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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편 97편1~12절

제목: 다스리시나니 기뻐할지어다

[시97:1-12]
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2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3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
4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5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랍 같이 녹았도다
6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7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8 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9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
10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
서 건지시느니라
11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12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오늘 말씀은 시편의 여러 갈래 가운데

어제와 오늘 이 시편 96편과 98편은 쌍둥이 시편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두 시


편 모두 우리 모두를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자리로 초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 모두 시인의 이 초대에 부응하여 주를 찬양하는 자로 살기로 결심하게 되기를 축복합니
다.

제가 가끔 시를 쓰고 있는데요. 아직 등단은 하지 못했고요. 등단을 해야겠다 생각도 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압축해서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싶을 때, 누군가에게 저
의 이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시를 쓰곤 합니다.

그렇게 시를 쓰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시를 쓰려면, 관찰력이 좋아야한다는 사실이


었습니다. 관찰력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관심에서 옵니다. 어떤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관찰하다보면 어느덧 그 사물과 대화를 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저도 너무 바쁘게 지내다보면 시가 잘 안 써지더라고요. 물론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


도 있지만,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서 안 써지는 겁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사물과 사람에게 관
심을 기울일 마음의 여유가 없다보면, 당연히 시가 잘 안 써지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응을 기록하게 하신 이 놀라운 사실을 그


냥 흘려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성경의 시편은 자기 삶에 대한 묵상
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지극한 관심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면밀히 관찰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 1 -
1절을 한 번 보실까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이 1절 말씀에는 인과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가 여호와시다. 라는 정적


인 표현이 아니라, 아주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표현이 가미되어있죠.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
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머리로는 동의하기 쉽지만, 마음과 행동으로는 쉽게 동의


되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통제와 지도,
다스림 아래 있을 때 자유와 행복과 기쁨과 즐거움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97편의 시인은 여호와의 다스림 때문에 기뻐하라고 하는 것이죠.

먼저 우리가 다스림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스림에 대한 오해를 풀


어야 우리가 다스림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인데요. 인류 역사를 돌아
보면 다스림은 언제나 병폐를 낳았다는 사실과 봉건사회를 지나며 빛을 보기 시작한 ‘자유’가
다스림과 대척점에 놓이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다스림’의 본래적 가치를 잃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다스림은 아주 일반적이고 본성적이며,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사람을 만드신 뒤에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때 다스림은 ‘경영’하는 일이었고, 이 경영은 모든 것의 ‘조화’를 전제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적 다스림은 ‘조화’, 다시말해 모든 피조물들 사이의 화합에 기초했습니다.
만물이 자기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상태, 그리고 서로 유기적으로 함께 화할 수
있는 상태, 그 무엇도, 누구도 서로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거나 방해하는 것이 아닌 상태가
하나님이 본래 목적하셨던 ‘다스림’인 것이죠.

지금 시인은 1절에서 바로 그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니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바로 창


조주 하나님,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 우리가 본래 우리 되게 하실 수 있는 그 분이
다스리시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즐거움이라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2절부터 시인은 9절은 그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는데요. 조금씩 살
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3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시97:2-3]
2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3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

- 2 -
이 두 구절을 보시면 ‘광야’의 두 기둥,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구름과 흑암
이 하나님을 둘렀다는 말은 구약 성경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인데요. 주로 가리워진 하나님의
존재, 숨겨져서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보좌를 묘사할 때 쓰이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불은 모든
것을 사르는 도구로 묘사되죠. 또 불은 빛을 발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사물은 자연스레
4절의 번개와 연결되는데요. 번개의 빛은 하늘에서 땅으로 향하고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의 대
명사입니다. 그 빛이 온 땅을 비추는 모습을 산이 밀납처럼 녹았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이 짧은 구절에서만 두 가지가 대구를 이루고 있는걸 볼 수 있습니다. 불과 밀납, 번개와 온


땅입니다. 불과 밀납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새벽이니까 제가 먼저 말씀드릴게요. 바로 ‘양
초’입니다. 양초의 불이 초의 그 밀납을 녹이며 빛을 지속하여 비추는 것과, 번개가 번쩍일 때
마다 어둠이 그치고 온 산과 땅에 환히 보이는 것이 대구를 이루며 하나를 지향하고 있습니
다. 그것은 바로 ‘세상이 떤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떨게 만드는 불과 번개의 기능을 6절이 이어받아서 말해주고 있는데요. 6절을 제가 읽


어보겠습니다.

[시97:6]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그 기능은 바로 ‘의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하여 의를 선포하고 계시기


에, 만물을 통해 당신이 이 땅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온천하에 알리고 계시기에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의 로마서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


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성경에 능통했고, 시편을 사랑했을지 그 마음이


느껴지더라고요.

지금 시인은 모든 만물이 주의 의를 선포하고 있기에 누구나 그의 영광을 알아챌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그렇지가 않죠. 시인도 그런 현실을 외면하지 않
고 이야기합니다.

7절과 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시97:7-8]
7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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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이 땅의 현실은 그의 의를 선포하는 만물을 통해 주를 보기보다 허무한 것들을 좇아 살기에


바쁩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다스림 밖을 추구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백성과는 전혀 어울
리지 않는 일입니다.

저는 대체 이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상상해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주의 말씀의 다스림 아래


사는 어떤 신실한 인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억압과 고난 속에서 눈물 흘리는 신자. 말씀대
로 살고 싶지만,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는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닌 이상,
‘심판’을 듣고 기뻐할 수 없겠더라고요.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의 심판을 듣고 즐거워하고 마지막 날


에 주를 찬양하고 높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그 심판과 이 세상의 끝을 기
다리는 사람입니다. 바로 주의 다스림 안에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 주의 다스림과 정 반
대의 가치를 종용하는 세상에 집어 삼켜질까봐 두려워 떠는 사람만이 주의 심판을 기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10절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이
말은 적극적으로 악을 거부하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라”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악을
미워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여호와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일이 너무 힘들지 않습니까. 물론 드러나는


악, 분명한 악은 우리가 피하고 거부하기 쉽지만, 내면의 갈등, 나도 모르게 본성적으로 튀어
나오는 습관적인 말과 행동은 늘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게 사실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를 사랑한다던 베드로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배
신할 정도인데, 우리라고 다를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 역시 날마다 죽는다고 이야기하고,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수 있겠느냐며


탄식하지 않았습니까. 시인은 이런 우리의 본성을 너무나 잘 공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래서 이렇게 시를 마무리합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시97:11-12]
11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12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의와 정직이라는 지혜의 두 기둥을 뿌리시는 하나님. 천지를 울리고 산천을 흔드시는 두려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 먼저 기쁨을 뿌리시는 그 하나님
이 느껴지십니까. 주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이신 사랑하는 은평의 성도여러분. 주 안에서 평
안하십시오. 그리고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의인을 위하여,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외면하지 않
으시고 기쁨의 빛을 흩날리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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