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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일라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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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지난 몇 달을 돌이켜보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도, 나는 내가


어떤 죽음을 맞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미리
생각을 했더라도 이런 죽음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길쭉한 방 건너편에 있는 사냥꾼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고, 그 역시 태연하게 나를 응시했다.

이왕이면 다른 사람 대신, 더욱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 대신 죽는다면 분명


멋진 죽음일 거야. 고결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 확실히 예사로운 일은
아니니까.

포크스에 가지 않았다면 이런 식으로 죽게 될 리도 없었으리란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몹시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나는 그 결정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삶이 기대보다 훨씬 멋진 꿈을 이루게 해 주었다면, 그런
삶의 끝에서 슬퍼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냥꾼은 나를 죽이려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온다. 그리고 다정한 표정으로


말없이 웃는다.

1.첫만남
엄마는 자동차 창문을 모두 연 채 공항까지 나를 태워다주었다. 오늘
피닉스 기온은 섭씨 24 도였고, 새파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나는
가장 좋아하는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일부러 구멍이 송송 뚫린 레이스
천으로 된 민소매 셔츠를 입은 건 그 옷에 대한 일종의 작별의식이었다.
비행기를 탈 때는 파카를 들고 들어가야 했다.

워싱턴 주 북서부 '올림픽 페닌술라' 에는 포크스라는 소도시가 거의 일년


내내 걷히는 법이 없는 두툼한 구름을 이고 있다.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그 소도시는 미국 전역에서 강우량이 가장 많은 곳이다.
엄마가 태어난 지 몇 달밖에 안 된 나를 안고 그곳에서 도망친 이유도 늘
그림자에 가려진 듯 음산한고 우울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열네 살이 될
때까지는 나도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그곳에서 한 달씩이나 버텨야 했다.
하지만 열네 살이 되던 해 나는 마침내 완강하게 그곳에 가기를 거부했고,
지난 3 년 동안은 나의 아버지 찰리가 2 주간 휴가를 내서 나와 함께
캘리포니아에서 지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포크스로 유배를 자처하고 있다. 끔찍한 공포를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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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포크스를 진저리나게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피닉스가 좋다. 강렬한 햇볕과 살갗을 델 듯한 더위가 좋았다. 점점


커져가는 듯 역동적인 느낌의 그 도시가 좋았다.

"벨라"

비행기를 타기 직전, 엄마가 이미 수천 번도 더 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꺼냈다.

"너 꼭 이러지 않아도 돼."

엄마는 머리가 짧고 눈가의 웃음 주름만 빼면 나와 똑같이 생겼다. 어린


아이처럼 천진한 엄마의 커다란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나는 발작과도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몹시 주의가 산만하고 건망증은 거의 환자 수준인
사랑스러운 엄마를 혼자 두고 내가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물론 지금은
필이 엄마 곁에 있다. 그러니 아마도 각종 고지서를 기한 내에 챙기는 것도
문제 없을 거고, 냉장고에 먹을 것이 떨어지거나 자동차에 기름 넣는 걸
잊을 일도 없을 거다. 엄마가 길을 잃었을 때 전화를 걸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내가 가고 싶어서 그래."

거짓말이었다. 원래 나는 거짓말을 하면 표가 나지만, 이 거짓말은 요즘


들어 하도 자주 했더니 이제는 내가 들어도 그럴듯하다.

"찰리한테 안부 전해라."

"그럴게."

"곧 다시 만나자. 집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 네가 온다고 하면 나도


당장 돌아올게."

엄마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약속하는 엄마의 눈빛에 아쉬움이 담긴걸


눈치 챌 수 있었다.

"내 걱정은 하지마. 잘 지낼 거야. 사랑해. 엄마."

엄마는 일 분쯤 나를 꼭 끌어안고 있다가 놓아주었다. 나는 비행기에


올랐고, 엄마는 떠났다.

포크스에 가려면 피닉스에서 시애틀까지 네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가서, 다시 작은 비행기로 갈아타고 포트앤젤레스까지 한 시간을 날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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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동차로 한 시간을 가야 한다. 비행기를 오래 타는 건 조금도 불편


하지 않지만 찰리와 한 시간이나 차를 같이 타고 가야 한다는 건 조금
걱정스러웠다.

찰리는 이번 일 모두를 꽤 잘 감당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나와 쭉 같이


살게 되었다는 데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 했다. 아빠는 이미 그쪽
고등학교에 전학수속을 마쳐 놓았고, 내가 타고 다닐 자동차를 살 때도
도와주기로 했다.

하지만 찰리와 같이 지내는 건 분명 어색할 것이다. 우리는 둘 다 말이


많이 않은 편인데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할 말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포크스를 싫어하는 건 워낙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므로, 엄마처럼
아빠도 내 결정을 약간 어리둥절 해 했다. 하긴 나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었으니까.

포트앤젤레스에 도착해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일뿐,


비가 내리는게 나쁜 징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태양에겐 이미
작별인사를 해둔 터였다.

찰리는 순찰차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찰리는 선량한 포크스 주민을 보호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경찰서장님이었다.
저축해 둔 돈이 얼마 없는데도 나는 꼭 차를 사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빨갛고 파란 경광등이 머리 위에서 번쩍이는 순찰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싶지 않아서였다. 경찰차만큼 주변 운전자들을
짜증나게 하는 건 없으니까.

내가 경비행기에서 터덜터덜 내려가자 찰리가 어색하게 한 팔로만 나를


껴안았다.

"반갑구나, 벨라. 하나도 안 변했네. 엄마는 안녕하시지?"

반사적인 행동처럼 나를 안고 미소를 지으며 찰리가 말했다.

"예, 잘 지내세요. 저도 반가워요, 아빠."

아빠 앞에서는 찰리라고 부르는 건 금지되어 있다.

난 가져온 짐이 별로 없었다. 애리조나 주에서 입던 옷들은 워싱턴 주에서


입기에는 너무 얇다. 엄마와 나는 옷장을 샅샅이 뒤쳐 겨울옷을 챙겼지만
그래도 많지 않았다. 두어 개 밖에 되지 않는 짐 가방은 순찰차 트렁크에
손쉽게 들어갔다.

"네가 쓸 만한 좋은 차를 찾았지. 값도 아주 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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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 다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아버지가 말했다.

"어떤 차인데요?"

그냥 '좋은 차'가 아니라 '네가 쓸 만한 좋은 차'라는 말이 왠지 미심쩍었다.

"실은 트럭이야. 시보네 트럭."

"어디에서 구하셨는데요?"

"라푸시에 사는 빌리 블랙 아저씨 기억나니?"

라푸시는 해안 근처에 있는 작은 인디언 보호구역이었다.

"아뇨."

"여름에 우리랑 낚시도 같이 다녔는데."

찰리가 덧붙여 설명했다. 그제야 나는 왜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원래 고통스럽고 쓸모없는 기억들은 뇌리에서 지워버리는데
선수였다.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찰리가 말을 이었다.

"그 친구 지금 휄체어 신세거든. 그래서 운전을 할 수가 없으니 나한테


트럭을 싼 값에 팔겠다는 거야."

"몇 년식이래요?"

찰리의 얼굴빛이 변하는 걸 보니, 반갑지 않은 질문인 모양이었다.

"빌리가 엔진을 잘 손봤다더라, 몇 년 안 쓴 차야."

내가 그리 쉽게 물러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찰리도 알고 있기를


바란다.

"친구 분이 몇 년도에 그 차를 사셨는데요?"

"1984 년에 샀다지, 아마."

"새 차를 사신 거래요?"

"어, 아니. 아마 60 년대 초반에 출시된 차일 거야. 어쩌면 50 년대 말에


나온 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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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당황하며 털어놓았다.

"아빠, 저는 차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요. 고장이 나더라도 직접 고칠


수가 없고, 그렇다고 카센터에 맡겨 비싼 수리비를 댈 능력도 안 된단
말이에요."

"벨라, 정말로 잘 달리는 물건이라니까 그래. 요즘엔 그렇게 쓸 만한


물건은 조립할 수도 없어."

'물건'이라니...... 차에 붙이는 별명으로 그나마 어울리기는 하네. 나는


그렇게 혼자 생각했다.

"대체 얼마나 싼데요?"

누가 뭐래도 가격만큼은 내가 절대로 숙이고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음, 내가 너 주려고 벌써 샀다. 집에 온 걸 환영하는 의미에서 주는


선물이야."

찰리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우와. 공짜란 말이지.

"뭐하러 그러셨어요. 차는 제가 직접 살 작정이었는데."

"그냥 사주고 싶더라. 난 네가 여기서 행복하게 지내길 바란다."

찰리는 빤히 앞만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찰리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데 그리 익숙하지 않다. 그런 부분은 나도 아버지를 닮았다. 나 역시 앞만
본 채로 대꾸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정말 기뻐요, 아빠.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포크스에서 내가 행복하게 지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겠지. 내가 괴롭다고 해서 아빠까지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공짜로 생긴
트럭의 엔진 따위를 내가 꼼꼼히 들여다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어, 고맙긴 뭘."

찰리는 내가 깍듯하게 감사인사를 하는 데 당황했는지 중얼거리 듯


대꾸했다. 눅눅한 날씨에 대해 몇 마디 더 얘기를 나누고 나니 더는 할 말이
없어, 우리는 그냥 잠자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물론 풍경은 아름다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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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걸 부인할 순 없었다. 이끼가 덮인 나무 밑동과 초록 잎이 무성하게


매달려 축 늘어진 나뭇가지, 양치식물로 뒤엎인 땅까지 눈이 닿는 곳은
모두 초록색이었다. 심지어 녹색 이파리 사이를 통과한 공기에서도 초록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너무도 초록 일색이어서 마치 낯선 행성 같았다.

마침내 우리는 찰리의 집에 도착했다. 아빠는 갓 결혼했을 때 엄마와 같이


살았던 방 두 개짜리 작은 집에서 아직도 살고 있었다. 두 분이 결혼 생활을
한 건 사실 신혼 때 뿐이었다. 절대 변하지 않는 낡은 집 앞 길가에 나의 새
트럭이 서 있었다. 아무리 낡았어도 나에겐 새 차니까. 차는, 참으로
놀랍게도 내 맘에 들었다. 제대로 굴러갈지는 모르겠지만, 트럭에 타고
있는 내 모습을 대번에 그려볼 수 있었다. 게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다른
외제 차들이 산산조각이 나 널브러진다 해도 이 트럭은 페인트 하나 벗겨진
곳 없이 멀쩡히 서 있을 것처럼, 몸체가 막강한 철제로 되어 있었다.

"와, 마음에 들어요! 고맙습니다!"

이로써 내일로 다가온 끔찍한 첫 등교는 훨씬 덜 괴로울 수 있을 듯했다.


3 키로 미터가 조금 더 넘는 거리를 빗속에 걸어갈 것인지 경찰서장의
순찰차를 얻어 탈 것인지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마음에 든다니 다해이구나."

찰리는 또다시 당황해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 짐은 한번에 전부 이층으로 옮길 수 있었다. 앞마당을 향해 있는 서쪽


방이 내가 쓸 방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써 왔던 방이라 아주 익숙했다.
나무 바닥, 하늘색 벽, 한쪽으로 기운 천장, 창문에 드리워진 노란색
레이스 커튼, 모든 게 내가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것들이었다. 유일하게
변한게 있다면 내가 자라면서 요람이 침대로 바뀌고, 책상을 하나 새로
들였다는 것뿐이었다. 이제 그 책상 위엔 중고 컴퓨터가 하나 놓여 있고,
모뎀에 꽂힌 전화선이 바닥에 고정된 채 쭉 이어져서 가장 가까운 전화회선
연결구에 꽂혀 있다. 연락을 주고받기 쉬워야 한다고 엄마가 성화를 해대서
이룩한 쾌거였다. 내가 아기 때부터 있던 안락의자는 여전히 구석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욕실은 계단 꼭대기에 있는 작은 목욕탕밖에 없어서 찰리와 내가 함께


쓰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얼마나 불편할지에 대해 난 오래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찰리와 함께 지낼 때 가장 좋은 부분은 참견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찰리는 늘 나 혼자 짐을 풀고 방을 정리하도록 내버려두는데, 엄마라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혼자 있으니 억지로 웃으며 기뿐 내색을 할
필요도 없어 좋았다. 비 내리는 창밖을 맥없이 응시하다 몇 방울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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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뜨릴 수도 있어 다행이었다. 아직 마음 놓고 소리내어 울 만한 기분은


아니다. 제대로 우는 건 내일 아침을 걱정할 수밖에 없을 잠자리에서나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끔찍하게도 포크스 고등학교는 전교생이 357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간신히 358 명 되는 셈. 전에 다니던 학교는 우리 학년만 해도 700 명이
넘었다. 반면 이곳 아이들은 모두 함께 자란 친구들이었고, 심지어 그
애들의 할머니, 할아버지까지도 걸음마를 할 때부터 같이 지낸 사이였다.
나는 대도시에서 새로 전학 온 여학생으로, 전교생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자
구경거리가 될 게 뻔했다.

혹시라도 내가 피닉스 출신답게 생긴 여자애였다면 전학생이라는 것이


이로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모로 보면 나는 피닉스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햇빛 찬란한 대도시에서 살았다면 잘 그을린 피부에
금발을 늘어뜨리고, 화려하게 차려 입은 배구선수나 치어리더쯤 되어야
어울리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줄곧 햇빛에 노출되어 살았는데도 피부가 우윳빛이었고,


심지어 새파란 눈동자나 빨간 머리 따위의 행운도 누리지 못했다. 늘 마른
체구였고, 그럭저럭 유연한 편이긴 했지만 운동엔 완전히 젬병이었다.
운동을 잘하는 데 필수적인 눈과 손의 협력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스스로 망신살이 뻗치거나 본인이나 주변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오래된 소나무 서랍장에 옷을 정리해 넣고 나는 목욕용품 가방을 집어


들고 찰리와 공동으로 쓰는 목욕탕으로 갔다. 헝클어진 젖은 머리를 빗으며
거울 속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조명 탓이겠지만 전보다 혈색이
나쁘고 병약해 보였다. 내 피부는 핏줄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해서
예쁘다고 할 수도 있는 편이다. 하지만 주변 색에 따라 완전히 달라
보이는데, 여기에는 돋보이게 해줄 다른 색깔이 없었다.

거울 속 핏기 없는 내 모습을 마주하며 나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왔다는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단순히 외모상으로만 피닉스에
적응을 못 한게 아니었다. 학생이 3 천명을 웃도는 학교에서도 적응을 못한
내가 여기서 적응할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어쩌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지구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인
엄마마저도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진 못했다. 가끔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내
머리가 이상한 건지도 몰라.

하지만 원인은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결과였다. 그리고 내일은, 시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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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지 않는다.

침대에서 실컷 울고 난 뒤에도 나는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요란한 빗소리와 지붕을 휘도는 바람소리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낡은 퀼트이불을 뒤집어썼다가 나중엔 베개까지
머리에 올려놓았다. 그런데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자정이 넘어
빗발이 가늘어져 마침내 가랑비가 된 다음에야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창밖으로 온통 두껍게 낀 안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서히 밀실 공포증이 밀려드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절대로
하늘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새장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찰리와 함께 한 아침식사 시간은 조용히 지나갔다. 아빠는 학교에서 잘


지내라며 행운을 빌어주었다. 나는 그의 바람이 헛되다는 걸 알면서도
고맙다고 인사했다. 행운은 늘 나를 피해가곤 했으니까. 찰리는 아내이자
가족과 다름없은 경찰서를 향해 먼저 집을 나섰다. 그가 출근한 뒤 나는
의자 세 개의 모양이 전부 제각각인 낡은 정사각형 식탁 한 귀퉁이에 앉아
작은 부엌을 둘러보았다. 벽엔 짙은 색 널빤지를 댔고, 바닥엔 하얀색
리놀륨이 깔렸고, 부엌 한쪽을 차지한 싱크대와 찬장은 샛노랑색 이었다.
아무것도 변한게 없었다. 18 년전 엄마는 어떻게든 집안에 햇살을 들여볼
요량으로 싱크대를 노란색으로 칠했다. 부엌과 바로 이어지는 손바닥만한
거실의 작은 벽난로 위에는 사진이 한줄로 놓여 있었다. 맨 첫 사진은
아빠와 엄마가 라스베가스에서 찍은 결혼사진이었고, 그 옆엔 내가
태어나자마자 간호사가 찍어준 우리 세 가족의 사진, 그리고 학교에서 찍은
내 사진들이 작년 것까지 주르륵 이어졌다. 그걸 보고 있자니 민망했다.
적어도 내가 여기 사는 동안에는 어디든 다른 곳으로 옮겨놓자고 찰리를
설득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집 안에 있으면 찰리가 엄마를 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게 곤혹스러웠다.

일찌감치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집 안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생화학 실험복 같은 재질로 만든 방수 점퍼를 입고
빗속으로 나갔다.

아직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지만 늘 열쇠를 숨겨두는 현관문 옆


처마 밑에서 열쇠를 꺼내 잠그는 사이에 옷이 흠뻑 젖을 정도는 아니었다.
새로 산 방수 부츠의 찍찍 거리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젖은 길을 걷고
있으려니 보송보송한 자갈을 밟은 평범한 소리가 그리웠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처럼 트럭 가까지 멈춰 서서 감상할 시간도 없었다. 점퍼에
달린 모자를 썼는데도 머리칼에 엉겨 붙는 축축한 습기를 어서 피하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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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안은 습기가 없고 쾌적했다. 빌리나, 아니면 찰리가 말끔히 세차를


한 게 분명했다. 그래도 가죽 시트에선 아직도 담배 냄새와 휘발유, 박하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다행히 시동은 금세 걸렸지만, 엔진 소리가
놀랍도록 컸다. 하긴, 이렇게 낡은 트럭인데 한 가지 결점쯤이냐 있는 게
당연하겠지. 또 한 번 예상을 뒤엎으며, 골동품 같은 라디오도 작동이 됐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도 학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른 주요


건물들처럼 학교 건물도 고속도로 가까이에 있었다. 하지만 학교처럼
보이지 않아서, 나는 포크스 고등학교라는 표지판을 보고서야 차를
멈췄다. 학교라기보다는 똑같이 지은 적갈색 벽돌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주변에 나무와 관목들이 맣아서 처음엔 학교 규모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학교다운 분위기는 대체 어디 간 거야. 예전 학교가
그리웠다. 강철로 된 담장과 금속 탐지기는 어디 있는 거지?

현관문에 '안내'라고 적힌 작은 팻말이 붙어 있는 첫 번째 건물 앞에


주차를 했다. 차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주차구역이 아닌게
분명했지만, 멍청이처럼 빗속에 교정을 배회하기보다는 먼저 안에
들어가서 교실 위치를 알아두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나는 마지못해
따뜻하고 쾌적한 트럭에서 내려 흠뻑 젖은 나무 울타리 사이로 난 좁은
돌길을 따라 걸어갔다. 문을 열기 전에 심호흡을 했다.

실내는 환하고 생각보다 따뜻했고, 사무실은 아담했다. 주황색


얼룩무늬가 들어간 싸구려 카펫 위엔 학생들을 위한 접이식 의자가 몇 개
놓여 있고 각종 안내문과 상장이 붙은 벽 한가운데에서 커다란 시계가
요란하게 초침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밖에 있는 나무들로는 부족하다는 듯
실내 곳곳에 커다란 플라스틱 화분이 놓여 있었다. 긴 카운터가 사무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카운터 위에는 색색깔의 견출지가 붙어 있는 각종
서류들이 잔뜩 담긴 철제 바구니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카운터 뒤에는
책상이 세개. 그중 한 자리에 빨간 머리에 안경을 쓴 뚱뚱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자주색 반팔 티셔츠를 입은 여자를 보자 내가 옷을 너무 껴입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빨간 머리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로 왔어요?"

"전 이사벨라 스완인데요."

내 말을 들은 순간 여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분명 다들 내가 올 것을


기대하며 소곤대고 있었던 것이다. 들었어? 경찰서장을 버리고 달아난
전처의 딸이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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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구나."

여자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책상에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는 서류 뭉치를


뒤지더니 마침내 원하는 걸 찾아냈다.

"배정된 과목 시간표는 여기 있고, 이건 학교 약도란다."

그녀가 서류를 몇 장 더 카운터에 올려놓더니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내가 들을 수업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가장 가까운 길을 약도 위에
형광펜으로 표시해 주었고, 각 선생님들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 서류 한
장을 주고는 오늘 수업이 끝나면 가져오라고 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찰리가 말한 것처럼 포크스 고등학교가 내 마음에 들길 바란다고 말했다.
나는 최대한 그럴듯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트럭에 다시 오를 무렵엔 다른 학생들도 등교하기 시작했다. 줄지어


늘어선 자동차를 따라 학교를 돌았다. 자동차가 대부분 내 트럭처럼 낡고
소박한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피닉스에서는 파라다이스 밸리 구역에서 몇
안 되는 가난한 동네에 살았는데도, 학생 전용 주차장에서 신형 벤츠나
포르셰 자동차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여기선 가장 좋은 차가 번쩍이는 신형
볼보 정도였는데도 눈에 확 띄었다. 그래도 주차할 곳에 자리를 잡자마자
천둥 같은 엔진 소리 때문에 사람들 시선이 나에게 쏠리지 않도록 시동을
얼른 껐다.

나는 트럭 안에서 약도를 들여다보며 대강이나마 길을 외우려고


노력했다. 하루 종일 약도에 코를 박고 학교를 헤매고 싶진 않았다. 그리곤
서류를 모두 가방에 넣고 배낭끈을 어깨에 맨 채 심호흡을 했다. 난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뻔한 거짓말을 한다. 설마 잡아먹히기야 하겠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심호흡을 한 뒤 트럭에서 내렸다.

십대들이 우글우글한 길을 걸으며 최대한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평범한 검정색 점퍼 때문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식당 건물을 돌아서자 3 번 건물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건물 모퉁이마다


하얀 바탕에 검은색 글자로 '3' 이라고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현관문으로 다가가니 호흡이 점점 빨라지는게 느껴졌다. 나는 비옷을
입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학생 두 명을 따라 건물로 들어가며
숨을 고르려고 애를 썼다.

교실은 작았다. 내 앞에서 걸어가던 두 사람이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길게 줄지어 있는 옷걸이에 비옷을 걸었다. 나도 따라했다. 둘은
여학생이었다. 하나는 금발에 피부가 흰 도자기처럼 투명했고, 다른 한
명도 연갈색 머리칼에 얼굴빛이 창백했다. 여기선 적어도 피부색 때문에
두드러질 일은 없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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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명 받을 서류를 들고 교사용 책상으로 다가갔다. 키 큰 대머리


남자가 앉아 있는 책상 명판엔 메이슨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내 이름을
보자마자 나를 올려다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기분 좋은 반응은
아니었고, 당연히 나는 잘 익은 토마토처럼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다행히도 선생은 아이들에게 나를 소개시키지 않고 교실 뒤쪽의 빈자리로
보내주었다. 내가 뒤쪽에 앉으면 아무래도 다들 흘끔거리기 어렵겠지.
물론 몇몇 아이들은 뒤를 돌아서까지 나를 훔쳐보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이 건네준 교재 목록에 신경을 고정시켰다. 브론테와 셰익스피어,
초서, 포크너. 다분히 기본적인 도서목록이었다. 이미 다 읽은 작품이었다.
안심이 되면서도...... 동시에 따분했다. 엄마한테 옛날에 했던 작문숙제를
보내달라고 부탁할까? 아마 엄마는 그게 사기라고 생각하겠지. 선생님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엄마와 벌이게 될 다양한 말싸움을
떠올렸다.

비음을 닮은 윙윙 소리를 내며 종이 울리자, 옆줄에서 얼굴에 여드름이


심하고 검은 머리칼에는 기름기가 흐르는 호리호리한 남학생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이사벨라 스완이지?"

그는 아무나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체스클럽의 지나치게 친절한 회원 같은


인상이었다.

"벨라라고 불러 줘."

내가 대꾸하자, 사방 세 줄 안에 있는 학생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다음 수업은 뭐 듣니?"

남학생이 물었다. 나는 가방 안의 시간표를 꺼내 확인해야 했다.

"어, 제퍼슨 선생님의 정치사회네. 6 번 건물에서."

어딜 봐도 호기심 어린 눈초리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4 번 건물로 가야 하니까 가면서 어딘지 알려줄게."

확실히 과잉친절 유형이로군.

"난 에릭이야."

남학생이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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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심스레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우리는 점퍼를 집어들고 나섰다.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뒤에 오던


아이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으려고 바짝 따라붙은 것 같았다. 내가
공연한 강박증에 사로잡힌 건 아니길 바랐다.

"여긴 피닉스랑 많이 다르겠다, 그렇지?"

"응. 굉장히."

"거긴 비 많이 안 오지?"

"일년에 서너 번."

"우와, 그럼 날씨가 어떻다는 거야?"

"늘 맑아."

"넌 많이 안 탄 것 같은데."

"우리 엄마가 백색증이 좀 있거든."

그가 알겠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으므로 나는 한숨을 쉬었다.


먹구름과 유머감각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몇 달만
지내면 나도 비꼬는 듯한 유머 따위는 잊고 살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다시 식당 건물을 돌아 체육관 옆에 있는 남쪽 건물로 향했다.


건물에 번호가 선명하게 적혀 있는데도 에릭은 굳이 나를 현관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럼, 잘해봐. 어쩌면 다른 수업도 몇 개는 나랑 같이 들을지도 몰라."

그는 현관문 손잡이를 잡으며 그러길 몹시 바라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희미하게 웃어 보인 뒤 안으로 들어갔다.

오전 시간은 첫 수업과 거의 비슷하게 지나갔다. 과목만으로도 이미


미워하기에 충분한 삼각함수 시간의 바너 선생만 유일하게 나를 교실 앞에
세워 자기소개를 시켰다. 나는 말을 더듬으며 얼굴을 붉혔고, 자리로
되돌아가다 공연히 내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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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이 지나자 각 교실에서 본 몇 명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용감한 아이들은 어디나 있는 법이어서, 먼저 자기소개를 한 뒤 포크스에서
지내는게 마음에 드는지 묻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사교적으로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대부분의 질문에는 그냥 거짓말로 대답했다. 어쨌든 적어도
약도를 찾아볼 필요는 없었다.

삼각함수 시간과 스페인어 시간에 모두 내 옆에 앉았던 한 여학생은


점심시간에 식당까지 같이 가주었다. 그 앤 160 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나보다도 훨씬 키가 작고 몸집도 아담했지만, 아주 곱슬곱슬하고 숱이 많은
검은 머리 때문에 나와 키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선생과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조잘대는 그 아이
여에서 그저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굳이 맞장구를 칠 생각도 없었다.

우리는 그 애의 친구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는 식탁에 앉았고, 그 애가


나를 일행에게 소개했다. 나는 아이들 이름을 듣자마자 모두 잊어버렸다.
다른 아이들은 나에게 말을 건 여자애의 용기에 감명을 받은 듯 했다. 영어
시간에 만난 에릭이라는 남학생이 다른 자리에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학생식당에서 호기심에 가득 찬 낯선 아이들 일곱 명과 대화를


이어가려고 애쓰던 바로 그곳에서 나는 처름 그들을 보았다.

길쭉한 식당 맨 구석 쪽에 앉은 그들은 내가 있는 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모두 다섯이었다. 각자 쟁반을 앞에 두고 있었지만 음식엔
손도 대지 않았고 얘기를 하지도 않고 그냥 앉아만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과 달리 그들은 나를 빤히 보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내 쪽에서
지나치게 관심 있어하는 눈길을 마주칠 염려 없이 편하게 그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유독 내 관심을 끈 것은 나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강했다. 남학생 셋 가운데 하나는 역도선수처럼


근육질에 몸집이 우람하고, 머리칼은 검고 곱슬곱슬했다. 또 한 명은 다른
애들보다 키가 더 크고 마른 편이었지만 역시 근육질이었고, 연한
금발이었다. 마지막 남학생은 셋 중 가장 마르고 호리호리한데다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모습이었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학생이라기보다는 선생 쪽에 가까워 보이는 처음 두 아이보다는
마지막 남자애가 좀더 어려 보였다.

두 여학생은 정반대 스타일이었다. 키가 큰 아이는 외모가 조각 같았다.


스포츠 잡지의 수영복 특집호 표지 모델 같은 아름다운 몸매에다, 같이
모여 있으면 주변 여자애들의 자긍심이 모두 바닥에 떨어지게 만들 법한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미안다게 살짝 구불거리는 금발을 등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렸다. 키가 작아 보이는 여학생은 대단이 마르고 체구가 작아서
요정 같았다. 짧게 자른 진한 검정색 머리칼을 사방으로 뻗친 듯 손질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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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는 서로 무척이나 닮은 구석이 있었다. 모두들 안색이


창백했고, 해를 볼 수 없는 이 소도시에 사는 모든 학생들 틈에서도 단연
혈색이 가장 파리했다. 심지어 백색증 환자라고 놀림받던 나보다도 더
하얬다. 그리고 머리색에 비해 눈동자색이 모두들 대단히 진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같이 멍이 든 것처럼 눈가가 보랏빛으로 짙게 그늘져 있었다.
마치 다같이 불면에 시달렸거나, 코가 부러졌다가 회복기에 접어든 것
같았다. 물론 그들의 외모는 흠잡을 데 없이 반듯했고, 콧날도 완벽하게
곧았다.

하지만 내가 눈길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런 기이한 느낌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넋을 잃고 그들을 바라본 이유는 지극히 다르면서도 동시에 몹시


닮은 그들의 얼굴이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절묘하게 수정을 거친 패션 잡지 화보에나
나올만큼 외모가 빼어났다. 혹은 천사의 얼굴을 그린 노장의 작품 속에서나
엿볼 수 있을까. 누가 가장 아름답다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완벽한
미모의 금발 여학생이나 머리카락이 갈색인 남학생이 최고인 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를 외면하며 딱히 어디랄 것도 없이 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는데, 다른 학생들과 시선을 마주치기가 싫은 듯했다. 내가 줄곧
지켜보고 있는 사이, 키 작은 여학생이 따지도 않은 음료 병과 입도 대지
않은 사과가 담긴 쟁반을 들고 일어나더니 패션쇼 무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빠르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멀어져 갔다. 날렵한 무용수의 스텝 같은
걸음걸이에 놀란 나는 시선을 떼지 못했고, 어느새 쟁반을 내려놓은 소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뒷문으로 사라졌다. 다시 시선을 돌려 다른 일행으로
향하니, 그들은 여전히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쟤들은 누구야?"

스페인어 수업을 같이 듣는 이름은 기억 나지 않는 여자애에게 내가


물었다.

내 말투에서 이미 누굴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지만 여자애는 굳이


고개를 들어 확인했고, 그 순간 기이한 일행 가운데 가장 호리호리하고
어려보이는 남학생이 갑자기 그 애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앞에 앉은
여자애를 흘끗 바라본 뒤 짙은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보다 먼저 그가 재빨리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나는 당혹감에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순식간이긴 했지만 그는 전혀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여자애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무심코 고개를 들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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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지만 대꾸는 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내 앞에 앉은 여자애도


나처럼 그쪽을 바라보다가 당황한 듯 킥킥거렸다.

"에드워드와 에밋 컬렌, 로잘리와 재스퍼 헤일이야. 방금 나간 애는


앨리스 컬렌이지. 다들 컬렌 박사님 댁에서 같이 살아."

여자애가 낮은 목소리로 단숨에 말했다.

곁눈질로 그 잘생긴 남자아이를 살펴보니, 그는 이제 쟁반을 응시한 채


길고 창백한 손가락으로 베이글을 조각조각 내고 있었다. 그는 완벽하게
생긴 입술을 거의 벌리지 않은 채 재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나머지 일행
셋은 여전히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엔 다들 나직이 속삭이는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들 이상하고 독특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부모님 대에나


썼을 법한 이름이었다. 혹시 이곳 같은 촌에서는 그런 이름이 최신
유행인가? 그제야 나는 앞에 앉은 여학생의 이름이 아주 흔한 제시카라는
게 생각났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도 역사 수업을 같이 듣는 여학생 중에
제시카 라는 이름이 둘이나 됐다.

"다들 외모가...... 꽤 괜찮네."

나는 애써 과소평가하려는 기색이 역력한 말투로 말했다.

"그렇지?"

제시카가 또다시 킥킥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쟤들 끼리끼리 사귀는 사이야. 에밋하고 로잘리, 재스퍼하고 앨리스


말이야. 게다가 모두 함께 산단다."

소도시에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는 듯한 충격과 비남이 깃든


목소리였다. 하지만 솔직히 피닉스에서도 그런 일이라면 사람들이 수군댈
만한 사건있었다.

"성이 컬렌인 애들이 누구라고? 친척 사이는 아닌 것 같던데......"

"친척 아니야. 컬렌 박사님도 얼마나 젊은데. 고작해야 20 대 후반이나 30


대 초반일걸. 다 입양됐대. 성이 다른 로잘리랑 재스퍼 헤일은 쌍둥이
남매인데, 금발인 애들 있잖아. 걔들은 양자인 셈이지."

"양자로 들이기엔 좀 나이 들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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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퍼하고 로잘리는 이제 둘 다 열여덟 살이지만, 여덟 살부터 컬렌


박사님 사모님이랑 같이 살았대. 사모님이 걔들 이모나 고모쯤 되나 봐."

"그렇게 젊은 나이에 애들을 저렇게 많이 데려다 돌보다니, 정말 착한


부부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제시카가 마지못해 대답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어쩐 일인지 그 애가 의사


부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흘끔흘끔 컬렌 박사 부부의
입양아들을 바라보는 제시카의 시선으로 미루어 질투심 때문인 것도
같았다.

"아무튼 컬렌 부인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다나 봐."

제시카가 마치 그들이 관대하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듯 그 사실을


덧붙였다.

이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에도 나의 시선은 자꾸만 기이한 가족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음식을 외면한 채 벽만 바라보았다.

"포크스에서 계속 살던 사람들인가?"

내가 물었다. 그랬다면 여름방학마다 여기 와 지내는 동안 내 눈에도 분명


띄었을 터였다.

"아니지."

제시카는 나처럼 갓 전학 온 학생이라도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차려야


하지 않느냐는 투로 대꾸했다.

"알래스카 주 어딘가에 살다가 겨우 2 년전에 이사 왔어."

나는 돌연 연민과 안도감을 느꼈다. 저렇게 예쁘고 잘생겼지만, 결국은


소외당한 이방인들이라는 데서 온 연민이었다. 한편 안도감은 나만 여기로
전학 온 게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어느 모로 봐도 내가 가장 흥미를 끄는
학생은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내가 계속해서 관찰하고 있는데, 컬렌 남매 가운데 가장 어려 보이는


남학생이 고개를 들더니 나와 시선을 부딪쳤다. 이번엔 그의 표정에도
확연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지만, 그는
한참동안이나 그대로 나를 바라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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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기가 도는 갈색머리 남자애, 이름이 뭐랬지?"

내가 물었다. 흘끔 곁눈질해 보니 그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지만 다른


학생들처럼 민망할 정도로 빤히 구경하는 느낌은 아니었고, 어쩐지 조금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또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에드워드야. 진자 근사하지? 하지만 시간낭비는 하지 않는게 좋을 걸.


쟤는 데이트 같은 거 안 해. 우리 학교 여학생들 중에는 자기한테 어울릴
만큼 예쁜 애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제시카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지만,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저 남자애가 과연 언제 제시카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을까 궁금해졌다.

나는 웃음을 감추려고 입술을 깨물고 나서 다시 그 남자아이를


돌아보았다. 그는 얼굴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 역시 웃는 듯 뺨의 근육이
살짝 올라간 것 같았다.

몇 분 뒤 그들 일행 넷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같이 눈에 띄게


동작이 우아했고, 심지어 덩치가 가장 크고 우람한 남학생까지도 움직임이
유연했다. 지켜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설레는 광경이었다. 에드워드라는
애는 두번 다시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제시카와 그 친구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있다 보니 시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흘렀다. 나는 등교 첫날부터 수업에 늦고 싶지 않아
마음이 초조했다. 새로 알게 된 아이들 중에서, 고맙게도 자기 이름이
앤젤라라고 다시 알려준 여학생이 다음 시간에 나와 같이 생물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우리는 말없이 함께 교실로 향했다. 앤젤라도 수줍음이
많았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앤젤라는 예전 학교에서도 익히 본 검은색 판자가


깔린 실험실용 책상에 가서 앉았다. 앤젤라에겐 이미 짝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 빈자리는 한 군데밖에 없었다. 교실 중앙 통로 쪽의, 하나밖에 안
남은 빈자리 옆 좌석엔 독특한 머리색깔만으로도 한눈에 알아본 에드워드
컬렌이 앉아 있었다.

가운데 통로를 지나 선생님에게 나를 소개하고, 가져간 서류에 서명을


받으며 나는 그 아이를 훔쳐보았다. 내가 지나치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몸을 움츠리며 바짝 얼어붙었다. 그는 몹시 못마땅해 보이는,
화가 난 듯한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충격을 받고
재빨리 시선을 돌리며 얼굴을 붉혔다. 통로 바닥에 놓인 책에 걸려
비틀거리던 나는 책상 귀퉁이를 잡고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키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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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학생의 눈동자는 싸늘한 검은색이었다.

배너 선생님은 내 서류에 서명한 뒤, 학생들 앞에서 소개를 하라는 따위의


허튼소리는 하지 않고 책 한 권을 건넸다. 이 생물 선생님이 마음에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빈자리는 한 군데밖에 없었으므로, 선생님도
나를 그 자리에 앉힐 수 밖에 없었다. 에드워드 컬렌의 적대적인 눈초리에
당황한 나는 줄곧 시선을 내리깐 채 그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나는 책상에 책을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들지 않고 곁눈질만


으로도 그가 앉은 자세를 바꾸는 걸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그는 나를 피해
최대한 의자 끝으로 비켜 앉더니 마치 나한테서 지독한 악취라도 난다는 듯
고개까지 돌려 외면했다. 나는 살짝 머리칼을 당겨 남몰래 냄새를 맡아
보았다. 머리칼에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딸기향 샴푸 냄새가 날 뿐이었다.
특별히 불쾌감을 줄 만한 냄새는 아니었다. 나는 둘 사이에 어둠의 장막을
펼치듯 오른쪽 어깨 위로 머리칼을 모두 늘어뜨린 뒤, 선생님의 말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수업내용은 내가 이미 배운 세포분열 해부


실험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레 필기를 했다.

머리칼로 시야를 가리긴 했지만 나는 이따금씩 옆에 앉은 이상한


남학생을 훔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수업시간 내내 그는 최대한 나와
떨어지기 위해 의자 끝에 간신히 걸터앉아서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왼쪽
다리 위에 올려진 그의 손은, 하도 세게 주먹을 쥐어 파아란 핏줄이 새하얀
피부를 뚫고 나올 것처럼 꿈틀거렸다. 수업시간 내내 그렇게 움켜쥔 주먹은
펴질 줄 몰랐다. 그는 하얀색 긴 소개 셔츠를 팔꿈치 위로 접어 올리고
있었는데, 피부는 창백했지만 팔 근육이 놀랍도록 발달되어 있었다.
우람한 형 옆에 있어서 호리호리 해 보였을 뿐, 실제로는 대단한
근육질이었다.

생물수업은 다른 수업보다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긴 하루가 드디어


끝나기 때문일까, 아니면 옆에 앉은 남학생의 단단한 주먹이 풀어지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까? 그는 결국 주먹을 풀지 않았다. 하도 꼼짝 않고
앉아 있어서 숨도 쉬지 않는 듯 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이게 평상시 이
아이의 행동일까? 점심시간에 제시카와 이 남자애한테 퇴짜를 맞았을
거라고 추측했던 것에도 새삼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제시카는 그래서 화가
난 게 아닐지도 몰라.

절대로 나 때문일 리는 없다. 얜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잖아.

또 한번 그를 훔쳐본 나는 이내 후회했다. 그는 검은 눈동자 가득


혐오감을 드러낸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돌연 '눈빛으로도 사람을 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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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면' 나는 당장 죽었을 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그를 피해 움찔


의자 끝으로 몸을 움츠렸다.

바로 그 순간 수업 종이 크게 울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에드워드


컬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생각보다 훨씬 키가 큰 그는 나를
등지고는 유연한 동작으로 다른 아이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교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가 사라진 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얼어붙은 듯 자리에 앉아 있었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지? 이런 건 정당하지 않잖아! 나는 혹시 눈물이
흐를까 봐 겁이 나,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른 채 천천히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고약한 성미의 분출구가 눈물샘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민망하게도, 화가 나면 대개 눈물이 났다.

"너 이사벨라 스완 맞지?"

남학생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흐릿한 금발을 정교하게 젤로 세워 올린, 얼굴이 아기처럼


귀여운 남학생이 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나한테서 악취가
난다고 여기진 않는 것 같았다.

"벨라라고 불러줘."

내가 웃으며 대꾸했다.

"난 마이크야."

"안녕, 마이크."

"다음 수업할 교실 찾아가는 거 도와줄까?"

"실은 교실이 아니라 체육관에 가야 하거든. 혼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다음 수업이 체육이야."

이렇게 작은 학교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다는게 별 대단한 우연도


아닐텐데 그는 잔뜩 신이 난 듯했다.

우리는 함께 체육관 쪽으로 갔다. 마이크는 말이 많았다. 거의 혼자


대화를 이끌어가는 쪽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편했다. 그는 열 살 때까지
캘리포니아에서 살았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햇빛을 그리워할지 잘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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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알고 보니 영어수업도 나와 같이 듣는다고 했다. 오늘 만난 아이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애였다.

강당 안으로 나란히 들어서며 그가 물었다.

"혹시 너, 연필 같은 걸로 에드워드 컬렌을 찌르기라도 한 거야? 그


녀석이 그렇게 구는 건 처음 봐."

나는 움찔했다. 역시 그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 챈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건, 에드워드 컬렌의 평소 모습이 아니었단 얘기다. 나는
모르는체 하기로 마음먹었다.

"생물 시간에 내 옆에 앉은 애 말이야?"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응. 어디 아프거나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보여서 말이야."

"난 모르겠어. 걔랑은 말 한 마디 안했는걸."

"하긴 워낙 이상한 놈이야."

마이크는 곧장 탈의실로 가지 않고 내 옆에서 머뭇거렸다.

"네 옆에 앉은 행운이 나한테 왔더라면 말을 걸었을 텐데."

나는 여학생 탈의실로 가기 전에 그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이크는


분명히 나를 마음에 들어하며 다정하게 굴고 있었다. 하지만 언짢았던 내
마음이 풀리기엔 그 정도론 부족했다.

체육선생인 클랩 코치는 내게 맞는 체육복을 골라주었지만, 당장 오늘


수업부터 참석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예전 학교에선 2 년 동안만
체육이 필수과목이었는데, 여기선 고등학교 4 년(미국의 고등학교는 4
년제가 흔하다) 내내 필수과목이었다. 포크스는 나를 위해 지상에 마련된
지옥이 틀림없었다.

나는 동시에 네 군데서 진행되는 배구경기를 지켜보았다. 배구를 하면서


내가 얼마나 많이 다치고 또 주변 친구들을 다치게 했는지가 떠올라 조금
속이 메슥거렸다.

마침내 마지막 수업시간 종이 울렸다. 나는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천천히


안내 사무실 쪽으로 갔다. 흩뿌리던 비는 거의 그쳤지만 바람은 훨씬 더
싸늘하고 거세져 있었다. 나는 양팔을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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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곧바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에드워드 컬렌이 내 바로 앞 창구에 서 있었다. 나는 그의 헝클어진 갈색
머리를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들어서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교직원이 어서 혼자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교직원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툼의 요지를 재빨리 알아차렸다. 그는 오늘 6 교시의 생물수업을
다른날로 바꾸려고 하고 있었다.

그게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생물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무슨 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이어야 했다. 그가 험상궂은 표정을 지은
것도 다른일 때문이어야 마땅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나를 그토록
심하게 증오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이 다시 열리고 싸늘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내 머리칼과 책상에 있던


서류가 함께 펄럭였다. 문으로 들어선 여학생은 창구 앞으로 가서 철제
바구니에 종이 한장을 내려놓은 다음 다시밖으로 나갔다. 에드워드 컬렌의
등이 움찔 굳어졌다. 그러곤 서서히 돌아서서 나를 노려보았다. 짜증니 날
만큼 잘 생긴 얼굴, 증오심이 가득한 날카로운 눈길에 꿰뚫릴 것만 같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진짜 공포감이 스치는 걸 느꼈고, 팔에 소름이 돋았다.
몇 초 안 되는 그의 차가운 시선은 얼음처럼 싸늘한 바람보다 훨씬 더 나를
떨게 했다. 그는 다시 교직원을 돌아보았다.

"그럼 됐습니다. 안된다니 어쩔 수 없죠.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는 벨벨처럼 매끄러운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두번 다시


나를 보지 않고 몸을 돌려 문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얌전히 창구로 다가가 선생님들의 서명을 받은


서류를 내밀었다.

"첫날 지내보니 어떠니?"

안내교사가 다정한 엄마처럼 물었다.

"좋았어요."

나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거짓말을 했다. 안내교사도 곧이곧대로 듣지는


않는 표정이었다.

트럭으로 갔을 때 주차장엔 남은 차가 몇 대 없었다. 이 눅눅한 초록색


소굴에서, 트럭은 집을 그나마 가깝게 느끼게 해 주는 안식처 같았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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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운전석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히터를 틀어야


할 만큼 추워졌으므로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시동을 걸었다. 나는 줄곧
눈물을 참느라 무던히 애를 쓰며 찰리의 집 쪽으로 달렸다.

2.생각이 드러나는 얼굴

다음 날은 좀 낫기도 하고...... 더 나쁘기도 했다.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잔뜩 끼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날보단 나았다. 하루가 어떻게 펼쳐질지 예상할 수 있었으므로 견디는
것도 좀더 쉬웠다. 영어시간에 내 옆자리에 앉은 마이크는 다음 과목
교실까지 나를 데려다주었고, 그 사이 예의 '체스클럽' 에릭은 줄곧
마이크를 노려보았다. 나로선 꽤 으쓱해지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어제만큼
심하게 나를 흘끔대지 않았다. 점심시간엔 마이크와 에릭, 제시카를
포함하여 이젠 얼굴과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몇몇 아이들과 왁자지껄
여럿이 모여 점심을 먹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게 아니라 물을 가르고
앞으로 나가는 듯한 느낌이 겨우 들기 시작했다.

더 나빴던 건 내가 피곤하기 때문이었다. 집 근처에서 쉴 새 없이


메아리치는 바람 소리 때문에 난 여전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삼각함수 시간에 바너 선생이 손도 들지 않은 내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틀린 답을 말했으므로, 전날보다 더 괴로웠다. 체육시간엔 어쩔 수 없이
배구를 해야 했는데, 한 번은 내가 공을 때린 순간, 공이 날아드는
길목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같은 팀 아이가 그 공에 맞았기 때문에 몹시
비참했다. 그리고 더 나빴던 결정적인 이유는 에드워드 컬렌이 아예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거였다.

오전 내내 나는 무섭게 쏘아보는 그의 시선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걸 겁내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엔 차라리 정면으로
맞붙어 대체 왜 그러는지 묻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심지어 어젯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 그에게 무슨 말로 따질리 상상해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일을 해낼 배짱이 없다는 걸 너무도 잘알고 있었다.
나라는 인간 옆에 있으면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겁쟁이 사자도
터미네이터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제시카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가면서그 아이를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으리라던 나의 결심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고, 이내 나는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그의 형제자매 넷을 발견했다. 그 아이는 함께 있지 않았다.

마이크가 우리를 막아서더니 자기가 앉았던 자리로 데려갔다. 제시카는


그의 관심에 몹시 우쭐한 듯했고, 제시카의 친구들도 곧 우리와 합석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 오가는 스스럼없는 수다에 귀를 기울이려 애썼지만,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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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게 몹시 불편한 심경으로 그 남학생이 들어설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애가 식당으로 들어서며 나를 완전히 무시해,
그간의 내 의심이 헛된 것으로 판명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애는
나탄나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나는 점점 더 긴장했다.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도 그 애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어제보다는


자신감이 생긴 나는 생물 강의실로 갔다. 마이크는 말 잘 듣는
골든리트리버 강아지처럼, 교실까지 충실하게 나를 호위했다. 나는 교실
문 앞에서 숨을 멈추었지만, 에드워드 컬렌은 교실에도 없었다. 참았던
숨을 내쉬며 내 자리에 가 앉았다. 마이크는 얼마 후에 갈 바다여행
이야기를 하며 나를 따라왔다. 그는 시작종이 울릴 때까지 내 책상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종이 울린 다음에야 안타까운 듯 웃어 보인 뒤,
흉측한 파마머리에 치열 교정기를 한 여학생 옆에 가 앉았다. 아무래도
조만간 마아크에게 모종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그리 쉽지는
않을 듯 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촘촘히 연결된 이런 소도시에선
사교술이 대단히 중요하다. 나는 절대로 사교술에 뛰어난 적이 없었던
아이였고, 특히 지나치게 친근하게 구는 남자애들을 다루는 연습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에드워드가 결석해 책상을 혼자 차지하게 됐다는 생각에 일단은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속으로 그 생각을 곱씹었다. 그러나 그가 결석한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라는 뼈아픈 의구심은 좀처럼 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토록 강하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우스꽝스럽고 독선적인
일이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게 사실일 거라는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침내 수업이 모두 끝나고, 체육시간에 배구공에 뺨을 맞는 바람에 생긴


빨간 자국이 옅어지는 사이 나는 재빨리 청바지와 감색 스웨터로 갈아
입었다. 서둘러 여학생 탈의실을 빠져나온 나는 일단 한없이
골든리트리버를 닮은 남자애한테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것에 쾌재를
불렀다. 나는 주차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주차장은 이미 하교하는
학생들로 붐볐다. 트럭에 올라탄 후 가방을 뒤져 필요한 걸 가져왔는지
확인했다.

어제 저녁 나는 찰리가 달걀 프라이와 구운 베이컨 말고는 할 줄 아는


요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와 지내는 동안
부엌일은 내가 맡겠다고 자청했다. 찰리는 기꺼이 나에게 식료품 창고
열쇠를 넘겨주었다. 집 안엔 사실 먹을거리라곤 거의 없었다. 쇼핑 목록을
적은 나는 찬장에서 '식비'라고 적힌 유리병을 찾아 현금을 꺼내왔고, 막
슈퍼마켓에 가려는 참이었다.

열쇠를 돌리니 귀청을 찢을 듯 요란한 엔진 소리가 되살아났다. 나는 트럭


쪽을 돌아보는 놀란 시선을 외면한 채 조심스럽게 후진을 해, 주차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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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나가려고 줄지어 서 있는 자동차 행렬에 합류했다. 고막을 찢을 듯한


엔진음이 다른 사람의 차에서 들려오는 것인 양 외면한 채 차 안에서
기다리다가, 컬렌 남매와 헤일 쌍둥이 남매가 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물론 그들의 차는 번쩍이는 신형 볼보였다. 그간 그들의 얼굴에 완전히
넋이 나가는 바람에 이제껏 옷차림새를 눈여겨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보니 그들은 옷맵시 역시 남달리 빼어났다. 단순한 옷인에도 어딘지 모르게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명품 느낌을 풍겼다. 하긴 잘생긴 외모에 뛰어난
옷맵시 까지 갖추었으니 걸레조각을 걸쳐도 멋들어져 보일 것 같았다.
외모도 후륭한데 돈까지 많다니, 너무 과분한 복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살아온 알량한 경험으로도 세상일은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그나마 그들도 돈으로 이곳 사람들의 호의를 사진 못한 듯했다.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지도 몰랐다. 소외는 그들이 스스로 바란


것임에 틀림없었다. 누구라도 저토록 아름답고 잘생긴 사람들을 문전박대
할 수는 없을 것 같으니까.

다른 아이들처럼 그들도 요란한 내 트럭이 지나가자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모르는척 줄곧 앞만 바라보았고. 마침내 학교를 벗어나자 마음이
놓였다.

슈퍼마켓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남쪽으로 서너 블럭만 가면


고속도로 바로 옆에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니 편안한 느낌이 들어 참
좋았다. 엄마랑 살 때도 식료품 쇼핑은 내 몫이었으므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익숙한 임무에 빠져들었다. 슈퍼마켓은 꽤 규모가 커서,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끊임없이 일깨워주듯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들리지
않아 더 좋았다.

집에 돌아온 나는 먼저 장 본 꾸러미를 모두 내려놓고 여유공간이 있는


곳마다 쑤셔넣었다. 찰리라 언짢아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감자를 알루미늄 포일에 싸서 달군 오븐에 넣은 뒤, 스테이크용 고기를
마리네이드 소스에 담가 냉장고 선반 달걀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저녁준비를 마치고 책가방을 들고 이층으로 갔다. 숙제를 하려다가 먼저


보송보송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젖은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뒤,
처음으로 이메일을 확인했다. 메일이 세 개나 와 있었다. 전부 엄마가 보낸
편지였다.

벨라에게.
도착하자마자 연락해라. 비행기 여행은 어땠니? 지금도 비 오니? 엄마는
벌써 네가 보고 싶다. 플로리다로 갈 짐은 거의 다 쌌는데, 분홍색
블라우스를 통 찾을 수가 없구나. 내가 어디 뒀는지 혹시 넌 아니? 필이
안부 전하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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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나는 한숨을 쉬며 다음 편지를 읽었다. 첫 편지를 쓴 지 여덟 시간 만에


보낸 것이었다.

벨라에게.
왜 아직 답장을 하지 않았니? 뭘 기다리는 거야?
엄마가.

마지막 편지는 오늘 아침에 보낸 것이었다.

이사벨라.
오늘 오후 다섯 시 반까지 너한테 소식이 없으면 찰리한테 전화할 거다.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지만, 엄마는 성미가


급하기로 정평이 난 사람이었다.

엄마, 진정해. 지금 바로 답장 쓸게. 성급하게 행동하지 마세요.


벨라.

그 이메일을 보내지마자 나는 또 한 통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
다 잘 돼가고 있어요. 물론 지금도 밖엔 비가 와. 뭔가 편지에 쓸 만한
일이 생기기를 기다리느라 늦어졌어. 학교생활은 나쁘지 않아. 배운 걸 또
배워서 좀 지겹긴 하지만, 점심시간에 같이 밥 먹을 괜찮은 아이들도 몇 명
만났어.
엄마 블라우스는 세탁소에 있잖아. 엄마가 금요일에 찾기로 했었는데!
찰리가 나한테 트럭을 사줬어요. 놀랍지? 나도 마음에 들어, 낡긴 했지만
굉장히 튼튼해서 나한테는 딱이다 싶어.
나도 엄마가 그리워. 곧 또 편지하겠지만, 그렇다고 5 분에 한 번씩
이메일을 확인하진 않을 거야. 진정하고 마음 놓으세요. 사랑해, 엄마.
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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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폭풍의 언덕]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요즘 영어시간에 읽고 있는


교재이긴 했지만, 찰리가 돌아올 때까지 재미 삼아 다시 읽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던 나는 오븐에서 감자를 꺼내고 스테이크를 석쇠 위에
올려놓으려고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벨라니?"

계단을 내려오는 내 발자국 소리를 들은 아빠가 외쳤다.

그럼 누구겠어요?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빠, 어서 오세요."

"고맙구나."

내가 부엌에서 부산하게 오가는 사이 아빠는 권총 허리띠를 옷걸이에


걸고 부츠를 벗었다. 내가 아는 한 찰리는 경찰 일을 하면서 총을 쏘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총을 잘 손질해 두었다. 내가 어린 시절
이집에 다니러 왔을 때, 아빠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권초에서 총알부터
뺐다. 이제 그는 내가 장난하다 권총으로 스스로를 쏘진 않을 만큼 자랐고,
일부러 권총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우울해 보이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녁 메뉴는 뭐니?"

찰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는 상상력이 뛰어난 요리사였는데, 엄마의


실험적인 요리들은 먹을 만한 것이 못 될 때가 많았다. 찰리가 그렇게
오래된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스테이크하고 구운 감자예요."

내 대답에 그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찰리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부엌에 서 있자니 어색한지 내가 부엌일을


하는 동안 슬며시 거실로 사라져 텔레비전을 보았다. 사실 그러는 쪽이
서로 더 편했다. 스테이크가 익는 동안 나는 샐러드를 만들고 식탁을
차렸다.

저녁준비가 끝나고 찰리를 부르자, 그는 부엌으로 들어서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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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우리는 몇 분 동안 잠자코 식사를 했다. 불편하지는 않았다. 우리 둘 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는 같이 사는데
참 적합한 파트너였다.

"그래, 학교생활은 어떠니? 친구는 좀 사귀었어?"

한참 뜸을 들이다 그가 물었다.

"제시카라는 애랑 수업을 몇 개 같이 들어요. 점심시간엔 그 애


친구들이랑 같이 어울리고요. 마이크라는 애도 있는데 아주 친절해요.
다들 잘해 주는 편이에요."

유별나게 딱 한 사람은 예외지만.

"마이크 뉴튼 말이로구나. 착한 녀석이지. 집안도 괜찮고. 그애 아버지가


교외에서 스포츠용품점을 하시지, 그곳을 거쳐가는 등산객들이 꽤 많아서
돈벌이도 잘 된다더라."

"컬렌 집안에 대해 좀 아세요?"

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컬렌 박사네 말이냐? 물론이지. 컬렌 박사는 훌륭한 사람이야."

"그 집 아이들은...... 좀 다른 것 같아요. 학교에서 잘 어울리지도 않는 것


같더라고요."

찰리가 돌연 화난 표정을 짓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랐다.

"다 여기 주민들 탓이지. 컬렌 박사는 다른 병원에서 일하면 여기보다 열


배는 더 벌 만큼 뛰어난 외과의사다."

중얼거리는 듯했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우리로선 그런 의사를 두게 됐으니 행운이지. 그 사람 아내가 소도시에


살고 싶어한 게 얼마나 다행이냐. 컬렌 박사는 우리 지역의 소중한
재산이고, 그 집 아이들도 전부 행실이 바르고 예절도 깍듯해. 처음 십대
입양아들을 잔뜩 데리고 그 집안이 이사를 왔을 땐 나도 걱정을 했다. 그
애들이 분명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 애들은 하나같이
아주 어른스러워서 나쁜 점이라곤 하나도 찾아 볼 수가 없더구나. 이
고장에 여려 대째 살고 있는 집안 아이들도 그보다 나을 수는 없을 정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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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 집안 사람들은 똘똘 뭉쳐서 거의 격주로 주말마다 야영도


즐긴다더라...... 단순히 새로 이사 왔다고 해서 사람들이 텃세하느라
말들이 많은 게지."

찰리가 그렇게 길게 이야기를 하는 건 난생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는


주민들이 쑥덕이는 이야기에 그동안 몹시 언짢았던 듯했다.

나는 일단 후퇴했다.

"제가 보기에도 꽤 괜찮은 애들 같던데요. 그냥 걔들끼리만 어울리는 것


같아 보여서 제 눈에 띄었나 봐요. 다들 외모가 아주 뛰어나던 걸요."

나는 좀더 칭찬처럼 들리기를 바라며 덧붙였다.

"네가 그 의사 선생을 못 봐서 그래."

찰리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 친구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니 다행이지. 간호사들이 그


친구랑 나란히 있으면 일에 정신을 집중하기가 어렵다고 난리라더구나."

우리는 다시 침묵을 지키며 식사를 마쳤다. 내가 설겆이를 시작하자,


찰리가 식탁을 치웠다. 그는 텔레비전 앞으로 돌아갔고 나는 식기세척기가
없어 손으로 설겆이를 마쳤다. 그러곤 이층으로 올라가 내키지 않았지만
삼각함수 숙제를 펼쳤다. 이미 그런 일과가 습관처럼 굳어진 듯 했다.

그날 밤엔 드디어 빗소리가 조용해졌다. 지쳐 있었으므로 나는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그 주는 내내 별일 없이 지나갔다. 나는 반복되는 학교수업에 익숙해졌다.


금요일쯤 되자 이름까지는 다 몰라도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얼굴은
모두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나와 같은 팀 아이들도 체육시간에 나에게
공을 패스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과, 상대편에서 나를 일부러 노리고
공격을 하면 재빨리 내 앞을 막아서야 한다는 것을 깨닫았다. 물론 나느
기쁜 마음으로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에드워드 컬렌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날마다 컬렌 집안의 나머지 아이들 넷만이 식당으로 들어설 때까지


초조하게 사방을 살폈다. 그들이 나타나면 그제야 나는 긴장을 풀고 대화를
나누며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우리 이야기의 중심은 마이크가 중심이
되어 2 주 뒤에 라푸시 해양공원에 놀러 가는 일이었다. 나도 초청을
받았는데, 가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예의상 가겠다고 승낙했다. 그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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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가면 여기보다 따뜻하고 건조하겠지.

금요일이 되자 에드워드가 교실에 와 있을까 봐 염려하지 않고 더할 나위


없이 편한 마음으로 생물시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분명
자퇴를 한 것 같았다. 나는 그 애를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가 계속
결석하는 것이 나 때문이라는 터무니없는 걱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내가 포크스에서 보낸 첫 일주일은 별 일 없이 지나갔다. 빈 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찰리는 주말에도 대부분 일을 했다. 나는
집안 청소를 하고 숙제를 미리 다 해치운 다음 엄마에게 거짓으로 아주
쾌활한 분위기의 이메일을 보냈다. 토요일엔 차를 몰고 시립도서관을
찾았지만, 장서량이 하도 적어 굳이 열람카드를 만드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날을 잡아 올림피아나 시애틀에 가서 큰 서점을 찾아봐야
할 듯했다. 나는 멍하니 내 트럭의 연비가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다가,
얼른 진저리치듯 그 생각을 떨처버렸다.

주말 동안에는 빗발이 계속 가는 편이라 잠을 실컷 잘 수 있었다.

월요일 아침 학교 주차장에선 사람들이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다 알지 못했지만, 모두에게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다. 오늘
아침엔 다른 날보다 더 추었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영어시간에
마이크는 익숙한 듯 내 옆자리에 앉았다. 수업 중에 갑가지 [폭풍의 언덕]
에 관한 쪽지시험을 봤다. 문제는 단순하고 직설적이어서 아주 쉬웠다.

그 무렵, 나는 여기로 전학 오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건물 밖으로 나가니, 바람이 새하얀 알갱이를 머금고


세차게 휘몰아치면서 우리를 감쌌다. 아이들이 신이 나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싸늘한 바람이 내 뺨과 코를 스쳤다.

"우와, 눈이 오네."

마이크가 말했다.

나는 길가에 쌓이기 시작한 작은 솜뭉치 같은 물체가 내 얼굴을 스치며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모양을 쳐다보았다.

"윽."

눈이네. 좋은 시절 다 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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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는 놀라는 표정이었다.

"눈이 싫어?"

"응. 비가 내리기엔 너무 춥다는 뜻이잖아."

두말하면 잔소리지.

"게다가 눈이라면 송이송이 내리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나하나 다른


모양의 입자로 말이야. 이건 그냥 면봉 끝을 잘라 뿌리는 것 같잖아."

"눈 오는거 처음 보니?"

마아크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물론 봤지."

내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텔레비전에서."

마이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때 축축하고 커다란 눈뭉치가 그의


뒷머리를 강타했다. 우린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보느라 동시에 돌아섰다.
다음 강의실이 있는 방향과 반대로 등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는 에릭이 내
눈에도 의심스러워 보였다. 마이크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그는
몸을 숙여 질척한 반죽 같은 눈덩이를 뭉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에 만나자. 사람들이 축축한 물건을 던지기 시작하면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버릇이 있거든."

내가 계속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마이크가 멀어지는 에릭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오전 내내 아이들은 하나같이 신이 나서 눈 이야기를 떠벌였다. 올해


첫눈인 모양이었다. 나는 줄곧 입을 다물었다. 그래, 비보다 덜 눅눅하긴
하지. 양말에 스며들어 녹기 전까지는.

스페인어 수업이 끝나자 나는 바짝 긴장한 채로 제시카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눈뭉치가 사방에서 날아다녔다. 나는 필요한 경우 방패로 쓸
요량으로 파일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제시카는 그런 내가 우스운 듯
했지만,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알고 나에게 눈뭉치를 던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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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식당 건물에 들어서자, 마이크가 뾰족하게 세운 머리칼에서


눈녹은 물을 뚝뚝 흘리며 우리에게 다가와 유쾌하게 웃어댔다. 음식을 골라
계산하는 줄에 서서 기다리는 사이, 마이크와 제시카는 즐겁게 눈싸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습관적으로 곁눈질 해 문제의 테이블을 흘끔 보았다.
그리고 곧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구석 테이블에는 다섯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제시카가 내 팔을 당겼다.

"왜 그래? 넌 뭐 먹을래?"

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귀가 화끈거렸다. 내가 꺼림칙해할 이유는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잘못한 일이 없으니까.

"벨라가 왜 저러지?"

마이크가 제시카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은 그냥 음료수나 마실래."

내가 대꾸하며 줄 끝으로 다가갔다.

"배 안 고파?"

제시카가 물었다.

"사실 속이 좀 안 좋아."

여전히 바닥만 내려다보며 내가 말했다.

나는 친구들이 계산을 하는 동안 기다렸다. 그들을 따라 테이블에 앉고


부터는 줄곧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탄산음료를 천천히 한 모금 마시자 위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마이크는


필요 이상으로 염려하며 두 번이나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더 아픈체 해서 양호실로 달아나 다음 시간
수업을 빼먹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도망쳐선 안 돼.

나는 컬렌 집안 아이들인 앉은 테이블을 한 번만 더 바라보기로 결심


했다. 만일 그가 나한테 눈울 부라린다면, 겁쟁이답게 생물수업을
빼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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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숙인 채 속눈썹 아래로 살며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그들 가운데 내 쪽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족므 더
들었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에드워드, 재스퍼, 에밋의 머리는 온통 눈이 녹아


촉촉히 젖어 있었다. 에밋이 머리를 흔들어 물기를 휘날리자 앨리스와
로잘리가 몸을 피했다. 그들 또한 눈 내리는 날씨를 즐기고 있었는데,
평범한 아이들과 달리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웃음과 장난기 말고도 그 아이들이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딱히 뭐가 달라졌는지 꼬집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에드워드를 가장 주의
깊게 살폈다. 아마도 눈싸움 때문에 상기된 듯 확실히 그의 피부는 훨씬 덜
창백해 보였고 눈가의 어두운 그림자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외에도 뭔가 더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달라진 점을 찾아내려고 애쓰며
생각에 잠긴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벨라, 뭘 보고 있는 거야?"

제시카가 내 시선이 향한 곳을 확인하며 물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눈길이 갑자기 내 쪽으로 향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머리칼로 온통 얼굴을 가렸다. 시선이 마주친 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분명 지난번에 봤을 때처럼 험악하거나
적대적인 느낌이 아니었다. 그냥 좀 불만스럽고 호기심에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드워드 컬렌이 너를 바라보고 있어."

제시카가 얼굴을 내 귓가에 대고 키득거렸다.

"화난 것 같아 보이진 않지?"

어쩔 수 없이 내가 물었다.

"응. 왜 화를 내겠어?"

제시카는 내 물음에 어리둥절 한 듯했다.

"아무래도 걔가 날 싫어하는 것 같아."

내가 실토했다. 아직도 속이 메슥거렸다. 나는 팔에 이마를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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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렌 집안 아이들은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 뭐랄까, 다른 애들이 하도


하찭아서 안중에도 없는 거지. 그런데 에드워드가 아직도 널 보고 있는데?"

"그만 좀 봐."

내가 제시카를 나무랐다. 친구는 낄낄 웃어대면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제시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완력으로라도 그렇게 하게 만들려고 고개를
살짝 들어 확인했다.

바로 그때 마이크가 끼어 들었다. 그는 방과 후에 주차장에서 대대적인


눈싸움을 할 계획이니 우리도 동참하라고 했다. 제시카는 신이 나서
찬성했다. 제시카가 마이크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마이크가 무엇을
하자고 해도 거들고 나설 기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론
주차장이 텅 빌 때까지 체육관에 숨어 있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점심시간 내내 나는 조심스럽게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는 자신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그 애의
표정이 화나 보이진 않았으므로, 생물수업에는 들어갈 생각이었다. 또 그
애 옆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겁이 나 뱃속이 다시 뒤틀렸다.

마이크는 날아다니는 눈뭉치의 표적으로 인기가 높은 편이라 평소처럼 그


애와 나란히 교실까지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식당 문을
나선 순간 나를 제외한 친구들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길가에 눈이 쌓였던 흔적은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나는 내심
기뻐하며 점퍼에 달린 모자를 썼다. 체육시간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갈 수
있겠군.

마이크는 4 번 건물로 가는 내내 투덜거렸다.

교실에 들어선 나는 아직 책상이 비어 있는 걸 보고 안도했다. 배너


선생님은 교실을 돌아다니며 책상마다 현미경과 슬라이드가 담긴 상자를
하나씩 올려놓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나도록 수업은 시작되지 않았고,
아이들은 계속 웅성거렸다. 나는 일부러 교실 문을 외면한 채 공책 표지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내 옆 자리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있던 무늬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안녕."

노래하듯 유연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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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애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는 데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책상 끝으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지만 의자는 분명 내 쪽으로
돌린 상태였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칼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방금 헤어 젤 광고 촬영을 끝내고 온 듯 했다. 눈부시게 잘생긴 그의 얼굴은
다정한 표정을 만들어냈고, 완벽한 입술엔 살짝 웃음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조심스러웠다.

"내 이름은 에드워드 컬렌이야. 지난주엔 소개할 기회가 없었지. 네가


바로 벨라 스완이구나."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모든 게 내 착각이었나? 오늘 본 그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했다. 그가 기다리고 있으니 나도 어서 뭔가 말해야 했다. 그런데
판에 박힌 인사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내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가 짧게, 매혹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네 이름은 다들 알고 있는 거 아닌가? 온 도시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뭐."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말이 사실에 가깝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왜 나를 벨라라고 불렀느냐는 뜻이야."

나는 바보처럼 계속 물고 늘어졌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사벨라가 더 좋아?"

"아니, 벨라가 좋아. 하지만 찰리는, 우리 아빠 말이야. 내가 안 들을 땐


이사벨라라고 부르시는 것 같거든.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으로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아아."

그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고맙게도 배너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했다. 나는 실험과정을 설명하는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상자에는 슬라이드가 무작위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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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우리는 각자 실험 파트너와 함께, 교과서를 보지 않고 양파뿌리


세포 슬라이드를 현미경으로 관찰해 체세포분열 단계를 확인하고 기록지에
이름을 적어야 했다. 20 분 뒤에 선생님이 돌아다니며 어느 팀이 세포분열
단계를 잘 구분했는지 확인할 것이다.

"시작들 해라."

선생님이 말했다.

"레이디 퍼스트니까 먼저 할래?"

에드워드가 물었다. 고개를 든 나는 조금 비딱하게 싱긋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워, 멍청이처럼 그저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싫으면 내가 먼저 해도 돼."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분명 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의아해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야, 내가 먼저 할게."

내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나는 조금 뽐내고 있었다. 이미 해봤던 실험이라 무얼 찾아봐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려울 게 없었다. 첫 번째 슬라이드를 현미경에 밀어넣고
재빨리 40 배로 확대시킨 다음 곧바로 슬라이드를 확인했다.

내 짐작은 곧 확신이 되었다.

"전기야."

"내가 좀 봐도 될까?"

내가 슬라이드를 치우려 하자, 그가 물으면서 동시에 나를 말리느라 내


손을 잡았다. 수업 시작 전에 줄곧 눈뭉치를 쥐고 있었는지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가 내 손을 잡은 순간, 우리 사이에 전류가
흐르기라도 한 듯 따끔거렸다.

"미안해."

그가 얼른 손을 치우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다시 현미경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덜덜 떨며, 나보다 더 빨리 슬라이드를 확인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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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맞네."

그는 내 의견에 동의한 뒤 우리 팀의 실험 기록지 맨 위 칸에 정갈한


글씨체로 답을 적었다. 그는 재빨리 첫 번째 슬라이드를 치우고 두 번째
슬라이드를 올려놓고는 유심히 살폈다.

"후기다."

그는 중얼거리면서 동시에 답을 적었다. 나는 무관심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도 좀 볼까?"

그는 씩 웃으며 내 쪽으로 현미경을 밀어주었다. 나는 현미경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지만 결과는 실망이었다. 쳇, 얘 말이 맞았잖아.

"세 번째 슬라이드 줄래?"

나는 시선을 외면한 채 손을 내밀었다. 그가 슬라이드를 건넸다. 나와


다시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간기야."

나는 그가 요구하기 전에 먼저 현미경을 밀어주었다. 그는 아주 잠깐


들여다본 뒤 답을 적었다. 그가 현미경을 보는 사이 내가 답을 적을 수도
있었지만, 그의 우아하고 깔끔한 글씨체에 기가 죽은 상태였다. 형편없는
내 글씨로 기록지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다른 아이들이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실험을 마쳤다. 마이크는


그의 파트너와 슬라이드 두 개를 거듭 다시 비교하고 있었고, 어떤
아이들은 책상 밑으로 교과서를 펼쳐놓기도 했다.

달리 할 일이 없어진 나는 그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하지만 허사였다. 내가 고개를 들자 그는 전처럼 형언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달라 보이는 이유를 알아챘다.

"너 렌즈 꼈니?"

생각 없이 내뱉은 내 질문에 그는 어리둥절한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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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 네 눈이 어딘가 달라 보이는 것 같아서."

그는 어깨를 으쓱한 뒤 시선을 돌렸다.

나는 뭔가 달라졌다는 걸 확신했다. 지난번에 나를 노려보던 새까맣게


비차는 눈동자가 아직도 생생하다. 창백한 피부와 붉은빛 도는 갈색
머리칼에 대조되어 더욱 두드러졌던 눈동자. 그런데 오늘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다른 색이었다. 버터맛 사탕보다는 조금 진한, 황금빛 기운이 도는
묘한 황토색 이었다. 콘택트렌즈에 관한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포크스에서
지내면서 확실히 내가 미쳐가고 있는지도 모르지.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전처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우리가 빈둥거리고 있는 걸 본 배너 선생님이 다가왔다. 선생님은 완성된


실험 기록지를 어깨너머로 살피더니, 이어 꼼꼼히 답을 확인했다.

"에드워드, 이사벨라에겐 현미경을 들여다 볼 기회도 주지 않은 거니?"

선생님이 물었다.

"아뇨, 벨라가 다섯 개 중에 세 개나 확인했는데요."

에드워드가 내 이름을 자연스럽게 바꿔 부르며 대답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의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전에 이 실험을 해본 적 있니?"

나는 겸연쩍어 웃어 보였다.

"양파 뿌리론 안 했어요."

"송어 포배 세포로 했나?"

"네."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닉스에서 우수학생 진학반에 있었니?"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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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선생님은 잠시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너희 둘이 실험 파트너가 돼서 다행이구나."

배너 선생님은 뭔가 더 중얼거리며 다른 자리로 갔다. 나는 다시 공책에


낙서하기 시작했다.

"눈이 그쳐서 아쉽지?"

에드워드가 물었다. 마치 억지로라도 나와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강박증이 다시 온몸을 휘감았다. 점심시간에 나와
세기카가 한 이야기를 들은 건가? 그래서 내 생각이 잘못됐다고
증명이라도 해 주려는 것일까?

"아니, 별로."

나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연기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아직도 바보 같은 의구심을 떨쳐버리느라 애를 쓰고 있었으므로 다른 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추위를 싫어하는구나."

그는 묻는 게 아니라 아예 단언하고 있었다.

"습기가 싫은 건지도."

"너한테 포크스는 살기 힘든 곳이겠네."

"아마 넌 상상도 못할걸."

내가 모호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영문인지 그는 내 대답에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만 보면 정신이 산란해졌으므로, 나는 예의상 꼭 필요하지 않으면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럼 여기 왜 온 거야?"

나한테 그런걸 단도직입으로 따지듯 물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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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좀 복잡해."

"설명 해 주면 안될까?"

그가 대답을 종용했다.

나는 한참 머뭇거리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진한 황금빛 눈동자를 보고 혼란에 빠진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을
열었다.

"엄마가 재혼을 하셨거든."

"그런 거라면 별로 복잡할 것도 없네."

그는 내 말을 반박하는 듯하더니 돌연 동정심을 발휘했다.

"그게 언제였지?"

"지난 9 월이야."

내 귀에도 내 목소리가 슬프게 들렸다.

"새아버지가 네 맘에 안 들었던 거군."

에드워드는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필은 좋은 사람이야. 너무 어리긴 하지만 꽤 괜찮아."

"그런데 왜 그분들하고 안 살지?"

나는 그가 흥미를 보이는 이유를 통 알 수가 없었지만, 에드워드는 지루한


내 인생사가 대단히 중요한 무엇이라도 되는 양 계속해서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았다.

"필은 여행을 많이 다녀. 야구 선수거든."

내가 건성으로 웃어 보였다.

"나도 아는 선수니?"

그도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마 못 들어봤을걸. 그렇게 뛰어난 선수는 아니야. 마이너리그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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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거든. 아무튼 원정 경기를 많이 다녀."

"그래서 너희 어머니가 새 남편하고 같이 여행을 다니려고 널 이곳으로


보내겼구나."

그는 이번에도 자기 짐작을 사실처럼 이야기했다.

못마땅해진 나는 살짝 턱을 치켜올렸다.

"아니야. 엄마가 날 여기로 보내신 게 아니라, 내가 오기로 결정한 거야."

에드워드의 눈썹이 꿈틀 접히며 미간이 좁아졌다.

"이해가 안 되는군."

그는 필요 이상으로 낙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왜 얘한테 이런 걸 설명해야 하지? 에드워드는


호기심을 확연하게 드러낸 채 계속 나를 응시했다.

"처음엔 엄마가 집에서 나랑 같이 지냈지만, 필을 그리워하셨어. 그


때문에 엄마가 불행해하는 것 같아서...... 차라리 이번 기회에 찰리하고 잘
지내봐야 겠다고 결심한 거야."

나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이젠 네가 불행하잖아."

"그래서 뭐?"

"불공평하다고."

그는 어깨를 으쓱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강렬했다.

나는 웃음기도 없이 웃는 소리를 냈다.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거라는 말 혹시 못 들어봤니?"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긴 하다."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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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체 왜 얘가 아직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볼까 의아해하며 대꾸했다.


눈동자가 알 만하다는 듯 빛을 발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연기가 꽤 뛰어난 편이구나. 하지만 넌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마음고생을 하고 있어."

나는 다섯살 짜리 어린애처럼 혀를 쏙 내밀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그에


인상을 쓴 뒤 고개를 돌렸다.

"내 말이 틀린가?"

나는 애써 그를 무시했다.

"틀릴 리 없을걸."

그가 잘난체 하듯 중얼거렸다.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인데?"

내가 짜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내 시선은 줄곧 학생들 사이를 돌고


있는 선생님을 향해 있었다.

"그거 참 좋은 질문이다."

에드워드는 혼잣말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몇 초 동안 침묵이 이어지자, 나는 그게 내 실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칠판을 향해 얼굴을 찡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 화났니?"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돌아보고는, 또다시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꼭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나 자신한테 더 화가 나. 내 얼굴은 생각이 너무


잘 드러나. 우리 엄만 언제나 내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알겠다고
하시더라."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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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나는 네 표정을 읽어내기가 참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이제껏 그는 내 이야기를 듣고 제멋대로 짐작하며 잘난척 했지만,


이번에는 진심인 것 같았다.

"원래 남의 생각을 잘 읽니?"

"대개는 그래."

에드워드는 새하얗고 완벽한 치열을 드러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때 배너 선생님이 주목하라고 말했으므로 나는 내심 안도하며


고개를 돌려 선생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나를 혐오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이 이상하고 잘생긴 남자애한테 방금 침울한 내 인생에 대하여
털어놓았다는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조금 전까지는 나와 이야기하는
데 열중하는 듯 했지만, 곁눈으로 살펴보니 이제는 또다시 나를 피해 멀리
앉아, 양손에 잔뜩 힘을 주어 책상 끝을 움켜잡고 있었다.

내가 현미경으로 별 어려움 없이 찾았던 세포 모양이 담긴 슬라이드를


생물 선생님이 오버헤드 프로젝터로 비추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수업에 열중하려고 애를 썼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드디어 수업종이 울리자 에드워드는 지난주 월요일에 그랬던 것처럼


재빠르면서도 우아하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나 또한 지난 월요일과 똑같이
놀란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마이크가 대뜸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내 책을 대신 챙겨 들었다. 나는


꼬리를 살랑거리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마이크가 한숨을 쉬었다.

"완전 끔찍했어. 다 똑같아 보이는 거 있지? 넌 컬렌이랑 짝이어서 운이


좋았던 거야."

"난 별로 어렵지 않던데."

당연한 듯 짐작하는 데 발끈해서 말했지만, 이내 쏘아붙인걸 후회했다.

"사실 전에 해 본 실험이거든."

나는 마이크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 전에 얼른 덧붙였다.

"오늘은 컬렌이 너한테 꽤 다정하게 구는 것 같더라."

벽에 걸어둔 비옷을 걸치는 사이 그가 말했다. 마이크는 그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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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무관심 한 척 대꾸했다.

"지난주 월요일엔 대체 왜 그랬나 몰라."

체육관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마이크의 수다에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고, 체육시간에도 내내 마찬가지였다. 마이크는 오늘 나와 같은
팀이었다. 그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아여 자기 자리뿐만 아니라 내 자리까지
모두 커버해 주었으므로, 나의 공상은 서브할 차례가 되었을 때를 빼곤 별
방해없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내가 서브할 때마다 우리팀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몸을 피했다.

수업이 끝나고 주차장으로 걸어갈 무렵엔 빗발이 가늘어져 거의 가랑비가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뽀송뽀송한 차 안이 훨씬 더 좋았다. 모처럼
시끄러운 엔진 소음 걱정을 하지 않고 히터를 켰다. 방수 점퍼의 지퍼를
열고 모자를 벗고 나서, 집에 가는 동안 히터를 틀고 젖은 머리가 마르도록
살살 흔들었다.

주변에 차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바로 그순간 꼼짝


않고 서 있는 희끄무레한 형체를 발견했다. 에드워드 컬렌이 내 트럭에서
자동차 세 대쯤 떨어진 곳에 세워둔 볼보에 기대어 내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트럭을 후진시키다가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녹슨 도요타 자동차를 거의 받을 뻔했다. 다행히 너무 늦지 않게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었다. 내 트럭에 부딪혔다간 단숨에 고철덩어리가
되고 말 것 같은 소형차였다. 나는 여전히 그를 외면한채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후진을 했고, 이번엔 성공했다. 볼보 앞을 지나며 나는 곧장
앞만 바라봤지만, 얼핏 보기에도 그가 소리 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3.이상한 현상

아침에 눈을 뜨니 뭔가 좀 달라져 있었다.

빛 때문이었다. 흐린 날 숲에서 뿜어 나오는 청회색 기운은 여전했지만,


조금 더 밝은 느낌이었다. 나는 베일처럼 창밖을 가리던 안개가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는걸 깨달았다. 벌떡 일어나 밖을 내다본 다는 경악하고
말았다.

새하얀 눈이 마당은 물론이고 내 트럭 지붕과 길까지 두툼하게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어제 내린 비가 단단히
얼어붙어 나무에 매달린 고드름은 환상적인 장관을 연출했지만, 도로는
죽음의 빙판으로 변해 있었다. 마른 땅에서도 걸핏하면 넘어지는 나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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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지금 다시 침대로 들어가 잠이나 자는게 안전할 듯 했다.

찰리는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기도 전에 출근하고 없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찰리와 함께 사는건 나 혼자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나는
외롭기는커녕 그 호젓함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시리얼 한 그릇을 비운 뒤 오렌지주스를 병째로 꺼내


꿀꺽꿀꺽 마셨다. 어쩐지 학교에 가는게 즐거웠고, 그래서 겁이 났다. 내가
기대하고 있던 대로 공부에 자극이 되는 학교 환경이라든지, 새로 사귄
친구들 때문이 아니란건 나도 잘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에드워드
컬렌을 보려고 학교에 빨리 가고 싶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무뇌아처럼 생각 없이 주절거린 어제 일을 생각하면 그를 철저히 피해


다녀야 할 판이었다. 게다가 그에겐 수상한 구석도 있으니까. 왜 자기 눈에
대해 거짓말을 했을까? 나는 아직도 가끔 그가 뿜어내는 적대감을
느끼지만, 그의 완벽한 얼굴을 상상할 때마다 여전히 말문이 막혔다. 물론
그와 내가 노는 물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
그늘 만나기를 이토록 고대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진입로의 얼어붙은 벽돌 위를 걸어가며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마침내 트럭에 도착한 순간 휘청하기는 했지만 가까스로 사이드미러를
붙잡고 매달릴 수 있었다. 분명 나에게 악몽 같은 날이 될 게 틀림없다.

학교까지 운전하는 길에, 나는 넘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꾸


떠오르는 에드워드 컬렌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이크와 에릭, 그리고
이곳 십대 남자애들이 나에게 보이는 반응이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내 모습은 분명 피닉스에 있을 때와 똑같았다.
거기선 남자애들이 어색한 사춘기 단계를 천천히 거치는 나의 성장과정을
모두 지켜보았기 때문에 여전히 나를 어리게 생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어쩌면 새로운게 지극히 드물거나 거의 없는 이곳에서 내가 새로운
인물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내가 꼴사나울 만큼 운동신경이 둔한 점에
대해서도, 오히려 여기 남학생들은 곤경에 빠진 연약한 아가씨 같은 느낌을
받는지 한심하기보다는 사랑스럽다고 여기는 듯 했다. 이유가 어떻든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마이크의 호의와 기사도 정신을 철저히
발휘하는 에릭의 행동은 당혹스러웠다. 차라리 예전처럼 무시당하며 지낼
때가 더 좋았던 걸까? 잘 모르겠다.

내 트럭은 검게 얼어붙은 아스팔트 위에서도 아무 문제 없는 듯했다.


그래도 중앙선을 넘어가는 교통사고를 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학교에 도착해 트럭에서 내린 나는 왜 그토록 운전에 문제가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뭔가 반짝이는 은빛이 눈에 들어와 트럭 뒤쪽으로 조심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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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 바퀴를 살폈다. 뒷바퀴엔 가느다란 스노우 체인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얽혀 있었다. 찰리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내 트럭에 스노우
체인을 감아놓은 것이었다. 갑자기 목이 메었다. 나는 살뜰한 보살핌을
받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찰리의 말없는 배려가 몹시도
뜻밖이었다.

트럭 뒷모서리 옆에 서서 스노우 체인이 불러온 갑작스런 감정의 파도와


싸우느라 애를 쓰고 있던 나는 문득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귀에 거슬리는
요란한 금속성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동시에 여러 가지를 보았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듯


슬로모션으로 움직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 대신 내 머리에서 솟아나온
아드레날린이 평소보다 뇌를 빨리 작동시킨 듯, 나는 단번에 여러 가지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컬렌이 자동차 네 대를 사이에 두고 서서 경악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똑같이 충격으로 얼어붙은 수많은
얼굴의 바다 가운에 유독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한
파란색 승합차 한 대가 얼어붙은 주차장을 빙글빙글 돌며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미끄러져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차는 내 트럭
뒷모서리를 들이받기 직전이었는데, 나는 바로 두 자동차 사이에 서
있었다. 눈을 감을 시간조차 없었다.

승합차가 트럭 모서리에 부딪쳐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기 바로 전,


뭔가 나를 세게 밀쳤다. 그러나 내가 예상했던 방향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아스팔트에 머리를 부딪친 나는 뭔가 단단하고 차가운 것이 나를 바닥에
짓누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나는 트럭 바로 옆에 주차되어 있던 황갈색
자동차 뒤쪽 아스팔트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승합차가 아직도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다른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트럭 모퉁이에 부딪쳐 방향을
바꾼 승합차는 여전히 빙글빙글 돌며 미끄러져 또 한번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낮게 내뱉는 욕설이 들려오자, 나는 그제야 누가 나와 함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기다란 두 팔이
나를 감싸며 뻗어나가더니, 승합차가 내 얼굴에서 30 센티미터쯤 떨어진
곳에 푸르르 떨며 멈췄다. 커다랗고 하얀 두 손이 닿은 승합차 옆구리
부분이 움푹 파여 있었다.

곧이어 손이 움직였다. 얼마나 빠른지 희미한 형체만 보였다. 한 손이


불쑥 승합차 차체 밑으로 들어가더니, 곧이어 내 몸이 뭔가에 끌려나왔다.
헝겊인형 다리처럼 흔들거리며 딸려나온 내 다리가 황토색 승용차
타이어에 부딪혔다. 이어 고막을 찢는 듯한 쇳소리가 들려오고, 방금 전 내
다리가 놓여 있던 자리에 승합차가 내려앉으면서 아스팔트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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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조각을 토해냈다.

턱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일 초 정도의 정적이 흐른 뒤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소동 속에서 여러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모든 외침보다 훨씬 또렷하게, 낮지만 흥분해
있는 에드워드 컬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라, 괜찮니?"

"난 괜찮아."

내 목소리가 아주 이상하게 들렸다. 일어나 앉으려던 나는 그가 아직 내


몸을 꽉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조심해. 머리를 꽤 세게 부딪힌 것 같더라."

내가 몸을 뒤채자 그가 경고하듯 말했다.

그제야 왼쪽 귀 위쪽이 욱신욱신 쑤시는게 느껴졌다.

"아앗."

내가 놀라 외쳤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놀랍게도 그는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대체......"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몸을 추스르려 애쓰며 말꼬리를 흐렸다.

"넌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나한테 왔어?"

"난 바로 네 옆에 서 있었어."

그가 다시 진지하게 대꾸했다.

내가 옆으로 몸을 틀어 일어나자 그도 내 허리에 둘렀던 팔을 풀고 좁은


공간에서 최대한 멀리 비켜 앉았다. 온통 걱정으로 가득 찬 그의 표정을
바라보던 나는 강렬한 황금빛 눈동자에 또 한번 이성을 잃었다. 내가 뭘
묻고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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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눈무을 흘리며 달려온 사람들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다 우리에게도 외쳐댔다.

"움직이지 마!"

누군가 말했다.

"타일러를 차 안에서 꺼내야 해!"

또 다른 누군가 외쳤다.

우리 주변에서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나는 일어서려 했지만


에드워드의 차가운 손이 내 어깨를 내리눌렀다.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어."

"춥단 말이야."

내가 불평하자 놀랍게도 그가 숨을 죽여 쿡쿡 웃었다. 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웃음소리였다.

"넌 저쪽에 있었어. 네 차 옆에 말이야."

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말하자, 그는 갑자기 웃음을 그쳤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니야."

"내가 분명히 봤어."

우리 주변은 온통 혼란의 도가니였다. 어른들의 굵은 목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논쟁을 이어갔다. 내 말이 옳다는걸
인정하게 만들고 말겠어.

"벨라, 난 네 옆에 서 있다가 너를 끌어당긴 거야."

그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전달하는 사람처럼 준엄한 눈빛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바라보았다.

"아니야."

내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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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제발 부탁이야, 벨라."

"이유가 뭔데?"

"날 믿어."

그가 부드럽지만 압도당할 수 밖에 없는 힘이 담긴 목소리로 애원했다.


어느덧 사이렌 소리도 들려왔다.

"나중에 다 설명해 주겠다고 약속할 거야?"

"좋아."

갑자기 짜증이 난 듯 그가 쏘아붙였다.

"좋아."

나도 화가 나서 똑같이 대꾸했다.

응급 구조 요원 여섯 명과 선생 두 명이 달려들어 승합차를 밀어 옮긴
다음에야 우리가 있는 곳으로 들것을 가져올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한사코
들것에 실려가기를 거부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그 몹쓸 배신자는
내가 머리를 부딪혔으니 뇌진탕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들은 내 목을 받침대로 고정시켰고, 나는 창피해서 죽고만
싶었다. 전교생이 다 몰려온 듯 했고,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앰뷸런스
뒤에 실리는 나를 지켜보았다. 에드워드는 걸어서 앞좌석에 올라탔다.
나는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나를 안전하게 데려가기 전에 스완 서장님까지


현장에 도착했다.

"벨라!"

들것에 누운 나를 알아본 찰리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전 멀쩡해요, 찰......, 아니 아빠. 하나도 안 다쳤어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응급구조요원에게 내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나는 머릿속에서 아우성을 치며 뒤섞여 되풀이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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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들을 놓고 고민하느라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나를 들어올려


사고현장에서 멀어질 때, 황토색 차 범퍼가 깊이 파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에드워드의 어깨 곡선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아주 또렷해서, 마치 그가 차에 기댄 채 몸을 지탱하면서 금속 프레임이
굽어질 만큼 힘을 쓴 것 같았다.

이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그의 가족들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못마땅한


표정에서 분노에 찬 얼굴까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에드워드의 안전을 염려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방금 본 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내가


미쳤다는 전제만 빼놓고서.

물론 앰뷸런스는 병원까지 경찰차의 호위를 받았다. 사람들이 나를


들것째 차에서 내려 옮기는 동안 몹시 민망했다. 에드워드가 제 발로
뚜벅뚜벅 걸어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는 걸 보니 더욱 열이 올랐다.

사람달은 길게 한 줄로 놓인 침대 중에서 파스텔 색상 무늬가 들어간


커튼이 달린 응급실로 나를 옮겼다. 간호사가 내 팔에 혈압계를 두른 뒤
혀밑에 체온계를 꽂았다. 아무도 나를 배려해 커튼을 쳐주지 않았으므로,
나 또한 바보처럼 목 보호대를 계속 하고 있을 의무는 없다고 생각했다.
간호사가 멀어지자 나는 재빨리 목 보호대를 풀어 침대 밑으로 던졌다.

병원 직원들이 또 한번 부산하게 움직이더니 또 한 대의 이동침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피에 젖은 붕대를 머리에 단단히 감고 실려 들어온
사람은 정치사회 수업을 같이 듣는 타일러 크로울리였다. 타일러의 상태는
나보다 백 배는 나빠 보였다. 그런대도 그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벨라, 미안해!"

