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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자라 육아가 위험해 3 권

목차

7. 드디어 평범한 가족

외전 1. 담이의 소원

외전 2. 재이의 장래 희망

외전 3. 우성 알파가 셋이라 위험해

7. 드디어 평범한 가족

하루가 일본에 다녀온 후로 7 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카쿠치 가문과 연을 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다울은 한
달 동안 눈에 불을 켜고 다니더니,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자 관심을 꺼 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기를 돌보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배가 고프다고 울면 분유를 타


먹여야 했고, 시도 때도 없이 기저귀를 갈아 주어야 하고, 낮부터 밤까지 아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최근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한 담이는 다울의 뒤를 열심히도 따라다녔다. 작은 팔과 다리로 기어 다니는 게 귀엽긴


했지만, 화장실까지 졸졸 쫓아 들어오려고 해서 곤란했던 적이 꽤 있었다.

“담아, 다울이 깨우면 안 돼.”

“으브부, 으우!”

“이리 와, 분유 먹으러 가자.”

어젯밤까지 담이에게 시달리던 다울은 곤히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태이 또한 새벽까지 깨어 있었으나, 잠이 없는


편이라 일찍이 일어나서 담이를 챙겼다.

한 손으로 아기를 꺼내 안은 그가 실내화를 직직 끌며 방을 나섰다. 다울이 두 손을 사용해 안정적으로 안아


주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인형 뽑기 하듯 안아 드는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담이가 이런 거친 행동에도 울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태이의 옆구리에 짐짝처럼 들려 가도 그저


해맑게 웃기만 하는 게 유별났다.
“거기 앉아서 기다려.”

“헤, 으부, 우!”

부엌으로 들어온 태이가 아기용 의자에 담이를 앉혀 놓았다. 평범한 의자들 사이에 아기용 의자가 섞여 있는
풍경은 언제 봐도 낯설었다. 어디 이것뿐일까. 분유를 타는 것도, 아기를 재우는 것도, 2 년 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익숙하게 분유통을 찾은 그가 적당량을 젖병 안에 덜어 내고 물 온도를 맞췄다.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로 분유를


타고 있는 모양새가 조금 웃겼다. 다울이 있었다면 사진까지 찍어 가며 웃었을지도 모른다.

“우, 으우, 아!”

“기다려.”

얌전히 앉아서 아빠를 구경하던 담이가 알 수 없는 옹알이를 외쳤다. 뜻은 잘 모르겠지만, 뉘앙스로 보아서는
배가 고프니 어서 분유를 달라는 말 같았다.

보채는 소리에 젖병을 흔들던 태이가 기다리라는 말을 반복했다. 목소리 톤이나 어투가 꼭 강아지를 교육하는
주인 같았다. 이것도 고치라고 몇 번을 경고했지만, 고쳐지지 않고 있었다.

“헤에, 우, 으우.”

“온도가 괜찮은지 모르겠는데, 먹어 볼래?”

“우아, 우!”

마침내 분유 타기를 끝낸 그가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담이를 품에 안고 젖병을 물렸다.

우와, 밥이다! 하는 표정으로 젖병을 문 담이가 분유를 두어 번 쪽쪽 빨아 마시더니 내용물을 퉤, 뱉어 냈다.


아무래도 온도가 안 맞았던 모양이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분유를 먹인 부모도 많이 당황할 텐데, 태이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무덤덤하게
더러워진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아 내고, 말랑한 볼을 장난스레 콕콕 찔렀다.

“하는 행동이 이다울이랑 똑같네. 다시 타 줄게.”

빙글 올라간 입꼬리가 그의 기분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먹기 싫다고 퉤, 뱉어 내 버리는 모습이 다울의


행동과 똑같아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따뜻한 물을 더 채워 넣은 그가 담이에게 다시 젖병을 물렸다. 이번에는 다행히 온도가 잘 맞았던 건지, 뱉어


내지 않고 잘 삼켰다.

거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그가 핸드폰을 꺼내 쌓인 메시지를 확인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젖병을 꼭 감싸


쥔 담이는 혼자서도 분유를 잘 먹었다. 간혹 손힘이 부족해 삐끗할 때마다 젖병을 고쳐 물려 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깜박이며 분유 먹기에 집중했다.

“태이, 좋은 아침. 분유 먹이고 있네?”

“이거 다 먹이면 네가 좀 봐 줘, 하루.”


“왜? 오늘 어디 가?”

“일이 생겨서 나가 봐야 해.”

타이밍 좋게 씻고 내려온 하루가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태이가 익숙하게 담이를 부탁했다.
오늘은 느긋하게 쉬면서 애나 보려고 했는데, 쌓인 메시지를 보니 일을 안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꺄아, 우!”

분유를 다 마신 담이가 젖병을 던져두고 몸을 움직였다. 호기심 가득한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태이의


핸드폰이었다. 반짝거리는 화면 안으로 메신저 앱이 띄워져 있었고, 대화방에 누군가의 사진이 오가는 중이었다.

태이가 하루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담이가 핸드폰 화면을 무작정 건드렸다. 좋은 놀잇감을 발견했다는
듯 핸드폰을 툭툭, 치자 키보드가 눌려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전송됐다.

[@#;ㅏ넝ㄹㅈ;ᅟᅢᆫ알 23 ㄴ티]

[2 ᅟᅥᆽ맫 2$ㅁㄹ 2034 ㅇ넝??ㅇㅁㅇ눞 1!SADS]

하필이면 들어가 있던 대화방이 간부들과의 정보 공유방이었다.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대화방을 확인한 간부들이
이건 무슨 암호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물음표를 남발했다.

[무슨 뜻인지 해석하지 못하겠습니다, 태이.]

[이게 무슨 뜻인지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ㅠㅠ]

“꺄하, 아부브!”

답장이 하나둘씩 도착하자 화면이 여러 번 반짝거렸다. 동시에 대화창이 올라가며 말풍선 여러 개가 만들어졌다.
열심히 키보드를 눌러 보던 담이가 말풍선들을 꾹꾹 터치했다.

이전에 공원에 나가서 다울이 불어 주는 비눗방울을 손가락 끝으로 터뜨려 본 적이 있는데, 그걸 떠올리고 똑같이
따라 하는 거였다.

그렇게 터치를 하던 중, 화면을 잘못 눌러 누군가의 사진이 띄워졌다. 험악한 인상의 남자였는데, 입가나 눈에
멍과 상처가 가득한 꼴이 징그러웠다. 담이가 조금이라도 더 컸다면 이 사진을 보고 기겁하듯 놀랐을 텐데,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라 다행이었다.

“아부! 아, 으우.”

“이건 또 언제 가져갔어, 아빠 일 건드리는 거 아니야.”

“아부브?”

“어, 안 돼.”

태이가 핸드폰을 뺏어 들자, 실망한 표정을 짓던 담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가만히 있으면 태이 얼굴이 더 잘
보이는데, 이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다울을 쏙 빼닮은 티가 났다. 동그란 눈 안에 호기심이 가득한 게 특히
그랬다.

옆에서 빼앗은 핸드폰 화면을 힐끔거리던 하루가 헉,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저런


징그러운 사진을 봤다니. 멀뚱하게 앉아 있는 담이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담이, 이런 사진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거예요? 태이 아들이 확실해.”

“쓸데없는 소리 한다. 나 씻고 올 테니까, 애 좀 보고 있어.”

“응, 알겠어. 너무 무리하지 마, 태이. 다우리가 알면 속상해할지도 몰라…….”

걱정 어린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하루가 담이를 안아 들었다. 시선은 여전히 태이에게 꽂혀 있었다.

최근 하루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떠안고 생활하는 중이었다. 아직 다울이 모르는 사실을 혼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가 본가에서 맞고 온 날, 다울은 카쿠치 가문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이걸로도 모자라 담이를
절대 후계자로 넘겨주지 않겠다는 말까지 했다.

당시 침묵을 유지하던 태이는 며칠 후, 본가에 따로 연락을 넣었다. 담이를 데려가지 않는 대신, 본인이
후계자로 들어가겠다는 연락이었다.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하루는 생각지도 못한 일에 충격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태이와 함께 커 온 하루는 그가 카쿠치 가문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고 싶어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온갖 학대에, 비도덕적인 일에, 같잖은 충성심까지 원하니 진절머리가 날 만도 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다시 후계자로 들어가겠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오직 담이와, 다울을 위해 택한 길이었다.

물론 다울에게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하는 중이었다. 다울의 성격상 이 일을 알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고,


이렇게 되면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부, 아!”

“삼촌이랑 놀고 있어, 담아.”

“으우!”

하루의 품에 쏘옥 안겨 있던 담이가 태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씻으러 들어가려던 그가 옹알이 소리를 듣고


되돌아와 웃었다. 통통한 볼이 눌려 붕어 입술이 되도록 얼굴을 만지작거리자, 애정을 느낀 담이가 헤실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애를 후계자로 넘겨줄 수는 없지.

태이는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본가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어 왔기에 때가 잔뜩 묻어
있었지만, 담이는 한없이 깨끗한 존재였다. 이런 애를 후계자로 넘길 바에야, 차라리 원래 물들었던 사람이
끝까지 손을 더럽히는 게 나았다.

“하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모은 한숨을 입 밖으로 내뱉은 그가 욕실 문을 열었다. 찬물이라도 끼얹어야 답답한


마음이 사그라들 것 같았다.
* * *

안방 침대 위로 돌돌 말린 이불이 꿈틀거렸다. 베개에 볼이 눌린 채, 코까지 도롱도롱 골던 다울이 꿈속을


허우적거리는 중이었다.

오늘 꾼 꿈은 참 희한했다. 호랑이도, 복숭아도 아닌 모르는 성인 남성이 꿈속을 활개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남자의 얼굴이 태이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다울은 꿈속에 등장한 남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뒤태가 말도 못 할 정도로 완벽했다.
듬직한 어깨나 쭉 뻗은 다리, 그리고 튼실해 보이는 몸까지 태이와 비슷했다.

저 남자, 대체 어딜 가는 거지.

근처를 환하게 비추던 꿈속 배경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망설임 없이 목적지를 향해 걷다가, 두꺼운
문을 발로 걷어차 열었다. 거친 행동에 당황한 다울이 몸을 숨기고 숨을 참았다.

“왜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요. 알아서 잘 해결하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일이 복잡하게 되어 버려서…….”

“일이 복잡한 걸 나더러 어쩌라고요. 앞뒤 상관없이 죽이면 깔끔하지 않겠어요?”

저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뭔가 위험한데, 저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불안한 눈으로 남자를 훔쳐보던 다울이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 하나를 두고 죽이니, 마니, 하던 그가 칼을 꺼내


들고 있었다.

아니야, 이게 무슨 악몽이야. 제발 꿈속에서 나가게 해 줘! 나 저런 남자 모른다고!

꿈에서 나가기 위해 애를 써 봤지만, 말짱 도루묵이었다. 꼼짝없이 저 남자가 저지르는 만행을 봐야만 하는


것인가. 반쯤 포기하고 눈을 가리고 있을 때 즈음, 정신이 슬슬 희미해졌다.

아, 이제 깨겠구나. 다행이다. 잔인한 장면을 보지 않아도 돼서…….

장면이 흐릿해지며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칼을 든 남자가 손을 휘두름과 동시에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담이 형님!”

어라, 씨발. 들리면 안 될 이름이 들린 것 같은데. 잠시만, 깨지 말아 봐. 안 돼!

“허, 허억, 분명 담이라고 했어, 미친…….”


잠에서 깨어난 다울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원래 꿈을 많이 꾸는 편이라서 웬만한 악몽에는 면역이 있었지만,
이번 건 차원이 다르게 무서웠다.

마지막에 들렸던 이름과 상황을 조합해 봤을 때, 꿈속에서 봤던 남자는 담이가 틀림없었다. 태이를 쏙 빼닮은
얼굴과 피지컬이 확신을 주었다.

“아니, 이딴 꿈은 왜 꾸는 거야. 우리 담이 아직 한 살밖에 안 됐는데! 나중에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리치던 다울이 패닉에 빠졌다. 악몽을 꿔서 그런지 기분이 영 찝찝한 게, 감이 좋지
않았다.

부스스한 상태 그대로 문을 열고 나온 다울이 담이를 찾았다. 설마, 내가 모르는 담이가 서 있으면 어떡하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거실로 나온 그가 담이를 발견하고 안도했다.

“음마, 아!”

“허어엉, 담이야. 이런 순수한 담이가 꿈속에서 그렇게, 하…….”

“아우, 아?”

“으응. 악몽 꿨어. 담이는 순수하게 커야 해, 알겠지?”

“으우!”

자신 있게 대답하는 옹알이가 기특했다. 담이를 껴안고 보드라운 살에 얼굴을 비비적대던 다울이 행동을 멈췄다.
부엌에서 나오던 하루가 이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뭘 봐, 솜사탕. 정태이는?”

“태이는 씻으러 들어갔어요. 헤헤.”

“뭐야, 요즘 일이 많아졌나. 왜 또 나가지.”

“어, 으음, 그러게요. 회사 일이 바쁜가 봐요!”

예리한 혼잣말에 지레 찔린 하루가 애써 둘러댔다. 눈치는 없어도 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다울이 신기했다.

이대로 가다가 다 들켜 버리는 거 아니야? 태이가 어떻게 숨겼는데……. 조마조마한 하루의 심정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자, 다울이 눈을 빛냈다.

“뭐야, 너 숨기는 거 있지. 표정이 왜 그래?”

“아니요. 아무것도 없어요. 다우리, 뭐 먹고 싶어요?”

“몰라, 아무거나. 그나저나 진짜 수상하다 너.”

“으음, 잘 모르겠는데요. 하나도 안 수상해요.”

거짓말에 취약한 하루가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울은 의심을 거둬 내지 않았다. 하루가 저렇게 행동할 때마다
뭔가 일이 벌어져서 방심할 수 없었다.
살살 떠볼까. 식탁 앞에 앉은 다울이 식사 준비 중인 하루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갑자기 태이의 일이
많아진 것도, 하루가 횡설수설하는 것도 이상했다.

“짜잔, 프렌치토스트 완성이에요!”

“…….”

“와, 완성! 맛있게 먹어요, 다우리.”

“…….”

“아, 청, 청소기 돌려야겠다. 청소, 청소…….”

확실히 숨기는 게 있구만. 샛노랗게 구워진 프렌치토스트를 입에 욱여넣은 다울이 내용물을 질겅질겅 씹었다.
건들거리는 태도에 위기감을 느낀 하루가 청소 핑계를 대며 부엌을 빠져나가자, 순진무구하던 입매가 매섭게
비틀려 올라갔다.

내가 야구 방망이를 어디에 숨겨 놨더라? 베란다에서 굴러다니는 걸 본 것 같은데.

밥을 먹다 말고 일어선 다울이 곧장 베란다로 향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며칠 사이에 야구 방망이를 쓸


일이 생길 거 같아서 미리 확인해 두기 위함이었다.

베란다 한쪽에 마련된 창고를 뒤적이다 보니 예전에 숨겨 놓은 야구 방망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루미늄 소재로
제작된 방망이를 손에 쥐고 두어 번 휘둘러 보던 다울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이 정도면 문제없겠다.”

“음마, 아?”

“아 깜짝이야! 담이야, 언제 여기까지 따라왔어. 깜짝 놀랐잖아.”

몰래 다울의 뒤를 따라온 담이가 안아 달라며 손을 뻗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심호흡하던 다울이 담이를
껴안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밥을 다 먹고 나니, 샤워를 마친 태이가 욕실에서 나왔다. 다울은 의심 가득한 눈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

“깼네, 잠이 안 와서 일찍 일어났어.”

“어디 가려고?”

“일 때문에 나가야 해. 오늘은 담이랑 둘이 있어야겠다, 다울아.”

간단히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태이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진동을 울려 댔다. 무슨 연락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회사에서 오는 메시지이거나, ‘그쪽’ 사람들이 보내는 메시지일 것이다.

전자라면 다행이었지만, 후자는 조금 걸렸다. 다울은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왜 태이가 본가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따라야 하는 걸까. 이제 담이까지 태어나서 완전한 가정을 가지게 된 남자인데, 배려 없이 일을 보내는
게 이상하기도 했고, 여러모로 짜증이 났다.
“언제 오는데?”

“글쎄, 빨리 끝나면 빨리 오겠지.”

“무슨 대답이 그래. 확 회사를 다 뒤집어엎을까 보다…….”

정확하지 않은 대답에 입술을 삐죽 내민 다울이 불만을 토로했다. 회사를 뒤집어엎겠다는 말에 꽤 진심이 담겨


있어서, 태이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최대한 일찍 끝내고 올 거니까, 표정 풀어.”

“삐치고 그런 거 아니거든?”

“안 삐쳤구나, 그래. 그런 거라고 쳐.”

“진짜 안 삐쳤다고!”

안 삐치긴 무슨, 무진장 삐쳤다. 다울이 퉁명스러운 표정을 유지하자, 산뜻하게 입을 맞춰 준 태이가 볼을
쓰다듬었다. 방금 막 씻고 나와서 그런지 시원한 샴푸 향이 가까이서 느껴졌다.

입맞춤 한 번에 녹아내린 다울이 고개를 휙 돌렸다. 방금까지 화를 내다가 웃으려니 민망해서였다.

“옷 갈아입고 올게.”

“뭐, 그러시든가.”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담이가 태이를 따라 기어갔다. 열심히 쫓아가 보겠다고 무릎을 움직이는 모습이
앙증맞았다. 핸드폰을 꺼내 그 모습을 촬영하던 다울이 계단을 오르려는 담이를 황급히 저지시켰다.

“담이야, 아빠 따라가다가 계단에서 쿵 하면 아파. 담이는 아직 계단 못 올라가잖아.”

“아부, 아부!”

“아빠 이따가 옷 갈아입고 내려온대. 담이도 옷 갈아입을래?”

“아우, 부!”

방으로 들어와 아기 옷을 꺼낸 다울이 담이 옷을 갈아입혀 줬다. 깜찍한 동물 패턴이 그려진 내복을 입혀 놓으니
귀여움이 한층 더해진 느낌이었다.

인형 같은 담이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던 중, 안방 문이 열렸다. 옷을 갈아입고 온 태이가 남다른


기럭지를 자랑하며 서 있었다.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에, 검은색 긴 바지. 셔츠를 입지 않은 걸 봐서는 회사에 가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수상하다 했더니, 역시. 심기가 불편해진 다울의 시선이 태이의 몸을 쭉 훑고 지나갔다.

“왜 그렇게 쳐다봐, 다울아. 아침부터 하고 싶어? 애도 있는데.”

“뭐, 무슨,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담이야, 우리 담이 귀 막아. 저거 헛소리야, 헛소리.”


“어차피 지금은 못 알아들어.”

“정태이, 진짜 입 꿰매 버린다? 아흑, 애가 태어나도 저런 말을 막, 미친놈인가 봐…….”

이제 7 개월 조금 지난 애가 뭘 알까. 아무리 뜻을 모른다고 해도 그렇지, 앞에서 대놓고 음담패설을 하는 태이가


참 대단했다.

진심으로 기겁하며 담이 귀를 막아주던 다울이 눈을 앙칼지게 치켜떴다. 매서운 눈초리에 피식거리며 웃어 대던


태이가 보란 듯이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능글맞게 구는 게 밉지 않아서 짜증이 났다.

쪽, 하는 소리에 몸을 움찔거린 다울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입맞춤 소리가 신기했는지 입을 오물거리던
담이가 꺄르륵, 웃었다.

“꺄하, 으웅, 우!”

“왜, 왜 웃어, 담이야. 창피하게 왜 웃어.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아우? 아부, 아.”

괜히 창피해진 다울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담이가 클 때까지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완전 창피한데.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워 가는 동안, 태이가 출근 준비를 마쳤다.

“다녀올게.”

“오늘은 어디로 가?”

“그건 왜 물어.”

“어?”

“그건 왜 묻냐고, 다울아.”

“아니, 그,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뭐, 불만 있어?”

몇 개월 사이 성격이 죽었다고 생각한 게 전부 다 착각이었나 보다. 그냥 어디로 가냐고 물어본 것뿐인데,


무언가 알아챈 태이가 눈을 번뜩이며 되물었다. 따라오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눈빛에 쪼그라든 다울이 말을 대충 얼버무렸다. 태이가 저렇게까지 예민하게 굴어 대니까, 오히려
따라가고픈 욕구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무슨 일이길래 신경질을 내는 걸까. 수상하다, 수상해.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니까 잘 들어.”

“어?”

“따라올 생각하지 마, 눈에서 다 보여.”

“…….”

“집에 얌전히 있어, 다울아. 나 지금 부탁하는 거 아니야.”


그래, 사람 성격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니까. 저 싸가지 좀 봐, 씨발. 부탁하는 게 아니라고? 명령하는 거니까
내 말대로 얌전히 집에 박혀 있어라, 이거잖아. 하, 참나.

재수 없는 말투에 다울의 심기가 제대로 비틀렸다. 조금 더 기회를 보다가 뒤를 조사해 볼 생각이었는데, 태이가
이렇게 나오니 가만히 있기 싫어졌다.

“알겠어, 알겠다고.”

“착하지, 우리 다울이. 집 잘 보고 있어.”

다울은 우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을 지워 내기 위해 연기를 한 거였다. 집 잘 보고 있기는, 개뿔.


조금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반려동물 대하듯 머리를 쓰다듬어 준 태이가 드디어 현관문을 열었다. 강아지 취급에 익숙해진 다울이 얌전히
쓰다듬을 받으며 그를 배웅했다.

철컥.

드디어 현관문이 닫혔다. 돌발 상황을 대비해 현관문에 귀를 대어 보던 다울이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뒤에야 행동을 개시했다.

“아우우, 으부!”

“담이야, 빨리 빨리. 아기 띠가 어디 있더라, 완전 급해!”

“꺄아아, 아부, 아아!”

“자, 업어 줄게.”

아기 띠를 찾아낸 다울이 담이를 업고 똑딱이를 채웠다. 중간중간 창문 밖을 바라보며 태이의 동선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대문 앞에 선 태이가 바로 출발하지 않고 서 있었다. 누군가에게 전화가 와서 대화를 나누는 중인 듯했다.

담이를 단단히 업고, 베란다에서 야구 방망이를 꺼낸 다울이 눈치를 보며 현관문을 열었다. 찔끔 열린 문틈


사이로 밖의 상황을 살펴보니, 태이가 이제 막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지금이다!

차 문이 닫히자마자 뛰쳐나간 다울이 다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태이가 탄 차가 벌써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택시 한 대가 앞에 멈춰 서자, 망설임 없이 올라탄 다울이 당당하게 외쳤다.

“지금 골목길 빠져나가고 있는 검은색 차, 끝까지 따라가 주세요! 아저씨, 빨리!”

“에헤이, 참 성격 급하시네. 알겠어요.”

느긋하게 핸들을 돌리던 기사가 적정 속도를 유지하며 액셀을 밟았다. 그와 달리 태이가 탄 차는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담이가 있어서 더 빨리 달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울의 속이 답답하다 못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오늘은 포기해야 하나…….

차를 돌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택시 기사가 솔깃한 제안을 건넸다.

“거 급해 보이는데, 따블 주면 안전하고 빠르게 모실 수 있어요. 어쩌실래.”

“하, 그걸 왜 지금 말해요! 따따블 줄 테니까, 최대한 안전하게! 빠르게! 가 주세요.”

“허허, 성격 한번 호탕하네. 안전은 걱정 마요. 내가 이래 봬도 무사고 경력이 30 년이야.”

따따블이라는 말에 크게 웃던 택시 기사가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거북이처럼 기어가던 차가 빨라지자,


조급하던 속마음이 적게나마 가라앉았다.

그나저나 정태이는 어디까지 가는 거야. 여기로 가면 수도권 밖인데,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건지.

창문 너머로 표지판을 확인하던 다울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가면 수도권 밖을 벗어나 고속 도로를 타게
된다. 아무리 멀어도 회사 근처겠지, 싶었는데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두려움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도착한 장소는 생전 처음 보는 곳이었다. 어디 버려진 폐공장 같기도 한데, 분위기가 으스스한 게 발을 들이기
싫었다.

“어휴, 대충 이 근처겠는데요. 여기 앞에서 세워 드릴게. 더는 못 들어가!”

“아, 아저씨이.”

“에이, 부정 타! 얼른 돈이나 주고 가요.”

더 못 들어가겠다는 택시 기사에게 20 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내렸다. 다울은 잠든 담이를 단단히 업고 몰래


숨어든 쥐처럼 걸음을 옮겼다.

어디지, 어디로 간 거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저 멀리 건장한 남성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딱 봐도 심상치 않게 생긴 게 정태이와


관련된 사람인 듯했다.

저기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을까. 혹시 가다가 잘못 걸려서 정태이도 못 보고 끽,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담이도


있는데 큰일 아니야?

불안감에 손이 발발 떨렸다. 이렇게까지 위험한 곳인 줄 알았으면, 담이는 하루에게 맡기고 왔을 텐데.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싸한 바람이 불며 근처 잡초들이 흔들렸다. 풀만 무성하게 자란 공터에 떡하니 자리를 잡은 폐공장이 음침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한 걸음, 두 걸음,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가던 다울이 담벼락 뒤에 몸을 숨겼다.

“으우…….”

“쉿, 쉬잇. 담이야, 착하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옹알이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다울이 무릎을 굽혔다 펴 가며 담이를 진정시켰다. 잠시
뒤척였던 것뿐인지 금세 조용해져서 다행이었다.

확실히 이대로 담이를 업고 있으면 위험할 것 같은데…….

어디 안전한 곳이 없을까. 간절하게 근처를 살피던 다울이 개구멍 하나를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저쪽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모르게 잠입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한 걸 행동으로 실천하는 데 1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담이를 앞으로 안은 다울이 최대한 몸을 낮춰
기어가며 개구멍을 통과했다. 몸집이 작은 탓에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개구멍으로 들어오니 폐공장 내부가 보였다. 캐비닛 여러 개가 있는 걸로 봐서는 예전에 탈의실로 쓰였던 방인
듯했다.

담이를 혼자 두는 게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에 잠깐 숨겨 두면 위험은 면할 수 있겠지.

“미안해, 담이야. 여기가 제일 안전할 것 같아. 자암깐만 여기에 있자? 아빠가 위험한 곳까지 데리고 와서
미안해.”

미안한 마음에 울상을 짓던 다울은 가장 멀쩡하고 깨끗해 보이는 캐비닛 하나를 찾아 그 안에 담이를 눕혀 놓았다.
딱 낮잠 잘 시간이라 깨지 않고 꿈나라에 빠져있는 담이에게 감사할 정도였다.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캐비닛 문을 살짝 열어놓은 뒤에는 들고 온 야구 방망이를 챙겨 주변을 마저 탐색했다.

으음, 정태이는 어디에 있는 거지. 탈의실 문에 바짝 붙어 귀를 대고 있으니, 바깥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왜 도망을…….’

‘…흐, 잘못…….’

얼핏 들어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태이 목소리는 요만큼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정태이가 잡혀 있는
거라면? 순간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떠올리던 그가 그럴 리 없다며 머릿속을 비워냈다.

역시, 쓸데없는 상상이었다. 탈의실 문을 티 나지 않게 열어 본 다울이 문 틈새로 밖을 바라봤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 자리가 명당이었던 것이다.

폐공장 가운데에 모여 있는 남자들이 정확히 보였고, 그 가운데에 의자를 펴고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태이도


단번에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잠시나마 걱정했던 내가 바보지, 바보야.

그나저나 무슨 일이길래 이런 곳까지 내려와서 사람들을 끌어모은 걸까. 숨을 죽인 채, 밖에서 펼쳐지는 광경들을
지켜보던 다울이 충격에 휩싸여 입을 떡 벌렸다.

모여 있던 남자들이 갈라지자, 그 사이로 다 죽어 가는 사람 하나가 보였다. 얼마나 얻어맞은 건지 얼굴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팅팅 부어 있었고, 몸 이곳저곳에서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왔다.

이것보다 더 충격적인 건 따로 있었다. 바로 태이의 행동이었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려다보고 있는 게 섬뜩했다.
게다가 그는 다울의 앞에서 피우지 않던 담배까지 입에 물고 있었다. 희뿌연 연기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와 허공에
흩어질 때 즈음, 다울이 보던 것을 멈추고 스륵 주저앉았다.

정태이가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저건 내가 아는 정태이가 아닌데. 대체 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만 틀어막고 있는데, 폐공장 안으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굳이 바깥을 내다보지
않아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불안감을 느낀 다울이 담이를 넣어 놓은 캐비닛 문을 완전히 닫아 주고, 귀를 막아 소리를 차단했다.

지금이라도 정태이를 말려야 하나, 이건 진짜 아니잖아. 이건! 씨발! 범죄란 말이야!

몰래 태이의 눈에 띄어 그를 말려 보려던 다울이 다시 문을 열어 눈을 빼꼼 내밀었다. 시체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쩌나, 싶어 긴장한 상태였는데 다행히 남자 여럿이 등지고 서 있어서 끔찍한 상황만은 피할 수 있었다.

“태이, 와 주셔서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 진짜 카쿠치구미의 후계자가 되셨으니, 저희도 믿고 따르겠습니다.”

아부를 떨며 웃던 남자가 이해하기 힘든 말을 지껄였다. 다울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카쿠치구미의 후계자라니?


아직 완전히 자유로워진 건 아니지만, 태이는 분명 후계자 자리를 보류한 상태였다.

그런데 저게 무슨 말일까. 도대체 누가 후계자라는 거야. 이상한 건, 태이가 별다른 말 없이 담배만 태우고
있었다는 거다. 그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고, 수긍한다는 듯 조용히 있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짓말. 정태이 미친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건데?

처음에는 배신감이 밀려들었다. 말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이후로는


안타까움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담이를 후계자로 넘기지 않겠다고 해서, 그래서 희생한 걸까.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담이를 후계자로 넘기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해서 태이를 희생시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다울은 태이도 담이도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생각이 없었다.

우선 정태이랑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 봐야겠어.

더 이상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정체를 들킬 수도 있었다. 중요한 상황은 이미 다 파악했으니, 태이와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우선이었다.

다울은 담이를 캐비닛 안에서 꺼내 품에 안고, 아기 띠로 단단히 고정했다. 그러고는 개구멍을 빠져나와 주변을
꼼꼼히 경계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담이가 위험해지지 않도록 잘 지켜야만 했다.

“어이, 거기. 너 뭐야. 뭔데 거기서 기어 나와?”

“…….”

“이 새끼 봐라, 너 누구냐고!”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야구 방망이를 챙겨 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경직된 다울이 손에 든 야구 방망이를 고쳐 쥐었다.

아까 서 있던 문지기인가. 분명 한 명이었어.

슬며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껄렁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제대로 입지 않은
정장, 무스를 한 통이나 처바른 머리카락이 특히 비호감인 남자였다.

꼴깍. 마른침이 바싹 마르다 못해 갈라지기 직전인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다울이 대답하지 않자


수상하다고 판단한 남자가 인상을 가득 찌푸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야, 씨팔, 쥐새끼 같은 게 대답을 안 하네.”

“…….”

“벙어리냐? 어라, 이놈 좀 봐라. 어린놈의 새끼가 왜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이러.”

발끝으로 다울의 허리를 툭툭, 건드리던 남자가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보다 몸도 얇고, 키도
작아서 자신감이 붙었는지 거침없이 행동하는 게 꼴 보기 싫을 정도였다.

고개를 숙인 채 무어라 중얼거리던 다울은 결심했다는 듯 야구 방망이를 꽉 쥐었다.

“야, 말 똑바로 해라. 왜 여기까지 들어왔냐고, 애새끼야.”

“……이러.”

“뭐, 인마?”

“너 죽이러! 이 개새끼야! 너 죽이러 왔다, 씨발! 됐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야구 방망이가 남자의 머리를 가격했다. 맞을 줄 모르고 까불거리던 남자는 다울의 한


방에 제대로 당해 머리를 감싼 채 바닥을 굴렀다. 쌤통이었다.

“누가! 애새끼야! 이 늙은이! 새끼야! 폭력 반대! 폭력 반대! 건전하게 좀 살아라!”

남자가 쓰러진 때를 틈타 야구 방망이를 사정없이 휘두르던 다울이 폭력 반대를 외쳤다. 정작 폭력을 사용하고
있는 건 본인인데도 건전하게 살라며 폭력 반대를 외치는 모습이 우스웠다.

오늘도 이렇게 한 명 갱생시키는 건가. 푸핫, 푸하하! 하하핫!

겁먹었던 얼굴이 점점 환하게 펴졌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맞기만 하는 남자 덕분에 다울의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방금까지 자신을 깔보던 깡패가 바닥을 뒹굴고 있다니 속이 다 시원했다.

“으음, 내 실력 나쁘지 않은데!”

야구 방망이를 어깨에 걸치고 뿌듯해하던 다울이 곡소리를 내는 남자의 등을 토닥였다. 야구 방망이로 때린 터라


멍만 조금 들었지, 큰 상처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여기서 제일 쫄따구인가. 하긴, 싸움을 못 하니까 밖에 세워 뒀겠지 뭐. 힘내요. 이런 곳에서 일하지 말고,
세상을 좀 넓게 둘러보면 건전한 일자리가 참 많거든요? 파이팅!”
위로와 응원까지 건넨 그가 황급히 개구멍으로 몸을 숨겼다. 밖이 소란스러워서 다른 남자들이 나오기라도 할까
봐 다시 숨은 것이었다.

“흐이잉…….”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칭얼거리는 울음소리가 작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담이가 낮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숨소리를 죽이고 아래를 내려다본 다울이 품에 안긴 담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담이야?”

“흐우, 아부, 아!”

“쉬잇. 담이야, 조용. 지금 울면 안 돼. 그런데 우리 담이 어디 봐?”

“흐이이, 빠아…….”

아기 띠에 몸을 묻고 허공에 손을 뻗은 담이가 어딘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낯선 곳이라 관찰하는 건가. 웬일로 나를 안 보고 다른 곳을 보네. 원래 칭얼거릴 때 얼굴 보여주면 활짝 웃는데


…….

다울이 멀뚱하게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담이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눈썹은 찌푸리고, 눈은 커진 채였고,
입술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다급하게 오물거렸다.

담이 표정이 왜 이러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흐억!”

다울이 담이의 시선을 따라 뒤돌아보려던 그때, 뒷덜미가 우악스럽게 붙잡혔다. 가냘픈 목을 내어 준 채, 뒤로


끌려가게 된 다울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가슴을 헐떡였다.

당하고 나서야 담이 표정이 왜 그랬는지 깨달았다. 낯선 곳을 탐색하고 있던 게 아니라, 내 등 뒤에 있는 남자를


보고 놀란 거였구나. 어떡하지. 나 살고 싶은데. 우리 담이도 살아야 하는데. ……좆 됐네.

“사, 살려 주, 살려 주세…….”

“따라올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봐, 다울아.”

“……정태이?”

어떻게 하면 살아나갈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던 다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올 줄 알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당황스러웠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태이였다.

서늘한 어투에 땀을 삐질 흘린 다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으로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이 보였다.

다울은 저도 모르게 안심하고 말았다. 무심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눈이, 아까 훔쳐봤던 눈과 달리


다정해서 힘이 풀렸다.

이와 반대로 태이는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그렇게 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담이까지 데리고 와서 숨어 있는
게 어이가 없기도 했다. 게다가 밖을 보니 문지기 역할을 하던 직원 하나도 때려눕힌 모양이었다.

다울을 발견한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하급 조직원이라 다행이었지, 다른 직원이었다면 이미 목숨이 날아갔을


것이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응? 담이까지 위험해질 뻔했잖아.”

“야, 나는……!”

“너는 뭐, 마저 얘기해 봐.”

“…….”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화를 내려던 다울이 입을 꾹 다물었다. 태이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따라온 건 자신이었고,
담이가 위험해질 뻔한 것도 맞았으니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담이를 넘겨주지 않겠다고 말한 탓에 태이가
희생까지 했다.

웬만한 것에 기죽지 않고 덤벼들던 다울이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막상 태이 얼굴을 마주하니 미안한 마음과
설움이 벅차올라 눈물이 맺혔다. 최근 들어 이렇게까지 속상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다울아, 답답하게 굴지 말고 얘기를 해.”

“…….”

“하아,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건데. 말해.”

“…….”

“이다울.”

“흐븝, 정태이, 미, 미안, 일부러는 아닌데…….”

맺혀 있던 눈물들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어깨를 바들거리며 눈물을 참던 다울이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냉정하게 대답을 강요하던 태이가 서러운 울음소리에 당황하며 다울의 얼굴을 살폈다.

“왜 울고 그래.”

“네가 내 이름을, 무섭게 막, 흐윽, 세 글자 다 부르고, 그래서, 흐끅.”

이름 세 글자 불렸다고 눈물을 퐁퐁 쏟아 내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다울은 태이가 뭐라고 더 말을 덧붙이기 전에


먼저 다가가 품에 쏙 안겨들었다.

정태이, 정태이 혼자서 모든 걸 다 떠안으려고…….

고작 이름 불린 것으로 눈물을 흘릴 리 없었다. 다울은 속상한 마음을 억지로 눌러 가며 코를 훌쩍였다.

평소였다면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을 텐데, 먼저 안겨들기까지 하자 이상함을 느낀 태이가 다울의 등을 살살


토닥여 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울에게 화를 퍼부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나오니 화를 내려야 낼 수가
없었다.

두 팔로 태이의 허리를 감싸 안은 다울이 너른 품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 특유의 체취와 페로몬이 섞여


시원하면서도 기분 좋은 향이 코끝을 타고 들어왔다.

“진정 좀 됐어?”

“으웅…….”

“그럼 왜 그랬는지,”

다울의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자 때를 기다리던 그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니,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다울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정태이, 왜 네가 후계자야? 너 그거 싫어했잖아. 싫으면 하지 마, 응? 그러지 마. 내가 부담 준 거면 미안해.


그러니까 하지 마. 저런 일 하지 마, 제발…….”

하지 말라는 말이 절반을 차지했다.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고,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던 다울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맑은 눈동자가 어둠을 덮어 버릴 기세로 빛나고 있었다.

태이는 숨기고 있던 사실을 들켰다는 생각에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탈의실에 숨어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듯했다.

“잘 생각하고 선택한 거야, 다울아.”

“아니야, 이건 희생이지 선택이 아니잖아. 나는, 나는 담이도 너도 넘겨주기 싫어.”

“…….”

