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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ÎÆÛ Æ®) ßÄíÀÚ Ó À° Æ°¡ À ÇèÇØ 3 Ç (¿Ï°á) @zoo
( ÎÆÛ Æ®) ßÄíÀÚ Ó À° Æ°¡ À ÇèÇØ 3 Ç (¿Ï°á) @zoo
목차
7. 드디어 평범한 가족
외전 1. 담이의 소원
외전 2. 재이의 장래 희망
7. 드디어 평범한 가족
하루가 일본에 다녀온 후로 7 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카쿠치 가문과 연을 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다울은 한
달 동안 눈에 불을 켜고 다니더니,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자 관심을 꺼 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으브부, 으우!”
부엌으로 들어온 태이가 아기용 의자에 담이를 앉혀 놓았다. 평범한 의자들 사이에 아기용 의자가 섞여 있는
풍경은 언제 봐도 낯설었다. 어디 이것뿐일까. 분유를 타는 것도, 아기를 재우는 것도, 2 년 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기다려.”
얌전히 앉아서 아빠를 구경하던 담이가 알 수 없는 옹알이를 외쳤다. 뜻은 잘 모르겠지만, 뉘앙스로 보아서는
배가 고프니 어서 분유를 달라는 말 같았다.
보채는 소리에 젖병을 흔들던 태이가 기다리라는 말을 반복했다. 목소리 톤이나 어투가 꼭 강아지를 교육하는
주인 같았다. 이것도 고치라고 몇 번을 경고했지만, 고쳐지지 않고 있었다.
“헤에, 우, 으우.”
“우아, 우!”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분유를 먹인 부모도 많이 당황할 텐데, 태이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무덤덤하게
더러워진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아 내고, 말랑한 볼을 장난스레 콕콕 찔렀다.
타이밍 좋게 씻고 내려온 하루가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태이가 익숙하게 담이를 부탁했다.
오늘은 느긋하게 쉬면서 애나 보려고 했는데, 쌓인 메시지를 보니 일을 안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꺄아, 우!”
태이가 하루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담이가 핸드폰 화면을 무작정 건드렸다. 좋은 놀잇감을 발견했다는
듯 핸드폰을 툭툭, 치자 키보드가 눌려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전송됐다.
[@#;ㅏ넝ㄹㅈ;ᅟᅢᆫ알 23 ㄴ티]
하필이면 들어가 있던 대화방이 간부들과의 정보 공유방이었다.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대화방을 확인한 간부들이
이건 무슨 암호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물음표를 남발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요?]
“꺄하, 아부브!”
답장이 하나둘씩 도착하자 화면이 여러 번 반짝거렸다. 동시에 대화창이 올라가며 말풍선 여러 개가 만들어졌다.
열심히 키보드를 눌러 보던 담이가 말풍선들을 꾹꾹 터치했다.
이전에 공원에 나가서 다울이 불어 주는 비눗방울을 손가락 끝으로 터뜨려 본 적이 있는데, 그걸 떠올리고 똑같이
따라 하는 거였다.
그렇게 터치를 하던 중, 화면을 잘못 눌러 누군가의 사진이 띄워졌다. 험악한 인상의 남자였는데, 입가나 눈에
멍과 상처가 가득한 꼴이 징그러웠다. 담이가 조금이라도 더 컸다면 이 사진을 보고 기겁하듯 놀랐을 텐데,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라 다행이었다.
“아부! 아, 으우.”
“아부브?”
“어, 안 돼.”
태이가 핸드폰을 뺏어 들자, 실망한 표정을 짓던 담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가만히 있으면 태이 얼굴이 더 잘
보이는데, 이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다울을 쏙 빼닮은 티가 났다. 동그란 눈 안에 호기심이 가득한 게 특히
그랬다.
최근 하루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떠안고 생활하는 중이었다. 아직 다울이 모르는 사실을 혼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가 본가에서 맞고 온 날, 다울은 카쿠치 가문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이걸로도 모자라 담이를
절대 후계자로 넘겨주지 않겠다는 말까지 했다.
당시 침묵을 유지하던 태이는 며칠 후, 본가에 따로 연락을 넣었다. 담이를 데려가지 않는 대신, 본인이
후계자로 들어가겠다는 연락이었다.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하루는 생각지도 못한 일에 충격을 받았다.
“아부, 아!”
“으우!”
태이는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본가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어 왔기에 때가 잔뜩 묻어
있었지만, 담이는 한없이 깨끗한 존재였다. 이런 애를 후계자로 넘길 바에야, 차라리 원래 물들었던 사람이
끝까지 손을 더럽히는 게 나았다.
“하아…….”
다울은 꿈속에 등장한 남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뒤태가 말도 못 할 정도로 완벽했다.
듬직한 어깨나 쭉 뻗은 다리, 그리고 튼실해 보이는 몸까지 태이와 비슷했다.
저 남자, 대체 어딜 가는 거지.
근처를 환하게 비추던 꿈속 배경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망설임 없이 목적지를 향해 걷다가, 두꺼운
문을 발로 걷어차 열었다. 거친 행동에 당황한 다울이 몸을 숨기고 숨을 참았다.
장면이 흐릿해지며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칼을 든 남자가 손을 휘두름과 동시에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담이 형님!”
마지막에 들렸던 이름과 상황을 조합해 봤을 때, 꿈속에서 봤던 남자는 담이가 틀림없었다. 태이를 쏙 빼닮은
얼굴과 피지컬이 확신을 주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리치던 다울이 패닉에 빠졌다. 악몽을 꿔서 그런지 기분이 영 찝찝한 게, 감이 좋지
않았다.
부스스한 상태 그대로 문을 열고 나온 다울이 담이를 찾았다. 설마, 내가 모르는 담이가 서 있으면 어떡하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거실로 나온 그가 담이를 발견하고 안도했다.
“음마, 아!”
“아우, 아?”
“으우!”
자신 있게 대답하는 옹알이가 기특했다. 담이를 껴안고 보드라운 살에 얼굴을 비비적대던 다울이 행동을 멈췄다.
부엌에서 나오던 하루가 이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뭘 봐, 솜사탕. 정태이는?”
예리한 혼잣말에 지레 찔린 하루가 애써 둘러댔다. 눈치는 없어도 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다울이 신기했다.
이대로 가다가 다 들켜 버리는 거 아니야? 태이가 어떻게 숨겼는데……. 조마조마한 하루의 심정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자, 다울이 눈을 빛냈다.
거짓말에 취약한 하루가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울은 의심을 거둬 내지 않았다. 하루가 저렇게 행동할 때마다
뭔가 일이 벌어져서 방심할 수 없었다.
살살 떠볼까. 식탁 앞에 앉은 다울이 식사 준비 중인 하루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갑자기 태이의 일이
많아진 것도, 하루가 횡설수설하는 것도 이상했다.
“…….”
“…….”
확실히 숨기는 게 있구만. 샛노랗게 구워진 프렌치토스트를 입에 욱여넣은 다울이 내용물을 질겅질겅 씹었다.
건들거리는 태도에 위기감을 느낀 하루가 청소 핑계를 대며 부엌을 빠져나가자, 순진무구하던 입매가 매섭게
비틀려 올라갔다.
베란다 한쪽에 마련된 창고를 뒤적이다 보니 예전에 숨겨 놓은 야구 방망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루미늄 소재로
제작된 방망이를 손에 쥐고 두어 번 휘둘러 보던 다울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마, 아?”
몰래 다울의 뒤를 따라온 담이가 안아 달라며 손을 뻗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심호흡하던 다울이 담이를
껴안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
“깼네, 잠이 안 와서 일찍 일어났어.”
“어디 가려고?”
간단히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태이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진동을 울려 댔다. 무슨 연락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회사에서 오는 메시지이거나, ‘그쪽’ 사람들이 보내는 메시지일 것이다.
전자라면 다행이었지만, 후자는 조금 걸렸다. 다울은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왜 태이가 본가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따라야 하는 걸까. 이제 담이까지 태어나서 완전한 가정을 가지게 된 남자인데, 배려 없이 일을 보내는
게 이상하기도 했고, 여러모로 짜증이 났다.
“언제 오는데?”
“삐치고 그런 거 아니거든?”
“진짜 안 삐쳤다고!”
안 삐치긴 무슨, 무진장 삐쳤다. 다울이 퉁명스러운 표정을 유지하자, 산뜻하게 입을 맞춰 준 태이가 볼을
쓰다듬었다. 방금 막 씻고 나와서 그런지 시원한 샴푸 향이 가까이서 느껴졌다.
“옷 갈아입고 올게.”
“뭐, 그러시든가.”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담이가 태이를 따라 기어갔다. 열심히 쫓아가 보겠다고 무릎을 움직이는 모습이
앙증맞았다. 핸드폰을 꺼내 그 모습을 촬영하던 다울이 계단을 오르려는 담이를 황급히 저지시켰다.
“아부, 아부!”
“아우, 부!”
방으로 들어와 아기 옷을 꺼낸 다울이 담이 옷을 갈아입혀 줬다. 깜찍한 동물 패턴이 그려진 내복을 입혀 놓으니
귀여움이 한층 더해진 느낌이었다.
쪽, 하는 소리에 몸을 움찔거린 다울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입맞춤 소리가 신기했는지 입을 오물거리던
담이가 꺄르륵, 웃었다.
괜히 창피해진 다울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담이가 클 때까지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완전 창피한데.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워 가는 동안, 태이가 출근 준비를 마쳤다.
“다녀올게.”
“그건 왜 물어.”
“어?”
오랜만에 보는 눈빛에 쪼그라든 다울이 말을 대충 얼버무렸다. 태이가 저렇게까지 예민하게 굴어 대니까, 오히려
따라가고픈 욕구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
“어?”
“…….”
재수 없는 말투에 다울의 심기가 제대로 비틀렸다. 조금 더 기회를 보다가 뒤를 조사해 볼 생각이었는데, 태이가
이렇게 나오니 가만히 있기 싫어졌다.
“알겠어, 알겠다고.”
반려동물 대하듯 머리를 쓰다듬어 준 태이가 드디어 현관문을 열었다. 강아지 취급에 익숙해진 다울이 얌전히
쓰다듬을 받으며 그를 배웅했다.
철컥.
드디어 현관문이 닫혔다. 돌발 상황을 대비해 현관문에 귀를 대어 보던 다울이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뒤에야 행동을 개시했다.
“아우우, 으부!”
“자, 업어 줄게.”
아기 띠를 찾아낸 다울이 담이를 업고 똑딱이를 채웠다. 중간중간 창문 밖을 바라보며 태이의 동선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이다!
차 문이 닫히자마자 뛰쳐나간 다울이 다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태이가 탄 차가 벌써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느긋하게 핸들을 돌리던 기사가 적정 속도를 유지하며 액셀을 밟았다. 그와 달리 태이가 탄 차는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담이가 있어서 더 빨리 달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울의 속이 답답하다 못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창문 너머로 표지판을 확인하던 다울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가면 수도권 밖을 벗어나 고속 도로를 타게
된다. 아무리 멀어도 회사 근처겠지, 싶었는데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두려움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도착한 장소는 생전 처음 보는 곳이었다. 어디 버려진 폐공장 같기도 한데, 분위기가 으스스한 게 발을 들이기
싫었다.
“아, 아저씨이.”
“으우…….”
어디 안전한 곳이 없을까. 간절하게 근처를 살피던 다울이 개구멍 하나를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저쪽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모르게 잠입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한 걸 행동으로 실천하는 데 1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담이를 앞으로 안은 다울이 최대한 몸을 낮춰
기어가며 개구멍을 통과했다. 몸집이 작은 탓에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개구멍으로 들어오니 폐공장 내부가 보였다. 캐비닛 여러 개가 있는 걸로 봐서는 예전에 탈의실로 쓰였던 방인
듯했다.
“미안해, 담이야. 여기가 제일 안전할 것 같아. 자암깐만 여기에 있자? 아빠가 위험한 곳까지 데리고 와서
미안해.”
미안한 마음에 울상을 짓던 다울은 가장 멀쩡하고 깨끗해 보이는 캐비닛 하나를 찾아 그 안에 담이를 눕혀 놓았다.
딱 낮잠 잘 시간이라 깨지 않고 꿈나라에 빠져있는 담이에게 감사할 정도였다.
‘그러게 왜 도망을…….’
‘…흐, 잘못…….’
얼핏 들어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태이 목소리는 요만큼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정태이가 잡혀 있는
거라면? 순간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떠올리던 그가 그럴 리 없다며 머릿속을 비워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길래 이런 곳까지 내려와서 사람들을 끌어모은 걸까. 숨을 죽인 채, 밖에서 펼쳐지는 광경들을
지켜보던 다울이 충격에 휩싸여 입을 떡 벌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만 틀어막고 있는데, 폐공장 안으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굳이 바깥을 내다보지
않아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저게 무슨 말일까. 도대체 누가 후계자라는 거야. 이상한 건, 태이가 별다른 말 없이 담배만 태우고
있었다는 거다. 그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고, 수긍한다는 듯 조용히 있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담이를 후계자로 넘기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해서 태이를 희생시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다울은 태이도 담이도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생각이 없었다.
다울은 담이를 캐비닛 안에서 꺼내 품에 안고, 아기 띠로 단단히 고정했다. 그러고는 개구멍을 빠져나와 주변을
꼼꼼히 경계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담이가 위험해지지 않도록 잘 지켜야만 했다.
“…….”
“이 새끼 봐라, 너 누구냐고!”
아까 서 있던 문지기인가. 분명 한 명이었어.
슬며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껄렁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제대로 입지 않은
정장, 무스를 한 통이나 처바른 머리카락이 특히 비호감인 남자였다.
“…….”
“……이러.”
발끝으로 다울의 허리를 툭툭, 건드리던 남자가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보다 몸도 얇고, 키도
작아서 자신감이 붙었는지 거침없이 행동하는 게 꼴 보기 싫을 정도였다.
“……이러.”
“뭐, 인마?”
남자가 쓰러진 때를 틈타 야구 방망이를 사정없이 휘두르던 다울이 폭력 반대를 외쳤다. 정작 폭력을 사용하고
있는 건 본인인데도 건전하게 살라며 폭력 반대를 외치는 모습이 우스웠다.
겁먹었던 얼굴이 점점 환하게 펴졌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맞기만 하는 남자 덕분에 다울의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방금까지 자신을 깔보던 깡패가 바닥을 뒹굴고 있다니 속이 다 시원했다.
“여기서 제일 쫄따구인가. 하긴, 싸움을 못 하니까 밖에 세워 뒀겠지 뭐. 힘내요. 이런 곳에서 일하지 말고,
세상을 좀 넓게 둘러보면 건전한 일자리가 참 많거든요? 파이팅!”
위로와 응원까지 건넨 그가 황급히 개구멍으로 몸을 숨겼다. 밖이 소란스러워서 다른 남자들이 나오기라도 할까
봐 다시 숨은 것이었다.
“흐이잉…….”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칭얼거리는 울음소리가 작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담이가 낮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숨소리를 죽이고 아래를 내려다본 다울이 품에 안긴 담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담이야?”
“흐이이, 빠아…….”
다울이 멀뚱하게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담이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눈썹은 찌푸리고, 눈은 커진 채였고,
입술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다급하게 오물거렸다.
“흐억!”
“사, 살려 주, 살려 주세…….”
“…….”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봐, 다울아.”
“……정태이?”
어떻게 하면 살아나갈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던 다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올 줄 알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당황스러웠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태이였다.
서늘한 어투에 땀을 삐질 흘린 다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으로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이 보였다.
이와 반대로 태이는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그렇게 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담이까지 데리고 와서 숨어 있는
게 어이가 없기도 했다. 게다가 밖을 보니 문지기 역할을 하던 직원 하나도 때려눕힌 모양이었다.
“야, 나는……!”
“…….”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화를 내려던 다울이 입을 꾹 다물었다. 태이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따라온 건 자신이었고,
담이가 위험해질 뻔한 것도 맞았으니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담이를 넘겨주지 않겠다고 말한 탓에 태이가
희생까지 했다.
웬만한 것에 기죽지 않고 덤벼들던 다울이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막상 태이 얼굴을 마주하니 미안한 마음과
설움이 벅차올라 눈물이 맺혔다. 최근 들어 이렇게까지 속상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
“…….”
“이다울.”
맺혀 있던 눈물들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어깨를 바들거리며 눈물을 참던 다울이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냉정하게 대답을 강요하던 태이가 서러운 울음소리에 당황하며 다울의 얼굴을 살폈다.
“왜 울고 그래.”
“진정 좀 됐어?”
“으웅…….”
“그럼 왜 그랬는지,”
다울의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자 때를 기다리던 그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니,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다울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하지 말라는 말이 절반을 차지했다.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고,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던 다울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맑은 눈동자가 어둠을 덮어 버릴 기세로 빛나고 있었다.
태이는 숨기고 있던 사실을 들켰다는 생각에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탈의실에 숨어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듯했다.
“…….”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던 다울이 품속을 더 파고들었다. 태이가 쉬이 대답하지 않자 불안감이 커졌다. 이러다
진짜 자신이 알던 태이를 잃어버리게 될까 봐, 그리고 태이가 그 지옥 같은 곳에 영원히 갇히게 될까 봐 무서웠다.
다울은 ‘책임’이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꺼냈다. 태이가 카쿠치 가문에 붙잡히는 건 무서웠지만, 그의
할아버지는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다부진 손이 태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직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하자니
찝찝했다. 착각인지 아닌지 애매모호 했으나, 태이는 지금 상황을 회피하려 들었다.
“…….”
자책하며 담이를 토닥여 주던 다울이 익숙하게 울음을 달랬다. 그러자 태이가 담이를 뺏어 안고 다울을 챙겼다.
자기도 울어서 눈가가 새빨갛게 부어올랐는데, 누가 누구를 달래고 있는 건지.
“크응, 알겠어.”
빠앙.
“정태이, 집에 가면 또 어디 나갈 거야……?”
“그건 왜 물어.”
“안 나갈게.”
불안한 눈으로 묻던 다울이 나가지 않겠다는 확답을 들은 뒤에야 시트에 몸을 편히 기댔다. 당분간은 어떤 방법을
써서든 태이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울은 절대 밀려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서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기만 한다면, 평범한 가족을 이루겠다는
꿈이 물거품 되는 거였다.
각오에 가득 찬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 * *
다울은 망설임 없이 작업을 진행하라고 말했다. 시끌벅적한 소음에 구경을 나온 하루가 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멀쩡한 현관문을 갑자기 왜 뜯어고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안 고장 났어.”
“그러면요?”
잠금장치라니. 현관문을 자세히 뜯어 보던 하루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어딘가 익숙한 장치는 이전에 태이가
현관문을 막았을 때 설치했던 그 장치와 유사했다.
“셀프 감금이에요……?”
순수하고도 잔인한 질문이었다. 얼마나 만만히 보였으면 이런 질문을 다 할까.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은
다울이 하루를 매섭게 쏘아봤다. 그 눈빛에 캬옹! 하고 고양이 효과음이 들리는 착각이 일었다.