"난 괜찮아. 너야말로 심각해 보이는데, 괜찮니?"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간호사들이 피에 젖은 붕대를 풀기


시작했고 그의 이마와 왼쪽 뺨 전체를 뒤덮은 찰과상이 드러났다.

그는 내 질문을 무시했다.

"내가 널 치어 죽이는 줄 알았어! 너무 빨리 달리다가 빙판을 만나는


바람에......"

간호사가 얼굴을 닦기 시작하자 그가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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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마. 결국 날 치지도 않았잖아."

"어떻게 그렇게 빨리 비켰어? 분명히 거기 있는 걸 봤는데, 금세


없어졌더라......"

"그게...... 에드워드가 날 잡아당겨줬어."

타일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에드워드 컬렌 말이야. 내 옆에 서 있었거든."

나는 언제나 거짓말에 서툴렀다. 내가 듣기에도 전혀 그럴듯하지 않았다.

"컬렌이? 난 못 봤는데...... 어휴, 모든게 너무 순식간이라 그랬나 보다.


걘 괜찮은가?"

"그런 것 같아. 걔도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사람들이 걔는 들것에도 안


태우던걸."

역시 내가 미친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본 걸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번엔 사람들이 내 침대를 밀고 머리 엑스레이를 찍으러 갔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고, 내 말이 옳다는 게 밝혀졌다.
뇌진탕도 아니었다. 내가 그만 가봐도 좋은지 묻자 간호사는 먼저 의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응급실에서 죽치고
기다리며, 끊임없는 타일러의 사과와 나중에 빚을 갚겠다는 약속을
들으면서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나는 멀쩡하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타일러는 계속해서 자책했다. 결국 나는 눈을 감고 그를 무시했다.
그런데도 그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반성했다.

"잠이 들었나?"

감미롭고 멋진 목소리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에드워드가 내 침대 발치에 서서 씩 웃고 있었다. 나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아서 남드이 보면 거의 추파를 던지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에드워드, 정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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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러가 입을 열자, 에드워드는 한 손을 들어 그의 말문을 막았다.

"피 한방울 안 흘렸으니 사과할 거 없어."

그렇게 말하며 에드워드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 보였다. 그는 타일러의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며 다시 싱긋 웃었다.

"검사 결과는 어땠어?"

"아무 이상 없는데도 못 보내주겠대. 넌 어떻게 우리들처럼 이동침대에


묶이지도 않고 마음대로 돌아다녀?"

내가 투덜거렸다.

"다 연줄이 있어서 그런 거지. 하지만 염려 마, 너도 구해주려고 온 거


니까."

에드워드가 대꾸했다.

이어 침대를 돌아 나타난 의사를 본 나는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젊은


의사는 금발이었고, 내가 본 그 어떤 영화배우보다도 잘생긴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창백하고 지친 표정이었으며, 눈가에도 검게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찰리의 설명대로라면 이 사람이 바로 에드워드의 아버지일 터였다.

컬렌 박사가 놀랍도록 매력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스완 양, 좀 어때요?"

"전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마지막이기를 바라며 내가 대꾸했다. 그는 내 머리


위쪽 벽에 걸린 형광판으로 걸어가 불을 켰다.

"엑스레이는 좋아 보이네요. 머리 아파요? 에드워드 말로는 머리를


상당히 세게 부딪혔다던데."

"괜찮아요."

나는 한숨을 쉬며 또 똑같이 대답한 뒤, 에드워드를 잠깐 흘겨보았다. 내


두개골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의사의 서늘한 손길이 느껴졌다. 내가
움찔하는 걸 그는 놓치지 않았다.

"만지면 아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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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진 않아요."

사실 그보다 더 심하게 머리를 부딪힌 적도 많았다.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에드워드가 선심이라도 쓰듯 말없이


웃고 있었다. 내 눈이 가늘어졌다.

"아버님께서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지금은 가도 좋아요. 하지만


어지럽거나 시력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병원으로 다시 와야 해요."

"학교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찰리가 간호를 한다고 나설 것이 마음에 걸려, 내가 물었다.

"오늘은 그냥 쉬는게 좋겠어요."

나는 에드워드를 흘깃 바라봤다.

"쟤는 학교로 돌아가나요?"

"우리가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좋은 소식을 누군가는 학교에 퍼뜨려야


하잖아."

에드워드가 잘난체 하며 말했다.

"사실은, 대기실에 전교생이 거의 다 와서 기다리는 것 같던데."

컬렌 박사가 말했다.

"아, 안 돼."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탄했다.

컬렌 박사가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

"병원에 더 있고 싶어요?"

"아뇨, 아니에요!"

나는 침대 옆으로 다리를 늘어뜨리고 벌떡 일어났다. 너무 빨리 일어나는


바람에 비틀거리자 컬렌 박사가 나를 잡아주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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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내가 다시 한 번 의사를 안심시켰다. 내가 균형을 잘 못 잡는게 머리를


부딪힌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겠지.

"혹시 두통이 생기면 타이레놀을 먹어요."

의사가 나를 붙들어주며 권했다.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굉장히 운이 좋았다고 들었어요."

컬렌 박사는 내 차트에 능숙하게 서명을 하더니 살며시 웃으며 내게


말했다.

"마침 에드워드가 제 옆에 있어서 다행이었죠."

나는 문제의 주인공을 쏘아보며 고쳐 말했다.

"아, 그렇군."

컬렌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곤 갑자기 눈앞에 있는 서류에 열중하는 체


했다. 이어 그는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 타일러를 바라보더니 옆 침대로
걸어갔다. 내 직감이 말해주었다. 의사 또한 연루되어 있다고.

"안됐지만 너는 여기 좀더 있어야 할 것 같구나."

컬렌 박사가 타일러에게 말한 뒤 그의 상처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의사가 등을 돌리자마자 나는 에드워드 옆으로 갔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내가 숨을 죽인 목소리고 씨근덕거렸다. 그는 갑자기 이를 꽉 깨물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가 이를 꽉 문 채 말했다.

"너희 아버지가 기다리신다잖아."

나는 컬렌 박사와 타일러를 흘끔 보았다.

"괜찮다면 너랑 단둘이만 이야기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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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그쳤다.

그는 나를 노려보다가 느닷없이 등을 돌리고 응급실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를 따라가느라 나는 거의 뛰어야 했다. 우리가 응급실
모퉁이를 돌아 짧은 복도로 들어서자마자 그가 돌아서서 나를 마주 보았다.

"원하는 게 뭐야?"

그가 화난 듯 물었다. 눈빛이 싸늘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주눅이 든


나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누구러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넌 나한테 설명해 줄 의무가 있어."

"난 네 생명을 구한 사람이야. 너한테 빚진 거 없어."

그의 화난 목소리에 나는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까 약속했잖아."

"벨라, 넌 머리를 부딪혔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알지 못하잖아."

그의 말투는 신랄했다. 이번엔 나도 폭발할 지경이었으므로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내 머린 멀쩡해."

그도 마주 노려보았다.

"대체 뭘 원하는 거야?"

"난 진실을 알고 싶어. 내가 왜 너를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겠어."

"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내 입에서 성급한 대답이 쏟아져 나왔다.

"넌 분명 내 옆에 없었어. 타일러도 널 보지 못했으니까, 내가 머리를 너무


심하게 부딪혔다는 핑계는 대지 마. 승합차가 우리 둘 다 뭉개버릴
상황이었는데, 결과는 전혀 달랐지. 네가 손을 짚었던 차 옆구리엔 깊이 팬
자국이 남았고, 다른 차도 범퍼가 찌그러졌더라. 그런데 넌 하나도 다치지
않았어. 게다가 승합차가 내 다리를 으스러뜨리려는 찰나에 넌 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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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올리고......"

내가 듣기에도 완전히 실성한 듯한 이야기였으므로 계속할 수가 없었다.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흐르는게 느껴졌다. 나는 이를 갈며 눈물을
참으려고 애썼다.

에드워드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변명하듯 굳어져 있었다.

"내가 승합차를 들어올려 널 구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의 말투는 내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듯 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내


의구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의 말은 노련한 배우가 던진 완벽한 대사
같았다. 나는 이를 꽉 문 채 한번 고개만 끄덕였다.

"너도 알겠지만 아무도 네 말을 안 믿을걸."

이제 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조롱기도 묻어났다.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 거야."

나는 조심스레 화를 조절하며 한 마디 한 마디 천천히 읊조렸다.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렇다면 왜 상관하는 거지?"

"나한테는 상관있으니까. 나는 거짓말하는 걸 싫어해. 그러니까 나한테


거짓말을 시키려면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해."

"그냥 나한테 고맙다고 하고 잊어버릴 순 없는 거니?"

"고마워."

나는 씨근덕거리며 기다렸다.

"그냥 넘겨버리지는 않겠다는 거야?"

"응."

"그렇다면...... 실망시키는 수밖에 없겠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또다시 그의 잘생기고 완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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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마치 타락해 가는


천사를 눈빛으로 제압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너는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건데?"

내가 쌀쌀맞게 물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고,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그의


매력적인 얼굴에 뜻밖에도 나약함이 스쳐갔다.

"나도 모르겠는걸."

그가 속삭였다. 곧이어 그는 나에게 등을 돌리고 멀어져갔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몇 분쯤 지난 다음에야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발길이 떼어지자 나는 천천히 복도 끝에 있는 출구로 걸어갔다.

대기실에 들어가는 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괴로웠다. 포크스에서


내가 알게 된 사람들이란 사람들은 모두 모여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찰리가 재빨리 내 옆으로 다가오기에 내가 양손을 들어올렸다.

"저 아무 이상 없대요."

내가 퉁명스럽게 아빠를 안심시켰다. 아직도 화가 안 풀려 이야기를


다정하게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던?"

"컬렌 박사님이 괜찮으니 집에 가도 된다고 하셨어요."

내가 한숨을 쉬었다. 함께 몰려와 있던 마이크와 제시카, 에릭도 어느새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서 가요."

내가 찰리를 다그쳤다.

찰리는 내 등에 어색하게 한 손을 올리고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한 채 나를


병원 유리문으로 이끌었다. 나는 친구들이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알아듣기를 바라며 살며시 손을 흔들어주었다. 순찰차에 오르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순찰차를 타면서 그런 느낌이 들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우리는 차에서 침묵을 지켰다. 나는 생각에 푹 빠져들어 옆에 찰리가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다. 에드워드가 복도에서 보인 방어적인
태도는, 내가 눈으로 직접 보고서도 여전히 좀처럼 믿을 수 없는 기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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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 찰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음...... 르네한테 전화 먼저 해라."

그는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펄쩍 뛰었다.

"엄마한테도 알리셨어요?"

"미안하다."

나는 차에서 내려 필요 이상으로 순찰차 문을 세게 닫았다.

물론 엄마는 완전 히스테리 상태였다. 내가 30 번도 넘게 괜찮다고 안심


시키고 나서야 진정할 기미를 보였다. 엄마는 예전 우리 집이 지금 텅비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집으로 돌아오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엄마의 애원을
물리치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나는 에드워드를 둘러싼 미스터리에 몰두 해
있었다. 그리고 에드워드라는 인물 자체에 더 집착하고 있었다. 멍청하고,
어리석고, 바보 같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포크스를 떠나야 마땅하겠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찰리가 계속 나를


걱정하면서 살피는 게 몹시 신경이 쓰였다. 나는 방에 올라가며 욕실에
들러 타이레놀 세 알을 챙겼다. 약을 먹으니 훨씬 편해졌고 통증이
사라지자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 밤 처음으로 나는 꿈속에서 에드워드 컬렌을 보았다.

4. 초대

몹시 어두운 꿈. 그 속에서 유일하게 느껴지는 희미한 빛은 에드워드의


피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나를 어둠 속에
남겨둔 채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아무리 큰 소리로 불러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괴로운 마음으로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오랫동안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로 그는 거의 매일 밤 내 꿈에 나타났지만, 언제나
주변에서만 맴돌 뿐 가까이 다가오는 적이 없었다.

사고 이후 한 달은 불편한 마음과 긴장 속에서 지나갔고, 처음엔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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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하게도 사고가 있던 주 내내 나는 온통 관심의 대상이었다. 타일러


크로울리는 어떻게든 나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내
주변을 졸졸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내가 바라는 건 모든 걸 잊어주는 것
뿐이라고 누누이 강조했고, 더욱이 나한테는 실제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이해시키려 했지만 그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그는 쉬는 시간마다
나를 따라다녔고, 점심시간엔 그렇잖아도 붐비는 테이블에 구태여 끼여
앉았다. 마이크와 에릭은 서로를 대할 때보다 타일러에게 더
퉁명스러웠고, 그걸 본 나는 원치 않는 팬이 또 하나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에드워드를 염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했다. 그가 어떻게 나를


잡아당겨 사고를 모면하게 해 주었는지, 그리고 그 역시 사고를 당할 뻔한
것을 이야기하며 진짜 영웅은 바로 에드워드라고 여러 번 설명해도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그럴듯하게 들리도록 이야기했다.
하지만 제시카, 마이크, 에릭을 포함한 모든 아이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승합차를 치우기 전까지는 에드워드가 거기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내 생명을 구하기 전까지, 턱도


없이 먼 거리에 서 있었다는 것을 왜 나 말고 아무도 못 봤는지 몹시
의아했다. 나중 나중에야 그럴 만한 이유를 깨닫고 속이 상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에드워드의 존재를 늘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그를 지켜보지 않았다. 처량맞기 짝이 없는 결론 이었다.

에드워드는 사고 순간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려고 몰려드는 호기심 많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이는 일도 절대로 없었다. 모두들 평소처럼 그를
피했다. 컬렌 집안 아이들은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음식에는 손도 안 대고
저희들끼리만 대화했다. 에드워드를 포함하여 그들은 이제 내가 있는 쪽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교실에서 나와 나란히 앉을 때면 그는 책상 맨 끝에 앉아 내 존재 자체를


아예 모르는 듯 행동했다. 아주 가끔, 갑자기 그가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주먹을 움켜쥐면, 그제야 나도 그가 겉보기보다는 나를 못 본
체 하는 게 힘든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차 사고 때 나를 구해준 걸 후회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나로선 다른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와 몹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므로, 사고가 있던 다음날 말을


붙였다. 응급실 밖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땐 우리 둘 다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 그날의 약속을 내 쪽에선 어김없이 지키고 있었지만, 그가 나를
믿지 못해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에 나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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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그가 내 목숨을 구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던 나의 분노는, 하룻밤 사이에 경외감에 가까운 고마움으로
돌변했다.

내가 생물 강의실에 들어가자 그는 이미 자리에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돌아보기를 기대하며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옆에 있는 걸 아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안녕, 에드워드."

나는 얌전하게 굴기로 했다는걸 보여주려고 쾌활하게 말을 건넸다. 그는


내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릴 듯 말 듯 하더니,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한 번 끄덕한 뒤 그대로 외면했다.

그 뒤로도 날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기는 하지만, 그것이 나와


에드워드 사이의 마지막 접촉이었다. 나는 가끔 스스로를 억제할 수가
없어서 식당이나 주차장처럼 먼 곳에서나마 그를 지켜보았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하루하루 눈에 띄게 진해졌다. 하지만 교실에선 그가 나한테
무관심한 것처럼 나도 그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했다. 내 기분은
절망적이었다. 그리고 밤마다 그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철저하게 마음을 숨기려 했지만, 내 이메일에서 우울함을 감지한 엄마는


걱정을 하며 두세 번 전활글 했다. 나는 그냥 날씨 때문에 기분이 좀 처진
것 뿐이라고 엄마를 애써 안심시켰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이크만은 나와 내 생물실험 파트너 사이의 냉랭한


분위기를 흡족해했다. 그는 에드워드가 과감하게 나를 구해낸 것에 내가
감동이라도 받을까봐 몹시 걱정했던 모양인데, 오히려 반대 효과가
나타나자 안심하는 눈치였다. 좀더 자신감을 갖게 된 그는 이제 생물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늘 내 책상에 걸터앉아, 에드워드가 우리를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그를 무시하며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위태로울 지경으로 빙판투성이던 그날 이후 눈의 자취는 완전히


사라졌다. 마이크는 눈싸움을 할 수 있을 만큼 눈이 쌓인 적이 없어 몹시
실망했지만, 해변여행을 떠날 날이 다가오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여전히 비는 많이 내렸고, 그렇게 몇 주일이 지나갔다.

제시카는 또 다른 사건 하나가 급부상하고 있다고 나에게 귀띔해 주었다.


3 월의 첫 번째 화요일, 제시카는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 2 주 뒤로
다가온 봄맞이 댄스파티에서는 여자가 파트너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며
마이크를 자기 파트너로 초대해도 좋은지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네가 그 앨 초대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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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혀 상관없다고 말했는데도, 제시카는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니야, 난 아예 안 갈 생각이야."

나는 친구를 안심시켰다. 댄스라니! 완전히 나의 능력 범위 밖의 일이었다.

"진짜 재미있을 텐데"

제시카는 나를 설득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간 설명할 길 없는 나의


인기를 나보다 제시카가 더 즐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나 마이크랑 재미있게 보내."

다음 날, 나는 삼각함수 시간과 스페인어 시간에 제시키가 평소와는 달리


활기가 없다는 걸 깨닫고 놀랐다. 다음 강의실까지 함께 걷는 동안 친구는
침묵을 지켰고, 나는 겁이 나서 이유를 묻지 못했다. 만일 마이크가 초대를
거절했다면 그 사실을 가장 털어놓기 싫은 상대가 바로 나일 테니까.

점심시간에 제시카가 마이크와 일부러 가장 멀리 앉아 에릭과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자 내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마이크도 유별나게 조용했다.

나와 함께 교실로 걸어가면서도 마이크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그의


얼굴에 떠오른 불편한 표정 역시 나쁜 징조가 틀림없었다. 마이크는 내
자리까지 따라와 책상에 걸터앉은 뒤에도 쉽사리 말문을 열지 않았다. 늘
그렇듯 나는 에드워드가 당장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단지 내 상상이
만들어 낸 인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아득하게 멀리 앉아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이크가 바닥을 응시하며 드디어 말을 꺼냈다.

"저 말야, 제시카가 봄맞이 댄스파티에 나를 초대했어."

"잘 됐네. 제시카랑 같이 가면 굉장히 재미있을 거야."

나는 일부러 신을 내며 활기찬 목소리로 거들었다.

"글쎄......"

그는 그런 반응이 못마땅한 듯 내 표정을 살피며 허둥댔다.

"나는 생각 좀 해보겠다고 대답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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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어?"

나는 속으로 마이크가 완벽하게 거절한 게 아니라는 데 안도하면서도,


나무라는 말투로 되물었다.

마이크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다시 바닥을 응시했다. 동정심이 내


결심을 뒤흔들었다.

"혹시 네가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할지도 몰라서 그랬어."

문득 죄책감에 휩싸이는 내 자신이 싫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잠깐 뜸을


들였다. 그 순간 에드워드가 내 쪽으로 확연히 고개를 기울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이크, 제시카한테 어서 같이 가겠다고 얘기 해."

"넌 벌써 다른 사람한테 부탁한 거야?"

에드워드는 마이크의 시선이 순간 자기 쪽으로 향한 걸 눈치 챘을까?

"아니, 난 아예 댄스파티에 안 갈 생각이거든."

"왜?"

춤을 추게 되면 내 신변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재빨리 새로운 계획을 생각해 냈다.

"난 그날 시애틀에 가야 해."

어차피 큰 도시에 다녀와야 할 일이 있었는데, 문득 그게 시기적으로도


완벽한 것 같았다.

"다른 주말에 가면 안 돼?"

"미안하지만 안 돼. 그러니까 제시카를 더 기다리게 하는 건 무례한


짓이야."

"그래, 네 말이 맞다."

마이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낙담한 듯 돌아서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눈을 감고 머리에서 죄책감과 연민을 몰아내려고 애를 쓰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생물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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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완연히


검게 변한 그의 눈동자에 눈에 익은 혼란스러운 기색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났다.

놀란 나는 그가 재빨리 시선을 피하기를 기대하며 마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뭔가를 탐색하듯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계속 바라봤다. 내가
먼저 시선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컬렌 군이 대답해 보겠나?"

선생님이 그를 지적하며 나는 미처 듣지도 못한 문제의 답을 물었다.

"크레브스 회로입니다."

에드워드는 내키지 않는 듯이 눈길을 돌려 선생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는 그의 시선에서 놓여나자마자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고개를 숙여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겁쟁이처럼 오른쪽 어깨 위로 머리칼을
늘여뜨려 얼굴을 가렸다. 몇 주일 만에 우연히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고
해서 이토록 감정이 흐트러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나에게 이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다. 한심한 일이었다. 한심한 건
둘째치고, 일단 건강에 이롭지 못했다.

나는 나머지 수업시간 내내 그의 존재를 모른체 하려고 몹시 애를 썼지만,


그게 불가능했으므로 적어도 내가 자기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침내 종이 울리자 나는 에드워드가 평소처럼
곧장 사라질 것을 예상하며 그에게 등을 돌린채 소지품을 챙겼다.

"벨라."

평생 알고 지낸 것도 아니고 겨우 몇 주일밖에 안 됐는데 그의 목소리가


이토록 친숙하게 들리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내키지 않은
마음에 천천히 돌아보았다. 너무 완벽한 그의 얼굴을 보면 내가 어떤
기분을 느낄지 알고 있었으므로 당장은 그 느낌을 피하고만 싶었다. 마침내
그를 마주한 내 얼굴은 아주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표정만으로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다시 나하고 말을 트기로 한 거니?"

뜻하지 않은 표독스러운 말투로 내가 물었다. 그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느라 입술을 씰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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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꼭 그런 건 아니야."

나는 눈을 감고 이를 갈며 코로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그는 내 대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나한테 뭘 어쩌라고?"

내가 눈을 감은채 물었다. 눈을 감으면 그와 논리적으로 대화를 나누기가


한결 쉬웠다.

"미안해, 내가 무례하게 굴었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러는 게 더 낫거든.


정말이야."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나는 눈을 떴다. 그의 얼굴도 몹시 진지해


보였다.

"무슨 뜻이야?"

"우린 친해지지 않는게 더 낫다는 말이야. 내 말 믿어."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지막 말은 전에도 들은 적이 있지.

"그걸 네가 좀더 일찍 깨닫지 못했다는게 참 안됐구나. 그랬더라면 네가


이렇게 후회할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내가 이를 악문 채 씨근덕거렸다.

"후회라니? 내가 뭘 후회해?"

후회라는 단어와 내 말투가 허를 찌른 모양이었다.

"그때 멍청한 차가 나를 깔아뭉개도록 내버려두지 않은거 말야."

에드워드는 깜짝 놀란 듯 했다.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들렸다.

"내가 네 목숨을 구한 걸 후회한다고 생각해?"

"그렇다는 거 알아."

"넌 아무것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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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는 노골적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비난을 마구 쏟아내고 싶은걸 참느라 입술을 꽉 다물며 홱


돌아섰다. 책을 모아 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멋들어지게 교실을 빠져나올 생각이었는데 그만 문설주에 신발 끈이
걸리면서 책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나는 멍하니 서서 그냥 책을
버려두고 가버릴까도 생각했다. 곧이어 한숨을 쉬며 책을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 어느새 그가 옆에 와 있었다. 그는 이미 책을 다 주워 가지런히
쌓은 뒤였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나에게 책을 내밀었다.

"고마워."

내가 차갑게 말했다.

"천만에."

그가 비웃기라도 하듯 대꾸했다. 재빨리 몸을 일으킨 나는 또 한 번


매몰차게 돌아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시간은 끔찍했다. 종목은 농구로 바뀌었다. 내가 속한 팀은 나에게


절대로 공을 패스하지 않았다. 그건 좋았지만, 나는 이유도 없이 여러 번
넘어졌다. 가끔은 다른 사람도 같이 넘어뜨렸다. 오늘 내 상태가 평소보다
심한 건 내 머릿속이 온통 에드워드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 다리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지만, 내가 정말로 균형을 잡아야
할 때마다 에드워드가 다시 내 뇌리를 파고들었다.

수업이 끝났다. 그것이 늘 그렇듯 반가웠다. 나는 거의 도망치다시피


트럭으로 향했다.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지난번 사고에서 내
트럭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등은 교체해야 했지만, 본격적인 도색
작업을 하게 된다면 몰라도 페인트가 살짝 벗겨진 부분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타일러의 부모님은 부품값만 받고 사고 난 승합차를 팔아야 했다.

트럭 모퉁이를 돈 순간 내 트럭 옆에 기대 서 있는 키 큰 그림자를
발견하고 나는 거의 심장마비에 걸릴 뻔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에릭이었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에릭이구나."

"안녕."

"웬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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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쇠로 차 문을 열며 물었다. 나는 어딘가 불편한 듯한 그의


목소리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다음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어, 무슨 일이냐면 말이지...... 봄맞이 댄스파티에 네가 나랑 같이 갈


생각이 있나 물어보려고."

끝에 가선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파트너는 여자가 선택하는 줄 알았는데."

너무 놀라 예의를 차릴 여유도 없이 내가 대꾸했다.

"그건 그렇지."

그가 민망한 얼굴로 인정했다. 침착함을 되찾은 나는 다정하게 웃으려고


애를 썼다.

"고맙긴 하지만 그날 난 시애틀에 갈 거야."

"아아, 그래. 그럼 다음을 기약하지 뭐."

"그러자."

선선히 대꾸한 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에릭이 내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다시 학교로
향했다. 문득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에드워드가 입술을 꼭 다문 채 똑바로 앞을 바라보며 내 트럭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나는 차 문을 확 열고 뛰어올라 쾅 소리를 내며 닫았다.
귀청이 떨어져나갈 듯한 엔진 소리와 함께 트럭을 후진시켜 주차장 통로를
들어섰다. 두 칸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던 에드워드는 이미 유연하게 차를
빼, 내 앞으로 끼어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차를 멈추고 가족들을 기다렸다.
네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그들은 아직 식당
건물 옆에 있었다. 반짝이는 그의 볼보 뒤를 확 받아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목격자가 너무 많았다. 나는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내 뒤에 차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타일러 크로울리가 최근에 장만한 중고 센트라를 타고
바로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너무 약이 오른 나머지 그를 아는 체 할
수가 없었다.

트럭에 앉아 바로 내 앞을 가로막은 차를 외면한 채 딴청을 부리고


있는데, 조수석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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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러였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다시 백미러를 살폈다. 그의 차는 운전석 문이 열린 채


여전히 내 뒤에 서 있었다. 나는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여 수동 창문을
내리기 시작했다. 뻑뻑했다. 나는 절반쯤 창문을 내리다가 포기했다.

"미안해, 타일러. 컬렌 때문에 꼼짝을 못하고 있어."

화가 났다. 차가 막힌 건 분명 내 잘못이 아닌데.

"어, 나도 알아. 어차피 여기 갇혀 있는 동안 뭘 좀 물어보려고."

타일러가 씩 웃었다.

앗, 아냐. 물어보지 마!

"봄맞이 댄스파티에 날 초대해 줄래?"

"난 그날 여기 없을 거야."

나는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이크와 에릭 때문에 이미 오늘


내 인내심 용량이 바닥을 드러낸 것일 뿐, 그게 타일러 탓은 아니라는 걸
기억했어야 했는데.

"응, 나도 마이크한테 들었어."

"그런데 왜......"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그냥 쉽게 거절하려고 핑계를 댄 것이길 바랐거든."

좋아. 이건 완전히 네 잘못다.

"미안해, 타일러. 정말로 난 그날 갈 데가 있어."

나는 짜증을 감추려 무던히 애를 쓰며 말했다.

"괜찮아. 아직 학기말 댄스파티도 남아 있잖아."

내가 대꾸도 하기 전에 그는 자기 차로 돌아갔다. 충격을 받아 얼굴이 다


굳어졌다. 앞을 돌아보자 엘리스와 로잘리, 에밋, 재스퍼가 자기네 볼보에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앞차 백미러를 보니 에드워드의 시선이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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꽂혀 있었다. 그는 타일러가 한 말을 다 듣기라도 한 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발이 가속페달을 향했다. 살짝 받으면 다치는
사람도 없고, 번쩍이는 은색 차에 도색만 다시 하게 만들 수 있을거야.
나는 가속 페달을 밟아 엔진 소음을 높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동차에 다 탄 뒤였고 에드워드는 재빨리 차를 몰아


사라졌다. 나는 집까지 천천히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내내 투덜투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집에 돌아온 나는 저녁으로 치킨 엔칠라다(전병의 일종인 토르티야에


고기와 채소를 다져 넣고 말아 칠리소스를 끼얹은 멕시코 요리)를 만들기로
했다. 요리과정이 길고 복잡한 음식이라 일손이 바빠졌다. 다진 양파와
칠리를 뭉근히 끓이고 있으려니 전화벨이 울렸다. 괜스레 받기가 겁이
났지만 찰리 아니면 엄마 전화일 듯 했다.

전화의 주인공은 제시카였고, 잔뜩 들떠 있었다. 마이크가 방과 후에


자기를 기다렸다가 댄스파티 초대를 받아들였다는 얘기였다. 나는 소스를
저으며 간단하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제시카는 앤젤라와 로렌한테도
소식을 전해야 한다며 금방 끊으려 했다. 나와 생물수업을 같이 듣는
수줍음 많은 여학생이 바로 앤젤라 였는데, 나는 지나가는 얘기처럼
앤젤라가 에릭에게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하면 좋겠다고 운을 뗐다.
점심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도 늘 나를 무시하는 거만한 로렌은
타일러에게 부탁하면 되겠다고도 전했다. 타일러도 아직 파트너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자, 제시카도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마이크를 확실히
파트너로 삼게 된 제시카는 새삼 진지하게 나도 댄스파티에 가면 좋겠다고
권했다. 나는 또 한번 시애틀에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저녁준비에 정신을 집중하려 노력했다. 특히


닭고기를 깍둑썰기하는 건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까딱 정신을
놓았다가 또다시 응급실에 실려 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 머리는
오늘 에드워드가 한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분석하느라 핑핑 돌아가고
있었다. 친해지지 않는게 더 낫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

그의 말뜻을 깨닫고 나니 뱃속이 울렁거렸다. 에드워드는 내가 그에게


빠져들고 있다는걸 알아차린게 틀림없었다. 내 감정을 부추기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나한테 관심이 전혀 없으니까...... 나와 친구도 되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물론 자기야 나한테 관심이 없겠지. 불끈 화가 나서 생각하니, 양파


때문인지 뒤늦게 눈이 시큰거렸다. 나는 원래 남들이 관심을 가질 만큼
재미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재미있고......
똑똑하고...... 신비롭고...... 완벽하고...... 잘생기고...... 게다가 한
손으로 승합차 한대쯤은 거뜬히 들어올릴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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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나도 그런 인간쯤 무시할 수 있어. 앞으로


얼마든지 무시할 거야. 내가 스스로 이리로 유배를 왔으니, 잘 견디고 나면
남서부 쪽이나 하와이쯤에 있는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줄곧 햇볕 내리쬐는 해변과 야자수를 떠올리며 엔칠라다를
무사히 만들어 오븐에 집어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찰리는 매운 고추 냄새를 맡자 의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먹을 만한 멕시코 요리를 만나려면 아마 남캘리포니아까진 가야할
테니, 그런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시골 도시에
처박혀 산다 해도 그는 경찰이었으므로 용감하게 한 입 떠먹었다. 의외로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서서히 내 요리솜씨를 신뢰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빠."

"왜 그러니?"

"음, 다음주 토요일에 시애틀에 다녀올 생각이에요...... 괜찮죠?"

찰리가 거의 식사를 마칠 무렵 내가 물었다.

그에게 허락을 받으려는 게 아니었다. 나쁜 선례를 남길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무례하다는 기분이 들어서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인 거였다.

"왜?"

그는 마치 내가 포크스를 벗어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는 듯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책을 몇 권 사려고요. 여기 도서관엔 책이 별로 없더라고요. 옷도 좀


보고요."

찰리 덕분에 차를 살 돈이 굳어서 평소보다 돈이 많았다. 물론 기름이


많이 들어 트럭 유지비가 제법 만이 들긴 했다.

"저 트럭으로 가면 기름값이 많이 들 텐데."

내 생각을 읽은 듯 찰리가 말했다.

"알아요, 가다가 몬테사노와 올림피아에 들를 거에요. 필요하면


타코마에도 들르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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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혼자서 가려고?"

내게 숨겨둔 남자친구라도 있는지 의심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차 때문에


걱정 하는 건지 나로선 판단이 서지 않았다.

"네."

"시애틀은 큰 도시야. 길을 잃으면 어쩌려고."

"아빠, 피닉스는 시애틀보다 다섯 배나 커요. 그리고 전 지도 읽을 줄도


아니까 걱정 마세요."

"내가 같이 가줄까?"

나는 싫은 내색을 감추며 교활하게도 묘안을 생각해 냈다.

"괜찮아요, 온종일 아마 탈의실에서 지낼 텐데요 뭐. 아빠가 너무


지루하잖아요."

"그래, 알았다."

여자 옷가게에 앉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곧바로 물러났다.

"고맙습니다."

내가 그에게 웃어 보였다.

"댄스파티 시간에 맞춰서 돌아올 거지?"

윽. 고등학교 댄스파티가 언제인지 아버지까지 알고 있는 동네는


여기처럼 좁아터진 소도시밖에 없을 거야.

"아뇨, 전 춤 안 춰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찰리는 내 심정을 이해해 줘야 했다. 내가 몸의


균형을 잡는 데 문제가 있는 건 엄마한테 물려받은 게 아니었으니까. 역시
찰리는 이해했다.

"아, 그렇지."

다음 날 아침, 나는 일부러 은색 볼보와 최대한 먼 곳에 차를 세웠다. 나


자신을 너무나도 커다란 유혹의 길로 인도해 결국 그에게 새 차를 사주게
될 일을 굳이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차에서 내려 자동차 열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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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작거리다가 그만 놓치고 말았다. 열쇠를 주우려 몸을 숙이자 하얀 손이


불쑥 나타나 나보다 먼저 열쇠를 집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에드워드
컬렌이 바로 내 옆에서 느긋하게 내 트럭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놀라움과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어떻게 하다니?"

에드워드가 되물으며 열쇠를 내밀었다. 내가 손을 뻗자, 그가 내 손바닥에


열쇠를 떨어뜨렸다.

"난데없이 휙 나타나는 거 말이야."

"벨라, 네가 유달리 관찰력이 없는건 내 잘못이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나직하고 벨벨처럼 부드러웠다.

나는 그의 완벽한 얼굴을 향해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늘 그의 눈동자는


깊고 진한 황금빛이 감도는 벌꿀 빛깔이었다. 돌연 뒤엉켜버린 생각을
가다듬느라 나는 얼른 눈길을 내리깔았다.

"어제 저녁엔 왜 길을 막고 서 있었어? 내 존재를 무시하기로 한 건


알겠는데, 설마 나를 죽도록 짜증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겠지?"

나는 여전히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캐물었다.

"그건 타일러를 위한 배려였어. 그 녀석한테도 기회를 줘야 하잖아."

"너......"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시원하게 욕이라도 해줘야 할 텐데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오른 분노의 열기로 그를 태워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오히려 더욱 재미있어하는 눈치였다.

"난 네 존재를 무시하려고 한 적 없어."

"그래서 내가 짜증으로 죽게 만들려는거야? 타일러 차에 치어 죽지 않은


게 아쉬워서?"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 노기가 서렸다. 그가 입술을 꾹 다물자 웃음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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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넌 정말 바보로구나."

뭔가를 심하게 내리치고 싶어져서 내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나는 그런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나는 원래 폭력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나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기다려."

그가 외쳤다. 나는 화난 걸음으로 빗속을 헤치고 계속 걸어갔다. 하지만


그는 금세 나를 따라잡아 바로 옆에서 걷고 있었다.

"미안해, 내 말이 심했다."

함께 걸으며 그가 말했다. 나는 그를 무시했다.

"사실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말을 입에 올렸으니 내가


무례했어."

"그냥 나 좀 혼자 있게 내버려둘래?"

내가 으르렁거렸다.

"너한테 물어볼 게 있었는데, 너 때문에 얘기가 딴 데로 흐른 거야."

그가 쿡쿡 웃었다. 그는 다시 유머감각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너 혹시 다중인격장애 환자니?"

내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또 그런다."

"좋아. 묻고 싶은 말이 뭔데?"

나는 한숨을 쉬었다.

"혹시 말이야, 다음주 토요일에. 그러니까 봄맞이 댄스파티가 있는 날


있잖아......"

"지금 너 날 웃기려고 이러는 거야?"

내가 그를 향해 홱 돌아서며 말허리를 잘랐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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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온통 비에 젖었다. 그는 짓궂게 웃고 있었다.

"제발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볼래?"

나는 입술을 깨물며 성급하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도록 양손을 깍지 꼈다.

"그날 네가 시애틀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혹시 다른 차를 얻어 타고


갈 생각 없나 해서."

완전히 뜻밖의 이야기였다.

"뭐라고?"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애틀까지 데려다 줄까?"

"누가?"

내가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그야 당연히 나지."

그는 마치 정신지체가 있는 사람에게 설명하듯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아직도 어리둥절했다.

"왜?"

"음, 나도 2~3 주 뒤에 시애틀에 갈 계획이었거든. 그리고 솔직히 네


트럭으로는 무리라고 생각했어."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내 트럭은 전혀 문제없어."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너무 놀라 아까 느꼈던 분노의 강도를 유지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네 트럭이 기름 한 번 넣고 시애틀까지 갈 수 있겠어?"

그는 다시 나와 보조를 맞추었다.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

안 그래? 이 멍청한 볼보 주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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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자원의 낭비를 막는건 누구나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잖아."

"솔직히 말이야, 에드워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 나는 희열을 느꼈고, 그래서 신경질이 났다.

"네 말을 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넌 나랑 친해지기 싫다고 했잖아."

"우리가 친해지지 않는게 더 낫다고 말했을 뿐, 친해지기 싫다고 말한적은


없어."

"어머나, 고마워라. 그 말을 들으니 모든 게 명확해지네."

나는 있는 대로 신랄하게 빈정거렸다. 그러다 또다시 걸음을 멈췄다는 걸


깨닫았다. 식당 건물 지붕 아래 서 있으니 그의 얼굴을 좀 더 쉽게 올려다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건 이성적인 판단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네 쪽에선 나와 친구가 되지 않는 게 좀더...... '신중한' 선택일 거야.


하지만 난 이제 너를 멀리하려고 애쓰는 데 지친 것 같다, 벨라."

마지막 문장을 말하는 그의 눈빛은 황홀하리만치 강렬했고, 목소리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숨 쉬는 법조차 잊은 것 같았다.

"나랑 같이 시애틀에 갈래?"

여전히 강렬한 눈빛으로 그가 물었다. 아직도 말문이 트이질 않았으므로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로 나를 멀리하는 게 네 신상에 좋아. 수업 때 보자."

그는 별안간 돌아서서 우리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5. 혈액형

나는 멍한 상태에서 영어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에 처음 들어갔을 땐


이미 수업이 시작됐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들어와줘서 고맙구나."

메이슨 선생님이 몹시 못마땅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얼굴을 붉히여


황급히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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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마이크가 평소처럼 내 옆자리에 앉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죄책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하지만 마이크와
에릭이 예전처럼 문가에서 나를 기다려주었으므로 완전히 용서받지 못한
건 아니라고 짐작했다. 함께 걸어가며 마이크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
했고, 이번 주말 날씨 예보를 전하며 활기를 보였다. 비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일 예정이라 어쩌면 해변여행을 갈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어제
그를 실망시킨 걸 만회할 생각에 덩달아 신이 나는 것처럼 거들었다.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다. 비가 오든 안 오든, 운이 좋아봤자 기온은
기껏 10 도 안팎일 테니까.

오전시간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에드워드가 나한테 한 말,


그의 강렬한 눈빛이 죄다 내 상상이 아니라는 걸 믿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현실과 헷갈릴 정도로 아주 그럴듯한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어떻게든 그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쪽이 더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제시카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가며 조바심이 나는 동시에


겁이 났다.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고, 그가 지난 몇 주일 동안
내가 알고 지냈던 차갑고 무관심한 사람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실은 내가 오늘 아침에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사실로 판명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제시카는 내 제안대로 로렌과
앤젤라도 파트너를 정했다는 둥 댄스파티에 대해 끊임없이 재잘거리느라,
내가 건성으로 듣고 있다는 것조차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드워드가 늘 앉는 자리를 바라본 나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실망감에


휩싸였다. 다른 네 명은 앉아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집에
갔나?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여전히 재잘거리는 제시카를 따라 배식 줄에
섰다. 입맛이 없어서 레모네이드만 한 병 샀다. 그저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아 골을 내고 싶었다.

"에드워드 컬렌이 또 널 바라보고 있어."

제시카의 입에서 그의 이름을 들은 순간 나는 마침내 혼자만의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오늘은 왜 혼자 앉아 있나 모르겠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친구의 시선을 따라가니, 에드워드가 늘 앉던


자리 건너편 테이블에 혼자 앉아 삐딱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나한테 그리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믿기지 않아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윙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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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지금 오라는 거야?"

제시카가 살짝 모욕감이 느껴질 정도로 깜짝 놀라며 물었다.

"생물숙제 때문에 부탁할 게 있나 봐. 무슨 일인지 가서 알아봐야겠어."

당황한 친구를 위해 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걸어가는 내내 등 뒤로


제시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앉은 자리까지 가서도 확신이 서지 않아
의자 뒤에 서 있었다.

"오늘은 나랑 같이 앉는게 어때?"

에드워드가 살포시 웃으며 물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를 지켜보며 자동인형처럼 자리에 앉았다. 에드워드는


여전히 웃음 짓고 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인간이 실존인물이라는게 믿기
어려웠다. 혹시라도 잠에서 깨어나면 그가 연기와 함께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그는 내가 뭔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별일도 다 있네."

마침내 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게......"

그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머뭇거리다, 이내 빠르게 나머지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어차피 지옥에 갈 바에야 철저히 내 마음대로 하기로 했어."

나는 그가 뭔가 더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길 기다렸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너도 알겠지만,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통 모르겠어."

마침내 내가 대꾸했다.

"알아."

그는 다시 미소를 짓더니 말머리를 돌렸다.

"너를 나한테 빼앗겨서 네 친구들이 화가 났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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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질 거야."

나는 친구들의 시선이 등에 와 박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난 널 다시 돌려주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에드워드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이군."

"아니야."

그렇게 말했지만 내 목소리는 우스꽝스럽게 갈라져 나왔다.

"사실 좀 놀랐어...... 이게 다 무슨 꿍꿍이야?"

"말했잖아. 너를 멀리하려고 애쓰는 데 지쳤다고, 그래서 포기하려는


거고."

그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지만, 황토색 눈동자는


진지했다.

"포기한다고?"

영문을 몰라 내가 되물었다.

"응. 착하게 사는 건 포기할 거야. 이젠 결과가 어찌 되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어."

설명을 이어가는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더니 목소리에


단호함이 서렸다.

"역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숨이 막힐 듯 멋진, 그의 불량스러운 미소가 다시 나타났다.

"너랑 대화할 때면 늘 내가 너무 말이 많아져. 그것도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 하나지."

"염려 마, 난 하나도 못 알아들으니까."

내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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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나마 다행이야."

"그래서, 쉬운 말로 하면 우리 이제 다시 친구가 된 거야?"

"친구......"

그가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아님 말고."

내가 중얼거리자 그는 씩 웃었다.

"글쎄, 노력은 해볼 수 있겠지. 하지만 다시 한 번 경고하는데, 나는


너한테 좋은 친구가 될 수 없어."

웃음기 뒤에 느껴지는 진지한 경고는 아무래도 진심 같았다.

"그 말을 참 여러 번 하네."

갑자기 뱃속이 파르르 떨리는 걸 무시한 채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목소리를 가장하며 말했다.

"네가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니까 그렇지. 난 아직도 네가 그 말을 믿길


기다리고 있어. 똑똑한 아이라면 넌 나를 피해야 하니까."

"내 지능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네 의견을 명확하게 표현한 걸로 아는데."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그는 사과하듯 웃어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멍청하게 굴기만 하면, 친구로 지내도록 서로 노력할 수


있다는 거야?"

나는 혼란스러운 대화 내용을 정리하려고 애를 썼다.

"대강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난감해진 나는 양손으로 붙들고 있던


레모네이트 병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해?"

나는 호기심 어린 물음에 고개를 들자마자 그의 깊은 눈동자에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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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적대다가, 또다시 사실대로 털어놓고 말았다.

"네 정체를 알아내려고 고민하는 중이야."

턱이 불끈 움직이다 굳어졌지만, 그는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 좀 알아낸 거라도 있어?"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었다.

"별로 없어."

내 대답에 그가 킥킥 웃으며 물었다.

"어떤 가설을 생각 중인데?"

나는 얼굴을 붉혔다. 지난달 내내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과 <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었지만 절대로 그
얘기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말 안 해줄 거야?"

그는 내 넋을 완전히 빼놓을 만큼 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한쪽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창피해서 안 돼."

"정말 실망스럽군."

그가 투덜대자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재빨리 반박했다.

"단순히 누군가 생각하는 걸 너한테 털어놓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왜 널


실망하게 만든다는 건지 난 도대체 '상상'이 안 돼. 더욱이 다른 사람한테
무슨 뜻인지 고민하느라 한밤중에 잠도 못 이룰 만큼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져놓은 장본인이 말이야. 넌 그 정도 갖고 왜 그렇게 실망하는데?"

에드워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는 나도 그간 꾹 참았던 화를 풀어내는


데 어느정도 익숙해진 것 같았다.

"어디 그뿐이어야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 사람 목숨을 구해줘


놓고는 바로 다음 날 더러운 벌레 취급을 한다거나, 황당하고 이상한
일들을 잔뜩 벌여놓은 다음에 다 설명해 주겠다고만 하고 변명 한마디 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 그런데도 나는 전혀 실망하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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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제법 성깔 있었구나."

"난 이중잣대를 싫어해."

우리는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에드워드는 내 어깨 너머를


흘끗 돌아보더니 느닷없이 숨죽여 웃었다.

"뭐야?"

"내가 너를 괴롭히는 줄 알았나 보군. 네 남자친구가 우리 싸움을 말려야


할지 말지 친구들하고 의논하고 있는 중이야."

그가 다시 킥킥 웃었다.

"누구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네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내가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내 생각은 틀리지 않은걸. 전에도 말했지만, 사람들은 단순해서 대부분


생각을 읽어내리가 쉽거든."

"그런데 나는 예외란 말이지?"

"맞아. 너는 예외야. 왜 그런지 궁금해지는데."

그의 낯빛이 갑자기 변했다. 물끄러미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는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나는 그의 강렬한 누빛을 피해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일단 레모네이드 병


뚜껑을 여는데 정신을 집중했다. 나는 멍하니 탁자를 응시하며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배 안 고파?"

상념에서 벗어난 듯 에드워드가 물었다.

"응."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려서 뭘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다는


걸 곧이곧대로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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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텅 빈 그의 앞을 건너다 보았다.

"나도 배 안 고파."

혼자만 아는 농담을 즐기고 있는 듯한 그의 표정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내가 조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갑자기 그가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어떤 부탁이냐에 따라 달라."

"대단한 건 아니야."

내 대꾸에 그는 조심스러우면서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기다렸다.

"그냥...... 다음에 또 그게 내 신상에 이롭다는 이유로 나를 무시할


생각이 들거든 미리 경고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잖아."

나는 병 입구를 따라 새끼손가락을 움직이며 레모네이드 병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겠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고마워."

"그 대신 나도 뭐 하나 물어도 될까?"

에드워드가 간청하듯 물었다.

"하나만."

"네 가설, 하나만 얘기 해 봐."

앗.

"그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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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은 무효. 방금 네 입으로 약속했잖아."

"너도 약속 안 지켰잖아."

"딱 한 가지 가설만 들려주면? 웃지 않을게."

"분명히 웃을 거야."

그가 웃을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길고


검은 속눈썹 아래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들어 나를 보았다.

"부탁이야."

그가 나를 향해 윗몸을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걸 느끼며 눈을 깜빡거렸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표정을 지을 수가
있지?

"어, 뭐라고?"

홀린 듯 내가 되물었다.

"딱 한 가지 가설만 얘기해 봐."

그는 여전히 눈빛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음, 혹시 방사능 거미한테 물렸나 하고......"

에드워드가 최면술도 할 줄 아는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대책 없이


유혹에 약한 걸까?

"별로 창의적인 생각은 아니군."

그가 코웃음을 쳤다.

"미안하군. 그것밖에 생각한 게 없어."

발끈 화가 나서 내가 대꾸했다.

"턱도 없는 짐작이야."

그가 놀리듯 말했다.

"거미랑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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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방사능이랑도?"

"응."

"젠장."

나는 한숨이 나왔다.

"슈퍼맨의 크립토나이트도 나한텐 소용없어."

에드워드가 킥킥 웃어댔다.

"웃지 않기로 했잖아. 잊었어?"

그가 무표정한 얼굴을 만드느라 애를 썼다.

"어떻게든 꼭 알아내고 말겠어."

"난 그러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이유가 뭔데?"

"내가 초인적인 영웅이 아니면 어쩔래? 내가 악당이면 어쩌려고?"

그는 장난스레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웃지 않고 있었다.

"아아, 알겠어."

그가 귀띔하려던 여러 가지 암시들. 그게 갑자기 한꺼번에 들어맞는 듯


했다.

"알겠어?"

혹시 실수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게 아닌지 겁을 내듯 그의 얼굴이


돌연 굳어졌다.

"결국 네가 위험한 사람이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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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뱉은 말이 사실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으며 내 맥박이


빨라졌다. 그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나에게 그걸
전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나로서는 채 헤아릴 수도 없는 감정을
듬뿍 담은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악당은 아니야. 난 네가 악당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네 생각이 틀린 거야."

그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했다. 에드워드는 내 병뚜껑을 가져가 손가락


사이로 이리저리 굴렸다. 나는 왜 겁이 나지 않는 걸까 의아해하며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한 말이 진심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난 그저
막연한 조바심을 느꼈을 뿐, 겁은커녕 마음을 깊이 사로잡힌 느낌이었다.

그의 곁에 있을 때면 언제나 느끼는 기분이었다. 우리 둘의 침묵은 내가


식당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문득 알아차릴 때까지 이어졌다.

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업에 늦겠어."

"오늘 난 수업에 안 들어갈 거야."

병뚜껑이 희미한 형체만 보일 정도로 빠르게 손을 놀리며 그가 말했다.

"왜?"

"이따금 땡땡이를 쳐야 건강에 이롭거든."

그는 나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엔 아직도 고민이 가득했다.

"난 들어갈 거야."

나는 선생한테 들키는 모험을 감수하기에는 겁이 많았다. 그는 임시로


만든 장난감에 다시 정신을 집중하며 말했다.

"그럼 나중에 보자."

나는 뭔가 허탈한 마음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이어 종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다급하에 문 쪽으로 갔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돌아보니 그는 1
센티미터도 움직이지 않고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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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로 뛰다시피 걸으면서 내 머리는 에드워드가 돌리던 병뚜껑보다 더


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새로 생긴 의문에 비하면 오늘 얻은 답은 너무
적었다. 다행히 비는 그쳐 있었다.

운이 좋았다. 내가 교실에 도착했을 때 생물 선생님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마이크와 앤젤라가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마이크는 못마땅한 표정이었고, 앤젤라는 존경의 기미마저
살짝 느껴지도록 놀란 표정이었다.

이어 교실로 들어온 생물 선생님이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는 작은


종이상자 여러 개를 조심스레 안고 있었다. 마이크의 책상에 상자를 내려
놓은 선생님은 상자를 차례로 교실에 돌리라고 말했다.

"좋아요, 여러분. 상자에 담긴 물건을 모두 하나씩 꺼내보세요."

그는 가운 주머니에서 멸균 고무장갑을 꺼내 손에 꼈다. 그의 손목에 찰싹


소리를 내며 달라붙는 고무장갑 소리가 어쩐지 불길하게 들렸다.

"처음 나눠주는 건 반응지시 카드입니다."

그가 네 칸으로 나뉘어 있는 카드 한 장을 들어 보여주며 말했다.

"두 번째는 네 갈래 지시봉이에요."

그가 이 빠진 굵은 빗 같은 것을 들어보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소독된 초소영 랜싯(의료용 칼) 입니다."

선생님은 파란색 작은 비닐봉투를 들어올리더니 찢어서 내용물을 꺼냈다.


멀어서 칼날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속이 메슥거렸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카드에 식염수를 떨어뜨려줄 테니, 내가 갈 때까지


시작하지 말아요."

그는 다시 마이크의 책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카드 네 칸에 각각


식염수를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그런 다음 조심스럽게 랜싯 끝으로 손가락을 찌르는 겁니다......"

선생님은 마이크의 손을 잡더니 랜싯 끝으로 마이크의 가운뎃손가락을


찔렀다. 오, 안 돼. 이마에 끈적끈적한 습기가 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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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시봉 끝에 혈액을 조금만 묻히세요."

선생님은 마이크의 손가락에서 피가 날 때까지 쥐어짜 시범을 보였다.


나는 억지로 구역질을 참느라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다음에 지시봉을 카드에 대는 겁니다."

실험을 마친 그는 빨간 피가 묻은 카드를 들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눈을 감고 소리가 왕왕 울리기 시작한 귀를 기울여 설명을 들으려 애썼다.

"다음 주에 적십자사에서 포트앤젤레스로 헌혈 권장 운동을 하러


나온다고 하니, 모두들 혈액형을 알아두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 18 세가 되지 않은 학생들은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니까, 내


책상에서 동의서를 가져가도록 해요."

생물 선생님은 계속해서 교실을 돌아다니며 카드에 식염수를 떨어뜨렸다.


나는 차가운 책상에 뺨을 대고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방에서
손가락을 찔러대는 친구들의 꺅 하는 비명과 투덜거림, 킥킥대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입으로만 숨을 쉬었다.

"벨라, 괜찮니?"

생물 선생님이 물었다. 내 귓가에서 가까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몹시


놀란 듯했다.

"전 이미 혈액형을 알아요, 선생님."

내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들기가 두려웠다.

"기절할 것 같니?"

"네."

기회가 있을 때 땡땡이를 치지 않은 자신을 속으로 마구 나무라며 내가


중얼거렸다.

"누가 벨라 좀 의무실에 데려가줄래?"

선생님이 외쳤다.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마이크가 자원했으리라는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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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수 있겠니?"

선생님이 물었다.

"네."

나는 속삭이듯 대답했다. 기어서라도 갈 테니 누구든 제발 여기서


나가게만 해 주세요.

마이크는 신이 난 듯 내 허리에 한 팔을 두르고 내 팔을 자기 어깨에


올렸다. 나는 힘없이 그에게 몸을 기댄 채 교실을 빠져나갔다.

마이크는 나를 끌고 천천히 교정을 걸어갔다. 혹시 선생님이 지켜보고


있을까 봐, 나는 4 번 건물이 보이지 않는 식당 건물 모퉁이를 돈 다음에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냥 나 좀 앉아 있게 해줄래? 그리고 뭘 하든 넌 손 좀 주머니에 넣고


있어줘."

내 부탁에 마이크는 보도블록 위에 내가 걸터앉도록 도와주었다. 아직도


너무 어지러웠다. 나는 스르르 옆으로 누워 얼음처럼 차갑고 축축한 시멘트
바닥에 뺨을 댄 채 눈을 감았다. 그나마 조금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우와, 낯빛이 정말 창백하다, 벨라."

마이크가 초조하게 말했다.

"벨라!"

또 다른 목소리가 멀리서 외쳤다.

안 돼! 끔찍이도 낯익은 이 목소리가 제발 내 상상이길.

"무슨 일이야? 어디 다쳤어?"

가까이 다가온 그의 목소리는 화가 난 듯했다. 내 상상이 아니었군. 나는


죽고 싶은 마음에 눈을 꽉 감았다. 아니 적어도 토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기절한 것 같아. 벨라는 손가락을 찌르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마이크가 긴장한 듯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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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내 말 들려?"

이제는 안정된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아니, 저리 가."

내가 신음하듯 말하자, 그는 쿡쿡 웃었다.

"의무실에 데려가는 중이었는데, 더 걷질 못하더라고."

마이크가 변명조로 설명했다.

"내가 데려갈게, 넌 교실로 돌아가라."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아직도 웃음기가 느껴졌다.

"싫어, 내가 데려갈 거야."

마이크가 거부했다. 갑자기 내 몸을 받치고 있던 보도블록이 사라졌다.


깜짝 놀란 내가 눈을 번쩍 떴다. 마치내 몸무게가 50 킬로그램이 아니라 5
킬로그램밖에 안 된다는 듯 에드워드가 나를 가뿐히 안아 올린 것이었다.

"내려놔!"

제발, 제발 그의 옷에 토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는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걷기 시작했다.

"야!"

벌써 열 발자국이나 뒤처진 마이크가 소리쳤다. 에드워드는 그를


무시했다.

"얼굴이 말이 아니군."

그가 씩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어서 바닥에 내려놔."

내가 신음하듯 말했다. 몸이 흔들리자 상태가 다시 나빠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 몸에서 멀리 뻗은 두 팔로만 내 체중을 지탱한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도 힘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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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피를 보고 기절한 거야?"

그가 물었다. 어쩐지 이런 상황이 그에겐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입술을 꽉 오므린 채 온 힘을 다해
메스꺼움과 싸우고 있었다.

"네 피도 아닌데 말이야."

혼자만 즐거워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그가 나를 안은 채로 문을 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갑자기 사방이 따뜻해졌으므로 나는 실내에 들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머나."

놀라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생물 시간에 기절했어요."

에드워드가 설명했다.

나는 눈을 떴다. 그곳은 안내 사무실이었고, 에드워드는 안내 창구를 지나


의무실 쪽으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안내 사무실 직원인 코프 선생님이
앞서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다. 에드워드가 의무실로 들어가, 위에 얇은
종이가 깔려 있는 비닐 매트리스 침대에 나를 내려놓자 소설을 읽고 있던
할머니 간호사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곧이어 그는 좁은 방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벽에 가 붙어 섰다. 에드워드의 눈동자는 흥분한 듯 반짝였다.

"살짝 기절했을 뿐이에요. 생물시간에 혈액형 검사를 했거든요."

그가 놀란 간호사를 안심시켰다. 간호사 할머니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마다 꼭 한명씩은 그런 아이들이 있지."

에드워드는 킥킥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냥 좀 누워 있으면 곧 괜찮아질 거다."

"알아요."

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동안 메스꺼움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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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자주 있니?"

간호사 할머니가 물었다.

"가끔이요."

내 말에 에드워드는 또 한 번 웃음을 숨기느라 기침을 했다.

"넌 그만 교실로 가도 돼."

간호사가 에드워드에게 말했다.

"제가 꼭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아주 단호하게 대꾸했고, 간호사 할머니는 입술을 꾹 다물기는


했지만 더 참견하지 않았다.

"이마에 댈 얼음주머니 좀 가져다 줄게."

간호사는 나에게 말한 뒤 부산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네 말이 옳았어."

눈을 감으며 내가 중얼거렸다.

"대개는 내 말이 맞긴 하지. 이번엔 특히 뭐가 옳았다는 거야?"

"땡땡이치는 게 건강에 이롭다는 거 말이야."

나는 고르게 숨쉬는 연습을 했다. 잠시 뜸을 들이다 그가 말했다.

"덕분에 또 한 번 심장이 얼어붙었어. 마이크가 네 시체를 끌고 나와 숲에


묻으려는 줄 알았다니까."

그의 말투는 마치 수치스러운 나약함을 고백하는 것 같았다.

"하, 하!"

나는 아직 눈을 감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이야, 시체도 아까 너보다는 혈색이 좋아 보이겠던걸. 네 원수를


갚아줘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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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은 마이크. 화 많이 났겠다."

"그 아인 날 엄청나게 싫어해."

에드워드가 왠지 신이 나서 말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반박했지만, 곧이어 정말로 에드워드라면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만 보면 알거든."

"어쩌다가 날 본 거야? 땡땡이 치겠다고 했잖아."

점심시간에 뭔가를 먹었다면 아마 헛구역질이 훨씬 더 빨리 사라졌을


테지만, 어쨌든 지금은 괜찮다고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뱃속이 비었던 게
다행인지도 몰랐다.

"차에서 CD 듣고 있었어."

너무도 정상적인 대답이 나오자 오히려 조금 놀라웠다. 문 소리가 들려


눈을 뜨니 간호사가 얼음주머니를 싼 차가운 습포를 들고 있었다.

"여기 있다. 아까보다 나아 보이는구나."

그녀가 내 이마에 얼음주머니를 올려주며 말했다.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내가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귀가 조금 울리긴 했지만 어지럽진 않았다.


연초록 벽도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간호사 할머니는 나를 다시 눕히려는
모양이었지만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코프 선생님이 고개를 들이밀고
말했다.

"환자가 또 왔어요."

나는 냉큼 뛰어내려 다음 환자를 위해 침대를 비워주었다. 나는


얼음주머니를 간호사에게 내밀었다.

"전 필요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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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마이크가 창백해 보이는 리 스티븐스를 부축하고 비틀거리며


문으로 들어섰다. 리도 생물수업을 같이 듣는 학생이었다. 에드워드와
나는 벽에 바짝 붙어 길을 내주었다.

"아, 곤란한데. 벨라, 사무실로 나가자."

에드워드가 중얼거렸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날 믿어, 어서 나가."

나는 얼른 돌아서서 문이 닫히기 전에 의무실을 빠져나왔다. 에드워드도


바로 내 뒤를 따랐다.

"네가 순순히 내 말을 들을 때도 다 있군."

그가 놀란 듯 말했다.

"피 냄새가 났거든."

내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리는 나처럼 다른 사람들의 피를 보고 기절한


게 아니었다.

"인간은 피 냄새를 못 맡아."

그가 반박했다.

"글쎄, 난 맡을 수 있어. 내가 기절한 것도 피 냄새 때문이야. 녹슨 쇠


냄새랑...... 찝찔한 냄새가 나."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어 마이크가 밖으로 나와 에드워드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에드워드를 보는 표정을 보니, 마이크가 자기를 싫어한다던 에드워드의
말이 맞는 듯 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이크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벨라, 좀 나아진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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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 좀 주머니에 넣고 있어줘."

내가 다시 그에게 경고했다.

"이젠 피도 안 나는 데 뭐, 다시 수업에 들어갈 거야?"

"농담하니? 가자마자 다시 이리로 와야 할 걸."

"그래, 그렇겠구나...... 그건 그렇고 이번 주말에 너도 갈 거지? 해변


말이야."

마이크는 한쪽 구석에 조각처럼 꼼짝 않고 서 있는 에드워드 쪽을 향해


눈을 한번 부라린 다음 나에게 말했다.

나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물론이지. 간다고 했잖아."

"다들 우리 아버지 가게에서 10 시에 만날 거야."

너무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고 생각했는지 마이크의 시선이 다시


에드워드에게 향했다. 그의 태도는 아무나 올 수 있는 여행이 아니란 걸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도 그리로 갈게."

"그럼 체육시간에 보자."

마이크가 자신 없는 걸음으로 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이따 봐."

내가 대꾸하자, 마이크는 한 번 더 나를 돌아보더니 동그란 얼굴을 살짝


씰룩거리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동정심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마이크의 실망한 얼굴을 체육시간에 또 마주할 생각을
하니 암담했다.

"윽, 체육시간."

내가 신음했다.

"내가 해결해 줄게. 창백한 얼굴로 저기 앉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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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드워드가 내 옆으로 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는 어느새 내


귀에 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난 원래 창백한
데다, 조금 전 기절하는 바람에 얼굴에는 아직 식은땀도 살짝 덮여 있었다.
나는 삐걱거리는 접이식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채 벽에 머리를 기댔다. 한
번씩 기절하고 나면 언제나 몹시 피곤했다.

에드워드가 안내 창구로 다가가 나직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프 선생님."

"응?"

나는 그녀가 자기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몰랐다.

"벨라가 다음 시간이 체육인데, 운동을 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실은 지금 집에 데려다줘야 할 것 같은데, 벨라가 체육수업을 빠질
수 있게 선생님이 조치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에드워드의 목소리는 흐르는 벌꿀처럼 감미로웠다. 그의 눈빛은 또


얼마나 압도적일지 상상할 수가 있었다.

"너도 병결 처리가 필요하니?"

코프 선생님이 속눈썹을 파닥거렸다. 왜 난 저런 행동을 하지 못할까?

"아뇨, 전 코프 선생님 수업인데, 별 신경 안 쓰실 거예요."

"알았다.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게. 벨라, 좀 괜찮니?"

그녀가 나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나는 조금은 과장된 모습으로 힘없이


끄덕였다.

"걸을 수 있겠어? 아니면 내가 다시 안고 갈까"

안내 직원을 등지고 선 그는 다시 예의 그 빈정대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걸어갈게."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섰고, 아직은 거뜬했다. 그는 나를 위해 문을 붙들어


주었다. 아주 예의 바르게 웃고 있었지만 눈은 장난기로 빛났다. 차가운
바깥 공기 속으로 걸어 나가자 마침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얼굴에 난
끈끈한 식은땀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늘에서 내려
오는 끊임없는 습기를 반갑게 느낀 건 난생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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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체육시간에 빠질 수 있다니 기절할 만 하네."

"언제든 부탁만 해."

에드워드는 빗속에서 눈을 찡그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너도 갈래? 이번 토요일 말이야."

턱도 없는 일 같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함께 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학교 아이들과 한 차에 와르르 몰려 타고 내리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는 우리와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같이 가기만 한다면, 나도 처음으로 이번 여행에 흥미가 생길 것 같았다.

"정확하게 다들 어디를 가는 건데?"

에드워드는 무표정하게 여전히 앞만 바라보았다.

"라푸시에 있는 퍼스트 해변에 갈 거래."

나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눈은 아주 가늘어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 비딱하게 웃음을 흘리며 곁눈질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까지 초대하는 것 같진 않던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방금 내가 초대했잖아."

"너랑 나, 이번 주엔 가엾은 마이크를 더 괴롭히지 말자. 열받아서


쓰러지게 만들면 곤란하지 않겠어?"

그의 눈빛에 다시 장난기가 일렁거렸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가엾은 마이크."

에드워드가 '너랑 나' 라고 말했다는 사실에 정신이 쏠린 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말이 필요 이상으로 너무 좋다는 게 문제였다.

이제 우리는 주차장 근처에 와 있었다. 나는 내 트럭을 향해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뭔가가 내 옷을 잡고 뒤로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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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려는 거야?"

에드워드가 벌컥 화를 내며 물었다. 그가 내 옷자락을 한 움큼 쥐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집에 가려고."

"내가 집까지 널 무사히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하는 말 못 들었어? 그런


상태로 운전하도록 내가 내버려둘 것 같아?"

아직도 화가 난 목소리였다.

"내 상태가 어때서? 그리고 내 트럭은 어쩌란 말이야?"

"수업 끝나고 앨리스가 갖다 놓도록 할게."

에드워드는 내 재킷을 잡아당기며 자기 차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뒤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넘어지면 질질 끌고서라도 갈
것 같았으니까.

"놔!"

소리쳤지만 그는 내 말을 무시했다. 그의 볼보가 있는 곳까지 나는 비에


젖은 보도를 옆걸음으로 끌려갔다. 드디어 에드워드가 놓아주자, 나는
조수석 문 앞에서 비틀거렸다.

"뭐든 제 맘대로야!"

내가 투덜거렸다.

"문 열렸어."

그는 짧게 대꾸하고는 운전석에 올랐다.

"나도 얼마든지 혼자 운전해서 집에 갈 수 있어!"

나는 씨근덕거리며 차 옆에 서 있었다. 어느새 빗줄기가 더 굵어졌는데


옷에 달린 모자를 쓰지 않아 빗물이 머리칼을 타고 등으로 떨어졌다.
자동창문을 열고 그가 내 쪽으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어서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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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그가 나를 붙잡기 전에 트럭까지


달려갈 확률을 계산하고 있었다. 승산이 별로 없다는 건 나도 인정했다.

"그럼 다시 끌고 올 거야."

내 게획을 짐작한 그가 협박하듯 말했다. 나는 최대한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차에 탔다. 별로 성공적이진 못했다. 나는 물에 빠진
고양이 같았고, 젖은 부츠에선 찍찍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건 정말 쓸데없는 짓이야."

내가 부루퉁해서 말했다.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히터를 틀고 음악 소리를 줄였다. 그가 주차장에서


차를 빼자 나는 뺨을 씰룩거리며 침묵 시위를 벌이려고 작정했지만, 차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순간 호기심이 결심을 이기고 말았다.

"<달빛>이네?"

내가 놀라서 물었다.

"드뷔시를 알아?"

그 역시 놀란 목소리였다.

"잘은 몰라. 엄마가 집에서 늘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는데, 난 내가


좋아하는 것만 알아."

"이건 나도 좋아하는 곡이야."

그가 생각에 잠겨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나도 연회색 가죽 시트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 음악을 감상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낯익은
멜로디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굵은 빗줄기 때문에 창밖은 온통
회색과 초록색 물감이 뒤섞인 것 같았다. 차는 매우 빨리 달렸지만,
흔들림이 없이 속도가 일정해 속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창밖으로
도시의 풍경이 섬광처럼 지나갈 뿐이었다.

"네 어머니는 어떤 분이시지?"

갑자기 그가 물었다. 뜻밖의 질문에 내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돌아보았다.

"엄마? 나랑 많이 닮았는데 훨씬 더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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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그가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

"나는 찰리를 너무 많이 닮았어. 엄만 나보다 외향적이고 용감하지.


책임감은 없는 편이고 별난 구석도 있는 데다가, 아주 엉뚱한 요리를
만들어 내곤 하지. 우리 엄마는 나한테 둘도 없는 친구야."

말을 멈췄다. 엄마 얘기를 하니 기분이 울적해졌다.

"너 몇 살이야?"

그의 목소리에서 나로서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는 혼란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가 차를 멈추는 바람에 비로소 나는 찰리의 집 앞에
도착했다는 걸 깨닫았다. 비가 워낙 심하게 쏟아져 집이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가 강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열일곱 살이야."

조금 혼란스러워하며 내가 대꾸했다.

"넌 절대 열일곱 살로 안 보여."

나무라는 듯한 그의 말투에 웃음이 났다.

"왜 웃어?"

"우리 엄마도 내가 서른다섯 살로 태어나서 해마다 나이를 먹어 더


중년처럼 되어간다고 늘 말씀하시거든."

내가 키득키득 웃다가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누군가는 어른 노릇을 해야 하잖아."

나는 몇 초쯤 또 입을 다물었다.

"너도 고등학생처럼은 절대 안 보이는걸."

내 말에 그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너희 어머니는 왜 필하고 결혼하신 거지?"

에드워드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거의 두 달 전에 딱


한 번 말했을 뿐인데. 내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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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이보다 굉장히 젊으셔. 근데 필이랑 같이 있으면 더 젊게


느껴지나 봐. 어쨌든 엄만 그분한테 홀딱 빠지셨어."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두 사람 사이는 나에게도 미스터리였다.

"너도 허락한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엄마가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엄마가 원하는건


필인걸."

"상당히...... 관대하네."

"뭐라고?"

"너희 어머니도 너한테 그런 호의를 베푸실까? 네가 누구룰 선택하든


상관없이?"

그는 돌연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그럴 거야. 하지만 어쨌든 엄마는 부모잖아. 서로 상황이 좀 다르지."

말이 더듬거려 나왔다.

"그럼 누굴 데려가든 아주 무서워하진 않으시겠군."

그가 놀리듯 말했다. 나 역시 싱긋 웃음이 나왔다.

"무섭다니, 무슨 뜻이야? 얼굴에 잔뜩 피어싱을 하고 여기저기에 문신을


한 뭐 그런 사람?"

"그것도 한 예가 될 수 있겠지."

"네가 생각하는 예는 뭔데?"

그는 내 질문을 무시하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나도 무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에드워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살짝 웃어 밝은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과 참말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을까 고민하느라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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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너도 네가 원한다면 무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지금 나 때문에 겁난다는 뜻?"

그의 웃음기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잘생긴


얼굴이 돌연 심각해졌다.

"아니."

내가 너무 빨리 대답하자 그의 웃음이 되살아났다.

"이젠 네 가족 얘기도 들려 줄래? 내 얘기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의 생각을 다른 쪽으로 이끌어보려고 내가 말을 이었다. 아내 그의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뭘 알고 싶은데?"

"컬렌 박사님 부부가 널 입양해다면서?"

"응."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네 부모님들은 어떻게 되신 거야?"

"오래전에 돌아가셨어."

그의 말투는 담담했다.

"안됐다."

내가 중얼거렸다.

"난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 칼라일하고 에스미가 오래전부터 내


부모였으니까."

"두 분을 사랑하는구나."

내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의 말투에서 분명히 애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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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두 분보다 착한 사람이란 상상도 하기 힘들지."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행운이네."

"나도 알아."

"형제자매들은?"

그가 계기판 위의 시계를 흘끔 쳐다보았다.

"형제자매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재스퍼와 로잘리가 빗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꽤나 화가 났을 것 같은데."

"어, 미안해. 어서 가봐."

그러면서도 나는 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다.

"아마 넌 트럭을 스완 서장님이 퇴근하시기 전에 가져다 뒀으면 하겠지.


그래야 생물시간에 있었던 사건을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벌써 들으셨을 거야. 포크스엔 비밀이 없거든."

내가 한숨을 쉬었다. 에드워드가 소리내어 웃었지만, 그의 웃음에는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해변에서 재미있게 놀다 와. 해수욕하기에는 참 좋은 날씨일 테니."

그가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내다봤다.

"내일은 학교에 안 올 거야?"

"응. 에밋하고 나는 주말을 일찍 시작하기로 했어."

"뭘 할 건데?"

친구라면 그 정도는 물을 수 있는 거겠지? 나는 내 목소리에서 실망캄이


너무 확연히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

"레이니어 산 바로 남쪽에 있는 고트록스 자연 보호 구역에서 등산을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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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야."

컬렌 가족이 자주 야영을 한다던 찰리의 말이 떠올랐다.

"아, 그럼 너도 재미있게 보내."

나는 유쾌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그를 속이는 데 성공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입가에 짓궂은 웃음기가 감돌았다.

"이번 주말 동안 내 부탁 좀 들어줄래?"

에드워드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불타는 황금빛


눈동자의 힘을 최대한 활용했다. 나는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 넌 아무래도 자석처럼 사고를 끌어당기는 부류에


속하는 인간인 모양이더군. 그러니까...... 바다에 빠지거나 높은 데서
떨어지거나 하지 않도록 조심해. 알았니?"

그가 비딱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을 들으니 나의 무력함은 사라졌다.


나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나는 빗속으로 뛰어내리며 쏘아붙이고는 지나치게 힘을 주어 자동차 문을


닫았다.

에드워드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차를 몰고 멀어져갔다.

6. 무서운 이야기

방에 앉아 <맥베스> 3 막에 집중하려 애쓰면서도 사실 나는 내 트럭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빗소리가 요란하긴 하지만 워낙 엔진 소리가
크니까 들리 거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커튼 사이로 다시 한 번 밖을
내다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트럭은 이미 제자리에 서 있었다.

금요일이 오는 게 반갑지도 않았지만, 실제로 겪는 하루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힘겨웠다. 물론 내가 기절한 사건에 대한 변명도 해야 했다.
특히 제시카는 그 얘기를 몹시 재미있어했다. 다행히 마이크가 입을 다물어
주어, 에드워드도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전날 점심시간에 대해서도 제시카는 나한테 물어볼 게 많았다.

"어제 에드워드 컬렌이 왜 널 보자고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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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함수 시간에 제시카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안 했거든."

"너 화나 있는 것 같던데."

"내가 그랬나?"

나는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걔가 자기네 가족 말고 다른 사람이랑 같이 앉아 있는 건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어. 정말 이상하더라."

"나도 이상했어."

내가 선선히 동의하자, 친구는 짜증이 난 듯 신경질적으로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칼을 어깨 뒤로 홱 넘겼다. 다른 아이들에게 들려줄 만한
그럴듯한 얘기를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그날 가장 속상했던 것은 에드워드가 학교에 나타나지 않으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기다렸다는 점이었다. 제시카와 마이크와 함께 식당에 들어서며,
나는 로잘리와 앨리스, 재스퍼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테이블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자, 걷잡을 수 없이 울적한 기분이
밀려왔다.

늘 나와 점심을 같이 먹는 멤버들은, 둘러앉아 다음 날 여행계획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시 쾌활한 표정을 되찾은 마이크는 내일 날씨가 맑을
것이라는 지역 기상예보관의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나는 눈으로 확인해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도 날씨가 따뜻해서 거의 16 도까지
기온이 올랐다. 주말 여행은 어쩌면 그렇게까지 끔찍하지는 않을지도
몰랐다.

점심시간 내내 이따금씩 로렌의 못마땅한 시선을 받아야 했던 나는 모두


함께 식당을 나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로렌의 매끄러운
은발 뒤로 한 걸음 떨어져 걷고 있었는데 그녀는 아무래도 그걸 모르는 듯
했다.

"왜 베엘라는 점심시간에도 계속 컬렌 일당하고는 어울리지 않나 몰라."

내 이름을 빈정거리듯 발음하며 로렌은 마이크한테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 애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그토록 듣기 싫은 줄도 몰랐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적대감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로렌을 잘 몰랐고, 그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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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나를 싫어할 만큼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여겼는데, 그건 내


생각 뿐인 듯했다.

"벨라는 내 친구니까 앞으로도 우리랑 같이 어울릴 거야."

마이크가 충직하게 속삭여 대꾸했지만, 어쩐지 나를 소유물처럼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는 제시카와 앤젤라가 앞서가도록 잠시 멈춰 섰다. 둘의
이야기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날 저녁, 찰리는 다음 날 아침 내가 라푸시로 여행을 가는 게 몹시 기쁜


듯 했다. 주말에도 일하는 것은 오랜 기간 익숙해진 습관이라 이제 와서 깰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주말에 나를 혼자 집에 홀로 남겨두자니 죄책감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는 함께 가는 아이들의 이름과 그 부모를 모두
알고 있었고, 어쩌면 조부모들까지도 알 터였다. 그는 당연히 허락하는
눈치였다. 내가 에드워드 컬렌과 단둘이 시애틀에 간다고 해도 허락할지
궁금했다. 물론 찰리에게 그 얘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아빠, 혹시 고트록스라는 데 들어보셨어요? 레이니어 산 남쪽이라던데."

내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응, 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애들 중에 누가 거기서 야영한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야영하기엔 별로 좋은 곳이 아닌데, 거긴 곰이 너무 많아. 대부분


사냥에나 가는 곳이지."

그는 놀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네, 제가 잘못 들었나 보죠 뭐."

내가 중얼거리며 얼버무렸다.

다음날은 늦게까지 잘 생각이었지만, 유난히 밝은 빛 때문에 잠이 깨고


말았다. 눈을 뜨자 선명한 노란 빛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황급히 창밖을 내다보니 정말로 해가 빛나고 있었다.
하늘에 잘못 걸려 있는 것처럼 너무 낮게 뜬데다 상당히 멀어 보이기는
했지만, 그건 분명 태양이었다. 지평선에 구름이 뭉게뭉게 몰려 있었지만
구름 사이로도 파란 하늘이 눈에 띄었다. 창가를 떠나면 파란 하늘이 다시
사라질 것만 같아서 나는 최대한 창가에서 머뭇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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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올림픽 등산용품점'은 도시 북쪽 외곽에


있었다. 나도 그 가게를 본 적은 있지만, 야외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살 일이 없으니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주차장에는 이미
마이크의 승합차와 타일러의 센트라가 서 있었다. 그 옆에 트럭을
주차시키면서 보니, 승합차 앞에 여러 명이 서 있었다. 나와도 수업을 같이
듣는 남학생 두 명과 함께 있는 에릭이 보였다. 확실치 않지만 그들의
이름은 벤과 코너였던 것 같다. 앤젤라와 로렌을 데려온 제시카도 있었다.
그 옆엔 여학생이 세 명 더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은 금요일 체육시간에
내가 부딪혀 넘어진 아이였다. 내가 트럭에서 내리자 그 아이가 나를
흘겨보더니 로렌에게 뭔가 속삭였다. 로렌은 옥수수 수염 같은 머리채를
흔들며 빈정거리듯 나를 노려보았다.

결국 나에게 '뻔한' 하루가 될 듯했다. 그래도 마이크는 나를 반겨주었다.

"왔구나! 내가 오늘은 맑을 거라고 했지?"

마이크가 기뻐하며 외쳤다.

"내가 온다고 했잖아"

"리하고 사만다만 오면 돼. 혹시...... 네가 다른 사람을 초대하지


않았다면 말이야."

"안 했어."

나는 거짓말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며 가볍게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적이라도 일어나 에드워드가 나타나기를 빌고 있었다. 마이크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내 차 타고 갈래? 그거 빼곤 리의 엄마가 빌려주신 미니밴밖에 없거든."

"좋아."

마이크가 활짝 웃었다. 마이크를 기분 좋게 만드는 건 참 쉬운 일이었다.

"네가 조수석에 앉으면 되겠다."

마이크의 말에 나는 속으로 낭패구나 싶었다. 마이크와 제시카를 동시에


기분 좋게 만드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제시카가 우리 둘을
노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상황은 나에게 이롭게 전개됐다. 리가 친구를 둘이나 더 데려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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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갑자기 좌석을 있는대로 다 써야 하게 되어서다. 나는 제시카를


승합차 앞좌석 가운데에 태워, 마이크와 내 사이에 앉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마이크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적어도 제시카의 마음은
풀렸다.

포크스에서 라푸시까지는 25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지만, 도로


양옆으로는 울창한 숲이 우거졌고, 뱀처럼 숲을 가로지르는 넓은 퀼러유트
강의 굽은 물줄기도 두 번이나 만났다. 나는 창가 자리에 앉은 게 기뻤다.
마이크의 승합차는 아홉 명이 끼어 타자니 밀실공포증이 느껴질 것만
같았으므로 창문을 모두 내리고 달렸다. 나는 최대한 햇볕을 쪼이려고
애썼다.

여름마다 포크스에 와서 찰리와 지내는 동안 라푸시 근처의 해변에는


많이 와 봤기 때문에, 길이가 1.5 킬로미터쯤 되는 퍼스트 해변은 낯이
익었다. 다시 봐도 경치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햇빛 아래서도 바다는 진한
잿빛이었고, 넘실거리는 하얀 파도가 회색 바위 해안으로 밀려왔다.
거무스름한 쇳물 같은 바다 위로 솟아난 섬들은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이었고, 울퉁불퉁한 섬 꼭대기에 앙상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전나무
숲이 왕관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모래사장은 파도가 밀려드는 맨 가장자리
해변에만 조금 형성됐을 뿐, 해변엔 주로 평평하고 거대한 바위들이
들쭉날쭉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멀리서 보면 하나같이 칙칙한 회색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적갈색부터 청록색, 연보라색, 청회색, 칙칙한
금색까지 색깔이 아주 다양했다. 뿌리채 뽑혀 폭풍에 밀려온 거대한
나무들은 소금물에 새하얗게 탈색되어 숲 가장자리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거나, 파도가 닿지 않는 곳에 덩그러니 홀로 놓여 있거나 했다.

파도를 타고 서늘하고 짠내 나는 바람이 상쾌하게 불어왔다. 넘실거리는


물결 위엔 펠리컨들이 둥둥 떠 있고 하늘엔 갈매기 떼와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다녔다. 구름은 언제라도 자리를 침범할 듯 여전히 하늘 구석에서 둥실
떠다니고 있었지만, 지금은 파란 하늘에 뜬 태양이 용감하게 환한 빛을
뿜고 있었다.

우리는 해변으로 내려갔고, 마이크는 누군가가 떠밀려온 나무를 이용해


둥글게 자리를 마련해 놓은 곳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우리처럼 해변에서
파티를 즐긴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분명했다. 가운데는 검은 재가 그득한
모닥불 자리도 남아 있었다. 이름이 벤이었던 것 같은 남자아이가 에릭과
함께 숲 가장자리에 쓰러져 있는 마른 나뭇더미에서 가지를 꺾어왔고, 이내
오래된 재 위에 원뿔형으로 나뭇가지를 쌓아올렸다.

"바다에 떠밀려 온 나무로 모닥불 피워본 적 있어?"

마이크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회백색 벤치에 앉아 있었고, 내 양옆엔


다른 여자애들이 둘러서서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마이크는 바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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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고 앉아 라이터로 작은 가지에 불을 붙였다.

"아니."

그가 불붙은 가지를 조심스럽게 쌓아놓은 나무에 올려놓는 걸 보며 내가


대답했다.

"그럼 신기한 걸 보게 될 거야. 색깔을 잘 봐."

마이크는 작은 나뭇가지 또 하나에 불을 붙여 다시 내려놓았다. 불꽃이


빠르게 마른 나무를 삼키기 시작했다.

"파란색이네."

내가 놀라 말했다.

"소금 때문에 그래. 예쁘지?"

그는 불쏘시개를 하나 더 만들어 아직 불이 붙지 않은 나무 위에 놓고는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다행히 그의 다른 쪽 옆에는 제시카가 앉았다.
제시카는 마이크를 향해 몸을 틀고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이상한 파란 불꽃과 초록 불꽃이 하늘로 탁탁 튀는 모습을
구경했다.

삼십 분쯤 수다를 떨고 나자 남자애들이 파도가 만들어 놓은 바위 웅덩이


근처로 산책을 가자고 제안했다. 나에겐 딜레마였다. 한편으로 나는 바위
웅덩이를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바닷가 바위들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포크스에 와야 한다고 결정했을 때, 바위 해변 산책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내가 고대했던 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바위
웅덩이에 잘 빠지기도 했다. 아빠랑 함께 있는 일곱 살짜리라면야 웅덩이에
빠지는 게 뭐 대수겠는가, 그 생각을 하니 바다에 빠지지 말라던
에드워드의 당부가 생각났다.

로렌이 내 대신 결정을 내려주었다. 그 앤 바윗길 산책에 적당하지 않은


신발을 신고 있어서 걷고 싶어하지 않았다. 앤젤라와 제시카를 제외하곤
다른 여자애들도 모두 해변에 남기로 했다. 나는 타일러와 에릭이
여자애들과 함께 남겠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일어나
산책하려는 무리에 끼었다. 나도 같이 가기로 한 걸 본 마이크가 환하게
웃어주었다.

숲에 가려져 잠시나마 하늘을 볼 수 없는 건 싫었지만,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숲속에서 느껴지는 초록빛은 십대들의 웃음소리와 이상하게
겉돌았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농담과 어울리기엔 너무 음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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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스스했다. 발밑으로 솟은 나무뿌리와 머리 위를 가로지른 나뭇가지를


피해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느라 나는 이내 뒤처졌다. 마침내
답답한 에메랄드빛 숲이 사라지고 바위 해변이 다시 나타났다. 파도는 세지
않았지만, 바다로 연결된 강 하구가 우리 뒤쪽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자갈과 바위로 뒤덮인 천연 방파제를 따라, 완전히 물이 빠지지 않은 얕은
웅덩이마다 생명의 신비가 가득했다.

나는 크고 작은 바닷물 웅덩이를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다른 아이들은 겁없이 바위 위를 뛰어다니며 바위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앉기도 했다. 가장 큰 웅덩이 옆에 제법 평평해 보이는
바위를 찾아낸 나는 거기에 조심스럽게 앉아 눈앞에서 펼쳐지는 천연
수족관의 아름다움에 심취했다. 꽃다발처럼 색깔이 선명하고 예쁜
말미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조류를 따라 하늘거렸고, 바위 가장자리에는 굴
껍데기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며, 바닥에서 기어다니는 게와 바위에 붙어
꼼짝도 하지 않는 불가사리도 들여다보였다. 하얀 줄무늬가 들어간 검정색
뱀장어 새끼 한 마리가 선명한 초록색 해초 사이로 헤엄을 치며, 밀물 때가
되어 다시 바다로 돌아가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지금쯤 에드워드는 무얼 하고 있을지, 여기에 같이 왔다면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잠깐 상상해 본 것을 빼면, 나는 완전히 바다의 신비에 몰두했다.

얼마 후 남자애들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나는 뻣뻣해진 몸을 일으켜


그들의 뒤를 따랐다. 다시 숲을 지날 때에는 최대한 빨리 따라가려고 애를
썼더니 아니나 다를까 몇 번이나 넘어졌다. 손바닥이 조금 벗겨지고 청바지
무릎에 초록 이끼가 묻었지만, 그만하니 다행이었다.

퍼스트 해변으로 돌아가니, 우리가 남겨두고 떠났던 일행의 수가 배로


많아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새로 합류한 일행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온 십대들로, 모두 반짝이는 검은 직모에 피부는
구릿빛이었다. 벌써 다들 점심을 나눠 먹고 있었으므로 남자애들은 황급히
다가가 제 몫을 집어들었고, 에릭은 모닥불가로 하나하나 합류하는 우리를
일행에게 소개했다. 가장 늦게 도착한 앤젤라와 나를 소개하자, 모닥불
주변 바위에 앉아 있던 가장 어려 보이는 남자애가 흥미롭다는 듯 흘긋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앤젤라 옆에 앉았고, 마이크가 우리에게
샌드위치와 캔 음료를 여러 종류 가져와 고르라고 했다. 그 사이 상대
쪽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애가 같이 온 일행 일곱 명의
이름을 소개했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쪽 여자애들 중에도 제시카라는
이름이 있고, 나를 알아본 남자애 이름이 제이콥 이라는 것 뿐이었다.

앤젤라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앤젤라는 언제나 같이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배려하는 편이었고, 침묵이 이어질 때마다 억지로 수다를
이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점심을 먹는 동안 그녀는 내가 방해받지 않고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는 포크스에서 물 흐르듯, 때로는 별
기억 없이 흘려보낸 시간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선명하게 각인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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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물론 매 순간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내 뇌리에 깊이 새겨진 때도 있었다. 나는 그 차이가 왜 생겨났는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게 걱정스러웠다.

점심을 먹는 동안 구름이 많아지기 시작해 파란 하늘을 점령하더니,


시시각각 해를 막아섰다. 해변에는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파도는
더욱 검은 빛을 띠었다. 식사를 마친 아이들은 둘 셋씩 어울려 제각기
흩어졌다. 일부는 물거품이 부서지는 바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닐 생각인지
파도 쪽으로 걸어갔다. 마이크는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제시카를
데리고 마을에 있는 토산품 가게로 향했다. 보호구역 아이들 몇 명도 함께
따라갔다. 다른 아이들은 산책을 떠났다. 모두들 흩어지고 나자, 누군가
가져온 CD 플레이어 옆에서 음악을 함께 듣고 있는 로렌과 타일러 말고는
원래 일행 중 나 혼자만 모닥불가에 앉아 있었다.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온
십대들도 제이콥이라는 아이와 대표처럼 굴던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애를 포함해 달랑 셋만 남아 있었다.

앤젤라가 아이들과 산책하러 떠나고 몇 분쯤 지나자, 제이콥이 어슬렁


거리며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그는 열넷이나 열다섯 살쯤 되어 보였고,
길고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묶은 모습이었다. 실크처럼
매끄러운 그의 구릿빛 피부는 아름다웠다. 두드러진 광대뼈 위로 깊이
자리한 검은 눈동자도 인상적이었다. 얼굴에는 아직 아이다운 볼살이 붙어
귀여운 느낌을 풍겼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잘생긴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외모에 대한 나의 긍정적인 느낌은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에 산산히
부서졌다.

"이사벨라 스완 맞지?"

전학 온 첫날로 다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벨라야."

내가 한숨을 쉬었다.

"난 제이콥 불랙이야. 네가 산 트럭이 바로 우리 아빠 차였어."

그가 다정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아, 빌리 아저씨 아들이로구나. 어쩌면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나는 안심하며 그의 매끄러운 손을 맞잡았다.

"나일걸, 내가 막내거든. 아마 우리 누나들은 생각나겠다."

"아, 레이첼하고 레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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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름이 떠올랐다. 내가 포크스에 와서 지내는 동안 찰리와 빌리는


우리를 자주 어울리게 했고, 어른들이 낚시를 하는 사이 아이들끼리 놀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우리는 다들 수줍음이 많아 별로 친해지지 못했다.
그리고 열한 살 무렵 그런 낚시여행에는 절대 따라가지 않겠다고 짜증을
부려 그 뒤로는 따라다니지 않게 되었다.

"누나들도 여기 같이 왔니?"

지금 그들을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지 궁금해 하며 나는 바닷가에 내려간


여자애들을 살폈다.

"아니."

제이콥이 고개를 흔들었다.

"레이첼 누나는 장학금을 받고 워싱턴주립대에 갔고, 레베카 누나는


사모아 출신 서핑 선수랑 결혼해서 지금 하와이에 살아."

"우와, 벌써 결혼을 했구나."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쌍둥이였던 두 자매는 나보다 겨우 한두 살밖에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트럭은 마음에 들어?"

"마음에 쏙 들어. 아주 잘 달리고 있지."

"그래도 엄청 느리잖아."

제이콥이 키득키득 웃었다.

"찰리 아저씨가 그 차를 사기로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안심했는데.


멀쩡하게 잘 굴러가는 차가 집에 있는데 또 다른 차를 조립하는 걸아버지가
허락할 리 없거든."

"그렇게 느리진 않아."

내가 반박했다.

"시속 90 킬로미터 이상 달려 봤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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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어, 안 해보는게 좋아."

제이콥이 씩 웃었다. 나 역시 웃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사고 나도 안전할 것 같더라."

내가 내 트럭을 감싸느라 이렇게 말했다.

"그 괴물은 아마 탱크랑 부딪쳐도 멀쩡할걸."

제이콥이 또 한번 유쾌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네가 직접 자동차를 조립한다고"

"시간 여유도 좀 있고 부품들도 있을 때나 그렇지, 혹시 1986 년형


폭스바겐 래빗 자동차의 엔진용 실린더를 구할 만한 데 알아?"

그가 농담하듯 물었다. 제이콥의 목소리는 듣기 좋은 허스키였다.

"미안하지만 최근엔 본 적이 없어. 아무튼 앞으로 눈여겨봐 둘게."

나는 자동차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대꾸했다. 제이콥은 아야기하기 편한


상대였다.

