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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돌 임용고시 자료

윤리와 사상 교과서 모음 데카르트

나는 이제부터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거짓으로 보아 던져


버림으로써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생각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진리는 아주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 나는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1원리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데카르트, 『방법서설』, 미래엔 윤사 교과서]

우리의 모든 지식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가장 단순한 원리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면 우선 그 출발점이


얼마나 확고한 기초 위에 서 있는가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확실하다고 할 것인가?
이 문제를 좀 더 조심스럽게 다루기 위하여 일단 나는 그 어떤 것도 확실하다고 보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철저한 회의를 이겨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해 보려는 것이다.
…… 그런데 내가 아무리 모든 것을 회의하는 데서 철학적 탐구를 시작한다고 할지라도 끝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의심하면 할수록 더욱 확실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심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지각하는 모든 것이 착각일 수 있고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허위일 수도 있지만 이 모든 회의를
통해서도 끝내 나는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나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즉 나는 내가 신체를 전혀 갖지 않았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또 내가 서 있는 어떠한 세계도, 어떠한
장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내가 다른 여러 사물이 실제로 있는가를 의심하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서 매우
명백하고 분명하게 ‘나는 존재한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진리 탐구를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모두 버림으로써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내 생각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는지를 보기로 했다. ……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그렇게 의심하기 위해서는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진리는 아주 확고부동하기 때문에
회의론자들의 모든 가정들에 의해서도 흔들릴 수 없는 것임을 인식하고 나는 주저 없이 그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데카르트, 『방법서설』, 미래엔 윤사 교과서]

나는 이제부터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거짓으로 보아 버림으로써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생각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였다. 나는 우리의 감각이 종종 우리를
속이기 때문에 감각이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는 모습 그대로 실재 세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하였다. ……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이렇게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진리는 아주 확실한 것이기에 …… 나는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1원리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데카르트, 『방법서설』, 씨마스 윤사 교과서]

나는 진리 탐구를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모두 버림으로써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내 생각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는지를 보기로 했다. … (중략) …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렇게 의심하기 위해서는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진리는 아주 확고부동하기 때문에
회의론자들의 모든 가정들에 의해서도 흔들릴 수 없는 것임을 인식하고 나는 주저 없이 그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데카르트, 『방법서설』, 교학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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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돌 임용고시 자료
윤리와 사상 교과서 모음 베이컨

인간은 자연의 사용자 및 해석자로서 자연의 질서에 관해 실제로 관찰하고, 고찰한 것만큼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그 이상의 것은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인간의 지식이 곧 인간의 힘이다.
[베이컨, 『신기관』, 미래엔 윤사 교과서]

우리에게는 천연의 우물이나 분수를 모방해서 만든 인공 우물이나 분수도 있습니다. 황산이나 황ㆍ강철ㆍ
청동ㆍ납ㆍ초석을 비롯한 기타 광물질이 섞인 온천도 있습니다. 많은 물질들을 주입해서 실험하기 위한
자그마한 우물도 있습니다. 여기에 물질을 넣으면 그릇에 담긴 것에 비해서 물의 반응 속도가 훨씬
빨라집니다. 이 실험의 결과, 우리는 천국의 물이라고 불리는 물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물을 마시면 건강이
증진되고 생명이 연장됩니다. …… 우리에게는 건강의 방이라고 불리는 특수한 방이 있습니다. 건강에 좋은
공기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질병 치유와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됩니다.
[베이컨, 『뉴 아틸란티스』, 미래엔 윤사 교과서]

지금까지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경험에만 의존하거나 독단을 휘둘렀다. 경험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은
개미처럼 오로지 자료를 모아서 사용하고, 독단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거미처럼 자신의 속을 풀어내서 집을
짓는다. 그러나 꿀벌은 중용을 취한다. 즉 들에 핀 꽃에서 재료를 구해다가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켜
소화한다. 참된 학문의 임무는 이와 비슷하다. 참된 학문은 경험이나 실험을 통해 얻은 재료를 지성의
힘으로 변화시켜 소화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의 사용자로서 또는 자연의 해석자로서 인간은 자연의 질서를 직접 관찰하고 고찰한 그만큼만 자연에
대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또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우리가 당면한 고난의 원인은 독단과 연역법에 있다. 존경할 만하지만 의심스러운 명제를 의심의 여지 없는
출발점으로 삼고, 이러한 전제 자체를 관찰 또는 실험에 의해 검토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진리를 찾아내지 못한다. 신이 부여한 권리이자 의무인 자연에 대한 온전한 지배를 위해서는 계획된 실험을
통해 얻은 원리를 토대로 또 다른 실험을 전개하여 새로운 지식을 얻어내야 한다.
[베이컨, 『신기관』, 미래엔 윤사 교과서]

인간의 지성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은 인간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리조차도 얻지 못하게 만든다. …… 우상들을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참된 귀납법으로 개념과
공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베이컨, 『신기관』, 미래엔 윤사 교과서]

그곳에는 당시보다 뛰어난 성능의 렌즈, 인공의 무지개를 만드는 기술, 음향 연구소, 동력 연구소, 수학
연구소 등이 있다. 솔로몬 교단 사람들은 새의 날개 모양을 이용하여 하늘을 나는 방법을 고안했고, 물
밑을 가는 배와 영구 운동을 하는 물건도 발견하였다.
[베이컨, 『뉴 아틀란티스』, 씨마스 윤사 교과서]

이곳에서는 접목이나 모종에 대한 온갖 실험을 하고 있소. 그리하여 과수원에서 기술을 사용하여 나무나
꽃을 제철보다 빠르게 혹은 늦게 피도록 하고, 또한 자연적인 상태보다 빨리 피든가 열매를 맺게 하고
있소. 또 기술에 의해 자연 그대로의 경우보다 훨씬 크게 만들 수도 있소. 그런 과일은 한층 크고 맛이
있는데, 맛이며 향기며 색깔이며 모습이 천연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오. 그러한 것의 대부분은
의약품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조정되어 있소. 또 수류나 조류를 위한 여러 종류의 자연원이나 울도
있소. 그것을 만든 것은 관람이나 단순히 진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해부나 실험 등을 하기 위해서요. 이와
같이 하여 인간의 신체에 어떠한 것이 작용되는가를 밝혀내고 있소. 이를테면 생명에는 결여되어서는 안
되게 되어 있지만, 여러 부분이 못쓰게 되든가 밖으로 나오든가 하더라도 그러한 생물류 중에서 생명이
지속되는 것이 있는지를 실험하고 관찰하는 것이오. 온갖 독물이나 그 밖의 약물들을 실험하고 있으며,
내과용과 외과용으로 사용하고도 있소.
[베이컨, 『베이컨 수상록』, 천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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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돌 임용고시 자료
윤리와 사상 교과서 모음 베이컨

우리가 만든 물을 마시면 건강이 증진되고 생명이 연장됩니다. 우리는 유성의 체계와 운동을 모방한 거대한
건물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서 눈, 비, 우박 등을 인공적으로 내리게 하며, 천둥과 번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 한 번 먹고 나면 오랫동안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고기, 빵, 음료수도 개발하였습니다.
[베이컨, 『뉴 아틀란티스』, 천재 윤사 교과서]

연역법의 기반이 되는 논리학과 삼단 논법은 새로운 과학을 정립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논리학은
진리를 탐구하기보다는 그들이 기초하고 있는 잘못된 토대를 공고화하거나 고착하는 데 봉사할 뿐이다.
그리고 삼단 논법은 과학에 적용될 수 없었고 쓸데없는 공리만을 양산했다. 이는 자연의 미묘함에 도저히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삼단 논법은 명제를 확증하는 데 사용할 수 있지만 사물의 진리에 접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베이컨, 『신기관』, 교학사 윤사 교과서]

인간의 지성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리조차도 얻지 못하게 만든다. …… 우상들을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참된 귀납법으로 개념과
공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베이컨, 교학사 윤사 교과서]

솔로몬 학술원에서는 신의 섭리와 신이 창조한 피조물에 대해 연구하고, 사물의 숨겨진 원인과 작용을
탐구하여 인간의 목적에 맞게 사물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다양한 곳에서 과학적 관찰과 실험을 하며, 해수와
담수를 서로 전환하고, 인공 눈과 비를 만들기도 한다. 식물 성장 촉진을 위한 배양토 제작, 품종 개량을
위한 접목 등 다양한 농업 실험을 한다. 또한 동물 해부와 교배, 복제 실험도 한다. …… 발달한 과학
기술을 통해 농작물이나 축산물이 아주 풍부하게 생산되며, 생활은 아주 편리하다. 학술원 회원은 화려한
복장과 금은으로 치장한 물건을 들고 다니며, 청중들에게 많은 하사품을 준다.
[베이컨, 『새로운 아틀란티스』, 교학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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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돌 임용고시 자료
윤리와 사상 교과서 모음 스피노자

사물의 본성에는 어떤 것도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게끔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스피노자, 『에티카』, 미래엔 윤사 교과서]

삶에서 무엇보다 유익한 것은 가능한 한 이성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며, 오로지 이것에 인간의 최상의 행복,
즉 지복(至福)이 존재한다. 지복이란 신의 직관적 인식에서 생기는 정신의 만족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성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신, 신의 속성, 그리고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생기는 활동을 파악하는 것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미래엔 윤사 교과서]

자연 가운데에는 하나도 우연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스피노자, 『윤리학』, 미래엔 윤사 교과서]

사물은 현재 산출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어떤 방식이나 질서에 의해 신으로부터 산출될 수가 없었다.


