번 해 본 단계라 그런지 처음처럼 엄청
놀랍다거나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손가락이 굉장히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베이비오일 효과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흐읏….”
하지만 손가락이 더 들어와 안을 휘젓는 느낌까지는 완벽히 적응할 수 없었다. 안에 오일을
바르며 느릿하게 푸는 현규진의 손가락이 깊은 곳을 꾹꾹 눌러 댔다. 아랫배가 수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싹한 것 같기도 한 묘한 감각이 어딘가를 스칠 때마다 올 것처럼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사라졌다.
“아…. 꽉… 응, 찬 것 같아….”
“오랜만이라 힘들 줄 알았는데. 미친, 진작 오일 살걸.”
손가락 두 개를 안에서 반쯤 빼낸 현규진이 그 위로 오일을 또 떨어뜨렸다. 제대로 하루
자지도 못하고 새로 깐 시트를 세탁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흐윽…. 또, 또….”
“응, 하나 더.”
미끄러운 느낌과 함께 손가락 세 개가 안으로 들어갔다. 아예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참을 만했다. 현규진의 손가락이 안을 꽉 채운 채 내벽을 문지르고 휘저을 때마다
마찰한 곳에서 열이 나는 것만 같았다.
“유원아, 좋아?”
웃음이 실린 낮은 목소리와 함께 손가락 세 개가 유원의 깊은 곳으로 확 파고들었다. 단단한
손끝이 묘한 느낌을 불러오는 곳을 세게 건드리며 긁은 순간 유원의 허리가 크게 들썩였다.
“하으읏…!”
현규진은 멍하니 제 손가락 세 개를 꽉 문 채 사정해 버린 유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물고 있는 아래가 꽉 조였다가 조금 풀어지고, 또 꽈악 조였다가 풀어지는 느낌이 났다.
유원의 안에 넣지 않은 손을 들어 눈가에 튄 정액을 훑은 현규진이 그 손끝을 혀로 문지르며
손가락을 빼냈다.
“…진짜 나 뒤질 것 같아. 넣을게.”
유원의 안이 너무 뜨거워 녹을 것 같은 손가락을 타고 오일이 뚝뚝 떨어졌다. 현규진은 콘돔
박스를 열어 안에 든 콘돔이 저번처럼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공부했던 대로 완전히 발기한 성기 위에 콘돔을 씌웠다. 아까 유원의 유두를 빨며 아래를
비비다가 한 번 사정을 했는데도 그런 적이 없던 것처럼 아플 만큼 발기한 성기가 꺼떡였다.
혹시 몰라 오일을 더 짜서 콘돔 위에도 조금 묻혔다. 그리고 손만 대도 쌀 것처럼 단단한 것을
쥐고 유원의 입구 위에 맞췄다.
“아….”
“으응….”
조금 힘을 주자 귀두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긴장감에 감고 있던 눈을 뜬 유원이 두 손으로
시트를 꽉 쥐었다. 이번에도 여전히 아팠다. 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흐윽….”
“많이… 읏, 아파? 아, 엄청… 아, 조이는데…. 너무 좁아….”
성기를 꽉 조이는 느낌에 한쪽 눈을 찌그러뜨린 현규진이 심호흡과 함께 허리를 움직였다.
오일 때문인지 조금만 힘을 줘도 안으로 생각보다 더 많이 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안이 너무
좁은 데다가 유원이 몸에 힘을 주고 있어 아래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저번보다는 나았다.
“여기까지만, 아…. 할까?”
“싫어…. 흣, 괜찮아…. 더, 더 해도 돼….”
“아파서 울면서 왜 이렇게… 아, 고집을 부려.”
“…아…. 너랑… 더 하고…. 아!”
“아…!”
현규진의 허리가 움직이자마자 성기가 안으로 확 미끄러져 들어갔다. 현규진은 절반 정도
들어간 것을 확인하곤 긴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5cm 의 벽을 넘어 다행이었다. 이 정도면
오늘은 정말 끝까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으응…. 다, 들어갔어?”
“미안. 반은 더 들어가야 돼.”
“…왜 그렇게 커?”
“그러게. 키 크면서 좆도 존나 컸나 봐. 우유 좀 작작 마실걸.”
이런 상황에 실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아픈데도 웃음이 나왔다. 유원은 눈물이 잔뜩 묻은
눈가를 문지르며 웃었다.
“진짜…. 아, 더 해도 돼?”
“…응….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한 번에 넣을게. 찔끔찔끔 아픈 것보단 한 번에 아픈 게 낫잖아.”
고개를 끄덕이는 유원을 향해 얼굴을 내린 현규진이 눈가에 묻은 눈물을 머금고, 더 아래로
내려와 혀를 부드럽게 섞었다. 혀끝에 묻은 눈물은 서로의 입 안으로 번져 사라졌다.
“으응….”
기분 좋을 때 흐르는 신음과 함께 유원의 몸이 나른해졌다. 현규진은 그 순간을 눈치채곤 깊게
혀를 얽으며 단숨에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유원의 성기 끝에서 말간 것이 터져
나왔다. 놀란 현규진이 커다래진 눈으로 얼른 유원을 살폈다.
아프냐고 물어야 하는데 온몸이 달아오른 채 저를 붙들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유원을 보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
아픈데 사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기분이 좋았던 걸까? 제 것을 끝까지 담은 채
불긋해진 유원을 보니 머리가 확 돌았다. 현규진은 집요해진 눈동자로 유원의 얼굴을 담으며
조금 전 건드린 곳을 성기 끝으로 다시 꾹 눌렀다.
“하으읏…!”
손가락으로 안을 건드리거나 혀로 유두를 문질러 줄 때랑은 확실히 다른 반응이었다.
현규진은 같은 곳을 계속 건드리며 연이어 터지는 유원의 신음을 온몸에 담았다.
“거기, 흐윽, 거기 이상해….”
“이상해?”
“으응, 이상, 응, 으응!”
“하…. 그러게, 이상해. 계속 나오잖아.”
자꾸 저에게 얼굴을 파묻거나 기대던 유원의 몸이 다시 한번 들어차는 쾌감과 함께 젖혀졌다.
현규진은 완전히 드러난 그 얼굴을 두 눈 가득 담으며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제가
움직일 때마다 눈도 뜨지 못한 채 헐떡이며 잔뜩 느끼는 유원을 볼 때마다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규진, 흣, 규진아…. 아, 거기…. 왜, 으응, 자꾸 거기마안….”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굵고 뜨거운 것이 빠져나갔다가 안으로 다시 확 밀려들 때마다 유원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각과 마주했다. 이건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자위를
하면서도 느끼지 못했고, 현규진과 몸을 비비면서도 느낀 적이 없었다.
온몸이 다 녹다 못해 줄줄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사정할 때 느끼는 그 쾌감의 몇 배나 되는
감각이 머리 끝으로 확 퍼졌다가 겨우 정신을 차릴 때쯤 손끝과 발끝으로 번졌다. 아랫배와
허벅지에는 내내 그 감각이 고여 찰랑이고, 현규진이 움직일 때마다 제 몸을 제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감각이 몸을 휩쓸고 지났다.
“하읏, 응…! 규진아…. 응, 나 계속, 으응…!”
현규진이 나갔다가 들어오기만 해도 유원을 이상하게 만드는 곳이 푹 짓눌렸다. 어떻게
들어오든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클 수가 있나 싶은 성기는 현규진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원의
안을 무자비하게 자극했다. 완전히 감기는 내벽을 뜨겁게 문지르며 들어가, 뭉툭하고 힘이
모인 선단으로 깊은 곳을 퍽 칠 때면 유원은 꼬리뼈에서부터 타고 흐르는 선득함에 하릴없이
자지러질 수밖에 없었다.
“아… 읏…! 미친, 아…. 존나 좋아….”
유원의 허리를 양손으로 쥔 채 허리를 움직이던 현규진의 허리에 확 힘이 들어갔다. 퍽!
소리와 함께 잔뜩 뜨거운 안에 귀두가 파묻혔단 생각이 든 순간 머리 끝에서부터 흘러내린
쾌감이 분출되었다. 유원의 몸 위로 무너지듯 내려온 현규진이 말도 안 되는 쾌감에 몸을 벌벌
떨었다.
“…아…, 씨발…. 후우….”
쾌감이 얼마나 강한지 머릿속이 다 오싹할 지경이었다. 쉽게 가시지 않는 여운에 한참이나
움칠댄 현규진이 느릿하게 성기를 빼냈다. 그리고 정액이 가득한 콘돔을 빼내 끝을 묶어 대충
던졌다. 어차피 미래의 제가 치울 테니 지금은 아무렇게나 막 굴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새 콘돔을 하나 더 꺼내 뜯으려던 현규진은 제 아래에서 기진해 헐떡이는 유원을
내려다보았다. 반쯤 맛이 갔던 정신이 그제야 제대로 돌아왔다.
“힘들지. 숨 쉬는 거 괜찮아?”
“괜찮아….”
흐트러진 숨 안에서 발음이 뭉그러졌다. 현규진은 그런 유원의 뺨과 입술에 차례로 여러 번
입을 맞췄다. 마지막에는 입술 사이로 제 숨을 불어 주기도 했다. 불어 주는 숨을 목 뒤로
삼키며 옅게 웃는 유원이 사랑스러워 심장이 다 아팠다.
“아팠지.”
“음…. 아팠는데 나중에는 아프다는 생각 안 들 만큼… 좋았어.”
“정말? 나 속상할까 봐 해 주는 말 아니고?”
“…아까 봤잖아….”
“…….”
“……이런 걸 어떻게 거짓말 해….”
그 말에 머릿속으로 제가 깊게 넣자마자 사정하던 유원이 떠올랐다. 그 뒤로도 제가 같은 곳을
건드릴 때마다 잔뜩 느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신음했던 것도 떠오르고, 묽어진 정액을 계속
흘리던 것도 떠올랐다.
“…그럼 나 한 번 더 해도 돼?”
사정을 했다는 게 무색할 만큼 다시 단단해진 성기가 유원의 허벅지 안쪽으로 느껴졌다.
유원은 잔뜩 빨개진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체력이 거의 바닥난 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현규진과 더 붙어 있고 싶었다. 바닥이 날 때 나더라도 그 마지막 순간까지 현규진을
담고 싶었다.
“흐읏….”
다시 몸이 맞춰졌다. 유원은 깊숙하게 들어오는 현규진을 느끼며 시트를 쥐었다. 이번에는
뒤에서 몸을 바짝 붙이고 들어와 아까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아…. 흣, 아까보다… 더, 으응, 더 들어오는 것 같아.”
“…읏, 또 쌀 것 같아. 아…. 유원아. 정유원….”
유원의 등에 가슴을 밀착한 채 현규진은 귀를 입술로 머금어 주었다. 잔뜩 흥분에 절어 낮아진
목소리가 파고들고, 혀가 귓불을 건드리다가 귓구멍을 살짝 찌를 때면 유원의 발끝이
움츠러들었다.
몸을 끌어안은 팔은 단단하고, 두 손은 유원의 유두를 매만졌다. 배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뜨거운 성기와 가슴에서 퍼지는 쾌감이 합쳐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무 기분이 좋은데
한편 그게 무서워 울음을 터뜨린 유원이 더듬더듬 현규진의 손을 쥐었다.
“얼굴, 흐윽…. 아…. 얼굴 보고… 싶어….”
허리를 빠르게 움직이던 현규진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대로 유원의 어깨 쪽으로 다가가 턱을
잡아 쥐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현규진의 얼굴에 유원은 울먹였다. 현규진은 성기를
빼내고 유원을 바로 눕힌 뒤 다시 몸을 포갰다. 깊숙하게 한 번에 들어가는 아래와 함께 잔뜩
보고 싶었던 얼굴을 두 눈이 서로의 얼굴로 물들도록 담았다. 잠시도 멀어지고 싶지 않아
키스를 하면서도 가까이에 있는 그 얼굴을 조금이라도 눈에 담으려 애썼다.
“하으, 으응!”
유원은 깊은 곳을 꽉 눌린 채 혀끝을 비비며 사정했다. 하도 많이 쏟아 내서 나오는 게 거의
없었지만, 극에 달한 순간 느끼는 쾌감은 점점 더 커졌다.
너무 큰 감각을 연달아 몇 번이나 마주하고, 잘 쓰지 않던 몸을 계속 움직이며 쓰다 보니
눈앞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다. 유원은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다들 운동장에서 뛰는데 저 혼자 스탠드에 앉아 바라만 보는 게 싫어 컨디션이 좋다는 이유로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을 때의 그런 느낌이었다. 눈앞이 핑 돌고, 어지러운 느낌. 몸에서 힘이
빠지면서 몸이 스러지는 그 순간, 두 눈에 가득 들어차는 현규진의 얼굴과 저를 부르는 목소리.
“읏…! 아….”
눈앞이 새카매지려는 순간 제 몸을 온통 뒤덮은 현규진의 온기가 느껴졌다. 귓가에서 잔뜩
쏟아지는 뜨거운 숨과 제 온몸을 옭아맨 단단한 팔, 몸이 꽉 이어져 있는 느낌, 그리고 숨이
묻던 귓가에 쪽,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멍해지는 머릿속으로 현규진의 목소리가 번졌다.
“진짜 너무 좋아, 유원아. 사랑해.”
이 말을 들으려고 평소보다 조금 더 버틴 게 아니었을까. 답을 해 주고 싶어 입술을 벌렸다.
정말 조금 남은 유원의 체력은 목소리가 되어 현규진에게 닿았다.
“나도… 사랑해애….”
유원은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언제나처럼 제가 조금도 다치지 않게 안아 주는
현규진의 품 안에서.
귓가로 스며들어 저의 모든 것이 된 현규진의 사랑에 흠뻑 젖은 채.
친구 사이 고백 금지-109 화(109/127)

109


미친 놈인가, 진짜. 애 몸 약한 거 알면서 기절할 때까지 하고 싶냐, 진짜. 그렇게 싸니
좋으셨어요?
…솔직히 존나 좋기는 해서 할 말이 없었다. 현규진은 체력을 소진해 기절하듯 잠이 든 유원의
몸을 따뜻한 물수건 여러 장을 만들어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오일로 난리가 난 다리 안쪽도
조심조심 닦아 주고, 부은 아래와 안쪽도 정말 조심히 닦아 주었다.
하얀 살결 여기저기에는 저의 흔적이 잔뜩 남아 있었다. 세게 쥐지 않는다고 했는데도 허리와
팔 같은 곳에 제 손자국이 남은 걸 보니 너무 미안하면서도… 묘하게 꼴렸다. 자책과 발기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걸까. 어이가 없었지만, 그게 진짜 됐다.
“잘 자.”
유원이 깨지 않도록 작게 인사한 현규진이 살짝 보송해진 이마를 손으로 덮어 보았다. 아까는
열이 있는 것 같았는데 다행히 지금은 심각한 생각이 들 정도의 열은 없었다.
몸을 닦은 수건을 옆으로 둔 현규진이 스탠드를 끄고 유원의 품 쪽으로 붙어 누웠다. 섹스를
하고 안 하고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히 똑같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몸을
잔뜩 깊게 마주했다는 사실은 현규진을 무척 기쁘게 했다.
평소 그렇게 편의점을 다녀도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베이비오일이 갑자기 오늘 눈에
들어온 건 어쩌면 운명이 아니었을까. 현규진은 앞으로 다시는 베이비오일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규진아….”
“어, 깼어? 자자, 아직 밤이야.”
“으응…. 같이….”
“응, 같이 자.”
눈도 못 뜨면서 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조금 다가오는 유원을 사랑스럽게 바라본
현규진이 품에 가득 안고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잘 자, 여보.”
“응…. 잘 자아….”
“여보라고 해 줘야지.”
“…여보오….”
“사랑해.”
“…사랑해애….”
잠결에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하는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게 또
귀여워 웃음이 났다. 체력이 똑 떨어져 잠든 애를 괴롭힐 수는 없어 더 말을 시키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가볍게 머리를 쓸어 주곤 그 위에 입을 맞춘 현규진이 눈을 감았다. 아직 가시지 않은
후끈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나 진짜 발정 났나. 다소 노골적인 마지막 생각과 함께 몸에서
힘이 빠졌다.
***
자기 전에 느낀 그 열이 진짜 열이었다니. 잠들기 직전까지는 흥분이 가시지 않는 줄 알
정도로 존재감이 그리 없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머리가 너무 묵직하고 아팠다. 열도 38
도까지 오르고,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현규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옆에 앉아 온도계를 바라보는 유원을 겨우 올려다보았다.
유원이 아프지 않아 다행이긴 하지만, 왜 제가 열이 나서 이러고 있는지 기가 막혀 할 말이
없었다.
“머리 많이 아파? 약 먹었으니까 열 떨어질 거야…. 아니다. 병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일어날
수 있겠어? 병원 가서 약 타오자.”
“괜찮아. 어제 내가 너무 긴장했나 봐. 긴장 풀려서 그런 것 같은데, 괜찮아.”
“나 때문에 미안해….”
“왜 너 때문이야. 네가 뭘 어쨌다고. 왜 그런 말을 해.”
어제 섹스를 하는 내내 현규진이 저를 내내 살피고 배려했다는 것을 알기에 유원은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가 아플까 봐 걱정하고 긴장했던 것이 풀리며 이렇게 몸이 아파 버린
것 같았다.
“나 챙기느라 그런 거잖아….”
“그럼 좋아하는 사람 안 챙겨? 너도 나 챙기잖아.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너한테 잘 보이려고
긴장했던 게 풀린 거지.”
“…너 아픈 거 진짜 오랜만에 봐서 더 걱정 돼.”
중학생 때 제가 추울까 봐 현규진이 패딩을 벗어 줬다가 크게 감기에 걸린 것을 본 뒤로
이렇게 운신도 하지 못하고 누워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유원은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시 현규진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감기인가? 아니면 몸살?”
“감기면 너 나랑 같이 있으면 안 되는데.”
“왜…. 넌 내가 감기 걸렸을 때 계속 같이 있었잖아.”
“그러다 너 옮으면 어쩌려고. 이제 학교도 가야 하는데.”
“괜찮아. 지금은 내가 튼튼이니까 내 말 들어.”
“네, 튼튼님.”
창백한 얼굴로 웃은 현규진이 열이 올라 뜨거운 손을 들어 유원의 뺨을 매만졌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속상한 얼굴을 한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쪽팔려….”
“뭐가?”
“잘 보이고 싶었는데 이게 뭐야. 섹스하고 앓아눕기나 하고.”
“괜찮아. 넌 아파도 잘생겼어.”
“진짜?”
“응, 지인짜.”
“너도 아플 때 존나 예뻐.”
작게 소리 내어 웃은 유원이 열이 올라 따뜻한 현규진의 쪽 뽀뽀했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죽도 먹고 약도 먹었으니까 좀 자자, 이제. 자고 일어나서도 열 안 떨어지면 그땐 같이 병원 가.
알았지?”
“응, 알았어. 나 자는 동안 넌 나가서 좀 쉬어. 같은 방에 있다가 괜히 너까지 아플까 봐 걱정
돼.”
“내 말 들으랬지.”
고개를 제법 단호히 저은 유원이 현규진 옆 이불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왔다.
“고집 좀 봐.”
“…내가 고집 세서 싫어?”
“정유원이 어떻게 싫어. 다 좋아. 안아 줘.”
졌다는 듯 팔을 벌린 현규진이 곧 저를 가득 끌어안는 유원을 안은 채 눈을 감았다. 유원이
아픈 건 싫지만, 떨어지는 건 더 싫었다. 게다가 유원도 저와 같이 있고 싶다는데 굳이 제가 그
다정함을 밀어낼 이유는 없었다. 머금고 또 머금어도 내내 안달이 나는 다정함을 어떻게
마다할 수가 있겠는가.
“잘 자, 규진아. 자다가 아프면 꼭 나 깨워, 알았지? 내가 옆에 계속 있을 거니까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제 품에 안겨 고개를 든 유원이 꼼꼼하게 당부하는 것을 듣던 현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보다 한참 작고 약하다는 걸 아는데도 유원이 제 옆에 있다는 것, 그 하나로 마음이 놓이고
너무나 든든했다.
제가 곁에 있어 좋았다는 유원의 말이 떠올랐다. 유원도 지금 제가 느끼는 이런 감정과 비슷한
것을 느꼈을 거라 생각하니 열이 나는데도 너무나 행복해졌다. 강한 의지를 담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유원을 보며 웃은 현규진이 두 팔 가득 유원을 끌어안았다.
아파도 그 무엇 하나 걱정되는 게 없는 날이었다. 언제나 저를 지켜 줄 유원이 있으니까.
***
현규진은 대학이 싫었다. 고등학생 땐 대학생이 되면 자유롭게 시간을 분배해서 유원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함께 살면서 신혼부부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정말 다 착각이고, 헛된 망상이었다는 걸 입학하고 보름 만에 알아 버렸다.
“야, 밥 먹으러 오라더니 죽상을 하고 앉아 있어.”
한국대에서 세 정거장만 가면 있는 세준대에 붙은 최해영이 같이 점심을 먹을 수 있냐고 물어
그냥 오라고 하긴 했지만, 딱히 마주 앉아 회포나 풀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그냥 꺼지라고
할걸. 현규진은 불만스럽게 타코를 한입 베어 무는 최해영을 보며 콜라나 한 모금 빨았다.
“멍유는?”
“수업 같이 듣는 애들이 먹자고 해서 빠질 수가 없대.”
“아, 그래서 나 오라 그랬냐?”
“어.”
“둘이 대학 가서 드디어 떨어지나 했더니 이게 뭐냐? 식장에도 같이 들어갈래?”
“그럴 건데.”
뭐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씨발. 쯧, 혀를 찬 현규진이 제 앞에 놓인 타코를 들어 한입 먹었다.
점심을 걸렀다고 하면 유원이 속상해할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이유였다.
“야, 여긴 물 좋냐?”
“넌 또 헤어졌냐?”
“엉. 붙은 학교도 너무 멀고, 뭐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그냥 자연스럽게? 괜찮은 애 있으면
소개 좀.”
“괜찮은 애를 왜 너한테 붙이냐.”
“네가 사귈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못 붙이는데. 어차피 넌 멍유 있어서 안 만날 거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넘겨. 김준재 연락은 차단하고.”
그 새끼 요즘 여자 만나려고 존나 꾸미고 다니고 지랄. 인스타 보다 토하는 줄. 최해영이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현규진에게 김준재의 인스타그램 사진을 보여 주었다.
진중한 척, 유쾌한 척, 사람 좋은 척, 풋풋한 척 사진을 찍어 쉬지 않고 올린 것을 보니 확실히
속이 안 좋아지긴 했다.
“아무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괜찮은 애 있으면 무조건 나. 그리고 너네 5 월에 축제하잖아. 나
무조건 올 거야.”
“나도 모르는 축제를 넌 어떻게 아냐?”
“야, 매년 하는데 그것도 안 찾아봤냐?”
“축제는 씨발, 무슨. 축제 아니어도 이러는데 축제 준비한다고 붙어 다닐 거 생각하면…. 아오.”
유원이 과 사람들이랑 같이 점심을 먹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그럴 수도 있고, 그럴 일이 또 많이 생길 거라는 건
각오하고 있지만, 그래도 막상 겪고 나니 자꾸 한숨이 나고 담배가 생각났다.
“멍유는 과 사람들이랑 잘 지내나 본데 넌 뭐야. 너 원래 성격대로 하지 말고 멍유한테 하는 거
반만 흉내 내. 그럼 너도 사람들이랑 잘 지낼 수 있어.”
“뭐래. 너나 잘해.”
“난 존나 이미 과의 중심이고.”
“지랄.”
“근데 역시 너랑 김준재랑 같이 다닐 때가 더 좋긴 했어. 입학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몇 번 들더라. 그래서 너도 그럴 것 같아서 근처 온 김에 온 거야. 나 존나
착하지. 해영이 보고 싶었지.”
“죽던지.”
씩 웃는 최해영을 보니 문득 미술실에 숨어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담배를 피우고, 웃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리 오래 지난 일도 아닌데 뿔뿔이 흩어져 지내고 있어 그런지 무척 예전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가 좋긴 했지. 고개만 돌리면 정유원도 바로 보이고. 다른 반이어도 복도만 좀 가면 바로
눈에 보이니까 좋고. 밥 먹을 데도 급식실 하나고, 쉬는 시간도 똑같고, 학교 가는 시간 끝나는
시간 다 똑같아서 무조건 나랑만 다니고.”
“와, 입만 열면 멍유, 멍유 그러는 거 더 심해졌네. 너 그거 병이야. 멍유병.”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최해영을 보며 혀를 찬 현규진이 콜라를 한 모금 더 쭉 빨며 답답한
마음에 괜히 가게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멍유다.”
최해영의 말처럼 창밖, 그러니까 제가 있는 곳 길 건너 피자 가게 문 앞에 유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본 원지호와 누군지 모를 남자 두 명이 있었다. 안
가고 서 있는 걸 보니 먼저 가게에서 나와 아직 나오지 않은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3 월의 햇살이 밝게 떨어지는 아래에서 맞은편에 선 누군가의 말을 들은 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가볍게 말아쥔 채 입술 위를 가리듯 누르며 웃었다. 원지호도 웃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웃는 걸 보니 뭔가 유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이름 모를 놈이
웃긴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저기요.”
그때 테이블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현규진은 바라보지 않았고, 최해영이 대신 고개를 돌려
테이블 옆으로 선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번호 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대꾸는커녕 돌아보지도 않는 현규진의 뒤통수를 보며 여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최해영이
얼른 그 상황을 수습하듯 현규진의 팔을 흔들었다.
“현! 너한테 하실 말씀 있으시다잖아.”
“아, 좀 꺼져 봐.”
최해영의 손에서 팔을 빼낸 현규진의 시선이 이제는 고개를 들어 누군가와 눈을 맞춘 채 웃고
있는 유원의 얼굴에 닿았다. 곧 문이 열리고 안에서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이 나와 함께 학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얼굴을 본 게 어딘가 싶어 멀어지는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려는 그 순간, 유원을 내려다보는 누군가의 손이 올라갔다. 설마…? 하는
순간 올라간 손이 유원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 꾹 눌렀다.
“허….”
그와 동시에 헛웃음이 터졌다.
<공금 olly>
친구 사이 고백 금지-110 화(110/127)