제이콥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감상하듯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도


이제는 남자애들의 그런 시선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걸 눈치 챈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제이콥, 너 벨라랑 아는 사이였니?"

로렌이 모닥불 건너편에서 몹시 오만한 말투로 물었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야."

제이콥이 또 한번 나에게 웃어 보인 뒤 큰소리로 유쾌하게 웃어댔다.

"어머, 좋겠네."

전혀 좋은 것 같지 않은 말투로 대꾸한 뒤 로렌이 뭔가를 더 캐물을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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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이 내 얼굴을 조심스레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타일리랑 컬렌 집안 아이들은 오늘 아무도 여기 못 와서 참


안됐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어. 아무도 걔네를 초대할 생각은 안 했나
보네?"

로렌의 표정에서 안타까움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칼라일 컬렌 박사님 댁 아이들 말인가?"

내가 대꾸하기도 전에 가장 키가 크고 나이도 많은 남자애가 되묻자,


로렌이 발칵 짜증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청소년이라기보다 어른에
가까웠고 목소리도 아주 굵었다.

"응, 그 사람들 알아?"

로렌이 그에게 반쯤 몸을 틀며 생색내듯 대꾸했다.

"컬렌 집안 사람들은 여기 오지 않아."

그는 로렌의 질문을 무시한채,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한 말투로 단언했다.

타일러는 로렌의 관심을 다시 끌려는 생각인지 그녀가 들고 있는 CD 가


어떤지 물었고, 로렌은 곧 우리 대화에서 빠졌다.

깜짝 놀란 나는 굵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지만, 그는 시선을 피해


우리 뒤쪽에 있는 어두운 숲을 바라보았다. 그는 컬렌 집안 사람들이 여기
오지 않는다고 했을 뿐이지만, 그의 말투는 뭔가 그 이상의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들은 이곳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듯했다. 그의
태도는 이상하게도 내 뇌리에 각인되었고, 무시하려 해도 자꾸만 떠올랐다.

제이콥이 내 생각을 방해했다.

"포크스에서 지내는거 아직은 견딜만 해?"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고 해야겠지."

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제이콥은 알 만하다는 듯 씩 웃었다.

여전히 컬렌 집안에 대한 낯선 사람의 짧은 말에 마음을 쓰고 있던 나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리석은 계획이기는 했지만, 더 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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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어린 제오콥이 아직은 여자애들을 많이


사귀어보지 않아서, 꼬리를 치며 살짝 유혹하려는 내 뻔한 시도를
알아차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나랑 해변까지 좀 걸을래?"

에드워드가 긴 속눈썹 아래로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을 흉내 내려고


애쓰며 내가 물었다. 같은 효력을 나타낼 리야 절대로 없겠지만, 어쨌든
제이콥은 선뜻 일어나주었다.

우리는 색색깔의 바위를 지나, 떠밀려온 나무들이 쌓인 방파제 쪽으로


걸었고, 그 사이 마침내 구름이 하늘을 온통 뒤덮어 바다색도 짙어지고
기온도 뚝 떨어졌다. 나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었다.

"그래 너 지금 몇살이지? 열여섯?"

나는 제발 바보 같아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텔레비전에서 본 여자애들


처럼 눈을 깜박거렸다.

"열다섯 살 된 지 얼마 안 됐는데."

제이콥이 우쭐해하며 털어놓았다.

"정말? 그보다는 더 먹은 줄 알았어."

내가 거짓으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또래에 비해 키가 좀 크지."

"포크스엔 자주 오니?"

나는 그렇다는 대답을 바라는 것처럼 은근하게 물었다. 내가 듣기에도


멍청한 질문이었다. 나는 제이콥이 당장 내 사기극을 비난하며 질색을 하고
가버릴까 봐 걱정스러웠지만, 그는 아직 우쭐해 보였다.

"자주는 못 가. 하지만 자동차 조립이 끝나고, 면허증도 따고 나면 가고


싶을 때마다 언제든 갈 수 있을 거야."

아쉬운 듯 이맛살을 찌푸렸던 제이콥이 열을 올리며 말했다.

"로렌이랑 얘기를 나누던 그 사람은 누구야? 우리랑 어울리기엔 좀 나이


들어 보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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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남자보다 제이콥을 더 좋아한다는 걸 명확히 하느라, 일부러 나도


어린축에 속하는 것처럼 뭉뚱그렸다.

"샘이야. 열아홉 살이지."

"박사님 가족에 대해서 그 사람이 한 얘긴 뭐야?"

순진한 체 하며 내가 물었다.

"컬렌 집안 사람들 얘기? 아, 그 사람들은 우리 보호구역에 오지 않기로


되어 있어."

샘의 목소리에서 내가 받은 느낌을 재확인해 주듯, 그는 눈길을 돌려


제임스 섬을 바라보았다.

"왜?"

그는 나를 다시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그 얘기는 하면 안 되는 건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그냥 좀 궁금해서 그래."

나는 내가 지나치게 아양을 떠는 건 아닐까 내심 염려하면서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어찌 되었든 그는 유혹에 넘어간 듯 헤벌쭉 웃었다. 이어 그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를 더욱 낮춰 말했다.

"혹시 무서운 이야기 좋아해?"

"당연히 좋아하지."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사로잡으려고 애쓰며, 내가 열광이라도 하듯


대답했다.

제이콥은 근처까지 떠밀려온, 뿌리가 거대하고 허연 거미 다리처럼


튀어나온 나무 잔해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뒤틀어진 뿌리 한 줄기에
가볍게 걸터앉았고, 나는 그보다 아래쪽 나무 몸통에 자리를 잡았다.
바위들을 내려다보는 그의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흥미진진한 눈빛을 계속 유지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혹시 우리 옛날이야기 들어왔어? 퀼렛 부족의 유래 같은 것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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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문을 열었다.

"아니."

"전설이 워낙 많은데, 어떤 이야기는 노아의 홍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해. 옛날 퀼렛 선조들은 산꼭대기 가장 높은 나무 끝에 카누를
매달아서 노아의 방주처럼 살아남았다는 거지."

그는 부족의 역사를 자기가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듯 날


보며 미소지었다.

"또 다른 전설은 우리 조상이 늑대라는 건데, 우린 아직도 늑대와 형제


관계라고 믿기 때문에 부족의 율법에 따라 늑대를 죽이는 걸 금하고 있어.
그리고 '냉혈족'에 대한 전설도 있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냉혈족이라고?"

난 더 이상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는 척할 필요 없이 곧이곧대로 반응했다.

"응. 냉혈족에 관한 이야기는 늑대 전설만큼 오래된 건데, 최근까지


내려오는 이야기도 있어. 전설에 따르면 우리 증조할아버지도 냉혈족
일부와 관련이 있대. 그들이 우리 땅을 침범하지 않도록 평화조약을 맺은
분이 바로 우리 증조할아버지라나."

제이콥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희번덕거렸다.

"너희 증조할아버지께서?"

"증조할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처럼 부족 원로셨대. 원래 냉혈족은 늑대와


타고난 원수지간이거든. 그러니까 진짜 늑대는 아니고, 우리 선조들처럼
인간이 된 늑대 말이야. 흔히 늑대인간이라고 부르잖아."

"늑대인간한테도 적이 있단 말이야/"

"유일한 적이지."

조바심이 치밀었지만, 제이콥이 내 표정을 감탄하는 것이라 여겨주기를


바라며 나는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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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냉혈족은 전통적으로 우리의 적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런데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사시던 때에 우리 영토로 들어온 냉혈족 일당은 좀 달랐대.
다른 일당들처럼 인간을 사냥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부족에게도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된 거지. 그래서 우리 증조할아버지께서 그들과
평화협정을 맺으셨대. 그들이 우리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우리도 그들의 정체를 다른 사람들에게 폭로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제이콥이 나를 보며 윙크를 했다.

"그들이 위험하지 않다면 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동시에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냉혈족이 제아무리 이들 일당처럼 교화됐다고 해도, 인간으로선 같이


어울리기 위험하잖아. 너무 굶주려서 본능적인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게
됐을 때 그들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

그는 일부러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돋구려는 듯 목소리를 음산하게 냈다.

"'교화됐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그들은 인간을 사냥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대. 인간 대신 짐승을 먹고 살


수 있게 됐다는 거지."

나는 평범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게 컬렌 가족과 무슨 상관이야? 너의 증조할아버지께서 만난


냉혈족하고 닮기라도 했나?"

"그게 아니야."

제이콥은 극적 효과를 노리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들이 바로 그 냉혈족이거든."

그는 내 얼굴에 떠로은 공포가 순전히 자기 이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금은 전보다 수가 많아져서, 여자도, 남자도 한명씩 더 늘어났지만,


나머지는 옛날 그 일당들이야.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사시던 때에도 그들의
우두머리인 칼라일은 이미 잘 알려진 인물이었대. 그자는 '너희들' 같은
백인들이 여기 와 정착하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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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은 웃음이 나는 걸 참고 있었다.

"그럼 그 사람들의 정체는 뭐야? 냉혈족이 뭔데?"

마침내 내가 묻자 제이콥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흡혈귀지. 백인들은 그들을 뱀파이어라고 부를걸."

제이콥이 음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내 얼굴에


어떤 표정이 드러나 있을지 자신이 없어 저 멀리 몰아치는 거친 파도를
바라보았다.

"소름 돋았구나."

제이콥이 유쾌하게 웃어댔다.

"너, 얘기를 참 실감나게 잘 한다."

여전히 파도를 응시한 채 내가 칭찬을 해주었다.

"아무래도 정신 나간 얘기 같지? 우리 아버지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한 것도 당연해."

나는 아직도 그와 얼굴을 마주해도 될 만큼 표정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걱정마.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을게."

"방금 난 그들과의 평화협정을 깬 셈이야."

제이콥이 소리 내어 웃었다.

"무덤까지 비밀로 갖고 갈게."

그렇게 장담하고 나서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튼 정말로 찰리 아저씨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마. 컬렌 박사님이 이곳


병원에서 일을 한 뒤로 우리 부족 사람들이 병원에 가길 거부한다는 얘길
듣고, 아저씨가 우리 아버지한테 많이 화내셨거든."

"물로닝야. 얘기 안 할게."

"우리 부족이 참 말도 안 되는 미신에 얽매인다고 생각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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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조금은 진심으로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도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아무튼 넌 정말 무서운 이야기를 실감나게 잘하는구나. 아직도


소름 돋은 게 가라앉질 않았어. 이거 봐."

내가 팔을 들어올리자 그가 흡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이어 바닷가 바위 위로 돌멩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 누군가 다가온다는


걸 알았다. 제이콥과 내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니 마이크가 제시카를 이끌고
50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벨라, 여기 있었구나."

마이크가 안심한 듯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저 사람이 혹시 남자친구야?"

마이크의 목소리에 질투심을 느낀 듯 제이콥이 물었다. 남들에게도


그토록 티가 난다는게 놀라웠다.

"아니, 절대로 아니야."

내가 속삭였다. 나는 제이콥이 아주 고마웠고, 최대한 그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나는 마이크가 보지 않도록 고개를 돌린 채 제이콥에게
윙크를 했다. 그는 내가 서투르게 추근거리는 것에도 우쭐해져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나한테 면허증이 생기면......"

제이콥이 말문을 열었다.

"포크스에 나 보러 꼭 와. 같이 놀러 나가자."

나는 제이콥을 이용했다는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정말로 제이콥이


좋았다. 그는 드물게도 내가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부류에 속했다.

어느새 마이크가 우리 앞에 와 있었고, 제시카는 두세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제이콥을 유심히 살펴보던 마이크는 그가 확실히 어려
보이는 것에 안심하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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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갔었어?"

대답이 뻔히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도 마이크가 물었다.

"제이콥이 이곳에 읽힌 옛날이야기를 들려줬어. 정말 재미있더라."

내가 대꾸했다. 내가 제이콥을 보며 따뜻하게 웃어 보이자, 그도 마주


웃어주었다. 마이크는 우리 둘이 동지처럼 주고받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조심스레 지켜보았다.

"지금 다들 짐 싸고 있어. 곧 비가 올 것 같거든."

우리는 모두 잔쯕 찌푸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비가 올


모양이었다.

"알았어. 갈게."

내가 벌떡 일어났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

제이콥이 일부러 마이크를 자극하려는 듯 말했다.

"정말 반가웠어. 다음에 아버지가 빌리 아저씨를 만나러 오실 땐 나도


따라올게."

내가 약속하자 제이콥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럼 좋지."

"그리고 고마웠어."

내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바위 해변을 따라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며 나는 점퍼에 달린 모자를


눌러썼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해, 바위에 검은 점을 찍어댔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다른 아이들이 벌써 짐을 트렁크에 모두 실은 뒤였다.
나는 올 때는 편하게 조수석에 앉아서 왔으니 이제 다음 사람 차례라고
말하며, 앤젤라와 타일러가 앉은 뒷좌석으로 파고들었다. 앤젤레는 빠르게
내려오고 있는 먹구름을 가만히 내다보았고, 로렌은 가운데 자리에 앉아
타일러의 관심을 끌려고 애쓰고 있었으므로, 나는 가만히 좌석 뒤에 머리를
대고 앉아 눈을 감은 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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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악몽

집에 가자마자 나는 찰리에게 숙제할 것도 많고, 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마침 찰리는 텔레비전에서 좋아하는 팀의 농구경기가
방송되어 한창 열을 올리며 보고 있었던 듯, 내 표정과 말투에서 특별히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방에 올라간 나는 문을 잠갔다. 책상을 샅샅이 뒤져 낡은 헤드폰을 찾아낸


뒤 작은 CD 플레이어에 꽂았다. 그러고는 크리스마스에 필한테 선물 받은
CD 를 집어들었다. 그가 좋아하는 밴드의 앨범이었지만 워낙 음악이
시끄럽고 요란해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나는 그 CD 를 플레이어에 넣고
침대에 누웠다. 헤드폰을 낀 다음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귀가 아플 때까지
볼륨을 높였다.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눈에 빛이 들어와, 베개를 눈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아주 조심스레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가사를 음미하고 복잡한 드럼


연주 패턴을 연구했다. CD 를 세 번째 되풀이해서 듣자 가사 내용을 모두
알 수 있었다. 일단 귀청을 찢는 소음에 익숙해지다 놀랍게도 정말로
밴드가 마음에 들었다. 필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효과도 있었다. 귀청을 찢는 비트 강한 음악 때문에 생각이라고는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 마지 않는 목표였다.
노래를 모두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되풀이해서 CD 를 듣던 나는 마침내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익숙한 곳이었다. 의식의 한 귀퉁이에서 나는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고, 숲에서 새어나오는 초록빛도 낯이 익었다.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바위를 때리는 파도 소리도 들려왔다. 바닷가를 찾아가면
태양을 볼 수 있으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파도 소리를 따라가려
했는데, 갑자기 제이콥 블랙이 나타나 내 손을 잡더니 으슥한 숲속으로
이끌었다.

"제이콥? 왜 그래?"

내가 물었다. 내가 제자리에서 버티며 저항하는 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나를 잡아당기는 제이콥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벨라, 뛰어. 달려야 해!"

제이콥이 겁에 질려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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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이야!"

음침한 숲속에서 마이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왜?"

어서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가고 싶어 여전히 제이콥의 손아귀를


뿌리치며 내가 물었다.

그러나 제이콥은 내 손을 놓고 비명을 지르더니 갑자기 부들부들 떨며


어두운 숲 바닥에 쓰러졌다. 내가 공포에 사로잡여 지켜보는 사이 그는
바닥에서 경련을 일으켰다.

"제이콥!"

내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있던 자리엔 검은


눈을 빛내는 거대한 적갈색 늑대 한 마리가 나타났다. 늑대는 나를 외면한
채 바닷가를 향해 서서 목덜미 털을 바짝 세우고, 무섭게 드러난 송곳니
사이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벨라, 달아나!"

마이크가 또 한 번 내 등 뒤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해변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빛을 지켜보고 있었다.

곧이어 에드워드가 나무 그늘에서 걸어나왔다. 그의 피부는 희미하게


빛을 발했고, 검은 눈동자는 위험해 보였다. 그는 한 손을 들어 나에게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 발밑에서 늑대가 으르렁거렸다.

나는 에드워드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가 미소를 짓자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나를 믿어."

에드워드가 그르렁거리며 말했다.

내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갔다. 늑대가 나와 뱀파이어인 에드워드


사이로 펄쩍 뛰어나가더니 그의 급소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안 돼!"

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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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내 움직임에 헤드폰이 딸려 올라오는 바람에 침대 머리맡


탁자에 올려둔 CD 플레이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등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나는 옷을 고스란히 입은 채 신발까지 신고


있었다. 정신이 들지 않아 멍하지 옷장 위 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5 시
반이었다.

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침대에 누워, 엎드린 채로 발길질을 해 신발을


벗었다. 하지만 너무 불편해서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똑바로 누워 청바지 단추를 푼 뒤 그대로 누워 어색하게 바지를 벗었다.
하나로 땋은 머리가 목덜미에 닿아 불편했다. 나는 옆으로 누워 고무줄을
빼버리고 손가락으로 재빨리 땋은 머리를 풀었다. 그리고는 베개로 얼굴을
덮었다.

에상대로 아무 소용 없었다. 무의식은 내가 그토록 절박하게 회피하고


싶어하는 영상을 자꾸만 만들어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할
상황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자, 갑자기 피가 아래로 쏠려 잠시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래도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나는 '그 일'을 최대한 미룰 수
있다는 걸 기뻐하면서 목욕용품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샤워는 내가 바란 만큼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헤어드라이어로


젖은 머리칼을 말려도 보았지만, 욕실에서 할 일은 곧 끝이 났다. 타월로
몸을 감싸고 방으로 돌아왔다. 찰리가 아직 자고 있는지, 아니면 벌써 집을
나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순찰차는 이미 없었다. 다시
낚시를 간 것이다.

나는 천천히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침대를 정리했다. 침대정리는


절대로 하지 않는 일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더 미룰 수가 없었다. 나는
책상으로 가 낡은 컴퓨터를 켰다.

이곳에서 인터넷을 쓰는 건 참 짜증나는 일이다. 모뎀이 처량맞을 만큼


구식이라 접속 속도가 수준 이하였다. 인터넷에 연결되는 데만도 너무 오래
걸려서, 나는 기다리는 동안 시리얼이나 한 그릇 먹어야 겠다고 결심했다.

한 입 한 입 조심스럽게 씹으며 천천히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를 미찬


뒤엔 그릇과 숟가락을 씻어 마른 행주로 닦은 다음 찬장에 넣었다. 그리고
발을 질질 끌며 계단을 올라갔다. 먼저 바닥에 떨어진 CD 플레이어를 집어
탁자 한가운데에 올려놓았다. 뽑은 헤드폰은 원래 있던 책상서랍에
넣었다. 그러고는 같은 CD 를 틀어, 귀에 거슬리지 않는 배경음악 정도로
들릴 만큼 볼륨을 낮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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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 한숨을 쉬며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모니터에는


광고창이 어지럽게 떠 있었다. 나는 딱딱한 접이식 의자에 앉아 광고창을
모두 닫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가장 즐겨 쓰는 검색 엔진을 불러냈다.
몇개 더 뜬 광고창을 닫은 후, 나는 단어 하나를 타이핑했다.

뱀파이어.

이번에도 물론 화가 치밀 정도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검색결과가 뜬


뒤에도 각종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롤플레잉게임, 언더그라운드
메탈밴드, 고딕풍 화장품 회사까지 걸러내야 할 게 많았다.

그러다 '뱀파이어 A 부터 Z 까지'라는 제법 쓸 만해 보이는 사이트가 눈에


띄었다. 나는 사이트가 연결되는 동안 초조하게 기다리며 모니터에 뜨는
광고창을 재빨리 닫았다. 마침내 단순하게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된
학구적인 느낌의 화면이 열렸다. 그 사이튼 초기화면에 뜬 인용문 두 개가
나를 반겼다.

유령과 악마의 어두운 세계를 통틀어, 유령도, 악마도 아니면서 그에


못지않게 신비와 공포를 간직하고 있는 뱀파이어만큼 경악과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끔찍할 만큼 매혹적인 존재는 다시 없다.
-몬테규 서머스 목사

이 세상에 뱀파이어만큼 그 존재가 잘 입증된 대상이 또 있을까.


공식보고서, 유명인사들의 저술서, 의사, 사제, 판사들의 증언까지
부족함이 없으니 단서는 아주 완벽하게 갖춰진 셈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뱀파이어를 믿는자 그 어디에 있는가?

- 루소

그 사이트의 나머지 내용은 전세계에 퍼져 있는 뱀파이어에 관한 다양한


미신을 알파벳 순으로 망라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 '다낙'이라는 단어를
클릭했다. 오래전 필리핀 제도에 토란의 일종인 타로를 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필리핀 뱀파이어였다. 이야기는 다낙 족이 여러 해 동안
인간들과 함께 일했으나, 어느 날 한 여인이 손가락을 베자 어느 다낙이
여인의 상처를 빨았고, 그 맛에 반한 다낙이 여인의 몸에 있는 피를 모두
빨아 마시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인간과의 유대관계는 끊어지고 말았다고
전했다.

나는 그 사이트의 여러 정보 가운데 그럴듯한 이야기는 고사하고 그나마


낯익은 이야기라도 있을까 해서 조심스레 읽어 내려갔다. 뱀파이어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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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은 대부분 아름다운 여인을 악마로, 어린이를 희생자로 그리는데


집중되어 있는 듯했다. 또 매우 높은 유아 사망률을 설명하려고 일부러
끼워 맞춘 이야기와 남자들의 간통을 변명하려는 시도도 눈에 띄었다.
몸뚱이 없는 영혼과 부적절한 매장에 관한 경고를 담은 이야기가 많았다.
내가 본 영화에서 흔히 다루어지던 이야기는 거의 없었고, 이스라엘의 '
에스트리'나 폴란드의 '유피에르'처럼 흡혈에 심취한 뱀파이어도 거의
없었다.

정말로 내 눈길을 끈 항목은 세 개밖에 없었다. 루마니아의 '


바라콜라치'는 죽지 않는 강력한 존재로, 피부가 창백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슬로바키아의 '넬랍시'는 자정이 지난 뒤
단 한 시간 만에 마을 전체 주민을 학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고도 빠른
존재였고, 마지막 하나는 '스트레고니 베네피치'였다. 이 마지막 항목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스트레고니 베네피치 : 이탈리아의 뱀파이어로, 선한 존재여서 모든 악한


뱀파이어에게는 불구대천의 적이라고 함.

뱀파이어에 관한 수백 가지의 미신 가운데 단 하나라도 선한 뱀파이어의


존재를 주장하는 항목이 있다는게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제이콥의 이야기라든가 내가 목격한 것과


맞아떨어지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간단한 목록을
만들어놓고, 각 미신을 읽어 내려가며 비교해 보았다. 빠른 속도, 강력한
힘, 출중한 외모, 창백한 피부, 색이 변하는 눈동자. 그리고 제이콥이 꼽은
특징들로는 흡혈귀, 늑대인간과 원수지간이라는 것, 냉혈족, 영생. 그런데
단 한가지라도 맞아 떨어지는 미신이나 전설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다른 문제도 있었다. 몇 안되기는 하지만 내가 본 공포영화처럼 그


사이트에서도 뱀파이어는 대낮에 돌아다닐 수 없으며 태양을 보면 불타
재로 변한다는 사실을 하나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낮에는
내내 관에서 잠을 자고 밤에만 돌아다닐 수 있다고.

화가 난 나는 컴퓨터가 제대로 꺼질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본체 전원을


꺼버렸다. 짜증스러우면서도 온몸을 억누르는 듯한 당혹감을 느꼈다.
모든게 너무 바보짓 같았다. 방에 앉아 뱀파이어에 관해 조사나 하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나는 모든게 빌어먹을 포크스에
발을 들여놓은 탓이라고, 눅눅하기 짝이 없는 올림픽 페닌술라 지역 전체의
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집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차로 사흘이나 달려야 도착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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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를 빼면 딱히 가고 싶은 데가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나는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부츠를 신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날씨도 확인하지 않은
채 방수외투를 걸치고 현관문을 나섰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지만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다. 나는 트럭을 버려둔


채, 집 뒤편으로 늘 웅크리고 있는 듯한 숲을 향해 동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금세 집과 길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숲속 깊이 들어갔고, 들리는
소리라고는 발밑에서 젖은 흙인 질퍽거리는 소리와 갑자기 울어대는
어치새 소리밖에 없었다.

이곳 숲에는 구불구불 좁은 오솔길이 길게 나 있었다. 안 그랬다면 이렇게


나 혼자 방황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였다. 내 방향감각은 대책 없는
수준으로, 뻔한 곳에서도 길을 잃기 일쑤였다. 오솔길은 숲으로 깊숙이
이어졌고, 내 느낌으로는 대부분 동쪽으로 뻗은 듯했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길 주변에는 가문비나무와 솔송나무, 자목, 단풍나무가
보였다. 내가 그 나무들 이름을 어렴풋하게나마 아는 건 어린 시절 찰리가
순찰차 창밖으로 나타나는 나무들을 하나하나 가르키며 가르쳐주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모르는 나무들도 많았고, 온통 초록색 기생식물로
뒤덮여 무슨 나무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도 있었다.

분노가 기폭제처럼 나를 밀어붙이는 걸 느끼며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화가 사그라들기 시작하자 걸음도 느려졌다. 머리 위쪽에서 줄기를 타고
물이 몇 방울 떨어졌지만 비가 오기 시작한 것인지 아니면 어제 내린 비가
나뭇잎에 고여 있다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솔길에서 몇 발자국
벗어난 곳에 나무 하나가 다른 나무 밑동에 기대어 벤치처럼 놓여 있었다.
이끼로 뒤덮이지 않은 걸로 보아 쓰러진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나는
양치식물을 헤치고 들어가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눅눅하게 젖은
나뭇등걸에 혹시라도 옷이 닿지 않도록 비옷을 길게 잡아당겨 자리에
앉아서 모자 쓴 머리를 나무줄기에 기댔다.

이곳에 온 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진작에 알아차려야 마땅했지만,


그렇다고 달리 갈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짙은 초록색 숲은 나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기에는 어젯밤 꿈의 장면과 너무 흡사했다. 이제
질척거리는 땅을 밟는 내 발자국 소리가 더 들리지 않으니,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새들도 조용했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횟수가 잦아지는
걸로 보아 위쪽에 비가 내리는 것도 같았다. 양치식물들이 내 앉은키보다
높게 자라, 세 발자국 쯤 떨어진 오솔길로 누군가 지니가더라도 내 모습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숲속에 낮아 있으니 아까 집 안에서 당혹스럽게 느껴지던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훨씬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 이 숲도 수 천년 동안 아무것도
변한게 없을 것이다. 잘 정돈된 내 방에서는 의심스러웠는데, 초록빛
아지랑이가 가득한 숲속에서는 백여 개의 다양한 나라에서 전해진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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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과 전설도 그럴듯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가장 결정적인 두 가지 문제에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쳤지만, 그러기가 죽도록 꺼려졌다. 우선 컬렌 집안 사람들에 대해
제이콥이 한 얘기가 사실을 가능성이 있는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내 머리는 곧장 부인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받아들이다니,


어리석고 끔찍할 뿐이다. 하지만 그 다음엔? 나는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것조차 논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또다시 나는 내가 관찰한 것들을 머릿속으로 헤아리기 시작했다.
불가사의한 힘과 속력, 검정에서 황금빛으로 그리고 다시 검정으로 변하는
눈동자, 인간이라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외모, 창백하고 차가운 피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서히 사소한 것들에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들이
뭔가를 먹는 모습을 전혀 본 적이 없다는 것과 그들인 움직일 때 보이는
경이로운 우아함도 떠올랐다. 게다가 가끔 에드워드가 쓰는 낯선 말투나
어휘는 21 세기 고등학교 교실보다는 한 세기쯤 전에 나온 소설에나 어울릴
법했다. 그는 우리가 혈액형 검사를 하던 날 수업을 빼먹었다. 해변 여행을
가던 날도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딘지 들은 다음에야 가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 아는 듯했다. 물론
나는 빼고. 또한 그는 나에게 자기가 악당이며 위험하다고 말했다.

컬렌 집안 사람들이 뱀파이어란 말이야?

아무튼 그들이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건 확실했다. 상식 안에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범주 이상의 일들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제이콥의
냉혈족 이야기든 내가 생각해 낸 초능력 이론이든, 에드워드 컬렌은......
인간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는 그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어쩌면'이 지금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이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만일 사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만에 하나' 에드워드가 뱀파이어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나도 내 자신을 못 믿는
마당에, 누구든 내 얘기를 들으면 날 정신병원에 보낼 게 뻔했다.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첫 번째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즉 영리하게 최대한 그를 피하는 것이었다.
시애틀에 함께 가자는 우리 계획을 취소하고 예전처럼 가능한 한 그를
무시하던 때로 되돌아 가는 것. 어쩔 수 없이 같은 수업을 듣더라도 우리
사이에 도저히 꿰뚫을 수 없는 두꺼운 유리벽이 존재하는 체 하는 것.
그에게 날 그냥 내버려두라고, 이번엔 진짜로 진지하게 당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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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법을 생각하는 사이 나는 갑작스런 절망과 고통에 사로잡혔다. 내


마음은 곧바로 고통을 거부했고 재빨리 다음 방법으로 넘어갔다. 그건 그냥
변화 없이 지내는 방법이었다. 정말로 그가 사악한 존재라고 해도
지금까지는 나한테 해가 될 행동을 한 적이 없다. 사실 그가 그토록 재빨리
행동하지 않았다면 나는 타일러의 자동차에 치였을 것이다. 그토록 재빠를
수 있던 건 순전히 반사신경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의
반사신경이 생명을 구하는 데 쓰였다면, 그가 나빠 봤자 얼마나 나쁘단
말인가? 쳇바퀴를 돌듯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지만 해답은 없었다.

다른건 몰라도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있었다. 어젯밤 내 꿈에 나타난


에드워드의 어두운 모습은 에드워드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제이콥의
이야기를 듣고 내 공포심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도
늑대인간이 공격하려는 순간 내가 "안 돼!"라고 비명을 지른 건 늑대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에드워드가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나를
불렀는데도 나는 그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

그러자 나는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원래부터 선택의 여지란 게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너무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이젠
사실을 알았다 해도, 두려운 비밀에 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를 떠올린다. 그 목소리와 금세라도 홀릴 듯한 눈빛, 강렬한 자석처럼
힘을 발휘하는 그의 매력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에드워드와
함께 있고 싶어졌다. '혹시'하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어두워져 가는 숲속에서 그와 단둘이 있고 싶지는 않았다. 비 때문에
어둑해진 숲속 나뭇가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매끄럽게 치댄
도자기 반죽 같은 흙바닥에 무늬처럼 작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몸을 떨며 재빨리 은신처에서 일어나, 비 때문에 오솔길이 사라졌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

그러나 물방울이 떨어지는 초록빛 미로는 저 멀리까지 그대로 뻗어


있었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거의 뛰다시피 다급하게 나무 사이를
지나며, 꽤 멀리 왔다는 데 몹시 놀랐다. 제대로 숲을 빠져나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점점 더 숲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는 건지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가 너무 심한 공포에 휩싸이기 전에 나뭇가지 사이로
얼핏 빈 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거리를 지나는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고, 잔디가 깔린 찰리의 집 뒷마당이 눈앞에 펼쳐졌다. 집이 나에게
따뜻한 온기와 마른 양말이 기다리고 있다며 손짓하고 있었다.

집 안에 들어가니 이제 겨우 정오였다. 나는 이츰에 올라가 온종일 집에서


지낼 생각으로 청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수요일까지 내야 하는 <
맥베스>에 관한 보고서를 오늘의 목표로 정하고 나자 집중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나는 흡족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보고서 초안을 쓰기 시작했다.
솔직히 목요일 오후 이래 처음 느껴보는 마음의 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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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늘 그런 식이었다. 결정을 내리는 과정은 내게 몹시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그러나 일단 결정을 내리면, 어쨌든 선택은 했다고
안도하면서 단순하게 그 결심을 따랐다. 포크스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처럼
가끔은 절망이 안도감을 좀먹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대안을 놓고 씨름하며 고민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번 결정은 우스울 만큼 쉬웠다. 위험천만할 정도로.

그래서 그날 하루는 조용하면서도 생산적으로 지나갔고, 8 시전에 숙제를


마쳤다. 찰리가 물고기를 잔뜩 잡아 돌아와, 다음 주에 시애틀에 가면 생선
요리법에 관한 책도 한 권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애틀에 갈 생각을 할
때마다 느껴지는 짜릿한 흥분은 제이콥 블랙과 산책을 하기 전에 느꼈던
기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달라야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겁이 나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그런 종류의 두려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새벽같이 일어난데다 전날 잠을 잘 못 자서인지 그날 밤엔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나는 화창한 날의 환한 햇빛 속에 눈을 떴다.
포크스에 온 뒤로 두 번째였다. 창가로 걸어간 나는 비를 전혀 머금었을것
같지 않은 솜사탕 같은 흰 구름만 군데군데 떠 있을 뿐 거의 맑게 갠 하늘을
보며 어리둥절했다. 몇 년 동안 한번도 연 적이 없을 것 같은 창문이
놀랍게도 소리 없이 스르르 열렸다. 나는 비교적 습기 없는 공기를 마음껏
들이켰다. 따뜻하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혈관에서 피가 생기 있게
솟구치는 것 같았다.

아래층에 내려가자, 아침식사를 거의 마친 찰리가 나를 보자마자 기분을


알아차렸다.

"외출하기 좋은 날씨구나."

"네."

내가 씩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찰리가 미소를 짓자 갈색 눈동자 꼬리 쪽에 주름이 접혔다. 찰리가 미소를


지으면 엄마가 왜 그렇게 어린 나이에 결혼을 결심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젊은 시절 찰리의 로맨틱한 면모는 내가 철들기 전에 이미 사라졌고,
나와 머릿결은 달라도 색은 똑같은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는 숱이 적어져
이마를 점점 많이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미소를 지을 때면, 지금의
나보다 겨우 두 살 많은 르네와 함께 달아난 청년의 모습이 조금 드러났다.

뒤쪽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드러난 춤추는 먼지 입자를


구경하며 나는 유쾌한 마음으로 아침을 먹었다. 찰리는 작별인사를 한 뒤
집을 나섰고, 이어 진입로를 벗어나는 순찰차 소리가 들렸다. 현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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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며 나는 방수 외투에 손을 댄 채로 잠시 망설였다. 두고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한숨을 쉬며 외투를 한 팔에 걸치고 몇 달 만에 처음 보는
강렬한 햇빛 속으로 걸어나갔다.

안간힘을 써서 트럭의 양쪽 창문을 거의 끝까지 내렸다. 학교에 도착하니


내가 거의 처음 등교한 축에 속했다. 서둘러 나오느라 시계도 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차를 세우고 식당 건물 남쪽에 있는, 사람들이 좀처럼 앉지
않는 벤치 쪽으로 걸어갔다. 벤치는 아직 촉촉했으므로, 방수 외투를
가져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깔고 앉았다. 사교생활이 드문 덕분에 숙제는
마쳤지만, 삼각함수 문제 몇 개는 제대로 풀었는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부지런히 책을 꺼냈지만, 첫 번째 문제를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껍질이
붉은 나무들 사이로 스며든 햇빛을 바라보며 공상에 잠겼다. 숙제 노트
가장자리에 나도 모르게 낙서를 하고 있었다. 몇 분 뒤 나는 문득 나를
노려보는 검은 눈 다섯 쌍을 그렸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겨우 지우개로
얼른 낙서를 지웠다.

"벨라!"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마이크 목소리 같았다.

돌아보니 내가 멍하니 앉아 있는 사이 학생들이 교정에 북적이고 있었다.


모두들 티셔츠 차림이었고, 기껏해야 15 도를 넘지 않을 텐데 반바지를
입은 아이들도 있었다. 카키색 반바지에 가로줄무늬 럭비 셔츠를 입은
마이크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안녕, 마이크!"

이런 날 아침에 심드렁하게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외쳤다.

내 옆에 와 앉은 마이크의 단정하게 세운 머리칼은 금빛으로 반짝였고,


그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마이크가 나를 보고 그토록 기뻐해 주다니,
나도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머리칼에 붉은 기운이 있는 걸 전엔 눈치 못 챘어."

마이크가 미풍에 나부끼는 내 머리칼 한 줌을 손가락으로 잡으며 말했다.

"햇빛에 드러날 때만 보이니까."

마이크가 머리칼을 손수 내 귀 뒤로 넘겨주자 조금 어색했다.

"날씨 참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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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날씨야."

나도 맞장구를 쳤다.

"어젠 뭐 했어?"

그의 말투는 지나치게 소유욕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글쓰기 숙제하느라 다 보냈어."

잘난체 할 필요까지는 없으므로 이미 다 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마이크가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쳤다.

"아, 맞다. 그거 목요일까지던가?"

"어, 아마 수요일일걸."

"수요일? 큰일이네...... 넌 무슨 주제로 썼어?"

"셰익스피어가 여성 등장인물을 묘사하면서 여성 혐오주의 경향을


띄었는지에 대해서."

마이크는 내가 방금 외계어로 말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금세


기가 죽었다.

"오늘 밤에 나도 당장 해야겠다. 원래는 너한테 데이트 신청하려고


했는데."

"어."

나는 완전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마이크랑 대화를 나누면 유쾌하게


시작해도 왜 꼭 어색하게 끝나는 걸까?

"혹시 오늘 나랑 같이 저녁 먹을 수 있으면, 숙제는 나중에 해도 돼."

마이크가 기대에 찬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않은 자리에서


거절하기가 참 싫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마이크......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마이크가 낙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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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가 눈빛이 어두워지며 물었다. 나는 퍼뜩 에드워드를 떠올렸고,


마이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있지...... 지금 내가 말하련는 거 다른 사람한테 전하면 죽도록 때려줄


테니 그리 알아. 하지만 난 제시카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전혀 기대하지 못한 반응이었는지 마이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제시카?"

"마이크, 넌 눈도 없니?"

"아아."

마이크가 확실히 어리벙벙해진 채 한숨을 내쉬는 찰나, 나는 그 틈을


이용해 빠져나갔다.

"수업 시작하겠다. 오늘 또 늦으면 안 돼."

나는 책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3 번 건물로


향했고, 마이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부디 옳은 방향으로 그를 이끌어주기만을 바랐다.

삼각함수 시간에 만난 제시카는 잔뜩 들떠 재잘거렸다. 오늘 저녁


제시카와 앤젤라, 로렌이 포트앤젤레스에 가서 댄스파티 때 입을 드레스를
사기로 했다는 얘기였다. 나는 드레스가 필요없는데도 제시카는 같이 가
주길 바랐다. 나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여자친구들과 다른 도시로
외출하는 건 좋지만, 로렌도 같이 갈 예정이었다. 게다가 오늘밤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물론 나 혼자 너무 앞서간 나머지
드는 착각 일 수도 있었다. 나는 햇빛 때문에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내가 한껏 들떠 있는 건 절대로 햇빛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제시카에게 일단 찰리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니 가도록 해보겠다고
말해두었다.

제시카는 스페인어 강의실로 가는 동안 내내 댄스파티 얘기뿐이었고, 5 분


늦게 수업이 끝나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도 전혀 맥이 끊이지 않은 듯 같은
얘기를 계속했다. 나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제시카의 얘기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에드워드 뿐만 아니라 컬렌 집안 아이들 모두를 다시 보며 내
마음에 새로이 자리 잡은 의구심과 비교해 보고 싶은 생각이 너무도
간절했다. 식당으로 들어가며, 처음으로 나는 등줄기를 스친 공포감이
뱃속으로 스미는 것을 느꼈다. 내가 생가가하는 걸 그들이 알아차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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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지? 이어 또 다른 기대감이 전율처럼 흘러갔다. 에드워드가 또다시


나와 같이 앉으려고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늘 하던 대로 먼저 컬렌 집안 아이들이 앉는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텅 빈 자리를 본 순간 전율 같은 낭패감이 밀려왔다. 실날 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혹시 에드워드가 홀로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않은지
식당안을 살폈다. 스페인어 수업이 늦게 끝나 식당은 거의 만원이었지만,
에드워드나 그의 가족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처절한 쓸쓸함에 몸이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친구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척 할 여유도 없이 제시카 뒤를 따랄


터벅터벅 걸어갔다. 모두들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일부러 마이크 옆의
빈 자리를 피해 앤젤라 옆에 앉았다. 마이크가 정중하게 의자를 빼
제시카에게 권하자 제시카의 얼굴이 환해졌지만 나는 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앤젤라가 <맥베스> 숙제에 관해 조용히 물었으므로, 나는 절망감을 애써


억누를 채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앤젤라 또한 그날 저녁 쇼핑을
함께 가지고 했기 때문에, 나는 달리 정신을 쏟을 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마지막 희망의 조각을 미처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지, 생물 강의실에


들어가 그의 빈자리를 발견한 순간 나는 새삼 몰아치는 실망의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오후 시간은 천천히 암울하게 지나갔다. 누군가 날마다 나를 위한 새로운


고문방법이라도 고안해 내는지, 체육시간에는 배드민턴 경기규칙을
배웠다. 하지만 이론 수업이라 코트에서 서툴게 뛰어다니는 대신 자리에
앉아 설명을 듣기만 하면 되었다. 더 좋은 건 체육 선생님이 규칙에 관한
설명을 마치지 못해, 내일도 쉴수 있다는 점이었다. 모레는 어쩔 수 없이
내손에 라켓을 쥐게 하겠지만, 결국에는 나머지 수업을 면제시켜 구석으로
내보낼 테니 상관없었다.

저녁에 제시카 일행과 쇼핑하러 가기 전까지는 혼자 마음껏 심통을


부리며 침울하게 지내도 될 테니, 집으로 가는 길이 반가웠다. 그러나 집에
들어서자마자 제시카가 전화를 걸어 계획을 취소했다. 마이크와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다는 소식에 나는 기뻐하려고 애를 썼고, 마이크가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사실에 안심했지만, 내 반응은 내가 듣기에도
가식적으로 들렸다. 제시카는 내일 저녁으로 쇼핑 일정을 변경했다.

사정이 그렇게 되니 달리 신경을 쓸 곳이 없었다. 저녁 메뉴는 마리네이드


소스에 담근 생선과 전날 저녁에 먹다 남은 샐러드였으므로, 부엌에서도 할
일이 없었다. 30 분쯤 숙제에 메달렸지만, 그것마저 이내 끝이 났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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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을 확인하고, 엄마가 보낸 여러 통의 편지를 순서대로 최근 것까지


빠르게 읽어 내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재빨리 답장을 썼다.

엄마, 미안해. 계속 외출했어. 친구들과 해변에도 다녀왔어요. 글쓰기


숙제도 있었고.

내 변명이 하도 처량 맞아서 지우고 다시 썼다.

오늘은 해가 났어, 엄마. 알아요. 나도 충격이었어.


그래서 밖에 나가 햇빛을 쬐며 최대한 비타민 D 를 합성할 생각이에요.
사랑해요.
벨라가.

나는 학교 수업과 상관없는 책을 읽으며 한 시간쯤 시간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포크스로 올 때 가져온 책들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요약해 모아놓은 책이 있었다. 그 책을 골라가지고
내려가는 길에 계단 꼭대기에 있는 침대시트 보관함에서 낡은 퀄트 이불
하나를 집어들고 뒷마당으로 향했다.

작고 네모난 뒷마당에 다가서 나무그늘을 피해 언제나 조금 축축하게


젖어 있는 잔디밭에 이불을 반으로 접어 깔았다. 나는 이불에 엎드려
발목을 엇갈리에 허공으로 들어올린 채, 책에 담긴 여러 소설 가운데 가장
읽고 싶은 부분을 찾아 책장을 넘겼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오만과
편견]과 [이성과 감성]이었다. [오만과 편견]은 최근에 읽었으므로 [
이성과 감성]을 읽기 시작했지만, 3 장을 읽기 시작하면서 남자 주인고
이름이 '에드워드'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화가 나서 [맨스필드 파크]로
옮겨갔는데, 그 작품의 주인공은 '에드먼드'여서 역시 너무 비슷했다. 18
세기 후반에는 다른 쓸만한 이름이 없었나? 나는 버럭 화를 내며 책을 덮고
드러누워, 소매를 최대한 접어올린 뒤 눈을 감았다. 피부에 느껴지는 온기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고 엄하게 자신을 달랬다. 바람은 아직
잔잔했지만, 그래도 머리칼이 나부껴 얼굴을 간질였다. 나는 머리칼을
모두 뒤로 넘겨 이불 위에 부채처럼 펼쳐 놓은 뒤 다시 눈꺼풀과 뺨, 콧날,
입술, 팔과 목덜미에 느껴지는 햇볕을 만끽했다......

다음 순간 내가 의식한 것은 진입로 벽돌 위를 굴러오는 찰리의 순찰차


바퀴 소리였다. 깜짝 놀라 일어나니 햇살은 어느새 나무 뒤로 사라졌다.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돌연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어리둥절 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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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내가 물었다. 그러나 집 앞쪽에서 자동차 문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이 빠진 채 초조한 모습으로 벌떡 일어나 이미 완전히 축축해진


이불과 책을 집어들었다. 저녁준비가 늦어지겠다는 생각에,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가스렌지에 기름을 두른 팬을 올려놓았다. 찰리가 권총 벨트를
풀어 걸고 부츠를 벗고 있었다.

"죄송해요, 아빠. 아직 저녁준비 못했어요. 밖에서 잠이 들었나 봐요."

내가 하품을 참으려 말했다.

"걱정 마라. 어차피 경기결과 먼저 볼 생각이었거든."

저녁식사 후 나는 뭔가 할 일을 찾느라 찰리와 텔레비전을 봤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하나도 없었지만, 찰리는 내가 야구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생각 없이 봐야 하는 시트콤을 틀어주었는데, 그건 우리 둘 다
재미없어했다. 그래도 뭔가 같이 하는 일이 있다는 생각에서인지 그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우울하긴 했지만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은
나도 기분 좋았다.

"아빠, 제시카하고 앤젤라가 내일 저녁에 댄스파티 때 입을 드레스를 사러


포트앤젤레스에 갈 거래요. 나도 같이 가서 골라달라는데...... 같이 갔다
와도 돼요?"

광고시간에 내가 물었다.

"제시카 스탠리 말이냐?"

"네, 안젤라 웨버하고요."

나는 한숨을 쉬며 성까지 알려주었다.

찰리는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넌 댄스파티에 안 간다면서?"

"맞아요. 그냥 걔들이 드레스 고르는 걸 돕는 거예요. 건설적인 비판을


해주는 거죠."

여자들끼리라면 이런 설명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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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았다."

그는 자신이 여자애들 문제에는 문외한 이라는 사실을 깨닫은 듯 했다.

"하지만 평일이잖니."

"학교 끝나자마자 떠날 거니까 일찍 돌아올 수 있어요. 저녁 혼자 차려


드실 수 있겠어요?"

"벨라, 네가 오기 전엔 17 년이나 혼자 먹고 살았다."

"어떻게 살아남으셨는지 그게 궁금하다니까요."

중얼거리던 내가 좀더 또렷하게 덧붙였다.

"냉장고에 샌드위치 재료 넣어놓을게요. 맨 위 선반에요."

다음 날 아침에 또다시 해가 났다. 나는 새로운 희망을 안고 깨어났지만


그것을 가차없이 억누르려고 애썼다. 훨씬 따뜻한 날씨에 맞춰 진한 파란색
브이넥 블라우스를 입었다. 피닉스에서는 음울한 겨울에나 입던 옷이었다.

나는 일부러 수업시간을 간신히 맞출 수 있을 만큼 늑장을 부려 학교에


도착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주차할 공간을 찾아 헤매며 은색 볼보를 찾아
보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줄에 차를 세운 뒤 숨을
헐떡이며 영어 강의실로 달려갔고, 다행이 수업종이 치기 전에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날 하루는 전날과 똑같았다. 일말의 희망을 마음에 품고 있던 나는


점심시간과 생물시간에 연이어 텅 빈 자리를 발견하고 마음 한구석이
참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포트앤젤레스 계획은 오늘 저녁으로 다시 잡혀 있었는데, 로렌이 다른 볼


일이 있다는 얘기를 하기에 더욱 흥미가 생겼다. 늘 그렇듯 난데없이 그가
어디선가 나타나주기를 바라며 자꾸만 어깨 너머를 흘깃거리는 게 싫어서
나는 얼른 포크스를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오늘 저녁 좋은 기분을
유지해서 앤젤라와 제시카의 쇼핑 분위기를 망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어쩌면 나도 옷을 좀 살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번 주말에
시애틀에서 혼자 쇼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애써 부인하고 나니,
옷을 사고 싶은 생각도 쑥 들어갔다. 분명 그는 적어도 나한테 미리 말도
하지 않고 약속을 취소하진 않겠지.

방과 후 제시카는 낡은 하얀색 머큐리 자동차를 몰고 내 뒤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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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까지 왔다. 그래야 내가 책과 트럭을 두고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포크스를 벗어난다는 데 조금 흥분하며 재빨리 안에 들어가 머리를
빗었다. 다시 한 번 찰리에게 저녁식사에 관한 메모를 식탁에 남긴 뒤,
나는 책가방에서 낡은 지갑을 꺼내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핸드백에
옮겨넣고 달려나가 제시카와 합류했다. 우리는 앤젤라의 집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를 태웠다. 자동차가 시계를 벗어나자 나는 점점 더
흥분하기 시작했다.

8. 포트앤젤레스

제시카는 경찰서장보다도 차를 빨리 몰았으므로, 우리는 4 시 전에


포트앤젤레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자들끼리 저녁에 외출하는 게 워낙
오랜만이라 그런지 여성호르몬이 용솟음쳤다. 우리는 제시카가 학교
남자애들 이야기를 재잘거리는 동안 감미로운 록 음악을 들었다. 제시카와
마이크의 데이트는 아주 순조로웠으므로, 토요일 저녁엔 첫 키스 단계까지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 말없이 웃었다.
앤젤라는 에릭한테 특별히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댄스파티에 가게
됐다는 걸 소박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제시카가 앤젤라의 이상형을 캐묻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앤젤라를 구해주려고 은근슬쩍 끼어들어 드레스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앤젤라는 내 쪽으로 고맙다는 시선을 보냈다.

포트앤젤레스는 포크스보다 훨씬 세련되고 예스러워 관광객의 발길을


끄는 아름다운 소도시였다. 하지만 제시카와 앤젤라는 워낙 많이
다녀본터라 만(灣) 옆에 조성된 그림 같은 산책로에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제시카는 곧장 시내 대형 백화점으로 차를 몰았는데,
관광객을 위해 꾸며놓은 만에서 거리 몇 개만 지나면 곧장 시내였다.

댄스파티 초대장에서는 세미정장을 입고 오라고 적혀 있었지만, 우리는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내가 피닉스에서도 댄스파티에 단
한번도 간 적이 없다고 하자, 제시카와 앤젤라는 둘 다 깜짝 놀라며 거의
믿지 않는 듯했다.

"남자친구 사귀어본 적 없어?"

백화점 정문으로 걸어 들어가며 제시카가 의심쩍다는 듯 물었다.

"정말이야. 남자친구도 없었고 누굴 사귀어본 적도 없어, 난 데이트


같은거 안 해봤어."

나는 춤을 전혀 못 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지 않아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설명했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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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신청 안 하던걸."

내가 정직하게 대답했다. 제시카는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여기서는 애들이 너한테 데이트 신청을 하는데 네가 거절하는 거잖아."

우리는 틴에이저를 위한 의류 매장의 정장 코너를 살펴보고 있었다.

"타일러는 예외잖아."

앤젤라가 조용히 반박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타일러가 학년말 무도회 때 널 데려가기로 했다고 모두에게 말했거든."

제시카가 의심어린 눈으로 나에게 말했다.

"걔가 뭐랬다고?"

나는 숨이 막힌 듯 헐떡이고 있었다.

"내가 사실이 아닐 거라고 했잖아."

앤젤라가 제시카에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충격에 사로잡혀 침묵을 지키던


나는 느닷없이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우리 앞에 드레스 코너가
나타났으므로 본격적으로 작업에 돌입해야 했다.

"그래서 로렌이 너를 싫어하는 거야."

제시카가 옷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깔깔거렸다.

나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내가 트럭으로 걔를 치어버리면 걔도 지난번 사고에 대한 죄책감을 그만


느끼게 될까? 그럼 서로 공평해질 테니 빚을 갚겠다는 생각도
포기하겠지?"

"그럴지도 모르지. 만일 타일러가 그러는게 순전히 그 이유 때문이라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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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가 킥킥대며 웃었다.

드레스 코너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두 친구는 입어보고 싶은 옷을 두어


벌씩 찾아냈다. 나는 삼면에 거울이 달린 탈의실 안에 있는 낮은 의자에
앉아 분을 참으려고 애를 썼다.

제시카는 어깨 끈이 없는 단순한 디자인의 긴 검정 드레스와, 밝고


금속적인 느낌의 청색에 가느다란 어깨 끈이 달린 무릎 길이의 드레스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나는 눈동자 색과 잘 어울린다며 파란색 드레스를
권했다. 앤젤라는 큰 키에 잘 어울리기도 하고, 연한 갈색 머리칼에 벌꿀
빛을 반사시키는 연분홍 드레스를 골랐다. 나는 두 사람을 한껏 칭찬해 준
뒤, 남은 옷들을 매장으로 되가져가는 걸 도와주었다. 모든 과정은 집에서
르네와 함께 옷 쇼핑을 다닐 때보다 훨씬 간단하고 쉬웠다. 선택의 폭이
워낙 좁기 때문이겠지.

우리는 신발과 액세서리 코너로 향했다. 나도 새 신발이 하나 필요하기는


했지만, 쇼핑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친구들이 이것저것 신어보고
걸쳐보는 동안 잠자코 지켜보다 평을 해주었다. 여자들끼리 보내는 저녁
시간의 짜릿한 흥분은 타일러에 대한 분노 때문에 확 사그라들고 우울한
기분이 되살아났다.

"앤젤라?"

파트너의 키가 꽤 커서 하이힐을 신을 수 있다는 데 몹시 기뻐하며


앤젤라가 분홍색 샌들을 신어보는 사이, 내가 머뭇머뭇 말을 걸었다. 마침
제시카는 액세서리 매장으로 가버려 우리 둘 뿐이었다.

"왜?"

앤젤나는 한쪽 다리를 내밀고 발목을 비틀어 신발의 모습을 좀더 잘


살폈다. 나는 겁쟁이처럼 다시 움츠러들었다.

"예쁘다."

"맞춰 입을 옷이 저 드레스밖에 없긴 하겠지만 그래도 살까 봐."

"그래라, 세일도 하네 뭐."

내가 거들자 앤젤라는 미소를 지으며, 좀더 실용적인 하얀 구두가 들어


있는 상자 뚜껑을 덮었다. 나는 다시 시도했다.

"있지. 앤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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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컬렌 집안 아이들 말이야...... 자주 결석하니?"

대수롭지 않게 물으려 했지만 형편없이 실패했다.

"응. 날씨가 좋으면 박사님까지 모두 함께 늘 야영을 떠난대. 다들 워낙


야외생활을 좋아하나 봐."

앤젤라는 신발을 살피며 나직이 설명 해 주었다. 제시카라면 벌써 백


가지도 넘는 질문을 던졌을 테지만, 앤젤라는 한 가지도 묻지 않았다.
앤젤라가 정말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아."

제시카가 은색 구두에 어울릴 만한 인조보석 액세서리를 찾아들고


다가와서, 나는 거기서 대화를 끝냈다.

우리는 판자가 깔린 해변 산책로에 있는 작은 이탈리아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을 계획이었지만, 쇼핑이 예상보다 너무 빨리 끝났다. 제시카와
앤젤라는 옷을 차에 실어놓고 해변을 좀 걸어다닐 거라고 했다. 나는
서점을 찾아보고 싶다며 한 시간 뒤에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친구들은
서점에 같이 가주겠다고 나섰지만, 나는 한번 책에 몰두하면 딴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피해 주기 싫다며 둘이 재미있게 보내라고 말했다. 책
고르기는 혼자 하는게 더 좋았다. 친구들은 신이 나서 재잘거리며 자동차로
걸어갔고 나는 제시카가 알려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서점을 찾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내가 찾던 서점은 아니었다.


진열장에는 각종 수정구슬과 드림캐처, 영혼치유에 관한 책들이 가득했다.
나는 안에 들어가보지도 않았다. 은발을 길게 등 뒤로 늘어뜨린 채 60
년대에나 유행했을 법한 옷을 입은 오십대 여인이 계산대 뒤에서 어서
오라는 듯 미소를 짓고 있는게 진열장 너머로 보였다. 그런 사람과의
대화는 피하는게 상책이었다. 근처 어딘가 분명 평범한 서점도 있을 것이다.

퇴근길이라 복잡해진 도로를 따라 걸으며 나는 이것이 도심 방향이기를


바랐다. 절망감과 싸우느라, 어리석게도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에드워드에 대해서, 앤젤라가 한 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실망보다 더 괴로운 것은 없다는 생각에
무엇보다도 토요일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돌리니 누군가 길가에 세워놓은 은색 볼보가 보였고, 곧이어 지난
기억들이 한꺼번에 나를 엄습해 왔다. 바보 같은, 믿을 수 없는 뱀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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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으니라고.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남쪽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그럴듯해 보이는 유리 진열장이 있는 가게들을


찾았다. 그러나 앞에 가서 보니 전자제품 수리점과 빈 가게뿐이었다.
제시카와 앤젤라를 찾아보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으므로,
친구들을 만나기 전에 먼저 기분을 달래야겠다고 생가했다. 나는 몇 번이나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빗어 내리며 심호흡을 한 뒤 모퉁이를 돌아 계속
걸어갔다.

길을 하나 건널 때쯤, 나는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좀전에 본 몇몇 행인들은 모두 북쪽으로 가고 있었고, 주변 건물들은 거의
다 창고 같았다. 나는 다음번 모퉁이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몇 블록
돌아가는 셈치고 해변 산책로로 가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지 내 운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내 앞쪽에서 남자 네 명이 모퉁이를 돌아 다가왔다. 퇴근해 집으로 가는


직장인이라기에는 옷을 너무 편하게 입었고, 관광객이라기에는 차림새가
너무 추레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들은 나이가 나보다 서너 살밖에 많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들며 서로의 어깨와
팔을 툭툭 쳤다. 나는 인도 맨 안쪽으로 비켜 서서 그들에게 최대한 길을
내준 채 멀리 앞쪽만 바라보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이!"

서로 지나치려는 순간 그들 가운에 하나가 외쳤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었으므로 나를 부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둘은 걸음을 멈추었고, 다른 둘은 속도를 늦췄다.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덩치가 가장 크고 검은 머리카락에 20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을 건 것 같았다. 그는 풀어헤진 모직 셔츠 안에 더러운 티셔츠를 받쳐
입고, 찢어진 청바지에 샌들 차림이었다. 그가 반 걸음쯤 나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내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이어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모퉁이


쪽으로 걸음을 빨리했다. 등 뒤에서 그들이 왁자하게 웃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잠깐만!"

등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또 들렸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얼른 모퉁이를


돌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 뒤에서 여전히 깔깔거리며 웃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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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어선 길은 칙칙한 색으로 칠해진 창고의 뒤쪽으로 이어지는


인도였고, 창고마다 짐을 싣고 내리는 트럭들이진입 할 수 있는 대형
출입구가 있었는데 모두 굳게 잠겨 있었다. 차도의 남쪽 편에는 아예
인도도 없이, 자동차 부품창고 같은 넓은 마당에 가시철망을 얹은
철제담장이 길을 따라 서 있었다. 포트앤젤레스에 처음 온 주제에 너무
많이 방황하느라 애초에 내가 찾아보려던 도심에서는 많이 벗어난
모양이었다. 어느새 서쪽 수평선에 구름이 모여들어 일찍 노을이 지고
있었다. 동쪽 하늘은 아직 맑았지만, 분홍색과 주황색 기운을 머금은 채
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자동차에 재킷을 두고 내린 터라 갑자기 한기가
느껴져 나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승합차 한 대가 옆을 지나간 뒤,
도로는 텅 비었다.

갑자기 하늘이 더 어두워져 어깨를 돌려 음산한 구름을 돌아본 뒤 나는 두


남자가 20 미터쯤 뒤에서 소리 없이 나를 따라오고 있어 깜짝 놀랐다,

나한테 말을 건 머리카락이 검은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일행이었다.


나는 곧장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빨리했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한기와
떨림은 날씨 때문이 아니었다. 핸드백을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나는
소매치기를 방지할 때 누구나 그렇듯 목에 걸쳐 옆으로 옮겨 멨다. 호신용
스프레이는 침대 밑에 넣어둔 가방에 풀지도 않은 채 들어 있었다. 가진
돈은 20 달러 지폐 한장과 잔돈 몇 푼이었으므로, '우연인 척' 가방을
떨어뜨리고 가벌릴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겁먹은
작은 목소리가 저들은 단순한 도둑 이상일지도 모른다고 나에게 경고했다.

나는 낮게 울리는 발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발소리는 조금전


왁자하게 떠들어대던 소리에 비하면 이상할 만큼 너무 조용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동안 더 속도를 높였거나 거리를 좁힌 것 같지는 않았다.
심호흡을 해.나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저들이 정말로 너를 따라오는 건지
확실히 모르잖아. 나는 몇십 미터 앞으로 다가온 오른쪽 모퉁이에 정신을
집중한 채 최대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발소리는 처음처럼
멀리에서 들려왔다. 남족에서 도로로 접어든 파란색 차가 빠르게 나를 스쳐
지나갔다. 자동차 앞으로 뛰어들 생각도 했지만, 정말로 내가 미행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주저하는 사이 자동차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모퉁이를 돌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건 다른 창고 뒤쪽으로 이어지는


막다른 진입로였다. 기대감에 반쯤 몸을 틀었던 나는 다급히 좁은 진입로를
건너 다시 인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길은 다음번 모퉁이에서 끝이 나는지
길 없음 표지판이 서 있었다. 나는 등 뒤에서 들리는 희미한 발소리에
정신을 집중하며 도망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듯했지만, 그들이 어떻게든 나를 앞지를 수 있으리라는 건 확실했다.
더 빨리 달리려고 하면 나는 뭔가에 걸려 바닥에 넘어질 게 틀림없었다.
문득 발소리가 멀어지는 듯 했다. 용기를 내어 돌아보니 다행히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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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40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둘 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음번 모퉁이까지 걸어가는 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나는 빠른 보폭을 유지했고 뒤에서 따라오던 남자들은 점점 뒤처지고
있었다. 어쩌면 자기네들 때문에 내가 겁먹은 걸 알고 미안해하는 걸지도
몰라. 내가 다가가고 있는 네거리에서 자동차 두 대가 북쪽으로 지나가는
본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텅 빈 거리를 벗어나면 저쪽에서
사람들이 더 많이 지나다닐 거야. 반가운 마음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얼른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 도로는 문도, 창도 없는 막다른 담벼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


네거리를 두 개쯤 지난 곳에는 가로등도 켜 있고 자동차와행인들도 더 많이
보였지만, 모두 너무 멀었다. 서쪽 건물을 등지고 도로 중간쯤에서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사람들은 아까 본 일행 가운데 나머지 둘이었고,
내가 인도에 얼어붙은 듯 서 있는 걸 본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감돌았다.
그제야 나는 미행을 당한게 아니란 사실을 깨닫았다.

저들은 사냥감을 몰듯 일부러 나를 구석으로 몰고 있었다.

일 초쯤 서 있었는데도 몹시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내 몸을


틀어 그 도로의 다른 방향으로 건너갔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내 뒤에서 쫓아오는 발소리가 요란해지기 시작했다.

"여기들 있었구나!"

머리카락이 검은 덩치 큰 남자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정적을 깨뜨리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차츰 사방에 내려앉고 있는 초저녁 어둠 속에서
남자가 내 뒤를 살피는 것 같았다.

"그래. 지름길로 질러 왔지."

누군가 바로 등 뒤에서 큰 소리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 나는 펄쩍 놀라며


걸음을 옮겼다.

이제 내 걸음은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두 남자와


나 사이의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비명 소리가 제법 큰
편이지, 하고 생각하며 소리칠 준비를 하느라 숨을 들이마셨지만,
목구멍이 바싹 말라 과연 얼마나 큰 소리가 나와줄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재빨리 머리 위로 가방을 들어올려 한 손에 쥐고, 무기로 쓰게 되든,
놈들이 빼앗으려 하면 그냥 내주든 필요에 따라 행동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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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심스레 걸음을 멈추자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덩치 큰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차도로 내려갔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단호하고 두려움 없는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내가 경고했다. 그러나


목구멍이 바싹 말랐을 거라는 내 짐작대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제자리에 버티고 서서 공포심을 자제하며, 예전에 배운 호신술을


떠올리려 애썼다. 손목 바로 아래의 손바닥 부분으로 세게 올려치면 코가
부러지거나 코뼈가 뇌 쪽으로 함몰되게 만들수도 있어. 손가락을 쑤셔넣어
눈알을 후벼 파는 방법도 있지. 물론 정석대로 무릎으로 사타구니를 차는
수도 있어. 하지만 똑같은 목소리가 이내 부정적인 의견을 내세웠다. 한
명한테도 그런 호신술을 쓸 가능성이 희박한데, 저들은 넷이나 된다고.
시끄러워, 닥쳐! 나는 공포심이 나를 삼키려 하기 전에 겁먹은 목소리에게
명을 내렸다. 누구든 한 사람과 호되게 한판 붙는 한이 있어도,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제대로 비명을 지를 수 있도록
마른침을 삼켰다.

별안간 모퉁이를 돌아온 자동차가 헤드라이트를 번득이며 나타나,


차도에서 서 있던 덩치 큰 남자를 거의 칠 뻔했다. 나는 내 앞에 멈춰
서든지 나를 치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심정으로 도로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뜻밖에도 은색 차는 돌연 방향을 돌리더니 내 바로 앞에서 조수석 문을 연
채로 끽 멈춰 섰다.

"어서 타."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곳을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순간적으로 숨 막히는 공포심이 사라지면서 돌연 안도감이
물밀듯이 찾아들었다. 나는 조수석에 뛰어올라 얼른 문을 닫았다.

차 안은 어두웠고, 길에도 불빛이 없었으므로 계기판 조명만으로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가 엑셀러레이터를 지나치게 빨리 밟으며
북쪽으로 방향을 돌리자, 타이머 마찰음이 요란하게 나면서 자동차가 놀란
표정으로 도로에 서 있던 일당을 향했다. 제대로 방향을 잡고 항구쪽으로
달리기 시작한 뒤 얼핏 내다보니 그들은 차를 피해 인도로 뛰어들고 있었다.

"안전벨트 매."

그의 명령을 듣고서야 내가 양손으로 의자를 꽉 움켜잡고 있다는 걸


깨닫았다. 찰칵 하는 벨트 여밈 소리가 어둠 속에서 몹시 크게 들렸다.
그는 급히 좌회전을 한 뒤, 교차로 서너 개에서 계속 정지신호를 무시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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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나는 이제는 안전하다고 느꼈고, 당장 우리가 어디로 가든


아무관심이 없었다. 갑작스레 곤경에서 구출된 안도감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안도감을 느끼며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호흡이 정상속도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흐린 불빛 속에서 그의 완벽한 얼굴을 관찰하던 나는
한참 뒤에야 그가 몹시 경직되고 화난 표정이라는 걸 알아차였다.

"괜찮아?"

그렇게 물으면서도 나는 내 쉰 목소리에 놀랐다.

"아니."

그가 매정하고 쌀쌀맞게 대꾸했다.

나는 앞만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번뜩이는 눈동자와 얼굴을 지켜보며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차가 멈추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너무
어두워 길가에 서 있는 가로수의 검은 그림자 말고는 보이는 게 없었다.
일단 시내를 벗어난 듯 했다.

"벨라."

에드워드가 몹시 절제되고 긴장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응?"

내 목소리가 여전히 이상하게 들렸으므로, 나직이 헛기침을 했다.

"괜찮니?"

그는 여전히 나를 보지 않고 있었고, 잔뜩 화난 얼굴이었다.

"응."

"딴 생각 좀 할 수 있게 해 줘."

그가 명령하듯 말했다.

"뭐라고?"

그가 초조한 듯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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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정될 때까지 뭐든 쓰잘데기 없는 얘기라도 좀 해보란 말이야."

그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콧날을 어루만졌다.

"음."

나는 사소한 이야기를 찾느라 머리를 쥐어짰다.

"나 내일 학교 가기 전에 타일러 크로울리를 차로 치어버릴 생각이다?"

그는 여전히 눈을 질끈 감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움직였다.

"왜?"

"나를 학년말 댄스파티에 데려가기로 했다고 모두한테 떠들고 다닌대.


정신이 나는 건지, 아직도 지난번에 나를 죽일 뻔한 걸 사과하려는 건지.
아무튼 너도 기억하겠지만 걘 학년말 무도회가 그 모든 걸 제대로 해결할
방법이라고 여겼나 봐. 그래서 나도 걔 생명을 위협하면 피장파장이니까
빚을 갚겠다는 생각을 관두지 않을까 싶어. 난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아.
걔가 날 가만두면 로렌도 생각을 바꿀 거야. 하지만 그러려면 걔가 타고
다니는 센트라를 완전히 망가뜨려야 할지도 몰라. 차가 없으면 누구든
무도회에 데려갈 생각도 못할 테니까......"

나는 계속해서 실없이 지껄였다.

"그 얘긴 나도 들었어."

그가 훨씬 침착해진 말투로 말했다.

"너도 들었어?"

잊고 있던 짜증이 확 되살아나 어이없다는 듯 내가 물었다.

"하긴 목 아래로 전신마비가 되는 경우에도 무도회에 못 가겠구나."

계속을 다시 수정하며 내가 중얼거렸다. 에드워드는 한숨을 쉬며 마침내


눈을 떴다.

"좀 나아졌어?"

"아니, 별로."

나는 기다렸지만, 그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등받이에 머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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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고 자동차 천장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왜 그래?"

내가 속삭이듯 물었다.

"가끔 분을 못 참는게 내 문제점이거든."

에드워드도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응시하며 속삭였다.

"하지만 돌아가서 놈들을...... 응징한다고 해도 도움이 되진 않을 거야."

그는 다시 치미는 화를 참느라 애를 쓰며 고개를 돌렸다.

"적어도 그렇게 스스로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중이지."

"아아."

참으로 부적절한 대꾸였지만, 더 좋은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내가 계기판의 시계를 흘끔거겼다.
여섯 시 반이었다.

"제시카랑 앤젤라가 걱정하겠다. 만나기로 했거든."

내가 중얼거렸다.

에드워드는 말없이 시동을 걸고 부드럽게 차를 돌려 다시 빠르게 시내를


향해 몰았다. 순식간에 우리는 다시 가로등 아래를 달리고 있었고, 천천히
해변 산책로를 오가는 자동차 사이로 요리조리 달려갔다. 차도에 일렬로 서
있는 자동차들 사이에 주차공간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볼보를 세우기에는
좀 좁아 보인다 싶었는데, 그는 단 한번에 별 어려움 없이 차를 세웠다.
밖을 내다보니 '라 벨라 이탈리아'의 등불과, 막 음식점을 나와
종종걸음으로 점점 멀어지는 제시카와 앤젤라의 모습이 보였다.

"네가 어떻게 여기를 알고......"

말문을 열었던 나는 이내 그냥 고개를 저었다. 문 여는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그가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무얼 하려는 거야?"

"너한테 저녁 사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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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아직 준엄했다. 그가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나도 안절벨트를 풀고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그는 인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에드워드가 말했다.

"제시카와 앤젤라도 길을 잃어버려서 내가 찾아다녀야 하기 전에, 어서


가서 잡아. 아까 그놈들을 또다시 마주치면 이번엔 나도 자제할 수 없을 것
같거든."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위협에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제시카! 앤젤라!"

나는 친구들을 소리쳐 부른 뒤, 돌아보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두


친구는 서둘러 나에게 다가왔고, 두 사람의 얼굴에 동시에 떠오른 안도감은
내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깨닫는 순간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친구들은 두세 걸음 앞에서 더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디 갔었던 거야?"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제시카가 물었다.

"길을 잃었어."

내가 부끄러워하며 털어놓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에드워드를 만났어."

내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나도 같이 어울리면 안 될까?"

에드워드가 매끄럽고 도발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친구들의 얼어붙은


표정을 보니, 에드워드의 놀라운 재능을 예전엔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듯 했다.

"어...... 물론 괜찮지."

제시카가 숨을 몰아쉬듯 말했다.

"아, 근데. 실은 우린 기다리면서 벌써 저녁을 먹었어. 미안해, 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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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젤라가 고백했다.

"괜찮아. 난 배 안 고파."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뭘 좀 먹어야지."

에드워드의 목소리는 낮지만 단호했다. 그는 제시카를 바라보며 좀더


목소리를 높였다.

"갈 때는 내가 벨라를 집까지 데려다주면 어떨까? 그러면 벨라가


저녁먹는 동안 너희가 기다리지 않아도 되잖아."

"어, 아마 괜찮을걸......"

제시카는 내 의향은 어떤지 표정을 살피느라 애쓰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친구에게 살짝 윙크를 했다. 끊임없이 나를 구해 주는 영웅과 단둘이
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게 수도
없었지만, 그건 단둘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알았어. 그럼 내일 보자, 벨라. ......에드워드도."

앤젤라가 제시카보다 상황 파악이 빨랐다. 그녀는 제시카의 손을 잡고


건너편에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가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자동차에 오른뒤
제시카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마주
흔들어주며 그들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에드워드를 향해 돌아섰다.

"정말로 나 배 안 고파."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내가 고집을 부렸다. 그의 표정은 헤아릴 길이


없었다.

"나한텐 안 통해."

에드워드는 식당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고집스런 표정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더 이상 실랑이 할 여지가 없는게 분명했다. 나는 체념하듯 한숨을
쉬며 음식점으로 걸어 들어갔다.

관광철이 아니어서 식당은 그리 붐비지 않았다. 안내원은 여자였는데,


에드워드를 감상하는 그녀의 눈빛을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는 필요
이상으로 다정하게 에드워드를 반겼다. 그게 몹시 신경 쓰인다는 게 나도
놀라웠다. 여자는 나보다 한 뼘쯤 키가 컸고, 부자연스러운 금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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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인데요."

거의 목소리는 의도앴든 의도하지 않았든 유혹적이었다. 여자는 대뜸


나를 훑어보더니 내 평범한 외모와, 에드워드와 나 사이의 조심스럽고
뜨악한 거리감에 흡족한 눈치였다. 여자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식당
한가운데 네 명도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내가 앉으려 하자 에드워드가 나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좀더 아늑한 자리 없을까요?"

그가 나직이 안내원에게 부탁했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에드워드가


능숙하게 팁을 건네는 것도 같았다. 옛날 영화에서 말고, 안내받은 식탁을
거절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있죠."

여자는 나만큼이나 놀란 목소리였다. 여자는 돌아서서 작은 칸막이로


나뉜 공간이 줄지어 있는 구석 자리로 안내했다. 그쪽 자리는 모두 비어
있었다.

"여긴 어떠세요?"

"완벽하네요."

에드워드는 순간적으로 여자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듯 빛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담당직원이 곧 올 겁니다."

여자는 눈을 깜빡이며 머리를 흔들더니, 비틀거리며 걸어나갔다.

"너 사람들한테 제발 그러지 좀 마. 옳지 못한 일이야."

내가 비난했다.

"뭘 말이야?"

"그렇게 눈빛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거. 방금 그 여자 아마 지금


주방에 가서 호흡 진정시키고 있을걸."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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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왜 이러셔. 사람들한테 네가 어떤 영향력이 있는지 너도 잘


알잖아."

의심을 풀지 못한 채 내가 말했다. 그는 한쪽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호기심어린 눈빛을 띄었다.

"내가 사람들을 현혹시킨다고?"

"몰랐어? 사람들이 다 너처럼 원하는 걸 쉽게 이룬다고 생각해?"

그는 내 질문을 무시했다.

"너도 나한테 현혹당할 때가 있어?"

"응. 자주."

곧 담당 웨스트리스가 기대어린 표정이 되어 자리로 왔다. 안내원이 벌써


잔뜩 떠벌인 모양이었고, 새로운 직원도 실망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웨이트리스는 짧은 검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꽂으며 필요 이상으로
따뜻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엠버라고 해요. 오늘 제가 두 분을 모실 거에요. 음료는


뭘로 하시겠어요?"

나는 여자가 에드워드만 보고 이야기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가 나를


보았다.

"난 콜라 마실까 해."

내 말이 어째 질문처럼 들렸다.

"콜라 둘 주세요."

그가 말했다.

"곧 가져다 드릴게요."

여자는 또 한 번 불필요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느라 여자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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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트리스가 가자 내가 물었다. 그의 시선은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기분 어때?"

"괜찮아."

내가 그의 강렬한 시선에 놀라며 대답했다.

"어지럽거나 토할 것 같거나, 춥거나 하지 않아?"

"그래야 해?"

어리둥절한 내 말투에 그가 쿡쿡 웃었다.

"사실 난 네가 쇼크 상태에 빠지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완벽하게 멋들어진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 일은 안 일어날걸. 내가 원래 불쾌한 것들을 억누르는 데 매우


뛰어나거든."

그의 웃음 때문에 숨이 멎을 것 같았던 나는 다시 숨을 쉴 가 있게 된
다음에야 겨우 대꾸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난 네가 당분과 음식을 좀 섭취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신호라도 받은 듯 웨이트리스가 음료와 함께 빵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여자는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서서 탁자 위에 음료와 얇고 길쭉한 빵을
내려놓았다.

"주문하시겠어요?"

여자가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벨라?"

그가 내게 묻자 여자는 마지못해 나를 향해 돌아섰다. 나는 메뉴에서


맨처음 눈에 띈 음식을 골랐다.

"음...... 저는 버섯 라비올리 주세요."

"손님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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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트리스가 다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전 됐습니다."

그가 말했다. 물론 그러시겠지.

"혹시 마음 바뀌시면 알려주세요."

여전히 새침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도 에드워드가 바라보지 않자


에이트리스는 속이 상해 자리를 떴다.

"마셔."

그가 명령했다. 나는 얌전히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뒤, 내가 그렇게 목이


말랐던가 새삼 놀라워하며 음료를 더 들이켰다. 에드워드가 자기 콜라 잔을
나에게 밀어준 다음에야 나는 내가 콜라 한 컵을 다 마셨다는 걸 깨닫았다.

"고마워."

여전히 갈증을 느끼며 내가 중얼거렸다. 차가운 콜라의 기운이 가슴으로


퍼져나가 나는 몸을 떨었다.

"추워?"

"콜라 때문에 그래."

나는 다시 몸을 부르르 떨며 변명했다.

"겉옷 안 가져왔어?"

못마땅한 목소리였다.

"응."

나는 아무것도 없는 내 옆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아 맞다, 제시카 차에 두고 내렸어."

그제야 생각이 났다. 에드워드가 재킷을 벗었다. 문득 나는 오늘 이전까지


단 한번도 그가 입은 옷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적이 없다는 걸 깨닫았다. 난
그저 그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지금 그는 연한 베이지색 가죽 재킷을 벗고 있었다. 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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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색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근육질의 날렵한 가슴이 보기


좋게 드러났다. 그가 재킷을 건네는 바람에 내 은근한 관찰은 끝이 났다.

"고마워."

그의 재킷에 팔을 밀어넣으며 내가 다시 말했다. 그의 옷은 복도에 걸어


뒀던 옷을 아침에 처음 집어들었을 때처럼 차가웠다. 나는 다시 몸을
떨었다. 매혹적인 향기가 났다. 나는 이 감미로운 체취의 정체가 무얼까
고민하며 숨을 들이켰다. 향수 냄새 같지는 않았다. 소매가 너무 길었다.
손을 제대로 움직이려면 소맷자락을 한참 밀어올려야 했다.

"파란색이 네 피부랑 참 잘 어울린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떨어뜨렸고,


물론 얼굴도 붉혔다. 그가 빵 바구니를 내 쪽으로 밀었다.

"정말로 난 쇼크 따위 안 을으킬 거야."

"일으켜야 정상이야.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게 당연한 거라고. 그런데 넌


크게 놀란 것 같지도 않네."

그는 그래서 불안한 모양이었다. 내 눈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지금껏


본 중에서 가장 흐린 황금빛이어서 거의 황금빛 버터사탕 같았다.

"난 너랑 있으면 아주 안전하단 생각이 들거든."

나는 그의 눈빛에 홀려 또다시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내 대답이 못마땅


했는지 상아 같은 그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였다.

"이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한데."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기다랗고 딱딱한 빵을 집어들고 그의


표정을 살피며 끝을 잘라 먹기 시작했다. 언제 그에게 질문을 던져도
좋을지 궁금했다.

"보통 넌 기분이 좋을 때 눈동자 색이 연해져."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인상을 찌푸리고 심각해진 그의 상념을


깨뜨려보려고 내가 말했다. 그가 보기 좋게 한방 먹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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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못되게 굴 땐 언제가 눈동자가 검은색이야. 그래서 나도 짐작을


하지. 내가 세운 가설이야."

에드워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새로운 가설인가?"

"응."

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고 빵 조각을 씹었다.

"이번엔 좀더 창의력을 발휘하길 빌어볼게. 혹시...... 아직도 만화책에서


아이디어를 훔칠 생각은 아니지?"

그가 놀리듯 희미하게 웃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진지했다.

"아니야, 만화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 혼자 생각해


낸 것도 아니야."

"그래서?"

그가 다그치듯 물었다. 바로 그때 웨이트리스가 칸막이를 돌아 음식을


들고 나타났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바짝 다가앉아 있었는지,
웨이트리스가 다가오자 둘 다 뒤로 물러나 앉았다. 웨이트리스는 꽤 맛있어
보이는 라비올리 접시를 내 앞에 내려놓고 재빨리 에드워드를 향했다.

"혹시 생각이 바뀌셨나요? 원하시는게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웨이트리스의 말에 교묘한 의미가 담긴 것 같다는 느낌은 어쩌면 내


상상일지도 몰랐다.

"아뇨, 됐습니다. 그냥 콜라나 좀더 갖다 주시면 고맙겠어요."

에드워드가 길고 우아한 하얀 손으로 내 앞에 놓인 빈 잔 두 개를


가리켰다.

"그러죠."

여자는 빈 잔을 들고 사라졌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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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차에서 얘기할게. 만일......"

내가 머뭇거렸다.

"조건부야?"

그가 험악한 목소리로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물론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당연히 그렇겠지."

웨이트리스가 콜라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이번엔 아무 말 없이 콜라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나는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서 얘기해 봐."

그가 여전히 엄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나는 가장 곤란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질문부터 시작했다.

"넌 왜 포트앤젤레스에 온 거야?"

그는 탁자 위에서 커다란 손을 천천히 오므리며 시선을 내리깔더니, 이내


기다란 속눈썹 밑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능글맞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다음."

"그게 가장 쉬운 질문이야."

"다음."

나는 기가 꺾여서 시선을 떨구었다. 나는 냅킨을 풀어 포크를 집어들고


조심스럽게 라비올라를 잘랐다. 그리고 시선을 떨군 채 천천히 라비올라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버섯향이 아주 좋았다. 나는
음식을 꿀꺽 삼키고 콜라를 한 모금 더 마신 다음 얼굴을 들었다.

"그럼 좋아."

나는 그를 노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인데 말이지..... 누군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고 가정 해 보자. 물론 몇몇 예외는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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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는 단 하나뿐이냐, 가설이지만."

"좋아, 단 하나의 예외를 인정할게."

나는 그가 협조적이라는 데 잔뜩 흥분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행동했다.

"그게 어떤 식으로 그렇게 되는 걸까? 한계는 어디까지지? 어떻게


누군가..... 또 다른 누군가를 정확하게 딱 필요한 순간에 찾아낼 수 있지?
어떻게 여자가 곤경에 처한 걸 그 남자가 알았을까?"

온통 뒤얽힌 내 질문이 말이 되긴 하는 건가 싶었다.

"가상의 질문이지?"

"그럼."

"글쎄, 만일 누군가가......"

"그 남자를 '조'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가 불량하게 씩 웃었다.

"그래, 만일 조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목한다면, 굳이 정확한 순간을


따질 필요가 없겠지."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이렇게 작은 도시에서 곤경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너


때문에 여기 범죄율이 10 년 만에 처음으로 높아졌을 거다."

"우린 지금 가설을 논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줘."

내가 뿌루퉁해서 쏘아붙였다.

"맞아, 그렇지. 여자도 '제인' 이라고 부를까?"

"어떻게 알았어?"

나는 솟구치는 호기심을 더는 억제하지 못하고 물었다. 나는 또다시


테이블에 몸을 바싹 기대고 있었다.

그는 내면의 갈등을 겪느라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서로 눈을 마주


보며, 그가 지금 당장 사실을 털어놓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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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믿어도 돼."

나는 중얼거리며 생각 없이 손을 뻗어 움켜쥔 그의 손을 살짝 잡았지만,


그는 슬그머니 손을 빼버렸고 머쓱해진 나도 손을 거뒀다.

"나한테 선택의 여지가 있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 내가 틀렸어, 넌 내


생각보다 훨씬 관찰력이 뛰어나군."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넌 언제고 틀리는 적이 없다더니."

"전엔 그랬지."

그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너에 대한 내 생각이 틀린 게 또 있어. 넌 사고를 끌어들이는 자석이


아니야. 정의를 크게 넓혀야겠더군. 넌 '문제'를 끌어들이는 자석이야. 반경
15 킬로미터 이내에 위험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네가 그 중심이지."

"너도 그 범주에 포함시키는 거야?"

그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굳어졌다.

"당연하지."

나는 또다시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그가 다시 손을 움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그의 손등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의
피부는 돌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고마워, 이번이 두 번째네."

진정으로 고마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는 굳은 표정을 풀었다.

"세 번째는 시도하지 말자. 알겠지?"

나는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손 밑에서 손을 빼


탁자 아래로 내려놓았다. 하지만 몸은 내 쪽으로 기울였다.

"포트앤젤레스엔 널 따라 온 거야. 나도 특정인을 살려 두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많이 골치 아프더군. 아마도 그건 상대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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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이기 때문일 거야.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엄청난 재앙을 안 겪고도


하루하루 잘만 살거든."

빠르게 속삭이던 그가 말을 멈추었다. 그가 나를 미행했다는걸 불쾌하게


여겨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에 기쁨이 번져갔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내 입술이 난데없이 왜 웃음을 머금는 듯 움직이는지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 차 사고 났을 때 내 명은 거기서 끝이 난 건데, 네가 운명을


거역하고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일부러 딴 생각을 하느라 말머리를 돌렸다.

"그게 처음이 아니었어."

그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만큼 낮았다.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네 생명은 처음 내가 널 만났을 때 끝날 뻔했다."

그의 말에 돌연 공포가 느껴지면서 첫날 너무도 가혹하게 노려보던 그의


검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곁에서라면 어떤 일이 생겨도
무사하다는 압도적인 느낌이 공포감을 억눌렀다. 그가 내 눈빛을 읽으려고
얼굴을 들었을 때쯤에는 이미 내 눈엔 공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기억 나?"

그가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심각한 빛을 띠며 말했다.

"응."

나는 침착했다.

"그런데도 넌 지금 여기 앉아 있어."

그의 목소리에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한 뉘앙스가 풍겼다.

"그래, 난 여기 앉아 있어...... 네 덕분에."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영문은 몰라도 네가 오늘 나를 어떻게 찾아낼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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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다시 결정의 기로에 선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다문 채 나를


응시했다. 그는 아직 음식이 거의 그대로 있는 내 접시를 흘끔 바라보더니
다시 나를 보았다.

"넌 어서 먹어, 얘기는 내가 할게."

나는 재빨리 라비올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네 자취를 계속 뒤쫓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어. 원래 내가 일단 마음을


읽은 사람들을 찾아내는 건 보통은 아주 쉬운 일이거든."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고서야 나는 내가 얼어붙어


있다는 걸 깨닫았다. 나는 꿀꺽 음식을 삼키고 또 다른 라비올리 조각을
잘라 입에 넣었다.

"대신 제시카를 이정표로 삼았어. 아까도 말했지만 포트앤젤레스에서


문제를 겪을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처음엔 너만 혼자
떨어져나간 걸 알아차리지 못했어. 네가 친구들과 같이 있지 않다는 걸
알고 나서는 제시카의 생각 속에서 본 서점으로 가서 너를 찾아보려고
했지. 그런데 네가 거기 들어가지도 않고 남쪽으로 간 걸 알게 됐어. 네가
곧 뒤돌아올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에 너를 마냥 기다리면서,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생각을 무작위로 살폈지. 혹시 너를 알아본 사람이
있으면 네 행방을 알게 될 테니까 말이야. 걱정할 이유가 없었는데......
아까는 이상하게도 초조했어......"

생각에 잠신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뭔가를 목격하고 있는 듯 했다.

"계속 귀를 기울이면서...... 반경을 넓혀 차를 몰고 널 찾아다니기


시작했어. 드디어 해까지 저물어서, 아무래도 차에서 내려 나도
걸어다니며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화가 치미는지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는 진정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뭐?"

내가 속삭여 물었다. 그는 또다시 내 머리 위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놈들이 생각하는 걸 들었어."

그가 윗니를 무섭게 드러내며 씩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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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네 얼굴이 보이더군."

그는 갑자기 몸을 수그리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자기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행동이 너무 빨라서 나는 깜짝 놀랐다.

"넌 아마 상상도 못하겠지만 놈들을...... 살려둔 채 너만 데리고 그곳을


떠나는 건 정말 힘겨운 일이었어."

팔에 가려져 그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들렸다.

"제시카랑 앤젤라와 함께 널 보낼 수도 있었지만, 네가 날 홀로 남겨두면


놈들을 뒤쫓아가게 될 것 같아 두려웠어."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하고 멍해져 말없이 앉아 있었다. 손은 무릎에 힘없이


올려둔 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는 아직도 팔에 얼굴을 묻고 그의
피부색을 띤 대리석으로 조각을 해놓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얼굴을 들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집에 갈 준비 됐니?"

그가 물었다.

"준비 됐어."

나는 집까지 한 시간이나 같이 차를 타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아직 그에게 작별인사를 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르기라도 한 듯 웨이트리스가 나타났다. 아니면 엿보고 있었거나.

"필요한 거 있으세요?"

웨이트리스가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계산서 부탁드립니다."

조금 전 우리의 대화 때문에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웨이트리스가 어리둥절해했다. 그는 다그치듯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무, 물론이죠. 여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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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트리스는 말을 더듬으며 검정색 앞치마 주머니에서 작은 가죽


집게판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에드워드는 이미 지폐를 쥐고 있었다.
그는 계산서 집게판 밑에 지폐를 끼워 곧장 여자에게 돌려주었다.

"잔돈은 됐습니다."

그는 말없이 웃으며 일어났다. 나도 어색하게 몸을 일으켰다.


웨이트리스는 다시 그를 유혹하듯 미소를 지었다.

"즐거운 저녁시간 보내세요."

그는 웨이트리스를 보지도 않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그는 여전히 나와 몸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문까지 걸어갔다. 마이크와


데이트를 하면서 거의 첫 키스 단계까지 갔다고 한 제시카의 말이
떠올랐다. 한숨이 나왔다. 에드워드가 내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마음이 들킨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라
여기며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조수석 문을 열고 내가 올라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살며시 문을


닫았다. 나는 그가 자동차 앞으로 돌아 걷는 모습을 지켜보며, 또 한번
그의 우아한 동작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쯤이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에드워드는 누군가가 익숙해질 수 있는
부류가 아니야.

차에 오른 그는 시동을 걸고 히터를 최대한 올렸다. 날씨가 꽤 추워진


걸로 보아, 좋은 날씨는 끝이 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재킷을 입고
있어 따뜻했고, 그가 보지 않을 때마다 그의 체취를 만끽했다.

에드워드는 창밖을 내다보지도 않고 자동차 물결에 합류해, 곧장


고속도로로 향했다.

"이젠 네 차례야."

그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9. 가설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에드워드가 한적한 도로에서 빠르게 차를 모는 사이 내가 말했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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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에 별 주의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하나만."

에드워드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있지......내가 서점에 들어가지 않고 남쪽으로 갔다는 걸 너도 알았다고


했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

그는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뭐든 회피하는 단계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못마땅해져서 투덜거렸다. 그의 얼굴은 웃는 듯 마는 듯 했다.

"알았어. 네 체취를 따라간 거야."

그는 나에게 표정관리할 시간을 주려는 듯 길을 바라보았다. 나는 적당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아, 나중에 좀더 생각해 봐야겠다고 여기며 일단
넘겼다. 나는 다시 초점을 맞추려고 애를 썼다. 드디어 에드워드가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지금 말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고 내가 처음 물어본 것에 대해서도 넌 대답하지 않았어......"

그가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듯 나를 보았다.

"무슨 말이야?"

"사람 마음을 어떻게 읽느냐고 내가 물었잖아. 어디서든 누구의 마음도


읽을 수 있는 거야? 어떻게? 너희 가족들도 가능해?"

가상의 이야기를 설명하라고 요구하는 것 같아 스스로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이 하나가 아니잖아."

그의 지적에 나는 그저 손가락을 깍지 끼고 그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먼저, 그럴 수 있는 건 나뿐이야. 그리고 거리나 대상에 상관 없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꽤 가까이 가야 하거든. 다른 사람보다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라면 좀 멀더라도 들을 수 있지. 하지만 그래봤자 3~4
킬로미터가 고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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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을 멈추었다.

"커다른 연회실 같은 데서 사람들이 모여 동시에 말하는 걸 듣는 것과 좀


비슷해. 처음엔 웅성웅성하는 배경음으로 들리지. 그러다 한 목소리에
집중하면, 그들이 무얼 생각하는지 명확해져. 대부분 필요한 목소리를
구분해 내긴 하는데, 그게 굉장히 어려울 때가 있어. 하지만 우연히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일부러 집중해서 그들의 생각을 읽는 건 '
대개는'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지."

"내 생각은 읽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호기심이 일어 내가 물었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수수께끼 같았다.

"모르겠어. 아마 네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기


때문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야. 네 상각은 AM 주파수인데 나는 FM
주파수만 포착하는 식이지."