태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는 중이었다. 새벽 늦게까지 담이를 보느라 피로가 쌓인 모양이었다. 다울은 오히려
잘됐다며 태이가 자는 사이에 잠금장치를 완벽히 설치해 놓았다.
사뿐한 걸음으로 부엌까지 달려간 다울이 음료수를 꺼내 마시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중간중간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집착 멘트에 멜로디를 붙여 흥얼거리던 그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한시라도 빨리 태이에게
이 막대한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안방은 아직 고요했다. 담이도 새근새근 잘 자는 중이었고, 태이는 곧 깰 것처럼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다울은
자연스레 이불로 기어 들어가 태이 옆자리를 차지했다.
콕. 콕콕. 콕콕콕.
“정태이, 일어났어?”
“피곤해, 조금 더 자.”
“하…….”
“들었어? 너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큰일 났어.”
잔망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던 다울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생뚱맞은 감금 발언에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뱉은
태이가 눈을 뜨고 다울을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일까.”
“…….”
“당연히 일도 못 가. 내가 막을 거야.”
다울이 생각한 반응은 이게 아니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당장 문 열라고 난리를 쳐도 모자랄 판에, 뭐? 그렇게
해? 태평해도 너무 태평한 거 아닌가.
딱히 비꼬는 말투도 아니었다. 표정도 아무렇지 않았고. 아니, 오히려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는 게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다울은 자신이 감금당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침부터 현관문에 매달려 온 집안이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지르던
모습, 바닥에 드러누워 시위하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 열어달라며 울부짖었을 만한
일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으으음, 수상해…….”
솔직히 태이가 나가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잠금장치 정도는 손쉽게 제거해 낼 수 있었다. 다울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평소 힘쓰는 것만 봐도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직 안 먹었어.”
늘 그렇듯 다울의 아침은 제대로 차려진 음식이었고, 태이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이 전부였다.
“이것도 네가 했어?”
어린아이 취급을 받아 창피해진 다울이 하루 핑계를 댔다. 이왕 먹는 거 귀여운 모양이면 더 좋지 않나. 숟가락
끝으로 달걀찜을 콕콕, 건드리던 그가 곰돌이 볼 한쪽을 푹 떠서 태이에게 내밀었다.
“먹어 봐.”
“너 먹어.”
이번에도 못 이기는 척 받아먹어 준 태이가 물컹한 달걀찜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다울은 삼키는 모습까지 제대로
확인한 뒤에야 밥을 떠먹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태이가 아침밥을 거르기 시작했다. 전에는 아침부터 식탁에 앉아 하루가 주는 밥을 다
비워 내고 나갔는데, 식사량이 줄어든 게 이상했다.
열심히 밥을 퍼먹던 다울이 의아함을 느끼고 태이를 훑어봤다. 자세히 보니 예전보다 턱선이 더 날렵해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요즘 인상이 더 싸가지 없어 보였나.
“몸 관리 때문에.”
완벽한데. 다울이 저도 모르게 내뱉을 뻔했던 말을 황급히 목구멍 너머로 삼켜 버렸다. 잔뜩 질린 눈이 태이의
몸을 또다시 훑었다. 다시 봐도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몸이었다.
“나 그만 먹을, 으웃!”
“아우으, 우아아.”
“으우…….”
“아르르 까꾸웅!”
“헤헤, 으부!”
훈훈한 광경에 웃음을 터뜨린 다울이 소파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담이는 하루가 봐주고 있고, 태이는 옷을
갈아입는 중이고. 할 일이 사라져 심심해진 그가 의미 없이 TV 채널을 돌렸다.
그나저나 정태이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네. 감금까지 했는데, 집 분위기가 평소와 다름이 없잖아.
소파에 누운 채 드레스룸을 힐끔거리던 중, 막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태이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친 다울이 얼굴을
붉혔다. 하필 이 타이밍에 나올 게 뭐람.
다울이 마주치지 않은 척하며 눈을 피하자, 가까이 다가온 태이가 자연스레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다울은
경직된 자세로 TV 화면만 바라보았다.
속마음은 경직된 자세처럼 얌전하지 못했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던 태이가 다울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몸을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러자 중심을 잃은 몸이 태이 쪽으로 맥없이 넘어갔다.
“흐익……!”
“하나도 안 보고 있는데.”
코끝으로 들어오는 향은 바디워시 향도, 비누 향도 아니었다. 이건 태이의 페로몬 향이었다. 은근하게 페로몬을
흘리고 있으면서, 안 그런 척하는 얼굴이 뻔뻔스러웠다.
정태이, 저 여우 새끼가 진짜. 눈을 부라리던 다울이 부엌 쪽을 돌아봤다. 혹여나 담이가 이 장면을 목격할까 봐,
미리 망을 보는 거였다. 다행스럽게도 담이는 하루가 만든 이유식에 푹 빠져 있었다.
다울이 뒤돌고 있는 사이, 가까이 붙은 태이가 귓속말을 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자 몸이 잘게
떨렸다.
“우, 아으우!”
“아이 착해라.”
흐뭇한 얼굴로 담이를 껴안은 하루가 조용히 제 방으로 올라갔다. 오늘만큼은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피해 줄
생각이었다. 담이도 하루의 의견에 동의하는 건지, 해맑은 웃음을 보여 줬다.
하루가 자리를 피해 줬다는 사실도 모르고 티격태격하던 둘은 어느새 나란히 앉아 TV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침 다울이 놓친 드라마가 재방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태이의 핸드폰이 매섭게 울려 댔다. 화면이 반짝일 때마다 무수히 쌓인 알림창들이 보여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태이, 왜 말이 없으세요. 태이?]
[태이!!! 제발 연락 좀 받아 주세요!!!!!!!]
끊임없이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확인하던 태이가 답장도 하지 않은 채 홀드 버튼을 눌러 버렸다. 핸드폰을 집어
들 때마다 다울이 뚫어지게 노려봐서 뭘 할 수가 없었다.
“그 인간들 왜 또 난리래.”
“글쎄, 별일 아니야.”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리던 다울이 핸드폰을 뺏었다. 혹여나 태이가 누군가와 연락하고 몰래
빠져나가지 않을까 싶어, 미리 차단해 놓는 거였다.
태이는 이번에도 순순히 핸드폰을 넘겨줬다. 의외의 행동이었다. 정태이가 웬일이지. 의심을 싹틔우고 있을 즈음,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왔다.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다울이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태이가 먼저 움직였다. 만지게 해 달라더니, 이게 만지는
걸까.
“입술 벌려.”
“으웃, 시, 싫어.”
“응.”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안심한 다울이 못 이기는 척 입술 사이를 벌려 주자,
기다렸다는 듯 혀가 맞물려 왔다.
다울은 키스 하나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느꼈다. 질척하게 얽혀 드는 혀라던가, 입천장을 쓸고 지나가는 자극에
달뜬 숨을 터뜨리자 태이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창피함에 어깨를 밀어낸 다울이 씩씩거리며 태이를 노려보았다. 키스에 익숙하지 않은 걸 본인도 잘 알고 있는데,
막상 태이가 웃으니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너 내가 만만하지, 만만하지!”
그동안 뜸했던 풍차 돌리기가 시작됐다.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태이를 때리던 다울의 몸이 훌쩍, 하고 들렸다.
가만히 맞아 주던 태이가 자그마한 몸을 어깨에 들쳐 업은 것이다.
“만지게 해 주겠다며.”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모습에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 태이가 다울의 엉덩이를 토닥여 줬다. 가만히 있는 게
기특해서 칭찬하는 거였다. 그러나 다울은 그의 다정한 손길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
능글맞게 대답하던 태이가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정적이 돌자 무언가 잘못됨을 느낀 다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 방금 한 말 취소야.”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다울은 잘못됨을 넘어서서 위기감을 느꼈다. 분명히 취소라고 했는데,
취소한다고 말했는데. 태이에게 자비란 없었다.
“어……?”
헬프 미! 헬프 미! 헬프 미!
“…….”
“하나.”
“……?”
“둘.”
다울은 제발 이 방에서 나가게 해 달라는 말만 수십 번 외쳐 댔다. 아무리 봐도 감금당한 사람은 태이가 아니라
자신 같았다.
“어디 가?”
“물 가지러.”
“가지 마.”
“……양심 없는 새끼.”
“뭐 안 먹어도 되겠어?”
잠이 온다, 온다, 온다. 안 되는데, 정태이 감시해야 하는데. 그래도 졸리고, 아…….
“커어어…….”
졸음에 취약한 다울이 짧은 사이에 곯아떨어졌다. 일정한 속도로 등을 토닥여 주던 태이는 다울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잠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몸만 빠져나온 그가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귀찮게 하기는.”
오늘 일은 간부들 말대로 중요했다. 본가와도 깊게 관련된 일이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수장이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했다. 어디 이것뿐일까. 잘못하면 몇 명은 조직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고, 태이의 경우 후계자가
되겠다는 충성심을 의심받아 큰 벌을 받을 수 있었다.
상황은 그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낮에는 다울이 원하는 대로 얌전히 있어 주고, 그가 잠든 밤에는 몰래 나가서
일을 처리한다.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은 작전이었다.
“태이, 지금 가?”
타이밍 좋게 내려온 하루가 태이를 배웅했다. 마음 같아서는 가지 말라며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후계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끝낸 후라 쉽게 붙잡을 수 없었다.
하루가 품에 안긴 담이의 팔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영문도 모르고 인사를 하게 된 담이가 방실방실 웃었다.
“아부으!”
마지막까지 볼을 매만져 주던 태이가 현관문을 손쉽게 열었다. 이런 잠금장치는 허술해서 조금만 만져도 쉽게
열렸다. 기껏 설치한 잠금장치가 뚝, 하고 부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철컥.
손을 흔드는 담이를 뒤로하고 집을 나선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온종일 자신을 붙잡아 두기 위해 애를 썼던
다울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일이 틀어지면 할아버지에게 의심을 받을 테고, 그렇게 되면 담이와 다울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컸다.
돌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에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 감정들이 발목을 붙잡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게 맞는
걸까. 그답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정태이!”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다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울음을 터뜨릴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던 다울이 계단을 한걸음에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기어코 울분을 터뜨린 다울이 몸을 들썩였다. 눈물은 줄줄 흐르는데, 평소처럼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아
답답했다. 소리 없이 울며 숨을 헐떡거리자, 등을 보이고 있던 태이가 뒤돌아서 눈을 마주 보았다.
“다울아.”
다울의 간절한 목소리에 몰래 지켜보던 하루가 눈물을 머금었다. 대문 앞에서 태이를 기다리던 직원도 입을
틀어막은 채 오열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단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다울이 대단했다. 어떻게든 태이에게 믿음을 심어 주겠다는 강한
의지가 돋보여서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태이는 이날, 임무에 나가지 않았다. 물론 본인의 의지로 택한 거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 * *
폭풍이 휘몰아친 뒤에는 맑은 날이 지속됐다. 태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나갔다. 물론 나오기 전까지
다울에게 허락을 받아 내느라 진땀을 뺐다. 그는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뒤에야 현관문을 나설 수 있었다.
간혹 정도가 심하긴 했으나, 이미 한 번 독단적으로 행동하려 했던 전적이 있기에 태이는 군말 없이 대답해 주고,
어디 가지 않는다며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아부부!”
이른 시간에 나와 운동하시던 어르신들이 신기한 눈으로 태이를 쳐다봤다. 저렇게 몸 좋고 잘생긴 청년이
뛰어다니는 것도 신기한데, 옆구리에 웬 아기까지 데리고 다니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아부, 이아아우!”
“아아우!”
“우아아아! 아!”
얇은 머리카락이 휘날려 엉망이 되었다. 게다가 빠르게 움직인 탓에 속까지 울렁거렸는지 멍하게 눈을 깜박이던
담이가 울상을 지었다.
급하게 속도를 늦춘 태이가 찌푸려진 담이의 표정을 발견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앙증맞은 등을
살살 쓸어내려 주고 있었다.
“흐, 흐이잉…….”
“으우…….”
“꺄아아! 우아아!”
방금까지 울상짓던 담이가 밥이라는 말에 손뼉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요즘 다울과 손뼉 치는 놀이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혼자서도 손을 잘 움직였다.
“아우우?”
작은 이다울. 요즘 태이가 담이를 부르는 애칭 중 하나였다. 단순한 것도, 애교를 부리는 것도, 전부 이다울을
빼다 박아놓은 것 같아서 붙여 준 애칭이었다.
담이도 애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은 이다울’이라 부를 때마다 반짝이는 눈으로 태이를 올려다보았다. 맑은
눈망울이 어찌나 순수한지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간단히 운동을 끝낸 태이가 집까지 가볍게 뛰었다. 산책로에서 집까지 뛰어가는 데는 5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덜컥.
“다녀왔어.”
해맑게 두 사람을 맞이해 주던 다울이 인상을 구겼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꼴이 엉망이 된 담이가 태이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이 왜 울어?”
태이는 억울했다. 달릴 때까지만 해도 꺄르륵,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는데 집에 도착하고 보니 갑자기 웃음이
울음으로 싹 바뀌어 있었다. 어느새 다울의 품으로 넘어가 안긴 담이가 헤실헤실 웃었다. 태이는 처음으로 제
자식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다울아, 나 억울한데.”
태이의 말을 깔끔히 씹어 버린 다울이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졸지에 혼자 남겨진 태이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식탁 위로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졌다. 일찍 일어난 하루가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다울은
담이를 아기용 의자에 앉혀 놓고, 노란색 접시 안에 이유식을 담아 왔다. 요리하는 하루의 옆에서 함께
사부작거리며 만든 이유식이었다.
“담이야, 아 하고 입 벌리세요.”
“음마아, 아아.”
“어때, 맘마 맛있지?”
“테에, 텟! 으부부…….”
입김을 후후 불어 식힌 다음, 담이의 입 안으로 이유식을 넣어 준 다울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특별히
레시피를 보지 않고 만들어 봤는데, 비주얼이 꽤 괜찮아서 맛에 자신이 있었다.
마침 마지막으로 낼 반찬을 식탁 위로 올려놓던 하루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헉, 소리를 냈다. 웃음이 삐져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아 내서 다행이었다. 만약, 웃었다면 다울에게 어떤 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
“담이야, 맛없어……?”
“에으우, 텟!”
“…….”
“줘 봐.”
막 씻고 나온 태이가 이유식 접시를 받아 들었다. 이유식 만들기에 실패한 다울이 서운해하는 게 잘 보여서
마음이 좋지 않았나 보다.
와중에 머리도 말리지 않고, 몸의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았는지 갈아입은 반소매 티셔츠가 살짝 젖어 단단한
상체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유식을 건네주던 다울이 근육질의 몸매를 힐끔거리며 몰래 침을 삼켰다.
“아 해.”
“아부, 아아!”
“옳지, 씹어.”
“우움…….”
방금까지 이유식을 뱉어 내던 담이가 입을 열심히 오물거리더니 내용물을 꼴깍, 삼켜냈다. 그리고는 입을 벌려,
다 먹었다는 걸 확인시켜 주기까지 했다. 먹이는 방법이 조금 다른가. 태이가 먹여 줄 때마다 밥을 잘 먹는
담이가 신기했다.
“…….”
“뭐야.”
“먹어 좀.”
“아니, 이게 뭐 하는 거래요?”
물을 떠서 착석하던 하루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태이는 담이에게 이유식을 먹여 주고, 다울은 그런
태이에게 밥을 먹여 주고 있는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다울아, 이제 너 먹어.”
“으웅. 얼른 먹으라니까.”
평화로움에 잔뜩 녹아내린 얼굴로 중얼거리던 다울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하루가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날만 이어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옆에서 초를 치는 하루가 미웠다.
뒤늦게 제 실수를 인지한 하루가 취소를 열댓 번씩이나 외쳤다. 사나워진 눈매로 하루를 예의 주시하던 다울이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드라이브라도 다녀올까.”
저렇게 좋을까. 뜨거운 반응에 헛웃음을 흘리던 태이가 어서 옷을 갈아입고 오라며 다울의 등을 떠밀었다.
드레스룸으로 쏜살같이 달려 올라간 다울은 그동안 아껴 놓았던 옷을 꺼내 입었다.
“으우우!”
뒷좌석 문을 열어 아기용 시트에 담이를 앉혀 놓은 태이가 시동을 걸었다.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와 대문 앞에
차를 세우니 다울이 기다렸다는 듯 올라탔다.
“출발!”
“…….”
“정태이, 왜 출발 안 해?”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액셀을 밟으려던 태이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차를 완전히 멈춰 세웠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다울이 태이가 보고 있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얼굴이 사색이 된 하루가 서 있었다. 계단을 뛰어 내려오며 두 팔을 마구 휘젓던 하루가 입
모양으로 위급 상황을 전달했다.
쿠궁. 고개를 쭉 내밀어 화면을 함께 살펴보던 다울이 충격받은 듯 손을 떨었다. 놀란 건 태이도 마찬가지였다.
수장이,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아무런 언질도 없이 한국에 넘어오다니. 먼저 연락을 회피한 건 이쪽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완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하루가 본가에 심어 놓은 부하 직원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끌려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할배가 기어코, 한국까지 들어왔다 이거지? 정태이랑, 우리 담이를 데리러.”
한편, 태이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놀란 속마음과 달리 머리는 냉철하게 돌아갔다. 최우선의 방법은
할아버지를 공항에서 그대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집까지 들이게 되면 문제가 커질지도 몰랐기에, 그는
공항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물론 다울과 담이는 따로 보내야 했다. 이번에는 태이뿐만 아니라 담이까지 노려지고 있어서, 가능한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게 좋았다.
다정하고 차분한 말투로 설명하던 그가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활짝 열었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담이를
안고 내린 다울이 태이의 손을 낚아채 꼭 쥐었다.
“너 혼자 가겠다고?”
“이따 만나.”
“다치지 말고 와야 해.”
“그럼, 출발할게요.”
“야, 솜사탕.”
“네?”
“정태이 차 따라가.”
“……에?”
흥분한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태이의 지시를 따라야만 하는 하루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는 얼굴로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다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해진 표정으로 제 뜻을 쏘아붙였다.
하루는 고민에 빠졌다. 다울의 말을 무시하고 도망가야 할지, 태이를 서포트하러 가야 할지. 사실 그도 태이를
따라가고픈 마음이었다.
치켜올라간 눈썹, 다부지게 뜬 눈, 꼭 깨문 입술이 꼭 단단한 포도를 연상케 했다. 뭔가 화난 얼굴이긴 한데,
워낙 동글동글 귀여운 이미지라 그런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저기, 다우리…….”
* * *
“태이 그 건방진 자식, 감히 연락을 끊어 내려고 해? 내 가만히 있을 줄 알았나 보지. 쯧.”
“태이 그놈은 무력으로 잡아. 애는 강제로 데려오고, 다울인지 뭔지 하는 그 녀석은 완전히 죽여 놔.”
“네, 수장.”
드디어 비행기가 착륙하고, 문이 열렸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내린 카쿠치 신코가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너, 너……!”
조를 나누어 보내려던 타이밍에 태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알고 도착한 건지, 위치 파악까지 완벽히 끝낸
그가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오자, 당황한 카쿠치 신코가 삿대질을 했다.