110


마음은 이미 타코 가게를 박차고 나가 길을 건너 유원을 둘러업고 무인도행 배를 탔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제가 갑자기 저 무리에 난입을 해 깽판을 치면 유원이 무척
곤란해질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미친 새끼가….”
“자기소개 하냐?”
“뭐, 씨발.”
안 그래도 빡치는데 살살 긁는 최해영에게 더 화가 난 현규진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슬쩍 옆쪽 눈치를 본 최해영이 목소리를 죽여 말을 쏟아 냈다.
“저 끝에 앉은 사람이 번호 달라고 너 계속 기다리다가 개빡쳐서 갔다고. 아니, 싫으면 싫다고
말이라도 해야지. 너 취향이라고 왔는데 쳐다보지도 않는 건 뭔 개매넌데.”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내가 와서 물어보랬어? 물어봐도 되는지 나한테 허락은 받았대?”
“조용히 해, 미친.”
빨대를 대충 빼서 테이블 위로 던지고 컵째로 콜라를 벌컥벌컥 마신 현규진이 얼음 하나를
물고 아드득아드득 깨물었다. 다른 사람과 뒤섞여 웃고 닿던 유원의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예쁜데다가 다정하고, 착하면서 자기 일도 잘하고 민폐 끼치는 성격도 아니니 어느 자리에
있든 당연히 사랑받고 예쁨받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도대체 사회인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머리를 귀엽단 듯 누를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제가
유원에게 장난치며 했던 행동이라 더 싫고, 짜증이 났다. 머리를 누르면 키가 더 작아진다면서
입술을 앞으로 내밀고 불만스럽게 말하던 귀여운 얼굴이 눈앞에 선명해 더 그랬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 이제.”
“커피 마시자, 커피.”
“커피는 알아서 마셔.”
“아, 왜. 밥이랑 커피는 세트 코스지. 너 어차피 다음 수업까지 시간 많다며.”
잔뜩 피곤한 얼굴로 대놓고 봐도 익숙하다는 듯 씩 웃은 최해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규진을
따라나섰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현규진은 계산을 하고 나가 학교 쪽으로 향했다.
“멍유는 벌써 적응해서 사람들이랑 잘 지내는데 왜 너만 아직도 멍유 붙잡고 늘어지냐? 너도
좀 너네 과 사람들이랑 다녀.”
“씨발, 뭘 붙잡고 늘어져. 뭐 정유원은 싫어하는데 나 혼자 이러는 거야?”
“알겠는데 대학 와서까지 멍유 중심으로 사는 건 너나 멍유나 피곤하잖아.”
“왜 피곤한데.”
“아무리 봐도 멍유가 잘못 걸렸어. 어! 저기 카페 가자. 저기 크림 라테 유명하다던데.”
슬슬 말을 돌리는 최해영을 불만스럽게 본 현규진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대충 눈으로
자리를 찾는데 유원의 얼굴이 시선 안에 걸렸다. 아까 피자 가게에서 나와 이 카페에 온
모양이었다. 테이블 세 개를 붙여 앉아 다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니 왜인지
모르게 심통이 났다.
“야, 자리 없는데 사서 나가자, 그냥.”
“저기 하나 있는데?”
유원의 무리가 앉은 자리 옆으로 딱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가리킨 최해영이 눈치도
없이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유원을 발견하고는 손까지 흔들며 인사를 나눴다.
“멍유!”
“어…? 최해영?”
“오랜만이다. 나 근처 왔다가 현이랑 밥 먹었어.”
“아…. 그랬어?”
둘의 대화를 들으며 가까이 다가가자 유원의 시선이 저에게 닿는 게 느껴졌다. 심통이 난 못난
인간처럼 보이고 싶진 않아 나이스하게 씩 웃으며 인사한 현규진이 의자에 대충 가방을 두고
카운터로 향했다.
“나 크림 라테!”
“저게 진짜.”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최해영은 떨어져 있던 테이블을 유원의 무리 쪽 테이블에 붙인 채 쉴 새
없이 입을 놀리고 있었다. 불쑥 짜증이 났지만, 이렇게 된 이상 별다른 수는 없었다. 그냥
적당히 앉아 있다가 유원을 데리고 나가는 수밖에.
크림 라테 한 잔과 제가 마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테이블로 갔을 땐 이미 최해영은 유원의
같은 과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있었다.
서로 인스타 아이디를 주고받고 난리가 난 현장 안에서 현규진은 비어 있는 가장 끝자리로
앉았다. 유원을 빼내서 같이 앉고라도 싶은데 원지호와 아까 유원의 머리를 꾹 누르던 놈
사이에 앉아 있어 쉽게 빼낼 수도 없었다.
“규진아!”
그 와중에 저와 대각선 끝으로 제일 멀리 앉은 원지호가 손을 번쩍 들어 인사하는 것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커피를 한 모금 쭉 빨던 현규진이 대충 손을 들어 그 인사에
응했다. 같은 학교가 아닌 최해영에게는 웃고 살갑게 굴던 사람들이 저는 조금 어려워하는 게
느껴졌다.
“그… 유원이 친구 맞지. 매일 과방 건물 앞에 있는. 그 강의실 앞에서도 계속 봤는데.”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현규진이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을 굳이 기억하고 싶진 않지만, 이
얼굴은 언젠가 본 것 같았다. 귀 아래에 딱 달라붙을 정도로 짧은 단발, 그것도 보라색 머리를
하고 있기도 하고, 귀에 피어싱이 굉장히 많아 기억이 났다.
“아, 어.”
“어제 봤을 때 피어스가 너무 예뻐서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네.”
“산 지 몇 년 돼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냥 제일 심플한 거 산 거라 별로 특별할 것도 없고.”
“네가 해서 더 예뻐 보이는 건가? 피어스도 얼굴 따진다니까. 위에 하나 더 뚫어도 예쁠 것
같은데. 더 할 생각은 없어?”
뭐 딱히 피어싱에 엄청난 관심이 있는 건 아니라 고개를 저은 현규진이 커피를 한 모금 다시
쭉 빨아들였다.
“타투는 관심 없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뭐 별로.”
정유원 이름이나 얼굴을 새길까. 정유원이 기겁하겠지. 그 상황을 생각하니 또 좀 재미있을 것
같긴 했다. 정유원 이름으로 타투 스티커나 제작해 볼까. 놀라서 멍하니 저를 볼 유원을
떠올리며 웃은 현규진이 저에게 닿는 시선에 눈동자를 그쪽으로 움직였다.
“…….”
“…….”
입에 빨대를 문 유원이 저를 보고 있었다. 망고 에이드로 추측되는 노오란 음료가 빨대를 타고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현규진은 진심으로 유원의 입 안에 담기고 싶어졌다.
아, 둘이 있고 싶다. 내가 왜 정유원이랑 같은 카페 안에서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되지.
뽀뽀하고 싶다. 수업 중에 나 안 보고 싶었냐고 물어보고 싶다. 나가자고 할까. 대놓고 말할
분위기는 아니라 톡을 보내려 휴대폰을 꺼낸 순간 귓불에 뭔가가 닿았다.
“이거 오닉스야?”
깜짝 놀란 현규진이 고개를 홱 돌리며 귀를 손으로 가렸다. 제 귀가 조금 전까지 위치하던
곳에 어색하게 있는 여자애의 손을 본 현규진이 확 인상을 썼다.
“아, 미안. 놀랐어? 자세히 보고 싶어서 그런 건데 미안해.”
왜 멋대로 남 몸에 손을 대고 지랄이냐고 진짜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고 싶었지만, 이름도
모를 이 애는 유원과 같은 과 동기였다. 제가 성질을 내서 깽판을 치는 순간 유원과도
어색해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웃음이 나오지 않는 입술을 겨우 올려 웃음처럼 보이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가 입꼬리를 푼
현규진이 최해영을 바라보았다. 라테 위에 크림도 다 퍼먹은 것 같겠다 이제 그만 여기서
사라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야, 가자.”
“아, 왜.”
“…안 나와?”
“너 혼자 가.”
“안 나오면 소개고 축제고 김준재만 해 줄 줄 알아라.”
“…아, 미친. 인성 봐라.”
현규진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최해영이 주변에 친해진 애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눴다.
현규진은 저를 따라 고개를 돌리는 유원에게 휴대폰을 들어 살짝 흔들어 보였다.
“이따 봐.”
“…응. 빠이.”
빠이, 소리에 웃은 현규진이 구시렁대는 최해영과 함께 카페를 나섰다. 사람이 득실대는
곳에서 나오니 이제야 좀 숨이 트였다.
“야, 너네 학교 물 존나 좋네. 네 옆에 있던 애도 존나 예쁘던데. 나 소개 좀.”
“우리 과 아니라 나도 누군지 몰라.”
“그럼 멍유한테 빌붙어야지.”
“꺼져. 정유원한테 연락하지 마.”
질린다는 얼굴로 본 최해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시간을 확인한 뒤 현규진의
팔을 툭 쳤다.
“암튼 점심에 커피까지 땡큐. 담엔 내가 쏠게. 우리 학교 쪽에 와. 멍유랑 같이. 우리 학교 앞에
꼬칫집 있는데 존나 개쩔음. 내가 밤새 쏜다.”
“유원이가 그런 데를 왜….”
가냐고 대꾸하려다가 생각해 보니 중학교 다닐 때 유원이 학원 앞 포장마차에서 팔던 달달한
닭꼬치를 맛있다고 잘 먹었던 게 떠올랐다. 그렇게 맛있는 데라면 유원과 함께 가서 맛있는 걸
먹이고 싶었다.
“알았어. 너 오후 비는 날 말해.”
“오케이. 그럼 나 간다. 배웅 안 해도 돼.”
“안 할 거야.”
“…멍유였어 봐라. 안 해도 된다 그래도 가는 데까지 데려다줬지.”
“정유원이랑 네가 같냐? 자꾸 정유원이랑 널 동일선상에 두고 비교하는데 존나 기분
더럽거든.”
“네, 네. 두 분 천년의 사랑 잘 봤습니다. 간다, 멍유 스토커야!”
동시에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어 인사하다가 작게 웃음이 터졌다. 결국은 팔을 크게 붕붕
흔들고 역으로 가는 최해영의 뒷모습을 보던 현규진이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유원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오후 수업 잘 듣고 이따 봐]
[끝나고 너네 강의동 앞에 가 있을게]
[얼굴만 겨우 좀 봐서 더 죽겠다]
[여보 뽀뽀]
[쪽]
[내거여보자기♥ : 쪽쪽]
유원이 보고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던 저장명 뒤에 붙는 뽀뽀하는 소리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현규진이 그보다 몇 배는 긴 쪽쪽쪽쪽 세례를 보내며 학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유원보다 수업이 더 빨리 끝나 슬슬 걸어 강의동 앞까지 온 현규진은 지나는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주변에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학교 다닌 지 이제 보름 정도 되었는데 그사이 현규진은 스무 번도 넘게 번호를 줄 수 있냐는
말을 들었다. 친구와 함께 다가와 묻는 사람도 있었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정말 너무
취향이라면서 구구절절 이야기를 쏟아 내는 사람도 있었다.
현규진은 그런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귀찮았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빨리 유원이 나와서 집에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1 교시부터 둘 다 수업이 있어 일찍 집에서 나와 지금까지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 애가 타고 마음이 다 불안했다. 카페에서 잠깐 얼굴을 본 것을
떠올리면서 버티기에는 그 시간이 너무 짧고 바로 옆에서 본 것도 아니라 보고 싶은 마음을
부추기기만 할 뿐이었다.
“어, 끝났다.”
강의동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현규진은 그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따뜻한
색으로 보이는 유원을 발견했다. 나오자마자 노트북까지 든 가방을 벗겨 제 어깨에 걸쳤다.
“수업 잘 들었어? 어디 카페 좀 갔다가 저녁 먹고…. 응? 기분 안 좋아? 무슨 일 있었어?”
어쩐지 시무룩해 보이는 것 같은 유원의 얼굴을 고개까지 기울여 살핀 현규진이 제 손목으로
감기는 가느다랗고 예쁜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더니 이내 유원이
저를 잡은 채 걷기 시작했다.
“자기야?”
왜 기분이 안 좋은 건지도 아직은 알 수 없고, 어디로 가는 건지도 알 수 없지만, 현규진은 저를
끌고 가는 유원의 뒷모습을 보며 기꺼이 걸음을 옮겼다. 유원과 함께라면 종착지가 어디든
좋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11 화(111/127)

111


“유원아, 어디 가는데…?”
저를 끌고 가는 게 좋기는 하지만, 기분 좋은 목소리로 물을 상황은 아닌 것 같아 현규진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유원에게 물었다. 하지만 유원은 앞으로 걸음만 옮기고 대답은 해 주지
않았다. 뭔가 단단히 화가 나거나 삐진 것 같은데 왜 그런 건지 머릿속에 맺히는 게 없었다.
도서관을 지나고 계단을 내려가 학교 정문까지 쭉 간 유원은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규진은 그제야 유원이 집으로 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와, 뭐지…. 아까 톡으로 쪽쪽할 때 기분 괜찮았는데. 그 뒤로 수업하느라 톡도 못 하고, 밑에 와
있다고 보낸 게 전분데. 진동으로 안 해 놨는데 내가 톡 보내서 뭐 곤란한 일 있었나? 아닌데,
정유원 항상 진동으로 해 두는데.
묻고픈 것을 전부 뒤로 묻어 두고 얌전히 집까지 끌려간 현규진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9 층을
누르는 유원의 옆모습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뭐에 화가 나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굴
한 번 제대로 안 보여 주는 건지 얼른 이유를 듣고 싶었다. 뭐…. 저야 정유원이 이대로 저를
끌고 가서 감금까지 시켜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유는 들어야 할 것 같았다.
9 층에 내려 비밀번호를 누르는 순간까지 잠자코 기다리던 현규진이 열리는 문 안으로 한 번
더 끌려 들어갔다. 이제 애교스러운 말이든 노골적으로 야한 말이든 편히 할 수 있는 공간에
들어왔다는 생각과 함께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물음이 맺혔다. 일단 내내 보고 왔던 뒷모습을
품으로 꽉 끌어안고 싶었다. 잡히지 않은 한쪽 팔을 든 순간, 유원이 뒤돌았다.
“…얼굴 내려 줘….”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서운하거나 기분이 안 좋은 이유를 말해 주는 것도 아닌 얼굴을 내려
달라는 말에 의아해진 현규진이 일단 유원이 원하는 대로 상체를 수그려 얼굴을 내려 주었다.
귓속말을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때릴 거야? 나 뭐 뺨 맞을 짓….”
말이 그대로 끊겼다. 현규진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먼저 키스하는 유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꿈인가? 정유원이 날 끌고 집에 와서 안으로 제대로 들어가기도 전에 현관에서
키스한다고?
상황은 꿈같은데 입술에 닿는 따뜻함은 꿈일 수가 없었다. 현규진은 그대로 살짝 고개를
기울여 조금 더 깊게 입술을 마주 물었다. 닿아만 있는 혀를 옭아매며 당기자 유원의 목에서
작게 앓는 소리가 울렸다.
“으응….”
작게 새어 나오는 가느다란 소리만 들어도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현규진은 그대로 유원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아 안아 올렸다. 갑자기 몸이 들리는 것에 놀란 유원이 놀라 현규진을
와락 끌어안았다.
“무서워, 내려 줘어….”
유원을 잡고 있던 손 하나를 떼어 뒤통수를 감싸듯 쥔 현규진이 살짝 힘을 주자 그대로 다시
유원의 얼굴이 내려왔다. 두 팔과 다리로 저를 꽉 안은 채 다시 키스하는 유원이 좋았다.
운동화를 벗은 현규진이 입 안에서 움직이는 유원의 혀를 마주 머금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같이 사는 집 구조에 이제 익숙해지긴 했지만, 키스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쉽게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현규진은 유원을 식탁에 앉히며 몸을 숙여 깊게 키스를 이어
갔다.
“아….”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목을 꼬옥 감고 있던 두 팔이 느슨하게 풀리며 유원의 손이 움직였다.
현규진은 제 뺨을 매만지던 손이 귀에 닿는 것에 어깨를 움칠댔다. 열이 오른 손끝이 귓불을
스치더니 이제는 아예 피어싱 위를 살살 누른 채 문지르고 있었다.
“…아, 거기 만지면 나 서는데.”
식탁 위에 앉은 유원의 다리 사이에 선 채 현규진은 그러면 곤란하지 않겠냐는 듯 유원과 눈을
맞췄다. 깊게 꽤 길게 키스를 나눠 살짝 통통해진 것 같은 입술이 귀여웠다.
“읏….”
뺨을 만지는 것처럼 키스할 때 잠깐 귓불을 스치고, 만지는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유원은
제 피어스 만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몸을 숙여 유원을 두 팔 사이에 두고 식탁을 짚은
현규진이 귓불 위를 둥글리며 매만지는 유원을 느낀 채 하릴없이 몸을 떨었다. 다리 사이가 선
것은 당연하고, 이러다 쌀 수도 있을 정도로 흥분해 버려 곤란했다.
“…아까도… 그럼…. 섰어?”
“하…. 아까?”
“…아까… 카페에서…. 보라가 여기… 만졌잖아.”
유원의 엄지와 검지가 현규진의 피어스 위를 누른 채 느릿하게 움직였다. 단정히 깎인 손톱이
피어스 옆을 누르거나 스치기라도 할 때면 허벅지 안쪽으로 힘이 확 들어갔다.
“보라? 보라가 누구….”
머릿속으로 보라색으로 염색을 한 단발머리 여자애 얼굴이 떠올랐다. 피어싱이나 타투 같은
쪽에 관심이 많은지 저에게 피어싱 이야기를 하고, 제 것을 보려고 귓불을 잡았던 기억까지
밀려드는 것은 순간이었다.
이제야 학교에서부터 집까지 저를 끌고 온 유원의 행동과 어쩐지 시무룩하고 토라진 것 같은
얼굴까지 모든 게 다 이해가 됐다. 그러니까 지금… 정유원이 어마어마하게 티를 내면서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 그 보라색 머리? 걔가 이름까지 보라야?”
“…머리색도… 기억해?”
“아까 내 옆에 앉았던 피어싱 열 개씩 한 걔 말하는 거 맞지?”
“……피어싱 개수도 세어 봤어?”
피어싱이 많다는 건 기억이 나는데 사실 몇 개씩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굳이
자세히 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가 말을 하면 할수록 동요가 커지는 유원이
너무 귀여워 그냥 아무 말이나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귀엽고 사랑스럽고 야한 순간을
어떻게 놓칠 수 있을까.
“세어 본 건 아니고 그냥….”
“…….”
“자기야. 그거 때문에 아까 나 잡고 집까지 막 온 거야?”
“…….”
“내 귀 만지려고?”
“…빨리… 대답해…. 아까도 그랬어?”
“아까 뭐? 아, 걔가 만졌을 때도 섰냐고?”
조금만 더 장난을 쳤다가는 펑펑 울 것만 같은 얼굴이라 여기서 멈추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현규진은 서러워 보이는 유원의 눈동자를 마주한 채 다가가 코끝과 입술, 그리고 뺨에 차례로
입 맞췄다.
“기분 나빴어. 말도 없이 나한테 손대서. 너랑 같은 과 사람만 아니었어도 욕했을 거야.”
“…….”
“나 너한테만 그러는 거야. 다른 사람한텐 안 그래.”
다시 유원의 입술에 쪽 뽀뽀한 현규진이 고개를 들어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너한테만 쉽고, 너한테만 헤픈 거야.”
소곤대는 목소리에 유원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기분이 풀렸는지 식탁 아래로
내려온 다리를 달랑이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이 몸을 더 꽉 밀착했다.
“네가 귀 만져서 섰어, 나. 아….”
섰다고 하는데도 제 귀에서 손을 떼지 않는 유원이 너무 야했다. 진짜 오늘 사람 하나
죽이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귀에서 번지는 찌릿찌릿한 감각에 심호흡한 현규진이
유원의 겉옷과 얇은 니트를 벗겼다. 부끄러워 눈을 제대로 못 마주치면서도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 유원을 보기만 해도 사정감이 밀려들었다.
“걔가 내 귀 만질 때 싫었어?”
“…응…. 기분이 이상했어. 네가 깜짝 놀라는 거 보니까 더….”
“그건 진짜 말 그대로 놀라서 그런 거야. 꼴려서 그런 게 아니고.”
제가 집 안으로 안고 오느라 벗지 못한 유원의 운동화를 벗겨 바닥으로 놓은 현규진이 바지
버클까지 풀어 엉덩이 아래로 내려 주었다. 어느새 얇은 하얀 티셔츠 한 장과 속옷만 입고
식탁에 앉아 있는 유원을 보니 속옷 안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현규진은 그대로 제 버클만 풀어 속옷 안에서 잔뜩 발기한 성기를 꺼냈다. 갇혀 있다가
튀어나온 것은 끝이 젖어 있었다.
“내일도 수업 많은데 힘드니까 넣진 않을게. 만져 줘.”
자주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러 번 봐서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유원은 볼 때마다 커서 놀라게 되는 현규진의 성기를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아…. 읏….”
제 손만 닿아도 배 쪽으로 올라붙어 꺼떡이는 현규진의 것을 눈에 담은 유원이 손가락을 펼쳐
단단하고 뜨거운 것을 쥐었다. 위아래로 손을 움직여 쓸어 주는 것만으로도 손아귀가 다
뻐근했지만, 그래도 유원은 현규진을 기분 좋게 해 주고 싶었다.
“…규진아, 좋아?”
“좋아. 기분… 아, 너무 좋아. 네 손… 읏….”
선단을 만지다가 몸쪽으로 손을 붙여 만지니 현규진의 몸이 기울어졌다. 제 몸 양옆으로 팔을
뻗어 겨우 식탁만 짚은 채 가까스로 버티는 현규진의 움직임과 숨소리가 너무 야해 유원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
현규진의 고개가 숙어지며 귀가 눈앞으로 보였다. 유원의 시선이 귓불에 있는 작고 까만
피어스에 닿았다. 피어싱이 신기해서 귀를 만지거나 할 때면 현규진은 늘 기분이
이상하다면서 야한 농담 같은 것을 하곤 했다. 그땐 그냥 짓궂은 장난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
고개를 기울여 현규진의 피어스 위를 혀끝으로 톡 건드린 것은 충동적이었다. 제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생각할 수도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유원은 지금
현규진의 귓불을 할짝이고 있었다. 까만 피어스 위를 혀끝으로 톡, 톡 건드리다가 그 주위를
빙 둘러 핥자 현규진의 뜨거운 숨이 와르르 쏟아졌다.
“…하…. 씨발, 읏…. 아, 유원아, 좋아.”
귓불을 할짝이느라 성기 매만지는 것을 잊은 유원의 손 위를 현규진이 감쌌다. 커다란 손이
위아래로 움직이자 그 안에 숨겨진 유원의 손이 따라 움직이며 성기를 빠르게 쓸었다.
귓속으로 들어오는 유원의 혀 움직이는 소리와 피어스를 건드리는 말캉하고 뜨거운 느낌,
그리고 입술로 귓불을 머금었다가 뗄 때마다 작게 울리는 뽀뽀 소리 같은 것들이 현규진을
극으로 몰았다. 기분이 좋다는 말로는 모자랐다.
“아…. 후우, 윽, 잠깐… 읏…!”
귓가에서 초옥…. 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유원의 입술이 눌리는 느낌이 나는 순간 현규진은
사정했다. 잔뜩 터져 나온 정액이 유원의 손을 적시고, 뽀얀 허벅지 위와 하얀 티셔츠 위로
마구 튀었다.
쉽게 가시지 않는 여운에 잘게 몸을 떤 현규진이 고개를 들어 유원과 눈을 맞췄다. 시선이
뒤엉키자마자 심장이 확 조여들었다. 너무 좋은데 어떡하지. 밀려드는 사랑에 휩쓸려 다가간
현규진이 그대로 유원의 입술을 갈급히 머금었다. 제 마음처럼 잔뜩 젖은 곳을 잔뜩 머금고
헤집은 뒤에야 눈에 초점이 맞았다.
“하…. 방에 갈까? 그…. 끝까지 안 하긴 안 할 건데, 그냥 이대로는 못 끝내겠어. 나 너 만지고
싶어.”
조금도 제 눈을 벗어나지 않는 현규진의 시선을 보며 유원이 미소 지었다. 두 팔을 들어 어깨
위로 얹자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그와 동시에 몸이 식탁에서 떨어졌다. 유원의 두 팔이
현규진의 목을 가득 끌어안았다.
안겨 방으로 가는 동안 떨어지지 않던 입술이 살짝 떨어진 틈으로 달아오른 숨이 흘렀다.
여전히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현규진이 좋았다. 그대로 현규진의 귓가에 다가간 유원이
온몸을 두드리는 열기가 뭉쳐 맺힌 용기를 소곤댔다.
“…끝까지… 해도 돼.”
저를 안은 두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귓가에 쪽…. 뽀뽀하고 얼굴을 떼자 몸이 뒤로
기울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유원은 침대에 저를 눕히고 바깥쪽에 서서 티셔츠를 벗어
던지는 현규진을 눈에 담았다.
곧, 침대 옆 테이블 서랍을 열어 콘돔과 베이비오일을 꺼낸 현규진이 씩 웃으며 유원의 위로
올라탔다.
“정유원, 또 애기 되겠네.”
코끝으로 스치는 베이비오일 향과 함께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온몸을 뒤덮었다.
***
저녁은 여덟 시가 훌쩍 넘어서야 먹을 수 있었다. 그래도 현규진이 자제를 한 덕분에 유원은
까무러치기 직전에 마지막 남은 아주 조금의 체력으로 버틸 수 있었다.
“우리 자기 아, 해.”
“내가 먹을 수 있어.”
“힘든데 숟가락을 어떻게 들어. 자, 아.”
무조건 잘 먹여야 한다는 이유로 제일 큰 사이즈로 시킨 갈비찜 살코기를 들어 밥 위에 얹은
현규진이 먹기 좋게 식혀 유원의 입 앞으로 가져왔다.
베이비오일을 쓰게 될 사람이 저인 줄 생각도 못 하고, 현규진을 놀리려 했던 말 때문에
섹스할 때마다 애기가 되는 유원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힘든 것도
맞고, 팔에 힘이 없는 것도 맞는 이유였다.
“맛있다아…. 너도 얼른 먹어. 힘들잖아.”
“나? 난 솔직히… 체력 반도 안 썼는데.”
“…정말?”
“어. 난 지금부터 내일 아침까지도 할 수 있어.”
현규진이 만족할 수 있을 만큼 하려면 몇 번이나 까무러쳐야 할까? 유원은 갈비찜을
우물거리며 곰곰 생각해 보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12 화(112/127)

112


“…그것도 할수록 잘하게 될까?”
“그렇지 않을까. 뭐든 익숙해지면 더 잘하게 되잖아. 똑같을 것 같은데.”
입 앞으로 또 스윽 다가온 밥을 받아먹은 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했던 것보다 조금
전에 했던 게 조금 더 자연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더 좋기도 했던 걸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것도 하면 할수록 늘긴 할 것 같았다.
지금은 겨우 두 번을 할 수 있지만, 다음에는 세 번, 또 그다음에는 자고 일어나서 네 번….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현규진이 하고 싶은 만큼 저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희망이 생긴 것 같아 좋았다.
“…아, 그런데 아까 카페에서 네 옆에 있던 놈 누구야?”
“지호?”
“말고 다른 쪽에 있던 놈.”
“…다른 쪽? 음…. 아, 도훈이?”
“뭔 도훈.”
“심도훈.”
갈비찜에 든 푹 삶아진 밤을 들어 입 앞으로 가져가자 이제는 익숙해져서 입을 잘 벌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 귀여움을 참지 못하고 갈비찜이 아니라 제 얼굴을 입술 앞으로 들이민
현규진이 조금의 머뭇댐도 없이 쪼옥 뽀뽀해 주는 유원을 보며 씩 웃었다.
“친해?”
“음…. 친해졌어. 아까 밥 같이 먹은 애들이 같은 반이거든. 경영 A 반. 같이 수업도 듣고, 과제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아까 밥 먹은 애들이랑 자꾸 다니게 돼서 많이 친해졌어.”
“아, 친해졌구나. 걔가 아까 네 머리 이렇게 누르고 그러던데.”
손바닥으로 유원의 머리 위를 살짝 누른 현규진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눈을 맞췄다.
“…그랬나? 언제?”
“피자 가게 앞에서. 나 그때 거기 건너편 타코에 있었거든. 그때 봤어.”
“…난 잘 기억이 안 나.”
“뭐야. 기억도 안 날 만큼 자주 하는 거야, 당연해진 거야. 아니면 그 정도는 임팩트도 없게 더
심한 것도 하는 거야?”
“땡. 다 틀렸어. 그렇게 해도 기억이 안 날 만큼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는 거지이….”
밥 한 숟가락을 더 먹여 준 현규진이 시무룩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나만 할 수 있었던 걸 다른 사람한테 다 뺏기는 기분이야.”
“진짜 그런 거 아냐…. 머리 꾸욱 하는 것도 네가 해야 의미도 있고, 재밌는 거지. 남이 하면
정말 별생각도 안 들어. 의미 있고 중요하고, 재밌는 거였으면 아까 언제 그랬는지 바로
기억이 났을 거야.”
“…정말? 내가 하는 것만 의미 있어?”
“응, 정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유원이 얼른 한 번도 쓰지 않은 현규진의 숟가락을 들어 밥을 뜨고,
그 위에 갈비찜을 올렸다. 그리고 현규진이 저에게 해 준 것처럼 한 숟가락 크게 먹여 주었다.
입 안으로 밥이 들어가는 것만 봐도 마음이 다 뿌듯했다.
“아까 보라인가 걔도 나한테 그래. 아무 의미 없어. 머리 보라색인 걸 기억한 건 너무 특이해서
그런 거고, 피어싱 몇 개인지 말한 건 그냥 대충 많으니까 열 개라고 한 거야.”
“하긴…. 보라 머리색이 좀 특이하긴 하지. 어디 있어도 눈에 잘 띄어.”
“넌 절대 그런 튀는 색으로 염색하지 마. 가만히 있어도 얼굴 존나 예뻐서 튀는데 머리까지
튀면 안 돼.”
진지하게도 말하는 현규진을 보며 웃은 유원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전까지는
움직이기도 어려울 만큼 힘들었는데 그래도 밥을 먹으니 조금 더 힘이 생긴 게 느껴졌다.
하지만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모인 건 아니라 유원은 조금 더 밥을 먹었다.
중간중간 현규진과 서로 먹여 주기도 하며 달착지근한 식사를 하고 나니 확실히 아까보다 더
에너지가 생긴 느낌이 났다.
“이제 배불러. 엄청 많았는데 우리 거의 다 먹었어.”
“잘 먹어서 좋네. 갈비찜 먹고 싶으면 여기서 시키면 되겠다. 음, 이제 이거 치우고 올게.
디저트 뭐 먹을까.”
“아이스크림! 거실에서 먹자.”
“움직일 수 있겠어?”
“그러엄.”
현규진을 따라 침대에서 일어난 유원이 잠시 비틀거렸다. 일어나 걸을 만큼 힘이 생기긴
했지만, 한참 다리를 잘 쓰지 않고 현규진의 허리에 감고 있어 그런지 생각만큼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괜찮아?”
“응, 괜찮아. 이건 괜찮은데…. 아이스크림 먹기 전에 일단 씻어야겠어. 다리 사이가… 아직도
좀… 촉촉해.”
“…올해 최고의 말이다. 촉촉해…. 존나 야해.”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다 야하다 그러더라.”
“존나 야하니까. 그럼 아이스크림은 씻고 먹자. 얼른 치우고 올게.”
방을 나가는 현규진을 보던 유원이 다리에 힘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할지 아니면 욕조에 물을 받아 따뜻하게 몸을 담글지 고민이 됐다. 유원은 칫솔을 입에 문 채
샤워부스와 욕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결국, 선택은 샤워였다. 현규진이 기다릴 테니 빨리 씻고 나가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샤워를
하기로 했다. 유원은 입고 있던 현규진의 커다란 셔츠를 벗었다. 벗은 채 밥 먹는 건
민망하다는 제 말에 현규진이 입혀 준 것이었다.
“…….”
거울 안으로 현규진의 흔적이 잔뜩 남은 몸이 보였다. 특히 가슴 쪽이 불긋했다. 현규진이
내내 물고 빨았던 것을 떠올린 유원의 아랫배가 간지러워졌다.
미쳤나 봐, 정말. 두 손으로 뺨을 두드린 유원이 얼른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가 따뜻한 물을
틀고 그 안으로 들어가 씻어 내야 할 것들을 씻었다.
“자기야.”
그때 욕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 문 안 잠갔다. 안으로 빼꼼 고개를 들이밀더니 아예
들어오는 현규진을 보며 문을 잠그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했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유원은 뿌연 유리 쪽으로 몸을 숨기고, 문만 조금 열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왜애…. 빨리 나가.”
“혼자 씻기 힘들지 않아? 아까 휘청휘청했잖아.”
“…괜찮아. 나가, 빨리이.”
“왜 자꾸 나가래.”
칫솔에 치약을 쭉 짜서 입에 문 현규진이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아예 욕조에 걸터앉아 정말 순진무구한 눈으로 유원을 바라보았다.
“여기 들어갈까?”
제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욕조를 가리키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은 잠시 고민했다. 몸을 씻고
있긴 하지만…. 따뜻한 물에 몸을 폭 담그면 나른하니 너무 좋을 것 같았다.
“…같이?”
“응. 같이.”
“…….”
“우리 어릴 때도 같이 자주 씻었잖아. 집에 있는 앨범에 욕조에서 노는 사진 엄청 많던데.”
“그건 어릴 때니까….”
“지금은?”
다 벗고 한 욕조에 들어가서 씻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알아 버린 지금은 쉽게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지만.
“…이것도 한 번 하고 나면 나중에는 익숙해질까?”
“그럼.”
욕조에서 일어나 세면대로 간 현규진이 물을 틀자 고요한 욕실 안으로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양치질을 마치고 수건으로 물 묻은 입술을 닦은 따뜻함이 샤워부스 쪽으로 다가와
몸을 숙였다.
“…으응….”
짙은 민트 향이 서로의 입 안으로 번졌다. 문을 잡고 있던 유원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현규진의 체온이 몸으로 다시 물든 순간 놀랍게도 모든 것이 현규진 쪽으로
기울며 고민이 사라졌다.
“같이 들어갈까?”
“…응….”
씩 웃은 현규진이 욕조로 가 물을 틀었다. 욕조가 꽤 커서 저와 유원이 들어가 몸을 붙이고
앉아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
“물 다 받으면 나와. 갑자기 나오면 추울 수도 있잖아.”
“…….”
욕조 앞에 서 있는 현규진의 등을 본 유원이 세면대 옆쪽으로 놓인 티셔츠를 끌어당겼다. 아까
씻느라 제가 벗은 현규진의 셔츠였다.
욕조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벗긴 하겠지만, 그때 다시 벗더라도 지금은 뭐라도 걸치고 싶었다.
젖은 몸에 제 것이 아니라 커다란 티셔츠를 다시 입은 유원이 샤워부스를 나가 현규진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너한테 맨날 져….”
축축한 따뜻함이 등으로 번졌다. 제 배 위에 감긴 유원의 팔을 본 현규진이 짧게 숨을 뱉곤
살살 몸을 돌려 유원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그냥 나오는 게 부끄러웠는지 제 티셔츠를 다시
입고 나온 유원을 보니 몸 여기저기가 또 홧홧했다.
“싫은데 내가 하자고 해서 억지로 맞추는 거면 안 그래도 돼. 그러라고 하는 말은 아니야.”
“…싫으면 싫다고 하지이. 아무리 좋아해도 싫은 걸 억지로 할 수는 없는 거잖아.”
“우리 자기 진짜 왜 이렇게 똑똑해? 여보는 진짜 뇌도 예쁠 거야. 이 얼굴에 뇌가 안 예쁠 수가
없지.”
유원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톡톡 두드린 현규진이 고개를 내려 쪽쪽 두 번 뽀뽀했다.
“규진이 네가 말하면 뭐든 다 해 주고 싶어…. 나 진짜 너 많이 좋아하나 봐.”
“그래도 하기 싫은 건 안 해도 돼. 알지?”
“응, 알지.”
씩 웃은 현규진이 물에 젖은 유원을 가득 끌어안았다. 등 뒤로 쏟아지는 따뜻한 물보다 유원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도 진짜 많이 좋아해.”
살짝 욕조에 걸터앉은 현규진이 유원을 제 다리 위에 앉혔다. 앉은 부분이 그리 넓지 않아
이러다 물에 빠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밀려드는 순간 유원의 우려대로 욕조를 잘못 짚은
현규진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같이 물 안으로 빠지는 건 예견된 수순이었다.
아예 물속에 잠겼다가 나온 현규진이 티셔츠가 쫄딱 젖어 제 배 위에 앉아 있는 유원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대충 쓸어 넘긴 머리칼 끝과 손, 턱…. 물이 머무를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뚝,
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안 다쳤어? 물 먹거나 그런 건 아니지?”
“난 괜찮아. 넌? 너 물 먹었지.”
“조금.”
또 소리 내어 웃은 현규진이 물을 잠그고 몸을 바로 해 제 다리 사이에 유원을 앉혔다. 그리고
티셔츠가 달라붙어 윤곽이 드러난 유원의 어깨와 마른 등, 제가 아까 꽉 쥐고 몸을 움직였던
허리를 내려다보며 몸에 달라붙은 옷을 벗었다.
“자, 만세.”
제 옷을 다 벗은 다음에는 유원의 몸에 달라붙은 티셔츠도 벗겨 냈다. 벗은 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좁은 욕조에 앉아 하얗고 매끄러운 뒤태를 보고 있으니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물 뜨겁진 않아?”
“……딱 좋아….”
“기대도 되는데.”
좀 떨어져 앉아 있는 유원의 허리를 팔로 감아 제 쪽으로 당긴 현규진이 귓가에 입술을 댔다.
“힘 빼 봐. 괜찮아.”
목소리가 파고들자 자연스럽게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유원은 완전히 현규진의 가슴에
몸을 기댄 채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댔다.
“기분 좋아….”
“나도.”
금세 몸이 말랑말랑하게 풀린 유원이 가볍게 물장구를 쳤다. 따뜻한 물이 튀어 올랐다가 다시
두 사람이 머문 욕조 안으로 떨어졌다. 몇 번 발을 움직여 장난을 치던 유원이 뭔가 생각난 듯
어깨에 기댄 채 턱을 들어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아…. 아까 너랑 최해영 가고 나서 애들이 너 잘생겼다고 난리였어. 네가 나 매일 나 데리러
오고 기다리니까 그때 보고 다들 내적 친밀감이 생겼나 봐. 다음 주에 반 모임하기로 했는데
괜찮으면 너도 같이 오래.”
“나만 가겠네, 그럼.”
“응?”
“넌 못 가, 술자리.”
“술 안 마시면 되지….”
“그러다가 누가 강요하면 또 마실 거잖아. 다른 놈들이랑 밥 먹는 것까진 내가 어떻게
참겠는데 술은 안 돼.”
단호히 고개를 저은 현규진이 제 어깨에 기댄 채 시무룩한 얼굴을 한 유원을 보며 표정 관리를
했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현규진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렇게 봐도 안 돼.”
“나도 저번에 취해서 부분부분 기억 안 나는 게 좀 충격이라 앞으로는 술 안 마셔야겠다고
생각했어. 앞으로는 그런 자리 가도 진짜 안 마실 거야. 어쩔 수 없이 마실 일 생겨도 딱 반
잔만.”
“그런 생각 했으면 다행이고. 뭐 아무튼 내가 너네 반 애들이랑 안면 터서 나쁠 건 없으니까
다음 주에는 같이 가.”
“응! 너희 과는 어때? 친해진 사람 있어?”
“친해졌다기보다는 나한테 일방적으로 아는 척하는 애들은 좀 있어. 난 뭐 딱히 친해져서 같이
다니고 뭐 그럴 필요는 없단 생각이라. 혼자 다녀도 되고.”
그래야 착한 우리 정유원이 날 한 번이라도 더 신경 쓰고 생각해 주지. 뒷말을 삼킨 현규진이
불쌍한 척을 하며 유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13 화(113/127)