그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날 보며 씩 웃었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옳지 않다는 거야? 괴짜라고?"

나는 그의 말에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아마도 그의 짐작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인 모양이다. 나 또한 그럴지도 모른다고 늘 의심하고
있었지만, 막상 다른 사람에게 확인을 받고 보니 당황스러웠다.

"지금 네가 괴짜라는 걸 걱정하는 네 마음의 목소리가 들린다.


걱정하지마, 그냥 가설일 뿐이니까......"

소리 내어 웃던 그의 얼굴이 다시 진지해졌다.

"가설 얘기가 나왔으니 네 얘기로 되돌아가자."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디부터 시작한담?

"뭐든 회피하는 단계는 지났다며?"

그가 부드럽게 재촉했다. 나는 적당한 낱말을 생각해 내느라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문득 속도계가 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속도를 낮춰!"

내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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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에드워드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자동차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시속 160 킬로미터로 달리고 있잖아!"

나는 여전히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당혹감에 창밖을 내다봤지만 너무


어두워 보이는 게 없었다. 푸른 기운이 도는 전조등 불빛에 멀리까지 비친
도로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도로 양쪽에 자리한 숲은 지금 속도로
도로에서 벗어나기라고 한다면 우리를 완전히 잡작하게 만들 것처럼
단단한 검은 강철벽으로 보였다.

"긴장 풀어, 벨라."

그는 여전히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죽게 만들려는 거야?"

"자동차 사고 따윈 나지 않아."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뭔데?"

"난 늘 이렇게 운전해."

에드워드가 나를 돌아보며 불량하게 웃었다.

"딴 데 보지 마!"

"난 한번도 교통사고 난 적 없어. 범칙금 딱지도 받은 적 없지. 내장형


감지기가 들어 있거든."

그는 씩 웃으며 자기 이마를 두들겼다.

"우습기도 하겠다. 찰리가 경찰이란 거 잊었더? 나는 교통법규를


지키라고 배우며 자랐어. 게다가 이 볼보가 나무 밑동에 부딪쳐 휴지조각이
되더라도 너는 아마 멀쩡하게 걸어나오겠지."

"아마도."

그는 큰 소리로 짧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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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넌 아니겠지."

에드워드가 한숨을 쉬었다. 속도계 바늘이 120 을 향해 차츰 떨어지는 걸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됐니?"

"비교적."

"난 느리게 운전하는 게 싫어."

"이게 느린 거야?"

"잔소리는 그만해. 난 아직 네 최근 가설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벌꿀빛 눈동자가 뜻밖에도


아주 부드러웠다.

"웃지 않을게."

"난 네가 화낼까 봐 그게 더 걱정인데."

"그렇게 심한 얘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에드워드는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고


그의 손으로 시선을 내려뜨렸다.

"어서 해봐."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잖아. 너 혼자 생각해 낸 얘기는 아니라고 했지?"

"응."

"어떻게 시작된 건데? 책? 영화?"

"아니야. 토요일에 해변에서 시작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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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험 삼아 그의 얼굴을 흘끔 보았다. 궁금한 표정이다.

"제이콥 블랙이라고, 옜날부터 알던 친구를 우연히 만났어. 내가 아기였을


때부터 그 애 아버지와 찰리는 친구였거든."

에드워드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제이콥 아버지는 퀼렛 부족 원로셔."

나는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살폈다. 혼란스러운 그의 표정이 이내 얼어


붙었다.

"우린 같이 산책을 했어."

내가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시도했던 작전 부분은 모두 편집 해 버렸다.

"나를 겁먹게 하려고 걔가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을 얘기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머뭇거렸다.

"계속 해."

"뱀파이어 이야기도 있었어."

나는 어느새 속삭이고 있었다. 이제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운전대를 쥔 그의 손마디가 하얗게 변하는 게 보였다.

"그랬는데 곧장 내 생각이 난 거야?"

그는 여전히 침착했다.

"아니. 제이콥이...... 너의 가족 얘기를 꺼냈어."

그는 길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문득 걱정이 앞선 나는 제이콥을


변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콥은 그냥 다 우스운 미신이라고 말했어. 내가 특별히 달리 생각 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을 거야."

재빨리 그렇게 말했지만, 왠지 부족한 것 같아 솔직히 고백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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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내 잘못이야. 내가 이야기를 유도했거든."

"왜?"

"로렌이 나한테 시비를 걸 생각이었는지 네 얘기를 꺼냈어. 그랬더니 가장


나이 많은 인디언 남자애가 너희 가족은 보호구역에 들어올 수 없다고
했는데, 나한테 뭔가 다른 의미가 더 있다는 식으로 들렸어. 그래서
제이콥을 혼자만 따로 불러내 속임수로 이야기를 유도한 거야."

내가 고개를 숙이며 털어놓자, 갑자기 그가 웃음을 터뜨려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강렬한 눈빛은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속였는데?"

"내가 관심 있는 척 추근댔어.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잘 먹히더라."

새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내가 중얼거렸다.

"나도 구경했으면 좋았을걸 그랬군. 나더러 사람들을 혹시킨다고 비난


하더니만. 가엾은 제이콥 블랙."

그가 짓궂게 소리 내 웃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았다.

몇 분쯤 뒤에 그가 물었다.

"그래서 그 다음엔?"

"인터넷으로 조사를 좀 했어."

"결과가 그럴듯했나?"

관심 없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하나도 안 맞더라. 대부분은 다 우스꽝스러운 내용이었어.


그래서......"

내가 말을 멈추었다.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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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다는 결론을 내렸어."

내가 속삭였다.

"상관이 없다고?"

왈칵 달라진 그의 말투에 나도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조심스럽게 가면을


쓰고 있던 그의 평온함을 깬 것이다. 내가 걱정했던 대로 못 믿겠다는 그의
표정에서 분노의 기미가 보였다.

"응. 네 정체가 무엇이든 나는 상관없어."

"내가 괴물이라도 상관이 없단 말이야? 내가 인간이 아니라도?"

몹시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응."

그는 또다시앞만 응시하며 침묵을 지켰다. 그의 표정은 싸늘하고


냉랭했다.

"화났구나. 아무 얘기도 하지 말 걸 그랬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야."

하지만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말투는 얼굴 표정만큼 굳어 있었다.

"차라리 네가 뭘 생각하는지 속속들이 알면 좋겠군. 그게 아주 정신나간


생각이더라도 말야."

"내가 또 틀렸다는 거야?"

"그 얘기가 아니야. '상관이 없다'니!"

그는 이를 갈며 내 말을 흉내냈다.

"내 추측이 맞아?"

헐떡이듯 내가 물었다.

"그건 상관 있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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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물음에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꼭 그렇진 않아. 하지만 궁금해."

적어도 내 목소리는 침착했다. 갑자기 에드워드가 저자세를 취했다.

"뭐가 궁금해?"

"너 몇 살이야?"

"열일곱 살."

그는 바로 대답했다.

"열일곱 살로 지낸 지 얼마나 됐는데?"

도로를 응시하는 그의 입꼬리가 위로 슬쩍 말려 올라갔다.

"좀 됐지,"

마침내 그가 인정했다.

"알았어."

내 질문에 계속 정직하게 대답하는 게 기뻐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얼마 전 내가 쇼크 상태에 빠질까 봐 걱정하던 때처럼 조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걱정 말라는 듯 더 환하게 웃자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젠 웃지 말고 대답해야 해. 어떻게 넌 낮에 돌아다닐 수 있지?"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미신이야."

"햇빛을 보면 불에 타?"

"미신이야."

"관에서 자는 건?"

"미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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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묘한 말투로 덧붙였다.

"난 잘 수가 없어."

내가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전혀?"

"단 한 숨도."

그는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생각의 고리를
잃어버렸다. 나는 그가 먼저 시선을 거둘 때까지 그를 응시했다.

"아직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지 않고 있군."

그의 목소리가 다시 싸늘해졌고 눈빛도 차가워졌다. 나는 여전히 홀린 듯


눈을 깜박였다.

"그게 뭔데?"

"내 식성에 대해 걱정되지 않아?"

그가 비아냥거리듯 물었다.

"아, 그거."

내가 중얼거렸다.

"그래, 그거. 내가 피를 마시는지 알고 싶지 않아?"

그의 냉랭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음, 제이콥이 거기에 대한 얘기를 좀 해줬어."

"제이콥이 뭐라고 했는데?"

"너희는...... 인간을 사냥하지 않는댔어. 너희 가족은 짐승들만 사냥하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다고 여겨진다더라."

"우리가 위험하지 않다고 그랬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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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단정한 게 아니라, 위험하지 않다고 '여겨진다'고 했어. 하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퀼렛 부족은 너희가 자기네 영역에 오늘 걸 원치
않는다고 말이야."

그는 앞만 바라봤지만, 그가 도로를 보고 있는 건지는 확실치 않았다.

"제이콥 말이 맞아? 인간을 사냥하지 않는다는 거 말야."

나는 목소리를 최대한 평온하게 내려고 애썼다.

"퀼렛 부족은 기억력이 대단하군."

그의 속삭임을 나는 확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지 마. 우리와 거리를 유지하려는 그 사람들 생각은


옳아. 우린 여전히 위험한 존재야."

"난 이해 못하겠어."

"우리도 노력은 하지. 대개는 우리도 자제력이 뛰어나. 하지만 가끔은


실수도 해. 가령 지금의 나처럼, 너와 단둘이 있잖아."

"나랑 같이 있는 게 실수라고?"

나는 내 목소리에서 서글픔을 감지했지만, 에드워드도 느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주 위험한 실수지."

우리는 둘 다 침묵을 지켰다. 나는 전조등에 비친 굽은 도로를 응시했다.


도로가 너무 빨리 움직여 현실이 아니라 컴퓨터 게임 같았다. 차체 밑으로
사라지는 검은 도로처럼 시간도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느끼며, 나는
이렇게 공공연하게 둘 사이의 벽을 허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또다시 없을 것 같아 겁이 났다. 그의 말은 얘기가 끝났다고 암시하는 듯
했지만, 나는 그 생각을 거부했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일 분 일 초라도
허비할 수는 없었다.

"더 얘기 해 줘."

에드워드가 무슨 말을 했든, 나는 그저 그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간곡히


부탁했다. 내 말투가 바뀌어 놀랐는지 에드워드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뭘 더 알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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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 대신 짐승을 사냥하는지."

여전히 절박함이 느껴지는 말투로 내가 조심스레 말했다. 눈가가 젖어


드는게 느껴져 나는 온몸을 죄어드는 슬픔과 싸웠다.

"나는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

그는 아주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짐승으로는 성에 안 차잖아?"

그가 대답하기 전에 조금 머뭇거렸다.

"물론 확실히는 몰라도 아마 고기 대신 두부와 두유만 먹고 사는


셈일거야. 우리끼리 농담 삼아 우린 채식주의자라고 말하지. 허기랄까,
갈증이 완전히 해소되진 않아. 하지만 그 때문에 그걸 억누를 수 있을 만큼
강해지지. 대부분의 경우는 말이야."

그의 말투가 험상궂어졌다.

"가끔은 굉장히 어려울 때가 있어."

"지금도 굉장히 어려워?"

내 질문에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응."

"하지만 넌 지금 허기지지 않았어."

나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네 눈 말이야. 내가 가설을 세웠다고 했잖아. 사람들은, 특히 남자들은


배가 고프면 눈빛이 거칠어져."

에드워드가 호탕하게 웃었다.

"너 정말 관찰력이 뛰어나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웃음소리를 기억에 새겨둘 작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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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지난주엔 에밋이랑 사냥하러 갔어?"

다시 침묵이 흐르자 내가 물었다.

"응."

그는 뭔가를 더 말해도 될지 고민하는 듯 잠깐 말을 그쳤다.

"떠나고 싶지 앟았지만, 가야 했어. 갈증을 느끼지 않아야 네 주변에서


맴도는 게 그마나 좀 쉽거든."

"왜 떠나고 싶지 않았어?"

"너랑 멀리 있으면...... 초조해져."

강렬하고도 부드러운 그의 눈빛에 온몸의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지난 목요일에 너한테 바다에 빠지거나 차에 치이지 말라고 부탁한 건


농담이 아니었어. 주말 내내 네 걱정을 하느라 내 정신이 아니었지.
오늘저녁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주말에 네가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돌아온
게 놀라워."

그는 문득 뭔가를 떠올렸는지 고개를 저었다.

"하긴, 아무 데도 안 다친 건 아니지."

"뭐라고?"

"네 손 말이야."

나는 손바닥의 긁힌 상처가 거의 다 아문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

"넘어졌어."

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너란 애는 얼마든지 그보다 훨씬 심하게도 다쳤을 수


있거든. 그 때문에 너랑 떨어져 있는 동안 내내 괴로웠어. 사흘이 참
길더군. 나 때문에 에밋이 거의 미치려고 할 정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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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사흘이라고? 오늘 막 돌아온 거 아니었어?"

"아니, 일요일에 돌아왔어."

"그런데 왜 아무도 학교에 오지 않았어?"

에드워드가 오지 않아 얼마나 실망했던가, 나는 마음이 쿵 내려앉으며


화가 났다.

"아까 네가 햇볕을 쪼이면 불이 붙느냐고 물었는데, 그렇지는 않아.


하지만 햇빛 속을 돌아다닐 순 없어. 적어도 다른 사람 눈에 띄는 곳은
곤란하지."

"왜?"

"나중에 보여줄게."

나는 그의 약속을 놓고 잠깐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전화 해 줄 수도 있었잖아."

에드워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안전하다는 걸 알았는데, 왜."

"하지만 나는 네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잖아. 난......"

고개를 떨구며 내가 머뭇거렸다.

"뭐?"

그는 벨벳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재촉했다.

"속상했어, 너를 보지 못해서. 네가 안 보이면 나도 초조해져."

나는 속마음을 입 밖에 내는 게 쑥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걱정이 돼 고개를 드니,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이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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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직이 탄식했다. 나는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

"모르겠어? 내가 스스로 비참해지는 건 상관없지만, 너까지 깊숙이 끌어


들이는 건 곤란해."

그는 화난 눈동자로 도로를 응시하며, 내가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목소리는 작지만 어딘가 급해 보였다.

"너한테 그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 이건 잘못됐어. 전혀 안전한 일이


아냐. 난 위험한 놈이야, 벨라. 제발 그걸 받아들여."

"싫어."

나는 심술난 아이 같은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몹시 애썼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에드워드가 투덜거렸다.

"나도 마찬가지야. 이미 말했지만 난 네 정체가 뭐든 상관없어. 너무


늦었어."

"그런 말 절대 함부로 해선 안 돼."

그의 목소리는 화난 듯 낮고 거칠었다. 입술을 깨물며 나는 그가 내


고통을 알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창밖을 보니 이제 집에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에드워드는 너무 빨리 차를 몰았다.

"무슨 생각 하는 중?"

그가 여전히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고개만 저었다. 그가 내 얼굴을 살피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냥 앞만
바라봤다.

"우는 거야?"

그가 놀란 듯이 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눈가에 맺힌 것도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얼른 손으로 얼굴을 훔쳤더니, 아니나 다를까 배신자 같은
눈물이 몇 방울 흘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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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에드워드가 머뭇머뭇 오른손을 뻗다가 결국은 멈추고 다시 천천히


운전대를 잡았다.

"미안해."

그의 목소리에는 참회의 느낌이 가득했다. 단순히 나를 화나게 한 말


때문에 사과하는 게 아니란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정적 속에서 어둠이 우리
곁으로 내려앉았다.

"궁금한게 있어."

몇 분쯤 흘렀을까, 그가 애써 가벼운 말투로 얘기하려고 애쓰는 게


느껴졌다.

"뭔데?"

"아까 저녁 때, 내가 모퉁이를 돌아 나타나기 직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네 표정을 통 모르겠더라. 그렇게 겁먹은 표정도 아니고, 뭔가에
대단히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어."

"어떻게 하면 치한을 일격에 물리칠 수 있는지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중이었어. 호신술 말이야. 그 사람 코를 걷어차서 뇌에 파묻히게 해줄
작정이었거든."

나는 검은 머리칼 남자를 생각하며 극도의 혐오감에 몸을 떨었다.

"놈들하고 싸울 생각이었단 말이야? 달아날 생각은 안 했어?"

"나는 달리기만 하면 꼭 넘어진단 말이야."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건?"

"그것도 준비하고 있었어."

에드워드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네 말이 맞다. 널 살려두기 위해 내가 운명과 싸우고 있는게 틀림없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포크스 외곽으로 접어들며 차가 속도를 늦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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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분도 채 걸리지 않은 듯 했다.

"내일 학교 올 거야?"

내가 물었다.

"응. 나도 과제물 낼 게 있거든. 점심시간에 네 자리 맡아놓는다."

그가 말없이 웃었다. 오늘밤 그 많은 일을 겪고도 가벼운 그 약속 한


마디에 잔뜩 기분이 들뜨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찰리의 집 앞에 당도했다. 집에는 불이 켜 있고, 트럭은 제자리에


있었으며 모든 건 극히 정상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에드워드가 차를 세운 뒤에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일 꼭 학교에 오겠다고 '약속'하는 거지?"

"약속할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체취를 맡은 뒤 그의 재킷을 벗었다.

"가져가도 돼. 넌 내일 입고 올 겉옷이 없잫아."

그가 권했지만, 나는 그냥 옷을 돌려주었다.

"찰리한테 설명하기 싫어."

"아, 그렇구나."

그가 씩 웃었다.

나는 문 손잡이에 손을 댄 채 헤어지는 순간을 최대한 미루려 애쓰며


머뭇거렸다.

"벨라."

그는 달라진 목소리로, 진지하면서도 주저하듯 불렀다.

"응?"

나는 얼른 그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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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뭐 하나만 약속 해 줄래?"

"좋아."

나는 그렇게 말해놓고 이내 덮어놓고 동의한 걸 후회했다. 혹시라도


자기와 거리를 두라는 말이면 어쩌지? 그 약속이라면 지킬 수 없는데.

"숲속엔 절대 혼자 들어가지 마."

나는 완전히 멍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왜?"

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내 뒤쪽 창문을 내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위험한 존재는 아니거든. 그 정도로만 알아둬."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갑작스레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에 부르르 몸이


떨렸지만 이내 안도했다. 적어도 이건 지키기 쉬운 약속이니까.

"알았어."

"내일 보자."

그가 한숨을 쉬는 걸 보니 이젠 내가 그만 차에서 내리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럼 내일 봐."

마지못해 내가 차 문을 열었다.

"벨라."

내가 돌아보자 그가 내 쪽으로 몸을 수르렸다. 창백하고 잘 생긴 그의


얼굴이 나와 겨우 한 뼘쯤 떨어져 있었다. 심장이 멈추었다.

"잘 자."

그가 말했다. 그의 숨결이 뺨에 닿자 나는 넋이 나갔다. 그의 재킷에서


풍기던 황홀한 체취가 좀더 강렬하게 훅 끼쳐왔다. 나는 완전히 넋을 잃고
눈을 깜박거렸다. 그가 뒤로 몸을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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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뇌가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급기야


뻣뻣하게 차에서 내린 나는 차체를 짚고 서며 균형을 잡았다. 그가 킥킥
웃는 것도 같았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비틀비틀 현관까지 걸어가는 동안 기다렸다가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 나는 돌아서서 은색 자동차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극심한 추위를 느끼며 기계적으로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찰리가 거실에서 불렀다.

"벨라 왔니?"

"네, 저에요."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찰리는 야구경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일찍 왔구나."

"그래요?"

나는 조금 놀랐다.

"아직 8 시도 안 됐어. 여자들끼리 재미있었니?"

"네. 아주 재미있었어요."

내가 꿈꿨던 여자들끼리의 외출 계획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죄다 기억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핑핑 돌았다.

"친구들은 둘 다 드레스를 골랐어요."

"너 괜찮니?"

"좀 피곤해서 그래요. 많이 걸었거든요."

"그럼 어서 가서 눕는 게 좋겠다."

찰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얼굴 상태가 어떤지 궁금


했다.

"제시카한테 먼저 전화부터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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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 같이 있지 않았니?"

아버지가 놀라 물었다.

"네, 그런데 차에 겉옷을 두고 내렸거든요. 내일 가져오라고 부탁해야


겠어요."

"우선 네 친구가 집에 갈 시간은 줘야지."

"그렇겠네요."

나는 진한 피로감을 느끼며 부엌으로 가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이젠


정말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제 와서 결국 쇼크 상태에 빠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정신 차려. 스스로에게 말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 부랴부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벨라니?"

"응, 제시카. 나도 막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집에 왔구나."

친구는 안심을 하면서도 조금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네 차에 내 겉옷을 두고 내렸어. 내일 갖다 줄래?"

"물론이지. 어떻게 된 건지 어서 말해 봐!"

"어, 내일 수학시간에 얘기하자. 응?"

친구는 재빨리 감을 잡았다.

"아, 아버지랑 같이 있구나?"

"맞아."

"알았어, 그럼 내일 만나. 안녕!"

나는 친구의 목소리에서 조바심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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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을게, 제시카."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천천히 이층으로 올라갔다. 줄곧 멍한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잘 준비를 했다. 샤워를 하면서
비로소 나는 살갗을 델 만큼 뜨거운 물 속에서도 덜덜 떨고 있다는 걸
깨닫았다. 뜨거운 수증기에 굳은 근육이 풀어질 때까지 몇 분 동안이나
심하게 몸을 떨었다. 그러고 나서도 너무 지쳐 움직일 수가 없었기에
온수가 다 떨어져갈 때까지 샤워기 아래 서 있었다.

나는 고통스러운 떨림이 다시 시작되지 않도록 뜨거운 물의 온도를


간직하려 애쓰며 큰 수건으로 온몸을 단단히 감쌌다. 재빨리 잠옷으로 갈아
입은 뒤에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공처럼 몸을 구부리고 온기를
유지했다. 몇 번 더 작은 전율이 있었다.

머릿속은 여전히 어지러웠고, 이해할 수 없는 영상으로 가득했지만 일부


장면을 애써 지워버렸다. 처음에는 모든게 혼란스러웠지만 차츰 무의식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면서 몇 가지는 더욱 확실해졌다.

세 가지는 아주 확실했다. 첫째, 에드워드는 뱀파이어였다. 둘째,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그의 일부는 내 피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셋째, 나는 돌이킬 수 없이 무조건적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10. 질문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젯밤 일이 꿈이었다고 주장하는 내 마음


한구석과 싸우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논리도 상식도 내 편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상상했을 리 없는 부분, 예를 들면 그의 체취 따위에
애써 매달렸다. 나 혼자서 그런 꿈을 꾸는 건 절대 불가능 했다.

창밖은 안개가 자욱해 어둑어둑했으므로 날씨는 거의 완벽했다. 오늘


에드워드가 결석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나는 겉옷이 없다는 걸 감안해
옷을 두툼하게 입었다. 내 기억이 사실이라는 또 다른 증거였다.

아래층에 내려가니 역시 찰리는 출근하고 없었고, 나는 생각보다 많이


늦어 있었다. 그라놀라 한 조각을 세 입 만에 삼키고 우유를 통째로 들어 몇
모금 마신 뒤 황급히 문을 나섰다. 제시카를 만날 때까지 비가 오지 않기를
빌 뿐이었다.

유독 안개가 짙은 날이어서, 공기마저 텁텁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수증기가 내 얼굴과 목 부분의 드러난 살갗에 들러붙었다. 어서 트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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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 히터를 틀고 싶었다. 몹시 짙은 안개 때문에 나는 진입로를 몇 발자국


내려간 다음에야 집 앞에 차 한 대가 서 있다는 걸 깨닫았다. 은색 차였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으면서 돌연 멈추었다 곧이어 두 배로 빠르게 뛰었다.

그가 나오는 모습도 보지 못했는데, 어느새 그가 나를 위해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오늘은 나랑 차 같이 타고 갈래?"

깜짝 놀란 내 표정에 그가 즐거워하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에드워드는 정말로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고 있었다. 나는
얼마든지 거절할 자유가 있었고, 그의 마음 일부는 그걸 바라고 있었다.
물론 그건 헛된 기대였다.

"응, 고마워."

나는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대꾸했다. 따뜻한 차 안에 몸을 밀어


넣으며, 나는 그의 갈색 외투가 조수석 머리받침대에 걸쳐 있는 걸
발견했다. 문이 내 뒤에서 닫혔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내 옆에 앉아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 옷은 널 위해 가져온 거야. 감기라도 걸리면 곤란하니까."

그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그는 겉옷 없이 얇은 회색 브이넥 셔츠만 입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의 완벽한 가슴 근육이 옷감 위로 보기 좋게 드러났다.
그의 몸매도 훌륭했지만 내 눈길은 조각 같은 그의 얼굴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난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그의 체취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좋은지


호기심이 일어 그의 재킷을 잡아당겨 아주 긴 소매에 팔을 꿰었다.

"과연 그럴까?"

그는 나더러 들으라는 건지 아니면 혼잣말인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리는 어색함 속에서 안개 자욱한 길을 여전히 너무 빠르게 달렸다.


어쨌든 나는 어색했다. 어젯밤엔 모든 벽이, 거의 다 허물어진 것
같았는데. 오늘도 여전히 둘 다 솔직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문이 막힌 채 그가 먼저 말을 걸기를 기다렸다. 그가 나를 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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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오늘도 수십 가지 질문을 하려는 건 아니지?"

"내 질문 때문에 성가셔?"

안도감을 느끼며 내가 되물었다.

"질문보단 네 반응이 더 성가시지."

그가 농담을 하는 표정이었지만, 역시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 반응이 형편없어?"

"아니, 바로 그게 문제야. 너는 모든걸 너무 수월하게 받아들여. 그건


자연스럽지 않거든. 그래서 정말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지는
거고."

"정말로 난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하는데."

"생략은 하잖아."

"많이는 안 해."

"나를 돌아버리게 만들 정도로는 해."

"넌 모르 게 나을 거야."

내가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 밖에 낸 순간 후회가 들었다.


내 목소리에 담간 고통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그가 눈치 채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아 내가 분위기를 망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학교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뒤늦게 내 뒤통수를 치는 생각이 있었다.

"네 가족들은 어디 있어?"

단둘이 있다는 게 너무 기쁜 나머지 그의 차에는 늘 가족들이 타고


다닌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로잘리 차로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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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번쩍이는 빨간색 컨버터블 자동차 옆에 차를


세웠다.

"꽤나 요란하지?"

"와, 로잘리는 저런 차가 있으면서 왜 네 차를 타고 다닌 거야?"

"말했다시피 꽤나 요란하니까. 우리도 평범하게 섞여 지내려고 '노력'은


하거든."

"그리 성공한 것 같지 않은데."

나는 소리 내어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지각은 아니었다. 에드워드의 미친


듯한 운전 덕분에 오히려 시간이 꽤 남았다.

"그런데 로잘리는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오늘은 왜 몰고 온 거야?"

"눈치 못 챘어? 지금 난 모든 규칙을 깨고 있는 거야."

자동차 앞을 돌아온 그는 내 옆에 아주 바짝 다가와 나란히 걸었다. 나는


손을 뻗거나 그와 살짝 몸을 부딪쳐 그 좁은 거리마저 없애고 싶었지만,
그가 싫어할까 봐 겁이 났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면서 저런 차는 처음부터 왜 산 거야?"

"일종의 탐닉이지. 우린 다들 과속하는 걸 좋아하거든."

그가 장난꾸러기 처럼 웃었다.

"어련하시겠어."

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시카가 식당 건물 지붕 아래 돌출된 발코니 쪽 쉼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본 그녀의 눈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다행히 제시카의
오른팔에는 내 겉옷이 걸쳐 있었다.

"안녕, 제시카. 기억해 줘서 고마워."

내가 몇 발자국 거리로 다가가서 말했다. 친구는 말없이 나에게 옷을


건넸다.

"좋은 아침이야, 제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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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가 정중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지독히 매력적인 건 정말이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의 강렬한 눈빛도.

"어...... 안녕."

제시카는 생각을 정리하려 애쓰는 듯 휘둥그레진 눈을 돌려 나를 보았다.

"이따 삼각함수 시간에 만나자."

친구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내게 던졌고, 나는 한숨이 나오는 걸 참았다.


제시카에게 대체 뭐라고 설명한담?

"그래. 이따 만나."

제시카는 멀어져가면서도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쟤한테 뭐라고 이야기 하려고?"

에드워드가 낮게 물었다.

"뭐야, 내 생각은 읽을 수 없다고 했잖아!"

내가 씨근덕거렸다.

"정말이야."

에드워드가 놀라서 말했다. 곧이어 그는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제시카의 생각은 읽을 수 있지. 쟨 수업시간에 널 심문하려고


벼르고 있더군."

나는 신음 소리를 내며 그의 재킷을 벗어 건네고 내 옷을 입었다. 그는


자기 옷을 한팔에 걸쳤다.

"그래서 뭐라고 얘기 할 거야?"

"네가 좀 도와주며 안 돼? 제시카가 알고 싶어하는 게 뭔데?"

에드워드는 짓궂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공평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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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 네가 알고 있는 걸 나한테 안 가르쳐주는 게 불공평하지."

그는 나란히 걸으며 잠시 머뭇거렸다. 우리는 1 교시 수업이 있는 강의실


밖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제시카는 우리가 남몰래 사귀고 있는지 알고 싶어해. 나에 대한 네


감정도."

마침내 그가 말했다.

"어머, 큰일이네.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해?"

나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복도에서 우리를 지나쳐 가는


학생들의 열 명 중 아홉 명은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은
시경 쓸 겨를도 없었다.

"흐음."

그는 목덜미에서 한 가닥 비어져나와 휘날리는 내 머리칼을 잡아 다시


넘겨주느라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내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첫 번째 문에제 대해선 그렇다고 하면 된 것 같은데......, 너도 싫지


않다면 말이야. 다른 변명보다는 훨씬 쉽잖아."

"나도 싫지 않아."

내가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 다른 문제에 대해선...... 글쎄, 그레 대한 대답은 나도 잘


귀기울여 봐야겠는걸."

그는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숨쉬는 것조차 잊었으므로 나는 그 말에 대꾸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돌아서서 멀어져갔다.

"점심시간에 만나."

그가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외쳤다. 교실 문으로 들어가던 학생 셋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속이 상해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교실로 들어갔다. 이 교묘한 사기꾼


같으니. 이젠 제시카한테 뭐라고 얘기할지 전보다 더 걱정스러웠다. 나는
짜증이 치밀어 늘 앉던 자리로 가 앉으며 가방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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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벨라."

옆자리에 앉은 마이크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드니, 마이크는 몹시 풀


죽은 듯한 표정이었다.

"포트앤젤레스에 간 건 어땠어?"

솔직히 한 마디도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그게...... 아주 좋았어. 제시카가 아주 귀여운 드레스를 장만했거든."

얼렁뚱땅 대답했다.

"월요일 저녁에 대해서 걔가 아무 말 안 하든?"

마이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나는 대화의 방향을 알아차리고 웃었다.

"정말 재미있었다고 하더라."

"정말?"

마이크는 내 부추김에 용기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럼, 진짜지."

바로 그때 선생님이 들어와 과제물을 내라고 했다. 제키사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그리고 내가 제시카한테 하는 얘기를 정말로 에드워드가
듣고 있을 것인지 고민하느라 영어수업과 뒤이은 정치사회 시간은 몽롱한
상태에서 지나갔다. 내 목숨을 구할 때가 아니고선, 그의 놀라운 재능이 참
불편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교시가 끝날 무렵 안개는 거의 걷혔지만 날씨는 여전히 어둡고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물론 에드워드의 말은 옳았다. 삼각함수 수업에 들어가던 순간, 맨 뒷줄에


앉아 있던 제시카는 흥분한 나머지 거의 자리에서 튕겨 일어날 지경이었다.
나는 마지못해 친구 곁에 앉으며, 이왕이면 최대한 빨리 해치우는 것이
나을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어서 다 털어놔!"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녀가 채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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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은 게 뭔데?"

"어젯밤에 어떻게 됐어?"

"걔가 나 저녁 사주고 집에 데려다줬어.'

제시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집에 도착했어?"

"에드워드가 워낙 미치광이처럼 차를 몰거든, 무서웠어."

나는 에드워드가 이 말을 듣고 있기를 바랐다.

"데이트였던 거야? 네가 거기서 만나자고 했었어?"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아니, 거기서 만나서 나도 깜짝 놀랐어."

내 목소리에서 진심이란 걸 알아차렸는지 제시카가 실망했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오늘은 일부러 학교까지 널 태워다준 거지?"

"응, 그것도 놀라웠어. 어제 내가 외투가 없었던 걸 눈치 챘나 봐."

"그래서 다시 데이트 하기로 했어?"

"내 트럭으론 무리라면서 토요일에 시애틀까지 자기 차로 데려다준댔어.


그것도 데이트로 쳐야 하나?"

"응."

제시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담 그런 거지."

"어.머.나."

제시카가 과장하듯 한 음절씩 끊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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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컬렌이!"

"그러게."

나도 맞장구를 쳤다. '어마나' 정도로는 감당이 안 됐다.

"잠깐!"

제시카가 길에서 차라도 막아서듯 나를 향해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걔랑 키스했어?"

"아니, 그런 거 아냐."

내가 중얼거렸다. 친구는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내 표정도 마찬가지 일


것 같았다.

"그럼 토요일에는 혹시......?"

친구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내 목소리에서도 불만이 묻어나 잘 감춰지지 않았다.

"무슨 얘기를 했어?"

속삭이는 목소리로 제시카가 계속 다그쳤다. 수업은 시작됐지만 바너


선생님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은 우리뿐이
아니었다.

"글쎄, 여러 가지 얘길 했어. 영어숙제에 대해서라든가."

아주,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에드워드가 지나가는 말로 말했던 것 같기도


하군.

"그러지 말고, 자세히 좀 얘기해 봐."

"음...... 알았어, 하나 생각났다. 웨이트리스가 걔한테 추파를 던지는 걸


너도 봤어야 했어. 난리도 아니더라. 하지만 걘 그 여자한테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어."

에드워드가 들을 테면 들으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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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좋은 징조다. 그 여자 예뻤어?"

"아주 예뻤어. 열아홉 살이나 스무 살쯤 됐겠던데."

"더 끝내주네. 걔가 널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그런 것 '같기는'한테, 잘은 모르겠어. 워낙 내색을 잘 안 하거든."

나는 그 대목에서 에드워드가 들으라는 듯 한숨을 한번 쉬어 주었다.

"걔랑 단둘이 있을 용기가 있다니, 너 정말 대단하다."

"뭐가?"

나는 충격을 받았지만, 친구는 오히려 내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사람을 위축시키잖아. 난 걔랑 말도 못하겠던데."

제시카는 오늘 아침과 어젯밤, 에드워드의 눈빛에 압도당했던 걸


떠올리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에드워드랑 같이 있을 때면 생각이 마구 헷갈리긴 해."

"아무튼 끔직이도 잘생겼잖아."

제시카는 그게 모든 단점을 상쇄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 친구의


기준으로는 그럴 법도 했다.

"외모 말고도 괜찮은 데가 많아."

"정말? 예를 들면 어떤 거?"

나는 그냥 넘어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자기도 듣고 있겠다고 했던


그의 말도 농담이라면 좋겠는데.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외모 '이면'의 모습이 더


대단해."

착해지고 싶어하고,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러


다니는 뱀파이어거든...... 나는 교실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게 과연 '가능' 하기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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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가 킥킥 웃었다.

나는 선생님한테 관심을 쏟는 체하며 그 말을 무시했다.

"그럼 너 걔 좋아하는 거야?"

친구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응."

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정말로 좋아하는지 묻는 거야."

제시카가 다그쳤다.

"그래."

나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대답했다. 나는 제시카의 생각이 너무


복잡해지지 않기를 빌었다. 친구는 한마디 대답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다.

"얼마나 '많이' 좋아하는데?"

"너무 많이. 그쪽에서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더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그런데 나도 그걸 어쩔 수가 없어."

채 식지 않은 내 뺨이 다시 붉어졌다.

바로 그때 고맙게도 바너 선생님이 제시카에게 질문을 던졌다. 수업 중엔


제시카가 다시 그 얘기를 꺼낼 기회가 없었으므로, 종이 울리자마자 내가
반격을 시도했다.

"영어시간에 마이크가 월요일 밤에 대해서 네가 뭐라고 했는지 묻더라."

"설마, 농담이지? 그래서 뭐랬어?"

완전히 딴 길로 빠진 제시카가 좋아서 숨이 막힐 듯했다.

"아주 재미있었다고 얘기 들었다니까 걔가 흐믓한 표정을 지었어."

"정확하게 마이크가 뭐라고 말했는지, 그리고 네가 대답한 내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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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말해봐!"

우리는 다음 강의실로 걸어가는 사이 문장구조를 상세히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마이크의 얼굴 표정을 묘사하는 데 스페인어 수업시간
대부분을 할애했다. 화제가 다시 나에게 쏠릴까 봐 걱정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토록 오랜 시간 시시콜콜 하찮은 설명을 해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내가 상기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을 거칠게 가방에 쓸어넣자, 제시카도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오늘은 우리랑 점심 같이 못 먹겠구나?"

"아마 그럴 것 같아."

에드워드가 또 슬쩍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라 나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어 교실을 나서자, 에드워드가 그리스 신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벽에 기대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시카는 그를 한번
바라보고는 눈동자를 굴리며 먼저 떠났다.

"나중에 만나, 벨라."

친구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했다. 집에 가자마자 전화선을 뽑아놔야 할 것


같았다.

"안녕."

그의 목소리는 즐거운 것도 같고 짜증이 난 것도 같았다. 줄곧 엿듣고


있었던 게 확실했다.

"안녕."

나는 다른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고, 그도 뜸을 들이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식당까지 침묵의 행진을 했다. 점심시간에
에드워드와 함께 붐비는 교정을 걸을 때 아이들이 보인 반응은 내가 여기
처음 온 날과 비슷했다. 모두들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음식을 사는 줄로 나를 이끌었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몇 초마다 한 번씩 나를 바라봤다. 그와 함께 있다는
기쁨보다 그의 심각한 표정 때문에 생기는 괴로움이 더 컸다. 나는 겉옷에
달린 지퍼를 초조하게 올렸다 내렸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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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배색대로 다가가 쟁반에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뭐 하는거야? 설마 나더러 그걸 거 먹으란 건 아니지?"

그는 계산대로 다가가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절반은 내거야."

내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는 전에도 한번 앉았던 자리로 나를 이끌었다. 우리가 테이블 끝에 서로


마주 앉자, 긴 테이블 반대편에 앉은 졸업반 학생들이 놀라워하며 우리를
바라봤다. 에드워드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네 마음에 드는 걸로 먹어."

그가 쟁반을 내 쪽으로 밀며 말했다.

나는 사과 하나를 집어들고 양손으로 돌리며 물었다.

"궁금한게 있는데, 누군가 너한테 음식을 먹으라고 굳이 권하면 어떻게


해?"

"넌 언제나 호기심이 발동하는 모양이군."

에드워드가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나를 빤히 노려보며,


쟁반에서 피자 한 조각을 들어올려 크게 한 입 베어 물고는 재빨리 씹다가
꿀꺽 삼켰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지켜보았다.

"누군가 너한테 굳이 흙을 먹으라고 권하면 너도 먹을 수 있잖아?"

그가 크게 생색내듯 물었다. 나는 콧등을 찌푸렸다.

"객기로...... 나도 한 번 먹어본 적 있어. 그리 나쁘진 않더라."

나도 인정하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어련하겠니."

내 어깨 너머에서 뭔가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제시카가 지금 내 모든 행동을 분석하고 있어. 나중에 너한테 추궁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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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가 남은 피자 조각을 나한테 내밀었다. 제시카 얘기를 입에


올리는 그의 얼굴에 아까 보았던 짜증이 묻어났다. 사과를 내려놓고 피자를
한 입 베어 물며, 나는 그가 곧 심문을 시작할 걸 알고 시선을 피했다.

"그래, 그 웨이트리스가 예뻤다고?"

에드워드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넌 정말로 눈치 못 챘어?"

"응. 자세히 안 봤거든.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그 여자 안됐다"

이제는 나도 관대해질 여유가 있었다.

"네가 제시카한테 한 어떤 얘기 때문에...... 신경이 쓰여."

그는 내가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려고 노력해도 넘어오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쉰 듯했고, 속눈썹 아래로 혼란스러운 눈빛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안 좋아할 만한 얘기를 들었더라도 어쩔 수 없어. 염탐꾼이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내가 듣고 있을 거라고 미리 경고했잖아."

"내 생각을 모두 알게 되는 건 너도 바라지 않을 거라고, 나도 미리


경고했지."

"그랬지, 하지만 네 짐작은 전혀 맞지 않아. 난 네 생각을 모두 알고 싶어.


다만, 네가 부다 어떤 특정한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라는 거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참 명확하게도 설명을 하시는군."

"하지만 지금 정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럼 뭔데?"

우리는 이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몸을 수그리고 있었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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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하얀 손을 깍지 껴 턱을 받쳤고 나는 오른손으로 목덜미를 받치고


앞으로 수그렸다. 나는 우리가 지금 붐비는 식당 한가운데서 호기심 여린
눈초리를 수도 없이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
했다. 나는 우리 둘만의 은밀하고 긴장감이 감도는 작은 망상 속에 너무
쉽게 빠져들었다.

"정말로 내가 널 좋아하는 것보다 네가 날 더 좋아한다고 생각해?"

짙은 황금빛 눈동자로 꿰뚫을 듯 나를 보며 그가 좀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중얼거렸다.

나는 숨쉬는 법을 기억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려면 일단은 시선부터


피해야 했다.

"또 그런다."

내가 투덜거렸다. 놀란 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뭘?"

"눈빛으로 현혹시키는 거."

다시 그를 마주 보며 나는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아."

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 잘못은 아니야. 너도 어쩔 수 없겠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 질문에 대답할 거야?"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응."

"내 질문에 대답하겠다는 '응'이야,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응'이야?"

그가 또다시 짜증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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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나는 여전히 식탁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인조 나무무늬가 인쇄된 표면을


응시했다. 이번에는 먼저 침묵을 끼지 않으려고 고집스레 버텼다.

마침내 그가 벨벳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틀린 생각인데."

고개를 드니 부드러운 그의 눈빛이 보였다.

"그거야 알 수 없지."

내가 속삭이는 소리로 반박했다. 그의 말에 내 심장은 쿵쾅거렸고, 몹시도


그 말을 믿고 싶었지만 결국 의심 많은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넌 왜 그렇게 생각하지?"

토파즈처럼 영롱한 그의 눈빛이 내 생각을 직접 읽어 진실을 알아내려고


예리하게 나를 뚫어보았지만, 헛된 노력인 듯 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뭔가 설명할 길을 찾아 생각을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내가 말을 고르는 사이 그가 점점 인내심을 잃어가는 게 보였다. 내 침묵에
낙담한 그는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목을 받치고 있던 손을 들어 한
손가락을 펴 보였다.

"생각 중이야."

내가 대답을 할 작정이라는 걸 알고 흡족했는지 그의 표정이 풀렸다. 나는


양손을 모두 테이블에 올려놓고 손바닥을 마주 댔다. 깍지를 꼈다 풀었다
하는 내 손을 응시하며 드디어 내가 입을 열었다.

"너무 뻔한 사실 이외에도 가끔......"

나는 머뭇거렸다.

"나는 사람 마음을 읽는 재주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가끔 넌


다른 얘기를 하면서도 작별을 고하려고 애쓰고있는 것 같아."

나로썬 이따금씩 그의 말을 듣고 느껴지는 고뇌를 그나마 촤대한 설명 해


본 것이었다.

"얘리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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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속삭였다. 내 두려움을 확인이라도 하듯 예의 그 번뇌 어린 표정을


다시 지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네 생각이 틀리다는 거야."

그는 설명을 시작하다 말고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뻔한 사실' 이라니 그건 또 무슨 뜻이야?"

"나를 좀 봐봐."

그가 이미 나를 보고 있는데도 쓸데없이 이렇게 말했다.

"난 지극히 평범한 애야. 물론 여러 번 죽을 뻔한 경험처럼 안 좋은


일들이라든가 거의 중증 장애인에 가까울 정도로 움직임이 서툴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야. 그런데 너를 좀 봐."

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그의 완벽한 얼굴을 향해 손짓했다. 잠시 화가 난


듯 그가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알 만하다는 듯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넌 네 자신을 제대로 못 봐서 그런 거다. 아, 나쁜 일들을 겪었다는 점은


네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걸 인정하지."

에드워드가 잠깐 불량스럽게 큭큭 웃더니 이어서 말했다.

"네가 전학 온 날 이 학교의 모든 남학생들이 한 말을 못 들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깜짝 놀라 눈문 껌벅였다.

"무슨 소리야......"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번엔 날 좀 믿어보시지. 넌 절대 평범하지 않아."

그의 눈빛에 떠오른 표정 때문에 나에게는 기쁨보다 당혹감이 훨씬 더


컸다. 얼른 원래 하던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난 작별을 고하진 않아."

"모르겠어? 그러니까 내 말이 맞다는 거다. 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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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과 갈등을 겪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만일 널 떠나는 게 옳은 일이라면, 널 다치게 하느리 차라리 내가 다치는


쪽을 선택해서라도 널 안전하게 지킬 거야. 그러니까 내가 널 더 좋아하는
거고."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렇게 못할 것 같아?"

"넌 선택을 내릴 필요가 없으니까."

늘 예측불허인 그의 기분이 다시 바뀌었다. 장난스럽고 불량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물론 이제는 너를 안전하게 지키는 게 내 존재의 의미랄까, 임무처럼


느껴지기 시작하긴 했어."

"오늘은 아무도 나를 해치려 들지 않았어."

나는 좀더 가벼운 화제로 넘어간 걸 고마워하며 대꾸했다. 그와 더는


작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만일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나는 그를
가까이 두기 위해 일부러 위험에 빠지는 쪽을 선택할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내 얼굴을 살피기 전에 얼른 그 생각을 지웠다.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

"아직은 그렇지."

그가 덧붙였다.

"그래. 아직은."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가 내가 사고라도 당할까 염려하는 쪽이


나을 것 같아 금세 수긍했다.

"물어볼게 하나 더 있어."

말을 거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편안했다.

"해보셔."

"이번 일요일에 꼭 시애틀에 가야 하는 거야, 아니면 네 추종자들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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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느라고 생각해 낸 핑계야?"

그 생각에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난 아직 타일러 건에 대해서 널 용서하지 않았어. 걔가 학년말 무도회에


날 데리고 가겠다는 환상을 품게 된 건 다 네 잘못이야."

"내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그 녀석은 어떻게든 너한테 물어볼 기회를


잡았을 거야. 나는 그냥 네 얼굴을 꼭 보고 싶었을 뿐이야."

에드워드가 껄껄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가 그토록 매력적이지 않았다면


난 훨씬 더 화가 났을 것이다.

"내가 신청했더라도 거절했을까?"

그가 여전히 웃으며 물었다.

"아마 아닐걸. 하지만 갑자기 병이 났다든지 발목을 삐었다든지 하는


핑계를 대서 나중에 취소했을 거야."

에드워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짓을 해?"

나는 서글픈 듯 고개를 흔들었다.

"넌 체육시간에 내 꼴을 못 봐서 그래. 하지만 너라면 취소해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평평한 바닥에서도 뭐든 꼭 걸려 넘어지지 않으면 못 걸어가는 문제


얘기야?"

"그렇지."

"그건 문제가 안 돼. 춤은 리드하기에 달렸거든."

그는 아주 자신만만했다. 내가 반박하려는 걸 눈치 챘는지, 먼저 내 말을


잘랐다.

"어쨌든 넌 아직 대답 안 했어. 꼭 시애틀에 가야 하는지, 아니면 우리


둘이 뭔가 다른 걸 해도 괜찮은지."

'우리 둘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사실 뭐든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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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도 난 좋아. 하지만 부탁할 게 있어."

내가 뭔가를 물으려고 할 때면 늘 그렇듯 그의 표정이 조심스러워졌다.

"뭔데?"

"내가 운전해도 돼?"

에드워드가 얼굴을 찡그렸다.

"왜?"

"우선은 찰리한테 시애틀에 갈 거라고 얘기했을 때 혼자 갈거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어. 다시 물으면 거짓말을 하진 않겠지만, 찰리가 다시 물어볼
것 같진 않아. 그런데 집에 트럭을 두고 가면 공연히 불필요한 문제를 다시
거론해야 하잖아. 그리고 또 네가 운전하면 난 겁이 나."

에드워드가 눈동자를 굴렸다.

"나에 대해서 겁먹을 일이 그렇게 많은데 겨우 운전하는 거나


걱정하다니."

그가 기가 막힌 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내 눈빛은 진지해졌다.

"그날 나랑 지낼 거라는 걸 아버지한테 말씀드리기 싫은 거야?"

이 질문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저의(底意)가 느껴졌다.

"찰리한테는 언제나 말을 삼가는 쪽이 더 편해, 어쨌든 우리 어디 갈


건데?"

"날씨가 좋을 거라서, 난 사람들 눈을 피해야 하지만...... 원한다면 너는


나랑 같이 지내도 돼."

이번에도 그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겼다.

"그럼 햇빛에 대해서 네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보여 줄 거야?"

나는 또 다른 미지의 사실을 캐내게 된다는 생각에 흥분해서 물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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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미소를 짓다가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네가...... 나랑 단둘이 있고 싶지 않대도, 너 혼자 시애틀에 가는


건 여전히 반대다. 그런 대도시에서 네가 겪을 어려움을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리거든."

내가 발끈했다.

"피닉스는 인구로만 따져도 시애틀보다 세 배나 큰 도시야. 실질적인


크기는....."

"하지만 피닉스에선 네 목숨이 위험한 적 없었잖아. 그러니까 여기선 널


내 옆에 두는 게 좋겠어."

그는 내 말허리를 자르고는 또다시 눈빛으로 나를 압도했다. 그의 눈빛


때문이든 그의 동기 때문이든, 일리 있는 지적있으므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난 너랑 단둘이 있어도 상관없어."

"알아. 그래도 찰리한테는 얘기해야 해."

그는 한숨을 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대체 왜 그래야 한다는 거야?"

그의 눈빛이 갑자기 사나워졌다.

"너를 무사히 데려올 작은 핑계라도 만들기 위해서."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잠시 생각한 뒤에도 내 생각은 변함


없었다.

"난 그냥 운에 맡길래."

그는 화난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돌렸다.

"우리 다른 얘기 하자."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

여전히 화난 듯 그가 물었다.

나는 주변에 우리 얘길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느라 주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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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았다. 식당 안을 둘러보던 나는 나를 바라보던 앨리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다른 가족들은 에드워드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에드워드를 보며, 처음 떠오른 생각을 물었다.

"지난주에 사냥하러 고트룩스엔 왜 간거야? 찰리 말로는 곰 때문에


야영장소로 나쁘다던데."

그는 내가 너무도 당연한 걸 놓치고 있다는 듯 나를 빤히 보았다.

"곰 사냥?"

내가 놀라서 되묻자 그가 씩 웃었다.

"요즘은 곰 사냥철이 아니잖아."

나는 충격을 감추려고 고집스럽게 덧붙였다.

"사냥 관련법을 주의 깊에 읽어보면, 그건 무기로 사냥하는 경우에만


국한되어 있어."

그는 서서히 말귀를 알아듣는 내 모습을 보니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곰 사냥?"

나는 믿어지지 않아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회색곰은 에밋이 제일 좋아하는 사냥감이야."

그는 여전히 가볍게 말했지만, 눈으로는 내 반응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나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흠."

나는 시선을 내리깔 핑계를 찾느라 피자를 한 입 베어 먹었다. 천천히


피자를 씹고 나서 빨대로 콜라를 마시는 동안 나는 계속 눈을 들지 않았다.
잠시 후 마침내 그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마주 보며 내가 물었다.

"그럼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건 뭔데?"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못마땅한 듯 입꼬리를 내렸다.

"퓨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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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나는 별 관심 없다는 투로 대꾸하곤 다시 음료를 집어들었다.

"물론 무분별한 사냥으로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육식동물이 아주 많은 지역을 찾아서, 필요하면 아주 멀리까지도
찾아가려고 노력하지. 이 근처에도 노루와 사슴이 늘 풍부하니까 그
녀석들을 잡아도 되지만, 무슨 재미가 있겠어?"

내 말투를 그대로 따라하며 그가 놀리듯 미소를 지었다.

"어련하겠어."

내가 피자를 또 한 입 먹으며 중얼거렸다.

"초봄은 에밋이 가장 좋아하는 곰 사냥철이야. 놈들이 겨울잠에서 막


깨어나 좀 예민하게 굴거든."

그는 문득 생각난 농담이라도 하는 듯 웃었다.

"예민한 회색곰 사냥보다 재미있는 건 없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소리


내 웃었다.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발 얘기해 줘."

"상상하려고 노력중인데 잘 안 되네. 무기 없이 어떻게 곰을 사냥해?"

내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우리도 무기야 있지."

그가 잠깐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반짝이는 치아를 내보였다. 나는 전율이


이는 걸 애써 참았다.

"사람들이 사냥 관련법을 제정할 때 미처 생각 못한 무기일 뿐이지.


텔레비전에서 곰이 먹이를 공격하는 장면을 보면, 에밋이 사냥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거야."

등줄기를 스치는 두 번째 전율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식당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에밋을 흘끔 돌아보았다. 다행히 그는 내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팔과 윗몸의 우람한 근육이 어쩐지 이제는 더 무시무시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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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선을 뒤쫓은 에드워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초조해진 나는 그를 다시


응시했다.

"너도 곰처럼 사냥해?"

내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가족들 얘기로는 퓨마에 더 가깝다고 하던걸. 아마 우리의 사냥감


취향대로 따라가나 봐."

에드워드가 가볍게 대꾸했다. 나도 웃으려고 애썼지만 머릿속은 도저히


합쳐지지 않는 상반된 영상들로 가득했다.

"앞으로 나도 보게 될까?"

"절대로 안 돼!"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욱 창백해지면서 갑자기 눈동자에 노기가


서렸다. 나는 그의 반응에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에드워드도
팔짱을 끼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보기엔 너무 무서운가?"

다시 차분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내가 물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이라면 오늘밤에라도 데려갈 수 있지. 넌 공포가 뭔지


단단히 배워야 해. 그것보다 너한테 이로운 공부는 없을 것 같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 차가웠다.

"그럼 왜?"

나는 그의 화난 표정을 무시하려 애쓰며 다그쳤다. 그는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았다.

"나중에."

마침내 그가 말했다. 그러고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일어섰다.

"늦겠다."

그의 말에 텅 빈 식당 안을 둘러본 나는 깜짝 놀랐다. 에드워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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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면 늘 시간과 장소 감각을 죄다 잃어버리고 만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가방을 집으며 벌떡 일어났다.

"좋아. 나중에 듣지."

나는 순순히 수긍하며,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11. 복잡한 문제

실험실 책상으로 나란히 걸어 들어가자 모두들 우리를 지켜보았다.


에드워드는 이제 의자를 일부러 나와 멀리 놓거나 외면하는 방향으로 돌려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우리 팔이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았다.

절묘하게 시간을 맞추기라도 한 듯 이내 교실로 들어선 생물 선생님은


난데없이 육중하게 생긴 구형 텔레비전과 비디오가 올려진 이동식
철체선반을 끌고 왔다. 비디오 감상을 하는 날이었다. 수업 분위기가
가벼워진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배너 선생님이 뻑뻑해서 잘 움직이지 않는 비디오에 테이프를 밀어넣고,


벽으로 걸어가 전등을 껐다.

교실이 암흑에 휩싸이자, 문득 나는 에드워드가 나와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느껴졌다. 예기치 않게 온몸을 꿰뚫는
전기충격 같은 느낌에 당황한 나는 지금까지보다 더 에드워드를 의식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손을 뻗어 그를 만지고, 어둠 속에서 딱 한
번만 완벽한 그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고 싶은 광기 어린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단단히 팔짱을 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는 미쳐가고 있었다.

오프닝 크레딧이 시작되자 교실이 조금 밝아졌다. 내 시선은 제멋대로


그를 향해 날아갔다. 나와 똑같이 주먹을 움켜쥔 채 팔짱을 끼고 내쪽을
곁눈질하고 있는 에드워드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민망해서 말없이 웃었다.
그도 씩 웃어주었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조차 빛나며 나를
현혹시켰다. 나는 호흡곤란이 시작될까 봐 얼른 눈길을 피했다.
현기증까지 느껴지다니, 나무 바보 같은 반응이었다.

한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나는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영화 주제가 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긴장을 풀려고 애썼지만
불가능했고, 그의 몸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전류도 멈추지 않는 듯
했다. 이따금씩 나는 그가 앉은 쪽을 흘끔거렸는데, 그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를 만져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도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꽉 움켜쥔 주먹으로 갈비뼈를 짓눌렀다.

수업이 끝나고 배너 선생님이 전등을 켜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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뻣뻣해진 손가락과 팔을 앞으로 뻗었다. 에드워드가 옆에서 픽 웃었다.

"흥미로운 관찰 이었어."

그가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낮았고 눈빛은 조심스러웠다.

"으응."

내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그것뿐이었다.

"갈까?"

그가 유연하게 일어서며 물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체육시간이었다. 나는 우리 둘 사이에 흐른 이상하고


새로운 전류 때문에 내 균형 감각에 이상이 생겼을까 염려하며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는 말없이 체육관까지 나를 데려다준 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인사를


건네려고 돌아선 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통스러운 듯
괴로워하는 그의 얼굴은 지독히도 아름다워서 아까처럼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강렬해졌다. 하려던 인사말은 먹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는 눈빛에 떠오른 갈등과 씨름하듯 머뭇머뭇 손을 들어올리더니,


손끝으로 내 뺨을 재빨리 어루만졌다. 그의 손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의 손가락이 내 뺨에 남긴 흔적은 아직 통증이 본격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화상 자국처럼 몹시 뜨거웠다.

그는 말없이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나는 정신이 몽롱해져 비틀비틀 체육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주위에


사람들이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만 알아차렸을 뿐, 구름에 둥둥 뜬 기분으로
라커룸에 들어가 거의 무아지경 속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배드민컨 라켓을
손에 든 다음에야 현실이 나를 일깨웠다. 라켓이 무겁지는 않았지만, 내
손에 들린 이상 몹시 불안하게 느껴졌따. 같은 반 아이들 몇몇이 조심스레
나를 지켜보았다. 체육 선생님이 둘씩 짝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고맙게도 기사도 정신이 아직도 남아 있었는지, 마이크가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나랑 같은 팀 할래?"

"고마워, 마이크. 그렇지만 꼭 이러지 않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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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미안해서 얼굴을 찡그렸다.

"걱정하지 마, 내가 잘 비틸게."

그가 씩 웃었다. 가끔은 마이크를 좋아하는게 참 쉬웠다.

역시 수월하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나는 라켓을 휘둘러 내 머리를 치고


곧바로 마이크의 어깨를 가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뒤로 수업시간 내내
나는 코트 뒤쪽에서 안전하게 라켓을 등 뒤에 감춘 채 서 있었다. 나 같은
파트너를 만나 몹시 불리했는데도 마이크는 실력이 꽤 좋았고, 혼자서 4
게임 중 3 게임을 이겼다. 체육 선생이 드디어 호루라기를 불어 수업
종료를 알리자 마이크는 자격도 없는 나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래서."

코트를 벗어나며 그가말했다.

"그래서 뭐?"

"너랑 컬렌이 사귄다고?"

그가 못마땅한 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까지 그에게 느꼈던 애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너하곤 상관없는 일이잖아."

마음속으로 제시카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내가 발끈했다.

"난 그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크가 중얼거렸다.

"넌 마음 쓸 필요 없어."

"그 자식은 널 볼 때 마치 먹을 걸 노려보듯 한단 말이야."

그가 내 말을 무시하며 계속 지껄였다.

나는 발작적으로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고 애썼지만 작은 웃음이


쿡쿡 새어나오고 말았다. 마이크는 나를 보며 인상을 썼다. 나는 손을
흔들고 라커룸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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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속에 나비보다 더 힘센 뭔가가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조바심을 느끼며


나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고, 조금 전 마이크와 나눈 말다툼은 어느새
까맣게 잊혀졌다. 에드워드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차로 가서 그를
만나야 할지 몰랐다. 가족들이 타고 있으면 어쩌지? 진짜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그들도 내가 안다는 걸 알까? 내가 안 다는 걸 그들이 눈치
채고 있다면 나도 아는 체 해야 할까?

체육관을 나올 무렵 나는 주차장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곧장 집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릴 참이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에드워드가
이제는 편안해진 얼굴로 체육관 벽에 느긋하게 기대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향해 걸어가며 나는 야릇한 해방감을 느꼈다.

"안녕."

내가 환하게 웃으며 숨 가쁘게 말했다.

"안녕. 체육시간은 어땠어?"

마주 웃어주는 그가 눈부시다. 내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좋았어."

내가 거짓말을 했다.

"정말?"

못 믿겠다는 말투였다. 그가 내 어깨 너머를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도 뒤를 돌아보니 멀어져가는 마이크의 뒷모습이 보였다.

"왜?"

내가 물었다. 여전히 못마땅한 눈으로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마이크 뉴튼이 신경에 거슬려서."

"설마 또 엿들은 건 아니지?"

공포감이 밀려왔다. 문득 기분 좋던 분위기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머리는 좀 어때?"

아무렇지도 않게 에드워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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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정말!"

홱 돌아선 나는 씩씩거리며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단숨에 나를


따라잡았다.

"체육시간에 내가 네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꺼낸 사람은


너잖아. 그 말 때문에 궁금해졌단 말이야."

미안해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그의 차로 걸어갔다. 나는 화도 나고 당황하기도


해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의 차 몇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춰야 했다.
남학생들이 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내 나는 그들이 볼보를 둘러싸고 있는
게 아니라, 로잘리의 빨간색 컨버터블 스포츠카를 부러운 눈으로 감상하며
둘러싸고 있다는 걸 깨닫았다. 에드워드가 그들 사이로 헤이촉 들어가 차
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사이 나 또한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탔다.

"꽤 요란하다니까."

그가 중얼거렸다.

"저건 무슨 차야?"

"M3 야."

"나는 자동차 잡지 같은거 안 봐서 그렇게 말하면 몰라."

"BMW 에서 나온 차야."

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눈동자를 굴리더니, 자동차광들을 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차를 후진했다. 나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화났니?"

조심스레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에드워드가 물었다.

"당연하지."

그가 한숨을 쉬었다.

"사과하면 용서해 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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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진심으로 용서를 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고 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해."

갑자기 그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진심으로 사과하지. '그리고 또' 토요일에 네가 운전하는 걸로 하면


어때?"

그는 내가 내세운 조건에 협상을 하려 했다. 나도 잠깐 생각해 보니 그게


최선의 협상안일 거라고 결론이 섰다.

"좋아."

"화나게 해서 미안하다."

그의 눈빛이 잠시 진지해진 순간 내 심장박동이 잠시 리듬을 잃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이내 장난기가 되살아 났다.

"토요일 아침 일찍 내가 너희 집 앞으로 가지."

"어, 낯선 볼보가 우리집 앞에 서 있는 것도 찰리한테 설명하기 힘들어 질


텐데."

이제 그의 미소가 완연해졌다.

"차 안 가져갈 거야."

"그럼 어떻게......"

"그건 염려 말고, 차 없이 갈 테니까."

그가 내 말문을 막았다.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나에게는 더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었다.

"아직 나중 되려면 멀었나?"

내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쯤이면 나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기다리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에드워드가 차를 세웠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물론 우리는 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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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 있는 트럭 뒤에 서 있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그의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그리 불안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 돌아보니 에드워드는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왜 내가 사냥할 때 네가 보면 안 된다고 하는지, 아직도 알고 싶어?"

그의 표정은 엄숙했지만, 눈동자에는 어딘가 웃음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글쎄, 난 그저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가 궁금했어."

"겁먹었구나?"

확실히 그건 웃음기였다.

"아니."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는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겁줘서 미안하군."

그는 살짝 웃으며 말했지만, 곧 놀리는 듯한 기미는 모두 사라졌다.

"우리가 사냥을 할 때...... 네가 거기 있다는 생각만 해도 섬뜩해서 그런


거다."

그의 턱이 불끈거렸다.

"그렇게나 심해?"

"그래. 아주."

그가 이를 꽉 다문 채 말했다.

"무엇 때문에?"

에드워드는 심호흡을 하며, 거의 손에 닿을 듯 앞 유리 밖으로 낮게 깔린


먹구름을 응시했다. 그는 내키지 않는 듯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사냥할 땐 생각은 접어둔 채 감각에만 의지해. 특히 후각에. 내가


그렇게 자제력을 잃고 있을 때 네가 근처에 있다면......"

그는 여전히 먹구름을 멍하니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곧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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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돌려 내 반응을 살피리라 예상하고 최대한 침착하게 표정을


관리했고, 곧이어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내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이 서로 얽혀 정적이 깊어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그가 내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오후에 느꼈던 찌릿한 전류가 사방에 흐르기 시작했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하고 나서야 나는 그 사이 숨을 쉬지 않았다는 걸
깨닫았다. 내가 흐트러진 호흡으로 정적을 깨자 에드워드는 눈을 감았다.

"벨라, 이제 그만 들어가 보는 게 좋겠다."

그의 목소리는 낮으면서 거칠었고, 다시 먹구름을 응시하고 있었다.

차 문을 열자 바람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내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나는 황홀경에 빠져 비틀거릴까 봐 차에서 조심스럽게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창문이 열리는 전동음이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참, 벨라!"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평온을 되찾은 듯 했다. 그는 열린 창문 쪽으로


몸을 숙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응?"

"내일은 내 차례야."

"무슨 차례?"

그가 빛나는 이를 드러내며 더 활짝 웃었다.

"질문하는 거."

마침내 그는 떠나갔다. 내가 생각을 추스르기도 전에 그의 자동차는


빠르게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집으로 걸어가며 미소를
지었다. 다른건 몰라도 그가 내일 나를 만날 작정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날 밤에도 평소처럼 에드워드는 내 꿈에 나타났다. 하지만 내 무의식 속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오후에 느꼈던 것과 같은 팽팽한
전류 때문에 기분이 짜릿했고, 자주 잠에서 깨어나 몸을 뒤척였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너무 지쳐 꿈 없는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아침에 피곤한 몸으로 깨어났지만, 정신은 맑았다. 어쩔 수 없이 청바지에


갈색 터틀넥 스웨터를 입었는데, 나는 끈으로 된 민소매 윗옷과 반바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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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 한숨을 쉬었다. 평소처럼 조용히 아침식사를 했다. 찰리는 직접


달걀 프라이를 해 먹었고, 나는 시리얼을 한 그릇 먹었다. 찰리가 이번
토요일에 대해 잊은 건 아닌가 궁금했다. 머릿속 내 질문을 듣기라도 한 듯
그가 접시를 개수대로 가져가며 말했다.

"이번 토요일 말이다......"

그는 개수대로 걸어가 수도꼭지를 틀며 말문을 열었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

"네, 아빠."
"아직도 시애틀에 갈 작정이니?"

"계획은 그랬어요."

나는 그가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를 바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야 사실을 절반만 조심스럽게 털어놓아야 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찰리는 접시에 주방용 세제를 조금 짠 뒤 수세미로 문질렀다.

"도저히 댄스파티 시간에 맞춰 돌아올 순 없는 거냐?"

"전 댄스파티에 안 간다니까요."

내가 발끈해서 대꾸했다.

"파트너 신청한 사람이 없었어?"

그는 걱정을 숨기느라 열심히 접시를 닦는 척하며 물었다. 내가 지뢰밭을


살짝 비켜갔다.

"신청은 여자 쪽에서 하는 거예요."

"아, 참."

찰리는 행주로 접시를 닦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딸한테 좋아하는 남자가 생길까 봐


염려하면서도, 남자친구가 없으면 없는 대로 걱정을 해야 하니 아버지가
된다는건 참 힘든 일이리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찰리가 짐작이라도 하면 얼마나 놀랄까 생각하니 몸이 떨렸다.

찰리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출근을 했고, 나는 이층에 올라가 양치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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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책가방을 쌌다. 순찰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불과 몇 초 만에


창밖을 내다본 것 같은데, 은색 볼보가 벌써 찰리의 차가 서 있던 진입로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이렇게 야릇한 일상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궁금해하며, 계단을 뛰어내려 현관으로 달려갔다. 물론 나는 절대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차에서 기다렸으므로, 내가 등 뒤로 문을 닫고 현관문을 잠글 생각도


못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차로 걸어가 문을 열기 전에 수줍은 듯
머뭇거리다 차에 올랐다. 그는 느긋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지극히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잘 잤어? 오늘 기분은 어때?"

그의 목소리는 실크처럼 매끄러웠다. 예의상 던진 질문이 아니라는 듯


그가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좋아."

에드워드 곁에 있을 때면 언제가 기분이 좋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의 시선이 내 눈 밑 그늘에서 아른거렸다.

"피곤해 보이는데."

"잠을 잘 못 잤어."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칼을 한쪽 어깨로 늘어뜨려 얼굴을 가리며 고백했다.

"나도 못 잤어."

그가 시동을 걸며 장난스레 말했다. 나는 이제 조용한 엔진음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다시 트럭을 운전하게 되면 새삼스럽게 내 트럭 엔진
소리에 깜짝 놀랄 것 같았다.

"그렇겠구나. 난 너보다는 조금 더 잤 다고 해야겠지."

"그랬겠지."

"그래서 어젯밤엔 뭐 했어?"

내가 묻자 에드워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림없어. 오늘은 내가 질문을 하는 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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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뭘 알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한테 그가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이


있다는 걸 상상할 수가 없었다.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뭐야?"

진지한 얼굴로 그가 물었다. 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매일매일 달라져."

"오늘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뭐야?"

그는 여전히 진지했다.

"아마 갈색일걸."

나는 기분에 따라 옷을 입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진지한 표정을 풀고 못


믿겠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갈색?"

"그래. 갈색이 얼마나 따뜻한 색인데. 난 갈색이 그리워. 원래 갈색이어야


하는 것들, 나무줄기, 바위, 흙, 이런 게 여기선 모두 질퍽한 초록색으로
뒤엎여 있잖아."

내가 불평을 쏟아냈다. 그는 내 설명에 마음이 움직인 것 같아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물끄러니 내 눈을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다시
진지해졌다.

"네 말이 맞다. 갈색은 따뜻하지."

그는 재빨리 손을 뻗었다가, 다시 조금 머뭇거리며 내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겨주었다.

우리는 어느새 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차를 세우느라 미끄러져 들어가며


그가 다시 나를 보았다.

"지금 네 CD 플레이어에 들어 있는 음악은 뭐야?"

그가 살인혐의를 자백받는 형사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필이 선물한 CD 를 꺼내지 않은게 생각났다. 내가 밴드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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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 그가 씩 웃으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동차 오디오 아래


수납장을 열고 30 장쯤 차곡차곡 들어 있는 CD 가운데 한 장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드뷔시에서 이런 것까지?"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내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CD 였다. 나는


눈길을 내리깔고 낯익은 앨범 재킷을 살폈다.

그날 하루는 그런 식으로 계속되었다. 나를 영어 강의실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그리고 스페인어 수업이 끝나고 다시 만나 점심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이에도 그는 나라는 존재의 하찭은 것까지 시시콜콜 끊임없이 캐물었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영화, 내가 가본 얼마 안 되는 장소, 가보고
싶어하는 수많은 장소, 그리고 책. 책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이렇게 많은 얘기를 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내 애기가


지루할 거라는 생각에 나는 자주 민망했다. 하지만 그는 이야기에 완전히
심취한 듯 골똘한 표정이었고,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그의 질문은
대부분 대답하기 쉬운 것이어서, 워낙 쉽사리 얼굴이 빨개지는 나도 실제로
얼굴을 붉힌 건 겨우 몇 번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얼굴을 붉히면 또
다시 새로운 질문이 쏟아졌다.

그러다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석이 뭔지 물었을 무렵 나는 생각도


하기 전에 토파즈라고 내뱉었다. 에드워드가 워낙 빠른 속도로 질문을
퍼부었으므로, 머리에 맨 먼저 떠오르는 낱말을 대는 심리분석 실험을
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내가 얼굴을 붉히지 않는 한 그는 미리
생각 해 둔 것들을 차례로 묻는 것 같았다. 얼굴이 빨래진 건 최근까지만
해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석이 가넷이었기 때문이다. 토파즈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내가 마음을 바꾼 이유를 떠올리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당연히 그는 내가 당황해하는 이유를 털어놓을 때까지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다.

"어서 말해봐."

내가 설득에 넘어가지 않자 마침내 그가 명령했다. 먼저 그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단순히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오늘 네 눈동자 색깔이라서."

나는 항복하듯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깔고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2 주쯤 뒤에 네가 물었다면 아마 마노라고 대답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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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필요 이상의 이야기까지 털어놓고는, 내가 얼마나


에드워드에게 집착하고 있는지를 너무 빤히 드러내는 말실수를 하거나
속마음을 들켰을 때 나타나는 그의 야릇한 분노를 또다시 겪게 될까 봐
걱정이 됐다. 그러나 그는 아주 잠깐 말을 멈췄을 뿐이었다.

"어떤 꽃을 좋아해?"

그의 질문이 이어지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심리분석 실험을


이어갔다.

생물시간에는 또다시 복잡한 상황이 연출됐다. 에드워드는 배너 선생님이


시청각 기구 선반을 끌고 교실로 등장한 순간까지 내게 질문을 퍼부었다.
선생님이 전등 스위치로 다가가는 순간, 나는 에드워드가 의자를 조금 더
멀리 끌고 가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교실이
어두워지자마자 어제와 똑같이 찌릿한 전류가 흘렀고, 손을 뻗어 아주
가까이에 있는 그의 차가운 피부를 만져보고 싶은 초조한 갈망도 똑같이
이어졌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턱을 팔에 올려놓고, 팔 아래 감춰진 손가락으로 책상


끝을 움켜잡으며 온몸을 마비시키는 비이성적인 욕망과 싸웠다. 혹시
에드워드가 나를 보고 있을까 봐 나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러면
자제력을 유지하기가 더 힘들 것 같았으니까. 나는 영화를 감상하는 데
집중하려고 애썼지만, 수업시간이 끝났을 때에는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배너 선생님이 전등을 켜자 나는 또 한 번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에드워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애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일어나 가만히 서서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어제처럼 말없이 체육관으로 나란히 걸어갔다. 그리고 그는 어제와 똑같이
말없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벤에는 손끝이 아니라 손등으로 내 뺨에서
턱까지 길게 어루만지고는 조용히 돌아서서 걸어갔다.

마이크 혼자서 하는 배드민턴 쇼를 지켜보는 사이 체육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내 냉담한 표정 때문인지, 아니면 어제 우리가 벌인 사소한
말다툼 때문에 아직 화가 안 풀렸는지 마이크는 오늘 말을 한 마디도 걸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때문에 좀 속이 상했다. 하지만 마이크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 나는 빨리 움직일수록 에드워드를 빨리 만난다는 생각에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초조한 마음 때문에 평소보다 손놀림은 더
서툴렀지만, 마침내 체육관을 나와 벽에 기대 서 있는 에드워드를 본 순간
전날과 똑같은 해방감을 느끼며 자동인형 처럼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도
나를 보며 웃었지만 곧바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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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는 질문 방향이 달라져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령 그는


피닉스에 있는 집에 두고 온 것 중 가장 그리운게 뭔지 알고 싶어했고, 낯선
부분에 대해서는 꼬치고치 캐물었다. 우리는 찰리의 집 앞에 세운 차
안에서 몇 시간이나 앉아 있었고,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에서는 갑자기
푹우가 쏟아졌다.

나는 목재가 썩는 걸 방지할 때 바르는 크레오소트의 씁쓸하면서도


나뭇진이 조금 섞인 냄새 때문에 여전히 좋은 냄새로 기억되는 피닉스
거리의 냄새와, 7 월이면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 너무 앙상해 깃털
같은 모습을 한 나무들, 이쪽 지평선에서 저쪽 지평선까지 드넓게 펼쳐진
흰색에 가까운 하늘의 정확한 크기, 자주색 화산암으로 뒤덮인 낮은 산이
어쩌다 한번 보일까 말까 하는 풍경 등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것들을
설명하려 애를 썼다. 설명하기 어려운건 나에게 그것들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였다. 반쯤 죽은 것처럼 보이는 침엽수 초목들의 엉성한
모양새와는 상관없이, 울퉁불퉁한 바위산 사이로 얕은 계곡이 군데군데
있는 지형의 아름다움과 햇빛이 비쳐드는 방법이 어딘가 다른 아름다움을
정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어느새 손짓을 섞어가며 설명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폭우 때문에 몹시 어둑어둑했지만, 나지막하게 캐묻는 그의 질문에 나는


스스럼없이 대답을 했고, 거의 독백으로 이어진 대화에도 민망해하지
않았다. 피닉스에 있는 어지러운 내 방 모양새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마침내 그가 질문을 던지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끝난 거야?"

안심한 내가 물었다.

"끝은 어림도 없지만 너희 아버지가 곧 오실 거야."

"찰리!"

갑자기 그의 존재를 떠올리니 한숨이 나왔다. 나는 비 때문에 어두워진


하늘을 내다봤지만 통 시간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됐지?"

시계를 흘끔 보며 중얼거리던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찰리가


집으로 오고 있을 시간이었다.

"해질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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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가 구름이 잔뜩 끼어 흐려진 서쪽 지평선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아주 먼 곳을 상상하는 듯 그의 목소리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돌아보니 그는 자동차 앞 유리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지켜보는 사이 그가 갑자기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눈빛에 떠오른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우리한테는 가장 안전한 시간이지. 가장 쉬운 때이기도 하고. 하지만 어느


면에선 가장...... 슬픈 시간이다. 또 하루가 끝나고 밤이 돌아오니까.
어둠은 너무 뻔하지 않니?"

그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나는 밤이 좋아. 어둠이 없으면 별을 볼 수도 없잖아. 어차피 여기선 많이


보이지도 않지만."

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웃음을 터뜨려 갑자기 분위기가 밝아졌다.

"몇 분 안에 찰리가 도착할 거야. 그러니까 토요일에 나랑 같이


있을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지 않으면......"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고맙지만 됐어."

나는 같은 자세로 너무 오래 앉아 있어 온몸이 뻣뻣해진 걸 느끼며 책을


집어들었다.

"그럼 내일은 내 차례인가?"

"꿈도 꾸지 말도록. 아직 다 안 끝났다고 했잖아?"

날 놀릴 모양인 듯 에드워드가 짐짓 화를 냈다.

"물어볼 게 더 남았어?"

"내일 두고 보면 알게 될걸."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려고 몸을 수그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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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손잡이를 잡은 그의 손이 얼어붙었다.

"난감하군."

그가 중얼거렸다.

"뭔데 그래?"

턱이 불끈거리도록 이를 꽉 다물고 눈빛이 흐트러진 그의 모습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흘긋 나를 바라보며 음울하게 말했다.

"복잡한 문제가 더 생겼어."

그는 재빨리 문을 열어주고는 신속하게 몸을 구부려 움직였다. 빗속을


뚫고 전조등 불빛이 다가오더니, 우리가 있는 곳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인도 옆에 검정색 차가 멈췄다.

"찰리도 바로 모퉁이 너머에 있어."

에드워드가 퍼붓는 빗속을 뚫고 우리와 마주 보고 선 차를 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나는 혼란스럽고 몹시 궁금했지만 곧바로 차에서 뛰어내렸다. 굵은


빗줄기가 방수 점퍼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나는 상대 차 앞좌석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아라보려고 애썼지만 너무


어두웠다. 에드워드가 차의 전조등을 켜는 게 보였다. 그는 여전히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절망감과 반항기가 야릇하게 뒤섞여 있었다.

곧이어 그는 시동을 걸었고,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타이어가 새된 소리를


내면서 볼보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벨라."

작은 검정색 차의 운전석에서 낯익은 허스키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콥?"

나는 빗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바로 그때 찰리의 순찰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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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를 돌아 나타나 전조등으로 내 앞에 서 있는 차에 탄 사람들을


비추었다.

제이콥은 어둠 속에서도 두드러져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를 머금고 이미


차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조수석에는 인상적인 얼굴에 훨씬 나이가 많은
덩치 큰 사내가 앉아 있었다. 뺨이 어깨 위로 쏟아질 듯 살이 많고 구릿빛
피부에 낡은 가죽재킷처럼 주름이 많은 얼굴이었다. 넓은 얼굴에 비해
놀랍도록 낯익은 검은 눈동자는 너무 어려 보이기도 했고 너무 나이 들어
보이기도 했다. 제이콥의 아버지 빌리 블랙 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지 5
년도 더 지났지만, 포크스에 온 첫날 찰리한테 이름을 들어서인지 나는
그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바람에 나는
소심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은 충격을 받거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휘둥그래졌고, 콧구멍도 벌름거렸다. 내 미소가 희미해졌다.

에드워드가 복잡한 문제가 더 생겼다고 말한 게 생각났다.

빌리는 여전히 강렬하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빌리가 에드워드를 그렇게 쉽사리 알아봤단 말인가?
빌리는 아들도 코웃음 치는 말도 안 되는 전설을 정말로 믿고 있는 걸까?

그에 대한 대답은 빌리의 눈빛에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랬다. 그는


너무도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12. 균형

"빌리!"

차에서 내리자마자 찰리가 외쳤다.

나는 제이콥에게 어서 오라는 손짓을 한 뒤 몸을 돌려 현관 처마 밑으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찰리가 그들과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콥, 네가 운전한 건 내가 못 본체 해 주마."

찰리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보호구역에선 다들 미리 운전을 시작하는데요."

내가 현관문 자물쇠를 따고 불을 켜는 사이 제이콥이 말했다.

"어련하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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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가 껄껄 웃었다.

"나도 이젠 손들 수 밖에 없더라니까."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성량이 풍부한 빌리의 목소리를 금방 알아


차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어둔 채 집 안으로 들어간 나는 먼저 전등 스위치를 올리고


나서 겉옷을 걸었다. 그러고는 문가에 서서 차에서 내려 찰리와 제이콥이
휠체어에 옮겨 앉는 빌리를 돕는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세 사람이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와 빗물을 떨어내자 나는 뒤로 물러났다.

"좀 놀랐는걸."

찰리가 말했다.

"굉장히 오랜만이지. 안 좋은 때 온 게 아니면 좋겠군."

빌리가 대꾸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다시 나를 쏘아보았지만 표정은


읽어낼 길이 없었다.

"아니야, 잘 왔네. 야구중계나 같이 보고 갈 수 있으면 좋겠군."

제이콥이 씩 웃었다.

"원래 그럴 계획이었어요. 저희 텔레비전은 지난주에 고장 났거든요."

빌리가 아들에게 인상을 썼다.

"그렇기도 하고, 제이콥이 워낙 벨라를 다시 보고 싶어해서 말이야."

그가 덧붙이자 이번에는 제이콥이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고, 나는


문득 밀려드는 후회를 억눌렀다. 지난번 해변에서 내가 너무 심하게 추근
댄 모양이다.

"배고프세요?"

내가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탐색하는 듯한 빌리의 눈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막 저녁 먹고 오는 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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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이 대답했다.

"아빠는요?"

모퉁이를 돌아 달아나며 내가 어깨 너머로 물었다.

"당연하지."

거실 텔레비전 쪽에서 찰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빌리의 휠체어가 따라


가는 소리도 들렸다.

치즈 샌드위치를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토마토를 썰고 있는데, 등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지냈어?"

제이콥이 물었다.

"잘 지냈어."

내가 살며시 웃었다. 감격하는 듯한 그의 태도를 거부하기가 어려웠다.

"넌 어때? 자동차 조립은 끝냈어?"

"아니. 아직 부품이 부족해. 저 차는 빌린 거야."

제이콥은 인상을 쓰며 엄지손가락으로 앞뜰 쪽을 가리켰다.

"미안해. 나도 아직 못 알아봤는데......, 찾고 있는게 뭐랬지?"

"엔진용 실린더."

제이콥이 씩 웃더니 갑자기 덧붙였다.

"트럭에 문제 생겼어?"

"아니."

"아, 안 몰고 다니기에 그냥 궁금했어."

나는 프라이팬에서 샌드위치 아래쪽이 노르슴하게 됐는지 끝을 살짝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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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태워줬어."

"차 좋더라. 그런데 운전하는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어. 난 이 근처 애들은


대부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샌드위치를 뒤집느라 눈을 내리깐 채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 아버지는 어디선가 봤는지 아는 얼굴인가 보더라."

"제이콥, 접시 좀 꺼내줄래? 개수대 위쪽 찬장에 있어."

"그러지 뭐."

그가 말없이 접시를 꺼냈다. 나는 제이콥이 더 묻지 않기를 바랐다.

"누구였어?"

조리대에 접시 두 개를 내려놓으며 그가 물었다. 나는 졌다는 심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에드워드 컬렌."

놀랍게도 제이콥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놀라서 올려다보니 그는 조금


민망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랬구나. 아버지가 왜 그렇게 이상하게 구시나 궁금했는데


말이지."

"그러게나 말이야. 아저씬 컬렌 집안 사람들을 정말 싫어하시나 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했다.

"미신에 사로잡혀서 그렇지 뭐."

제이콥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저씨가 찰리한테 얘기하실까?"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제이콥이 잠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그의 검은 눈동자에


드러난 느낌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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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아닐걸. 지난번에 찰리 아저씨랑 아버지랑 대판 싸우셨거든. 그뒤로


서로 말도 안 하셨는데, 오늘은 일종의 화해 방문이야. 그러니 다시 그
문제를 거론하진 않으실 거야."

"아."

나는 무관심하게 대꾸했다.

나는 거실에 있는 찰리에게 저녁을 가져다 준 뒤, 수다를 떠는 제이콥과


같이 야구경기를 보는 체하며 거실에 머물렀다. 실제로는 빌리가 내
이야기를 꺼낼 기미가 있는지 살펴보면서, 혹시라도 그 말을 꺼내면 어떻게
말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길고 긴 밤이었다. 해야 할 숙제가 많았지만 나는 빌리와 찰리를 단 둘이


두는 게 두려웠다. 마침내 경기가 끝났다.

"조만간 친구들하고 해변에 또 올 계획 있어?"

제이콥이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현관 턱을 넘으며 물었다.

"잘 모르겠어."

내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재미있었네, 찰리."

빌리가 말했다.

"다음 경기 때도 와."

찰리가 권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또 올게. 잘 있게."

빌리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더니 웃음기가 사라졌다.

"몸조심해라, 벨라."

진지하게 그가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내가 눈길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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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가 현관에서 손을 흔드는 사이 나는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 벨라."

나는 움찔했다. 내가 거실로 나가기 전에 빌리가 뭔가 얘기를 한 걸까?


그러나 찰리는 뜻밖에 친구가 다녀간게 아직도 흐뭇한지 느긋해 보였다.

"오늘은 서로 얘기할 기회가 없었구나. 오늘은 어떻게 지냈니?"

"잘 지냈어요."

나는 첫 계단에 한 발을 올린 채, 아버지와 나눌 수 있는 괜찮은 이야기가


뭘까 머리를 굴렸다.

"배드민턴 경기에서 제가 속한 팀이 네 게임을 모두 이겼어요."

"우와, 네가 배드민턴을 할 줄 아는 줄은 몰랐구나."

"저는 사실 못해요, 하지만 제 파트너는 정말 솜씨가 좋아요."

"누군데?"

찰리가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저...... 마이크 뉴튼이요."

마지못해 내가 말했다.

"아, 그래. 뉴튼 아들이랑 네가 친구라고 했지. 훌륭한 집안이다."

찰리는 활기를 띄며 말한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 주말에 걔한테 댄스파티에 가자고 신청하지 그러니?"

"아빠! 걘 제 친구 제시카하고 사귄단 말이에요. 게다가 제가 춤 못


춘다는거 아시면서."

"아, 그렇지."

그는 나를 보며 미안한 듯 살짝 웃었다.

"너도 토요일에 집을 비울 테고 해서...... 경찰서 동료들이랑 낚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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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로 했는데 잘한 것 같구나. 날씨도 아주 따뜻할 거라더라. 하지만 같이


갈 사람이 생길 때까지 네가 시애틀 여행을 미루고 싶으면 나도 집에
있을게. 널 집에 혼자 두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거 나도 안다."

"아빤 아주 잘하고 계세요. 그리고 전 혼자 있는 게 조금도 싫지 않아요.


제가 아빠를 너무 많이 닮았나 봐요."

나는 안도감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며 말없이 웃었다. 내가 윙크를 하자,


찰리는 눈꼬리에 매력적인 주름을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그날 밤은 너무 피곤해 꿈도 꾸지 않고 모처럼 잘 잤다. 은회색 아침공기


속에 눈을 뜬 기분은 하늘이라도 오를 듯 했다. 빌리와 제이콥 덕분에
저녁시간 내내 잔뜩 긴장했던 것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서 완전히 잊기로
결심했다. 나는 베레모를 쓰면서 어느새 휘파람을 불기 시작해 계단을
내려가면서까지 멈추지 않았다. 찰리도 내 기분을 눈치 챘다.

"오늘 아침은 기분이 좋구나."

찰리가 아침을 먹으며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금요일이잖아요."

찰리가 집을 나서자마자 나는 서둘러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재빨리 가방을


챙기고 신발을 신고, 이를 닦은 뒤, 찰리 차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현관을
나섰다고 생각했지만, 에드워드가 더 빨랐다. 그는 창문을 내린 채 시동을
끄고 빛나는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얼른 보고 싶은 생각에 주저 없이 차에 올랐다. 나를


보며 그는 짓궂게 씩 웃었고, 순간 내 호흡과 심장이 멎었다. 천사라도
그보다 더 멋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에드워드는 흠잡을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잠은 잘 잤어?"

그가 물었다.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호소력 있는지 에드워드 자신도 알고


있을까?

"잘 잤어. 너는 밤 잘 보냈어?"

"좋았어."

그가 흐뭇하게 웃었다. 뭔가 그가 혼자만의 농담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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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했는지 물어봐도 돼?"

"아니, 오늘도 계속 내 차례야."

그가 싱긋 웃었다.

에드워드는 오늘은 내 주변 사람들에 관해 알고 싶어했다. 우리 엄마


르네에 관해서, 취미가 뭔지, 둘 다 한가할 때는 뭘 하며 지내는지 따위를
물었다. 그러고는 내가 알았던 유일한 할머니인 외할머니와 몇 안 되는
학교 친구들 얘기를 캐물었는데, 내가 사귄 남자애들에 대해 물을 때는
몹시 민망했다. 다행히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귀어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 대화는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내 연애사가 전무하다는데
제시카와 앤제라처럼 에드워드도 깜짝 놀란 듯 했다.

"사귀고 싶은 사람을 한번도 못 만난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질 만큼 그가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퉁명스럽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피닉스에선 없었어."

그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무렵 우리는 식당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모를 만큼 빠르게


흘러가는 하루가 이제는 일상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가 잠시 말을
멈춘틈을 타 베이글을 베어 물었다.

"오늘은 혼자 운전하고 집에 가야겠다."

내가 빵을 씹는 사이 그가 뜬금없이 말했다.

"왜?"

"점심 먹고 나서 앨리스랑 조퇴할 거거든."

"아아, 괜찮아. 걷기에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뭐."

나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여 눈을 깜박였다. 그는


못마땅한 듯 나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집까지 네가 걸어가게 내버려두진 않을 거야. 이따 네 트럭을 학교에


가져다 놓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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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열쇠도 안 가져왔어. 정말 난 걷는 거 괜찮아."

나는 한숨을 쉬었다. 속이 상한 건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빼앗긴다는


점이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트럭 갖다 놓고 열쇠는 안에 꽂아둘게. 혹시 누군가 훔쳐갈까 봐


걱정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생각만 해도 웃기는지,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내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차 열쇠는 수요일에 입었던 청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게 확실하므로, 세탁실 옷더미 안에 있을 터였다. 그의
계획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무사히 들어간다 해도, 열쇠를 찾아낼 리는
없었다. 그는 내가 순순히 수긍하자 뭔가를 눈치 챘는지 대단히 자신 있는
것처럼 씩 웃었다.

"넌 어디 갈건데?"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사냥하러. 내일 너랑 단둘이 있으려면 최대한 미리 어떻게든 준비를


해야지."

엄숙하게 대꾸하는 그의 표정이 시무룩해지더니...... 뭔가 간청하는 듯


했다.

"언제든 취소해도 좋아."

나는 그의 눈빛에 설득당할까봐 두려워 눈을 내리깔았다. 정마로 아무리


위험해도 그를 두려워하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난 상관없어. 나는 거듭
머릿속으로 되풀이했다.

"아니, 그럴 수 없어."

내가 그의 얼굴을 다시 응시하며 속삭였다.

"아아,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내가 지켜보는 사이 그의 눈동자가 점점


진해지는 듯 했다. 나는 말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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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몇 시에 올거야?"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 때나......, 토요일엔 늦잠 자고 싶지 않아?"

"아니."

내가 너무 빨리 대꾸하자, 그가 웃음을 참았다.

"그럼 평소와 같은 시간으로 하자. 찰리도 집에 계신 걸가?"

"아니, 내일 낚시하러 가신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기쁜 마음에 내가 환하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혹시 네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시려나?"

"그야 모르지. 주말엔 주로 빨래하는 걸 알고 계시니 아마 세탁기에


빠졌다고 생각할지도."

내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는 나를 보며 인상을 썼고, 나도 마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분노가 나보다 훨씬 강렬한 것 같았다.

"오늘은 뭘 사냥할 거야?"

눈싸움에서 졌다는게 분명해지자 내가 물었다.

"국립공원에서 아무거나 보이는 대로, 별로 멀리 안 갈 거야."

에드워드는 자기의 비밀 정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내 태도가


우스운 모양이었다.

"왜 앨리스랑 같이 가?"

"앨리스가 가장......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거든."

그가 말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다들 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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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심하게 물었다. 그의 이마에 잠시 주름이 파였다.

"대부분 못 미더워해."

나는 재빨리 내 뒤쪽에 앉아 있는 그의 가족을 훔쳐보았다. 그들은 넷이란


것만 다를 뿐 내가 처름 그들을 본 날처럼 각자 다른 방향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칼에 몹시 잘생긴 그들의 막내동생은 지금
황금빛 눈동자에 걱정을 담은 채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다들 날 싫어하는구나."

