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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담당 국가: 당
2. 발해가 어떤 나라인지 소개하기
ㄱ. 건국자를 중심으로 건국과정을 자세히 설명할 것

-668 년 나당 연합군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지배층 다수가 당으로 끌려갔다. 그


가운데 일부는 요서 지방 영주에 머물고 있었는데, 7 세기 말 거란의 반란으로 영주
지역의 당의 통제력이 약화하자, 옛 고구려 장수 대조영 등이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탈출, 당군을 천문령에서 격파한뒤 698 년 동모산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만주지역에 펴져 살던 고구려인과 말갈인의 적극적 호응으로 빠르게 나라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건국 이후 바로 돌궐과 국교를 맺어 당을 견제하였고, 신라, 왜와도
교류하면서 나라를 발전시켜 나갔다.

ㄴ. 발해의 정체성(고구려 계승의식)에 대해 3 가지 근거를 들어 설명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그들을 고구려라고 칭하였으며, 일본도 발해왕을


고구려왕이라고 칭하는 등 그것을 인정 하였다.(외교문서)

-발해의 무덤은 고구려계의 돌무덤과 비슷하다. 정혜공주의 묘는 돌로 방을 만들어


그 위를 흙으로 덮고, 돌로 된 벽돌을 한 층 한 층 쌓아 위로 올라갈수록 모아는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무덤 양식과 매우 비슷하다. (무덤 양식)

-우리나라의 전통적 난방법 온돌은 고구려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있는데, 발해


유적지에서 많이 발견된다.(주택 난방 방법)

ㄷ. 발해의 역사를 역대 왕 시기별로 나누어 설명

-무왕: 무왕은 대조영의 아들로 북만주 일대까지 세력을 확대해 나갔고 독자 연호를
사용하는 등 황제의 나라임을 표방하였다. 당의 신라와 흑수말갈을 이용한 압박에도
돌궐, 일본과 친선 관계를 맺으며 당과 신라를 견제해 나갔다.

-문왕: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또 상경


용천부로 천도했으며, 중앙 정치 제도를 정비 하는 등 국가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선왕: 요동 지방에서 만주와 연해주에 이르는 최대 영토를 확보하렸다. 당에서는


발해를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를 뜻하는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3. 발해와 해당 국가의 교류의 역사 설명하기

-발해는 국내의 불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대외무역의 발전에 힘을


쏟았다. 당과 약 130~160 정도 교류하였으며, 당에서 발해로 30 회의 사신을
파견하였고 발해에서 당나라로 100 회 정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교류는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적극성을 띠어 매우 융성하였다
≪신당서≫발해전에는 발해의 대외교통로가 언급되어 있다.
-발해와 당과의 교역은 713 년 대조영이 아들을 당에 보내어 교역할 수 있도록
요구하여 당 현종의 허락을 얻으면서 시작되었다. 발해가 중국으로 수출한 상품은
담비·호랑이·표범·곰·말곰·토끼·쥐 등의 가죽, 인삼·우황·사향·꿀 등의 약재, 고래·마른
문어·매·말·양·구리 등이었다.
-당에서 발해에 들여온 물품에는 비단·솜과 금·은으로 만든 그릇 등이었다.

4. 상대국과 어떻게 지낼지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언급하기

-고왕께서 당나라의 지배를 벗어나 도망쳐 건국한 나라가 발해이기에, 우리 발해와


당은 건국 초기 대립했습니다. 하지만, 2 가지 이유로 당과 발해는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 미래에 좋습니다.

첫번째, 발해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당은 주변의 거란, 돌궐 등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힘을 분산하면 안됩니다. 당과 발해는 든든한 협력국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귀중한 자원의 교류와 문화적인 교류를 통해 양국을 더 발전 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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