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wnload as pdf or txt
Download as pdf or txt
You are on page 1of 3

플라톤, 허스트의 자유교육 관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후설의 현상학적 개념

플라톤은 자유교육을 통해 형이상학적 존재인 이데아를 추구하며 삶을 살아가야 함을 주장하


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주장은 가지계를 추구하나 가시계를 경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에
게 있어 ‘자유’란 인간의 지성을 통해서 인식되는 이데아로 말미암아 달성될 수 있으며, 우리 눈
에 보이는 지각 현상은 허상이나 불확실한 세계라 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각 현상에 관하여
탐구한 결과라 할 수 있는 학문이 실재의 단편을 다루기에 의미가 있다고 보았지만, 지각 현상
자체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현상과 이
데아라는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측면의 분절을 야기한다. 후설이 현상학을 통해 주장한 의식의 지
향성과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데아를 지향하며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을 통해 가능하다. 여기서 지성이 발
휘될 수 있도록 하는데 의식이 전제되어야 함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생각은 무언가를 의식함
으로써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후설이 현상학에서 브렌타노의 지향성 개념을 차용해
주장한 ‘모든 의식은 어떤 대상에 관한 의식’이라는 의식의 지향성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 의식한
다는 것을 통해 의식을 하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계는 결코 분
리되어서는 안 된다. 의식 주체가 없이 대상만 있거나, 대상 없이 의식 주체만 있다면 의식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의식하는가?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후설이 말하는
바와 같이 ‘현상’이다. 이는 플라톤이 말하는 현상 세계와 처음에는 그 의미가 유사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자연적인 세계와 관계 맺으며 의식이라는 과정을 계
속해서 해나가게 된다. 이러한 설명에서 그친다면 플라톤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불확실한 현상
세계와 인간 의식 사이의 관계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후설이 제시한 현상학적 환원을 통
해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다. 현상학적 환원은 학문과 인간의 이성에 가장 근본적인 명증
성을 부여하는 것을 찾는 과정에서 도입하게 된 개념이다. 후설은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의식의
비심리학적 분석을 거쳐, 비심리학적인 의식의 분석, 초험적인 의식으로까지 나아갔다. 이는 우리
의 마음이 자연적으로 갖는 경향성을 거스르는 행위이기에 쉽지는 않은 것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도달한 ‘초험적’이라는 세계는 지대한 의미를 지닌다.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초험적 의식에 관한 설명까지 도달한다면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이러저러한 대상이 아닌, 세계
라는 전체를 하나의 ‘현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라는 현상은 다시 ‘의식’
되기 위해 그것을 의식하는 어떠한 자아와 지향적 관계를 형성하여야 하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초험적 자아(transcendental ego)’이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우리가 세계 안
에 있는 이러저러한 현상을 의식하던 차원을 넘어 그러한 세계 자체를 의식할 수 있게 되는 철
학적인 설명의 근저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초험적 자아는 세계라는 현상을 의식하면서
그것의 의미 기초를 형성하거나 형성을 돕는 가장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환원을 통해 의식하고 사유하는 존재와 초험적 의식에 의해 지향된 세계라는
현상 사이의 명증하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자연적 세계 밖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자아는 그것을 의식하며 ‘의미’를 형성하게 되고, 후설이 현상학적 기술을 통해 설명한
바와 같이 의식에 드러나는(현상이 스스로를 의식에 주는) 과정에서 현상의 본질을 직관할 수 있
게 된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는 결국 우리가 지각하는 현상 세계와 의식의 지향적 관계, 그
리고 그것을 더 높은 차원에서 설명 가능하게 하는 초험적 자아와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개념으
로 말미암아 이데아와 같은 본질적이고 불변하는 세계인 가지계의 추구가 실은 가시계와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허스트는 지식의 형식을 통한 합리적 마음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간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형이상학적인 실재에는 반대한 점을 고려할 때 플라톤과 같이 가지계
의 추구를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가시계에 가치를 두었는가?
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의 경험이 우리가 사용하는 공공의 상징체계를 통해 구조화되는 과정을
거쳐 ‘지식의 형식’이 만들어지며 그것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경험을 이해하는 복잡한 여러 가지