저 자식이 혼자 여기까지 온 건가. 태이의 뒤를 유심히 살펴보던 카쿠치 신코가 실눈을 뜨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충격에 충격의 연속이었다. 단호한 목소리에 혈압이 오르는 걸 느낀 카쿠치 신코가 부하들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태이 주변을 둥글게 감쌌다.
가지 않는다면 무력을 행해서라도 데리고 간다. 절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가 무섭게 치켜뜬
눈으로 태이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태이라도 혼자 저 남자들을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공항 근처였기 때문에 과격하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태이가 한 걸음 물러서자, 남자들이 원을 좁히며 다가섰다. 다행히 무기를 든 사람은 없었다. 막무가내인 카쿠치
신코도 생각이라는 걸 하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소란 피워 봤자 좋을 게 하나 없으니, 최대한 조용하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려는 눈치였다.
태이의 건방진 도발에 열이 오른 카쿠치 신코가 이를 악물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기고만장해지는 손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 경고를 해 봐도, 태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만만히 보는 게 아니라 그냥 만만한 겁니다. 어렸을 때야 뭣 모르고 맞았지만, 제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노인네
하나 죽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그는 어렸을 적부터 떡잎이 달랐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아서 맷집을 키우고, 아프다는 소리 하나 내뱉지 않는
독한 놈. 순순히 따르는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반항하는 끈질긴 놈. 그게 바로 태이였다.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작은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메웠다. 심지어 태이보다 더 건방지고, 버릇없는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노인에게 할배라느니, 거지 같다느니 욕을 할 인물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다울.
듬직한 어깨와 등이 다울의 시야를 가렸다. 호기롭게 나서서 말싸움을 이어 가던 다울이 묘하게 인상을
찌푸리다가, 태이의 몸을 힘껏 밀어내고 다시 앞에 나섰다.
아담한 몸에서 어떻게 이런 자신감이 나오는 걸까. 태이는 진심으로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울의
태도가 너무나 완강해서 더 이상 말릴 수도 없었다. 그저 상황을 지켜보다가 위험해질 때 나서는 게 좋을 듯했다.
위기를 느낀 카쿠치 신코가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큰 소란을 피우지 않으면서, 태이와 증손주를 빼돌리고,
다울을 쳐낼 방법.
그래, 데려온 조직원들을 나누어 혼선을 주어야겠군. 저놈이 난리를 피우는 사이, 증손주를 납치한다.
“크흠!”
손주는 손주다, 이건가. 카쿠치 신코가 태이를 감싸며 다울을 깎아내렸다. 다울은 문득 부모님이 보고 싶어졌다.
부모 없는 서러움, 씨발.
“어이가 없네, 저 할방구가 진짜. 나한테 감사하게 생각해. 할배가 인간쓰레기로 만들어 놓은 정태이, 내가
여얼심히 분리수거하고, 깨끗이 닦아 놓는 중이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방해하지 말고, 할배 나라로 돌아가라고!”
“아, 이거 놔.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태이의 다정한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카쿠치 신코가 연신 헛웃음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피도 눈물도 없던
손주 자식이 쥐방울만한 놈한테 빌빌 기는 것 같아서 열이 오르기도 했다.
남자 여럿이 담이가 있는 차 쪽으로 뛰어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뒤쪽을 경계하고 있던 남자들이라
어떻게 막아볼 틈도 없었다.
뒷좌석을 지키며 남자들과 몸싸움을 하던 하루가 담이 울음소리에 뒤를 돌았다. 여럿을 상대하면서 담이를 지키는
건 무리였다. 뒤늦게 태이가 따라붙어 봤지만, 남자를 단번에 제압하기 어려웠다.
카쿠치 신코는 담이를 지키기 위해 싸운 하루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태이의 보좌라는 직급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조직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철저히 태이를 위해 움직이는 꼴이 순종적인 개 같았다.
카쿠치 신코가 시선을 돌려놓는 사이, 담이를 납치한 남자가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려는 건지 몰라도, 출국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모양이었다.
하루의 주변은 어느새 남자들로 빙 둘러싸여 있었고, 차에 탄 남자는 담이를 조수석에 내려놓은 채 급히 액셀을
밟았다.
좆 됐다.
담이가 남자의 손에 잡혀간 순간, 다울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말대꾸하듯 내뱉던 당돌한 말들도 쏙
들어가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태이 또한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는 남자들의 머릿수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카쿠치 신코와 절연하고 야쿠자 짓까지
청산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돌아가면 행동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너…….”
저쪽이나 이쪽이나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으나, 다울의 말대로 여기에 있는 게 더 안전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담이를 영영 놓칠 수도 있었다.
“어디 가려고, 할배. 나 오늘 당신 일본으로 보낼 생각 없거든? 우리랑 절연하고, 담이 멀쩡히 되돌아올 때까지
절대 못 돌아가.”
태이가 자리를 뜨고, 담이가 납치되자마자 남자들이 흩어졌다. 그 둘만 잡으면 다울 따위 내버려 둬도 상관이
없었다. 원래는 깔끔히 없애 버리는 게 목표였으나, 태이가 하는 행동을 보니 다울을 건드리면 큰 화를 입을 거
같아 얌전히 돌아가려는 거였다.
이런 카쿠치 신코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다울의 야무진 손이 그의 옷자락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거 놓지 못하겠냐! 어려서 무서움을 모르나 본데, 나는 당장 널 죽일 수도 있다.”
“죽여.”
“뭐라, 뭐라고?”
“죽이라고. 할배, 정태이가 생각보다 나를 많이 사랑하거든. 그런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정태이 걔,
천성이 미친놈이라서 눈깔 돌걸. 아까도 들었지? 할배 목 딴다고 하는 거.”
카쿠치 신코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다울의 말대로 태이는 화나면 앞뒤 없이 덤벼들고 보는 놈이었다.
다울이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한 건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태이의 성깔을 믿고 겁 없이 덤빈 거였다.
나이를 먹어 주름이 생긴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작기만 한 다울을 만만히 봤는데,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보통 또라이가 아니라는 게 느껴져서 곤란한 모양이었다.
역시, 그냥 노인과 야쿠자 집단의 수장은 다른가. 다울이 떨어지지 않자, 카쿠치 신코가 힘을 사용해 한 걸음씩
옮기기 시작했다. 종잇장 같은 몸은 악착같이 달라붙어 끌려갈 뿐, 힘을 쓰지는 못했다.
남아 있던 조직원들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이 무슨 우스운 상황이람. 카쿠치 신코의 팔에 매달린 다울은
공항 안까지 질질 끌려가고 있었고, 멍해진 조직원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따로 떨어져 걸으며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거 놓으래도!”
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다울의 행동에 지나치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카쿠치 신코는 다울을 떼어놓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70 년이 넘는 인생을 야쿠자로 살아오면서 이렇게 체면을
구긴 건 처음이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주변 눈치를 보던 카쿠치 신코가 다울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 대니 어떻게 당해 낼 방법이 없었다.
“…….”
와, 제대로 된 또라이다.
작정하고 소리를 질러 대는 모습에 심히 당황한 카쿠치 신코가 허둥지둥거렸다. 이대로라면 공항에 배치된
경찰들이 달려올 것이고, 야쿠자 신분인 카쿠치 신코는 당연히 상황이 불리해지고 만다.
다울은 이 사실을 알고, 상황을 이용하고 있었다. 만약, 경찰이 달려오면 납치당한 척하며 카쿠치 신코와 망할
야쿠자 새끼들을 엿 먹일 작정이었다.
* * *
어느새 공항을 빠져나간 차가 도로 위를 빠르게 질주했다. 담이를 납치한 차량은 시간을 벌기 위해 공항 근처를
빙빙 돌고 있었다. 먼 곳으로 도망가자니 출국 시간에 못 맞출 게 분명하고, 길을 잘 알지도 못해서 그나마
안전한 방법을 택한 듯했다.
반면, 태이는 이 근처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지령이 내려올 때마다 공항 근처를 자주 오가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막다른 길이 나오는지, 어느 곳이 한적한지 파악한 상태였다.
운전대를 붙잡은 하루는 태이가 지시하는 대로 방향을 틀며 남자의 차량을 막다른 곳으로 몰았다.
“응, 알겠어.”
담이를 걱정하던 그가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울을 혼자 두고 온 것도 마음에 걸렸고, 납치당해
울고 있을 담이도 걱정돼 심란해 보였다.
“도로 상황 어때?”
날 선 말투에 긴장한 듯 고개를 끄덕인 하루가 침착하게 차선을 변경했다. 남자의 뒤를 쫓던 차가 옆으로 바짝
붙자마자 태이가 조수석 문을 확, 열어젖혔다. 속도를 내던 중, 문이 열리자 강풍이 들이닥쳤다.
“더 가까이 붙여 봐.”
차를 더 가까이 붙인 하루가 울상을 지으며 액셀을 밟았다. 드디어 가까워진 거리에 기회를 보던 태이가 옆
차량의 운전석 문을 뜯어 버릴 기세로 열었다. 멍청한 남자가 차 문을 잠그지 않아 다행이었다.
태이가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렸다. 도로에 처박힐 줄 알았던 몸이 옆 차량 운전석에 깔끔히 안착했다.
운전석에서 떨어져 나간 남자는 도롯가에 뒹굴었고, 평온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은 태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문을 닫아 버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옆 차량을 바라보던 하루가 점차 속도를 줄였다. 곧 창문을 끝까지 내린 태이가
손을 내밀어 공항으로 돌아가자는 수신호를 보였다.
“흐이이, 흐애애앵!”
“흐애앵, 흐잉…….”
“다행히 다친 곳은 없네.”
아빠 얼굴을 본 뒤에야 울음을 그친 담이가 태이의 품에 안겨 옷자락을 쥐었다. 고사리 같은 손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
“압바아, 빠!”
담이가 처음으로 ‘아빠’를 외친 순간이었다. 태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미묘한 감정이 담긴
시선이 담이에게 닿았다.
방금 아빠, 라고 한 건가.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유독 따스했다. 담이의 색색거리는 숨소리, 순수함으로 가득 찬 눈망울, 옷자락을
단단히 쥐고 있는 손까지. 따듯하지 않은 게 없었다.
“…….”
“으우?”
말뜻을 전부 알아들은 걸까. 담이가 꺄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청량하고 맑은 웃음소리에 태이가 슬며시 따라
웃음을 흘렸다.
* * *
태이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 다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죽어라 반항할 것 같았던 다울은 의외로 순순히 그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태이가 공항을 완전히 벗어났을 때
즈음에서야 귀신같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장소를 옮겨 한숨을 돌린 카쿠치 신코는 제 직원을 시켜 물을 구해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람이 오가지 않는
공터에 덩그러니 선 다울은 숨을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못 배운 티 내는 건 할배도 마찬가지면서.”
부어라.
다울은 끓어오르던 속이 확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잠깐이었으나 한계까지 확장되었던 동공이 서서히 원상태로
돌아왔다.
물을 끼얹으라고 명령한 카쿠치 신코는 온몸이 푹 젖어 처량한 신세가 된 다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아까처럼 쉬이 대들지 않는 게 이상했기 때문이다.
손등으로 얼굴에 흘러내린 물기를 닦아 낸 다울이 주먹을 꽉 쥐었다. 고개를 숙인 상태라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지만, 이거 하나는 유추할 수 있었다. 방금 닦은 건 대차게 부어진 물이 아니라,
왈칵 차오른 눈물이었다는 것.
“우습게 본 적 없어.”
“할배가 뭘 알아. 나는, 전부터 당신이 담이랑 정태이를 데리고 갈까 봐 마음 졸이면서 살았어. 알기나 해?”
악에 받친 눈빛이 그에게 닿았다. 다울은 진심으로 억울했다. 정말 우습게 봤다면, 이런 수모를 당하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쿠치 신코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애초에 일반인이 대규모 야쿠자 집단의 수장을 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다울은 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겁대가리 없는 짓을 벌인 것이다.
심호흡을 내뱉으며 마음을 한 번 가라앉힌 다울이 이야기를 꺼냈다. 주제는 당연히 정태이였다. 카쿠치 신코는
어떤 말을 하든 듣지 않겠다는 심보로 대응했다.
“하나뿐인 핏줄이잖아. 정태이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할배 가문에서 어렸을 때부터 학대당했다고 그랬어.
그 감정 없는 정태이가, 다시 상상하기도 싫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고!”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에 주변 남자들이 애써 시선을 피했다. 태이가 심한 학대를 당하며 자라왔다는 건, 남자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은 많지만, 가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한다는 이유로
한 번도 도운 적이 없었다.
말하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했다. 숨을 죽이고 다울의 말에 집중하던 남자들이 하늘을 보며 눈물을 삼켜냈다.
“동정 아니야,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거야. 할배는 안 봐서 모르잖아. 정태이가 나랑 사는 동안, 얼마나,
얼마나 행복했는지.”
다울의 머릿속에 지난날의 기억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빙의된 후, 태이를 마주했을 때. 처음으로 태이에게
두근거림을 느꼈을 때. 늦은 새벽, 그가 피곤함을 무릅쓰고 담이와 자신을 위해 불족발을 사 왔을 때.
사소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눈물샘이 자극됐다. 입이 마음대로 움직여서 ‘정태이는 나랑 사는
동안 행복했다’라는 말을 막 뱉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동안 진심으로 행복했었다.
“정태이는 자기가 학대당하며 컸어도, 담이한테는 정상적인 삶을 주려고 했어. 그러니까 나도 정태이한테 더
나은 삶을 선물해 줄 거야.”
“하, 참…….”
자존심에 금 가는 걸 가장 싫어하는 다울이 찬 콘크리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무릎을 꿇었다. 아까부터
소리를 꽥꽥 지르며 버릇없이 굴던 태도와 180 도 다른 모습이었다.
짧은 사이에 다울의 성격을 파악한 카쿠치 신코가 당황한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하니 더
밀어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는 다울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여서 양심이 쿡쿡 찔리기도 했다.
다울의 짠한 모습에 울컥한 조직원들은 모두 등을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 인상이 험악하고 성깔이 더러워 보여도,
그들은 불쌍하고 여린 것에 유독 마음이 약했다.
엉금엉금 기어가 카쿠치 신코의 바짓가랑이를 붙든 다울이 간절하게 빌었다. 꼭 어디까지 불쌍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듯했다.
“다울아.”
그때였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을 것 같았던 공터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목소리는, 정태이였다.
단호하게 대답한 태이가 매달려 있는 다울을 떼어 내 제 옆으로 데려왔다. 카쿠치 신코를 상대하느라 힘을 다 쓴
다울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찬물을 뒤집어써서 새파랗게 질린 입술은 물론이고, 팔과 다리까지 심하게
후들거렸다.
카쿠치 신코는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다울에게 관심을 주지 않던 녀석이, 이제는
없으면 죽을 것처럼 다정하게 굴고 있었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상황인가. 그래도 다울을 만나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는 게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다울을 건드렸다며 협박까지 해왔다. 살기 가득한 눈으로 카쿠치 신코를 바라보는 게 소름이 돋았다.
태이는 진심으로 제 할아버지를 죽일 작정이었다. 태이의 묵직한 경고에 타격을 입은 그가 말을 아꼈다.
“할배가 더…….”
침묵 사이로 신경전이 오갔다. 카쿠치 신코는 태이도, 그 아들인 담이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는
거대한 야쿠자 집단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늙었어도 무서울 게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신경전에서 이길 방법은 오직 부딪치는 것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특히나 어려서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은 태이는 아무도 당해 내지 못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카쿠치 신코가 곤란한 얼굴로 뒷목을 부여잡자, 뒤편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눈을 서늘하게 떴다.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태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경계하며 다울을 보호했다. 언제 어디서
공격이 날아올지 몰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시는 편이 좋을 텐데요.”
콰직!
카쿠치 신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태이의 뒤에서 기회를 보던 조직원 한 명이 달려들었다. 손에는 거친
각목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공격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각목이 휘둘러지기 전에 태이가 달려든 남자를 손쉽게 제압했기 때문이다.
손목이 꺾이고, 각목이 큰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라졌다.
툭!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태이에게 제압당한 조직원이 들고 있던 각목을 놓쳤고, 반 토막 난 각목은 그대로 날아가
다울의 머리를 맞고 떨어졌다.
“아, 씨…….”
태이의 죽은 시선이 달려든 조직원에게 향했다가, 정수리를 두 손으로 문지르고 있는 다울에게 향했다.
마지막으로는 싸하다 못해 살벌한 눈빛으로 카쿠치 신코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거 큰일 났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머지 조직원들이 슬금슬금 멀어지기 시작했다. 몇몇은 태이에게 달려든 조직원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흑, 컥, 너 이, 쿨럭!”
순식간에 카쿠치 신코의 앞까지 다가간 태이가 그의 재킷 안에서 단도를 빼냈다. 늘 품에 단도를 품고 다닌다는
사실은 야쿠자로서 기본으로 알고 있던 상식이었다.
그렇게 빼내어 든 단도는 정확히 카쿠치 신코의 가슴팍에 닿았다. 다른 손으로는 발버둥 치지 못하도록 카쿠치
신코의 목을 힘껏 조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자극하면 정말 칼부림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수장이 위험에 처하자, 근처에 있던 조직원들이 하나같이 당황해 태이를 진정시키느라 난리였다. 그러나 태이의
귀에 그들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멍하게 앉아 정수리를 문지르고 있던 다울은 처음 보는 태이의 모습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살벌한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는데, 지금의 분위기는 여태까지와 비교도 못 할 정도였다.
허공에 손을 뻗고 목소리를 내려던 다울이 얌전히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지금 상황에서 태이를 말릴 수 있는
건 오직 다울 뿐인데, 마지막 희망까지 잃은 조직원들은 절망에 빠졌다.
조직원들은 포기해 버렸다. 방금 다울의 발언으로 인해 태이의 눈이 제대로 돌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무슨 수를
써도 태이를 말릴 수 없게 됐다.
“허억, 컥, 켁!”
단도가 점점 카쿠치 신코의 살갗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1cm 도 남지 않아, 손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살이
서늘한 칼날에 찢겨나갈 듯했다.
조직원들의 처절한 외침이 오히려 독이 되었던 걸까. 단도를 쥔 손이 휙,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팔이 크게 치켜올라갔다 떨어졌다.
“…….”
그때, 다울의 다급한 목소리가 태이를 막았다. 아니, 살인을 막았다 해도 무방했다. 아무리 그래도 태이가
살인을 저지르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카쿠치 신코가 절연하고 돌아가면 야쿠자 집안과의 인연도 끝인데,
여기서 살인을 저지르면 모두 물거품이 된다.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거다.
거짓말 같게도 태이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크게 뜨인 눈과 줄어들었던 동공에 서서히 힘이 풀리고 있었다.
이제야 이성이 조금 돌아온 모양이었다.
끝내, 카쿠치 신코가 절연을 선언했다. 20 년 동안 태이의 손목을 옥죄고 있던 사슬이 드디어 풀린 것이다.
