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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864년 1월 7일 전라도 보성군에 있던 외가 성주 이씨 집안에서 서광효어머니 이조이 사이의


4남 1녀중 차남
- 출생 이후 아버지 서광효의 6촌 형제인 서광하의 양자로 감, 양부 서광하의 처가는 문충공 김
상용의 후손
- 이 때문에 서광하는 세도가문에 발을 걸칠 수 있었다. 이 때 서재필은 양어머니의 오빠인 예조
참판 김성근 집에 갔다가 김옥균을 만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 이후 김옥균과 박영효를 통해 개화사상을 접하고, 조선이라는 국가에 근대화가 필요함을 인식
하게 된다.
- 19살 문과 급제, 승문원 부정자. 훈련원 부봉사 등을 지냄

#2
- 그러나 국방을 충실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김옥균의 권유를 받고 일본에 건너가서 군
사학을 배울 것을 결심
- 일본 도야마육군학교 입학
- 특히 서재필이 과거에 합격하던 해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청나라 군대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
습에 군사개혁 필요성 절감

#3
- 조선 귀국 후 사관학교 건립 건의, 고종의 동의를 받아 조련국을 세움
- 신식 사관학교를 창설할 목적으로 설립된 병조 예하 조련국의 사관장으로서 생도 양성

#4
- 결국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들은 1884년 10월 17일 갑신정변
- 당시 20세였던 서재필은 생도들을 인솔하여 무사로서 활약
- 비록 사흘에 불과했지만 신정부의 병조참판 겸 정령관에 임명

#5
- 그러나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그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한다.
- 아내 광산 김씨 자살
- 하나 있던 2살 난 아들은 돌봐주는 이가 없어 굶어 죽는다
- 양가와 친가 가릴 것 없이, 양아버지 서광하는 갑신정변 직후 서재필을 파양했으나 결국 연좌
제를 당하여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했으며 생부 서광효는 자결
- 생가 형제들 중 맏형 서재춘은 감옥에 갇혀 독약을 먹고 자살
- 이복 형 서재형은 관군에 붙잡혀 참형
- 생모 성주 이씨는 노비로 끌려갔다가 자살했고 서모와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 일본으로 망명

#6
- 일본에서의 냉대
-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1885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감
- 미국에서 서재필은 일행들과 헤어져 독자적인 생활
- . 서재필은 품팔이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영어를 배웠다.
- 서재필은 교회에서 사귄 친구의 집에서 해리 힐맨 고등학교의 이사였던 홀랜백을 만남
- 서재필은 홀랜백의 도움으로 1886년 이 학교에 입학
- 이때 이름을 필립 제이슨으로 개명하고 망명
-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발음했을 때 필재서를 영어식으로 바꾼 것
#7
- 코크란 단과대학에서 물리학과
- 홀랜백은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로 파송갈 것을 서면으로 약속할 것을 요구
-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음
- 라파예트 대학 입학
- 2년 만에 중도 포기 후 워싱턴 이주
- 조지 워싱턴 대학 입학, 의대 졸업

#8
- 뮤리얼 암스트롱은 미국에서 명망 있는 정치가문의 여식이었는데,
- 제임스 뷰캐넌 전 미국 대통령과 사촌 형제이자 남북 전쟁 당시 철도 우편국을 창설했던 미국
의 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의 딸
- 미국 대통령 가문의 결혼식 =>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미국 주류 언론의 조명을 받음
- 두 딸을 낳고 결혼하여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꾸림

#9
-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졌던 갑오개혁 과정에서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
- 박영효, 서광범 등이 귀국하여 복권
- 박영효는 서재필을 외부 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
- 그러나 당시 병원을 개업한 직후일 뿐만 아니라 결혼을 앞두고 있었음
-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고 그 후 실각한 박영효가 미국을 방문하여 재차 귀국을 권유
- 원래 사면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신변의 위협과 고종과 민씨 척족, 조선 조정 대한 환멸에 귀국
요청을 거절
- 조선 조정이 그를 데리고 오기 위해 주미조선공사관의 방을 빌려주고 식비를 제공하며 그를
설득
- 다시 한번 조선을 개혁해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렇게 귀국을 결심하게 됨

#10
- 갑신정변의 실패, 미국의 민주주의를 겪은 서재필
- 민중의 자각, 계몽이 중요하다고 생각
- 마침 조선 정부는 『독립신문』 창간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 창간 작업을 서재필에게 맡김
- 4면으로 발행
- 1, 2면은 논설,관보 등, 3면은 광고, 4면은 영문으로 논설을 비록한 정치 활동 소개
- 주요 기사는 한글로 발행
-
#11
- 사장 겸 주필, 국문판 논설과 영문판 편집
- 주시경 국문판편집, 교정
- 논설 사회 전반에 근대 사상과 제도를 소개하여 국민을 계몽하려던 목적
- 민권 사상, 근대적 법치주의, 독립의식

#13
- 독립문을 짓기 위해 결성된 독립협회 (뒤에서 더 자세히 설명)

#14
- 서대문 형무소 근처에 있어서 일제의 독립을 상징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일제로부터
독립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청나라임
- 프랑스 에투알개선문을 모티브로 서재필이 디자인
#15
- PPT

#16
- 만민공동회 주최

#17

#18
- 제1차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주도로 반러투쟁에 집중
- 만민공동회에서 보여준 민중들의 힘은 독립협회의 투쟁방향을 전환
- 국내 문제에 관심을 돌려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 수호, 연좌법부활 저지, 언론과 집회 보장, 탐
관 및 수구파 관료의 규탄 내지 축출 등 민권 보장 및 참정권 획득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가
기 시작
- 거의 날마다 열린 만민공동회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개최, 독립협회 회원들이 불참한 상태에
서도 집회가 이루어짐
- 점차 독립협회의 영향력을 배제하며 독자적인 시민단체로 변화

#19
- 관민공동회
- <헌의6조>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한 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하게 할 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표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을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 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20
- 정치화
-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게 될까봐 근대적 개혁을 거부하던 수구파, 고종의 탄압
- 미국으로 추방되는 서재필
#21
- 1919년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
- 소식이 알려지자 서재필은 자신이 살고 있는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한 외
교 활동과 여론 선전 활동

#22
-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1차 한인연합대회 개최
-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태극기를 달고 대한독립을 외치며 행진
- 다음 페이지에 영상
- 대회 결과 한국통신부가 만들어짐
- 일본의 만행을 소개하고 독립의지를 표현하는 잡지, 책자를 발행하여 미국 내 지방순회 강연
때 홍보책자로 활용
- 통신부에 한인연합대회에 연사로 초빙되었던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한국친우동맹 개설

#23
- 1921년 한인연합대회 개최
- 기미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낭독, 미국 주류 언론 주목
- 미 상원, 하원에서 한국 문제 토의, 결의안 제안
- 일본의 침략행위를 강력하게 비난하고, 미국 연방정부에 대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촉구
하는 내용
- 미국생활에서 경험한 미국적인 방식의 운동을 통해 미국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노력

#24
- 1925년 호놀룰루 범태평양 회의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
- 일제 한반도 침략 규탄
- 사진 속 이승만 & 서재필

#25
-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정 초청으로 고문 자격으로 입국
- 일제가 패망하기 전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한 카이로·포츠담 회의에서 강대국들은 한
국의 독립 결의
독립한 이후에는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서재필을 초빙하여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문
을 구하기도 함
-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남북이 분열되는 아픔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함
- 혼란스러운 한국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었는지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
로 돌아갔다
-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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