[스피노자, 『윤리학』, 미래엔 윤사 교과서]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모든 것이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이다. …… 사물의 본성에는 어떤 것도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게끔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생산하는 자연[能産的 自然(능산적 자연)]은 그 자체 안에 존재하며 그 자신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 또는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실체의 속성, 즉 신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비해 생산된
자연[所産的 自然(소산적 자연)]은 신의 본성이나 신의 각 속성의 필연성에서 생기는 모든 것, 즉 신 안에
존재하며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는 것, 다시 말해 신의 속성의 모든 양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성에 따라 추구하는 모든 것은 단지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정신은 이성을 사용하는 한 인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결코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 정신의 최고의 덕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본성상 강건한 사람은 모든 것이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둔다. 따라서
자신이 보기에 불쾌하고 악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과 더욱이 비도덕적이고, 혐오스럽고, 정당하지 않고,
수치스럽게 보이는 모든 것은 자신이 사물 자체를 무질서하고, 왜곡된, 혼란한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런 까닭에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고
노력하며, 진정한 인식에 장애가 되는 것들, 즉 미움, 분노, 질투, 조롱, 오만 등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스피노자, 『에티카』, 미래엔 윤사 교과서]

삶에서 무엇보다 유익한 것은 가능한 한 지성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며, 오로지 이것에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 있다. 진실로 최고의 행복은 신(神)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정신의 만족일 뿐이다. 그런데
지성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신과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나오는 활동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이 품고 있는 최고의 욕망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온전하게 인식하려는 욕망이다.
지복은 덕의 보상이 아니라 덕 그 자체이다. 우리가 자신의 육욕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지복을 누리기 때문에 육욕을 억제할 수 있다.
무지한 자는 외부 원인들에 의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달림을 받아 참된 마음의 평화를 결코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신과 사물을 모르는 것처럼 살며, 작용받는 것을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도 멈춘다.
이에 반해, 현자(賢者)는 거의 영혼이 흔들리지 않고,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자신과 신과 사물을
인식하며, 존재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고, 항상 참된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
[스피노자, 『에티카』, 미래엔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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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돌 임용고시 자료
윤리와 사상 교과서 모음 스피노자

우리는 매우 쉽게 단지 정서 또는 속견에 의해서 이끌리는 사람과 이성에 의해서 인도되는 사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자신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신이 전혀
모르는 것을 행하는 반면, 후자는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따르지 않고 오직 자신만 따르며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한 것만을, 따라서 자신이 가장 강하게 욕구하는 것만을 행한다.
나는 전자를 노예라고 부르며 후자를 자유인이라고 부른다.
[스피노자, 『에티카』, 미래엔 윤사 교과서]

무지한 자는 외부의 원인들 때문에 이리저리 동요하고 결코 정신의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하며 자기 자신과
신과 사물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산다. 그리고 외부의 존재로부터 받는 작용을 멈추는 순간 즉시
존재하기를 멈추게 된다. 이에 반해 현명한 자는 정신이 거의 동요하지 않고 자신과 신과 사물을 영원의
필연성에 따라 인식한다. 그리고 그는 존재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언제나 정신의 참다운 만족을 누린다.
[스피노자, 『에티카』, 비상 윤사 교과서]

정신 안에는 절대적이거나 자유로운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은 이것 또는 저것을 의지하도록
어떤 원인에 의해 결정되고, 이 원인 역시 다른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그것은 다시 또 다른 원인에 의해
결정되는 식으로 무한히 진행한다.
[스피노자, 『윤리학』, 씨마스 윤사 교과서]

우리는 우리 존재의 보존에 도움이 되거나 해가 되는 것을, 즉 우리의 활동 능력을 증대하거나 감소하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것을 선 또는 악이라 부른다. …… 선과 악의 인식은 기쁨이나 슬픔의 정념 자체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기쁨이나 슬픔의 관념일 뿐이다.
[스피노자, 『윤리학』, 씨마스 윤사 교과서]

수동적인 정념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명석 판명한 관념을 형성하는 순간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정념에 대해 더 잘 알면 알수록 정념은 우리들의 힘 안에 있게 되며 또한 정신은
그만큼 더 정념의 영향을 덜 받게 된다.
[스피노자, 『윤리학』, 씨마스 윤사 교과서]

진정한 덕은 오직 이성의 인도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무능력이란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들이 자신을 인도하도록 하고, 자신의 본성이 그 자체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사물이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것에 따라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노자, 『윤리학』, 씨마스 윤사 교과서]

자연 안에는 우연한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영향을


미치게끔 결정되어 있다.
[스피노자, 『에티카』, 천재 윤사 교과서]

이성은 자연에 반(反)하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므로 이성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라고 요구하며,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자 노력할 것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스피노자, 『에티카』, 천재 윤사 교과서]

외부에는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추구할 만한 것이 많다. …… 맛있는 음식, 좋은 향기, 푸른 식물의
아름다움, 장식, 음악, 운동, 연극, 그리고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각자가 이용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것으로 자신을 상쾌하게 하고 원기를 북돋우는 것은 현명한 사람의 모습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천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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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돌 임용고시 자료
윤리와 사상 교과서 모음 스피노자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데 다음과 같은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다. 즉, 모든 사람이 모든 측면에서
일치하여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 그리하여 할 수 있는 한 모두가 함께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천재 윤사 교과서]

인간의 삶에서 무엇보다 유익한 것은 우리의 이성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하는 것이며, 오직 이것에 최고의
행복이 있다. 최고의 행복이란 신을 인식함으로써 생기는 정신의 만족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천재 윤사 교과서]

무지한 자는 외부 원인으로부터 갖가지 시달림을 받아 참된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현명한 자는


어떤 영원한 필연성의 관점에서 자신과 신, 그리고 사물을 인식하며 참된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
[스피노자, 『에티카』, 천재 윤사 교과서]

최고의 행복은 덕의 보상이 아니라 덕 그 자체이다. 우리가 자신의 욕심을 억제하기 때문에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최고의 행복을 누리기 때문에 욕심을 억제할 수 있다. …… 이러한 것들에
이르는 길은 매우 어렵게 보일지라도 그 길은 발견될 수 있다. 그리고 물론 그렇게 드물게 발견되는 것은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구원이 가까이에 있고 커다란 노력 없이도 발견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거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무시하겠는가? 그러나 모든 탁월한 것은 드물 뿐만 아니라 어렵다.
[스피노자, 『에티카』, 천재 윤사 교과서]

일상생활에서 보통 일어나는 모든 일이 헛되고 무용하다는 것을 경험으로부터 배운 후에, 두려워하였던


대상이나 원인 모두가 내 마음을 움직였을 뿐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후에, 마침내
나는 다음 문제를 탐구하기로 결심하였다. 즉 참으로 좋고 그 가치를 나에게 전해 줄 수 있으며 다른 모든
것이 버려져도 오직 그것만이 내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내가 그것을 발견하고 획득하면
나에게 영원히 이어지는 최고의 기쁨을 지속적으로 선사할 어떤 것이 정말로 있는지를 말이다.
[스피노자, 『지성 개선론』, 천재 윤사 교과서]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이 되는 어떤 것이 우리의 내부나 외부에 생길 때, 즉 우리의 본성만으로


명석하고 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우리 내부나 외부에서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작용한다(능동, nostum agere, we act)’고 말한다. 반면 우리가 그것의 단지 부분적 원인이
되는 어떤 것이 우리의 내부에 생기거나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작용을
받는다(수동, nos pati, we are acted on)’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변용의 적합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 감정을 능동(actio, action)으로 이해하고, 우리가 변용의 적합한 원인이 될 수 없다면 나는 그
감정을 수동(passio, passion)으로 이해한다.
[스피노자, 『에티카』, 천재 윤사 교과서]