태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싸워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할아버지가 저리 미련도
없이 관계를 끊어 낸 걸까. 집착과 끈질김이 전부인 사람이라 고작 이런 것에 물러나지 않을 게 분명한데 말이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뒤덮여 버렸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다울이 주먹을 꼭 쥐었다. 드디어, 드디어 정태이가 저 지긋지긋한 야쿠자 집안에서……!
원하는 답을 얻어 낸 다울은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환한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행복감에
마음 깊은 곳이 울렁였다.
“다들 멀뚱히 서서 뭐 하냐, 당장 일본 돌아가는 티켓이나 끊어 와라! 저 맹랑한 것들,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보자.”
태이와 담이를 포기한 카쿠치 신코는 상황을 질질 끌지 않고 떠나 버렸다. 마지막까지 미련스러운 눈으로 태이를
바라보았지만, 태이는 무심한 시선으로 대응했다. 실컷 날뛰어 놓고, 이제 와서 저런 눈이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불구경하듯 상황을 지켜보던 조직원들은 눈물을 머금은 눈빛으로 다울과 태이를 한 번씩 쳐다보고 잽싸게 튀었다.
그들이 모두 떠나가니 복잡했던 공간이 조금이나마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멍하니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다울이 치아를 예쁘게 드러내며 웃었다. 처량하게 애원했던 건 모두 잊고,
그저 태이와 담이를 지켜냈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제 정말 마음 편히 살 수 있겠구나. 우리 세 사람.
고개를 들어 태이를 바라본 그가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보였다. 뒤따라 들리는 목소리가 명쾌했다.
“…….”
“뭐야, 왜 말이 없어?”
“고마워서.”
진심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묵직하게 건네진 목소리에 얼굴을 붉힌 다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막상 들으니 괜히 울컥했다.
“사랑해, 다울아.”
“……어? 어?”
“사랑한다고.”
입술이 빠르게 맞부딪쳐 왔다. 부드럽고, 말캉한 느낌에 눈을 꼭 감은 다울이 고개를 비틀자, 기다렸다는 듯
혀를 섞어오던 태이가 두어 번 짧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입술을 떼고 태이와 눈을 마주한 다울은 그저 멍하게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훤칠하게 웃는 태이의 얼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서, 심장이 튀어나올 듯 뛰어댔다.
아까까지 살벌하게 칼을 휘두르던 태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얼떨떨하지만, 환해진 낯빛이 보기 좋았다.
빨갛게 익은 사과 같은 얼굴로 도리질 치는 다울이나, 해맑은 얼굴로 두 사람을 놀리는 담이가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주변에 꽃이 피어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랑스럽다.
“푸흡…….”
진심으로 사랑해 보는 것도, 제대로 된 가정을 갖게 된 것도, 모두 이다울 덕분에 이룰 수 있었다. 태이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다울의 시선이 온전히 태이에게 닿았다. 처음에는 많이 삐걱거리기도 했고, 사소한 다툼도 잦았다. 그러나
지금은 초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진전되어 있었다.
여전히 무심하지만 다정하고, 거칠어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 따스한 사람. 영원히 함께해도 좋을 소중한 내 사람.
외전 1. 담이의 소원
아기를 키우기 시작하면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른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간신히 배를 뒤집고, 어설프게 걸어
다니던 담이는 어느덧 의젓한 5 살이 되어 유치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모두가 잠에서 깨지 않은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다울은 심장이 바닥에 처박히는 기분을 느끼며 하루를
시작했다.
어젯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이가 상의를 껴입지 않고 잠든 모양이었다. 침대에 얼굴을 묻고, 등을 시원하게
드러낸 채 잠에 빠진 모습이 얄미웠다. 야쿠자 가문을 벗어났어도, 이전에 새긴 문신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다울은 등에 새겨진 호랑이와 눈싸움을 하다가, 졌다는 듯 이불을 폭 덮어 버리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우웅, 일어나써.”
잠에서 깬 담이가 멀뚱한 눈으로 다울을 쳐다봤다. 따로 마련해 놓은 어린이용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이
인형같이 귀여워서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다울은 담이를 두고, 욕실로 들어와 씻었다. 평일 아침에는 분주하게 움직여야 해서 바빴다. 씻고, 태이가
일어나서 담이 밥을 먹일 동안 유치원에 갈 가방을 싸 주고, 장난감으로 어질러진 집을 대충 정리하고 나면 아홉
시가 훌쩍 넘어가곤 했다.
오늘 하루도 무난히 보내기 위해 힘차게 세수를 끝마친 그가 방으로 돌아왔다. 욕실에서 돌아오던 중, 거실을
살펴봤는데 놀고 있어야 할 담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이야, 뭐 해?”
“허업……! 담이야!”
잽싸게 사인펜을 빼앗은 다울이 곤란하다는 눈으로 태이의 등을 빤히 응시했다. 반면, 사고를 친 담이는 해맑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짙은 파란색 사인펜을 문질러 닦으니 숨겨져 있던 호랑이 눈이 서서히 드러났다. 아빠 무서운 거 보지 말라고
짙은 색으로 칠해놓은 게 어이없이 기특했다. 피실피실, 웃음을 흘리며 등을 닦던 중 다울의 몸이 기울어졌다.
“어, 어어……?”
“아침부터 뭐 해, 다울아.”
“낙서?”
“많이도 그려 놨네.”
“…….”
“뭐야, 그 눈빛은.”
다울의 동그란 머리통 위로 능글맞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몇 년이 지나도 저놈의 입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담이가 들었다면, 뭘 하고 싶은 거냐며 물음표를 남발해 댔을 것이다. 이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 있던 다울은
누가 들을까 무서워 태이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이는 제 감정에 지나치게 솔직했다. 입은 틀어막혔지만, 능구렁이 같은 손은 어느새 다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문 잠글까, 다울아.”
뒷걸음질 치던 다울이 침대에 걸려 뒤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는데,
제 발로 잡아먹어 달라 유인하는 꼴이었다.
그때를 노려 다울의 위에 올라탄 태이가 덮치기 직전의 자세를 취했다. 누가 본다면 상당히 민망해질 만한 자세와
분위기였다.
달칵!
양쪽 볼에 딸기 스티커를 붙이고 나타난 담이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들에게 민망한 장면을 들킨 다울은
당황해서 태이를 힘껏 밀쳐 내 버렸다. 평소에는 발휘되지 않던 힘이 이럴 때만 기운 좋게 솟구쳤다.
얼떨결에 밀쳐진 태이는 눈썹을 찌푸린 채, 담이를 안아 들었다. 오늘은 잠깐이라도 붙어먹을 생각이었는데,
분위기가 와장창 깨져 버려서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담이를 안은 손은 퍽 다정했다.
몸이 들어 올려진 담이는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비행기 놀이를 좋아해서, 태이가 들어 올려 줄 때마다 세상
행복한 얼굴로 웃곤 했다.
“웅! 알게써.”
이전에 부엌에서 장난을 치던 담이가 실수로 끓는 물을 엎은 적이 있었다. 다행히 담이는 다치지 않았지만, 앞에
서 있던 다울의 발에 뜨거운 물 일부가 쏟아져 화상을 입었었다.
나름 담이를 오냐오냐 키우던 태이는 그때 처음으로 화를 냈다. 늘 무심하게 경고하고 넘어가던 그가 벼락같이
화를 내며 혼낸 뒤로 담이는 혼난다는 말을 무서워했다.
물론, 혼난 뒤에는 늘 태이가 애정으로 안아 줘서 트라우마가 생긴다거나 하지 않았다. 좋은 훈육 방식이었다.
볼을 긁적이며 부엌으로 나간 다울이 식탁에 나란히 앉은 뒷모습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담이의 성격이
다울을 닮았다고 해도, 뒷모습은 태이와 붕어빵이었다.
“으음, 그렇네. 담이야, 오늘 유치원에서 이 색종이로 액자 만든대. 스케치북에 소중한 보물 그려서, 색종이
액자에 넣을 건가 봐.”
정담이.
견출지에 이름을 대신 써 준 다울이 스티커를 떼어 내 물풀에 붙였다. 크레파스에는 이전에 태이가 이름을 써 준
적이 있어서 건너뛰어도 될 것 같았다. 동글동글한 다울의 글씨체와 달리 시원스레 뻗은 글씨체가 태이와 잘
어울렸다.
“담이야, 밥 다 먹었어?”
그 사이, 2 층 욕실을 이용해 씻고 내려온 태이가 옷을 갈아입고 차 키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담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건, 언제나 태이의 몫이었다.
방에서 쉬다가 온 하루가 뛰어다니는 담이를 붙잡고 옷을 갈아입히러 들어갔다. 그나마 하루가 이 집에 계속
머물러 줘서, 육아가 덜 힘들 수 있었다.
“으, 으웃……!”
혀가 깊게 파고들 때마다 입술 새로 민망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혀와 혀끼리 질척한 소리를 만들어 내며 얽히던
중, 2 층 계단에서 정신없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읏, 으웅……!”
담이가 뛰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울이 급히 몸을 밀어내 봤으나, 태이는 순순히 밀려나 주지 않았다. 이
장면을 들킬까 봐 심장을 졸이고 있는데, 발소리가 가까워지기 직전에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진 그가 능글맞게
웃었다.
덕분에 다울의 얼굴만 잘 익은 복숭아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샛노란 유치원 가방을 등에 메고 달려온 담이가
다울의 다리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물었다.
질문 폭탄을 던지던 담이가 태이의 꾀에 넘어가 현관문을 단번에 나섰다. 장난스럽게 웃던 태이는 마지막까지
다울의 볼에 입 맞춰 주고 뒤돌아섰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저 여우 같은 면은 그대로였다.
한편, 태이는 담이를 데려다주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익숙하게 뒷좌석에 오른 담이는 어서 사탕을 달라며
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사탕, 사탕!”
“다음에는 꼭 문 먼저 열고 사탕 얻어가.”
무심한 말투지만, 분명 담이를 놀리고 있는 거였다. 담이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미끼를 던졌던 그는 수준급의
실력으로 상황을 넘기며 사탕을 주지 않았다. 최근 단 음식을 많이 먹어서, 이가 썩는 사탕이나 초콜릿은 당분간
금지였기 때문이다.
다울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단 음식을 그렇게 좋아하더니, 나와서도 좋아하는 게 신기했다. 다울이 임신했을
당시 딸기 생크림 샌드위치에 미쳐 있었던 모습을 떠올린 그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치사해!”
“그래?”
“지금은 없지.”
“잘하면 있을 수도 있고.”
다울이 들으면 기겁할 만한 대화였다. 동생을 갖고 싶다니. 태이는 담이가 태어난 뒤로 둘째 가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다울이 워낙 입덧으로 힘들어해서 다시는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태이와 달리 담이는 진심으로 동생이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차 안에서 동생을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담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태이를 설득했다.
“다녀와.”
“뭘 알겠지야, 얼른 들어가.”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다울이 임신했을 때를 느릿하게 떠올렸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둘째는 무리일 듯했다.
저러다 말겠지.
태이는 단순한 담이가 동생을 포기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며칠 후면 ‘동생’이라는 단어조차도
까먹을 게 분명했다.
* * *
집에 들어오자마자 기분 좋은 바람이 통창 너머로 흘러들어와 다울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유독 맑고 상쾌한
날이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울과 공원에 다녀온 담이는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날이 좋아서 마음껏
놀게끔 두었더니, 나중에는 흙바닥에서 새들과 함께 엎어져 노느라 옷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담이야, 일단 씻자.”
“압빠는?”
떡꼬치가 어지간히도 맛있었나 보다. 아담한 크기의 입에 떡을 마구 욱여넣은 담이가 자랑스럽게 브이를 했다.
누구 아들인지, 참 해맑단 말이야. 뿌듯한 얼굴로 담이를 바라보던 다울이 다 먹은 꼬치를 건네받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압빠처럼?”
한참 욕조 안에서 물오리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담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언가 잊어버린 걸 떠올릴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아니이, 아닌데.”
“그러면? 잘 생각해 봐.”
“병아리 반 현우?”
병아리 반 현우, 담이가 이전에 태이에게 말했던 ‘동생 있는 친구’였다. 며칠 까먹고 지내더니, 이제야 슬슬
기억을 되짚어 보는 듯했다.
“자, 바나나우유.”
“고마씁니다.”
“생각났어?”
“…….”
“……어?”
“왜애?”
가끔은 아이의 순수한 물음이 잔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고민하던 다울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럴 때마다 담이의 집요한 시선이 끈질기게 쫓아왔다.
“진짜아?”
삑, 삐비빅. 덜컥.
일을 끝내고 온 태이는 멀뚱히 사탕을 빨고 있는 담이를 발견하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단 음식은 당분간
금지일 텐데, 무슨 이유로 사탕을 준 걸까. 의심스러운 눈빛이 다울에게 닿았다.
다울은 침대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갑자기 화를 내서 그런가, 얼굴이 순간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뿐만 아니라 가슴도 심하게 두근거렸고. 아무튼 몸 상태가 이상했다.
“하아, 하아…….”
그러나 방금 느낀 증상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뭐랄까, 이번만큼은 쉽게 넘어갈 수 없다는 걸 몸으로 확실히
깨달은 것 같았다.
끼이익.
방문이 천천히 열리며 소리를 냈다. 태이가 온 줄 알고 기겁하며 놀라던 다울이 약통을 던지듯 넣어 놓고,
서랍을 닫아 버렸다. 다행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태이가 아닌 담이었다.
“머야? 머 해?”
“담이 사탕 다 머거써.”
“웅.”
담이에게 아픈 모습을 들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약 효과가 빨리 돌아서 열감이 쉽게 가라앉았다. 역시,
사람 몸에 안 드는 약은 없다니까. 세 알을 먹기 잘했다며 속으로 안심하던 다울이 슬며시 웃어 보였다.
사탕을 다 먹고 아쉬워하던 담이는 폭신한 침대에 누워 몸을 뒹굴거리는 중이었다. 아까부터 비행기 노래를
부르는 걸 보니, 태이가 오면 비행기를 태워 달라고 하려는 모양이었다.
“왜 다 여기 있어.”
“압빠, 압빠!”
다울은 제 설득이 무참히 실패로 돌아갔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울상을 지었다. 이제 태이가 무슨 말을 하려나,
또 능글맞게 대꾸하려나. 반쯤 포기하고 있을 때 즈음, 태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외로 단호한 태도였다. 그가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하자,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담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다울은 이 상황을 어찌 넘겨야 할지 곤란했다. 담이는 울고, 태이는 쓸데없이 단호하고.
얌전하고 착하던 담이가 웬일로 생떼를 썼다. 당황스러움에 담이를 말려 보려던 다울이 자그마한 발에 어깨를
맞아 힘없이 밀려났다. 고작 유치원생한테 무슨 힘이 있겠어, 하고 겁 없이 손을 뻗었는데 막상 얻어맞아 보니
굉장히 얼얼했다.
“아으…….”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평소보다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잠깐이었지만, 다울은 페로몬이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걸 느끼고 숨을 꾹 참았다.
태이는 언제나 눈치가 빨랐다. 다울의 몸 상태를 단번에 파악한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손은 어느새 담이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붙잡고 있었다.
“정담이, 눈물 그쳐.”
“그치라고 했어.”
“흐아앙!”
“안 되겠다, 따라와.”
차분하게 얘기하던 태이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안 참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이
어이없어서였다. 잘못했다고 말하기는커녕,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제 할 말만 늘어놓는 게 다울과 똑같아서
귀여웠다.
“히이, 너, 너무해…….”
떼를 쓰던 담이는 눈물을 뚝 그치고 나와 소심한 사과를 건넸다. 쭈뼛거리며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귀여워서 쉽게
용서해 준 다울이 담이를 꼭 안아 줬다.
다울은 이 일 이후로 툭하면 둘째를 고민했다. 허리 걱정이 돼서 무서웠던 것뿐이지, 잘 생각해 보면 담이에게
동생을 만들어 주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무슨 생각해.”
“어?”
주말에도 고민은 계속됐다. 담이를 하루에게 데려다주고 온 다울이 침대에 엎어져 있자, 태이가 포실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담이가 없어서 시간이 남았는지, 여유롭게 옷을 갈아입던 그가 다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덕분에 다울은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일이 있는 태이는 오늘도 회사에 나가려는 모양이었고, 집이 조용해진
김에 계속 고민하던 답을 내려 볼 참이었다.
하여튼 몸이 조금만 안 좋아도 금세 알아차리니, 다울은 뭘 숨길 수가 없었다. 무심한 낯으로 다울을 걱정하던
그가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쓰다듬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한 듯했다.
카쿠치 가문과 완전히 연을 끊어 낸 태이는 회사에 있던 간부들을 전부 쫓아냄과 동시에 재정비에 들어갔다.
직원들도 많이 바뀌고, 회사 시스템도 바뀌다 보니 몇 년 동안 일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부사장인 마사키 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설렁설렁 일하던 태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모든 걸 뒤엎고, 다시 일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다울과 담이 덕분이었다.
“혹시라도 몸 상태 안 좋으면,”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 전, 다울의 뒤통수를 끌어당겨 가볍게 입 맞춰 준 태이가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려 웃었다.
몇 년 사이에 까칠한 모습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다녀올게.”
페로몬을 거두어들인 다울이 방으로 호다닥, 뛰어 들어갔다. 히트 사이클이 무서워서 조짐이 보일 때마다 약을
먹는 습관을 들였더니, 이제는 물 없이도 약을 삼킬 수 있는 지경까지 와 버렸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억제제가 든 약통이 손에 들렸다. 가벼운 통 안을 힐끔 쳐다보던 다울이 한숨을
내쉬었다. 절반 정도 차 있던 알약이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얇은 외투를 걸치고 나온 다울이 주차장 앞에 묶인 자전거 자물쇠를 풀었다. 크림색으로 칠해진 자전거가 다울의
순한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당연히 이 자전거는 태이가 선물해 준 거였다.
익숙하게 자전거에 올라탄 다울이 페달을 힘껏 밟았다. 날씨가 그리 덥지도 않은데 몸 내부가 오묘하게
뜨거워지고 있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약국까지 달려온 다울은 식은땀을 흘리며 문을 열었다. 규모가 큰 약국 안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의 다울에게 인내심과 도덕심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급한 부탁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약사가 억제제 한 통을 내밀었다. 다울은 카드를 내어줌과 동시에
억제제 통을 열어 약을 꺼냈다. 참으로 황당한 행동이었다.
“후우, 감사합니다.”
“아, 네에.”
덜컥.
지잉.
다울이 의아해하던 중,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화면이 반짝이며 문자 메시지 알림창이 띄워졌다. 발신인은
태이였다.
[몸 상태 어때.]
[멀쩡해 ㅇㅇ!!!!]
[무리하지 말고 쉬어.]
채팅창을 켜 놓고 있었던 걸까. 답장을 보내자마자 숫자가 사라졌다. 다울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메시지를
보내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안일한 생각을 하던 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프기 전에 잠드는 게 나을 듯해서였다. 베개에 머리만 올려놔도
금방 잠드는 다울은 5 분도 지나지 않아 코를 골기 시작했다.
