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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제관계

조선은 조선 초부터 사대교린정책을 수립하여 명과는 사대하고 여진과 왜에는 교린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허나 조선의 역사상 유래 없는 평화로 군사력이 약해진 결과 교린 정책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고, 결국 명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형국이 되었다.

조선 - 왜 관계

조선은 일본과 하는 외교를 기본으로 교린(交隣) 정책을 유지하였다. 고려 말기에 번번이 왜구는
한반도의 해안을 침범하여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 시대 와서는 수군력을 강화하고자 성능이
뛰어난 대포와 전함을 양산하는 등 왜구 소탕에 진력하였다. 조선은 부산, 울산 등 일부 항구만을
제한으로 개방하는 통상 교류하였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며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다.

조선 - 명 관계
명과 조선 간 관계는 ‘책봉-조공 체제’으로 대표되는 가장 전형이 될 만한 군신관계였다. 명과 조선
간 관계는 조선 전기에는 기본으로 책봉-조공 체제에 기반을 둔 사대 관계를 토대로 조선이 명을
섬기는 상황이었다. 조선과 명 사이에는 군신·상하 관계가 성립되고 조선은 제후국으로서 예와 명분에
합당한 불평등한 국가 지위를 감수해야 했다. 구체로는 명 황제에 의거한 조선 국왕 책봉의 수용, 명
연호의 사용, 정기로 계속 하는 조공 등 제후로서 의무가 부과되었다.

명의 조선을 대상으로 한 내정간섭은 거의 없었으며, 초기에는 태조의 조선 국왕 인정 문제와 여진족


문제, 조공 문제로 양국 간에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6 세기에는 사대주의를
노골로 옹호하는 사림파가 전면에 등장하여 명을 대상으로 한 사대가 매우 당연시되면서 명과 외교
관계는 15 세기 이래 기조를 유지하였다.

평화스럽고 안정된 명과 조선의 군신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조선 국왕과 백관은 명과 약속한 ‘1 년


3 공’의 규정을 넘어서까지 명과 교섭에 적극이었고 그로써 명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 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E%84%EC%A7%84%EC%99%9C%EB%9E%80
조선 - 청 관계
고려시대부터 여진족을 토벌하고 다녔었음. (4 군 6 진 개척, 동북 9 성)
사르후 전투 : 명-조선 vs 청
병자호란, 정묘호란: 조선 vs 청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조선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는 식량 지원과 명 정벌에 사용할
병선 제공이 포함되었고 1632 년(인조 10) 조선에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바꾸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삼으려는 굴욕스러운 요구였다. 후금의 무리한 요구와 강압
정책으로 조선 내에서는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화친하자는 논의를 배척하자는 척화론이
대두되었고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후금의 홍타이지는 내몽골을 평정한 뒤
만주족의 왕을 일컫는 칭호인 한을 버리고 황제를 칭하려 했다. 1636 년(인조 14) 3 월에 여러 만주·
몽골의 부족장들이 홍타이지에게 올린 존호의 글을 보이면서 조선 조정도 이같이 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척화론을 좇아 인조는 후금의 사신을 접견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물론
조정에서는 최명길과 같이 전쟁을 피하고 화해하거나 평화롭게 지내자는 주화론을 주장한 자도
있었지만, 대세는 척화선전하는 기운으로 기울어졌고 드디어 팔도에 선전 교서를 내리어 방비를 굳게
하고 적의를 보였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B3%91%EC%9E%90%ED%9
8%B8%EB%9E%80#

광해군의 외교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에 조선과 명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서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였다(1616).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후금은 명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하였다.
이에 명은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대내적으로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은 명의 후금 공격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 만 3000 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출처: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30_0060_0040
광해군은 명이 점점 쇠퇴하고 북방 여진족이 강성해지고 있는 정세의 변화를 파악하고, 외교적으로
신중하게 대처하였다. 여진족은 조선과 명에 눌려서 통일을 이루지 못하다가, 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명의 힘이 약화되자, 후금을 세우고 명의 변경을 위협하였다. 명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였다.

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았던 조선으로서는 명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광해군은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한 후금과 적대 관계를 가지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강홍립으로 하여금
출병하게 한 후 정세에 따라 슬기롭게 대처하도록 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이와 같은 중립 외교 정책을
폄으로써 외침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때, 일부 사림은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였다. 게다가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자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펴 도덕적으로 큰 약점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를 빌미로 서인이 인조반정을
일으킴으로써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출처: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view.do?levelId=ta_m71_0060_0030_0020_0020

광해군에 대한 재해석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시기별로 크게 달랐으며, 현재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편이다. 먼저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평가가 최악이었다. 인조의 후예들이 왕위를 잇는 상황에서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 곧 인조반정의 취지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 수 있는 내용은 입에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는 1930 년대 일본인 학자들이 주도하였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광해군이 취한 노선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옥사 문제는 모두 대북 탓으로 돌린 새로운 해석이다. 이는
만주사변(1931) 이후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하여 한반도와 같은 문명권으로 보려던 일제
관학자들의 정치적 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해방 후 1959 년 이병도가 그대로 수용하여
퍼트리면서 통설로 자리 잡아, 각종 교과서와 개설서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도 익숙하다. 하지만 1990
년대 이래 광해군 관련 연구가 상당히 쌓이면서 통설은 그 지위를 거의 상실하였다. 무엇보다도
광해군의 외교 노선이 과연 현명한 ‘중립’ 외교였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거센 편이며, 내치에서도
광해군이 정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결코 대북 같은 특정 정파에 휘둘리지 않았다는 실증적 연구가
나왔다. 아울러 광해군의 여러 업적이 다소 부풀려졌다는 비판도 무시하기 힘들다. 요컨대, 광해군에
대한 평가 문제는 시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열린 마음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출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335#section-3
광해군은 왕권 불안과 피의 숙청으로 인해 힘을 부정적으로 행사하며 동생과 어머니를 살해한
폐모살제의 사건으로 유명하다.
또한 인재를 활용하지 않고 특정 붕당에 선호를 두어 혼란을 초래하였고, 불필요한 토목공사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광해군의 갈등과 분열을 부채질하며 공동체를 통합하지 못해 실패를 겪었음을 보여준 사례다. 긍정적
평가를 받는 면도 있었는데, 대동법을 통해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등거리 외교를 통해 조선의 안전을
확보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혼란을 초래하는 많은 실책을 저지르며, 광해군이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임금이었나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https://dbr.donga.com/article/view/1306/article_no/10988/ac/a_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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