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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만 사랑해 줘

#214. 초대장을 받아서 목록

#214. 초대장을 받아서


2024.06.14.

“주인님, 이것 좀 보세요.”

로호스 영주성, 과거 부친의 거래 기록을 뒤지고 있던 아


니카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다헬이 붉은 수첩 한 권을
들고 그녀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전 영주님이 특별히 관리하던 이들과의 거래 내역을 적


어 둔 장부인데, 명단이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다헬이 펼친 장부를 살펴보고 있던 아니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정말이었다. 장부에 적힌 이름은 전부 그녀에게 낯익었


다. 모두 부친의 절친한 친구들이자, 전부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들이었다.

그들 중 절반은 왕이 죽였고, 다른 절반은…….

“……독살당한 사람들이네.”

“네.”

“하지만 이걸로는 단서가 부족해.”

내역을 보아서는 부친이 친구들에게 돈을 받은 것이 분명


했지만, 세부 항목 란이 비어 있었다. 이래서야 부친이 친
구들과 돈거래를 하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목
록일 뿐이었다.

그러나 다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충분해요. 이분들은 모두 전 영주님에게 한 가지


를 사 갔거든요.”

그녀에게 장부를 건네준 다헬이 책장을 향해 다가갔다.


아니카는 그 애가 책들을 빼내 숨겨져 있던 비밀 공간을
드러내는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있는
줄도 몰랐던 공간이었다.

그 안에 있던 무언가를 꺼낸 다헬이 뒤를 돌았다. 그제야


아니카는 부친이 공간까지 따로 마련해 숨겨 두고 있었던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은으로 만든 차통이었다.

***

이실리는 이웃 나라 왕성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어제저녁 에데그룬에 도착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2


황녀가 그를 아글란테로 보내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황후궁에 나타난 2황녀는 그를 아글란테


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이야기는 이미 그의 스승인 타넬
과 끝내 둔 후였다.

이실리는 그 일에 불만이 없었다. 스승이 바라는 일 아닌


가. 그에게 입은 은혜를 생각하면 이실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2황녀 탈리아 룬탈리스는 그에게 공왕이 말하는 일에 협


조하라고 말하며, 한 가지를 더 주문했다.

“사라진 2황자에게 대한 단서를 찾아와.”

그의 스승인 타넬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스승님이 모시던 분께서 사라지셨다. 정보가 필요해.”

그리고 타넬은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갔던 곳이 레덴 왕궁이지. 지금 아글란테의


왕비는 과거 레덴의 왕녀였다. 무언가 아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필요하다면 왕비의 비위를 맞추어서라도 단서를


알아 오라는 말이 따라붙었을 때, 이실리는 기꺼이 그러
겠노라 했었다.

응접실의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이실리가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글란테의 왕과
왕비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곧바로 왕족과 독대하게 될 줄 몰랐던 이실리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그의 앞에 왕비가 먼저
앉고, 그다음 왕이 앉았다. 일반적인 순서는 아니었기에
이실리는 그것을 눈여겨보았다.

잠시 그가 허리 숙인 꼴을 바라보고 있던 왕비가 손짓했


다.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허락이었다.

그를 앞에 앉혀 두고, 왕비가 먼저 입을 뗐다.

“황후궁 소속의 의원들은 약초에 능하다 하던데.”

“미천한 실력입니다만, 그렇게 보는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미천하다니, 스스로를 깎는 말은 주인을 욕되게 하는 법


인데.”

말마디 사이사이에 가시가 돋친 듯 묘한 화법이었다.

제가 왕비에게 밉보일 일은 없었으므로 이실리는 조금 당


황했다. 왕가의 태생답게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왕비가 물었다.

“독에 대해 잘 아는가?”

***

연회의 첫날이 되었다.

라헬리카에게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싫은 날 중 하나였다.


라헬리카는 연회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맞부딪히
는 게 피곤한 것이 주된 이유였지만, 오늘은 하나가 더 있
었다.

탈리아 룬탈리스. 그 버릇없는 동생은 저를 보자마자 고


개를 돌려 버렸다.

“저리로 가자.”

그리고 탈리아는 저를 따라 모인 귀족들을 우르르 끌고


그녀의 반대편으로 가 버렸다. 라헬리카는 그 어처구니없
는 행태에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대놓고 따지진 못했다.
그랬다간 소란이 벌어질 테고, 소란이 벌어지면 부황이
탈리아에게 쓴소리를 할 터였으므로.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탈


리아는 그녀를 피한 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제 친구들과
함께 그대로 연회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술을 많이 마셔 바람을 쐬고 싶다 말하긴 했지만 그건 그


냥 둘러대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내내 그쪽을 보고 있었
기에, 라헬리카는 그 애가 가벼운 과실주 이상의 것을 마
시지 않았음을 알았다.

상인하고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애가 그런 것으로 취


할 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 애가 왜 회장 바깥으로 나갔는지는 뻔해서,


라헬리카는 지나가는 시종을 붙잡아 술을 몇 잔 마셨다.