* * *
정신이 몽롱하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안 뜨거운 곳이 없다. 중간에 깨어나 억제제를 더 먹어 봤지만, 한 번 터진
페로몬은 가라앉을 생각을 안 했다.
페로몬이 터져 나올 때마다 바지 뒤쪽이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찝찝함에 옷을 갈아입어 보려고 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힘들었다. 게다가 투명한 액이 쉴 새 없이 삐져나와 옷을 갈아입어도 소용없을 듯했다.
다울은 이성의 끈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정신을 완전히 놓아 버리면 자신이 어떤 짓을 벌일지 무서워서 몸을
덜덜 떨었다. 처량하게 뻗은 손이 침대보를 세게 움켜쥐어 새하얗게 변했다.
담이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담이까지 있었더라면 애는 울고, 다울은 패닉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투둑!
언제나 그렇듯 신은 다울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핸드폰이 침대 아래로 떨어지자, 집기를 포기한 다울이
고개를 푹 떨궜다.
지잉.
그때였다. 떨어진 핸드폰이 진동음을 내며 울렸다. 다울은 고개만 쏙 내밀어 밝아진 화면을 응시했다. 이제 막
도착한 메시지가 미리보기 창에 띄워져 있었다.
[나 조금 더 늦을 것 같으니까, 먼저 저녁 먹고 …더보기]
태이는 조금 더 늦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다울은 서러움에 눈물을 팡,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죽겠는데, 괴로운데, 정태이는 늦는다고 하고!
서러운 상체와 달리 본능에 약한 하체는 안달이 나 있었다. 다울은 이불보에 뒤를 문지르며 울었다. 애액이 왈칵,
흘러나올 때마다 뒤가 간지러워서 괴로웠다.
그저 달콤한 페로몬 향에 취해 숨을 헐떡이던 다울은 바지를 끌어 내리고 스스로 뒤를 뭉근히 짓눌렀다. 애액으로
완전히 젖어 든 뒤가 축축하고, 미끌거렸다.
“아읏, 응…!”
아이처럼 울던 다울이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며 일어섰다. 방금까지는 움직일 힘도 없었는데, 흥분감이 온몸을
잡아먹을 듯 삼켜오자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다울은 자신의 뒤를 채워 줄 물건을 찾았다. 아쉽게도 집에는 잠깐의 유희를 즐길 만한 도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태이가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뜬 숨을 내뱉던 다울이 거실과 부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살펴도 마땅한 물건이 보이지 않아서 이번에는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 안 채소 칸에는 대파 몇 개와 당근이 들어 있었다.
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마른침이 목구멍 너머로 꼴깍, 넘어갔다. 침대에 올라와
누운 다울은 손에 든 당근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고, 뒤에 넣는 것을 망설였다.
이성과 본능이 마음속에서 싸우는 사이, 또다시 뒤쪽에서 애액이 흘러 허벅지를 적셨다. 덕분에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던 이성이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야 말았다.
“으, 흐윽……!”
심지어 다울은 콘돔도 씌우지 않은 당근을 안쪽에 밀어 넣고 있는 거였다. 아무리 뒤가 흥건하다지만, 빡빡한
당근을 밀어 넣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둥글게 벌어진 구멍이 힘겨워하면서도 당근을 꽉 물고 놓지 않았다. 애매하게 박힌 당근을 내려다보던 다울이
작게 흐느꼈다. 넣긴 넣었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무서웠다.
뽀얀 엉덩이로 당근을 물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흰토끼 같기도 했고.
지잉.
[왜 답이 없어.]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 태이의 이름과 함께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다울은 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손을 뻗으면 핸드폰을 집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몸을 살짝만 움직여도 뒤에 꽂힌 당근이 내벽을
자극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우당탕!
욕심을 내서 상체를 더 밖으로 내밀던 다울이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바닥에 엎어져 경련하던 그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신음을 내질렀다.
엎어지면서 반 정도 꽂혀 있던 당근이 끝까지 들어오고 말았다. 찢어질 것처럼 벌어진 구멍이 힘겹게 당근을
삼켜냈고, 비좁은 내벽이 아우성치듯 움찔거렸다.
눈물을 흘리는 걸로 모자라 침까지 줄줄 흘리던 다울이 정신을 못 차리고 허리를 떨어댔다. 앞에서는 투명한 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Trrr…….
오늘따라 전화 연결음이 길게 느껴졌다. 스피커 모드로 전환한 다울은 연결음이 들리는 동안 허리를 치켜올린 채
눈물을 흘렸다. 배 안을 가득 채운 느낌이 생소해서, 여린 안쪽이 잘못되지 않을까 겁이 났다.
- 여보세,
- 너 왜 울어, 아파?
- 금방 갈게. 기다려.
전화는 간결하게 끝났다. 태이가 온다고 했으니, 다울은 그때까지 잘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침대에 올라갈 힘도
없어 바닥에 늘어진 다울이 주먹을 꾹 쥐었다.
* * *
끼익.
주차장에 대충 차를 세우고 내린 태이가 돌계단을 뛰어올랐다. 일하던 도중에 다울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다급함이 뒤섞여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온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페로몬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니,
여태 회사에 있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망설임 없이 방문을 연 태이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페로몬으로 범벅된 방 안에는 엉망진창이 된
다울이 쓰러져 있었다. 바닥은 투명한 애액이 묻어 번들거렸고, 침대 아래에 엎어진 다울은 허리를 벌벌 떠는
중이었다.
“다울아.”
“너 이게 다,”
“흐으, 하으읏!”
자세히 보니 다울의 품에 무언가가 소중히 안겨져 있었다. 팔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옷자락을 당겨 본 태이는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태이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코알라처럼 매달린 다울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페로몬을 풀자마자 시원한
향이 느껴져서 몸이 절로 품을 파고들었다.
“뭐야.”
이런, 들켜 버렸다. 태이가 도착하기 전까지 뒤에 박힌 당근을 빼냈어야 하는 건데. 다울에게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만할까?”
가기 직전에 움직임을 멈춰서 죽을 맛이었던 다울은 태이의 팔을 애처롭게 붙잡았다. 평소에는 부끄러워서 잘
벌리지 않던 허벅다리가 활짝 벌어져 분홍빛의 구멍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
“흐윽, 해 줘, 읏, 가고 싶어…….”
“다리 더 벌려.”
“흐, 으웅…….”
순순히 명령을 따른 다울이 다리를 더 활짝 벌렸다. 살살 시작하길 바랐던 다울은 1 초도 지나지 않아 교성을
내뱉었다.
찔꺽이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신음을 내지르던 다울의 엉덩이가 경련하듯 떨렸다. 손가락만으로 가 버린 다울은
쾌락에 취해 헥헥거리기 바빴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뱉어졌다.
키스를 받아 내던 다울은 소심한 손짓으로 태이의 것을 매만졌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성기는 뜨겁고 단단했다.
“제대로 얘기해야지.”
“네 거, 으읏, 빨리 넣어 줘.”
제 성기를 손으로 쓸어내리던 태이가 서랍 쪽으로 다가가자, 다울이 팔을 잡아채 제 쪽으로 끌었다. 덕분에
콘돔을 꺼내려고 돌아선 몸이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이성이 날아간 다울은 태이의 허벅지 위에 자리를 잡고, 부푼 성기를 붙잡아 제 뒤에 맞췄다. 태이가 아무리
밀어 내 봐도, 다울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붙여 왔다.
히트 사이클이 온 우성 오메가와 우성 알파가 섹스하게 된다면, 임신할 수도 있었다. 이 상태에서 박으면 태이도
이성이 사라질 텐데, 어떻게든 콘돔을 씌워야 했다.
상황이 골치 아프게 됐다. 임신하고 싶다니. 분명 진심으로 하는 소리가 아닐 것이다. 다울을 밀어 내다 포기한
태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행위를 이어 갔다. 자신만 잘 참고, 실수하지 않으면 임신은 피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느슨하게 풀어진 뒤가 팽팽할 정도로 늘어나며 단단한 살덩이를 받아 냈다. 뿌리 끝까지 성기를 처박아 넣은 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자, 맥없이 늘어진 다울이 신음을 흘렸다.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성기가 내벽을 찌르고 나오면, 벌어졌던 안쪽이 잘게 경련했다. 다울이 숨을 헐떡이자 속도
조절을 하던 그가 조여드는 느낌에 참지 못하고 허리를 빠르게 털어 댔다.
맞부딪치는 살결 사이로 투명한 애액이 길게 늘어져 실선을 만들어 냈고, 한껏 벌어진 다리가 허공에서 갈대같이
흔들렸다.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 다울은 내벽을 힘껏 조이며 허리를 휘었다. 동시에 사정감이 가까워진 태이가 제
것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다울이 허리에 다리를 감은 채 태이를 놓아 주지 않았다. 사정하느라 달아오른 내벽이 경련하며 안으로 들어온
성기를 자극하자, 태이가 이를 악물고 인상을 구겼다.
“읏, 놔, 다울아.”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좁혀진 내벽 안에 희뿌연 정액이 가득 들어찼다. 뜨끈한 느낌이 배 안에 퍼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다리를 풀어 낸 다울이 끔뻑 기절해 버렸다.
침대 위에 늘어진 다리 사이로는 흘러넘친 정액이 꿀럭, 거리며 새어 나오고 있었다. 허망한 시선으로 그 장면을
응시하던 태이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며칠 후, 태이와 다울은 의사에게서 둘째 임신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외전 2. 재이의 장래 희망
창문 밖으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여름에는 정원에 매미가 더 많아진 모양이었다. 집 안에서 에어컨을
틀고 누워 있던 다울은 아이들의 발소리에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아빠! 이거 봐도 돼?”
“형아, 나도 보고 시퍼.”
“재이도 보구 싶대.”
서재 쪽에서 나온 담이가 한 손에 앨범을 들고 있었다. 언제 뒤쫓아 간 건지, 동생인 재이도 앨범을 보고 싶다며
눈을 빛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두 아이를 바라보던 다울이 활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앨범을 만들어 두고 서재에
꽂아 놨는데, 아이들이 그걸 찾아낼 줄은 몰랐다.
태이를 많이 닮았던 담이는 눈매가 유순해지면서 밝고 서글서글한 이미지가 되었고, 둘째인 재이는 누가 봐도
태이 아들이라고 할 만큼 그를 쏙 빼닮아 가고 있었다.
성격도 마찬가지였다. 담이는 태이와 다울을 반반 섞어 놓은 성격이라 고집이 세면서도 해맑고 단순했다. 반면,
재이는 성격마저도 태이를 닮아 매사에 무덤덤하고 잘 울지도 않았다.
“웅.”
“하나또 안 기여워.”
손가락으로 아기 때 사진을 가리키던 담이가 울상을 지었다. 감성적인 담이에 비해 재이는 매우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고작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뭐 이리 시크한지 모르겠다.
“웅.”
“재이 잘못 안 해써.”
흐잉, 너무해! 무심한 반응에 감정이 상한 담이가 방으로 뛰어가 버렸다. 마침 욕실에서 나오던 태이가 뛰어드는
담이를 손쉽게 붙잡아 거실로 돌아왔다.
“아빠, 이거 놔!”
“아, 안 삐쳤어!”
“그렇다고 쳐.”
담이를 소파에 던지듯 내려놓은 태이가 바닥에 떨어진 앨범을 주워들었다. 몇 년 동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앨범이었다.
“이, 이거……!”
사진 속에는 다울이 있었다. 사진 속 다울은 태이의 물건들을 주변에 동그랗게 펼쳐 놓고, 그사이에 들어가 자고
있었다. 배가 조금 튀어나온 걸 봐서는 임신했을 시절 같았다.
다울은 민망함에 우선 사진을 숨기고 봤다. 재이를 가졌을 때, 그는 입덧도 먹덧도 하지 않았다. 참
다행이었지만, 입덧보다 더 심각한 증상이 생겼었다. 바로 태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
아마 이 사진은 하루가 찍어서 태이에게 줬을 것이다. 태이는 또 그걸 좋다고 받아서 앨범에 간직 중이었고. 참
나.
“귀엽잖아.”
“…….”
“내 물건에 둘러싸여 있는 게, 귀여워.”
그러고 보니, 다울은 그때 태이에게 중요한 시계를 팔았었다. 태이 말로는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내가 준
걸 내 손으로 팔아먹어서 마음이 뜬 줄 알았다나 뭐라나.
이왕 생각난 거, 내일은 백화점에 가서 태이에게 줄 시계를 사야겠다. 빙의 전 이다울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아무튼.
“가야지.”
“으음, 알겠어.”
“중간중간 연락해.”
태이의 집착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했다. 부드러워지긴 했으나, 말투만 좀 유해졌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이제
이런 집착에 익숙해진 다울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마음속으로 뿌듯하게 웃던 다울은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랜만에 백화점 나들이를 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들떴다.
* * *
아침부터 날씨가 화창했다. 비가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다울이 한시름 놓았다.
아이가 두 명이다 보니, 비 오는 날 돌아다니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담이는 무슨 색 옷 입을래?”
“재이는?”
“까망색.”
“으응…….”
밝은색을 좋아할 법도 한데, 재이는 늘 검은색 아니면 흰색 옷만 입으려고 했다. 다울이 아무리 귀여운 옷을
사다 줘도,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엉덩이 맴매한다!”
“재이는 왜 대답 안 해?”
“형아가 대답해써.”
“담이야아아, 재이야아아아!”
애는 그렇다 쳐도, 솜사탕 쟤는 왜 저렇게 신이 난 거야. 게슴츠레 뜬 눈으로 재회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다울이 재이를 챙겨 차에 올라탔다. 담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 삼촌 옆에 타겠다며 조수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답장은 빠르게 돌아왔다. 일하는 중이라도 다울의 메시지라면 곧장 답장해 주는 스윗함이 여전했다.
[떼어 놔.]
“압빠, 조아?”
“풉…….”
다울을 빤히 바라보던 재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웃음이 아니라, 다울을 놀리는 듯한 웃음이었다. 메시지
내용을 보기라도 한 걸까. 민망함에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자,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너는 같이 안 가게?”
“결혼이나 해.”
서른이 넘었는데 저 역겨운 말투는 고쳐지지 않고 있었다. 백미러를 통해 눈을 마주치며 말하던 하루가
번지르르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 왜 저렇게 꾸미고 나왔나, 했더니 데이트가 있었구나. 궁금하지 않은 척, 하루를 훑어보던 다울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나이에도 유지하고 있는 분홍빛 머리카락, 매끈한 피부, 여전히 유순하니 잘생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이도 그렇고 하루도 그렇고, 세월이 지나도 늙지 않는 것 같았다.
정작 이런 생각을 하는 다울은 가장 동안의 얼굴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본인만 모르는
듯했다.
“백화점 도착! 담이야, 재이야, 다우리한테 맛있는 거 많이 사 달라고 해!”
재이를 껴안고 내리려던 다울이 비웃음을 날렸다. 언젠가 한 번 뺨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타나더니, 그게 지금
사귀는 사람한테 처맞은 거였어? 하루가 뺨을 맞았다고 생각하니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황급히 담이의 입을 막던 하루가 망했다는 듯 우는 소리를 냈다. 삼촌의 비밀을 터뜨린 담이는 차에서 내려
다울의 옆에 딱 붙어 섰다. 웃는 모습이 귀여운 악동 같았다.
“다녀와요, 다우리…….”
“이따 봐, 뺨 맞은 솜사탕.”
“힝, 다 들켰어…….”
하루의 차가 큰길로 빠져나가 모습을 감췄다. 아이들은 백화점 건물을 보자마자 다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빠
시계를 사는 것보다, 백화점을 탐험하는 게 먼저였다.
양손이 붙잡혀 끌려가듯 안으로 들어온 다울은 담이와 재이를 잡아 두고, 주의 사항을 일러 주었다. 백화점
안에서는 뛰면 안 된다던가, 손을 놓으면 안 된다는 간단한 주의 사항이었다.
“응!”
“웅.”
대답은 잘했다. 다울은 아이들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태이의 선물을 먼저 고르러 갔다. 고가의 시계만
취급하는 스위스 브랜드는 입구부터 심플하고 고급스러웠다. 시계에 대해 잘 모르는 다울은 태이가 평소에 차고
다니는 브랜드를 참고하여 이곳부터 들러 디자인을 살펴봤다.
“와아, 반짝반짝해.”
“건드리는 거 아니야.”
번쩍거리는 시계들에 시선을 빼앗긴 담이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가장 가운데에 전시된 모델을 손으로 가리켰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레 따라붙어 쇼핑을 돕던 직원이 이때다 싶어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검은색이 포인트로 들어간 베젤과 깔끔한 스트랩이 어우러진 디자인은 태이의 이미지와 딱 들어맞았다.
“아…….”
가끔은 아이들의 말이 가슴을 울릴 때가 있다. 그래, 이건 ‘내가’ 선물하는 거지. 잠시 고민하던 다울이
경쾌하게 웃었다.
다울이 고른 시계가 예쁘게 포장됐다. 검은색과 금색이 적절히 섞여 포장된 시계는 누가 봐도 귀해 보였다.
다울은 여태 조금씩 모아 놓았던 용돈으로 결제를 마쳤다. 용돈이라 말하기에는 좀 큰 금액이었지만, 어쨌든 이
돈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선물을 구매한 게 뿌듯했다.
“와아아!”
그리고 아이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시계를 구매하자마자 담이가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갔다. 아까 말해
준 주의 사항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게 분명했다.
겨우 두 아이를 붙잡아 온 다울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아이스크림 브랜드로 향했다. 백화점 지하에는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부터, 여러 종류의 음식이 즐비해 있었다.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음식마다 먹고 싶다며 다울의 손을
이끌었다.
방금까지 조잘조잘 떠들던 담이는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흡입했고, 재이도 아이스크림에 집중했다.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인 다울이 딸기 맛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득 퍼넣었다.
“안 된다고 해!”
“머 사 줄 거냐고 무러보면 안 대?”
초등학교에서 이미 한 번 교육을 받은 담이는 똑 부러지게 정답을 외쳤다. 하지만 재이의 대답은 달랐다. 애가
겁도 없지, 뭐 사 줄 거냐고 물어본다니. 배짱이 대단했다.
담이는 언제나 호기심이 많았다. 상상력이 풍부해서 그런가, 한마디를 하면 질문이 다섯 개는 돌아왔다. 정작
틀린 답을 말한 재이는 관심 없다는 듯 아이스크림 먹기에 집중했다.
담이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 줘야 할까 고민하던 다울은 태이를 떠올렸다. 그래, 전직 야쿠자인 인간이 아빠인데
이걸 써먹으면 납치범들도 도망가겠지.
질문을 던지는 담이의 눈빛이 순수했다. 다울은 차마 자세한 이유까지 설명해 주지 못하고, 단순하게 대처 방법만
알려 줬다. 애들한테 아빠가 사실 야쿠자였어, 라는 말을 어떻게 할까.
“나 바다 가고 싶어!”
둘이 대답하는 것도 상극이었다. 담이는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다울은 ‘바다’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옛
기억을 다시금 떠올렸다.