113


“난 너 혼자 다니는 거 싫은데….”
“왜?”
배 위에 놓인 현규진의 손을 물 안으로 쥔 유원이 가만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쉽게 대답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나오지 않는 대답에 현규진도 잠자코 유원의
생각을 도우며 가만히 답을 기다렸다.
“우리 잠깐 헤어졌을 때 방학 동안에 계속 혼자 있었잖아. 엄마, 아빠는 바빠서 없을 때가
많았고…. 집에 혼자 자주 있었는데 그때마다 계속 네 생각이 났어. 그동안은 혼자 조금
있다가도 너랑 만나서 뭐든 같이 했는데 계속 혼자니까 처음엔 괜찮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너무 허전해지고, 그냥 계속 네 생각만 하는 거야.”
고요한 욕실 안으로 울리는 유원의 목소리가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를 타고 현규진의
여기저기로 스며들었다. 유난히 외롭고 참 많이 힘들었던 그 겨울의 진지하고 깊은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따끔거렸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과가 다르고 시간표도 거의 다르니까…. 하루 종일
전처럼 같이 다니긴 힘들잖아. 너 혼자 있으면…. 너도 그때 나처럼 허전해지고… 속상해질 것
같아서 걱정돼.”
몸에 기대어 있던 어깨가 살짝 틀어지며 유원의 고개가 뒤로 돌았다. 현규진은 잔뜩 걱정이
묻은 눈으로 저를 보는 유원을 보며 착실하게 발기했다. 이게 이래도 되나 싶은데…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감각이 고였다.
현규진의 다리 사이에 앉아 있던 유원이 그걸 모를 수는 없었다. 갑자기 단단한 것이 엉덩이를
찔러 오는 것에 놀란 유원이 물속을 한 번 내려다봤다가 고개를 들어 다시 현규진과 눈을
맞췄다.
“지, 진지한 얘기 하는데!”
“알아, 진지한 얘긴 거 나도 아는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어.”
“…이렇게 될… 말 하나도 안 했는데…. 변태야, 진짜.”
“말이 뭐가 필요해. 정유원이 내 걱정을 한다는데 어떻게 안 서. 혼자 있으면서 내 생각만
했다는데 안 서는 게 이상한 거 아냐? 변태가 아니라 존나 정상이야.”
변태 보듯 하며 떨어지는 유원의 몸을 다시 당겨 제 몸에 붙인 현규진이 고개를 내려 촉촉한
목덜미를 핥아 올렸다. 뜨거운 공기가 달라붙은 위로 더 뜨거운 혀가 닿자 유원의 어깨가 확
움츠러들었다.
“… 나 딱… 한 번밖에 못 해.”
“응?”
“힘이… 딱 그만큼밖에 없어….”
무슨 말인지 잠시 생각하던 현규진이 곧 말을 이해하곤 어깨 위로 쪽 뽀뽀했다.
“난 한다고 안 했는데.”
“…응?”
동그래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정유원 존나 야해. 나랑 당연히 또 할 생각하고 있었어?”
“그, 그건! 네가… 그렇게 됐으니까….”
“나 설 때마다 할 거야? 나 너만 봐도 설 때 있는데?”
“…그런 건 아니지만….”
유원은 조금 전 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몸에 열이 확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정말
당연히 현규진과 섹스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냥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해서 나온 말이었다.
“…나 나갈래….”
“왜. 아직 안 했잖아.”
“…자꾸 놀리지 마.”
“놀리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한 번은 할 수 있다고 했잖아.”
몸을 떼는 유원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아 안은 현규진이 그대로 욕조 끝 쪽으로 유원을 올려
앉혔다. 놀란 유원이 얼른 손을 내려 다리 사이를 덮었다.
“자기는 변태도 아닌데 왜 이렇게 됐어?”
쉽게 유원의 손을 뗀 현규진이 반쯤 선 유원의 성기를 툭 건드렸다. 그에 몸을 잘게 떤 유원이
잔뜩 부끄러워져 다리를 더 오므렸다.
“…너 때문이야.”
“나랑 할 생각해서 이렇게 된 거야?”
“몰라.”
시선을 피하는 유원이 귀여워 웃음이 작게 터졌다. 현규진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 그대로
무릎을 잡아 벌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얼굴을 넣어 따뜻하고 촉촉한 허벅지에 쪽, 가볍게 입
맞추며 올려다보았다. 잔뜩 일렁이는 눈동자로 저를 담고 있는 유원과 눈이 마주치자
아랫배로 또 감각이 확 몰렸다.
“…으응….”
욕실 안으로 약하게 살을 빠는 소리가 울렸다. 유원은 제 다리 사이에서 허벅지 이곳저곳에
흔적을 남기는 현규진을 내려다보며 그새 달아오른 숨을 내쉬었다.
입술이 벌어지고 살을 빨아들일 때마다 묘한 감각이 주위로 번졌다. 욕실 안의 뜨거워진
공기와 발목이 잠긴 따뜻한 물, 그리고 제 허벅지를 벌린 채 잡고 있는 현규진의 그보다
뜨거운 손이 자꾸만 ‘그다음’을 기대하게 했다.
“…하아…. 흐읏, 아….”
“유원아, 좋아?”
“으응….”
대답인지 신음인지 불분명한 소리가 울리며 허벅지가 닫혔다. 그 사이에 갇히고 눌린 채 약한
허벅지 안쪽 살을 깊게 빨아들여 불긋한 자국을 남긴 현규진이 아까보다 더 흥분한 유원의
성기를 혀끝으로 핥아 올렸다.
“아…!”
유원의 허벅지에서 힘이 빠지며 그대로 몸이 흐무러졌다. 자극을 너무나 원하는 몸에 당황한
유원이 울먹였다. 너무너무 부끄러워 현규진을 밀어내고 욕실을 나가고 싶은데 또 현규진이
제 앞을 만져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머리를 괴롭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빨아 줄까?”
말을 할 때마다 현규진의 숨이 다리 사이에 닿았다. 해 달라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워 겨우
용기를 끌어모아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현규진의 입술이 벌어지는 게 보였다.
“하으, 응….”
혀만 내어 끝을 할짝이던 현규진이 그대로 유원의 성기를 입에 담았다. 반쯤 물고 빨아 주다가
조금 더 깊게 담자 울음소리가 들렸다. 제 머리 위로 내려앉은 손이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었다.
유원의 손가락만으로도 사정감을 느낀 현규진은 조금 더 빠르게 고개를 움직여 유원의
사정을 도왔다.
“아, 흐윽, 이제…. 흐읏, 할, 할 것 같아….”
해도 돼. 성기를 문 채 말해 뭐라는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발음이 뭉그러졌다. 정말 쌀 것
같은지 당황해 머리를 밀어내는 유원의 얼굴은 흥분과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처음
빨리는 것도 아니면서 아직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지 않아 매번 어쩔 줄 모르는 유원은
현규진의 짓궂음에 늘 불을 붙였다.
“진짜… 할, 하으읏…!”
유원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몸을 앞으로 숙인 유원이 현규진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허리를
떨었다. 뜨겁고 축축한 곳으로 사정한 것도 자극이 너무 큰데 놓아주지 않고 약하게 계속
빨아들이는 느낌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으응, 나 했는데에….”
사정한 것을 모를 리가 없는데도 계속 가해지는 자극에 어쩔 줄 모른 채 잔뜩 느끼던 유원의
발끝이 다시 확 펴졌다. 이렇게 빠르게 연달아 가 버린 것은 처음이라 눈앞이 다 새하얗게
변했다.
너무 느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떠는 유원의 성기를 그제야 놓아준 현규진이 제 손만 닿아도
움칠대는 허리를 단단히 잡아 다시 물 안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몸을 돌려 욕조를 두 손으로
짚게 한 다음 두 손가락으로 유원의 안을 살살 헤집었다. 섹스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안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아, 콘돔…. 가지고 올게.”
욕조를 나가려고 몸을 반쯤 일으킨 현규진의 손목으로 유원의 손가락이 감겼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천진해 보이는 눈동자가 부끄러움을 머금은 채 흔들렸다.
“…그냥… 하면 안 돼?”
유원의 손가락이 감긴 손목이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정유원은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 다시 물 안으로 무릎을 꿇고 몸을 세운 현규진이 유원의 몸에 꽉
밀착했다.
“뒷정리는 내가 다 해 줄게.”
“…응.”
잔뜩 발기한 것을 유원의 입구 위에 비비던 현규진이 끝을 맞춰 안으로 파고들었다. 풀려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좁은 유원의 안으로 끝까지 들어가는 것은 꽤 시간이 들었다.
현규진은 유원에게 너무 큰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더 풀어 가며 조금씩 더 깊게
삽입했다.
“아…. 오일 안 썼는데도, 읏, 들어가네.”
몸을 뒤로 포개고 손을 앞으로 해 유두를 만져 주자 몸에서 더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그대로 완전히 끝까지 유원의 안에 넣은 현규진이 제 성기를 꽈악 조이며 달라붙은 내벽을
느끼며 긴 숨을 내뱉었다. 그 얇은 콘돔 하나 없을 뿐인데 감겨 오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몸이 맞물려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 머리가 돌 것만 같았다.
“흐읏, 응….”
“후우….”
깊게 들어간 것을 반쯤 뺐다가 치받자 유원의 몸이 흔들렸다. 희고 예쁜 목에서부터 어깨,
등줄기를 지나 군살 하나 없는 허리까지 유원은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엉덩이나 허벅지,
늘씬한 종아리에 가느다란 발목, 그리고 깨끗한 발가락까지 정말 제가 아는 모든 부분이 다
예뻤다.
그중에서도 제일 예쁜 얼굴을 떠올린 현규진이 어깨 쪽으로 다가가 유원의 턱을 쥐고
부드럽게 돌렸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혀를 물려 주자 초옥, 촉 빨며 키스하는 게 사랑스러웠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욕조 안에 차 있는 물이 찰박였다. 유원의 혀끝을 문지르며 유두까지
손끝으로 돌려 매만지자 유원의 허리가 비틀렸다. 유두를 튕겼다가 손톱 끝으로 누른 순간
신음과 함께 얽혀 있던 혀가 풀렸다.
“아…. 너무, 으응….”
기분 좋은 쪽의 감각이 너무 크다 보니 순간 조금 무섭단 생각이 들었다. 현규진의 뜨거운
것이 직접적으로 안을 문지르며 드나드는 감각이 너무 선명해서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몸과 몸이 맞물릴 때마다 나는 찔꺽이는 소리에 맞춰 유원도 무의식중에 몸을 뒤로 뺐다.
현규진이 치받는 순간 뒤로 빠진 엉덩이에 느껴 본 적 없는 깊은 곳이 확 찔렸다.
“하으읏!”
유원의 안이 확 수축하며 현규진의 성기를 더 꽉 조였다. 그대로 묽은 것을 확 터뜨리며
사정한 유원이 여전히 깊은 곳을 찌르고 있는 성기에 몸을 벌벌 떨었다.
“아…. 윽, 씨발.”
미끄럽고 끈적하게 느껴지는 내벽이 성기를 완전히 꽉 조이며 빨아들인 순간 현규진은
유원의 깊은 곳에 사정했다. 유원이 힘들지 않도록 사정은 밖에 하고 싶었는데 그럴 정신이
없었다.
“으응, 안에…. 아, 흣, 안에 뭐가 나와….”
“아….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너무, 읏, 너무 좋아. 유원아.”
배 속으로 뭔가가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 났다. 뭔지 모르지는 않지만, 몸 안에 현규진의 것이
담기는 느낌은 너무나도 생경했다. 그 느낌마저도 쾌감과 마주 닿아 유원을 한참이나 더
느끼게 했다.
뒤에서 성기가 빠져나갔다. 몸을 돌린 유원이 자연스럽게 현규진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다시 깊숙하게 성기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한 물 안에서 맞물리는 느낌에 몸을 떤
유원이 현규진의 귓가에 뺨을 비볐다. 힘은 들지만, 그래도 더 하고 싶은 마음은 현규진과
똑같았다.
“흐읏, 응…!”
이번에는 물속에서 몸이 맞물렸다가 빠지는 것을 반복했다. 정신없이 혀가 얽히고 숨이
뒤엉켰다. 한 번씩 초점이 나가는데도 현규진의 얼굴만은 선명했다.
“…으응, 좋아….”
“좋아?”
“좋아….”
다시 혀끝이 입술 바깥에서 마주 문질렸다. 깊은 곳이 퍽, 퍽 찔릴 때마다 물속에 담긴 몸이
녹아 똑같이 물이 되는 것만 같았다. 현규진의 혀를 쪼옥 빨아들인 유원의 몸이 뒤로 확
젖혀지며 허리가 다시 비틀렸다. 딱 한 번 버틸 만큼 남아 있던 체력이 그대로 확 꺼지는 게
느껴졌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번지는 쾌감에 뜨거운 물 안에서 쫙 펴진 발끝과 종아리가 잘게 떨렸다.
다시 현규진이 쏟아 낸 것이 배 속으로 가득 담겼다. 틈 하나 없이 맞물린 몸에서 그제야
완전히 힘이 빠지며 까무룩 눈앞이 흐려졌다.
***
아직 캄캄한 새벽에 눈을 뜬 유원은 보송보송 기분 좋은 느낌에 이불을 더 위로 끌어올려
덮었다. 제 몸에 팔을 올린 채 잠든 현규진에게 가까이 다가가 쪽 가볍게 입 맞추자 곧 닫혀
있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깼어? 미안…. 뽀뽀만 살짝 하려고 했는데.”
“나도 하고 싶어서 깬 거야.”
자다 깬 낮은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원은 제가 미안해하지 않도록 가까이 다가와
얼굴 여러 곳에 깊게 입 맞추는 현규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몸 아파서 깬 건 아니고?”
“응…. 그럴 정도로 아프진 않아.”
“허리 주물러 줄까?”
“아니야…. 괜찮아. 얼른 다시 자.”
“응, 자기도 다시 자…. 이제 잠 안 오는 건 아니지?”
“응, 나도 다시 잘 거야.”
현규진의 팔 쪽으로 가까이 머리를 댄 유원이 눈을 감으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
“…그런데 아까 우리 오일 안 쓰고 했잖아.”
“응….”
“그럼 이제 나 애기 아니다아, 그치.”
눈을 감은 채 현규진이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못 살겠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다음
다시 유원을 가득 품에 안았다. 온몸이 다 사랑으로 충만한 느낌이었다. 유원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린 현규진이 제 온몸에 가득한 사랑을 그대로 유원에게 쏟아 냈다.
“응, 정유원 애기 졸업.”
작게 웃는 소리가 품 안에서 들렸다. 같이 덮고 있는 이불 안에서 다리가 얽히고, 두 팔 안이
사랑으로 가득 찼다.
결코 끝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새벽이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14 화(114/127)

114


서둘러 학교 안 기념관 쪽에 있는 카페로 간 유원은 창가에 앉아 있는 익숙한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
“선생님!”
“어, 유원아!”
저를 보고 웃는 이준서에게 다가간 유원이 맞은편에 앉아 가방을 내려 두었다.
“뭐 마실래?”
“제가 사 올게요.”
“에이, 제자에 이제 우리 후배까지 됐는데 돈 쓰게 하면 돼? 뭐 마실래? 편하게 말해.”
“어…. 그럼 저는 레모네이드요.”
“알았어. 잠깐만.”
벌떡 일어나 카운터로 가는 이준서를 본 유원이 미소 지었다. 수능 보기 사흘 전에 마지막
과외를 하며 얼굴을 본 이후 수능 결과를 공유하려고 톡을 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오랜만이라 무척 반가웠다.
주문을 하고 아예 에이드를 받아서 가지고 온 이준서가 유원의 앞으로 노란 에이드를 놓아
주었다. 꾸벅 인사한 유원이 에이드를 휘휘 저어 한 모금 빨아들였다.
“이게 얼마 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학교 다니느라 요즘 정신없지?”
“네, 아직 적응 중이라 조금 정신없긴 한데 그래도 재밌어요. 선생님은 잘 지내셨어요? 3
학년이라 이제 바쁘시죠.”
“그렇지 뭐. 학교도 학교인데 이제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져서 나야말로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어. 밥 사 줘야지 했는데 하도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톡 했잖아. 아, 유원이 넌 경영 A
반이라고?”
“네, 맞아요. A 반.”
“같은 반이었으면 더 자주 봤을 텐데.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진짜 후배 됐으니까
앞으로 자주 보자. 학교에서 보니까 너무 좋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유원이 뭔가 할 말이 더 있어 보이는 이준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을 꺼내기가 조금 곤란해 보이는 것처럼 보여서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자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이준서가 곧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는 건데. 그때
그… 내가 학교 구경 시켜 준다고 했을 때 만났던 내 과 동기들 기억해?”
“아….”
완전히 잊고지내던 얼굴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그중 백진석이라는 사람은 더욱 이름이
선명했다. 저에게 번호를 알려 달라고 해서 연락을 했었고, 그 일로 현규진이 잔뜩 화가
났었기에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네, 기억나요.”
“그때 그 문제 있던 놈이 나랑 같은 반이기는 한데 걔랑 친한 애들이 A 반에 많거든.”
“아….”
“그래서 A 반 술자리에 자주 가고 그래. 그거 아니어도 술자리만 있으면 어디든 다 끼려는
놈이라…. 아직은 못 봤어도 다니다 보면 마주칠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술자리에서
만날 수도 있으니까 알고는 있으라고.”
“…네에….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신경 안 써도 될 일까지 신경 쓰게 되고…. 그때 합석만 안 했어도 이런
일 없었을 텐데.”
“어쩔 수 없죠, 뭐…. 선생님도 그런 사람인지 모르셨던 거잖아요.”
불편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싫어 미소 지은 유원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학교 다니면서
알면 좋을 게 있는지 묻자 이준서도 금세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고 잔뜩 들떠 유원에게
이것저것 팁을 전수해 주었다.
“규진이도 오늘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 나 시간 될 때 연강이라 아쉽네.”
“네에…. 규진이도 아쉬워했어요.”
“규진이는 벌써 진짜 유명하더라. 내 동기 중에서도 이번에 경제학과에 얼굴 난리 나는 애
들어왔다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과외했던 애라 그러니까 소개해 달라고 나한테도 난리야.
규진이 덕분에 여자애들이 요즘 나한테 엄청 친절해졌어.”
3 학년인 이준서의 주변까지 현규진을 알 정도로 벌써 그렇게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아직
입학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벌써 이러면 앞으로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현규진이
잘생긴 거야 저도 너무나 잘 알고, 또 저도 그 얼굴을 너무너무 좋아하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규진을 연애 상대 쪽으로 관심을 가진다는 건 역시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규진이는 그때 사귀는 사람 있댔지? 지금도 만나?”
“아…. 네에….”
“뭔가 새롭다. 다시 보여. 선입견이긴 한데 규진이가 워낙 잘생겼잖아. 그래서 그런지 한 명을
진득하게 만날 타입은 아닌 것 같다고 혼자 생각했거든.”
“규진이 하나를 좋아하면 깊게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어…. 지금 만나는 사람도 규진이가
엄청 많이 좋아하거든요. 저도…. 아니, 그 규진이가 사귀는 사람도 규진이 엄청 좋아해서….
아마 둘이 절대, 절대로 안 헤어질 거예요.”
“아, 진짜 사람 보이는 것만 보고 혼자 판단하는 거 진짜 나쁜 버릇인데 고쳐야겠다.
규진이한테 미안하네.”
굳이 안 해도 될 말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라도 소리 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유원은 금세 다른 화제를 꺼내 이야기하는 이준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현규진이 보고 싶었다.
***
“저기… 안녕하세요. 잠깐만, 진짜 잠깐만 시간 내 줄 수 있어요?”
과방에서 유원이 끝날 시간까지 기다리며 과제를 하고 있던 현규진은 갑자기 제 주위를
둘러싸고 앉는 다섯 명의 낯선 얼굴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의 손에는 각기 다른
종이가 들려 있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혹시 농구 안 좋아해요? 피지컬이 딱 농군데! 농구 동아리 <덩크>에서 나왔는데 농구 같이 안
해 볼래요? 규모도 크고, 진짜 다들 실력도 좋거든요. 대회도 나가고, 어, 또 스트레스 풀기도
좋은데.”
눈앞으로 농구 하는 사진이 담긴 홍보물이 쑥 다가왔다. 얼결에 받아 별생각 없이 눈에 담고
있으니 맞은편에 앉은 사람도 홍보물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기타와 악보가 그려져 있었다.
“저희는 기타 동아리 <초킹>인데 농구는 땀 나잖아요. 땀도 안 나고 음악으로 스트레스 풀 수
있는 기타 어때요?”
“아, 왜 우릴 들먹여. 깨끗하게 해. 기타 하나로 승부 보라고.”
“그럼 봉사 동아리는 어때요? <온기>라고, 사회적 약자는 물론이고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1992 년부터….”
“마술 어때요, 마술? 이게 트릭 배우는 재미가 있거든요?”
“사진으로 세상을 담는 <초점>에 오시면 저희가 진짜 잘해 드릴 수 있거든요. 저희 출사
나가는 것도 진짜 재밌고, 어, 모델로도 진짜 조건 훌륭하시니까 저희가 진짜 증명사진 같은
것도 잘 찍어 드릴 수 있고….”
얼마 전부터 학교에 갈 때면 계속 유원과 제 근처에 들러붙어서 동아리 홍보를 하더니 이제는
아예 과방까지 찾아온 모양이었다. 어느새 노트북 키보드 위로 여러 장 쌓인 홍보물을 본
현규진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유원에게 가면 될 것 같았다.
“동아리 들 생각이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다섯 명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수업이 끝나
과방에 있을 시간까지 건너건너 묻고 파악해서 온 보람이 없었다.
“이번 주말에 세준대 농구 동아리랑 시합하는데 그거 보러 안 올래요? 한번 보고 결정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다시 인사한 현규진이 과방을 나섰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따라 나온 사람들이 계속
현규진을 설득했지만, 현규진은 그 어떤 여지도 주지 않고 들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다시
말했다.
말 그대로 정말 동아리 활동을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유원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 엿 같은데 동아리 활동이라니? 그런 일에 한눈을 팔 마음도 무엇도 없었다.
과방이 있는 건물을 벗어난 뒤에야 동아리 홍보를 하러 온 사람들이 현규진에게서 떨어졌다.
비로소 홀가분해진 현규진이 유원이 수업을 듣는 강의동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술자리가 있는 날이라 같이 갈 원지호화 함께 강의실을 나선 유원은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현규진에게 다가갔다. 현규진의 옆에는 보라색 머리를 한 보라가 있었다.
보라는 팔과 허리에 있는 타투를 현규진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허리와 배가
조금 보이는 티셔츠를 입어 팔을 들기만 해도 허리에 있는 타투가 전부 드러났다. 그걸 보고
있는 현규진을 보니 괜히 또 기분이 이상해졌다. 질투까지는 아닌데 기분이 막 좋지는 않았다.
“규진아.”
심드렁하게 서 있던 현규진의 눈동자가 유원을 담자마자 활기를 되찾았다. 유원은 저에게
다가와 가방을 벗기는 현규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까 과외는 잘 만났어?”
“응. 선생님이 너도 많이 보고 싶어 하셨어.”
“뭐 얼마나 대단한 사이라고.”
“그래도 같이 오래 과외 했잖아. 다음 주쯤 저녁 사 주신대. 고기.”
“밥 사 준다는 말 하려고 부른 거야?”
“그냥 겸사겸사. 아, 그리고….”
트러블이 있었던 백진석에 대해 말하려던 유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원지호와 이보라를
흘끗 보곤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 이야기는 이따 둘이 있을 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규진아! 너도 오늘 같이 간다며? 잘됐다, 잘됐다. 나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
이야기가 잠시 끊긴 사이로 파고든 원지호가 살갑게 말을 거는 것에 현규진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뭔데.”
“혹시 동아리 정했어?”
“아니.”
“그럼 농구 동아리 어때? 나 이번에 거기 들었는데 거기서 1 순위로 널 영입하고 싶어
하더라고.”
조금 전까지 지겹도록 들은 동아리 설명을 떠올린 현규진이 고개를 저었다. 겨우 벗어났나
했더니 원지호까지 동아리 타령을 해 짜증이 불쑥 치밀었다.
“동아리 안 들어, 난.”
“아, 진짜? 아예 안 할 거야?”
“어. 굳이 그런 데에 시간 뺏기기 싫어.”
“아, 그렇구나…. 아쉽다. 같이 농구 하면 재밌을 것 같았는데. 아, 혹시 그럼 너도 유원이처럼
학술 동아리 이런 거 관심 있어?”
“…학술 동아리?”
과에서 배우는 것을 더 심화해서 토론하고 연구하는 학술 동아리가 과 안에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으나 거기에 왜 유원의 이름이 함께 거론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유원과 그런 쪽으로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어 솔직히 조금 어리둥절했다. 현규진은 제 뒤에서
보라라는 애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는 유원을 흘끗 바라보다가 다시 원지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유원 동아리 든대?”
“듣기로는 학술 동아리 들 것 같던데. 난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데 유원이는 공부가 재밌나
봐.”
제가 전혀 모르는 사실을 원지호가 알고 있다는 게 싫었다. 게다가 그 내용이 저는 유원과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고파 칼같이 다 쳐 낸 동아리에 관한 것이라 더 그랬다.
“…….”
당장이라도 그게 다 무슨 얘기인지 묻고 싶었지만, 술자리에 가기 전에 심각한 이야기를 해서
유원의 기분까지 가라앉게 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그냥 저 혼자 기분이 이상한 게
나았다.
현규진은 자연스럽게 다시 제 옆으로 온 유원을 내려다보며 서운함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분명 저에게 말하지 못한 어떤 이유가 있을 테니까. 자꾸만 달라붙는 묵직한 감정을 털어 낸
현규진이 유원의 목덜미를 큰 손으로 감싼 채 조몰락거렸다. 유원의 고개가 들리며 눈이
마주쳤다. 봄바람처럼 웃는 얼굴이 예뻤다. 언제나처럼.
친구 사이 고백 금지-115 화(115/127)