"그렇지 않아. 그냥 네가 널 왜 그냥 내버려두지 못하는지 이해를 못할


뿐이야."

그는 부인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 정직했다.

"사실 이해 안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에드워드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얘기했잖아. 넌 네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해. 넌 내가 알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라. 그래서 너한테 자꾸 끌려."

나는 그가 나를 놀리는 거라고 생각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내 표정을


알아챈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신중하게 자기 이마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난 내가 가진 여러 이점을 이용해서 인간의 본성을 남들보다 잘


알아차려. 사람들의 행동을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어. 그런데 넌......, 넌
단 한번도 내 예상대로 행동한 적이 없어. 넌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지."

당혹스럽기도 하고 불만스럽기도 해서 나는 시선을 피해 다시 그의


가족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들으니 어쩐지 내가 과학 실험 대상처럼
느껴졌다. 뭔가 다른걸 기대했던 나 자신을 비웃어주고 싶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건 설명하기 쉬운 부분이고."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가 내 눈빛에서 내 생각을 읽어낼까 두려워


아직은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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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뿐이 아니라...... 뭔가 말로 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지......"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여전히 컬렌 집안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눈부신 금발미녀 로잘리가 나를 보았다. 아니,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검고 차가운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에드워드가 하던 말을 멈추고 낮은 소리로 화를 낼 때까지, 그녀의 눈길은
나를 붙들고 꼼짝 못하게 했다. 에드워드는 거의 으르렁 거리다시피 했다.

로잘리가 고개를 돌리자 나도 자유로워졌다. 에드워드를 돌아본 순간,


크게 확대된 내 눈에서 그가 혼란과 공포를 감지할 수 있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안해. 로잘리는 그냥 걱정하는 거야. 이렇게 너랑 드러내놓고 많은


시간을 보내면...... 위험해지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거든. 혹시......"

그가 눈길을 깔았다.

"혹시 뭐?"

"혹시 이러다...... 잘못될까 봐서지."

그는 포트앤젤레스에서 저녁을 함께 보내면서 그랬듯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고뇌가 눈에 선했다. 나는 그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나도 모르게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다가 문득
혹시 상황을 더 악화시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내려놓았다. 내가
그의 말에 공포감을 느껴야만 한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았다. 공포가 찾아
오기를 기다렸지만, 내 마음에 느껴지는 감정은 오로지 그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로잘리가 끼어드는 바람에 에드워드가 하려던 말을 듣지 못해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다시 꺼낼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나는 태연하려고 애썼다.

"지금 떠나야 해?"

"응."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잠깐 심각했던 그의 얼굴은 이내 분위기가 바뀌어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아마 그게 최선일 것 같아. 또 그 끔찍한 영화를 봐야 하는 생물시간까지


겨우 15 분 남았잖아. 난 더 못 견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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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요정같이 절묘한 얼굴에 칠흑같이 새카맣고


짧은 머리를 후광처럼 아무렇게나 흩어뜨린 앨리스가 에드워드 등 뒤에 서
있었다. 버드나무처럼 호리호리한 그녀의 몸매는 가만히 서 있는데도
우아했다. 에드워드는 나를 보던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그녀를 맞이했다.

"앨리스."

"에드워드."

그녀의 높은 소프라노 목소리는 에드워드 목소리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앨리스, 여긴 벨라야. 벨라, 앨리스야."

에드워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한 손을 들어 우리 두 사람을 소개했다.

"안녕. 벨라. 드디어 만나게 돼서 반가워."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속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미소는


다정했다. 에드워드가 흘끔 앨리스를 노려보았다.

"안녕하세요, 앨리스."

내가 수줍게 중얼거렸다.

"갈 준비 됐어?"

앨리스가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시무룩했다.

"응, 거의. 차에서 만나."

앨리스는 말없이 돌아섰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너무도 유연하고 우아해서


나는 돌연 질투를 느꼈다.

"'재미있게 보내'라고 말해도 돼? 어색한 표현인가?"

내가 다시 에드워드를 바라모며 물었다.

"'재미있게 보내'란 말은 어디나 어울리겠지."

그가 싱긋 웃었다.

"그럼 재미있게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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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심처럼 들리도록 조심해서 말했다. 물론 그를 속일 수는 없었다.

"노력할게. 넌 제발 무사히 지내도록 해."

여전히 그가 씩 웃었다.

"포크스에서 무사하라니, 참 힘든 일이지."

"너한테는 '정말' 힘든 일이겠지. 어서 약속해."

그가 이를 꽉 물었다.

"무사히 지내겠다고 약속할게. 오늘 저녁에 빨래할 건데, 그것도 난 목숨


걸고 해야 하거든."

"세탁기에 빠지지 말도록."

그가 놀려댔다.

"최선을 다해볼게."

그제야 그가 일어섰으므로 나도 따라 일어났다.

"내일 만나.'

내가 한숨을 쉬었다.

"꽤나 길게 느껴지나 보군?"

그가 흐뭇하게 묻자 내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집으로 갈게."

그가 짓궂게 웃으며 말하고 나서 손을 뻗어 내 뺨을 또 한번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멀어져갔다. 나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나는 오후 수업에 모두 빠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적어도


체육수업만이라도 빠지고 싶었는데 본능적인 경고가 나를 막았다. 지금
사라진다면 마이크와 다른 친구들은 틀림없이 내가 에드워드와 같이 있는
걸로 짐작할 것이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혹시 일이 틀어지는 경우 우리가
드러내놓고 함께 보내서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을 애써 물리치고, 그의 부탁대로 무사히 지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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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하기로 했다.

직감적으로 나는 내일이 아주 중요한 날이 될 것을 알고 있었고,


에드워드도 그걸 감지하고 있었다. 우리 관계를 지금처럼 계속 위태롭게
칼날 위에 선 듯 놓아 둘 수는 없었다. 우리가 어느 쪽으로 떨어질지는
전적으로 그의 결정에, 아니 그의 본능에 달려 있었다. 내 결정은
의식적으로 선택을 내리기 이전에 이미 내려져 있었으므로, 끝까지 가볼
작정이었다. 세상에 에드워드와 헤어진다는 생각보다 더 두렵고 괴로운
일은 없었다. 그건 내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의무감을 느끼며 수업에 들어갔다. 솔직히 나는 생물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은 온통 내일 생각으로
가득했다. 체육시간에는 마이크가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고, 시애틀에서
재미있게 보내라고 해주었다. 나는 트럭이 걱정스러워 여행을 취소했다고
조심스레 설명했다.

"컬렌이랑 댄스파티에 가려는 거야?"

마이크가 갑자기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니, 댄스파티 따위엔 절대로 안 가."

"그럼 뭘 하려고?"

그가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실대로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나는 가볍게 거짓말을 했다.

"빨래하고, 그 다음엔 삼각함수 시험공부도 해야 해. 안 그러면 나,


낙제할지도 몰라."

"컬렌이 네 공부 도와주겠대?"

"'에드워드'가 내 공부를 도와주는 일은 없을 거야. 걔는 주말에 어딜 가야


한댔어."

거짓말이 평소보다 자연스럽게 나와 나도 깜짝 놀랐다.

"아, 그렇구나. 어쨌든 너도 우리랑 다 같이 어울려서 댄스파티에 가도 돼.


재미있을 거야. 우리 모두 너랑 춤을 춰줄게."

마이크가 한층 기분이 나아져서 말했다. 제시카의 얼굴이 어떨지 떠올라


내 목소리가 필요 이상 싸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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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댄스파티에 가지 않아, 마이크. 알겠니?"

"알았어. 그냥 물어본 거야."

마이크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마침내 모든 수업이 끝나자 나는 맥이 빠져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특별히


집까지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에드워드가 내 트럭을
어떻게 갖다 놓았을지 의아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겐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 같았다. 그 직감이 옳다는 걸 증명하듯, 아침에
에드워드가 볼보를 세웠던 바로 그 자리에 내 트럭이 서 있었다. 나는
믿어지지가 않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차 문을 열었고, 안에 꽂혀 있는
열쇠를 발견했다.

운전석에 반으로 접힌 하얀 쪽지가 놓여 있었다. 나는 차에 올라 문을


닫은 뒤 쪽지를 폈다. 그의 고상한 글씨체로 두 낱말이 적혀 있었다.

무사히 지내.

나는 시동을 건 순간 엔진 소리에 깜짝 놀라 혼자 깔깔댔다.

집에 돌아와 보니 현관문은 아침에 내가 잠갔던 그대로 묵직하게 잠겨


있었다. 나는 곧장 세탁실로 갔다. 빨랫감은 내가 내버려두고 간 그대로인
것 같았다. 빨래 바구니를 뒤져 청바지를 찾아내 주머니를 살펴보았다.
비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아마 열쇠를 벽걸이에 걸어뒀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마이크한테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던 것과 똑같은 본능에 충실하면서


제시카에게 댄스파티에서 즐겁게 보내라는 인사를 하는 체 하며 전화를
걸었다. 제시카가 에드워드와 즐겁게 보내라고 말하자, 나는 여행이
취소됐다고 했다. 제시카는 제 3 자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실망했다. 나는
재빨리 작별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찰리는 일 때문에 걱정이 있는지 아니면 농구경기 때문에 심난한 건지


아니면 그냥 라자냐가 맛있어서 아무 생각이 없는지, 딴데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는건 늘 어려웠다.

"있잖아요. 아빠......"

그의 상념을 깨며 내가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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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니?"

"시애틀에 대해선 아빠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시카나 다른


친구가 같이 가줄 수 있을 때까지 미루려고 해요."

"아아. 그래, 잘했다. 그럼 내가 집에 같이 있어줄까?"

찰리는 놀란 눈치였다.

"아니에요. 계획대로 하세요. 저도 할 일이 아주 많아요. 숙제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도서관이랑 식품점에도 가야 하거든요. 하루종일
들락날락 해야 할 테니까, 아빤 즐겁게 다녀오세요."

"정말이냐?"

"당연하죠. 게다가 냉동실에 생선도 다 떨어졌어요. 2~3 년쯤 묵은 것


같은 생선 한 마리밖에 없거든요."

"넌 참 같이 살기 편한 아이구나, 벨라."

찰리가 웃음을 지었다.

"아빠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가 지나치게 과장된 것 같았지만 그는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찰리를 속이는게 너무 죄스러워,
순간적으로 에드워드의 충고를 받아들여 내일 무얼 할지 밝힐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물론 시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저녁식사 후 나는 빨래를 갠 뒤, 또 한번 세탁물을 넣어 건조기를 돌렸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그저 내 일손만 바쁘게 만들 뿐이었다. 내 머리는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아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나는 너무 강렬해서 마치
통증처럼 느껴지는 기대감과, 내 굳은 결심에서 비롯된 불길한 공포
사이에서 마구 흔들렸다. 나는 그가 남긴 쪽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그가
적은 두 낱말을 지나치게 자주 들여다보았다. 그는 내가 무사하기를
바란다고 나는 거듭 되풀이해 혼잣말을 했다. 내가 그 믿음에 매달린다면
결국 그 바람이 모든 염려를 잠재워버릴 거다. 게다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나. 그를 내 인생에서 도려내는 것?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포크스에 온 뒤로 내 인생은 완전히 그에 '관한' 삶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작은 목소리는......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엔 마음을 '아주' 크게 다칠 거라고 불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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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에 들어도 될 시간이 되자 나는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너무


스트레스가 심해 잠을 자기에는 무리라는 걸 알았으므로 전에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짓을 저질렀다. 일부러 감기약을 먹은 것이다. 적어도 여덟
시간은 정신없이 자게 만드는 약이었다. 평소 나는 그런 무모한 짓을 몹시
경멸하는 편이었지만, 내일은 불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게 아니어도 이미
충분히 복잡한 상황일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약효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젖은 머리가 직모처럼 완전히 펴질 때까지 헤어드라이기로 말렸고, 내일
입을 옷을 이것저것 고르며 소란을 피웠다.

내일 아침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자 나는 드디어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흥분한 상태라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 CD 를
담아놓은 신발상자를 뒤져 쇼팽의 야상곡을 골랐다. 아주 조용하게 음악을
틀어놓고 다시 침대에 누워 신체의 각 부위에서 힘을 빼려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감기약이 약효를 발휘했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무의식으로 빠져들었다.

고마운 감기약 덕분에 꿈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한 나는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푹 쉬었는데도 이내 전날 느꼈던 광기 어린 흥분에 빠져들었다.
나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안에 입은 하얀 셔츠 깃을 밖으로 꺼낸 뒤 갈색
스웨터가 맵시 있게 청바지 위로 늘어질 때까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재빨리 창밖을 내다보니 찰리는 이미 가고 없었다. 하늘에는 솜털처럼
푹신한 구름층이 얇게 떠 있었지만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맛도 못 느낀 채 아침을 먹고, 서둘러 설거지를 했다.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변한 건 없었다. 양치질을 마치고 막 아래층으로
내려 가려던 순간, 조용한 노크 소리에 내 심장이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다.

나는 현관으로 달려갔다. 낡은 자물쇠 때문에 조금 애를 먹긴 했지만


마침내 문을 활짝 열었고, 눈앞에 그가 서 있었다. 침착함을 되찾고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모든 초조함이 사라졌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그를 마주하니 어제 느꼈던 공포가 몹시 어리석에 느껴졌다.

에드워드는 처음에는 웃음기 없는 굳은 얼굴이었지만, 나를 훑어보고


나서는 표정이 밝아져 이윽고 웃음을 터뜨리며 아침인사를 건넸다.

"왜 그래?"

나는 신발이나 바지 같은 중요한 뭔가를 빠뜨렸는지 훑어보았다.

"옷이 똑같아."

그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에드워드도 옅은 갈색 스윁터에 하얀


셔츠깃을 밖으로 내놓고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순간 속상했지만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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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을수 밖에 없었다. 얘는 패션쇼 모델처럼 보이는데 난 왜 아닌 거야?

그가 트럭으로 걸어가는 사이 나는 현관문을 잠갔다. 그는 조수석 옆에서


처형을 기다리는 순교자처럼 서 있었다.

"약속은 약속이야."

나는 운전석에 올라 잠겨 있던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느긋하게 말했다.

"어디로 가?"

내가 물었다.

"안전벨트부터 하시지. 난 벌써 초조해."

나는 그를 노려보며 안전벨트를 맸다.

"어디로 가냐니까?"

한숨을 쉬며 내가 되물었다.

"101 번 고속도로 북쪽 방향을 타."

그가 명령했다.

그의 시선을 온 얼굴로 느끼며 운전에 집중하기란 정말 어려운일이었다.


휴일이라 아직 잠에 빠져 있는 시내를 지나며 나는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이러다 저녁 되기 전에 포크스를 빠져나갈 수나 있겠니?"

"이 트럭은 네 차의 할아버지뻘은 될 만큼 오래된 차야. 존경심을 좀


가져봐."

내가 쏘아붙였다.

어쨌든 우리는 곧 시 경계를 벗어났다. 나뭇가지가 촘촘하고 기둥까지


초록 이끼로 뒤덮인 나무들 대신, 잔디밭과 주택들이 나타났다.

"우회전해서 110 번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막 물어보려는 찰나 그나 꺼낸 말에 나는 잠자코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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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포장도로가 끝날 때까지 달리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졌지만, 나는 포장도로를 벗어나 달릴까봐


너무 두려워,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그의 얼굴을 돌아보기도 겁났다.

"포장도로가 끝나면 뭐가 있는데?"

"등산로."

"우리 등산해?"

테니스화를 신고 오길 다행이었다.

"그럼 곤란해?"

그런 줄 알았다는 듯이 그가 물었다.

"아니."

나는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 트럭도 느리다고


생각하는 판에......

"걱정하지 마. 길이도 8 킬로미터 정도밖에 안 되고, 천천히 갈 테니까."

8 킬로미터. 두려움에 떠는 내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아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발목을 삐끗하거나 다른 부상을 당하려고 기를 쓰듯, 위험천만인
나무뿌리와 흔들거리는 바위를 짚으며 8 킬로미터나 걸어야 한다니.
망신살이 뻗치겠군.

내가 다가오는 공포에 빠져 말문이 막혔으므로 우리는 조용히 차를


몰았다.

"무슨 생각 하니?"

얼마쯤 지나자 그가 초조한 듯 물었다. 나는 또다시 거짓말을 했다.

"그냥 어딜 가게 되려나 생각했어."

"날씨가 좋으면 늘 내가 가고 싶어지는 곳이야."

우리는 둘 다 창밖으로 점점 옅어지는 구름을 올려다 보았다.

"찰리가 오늘은 날씨가 아주 따뜻할 거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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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한테 오늘 뭐 할지 말씀드렸어?"

"아니."

"하지만 제시카는 우리가 같이 시애틀에 가는 줄 알고 있지?"

"아니, 네가 여행을 취소했다고 말했어. 사실이잖아."

"그럼 네가 나랑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단 얘긴가?"

이젠 화난 말투였다.

"글쎄...... 네가 앨리스한테는 말하지 않았어?"

"그게 퍽이나 도움 되겠군."

나는 못 들은척 했다.

"포크스에서 지내는게 너무 우울해서 자살이라도 하기로 한 거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다그쳤다.

"우리가 공공연하게 같이 다니면...... 너한테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그래서 '네'가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나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봐


염려한 건가?"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화난 듯 차갑게 비아냥거렸다. 나는 길에 눈길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낮게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너무 빨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침묵을 지켰다. 그가 몹시 못마땅해하며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드디어 도로가 끝나고, 작은 나무 팻말과 함께 좁은 등산로가 나타났다.


나는 좁은 갓길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나는 화가 난 그를 바라볼
핑계를 생각해 내지 못해 조금 겁이 났다. 날씨는 아주 따뜻했다. 내가
포크스에 온 뒤로 가장 따뜻한 날씨였고, 구름이 끼어 그런지 후덥지근할
정도였다. 나는 스웨터를 벗어 허리에 두르며, 얇은 민소매 셔츠를 입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앞으로 8 킬로미터나 걸어가야 한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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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석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그도 스웨터를 벗었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해 트럭 옆으로 펼쳐진 숲을 바라보았다.

"이쪽이야."

그가 여전히 화난 눈빛으로 고개만 돌려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가


어둑한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등산로는 어쩌고?"

다급히 트럭을 돌아 그의 뒤를 쫓아가는 내 목소리는 두려움이 듬뿍


묻어났다.

"도로 끝에 등산로가 있다고 했지, 거기로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등산로로 안 간다고?"

내가 절박하게 물었다.

"길 잃어버리게 하지는 않을 테니 염려 마."

그가 놀리듯 웃음을 흘리며 돌아서자 나는 힘칫 숨을 멈췄다. 풀어헤친


하얀색 민소래 셔츠 앞섶 사이로 새하얗고 매끄러운 그의 목덜미와
대리석처럼 단단한 근육질로 뒤덮인 그의 가슴이 살짝 엿보였다. 옷으로
덮인 나머지 몸매도 어떤 모습일지 눈에 선했다. 너무 완벽해, 가슴을 찌를
듯한 절망감이 내 뇌리를 스쳤다. 이렇게 신처럼 완벽한 존재가 내
사람일리가 없어.

에드워드는 고통스러운 내 표정에 당황한 듯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집에 가고 싶니?"

그의 목소리에는 나와는 또 다른 고통이 배어 있었다.

"아니."

나는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단 일초라도


허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럼 왜 그래?"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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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등산 잘 못해. 네가 많이 참아줘야 할 거야."

내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나도 꽤 참을 수 있어. 무던히도 노력했을 때 얘기지만."

그는 갑자기 이유 없이 우울해진 내 기분을 복돋우려는 듯 살며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마주 웃어주려 했지만, 어설펐는지 그가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집에 보내줄게."

그가 약속하듯 말했다. 무조건적인 의미의 약속인지, 지금 당장 집에


가자는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내가 겁을 먹고 속상해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나는 그가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는게 다행스러웠다.

"해 지기 전에 8 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끌고 가려면 어서 앞장서시지."

내가 뿌루퉁하게 말했다. 그는 내 말투와 표정을 이해하느라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내 포기한 듯 숲속으로 앞장서 걸어갔다.

미리부터 겁을 먹어서인지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길은 대부분 평탄했고,


우거진 양치식물이나 그물처럼 얽힌 이끼가 나타나면 에드워드가 얼른
지나가기 쉽게 잡아주었다. 쓰러진 나무나 길을 막은 바위를 가로질러 갈
때는 내 팔꿈치를 잡고 올려주었지만, 장애물을 지나면 곧바로 손을
치웠다. 그의 차가운 손이 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두 번째 그런 일을 겪으며 그의 얼굴을 살피니, 어쩐지
에드워드도 내 심장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나는 가능한 한 완벽한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내 시선은


제멋대로 그쪽을 향했다. 그때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슬픈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찔렀다.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이따금씩 그가 이틀동안


심문하면서 빠뜨린 것들을 묻기는 했다. 그는 내가 지난 생일들을 어떻게
보냈는지, 초등학교 선생님은 어땠는지, 어린 시절 어떤 애완동물을
키웠는지 따위를 물었다. 나는 물고기를 세 마리 내리 죽이고 나서
애완동물은 아예 키우기를 포기했다고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에
에드워드는 난데없이 크게 웃었고, 은은한 종소리 같은 메아리가 텅 빈
숲을 지나 되돌아왔다.

등산하느라 오전이 거의 다 지났지만, 그는 조금도 조바심을 내는 것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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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 오래전 나무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숲을 지나며 나는 빠져나가는


길을 과연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가
가는 방향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는 듯, 초록으로 둘러싸인 미로를
느긋한 표정으로 아주 수월하게 지났다.

몇 시간이 지나자 머리 위를 뒤덮은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든 빛이 칙칙한


올르브색에서 밝은 옥색으로 변했다. 에드워드가 예견한 대로 날씨가 갠
것이다. 숲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나는 짜릿한 흥분을 느꼈고, 그 마음은
이내 조바심으로 돌변했다.

"아직 멀었어?"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체 하며 물었다.

"거의 다 왔어. 저 앞에 밝은 빛 보여?"

돌변한 내 기분을 눈치 채고 에드워드가 살짝 웃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가 빽빽한 숲을 바라보았다.

"글쎄, 안 보이는 것 같은데?"

"하긴 '네' 눈엔 아직 무리겠다."

그가 싱긋 웃었다.

"안과에 가봐야겠군."

내가 중얼거리자, 그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그러나 몇백 미터쯤 더 걷고 나자 확실히 앞쪽 나무 사이로 환한 빛이


느껴졌고, 초록빛이 아니라 노란색으로 보이는 지점이 나타났다. 나는
한걸음 한걸음 열망을 담아 속도를 높였다. 그는 이제 내가 앞장을 서도록
뒤에서 소리 없이 따라왔다.

빛의 가장자리에 당도한 나는 마지막으로 키 큰 양치식물을 넘어 난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들어섰다. 초원은 작지만 완전히 동그랬고,
보라색, 노란색, 하얀색 야생화가 가득 피어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재잘거리며 흐르는 개울물 소리도 들려왔다. 햇빛은 바로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려 아련하게 초원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아름다운 경치에 감동해
부드러운 풀과 하늘거리는 꽃밭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금빛을 머금은
따뜻한 대기를 맛보았다. 에드워드와 그 기분을 나누고 싶어 반쯤
돌아섰지만, 그는 내가 생각한 것처럼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지 않았다.
깜짝 놀라 그를 찾으려고 홱 돌아섰다. 그는 아직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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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자리에 서서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초원의 아름다움에 취해 오늘 보여주기로 약속했던 햇볕의 수수께끼를
깜박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닫았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향해 한 걸음 되돌아갔다. 그의 눈빛은


내키지 않는 듯 아주 조심스러웠다. 나는 그에게 용기를 복돋아주느라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가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그가 경고신호를
보내듯 한 손을 들었으므로, 나는 머뭇거리며 제자리에서 발을 앞뒤로
굴렀다.

에드워드가 심호흡을 하더니 정오의 눈부신 태양 아래로 걸어 나왔다.

13. 고백

햇빛 아래서 보는 에드워드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오후 내내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면서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제 사냥을 다녀와
조금 홍조를 띄기는 했지만 그의 새하얀 살갗은 자잘한 다이아몬드 수천
개가 박힌 것처럼 반짝거렸다. 지금 그는 반짝이는 팔과 조각 같은 가슴을
셔츠 사이로 살짝 드러낸 채 풀밭에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물론 잠을
자는건 아니지만 영롱하게 반짝이는 창백한 보랏빛 눈꺼풀은 감겨 있었다.
그는 대리석처럼 매끄럽고 수정처럼 반짝이는 이름 모를 돌로 깎아놓은
완벽한 조각상 같았다.

그의 입술이 이따금씩 움직였지만 너무 빨라 바르르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말을 했냐고 묻자 그는 노래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음역이
너무 낮아서 내게는 들리지 않는 노래.

공기는 내 맘에 쏙 들 정도로 건조하지는 않았지만 나 또한 햇살을


만끽했다. 나도 에드워드처럼 누워서 따뜻한 햇볕에 얼굴을 드러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눈을 떼고 싶지 않아 무릎에 턱을 올려놓고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에 내 머리칼이 휘날렸고, 꼼짝 않고
누워 있는 에드워드 주변에서 풀잎이 하늘거렸다.

처음에는 그토록 장관이었던 초원 풍경도 그의 장엄한 아름다움 앞에는


빛을 잃었다.

너무 아름다워 현실로 믿기지 않았다. 혹시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면서, 머뭇머뭇 손을 뻗어 손가락 하나로 그의 반짝이는 손등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새틴처럼 매끄럽고 돌처럼 차가운 완벽한 감촉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내가 눈을 들어올리니 그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냥 뒤끝이라 오늘 그의 눈은 연하고 따뜻한 버터사탕
빛깔이었다. 완벽한 그의 입술에 어느새 희미하게 웃음기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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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 안 나?"

그가 장난스레 물었지만,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는 진실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다른 때보다 특별히 더 겁나진 않아."

그의 얼굴 가득 웃음기가 번지며 새하얀 이가 햇볕에 반짝거렸다.

나는 조금 더 가까이 가 손가락을 다 뻗어 손끝으로 그의 팔뚝을


어루만졌다. 손가락이 떨리는 게 내 눈에도 보일 정도니 에드워드가 그걸
놓칠리 없었다.

"혹시 싫어?"

그가 다시 눈을 감는 걸 보고 내가 물었다.

"아니. 어떤 느낌인지 넌 상상도 못할걸."

그가 눈을 감은 채 대꾸하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의 팔 근육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팔꿈치 안쪽의 푸르스름한


핏줄을 따라 올라갔다. 그의 손을 뒤집으려고 내가 다른 손을 뻗었다. 그가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손바닥이 위로 보이도록 뒤집었다.
깜짝 놀라 내 손길이 잠시 얼어붙었다.

"미안해."

그가 중얼거렸다. 고개를 드니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다시 나를 보고


있었다.

"너랑 있으면 마음이 너무 편해서 자꾸 혼자 있을 때처럼 행동하게 돼."

나는 그의 손을 이리저리 들어 보며, 손바닥에 반사되는 햇빛을 감상했다.


나는 그의 피부에 숨겨진 면이라도 있는지 찾아보려고 그의 손을 내 눈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봐. 네 생각은 왜 알 수가 없는지 난 아직도


이상하니까."

속삭이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갑자기 강렬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모르고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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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겠다."

그의 말투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건 나만의 망상인 걸까.

"무슨 생각했는지 아직 말 안 했잖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도 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또?"

"네가 진짜라는 걸 믿을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고, 내 두려움이 없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네가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차마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해 말할 수 없는지 몰라도, 나에겐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들렸다.

"그것도 분명 생각해 볼 일이긴 하지만, 내가 말하는 두려움은 그게


아니야."

너무 빨라 제대로 보지 못한 사이 그는 반쯤 일어나 오른팔에 몸을


지탱하고 앉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왼손을 내 손에 맡기고 있었으며, 천사
같은 그의 얼굴은 내 눈에서 겨우 한 뼘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느닷없는
그의 움직임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을 법도 한데,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나에게 마법을 걸었다.

"그럼 뭐가 두려운 거야?"

그가 진지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전에 딱 한번 겪은 것처럼 그의 서늘한


숨결이 내 얼굴에 와 닿았다. 달콤하고 감미로운 체취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향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다가가 숨을 들이마셨다.

다음 순간 그가 내 손을 뿌리치고 사라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스무걸음쯤 떨어진 초원 반대편 가장자리의 커다란 전나무 그늘에 서
있었다. 그림자 때문에 그의 눈은 검게 보였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어떤지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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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충격과 상처를 한꺼번에 받은 표정이 되었다. 텅 빈 손이 아프게


느껴졌다.

"미안......해......, 에드워드."

내가 속삭였다. 그가 들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잠깐만."

그가 내 귀에 들리도록 외쳤다. 나는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10 초가 지났을까, 그가 천천히 걸어서 도라왔다.


그는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유연한 동작으로 바닥에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나에게 박혀 있었다. 그는 두 번
심호흡을 한 뒤, 사과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 미안해. 나도 어느 면에선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해 할


수 있을까?"

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나는 그의 농담에 제대로 웃을 수가 없어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혈관에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걸 느끼면서, 서서히 위험하다는 걸 깨닫았다.
에드워드는 지금 앉아 있는 곳에서도 내 체취가 변한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미소가 슬픈 조롱으로 바뀌었다.

"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육식동물이야. 그렇지 않아? 내 목소리, 내


얼굴, 심지어 내 체취까지 얼 유인하고 있으니. 마치 그것들이 나한테 꼭
필요한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눈앞에서 사라져, 0.5 초 만에 초원을


한바퀴 돌아 조금 전 바로 그 나무 아래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네가 날 피해 도망이라도 칠 수 있다는 듯이 말이지."

그가 씁쓸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한 손을 뻗어 우지끈 소리를 내며 지름이 60 센티미터쯤 될 것 같은


굵은 전나무 가지를 꺾었다. 그러고는 기다란 가지를 잡고 균형을 잡는 듯
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나무를 향해 던졌고, 날아온 가지에 부딪힌
나무는 큰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다음 순간 그는 두 걸음이면 닿을 거리로 다가와 흡사 석상처럼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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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네가 나와 싸울 상대라도 된다는 듯이."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겁을 먹고 얼어붙은 채 앉아 있었다. 나는 그가


조심스레 지켜온 겉모습을 그토록 스스럼없이 벗어던진 걸 본 적이 없었다.

인간이 아니란 걸 그토록 실감한 적도......, 그가 그토록 더 아름다워


보인 적도 없었다. 나는 뱀의 눈빛에 사로잡혀 얼어붙은 새처럼 창백한
얼굴로 눈만 휘둥그레 뜬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감출 수 없는 흥분으로 이글거렸다. 그러나 불과


몇 초 만에 그 일렁임이 사그라졌다. 그의 표정은 오랜 슬픔의 가면 속으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두려워하지 마."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가 벨벨처럼 매끄럽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약속할게...... 널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 하겠어."

그는 나보다 자신을 확신시키기 위해 더 애쓰는 것 같았다.

"두려워하지 마."

그는 아주 천천히 한 걸음 다가서며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그러고는


일부러 서두르지 않는 듯 조심스럽고 느린 동작으로 자리에 앉아 나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날 용서해. 이제 충분히 자제할 수 있어. 잠시 너 때문에 허를 찔린 거지.


지금은 얌전해졌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는 내 대꾸를 기다렸지만 난 여전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오늘은 나, 갈증 같은 거 안 난다니까."

그가 윙크를 하자 이번에는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지만 숨결이 고르지


않아 웃음소리가 부자연스러웠다.

"괜찮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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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는 조심스레 대리석 같은 손을 다시 내 손에 쥐어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매끈하고 차가운 그의 손을 내려다본 뒤, 다시 그의 눈을 보았다.


회개하는 듯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다시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일부러
손끝으로 그의 손 모양을 훑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소심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주 웃어주는 그의 표정이 눈부셨다.

"내가 무례하게 굴기 전에,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지?"

그가 한 세기쯤 전에나 썼을 법한 정중한 말투로 물었다.

"솔직히 난 기억 안 나."

그는 웃음을 지었지만, 나를 나무라는 표정이었다.

"뻔한 이유 말고......, 네가 두려워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맞다."

"그래서?"

나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매끄럽고 반짝이는 그의 손바닥을 무심히


쓰다듬었다. 침묵이 흘렀다.

"내가 이렇게 한심한 놈인지 미처 몰랐는데."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는 문득 나처럼 그도 이


모든 일을 처음 겪고 있음을 깨닫았다. 헤아릴 길 없이 수많은 경험을
했겠지만, 그 역시도 어렵게 느끼고 있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자 용기가
생겼다.

"내가 두려운 건...... 네 곁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야. 나는 나에게 허락된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네 곁에 머물고 싶으니까."

나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했다. 속마음을 털어놓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 정말로 두려워할 만한 일이지. 나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 네


신상을 위해 절대로 좋은 일이 못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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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래전에 난 떠났어야 했어. 지금이라도 떠나야겠지. 하지만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군."

"난 네가 떠나는 거 싫어."

내가 또다시 눈을 내리깔며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떠나야 하는 거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난 더없이 이기적인


놈이거든. 너랑 함께 있는 걸 너무 좋아해서 문제지."

"다행이야."

"그럼 안 된다니까!"

그가 이번에는 좀더 부드럽게 손을 뺐지만, 목소리는 거칠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아무리 거칠어도 어느 인간의 목소리보다 아름다웠다. 그의
갑작스런 기분 변화는 언제나 따라잡기 힘들어 늘 나를 홀린 듯 한 박자
뒤처졌다.

"내가 원하는 건 너랑 함께 있는 것 뿐이 아니야! 그건 절대 잊지 마. 난


다른 사람보다 특히 너한테 더 위험한 존재란 걸 절대 잊어선 안 되는
거야."

그가 돌연 말을 멈춰 돌아보니, 멍하니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 네가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어. 특히 마지막 부분은."

그는 또다시 기분이 바뀌었는지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널 다시 겁먹게 하지 않으면서......, 음."

그는 다시 내 손에 자기 손을 내려놓았다. 나는 양손으로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가 우리 손을 내려다보았다.

"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참 좋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잠시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이 저마다 좋아하는 맛이나 향이 다르다는 거 알지? 어떤 사람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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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식으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먹는 거에 비유해서 미안하지만, 달리 생각할 방법을 모르겠군."

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도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모두 근본적인 체취가 달라서, 저마다 다른 냄새가 나.


알코올 중독자는 시큼한 맥주 냄새 가득한 맥주 창고에 가둔다면 그 사람은
기꺼이 맥주를 마시겠지. 하지만 그 사람이 원해서라면, 예컨대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는 중이라면 참을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또 다른 방 한
가운데 몇백 년쯤 묵은 아주 귀한 브랜디나 최고급 코냑 한 잔이 있고
방안에 달콤하고 그윽한 향기가 가득하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할 것
같아?"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읽으려고 애를 쓰며 말없이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에드워드가 먼저 침묵을 깼다.

"아무래도 그건 올바른 비교가 아닌 것 같다. 브랜디를 거부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일 것 같군. 알코올 중독자 대신 헤로인 중독자로 바꿔야겠어."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헤로인 종류라도 된다는 거야?"

분위기를 밝게 해보려고 내가 놀리듯 물었다.

내 의도를 알아차린 그가 재빨리 미소했다.

"응. 넌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헤로인이야."

"그런 일이 자주 있어?"

내 물음에 그는 생각에 잠기듯 멀리 나무 꼭대기를 응시했다.

"남자 형제들끼리 그에 대해 얘길 나눠봤어. 재스퍼는 너희들 모두의


체취가 다 같다더군. 재스퍼는 맨 나중에 우리 가족이 됐거든. 절제하는 것
자체만 해도 재스퍼한테는 힘든 일이야. 체취나 향의 차이를 구분할 만큼
민감해질 시간이 아직 없었던 거지."

미안한 표정으로 그가 얼른 나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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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괜찮아. 내가 언짢아지거나 겁을 먹을까 봐 걱정하진 마. 그게 네가


생각하는 방식이잖아. 나도 이해할 수 있어. 아니,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은 할게. 그냥 네가 편한 대로 설명하면 돼."

그는 심호흡을 한 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재시퍼는 내가 너한테 느낀 것처럼...... '끌리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더군. 그러니 생각해 보나 마나겠지. 에밋은
오래전에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내 말을 이해했어. 에밋은 그런 적이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이 다른 한 번보다 더 강했다고 했어."

"너는?"

"한 번도 없었어."

그의 말이 따뜻한 바람에 잠시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에밋은 어떻게 했는데?"

내가 침묵을 깨며 물었다.

해서는 안 될 질문이었다. 그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내 손에 잡혀 있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기다렸지만, 그는 대답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알 것 같아."

마침내 내가 말했다.

에드워드가 얼굴을 들었다. 그의 표정은 뭔가를 애원하듯 수심에 차


있었다.

"유혹에 강한 자들도 가끔은 실수를 하잖아. 안 그래?"

"뭘 묻는 거야? 내 허락이라도 구하는 거니?"

생각보다 내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그가 솔직히 털어놓느라 얼마나


힘들지 생각하며 나는 말투를 좀더 부드럽게 내려고 노력했다.

"그럼, 희망이 없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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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의 죽음을 논하면서, 얼마다 더 침착하란 말인가!

그는 곧바로 회한의 빛을 띠었다.

"아니, 아니야! 당연히 희망은 있어! 물론 난 절대로......"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내 눈을 파고들었다.

"우린 달라. 에밋은...... 그 사람들은 에밋이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들


이었어.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이고, 그때 에밋은 지금보다 훈련도 덜
됐고...... 그러니 조심하지도 않았겠지."

에드워드는 입을 다물고 내 생각을 꿰뚫어보려는 듯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만일 우리가...... 어두운 골목길 같은 데서 만났다면......"

나도 말꼬리를 흐렸다.

"그날 학생들이 가득한 교실 한가운데서 벌떡 일어나지 않으려고 내가


얼마나......"

그가 느닷없이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네가 내 옆을 스쳐 걸어았을 때, 바로 거기서 난 칼라일이 우릴 위해


쌓아온 모든 것을 망칠 수도 있었어. 그렇게 오랜 세월 내가 마지막까지
남은 갈증을 부인하며 살지 않았다면, 나 자신을 막지 못했을 거야."

그는 숲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엄숙한 얼굴로 나를 흘끔


돌아본 순간, 우리는 둘 다 같은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넌 내가 미친 줄 알았겠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날 미워할 수


있는지......"

"나한테 넌, 나를 파멸시키려고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어. 네


피부에서 풍기는 향기는......, 첫날은 그 향기 때문에 완전히 돌아버릴 것
같더군. 그 한시간 내내, 나는 너랑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널 꼬여낼
방법을 수백 가지는 생각했다. 그리고 가족을 떠올리고는,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냐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그 생각을 물리쳤지.
그래서 너를 유혹해 나를 따라오게 만들기 전에 어서 달아나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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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씁쓸한 기억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느라 내 표정이 평정을 잃자


에드워드는 대번에 눈치 챘다. 짙은 속눈썹 아래서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꿈을 꾸듯 번득였다.

"넌 따라왔을 거야."

"분명 그랬겠지."

나는 침착하게 대꾸하려고 애썼다.

그는 강렬한 눈빛에서 나를 풀어주고는 내 손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당장 수업 시간표를 바꿔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쓸데없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네가 거기 있었다......, 그렇게 가까이. 작고 따뜻한 방에 네
체취가 가득해 난 다시 미칠 것 같았지. 거기서 정말 난 널 해치울 뻔 했어.
거긴 내가 상대해야 할 다른 인간이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그의 시각을 통해 내 기억음 더듬으며 새삼 그날의 위험을 깨닫자 따뜻한


햇볕 속에서도 소름이 돋았다. 가엾은 코프 선생님. 나는 뜻하지 않게 그
교직원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 했다는 사실에 다시 몸을 떨었다.

"하지만 난 참았어. 어떻게 참았는지는 모르겠어. 난 널 기다리면 안


된다고, 학교에서 널 집까지 따라가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억제했어. 밖에
나와 네 체취를 맡지 않으니까, 생각도 맑아지고. 옳은 결정을 내리는게
쉬워지더라. 나는 형제들을 집 근처에 내려준 뒤 곧장 병원에 있는
칼라일에게 가서 떠나겠다고 말했어. 내가 얼마나 나약한지 다른 가족에게
털어놓는 건 너무 수치스러웠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것만 눈치 채고 있었지."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우선 칼라일과 차를 바꿨어. 그 차엔 휘발유가 가득했고, 난 어디서든


멈추고 싶지 않았거든. 차마 집에 가서 에스미를 만날 용기가 없었어.
에스미는 나를 그대로 떠나보낼 사람이 아니야. 떠날 필요까진 없다고
분명히 나를 설득하려 했을 거야...... 다음날 아침에 난 이미 알래스카에
있었어."

그는 대단히 비겁한 행위라도 고백하듯 부끄러운 말투였다.

"옛날에 알던 이들과 거기서 이틀을 보냈지만...... 집이 그리웠다. 나


때문에 에스미와 다른 가족들이 괴로워하는게 싫었지. 산속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생각하니 네가 그토록 견디기 힘든 유혹이란 게 믿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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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어. 달아나는 건 나약한 짓이라고 나 자신을 나무랐지. 예전에 내가


겪은 유혹들은, 물론 이렇게 강렬하지도 않았고 비교할 수도 없지만,
어떻든 견뎌냈으니까. 난 강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네가 뭔데, 대수롭지
않은 계집애 하나 때문에......"

갑자기 그가 씩 웃었다.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쫓겨나야 하는 건가 싶은 거야. 그래서


돌아왔고......"

그가 먼 곳을 응시했다.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를 다시 만나기 전에 평소보다 더 열심히 사냥을 하고 먹으면서 미리


준비를 했어. 너를 다른 인간들처럼 대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 강다하고
자신했지. 결국 그건 내 오만이더군.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네 생각을
미리 읽을 수 없다는 것도 나한테는 복잡한 문제였다. 제시카의 마음을
통해서 네 생각을 들어보는 식으로 우회해서 누군가를 파악하는 건
익숙하지 않은데다...... 제시카의 마음이 원래 네 생각을 그대로 담은 것도
아니어서, 몹시 성가셨지. 게다가 네가 한 말이 정말로 네 진심인지도 알
수 없잖아. 정말 대단히 짜증나는 일이더군."

그는 생각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가능하면 처음 만난 날 내 행동을 잊어주길 바랐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대하듯 너한테도 말을 걸었어. 실은 네 생각을 어떻게든
읽어보겠다는 생각에 더 열심이었지. 하지만 너는 너무 흥미로운
상대였고, 나는 네 표정에 어느새 빠져들어 있었다......, 게다가 이따금씩
네가 손이나 머리칼을 흔들어 네 체취가 나에게 다시 전해지면 난......
그뿐이겠어? 그러다 네가 내 눈앞에서 거의 박살날 뻔한 순간까지 있었지.
그 순간에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나중에 생각해 보니 완벽한 핑계가
있더군. 만일 내가 널 구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네 피가 내 눈앞에 확
흩뿌려졌다면, 난 분명 자제하지 못하고 우리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냈겠지. 하지만 그 핑계는 나중에야 비로소 생각난 거였어. 당시에 내
생각은 온통 '이 앤 안 돼!' 뿐이었으니까."

에드워드는 고통스러운 고백에 심취한 듯 눈을 감았다. 나는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워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평범한 상식대로라면 나는 겁에 질려
벌벌 떨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마침내 이해하게 되어 안심하고 있다니.
심지어 방금 그가 내 생명을 빼앗기를 갈망한다는 고백을 들으면서도, 나는
마음 가득히 그가 겪은 고통에 연민을 느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나는 마침내 입을 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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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선?"

그의 시선이 나를 찾아들었다.

"난감하더군.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를 위험에 빠뜨렸고,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너한테 내가 휘둘리게 됐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지. 마치 널 죽여야 할
또 다른 동기라도 필요한 듯이 말이야."

죽인다는 말이 흘러나온 순간 우리 둘 다 움찔했다. 재빨리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외려 반대의 효과를 불러왔지. 로잘리와 에밋, 재스퍼는


드디어 때가 됐다는 식으로 나를 다그쳤고, 그 때문에 크게 싸웠어. 그렇게
심하게 싸운건 처음이었을 거야. 칼라일은 내 편이었고, 앨리스도
마찬가지였어."

앨리스의 이름을 말하며 그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에스미는 나더러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그 어느 쪽이든


선택하라고 했지."

그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저었다.

"다음 날 나는 네가 얘기를 나눈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엿보느라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 그러고는 네가 나와 한 약속을 지켰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도저히 널 이해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너와 더 엮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난 널 멀리하려고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날마다 네 피부와 숨결, 머리칼에서 풍겨오는 향기는......
첫날만큼이나 힘겹게 나를 뒤흔들었지."

다시 내 눈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빛은 놀라우리만치 부드러웠다.

"그 모든 걸 다 감안해도, 바로 지금, 보는 사람도 없고 날 막을 이유도


전혀 없는 지금 널 해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처음 만난 순간에 우리 존재를
노출시키는 편이 훨씬 마음 편했을 거야."

나는 인간이다 보니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이사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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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내 본명을 조심스레 발음하고는 여유로운 한 손으로 장난스레 내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가벼운 그의 손길에도 온몸에 충격이 번져갔다.

"벨라, 널 해친다면 나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살아갈 수가 없을 거야. 그


생각이 날 얼마나 괴롭혔는지 넌 모르겠지."

그는 또다시 수치스러운 듯 시선을 떨구었다.

"창백하고 싸늘한 모습으로 식어버린 네 모습을 생각만 해도......, 빨갛게


얼굴을 붉히는 너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고, 내 가식을 꿰뚫어볼 때면
예리하게 반짝이는 네 눈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난 견딜 수가
없어."

에드워드가 고통으로 가득 찼으면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눈동자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너는 나한테 가장 중요한 존재야. 영원히. 가장 중요한 존재."

갑작스런 반전에 내 머리가 팽글팽글 돌았다. 눈앞에 닥친 내 죽음을


유쾌하게 논하던 우리는 문득 자기 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나도 입을 열었다.

"너도 내 마음 이미 알잖아.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건...... 한 마디로


말해서 너랑 헤어져 있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뜻이야. 난 바보거든."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넌 정말 바보라니까."

그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와 눈을 마주치며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는 서로의 바보스러움과 그 순간의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해서 사자가 새끼 양과 사랑에 빠져버렸지......"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고백에 흥분한 마음을 숨기느라 시선을


돌렸다.

"참 바보 같은 양도 다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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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숨을 쉬었다.

"참 정신 나간 사자도 다 있지."

그가 한참이나 어두운 숲을 응시했으므로,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왜......"

나는 말문을 열었다가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말꼬리를 흐렸다.

에드워드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의 얼굴과 이가 햇살에 눈부시게 빛났다.

"응?"

"아까 왜 달아났는지 말해줘."

그의 미소가 사라졌다.

"너도 알잖아."

"아니, 그러니까 내가 뭘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고 싶어. 그래야 앞으로


조심해야 할 행동이 뭔지 배울 수 있잖아. 예를 들어서 이런 건......"

내가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괜찮은 것 같아."

그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넌 잘못한 거 없어. 벨라. 내 잘못이니까."

"그래도 더 힘들게 만들지 않도록 나도 최대한 돕고 싶단 말이야."

"글쎄......"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랑 가까이 있는 것 자체가 힘들었어. 인간들은 대부분 본능적으로


우리가 풍기는 낯선 느낌에 치를 떨면서 우리를 멀리하거든...... 네가
그렇게 가까이 다가올 줄은 예상 못했어. 네 목덜미에서 풍기는 냄새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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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는 내 기분이 상했는지 살피며 얼른 말을 멈추었다.

"알았어. 목을 내놓지 말아야겠군."

나는 갑자기 경직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가볍게 말했다. 그가


웃음을 터뜨리는 걸 보니 효과가 있었다.

"아니야,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냥 좀 놀라서 그랬달까."

그는 내 손에 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내 목덜미에 살며시 갖다 댔다.


나는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싸늘한 그의 손길, 그건 내게 겁을
먹으라고 일러주는 자연의 경고였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두려움이 일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봐, 아무렇지도 않잖아."

그가 말했다.

내 혈관에서는 피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이런 내 반응이 모든 걸 더


어렵게 만들고 있음을 깨닫으며 나는 빠르게 돌아가는 혈액의 속도를 늦출
수 있기를 바랐다. 에드워드도 내 심장박동을 분명히 들을 수 있을 듯 했다.

"뺨이 달아오르면 넌 참 사랑스러워."

그가 중얼거리며 다른 손도 마저 들어올렸다. 내 양손은 힘없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살며시 내 뺨을 어루만지던 그가 대리석 조각 같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움직이지 마."

난 이미 얼어붙어 있는데도 그가 속삭였다.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내 그의 차가운


뺨이 내 목덜미 우묵한 곳에 닿았다. 나는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다른 어느 부분보다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햇살에 반짝이며
바람에 나부끼는 그의 갈색 머리칼을 응시하며, 그의 고른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일부러 더 천천히 움직이는 듯한 그의 손이 내 목으로 내려갔다. 내가


부르르 떨자 그가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의 손은멈추지
않고 부드럽게 내 어깨까지 내려가 그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내 쇄골에 코를 묻었다. 이어 그는 내 가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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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시 뺨을 대고 휴식을 취했다. 마치 내 심장 소리를 듣는 듯이.

"아아."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꼼짝도 않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드디어 내 맥박이 제 속도를 찾았지만, 그는 어떤
말도, 움직임도 없이 나를 안고 있었다. 여차하면 내 목숨이 끝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너무 빨라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순간에
숨이 끊어지겠지. 하지만 조금도 겁이 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어루만지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따.

이윽고, 그가 나를 놓아주었다. 아쉽게도 너무 일찍. 그의 눈은


평화로웠다.

"다시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그가 흡족한 듯 말했다.

"너한텐 어려운 일이었어?"


"내가 상상한 것만큼 나쁘진 않았어. 넌?"

"나도 나쁘지 않았어."

내 대꾸에 그가 미소를 지었다.

"무슨 뜻인지 알잖아."

나도 미소를 지었다.

"자, 봐."

그가 내 손을 잡아 자기 뺨에 댔다.

"따뜻해진 거 느껴져?"

늘 얼음처럼 차갑던 그의 피부가 제법 따뜻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


그를 본 순간부터 끊임없이 꿈꿔왔던 대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그 온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움직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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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삭였다.

에드워드만큼 꼼짝없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고 내 손길 아래 놓인 조각상처럼 얼어붙었다.

나는 혹시라도 잘못된 행동을 할까 조심스러워, 좀전에 에드워드가 했던


것보다 더 천천히 손을 놀렸다. 나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다, 부드러운
눈꺼풀과 눈 밑에 생긴 자줏빛 그림자를 섬세하게 쓰다듬었다. 완벽한 그의
코와 흠잡을 곳 없는 그의 입술도 더욱 조심스런 손길로 간질였다. 내 손이
닿자 그의 입술이 벌어져 서늘한 그의 입김이 손끝에 느껴졌다. 나는 좀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체취를 들이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그를
밀어붙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쯤에서 손을 내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가 눈을 뜨자, 눈빛에서 허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허기가 아니라, 다시 심장이 빨라지고 뱃속이 졸아드는 듯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너한테도


전할 수 있다면 좋겠군. 그럼 너도 이해할 텐데."

에드워드가 속삭였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조심스레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얘기해 봐."

내가 흐트러진 호흡 사이로 말했다.

"말로는 설명 못할 것 같아. 이미 말한대로...... 나는 너에게 허기와


갈증을 느껴야 하는 비참한 존재야. 그런 부분은 너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그가 슬며시 웃었다.

"넌 허락될 수 없는 물건에 중독된 적이 없으니 아마 완벽하게 공감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가 손끝으로 가볍게 내 입술을 어루만지자 나는 또 한번 전율했다.

"또 다른 허기 같은게 느껴져. 나한텐 너무 낯설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허기야."

"그거라면 의외로 내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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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엔 익숙하지 않아. 언제나 이런 느낌인가?"

"나한테 묻는 건가? 나도 잘 몰라. 전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거든."

그가 내 양손을 붙들었다. 그의 강인한 손에 잡힌 내 손이 참 나약해


보였다.

"난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어. 과연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나는 눈빛으로 그에게 주의를 주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그의


단단한 가슴에 뺨을 기댔다. 내 귀에는 그의 숨소리 밖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거면 충분해."

나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너무도 인간답게, 그가 두 팔로 나를


안으며 내 머리칼에 뺨을 기댔다.

"생각보다 잘하네 뭐."

내가 말했다.

"나도 인간으로서의 본능이 있어. 깊숙이 파묻혀 있겠지만 분명


있을거야."

우리는 또다시 한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나는 에드워드도 나만큼 몸을


움직이기 싫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햇살이 점점 옅어졌고, 숲에서
드리워진 긴 그림자가 우리를 가리기 시작했으므로 한숨이 나왔다.

"가야겠다."

"내 생각은 못 읽는다더니?"

"아무래도 점점 또렷해지는 것 같은데."

그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졌다. 그는 내 어깨를 잡았고, 나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뭐 하나 보여줄까?"

그가 갑자기 신이 난 눈빛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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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보여주려고?"

"내가 숲에서 어떻게 돌아다니는지 보여줄게."

그가 뜨악한 내 표정을 본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 넌 안전할 테니. 훨씬 더 빨리 네 트럭까지 갈 수 있어."

그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너무도 멋지게 씩 웃는 바람에 심장이 거의


멈추는 듯 했다.

"박쥐로 변하기라도 해?"

내가 조심스레 묻자 그가 난데없이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또 그 소리!"

"그래, 난 네가 언제든 박쥐로 변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겁쟁이 아가씨, 얼른 내 등에 업히기나 해."

나는 그가 농담을 한 거라 생각했지만, 진심인 모양이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에드워드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먼저 손을 뻗었다. 내 심장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에드워드가 내 생각을 읽을 수 없다지만, 그는
심장박동 소리만 들어도 내 속마음을 알 거다. 그는 가벼운 솜털을
들어올리 듯 나를 등에 업고는 내 팔과 다리로 자기 몸을 꽉 조이도록 해
놓았다. 바위에 메달린 기분이었다.

"네가 평소 메고 다니는 배낭보다 좀 무거울걸."

내가 경고하자 에드워드는 코웃음을 쳤다. 그의 눈동자가 어이없다는 듯


또르르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흥분한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갑자기 그가 내 손을 잡아당겨 얼굴에 대고 깊이 숨을 들이키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러면 언제나 쉬워진다니까."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그와 함께 있으면서 정말로 죽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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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한 적이 있었다 해도, 그 순간의 느낌에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는 낮게 드리워진 숲속 나뭇가지 사이로 어둠을 뚫고 총알처럼,


유령처럼 달려갔다. 발이 땅에 닿는 느낌도 없었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숨결은 조금도 가빠지지 않았고, 조금도 힘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들이, 우리와 한 뼘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무서운 속도로 옆을
지나쳤다.

서늘한 숲의 공기가 내 뺨을 너무 빠르게 스쳐 불이 붙은 것 같았지만


나는 너무 무서워 차마 눈도 감지 못했다.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바보같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멀미 때문에
지독한 현기증을 느꼈다.

마침내 무서운 달리기가 끝났다. 에드워드의 비밀 초원에 가느라 오전


내내 등산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단 몇 분 만에 트럭 앞에 와 있었다.

"재미있지?"

그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내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움직이려 했지만


온몸의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다리는 그의 몸에 달라붙은 듯 얽혀
있고, 머리는 정신없이 휘휘 돌았다.

"벨라."

그가 이번에는 좀 걱정스러운 듯 내 이름을 불렀다.

"나 좀 누워야 할 것 같아."

내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아, 미안해."

에드워드는 여전히 내가 내리기를 기다렸지만 난 여전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네가 도와줘야 할 것 같아."

내가 말했다.

그는 그제야 나직이 웃으며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내 팔을 조심스레


풀었다. 그의 엄청난 손 힘을 막을 기운이 내게는 없었다. 이어 그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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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처럼 앞으로 돌려서 안았다. 그는 잠시 나를 안고 있다가 조심스레


푹신한 이끼 위에 앉혔다.

"기분이 어때?"

그가 물었다. 나는 미친 듯이 머리가 어지러워 기분이 어떤지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어지러울걸, 아마."

"무릎 사이로 머리를 숙여 봐."

그의 말대로 하자 조금 진정이 됐다. 나는 머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가만히


잡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가 내 옆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드디어 머리를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귀에서는 아직 윙윙
소리가 났다.

"좋은 생각은 아니었나 봐."

그의 말에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아니야. 아주 재미있었어."

"하! 너 지금 유령처럼 창백해. 아니, 안색이 나만큼이나 하얗게 질려


있다고."

"눈을 감을 걸 그랬어."

"다음번엔 잊지 마."

"다음번이라니!"

내가 투덜거렸지만 그는 여전히 기분이 좋은지 신나게 웃어댔다.

"잘난 척은."

"눈을 떠봐, 벨라."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의 얼굴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그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다시


아득해졌다.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지나친 아름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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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면서 내가 생각한 게 있어......"

그가 말을 잠시 멈추었다.

"나무랑 부딪치지 않아야겠다는 거겠지."

"바보 같기는. 달리기는 나에게 제 2 의 본능과 같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지."

그가 후후 웃었다.

"잘난 척은."

내가 다시 투덜거리자 그는 웃음을 지었다.

"그게 아니야. 해보고 싶은 게 생각났어."

그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다시 감싸자,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머뭇거렸지만, 그건 인간이 머뭇거리는 것과는 달랐다.


남자가 여자에게 키스하기 전에 여자의 반응을 재느라,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생각하느라 머뭇거리는 것과는 다른 망설임이었다.
인간이라면 때로 키스 자체보다 기대감에 휩싸인 직전의 순간을 최대한
즐기기 위해서 머뭇거릴 수도 있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이게 안전할지, 아직 그의 욕구를 확실히 자제할 수 있는지


자신을 실험하느라 머뭇거리는 중인 거다.

이어 그의 차갑고 매끄러운 입술이 아주 살며시 내 입술에 포개졌다.

우리 둘 다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건, 바로 내 반응이었다.

내 살갗 밑에서 피가 들끓어 입술에 불이 붙는 듯했다. 내 숨결이


거칠어졌다. 나는 그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파묻고 힘껏 당겼다. 그의
몽롱한 체취를 들이마시느라 내 입술이 벌어졌다.

이내 돌처럼 굳어버린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그는 부드럽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내 얼굴을 밀어냈다. 나는 눈을 뜨고 굳은 그의 표정과
바라보았다.

"앗."

"그 정도론 만회가 안 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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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의 눈빛은 거칠고, 몹시 자제력을 발휘한 듯 턱이 불끈거렸지만,


목소리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내 얼굴을 여전히 감싸 쥐고는
눈빛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럼 어떻게......"

나는 그와 좀더 거리를 두려고 고개를 뒤로 빼려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야, 참을만 했어. 제발 잠깐만 기다려 줄래?"

절제된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나는 그의 눈동자에 떠올랐던 흥분이 서서히 사그라져 부드러운 눈빛으로


변하는 걸 지켜보았다. 이내 그가 꼬마 도깨비처럼 장난스레 씩 웃었다.

"됐어."

그는 스스로에게 몹시 흡족한 모양이었다.

"참을만 해?"

내가 묻자 그가 큰 소리로 웃었다.

"난 생각보다 강하군. 알고 나니 기쁜데."

"나도 같은 말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미안해."

"넌 어차피 인간에 불과하잖아."

"그거 참 고마운 말이네."

내가 뿌루퉁하게 쏘아붙였다.

그는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날렵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뜻하지


않게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와 닿지 않도록 조심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어색하게 그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아직 균형감각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달려온 것 때문에 어지러워? 아니면 키스 후유증인가?"

천사 같은 얼굴에 아무런 근심도 없이 유쾌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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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인간적이었다. 그는 내가 알아온 사람과는 전혀 다른


에드워드였다. 나는 전보다 더 그에게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그와
헤어진다는 생각만 해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잘 모르겠지만 아직 어지러워. 아마 둘 다 영향이 있겠지."

"내가 운전해야겠다."

"정신 나갔어?"

"난 네가 멀쩡할 때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어. 넌 반사신경이 워낙


느리잖아."

그가 놀려댔다.

"그건 사실이지만, 내 신경이나 트럭은 지금 네 운전솜씨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

"부탁이니 좀 믿어보시지."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열쇠를 꽉 움켜쥐었다. 나는 입술을 꽉 다물고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어림도 없어."

그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나는 에드워드가 서 있는 곳을 지나 운전석으로 걸어갔다. 내가


비틀거리지만 않았다면 그도 내가 운전하도록 내버려뒀을 것이다. 아니,
안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가 내 허리를 움켜잡았다.

"벨라, 지금까지 난 널 살려두느라 이미 별의별 짓을 다 했어. 그런데


똑바로 걷지도 못하는 지금 운전석에 앉힐 수야 없지. 게다가 '친구가
음주운전을 하게 내버려둔다면 사람이 아니'지."

그는 공익광고를 인용하며 껄껄 웃었다. 그의 가슴에서 못 견디게 달콤한


향기가 풍겨나왔다.

"음주운전이라니?"

"너는 내가 옆에 있기만 해도 몽롱하게 취하잖아."

그가 다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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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나도 인정해."

한숨이 나왔다. 이미 어쩔 수가 없었다. 그에 관해서라면 나는 뭐든


거부할 수가 없었으니까. 나는 열쇠를 높이 들어올렸다 떨어뜨린 뒤, 그가
번개처럼 빠른 손놀림으로 열쇠를 잡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살살 다뤄. 내 트럭은 노인이란 말이야."

"잘 생각했다."

"그럼 넌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야? 내가 옆에 있어도?"

늘 변하무쌍한 그의 표정이 부드럽고 다정하게 변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더니 그가 고개를 숙여 내 입술을 살며시 스치고는 뺨과 귀,
턱을 오가며 살포시 입술을 눌렀다. 나는 몸을 떨었다.

"어쨌든 반사신경은 내가 더 뛰어나잖아."

마침내 그가 중얼거렸다

14. 육체보다 강한 정신

에드워드는 적당한 속도로 운전하는 데도 능숙했다.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지만, 그는 운전에 전혀 힘을 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길은 거의
바라보지도 않았지만, 타이어는 차로 중앙에서 단 1 센티미터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만 운전했다. 가끔
지는 해를 바라보기도 하고, 가끔은 열린 창으로 불어온 바람에 휘날리는
내 머리칼과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린 계속 서로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그는 옛날 음악이 나오는 라디오 방송을 틀더니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는 가사를 모두 알고 있었다.

"50 년대 음악 좋아해?"

내가 물었다.

"50 년대 음악은 좋아. 60 년대나 70 년대 음악보다 훨씬 낫지, 윽!"

그가 몸을 떨었다.

"80 년대 음악도 들어줄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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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몇 살인지 말 안 해줄 거야?"

나는 그의 들뜬 기분이 상하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다행히 그는 여전히 느긋한 얼굴로 웃음을 머금었다.

"아니,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궁금해..... 난 궁금한 게 있으면 잠을 못


자는 타입이란 말이야."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기분 나빠할까 봐 그러지."

에드워드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해를 응시했다. 몇 분이 그냥


흘러갔다.

"얘기 해 봐."

마침내 내가 말했다.

그가 한숨을 쉬며, 운전하는 걸 잊은 사람처럼 한동안 내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내 눈에 떠오른 느낌이 그에게 용기를 준 듯 했다. 그는
자기 피부에 부딪혀 반짝이는, 루비가 뒤섞인 빛을 반사시키고 있는 해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1901 년 시카고에서 태어났어."

에드워드는 말을 멈추고 흘끔 나를 곁눈질했다. 나는 나머지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 조심스레 놀란 표정을 자제했다. 그는 살짝 미소를 짓고
나서 이야기를 이었다.

"칼라일은 1918 년 나를 병원에서 발견했어. 난 열일곱 살이었고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지."

그는 내 귀에도 들릴 듯 말 듯했던 나의 신음 소리를 듣고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때 일은 잘 생각나지 않아. 오래전이기도 하고, 인간이었던 때의


기억은 사라지게 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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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시 생각에 몰두한 듯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칼라일이 나를 구해줬을 때 느낌이 어땠는지는 기억해. 쉬운 일도
아니었고, 잊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지."

"부모님은?"

"부모님은 이미 같은 병으로 돌아가셨고, 나 혼자였다. 칼라일이 나를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지. 돌림병의 혼란 속에서 내가 사라진 걸 아무도
모를 테니까."

"그분이 어떻게...... 너를 구하신 거야?"

에드워드는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어려운 일이었지. 우리로선 그 일을 이루는 데 필요한 자제력을 갖추기가


쉽지 않거든. 역사를 통틀어도 그분 같은 사람을 찾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해."

그가 잠시 또 머뭇거렸다.

"나로선 그저 고통스러울 뿐이었지만."

입매만 보아도 그가 이 주제에 대해 더는 이야기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몹시 궁금했지만 호기심을 억눌렀다.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생각할 게 많았고, 어쩌면 나와 관련된 일인 것도
같았다. 재빠른 그의 생각은 내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까지 미리
알아차린 듯 했다.

에드워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생각을 중단시켰다.

"칼라일은 외로움 때문에 그런 일을 한 거였어. 대개 그런 이유로 선택을


내리는 경우가 많지. 나는 칼라일이 처음 만든 가족이었지만, 그는 곧
에스미도 찾아냈어. 에스미는 절벽에서 떨어졌다더군. 사람들이 곧장
에스미를 병원 시체실로 옮겨왔는데, 아직 숨이 붙어 있었던 거야."

"죽어가는 중이어야 하나 보네. 그게...... 되려면?"

우리는 한 번도 그 결정적인 낱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고, 나는 여전히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아니야. 칼라일이니까 그렇게 한 거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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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겐 절대로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니니까."

아버지 같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의 목소리에서 깊은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칼라일 말로는 약해지면 더 쉽다고는 하더라."

에드워드는 이제 어두워진 도로를 내다보았다. 나는 또다시 그가 그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려 한다는 걸 감지했다.

"에밋하고 로잘리는?"

"그 다음으로 칼라일이 로잘리를 데려와 가족으로 삼았어. 칼라일이 나와


로잘리가 자기와 에스미 사이처럼 되기를 바랐다는 건 나중에야 깨닫았어.
그분은 나한테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법이 없거든."

에드워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로잘리는 내게 단 한번도 여자 형제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어.


그러다 겨우 2 년 만에 로잘리가 에밋을 찾아냈지. 그땐 우리가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살고 있었는데, 사냥을 하다가 곰한테 물려 거의 목숨이 끊긴
에밋을 찾아낸 거다. 로잘리는 혼자서 못해낼까 봐. 에밋을 안고
칼라일에게 100 킬로미터도 넘는 거리를 달려왔어. 그게 얼마나 힘겨운
여정이었을지 나도 이제야 겨우 짐작이 가는군."

그는 내 쪽을 흘끔 보더니, 여전히 잡고 있는 손을 그대로 들어 손등으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래도 해냈잖아."

나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그의 아름다운 눈을 피하며 그를 부추겼다.

"그렇지. 에밋의 얼굴에서 뭔가 강한 용기를 얻을 만한 걸 봤나 봐. 그뒤로


두 사람은 줄곧 함께 지냈어. 가끔은 우리와 떨어져 둘이 부부로 지내기도
하지. 하지만 어린 행세를 해야 한 곳에서 오래 머물 수가 있거든.
포크스는 완벽한 곳인 것 같아서, 우리 모두 고등학교게 들어가기로
한거야. 몇 년 있으면 아마 우린 '또' 두 사람 결혼식에 참석해야 할 것
같은데."

그가 후후 웃었다.

"앨리스랑 재스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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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랑 재스퍼는 둘 다 참 드문 경우야. 둘 다 외부인의 도움 없이


우리가 '양심'이라고 부르는 지금의 취향을 개발했거든. 재스퍼는 다른......
가족에 속해 있었는데, 우리하고는 성향이 아주 다른 가족이었어.
침울해진 재스퍼는 혼자 동떨어져 살게 됐고, 그런 재스퍼를 앨리스가
찾아냈지. 앨리스도 나처럼 일반적인 우리 부류와는 다른 재능을 갖고
있어."

"정말?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건 너뿐이라고 했잖아."

나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나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맞아. 앨리스는 다른 재능이 있어.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 즉 다가올


일을 내다보는 거지. 하지만 앨리스의 예지력은 아주 주관적이야. 미래는
돌처럼 굳어진 게 아니라서, 많은 것이 바뀌기도 하거든."

에드워드가 굳은 얼굴로 나를 흘끔 돌아본 것 같지만, 너무 빨라 내


상상에 지나지 않는 것도 같았다.

"어떤 것들을 내다보는데?"

"앨래스는 재스퍼 스스로도 알아차리기 전에 재스퍼가 자기를 찾아다닐


걸 예견했어. 칼라일과 우리 가족의 모습을 미리 보고서 둘이 함께 우릴
찾아왔지. 앨리스는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한 예지력이 더 뛰어나. 예를
들면 우리 같은 부류의 존재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언제나 앨리스가 먼저
알아.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위협을 줄지 예견하는 거지."

"너 같은 부류가...... 많아?"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저들의 수는 얼마나 되는 걸까?

"아니, 많진 않아. 하지만 대부분 한 곳에 정착하지 않지. 우리처럼


인간사냥을 포기한 경우에만 언제까지나 인간들과 함께 살 수 있거든.
우리처럼 사는 건 알래스카의 작은 마을에서 만난 한 가족밖에 없었어.
한동안 우리들도 그들과 함께 살았는데, 너무 많이 몰려 살면 눈에 쉽게
띄잖아. 우리같이...... 다르게 사는 이들은 서로 어울려 지내는 경향이
있거든."

"그럼 다른 부류는?"

"대부분 떠돌며 지내. 우리 가족도 모두 그런 시기를 거쳤어. 그런 데


그것도 시들해지더라. 하지만 우리들은 대부분 북반구를 선호하기 때문에
이따금씩 다른 이들을 우연히 만나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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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또 왜?"

그때 우리는 우리 집 앞에 도착했고, 에드워드가 시동을 껐다. 밖은 아주


조용하고 어두웠다. 달도 없었다. 현관 불이 켜 있지 않은 걸 보니 아직
찰리는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오늘 오후에 너 계속 눈 감고 있었니?"

그가 놀리듯 물었다.

"내가 햇빛 속에서 마구 거리를 돌아다니면 사방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겠어?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햇빛이 적은 곳에 속하는 올림픽
페닌술라를 선택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낮에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참
근사하거든. 80 년도 넘게 밤에만 활동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 넌 모를
거다."

"그래서 그런 전설이 생겨났나 보네?"

"아마 그럴 거야."

"그럼 앨리스도 재스퍼처럼 다른 가족에 속한 아이였어?"

"아니. 그건 여전히 미스터리야. 앨리스는 인간이었을 때의 삶을 전혀


기억 못 해. 게다가 누가 자기를 만들었는지도 몰라. 혼자서 깨어났대.
앨리스를 만든 게 누군지는 몰라도 그냥 가버렸다는 건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이유가 뭔지 우리도 도무지 모르겠어. 앨리스한테 예지력이
없었으면, 그래서 재스퍼와 칼라일을 예견하고 언젠가 가족이 된다는 걸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완전히 야만스런 짐승처럼 살았을 거다."

나는 생각할 것도 많았고, 아직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당황스럽게도 내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이제껏 그의 이야기에 너무
정신이 팔려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제야 몹시 허기가 느꼈다.

"미안해, 나 때문에 저녁도 못 먹고 있구나."

"난 괜찮아. 정말이야."

"음식을 먹는 사람이랑 같이 오래 지낸 적이 없어서 잊어버렸어."

"난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대책 없이 그에게 중독된 내 마음이 고스란히 목소리에 드러나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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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스러웠지만, 어둠 속이라 그런 말을 하기가 조금은 쉬웠다.

"나도 들어가도 돼?"

그가 물었다.

"들어가고 싶어?"

나는 이렇게 신처럼 멋진 존재가 찰리의 초라한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너만 괜찮다면 나야 좋지."

운전석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에드워드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대단히 인간다운 행동이네."

내가 그를 칭찬했다.

"확실히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나 본데."

에드워드와 나란히 걸어가며, 나는 아직도 그가 내 곁에 있는지 끊임없이


눈길을 돌려 확인해야 했다. 어둠 속에서 그는 훨씬 더 평범해 보였다.
여전히 창백하고 그의 외모는 여전히 꿈결같이 근사했지만, 오후 햇살
속에서 본 것처럼 환상적으로 빛을 뿜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가 나보다 먼저 현관문에 당도해 나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문설주를 지나며 잠시 멈칫했다.

"문이 열려 있었어?"

"아니, 처마 밑에 있는 열쇠로 내가 열었어."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 현관 전등을 켠 뒤 눈썹을 들어올리며 그를 돌아


보았다. 그가 보는 앞에서 열쇠를 사용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자신했다.

"너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거든."

"그동안 날 염탐했어?"

하지만 나는 제대로 화난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어쩐지 기분이


우쭐했다. 그는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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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달리 할 일이 있어야지."

나는 일단 그 문제를 접어둔 채 복도를 지나 부엌으로 갔다. 그는 안내 할


필요도 없이 나보다 먼저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내가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려고 애썼던 바로 그 의자를 골라 앉았다. 에드워드 때문에
부엌이 환해졌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가까스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어제 만들어둔 라자냐를 냉장고에서 꺼내 한 조각 잘라 접시에


올려놓은 뒤 전자레인지에 넣어 데우며 저녁을 준비하는 데만 정신을
집중했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며 토마토와 오레가노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 나는 라자냐 접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문을 열었다.

"여기 얼마나 자주 왔어?"

내가 가볍게 물었다.

"음......"

그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가 억지로 끌려나온 듯했다. 나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여기 얼마나 자주 왔냐고."

"거의 매일 밤 왔지."

나는 너무나 놀라 홱 돌아섰다.

"왜?"

"넌 잠잘 때 아주 흥미롭거든. 얘기를 하잖아."

그가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말도 안 돼!"

얼굴이 이마 끝까지 온통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내가 소리쳤다. 나는


쓰러질 것만 같아 싱크대를 움켜잡았다. 물론 엄마가 늘 놀려댔기 때문에
잠꼬대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여기 와서 지낼 때도 문제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한 적 없었다.

그의 표정이 이내 진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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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화 많이 났니?"

"그야 상황에 따라 다르지!"

내 목소리는 숨이 가쁜 사람처럼 들쭉날쭉했다.

그는 좀 기다리다 되물었다.

"무슨 상황?"

"제가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내가 소리쳤다. 순식간에 소리 없이 그가 내 옆으로 와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제발 화내지 마!"

그가 간청했다. 그는 내 얼굴을 낮춰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나는 당황해서 눈길을 돌리려고 했다.

그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넌 어머니를 그리워해. 어머니 걱정을 많이 하지. 비가 내리면 빗소리


때문에 잘 못 자고 뒤척이는 편이야. 전에 살던 집 얘기를 참 많이
했었는데, 이젠 좀 드물어졌어. 한 번은 '너무 초록색 일색이야'라고 한
적도 있어."

그는 내가 더 이상 화내지 않기를 바라는 듯 일부러 낮게 웃었다.

"그밖에 또?"

내가 다그쳤다. 에드워드는 내가 묻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더라."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었다.

"많이?"

"'많이'라면 정확히 얼마나 되는 거야?"

"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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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가 부드럽게 나를 안았다.

"쑥스러워하지 마. 내가 꿈을 꿀 수 있다면 네 꿈을 꿀 거야. 그렇다 해도


난 그게 전혀 부끄럽지 않아."

에드워드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문득 벽돌 깔린 진입로를 굴러오는 타이어 소리가 들리면서, 집 앞


유리창에 자동차 불빛이 어른거렸다. 그의 푸멩 안겨 있던 내 몸이
굳어졌다.

"내가 여기 있는 걸 너의 아버지가 아셔도 돼?"

"잘 모르겠어......"

나는 재빨리 생각하려고 했지만 정신이 멍했다.

"그럼 다음에 뵙지......"

이내 난 혼자가 되었다.

"에드워드!"

나는 쌔근거렸다. 그러나 유령 같은 웃음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빠가 열쇠로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벨라니?"

전에는 달리 누구겠냐는 생각에 짜증스럽게 들리던 질문이었는데, 문득


아빠가 괜히 저렇게 묻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어요."

내 목소리가 지나치게 흥분한 걸 찰리가 눈치 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내가


전자레인지에서 저녁을 꺼내 식탁에 놓자 그가 들어왔다. 에드워드와
온종일 함께 있다 보니 그의 발소리가 너무 시끄럽게 느껴졌다.

"나도 그거 좀 줄래? 배고파 죽겠구나."

찰리는 방금 에드워드가 앉았던 의자 등받이를 집고 서서 부츠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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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찰리의 저녁을 준비하며 라자냐를 한 입 넣고 꿀꺽 삼켰다. 너무


뜨거워 혀를 데었다. 나는 찰리의 라자냐를 데우는 동안 우유 두 잔을 따른
다음, 덴 혀를 식히느라 꿀꺽꿀꺽 우유를 마셨다. 우유잔을 내려놓으며
보니 우유가 바르르 떨렸다. 내가 손을 떨고 있는 것이다. 찰리가 의자에
앉자, 방금 전 같은 의자에 앉았던 에드워드의 모습과 대조되는 것이
어쩐지 몹시 우스웠다.

"고맙다."

내가 식탁에 접시를 내려놓자 그가 말했다.

"오늘 어떠셨어요?"

내가 서둘러 물었다. 나는 어서 부엌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하고 있었다.

"좋았어. 고기도 많이 잡았다. 넌 어땠니? 하려던 일은 다 했어?"

"아뇨, 집안에만 있기엔 날씨가 너무 좋았어요."

나는 또 한 입 크게 라자냐를 떠먹었다.

"날씨 참 좋았지."

찰리의 맞장구에 나는 그 정도 표현으로는 부족하죠,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라자냐를 다 먹어치운 나는 남은 우유를 꿀꺽꿀꺽 마셨다.
놀랍게도 찰리가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뭐가 그렇게 바빠?"

"네, 좀 피곤해서요. 일찍 자려고요."

"좀 흥분한 것 같구나."

하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나한테 관심을 보이실까?

"제가요?"

생각나는 대답이 그뿐이었다. 나는 재빨리 개수대에서 접시를 닦아,


저절로 마르도록 행주 위에 엎어놓았다.

"토요일이잖니."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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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에 별다른 계획 없어?"

갑자기 찰리가 물었다.

"없어요. 전 그냥 잠이나 잘 거예요."

"시내에선 네 마음에 드는 남자애를 못 찾은 거냐?"

그는 내 행동을 수상쩍게 생각하면서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묻고


있었다.

"네, 아직은 별로 마음에 드는 애가 없어요."

나는 찰리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애'라는 말을 강조하지 않으려고


유난히 조심했다.

"마이크 뉴튼은 어떨까 생각했는데...... 걔가 잘해준다면서."

"걘 '그냥' 친구예요, 아빠."

"하긴, 아무래도 걔네들한텐 네가 너무 과하지. 대학에 들어가서 찾아


보는 것도 괜찮으니 기다려봐라."

딸이 성적인 호르몬에 휩쓸리기 전에 집을 떠나주는 것은 모든


아버지들의 꿈일 것이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내가 이층으로 올라가며 맞장구쳤다.

"잘자라."

찰리가 내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찰리는 내가 몰래 집을 빠져나갈까봐


걱정하며 저녁 내내 귀를 기울일 게 틀림없다.

"아침에 봐요, 아빠."

자정쯤 제 방에 몰래 들어와 자고 있나 확인할 때 봐요.

나는 정말 피곤한 듯 발소리를 최대한 천천히 내며 이층으로 올라가


방으로 향했다. 나는 아래층에 충분히 들리도록 방문을 닫은 뒤, 까치발로
뛰어 창문으로 다가갔다. 나는 창문을 열고 어두운 밖을 내다보았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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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속에 서 있는 나무 그림자를 열심히 살폈다.

"에드워드?"

나는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으로 속삭였다.

웃음기 가득한 낮은 대답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응?"

놀라 한 손으로 목을 잡으며 내가 홱 돌아섰다.

그는 팔베개를 하고 내 침대에 길게 누워 발만 침대 끝에 대롱거리며


느긋하게 웃고 있었다.

"우왓!"

나는 비틀비틀 바닥에 주저않았다.

"미안해."

그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에드워드는 내가 또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곧이어


그는 몸을 앞으로 수그려 두 팔을 뻗고는, 갓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일으키듯 내 양팔을 잡고 일으켜 침대 위 자기 옆에 앉혔다.

"옆에 좀 앉아 있도록. 심장은 어때?"

그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도 몰라. 심장 소린 나보다 네가 더 잘 듣잖아."

그가 소리 없이 웃느라 침대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침묵 속에 앉아 내 심장박동이 느려지기를 기다렸다. 나는 아빠가


있는 집 안에 에드워드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인간적인 일로 잠시 실례해도 될까?"

"물론이지."

그가 어서 다녀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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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지 마."

내가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가 침대 끝에 조각처럼 앉아 있겠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바닥에서 잠옷을 집어든 뒤 책상에서 목욕용품 가방을


챙겼다. 나는 방 전등을 끈 채로 살며시 빠져나와 방문을 닫았다.

아래층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찰리가 올라와 성가시게 굴지


않도록 욕실 문을 분명히 소리 나게 닫았다.

나는 서두를 작정이었다. 우선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그러나 빠진 곳


없이 이를 닦아 라자냐 냄새를 모두 없애려고 애썼다. 하지만 샤워는
서두를 수가 없었다. 뜨거운 물이 뭉친 등 근육을 풀어주었고 맥박을
진정시켜 주었다. 익숙한 딸기향 샴푸 냄새는 내가 오늘 아침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일깨워주었다. 에드워드가 내 방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랬다간 처음부터 다시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이제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재빨리 문을 잠그고
서둘러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얼른 벌꿀빛 티셔츠와 회색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었다. 엄마가 2 년전 생일선물로 준 빅토리아 시크릿 실크
파자마를 챙겨오지 않은 걸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 잠옷은 상표도
떼지 않은 채 피닉스 집 서랍 어딘가에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나는 수건으로 다시 한 번 머리를 문지른 다음 브러시로 재빨리 빗었다.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은 뒤, 칫솔과 치약을 가방에 쑤셔넣었다.
그러고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찰리에게 젖은 머리칼까지 보여주려고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잘 자라, 벨라."

내가 나타나자 찰리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어쨌든 오늘 밤에 나를


확인하러 올라오는 건 포기할지도 몰랐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계단을 한 걸음에 두 개씩 올라


방문으로 달려간 뒤 문을 꼭 닫았다.

에드워드는 퀼트 이불 위에 아도니스 조각상처럼 꼼짝 앉아 있었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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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를 짓자, 그의 입술이 움직이며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가 나의 젖은 머리와 낡은 티셔츠를 유심히 보더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멋져."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 너한테 잘 어울리는걸."

"고마워."

나는 속삭여 대답하고는 그의 옆에 앉아 책상다리를 했다. 나는 바닥의


나무판자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찰리는 내가 몰래 외출하려는 줄 알아."

"아."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왜?"

나보다 찰리의 마음을 훨씬 더 잘 읽을 수 있으면서 왜 묻는 걸까?

"내가 좀 흥분한 것처럼 보이나 봐."

에드워드가 내 턱을 들어올리고 유심히 살폈다.

"좀 열에 들뜬 것 같긴 하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숙여 내 얼굴에 차가운 뺨을 댔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흐음......"

그가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나를 어루만지고 있을 때는 앞뒤가 맞는


질문을 생각해 내기가 참 어려웠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차츰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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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나랑 가까이 있는게...... 훨씬 편해졌나 봐."

"그렇게 보여?"

콧날로 내 턱을 쓰다듬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나비 날갯짓처럼 가벼운


손길로 그가 내 젖은 머리칼을 들어올리더니, 귀 뒤 오목한 곳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확실히 훨씬 쉬워졌어."

내가 숨을 내쉬려고 애쓰며 말했다.

"음."

"그래서 궁금해졌어......"

다시 질문을 시작했지만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내 쇄골을 어루만지고


있었으므로 나는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다.

"뭐가?"

"왜 그런 거야?"

당혹스럽게도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조용히 웃어대는 그의 숨결이


목덜미로 느껴졌다.

"육체적인 본능보다 정신력이 강했던 거지."

나는 몸을 뒤로 뺐다. 내 움직임에 그가 얼어붙었다. 더는 그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조심스레 서로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경직되었던


턱을 천천히 풀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그 반대야. 난 너 때문에 미칠 것 같아."

내가 변명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승리감 어린 웃음이 그의 얼굴에 서서히 떠올랐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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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라도 한판 쳐줄까?"

내가 비아냥거리듯 말하자 그는 싱글싱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랄까, 그냥 좀 기분 좋게 놀랐을 뿐이야. 백 년 넘게 살면서 이런 건


상상도 못했거든."

그의 말투는 어느새 놀림조였다.

"형제자매 이외의 방식으로...... 같이 있고 싶은 누군가를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그런데 이렇게 찾아낸 데다, 나한텐 모든 게 새로운데도 잘
해낼 수 있다는게......, 그리고 너랑 함께 있는 것까지 모든 게......"

"넌 원래 뭐든 잘하잖아."

그가 자기도 인정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바람에 우리는 동시에


소리를 낮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그렇게 쉬워진 거지? 오늘 오후만 해도......"

"그리 '쉽지'는 않아."

그가 한숨을 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 오후엔 나도...... 아직 갈팡질팡 했어. 아까 용서 못할 만큼


무례하게 군 거 정말 미안하다."

"용서 못할 만큼은 아니었어."

"고마워."

에드워드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제 시선을 떨군 채 설명을 계속했다.

"내가 얼마나 강한지 자신이 없었던 거야......"

그가 내 한쪽 손을 들어 자기 얼굴에 가볍게 댔다.

"하지만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조심스러웠지. 내가


충분히 강하다는 확신이 서서, 혹시 모를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달까......"

그가 내 손목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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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드워드가 이토록 말을 고르는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그럼 이젠 전혀 가능성이 없는 거야?"

"육체적인 본능보다 정신력이 강하니까."

그가 어둠 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와, 그것 참 쉽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속삭임처럼 낮은 소리로, 그러나 여전히


유쾌하게 웃어댔다.

"너니까 쉬운 거야!"

그가 고쳐 말하며 손끝으로 내 코를 어루만졌다.

그러나 돌연 그의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몹시 애쓰고 있어. 너무...... 견디기 힘들어지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헤어지는 얘기는 싫다.

"내일은 더 힘들어질 거야. 온종일 네 체취를 맡아서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거기 둔감해졌거든. 하지만 상당기간 너랑 떨어져 있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거다. 그래도 완전히 처음부턴 아니겠지."

"그럼 가지 마."

애틋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내가 대꾸했다.

"나야 좋지."

에드워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쇠고랑을 가져와, 내 너의 포로가 되어주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긴 손은 수갑처럼 '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가 듣기 좋은 악기 소리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에드워드는
오늘밤 이제껏 나와 함께 지낸 시간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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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평소보다...... 낙천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 이런 네 모습


처음이야."

"원래 이런 거 아니야? 첫사랑의 기쁨이란 게 바로 이런 거라던데. 책에서


읽거나 영화에서 본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건 참 많이 다르다는 게
놀랍잖아."

에드워드가 웃음을 지었다.

"아주 다르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강력해."

나도 맞장구를 쳤다.

"예를 들어서, 질투라는 감정도 마찬가지야. 책에서도 수만 번은 읽어


봤고, 연극이나 영화에서 배우들이 다르게 연기하는 것도 수천번은
봤을거다. 그래서 난 질투란 감정을 꽤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실제론 충격이더군......"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마이크가 너한테 댄스파티에 가자고 한 날 기억 나?"

나는 다른 이유로 그날을 기억하고 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다시 나한테 말을 건 날이잖아."

"그날 난 거의 분노에 가까운 불쾌감을 느껴 몹시 놀랐는데, 처음엔 그게


뭔지 잘 몰랐어.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네가 그 자식의 청을
거절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평소보다 더 짜증이 났거든. 단순히 친구가
좋아하는 상대라서였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내가
상관할 권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관하지 않으려고 '노력'은
했지. 그러더니 아예 파트너가 줄을 서는 거야."

그가 킥킥 웃어댔다. 나는 어둠 속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네가 그 놈들에게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고 네 표정을 지켜보려고,


이상하리만치 초조하게 기다렸어. 네 얼굴에 떠오른 짜증을 보며 안도감이
드는 걸 부인할 수가 없었지.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더군. 그래서 그날 밤
처음 여길 오게 된 거야. 네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밤새 내가
지켜야 할 도리나 원칙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에서 몹시 갈등했어.
원칙대로 내가 널 계속 무시하거나, 네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몇 년쯤 내가
어딘가 다른 데 있다 돌아오면, 넌 언젠가 마이크나 어떤 다른 놈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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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버럭 화가 났어. 그런데 바로 그때 네가 잠자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너무 똑똑하게 말해서 처음엔 잠이 깬 줄 알았지.
그런데 네가 몸을 뒤척이며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중얼거리곤 한숨을
쉬었어. 그 순간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면서 무기력해지는 느낌이 들더군.
그제야 난 너를 더는 무시할 수 없다는 걸 깨닫았지."

갑자기 불규칙해진 내 심장박동을 들었는지, 그의 속삭임이 침묵으로


이어져 한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질투는...... 정말 이상한 감정이야.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렬했어.


게다가 비논리적이기도 하지! 조금 전만 해도 찰리가 마이크 뉴튼 이름을
꺼냈을 땐......"

에드워드가 화난 듯 고개를 저었다.

"네가 듣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내가 투덜거렸다.

"당연하지."

"어쨌든 그것 때문에 정말로 질투심을 느꼈어?"

"나한텐 새로운 감정이야. 너 때문에 내 안에 있는 인간의 본성이


되살아나고 있는 모양이지. 그런데 모든게 새로우니까 훨씬 더 강렬하게
느껴져."

"겨우 그걸로 네가 언짢았다니까 하는 말이지만, 로잘리가 그런 미모의


화신 로잘리가 원래 네 짝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난 어떻겠어? 에밋이 있든
없든, 내가 어떻게 로잘리랑 경쟁상대가 되겠느냐고."

내가 놀리듯 말했다.

"경쟁이 안 되지."

에드워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그때까지 잡고 있던 내 손을 자기


등 뒤로 보내며 나를 가슴에 안았다. 나는 조심스레 숨을 고르며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경쟁이 안 된다는 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문제지."

내가 그의 차가운 살갗에 얼굴을 파묻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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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로잘리는 나름대로 예쁘지만, 행여 내게 누이 같은 존재가 아니고


에밋이 곁에 없었더라도 너랑 비교하면 나한텐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
만큼의 매력도 없거든."

어느새 그는 생각에 잠겨 진지해졌다.

"거의 90 년 동안 나는 나와 같은 부류는 물론이고 너 같은 인간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내가 찾는 게 뭔지도 모른 채 나 혼자만으로도 완벽하다고
생각했어. 네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던
거지."

"불공평한 것 같아. 나는 전혀 누굴 기다린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쉽게


사랑에 빠진 거지?"

내가 여전히 그의 가슴에 기댄 채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속삭였다.

"네 말이 맞아. 너한텐 더 어렵게 만들어야 할지도."

그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하며 내 손목을 놓고는 조심스레 다른 손에


옮겨 잡았다. 그는 젖은 내 정수리부터 허리까지 쓸어내렸다.

"넌 그저 나랑 함께 있는 매 순간 목숨만 걸면 되니까 별로 힘든 것도


아니겠지. 그저 본성을 저버리고, 인간다운 면모를 등지면 되는거야......,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난 조금도 아까울 게 없어."

"아직은 그렇겠지."

돌연 그의 목소리에 깊고 오랜 슬픔이 느껴졌다. 나는 몸을 떼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려 했지만, 내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슨......"

그의 몸이 굳어지는 걸 느끼며 내가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내 손을 놓고 사라졌으므로 싸늘하게 얼어붙었던 나는 하마터면 침대에
얼굴을 부딪힐 뻔했다.

"어서 누워!"

어둠 속 어딘가에서 그의 낮은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늘 자던 대로 옆으로 몸을 틀었다. 문이 삐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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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리는 소리가 나고, 찰리가 고개를 들이밀어 내가 무사히 잠자리에


들었는지 확인했다. 나는 숨소리를 고르게 내며 과장해서 뒤척거렸다.

길게만 느껴지는 일 분이 지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는지


자신이 없어 계속 귀를 기울였다. 곧이어 이불 속에서 에드워드의 서늘한
팔이 나를 감쌌고, 귓가에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네 연기 참 형편없더라. 그쪽으로 진출하면 절대로 안 되겠어."

"상관없어."

내가 투덜거렸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뛰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내가 모르는 곡조를 흥얼거렸다. 자장가 같았다. 그가


흥얼거림을 멈추고 물었다.

"잠들 때까지 노래 불러줄까?"

"좋아. 네가 여기 있는데 과연 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웃어댔다.

"다른 땐 잘만 자던데 뭐."

"그땐 네가 여기 있는 걸 몰랐으니까 그렇지."

내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네가 자고 싶지 않으면 그럼......"

그가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내가 자고 싶지 않으면.....?"

에드워드가 후후 웃었다.

"그럼 뭘 하고 싶은데?"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낼 수는 없다.

"모르겠어."

마침내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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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면 말해."

목덜미에 그의 서늘한 숨결이 느껴지더니, 이어 그가 턱 선을 따라 코를


움직이며 숨을 들이마셨다.

"냄새에 둔감해졌다더니."

"와인을 마다한다고 해서 와인의 향을 음미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잖아.


너한테선 꽃향기가 나. 라벤더...... 프리지아 같은, 군침 도는 향기지."

에드워드가 속삭였다.

"그럼 그렇지. '누군가'가 내가 얼마나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는지


말해주지 않는 날은 일진이 나쁜 날 아니겠어."

에드워드가 킥킥 웃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각났어. 너에 대한 얘기를 더 듣고 싶어."