미움은 사랑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이성에 인도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욕구하는 선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욕구한다. 여기에 다음이 더해진다. 정신이 강한 사람은 무엇보다 모든 것이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따라서 그가 불쾌하고 악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과 비도덕적이고 무서우며 불공정하고
수치스럽게 보이는 모든 것은 사물을 어지럽고 훼손되게 그리고 혼란스럽게 생각하는 데에서 생긴다는 것을
고려한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보다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고 노력하며, 참다운 인식의 방해물들, 즉
미움, 분노, 질투, 조롱, 오만 등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 최고의 선을 누리도록
충고나 행동으로 그들을 돕고자 하는 사람은 그들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신을
경탄해 자신의 가르침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도록 노력하지 않는다. 그는 질투의 어떤 원인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단점을 지적하는 데 신중하며, 사람의 무능력을 말할 때 조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덕이나 능력, 그것을 완성하는 방법은 많이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이 두려움이나
혐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기쁨의 감정에 움직여 가능한 한 이성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천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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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돌 임용고시 자료
윤리와 사상 교과서 모음 스피노자

우리는 증오하거나 경멸, 조롱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분노하거나 누구를 시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여야 하며, 이웃들에게 편파성 또는 미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성의
인도에 의해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스피노자, 『에티카』, 교학사 윤사 교과서]

이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즉 이성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바라지 않는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욕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공정하며
성실하고 또한 정직하다.
[스피노자, 『에티카』, 교학사 윤사 교과서]

우리는 신을 완전하게 이해함으로써 완벽한 마음의 평화를 갖게 된다. 즉, 신에 대한 이해는 최고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완전한 행복은 신을 인식하는 데에서 성립하며, 이를 통하여 사랑과 도덕성이
요구하는 것만을 행할 수 있다.
[스피노자, 『에티카』, 교학사 윤사 교과서]

본성상 강건한 사람은 모든 것이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둔다. 따라서
자신이 보기에 불쾌하고 악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과 비도덕적이고, 혐오스럽고 정당하지 않고, 수치스럽게
보이는 모든 것은 자신이 사물 자체를 무질서하고 왜곡된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런 까닭에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고 노력하며, 진정한 인식에
장애가 되는 것들, 즉 미움, 분노, 질투, 조롱, 오만 등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스피노자, 『에티카』, 교학사 윤사 교과서]

생산하는 자연[能産的 自然]은 그 자체 안에 존재하며 그 자신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 아니면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실체의 속성, 즉 자유 원인으로 고찰되는 신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비해 생산된 자연[所産的 自然]은 신의 본성이나 신의 각 속성의 필연성에서 생기는 모든 것, 즉 신 안에
존재하며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는 그러한 것으로 고찰되는 신의 속성의 모든 양태(樣態)로
이해되어야 한다.
[스피노자, 『에티카』, 교학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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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과 덕은 단순히 관념들의 비교 혹은 이성에 의해 발견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악덕과 덕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감정에 의해서임이 틀림없다. 도덕적 올바름과
악함에 관한 우리의 결정은 명백히 지각이다. …… 그러므로 보다 정확히 말해서 도덕성은 판단된다기보다
오히려 느껴진다.
사람의 품성과 행위에서 발생하는 쾌락 또는 고통의 모든 감정이 우리가 칭찬하거나 비난하게 되는 특별한
종류의 감정은 아니다. 적의 훌륭한 품성은 우리에게 해롭지만 우리의 존경심을 유발할 수 있다. 어떤
품성을 도덕적으로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느낌이나 감정을 일으키는 경우는 오직 그 품성을
우리의 개별적 이익과 무관하게 일반적으로 고려할 때뿐이다.
유용한 행동은 우리의 호감, 시인(是認)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일상의 경험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유용성인가? 물론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도대체 누구의 이익일까? 우리
자신만의 이익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인은 멀리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인되는
인격이나 행위가 지향하는 어떤 것의 이익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이것이 비록 멀리 있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 만약 유용성이 도덕감(道德感)의 원천이고, 이 유용성이
항상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어떤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사회의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은 곧바로 우리의
시인과 호감을 불러일으킨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도덕의 기원을 상당 부분 설명해 주는
원리이다.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미래엔 윤사 교과서]

만약 유용성이 도덕적 정서의 근원이라면, 그리고 이 유용성이 항상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만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로부터 사회 전체의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곧바로 우리의 시인을 받으며 선한
의지가 그것을 추천한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흄, 『도덕 원리에 관한 연구』, 미래엔 윤사 교과서]

행동의 가치는 이성과 부합되는 속에서 유래되는 것이 아니고, 그 허물도 이성과 상반되는 속에서 유래되지
않는다. …… 이성은 어떤 행동에 대해 부인하거나 찬동함으로써 직접 그 행동을 중단하거나 유발할 수
없으므로, 그 행동을 중단하거나 유발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밝혀진 도덕적 선악을 구별하는 원천일 수
없다. …… 행동의 잘잘못은 흔히 우리의 자연적 성향과 상충되며, 우리의 자연적 성향을 억제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성에는 이런 영향력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도덕적 구별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의 도덕적 신념들은 ‘이성’보다는 ‘감정(정념)’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이성은 감정의 노예일 뿐이고,
감정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직무를 탐해서도 안 된다. 이성은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도덕적 신념의 근원이 될 수 없다. 이성은 감정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고통과 좌절을 피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정보들을 우리에게 전해 줄 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감정은 행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도덕적 행위에 있어서 누구나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사회적 감정, 즉 ‘공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리고 어떤 행위를 옳게 만드는 것은 그 행위의 ‘효용’, 즉 그 행위가 ‘공공의 선’과 사람들
일반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능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미래엔 윤사 교과서]

어떤 사람에게 왜 운동을 하느냐고 물어보라. 그는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왜 건강하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라. 그는 곧바로 질병은 고통을 주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더 이상 질문을 던져서 왜 고통을 싫어하는지 그 근거를 알고 싶다고 한다면 그는 더 이상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궁극 목적이며 다른 어떤 대상을 지적할 필요가 전혀 없다.
[흄, 『도덕 원리에 관한 연구』, 미래엔 윤사 교과서]

인간 정신의 주요 원천 또는 작용 원리는 쾌락이나 고통이다. …… 도덕적 구별은 쾌락이나 고통이라는


특정 소감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반성을 통해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정신적 성질은 무엇이든 유덕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본성이 우리에게 거북함을 주는 것은 모두 부덕하다.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비상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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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쾌락과 이익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공통의 관점으로 대상을 조망하지 않는 한,
사람들의 소감과 판단은 결코 언제나 일치할 수 없다. 성격을 판단하는 경우, 모든 관찰자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이익이나 쾌락만이 …… 더 불변적이고 보편적이므로, 현실적으로도 우리 자신의 이익과 평형을
이루며, 덕과 도덕성의 유일한 기준으로 인정된다. 그와 같은 이익과 쾌락만이 특정한 느낌이나 소감을
산출하는데, 도덕적 구별은 이 느낌이나 소감에 의존한다.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비상 윤사 교과서]

이성은 감정의 노예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따르고 뒷받침하는 이외에 다른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
…… 이성은 우리의 행위에 오직 두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 하나는 적절한 대상의 존재를 알려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감정을 움직이게 해 줄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인과관계를 밝혀 줌으로써 우리에게
감정의 행사 수단을 제공해 줄 경우이다.
[흄, 『인간 본성론』, 씨마스 윤사 교과서]

인류애가 허영심이나 야망처럼 그렇게 강한 것으로 평가되지는 않을지 모르나, 그것은 모든 인간이 공유한
것으로서, 유일하게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흄, 『인간의 지성과 도덕의 원리에 관한 탐구』, 씨마스 윤사 교과서]

그(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자)는 자신의 개인적이고 특수한 상황을 떠나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관점을
취해야 한다. 그는 인간 본성 안의 보편적 원리를 움직여, 모든 인간이 거기에 화답할 수 있는 소리를 내야
한다.
[흄, 『인간의 지성과 도덕의 원리에 관한 탐구』, 씨마스 윤사 교과서]

유용한 행위는 우리의 쾌감, 즉 그것을 시인(是認)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일상의 경험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유용성인가? 물론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도대체 누구의
이익인가? …… 만약 유용성이 도덕의 원천이고, 이 유용성이 항상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어떤 것이
아니라면, 사회의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은 곧바로 우리의 쾌감, 즉 우리가 그것을 시인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흄, 『인간의 지성과 도덕의 원리에 관한 탐구』, 씨마스 윤사 교과서]

악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행위, 가령 고의적인 살인을 생각해 보자. 이 행위를 모든 면에서 검토하고, 당신이
악이라고 말하는 사실이나 실재적 존재를 발견할 수 있는지 고찰해 보라. 그 행위를 어떤 방식으로 보든지
간에 당신은 오직 특정한 정념, 동기, 의지, 그리고 사고만을 발견할 뿐이다. 이 경우에 다른 사실은 없다.
당신이 대상을 살피는 한, 당신은 악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당신이 고찰의 방향을 당신 자신의
마음속으로 돌려 살인에 대해 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거부의 감정을 찾을 때까지, 결코 악을 발견할 수
없다. 여기에는 사실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느낌의 대상이지 이성의 대상이 아니다. 그 사실은
당신 자신의 속에 있지, 대상의 속에 있지 않다.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천재 윤사 교과서]