115


입가에 경련이 날 것만 같았다. 저희 과 모임이었으면 참석 자체를 하지 않았겠지만, 만약
어쩔 수 없이 참석했다고 해도 그냥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모두 유원과 관련된 사람들이라 내내 사람 좋은 척하며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저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는 건 결국, 유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나 기억하지? 며칠 전에 카페에서 잠깐 봤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심도훈이야.”
“아, 어. 알아.”
유원의 머리를 꾹 눌렀던 놈인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현규진은 반갑다고 말하는
심도훈을 보며 잘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유원이한테 말을 많이 들어서 뭔가 너도 우리 반 같다. 내적 친밀감 장난 아냐.”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우리 진짜 다 너 엄청 궁금했었거든. 수업 끝나고 나올 때마다 자주 보여서 누구 기다리나
했는데 유원이라 개놀랐잖아. 여친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식상하고 지루한 대화에도 애써 웃으며 대꾸를 해 주고 있자니 계속 성질이 올라왔다. 유원이
꼭 가야 하는 술자리라고도 하고, 마침 저도 데리고 오라고 했다니 옆에 딱 붙어 술을 못
마시게 하려고 따라오긴 했지만, 생각보다도 훨씬 더 지루했다.
아, 안 되겠다. 재밌는 정유원 얼굴 봐야지. 맞은편에 앉은 심도훈에게서 시선을 뗀 현규진이
크림 떡볶이를 먹고 있는 유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맛있어?”
“응, 너도 먹어 봐.”
제 접시에 덜어 주는 유원의 머리를 습관적으로 쓰다듬다가 혹시나 해 손을 뗀 현규진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허벅지에 손가락으로 ‘손’이라는 글씨를 쓰자 포크를 들지 않은 손이 테이블 아래로 내려왔다.
그 손을 잡은 현규진이 장난스럽게 손가락 사이를 문지르자 간지러운지 유원이 손가락을
움츠렸다.
“…….”
“…….”
왁자지껄한 분위기 안에서 느릿하게 손가락이 얽히는 느낌이 유독 선명했다. 크림 떡볶이를
입에 하나 더 넣은 유원이 포크를 문 채 허벅지 위에 놓인 현규진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느릿하게 밀어 넣었다. 얽힌 건 손가락인데 차오르는 것은 마음이었다.
“넌 왜 안 먹어….”
“먹고 있어.”
유원이 걱정하지 않도록 접시에 놓인 떡볶이를 하나 먹고, 다른 것도 가져와 먹자 그제야
유원이 웃음 지었다. 조금 전까지는 지루한 분위기를 참는 게 제일 힘들었는데 이제는
키스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게 가장 힘들었다.
“안녕, 우리가 좀 늦었지.”
맛있어 보이는 걸 집어 유원의 앞접시에 놓아 주고 있는데 낯선 사람들이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다들 일어나 인사를 하는 걸 보니 반 선배인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원을
따라 반쯤 다리를 세워 대충 고개를 까딱한 현규진이 빈자리에 앉는 사람 중 한 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르는 사람이긴 한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뭐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고개를
기울인 순간 가방을 내려놓고 얼굴을 든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 아까 과방에서!”
“아.”
기타 동아리. 옆에 앉아 있던 농구 동아리 사람과 친한 사이인지 장난식으로 티격태격하며
같이 막 동아리 홍보를 했던 게 떠올랐다.
“어떻게 여기서 또 보네요? 진짜 반갑다. 이쯤 되면 기타 동아리 들라는 계시 아닐까요?”
진담이 가득 담긴 말 같았지만, 전혀 들어줄 생각이 없기에 현규진은 그냥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동아리 같은 거 들 생각 없다는데 도대체 몇 번을 묻는 거냐고 내뱉고 싶은 것을
참는 게 쉽지 않았다.
그 말을 시작으로 화제가 바뀌며 여기저기에서 동아리 이야기가 나왔다. 현규진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심도훈과 이야기를 나누는 유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듣기로는 학술 동아리 들 것 같던데. 난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데 유원이는 공부가 재밌나 봐.’
머릿속으로 원지호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전에 동아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제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싶어 기억의 시간을 돌리고 또 돌려 봐도 그런 이야기를 한 기억은
없었다.
왜 저한테는 동아리 얘기를 안 한 걸까. 동아리 홍보를 밤낮으로 하는 이 시기에 들 생각이
아예 없으면 몰라도 뭔가에 관심이 있다면 지나가는 말로라도 할 법한데 저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공부의 연장선이니 저와는 이야기를 딱히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걸까? 어차피 저는 같은
과가 아니니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기분이 가라앉았다. 머릿속을 잔뜩 어지럽히는 ‘학술 동아리’라는 말을
지우려 애쓰며 현규진이 제 몫의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술자리가
무르익을 때까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주 조금도.
드디어 관심이 저에게서 멀어졌다고 생각하면 다시 몰려들고, 이제 진짜 빠져나가도
되겠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저에게 집중되는 시선들 때문에 현규진은 밤 열 시가 훌쩍
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유원의 옆에 딱 붙어 앉아 대신 술을 다 마셔 줄 수 있어 그 몇 시간이 무의미하지는 않았지만,
쓸데없는 것을 너무 많이 묻고, 사생활 깊은 곳까지 파고들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과 한참을
같이 있었더니 머리가 다 지끈댔다.
“취한 거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맥주 정도로는 안 취해. 술 마신 느낌이 나긴 하는데 정신도 멀쩡하고, 아무렇지도
않아.”
저를 걱정하는 유원의 머리를 드디어 마음껏 편하게 쓰다듬은 현규진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밤바람에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집 방향으로 조금 걷다 보니 사람이 없어
한적하고, 환한 길이 나왔다. 현규진은 내내 머릿속을 괴롭히던 것을 입 밖으로 툭 소리 냈다.
“동아리 들 거야?”
“응?”
“아까 원지호가 너 뭐 학술 동아리 그런 거 들 거라 그러던데.”
“아, 아직 확실한 건 아냐. 그냥 앞으로 들을 전공이나 스펙 쌓는 거에 도움 된다고 해서 해
볼까 생각 중이야.”
“왜 나한테는 그런 얘기 안 했어?”
아, 이건 그냥 묻지 말걸. 그래, 그랬구나. 그냥 깔끔하게 말하고 끝낼걸. 작은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뱉은 말은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냥 과 사람들끼리 소소하게 모여서 하는 거라고 해서…. 그리고 아직 생각 중이기도 하고.
뭐라도 확실해지면 말하려고 했지이.”
“그거 안 하면 안 돼?”
“응? 왜애?”
“그거 들면 우리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 더 줄어들잖아. 아까 찾아보니까 수업 끝나고도
모이고, 주말에도 시간 내야 할 때 많다던데. 난 그런 거 싫어서 동아리 안 들 생각이거든. 뭐
관심이 없기도 하고.”
현규진의 말을 이해한 유원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묘하게 살짝 다운되어 있는
것 같더니 이것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유원은 가만히 손을 내려 현규진의 새끼손가락을
잡아 살살 흔들었다.
“화난 건 아니지?”
“안 났어. 화나고 그럴 일 아니잖아.”
바닥만 바라보던 현규진의 시선이 유원의 얼굴에 닿았다. 드디어 닿는 시선에 웃은 유원이
작게 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음….”
“…….”
“나한테는 규진이 네가 제일 중요해. 너랑 사귀는 거…. 연애하는 것도 너무너무 중요하고, 또
너무너무 좋아.”
“…….”
“그런데… 대학 다니면서 해 보고 싶은 것도 많아.”
베이비오일을 샀던 집 근처 편의점 앞 횡단보도에 선 현규진의 시선이 유원에게로 다시
떨어졌다. 저를 올려다보는 유원의 얼굴이 자못 진지했다.
“다 너랑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잖아. 그리고 동아리는 정말 아직 결정이 난
것도 아니고…. 1 학년은 안 받아 준단 말도 많아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 말 안 한 거야.
지호는 내가 그 형이랑 얘기하는 걸 들어서 알게 된 거고.”
“그럼 받아 준다고 하면 그때 나한테 말하는 거야? 동아리 들어가게 됐다고? 나랑 같이할 수
있는 거 아니어도 그냥 얘기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말하면 내가 반대할까 봐 그래?”
“…솔직히….”
말을 멈추고 올려다보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해.”
“같이 들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하고…. 또…. 넌 싫잖아. 내가 동아리 드는 거.”
“어, 싫어. 싫은데 그걸 떠나서 아예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라고 네가 생각할 줄은 몰랐어.
솔직히 난 그게 왜 나랑 관계가 없는지도 모르겠고. 그럼 나도 다음 달에 갑자기 너한테 나
유학 가, 해도 돼? 갈지 안 갈지 확실하지도 않았고, 유학은 네가 가는 게 아니라 내가 가는
거라 너랑은 관계없는 일이니까 그렇게 통보만 해도 되는 거야?”
“비약하지 마. 동아리랑 유학이 같아?”
“비약?”
신호등이 다시 빨간 불로 바뀌었다. 겨우 하나 얽혀 있던 손가락이 풀어지고 마주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먼저 시선을 피하는 유원을 보며 현규진도 고개를 돌렸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하고 너랑 같이 있으면 돼? 규진이 네가 원하는 건 그런 거야?”
다시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뀔 때쯤 유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적당히 시원하게 느껴지던
바람이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하…. 너야말로 비약하지 마. 내가 언제 너 하고 싶다는 거 진짜 못 하게 한 적 있어? 네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나한테 제일 먼저 얘기해 달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야? 제발 알게만 해
달라고. 다른 새끼한테 네 얘기 듣는 거 싫다고.”
“…….”
“그리고 억지로 나랑 같이 있을 것도 없어. 그런 생각으로 같이 있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러라고 한 말 아니야.”
“…억지로 같이 있을 거 없다고?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해? 그런 생각이 뭔데? 난 너랑 있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같이 있다는 거야?”
말이 조금 심했다는 것을 알기에 이번에는 현규진의 시선이 먼저 바닥으로 뚝 다시 떨어졌다.
몇 번째 바뀌는 건지 모를 신호등 불빛이 다시 초록색으로 바뀌자마자 유원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현규진도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후회가 따라붙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었는데, 그런 식으로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상황을 악화시키면 안 됐는데…. 하지만 후회 사이로
서운함 역시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어 마음이 자꾸만 오목해졌다.
“…….”
“…….”
9 층으로 오르는 내내 엘리베이터의 양쪽 끝에 서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들어가자마자 유원은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고,
현규진은 차가운 생수를 한 병 들고 소파에 몸을 깊게 묻고 앉았다.
“…….”
제가 유원을 너무 답답하게 한 걸까? 심하게 구속하고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거라면?
‘넌 싫잖아. 내가 동아리 드는 거.’
꼭 제가 유원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고 싶은 것도 다 주저앉혀 포기하게 하고,
저와만 있어 달라고 떼를 쓰는 한심한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뭐 영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유원이 그 동아리 이야기를 저에게 말했으면
처음에는 같이 있어 달라고 하다가도 결국은 고개를 끄덕여 줬을 것이었다. 유원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니까.
학술 동아리가 위험한 일도 아니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싶다는데 제가 그걸 막을 권리는
아무리 애인이어도 없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동안 제가 한 많은 걱정이, 그리고 유원이 너무 좋아서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부린 투정이 유원에게 부담을 줬을 수도 있단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답답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다.
“…….”
머리를 쥐어뜯다가 소파에서 일어난 현규진이 욕실 쪽으로 다가가 닫힌 문을 두드렸다.
“잠깐 나갔다 올게. 먼저 자.”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갈 수는 없어 나간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속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한참이나 서서 싸웠던 횡단보도를 다시 지난 현규진은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이거라도 안 하면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밖으로 나와 담배를 열어 기다란 것을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싸구려 라이터 불을 켰다.
“…….”
불을 붙이기만 하면 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담배를 끊었다고 유원이 좋아하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기분이 안 좋다고 해서 그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실망했을 유원에게 더 큰 실망감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불을 끈 현규진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와 담뱃갑에 든 담배를 한 번에 와그작 손으로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비어 있는 파란색 편의점 테이블에 초록색 라이터를 툭 놓고
의자를 빼 앉았다. 그와 동시에 여러 감정이 온몸을 뒤덮었다.
두려움과 답답함, 그리고 슬픔. 현규진은 수많은 감정 중 가장 또렷한 것들과 마주했다.
“…….”
유원이 저에게 질렸을까 봐 무섭고, 열여덟의 그날에서 조금도 자라지 못한 제가 답답하고,
일을 이렇게 만든 주제에도 유원이 보고 싶어… 슬펐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16 화(116/127)

116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한참을 멍하니 식탁 의자에 앉아 있던 유원은 비어 있는 소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갔다가 온다는 말을 듣기는 들었지만, 정말 텅 빈 집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딜 간 거야.”
현규진과 그런 식으로 대화를 하려던 건 아니었다. 대화라고 하기에는 무리일 만큼 정말 말도
안 되게 일이 커졌지만, 정말 그렇게 격앙된 분위기를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동아리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정말 아직 정해진 게 없기 때문이었다. 동아리 홍보를 하면서
다가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현규진은 늘 딱 잘라 들 생각이 없다고 말했고, 당연히 동아리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저 역시 중앙 동아리 활동까지는 조금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소소하게 과에서 하는
동아리에 들어 볼까 생각만 하던 중이라 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현규진과 있을 때
동아리를 떠올린 적이 없을 만큼 저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저에 대해 모르는 게 생기는 게 싫다던 현규진을 생각하면 제가 아니라 원지호에게 그 말을
전해 들었다는 사실 하나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현규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대학 다니면서 해 보고 싶은 것도 많아.’
사실이기는 하지만, 거기서 그렇게 말할 건 아니었단 후회가 이제야 밀려들었다. 앞으로 그냥
하나하나 하고 싶은 게 생길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그렇게 해 나가면 되는 건데 제가 너무
연애는 연애고, 대학 생활은 대학 생활이라고 딱 선을 그어 말한 것 같았다. 꼭 저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처럼.
“…….”
유원은 하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늘 몸이 약해서, 조금만 무리해도 쓰러지기 일쑤라 하고
싶은 것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지냈다. 하지만 대학에 오고 나니 하고 싶은 것들을 크게
무리하지 않고도 할 수가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과제를 하는 것도 좋고, 한 집단의 일원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좋았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것을 배우고 활동해도 체력이 남는다는 게 신기했다.
그래서 제가 배우는 것을 조금 더 깊게 공부해 볼 수 있는 과 동아리에 들어 보고 싶었다.
일주일에 두 번쯤 소소하게 모여 공부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저처럼 무리를 하면
탈이 나는 사람도 그 정도는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관심이 갔다.
“…….”
그런 이야기를 현규진에게 먼저 자세히 했으면 싸울 일이 없었을까? 고개만 돌리면 빈 소파와
침대가 둘 다 눈에 들어오는 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유원은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자정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걱정이 밀려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던 유원이 용기를 내어 휴대폰을 들었다. 익숙한 번호를 띄워 놓고
심호흡까지 한 다음 전화를 걸었는데 허무하게도 소파 쪽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놀란 유원은 얼른 소파로 가 구석에 놓인 현규진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앉았다가 일어나며
주머니에서 빠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제가 전화를 거는 것도 싫어 휴대폰을 두고 갔거나. 아니,
후자일 리는 없었다. 현규진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내거여보자기♥
화면에 뜬 간지럽고 조금은 유치한 저장명에 유원의 입가로 작게 웃음이 번졌다. 처음 이렇게
저장해 둔 것을 봤을 때는 놀라서 말이 다 안 나왔는데 그새 익숙해져 지금은 이마저도 귀엽게
보였다.
“…….”
현규진이 저와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만큼 저도 현규진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좋았다.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순간의 연속, 찰나의 쌓임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대학 다니는 것도 좋지만, 집에서 현규진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이불 안에서 장난을 치는
게 더 좋았다. 아침이면 제가 좋아하는 초코링 시리얼을 담아 가져와 먹여 주는 그 시간도
좋고, 잠들기 전 가볍게 쪽쪽 뽀뽀하다가 키스가 되고, 새벽까지 더 깊은 무언가로 이어지는
것도 좋았다. 현규진과 함께 보내는 모든 시간은 소중하고, 즐겁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학교에 다녀야 하니 매일 24 시간 내내 현규진과 붙어 있기는 어려웠다. 주말이 아닌
이상 평일에는 수업이 끝난 틈틈이 얼굴을 겨우 잠깐 보고, 수업이 완전히 끝난 뒤에야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게 전부였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현규진과 시간을 보낼 때는 그 사랑스러운
시간에 온전히 마음을 쏟고, 어쩔 수 없이 떨어져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그 시간에는 또 그
시간에 집중하고 싶다는 말을 아무래도 제가 오해할 수밖에 없게 말한 것 같았다. 그 앞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오해하기도 딱 좋았고.
포옥 한숨을 쉰 유원이 현규진의 휴대폰을 든 채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옷장에서 후드집업을
꺼내 티셔츠 위에 걸쳤다. 휴대폰도 집에 두고 가고, 밤이 늦도록 들어오지도 않으니 아무래도
직접 찾으러 나가 봐야 할 것 같았다.
1 층으로 내려가 바깥으로 나간 뒤에야 유원은 제가 겉옷을 조금 얇게 입고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굳이 옷을 갈아입으러 다시 집에 갈 생각은 없었다. 못 견딜 만큼 추운 것도
아니고, 그냥 조금 선득한 것뿐이라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
솔직히 찾으러 나오기는 나왔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제 여기가
저와 현규진의 집이기는 하지만, 아직 학교를 다닌 지는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주변 지리를
훤히 알지 못하는 데다가 싸운 것도 오랜만인데 집을 나간 건 또 처음이라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학교에 갔으려나? 아니지…. 학교 별로 안 좋아하는데. 공원? 아니면 카페 같은 데에 있으려나
…. 일단 학교 가는 길 쪽에 있는 카페부터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한 유원이 집 앞 횡단보도에
섰다.
“…어….”
고개를 든 순간 길 건너편 편의점 앞, 파란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현규진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아도 분명 현규진이었다. 유원은 현규진을 어떤 경우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초조한 얼굴로 신호등을 보던 유원이 발을 동동 굴렀다. 몇 분 사이에 일어나 사라져 버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눈앞에 있는데 바로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급해졌다.
반짝, 초록 불로 바뀐 것을 본 유원은 차가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현규진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여전히 엎드려 있는 현규진의 맞은편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에 놀랐는지 현규진이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마주한 시선에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따뜻함이 번졌다. 유원은 저에게 현규진이 어떤 존재인지 새삼
다시 깨달았다.
“…여기서 뭐 해.”
“그냥.”
“…….”
“…네 생각.”
후드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을 현규진의 앞으로 놓은 유원이 조금 어색한 분위기에 입술
안쪽을 꾹꾹 깨물었다. 어색함을 조금이라도 풀어 보려 괜히 주변을 보며 두근두근한 마음을
누르려던 그때 눈에 익숙하고도 낯선 것이 들어왔다. 현규진의 시선도 유원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아니야! 안 피웠어. 샀는데 버렸어. 진짜야.”
유원이 보고 있는 초록색 라이터를 집어 든 현규진이 고개를 저었다. 유원은 그런 현규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거 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라이터를 내미는 현규진의 손을 잡은 유원이 기다란 손가락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코끝이 살짝 닿는 순간 현규진의 손이 움찔거렸다.
“정말이네.”
담배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유원이 손을 놓아주었다. 갑작스러우면서도 설렐
수밖에 없는 행동에 잠시 힘이 빠진 현규진의 손에서 라이터가 툭 떨어졌다.
“…….”
“…….”
유원의 손이 떨어졌는데도 현규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손을 뻗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얼른 손을 거두었다.
테이블 아래로 내려온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자 심장이 마구 뛰는 게 느껴졌다. 유원의 숨이
손가락에 닿는 순간 심장이 그 숨이 닿은 자리로 옮겨 온 모양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도… 아랫배가 울렁일 수 있다니. 현규진은 제 허벅지를 아프게 확 주먹으로
치고 긴 숨을 뱉어 냈다. 몇 번이나 숨을 쉬고 내뱉는 것을 반복한 뒤에야 정상인의 범주
안으로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테이블 아래만 보고 있던 현규진이 고개를 들어 저를 가만히
보고 있는 유원을 살폈다.
“너 옷이 그게 뭐야. 왜 그렇게 얇게 입고 나왔어. 일어나. 집에 가. 가서 얘기해.”
“…괜찮아. 이 정도는.”
자리에서 일어난 현규진이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유원을 내려다보다가 제가 입고 있는
아우터를 벗어 유원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리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편의점으로 들어간 현규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원은 몸으로
번지는 포근함에 미소 지었다. 역시 저는 현규진이 좋았다. 그것도 너무너무 많이.
참 많이 좋아하는 익숙한 냄새와 그 애가 늘 주는 선물 같은 포근함이 너무나 행복해 싸웠던
기억이 흐려질 정도로.
현규진의 아우터를 조금 더 앞까지 끌어당긴 유원이 옷 위로 얼굴을 묻었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자 제가 좋아하는 현규진의 냄새가 몸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눈물이 날 만큼
좋았다.
“이거라도 마셔.”
앞으로 불쑥 꿀유자차 컵이 놓였다. 유원은 두 손으로 현규진의 온기가 담긴 유자차 컵을
가만히 쥐었다. 참 따뜻했다. 현규진처럼.
“힘들게 뭐 하러 나왔어. 알아서 집에 갈 텐데.”
“넌 내가 싸우고 혼자 집 나가서 안 들어오면 집에 있을 거야?”
“…….”
“아니잖아…. 나도 너랑 똑같아.”
“…….”
“네가 없으면 걱정돼. 어디 있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어….”
“…….”
“…폰도 두고 가고…. 나간 지 한 시간도 넘었는데 안 들어오고…. 나한테 완전히 질려서 집 나간
줄 알았어….”
유원의 말에 고개를 든 현규진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어떻게 너한테 질려. 말도 안 돼. 네가… 나한테 질리면 질렸지….”
“내가 어떻게 너한테 질려…. 말도 안 돼.”
저와 똑같은 대답을 하는 유원을 바라보자 유원의 입술로 작게 웃음이 번졌다. 웃음과 마주한
순간 뜨거운 것이 확 심장을 치고 올랐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고개를 숙인
현규진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철없게 굴어서 미안해….”
“…….”
“우리가 같이 사는 걸 내가 좀…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나 봐. 좋아해서 같이 사는 것도 맞지만,
학교 편하게 다니려고 사는 거기도 한데…. 자꾸 그 이유는 생각 안 하고, 너랑 둘이 있어 좋단
것만 생각하다 보니까 대학이 우리 같이 있는 걸 방해하는 것 같고….”
말 하나를 소리 낼 때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주 오늘 제대로 못난 꼴을 보이는 날인
모양이었다. 현규진은 어떻게든 유원에게 제 몰골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더 푹 숙였다.
“…규진아.”
“…미안해. 나 진짜 너한테 잘하고 싶었는데. 예전이랑 그냥 똑같아. 하나도 변한 게 없어.”
“고개 들어 봐…. 규진아. 울어?”
말 중간중간 떨리는 숨소리에 놀란 유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규진의 옆 의자로 옮겨 앉았다.
의자를 당겨 더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기울였지만, 작게 우는 소리만 날 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얼굴 보여 줘. 응?”
“내가 잘못했어.”
“규진아. 고개 들어 봐…. 괜찮아. 나도 잘한 거 하나도 없어.”
“…….”
“얼굴 보고 싶어, 자기야. 응?”
달래듯 손을 내려 뺨을 만지자 물기가 묻어났다. 울상이 된 유원이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현규진의 얼굴을 잡아 천천히 올렸다. 완전히 마주한 현규진의 눈가와 뺨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걸 두 눈에 담는 순간 유원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놀란 현규진이 얼른
유원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왜 울어,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응?”
“…너 우니까….”
“안 울게. 나 안 울어.”
손으로 뺨과 눈가를 닦아 낸 현규진이 계속 퐁퐁 눈물이 솟는 유원의 눈가를 살살 문지르다가
붉어진 눈가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나 이제 안 우는데. 유원아. 나 봐.”
눈물이 넘쳐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현규진이 보였다. 유원은 다시 제 양쪽 눈가에 입술을
차례로 눌렀다가 떼는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흐릿하지 않은 눈동자에 들어찬 현규진이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러 닦아 주었다.
“많이 울면 열나서 안 돼. 뚝. 애기 졸업 겨우 했는데 자꾸 울면 다시 애기 된다?”
“…그럼 너도 애기지…. 너도 많이 울었잖아.”
“난 그쳤는데, 이제. 자기도 이제 뚝.”
다시 눈가에 입 맞춘 현규진이 눈물이 그친 것을 확인하곤 잘했다는 듯 뺨을 만져 주었다. 그
손에 얼굴을 비빈 유원이 현규진의 손바닥으로 입술을 꾸욱 눌렀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17 화(117/127)

117


“…나도 미안해. 서운하게 해서…. 말도 오해하게 한 것 같아. 나중에는 막… 이상한 말도 하고….
미안해.”
“아니야. 내가 속 좁게 굴었어. 그냥 네 말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되는 건데 서운하다고 티
내다가 유치해지고, 억지 부리고… 내가 생각해도 나 진짜 너무 별로였어.”
“너 별로 아니야….”
고개를 저은 유원이 다리 위에 놓인 현규진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이렇게 오래 끌지
않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풀 수 있어 다행이었다.
“동아리는 1 학년은 안 받아 준단 말도 있어서 아직 들 수 있을지 없을지 잘 몰라…. 만약
들어가도 매일매일 만나고 그러는 분위기 아니고, 음…. 보충수업 하는? 그런 식으로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모인다고 하니까 우리 같이 있을 시간 많이 안 줄어들 거야.”
“…나 너무 유치하지. 나랑 놀아 달라고, 같이 있어 달라고 너 하고 싶은 것도 반대하고.”
“아니야, 안 그래. 내가 하고 싶은 거 진짜 반대한 적 없잖아. 반대해도 다 나 걱정해서 그런
거였고…. 나 아플까 봐 걱정해서 그런 거지, 너 좋자고 내가 하고 싶은 거 못 하게 한 적 한 번도
없었던 거 알아.”
아까도 그냥 이렇게 천천히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꼭 뭔가에 씐 것만 같았다. 유원을 학교에 빼앗길 것 같다는 위기감과 불안감, 그리고
서운함에 홱 돌아 개소리를 시전했던 걸 떠올리면 창피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학교 다닐 때 너 몸 약해서 하고 싶은 게 많아도 거의 다 못 했잖아.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말 자체를 안 하고, 당연히… 못 한다고 생각하면서 지내는 거 볼 때마다
속상했었어.”
“…….”
“그 생각하면 뭐든 다 하게 해 주고 싶은데 또… 네가 이것저것 다 하다 보면 나보다 좋은 게
생길까 봐 좀 걱정이 됐던 것 같아. 넌 너무 예쁘고,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 사람들이 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아니까.”
“규진아….”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나쁜 줄 몰랐어.”
속상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유원은 현규진이 마음에 뭉쳐 두었던 말을 하나하나
저에게 전부 소리 내 주는 게 좋았다. 지금은 이렇게 풀려 소리가 될 수 있고, 저에게 전해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소리가 되지 못한 생각과 감정은 더욱 단단하게 뭉쳐 내내
마음을 아프게 할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현규진의 마음 안에 그런 생각 덩어리가 있는 건 싫었다. 뭉치기 시작한 어두운 쪽 감정을
전부 들어 없애고, 그 자리에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것을 가득 채워 주고 싶었다.
“너 안 나빠…. 네가 왜 나빠.”
“…….”
“화나서 집 나갔으면서 멀리 가지도 못하고 집 앞에 있고, 기분도 안 풀렸을 텐데 내 옷 얇은 거
보고 옷도 벗어 주고, 유자차도 사다 주는데 네가 어떻게 나빠. 아, 그리고 담배도 샀는데 안
피웠잖아. 내 생각해서… 안 피운 거 다 알아.”
“…그건 당연한 거잖아.”
“너만 할 수 있는 거야. 규진이 너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못 해.”
다시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현규진의 뺨을 쓸어 준 유원이 미소 지었다. 장난기 가득해 웃는
현규진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네가 진짜 나쁘면… 내가 너 안 좋아하지이. 난 너 착해서 좋아하는데.”
“…얼굴 보고 좋아하면서.”
드디어 계절을 되찾은 봄밤을 물들이며 유원의 웃음소리가 작게 울렸다. 귀엽다는 듯
현규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꾹 눌러 문질문질한 유원이 소곤거렸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잘생기래.”
“…이제 진짜 안 그럴게.”
“그만 사과하고 웃어 줘. 웃는 거 보고 싶어.”
“…갑자기 웃어도 이상하잖아.”
“안 이상해. 넌 잘생겨서 괜찮아.”
얼굴을 감싸 쥔 채 문질러 주는 유원의 온기가 좋았다. 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도,
다정한 웃음도 다 너무 좋기만 해서 유원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하고 싶고, 할 수 있었다.
시원한 입매가 웃음을 그렸다. 그토록 보고 싶던 현규진의 웃음에 유원도 따라 웃었다. 눈이
접힌 채 활짝 웃는 그 얼굴에 밤공기가 따뜻해졌다. 역시 봄은 봄인 모양이었다. 결국,
따뜻해지는 것을 보면.
“집에 가자, 규진아.”
“응….”
두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렸다.
***
씻고 나온 현규진의 젖은 머리칼을 말려 준 유원이 보송보송해진 머리를 보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규진의 손을 잡아 방으로 데려갔다. 저보다 훨씬 키도 덩치도 크면서 제가
당기는 그리 세지 않은 힘에 끌려오는 현규진이 귀여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됐다.
“왜 그렇게 조용해?”
“나 원래 과묵하잖아.”
“올해 들은 말 중에 제일 웃겨.”
언젠가 현규진이 저에게 했던 말을 따라 하며 웃은 유원이 방으로 들어갔다. 먼저 현규진을
침대에 앉히고, 다리까지 들어 위로 올린 다음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얼른 저도
옆자리로 올라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너한테만 말이 많은 거지 다른 사람들한텐 진짜 과묵해. 우리 과 사람들은 다 나 엄청
과묵하고 조용하고 사연 있는 줄 알아.”
옆으로 누워 푸스스 웃은 유원이 현규진의 손을 꼬옥 쥔 채 이불 밖으로 들어 올려 살살
흔들었다.
“집 못 나가게 손잡고 잘 거야.”
“…잘못했어.”
“다음부터는 집 나가지 마. 나갈 거면 어디 갈 건지 알려 주고 가. 그래야 내가 가지.”
“나 또 찾으러 올 거야?”
“응. 유학 가도 찾으러 갈게.”
“…아, 정유원 이제 이걸로 10 년 놀린다.”
논리 점프를 어마어마하게 해서 내뱉은 말도 안 되는 말이 유원을 결국, 웃게 한다면 10
년이든 20 년이든 기꺼이 놀림감이 되어도 좋았다. 현규진은 두 팔을 벌려 제 품으로 파고드는
유원을 꼭 끌어안았다.
“규진아.”
“응.”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너 좋아해. 그리고 잊어버리지 마. 내가 먼저 너 좋아한
거….”
“…….”
“좋아하지 않으려고 정말 정말 많이, 수능 준비하던 때보다도 더 많이 노력했는데 그럴수록
매일매일 더 좋아지기만 했어.”
한 시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같은 침대에서 이렇게 따뜻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냥 그 편의점 테이블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지금 유원과
함께였다. 저를 찾으러 와 준,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고 멋진 애인 덕분에.
현규진은 꿈만 같은 유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내 의지로 안 되는 게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게 너야. 아픈 것도 내가 조심만 하면 피할 수
있는데, 널 좋아하는 건… 없던 일로 할 수가 없었어.”
“고마워. 그게 나여서.”
“그러니까 혹시 나한테 서운한 일 생겨도… 내가 널 덜 좋아해서 그러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알았지? 나… 규진이 너 없으면 못 살아.”
“나도 못 살아. 정유원 없이 어떻게 살아. 하루도 못 살아.”
팔과 다리로 유원을 완전히 결박하듯 끌어안은 현규진이 귓가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제
허리로 마주 감기는 팔이 좋아 바보처럼 웃음이 났다.
“혹시 내가 너한테 너무 집착하는 거 같으면 말해 줘. 티 덜 내고 속으로만 할게.”
“그게 뭐야아. 원래 안 하려고 노력할게,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안 할 수는 없으니까.”
당당한 현규진의 대답에 웃은 유원이 따뜻한 품에 뺨을 비볐다.
“티 많이 내도 돼…. 난 네가 막 그런 집착하는 말할 때 좋아.”
“어떤 말?”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만 살짝 몸을 뗀 현규진이 고개를 든 유원과 눈을 맞췄다.
“아무 데도 못 간다고 하거나…. 어디든 같이 갈 거라고 하는 것도 좋고, 절대 안 놔줄 거라고
하는 것도 좋아.”
“뭐야. 집착은 정유원이 더 심하네. 얼른 나한테도 말해 줘.”
집착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예쁘게도 웃은 유원이 몸을 살짝 일으켜 현규진의 몸 위로
올랐다. 크고 단단한 몸 위에 엎드리자 현규진이 움칠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너 이제 아무 데도 혼자 못 가. 너 가는 데는 내가 어디든 다 같이 갈 거야…. 또…. 음, 또오….”
“절대 안 놔줄 거야.”
소곤대며 알려 준 현규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유원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진짜
그냥 입에 넣어 내내 혀로 굴리며 아껴 먹고 싶었다.
“절대 안 놔줄 거야. 편의점도 따라가고 유학 가도 따라갈 거야.”
“와, 존나 감동받고 있었는데.”
봄이 들어찬 침대 주위로 유원의 웃음소리가 번졌다.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프다는 유원을
그대로 눕히고 올라탄 현규진이 이불을 머리 위까지 당겨 덮었다. 이불 속 봄밤 안으로 유원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울렸다.
“계속 놀릴 거야?”
“세 번만 더 놀릴래.”
“진짜 세 번이면 돼?”
“…음, 다섯 번?”
“그럼 다섯 번으로 정한다?”
“아니야, 열 번.”
“그러다 백 번 되겠다. 정유원 아직도 양아치네.”
다시 이불 안으로 웃음이 가득 퍼졌다. 한참을 같이 웃다가 마주친 눈동자 안에는 서로가
가득했다. 그걸 깨달은 순간에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갔다. 틈 없이
맞물린 입술 사이로 유독 더 달착지근하게 느껴지는 숨이 흘렀다.
오해, 다툼, 서운함, 슬픔, 답답함, 눈물.
그 모든 것을 뒤덮으며 오늘 밤을 기억할 유일한 말은 결국, 사랑이었다.
***
다 먹은 시리얼 볼을 설거지하는 현규진의 뒤로 유원이 달라붙었다. 제가 외로울까 봐 왔다는
유원의 말에 웃은 현규진이 물 묻은 손 하나를 수건에 닦고 유원의 팔을 잡아 앞쪽으로
데려왔다.
싱크대와 현규진의 사이에 갇힌 유원은 가만히 다시 현규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조금
전에도 뒤에서 현규진을 안고 있긴 했지만, 확실히 앞에서 안는 게 더 좋았다. 쿵, 쿵 뛰는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고, 고개만 들면 얼굴을 볼 수도 있으니까.
“정유원, 진짜 큰일이다.”
“뭐가?”
“아침부터 존나 예뻐, 진짜.”
주스를 마신 컵을 닦으며 고개를 숙인 현규진의 유원의 머리칼에 쪽 입 맞췄다. 유원에게 안긴
채 하는 설거지라니 이대로 종일 손이 부르트도록 설거지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어제 싸운
거? 그런 건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게 뭐야아….”
“그러게 누가 아침부터 예쁘랬어? 여보 뽀뽀.”
“뽀뽀.”
현규진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던 유원이 고개를 들어 입술을 모아 내밀었다. 쪽, 쪽. 처음에는
두 번 닿았던 입술이 또 한 번, 그리고 아쉬움에 또 한 번 마주치다가 이내 깊게 맞물렸다.
“…으응….”
등 뒤에서 나던 물소리가 잦아들었다. 유원은 오늘따라 더 뜨겁게 느껴지는 현규진의 혀를
마주 문지르며 몸을 더 밀착했다. 물 온도를 따라 서늘해진 현규진의 손이 티셔츠 아래로
들어왔다. 체온보다 낮은 온도에 놀란 유원이 움칠대며 허리를 비틀었다.
“아, 미안. 차갑지. 여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더 따뜻해?”
입술을 뗀 현규진의 유원의 얼굴을 살폈다. 그새 달아오른 유원은 떨어진 게 싫다는 듯
발뒤꿈치를 들어 다시 입술을 머금었다. 그에 머리가 확 돈 현규진이 허리에 있던 손을 더
위로 올려 등까지 넣으며 깊게 혀를 섞었다.
말캉한 혀가 거칠다는 느낌이 날 정도로 뒤엉켜 문질렸다. 두 눈을 꼬옥 감은 채 키스하는
유원을 보다가 눈을 감으려던 현규진의 눈이 다시 뜨였다. 그리고 다시 살짝 입술을 떼어 냈다.
얽혀 있던 혀가 풀리며 끝에서 침이 가느다랗게 늘어나다가 툭 끊겼다.
“…하아…. 더, 더 하고… 싶어…. 더 할래, 응?”
“하…. 잠깐만.”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현규진이 다시 유원의 얼굴을 잡아 입술을 마주 댔다. 혀를 넣어 유독
더 뜨겁게 느껴지는 혀를 쪽쪽 빨자 유원이 앓는 소리를 냈다. 현규진은 다시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반쯤 멍해진 유원의 얼굴이 다시 다가왔다.
“잠깐만, 확인 좀 하고.”
현규진의 커다란 손이 유원의 이마를 덮었다. 따뜻한 유원을 만지고 있어 그 체온이 옮겨 와
잔뜩 손이 따뜻해진 상태인데도 제 손보다 유원의 이마가 더 뜨거운 게 느껴졌다.
사색이 된 현규진이 마지막 확인이라도 하듯 두 손으로 유원의 뺨을 감쌌다가 풀어 몸
여기저기를 만져 보았다. 그럴수록 점점 더 현규진의 눈은 걱정으로 물들었다.
“아…. 진짜 큰일 났다.”
“하아…. 왜?”
“너 열나, 유원아.”
친구 사이 고백 금지-118 화(118/127)

