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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인물 탐구 보고서

인물을 선택한 이유

조사할 인물을 고르면서 여성 독립운동가에게 관심을 가졌다. 당시 식민지의 국민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이중압박을 받았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녀들에게 큰 존경을 느꼈으며,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과 목숨을 바친 수많은 여성투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독립운동가에 비해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러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조사하면서 윤희순 의사가 가장 눈에 띄었다. 여성이 함부로 바깥에 나가는 것조차도
꺼리는 시대에서 최초로 여성 의병장 자리까지 오르고, 가사노동을 하거나 의병가를 창작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열정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 그녀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었다.

주요 활동

1895 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키자 윤희순 지사는 「안사람 의병가」, 「병정의 노래」 등
의병가를 지어 사기를 북돋거나, 굶주린 의병들을 먹이고 입히는 등 주로 뒷바라지에 힘썼다. 그녀는
1907 년 정미의병 때부터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에 뛰어들었다. 윤희순은 여성 30 여 명으로 조직된
최초의 여성의병대, 안사람 의병단을 결성하면서 여성이 자발적으로 의병운동을 실천하는 대열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군자금을 모집해 탄약 제조소를 직접 운영하며 의병들에게
탄약을 공급하였고, 남장을 하고 정보수집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윤희순은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한일병합 이후에 의병이 와해되자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노학당을
세우고, 의병 가사를 보급하는 등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인물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 및 개요

항일 의병 운동 또는 항일의병은 일본 제국에 항거하는 의병 운동이며, 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하여


1895 년 을미의병으로 이어졌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항거하여 발생한 을미의병은 제천의
유인석 등의 유생 의병장들이 활약하였고, 아관파천 후 고종의 권유로 인해 해산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1905 년 을사의병이 일어났고, 전북의 최익현 등의 유생 의병장, 경북 영덕의
신돌석 등의 평민 의병장이 활약하였다. 그 후에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면서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한
이후 해산 군인과 일본군의 시가전이 발발했고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 전쟁
수준으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위와 같은 항일 의병 운동은 국권 침탈의 시기를 늦추고, 해외 무장
독립 투쟁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인물에 대한 본인의 생각

윤희순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녀가 의병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한 가사노동부터 의병단을 조직하기까지, 그녀의 활동폭이 매우 넓은 것으로 보아,
그녀는 할 수 있는 선에서, 그리고 가끔 그 선 밖에 나아가면서, 의병활동을 조금이라도 더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열정적으로 찾은 것 같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꿋꿋이 항일운동을
이어나간 모습을 통해서도 그녀의 조국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와 애국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녀가
창작한 의병가들 또한 매우 인상깊게 남았다. 그중에서도 나라를 되찾는데 남녀가 따로 없으니, 함께
단합해서 일본에 저항하자는 내용의 <안사람의병가>가 기억에 남았다. 당시에 여성의 역할로
인식된 가사 활동과 남성의 역할로 인식된 의병장의 활동을 동시에 수행한 윤희순 의사는 진정으로
나라를 되찾는데 남녀가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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