내가 말했다.

"아무거나 물어봐."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질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부터


골랐다.

"왜 그렇게 사는 거야? 너의 원래...... 존재를 거부하기 위해 어떻게


그토록 애를 쓸 수가 있는지 난 아직 이해가 안 돼. 내 말 오해하진 마.
물론 난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게 기쁘니까. 그냥 처음에 왜 그런
어려운 결정을 내렸는지 알고 싶을 뿐이야."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좋은 질문인데, 그걸 물어본 사람이 네가 처음은 아니야. 다른 이들은


대부분 우리 존재에 꽤 만족하며 살기 때문에 그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놀라워해. 하지만 우리가 어떤 일정한 방식으로 살아왔다고
해서......,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원한 적 없는 운명의 한계를
극복하고...... 좀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 우리에게
내재된 근본적인 인간성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최대한 그걸
지키려고 노력하는 거야."

나는 경외감에 휩싸여 침묵을 지키며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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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었니?"

몇 분 뒤에 그가 속삭였다.

"아니."

"궁금한 게 그것뿐이야?"

"아직 멀었어."

"또 알고 싶은 게 뭔데?"

"왜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됐을까? 왜 너만? 그리고 앨리스는 미래를


내다본다는데, 왜 그런 일이 생기는 거지?"

어둠 속에서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하는 게 느껴졌다.

"우리도 잘은 몰라. 칼라일이 생각해 낸 이론은...... 우리가 인간일 때


갖고 있던 가장 강한 성향을 다음 생에 가져간다는 거야. 다시 태어났을 땐
우리의 정신력이나 감각 같은 것들이 더 강화되는 거지. 칼라일은 내가
원래 주변 사람들의 생각에 대단히 민감한 아이였을 거라고 생각해.
앨리스는 예전에도 얼마간 예지력이 있었을 테고."

"그럼 박사님은 이번 생에 어떤 성향을 가져오신 거야? 다른 사람들은?"

"칼라일은 동정심을 가져왔고, 에스미는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능력을


갖고 왔어. 에밋은 강인한 힘을, 로잘리는...... 끈기를 갖고 태어났다고
해야겠지. 다른 사람들은 옹고집이라고 부르겠지만."

그가 로잘리 얘기를 하며 킥킥 웃었다.

"재스퍼는 아주 흥미로워. 재스퍼는 전생에서 자기 방식대로 일이


추진되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던
것 같더군. 지금 재스퍼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가 있거든. 예를 들어 방 안에 가득 모여 있는 화난 사람들을
달랜다거나, 반대로 무기력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거지. 대단히 미묘한
재능이야."

나는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을 설명하는 에드워드의 말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그는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럼 모든 게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칼라일이 너를 변하게 했고,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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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분을 변하게 했을 테니까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글쎄, 너희 인간은 어디에서 시작됐는데? 진화론? 창조론? 우리도 먹고


먹히는 천적관계가 존재하는 다른 여러 종(種)과 마찬가지로 진화한게
아닐까? 만일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우연히 저절로 존재하게 된 게
아니라면, 섬세한 에인젤피시와 상어를 같은 바다에서 헤엄치게 하고,
새끼 바다표범과 범고래를 한꺼번에 창조한 위대한 신이 너희와 우리를
함께 창조해 이 세상에 살게 했다는 걸 나로선 믿을 수가 없으니까."

"잠깐만, 그러니까 나는 새끼 바다표범인 셈이지?"

"맞아."

그가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 머리칼에 뭔가 살며시 닿았다. 그의


입술이었을까?

나는 내 머리칼에 닿은 게 정말로 그의 입술이었는지 돌아누워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얌전히 있기로 했다.

"잘 준비 됐니? 아니면 물어볼 게 더 있어?"

짧은 침묵을 뚫고 그가 물었다.

"백만 두어 개 정도밖에 없어."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고. 또 그 다음날도 있잖아......"

그의 말에 나는 생각만 해도 흐뭇해져 웃음이 배어나왔다.

"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자신 있어? 어쨌든 넌 전설적인 존재잖아."

나는 무엇보다 그걸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안 갈게."

그가 굳게 약속하듯 말했다.

"오늘 밤엔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을게......"

얼굴이 붉어졌다. 어둠도 소용이 없었다. 갑자기 달아오른 내 얼굴을 분명


에드워드도 느꼈을 것이다.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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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만 두자. 마음이 바뀌었어."

"벨라. 아무거나 물어도 된다니까."

내가 대꾸하지 않자, 그가 투덜거렸다.

"네 생각을 읽지 못해도 차츰 괴로움이 덜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좌절감이 점점 더 심해지는군."

"난 네가 내 생각을 읽지 못해서 얼마나 기쁜데. 네가 내 잠꼬대를 엿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괴로워."

"부탁이야."

그의 목소리는 거역하기 힘들 정도로 호소력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난 뭔지 몰라도 훨씬 심각한 거라고 짐작할 거야.


어서 말해 보라구."

또 한 번 그가 애원하는 목소리로 독촉했다.

"있지."

나는 그가 내 얼굴을 볼 수 없어 다행이라 여기며 말문을 열었다.

"응."

"로잘리하고 에밋이 곧 결혼할 거라고 했잖아......, 너희들...... 결혼도


인간들의 결혼과 똑같아?"

내 의도를 알아차린 에드워드가 소리 내 웃었다.

"궁금한 게 그거였어?"

나는 대답도 못하고 몸을 꼼지락거렸다.

"응, 거의 같을 거야. 아까도 말했듯이 분명히 인간으로서의 욕망도


대부분 남아 있는 상태에서, 더 큰 다른 욕망에 가려져 있을 뿐이거든."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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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밖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게 궁금한 다른 이유라도 있어?"

"계속 궁금했거든. 혹시...... 언젠가...... 너와 나도......"

갑자기 그의 몸이 굳어졌으므로, 나는 에드워드가 심각해졌음을


알아차렸다. 나 역시 반사적으로 반응하듯 얼어붙었다.

"내 생각에...... 우린 안 될 거다."

"나랑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 너한테 너무 힘들기 때문에?"

"확실히 그것도 문제가 되겠지. 하지만 내가 염려하는 건 그게 아니야.


네가 너무 부드럽고 연약하기 때문에 곤란해. 우리가 함께 있을 때 난 네가
다치지 않도록 매 순간 행동을 조심해야 돼. 벨라, 난 단순한 실수로도 널
쉽게 죽일 수 있어."

그의 목소리는 낮은 중얼거림으로 바뀌었다. 그가 차가운 손바닥으로 내


뺨을 감쌌다.

"내가 성급하게 군다면...... 만약 단 일 초라도 주의를 충분히 기울이지


않으면, 네 얼굴을 어루만지려고 손을 뻗었는데 실수로 두개골을
부서뜨릴지도 몰라. 네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지 넌 아마 짐작도
못 할 거야. 너랑 같이 있으면서 어떻게든 자제력을 잃는 건 내가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어."

에드워드가 내 대꾸를 기다리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겁나니?"

나는 진심을 그대로 전하느라 조금 뜸을 들였다 대답했다.

"아니, 난 괜찮아."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 가벼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나도 궁금해졌어. 너 혹시 그런 경험......?"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당연히 없지! 다른 사람한텐 이런 기분 느껴본 적 없다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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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굴을 붉혔다.

"알아. 그냥 다른 사람들 생각은 다르니까 물어본 거야. 사랑과 욕망이


언제나 같이 움직이는 건 아니란 거 나도 알거든."

"나한텐 걔들이 늘 붙어다녀. 어쨌든 지금 내 안엔 걔네 둘이 같이 존재


하고 있단 말이야."

내가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네. 적어도 우리한테 공통점이 한 가지는 생겼군."

그는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안에 있는 인간적인 본능 말이야......"

내가 말문을 열자, 그가 잠자코 기다렸다.

"'그런' 식으로도 나한테 매력을 느끼나?"

에드워드가 웃음을 터뜨려, 거의 다 마른 내 머리칼을 가볍게 날렸다.

"인간이 아닐지는 몰라도 나 역시 남자야."

에드워드가 나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나도 모르게 하품이 나왔다.

"질문에 대답해 줬으니까 이제 그만 자."

"잘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럼 내가 갈까?"

"안 돼!"

내가 너무 크게 소리쳤다.

그는 쿡쿡 웃고는 아까 불러주었던 낯선 자장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천사의 속삭임처럼 부드러웠다.

난생처음 느낀 정신적, 감성적 스트레스에 온종일 시달리느라 생각보다


피곤했는지, 나는 그의 서늘한 품 안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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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컬렌 집안 사람들

다시 흐린 날 아침의 희미한 기운을 느끼며 눈을 떴다. 아직 잠에 취해


몽롱한 기분으로 눈 위에 팔을 올려놓았다. 뭔가 꿈의 기억 같은 것이 내
의식을 비집고 나오려고 했다. 나는 좀더 잠이 찾아오길 바라며 옆으로
돌아누워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자 전날의 기억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앗!"

너무 빨리 일어나 앉는 바람에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머리가 건초더미같이 부스스하지만......, 그래도 예쁜데."

구석에 놓인 안락의자 쪽에서 침착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드워드! 안 갔구나!"

나는 펄쩍 뛸 듯이 좋아 생각 없이 그의 무릎에 뛰어들었다. 곧이어 내


행동이 경솔했다는 걸 깨닫고 갑자기 몸이 얼어붙었다. 나의 주체 못할
열정에 스스로도 충격을 받았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건 아닌가
두려워 살며시 에드워드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당연하지."

그는 조금 놀란 듯 대꾸했지만, 내 반응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가 내 등을


어루만졌다. 나는 그의 어깨에 조심스레 얼굴을 묻고 그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꿈인 줄 알았어."

"넌 그렇게 창의력이 뛰어나지 않잖아."

"찰리!"

갑자기 아빠 생각이 나서 또다시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한 시간 전에 나가셨어. 먼저 네 트럭 배터리 케이블부터 갈아주셨지.


딸이 나가고 싶은데도 고작 배터리 케이블 때문에 못 나갈 거라
생각하신다면 솔직히 조금 실망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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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가에 서서 머뭇거렸다. 그에게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입 냄새가


날까 봐 염려스러웠다.

"너 원래 아침에 이렇게 갈팡질팡하지 않잖아."

에드워드는 돌아오라는 듯 팔을 벌렸다. 거역할 수 없는 유혹.

"일 분만 기다려. 다녀올 데가 있어."

"기다릴게."

나는 정신없이 뛰어 욕실로 향했다. 안팎으로 모두 어제의 내가 아닌 것


같았다. 거울 속의 얼굴도 아주 낯설었다. 눈은 너무 반짝거렸고, 광대뼈
위에는 드물게도 홍조가 피어올랐다. 양치질을 한 뒤 나는 심하게 엉킨
머리칼을 애써 빗었다. 찬물로 얼굴을 씻고 숨을 고르게 쉬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달리다시피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에드워드가 여전히 두 팔을 벌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기적 같았다.


그가 나에게 손을 뻗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서 와."

그가 나를 품에 꼭 안으며 중얼거렸다. 아무 말 없이 잠시 그에게 안겨


있던 나는 그의 옷이 바뀌고 머리칼도 단정하다는 걸 눈치 챘다.

"집에 갔었어?"

그의 새 셔츠 깃을 만지며 내가 나무라듯 물었다.

"어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나갈 순 없잖아. 이웃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내가 입을 삐죽거렸다.

"넌 아주 깊이 잠들어 있었어. 난 하나도 놓치지 않았지. 잠꼬대가 다른


날보다 일찍 시작되더군."

그의 눈이 장난스레 반짝거렸다. 나는 신음을 내뱉었다.

"무슨 얘기 들었어?"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아주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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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사랑한다고 했어."

"그건 이미 알잖아."

고개를 수그리며 내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또 들으니까 좋던걸."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랑해."

내가 속삭였다.

"이제 넌 내 생명이야."

그가 대꾸했다. 그 순간에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가 나를 안고 살며시


흔들어주는 사이 방 안이 점점 밝아졌다.

"아침 먹을 시간이야."

마침내 그가 말했다. 나의 인간적인 일상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양손으로 목을 움켜잡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장난이야! 내 연기가 형편없다더니!"

내가 까르르 웃자, 못마땅한 듯 에드워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재미없었어."

"재미있잖아."

나는 정말로 화가 났는지 조심스레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살폈다. 이미


용서한 것 같았다.

"다시 말할까? 인간들은 아침 먹을 시간이야."

"알았어."

그가 나를 어깨에 둘러맸다. 부드럽게 움직였는데도 나는 그 빠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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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감에 잠시 숨을 헐떡였다. 내가 몸부림을 치는데도 그는 모르는 체


계단을 내려갔고, 식탁 의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부엌은 내 기분을 반영하듯 밝고 행복해 보였다.

"아침 메뉴는 뭔데?"

내가 유쾌하게 물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글쎄. 뭘 먹고 싶은데?"

대리석 같은 그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나는 벌떡 일어나며 씩 웃었다.

"됐어, 내가 알아서 잘 찾아 먹을게. 어떤 걸 준비하는지 잘 보라구."

나는 그릇과 시리얼 상자를 찾아냈다. 우유를 따르고 숟가락을 집는 동안


줄곧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식사준비를 끝내고 내가 그를 건너다보았다.

"넌 뭐 필요한 거 없어?"

예의상 물어봤더니, 에드워드가 눈동자를 굴렸다.

"어서 먹기나 해, 벨라."

나는 식탁에 앉아 시리얼을 한 숟갈 뜨며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내 모든


동작을 관찰하고 있었다. 문득 쑥스러워졌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말을 걸기로 작정하고 시리얼을 삼켰다.

"오늘 할 일은 뭐야?"

"흠......."

나는 그가 조심스레 대답할 말을 찾는 동안 지켜보았다.

"우리 가족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겁나는군?"

"응."

내 눈에 빤히 드러났을 텐데 어떻게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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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마. 내가 보호해 줄게."

에드워드가 씩 웃었다.

"너희 가족이 겁나는 게 아니야. 다들...... 나를 싫어할까 봐 겁나는 거지.


나 같은...... 애를 집에 데려가서 소개하면...... 가족들이 놀라지 않겠어?
내가 다 안다는 거 가족들도 알아?"

"이미 다 알고들 있다구."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거칠었다.

"어젠 다들 내기까지 했지. 널 무사히 데려올 수 있을지 아닌지. 어쩌자고


앨리스 반대편에들 걸었는지 통 이해는 안 되지만, 아무튼 우리 가족은
비밀이 없어. 내가 마음을 읽어대고 앨리스가 미래를 보는 판인데,
비밀같은 게 있을 수가 없지."

"마음 편하게 만들어서 아무한테나 속내까지 다 털어놓게 하는 재스퍼도


빼먹지 말아야지."

"내 얘길 꽤 귀담아 들었구나."

그가 흐뭇한 듯 미소를 지었다.

"나도 이따금은 꽤 주도면밀하거든. 그래서 앨리스가 내가 오는 걸 예견한


거야?"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반응은 아주 이상했다.

"그런 셈이지."

그는 어딘가 불편한 듯 내가 자기 눈을 보지 못하게 시선을 피했다. 나는


의아해하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거 맛있나?"

에드워드가 갑자기 눈길을 돌려 시리얼을 장난스레 보며 물었다.

"솔직히 내 눈엔 별로 맛있어 보이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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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예민해진 회색곰 맛은 아니겠지......"

내가 중얼거리자 에드워드가 인상을 찡그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앨리스 얘기를 물었을 때 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여전히
궁금했다. 나는 생각에 잠긴 채 서둘러 시리얼을 먹었다.

에드워드는 또다시 아도니스처럼 부엌 한가운데 서서 뒤뜰을 무심히


내다보았다. 이어 다시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내 심장을 멎게 하는
멋진 웃음이 피어놀라 있었다.

"그리고 너도 너의 아버지한테 나를 소개시켜 줘야지."

"벌써 너에 대해 아시는 데 뭐."

"네 남자친구로서 말이야."

나는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게 관례 아닌가?"

그가 천역덕스럽게 말했다.

"난 모르겠는데."

내 데이트 역사에는 딱히 참고할 만한 경험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데이트 원칙을 적용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꼭 그럴 필요는 없잖아. 날 위해서...... 네가 굳이 연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그가 참을성 있게 계속 미소를 지었다.

"연기하는 거 아닌데."

나는 입술을 깨물며 남은 시리얼을 그릇 가장자리로 밀었다.

"찰리한테 내가 네 남자친구라고 얘기할 거야, 말 거야?"

"네가 내 남자친구야?"

에드워드와 찰리가 같은 방에 있고 '남자친구'로 그를 소개하는 장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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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리자 뱃속이 뜨끔했다.

"나로선 '남자친구'라는 말의 범위를 넓힌다면 별다른 이의가 없는데."

"사실 네가 그 이상의 존재야."

내가 식탁을 내려다보며 고백했다.

"네 아버지께 괜히 쓸데없는 설명까지 덧붙일 필요는 없을 거야."

에드워드가 식탁 위로 손을 뻗어 차가운 손가락으로 내 턱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왜 내가 여기 자주 나타나는지 어느 정도 설명은 해드려야지.


스완 서장님이 나한테 딸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리는 건 원치
않으니까."

"정말? 정말 로 여기 자주 올 거야?"

나는 갑자기 초조해져서 물었다.

"네가 원하는 한 언제든."

"난 언제나 널 원할 거야. 영원히."

그가 천천히 식탁을 돌아 몇 걸음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끝으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런 말 들으면 슬퍼?"

내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오래도록 내 눈을 응시했다.

"다 먹었어?"

마침내 그가 물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응."

"옷 갈아입어. 난 여기서 기다릴게."

무엇을 입을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뱀파이어 애인이 처음 자기 집에


데려가 뱀파이어 가족에게 소개시켜 줄 때 여자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은 당연히 없겠지. 혼자 있을 때나마 그 낱말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나는 일부러 그 말을 피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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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벌뿐인 치마를 입기로 했다. 긴 카키색 면치마도 역시 캐주얼한


옷이었다. 위에는 언젠가 에드워드가 예쁘다고 했던 진한 파란색
블라우스를 입었다. 거울로 얼핏 보기에도 완전히 수습 불능인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었다.

나는 요란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다 됐어. 이 정도면 얌전하지?"

에드워드는 생각보다 더 가까이 계단 바로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곧장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내 어깨를 잡고 조심스럽게
거리를 둔 채 나를 관찰하더니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그가 내 귓가에 중얼거렸다.

"또 틀렸어. 넌 전혀 얌전하지 않아. 이렇게 유혹적으로 보일 수 있다니,


불공평해."

"어떻게 유혹적인데? 그럼 갈아입을......"

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넌 정말 바보다."

그가 내 이마에 차가운 입술을 살며시 누르자, 방 안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그의 숨결 때문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네가 얼마나 유혹적인지 설명해 줄까?"

그건 분명 수사학적인 질문이었다. 그가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좀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의 가슴에 힘없이 손을 올린 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두 번째로 서늘한 입술을 나에게
겹쳐왔고, 조심스레 살며시 입술을 벌렸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다.

"벨라?"

나를 안아 올리는 그의 목소리가 잔뜩 긴장돼 있었다.

"너 때문에...... 기절......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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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몽롱한 채 그를 나무랐다.

"대체 널 어쩌면 좋은 걸까. 어제는 키스하니까 자기가 먼저 나를 공격


하더니, 오늘은 입술이 닿자마자 기절이라니!"

그가 기가 막힌 듯 투덜거렸다. 나는 빙빙 도는 머리가 진정될 때까지


그에게 온몸을 기댄 채 가볍게 웃었다.

"모든 면에서 멋진 솜씨를 발휘하는 건 역시 보통 일이 아니려나."

그가 한숨을 쉬었다.

"바로 그게 문제야. 넌 너무 멋져. 지나치게 멋져서 문제라고."

아직도 현기증이 가시지 않았다.

"속도 메슥거려?"

전에도 이런 내 모습을 본 적이 있으므로 그가 물었다.

"아니야, 이건 종류가 다른 현기증이야. 어떻게 된 건지 나도 모르겠어.


숨쉬는 걸 잊어버렸나 봐."

내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태론 아무 데도 못 데려가겠다."

"괜찮아. 어차피 너희 식구는 나를 미쳤다고 생각할 텐데 무슨 상관이야?"

에드워드는 잠시 내 표정을 살폈다.

"네 얼굴이 그렇게 붉어지면 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게 돼버려."

그가 난데없이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있잖아, 지금 나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애쓰고


있으니까 빨리 가면 안 될까?"

"그러니까 너는 뱀파이어 가족을 만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뱀파이어


가족들이 너를 못마땅해할까 봐 걱정이라는 거지?"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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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드워드가 아주 스스럼없이 그 낱말을 썼다는 데 놀랐다. 하지만


애써 속마음을 감추며 곧바로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괴짜 아니랄까 봐."

에드워드가 운전하는 트럭을 타고 시내 중앙로를 달리면서 생각해 보니


나는 그가 사는 곳도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칼라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나 북쪽으로 향하는 도로를 달렸다. 이따금 지나치는 집들은 점점
뜸해졌고 규모는 더 커졌다. 집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우리는
안개 낀 숲을 한참이나 달려갔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물어볼 것인지,
아니면 참고 기다릴 것인지 결정을 내리려는 찰나, 차가 갑자기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비포장도로 입구는 키 큰 양치식물로 뒤덮여 잘
눈에 띄지도 않았다. 숲 한가운데로 난 길은 오래된 아름드리나무 사이로
뱀처럼 이리저리 굽어 몇 미터 앞까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킬로미터쯤 갔을까. 드디어 나무가 뜸해지더니 갑자기 눈앞에


작은 초원이 나타났다. 초원이 아니라 잔디밭인가? 어쨌든 원시시대부터
살았을 것 같은 거대한 삼나무 여섯 그루가 초원 한가운데에 거대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서 숲의 어둑한 기운이 빈 터까지 이어졌다. 길게 가지를
뻗은 삼나무 그림자는 나무들 가운데 서 있는 저택 벽까지 드리워져,
일층을 둘러싸고 있는 드넓은 베란다를 온통 어둡게 만들었다.

내가 무얼 기대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의 집은 뜻밖의


모습이었다. 저택은 어림잡아 백 년은 된 듯 낡고 우아했다. 부드러운
하얀색 페인트를 칠한 삼층집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고 몹시 높아
보였다. 창문과 문의 디자인은 원래부터 고색창연하게 설계되었거나,
아니면 옛날 양식을 완벽하게 재현한 것 같았다. 차는 내 트럭밖에 보이지
않았다. 숲 어딘가에 숨어 흐르는 강물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와아."

"마음에 들어?"

에드워드가 미소를 지었다.

"독특한...... 매력이 있는 집이야."

그가 내 묶은 머리끝을 잡아당기며 킥킥 웃었다.

"준비됐어?"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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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조금도 안 됐지만, 들어가자."

웃으려 했지만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초조하게 머리를


매만졌다.

"안 그래도 예뻐."

에드워드가 스스럼없이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나무 그림자를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내가 긴장한 걸 눈치


챘는지, 에드워드가 엄지손가락으로 둥글게 그림을 그리듯 내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가 나를 위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집 안은 외관보다 더 예상 밖이어서 더욱 놀라웠다. 실내는 아주 밝았고


툭 트였으며 대단히 넓었다. 원래는 방이 여러 개였는데 벽을 모두 허물고
1 층을 아예 드넓은 공간 하나로 만든 듯했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 반대편
벽은 전면이 유리였고, 창밖 삼나무 그늘 너머로는 잔디밭이 넓은 강가까지
펼쳐져 있었다. 서쪽 벽은 위풍당당한 곡선 계단이 차지하고 있었다. 벽과
높은 천장과 마룻바닥, 그리고 그 위에 놓인 두툼한 카펫은 모두 조금씩
느낌이 다른 흰색이었다.

현관문 왼쪽으로는 바닥보다 조금 높은 받침대 위에 멋들어진


그랜드피아노가 놓여 있었는데, 바로 그 옆에서 에드워드의 양부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컬렌 박사님은 전에 만난 적이 있지만, 그의 젊고 완벽한 외모에


나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사님 옆에는 에드워드의 가족 중에
내가 유일하게 만나보지 못했던 에스미가 서 있었다. 다른 이들처럼
에스미도 창백하고 아름다웠다. 섬세한 달걀형 얼굴과 물결치듯 흘러내린
연한 갈색 머리칼 때문인지 무성영화 시대의 배우가 떠올랐다. 그녀는
몸집이 작고 호리호리했지만, 다른 이들보다 각이 덜 지고 동글동글한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집안 인테리어아 어울리는 옅은 색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환영한다는 미소를 지었지만 우리에게 다가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를 겁주지 않으려고 배려하는 것 같았다.

"칼라일, 에스미. 얘가 벨라예요."

짧은 침묵을 깨며 에드워드가 말했다.

"어서 와라, 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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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일이 자로 잰 듯한 걸음으로 나에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가


주저하듯 손을 내밀었으므로, 내가 한 걸음 다가가 그와 악수를 나눴다.

"다시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컬렌 박사님."

"편하게 칼라일이라고 부르렴."

"네, 칼라일."

갑작스럽게 자신감이 생긴 데 나 스스로도 놀라며, 그를 보고 싱긋


웃었다. 옆에 서 있던 에드워드도 안심하는 것 같았다.

에스미도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꼭 잡는 손의


차가운 느낌은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에스미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맙습니다. 저도 뵙게 돼서 기뻐요."

나 역시 진심이었다. 동화 속 주인공 백석공주를 실제로 만나는


느낌이었다.

"앨리스랑 재스퍼는 어디 있어요?"

에드워드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 두 사람이 넓은 계단


꼭대기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왔구나!"

앨리스가 열광하듯 외쳤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를 번득이며


전속력으로 달려 내려온 그녀는 바로 내 앞에서 우아하게 와락 멈춰 섰다.
칼라일과 에스미가 못마땅한 눈치를 주었지만 나는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앨리스에게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안녕, 벨라!"

앨리스가 성큼 다가와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조금 전까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짓던 칼라일과 에스미는 이제 거의 쓰러질 것처럼 당황했다. 나
또한 충격이면서도 앨리스가 나를 전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 같아 매우
기뻤다. 내 옆에 서 있는 에드워드가 굳어진 것이 오히려 놀라웠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지만,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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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엔 몰랐는데, 너한테서 아주 좋은 냄새가 나."

앨리스 말에 나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재스퍼가 커다란 사자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편안함이 밀려들면서, 낯선 곳에 서 있는데도
아늑함이 느껴졌다. 에드워드가 의아한 눈으로 재스퍼를 바라보는 걸
보고서야 재스퍼의 능력이 떠올랐다.

"안녕, 벨라."

재스퍼가 말했다. 그는 악수를 청하지도 않고 거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와 가까이 있으면서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재스퍼."

나는 수줍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다른 가족을 돌아보았다.

"모두 뵙게 돼서 기뻐요. 집이 참 예쁘네요."

내가 고리타분한 말을 덧붙였다.

"고맙다. 네가 이렇게 와 줘서 우리도 참 기쁘단다."

에스미의 진실함이 느껴지는 말을 듣고 보니, 그녀는 내가 용감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로잘리와 에밋은 보이지 않는 걸 눈치 채며, 식구들이 나를 싫어하느냐고


물었을 때 에드워드가 지나치게 천진한 얼굴로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이
떠올랐다.

칼라일의 표정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아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예의상 눈길을 돌렸다. 여기저기 방황하던 내 시선은 현관 옆 장식대


위에 놓인 아름다운 피아노로 되돌아갔다. 문득 복권에 당첨되면 엄마한테
그랜드피아노를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꿈이 떠올랐다.
엄마의 피아노 솜씨는 그리 훌륭하지도 않았고, 우리 집에 있던 일반 중고
피아노를 혼자 즐기는 게 전부였지만 나는 엄마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는게
참 좋았다. 엄마는 행복한 표정으로 연주에 몰두했고, 그때만큼은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엄마'라는 껍데기를 벗고 새롭고 신비로운 존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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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물론 엄마는 나에게도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지만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나는 결국 엄마가 포기할 때까지 싫다고 투정을 부렸다.

에스미가 내 시선을 알아차렸다.

"칠 줄 아니?"

에스미가 피아노를 향해 고갯짓을 하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그래도 참 아름답네요. 직접 연주하세요?"

"아니. 에드워드가 음악에 재능 있다는 얘기 안 하든?"

에스미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뇨. 하긴 미리 짐작했어야 할 일인지도요."

갑자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에드워드를 노려보며 내가


대꾸했다.

에스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섬세하게 다듬은 눈썹을 들어올렸다.

"에드워드는 못하는 게 없잖아요."

내가 설명했다.

재스퍼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고, 에스미는 나무라듯 에드워드를


흘겨보았다.

"잘난체 하면 못쓰지. 그런 무례한 짓이야."

에스미가 에드워드를 꾸짖었다.

"별로 안 했어요."

에드워드가 호탕하게 웃자 에스미의 표정이 흡족한 듯 풀어졌지만, 두


사람은 내가 알 수 없는 시선을 짧게 주고받았다.

"사실은 그동안 너무 겸손해서 탈이었어요."

내가 고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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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를 위해 한 곡 연주해 주렴."

에스미가 부추겼다.

"방금 잘난체 하는 건 무례한 짓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에드워드가 투덜댔다.

"모든 규칙엔 예외가 있는 법이지."

에스미가 대꾸했다.

"나도 네 연주 듣고 싶어."

내가 거들었다.

"그럼 결정된 거네."

에스미가 에드워드를 피아노 쪽으로 밀었다. 그녀는 나도 함께 데려다


옆에 앉혔다. 에드워드는 난감하다는 듯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 건반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어 그의 손가락이 빠르게 건반 위를 움직이자, 한 사람이 연주하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장중하고 풍성한 선율이 실내를
가득 메웠다. 나는 너무 놀라 딱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나의 그런
반응을 보고 사람들이 등 뒤에서 작은 소리로 웃었다.

에드워드는 계속해서 유연하게 연주를 하며 나를 보고 윙크를 했다.

"마음에 들어?"

"네가 작곡한 거야?"

나는 그제야 알아차리고 흠칫 놀랐다.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미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

"왜 그래?"

"내가 너무 하찮게 느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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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느려지면서 좀더 부드럽고 감미로운 곡조로 바뀌었다. 놀랍게도


복잡한 선율 속에서 나는 그것이 그가 흥얼거리던 자장자의 멜로디라는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가 영감을 줘서 만든 곡이야."

그가 나직이 말했다. 음악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달콤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도 알겠지만 다들 널 좋아해. 특히 에스미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드넓은 방은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다들 어디 가신 거야?"

"우리 둘만 있을 수 있게 살짝 비켜준 거겠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네 사람은 날 좋아하지만 로잘리하고 에밋은......"

나는 의구심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말꼬리를 흐렸다. 에드워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로잘리 걱정은 하지 마. 나중엔 돌아설 거야."

커다랗게 뜬 그의 눈은 호소력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못 미더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에밋은?"

"글쎄, 에밋이 날 미치광이라고 생각하는 건 확실하지만, 너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그냥 로잘리 편을 들어주는 것 뿐이지."

"로잘리는 내가 왜 그렇게 못마땅하대?"

나는 그것을 정말로 알고 싶은지도 자신이 없었다. 에드워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잘리는...... 우리 존재에 대해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외부인이 우리 정체를 안다는게 싫은 거지. 게다가 조금은 질투심도
느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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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리가 나한테 질투심을 느낀단 말이야?"

나는 믿어지지 않아 되물었다. 로잘리처럼 놀라운 미인이 나 같은 애한테


질투심을 느낄 만한 이유가 이 세상에 있을까? 나로선 도저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넌 인간이잖아. 로잘리도 인간이고 싶어하거든."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내가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재스퍼도......"

"그건 내 탓이야. 재스퍼가 가장 최근에 우리 방식대로 살기로 한


식구라고 말했었지? 그래서 내가 거리를 유지하라고 먼저 경고해 뒀던
거고."

나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곤 몸을 떨었다.

"에스미하고 칼라일은......?"

내가 떨고 있는 것을 에드워드가 눈치챌까봐 재빨리 질문을 이었다.

"두 분은 나만큼 행복해하셔. 사실 에스미는 네가 눈이 세 개에다 발에


물갈퀴가 달렸더라도 상관 안 했을걸. 에스미는 그동안 줄곧 내 걱정을
했거든. 칼라일이 나를 변모시킬 때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혹시
변신과정에서 근본적인 구조에 뭔가 빠진 건 아닌지 걱정이 많았는데,
지금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지. 내가 너를 만질 때마다, 흡족해서 거의
숨이 막히는 표정이던걸."

"앨리스는 참...... 정이 많은가 보더라."

"앨리스는 매사를 바라보는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어."

그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설명 안 해줄 거야?"

우리 사이에 무언의 대화가 오갔다. 그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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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렸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모든걸 나에게 털어놓지는


않을 거라는 걸 깨닫았다. 어쨌든 지금은 아니야.

"조금 전에 칼라일이 한 얘기는 뭐야?"

에드워드가 눈썹을 찡그렸다.

"봤구나?"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잖아."

그는 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한테 뭔가 전할 소식이 있었는데, 내가 너한테도 알릴 생각이 있는지


모르니까 의향을 물으신 거야."

"나한테 얘기할 작정이야?"

"얘기 할 수 밖에 없어. 앞으로 며칠 동안, 어쩌면 몇 주일 동안 내가


지나치게 과잉보호를 하려 들지도 모르거든. 공연히 네가 날 폭군으로
여기는 건 나도 원하지 않으니까."

"무슨 일 있어?"

"정확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야. 앨리스가 손님들이 찾아오는 걸


예견했어.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저들이 호기심을 느낀다더군."

"손님들이라고?"

"응...... 그들은 물론 사냥 습관이 우리와 달라. 아마 시내엔 아예


들어가지도 않을 거고. 그래도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널 절대 내 옆에서
떼어 놓지 않을 생각이야."

전율이 일었다.

"이제야 좀 이성적인 반응을 보이는군! 너란 애는 아예 자기보호 본능이


없나 보다고 생각하려는 참이었어."

나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피해 드넓은 실내를 돌아보았다.


그가 내 시선을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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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한 것과 다르지?"

그가 흐뭇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관도 없고, 구석에 쌓아둔 해골도 없지. 아마 거미줄도 없을걸......


그러니 얼마나 실망스럽겠어."

그가 장난스레 말했다. 나는 그의 놀림을 무시했다.

"참 밝고...... 시원하게 툭 트였네."

"우리가 숨을 필요 없는 유일한 곳이니까."

그가 훨씬 진지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제껏 그가 연주하고 있던 음악이 좀더 우수에 찬 선율로 이어지다


감미롭게 끝이 났다. 마지막 선율의 여운이 정적 속에서 내 귓가를
맴돌았다.

"고마워."

내가 중얼거리다 어느덧 눈물이 맺힌 게 느껴졌다. 나는 당황해하며 얼른


눈가를 훔쳤다.

미처 못 닦은 눈가의 눈물을 그가 손끝으로 훔쳐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올리고 눈물방울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정말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눈 깜짝 할 사이에 손가락을 입에 넣어 맛을 보았다.

내가 의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나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나머지 집 안도 둘러볼래?"

"관은 없다고 했지?"

다시 묻는 내 목소리는 속으로 느끼는 사소하면서도 솔직한 염려를


감추지 못해 냉소적으로 들렸다.

에드워드는 소리 내웃으며 내 손을 잡고 피아노에서 일어났따.

"관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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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따라 넓은 계단을 올라가며 나는 새틴처럼 매끄러운 난간을


어루만졌다. 계단 끝에 나타난 긴 복도에는 1 층 바닥과 똑같은 연노랑색
마루가 깔려 있었다.

"여긴 로잘리와 에밋의 방이고...... 여긴 칼라일의 서재...... 앨리스


방......"

방문을 지날 때마다 그가 손짓했다. 내가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복도


끝벽에 높이 매달린 장식물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그의 설명이
중단되었다. 넋이 나간 듯한 내 표정을 보며 에드워드가 킥킥 웃었다.

"웃어도 돼. 참 아이러니컬하긴 하지."

나는 웃지 않았다. 밝은 색 벽과 대조되는 대형 나무 십자가의 고풍스런


나뭇결을 만져보기라도 할 듯 손가락을 뻗었을 뿐. 아주 오래된 듯한
십자가의 나뭇결이 보이는 것처럼 정말로 매끄러운지 궁금했지만, 결국
손을 대지는 않았다.

"굉장히 오래된 것 같아."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1630 년대 초반쯤의 물건이야."

나는 십자가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돌아보았다.

"이걸 왜 여기에 걸어뒀어?"

"향수를 달래는 거지. 칼라일의 아버님 유품이거든."

"골동품을 수집하셨나?"

"아니. 직접 깎으셨다더군. 칼라일의 아버님이 목사관에서 설교하실 때


연단 위 벽에 걸려 있던 거야."

나는 내 얼굴에 충격이 고스란히 드러났을지 알 수 없었지만 혹시 몰라


낡고 꾸밈없는 십자가를 다시 쳐다보았다.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을 해
보니, 370 년도 더 된 물건이었다. 그 오랜 세월을 어림하느라 애쓰는 사이
침묵이 길게 흘렀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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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칼라일은 몇 살이야?"

그의 질문은 무시한 채 여전히 십자가를 올려다보며 내가 조용히 물었다.

"얼마 전에 362 번째 생일을 지냈어."

에드워드가 말했다. 나는 수만 가지 질문을 떠올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조심스레 나를 지켜보며 설명을 했다.

"칼라일은 1640 년대에 런던에서 태어났다더군. 당시는 연도를 정확히


따지던 때도 아니고, 더욱이 평민들에 관해선 정확한 기록이 없었겠지.
그래도 크롬웰이 영국을 다스리기 직전이었던 건 확실해."

나는 그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나마 생각보다는 쉬웠다.

"칼라일은 영국 국교회 목사의 외아들이었어. 어머니는 칼라일을 낳다가


돌아가셨지. 아버지는 상당히 완고한 분이셨다더군. 신교도가 득세하자,
그분은 로마가톨릭 신자들과 다른 종교인들을 처단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
섰다고 해. 게다가 악의 존재란 것도 아주 굳게 믿고 계신 분이었지.
마녀와 늑대인간......, 뱀파이어 사냥을 선두에서 이끌었으니까."

나는 그 말에 얼어붙고 말았다. 에드워드도 눈치 챈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그들은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을 수도 없이 화형에 처했어. 물론


진짜였다면 쉽게 잡히지도 않았겠지. 연로해진 목사는 순종적이었던
아들에게 악을 퇴치하는 일을 물려줬어. 처음에 칼라일은 아버지를 많이
실망시켰어. 존재하지도 않는 악마를 봤다고 우기거나 무고한 사람을
처단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아주 끈질겼고, 아버지보다 훨씬 더 영리했어.
그러다 도시 하수구에 숨어 살면서 밤에만 사냥을 하러 나오는 진짜
뱀파이어 집단을 찾아낸 거야. 당시에 괴물은, 단순히 미신이나 전설이
아니라 그냥 다양한 삶의 한 방식이었어. 사람들이 삼지창과 횃불을 들고
모여들었고, 칼라일이 발견한 괴물들이 있는 도로 쪽 출입구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지. 드디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지."

그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고, 나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자는 아주 늙은데다, 허기가 져 몹시 약해져 있었던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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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일은 그자가 인간들의 낌새를 눈치 채고 라틴어로 다른 동료들에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어. 늙은 괴물은 거리로 달아났고, 몹시 재빨랐던
스물세살 청년 칼라일은 맨 앞에 서서 추적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을 쉽사리
따돌릴 수도 있었을 텐데, 칼라일 생각으론 몹시 배가 고팠던 것 같다더군.
그래서 돌아서서 공격을 감행한 거지. 그는 칼라일을 가장 먼저 덮쳤지만
바로 뒤에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방어를 해야 했어.
괴물은 두 사람을 죽이고 세 번째 희생자를 데리고 달아났고, 칼라일은
피를 흘리면서 길에 쓰러져 있었어."

에드워드가 말을 멈추었다. 나는 그가 나를 위해 일부 이야기를 생략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칼라일은 자기 아버지가 자길 어떻게 할지 잘 알고 있었어. 괴물손에


닿은 것은 무엇이든 철저하게 파괴해야 했기 때문에 시신까지도 불에
태우는 게 관례였거든. 칼라일은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본능적으로
행동했어. 사람들이 괴물과 세 번째 희생자를 뒤따라간 사이에 그 골목에서
몸을 피한 거야. 지하실로 숨어든 그는 사흘 동안 썩어가는 감자 속에 숨어
있었어. 칼라일이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기적이라고 해야겠지. 모든 게 끝나고 나서, 칼라일은 자기가
어떤 존재가 됐는지를 깨닫았다."

내 얼굴에 심상치 않은 표정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에드워드가 말을


멈추었다.

"기분이 어때?"

그가 물었다.

"난 괜찮아."

나는 그를 안심시켰다. 내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깨물기는 했지만, 내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호기심을 에드워드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묻고 싶은 게 몇 가진 있을 테지."

"응, 두어 가지."

그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더 환하게 웃음 지었다. 에드워드는 내 손을


잡아끌며 다시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그럼 가자.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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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칼라일

그는 칼라일의 서재라고 가르쳐 주었던 방으로 다시 나를 데려갔다. 그가


문밖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들어와라."

칼라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드워드가 문을 열자 서쪽으로 창이 난 천장 높은 방이 나타났다. 벽은


역시 널빤지로 되어 있었는데, 짙은 나무색으로 된 벽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벽마다 공간 대부분을 높은 책꽂이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이 아닌 곳에서 그토록 많은 책을 한꺼번에 본 것은
처음이었다.

칼라일은 넓은 마호가니 책상 뒤에 높인 가죽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펼쳐놓고 읽던 두툼한 책에 책갈피를 끼웠다. 그 방은 대학
학장의 집무실이 이럴 거라고 내가 늘 상상하던 모습이었는데, 칼라일은 그
방에 어울리기에는 너무 젊어 보였다.

"어떻게 왔니?"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유쾌하게 물었다.

"벨라한테 우리 역사를 좀 보여주고 싶어요. 실제로는 칼라일의


역사지만."

에드워드가 말했다.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내가 사과하듯 말했다.

"아니다. 어디부터 시작할까?"

"왜거너부터요."

에드워드는 대답하며, 스스럼없이 내 어깨에 한 팔을 올리고 우리가 방금


들어온 문 쪽으로 나를 돌려 세웠다. 그의 손길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 몸에
닿을 때마다 내 심장은 밖으로 소리 들릴 것처럼 심하게 뛰었다. 칼라일
앞이라 더욱 당혹스러웠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벽은 다른 벽과 달랐다. 그 벽에는 책장 대신 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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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의 그림과 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일부는 색이 화려했고 일부는


단조로운 흑백이었다. 나는 공톰점이나 서로 연결된 규칙 따위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성급하게 훑어봐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가 나를 맨 왼쪽 끝 벽으로 이끌더니 소박하고 작은 나무액자에


들어 있는 유화 앞에 서게 했다. 경사진 지붕과 뾰족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도시의 모습을 섬세한 세피아 톤으로 그린 그 그림은 크고 화려한
그림들 사이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앞으로 넓은 강이 흐르고 작은
성당처럼 보이는 구조물을 위에 덧세운 다리가 걸쳐 있었다.

"1650 년대 런던의 모습이야."

"내 청년시절의 런던이지."

칼라일이 바로 몇 발자국 뒤에서 말했다. 그가 다가오는 소시를 듣지 못한


나는 움찔 놀랐다. 에드워드가 내 손을 지그시 잡았다.

"직접 얘기 해 주시겠어요?"

에드워드가 물었다. 나는 칼라일의 반응을 보느라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 시선을 받았다.

"그러고 싶지만, 사실 지금도 좀 늦었다. 오늘 아침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스노 선생이 병가를 냈다는 거야. 게다가 그 이야기라면 너도
나만큼 잘 알잖니."

칼라일이 이번에는 에드워드를 보고 씩 웃으며 덧붙였다.

17 세기 런던에서 보낸 청년 시절을 이야기하는 도중에 현대적인 병원의


일상을 염려하는 의사라니,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참 이상스러운
조합이었다.

칼라일이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이야기를 나 때문에 일부러 설명했다는


사실도 나를 심난하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칼라일은 또 한번 나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방을 나갔다.

나는 칼라일의 고향을 담은 작은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칼라일이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난


다음엔?"

마침내 내가 고개를 들고 나를 지켜보는 에드워드와 눈을 마주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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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었다.

에드워드가 그림들을 다시 보았으므로, 나는 그가 어떤 그림을 눈여겨


보는지 살폈다. 그가 보고 있는 그림은 멀리 바위산이 아련하게 보이는 숲
한가운데 있는 텅 빈 초원을 칙칙한 색으로 그린 커다란 풍경화였다.

"자기가 어떤 존재가 됐는지 처음 알케 됐을 때 칼라일은 거부했어.


스스로 파멸하려고 노력했지.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나는 큰 소리로 물으려고 했지만, 충격을 받았는지 말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잘 나오지 않았다.

"아주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바다에 빠져 죽으려고도


했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 새로운 생을 얻었기 때문에 대단히 강했지.
새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칼라일이 어떻게...... 먹는 걸......
자제했는지 놀라울 뿐이야. 그 시기에는 본능이 그 무엇보다 더 강하거든.
하지만 그는 굶어죽기로 작정할 만큼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컸던 거야."

"그게 가능해?"

내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다.

"아니, 우릴 죽일 수 있는 방법은 극히 드물어."

나는 더 물으려고 입을 벌렸지만, 나보다 에드워드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그래서 칼라일은 몹시 허기졌고, 그래서 나약해졌어. 의지력도 약해지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최대한 인간들이 지내는 곳을 멀리했지. 몇 달
동안이나 그는 밤마다 인적 없는 곳을 찾아 방황하며 자기혐오를 키워갔어.
어느날 밤, 그가 숨어 있는 곳으로 사슴 떼가 지나갔어. 너무 갈증이 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사슴을 공격했지. 그는 원기를 회복했고,
그가 두려워하던 사악한 괴물이 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도 살 수 있다는 걸
깨닫았어. 전생에서도 어차피 사슴고기는 먹고 살았잖아. 그뒤로 몇 달
동안 칼라일의 새로운 철학이 탄생했어. 악마가 되지 않고도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그는 다시 자신감을 얻었어. 주어진 시간도 최대한
이용하기 시작했지. 칼라일은 늘 지적이고 배우는 걸 즐겼는데, 이젠
끝없는 시간이 그에게 주어진 거니까. 그는 밤엔 공부를 하고 낮엔 계획을
세웠어. 헤엄을 쳐서 프랑스로 건너간......"

"헤엄을 쳐서 프랑스로 건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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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버해협을 수영해서 건넌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그가 참을성 있게 설명해 주었다.

"그건 맞는 말이지만, 아무튼 칼라일의 얘기 속에서 들으니 우스워서.


계속해."

"수영은 우리에게 아주 쉬운......"

"너한텐 뭐든 쉽겠지."

내가 딱딱거리자, 에드워드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기다렸다.

"다시는 말 막지 않을게, 약속해."

그는 소리 내어 웃더니 하려던 말을 이었다.

"우리한테 수영이 쉬운 건 숨을 쉴 필요가 없기 때문이야."

"숨을 쉴 필요가......"

"안 돼,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그가 웃으면서 차가운 손가락을 내 입술에 가볍게 댔다.

"얘기를 듣고 싶은 거야, 아니야?"

"그렇게 엄청난 얘기를 해놓고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건


너무해."

그의 손가락을 입술에 얹은 채로 내가 투덜거렸다. 그가 손을 들어 내


목덜미에 내려놓았다. 심장박동이 빨라졌지만 나는 애써 모른체했다.

"너희는 숨을 쉴 필요가 없어?"

"그래, 반드시 필요하진 않아. 습관일 뿐이지."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숨을 안 쉬고......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어?"

"아마 한계가 없을걸. 잘은 모르겠지만. 후각이 없어지면 좀 불편할 것


같긴 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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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불편하다니?"

내가 그의 말을 따라했다.

나는 내 표정에 그다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뭘 봤는지 에드워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손을 내리고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그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왜 그래?"

내가 그의 굳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내 손끝이 닿자 에드워드는 어두워진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난 계속해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어."

"뭘 기다려?"

"어느 시점엔, 내가 들려준 얘기나 네 눈으로 직접 본 무언가가 도를 넘게


되는 순간이 오리란 거 알아. 그러면 너는 비명을 지르며 나를 피해
달아나겠지."

그의 입술은 반쯤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난 그럼 널 막지 않을 거야. 그런 순간이 다가오길 원하고 있으니까. 네가


안전하길 바라니까. 그러면서도 난 너와 함께 오고 싶다. 이 두 욕망은
절대로 타협할 수가 없는데......"

에드워드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난 절대 달아나지 않아."

"그건 두고 보기로 하고."

그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를 째려보았다.

"아무튼 계속해 봐. 칼라일이 헤엄을 쳐서 프랑스로 건너간 거기부터."

그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기 전에 조금 머뭇거렸다. 생각을 정리하듯


그의 시선이 또 다른 그림에서 머물렀다. 크기가 가장 크고 색깔도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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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으며, 액자 장식도 가장 요란한 작품이었다. 헐렁한 가운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높은 기둥과 대리석 발코니 주변에 쓰러져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이 화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스 신화를 재현한 것인지, 사람들이
구름 위로 떠다니는 것으로 보아 성경 내용을 그린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칼라일은 프랑스로 건너간 다음 계속해서 유럽을 돌아다니며 대학을


다녔어. 밤마다 음악, 과학, 의학을 공부하다가 문득 천직을 찾은거야.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로 속죄를 하기로 한 거지."

에드워드의 표정에 경외감에 가까운 존경이 우러나왔다.

"나로선 그동안 칼라일이 겪은 갈등을 제대로 설명할 길이 없어. 칼라일이


고문과도 같았을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완벽한 자제력을 얻기까지 200
년이나 걸렸거든. 이제 칼라일은 인간의 피 냄새에 완전히 면역이 돼서,
아무런 고통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 그는 병원에서 크나큰
마음으 평화를 느낀다더군......"

에드워드가 한동안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갑자기 하려던 일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우리 앞에 놓인 커다란 그림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칼라일은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하다가 다른 동료를 만났어. 그들은


런던의 시궁창에서 유령처럼 사는 존재들에 비한다면 너무도 세련되고
교육받은 존재였지."

그는 가장 높은 발코니에서 발 아래에서 벌어진 참상을 침착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근엄한 표정을 한 네 인물을 가리켰다. 나는 조심스레 네
사람들 살피다 금발 남자를 알아보고는 깜짝 놀라 웃었다.

"솔리메나(1657~1747. 이탈리아의 화가)는 칼라일의 친구들한테 영감을


많이 받았어. 그래서 그들을 자주 신의 모습으로 그려냈지."

에드워드가 킥킥 웃었댔다.

"아로, 마르쿠스, 카이우스야. 밤마다 나타났던 예술의 후원자들이지."

에드워드가 검은 머리 남자 둘과 백발인 남자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캔버스에 그려진 그 인물들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내가 물었다.

"아직도 거기 있어. 몇천 년 동안 지내온 대로 여전히 건재하지. 칼라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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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아주 짧은 기간, 겨우 몇십 년 동안만 같이 지냈어. 그들의 호의와


세련된 사교생활은 존경스러웠지만, 그들이 자꾸 '자연스러운 식성'을
거부하는 칼라일의 혐오감을 치료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거든. 그들은
칼라일을 설득하려 했고, 칼라일은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둘 다
소용없었어. 어느 시점겐가 칼라일은 신대륙에서 살아보겠다고 결심했어.
그는 자신과 같은 동족을 찾아내는 꿈을 꿨지. 몹시 외로웠으니까.
오랫동안 그는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어.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괴물들은
동화 속에나 등장하는 존재로 전락했고, 칼라일은 아무 의심 없는 인간들
틈에서 인간인 체 살아갈 수 있게 됐어. 의술도 펼치기 시작했고, 하지만
그가 꿈꿔온 동료애는 좀처럼 찾을 수 없었어. 인간들과 너무 친해지는 건
위험할 수 도 있으니까. 유행성 독감이 유례없이 창궐했을 때, 칼라일은
시카고 병원에서 밤마다 일을 했어. 마침 몇 년 동안 고민해 오던 일을
실행에 옮겨야겠다고 작정한 때였어. 친구를 찾을 수 없다면 만들기로 한
거지. 그는 스스로 어떻게 변신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망설이기도 했다더군. 자기가 당한 것처럼 누군가의 생명을 훔친다는 것도
못 견뎌했고, 그런데 나한테는 희망이 없었어. 나는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병동에 버려져 있었으니까. 칼라일은 내 부모님의 치료도 맡았기
때문에 내가 고아란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마침내 시도해 보기로 결심한
거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던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는 서쪽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지금 그의 머릿속은 어떤 영상으로 가득할까
궁금했다. 칼라일의 기억일까, 아니면 스스로의 기억일까.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다시 나를 바라본 그의 얼굴에는 천사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만나게 된 거야."

"그럼 넌 칼라일과 늘 같이 지냈어?"

"거의 같이 지냈다고 봐야지."

그는 가볍게 내 허리를 안고 문을 빠져나갔다. 나는 다른 이야기도 들을


기회가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그림이 걸린 벽을 돌아보았다.

에드워드가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더는 입을 열지 않아, 할 수 없이 나는


물었다.

"거의라니?"

그는 대답하기 꺼려지는 듯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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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태어난 뒤에...... 아니 창조되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뒤로 십 년 동안은 반항심으로 가득 찬 전형적인 사춘기 같은 시간을
보냈어. 칼라일의 절제하는 삶을 놓고 코웃음 치면서 나까지 식욕을
절제하게 만드는 그를 미워했지. 그래서 한동안은 나 혼자 따로 살기도
했고."

"정말?"

겁이 나야 정상일 텐데, 오히려 호기심만 자라났다.

에드워드도 그걸 알아차렸다. 우리는 이층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만, 나는


주변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혐오스럽지 않아?"

"아니."

"왜 아니지?"

"그냥...... 그게 당연한 것 같아."

그가 큰 소리로 웃었다. 계단 꼭대기에 올라와 보니 마루가 깔린 복도가


또 나타났다.

"나는 새로운 생을 얻은 순간부터,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의 생각을 알아차리는 재능을 갖게 되었지. 그래서 칼라일한테
더는 반항하지 않게 된 거야. 십 년 만에, 난 그의 진심을 완벽하게 읽을
수도 있고, 그가 왜 그렇게 살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거든. 하지만
난 이삼 년 만에 다시 칼라일에게 돌아가 그의 눈을 속이며 지내기도 했어.
나는 예외라고, 양심에 뒤따르는 우울함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나는 먹이가 될 대상의 생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착한
상대는 그냥 두고 악한 자들만 쫓아다녔으니까. 살인자가 어떤 소녀를
노리고 어두운 골목을 따라 걷고 있는데, 내가 그 소녀를 구한다면 나도
그렇게 끔찍한 존재는 아니지 않겠어?"

나는 그가 묘사하는 어두운 골목과 겁에 질린 소녀, 그 뒤를 쫓는 검은


그림자가 너무도 선명하게 떠올라 몸을 떨었다. 사냥할 때의 에드워드는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젊은 신처럼 끔찍하고도 아름다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소녀는 에드워드에게 고마워했을까. 아니면 그 전보다 더 놀라게 될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내 눈에도 괴물의 모습이 보이더군. 내가 아무리


정당화하려고 해도 수많은 인간의 목숨을 빼앗은 빚은 갚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칼라일과 에스미한테 돌아갔지. 두 분은 돌아온 탕아를 맞듯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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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게 맞아주었고. 그럴 자격이 없는 놈이었는데도."

우리는 어느새 복도 맨 끝에 있는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내 방이야."

그가 문을 열고 나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의 방은 맨 아래층처럼 남쪽 벽 전면이 유리였다. 저택의 남쪽 벽은


전체가 유리로 된 것 같았다. 그의 방에서는 굽이쳐 흐르는 솔덕 강과
올림픽 산으로 이어지는 원시림이 내다보였다. 산봉우리가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워 보였다.

서쪽 벽에는 CD 가 선반마다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음반가게보다 더


많은 것 같았다. 구석에는 대단히 복잡해 보이는 음향기기가 놓여
있었는데, 내가 만지면 분명히 어딘가 망가질 것 같아 손도 못 댈 듯했다.
침대는 없고, 푹신해 보이는 커다란 소파만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푹신한 황금빛 카펫이 깔려 있고, 벽마다 진한 금빛 천이 두껍게
드리워져 있었다.

"음향효과 때문이겠지?"

내가 묻자 에드워드가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리모컨을 들어 오디오를 켰다. 조용하면서 부드러운 재즈 선율이


흐르자, 마치 밴드가 이 방에서 연주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가
모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음반을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어떻게 정리해 놓은 거야?"

장르나 알파벳순으로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 보여 물어보았다.

"음, 연도순으로 내 선호도에 따라 정리한 거지."

그가 다른데 정신을 팔고 있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돌아보니 그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왜?"

"마음이...... 편해질 거란 예상은 했어. 너한테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아무런 비밀이 없게 되면 말이지. 그런데 그 이상의 느낌이 들 줄은 전혀
예상 못했어. 지금 기분이 참 좋은데. 어쩐지...... 행복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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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며시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기쁜데."

나도 따라 웃었다. 에드워드가 자기 얘기를 털어놓은 걸 후회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니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 표정을 샅샅이 뜯어보더니 미소를 거두고 이마를


찡그렸다.

"아직도 내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길 기다리고 있지?"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환상을 깨뜨리긴 싫지만,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무섭지


않아. 사실 난 네가 하나도 안 무서워."

내가 스스럼없이 거짓말을 했다.

그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러더니 이내 짓궂은


웃음을 머금었다.

"방금 그 말 '정말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그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완벽한 이를 모두


드러냈다. 그는 갑자기 바닥에 납작 엎드리더니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는
사자처럼 공격자세를 취했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뒤로 물러났다.

"설마."

그의 동작이 너무 빨라 그가 나를 향해 뛰어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만 내가 느낀 건 갑자기 허공으로 둘이 함께 붕 떴다가 소파 위로
떨어졌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 사이 에드워드가 두 팔로 나를 꼭 안고
있어서 나는 거의 흔들림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소파에서 자세를
바로 하려고 애쓰며 여전히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그를 품에 꼭 안은채


꼼짝도 못하게 옥죄었다. 나는 놀라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철저하게
절제된 표정이었고, 이내 굳어졌던 얼굴을 풀고 싱글싱글 웃으며 장난스레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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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뭐라고 했더라?"

그가 농담 삼아 위협하듯 말했다.

"네가 아주, 아주 무서운 괴물이라고 했다. 왜?"

호흡이 흐트러져, 나의 비아냥거림은 조금 효과를 잃었다.

"좀 낫군."

"음. 이제 나 얼어나도 돼?"

내가 몸부림을 치자 그는 그냥 껄껄 웃기만 했다.

"들어가도 돼?"

복도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에드워드는 나를 가지


무릎에 앉히는 정도로만 자세를 바꿨다. 앨리스가 먼저 문가에 나타났고
뒤에 재스퍼가 보였다.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에드워드는
태평했다.

"들어와."

에드워드가 아직도 낮게 웃으며 말했다.

앨리스는 우리가 껴안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듯, 댄서처럼 우아한


걸음으로 들어와 방 한가운데에 앉았다. 하지만 재스퍼는 조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문가에 서 있었다. 에드워드의 얼굴을 살피는 재스퍼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가 지금도 저 비범한 감수성으로 방 안 분위기를 파악 중인
건지 궁금해졌다.

"네가 벨라를 점심거리로 해치우는 것 같아서, 남는게 있으면 우리도 좀


거들까 해서 왔지."

앨리스가 말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굳어졌지만 에드워드가 씩 웃는 걸 보고 긴장을 풀었다.


앨리스의 말 때문에 웃는 건지, 내 반응 때문에 웃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남겨줄 게 없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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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가 나를 좀더 가까지 껴안으며 말했다.

"앨리스가 오늘밤 폭풍우가 제대로 올 거래. 에밋이 공 한번 치자는데,


같이 할래?"

재스퍼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말에 어려운 낱말이라고는 없었지만, 나는 전체적인 맥락을 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앨리스가 기상예보관보다 더 믿음직스럽다는
건 눈치 챌 수 있었다.

에드워드가 눈을 빛내며 반색을 하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물론 벨라도 데려가야지."

앨리스가 종달새처럼 말했다. 재스퍼가 앨리스를 흘끔 보는 게 느껴졌다.

"같이 갈래?"

에드워드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런 얼굴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당연히 좋지. 근데 어딜 가는 건데?"

"우리가 공놀이하려면 천둥이 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거든. 이유는 보면


알아."

"우산을 가져갈까?"

나만 빼고 셋이 모두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

재스퍼가 앨리스에게 물었다.

"아니. 폭풍우는 시내에만 쏟아질 거야. 공터엔 비 안 와."

앨리스가 단언했다.

"잘됐네."

재스퍼의 목소리에는 열의가 묻어났다. 나도 겁 따윈 온데간데없이


기대감에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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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일도 같이 갈 건지 물어보자."

앨리스가 벌떡 일어나, 무수한 발레리나들이 보면 좌절감에 휩싸일 것


같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방을 나갔다.

"이미 알면서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얘기하네."

재스퍼가 놀리듯 말했고, 두 사람은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재스퍼가


살며시 문들 닫아주었다.

"우리 다 같이 뭘 한다는 거야?"

"'너'는 구경만 해. 우리는 야구를 할 거야."

내가 눈동자를 굴렸다.

"뱀파이어들이 야구를 한다고?"

"미국인의 대표적인 오락이잖아."

그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는체 하며 말했다.


17. 게임

에드워드가 운전하는 트럭이 우리 집이 있는 도로로 접어들자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당연히 낯익은 현실세계에서 몇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이어 찰리의 집 앞 진입로에서 있는 낡은 검정색 포드 자동차를


발견했고, 에드워드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좁은 현관 지붕 아래레는 제이콥 불랙이 아버지의 휄체어 뒤에 서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인도 옆에 차를 대는 동안 빌리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제이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에드워드가 감정이 격해져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선을 넘는 행동인데."

"찰리한테 경고하러 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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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가 나기보다 더럭 겁이 났다. 에드워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비를


뚫고 날아드는 빌리의 시선을 맞받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찰리가 아직 집에 오지 않았다는 게 너무도 다행스러워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갔다.

"이 문제는 나한테 맡겨둬."

에드워드의 어두운 눈빛이 마음에 걸려 내가 말했다. 놀랍게도 그가


순순히 동의했다.

"아마 그게 최선일 거야. 하지만 조심해. 저 꼬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까."

'꼬마'라는 말에 내가 조금 발끈했다.

"제이콥은 나보다 몇 살 안 어려."

그제야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져 가더니, 그는 씩 웃었다.

"나도 알아."

나는 한숨을 쉬며 문 손잡이에 손을 댔다.

"어서 안으로 데려가. 그래야 내가 갈 수 있으니까. 해질녘에 다시 올게."

"내 트럭 가져갈래?"

한편으로 찰리에게 트럭이 없어진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하며


내가 물었다.

그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난 '걸어서도' 이 트럭보다 빨리 집에 갈 수 있어."

"네가 꼭 피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말했다.

심술 난 내 표정을 보며 에드워드가 싱긋 웃었다.

"어차피 가야 해. 저자들을 돌려보내고 난 뒤에도, 넌 찰리한테 새


남자친구를 소개할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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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를 온통 드러내며 씩 웃었다.

내가 신음 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참 고맙기도 해라."

에드워드는 내가 사랑하는 비딱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곧 돌아올게."

그의 시선이 다시 현관에 서 있는 블랙 부자에게 날아갔다. 그러곤 재빨리


내 턱선 바로 아래쪽에 입을 맞추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걸
느끼며 나도 얼른 현관 쪽을 살폈다. 냉담한 표정이던 빌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양손으로 휠체어 팔걸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빨리 와."

나는 한 번 더 강조한 뒤 문을 열고 빗속으로 내려섰다. 종종걸음으로


현관으로 달려가는 내 등 뒤로,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안녕, 제이콥."

나는 최대한 명랑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맞았다.

"아빤 외출하셨는데, 오래 기다린 건 아니시죠?"

"오래 안 기다렸다."

빌리가 침착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나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전해줄 게 있어서 잠시 들른 거다."

그가 무릎 위에 올려둔 갈색 종이봉지를 가리켰다.

"고맙습니다. 잠깐 들어가서 몸이라도 말리시면 어떨까요."

종이봉지에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도 못하면서 내가 말했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두 사람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하며, 일부러


빌리의 강렬한 눈빛을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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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이리 주세요."

현관문을 닫으려고 돌아서며 내가 말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에드워드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는 꼼짝도 않고 운전석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냉장고에 넣어야 할 거다. 해리 클리어워터에서 파는 가정식


생선튀김이야. 찰리가 가장 좋아하는 거지."

"고맙습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말했다.

"아버지가 오늘도 고기 많이 잡아 오실 텐데, 그렇잖아도 참신한 생선


요리법이 바닥나서 고민이었어요."

"오늘도 낚시하러 갔다고? 늘 가던 데겠지? 가다가 들러서 만나보고


가야겠구나."

빌리가 미묘하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니에요."

내가 얼굴을 굳히며 얼른 거짓말을 했다.

"새로운 장소를 찾으신다고 했는데...... 어딘지는 저도 잘 몰라요."

내 표정 변화를 눈치챈 빌리가 생각에 잠겼다.

"제이콥, 차에 가서 레베카가 새로 보낸 사진을 좀 가져오너라. 그것도


찰리 보라고 두고 가야겠다."

빌리는 눈으로는 여전히 나를 살피며 아들에게 말했다.

"어디 있는데요?"

제이콥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돌아보니 제이콥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트렁크에서 본 것 같아. 네가 잘 찾아봐라."

빌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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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이 다시 빗속으로 걸어나갔다.

빌리와 나는 침묵 속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몇 초 지나가 어색해져서 내가


먼저 부엌으로 갔다. 그가 젖은 휠체어 바퀴를 돌려 나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누런 봉지를 냉장고 맨 윗칸에 대강 밀어넣은 뒤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았다. 주름이 깊에 팬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찰리는 금방 안 돌아올 거예요."

내 목소리는 거의 무례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선튀김은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그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내가


한가롭게 잡담하기를 포기했다는 걸 그도 눈치 챈 것 같았다.

"벨라."

그는 내 이름만 부른 뒤 머뭇거렸다.

나는 말없이 기다렸다.

"벨라. 찰리는 내 둘도 없는 친구다."

"네."

그는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네가 컬렌집안 아이와 어울리기는 것 같더구나."

"네."

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빌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다만,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

"옳은 말씀이에요. 그건 아저씨가 간섭하실 일이 아니죠."

나의 무례한 말투에 그의 흰 눈썹이 불끈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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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잘 모르는가 본데, 컬렌 집안 사람들은 보호구역 안에서 평판이


좋지 못해."

"그건 저도 알아요."

내가 담담하게 말하자, 빌리는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근거 없는 평판이잖아요. 컬렌 집안 사람들은 보호구역에


한발자국도 들어선 적이 없어요. 안 그래요?"

그들의 발길을 막고 동시에 인디언 부족을 보호하기 위해 맺은 협정을


은근히 들먹이자, 빌리의 기가 눈에 띄게 죽었다.

"그야 그렇지."

그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인정했다.

"너는...... 컬렌 집안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나.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이."

내가 휠체어에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아저씨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는 두툼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럴지도 모르지. 찰리도 알고 있니?"

그는 내 약점을 찾아냈다.

"아빤 컬렌 집안 사람들을 아주 좋아하세요."

내가 발뺌을 했다. 그는 내가 교묘히 달아나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다만, 찰리가 간섭할 일은 될수 있겠지."

"하지만 아빠가 걱정할 일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도 역시 제가 알아서 할


일 아닌가요?"

나는 과연 빌리가 복잡하게 꼬인내 질문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인가


의아해하며, 사태를 더 악화시킬 말은 그만 두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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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유일하게 정적을 깨뜨리며 지붕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점점 커지는 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래, 그것도 네가 알아서 할 일인 것 같구나."

마침내 그가 항복을 선언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요, 빌리 아저씨."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만 그저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알겠어요."

내가 재빨리 응수했다. 빌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 말뜻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라는 거야."

나에 대한 걱정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현관문이 요란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차를 다 뒤졌는데도 사진 같은 건 없어요."

제이콥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그의 모습보다 먼저 들려왔다.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그의 셔츠 어깨는 흠벅 젖었고, 머리에서는 비가 뚝뚝
떨어졌다.

"흠. 집에 두고 왔나 보구나."

빌리는 아들 쪽으로 휠체어를 돌리고는 갑자기 부엌을 빠져나갔다.

제이콥이 신경질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시네요."

"그럼 벨라, 찰리한테......"

빌리는 잠시 말을 머뭇거리다 다시 이었다.

"우리가 들렀더라고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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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게요."

제이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 가요?"

"찰리가 늦게 온다는구나."

빌리가 제이콥을 지나쳐 휠체어를 몰며 말했다.

"어휴. 그럼 나중에 만나, 벨라."

제이콥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몸조심 해라."

빌리가 나에게 경고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콥이 아버지를 도와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다가, 트럭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재빨리 확인하고는 그들이
출발하기도 전에 문을 닫았다.

나는 잠시 복도에 서서 그들의 차가 후진을 했다가 진입로를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짜증과 염려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긴장감이 조금 수그러들자, 애써 얌전하게 차려 입었던 옷을 갈아입으러
이층으로 올라갔다.

저녁에 어떤 일을 겪에 될지 몰라 몇 번이나 옷을 다시 갈아입었다.


앞으로 다가올 일에 집중하니, 방금 지나간 일은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았다.
재스퍼와 에드워드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지금, 오전에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이 새삼스레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옷 고르기를 얼른 포기하고,
낡은 모직 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다. 어차피 저녁 내내 비옷을 입고 있을 게
뻔하기때문이었다.

전화벨이 울려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내가 기다리는 건 단 한 사람의


목소리뿐이었으므로, 다른 전화는 모두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면, 아마 전화 대신 직접 내 방에 나타날 거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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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숨 가쁘게 물었다.

"벨라, 나야."

제시카였다.

"어. 안녕, 제시카."

나는 잠시 현실로 돌아가느라 비틀거렸다. 제시카와 마지막으로 얘기한지


몇 달은 된 것 같았다.

"댄스파티는 어땠어?"

"정말 재미있었어!"

제시카가 열정적으로 소리쳤다. 내가 더 캐묻지 않아도 친구는 어젯밤


있었던 일을 자세히 떠벌이기 시작했다. 나는 적당한 때에 "음", "아"하는
정도로만 장단을 맞췄지만 얘기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시카와
마이크, 댄스파티, 학교. 모든 것들이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짙은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이 어떤지 살피느라 내 시선은
자꾸만 창밖을 향했다.

"방금 내가 한 얘기 들은 거야?"

제시카가 짜증스레 물었다.

"미안해, 뭐라고?"

"마이크가 나한테 키스했다니까! 믿어져?"

"잘됐다, 제시카."

"그래 넌 어제 뭐 했어?"

제시카는 내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 아직도 못마땅한 목소리였다.


어쩌면 내가 자세히 묻지 않아서 화가 난 걸지도 몰랐다.

"별일 없었어. 그냥 햇살을 만끽하러 밖으로 나돌았어."

찰리의 차가 차고로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에드워드 컬렌한테는 아무 연락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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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 소리가 나고, 찰리가 계단 밑에 낚시도구를 내려놓는 소리도


들려왔다.

"음."

나는 내 이야기를 어떻게 꾸며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우리 딸, 잘 있었니!"

찰리가 부엌으로 들어오며 소리쳤다. 내가 가만히 손을 흔들었다.

제시카도 찰리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어머, 너희 아빠 오셨구나. 됐어 그럼, 내일 얘기하자. 삼각함수 시간에


만나."

"안녕, 제시카."

나는 전화를 끊었다.

"오셨어요, 아빠."

그는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생선은요?"

"냉동실에 넣어뒀다."

"참, 빌리 아저씨가 오후에 들러서 해리 클리어워터에서 파는 가정식


생선튀김을 갖다 주셨어요. 얼기 전에 몇 조각 꺼내와야겠어요."

나는 애써 흥분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데."

찰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찰리는 샤워를 했다. 얼마 뒤 우리는 식탁에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 찰리는 생선튀김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며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넌 오늘 뭐 하고 지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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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의 질문이 퍼뜩 나를 상념에서 끄집어냈다.

"오후엔 그냥 집안에서 뒹굴었어요......"

사실 조금 전에 잠깐 그랬을 뿐이었다. 나는 쾌활한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뱃속이 졸아들었다.

"그리고 오전엔 컬렌네 집에 갔었어요."

찰리가 포크를 떨어뜨렸다.

"컬렌 박사 집에?"

찰리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나는 그의 반응을 못 본 체 했다.

"네."

"거긴 왜?"

그는 아직도 포크를 집어들지 않았다.

"제가 오늘 저녁에 에드워드 컬렌하고 데이트 비슷한 걸 하거든요. 그래서


부모님한테 절 소개시키려고......,아빠?"

찰리가 아무래도 뇌졸증이라도 일으키려는 것 같았다.

"아빠, 괜찮으세요?"

"에드워드 컬렌하고 데이트를 한다고?"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 이런.

"아빤 컬렌 집안 사람들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걘 너랑 어울리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

"우린 둘 다 3 학년인데요."

찰리의 말은 그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옳은 지적이었지만, 어쨌든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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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박했다.

"잠깐만......, 어느 애가 에드윈이야?"

"'에드워드'는 막내에요. 머리카락이 붉은 기운이 도는 갈색인 애


있잖아요."

신처럼 잘생기고 아름다운 그 사람이요.

"아, 그 애라면......"

찰리가 말문이 막혀 어쩔 줄 몰라했다.

"좀 낫구나. 큰애는 생긴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착한 애라는건 알겠는데


너무...... 성숙해서 너랑은 안 어울려. 그 에드윈이란 애가 네
남자친구냐?"

"에드워드에요, 아빠."

"그래?"

"그런 셈이죠."

"어제 저녁만 해도 시내에 있는 남자애들한테는 관심이 없다고 했잖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찰리가 다시 포크를 집었으므로, 나는 최악의


순간은 지나갔다고 안심했다.

"에드워드는 시내에 안 살아요."

찰리가 음식을 씹으며 나무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어쨌거나 이제 겨우 시작인걸요 뭐. 자꾸 남자친구 운운하면서


민망하게 하지 마세요."

"여긴 언제 온다니?"

"좀 있으면 올 거예요."

"같이 어디 갈 건데?"

내가 못마땅한 듯 크게 신음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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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에서도 이젠 강제로 자백받는 관례는 없어졌잖아요. 걔네


식구들하고 야구하러 갈 거예요."

찰리는 얼굴을 씰룩이더니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너 그 녀석을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찰리가 수상쩍은 듯 나를 살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보란 듯이 눈동자를


굴렸다.

집 앞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내가 먹은 그릇들을


닦기 시작했다.

"접시는 그냥 둬라. 오늘은 내가 설거지할게. 넌 나를 아기 취급하더라."

벨소리가 나자 찰리가 가만히 일어나 현관으로 나갔다. 나는 반 걸음쯤


뒤에서 바짝 그를 따라갔다.

나는 밖에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현관


불빛 아래 비옷 광고 모델처럼 근사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들어오너라, 에드워드."

찰리가 그의 이름을 제대로 말한 순간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맙습니다, 서장님."

에드워드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편하게 찰리라고 불러라. 비옷은 이리 주고."

"고맙습니다."

"저쪽으로 가서 좀 앉아라, 에드워드."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에드워드가 하나밖에 없는 의자에 잽싸게 않았으므로, 나는 찰리와


나란히 소파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재빨리 에드워드를 째려보자,
그는 찰리가 안 보는 사이 살짝 윙크를 했다.

"우리 딸한테 야구하는 걸 보여주기로 했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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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야외 스포츠를 즐긴다 해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곳은 아마 이 세상에 워싱턴 주밖에 없을 것이다.

"네, 그럴 계획입니다."

그는 내가 아빠한테 사실대로 이야기한 것이 조금도 놀랍지 않은


표정이었다. 어쩜 다 엿듣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주도권을 잡은 모양이로구나."

찰리가 껄껄 웃자, 에드워드도 따라 웃었다. 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요. 절 갖고 농담하는 건 이쯤 해 두죠. 가자."

내가 복도로 걸어가며 방수 점퍼를 집어들었다. 두 사람도 내 뒤를


따라왔다.

"너무 늦지 마라, 벨라."

"걱정 마세요. 제가 일찍 데려오겠습니다."

에드워드가 다짐했다.

"네가 우리 딸 좀 잘 돌봐줘라."

내가 끙 신음 소리를 냈지만 두 사람은 나를 무시했다.

"저랑 있으면 안전할 거예요, 염려 마십시오."

한 마디 한 마디에 성실함이 묻어나는 에드워드의 말을 찰리인들 의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쿵쾅거리며 현관을 나섰다. 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고,


에드워드만 나를 따라왔다.

현관 앞에서 나는 우뚝 멈춰 섰다. 내 트럭 뒤에 괴물처럼 생긴 지프가 한


대 서 있었다. 바퀴 하나의 높이가 내 허리보다 높았다. 전조등과 미등에는
철망이 씌워져 있었고, 앞 범퍼 위쪽으로 커다란 조명등이 네 개나 달려
있었다. 차체 지붕은 반짝이는 빨간 색이었다.

찰리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안전벨트 꼭 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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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가 감탄을 억누른느 목소리로 등 뒤에서 소리쳤다.

에드워드가 나를 따라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의자와의 거리를


계산하고 뛰어오를 준비를 했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한 손으로 나를 들어
올려주었다. 나는 찰리가 그 모습을 보지 않았기를 빌었다.

그가 평범한 인간의 속도로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사이 나는 안전벨트를


채우려고 했지만, 버클이 너무 많았다.

"이게 다 뭐야?"

그가 문을 열자마자 내가 물었다.

"비포장도로용 안전장비야."

"아하"

나는 맞는 버클을 찾아 헤맸지만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숨을 쉬며 손을 뻗어 나를 도와주었다. 빗줄기가 너무 굵어 찰리가 있는
현관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에드워드가 내 목덜미
근처에서 손을 머뭇거리며 내 쇄골을 어루만지는 걸 찰리는 분명 못 봤을
테니까. 나는 짝이 맞는 안전벨트를 찾는 걸 포기하고 숨고르기에 집중했다.

에드워드가 열쇠를 돌리자 엔진이 으르렁거리듯 살아났다. 우리는 집앞을


빠져나갔다.

"굉장히...... '큰' 지프도 갖고 있네."

"에밋 차야. 네가 험한 길 전체를 뛰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빌려왔지."

"이런 차는 어디에 보관해?"

"근처에 있는 창고 하나를 차고로 개조했어."

"너는 안전벨트 안 맬 거야?"

에드워드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뭔가 중요한 사실이 내 뒤통수를 쳤다.

"험한 길 '전체'를 뛰어가다니? 그럼 일부는 어쨌든 뛰어가야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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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야?"

내 목소리가 몇 옥타브쯤 올라갔다. 그가 씩 웃었다.

"넌 뛰지 않아도 돼."

"멀미할 거야."

"눈만 감으면 괜찮아."

나는 공포감과 싸우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몸을 수그려 내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는 신음 소리를 냈다. 나는


어리둥절해 그를 바라보았다.

"비가 올 때 네 냄새, 너무 좋아."

"좋은 의미로, 나쁜 의미로?"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에드워드는 한숨을 쉬었다.

"양쪽 다야, 늘 양쪽 다지."

어둑어둑하고 폭우가 쏟아붓는데 어떻게 길을 찾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도로라기보다는 등산로 같은 길을 잘도 찾아냈다. 내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계속 튕겨 올랐다 내려앉기를 반복했으므로, 꽤 오랫동안 대화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운전이 신나는지 줄곧 환하게 웃고 있었다.

드디어 길이 끝났다. 나무들이 지프를 초록 벽처럼 삼면에서 에워쌌다.


가랑비 수준으로 가늘어진 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빗발이 약해졌고, 구름은
끼었지만 하늘은 점점 밝아졌다.

"미안하지만 여기부턴 걸어서 가야 해."

"있지, 난 여기서 기다릴래."

"그 많은 용기는 다 어디 갔어? 오늘 아침엔 진짜 훌륭했는데."

"지난번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단 말이야."

그게 겨우 어제 일이었던가? 그는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안전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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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가 풀 테니까 넌 어서 가."

"흐음, 네 기억을 흐리게 만들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네."

그가 재빨리 안전벨트를 모두 푼 뒤 말했다.

내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가 나를 안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는


거의 안개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정말로 앨리스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내 기억을 흐리게 만들다니?"

내가 초조하게 물었다.

"말 그대로야."

그가 웃음이 담긴 시선으로 강렬하게 그러나 조심스럽게 나를


지켜보았다. 에드워드가 양팔로 나를 가두듯 차체를 짚은 뒤 가까이
다가왔으므로, 나는 문에 등을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좀더 다가와
고개를 숙이자, 둘 사이 거리가 한 뼘도 되지 않았다. 내가 달아날 구석은
없었다.

"자, 정확하게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말해봐."

그의 숨결이 와 닿는 것만으로도 나는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어, 나무에 부딪혀서......"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죽을까 봐. 그리고 멀미할까 봐."

에드워드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고개를 숙여 차가운 입술로 내


목덜미를 살짝 스쳤다.

"아직도 걱정 돼?"

내 살결에 입술을 대고그가 중얼거렸다.

"응. 나무에 부딪히고 멀미할 것 같아."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는 내 목덜미에서 턱까지


그림을 그리듯 코끝을 살며시 움직였다. 그의 차가운 숨결이 내 피부를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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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에드워드가 내 턱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나무랑 멀미."

내가 숨을 헐떡였다. 그가 얼굴을 들어 내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벨라, 정말로 내가 널 나무에 부딪히게 할 거라고 생각하는건 아니지?"

"응, 그렇지만 혹시 모르잖아."

내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손쉽게 승리하리라고


예감한 듯 했다.

에드워드는 천천히 내 뺨에 입을 맞추어 가다 입술 바로 옆에서 멈추었다.

"나무에 부딪히도록 내가 내버려둘 것 같아?"

그의 입술이 떨리는 내 아랫입술을 살짝 스쳤다.

"아니."

아직 반항심이 남아 있었지만, 다시 불러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거 봐. 겁낼 건 하나도 없어, 안 그래?"

그가 내 입술 위에서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

"응."

나는 한숨을 쉬며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자 에드워드가 조금 거칠게 내


얼굴을 잡고 열정적으로 입술을 움직여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내가 보인 행동에 대한 핑계는 있을 수 없었다. 지금 나는 모든 걸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참지 못하고 처음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안전하게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했지만, 나도 모르게
그의 목을 꽉 움켜잡고 차가운 그의 몸에 매달렸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입술을 벌렸다.

그는 한순간 내 팔을 풀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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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벨라! 너 때문에 죽겠다니까, 정말."

숨을 헐떡이며 에드워드가 소리쳤다. 나는 몸을 숙여 손으로 무릎을 잡고


몸을 지탱했다.

"넌 쉽게 죽지 않는다고 했잖아."

내가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널 만나기 전엔 나도 그렇게 믿었지. 어쨌든 내가 또 뭔가 멍청한 짓을


하기 전에 어서 가야겠군."

그는 투덜거림을 멈추더니 지난번처럼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나를 등에


업었다. 그는 내 다리를 자기 허리에 감고 목을 조이듯 내 팔을 단단히
둘렀다.

"눈 감는 거 잊지 말도록."

그가 가혹하게 쏘아붙였다. 나는 재빨리 그의 어깨와 내 팔 사이에 얼굴을


묻고 눈을 꽉 감았다.

그러자 움직이는 느낌도 거의 없었다. 미끄러지듯 유연한 그의 움직임이


전달되긴 했지만, 너무도 조용해서 느긋하게 인도를 걷는 기분이었다.

나는 정말로 에드워드가 전처럼 숲속을 날아가듯 달리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살짝 눈을 뜨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애써 참았다. 끔찍한
현기증을 감수할 만한 충동은 아니었다. 나는 편안하고 고른 그의 숨소리를
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움직임을 멈추고 난 뒤에도 에드워드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다.

"다 끝났어, 벨라."

용기를 내어 눈을 뜨니 정말로 숲속에 서 있었다. 나는 뻣뻣해진 팔다리를


풀다가 미끄러져 주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내가 젖은 땅에 부딪히며 외쳤다.

에드워드는 계속 화를 내야 할지 내 꼴을 보고 웃어야 할지 마음을 못


정했는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완전히 넋이나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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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을 본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웃고 있는 그를 못 본 체하며, 홀로 몸을 일으켜 비옷에 묻은 진흙과


나뭇잎을 떨어냈다. 나는화가 나서 숲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에드워드의
팔이 내 허리를 감았다.

"어딜 가는 거야?"

"야구 구경 하러. 넌 이제 별 관심 없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너 없이도


재미있게 놀걸."

"엉뚱한 길로 가고 있잖아."

나는 그를 외면한 채 방향을 바꿔 반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또다시 나를 따라잡았다.

"화내지 마. 나도 어쩔 수 없었더. 너도 네 표정을 봤어야 하는 건데."

그는 계속해서 키득키득 웃었다.

"너만 화 낼 자격이 있는 줄 알아?"

내가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너한테 화난거 아니야."

"'벨라, 너 때문에죽겠다니까. 정말.' 이라고?"

내가 뾰로퉁하게 그의 말투를 흉내 냈다.

"그건 사실이잖아."

나는 또다시 그를 피해 달아나려 했지만, 재빨리 그가 나를 잡았다.

"분명 너 화났었잖아."

"맞아."

"그런데 지금은 또......"

"'너한테' 화난 게 아니란 뜻이야. 아직도 모르겠어?"

그는 갑자기 놀리는 말투를 싹 거두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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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몰라?"

나는 그의 갑작스런 기분 변화와 그가 하는 말 두 가지 모두 혼란스러웠다.

"난 절대로 너한테 화를 낼 수 없어. 어떻게 화를 내겠니? 용감하고,


믿음직하고...... 따사로운 너에게."

"그런데 왜?"

나는 속삭여 물으며 에드워드가 나를 멀리하려고 할 때마다 느껴지는


암울한 기분을 떠올렸다. 그때마다 나는 내 나약함과 굼뜬 행동, 종잡을 수
없는 인간적인 반응에 절망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한테 화가 난 거야. 자꾸만 널 위험에 빠뜨리는 내 행동이 싫어. 내


존재 자체가 널 위험하게 하잖아. 가끔은 정말로 내 자신이 혐오스럽다는
걸 알아야 해. 내가 더 강해져야 하는데, 더 강해져야 널......"

내가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런 말 하지마."

에드워드는 내 손을 자기 입에서 뺨으로 옮겨놓았다.

"사랑해. 내 행동에 대한 핑계로는 참 알량하지만, 그래도 그게


사실이야."

에드워드가 날 사랑한다고 말한 건 처음이었다. 그는 깨닫지 못했을지


몰라도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번엔 부디 얌전히 있어줘."

그가 고개를 숙여 가볍게 나에게 입술을 포갰다. 나는 부탁대로 가만히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스완 서장님한테 날 집에 일찍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한 거 기억나지?


어서 가는 게 좋겠다."

"네, 아가씨."

그는 안타가운 듯 미소를 지으며,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내 손만 잡았다.


비에 젖은 키 큰 양치식물과 덩굴가지에 늘어진 이끼를 뚫고 지나 커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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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송나무 한 그루를 돌아서자, 올림픽 산봉우리 중턱에 자리 잡은 드넓은


들판 가장자리가 나타났다. 야구경기장의 두 배는 되는 크기였다.

모두들 와 있는 게 보였다. 에스미와 에밋, 로잘리는 백 미터쯤 떨어진


바위에 앉아 있었다. 까마득히 먼 곳에서는 재스퍼와 앨리스가 몇백 미터
거리를 두고 뭔가를 던져 주고받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공이
보이지 않았다. 칼라일은 베이스 표시를 하고 있는 듯 했는데, 내 눈에는
왜 그렇게 멀리 떼어놓아야 하는지 의아했다.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세 사람이 일어났다.


에스미는 우리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에밋은 로잘리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에스미를 뒤따라왔다. 로잘리는 우아하게 일어나 내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들판으로 걸어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니 속이 살짝
뒤틀리는 것 같았다.

"에드워드, 조금 전에 네가 낸 소리였니?"

에스미가 다가오며 물었다.

"곰이 숨 막혀 캑캑거리는 소리 같던데."

에밋이 거들었다.

나는 머뭇거리다, 에스미에게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벨라가 자기도 모르게 아주 우스꽝스러운 짓을 했거든요."

에드워드가 재빨리 변명하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앨리스가 춤을 추듯 달려오더니 바로 우리 앞에서 멈췄다.

"시간 됐어."

앨리스가 말을 마치자마자 우리 뒤쪽에서 으르렁거리는 천둥소리가


나더니 시내 쪽으로 벼락이 쳤다.

"등골이 오싹하지 않아?"

에밋이 친근하게 말하며 나에게 윙크를 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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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에밋의 손을 잡고 거대한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앨리스가


달리는 모습은 마치 한 마리 가젤(영양의 일종) 같았다. 에밋이 달리는
모습도 꽤 우아하고 똑같이 빨랐지만, 절대로 가젤에 비유할 수는 없을
듯했다.

"너도 멋진 경기 구경할 준비 됐어?"

에드워드가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나는 최대한 열의를 불러일으켰다.

"파이팅!"

그는 킥킥 웃더니 내 머리를 헝클어놓고 나서 두 사람을 따라 달렸다.


그는 가젤보다는 치타에 가까운 모습으로 좀더 공격적으로 달렸고, 이내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 달려가는 그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힘찬 기세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우리도 갈까?"

노래하듯 부드러운 에스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내가 입을 딱 벌리고


에드워드를 좇고 있었다는 걸 깨닫았다. 나는 재빨리 표정을 바로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미는 나와 몇 발자국 정도 거리를 유지했으므로,
아직도 나를 겁주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녀는 조금도
조바심 내는 기색 없이 나와 걷는 속도를 맞춰주었다.

"경기 같이 안 하세요?"

내가 수줍어하며 물었다.

"응, 난 심판 보는게 더 좋아. 다들 정직하게 경기에 임하도록 내가 지켜야


하거든."

"그럼 다들 속이기도 하나 봐요?"

"그럼, 서로 자기가 옳다고 싸우는 모습을 너도 봐야 알겠구나! 하지만


오늘만은 너한테 그런 모습 안 보이면 좋겠다. 그 꼴을 봤다간 내가 저
녀석들을 늑대처럼 아무렇게나 키웠다고 생각할 거야."

"저희 엄마랑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내가 놀라워하며 웃었다. 에스미도 따라 웃었다.

"난 여러 모로 저 녀석들을 친자식처럼 생각한단다. 난 모성본능을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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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하지 못할 것 같아. 에드워드한테 내가 아이를 잃었다는 얘기 들었니?"

"아뇨."

나는 그녀가 어떤 인생을 회고하는지 감을 잡으려고 애쓰며 중얼거렸다.

"내 첫 아이이자 유일한 아기였지. 아들이었는데, 가엾게도 태어나자마자


며칠 만에 죽고 말았단다."

에스미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못 이기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던 거야."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에드워드는 그냥 떠, 떨어졌다고만 했어요."

내가 말을 더듬었다.

"저 앤 언제나 신사다우니까."

에스미가 미소를 지었다.

"에드워드는 처음으로 얻은 내 아들이었어. 어느 면으로는 그 애가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난 언제나 그 애를 아들로 생각했지."

그녀가 따사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 널 찾아냈을 때 내가 그토록 기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란다.


에드워드는 너무 오랫동안 짝이 없었어. 걔가 혼자 있는 걸 보면 마음이
너무 아팠지."

"그럼 속상하지 않으세요? 제가......"

나는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가 에드워드한테...... 안 어울리는 상대라서요."

"아니야. 걔가 원하는 건 바로 너야. 모든 게 다 잘 해결될 거다."

에스미는 염려스러운 듯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또 한 번


천둥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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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미가 걸음을 멈추었다. 거기가 경기장 가장자리인 듯했다. 벌써 팀이


나뉜 것 같았다. 에드워드는 들판 왼쪽 끝에 서 있고, 칼라일은 1 루와 2 루
중간쯤에, 앨리스는 투수 자리인 듯한 곳에 공을 들고 서 있었다.

에밋이 알루미늄 방망이를 휘둘렀다. 방망이는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나는 에밋이 홈으로 들어서기를
기다렸지만, 제자리에서 타격 자세를 취하는 걸 보고 거기가 홈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투수와 홈의 거리가 굉장히 멀었다.
재스퍼가 에밋보다 몇 발자국 뒤에서 상대 팀을 위해 포수 역할을
해주었다. 물론 아무도 야구 글러브를 끼지 않았다.

"좋아, 경기 시작!"

에드워드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잘 들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에스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앨리스가 타자를 속이려는 듯 잠시 똑바로 서 있었다. 그녀는 위풍당당


하기보다는 교묘한 투수였다. 그녀는 양손으로 공을 쥐고 허리께에 들고
있다가 코브라가 공격하는 것처럼 오른손을 휘둘렀고, 공은 어느새
재스퍼의 손에서 뻑, 하는 소리를 냈다.

"스트라이크였나요?"

내가 에스미에게 속삭여 물었다.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으면 무조건 스트라이크야."

에스미가 말했다.

재스퍼가 앨리스에게 공을 던져주었다. 앨리스는 혼자 씩 웃더니 다시


팔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방망이를 제때 휘둘러 보이지 않는 공을 맞혔다. 공을 때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요란했다. 산 전체로 울려 퍼지는 메아리를 들으며,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가 꼭 필요한 이유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공은
유성처럼 들판 위로 솟아올라 숲속 깊이 날아갔다.

"홈런이네요."

내가 중얼거렸다.

"기다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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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미는 한 손을 들어올리고 귀를 기울이며 주의를 주었다. 에밋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베이스를 돌았고, 칼라일이 그림자처럼 뒤를
좇았다. 갑자기 에드워드가 보이지 않았다.