118


아무래도 그 밤에 얇게 입고 저를 찾으러 나왔던 게 화근인 것 같았다. 현규진은 심각한
얼굴로 유원의 얼굴 여기저기를 만져 다시 열을 체크했다. 아주 오랫동안 유원의 열을 직접
체크했던 경험에 의하면 이건 분명 감기 전조 증상이었다. 지금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안 되겠다. 오늘 학교 가지 마. 병원 갔다가 푹 쉬어야 돼.”
“오늘 수업도 있고…. 과제 때문에 이따 모이기로 해서 빠지면 안 돼.”
“지금 과제가 문제가 아냐. 머리 아프진 않아?”
“하나도 안 아파. 무겁지도 않고…. 너랑 뽀뽀해서 그런 거 아냐? 너랑 그거… 해도 엄청
열나잖아.”
“그 열이랑 좀 달라. 이거 백퍼 감긴데.”
난감한 상황에 현규진은 고민에 빠졌다. 100%의 확률로 감기라는 걸 확신할 수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고등학교 다닐 때처럼 마음대로 수업을 다 빠지고, 과제 모임까지 무조건 빠지라고
단호히 말할 수는 없었다. 한 교시 보건실에서 잠시 쉬었다가 들어가고, 조퇴를 해도 큰
문제가 없는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정말 컨디션 괜찮아?”
“응, 괜찮아. 안 좋으면 안 좋다고 너한테 제일 먼저 말했지.”
다시 제 허리를 안으며 웃는 걸 보면 확실히 컨디션이 나쁜 것 같진 않았다. 심하게 아프기
전에는 아침부터 컨디션 안 좋은 게 확 겉으로 드러났었으니 일단 병원에 가서 약을 지어
먹이는 정도로 하루 정도는 커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오늘만 무사히 넘기면 주말이니 이틀
푹 재우고 먹이면 월요일에는 또 컨디션이 좋아질 것이었다.
“음…. 그럼 병원 갔다가 학교 가자. 컨디션 나빠지기 전에 약 먹는 게 나아. 심해지면 그땐
먹어도 오래 아플 수 있으니까.”
“응. 알았어. 그런데 규진아….”
“응?”
“…나 뽀뽀 더 하고 싶어.”
유원이 아프다는 걸 인식하고 있는데도 그 말에 머리가 회까닥 돌았다. 현규진은 유원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아 올려 싱크대 옆으로 앉혔다. 그리고 두 다리를 제 허리에 감게 했다.
“…으응….”
두 팔로 따끈따끈한 몸을 가득 끌어안고 다시 입술을 마주했다. 열이 난다는 걸 한 번
의식하고 나니 혀가 더 뜨겁게 느껴졌다. 얇은 티셔츠 위로 등을 쓸어 주다가 손을 내려 다시
안으로 파고드니 보드라운 피부가 손끝으로 감겼다.
허리를 커다랗고 뜨거운 손으로 매만지다가 위로 올려 유두 주변을 엄지로 살살 문지르니
유원의 엉덩이가 약하게 들썩였다. 오늘따라 스킨십을 먼저 더 해 달라고 자꾸 조르고 더
끌어안고 더 안겨 와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정신을 가장 똑바로 차리고 더 아프지 않게
케어해야 할 순간에 정신을 차리기 가장 어렵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 이제, 후우, 그만.”
“하아….”
눈동자가 다시 반쯤 멍해진 유원이 현규진의 허리에 감은 다리를 조금 더 꽉 조였다. 떨어지기
싫다는 적극적인 행동을 마주하며 현규진은 착실히 발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유원이 혀를
비비다가 쪽쪽 빨아 주며 제 머리칼을 쓸어 줄 때부터 서 있기는 했지만.
“안 돼. 무리하면 절대 안 되는 거 알잖아.”
“…하기 싫어…?”
“……아, 씨…. 하기 싫겠냐. 나도 하고 싶어. 존나 하고 싶어 뒤지겠어.”
“규진아…. 나 이상해. 너랑 떨어지기 싫어….”
오늘따라 제 이름을 부르면서 아주 가끔 기분이 잔뜩 좋을 때, 그러니까 취했거나, 섹스하다가
너무 느껴 어쩔 줄 모를 때 보여 주는 애교 섞인 말까지 자꾸 해 주니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제 머릿속 중심이 유원에서 섹스로 옮겨 가면 절대 안 된다는 걸 알기에
현규진은 머리에 꽉 힘을 주고 가까스로 유원을 달랬다.
“자기야. 나도 자기랑 떨어지기 싫어. 당연히 하고 싶지. 그런데 지금 병원 갔다가 학교 가려면
한 시간 뒤에 나가야 돼. 씻고 준비해야지. 응? 저녁에 컨디션 괜찮으면 그때 하자. 내일
주말이니까 밤새… 아….”
말을 채 마무리하지 못한 현규진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유원의 손이 피어싱 위를 누르고
있었다. 귓불을 만지다가 피어싱 위를 덮어 문지르니 아랫배 울렁임이 심해졌다. 참고 또 참던
게 다 무너져 저 멀리 저에게 빠이 인사하며 사라지는 게 보였다.
인간의 의지가 이렇게도 나약하고, 쾌락에 약하다는 것을 두 눈으로 마주하며 현규진은
자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쾌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유원아, 여보…. 잠깐, 손 좀…. 아, 흐으….”
허리는 감긴 다리에 갇혀 있고, 귀에서는 등줄기가 오싹할 정도의 묘한 감각이 전신을 훑으며
흘러내렸다. 유원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고 몸을 떨던 현규진이 고개를 돌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포근한 체향이 파고드는 순간 버티기가 힘들었다.
씨발, 큰일 났다, 진짜. 고개를 들어 급히 유원의 입술을 머금은 현규진이 두 손으로 유원의
잠옷 바지를 속옷과 함께 끌어 내렸다. 그제야 허리에 감겨 있던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같이 벗겼지만, 헐렁한 바지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속옷은 유원의 오른쪽 무릎에
걸려 머물렀다.
“으응…. 하아….”
길게 이어지던 키스 끝에 입술을 뗀 현규진이 검지와 중지를 붙여 제 입 안으로 넣었다.
유원의 입속에 넣고 헤집어도 좋겠지만, 아플 가능성이 큰 애한테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유원에게 져서 이러고 있지만, 그래도 완전히 지금의 이 상황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
“…….”
손가락을 입에 넣어 혀로 문지르자 유원의 시선이 더욱 멍해지는 게 느껴졌다. 현규진은
보라는 듯 혀를 조금 내밀어 손가락을 더 노골적으로 문질렀다. 유원의 뺨과 귀가 더 불긋하게
달아올랐다.
축축해진 손가락을 입에서 빼낸 현규진이 유원의 다리 사이로 내려가 다물린 입구 위를
문지르다가 손가락 하나를 넣었다. 아픈 소리를 내는 유원의 뺨과 입술에 내내 입 맞추며
천천히 밀어 넣자 이내 허리가 살짝씩 비틀렸다. 현규진은 손가락을 하나 더 넣어 유원의 안을
느릿하게 풀어 주었다. 손가락이 안을 헤집는 내내 맞붙은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흐읏….”
부드러워진 안으로 현규진의 것이 파고들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또 느릿하게 파고드는
움직임에 유원은 어찌할 줄을 모른 채 매달렸다.
너무 느려서 현규진의 성기가 안을 쓸고 들어가는 느낌이 더 또렷했다. 조금씩 깊어질 때마다
유원의 벌어져 있는 허벅지 안쪽이 잘게 떨리고, 하얀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배 속이 꽉 찬
느낌이 나는 걸 보니 이제… 곧 안쪽으로 닿을 것 같았다.
“아…. 응, 천천히, 흣, 하니까 너무… 이상해….”
몸이 마구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부끄럽게 자꾸 안달이 나고 애가 탔다. 벌어진 채 싱크대
아래쪽으로 내려가 있던 유원의 다리가 다시 현규진의 허리에 닿았다. 날씬한 종아리가
그대로 허리를 감은 채 조인 순간 현규진의 성기가 유원의 깊은 곳을 푹 찌르며 몸이 꽉
맞물렸다.
“하으읏!”
완전히 몸이 마주 물려 깊은 곳을 찔린 순간 유원은 사정했다. 입술이 벌어지고 온몸이
쾌감으로 떨렸다. 그런 유원의 몸을 두 팔로 꽉 안은 현규진이 깊은 곳을 짓누르고 있는
성기를 조금만 빼냈다가 같은 곳을 잘게 쳐 주었다.
빠르게 퍽, 퍽 힘이 실려 같은 곳만 자극하자 유원의 신음이 목덜미로 뭉그러졌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크게 허리를 비틀며 가 버린 유원의 안으로 현규진도 사정했다.
과격하게 움직이며 한 것도 아니고, 유원을 생각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체력을 뺏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전보다 유원이 더 느껴 버린 것 같았다.
쉽게 가시지 않고 길게 고인 쾌감의 여운에 성기를 빼지 않고 허리를 한 번씩 탁, 탁 칠 때마다
유원의 성기 끝에서 묽은 것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잔뜩 느껴 신음하는 유원을 끌어안은 채
마지막으로 깊게 찌르며 한 번 더 사정한 뒤에야 현규진은 아쉬움을 애써 외면한 채 성기를
빼냈다.
마음 같아서는 학교고 뭐고 방으로 데려가 열 번은 더 하고 싶은데 인간이기 때문에 참아야
했다. 저한테 빠이 인사하고 떠났던 이성이 어느 순간 다시 돌아와 ‘아픈 애한테 못 참고 해
대니 좋냐?’비난을 하고 있어 더 그랬다.
“하…. 괜찮아? 너무 힘들거나 막 어지럽진 않아?”
“…하아…. 괜찮아…. 기분 너무 좋아….”
제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대는 유원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앓는 소리를 낸 현규진이
그대로 유원을 안은 채 욕실로 향했다. 아까보다 힘이 빠져 추욱 늘어져 안긴 유원에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젠 정말 유원을 보호해야 할 시간이었다.
***
[여보♥ : 어지럽거나 속 메스꺼우면 바로 전화해]
[여보♥ : 과일 주스 같은 거 마셔 비타민 보충]
[여보♥ : 열 심하게 나는 것 같다 싶어도 바로 콜]
걱정하는 여우 이모티콘을 보낸 현규진의 톡을 본 유원이 웃으며 카페에 모여 있는 사람들
몰래 답을 보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여보 뒤에 하트까지 생긴 저장명이 너무 귀여워 현규진의
얼굴이 눈앞에 막 아른거렸다.
[알았어 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수업 잘 들어]
[여보♥ : 응]
[여보♥ : 사랑해 여보]
[나도 사랑해]
다른 건 몰라도 사랑한다는 말에는 답을 해 주고 싶어 그 말까지 꾹꾹 눌러 적은 유원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열어 과제 자료를 업로드해 두었다는 팀원 공유
드라이브에 접속했다.
다운받은 폴더 압축을 풀고 열자 수십 개의 자료가 한 번에 확 떴다. 순간 눈앞이 흔들리며
노트북 화면도 따라 위아래로 요동쳤다. 유원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그제야 화면이 다시
멀쩡해졌다. 아무래도 과제 회의만 끝나면 현규진과 얼른 집에 가서 주말 내내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주말 동안 집에서 현규진이랑 계속 붙어 있어야지. 떨어지기 싫다고 말로도 해 주고, 뽀뽀도
먼저 해 줘야지. 그러면 또 놀라서 삐거덕삐거덕 로봇처럼 굴겠지?
생각만으로도 귀여워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은 유원이 딸기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자료에 대해 설명하는 동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과제를 할 방향을 정하고, 각각 어떤 일을 할지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현규진의
수업이 끝나려면 30 분 정도 남은 것을 확인한 유원이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품을 한 원지호가 그런 유원의 옆으로 다가와 눈을 비볐다.
“아, 오늘 너무 피곤해. 집에 가자마자 자야지. 자고 일요일 아침에 일어날래.”
“나도 오늘은 일찍 자려고. 감기 걸린 것 같아. 낮까지는 괜찮았는데 좀 으슬으슬하네.”
“헐, 저녁 무조건 고칼로리 먹어. 그리고 약 먹고 땀 쫙 빼면서 푹 자.”
“그래야지. 넌 어느 쪽으로 가? 난 도서관 쪽으로 갈 건데.”
“나도 그쪽으로 가. 같이 가.”
원지호와 함께 과제 이야기를 하며 도서관 쪽으로 가던 유원은 저녁에 가까워질수록 확실히
체력이 훅훅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원래라면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아침에 현규진과 키스
다음까지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제가 너무너무 하고 싶어서 조른 거라 절대 후회는 없지만, 현규진에게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가 후회하지 않고, 너무 좋았다고 해도 그 착한 애는 분명 자책할 테니까. 잔뜩
좋았던 일에 현규진이 속상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월요일에 우리 수업 사이에 시간 뜨잖아. 그때 같이 그 과제 자료 정리하자. 주말에는 좀
쉬고.”
“응, 그러자. 같이 하면 빨리 끝낼 수….”
유원은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과 너무나 정확하게 마주친 눈에 잠시 머뭇댔다. 걷다 보면 마주
걸어오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경우가 흔하다지만, 이렇게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는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누구지? 분명히 본 적 있는…. 아….
과외 선생님 친구. 대학 구경을 하러 갔던 날 저를 붙잡고 번호를 물어보며 입을 길쭉하게
만들어 웃던 얼굴이 가까워지는 남자의 얼굴 위로 덧그려졌다.
“어? 너!”
“…아….”
“여전히 맛있게 생겼네?”
그때처럼 입술을 길게 찢어 웃은 남자가 이상한 소리를 하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순간 놀란
유원이 뒷걸음쳤다. 이상한 말도 징그럽지만, 정상인처럼 보이지 않는 안광이 무서웠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19 화(119/127)

119


“지호야…. 나 카페에, 카페에 다시 가야 할 것 같은데….”
“어? 어어…. 가자!”
뭔가 싸한 기운을 느낀 원지호가 유원과 함께 뒤돌았다. 그때 뒤에서 달려오는 것 같은
발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유원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카페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위협하며 놀리기 위해 굴린 발소리가 멈추고 재밌다는 듯 웃는 소리가 크게 울렸지만,
그걸 파악할 상태가 아닌 유원은 제 한계치를 넘을 때까지 달렸다. 뒤에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원지호가 잡아 세울 때까지 쭉.
“하…. 아무도, 안 와, 아, 아까 누구야? 인상 진짜, 헉, 개더럽던데.”
가쁜 숨을 내쉬며 원지호가 물었다. 유원은 몸을 앞으로 숙인 채 두 무릎을 쥐고 쏟아지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까지 뛴 적은 초등학생 이후 처음이었다. 저도 애들과 놀고 싶어서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억지로 뛰다가 쓰러졌던 이후로 이렇게까지 한계치, 아니 그 이상까지 달려
본 적이 없었다.
“…하아…. 하으, 하….”
숨이 마구 터져 나왔다. 온몸이 오싹했다가 식은땀이 확 배어 나왔다. 두 발이 빙빙 돌고 바닥
벽돌 문양이 어지러이 흐트러졌다. 바닥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건지 붕 떠 있는 건지 알 수
없고,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가 까맣게 변했다.
“헐, 유원아. 하…. 헉, 너 괜찮아? 유원아! 숨, 숨 제대로 쉬어 봐. 정유원!”
어깨에서 가방끈이 흘러내리고 이내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마구잡이로 터져 나오는 숨이 멈추지 않았다. 원지호의 목소리가 웅웅대며 들렸다. 몸을
세워야 하는데 도저히 세울 수 없고, 메스꺼워 눈물이 났다.
‘어지럽거나 속 메스꺼우면 바로 전화해.’
현규진의 톡이 떠올랐다. 휴대폰을 꺼내야 할 것 같아 상체를 살짝 들어 올린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무릎이 꺾이고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어떡해, 규진아. 나 너한테 전화도
못 했는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점멸했다.
***
오늘따라 시간이 정말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현규진은 아직도 수업이 끝나려면 20
분이나 남은 것을 확인하고 손으로 턱을 괴었다. 혹시라도 유원에게 연락이 올까 싶어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의 까만 화면을 보다가 교수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든 순간 진동 울리는
소리가 났다.
원지호.
화면에 뜬 원지호의 이름을 본 현규진이 심드렁한 얼굴로 통화 거절을 눌렀다. 왜 전화질이야,
갑자기. 혀를 한 번 쯧 차고 다시 고개를 들려는 순간 다시 화면이 반짝였다. 이번에는
톡이었다. 현규진은 눈동자만 아래로 내려 잠금화면에 뜬 원지호의 오타가 잔뜩 난 메시지를
눈에 담았다.
[원지호 : ㅇ유우ㅏㄴ이 쓰러졋어]
[원지호 : 지금 경양ㅇ관 캎페 앞]
뭐라는 거야. 유원이… 쓰러졌어? 씨발?
의자가 뒤로 확 밀렸다. 현규진은 가방이나 노트북 같은 것을 챙길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휴대폰 하나만 든 채 강의실을 뛰쳐나갔다. 미친 듯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원지호에게 전화를
걸자 신호가 한 번 가기가 무섭게 잔뜩 겁먹은 것 같은 원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어디야.”
-어, 규진아! 여, 여기… 경영관 카페…. 카페 앞인데….
“어떻게 된 거야. 정유원 지금 괜찮아? 기절한 거야?”
-기절한 것 같아…. 어떡해? 숨은 쉬는데…. 어, 119 는 불렀어. 10 분 안에 온다고는 했는데….
“갑자기 왜 쓰러졌는데. 하…. 열 많이 났어? 어지럽다 그랬어? 감기 기운 있어서 그래?”
경영관이라면 다행히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현규진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내어 유원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과제 끝나고… 어, 가는데…. 그 누군진 모르겠는데 유원이가 누굴 보더니… 놀란 것 같았어.
그래서 다시 카페로 가야 한다고 해서… 뛰었거든. 도망치는 것 같았어.
도대체 누굴 보고 유원이 놀라서 뛰어 도망까지 간 건지 한 번에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해 컨디션 좋을 때도 그렇게 무리해서 뛰면 견디지 못하는데 감기 기운까지
있는 상태로 뛰었으니 버티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현규진은 저 앞으로 보이는 경영관을 보며
다리를 움직였다.
“얼마나 뛰었는데.”
-어…. 글쎄, 한…. 5 분?
1 분도 계속 달리기 힘든 애가 그보다 몇 배를 달렸으니 탈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현규진은
욕을 내뱉으며 마침내 가까워진 경영관 반대쪽 입구에 있는 카페 쪽으로 향했다.
“나 다 왔는데 어디….”
코너를 돌자마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 사이를 헤치고 들어간 현규진이 창백한
얼굴로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유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유원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유원아. 정유원. 내 말 들려? 유원아.”
단순히 체력이 다 떨어져 까무룩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너무 무섭고 걱정이 되어 울고 싶었지만, 여기서 제가 흔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현규진은 최대한 냉정히 이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늘 해 왔던 것처럼 유원을 살피고,
차가운 손발을 주물러 주며 한 번씩 코 아래 손을 대어 보았다. 냉정히 굴려 노력하지만, 손이
떨리는 것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그때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구급차가 경영관 앞으로 서고, 구급대원이 들것을 가지고 와
유원을 구급차로 옮겼다. 원지호에게 연락하겠다 말한 현규진이 얼른 유원과 함께 구급차에
올랐다.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은 유원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색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차갑던 손도 따뜻해졌다. 내내 냉정을 유지하며 절대 무너지지 않으려
노력하던 현규진은 그제야 주저앉았다. 침대 옆 보호자 의자에 앉는 순간 손이 덜덜 떨리고
눈동자가 축축해졌다. 유원이 보면 울보가 다 됐다고 놀리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동안 아파도 이렇게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은 없었기에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놀랐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원지호의 연락을 받고 강의실을
뛰쳐나가던 그 순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
힘이 없는 유원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얼굴을 묻은 현규진이 긴 숨을 내쉬었다. 유원의
안정이 확보되고 나자 정신없고 복잡하던 머릿속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현규진은 그제야
유원이 누군가를 보고 도망쳐 5 분 가까이 달렸다는 원지호의 말이 떠올랐다.
“…….”
도대체 누굴 본 걸까.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떠올리려고 해도 바로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그렇게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달려 도망칠 만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착한 유원이 누군가의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한 적도 없거니와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시점에 그런 사람이 생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동안 유원이 어떻게 지냈는지
누구를 만나고, 뭘 했는지는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기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원지호도 그 상대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한 걸 보면 같은 반 사람은 아닐 것이었다.
그럼 누굴까. 같은 과 다른 반 사람? 아니, 잘 만날 일도 없는 다른 반 사람을 보고 유원이
도망까지 칠 리는 없었다. 아, 누구지. 도대체 누굴 보고….
아니, 사실 거기까지 가기 전에 제가 더 문제였다. 감기 기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침에 못
참겠다는 이유로 섹스를 해 댄 것도 분명 문제였을 것이었다. 안 그래도 체력 약한 애를
아침부터 괴롭힌 제가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유원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에 한
번쯤은 해도 되지 않을까 쉽게 합리화해서 진짜 해 댄 제가 화근이었다.
“…규진아.”
“어, 유원아. 깼어? 괜찮아? 머리는 어때. 아니, 몸, 아니 나 보여?”
쏟아지는 질문에 유원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제 손을 꼭 쥐고 있는 현규진의 덜덜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가만히 쥐었다.
“미안해…. 걱정했지.”
“…걱정한 건 맞는데 미안할 건 없어.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미안하지. 너 감기 기운 있는 거
알면서도 내가 아침에… 그래서….”
“그거 때문에 그런 거 아냐아….”
손을 하나 떼어 유원의 머리칼을 쓸어 준 현규진이 반쯤 들어간 링거를 확인하고 다시 유원을
바라보았다.
“이모한테는 아직 연락 안 드렸어.”
“잘했어…. 별일도 아닌데 괜히 엄마, 아빠 걱정하는 거 싫어.”
“뭐가 별일이 아냐. 이렇게 완전히 쓰러진 건 진짜 오랜만인데. 대학 준비하느라 힘들 때도
이런 적 없었잖아.”
“오늘은 내가 뛰어서 그래.”
그래도 이젠 어느 정도 핏기가 도는 뺨을 쓰다듬은 현규진이 조금의 재촉과 다그침도 없이
유원에게 물었다.
“원지호 말로는 네가 누굴 보더니 도망치는 것 같았다는데 정말이야?”
“그게…. 나 너한테 까먹고 말 안 한 거 있어….”
“뭔데?”
“…말하려고 했는데 싸워 버려서 그거 말해야 한다는 걸 잊었어.”
미안한 얼굴이 된 유원의 머리를 다시 부드럽게 쓰다듬은 현규진이 괜찮다는 듯 웃음 지었다.
“괜찮아. 말해 봐.”
“선생님 만났을 때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그… 전에 우리 학교 구경 갔을 때 만난 선생님
친구분들 있었잖아.”
“어. 그 미친 새끼.”
그제야 머릿속으로 이 학교에 미친 변태 새끼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현규진은 확 구겨지려는
얼굴을 애써 평온하게 유지했다. 안 그래도 아픈 애한테 화내는 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그때… 나한테 연락해서 네가 화냈던 그분이 경영 C 반인데 나 있는 A 반에 친한 사람들도
있고, 또 술자리만 있으면 여기저기 다 가니까 만날 수도 있다고 선생님이 그러셨거든.”
“꼴에 아직도 친한 사람이 있어? 다 병신인가. 그딴 새끼랑 친하게.”
“그런데 아까 너 있는 쪽으로 가려고 지호랑 가는데 맞은편에서 그분이 오는 거야….”
“아, 씨. 미쳤나, 진짜. 아니, 일단 그분이라고 할 것도 없어. 그 새끼라고 해. 해 봐. 그 새끼.”
“…그… 새…. 그 사람이 날 알아보고 가리키면서 막 웃는데 너무 무서웠어. 뭔가 피해야 할 것
같아서 지호랑 다시 카페 쪽으로 가려고 했거든. 그런데 막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나서 더
빨리 뛰다 보니까 숨쉬기가 힘들었어.”
새끼라는 말 하나를 못 해서 그딴 새끼한테도 사람이라 말하는 유원을 두렵게 하고, 도망치게
하고, 결국은 쓰러지게 했다는 자체로 도저히 용서가 되질 않았다. 역시 전화로 좆같은 소리를
했을 때 찾아가서 제대로 조졌어야 했단 후회가 밀려들었다.
“잘했어. 우리 자기는 잘못 하나도 없어. 그 새끼 때문에 자기가 고생한 거잖아. 내가 놀란 것도
결국, 다 그 새끼 때문이고.”
“…….”
“그럴 일 없어야겠지만, 다음에 혹시 마주치더라도 절대 둘이는 있지 마. 어디 가서
얘기하자고 해도 가지 말고, 사람 많은 데에 있어. 나 바로 부르고. 알았지?”
“응…. 그런데 규진아, 넌 괜찮아? 얼굴이 너무 하얘. 많이 놀라서 그런가 봐. 너도 누워서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와중에도 제 걱정을 하는 유원은 정말이지 천사였다. 괜찮다며 고개를 저은 현규진이
유원의 손가락에 쪽 입 맞췄다. 입에 해 주고 싶었지만, 혹시 누가 봐서 유원이 부끄러워할까
봐 참았다.
“너 괜찮아졌으니까 나도 이제 괜찮아질 거야.”
“…수업 중에 나온 거야?”
“아…. 어. 맞아. 아, 가방이랑 다 거기 있겠다.”
“안 가지고 나왔어?”
“응. 그냥 바로 일어나서 나오느라.”
“어떡해….”
“그런 거 걱정 안 해도 돼. 그게 뭐 대수야. 가방이야 찾아오면 되지. 없어졌으면 다시 사면
되고.”
대수롭잖게 말한 현규진이 다시 유원의 손에 쪽 뽀뽀하고 이불을 올려 덮어 주었다.
“이거 다 맞으려면 시간 좀 더 걸리니까 좀 더 자. 말 많이 해도 힘 빠지잖아. 얘기는 이따 집에
가서 하자.”
“응…. 넌 가서 뭐라도 좀 마시고 와. 힘들어 보여.”
“싫어. 여기 있을래.”
“…….”
“가라고 하지 마. 같이 있자고 해 줘. 나 무서웠단 말이야.”
제 손을 잡고 덜덜 떨던 현규진을 떠올린 유원이 이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현규진이 가장 원하고, 사실은 저도 가장 원하는 말을 소리 냈다.
“나 일어날 때까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나랑 있어.”
“응. 아무 데도 안 갈게.”
“손도 놓으면 안 돼….”
“알았어. 절대 안 놔.”
맞잡은 손의 온기에 마음을 놓은 유원의 눈이 다시 스르륵 감겼다. 현규진은 가만히 그
자리에서 천천히 잠이 드는 유원을 살폈다. 괜찮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오늘 아침 저를 보고
웃고, 안겨들던 정도로 회복된 것은 아니라 여전히 걱정이 됐다.
‘그 사람이 날 알아보고 가리키면서 막 웃는데 너무 무서웠어.’
현규진은 가만히 그 낯짝을 떠올렸다. 히죽대며 웃고, 희롱을 농담처럼 하던 면상으로 유원을
마주했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아무래도 가만히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
딱 기다려라, 씨발아. 우리 유원이가 쓰러졌으면 넌 죽어야지.
현규진의 짙은 눈동자가 번득였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20 화(120/127)