방식을 획득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지식의 형식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다양
한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모종의 ‘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틀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벌
어지는 다양한 현상을 이해하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며,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었던 세계에까지
나아가며 경험의 외연을 확장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보다 더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이를 가능
하게 하는 지식의 형식은 ‘교과’이며, 교과를 통해 인간이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본 것으
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지식의 형식인 교과를 배움으로써 다
양한 현상을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게 되며 마음이 발달한다는 설명만으로 교과의 가치가 철학
적으로 충분히 설명되는가?’이다. 후설의 현상학적 개념과 설명을 통해 이와 같은 부분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허스트의 주장은 가시계에 나름의 가치를 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 범위를 점차 확장해나가는 틀을 가지는 것
이 마음의 발달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소되어야 할 부분은 가시계에서 출발한 것이 어
떻게 우리가 생각을 통해 만들어내는 세계로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우리는 후설이
제시한 개념 중 현상학적 환원을 바탕으로 한 초험적 차원의 세계를 통해 의문을 해소해나갈 수
있다. 우리는 환원을 통해 세계라는 전체를 하나의 현상으로 인식하며 그것과 지향적 관계를 맺
는 초험적 자아를 상정할 수 있게 된다. 초험적 자아가 갖는 의식과 현상으로서의 세계는 가장
기초적이며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초험적 자아의 의식의 지향성으로 말미암은 것이
다. 세계가 현상으로서 드러나기(이해되기) 시작한다는 것은 세계의 존재가 어떠한 실존
(existence)이나 실제(reality)가 아닌 그것의 의미(meaning)로 이해됨을 의미한다. 이는 사유하는
존재(cogito)에 의해 지향되는 사유대상(cogitatum)이라는 관계로 설명이 가능하며, 사유자
(cogito)는 홀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자아(ego)-사유자(cogito)-사유대상
(cogitatum)’이라는 구조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틀을 제공하게 된다. 즉, 세상에 관한 의식을 통해
의식이 세상에 관한 의미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그것의 실존(existence)이 아
닌 단순한 현상이며 의미가 부여된 것(signification)으로 파악된다. 다시 허스트의 설명으로 돌아
가 논의를 발전시켜보자면 우리가 지식의 형식을 통해 합리적 마음을 발달시키고 ‘자유’로워지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공공의 상징체계를 통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을 이해하는
모종의 틀이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자신이 경험하는 현상에 관하여 이해하는 모종의
틀을 넘어서, 그들이 마주한 세계라는 현상에 관하여 어떻게 사유하며 의미를 부여하였는지에 관
한, 사유자-사유대상의 관계를 다음 세대로 하여금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라
고 설명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보아야 하는 이유는 글의 서두에서 언급
한 후설이 그의 저서에서 설명한 ‘위기’와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우리 삶에서 마주하
는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적인 산물을 만들어가며 생을 영위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
는 세계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데 그러한 이해는 우리가 그 세계에 있을 때는 가능하지 않다. 이는 마치 우리의 눈으로 우리 스
스로를 직접 바라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러한 세계의 하나하나와 관계를 맺는 우리 자
신을 하나의 전체(세계)로 보고 그것과 관계 맺으며 의식하고 사유하는 차원에서의 자아 개념을
상정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였을 때 자연 세계에서 경험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우리에 관하여 탐
구하고 해명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와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하여 설
명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경험하며 감각을 통해 느끼는 가시계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이성과 사유 능력으로 말미암아 도달할 수 있는 가지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게 하였
을 때 인간은 비로소 영혼이나 마음의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구조와 차원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지식의 형식을 왜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그 질문의 논리적 가정인 지식의 형식의 가치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선험적 논
의’(transcendental argument)의 정당화 방식이 갖는 한계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