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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독립운동가 - 윤희순 조사하기
한국사 독립운동가 - 윤희순 조사하기
- 남장을 하고 정보수집에 나섬
- 한일병합 이후에 의병이 와해되자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노학당을 세우고, 의병 가사를
보급하는 등 항일투쟁을 이어감
=>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서 남녀의 구분이 없다! 모두가 합심하여 활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을미의병과 정미의병에서 의병가사를 저작, 배포하여 민중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구전성 의병가사를
전파시킴으로써 여성의 역할과 의병정신을 부각시켰다.
윤희순이 안사람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여성이 의병운동을 실천하는 대열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 강원도 춘천 가정리 일원에서 부녀자 76 명을 규합하여 군자금을 모금한 이력과 여성의병 30
여명을 모야 춘천 가정리 여의내골 주산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여 무기와 탄약을 제조 및 공급함
남장을 하고 정보 수집, 군자금 모금활동, 군사훈련 참가, 병기제작, 화약제조, 부상자 치료, 군수품
전달, 군사 훈련 등 의병운동의 현장으로 뛰어듦
남녀 구분 없는 구국운동을 실천
1912 년 이회영, 우병렬, 도원훈, 채인산, 슨홍령 등의 지지와 찬조로 건립자금을 마련하고
항일인재를 양성하는 ‘노학당’을 건립하여 본격적인 항일인재양성에 나섰다.
‘항일, ‘애국’, ‘분발’, ‘향상’ 정신을 추구한 노학당에서는 역사, 국어, 수신, 한문, 작문, 지리, 습자, 이과,
산술, 창가, 도화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는데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박은식, 신채호 선생도 함께
했다.
노학당에서는 50 여명의 항일인재가 양성되었고, 그들은 독립운동의 핵심인물로 성장했다. -> 1915
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
1915 년 말 윤희순은 무순 포가둔으로 근거지를 옮겨 다시 항일투쟁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