120


현규진은 정말 유원을 아기 다루듯 조심히 대했다. 병원에서 나올 때도 업히라며 등을
내밀었고,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고개를 젓는 유원을 품에 거의 숨기듯 폭 안은 채 응급실
밖으로 나와 택시에 태웠다.
집에 도착해 씻고 싶어 하는 유원을 데리고 욕실로 들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아주 살살
천천히 씻겨 주었고, 머리도 말려 주었다. 그런 다음에는 안아 들고 나와 침대에 눕히고
로션과 크림까지 전부 발라 주었다.
평소에도 늘 과보호 상태기는 하지만, 간만에 보는 1 급 과보호 상태에 유원은 그냥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주말이고, 둘만 있으니 그냥 현규진의
마음이 편한 쪽으로 하게 두고 싶었다. 저 때문에 너무너무 많이 놀랐을 테니까. 하얗게 질려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그 얼굴이 한 번씩 아른거릴 때마다 유원의 마음이 일렁였다.
저녁은 삼계탕이었다. 몸보신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삼계탕을 주문한 현규진은 먹기 좋게
살을 다 발라 한 숟가락씩 유원에게 손수 먹여 주었다. 혼자 밥 먹을 힘 정도는 너끈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원은 가만히 입을 벌려 현규진이 주는 것을 받아먹었다. 제가 열 번 먹을 때
겨우 한 번 먹는 현규진을 보며 미안하고 속상해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결국, 제가 다 먹은 뒤에야 식은 것을 대충 먹고 치우는 현규진의 뒷모습을 보며 유원은 작게
한숨지었다. 저를 걱정하고 사랑해서 그런다는 걸 알아 너무너무나 고마우면서도 자꾸만
미안해졌다.
물론 다신 없어야 할 일이지만, 혹시 또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현규진은 저를 걱정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밥조차 식은 것을 대충 먹으며 때울 테니까.
“규진아.”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어 일어난 유원이 현규진에게 다가가 뒤에서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중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였다. 팔을 조금 느슨하게 풀고
발꿈치를 들자 현규진이 고개를 기울여 주었다. 유원은 그 귓가에 입술을 누른 채 소곤댔다.
사랑해.
다정하게 흐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현규진이 웃었다. 씩 웃는 얼굴 위로 그 언젠가의 웃음이
겹쳤다.
달리기 1 등을 하고 결승점을 지나 저에게 달려오며 짓던 웃음과 엄마 몰래 이불 안에서
랜턴을 켜고 새벽 늦게까지 만화책을 보다가 들켜 혼난 다음 캄캄한 방에 누워 그래도
재밌었다면서 소곤대던 웃음. 그리고 별것도 아닌 일로 다투고 집에 간 지 10 분 만에 다시
찾아와 문 사이로 얼굴을 반만 넣어 저를 보다가 들어오라고 손짓하면 시원하게 입매가
늘어나며 짓던 웃음까지.
스무 살, 현규진의 웃음 안에는 다섯 살 때의 현규진도 있고, 열두 살 때의 현규진도 있었다.
유원은 그 모든 현규진을 사랑했다. 제가 기억하는 모든 현규진을.
“너무 오래 서 있는 거 아냐? 어지럽거나 그러진 않아? 얼른 하고 갈 테니까 가서 누워 있어.
아니다, 먹고 바로 누우면 안 좋지.”
“혼자 가기 싫어…. 방에 같이 가. 침대에서 놀자.”
“…아픈데 야한 말 금지.”
“…그게 왜 야한 말이야?”
“침대에서 놀자며. 존나 야해, 진짜. 아픈데 야해도 돼?”
“그, 그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침대에서 놀자는 거야.”
설거지를 마치고 손을 닦은 현규진이 몸을 돌려 당황해 불그스름해진 유원의 뺨을 톡
건드렸다.
“그러니까 뭐 하고 노는데 침대에서.”
“…얘기하고….”
“얘기하고, 또?”
“…뽀뽀도 하고….”
“또?”
“……키스?”
“이거 봐. 얼굴은 안 그렇게 생겨서 입만 열면 나 자빠뜨리려고.”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를 만큼 어이가 없어진 유원의 입술이 퐁 벌어졌다. 현규진은 끝까지 정말
문제라는 듯 연기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유원을 그대로 안아 들었다. 갑자기 두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는 것에 놀란 유원이 얼른 현규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미안한데 오늘은 안 돼.”
“나, 나도 그거… 할 생각 안 했어….”
“근데 왜 빨개져.”
“…네가 이상한 말 하니까 그렇지.”
방으로 들어가며 웃음을 참지 못한 현규진이 고개를 숙여 안겨 있는 유원의 머리칼에 깊게 입
맞췄다. 그러고는 저를 올려다보는 유원과 눈을 맞추며 소곤댔다.
“오늘이랑 내일 푹 쉬고 괜찮아지면 일요일엔 생각해 볼게.”
“…….”
“긍정적으로.”
현규진이 웃었다. 유원의 마음속으로 웃는 현규진의 웃음이 하나 더 자리 잡았다. 언제 꺼내
보아도 행복할 수밖에 없을 스무 살의 봄을 닮고, 봄을 담은 그 웃음이.
***
유원이 과방으로 들어가자 걱정 어린 시선이 닿아왔다. 경영관 앞에서 쓰러졌으니 소문이
돌았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정작 저를 잔뜩 걱정하는 눈으로 보는 사람들과 마주하니 조금
민망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큰 소란을 일으킨 것 같았다.
유원은 반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안심시켰다. 주말 동안 현규진이 먹여 주고, 씻겨 주고,
재워 주고, 여기저기 기분 좋게 만져 주기까지 하는 시간을 보냈더니 이젠 정말 전보다 더
좋은 컨디션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과제를 조금 하다가 과방을 나서는데 원지호가 오는 게 보였다. 안에 있던 사람들처럼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는 원지호에게 괜찮다는 말을 다시 하자 그제야 원지호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다행이다. 걱정했어.”
“그날 놀랐지. 미안해…. 내가 어릴 때부터 몸이 좀 약해서 갑자기 뛰거나 그러면 안 되는데
그날 너무 무리했어.”
“놀란 것도 놀란 건데 나 진짜 너 죽는 줄 알았어. 앞으로 절대 뛰지 마. 너 못 뛰게 한다고
규진이한테 내가 약속도 했어.”
“…규진이한테?”
“응. 규진이가 그날 밤에 전화해서 너 괜찮다고 말도 해 주고, 너 몸 약하니까 자기 없을 땐
옆에서 좀 봐 달라고 그러더라고.”
제가 자고 있을 때 현규진이 원지호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저를 걱정하며
원지호에게까지 부탁했을 현규진을 떠올리자 또 마음이 울렁울렁했다.
“평소에는 내가 잘 관리하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때 같은 일 사실 거의 없거든. 너한테 피해
주는 거 싫어….”
“피해는 무슨 피해. 친구끼리 그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지. 아, 근데 그때 그… 사람 누구야?
에타에도 막 너 아냐고 댓글 달고 그러는 것 같던데.”
“…그 사람이?”
“익명이라 확실하진 않은데…. 그때 경영관 앞에서 사람 쓰러졌다고 사진 올라오고 그랬거든.
혹시 얼굴 찍혔으면 지우라 그러려고 들어갔는데 얼굴은 없고 그냥 다리 정도 나오고 사람들
몰려 있는 그런 사진이었어.”
강의동 쪽으로 걸으며 유원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저번처럼 갑자기
어디선가 그 사람이 나타날 것만 같아 괜히 신경이 쓰였다. 원지호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
그랬다.
“그래도 괜히 올라와 있으면 안 좋을 것 같아서 지우라고 댓글 달려는데 누가 쓰러진 애
누군지 아는 사람? 막 이렇게 달아 둔 거야. 누가 신상을 여기 어떻게 까냐고 하니까 무슨
과인지만 알려 달라 그러고…. 뭔가 촉이 그때 본 그 사람인 것 같아서.”
그것 하나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학교에서 누군가가 쓰러졌다는 글을
봤을 때 그게 누구인지 파헤치려 들 것 같지는 않았다. 순간 확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얼굴에
고개를 저은 유원이 작게 숨을 폭 내쉬었다.
“너랑 친한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
“아…. 나랑 규진이 과외해 준 선생님 친구.”
“엥? 과외 선생님 친구?”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관계성이라는 듯 원지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이인지라 유원은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선생님도 이 학교 다니셔서 전에 학교 구경하러 온 적이 있거든. 그때 잠깐 만났는데… 좀…
이상하게 굴어서 별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인데 며칠 전에 우연히 마주친 거야.”
“아, 그래서 놀랐구나. 아, 남 얼굴 보고 이러면 안 되긴 하는데 좀 이상해 보이긴 하더라. 특히
눈! 아니, 그건 눈이라고 하면 안 돼. 눈깔이 좀 이상하던데.”
흥분해서 과격하게 말하는 원지호를 보며 웃은 유원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태까지
수업을 들으면서 만난 적은 없어 앞으로도 이렇게 볼 일은 없다는 걸 알지만, 괜히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게 됐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고 신신당부한 현규진의 목소리가
떠올라 주머니 안에 든 휴대폰을 쥐자 때마침 진동이 울렸다.
[여보♥ :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여보♥ : 걱정돼]
걱정을 숨기지 않는 현규진의 톡을 본 유원이 화면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아무 일도 없어]
[걱정 안 해도 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할게]
[여보♥ : 알았어 수업 잘 듣고 이따 점심도 맛있게 먹어]
[여보♥ : 쪽쪽]
현규진의 메시지는 참 특이한 힘이 있었다. 글자로 보는 건데도 꼭 뺨에 입술이 두 번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괜히 간지러운 뺨을 손끝으로 문지른 유원이
현규진이 쓴 것과 똑같은 글자를 세 개 적었다.
[쪽쪽쪽]
화면으로 커다란 하트를 몸에 맞고 기절하는 강아지 이모티콘이 올라왔다. 꼭 현규진을 보는
것 같아 잔뜩 귀엽다는 듯 보던 유원이 문 열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얼른 앞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간지러운 뺨을 손으로 꾹 누른 채.
***
원지호와 간단히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은 유원은 현규진에게도 꼭 점심을 맛있게 먹으라고
톡을 보낸 뒤 카페로 향했다. 벅적벅적한 카페 안에서 겨우 자리를 찾아 가방을 놓고 일어나는
유원을 보며 원지호가 앉아 있으라고 손을 아래로 움직였다.
“점심 네가 쐈잖아. 카페는 내가 쏠게. 뭐 마실래?”
“아…. 난 오렌지에이드.”
고개를 끄덕이더니 카운터로 가는 원지호의 뒷모습을 보던 유원이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미리 필요한 과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한 시간 반 정도는 같이 과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오늘만 허탕을 안 쳐도 꽤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21 화(121/127)

121


“음….”
이것저것 찾아 눈으로 훑어보며 필요한 자료인지 아닌지 파악하던 유원이 흘끗 카운터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카운터는 물론이고 키오스크 앞까지 줄을 꽤 서 있어 원지호가 오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기고 스크롤을 아래로 내린 순간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눈앞에 인영이 들어찼다. 유원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또 보네?”
조금 전까지 카운터에 줄을 서 있던 원지호가 벌써 왔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얼굴을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기에 유원의 눈이 커다래졌다.
“우리 학교 왔다고 좀 말해 주지. 나만 몰랐잖아. 짜증 나게.”
“…….”
“인사 안 해? 싸가지 없는 새끼랑 붙어먹더니 너도 그렇게 됐어?”
“…무슨 일로….”
“일은 무슨 일. 다시 봐서 존나 반가워서 왔지. 그동안 잘 지냈어? 저번엔 왜 도망갔어. 도망칠
주제도 안 되던데. 그거 뛰고 쓰러져?”
기분이 나쁜 말만 골라서 하는 백진석의 얼굴을 조금 겁에 질린 눈으로 보던 유원이
심호흡했다. 제가 에너지와 감정을 소비할 만큼의 가치도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더는
무서워하고 싶지 않았다.
“내 번호 차단했어?”
“…네.”
“왜? 내가 뭘 어쨌다고? 너도 그렇고 이준서도 그렇고 왜 그렇게 오버해? 나 그때 이준서한테
손절 당했어. 너 때문에.”
“…….”
“아니, 그 네 옆에 있던 그 싸가지 없는 새끼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아, 또 애인 욕하는 건 싫어? 얼마나 잘 쑤셔 주면 반응이 이래. 다리 벌리는 게 쪽팔리지도
않나 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뱉는 말이 상처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원은 티 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라고 하는 말에 진짜 그런 반응을 보이면 더 즐거워할 테니까. 제 마음과
기분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도 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같은 과에서 나쁘게 지낼 필요 없잖아. 뭐 반 다르니까 볼 일 별로 없겠다 싶어? 나 A 반에
아는 애 존나 많은데. 작년엔 거기 술자리도 다 나갔어.”
“…….”
“내가 맘만 먹으면 너 진짜 좆돼. 남자 후리고 다닌단 말 돌아서 좋을 거 없잖아.”
명백한 협박에 등줄기가 다 오싹했다. 유원은 최대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을 하려
노력했다.
“그러니까 차단 풀고 내 전화 받아. 이따 확인해 본다?”
“…….”
“근데 너도 알지. 너 존나 따먹고 싶게 생긴 거.”
거칠어진 숨으로 입매를 길쭉하게 늘려 무섭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웃은 백진석이 자리를
벗어났다. 유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키오스크 쪽에 선 누군가에게로 다가가는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지었다. 협박이 무섭다기보다는 짧은 시간 동안 계속 들은 말의 수준이 너무
낮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휴…. 다시 한숨을 내쉰 유원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차단을 풀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그저
현규진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강의동을 나선 현규진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유원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짠.”
“도서관 앞에서 보기로 했잖아. 뭐야, 못 기다리고 나 보러 온 거야? 나 빨리 보고 싶어서?”
“응. 빨리 보고 싶어서 왔어. 나 수업 내내 너 보고 싶단 생각만 했어…. 손도 잡고 싶고….”
장난기가 가시고 멍해진 얼굴로 저를 보는 현규진을 올려다본 유원이 주변을 살피곤 슬쩍
현규진의 손끝을 쥐었다.
“…뽀뽀도 하고 싶어.”
이제 현규진은 아예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왜애…. 싫어?”
“…아니. 나 오늘 뭐 착한 일 했어? 왜 이렇게 선물을 연달아 줘? 이러면 나 버릇 나빠지는데.
매일 이렇게 해 줘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럼 매일 하면 되지이…. 넌 매일 해 주잖아.”
“그거야 해 주는 게 아니라 너만 보면 저절로 나와서 하는 거고.”
“나도 그래. 너 보고 싶어서 온 거고, 진짜 하고 싶으니까 말한 거야. 나도 매일 매일 할 수
있어.”
유원이 저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는 당연히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 번씩 마음을
투명하게 다 소리 내 말해 줄 때마다 현규진은 너무 좋아 딱 죽을 것만 같았다. 유원을
들쳐업고 온 학교를 뺑뺑 돌면서 정유원이 저를 좋아한다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럼 얼른 집에 가자. 가서 다 해 줄게. 너 하고 싶은 거.”
“응. 얼른 가자. 나 할 말도 있어….”
“할 말? 뭔데?”
“일단 집에 가. 응?”
조르듯 말하는 게 또 너무 귀여워 냅다 고개를 끄덕인 현규진이 유원의 가방을 가져가 어깨에
걸쳤다. 마음 같아서는 진짜 유원도 어깨에 걸치고 단숨에 뛰어 집까지 가고 싶은데 참아야
하는 게 힘들었다.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안아 줄 수도 없고, 귀여워 뽀뽀할 수도 없는 학교를
도대체 왜 다녀야 하나 싶었다.
“응, 얼른 가자.”
유원이 힘들지 않도록 급한 마음을 누른 채 평소 속도보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현규진이
씩 웃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가방 두 개를 대충 놓은 현규진이 유원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아직 몸이
휙 들리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은 유원은 현규진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려 방까지 안전히
도착했다. 침대에 등이 닿자마자 입술이 겹치고 아까부터 달아올라 있던 숨이 마구 뒤섞였다.
유원은 두 손으로 현규진의 얼굴을 소중히 감싼 채 마구 쏟아지는 숨과 시선을 모두 머금었다.
“하아….”
“…하…. 진짜 너한테서 설탕 나오나. 왜 이렇게 달아. 응?”
유원의 입술을 쪽 빨아들인 현규진이 이번에는 뺨을 핥아 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더 아래로
내려 목덜미를 입술로 춥, 춥 소리가 나게 빨아들였다.
“더 해도 돼?”
“응…. 나도 하고 싶어.”
“어제도 했는데 또 하면 안 힘들겠어?”
“힘들어도… 할래….”
유원은 지금 현규진이 필요했다. 현규진과 깊게 닿고 싶었다. 비어 있는 모든 곳이 전부
현규진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단 생각이 전부였다. 제 셔츠 단추를 풀고, 벌어진 안으로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추는 현규진의 머리칼을 쓸며 유원은 몸으로 착실히 퍼지는 쾌감을 느꼈다.
“아….”
현규진의 입술 사이로 유두가 사라졌다. 힘을 주어 빨다가 혀로 문지르는 느낌이 날 때마다
허리가 약하게 비틀렸다. 가슴을 빨며 손을 내려 바지를 벗기는 현규진을 도와 엉덩이를 살짝
들자 바지가 단숨에 발목까지 벗겨졌다. 유원의 배꼽 주변을 손가락을 간질이듯 문지르던
현규진이 느릿하게 속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미 반쯤 발기한 성기를 쥐는 것만으로도
유원의 신음이 더 크게 울렸다.
“으응….”
집요하게 양쪽 유두를 번갈아 물며 잔뜩 빨아 댄 현규진이 혀로 배를 문지르며 내려왔다. 앞이
젖은 유원의 속옷 위를 손끝으로 문지르다가 두 손으로 벗겨 냈다. 그러고는 벗겨 낸 속옷의
젖은 곳 위를 혀끝으로 문질렀다. 기겁한 유원이 속옷을 빼앗으려 얼른 손을 뻗었다.
“왜, 왜 거기 그래애….”
“여기 말고 그럼 여기다 할까?”
유두를 물고 빨아 주는 동안 완전히 발기한 유원의 성기 끝은 이미 잔뜩 젖어 있었다. 그
선단을 톡 건드리자 유원의 몸이 크게 튀었다. 다리 사이로 고개를 내린 현규진이 그대로 젖은
귀두 끝을 혀로 문지르다가 혀끝을 뾰족하게 모아 짓눌렀다.
“하읏….”
시트를 쥐고 있던 유원의 손이 올라와 다리 사이에 있는 현규진의 머리칼을 쥐었다. 떼라는 듯
밀던 손은 어느 순간 머리를 더 누르고 있었다. 귀두를 문지르고 혀로 찌를 때마다 바들바들
떨리는 하얀 허벅지와 제 머리를 누르는 손의 힘만으로도 현규진은 쌀 것처럼 발기했다.
“응, 흐읏, 아…. 으으응….”
아예 유원의 성기를 목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나올 만큼 깊게 물며 빨아 주자 신음이 길어졌다.
현규진은 몇 번이나 반복해 빨다가 성기를 입에서 빼내고 성기 아래쪽으로 혀를
미끄러뜨렸다.
“하으읏…!”
고환을 혀로 굴리다가 말랑한 회음부를 혀끝으로 누르자 이제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현규진은 유원의 다리를 모아 들고 통통한 회음부를 혀로 누르다가 아예 입으로 빨아들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더 혀를 내려 흥분해 약하게 움직이는 입구 위를 건드리자 유원의 허리가
크게 비틀렸다. 현규진은 그대로 혀끝에 힘을 줘 안으로 파고들었다.
“으응…! 아…. 흐윽, 규진아…. 응, 이상해, 뭐, 뭐 해? 으응, 이상한 거… 들어왔어….”
이상한 게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말할 여유가 없었다. 현규진은 혀를 넣을 수 있을 만큼
깊게 넣어 유원의 내벽을 핥다가 안을 쑤셔 주었다. 손가락처럼 단단하지도, 또 깊게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그 말캉거리고 뜨거운 것이 얕게 안을 쑤시는 묘한 감각이
유원의 성감을 부추겼다.
연신 허리가 비틀리고 할딱이는 소리가 들렸다. 높아진 신음이 듣기만 해도 아랫배가 조여들
정도로 야하게 울렸다. 조금도 신음을 참을 수 없을 만큼 잔뜩 흥분하고, 느끼는 소리를
들으니 다리 사이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하….”
씨발…. 유원의 안을 혀로 쑤시며 제 버클을 푼 현규진이 한 손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사정할
만큼 발기한 성기를 흔들었다. 혀가 푹 안을 찌르고 들어가 안에서 느릿하게 돌아갔다. 그대로
유원의 허리가 크게 들썩이며 비틀렸다. 울음과 뒤섞인 높은 신음이 울리는 순간 유원이
사정했다. 그리고 현규진도 그 소리에 정액을 쏟아 냈다. 눈앞이 잠시 새하얗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하…. 하으, 후우….”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유원의 다리를 내려 준 현규진이 눈물범벅이 되어 두 팔을 벌리는
유원과 몸을 겹쳤다.
“좀 전에, 하…. 별로였어?”
“하아…. 아니이…. 너무, 기분 좋아서… 이상했어.”
“좋았으면 다행이야.”
한 번 사정했는데도 유원의 것과 대고 문지르니 금세 다시 열이 올라 성기가 단단해졌다. 손을
뻗어 침대 옆 서랍에서 콘돔을 꺼낸 현규진이 콘돔 하나를 뜯어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내내
혀로 헤집어 말랑해진 안으로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었다. 평소보다 어렵지 않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좋았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22 화(122/127)

122


“하읏….”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
유원의 뺨에 입 맞추고 얼굴을 살피며 아래를 풀어 주던 현규진이 모으고 있던 손가락 사이를
떼며 브이 모양을 만들었다. 뜨거운 유원의 내벽이 조금 더 늘어났다. 이물감은 여전하지만,
아프지도 기분이 이상하지도 않았다. 오늘따라 유독 더 보고 싶고, 닿고 싶던 현규진이 들어와
있다는 게 좋았다.
“아….”
“으응…!”
손가락이 아니라 몸이 맞물린 것은 한참이나 아래를 푼 뒤였다. 그렇게 공들여 풀었는데도
유원의 아래는 좁았다. 현규진은 천천히 안을 늘리며 파고들다가 절반쯤 들어갔을 때 혀를
뒤섞으며 단숨에 퍽 박았다. 유원은 어찌할 도리도 없이 그대로 다시 사정했다. 그걸 시작으로
현규진의 허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아…! 응, 으응, 아, 흣, 응!”
퍽, 퍽 몸이 맞물릴 때마다 유원의 날씬한 종아리가 현규진의 어깨 위에서 흔들렸다. 쉴 새
없이 혀가 문질리고 서로를 가득 담은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유원은 더 가득 현규진을
당겼다. 더욱 깊숙하게 완전히 몸이 마주 물린 순간 온몸이 다 덜덜 떨렸다.
현규진은 사정하면서도 허리를 잘게 탁, 탁 쳐 주었다. 까무러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쾌감이 유원의 몸을 휩쓸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했지만, 그래도 현규진을 놓고 싶지 않았다.
유원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두 팔에 힘을 주며 내내 너무나 보고 싶었던 저의 따뜻함을
끌어안았다.
눈을 떴을 때는 밤이었다. 여덟 시가 넘은 시간을 확인한 유원은 조금도 찝찝하지 않고
보송보송한 몸과 말끔히 갈아입혀진 옷을 확인했다. 비어 있는 옆자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몸을 일으키자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리고 현규진의 얼굴이 안으로 쏙
들어왔다.
“어! 자기 깼네?”
열린 문 사이로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났다. 조금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허기를 느낀 유원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맛있는 냄새 나.”
“배고프지. 볶음밥이랑 불고기 했어. 저녁 먹자.”
다가와 허리에 팔을 두르는 현규진을 두 팔로 안은 유원이 품에 안긴 채 방을 나섰다. 식탁에
놓인 볶음밥과 불고기를 보니 입맛이 돌았다.
“나 깨워서 같이 하지. 너도 피곤할 텐데….”
“불고기는 엄마가 보내 준 거 그냥 볶은 거고, 볶음밥만 한 건데 뭐. 하나도 안 힘들었어.
맛있게 드세요, 여보.”
“네에, 잘 먹을게.”
볶음밥을 한 숟가락 입에 넣은 유원은 너무 맛있어 얼른 현규진을 바라보았다. 평가를
기다리는 기대에 찬 눈을 보며 맛있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현규진이 웃으며 크게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아, 맞다. 할 말. 아까 할 말 있댔잖아.”
“아….”
현규진과 닿느라 완전히 잊고 있었던 불쾌한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유원은 볶음밥을 한
숟가락 더 입에 물고는 잠시 마음을 안정시켰다.
“아까 지호랑 점심 먹고 카페에 갔는데 그 사람 또 봤어.”
“그 사람?”
“…백진석….”
단박에 인상을 쓴 현규진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유원이 얼른 다시 숟가락을 들어 현규진의
손에 쥐여 주었다. 밥 먹을 때 할 만큼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규진에게는 조금도
숨기는 것 없이 전부 알리고 싶었다. 예전이라면 그냥 혼자 해결해 보려고 했겠지만,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보기만 했어?”
“지호가 마실 거 사러 간 사이에 날 봤는지 와서 막… 협박했어.”
“협박? 뭐라고?”
“…A 반에 아는 사람 많다 그러고, 남자… 후리고 다니는 거 알려지면 나… 그거 된다고….”
“그거?”
“…그….”
말하기가 조금 그래 고민하던 유원이 슬쩍 현규진의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아래를 한 번
내려다본 현규진이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
“씨발, 좆된다고?”
“…응.”
“와, 씨발 새끼 그거 진짜 돌았네. 뒤질라고.”
“그리고… 또 자기 차단했냐고 풀라 그러고…. 너한테 뭐라고 해서 하지 말랬더니 막… 네가
얼마나 잘… 쑤셔… 주면 반응이 그러냐고….”
현규진은 이제 화를 넘어 어느 경지에 감정이 도달하는 것을 느꼈다. 유원을 협박한 걸로도
모자라 저런 성적인 말로 희롱까지 했다니 정말 이건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유원을 쓰러지게
한 것 하나로도 죽이려 했는데 친히 나서서 죽여도 정당방위가 될 말을 지껄이고 갔다니
가뿐한 마음으로 조지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차단 푼 거 아니지?”
“응…. 안 풀었어. 안 풀 거야.”
“잘했어. 그리고 나한테 다 말한 것도 존나 잘했어. 그딴 개좆같은 소리 듣느라 힘들었지. 씨발,
감히 누구한테 그딴….”
들끓는 화를 굳이 유원에게 보일 것은 없기에 가까스로 감정을 숨긴 현규진이 맞은편에서
일어나 유원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그리고 저를 보며 팔을 벌려 안겨드는 유원을 꽉
끌어안았다. 힘들었다고 말을 하진 않지만, 분명 혼자 그 상황을 견디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었다.
유독 오늘 저를 찾고, 몸이 가득 맞닿길 원한 것만 봐도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현규진은
유원에게 단단한 안정과 걱정할 것 하나 없다는 확신을 계속해서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그딴 놈 신경도 쓰지 말고. 나 있잖아. 그런 것 때문에 너 신경 쓰이게 안 해.”
“응…. 나 괜찮아. 예전 같았으면 그런 말 들었을 때 무서웠을 거야. 그런데 이제 하나도 안
무서워. 아까도 무섭지는 않고 좀… 피곤했어.”
“그랬어? 우리 정유원 진짜 다 컸네.”
“너 있는 거 알아서 그래…. 규진이 너랑 있으면 불안한 것도 없고, 무서운 것도 없어.”
“응, 절대 너 힘들게 안 해. 변태 퇴치 한두 번 하나.”
“때릴 거야?”
걱정스럽게 묻는 유원을 내려다본 현규진이 씩 웃음 지었다. 그러고는 유원의 보송보송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제가 두드릴 때마다 눈 한쪽이 찡긋거렸다.
“스물이나 먹고 고딩 때처럼 싸우면 안 되지. 걱정하지 마. 되도록 말로 잘 해결할게. 근데 안
되면 좀 팰 수도 있긴 해.”
“우리 현규진도 다 컸네.”
제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리는 유원을 보며 한 번 더 씩 웃은 현규진이 다시 유원을 가득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안에 머문 걱정과 상처 같은 것을 전부 다 제 마음으로 옮겼다.
유원 혼자 조금도 속상하지 않기를 바라며.
***
유원을 수업에 들여보낸 현규진은 다짜고짜 경영 C 반의 과방으로 향했다. 삐딱한 태도로
도착했지만, 닫힌 문을 열기 전에는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매너를 몸과 얼굴에 갖췄다.
그리고 노크를 하고 들어가 저를 보는 낯선 얼굴들과 마주하며 아주 나이스하게 웃음 지었다.
누가 봐도 홀릴 만큼 잘생긴 얼굴로 상냥하게 웃기까지 하니 과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현규진을 웃으며 맞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백진석 선배님을 좀 뵙고 싶은데 연락이 닿질 않아서요. 어디로 가야 뵐 수
있는지 여쭙고 싶어서 왔습니다. 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또박또박 예의 바르게 말한 현규진은 저에게 정보를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자기들끼리 막 이야기를 하던 몇몇이 얼른 현규진에게 다가왔다.
“실례는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잘 오셨어요. 백진석 아마 지금 회계 듣고 있을 거예요. 그게
어디더라….”
“아, 그거 지수도 듣는데. 물어볼까?”
“응, 빨리.”
알아서 자기들끼리 물어 자세한 위치까지 알려 주려는 사람들을 보며 현규진은 그저
나이스한 미소만 유지하고 있었다. 얼굴과 웃음 하나로 세상이 자신에게 친절해질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이유였다.
“아, 한경관, 어…. 한영 경영관이라고 있어요. 여기 바로 옆에 있는 유리로 된 건물인데 나가면
바로 보이거든요. 거기 216 호래요. 그리고…. 어, 잠시만요.”
빨리 알아봐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여자는 굉장히 급하게 휴대폰 화면을 두드렸다. 현규진은
차분히 앞에 서서 앞에 선 세 사람을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아, 끝나려면 20 분 남았대요.”
“아, 그런 것까지 알아봐 주시고 너무 감사합니다.”
“뭘요, 저희가 더 감사하죠.”
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싱긋 웃은 현규진이 다시 꾸벅 공손하게
인사하고 과방을 나섰다. 문을 닫자마자 입에 걸려 있던 웃음이 사라지고, 원래의 삐딱한
태도가 돌아왔다.
곧바로 바깥으로 나가 주위를 둘러보자 아까 누군가 말한 것처럼 유리로 된 건물이 보였다.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그쪽으로 간 현규진은 입구에 붙은 한영 경영관이라는 이름을
확인했다.
216 호라…. 바로 한 층을 오르자 여러 강의실과 세미나실이 보였다. 그중 216 호를 어렵지
않게 찾은 현규진은 아직 강의 중인 안을 흘끗 보고 벽에 기대어 섰다. 아까 20 분 정도 수업이
남았다고 했으니 10 여분 정도만 기다리면 백진석을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현규진은 조용한 복도에서 팔과 어깨를 풀었다. 그리고 목과 손가락, 다리까지 느릿하게 몸을
충분히 풀어 주었다. 입학한 이후로 빡센 운동을 하지 못해 그런지 몸을 풀 때마다 뼈마디에서
뚝뚝 소리가 났다. 마지막으로 발을 앞으로 세워 바닥을 찍은 채 발목까지 돌려 가며 풀어
주고 있을 때 안에서 사람들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
몸을 바로 세우고 다시 부드러운 얼굴을 한 현규진이 강의실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그렇게 열 명쯤 확인했을 때 기분 나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보자마자 착한 척
연기고 뭐고 그냥 냅다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저는 이제 십 대가 아니고 이십 대였다.
다짜고짜 주먹이나 날려 뒤엉켜 싸우는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너 뭐냐?”
“선배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실례인 줄 알면서도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지랄한다. 하던 대로 해, 씨발.”
일부러 지나는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한 현규진이 저를 어이없다는 듯
올려다보는 백진석을 향해 미소 지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23 화(123/127)