“그러니까 하지 마, 으응? 정태이. 너희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내가 책임질게…….”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던 다울이 품속을 더 파고들었다. 태이가 쉬이 대답하지 않자 불안감이 커졌다. 이러다
진짜 자신이 알던 태이를 잃어버리게 될까 봐, 그리고 태이가 그 지옥 같은 곳에 영원히 갇히게 될까 봐 무서웠다.

다울은 ‘책임’이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꺼냈다. 태이가 카쿠치 가문에 붙잡히는 건 무서웠지만, 그의
할아버지는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일단 집으로 가자. 여기 있으면 위험해.”

“정태이, 왜 대답 안 해 줘? 확실히 대답해 주면 안 돼……?”

다부진 손이 태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직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하자니
찝찝했다. 착각인지 아닌지 애매모호 했으나, 태이는 지금 상황을 회피하려 들었다.

다울은 잡은 옷자락 끝을 놓아주지 않았다. 태이가 모든 것을 그만둔다고 할 때까지 붙잡고 있을 작정이었다.

“흐이, 흐애앵, 흐애애앵!”

“…….”

“아브, 흐잉, 빠아, 흐이잉…….”


“집에 가면 꼭 대답해 줘야 해. 알겠지?”

하필 이 타이밍에 담이의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평소 잘 울지도 않던 애가 다울을 찾으며 울어 대는 게


신기했다.

아무리 아기라도 돌아가는 상황 파악은 할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내 울음소리를 들었나.

자책하며 담이를 토닥여 주던 다울이 익숙하게 울음을 달랬다. 그러자 태이가 담이를 뺏어 안고 다울을 챙겼다.
자기도 울어서 눈가가 새빨갛게 부어올랐는데, 누가 누구를 달래고 있는 건지.

“차 끌고 올 테니까, 여기 가만히 있어.”

“크응, 알겠어.”

폐공장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다울을 세워놓은 그가 차를 몰고 나왔다. 그 짧은 사이에 일을 다 정리한 건지,


도롯가에 똑같이 생긴 차들이 여러 대 지나갔다.

빠앙.

혹시 몰라 풀숲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다울이 클랙슨 소리에 놀라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태이가 풀숲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다울을 발견하고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왜 그러고 있어, 와서 타.”

태이가 직접 운전하는 차를 타는 건 오랜만이었다. 담이를 챙기기 위해 뒷좌석에 올라탄 다울이 출발해도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바퀴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정태이, 집에 가면 또 어디 나갈 거야……?”

“그건 왜 물어.”

“빨리 대답해. 나갈 거야?”

“안 나갈게.”

불안한 눈으로 묻던 다울이 나가지 않겠다는 확답을 들은 뒤에야 시트에 몸을 편히 기댔다. 당분간은 어떤 방법을
써서든 태이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른 건 다울의 특기이기도 했다. 태이는 대충 상황을 넘긴 후 제 뜻대로 행동할 것이다.


풍기는 뉘앙스만 봐도 뻔했다.

다울은 절대 밀려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서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기만 한다면, 평범한 가족을 이루겠다는
꿈이 물거품 되는 거였다.

그보다도 다울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카쿠치 신코인지 뭔지, 아무튼 야쿠자라는 오물을 정태이에게 묻힐 수는 없지!

각오에 가득 찬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 * *

“아저씨, 꼼꼼하게 달아 주세요.”

“예, 아주 단단히 달아 놓을게요.”

이른 아침, 웬일로 늦잠을 자지 않은 다울이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문 앞에는 작업복을 입은 중후한 남성 두


명이 공구함을 들고 서 있었다.

다울은 망설임 없이 작업을 진행하라고 말했다. 시끌벅적한 소음에 구경을 나온 하루가 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멀쩡한 현관문을 갑자기 왜 뜯어고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우리, 이게 다 뭐예요? 우리 현관문 고장 났어요?”

“아니, 안 고장 났어.”

“그러면요?”

“잠금장치 설치하는 거야. 귀찮게 하지 말고 가라?”

잠금장치라니. 현관문을 자세히 뜯어 보던 하루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어딘가 익숙한 장치는 이전에 태이가
현관문을 막았을 때 설치했던 그 장치와 유사했다.

아니, 지금 이걸 왜 설치하는 거지. 셀프 감금인가. 사실 태이가 감금했던 게 마음에 들었나.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다울을 바라보던 하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너 뭘 오해하고 있는 거야.”

“셀프 감금이에요……?”

“내가 정태이를 감금시킨다는 생각은 안 해 봤냐? 이 바보야.”

“다우리가 태이를 어떻게 감금시켜요……?”

순수하고도 잔인한 질문이었다. 얼마나 만만히 보였으면 이런 질문을 다 할까.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은
다울이 하루를 매섭게 쏘아봤다. 그 눈빛에 캬옹! 하고 고양이 효과음이 들리는 착각이 일었다.

태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는 중이었다. 새벽 늦게까지 담이를 보느라 피로가 쌓인 모양이었다. 다울은 오히려
잘됐다며 태이가 자는 사이에 잠금장치를 완벽히 설치해 놓았다.

하핫, 이제 정태이는 감금당했다. 아무 데도 못 가!

설치를 마친 기사님들이 떠나가고, 그 자리에 혼자 남아 잠금장치를 시험 삼아 만지작거리던 다울이 뿌듯하게


웃었다.
아, 정태이도 이런 기분이었나. 왜 그때 나를 감금시켰는지 알겠다. 이거 좀……. 짜릿해!

사뿐한 걸음으로 부엌까지 달려간 다울이 음료수를 꺼내 마시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중간중간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아무 데도 못 가, 정태이는 나만 볼 수 있어, 흐으음, 나난.”

집착 멘트에 멜로디를 붙여 흥얼거리던 그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한시라도 빨리 태이에게
이 막대한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안방은 아직 고요했다. 담이도 새근새근 잘 자는 중이었고, 태이는 곧 깰 것처럼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다울은
자연스레 이불로 기어 들어가 태이 옆자리를 차지했다.

콕. 콕콕. 콕콕콕.

왕방울 같은 눈을 끔뻑거리며 태이를 관찰하던 그가 손가락 하나를 뻗어 볼을 콕콕 건드렸다. 그러자 소심하게


맞닿아 오는 손길에 인상을 찌푸리던 태이가 다울의 몸을 확 잡아끌어 제 품에 가뒀다.

“정태이, 일어났어?”

“피곤해, 조금 더 자.”

“정태이, 있잖아. 너 나한테 감금당했어.”

“하…….”

“들었어? 너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큰일 났어.”

잔망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던 다울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생뚱맞은 감금 발언에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뱉은
태이가 눈을 뜨고 다울을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일까.”

“너 여기서 꼼짝도 못 한다는 말!”

“…….”

“당연히 일도 못 가. 내가 막을 거야.”

“그래, 그렇게 해.”

다울이 생각한 반응은 이게 아니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당장 문 열라고 난리를 쳐도 모자랄 판에, 뭐? 그렇게
해? 태평해도 너무 태평한 거 아닌가.

딱히 비꼬는 말투도 아니었다. 표정도 아무렇지 않았고. 아니, 오히려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는 게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감금당했다는데 웃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다울은 자신이 감금당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침부터 현관문에 매달려 온 집안이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지르던
모습, 바닥에 드러누워 시위하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 열어달라며 울부짖었을 만한
일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네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겠지?”

“감금이라며, 못 나가는데 무슨 꿍꿍이를 부리겠어.”

“으으음, 수상해…….”

수상했지만, 태이 말대로 밖에 나가지 못하니 뭐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원하는 대로 반응해 주지 않은 건


아쉬웠으나, 중요한 건 태이를 집에 묶어 두는 거였다.

솔직히 태이가 나가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잠금장치 정도는 손쉽게 제거해 낼 수 있었다. 다울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평소 힘쓰는 것만 봐도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 얌전히 꼬리 내리고 있어 줄 때 잡아 놓자.

“아침 먹으러 가자, 다울아. 이미 먹었나.”

“아직 안 먹었어.”

“볼이 통통하길래, 먹은 줄 알았지.”

“아아! 깨물지 마아, 좀.”

다울의 볼을 주욱 잡아당기던 그가 말랑한 볼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여린 살이 찹쌀떡처럼 눌려 들어가는 게


중독성 있어서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하여튼 그는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놓치지 않고 스킨십을 해 댔다. 이러는 게 싫지 않으면서 귀찮은 척


들러붙는 몸을 떼어 낸 다울이 부엌으로 향했다.

늘 그렇듯 다울의 아침은 제대로 차려진 음식이었고, 태이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이 전부였다.

“맛있게 먹어요, 다우리.”

“이것도 네가 했어?”

“네에, 귀엽죠. 사진 찍어도 돼요. 헤헹.”

“어 완전 귀엽다. 너 말고, 이 곰돌이가.”

부엌에서 사부작거리던 하루가 식탁 위에 접시 여러 개를 올려놓았다. 다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음식은 바로


곰돌이 모양의 달걀찜이었다. 이런 모양의 달걀찜을 만들 수 있다니.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은 다울이
요리 폴더에 사진을 저장했다.

나중에 담이한테 만들어 줘야지. 곰돌이 달걀찜을 능숙하게 만드는 나, 너무 멋지다.

아직 시도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상상으로는 이미 프로 요리사가 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쿵짝이 잘 들어맞는


하루와 다울의 모습에 조용히 커피를 홀짝이던 태이가 웃음을 흘렸다.
“애도 아니고, 이런 거 되게 좋아하네.”

“아니거든? 솜사탕이 만들어 준 거라 적당히 호응만 한 거야.”

“히잉, 너무해요. 항상 맛있다고 잘 먹으면서. 다우리는 거짓말쟁이.”

어린아이 취급을 받아 창피해진 다울이 하루 핑계를 댔다. 이왕 먹는 거 귀여운 모양이면 더 좋지 않나. 숟가락
끝으로 달걀찜을 콕콕, 건드리던 그가 곰돌이 볼 한쪽을 푹 떠서 태이에게 내밀었다.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이제 익숙한 일이었다. 다울은 커피밖에 마시지 않는 태이를 위해 늘 제가 먹던 음식을 한


입씩 권하고는 했다. 설령 커피와 조합이 맞지 않는 음식이라도.

“먹어 봐.”

“너 먹어.”

“맛 이상할까 봐 너한테 먼저 먹이는 거야. 얼른 먹어.”

이번에도 못 이기는 척 받아먹어 준 태이가 물컹한 달걀찜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다울은 삼키는 모습까지 제대로
확인한 뒤에야 밥을 떠먹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태이가 아침밥을 거르기 시작했다. 전에는 아침부터 식탁에 앉아 하루가 주는 밥을 다
비워 내고 나갔는데, 식사량이 줄어든 게 이상했다.

열심히 밥을 퍼먹던 다울이 의아함을 느끼고 태이를 훑어봤다. 자세히 보니 예전보다 턱선이 더 날렵해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요즘 인상이 더 싸가지 없어 보였나.

“정태이, 너 왜 아침 안 먹어? 전에는 먹었으면서.”

“몸 관리 때문에.”

“몸 관리? 네가? 아니, 이미 완…….”

완벽한데. 다울이 저도 모르게 내뱉을 뻔했던 말을 황급히 목구멍 너머로 삼켜 버렸다. 잔뜩 질린 눈이 태이의
몸을 또다시 훑었다. 다시 봐도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몸이었다.

저런 몸을 가졌으면서 대체 뭘 관리한다는 걸까. 그의 철저함에 혀를 내두르던 다울이 숟가락을 쥔 제 팔목을


쳐다봤다. 근육 하나 없는 앙상한 팔목이 오늘따라 초라해 보였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밥이나 마저 먹어, 다울아.”

“내,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전보다 숟가락질이 느려졌다. 의기소침해진 다울이 깨작거리자, 숟가락을 뺏어 든 태이가 밥을 직접 떠먹여 주기


시작했다.

“나 그만 먹을, 으웃!”

“너는 관리할 필요 없으니까 다 먹어.”


입 안으로 들어오는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심지어 태이가 먹여 주는 음식이라니. 방금까지 태이를 따라
관리하겠다고 마음먹은 다울이 언제 그랬냐는 듯 음식물을 꼭꼭 씹어 넘겼다. 역시, 맛있는 걸 먹고,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사는 게 최고였다.

밥을 다 먹은 후에는 태이와 나란히 서서 양치질을 했다. 물론 씻는 시간보다 붙어먹은 시간이 더 많았다.


상쾌하게 나온 다울은 이제 막 깨서 옹알이 중인 담이를 품에 안고 달랬다.

“아우으, 우아아.”

“안녕, 담이야. 잘 잤어?”

“으우…….”

“솜사탕 삼촌한테 이유식 달라고 하자.”

문을 열고 나가니, 미리 기다리고 있던 하루가 담이를 받아 들었다. 아침을 먹이는 건 다울이나 태이가 주로


했지만, 가끔 이렇게 부탁할 때도 있었다. 하루가 아기를 좋아해서 이렇게 맡겨 주면 눈에 띄게 기뻐했다.

“아르르 까꾸웅!”

“헤헤, 으부!”

“너무 너무 너무 너무 귀엽다. 삼촌이랑 맘마 먹자, 담이야.”

얼씨구, 누가 보면 자기 아들인 줄 알겠네.

훈훈한 광경에 웃음을 터뜨린 다울이 소파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담이는 하루가 봐주고 있고, 태이는 옷을
갈아입는 중이고. 할 일이 사라져 심심해진 그가 의미 없이 TV 채널을 돌렸다.

그나저나 정태이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네. 감금까지 했는데, 집 분위기가 평소와 다름이 없잖아.

소파에 누운 채 드레스룸을 힐끔거리던 중, 막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태이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친 다울이 얼굴을
붉혔다. 하필 이 타이밍에 나올 게 뭐람.

다울이 마주치지 않은 척하며 눈을 피하자, 가까이 다가온 태이가 자연스레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다울은
경직된 자세로 TV 화면만 바라보았다.

차려입은 것도 아니고, 그냥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것뿐인데 뭐 저리 잘생기고 지랄.

속마음은 경직된 자세처럼 얌전하지 못했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던 태이가 다울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몸을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러자 중심을 잃은 몸이 태이 쪽으로 맥없이 넘어갔다.

“흐익……!”

“담이는 하루한테 맡겨야겠다. 너무 좋아하는데.”

“어, 어어. 쟤 원래 아기 좋아한대.”

“다울아, 난 여기 있는데 어딜 보는 거야.”

“어? 나 보고 있어, 보고 있는데?”


보고 있기는 무슨, 거짓말이었다. 눈만 조금 돌려도 태이 얼굴이 가까이 보여서 도저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이건 내 탓이 아니다, 정태이 얼굴이 잘난 탓이다.

“하나도 안 보고 있는데.”

“야, 너, 페로몬 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코끝으로 들어오는 향은 바디워시 향도, 비누 향도 아니었다. 이건 태이의 페로몬 향이었다. 은근하게 페로몬을
흘리고 있으면서, 안 그런 척하는 얼굴이 뻔뻔스러웠다.

정태이, 저 여우 새끼가 진짜. 눈을 부라리던 다울이 부엌 쪽을 돌아봤다. 혹여나 담이가 이 장면을 목격할까 봐,
미리 망을 보는 거였다. 다행스럽게도 담이는 하루가 만든 이유식에 푹 빠져 있었다.

다울이 뒤돌고 있는 사이, 가까이 붙은 태이가 귓속말을 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자 몸이 잘게
떨렸다.

“일을 안 가니까 시간이 비는데, 뭐 하면서 때울까.”

“그, 그냥 가만히 있어.”

“그럼 심심하잖아. 다울이가 몸으로,”

“와아아악! 그만, 그만 말해!”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다울은 소리를 지르며 말을 잘라 버리고, 귀까지 틀어막았다. 언제 봐도


놀리는 사람이 뿌듯해할 만한 리액션이었다.

담이 이유식을 다 먹이고 뒷정리를 하던 하루가 발꿈치를 들어 거실 상황을 살폈다. 티격태격하면서도 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귀여웠다.

“담이야, 오늘은 삼촌이랑 놀자.”

“우, 아으우!”

“아이 착해라.”

흐뭇한 얼굴로 담이를 껴안은 하루가 조용히 제 방으로 올라갔다. 오늘만큼은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피해 줄
생각이었다. 담이도 하루의 의견에 동의하는 건지, 해맑은 웃음을 보여 줬다.

하루가 자리를 피해 줬다는 사실도 모르고 티격태격하던 둘은 어느새 나란히 앉아 TV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침 다울이 놓친 드라마가 재방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잉. 지잉. 지잉.

그런데 아까부터 태이의 핸드폰이 매섭게 울려 댔다. 화면이 반짝일 때마다 무수히 쌓인 알림창들이 보여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태이, 왜 말이 없으세요. 태이?]

[오늘 임무 중요합니다. 애들 다 기다리고 있어요.]

[태이!!! 제발 연락 좀 받아 주세요!!!!!!!]

[오늘 안에 해결 못 하면 큰일 납니다 ㅠㅠㅠㅠㅠㅠ!!!]

[태이... 읽은 거 맞죠. 읽씹...?]

[저녁에는 꼭 오셔야 합니다. 꼭이요!!]

[이거 무르시면 수장께서 가만 안 두겠다고 하셨어요 ㅠㅠㅠ!]

끊임없이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확인하던 태이가 답장도 하지 않은 채 홀드 버튼을 눌러 버렸다. 핸드폰을 집어
들 때마다 다울이 뚫어지게 노려봐서 뭘 할 수가 없었다.

“그 인간들 왜 또 난리래.”

“글쎄, 별일 아니야.”

“정태이, 핸드폰 보지 마. 그 인간들은 너 없으면 일이 안 된대? 왜 자꾸 연락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리던 다울이 핸드폰을 뺏었다. 혹여나 태이가 누군가와 연락하고 몰래
빠져나가지 않을까 싶어, 미리 차단해 놓는 거였다.

태이는 이번에도 순순히 핸드폰을 넘겨줬다. 의외의 행동이었다. 정태이가 웬일이지. 의심을 싹틔우고 있을 즈음,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왔다.

“다울이가 핸드폰을 못 만지게 하니까 곤란하네.”

“그래도 그 사람들한테 자꾸 연락이 오니까……!”

“핸드폰 안 만지는 대신, 너 만지게 해 줘.”

“무, 무슨 그런 말을, 내가 만지게 해 줄 것 같아?”

“응, 다울아. 그럴 것 같아.”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다울이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태이가 먼저 움직였다. 만지게 해 달라더니, 이게 만지는
걸까.

정태이는 손이 아니라 입술로 사람을 만지나 보다. 미친.

짧게 맞부딪치던 입술이 점차 시간을 늘려가며 애를 태웠다. 다울이 슬금슬금 뒤로 갈 때마다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단단히 붙잡아 끌었다.

다울은 일부러 입술을 벌려 주지 않았다. 한번 시작하면 어디까지 갈지 몰라서 아예 싹을 잘라 놓으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늘 태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입술 벌려.”
“으웃, 시, 싫어.”

“아아, 싫었구나. 그래도 벌려야지, 다울아.”

“으, 키스하면 핸드폰 안 볼 거야? 그 아저씨들한테, 안 갈 거야?”

“응.”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안심한 다울이 못 이기는 척 입술 사이를 벌려 주자,
기다렸다는 듯 혀가 맞물려 왔다.

다울은 키스 하나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느꼈다. 질척하게 얽혀 드는 혀라던가, 입천장을 쓸고 지나가는 자극에
달뜬 숨을 터뜨리자 태이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창피함에 어깨를 밀어낸 다울이 씩씩거리며 태이를 노려보았다. 키스에 익숙하지 않은 걸 본인도 잘 알고 있는데,
막상 태이가 웃으니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너 왜 자꾸 웃어, 정태이. 그래, 나 키스 못 한다! 뭐!”

“아니, 잘해서 웃은 거야. 너무 잘하는데.”

“너 내가 만만하지, 만만하지!”

그동안 뜸했던 풍차 돌리기가 시작됐다.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태이를 때리던 다울의 몸이 훌쩍, 하고 들렸다.
가만히 맞아 주던 태이가 자그마한 몸을 어깨에 들쳐 업은 것이다.

오랜만에 들쳐 업힌 다울이 발버둥을 치며 몸을 비틀었다. 아무리 그래도 태이의 힘은 이길 수 없었다. 허공에


동동거리는 발이 애처로우면서도 귀여웠다.

“이거 놔, 왜 방으로 가냐고, 왜!”

“만지게 해 주겠다며.”

“누가 그렇고 그렇게 만지래? 이거 놓으란 말이야악!”

“쉿, 다울아. 자꾸 소리 지르면 엉덩이 때릴 거야.”

무덤덤한 경고에 다울의 입이 꾹 다물려졌다. 저번에 한 번 엉덩이를 맞아 봐서 그런지, 태이의 경고가 장난


같이 들리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모습에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 태이가 다울의 엉덩이를 토닥여 줬다. 가만히 있는 게
기특해서 칭찬하는 거였다. 그러나 다울은 그의 다정한 손길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왜 건드려? 살살 하는 척하면서 때릴 거지, 그렇지?”

“안 때려, 다울아.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자기가 오해할 짓 했으면서.”

“…….”
능글맞게 대답하던 태이가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정적이 돌자 무언가 잘못됨을 느낀 다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 방금 한 말 취소야.”

“아니야, 이왕 오해받았으니까 그냥 오해한 대로 행동할게.”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다울은 잘못됨을 넘어서서 위기감을 느꼈다. 분명히 취소라고 했는데,
취소한다고 말했는데. 태이에게 자비란 없었다.

“어……?”

“방으로 갈 때까지 몇 대 맞을지 생각해 놔.”

아니, 얘 감금당한 애 맞아? 왜 자꾸 내가 불리해지는 건데? 내가 감금당한 거야? 어?

당혹스러움에 물든 표정이 멍했다. 몇 대 맞을지 생각해 놓으라니. 초점 없는 눈으로 들려 가던 다울이 모든 걸


포기한 채 몸을 축 늘어뜨렸다.

저기요, 하늘의 아무 신님. 왜 자꾸 정태이 편만 들어주세요? 나 엉덩이 맞기 싫다고요. 엉덩이 맞기 싫단


말이야…….

오늘만큼은 자신이 우위에 있을 줄 알았다. 왜냐? 태이를 감금시켰으니까. 그런데 이건 뭔가 이상했다. 지금


휘둘려야 할 사람은 정태이인데, 대체 왜 내가 휘둘리고 있는 거야. 시발.

방문이 조금씩 열리고, 오늘따라 넓어 보이는 침대가 자태를 드러냈다.

아, 몇 대 맞을지 생각 안 했는데. 그냥 안 맞고 싶은데…….

태이가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즈음, 다울이 찔끔 눈물을 훔쳐냈다.

헬프 미! 헬프 미! 헬프 미!

속으로 SOS 를 쳐 봐도, 손을 내미는 건 악마뿐이었다.

“침대로 올라가서 엎드려, 다울아.”

“…….”

“하나.”

“……?”

“둘.”

“오, 올라가! 올라간다고! 이 씨!”

땡땡땡. 이다울 완패! 그는 오늘도 장렬하게 패배했다.


* * *

어느새 창밖이 어둑어둑해졌다. 다울은 퉁퉁 부어오른 눈을 진정시키며 제 엉덩이를 매만졌다. 빨갛게 물이 든


엉덩이 위로 손이 닿으니 화끈거리는 느낌이 다 들었다.

다울은 제발 이 방에서 나가게 해 달라는 말만 수십 번 외쳐 댔다. 아무리 봐도 감금당한 사람은 태이가 아니라
자신 같았다.

괜히 태이를 자극했다가 엉덩이를 맞은 다울이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글썽였다. 낮 동안 그렇게 울어댔는데


아직까지 나올 눈물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어떻게, 어떻게 엉덩이를 때릴 수 있어. 미친놈. 나는 또 왜 처맞고 흥분한 거야. 더 미친놈.

몸을 움직일 힘이 없어 가만히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누워 있던 태이가 대뜸 일어나 옷을 껴입었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눈을 끔뻑이던 다울이 그 움직임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어디 가?”

“물 가지러.”

“가지 마.”

“그럼 뽀뽀해 줄래?”

“……양심 없는 새끼.”

말은 거칠게 하면서도 요구한 건 다 들어줬다. 다울이 입을 맞추고 떨어지자, 태이가 다시 침대 위로 누웠다.


물이라도 먹이려고 했더니, 가지 말라고 붙잡아 오는 게 퍽 귀여워서 말을 들어 주기로 한 것이었다.

“뭐 안 먹어도 되겠어?”

“안 먹어, 아무것도 안 들어가. 그냥 졸려…….”

배고픔도 뒤로하고 고개를 휘휘 젓던 다울이 태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냥 이대로 잠이나 푹 자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두 눈을 꾹 감고 있자니 잠이 솔솔 몰려왔다.

잠이 온다, 온다, 온다. 안 되는데, 정태이 감시해야 하는데. 그래도 졸리고, 아…….

“커어어…….”

졸음에 취약한 다울이 짧은 사이에 곯아떨어졌다. 일정한 속도로 등을 토닥여 주던 태이는 다울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잠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몸만 빠져나온 그가 곧장 욕실로 향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여덟 시. 소파에 방치되어 있던 태이의 핸드폰이 불티나게 울려 댔다. 모두 간부들에게서 온


연락들이었다.
말끔하게 씻고 나온 그가 검은 셔츠와 바지를 챙겨입고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했다. 옷을 갈아입은 걸로 봐서 일을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지잉. 지잉. 지잉. 지잉.

[오고 계시죠?? 태이?]

[차 보내지 말라셔서 집 앞 대기 중입니다.]

[와... 그 집요함 좋다. 태이, 보이죠? 저희가 이렇게 간절합니다.]

[방금 욕실 불 켜졌습니다. 나올 준비 하시나 봐요.]

[그래 막내야 그 집요함 칭찬한다!! 태이 꼭 데리고 와!!]

“귀찮게 하기는.”

전원을 꺼 버린 태이가 뜨거워진 핸드폰을 다시 소파 위로 던졌다. 간부들이 굳이 닦달하지 않아도 밤에는 나갈


생각이었기에 쌓여 가는 메시지를 매정히 차단해 버렸다.

오늘 일은 간부들 말대로 중요했다. 본가와도 깊게 관련된 일이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수장이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했다. 어디 이것뿐일까. 잘못하면 몇 명은 조직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고, 태이의 경우 후계자가
되겠다는 충성심을 의심받아 큰 벌을 받을 수 있었다.

상황은 그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낮에는 다울이 원하는 대로 얌전히 있어 주고, 그가 잠든 밤에는 몰래 나가서
일을 처리한다.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은 작전이었다.

“태이, 지금 가?”

“어, 다울이 깨지 않게 잘 봐줘.”

“담이야, 아빠한테 인사해 주자. 몰래 잘 다녀오세요, 해.”

타이밍 좋게 내려온 하루가 태이를 배웅했다. 마음 같아서는 가지 말라며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후계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끝낸 후라 쉽게 붙잡을 수 없었다.

하루가 품에 안긴 담이의 팔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영문도 모르고 인사를 하게 된 담이가 방실방실 웃었다.

때 묻지 않은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태이가 통통한 볼에 입을 맞춰 주었다. 애정 어린 입맞춤에 꺄르륵,


거리던 담이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손을 뻗었다.

“꺄아아, 아부! 아브!”

“응, 담아. 아빠 다녀올게.”

“아부으!”

마지막까지 볼을 매만져 주던 태이가 현관문을 손쉽게 열었다. 이런 잠금장치는 허술해서 조금만 만져도 쉽게
열렸다. 기껏 설치한 잠금장치가 뚝, 하고 부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철컥.
손을 흔드는 담이를 뒤로하고 집을 나선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온종일 자신을 붙잡아 두기 위해 애를 썼던
다울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일이 틀어지면 할아버지에게 의심을 받을 테고, 그렇게 되면 담이와 다울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컸다.

돌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에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 감정들이 발목을 붙잡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게 맞는
걸까. 그답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정태이!”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다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울음을 터뜨릴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던 다울이 계단을 한걸음에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쓸쓸하던 등 뒤로 온기가 닿아왔다. 태이의 허리를 꽉 붙잡은 다울이 너른 등에 제 몸을 붙인 채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왜, 왜 말을 안 들어 주는 거야. 윽, 너 자꾸 그쪽에서 시키는 대로 행동하면 진짜,


흐으, 못 빠져나온다고!”

기어코 울분을 터뜨린 다울이 몸을 들썩였다. 눈물은 줄줄 흐르는데, 평소처럼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아
답답했다. 소리 없이 울며 숨을 헐떡거리자, 등을 보이고 있던 태이가 뒤돌아서 눈을 마주 보았다.

엄지로 눈물을 닦아 내 주던 그가 벌벌 떨고 있는 다울을 품에 안았다. 밀어낼 거라는 예상과 달리 다울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마주 안았다. 혹여 놓치기라도 할까 봐 있는 힘을 다해 안겨드는 몸이 안쓰러웠다.

“정태이, 우리, 평범한 가족으로 살자. 내가,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어.”

“다울아.”

“진짜야, 흐으, 나는 다 행복했으면 좋겠단 말이야. 할 수 있어, 나 믿어, 정태이, 제발.”

다울의 간절한 목소리에 몰래 지켜보던 하루가 눈물을 머금었다. 대문 앞에서 태이를 기다리던 직원도 입을
틀어막은 채 오열했다.

평생 카쿠치 가문 밑에 잡혀 살 줄 알았던 태이에게 다울이 빛을 내밀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단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다울이 대단했다. 어떻게든 태이에게 믿음을 심어 주겠다는 강한
의지가 돋보여서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나는 있지, 너랑 살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모든 악을 끊어 내 버리겠다고 각오했어.”

“…….”

“크응…! 내가 너 갱생시킬 거야. 반드시.”

코를 먹은 다울이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아 내며 제 뜻을 밀어붙였다. 부어오른 눈가와 맹맹해진 목소리가


우스웠지만, 태이의 눈에는 그 어떤 것보다 사랑스러워 보였다.

묘한 핑크빛 분위기에 물러선 직원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메시지를 전송했다.


[오늘 일은 포기합시다. 죄송합니다.]

[아니 막내야 뭔 소리냐!!!! 태이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태이는 이날, 임무에 나가지 않았다. 물론 본인의 의지로 택한 거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평범한 가족으로 살아가고 싶어서.

* * *

폭풍이 휘몰아친 뒤에는 맑은 날이 지속됐다. 태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나갔다. 물론 나오기 전까지
다울에게 허락을 받아 내느라 진땀을 뺐다. 그는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뒤에야 현관문을 나설 수 있었다.

최근 다울은 더 예민해져 있었다. 굳이 티는 내지 않았지만, 태이가 움직일 때마다 집요하게 쳐다본다던가,


화장실만 가려고 일어서도 어딜 가냐며 물어오곤 했다.

간혹 정도가 심하긴 했으나, 이미 한 번 독단적으로 행동하려 했던 전적이 있기에 태이는 군말 없이 대답해 주고,
어디 가지 않는다며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나마 오늘은 쉽게 허락을 받아 낼 수 있었다. 바로 담이가 함께 나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아부부!”

아침이라 날씨가 선선했다. 호수 옆으로 길게 깔린 산책로는 조깅하기에 적격인 장소였다. 트레이닝복을 맞춰


입고, 담이를 옆구리에 끼우듯 안아 든 그가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다울이 봤다면 식겁할 만한 행동이었다.

정작 담이는 입을 활짝 벌려 웃기 바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게 꼭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아서 신이


난 모양이다. 멀미를 안 해서 천만다행이었다.

이른 시간에 나와 운동하시던 어르신들이 신기한 눈으로 태이를 쳐다봤다. 저렇게 몸 좋고 잘생긴 청년이
뛰어다니는 것도 신기한데, 옆구리에 웬 아기까지 데리고 다니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아부, 이아아우!”

“여기서 더 빨리 달리면 너 어지러워 죽어, 담아.”

“아아우!”

“빨리 달려줘? 후회할 텐데.”

흥이 오른 담이가 더 빨리 달리라며 허공에 손을 뻗고 마구 흔들었다. 옹알이를 전부 알아들은 태이가 장난스레


웃으며 속도를 높여 달렸다. 선선한 바람을 기분 좋게 맞던 담이가 상상을 초월하는 바람 세기에 놀라 입을
벌렸다.

“우아아아! 아!”

얇은 머리카락이 휘날려 엉망이 되었다. 게다가 빠르게 움직인 탓에 속까지 울렁거렸는지 멍하게 눈을 깜박이던
담이가 울상을 지었다.

급하게 속도를 늦춘 태이가 찌푸려진 담이의 표정을 발견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앙증맞은 등을
살살 쓸어내려 주고 있었다.

“봐, 아빠가 어지럽다고 했지.”

“흐, 흐이잉…….”

“괜찮아, 울지 마. 이제 안 어지럽잖아, 담아.”

“으우…….”

“이제 집 가서 밥 먹자. 배고프지.”

“꺄아아! 우아아!”

가짜 울음을 기가 막히게 알아낸 태이가 손가락으로 코끝을 톡, 하고 치자 담이가 민망하다는 듯 모르는 척을


했다. 그 모습이 다울과 묘하게 닮아 귀여웠다. 자연스레 이마에 짧게 입 맞춰 준 태이가 이제 밥을 먹으러
가자며 방향을 틀었다.

방금까지 울상짓던 담이가 밥이라는 말에 손뼉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요즘 다울과 손뼉 치는 놀이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혼자서도 손을 잘 움직였다.

“단순한 게 똑 닮았네. 작은 이다울.”

“아우우?”

작은 이다울. 요즘 태이가 담이를 부르는 애칭 중 하나였다. 단순한 것도, 애교를 부리는 것도, 전부 이다울을
빼다 박아놓은 것 같아서 붙여 준 애칭이었다.

담이도 애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은 이다울’이라 부를 때마다 반짝이는 눈으로 태이를 올려다보았다. 맑은
눈망울이 어찌나 순수한지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간단히 운동을 끝낸 태이가 집까지 가볍게 뛰었다. 산책로에서 집까지 뛰어가는 데는 5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덜컥.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다울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 막 세수를 마치고 나온 건지, 물기 묻은 볼과


머리카락이 싱그러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다녀왔어.”

“흐애애앵, 흐이잉, 으애앵!”

해맑게 두 사람을 맞이해 주던 다울이 인상을 구겼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꼴이 엉망이 된 담이가 태이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잘 울지 않는 아인데 무슨 일로 이러는 걸까. 의문을 품던 다울이 눈을 매섭게 뜨고 태이를 쳐다봤다.

“담이 왜 울어?”

“자꾸 빨리 가자고 재촉하길래 뛰었더니.”

“아니, 담이를 안고 뛰었다고? 심지어 정태이 너는 애를 막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이!”

미친……! 차마 담이 앞이라 욕을 끝까지 뱉지 못한 그가 화를 눌러 삼켰다. 사이좋게 운동 나갈 때는 언제고


애를 울려서 돌아온 게 어이가 없었다.

태이는 억울했다. 달릴 때까지만 해도 꺄르륵,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는데 집에 도착하고 보니 갑자기 웃음이
울음으로 싹 바뀌어 있었다. 어느새 다울의 품으로 넘어가 안긴 담이가 헤실헤실 웃었다. 태이는 처음으로 제
자식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놀랐지, 담이야? 아빠가 원래 저래. 이제 아빠랑 운동 나가지 말자.”

“다울아, 나 억울한데.”

“으응, 밥 먹으러 가자. 우리 담이.”

태이의 말을 깔끔히 씹어 버린 다울이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졸지에 혼자 남겨진 태이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식탁 위로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졌다. 일찍 일어난 하루가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다울은
담이를 아기용 의자에 앉혀 놓고, 노란색 접시 안에 이유식을 담아 왔다. 요리하는 하루의 옆에서 함께
사부작거리며 만든 이유식이었다.

“담이야, 아 하고 입 벌리세요.”

“음마아, 아아.”

“어때, 맘마 맛있지?”

“테에, 텟! 으부부…….”

입김을 후후 불어 식힌 다음, 담이의 입 안으로 이유식을 넣어 준 다울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특별히
레시피를 보지 않고 만들어 봤는데, 비주얼이 꽤 괜찮아서 맛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입에 든 이유식을 한두 번 오물거려 보던 담이가 그대로 내용물을 뱉어 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뱉어 버리는 행동까지 다울과 똑 닮아 있었다.

마침 마지막으로 낼 반찬을 식탁 위로 올려놓던 하루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헉, 소리를 냈다. 웃음이 삐져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아 내서 다행이었다. 만약, 웃었다면 다울에게 어떤 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

“담이야, 맛없어……?”

“에으우, 텟!”
“…….”

역시, 레시피가 없으면 다 실패하는구나. 담이가 입 안에 남은 잔여물까지 모조리 뱉어 내자, 내심 상처받은


다울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가를 닦아 줬다. 레시피 없이 요리하는 프로 요리사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왜, 담이가 밥 안 먹어?”

“내가 만든 이유식이 맛없어서…….”

“줘 봐.”

막 씻고 나온 태이가 이유식 접시를 받아 들었다. 이유식 만들기에 실패한 다울이 서운해하는 게 잘 보여서
마음이 좋지 않았나 보다.

와중에 머리도 말리지 않고, 몸의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았는지 갈아입은 반소매 티셔츠가 살짝 젖어 단단한
상체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유식을 건네주던 다울이 근육질의 몸매를 힐끔거리며 몰래 침을 삼켰다.

“아 해.”

“아부, 아아!”

“옳지, 씹어.”

“우움…….”

방금까지 이유식을 뱉어 내던 담이가 입을 열심히 오물거리더니 내용물을 꼴깍, 삼켜냈다. 그리고는 입을 벌려,
다 먹었다는 걸 확인시켜 주기까지 했다. 먹이는 방법이 조금 다른가. 태이가 먹여 줄 때마다 밥을 잘 먹는
담이가 신기했다.

“담이야, 내가 먹여 줄 때는 뱉었으면서. 너무해.”

“너도 얼른 밥 먹어, 다울아.”

“…….”

의자를 제대로 끌어 앉은 다울이 숟가락을 들었다. 따스한 밥을 퍼서 입에 넣던 그가 담이 이유식을 먹이고 있는


태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오늘도 커피 한 잔만 마시는 건가.

운동한 뒤에 든든히 먹지 않는 건 다울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느새 집요해진 시선이 태이의 몸을


훑어내렸다. 아무리 봐도 완벽한 몸매였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다울이 숟가락으로 밥을 가득 푼 다음, 위에 반찬을 하나 올려놓았다. 나름 정성스레


올린 밥과 반찬이 태이의 앞에 내밀어졌다.

“뭐야.”

“먹어 좀.”

“담이한테 먹이는 거 실패해서 나한테 주는 건가.”