담이가 옹알이를 막 시작했을 때, 가족끼리 바다에 다녀오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다울은 아직도 이날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야쿠자 가문에 묶여 있던 태이가 풀려난 날이었기 때문이다.
태이의 할아버지인 카쿠치 신코를 온몸으로 막고, 심지어 찬물까지 맞아 가며 절연하라는 말을 외쳤었는데. 벌써
9 년이 지났구나.
담이는 당연히 그때를 기억하지 못했다. 말도 못 하는 아기였으니 기억을 못 하는 게 당연했다. 다울은 담이가
그때 바다에 가지 못해서, 지금이라도 가자고 말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좋아, 좋아!”
잘 놀고 있어?
“아빠, 우리 바다 가자!”
전화를 받은 태이가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화면을 바라봤다. 신이 난 담이는 카메라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물었다.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서 다울의 말투를 따라 하는 게 귀여웠다.
태이는 집이 좋다고 했다. 재이와 비슷한 대답이었다.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던 다울이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
다울이 황급히 말을 끊어 봤지만, 담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덩달아 오묘하게 태이를 비웃고 있는
재이까지.
“어……?”
아무것도 모르는 담이는 다울이 태이에게 괴롭힘당하는 줄로만 알았다. 뭐, 어떻게 보면 괴롭힘당하는 게 맞긴
했다.
당황한 다울이 대답을 망설이고 있을 때 즈음, 조용히 아이스크림을 먹던 재이가 폭탄 발언을 던졌다.
“나는 다 봐써.”
재이가, 다, 봤다고……?
돌처럼 굳은 다울이 패닉에 빠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그 장면을 재이에게 들켰다니. 충격이 커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면, 재이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
“아빠?”
“……고, 고마워.”
다울을 빤히 쳐다보던 재이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비밀을 약속했다. 아이 같지 않은 행동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던 다울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재이 얼굴을 보는 게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등 뒤에 쇼핑백을 숨기고 다가온 다울이 태이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뒤늦게서야 다울의 존재를 알아챈 그는
능글맞게 웃어 보이며 얇은 허리에 팔을 휘감았다.
“왔어?”
“아, 그때 진짜 열받았었지.”
웃는 낯으로 열받았다는 말을 잘도 한다. 밉지만, 밉지 않은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던 다울이 퉁명스러운 손짓으로
쇼핑백을 내밀었다.
“조옴,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준 태이가 다울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가까워진 거리에 긴장한 다울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자, 웃음을 흘린 태이가 부드럽게 입을 맞춰 왔다. 자연스레 넘어가는 진도에 휘말려 가던 다울은 급히
어깨를 밀쳐 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그래.”
“이 망할 입! 입!”
태이의 안일한 대답에 기겁하던 다울이 입을 틀어막았다. 애들 동심은 지켜줘야 하는 게 맞는 건데, 태이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응, 제일 예쁘네.”
시계를 꺼내 제 손목에 채워 본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칭찬을 늘어놓았다. 검은색 포인트가 태이에게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다울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씨, 절대 안 팔아!”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 태이의 어깨에 날아들었다. 익숙하게 주먹을 받아 내던 태이가 다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자, 그제야 주먹질이 멈추었다.
앙칼진 눈이 점점 온순하게 바뀌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태이의 상체에 몸을 완전히 기댄 다울이 언제 주먹을
휘둘렀냐는 듯 안겨들었다. 망설이는 걸 보아하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다울의 소심한 손가락이 태이의
팔뚝을 살살 문질렀다.
“저기, 정태이.”
“응.”
내심 바다에 가고 싶었던 다울이 태이를 은근슬쩍 졸랐다. 좋다고 하는 곳은 전부 가봤는데, 국내에 있는 바다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기를 껴안듯 다울을 안아 준 태이가 장난스레 엉덩이를 토닥였다. 담이도, 재이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망설임 없이 말하는데, 정작 다울이 부끄러워하는 게 웃기고 귀엽기도 했다.
“가자, 바다.”
“언제?”
“이번 주말에.”
“어……?”
다울이 내빼지 못하도록 계획을 세워 버린 그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태이를
말리려던 다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태이의 휴가 날짜는 정해졌고, 여행 계획은 그대로 진행될 것 같았다. 마침내 하루에게 전화를 건 태이가
남은 날 동안 애들을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끊었다.
머리를 감싸 쥔 다울이 미래의 제 모습을 상상하며 좌절했다. 태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울은 어떨지 몰라도, 태이는 다가올 날을 매우 기대했다. 휴가가 이렇게 기다려지는 건 처음이었다.
* * *
짭짜름한 바다 향이 시원하게 흘러들었다. 하늘은 푸른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맑았고, 바다는 어디가 끝일지
모를 정도로 광활히 펼쳐져 있었다.
다울은 오랜만에 와 보는 바다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한참 더울 날씨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아 복작거렸지만,
이건 또 이거대로 좋았다.
“흐으음, 흐흥.”
선크림을 주욱, 짜내 볼에 문지르던 다울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새하얀 선크림이 말랑한 볼에 묻어 질척거리는
느낌은 별로였지만, 진짜 피서를 온 기분이라 신나기만 했다.
“야 야,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마. 저 사람 눈 좀 봐.”
어딘가 익숙한 조합이었다. 선크림을 바르다가 만 다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아직 다 발리지
않은 선크림이 볼에 하얗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저 미친!”
뒤돌아본 곳에는 태이가 있었다. 상체를 훤히 드러내고, 양쪽에 아이 둘을 안아 든 태이가. 그래, 바닷가이니
상의를 탈의하는 건 당연한 거였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이다.
휘황찬란한 문신이 태이의 존재를 더 뚜렷하게 만들었다. 반소매 티셔츠라도 입고 올 것이지, 시원스레 웃통을
벗고 나타난 그는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세상에, 웬 호랑이가…….”
아직 떠나지 않은 여자들이 계속해서 수군거렸다. 다울은 급히 얼굴을 가리고, 태이와 상관없는 척, 모르는 척을
했다. 엿들을 만큼 엿듣고 아무렇지 않게 태이를 부르기 민망해서였다.
빨리 가 주세요, 가세요.
여자들이 어서 자리를 뜨길 기다렸지만, 한번 시작된 수다는 멈추지 않았다. 다울이 파라솔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 즈음, 담이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우리 아빠아아아!”
태이의 품에서 내려와 모래사장을 힘껏 밟으며 뛰어온 담이가 곧장 다울의 품에 안겨 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들은 담이의 외침에 다울을 쳐다보더니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자리를 떠 버렸다.
느긋하게 걸어온 태이는 돗자리 위에 재이를 내려놓고 다울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하얀 볼에 선크림이 뭉쳐
있어서 꼭 생크림을 묻혀 놓은 것 같았다.
“제대로 발라야지.”
“정태이, 당장 위에 옷 입어!”
“더워, 다울아.”
잠잠하다 싶더니, 다울이 오랜만에 호통을 쳤다. 태이는 어쩔 수 없이 반소매 티셔츠를 입어야만 했다. 얇은
흰색 반소매 티셔츠라 문신이 비쳐 보이긴 했지만, 완전히 드러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빠는 착한 사람이야.”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담이가 말했다. 아빠는 착한 사람이라고. 태이는 그 말에 자랑스럽게 웃어 보였다.
한쪽 입꼬리만 슥, 당겨 웃는 게 재수 없었다. 태이한테 잔소리를 했다가 담이에게 혼난 꼴이 된 다울은
억지웃음을 지어냈다.
“……귀차나.”
“다울아, 이것 좀 발라 줘.”
“여기서?”
“손길이 좀 야한데.”
“말은 왜 더듬어.”
“내가 언제 더듬었다고, 조용히 해!”
방금까지 소심하게 닿아 오던 손길이 거칠어졌다. 오일을 과감히 쏟아부은 다울이 양손으로 등을 마구 문지르자,
누워 있던 태이가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딱 봐도 놀리는 듯한 웃음이었다.
“아야!”
태이와 다울이 잔잔히 투닥거리고 있는 사이, 잘 놀고 있던 담이가 모래사장에 엎어졌다. 쪼그려 앉아서 열심히
모래성을 만들던 중, 한 남자와 부딪혀 엎어진 것이었다. 남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놀란 다울이 파라솔 아래로
얼굴을 내밀고 담이 상태를 살폈다.
“담이야, 왜 그래.”
“죄송합니다, 했어?”
“죄송합니다!”
다울이 평소에 가르친 대로 허리를 숙여 사과한 담이가 저보다 몇 배는 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깔끔한 사과에
인상을 구기던 남자는 서 있는 담이를 툭, 치고 지나갔다. 그 때문에 중심을 잃고 넘어진 담이가 또다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사과도 했는데, 어른스럽지 못하게 애를 치고 지나가다니. 처음은 실수일 수 있다 쳐도, 이번은 명백한 고의였다.
다울은 금세 제 성깔을 드러내며 남자를 붙잡았다.
“그러게 왜 애를 저런 데 풀어놔.”
“풀어놔? 너 방금 반말 지껄였냐?”
당황한 담이와 재이를 돗자리 안에 앉혀 놓은 태이가 밖으로 나왔다. 그냥 지나갈 줄 알았던 남자가 굳이 시비를
걸어 와서 일이 귀찮아질 것 같았다.
다울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쳤다. 자기한테는 반말까지 하면서 덤비더니, 태이가 나타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수그리는 게 짜증이 났다.
“미안,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사과한 남자가 잽싸게 도망가 버렸다. 더 꼬투리 잡히기 전에 냅다 도망친 거였다. 다울은 찝찝한
기분을 떠안고 자리로 돌아왔다. 바다에 온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트러블이 생긴 게 괜히 마음에
걸렸다. 이런 날은 꼭 무슨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남자가 멀리 떨어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던 태이가 돌아오자마자 다울의 상태를 살폈다. 혹여 다치지는
않았는지 확인해 보는 거였다. 다행히 얼굴은 말짱했다.
“어디 다친 곳 없지.”
“걱정하지 마, 내가 잘 보고 있을게.”
파도가 잔잔히 밀려와 모랫바닥을 적셨다. 재이가 무섭지 않도록 조금씩 발을 담그게 해 주던 다울이 장난스레
물을 튀겼다.
첨벙!
다울이 재이와 알콩달콩한 물놀이를 즐기는 동안, 옆에서는 지옥의 물놀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어깨에 매달려
있던 담이를 그대로 바닷물에 던져 넣은 태이가 유쾌하게 웃었다. 의도치 않게 스릴을 즐기게 된 담이는
허우적거리며 일어나 얼굴을 닦아 냈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울은 얌전히 놀아 주라며 경고했다. 당연히 경고는 먹혀들지 않았다. 과격한 놀이에 맛 들인
담이는 더 스릴 있게 해 달라며 태이를 졸랐고, 태이는 그럴 때마다 흔쾌히 담이를 내던져 줬다.
“아빠, 더, 더 재밌게!”
“대신 울지 마.”
“안 울어!”
자신감 있게 울지 않겠다고 말한 담이는 정확히 5 초 뒤에 울음을 터뜨렸다. 태이가 담이의 몸을 360 도 돌렸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고, 물속까지 구경하고 나온 담이는 잠시 어리둥절하게 서 있다가 다울을
찾으며 울어 댔다.
“흐어어어엉, 흐어엉!”
“허어엉, 아빠 악마야!”
“정담이, 너 아빠 배신하냐.”
튜브에 몸을 끼워 넣고, 물 위에 동동 떠다니던 재이는 담이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게 왜
아빠한테 놀아 달라고 해서 우느냐는 눈빛이었다.
“재이야, 네 형이 아빠 배신한다.”
“……멍충이.”
“압빠한테 한 건데.”
아들 둘에게 완전히 배신당한 태이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담이와 재이는 다울을 지나치게 좋아했다.
학교나 유치원에서 뭘 만들면 꼭 다울에게 먼저 선물했고, 저번 어버이날에는 다울에게만 카네이션을 두 개씩
줬다.
“담이가 심부름할게!”
“와아! 심부름!”
앙증맞은 뒷모습에 입을 틀어막은 다울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형제끼리 다정하게 손을 잡고 심부름가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고 귀엽던지,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다울아, 얼른 와. 애들 놓칠라.”
곧바로 뒤를 밟기 시작한 태이가 다울을 향해 손짓했다. 조심조심 걸어가 태이의 옆에 선 다울이 자연스레 손을
붙잡고, 아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태이의 눈에는 이런 다울도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재이야, 뭐 먹구 싶어?”
“옥쑤수.”
“형아는 옥수수 안 좋아하는데. 그러면 재이는 옥수수 먹구, 형아는 핫도그 먹을래.”
사람들 손에 들린 옥수수를 부럽게 쳐다보던 재이가 단번에 답을 내놓았다. 담이는 핫도그 가게 간판을 한참
쳐다보다가, 재이를 위해 옥수수 가게에 먼저 들렀다.
고소한 버터 냄새가 풍기고, 두 아이의 눈앞에 노르스름하게 익은 옥수수들이 펼쳐졌다. 옥수수를 먹지 않겠다고
했지만, 유혹적인 냄새에 넘어간 담이는 당당히 버터 옥수수 두 개를 주문했다.
“우리 담이 진짜 많이 컸다.”
“그러게, 많이 컸네.”
“재이도, 어, 어라.”
뒤에서 몰래 아이들을 지켜보던 다울이 뿌듯하게 웃고 있는데, 웬 무리가 몰려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단체로 놀러
온 대학생들인 모양이었다. 아이들을 놓칠세라 무리를 뚫고 지나온 다울이 푸드트럭 근처를 샅샅이 훑어봤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시끄러운 사람들 틈에서 아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눈을 굴리던 다울이 주저앉고 말았다. 태이 또한 고개를 돌려
가며 아이들을 찾으려고 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아 착잡해진 참이었다.
“정태이, 너는……?”
주저앉은 다울을 단단히 붙잡아 일으킨 태이가 먼저 돌아가 있으라며 등을 토닥였다. 넋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애들을 찾으라고 했다가는, 다울까지 잃어버릴 것 같아서 돌려보낸 것이었다.
그의 침착한 대처에 조금이나마 안심한 다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태이는 다울이 안전히
돌아가는 걸 확인한 뒤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옥수수를 사 들고 나온 아이들은 한 남자와 대립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타나 아이들에게 말을 건 남자는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시러요.”
도와달라는 말에 망설이던 담이와 달리, 재이는 딱 잘라 싫다고 대답했다. 다부진 대답에 잠시 당황하던 남자는
눈을 최대한 불쌍하게 뜨고 담이를 쳐다봤다. 재이 쪽이 만만치 않으니, 담이를 노리는 듯했다.
울망한 눈으로 남자를 응시하던 담이가 이전에 다울이 했던 말을 떠올려냈다. 모르는 사람이 가자고 하면, 우리
아빠 무서운 사람이라고 말하라던 기억이었다.
긴장한 탓에 학습된 말만 기계적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재이는 몰래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담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당당히 행동하고 있었지만, 실은 앞에
선 아저씨가 무서워서 이가 덜덜 떨렸다.
그때였다. 아이들의 뒤에서 다울의 힘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태이가 아이들을 찾아보는 동안 자리로
돌아가던 다울이 운 좋게 담이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뛰어오는 중이었다.
모래사장에 발이 푹푹, 빠져서 달리는 게 힘들었지만, 다울은 있는 힘껏 달려왔다. 큰 목소리에 이목이 쏠리자,
당황한 남자는 그대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차마 남자를 따라잡지 못한 다울이 놀란 아이들을 껴안아 달래기 시작했다. 마침 근처를 둘러보던 태이는 다울의
목소리를 듣고, 도망치는 남자를 잡기 위해 뒤를 쫓았다.
아이들을 유괴하려던 남자는 생각보다 다리가 재빨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금방 따라잡힐 텐데, 그러지 않는 걸로
봐서는 확실히 어딘가 수상하긴 했다.
그나마 발이 덜 빠지는 바닷가 쪽으로 노선을 변경한 태이가 더 빠르게 뛰었다. 눈치를 보며 달리던 남자는
사람이 없는 화장실 뒤편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공터의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싸했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모습을 드러낸 태이가 화장실 뒤를
훑어보다가, 쓰레기가 담긴 드럼통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 그러자 두어 번 흔들리던 드럼통이 큰 소리를 내며
쓰러져 굴러갔다.
“나와.”
“저, 저기 나는 진짜 길만 물으려고…….”
“몇 명이야.”
“…….”
도대체 무슨 이유로 아이들을 유괴하려 했던 걸까. 그것도 굳이 태이와 다울의 아이를 유괴하려 했다. 애초부터
유괴 대상을 정하고 온 것처럼.
* * *
다울은 우는 담이를 데리고 돌아와 달래기 바빴다. 위험한 상황에서 재이를 지키겠다고 애를 쓰더니, 실은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껴안아서 등을 토닥이고, 먹을 것까지 손에 쥐여 준 다울이 목을 쭉 내밀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태이를 기다리는 거였다.
“아빠는?”
“어, 저기 온다.”
감쪽같이 사라졌던 태이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어쩐지 머리카락이나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것 같았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 틈 사이에서 아빠를 발견한 담이가 달려가자, 몸을 가볍게 안아 든
태이가 머리를 격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정태이, 그 새끼는?”
카쿠치 신코가 나이를 먹어 후계자가 정말 필요해졌을 때쯤, 이런 일이 벌어진 게 불안했다. 이제는 애들도 커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기억할 텐데. 큰일이었다.
“아빠, 어디 가?”
“왜, 왜? 더 놀고 싶은데…….”
또 데리고 와 준다는 회유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담이가 차에 올라탔다. 멍하게 안겨 있던 재이는 태이가
시트에 앉혀 놓았고, 다울은 트렁크에 짐을 싣자마자 조수석에 올라타 문을 잠가 버렸다.
태이가 운전대를 잡자마자 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백미러로 뒤쪽 상황을 지켜보던 그가 금세 따라붙은 차량을
확인하고 속도를 더 높이기 시작했다.
다울은 몰래 주먹을 움켜쥐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몇 년 전, 태이와 절연하고 일본으로 떠난 카쿠치 신코가 왜
다시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 걸까. 제대로 떨쳐 낸 줄 알았는데, 야쿠자 가문과 끈질기게 엮여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집으로 향하는 길이 이렇게 공포스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태이는 아이들이 다치지 않을 선에서 속도를 높여
차선을 이리저리 변경했다. 뒤쫓아 오는 차량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상황은 태이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하아…….”
착잡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도로는 꽉 막혔고, 이 상태에서 속도를 내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고, 미칠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행 차량도 도로 상황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막히는 구간을 지나고 나니, 다시 앞이 뻥 뚫렸다. 태이는 곧장 액셀을 밟아 속도를 높였다. 아이들이 타고 있을
때는 평소처럼 차를 과격하게 몰지 않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걱정과 달리 아이들은 겁도 없이
속도감을 즐기고 있었다.
“와아, 롤러코스터!”
붕 뜬 목소리 톤에 차 안 분위기가 이상하게 밝아졌다. 담이가 너무 해맑은 탓일까. 백미러로 뒷좌석을 바라보던
태이가 피실,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우리 더 빨리 달리자!”