본래 자주 하지 않던 음주라 곧 얼굴이 홧홧해졌다. 저야


말로 ‘술을 많이 마셔 바람을 쐬어야 하는’ 수준이라는 것
을 깨닫고, 라헬리카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궁정 예
법에 따라 그녀가 말을 걸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
람들이 몇 얼쩡거렸지만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비틀거리는 그녀의 곁으로 세르


벤이 따라붙었다.

“황제 폐하께서 자리를 오래 비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라헬리카는 아버지의 충실한 개나 다름없는 기사에게 건


성으로 대꾸했다.

“알았다.”

“안전한 곳에 계시라고도 하셨습니다.”

이리스가 안 좋은 꿈을 꾼 이후로, 레버넨은 딸의 신변에


극도로 세심해졌다. 아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라헬리카가 손을 내저었다.

“알았대도.”

“바깥은 어둡습니다.”

기사의 말은 그저 명분에 불과했다.

회장 바깥은 어둡지 않았다. 연회를 준비하며 온 화원에


불을 밝히라 명령했던 것이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더하여 그녀가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면 탈리아 역시 나가


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사가 저딴 말을 하는 이유는 거짓을 말해서라


도 저를 말리려는 게 분명해서, 라헬리카는 입꼬리를 비
틀었다.

“네 동료들이 일을 제대로 못 할까 걱정인가 보구나.”

황궁 안에서 그녀가 위험에 처한다면 기사들부터 문초당


할 테니 그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세르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단정한


기사의 얼굴에 심사가 뒤틀린 라헬리카가 바닥에 들고 있
던 부채를 내던졌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몇몇 이의 시
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무슨 상관이람. 곧 있으면 부친까지 이쪽을 돌아볼 것을


알면서도 라헬리카는 제 행동을 시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탈리아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런데 다른 이에게 불똥이
튀든 말든.

그녀가 중얼거렸다.

“짜증 나는 것들.”

“취하셨습니다.”

“역겨워.”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 말은 적당히 하고 체면을 챙기란 뜻이리라.

기사가 그렇게까지 불경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라


헬리카는 멋대로 그렇게 꼬아 생각했다. 둘밖에 없는 동
생 중 하나와도 내내 꼬인 채로 대화하는데, 기사 하나 멋
대로 매도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녀가 조소와 함께 물었다.

“그중에는 네 눈도 있겠지?”

이 젊고 번듯한 기사는 레버넨의 측근 기사 중 하나로, 제


가 듣고 본 것을 주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도
했다.

세르벤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라헬리카는 제가


부채를 바닥에 던져 버린 것을 후회했다. 바닥이 아니라
이 기사의 얼굴에 던졌어야 했다. 그랬다면 속이라도 후
련했을 텐데.

그녀가 그의 가슴팍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고 속삭였다.

“넌 고결한 척하지만, 사실은 아버지께서 내게 던져 주신


장난감이나 다름없단다.”

첫째 딸의 혼사를 막은 대신, 레버넨은 그 딸이 몇 번 침


실로 끌어들였다 내쳐도 뒤탈 없을 만한 기사를 여럿 두
고 있었다. 세르벤은 그중 하나였다.

아마 본인도 그 사실을 알리라. 매번 주기적으로 몸이 깨


끗한지 점검받을 테니 당연했다. 라헬리카가 빈정거렸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니?”

“정해진 쓰임새가 있다면 그에 순응하는 것이 제 몫입니


다.”

“재미없는 것.”

찔러도 눈물 한 방울, 분노 한 조각 내비치지 않으니 괴롭


히는 맛이 없었다.

차라리 탈리아가 저랬더라면 그들 관계가 나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기사처럼 고분고분하고 말을 잘 들었더라면 어쨌든 그


녀 혼자 화내는 꼴일 테니 싸울 일은 없었을 것도 같았다.

현실로 나타날 리 없는 상상을 잠시 한 라헬리카가 고개


를 저었다.

“되었다. 너처럼 목석같은 것을 놀려서 무엇하겠니? 나가


지 않고 여기 있을 테니 아버지께 돌아나 가 보렴.”

그리고 그녀는 곁에 있는 시종에게 손을 까닥였다. 보란


듯이 시종의 부축을 받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기사가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라헬
리카가 시종을 밀어냈다.

“너도 저리로 가라.”

그녀의 등 뒤에 있던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때였다. 놀란
라헬리카가 미간을 찌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황
족만 쓸 수 있는 문으로, 오리엔조차 저렇게 예법을 다 무
시하고 거칠게 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열린 문을 넘어 들어오는 사람을 보았을 때, 그녀


는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좌중 역시 얼음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런, 다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그리고 네테펠 룬탈리스는 제게 꽂힌 수십 쌍의 눈동자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초대장을 받아서 참석한 것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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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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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lsw****(wlsw****)
어유..징글징글한것..살아있을거 같았지만 진짜 너무 멀쩡하
네 얘를 어찌 죽여야 신이 못살릴까..머리를 몸통에서 아주
분리해야 하나?
2024-06-14 10:28 신고 4 0

설야몽(jonh****)
최종 빌런의 재등장이네 이번엔 제대로 흑화 했을테니 꽤 무
섭겠네
가식과 기만으로 뭉쳐져 있을 땐 역겹기만 했는데 ㅉ
2024-06-14 01:58 신고 1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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