“자꾸 놀릴래? 이씨.”

짓궂은 표정으로 놀리던 그가 별말 없이 밥을 받아먹었다. 다울은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고, 다시 밥을 퍼서


태이의 입에 쑤셔 넣었다.

“아니, 이게 뭐 하는 거래요?”

물을 떠서 착석하던 하루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태이는 담이에게 이유식을 먹여 주고, 다울은 그런
태이에게 밥을 먹여 주고 있는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다울아, 이제 너 먹어.”

“어허! 빨리 먹어, 이거 맛있어. 내가 안 만들었어.”

“걱정돼서가 아니라 재미있어서 자꾸 먹이는 것 같은데.”

“으웅. 얼른 먹으라니까.”

마지막 남은 밥까지 싹싹 긁어 태이의 입에 넣어 준 다울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앞으로 이렇게 먹여야겠군. 한


그릇 클리어. 빈 그릇을 들고 일어선 그가 다시 밥을 퍼 와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따라 밥맛이 좋았다.

“아휴,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매일 이랬으면 좋겠다.”

“꼭 그렇게 말하면 뭔가 일이 생겨요. 헤헤.”

평화로움에 잔뜩 녹아내린 얼굴로 중얼거리던 다울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하루가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날만 이어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옆에서 초를 치는 하루가 미웠다.

“야, 솜사탕. 너 뒤질래? 부정 타니까 빨리 그 말 취소해.”

“으악, 취소, 취소!”

뒤늦게 제 실수를 인지한 하루가 취소를 열댓 번씩이나 외쳤다. 사나워진 눈매로 하루를 예의 주시하던 다울이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밥을 다 먹은 후에는 긴 휴식 시간이 따랐다. 간간이 담이 기저귀를 갈아 주고, 목욕을 시키고, 놀아 주다 보면


시간이 훅 지나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특별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라이브라도 다녀올까.”

“정말? 우리 바닷가 가자, 나 진짜 가고 싶어.”

너무 집에만 박혀 있었더니 좀이 다 쑤시던 참이었는데, 드라이브라니! 태이의 갑작스러운 드라이브 제안에 들뜬


다울이 햇살 같은 미소를 얼굴에 피워 냈다.

저렇게 좋을까. 뜨거운 반응에 헛웃음을 흘리던 태이가 어서 옷을 갈아입고 오라며 다울의 등을 떠밀었다.
드레스룸으로 쏜살같이 달려 올라간 다울은 그동안 아껴 놓았던 옷을 꺼내 입었다.

“하루, 너도 따라오려면 와.”


“아니이, 나는 집에 있을게. 다우리랑 잘 다녀와.”

눈치 있게 빠져 준 하루가 손을 흔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겨 내려온 다울이 하나도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하루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쉽다, 솜사탕. 다음에 같이 가.”

“저기, 다우리?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어요.”

하루의 말대로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웃던 다울이 성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문을 열자마자


맑고 푸른 하늘이 그를 반겼다. 따사로운 햇살은 덤이었다. 딱 나들이 가기 좋은 날씨였다.

날다람쥐처럼 계단을 뛰어 내려간 다울이 대문 앞에 서서 차를 기다렸다. 한껏 들뜬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태이가 담이를 챙겨 주차장으로 향했다.

“담아, 얌전히 앉아 있어.”

“으우우!”

뒷좌석 문을 열어 아기용 시트에 담이를 앉혀 놓은 태이가 시동을 걸었다.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와 대문 앞에
차를 세우니 다울이 기다렸다는 듯 올라탔다.

하하핫, 오늘은 진짜 특별한 하루가 되겠어! 사진 많이 찍어야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다울이 안전벨트를 매자, 멈춰 있던 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이제 바닷가를 향해 달리기만


하면 끝이었다.

“출발!”

“…….”

“정태이, 왜 출발 안 해?”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액셀을 밟으려던 태이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차를 완전히 멈춰 세웠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다울이 태이가 보고 있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태이! 태이! 큰! 일! 났! 어!’

시선의 끝에는 얼굴이 사색이 된 하루가 서 있었다. 계단을 뛰어 내려오며 두 팔을 마구 휘젓던 하루가 입
모양으로 위급 상황을 전달했다.

영문도 모른 채 차를 멈춰 세운 태이가 대체 무슨 일이냐며 운전석 창문을 끝까지 내렸다. 그러자 대문을 열고


나온 하루가 울먹이며 제 핸드폰 화면을 내밀어 보여 줬다.

[수장께서 비밀리에 한국으로 넘어가는 중. 태이랑 증손주 찾으러 가시겠답니다.]

쿠궁. 고개를 쭉 내밀어 화면을 함께 살펴보던 다울이 충격받은 듯 손을 떨었다. 놀란 건 태이도 마찬가지였다.

수장이,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아무런 언질도 없이 한국에 넘어오다니. 먼저 연락을 회피한 건 이쪽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완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하루가 본가에 심어 놓은 부하 직원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끌려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할배가 기어코, 한국까지 들어왔다 이거지? 정태이랑, 우리 담이를 데리러.”

씨발. 참고 있던 욕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특별한 하루를 기대하고 있던 다울이 허무하다는 듯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려보냈다.

진짜 특별한 하루가 되어 버렸네. 내가 원한 건 이런 개같은 상황이 아니었다고, 썅!

방심하고 있던 때에 적이 들이닥치다니, 다울의 머릿속에 비상벨이 울렸다. 언젠간 맞닥뜨리게 될 상황이었고,


만약 그때가 다가온다면 온 힘을 다해 태이와 담이를 지키기로 다짐까지 했었다.

다울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길 반복하던 그가 결심했다는 듯 눈을 번쩍 떴다.

한편, 태이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놀란 속마음과 달리 머리는 냉철하게 돌아갔다. 최우선의 방법은
할아버지를 공항에서 그대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집까지 들이게 되면 문제가 커질지도 몰랐기에, 그는
공항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물론 다울과 담이는 따로 보내야 했다. 이번에는 태이뿐만 아니라 담이까지 노려지고 있어서, 가능한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게 좋았다.

“다울아, 내 말 잘 들어. 너는 담이 데리고 하루랑 먼저 도망가 있어.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게 중요해. 나는


공항으로 가서 할아버지 다시 돌려보내고, 일 해결한 뒤에 갈게.”

다정하고 차분한 말투로 설명하던 그가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활짝 열었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담이를
안고 내린 다울이 태이의 손을 낚아채 꼭 쥐었다.

“너 혼자 가겠다고?”

“그리 위험한 일 아니야.”

“그 할배가 너를 데리고 가겠다잖아. 그래서 온 거라며!”

“다울아, 안 따라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도망가 있어.”

안 따라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여태 얌전히 있어 줬지만, 저번처럼 자기 하나 희생해서 본가로 따라갈 수도


있었고. 이번에는 담이도 관련되어 있어서 위험한 짓도 서슴없이 할 것 같았다.

한참 생각하던 다울이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담이를 안고 있는 손에 단단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다울이 순순히 응해 준 덕분에 일이 빠르게 진행됐다. 트렁크에 무언가를 던져 넣은 태이가 담이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다울의 입술에 짙게 입맞춤한 뒤 떨어졌다.

“이따 만나.”

“다치지 말고 와야 해.”

태이를 꼭 안아 준 다울이 어서 가라며 손을 휘저었다. 미련 가득한 눈으로 뒤쪽을 바라보던 태이가 먼저 차를


출발시켰다. 액셀을 얼마나 세게 밟았는지, 큰 엔진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간 차가 짧은 사이에 골목길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 사이, 다른 차를 끌고 나온 하루가 다울과 담이를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목적지는 아랫지방에 있는 태이의
별장이었다. 마침 근처에 바닷가가 있는데, 놀러 가는 게 아니라 도망의 목적으로 가게 되어 참 안타까웠다.

“그럼, 출발할게요.”

“야, 솜사탕.”

“네?”

“정태이 차 따라가.”

“……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려던 하루가 눈을 크게 뜨고 백미러를 응시했다.

“방금까지 태이 말에 알겠다면서요! 고개까지 끄덕끄덕했잖아요!”

흥분한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태이의 지시를 따라야만 하는 하루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는 얼굴로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다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해진 표정으로 제 뜻을 쏘아붙였다.

“야, 내가 그 할배랑 연 끊어 놓겠다고 분명히 얘기했지. 그게 괜히 한 소리 같아? 난 절대 정태이 혼자 보낼


생각 없어. 아까는 의심할까 봐 따르는 척한 거고. 당장 차 돌려.”

하루는 고민에 빠졌다. 다울의 말을 무시하고 도망가야 할지, 태이를 서포트하러 가야 할지. 사실 그도 태이를
따라가고픈 마음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냥 오지는 않았을 테고, 분명 간부 여럿을 대동했을 텐데. 태이 혼자서 그 많은 인원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백미러로 다울을 쳐다보던 하루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깨를 흠칫, 떨었다.

뭐냐고오, 저 단단한 포도 같은 얼굴은!

치켜올라간 눈썹, 다부지게 뜬 눈, 꼭 깨문 입술이 꼭 단단한 포도를 연상케 했다. 뭔가 화난 얼굴이긴 한데,
워낙 동글동글 귀여운 이미지라 그런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저기, 다우리…….”

“아이 씨, 차 돌리라니까! 정태이가 본가로 끌려가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다 네 탓이야. 나한테 평생 저주받기


싫으면 당장 차 돌려라?”

성질 하나는 좀 위협적이었다. 끝까지 고민하던 하루는 눈을 질끈 감고 핸들을 돌렸다.

에라, 모르겠다! 태이 미안해!

차를 돌린 하루가 액셀을 꾹 밟았다. 내비게이션에는 어느새 공항으로 향하는 길이 안내되고 있었다.

* * *
“태이 그 건방진 자식, 감히 연락을 끊어 내려고 해? 내 가만히 있을 줄 알았나 보지. 쯧.”

“곧 착륙한다고 합니다, 수장.”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태이를 씹어 대던 카쿠치구미의 수장, 카쿠치 신코가 혀를 끌끌 찼다. 후계자로 삼을


손주가 임무를 개판으로 만들어 놓은 걸로도 모자라, 연락까지 받지 않아 열이 바짝 오른 듯했다.

며칠 내내 연락을 보내다 포기한 그는 망할 손주와 증손주를 강제로 잡아 오기 위해 비행기 표를 끊었다. 당연히


한국으로 넘어간다는 건 비밀이었다.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도망칠까 봐 쉬쉬한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본가에서 일하는 고위 간부 중 한 명이 하루의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덕분에 한국에


간다는 소식이 빠르게 하루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태이 그놈은 무력으로 잡아. 애는 강제로 데려오고, 다울인지 뭔지 하는 그 녀석은 완전히 죽여 놔.”

“네, 수장.”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기내에 착륙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평안한 목소리의 안내 방송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도 같았다.

드디어 비행기가 착륙하고, 문이 열렸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내린 카쿠치 신코가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의 뒤로는 사복 차림을 한 부하들이 줄줄이 따랐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일부러 사복까지 차려입었지만,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수상했다.

짐도 없이 게이트를 나온 그들은 공항 뒤편으로 빠져나왔다. 태이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 여러 명을 나누어서


전국을 뒤지게 할 작정이었다.

“어떤 방법을 써서든 데리고 와라. 태이도, 애도!”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제 발로 왔거든요.”

“너, 너……!”

조를 나누어 보내려던 타이밍에 태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알고 도착한 건지, 위치 파악까지 완벽히 끝낸
그가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오자, 당황한 카쿠치 신코가 삿대질을 했다.

많이 놀라긴 했지만,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굳이 태이를 찾느라 힘 빼지 않아도 되고, 공항 근처라 바로 태워서


가기만 하면 됐다.

저 자식이 혼자 여기까지 온 건가. 태이의 뒤를 유심히 살펴보던 카쿠치 신코가 실눈을 뜨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큼, 크흠! 너 혼자 여기까지 온 거냐. 애는 어디에 두고.”

“제가 애를 왜 데려옵니까. 무슨 기대를 하시는 거예요.”


“뭐, 뭐 이 녀석아?”

“저 일본으로 안 넘어가요. 애도 안 넘길 겁니다.”

충격에 충격의 연속이었다. 단호한 목소리에 혈압이 오르는 걸 느낀 카쿠치 신코가 부하들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태이 주변을 둥글게 감쌌다.

가지 않는다면 무력을 행해서라도 데리고 간다. 절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가 무섭게 치켜뜬
눈으로 태이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태이라도 혼자 저 남자들을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공항 근처였기 때문에 과격하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태이가 한 걸음 물러서자, 남자들이 원을 좁히며 다가섰다. 다행히 무기를 든 사람은 없었다. 막무가내인 카쿠치
신코도 생각이라는 걸 하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소란 피워 봤자 좋을 게 하나 없으니, 최대한 조용하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려는 눈치였다.

“교도소에서 죽고 싶으신 거 아니면 얌전히 돌아가시죠.”

“네가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이 건방진 새끼. 할애비를 만만히 보면 쓰나.”

태이의 건방진 도발에 열이 오른 카쿠치 신코가 이를 악물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기고만장해지는 손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 경고를 해 봐도, 태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만만히 보는 게 아니라 그냥 만만한 겁니다. 어렸을 때야 뭣 모르고 맞았지만, 제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노인네
하나 죽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그는 어렸을 적부터 떡잎이 달랐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아서 맷집을 키우고, 아프다는 소리 하나 내뱉지 않는
독한 놈. 순순히 따르는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반항하는 끈질긴 놈. 그게 바로 태이였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말대답을 하는 모습에 참던 화를 터뜨린 카쿠치 신코가 당장 저 녀석을 잡아 오라며


호통쳤다.

“패 죽여서라도 데리고 와라!”

그 명령에 남자들이 공격 태세를 마치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태이 또한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자세를 잡던


참이었다.

“저 거지 같은 할배가 미쳤나! 지금 누구한테 손을 대는 거야, 이 개새끼들아!”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작은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메웠다. 심지어 태이보다 더 건방지고, 버릇없는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노인에게 할배라느니, 거지 같다느니 욕을 할 인물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다울.

당돌한 어투에 모든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 상황에 끼어든단 말인가.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카쿠치 신코가 다울을 알아보고는 뒷목을 부여잡았다.

분명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만 해도 얌전하고 소심하던 놈이, 무서운 거 하나 없다는 얼굴로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놀란 건 태이도 마찬가지였다. 도망가라고 했더니 쪼르르 뒤따라와서 겁도 없이 덤벼들지 않나, 야구 방망이는 또


어디서 구했는지 어설프게 휘두르는 꼴이 불안불안해 보였다.

“네 녀석, 마침 잘 왔다. 어디 버릇없이 덤벼드는 거냐! 여기가 어디라고!”

“하, 먼저 막무가내로 군 건 할배거든? 그리고 뭐, 한국 땅에 전세 내셨어요? 내가 못 올 곳에 온 것도 아니고.


참 나.”

한 마디 꾸짖으면 두 마디, 아니 세 마디 말대답이 따라붙었다. 아무리 겁을 주며 호통쳐 봐도, 다울은 고개를


더 빳빳하게 치켜올릴 뿐, 절대 수그리지 않았다.

남자들이 다울을 경계하기 시작하자, 움직임을 눈치챈 태이가 제 뒤로 작은 몸을 숨겨 주었다. 다울이 겁이


없다고 한들, 이 남자들을 당해 내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듬직한 어깨와 등이 다울의 시야를 가렸다. 호기롭게 나서서 말싸움을 이어 가던 다울이 묘하게 인상을
찌푸리다가, 태이의 몸을 힘껏 밀어내고 다시 앞에 나섰다.

“비켜, 정태이. 너는 저 할배랑 말 섞지 마. 내가 해결할게. 내가!”

“다울아, 얌전히 내 뒤에 있어. 그러다 다쳐.”

“다치면 뭐, 내가 그랬지? 나 믿으라고.”

아담한 몸에서 어떻게 이런 자신감이 나오는 걸까. 태이는 진심으로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울의
태도가 너무나 완강해서 더 이상 말릴 수도 없었다. 그저 상황을 지켜보다가 위험해질 때 나서는 게 좋을 듯했다.

카쿠치 신코는 말도 안 된다는 눈으로 다울을 응시했다. 조용하고, 호구 같아서 나중에 쉽게 내칠 수 있을 줄


알고 다울을 태이의 결혼 상대로 허락한 거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때의 다울과 정반대된 행동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떻게든 둘을 이혼시키고, 태이와 증손주 자식을 본가로 데려가야겠군. 저 쥐방울만 한 놈이 집안 다 말아먹게


생겼어!

위기를 느낀 카쿠치 신코가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큰 소란을 피우지 않으면서, 태이와 증손주를 빼돌리고,
다울을 쳐낼 방법.

그래, 데려온 조직원들을 나누어 혼선을 주어야겠군. 저놈이 난리를 피우는 사이, 증손주를 납치한다.

“크흠!”

헛기침을 해 신호를 보낸 카쿠치 신코가 의미심장한 눈짓으로 아이가 있을 만한 곳을 가리키자, 귀신같이


알아들은 조직원이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이 쥐방울만 한 놈, 넌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당장 태이랑 이혼해.”

“할배야 말로, 정태이랑 절연해.”

“무, 뭐? 지금 저 녀석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나도 할배 마음에 안 든다고요. 정태이 옆에 못 두겠으니까, 당장 절연하라고. 절! 연!”

굳이 강조까지 해 가며 말한 다울이 야구 방망이를 땅에 쿡, 찔러 세웠다. 이혼하라는 소리는 개껌 씹듯 씹어


버린 지 오래였다. 저런 허접한 소리에 일일이 대꾸해 주고 싶지 않았다.

이혼? 절대 안 해. 내가 왜 해. 정태이한테 마음 주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었는데.

“허, 저, 저 시건방진 녀석이! 애초에 네까짓 놈이 태이에게 어울린다 생각하는 거냐.”

손주는 손주다, 이건가. 카쿠치 신코가 태이를 감싸며 다울을 깎아내렸다. 다울은 문득 부모님이 보고 싶어졌다.
부모 없는 서러움, 씨발.

주먹을 꽉 쥐고 바들바들 떨던 다울이 이마에 힘줄까지 세워가며 소리쳤다.

“어이가 없네, 저 할방구가 진짜. 나한테 감사하게 생각해. 할배가 인간쓰레기로 만들어 놓은 정태이, 내가
여얼심히 분리수거하고, 깨끗이 닦아 놓는 중이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방해하지 말고, 할배 나라로 돌아가라고!”

듣고 있던 태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물들었다. 여태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얼떨결에 인간쓰레기 취급까지 받은


그가 다울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려놓았다. 이대로 말싸움을 이어 가다가 카쿠치 신코가 확 돌아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아, 이거 놔.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일단 뒤로 와 봐, 다울아. 위험해.”

태이의 다정한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카쿠치 신코가 연신 헛웃음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피도 눈물도 없던
손주 자식이 쥐방울만한 놈한테 빌빌 기는 것 같아서 열이 오르기도 했다.

결국, 참을 대로 참던 그가 제 조직원들에게 어서 행동을 시작하라며 신호를 보냈다.

다울은 차 안에 담이를 두고 홀로 여기까지 온 거였다. 직접 데리고 오면 위험할지도 모르니, 하루에게 담이를


부탁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실수였을까.

남자 여럿이 담이가 있는 차 쪽으로 뛰어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뒤쪽을 경계하고 있던 남자들이라
어떻게 막아볼 틈도 없었다.

“흐이이잉, 흐애애앵! 아부, 아, 흐이잉!”

“다, 담이야, 담이야!”

하루와 달려든 남자들이 대치하던 중, 몰래 뒤로 돌아간 남자 하나가 뒷좌석 문을 열어 담이를 달랑 꺼내 들었다.

뒷좌석을 지키며 남자들과 몸싸움을 하던 하루가 담이 울음소리에 뒤를 돌았다. 여럿을 상대하면서 담이를 지키는
건 무리였다. 뒤늦게 태이가 따라붙어 봤지만, 남자를 단번에 제압하기 어려웠다.

그 남자가 소매 안쪽에 숨겨 둔 칼을 담이에게 겨눴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담이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애 죽어 나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지금 장난하십니까. 제가 진짜 할아버지 목이라도 따 드려야 그만하시겠어요?”


“태이, 현실을 봐라. 넌 이 가문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방금까지만 해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태이가 잔뜩 흥분한 상태로 눈을 번뜩였다. 다울은 알 수 있었다. 크게


소리치지도, 그렇다고 떨지도 않았지만, 일정하게 내뱉어진 목소리에 격양된 감정이 섞여 있다는 것을.

카쿠치 신코는 담이를 지키기 위해 싸운 하루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태이의 보좌라는 직급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조직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철저히 태이를 위해 움직이는 꼴이 순종적인 개 같았다.

“한심한 놈, 내가 그러라고 널 태이 옆에 붙여놓은 줄 아느냐.”

카쿠치 신코가 시선을 돌려놓는 사이, 담이를 납치한 남자가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려는 건지 몰라도, 출국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모양이었다.

하루의 주변은 어느새 남자들로 빙 둘러싸여 있었고, 차에 탄 남자는 담이를 조수석에 내려놓은 채 급히 액셀을
밟았다.

좆 됐다.

담이가 남자의 손에 잡혀간 순간, 다울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말대꾸하듯 내뱉던 당돌한 말들도 쏙
들어가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태이 또한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는 남자들의 머릿수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카쿠치 신코와 절연하고 야쿠자 짓까지
청산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돌아가면 행동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태이, 담이는 네가 데리고 와. 난 여기서 저 노친네랑 끝장을 봐야겠으니까.”

“너…….”

“가라고! 난 멀쩡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저 할배가 절연 선언할 때까지 절대 일본 안 보낼 거야. 거기보다


여기가 더 안전할 거고. 무조건 담이 데려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저쪽이나 이쪽이나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으나, 다울의 말대로 여기에 있는 게 더 안전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담이를 영영 놓칠 수도 있었다.

다울의 손을 꽉 잡아 준 태이가 걱정스러운 마음을 한가득 품은 채 자리를 떴다. 이미 뒤따라갈 준비를 마친


하루가 클랙슨을 울리자, 그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는 조수석 문이 닫히기도 전에 쏜살같이 출발해 버렸다.

“쯧쯔, 다들 돌아갈 준비 해라.”

“어디 가려고, 할배. 나 오늘 당신 일본으로 보낼 생각 없거든? 우리랑 절연하고, 담이 멀쩡히 되돌아올 때까지
절대 못 돌아가.”

태이가 자리를 뜨고, 담이가 납치되자마자 남자들이 흩어졌다. 그 둘만 잡으면 다울 따위 내버려 둬도 상관이
없었다. 원래는 깔끔히 없애 버리는 게 목표였으나, 태이가 하는 행동을 보니 다울을 건드리면 큰 화를 입을 거
같아 얌전히 돌아가려는 거였다.

이런 카쿠치 신코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다울의 야무진 손이 그의 옷자락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거 놓지 못하겠냐! 어려서 무서움을 모르나 본데, 나는 당장 널 죽일 수도 있다.”

“죽여.”

“뭐라, 뭐라고?”

섬뜩한 눈빛에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죽이라고 대답한 다울이 선뜻 목을 내밀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여러


번 놀란 카쿠치 신코가 눈을 끔뻑였다.

“죽이라고. 할배, 정태이가 생각보다 나를 많이 사랑하거든. 그런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정태이 걔,
천성이 미친놈이라서 눈깔 돌걸. 아까도 들었지? 할배 목 딴다고 하는 거.”

카쿠치 신코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다울의 말대로 태이는 화나면 앞뒤 없이 덤벼들고 보는 놈이었다.
다울이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한 건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태이의 성깔을 믿고 겁 없이 덤빈 거였다.

나이를 먹어 주름이 생긴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작기만 한 다울을 만만히 봤는데,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보통 또라이가 아니라는 게 느껴져서 곤란한 모양이었다.

그래, 사람이 많은 곳으로 장소를 이동하면 저놈도 조용해지겠지.

“크흠, 떨어져라. 내가 손주 놈 하나를 무서워할 것 같으냐.”

“어딜, 가는, 거냐고! 이 할배야!”

“이 끈질긴 자식이! 어디까지 끌려 오나 보자!”

역시, 그냥 노인과 야쿠자 집단의 수장은 다른가. 다울이 떨어지지 않자, 카쿠치 신코가 힘을 사용해 한 걸음씩
옮기기 시작했다. 종잇장 같은 몸은 악착같이 달라붙어 끌려갈 뿐, 힘을 쓰지는 못했다.

남아 있던 조직원들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이 무슨 우스운 상황이람. 카쿠치 신코의 팔에 매달린 다울은
공항 안까지 질질 끌려가고 있었고, 멍해진 조직원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따로 떨어져 걸으며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거 놓으래도!”

“절대, 안, 놔! 정태이랑 절연해, 다시는 우리 가족한테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여기 공항이다, 이 모자란 놈아! 사람들 시선이 무섭지도 않냐!”

“할배, 나 우습게 보지 마. 사람들 시선 무섭다고 내가 순순히 보내줄 것 같아? 어?”

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다울의 행동에 지나치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카쿠치 신코는 다울을 떼어놓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70 년이 넘는 인생을 야쿠자로 살아오면서 이렇게 체면을
구긴 건 처음이었다.

다울은 체면 따위 중요시하지 않았다. 태이를 갱생시키기 위해 도로 한복판에서 임신했다는 말도 해 봤고, 집에


드나드는 간부들을 단속하겠다며 설친 적도 있었고, 싸가지의 절정을 찍던 태이에게 쫄면서도 끊임없이 덤벼 왔다.

그런 그에게 이런 일 정도는 뭐,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사랑하는 태이와 담이까지 걸려


있는 문제이니, 더더욱 망설일 게 없었다.
“태이는 내 손주 놈이다. 그러니 내가 데려가는 게 맞다, 이놈아!”

“정태이가 정씨 가문이지, 카쿠치인지 뭔지 하는 가문이냐고, 이 할밤탱아! 한국말도 잘하는 것 같은데, 왜


사람 말귀를 못 알아먹어? 으븝, 으으읍!”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주변 눈치를 보던 카쿠치 신코가 다울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 대니 어떻게 당해 낼 방법이 없었다.

근엄한 경고 한 번에 깨갱, 하고 물러나야 할 다울이 당당히 맞서자 상황이 골치 아파졌다. 70 이 넘는 나이를


먹고 한참 어린 다울과 유치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자니 눈앞이 핑 도는 느낌이었다.

“제발, 조용히 좀 하거라.”

“…….”

“그래, 입 좀 그렇게 다물고,”

“아아아아악! 담이 돌려줘! 정태이랑 절연해! 절연하라고오오오!”

상관없는 사람인 척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조직원들이 놀란 눈으로 다울을 쳐다봤다.

와, 제대로 된 또라이다.

작정하고 소리를 질러 대는 모습에 심히 당황한 카쿠치 신코가 허둥지둥거렸다. 이대로라면 공항에 배치된
경찰들이 달려올 것이고, 야쿠자 신분인 카쿠치 신코는 당연히 상황이 불리해지고 만다.

다울은 이 사실을 알고, 상황을 이용하고 있었다. 만약, 경찰이 달려오면 납치당한 척하며 카쿠치 신코와 망할
야쿠자 새끼들을 엿 먹일 작정이었다.

좋아,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어. 저 할배가 당황하잖아!

숨을 크게 들이마신 다울이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당장 정태이랑 절연해애애액!”

막무가내에는 막무가내로, 미친놈에는 미친놈으로, 또라이에는 또라이로 대응하자. 이건 다울만의 철칙이었다.

* * *

어느새 공항을 빠져나간 차가 도로 위를 빠르게 질주했다. 담이를 납치한 차량은 시간을 벌기 위해 공항 근처를
빙빙 돌고 있었다. 먼 곳으로 도망가자니 출국 시간에 못 맞출 게 분명하고, 길을 잘 알지도 못해서 그나마
안전한 방법을 택한 듯했다.
반면, 태이는 이 근처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지령이 내려올 때마다 공항 근처를 자주 오가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막다른 길이 나오는지, 어느 곳이 한적한지 파악한 상태였다.

운전대를 붙잡은 하루는 태이가 지시하는 대로 방향을 틀며 남자의 차량을 막다른 곳으로 몰았다.

“너무 밀어붙이지 마, 안에 담이도 있으니까.”

“응, 알겠어.”

담이를 걱정하던 그가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울을 혼자 두고 온 것도 마음에 걸렸고, 납치당해
울고 있을 담이도 걱정돼 심란해 보였다.

가장 나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담이를 빨리 구출해 내고,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공항으로 돌아가 다울을


감싸는 것. 그러니까, 짧은 시간 내에 모든 일을 해결해야 했다.

같은 도로를 빙빙 돌던 차량이 매우 한적한 길로 들어섰다. 뒤에서 압박하듯 밀어붙이자, 태이가 의도한 대로


막다른 길을 향해 방향을 튼 것이다.

“운전석 쪽으로 차 붙여, 하루.”

“도로 상황 어때?”

“아무도 없어, 지금 치고 빠져야 하니까 빨리 붙여.”

날 선 말투에 긴장한 듯 고개를 끄덕인 하루가 침착하게 차선을 변경했다. 남자의 뒤를 쫓던 차가 옆으로 바짝
붙자마자 태이가 조수석 문을 확, 열어젖혔다. 속도를 내던 중, 문이 열리자 강풍이 들이닥쳤다.

태이는 몸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힘을 주고 버텼다. 독기 가득한 눈으로 이를 악물고 있는 모습이 꼭 성난


호랑이 같았다.

“더 가까이 붙여 봐.”

“조, 조심해. 태이!”

차를 더 가까이 붙인 하루가 울상을 지으며 액셀을 밟았다. 드디어 가까워진 거리에 기회를 보던 태이가 옆
차량의 운전석 문을 뜯어 버릴 기세로 열었다. 멍청한 남자가 차 문을 잠그지 않아 다행이었다.

“흐아아, 태이! 잠시만, 그건 너무 무모한데……! 으아악!”

태이가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렸다. 도로에 처박힐 줄 알았던 몸이 옆 차량 운전석에 깔끔히 안착했다.

차 필러를 붙잡고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를 발로 힘껏 차낸 그가 빈 운전석에 올라타 핸들을 바로 잡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차를 몰고 있던 하루는 헉, 소리를 내며 놀랐다.

운전석에서 떨어져 나간 남자는 도롯가에 뒹굴었고, 평온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은 태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문을 닫아 버렸다.

태이, 사람이 맞는 걸까. 저건 사람이 아니야. 다우리는 로봇이랑 사랑하고 있는 거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옆 차량을 바라보던 하루가 점차 속도를 줄였다. 곧 창문을 끝까지 내린 태이가
손을 내밀어 공항으로 돌아가자는 수신호를 보였다.

“흐이이, 흐애애앵!”

“담아, 상태 좀 볼게. 이제 괜찮으니까 울지 말고, 착하지?”

“흐애앵, 흐잉…….”

“다행히 다친 곳은 없네.”

속도를 낮추고 담이 상태를 살피던 그가 상처 하나 없는 얼굴에 크게 안심했다. 납치당한 후로 계속 운 건지,


주먹만 한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게 속상하기도 했다.

아빠 얼굴을 본 뒤에야 울음을 그친 담이가 태이의 품에 안겨 옷자락을 쥐었다. 고사리 같은 손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담아, 이제 다울이 데리러 가자.”

“빠아, 으우, 압바, 빠아…….”

“…….”

“압바아, 빠!”

담이가 처음으로 ‘아빠’를 외친 순간이었다. 태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미묘한 감정이 담긴
시선이 담이에게 닿았다.

방금 아빠, 라고 한 건가.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유독 따스했다. 담이의 색색거리는 숨소리, 순수함으로 가득 찬 눈망울, 옷자락을
단단히 쥐고 있는 손까지. 따듯하지 않은 게 없었다.

태이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마음속에서부터 알 수 없는 벅차오름이 끓어올라 심장이 쿵, 쿵,


뛰었다.

“빠아, 압바, 압바!”

“…….”

“으우?”

“응, 담아. 아빠야.”

말뜻을 전부 알아들은 걸까. 담이가 꺄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청량하고 맑은 웃음소리에 태이가 슬며시 따라
웃음을 흘렸다.

* * *
태이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 다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몇십 분 전, 공항 한복판에서 소란을 피우던 다울은 남자들의 손에 이끌려 인적 드문 곳까지 강제로 옮겨졌다.


보는 눈이 많아서 마음이 조급해진 카쿠치 신코가 재빨리 손을 쓴 것이었다.

죽어라 반항할 것 같았던 다울은 의외로 순순히 그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태이가 공항을 완전히 벗어났을 때
즈음에서야 귀신같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장소를 옮겨 한숨을 돌린 카쿠치 신코는 제 직원을 시켜 물을 구해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람이 오가지 않는
공터에 덩그러니 선 다울은 숨을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거머리 같은 놈, 눈 똑바로 떠라. 못 배운 티 내기는.”

“못 배운 티 내는 건 할배도 마찬가지면서.”

“그래, 네가 언제까지 기를 쓰고 버티는지 보자.”

부어라.

짧은 명령과 함께 다울의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렸다.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입고 온 옷까지 축축하게


젖어 물기가 뚝뚝 흘러내릴 정도였다.

다울은 끓어오르던 속이 확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잠깐이었으나 한계까지 확장되었던 동공이 서서히 원상태로
돌아왔다.

물을 끼얹으라고 명령한 카쿠치 신코는 온몸이 푹 젖어 처량한 신세가 된 다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아까처럼 쉬이 대들지 않는 게 이상했기 때문이다.

손등으로 얼굴에 흘러내린 물기를 닦아 낸 다울이 주먹을 꽉 쥐었다. 고개를 숙인 상태라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지만, 이거 하나는 유추할 수 있었다. 방금 닦은 건 대차게 부어진 물이 아니라,
왈칵 차오른 눈물이었다는 것.

“네가 나를 우습게 봐도, 한참 우습게 봤구나.”

“우습게 본 적 없어.”

“우습게 보지 않았다는 놈이,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행동하겠냐!”

“할배가 뭘 알아. 나는, 전부터 당신이 담이랑 정태이를 데리고 갈까 봐 마음 졸이면서 살았어. 알기나 해?”

악에 받친 눈빛이 그에게 닿았다. 다울은 진심으로 억울했다. 정말 우습게 봤다면, 이런 수모를 당하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쿠치 신코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애초에 일반인이 대규모 야쿠자 집단의 수장을 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다울은 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겁대가리 없는 짓을 벌인 것이다.

“할배는 아무것도 몰라. 정태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그놈이 어떤 마음으로 살았든, 상관없다.”

심호흡을 내뱉으며 마음을 한 번 가라앉힌 다울이 이야기를 꺼냈다. 주제는 당연히 정태이였다. 카쿠치 신코는
어떤 말을 하든 듣지 않겠다는 심보로 대응했다.

“하나뿐인 핏줄이잖아. 정태이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할배 가문에서 어렸을 때부터 학대당했다고 그랬어.
그 감정 없는 정태이가, 다시 상상하기도 싫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고!”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에 주변 남자들이 애써 시선을 피했다. 태이가 심한 학대를 당하며 자라왔다는 건, 남자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은 많지만, 가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한다는 이유로
한 번도 도운 적이 없었다.

남자들 모두 같은 생각으로 지내왔으나, 누군가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을 듣게 된 건 처음이었다. 워낙 무심한


태이라 어렸을 때의 기억은 잊었으리라 생각했는데, 묘한 죄책감이 각자의 마음 한구석에 들어와 박혔다.

카쿠치 신코 또한 다울의 말에 주춤거렸다. 말은 함부로 해도 그토록 아끼던 손주였으니, 신경이 쓰이긴 했나


보다. 다울은 이때를 기회 삼아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 끔찍한 가문에서는 불행하게 자랐지만, 나랑 있을 땐 그런 거 모르고 지냈어. 물론, 처음에는 많이


삐걱거렸어도, 정말 행복하게 지냈단 말이야. 나한테 웃어도 주고…….”

말하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했다. 숨을 죽이고 다울의 말에 집중하던 남자들이 하늘을 보며 눈물을 삼켜냈다.

행복하게 지냈다니, 그 냉동 인간이 웃었다니!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누구보다 진지한 다울의 태도를 보니


신뢰가 갔다.

“네 녀석이 아무리 그런 말로 동정을 사도…….”

“동정 아니야,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거야. 할배는 안 봐서 모르잖아. 정태이가 나랑 사는 동안, 얼마나,
얼마나 행복했는지.”

다울의 머릿속에 지난날의 기억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빙의된 후, 태이를 마주했을 때. 처음으로 태이에게
두근거림을 느꼈을 때. 늦은 새벽, 그가 피곤함을 무릅쓰고 담이와 자신을 위해 불족발을 사 왔을 때.

사소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눈물샘이 자극됐다. 입이 마음대로 움직여서 ‘정태이는 나랑 사는
동안 행복했다’라는 말을 막 뱉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동안 진심으로 행복했었다.

“정태이는 자기가 학대당하며 컸어도, 담이한테는 정상적인 삶을 주려고 했어. 그러니까 나도 정태이한테 더
나은 삶을 선물해 줄 거야.”

“하, 참…….”

“그러니까 할배, 제발 정태이 좀 포기하고 돌아가 줘.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자존심에 금 가는 걸 가장 싫어하는 다울이 찬 콘크리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무릎을 꿇었다. 아까부터
소리를 꽥꽥 지르며 버릇없이 굴던 태도와 180 도 다른 모습이었다.

짧은 사이에 다울의 성격을 파악한 카쿠치 신코가 당황한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하니 더
밀어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는 다울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여서 양심이 쿡쿡 찔리기도 했다.

다울의 짠한 모습에 울컥한 조직원들은 모두 등을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 인상이 험악하고 성깔이 더러워 보여도,
그들은 불쌍하고 여린 것에 유독 마음이 약했다.

“가문의 수장이기 전에 정태이의 할아버지잖아. 제발, 행복하게 살게 해 줘.”

엉금엉금 기어가 카쿠치 신코의 바짓가랑이를 붙든 다울이 간절하게 빌었다. 꼭 어디까지 불쌍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듯했다.

“다울아.”

그때였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을 것 같았던 공터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목소리는, 정태이였다.

뒤늦게 도착한 태이는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게 현실이 맞는 건지 의심부터 하고 봤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다울이 카쿠치 신코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 있는 게 가엾었다. 심지어 온몸이 물에 쫄딱 젖어 있는 상태였다.

몇십 분이 넘도록 카쿠치 신코를 상대하고 있던 다울이 태이를 발견하고 헤실거렸다. 너른 품에 안긴 담이가 활짝


웃고 있어서, 화답하듯 웃어 준 것이었다.