유용성이 도덕적 감정의 근원이고, 이 유용성이 항상 개인 자신만을 챙기는 어떤 것이 아니라면,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이 도출된다. 즉 사회의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은 곧바로 우리의 시인을 받는다.
[흄, 『도덕 원리에 관한 연구』, 천재 윤사 교과서]

우리가 감정과 이성의 반목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엄밀하게 그리고 철학적으로 말하고 있지 못하다. 이성은
감정의 노예이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이성은 감정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말고 다른 어떤 역할도 요구할
수 없다.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천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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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훌륭한 품성은 우리에게 해롭지만 우리의 존경심을 유발할 수 있다. 어떤 품성이 도덕적 선 또는
악이라 불리는 감정을 일으키는 경우는 오직 그것이 우리의 개별적 이익과 무관하게 일반적으로 고려될
때이다.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천재 윤사 교과서]

내가 어떤 사람의 목소리와 몸짓에서 어떤 감정의 결과를 볼 때 나의 마음은 즉시 이런 결과로부터 이것의


원인으로 나아가 그 감정에 관한 생생한 관념을 형성하는데, 이것은 곧바로 감정 자체로 전환된다.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내가 감정의 원인을 지각할 때 나의 마음은 그 결과로 나아가 그 결과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끔찍한 수술실에 있다면 수술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도구를 준비하고
붕대를 정리하며 철제 기구를 가열하는 일과 환자와 보조원의 불안과 걱정의 모습은 나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며, 강한 가엾음과 공포의 감정을 일으킬 것이다. …… 결국, 타인이 느끼는 감정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공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천재 윤사 교과서]

이성 혼자서는 그 어떤 의지 작용의 동기가 될 수 없으며, 이성은 의지를 지도함에 있어서 감정에 반대할
수 없다.
악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행위든지 살펴보자. 이 행위를 모든 면에서 검토하고, 당신이 악이라고 말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지 고찰해 보라. 당신이 대상을 살피는 한, 전혀 악을 발견할 수 없다. 당신이
고찰의 방향을 자신의 마음속으로 돌려서, 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부인의 감정을 찾을 때까지 결코 악을
발견할 수 없다.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천재 윤사 교과서]

악덕과 덕은 단순히 관념들의 비교 혹은 이성에 의해 발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덕과 덕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감정에 의해서 임이 틀림없다. 도덕적 올바름과
악함에 관한 우리의 결정은 명백히 지각이다. 그리고 모든 지각은 인상이거나 관념이므로 이 가운데 하나의
제거는 다른 하나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명이다. 따라서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도덕성은 판단된다기보다
오히려 느껴지는 것이다.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천재 윤사 교과서]

악덕과 덕은 단순히 관념들의 비교 혹은 이성에 의해 발견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악덕과 덕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감정에 의해서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보다
정확히 말해서 도덕성은 판단된다기보다는 오히려 느껴진다.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교학사 윤사 교과서]

이성만으로는 어떤 행동도 유발할 수 없고 어떤 의욕도 불러일으킬 수 없다. … (중략) … 이성은 감정의


노예이고 또 노예일 뿐이어야 하며, 감정에게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에 결코 어떤 직무도 탐낼 수
없다.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교학사 윤사 교과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행복 및 불행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다른 사람의 눈물과 비명과 신음 소리는


항상 우리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흄, 『도덕 원리에 관한 연구』, 교학사 윤사 교과서]

이성은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도덕적 신념의 근원이 될 수 없다. 이성은 감정들을 충족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고통과 좌절을 피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정보들을 우리에게 전해 줄 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감정은
행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교학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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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사상 교과서 모음 흄

도덕성이 도덕적 정서의 근원이라면 그리고 유용성이 항상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만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 전체의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우리의 시인을 얻을 것이며, 선한 의지가
이것을 추천할 것이다.
[흄, 『도덕 원리에 관한 연구』, 교학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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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사상 교과서 모음 칸트

이 세계에서 또는 도대체 이 세계 밖에서까지라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의지뿐이다.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미래엔 윤사 교과서]

나는 과연 거짓 약속이 의무에 맞는가 어떤가 하는 이 과제에 대한 답을 아주 간략하게 그러면서도 속임수


없이 제시하기 위해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는 (진실하지 못한 약속을 통해 곤경에서 벗어난다는) 나의
준칙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보편적 법칙으로 타당해야 한다는 것에 정말로 만족할 것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든 그가 거기에서 다른 방도로는 벗어날 수 없는 곤경에 처해 있다면 진실하지 못한
약속을 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나에게 말할 수 있는가?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미래엔 윤사 교과서]

여러 국가들이 그들의 권리를 추구하는 방식은 국제 법정에서의 소송과 같은 것이 아니라 전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쟁에 의해서도, 승리에 따른 전리품의 획득에 의해서도, 권리는 결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비록
평화 조약에 의해 그때그때의 싸움은 멈춰질 수 있다고 할지라도 전쟁 상태가 종식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특별한 종류의 연맹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평화 연맹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리고 평화
조약과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들이 전쟁을 포함하는 무법천지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하게 이성적인
출구는 다음의 길밖에 없다. 그들 국가는 개인의 경우처럼 야만적인 자유를 포기하고 그들 스스로를 공법의
규제에 내맡기는 한편, 궁극적으로 전 세계 모든 국가를 포함할 국제 국가(civitas gentium)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법의 이념에 의해서는 이들 국가는 이것을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옳은 것이 실천에서는 거부된다. 그러므로(만일 모든 것을 잃지 않으려면) 세계 공화국이라는 적극적인
이념 대신에 소극적 대안으로서 연맹을 구성하는 것이다.
[칸트,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미래엔 윤사 교과서]

인간은 신성하지 않으나, 그의 인격 속의 인간성은 그에게 신성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우리가 의욕하고, 또 우리가 지배하는 모든 것은 단지 수단으로써 사용될 수 있다. 오직 인간, 그리고 그와
더불어 모든 이성적 피조물만이 목적 그 자체이다. 즉 인간은 도덕 법칙의 주체이며 도덕 법칙은 그의
자유가 지닌 자율로 말미암아 신성한 것이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미래엔 윤사 교과서]

도덕은 그 자체로서 가치 있고 그 자체로서 숭고하므로 다른 어떤 것의 수단이 될 수 없고 다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인간의 자기애에 근거한 자연적 경향성은 필연적으로 도덕 법칙에 따른 행위를 방해한다.
동정심은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고 하나의 수동적인 감정이며 때로는 악을 옹호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성의 근본 원리가 될 수 없다.
[칸트, 『도덕형이상학 정초』, 미래엔 윤사 교과서]

내가 절박한 상황에 처할 경우 지킬 생각이 없으면서도 거짓 약속을 해도 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찾으려면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면 된다.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 약속을 할
수도 있다는 나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으로 통용되더라도 나는 만족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나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거짓 약속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비록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원할 수 있을지라도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법칙에 따르게 되면
약속이라는 것은 아예 성립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 『도덕형이상학 정초』, 미래엔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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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사상 교과서 모음 칸트

내가 그것을 거듭 또 오랫동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새롭고 더욱 높아지는 감탄과 경외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도덕 법칙은 지성적 존재로서의 나의 가치를 인격성에 의해 무한히 고양시킨다. 나의 인격성 속에 있는
도덕 법칙은 동물성으로부터, 더 나아가 모든 감성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는 삶을 나에게 드러내 준다.
도덕 법칙은 하나의 완전한 존재자의 의지에게는 신성(神性)의 법칙이지만, 모든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게는 의무의 법칙이며, 이 법칙에 대한 존경심에 의해서 그리고 자신의 의무에 대한 외경에서 행위를
규정하는 도덕적 강제의 법칙이다.
진실로 객관적인 도덕 법칙만이, 자기애(自己愛)가 최상의 실천 원리에 미치는 영향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자기애의 주관적 제약을 법칙으로 지시하는 자만을 끊임없이 몰아낸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판단에 있어서
우리의 자만을 몰아내는 일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겸허하게 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도덕 법칙과 자기
본성 중에 있는 감성적 성벽을 비교할 때,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을 겸허하게 한다. 도덕 법칙은 그 관념이
우리 의지의 규정 근거로서 우리의 자각에 있어 사람을 겸허하게 하고, 그것이 적극적이며 규정 근거인 한,
그 자체로 ‘존경심’을 일으킨다. 따라서 도덕 법칙은 주관적으로도 존경의 근거이다.
도덕 법칙은 (경험적인 목적을 전제로 하여 단지 가언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단정적으로 명령하며,
따라서 모든 의도에 대하여 필연적인 것이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미래엔 윤사 교과서]