"아웃!"

에스미가 청아한 목소리로 외쳤다. 에드워드가 공을 높이 들어올린 채


나무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멀리서도 환하게 웃음 짓는 그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에밋이 진짜 어려운 공을 쳤는데 에드워드의 달리기가 더 빨랐어."

에스미가 설명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그런 식으로 경기가 지속되었다. 날아가는 공의 속도나


그들이 들판을 누비는 속도는 도저히 눈으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곧이어 그들이 천둥이 치기를 기다렸던 또 다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외야를 철저하게 방어하고 있는 에드워드를 피해 재스퍼가 칼라일이 있는
쪽으로 공을 낮게 쳤다. 칼라일은 공을 쫒아 달렸고, 재스퍼는 1 루 쪽으로
뛰어갔다. 두 사람이 부딪치자 거대한 바위 두 개가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걱정스러워 발을 동동 굴렀지만, 두 사람은 어디 하나 긁힌
곳 없이 일어났다.

"세이프."

에스미가 침착한 목소리로 외쳤다.

에밋이 높이 뜬 공을 친 뒤 아웃되면서 1 루에 나가 있던 재스퍼가


베이스를 돌아 홈에 들어오는 데 성공. 그리고 에드워드가 세 번째로
날아오른 공을 잡자 에밋 팀이 1 점 앞선 가운데 선제공격이 끝났다.
에드워드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내 옆으로 달려왔다.

"보니까 어때?"

"한 가지는 확실해. 앞으로 메이저리그 야구경기는 지루해서 못 볼 것


같아."

"전에 꽤나 많이 본 사람처럼 얘기하네."

에드워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어쨌든 좀 실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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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놀리듯 말했다.

"왜?"

에드워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지구상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잘하지 못하는 걸 하나쯤은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서."

특별히 나를 위해 보여주는 듯한 그의 살짝 비뚤어진 미소에 나는 그만


숨이 가빠졌다.

"내 차례야."

그가 타자석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는 로잘리가 철저하게 막고 있는 외야를 피해 낮게 공을 쳤고, 에밋이


공을 잡아 달려오기 전에 번개처럼 2 루까지 진출했다. 칼라일은 천둥치는
소리를 내며 공을 때려 멀리 날려 보냈고, 에드워드와 칼라일이 모두
홈으로 들어왔다. 앨리스가 날렵하게 손을 들어 두 사람과 허공에서
손바닥을 마주쳤다.

경기가 진행되면서 점수는 계속해서 바뀌었고, 역전을 할 때마다 그들은


장난기 많고 껄렁한 거리 야구선수들처럼 상태팀에게 야유를 보냈다.
가끔은 에스미가 흥분한 양쪽 선수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천둥은 계속
으르렁거렸지만 앨리스가 예견한 대로 비는 오지 않았다.

칼라일이 타석에 서고 에드워드가 포수 역할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앨리스가 흠칫 놀라며 신음 소리를 냈다. 여느 때처럼 에드워드에게 시선이
쏠려 있던 내 눈에, 바짝 긴장해서 앨리스를 바라보는 에드워드가
들어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면서 순간적으로 뭔가 신호를
주고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앨리스에게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에드워드는 어느새 내 옆에 와 있었다.

"앨리스?"

에스미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정확히 보이지 않아서...... 몰랐어요."

앨리스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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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모두들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니, 앨리스?"

칼라일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침착하게 물었다.

"생각보다 저들이 훨씬 빠르게 이동하고 있어요. 전에 본 장면은 제


착각이었나 봐요."

앨리스가 중얼거렸다. 재스퍼는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 옆으로 다가섰다.

"뭐가 바뀐 거야?"

"우리가 경기하는 소리를 듣고 저들이 진로를 바꿨어."

뭔지 모르지만 앨리스는 큰 잘못을 한 사람처럼 뉘우치는 목소리였다.


눈동자 일곱 쌍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가 금방 시선을 돌렸다.

"얼마나 가까이 왔니?"

칼라일이 에드워드를 보고 물었다.

"5 분도 안 걸릴 것 같네요. 같이 경기를 하고 싶어서 달려오고 있는데요."

에드워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피할 수 있겠어?"

칼라일이 또 한번 내 쪽을 흘끔 바라보며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아뇨, 업은 상태로는......"

그가 말을 잘랐다.

"게다가 저들이 체취를 맡고 사냥을 시작하게 하는 건 곤란해요."

"몇이나 돼?"

에밋이 앨리스에게 물었다.

"셋."

앨리스가 짧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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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얼마든지 오라고 해."

에밋이 코웃음을 치며 우람한 팔뚝 근육을 씰룩거렸다.

몇 초밖에 안 되었지만 몹시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르는 사이 칼라일이


머뭇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건 에밋뿐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걱정스러운 눈으로 칼라일을 바라보았다.

"하던 경기나 계속하자. 앨리스 말 들었잖니. 그냥 호기심에 오는 것


뿐이라잖아."

마침내 칼라일이 결단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조용했다.

그 뒤로 몇 초 동안 빠른 대화가 오갔다. 나는 조심스레 귀를 기울였지만,


에스미가 입술을 조용히 떨며 에드워드에게 뭐라고 묻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가볍게 고개를 젓자 에스미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오른 것만 볼 수 있었다.

"에스미가 공 좀 받아주세요. 전 그만할게요."

에드워드는 그 말과 함께 내 앞을 가리고 섰다.

다른 사람들은 예리한 눈으로 어두운 숲을 살피며 경기장으로


되돌아갔다. 앨리스와 에스미는 내 좌우를 감싸듯 둘러섰다.

"머리 풀어서 내려."

에드워드가 낮은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얼른 고무줄을 풀어


머리칼을 늘어뜨렸다.

내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다른 이들이 지금 오고 있나 보구나."

"그래. 그러니까 꼼짝도 하지 말고 조용히 내 옆에 있어."

그는 긴장감을 감추려 했지만,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내 긴 머리채를


어깨 앞으로 늘어뜨렸다.

"소용없어. 내가 들판 건너편에 있을 때도 벨라 냄새가 나던걸."

앨리스가 나직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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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에드워드가 절망이 묻어나오는 말투로 대꾸했다. 칼라일이 타자석에


서고, 다른 선수들도 내키지 않는 듯 경기에 임했다.

"에스미가 너한테 뭘 물은 거야?"

내가 속삭였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 해 주었다.

"저들이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지......"

내키지 않는 듯 그가 중얼거렸다.

시간이 흘러갔다. 경기는 이제 아무 재미도 없이 진행됐다. 번트 이상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에밋과 로잘리, 재스퍼는 모두 내야를 지켰다. 머리가
멍할 정도로 두려운 상태에서도 나는 로잘리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입매를 보면 화가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야구경기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숲에만 온 정신과 시선을


집중시켰다.

"미안해, 벨라. 널 이렇게 무방비하게 노출시키다니, 어리석고 무책임 한


짓이었어. 정말 미안하다."

그가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에드워드가 흠칫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리고, 그의 시선이 오른쪽


들판으로 향했다. 그는 반 걸음쯤 자리를 옮겨서, 다가오는 위험과 나
사이를 굳게 가로막았다.

너무 희미해서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칼라일과 에밋, 다른


사람들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18. 사냥

그들은 숲 가장자리에서 십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씩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맨 처음 들판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두 번째로 나타난
일행의 우두머리인 듯한 머리칼이 검고 키가 큰 남자에게 앞장 서라는 듯이
잠시 머뭇거리며 방향만 틀었다. 세 번째는 여자였다. 너무 거리가 멀어서
여자의 머리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한 붉은 빛을 띠고 있다는 것 말고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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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에드워드 가족을 향해 다가오기 전에 먼저 조심스레 자기들


사이의 거리를 좁혔고, 한꺼번에 이 정도로 많은 동족을 만난 것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 같았다.

그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컬렌 집안 사람들과 그 얼마나 다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은 언제라도 바닥에 몸을 웅크릴 것처럼 몸을
숙인 채 고양이처럼 걸었다. 또 평범한 등산객처럼 청바지에 두툼한
방수천으로 된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옷은 낡고 남루했고, 모두
맨발이었다. 남자 둘은 머리가 짧았지만, 선명한 주황빛에 가까운 여자의
긴 머리칼에는 숲에서 떨어진 나뭇잎 같은 것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그들은 에밋과 재스퍼를 양쪽에 거느리고 서 있는 칼라일의 세련되고


도회적인 모습을 조심스레 살폈다. 서로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바라만
보는 사이, 그들이 좀더 편한 기색이 되어 윗몸을 일으켰다.

맨 앞에 있는 남자는 창백하면서도 어딘가 햇빛에 그을린 느낌의


피부색과 반짝이는 검은 머릿결이 돋보이는 미남이었다. 키는 중간
정도였지만, 단단한 근육은 에밋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편안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훨씬 느낌이 거친 여자는 온통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미풍에


날리며 눈앞에 나타난 남자들을 끊임없이 이리저리 살피고 있다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까지 놓치지 않고 눈여겨보았다. 여자의 자세는
정말로 고양이 같았다. 두 번째 남자는 조심스레 두 사람 뒤에 서
있었는데, 우두머리보다 좀 호리호리한 편이었고 옅은 갈색 머리칼에
외모는 평범했다. 하지만 한 곳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빛만은
예사롭지 않게 번득였다.

그들은 눈동자 색도 달랐다. 내가 예상한 금빛이나 검은색이 아니라,


어딘지 불안하고 사악해 보이는 짙은 자주색이었다.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칼라일 앞으로 다가섰다.

"야구하는 소리를 들었지요."

그가 프랑스어 억양이 조금 섞인 말투로 느긋하게 말했다.

"저는 로렌트이고, 이쪽이 빅토리아와 제임스입니다."

그가 옆에 있는 뱀파이어들을 가리켰다.

"저는 칼라일입니다. 이쪽이 제 가족이고요. 에밋, 재스퍼, 로잘리,


에스미, 앨리스, 에드워드, 벨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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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일은 일부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되지 않도록 뭉뚱그려


우리를 가리켰다. 그가 내 이름을 말한 순간 나는 충격을 느꼈다.

"선수를 몇 명 더 끼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로렌트가 정중하게 물었다.

칼라일은 로렌트의 다정한 말투에 맞춰 상냥하게 대꾸했다.

"사실 막 끝내려는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엔 꼭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이 근처에서 오래 지내실 계획입니까?"

"원래 북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근방에 어떤 분들이 계신주 궁금해서


일부러 들렀습니다. 꽤 오랫동안 동족을 만난 적이 없거든요."

"네, 이 지역엔 여러분처럼 가끔 지나가는 분들 말고는 우리들밖에


없으니까요."

긴장된 분위기가 서서히 가라앉고 편안한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아마


재스퍼가 상황을 통제하느라 특별한 능력을 사용하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사냥은 어디까지 다니시나요?"

로렌트가 허심탄회하게 물었다.

칼라일은 그 질문에 담긴 또 다른 의미를 무시했다.

"주로 이쪽 올림픽 산악지역하고, 가끔은 해변 위아래까지 가기도 합니다.


근처에 저희가 눌러 사는 곳이 있거든요. 우리처럼 영구적인 거주지를 갖고
있는 이들이 데날리(알라스카 산맥에서 가장 높은 지역) 근처에도 있지요."

로렌트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영구적이라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솔직하게 담겨 있었다.

"저희 집으로 가서 편하게 얘기라도 나누시죠. 사연이 깁니다."

칼라일이 흔쾌히 청했다.

제임스와 빅토리아가 '집' 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서로 눈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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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받았지만, 로렌트는 표정관리에 좀더 능숙했다. 그의 미소는 진심인


듯했다.

"흥미롭고 반가운 말씀이시군요. 우리는 온타리오 호에서부터 줄곧


사냥을 했는데 그동안 몸을 씻지 못했습니다."

그의 시선이 칼라일의 세련된 차림새를 유심히 살폈다.

"언짢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이 근처에선 사냥을 자제해


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우리가 의심을 받으면 곤란하거든요."

칼라일이 설명했다.

"물론이죠. 당연히 우리는 여러분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최근에 시애틀 오곽에서 배를 불렸거든요."

로렌트가 소리내어 웃자 내 등줄기에 전율이 흘렀다.

"우리가 길을 안내할 테니 같이 가시죠. 에밋, 앨리스, 너희는 에드워드와


벨라를 데리고 지프를 가져오너라."

칼라일이 슬쩍 덧붙였다.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 세 가지 움직임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산들바람이


불어 내 머리칼이 휘날렸고, 에드워드의 몸이 굳어졌으며, 두 번째 남자인
제임스가 갑자기 고개를 젖히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제임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바닥에 납작 엎드리나 순간적으로


모두가 얼어붙었다. 방어를 위해 에드워드도 이를 드러내고 바닥에
엎드리며 무시무시한 소리를 목구멍에서 울렸다. 오늘 아침에 들었던
장난스러운 으르렁거림이 아니었다. 그토록 서슬 퍼런 위협의 소리는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싸늘한 전율이 정수리부터 발뛰꿈치까지 빠르게 전해졌다.

"이건 뭐죠?"

로렌트가 드러내놓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임스도 에드워드도 공격의


자세를 풀지 않았다. 제임스가 살짝 옆으로 몸을 움직이자, 에드워드도
지지 않고 맞섰다.

"저 아인 우리 일행입니다."

칼라일이 제임스를 향해 호되게 나무라듯 말했다. 로렌트는 제임스만큼


내 체취를 강렬하게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제 그의 얼굴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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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의 빛이 떠올랐다.

"간식거릴 가져오신 건가요?"

로렌트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에드워드가 입술을 벌려 번쩍이는 이를 드러내며 전보다 더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로렌트가 얼른 뒤로 물러났다.

"우리와 일행이라고 하지 않았소."

칼라일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저 아인 '인간'이 아닙니까."

로렌트가 반박했다. 그 말 속에 공격적인 느낌은 없었고 단순히 놀란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에밋이 칼라일의 말이 사실이라고 증명하듯 제임스를 노려보며 앞으로


나섰다. 제임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지만, 그의 눈은 계속해서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콧구멍도 여전히 벌름거렸다. 에드워드는 사자처럼
꼼짝않고 내 앞을 지키고 있었다.

로렌트는 갑작스런 적대감을 무마할 생각인 듯, 달래는것 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우린 서로에게 배울 게 상당히 많은 것 같군요."

"맞습니다."

칼라일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하지만 어쨌든 당신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로렌트는 나를 흘끔 바라본 뒤 다시 칼라일을 응시했다.

"물론 우리도 저 인간 소녀를 해치진 않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


영역에서 사냥을 하진 않을 테니까요."

제임스는 신경이 곤두선 듯 화난 눈으로 로렌트를 흘끔 보더니, 여전히


여러 사람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던 빅토리아와 눈으로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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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인가 주고받았다.

칼라일은 잠시 로렌트의 스스럼없는 표정을 살피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재스퍼, 로잘리, 에스미?"

칼라일이 부르자 그들은 함께 모여 서서 나를 그들의 시야에서


가려주었다. 앨리스가 이내 내 옆으로 다가왔고, 에밋은 제임스를 계속
노려보며 천천히 우리와 합류했다.

"가자, 벨라."

앨리스의 목소리는 낮고 냉랭했다.

그동안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려 줄곧 얼어붙은 듯 서 있었기 때문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내 팔꿈치를 잡고 확 잡아당겼다. 앨리스와
에밋이 바로 뒤에서 나를 가려주었다. 나는 여전히 겁에 질려 넋이 나간채
에드워드 옆에서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나머지 사람들이 그곳을
떠났는지 알 수도 없었다. 인간이 걷는 속도로 느리게 숲 가장자리로
걸어가는 동안 에드워드가 얼마나 조바심을 느끼는지, 나는 손으로도 만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일단 숲으로 들어서자 에드워드는 걸음도 멈추지 않고 나를 등에 업었다.


그가 달리기 시작하자 나는 최대한 그에게 바짝 매달렸고, 다른 두 사람도
바로 우리 뒤를 따랐다. 고개를 숙였지만 겁에 질린 내 두 눈은 좀처럼
감기려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어느덧 검은 암흑에 휩싸인 숲을 죽음의
신처럼 미친 듯이 내달렸다. 나를 업고 달릴 때마다 느껴지던 에드워드의
흥분된 감정은 고스란히 사라지고, 극에 달한 분노만이 그를 더욱 빨리
달리도록 다그치는 것 같았다. 나를 등에 업고서도 그는 앨리스나 에밋이
뒤처질 만큼 앞서갔다.

우리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시간 안에 지프에 도착했고, 에드워드는


속도를 줄일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나를 뒷좌석에 태웠다.

"대신 벨트 좀 채워줘."

그는 내 옆으로 뛰어오른 에밋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앨리스는 이미 앞좌석에 올라 있었으므로, 에드워드가 시동을 걸었다.


차는 잠시 후진을 하다가 방향을 틀어 구불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무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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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렸는데, 대부분 욕설 같았다.

비포장 도로는 올라갈 때보다 훨씬 더 덜컹거렸고, 어둠 때문에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에밋과 앨리스는 양쪽 창밖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포장 도로에 도착해 속도를 높이자, 나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포크스 반대방향인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어디 가는 거야?"

내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를 보지도 않았다.

"젠장, 에드워드!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지금은 널 데리고 어서 여길 떠나야 해. 아주 멀리."

그는 도로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속도계는 시속


170 킬로미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차 돌려! 우리 집에 데려다 줘야지!"

내가 소리쳤다. 나는 복잡한 안전벨트를 풀려고 발버둥을 쳤다.

"에밋."

에드워드가 단호한 목소리로 형을 부르자, 에밋이 내 손을 꽉 잡았다.

"안 돼! 에드워드! 안 돼, 이럴 순 없어."

"어쩔 수 없어, 벨라. 제발 좀 조용히 해."

"싫어! 넌 날 데려다 줘야 해. 찰리가 FBI 를 부를 거야! 그럼 너희 가족을


전부 조사하겠지. 칼라일과 에스미까지! 그럼 다들 여길 떠나 영원히 숨어
살아야 할 거야!"

"진정해, 벨라. 우린 전에도 그런 적 있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나 때문에 그렇게 할 순 없어! 나 때문에 모든 걸 망치게 할 순 없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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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격렬하게 몸부림을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앨리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에드워드, 차 세워봐."

에드워드가 앨리스를 홱 노려본 뒤 속도를 더 높였다.

"에드워드, 일단 얘기부터 좀 해보자."

"넌 이해 못 해!"

그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에드워드가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지프가 달리는 소음 속에서도 귀청을 찢을 듯
했다. 속도계는 이제 200 킬로미터에 육박했다.

"그자는 추적의 귀재야. 그걸 모르겠어? 놈은 추적자란 말이야!"

옆에 앉은 에밋의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 말이 대체 어떤


뜻이기에 에밋까지 그런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졌다. 세 사람에게는 그게
뭔가 다른 의미인 모양이었다. 나도 이해하고 싶었지만, 물어볼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차 세워, 에드워드."

앨리스의 말투는 논리적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전에는 감지할 수 없던


권위가 느껴졌다.

속도계가 시속 200 킬로미터를 넘어섰다.

"어서."

"내 말 들어, 앨리스. 난 놈의 마음을 읽었어. 먹이를 추적하는 건 그자가


열렬히 집착하는 행동이야. 게다가 놈은 벨라를 원해. 아주 특별히 원하고
있지. 놈은 오늘밤 사냥을 시작할 거야."

"하지만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

"놈이 벨라의 체취를 쫓아 시내로 들어가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놈은


로렌트가 이야기하기도 전에 이미 계획을 세웠어."

에드워드가 앨리스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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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체취가 어디로 이어질지 깨닫고 움찔했다.

"찰리를 집에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 찰리를 두고 떠날 순 없단 말야!"

내가 안전벨트를 마구 잡아당겼다.

"벨라 말이 맞아."

앨리스가 말했다.

차가 속도를 조금 늦췄다.

"잠깐이라도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앨리스가 에드워드를 달랬다.

차가 속력을 눈에 띄게 늦추더니 갑자기 고속도로 갓길에 멈춰 섰다. 나는


안전밸트에 매달린 채 앞으로 쏠렸다가 다시 뒤로 부딪혔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어."

에드워드가 씨근덕거렸다.

"난 찰리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

내가 소리쳤지만 그는 나를 완전히 무시했다.

"다시 데려가야 해."

마침내 에밋이 말했다.

"안 돼."

에드워드는 완강했다.

"놈은 우리한테 상대가 안 돼, 에드워드. 놈은 벨라한테 손도 댈 수 없을


거야."

"놈은 기다릴 거야."

에밋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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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기다리면 뒤지."

"넌 몰라서 그래, 넌 이해 못해. 일단 놈이 사냥을 시작하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어. 우린 놈을 죽여야 할 거다."

에밋은 그 말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것도 한 방법이겠지."

"게다가 여자는 어쩌고? 여자도 놈과 함께 있어. 싸움이 시작되면 그


우두머리도 그들 편을 들 거야."

"우린 수적으로도 우세해."

"다른 방법도 있어."

앨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에드워드가 그녀에게 벌컥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다른 방법은 없어!"

에밋과 나는 깜짝 놀라 동시에 그를 바라봤지만, 앨리스는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에드워드와 앨리스가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 기나긴
정적이 흘렀다.

내가 침묵을 깼다.

"내 계획을 들어보고 싶은 사람 혹시 없어요?"

"없어."

에드워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드디어 화가 폭발했는지 앨리스도 그를


노려보았다.

"잘 들어봐. 먼저 나를 데려다 줘."

내가 간청하듯 말했다.

"싫어."

나는 에드워드를 흘겨본 뒤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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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집에 데려다 줘. 그럼 내가 아빠한테 피닉스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할게. 나는 짐을 싸고, 우리는 그 추적자가 지켜보는지 기다렸다가
달아나는 거야. 그럼 그자는 우릴 따라올 테고, 찰리는 안전해지겠지.
찰리가 너희 가족을 조사하도록 FBI 를 부르는 일도 없을 거야. 그런
다음엔 아무 데나 어디로든 네가 날 데리고 떠나면 되잖아."

그들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라, 진짜...... 나쁜 생각은 아니네."

에밋이 너무 놀라워하는 게 나에게는 모욕처럼 느껴졌다.

"그 계획이 잘 먹힐 수도 있어. 게다가 벨라 아버지를 아무 대책 없이 두고


떠날 순 없잖아. 그건 너도 알겠지."

앨리스가 말했다.

모두들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너무 위험해. 절대로 놈을 두 번 다시 벨라 가까이에 두고 싶지 않다."

"에드워드, 놈은 절대 우리를 피해가지 못해."

에밋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앨리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놈이 우릴 공격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군. 그자는 우리가 벨라를 혼자


둘 때까지 기다리려고 할 거야."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걸 놈도 조만간 알아차리겠지."

"당사자인 '내가' 우리 집에 데려다 달라고 요구하는 거야."

나는 단호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에드워드가 눈을 꽉 감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부탁이야."

내가 좀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더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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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가 눈치 채든 말든 넌 오늘 밤에 떠나야 해. 찰리한테는


포크스에서 더는 단 일 분도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해. 이야기는 네가 알아서
꾸며 봐. 손에 닿는 물건만 챙겨서 트럭을 타고 떠나는 거야. 너희
아버지가 무슨 말로 널 말려도 들어선 안 돼. 딱 십오 분 주겠어. 알겠니?
집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십오 분 만에 나와야 해."

시동을 걸어 다시 차를 출발시킨 그는 타이어 소리를 내며 방향을 바꿨다.


속도계 바늘이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몇 분 동안 엔진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에드워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명심하도록. 집에 도착해서 놈이 거기 없는 게 확실하면 내가


벨라를 집 안에 들여보낼 거야. 그리고 벨라는 십오 분 안에 다시 나와야
해."

그가 뒷거울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에밋은 집 밖을 맡아. 앨리스는 트럭에 타고 있고. 나는 벨라랑 같이 계속


집 안에 있겠어. 벨라가 집을 나온 뒤엔 둘이 이 차를 가지고 집에 가서
칼라일한테 얘기 해."

"웃기지 마. 나도 같이 갈 거야."

에밋이 끼어들었다.

"잘 생각하고 얘기해. 얼마나 오래 떠나 있어야 할지 나도 몰라."

"그때가 언제든 난 너랑 같이 갈 거야."

에드워드가 한숨을 쉬고는 설명을 계속했다.

"아무튼 놈이 거기 있으면 우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차를 몰고 가는 거야."

"우린 그자보다 먼저 집에 도착할 거야."

앨리스가 확고하게 말했다.

에드워드도 믿는 눈치였다. 앨리스와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도 그녀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럼 이 차는 어떻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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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물었다.

"네가 집까지 운전해서 가."

"난 싫어."

앨리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에드워드는 또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트럭에 다 탈 수는 없어요."

내가 속삭였다. 에드워드는 내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나 혼자 가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좀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에드워드도 들은 모양이었다.

"벨라, 제발 이번 한 번만 내가 하자는 대로 해."

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찰리는 멍청이가 아니야. 내일 당장 네가 없어지면, 찰리가 의심을


할거란 말이야."

"그건 상관없어. 일단 너희 아버지가 안전한 것만 확인하면 그뿐이니까."

"그럼 그 추적자는 어쩔 건데? 그 사람은 오늘 네 행동을 다 봤어. 네가


어디 있든 나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거야."

에밋이 또다시 기분 나쁘게 놀랍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에드워드, 벨라 말 들어. 나도 이 아이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래, 맞아."

앨리스도 거들었다.

"그럴 순 없어."

에드워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냉혹했다.

"에밋도 여기 있는 게 좋겠어요. 그 사람이 아까 에밋도 눈여겨보던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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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라고?"

에밋이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 있어야 놈을 해치울 기회가 더 많긴 하지."

앨리스가 거들고 나섰다.

에드워드가 기막힌 얼굴로 앨리스를 노려보았다.

"그럼 나더러 벨라를 혼자 보내라는 거야?"

"물론 그건 아니지. 재스퍼랑 내가 데려갈게."

"그럴 순 없어."

에드워드가 고집스레 되풀이했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는 패배감이


조금이나마 느껴졌다. 그도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내가 설득에 나섰다.

"여기서 한 일주일만 기다려 줘......"

뒷거울로 그의 표정을 본 나는 말을 바꿨다.

"며칠만 기다리는 거야. 찰리한테 네가 날 납치한 게 아니란 걸 확실히


보여주면서 제임스라는 사람을 궁지로 모는 거지. 그자가 내 자취를 전혀
찾을 수 없을 때까지. 그런 다음에 와서 나랑 만나면 되잖아. 물론
여기저기 우회로를 따라 와야겠지. 그러면 재스퍼랑 앨리스도 집에 갈 수
있잖아."

그도 내 작전을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어디에서 널 만나지?"

"피닉스."

말할 필요도 없지.

"안 돼. 그놈도 네가 거기 갈 거란 얘기를 어디서든 듣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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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게 너무 뻔한 계략인 것처럼 들리게 하면 되잖아. 그쪽에서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는 걸 그자도 알겠지. 내가 진짜로 내
행선지를 밝힌 거라고는 그 사람도 절대 믿지 않을 거야."

"너 참 대단하구나."

에밋이 소리 내 웃었다.

"그러다 놈이 알아차리면?"

"피닉스엔 수백만 명이 살고 있어."

내가 말했다.

"전화번호부를 뒤지는 건 어렵지 않아."

"난 집에 안 갈 거야."

"뭐?"

"나 혼자 살 나이도 됐잖아."

"에드워드, 우리가 같이 있을 거라니까 그래."

앨리스가 거들었다.

"다른 데도 아니고 '피닉스' 에서 둘이 뭘 하겠다는 거야?"

"집 안에만 있지."

"난 벨라 계획이 마음에 들어."

에밋은 지금 분명 제임스를 구석에 몰아 공격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닥쳐, 에밋."

"생각해 봐, 벨라를 데리고 있는 상황에서 놈과 맞서게 된다면 누군가


다칠 확률이 더 커. 벨라가 다칠 수도 있고, 보호하려다 네가 다칠 수도
있잖아. 하지만 우리끼리 놈을 처치한다면......"

에밋이 느긋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역시 내 생각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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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로 접어들었으므로 지프는 이제 천천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용감하게 얘기를 꺼내긴 했지만, 내 팔에는 아직도 소름이 돋아 있었다.
집에 홀로 있을 찰리를 생각하며 나는 용기를 냈다.

"벨라."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부르자, 앨리스와 에밋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혹시라도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떤 일이든 내가 전부 책임을


질거야. 알겠어?"

"응."

내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는 이내 앨리스를 보고 말했다.

"재스퍼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재스퍼를 믿어봐, 에드워드. 지금까지 아주 잘해내고 있었잖아. 모든


가능성을 다 고려한 거야."

"그러는 본인은 감당할 수 있겠어?"

늘 우아하기만 했던 앨리스가 갑자기 입을 벌리고 사납게 이를


드러내더니, 무서운 표정으로 소름끼치는 으르렁 소리를 내는 바람에 나는
와락 겁을 집어먹고 구석 자리에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에드워드가 앨리스를 보며 씩 웃더니, 갑자기 중얼거렸다.

"그 생각은 혼자만 품고 있도록 해."


19. 작별

찰리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 집 안의 불이 다 켜져 있었다. 어떻게


해야 찰리가 나를 보내줄까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닐 터였다.

에드워드가 천천히 내 트럭 뒤에 충분한 공간을 두고 차를 세웠다. 세


사람은 동시에 바짝 긴장한 채 혹시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는지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림자를 모두 살폈다. 시동이 꺼지고
그들이 정적 속에서 계속 귀를 기울이는 동안 나는 얼어붙은 듯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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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다.

"여긴 없어. 들어가자."

에드워드가 짧게 말했다.

에밋이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푸는 걸 도와주었다.

"걱정 마, 벨라. 여기 일은 우리가 재빨리 해치울게."

에밋은 나지막하지만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에밋을 보며 눈물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나는 에밋을 잘 알지


못하는데도,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왔다. 이건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이별의 서막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더욱 눈물이 차올랐다.

"앨리스, 에밋."

에드워드가 명령하듯 말했다. 두 사람은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에드워드는 차 문을 열고 내 손을 잡고는 조심스럽게 안아서 내려주었다.
나를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며 그는 연신 사방을 예리하게
둘러보았다.

"십오 분이야."

그가 낮은 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

"난 할 수 있어."

내가 훌쩍이며 말했다. 눈물 때문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현관에 멈춰 선 내가 두 손으로 에드워드의 얼굴을 감쌌다. 나는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사랑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난 언제나 널 사랑할 거야."

작지만 절실한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너한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벨라."

"그냥 계획대로만 해줘, 알겠지? 날 위해 찰리를 무사하게 지켜줘. 찰리는


이번 일로 날 좋아하지 않게 되겠지만, 나중에 사과할 기회가 분명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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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야."

"어서 들어가, 벨라. 서둘러야 해."

에드워드의 목소리는 몹시 급박했다.

"한 가지만 더 들어. 오늘 밤에 내가 하는 말은 한 마디도 귀담아 듣지 마!"

그는 고개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므로 나는 발끝으로 서서 놀란


그의 입술에 온 힘을 다해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현관문을
발로 차 열었다.

"꺼져버려, 에드워드!"

나는 그에게 고함을 지른 뒤 안으로 뛰어들어가, 아직도 충격에 사로잡혀


있는 그의 면전에서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벨라니?"

거실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던지 찰리가 벌써 달려나왔다.

"신경 쓰지 마세요!"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사이로 일그러져 보이는 그를 보며 내가


고함을 질렀다. 나는 이층으로 뛰어올라가 문을 잠갔다. 나는 침대로
뛰어가 바닥에서 여행가방을 꺼냈다. 매트리스 사이로 손을 넣어 스프링
사이에 끼워놓았던 양말뭉치도 꺼냈다. 내가 현금을 보관하는
비밀장소였다.

찰리가 방문을 두들겼다.

"벨라, 괜찮니? 무슨 일이야?"

찰리는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집에 갈 거예요."

내가 소리쳤다.

"그 녀석이 너한테 뭐 잘못 했니?"

버럭 화를 내며 찰리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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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돌연 내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나는 옷장 쪽으로 돌아섰다. 에드워드가


이미 소리 없이 옷을 한아름 꺼내 나에게 던졌다.

"그 녀석이 너한테 헤어지자고 하든?"

찰리는 몹시 당황해하고 있었다.

"아뇨!"

나는 가방에 옷가지를 쑤셔넣느라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에드워드가


서랍장 또 하나를 비워 나에게 옷을 가져왔다. 가방은 이제 거의 다 찼다.

"무슨 일이냐, 벨라?"

찰리가 다시 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제가 헤어지자고 했어요!"

가방 지퍼를 채우려고 애를 쓰며 내가 외쳤다. 에드워드가 내 손을 치우고


능숙하게 지퍼를 잠갔다. 그는 조심스레 가방 끈을 내 어깨에 매 주었다.

"난 트럭에 있을게, 어서 가!"

에드워드는 속삭이며 문 쪽으로 나를 떠밀었다. 그는 창문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잠긴 문을 열고, 무거운 가방으로 거칠게 찰리를 밀어내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무슨 일이니?"

찰리가 바로 내 뒤에서 달려오며 물었다.

"너도 그 녀석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부엌에서 내 팔꿈치를 잡았다. 여전히 당황하는 표정이었지만


찰리의 손길은 완강했다.

억지로 돌아서서 그의 표정을 보니, 찰리는 절대로 나를 보낼 생각이


없었다. 달아날 방법은 이제 단 한 가지뿐이었는데, 그건 찰리의 가슴을
너무도 아프게 하는 짓이어서 생각만 해도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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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었고, 난 아빠를 무사히 지켜야만 했다.

아빠 가슴에 못을 박을 생각을 하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또다시


새로운 눈물이 넘겨 흘렀다.

"좋아해요. 그러니까 문제죠. 전 더는 이렇게 못 살겠어요! 여기서 더이상


뿌리 내리고 살 수가 없단 말이에요! 엄마처럼 저도 이렇게 지루하고
형편없는 시골에 발목 잡혀 살긴 싫어요! 엄마가 저지른 어리석은 실수를
저도 되풀이할 수는 없어요. 싫어요, 단 일 분도 여기 더 있기 싫단
말예요!"

내가 전기충격을 주기라도 한 듯 내 팔을 잡았던 그의 손이 떨어졌다.


나는 마음 깊숙이 충격과 상처를 받은 그의 얼굴을 외면하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벨라, 지금은 못 간다. 밤이 늦었어."

찰리가 내 등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나는 돌아서지 않았다.

"피곤하면 차에서 자면 돼요."

"일주일만 더 기다려라. 그때쯤이면 르네도 돌아올 거야."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찰리가 애원했다.

전혀 뜻밖의 이야기에 내가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내가 머뭇거리자 찰리는 안심을 했는지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네가 외출한 사이에 전화가 왔었다. 플로리다에서 일이 잘 안 풀려서,


이번 주말까지 필이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못하면 애리조나로 돌아올
거라더라. 사이으윈더스 코치가 유격수 한 명이 더 필요하다고 한
모양이야."

나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느라 머리를 흔들었다. 일분 일초가


흐를수록 찰리가 더 위험해졌다.

"저한테 열쇠 있어요."

나는 손잡이를 돌리며 매몰차게 말했다. 찰리는 멍한 표정으로 한 손을


뻗은 채 너무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와 말다툼을 하느라 허비할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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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없었다.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수 밖에 없었다.

"그냥 절 보내주세요. 찰리."

나는 엄마가 여러 해 전에 똑같은 문을 나서며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나는 문을 활짝 열고 최대한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결국 우린 안 될 사이예요. 난 정말로 끔찍이도 포크스가 싫어요!"

잔인한 내 말은 효력이 있었다. 찰리가 멍하니 현관문에 얼어붙은 듯


서있는 사이, 나는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텅 빈 마당이 끔찍이도
무서웠다. 나는 뒤를 쫓는 검은 그림자를 상상하며 미친 듯이 트럭으로
달려갔다. 가방을 짐칸에 던져넣고 차 문을 열었다. 열쇠는 이미 꽃혀
있었다.

"내일 전화할게요!"

그럴 수 없을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내일은 찰리에게 좀더 제대로


설명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소리쳤다. 나는 시동을 걸고 요란한 바퀴
소리를 내며 차를 몰았다.

에드워드가 내 손을 잡았다. 집과 찰리의 모습이 뒤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자 말했다.

"차를 세워."

"내가 운전할 수 있어."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내가 말했다.

에드워드는 갑자기 팔을 뻗어 내 허리를 잡고는 가속 페달을 밟은 내 발을


자기 발로 밀어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내 손을 억지로 푼 후 자기 무릎
쪽으로 확 나를 잡아당기더니, 어느새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그 사이
트럭은 도로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다.

"너 혼자선 집을 못 찾아갈 거야."

갑자기 우리 뒤에서 불빛이 비쳤다. 나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뒤를


확인했다.

"앨리스야."

에드워드가 나를 안심시키며 다시 내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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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 서 있는 찰리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추적자는?"

"놈은 네 연기의 마지막 부분을 들었어."

에드워드가 엄숙하게 말했다.

"찰리는?"

겁에 질려 내가 물었다.

"추적자가 따라오고 있어. 지금 우리 뒤에서 달리고 있지."

내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자를 앞지를 수 있겠어?"

"아니."

그러나 그는 얘기를 하면서 속력을 높였다. 트럭의 낡은 엔진이 반항하듯


요란한 소리를 냈다. 문득 내 계획이 그렇게 훌륭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앨리스가 모는 지프의 전조등을 돌아보던 나는 갑자기 트럭이 부르르


떨리면서 창밖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는 걸 발견했다. 등골이 오싹해져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에드워드의 손이 내 입을 막았다.

"에밋이야!"

그는 내 입을 막았던 손을 내려 내 허리를 감쌌다.

"괜찮아, 벨라. 넌 무사할 거야."

우리는 북쪽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향해 조용한 시내를 달리고 또


달렸다.

"조용한 시골생활을 네가 그렇게 지루해하는 줄은 몰랐는데."

에드워드가 내 정신을 딴 데로 돌리려고 말을 걸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꽤 잘 적응하는 것 같았거든. 특히 최근엔 말이지. 나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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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이 좀더 흥미로워진 거라고 생각했는데 순전히 내 착각이었나


보다."

"내가 너무 못되게 굴었어."

분위기를 바꾸려는 그의 노력을 무시하며 내가 무릎으로 시선을 떨구고


고백했다.

"그 말은 우리 엄마가 찰리를 버리고 떠날 때 했던 말이야. 내가 치사하게


반칙한 셈이지."

"걱정하지 마, 찰리도 용서할 테니."

에드워드가 슬쩍 미소를 지었지만, 웃음이 눈까지 전해지진 못했다. 나는


절박하게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내 눈빛에 떠오른 선연한 공포를 보았다.

"벨라, 다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난 너랑 같이 있지 않으면 괜찮을 수가 없어."

"며칠 뒤엔 다시 만날 수 있어. 이건 네 생각이었다는 거 잊지 말고."

그가 나를 한 팔로 꼭 안으며 말했다.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어. 물론 내가 생각해 낸 거고."

그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왜 하필 나야?"

내가 목멘 소리로 물었다.

그는 멍하니 도로를 응시했다.

"내 잘못이야. 그렇게 너를 노출시키다니 내가 바오였던 거지."

그는 정말로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난 목소리였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그 제임스라는 자가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냔


얘기야. 세상엔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나지?"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머뭇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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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에 난 그자의 생각을 똑똑히 읽을 수 있었어. 일단 놈이 너를 본


뒤엔 이 일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고 생각해. 부분적으론 네 잘못이기도
해."

그의 목소리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네 체취가 그토록 육감적이지 않았다면, 그자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내가 널 보호하려고 나서는 바람에...... 상황이 더
나빠진 거야. 그자는 대상이 아무리 하찮더라도 방해를 받는 걸 못 참는
성격이거든. 그자는 최고의 사냥꾼이라고 자처하는 놈이야. 먹이를 뒤쫓는
건 그의 존재 이유고. 놈이 삶에서 바라는 건 신나는 도전뿐이지. 그런데
우리가 갑자기 놈에게 훌륭한 도전거리를 제시한 셈이 됐고. 강한
싸움꾼들로 이루어진 대가족이 뭉쳐서는 아주 나약한 존재 하나를
보호하려 들었으니 말이야. 지금 놈이 얼마나 흥분해 있는지 넌 짐작도
못할 거야. 이건 놈이 가장 좋아하는 게임인데, 우리가 놈에게 최고로
흥미진진한 미끼를 던져주고 말았어. 하지만 만일 내가 그냥 방관하고
있었다면, 놈은 아까 거기서 널 단숨에 죽였을 거야."

그가 자기혐오에 빠진 말투로 설명했다.

"다른 뱀파이어는...... 내 체취를 너처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어."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에게 네 체취가 전혀


유혹적이지 않다는 뜻은 아니야. 만일 내가 네 체취에 이끌리는 만큼 그
추적자도 그랬다면, 혹시 다른 놈들이 더 있었더라도 그 자리에서 싸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을 거야."

나는 몸을 떨었다.

"이젠 내가 놈을 죽이는 수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군. 칼라일이 좋아하지


않을 거야."

어두워서 강은 보이지 않았지만, 차 바퀴가 다리를 건너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갈 길이 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뱀파이어는 어떻게 죽여?"

그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 갑자기 거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유일한 방법은 갈가리 찢은 다음 조각조각 태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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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른 일행 둘도 같이 싸우려 할까?"

"여자는 그럴 거야. 로렌트는 잘 모르겠더군. 그들은 서로 유대감이 깊지


않아. 편의상 합류한 것 뿐이거든. 초원에서 그자는 분명 제음스 때문에
당황하고 있었어......"

"하지만 제임스와 그 여자는, 정말 널 죽이려고 할까?"

내 목소리가 갑자기 갈라졌다.

"벨라, 쓸데없이 내 걱정은 하지 마. 넌 그냥 너만 무사히 지낼 걱정만


하면 돼. 그리고 제발 무모한 짓은 하지 말아줘."

"아직도 따라오고 있어?"

"응. 하지만 집은 공격하지 않을 거야. 오늘 밤엔 아니야."

그는 보이지 않는 진입로로 접어들었고 앨리스도 바로 뒤에서 따라왔다.

우리는 곧장 집으로 차를 몰았다. 집 안에서는 불빛이 환하게


새어나왔지만, 주변 숲의 어둠을 밝혀주지는 못했다. 에밋은 트럭이
멈추기도 전에 내가 앉은 쪽 문을 열었다. 그는 의자에서 나를 안아 내려
넓은 가슴에 안고는 그대로 현관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는 에드워드와 앨리스를 이끌고 커다란 하얀 방으로 뛰어들었다.


모두 모여 있었다. 우리가 오는 소리를 듣고 이미 다들 일어나 있었다.
로렌트가 한가운데 서 있었다. 에밋은 나를 에드워드 바로 옆에
세워놓고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자가 우릴 뒤쫓고 있어요."

에드워드가 로렌트를 불길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앨리스가 재스퍼 곁으로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 말도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입술이 떨리듯 빠르게 움직였다. 두 사람은 계단으로 달려
올라갔다. 로잘리는 그들을 지켜보다 에밋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이글이글 타고 있었고, 마지못해 나를 바라볼 때는
분노로 번득였다.

"이제 어떻게 나올까요?"

칼라일이 차분한 말투로 로렌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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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아드님이 가로막고 나서는 바람에 제임스가 더 발끈했어요.


유감이군요."

"당신이 막을 수 있을까요?"

로렌트가 고개를 저었다.

"제임스가 일단 사냥을 시작하면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우리가 막을 겁니다."

에밋이 장담 했다. 그 누구도 그의 의도를 의심할 수는 없을 듯한


말투였다.

"여러분은 그 친구를 해치우지 못해요. 삼백 년 동안 살면서 나도 제임스


같은 친구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정말로 치명적인
존재지요. 내가 그의 일행에 합류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역시 '그의' 일행이었군. 숲속 초원에서 로렌트가 우두머리 행세를 한것은


순전히 쇼였다는 의미였다.

로렌트는 여전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흘끔 보고는 다시 칼라일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성난 에드워드의 포효가 방 안을 울렸다. 로렌트가 움찔해서 뒤로


물러났다.

칼라일이 엄숙한 표정으로 로렌트를 바라보았다.

"유감스럽지만 당신도 선택을 내려야 할 것 같군요."

로렌트는 무슨 말인지 곧바로 알아차리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얼굴을 살핀 뒤 마지막으로 환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저는 여러분이 여기에 이루어놓은 삶에 흥미를 느낍니다. 하지만


이번일에 끼어들진 않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악의도 없지만,
그렇다고 제임스와 맞설 생각도 없습니다. 전 북쪽으로 가서 데날리에
있다는 동족을 만나볼까 합니다."

그가 잠시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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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를 과소평가 하지 마십시오. 그 친구는 두뇌도 명석한데다 누구도


따르지 못할 감각을 갖추었습니다. 여러분 못지않게 인간 세상에 익숙한
친구라, 절대로 정면 승부를 하진 않을 겁니다...... 이런 일이 빚어지게 돼
유감입니다. 정말 미안하군요."

로렌트가 고개 숙여 인사했지만, 나는 그가 또 한번 어리둥절한 시선을


나에게 던지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럼 편히 가십시오."

칼라일이 공식적인 답변을 마쳤다. 로렌트는 주변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둘러본 뒤 서둘러 문을 나섰다.

정적은 일 초도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가까이 왔니?"

칼라일이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에스미는 벌써 움직이고 있었다. 어딘가 벽에 달려 있던 키패드를


조작하자 윙 소리가 나며 유리벽 위로 거대한 금속 셔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강 건너 5 킬로미터쯤 되는 곳에 있어요. 여자랑 만나기 위해 주변을


돌고 있네요."

"계획은 세웠니?"

"우리가 놈을 유인하면 재스퍼와 앨리스가 벨라를 데리고 남쪽으로 갈


거예요."

"그런 다음엔?"

"벨라가 안전해지자마자 우리가 놈을 사냥하는 거죠."

에드워드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구나."

칼라일도 굳은 표정으로 동의했다. 에드워드가 로잘리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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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를 데리고 올라가서 옷을 바꿔 입어."

에드워드의 명령에, 로잘리는 기가 막힌 듯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왜? 저 계집애가 나한테 뭐라고? 우리 모두한테 이런 곤경이나


안겨준 위험한 존재일 뿐인데!"

로잘리가 씩씩거렸다. 나는 악의에 찬 그녀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로잘리......"

에밋이 그녀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중얼거렸지만, 로잘리는 매몰차게


뿌리쳤다.

에드워드의 성미를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녀의 반응에 어떤 행동을 할까


두려워 조심스레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로잘리한테 아무 말도 듣지 않은 것처럼, 마치 그녀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에스미?"

침착하게 그가 물었다.

"물론이지."

에스미가 중얼거렸다.

에스미는 어느 틈에 내 옆으로 다가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새도 없이


내 팔을 잡고 계단으로 이끌었다.

"뭘 하려는 거죠?"

에스미가 이층 복도 어딘가의 어두운 방으로 나를 밀어넣자마자 내가 숨


가쁘게 물었다.

"냄새를 뒤섞어 혼란시키려는 거야. 효과가 오래가진 않겠지만 네가


빠져나가는 데 도움은 될지 모르니까."

에스미의 옷가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옷이 안 맞을 텐데......"

나는 주저했지만, 에스미가 재빠른 손길로 느닷없이 내 셔츠를 머리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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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겼다. 나는 얼른 청바지를 벗었다. 에스미가 뭔가 건네주는 걸 받아 보니


셔츠였다. 나는 셔츠에 제대로 팔을 꿰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간신히
셔츠를 입자마자 에스미는 바지를 건넸다. 나는 얼른 다리를 바지 통에
넣었지만 기장이 너무 길어서 발이 나오지 않았다. 에스미는 내가 일어설
수 있도록 바지 밑단을 몇 번 접어주었다. 그녀는 이미 내 옷을 입고
있었다. 에스미가 내 손을 잡고 다시 계단 쪽으로 갔다. 복도 끝에서는
앨리스가 작은 가죽가방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내 팔꿈치를
각각 붙잡아 나를 반끔 들어올리고는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우리가 없는 사이 이미 모든 게 결정된 듯 했다. 에드워드와 에밋은 떠날


준비를 마친 듯, 에밋을 보니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메고 있었다. 칼라일이
에스미에게 작은 물건을 건넸다. 이어 앨리스에게도 같은 것을 건넸다.
작은 휴대전화 였다.

"에스미하고 로잘리가 네 트럭을 몰고 갈 거다. 벨라."

내 앞을 지나며 칼라일이 말했다. 나는 조심스레 로잘리를 흘끔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잘리는 여전히 반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칼라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앨리스, 재스퍼. 너희들이 벤츠를 가져가라. 남쪽으로 가려면 선팅이


짙은 차가 필요할 거야."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지프를 타고 간다."

나는 칼라일이 에드워드와 함께 갈 작정이란 걸 알고 깜짝 놀랐다.


날카로운 공포가 가슴을 후비는 가운데 나는 그들이 사냥팀을 짠 것을
깨닫았다.

"앨리스, 저들이 미끼에 걸려들까?"

칼라일이 물었다. 앨리스가 눈을 감고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 있자 모두들


그녀를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눈을 떴다.

"남자는 칼라일을 따라갈 거예요. 여자는 트럭을 뒤쫓고요. 우린 그 뒤에


떠날 수 있을 거예요."

앨리스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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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칼라일이 주방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곧장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나를 으스러져라 와락


껴안았다. 그는 지켜보는 가족들조차 안중에 없는 듯 내 발이 바닥에서
떨어질 정도로 내 얼굴을 끌어당겼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차가운
입술이 내 입술을 세게 빨아들였다. 입맞춤은 이내 끝이 났다. 그는 여전히
내 얼굴을 감싼 채 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이글거리는 황금빛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의 눈빛이 공허하게 바뀌더니, 그가 돌아섰다.

그렇게 두 사람은 떠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내 모습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침묵의 순간이 이어지다 이윽고 에스미가 쥐고 있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그녀는 번개처럼 빠른 손길로 전화기를 귀에 댔다.

"지금이야."

에스미의 말이 떨어지자 로잘리는 내 쪽을 보지도 않고 현관문으로


나갔다. 하지만 에스미는 곁을 지나며 내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무사해야 한다."

그들이 문 밖으로 사라진 뒤에도 에스미의 속삭임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천둥처럼 요란하게 시동 걸리는 소리가 나더니, 차츰 멀어져갔다.

재스퍼와 앨리스는 묵묵히 기다렸다. 앨리스의 휴대전화가 진동하기도


전에 그녀가 전화기를 귓가에 댔다.

"여자가 에스미를 뒤쫓고 있다는 에드워드의 전화야. 내가 가서 차를


가져올게."

앨리스는 에드워드가 떠나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재스퍼와 내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듯 나와 현관


통로 길이만큼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건 틀린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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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조용히 말했다.

"뭐라고요?"

내가 흠칫 놀라 물었다.

"네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느껴지거든, 넌 분명 그럴 가치가 있어."

"아니에요. 혹시 모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건 헛된 희생일


거예요."

"틀린 생각이라니까."

그는 다정하게 웃어 보이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앨리스가 현관문으로 들어와 나에게 두 팔을 벌렸다.

"안아도 될까?"

"내 허락을 먼저 구한 건 앨리스가 처음이에요."

내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앨리스는 가녀린 팔로도 에밋만큼 가뿐하게 나를 들어올리고는 아이처럼


보듬어 안았다. 곧이어 우리는 환한 불빛을 등지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20. 조바심

잠에서 깨어난 나는 혼란스러웠다. 아직도 뒤엉킨 꿈들,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머리는 몹시 몽롱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기까지
한참이나 걸렸다.

방이 지나치게 화려한 걸 보니 호텔이 분명했다. 침대 머리맡 탁자에


연결된 독서등은 침대 커버와 같은 원단으로 깔끔하게 덧씌워져 있고,
벽에는 단조로운 수채화가 걸려 있었다.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지 생각하려 애썼지만 처음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 날렵하게 생긴 검정색 차와 리무진보다 선팅이 짙은 차량이


떠올랐다. 규정속도의 거의 두 배나 되는 속력으로 검게 뻗은 고속도로를
달렸는데도 엔진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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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짙은 색 가죽 시트가 덮인 자동차 뒷좌석에 나와 나란히 앉아 있던


앨리스가 떠올랐다. 긴 밤을 보내는 사이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단단한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내가 그 정도로 가까이 있는데도
앨리스는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 듯했고, 차갑고 단단한 그녀의 피부는
이상하리만큼 내게 위안을 주었다. 앨리스가 입은 얇은 면 셔츠 앞자락은
내 눈물로 한동안 축축하게 젖어 있었지만, 빨갛게 부풀었던 내 눈에서도
차츰 눈물이 말라갔다.

처음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드디어 밤이 끝나고 캘리포니아 어딘가의


낮은 봉우리 사이로 여명이 밝아왔지만 쓰라린 내 눈은 감길 줄을 몰랐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회색 빛이 쏟아져 눈이 따가웠다. 그러나 나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바로 눈꺼풀 뒤에서 아른거리는
것처럼 여러 영상들이 너무도 선명하게 이어져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찰리의 낙담한 표정, 이를 드러내고 무시무시하게 으르렁거리는
에드워드의 모습, 분노로 얼룩진 로잘리의 시선, 날카롭게 노려보던
추적자의 눈길, 마지막으로 입맞춤을 나눈 뒤 에드워드의 눈동자에
떠올랐던 공허함...... 나는 그런 장면들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높이 떠오른 강렬한 햇빛과 피로에 맞서 싸웠다.

어느새 해를 등지고 낮은 산등성이를 지나 마침내 높은 건물 꼭대기에서


타일이 반짝거리는 피닉스 시가지가 저 멀리 나타날 때까지도 나는 줄곧
깨어 있었다. 꼬박 사흘 걸리는 거리를 단 하루 만에 주파했다는 사실에
놀랄 만한 감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평평하고
광활한 도시를 멍하니 응시했다. 야자수와 서로 엉키듯 아무렇게나 뻗어
있는 고속도로, 골프장의 잘 정돈된 초록색 잔디, 군데군데 보이는 청록색
수영장이 희미한 스모그 속에 펼쳐진 피닉스가, 산이라기보다는 그리 높지
않은 야트막한 바위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야자수는 색깔마저


흐릿해져 고속도로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에는 아무것도 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밝고 환하게 펼쳐진 고속도로는 제법 길한 징조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안도감과, 집에 왔다는 푸근함도 느낄 수 없었다.

"벨라, 공항 가는 길이 어느 쪽이지?"

재스퍼가 부드럽고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는데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움찔했다. 조용한 자동차 소음 말고는 긴 밤부터 시작된 침묵을 깨뜨린 첫
소리였다.

"1-10 번 고속도로를 계속 따라가면 오른쪽에 나타날 거예요."

내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잠을 자지 못해 몽롱한 상태라 두뇌가 둔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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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타고 어디 갈 거예요?"

내가 앨리스한테 물었다.

"아니, 그래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가까운 게 좋잫아."

스카이하버 국제공항을 끼고 달리기 시작하던 장면이 떠올랐지만...... 그


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 무렵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애써 생각을 더듬어보니, 태양이 막 지평선을 넘어갔을 무렵 차에서 내린


기억이 흐미하게 떠올랐다. 앨리스는 내 팔을 어깨에 두르고 내 허리를
껴안듯 안고 따뜻하고 건조한 그늘을 따라 걸어갔다.

하지만 이 방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머리맡 스탠드에 붙어 있는 디지털 시계를 바라보았다. 빨간 숫자는 3 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밤인지 낮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툼한 커튼 사이로는
빛이 전혀 새어들지 않았지만, 방 안은 불빛 때문에 꽤 밝았다.

나는 뻣뻣한 몸을 겨우 일으켜, 비틀비틀 창문으로 걸어가 커튼을 젖혔다.

밖은 어두웠다. 새벽 3 시였던 것이다. 방은 인적 드문 고속도로와 공항에


새로 생긴 장기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간과 장소를 확실히 알수
있다는 게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나는 내 몰골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에스미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몸에


맞지 않아 꼴이 말이 아니었다. 방을 둘러본 나는 낮은 서랍장 위에서 내
여행용 헝겊가방을 발견하고 기뻤다.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가려는 찰나 문 밖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와


나는 펄쩍 뛰며 놀랐다.

"들어가도 되니?"

앨리스가 물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럼요."

앨리스가 나를 조심스레 바라보며 걸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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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말이 아닌데 좀더 자지 그랬어."

나는 그냥 고개만 흔들었다. 앨리스는 말없이 창문으로 다가가 빈틈없이


커튼을 닫은 다음 나를 향해 돌아섰다.

"우린 계속 실내에서 지내야 해."

"괜찮아요."

내 목소리가 제멋대로 갈라졌다.

"목마르니?"

앨리스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 괜찮아요. 두 분은요?"

"우린 염려 마."

앨리스가 미소를 지었다.

"네가 먹을 음식을 좀 주문했는데, 거실에 있어. 에드워드가 너는


우리보다 식사를 훨씬 자주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라고 했거든."

순간적으로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전화 왔었어요?"

"아니, 우리가 떠나기 전에 들은 거야."

앨리스는 낙담하는 내 표정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녀는 조심스레 내 손을


잡고 호텔 스위트룸의 거실로 나를 이끌었다. 볼륨을 낮춘 텔레비전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재스퍼는 구석에 놓인 책상 앞에 그림처럼 앉아 무심히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쟁반이 놓여 있는 커피탁자 옆 바닥에 앉아, 무슨 음식인지도


모르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앨리스는 소파 팔걸이에 앉아 재스퍼처럼 텔레비전을 멍하니 응시했다.

나는 천천히 식사를 하며 앨리스를 지켜보다 가끔 재스퍼를 흘끔거렸다.


두 사람이 너무 긴장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광고가
나오는데도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갑자기 뱃속이 불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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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쟁반을 밀어놓았다. 앨리스가 나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에요, 앨리스?"

"아무 일도 없어."

앨리스의 눈은 크고 솔직해 보였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이제 우린 어쩌죠?"

"칼라일이 전화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지금쯤은 전화가 왔어야 하지 않나요?"

내 짐작이 옳았다는 게 느껴졌다. 앨리스의 시선이 그녀의 가죽가방 위에


놓인 휴대전화로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아직 전화를 하지 않은 거 말이에요."

목소리가 떨려나와 나는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직은 우리에게 전할 말이 없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앨리스의 목소리는 너무 평이했고, 공기는 숨을 쉬기 힘들 만큼


무거워졌다. 재스퍼가 갑자기 앨리스 옆으로 다가와 평소보다 훨씬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벨라. 넌 아무 걱정 할 필요 없어. 여기 있으면 넌 완벽하게 안전하니까."

재스퍼가 달래듯 말했다.

"그건 알아요."

"그런데 왜 겁을 내는 거야?"

재스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내 마음의 갈등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이유를 알아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내 목소리는 속삭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충분히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렌트가 한 말 들었잖아요. 제임스는 치명적인 존재랬어요. 혹시 일이


잘못돼서 세 사람이 헤어지면 어떻게 해요? 혹시 누구에게든, 칼라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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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밋......, 에드워드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면서 히스테리가


느껴졌다.

"그 사나워 보이던 여자가 에스미를 해치면...... 다 내 잘못인데 내가


어떻게 마음 편히 살겠어요? 나까짓 것 때문에 여러분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건 절대로......"

"벨라, 벨라! 그만해."

재스퍼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말은 너무 빨라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넌 지금 엉뚱한 걱정을 하고 있는 거야. 내 말 믿어야 해, 우린 지금


아무도 위험에 처하지 않았어. 지금 이대로도 감당하기 힘들 텐데,
쓸데없는 걱정으로 더 부담 갖지 마. 벨라, 내 말 좀 들어!"

내가 시선을 돌리가 그가 나를 다그쳤다.

"우리 가족은 강해.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건 너를 잃는 일이야."

"하지만 대체 무엇 때문에 여러분이......"

이번에는 앨리스가 차가운 손가락으로 내 뺨을 어루만지며 내 말문을


막았다.

"에드워드가 홀로 외롭게 지낸 게 얼마나 됐을까. 백 년에 가까운


세월이야. 그런데 이젠 널 찾은 거야. 네가 에드워드와 긴긴 세월을 함께
보낸 우리만큼 그 애의 변화를 눈치 챌 순 없었겠지. 에드워드가 널 잃게
되면 앞으로 몇백년 동안 우리가 그 애랑 눈이라도 마주칠 수 있을 것
같니?"

앨리스의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내 죄책감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도, 나는 재스퍼가 곁에 있는 한 나 자신의
기분조차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우리는 호텔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앨리스는 프런트 데스크에


전화를 걸어 당분간 침실을 청소하는 직원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부탁했다.
창문은 꼭 닫은 채였고, 아무도 보지 않았지만 텔레비전은 늘 틀어놓았다.
나를 위해 식사는 규칙적으로 배달되었다. 앨리스의 가방 위에 놓인 은색
휴대전화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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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는 두 사람이 훨씬 더 긴장감을 잘 견뎌냈다. 나는 초조하게 방안을


오갔지만, 두 사람은 조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남몰래 시선으로만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호텔방을 또렷하게 기억에 남기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려
했고, 갈색, 주황색, 크림색, 탁한 황금색 다시 갈색의 순으로 반복되는
소파의 줄무늬를 유심히 살폈다. 가끔은 내가 어린 시절에 구름 속에서
모양찾기 놀이를 하던 것처럼, 벽에 걸린 추상화에서 뭔가 형체를
찾아내려고도 애를 썼다. 머리를 빗는 여자의 파란 손과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흐릿한 빨강색 원이 나를
노려보는 눈처럼 보여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런 오후가 이어지자 나는 단순히 할 것이 없어 다시 침대를 찾았다.


어둠 속에 혼자 있으면, 재스퍼의 주의 깊은 배려 때문에 좀처럼 찾아들지
못하는 끔찍한 공포감이 내 의식의 가장자리를 뚫고 들어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앨리스는 우연히 나처럼 거실에 있는 게 싫증이 난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 뒤를 따라왔다. 에드워드가 대체 그녀에게 무슨 당부를
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에 누웠고, 앨리스는 얌전히
다리를 오므리고 내 옆에 앉았다. 갑자기 너무 피곤해 잠이 올 것 같아서
나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자, 재스퍼가
없어서인지 발작적인 두려움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을 재빨리 포기하고, 새우처럼 몸을 웅크려 양팔로 다리를 감쌌다.

"앨리스?"

"응?"

"다들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요?"

나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칼라일은 추적자를 최대한 북쪽으로 유인해서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그자를 습격할 생각이었어. 에스미하고 로잘리는 그 여자가
뒤쫓는 한, 최대한 멀리 서쪽으로 유인할 작정이었지. 만일 여자가
포기하고 되돌아간다면 두 사람도 포크스로 돌아가 너희 아버지를
지키기로 했어. 그러니까 칼라일 일행이 전화를 할 수 없다는 건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일 거야. 추적자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혹시 대화
내용을 엿들을까 봐 조심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에스미는요?"

"지금쯤 포크스로 돌아갔을 거야. 그 여자가 엿들을지도 모르니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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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는 하지 않을 거야. 극도로 주의해야 하는 게 사실 당연하거든."

"정말로 모두들 무사하다고 생각해요?"

"벨라, 우린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대체 몇 번이나 얘기해야 믿겠어?"

"앞으로는 저한테 사실대로 얘기해 줄 거예요?"

"그럼. 난 너한테 언제나 사실대로 얘기할 거야."

진심이 깃든 목소리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앨리스가 진심을 털어놓을


것이라 믿기로 했다.

"그럼...... 어떻게 뱀파이어가 되는 건지 얘기 해 주세요."

앨리스는 내 부탁이 몹시 뜻밖인지 금세 대꾸하지 않았다. 몸을 돌려


그녀를 보니, 갈팡질팡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너한테 이런 얘기 하는 거 싫어할 거야."

단언하듯 말했지만, 앨리스는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게


느껴졌다.

"그건 불공평해요, 나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도 알아."

내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기다렸다. 앨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 녀석일 알면 엄청 화낼 텐데."

"에드워드가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이건 우리 둘 사이의 문제잖아요.


친구로서 내 부탁을 들어주세요."

앨리스는 오래전부터 미리 알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제 우리는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고민에 빠진 듯 앨리스는 커다랗고 지혜로운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침내 앨리스가 말했다.

"일반적인 과정은 얘기해 줄 수 있지만, 내 개인적인 경험은 전혀 기억


나지 않아. 난 직접 해본 적도 없고 지켜본 적오 없기 때문에, 내가 하는
얘기는 이론이라는 것만 명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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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약탈자로서 우리는 정말 뛰어난 존재들이야. 상상조차 하기 힘든


무기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에드워드나 재스퍼, 내가 지닌 특별한 능력은
말할것도 없고, 대개 엄청난 힘과 빠른 속력, 예민한 감각을 타고나지.
또한 육식의 대가들이고, 그래서 먹이에 몹시 이끌리는 특성이 있어."

언젠가 초원에서 에드워드가 같은 개념을 꼬집어 설명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앨리스는 돌연 반짝이는 이를
드러내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뿐이 아냐. 우리는 또 한 가지 필요 이상의 무기를 갖고 있지. 다들


독을 품고 있거든. 그 독은 인간을 죽이는 게 아니야. 단지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지. 천천히 혈관을 따라 퍼지기 때문에, 한번 물리면 우리의
먹이가 된 대상은 도저히 우릴 피해 달아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고통에
휩싸이게 돼. 이미 말했듯이 참 불필요한 무기일지도 몰라. 어차피 우리가
그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다면 먹이는 절대 도망치지 못하거든. 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지. 예를 들어 칼라일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독이 몸에 남아 퍼지면....."

내가 중얼거렸다.

"독이 혈관에 얼마나 퍼졌는지, 심장에 얼마나 가까이 침투했는지에 따라


변신과정이 완료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달라. 하지만 심장이 뛰는 한 독은
퍼져나가게 되고, 그 흐름에 따라 치유와 함께 몸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거야. 결국엔 심장이 멈추고 변신은 끝나게 되지. 그 과정 내내 희생자는,
단 한순간도 빠짐 없이 죽기를 열망할 정도로 고통을 겪어야 해."

나는 몸을 떨었다.

"유쾌한 일은 아니겠지."

"에드워드 말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던데, 난 잘 이해가 안 돼요."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상어와도 비슷하기 때문이지. 일단 피를 맛보거나,


아니 냄새만 맡아도 먹어치워버리지 않고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거든.
때로는 아예 불가능하지. 실제로 누군가를 물어 피를 맛보게 되면 거의
발작상태가 돼. 양쪽 모두에게 어려운 상황이지. 한쪽은 흡혈의 욕망
때문에 괴롭고, 다른 한쪽은 끔찍한 고통 때문에 괴롭고."

"앨리스는 왜 기억을 못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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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어. 다른 이들에겐 모두 변신의 고통이 인간으로 살았던 삶에서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이거든. 나는 인간이었던 때의 기억이 전혀 없어."

앨리스의 목소리가 처연했다.

우리는 조용히 각자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혼자만의


생각에 몰두해 앨리스가 옆에 있다는 것마저 잊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경고도 없이 앨리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섰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상황이..... 뭔가 바뀌었어."

앨리스의 목소리는 긴박했지만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문을 여는 순간 재스퍼도 문 앞에 와 있었다. 그는 우리의 대화와


앨리스의 갑작스런 말을 줄곧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앨리스의
어깨에 양손을 얹고 다시 침대 가장자리에 앉혔다.

"뭐가 보여?"

재스퍼가 앨리스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앨리스의 눈은 아주 먼 곳을


바라보듯 초점을 잃고 있었다. 나는 바짝 자가앉으며 그녀의 낮고 빠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방이 보여. 길쭉한 방인데 사방에 거울이 있군. 바닥은 나무야. 그자가,
그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거울을 가로질러서...... 금빛 끈 같은게 보여."

"어디 있는 방이지?"

"모르겠어. 뭔가 빠져 있어. 또 다른 결정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어."

"시간은 얼마나 남았어?"

"곧 뭔가 일어날 거야. 그자는 오늘이나 내일쯤 그 거울 방에 있게 될


거고. 아직은 결정되지 않았군. 놈은 뭔가를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지금
그자는 어둠 속에 있어."

재스퍼는 침착하고 논리정연하게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뭘 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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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을 보고 있어...... 아니다, 또 다른 장소에서 비디오를 틀고


있어. 아주 어두운 곳에서."

"어딘지 안 보여?"

"응. 너무 어두워."

"그럼 거울 방엔, 또 뭐가 있어?"

"그냥 거울하고 금빛 끈뿐이야. 띠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군. 검은 탁자


위에 커다란 오디오가 놓여 있고, 텔레비전도 보여. 그자는 거기서도
비디오를 만지고 있는데, 어두운 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화면을 바라보진
않아. 그자는 그 거울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앨리스의 눈빛이 이리저리 떠도는 듯하더니 이윽고 재스퍼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른 건 없어?"

앨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얼어붙은 듯 서로를 응시했다.

"그건, 무슨 의미일까요?"

내가 물었다. 둘 다 한동안 말이 없다, 이윽고 재스퍼가 나를 바라보았다.

"추적자의 계획이 바뀌었다는 뜻이야. 그 자는 그 거울 방과 어두운


방으로 가기로 결정한 거다."

"하지만 우린 그 방이 어딘지 모르잖아요."

"모르지."

"어쨌든 그자가 워싱턴 주 북쪽에서 대치하고 있지 않다는 건 확실해,


그자는 이미 칼라일 일행을 따돌렸어."

앨리스의 목소리가 황량했다.

"우리가 먼저 전화를 해야 하는 걸까요?"

내가 묻자 두 사람은 마음을 정하지 못한 듯 심각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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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는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벌써 거실로 달려갔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전화를 귀에 댔지만 그녀는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칼라일."

숨 가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앨리스는 나처럼 놀라지도, 안도하지도


않는 듯 했다.

"네."

그녀가 흘끔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오랫동안 듣기만 했다.

"저도 방금 그자를 봤어요."

앨리스는 방금 본 영상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했다.

"무슨 생각으로 비행기를 탔는지는 모르지만...... 그 방으로 가려는 게


틀림없어요."

앨리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네."

앨리스는 수화기에 대고 답한 뒤 나를 부르며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내가


얼른 달려가 휴대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벨라."

에드워드였다.

"아아, 에드워드! 걱정돼서 죽을 뻔했어."

"벨라, 넌 네 걱정만 해야 해. 염려할 것 없다고 했잖아."

에드워드는 속상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좋았다. 짙은 절망의 먹구름이 조금이나마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어디야?"

"밴쿠버 외곽이야. 벨라, 미안해, 놈을 놓쳤어. 우릴 수상쩍게 여겼는지.


내가 놈의 생각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조심스레 거리를 유지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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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지금은 사라져버렸어. 비행기를 탄 것 같아. 포크스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시작할 작정이겠지."

등 뒤에서 앨리스가 재스퍼에서 빠르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벌써


윙윙거리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나도 알아. 앨리스가 방금 그자가 달아난 장면을 예견했어."

"하지만 넌 걱정할 필요 없어. 놈은 너를 찾아낼 단서를 발견할 수


없을테니까. 넌 그냥 거기 있으면서 우리가 다시 놈을 찾아낼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돼."

"난 괜찮아. 에스미는 찰리랑 같이 있지?"

"응. 여자는 줄곧 시내에 있더군. 너희 집에도 갔지만, 찰리는 출근하고


없었어. 찰리 근처엔 얼씬대지 않았으니 걱정 말고. 에스미와 로잘리가
지켜보고 있으니 무사하실 거다."

"여자가 뭘 하려는 걸까?"

"아마 널 추적할 단서를 찾으려는 거겠지. 밤새 온 시내를 다 뒤졌어.


로잘리가 줄곧 뒤를 쫓았는데, 공항이며 시내 주변도로, 학교까지 다
뒤지고 다녔다더군. 하지만 찾아낼 게 없었겠지."

"찰리가 무사하다는 거 확실해?"

"그럼, 에스미가 한순간도 빠짐없이 지키고 있는걸. 그리고 우리도 곧


갈거야. 추적자가 포크스 근처에 오면 우리가 놓치지 않고 잡을 거다."

"보고 싶어."

내가 속삭였다.

"나도 알아. 그런데 네가 떠날 때 내 반쪽을 떼어간 것 같아."

"그럼 어서 와서 가져가."

"곧 갈게. 최대한 빨리 갈 거야. 하지만 먼저, 널 안전하게 지켜야 해."

에드워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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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시련을 겪게 만든 게 나야. 그런데도, 나 역시 널 너무


사랑한다는 거 믿어져?"

"그럼. 당연하잖아."

"곧 데리러 갈게."

"기다리고 있을게."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암울한 먹구름이 다시 스멀스멀 나를 덮치기


시작했다.

휴대전화를 앨리스에게 돌려주려고 돌아서니, 앨리스는 호텔 편지지에


뭔가를 그리고 있고 재스퍼는 탁자 위로 몸을 수그려 지켜보고 있었다.
소파로 돌아간 나는 앨리스의 어깨 너머로 무슨 그림인지 살폈다.

가장 먼 벽이 조금 좁은 형태를 하고 있는, 길쭉한 직사각형 방을 원근감


있게 그런 그림이었다. 좁은 널빤지를 이어 붙인 나무바닥은 길쭉한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사방에 둘러쳐진 거울 가운데 가장 먼 벽 쪽의
거울이 깨져 있었다. 벽을 따라 허리 높이에 긴 끈이 둘러쳐져 있었다.
앨리스가 금빛이라고 말하던 그 끈이었다.

"발레 교습소네요."

갑자기 이 방 생김새와 비슷한 곳을 떠올려 내고, 내가 말했다.

두 사람이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이 방을 알아?"

재스퍼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묘한 떨림이 담겨


있었다. 앨리스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날아갈 듯 빠른 속도로 뒤쪽 벽에
매달린 비상구 표시와, 오른쪽 앞 구석에 놓인 오디오와 텔레비전을 그렸다.

"내가 여덟 살인가 아홉 살 때 발레를 배우러 다니던 교습소하고


비슷해요. 거기랑 똑같이 생겼어요."

내가 맨 뒷벽이 조금 좁아지는 듯한 생김새를 가리키며 말했다.

"화장실은 이쪽에 있었고, 다른 층으로 이어지는 문도 그쪽이었어요.


하지만 오디오는 이쪽에 있었는데......"

내가 왼쪽 구석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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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보다 훨씬 낡았고, 드땐 텔레비전이 없었어요. 대기실엔 창문이


있어서, 이쪽 편에서 보면 교습소가 이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왔어요."

앨리스와 재스퍼가 나를 보았다.

"같은 방이 확실해?"

재스퍼가 여전히 침착하게 물었다.

"아뇨, 잘 모르겠어요. 댄스 교습소는 대부분 다 똑같이 생겼잖아요.


사방이 거울이고 벽에 손잡이가 달렸고."

나는 거울 벽에 붙어 있는 연습용 바를 따라 손을 움직였다.

"낯익어 보이는 건 방의 모양 때문이에요."

기억 속에 있는 곳과 똑같은 데 붙어 있는 문을 가리키며 내가 말했다.

"지금 네가 거길 다시 갈 만한 이유가 있을까?"

앨리스가 내 상념을 깨며 물었다.

"아뇨, 거의 십 년 동안 한 번도 간 적 없어요. 춤을 워낙 못 춰서, 발표회


땐 늘 맨 뒤에 서 있었으니까요."

"그럼 너랑 연결될 가능성은 없다는 얘기네?"

앨리스가 심각하게 물었다.

"네, 옛날 주인이 지금도 하는지조차 모르는걸요. 아마 어딘가 다른 데


있는 발레 교습소일 거예요."

"네가 다니던 교습소는 어디 있었어?"

재스퍼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엄마 집에서 길모퉁이만 돌면 있었어요. 학교 끝나고 걸어서 다니곤


했는데......"

내가 말꼬리를 흐렸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표정을 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럼 여기 피닉스에 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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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가벼웠다.

"네. 58 번가와 캑터스 가가 만나는 곳에 있어요."

우리는 그림을 응시하며 모두 침묵을 지켰다.

"앨리스, 그 전화 써도 안전할까요?"

"응. 발신번호를 확인해도 워싱턴 주 지역번호로 나올 거야."

"그럼 이걸로 엄마한테 전화 걸어도 되겠네요."

"플로리다에 계시다면서."

"맞아요. 하지만 곧 집에 오실 거라는데, 당분간은 집에 오면 안 될 것


같아서......"

내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에드워드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머리칼이 빨간 여자가 찰리의 집과 학교에 갔었다는 이야기.
학적부에는 내가 전학하기 전 주소가 적혀 있을 터였다.

"엄마와 어떻게 연락을 하려고?"

"집 전화밖에 확실한 연락처가 없기 때문에 엄마가 주기적으로 메시지를


확인할 거예요."

앨리스가 재스퍼에서 의견을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해. 물론 네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나는 얼른 수화기를 들고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네 번 울린 뒤


메시지를 남기라는 엄마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삐 소리가 난 뒤 내가
말했다.

"엄마, 나야. 부탁할 게 있으니까 잘 들어. 중요한 일이야. 이 메시지 듣는


대로, 이 번호로 꼭 전화해."

앨리스가 벌써 그림 아래 전화번호를 적어 들고 내 옆에 서 있었다. 나는


번호를 조심스레 두 번 읽어주었다.

"나한테 전화하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면 안 돼.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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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고, 시간이 아무리 늦더라도 이 메시지 듣는 대로 꼭 전화해야 해,


알겠죠? 사랑해, 엄마. 끊어요."

나는 눈을 감고, 예기치 못하게 계획이 바뀌더라도 부디 엄마가 내


메시지를 듣기 전에 집에 오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온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

긴 저녁이 될 게 분명하다. 소파에 앉아 접시에 남은 과일을 집어먹었다.


찰리한테 전화를 걸 생각도 했지만, 지금쯤 집에 도착했을 시가이 맞는지
아닌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뉴스에 정신을 집중해 플로리다나 봄 시즌
야구 경기에 대한 특별한 소식이 있는지 살폈다. 계획보다 일찍 엄마와
필을 집으로 보낼 만한 시위나 허리케인, 테러 공격 소식이 있을까 봐
두려웠다.

불멸의 존재들은 본래 끝없는 인내를 타고나는 모양이었다. 재스퍼나


앨리스는 아무런 욕구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한동안 앨리스는 예견한
장면에서 본 텔레비전이 켜진 어두운 방의 생김새를 보이는 만큼 최대한
떠올려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그 일이 끝난 뒤에는 가만히 앉아 시간을
초월한 듯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재스퍼 또한 나처럼 방 안을
초조하게 오가거나 커튼 밖을 내다보거나, 소리를 지르며 문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을 전혀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전화가 다시 울리기를 기다리다 소파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나를 안아


침대로 옮기는 앨리스의 차가운 손길에 잠시 잠이 깼지만 나는 베개에
머리가 닿기도 전에 다시 정신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21. 전화

눈을 뜨는 동시에 너무 이른 새벽이라는 걸 감지할 수 있었지만, 내 몸이


느끼는 밤낮이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거실에서 소근거리는 앨리스와 재스퍼의 나직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했다. 나는 먼저 발을 침대 아래로
내려뜨리고 일어나 비틀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텔레비전 위에 걸린 시계를 보니 새벽 2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앨리스와 재스퍼가 보였다. 앨리스가 그리는 그림을 재스퍼가
넘겨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림 그리기에 너무 열중해 내가 들어가는 데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내가 재스퍼 옆에 앉으며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더 보이는 게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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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응. 무슨 일인지 놈이 비디오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는데, 지금은 방 안이


밝아졌어."

나는 앨리스가 그린, 짙은 색 나무 대들보가 드러나 있고 천장이 낮은


네모난 방을 들여다보았다. 짙은 색 나무 널빤지를 댄 벽은 좀 구식이었다.
바닥에는 무늬가 들어간 진한 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남쪽 벽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고, 서쪽 벽은 응접실로 이어졌다. 그 입구 한쪽 옆에는 커다란
갈색 돌로 만들어진 벽난로가 양쪽 방을 향해 뚫려 있었다. 그림의 초점은
방의 남서쪽 구석에 놓인 아주 작아 보이는 받침대에 나란히 놓인
텔레비전과 비디오였다. 낡은 조립식 소파가 텔레비전 앞에 놓여 있고 그
앞에는 둥근 커피테이블이 자리를 자고 있었다.

"전화는 저쪽에 있어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속삭였다. 눈동자 두 쌍이 나를 향했다.

"여긴 우리 엄마 집이에요."

앨리스는 어느새 소파에서 일어나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는 엄마 집의


거실을 정확하게 그려낸 그림을 멍하니 응시했다. 재스퍼가 소리 없이
나에게 다가왔다.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자, 기분을 침착하게 해주는
그만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느닷없는 공포가 막연하게 멀어진
느낌이었다.

앨리스의 입술이 낮은 소리를 내며 빠르게 떨리고 있었지만,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벨라."

앨리스가 내 이름을 부르가 나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벨라, 에드워드가 널 데리러 올 거야. 에밋, 칼라일과 같이 와서 당분간


널 어디로든 데려가 숨길 생각이야."

"에드워드가 온대요?"

에드워드가 온다는 말이 물에 빠진 내 목숨을 구해 줄 구명조끼처럼


느껴졌다.

"응. 시애틀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올 거야. 에드워드가 널 공항에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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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고 떠나기로 했어."

"하지만 우리 엄마는요? 그자는 우리 엄마를 노리고 온 거예요. 앨리스!"

재스퍼가 옆에 있는데도 내 목소리는 발작적으로 커졌다.

"어머님이 안전하실 때까지 재스퍼와 내가 곁에 있을게."

"이건 이길 수 없는 게임이예요. 여러분이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를


영원히 보호할 순 없잖아요. 그자가 하려는 짓이 뭔지 모르겠어요? 그자는
날 뒤쫓는게 아니었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서 해치우려는
거예요...... 앨리스, 난 못가요......"

"우리가 반드시 놈을 잡을 거야, 벨라."

"그러다 앨리스가 다치면 어쩌죠? 그래도 내가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아요?


그자가 나를 이용해서 인간인 내 가족만 해칠 거라고 생각해요?"

앨리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재스퍼를 바라보았다. 문득 묵직한 안개처럼


무기력감이 온몸에 흐르며,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리고는 안개 속에서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억지로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재스퍼의 손을 뿌리쳤다.

"다시 잠들고 싶지 않아요."

나는 방으로 돌아가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그래야 정신을 차리고


나 혼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앨리스도 나를 따라
오지 않았다. 세 시간 반 동안 나는 벽을 바라보며 웅크리고 앉아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 악몽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느라 골똘히
고민했지만 생각은 늘 제자리였다. 영영 벗어날 방법은 커녕 잠시 모면할
길조차 없었다. 내 미래를 어둡게 짓누르고 있는 결말은 단 한 가지 였다.
유일하게 달라질 수 있는 문제는, 내가 그 결말에 도달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나에게 남은 유일한 위안이자 희망은 에드워드를 곧 만나게 된다는 것


뿐이었다. 어쩌면, 지금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지만,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면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전화벨 소리가 들리자, 나는 조금 전 내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거실로


나갔다. 두 사람이 나 때문에 화가 나지 않았기를 바랐고, 날 위해 치르고
있는 그들의 희생을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알아주길 바랐다.

앨리스는 여느 때처럼 빠르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재스퍼가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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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없다는 사실이 내 주의를 끌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5 시 반이었다.

"이제 막 비행기를 탈 거래. 9 시 45 분 도착이야."

앨리스가 말했다. 이제 몇 시간만 더 숨죽여 기다리면 그가 여기 온다는


의미였다.

"재스퍼는 어디 갔어요?"

"체크아웃하러 갔어."

"두 분, 여기 안 있을 거예요?"

"응, 네 어머님 댁과 더 가까운 곳에 있기로 했어."

앨리스의 말에 뱃속이 뒤틀렸다.

그러나 다시 전화벨이 울려 내 정신을 빼앗았다. 앨리스는 놀란


표정이었지만, 나는 내 전화일 거라 생각하며 벌써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아뇨, 바로 옆에 있어요."

앨리스가 전화기를 나에게 건네며 입 모양으로 '네 어머니야'라고 알려


주었다.

"여보세요?"

"벨라? 벨라?"

어린 시절 내가 보도블록 가장자리로 너무 가깝게 걸어가거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을 때마다 수천 번도 넘게 듣던 낯익은 엄마
목소리였다. 그것은 돌연한 공포의 소리였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긴급하다는 느낌을 주면서도 최대한 놀라지 않도록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엄마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진정해, 엄마."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엄마를 달래며 천천히 앨리스 옆을 벗어났다.


앨리스의 눈총을 받으며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 일도 없어. 잠깐만 진정하고 기다리면 내가 다 설명할게,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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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직도 내 말을 자르기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내가 말을


멈추었다.

"엄마?"

"내가 별도로 지시할 때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수화기에서는 뜻밖의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량이 풍부하고 듣기


좋은 남자의 낮은 목소리는, 호화로운 자동차 광고에나 나올 법한 목소리
같았다. 남자가 아주 빠르게 말했다.

"나도 굳이 네 어머니를 해칠 생각은 없으니,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그럼


네 어머닌 무사할 거야."

내가 공포게 사로잡혀 아무 말도 못하고 듣고만 있자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주 좋아. 이제는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해라. 목소리를 아주 자연스럽게


내도록 해. '아니야, 엄마. 거기 계세요.' 라고 말해라."

"아니야, 엄마. 거기 계세요."

내 목소리는 속삭임에 지나지 않았다.

"너한텐 꽤 어려운 일이겠지."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목소리가 가볍고 다정했다.

"네 표정 때문에 일을 망치지 않도록 다른 방으로 가서 전화를 받으면


어떨까? 그러면 네 어머니가 곤경을 겪을 일은 없을 거다. 걸어가면서 '
엄마, 내 말 잘 들으세요.' 라고 말해. 어서."

"엄마, 내 말 잘 들으세요."

나는 앨리스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등 뒤로 느끼며 천천히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방문을 닫으며 나는 공포에 사로잡힌 두뇌를 어떻게든 움직여
또렷하게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자, 이제 혼자가 됐나? 예, 아니오로 대답하도록."

"네."

"하지만 그래도 저들이 네 얘긴 들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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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럼 좋아. '엄마, 날 믿어줘요' 라고 말해라."

"엄마, 날 믿어줘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더 잘 풀리더군. 난 기다릴 작정이었는데, 네


어머니가 예정보다 빨리 돌아온 거지. 차라리 이게 더 쉽지 않겠니? 너로선
불안감도, 걱정도 덜할 테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 이제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네 친구들을 따돌려야 한다. 할수


있겠니? 예, 아니오로 대답해."

"아뇨."

"유감스러운 대답이군. 좀더 창의력이 있는 아이이길 바랐는데 말이지. 네


어머니의 목숨이 달린 일이리면 친구들을 따돌리고 올 수 있겠니? 예,
아니오로 대답해라."

방법이 있을 것도 같았다. 문득 공항에 갈 예정이라는 게 생각났다.


스카이하버 국제공항은 늘 사람들로 붐비는 복잡한 곳이었다.

"네."

"좀 낫구나. 쉽진 않겠지만, 네가 누굴 달고 온다는 기미가 조금만 보여도


네 어머니는 무사하지 못할 거다. 그런 낌새를 내가 얼마나 빨리 알아 차릴
수 있는지, 우리들에 대해선 너도 충분히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런
경우 내가 얼마나 순식간에 네 어머니를 해치울 수 있는지도 잘 알겠지. 내
말 알아듣겠니? 예, 아니오로 대답해라."

"네."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주 좋아, 벨라. 이제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은 이거다. 우선 네 어머니


집으로 가는 거야. 전화기 옆에 전화번호가 있을 거다. 그리로 전화를
걸면, 어디로 와야 하는지 내가 일러주겠다."

나는 이미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 악몽이 어디에서 끝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고스란히 따를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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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겠니? 예, 아니오로 대답해."

"네."

"정오 이전까지 와야 한다, 벨라. 하루 종일 기다리진 않을 거니까."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은 어디 있어요?"

내가 따지듯 물었다.

"이런, 조심해야지, 벨라. 얌전히 기다리렴. 내가 하라는 말만 해."

시간이 조금 흘렀다.

"이제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되면 의심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어머니랑 통화해서 당분간은 집에 오지 마시라고 잘 말씀드렸다고 해. 자,
이젠 내 말을 따라 해라. '고마워요, 엄마.' 지금 바로 얘기해."

"고마워요, 엄마."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울음을 참으려고 애썼다.

"'사랑해, 엄마. 곧 만나요.'라고 말해. 어서."

"사랑해, 엄마. 곧 만나요."

나는 목멘 소리로 속삭였다.

"잘 있거라, 벨라. 곧 다시 보게 되기를 빈다."

그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기를 계속 귀에 대고 있었다. 공포 때문에 온몸의 관절이 얼어


붙은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내 머릿속에는 온통 엄마의 공포 어린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자제력을 되찾으려고 애쓰는 사이 시간이
흘러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생각이 고통의 벽을 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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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워야 했다. 이제 나에게는 한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거울 방에 가서


죽는 것. 나는 제임스가 게임에서 에드워드를 이겼다는 것에 만족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절망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의 마음을 바꿀 만한 어떤
협상이나 제안도 불가능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조건 따를 수 밖에
없다.

나는 최대한 공포감을 억눌렀다. 마음의 결정은 내려졌다. 결과에 대해


고민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앨리스와 재스퍼가
기다리고 있는데다, 그들을 따돌리고 달아나는 건 이 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면서 또한 불가능한 임무였다. 생각을 가다듬어야 했다.

문득 재스퍼가 없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지금 내가 느끼는 괴로움을 그가


옆에서 느낄 수 있었다면, 그들의 의굼심을 도저히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르는 두려움과 걱정을 애써 삼켰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언제 그가 돌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탈출 계획에만 정신을 쏟았다. 누구보다 공항 구조에 익숙하다는


점이 나에게 이롭게 작용하기를 빌었다. 어떻게든 앨리스를 멀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앨리스가 몹시 궁금해하며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재스퍼가 돌아오기 전에 남몰래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어야 했다.

나는 에드워드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더 보지 못하고 거울


방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겨야
하는데 작별인사도 할 수 없다니. 나는 고문과도 같은 고통의 파도에 몸을
내맡긴 채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나는 그 마음마저 억누른
채 앨리스를 만나러 나갔다.

지금 내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은 공허하고 멍한 표정뿐이었다. 앨리스가


깜짝 놀라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그녀가 물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지금 내게 주어진 대본은 오로지 하나뿐이었고, 즉흥연기는 불가능했다.

"엄마가 걱정을 많이 해서 집에 오고 싶어하셨어요. 하지만 내가 오지


마시라고 잘 말씀드렸으니까 괜찮아요."

내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안전하게 지켜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 벨라."

나는 차마 앨리스에게 얼굴을 보여줄 수가 없어서 돌아섰다. 책상에 놓인


호텔 편지지가 들어왔다. 한 가지 계획이 떠올라 나는 천천히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편지봉투가 있었다. 다행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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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엄마한테 편지를 쓰면 전해줄 수 있겠어요? 집에나 갖다놔


달라는 뜻이에요."

내가 얼굴을 돌리지 않은채 목소리를 침착하게 유지하며 물었다.

"물론이지."

앨리스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내가 감정에 복받쳐 있다는 걸 느끼는


듯 했다. 어서 감정을 더 잘 단속해야 했다.

나는 다시 침실로 돌아가 편지를 쓰기 위해 작은 침대 머리맡 탁자 옆에


쭈그려 앉았다.

우선 '에드워드'라고 적었다. 손이 떨려 글씨를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랑해. 그리고 너무 미안해. 그자가 우리 엄마를 데리고 있어서 이럴 수


밖에 없었어. 일이 잘 안 될지도 모른다는 거 알아. 정말, 정말 미안해.
앨리스와 재스퍼한테 화내지 말아줘. 내가 두 사람을 따돌린다면 그건
기적일 거야. 나 대신 고맙다고 전해줘, 특히 앨리스한테.
그리고 제발, 부디 그자를 뒤쫓지 말아줘. 내 생각에는 그게 그자가
원하는 일같거든. 나 때문에 누군가 다치는 건, 특히 네가 다치는건 견딜
수 없어. 제발 부탁이야. 이게 지금 내가 너한테 바라는 유일한 부탁이야.
날 위해 꼭 그렇게 해 줄래?
사랑해, 용서해 줘.
- 벨라 -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봉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편지를 받게 될 것이다. 그가 내 심정을 이해하고 이번 한 번만이라도
내말대로 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곧이어 나는 조심스럽게, 내 마음도 단단히 봉했다


22. 숨바꼭질

끔찍한 공포감과 절망, 참담한 심정을 추스르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앨리스가 있는 곳으로 나가니 재스퍼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앨리스가 사태를 짐작할까 봐 겁이 나 한방에 있기가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같은 이유로 떨어져 있기도 겁이 났다.

워낙 머릿속이 복잡했던 데다 불안하고 초조했으므로 이제 더 놀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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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없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두 손으로 탁자 모서리를 붙잡고 몸을


수그린 앨리스를 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앨리스."

내가 불러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앨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앨리스의 동공은 정신이 혼미한 사람처럼 텅 비어 있었다.
퍼뜩 나는 엄마 생각이 났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걸까?

나는 다급히 앨리스 곁으로 달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앨리스!"

재스퍼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그는 어느새 앨리스를 등 뒤에서 안고


탁자를 움켜쥐고 있는 손을 풀었다. 방 건너편에서 그제야 찰칵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 왜 그래?"

재스퍼가 물었다. 앨리스는 나한테서 얼굴을 돌리고 그의 가슴에 기대며


속삭였다.

"벨라."

"나 여기 있어요."

내가 대꾸했다.

앨리스가 고개를 돌려 내 눈을 응시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아득했다. 그제야 나는 앨리스가 나한테 말을 건 것이 아니라 재스퍼의
질문에 대답한 것임을 깨닫았다.

"뭐가 보였어요?"