다울의 눈빛에 불안이 가득 찼다. 설마, 여기서 더 빨리 달릴 생각은 아니겠지. 의심하던 중, 차가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좋아했지만, 다울은 잔뜩 겁먹어 몸을 웅크렸다.
확실히 속도를 더 높이자 미행하던 차량이 쉽게 따라오지 못했다. 대신 다울의 살벌한 시선이 태이에게
따라붙었다.
아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리를 죽여 욕하던 다울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조금만 참으라며
액셀을 더 세게 밟는 태이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와중에 운전 실력이 군더더기 없이 좋은 게 어이가 없었다.
도로 위를 미친 것처럼 달리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이었다. 두 시간
걸릴 거리를 한 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었다.
“금방 따라 들어갈게.”
징하기도 하지. 기어코 미행 차량이 태이의 차를 따라잡았다. 골목길 끄트머리에 들어선 검은 승용차를 뚫어지게
노려보던 다울이 대문을 쾅, 닫아 버렸다.
“아빠!”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돌계단을 오르던 담이가 바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맑은 미소에 화답하듯 입꼬리를 말아
올린 태이가 어서 들어가라며 손짓해 보였다. 여유로운 모습에 마음을 놓은 다울이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아이들을 챙기는 얼굴은 평온했으나 속은 그렇지 않았다. 다울은 예전에 사용하던 야구 방망이를 어디에 처박아
놨는지 고민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준비해 놓으려던 것이었다.
아스팔트 위로 정장을 입은 다리가 우뚝 섰다. 뒷좌석에 탄 사람은 두 명. 한쪽은 간부일 테고, 한쪽은 카쿠치
신코가 분명하다. 카쿠치 신코는 늘 우측에 앉는 걸 선호했다.
“커윽, 컥……!”
태이가 목을 조른 남자는 카쿠치 신코가 확실했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잽싸게 뛰쳐나온 간부들이 태이의 주변을
둘러쌌다.
아무리 저쪽에서 먼저 미행했다지만, 죽일 기세로 할아버지의 목을 조르는 모습이 지나치게 냉정했다. 당황한
간부들은 태이를 경계하는 것보다 말리기 급급했다.
“아닙니다, 오해이십니다.”
“오해는 무슨 오해.”
증손주를 데리고 가려는 게 아니라, 보고 싶어서 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그가 헛웃음을 쳤다.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신을 학대하며 키웠던 할아버지가 고작 증손주를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게 우습기만 했다.
카쿠치 신코는 제 목을 조르는 팔을 힘겹게 툭툭, 쳤다. 다 늙어 앙상해진 손가락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벌써 여든이 넘었는데 힘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허윽, 콜록!”
팔을 거칠게 풀어낸 태이가 퉁명스레 물었다. 허리를 숙여 괴로운 기침을 내뱉던 카쿠치 신코가 가슴께를
부여잡고 태이를 매섭게 노려봤다. 손주 자식이 진짜 목을 조를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태이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이미 한 번 경고를 했고, 알아듣지 못한다면 무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도덕 없는 짓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간부들이 달려들어 카쿠치 신코를 걱정했다.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몸을 겨우 겨누고, 천천히 숨을 고르던
노인이 태이를 향해 크게 호통쳤다.
간부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카쿠치 신코는 증손주를 진심으로 보고 싶어 했다. 다 늙어서 노망이 난 게
분명했다. 차 안, 간부들의 옷, 세세히 다 따져가며 훑어보았으나, 흉기는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기 싸움이 이어졌다. 물론 한쪽은 기 싸움보다 고집에 더 가까웠다. 숨 막히는 신경전에 불편해지는
건 간부들뿐이었다. 대문을 뚫고 들어가려는 창과 절대 물러나지 않는 방패라니.
5 분 가까이 대립하던 중,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려서는 안 될 소리에 뒤를 돌아본 태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들어오라고 해.”
“다울아.”
창문으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다울이 카쿠치 신코를 흔쾌히 집 안으로 들였다. 별도의 목적으로 온 거였다면
야구 방망이를 무자비하게 휘두를 생각이었지만, 그저 증손주를 보고 싶어 멀리까지 온 사람에게 매몰차게 굴기는
싫었다.
쓸데없는 동정심을 느낀 다울이 대문을 활짝 열었다. 만약, 카쿠치 신코가 허튼짓이라도 하면 그때는 태이가
나서서 해결할 것이다.
뻘쭘한 얼굴로 다울을 바라보던 카쿠치 신코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말은 얄밉게 하면서, 내심 문을 열어 준
다울에게 고마웠는지 헛기침을 연신 내뱉었다.
“아빠, 누구야?”
“너희 증조할아버지.”
이건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다울의 뒤를 쫓아 들어온 태이는 어이없는 광경에 이마를 짚고 말았다. 낯가림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당황한 건 카쿠치 신코도 마찬가지였다.
담이가 카쿠치 신코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할아버지가 생기면 꼭 보여 주고 싶었던 그림이 있다며 방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앙증맞았다.
밝은 아이들 덕분에 어른들 사이는 어색해졌다. 이게 아닌데, 이런 분위기가 아니어야 하는데. 참 이상하다.
다울은 멋쩍은 태도로 볼을 긁적였다. 태이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품에 얌전히 안겨든 재이가 더 높게 안아 달라며 할아버지에게 엉겨 붙었다. 살가운 태도에 들뜬 카쿠치 신코는
무게가 꽤 나가는 재이를 잘도 들었다 올렸다 하며 안아 줬다.
담이는 어느새 제가 그린 그림을 가지고 나와 자랑하고 있었다. 스케치북 위에는 네 가족이 그려져 있었고,
왼편에 따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한 다른 식구들이 그려진 채였다. 나중에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 미리 그린
모양이었다.
그림을 본 카쿠치 신코는 장하기도 하다며 담이를 쓰다듬었다. 칭찬받는 걸 좋아하는 담이는 신이 나서 다른
그림들까지 보여 주고 난리도 아니었다.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할아버지는 엄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훈련에
제대로 임하지 않으면 칼집으로 때리기도 하고, 거친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태이에게는 지옥이었던 시간이었고, 악마 같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이들에게는 환하게 웃어 준다.
아이들도 그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편하게 ‘할아버지.’로 호칭을 정한 담이가 카쿠치 신코 옆에 꼭 붙어 앉았다. 평소에는 태이나 다울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더니 의외였다.
순수한 질문에 카쿠치 신코의 표정이 씁쓸하게 물들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태이를 유독 엄하게 키웠다는
것을. 어디 엄했을 뿐일까, 훈련에서 도망치면 심할 정도로 때리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태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동안, 다울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카쿠치 신코가 뒤늦게
화해를 시도하는 걸까. 후회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태이의 표정이 좋지 않아졌다.
가만히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던 태이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베란다로 향하는 걸 보니, 손대지 않던 담배를
피우려는 모양이었다. 다울은 말없이 손을 놓아 주었다. 지금은 태이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카쿠치 신코는 아이들 사이에 앉아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태이가 시키지 않은 일까지 척척 해낸 이야기,
무슨 일이든 잘해서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샀던 이야기, 특히 검도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는 이야기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담이와 재이는 그저 감탄하기 바빴다. 제일 의외였던 건, 재이가 할아버지를 잘 따른다는 거였다.
그 무심하던 애가 아빠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더니 배시시 웃기까지 했다.
“너, 잠깐 나 좀 보자.”
늘 할배라고 부르던 다울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호칭을 사용했다. 자기 할 말을 야무지게 하는 다울의 모습에
허탈하게 웃던 그가 뜸을 들였다. 퉁명스럽게 굴었지만, 진짜 하고픈 말은 따로 있었다.
원망하는 목소리가 제법 얄미웠다. 다울은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잘못한 건 잘못한 거였고,
카쿠치 신코를 용서할지 말지는 태이가 정하는 거였다.
다울은 그 당시 자신이 겪었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물을 맞았어도 태이와 담이, 그리고 미래의 재이를
지켜냈으니 분하지 않았다.
“내가 그놈한테는 미안하다는 말도 미안해서 못 하겠어. 마지막까지 막무가내로 굴어서 미안하다. 그래도 죽기
전에 한 번쯤은 보고 싶어서…….”
“할배, 아니, 할아버지 마음은 알겠는데, 정태이는 지금 심란해 미칠걸요. 원하는 대로 증손주 얼굴도 봤으니까
이만 돌아가요.”
다울이 단호한 태도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카쿠치 신코가 마음을 고쳐먹고 반성하든 말든 그에게는 태이가
최우선이었다.
다울의 대답에 내심 서운해하던 카쿠치 신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마지막까지 막무가내로 군
게 미안해서 이만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손을 까딱이자, 멀뚱하게 서 있던 간부들이 줄줄이 현관 밖으로 나섰다. 담이와 재이는 할아버지가 간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채고 우다다다, 뛰어나왔다.
“할부지, 가지 마.”
다울의 표정이 곤란함으로 가득 찼다. 담이와 재이는 카쿠치 신코의 다리에 매달려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잠깐이나마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정이 제대로 든 모양이었다.
“할부지, 압빠 얘기 또 해 조야 대.”
“그래, 그래.”
“알았어요.”
“……간다.”
마지막까지 아이들을 눈에 담던 그가 뒤돌아섰다. 왜소한 등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재이를 꼭 껴안고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다울이 고민 끝에 다시 카쿠치 신코를 불러세웠다.
“저기!”
“왜 그러냐.”
“나한테만 몰래 연락처 줘요. 곧 죽는다는 얘기는 왜 한 거야? 누구 동정심을 막 유발하고, 아무튼, 연락처
주면 가끔 증손주 사진 정도는 보내 줄게요.”
담이 성격은 다울을 빼닮았나 보다. 정이 많은 건 다울도 마찬가지였다. 온순해진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다울이
어서 연락처를 찍으라며 핸드폰을 건넸다. 이런 다울의 태도에 놀란 그가 손을 벌벌 떨었다.
“할부지, 가지 마.”
“할아버지, 잘 가…….”
잔잔하게 웃으며 뒤돌아선 그가 현관문을 나섰다. 다울이 먼저 손을 내밀어 준 덕분에 돌아가는 길에 미련이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집이야.”
“잠깐 일이 있었어.”
핸드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밝은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하루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하루에게 무심한 대답을 내놓은 그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끊어.”
마음대로 전화를 끊은 그가 통창을 막 열었을 때였다. 문 앞에서 우물쭈물하던 다울이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태이의 품에 포옥 안겨들었다. 전부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울은 가라앉은 태이의 기분을 띄워 주기 위해
애를 썼다.
“뭐 하는 거야, 다울아.”
“뽀뽀.”
“애들도 있는데.”
“괜찮아. 다 방에 있어.”
평소와 대화가 다르게 흘러갔다. 보통 태이가 들이대고 다울이 밀어내는 식이었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가
되어버렸다. 다울의 머릿속을 꿰뚫어 본 태이는 피실, 웃음을 터뜨리며 작은 몸을 마주 껴안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울은 변하지 않고 옆에 있어 줬다. 몸집은 작지만, 언제나 당차게 옆을 지켜주려는 모습이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 * *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에는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됐다. 아침 일찍 일어난 다울은 평소처럼 아이들을 깨워
유치원에 보내고, 학교에 보냈다. 며칠 동안 할아버지 타령을 하던 재이는 나흘이 지난 후에야 조용해졌다.
오늘의 간식은 떡볶이였다. 냉장고를 뒤적거려 보니 어묵은 나오는데 떡은 나오지 않았다. 떡볶이를 만들지
말라는 계시인가. 멍하니 볼을 긁적이던 다울이 냉장고 문을 닫아 버렸다.
담이와 재이가 어른이 된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아직 작은 아기들인데, 금방 커서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교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담이와 재이는 어떤 형질일까. 나중에 어떤 애인을 사귈까. 크면 태이를 똑
닮았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질 때쯤, 다울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날씨는 여전히 푹푹 쪘다.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나온 다울은 손을 이마에 대고 그늘을 만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아직 유치원 버스가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겨우 찾아낸 나무 밑 그늘에 서서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던 다울은 이상함을 깨달았다. 십 분이나 기다렸는데
버스가 오지 않는 것이다.
“아니야, 설마.”
한 걸음씩 움직여 모퉁이를 돌아본 다울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구석진 곳에 재이가 쪼그려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재이야!”
“어, 아빠.”
찬물을 마시게 한 다울이 에어컨 온도를 낮췄다. 더워서 두 볼이 발그레해진 재이는 인형처럼 누워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 밖에서는 더운 걸 모르더니, 집에 오니까 살 것 같았나 보다.
다울은 재이의 유치원 가방을 확인했다. 작은 알림장을 꺼내려 하는데, 왠지 스케치북이 눈에 밟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유치원에서 장래 희망 그리기를 한다고 했었다.
뒤적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재이가 화들짝 놀라며 뛰어왔다. 그리고는 다울의 손에서 스케치북을 휙, 낚아채
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한 다울이 눈을 끔뻑거리자, 재이가 꼬물거리며 스케치북을 펼쳤다.
“다 완성 못 해서 아까 거기서 그려써.”
밖에서 뭘 그리 열심히 했나 했더니, 다 완성하지 못한 그림을 완성시켰나 보다. 재이가 웬일로 부끄러운 표정을
다 지었다.
다울의 앞에 스케치북이 내밀어졌다. 경찰을 그렸을까, 아니면 소방관? 기대하며 스케치북을 바라본 그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태이 아빠.”
차마 재이한테 뭐라고 할 수 없었던 다울이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이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물론 지금의
태이는 건전하게 살고 있지만, 재이는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전의 아빠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울이 아무리 설득해 보려고 해도 재이의 장래 희망은 확고했다. 제 꿈을 빼앗길세라 스케치북을 꼭 껴안은
팔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꼭 아빠처럼 될 거야.
이글이글 타는 눈빛에 다울은 눈물을 훔쳐내고 말았다. 전직이 야쿠자인 남편 때문에 육아가 더럽게 위험했다.
여름이 떠나고, 가을바람이 솔솔 불었다. 담이가 태어난 후, 25 번째로 맞이하는 가을이었다. 다울의 허리
아래로 내려오던 아이들이 지금은 태이와 키가 엇비슷해졌다. 담이 나이는 어느새 스물다섯이었고, 재이는 올해
막 스무 살이 되었다.
다울은 건장한 남자 셋을 줄줄이 달고 외출에 나섰다. 오늘은 재이의 형질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다울의 성격을 닮아 잠시나마 기대했던 담이도 우성 알파, 재이는 아직 결과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거의 우성
알파가 확실하고, 태이도 우성 알파다.
다울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끈 재이가 습관적으로 걱정을 했다. 태이는 그런 재이의 손을 쳐내기 바빴다. 둘이
하는 행동도, 성격도 똑같아서는 시도 때도 없이 티격태격했다.
태이의 옆에 꼭 붙어 걷게 된 다울이 체념한 듯 한숨을 뱉었다. 두 사람이 싸우는 사이, 능글맞게 다가온 담이가
자연스레 팔짱을 꼈다. 저쪽은 너무 싸워 대서 문제였고, 이쪽은 너무 붙어서 문제였다.
“담이야, 너 또…….”
“아빠, 우리 둘만 쏙 빠질까?”
“안 돼. 재이 결과 나오는 거 봐야지.”
“안 봐도 우성 알파일 텐데 뭐, 으억!”
아들 둘을 따돌리고 온 태이가 다울의 어깨를 자연스레 감쌌다. 전보다 나이를 더 먹었어도 하는 행동은 예전과
똑같았다.
담이랑 재이가 어릴 때는 안 그러더니, 크고 나서는 태이와 싸우는 일이 잦았다. 그렇다고 해서 심하게 싸우는
건 아니었고, 사소한 걸로 신경전을 벌인다던가, 투닥거렸다.
드디어 병원에 들어선 다울이 태이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경고를 줬다. 병원에서는 애들과 싸우지
말라는 무언가의 신호였다.
다울이 로비에 자리를 잡고 앉자, 세 명이 나란히 따라 앉았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시선이 집중되어 버렸다.
다울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렸다.
나이를 먹어도 먹은 티가 안 날 정도로 잘생긴 정태이, 선한 눈매에 시원스레 올라간 입꼬리가 매력적인 강아지상
온미남 정담이, 날카롭고 차가운 이미지에 까칠하면서도 무심한 눈동자가 매력인 냉미남 정재이.
“정재이 님, 들어오세요.”
타이밍 좋게 나타난 간호사가 이름을 불렀다. 가족이 다 같이 일어나서 진료실로 들어가자, 등 뒤가 따가웠다.
“내 작은 기대가…….”
내심 0.1%의 기적을 바라던 다울이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진짜 우성 알파라니. 결과지 첫 페이지에는 ‘
우성 알파.’라는 글자가 빨간색으로 쓰여 있었다. 담이 때도 한 번 보았던 결과지였다.
태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애들이 청소년기에 접어들 때부터 우성 알파가 되리라는 걸
예상했었다.
온순해 보여도 담이는 제 고집이 셌고, 웃으면서 제 뜻을 몰아붙이기를 제일 잘했다. 재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무슨 일이든 자기 생각에 맞게 돌아가야 하고, 관심사가 아닌 것은 철저히 무시했다. 둘 다 확실히 무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의사에게서 부가적인 설명을 듣고 나온 다울은 제 옆에 선 남자들을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1 번 정태이,
2 번 정담이, 3 번 정재이. 이렇게 보니까 셋이 닮긴 닮았구나.
“안 돼.”
“싫어!”
“싫어.”
다울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오, 저것들을 그냥. 꽉 움켜쥔 주먹이 곧 튀어 나갈 것처럼 바들거렸다.
퍽, 퍽, 퍽!
“형은 좀 꺼져.”
완전히 포기한 다울이 두 귀를 틀어막고 걸음을 빨리했다.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못 들은
척하며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 * *
오랜만에 부엌이 분주했다. 몇 년 사이 요리 실력을 키운 다울은 간단한 것부터 까다로운 음식까지 어렵사리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평소에는 태이가 요리하는 일이 더 많았지만.
아무튼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바로 담이와 재이가 집에 애인을 데려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항상 말로만 들었지,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라 다울은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에 소름이 돋은 다울이 태이를 매정하게 밀쳐 냈다. 곧 애들이 도착할 텐데 이러고
있는 걸 들키기라도 한다면…….
“아빠도 참 징하다니까.”
“담이야!”
젠장, 이미 들켜 버렸다. 다울은 확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시키며 웃었다. 담이의 옆에 낯선 얼굴이 서 있어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소파에 앉아 다울을 가만히 바라보던 서원이 슬며시 웃었다. 제 알파가 누굴 닮아 그리 해맑나 싶었는데, 하는
행동이 다을과 똑같아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기야, 왜 웃어?”
“몰라도 돼.”
“왜, 나도 알려 줘. 응? 응?”
담이와 서원,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경찰서에서 이루어졌다. 술 먹고 집 비밀번호를 까먹어서 경찰서에 간 담이가
서원에게 첫눈에 반했고, 서원은 몇 번 밀어내다가 자신을 자꾸 찾아오는 담이가 귀여워서 받아 주고. 다울은
처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기겁하는 줄 알았다.