(도덕) 법칙만이 존경의 대상일 수 있고 그래서 명령이 될 수 있다. 의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법칙뿐이며 주관적으로 보면 실천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 즉 나의 모든 경향성을 포기하고서라도
그 법칙을 따르겠다는 준칙뿐이다.
할 수 있는 한, 선행을 하는 일은 의무이다. 그 밖에도 천성적으로 동정심이 많은 사람들도 많아서 그들은
허영이나 사익과 같은 어떤 다른 동인 없이도 자기 주위에 기쁨을 확대하는 데서 내적 만족을 발견하고,
그것이 자기의 작품인 한에서 타인의 만족을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주장하거니와, 그러한 경우에 그
같은 행위는 매우 의무에 맞고 매우 사랑받을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참된 윤리적 가치를
갖지 못하며 오히려 다른 경향성들, 예컨대 명예에 대한 경향성과 같은 종류이다. 명예에 대한 경향성은
만약 그것이 다행히도 실제로는 공익적이며 의무에 맞고 그러니까 명예로운 것에 해당한다면, 칭찬과
격려를 받을 만하지만 존중받을 만한 것은 못 된다. 왜냐하면 그 준칙에는 곧 그러한 행위들을
경향성에서가 아니라, 의무로부터 행하는 윤리적 내용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박애가의
마음이 자신의 깊은 슬픔으로 흐려져 타인의 운명에 대한 모든 동정심을 없애 버렸고, 그는 여전히
고난받고 있는 타인들을 돌볼 능력이 있음에도 자기 자신의 고난에 극도로 얽매여 있기 때문에 남의 고난은
그를 자극하지 못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제 어떠한 경향성도 더 이상 그를 그렇게 하도록 자극하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그가 이 치명적인 무감수성에서 벗어나 아무런 경향성 없이 오로지 의무에서 그 행위를
할 때, 그때 그 행위는 비로소 진정한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
[칸트, 『도덕형이상학 정초』, 미래엔 윤사 교과서]

‘행복 원리’와 ‘도덕 원리’를 구별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 양자의 대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실천
이성은 행복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무가 문제가 될 때는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오히려 어떤 점에서 볼 때는 자기의 행복을 배려하는 것은 의무일 수도
있다. 일부는 행복[숙련, 건강, 부 등]이 그의 의무를 실현하는 수단이기 때문이요, 다른 일부는 행복이
없는 것[가난 등]은 자기의 의무를 위반하게 만드는 유혹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행복만을
촉진하는 것은 결코 직접적인 의무일 수 없으며, 더구나 모든 의무의 원리일 수는 없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미래엔 윤사 교과서]

모든 실천 법칙은 가능한 행위를 선한 것으로, 그렇기에 이성에 의해 실천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주관에


대해서는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에, 모든 명령들은 어떤 방식에서든 선한 의지의 원리에 따라
필연적인 행위를 규정하는 공식들이다. 그런데 행위가 한낱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해, 즉 수단으로서 선하다면
그 명령은 가언적인 것이다. 행위가 그 자체로서 선한 것으로 표상되면, 그러니까 그 자체로서 이성에
알맞은 의지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즉 의지의 원리로 표상되면 그 명령은 정언적인 것이다.
[칸트, 『도덕형이상학 정초』, 미래엔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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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아니 이 세상 밖에서까지라도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의지뿐이다.


천부적 재능이나 기질도 그것을 사용하는 의지가 선하지 못하다면, 지극히 악하고 또 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
선의지는 그것이 무엇을 실현하고 성취했기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다. 또한 선의지는 그것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쓸모가 있기 때문에 선한 것도 아니다. 선의지는 오직 자신의 의지를 통해서만, 즉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선의지에만 주목한다면 우리는 선의지가 의지의 모든 결과물보다 월등하게
우월함을 알 수 있다. 어떤 하나의 경향성을 위해 의지가 산출한 것, 아니 경향성 전체를 위해 의지가
산출한 것 모두와 비교해도 선의지가 월등하게 우월하다. 운명의 기구한 장난에 의해서나 또는 자연의
인색함 때문에 의지는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능력을 전혀 갖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모든 노력을
다했음에도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결국 선의지만이 홀로 남겨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도
선의지는 그 자체로 보석처럼 빛날 것이며, 모든 가치를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빛날 것이다.
[칸트, 『도덕형이상학 정초』, 미래엔 윤사 교과서]

그것을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경외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비상 윤사 교과서]

선의지는 그것이 생기게 하는 것이나 성취한 것 때문에, 또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쓸모 있기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선의지는 그 자체만으로 고찰될 때 ……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비상 윤사 교과서]

과연 거짓말로 약속하는 것이 의무에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이 과제의 답을, 아주 간략하면서도


속임이 없이 제시하기 위해 나는 자신에게 물어본다. 진실하지 못한 약속을 통해 곤경에서 벗어나겠다는
나의 준칙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보편적 법칙으로서 타당해야 한다는 원리를 정말로 충족할
수 있는가? 그리고 누구든 그 자신이 다른 방도로써 벗어날 수 없는 곤경에 처한다면, 진실하지 못한
약속을 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나에게 말할 수 있는가? 이렇게 보면 나는 곧 내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비상 윤사 교과서]

① 장차 전쟁의 화근이 될 수 있는 내용을 유보한 채로 맺은 평화 조약은 불가능하다.


② 어떠한 독립 국가도 타국의 소유가 될 수 없다.
③ 상비군은 조만간 완전히 폐지되어야 한다.
④ 대외적 분쟁과 관련하여 어떠한 국채도 발행해서는 안 된다.
⑤ 타국의 체제와 통치에 폭력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⑥ 전쟁 중 암살이나 독살, 항복 조약 파기 등의 신뢰를 배신하는 비열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칸트, 『영구 평화론』, 비상 윤사 교과서]

이 세상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 밖에서도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뿐이다.


…… 선의지는 그것이 실현하거나 성취한 것 때문에, 또는 이미 주어진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쓸모가
있기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렇게 마음먹는 일 자체로 선한 것이다.
[칸트, 『도덕형이상학 정초』, 씨마스 윤사 교과서]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칸트, 첫 번째 정언 명령, 씨마스 윤사 교과서]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도 대하도록
행위하라.
[칸트, 두 번째 정언 명령, 씨마스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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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개념은 도덕 법칙에 앞서서가 아니라, (얼핏 보면 이 개념이 도덕 법칙의 기초에 놓여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도덕 법칙에 따라서 그리고 도덕 법칙에 의해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씨마스 윤사 교과서]

인간은 분명히 신성하지 않으나, 그의 인격 속의 인간성은 그에게 신성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우리가 의욕을 갖고, 또 우리가 지배하는 모든 것들은 단지 수단으로서 사용될 수 있다. 오직 인간,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있는 모든 이성적 피조물만이 목적 그 자체이다. 즉, 그는 도덕 법칙의 주체이며, 도덕
법칙은 그의 자유가 지닌 자율로 인해서 신성한 것이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씨마스 윤사 교과서]

누군가가 자신의 성적 쾌락 경향성에 대해 말하기를, 만일 자기에게 사랑스러운 대상과 즐길 기회가 온다면


자기는 이러한 경향성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변명한다고 해 보자. 그러나 그가 이런 기회를
만난 집 바로 앞에, 그런 향락을 누린 직후에 그를 달아매기 위한 교수대가 설치되어 있다면, 그래도 과연
그가 자신의 경향성을 이겨내지 못할 것인가? 그가 어떤 대답을 할지는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씨마스 윤사 교과서]

그러나 그의 군주가 그를 즉시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그에게 한 정직한 사람에 대하여(이 사람은
군주가 그럴듯한 구실을 대어 파멸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위증할 것을 부당하게 요구한다고 할 때,
비록 생명에 대한 그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가 그것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지
아닌지 그에게 물어보라.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 어쩌면 그는 확신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틀림없이 그는, 그런 일이 자기에게 가능하다는 것만은 주저 없이 시인할 것이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씨마스 윤사 교과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새로워지고, 더 큰 감탄과 존경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것 두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이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씨마스 윤사 교과서]

이 세계에서 또는 이 세계 밖에서까지라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선의지뿐이다.