내가 물었다. 단조롭고 무심한 내 목소리에는 궁금함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재스퍼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앨리스와 내 얼굴을 빠르게 번갈아 보는 그 눈 안에 혼란이 담겨
있었다. 나 또한 앨리스가 예견한 게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평온한
분위기가 나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내 감정을 절제하고 제어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앨리스도 곧 침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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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야. 정말이야. 또 전에 봤던 그 방이었어."

마침내 입을 연 앨리스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침착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이윽고 앨리스가 평온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침 먹을래?"

"아뇨. 공항에서 먹을게요."

나 또한 아주 침착했다. 나는 샤워를 하려고 욕실로 갔다. 재스퍼의


놀라운 능력을 잠시 빌리기라도 한 듯, 나는 잘 감추고 있기는 하지만 어서
나를 방에서 내보내고 재스퍼와 단둘이 있고 싶어하는 앨리스의 절박한
심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야 뭔가 잘못되어 그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것임을 재스퍼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담담하게 준비를 했다. 머리는 길게


늘어뜨려 얼굴이 가려지도록 내버려두었다. 재스퍼가 불러온 평온한
분위기는 생각을 또렷하게 가다듬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계획을 세우기에도
좋았다. 나는 가방을 뒤져 돈이 든 양말을 찾아냈고, 돈을 몽땅 주머니에
넣어다.

한시라도 빨리 공항으로 가고 싶었기 때문에 7 시쯤 호텔을 나설 때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어두운 자동차 뒷자석에 나 혼자
앉았다. 앨리스는 문 쪽에 바짝 기대 앉아 얼굴은 재스퍼를 향해 있었지만
몇 초마다 한 번씩 선글라스 뒤로 내 쪽을 흘끔거렸다.

"앨리스?"

내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앨리스가 예견했다는 장면 말이에요."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몹시 지루한 것처럼 말했다.

"에드워드 말로는 확실하지 않다던데...... 바뀌기도 한다면서요?"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


사실을 재스퍼도 눈치 챘는지, 새로이 차분한 분위기가 파도처럼 차 안을
감돌았다.

"맞아, 바뀌기도 하지. 비교적 좀더 확실한 것도 있어. 날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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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경우는 더 어렵지. 나는 사람들이 처해 있는 상황의 흐름만을 볼


뿐이야. 사람들이 마음을 바꿔 먹거나 새로운 결심을 하면, 그게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미래는 전체적으로 바뀌니까."

나는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임스가 이리로 오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피닉스에 있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거로군요."

"그래."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앨리스가 대꾸했다.

마찬가지로 내가 거울 방에서 제임스를 만나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내가 그와 거울 방에 함께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리라. 나는
그밖에 앨리스가 또 무엇을 봤을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 공포심
때문에 재스퍼가 더 의구심을 품는 건 바라지 않았으니. 어쨌든 그들은
앨리스의 예견 때문에 나를 배로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하려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었다.

우리는 공항에 도착했다. 내가 운이 좋은 건지, 우연의 일치인지


에드워드가 탄 비행기는 가장 큰 4 번 청사로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곳은
대부분의 비행기가 착륙하는 터미널이라 특별히 놀라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가장 넓고 복잡한 터미널이라는 점이 나에게 유리했다. 그곳 삼층에
있는 출입구 하나가 내게는 유일한 기회가 될 듯 했다.

우리는 거대한 주차장 사층에 차를 세웠다. 두 사람보다 지리에 익숙한


내가 앞장을 섰다. 우리는 탑승객이 나오는 삼층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앨리스와 재스퍼는 피닉스를 떠나는 비행편이 적힌
안내판을 오래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뉴욕과 애틀랜타, 시카고 등지에
대해 좋고 나쁜 점들을 늘어놓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내가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물론 내가 가볼 일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초조해진 나는 끊임없이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기회를 기다렸다.


우리는 금속 탐지기 옆에 길게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재스퍼와
앨리스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체했지만 실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의자에서 앉는 자세를 조금만 바꿔도 두 사람의 시선이 재빨리 나를
흘끔거렸다. 가망이 없어 보였다. 달아나야 할까? 공공장소인데 물리적인
힘을 써서 막으려 할까? 그럴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날 따라올까?

나는 주머니에서 아무것도 쓰지 않은 봉투를 꺼내 앨리스의 검정색


가죽가방 위에 올려놓았다. 앨리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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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예요."

내가 말하자,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 집어넣었다. 머지않아


에드워드가 읽어보겠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에드워드가 도착할 시간도 점점 가까워졌다.


놀랍게도 내 몸의 모든 세포가 그를 보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힘겨웠다. 난 어느새 좀더 있어야 할 핑계를 궁리하며, 먼저 그를 만난
다음에 달아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 전에
달아날 기회를 잡는다면 에드워드를 만날 길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앨리스는 몇 번이나 아침을 먹으러 가자고 권했다. 나는 아직은 싫으니


나중에 가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정시에 도착하는 여러 비행편을 알리는
전광판을 응시했다. 시애틀발 비행편도 조금씩 위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달아날 시간이 겨우 30 분밖에 남지 않았을 무렵, 숫자가 바뀌었다.


에드워드가 탄 비행기는 10 분 일찍 도착할 예정이었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이제 아침을 먹어야 겠어요."

내가 재빨리 말했다. 앨리스가 일어났다.

"내가 같이 갈게."

"재스퍼가 대신 가면 안 될까요? 지금 기분이 좀......"

나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말로 하지 않아도 사나운 내 눈빛이 의미를


전하고 있었을 것이다.

재스퍼가 일어났다. 앨리스는 곤혹스러운 눈빛을 했지만 다행히 수상쩍게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예견이 달라진 것은 내가 배신해서가 아니라
추적자가 작전을 바꾸었기 때문이라 여기는 듯 했다.

재스퍼는 나를 이끌듯 내 등에 한 손을 올리고 아무 말 없이 옆에서


걸어갔다. 나는 처음 나나탄 공항 간이음식점 몇 군데를 들어가고 싶지
않은척 지나치면서, 머릿속으로는 정말로 찾고 싶은 것을 샅샅이 찾고
있었다. 앨리스의 예리한 시선에서 벗어나 모퉁이를 돌자마자 바로,
그것이 나나탔다. 3 층 여자 화장실.

"잠깐 기다려줄래요? 금방 다녀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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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앞을 지나며 재스퍼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릴게."

그가 말했다.

화장실 문이 내 등 뒤에서 닫히자마자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예전에 이


화장실에 출입구가 둘이라서 길을 잃었던 게 생각났다.

반대편 문 밖은 바로 엘리베이터 부근이었고, 재스퍼가 약속대로


제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그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을 거다. 나는
뛰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유일한 기회였으므로 재스퍼가 나를 봤다
해도 계속 달아나야 했다.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퉁이에 있는 하행 엘리베이터가 떠나기 직전이었으므로, 나는 재빨리
달려가 닫히려는 문에 손을 넣어 다시 열고 뛰어들었다. 짜증스러워하는
승객들을 비집고 들어가 엘리베이터 1 층 버튼이 눌려 있는지 확인했다.
이미 불이 들어와 있었고, 이어 문이 닫혔다.

내가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을 헤집고 먼저 뛰어내리가 뒤에서


볼멘소리가 웅서웅성 들려왔다. 탑승객의 짐이 실려 나오는 화물
컨베이어를 지키는 공항 보안요원 옆을 지날 때만 속도를 늦추고, 출구가
눈에 띄자 다시 달렸다. 재스퍼가 벌써 나를 찾고 있는지 어쩐지 알 도리는
없었다. 그가 내 체취를 따라오고 있다면 여유는 몇 초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너무 천천히 열리는 자동 유리문을 거의 걷어차듯 빠져나갔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택시 정류장에는 대기중인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앨리스와 재스퍼는 이제 내가 사라진 걸
깨닫았거나, 혹은 이미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나를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 였다.

몇 미터 뒤에 서 있던 하얏트 호텔 셔틀버스가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내가 운전기사에게 손을 흔들고 달려가며 소리쳤다.

"이건 하얏트 호텔 셔틀버스인데."

운전기사가 문을 다시 열며 의아한 듯 말했다.

"저도 거기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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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급히 계단을 올랐다.

운전기사는 짐 하나 없는 내 차림새를 곁눈으로 흘끔 바라보았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더 캐묻지 않았다.

버스 좌석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나는 최대한 다른 승객들과 멀리 떨어져


앉아 차창 밖으로 인도와 공항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 자취를
놓치고 길 끝에 망연히 서 있는 에드워드의 모습을 상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은 울 수 없다고 자신을 달랬다.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내 행운은 계속 이어졌다. 하얏트 호텔 입구에 당도하자 지친 표정의


노부부가 택시 트렁크에서 마지막 여행가방을 꺼내고 있었다. 나는
셔틀버스에서 뛰어내려 택시 뒷좌석으로 뛰어들었다. 노부부와 셔틀버스
운전기사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놀란 택시 운전기사에게 엄마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거긴 스콧츠데일이잖아."

운전기사가 불평을 했다. 나는 얼른 20 달러 지폐 넉 장을 건넸다.

"이거면 충분할까요?"

"물론이지, 알았다."

나는 무릎에 손을 올려놓고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낯익은 도시 풍경이 스쳐


지나기 시작했지만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나는 자제력을 유지하느라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금 무너지면 안 된다고, 이제부터 내 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굳이 공포와 불안감에
시달릴 이유가 없었다. 내 길은 정해졌다. 이제는 그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초조감에 휩싸이는 대신, 집까지 20 분쯤 걸리는 거리를


달리는 동안 눈을 감고 에드워드를 생각했다.

공항에서 에드워드를 만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까치발을 드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우리를 갈라놓은 수많은
인파를 뚫고, 그는 얼마나 빠르고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올까. 그럼 나는 늘
그렇듯 조바심 할 테고. 마지막 몇 걸음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가,
대리석 같은 그의 품에 뛰어들면서 겨우 안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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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디로 갔을지도 궁금했다. 그가 낮 동안에도 외출할 수 있도록


북쪽 어딘가로 갔을 것이다. 아니면 태양 아래서도 우리끼리만 누워 있을
수 있도록 아주 외딴 곳으로 갔을지도 모르고. 나는 그가 반짝이는 바다
물결 같은 살갗을 빛내며 해변에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숨어 있어야 할지는 상관없었다. 작은 호텔방에 갇혀 지낸다
해도 그와 함께 있으면 천국일 테니. 아직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나는 잠도 자지 않을 거야. 절대로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영원히 그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이미 그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고, 목소리도 거의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자 온갖 공포와 절망 속에서도 너무나 행복했다. 현실에서 도피해
백일몽에 심취한 나는 시간 감각도 모두 잊고 말았다.

"주소가 몇 번지라고 했지?"

운전기사의 질문에 내 상상은 깨졌고, 색색깔의 영롱한 환영은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황량하고 힘겨운 공포만이 텅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5821 번지요."

목이 졸린 듯 목소리가 이상했다.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 신경이


쓰이는지 운전기사가 나를 바라보았다.

"자, 다 왔다."

그는 내가 거스름돈을 달라지 않기를 바라는 듯, 얼른 내리라는 투였다.

"고맙습니다."

나는 속삭이듯 대꾸했다. 겁낼 필요는 없다고 나는 자신을 다그쳤다. 집은


비어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엄마가 겁에 질려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현관으로 달려가 반사적으로 처마 밑에서 열쇠를 꺼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 안이 어둡고 텅 빈 것이 평소와 똑같았다. 나는 부엌 전등을
켜고 전화기 앞으로 달려갔다. 전화기 옆 화이트보드에 열개의 숫자가 작고
정갈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전화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마구 떨려 몇
번이나 번호가 어긋났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번에는 숫자 버튼에만 집중하여 조심스레 차례로 번호를 눌렀다.
성공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귀에 댔다. 신호는 단 한번만 울렸다.

"안녕, 벨라. 아주 빠르구나. 감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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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엄마는 무사한가요?"

"당연히 무사하지. 네 엄마한테는 아무 불만 없으니 걱정 마라, 벨라. 물론


너 혼자가 아니라면 상황은 달라지겠지."

"나 혼자예요."

살아오면서 이토록 나 혼자임을 절실히 느껴본 적은 없었다.

"아주 좋아. 너희 집에서 대각선으로 길모퉁이에 있는 발레 교습소 알지?"

"네. 찾아가는 길도 알아요."

"그럼 곧 거기서 만나자."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문 밖으로 달려나가 찌는 듯한 열기 속으로


나섰다.

집을 돌아볼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아늑한 보금자리의 의미 대신


지금처럼 텅 빈 공포의 상징이 되고 만 우리 집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낯익은 우리 집 방들을 마지막으로 걸어다닌 사람은 나의 적이었으니.

내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커다란 유칼립투스 나무 그늘에 엄마가 서 있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우편함 주변의 꽃밭, 거기서 꽃을
키우려 했었는데 결국 모두 죽이고 말았었다. 그 꽃밭에서 엄마가 무릎을
꿇고 일하는 모습도 눈에 선했다. 추억은 앞으로 내가 보게 될 그 어떤
현실보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도망치듯
길모퉁이로 달려갔다.

젖은 모래 위를 달려가는 것처럼 속도가 너무도 느리게 느껴졌다.


콘크리트가 내 발을 빨당당기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발부리에 걸려
비틀거리다가 한 번은 완전히 넘어져 보도블록에 손이 까졌지만 다시 몸을
일으켜 앞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모퉁이가 눈앞에 보였다. 다른 도로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나는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며 달려갔다. 피부에
와 닿는 뜨거운 햇볕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하얀 콘크리트에
반사되었다. 위험에 완전히 노출된 기분이었다. 이런 마음이 들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나는 포크스의 아늑한 초록색 숲과 집을 갈망하고 있었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 캑터스 가로 접어들자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발레 교습소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 앞 주차장은 텅 비었고,
창문에는 수직 블라인드가 빈틈없이 드리워져 있었다. 더 달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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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숨을 쉴 수도 없었다. 피로와 공포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엄마 생각에 매달려 가까스로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수 있었다.

건물에 다가가자, 유리문 안쪽으로 표지판이 보였다. 표지판에는


진분홍색 종이에 손글씨로 봄방학 동안 교습소가 문을 닫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열려 있었다.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어두운 로비는 서늘했고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다. 플라스틱 의자들이


벽을 따라 놓여 있고, 카펫에서는 샴푸 냄새 같은 게 났다. 대기실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서쪽 연습실은 어두웠다. 규모가 더 큰 동쪽
연습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쳐져, 안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강한 공포감이 온몸을 사로잡아 나는 거의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그 때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라? 벨라?"

전과 똑같이 공포에 질린 목소리였다. 나는 엄마 목소리를 쫓아 문으로


달려갔다.

"벨라, 너 때문에 놀랐잖아!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라!"

천장이 높은 기다란 방으로 내가 달려 들어가는 사이에도 엄마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찾느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뒤를 돌아본다.

엄마가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안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 머리를 헝클고


있었다. 내가 열두 살 되던 추수감사절이었다. 우리는 외할머니를 만나러
캘리포니아에 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바로 일 년 전 이었다. 이날은
해변에 놀러 갔는데, 내가 부두 난간에 너무 위험하게 매달렸었다. 엄마는
난간 사이로 발이 빠지는 바람에 삐끗했다가 다시 균형을 잡는 내 모습을
보았다. "벨라? 벨라?" 엄마가 겁에 질려 내 이름을 불렀다.

이내 텔레비전 화면이 파랗게 변했다.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뒷문 옆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손에 들린 리모컨이 보였다. 우리는 한참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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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응시했고, 이윽고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천천히 나를 행해 다가오더니 바로 내 앞을 지나쳐 비디오 옆에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나는 조심스레 돌아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속인 건 밍란하다, 하지만 뭐, 네 어머니가 진짜로 얽히는 것 보다야 훨씬


낫지 않니?"

그의 목소리는 은근하고 다정했다.

그제야 퍼뜩 깨닫았다. 엄마는 무사하다. 엄마는 아직 플로리다에 있다.


내 메시지를 받은 게 아니었다. 엄마는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남자의
끔찍이도 창백한 얼굴과 검붉은 눈동자 때문에 공포에 떤 적도 없다.
엄마는 지금, 무사한 것이다.

"그래."

내가 안심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한테 속았다는 게 화나지 않는 모양이군."

"맞아."

갑자기 용기가 샘솟았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어차피 곧


끝날 텐데. 찰리와 엄마가 다치는 일도, 공포를 겪을 일도 없다는게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거의 들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마음
한구석의 분석적인 성향이, 내가 스트레스 때문에 이성을 잃기 직전임을
위험스레 경고했다.

"이상하기도 하지. 진심으로 하는 말 같군."

그의 검은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나를 살폈다. 그의 눈동자는 거의


검은색이었고 가장자리에만 붉은 기운이 조금 남아 있었다. 심한 갈증을
의미했다.

"너희 인간들이 꽤 흥미로울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 너와 어울리던 그


이상한 가족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구나. 관찰하는 재미가 만만치
않겠어. 몇몇 인간들이 이기심을 완전히 버릴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 그래."

그는 팔짱을 낀 채 나와 겨우 두세 발자국 거리에 서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나 자세에서는 악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얼굴이며 몸이며 특별히 기억할 만한 개성이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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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평범한 외모였다. 나에게도 익숙해진 하얀 피부와 가장자리만 색이


다른 눈동자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는 하늘색 긴 소개 셔츠에 물 빠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네 남자친구가 네 복수를 해줄 거라고 말하고 싶겠지?"

남자는 자기가 그걸 몹시 바란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그렇지 않을 거야. 적어도 나는 그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으니까."

"그 녀석은 뭐라고 대답했나?"

"나도 몰라. 편지를 남겼거든."

얌전한 사냥꾼과 대화를 나누는 건 이상하리만치 쉬웠다.

"마지막 편지라, 참 낭만적이기도 하군. 어때, 네 생각엔 그 친구가 부탁을


들어줄 것 같은가?"

예의바른 그의 말투에 점점 냉소가 깃들면서 목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

"흐음. 그럼 우린 서로 다른 걸 바라는군. 이거 생각보다 너무 쉽고


간단하잖아. 솔직히 좀 실망했어. 훨씬 더 근사한 게임을 기대했다고,
어차피 나한테 필요한 건 약간의 행운뿐이었지만."

나는 말없이 기다렸다.

"빅토리아가 네 아버지를 못 잡았다기에 네 뒷조사를 좀더 부탁했지.


내가 고른 장소에서 편안하게 기다리면 되는데 뭐 하러 온 세상을 다니며
널 뒤쫓겠어? 그래서 빅토리아와 얘기를 나눠본 뒤에, 네 어머니를 만나러
피닉스에 와야겠다고 결심했지. 네가 집에 가겠다고 얘기하는 걸 이미
들었으니까 말이야. 처음엔 정말로 집에 갈 작정이라곤 상상도 못했지.
하지만 문득 의구심이 들더군. 인간은 원래 아주 예측하기 쉬운
동물이거든. 어디든 익숙하고 안전한 곳을 좋아하지. 그렇게 생각하니
네가 절대로 숨어 있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에 숨는 것도 나름대로
계략이다 싶더군. 물론 느낌이 그랬을 뿐, 확신은 없었어. 난 원래 사냥을
할 때 먹이에 대한 본능에 의존하지, 육감이라고 할까. 네 어머니 집에
가서 메시지를 들었을때도, 네가 어디에서 전화를 걸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어. 물론 전화번호가 아주 유용하긴 했지만, 남극에서 전화를
걸었을지도 모르는 상황 아니겠어. 내 작전은 네가 가까운 곳에 있지 않는
한 먹힐 수가 없었거든. 그러던 차에 네 남자친구가 피니긋행 비행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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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더구나. 물론 빅토리아가 나대신 놈들을 감시하고 있었지. 이렇게


선수들이 많은 게임에선 나라도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드니까. 결국 내가
바라던 대로 저들이 네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걸 가르쳐준 셈이지. 난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어. 이미 너희 집에 있는 비디오 테이프를 모두
감상하고 난 뒤였거든. 적당히 속여 넘길 수만 있으면 나머지는 술술
풀리겠더군. 너무 쉬워서 내 기준으론 게임으로 칠 수도 없을 정도야.
그러니까, 네 남자친구가 복수를 하지 않을 거라는 네 말이 절대로
틀리기를 바라고 있는 거야. 이름이 에드워드라고 했던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용기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의 흡족함도


막바지에 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그의 목표는 내가 아니었다.
나같이 나약한 인간을 쓰러뜨리는 건 그에게 아무런 승리의 쾌감도 주지
못할테니.

"그럼, 내가 너의 에드워드에게 작은 정성을 담은 편지를 남겨 둬도


될까?"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오디오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소형


디지털 비디오카메라의 버튼을 눌렀다. 작고 빨간 불빛이 켜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녹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몇 번 스위치를 작동해 초점을
맞췄다. 나는 겁에 질려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미안하지만 네 남자친구는 이걸 보고 나면 나를 잡겠다는 욕망을


억누르지 못할 거다. 때문에 난 놈에게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고
보여주고 싶거든. 물론 이 모든 건 그놈을 위한 거다. 넌 재수 없게 엉뚱한
장소에서 엉뚱한 사람들과 엮이는 바람에 덩달아 피해를 보게 된 어리석은
인간일 뿐이야."

그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시작하기 전에......"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욕지기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이건 내가 예상한


결말이 아니다.

"짚고 넘어갈 이야기가 하나 더 있어. 어차피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는데, 혹시나 에드워드가 그걸 알아차리고 내 재미를 망칠까봐 은근히
걱정이었지. 아주 오래전에 그런 일이 한 번 있었거든. 노리고 있던 먹이가
나를 피해 달아난 적이 딱 한 번 있었단 말이지. 예전에 어리석게도 너 같은
먹이를 너무 좋아하게 되는 바람에, 나약한 네 남자친구는 절대로 하지
못할 선택을 했던 뱀파이어가 있었다. 내가 노리고 있다는걸 알아차린 그
뱀파이어는, 자기가 일하는 정신병원에서 몰래 그 애를 빼돌렸었다. 난 너
같은 인간들에게 그렇게도 집착하는 몇몇 뱀파이어의 심정을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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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가 없어. 어쨌든 그자는 여자애를 빼돌리자마자 '안전하게'


만들었지. 가엾은 그 계집애는 거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더군. 지하감옥
같은 어두운 골방에서 너무 오래 갇혀 있었던 탓이지. 몇백 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그 계집애는, 미래를 내다본다는 이유로 마녀의 낙인이 찍힌 채
화형을 당했을 거야. 그나마 1920 년대니까 정신병원에서 전기충격 치료를
받았던 거지. 새로이 젊은 몸으로 눈을 뜬 그 앤 난생처음 태양을 보는 양
새로운 세상을 만끽할 수 있었어. 늙은 뱀파이어가 그 계집애를 강한
뱀파이어로 다시 태어나게 했으니, 이젠 내가 탐을 낼 이유도 없어졌지.
그래서 난 복수심에 불타 그 늙은이를 없애버렸다."

제임스가 한숨을 쉬었다.

"앨리스."

나는 너무 놀라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래, 바로 네 친구. 초원에서 그 애를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그러니 그


여자애 가족도 이번 경험에서 뭔가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순 있을 거다. 난
너를 손에 넣었지만, 그들은 그앨 데리고 있으니 말이야. 감히 내 손을
빠져나간 유일한 먹이를 데리고 있으니 영광으로 알아야겠지. 그 애가
얼마나 맛있는 냄새를 풍겼던지 아무도 모를 거다. 그때 맛을 보지 못한 게
아직도 후회스러울 지경이야...... 그 앤 너보다도 더 근사한 냄새를
풍겼거든. 미안하구나, 널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다. 네 냄새도 꽤 좋아.
꽃향기 같은 게 나지......"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와 내 코앞에 섰다. 그러곤 내 머리칼을 한 줌 들어


은근히 냄새를 맡았다. 머리칼을 제자리에 돌려놓자마자, 목덜미에 차가운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나를 보며 엄지손가락으로
내 뺨을 재빨리 어루만졌다. 나는 죽도록 도망치고 싶었지만 완전히
얼어붙어 어디 한 군데 움찔할 수도 없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그는 손을 내리며 중얼거리다 한숨을 쉬었다.

"자, 이젠 일을 시작해야겠다. 그래야 네 친구들한테 전화를 걸어서 너를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지 알려주고, 또 내 메시지도 전할 수 있으니까."

이제 나는 정말로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고통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그의 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게임에 이겨 나를 먹이로 삼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도 이제 알 수 있었다. 내가 바라마지 않던 빠른
결말은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 무릎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러다
쓰러질까 봐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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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박물관에서 조각품을 감상하듯 느긋하게 내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어디부터 시작할지 고민하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다정하고 상냥하게만 보였다.

이윽고 그가 몸을 수그려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유쾌한 듯 미소를 짓던


얼굴은 천천히 돌변했고, 뾰족한 송곳니가 무시무시하게 드러났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탈출을 시도했다.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다리도 부들부들 떨렸지만 공포가 극에 달한 순간 나는 비상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내 앞을 가로막았다. 동작이 너무 빨라 나는 그가


손을 사용했는지 발을 사용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가슴이 찢기는 듯한
충격과 함께 내 몸이 뒤로 날아가 머리부터 거울에 부딪혔다. 깨진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내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너무 놀라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그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아주 훌륭한 특수효과군."

깨진 유리조각을 내려다보며 그가 또다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찍는 영화에서 이 방이, 시각적으로 극적인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널 만날 장소로 굳이 이곳을 선택한 거란다.
어때, 완벽하지 않니?"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엉금엉금 기어 문으로 향했다.

그는 단숨에 나를 덮쳤고, 발로 내 다리를 짓밟았다.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뼈가 뚝 부러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통증이
밀려들었으므로 고통슬너 비명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다리에 손을
뻗으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 나를 밟고 서 있었다.

"네 마지막 부탁,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그러니?"

그가 상냥한 말투로 물었다. 그가 발끝으로 부러진 내 다리를 툭툭


건드리자 어디선가 소름끼치는 비명이 들려왔다. 믿을 수 없게도 그건 내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구해달라고 에드워드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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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안 돼, 에드워드. 그러면......"

그 순간 뭔가 내 얼굴을 강타해, 나는 다시 깨진 거울을 향해 날아갔다.

다리의 고통 외에도 유리에 부딪힌 머리 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내 놀라운 속도로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셔츠를 적시며 흘러내린 피가 나무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릿한 냄새에 속이 뒤집혔다.

구역질과 현기증 속에서도 나는 마지막 실낱 같은 희망을 보았다.


이전까지는 강렬한 증오로만 이글거리던 그의 눈동자가, 이제는 억제할 수
없는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 내가 입은 하얀 셔츠를 온통 선홍색으로
물들이고 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가 그의 갈증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원래
목표가 무엇이었든 그는 이 순간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때문에 의식이 점점 가물거리는 와중에, 내가


바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빨리 끝나게 해 달라는 것뿐이었다. 눈이 스르르
감기고 있었다.

깊은 물속에서 들려오는 듯, 사냥꾼의 마지막 표효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길고 긴 터널처럼 느껴지는 희미한 눈꺼풀 사이로 그의 검은 형체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온 힘을 그러모아 본능적으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는 마침내 나는, 눈을 감고 의식을 잃었다.

23. 천사

의식을 잃은 사이 나는 꿈을 꾸었다.

검은 물속을 떠다니며 소름이 끼치면서도 동시에 가슴을 들뜨게 하는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내 마음이 불러낸 환청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더
깊고 거칠어 섬뜩한 분노가 느껴지는 또 다른 으르렁거림이었다.

나는 얼굴을 가렸던 손에서 느껴지는 예리한 통증 때문에 곧 다시


수면으로 끌어올려졌지만, 도저히 눈을 다시 뜰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죽었다고 생각했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물속에서 내가


바라는 천국, 단 하나뿐인 그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천사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안 돼. 벨라,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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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목소리 뒤편으로 또 다른 소리들이 들려왔다.


듣기만 해도 섬뜩해지는 끔찍한 소음이었다. 무시무시한 으르렁거림과
뭔가 부러지는 충격적인 소리, 새된 비명, 뭔가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

나는 천사의 목소리에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벨라, 제발! 벨라, 내 말 들어. 부탁이야, 벨라!"

그가 애원했다.

나도 말을 하고 싶었다. 무슨 말이든 좋았다. 하지만 입술을 찾을 수가


없었다.

"칼라일!"

천사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벨라, 벨라. 안 돼. 제발 이러지 마, 안 돼!"

천사가 눈물 없는 흐느낌을 토해냈다.

천사는 울면 안 돼. 그건 안 되는 일이야. 나는 그에게 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물이 너무 깊고 묵직하게 나를 누르고 있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누군가 머리 어딘가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팠다. 곧이어


어둠을 뚫고 또 다른 통증이 강렬하게 밀려왔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검은
물을 헤쳐 나가려고 몸부림을 쳤다.

"벨라!"

천사가 소리쳤다.

"출혈이 심하긴 하지만, 머리 상처는 깊지 않다. 다리를 조심해라,


부러졌어."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사의 입에서 억눌린 분노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옆구리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여기가 천국일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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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라기엔 아픈 데가 너무 많아.

"늑골도 몇 개 부러진 것 같구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예리한 통증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통증이


시작되었다. 내 손의 살갗을 꼬챙이로 벗겨내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다른
모든 통증을 잊게 했다.

누군가 내 손에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에드워드."

나는 그에게 말을 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나 자신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벨라, 괜찮아질 거야. 내 말 들려, 벨라? 사랑해."

"에드워드."

내가 다시 애를 썼다. 목소리가 조금 또렷해진 것도 같았다.

"그래, 나 여기 있어."

"아파."

내가 칭얼거렸다.

"알아, 베라. 나도 알아."

이어 그가 다른 사람에게 안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좀 해볼 수 없어요?"

"내 가방 좀 이리 다오...... 앨리스, 숨을 쉬지 않으면 도움이 될 거야."

칼라일의 목소리였다.

"앨리스?"

내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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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어. 애리스가 이곳을 찾아냈어."

"손이 아파."

"알아, 벨라. 칼라일이 뭔가 조치를 취해 줄 거야. 그럼 안 아플 거야."

"내 손이 타고 있어!"

마침내 어둠을 뚫고 나온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뭔가 어둡고


따뜻한 구름 같은 것이 내 눈을 막아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왜 누구든
내 손에 붙은 불을 꺼주지 않는 걸까?

"벨라?"

그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불이야! 누가 불 좀 꺼줘!"

내가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고함쳤다.

"칼라일! 손 좀 봐 주세요."

"놈한테 물렸구나."

겁에 질린 듯, 칼라일의 목소리도 이제 침착성을 잃었다.

에드워드가 공포에 질려 숨을 멈추는 헉 소리가 들렸다.

"에드워드, 네가 해야 할 일이야."

앨리스의 목소리가 내 머리 가까이에서 들렸다. 서늘한 손가락이 내 눈을


덮은 축축한 뭔가를 쓸어 넘겼다.

"안 돼!"

에드워드가 외쳤다.

"앨리스."

내가 중얼거렸다.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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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일이 말했다.

"뭐라고요?"

에드워드가 되물었다.

"혹시 독을 빨아낼 수 있는지 해 봐라. 상처는 꽤 깨끗한 편이야."

칼라일의 목소리와 함께 머리에 좀더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고, 뭔가


두피를 찔렀다가 다시 당기는 느낌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고통은 손에
불이 붙은 듯한 통증에 묻혀버렸다.

"효과가 있을까요?"

앨리스가 몹시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겠다. 하지만 서둘러야 해."

"카라일, 저는......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에드워드가 머뭇거렸다.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에서 다시 고뇌가 느껴졌다.

"어느 쪽이든 네가 결정해라, 에드워드. 나도 도울 수가 없는 일이란다.


네가 벨라 손에서 피를 빨아낼 생각이라면 나도 여기쯤에서 지혈을 해야
한다."

나는 고문과도 같은 통증에 몸을 비틀었고, 움직임 때문에 다리의 통증도


더욱 심해졌다.

"에드워드!"

내가 소리쳤다. 어느새 내 눈은 다시 감겨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찾아보려는 절실한 욕구만으로 눈을 떴다. 그가 보였다. 마침내 고뇌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에드워드의 잘생긴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앨리스, 벨라 다리에 댈 만한 걸 찾아오너라!"

칼라일이 몸을 수그리고 내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에드워드!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때를 놓칠 거다."

에드워드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갈팡질팡하던 그의 눈에 갑자기


단호한 결심이 서리는 것이 보였다. 그의 턱이 굳어졌다. 불타는 듯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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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쥐는 그의 서늘한 손가락이 느껴졌다. 이내 그가 고개를 숙였고, 그의


차가운 입술이 내 살갗에 닿았다.

처음에는 고통이 더 심해졌을 뿐이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빼내려고 몸부림을 쳤다. 나를 진정시키려 애쓰는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 묵직한 것이 내 다리를 바닥으로 잡아끌었고, 칼라일이
든든한 팔로 내 머리를 안아주었다.

그러자 서서히 손의 통증이 무뎌지면서 내 몸부림도 잦아들었다. 불타는


느낌이 점점 줄어들어 작은 점으로 모이는 것 같았다. 통증이 잦아들면서
의식도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또다시 검은 물속에 빠져들어,
캄캄한 어둠 속에 그를 잃을까 두려웠다.

"에드워드."

말을 하려고 애썼지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내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바로 옆에 있어, 벨라."

"에드워드, 아무 데도 가지 마......"

"안 갈게."

그의 목소리는 긴장했지만, 어딘가 승리감에 들뜬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제야 만족해 한숨을 쉬었다. 불길은 사라졌고, 졸음이 온몸으로


밀려들면서 다른 통증들도 둔해졌다.

"다 빼냈니?"

칼라일이 아득히 먼 곳에서 물었다.

"피 맛이 깨끗해요. 모르핀 맛도 느껴졌어요."

에드워드가 나직이 말했다.

"벨라?"

칼라일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대답을 하려고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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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불타는 느낌은 없어졌니?"

"네."

내가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 에드워드."

"사랑해."

"알아."

지독한 피로감을 느끼며 내가 속삭이듯 말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감이 느껴지는


에드워드의 낮은 웃음소리였다.

"벨라."

칼라일이 다시 불렀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고만 싶었다.

"왜요?"

"네 어머니는 어디 계시니?"

"플로리다에요."

내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속았어, 에드워드. 그자는...... 비디오를 본 거였어."

분노가 치밀었지만 목소리가 너무 약해 느낌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자


문득 한가지가 떠올랐다.

"앨리스."

나는 눈을 뜨려고 몹시 애를 썼다.

"앨리스, 비디오에...... 그자가 앨리스를 알아요. 앨리스가 어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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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는지 그자는 알고 있었어요."

나는 긴박하게 말할 작정이었지만 목소리가 희미했다.

"석유 냄새가 나."

몽롱한 가운데세도 깜짝 놀라며 내가 덧붙였다.

"이젠 벨라를 옮겨야겠다."

칼라일이 말했다.

"싫어요. 전, 자고 싶은 걸요."

내가 불평했다.

"넌 자도 돼. 내가 안고 갈 거야."

에드워드가 나를 달랬다.

그의 품에 안겨 가슴에 얼굴을 묻자, 모든 통증이 사라지며 허공에 둥둥


뜬 느낌이었다.

"지금은 푹 자, 벨라."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24. 막다른 골목

눈부신 하얀 조명등. 그 아래서 눈을 떴다. 나는 낯선 하얀 방에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벽에는 세로로 긴 블라인드가 걸려 있고, 머리 바로 위에서
내리쬐는 불빛에 눈이 멀 것 같았다. 바닥이 딱딱하고 울퉁불퉁하고 난간이
있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베개는 평평하고 딱딱했다.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신경에 거슬리는 삑삑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의미이기를 바랐다. 죽었다면 이렇게 불편할 리 없을 것 같으니까.

내 두 손에는 투명한 튜브가 연결되어 있었고, 얼굴에도 뭔가가 테이프로


고정되어 코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테이프를 떼버리려고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면 안 돼."

서늘한 손가락이 내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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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고개를 살짝 돌리니, 턱을 베개 끝에 대고 있는 그의 잘생긴 얼굴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살아 있음을 다시 실감하며, 이번에는 감사와 흥분을
느꼈다.

"에드워드, 정말 미안해!"

"쉿. 이제 다 괜찮아졌으니까 됐어."

"어떻게 된 거야?"

기억이 뚜렷하지 않았다.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머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너무 늦을 뻔했어. 조금 더 일찍 가지 못해 미안해."

그가 자책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어리석었어, 에드워드. 난 정말 그자가 엄마를 잡고 있는 줄


알았어."

"우리 모두가 속은 거야."

"찰리하고 엄마한테 전화해야 해."

"앨리스가 전화 드렸어. 르네는 여기, 병원에 와 계시고. 지금은 뭘 좀


드시러 가신 거야."

"엄마가 여기 있다고?"

나는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현기증이 더 심해져 에드워드가 나를 베개


위로 살며시 눕혔다.

"곧 돌아오실 거야. 그리고 넌 가만히 안정을 취해야 해."

"엄마한테 뭐라고 말했어?"

나는 겁에 질렸다. 지금은 안정을 취할 때가 아니었다. 엄마가 여기 와


있는데, 나는 뱀파이어의 공격을 받고 겨우 회복되는 중이라고?

"우리 엄마한테는? 내가 왜 여기 있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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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이층 계단에서 넘어져 창문으로 떨어진 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거 너도 인정해야 할걸."

나는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불 아래로 내 몸을


내려다보니, 불룩하게 산처럼 솟아 있는 내 다리가 보였다.

"나 얼마나 심하게 다쳤어?"

"한쪽 다리랑 갈비뼈 네 대가 부러졌고, 두개골엔 금이 가고, 온몸엔 멍이


든 데다 출혈도 심했어. 수혈도 여러 번 했지. 그래서 한동안 너한테 전혀
다른 냄새가 나서 난 싫었어."

"너한테도 색다른 변화였으니 좋았겠네."

"아니, 난 원래 그대로의 네 체취가 좋아."

"어떻게 한 거야?"

내가 조용히 물었다. 그는 내 질문의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

"나도 모르겠어."

그는 내 눈길을 피한 채, 모니터에 연결된 전선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붕대가 감긴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나는 참을성 있게 나머지 이야기를 기다렸다.

에드워드는 계속해서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한숨을 쉬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걸 막는 건...... 불가능해. 불가능한 일인데, 내가 해냈네."

마침내 그가 눈길을 들어 나를 보며 살며시 웃었다.

"내가 정말로 너를 사랑하나 봐."

"냄새만큼 맛은 좋지 않았어?"

나도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얼굴이 아팠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았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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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장난스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사과 받을 게 어디 한두 가지라야 말이지."

"내가 뭘 사과해야 하는데?"

"널 영원히 잃어버릴 뻔하게 만들었으니까."

"미안해."

내가 다시 사과했다.

"네가 왜 그랬는지는 알아. 그래도 그건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이었지.


먼저 날 기다렸다가 얘기부터 해줘야 했던 거 아닐까."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그랬으면 넌 날 안 보내줬을 거야."

"그래. 안 보냈겠지."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몹시 불쾌한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부르르 몸을 떨다 움찔


몸을 움츠렸다. 에드워드가 곧바로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벨라, 왜 그래?"

"제임스는 어떻게 됐어?"

"내가 놈을 너한테서 끌어낸 다음에 에밋과 재스퍼가 처리했어."

그의 목소리에서는 씻을 수 없는 회한이 느껴졌다. 그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에밋하고 재스퍼는 거기서 못 봤는데."

"피가 너무 많아서...... 두 사람은 다른 곳에 있어야 했거든."

"하지만 넌 곁에 있었잖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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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랑 칼라일도......"

내가 경이로움을 느끼며 말했다.

"그들도 너를 사랑하니까."

마지막으로 앨리스를 봤을 때의 고통스런 영상이 섬광처럼 스치며 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앨리스가 테이프 봤어?"

내가 걱정스레 물었다.

"응."

새삼 증오에 불타는 듯, 그의 목소리가 한층 어두워졌다.

"앨리스는 언제나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에 기억을 못하는 거였어."

"알아. 이젠 본인도 알게 됐지."

에드워드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표정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나는 멀쩡한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려 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맥주사 튜브 때문이었다.

"윽."

내가 움찔했다.

"왜 그래?"

그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노여움이 다 가신 얼굴은 아니었다. 그의


눈빛에는 아직도 냉혹한 분노가 남아 있었다.

"바늘 싫은데."

손에서 눈을 돌리며 내가 말했다. 나는 늑골에 통증을 느끼면서도


비뚤어진 천장 타일에 정신을 집중하고 심호흡을 했다.

"바늘이 무섭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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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널 죽을 때까지 고문하려고 달려드는 악마 같은 뱀파이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러 달려가면서, 정맥주사 바늘에 덜덜 떨다니....."

나는 시선을 딴데로 돌렸다. 그나마 에드워드가 더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나는 화제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넌 왜 여기 와 있는 거야?"

그는 처음에는 혼란스러운 듯 하다가 마음이 상한 듯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내가 가면 좋겠어?"

"아니!"

생각만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으므로 나는 펄쩍 뛰었다.

"내 말은 네가 여기 있는 이유를 우리 엄마가 어떻게 알고 계시느냔


뜻이야. 엄마가 돌아오시기 전에 서로 얘기를 맞춰놔야 할 거 아냐?"

"아."

접혔던 그의 이마가 다시 대리석처럼 매끄럽게 펴졌다.

"나는 너를 설득해서 포크스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려고 피닉스에 왔어."

그의 커다란 눈동자가 어찌나 진지하고 호소력 있는지 나도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넌 나와 만나기로 했고,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까지 차를 몰고 왔어. 물론


보호자로 칼라일과 앨리스가 함께 온 거지. 그런데 네가 그만 내 방으로
올라오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진 거야...... 나머지는 너도 알겠지.
어쨌든 너는 자세한 사항은 기억할 필요 없어. 그런 부분까지 기억 못하는
게 당연할 만큼 많이 다친 걸 핑계 삼으면 돼."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얘기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어. 가령 호텔에 깨진 창문이 없다든지


하는 거."

"그렇지 않아. 앨리스가 그럴듯한 증거를 남기는 데 너무 재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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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였거든. 모든 일이 아주 자연스럽게 처리됐어. 원한다면 넌 아마 호텔을


고소할 수도 있을걸.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이제 네가 신경 쓸 일은 어서
낫는 것 뿐이야."

그가 내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나는 온몸이 결리는 데다 진통제 때문에 몽롱한 상태여서 그의 손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심장 모니터의 신호음이
미친 듯이 빨라져, 내 심장의 부실한 움직임을 만천하에 알리고 있었다.

"민망해 죽겠군."

내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자, 그는 킥킥 웃으면서도 뭔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흠, 갑자기 궁금해지는 걸......"

에드워드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닿기도 전에 모니터의


신호음이 몹시 빨라졌다. 그러나 그의 입술이 가볍게 포개진 순간 신호음이
아예 정지했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가 퍼뜩 고개를 들자 다행히 모니터가 내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음을 알렸다.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해야겠군."

에드워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난 아직 키스 안 끝났어. 설마 나더러 그쪽으로 오라는 얘긴 아니겠지."

내가 투덜거렸다.

그는 씩 웃으며 다시 나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모니터가 또다시


요란하게 울려댔다.

그러나 이내 그의 입술이 굳어지더니 뒤로 물러났다.

"네 엄마가 오시는 소리가 들려."

그가 다시 씩 웃으며 말했다.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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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이며 내가 소리쳤다. 그를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또다시 내 눈앞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그는 내 눈빛에 떠오른
두려움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안 갈게. 난 낮잠이나 잘 생각이야."

그는 진지하게 약속한 뒤 이내 웃어주었다.

그는 내 침대 옆에 놓인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발치에


있던 터키석 색깔의 인조가죽 안락으자에 앉아 완전히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는 이내 그림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숨쉬는거 잊지 마."

내가 장난스레 속삭였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했다.

나도 엄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구에겐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간호사인 것 같았다. 엄마 목소리는 지치고 걱정에 가득 찬 것처럼
들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달려가 엄마를 진정시키고, 아무 일
없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벌떡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엄마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엄마!"

나는 사랑과 안도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마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에드워드를 흘끔 본 뒤 발꿈치를 들고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저 앤 한 순간도 병실을 안 떠나는구나."

엄마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엄마, 너무 반가워!"

엄마가 몸을 수그려 나를 가볍게 안아주자, 뜨거운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니?"

"미안해, 엄마. 하지만 이젠 다 괜찮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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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네가 깨어난 걸 보니 정말 기쁘다."

엄마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문득 내가 아직도 날짜를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닫았다.

"내가 며칠이나 정신이 없었던 거야?"

"오늘 금요일이야. 꽤 오래 의식이 없었던 거지."

"금요일?"

충격적이었다. 그날이 언제였나 기억하려 했지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친 데가 워낙 많아서 진정제를 많이 투여했다더라."

"나도 알아."

온몸으로 상처가 느껴졌다.

"컬렌 박사님이 거기 있었으니 다행이었지. 정말 좋은 분이시더라......


그런데 너무 젊어. 의사라기보다는 모델처럼 보이던데."

"엄마도 칼라일을 만났어?"

"에드워드의 누나 앨리스도 만났는 걸. 참 사랑스런 아가씨더라."

"맞아."

내가 진심으로 맞장구를 쳤다.

엄마가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에드워드를 돌아보았다.

"포크스에서 저렇게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는 얘기는 나한테 안 했잖아."

나는 움찔하며 신음 소리를 냈다.

"어디가 아프니?"

엄마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에드워드가 눈을 번쩍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걸 잊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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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심시키자, 에드워드가 다시 자는 체 했다.

엄마가 솔직하지 했던 나를 더 추궁하기 전에 나는 잠시 이야기가 끊어진


틈을 이용해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필은 지금 어디 있어?"

"플로리다에 있어. 아, 참 벨라! 넌 짐작도 못할 거야! 우리가 막 떠나려던


찰나에 최고의 소식이 날아들었지 뭐니!"

"필이 구단이랑 계약했구나!"

"맞아, 어떻게 알았니! 선즈랑 계약을 했단다, 믿어지니?"

"잘됐다, 엄마."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있는 대로 열렬하게 반응을 보였다.

"너도 잭슨빌이 마음에 들 거야."

엄마는 내가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필이 애크론 얘기를 꺼냈을 땐 나도 좀 걱정을 했었어. 거긴 눈이 많이


온다는데, 내가 얼마나 추위를 싫어하는지 너도 잘 알잖니. 하지만
잭슨빌이라니! 거긴 늘 날씨도 좋고 직접 가보니 습기도 그렇게 심하지
않더라. 우리가 거기서 아주 귀여운 집을 발견했단다. 노란색에
하얀색으로 테두리가 장식된 집인데, 옛날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테라스도
있고 커다란 떡갈나무도 있어. 게다가 집에서 몇 분만 가면 바로 바다가
나온단다. 너 혼자 쓸 수 있는 욕실도 따로 있고......"

"엄마, 잠깐만!"

내가 엄마의 말문을 막았다. 에드워드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을


잔다고 하기에는 너무 긴장된 모습이었다.

"그게 다 무슨 얘기야? 난 플로리다에 안 갈 거야. 난 포크스에 살잖아."

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 너도 이제 거기서 안 살아도 돼. 필도 이젠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거든...... 우리 둘이 상의해 봤는데, 원정경기 때 절반은 필이
양보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엄마가 절반은 너랑 지내고, 절반은 필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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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내는 거지."

나는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머뭇거렸다.

"엄마, 난 '정말로' 포크스에서 살고 싶어. 학교에도 벌써 적응했고,


여자친구들도 생겼는걸."

내가 친구 얘기를 꺼내자 엄마가 대번에 에드워드를 돌아보았으므로,


나는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려고 애를 썼다.

"찰리한테도 내가 꼭 필요해요. 엄마, 찰리는 늘 외톨이로 지내는데다,


요리는 아예 할 줄도 몰라."

"포크스에서 살고 싶다고? 네가?"

엄마는 대단히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엄마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인 듯했다. 엄마의 시선이 다시 에드워드에게 향했다.

"이유가 뭐니?"

"말했잖아. 학교도 그렇고 찰리 문제도 있고...... 아야!"

몸상태를 잊고 어깨를 으쓱했던 나는 곧장 후회를 했다.

엄마가 안전하게 딸을 토닥여줄 데를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유일하게


붕대를 감지 않은 이마를 어루만져주었다.

"벨라, 넌 포크스를 싫어하잖니."

"지내 보니 그렇게 나쁘지 않아."

엄마는 인상을 찌푸리다,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에드워드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 애 때문이지?"

엄마가 속삭여 물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내 얼굴을


찬찬히 살피는 엄마의 눈빛을 보니 내 마음을 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분적으론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에드워드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까지 굳이 고백할 필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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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을 것이다.

"엄마도 에드워드랑 얘기해 봤어요?"

"그래."

엄마는 꼼짝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서 너랑 할 얘기가 있어."

어, 이런.

"무슨 얘기?"

"저 앤 너한테 푹 빠져 있는 것 같더라."

엄마가 목소리를 낮추며 나를 나무라듯 말했다.

"그런 것 같아."

"그런데 넌 저 애를 어떻게 생각하니?"

엄마는 호기심을 제대로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쉬었다. 엄마를 몹시 사랑하긴 하지만, 이건


엄마와 주고받고 싶은 얘기가 아니었다.

"나도 에드워드한테 완전히 빠져 있어요."

말해놓고 보니 십대 딸이 엄마한테 첫 남자친구에 대해 이야기할 법한


반응 같았다.

"내가 보기에도 착한 것 같고, 엄청나게 잘생기긴 했지만, 넌 너무


어리잖니......"

엄마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여덟 살 이후 처음으로


엄마가 부모로서 권위 비슷한 것을 내세우려 하고 있었다. 함께 남자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면 합리적이면서도 단호하게 의견을 피력했던
엄마의 말투가 느껴졌다.

"나도 알아, 엄마. 그건 걱정하지 마. 그냥 한때 느끼는 감정일 뿐이야."

내가 엄마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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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엄마가 쉽사리 마음을 풀고 웃어주었다.

이어 엄마는 한숨을 쉬며 미안한 듯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돌아보았다.

"가봐야 해?"

내 물음에 엄마가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있다가 필이 전화하기로 했어. 네가 깨어날 줄 몰라서 그만......"

"걱정하지 마, 엄마. 나 혼자도 아닌데 뭐."

나는 혹시 엄마가 마음을 상할까 봐. 속으로 느끼는 안도감을 조금


누그러뜨려 표현했다.

"곧 올게. 나도 줄곧 여기에서 잤단다."

엄마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엄마, 안 그래도 돼! 집에 가서 주무세요. 어차피 난 알지도 못할 거


아냐."

분명 며칠 동안 잠을 잤을 텐데도 진통제 효과 때문인지 여전히 대화에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조바심이 나서 그럴 수가 있어야지. 게다가 이웃에 범죄 사건도 있고


해서 집에 혼자 있기가 싫어."

"범죄라니?"

내가 놀라서 물었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길모퉁이에 있는 발레 교습소. 거기에 누가
침입해서 불을 질렀지 뭐니. 아무것도 남아나질 않았어! 건물 앞에선 도난
차량이 발견됐단다. 너도 발레 배우러 다녔던 곳인데, 기억 나니?"

"기억 나요."

내가 움찔 몸서리를 치며 대꾸했다.

"네가 가지 말라면 그냥 여기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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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엄마. 괜찮아. 에드워드가 같이 있을 거야."

엄마는 그 때문에 더 가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밤에 다시 올게."

엄마가 에드워드를 다시 한 번 흘끔 바라보며 그 말을 해서인지,


약속이라기보다는 경고처럼 들렸다.

"사랑해, 엄마."

"나도 사랑한다, 벨라. 앞으론 걸어다닐 때 좀더 조심해 줄래? 엄만 널


잃고 싶지 않아."

에드워드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씩 웃었다.

간호사가 부산하게 방으로 들어와 내 튜브와 전선들을 확인했다. 엄마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붕대가 감겨 있는 손을 토닥여주고 나서 병실을
나섰다.

"불안한 일이 있나요? 심박수가 좀 높네요."

"전 괜찮아요."

나는 간호사를 안심시켰다.

"깨어났다고 담당 간호사 선생님한테 말씀드릴게요. 곧 와서 봐주실


거예요."

보조인 듯한 간호사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에드워드가 내 옆에 서


있었다.

"자동차를 훔쳤어?"

내가 눈썹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그는 반성하는 기색 없이 미소를 지었다.

"아주 빠르고 좋은 차였어."

"낮잠은 어땠어?"

"재미있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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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좀 놀랐어. 플로리다...... 네 어머니가...... 네가 원하는 게 그거라고


생각했거든."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플로리다에 가면 넌 언제나 집 안에만 갇혀 지내야 하잖아. 진짜


뱀파이어처럼 밤에만 나와서 돌아다닐 수 있을 테고."

그는 미소를 지을 듯 했지만 결국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난 아마 포크스에 있을 거야, 벨라. 거기가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곳이면


괜찮겠지. 어디가 됐든 널 더는 해칠 수 없는 곳에 가 있을 거야."

그의 설명이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사이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무시무시한 퍼즐처럼 내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나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신호음 소리도, 호흡이
가빠지는 소리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늑골 안에서 예리하게 번지는
가슴의 쓰라림만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러진 뼈와는 아무 상관 없는,


그러나 훨씬 더 강렬한 고통이 나를 잡아먹을 듯 위협하는 모습을 조심스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어 다른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간호사가 노련하게 내 표정을 살핀


뒤 모니터를 확인하는 동안 에드워드는 돌처럼 앉아 있었다.

"진통제를 더 맞을 시간이 된 것 같죠?"

정맥주사에 연결된 모니터를 톡톡 치며 간호사가 친절하게 말했다.

"아뇨, 아니에요.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나는 고통스럽다는 느낌을 전하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자제하며


중얼거렸다. 지금 잠들 수는 없었다.

"용감한 척할 필요 없어요. 지금은 스트레스를 너무 받지 않는 게 좋아요.


쉬는 게 제일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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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는 그렇게 말하며 기다렸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준비되면 호출 버튼을 누르세요."

간호사가 한숨을 쉬고 에드워드를 한번 엄하게 바라본 뒤, 기계를


걱정스레 흘끔거리며 병실을 나갔다.

에드워드의 서늘한 손길이 얼굴에 닿았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쉿, 벨라. 진정해."

"날 떠나지 마."

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했다.

"알았으니까 이젠 진정해. 그래야 다시 간호사를 불러서 진정제를


놔달라고 하지."

하지만 내 심장은 느려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벨라. 난 아무 데도 안 가. 네가 원하는 한 여기 있을 거야."

에드워드가 내 얼굴을 걱정스레 쓰다듬었다.

"날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해?"

나는 헐떡이는 호흡을 진정하려고 노력하며 속삭였다. 부러진 늑골이


욱신거렸다.

에드워드는 내 얼굴을 감싸 쥐고 자기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는 몹시 진지했다.

"맹세할게."

그의 숨소리를 들으니 진정이 되었다. 힘겹던 호흡도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는 내 몸이 서서히 긴장을 풀고 심장박동 신호음이 정상 속도로
돌아갈 때까지 내게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오늘 그의 눈빛은 검정색에
가까울 만큼 진했다.

"좀 낫니?"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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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저으며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과잉 반응'이라는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왜 그런 말을 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구해주는 데 이젠 지친 거야?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속삭였다.

"물론 그렇지 않아. 난 너 없이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 벨라,


이성적으로 생각해. 널 구하는 일도 전혀 문제가 안 돼. 하지만 널 위험에
빠뜨리는 건 언제나 나야. 네가 여기 누워 있는 이유도 바로 나
때문이잖아."

"그래, 너 때문이야. 내가 여기 '살아 있는' 이유 말이야."

"온몸에 붕대를 감고 깁스까지 하고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그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죽을 뻔했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난 다른 경험들을


생각했어. 너도 잘 알잖아. 네가 아니었다면, 난 벌써 포크스 공동묘지에서
썩어가고 있을 거야."

나는 점점 짜증을 느끼며 말했다. 그는 내 말에 움찔하는 것 같았지만


죄책감에 사로잡힌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최악의 상황이 아니었어. 바닥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네 모습을 보고 고통에 찬 네 비명을 듣는 순간,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했을 때의 그 견디기 힘든 기억은 영원히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가장 괴로웠던 순간은...... 그걸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였지. 그러다 내가 직접 널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아니었잖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어. 그것도 아주 쉽게."

진정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에드워드가 자꾸 날 떠나야 하는 이유를


대고 있는 것 때문에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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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해 줘."

내가 속삭였다.

"뭘?"

"너도 알잖아."

이젠 나도 화가 났다. 그는 고집스레 부정적인 면만 부각시키고 있었다.


에드워드도 내 말투의 변화를 알아차린 듯 눈빛이 조심스러워졌다.

"나도 널 멀리할 만큼 강하진 않은 것 같고, 너도 목숨이......


위험하든말든 너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란 건 알지."

"좋아."

하지만 에드워드가 약속을 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놓치지 않았다.


두려움을 애써 진정시키고 나니, 화를 낼 기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멈췄는지는 얘기를 들었으니...... 이젠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이유라니?"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왜 막았는지 말이야. 왜 그냥 독이 퍼지게 두지 않았지? 그랬으면 지금쯤


나도 너처럼 되어 있을 텐데."

에드워드의 눈빛이 완연한 검정색으로 돌변하는 걸 보면서, 나는 그가


철저하게 숨기려 했던 사실이 바로 그것임을 깨닫았다. 앨리스는 그녀
자신에 대해 알게 된 사실들에 온통 몰두해 있었거나, 아니면 좀더
에드워드를 염두에 두고 생각했어야 했다. 앨리스가 뱀파이어로 변신하는
과정에 대해 나에게 자세히 알려줬다는 것을 그는 전혀 모르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는 몹시 놀라면서 격분했다. 그의 콧구멍이 넓어지면서
입매가 돌로 깎은 것처럼 굳어졌다. 그가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내가 누굴 사위어본 경험이 없다는 건 일단 인정할게. 하지만 논리적으로


남녀가 동등한 입장이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한쪽은 늘 기절해
쓰러지고 다른 쪽은 늘 구해주는 식은 곤란하잖아. 서로 '동등하게' 구해줄
수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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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했다.

그는 침대에 팔을 걸치고 엎드려 턱을 팔에 올려놓았다. 화가


가라앉았는지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확실히 나한테 화를 내는 건
아니었다. 나는 에드워드가 앨리스한테 비난을 쏟아붓기 전에 먼저 귀띔을
해줄 기회가 있기를 속으로 바랐다.

"너도 날 구했어."

그가 나직이 말했다.

"언제나 내가 루이스 레인이 될 순 없어. 난 슈퍼맨도 되고 싶단 말이야."

"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는 베개 끝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안다고 생각하는데."

"벨라, 넌 몰라. 난 거의 90 년 가까이 고민했지만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아."

"칼라일이 너를 구하지 않았다면 좋겠어?"

"아니, 그건 아니야. 하지만 그때 내 생명은 끝장나 있었어. 아무것도


포기할 것이 없었다고."

"네가 바로 내 생명이야. 내가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유일한 게 바로


너란 말이야."

나는 점점 과감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얼마나 그를 원하는지


인정하는 게 쉬웠다.

하지만 그는 몹시 침착했고, 결심이 단호했다.

"난 못해, 벨라. 난 너한테 그럴 수 없어."

"왜 못해? 너무 어렵다는 말은 하지 마! 오늘이 지나고 나면, 아니


며칠전에 그 일을 겪은 뒤로는 나도 두려울 게 없어."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그 고통은 어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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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나는 혈관에 불이 붙는 것


같던...... 그 끔찍하도록 선명한 기억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건 내 문제야. 내가 감당할 수 있어."

"용기도 도를 지나치면 광기가 되는 거야."

"그건 이 문제와 상관 없는 얘기야. 겨우 사흘이라며? 별것 아니야."

에드워드는 나에게 숨기고 싶은 사실들을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데


놀란 듯 또 한 번 움찔했다. 나는 그가 화를 억누르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걸 지켜보았다.

"찰리는? 르네는?"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몇 분 동안 침묵이 흐른 뒤 내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입을


벌렸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말없이
기다리던 그는, 내가 제대로 대답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승리의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상관없는 문제야."

마침내 내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내가 거짓말을 할 때처럼


자신이 없었다.

"엄마는 언제나 자신을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했으니까 나도 그러길 바랄


거야. 그리고 찰리는 씩씩하니까 혼자 지내는 데 곧 익숙해질 거야. 어차피
내가 두 분을 영원히 돌볼 순 없어. 나도 내 인생이 있으니까."

"맞는 말이야. 그러니까 난 네 인생을 끝내지 않을 거야."

"내가 숨을 거둘 날을 기다릴 거라면, 나도 해줄 말이 있어! 난 바로 얼마


전에 죽을 뻔 했어!"

"지금 회복되고 있잖아."

나는 스스로 진정하려고 심호흡을 했다. 옆구리가 아팠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고, 그도 지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협상해 볼 여지라곤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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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천천히 말했다.

에드워드가 이마를 찡그렸다.

"물론 넌 회복될 거야. 한두 군데 흉터가 생길지는 몰라도......"

"그런 얘기가 아니야. 난 죽을 거야."

"벨라, 넌 며칠 지나면 퇴원 할 수 있어. 길어야 2 주야."

이제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지금 당장 죽지 않을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죽을 거야. 매일 매 순간


나는 죽음에 가까워질 거야. 그러면서 '늙어' 가겠지."

마침내 내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그는 눈을 감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원래 그런 거야. 인간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라고. 내가 없었다면 넌


그렇게 평범하게 살았겠지. 나는, 존재하지 말았어야 해!"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가 놀라서 눈을 떴다.

"바보 같은 생각이야. 누군가 복권에 당첨되고 나서 돈을 찾은 다음에, '안


되겠다, 옛날로 되돌아가야겠어. 그때가 더 좋았어.'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뭐야. 난 그러기 싫어."

"난 복권 당첨금이 아니야."

"맞아. 넌 그보다 훨씬 대단하니까."

에드워드가 어이없는 듯 입을 다물었다.

"벨라, 더 얘기하지 말자. 너랑 밤새도록 쓸데없는 이야기 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 그만 둬."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넌 날 잘 모르고 있다는 뜻이야. 내가 아는


뱀파이어는 너만이 아니거든."

그의 눈빛이 다시 검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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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는 감히 그런 짓 못할 거야."

순간적으로 그의 표정이 너무도 무섭게 보여서 나도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를 거역할 만큼 용감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앨리스는 이미 그걸 예견했잖아, 안 그래? 그래서 앨리스 말에 네가 자꾸


발끈하는 걸 테고. 앨리스는 내가 언젠가...... 너처럼 된다는 걸 알고
있어."

"앨리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네가 죽는 장면을 보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어."

"내가 몰래 앨리스랑 일을 꾸며도 넌 절대 모를걸."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다. 윙윙거리는 기계음과,


삑삑거리는 소리, 약물 떨어지는 소리, 벽에 걸린 큰 시계의 초침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에드워드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럼 우리 이제 어쩌지?"

내가 물었다. 에드워드는 전혀 웃음기 없이 공허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건 걸 '막다른 골목' 이라고 하는 거겠지."

"어휴."

내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기분은 좀 어때?"

그가 간호사 호출 버튼을 보며 물었다.

"괜찮아."

내가 거짓말을 했다.

"못 믿겠는데."

"잠들기 싫어."

"넌 쉬어야 해. 이런 말다툼은 너한테 좋지 않아."

"그러니까 항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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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가상하다."

그가 호출 버튼으로 손을 뻗었다.

"안 돼!"

그는 내 말을 무시했다.

"네?"

벽에 붙은 스피커가 울렸다.

"진통제 더 맞을 준비 됐습니다."

그는 화난 내 표정을 무시하며 침착하게 말했다.

"담당 간호사 보내드릴게요."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대단히 따분했다,

"난 거부할 거야."

내가 말했다. 그는 내 침대 옆에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봉지들을 올려다


보았다.

"간호사가 약을 알약으로 갖다 줄 것 같진 않은데."

내 심박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내 눈빛을 보며


자포자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벨라, 지금 너 아프잖아. 쉬어야 낫는단 말이야. 왜 이렇게 힘들게 구니?


너한테 다시 주사바늘을 꽂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난 바늘이 두려운 게 아니야. 눈 감는 게 두려운 거지."

내가 중얼거리자 그가 싱긋 웃으며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가 아무 데도 안 갈 거라고 했잖아. 겁내지 마. 널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한 언제까지나 난 여기 있을 테니."

얼굴이 당겨 아팠지만 나도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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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 곁에 영원히 있겠다는 말인데."

"네가 먼저 지겨워할걸. 어차피 한때 지나가는 감정이라며."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자 현기증이 났다.

"아까 엄마가 그 말을 믿었을 때도 충격이었어. 너는 좀 나을 줄 알았더니


실망이야."

"인간이라 좋은 게 바로 그 점이지. 모든게 변한다는 거."

내가 눈을 가늘 게 떴다.

"잘난 척 하지마."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들어왔을 때 에드워드는 소리 내 웃고 있었다.

"잠깐 비켜주세요."

간호사가 에드워드한테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얼른 일어나 작은 병실 끝으로 가 벽에 기대어 섰다. 그는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아직도 염려스러워 나는 계속해서 그를 지켜보았다.
에드워드는 침착하게 내 시선을 받았다.

"약이 들어가니까 이젠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간호사가 튜브에 주사를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약효는 빨랐다. 이내 나른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가는 게 느껴졌다.

"편히 쉬어요."

내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오자 간호사가 중얼거렸다.

어느새 간호사가 병실을 나갔는지 차가운 뭔가가 내 뺨을 어루만졌다.

"가지 마."

웅얼거리듯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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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아까 말했듯이 너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한...... 너를 위해


최선이라고 생각할 때까지 곁에 있을게."

그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감미로웠다.

나는 머리를 흔들려고 했지만 너무 무거워서 되지 않았다.

"그건 다른 얘긴데."

내가 중얼거리자 그가 웃는 소리를 냈다.

"지금은 그런 걸로 걱정하지 마. 잠이 깬 다음에 다시 얘기하면 되잖아."

"알았어."

그의 입술이 귓가에 닿는 게 느껴졌다.

"사랑해."

그가 속삭였다.

"나도."

"알아."

그가 나직이 웃었다.

내가 뭔가를 찾듯......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그의 입술이 살며시 내 입술에 내려앉았다.

"고마워."

내가 한숨을 쉬었다.

"고맙긴."

난 이제 더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른함 속에서도 몽롱한


기운과 싸웠다. 그에게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에드워드?"

나는 그의 이름을 똑바로 발음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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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난 앨리스를 더 믿어."

내가 중얼거렸다.

곧이어 밤이 나를 삼켰다.
에필로그 : 특별한 날

에드워드는 하늘거리는 실크와 시폰 옷자락은 물론이고, 정성들여 손질한


내 머리에 방금 그가 꽂아준 꽃이며, 볼썽사나운 다리 깁스까지 몹시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루며 나를 차에 태웠다. 그는 내가 골이 나 입을
삐죽거리는 걸 못 본 체했다. 나를 무사히 조수석에 태운 그는 운전석에
앉아 길고 좁은 진입로를 후진해서 빠져나갔다.

"이게 다 무슨 꿍꿍인지 대체 언제쯤 얘기해 줄 거야?"

내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깜짝쇼는 정말로 질색이었다. 그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아직도 눈치를 못 챘다는 게 나한텐 더 충격적인데."

에드워드가 나를 흘끔 돌아보며 놀리는 듯이 웃자 나는 흠칫 숨이 멎었다.


난 대체 언제쯤이 되어야 그의 완벽한 외모에 익숙해질까?

"어쨌든 너 오늘 되게 근사하단 말 내가 했던가?"

내가 확인하듯 물었다.

"응."

그가 다시 한 번 싱긋 웃었다. 에드워드가 검은색 옷을 입은 걸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어 그의 아름다움은 거의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돋보였다. 그가 턱시도를 입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더
초조하기는 했지만, 그가 멋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초조한 건 내가 입고 있는 드레스와 신발 때문이기도 했다. 그나마


한쪽발은 아직 깁스를 풀지 않아서 성한 발에만 신발을 신었다. 하지만
새틴 리본으로 발목에 고정된 뾰족 구두를 한쪽만 신고 절뚝거리며
다니려면 분명 문제가 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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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앨리스가 날 실험용 바비인형처럼 다룰 생각이라면 다시는


너희 집에 안 갈 거야."

내가 불만을 토로해냈다. 나는 거의 온종일 엄청나게 넓은 앨리스의


욕실에서 무기력한 포로처럼 잡혀 있어야 했다. 내가 몸을 뒤채며 불평을
할때마다, 앨리스는 자기는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이 전혀 없다면서 간접
경험으로라도 재미를 느껴보려는 참이니 방해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더니 포크스보다는 패션쇼에나 어울릴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드레스를 입혀놓았다. 진한 파란색에 프릴이 많이 달리고 어깨가 드러난 그
드레스에는 내가 읽을 수도 없는 프랑스어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대체
우리 둘 다 이렇게 정장을 차려입고 어딜 가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 하지만 나는 이런 의구심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들려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에드워드가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발신번호를 확인한 다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찰리."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찰리?"

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찰리는..... 내가 포크스로 돌아온 뒤로 유독 고약하게 굴었다. 내가 겪은


사고에 대한 그의 반응은 정확하게 두 가지로 갈라졌다. 그는 칼라일에게
거의 숭배에 가까울 정도의 고마움을 표시했다. 반면에 모든 잘못은
에드워드한테 있다는 것이 그의 고집스러운 결론이었다. 에드워드가
아니었다면 애당초 내가 집을 떠나지도 않았을 거라는 얘기였다.
에드워드는 반박하기는커녕 찰리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래서 요즘 우리
집에는 전에 없던 규칙들이 생겨났다. 귀가시간이 정해졌고, 에드워드의
방문시간도 엄격히 통제됐다.

찰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에드워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농담이시겠죠!"

에드워드가 소리 내어 웃었다.

"뭔데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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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물었다. 그는 내 말을 무시했다.

"제가 얘기할 테니 바꿔주세요."

에드워드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한 뒤 잠시 기다렸다.

"여보세요. 타일러, 나 에드워드 컬렌이야."

그의 목소리는 얼핏 대단히 다정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 바탕에 은근한


위협이 깔려 있다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타일러가 우리 집엔 웬일일까?
나는 끔찍한 진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앨리스가 억지로 입힌
말도 안 되는 드레스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서로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벨라는 오늘 시간


없어."

에드워드의 말투가 갑자기 변해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렸다.

"솔직히 말할게. 벨라는 앞으로도 나 이외의 사람한테는 전혀 시간을 낼


수 없어.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라. 오늘 네 헛수고에 대해서는 정말
유감이라고 생각하니까."

전혀 안타까워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곧이어 폴더형 휴대전화를 접어


전화를 끊어버린 그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화가 나 얼굴과 목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분하다 못해 눈물까지


맺히는게 느껴졌다. 에드워드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마지막 말은 좀 심했나? 널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날 '학교 댄스파티'에 데려가는 거였군!"

내가 고함을 질렀다.

이제는 당황스러울 만큼 모든 게 명확했다. 내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학교 건물마다 붙어 있는 포스터에 적힌 날짜를 알아차렸을
텐데. 하지만 나는 에드워드가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 아무것도
몰랐단 말인가?

그는 예기치 못한 내 반응에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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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겨보았다.

"까다롭게 굴지 마, 벨라."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우리는 벌써 학교에 절반이나 다 와 있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 물음에 에드워드는 자기 턱시도를 가리켰다.

"솔직히 말해 봐. 넌 우리가 뭘 할 거라고 생각한 거지?"

나는 말문이 막혔다. 우선 나는 너무 뚜렷한 걸 놓치고 있었다. 게다가


앨리스가 온종일 나를 미인대회의 여왕처럼 꾸미는 사이 품었던 막연한
의구심, 아니 실은 기대감 때문에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반쯤은 두려움에
휩싸여 품고 있던 바람이, 지금 생각하니 너무도 어리석은 것 같았다.

나는 뭔가 특별한 날이 될 모양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


무도회' 라니!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노여움의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문득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스카라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꼴사납게 마스카라가
번질까 봐 얼른 눈가를 닦았다. 손에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한테는 방수 마스카라 화장이 필요하다는 걸 리스가 미리 알고 있었던 듯
했다.

"정말 못 말리겠네. 왜 우는 거야?"

어쩔 줄을 몰라하며 에드워드가 물었다.

"화가 났으니까 그렇지!"

"벨라."

그가 이글거리는 황금빛 눈동자로 나를 사로잡을 듯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벌써 마음이 흔들려 내가 중얼거렸다.

"울어도 소용없어."

그의 눈빛에 내 분노는 어느새 모두 녹아버렸다. 그가 눈빛으로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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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을 때는 그와 싸우는 게 불가능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항복을


인정했다. 나는 최대한 그를 노려보았다.

"좋아. 얌전히 따라가기는 하겠어. 하지만 두고 봐. 더 큰 악운이 나를


덮칠 테니까. 아마 난 이 성한 다리도 부러뜨릴 거야. 이 신발 좀 보란
말이야! 이건 날 죽이려는 함정이나 다름없어."

내가 증거를 보이듯 성한 다리를 내밀었다.

"흐음. 오늘 밤에 앨리스한테 고맙다는 인사 꼭 하라고 일러줘."

그는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내 다리를 바라보았다.

"앨리스도 거기 갈 거야?"

앨리스도 온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재스퍼랑 에밋...... 로잘리도 올 거야."

안도감이 일시에 사라졌다. 로잘리의 애인이자 남편인 에밋과는 나도 꽤


잘 지내고 있었지만, 로잘리와는 도무지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에밋은
인간으로서 이상야릇한 반응을 보이는 내 태도를 아주 재미있다고 여기며
나와 어울리는 걸 즐겼다. 어쩌면 내가 시시때때로 넘어지는 걸 즐기는지도
몰랐다. 로잘리는 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 행동했다. 자꾸만 염려로
치닫는 생각을 떨쳐버리려 고개를 흔들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났다.

"찰리도 이번 꿍꿍이에 가담한 거야?"

"물론이지."

에드워드는 씩 웃다가 이내 껄껄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일러는 계획에 없던 일이야."

나는 이를 갈았다. 타일러가 어떻게 그런 얼토당토않은 꿈을 꿨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찰리의 간섭도 학교까지 미칠 수는 없었으므로,
에드워드와 나는 드물게 해가 나는 날만 빼면 학교에서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우리는 학교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서 있는 로잘리의 빨간색


컨버터블 스포츠카가 눈에 띄었다. 오늘은 구름이 옅어 멀리 서쪽 하늘에서
햇살 몇 줄기가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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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차에서 내려 내가 앉은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고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내심 우쭐한 기분으로 고집스레 앉아 있었다. 주차장은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로 붐볐다. 증인들이 있으니 억지로 나를 차에서
끌어내리진 못할 것이다.

에드워드가 한숨을 쉬었다.

"누가 널 죽이려고 할 땐 사자처럼 용감해지면서, 누가 춤 얘기만 하면


움츠러드니 원......"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춤이라니.

"벨라, 어떤 것도 널 해치진 못하게 내가 지켜줄 거야. 절대로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약속해."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에드워드도 변화된


내 표정을 알아차렸다.

"자, 내리자. 그렇게 괴롭지 않을 거야."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에드워드가 몸을 숙여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나는 그의 다른 팔을 잡고 나를 번쩍 안아 내릴 수 있게 그를 도와주었다.

절룩거리며 학교 쪽으로 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나를 부축했다.

피닉스에서는 호텔 연회장을 빌려 학교 무도회를 열었다. 물론 이곳에선


체육관이 무도회장이었다. 춤을 출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은 온 도시에서
아마 체육관밖에 없을 것이다.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며 나는 깔깔
웃어댔다. 입구에는 풍선으로 만든 아치가 서 있고, 벽에는 파스텔톤
종이를 꼬아 만든 꽃장식이 여기저기 달려 있었다.

"공포영화가 시작될 것만 같아."

내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글쎄, 필요 이상으로 뱀파이어들이 많이 참석하긴 했지."

에드워드는 천천히 입장권 판매소로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그가 내


체중을 거의 다 지탱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발을 앞으로 움직이는
것만큼은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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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댄스플로어를 바라봤다. 중앙에서 춤을 추는 건 우아한 솜씨를


뽐내는 두 커플밖에 없었으므로 무대가 한산해 보였다. 다른 커플들은 감히
비교되기가 싫은지 모두 벽 쪽에서 소심하게 움직이며 그들에게 공간을
내주고 있었다. 고전적인 턱시도를 차려입은 에밋과 재스퍼는 흠 잡을 곳
하나 없이 위풍당당했다. 기하학적인 삼각형 무늬를 군데군데 뚫어놓아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과감하게 드러낸 검정색 새틴 드레스를 입은
앨리스의 모습은 눈이 부셨다. 로잘리는...... 역시 로잘리였다. 그녀의
옷맵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등이 온통 드러난 새빨간 드레스는
발목까지 온통 찰싹 달라붙어 날씬한 몸매를 드러냈고, 무릎 높이부터
뒤트임 대신 기다란 레이스 자락이 늘어져 있었으며, 앞깃은 허리까지 깊이
파여 있었다. 나를 포함해 체육관에 있는 모든 여자애들이 불쌍해졌다.

"너희가 멋모르는 마을사람들을 모두 학살할 수 있도록 내가 체육관 문을


잠글까?"

내가 음모를 꾸미듯 속삭였다.

"넌 그 계획에서 어느 쪽에 가담할 건데?"

에드워드가 나를 노려보았다.

"아, 나야 물론 뱀파이어들 편이지."

마지못해 그가 미소를 지었다.

"춤만 안 출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는 얘기네."

"뭐든 상관없어."

그는 입장권을 산 다음 댄스플로어로 나를 데리고 나갔다. 나는 그이 팔을


뿌리치고 발을 질질 끌며 혼자 걸어갔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

그가 경고하듯 말했다.

결국 그는 나를 자기 형제들이 우아하게 춤을 추고 있는 무대 중앙으로


끌어냈다. 그들의 춤 솜씨는 요즘 시대와 음악에 전혀 맞지 않는 듯 했다.
나는 공포스럽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에드워드. 난 정말로 춤 못 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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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이 말라 속삭임밖에 새어나오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갑작스레


공포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걱정하지 마, 바보. 내가 잘 추니까."

그는 내 팔을 자기 목에 두르게 한 뒤 살짝 나를 들어 자기 발 위에 올려
놓았다.

곧이어 우리도 무대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된 기분이야."

아무 힘돌 들이지 않고 몇 분쯤 왈츠를 추고 나서 내가 웃으며 말했다.

"전혀 다섯 살로 보이지 않아."

그는 내 다리가 순간적으로 바닥에서 30 센티미터쯤 떨어지도록 나를


바짝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춤을 추던 앨리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용기를 복돋아주듯 미소를


지었다. 나도 미소를 보냈다. 놀랍게도 아주 조금은 나도 춤을 즐기고
있었다.

"좋아, 생각보다 그렇게 괴롭진 않네."

내가 솔직히 인정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시선이 입구로 쏠리며 얼굴이 굳어졌다.

"왜 그래?"

둥글게 회전하느라 방향감각을 잃기는 했지만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에드워드가 화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이콥 블랙이 턱시도는 아니지만
하얀 긴 소매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평소처럼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모습으로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를 알아보고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제이콥에 대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눈에 띄게 어색해하고 불편해했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에드워드가 아주 낮게 으르렁거렸다.

"신사적으로 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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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무라자 에드워드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녀석이 너와 얘기를 하고 싶어해."

바로 그때 당혹감과 미안한 표정이 더욱 뚜렷해진 제이콥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안녕, 벨라. 여기 오면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어."

제이콥의 목소리는 그 반대를 바란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예전처럼 변함없이 따사로웠다.

"안녕, 제이콥. 웬일이야?"

나도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깐 실례해도 될까?"

제이콥이 처음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제이콥이


에드워드를 올려다보지 않아도 되는 키인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20 센티미터는 큰 것 같았다.

에드워드는 침착하고 무표정했다. 그는 나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주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마워."

제이콥이 친근하게 말했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나를 강렬한 시선으로 바라본 뒤


돌아서서 걸어갔다.

제이콥이 내 허리를 잡았고,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와, 제이콥. 이제 키가 얼마나 되는 거야?"

"185 센티미터."

그가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내 다리는 아직 움직일 현편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제대로 춤을 춘다고


할 수 없었다. 그저 발을 떼지 않은채 어색하게 좌우로 살살몸을 흔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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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뿐이었다. 그게 최선인 것도 같았다. 제이콥은 갑자기 불쑥 키가 크는


바람에 껑충한 자기 몸이 스스로도 어색한 터였고, 실은 나만큼이나 춤을
못 추는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내가 궁금증을 숨기지 않고 대뜸 물었다. 에드워드의 반응을 볼 때 나도


짐작이 갔다.

"아버지가 날 여기 보내려고 20 달러나 주셨다는 거 믿어져?"

제이콥이 부끄러운 듯 고백했다.

"응, 믿어져. 어쨌든 이왕 왔으니 맘껏 즐기면 좋겠네. 혹시 마음에 드는


여자애라도 찾았어?"

내가 놀리듯 파스텔톤의 드레스를 입고 벽에 줄지어 서 있는 여학생들을


고갯짓했다.

"응. 그런데 그 사람은 벌써 파트너가 있어."

제이콥이 한숨을 쉬었다.

호기심 어린 내 눈을 그가 빤히 바라봤으므로, 우리는 잠시 후 당황하며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오늘 정말 예쁘다."

그가 수줍은 듯 말했다.

"음, 고마워. 그나저나 빌리 아저씨가 왜 돈까지 쓰시며 널 이리로


보낸거야?"

이미 답을 알면서도 내가 재빨리 물었다.

제이콥은 화제를 바꾸는 게 탐탁치 않은 듯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시선을 외면했다.

"아버지 말이 벨라와 얘기를 나누려면 여기가 '안전한' 장소라는 거야.


노인네가 확실히 정신이 이상해질 모양이야."

내가 힘없이 그를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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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내가 아버지 말을 전하면 자동차 조립에 필요한 엔진용 실린더도


구해주시겠다고 하더군."

민망한 듯 씩 웃으며 그가 털어놓았다.

"그럼 어서 얘기해. 나도 네 자동차 조립이 끝나는 걸 바라니까."

내가 마주 웃어주었다. 적어도 제이콥은 이 모든 애기를 믿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상황이 조금 쉽게 느껴졌다. 에드워드는 벽에 기대
무표정한 얼굴로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2 학년
여학생이 조심스레 에드워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아는체도 하지
않았다.

제이콥이 부끄러운 듯 또다시 시선을 피했다.

"화내면 안 된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화를 내겠니. 빌리 아저씨한테도 화 안 낼 거야. 그냥


할 말만 어서 해."

"너무 어처구니없는 얘기라서, 미안해. 아버지는 네 남자친구랑 헤어지길


원하셔. 나한테 특별히 '부탁' 이라고 말하라고 하셨어."

그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미신에 사로잡혀 계신 거야?"

"응. 네가 피닉스에서 다쳤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어.사고라는 걸 안 믿으셨지......"

제이콥이 창피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난 넘어졌어."

"나도 알아."

"내가 다친 게 에드워드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구나."

질문이 아니라 아예 단정적으로 말하고 보니, 미리 약속했는데도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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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아직 그는 내 허리를 잡고 나도


그의 목에 팔을 둘렀지만, 이제 우리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제이콥, 빌리 아저씨는 아마 내 얘기를 들어도 안 믿으실 테니까, 너라도


똑똑히 들어둬."

내 목소리에서 새삼 진지함을 느꼈는지 제이콥이 나를 바라보았다.

"에드워드는 정말로 내 목숨을 구했어. 에드워드랑 걔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난 죽었을 거야."

"나도 알아."

그는 원래 아는 얘기처럼 대꾸했지만, 내 진지한 태도와 이야기를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어쩌면 아들 얘기를 듣고 빌리도 이 정도는
믿어줄 수 있을지 몰랐다.

"네가 이런 일까지 하게 돼서 내가 다 미안하다. 어쨌든, 필요한 부품은


갖게 됐으니 된 거지?"

"응."

제이콥이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어색하고...... 언짢은 표정이었다.

"할 말이 더 있어?"

"관두자. 내가 일자리 얻어서 저축해서 사면 돼."

그가 웅얼거렸다. 나는 그가 나를 마주 볼 때까지 빤히 바라보았다.

"어서 말해버려, 제이콥."

"너무 우수운 얘기야."

"난 괜찮아. 어서 얘기해 봐."

"좋아...... 어휴,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긴데."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버지가 전하라는 말은, 아니 '경고'하라는 말은 이거야. 그치만 여기서


'우리'는 나를 포함해서 말하는 건 아니야. 아버진 '우리가 지켜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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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겠다'고 전하라고 했어."

제이콥이 내 허리를 잡았던 손 하나를 들어 허공에 인용부호 표시를 했고,


말을 마친 뒤 조심스레 내 반응을 살폈다.

마피아 영하에 나오는 대사 같았다. 나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일에 끌어들여서 정말 미안해, 제이콥."

내가 키득거렸다.

"난 뭐 그렇게 싫지 않았어."

제이콥이 안심하는 듯 싱긋 웃었다. 그는 새삼 내 드레스를 감상하듯


재빨리 시선을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럼 이제 돌아가서 아버지한테 벨라가 상관 마시라고 했다고 전하면


되는 건가?"

"아니야. 가서 고맙다고 말씀드려. 아저씨가 좋은 의도로 그러신다는 거


나도 알아."

내가 한숨을 쉬었다.

음악이 끝났으므로 내가 팔을 풀었다.

제이콥은 내 허리를 잡은 손을 내리지 않고 머뭇거리며 깁스를 한 내


다리를 흘끔거렸다.

"한 곡 더 출까? 아니면 다른 데로 데려다 줄까?"

에드워드가 내 대신 대답했다.

"괜찮아, 제이콥. 이제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제이콥이 움찔 놀라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로 우리 곁에 서 있는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어휴, 여기 와 있는 걸 못 봤군."

그가 중얼거렸다.

"그럼 벨라, 나중에 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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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뒤로 물러나며 내키지 않는 듯 손을 흔들었다.

나는 싱긋 웃어주었다.

"그래, 나중에 보자."

"미안해."

제이콥은 다시 한 번 말한 뒤 문을 향해 돌아섰다.

다음 곡이 시작되자 에드워드가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왈츠를 추기에는


조금 빠른 곡이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기분 나아졌어?"

내가 놀리듯 물었다.

"아니, 전혀."

그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빌리한테 화내지 마. 아저씨는 그냥 찰리를 봐서 내 걱정을 하는 것


뿐이니까.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빌리한테 화난 건 아니야. 하지만 그 아들놈 때문에 짜증이 나."

에드워드가 무뚝뚝한 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몹시 진지했다.

"왜?"

"우선, 그 자식 때문에 내가 약속을 어기게 됐잖아."

무슨 말인지 몰라 내가 그를 쳐다보자 그가 얼핏 미소를 지었다.

"오늘밤엔 네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잖아."

"아, 그건 내가 용서할게."

"고마워. 하지만 다른 문제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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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마침내 그가 얼굴을 더욱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녀석이 너한테 '예쁘다'고 하더군. 지금 네 모습을 볼 때 그건 확실히


모욕이야. 몹시 아름답다는 말로도 모자라는데."

"네가 눈이 좀 삔 거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게다가 난 시력이 엄청나게 좋거든."

우리는 다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내 발을 자기 발등에


올린 채 꼭 끌어안았다.

"이제 이 모든 일을 꾸민 이유를 설명해 줄 거야?"

내 질문에 에드워드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체육관 벽을 장식한 종이꽃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춤추는 방향을 바꾸어 사람들을 헤치고


체유관 뒷문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나는 마이크와 춤을 추고 있던 제시카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제시카가 손을
흔들었으므로, 나도 재빨리 웃어주었다. 앤젤라도 눈에 들어왔다.
앤젤나는 머리 하나쯤은 더 작은 귀여운 벤 체니의 품에 안겨 행복한
표정으로 춤을 추느라 고개도 들지 못했다. 리와 사만다도 보였고, 코너와
춤을 추며 우리를 무섭게 노려보는 로렌도 있었다. 나는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가며 춤을 추는 모든 이의 이름을 다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문 밖으로
나가니 석양과 서늘한 초저녁 공기가 우리를 맞았다.

우리 둘만 있게 되자마자, 에드워드는 나를 번쩍 안고 마드론 나무 그늘


아래 놓인 벤치까지 걸어갔다. 그는 나를 품에 안은 채로 벤치에 앉았다.
어느새 떠오른 달이 성긴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하얀 달빛에 비친
에드워드의 얼굴이 창백하게 빛났다. 입술을 굳게 다문 그의 눈에는
고민하는 빛이 역력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내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내 말을 못 들은 척 달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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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해질녘이야. 또 하루가 끝난 거지. 아무리 완벽한 날이라도


언제나 끝이 나게 되어 있어."

그가 중얼거렸다.

"끝날 필요가 없는 것도 있어."

내가 이를 악문 채 긴장하며 대꾸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마침내 느릿느릿 그가 내 질문에 대답을 시작했다.

"내가 널 학교 무도회에 데려온 건, 내 존재 때문에 네가 누려야 할 것들을


빼앗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어. 난 네가 '인간'이길 원해. 내가 1918 년에
타고난 운명대로 죽었던 것처럼 네 인생도 변함없이 이어지길 원해."

그의 말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너무 화가 나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내 자유의지로 학교 무도회에 왔을 거라고


짐작하는 거지? 네가 나보다 수천 배쯤 힘이 세지만 않았다면 난 절대로
이렇게 여기 끌려오지 않았을 거야."

에드워드가 잠시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괴롭지 않다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그건 네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지."

우리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는 달을 쳐다보았고,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평범한 인간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에게
어떻게든 설명할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얘기 해 줄래?"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언젠 안 그랬던가?"

"사실대로 얘기하겠다고 약속이나 해."

그가 씩 웃으며 다그쳤다.

곧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의 미소에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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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오늘 내가 여길 데려올 작정이라는 걸 알았을 때, 너 정말 놀란 것


같더라."

"그랬지."

"넌 다른 짐작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던데...... 그게 뭔지 궁금해. 내가


무엇 때문에 너를 이렇게 요란하게 차려입혔다고 생각한 거야?"

짐작했던 대로 나는 곧장 후회를 했다. 나는 머뭇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

"약속했잖아."

"알아."

"뭐가 문제야?"

그는 내가 단순히 당황스러워서 주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얘기 들으면 네가 화를 내거나...... 슬퍼할 것 같아."

에드워드는 내 말에 대해 유심히 생각하는 듯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그래도 알고 싶어. 부탁이야."

나는 한숨을 쉬었고, 그는 묵묵히 기다렸다.

"나는...... 뭔가 특별한 날이...... 될 모양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이렇게 하찮은 인간들의 행사인...... 학교 댄스파티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지!"

내가 콧방귀를 꼈다.

"인간들의 행사?"

그가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내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나는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시폰 레이스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말없이


내가 설명을 계속하길 기다렸다. 나는 서둘러 고백을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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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난 네가 마음을 바꿔 먹고...... 결국엔 나를 변신하게 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의 얼굴에 온갖 감정이 스쳤다. 어떤 건 나도 알 것 같았다. 분노......


고통......, 그러다 문득 그가 뭔가 다른 생각을 해냈는지 우습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넌 그게 정장을 차려입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가 자기 턱시도 깃을 만지며 놀려댔다. 나는 당혹감을 감추느라 얼굴을


찌푸렸다.

"나야 그게 어떻게 되는 건지 잘 모르지. 어쨌든 나는 그게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웃으라고 한 말 아닌데."

"맞아, 우스은 얘기는 아니지."

그가 맞장구를 치며 웃음기를 감추었다.

"그래도 네가 진심이라고 생각하느니 차라리 농담으로 받아들이겠어."

"난 진심이야."

그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알아. 정말로 '그걸' 그토록 바라는 건가?"

에드워드의 눈빛에 다시 고통이 떠올랐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걸 끝낼 준비가 됐다는 거야? 네 인생은 이제 겨우 시작됐는데,


해질녘처럼 그걸 끝내버리고 모든걸 포기할 준비가 됐단 말이지."

그가 거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잖아."

내가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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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

서글픈 목소리였다.

"내가 나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했던 말 기억나? 너도 네 자신에


대해선 똑같이 장님이야."

"난 나를 잘 알아."

에드워드의 말에 내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변덕스럽게 변하는 그의 기분이 나한테까지 전해지는 듯 했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나를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내
얼굴을 응시했다.

"그럼 이제 준비된 거야?"

그가 물었다.

"응."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턱 바로 아래에 차가운 입술을


댔다.

"지금 당장?"

그가 내 목덜미에 싸늘한 숨결을 뿜으며 속삭였다.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응."

내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내가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넘겨짚었다면


그는 분명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지
오래였고, 확신도 있었다. 내가 나뭇조각처럼 몸을 굳힌 채 가쁜 호흡으로
주먹을 굳게 움켜쥐고 있다고 해도, 거기엔 아무 의미도 없단 말이다.

돌연 그가 음울하게 웃어대며 고개를 들었다. 실망한 얼굴이었다.

"내가 이렇게 쉽게 항복할 거라고 정말로 믿진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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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꿈꾸는 건 내 마음이야."

그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네가 꿈꾸는 게 겨우 그거야? 괴물이 되는 거?"

"꼭 그렇진 않아."

나는 그가 하필 선택한 말이 마음에 안 들어 얼굴을 찌푸렸다. 몰론


괴물은 괴물이겠지.

"난 항상 너와 영원히 함께 있는 꿈을 꿔."

내 목소리에 담긴 미묘한 아픔을 느꼈는지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서글픔이 어렸다.

"벨라, 난 네 곁에 머물 거야.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에드워드가 내 입술 가장자기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나는 감미로운 그의 손길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은 충분해."

내 고집스러움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 밤에는 누구도 항복할 것


같지 않았다. 그가 길게 숨을 내쉬자, 거의 으르릉 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난 이 세상 모든 걸 다 합친 것보다 더 널 사랑해.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내가 말했다.

"응, 충분해. 영원히 충분한걸."

에드워드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그는 내 목덜미에 다시 한 번 차가운 입술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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