“너, 태이 너 이 자식.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여태 데리고 살았던 거냐!”

“이쯤 하셨으면 포기하시죠. 저 무슨 일이 있어도 본가로 안 돌아갑니다.”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지껄일 수가 있냐. 애초에 약속된 거였고!”

“그깟 약속 따위, 뭐 중요하다고. 제가 지금 참고 있는 걸 감사히 여기세요.”

단호하게 대답한 태이가 매달려 있는 다울을 떼어 내 제 옆으로 데려왔다. 카쿠치 신코를 상대하느라 힘을 다 쓴
다울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찬물을 뒤집어써서 새파랗게 질린 입술은 물론이고, 팔과 다리까지 심하게
후들거렸다.

다울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휘청거리자, 태이가 얇은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제 몸에 기댈 수 있게끔 해


주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하루에게서 걸칠 만한 외투를 건네받아 다울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제 사람이고, 제 가족이에요. 함부로 건드려도 될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 손으로 할아버지 목숨 끊게


만들지 마세요. 마지막 부탁입니다.”

카쿠치 신코는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다울에게 관심을 주지 않던 녀석이, 이제는
없으면 죽을 것처럼 다정하게 굴고 있었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상황인가. 그래도 다울을 만나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는 게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다울을 건드렸다며 협박까지 해왔다. 살기 가득한 눈으로 카쿠치 신코를 바라보는 게 소름이 돋았다.
태이는 진심으로 제 할아버지를 죽일 작정이었다. 태이의 묵직한 경고에 타격을 입은 그가 말을 아꼈다.

“절연해, 정태이 좀 놔 줘, 제발…….”

힘없는 목소리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다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 안에 이 몹쓸 관계를 끊어 놓고


싶어서, 확답을 얻어낼 때까지 죽어라 덤벼들었다.
“저 끈질긴 놈, 아주 독하다. 독해.”

“할배가 더…….”

“쯧쯔, 내가 이런 꼴 보겠다고 손주 녀석을 후계자로 삼은 줄 아느냐. 망할 것들.”

침묵 사이로 신경전이 오갔다. 카쿠치 신코는 태이도, 그 아들인 담이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는
거대한 야쿠자 집단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늙었어도 무서울 게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신경전에서 이길 방법은 오직 부딪치는 것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특히나 어려서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은 태이는 아무도 당해 내지 못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카쿠치 신코가 곤란한 얼굴로 뒷목을 부여잡자, 뒤편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눈을 서늘하게 떴다.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태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경계하며 다울을 보호했다. 언제 어디서
공격이 날아올지 몰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내가 이대로 얌전히 돌아갈 것 같으냐.”

“그러시는 편이 좋을 텐데요.”

할아버지와 손주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치고 살벌했다. 태이는 우직하게 선 채 막힘 없이 대답을 뱉었다.

“네가 이길 거라는 생각은,”

콰직!

카쿠치 신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태이의 뒤에서 기회를 보던 조직원 한 명이 달려들었다. 손에는 거친
각목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공격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각목이 휘둘러지기 전에 태이가 달려든 남자를 손쉽게 제압했기 때문이다.
손목이 꺾이고, 각목이 큰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라졌다.

툭!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태이에게 제압당한 조직원이 들고 있던 각목을 놓쳤고, 반 토막 난 각목은 그대로 날아가
다울의 머리를 맞고 떨어졌다.

“아, 씨…….”

다울의 자그마한 목소리를 끝으로 주변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태이의 죽은 시선이 달려든 조직원에게 향했다가, 정수리를 두 손으로 문지르고 있는 다울에게 향했다.
마지막으로는 싸하다 못해 살벌한 눈빛으로 카쿠치 신코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거 큰일 났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머지 조직원들이 슬금슬금 멀어지기 시작했다. 몇몇은 태이에게 달려든 조직원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거기서 태이를 건드리긴 왜 건드리냐고!


누구 하나가 먼저 덤벼든 이상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조직원들은 크게 다치기 전에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어흑, 컥, 너 이, 쿨럭!”

“수, 수장! 태, 태이, 진정, 그, 진정을.”

자리를 뜨긴 무슨. 태이는 그럴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카쿠치 신코의 앞까지 다가간 태이가 그의 재킷 안에서 단도를 빼냈다. 늘 품에 단도를 품고 다닌다는
사실은 야쿠자로서 기본으로 알고 있던 상식이었다.

그렇게 빼내어 든 단도는 정확히 카쿠치 신코의 가슴팍에 닿았다. 다른 손으로는 발버둥 치지 못하도록 카쿠치
신코의 목을 힘껏 조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자극하면 정말 칼부림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수장이 위험에 처하자, 근처에 있던 조직원들이 하나같이 당황해 태이를 진정시키느라 난리였다. 그러나 태이의
귀에 그들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멍하게 앉아 정수리를 문지르고 있던 다울은 처음 보는 태이의 모습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살벌한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는데, 지금의 분위기는 여태까지와 비교도 못 할 정도였다.

분명 말려야 할 것 같은데, 말리기 싫었다.

‘정태이가 안 막아 줬으면 나 진짜 뒤질 뻔한 거잖아……?’

허공에 손을 뻗고 목소리를 내려던 다울이 얌전히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지금 상황에서 태이를 말릴 수 있는
건 오직 다울 뿐인데, 마지막 희망까지 잃은 조직원들은 절망에 빠졌다.

가만히 있어도 태이가 알아서 날뛸 텐데, 다울은 굳이 한마디 거들었다.

“아, 머리 깨질 뻔했네. 아파라…….”

조직원들은 포기해 버렸다. 방금 다울의 발언으로 인해 태이의 눈이 제대로 돌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무슨 수를
써도 태이를 말릴 수 없게 됐다.

“허억, 컥, 켁!”

다들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카쿠치 신코의 괴로운 기침 소리가 들렸다. 제 할아버지가 다 죽어 가는데 태이는


감정 없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단도가 점점 카쿠치 신코의 살갗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1cm 도 남지 않아, 손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살이
서늘한 칼날에 찢겨나갈 듯했다.

이러다간 수장이 정말 죽고 만다.

“태, 태이, 제발 수장을 놓아주세요!”

“태이, 이대로 조용히 돌아가겠습니다. 제발!”

조직원들의 처절한 외침이 오히려 독이 되었던 걸까. 단도를 쥔 손이 휙,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팔이 크게 치켜올라갔다 떨어졌다.

“야, 저, 정태이! 진짜 죽이면 안 돼!”

“…….”

그때, 다울의 다급한 목소리가 태이를 막았다. 아니, 살인을 막았다 해도 무방했다. 아무리 그래도 태이가
살인을 저지르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카쿠치 신코가 절연하고 돌아가면 야쿠자 집안과의 인연도 끝인데,
여기서 살인을 저지르면 모두 물거품이 된다.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거다.

거짓말 같게도 태이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크게 뜨인 눈과 줄어들었던 동공에 서서히 힘이 풀리고 있었다.
이제야 이성이 조금 돌아온 모양이었다.

태이는 고개를 숙여 카쿠치 신코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고 또 낮은


목소리였다.

“이 자리에서 연을 끊지 않으면, 내일 시체로 일본까지 흘러가게 될 겁니다. 끝까지 고집부려 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당신을 죽이는 게, 어려서부터 내 소원이었거든.”

자그마한 감정 하나조차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에 카쿠치 신코의 표정이 굳어 갔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그가 가장 잘 알았다.

“망할 자식 같으니라고. 커흡, 켁, 너 같은 놈을 손주라며 후계자로 키운 내가 한심할 지경이다. 그래, 나도 내


모가지 노리는 손주 새끼 필요 없다.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날 생각하지 마라!”

끝내, 카쿠치 신코가 절연을 선언했다. 20 년 동안 태이의 손목을 옥죄고 있던 사슬이 드디어 풀린 것이다.

태이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잠깐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던져 놓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괘씸함과 분노로 가득 찬 카쿠치 신코의 눈빛 속에


무언가의 서운함이 담겨 있었다.

드디어, 할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건가.

태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싸워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할아버지가 저리 미련도
없이 관계를 끊어 낸 걸까. 집착과 끈질김이 전부인 사람이라 고작 이런 것에 물러나지 않을 게 분명한데 말이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뒤덮여 버렸다.

“다시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다울이 주먹을 꼭 쥐었다. 드디어, 드디어 정태이가 저 지긋지긋한 야쿠자 집안에서……!

원하는 답을 얻어 낸 다울은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환한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행복감에
마음 깊은 곳이 울렁였다.

“다들 멀뚱히 서서 뭐 하냐, 당장 일본 돌아가는 티켓이나 끊어 와라! 저 맹랑한 것들,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보자.”

태이와 담이를 포기한 카쿠치 신코는 상황을 질질 끌지 않고 떠나 버렸다. 마지막까지 미련스러운 눈으로 태이를
바라보았지만, 태이는 무심한 시선으로 대응했다. 실컷 날뛰어 놓고, 이제 와서 저런 눈이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불구경하듯 상황을 지켜보던 조직원들은 눈물을 머금은 눈빛으로 다울과 태이를 한 번씩 쳐다보고 잽싸게 튀었다.
그들이 모두 떠나가니 복잡했던 공간이 조금이나마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멍하니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다울이 치아를 예쁘게 드러내며 웃었다. 처량하게 애원했던 건 모두 잊고,
그저 태이와 담이를 지켜냈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제 정말 마음 편히 살 수 있겠구나. 우리 세 사람.

고개를 들어 태이를 바라본 그가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보였다. 뒤따라 들리는 목소리가 명쾌했다.

“정태이, 내가 나 믿으라고 했지?”

“…….”

“뭐야, 왜 말이 없어?”

“고마워서.”

진심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묵직하게 건네진 목소리에 얼굴을 붉힌 다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막상 들으니 괜히 울컥했다.

“평범한 가족으로 살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얼굴이 막 달아오르고 있는데, 또 한 번 진심 어린 목소리가 다울의 귓가를 타고 흘러들었다.

“그, 그렇게까지 고마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사랑해, 다울아.”

“……어? 어?”

“사랑한다고.”

입술이 빠르게 맞부딪쳐 왔다. 부드럽고, 말캉한 느낌에 눈을 꼭 감은 다울이 고개를 비틀자, 기다렸다는 듯
혀를 섞어오던 태이가 두어 번 짧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입술을 떼고 태이와 눈을 마주한 다울은 그저 멍하게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훤칠하게 웃는 태이의 얼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서, 심장이 튀어나올 듯 뛰어댔다.

아까까지 살벌하게 칼을 휘두르던 태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얼떨떨하지만, 환해진 낯빛이 보기 좋았다.

“빠아, 으우, 음마아!”

“다, 다, 담아, 담이야, 봤어?”

“아우으, 마아, 쭈우!”

다울이 한참 태이에게 빠져 있을 때, 품에 안긴 담이가 옹알이를 하며 제 존재를 밝혔다. 입술을 쭉 내밀고


옹알이하는 게 키스하던 두 사람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아무래도 태이와 다울이 입 맞추는 걸 보고 따라 하는
듯했다.
“담이야, 이런 거 배우면 안 돼……!”

“쭈우, 빠아, 쭈!”

빨갛게 익은 사과 같은 얼굴로 도리질 치는 다울이나, 해맑은 얼굴로 두 사람을 놀리는 담이가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주변에 꽃이 피어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랑스럽다.

“푸흡…….”

태이가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평범한 가족 같은 건, 꿈도 못 꾸던 일이었는데. 지금 이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평범하고, 행복해 보이는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진심으로 사랑해 보는 것도, 제대로 된 가정을 갖게 된 것도, 모두 이다울 덕분에 이룰 수 있었다. 태이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다울의 시선이 온전히 태이에게 닿았다. 처음에는 많이 삐걱거리기도 했고, 사소한 다툼도 잦았다. 그러나
지금은 초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진전되어 있었다.

여전히 무심하지만 다정하고, 거칠어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 따스한 사람. 영원히 함께해도 좋을 소중한 내 사람.

이제 이다울에게 있어 정태이는 이런 존재였다.

외전 1. 담이의 소원

아기를 키우기 시작하면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른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간신히 배를 뒤집고, 어설프게 걸어
다니던 담이는 어느덧 의젓한 5 살이 되어 유치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모두가 잠에서 깨지 않은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다울은 심장이 바닥에 처박히는 기분을 느끼며 하루를
시작했다.

“흐아, 깜짝이야! 망할 호랑이 문신. 아침부터 눈 마주쳤잖아, 씨…….”

어젯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이가 상의를 껴입지 않고 잠든 모양이었다. 침대에 얼굴을 묻고, 등을 시원하게
드러낸 채 잠에 빠진 모습이 얄미웠다. 야쿠자 가문을 벗어났어도, 이전에 새긴 문신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다울은 등에 새겨진 호랑이와 눈싸움을 하다가, 졌다는 듯 이불을 폭 덮어 버리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담이야, 일어나 있었어?”

“우웅, 일어나써.”

“나 씻고 나올게, 심심하면 거실에서 놀고 있어.”


“웅!”

잠에서 깬 담이가 멀뚱한 눈으로 다울을 쳐다봤다. 따로 마련해 놓은 어린이용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이
인형같이 귀여워서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다울은 담이를 두고, 욕실로 들어와 씻었다. 평일 아침에는 분주하게 움직여야 해서 바빴다. 씻고, 태이가
일어나서 담이 밥을 먹일 동안 유치원에 갈 가방을 싸 주고, 장난감으로 어질러진 집을 대충 정리하고 나면 아홉
시가 훌쩍 넘어가곤 했다.

오늘 하루도 무난히 보내기 위해 힘차게 세수를 끝마친 그가 방으로 돌아왔다. 욕실에서 돌아오던 중, 거실을
살펴봤는데 놀고 있어야 할 담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이야, 뭐 해?”

“다우리 아빠 호랑이 무섭찌? 담이가 가려써.”

“허업……! 담이야!”

“헤헤, 담이 예쁘게 칠해찌.”

조용하다 싶으면 무조건 사고 치고 있는 건데, 다울이 사고 현장을 목격했을 땐 이미 말릴 수 없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침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은 담이는 태이의 등을 형형색색의 사인펜으로 칠하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요란하게


새겨진 문신 위에 낙서까지 더해지니 꼴이 가관이었다.

잽싸게 사인펜을 빼앗은 다울이 곤란하다는 눈으로 태이의 등을 빤히 응시했다. 반면, 사고를 친 담이는 해맑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압빠가 일어나서 태이 압빠 호랑이 보고 놀라써. 그래서 담이가 호랑이 다 칠해써.”

“그런 거야? 담이야, 걱정해 줘서 고마워.”

“히히. 담이 칭찬 받아따. 솜사탕 삼쭌한테 자랑해야지이.”

“잠시만, 잠시만 담이야! 스탑! 다음부터는 아빠 등에 이런 걸로 낙서하면 안 돼, 알겠지.”

누가 다울의 핏줄 아니랄까 봐. 칭찬을 듣고 신난 담이가 하루 삼촌에게 자랑하러 가겠다며 방방 뛰어 댔다.


산만한 움직임에 황급히 손을 쥐어 잡은 다울이 앞으로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걸 가르쳤다.

자랑하러 갈 생각에 정신이 팔린 담이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뛰쳐나갔다. 이 세상 산만함이 아니었다.

혼자 남은 다울은 곤히 잠든 태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가 낙서를 하는데 깨지 않고 자는 게


신기해서였다.

“하아, 이걸 다 어떻게 지우지.”

물티슈 두어 장을 뽑아 온 다울이 태이의 등을 박박 문질러 닦기 시작했다. 다행히 여러 번 문지르다 보니 사인펜


자국들이 지워졌다. 비교적 옅은 색들은 금방 지워지는데, 문제는 짙은 색들이었다.
“우리 담이, 진짜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치는구나.”

짙은 파란색 사인펜을 문질러 닦으니 숨겨져 있던 호랑이 눈이 서서히 드러났다. 아빠 무서운 거 보지 말라고
짙은 색으로 칠해놓은 게 어이없이 기특했다. 피실피실, 웃음을 흘리며 등을 닦던 중 다울의 몸이 기울어졌다.

“어, 어어……?”

“아침부터 뭐 해, 다울아.”

“가만히 있어, 담이가 등에 낙서해서 지우는 중이란 말이야.”

“낙서?”

“으응, 거의 다 지워지긴 했는데.”

태이도 담이의 엉뚱함을 당해 내지 못했다. 자는 동안 뭔가 옆에서 꼬물거리는 거 같더라니, 등에 낙서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헛웃음을 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슬쩍 고개를 돌려 거울을
확인해 보니, 다 지워지지 못한 사인펜 낙서가 등 이곳저곳에 보였다.

다울은 그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 등을 닦아 내기 바빴다. 닦는 데 얼마나 집중했는지, 입술까지 삐죽 튀어나온


채였다.

“많이도 그려 놨네.”

“아직 다 안 지워졌어, 조금만 더.”

“…….”

“뭐야, 그 눈빛은.”

“아침부터 노골적으로 만져 대니까, 하고 싶어져서.”

다울의 동그란 머리통 위로 능글맞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몇 년이 지나도 저놈의 입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담이가 들었다면, 뭘 하고 싶은 거냐며 물음표를 남발해 댔을 것이다. 이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 있던 다울은
누가 들을까 무서워 태이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이는 제 감정에 지나치게 솔직했다. 입은 틀어막혔지만, 능구렁이 같은 손은 어느새 다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죽을래? 이씨. 이거 놔.”

“문 잠글까, 다울아.”

“아니, 절대 아니. 아침부터 무, 무슨 짓을 하려고.”

뒷걸음질 치던 다울이 침대에 걸려 뒤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는데,
제 발로 잡아먹어 달라 유인하는 꼴이었다.

그때를 노려 다울의 위에 올라탄 태이가 덮치기 직전의 자세를 취했다. 누가 본다면 상당히 민망해질 만한 자세와
분위기였다.
달칵!

“아빠아아, 삼쭌이 칭찬 스티커 두 개 줘써!”

“허, 허억! 담, 담이야, 담이야 잠깐, 으악!”

“압빠 둘이서 머 해? 담이도 끼워 줘. 담이도 할래.”

양쪽 볼에 딸기 스티커를 붙이고 나타난 담이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들에게 민망한 장면을 들킨 다울은
당황해서 태이를 힘껏 밀쳐 내 버렸다. 평소에는 발휘되지 않던 힘이 이럴 때만 기운 좋게 솟구쳤다.

얼떨결에 밀쳐진 태이는 눈썹을 찌푸린 채, 담이를 안아 들었다. 오늘은 잠깐이라도 붙어먹을 생각이었는데,
분위기가 와장창 깨져 버려서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담이를 안은 손은 퍽 다정했다.

몸이 들어 올려진 담이는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비행기 놀이를 좋아해서, 태이가 들어 올려 줄 때마다 세상
행복한 얼굴로 웃곤 했다.

“꺄아아, 헤헤! 비행기, 비행기!”

“정담이, 아빠 등에 낙서하면 돼, 안 돼.”

“담이 낙써 안 해써. 다우리 압빠가 무서워해서 호랑이 쓱싹 지워 준 거야!”

“조그만 게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하네.”

엄한 말투에 주눅 들지 않고 말대답하는 모습이 당돌했다. 커 갈수록 행동이 점점 다울을 닮아 가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담이를 바라보던 태이가 끝내 웃음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의도는 좋았는데, 사람 피부에 사인펜 칠하는 거 아니야. 대답해, 정담이.”

“웅! 알게써.”

“다음에 또 이러면 혼날 줄 알아.”

“압빠 화나면 뿔나, 무서워! 담이 싸인펜 안 칠하께.”

“그래, 착하다. 밥 먹게 나가자.”

부자의 대화에 얼이 빠진 다울이 입을 떡 벌렸다. 의도는 좋았다니. 저런 말을 덧붙이면, 낙서해도 괜찮은 줄


알고 유치원에서 친구에게 똑같이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담이는 혼난다는 말 한마디에 다시는 하지 않겠다며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다울은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내가 얘기할 때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정태이가 얘기하니까 반성하는 거야?


그런 거야?

이전에 부엌에서 장난을 치던 담이가 실수로 끓는 물을 엎은 적이 있었다. 다행히 담이는 다치지 않았지만, 앞에
서 있던 다울의 발에 뜨거운 물 일부가 쏟아져 화상을 입었었다.

나름 담이를 오냐오냐 키우던 태이는 그때 처음으로 화를 냈다. 늘 무심하게 경고하고 넘어가던 그가 벼락같이
화를 내며 혼낸 뒤로 담이는 혼난다는 말을 무서워했다.
물론, 혼난 뒤에는 늘 태이가 애정으로 안아 줘서 트라우마가 생긴다거나 하지 않았다. 좋은 훈육 방식이었다.

내가 정태이처럼 막 크게 혼내지 않아서 그런가, 우리 담이는 나를 너무 안 무서워해. 뭐, 좋은 거긴 하지만…….

볼을 긁적이며 부엌으로 나간 다울이 식탁에 나란히 앉은 뒷모습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담이의 성격이
다울을 닮았다고 해도, 뒷모습은 태이와 붕어빵이었다.

“담이야, 오늘 준비물 뭐랬지?”

“선생님이 담이 이름 이뿌게 써진 물풀이랑, 크레파쓰랑, 색종이 가지구 오래써.”

“으음, 그렇네. 담이야, 오늘 유치원에서 이 색종이로 액자 만든대. 스케치북에 소중한 보물 그려서, 색종이
액자에 넣을 건가 봐.”

노란색 유치원 가방에서 학부모용 알림장을 꺼낸 다울이 오늘 할 놀이 활동을 확인했다. 매일 가지고 가야 하는


준비물이 달라서, 알림장을 꼼꼼히 살펴 봐야만 했다.

정담이.

견출지에 이름을 대신 써 준 다울이 스티커를 떼어 내 물풀에 붙였다. 크레파스에는 이전에 태이가 이름을 써 준
적이 있어서 건너뛰어도 될 것 같았다. 동글동글한 다울의 글씨체와 달리 시원스레 뻗은 글씨체가 태이와 잘
어울렸다.

“담이야, 밥 다 먹었어?”

“웅! 이제 치카치카 하면 끄읕.”

식탁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린 담이가 욕실까지 전력 질주했다. 어디 만화에서 본 건지,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치며 욕실로 들어가더니 혼자 칫솔질을 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보다 더 산만한 태도에 고개를 휘젓던 다울이
준비물을 노란 가방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 사이, 2 층 욕실을 이용해 씻고 내려온 태이가 옷을 갈아입고 차 키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담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건, 언제나 태이의 몫이었다.

방에서 쉬다가 온 하루가 뛰어다니는 담이를 붙잡고 옷을 갈아입히러 들어갔다. 그나마 하루가 이 집에 계속
머물러 줘서, 육아가 덜 힘들 수 있었다.

담이가 옷을 갈아입을 땐 시간이 조금 비었다. 태이는 항상 이때를 기회 삼아 수작을 걸었다. 다울의 팔을


잡아끌어 벽에 밀어붙인 그가 망설임 없이 입을 맞춰 왔다.

“으, 으웃……!”

매일 아침 겪는 일이라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언제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태이는 이걸 가벼운


인사치레라고 생각했다. 짧게 입 맞추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짙게 하는 키스가 어딜 봐서 가벼운
인사치레라는 것인가.

혀가 깊게 파고들 때마다 입술 새로 민망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혀와 혀끼리 질척한 소리를 만들어 내며 얽히던
중, 2 층 계단에서 정신없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읏, 으웅……!”
담이가 뛰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울이 급히 몸을 밀어내 봤으나, 태이는 순순히 밀려나 주지 않았다. 이
장면을 들킬까 봐 심장을 졸이고 있는데, 발소리가 가까워지기 직전에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진 그가 능글맞게
웃었다.

덕분에 다울의 얼굴만 잘 익은 복숭아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샛노란 유치원 가방을 등에 메고 달려온 담이가
다울의 다리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물었다.

“얼굴 왜 빨개? 복쑹아 가태. 헤헤, 복쑹아.”

“다울이 부끄럽대, 가자.”

“다우리 왜 부끄더? 압빠, 왜야? 왜?”

“얼른 나와, 담아. 아빠보다 먼저 차에 타면 사탕 줄게.”

“와아아, 담이가 쩨일 먼저 갈 꺼야!”

질문 폭탄을 던지던 담이가 태이의 꾀에 넘어가 현관문을 단번에 나섰다. 장난스럽게 웃던 태이는 마지막까지
다울의 볼에 입 맞춰 주고 뒤돌아섰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저 여우 같은 면은 그대로였다.

다울은 푹 익은 얼굴 상태 그대로 굳어 있었다. 뒤늦게 하루가 그를 발견하고 말을 걸자, 부끄러움에 소리를


왕왕 지르던 다울이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한편, 태이는 담이를 데려다주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익숙하게 뒷좌석에 오른 담이는 어서 사탕을 달라며
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사탕, 사탕!”

“아빠보다 늦게 도착해서 없어.”

“아니야아, 압빠 자동차가, 어, 문이 안 열려서, 그래서 담이가 늦은 고야.”

“다음에는 꼭 문 먼저 열고 사탕 얻어가.”

무심한 말투지만, 분명 담이를 놀리고 있는 거였다. 담이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미끼를 던졌던 그는 수준급의
실력으로 상황을 넘기며 사탕을 주지 않았다. 최근 단 음식을 많이 먹어서, 이가 썩는 사탕이나 초콜릿은 당분간
금지였기 때문이다.

다울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단 음식을 그렇게 좋아하더니, 나와서도 좋아하는 게 신기했다. 다울이 임신했을
당시 딸기 생크림 샌드위치에 미쳐 있었던 모습을 떠올린 그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치, 압빠는 칫사해.”

“칫사해가 아니고, 치사해.”

“치사해!”

잔뜩 토라진 담이가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부정확하게 뱉었다. 치사하다는 말은 또 언제 배운 걸까. 무덤덤하게


발음을 교정해 준 태이가 액셀을 밟았다.
담이는 단순했다. 토라지더라도 일 분만 지나면 원상태로 돌아왔다. 유치원에서 배운 동요를 흥얼거리던 담이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태이에게 말을 걸었다.

“압빠, 동생이 머야.”

“너보다 어린 애가 태어나서, 우리 가족이 되는 거야.”

“우리 병아리 반 혀누는 동생 있대써.”

“그래?”

“웅, 여자 동생이래써. 근데 담이는 동생 없찌?”

대충 대꾸해 주며 운전하던 태이가 백미러를 통해 담이를 쳐다봤다. 호기심과 기대에 가득 찬 눈이 무척이나


순수해서 부정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없지.”

“그러면? 그러면 다음에는? 내일 밤에는 담이 동생 이써?”

“잘하면 있을 수도 있고.”

“왜애? 담이가 잘해야 대? 담이 잘하께. 담이 동생 가꼬 시퍼.”

다울이 들으면 기겁할 만한 대화였다. 동생을 갖고 싶다니. 태이는 담이가 태어난 뒤로 둘째 가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다울이 워낙 입덧으로 힘들어해서 다시는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태이와 달리 담이는 진심으로 동생이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차 안에서 동생을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담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태이를 설득했다.

“다녀와.”

“압빠, 동생! 알겠찌?”

“뭘 알겠지야, 얼른 들어가.”

태이는 담이가 갖고 싶다고 말하는 건 전부 사 주는 편이었다. 안 그래 보여도 나름 아들 바보였다. 하지만


동생은 갖고 싶다고 해서 덜컥 손에 안겨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다울이 임신했을 때를 느릿하게 떠올렸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둘째는 무리일 듯했다.

저러다 말겠지.

태이는 단순한 담이가 동생을 포기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며칠 후면 ‘동생’이라는 단어조차도
까먹을 게 분명했다.

* * *
집에 들어오자마자 기분 좋은 바람이 통창 너머로 흘러들어와 다울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유독 맑고 상쾌한
날이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울과 공원에 다녀온 담이는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날이 좋아서 마음껏
놀게끔 두었더니, 나중에는 흙바닥에서 새들과 함께 엎어져 노느라 옷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와중에 담이의 한 손에는 작은 잇자국이 남은 떡꼬치가 들려 있었다. 다 놀고 나니까 배가 고프다고 해서 다울이


간식으로 사 준 것이었다.

“담이야, 일단 씻자.”

“압빠는?”

“아빠? 잠깐 회사에 갔어, 아마 곧 올 거야.”

“크응, 담이 금방 떡꼬치 먹으께. 다 먹고 씻을래애.”

떡꼬치가 어지간히도 맛있었나 보다. 아담한 크기의 입에 떡을 마구 욱여넣은 담이가 자랑스럽게 브이를 했다.

누구 아들인지, 참 해맑단 말이야. 뿌듯한 얼굴로 담이를 바라보던 다울이 다 먹은 꼬치를 건네받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목욕을 시키기 위해 옷을 벗겨 놓으니, 아주 꼬질꼬질한 게 상태가 말도 아니었다. 기껏 사서 입힌 흰색 옷도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다음에는 검은 옷 입고 가야겠다, 담이야.”

“압빠처럼?”

“으응, 아빠처럼. 자, 욕조로 들어가.”

“와아, 물이다! 물!”

담이는 물을 좋아해서 목욕 시간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목욕하기 싫어한다던데, 담이의 경우 한 번


욕실에 들어가면 나오기 싫어해서 문제였다.

몸에 거품질을 하고, 깨끗한 물로 씻어 내니 본래의 뽀송뽀송한 피부로 돌아왔다. 말랑한 볼이 귀여워서 두어 번


만지작거리던 다울이 싱긋 웃었다. 아이를 키우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이렇게 사소한 부분에서 힐링 받는 게
좋았다.

한참 욕조 안에서 물오리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담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언가 잊어버린 걸 떠올릴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담이야, 뭐 까먹었어? 선생님이 오늘 준비물 있대?”

“아니이, 아닌데.”
“그러면? 잘 생각해 봐.”

“으움, 혀누, 혀누랑…….”

“병아리 반 현우?”

병아리 반 현우, 담이가 이전에 태이에게 말했던 ‘동생 있는 친구’였다. 며칠 까먹고 지내더니, 이제야 슬슬
기억을 되짚어 보는 듯했다.

멍하니 생각에 빠진 담이를 힘껏 안아 들어 욕실 밖으로 데리고 나온 다울이 물기를 닦이고, 옷을 갈아입혔다.


뭘 까먹었길래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하는 걸까. 담이의 신중한 모습에 덩달아 궁금해진 다울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자, 바나나우유.”

“고마씁니다.”

“생각났어?”

“으움, 그러니까아, 아!”

바나나우유를 두 손으로 소중히 잡고, 빨대를 쪽쪽 빨던 담이가 눈과 입을 동그랗게 떴다. 작은 바나나우유를


보니 생각이 났다.

동생. 담이보다 작은 애가 태어나서, 가족이 되는.

“담이 소원이 이써.”

“담이 소원이 뭘까.”

“담이는 동생이 가꾸 시퍼!”

“…….”

“들어써? 담이 동생 가꾸 싶다구 한 거 들어써?”

다울의 동공이 1 초에 열댓 번씩 떨렸다. 설마, 담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동생이


태어나는 과정을 모르는 담이는 그저 해맑게 갖고 싶다고 말할 뿐이었다.

다울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담이 입을 살포시 틀어막았다. 태이가 이 대화를 듣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우선


지금은 담이에게 잘 설명해서 넘기고, 없었던 일로 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 담이야. 동생은 나중에, 응?”

“왜애? 담이는 지금 가꾸 시퍼. 주세요.”

“동생은 저어기 하늘에서 화, 황새가 물어다 줘야 가질 수 있는 거야. 황새가 일이 많아서, 담이 동생은 더 많이


기다려야 물어다 줄 수 있대.”

좋았어. 내가 이렇게 창의력이 뛰어났나. 하하!


동화책 읽어 주듯 담이를 설득시킨 다울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생이라니, 동생이라니! 안 그래도 요즘
들어 태이가 진득하게 붙어대서 허리가 남아나질 않는데, 담이가 동생 갖고 싶다는 말까지 하면, 아, 상상만
해도 무섭다.

한참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실망한 담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정말로 동생이 갖고 싶었던 걸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상황을 넘긴 다울이 멋쩍게 목 언저리를 긁적였다.

“압빠한테 말해두 황새가 어, 늦게 온대?”

“……어?”

“압빠는 다 해 줄 수 있자나. 쩌번에 마트에 없는 장난감두 압빠가 쨔잔 하고 줬자나.”

“담이야, 잘 들어. 동생 갖고 싶다는 얘기, 아빠한테 절대 비밀이야.”

“왜애?”

가끔은 아이의 순수한 물음이 잔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고민하던 다울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럴 때마다 담이의 집요한 시선이 끈질기게 쫓아왔다.

“으음, 황새가 아빠한테 비밀로 해야 한댔어. 그래야 동생 물어다 준대.”

“진짜아?”

“으, 으응. 담이야, 우리 사탕 먹을까?”

“담이 사탕 먹을 수 이써? 와아, 사탕. 사탕이다!”

“자, 담이야. 사탕 먹는 대신 꼭, 아빠한테 비밀로 하는 거다. 꼭!”

딸기 맛 막대사탕을 입에 문 담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다우리 압빠 바부, 동생 갖고 싶다구 한 거 이미


태이 압빠한테 먼저 다 말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다울을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담이가 키득거렸다.

삑, 삐비빅. 덜컥.

하필 막 비밀 약속을 받아 낸 타이밍에 태이가 들어왔다. 다울은 입가에 검지를 올리고는 다시 한번 입단속을


시켰다.

일을 끝내고 온 태이는 멀뚱히 사탕을 빨고 있는 담이를 발견하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단 음식은 당분간
금지일 텐데, 무슨 이유로 사탕을 준 걸까. 의심스러운 눈빛이 다울에게 닿았다.

다울은 급히 모르는 척을 했다. 먼 산을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가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태이가 그 손을


낚아채 잡았다.

“다울아, 사탕 왜 줬어. 이 썩는다며.”

“아, 아니. 한 번은 괜찮잖아.”

“나한테 숨기는 게 있는 건 아니겠지.”

“뭐, 뭘 숨겨. 하나도 숨기는 거 없거든!”


일부러 화를 낸 다울이 발을 쿵쿵거리며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을 하는 데 재주가 없었다.

다울은 침대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갑자기 화를 내서 그런가, 얼굴이 순간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뿐만 아니라 가슴도 심하게 두근거렸고. 아무튼 몸 상태가 이상했다.

“하아, 하아…….”

설마, 히트 사이클은 아니겠지.

불안한 기운이 다울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그는 빙의한 후로 여러 번 히트 사이클을 보내왔지만, 다른


오메가들에 비해 증상이 심하지는 않았었다. 임신의 영향이었는지는 몰라도, 약을 먹으면 금세 가라앉아서
괜찮았다.

그러나 방금 느낀 증상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뭐랄까, 이번만큼은 쉽게 넘어갈 수 없다는 걸 몸으로 확실히
깨달은 것 같았다.

하필 담이가 동생 이야기를 꺼낸 시점에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려 하다니. 이런 거지 같은 타이밍이 다 있나.

태이가 씻고 오기 전에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한 다울은 황급히 억제제를 꺼내 삼켰다. 평소에는 한 알씩 먹었으나,


오늘은 불안감에 세 알이나 털어먹었다.

끼이익.

방문이 천천히 열리며 소리를 냈다. 태이가 온 줄 알고 기겁하며 놀라던 다울이 약통을 던지듯 넣어 놓고,
서랍을 닫아 버렸다. 다행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태이가 아닌 담이었다.

“머야? 머 해?”

“아, 아무것도 아니야.”

“담이 사탕 다 머거써.”

“막대 이리 줘, 그거 계속 물고 있으면 이 상해.”

“웅.”

담이에게 아픈 모습을 들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약 효과가 빨리 돌아서 열감이 쉽게 가라앉았다. 역시,
사람 몸에 안 드는 약은 없다니까. 세 알을 먹기 잘했다며 속으로 안심하던 다울이 슬며시 웃어 보였다.

사탕을 다 먹고 아쉬워하던 담이는 폭신한 침대에 누워 몸을 뒹굴거리는 중이었다. 아까부터 비행기 노래를
부르는 걸 보니, 태이가 오면 비행기를 태워 달라고 하려는 모양이었다.

“왜 다 여기 있어.”

“압빠, 압빠!”

“침대 위에서 뛰지 마, 담아.”

“압빠, 담이 동생은? 황새가 왜 압빠한테만 비밀 해써?”


오 마이 갓. 다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당황한 건 태이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악의 없는 물음이었다.
담이는 그저 황새가 왜 아빠한테만 비밀이라고 한 건지, 진심으로 궁금했을 뿐이었다.

다울은 제 설득이 무참히 실패로 돌아갔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울상을 지었다. 이제 태이가 무슨 말을 하려나,
또 능글맞게 대꾸하려나. 반쯤 포기하고 있을 때 즈음, 태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아, 동생 얘기는 그만.”

“왜애? 담이는 동생이 가꾸 싶딴 말이야. 담이만 없써.”

“지금은 안 돼. 그 얘기는 그만.”

의외로 단호한 태도였다. 그가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하자,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담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다울은 이 상황을 어찌 넘겨야 할지 곤란했다. 담이는 울고, 태이는 쓸데없이 단호하고.

“흐이이, 시러. 압빠는 담이 가꾸 시픈 거 다 해 주자나! 흐아아앙, 쩐에는 내일 밤에 담이 동생 생길 수도


있따구 했자나, 흐이잉!”

내일 밤에? 생길 수도 있다고? 담이의 말을 곱씹어 보던 다울이 태이를 힘껏 노려봤다. 최근 들어 저런 앙칼진


눈은 보기 힘들었는데, 오래간만에 보니 전보다 더 사나워진 느낌이었다.

“담이야, 뚝 해. 동생은 나중에…….”

“흐아아아앙! 담이는 지금 가꾸 시퍼! 지금!”

얌전하고 착하던 담이가 웬일로 생떼를 썼다. 당황스러움에 담이를 말려 보려던 다울이 자그마한 발에 어깨를
맞아 힘없이 밀려났다. 고작 유치원생한테 무슨 힘이 있겠어, 하고 겁 없이 손을 뻗었는데 막상 얻어맞아 보니
굉장히 얼얼했다.

“아으…….”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평소보다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잠깐이었지만, 다울은 페로몬이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걸 느끼고 숨을 꾹 참았다.

태이는 언제나 눈치가 빨랐다. 다울의 몸 상태를 단번에 파악한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손은 어느새 담이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붙잡고 있었다.

“정담이, 눈물 그쳐.”