지성, 기지, 판단력 같은 정신적 재능들 또는 용기, 결단성, 초지일관성 같은 기질상의 성질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많은 의도에서 선하고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러한 천부적 재능이나 기질조차 그것을 사용하는 의지가
선하지 않다면, 극도로 악하고 해가 될 수도 있다.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천재 윤사 교과서]

선의지는 그것이 생기게 하는 것이나 성취한 것, 또는 어떤 목적의 달성에 쓸모 있음으로 말미암아 선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 의욕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 선의지는
보석과 같이 그 자체만으로도 그 자신 안에 온전한 가치를 가진 어떤 것으로서 빛날 터이다. 유용성이니
무익함이니 하는 것은 이 가치의 어떤 것도 증감시킬 수 없다.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천재 윤사 교과서]

완전한 선의지는 (선의) 객관적인 법칙들 아래에 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것이 법칙에 맞는
행위를 하도록 강요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완전한 선의지는 오로지 선의 표상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적인 의지와 신성한 의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명령도 타당하지 않다.
여기서는 당위가 있을 바른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의욕이 이미 스스로 법칙과 필연적으로 일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령은 의욕 일반의 객관적 법칙과 이런저런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 예컨대 인간 의지의
주관적 불완전성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정식일 따름이다.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천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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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로부터의 행위는 그 행위를 통해 달성해야 할 의도가 아니라, 그 행위가 결의되는 준칙에서 그것의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 …… 의무는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말미암은 행위의 필연성이다. 나는 내가
뜻하는 행위의 결과로서의 객관에 대해 경향성을 가질 수는 있지만, 결코 존경을 가질 수는 없다. ……
그러므로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그것에서 기대되는 결과에 있지 않으며, 또한 이 기대되는 결과에서 그
원리의 동인을 얻을 필요가 있는 어떤 행위 원리에도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결과는 다른 원인들에
의해서도 달성될 수 있을 터이고, 그러므로 그것을 위해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무조건적인 선은 오로지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서만 마주칠 수 있다. 그래서 예상되는
결과가 아니라 법칙의 표상이 의지의 동인인 한에서, 두말할 것도 없이 오로지 이성적 존재자에서만 생기는,
이 법칙의 표상 자체만이 우리가 윤리적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탁월한 선을 이룰 수 있다.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천재 윤사 교과서]

“거짓 약속이 의무에 맞는가?”라는 물음에 아주 간략하면서도 오류 없이 답하고자 나는 스스로 이렇게


물어본다. 나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으로 타당해야 한다는 것에 정말로 만족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을
던져 보면, 거짓말하는 것을 보편적 법칙으로 의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천재 윤사 교과서]

모든 명령은 가언적으로나 정언적으로 지시 명령한다. 가언 명령은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사람들이 의욕하는, 또는 의욕하는 것이 가능한 다른 어떤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상하는 것이다.
정언 명령은 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다른 어떤 목적과 관계없이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그러한 명령이다. 모든 실천 법칙은 가능한 행위를 선한 것으로, 선하기 때문에 이성에 의해 실천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주관(주체)에 대해서는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한다. 그러므로 모든 명령은 어떤 방식에서든
선한 행위를 규정하는 공식들이다. 그런데 행위가 자체로서 선한 것으로 표상되면, 그러니까 자체로서
이성에 알맞은 의지에서 필연적인 것, 즉 의지의 원리로 표상되면, 그 명령은 정언적인 것이다.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천재 윤사 교과서]

행복의 원리와 윤리를 구별하는 일이 곧 양자를 대립시키는 것은 아니다. 순수 실천 이성은 행복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무가 문제가 될 때에는 그러한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볼 때에는 자신의 행복을 배려하는 것이 오히려 간접적으로 의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어떤 면에서 행복은 의무를 완수하기 위한 수단을 포함하고, 어떤 면에서 행복의 결여는 의무를
벗어나게 하는 유혹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행복만을 촉진하는 일은 직접적으로는 결코
의무일 수가 없고, 모든 의무의 원리일 수는 더더욱 없다. 무릇 몇몇 순수 실천 이성 법칙을 제외하고는
의지의 모든 규정 근거는 경험적인 것이고, 그래서 그 자체로서 행복의 원리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모두 최상의 윤리 원칙에서는 분리되어야 하고, 결코 그것에 조건으로서 병합되어서는 안 된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천재 윤사 교과서]

국가로서의 민족은, 개인 각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자연 상태로 있을 때, 즉 외적 법칙에서 벗어나


있을 때는 서로 병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서로를 해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각자
자신의 안전을 위해 각자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시민적 체제를 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의 비슷한
체제로 들어갈 것을 서로에게 요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이 아마도 국제 연맹일 것이다.
[칸트, 『영구 평화론』, 천재 윤사 교과서]

제1항 모든 국가의 시민적 정치 체제는 공화정이어야 한다.


제2항 국제법은 자유로운 국가들의 연방체제에 기초해야 한다.
제3항 세계 시민법은 보편적 우호의 추구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칸트, 『영구 평화론』, 천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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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 중에서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새로운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 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 주는 내 마음속의
도덕 법칙이다. 이를 통해서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칸트, 『실천 이성 비판』, 교학사 윤사 교과서]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는 그 행위를 통해 달성하려는 의도나 목적이 아니라, 그 행위를 결심할 때
준수하는 준칙에서 도덕적인 가치를 갖는다.
[칸트, 『도덕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교학사 윤사 교과서]

할 수 있는 한 자선을 베푸는 것은 의무인데, 그에 더해서 동정심을 잘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허영심이나 자신의 이익이라는 다른 동기 없이도 주위에 기쁨이 퍼져 나가는 것을 내심 즐거워하며, 자기가
한 일로 다른 사람이 만족하는 것에 흥겨워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같은 행위의 경우, 그
행위가 아무리 ‘의무에 맞고’, 또 아무리 사랑스럽다 해도 참된 도덕적 가치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준칙에는 도덕적인 내용, 즉 경향성 때문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칸트, 『도덕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교학사 윤사 교과서]

국제법의 최종 목표인 영구 평화는 표현 불가능한 하나의 이념이다. 그렇지만 영구 평화를 지향하는 정치적인
모든 원칙은 표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국가의 권리에 기초하여 설정된 과제이므로 확실히 실현
가능하다.
[칸트, 『윤리형이상학』, 교학사 윤사 교과서]

[ 로스 ]

약속을 이행하는 행위 혹은 선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행위는 직관적으로(prima facie) 옳고 자명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생애의 초기부터 또는 처음으로 그 명제를 접하자마자 자명하다는 의미에서 자명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충분히 정신적으로 성숙한 상태에서 그 명제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을 때 어떤 증명이나 그 자체
외의 어떤 증거도 필요 없다는 의미에서 자명한 것이다. 그것은 수학적 공리와 같이 자명한 것이고, 또 추론
형식의 타당성과 같이 자명한 것이다.
[로스, 『The Right and The Good』, 천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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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사상 교과서 모음 벤담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최고의 두 주인이 지배하도록 하였다. 우리가 무엇을 행할까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지시해 주는 것은 오직 고통과 쾌락뿐이다. 한편으로는 옳음과
그름의 기준이, 또 한편으로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 두 주인의 왕좌에 고정되어 있다. 이들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든 말에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사고에서 우리를 지배한다.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 미래엔 윤사 교과서]

자연은 인류를 두 군주, 즉 쾌락과 고통의 지배하에 두었다.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뿐만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이 두 요소이다. 한편으로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른
한편으로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가 오직 이들의 지배에 달려 있다. 그들은 우리가 행하거나 말하며 생각하는
것 모두를 지배한다.
공리란 이해 당사자에게 이익, 쾌락, 좋음, 행복을 가져다주거나 해악, 고통, 악, 불행의 발생을 막아 주는
경향을 가진 어떤 대상의 속성을 의미한다.
공리의 원리(principle of utility)는 쾌락과 고통이 우리를 지배함을 인정하고 이것을 전체 체계의 기초로
삼는다. 이러한 체계의 목표는 이성 또는 법률의 손으로 조직적인 행복을 구성하려는 것이다.
어떤 행위가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경향이 그 행복을 감소시키는 경향보다 더 클 때 그 행위는
공리의 원리에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정부의 정책은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경향이 행복을 감소
시키는 경향보다 더 클 때 공리의 원리에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미래엔 윤사 교과서]

한 행위가 가져다주는 쾌락의 총량과 고통의 총량을 계산해 보라. 이 둘을 비교하여 차감했을 때 쾌락 쪽이
남는다면 그 행위는 관련자 전체 또는 개인들이 모인 사회와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좋은 성향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고통 쪽이 남는다면 일반적으로 나쁜 성향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리의 원리는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당사자들의 행복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또는 촉진하거나 억누르는)
경향에 따라서 각각의 행위를 승인하거나 부인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각각의 행위란
개인의 사적인 모든 행위뿐만 아니라 정부의 모든 정책까지 포함한다.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미래엔 윤사 교과서]