123


“여기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당연히 여기에서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증거를 만들기 위해서는 밑밥을 깔아야만 했다.
현규진은 제 얼굴로 닿는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한껏 받으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더욱 공손해
보이게 마주 잡았다.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있는 좋은 자세이기도 했다.
“뭘 여기서 말해. 여기서 말할 자신은 있고?”
“그럼 어디서….”
“따라와, 새끼야.”
공손한 저의 태도와는 달리 싸울 것처럼 목소리를 크게 내고 삐딱하게 말하는 백진석에게도
여러 사람의 시선이 닿았다. 현규진은 고개를 꾸벅 숙여 대답하곤 앞장서는 백진석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백진석이 저를 데리고 갔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현규진은 제가 바라는
대로 척척 병신처럼 움직여 주는 뒷모습을 보며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여전히 ‘ㄱㅇ’라고
저장된 이름을 찾아 톡을 보냈다.
[선생님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역시 성실한 이준서는 메시지도 아주 빠르게 읽었다. 현규진은 만족스럽게 화면으로
떠오르는 답을 바라보았다.
[ㄱㅇ : 응 규진아 오늘 시간 괜찮아 지금도 괜찮은데]
[ㄱㅇ : 어디야? 너 괜찮으면 지금 보자]
아, 정말 온 세상이 저를 돕는 모양이었다. 적당한 시기에 현장을 봐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이렇게 바로 섭외가 되는 것을 보면. 현규진은 주변을 살피곤 조용한 복도에 있는 세미나실
호수를 적어 보냈다.
[지금 누굴 좀 만나느라 한경관? 312 호 거기 앞에 있거든요]
[휴게실이랑 뭐 화장실 그런 거 있는데 여기 아세요?]
[ㄱㅇ : 아 알지 나도 애들이랑 뭐 제출할 거 있어서 한경관 가려던 참이야 10 분쯤 걸릴 것
같은데 좀만 기다려]
[네 천천히 오세요]
10 분. 백진석을 조지기에는 아주 충분한 시간이었다. 현규진은 312 호 옆에 있는 휴게실로
들어가려는 백진석의 등을 보며 입을 열었다. 휴게실은 좀 곤란했다. 어딘가 CCTV 가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그렇기에 이 대화는 반드시 화장실에서 이뤄져야만 했다.
“야, 거기 말고.”
“뭐? 야? 이 새끼가 돌았나.”
혹시 어딘가에 찍힐 것을 대비해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바른 자세를 유지한 현규진이 미소
지으며 태도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너 변태 새낀 거 남들이 다 알아도 상관없어?”
“뭐?”
“나 그때 네가 정유원한테 보낸 톡도 다 가지고 있어. 에타에 올려 줄까?”
누가 봐도 이런 협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웃음을 지은 채 말을 잇던 현규진이
씩씩대는 백진석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데에서 얘기하는 게 너나 나나 둘 다 좋지 않겠어?”
“하, 씨팔. 이 새끼가 진짜 계속 말이 짧네?”
팔을 걷어붙인 백진석이 안 되겠다는 듯 주변을 보다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며 현규진에게
삿대질했다. 아무래도 저를 팰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현규진은 얌전히 그 뒤를 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야, 잠가.”
“응.”
그리고 손을 뒤로해 문을 잠갔다가 소리가 나지 않게 다시 풀었다. 훌륭한 목격자들이 편히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칸이 전부 비어 있는 걸 확인한 백진석이 다가와 현규진의 멱살을 쥐었다.
현규진은 눈동자를 내리깔아 저보다 아래에 있는 굳이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보다가 길게
한숨지었다. CCTV 도 없겠다 이제 더는 이 변태 새끼를 봐줄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손 치워, 병신아.”
가볍게 손을 떼어 밀친 현규진이 살기등등한 눈을 향해 다가갔다.
“너 때문에 정유원 쓰러진 거 알지.”
“그게 왜 나 때문인데. 내가 도망가랬어? 도망칠 주제도 안 되는 게 혼자 도망치다가 쓰러진
것도 내 죄야? 아, 가서 인공호흡이라도 해 줄 걸 그랬나. 일어날 때까지 혀도 좀 빨아 주고?”
그대로 현규진의 기다란 다리가 올라가 백진석의 배를 걷어찼다. 버텨 보지도 못하고 날아가
엎어진 백진석이 쿨럭대며 배를 감싸 쥐었다.
“이 씨발 새끼가!”
바닥을 짚고 일어난 백진석이 현규진에게 달려들었다. 현규진은 다시 한번 배를 발로 차고,
바닥에 널브러져 몸을 웅크리는 백진석을 짓밟았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멱살을 잡아
빈칸 안으로 던졌다.
얼굴을 그냥 확 조지고 싶지만, 그럼 누가 봐도 제가 더 많이 팬 것처럼 보일 테니 그건 참아야
했다. 현규진은 변기에 주저앉아 반쯤 늘어진 백진석의 어깨를 발로 찍어 눌렀다.
“아! 씨발, 아파, 야! 아, 어깨 빠진다고, 씹…! 아, 야, 야!”
“애 쓰러지게 한 것도 모자라서 협박까지 해? 정유원이 왜 네 연락을 받아. 너만 눈 있는 게
아니라 정유원도 눈 있어.”
“알았으니까, 아! 좀, 윽, 진짜 죽… 아!”
“알긴 뭘 알아. 이게 아파? 겨우 이것도 못 참을 거면서 그 지랄을 했어?”
더 콱 힘을 줘 누르자 비명을 내지른 백진석이 침을 질질 흘렸다. 느릿하게 발을 뗀 현규진이
어깨를 움켜쥐고 우는 백진석을 보다가 진동에 휴대폰을 꺼냈다.
[ㄱㅇ : 지금 올라가는 중이야]
아, 빨리도 오시네. 현규진은 일부러 휴대폰을 더 길게 보는 척하며 백진석에게 틈을 주었다.
어깨를 감싸고 있던 백진석이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달려들었다.
현규진은 기꺼이 백진석이 미는 대로 적당히 넘어져 깔려 주었다. 제가 안 보이는 곳만
공략했던 것과 달리 백진석은 얼굴에 주먹부터 날렸다. 이래서 멍청하면 안 된다니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그리고 입가도 쓰라렸다. 아, 씨. 입 찢어지면 키스할 때
힘든데.
“내가 걔한테 연락을 하든 말든 네가, 씨팔. 뭔 상관이야. 너만 먹으려고? 싫은데? 나도 걔 먹을
수….”
“지랄하네.”
누워서 가슴을 주먹으로 갈기자 다시 주먹이 날아왔다. 아, 씨발. 욕을 삼킨 현규진은 화장실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보이는 이준서를 눈에 담았다. 눈이 커진 이준서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런 이준서를 따라 세 명이 더 들어와 백진석을 떼어 냈다. 아까 톡에서 말한 그 ‘애들’
인 모양이었다.
같이 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목격자를 많이 데려와 준 이준서에게 고마웠다. 역시
선생은 선생인 모양이었다. 저한테 매번 도움을 주는 걸 보면.
“규진아! 괜찮아? 이게 무슨 일이야. 얼굴이 이게 뭐야. 아, 저 새끼 진짜 미쳤네?”
“선생님….”
조금 불쌍한 척을 하자 백진석이 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준서의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런 백진석에게 작작 좀 하라며 욕을 내뱉었다. 후배한테 그러고 싶냐는 말부터
아직도 그 욱하는 버릇 못 고쳤냐는 비난까지 쉴 새 없이 쏟아져 화장실 안을 가득 채웠다.
“어쩌다 이런 거야?”
“…저 선배가 유원이 만나서 또 협박했다고 해서요.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러 갔는데
갑자기 막 욕하고 때리잖아요.”
“…아…. 진짜…. 내가 진짜 너희한테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안 되겠다. 일단
보건실부터 가자. 치료해야지.”
“네….”
이준서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현규진은 사람들에게 잡혀 씩씩대며 저를 올려다보는 백진석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에 백진석이 다시 길길이 날뛰며 억울하다는 듯 발버둥 쳤다.
“씨팔, 내가 욕하고 때렸다고? 내가? 야, 저 새끼가 나 팼다고. 난 정당방위야!”
“정말 다신 이런 일로 얼굴 붉힐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선배님. 유원이한테 먹고 싶다느니
남자를 후리고 다닌다느니… 그런 말씀 하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마지막까지 공손하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현규진이 악을 쓰는 백진석을 뒤로한 채
이준서와 화장실을 나섰다. 복도에는 어느새 소란이 난 것을 듣고 왔는지 구경하러 온 몇몇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고 서 있었다. 이다음에는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 사람들이
백진석의 몸을 꽁꽁 묶어 내쫓아 줄 것이었다.
얼굴을 갈겨 주지 못한 게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백진석이 제 잘생긴 얼굴에 주먹을
날려 준 덕분에 당분간은 유원의 사랑을 더 듬뿍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 얼른 정유원 보고
싶다. 아팠다고 하면서 안아 달라 그래야지. 생각만 해도 코끝으로 포근한 향이 스쳤다.
***
“와, 태경관에서 싸움 났대. 경영 3 학년이 경제 존잘 신입을 팼다고 난리 났어. 근데 경제 존잘
신입이면 규진이 아니야?”
“…응?”
“여기 영상도 있다.”
수업이 끝나 가방을 챙기던 유원은 그 틈을 못 참고 바로 대학 커뮤니티에 들어가 뭔가를 보고
있는 원지호를 바라보았다. 누가 싸우든 말든 조금의 관심도 생기지 않지만, 현규진의 이름이
나오니 확인을 해 볼 수밖에 없었다.
“어! 여기 규진이!”
“…어…. 진짜…. 옆엔 선생님이네….”
“규진이가 맞았나 봐.”
영상 안에서 과외 선생님과 함께 화장실을 걸어 나오는 사람은 분명 현규진이었다. 유원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현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두 번까지 울리기 전에 현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규진아. 나야.”
-응, 유원아. 수업 끝났어?
“응…. 지금 끝났어. 너 어디야? 너 혹시 싸웠어?”
-어떻게 알았어? 벌써 거기까지 소문났어?
“그 에타 거기에 올라왔다고 지호가 보여 줬어. 어디야? 내가 지금 갈게. 많이 다쳤어?
영상에서는 피 나는 것 같던데….”
-아, 그게 영상까지 올라갔어? 대단하네. 나 지금 경영관 앞이야. 오늘 고기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
바로 아래에 와 있다는 말에 유원이 대충 가방 안에 물건들을 욱여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를 올려다보는 원지호의 어깨를 잡았다.
“지호야, 미안. 규진이가 기다리고 있나 봐. 나 먼저 가 볼게.”
“어, 어어! 얼른 가 봐. 걱정되니까 괜찮은지 보고 알려 줘.”
“응! 내일 봐.”
유원은 얼른 강의실을 빠져나가 복도를 달렸다. 금방 숨이 찼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도 없어 계단을 최대한 빠르게 내려가 문을 나서자 입가와 뺨에
밴드를 붙인 현규진이 보였다. 가쁜 숨을 내쉬는 유원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변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24 화(124/127)

124


“하아…. 하으, 싸웠어? 왜 싸웠어….”
“왜 뛰어왔어. 힘들게. 숨 천천히.”
유원의 등을 쓸어 주며 호흡을 도운 현규진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후에야 유원이 듣고파 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경고하러 갔더니 패잖아.”
“…어떻게 이렇게 때려? 내가 가서 만날래. 못 참겠어.”
“어?”
휴대폰을 꺼내 과외 선생에게 전화를 거는 유원을 보던 현규진이 부드럽게 그 휴대폰을 잡아
내려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정말 화가 나서 뜨거워진 숨을 내쉬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어, 아니야. 자기야. 진정해. 응?”
“어떻게, 어떻게 진정해…. 네가 이렇게 다쳤는데.”
“아니야, 자기야. 진정하고 내 얘기 들어 봐.”
주변을 슬쩍 본 현규진이 고개를 숙여 유원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나는 더 때렸어.”
“…정말?”
“응. 내가 다 갚아 주고 왔으니까 자기는 화 안 내도 돼. 그리고 가긴 어딜 가. 다신 만날 일 없게
하려고 내가 간 건데 그 새끼를 보러 간다고? 절대 안 돼.”
“…그래도 너 아픈 거 싫어…. 많이 다쳤어? 아, 해 봐.”
고개를 저은 현규진이 작은 밴드를 떼어 살짝 찢어진 입가와 입 안을 보여 주었다. 딱 일부러
맞아 준 정도만 다쳤는데도 유원은 무척 속상한 모양이었다. 울상이 되어 제 입가를 만지며
울먹울먹하는 얼굴이 예뻐 자꾸 지금 이 상황에서 해서는 안 될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여튼
저도 문제는 문제였다.
“많이 안 다쳤지?”
“…그래도 다치긴 다쳤잖아. 속상해. 맨날 나 때문에….”
“그게 왜 너 때문….”
벌써 여기저기 일이 퍼지기 시작했는지 저를 흘끗대는 시선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늘 주목을 받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뭔가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현규진은 얼른 유원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한 복도를 걸어 비어
있는 강의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하고 유원과 단둘이 남고 나니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유원아. 자기야. 속상한 건 이해해. 어떤 이유로든 나도 너 조금이라도 다치면 속상하니까.
그런데 너 때문이란 생각은 하지 마. 이게 왜 너 때문이야. 그 새끼 때문이지.”
“…….”
“그 새끼가 개소리만 안 했어도 싸울 일 없었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 새끼 때문이야. 아니,
예쁜 게 죄야? 예쁘다고 다 변태같이 그 지랄 떠는 거 아니잖아.”
유원의 뺨을 두 손으로 쥐고 문지르다가 살짝 누르자 입술이 앞으로 뽀뽀할 때처럼 나왔다.
그게 귀여워 웃은 현규진이 쪽, 쪽 몇 번 입 맞추다가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머금었다. 찢어진
입가가 쓰리고, 움직일 때마다 터진 입 안도 아팠지만, 그래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하아…. 어떡해….”
“왜. 또 울고 싶어? 네 탓 같아?”
“그게 아니라… 내가 또 연고 다 먹었나 봐.”
유원의 말을 듣자마자 보건실에서 제 입가에 연고를 발라 주던 유원에게 키스했던 것이
떠올랐다. ‘또’ 다 먹었다고 하는 걸 보면 그때도 제 연고를 다 먹었다고 생각했었던
모양이었다.
아, 어떡하지. 진짜. 너무 좋은데. 두 팔을 벌린 현규진이 그대로 저보다 작은 유원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곧 허리로 두 팔이 마주 감겼다. 이미 아무것도 아니었던 찢어진 입가나 터진 입
안 따위는 더욱더 가치를 잃고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이따 집에 가서 자기 전에 연고 발라 줘.”
“응. 다 나을 때까지 내가 발라 줄게.”
씩 웃은 현규진이 그대로 유원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소곤댔다.
“그리고 또 먹어 줘.”
금세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는 귓가와 목덜미가 사랑스러웠다. 몸이 따끈따끈해지는 게
느껴지고, 부끄러운지 어깨 위로 얼굴이 다시 폭 묻혔다.
싫다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 뒤로도 계속.
***
모든 것은 현규진의 생각대로 돌아갔다. 대학교 커뮤니티를 시작으로 경영 2 학년이 경제
신입생을 팼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날 직접 그 일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현규진 편을 들어 주었다.
백진석을 만나고 싶다고 무척 공손하고 물었다는 말부터 피지컬이 훨씬 더 압도적인데도
불구하고 선배에게 주먹질 한 번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알아서 말이 만들어졌다.
현규진은 그 안에서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언론플레이를 하지도 않았고, 억울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 일에 대해 물어도 이미 다 잊었다는 말로 끝냈다. 그런
현규진과는 달리 백진석은 억울하다고, 자기가 더 처맞았다고 상의 탈의까지 한 사진을
올렸지만, 안 본 눈 산다는 댓글과 욕설이 수십 개씩 달릴 뿐이었다.
그 와중에 백진석에게 술자리에서 희롱을 당했던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며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한 명이 나타나자 또 다른 한 명이 나타났고, 여기저기에서 백진석이 보낸 지저분한
톡 캡처가 올라오며 그야말로 학교가 뒤집혔다. 누구보다 비겁한 백진석이 휴학계를 내고
사라지는 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결말이었다.
“어, 규진아!”
“야, 이름 부르지 마.”
“헐, 미안.”
모자를 푹 눌러쓴 현규진이 혀를 차며 원지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옆에 앉은 유원이 그런
현규진을 보며 웃음 지었다.
백진석 사건 이후 현규진의 얼굴이 대학 커뮤니티에 퍼지며 현규진은 그야말로 유명인이
되었다. 잘생긴 데다가 선배를 패지 않는 인성까지 가졌다면서 여기저기에서 현규진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래서 현규진은 요즘 내내 볼캡을 눌러쓰고 학교를 다녔다. 물론 그래도
누구보다 큰 키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긴 하지만, 그래도 대놓고 얼굴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아, 졸려.”
눈까지 안 보일 정도로 볼캡을 깊게 쓴 현규진이 유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유원 특유의
포근한 냄새에 규칙적으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까지 듣고 있자니 정말 잠이 솔솔 왔다.
“언제 끝나?”
“음…. 집중해서 하면 한 30 분?”
“그럼 방해 안 하고 나 자고 있을게.”
“응. 나 빨리 끝낼게. 자고 있어. 이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모자챙이 만든 그늘 안으로 들어온 유원의 손이 현규진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손을 잡아
깨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참았다.
“어제 늦게 잤어?”
원지호의 질문에 머릿속을 뒤덮던 몽롱함이 잠시 흐트러졌다. 새벽까지 유원과 조금도
떨어지지 않은 채 섹스했던 것을 떠올린 현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두 시 넘어서 잤어.”
“과제 때문에?”
“그건 아니고. 우리 여보랑 노느라.”
귓가에서 들리던 키보드 치는 소리가 멈췄다. 어깨도 조금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제
말에 유원이 긴장한 모양이었다.
“헐, 규진이 너도 그렇게 불러? 와, 진짜 상상 안 된다. 넌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왜. 난 뭐라 그럴 것 같은데.”
“그냥 절대 그런 말 안 할 것 같이 생겼어. 오글거리는 거 엄청 싫어할 것 같은데.”
“나 그런 거 존나 좋아해. 우리 여보한텐 애교도 존나 많은데.”
“와, 이래서 겉만 보면 진짜 모른다니까. 여친도 그런 거 좋아해?”
“좋아할걸. 하는 건 잘 못 해도 듣는 건 좋아하는 것 같은데.”
여전히 멈춰 있는 손을 흘끗 본 현규진이 유원의 손등을 손끝으로 톡 두드렸다. 어깨가 다
흔들리도록 움찔한 유원이 다시 느릿하게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근데 하기만 하고 못 받으면 좀 서운하지 않아? 난 가끔 좀 나만 혼자 좋아하는 것 같고 그런
생각 들던데.”
“나도 예전엔 좀 그랬는데 지금은 딱히?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잖아. 해 달래서 하는 거
아니고. 내가 걔 존나 좋아서 하는 건데 뭘 서운해해. 그냥 그 시간에 애교 한 번 더 떨어.
그래야 그거 보고 한 번 더 웃지.”
다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느려졌다. 여전히 유원의 어깨에 기댄 채 테이블 아래로 손을
하나 내린 현규진이 손가락을 펼쳤다. 곧 유원의 손이 그 위를 뒤덮었다. 손가락이 마주
물리며 단단하게 얽혔다. 애교 부리듯 유원의 어깨 위에 얹힌 머리를 비비적대자 유원의 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래야 네가 한 번 더 웃지.
현규진의 입매가 부드럽게 늘어났다. 그렇게도 몰려들던 잠기운은 어느새 달착지근한
설렘으로 변해 있었다.
***
캠퍼스 안에도 벚꽃이 여기저기 피기 시작했지만, 벌써 며칠째 공부하는 정유원, 과제하는
정유원, 그러다가 피곤해서 쓰러져 자는 정유원만 본 현규진의 마음은 겨울이었다.
전에는 벚꽃이 필 때쯤 공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꽃 냄새가 네 냄새 같다고 소곤대면서
간질간질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지금은 정말 중간고사를 앞둔 성실하고 바쁜 대학생
유원을 잠깐 보고, 오래 기다리는 것으로 하루가 다 가 버렸다.
물론 저도 과제를 하고 중간고사 준비를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사이사이 유원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너무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서운하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첫 시험인데 당연히
잘 보고 싶을 거고, 개인의 공부 외에도 다 같이 하는 과제를 해야 하니 혼자만 노닥댈 수 없는
일이라 유원을 충분히 이해했다. 다만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유원을 만지고 싶어 미치겠다는
것이었다.
“하….”
“아, 왜 또 사람 앞에 앉혀 놓고 한숨이냐? 나오랄 땐 언제고.”
닭꼬치를 세 개째 해치운 최해영이 빈 꼬치로 현규진 앞을 툭툭 쳤다. 그리고 옆에 앉아
아까부터 한마디도 없이 꼬치만 한 판을 조지고 있는 김준재의 어깨를 툭 쳤다.
“넌 꼬치 털러 왔냐?”
“어.”
“…아, 남들은 고등학교 친구들 만나면 존나 그때 생각나고 좋다던데 난 뭐냐. 하나는 사람
개무시하고 한숨만 쉬고, 하나는 배에 거지새끼가 들어서 존나 처먹기만 하고.”
“과제 하느라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다고. 개배고파.”
“그리고 하필 만나도 왜 아무도 안 만나는 지금 만나자 그러는데. 너넨 시험 준비 안 해?”
시험이라는 말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한 현규진이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턱을 괸 채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25 화(125/127)

125


“근데 현 네가 뭔 일로 여기까지 왔어? 멍유는.”
“과제.”
“넌 과제도 안 해? 아…. 다 까였구나. 너랑 아무도 같은 조 안 해 줘? 이게 고딩 때까진 와꾸로
먹히거든? 근데 대학은 좀 다르다니까. 인간 됨됨이도 보더라고.”
“꺼져, 얼굴 존나 보니까. 나랑 같은 조 하려고 줄 서서 면접 보는 건 아냐?”
손을 들어 맥주를 더 주문한 현규진이 앞에 놓인 마카로니 뻥튀기를 하나 들어 입에 넣었다.
그 뻔뻔한 말에도 최해영과 김준재는 어쩐지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러운
세상은 여전히 잘생긴 얼굴을 좋아하니까.
“면접이나 밤새 보시지 여긴 왜 오셨냐고요.”
“유원이 늦게 온대서.”
“…그게 이유야?”
“어. 집에 혼자 있기도 싫고.”
“아니, 근데 너네도 담주부터 시험 아냐?”
“맞아.”
“그럼 멍유가 정상이지. 나도 오늘만 운 좋게 시간이 있었던 거지 어제도 과제 존나 하고,
내일도 아침부터 존나 해야 돼.”
염통 꼬치를 들어 가로로 들고 한 번에 훑어 먹은 김준재가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나도 그래. 나도 할 거 많아 많은데.”
매일 물고 빨고 하다가 갑자기 손 하나 닿기 힘들어지니 죽겠어서 그러지. 소리 낼 수 있는
말보다 소리를 낼 수 없는 말이 더 많았다. 현규진은 다시 맥주 한 모금과 함께 말을 삼켰다.
영혼을 가득 채우며 삶을 관통하는 사랑을 해 보지도 않은 놈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었다.
“말을 하다 말아. 뭐 멍유 네 건데 다른 놈들이 뺏어 가서 슬퍼, 징징. 이거 아냐.”
“뭐래.”
“맞잖아. 우리 다 알거든? 너랑 멍유 찐인 거?”
잠시 당황해 할 말을 잃었던 현규진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괜히 닭꼬치 하나를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매울 줄 알았는데 안 맵네.”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모를 줄 알았냐? 그냥 모른 척한 거지.”
“정유원 사다 줘도 되겠다. 정유원 매운 거 잘 못 먹거든.”
“그렇게 유난을 떠는데 모를 수가 있겠냐고. 우리도 다 아니까 좀 편하게 말해도 된다고.”
“아니다, 밤에 먹으면 체하려나.”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다가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살짝 매콤은 하지만, 전반적으로 달달해
유원도 좋아할 것 같은 닭꼬치를 내려놓은 현규진이 저를 보고 있는 최해영과 볼이 빵빵해
아직도 먹고만 있는 김준재를 바라보았다.
“우리 친구야.”
“친군데 뽀뽀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미친, 우리가 언제.”
“담배 아지트에서 그러는 거 다 봤거든. 누가 볼까 봐 얘랑 나랑 그때 문 앞에서 존나 망도
봤어.”
“뭐 그랬다고 치자. 그럼 그땐 왜 말 안 했는데. 만약에 진짜 봤으면 놀랐을 거 아냐. 너네가
그걸 보고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고? 지랄.”
삼겹살 꼬치까지 두 개 해치운 김준재가 꼬치 C 세트를 추가로 주문하고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안 놀랐는데.”
“왜.”
“그냥 그럴 것 같았어. 너넨.”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최해영과 김준재의 얼굴을 보며 오히려 당황한 것은 현규진이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곤 있지만, 저와 유원이 학교에서 뽀뽀하는 걸 둘이 봤을 줄은
몰랐기에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또 한편으로는 그걸 다 보고도 지금까지 모른 척을 하면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두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그냥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봐. 진짜 그때 안 놀랐어. 그냥 왜 학교에서
지랄이냐, 딱 그 정도?”
“그럼 지금은 왜 말하는데.”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
“미리 말하는데 우린 무조건 멍유 편이야. 멍유가 널 거둬 준 거라고 우린 이미 전에 결론
내렸어. 멍유는 진짜… 노벨상 받아도 인정. 노벨 조련상 이런 거 없냐? 돈도 많은데 하나
만들어. 멍유 덕분에 사람 흉내라도 내고 사는 줄 알아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도 재밌다고 낄낄대는 두 사람을 보니 당황해 울렁이던 마음이
잠잠해졌다. 저와 유원이 친구가 아니라 서로 좋아하는, 너무나 많이 좋아하는 사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다는 것도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존나 의외네.”
“뭐가?”
“너네 입 존나 싼 줄 알았는데.”
“씨발, 김준재 이 새끼가 싸지, 내가 싸냐.”
갑자기 공격하는 최해영을 어이없단 듯 바라보던 김준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친아, 내가 입이 싸도 그걸 말하고 다니겠냐?”
“그럼 나 개총 때 술 먹고 벤치에서 잔 건 단톡에 왜 말했는데.”
“다 널 위해서 그런 거지. 개망신을 당해야 쪽팔려서 정신을 차릴 거 아냐? 그때 길바닥에서
자고 입 안 돌아갔냐?”
같이 편 먹고 저를 당황하게 하더니 늘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공격하는 최해영과 김준재를
보던 현규진이 테이블을 탁탁 두드렸다.
“야, 시험 끝나면 밥 사 줄게.”
“뭐 한국대 학식? 줘도 안 먹어.”
“호텔 뷔페, 오마카세, 파인다이닝, 한우. 원하는 걸로. 가격 제한 없어.”
“선생님, 진지하게 회의한 다음에 결과 보고드리겠습니다.”
바로 태도가 변해 고개 숙여 인사하는 최해영을 따라 김준재도 과장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절레절레한 현규진이 진동 오는 느낌에 얼른 휴대폰을 확인했다.
[내거여보자기♥ : 30 분 뒤에 끝날 것 같아]
[내거여보자기♥ : 최해영 김준재랑 같이 있어?]
[응 이제 갈 거야]
[데리러 갈게 대충 나도 30 분쯤 걸릴 것 같아]
[아 닭꼬치 먹을래? 안 맵고 맛있던데]
[내거여보자기♥ : 응! 먹을래]
[내거여보자기♥ : 맛있겠다]
먹는다는 말만 봐도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직원을 불러 닭꼬치로만 여러 맛이 든 A 세트를
포장해 달라 말한 현규진이 저를 구경하듯 바라보는 최해영과 김준재를 보며 휴대폰을
흔들었다.
“유원이 거의 끝났나 봐. 나 먼저 간다.”
“네, 선생님. 다시 뵙는 날까지 건강하시길 바라고, 또 멍유원 님과 영원히 행복하시기를….”
“꺼지세요. 10 만원 계산하고 갈 테니까 더 먹고 가.”
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아 배 위에 놓고 공손히 인사하는 두 사람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린 현규진이 카운터로 가 금세 포장되어 나온 봉투를 받고, 계산했다.
가게를 나가기 전 다시 테이블을 흘끗 보니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 저에게 내미는 두
사람이 보였다. 어이가 없어 작게 웃은 현규진이 얼른 가게를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얼른 유원에게 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
유원이 있는 학교 근처 카페 앞에서 내린 현규진은 벌써 나와서 가만히 저를 기다리고 서 있는
유원에게 얼른 달려갔다. 가자마자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서 벗기고 품에 안고 있는 노트북
파우치도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있는 것을 가져오려던 현규진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나 주려고 산 거야?”
“응. 좋아하잖아.”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아이스 초코 컵을 받은 현규진이 얼른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머리가
잠시 띵할 만큼 차갑고, 달았다. 저를 생각하며 이걸 주문해 들고 기다렸을 유원을 생각하니
평소보다 더 맛있었다. 현규진은 얼른 유원의 입에도 빨대를 물려 주었다. 유원도 쪼록 한
모금을 머금고는 맛있다며 웃었다.
“네 건 왜 안 샀어.”
“난 과제 하면서 두 잔이나 마셨어. 망고 스무디랑 아이스 녹차.”
“갑자기 웬 녹차?”
“설탕 많이 먹으면 안 좋을 것 같아서. 나 잘했지.”
“완전 잘했어. 우리 여보 진짜 똑똑이.”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칭찬하자 유원이 또 웃었다. 현규진은 그런
유원의 얼굴 앞에서 닭꼬치가 든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맛있는 냄새 나.”
“최해영이 맛있다고 난리를 쳐서 뭐 얼마나 맛있나 했는데 맵지도 않고 딱 맛있더라. 하나
줄까? 먹으면서 갈래?”
“응. 냄새 맡으니까 갑자기 배고파.”
“저녁 뭐 먹었는데.”
유원에게 잠시 아이스 초코 컵을 맡긴 현규진이 봉투 안에 든 상자를 열어 닭꼬치를 하나를
꺼냈다. 뜨겁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 온기가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차돌박이 떡볶이랑 허니 버터 감자튀김. 애들이 그러는데 배달해도 똑같이 맛있대. 우리
다음에 시켜 먹자.”
“응, 그러자.”
손에 소스가 묻지 않도록 봉투 안에 같이 든 휴지로 나무 막대 부분을 잘 감싼 현규진이
유원의 손에 꼬치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다른 손에 들린 컵을 다시 받았다. 뜨겁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꼬치를 한 번 호오 불고 먹는 유원이 귀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진짜 맛있다아. 맵지도 않고.”
“딱 네가 좋아할 것 같았어.”
유원의 머리를 쓰다듬은 현규진이 다시 아이스 초코를 한 모금을 마셨다. 종일 바빠 내내
얼굴을 못 보다가 겨우 밤이 되어 본 얼굴이라 그런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최해영이랑 김준재는 잘 지내?”
“응. 그렇지, 뭐. 그래도 정신들 차린 것 같더라. 대학 적응도 잘하고.”
“학교 얘기했어?”
“응. 그리고….”
최해영과 김준재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채웠다. 저 혼자만 알고 있을 일은 절대 아니었다.
저와 유원의 일이니까. 그래서 유원에게도 두 사람이 우리 사이를 다 이미 알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조금 걱정이 됐다. 혹시라도 유원이 부담스러워하거나 많이 놀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였다.
다시 사귀고 난 뒤부터는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유원은 저와 사귀는 것을 외부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부모님께 들킬까 봐 특히 걱정했고,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일절 스킨십을
금지하기도 했었다.
친구 사이 고백 금지-126 화(126/127)