“흐윽, 흐이이잉, 압빠 미워.”

“그치라고 했어.”

“흐아앙!”

“안 되겠다, 따라와.”

발버둥 치는 담이를 어깨에 얹고 방을 나선 그가 빈방으로 향했다. 이전부터 담이를 혼낼 때마다 사용하는


방이었다. 다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 둘을 따라나섰다.
담이는 정말 동생이 갖고 싶어서 말했을 텐데,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고 안 된다고만 한 게 마음에
걸렸다.

방 앞에 서서 문에 귀를 가져다 댄 다울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몰래 엿들었다. 태이가 너무 심하게 혼내면,


그때 들어갈 작정이었다.

“정담이, 갖고 싶은 게 있어도 참아. 참을 줄도 알아야지.”

“흐끅, 담이는 안 참아! 담이는 가꾸 시픈 거 안 참아. 다 할 꺼야.”

차분하게 얘기하던 태이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안 참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이
어이없어서였다. 잘못했다고 말하기는커녕,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제 할 말만 늘어놓는 게 다울과 똑같아서
귀여웠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였다. 고집부리는 담이를 단단히 붙잡아 눈을 마주친 그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참아. 동생은 네가 아니라, 아빠들이 결정할 일이야.”

“히이, 너, 너무해…….”

“그리고 누가 그렇게 떼쓰래. 네가 발길질해서 다울이가 맞았잖아, 담아.”

“담이 일부러 안 그래써, 흐이잉.”

“반성하고 가서 다울이한테 제대로 사과해.”

밖에서 듣고 있던 다울이 소리 죽여 웃었다. 다정하게 꾸며 내서 말하지는 못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는


태이의 모습이 너무 그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떼를 쓰던 담이는 눈물을 뚝 그치고 나와 소심한 사과를 건넸다. 쭈뼛거리며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귀여워서 쉽게
용서해 준 다울이 담이를 꼭 안아 줬다.

담이도 아직 이렇게 아기인데, 더 어린 동생이 태어나면 잘 돌봐줄 수 있을까.

다울은 이 일 이후로 툭하면 둘째를 고민했다. 허리 걱정이 돼서 무서웠던 것뿐이지, 잘 생각해 보면 담이에게
동생을 만들어 주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무슨 생각해.”

“어?”

“며칠 동안 계속 멍하니 있잖아. 담이가 한 얘기 때문에 그래?”

“아, 아니. 아닌데. 그나저나 정태이, 너 오늘 늦게 온다고 했지?”

주말에도 고민은 계속됐다. 담이를 하루에게 데려다주고 온 다울이 침대에 엎어져 있자, 태이가 포실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담이가 없어서 시간이 남았는지, 여유롭게 옷을 갈아입던 그가 다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담이는 오늘 하루와 함께 놀이동산에 갔다. 담이가 태어난 후로 하루는 따로 나가 살며 가끔 집에 들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담이를 볼 시간이 부족해서 아쉽다며 주말을 이용해 놀이동산에 함께 가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다울은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일이 있는 태이는 오늘도 회사에 나가려는 모양이었고, 집이 조용해진
김에 계속 고민하던 답을 내려 볼 참이었다.

“늦게 올 예정이긴 한데, 최대한 빨리 올게.”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너 몸 아직 안 좋잖아. 억제제 먹었어?”

“으웅, 잘 먹고 있으니까 괜찮아.”

하여튼 몸이 조금만 안 좋아도 금세 알아차리니, 다울은 뭘 숨길 수가 없었다. 무심한 낯으로 다울을 걱정하던
그가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쓰다듬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한 듯했다.

카쿠치 가문과 완전히 연을 끊어 낸 태이는 회사에 있던 간부들을 전부 쫓아냄과 동시에 재정비에 들어갔다.
직원들도 많이 바뀌고, 회사 시스템도 바뀌다 보니 몇 년 동안 일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부사장인 마사키 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설렁설렁 일하던 태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모든 걸 뒤엎고, 다시 일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다울과 담이 덕분이었다.

“혹시라도 몸 상태 안 좋으면,”

“전화하라고? 알겠어. 너 그거 오백 번 얘기해서 귀에 딱지 앉을 것 같거든?”

“하루한테는 내일까지 담이 좀 봐달라고 말해 둘게.”

“어엉? 그래. 담이 솜사탕 좋아하니까 잘 있겠지.”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 전, 다울의 뒤통수를 끌어당겨 가볍게 입 맞춰 준 태이가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려 웃었다.
몇 년 사이에 까칠한 모습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다녀올게.”

순순히 눈을 감고 입을 맞춘 다울이 아쉽다는 듯 제 입술을 매만졌다. 은은한 복숭아꽃 향의 페로몬이, 닫힌


현관문 앞에 머물렀다.

헉, 나도 모르게 페로몬 흘렸다. 이게 왜 갑자기 나오고 난리야.

페로몬을 거두어들인 다울이 방으로 호다닥, 뛰어 들어갔다. 히트 사이클이 무서워서 조짐이 보일 때마다 약을
먹는 습관을 들였더니, 이제는 물 없이도 약을 삼킬 수 있는 지경까지 와 버렸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억제제가 든 약통이 손에 들렸다. 가벼운 통 안을 힐끔 쳐다보던 다울이 한숨을
내쉬었다. 절반 정도 차 있던 알약이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까지 먹으면 남는 약은 두 알…….”

한꺼번에 세 알씩 삼켜야 마음이 좀 진정되는데, 두 알밖에 남지 않았다. 다울은 곧장 나갈 채비를 마쳤다. 듣는


약은 이것뿐이라 다른 약을 쓸 수 없어서 멀리 있는 약국까지 부지런히 가야 했다.
“자전거 타고 가야지.”

얇은 외투를 걸치고 나온 다울이 주차장 앞에 묶인 자전거 자물쇠를 풀었다. 크림색으로 칠해진 자전거가 다울의
순한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당연히 이 자전거는 태이가 선물해 준 거였다.

익숙하게 자전거에 올라탄 다울이 페달을 힘껏 밟았다. 날씨가 그리 덥지도 않은데 몸 내부가 오묘하게
뜨거워지고 있었다.

방금 약 먹었는데 왜 효과가 안 도는 거야, 미친.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라, 내 몸아!

페달을 밟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다울은 달렸다.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이대로 길거리에서 히트


사이클이 터져 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약국까지 달려온 다울은 식은땀을 흘리며 문을 열었다. 규모가 큰 약국 안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의 다울에게 인내심과 도덕심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억제제, 효과 제일 좋은 억제제 빨리 주세요!”

“저기, 저기서 조금 기다리시면…….”

“죄송한데, 그럴 틈이 없어서 그래요. 진짜, 제발, 억제제 하나만 빨리 사고 나갈게요. 네?”

다급한 부탁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약사가 억제제 한 통을 내밀었다. 다울은 카드를 내어줌과 동시에
억제제 통을 열어 약을 꺼냈다. 참으로 황당한 행동이었다.

약을 무려 네 알이나 꺼내 삼킨 그는 이제야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돌렸다. 한 박자 늦게 계산을 마친 약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울을 나무랐다. 억제제도 정해진 양이 있는데, 저렇게 물 마시듯 때려 붓다니. 이런
환자는 또 처음이었다.

“후우, 감사합니다.”

“약 그렇게 드시면 안 돼요. 정해진 양대로, 아시겠죠.”

“아, 네에.”

약국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약사의 잔소리까지 더해지니 시선이 더


따끔거리는 게, 민망했다. 붉어진 얼굴로 볼을 긁적이던 다울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 약국을 나섰다.

좋아, 약도 샀으니까 집까지 최대한 빨리 가는 거야.

몸이 조금 진정되긴 했지만, 집에 갈 때까지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다울은 자전거를 끌고 나온 걸 후회했다.


차라리 택시를 탈걸.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먹어서 몸을 고생시키고 만 것이다.

집에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더 힘들었다. 페달을 밟는 다리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평소에 차만


타고 다녀서 체력이 더 거지 같아진 모양이다.

덜컥.

자전거로 십 분이면 올 거리를 사십 분이나 걸려서 도착했다. 기가 완전히 빨려 버린 다울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헥헥, 내쉬었다. 산책하고 온 강아지처럼 숨을 헐떡이는 게 본인이 생각해도 좀 우스웠다.

바닥에 누워 휴식을 취한 뒤에는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컵 마셨다. 얼음까지 넣은 찬물을 쭉 들이켜니 속이


시원하게 가라앉았다.

“집까지 오는 데 힘을 다 써서 그런가, 몸이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고.”

가슴께를 천천히 쓸어내려 보던 다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약사가 진짜 효과 좋은 억제제를 줬나 보다. 몸속


깊이 일렁이던 페로몬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으니 말이다.

지잉.

다울이 의아해하던 중,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화면이 반짝이며 문자 메시지 알림창이 띄워졌다. 발신인은
태이였다.

[몸 상태 어때.]

일하느라 바쁠 텐데, 그는 다울의 걱정을 틈틈이 해 주었다. 가끔 보면 귀신 같은 타이밍에 문자를 보내서


소름이 돋았다. 다울은 헤실거리며 답장을 보냈다.

[멀쩡해 ㅇㅇ!!!!]

[무리하지 말고 쉬어.]

[ㅇㅇㅇ웅! ㅇㅋㅇㅋ!~ O_O]

채팅창을 켜 놓고 있었던 걸까. 답장을 보내자마자 숫자가 사라졌다. 다울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메시지를
보내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억제제까지 먹었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기야 하겠어?

안일한 생각을 하던 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프기 전에 잠드는 게 나을 듯해서였다. 베개에 머리만 올려놔도
금방 잠드는 다울은 5 분도 지나지 않아 코를 골기 시작했다.

마침내 무방비한 상태가 되었을 때, 몸에 갇혀 있던 페로몬이 터져 나와 방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 * *

정신이 몽롱하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안 뜨거운 곳이 없다. 중간에 깨어나 억제제를 더 먹어 봤지만, 한 번 터진
페로몬은 가라앉을 생각을 안 했다.

다울은 금방이라도 타 버릴 것 같았다. 열이 올라서 일어났더니 방이 온통 페로몬으로 범벅되어 있었고,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와 몸이 진정되지 않았다.
“으, 하아…….”

기어코 히트 사이클이 터져 버렸다. 평소처럼 미미하게 지나가는 줄 알았더니, 몸이 말썽이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 여섯 시를 지나치고 있었다. 태이가 오려면 적어도 네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페로몬이 터져 나올 때마다 바지 뒤쪽이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찝찝함에 옷을 갈아입어 보려고 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힘들었다. 게다가 투명한 액이 쉴 새 없이 삐져나와 옷을 갈아입어도 소용없을 듯했다.

다울은 이성의 끈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정신을 완전히 놓아 버리면 자신이 어떤 짓을 벌일지 무서워서 몸을
덜덜 떨었다. 처량하게 뻗은 손이 침대보를 세게 움켜쥐어 새하얗게 변했다.

“정, 태이, 이씨, 빨리 와, 흐으….”

담이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담이까지 있었더라면 애는 울고, 다울은 패닉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침대보를 쥐고 있던 손이 핸드폰을 집었다. 태이가 바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몸이 안 좋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거 같았다. 보통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투둑!

언제나 그렇듯 신은 다울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핸드폰이 침대 아래로 떨어지자, 집기를 포기한 다울이
고개를 푹 떨궜다.

숨은 더 가빠지고,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미칠 지경이었다. 다른 오메가들은 이런 일을 매번 겪고 있었던


걸까.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던 다울이 잇새로 흐느끼는 소리를 내보냈다.

“으, 흐윽, 정태이, 살려 줘, 씨이, 흐…….”

지잉.

그때였다. 떨어진 핸드폰이 진동음을 내며 울렸다. 다울은 고개만 쏙 내밀어 밝아진 화면을 응시했다. 이제 막
도착한 메시지가 미리보기 창에 띄워져 있었다.

[나 조금 더 늦을 것 같으니까, 먼저 저녁 먹고 …더보기]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태이였다. 다울은 망했음을 감지했다. 아, 망했다. 망했어.

태이는 조금 더 늦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다울은 서러움에 눈물을 팡,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죽겠는데, 괴로운데, 정태이는 늦는다고 하고!

“흡, 흐어엉, 어떡해, 흐끅, 나 어떡해애!”

서러운 상체와 달리 본능에 약한 하체는 안달이 나 있었다. 다울은 이불보에 뒤를 문지르며 울었다. 애액이 왈칵,
흘러나올 때마다 뒤가 간지러워서 괴로웠다.

이럴 땐 환기라도 시켜야 하는데, 이성을 잃어가는 와중에 환기 따위가 생각날 리 없었다.

그저 달콤한 페로몬 향에 취해 숨을 헐떡이던 다울은 바지를 끌어 내리고 스스로 뒤를 뭉근히 짓눌렀다. 애액으로
완전히 젖어 든 뒤가 축축하고, 미끌거렸다.
“아읏, 응…!”

조심스레 손가락 하나를 내벽 안으로 밀어 넣은 다울이 옅은 신음을 내질렀다. 작은 자극 하나에도 몸이 예민하게


반응해서 허리가 휘었다.

찔걱이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얇은 손가락 하나로 뒤를 쑤시자니 못마땅하고, 그렇다고 제 손가락을 다 넣어


보자니 무서웠던 다울은 몸을 웅크린 채 오열했다. 흥건하게 젖은 제 손가락이 너무 불쌍했다.

“흐끅, 흐어어엉, 정태이, 흐으, 보고 싶, 흐어엉!”

아이처럼 울던 다울이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며 일어섰다. 방금까지는 움직일 힘도 없었는데, 흥분감이 온몸을
잡아먹을 듯 삼켜오자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흐, 흐읍, 크응…….”

가슴을 헐떡이며 방을 나선 그가 자연스레 부엌 쪽으로 향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어딘가 멍해 보였다.


안광이 빛나던 눈도 초점이 희미한 게, 나사 하나가 풀린 모양새였다.

다울은 자신의 뒤를 채워 줄 물건을 찾았다. 아쉽게도 집에는 잠깐의 유희를 즐길 만한 도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태이가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착이 심한 태이는 자신의 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이 다울의 뒤를 뚫고 들어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그게


하찮은 도구더라도.

“하, 하아, 하…….”

달뜬 숨을 내뱉던 다울이 거실과 부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살펴도 마땅한 물건이 보이지 않아서 이번에는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 안 채소 칸에는 대파 몇 개와 당근이 들어 있었다.

안 돼, 이다울! 너 진짜 미쳤냐? 아무리 이성을 잃어도 그렇지, 어떻게 당근을, 당근을!

마지막 남아 있던 이성이 다급하게 스탑을 외쳤지만, 다울의 손은 이미 당근을 집고 있었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당근을 손에 쥔 다울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두근. 두근. 두근.

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마른침이 목구멍 너머로 꼴깍, 넘어갔다. 침대에 올라와
누운 다울은 손에 든 당근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고, 뒤에 넣는 것을 망설였다.

저, 정태이 것보다 작으니까, 혼자 넣을 수 이, 있겠지.

야, 이다울! 진짜 안 돼!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말라고!

이성과 본능이 마음속에서 싸우는 사이, 또다시 뒤쪽에서 애액이 흘러 허벅지를 적셨다. 덕분에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던 이성이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야 말았다.

“으, 흐윽……!”

다울은 망설이지 않고 당근을 제 뒤에 꽂아 넣었다. 흘러나온 애액으로 인해 부드럽게 풀린 구멍이 굵직한 당근


끝을 어렵지 않게 물었다. 그러나 안쪽 사정은 달랐다. 입구가 풀렸어도 안쪽은 잔뜩 수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뾰족하면서도 둥근 끝이 내벽을 밀고 들어오자, 연분홍빛 입구가 여러 번 움찔거렸다. 매번 섹스할 때마다 태이의
것을 깊숙한 곳까지 받아들여서, 이런 것쯤은 쉽게 들어갈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심지어 다울은 콘돔도 씌우지 않은 당근을 안쪽에 밀어 넣고 있는 거였다. 아무리 뒤가 흥건하다지만, 빡빡한
당근을 밀어 넣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뒤를 밀고 들어오는 차가운 느낌에 몸을 바르르 떨던 다울이 당근을 집은 손에 힘을 줬다. 억지로라도 밀어 넣다


보니 어느새 당근의 반절이 몸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둥글게 벌어진 구멍이 힘겨워하면서도 당근을 꽉 물고 놓지 않았다. 애매하게 박힌 당근을 내려다보던 다울이
작게 흐느꼈다. 넣긴 넣었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무서웠다.

저 당근을 다 넣으면 다시는 못 뺄까 봐 두렵고, 와중에 애액도 더 이상 새어 나오지 않아 입구가 빡빡해졌다.

“아, 하으, 윽, 살려줘, 아!”

뽀얀 엉덩이로 당근을 물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흰토끼 같기도 했고.

지잉.

[왜 답이 없어.]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 태이의 이름과 함께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다울은 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손을 뻗으면 핸드폰을 집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몸을 살짝만 움직여도 뒤에 꽂힌 당근이 내벽을
자극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흐, 흐엉, 어떡해, 아읏, 정태이, 제발…….”

무언가 결심한 다울이 조심스레 몸을 틀었다. 조금 힘들더라도, 태이에게 연락을 하는 게 나을 듯했다. 침대


밖으로 상체를 내밀어 손을 뻗자,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핸드폰 모서리에 닿았다.

우당탕!

욕심을 내서 상체를 더 밖으로 내밀던 다울이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바닥에 엎어져 경련하던 그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신음을 내질렀다.

“아, 하으읏! 하으, 흑…….”

엎어지면서 반 정도 꽂혀 있던 당근이 끝까지 들어오고 말았다. 찢어질 것처럼 벌어진 구멍이 힘겹게 당근을
삼켜냈고, 비좁은 내벽이 아우성치듯 움찔거렸다.

눈물을 흘리는 걸로 모자라 침까지 줄줄 흘리던 다울이 정신을 못 차리고 허리를 떨어댔다. 앞에서는 투명한 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한 번 사정한 다울은 그 뒤로 여러 번 가 버렸다. 본인의 의지 없이 강제로 사정한 거였다. 뒤에 박힌 당근이


너무 깊숙이 들어가 버려서 빼기도 힘들었고, 끝이 전립선을 뭉근히 누르고 있어서 허벅지가 끝없이 경련했다.

“아, 아흐윽, 흐, 정태이.”


갈 곳을 잃었던 손이 천천히 핸드폰 화면을 터치했다. 태이의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연결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자그마치 2 분이었다. 10 초면 끝날 일을, 2 분 동안 붙잡고 있었던 거다.

Trrr…….

오늘따라 전화 연결음이 길게 느껴졌다. 스피커 모드로 전환한 다울은 연결음이 들리는 동안 허리를 치켜올린 채
눈물을 흘렸다. 배 안을 가득 채운 느낌이 생소해서, 여린 안쪽이 잘못되지 않을까 겁이 났다.

제발 전화 받아, 정태이. 제발!

“흐으, 읏, 받아, 개새끼야, 흐끅.”

태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길 간절히 바라던 중, 드디어 연결음이 끊겼다.

- 여보세,

“흐으, 흐끅, 정태이, 개새끼, 전화 왜 안, 흐읏, 받아!”

- 너 왜 울어, 아파?

“허어엉, 몰라, 흐윽, 몸이 이상해, 흐…….”

- 금방 갈게. 기다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타고 들어왔다. 고작 목소리 한 번 들었을 뿐인데,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은


다울이 눈물을 그쳤다.

전화는 간결하게 끝났다. 태이가 온다고 했으니, 다울은 그때까지 잘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침대에 올라갈 힘도
없어 바닥에 늘어진 다울이 주먹을 꾹 쥐었다.

조금만 있으면 정태이가 올 텐데, 그때까지만 참으면 되는데.

눈물은 참을 수 있어도, 달아오른 몸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때, 다울의 시선 끝에 태이의 셔츠가 한 장이


걸려들었다. 아침에 옷을 고르던 태이가 한 번 걸쳐 본 셔츠를 의자에 두고 간 것이었다.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한 다울이 셔츠가 있는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 * *

끼익.

주차장에 대충 차를 세우고 내린 태이가 돌계단을 뛰어올랐다. 일하던 도중에 다울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다급함이 뒤섞여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온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페로몬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니,
여태 회사에 있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망설임 없이 방문을 연 태이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페로몬으로 범벅된 방 안에는 엉망진창이 된
다울이 쓰러져 있었다. 바닥은 투명한 애액이 묻어 번들거렸고, 침대 아래에 엎어진 다울은 허리를 벌벌 떠는
중이었다.

“다울아.”

“흐, 으응, 정태이, 나, 나 좀…….”

“너 이게 다,”

“흐으, 하으읏!”

가까이 다가간 그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안아 들자, 다울이 목을 힘껏 끌어안으며 사정했다. 동시에 뒤에서 물이


새어 나와 태이의 옷을 적셨다.

자세히 보니 다울의 품에 무언가가 소중히 안겨져 있었다. 팔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옷자락을 당겨 본 태이는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내 냄새 맡으면서 쑤시고 있었구나, 다울아.”

“아, 하으, 아니야,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오죽 견디기 힘들었으면 셔츠에 코를 묻고 있었을까. 괴로워하는 게 안쓰러웠지만, 자신을 애타게 찾는 모습이 퍽


귀여워서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태이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코알라처럼 매달린 다울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페로몬을 풀자마자 시원한
향이 느껴져서 몸이 절로 품을 파고들었다.

엉덩이 밑을 단단히 받쳐 들고 있던 손이 다울의 뒤로 향했다. 굵직한 손가락이 뒤를 살살 문지르자 벌어진


입구가 부드럽게 늘어났다.

태이는 안쪽 깊은 곳까지 풀어 주기 위해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었다. 이미 당근이 박혀 있는 상태에서


손가락까지 들어오니 버거웠던 다울이 우는 소리를 냈다.

“아, 아응, 읏!”

“뭐야.”

“으, 흐으, 왜애…….”

“뒤에 뭐 넣었어, 이다울.”

“아, 아아, 그, 으읏!”

이런, 들켜 버렸다. 태이가 도착하기 전까지 뒤에 박힌 당근을 빼냈어야 하는 건데. 다울에게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손가락을 끝까지 밀어 넣고, 당근 끝을 툭툭 건드려 보던 태이가 눈썹을 찌푸렸다. 집에 섹스 토이도 없는데,


대체 뭘 박아 놓은 건지 골치가 아팠다.

“대답해, 뭐 넣었냐고 물어봤잖아.”

“으, 으응, 그게…….”

“여기로는 내 좆만 받아먹으라고 얘기했을 텐데.”

“아, 아앗, 아! 거, 건들지 마, 하윽.”

손가락을 벌려 내벽을 넓힌 그가 잡히는 것을 집어 꺼냈다. 그러자 내벽 안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있던 당근이


태이의 손에 의해 삐져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민망함에 고개를 숙인 다울이 얼굴을 들지 못했다. 쑤실 게 없어서 저런 걸 집어넣었다니. 뒤늦게 이성이


돌아오면서 수치심이 들었다. 그때, 머리 위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울아, 네가 토끼야? 이런 걸 처박고 있게.”

“아, 아흣, 빼 줘, 빼…….”

“기껏 넣었는데 뭐하러 빼. 이걸로 몇 번 갔어, 응?”

“아, 안 갔어, 하으.”

“거짓말하는 습관 못 고쳤네. 바닥을 저렇게 적셔 놓고, 뭐가 안 갔다는 거야.”

나 진짜 망했다. 정태이 왜 빡친 건데?

물기 가득한 눈망울이 태이에게 닿았다. 이번 한 번만 봐달라는 눈빛이었지만, 매정한 그는 모르는 척 시선을


피하고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져나간 줄로만 알았던 당근이 예고 없이 내벽을 치고 들어왔다. 그 움직임에 놀라 헉, 소리를 내던 다울이


태이의 목을 더 힘껏 끌어안았다.

당근은 멈추지 않고 안을 들락거렸다. 핏줄 선 팔로 당근을 쑤셔 박던 태이가 속도를 높이자 이미 푹 젖은 뒤에서


물이 튀었다. 찰박이는 소리라던가, 안쪽을 쑤셔 대는 소리까지 더해지니 분위기가 더욱 야하게 무르익어 갔다.

“아, 아응, 흐, 그만, 그만, 하으읏!”

“그만할까?”

“아, 하으, 으, 정태이…….”

침대 위에 다울을 눕혀 놓은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흠뻑 젖은 당근을 바닥에 떨궈 버렸다. 안쪽을 쑤시던


당근이 사라지자, 허전해진 뒷구멍이 잔뜩 벌어진 채 벌렁거렸다.

가기 직전에 움직임을 멈춰서 죽을 맛이었던 다울은 태이의 팔을 애처롭게 붙잡았다. 평소에는 부끄러워서 잘
벌리지 않던 허벅다리가 활짝 벌어져 분홍빛의 구멍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
“흐윽, 해 줘, 읏, 가고 싶어…….”

“앞으로 저런 걸로 뒤 쑤시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으, 흐으, 알겠어, 약속할게. 그러니까 제발, 흑.”

간절한 부탁에 져 준 그가 다울의 허리를 고정하듯 붙잡고 명령했다.

“다리 더 벌려.”

“흐, 으웅…….”

순순히 명령을 따른 다울이 다리를 더 활짝 벌렸다. 살살 시작하길 바랐던 다울은 1 초도 지나지 않아 교성을
내뱉었다.

네 손가락을 한꺼번에 내벽 안으로 밀어 넣은 그가 강약 조절 없이 손을 털어 대기 시작했다. 굵은 손가락이 어느


지점을 빠르게 눌러 올 때마다 다울의 허리가 바르작거렸다.

“아, 하응, 읏, 안 돼, 하으!”

“허리 움직이지 마.”

“읏, 하응, 흐으, 잠, 잠깐!”

찔꺽이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신음을 내지르던 다울의 엉덩이가 경련하듯 떨렸다. 손가락만으로 가 버린 다울은
쾌락에 취해 헥헥거리기 바빴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뱉어졌다.

쉴 틈을 주지 않고 입술을 맞물린 태이가 부족한 숨을 불어넣어 주며 혀를 섞었다. 치열을 고르게 훑고 지나간 후,


혀뿌리까지 뽑아 낼 것처럼 키스하던 그가 자연스레 허리띠를 풀어냈다.

키스를 받아 내던 다울은 소심한 손짓으로 태이의 것을 매만졌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성기는 뜨겁고 단단했다.

“하으, 빨리, 빨리…….”

“제대로 얘기해야지.”

“네 거, 으읏, 빨리 넣어 줘.”

제 성기를 손으로 쓸어내리던 태이가 서랍 쪽으로 다가가자, 다울이 팔을 잡아채 제 쪽으로 끌었다. 덕분에
콘돔을 꺼내려고 돌아선 몸이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이성이 날아간 다울은 태이의 허벅지 위에 자리를 잡고, 부푼 성기를 붙잡아 제 뒤에 맞췄다. 태이가 아무리
밀어 내 봐도, 다울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붙여 왔다.

히트 사이클이 온 우성 오메가와 우성 알파가 섹스하게 된다면, 임신할 수도 있었다. 이 상태에서 박으면 태이도
이성이 사라질 텐데, 어떻게든 콘돔을 씌워야 했다.

“또 임신하고 싶은 거 아니면, 얌전히 비켜 봐.”

“시, 싫어, 흐읏, 싫어!”


“다울아, 콘돔만 씌우고 해.”

“하으, 할 거야. 임신할 거야.”

상황이 골치 아프게 됐다. 임신하고 싶다니. 분명 진심으로 하는 소리가 아닐 것이다. 다울을 밀어 내다 포기한
태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행위를 이어 갔다. 자신만 잘 참고, 실수하지 않으면 임신은 피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느슨하게 풀어진 뒤가 팽팽할 정도로 늘어나며 단단한 살덩이를 받아 냈다. 뿌리 끝까지 성기를 처박아 넣은 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자, 맥없이 늘어진 다울이 신음을 흘렸다.

“아, 아응, 읏, 하으!”

앉은 상태 그대로 내벽 깊숙한 곳까지 찔러 대던 태이가 다울을 다시 침대 위에 눕혔다. 자세가 편안해진 다울은


태이의 상체를 꼭 끌어안은 채 흔들렸다.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성기가 내벽을 찌르고 나오면, 벌어졌던 안쪽이 잘게 경련했다. 다울이 숨을 헐떡이자 속도
조절을 하던 그가 조여드는 느낌에 참지 못하고 허리를 빠르게 털어 댔다.

맞부딪치는 살결 사이로 투명한 애액이 길게 늘어져 실선을 만들어 냈고, 한껏 벌어진 다리가 허공에서 갈대같이
흔들렸다.

허리 짓이 빨라질수록 태이의 탄탄한 허벅지와 허리 근육이 바짝 세워졌다. 자세를 바꿔 가며 박아 댔더니, 땀에


푹 젖은 다울이 맥을 추리지 못하고 늘어졌다.

“하, 하으, 더는 못해, 나, 흐읏!”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 다울은 내벽을 힘껏 조이며 허리를 휘었다. 동시에 사정감이 가까워진 태이가 제
것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다울이 허리에 다리를 감은 채 태이를 놓아 주지 않았다. 사정하느라 달아오른 내벽이 경련하며 안으로 들어온
성기를 자극하자, 태이가 이를 악물고 인상을 구겼다.

“읏, 놔, 다울아.”

“흐으, 싫어, 안에 싸 줘…….”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빨리, 이거 풀어.”

“하으, 임신, 할 거야, 하고 싶어, 아기…….”

초점 나간 눈으로 태이를 응시하던 그가 입을 맞춰 왔다. 진득하게 얽혀든 혀가 몸의 예민도를 끌어올리는 동안,


구멍을 조이고 힘을 준 다울이 뽀얀 엉덩이를 살살 흔들었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좁혀진 내벽 안에 희뿌연 정액이 가득 들어찼다. 뜨끈한 느낌이 배 안에 퍼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다리를 풀어 낸 다울이 끔뻑 기절해 버렸다.

침대 위에 늘어진 다리 사이로는 흘러넘친 정액이 꿀럭, 거리며 새어 나오고 있었다. 허망한 시선으로 그 장면을
응시하던 태이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며칠 후, 태이와 다울은 의사에게서 둘째 임신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뻐하던 담이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담이 소원을 들어줘서 고마씁니다, 황새님!

외전 2. 재이의 장래 희망

창문 밖으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여름에는 정원에 매미가 더 많아진 모양이었다. 집 안에서 에어컨을
틀고 누워 있던 다울은 아이들의 발소리에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아빠! 이거 봐도 돼?”

“형아, 나도 보고 시퍼.”

“재이도 보구 싶대.”

서재 쪽에서 나온 담이가 한 손에 앨범을 들고 있었다. 언제 뒤쫓아 간 건지, 동생인 재이도 앨범을 보고 싶다며
눈을 빛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두 아이를 바라보던 다울이 활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앨범을 만들어 두고 서재에
꽂아 놨는데, 아이들이 그걸 찾아낼 줄은 몰랐다.

다울은 바닥에 앉아 앨범을 펼치는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쳐다봤다. 이제 열 살이 된 담이와, 다섯 살이 된


재이는 싸우지도 않고 잘 지냈다.

그나저나 참 신기했다. 두 아이 모두 아들이지만, 크면 클수록 외모가 바뀌어 가는 게 묘했다.

태이를 많이 닮았던 담이는 눈매가 유순해지면서 밝고 서글서글한 이미지가 되었고, 둘째인 재이는 누가 봐도
태이 아들이라고 할 만큼 그를 쏙 빼닮아 가고 있었다.

성격도 마찬가지였다. 담이는 태이와 다울을 반반 섞어 놓은 성격이라 고집이 세면서도 해맑고 단순했다. 반면,
재이는 성격마저도 태이를 닮아 매사에 무덤덤하고 잘 울지도 않았다.

“이거 봐, 재이야. 이거 형아야.”

“웅.”

“형아 어때? 형아 아기 때 귀여웠지?”

“하나또 안 기여워.”
손가락으로 아기 때 사진을 가리키던 담이가 울상을 지었다. 감성적인 담이에 비해 재이는 매우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고작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뭐 이리 시크한지 모르겠다.

“형아는 상처받았어. 이제 앨범 안 볼래.”

“웅.”

“형아가 삐치면 재이가 미안해, 이렇게 말해야지!”

“재이 잘못 안 해써.”

흐잉, 너무해! 무심한 반응에 감정이 상한 담이가 방으로 뛰어가 버렸다. 마침 욕실에서 나오던 태이가 뛰어드는
담이를 손쉽게 붙잡아 거실로 돌아왔다.

서른 중반이 된 나이에도 애를 한 손으로 턱턱, 드는 게 대단했다. 나이만 먹었지, 몸은 여전히 탄탄했고,


얼굴은 20 대 후반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아빠, 이거 놔!”

“초등학생이나 돼서 동생한테 삐치긴.”

“아, 안 삐쳤어!”

“그렇다고 쳐.”

담이를 소파에 던지듯 내려놓은 태이가 바닥에 떨어진 앨범을 주워들었다. 몇 년 동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앨범이었다.

그가 앨범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유심히 바라보았다. 옆에서 궁금하지 않은 척 힐끔거리던 다울이 잽싸게 사진을


낚아챘다.

“이, 이거……!”

사진 속에는 다울이 있었다. 사진 속 다울은 태이의 물건들을 주변에 동그랗게 펼쳐 놓고, 그사이에 들어가 자고
있었다. 배가 조금 튀어나온 걸 봐서는 임신했을 시절 같았다.

다울은 민망함에 우선 사진을 숨기고 봤다. 재이를 가졌을 때, 그는 입덧도 먹덧도 하지 않았다. 참
다행이었지만, 입덧보다 더 심각한 증상이 생겼었다. 바로 태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

태이가 회사에 나갈 때면, 다울은 그의 물건을 죄다 꺼내 놓고 향을 맡거나 그 속에 파묻혀 잠들곤 했다. 한


번은 하루가 어질러진 물건들을 치우려고 했는데, 온갖 난리를 피우면서 가져가지 못하게 한 적도 있었다.

아마 이 사진은 하루가 찍어서 태이에게 줬을 것이다. 태이는 또 그걸 좋다고 받아서 앨범에 간직 중이었고. 참
나.

“이, 이걸 왜 가지고 있어?”

“귀엽잖아.”

“…….”
“내 물건에 둘러싸여 있는 게, 귀여워.”

“미, 미친. 가면 갈수록 능글맞아져, 무슨…….”

사진을 다시 뺏어가 앨범에 넣은 태이가 능글맞게 웃었다. 어찌 된 게 나이가 들수록 사랑꾼이 되어 가는 거


같았다. 물론 싫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아이들이 빤히 보고 있을 때면 민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슬금슬금 허리 위로 올라오는 손을 따끔하게 내친 다울이 아무 일도 없는 척, 앨범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니 옛 추억이 생각나서 미소가 지어졌다.

앨범의 맨 뒷장까지 넘겨 보던 다울은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사진을 손에 들었다. 왜 이 사진만 안 꽂혀 있지.


의아함에 사진을 잘 살펴보는데, 이게 웬걸. 무려 10 년 전 사진이었다.

다울이 처음 이곳으로 와서 임신 소식을 알게 되고, 태이에게 감금당했을 때 찍혔던 사진.

이것도 하루가 몰래 찍은 모양이었다. 사진 속 다울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침대에 앉아


열심히 빵을 먹고 있는 모습이 우스웠다.

이때, 괜한 오기가 생겨서 나가려고 별짓을 다 했지. 정태이 시계도 팔아먹고…….

그러고 보니, 다울은 그때 태이에게 중요한 시계를 팔았었다. 태이 말로는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내가 준
걸 내 손으로 팔아먹어서 마음이 뜬 줄 알았다나 뭐라나.

이왕 생각난 거, 내일은 백화점에 가서 태이에게 줄 시계를 사야겠다. 빙의 전 이다울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아무튼.

“정태이, 너 내일도 일 가?”

“가야지.”

“으음, 알겠어.”

“그건 왜 물어, 뭐 하려고.”

“애들이랑 백화점 가려고.”

“중간중간 연락해.”

태이의 집착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했다. 부드러워지긴 했으나, 말투만 좀 유해졌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이제
이런 집착에 익숙해진 다울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정태이, 내가 네 선물 사러 백화점 갔다는 걸 알면 엄청 감동할 거다. 하핫!

마음속으로 뿌듯하게 웃던 다울은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랜만에 백화점 나들이를 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들떴다.

* * *
아침부터 날씨가 화창했다. 비가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다울이 한시름 놓았다.
아이가 두 명이다 보니, 비 오는 날 돌아다니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담이는 무슨 색 옷 입을래?”

“나는 하늘색 옷 입을래!”

아이들 옷을 골라 주던 다울이 무슨 색 옷을 입겠냐며 질문을 던졌다. 해맑게 웃던 담이는 하늘색을 고집하며


방방 뛰었다. 백화점에 간다고 했더니 신이 난 모양이다.

“재이는?”

“까망색.”

“으응…….”

밝은색을 좋아할 법도 한데, 재이는 늘 검은색 아니면 흰색 옷만 입으려고 했다. 다울이 아무리 귀여운 옷을
사다 줘도,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무채색으로 가득 찬 옷장에서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를 꺼내 입혀 준 다울이 어색하게 웃었다. 밍밍한 옷을 입혀


놔도 얼굴이 잘생겨서 화려해 보였다. 누구 아들인지 참…….

“자, 이제 나가자. 오늘 말 안 들으면 어떻게 된다?”

“엉덩이 맴매한다!”

“재이는 왜 대답 안 해?”

“형아가 대답해써.”

양쪽에 아이를 둔 다울이 손을 꼭 잡고 현관문을 나섰다. 대문 앞에는 하루의 차가 서 있었다. 일이 바빠


데려다주지 못한 태이가 하루에게 대신 부탁을 한 것이었다. 하루 삼촌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담이는
차를 발견하자마자 손을 놓고 뛰어가 버렸다.

“삼초오오온! 솜사탕 삼초온!”

“담이야아아, 재이야아아아!”

애는 그렇다 쳐도, 솜사탕 쟤는 왜 저렇게 신이 난 거야. 게슴츠레 뜬 눈으로 재회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다울이 재이를 챙겨 차에 올라탔다. 담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 삼촌 옆에 타겠다며 조수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다울은 담이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태이에게 전송했다. 장난스러운 메시지는 덤이었다.

[ㅋㅋ 담이 솜사탕 아들인가 봐;;;;;;; 너보다 더 좋아하는데;;;;;]

답장은 빠르게 돌아왔다. 일하는 중이라도 다울의 메시지라면 곧장 답장해 주는 스윗함이 여전했다.
[떼어 놔.]