우리가 동물의 이익을 고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나로서는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
그들을 고문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있는가? 그렇다. …… 설령 다리의 숫자, 피부에 털이 있는지의 여부,
뼈의 모양 등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차이가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의 고통을 방관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성 능력인가? 아니면
의사소통 능력인가? 하지만 완전히 성장한 말이나 개는 갓난아이 또는 태어난지 일주일이나 한 달이 지난
아이보다도 훨씬 합리적이다. 또한, 우리는 어린아이들에 비해 그들과 훨씬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들의 능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문제는 그들이
사고할 능력이 있는가, 또는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미래엔 윤사 교과서]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최고의 두 주인이 지배하도록 하였다. 우리가 무엇을 행할지 결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지시해 주는 것은 오직 고통과 쾌락뿐이다. 한편으로는 옳음과 그름의
기준이, 다른 한편으로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 이 둘의 옥좌에 매여 있다.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관한 서론』, 비상 윤사 교과서]

공리의 원리는 이해 당사자의 행복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처럼 보이는, 혹은 달리 말해서 그의 행복을 증진
하거나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향에 따라서 각각의 행동을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원칙을 의미한다.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관한 서론』, 비상 윤사 교과서]

공리의 원칙이란 이해당사자의 행복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처럼 보이는 혹은 달리 말해서 그 행복을
증진하거나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향에 따라 각각의 행동을 승인하거나 비난하는 원칙을 의미한다.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씨마스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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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성상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가지 최고의 주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려 주는 것 역시 오직 고통과 쾌락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옳음과 그름의 기준과 다른 한편으로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 이 두 주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고통과 쾌락은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생각 하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씨마스 윤사 교과서]

공동체의 이익이란 도덕 용어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에 속한다. …… 공동체란 그 구성원


으로 간주되는 개인들의 집합에 불과한 가공일 뿐이다. …… 그렇다면 공동체의 이익이란 무엇인가? 공동체
구성원들의 이익의 총합일 뿐이다.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씨마스 윤사 교과서]

우리가 동물의 이익을 고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설령 다리 숫자, 피부 털, 뼈 모양


등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차이가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의 고통을 방관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성 능력인가? 아니면
의사소통 능력인가? …… 문제는 그들이 사고할 능력이 있는가, 또는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씨마스 윤사 교과서]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인에게서 지배받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무엇을 할까 결정하는 일은
물론이요, 무엇을 행해야 할까 짚어 내는 일은 오로지 이 두 주인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옳음과 그름의
기준이 두 주인의 왕좌에 고정되어 있다.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천재 윤사 교과서]

공리의 원리란 행복을 증진하거나 감소하느냐에 따라 각각의 모든 행위를 승인하거나 부인하는 원리를 뜻한다.
내가 말하는 모든 행위란, 개인의 사적인 모든 행위뿐만 아니라 정부의 모든 정책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천재 윤사 교과서]

한 개인에게 쾌락이나 고통의 가치는 그것의 강도(intensity), 지속성(duration), 확실성(certainty) 또는


불확실성(uncertainty), 근접성(propinquity) 또는 원격성(remoteness)에 따라 더 커지거나 작아질
것이다. 이러한 사항들은 쾌락과 고통을 측정할 때 고려해야 할 여건이다. 다음으로, 다른 쾌락 및 고통과
연관된다고 간주되는 쾌락과 고통을 측정할 때에는 생산성(fecundity)과 순수성(purity)을 고려해야 한다.
생산성은 동일한 종류의 감각이 뒤따를 가능성, 즉 쾌락이라면 쾌락이, 고통이라면 고통이 뒤따를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순수성은 반대되는 종류의 감각이 뒤따르지 않을 가능성, 즉 그것이 쾌락이라면 고통이,
고통이라면 쾌락이 뒤따르지 않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다수의 개인과 연관된다고 간주되는
쾌락과 고통을 측정할 때에는 쾌락과 고통의 범위, 즉 그것이 적용되거나 그것에 영향받을 개인들의 수를
고려해야 한다. 한쪽에서는 쾌락의 총량을, 다른 쪽에서는 고통의 총량을 합산해 보라. 그리고 쾌락의
총량에서 고통의 총량을 차감해 보라. 만일 차감한 값이 쾌락 쪽에 기운다면 그것은 개별적 개인의 이익과
관련해 전반적으로 행위의 좋은 경향을 제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차감한 값이 고통 쪽에 기운다면
그것은 전반적으로 행위의 나쁜 경향을 제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천재 윤사 교과서]

인간이 아닌 동물이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권리를 획득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누군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다리의 숫자, 피부에 털이 있는지의 여부, 또는 뼈의 모양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존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날이 미래에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이겠는가? 이성 능력인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인가?
다 자란 말이나 개는 갓난아이보다도 훨씬 합리적이며, 인간과 원활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동물의 능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문제는 동물들이 ‘이성적인가’
혹은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교학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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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돌 임용고시 자료
윤리와 사상 교과서 모음 밀

공리의 원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어떤 종류의 쾌락은 다른 쾌락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고, 한층 더 가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른 모든 것을 평가할 때는 양과 마찬가지로 질도 고려하는 것이 보통인데, 유독
쾌락을 평가할 때만 반드시 양에 의존하라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은가?
[밀, 『공리주의』, 미래엔 윤사 교과서]

그 이름값을 하는 유일한 자유는, 우리가 타인들로부터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고 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추구할 자유이다. …… 어떤 종류의 행동이든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강압적인 통제를 받을 수 있으며, 사안이 심각하다면 반드시 통제해야 한다.
나아가 필요하다면 사회 전체가 적극적으로 간섭해야 한다.
[밀, 『자유론』, 미래엔 윤사 교과서]

고급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하급의 존재보다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아마도 고급의 능력을 가진 자는 그것을 만족시키는 과정에서 더 큰 고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보다 미천한 삶으로 전락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
스러운 인간으로 사는 것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밀, 『공리주의』, 미래엔 윤사 교과서]

전체적으로 볼 때 인류의 생각과 행동이 지금처럼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인 방향으로 발전해올 수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지적 또는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자신의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토론과 경험에 힘입어 자신의 과오를 고칠 수 있다.
[밀, 『자유론』, 미래엔 윤사 교과서]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삶을 동물의 삶과 동일시하며 비판하는 것은 명확하게 부당하다. 왜냐하면 동물의


쾌락은 인간의 행복 개념을 만족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적 욕구보다 더 높은 여러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능력을 만족시키지 않는 한 어떠한 것도 행복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 공리의 원리는 어떤
종류의 쾌락이 다른 종류의 쾌락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고 한층 더 가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른 모든 것을
평가할 때는 양 이외에 질도 고려하면서 쾌락을 평가할 때에는 양에만 의존하라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은가?
쾌락의 질적 차이가 무슨 뜻이냐, 또는 양이 더 많다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쾌락을 다른 쾌락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만일 두 가지 쾌락이
있는데, 이 둘을 모두 경험해 본 사람 전부 또는 거의 전부가 도덕적 의무 같은 것과 관계없이 그중 하나를
더 뚜렷하게 선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바람직한 쾌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둘에 대해 확실하게
잘 아는 사람들이 쾌락의 양이 적고 엄청난 불만족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리고 쾌락의
양이 적더라도 어떤 하나를 분명하게 더 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더욱 선호되는 즐거움이 양의 많고 적음을
사소하게 만들 정도로 질적으로 훨씬 우월하다고 규정해도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동물적 쾌락을 완전히 만끽하기 위해서 자기를 하찮은 동물로 변신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최대 행복의 원리에 의하면 행위의 궁극 목적은 양과 질이라는 두 측면 모두에서 가능한 한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충분히 향유하는 것이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되는 편이 낫고, 만족한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낫다.
[밀, 『공리주의』, 미래엔 윤사 교과서]

어떤 대상이 보일 수 있다는(visible) 것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 대상을


본다는(see) 것이다. 어떤 소리가 들릴 수 있다는(audible) 것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는다는(hear) 것이다. 우리 경험의 다른 원천들도 모두 이와 같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바람직하다는
(desirable)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원한다는(desire) 사실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마다
스스로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한에서 이를 원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왜 일반의 행복이 바람직한 것인지를
밝혀 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도 없다.
[밀, 『공리주의』, 미래엔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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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의 도덕은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최대 선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다고 본다. 공리주의는 다만 희생 그 자체가 선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따름이다. 행복의 총량을 증대시키지
않는 희생이나 그것을 증대시키려는 경향성을 지니지 않는 희생은 무용지물로 간주된다. 공리주의가 인정
하는 자기 포기는 단 하나뿐인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나 행복의 수단에 헌신하는 경우이다. 이때의
다른 사람들이란 인류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든, 인류 전체 이익의 범위 내에 있는 개인이든 모두 상관없다.
공리의 원리 역시 다른 도덕 체계들이 가지고 있는 제재를 모두 지니고 있다. 이들 제재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으로 나뉜다. 우리로 하여금 의무를 지키게 하는 것은 언제나 내적인 제재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생기는 어떤 느낌이다. 그래서 이것을 어기면 고통이 따라온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더욱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다. 이러한 느낌이 공정한 의무 관념과 결합하면 양심이 된다.
[밀, 『공리주의』, 미래엔 윤사 교과서]