무뚝뚝해 보이는 서원은 꽤 다정한 구석이 있었다. 이래서 담이가 죽고 못 사는 건가. 해맑게 웃어 주던 다울이
이번에는 쿠키를 가져오겠다며 뒤돌아섰다.
“흐악!”
“조심해야지.”
꼭 이럴 때만 모양 빠지는 일이 생긴다니까.
와중에 담이는 ‘우리 아빠 귀엽지.’ 같은 소리나 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밝은 모습에 서원이 담이의 허벅지를
티 나지 않게 꼬집었다.
덜컥!
거실이 대화 소리로 시끄러워졌을 때쯤, 현관문이 열렸다. 다울은 곧장 달려 나가 재이와 그의 애인을 반겼다.
먼저 인사를 건네던 서원과 다르게 재이의 애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이런 자리가 부담스러운 걸까. 잠깐 사이에 다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재이가 제 뒤에 숨은 몸을 끌어내
강제로 인사를 시켰다. 여전히 제멋대로인 행동이었다.
“인사해.”
“아, 안녕하세요…….”
“이름도 알려 줘야지.”
“유, 윤지안이에요…….”
어느새 다울의 옆에 선 태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강압적인 태도 하며, 묘한 말투를 사용하는 재이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온 것이었다. 지안은 작은 소리에도 쉽게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편하게 마, 말씀하세요.”
“듣긴 들었어요…….”
다울이 살갑게 굴며 지안을 챙겼다. 딱 보니 재이는 지금 지안의 심정을 모르는 것 같았고, 태이는 그냥
무관심해 보여서 자기라도 알뜰히 챙겨 줬다. 하여튼 이 집은 알파들이 문제다.
연인이라면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정상인데, 지안은 재이에게 저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게다가 재이가 무슨
말만 하면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고, 싫다는 표현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당장이라도 재이를 혼내고 싶었던 다울은 있는 힘을 다해 성깔을 눌러 참았다. 혼내더라도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 해야 했다.
“아……!”
“하아, 줍지 마.”
“무, 묻었어?”
젓가락질을 잘못해 음식을 떨어뜨린 지안이 눈치를 봤다. 떨어뜨린 건 치우면 되는 거고,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데 눈치를 보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벌써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현관문 앞에 선 다울은 서원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줬다.
담이와 서원이를 보낸 후에는, 지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아니에요…….”
“네, 감사합니다…….”
다울의 옆에 선 태이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자, 눈을 마주친 지안이 잽싸게 뒤돌아가 버렸다. 재이랑 비슷하게
생겨 먹은 태이가 무서웠나 보다.
“알겠어.”
험한 눈빛을 쏘아대던 다울이 마지막까지 지안을 다정히 배웅하고 들어왔다. 그저 밥 먹고 얘기만 나누었을
뿐인데 시간이 왜 이리 빨리 지나갔는지. 기가 다 빨렸다.
다울이 소파에 늘어지자, 옆에 앉은 태이가 몸을 기대게 해 줬다. 5 분 정도를 가만히 누워 있었을까. 생각에
잠겨 있던 다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재이의 행동이 좋지 못하다는 건 태이가 가장 잘 알았다. 본인이 그렇게 살아 봤고, 후회한 적도 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이야 모르겠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게 되어 있다.
덜컥.
타이밍 좋게 재이가 돌아왔다. 다울은 곧바로 달려가 재이를 끌어다 앉혔다. 표정을 보아하니 왜 오라고 한 건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울은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고민했다. 연애에 직접적으로 상관하면 안 될 것 같고, 하지만 재이 행동은
상당히 잘못됐고, 답이 없었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태이가 먼저 끼어들었다. 슬며시 재이의 표정을 확인한 다울이 망했다는
듯 머리를 쥐어 잡았다.
“아빠가 나한테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해. 아빠는 예전에 감금까지 한 적도 있으면서 무슨.”
진짜 망했다. 싸움이 커지게 생겼다. 작은 불씨에 기름을 콸콸 들이부은 건 정태이고, 재이는 소화기를 들긴커녕
스스로 부채질 중이었다.
태이의 묘한 시선이 다울에게 닿았다. 갇혔던 얘기를 왜 애들한테 했냐는 눈빛이었다. 다울은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해 버렸다.
이번에는 재이가 팔을 잡아당겼다. 힘없이 비실거리는 몸이 손쉽게 딸려가 재이의 품 안에 안착하자, 제대로
열받은 태이가 다울을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다 안았다.
가운데에 껴서 고통받던 다울이 양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아빠나 아들이나 똑같았다. 싸울 거면 조용히
싸우던가, 새우 등 터트리려고 작정한 것처럼 굴어 대니 화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망할 새끼들아! 둘 다 똑같아!”
두 사람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린 다울이 소리를 질렀다. 태이나, 재이나, 서로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 한쪽은
예전에 한 쓰레기 했고, 다른 한쪽은 이제 막 떠오르는 쓰레기였다.
태이는 억울했다. 아들 하는 행동이 영 아니라 훈수를 둔 것뿐인데, 갑자기 말 걸지 말란다. 재이도 억울했다.
나름 애인에게 잘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잘해 주란다. 두 사람 다 답이 없었다.
담이는 토라진 다울을 잘 달랠 줄 알았다. 지금도 다울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정원 끄트머리에 마련된 미니 텃밭에는 뜬금없이 토마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텃밭도, 토마토도 모두
하루가 심고 가꾸던 것이었다.
하루의 집은 여기서 조금 더 떨어진 오피스텔이었는데, 태이 집 정원이 그립다며 들를 때마다 꼭 뭐 하나를 심고
갔다. 결국, 돌보는 건 다울이라 귀찮은 일만 늘었지만. 가끔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러 나오면 텃밭부터 찾았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태이는 계속해서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고, 인상을 찌푸린 재이는 맞받아치고 있는
듯했다. 둘이 참 징하게도 싸워 대는 게 어이가 없었다.
“저 정도면 동족 혐오 아니야?”
“너 너무 재미있어한다, 담이야.”
“거짓말.”
슬프다는 말에 진심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다울이 뾰로통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자, 담이가 희고 말랑한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부모한테 이런 행동하는 건 버릇없을지도 모르지만,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볼을
만지작거리고 싶었다.
볼이 늘어나 발음이 뭉개진 다울이 담이의 손을 억지로 떼어 놓았다. 안에 있어도 치이고, 밖에 나와도 치이고,
아들이나 남편이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아 힘들었다.
한편, 안에서는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울이 나간 뒤로 화해할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더 박
터지게 싸워 대던 둘이 아직도 말싸움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태이는 재이가 진심으로 결혼하지 못할 거라고 얘기했다. 악담 수준에 가까웠다. 재이도 그에 밀리지 않기 위해
정략결혼을 들이밀며 태이를 건드렸다. 이 망할 싸움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통창으로 거실 상황을 살피던 다울이 조용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이를 먹어서 성격이 많이 죽었는데, 다시 몇
년 전처럼 지랄할 수 있을 만큼 분노 게이지가 쌓였다.
쾅쾅쾅!
“다우리, 문 열어 주세요!”
“빨리 와, 담이야!”
어색하게 웃어 보이던 담이가 하루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원에 덩그러니 남은 다울은 손에
든 삽을 텃밭에 내리꽂듯 던지고 한숨을 내쉬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느릿하게 걸어 올라간 다울이 현관문을 열었다. 먼저 들어온 하루는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도 눈치 없이 웃으며 제가 왔다는 걸 알리고 있었다. 눈치가 없어도 보통 없는 게 아니었다.
“조용히 해.”
“안 돼, 오늘 진짜 중요하게 할 말 있단 말이야.”
뒤따라 들어온 다울이 서로 눈길도 주지 않는 태이와 재이를 몰래 노려봤다. 당장 화해하지 않으면 뒤통수를 한
대씩 더 후리겠다는 눈빛이었다.
재이는 표정을 푸는 척이라도 했지만, 태이는 무표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하루의 말에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다울 또한 하루의 말이 궁금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신경전을 깨 버리기 위해 일부러 질문을 던졌다.
“중요하게 할 말이 뭔데?”
“나, 결혼해요.”
“뭐, 뭐라고?”
“갑자기 무슨 결혼.”
이번에는 태이도 좀 놀랐나 보다. 이 나이가 되도록 연애만 즐기던 하루가 갑자기 결혼이라니 당황스러웠다. 아주
늦지 않은 때에 가서 다행이긴 했지만, 어쨌든 결혼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결혼을 주제로 싸우고 있던 재이가 황당한 얼굴로 하루를 쳐다봤다. 자신이 결혼을 못 해도, 하루보다는 빠르게
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허무한 감정이 들었다.
태이도 하루의 결혼 소식이 유독 반가웠나 보다. 어렸을 때부터 태이의 보좌라는 이유로 옆에 붙어 다니며 수발을
들기 바빴던 하루가 이제야 제 진짜 인생을 찾은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건넨 재이가 어설프게 웃었다. 다울은 불안한 시선으로 재이를 몰래
훔쳐봤다. 웃긴 웃고 있는데, 어딘가 꽁한 게 신경이 쓰였다.
* * *
하루의 결혼식은 지나칠 정도로 호화스럽게 치러졌다. 몇십 년간 카쿠치 가문에 충성을 다했다는 의미로 차기
수장이 신경을 써 준 것이었다.
태이는 일찍이 연을 끊었으나, 하루는 기존에 맡았던 일을 한국에서 쭉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기존에
태이가 맡아서 하던 조직 일을 그대로 이어받은 거였다.
하루의 결혼식을 보러 일본까지 간 가족들은 며칠 더 묵으며 관광을 즐기고 온 참이었다. 담이는 힘들어서
오자마자 소파에 뻗어 버렸고, 다울은 즐거웠다는 듯 여행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다리를 꼬고 앉아 착잡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재이가 인상을 구겼다. 그러고 보니, 하루 결혼식이 끝난
후부터 재이의 행동이 어딘가 수상쩍었다.
“재이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어?”
예상치 못했던 답이 돌아왔다. 그저 걱정돼서 가볍게 물었던 것뿐인데, 신경질을 내는 모습에 당황한 다울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동시에 옆에 앉아 있던 담이와 태이의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방금까지 평온하던 두 사람의 표정마저 굳어
버리자, 거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
부엌에서 나온 태이가 다시 지껄여 보라는 말을 싸늘하게 내뱉었다. 이렇게 화난 모습은 또 오랜만에 보는 거였다.
다울이 나서서 상황을 무마시켜 보려고 했으나, 담이까지 뒤따라 말하는 걸 듣고 포기해 버렸다.
망할, 알파 새끼들.
“윽, 미친.”
제 페로몬을 풀어낸 태이가 재이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알파들끼리 기 싸움을 할 때마다 푸는 페로몬이었다.
갑작스러운 페로몬 향에 입을 틀어막은 다울이 눈을 앙칼지게 떴다.
“그만 안 해?”
다울의 무시무시한 협박에 하는 수 없이 페로몬을 거둬 낸 담이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태이는 여전히 재이와
대립 중이었다. 아주 둘 다 고집은 더럽게 세서, 누구 하나 먼저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단번에 페로몬을 거둔 태이가 다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보통 이렇게까지 하면 분위기가 조금 풀어져야 하는데,
오늘따라 재이가 이상하긴 했다.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핸드폰을 수시로 쳐다보고, 불안한 듯 다리까지 떨고.
“네 애인 도망갔냐.”
“……!”
“내 아들이지만 한심하네.”
“…….”
그래, 왜 도망간 건지 그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찾아내서 마무리는 지어야 했다. 다울은 재이의 등을 힘껏
떠밀고, 찾는 걸 도와주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태이가 뭐 하러 너까지 가냐며 알아서 하게 두라고 했지만, 불안정한 상태의 재이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혼자 찾으려면 더 힘들 테고. 또, 재이가 먼저 찾아내면 도망간 애인한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니…….
“다울아, 어딜 너 혼자 가. 기다려.”
지안이 자주 가는 카페, 도서실, 산책로까지 다 뒤져도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 활동적인 걸
좋아하지 않아서 잘 나가지도 않던 애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니 눈이 안 뒤집힐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도심을 전부 헤집듯 뒤지고 다닌 것만 여섯 시간이 넘어갔다. 자그마치 여섯 시간. 정신 상태가 엉망이
된 재이는 버스 터미널에 앉아 드나드는 사람들을 죽은 눈으로 쳐다봤다. 허망하게 늘어진 팔과 다리는 이미
체념한 뒤였다.
한편, 다울은 공항까지 다녀왔다. 몇 시간 전 지나쳤던 공항을 다시 쥐 잡듯 뒤져 보았지만 지안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울이 고생하는 걸 보고 열받은 태이는 이제 할 만큼 했다며 토닥이고는 집까지 액셀을
밟았다.
“재이는 찾았을까…….”
“글쎄, 모르지.”
“무신경해, 정태이.”
어떻게 보면 태이의 말이 맞긴 했다. 계속 이어질 사이라면 언젠간 꼭 찾을 것이다. 한쪽이 도망간 거고, 마음이
남아 있다면 다시 찾아올 테니까. 대신, 그런 마음조차 없다면 재이는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찾았구나……!
다울은 크게 안심했다. 이쪽은 성과가 없었는데, 다행히 재이가 제 애인을 잘 찾아온 거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어쩌다가 집 앞에서 만나게 된 걸까. 어딜 뒤져도 보이지 않던 지안이 이렇게 코앞에 있었다니, 차라리 다행인
건가.
벽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다울이 입을 틀어막았다. 들어보니 일부러 도망간 게 아닌 듯한데, 재이가
지안을 밀어붙이며 말도 못 하게 했다.
이게 끝이었다면 다울이 충격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재이는 지안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기까지 했다.
연인이라면서 저런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다울은 순간 제 옛 기억을 떠올렸다. 막 빙의했을 때, 자신을 사랑하지 않던 태이가 막 대하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결국, 다울의 화가 화산처럼 폭발했다. 일부러 발을 크게 구르며 걸어간 다울이 손목을 쥐고 있는 재이의 팔을
우악스럽게 떼어 냈다.
재이가 일본에 다녀오는 동안 혼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려 했던 건데, 타이밍 나쁘게 핸드폰이 고장 나고, 버스
예매표까지 잘못 예매하는 바람에 일정까지 꼬여서 일이 커진 것이었다. 연락만 잘 됐더라면, 버스만 제대로
탔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지안의 속상한 마음이 울음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다울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어깨를 토닥여 줬다.
“뭔가 사정이 있었구나. 헤어질 마음으로 그러지 않은 건 다행이네요. 그래도, 이럴 땐 그냥 뺨부터 때려요.
절대 봐주지 말아야 해요. 제정신인 상태에서 얘기해야지, 저건 뭐.”
다울의 사나운 시선이 재이에게 향했다. 제 아들이지만 그런 폭력적인 행동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진짜
아들까지 갱생시켜야 할 판이었다.
천성이 착한 지안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으면 똑같이 대응해 주라고 했지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들어가자, 정태이.”
이제 막 걸어오던 태이가 자연스레 말을 걸며 상황을 종료시켰다. 다울은 태이를 끌고 계단을 올랐다. 나머지는
저 둘이 대화로 풀어야 했기에, 다울이 더 끼어들 문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던 태이가 재이를 대놓고 비웃었다. 아들놈 성격이 어려서부터 자신을 닮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는 행동까지 똑같은 게 어이가 없어서 나온 웃음이었다.
‘그래 봤자 얻는 거 하나 없다. 잘해 줘.’
재이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인 그가 다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태이의 한마디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진
재이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야구 방망이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던 다울이 창문을 바라보고 행동을 멈췄다. 거실 쪽 테라스에서는 대문 밖까지
훤히 보여서 재이와 지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핏 고개를 돌리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다울은
조용히 들고 있던 야구 방망이를 내려놓았다.
“…….”
“저거 봐, 알아들었네.”
대문 밖에는 서로를 꼭 껴안고 있는 재이와 지안이 보였다. 울어서 코가 빨개진 지안이 재이를 다독이며 웃는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예뻤다.
흐릿한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꼈다. 천둥 번개는 끊임없이 내리쳤고, 굵어진 빗줄기가 낡은 창문을 거세게 때렸다.
퀴퀴한 벽지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곰팡이가 슬어서 악취가 풍겼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다울은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쾅쾅쾅! 쾅쾅쾅!
앙상한 손가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정신은 왜 이리 몽롱한 건지, 아무리 움직이려 해 봐도 졸음이 쏟아져서 축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걸쭉하고 거친 목소리가 현관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어딘가 익숙한 게,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상종하기
싫어서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는데, 기어코 문이 열렸다.
쾅!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게다가 이 집은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낯선 곳이었다. 빠져나가고픈 마음에 발버둥 치던 다울이 현관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사채업자로 추정되는 남자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천둥 번개는 계속 내리쳤다.
현관문을 연 다울이 몸을 굴려 밖으로 빠져나왔다. 빗소리는 여전히 들렸지만, 눈앞은 캄캄했다. 어디로 가야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선 다울이 어둠 속을 헤치고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아무리 걸어도 집에
도착할 수 없었다. 이대로 영영 어둠에 갇혀 버리면 어떡하지. 정태이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둠 속에 영영 갇힐 바에야 죽는 게 나았다.
눈을 번쩍 뜬 다울이 주변을 둘러봤다. 어둠은 어디로 가고, 익숙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악몽을 꾼 건가.
헐떡이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그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어 보던 다울이 고개를 돌렸다. 함께 잠들었던 태이가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꿈에서 그렇게 정태이를 찾아다녔는데, 깨어나서도 눈앞에 없으니 괜히 불안했다. 다울은 침대에서 내려와 곧장
방문을 열고 나왔다.
다행히 거실에서 생활 소음이 들려왔다. 작은 TV 소리, 핸드폰을 터치하는 소리. 실내화를 끌며 거실로 온
다울이 세 사람을 발견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다울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가 태이의 품에 꼭 안겨들었다. 너른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이제야 꿈에서
완전히 깼다는 게 느껴졌다.
“악몽 꿨어?”
“으응.”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꿈.
사실 다울은 꿈에서 봤던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곳을 ‘다른 세계’라고 칭했다.
“거기에, 네가 없었어.”
“…….”
목소리에 불안함이 섞여 나왔다. 늘 밝기만 하던 다울이 약한 모습을 보여주니 재이도, 담이도 놀란 모양이었다.
둘이 또 깨를 볶는구나, 하며 철저히 외면하던 담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다울을 쳐다봤다. 재이도 마찬가지였다.
태이는 다울을 더 꼭 껴안아 주고는 이마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다울이 불안해할 때마다 해 주는 스킨십이었다.
“……으응.”
다정한 손길에 민망해진 다울이 두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아들들 앞에서 어리광을 부렸다는 사실이 급격히
부끄러워졌다.
“응, 잊어버려.”
그래, 악몽 같은 건 잊어버리자.
이곳으로 오게 되어서, 태이와 소중한 가족을 꾸릴 수 있게 되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다울은 지금의 행복한 삶이
너무나도 좋았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