그래, 답장 속도는 스윗할지 몰라도 내용은 그렇지 않은 게 문제지만.

[애한테 질투 ㄴㄴㄴㄴ... 나 다녀옴!!!!!!!!!]

[조심히 다녀와. 담이 떼어 놓고.]

이걸 집착이라 해야 할까, 질투라 해야 할까. 애들한테 무심하게 굴면서도 다정하지만, 이럴 때를 보면 진짜


사랑으로 키우고 있다는 게 티가 났다. 소리 없이 웃던 다울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숨을 헛, 하고
들이마셨다.

“압빠, 조아?”

“어? 아빠 아무것도 안 했는데?”

“풉…….”

다울을 빤히 바라보던 재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웃음이 아니라, 다울을 놀리는 듯한 웃음이었다. 메시지
내용을 보기라도 한 걸까. 민망함에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자,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우리 재이, 어떡하지. 진짜 정태이랑 똑같아지고 있어. 이런….

“다우리, 이따가 쇼핑 끝나면 전화해요!”

“너는 같이 안 가게?”

“나 데이트 있거든요. 헤헹.”

“결혼이나 해.”

“그거 금지어인 거 몰라요? 너무해요. 힝.”

서른이 넘었는데 저 역겨운 말투는 고쳐지지 않고 있었다. 백미러를 통해 눈을 마주치며 말하던 하루가
번지르르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요즘 만나고 있는 오메가가 있었다. 다울도 한 번 마주쳐 봤지만,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하루보다 훨씬


정상적이고 철저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대체 왜 하루를 만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잘 맞아서
이번에는 하루의 연애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오늘 왜 저렇게 꾸미고 나왔나, 했더니 데이트가 있었구나. 궁금하지 않은 척, 하루를 훑어보던 다울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나이에도 유지하고 있는 분홍빛 머리카락, 매끈한 피부, 여전히 유순하니 잘생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이도 그렇고 하루도 그렇고, 세월이 지나도 늙지 않는 것 같았다.

나만 늙어 가는 기분이란 말이지. 망할.

정작 이런 생각을 하는 다울은 가장 동안의 얼굴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본인만 모르는
듯했다.
“백화점 도착! 담이야, 재이야, 다우리한테 맛있는 거 많이 사 달라고 해!”

“웅, 삼촌! 데이트 잘하고 와. 그 형아한테 또 얼굴 맞으면 안 돼.”

“담이야, 쉿! 그거 비밀이라고 했잖아.”

재이를 껴안고 내리려던 다울이 비웃음을 날렸다. 언젠가 한 번 뺨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타나더니, 그게 지금
사귀는 사람한테 처맞은 거였어? 하루가 뺨을 맞았다고 생각하니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황급히 담이의 입을 막던 하루가 망했다는 듯 우는 소리를 냈다. 삼촌의 비밀을 터뜨린 담이는 차에서 내려
다울의 옆에 딱 붙어 섰다. 웃는 모습이 귀여운 악동 같았다.

“다녀와요, 다우리…….”

“이따 봐, 뺨 맞은 솜사탕.”

“힝, 다 들켰어…….”

하루의 차가 큰길로 빠져나가 모습을 감췄다. 아이들은 백화점 건물을 보자마자 다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빠
시계를 사는 것보다, 백화점을 탐험하는 게 먼저였다.

양손이 붙잡혀 끌려가듯 안으로 들어온 다울은 담이와 재이를 잡아 두고, 주의 사항을 일러 주었다. 백화점
안에서는 뛰면 안 된다던가, 손을 놓으면 안 된다는 간단한 주의 사항이었다.

“알겠지? 제발 삼십 분이라도 얌전히 있기다.”

“응!”

“웅.”

대답은 잘했다. 다울은 아이들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태이의 선물을 먼저 고르러 갔다. 고가의 시계만
취급하는 스위스 브랜드는 입구부터 심플하고 고급스러웠다. 시계에 대해 잘 모르는 다울은 태이가 평소에 차고
다니는 브랜드를 참고하여 이곳부터 들러 디자인을 살펴봤다.

“와아, 반짝반짝해.”

“건드리는 거 아니야.”

“아빠는 저거 좋아할 거 같아!”

번쩍거리는 시계들에 시선을 빼앗긴 담이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가장 가운데에 전시된 모델을 손으로 가리켰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레 따라붙어 쇼핑을 돕던 직원이 이때다 싶어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모델은 한국에 딱 15 개만 들어왔답니다. 디자인을 보시면…….”

다울은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할 설명을 이십 분째 듣고 있자니 머리까지 아팠다. 뭐,


설명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담이가 고른 디자인이 예쁘긴 했다.

검은색이 포인트로 들어간 베젤과 깔끔한 스트랩이 어우러진 디자인은 태이의 이미지와 딱 들어맞았다.

잠깐, 그때 팔았던 시계랑 비슷한 디자인으로 줘야 하나. 내 눈에는 이게 제일 괜찮긴 한데…….


“아빠아, 왜 고민해?”

“응? 아니, 아니야.”

“왜애, 이거는 아빠가 선물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아빠 마음이지!”

“아…….”

가끔은 아이들의 말이 가슴을 울릴 때가 있다. 그래, 이건 ‘내가’ 선물하는 거지. 잠시 고민하던 다울이
경쾌하게 웃었다.

“이걸로 할게요. 예쁘게 포장해 주세요.”

“네, 고객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다울이 고른 시계가 예쁘게 포장됐다. 검은색과 금색이 적절히 섞여 포장된 시계는 누가 봐도 귀해 보였다.
다울은 여태 조금씩 모아 놓았던 용돈으로 결제를 마쳤다. 용돈이라 말하기에는 좀 큰 금액이었지만, 어쨌든 이
돈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선물을 구매한 게 뿌듯했다.

“와아아!”

“담이야, 재이 손잡고 뛰지 마!”

그리고 아이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시계를 구매하자마자 담이가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갔다. 아까 말해
준 주의 사항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게 분명했다.

겨우 두 아이를 붙잡아 온 다울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아이스크림 브랜드로 향했다. 백화점 지하에는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부터, 여러 종류의 음식이 즐비해 있었다.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음식마다 먹고 싶다며 다울의 손을
이끌었다.

“그만, 그만!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나는 초코아이스크림. 초코!”

“나는 바닐라 머글래.”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에 신나서 뛰어가는 모습이 꼭 비글 같았다. 자리에 아이들을 앉혀 두고 아이스크림을 사 온


다울이 고사리 같은 손에 스푼을 하나씩 쥐여 줬다. 주문대로 하나는 초코, 하나는 바닐라 맛이었다.

방금까지 조잘조잘 떠들던 담이는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흡입했고, 재이도 아이스크림에 집중했다.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인 다울이 딸기 맛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득 퍼넣었다.

우리 애들, 어디 가서 누가 맛있는 거 준다고 따라오라고 하면 냉큼 가는 거 아니야?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던 다울이 스푼을 내려놓고 교육을 시작했다.

“얘들아, 밖에서 누가 맛있는 거 사 준다고 따라오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안 된다고 해!”
“머 사 줄 거냐고 무러보면 안 대?”

초등학교에서 이미 한 번 교육을 받은 담이는 똑 부러지게 정답을 외쳤다. 하지만 재이의 대답은 달랐다. 애가
겁도 없지, 뭐 사 줄 거냐고 물어본다니. 배짱이 대단했다.

“담이 정답, 재이는 땡. 무조건 안 된다고 해야 해.”

“그런데 그 사람이 막 잡아가려고 하면?”

담이는 언제나 호기심이 많았다. 상상력이 풍부해서 그런가, 한마디를 하면 질문이 다섯 개는 돌아왔다. 정작
틀린 답을 말한 재이는 관심 없다는 듯 아이스크림 먹기에 집중했다.

담이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 줘야 할까 고민하던 다울은 태이를 떠올렸다. 그래, 전직 야쿠자인 인간이 아빠인데
이걸 써먹으면 납치범들도 도망가겠지.

“우리 아빠 무서운 사람이라고 해. 겁을 주란 말이야.”

“그냥 아빠 무서운 사람이라고 말해?”

“으음, 우리 아빠 몸에 무서운 그림 있다고 해. 그럼 대충 알아먹고 도망가지 않을까?”

질문을 던지는 담이의 눈빛이 순수했다. 다울은 차마 자세한 이유까지 설명해 주지 못하고, 단순하게 대처 방법만
알려 줬다. 애들한테 아빠가 사실 야쿠자였어, 라는 말을 어떻게 할까.

“아빠 몸에 그림 있는 거 무서운 거야? 담이 학교에서 친구들한테 자랑했는데?”

“뭐, 뭐라고? 안 돼, 친구들한테 그런 거 자랑하지 마!”

“왜? 왜야? 왜 안 돼?”

“안 돼, 담이야. 아무튼 안 돼. 수상한 사람들한테만 자랑하는 거야, 알겠지? 약속해.”

질문 폭탄을 자연스레 넘겨 버리고, 손가락을 내민 다울이 눈을 부릅떴다. 어서 약속하라는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새끼손가락을 건 담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아서 답답한 모양이었다.

다울은 또 질문이 들이닥치기 전에 대화 주제를 돌렸다. 다행히 아이들이 단순해서 금세 분위기를 전환 시킬 수


있었다.

“담이랑 재이, 방학인데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어?”

“나 바다 가고 싶어!”

“귀차나. 재이는 집이 조아.”

둘이 대답하는 것도 상극이었다. 담이는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다울은 ‘바다’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옛
기억을 다시금 떠올렸다.

담이가 옹알이를 막 시작했을 때, 가족끼리 바다에 다녀오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다울은 아직도 이날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야쿠자 가문에 묶여 있던 태이가 풀려난 날이었기 때문이다.

태이의 할아버지인 카쿠치 신코를 온몸으로 막고, 심지어 찬물까지 맞아 가며 절연하라는 말을 외쳤었는데. 벌써
9 년이 지났구나.

담이는 당연히 그때를 기억하지 못했다. 말도 못 하는 아기였으니 기억을 못 하는 게 당연했다. 다울은 담이가
그때 바다에 가지 못해서, 지금이라도 가자고 말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아빠한테 전화 걸어서 바다에 가자고 하자.”

“좋아, 좋아!”

핸드폰을 꺼낸 다울이 태이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둘이 연락할 땐 굳이 영상 통화를 하지 않지만, 아이들이


있으면 자주 하곤 했다.

잘 놀고 있어?

“아빠, 우리 바다 가자!”

아들이 가고 싶다면 데려가 줘야지.

“아빠는 어, 여름인데 어디 가고 싶어?”

집. 침대에서 다울이랑 누워 있고 싶은데.

전화를 받은 태이가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화면을 바라봤다. 신이 난 담이는 카메라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물었다.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서 다울의 말투를 따라 하는 게 귀여웠다.

태이는 집이 좋다고 했다. 재이와 비슷한 대답이었다.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던 다울이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

아니, 집에 있는 거면 있는 거지. 침대에 나랑 누워 있고 싶다는 얘기는 왜 해? 미친.

“크흠! 정태이, 그믄흐…….”

담아, 바다 다녀오면 아빠한테도 꼭 휴가 줘. 다울이랑 좀 붙어 있게.

“아아악!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담이야,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 응?”

다울이 황급히 말을 끊어 봤지만, 담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덩달아 오묘하게 태이를 비웃고 있는
재이까지.

“정태이, 너 진짜 가만 안 둬. 이씨, 끊어!”

전화를 끊어 버린 다울이 숨을 씩씩거렸다. 가만 보면 태이는 애들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었다. 결국,


민망해지는 건 다울뿐이었다.

“담이는 착하니까 휴가 줄래. 그런데, 다울이 아빠는 태이 아빠랑 있으면 아파.”

“어……?”

“문 꼭 닫고 들어가면, 아빠가 아픈 소리를 내. 태이 아빠가 괴롭혀?”

“그, 그, 그러니까, 그건, 그게…….”


대화 주제를 돌린 게 문제였을까. 상황이 더 곤란해지고 말았다. 다울은 마음속으로 태이를 여러 번 쥐어패는
중이었다. 그러게, 애들 집에 있을 땐 하지 말자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담이는 다울이 태이에게 괴롭힘당하는 줄로만 알았다. 뭐, 어떻게 보면 괴롭힘당하는 게 맞긴
했다.

당황한 다울이 대답을 망설이고 있을 때 즈음, 조용히 아이스크림을 먹던 재이가 폭탄 발언을 던졌다.

“나는 다 봐써.”

“뭐어? 왜 재이 너만 봐, 형아도 알고 싶어!”

“형아는 몰라두 돼.”

재이가, 다, 봤다고……?

돌처럼 굳은 다울이 패닉에 빠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그 장면을 재이에게 들켰다니. 충격이 커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면, 재이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압빠, 비밀로 하께.”

“…….”

“아빠?”

“……고, 고마워.”

다울을 빤히 쳐다보던 재이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비밀을 약속했다. 아이 같지 않은 행동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던 다울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재이 얼굴을 보는 게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고 봐, 정태이. 집에 가면 가만 안 둬. 앞으로 절대, 절대로 그런 짓 안 할 거야!

* * *

집으로 돌아온 다울은 아이들을 재워 놓고, 곧장 서재 문을 열어젖혔다. 서류 더미가 쌓인 책상 앞에는 태이가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집에 일찍 오는 대신, 남은 일을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등 뒤에 쇼핑백을 숨기고 다가온 다울이 태이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뒤늦게서야 다울의 존재를 알아챈 그는
능글맞게 웃어 보이며 얇은 허리에 팔을 휘감았다.

“왔어?”

“큼, 앨범 보다가 예전 일이 생각나서.”


“응?”

“왜, 내가 옛날에 네 시계 팔아먹었잖아.”

“아, 그때 진짜 열받았었지.”

웃는 낯으로 열받았다는 말을 잘도 한다. 밉지만, 밉지 않은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던 다울이 퉁명스러운 손짓으로
쇼핑백을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선물 공세에 당황하던 태이가 쇼핑백을 확인하고 시원스레 웃었다. 그때의 일을 아직 담아 두고 있을


줄 몰랐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시계를 선물해 주는 게 사랑스러웠다.

“펴, 평생 간직해. 알겠어?”

“다울아, 긴장했지. 왜 말을 떨어.”

“조옴,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고마워. 누가 준 건데, 평생 간직해야지.”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준 태이가 다울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가까워진 거리에 긴장한 다울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자, 웃음을 흘린 태이가 부드럽게 입을 맞춰 왔다. 자연스레 넘어가는 진도에 휘말려 가던 다울은 급히
어깨를 밀쳐 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그래.”

“애들이 볼까 봐. 저번에 우리 그, 그거 한 것도 재이가 본 것 같아.”

“어차피 나중에 다 알게 될 텐데, 먼저 아는 것도,”

“이 망할 입! 입!”

태이의 안일한 대답에 기겁하던 다울이 입을 틀어막았다. 애들 동심은 지켜줘야 하는 게 맞는 건데, 태이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이번 한 번만 물러나 주는 거라며 인심 쓰는 척을 한 태이가 스킨십 대신, 쇼핑백을 열어 보았다. 고급스러운


포장지를 뜯어내니, 다울이 고른 시계가 번쩍거리는 게 보였다.

“어, 어때. 별로야?”

“아니, 마음에 들어.”

“사실 담이도 이게 예쁘다고 했어.”

“응, 제일 예쁘네.”

시계를 꺼내 제 손목에 채워 본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칭찬을 늘어놓았다. 검은색 포인트가 태이에게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다울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시계를 매만져 보던 태이는 무릎 위에 앉은 다울을 세게 껴안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벗겨


먹고 싶었지만, 꾸중을 들은 게 있어서 애써 참고 있는 거였다.
다울의 목 언저리부터 입을 맞추며 올라가, 귀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놓은 그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낮고 나른한
목소리에 어깨를 떨며 놀라던 다울이 새빨간 사과처럼 얼굴을 물들였다. 성인 남자치고 앙증맞은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시계 팔아먹으면 안 돼, 다울아. 이거 내 보물이니까.”

“씨, 절대 안 팔아!”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 태이의 어깨에 날아들었다. 익숙하게 주먹을 받아 내던 태이가 다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자, 그제야 주먹질이 멈추었다.

앙칼진 눈이 점점 온순하게 바뀌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태이의 상체에 몸을 완전히 기댄 다울이 언제 주먹을
휘둘렀냐는 듯 안겨들었다. 망설이는 걸 보아하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다울의 소심한 손가락이 태이의
팔뚝을 살살 문질렀다.

“저기, 정태이.”

“응.”

“나도, 바다에 꼭 가고 싶어. 그러니까 가자…….”

“이제 보니까 다울이가 우리 집 막내 같네. 바다에 가고 싶었어?”

“이씨, 놀리지 마. 그냥, 너랑 바다에 간 적은 없으니까, 그래서.”

내심 바다에 가고 싶었던 다울이 태이를 은근슬쩍 졸랐다. 좋다고 하는 곳은 전부 가봤는데, 국내에 있는 바다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기를 껴안듯 다울을 안아 준 태이가 장난스레 엉덩이를 토닥였다. 담이도, 재이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망설임 없이 말하는데, 정작 다울이 부끄러워하는 게 웃기고 귀엽기도 했다.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다울을 바라보던 그가 입술을 두어 번 정도 맞추고 떨어졌다. 이보다 더한 요구를 해도


되는데, 다울은 은근 욕심이 없었다. 돈 욕심은 확실히 있는 것 같지만.

“가자, 바다.”

“언제?”

“이번 주말에.”

“며칠 안 남았으니까, 잘 준비해야겠다.”

“주말 끼워서 휴가 낼게. 이틀은 애들이랑 보내고, 나머지는 우리 둘이 보내기로.”

“어……?”

다울이 내빼지 못하도록 계획을 세워 버린 그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태이를
말리려던 다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태이의 휴가 날짜는 정해졌고, 여행 계획은 그대로 진행될 것 같았다. 마침내 하루에게 전화를 건 태이가
남은 날 동안 애들을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끊었다.

그렇다면 진짜 며칠 동안, 태이랑 둘이 시간을…….

망했다. 내 허리. 내 허리!

머리를 감싸 쥔 다울이 미래의 제 모습을 상상하며 좌절했다. 태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울은 어떨지 몰라도, 태이는 다가올 날을 매우 기대했다. 휴가가 이렇게 기다려지는 건 처음이었다.

* * *

짭짜름한 바다 향이 시원하게 흘러들었다. 하늘은 푸른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맑았고, 바다는 어디가 끝일지
모를 정도로 광활히 펼쳐져 있었다.

다울은 오랜만에 와 보는 바다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한참 더울 날씨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아 복작거렸지만,
이건 또 이거대로 좋았다.

해맑게 웃는 사람들, 바닷물을 튀기며 노는 청춘들, 마지막으로 해변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간식 트럭들까지


환상적이었다.

좋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다울은 태이와 아이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필 도착하자마자 담이가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다고 해서, 다울이 자리를 잡는 동안 태이가 아이들을 케어한 거였다.

“흐으음, 흐흥.”

선크림을 주욱, 짜내 볼에 문지르던 다울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새하얀 선크림이 말랑한 볼에 묻어 질척거리는
느낌은 별로였지만, 진짜 피서를 온 기분이라 신나기만 했다.

“어머, 뭐야. 애 아빠였어?”

“좀 무섭긴 한데, 진짜 잘생겼다. 애들도 엄청 예쁘네.”

“야 야,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마. 저 사람 눈 좀 봐.”

여름 해변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는데, 돗자리 앞을 지나치던 사람들이 다울의 뒤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수군거렸다. 자기들끼리 조용히 얘기하는 거 같았으나, 다울은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애 아빠, 무섭긴 한데 잘생겼다, 애들도 예쁘고, 쳐다보지 마라?

어딘가 익숙한 조합이었다. 선크림을 바르다가 만 다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아직 다 발리지
않은 선크림이 볼에 하얗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저 미친!”
뒤돌아본 곳에는 태이가 있었다. 상체를 훤히 드러내고, 양쪽에 아이 둘을 안아 든 태이가. 그래, 바닷가이니
상의를 탈의하는 건 당연한 거였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이다.

“내가 진짜 저 이레즈미 다 지우개로 지워 버릴 거야, 아오! 정태이!”

휘황찬란한 문신이 태이의 존재를 더 뚜렷하게 만들었다. 반소매 티셔츠라도 입고 올 것이지, 시원스레 웃통을
벗고 나타난 그는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에이, 요즘 저런 문신하는 사람 많아. 무조건 문신 있다고 무서운 사람이게?”

“……히에엑! 야, 야, 아니야. 등, 등을 봐.”

“세상에, 웬 호랑이가…….”

“그래도 몸이 좋으니까 괜찮다, 야.”

아직 떠나지 않은 여자들이 계속해서 수군거렸다. 다울은 급히 얼굴을 가리고, 태이와 상관없는 척, 모르는 척을
했다. 엿들을 만큼 엿듣고 아무렇지 않게 태이를 부르기 민망해서였다.

빨리 가 주세요, 가세요.

여자들이 어서 자리를 뜨길 기다렸지만, 한번 시작된 수다는 멈추지 않았다. 다울이 파라솔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 즈음, 담이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우리 아빠아아아!”

“어, 다, 담이야. 하하.”

태이의 품에서 내려와 모래사장을 힘껏 밟으며 뛰어온 담이가 곧장 다울의 품에 안겨 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들은 담이의 외침에 다울을 쳐다보더니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자리를 떠 버렸다.

느긋하게 걸어온 태이는 돗자리 위에 재이를 내려놓고 다울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하얀 볼에 선크림이 뭉쳐
있어서 꼭 생크림을 묻혀 놓은 것 같았다.

“제대로 발라야지.”

태이의 무심한 손이 다울의 볼에 닿았다. 세심하지 못한 손길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다정해서 하마터면 넋을 놓을


뻔했다.

다울은 한 박자 늦게 화를 냈다. 야무진 손이 탄탄한 몸을 찰싹, 내려치자 모래 장난을 치고 있던 담이가 화들짝


놀라 두 사람을 쳐다봤다. 재이와 태이는 늘 그렇듯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정태이, 당장 위에 옷 입어!”

“더워, 다울아.”

“그, 그 망할 문신을 사람들한테 다…….”

“이제 건전하게 사는데 뭐가 문제야.”


“건전하게 살아도, 그 문신이 문제야. 당장 입어!”

잠잠하다 싶더니, 다울이 오랜만에 호통을 쳤다. 태이는 어쩔 수 없이 반소매 티셔츠를 입어야만 했다. 얇은
흰색 반소매 티셔츠라 문신이 비쳐 보이긴 했지만, 완전히 드러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빠는 착한 사람이야.”

“응? 아, 알지. 아빠는 착한 사람이지…….”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담이가 말했다. 아빠는 착한 사람이라고. 태이는 그 말에 자랑스럽게 웃어 보였다.
한쪽 입꼬리만 슥, 당겨 웃는 게 재수 없었다. 태이한테 잔소리를 했다가 담이에게 혼난 꼴이 된 다울은
억지웃음을 지어냈다.

“담이야, 재이야, 모래놀이 할래?”

“응! 모래놀이 세트 줘!”

“잠시만, 재이는? 형이랑 같이 모래놀이 할까?”

“……귀차나.”

사이 좋게 하라고 모래놀이 세트를 두 개나 구매했는데, 정작 재이는 흥미가 없어 보였다. 함께 놀 생각에 들떠


있던 담이가 울상을 지으며 재이의 팔을 이끌자, 어린애답지 않게 한숨을 내쉰 재이가 인심 쓰듯 끌려 나가
모래사장 위에 앉았다.

우리 재이, 뼛속까지 정태이 닮았구나.

다울이 모래놀이 세트를 꺼내 주자 담이가 열심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돗자리 바로 앞에서 모래놀이를 하게 시킨


다울은 안심하고 드러누웠다.

“다울아, 이것 좀 발라 줘.”

“여기서?”

“그럼 어디서 바를까, 급하게 모텔이라도 잡고,”

“아아아아악! 닥쳐! 발라, 발라 줄게!”

태이가 발라 달라고 내민 것은 오일이었다. 바닷가에 온 김에 살을 태우려는 모양이었다. 오일을 받아 들고 살을


그을린 태이를 상상해보던 다울이 귀를 빨갛게 물들였다. 적당히 태워 건강미가 돋보이는 피부에, 탄탄한
몸이라니. 별거 아닌데 괜히 가슴이 뛰었다.

돗자리 위에 등을 보이고 누운 그가 어서 바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다울은 제 손에 오일을 덜어 내 등에 살살


문질렀다. 매끄러운 느낌 때문에 기분이 영 이상했다.

“손길이 좀 야한데.”

“아, 뭐래. 너 자꾸 그런 말 하, 하지 좀 마.”

“말은 왜 더듬어.”
“내가 언제 더듬었다고, 조용히 해!”

방금까지 소심하게 닿아 오던 손길이 거칠어졌다. 오일을 과감히 쏟아부은 다울이 양손으로 등을 마구 문지르자,
누워 있던 태이가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딱 봐도 놀리는 듯한 웃음이었다.

“아야!”

“에헤이, 왜 사람 다니는 데서 모래 장난을 치고 있어!”

태이와 다울이 잔잔히 투닥거리고 있는 사이, 잘 놀고 있던 담이가 모래사장에 엎어졌다. 쪼그려 앉아서 열심히
모래성을 만들던 중, 한 남자와 부딪혀 엎어진 것이었다. 남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놀란 다울이 파라솔 아래로
얼굴을 내밀고 담이 상태를 살폈다.

“담이야, 왜 그래.”

“어떤 아저씨랑 부딪혀서…….”

“죄송합니다, 했어?”

“죄송합니다!”

다울이 평소에 가르친 대로 허리를 숙여 사과한 담이가 저보다 몇 배는 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깔끔한 사과에
인상을 구기던 남자는 서 있는 담이를 툭, 치고 지나갔다. 그 때문에 중심을 잃고 넘어진 담이가 또다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사과도 했는데, 어른스럽지 못하게 애를 치고 지나가다니. 처음은 실수일 수 있다 쳐도, 이번은 명백한 고의였다.
다울은 금세 제 성깔을 드러내며 남자를 붙잡았다.

“저기요, 알 만한 어른이 왜 애를 치고 지나가세요.”

“그러게 왜 애를 저런 데 풀어놔.”

“풀어놔? 너 방금 반말 지껄였냐?”

당황한 담이와 재이를 돗자리 안에 앉혀 놓은 태이가 밖으로 나왔다. 그냥 지나갈 줄 알았던 남자가 굳이 시비를
걸어 와서 일이 귀찮아질 것 같았다.

덩치 큰 남자 앞에서 기죽지 않고 싸우던 다울을 제 뒤에 숨긴 그가 인상을 구겼다. 방금까지 다울을 상대로


큰소리치던 남자는 태이를 보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다울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쳤다. 자기한테는 반말까지 하면서 덤비더니, 태이가 나타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수그리는 게 짜증이 났다.

“나이를 어디로 처먹었길래 남의 집 애를 막 치고 다녀.”

“그, 실수라니까 그러네! 요…….”

“끝까지 사과를 안 하네.”

“미안,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사과한 남자가 잽싸게 도망가 버렸다. 더 꼬투리 잡히기 전에 냅다 도망친 거였다. 다울은 찝찝한
기분을 떠안고 자리로 돌아왔다. 바다에 온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트러블이 생긴 게 괜히 마음에
걸렸다. 이런 날은 꼭 무슨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남자가 멀리 떨어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던 태이가 돌아오자마자 다울의 상태를 살폈다. 혹여 다치지는
않았는지 확인해 보는 거였다. 다행히 얼굴은 말짱했다.

“열받아, 오자마자 웬 미친놈이 걸려서.”

“어디 다친 곳 없지.”

“없어. 정태이, 나 뭔가 오늘 느낌이 안 좋아.”

“걱정하지 마, 내가 잘 보고 있을게.”

느낌이 좋지 않은 건 태이도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싸하고, 누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서늘한


눈매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분위기를 유하게 풀었다.

“놀러 왔으니까 바다에 들어가 볼까.”

“으응. 담이야, 재이야, 물놀이하러 가자!”

튜브를 챙겨 든 다울이 재이 손을 잡고 물가로 향했다. 담이는 태이의 어깨에 매달려 오고 있었다.

파도가 잔잔히 밀려와 모랫바닥을 적셨다. 재이가 무섭지 않도록 조금씩 발을 담그게 해 주던 다울이 장난스레
물을 튀겼다.

재이는 겁이 없었다. 처음 와 보는 바다가 무서울 법도 한데,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배 높이까지 차오른 물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시크한 척을 해도 바닷물이 신기하긴 한 모양이었다.

첨벙!

“흐아아악, 으부, 아빠아악!”

다울이 재이와 알콩달콩한 물놀이를 즐기는 동안, 옆에서는 지옥의 물놀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어깨에 매달려
있던 담이를 그대로 바닷물에 던져 넣은 태이가 유쾌하게 웃었다. 의도치 않게 스릴을 즐기게 된 담이는
허우적거리며 일어나 얼굴을 닦아 냈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울은 얌전히 놀아 주라며 경고했다. 당연히 경고는 먹혀들지 않았다. 과격한 놀이에 맛 들인
담이는 더 스릴 있게 해 달라며 태이를 졸랐고, 태이는 그럴 때마다 흔쾌히 담이를 내던져 줬다.

“아빠, 더, 더 재밌게!”

“물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네.”

“더어, 더 스릴있게 해 줘!”

“대신 울지 마.”

“안 울어!”
자신감 있게 울지 않겠다고 말한 담이는 정확히 5 초 뒤에 울음을 터뜨렸다. 태이가 담이의 몸을 360 도 돌렸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고, 물속까지 구경하고 나온 담이는 잠시 어리둥절하게 서 있다가 다울을
찾으며 울어 댔다.

“흐어어어엉, 흐어엉!”

“담아, 안 울겠다고 했잖아.”

“허어엉, 아빠 악마야!”

다울의 등에 착 달라붙어 안긴 담이가 태이를 매섭게 노려봤다. 더 스릴 있게 해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는


아빠가 악마란다. 묘하게 억울해진 태이는 제 나름대로 해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다울은 담이 편만 들어줄 뿐,
태이의 말을 깔끔히 무시해 버렸다.

“내가 과격하게 하지 말랬지! 담이야, 물 많이 먹었어?”

“정담이, 너 아빠 배신하냐.”

“흐끅, 흐어엉! 코가 찌릿찌릿해….”

다울의 품에 안겨 토닥임을 받던 담이가 태이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얄미운데 마냥 귀엽기만 한 것까지 다울을


닮아 혼낼 수가 없었다. 그저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던 태이가 덩그러니 남겨진 재이의 옆으로 다가가 대충
튜브를 밀어 줬다.

튜브에 몸을 끼워 넣고, 물 위에 동동 떠다니던 재이는 담이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게 왜
아빠한테 놀아 달라고 해서 우느냐는 눈빛이었다.

“재이야, 네 형이 아빠 배신한다.”

“……멍충이.”

“형한테 멍청이가 뭐야, 혼나려고.”

“압빠한테 한 건데.”

“우리 아들들, 다 다울이만 좋아하네. 아빠는 서러워서 살겠냐.”

아들 둘에게 완전히 배신당한 태이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담이와 재이는 다울을 지나치게 좋아했다.
학교나 유치원에서 뭘 만들면 꼭 다울에게 먼저 선물했고, 저번 어버이날에는 다울에게만 카네이션을 두 개씩
줬다.

카네이션은 못 받아도, 역으로 아이들 선물 하나는 잘 챙겨 주는 태이인데 정작 이럴 땐 찬밥 신세였다.

“담이야, 뚝.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흐윽, 맛있는 거 좋아!”

담이를 달래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꺼낸 다울이 물가를 빠져나갔다. 슬슬 점심시간이기도 하니 달랠 겸 밥을


먹이기로 한 것이다.
튜브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재이를 가볍게 들어 안은 태이가 다울의 뒤를 따라 자리로 돌아왔다. 어느새 울음을
그친 담이는 맛있는 걸 먹을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럴 때를 보면 참 단순했다.

“담이가 심부름할게!”

“담이야, 여기 사람들 많아서 위험해.”

“할 수 있어, 나 이제 초등학생인데! 재이랑 손 꼭 잡고 맛있는 거 사 올래!”

심부름으로 먹을 것을 사 오겠다던 담이가 다울의 팔을 붙잡고 애교를 부렸다. 푸드트럭이 모여 있는 곳은 워낙


사람이 많아서 길을 잃으면 아이들 힘으로 돌아오기 힘들 것 같았다. 다울은 한참 고민하다가 지갑을 담이에게
건네줬다.

“알겠어, 그럼 담이랑 재이랑 상의해서 먹고 싶은 거 사 와.”

“와아! 심부름!”

다울이 순순히 허락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끼리 보내는 건 위험할지도 모르니, 몰래 뒤를 따라 밟을


생각이었다. 지갑을 받아 든 담이는 재이 손을 꼭 붙들고 걸음을 옮겼다.

앙증맞은 뒷모습에 입을 틀어막은 다울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형제끼리 다정하게 손을 잡고 심부름가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고 귀엽던지,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다울아, 얼른 와. 애들 놓칠라.”

곧바로 뒤를 밟기 시작한 태이가 다울을 향해 손짓했다. 조심조심 걸어가 태이의 옆에 선 다울이 자연스레 손을
붙잡고, 아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태이의 눈에는 이런 다울도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재이야, 뭐 먹구 싶어?”

“옥쑤수.”

“형아는 옥수수 안 좋아하는데. 그러면 재이는 옥수수 먹구, 형아는 핫도그 먹을래.”

사람들 손에 들린 옥수수를 부럽게 쳐다보던 재이가 단번에 답을 내놓았다. 담이는 핫도그 가게 간판을 한참
쳐다보다가, 재이를 위해 옥수수 가게에 먼저 들렀다.

고소한 버터 냄새가 풍기고, 두 아이의 눈앞에 노르스름하게 익은 옥수수들이 펼쳐졌다. 옥수수를 먹지 않겠다고
했지만, 유혹적인 냄새에 넘어간 담이는 당당히 버터 옥수수 두 개를 주문했다.

어린아이의 야무진 주문에 특별히 버터를 더 많이 발라 구워 준 주인이 꼬치에 꽂힌 옥수수 두 개를 내밀었다.


재이의 손에 옥수수를 먼저 쥐여 준 담이는 계산까지 완벽히 마치고 가게를 나섰다.

“우리 담이 진짜 많이 컸다.”

“그러게, 많이 컸네.”

“재이도, 어, 어라.”

뒤에서 몰래 아이들을 지켜보던 다울이 뿌듯하게 웃고 있는데, 웬 무리가 몰려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단체로 놀러
온 대학생들인 모양이었다. 아이들을 놓칠세라 무리를 뚫고 지나온 다울이 푸드트럭 근처를 샅샅이 훑어봤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아이들이 사라져 버렸다.

시끄러운 사람들 틈에서 아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눈을 굴리던 다울이 주저앉고 말았다. 태이 또한 고개를 돌려
가며 아이들을 찾으려고 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아 착잡해진 참이었다.

“다울아, 진정해. 찾을 수 있어.”

“없어, 방금까지만 해도 저기에 있었는데, 그랬는데.”

“우선 자리로 가 있어,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정태이, 너는……?”

“나는 애들이 갈 만한 곳 뒤져 볼게. 진정하고, 응?”

주저앉은 다울을 단단히 붙잡아 일으킨 태이가 먼저 돌아가 있으라며 등을 토닥였다. 넋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애들을 찾으라고 했다가는, 다울까지 잃어버릴 것 같아서 돌려보낸 것이었다.

그의 침착한 대처에 조금이나마 안심한 다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태이는 다울이 안전히
돌아가는 걸 확인한 뒤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옥수수를 사 들고 나온 아이들은 한 남자와 대립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타나 아이들에게 말을 건 남자는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얘들아, 아저씨가 곤란한 일이 생겼는데 도와줄 수 있을까?”

“시러요.”

도와달라는 말에 망설이던 담이와 달리, 재이는 딱 잘라 싫다고 대답했다. 다부진 대답에 잠시 당황하던 남자는
눈을 최대한 불쌍하게 뜨고 담이를 쳐다봤다. 재이 쪽이 만만치 않으니, 담이를 노리는 듯했다.

울망한 눈으로 남자를 응시하던 담이가 이전에 다울이 했던 말을 떠올려냈다. 모르는 사람이 가자고 하면, 우리
아빠 무서운 사람이라고 말하라던 기억이었다.

재이의 손을 더 꽉 붙잡고, 한 손에 쥔 옥수수까지 야무지게 붙든 담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우리 아빠 무서운 사람인데!”

“하하, 얘들아. 아저씨는 그냥 잠깐…….”

“우리 아빠 몸에는 그림도 있는데!”

“그러니까, 아저씨 말을 좀…….”

“우리 아빠 힘도 완전 세고, 근육도 많이 있는데!”

긴장한 탓에 학습된 말만 기계적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재이는 몰래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담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당당히 행동하고 있었지만, 실은 앞에
선 아저씨가 무서워서 이가 덜덜 떨렸다.

“야, 이 개새끼야! 너 뭐야! 너 뭔데 우리 애들한테 접근해!”

그때였다. 아이들의 뒤에서 다울의 힘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태이가 아이들을 찾아보는 동안 자리로
돌아가던 다울이 운 좋게 담이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뛰어오는 중이었다.

모래사장에 발이 푹푹, 빠져서 달리는 게 힘들었지만, 다울은 있는 힘껏 달려왔다. 큰 목소리에 이목이 쏠리자,
당황한 남자는 그대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야, 너 거기 안 서? 이 범죄자 새끼가! 정태이! 저 새끼 잡아!”

“흐읍, 흐, 흐아아앙, 아빠아!”

“저, 저! 어, 담이야, 재이야. 많이 놀랐지? 괜찮아, 괜찮아.”

차마 남자를 따라잡지 못한 다울이 놀란 아이들을 껴안아 달래기 시작했다. 마침 근처를 둘러보던 태이는 다울의
목소리를 듣고, 도망치는 남자를 잡기 위해 뒤를 쫓았다.

아이들을 유괴하려던 남자는 생각보다 다리가 재빨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금방 따라잡힐 텐데, 그러지 않는 걸로
봐서는 확실히 어딘가 수상하긴 했다.

그나마 발이 덜 빠지는 바닷가 쪽으로 노선을 변경한 태이가 더 빠르게 뛰었다. 눈치를 보며 달리던 남자는
사람이 없는 화장실 뒤편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공터의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싸했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모습을 드러낸 태이가 화장실 뒤를
훑어보다가, 쓰레기가 담긴 드럼통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 그러자 두어 번 흔들리던 드럼통이 큰 소리를 내며
쓰러져 굴러갔다.