자유의 기본 영역으로 다음의 셋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절대적인
의견과 주장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둘째, 각자의 개성에 맞게 자기 삶을 설계하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갈
자유를 누려야 한다. 셋째, 어떤 목적의 모임이든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는 결사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어떤 정부 형태를 가지고 있든 이 세 가지 자유가 원칙적으로 존중되지 않는 사회라면 결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자유를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자유이다.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호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각 개인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자기 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다
일이 잘못돼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결과를 맞게 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누구든지 웬만한 정도의 상식과 경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자유에 관한 아주 간단명료한 단 하나의 원리를 천명하고자 한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물리적 또는 도덕적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간섭하는 것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거나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또는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거나 옳은 일이라는 이유에서라도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슨
일을 시키거나 금지시켜서는 안 된다. ……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이 당연히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몸이나 정신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권자인 것이다.
[밀, 『자유론』, 미래엔 윤사 교과서]

비록 한 사람을 제외한 전 인류가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고 오직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 한 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전 인류를 침묵시키는 것이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그 한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도 부당하다. …… 만일 그 의견이 옳다면 인류는 오류를 진리와 교환할 기회를
상실하게 되고, 만일 그것이 옳지 않다면 진리가 오류와 충돌하면서 발생하게 되는 진리에 대한 더욱
명백한 인식과 더욱 선명한 인상을 상실하게 되는 엄청난 혜택의 손실을 입게 된다. 이 두 가설을
독립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필수적인 이유는 제각기 상이한 논의의 영역을 점유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침묵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의견이 오류라고 우리는 확신할 수가 없고, 만에 하나 우리가 그렇다고
확신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침묵시키는 것은 여전히 해악일 것이다.
[밀, 『자유론』, 미래엔 윤사 교과서]

어떤 종류의 쾌락이 다른 것보다 더 바람직하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공리주의의 원리와


어긋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것을 평가할 때는 양뿐만 아니라 질도 고려하면서, 쾌락을 평가할 때는
오직 양만 따져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전혀 설득력이 없다.
[밀, 『공리주의』, 비상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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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류의 쾌락이 다른 것들보다 더 바람직하고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공리의 원리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일을 헤아릴 때에는 양뿐만 아니라 질도 고려하면서, 쾌락을 측정할
때에는 양에만 의거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밀, 『공리주의』, 씨마스 윤사 교과서]

공리주의는 어떤 행동이든 행복을 증진시킬수록 옳은 것이 되고, 행복과 반대되는 것을 낳을수록 옳지 않은


것이 된다는 주장을 편다. 여기서 ‘행복’이란 쾌락, 그리고 고통이 없는 것을 뜻한다. ……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쾌락이야말로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며, 바람직한 모든 것은 그 자체에 들어 있는 쾌락
또는 고통을 막아 주고 쾌락을 늘려 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핵심 명제이다.
[밀, 『공리주의』, 천재 윤사 교과서]

만족한 돼지가 되기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편이 낫다. 만족한 바보이기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낫다. 바보나 돼지가 이러한 주장과 다르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들이 한쪽 측면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과 비교 대상이 되는 인간이나 소크라테스는 양쪽 측면 모두를 잘 알고 있다.
[밀, 『공리주의』, 천재 윤사 교과서]

‘쾌락의 질적 차이가 무슨 뜻이냐?’ 또는 ‘양이 더 많다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쾌락을 보통의 다른 쾌락보다


더 가치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한다면,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만일 두
가지 쾌락이 있는데, 이 둘을 모두 경험해 본 사람 전부 또는 거의 전부가 그 가운데 하나를 더 뚜렷하게
선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바람직한 쾌락이라고 할 수 있다. 쾌락의 양이 적더라도 어떤 하나가
분명하게 더 선호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더욱 선호되는 즐거움이 양의 많고 적음을 사소하게 만들 정도로
질적으로 훨씬 우월하다고 규정해도 될 것이다. …… 두 종류의 쾌락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쾌적한 기분을
안겨 줄지 결정해야 할 때, 각각에 정통하다고 인정되는 사람들 또는 이들의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가운데 다수의 판단이 가장 존중되어야 한다.
[밀, 『공리주의』, 천재 윤사 교과서]

공리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인간행동의 옳고 그름에 관한 공리주의적 판단 기준의 관건이 되는 행복이


행위자 자신뿐만 아니라 관련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당사자 본인의
행복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이라면, 공리주의는 그 사람에게 사심없는
선의의 구경꾼만큼이나 엄격하게 중립적이고 공평한 자세를 취하도록 요구한다.
[밀, 『공리주의』, 천재 윤사 교과서]

자유의 기본 영역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모든 주제에 대해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의견과 주장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둘째,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를
지녀야 한다. 셋째,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어떤 목적의 모임이든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정부 형태든 이 세 가지 자유가 존중되지 않는다면 결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밀, 『자유론』, 천재 윤사 교과서]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밀, 『자유론』, 천재 윤사 교과서]

대부분의 나라, 특히 영국의 경우 투표권자의 절대 다수는 육체 노동자들이다. 그 결과 두 가지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즉 정치 문제를 판단하는 유권자들의 지적 능력이 매우 낮은 수준이고, 계급 입법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이 같은 폐해를 극복할 방안이 있는지 따져 보아야겠다.
[밀, 『대의 정부론』, 천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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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 1표 이상의 투표권을 주는 것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근거는 정신 능력이 탁월한 경우이다.


만일 국가가 교육 체계를 직접 관장하거나 믿을 만한 국가시험 제도 같은 것이 있기만 하다면 사람들의
교육수준을 직접 시험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각자 종사하는 직업의 성격이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직업과 관련하여 탁월한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2~3표씩 투표권을 줘도
무방할 것이다.
[밀, 『대의 정부론』, 천재 윤사 교과서]

지금까지 대의 민주주의에 내재한 두 가지 위험에 대해 살펴보았다. 첫째 위험은 대의 기구와 이것을


통제하는 국민 여론이 조야한 지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때 생기는 것이다. 둘째 것은 똑같은 계급으로
구성된 다수파 사람들이 자기 당파적 이익에 따라 계급 입법을 시도할 때 생기는 위험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민주 정부의 특징적인 장점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이런 두 가지 해악을 제거하기
위한 또는 최대한 그 문제점들을 줄여 나가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일이다.
단일 계급이 수적으로 다수파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완전평등 민주주의는 일련의 해악을 피할 수가 없다.
이런 식의 민주주의는 평등한 것이 아니라 지배 계급을 이롭게 하는 체계적으로 불평등한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오히려 각종 해악을 더욱 심각하게 악화시키고 만다. 민주주의라는 말 속에 두 가지 완전히 상반된
개념이 통용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순수한 의미의 민주주의는 평등하게 대표되는 전체 인민에 의한 전체
인민의 정부를 지향한다. 반면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민주주의 그리고 지금까지 존재했던 민주주의는
특정 집단만 대표하는 그저 다수파 인민에 의한 전체 인민의 정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자는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반면 후자는 앞의 것과 묘하게 뒤섞여 있지만 사실은 다수파를 이롭게 하는
특권 정부이다. 이들 다수파만 실질적으로 국가 안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소수파의 선거권을 철저하게 배재하는 체제 아래에서는 이 같은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진정한 의미의
평등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구성원 또는 그 어떤 구성원이라도 반드시 그 수에 비례하여 대표자를 내야한다.
유권자의 다수파가 대표도 가장 많이 낸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소수파도 그에 비례해서 적으나마 대표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밀, 『대의 정부론』, 천재 윤사 교과서]

행위는 행복을 증진하는 경향성에 비례하여 옳고, 행복의 역을 산출하는 경향성에 비례하여 그르다. ‘행복’은
쾌락을 그리고 고통의 부재를 의미한다. ‘불행’은 고통을 그리고 행복의 상실을 의미한다.
[밀, 『공리주의』, 교학사 윤사 교과서]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고, 만족스런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밀, 『공리주의』, 교학사 윤사 교과서]

자유가 있는 사회는 개인의 행복과 참다운 진리가 있으며, 더불어 인류도 성장한다.
[밀, 교학사 윤사 교과서]

간섭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에게 하지 못하도록 저지시키고 싶은 행위가 다른 어떤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게 되리라는 것이 예측되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사람의 행위라도 그 사람이 사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유일한 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관계되는 부분이다. 단지 그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행위에 있어서
그의 독립성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절대적이다.
[밀, 『자유론』, 교학사 윤사 교과서]

개인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의 주관자로서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밀, 『자유론』, 교학사 윤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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