126


물론 현규진도 그 마음을 전부 이해했다. 일반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아, 그래?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특히 부모님은 큰 충격을 받으실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해영과 김준재가 이 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을 유원이
알게 됐을 때의 반응이 조금 긴장되고 무서웠다.
얼마나 긴장이 되냐면 분명히 엄청 달게 느껴졌던 초콜릿 맛이 잠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또 봉투를 쥔 손에서 자꾸 땀이 나기도 했다. 분명 덥지 않았는데 지금은 긴장과 함께 열이
올랐는지 체온이 후끈후끈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할 말 있지?”
“어?”
“근데 하기 좀 힘든 말이지?”
“…어떻게 알았어?”
“손.”
유원의 말에 현규진은 고개를 숙여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긴장해 봉투 손잡이를 잡았다가
폈다 반복하고 있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잘못한 거 있으면 그러잖아. 손가락 접었다 폈다 접었다 폈다 가만히 못 두고.”
“이번엔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그냥 좀… 자기 반응이 잘 상상이 안 되는 일이라.”
“뭔데? 그렇게 말하니까 괜히 무서워.”
“그거 다 먹으면 말할게. 아니, 집에 가서 남은 것도 너 먹고 싶은 만큼 다 먹고 나면.”
손을 뻗어 유원이 쥐고 있는 휴지를 위로 조금 밀어 아래쪽에 있는 닭고기를 먹기 좋게 위로
올려 준 현규진이 씩 웃었다.
“음, 나쁜 일이야?”
“아니, 뭐 나쁜 일까진 아닌데…. 아닌가? 어, 내 기준에서는 나쁜 일은 아니야.”
“…들으면 엄청 놀랄 일이야?”
“조금은 놀라지 않을까. 솔직히 나도 좀 놀랐어.”
“우리 일이야?”
“응.”
“…그럼 지금 말해 줘. 우리 일이니까.”
집으로 가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 현규진이 다시 손가락을 폈다가 오므리며 봉투 손잡이를
꽉 쥐었다.
“우리 일이니까 나도 알아야지. 얼마나 놀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규진이 너처럼
똑같이 겪어야 하는 거잖아. 우리 일이니까.”
“…맞아. 우리 일이니까. 후우…. 잠깐만.”
깊게 숨을 마셨다가 내쉰 현규진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긴장이 전부 사라지진 않았다.
“…최해영이랑 김준재가….”
“응.”
“…내가 너 좋아하는 걸 알고 있더라고. 우리 사귀는 것도.”
“아….”
반짝. 초록 불로 바뀌었지만, 누구도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았다. 두꺼운 하얀 금만 바라보던
현규진이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유원과 눈을 맞췄다.
“…미안해. 내가 너무 티를 냈나 봐.”
“…….”
“우리가 그… 미술실에서 뽀뽀하는 걸 봤대. 넌 학교에서는 하지 말라고 그랬었는데 내가
괜찮다고 한 거잖아. 미안해. 네 말 들어야 했는데.”
유원이 저를 혼내더라도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혼나도 싼 일이니까. 집에 갈 때까지 못
참겠다고 학교에서는 안 된다는 유원을 데리고 가 여기저기에서 뽀뽀하고 키스했던 기억이
너무나도 분명해 변명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솔직히 말 없는 유원을 보니 좀 무서웠다. 아니, 사실은 많이. 그래서 괜히 그 정적을
채우려 더 말을 많이 하게 됐다.
“…그… 둘 다 그래도 여태까지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나한테도 그런 티 전혀 안 냈고….
앞으로도 절대 누구한테 말할 일 없을 거랬어.”
“…….”
“…자기야. 그냥 화라도 내 주면 안 될까. 한 대 칠래?”
유원의 얼굴 앞으로 몸을 숙여 고개를 내린 현규진이 정말 바로 치려면 칠 수 있게 뺨을 대
주었다. 그걸 가만히 보던 유원의 손이 올라갔다.
아, 드디어 정유원한테 맞는구나. 그래, 그동안 그렇게 혼날 짓을 많이 하고 한 대 안 맞고
여태까지 버틴 게 존나 말도 안 되는….
“…….”
“…….”
퍽 또는 짝 소리가 날 줄 알았던 곳으로 따뜻함이 닿았다. 현규진은 제 뺨을 쓰다듬는 유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뺨을 쓰다듬다가 머리칼까지 쓰다듬어 준 유원이 꼬치 끝에 달린 마지막
한입을 입에 쏙 넣었다. 현규진은 상황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여전히 멍한 눈으로 그
얼굴만 살폈다.
“…화난 거 아냐?”
“안 났어.”
“…막 화도 안 날 만큼 빡쳐?”
“그게 뭐야아. 진짜 화 안 났어.”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신기해서.”
“뭐가?”
혹시 다칠까 싶어 유원이 든 빈 꼬치를 가져와 봉투에 넣은 현규진이 다시 아이스 초코 빨대를
유원의 입에 물려 주었다. 두 번 연달아 쪽쪽 빠는 게 이런 상황에서 봐도 너무 귀여워 진짜
이번에는 버티기 힘들었다. 주위를 둘러본 현규진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고개를 내려
유원의 보들보들한 뺨에 쪽 입 맞췄다.
“예전이었으면 이런 말 들었을 때 좀 엄청 놀라고… 화…는 아니어도 좀 기분이 이상했을 거야.
그때 내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해서 일을 이렇게 만드냐고 너한테 뭐라고 했을지도 몰라.”
“…….”
“그런데 지금은… 좀….”
“…….”
“…놀라긴 했는데 뭔가…. 좋아.”
“…좋아?”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숨길 일도 아니고, 당연히 유원도 알아야 할 일이지만, 말을
하면서도 유원이 너무너무 신경 쓰고 싫어할까 봐 걱정했기에 좋다는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우리가… 사귀는 걸 다른 사람도 안다는 게 기분 좋은 일일 줄 몰랐어.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아. 우리 둘만 알고 있을 때도 좋았지만, 숨길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돼서 그런가? 기분
좋아.”
“…아…. 다행이다…. 나 진짜 걱정했거든.”
몸을 숙여 내내 갇혀 있던 숨을 내쉰 현규진이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이제야 좀 제대로 숨이
쉬어졌다.
“그런데 최해영이랑 김준재가 더 놀랄 일 아니야? 우리 뽀뽀하는 것까지 봤으면… 더 그랬을
것 같은데.”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대.”
“왜?”
“그냥 우린 그럴 것 같았대. 좋아하는 게 다 보였나 봐. 그리고 자기들은 무조건 네 편이래.
네가 나 조련해서 사람 만들고, 뭐 그래서 내가 사람 흉내라도 내고 산다고 뭐 상 주라던데.”
“최해영이 그랬지?”
“어.”
“목소리 들리는 것 같아.”
최해영의 말투를 떠올린 유원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저와 현규진이 사귀는 것을 아는 친구들도
생기고, 그 친구들이 무려 제 편까지 들어 준다니 정말 생각보다 훨씬 더 기분이 괜찮았다.
아니, 괜찮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좋았다.
“뭐야. 최해영 목소리가 왜 들리는 것 같은데.”
“응?”
“아니, 평소에 최해영 목소리가 맘에 들었어?”
“아니이, 최해영이 어떤 말투로 어떻게 말했을지 상상이 된다는 거지.”
“아니, 그러니까 왜 최해영을 상상하냐고. 날 앞에 두고.”
“아니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니, 그게 왜….”
계속 아니라고 앞에 붙이며 말하는 것을 깨달은 순간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적당히 따뜻한 밤바람 안으로 번진 웃음은 서로의 마음 안으로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그렇게 사랑은 서로의 웃음으로 둘러싸여 조금 더 단단해졌다.
다시 반짝, 불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현규진이 손을 내밀었다. 곧 손가락 사이로 조금 더
가느다란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단단히 얽힌 손가락은 봄보다 따뜻했다.
함께 걸음을 옮겨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은 늘 설렜다. 아마도 ‘우리’의 집으로 가서 그런 게
아닐까. 유원은 깊게 달착지근한 봄밤의 공기를 머금었다.
“잠깐 공원 갔다 갈까? 꽃 다 피었을 텐데.”
“가방 무겁지 않아?”
“안 무거워.
씩 웃은 현규진이 집을 지나 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질수록 공기가 달큰해졌다.
“요즘 어딜 가든 벚꽃이 피어 있어서 그런가. 공기가 달달해서 숨 쉴 때마다 네 생각 나.”
벚꽃이 잔뜩 피어 있는 공원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유원은 친구일 때, 친구여야만 했을 때
현규진이 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잠깐 나올래? 오다 보니까 공원에 벌써 벚꽃 피었더라.’
그때의 저는 매분, 매초 현규진을 그리워했다. 두 눈에 담고 있어도 더 깊이 보고 싶고, 잠깐
떨어질 때면 다음 날 아침이 되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친구로 지내는 게 너무너무 어려워 매일
밤 또 현규진을 생각하며 울었다.
‘같이 잠깐 걸을까? 공기가 달달해서 숨 쉴 때마다 네 생각 나.’
그 말 하나에 숨 쉬는 것도 잊고, 오직 단 하나 현규진이 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움직였다.
친구로 지내야 한다면서 바보같이 질투도 하고, 너무너무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해 잔뜩
보이기도 했던 기억이 났다.
열아홉의 봄밤은 유원을 참 많이 헤집었다. 아주 다정히, 사랑을 눈동자 안으로, 손끝으로,
입술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은 전부 현규진의 것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스무 살의 봄밤 역시 유원을 뒤흔들었다. 이미 눈동자 안에, 손끝에,
입술 위에 묻어 있는 사랑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유원은 마음 안에서 제 사랑이 마구
드러나는 것을 숨기지 않은 채 현규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현규진의 어깨가 잠시 굳었다가 풀어졌다. 내내 닿고, 이보다 더 가득 닿은 적도 많은데도
현규진은 여전히 제가 먼저 닿을 때면 이렇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떨림과 설렘이 고스란히
묻은 그 움찔거림이 좋았다. 유원은 웃음 지었다.
두 눈에 보이고, 온몸으로 느껴지고, 이제는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한 이 사랑이
좋았다. 현규진이 좋았다.
열아홉과 스물에 본 벚꽃의 꽃말은 현규진.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 앞으로 이어질 모든
봄의 이름 역시 늘 현규진일 것이었다.
“아까 엄마한테 전화 왔는데 중간고사 끝나면 집에 오래. 어떻게 집에 한 번을 안 오냐고
잔소리해서 그냥 알겠다고 했어.”
“나도 며칠 전에 아빠가 시험 끝나면 집에 오라고 하셔서 간다고 했어. 같이 가자. 엄마, 아빠도
보고 싶고… 이모랑 이모부도 보고 싶어.”
“간만에 정유원이랑 친구 되겠네.”
씩 웃은 현규진이 맞잡은 손을 들어 흔들었다. 현규진과 다시 친구가 된다니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친구일 때도 스킨십하는 것을 빼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나날을 보냈던 것
같은데 새삼 어떻게 친구인 척을 해야 할지 조금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규진아. 우리… 친구일 때 어땠지?”
“글쎄. 나도 잘 기억 안 나. 그렇게 오래전 일도 아닌데. 뭐…. 뽀뽀만 안 하면 되지 않을까.”
“뽀뽀 참는 거 너무 어려울 것 같아….”
중간고사 준비로 바쁜 중에도 이렇게 짬을 내어 현규진과 벚꽃 구경을 하는 것도 너무나
기분이 좋고, 또 현규진과 저의 관계를 누군가 알게 되었는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대수롭잖게
여겨 준다는 것도 기분이 좋아 그런지 평소에 잘 하지 않는 농담이 다 나왔다.
물론 100% 농담은 아니고 진심이 섞여 있기도 했다. 사귄 뒤로 눈만 마주치면 뽀뽀를 한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많이 쪽쪽대고 있으니까. 이제는 습관이 된 뽀뽀를 참아야 한다 생각하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또 조용해진 옆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가로등 불빛 아래로 현규진의 귀가 빨개진 게 보였다.
그게 귀여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한 유원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자기는 안 그래?”
“…어?”
“나만… 여보랑 뽀뽀하는 거 좋은가 봐아….”
‘자기’에 ‘여보’까지 연달아 터뜨려 주자 다물려 있던 현규진의 입술이 점점 더 벌어졌다. 더는
참지 못한 유원이 두 손을 들어 현규진의 뺨을 꾹 눌러 문질렀다.
“오늘 왜 이렇게 귀여워?”
“자기야.”
“응?”
“하고 싶어.”
뭘 하고 싶은지 말하지 않았지만, 유원은 되묻지 않았다. 딱 한 가지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보니 저도 현규진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중요한 과제 하나를 끝내고 내일 발표자가 발표만 하면 되니 오늘 밤은 현규진과 잔뜩 붙어
있고 싶었다.
“…나도.”
“…아, 존나 미치겠네. 미안한데 좀 빨리 걸을게.”
손을 잡은 채 현규진이 뒤돌았다. 왔던 길을 따라 유원도 걸음을 옮겼다.
빨리 가자 말하면서도 제가 숨이 찰까 봐, 그래서 혹시 조금이라도 아프게 될까 봐 조금도
빠르게 속도를 내지 못하고 제 속도에 맞춰 걷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이 미소 지었다.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마다 귀와 목덜미가 빨개진 게 보여 저 역시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웠다.
부드러운 봄바람에 꽃잎이 흩날렸다. 달달한 공기가 피부로 달라붙었다. 평소보다 더 빠르게
걷는데도 힘들지도 않고, 숨이 차지도 않았다.
공원을 나서자 집이 보였다. 못 참고 가볍게 달리기 시작하는 현규진을 따라 유원도 급한
마음을 따라 발을 움직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쁜 숨 대신 웃음이 터졌다.
“…좀 더 천천히 갈까?”
“아니이, 더 빨리 가도 돼.”
돌아보는 현규진을 보며 유원은 생각했다. 몇 번을 다시 돌아가도 저는 분명히 제 친구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친구를 좋아하게 된 가을, 단둘이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던 겨울, 그 무엇 하나 반짝이지 않는
게 없었던 여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봄. 그 언제라도 결국은 사랑에 빠질 테니까.
사랑에 빠진 유원의 모든 계절이 반짝였다.
현규진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친구 사이 고백 금지> 마침.
친구 사이 고백 금지-127 화 (에필로그)
(127/127)

에필로그


햇볕은 쨍한데 얼굴로 닿아 오는 바람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물론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
환기할 때만 날씨 체크를 할 수 있지만.
종강 이후 일주일 정도는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며 유원과 딱 붙어 시간을 보냈다.
기말고사를 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 또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해 정말 유원의 마지막
시험이 끝난 그 순간부터 일주일 동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연락도 다 끊은 채 유원만
물고 빨았다.
침대 밖으로 나가는 것도 혼자는 못 나가게 하고,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졸졸 뒤를
쫓아다녔다. 먹는 것도 함께, 자는 것도 함께, 씻는 것도 늘 함께였다.
저는 너무 좋지만, 유원이 조금 질려하려나 걱정이 되는 상황까지 밀고 간 현규진은 부스스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아직 빛이 보이는 걸 보니 저녁은 아닌 모양이었다. 머릿속으로 잔뜩
밝은 대낮에 유원과 소파에서 뒤엉키다가 방까지 온 모든 장면이 맺혔다.
눈을 비빈 현규진은 유원이 깨서 먹을 달착지근한 것들을 주문해야겠다 생각하고 침대
주변을 손으로 더듬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휴대폰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기 없다면 거실 소파에 떨어져 있을 것 같았다. 아까 소파에서 유원의
다리에 누워 영화를 보다가 제 피어싱 위를 만지는 손길에 눈이 돌아 그대로 달려들었으니까.
침대에서 내려와 그래도 속옷 정도는 챙겨입은 현규진이 팔을 쭉 펴 스트레칭을 하며 거실로
나갔다. 아직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거실 소파 위에 역시나 휴대폰이 떨어져 있었다. 그것도
같은 기종의 휴대폰 두 대가 모두. 미소 지은 현규진이 유원의 것도 함께 집어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한 병 꺼내 마시며 현규진은 유원의 간식 메뉴와 저녁 메뉴를 떠올렸다. 간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저녁을 제때 먹기 힘들 것이었다.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만 간단히 먹고, 저녁에
맛있는 것을 먹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까지 한 순간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기 전에 허리에 두 팔에 감겼다.
“옆에 없어서 놀랐잖아….”
아…. 미친. 현규진은 몸을 돌려 이번에는 품으로 안겨 오는 유원을 가득 끌어안았다. 제가
너무 붙어 다녀 지겨울까 생각했는데 유원도 저와 똑같이 제가 없으면 잠시도 버티기 힘들게
됐다니 너무 좋아 마음이 막 벅차올랐다.
“자기야, 이거 뭐야.”
살짝 몸을 뗀 현규진이 유원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급히 나오는 중에도 아무것도 안
입고 나오는 것은 좀 그랬는지 뭔가를 입었는데 하필 아까 침대 어디론가 벗어 던진
티셔츠였다.
제가 없는 것에 불안해져 급히 주워 든 제 티셔츠를 입고 나와 저를 찾아 안기는 정유원이라니
…. 다리 사이로 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몸을 댄 채 안고 있어 당연히 유원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살짝 고개를 든 유원이 저를
내려다보는 현규진과 눈을 맞췄다.
“…너 또….”
“응. 나 또 이래. 한 번만, 아니, 두 번만 더 해도 돼? 천천히 할게.”
“…….”
“아까처럼 자기 기분 좋아지게.”
제 몸을 공들여 핥고 빨아 주다가 안으로 들어와 너무 힘들지 않게 한다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던 현규진이 떠올랐다. 느릿하게 움직여서 다른 의미로 더 힘들었다는 걸 현규진은
알까. 유원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현규진의 귓불에 있는 작고 까만 피어스를 손끝으로 살살
매만졌다. 허락의 의미였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현규진이 유원의 허리를 안아 들었다. 유원의 두 팔은 현규진의 목에,
그리고 다리는 허리에 감겼다. 완전히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방으로 가면서도 현규진은 유원의 귓가와 뺨에 입 맞추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쪽, 쪽
간지러운 소리가 쉴 새 없이 퍼졌다. 작게 소리 내어 웃던 유원이 이내 조금 빨개져 현규진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데 있잖아….”
“응.”
“…천천히… 안 해도 돼.”
어딘가에 갇힌 듯 웅얼웅얼하는 소리였지만, 현규진은 정확하게 그 말을, 또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아래로 감각이 더 몰려들었다. 천천히 할 수가 없을 만큼 급했다.
현규진이 침대까지 달렸다. 그 몸에 매달린 채 유원이 웃었다.
스무 살의 마지막 순간을 머금은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여전히 함께인 채 언제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
방학이 시작되고 열흘은 어떻게 버텼지만, 엄마의 잔소리에 더 버티지 못하고 결국은 집으로
끌려갔다. 현규진은 6 층에 내려 유원을 끌어안고 어떻게 떨어져 있냐며 한참을 우울해했다.
평소라면 그런 현규진을 어린애 보듯 귀엽다며 달랬을 유원도 현규진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얼굴을 어깨에 비비적대고 한 번씩 귓가에 쪽 뽀뽀해 주었다. 조금의 틈도 존재하지 않던
열흘을 보내다 보니 이제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불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진짜 그렇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보고 싶어서 어떡해.”
“그러게에…. 그래도 이따 저녁 같이 먹는다니까 다행이야.”
“그때까지 참으라고? 자기야, 저녁때까지 나 안 볼 수 있어? 그게 참아져?”
“못 참지이…. 보고 싶어서 어떻게 참아.”
유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나치게 사랑스러워 속으로 욕을 내뱉은 현규진이 더 꽉
몸을 끌어안았다가 살짝 놓았다. 그리고 입술을 마주했다.
집 앞이라 하지 말라 그럴 줄 알았는데 자연스럽게 제 뺨을 매만지는 손길이 좋아 손끝이 다
저릿했다. 유원의 기분이 좋아지도록 혀끝을 살살 마주 문지르다가 쪽쪽 빨아 주니 작게 앓는
소리가 울렸다. 조금 더 했다가는 집이고 뭐고 당장 호텔에 갈 것 같아 인내심을 끌어모아
몸을 뗀 현규진이 다시 유원을 꽉 끌어안았다.
“가서 인사만 하고 올게.”
“응….”
한참 못 만날 사람들처럼 겨우겨우 몸을 뗀 현규진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며 손을 흔들었다.
유원도 아쉬움에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빠이…. 이따 봐.”
예전에는 분명 유원이 ‘빠이.’ 인사하는 게 귀엽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빠이’는
정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슬픈 말이었다.
***
“현규진. 오자마자 또 어딜 나가?”
“어? 어…. 그 유원이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한 시간 전까지 계속 같이 있었으면서 갑자기 무슨 할 말이 있어.”
“어? 뭐…. 생겼어, 갑자기. 그… 어, 날씨도 좋은데 그냥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운동 좀 하고 올게.
정유원 몸 약해서 운동해야 돼. 내가 요즘 매일 운동시키거든.”
물론 겨울이라 침대 안에서 하긴 했지만. 뒷말을 삼키고 씩 웃은 현규진이 현관으로 뒷걸음쳐
나가 얼른 운동화에 발을 반쯤 넣었다.
“날씨가 좋긴 뭐가 좋아. 오늘 영하야. 이런 날 밖에서 운동하면 돼?”
“…아니, 진짜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저녁 전까지 들어올게!”
더 질문 폭격을 받았다가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아 집을 뛰쳐나온 현규진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유원에게 톡을 보냈다.
[여보 나 지금 집에서 나왔어]
[밖에 추우니까 코트ㄴㄴ 패딩ㅇㅇ 목도리, 장갑 꼭 하고 나와]
곧 강아지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이모티콘이 화면에 떴다. 유원은 꼭 이모티콘도 저 같은
것만 썼다.
6 층으로 내려가 조금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코트를 입은 유원이 집에서 나왔다. 예쁘긴 한데
이렇게 추운 날씨에 아무래도 코트는 아닌 것 같아 유원을 데리고 다시 들어간 현규진이 저를
보고 반기는 유원의 부모님께 시원시원하게 인사하곤 방으로 향했다.
“왜애…. 이거 입을래.”
“밖에 추워.”
“괜찮은데….”
“패딩 입기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코트가 더 예쁘잖아.”
코트를 벗기고 아까 올 때 입혀 온 기다란 패딩을 입힌 현규진이 반쯤 닫힌 문을 흘끗 보곤
유원의 뺨에 쪽 입 맞췄다.
“지금도 존나 예쁜데 무슨 소리야. 넌 지금 형광 연두에 오렌지 땡땡이 있는 패딩 입고 나가도
사람들이 줄 서서 이거 어디서 샀냐고 물어봐. 그리고 내일 존나 그 브랜드 패딩 완판. 정유원
셀럽 등극.”
“그게 뭐야.”
“그만큼 존나 예쁘시다구요.”
목도리를 잘 둘러 주고, 장갑까지 끼워 준 현규진이 제가 챙겨 온 핫팩을 하나씩 양쪽 패딩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이제 가자.”
“응.”
소리가 나지 않게 세 번 뽀뽀한 뒤에야 방을 나설 수 있었다. 현규진은 이따 저녁때 오겠다고
다시 유원의 부모님께 인사한 뒤 함께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쪽으로 가서 구경하다가 학원가로 향했다. 방학이라 그런지 낮에도
학원으로 향하는 학생들이 꽤 보였지만, 그래도 막 붐비는 정도는 아니었다.
유원이 꽤 오래 다녔던 학원 앞을 지나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꼬박꼬박 갔던 버블티 가게에
들어갔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안을 보며 유원은 안쪽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현규진과 대부분
이 자리에 앉아 버블티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났다.
대부분 기억에 크게 남지 않을 가벼운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학원 끝나고 저를 데리러 온
현규진과 이 버블티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유원에게는 무척 큰 즐거움이었다.
엄마, 아빠가 알면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할 것 같은 달착지근한 버블티를 몰래 마시는
것도 일탈하는 기분이라 좋았고, 그런 저의 앞에 언제나 당연히 저의 ‘친구’ 현규진이 있다는
것도 좋았다.
현규진이 있어 누릴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이유였다. 혼자였으면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그냥 스쳐 지났을 모든 것들이 현규진과 함께라는 이유로 유원에게 갖가지 큰
의미를 안겨 주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을 수 없을 아주 소중한.
“추워서 차가운 거 마시면 안 되는데.”
“괜찮아. 여긴 따뜻하잖아.”
걱정하면서도 제가 좋아하는 버블티를 주문한 영수증을 보며 유원이 웃었다. 제가 웃자 그냥
따라 웃는 잘생긴 얼굴이 두 눈 가득 들어찼다. 바라만 봐도 행복하다는 게 뭔지 요즘 유원은
날마다 느끼고 있었다. 살짝 화가 날 일이 생겨도 저를 보고 웃는 얼굴을 보면 그냥 화가 다
풀리고, 안기고만 싶어지는 게 문제긴 하지만.
“어, 나왔다. 가져올게.”
현규진이 가져온 버블티를 한 모금 쪼로록 빨아들이자 쫀득쫀득한 버블이 씹혔다.
달콤하면서도 너무너무 맛있어 연달아 몇 모금이나 말없이 마시는 유원의 앞으로 웃음소리가
번졌다. 빨대를 문 채 현규진을 본 유원은 이 순간을 간직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과 동시에 머릿속으로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거 마시고 갈 데 있어.”
“어디?”
“비밀이야.”
“왜, 어딘데. 설마… 호텔?”
“으…. 아니거든. 가 보면 알아.”
“반응 봐라. 예쁘면 다냐.”
버블티를 한 모금 더 마신 유원이 불만스럽다는 듯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는 현규진의 손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제 손으로는 완전히 가릴 수 없을 만큼 큰 손 위를 덮자 넓고 단단한 어깨가 또 움칠 떨리는 게
느껴졌다. 유원의 마음 안으로 사랑이 또 울컥 넘쳤다. 유원은 말하고 싶었다. 막 스물한 살에
접어든 1 월의 어느 날, 버블티 가게에서 느낀 사랑을.
“규진아.”
“응.”
“사랑해. 많이 많이.”
현규진에게 마음속에 있는 보들보들한 감정을 더 많이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한 뒤로 유원은
종종 이렇게 불쑥 사랑을 고백하곤 했다. 작년 봄부터 쭉 해 와서 이제 익숙해질 법한데도
현규진은 여전히 제가 소리 내는 사랑이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반응했다.
뭔가를 말하려고 벌린 입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물면서 숨을 고르기도 하고, 맞잡은 손을
떨기도 하며 때때로 아무 말도 없이 저를 끌어안고 한참을 가만히 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유원은 그 사랑스러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묵묵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도. 나도 사랑해.”
사랑에 있어 단 한 번도 가벼웠던 적이 없는 현규진의 고백을.
***
솔직히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지 없을지 확인은 서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원은 아직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걸음을 옮겼다. 제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코너를 돌자 저
앞으로 유원이 그토록 바라던 포토 부스가 보였다. 기분이 더 좋아진 유원이 얼른 현규진의
손을 잡아 그곳으로 이끌었다.
평일이기도 하고, 또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지 포토 부스는 졸업식이 끝나고 왔던 그때처럼
사람이 없고 조용했다. 그래도 다른 때는 찾는 사람이 많은지 벽 곳곳에 친구와 또는 연인,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붙이고 간 흔적이 가득했다. 또 그때보다 기계 수도 많아지고, 더
좋은 기계로 바뀌어 있었다.
“아, 존나 다행이다. 안 망해서.”
“여기 가는 줄 알았어?”
“코너 돌 때 알았는데 진짜 와, 존나 조마조마했어. 망했을까 봐.”
“나도 사실 쪼끔 걱정했어.”
“생각보다 잘 되나 보네. 전보다 뭐 많아진 거 보면.”
기계들을 둘러보던 현규진이 하나를 골라 들어가 유원에게 손짓했다. 유원도 얼른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졸업식 날, 같이 사진을 찍은 이후 꽤 자주 같이 사진을 찍었다. 밖에서 저녁을 먹으러 나갔을
때 포토 부스가 보이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같이 안으로 들어가 여러 컷의 사진을
찍었고, 덕분에 집에는 네 컷 사진을 모아 둔 앨범도 세 개나 생겼다.
그 안에는 그날의 계절감이 느껴지는 옷을 입고, 조금은 다른 머리 길이를 한 채 여전히
조금도 변함없이 딱 달라붙어 웃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언제 꺼내 보아도 좋은 스무 살의
기록이었다.
“우리 그때처럼 찍자. 사진 처음 찍었을 때처럼. 어떻게 찍었는지 기억나?”
“응. 기억나. 그때랑 똑같이 하려면 찍기 전에 키스도 해야 되는데.”
겉옷을 벗은 현규진이 유원의 목에서 목도리를 풀어 뒤쪽으로 놓았다. 그리고 절대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단단히 잠가 주었던 패딩 지퍼를 내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유원의
발꿈치가 살짝 들리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맞물렸다.
깊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혀가 살살 문질렸다. 그게 너무 좋아 순간 장소도 잊고 키스가
깊어졌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현규진이었다. 눈을 감은 채 발그레 달아올라 앓는 소리를
내는 유원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1 년 전쯤, 졸업하고 왔을 때도 지금과 같은 감정을 느꼈던
기억이 났다.
말랑한 혀를 쪼옥 빨아 주고 입술을 떼자 유원의 눈이 뜨였다. 저녁이고 뭐고 급한 일이 생겨
집에 돌아간다고 엄마한테 연락하고 싶었다.
“키스하는 게 그렇게 좋아? 할 때마다 멍해져. 진짜 존나 귀여운 거 너도 알지.”
“내가 그러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돼.”
“날 너무 사랑해서 그래. 세상에서 날 제일 사랑하고 나 없으면 하루도 못 살고, 하루 종일 내
생각만 하고 싶을 만큼.”
“응…. 맞아.”
“…미치겠네, 진짜.”
원래도 그랬지만, 요즘의 유원은 전에 비해 더 말랑말랑해지고 표현에 있어 솔직해졌다.
전이었다면 부끄러워서 으…. 소리를 내거나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요즘은
이렇게 바로 인정하면서 먼저 다가왔다. 덕분에 현규진은 안 그래도 유원 생각밖에 할 수
없었던 뇌 자체가 아예 정유원으로 변해 버리는 것을 매일 느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겨울과 함께 맞은 스물한 살을, 평범하지만, 결국은 특별한 날로
기록될 오늘을 사진에 남기고 싶었다. 유원의 뺨에 깊게 입 맞춘 현규진이 촬영 버튼을 눌렀다.
준비 시간 5 초 동안 현규진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유원과 몸을 반쯤 겹쳐 서서 어깨
뒤쪽으로 가져간 손을 올려 유원의 머리를 부드럽게 짚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크게 브이를
그려 이번에는 유원의 턱 아래로 가져갔다. 손끝으로 턱을 괜히 살짝 찌르며 장난치자 웃은
유원이 하지 말라는 듯 손목을 감싸 쥐었다.
찰칵, 소리와 함께 그 순간이 기록되었다.
이번에는 유원의 턱을 쥔 현규진이 머리를 짚었던 손을 내려 유원의 목과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찍히기도 전에 쪽, 쪽 여기저기 뽀뽀하는 현규진을 보며 웃은 유원이 눈가에 닿는
입술이 간지러워 눈을 찡긋 감았다.
그리고 또 찰칵,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기억이 생겼다.
자연스럽게 저를 꽉 끌어안는 현규진의 허리를 끌어안자 따뜻함이 온몸으로 번졌다. 또다시
찰칵.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한 컷뿐이었다.
그때 어떻게 했더라. 유원은 현규진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헷갈렸던 기억은 저를 내려다보는
현규진과 눈을 마주하자마자 선명해졌다.
미소와 함께 현규진의 얼굴이 내려왔다. 발뒤꿈치를 들며 올라간 유원의 두 손이 따뜻하고
다정한 그 두 뺨을 감싸 쥐었다.
“정유원. 내가 존나 사랑하는 거 알지.”
“내가 더 사랑해.”
“미안한데 내가 더.”
“아니이, 내가 더.”
“나거든.”
“난데….”
“나라고? 알았어.”
못 말린다는 듯 아프지 않게 현규진의 볼을 꼬집었다가 놓은 유원이 다시 그 위를 문질렀다.
웃음을 머금은 채로 입술이 마주 닿는 순간 다시 한번 찰칵, 소리가 울렸다.
마지막 컷은 언제까지고 변치 않을 사랑의 기록이었다.
<에필로그> 마침.
<공금 o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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