“나와.”

“저, 저기 나는 진짜 길만 물으려고…….”

“몇 명이야.”

“…….”

“너 말고, 여기 숨어든 쥐새끼들 더 있잖아.”

드럼통 뒤에 숨어 있던 남자가 뒷걸음질 치자, 태이가 멱살을 잡아 올려 강제로 눈을 마주쳤다. 길을 물으려고


했다는 이유로 상황을 빠져나가려 하던 남자는 의미심장한 물음에 시선을 회피해 버렸다.

어둠을 구른 세월만 20 년이었다. 이런 인기척을 알아채는 건 태이에게 일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무도 없는 거


같아 보여도, 이 공터에는 눈앞의 남자를 비롯한 쥐새끼가 여럿 숨어들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아이들을 유괴하려 했던 걸까. 그것도 굳이 태이와 다울의 아이를 유괴하려 했다. 애초부터
유괴 대상을 정하고 온 것처럼.

태이의 촉은 늘 빗나가지 않았다. 그는 예상가는 인물을 머릿속에 떠올려냈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절연한


태이의 할아버지, 카쿠치 신코밖에 없었다.

* * *

다울은 우는 담이를 데리고 돌아와 달래기 바빴다. 위험한 상황에서 재이를 지키겠다고 애를 쓰더니, 실은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껴안아서 등을 토닥이고, 먹을 것까지 손에 쥐여 준 다울이 목을 쭉 내밀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태이를 기다리는 거였다.

“아빠는?”

“어, 저기 온다.”

감쪽같이 사라졌던 태이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어쩐지 머리카락이나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것 같았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 틈 사이에서 아빠를 발견한 담이가 달려가자, 몸을 가볍게 안아 든
태이가 머리를 격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정태이, 그 새끼는?”

“일어나, 일단 집으로 가자. 여긴 위험해.”

“어? 위험하다고? 아니, 어떻게 된 건데.”

“할아버지 일행이 따라붙었어.”

다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몇 년 동안 걱정 없이 살아왔는데, 카쿠치 신코가 갑자기 따라붙었다니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걸까.

카쿠치 신코가 나이를 먹어 후계자가 정말 필요해졌을 때쯤, 이런 일이 벌어진 게 불안했다. 이제는 애들도 커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기억할 텐데. 큰일이었다.

사색이 된 다울이 황급히 짐을 챙겼다. 오랜만에 나온 바다였는데, 왜 항상 행복할 때 불행한 일이 발생하는지


모르겠다. 다울이 손을 버벅거리자, 태이가 대신 짐을 챙기고 아이들을 안아 들었다.

“아빠, 어디 가?”

“오늘은 여기까지 놀고 집에 갈 거야.”

“왜, 왜? 더 놀고 싶은데…….”

“지금 아빠 말 잘 들으면, 나중에 또 데리고 와 줄 테니까 쉿.”

또 데리고 와 준다는 회유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담이가 차에 올라탔다. 멍하게 안겨 있던 재이는 태이가
시트에 앉혀 놓았고, 다울은 트렁크에 짐을 싣자마자 조수석에 올라타 문을 잠가 버렸다.
태이가 운전대를 잡자마자 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백미러로 뒤쪽 상황을 지켜보던 그가 금세 따라붙은 차량을
확인하고 속도를 더 높이기 시작했다.

다울은 몰래 주먹을 움켜쥐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몇 년 전, 태이와 절연하고 일본으로 떠난 카쿠치 신코가 왜
다시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 걸까. 제대로 떨쳐 낸 줄 알았는데, 야쿠자 가문과 끈질기게 엮여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차를 유턴시켜 미행하는 차량을 잡고, 안에 탄 카쿠치 신코에게 협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아이들이 있어서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집으로 향하는 길이 이렇게 공포스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태이는 아이들이 다치지 않을 선에서 속도를 높여
차선을 이리저리 변경했다. 뒤쫓아 오는 차량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상황은 태이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하아…….”

착잡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도로는 꽉 막혔고, 이 상태에서 속도를 내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고, 미칠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행 차량도 도로 상황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막히는 구간을 지나고 나니, 다시 앞이 뻥 뚫렸다. 태이는 곧장 액셀을 밟아 속도를 높였다. 아이들이 타고 있을
때는 평소처럼 차를 과격하게 몰지 않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걱정과 달리 아이들은 겁도 없이
속도감을 즐기고 있었다.

“와아, 롤러코스터!”

“담이야, 다리 흔들지 마. 그러다 다친단 말이야.”

“아빠, 우리 자동차만 속도 짱 빨라!”

붕 뜬 목소리 톤에 차 안 분위기가 이상하게 밝아졌다. 담이가 너무 해맑은 탓일까. 백미러로 뒷좌석을 바라보던
태이가 피실, 웃음을 터뜨렸다.

“정담이, 정재이, 더 재미있게 해 줄까.”

“아빠, 우리 더 빨리 달리자!”

“그래, 대신 안전벨트 절대 풀지 마.”

다울의 눈빛에 불안이 가득 찼다. 설마, 여기서 더 빨리 달릴 생각은 아니겠지. 의심하던 중, 차가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좋아했지만, 다울은 잔뜩 겁먹어 몸을 웅크렸다.

확실히 속도를 더 높이자 미행하던 차량이 쉽게 따라오지 못했다. 대신 다울의 살벌한 시선이 태이에게
따라붙었다.

“정태이, 므츴으? 속도 줄여. 무섭다고…….”

“다울아, 조금만 참아 봐.”

아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리를 죽여 욕하던 다울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조금만 참으라며
액셀을 더 세게 밟는 태이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와중에 운전 실력이 군더더기 없이 좋은 게 어이가 없었다.
도로 위를 미친 것처럼 달리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이었다. 두 시간
걸릴 거리를 한 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었다.

집 앞 골목, 주차장까지 들어가지도 않고 대충 차를 세운 그가 문을 열고 내렸다. 다울은 주변을 경계하며


아이들을 먼저 챙겼다.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

“애들이랑 먼저 들어가 있어.”

“잠시만, 정태이. 너 혼자 뭘 어떻게 하려고?”

“금방 따라 들어갈게.”

징하기도 하지. 기어코 미행 차량이 태이의 차를 따라잡았다. 골목길 끄트머리에 들어선 검은 승용차를 뚫어지게
노려보던 다울이 대문을 쾅, 닫아 버렸다.

태이 혼자 저들을 상대할 수 있을는지 걱정되긴 했지만, 당장 공격해 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그리 위험할 것 같지


않았다.

다울은 이제 무섭지 않았다. 저들이 무슨 수를 써도 태이는 넘어가지 않을 것이고, 애들 또한 지켜낼 자신이


있었다.

“아빠!”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돌계단을 오르던 담이가 바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맑은 미소에 화답하듯 입꼬리를 말아
올린 태이가 어서 들어가라며 손짓해 보였다. 여유로운 모습에 마음을 놓은 다울이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예전에 쓰던 야구 방망이를 찾아 놔야 하나.

아이들을 챙기는 얼굴은 평온했으나 속은 그렇지 않았다. 다울은 예전에 사용하던 야구 방망이를 어디에 처박아
놨는지 고민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준비해 놓으려던 것이었다.

한편, 혼자 남은 태이는 미행 차량 앞까지 다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겁 없는 행동이었다. 상대가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태이는 자신이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주변 공기가 싸하게 내려앉았다. 한참을 기다리니, 응답 없던 미행 차량 문이 서서히 열렸다. 태이는 정확히


우측에 서서 제가 예상한 사람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아스팔트 위로 정장을 입은 다리가 우뚝 섰다. 뒷좌석에 탄 사람은 두 명. 한쪽은 간부일 테고, 한쪽은 카쿠치
신코가 분명하다. 카쿠치 신코는 늘 우측에 앉는 걸 선호했다.

“커윽, 컥……!”

망설이면 먼저 당하고 만다. 태이는 이제 막 차에서 내린 남자의 목을 노렸다. 뒤에서 팔을 걸어 목을 졸라 대니


괴로움에 찬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얇은 목, 전보다 왜소해진 체형, 낮은 키, 하얗게 센 머리까지.

태이가 목을 조른 남자는 카쿠치 신코가 확실했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잽싸게 뛰쳐나온 간부들이 태이의 주변을
둘러쌌다.

“그때 경고했을 텐데요. 제 손으로 할아버지 목숨 끊게 만들지 말라고.”

“허, 허큭, 윽!”

아무리 저쪽에서 먼저 미행했다지만, 죽일 기세로 할아버지의 목을 조르는 모습이 지나치게 냉정했다. 당황한
간부들은 태이를 경계하는 것보다 말리기 급급했다.

“아닙니다, 오해이십니다.”

“오해는 무슨 오해.”

“수장께서는 그저 증손주를 보고 싶어서……!”

증손주를 데리고 가려는 게 아니라, 보고 싶어서 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그가 헛웃음을 쳤다.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신을 학대하며 키웠던 할아버지가 고작 증손주를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게 우습기만 했다.

카쿠치 신코는 제 목을 조르는 팔을 힘겹게 툭툭, 쳤다. 다 늙어 앙상해진 손가락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벌써 여든이 넘었는데 힘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허윽, 콜록!”

“수작 부리지 말고 제대로 말씀해 보시죠.”

팔을 거칠게 풀어낸 태이가 퉁명스레 물었다. 허리를 숙여 괴로운 기침을 내뱉던 카쿠치 신코가 가슴께를
부여잡고 태이를 매섭게 노려봤다. 손주 자식이 진짜 목을 조를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태이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이미 한 번 경고를 했고, 알아듣지 못한다면 무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도덕 없는 짓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간부들이 달려들어 카쿠치 신코를 걱정했다.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몸을 겨우 겨누고, 천천히 숨을 고르던
노인이 태이를 향해 크게 호통쳤다.

“이 배은망덕한 자식을 보았나!”

“왜 오셨는지 똑바로 말씀하세요.”

“크흠, 증손주들 보러 왔다. 너는 내 몸 상태가 보이지 않는 거냐. 걱정이라도 좀 하지 그러냐.”

태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할아버지의 몸 상태 따위 궁금하지 않았다. 그의 건강을 걱정해 줄 사람이


조직 내에 깔렸는데, 굳이 걱정할 필요성이 있을까. 심지어 둘은 절연한 사이였다.

간부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카쿠치 신코는 증손주를 진심으로 보고 싶어 했다. 다 늙어서 노망이 난 게
분명했다. 차 안, 간부들의 옷, 세세히 다 따져가며 훑어보았으나, 흉기는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돌아가세요. 애들이랑 만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 곧 죽을지도 모른다, 이놈아. 마지막으로 증손주 얼굴 보는 것도 안 되는 거냐.”

두 사람의 기 싸움이 이어졌다. 물론 한쪽은 기 싸움보다 고집에 더 가까웠다. 숨 막히는 신경전에 불편해지는
건 간부들뿐이었다. 대문을 뚫고 들어가려는 창과 절대 물러나지 않는 방패라니.

5 분 가까이 대립하던 중,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려서는 안 될 소리에 뒤를 돌아본 태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다울이었다. 한 손에 든 야구 방망이를 구석에 집어 던진 그가 건방진 태도로 짝다리를


짚고 섰다.

“들어오라고 해.”

“다울아.”

“증손주 보러 온 거라잖아. 막말로 저 할배가 뭘 할 수 있겠어.”

창문으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다울이 카쿠치 신코를 흔쾌히 집 안으로 들였다. 별도의 목적으로 온 거였다면
야구 방망이를 무자비하게 휘두를 생각이었지만, 그저 증손주를 보고 싶어 멀리까지 온 사람에게 매몰차게 굴기는
싫었다.

그래,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뒤에서 그런 수작까지 부렸겠어.

쓸데없는 동정심을 느낀 다울이 대문을 활짝 열었다. 만약, 카쿠치 신코가 허튼짓이라도 하면 그때는 태이가
나서서 해결할 것이다.

“저 맹랑한 녀석, 몇 년 사이에 얌전해졌구나. 어른 위할 줄도 알고.”

뻘쭘한 얼굴로 다울을 바라보던 카쿠치 신코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말은 얄밉게 하면서, 내심 문을 열어 준
다울에게 고마웠는지 헛기침을 연신 내뱉었다.

현관문을 연 그는 몇 초 동안 굳어 있었다. 문 바로 앞에 담이와 재이가 멀뚱히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을 보고도 울지 않는 게 신기했다.

“아빠, 누구야?”

“너희 증조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와아,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라는 말에 아이들이 뛸 듯이 기뻐했다. 한 번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까. 친구들


다 있는 할아버지를 갖게 되어 신난 담이가 방방 뛰어 댔다. 무심한 척 앉아 있던 재이도 할아버지가 나름
좋았는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다울의 뒤를 쫓아 들어온 태이는 어이없는 광경에 이마를 짚고 말았다. 낯가림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당황한 건 카쿠치 신코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 태이는 붙임성도 없고 귀염성도 없는 아이였다. 하루도 어릴 때는 말이 없어서 조용했다. 카쿠치


신코는 이런 아이들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이토록 밝고 기운 넘치는 아이들이라니. 도저히 태이의 자식 같지
않았다.

“할아버지, 들어와! 들어와!”


“할부지, 할부지.”

담이가 카쿠치 신코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할아버지가 생기면 꼭 보여 주고 싶었던 그림이 있다며 방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앙증맞았다.

밝은 아이들 덕분에 어른들 사이는 어색해졌다. 이게 아닌데, 이런 분위기가 아니어야 하는데. 참 이상하다.
다울은 멋쩍은 태도로 볼을 긁적였다. 태이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허허, 이 자식들. 난 이렇게 밝은 녀석들은 처음 본다. 어디 안아 보자. 네가 둘째 맞지? 이름이 뭐냐.”

“나는 재이, 정재이. 할부지, 더 높게 안아 조.”

품에 얌전히 안겨든 재이가 더 높게 안아 달라며 할아버지에게 엉겨 붙었다. 살가운 태도에 들뜬 카쿠치 신코는
무게가 꽤 나가는 재이를 잘도 들었다 올렸다 하며 안아 줬다.

담이는 어느새 제가 그린 그림을 가지고 나와 자랑하고 있었다. 스케치북 위에는 네 가족이 그려져 있었고,
왼편에 따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한 다른 식구들이 그려진 채였다. 나중에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 미리 그린
모양이었다.

그림을 본 카쿠치 신코는 장하기도 하다며 담이를 쓰다듬었다. 칭찬받는 걸 좋아하는 담이는 신이 나서 다른
그림들까지 보여 주고 난리도 아니었다.

태이는 제 눈을 의심했다. 저 앞에서 애들과 놀아 주고 있는 사람이 정녕 제 할아버지가 맞는 것인지.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할아버지는 엄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훈련에
제대로 임하지 않으면 칼집으로 때리기도 하고, 거친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태이에게는 지옥이었던 시간이었고, 악마 같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이들에게는 환하게 웃어 준다.
아이들도 그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아이들한테라도 너그러운 사람으로 남아 줘서 다행인 건가. 마음속이 괜히 복잡해졌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 그냥 할아버지가 아니라, 증조할아버지야?”

“아빠의 엄마가 할머니시고, 할머니의 아빠를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냥 할아버지라고 부를래!”

편하게 ‘할아버지.’로 호칭을 정한 담이가 카쿠치 신코 옆에 꼭 붙어 앉았다. 평소에는 태이나 다울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더니 의외였다.

“할아버지, 그러면 할아버지가 우리 아빠 키운 거야?”

“너희들만 할 때부터 내가 키웠지, 그럼.”

순수한 질문에 카쿠치 신코의 표정이 씁쓸하게 물들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태이를 유독 엄하게 키웠다는
것을. 어디 엄했을 뿐일까, 훈련에서 도망치면 심할 정도로 때리기까지 했다.

다 늙은 지금에서야 후회해 봤자였다. 그가 한 짓은 여전히 용서받지 못했고, 앞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태이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 버렸다. 다울은 슬며시 손을 붙잡아 줬다.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작게나마 위로해 주고 싶어서였다.

“아빠는 어땠어? 아빠 착했어?”

“…그래. 가끔 말썽을 부리긴 해도, 천성은 괜찮았지.”

아이들이 태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동안, 다울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카쿠치 신코가 뒤늦게
화해를 시도하는 걸까. 후회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태이의 표정이 좋지 않아졌다.

가만히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던 태이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베란다로 향하는 걸 보니, 손대지 않던 담배를
피우려는 모양이었다. 다울은 말없이 손을 놓아 주었다. 지금은 태이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카쿠치 신코는 아이들 사이에 앉아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태이가 시키지 않은 일까지 척척 해낸 이야기,
무슨 일이든 잘해서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샀던 이야기, 특히 검도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는 이야기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담이와 재이는 그저 감탄하기 바빴다. 제일 의외였던 건, 재이가 할아버지를 잘 따른다는 거였다.
그 무심하던 애가 아빠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더니 배시시 웃기까지 했다.

약 한 시간 동안 아이들과 어울리던 카쿠치 신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럭무럭 자란 증손주도 잘 보았고, 태이


얼굴도 오랜만에 봤으니 가려는 모양새였다.

“너, 잠깐 나 좀 보자.”

태이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다울을 불렀다. 표정이 영 심상치 않은 걸로 봐서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다울은 순순히 그 뒤를 따랐다.

“버르장머리 없이 굴더니, 애는 잘 키웠구나.”

“버르장머리 없었던 건, 할배, 아니, 할아버지가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해서 그런 거거든요.”

늘 할배라고 부르던 다울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호칭을 사용했다. 자기 할 말을 야무지게 하는 다울의 모습에
허탈하게 웃던 그가 뜸을 들였다. 퉁명스럽게 굴었지만, 진짜 하고픈 말은 따로 있었다.

“그때 일은 내가 조급해서 실수했다. 조직을 이어 가야 한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짓을 했어.”

“그럼요. 내가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데? 할배한테 물 맞고, 악 쓰고. 그때 내가 안 그랬으면, 지금쯤 정태이는


불행하게 살고 있었을 거예요. 예쁜 아들들도 못 보고.”

원망하는 목소리가 제법 얄미웠다. 다울은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잘못한 건 잘못한 거였고,
카쿠치 신코를 용서할지 말지는 태이가 정하는 거였다.

다울은 그 당시 자신이 겪었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물을 맞았어도 태이와 담이, 그리고 미래의 재이를
지켜냈으니 분하지 않았다.

“내가 그놈한테는 미안하다는 말도 미안해서 못 하겠어. 마지막까지 막무가내로 굴어서 미안하다. 그래도 죽기
전에 한 번쯤은 보고 싶어서…….”

“할배, 아니, 할아버지 마음은 알겠는데, 정태이는 지금 심란해 미칠걸요. 원하는 대로 증손주 얼굴도 봤으니까
이만 돌아가요.”
다울이 단호한 태도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카쿠치 신코가 마음을 고쳐먹고 반성하든 말든 그에게는 태이가
최우선이었다.

다울의 대답에 내심 서운해하던 카쿠치 신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마지막까지 막무가내로 군
게 미안해서 이만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손을 까딱이자, 멀뚱하게 서 있던 간부들이 줄줄이 현관 밖으로 나섰다. 담이와 재이는 할아버지가 간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채고 우다다다, 뛰어나왔다.

“할부지, 가지 마.”

“가지 마! 할아버지, 가지 마!”

우리 담이랑 재이 어쩌면 좋지. 한 시간 전에 본 할아버지를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누굴 닮아서


친화력이 좋은 거야.

다울의 표정이 곤란함으로 가득 찼다. 담이와 재이는 카쿠치 신코의 다리에 매달려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잠깐이나마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정이 제대로 든 모양이었다.

“이 녀석들, 귀엽기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보자, 기회가 된다면.”

“할부지, 압빠 얘기 또 해 조야 대.”

“그래, 그래.”

재이와 담이를 떼어 낸 다울이 어서 가라며 눈치를 줬다. 지금 안 가면 담이가 울지도 몰랐다. 정이 워낙 많은


아이라 울음도 많아서 문제였다.

“태이한테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말고.”

“알았어요.”

“……간다.”

마지막까지 아이들을 눈에 담던 그가 뒤돌아섰다. 왜소한 등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재이를 꼭 껴안고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다울이 고민 끝에 다시 카쿠치 신코를 불러세웠다.

“저기!”

“왜 그러냐.”

“나한테만 몰래 연락처 줘요. 곧 죽는다는 얘기는 왜 한 거야? 누구 동정심을 막 유발하고, 아무튼, 연락처
주면 가끔 증손주 사진 정도는 보내 줄게요.”

담이 성격은 다울을 빼닮았나 보다. 정이 많은 건 다울도 마찬가지였다. 온순해진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다울이
어서 연락처를 찍으라며 핸드폰을 건넸다. 이런 다울의 태도에 놀란 그가 손을 벌벌 떨었다.

핸드폰에 익숙치 않은 번호가 입력됐다. 한 자 한 자를 신중하게 입력한 그가 일부러 목을 가다듬으며 딴청을


피웠다.
“자, 담이야 재이야, 할아버지한테 손 흔들어 줘.”

“할부지, 가지 마.”

“할아버지, 잘 가…….”

잔잔하게 웃으며 뒤돌아선 그가 현관문을 나섰다. 다울이 먼저 손을 내밀어 준 덕분에 돌아가는 길에 미련이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대문 밖으로 나온 카쿠치 신코는 차에 올라타기 전, 고개를 들어 집을 바라봤다. 어디선가 집요한 시선이


느껴지더라니, 테라스에 태이가 서 있었다. 묵묵히 담배를 태우며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는 차가 출발한 뒤에야
등을 돌렸다.

드디어 집이 조용해졌다. 고작 하루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져서 기가 쭉쭉 빨렸다.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끈


태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태이. 바닷가는 어때? 재미있어?

“집이야.”

왜? 나한테 애들까지 봐 달라고 했으면서. 설마, 다우리랑 싸운 거 아니지?

“잠깐 일이 있었어.”

핸드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밝은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하루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하루에게 무심한 대답을 내놓은 그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한테 전해. 돌아가시기 직전에 한 번 들르겠다고.”

저기, 태이……?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끊어.”

마음대로 전화를 끊은 그가 통창을 막 열었을 때였다. 문 앞에서 우물쭈물하던 다울이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태이의 품에 포옥 안겨들었다. 전부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울은 가라앉은 태이의 기분을 띄워 주기 위해
애를 썼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입술이 맞붙었다 떨어졌다.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다울은 일부러 쪽쪽, 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해야 태이가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하는 거야, 다울아.”

“뽀뽀.”

“애들도 있는데.”

“괜찮아. 다 방에 있어.”

평소와 대화가 다르게 흘러갔다. 보통 태이가 들이대고 다울이 밀어내는 식이었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가
되어버렸다. 다울의 머릿속을 꿰뚫어 본 태이는 피실, 웃음을 터뜨리며 작은 몸을 마주 껴안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울은 변하지 않고 옆에 있어 줬다. 몸집은 작지만, 언제나 당차게 옆을 지켜주려는 모습이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 * *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에는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됐다. 아침 일찍 일어난 다울은 평소처럼 아이들을 깨워
유치원에 보내고, 학교에 보냈다. 며칠 동안 할아버지 타령을 하던 재이는 나흘이 지난 후에야 조용해졌다.

아이들과 태이가 없는 집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하루가 들릴 때는 잠시 사람 사는 집 같기도 했는데, 요즘은


연애한다고 잘 들르지 않아서 늘 혼자였다.

심심해서 청소기를 돌리고 나면 열한 시, 이른 점심을 먹으면 열두 시, 태이와 간간이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TV 를


시청하다 보면 두 시가 되었다.

그나마 위안 삼을 건, 재이가 유치원에서 일찍 돌아온다는 사실이었다. 초등학교에 간 담이는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왔지만, 재이는 세 시에 데리고 와야 했다.

“집에 오면 간식으로 떡볶이나 만들어 줄까.”

간식 걱정을 하던 다울이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한 달 전에 오븐을 태우고 나서 요리 금지령이 내려졌었는데,


이제 슬슬 다시 요리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오늘의 간식은 떡볶이였다. 냉장고를 뒤적거려 보니 어묵은 나오는데 떡은 나오지 않았다. 떡볶이를 만들지
말라는 계시인가. 멍하니 볼을 긁적이던 다울이 냉장고 문을 닫아 버렸다.

“역시 떡볶이는 사 먹는 게 맛있으니까.”

거실까지 걸어 나온 다울이 소파에 드러누웠다. 의미 없이 천장을 보고 있다 보면 온갖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우리 애들은 언제 다 클까. 영영 안 클 것 같은데.

담이와 재이가 어른이 된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아직 작은 아기들인데, 금방 커서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교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정태이는 그때 즈음이면 늙을까? 지금도 젊은데, 뭔가 나만 늙을 느낌이란 말이지.

쓸데없는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담이와 재이는 어떤 형질일까. 나중에 어떤 애인을 사귈까. 크면 태이를 똑
닮았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질 때쯤, 다울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재이 데리러 가야 하는데!”


벌써 재이를 마중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곧 있으면 집 근처에 샛노란 유치원 버스가 설 것이다. 다울은 머리만
대충 정리하고 황급히 뛰쳐나갔다.

날씨는 여전히 푹푹 쪘다.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나온 다울은 손을 이마에 대고 그늘을 만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아직 유치원 버스가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겨우 찾아낸 나무 밑 그늘에 서서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던 다울은 이상함을 깨달았다. 십 분이나 기다렸는데
버스가 오지 않는 것이다.

“아니야, 설마.”

한 걸음씩 움직여 모퉁이를 돌아본 다울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구석진 곳에 재이가 쪼그려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재이야!”

“어, 아빠.”

“재이야, 왜 여기 있어! 안 더웠어?”

노란색 유치원복을 입은 재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말은 안 덥다고 하는데, 이마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와중에 뭘 그리고 있었는지 손에 크레파스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뭐에 열중하고 있었길래 더운 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준 다울이 재이를 들어 안고 집까지


달렸다.

“재이야, 물 마시고 좀 누워 있어.”

찬물을 마시게 한 다울이 에어컨 온도를 낮췄다. 더워서 두 볼이 발그레해진 재이는 인형처럼 누워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 밖에서는 더운 걸 모르더니, 집에 오니까 살 것 같았나 보다.

다울은 재이의 유치원 가방을 확인했다. 작은 알림장을 꺼내려 하는데, 왠지 스케치북이 눈에 밟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유치원에서 장래 희망 그리기를 한다고 했었다.

뒤적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재이가 화들짝 놀라며 뛰어왔다. 그리고는 다울의 손에서 스케치북을 휙, 낚아채
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한 다울이 눈을 끔뻑거리자, 재이가 꼬물거리며 스케치북을 펼쳤다.

“오늘 유치원에서 그림 그리기 해써. 내가 되고 시픈 거.”

“으응, 그래? 재이가 직접 보여 주고 싶었구나.”

“다 완성 못 해서 아까 거기서 그려써.”

밖에서 뭘 그리 열심히 했나 했더니, 다 완성하지 못한 그림을 완성시켰나 보다. 재이가 웬일로 부끄러운 표정을
다 지었다.

다울의 앞에 스케치북이 내밀어졌다. 경찰을 그렸을까, 아니면 소방관? 기대하며 스케치북을 바라본 그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태이가 무려 78 색 크레파스를 사 줬는데, 재이가 사용한 색은 검은색 하나가 다였다. 흰 바탕에는 사람 한 명만


떡하니 서 있었다. 키가 크게 표현되어 있고, 몸집이 다부지고, 팔에 그림이 그려진…….

“재이야, 이거, 뭐 그린 거야?”

“태이 아빠.”

“아빠? 재이는 커서 아빠가 되고, 싶어……?”

“할부지가 아빠 멋있는 사람이래써.”

망할 할배. 애한테 무슨 얘기를 했길래! 장래 희망에 저런 그림을! 그리냐고!

차마 재이한테 뭐라고 할 수 없었던 다울이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이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물론 지금의
태이는 건전하게 살고 있지만, 재이는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전의 아빠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안 돼, 이대로는 안 돼. 정태이는 왜 전직이 야쿠자인 거야. 한 명 죽어라 갱생시켜 놨더니, 상황이 또


위험해졌잖아! 진짜 위험하다고! 애들이! 내 애들이!

다울이 아무리 설득해 보려고 해도 재이의 장래 희망은 확고했다. 제 꿈을 빼앗길세라 스케치북을 꼭 껴안은
팔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꼭 아빠처럼 될 거야.

이글이글 타는 눈빛에 다울은 눈물을 훔쳐내고 말았다. 전직이 야쿠자인 남편 때문에 육아가 더럽게 위험했다.

외전 3. 우성 알파가 셋이라 위험해

여름이 떠나고, 가을바람이 솔솔 불었다. 담이가 태어난 후, 25 번째로 맞이하는 가을이었다. 다울의 허리
아래로 내려오던 아이들이 지금은 태이와 키가 엇비슷해졌다. 담이 나이는 어느새 스물다섯이었고, 재이는 올해
막 스무 살이 되었다.

다울은 건장한 남자 셋을 줄줄이 달고 외출에 나섰다. 오늘은 재이의 형질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담이의 경우 중학생 때 발현이 되어 우성 알파라는 걸 일찍 알았지만, 재이는 성인이 된 직후에야 발현이


이루어졌다. 의사는 재이의 검사 결과를 손쉽게 예상했다. 99.9%의 가능성으로 우성 알파가 된다는 말에 다울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낳았는데 왜 정태이 유전자가 더 강한 거야.

다울의 성격을 닮아 잠시나마 기대했던 담이도 우성 알파, 재이는 아직 결과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거의 우성
알파가 확실하고, 태이도 우성 알파다.

뭔 놈의 집안이 우성 알파 파티였다. 우성 알파로 발현되기도 힘들다던데, 힘들기는 개뿔이었다.


“아빠, 넋 놓고 걷지 마. 그러다 또 다칠라.”

“정재이, 이다울한테 손대지 말라고 했다.”

다울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끈 재이가 습관적으로 걱정을 했다. 태이는 그런 재이의 손을 쳐내기 바빴다. 둘이
하는 행동도, 성격도 똑같아서는 시도 때도 없이 티격태격했다.

태이의 옆에 꼭 붙어 걷게 된 다울이 체념한 듯 한숨을 뱉었다. 두 사람이 싸우는 사이, 능글맞게 다가온 담이가
자연스레 팔짱을 꼈다. 저쪽은 너무 싸워 대서 문제였고, 이쪽은 너무 붙어서 문제였다.

“담이야, 너 또…….”

“아빠, 우리 둘만 쏙 빠질까?”

“안 돼. 재이 결과 나오는 거 봐야지.”

“안 봐도 우성 알파일 텐데 뭐, 으억!”

둘만 빠지자고 꼬드기던 담이가 억, 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태이가 팔짱 낀 팔을 우악스럽게 떼어 냈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쪽을 한 번씩 보고 지나치자, 창피했던 다울이 모르는 척 앞장서 갔다.

아들 둘을 따돌리고 온 태이가 다울의 어깨를 자연스레 감쌌다. 전보다 나이를 더 먹었어도 하는 행동은 예전과
똑같았다.

“같이 가야지, 다울아.”

“애들이랑 싸우지 좀 마.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건방진 것들이 자기 애인 두고 내 애인을 넘보니까.”

“이, 이 철없는 인간아…….”

담이랑 재이가 어릴 때는 안 그러더니, 크고 나서는 태이와 싸우는 일이 잦았다. 그렇다고 해서 심하게 싸우는
건 아니었고, 사소한 걸로 신경전을 벌인다던가, 투닥거렸다.

드디어 병원에 들어선 다울이 태이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경고를 줬다. 병원에서는 애들과 싸우지
말라는 무언가의 신호였다.

다울이 로비에 자리를 잡고 앉자, 세 명이 나란히 따라 앉았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시선이 집중되어 버렸다.
다울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렸다.

애들이 큰 후로 다 같이 어디 외출할 때마다 시선 집중되는 일이 많아졌다. 이게 다 훤칠한 키와 잘난 얼굴


때문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먹은 티가 안 날 정도로 잘생긴 정태이, 선한 눈매에 시원스레 올라간 입꼬리가 매력적인 강아지상
온미남 정담이, 날카롭고 차가운 이미지에 까칠하면서도 무심한 눈동자가 매력인 냉미남 정재이.

그리고, 그사이에 섞인 자그마한 이다울.

“와, 엄마. 저 오메가 대단하다. 알파를 셋씩이나 사귀는 거야?”


“에이, 닮은 거 보니까 가족인 거 같은데. 저 집 아들 농사 잘 지었네.”

이런 오해를 받는 건 이제 익숙했다. 오메가가 알파 셋을 거느리고 다닌다느니, 문어발을 당당하게 걸치고


다닌다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하도 많이 들어서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재이 님, 들어오세요.”

타이밍 좋게 나타난 간호사가 이름을 불렀다. 가족이 다 같이 일어나서 진료실로 들어가자, 등 뒤가 따가웠다.

담이 형질 검사 때부터 봐 왔던 의사가 흐뭇하게 웃으며 다울을 반겼다. 보자마자 박수를 치는 걸 보니 우성


알파가 확실한 모양이었다.

“이런 경우가 흔하지 않은데, 참 특이하네요. 재이 군도 우성 알파입니다.”

“내 작은 기대가…….”

내심 0.1%의 기적을 바라던 다울이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진짜 우성 알파라니. 결과지 첫 페이지에는 ‘
우성 알파.’라는 글자가 빨간색으로 쓰여 있었다. 담이 때도 한 번 보았던 결과지였다.

태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애들이 청소년기에 접어들 때부터 우성 알파가 되리라는 걸
예상했었다.

온순해 보여도 담이는 제 고집이 셌고, 웃으면서 제 뜻을 몰아붙이기를 제일 잘했다. 재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무슨 일이든 자기 생각에 맞게 돌아가야 하고, 관심사가 아닌 것은 철저히 무시했다. 둘 다 확실히 무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의사에게서 부가적인 설명을 듣고 나온 다울은 제 옆에 선 남자들을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1 번 정태이,
2 번 정담이, 3 번 정재이. 이렇게 보니까 셋이 닮긴 닮았구나.

고개를 올리고 있던 다울이 문득 억울함을 느꼈다. 오메가는 왜 이렇게 키가 작은 것인가. 셋 다 180 이 훨씬


넘는 키를 가졌는데, 다울만 작아서 꼭 난쟁이 같았다.

“너희, 나랑 떨어져서 걸어.”

“안 돼.”

“싫어!”

“싫어.”

하나같이 말도 더럽게 안 들었다. 정태이가 말 안 듣는 거야 뭐 익숙했고, 아들 두 명은 날이 가면 갈수록


제멋대로 사는 느낌이었다.

다울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오, 저것들을 그냥. 꽉 움켜쥔 주먹이 곧 튀어 나갈 것처럼 바들거렸다.

“아빠, 옆자리 양보 좀 해.”

“웃기지 말고, 네 애인이나 챙겨.”

“부모님 챙기는 거랑 애인 챙기는 건 별개라니까.”


“은근슬쩍 끼어드네, 비켜라.”

퍽, 퍽, 퍽!

기어코 세 명이 다울의 화를 터뜨렸다. 다부지게 쥐어진 주먹이 세 명의 팔뚝을 세게 치고 지나갔다. 밖에서


맞은 건 처음이라 당황한 담이와 재이가 휘둥그레한 눈으로 다울을 쳐다봤다. 반면, 태이는 익숙하다는 듯 엉겨
붙고 있었다.

“내가 밖에서 싸우지 말라고 했지.”

“아빠, 아빠 옆자리는 나지? 그렇지?”

“형은 좀 꺼져.”

여러 번 경고를 주면 뭐 하나. 들어먹지를 않는데.

완전히 포기한 다울이 두 귀를 틀어막고 걸음을 빨리했다.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못 들은
척하며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육아는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된 게 크니까 더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 * *

오랜만에 부엌이 분주했다. 몇 년 사이 요리 실력을 키운 다울은 간단한 것부터 까다로운 음식까지 어렵사리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평소에는 태이가 요리하는 일이 더 많았지만.

아무튼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바로 담이와 재이가 집에 애인을 데려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항상 말로만 들었지,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라 다울은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애들이 벌써 커서 애인을 다 데려오고, 세월 진짜 빠르다. 나 완전 늙었어.”

“하나도 안 늙었어, 다울아. 아직도 살이 하얗고 뒤도,”

“아아악! 너 진짜 그만해. 그 이상 말하면 나 화낸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음담패설에 식겁한 다울이 소리를 내질렀다.

늙었다고 말한 내 잘못이다, 내 잘못!

태이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해 주는 건 좋았지만, 그게 이상하게 번져 음담패설이 되는 것 또한 여전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에 소름이 돋은 다울이 태이를 매정하게 밀쳐 냈다. 곧 애들이 도착할 텐데 이러고
있는 걸 들키기라도 한다면…….
“아빠도 참 징하다니까.”

“담이야!”

젠장, 이미 들켜 버렸다. 다울은 확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시키며 웃었다. 담이의 옆에 낯선 얼굴이 서 있어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김서원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번거로우셨을 텐데.”

“아, 아니에요. 재이는 아직 도착하기 전인데, 잠깐 앉아 있어요!”

담이의 애인은 열성 오메가였다. 보통 열성 오메가는 우성 오메가보다 외모가 덜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다 거짓인


모양이다. 새하얀 피부에 고양이 같은 눈매가 얼마나 예쁘던지, 다울은 잠시 넋을 놓았다.

손님이 온 게 오랜만이라 들뜬 다울이 허둥지둥거렸다. 뒤집개를 들고 거실과 부엌을 오가거나, 중간중간 먹을


만한 간식을 내오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고, 정신이 없었다.

소파에 앉아 다울을 가만히 바라보던 서원이 슬며시 웃었다. 제 알파가 누굴 닮아 그리 해맑나 싶었는데, 하는
행동이 다을과 똑같아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기야, 왜 웃어?”

“몰라도 돼.”

“왜, 나도 알려 줘. 응? 응?”

“가족들 계신 곳에서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붙지 말라고 했었지. 나 진짜 슬퍼.”

담이가 애교를 부리며 붙어오자, 딱 잘라 떼어 낸 서원이 차가운 눈빛을 날렸다. 아무래도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닌 모양이다. 담이가 우는 척을 해도 끄떡하지 않던 서원이 음료수를 가지고 온 다울에게 온화한 웃음을 보였다.

“안 주셔도 되는데, 감사해요. 잘 마시겠습니다.”

“아니에요. 그, 서원 씨는 경찰 일 한다고 했던가요? 담이가 처음 만났을 때 폐를 끼쳤죠…….”

담이와 서원,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경찰서에서 이루어졌다. 술 먹고 집 비밀번호를 까먹어서 경찰서에 간 담이가
서원에게 첫눈에 반했고, 서원은 몇 번 밀어내다가 자신을 자꾸 찾아오는 담이가 귀여워서 받아 주고. 다울은
처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기겁하는 줄 알았다.

담이가 집 비밀번호를 까먹어서 경찰서에 간 것도, 그곳에서 처음 만난 서원에게 반한 것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폐를 끼쳤을지 몰라도, 지금은 소중한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무뚝뚝해 보이는 서원은 꽤 다정한 구석이 있었다. 이래서 담이가 죽고 못 사는 건가. 해맑게 웃어 주던 다울이
이번에는 쿠키를 가져오겠다며 뒤돌아섰다.

“흐악!”
“조심해야지.”

꼭 이럴 때만 모양 빠지는 일이 생긴다니까.

카펫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다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태이가 잡아 줘서 대 자로 넘어지는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조금 민망했을 뿐.

와중에 담이는 ‘우리 아빠 귀엽지.’ 같은 소리나 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밝은 모습에 서원이 담이의 허벅지를
티 나지 않게 꼬집었다.

덜컥!

거실이 대화 소리로 시끄러워졌을 때쯤, 현관문이 열렸다. 다울은 곧장 달려 나가 재이와 그의 애인을 반겼다.
먼저 인사를 건네던 서원과 다르게 재이의 애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이런 자리가 부담스러운 걸까. 잠깐 사이에 다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재이가 제 뒤에 숨은 몸을 끌어내
강제로 인사를 시켰다. 여전히 제멋대로인 행동이었다.

“인사해.”

“아, 안녕하세요…….”

“이름도 알려 줘야지.”

“유, 윤지안이에요…….”

어느새 다울의 옆에 선 태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강압적인 태도 하며, 묘한 말투를 사용하는 재이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온 것이었다. 지안은 작은 소리에도 쉽게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다울은 저 마음을 잘 알았다. 상대가 아무리 잘해 줘도 두렵거나 무서운 감정. 눈도 못 마주치는 걸로 보아


지안은 생각보다 더 세심한 사람인 듯했다.

“우성 오메가라고 했었나요? 저도 우성 오메가인데, 만나서 너무 좋다.”

“편하게 마, 말씀하세요.”

“지안 씨도 편하게 있으세요. 안에 재이 형도 와 있는데, 괜찮겠어요?”

“듣긴 들었어요…….”

다울이 살갑게 굴며 지안을 챙겼다. 딱 보니 재이는 지금 지안의 심정을 모르는 것 같았고, 태이는 그냥
무관심해 보여서 자기라도 알뜰히 챙겨 줬다. 하여튼 이 집은 알파들이 문제다.

슬쩍 뒤로 빠진 태이는 제 아들의 등을 거칠게 토닥였다. 하루빨리 정신 차리고 잘해 주라는 뜻에서 토닥인


거였다. 재이는 아빠나 잘하라는 시선을 보내며 앞장서서 걸었다.

재이가 도착하고 난 뒤, 모두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서원은 입맛에 맞는다며 앞에 놓인


음식들을 잘 먹었고, 지안은 최대한 깨작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다울은 지안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연인이라면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정상인데, 지안은 재이에게 저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게다가 재이가 무슨
말만 하면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고, 싫다는 표현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다울은 이제 화가 났다. 기껏 잘 키워 놓은 아들이 밖에 나가서 제 애인을 저렇게 막 대하고 있었다니. 남편


성격 뜯어고치느라 힘들었는데, 이제는 아들 성격까지 뜯어고치게 생겼다.

당장이라도 재이를 혼내고 싶었던 다울은 있는 힘을 다해 성깔을 눌러 참았다. 혼내더라도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 해야 했다.

“아……!”

“하아, 줍지 마.”

“무, 묻었어?”

“괜찮으니까 똑바로 앉아. 횡설수설하지 말고.”

젓가락질을 잘못해 음식을 떨어뜨린 지안이 눈치를 봤다. 떨어뜨린 건 치우면 되는 거고,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데 눈치를 보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다울은 속으로 참을 인 자를 새겼다. 설마, 내 아들이 저러고 다닐 줄은 몰랐는데. 싹바가지 없는 말투는


물론이고, 무뚝뚝하고 강압적인 태도가 아주 가관이었다. 정태이 싸가지 리즈 시절을 보는 느낌이랄까.

식사 시간 내내 분위기가 괜찮았으나, 다울의 속은 말도 아니었다. 예뻐 보이기만 하던 아들을 이렇게 쥐어박고


싶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우리 담이랑 잘 지내 줘서 고마워요. 잘 가요!”

시간은 빠르게 흘러 벌써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현관문 앞에 선 다울은 서원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줬다.
담이와 서원이를 보낸 후에는, 지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와 줘서 고마웠어요. 진짜 진짜 고마웠어요.”

“아, 아니에요…….”

“잘 들어가고, 다음에 또 봐요!”

“네, 감사합니다…….”

다울의 옆에 선 태이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자, 눈을 마주친 지안이 잽싸게 뒤돌아가 버렸다. 재이랑 비슷하게
생겨 먹은 태이가 무서웠나 보다.

“재이야, 너는 지안 씨 데려다주고 집으로 들어와.”

“알겠어.”

정재이, 넌 오늘 나한테 죽었어.

험한 눈빛을 쏘아대던 다울이 마지막까지 지안을 다정히 배웅하고 들어왔다. 그저 밥 먹고 얘기만 나누었을
뿐인데 시간이 왜 이리 빨리 지나갔는지. 기가 다 빨렸다.
다울이 소파에 늘어지자, 옆에 앉은 태이가 몸을 기대게 해 줬다. 5 분 정도를 가만히 누워 있었을까. 생각에
잠겨 있던 다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담이는 서원 씨가 꽉 붙잡고 있어서 괜찮아 보이는데, 재이 쪽이 좀 걱정이지?”

“원래 한 명이 소심하면, 다른 한 명이 이끌게 되어 있어.”

“아니, 그것도 어느 정도지! 그냥 싸가지 없는 거랑은 다르다고!”

안 되겠어. 재이 오면 단단히 혼낼 거야.

야무지게 다짐한 다울이 입술을 꼭 깨물고 굳센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재이의 행동이 좋지 못하다는 건 태이가 가장 잘 알았다. 본인이 그렇게 살아 봤고, 후회한 적도 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이야 모르겠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게 되어 있다.

덜컥.

타이밍 좋게 재이가 돌아왔다. 다울은 곧바로 달려가 재이를 끌어다 앉혔다. 표정을 보아하니 왜 오라고 한 건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울은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고민했다. 연애에 직접적으로 상관하면 안 될 것 같고, 하지만 재이 행동은
상당히 잘못됐고, 답이 없었다.

“행동 그따위로 하다가는 네 애인 도망간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태이가 먼저 끼어들었다. 슬며시 재이의 표정을 확인한 다울이 망했다는
듯 머리를 쥐어 잡았다.

아니, 미친. 정태이, 좋게 말해야지 그걸 그렇게 말하는 인간이 어디 있냐고! 재이 표정 썩었잖아!

“아빠가 무슨 상관이야, 내 행동이 어쨌다고.”

“애인을 네 하인처럼 대하던데, 도망 안 가는 게 신기한 거지. 잘해라.”

“아빠가 나한테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해. 아빠는 예전에 감금까지 한 적도 있으면서 무슨.”

진짜 망했다. 싸움이 커지게 생겼다. 작은 불씨에 기름을 콸콸 들이부은 건 정태이고, 재이는 소화기를 들긴커녕
스스로 부채질 중이었다.

분명 혼내려고 했던 건 다울인데, 갑자기 저 둘의 싸움이 시작됐다. 이게 아닌데. 정말 이러려고 재이를 부른 건


아니었는데!

태이의 묘한 시선이 다울에게 닿았다. 갇혔던 얘기를 왜 애들한테 했냐는 눈빛이었다. 다울은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해 버렸다.

“그, 그만, 으억!”

“그건 보호 차원에서 가뒀던 거고.”


우선은 싸움을 말려야 했다. 가운데에 선 다울이 그만하라고 손짓하던 중, 태이의 손에 잡혀 끌려갔다. 얼떨결에
무릎 위에 앉게 된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잠, 잠깐만 나 좀, 아악!”

“말이 좋아 보호지, 가둔 건 가둔 거잖아. 나보다 아빠가 더 했어.”

이번에는 재이가 팔을 잡아당겼다. 힘없이 비실거리는 몸이 손쉽게 딸려가 재이의 품 안에 안착하자, 제대로
열받은 태이가 다울을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다 안았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지. 다울의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인형도 아니고 자기들 마음대로 이리 끌었다, 저리


끌었다 하는 행동에 인내심이 점점 사라져 갔다.

“네 애인이나 그렇게 걱정하지, 정재이.”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왜 오지랖이실까.”

한마디가 가면 또 한마디가 오고, 그 한마디가 두 마디가 되고, 세 마디가 되고. 씨발.

가운데에 껴서 고통받던 다울이 양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아빠나 아들이나 똑같았다. 싸울 거면 조용히
싸우던가, 새우 등 터트리려고 작정한 것처럼 굴어 대니 화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망할 새끼들아! 둘 다 똑같아!”

두 사람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린 다울이 소리를 질렀다. 태이나, 재이나, 서로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 한쪽은
예전에 한 쓰레기 했고, 다른 한쪽은 이제 막 떠오르는 쓰레기였다.

말없이 씩씩거리던 다울이 제 할 말만 남기고 집을 나와 버렸다.

“정재이, 너는 애인한테 싸가지 없이 굴지 말고 좀 잘해 주고! 정태이, 너는 그냥 말 걸지 마!”

태이는 억울했다. 아들 하는 행동이 영 아니라 훈수를 둔 것뿐인데, 갑자기 말 걸지 말란다. 재이도 억울했다.
나름 애인에게 잘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잘해 주란다. 두 사람 다 답이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던 다울은 이제 막 들어오는 담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 눈치 빠른 담이는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상하고는 잽싸게 다울의 편을 들며 애교를 부렸다.

“둘이 또 싸웠대? 왜 저럴까, 진짜.”

“둘 다 답이 없어. 성격은 아주 똑 닮아가지고.”

“뭐, 재이가 아빠 성격을 많이 닮긴 했지.”

와, 벌써 토마토가 다 익었네. 우리 토마토나 따고 있자.

담이는 토라진 다울을 잘 달랠 줄 알았다. 지금도 다울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정원 끄트머리에 마련된 미니 텃밭에는 뜬금없이 토마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텃밭도, 토마토도 모두
하루가 심고 가꾸던 것이었다.
하루의 집은 여기서 조금 더 떨어진 오피스텔이었는데, 태이 집 정원이 그립다며 들를 때마다 꼭 뭐 하나를 심고
갔다. 결국, 돌보는 건 다울이라 귀찮은 일만 늘었지만. 가끔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러 나오면 텃밭부터 찾았다.

“베란다 창문으로 안쪽 상황 보고, 둘이 좀 잔잔해지면 들어가자.”

“아직도 싸워? 내가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데, 저것들이, 씨.”

분홍색 바구니를 들고 잘 익은 토마토를 골라 따 넣던 다울이 베란다 창문을 바라봤다. 통창으로 되어 있어서


거실 안쪽이 훤히 보이는 구조였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태이는 계속해서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고, 인상을 찌푸린 재이는 맞받아치고 있는
듯했다. 둘이 참 징하게도 싸워 대는 게 어이가 없었다.

“저 정도면 동족 혐오 아니야?”

“하하! 그거 진짜 맞는 거 같아. 아빠랑 재이랑 너무 똑같아.”

외모도 비슷해, 성격도 똑같이 더러워, 뭐 하나 다를 게 없는 두 명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게 우스웠다.


다울의 말대로 ‘동족 혐오’가 따로 없었다.

다울의 입담에 크게 웃던 담이가 고인 눈물을 닦아 냈다. 집 안에서 누군가가 싸우는 건 싫었지만, 저 둘이 싸울


때마다 상황이 꽤 흥미진진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다울의 반응이 웃기기도 했고.

“너 너무 재미있어한다, 담이야.”

“아니야, 둘이 싸워서 내가 얼마나 슬픈데.”

“거짓말.”

슬프다는 말에 진심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다울이 뾰로통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자, 담이가 희고 말랑한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부모한테 이런 행동하는 건 버릇없을지도 모르지만,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볼을
만지작거리고 싶었다.

“담이야, 너 스물다섯이야. 부모님 볼을 누가 이렇게 늘려…….”

“미안, 아빠가 왜 맨날 잡아당기는지 알겠어.”

“놔아, 혼나기 전에!”

볼이 늘어나 발음이 뭉개진 다울이 담이의 손을 억지로 떼어 놓았다. 안에 있어도 치이고, 밖에 나와도 치이고,
아들이나 남편이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아 힘들었다.

한편, 안에서는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울이 나간 뒤로 화해할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더 박
터지게 싸워 대던 둘이 아직도 말싸움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그렇게 살다가는 평생 결혼도 못 해, 재이야.”

“아빠도 처음에는 정략결혼이었잖아.”

“너는 정략결혼 해도 소용없겠는데. 아까도 말했지, 네 애인 하인 대하듯 하면 도망갈 거라고.”


주제가 자연스레 ‘결혼’으로 넘어갔다. 방금까지는 다울을 두고 싸워 대더니, 이제는 결혼 문제를 두고 싸워
댄다. 웃긴 건 둘 다 목소리 톤이 올라가지 않고 차분하다는 거였다.

태이는 재이가 진심으로 결혼하지 못할 거라고 얘기했다. 악담 수준에 가까웠다. 재이도 그에 밀리지 않기 위해
정략결혼을 들이밀며 태이를 건드렸다. 이 망할 싸움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통창으로 거실 상황을 살피던 다울이 조용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이를 먹어서 성격이 많이 죽었는데, 다시 몇
년 전처럼 지랄할 수 있을 만큼 분노 게이지가 쌓였다.

쾅쾅쾅!

집이 한창 소란스러울 때,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 대문 밖의 사람을 확인해 본 다울은 좌절하며


주저앉았다.

“다우리, 문 열어 주세요!”

“안 그래도 시끄러운데, 제일 시끄러운 놈이 와 버렸어.”

문을 두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하루였다. 타이밍이 참 기가 막히기도 하지. 꼭 집이 시끄러울 때만 나타나서


상황을 더 복잡스럽게 만들었다.

오늘만큼은 제발 조용하기를 바라며 문을 연 다울이 대충 손 인사를 했다. 누가 봐도 반가워 보이지 않는


인사였다. 담이는 하루에게 달려가 포옹을 나눴다. 어렸을 때부터 하루랑 많이 붙어 있어서 그런지 유독 사이가
좋았다.

“삼촌, 오랜만. 웬일이야?”

“오늘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들렀어. 자자, 들어갑시다!”

“어, 삼촌, 지금…….”

“빨리 와, 담이야!”

어색하게 웃어 보이던 담이가 하루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원에 덩그러니 남은 다울은 손에
든 삽을 텃밭에 내리꽂듯 던지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씨발. 뉘앙스가 이상해. 뭔가 더 소란스러워질 것 같은 느낌.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느릿하게 걸어 올라간 다울이 현관문을 열었다. 먼저 들어온 하루는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도 눈치 없이 웃으며 제가 왔다는 걸 알리고 있었다. 눈치가 없어도 보통 없는 게 아니었다.

“태이, 나 왔어.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둘이 싸웠어? 또?”

“조용히 해.”

“안 돼, 오늘 진짜 중요하게 할 말 있단 말이야.”

뒤따라 들어온 다울이 서로 눈길도 주지 않는 태이와 재이를 몰래 노려봤다. 당장 화해하지 않으면 뒤통수를 한
대씩 더 후리겠다는 눈빛이었다.
재이는 표정을 푸는 척이라도 했지만, 태이는 무표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하루의 말에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다울 또한 하루의 말이 궁금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신경전을 깨 버리기 위해 일부러 질문을 던졌다.

“중요하게 할 말이 뭔데?”

“나, 결혼해요.”

결혼해요, 결혼해, 결혼, 결…….

하루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다울은 제 귀를 의심했다. 메아리치듯


반복되는 소리에 넋을 놓고 있던 그가 뒤늦게 경악했다.

“뭐, 뭐라고?”

“갑자기 무슨 결혼.”

이번에는 태이도 좀 놀랐나 보다. 이 나이가 되도록 연애만 즐기던 하루가 갑자기 결혼이라니 당황스러웠다. 아주
늦지 않은 때에 가서 다행이긴 했지만, 어쨌든 결혼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결혼을 주제로 싸우고 있던 재이가 황당한 얼굴로 하루를 쳐다봤다. 자신이 결혼을 못 해도, 하루보다는 빠르게
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허무한 감정이 들었다.

“드디어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찾았어요. 하핫. 그런데 다들 표정이 왜 이러지?”

“아니, 네가, 그것도 이런 타이밍에 결혼 발표를 하니까…….”

“진짜 싸우고 있었어요?”

“아니다, 아니야. 일단 축하해.”

모여 있던 가족들이 애써 표정을 풀고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하루는 가족과도 같았다. 태이에게는 소중한


친척이었고, 재이와 담이에게는 어려서부터 본 삼촌이었고, 다울에게는 동생 같기도, 친구 같기도 한 존재였다.

하루의 결혼 소식으로 싸움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대신 집 안은 더 떠들썩해졌다. 다들 안 그런 척하지만,


하루가 어쩌다 결혼을 결심하게 됐는지 궁금해서 질문을 마구 던졌기 때문이다.

결혼 상대를 말해 주며 화사하게 웃는 하루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다울은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꼭


아들 하나가 더 있는 느낌이랄까.

태이도 하루의 결혼 소식이 유독 반가웠나 보다. 어렸을 때부터 태이의 보좌라는 이유로 옆에 붙어 다니며 수발을
들기 바빴던 하루가 이제야 제 진짜 인생을 찾은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진짜 축하해, 삼촌!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나 축의금 많이 낼게!”

“진심으로 축하해, 삼촌. 좋은 사람 만나서 다행이다.”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건넨 재이가 어설프게 웃었다. 다울은 불안한 시선으로 재이를 몰래
훔쳐봤다. 웃긴 웃고 있는데, 어딘가 꽁한 게 신경이 쓰였다.

결혼. 아빠 말대로 나 진짜 결혼할 수 있을까.


태이의 악담을 의식하고 있던 재이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행동이 조금씩 어긋나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한 번에 고치기 쉽지 않았다. 지안에게 집착하는 버릇이라던가, 강압적으로 굴게 되는 것.

지안을 정말 사랑하지만, 이대로라면 위험했다. 만약, 지안이 도망가기라도 한다면…….

뒷일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나도 저렇게 행복하게 웃을 날이 오면 좋을 텐데.

부러운 눈으로 하루를 바라보던 재이가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 * *

하루의 결혼식은 지나칠 정도로 호화스럽게 치러졌다. 몇십 년간 카쿠치 가문에 충성을 다했다는 의미로 차기
수장이 신경을 써 준 것이었다.

태이는 일찍이 연을 끊었으나, 하루는 기존에 맡았던 일을 한국에서 쭉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기존에
태이가 맡아서 하던 조직 일을 그대로 이어받은 거였다.

본가로 돌아가기 싫어 이곳에 남는 선택을 한 하루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 따로 나와 살았기에


본가에 있는 것보다 훨씬 자유로웠고, 이곳에서 영원히 함께할 짝을 만나기도 했다.

결혼식은 일본에서 한 번, 한국에서 한 번, 이렇게 총 두 번씩이나 진행했다. 태이와 다울은 귀찮게 뭘 두


번이나 하냐며 핀잔을 늘어놓았지만, 두 번 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축의금을 두둑하게 내고 갔다.

“아, 힘들다. 삼촌 결혼식 끝나고 바로 올걸, 관광을 괜히 했어.”

“그래도 재미있었잖아, 가족사진도 새로 찍고.”

하루의 결혼식을 보러 일본까지 간 가족들은 며칠 더 묵으며 관광을 즐기고 온 참이었다. 담이는 힘들어서
오자마자 소파에 뻗어 버렸고, 다울은 즐거웠다는 듯 여행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실은 관광까지 할 생각이 없었는데, 손 빠른 태이 덕분에 며칠 더 있었던 것이었다. 조금 더 구경하고 싶다는


다울의 말 한마디에 비행기 예약을 깔끔히 취소해 버린 그는 짧은 일정 안에 일본의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었다.
이제는 사랑꾼이 다 되어 있었다.

짐을 다 풀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울이 소파에 널브러졌다. 담이는 이미 뻗어 있고, 태이는 이미 씻고


나와서 물을 마시는 중이고, 재이는…….

어라, 재이 표정이 조금 이상하다.

다리를 꼬고 앉아 착잡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재이가 인상을 구겼다. 그러고 보니, 하루 결혼식이 끝난
후부터 재이의 행동이 어딘가 수상쩍었다.
“재이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일본에서부터 표정이 안 좋잖아, 무슨 일 있는 거면 나한테 말해.”

“하아, 말하면 뭘 해 줄 수 있는데.”

“……어?”

예상치 못했던 답이 돌아왔다. 그저 걱정돼서 가볍게 물었던 것뿐인데, 신경질을 내는 모습에 당황한 다울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동시에 옆에 앉아 있던 담이와 태이의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방금까지 평온하던 두 사람의 표정마저 굳어
버리자, 거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정재이, 다시 지껄여 봐.”

“…….”

“아빠 말 안 들려? 재이야, 다시 지껄여 보라잖아.”

아니, 얘네 둘은 또 갑자기 왜 이래! 안 그래도 분위기 안 좋은데!

부엌에서 나온 태이가 다시 지껄여 보라는 말을 싸늘하게 내뱉었다. 이렇게 화난 모습은 또 오랜만에 보는 거였다.
다울이 나서서 상황을 무마시켜 보려고 했으나, 담이까지 뒤따라 말하는 걸 듣고 포기해 버렸다.

망할, 알파 새끼들.

이 집안 알파들끼리 싸움이 날 때마다 괴로운 건 다울이었다. 원래 성격이 개 같은 정태이나, 그런 정태이를 쏙


빼닮아 성깔이 더러운 정재이나, 평소엔 귀염을 떨면서 이럴 때만 귀신같이 싸해지는 정담이나. 아무튼 셋이 붙어
싸우면 상황이 굉장히 곤란해졌다.

“윽, 미친.”

페로몬은 또 왜 풀고 지랄이야, 저것들이.

제 페로몬을 풀어낸 태이가 재이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알파들끼리 기 싸움을 할 때마다 푸는 페로몬이었다.
갑작스러운 페로몬 향에 입을 틀어막은 다울이 눈을 앙칼지게 떴다.

“그만 안 해?”

“그래도 재이가 저렇게 싸가지 없이 말하는데.”

“정담이, 너도 당장 페로몬 거둬. 정태이랑 같이 코피 터지게 처맞고 싶지 않으면.”

다울의 무시무시한 협박에 하는 수 없이 페로몬을 거둬 낸 담이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태이는 여전히 재이와
대립 중이었다. 아주 둘 다 고집은 더럽게 세서, 누구 하나 먼저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정태이, 정재이, 페로몬 거둬. 지금 그만 안 하면, 나 집 나갈 줄 알아.”


“다울아,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단번에 페로몬을 거둔 태이가 다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보통 이렇게까지 하면 분위기가 조금 풀어져야 하는데,
오늘따라 재이가 이상하긴 했다.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핸드폰을 수시로 쳐다보고, 불안한 듯 다리까지 떨고.

태이도 이상함을 느낀 건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재이의 상태를 살폈다.

눈 밑이 퀭하고, 눈동자는 다 죽어 있고, 잠을 못 잔 건지 피부까지 푸석하고. 이 상태에서 핸드폰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네 애인 도망갔냐.”

“……!”

“내 아들이지만 한심하네.”

태이의 말에 정곡을 찔린 재이가 손을 벌벌 떨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도망갔다니. 다울은 안타까운


마음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게, 내가 도망갈 거라고 얘기,”

“정태이, 불난 집에 부채질해? 쉿.”

“…….”

“정재이, 너는 당장 일어서. 지안 씨 찾으러 가야 할 거 아니야!”

그래, 왜 도망간 건지 그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찾아내서 마무리는 지어야 했다. 다울은 재이의 등을 힘껏
떠밀고, 찾는 걸 도와주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태이가 뭐 하러 너까지 가냐며 알아서 하게 두라고 했지만, 불안정한 상태의 재이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혼자 찾으려면 더 힘들 테고. 또, 재이가 먼저 찾아내면 도망간 애인한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니…….

어째, 도와주려는 마음보다 불신하는 마음이 더 큰 듯했다.

“나도 찾으러 나가 볼게.”

“다울아, 어딜 너 혼자 가. 기다려.”

다울이 나서자 옆에 태이가 따라붙었다. 표정이 못마땅한 걸로 봐서는 귀찮은 일을 시킨 재이에게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다울은 그런 태이를 강제로 끌고 나와 온 동네를 뒤졌다.

먼저 나간 재이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전화는 벌써 200 통이 넘어가게 했고, 문자 메시지도 100 통 넘게


남겼으나 돌아오는 답이 없어서 미칠 노릇이었다.

지안이 자주 가는 카페, 도서실, 산책로까지 다 뒤져도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 활동적인 걸
좋아하지 않아서 잘 나가지도 않던 애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니 눈이 안 뒤집힐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도심을 전부 헤집듯 뒤지고 다닌 것만 여섯 시간이 넘어갔다. 자그마치 여섯 시간. 정신 상태가 엉망이
된 재이는 버스 터미널에 앉아 드나드는 사람들을 죽은 눈으로 쳐다봤다. 허망하게 늘어진 팔과 다리는 이미
체념한 뒤였다.
한편, 다울은 공항까지 다녀왔다. 몇 시간 전 지나쳤던 공항을 다시 쥐 잡듯 뒤져 보았지만 지안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울이 고생하는 걸 보고 열받은 태이는 이제 할 만큼 했다며 토닥이고는 집까지 액셀을
밟았다.

“재이는 찾았을까…….”

“글쎄, 모르지.”

“무신경해, 정태이.”

“계속 이어질 사이라면 언젠간 찾겠지. 그게 아닌 거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어떻게 보면 태이의 말이 맞긴 했다. 계속 이어질 사이라면 언젠간 꼭 찾을 것이다. 한쪽이 도망간 거고, 마음이
남아 있다면 다시 찾아올 테니까. 대신, 그런 마음조차 없다면 재이는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한 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태이는 주차를 하고 오겠다며 다울을 먼저 내려 주었다.

힘없는 걸음으로 걷던 다울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벽 뒤에 몸을 숨겼다. 집 담벼락 앞에 재이와 그의 애인인


지안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찾았구나……!

다울은 크게 안심했다. 이쪽은 성과가 없었는데, 다행히 재이가 제 애인을 잘 찾아온 거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어쩌다가 집 앞에서 만나게 된 걸까. 어딜 뒤져도 보이지 않던 지안이 이렇게 코앞에 있었다니, 차라리 다행인
건가.

“재, 재이야, 나는.”

“변명하지 마. 나한테 말은 하고 갔어야지.”

“미안해, 나는, 네가 여행에서 늦게 올 줄 알, 으윽!”

“변명하지 말라고 했잖아, 지안아.”

벽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다울이 입을 틀어막았다. 들어보니 일부러 도망간 게 아닌 듯한데, 재이가
지안을 밀어붙이며 말도 못 하게 했다.

이게 끝이었다면 다울이 충격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재이는 지안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기까지 했다.
연인이라면서 저런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다울은 순간 제 옛 기억을 떠올렸다. 막 빙의했을 때, 자신을 사랑하지 않던 태이가 막 대하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재이가 지금 하는 행동이 그 시절의 태이와 똑같았다.

나 성격 많이 죽이고 살았는데, 게다가 우리 애들한테는 더 상냥했고. 하지만 저 모습은…….

“정재이! 네가 인간이야? 어?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도저히 참아 주기 힘들었다. 그때의 정태이가 자꾸 생각나서, 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고
해야 하나.

결국, 다울의 화가 화산처럼 폭발했다. 일부러 발을 크게 구르며 걸어간 다울이 손목을 쥐고 있는 재이의 팔을
우악스럽게 떼어 냈다.

당황한 재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안 또한 놀라서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다울은 굴하지 않고 화를


냈다. 자신이 키운 아들이 저런 개차반 같은 행동을 하고 다닌다는 것에 제대로 열받은 모양이었다.

“지안 씨, 어디 더 다친 곳 없죠? 저 망할 알파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에요.”

“저, 생각해 주셔서 가, 감사합니다.”

“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지자고 말해요. 저런 거 참아 줄 필요 없어요. 확 그냥!”

“아니, 아니요. 아니에요. 그게, 이번에는 제가 잘못한 거예요…….”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대신 정리해 주던 다울이 걱정 어린 말을 건넸다. 지안은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하고, 자기가 잘못한 거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본인 입으로 잘못한 거라고 말하는데도, 다울은
재이를 노려보기 바빴다.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고 판단한 지안은 끝내 울음을 보였다.

재이가 일본에 다녀오는 동안 혼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려 했던 건데, 타이밍 나쁘게 핸드폰이 고장 나고, 버스
예매표까지 잘못 예매하는 바람에 일정까지 꼬여서 일이 커진 것이었다. 연락만 잘 됐더라면, 버스만 제대로
탔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저, 저는 재이 많이 좋아해요, 헤어질 마음이 없어요. 흐으, 그런데 바보같이 실수해서…….”

지안의 속상한 마음이 울음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다울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어깨를 토닥여 줬다.

“뭔가 사정이 있었구나. 헤어질 마음으로 그러지 않은 건 다행이네요. 그래도, 이럴 땐 그냥 뺨부터 때려요.
절대 봐주지 말아야 해요. 제정신인 상태에서 얘기해야지, 저건 뭐.”

다울의 사나운 시선이 재이에게 향했다. 제 아들이지만 그런 폭력적인 행동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진짜
아들까지 갱생시켜야 할 판이었다.

천성이 착한 지안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으면 똑같이 대응해 주라고 했지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그래, 정재이 저게 미친놈이지. 미친놈을 뜯어고쳐야지! 멀쩡한 사람은 잘못이 없는데!

“여기서 뭐 해. 뭐야, 애인 찾았네.”

“들어가자, 정태이.”

이제 막 걸어오던 태이가 자연스레 말을 걸며 상황을 종료시켰다. 다울은 태이를 끌고 계단을 올랐다. 나머지는
저 둘이 대화로 풀어야 했기에, 다울이 더 끼어들 문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던 태이가 재이를 대놓고 비웃었다. 아들놈 성격이 어려서부터 자신을 닮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는 행동까지 똑같은 게 어이가 없어서 나온 웃음이었다.
‘그래 봤자 얻는 거 하나 없다. 잘해 줘.’

재이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인 그가 다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태이의 한마디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진
재이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집으로 들어온 다울은 몇 년 동안 쓰지 않았던 야구 방망이를 꺼내 들었다. 저 둘이 화해한다 해도 재이는 오늘


좀 맞을 필요가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도구에 웃음을 터뜨린 태이가 다울의 손을 능글맞게 잡아 왔다.

“이건 또 왜 꺼냈어. 다쳐.”

“이거 놔. 내가 오늘 정재이 저 자식 가만히 안 둘 거야.”

“그렇게 화냈으니까 잘 알아듣겠지. 걱정돼서 제정신 아니었을 거야.”

“네 쓰레기 시절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야구 방망이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던 다울이 창문을 바라보고 행동을 멈췄다. 거실 쪽 테라스에서는 대문 밖까지
훤히 보여서 재이와 지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핏 고개를 돌리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다울은
조용히 들고 있던 야구 방망이를 내려놓았다.

“…….”

“저거 봐, 알아들었네.”

“…너보다는 덜 쓰레기여서 다행이다. 우리 재이.”

“자꾸 그렇게 말하면 섭섭한데.”

태이가 다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쓰레기니, 뭐니 하던 것도 다 옛날 일이었다. 뭐, 딱히 쓰레기


취급당한다고 해서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이 핑계로 들러붙을 수 있어서 일부러 섭섭해하는 척을 했다.

대문 밖에는 서로를 꼭 껴안고 있는 재이와 지안이 보였다. 울어서 코가 빨개진 지안이 재이를 다독이며 웃는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예뻤다.

많이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풀어져서 정말 다행이다.

재이는 품 안에 쏙 안긴 지안의 등을 살살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아빠처럼 변할 수 있을까. 마냥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지안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분노해 처음으로 몹쓸 짓을 한 재이가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다. 네가 사라져서 많이


놀랐었다고, 미안하다고. 무뚝뚝한 말투였으나, 재이는 전보다 한 걸음 나아가 있었다.

재이의 굳건해진 표정을 멀리서 바라보던 태이는 아무도 몰래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내 아들이 부디 나처럼 행복해질 수 있기를.


* * *

흐릿한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꼈다. 천둥 번개는 끊임없이 내리쳤고, 굵어진 빗줄기가 낡은 창문을 거세게 때렸다.

퀴퀴한 벽지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곰팡이가 슬어서 악취가 풍겼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다울은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다 낡아 쓰러질 법한 좁은 집, 탈탈탈 소리를 내며 겨우 작동하고 있는 냉장고, 바퀴벌레가 나올 것만 같은 부엌.

쾅쾅쾅! 쾅쾅쾅!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거센 노크 소리가 들릴 때마다 현관문이 흔들거렸다. 바닥에 누워 존재감을 숨기고 있던


다울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보았다.

앙상한 손가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정신은 왜 이리 몽롱한 건지, 아무리 움직이려 해 봐도 졸음이 쏟아져서 축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이, 이다울이! 빚 갚아, 빚!”

걸쭉하고 거친 목소리가 현관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어딘가 익숙한 게,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상종하기
싫어서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는데, 기어코 문이 열렸다.

쾅!

구둣발로 걸어 들어온 남자가 다짜고짜 다울의 목을 졸랐다. 숨을 쉬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다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두려움에 몸이 벌벌 떨렸다. 다울은 손을 뻗어 옆을 더듬거렸다. 허공에는 아무것도 짚이는 게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두 팔을 휘적거리던 다울이 눈물을 보였다.

없다. 없어. 정태이가 사라졌다. 재이도, 담이도, 하루도 없었다.

게다가 이 집은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낯선 곳이었다. 빠져나가고픈 마음에 발버둥 치던 다울이 현관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있어, 정태이. 어디, 어디 있어…….”

한 번 터진 눈물은 그칠 기미가 안 보일 정도로 줄줄 흘러내렸다. 눈가가 붉어지다 못해 까질 때까지 눈물을


흘리고, 또 닦기를 반복하던 다울이 있는 힘껏 기어가 현관문을 밀었다.

뒤에서는 사채업자로 추정되는 남자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천둥 번개는 계속 내리쳤다.

“정태이, 흐끅, 정태이!”

현관문을 연 다울이 몸을 굴려 밖으로 빠져나왔다. 빗소리는 여전히 들렸지만, 눈앞은 캄캄했다. 어디로 가야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선 다울이 어둠 속을 헤치고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아무리 걸어도 집에
도착할 수 없었다. 이대로 영영 어둠에 갇혀 버리면 어떡하지. 정태이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둠 속에 영영 갇힐 바에야 죽는 게 나았다.

어둠 속에 선 다울이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이 지옥 속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마침내 몸이 깊은 어둠


사이로 사라질 때 즈음, 빛 한 줄기가 내려왔다.

“허, 허억, 헉…….”

눈을 번쩍 뜬 다울이 주변을 둘러봤다. 어둠은 어디로 가고, 익숙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악몽을 꾼 건가.
헐떡이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그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어 보던 다울이 고개를 돌렸다. 함께 잠들었던 태이가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꿈에서 그렇게 정태이를 찾아다녔는데, 깨어나서도 눈앞에 없으니 괜히 불안했다. 다울은 침대에서 내려와 곧장
방문을 열고 나왔다.

다행히 거실에서 생활 소음이 들려왔다. 작은 TV 소리, 핸드폰을 터치하는 소리. 실내화를 끌며 거실로 온
다울이 세 사람을 발견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소파에는 이 집안 알파 세 명이 나란히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중, 다울을 가장 먼저 발견한 태이가


안기라는 듯 두 팔을 벌려 보였다.

다울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가 태이의 품에 꼭 안겨들었다. 너른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이제야 꿈에서
완전히 깼다는 게 느껴졌다.

“악몽 꿨어?”

“으응.”

“무슨 꿈이었길래 애교를 부리실까.”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꿈을 꿨어.”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꿈.

사실 다울은 꿈에서 봤던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곳을 ‘다른 세계’라고 칭했다.

태이의 팔을 꼭 붙잡은 다울이 가슴팍에 제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안정적인 알파 페로몬을 제 몸에 묻힐 때마다


기분이 몽글몽글해져서 좋았다.

“거기에, 네가 없었어.”

“…….”

“그래서 무서웠나 봐.”

목소리에 불안함이 섞여 나왔다. 늘 밝기만 하던 다울이 약한 모습을 보여주니 재이도, 담이도 놀란 모양이었다.
둘이 또 깨를 볶는구나, 하며 철저히 외면하던 담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다울을 쳐다봤다. 재이도 마찬가지였다.

태이는 다울을 더 꼭 껴안아 주고는 이마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다울이 불안해할 때마다 해 주는 스킨십이었다.

“진짜 무서운 꿈이었네. 그래도 이렇게 옆에 있잖아.”

“……으응.”

다정한 손길에 민망해진 다울이 두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아들들 앞에서 어리광을 부렸다는 사실이 급격히
부끄러워졌다.

“맞아, 아빠. 우리가 이렇게 있잖아. 악몽 같은 건 잊어버려.”

“응, 잊어버려.”

부끄러워하는 다울과 달리 두 아들은 나름 진지했다. 악몽 같은 건 잊어버리라며 환하게 웃어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래, 악몽 같은 건 잊어버리자.

내게 있어 이 세상은 ‘낯선 세계’였지만, 이제는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니까.

여기에 진짜 내 가족이 있으니까.

태이와 재이, 담이를 차례대로 바라보던 그가 진심으로 기쁜 미소를 지었다.

이곳으로 오게 되어서, 태이와 소중한 가족을 꾸릴 수 있게 되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다울은 지금의 행복한 삶이
너무나도 좋았다.

[다음 권에 계속.]

야쿠자라 육아가 위험해 3 권 @z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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